00001 트롤러 ========================================================================= “헉, 허억… 헉…….” 타는 듯한 갈증에 눈을 뜬다. 하지만 그는 눈을 떴음에도 불구하고 뜨지 않은 것과 별반 차이를 느낄 수 없었다. 도대체 어디가 아픈지조차 파악이 안 될 정도의 고통 속에서, 남자는 자꾸만 감기려는 눈을 필사적으로 부릅 뜨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그렇게 애를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야는 조금도 밝아지지 않았다. 애초에 빛이라고는 존재하지도 않는 듯한, 그런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남자는 필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큭!” 하지만 상반신을 일으키는 순간 곧바로 머릿속이 핑하고 돌아가는 것만 같은 느낌에 남자는 다시금 그대로 털썩 몸을 눕힐 수밖에 없었다. “헉… 헉…….” 곧바로 귀 뒤쪽이 땡기는 듯한 느낌과 함께 이어지는 현기증. 남자는 잠시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한 채 거친 숨만 몰아쉴 뿐 다른 행동은 취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현기증이 사라지고 나서야 남자는 겨우 손을 들어 얼굴을 만질 수 있었다. 손등을 통해 전해지는 이마와 눈의 뜨거운 기운. 그에 반해 눈알로부터 전해지는 손등의 체온은 너무나 차갑기만 하다. 같은 사람의 그것이 맞을까 싶을 정도의 온도차에 남자는 당혹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내 손등으로부터 전해지는 차가운 느낌이 이마와 눈을 식혀주는 그 기묘한 쾌감에 빠져들었다. “으음…….” 한동안 그렇게 손을 번갈아가며 이마에 가져다 대는 것으로 끓어오르는 열을 조금이나마 식힌 남자는 그제서야 자신의 몸 상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마치 몰매를 맞은 것처럼, 온 몸 구석구석이 쑤시고 결렸지만…… 그것은 아마도 차가운 땅바닥 위에서 오랫동안 정신을 잃은 채 쓰러져 있었던 후유증이리라. 이번에는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먼저 한 팔을 땅에 짚은 후, 천천히 상반신을 일으킨다. “끄응…….” 복근이 찢어질 것처럼 아파왔지만, 이를 악물고 상반신을 일으키는데 성공했다. 다시금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역시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위를 올려다 보았지만, 보이는 것은 오직 한치 앞을 분간하기 어려운 어둠 뿐이다. 도대체 이게 어찌된 영문일까. 분명히…… 아르바이트를 마친 다음, 애마인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향하다가 집 근처의 네거리에서 신호를 기다리던 것까지는 기억이 난다. 그리고, 횡단보도 앞에 잠시 멈춰서서 휴대폰을 열어보다가……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갑자기 웅성거리며 하늘을 쳐다보는 모습에 고개를 들었고…… “으으…….” 남자는 그 순간 느껴지는 통증에 신음을 흘려야만 했다. 아아… 그랬다. 그때 올려다 보았던 하늘 또한…… 이렇게 새까만 어둠이 자리하고 있었다. “후우… 후우…….” 그거 잠깐 생각했다고 다시 머리가 어질거린다. 남자는 입술을 깨문 채로 품을 뒤져 휴대폰이 있는지 확인해 보았다. “아… 있다.” 급히 휴대폰을 꺼냈다. 그러자 지금까지 빛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던 공간 일부가 휴대폰에서 흘러나온 빛에 의해 밝혀졌다. 반가운 마음에 주위를 둘러보던 남자는, “헉!” 다음 순간 자신도 모르게 헛숨을 들이키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그가 위치한 곳은 그 바닥조차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 위쪽이었기 때문이다. “후우… 후흡…….” 높이가 얼마나 되는지조차 알 수 없는…… 끝도 없는 심연. 단지 그 일면을 휴대폰의 미약한 빛에 의지해 보았을 뿐인데도 불구하고 남자는 손과 발 어딘가에 구멍이 뚫려 그 안에 존재하던 피가 모조리 쓸려나가는 듯한 착각을 느껴야만 했다. 얼른 고개를 돌렸지만 가빠진 호흡은 좀처럼 본래대로 되돌아 오지 않았다. 남자는 일단 자신이 있는 곳을 다시 확인해 보았다. “이건…….” 넓이는 고작해야 일인용 침대 하나가 들어갈까 말까 싶은 정도. 절벽 중간에 외로운 섬처럼 튀어나온 그 작은 공간이 지금 남자가 누워있는 장소였다. 전파를 확인해 보았다. 그러나, 절벽 때문인지 전파가 하나도 잡히지 않는다. 혹시나 하고 메신저를 열어봤지만 마찬가지. 이래서는 구조 요청을 보낼 수도 없다. “흐읍… 흐읍… 이봐요! 거기 누구 없어요!” 숨을 모아쉰 뒤 있는 힘껏 소리를 질러보았다. 하지만 들려오는 것은 우렁거리며 되돌아오는 자신의 메아리 뿐. 남자는 다시 한 번 소리를 질러보았다. “여기 사람 있어요! 도와주세요!” 하지만 이번에도 아무런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것일까. 이런 저런 생각이 마구 잡이로 떠오르기 시작했지만 남자는 고개를 저어 잡념을 떨쳐 버렸다. 다른 건 나중에 생각해도 된다. 지금 중요한 것은 이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바로 그 한 가지 뿐이다. 주머니를 뒤져보았다. 휴대폰 외에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는, 어제 야식 사고 받은 영수증 조각 하나와 지갑, 그리고 열쇠와 잡동사니가 달린 열쇠 고리 하나 뿐이다. 지갑 안에 있는 것은 현금 약간과 신분증, 그리고 카드 뿐. 열쇠고리에는 집 열쇠와 자전거 열쇠, 여기에 사물함 열쇠와 손가락 마디 두 개 정도 되는 멀티툴 하나와 ‘나 너 찍었어’라는 문구가 새겨진 장난감 도끼 모양의 장식 하나 뿐이다. “후…….” 잭나이프라고 부르기엔 너무나 작은, 도구도 고작해야 네다섯 가지가 전부인 멀티툴. 그것이 지금 그가 가진 도구의 전부였다. 남자는 멀티 툴에 담긴 도구를 하나하나 확인했다. 가장 먼저 칼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나이프와 입고 있는 청바지조차 자를 수 없을 것 같은 조그마한 가위가 나왔고, 여기에 코르크 따개와 도대체 이걸로 어떻게 나무를 자르라는 건가 싶은 작은 톱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끄트머리를 손톱으로 밀어 올리자 이쑤시개와 족집게 하나를 더 찾을 수 있었다. “후우…….” 남자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도구들을 원래대로 접은 후 소지품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여전히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러나, 여기서는 먼저 일단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이렇게 어두운 상황에서 공연히 잘못 움직이다가 발이라도 헛디디면, 이런 식으로 잡념을 떠올리는 일조차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고라면 분명 구조 활동이 시작될테니, 섣부르게 움직이는 것보다 가만히 체력을 온존하며 구조를 기다리는 편이 현명하리라. “후우… 하아… 후우…….” 깊게 숨을 몰아쉬며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쓴다.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잠을 청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잠인들 쉽게 오겠는가. 문득 어딘가에서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 그의 몸을 훑고 지나간다. 남자는 몸을 웅크렸다. 그리고 양손을 마주 쥔 채로 입술을 깨문 채 이 악몽과도 같은 밤이 어서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완전히 잠이 든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확실하게 깨어있지도 않은, 비몽사몽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한 상태로 좁은 바위턱 위에 새우처럼 웅크려 있던 남자는 갑자기 울리는 알람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얼른 휴대폰을 열어 확인해 보자, 아침 여섯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주위는 한 치 앞을 알아보기 힘든 어둠 속.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그러나 그 어느 곳에서도 빛이라는 존재의 기척을 찾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된 일일까. 남자는 불안해졌으나, 그래도 좀 더 기다려 보기로 했다. 하지만 마찬가지였다. 한 시간이 지나고 다시 두 시간이 지나도 주위를 감싼 어둠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남자는 불안해졌다. 이대로, 이대로 이 영문 모를 낭떠러지 한복판의 바위턱에서 아무도 모른 채 죽는 것은 아닐까. 이곳에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조차 알려지지 않은 채, 이대로 죽어서 잊혀지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들이 머리 속에 떠오르기 시작하자, 남자는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직 해보지 못한, 해보고 싶었던 수많은 일들이 머리 속에 떠올랐고, 또한 지금껏 해왔던 일들 또한 주마등처럼 떠오르기 시작한다. “빌어먹을…….”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하지만 남자는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고, 그러는 동안에도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만 갔다. 남자는 주기적으로 소리를 쳐서 자신이 이곳에 있음을 알리려 했지만,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열두시…….” 정오가 되자 그나마 조금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조금이나마 사물을 식별할 수 있을 정도의 빛이 들어오자, 남자는 발 아래 펼쳐진 바닥에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의 모습에 다시 한 번 크게 놀랐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생각보다 위쪽까지의 거리가 얼마 되지 않는다는 정도일까. 남자는 가만히 위쪽까지의 거리를 가늠해 보았다. 모르긴 해도, 대략 성인 남자 서너명의 키를 합쳐 놓은 정도의 거리인 듯 하다. “할 수… 있을까.” 아직 체력이 회복되지 않은 탓에 다리가 휘청거리는 상황이기는 하지만, 어디 찢어지거나 부러지지는 않았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남자는 고민했다. 이대로 하루 더 기다려 보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일단 저 위로 올라가보는 것이 좋을까. 시간 상으로만 따져봐도, 어제 저녁 이후로 벌써 열 두 시간 이상이 지난 상황.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조대는커녕 별다른 인기척조차 전해지지 않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상황이 훨씬 더 심각하다는 뜻이리라. 잠시 고민하던 남자는 결국 각오를 굳혔다. 자칫 여기서 시간을 더 끌게 되면 금방 주위가 어두워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조금이나마 주위가 밝아지는 정오까지 다시 하루 동안 꼼짝 없이 이 바위턱에 묶여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남자는 휘청거리는 다리로 일어서며 다시 한 번 망설였다. 너무 성급한 판단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자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희미하게나마 식별이 가능해진 절벽의 요철을 살피며 손을 뻗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남자는 이전에 스포츠 클라이밍이라 불리는 맨손 등반을 조금 해본 경험이 있었다. 만약 그런 경험조차 없었더라면 아무리 상황이 나쁘다 할지라도 이런 식으로 맨손 등반을 시도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후웁… 후… 후읍… 후…….” 허나, 남자는 채 몇 미터 오르기도 전에 자신의 선택을 후회했다. 아래쪽에서 봤을 때는 보통의 절벽처럼 보였으나, 막상 오르고 보니 이 낭떠러지는 암벽은커녕 물렁한 토벽에 가까웠다. 이렇게 되면 몸무게를 지탱할 만한 발판을 찾기가 어려워진다. 때문에 남자는 두더지처럼 벽을 파헤치며 스스로 발판을 만들어 올라가야만 했다. 이것은 보통의 맨손 등반보다 몇 배는 힘든 일이인데다, 그렇게 만들어진 발판 또한 그의 체중을 완전히 견딜 수 있을지 의문스럽기는 매한가지였다. 벽을 파헤치는 손가락 끝에서 밀려오는 통증을 억지로 참으며 남자는 필사적으로 벽을 기어올랐다. 그렇게 얼마나 올랐을까. 갑자기 오른 발을 딛고 있던 발판이 무너졌다. “큭!” 남자는 두 팔을 뻗어 필사적으로 벽에 매달리는 것으로 간신히 떨어지는 것은 모면했지만, 두 어깨로부터 끊어질 듯한 통증이 몰아치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남자는 입술을 깨물었다. 잘근 깨문 입술로부터 비릿한 피냄새가 전해져 왔다. 그러나 고통으로 아우성치는 온몸의 통증을 억누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후읍… 후우… 후으읍… 후우…….” 가빠지는 호흡을 억누르며 남자는 몇 번이고 심호흡을 한 뒤에야 다시금 느릿느릿 위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 모진 등반 끝에, 결국 남자는 절벽 위에 올라설 수 있었다. 남자는 주위를 둘러볼 틈도 없이 그대로 바닥에 널브러졌다. “헉… 허억…….” 00002 트롤러 ========================================================================= 이렇게 무언가에 전심전력을 다 해 본 적이 과연 얼마만이던가. 이런 상황에 성취감 운운하는 것도 우스운 얘기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여전히 어두운 하늘을 보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쾌감을 느꼈다. 그래서일까. 긴장이 풀리자 지금까지 억눌러왔던 요의가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만큼 용솟음치기 시작한다. “끙...” 남자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제서야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 순간 남자는 당황했다. 그도 그럴 것이... 눈에 들어온 것은 지금까지 남자가 단 한 번도 본적이 없는 거대한 밀림의 초입이었기 때문이다. 눈을 비비고 다시 살펴 봐도 마찬가지. 이것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남자는 다시금 머리 속이 복잡해졌지만, 일단 급한 요의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후우...” 배설의 욕구를 해결하고 나니, 이번에는 배가 고파오기 시작한다. 혹시나 싶어 휴대폰의 GPS를 확인해 보았지만, 역시나 먹통이다. 일단 전원을 꺼두는 편이 좋을까. 얼핏 들은 얘기긴 하지만, 전파가 약한 곳에서 휴대폰을 켜두면 평소보다 훨씬 전력 소모량이 커진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 것 같다. 어차피 이런 밀림에서 전화기가 터질 일은 없으니... 나중에 정말 필요한 상황을 위해서라도 전화기는 꺼두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고 남자는 생각했다. 하지만 바로 그때. 작은 알림음과 함께 메시지의 도착을 알리는 표시가 전화기에 나타난다. “엇!” 남자는 급히 메시지를 열어보았다. 튜토리얼을 시작합니다. 1. 전투의 기본을 연습해 봅시다. - 쥐고기 다섯 개를 모으세요 (0/5) “...” 남자는 영문 모를 메시지에 잠시 어리둥절해졌다. 하지만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것은 전파가 연결되었다는 뜻. 얼른 전화기를 이리저리 대보며 전파가 들어오는 곳을 확인해 보았지만, 불행히도 화면 상의 전파 표시는 단 하나도 들어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건 도대체...” 그렇게 껑충 껑충 뛰며 전파가 닿는 곳을 찾으려 애쓰는데... 문득 밀림 쪽에서 무언가 붉은 빛이 번쩍이는 것을 발견했다. 잘못 본 것인가 싶어 눈을 비비는 동안 그 붉은 빛은 천천히 밀림을 빠져나와 남자 앞에 실체를 드러냈다. “...” 남자는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거의 강아지 만한 크기의 거대한 쥐의 번들거리는 붉은 눈에 압도당한 탓이다. 자신도 모르게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서야 남자는 방금 전 도착한 메시지의 내용을 떠올렸다. “쥐고기... 다섯 개?” 설마 저 괴물 쥐를 쓰러뜨리라는 말인가? 하지만 무슨 수로? 그가 가진 도구는 장난감 같은 멀티툴 하나 뿐. 급한 대로 남자는 주머니를 뒤져 멀티툴을 꺼내려 했지만... 괴물 쥐는 그의 손이 주머니 속에서 열쇠 고리를 찾아내기도 전에 먼저 그 커다란 몸을 날렸다. “헉!” 남자는 피할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괴물 쥐와 뒤엉켜 쓰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괴물 쥐의 날카로운 이가 그의 팔뚝으로 파고 들었다. “으악!” 불로 지지는 듯한 날카로운 통증에 남자는 다급하게 팔을 휘둘렀지만, 괴물 쥐는 마치 거머리 마냥 그의 팔에 이빨을 박아넣은 채로 매달려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남자는 통증으로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생각했다. 만약 반사적으로 팔을 휘둘러 막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을까. 아마도 저 날카로운 이빨이 그의 목을 물어뜯었을 것이고... 그렇게 되었다면 반항할 틈조차 얻지 못한 채 이 괴물 쥐의 먹이가 되었을 것이다. “으아아아!” 남자는 손을 뻗어 휘젖다가 커다란 돌맹이가 잡히자 그것을 그대로 괴물 쥐의 머리를 향해 휘둘렀다. 퍽! 쥐는 방법이 좋지 못했던 것일까. 돌맹이는 괴물 쥐의 머리에 적중하는 순간 남자의 손으로부터 튕겨져 나가고 말았다. -키릭! 킥! 키리릭! 비명인지, 아니면 비웃음인지 모를 소리가 괴물 쥐로부터 흘러나온다. 남자는 떨어져 나갈 것만 같은 팔의 통증을 억지로 참으며 다시 팔을 휘저어 무기가 될만한 것을 찾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나무 가지 하나가 손에 잡혔다. 무언가에 꺾여 나간 듯한, 손가락 두 개를 합친 정도의 굵기를 가진 나뭇가지를 손에 쥐기가 무섭게 남자는 그것을 거꾸로 쥐고 마치 송곳으로 내려 찍듯이 괴물 쥐의 눈을 노렸다. 그리고... 손바닥으로부터 기분 나쁜 파열음이 전해져 오는 순간 괴물 쥐는 예의 커다란 울음 소리와 함께 비로소 물고 있던 그의 팔로부터 떨어져 나갔다. 눈에 나뭇가지가 꽂힌 생쥐는 펄떡거리며 바닥을 마구 뒹굴었다. “크윽...” 남자는 괴물 쥐가 이빨을 박아 넣은 자리를 다른 손으로 감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주위를 살피다가 머리 통 만한 바위 하나를 찾아 그것을 양손으로 들어올린 후, 고통에 몸부림치는 괴물 쥐를 향해 다가갔다. “이 망할 쥐새끼...” 남자는 발버둥치는 괴물 쥐를 한쪽 발로 밟은 후, 두 손에 들린 바위를 있는 힘껏 괴물 쥐의 머리를 향해 내리쳤다. 퍽! -키리릭! 둔탁한 소리가 울려퍼졌지만, 괴물 쥐는 오히려 더 크게 울부짖으며 내 발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을 친다. 남자는 그 모습을 보자 알 수 없는 광기에 휩싸였다. “죽어! 죽어! 죽어어어엇!” 두 번, 세 번... 남자는 미친 듯이 바위를 내리쳤다. 그렇게 얼마나 내리쳤을까. 남자는 자신의 발 아래 깔린 채 완전히 곤죽이 되어 형체를 알 수 없게 된 시체를 발견하고 나서야 내리치던 바위를 집어던졌다. 코끝으로 흘러들어오는 비릿한 혈향을 통해 남자는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우읍...” 구역질이 올라왔지만, 이미 한 나절 동안 아무것도 먹은 것이 없는 그의 위장으로부터 올라온 것은 시큼한 위액 뿐이었다. “크으...” 위산으로 인해 타는 듯한 통증이 목구멍으로부터 전해지자 남자는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남자는 방금 전 휴대폰으로부터 전해진 메시지의 내용을 되새겼다. “쥐고기... 다섯 개...” 쥐가 아니라 쥐고기 다섯 개라고 되어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저 처참한 쥐의 잔해로부터 쥐고기라고 불리는 것을 잘라내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남자는 이내 고개를 저으며 허공에 대고 크게 외쳤다. “누구야! 나오라고, 이 빌어먹을 자식아!” 메시지를 보내고 다시 괴물 쥐가 나타났다는 것은, 누군가가 지금의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뜻.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모르지만, 아무것도 모른 채 그 누군가가 시키는 대로 따를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자... 그의 외침에 대답하기라도 하듯이 밀림으로부터 붉은 빛이 줄 지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비, 빌어먹을...” 한 마리에게도 그 난리 법석을 떨었는데... 이번에는 무려 네 마리가 한꺼번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쯤 되면, 아무리 유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도 저절로 상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다. -키릭, 키리릭... 괴물 쥐들은 그렇게 들릴 듯 말 듯한 울음 소리를 내며 점차 남자를 향해 다가왔다. 남자는 그제서야 허겁지겁 첫 번째 괴물 쥐를 때려 죽인 바위를 집어들었지만... 이 재빠른 거대 설치류를 상대로 둔중하고 커다란 바위는 그리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괴물 쥐들은 숙련된 사냥꾼처럼 남자의 주위를 돌며 기회를 엿보았다. 기회를 노리기는 남자도 마찬가지. 아까와 마찬가지로 발로 목을 밟은 다음 머리를 박살내 죽이려는 생각이었지만, 지금 이 쥐들은 눈을 찔려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던 아까의 쥐와는 달리 너무나도 생생한 상태였다. 남자가 한 마리의 쥐를 노리고 발을 치켜드는 순간, 뒤쪽에서 기회를 노리던 괴물 쥐가 남자의 목덜미를 노리고 튀어 올랐다! 순간 남자는 뭔가 잘못 되었다는 느낌에 얼른 고개를 숙였지만, 뒤에서 날아든 괴물 쥐는 어김없이 남자의 어깨에 그 날카로운 이빨을 박았다. “크악!” 아까와는 달리 이번에는 위치가 너무 나빴다.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데다 손도 제대 닿지 않는 위치였기 때문이다. 남자는 비명을 지르며 들고 있던 바위를 놓치고 말았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다른 괴물 쥐들이 남자의 목을 노리고 튀어 오른다. 한 마리는 운좋게 피할 수 있었지만... 다른 두 마리가 각자 남자의 팔뚝 하나씩을 차지한 채 이빨을 박아넣는데 성공했다. “아아악!” 남자는 발악하며 자신의 몸에 이빨을 박아 넣은 괴물 쥐들을 떨쳐 내려 했지만... 녀석 들은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며 남자가 지치기를 기다렸다. 남자는 생각했다. 이러다가는... 정말 죽을지도 모르겠다고. 그 생각이 떠오른 순간 아까 피해냈던 쥐 한 마리가 남자의 허벅지에 이빨을 박아 넣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남자는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자신에게 남은 유일한 무기를 사용했다. 팔뚝을 물고 있던 괴물 쥐의 목덜미를 물어뜯은 것이다. -으지직! 남자의 이빨은 너무나도 간단하게 괴물 쥐의 등골을 으깨 버렸다. 척수가 으깨지자, 괴물 쥐는 붉게 빛나는 눈동자의 빛이 사그라들며 힘없이 떨어져 나갔다. 뭐든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 부터는 쉬운 법이라던가. 남자의 이빨은 다른 팔을 물고 늘어지던 괴물 쥐의 목덜미에 다시금 정확히 파고들었다. 그러자 이번에도 기분 나쁜 파쇄음과 함께 괴물 쥐의 생명이 끊어진다. 허벅지를 물고 있는 괴물 쥐는 오히려 쉬웠다. 꺾어진 나뭇 가지를 그 머리 통에 쑤셔 박는 것으로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뒤에서 어깨를 물고 늘어지는 괴물 쥐였다. 하지만 남자는 등 뒤로 손을 뻗어 괴물 쥐의 눈알을 그대로 후벼 파는 것으로 이 골치 아픈 생물체를 떼어내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온 몸을 비틀며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괴물 쥐의 목덜미를 발로 밟은 채 아까와 마찬가지로 바위를 내리쳐 그 머리를 으깨버렸다. “헉... 헉... 허억...” 어렵사리 이기기는 이겼으되... 남자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 버렸다. 그렇지 않아도 한 나절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판국이 아니던가. 남자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다시 꺼냈다. 하지만 괴물 쥐 다섯 마리를 해치웠음에도 불구하고 휴대폰에는 아무런 메시지도 들어와 있지 않았다. 남자는 다시 어두워지기 시작한 하늘을 보며 절규했다. “재밌냐! 이 개 자식아아아아!” 하지만 역시나 이번에도 주위에서 들려오는 것은 을씨년스러운 바람소리와 메아리 소리 뿐이었다. “후우... 후우...”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지만, 이성마저 잃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쥐고기 다섯 개...” 남자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주머니에서 멀티툴을 꺼냈다. 그리고 칼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손가락 마디 한 개가 간신히 될까 싶은 칼을 펼쳤다. 어딘지 알 수조차 없는 공간. 의문의 문자 메시지... 이런 것을 감안하지 않더라도, 그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물과 식량이 필요하다. 처참한 괴물 쥐들의 시체를 보며... 문득 쥐벼룩 같은 것이 옮으면 어쩌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남자는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판에 그런 걱정이나 하고 있는 자신이 어쩐지 우습게 느껴진 탓이다. 게다가... 만약 놈들이 쥐벼룩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미 엎치락 뒤치락하는 사이에 옮고도 남았으리라. “큭...”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남자는 어깨로부터 전해지는 격통에 얼굴을 찌푸릴 수 밖에 없었다. “젠장...” 남자는 통증을 참으며 잘 들지도 않는 조막만한 칼로 괴물 쥐의 시체로부터 고기를 잘라냈다. 비릿한 혈향으로 인해 몇 번이나 토악질이 나왔지만, 한 나절을 꼬박 굶은 탓인지 넘어오는 것은 역시나 시큼한 위액 뿐이었다. 결국 고생 끝에 괴물 쥐의 해체를 끝내자... 그제서야 빌어먹을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다. 튜토리얼을 시작합니다. 1. 전투의 기본을 연습해 봅시다. - 쥐고기 다섯 개를 모으세요 (5/5) -> 완료! 보상:경험치 약간 -> 보상을 지금 수령하시겠습니까? (Y/n) _ (주의) 수령하지 않은 보상은 7일후 자동 소거됩니다. “놀고 있네...” 남자는 투덜거리면서도 어느새 손을 뻗어 Y를 입력하고 있었다. 그러자... 갑자기 온 몸에 푸른 빛의 소용돌이가 감싸고 사라지더니 방금 전까지 그를 괴롭히던 미칠 듯한 통증들이 깨끗하게 사라져 버린다. “어?” 당황한 남자는 괴물 쥐에게 물어 뜯겼던 상처를 살펴 보았지만, 어느 새인가 옅은 흉터만 남긴 채 깨끗하게 아물어 있었다. “이건...” 자신의 몸에 일어난 변화에 당혹해 하고 있는데... 다시금 전화기로부터 메시지가 전해졌다. 축하합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보상:랜덤카드 -> 보상을 지금 수령하시겠습니까? (Y/n) _ (주의) 수령하지 않은 보상은 7일후 자동 소거됩니다. 00003 트롤러 ========================================================================= “랜덤카드는 또 뭐냐고... 후...” 남자는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귀신에 홀린 것도 아니고,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갈피가 잡히지 않는 탓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쥐에 물렸던 상처가 레벨업이라는 말과 함께 깨끗하게 나았다는 사실이다. 아무래도 현실로 믿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지만. 손가락으로 허벅지를 꼬집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괴물 쥐들의 이빨이 살점을 파고드는 그 고통을 생각하면... 현실이 아니라고 생각하기도 어렵다. “젠장...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노릇인지.” 남자는 투덜거리며 휴대폰 메시지를 다시 노려보았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준다는 걸 마다하는 건 도리가 아니다. 하물며 그것이 그 쥐새끼들과 물고 뜯으며 싸운 보상이라면 더더욱. 남자는 손가락을 들어 Y를 눌렀다. 그러자 화면에 카드 한 장이 마치 동전처럼 핑그르르 도는 그림이 나타나는가 싶더니, 일종의 트레이딩 카드와 비슷한 그림이 나타났다. 축하합니다! 스킬카드 ‘물어뜯기’를 획득했습니다. :스킬카드는 카드 슬롯에 장착하여 그 능력을 사용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스킬카드를 카드 슬롯에 장착하시겠습니까? (Y/n) _ [카드 상세 정보 확인은 이곳을 누르십시오.] “물어뜯기?” 어쩐지 방금 전에 괴물 쥐를 물어뜯던 감각이 되살아나는 느낌이라 얼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남자는 다시 카드 상세 정보를 확인을 눌렀다. 카드정보 명칭 : 물어뜯기 레벨 : 1Lv 경험치 : 0 등급 : Common 분류 : 스킬 성장 : 조숙(소) 속성 : 없음 효과 : 1. 대상이 되는 적 1개체를 물어뜯어 교상을 입힌다. 2. 기본 공격력 5% 상승. Cost : 5 Seed : 1슬롯 “...” 남자는 잠시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다가 이를 부득 갈았다. “게임이라... 후우...” 한숨을 푸욱 내쉰 남자는 가만히 눈을 감고 마음을 가라 앉혔다. “그래... 해주마. 이 망할 게임.” 그렇게 중얼거리며 스킬 카드를 등록했지만 딱히 뭔가 변한 듯한 느낌은 들지 않는다. 그나저나... 물어뜯기라니. 다음에 또 전투가 일어나면 손대신 이빨로 싸워야 하는 건가.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망연하게 서 있는데... 다시금 메시지가 전해져 왔다. 튜토리얼을 시작합니다. 2. 불을 피워봅시다. - 가지고 있는 도구를 최대한 활용해서 불을 피우세요. (미달성) “이번엔 불인가.” 하지만 막상 불을 붙일 생각을 하니 막막하기만 하다. 담배라도 피우면 그 흔한 라이터나 성냥이라도 가지고 있겠지만, 불행히도 남자는 담배를 끊은지 제법 되었기 때문에 이런 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일단 가지고 있는 것을 다시 꺼내 보았다. 하지만 별 도움도 되지 않는 멀티툴과 불쏘시개로 쓰면 딱 어울릴 법한 영수증 하나가 고작이다. 혹시나 싶어 지갑을 탈탈 털어 봤지만... 카드와 현금 외에 달리 나온 것이라고는 쿠폰과 언제 산건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 즉석 복권 한 장이 고작이었다. 남자는 평소에 다큐멘터리 같은 것을 제법 많이 보는 편이라 이런 악조건에서 불을 피우는 여러 가지 방법에 대해 제법 많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방법은 최소한의 도구가 존재한다는 가정이 전제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햇빛을 모아 불을 피우는 방법은 볼록 렌즈나 오목 거울의 역할을 할 만한 도구가 필요하다. 피티병이나 금속제 식기, 유리병, 비닐 봉지, 하다 못해 얼음 덩어리라도 있어야 가능하지만 불행히도 이곳에서는 그런 일에 사용할 만한 쓰레기조차 찾을 수 없는데다 햇빛 자체가 거의 들지 않는 것도 문제다. 다른 방법으로는 건전지 두 개와 껌종이 같은 은박지를 이용하는 방법도 있지만, 그것 역시 없기는 마찬가지.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만 무엇 하나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은 지금 상황에서는 전부 불가능한 방법 뿐이다. 결국 남는 것은... 마찰열을 이용한 원시적인 방법 뿐이다. 날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으므로, 남자는 급히 숲 언저리를 돌아다니며 장작이나 불쏘시개로 쓸만한 것을 뒤지기 시작했다. 얇은 나무껍질이나 죽은 나뭇가지, 영지버섯 비슷한 목질 버섯 등을 한웅큼 찾아낸 남자는 그것을 한 곳에 쌓아두었다. 남자는 이제 모은 재료들 중에 적당한 길이의 나뭇가지 두 개와 두툼한 나무껍질을 골라 보우 드릴을 만들기 시작했다. 신발끈을 풀어 긴 나뭇가지에 묶는 것으로 활대는 어렵지 않게 만들 수 있었다. 아래쪽에 위치할 받침은 죽은 나무 둥치에서 벗겨낸 두툼한 나무 껍질로 정했다. 남자는 멀티툴의 코르크 따개 부분으로 나무 껍질에 작은 홈을 낸 다음, 칼로 그 홈을 넓혔다. 이때 중요한 것은 홈 옆에 뜨거운 재들이 빠져 나올 수 있도록 통로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그냥 홈만 내면 뜨거운 재들이 한데 뭉치지 않고 흩어져 버리기 때문에 연기가 나다가도 금방 꺼져버리지만, 통로를 만들어주면 마찰로 인해 생긴 뜨거운 재가 한데 뭉쳐 나오기 때문에 쉽게 꺼지지 않게 된다. 도구가 워낙 조악한데다, 실제로 시험해 보는 것 역시 처음이라 남자는 날이 상당히 어두워지고 나서야 겨우 필요한 도구들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남자는 둥글게 끝을 다듬은 대걸레 자루 굵기의 나뭇가지에 활대를 꼬아 끼웠다. 마찰시킬 나뭇가지가 너무 얇아도 불을 붙이기 어려운데, 두꺼우면 두꺼울수록 회전시 접촉되는 면적이 늘어나기 때문에 그만큼 마찰열이 크게 일어나서 불을 붙이기 쉬워진다. 받침으로 사용한 나무 껍질 밑에 넓적한 나뭇잎을 깐 남자는 활대를 끼운 나뭇가지를 홈에 가져다 댄 후, 마찬가지로 홈을 낸 나무 조각으로 막대의 위쪽을 누르면서 활대를 왕복시키기 시작했다. 위에서 힘주어 누르면서 활대를 왕복시키자 홈 옆에 내놓은 통로로 갈색의 톱밥 같은 것이 떨어지기 시작했지만, 연기는 나오지 않았다. 남자는 더욱 힘주어 열심히 활대를 왕복시켰다. 끼긱거리는 기분 나쁜 마찰음이 잠시 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슥슥거리는 소리만 들려온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마침내 수북하게 쌓인 갈색의 톱밥에서 흰 연기가 희미하게 올라온다. 남자는 얼른 받침을 치우고 바닥에 깥 나뭇잎을 조심스럽게 들어올렸다. 그곳에는 갈색의 톱밥 같은 것이 한데 손가락 하나 크기 정도로 쌓여진 채 흰 연기를 피워올리고 있었다. 남자는 그것을 들어올려 미리 준비해 둔 불쏘시개로 조심스럽게 감쌌다. 보풀이 생길 정도로 마구 구긴 영수증 조각을 중심으로 목질 버섯을 잘게 부순 것과 나무껍질의 가장 바깥쪽 허물이 덤불처럼 뒤엉킨 불쏘시개로 연기가 피어오르는 갈색의 톱밥을 가만히 감싼 채 살살 숨을 불어 넣는다. 하지만 그렇게 소중하게 다루었음에도 불구하고, 연기는 오래지 않아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젠장...” 뭐가 잘못 되었을까. 남자는 허탈한 느낌에 기운이 쭉 빠지고 말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튜토리얼인지 뭔지는 그렇다 쳐도... 어제와 같은 새까만 어둠 속에서 빛도 없이 밤을 지새기는 두려웠기 때문이다. “후웁...” 숨을 가다듬고 다시금 활대를 움직인다. 이미 한번 마찰을 시켰던 덕분인지, 이번에는 제법 빠르게 연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남자는 충분히 많은 양의 갈색 톱밥이 모이기를 기다린 후, 그것을 모아 다시금 불쏘시개로 조심스럽게 감쌌다. 양손으로 가만히 감싸자, 미약하기는 하지만 은은한 온기가 손바닥을 통해 전해져 왔다. 조심스럽게, 아주 조심스럽게 남자는 숨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천천히, 아주 천천히 흰 연기가 불쏘시개 안쪽에서 피어오르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연막탄이라도 피운 것처럼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그리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이윽고 붉은 불꽃이 확 하고 피어올랐다. “하하하하하!” 남자는 얼른 불이 붙은 불쏘시개를 바닥에 내려 놓은 다음 그 위에 장작들을 얹었다. 그러자 마침내 기다렸던 메시지가 다시 휴대폰에 도착한다. 튜토리얼을 시작합니다. 2. 불을 피워봅시다. - 가지고 있는 도구를 최대한 활용해서 불을 피우세요. (달성) -> 완료! 보상:경험치 약간 -> 보상을 지금 수령하시겠습니까? (Y/n) _ (주의) 수령하지 않은 보상은 7일후 자동 소거됩니다. 이번에도 경험치 약간인가. 남자는 입맛을 다시며 Y를 눌렀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까와는 달리 아무런 반응도 일어나지 않았고, 레벨이 올랐다는 메시지도 도착하지 않았다. “쯧...” 아마도 아까는 괴물 쥐와의 싸움에 의한 경험치가 더해져서 바로 레벨이 올랐던 것이 아닐까 싶다. 보상은 미약했지만, 그래도 이 끔찍한 어둠을 물리칠 방법을 찾았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으며 남자는 자신이 피운 모닥불 앞에 앉았다. 불빛이 닿는 앞쪽은 뜨겁고, 뒤쪽은 차가운 바람으로 인한 한기가 느껴지는 이상한 상태. 남자는 무언가에 홀린 듯 가만히 타오르는 불꽃을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하지만 모처럼의 휴식은 다시 한번 울리는 휴대폰 메시지 알림음에 의해 깨어지고 말았다. “...” 메시지를 알려주기 위해서일까. 남자는 이제야 휴대폰 배터리가 전혀 줄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후... 기왕이면 휴대폰 배터리 말고 배도 좀 채워줄 것이지.” 그렇게 투덜거리며 화면을 바라보자, 그곳에는 새로운 내용이 적혀 있었다. 튜토리얼을 시작합니다. 3. 음식을 만들어 봅시다. - 쥐고기를 구워 봅시다. (0/5) “...” 남자는 말없이 저쪽에 흩어져 있는 쥐의 사체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쪽에 대충 잘라 던져 두었던 쥐고기를 다시 바라보았다. “우읍...” 그러자 바로 욕지기가 치밀어 오른다. 가뜩이나 배가 고픈 마당에... 아까부터 몇 번이나 구역질을 해댄 탓에 이젠 슬슬 속이 쓰리기까지 하다. “젠장...” 남자는 투덜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잘라둔 쥐고기 조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것을 가져다가 꼬치에 끼워 불에 굽기 시작했다. 저쪽에 흩어져 있는 괴물 쥐의 사체를 생각하면 역겹게 느껴졌지만... 막상 불에 굽기 시작하니 제법 그럴 듯한 냄새가 흘러나온다. “미치겠군.” 얼마 지나지 않아 다섯 개의 고기 조각은 노릇하게 구워진 채 남자의 손에 들려졌다. 그러자 다시금 휴대폰으로 메시지가 전해진다. 튜토리얼을 시작합니다. 3. 음식을 만들어 봅시다. - 쥐고기를 구워 봅시다. (5/5) -> 완료! 보상:경험치 약간 -> 보상을 지금 수령하시겠습니까? (Y/n) _ (주의) 수령하지 않은 보상은 7일후 자동 소거됩니다. “후...” 남자는 Y를 누른 후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손에 들린 고기 조각을 뜯었다. 쥐고기는... 생각보다 꽤 맛있었다. 00004 트롤러 ========================================================================= 시장이 반찬이라고... 평소라면 입에도 대지 않았을 쥐고기 꼬치를 본격적으로 먹기 시작하는데 아까 전과 같은 빛이 몸을 감싸더니 다시금 휴대폰으로 메시지가 전달되었다. “레벨이 오른건가.” 축하합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보상:랜덤카드 -> 보상을 지금 수령하시겠습니까? (Y/n) _ (주의) 수령하지 않은 보상은 7일후 자동 소거됩니다. 예상대로 메시지는 레벨 업이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음...” 기왕이면 이번에는 물어뜯기 같은 이상한 스킬 말고 좀 제대로 된 번듯한 스킬이라도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떠올리며 남자는 Y를 눌렀다. 그러자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화면에 카드 한 장이 핑그르르 돌더니 아까와는 다른 카드 하나가 등장했다. 축하합니다! 스킬카드 ‘피칠갑’를 획득했습니다. :스킬카드는 카드 슬롯에 장착하여 그 능력을 사용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스킬카드를 카드 슬롯에 장착하시겠습니까? (Y/n) _ [카드 상세 정보 확인은 이곳을 누르십시오.] “...” 좀 정상적인 카드가 나오기를 기대했건만... 이번에는 이름만 들어도 뭔가 확 깨는 스킬카드가 나왔다. “피칠갑...” 어쩐지 화를 낼 기력도 없어진 남자는 카드의 상세 정보를 확인해 보았다. 카드정보 명칭 : 피칠갑 레벨 : 1Lv 경험치 : 0 등급 : Common 분류 : 스킬 성장 : 대기만성(중) 속성 : 없음 효과 : 공격 성공시 적에게 2% 확률로 공포 유발 Cost : 10 Seed : 2슬롯 “망할...” 남자는 자기도 모르게 상소리를 입에 담았다. 그도 그럴 것이, 공격 성공시 2%라는 얘기는 오십번 공격하면 1번 공포 유발에 걸린다는 얘기가 아닌가. 물론 확률이란 것이 그렇게 딱 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도 어지간해야지. 이래서는 쓰레기란 말이 딱 어울리는 스킬이다. “에휴... 하긴 내 팔자가 그렇지.” 복권을 사도 그 흔한 꼴등조차 일년에 한두번 할까 말까 할 정도인데, 이런 상황이 되었다고 그 운이 어디 가겠는가. 하긴 이런 상황에 처한 것 자체가 이미 운이 없는 것이겠지만 말이다. 쓰레기이긴 해도 그나마 없는 것보다는 나으리라는 생각에 슬롯에 등록하고 나서 다른 괴물 쥐의 사체도 끌어다 남은 고기 조각을 떼어 먹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렇게 조금이나마 배를 채우자 남자는 슬슬 졸음이 찾아오는 것을 느꼈다. 그래도 저 낭떠러지 아래에서 버둥거릴 때는 어쩌나 싶었는데... 따뜻한 모닥불이 있고 누린내가 진동을 하기는 해도 적당히 배도 채우고 나니 슬슬 마음이 풀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남자가 모닥불을 향해 꾸벅 꾸벅 인사를 시작할 즈음, 다시금 메시지가 도착했음을 알리는 효과음이 이미 캄캄해진 하늘을 가르며 울려퍼진다. “미치겠네...” 막 잠이 들 찰나에 깨어난 참이었지만, 그래도 남자는 띵한 머리를 부여잡고 새로운 메시지를 확인했다. 튜토리얼을 시작합니다. 4. 모닥불을 지키십시오. - 어두워지자 숲의 야수들이 당신을 노리기 시작합니다. 모닥불은 그런 당신을 지킬 유일한 방패가 될 것입니다. 아침까지 모닥불이 꺼지지 않도록 지키십시오. (남은 시간 07:28) “...” 남자는 잠시 이게 무슨 소린가 하고 멍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숲으로부터 붉고 푸른 눈동자들이 저벅 저벅 걸어 나오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이런 젠장...” 처음에는 그냥 도깨비불 같은 것인가 싶었지만... 모닥불과 점차 가까워지자 그 실체가 서서히 드러났다. 한쪽에는 붉은 털빛의 늑대 서너 마리가 다가오고 있었고, 그 옆으로는 송아지만한 검치호가 다가서고 있었다. 아까 전에 상대했던 괴물 쥐와는 차원이 다른 야수들. 남자는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려다가 우뚝 멈춰서고 말았다. 어차피 뒤쪽은 낭떠러지인데다... 모닥불을 벗어나면 대번에 공격 당하리란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남자는 다급히 남은 장작을 확인해 보았다. 그리고 좌절했다. “마, 망했다.” 고작해야 마른 나뭇가지 서너개로는 아무리 아껴서 불을 피운다 해도 도저히 아침까지 버텨낼 수 없었다. 그런 남자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늑대 떼와 검치호는 마치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모닥불과 남자를 가운데 두고 대치하기 시작했다. 어째서 검치호 같은 생물이 이런 곳에 존재하는지에 대한 의문 같은 걸 떠올릴 틈도 없었다. 남자는 그저 어떻게 아침까지 버티어내야 할지에 대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빠개질 지경이었다. -그르르르릉. 안 그래도 무서워 죽겠는데... 이제 늑대 떼들과 검치호는 서로 남자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기라도 하듯이 으르렁대며 기세를 피워 올리기 시작한다. 번뜩이는 눈동자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진득한 살기에 둘러싸인 남자는 이제 정신을 제대로 챙기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남자는 원망했다. 이럴 거면 최소한 그 전에 장작을 많이 모아 두라던가, 다른 대책을 세울 수 있도록 힌트라도 줬어야 하지 않는가. 도대체 효과가 있는지 조차 의심스러운 말도 안되는 스킬 두 개 던져 주고 이 무슨 말도 안되는 상황이란 말인가. 하지만 남자의 그런 원망을 아는지 모르는지, 불어오는 바람은 가뜩이나 부족한 장작을 더 빨리 태워 없애고 있었다. 방법을...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이대로는 아침 나절이 되기도 전에 늑대든 검치호든 둘 중 한쪽의 먹이가 되어 버리고 말 것이다. 다급하게 머리를 굴리던 남자의 눈에 이제는 원래의 형체조차 알기 힘들게 되어버린 괴물 쥐의 사체가 눈에 띄었다. 혹시... 이걸 쓰면 되지 않을까. 남자는 고민했다. 아직 장작은 조금 남은 상황. 아껴서 피운다면 못해도 서너시간은 버틸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 이후. 잘 하면... 이 괴물 쥐의 시체로 그 위기를 모면할 수 있지 않을까. “후우...” 남자는 심호흡을 하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지금 괴물 쥐의 시체를 미끼로 쓰는 것은 현명한 생각이 아니었다. 주어진 기회를 최대한 살리기 위해서는... 놈들이 좀 더 굶주릴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당장 괴물 쥐의 시체를 던져 본들... 녀석들에게 맛 좋은 에피타이저를 제공하는 일 밖에 되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배를 채우게 되면, 정작 중요할 때 놈들을 이간시키려는 계획이 물거품이 될 수도 있었다. 남자는 초조하게 모닥불을 지켜보며 기다렸다. 한 시간이 흐르고, 다시 또 한 시간이 흘렀다. 어지간하면 그냥 물러갈 법도 하건만. 늑대 떼와 검치호는 야광주처럼 빛나는 눈을 사납게 치켜 뜬 채 한 치도 물러설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눈앞의 늑대 떼와 검치호 외에 다른 야수는 접근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남자는 초조하게 기다렸다. 다시 한 시간이 흘렀다. 이제 모닥불은 눈에 띌 정도로 화력이 약해졌고, 남아있는 장작도 마른 가지 하나가 고작이었다. 남자는 나뭇가지를 꺾어 모닥불에 집어 넣었다. 불어오는 바람 탓일까. 예상보다 훨씬 더 빨리 장작이 소모되어 버리고 말았다. “후우...” 남자는 심호흡을 하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다시 기다렸다. 그렇게 기다리기를 약 삼십분 정도. 이제는 정말 금방이라도 꺼질 듯한 미약한 불꽃 밖에 남지 않았다. 늑대들도, 검치호도 이제 모닥불이 얼마 안 있어 꺼지리란 것을 알고 있는지 점차로 숨이 거칠어지고 있었다. 지금이다. 바로 지금이다. 남자는 싸늘하게 식어버린 괴물 쥐의 배를 칼로 찔러 억지로 가른 뒤, 그것을 늑대 떼와 검치호 사이에 던졌다. 순간, 야수들이 움찔하며 반응한다. 하지만 녀석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움직이지 않았다. “젠장...” 남자는 머리가 곤죽이 되어버린 괴물 쥐의 시체를 칼로 헤집었다. 죽은지 제법 시간이 흐른 터라 싸늘하게 굳어 있었지만, 칼로 시체를 헤집자 아직 굳지 않은 피와 체액이 흘러나온다. 남자는 그것을 다시 늑대와 검치호 중간에 던져 넣었다. 이번에는 확실하게 반응이 왔다. 강렬한 피와 체액의 향기가 배고픈 야수들의 후각을 사로 잡은 것이다. 늑대 중 한 마리가 괴물 쥐의 시체 쪽으로 한 걸음 움직이자, 검치호는 이빨을 드러내며 위협했다. 마치... 내 먹이에 손대지 말라고 엄포를 놓는 것처럼. 하지만 늑대 떼들은 검치호가 보인 위협의 동작에 마주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다시 한 마리의 늑대가 괴물 쥐의 시체 쪽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그러자 검치호는 몸을 낮추며 한층 강도 높은 위협의 자세를 취했다. 남자는 가만히 그 모든 모습을 지켜보다가... 마지막 방아쇠를 당기기로 결정했다. 다시 한 마리의 괴물 쥐 시체를 그들 사이에 던져 넣은 것이다. 괴물 쥐의 시체가 공중을 날아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늑대 떼와 검치호는 용수철처럼 튀어올라 서로에게 돌진했다. -퍼억! 선두에 서있던 늑대 한 마리가 검치호의 앞발에 얻어 맞고 옆으로 날아갔다. 하지만 늑대 떼들은 오히려 크게 울부짖으며 검치호의 양 옆을 파고 들더니 검치호를 사방에서 공격하기 시작했다. -쿠와아앙! 검치호는 그 커다란 송곳니를 드러내며 그런 늑대들의 공격을 받아넘겼다. 하지만 후방에서 덤벼든 늑대의 공격이 엉덩이 부근을 물리고야 말았다. -쿠워억! 검치호의 엉덩이에 이빨을 박아 넣은 늑대는 공중으로 떠올라 몸을 팽이처럼 회전시켰다. 그 말도 안되는 공격에 검치호의 엉덩이 부근의 살은 뭉텅이로 떨어져 나가며 피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검치호는 그 와중에도 목덜미를 노리고 달려들던 늑대 한 마리의 목에 그 날카로운 송곳니를 박아 넣는데 성공했다. -우직! 제법 거리가 떨어져 있는 남자에게까지 목뼈가 단숨에 부러지는 소리가 전해짐과 동시에 늑대의 몸은 그대로 축 늘어져 버렸다. 늑대 한 마리를 단숨에 해치운 검치호는 다시 옆으로 다가서던 늑대의 머리를 앞발로 후려쳤다. 그 강력한 일격에 얻어맞은 늑대는 깨갱거리는 소리와 함께 바닥을 뒹굴더니 뇌진탕이라도 일으켰는지 좀처럼 바로 서지를 못했다. 한 마리는 목이 부러져 즉사했으며, 처음에 검치호의 앞발에 얻어 맞은 한 마리는 다리가 부러졌는지 앞발을 절룩거리며 검치호에게서 거리를 띄우고 있었고, 나중에 얻어 맞은 한 마리는 비틀거리며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 제대로 싸울 수 있는 늑대는 오직 한 마리. 엉덩이의 살점이 뜯겨 나가는 바람에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오른 검치호는 다른 늑대들이 비실거리자 더 이상 눈치 보지 않고 남은 늑대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이 늑대는 상당히 민첩했다. 검치호의 벼락같은 앞발을 피하는가 싶더니 밑으로 파고 들어 검치호의 목덜미에 이빨을 박아 넣은 것이다. 검치호는 몸부림을 치며 앞발로 늑대의 몸을 마구 후려쳤다. 하지만 늑대는 거대한 검치호의 앞발에 맞아 비틀거리면서도 한사코 목덜미를 문 이빨을 풀지 않았다. 그러자 뒤늦게서야 얻어맞아서 비틀거리던 늑대가 다시 검치호에게 달려들었다. 검치호는 필사적으로 반항했지만,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번째 늑대에게 등골을 물리고 말았다. 곧바로 세 마리의 야수는 버둥거리며 바닥을 뒹굴었다. 남자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숲 언저리에서 장작을 있는 대로 집어 들었다. 발을 절뚝거리며 싸움에서 벗어나 있던 늑대가 이빨을 드러내며 위협의 몸짓을 보냈지만, 남자는 개의치 않고 최대한 끌어안을 수 있는만큼 챙겨서 모닥불로 돌아왔다. 이 정도라면... 이제 충분히 아침까지 버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 때. 남자는 앞발을 절뚝거리는 붉은 빛의 늑대가 자신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음을 깨달았다. “아차!” 급하게 가물거리는 불꽃 위에 장작을 넣은 것 까지는 좋았지만... 한 순간 불꽃이 가려져 주위가 어두워졌고 그 틈을 타서 늑대가 접근한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깨달은 순간에는 이미. 늑대의 거대한 몸이 남자를 향해 덮쳐들고 있었다. 00005 트롤러 ========================================================================= -쿠어어엉! 확 하고 늑대의 뜨거운 입김과 냄새가 남자의 얼굴로 밀어닥친다고 느껴졌을 때는 이미 남자의 몸은 거대한 늑대의 체중에 밀려 뒤로 넘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크윽!” 남자는 등을 세차게 부딪히며 바닥을 나뒹굴면서도 필사적으로 늑대의 목을 손으로 밀쳐내며 물리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손으로 늑대의 목을 조르려고 했으나 순간 손가락이 미끄러지면서 늑대의 날카로운 이빨이 남자의 목을 향해 덮쳐 온다. “젠장!” 있는 힘을 다해 늑대의 목을 한쪽 방향으로 밀어낸 덕분에 목덜미를 물리는 것만큼은 면했지만, 얼굴과 팔뚝이 늑대의 발톱에 할퀴어지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순간 비릿한 피 냄새가 남자와 늑대의 후각을 자극한다. 남자는 얼굴 피부를 찢기는 통증에 눈을 부릅 떴고, 늑대는 코앞에서 풍기는 신선한 피 냄새에 흉성이 폭발했다. 그제서야 꺼져가던 모닥불이 새로운 땔감에 옮겨 붙으며 다시 불이 환하게 켜졌지만, 이미 남자도 늑대도 그런 것 따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이 망할 개새끼가!” 남자는 늑대의 목을 팔꿈치로 밀어내며 오른손으로 마구 늑대의 몸을 때렸다. 하지만 자세도 거리도 제대로 잡지 못한 상태에서 내뻗는 주먹은 늑대에게 아무런 상처도 주지 못하고 남자의 기력만 앗아갈 뿐이었다. 그에 반해 늑대는 날카로운 이빨로 계속해서 남자의 목덜미를 노렸다. 남자는 깨달았다. 이런 식으로 버텨봐야 먼저 지치는 것은 자신이라는 사실을. 남자는 무의미하게 주먹을 휘두르던 것을 멈추고 호주머니를 뒤졌다. 멀티툴에 달린 칼이라도 써볼 심산이었지만, 늑대와 뒹구는 와중에 떨어졌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무언가 잡히기를 기대하며 손을 휘저었지만, 돌맹이나 나뭇가지는커녕 모래조차 제대로 잡히지 않는다. 바로 그 순간 늑대는 개를 크게 흔들어 목을 밀쳐내던 팔을 떨쳐내고 남자의 목을 향해 이빨을 들이밀었다. 절체절명의 순간! 남자가 다급하게 비어있던 손을 들어올리는 순간, 늑대의 이빨은 남자의 팔뚝을 여지없이 물어버렸다. “으아악!” 괴물 쥐가 물었을 때보다도 훨씬 끔찍한 고통이 남자의 통각을 격렬하게 자극했다. 아니, 아픈 것은 둘째 치고... 늑대 이빨이 자신의 팔뼈를 긁어대는 그 소름 끼치는 느낌에 남자는 잠시 패닉 상태에 빠져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늑대는 일단 한 번 피맛을 보자 입안에 들어온 먹이를 놓치려 하지 않았다. 고통으로 울부짖으며 버둥거리던 남자의 시야에... 자신의 팔을 물고 있는 늑대의 번들거리는 코가 들어온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생각보다 행동이 빨랐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남자가 자신의 행동을 인지한 것은 늑대의 촉촉하게 젖은 코를 스스로의 이빨로 물어뜯은 후의 일이었다. -깨개개갱! 늑대는 예상치 못한 일격에 놀라 비명과 함께 남자의 팔뚝으로부터 떨어져 나갔다. 남자는 그제서야 입안에 들어 있는 말캉하고 비린 무언가를 퉤하고 뱉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크윽...” 늑대의 타액과 피로 흥건하게 젖은 오른팔을 부여잡으며 몸을 일으킨 남자는 성한 한쪽 앞발로 코언저리를 누른 채 바닥을 뒹굴고 있는 늑대를 바라보았다. “이 망할 개새끼...” 악이 받칠대로 받친 남자는 주위를 둘러보고는 새로 주워온 땔감 가운데 길고 튼튼한 나뭇가지 하나를 들어 올렸다. 남자는 바닥을 뒹굴고 있는 늑대에게로 다가가 그 목을 발로 세차게 밟았다. 늑대는 남자의 발을 피하며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하필 남자의 발이 늑대의 성한 앞발을 밟아 버렸다. -우둑! 남자는 뼈가 부러지는 소름끼치는 소음이 귓가로 전해지자 쾌재를 올렸다. 밟은 위치가 나빴던 것일까. 아니면 레벨이 오르면서 힘이 강해진 탓일까. 하지만 남자에게 있어 단숨에 늑대의 다리가 부러진 이유 따위는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자신의 팔뚝에 바람 구멍을 낸 이 빌어먹을 늑대가 이제 도망을 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몸이 되었다는 사실 뿐이다. 남자는 바닥을 뒹굴며 뒷다리를 움직여 어떻게든 자신을 피하려 드는 늑대의 배를 향해 마치 축구공을 차듯이 세차게 발길질을 했다. 전심전력을 담은 사커킥은 가죽북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정확히 늑대의 복부에 틀어박혔다. -깨개갱! 늑대는 상처입은 개새끼마냥 비명을 질러댔지만, 남자는 아랑곳없이 연거푸 늑대의 배를 걷어찼다. 그리고 마침내 늑대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숨을 헐떡거리기 시작하자... 손에 들고 있던 막대기를 거꾸로 쥐고 녀석의 부드러운 뱃가죽을 향해 그대로 내려 찍었다. 하지만 막대기가 뭉툭한 탓인지 늑대의 뱃가죽은 뚫리지 않았다. 대신... 뚝 하는 소리와 함께 늑대의 갈비뼈가 부러졌다. 남자는 광기에 휩싸인 채 나뭇가지를 마구 내려 찍었다. 거친 나뭇가지의 표면에 긁혀 손바닥이 찢어진 것조차 의식하지 못한 채, 남자는 미친 듯이 나뭇가지를 내리 찍었고, 그렇게 예닐곱 번을 연속해서 내리 찍자 결국 늑대의 뱃가죽은 견디지 못하고 구멍이 뚫리고야 말았다. 푹하고 나뭇가지가 늑대의 뱃가죽을 뚫고 들어가는 감촉이 손에 전해지자... 남자는 그제서야 정신이 퍼뜩 들었다. 곧바로 자신이 모닥불에서 제법 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남자는 흰 연기를 내뿜으며 붉게 타오르는 불꽃 옆으로 얼른 돌아왔다. “큭...” 정신이 돌아오자 새삼스럽게 팔뚝의 상처가 아파오기 시작한다. 발톱에 긁힌 얼굴도 화끈거리기는 매한가지였지만, 바람 구멍이 나버린 팔뚝의 상처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남자는 고통으로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자신의 생명줄인 모닥불을 살폈다. 그리고... 한동안은 안심해도 되리란 사실을 확인한 후에야 저쪽에서 벌어지고 있는 싸움의 향방으로 관심을 돌렸다. 이대 일로 맞붙어 있던 검치호와 늑대의 싸움은, 남자가 늑대 한 마리와 사투를 벌이는 동안 다시 상황이 뒤바뀌어 있었다. 등골을 물고 늘어지던 늑대 한 마리는 이미 어디론가 사라진 상태였고, 검치호는 끈덕지게 자신의 목덜미를 물고 늘어지는 늑대 한 마리와 뒤엉켜 있었다. 검치호는 비틀거리며 어떻게든 늑대를 떼어 놓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검치호의 움직임은 점점 둔해지기 시작했고, 마침내 다시 한 시간이 지날 무렵 결국 검치호는 발이 푹 꺾이며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검치호의 목에 매달려 있던 늑대는 마치 죽은 것처럼 한 동안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대신 엉덩이의 살점을 물어 뜯을 때처럼 몇 번 몸을 뒤트는 움직임을 보이며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리고... 남자가 초조하게 지켜보는 가운데 다시 한 시간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그제서야 늑대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늑대는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기다가 몇 발자국 가지도 못하고 그대로 폭 고꾸라지고 말았다. 몸이 들썩거리는 것을 보니 죽지는 않은 모양이다. 남자는 휴대폰을 바라보았다. 남은 시간은 약 삼십분. 어느새 주위는 칠흑 같은 어둠에서 벗어나 희미하게나마 조금씩 밝아지고 있었다. 남자는 반대편에 나뭇가지를 깃발처럼 뱃가죽에 꽂은 채로 죽어있는 늑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숨을 헐떡거리는, 마지막 남은 늑대를 다시 바라보았다. 망설임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남자는 곧바로 죽어있는 늑대에게로 다가가 그 몸통에서 나뭇가지를 뽑아낸 후 쓰러져서 숨을 헐떡이고 있는 늑대에게로 다가갔다. 늑대는 남자의 접근을 알아차리고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지만. 남자는 가차 없이 그런 늑대의 옆구리를 있는 힘껏 발로 걷어찼다. -깨개개개갱! 다시 한번 고통에 찬 늑대의 비명소리를 들으며 남자는 희열을 느꼈다. 아니, 이것은 단순히 희열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도 격한 감각이었다. 온몸의 솜털이 올올이 곤두서는 그런 쾌감!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며 다시금 늑대의 배를 있는 힘껏 걷어찼다. 마치 공처럼 이리저리 나뒹굴던 늑대는 이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헐떡이며 간신히 숨만 붙어있는 상태가 되었다. 남자는 그제서야 들고 있던 나뭇가지를 치켜올렸다. 다른 늑대의 피로 얼룩진 그 나뭇가지를 마지막 남은 늑대는 망연히 올려다 보았다. 남자는 순간 늑대의 누런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지만... 망설임 없이 그 뱃가죽을 향해 나뭇가지를 내려 찍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곧바로 손 끝에 가죽이 꿰뚫리는 느낌이 전해져 왔다. 늑대는 숨을 헐떡거리다가 이내 혀를 빼물고 그대로 축 늘어지고 말았다. 남자는 거친 숨을 몰아쉬다가... 이내 주위에 흩어진 사체들을 하나씩 모닥불 근처로 끌어 모았다. 그렇게 뒷정리를 하다보니... 어느새 정해진 시간이 모두 흘러가 버렸다. 튜토리얼을 시작합니다. 4. 모닥불을 지키십시오. - 어두워지자 숲의 야수들이 당신을 노리기 시작합니다. 모닥불은 그런 당신을 지킬 유일한 방패가 될 것입니다. 아침까지 모닥불이 꺼지지 않도록 지키십시오. (남은 시간 00:00) -> 완료! 보상:경험치 조금 -> 보상을 지금 수령하시겠습니까? (Y/n) _ (주의) 수령하지 않은 보상은 7일후 자동 소거됩니다. “...” 약간이 조금으로 바뀐 것 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남자는 큰 희열을 느꼈다. 하기야... 지난 밤의 악전고투를 생각하면 고작 ‘조금’이 뭔가 싶은 느낌이긴 하다. 물론 땔감만 제대로 갖춰져 있었다면, 고생할 일도 없었겠지만 말이다. “후우...” Y를 누르자 예의 빛이 몸을 감싸며 몸에 났던 상처가 아문다. 흉터는 남았겠지만... 정신을 갉아먹던 상처가 나은 것만으로도 지금은 감지덕지다. 레벨이 오르자 예의 축하 메시지가 다시 도착했다. 이번에는 제발 제대로 된 카드가 나오기를 기대하며 남자는 보상을 수령했다. 축하합니다! 스킬카드 ‘피칠갑’을 획득했습니다. :스킬카드는 카드 슬롯에 장착하여 그 능력을 사용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스킬카드를 카드 슬롯에 장착하시겠습니까? (Y/n) _ [카드 상세 정보 확인은 이곳을 누르십시오.] “...” 하지만 이번에도 어김없이 남자의 기대는 무너지고 말았다. 하필 이전에 나왔던 피칠갑 카드가 다시 나와버린 탓이다. “후우...” 그야말로 짜증에 몸부림치며 한숨을 푸욱 내쉬는데... 다시금 몸에서 빛이 흘러나온다. “어?” 어떻게 된 영문일까. 레벨 업이라면 방금 전에 이미 했었는데? 잠시 어리둥절했지만 남자는 그 이유를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아마도... 늑대들과 검치호를 잡은 것 또한 경험치로 계산이 된 것이 아닐까 싶었다. 남자는 다시 보상을 수령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팡파레가 울려퍼진다. 축하합니다! 스킬카드 ‘피칠갑(R)’을 획득했습니다. :스킬카드는 카드 슬롯에 장착하여 그 능력을 사용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스킬카드를 카드 슬롯에 장착하시겠습니까? (Y/n) _ [카드 상세 정보 확인은 이곳을 누르십시오.] “미친...”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또다시 피칠갑이라고 씌어진 이름을 보는 순간 남자는 좌절해 버렸다. 무슨 피칠갑에 원수진 것도 아니고... 어떻게 뽑는 족족 이 카드만 연달아 나올 수가 있단 말인가. 남자는 짜증을 내며 휴대폰을 덮으려다가... 문득 이번에 나온 메시지가 이전과는 조금 틀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번에 나온 피칠갑은 피칠갑이기는 하지만, 이전과는 달리 피칠갑(R)이라고 되어 있었다. 남자는 카드 상세 정보를 확인했다. 카드정보 명칭 : 피칠갑(R) 레벨 : 1Lv 경험치 : 0 등급 : Rare++ 분류 : 스킬 성장 : 대기만성(중) 속성 : 불 효과 : 1. 공격 성공시 적에게 30% 확률로 공포 유발 2. 재생률 10% 상승 3. 공격력 5% 상승 Cost : 20 Seed : 5슬롯 00006 트롤러 ========================================================================= 그래봐야 거기서 거기겠거니 했던 남자는 휴대폰 화면에 나온 내용을 잠시 말문을 잃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전에 나왔던 피칠갑과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이라 할 정도의 효과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등급이 높아서 그런걸까. 여기 나오는 카드의 등급 체계가 어떤 식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희귀라는 뜻의 레어에 플러스가 둘이나 붙은 걸 보면 절대로 낮은 등급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남자는 의문이 들었다. 솔직히 별로 믿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지금 그가 처해 있는 현실이 게임의 그것과 비슷하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초반에 이런 식으로 높은 등급의 무언가가 나온다는 것은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혹시... 검치호와 늑대들을 모조리 잡아서 그런건가.” 앞서의 퀘스트 완료 조건은 어디까지나 아침까지 모닥불을 지키기만 하는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남자는 땔감이 부족한 상황에서 궁여지책으로 늑대들과 검치호를 이간시켜 서로 양패구상하도록 만들었고 결과적으로 모든 야수들을 죽이는데 성공했다. 이것이 보상에 무언가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닐까? 이를테면 보너스 스테이지 클리어 같은 개념으로 말이다. 실질적으로 맨손의 그가 늑대들과 검치호를 동시에 전부 잡는 건 절대로 불가능한 일. 괴물 쥐의 시체가 있으니 서로 이간을 시키는 것이라면 몰라도 모든 야수를 잡는 건 여러모로 기회나 운이 맞아떨어져야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불가능한 일을 이루었기 때문에 나온 보상으로 원래 나올 예정이었던 피칠갑 카드의 등급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은 아닐까? “확실히...”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런 것이라면 이런 카드가 나온 것도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다. 남자는 다시 생각했다. 만약 자신의 가정이 맞다면, 다른 퀘스트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하고. 다시 말하자면, 모든 퀘스트는 기본 완료 조건 외에도 보너스 스테이지의 개념으로 추가 완료 조건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것을 클리어할 경우 본래 나와야할 카드의 등급이 올라가는 등의 추가 보상이 주어지는 것이리라. “이건 확인해 볼 필요가 있겠군.” 남자는 일단 카드 슬롯에 피칠갑(R) 카드를 등록했다. 그러자 짤막한 내용의 경고 메시지가 표시된다. 주의! 스킬 카드의 경우, 서로 다른 등급의 같은 카드를 동시에 등록하면 가장 높은 등급의 스킬 카드 하나를 제외한 다른 스킬 카드는 무효처리됩니다. -그래도 ‘피칠갑(R)’ 카드를 등록하시겠습니까? (Y/n) _ “이런 제한이 있는 건가.” 하긴, 당연하다면 당연한 제한이다. 이런 제한조차 없다면 피칠갑(R) 카드를 여러 개 등록해서 공포 유발 100퍼센트를 맞추는 것도 가능할 테니까. “근데... 공포 유발의 효과는 뭘까.” 혹시나 싶어 공포 유발이라고 되어 있는 부분을 손가락으로 툭 찍어 보았다. 그러자 팝업이 열리며 도움말 창이 나타난다. 공포 유발 :대상이 되는 적에게 공포를 일으켜 반격 불가 상태로 만듭니다. -기본지속시간 : 1초 -캐릭터 레벨과 대상의 레벨 차가 클수록 지속시간이 증가합니다. “1초라면 그냥 잠깐 움찔거리는 정도군.” 온라인 게임이라면 사실 1초의 움찔거림 정도는 별 의미가 없다. 공포 유발 효과가 100퍼센트라도 상대의 레벨이라든가 기타 다른 버프 효과 같은 것을 감안하면 1초 이내에 추가타를 명중시키더라도 반드시 계속해서 반격 불가 상태가 유지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부분의 1초라는 시간 제한에 맞추기 위해서는 스킬 쿨타임을 맞추기도 어렵다는 문제가 있다. “이건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네.” 남자는 내친 김에 재생률에 대해서도 확인해 보았다. 재생률은 체력과 스테미너 등이 단위 시간당 재생되는 양으로서 10퍼센트라는 말은 최대치의 10퍼센트가 단위 시간당 재생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원래 가지고 있는 재생률의 10퍼센트가 증가한다는 뜻이다. 원래 가진 재생률이 높을수록 빛을 보는 옵션인 셈이지만, 지금으로서는 이것조차 감지덕지다. 여기에 공격력 5퍼센트가 추가되므로, 물어뜯기를 사용할 경우 최대 10퍼센트의 공격력 증가 효과가 부여되는 셈이다. 남자는 원래 장착되어 있던 피칠갑 카드를 슬롯에서 빼고 피칠갑(R) 카드를 넣었다. 역시나 뭔가 효과가 피부로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왠지 레어 등급 카드를 장착하자 기분은 조금 뿌듯해지는 느낌이다. 스킬 카드 등록을 마치자 기다렸다는 듯이 새로운 퀘스트가 도착했다. 튜토리얼을 시작합니다. 5. 숲을 통과하십시오. - 지금까지의 경험을 토대로 눈앞에 보이는 숲을 통과하십시오. 숲에는 예상치 못한 여러 가지 장애물과 강력한 야수들이 존재하므로 충분히 주의하셔야만 합니다. “...” 남자는 눈앞에 펼쳐진 밀림을 바라보았다. 날이 밝았음에도 여전히 주위가 어둑어둑한데다, 남자가 위치한 곳 역시 그리 높지 않았기 때문에 이 눈앞의 숲이 도대체 얼마나 넓을지 좀처럼 가늠이 되지 않았다. 저렇게 어두운 숲속으로 무턱대고 들어갔다가, 어젯밤의 늑대들이나 검치호 같은 야수를 만나면 스킬이고 뭐고 써볼 틈도 없이 먹이가 되어 버리고 말 것이다. 하지만 튜토리얼은 그 해결법 또한 제시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지금까지의 경험을 토대로...” ...라는 내용이었다. 어젯밤의 경험을 통해 숲속의 야수들이 불을 꺼려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즉, 이 퀘스트는 횃불 등의 방법을 동원해 불을 가지고 숲으로 들어가 출구를 찾으라는 의미가 된다. 관건은 출구를 찾을 때까지 횃불이 꺼지지 않도록 유지하는 것이 되리라. 남자는 곧바로 횃불의 재료로 쓸만한 관솔 등을 찾으려다가 문득 한 가지 생각을 떠올리고 그대로 멈춰섰다. 보너스 스테이지에 대한 생각이 문득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 경우라면 어떤 것이 보너스 스테이지로 적용될까. 가능성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첫 번째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출구까지의 도달 속도이다. 하지만 출구의 위치를 미리 알지 못하는 이상 이것은 쉽게 달성하기 어려운 조건이다. 그야말로 운에 달렸다고나 할까. 그렇다면 두 번째는? 퀘스트 내용에는 숲 안에 여러 가지 장애물과 강력한 야수들이 존재한다고 나와 있다. 만약 이것을 모두 제거한다면? 아니, 가장 큰 장애물인 숲 그 자체를 없애버린다면? 씨익. 남자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활활 타오르고 있는 모닥불과 검은 숲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것으로 앞으로의 방침은 정해졌다. 남자는 일단 모닥불에서 불씨를 가져다 숲 입구 여기저기에 새로운 모닥불을 지펴 야수들의 접근을 막은 후 불쏘시개로 쓸 재료를 찾았다. 횃불 제작을 염두에 둔 탓일까. 숲 입구에는 관솔이 제법 많았다. 관솔은 송진이 나무의 가지나 옹이에 엉겨 그대로 굳어버린 것을 말한다. 주성분이 로진과 테레빈유이기 때문에 예전에는 이것을 등불이나 횃불의 재료로 사용했다. 관솔은 한자로 흔히 송명(松明)이라고 쓰는데, 일본에서는 이 말을 아예 횃불이라는 의미로 사용할 정도다. 남자는 관솔을 채취해 숲 입구 이곳 저곳의 나무 가져다 놓고 일시에 불을 질렀다. 그렇지 않아도 물이 부족한 고지대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관솔의 화력이 생각보다 강력했던 탓일까. 어찌되었든 불은 남자의 의도대로 순식간에 그 기세를 키우더니 때마침 불어온 바람을 타고 그대로 숲을 집어 삼켜 버렸다. “허...” 생각보다 강한 산불의 기세에 남자는 겁이 덜컥 났다. 퀘스트니 튜토리얼이니 해서 사람을 가지고 노는 듯한 그 누군가의 행위에 울컥 치밀어 올라서 너무 큰일을 저질러 버렸다는 생각이 든 까닭이다. 하지만 이미 산불은 크게 번져서 남자로서는 수습할 방법이 없었다. 남자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처음의 모닥불로 돌아와 검치호와 늑대의 시체에서 살을 발라냈다. 맛이 어떨지는 의문이었지만... 생각보다 숲의 크기가 넓을 경우를 감안해서 미리 식량을 준비해둘 심산이었다. 칼이 워낙 조악해서 이것만으로도 이미 악전고투였지만, 남자는 잘라낸 고기를 꼬치에 끼워 불에 구웠다. 그리고 약간 바삭한 느낌이 날 정도로 구워진 고기들을 넓은 잎사귀로 정성껏 포장했다. 그렇게 제법 두툼한 식량 꾸러미가 만들어지자 이번에는 긴 나뭇가지 하나를 다듬어 목창을 만들었다. 들지 않는 칼로 열심히 손을 놀려 끝을 뾰족하게 다듬고 다시 불에 그을려 단단하게 만들고 나서야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우... 그럼 가볼까.” 남자가 불을 붙였던 숲의 입구는 이미 검게 그을려 앙상한 나무 줄기 들만 타닥거리는 소리를 내며 불똥을 흘리고 있었다. 얼마나 빠르게 불길이 번졌는지... 숲 안쪽으로 들어서자 미처 도망치지 못하고 불에 타 죽은 야수들의 시체가 드문 드문 눈에 들어왔다. “음...” 아직 이곳 저곳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기 때문에 눈이 따갑고 목도 칼칼해졌지만, 남자는 옷자락을 찢어 입과 코를 막은 후 숲 안쪽으로 계속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얼마나 이동했을까. 문득 휴대폰에서 메시지 알림음이 들려왔다. 남자는 얼른 휴대폰을 꺼내어 메시지를 확인했다. 튜토리얼을 시작합니다. 5. 숲을 통과하십시오. - 지금까지의 경험을 토대로 눈앞에 보이는 숲을 통과하십시오. 숲에는 예상치 못한 여러 가지 장애물과 강력한 야수들이 존재하므로 충분히 주의하셔야만 합니다. ->미완료. (Hidden) 숲에 숨겨진 모든 흉악한 장애물을 제거하십시오. ->완료! (Hidden) 숲에 숨어 있는 모든 흉악한 야수들을 제거하십시오. ->완료! (Hidden) 장애물과 야수들이 사라지자 숲에 숨겨져 있던 알수 없는 던전의 입구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안쪽을 탐사하여 그 비밀을 밝혀 내십시오. [던전 위치 정보 확인은 이곳을 누르십시오.] “...” 남자는 새로운 메시지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산불 덕분에 장애물과 야수들이 제거된 것은 다행이었지만, 느닷없이 숨겨진 던전이라니? 남자는 잠시 고민했지만, 망설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후우...” 결정을 내린 남자는 심호흡을 한 뒤 던전의 위치 정보를 확인했다. 그리고 아직까지 연기를 피워 올리는 불타버린 숲을 통과해 던전 입구로 발걸음을 옮겼다. 던전의 입구는 생각보다 멀었다. 제법 시간이 걸려서 위치 정보에 표시된 곳에 도착한 남자는 눈 앞에 나타난 동굴 입구를 잠시 바라보았다. 숲이 불타버리면서 입구를 가리고 있던 나무와 덩굴들이 사라지자 모습이 드러난 것이 아닌가 싶다. 남자는 관솔을 덤불과 함께 나뭇가지에 묶어 횃불을 만들어 든 후 동굴 안으로 들어섰다.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후각을 자극하는 동굴 안쪽으로 들어선 남자는 조심스럽게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구불구불한 동굴 속을 걷기를 얼마나 했을까. 문득 좁은 동굴 입구가 넓어지며 공터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건...” 잠시 주위를 둘러보던 남자는 다 썩어가는 목재 침상 하나와 책상 하나, 그리고 나무 상자 하나를 발견했다. 침상으로 다가가자 미이라로 변해버린 시체 하나가 누워 있는 모습에 흠칫 놀랐다. 느닷없이 발견한 시체로 인해 놀란 마음을 잠시 진정시킨 남자는 먼저 책상 위를 살펴보았지만 특이한 것은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남자는 다시 옆에 놓여진 상자로 관심을 돌렸다. 척 보기에도 보물 상자 같은 느낌이긴 했지만, 함정일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에 남자는 목창과 횃불을 들이댄 채로 발로 툭 차서 뚜껑을 열었다. 00007 트롤러 ========================================================================= 그러자 먼지가 풀썩 피어오르며 뚜껑이 뒤로 넘어간다. 남자는 코를 막은 채 먼지가 가라앉기를 기다린 후 상자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작은 수첩 하나와 가죽 주머니 하나가 놓여 있었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우선 수첩을 확인해 보았다. 하지만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난 탓인지 안쪽의 종이는 이미 다 부스러져 사라진 후였다. 이번에는 가죽 주머니를 열어보았다. 그러자 투박한 금반지 두 개가 나왔다. “흠...” 남자는 잠시 금반지를 살펴 보았다. 첫 번째 반지에는 작은 홈이 하나 나 있는 것 외에는 특이한 점이 없었고, 두 번째 반지의 홈에는 무언가 해바라기 씨앗 같은 검은 것이 박혀 있었다. 혹시 마법 반지 같은 건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서 손가락에 껴볼까 하다가... 오히려 저주 같은 것이 걸려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만 두었다. 정확히 용도가 확인되지 않은 물품을 무턱대고 사용하는 건 위험한 일. 남자는 입맛을 다시며 반지들을 바지 주머니에 집어 넣었다. 어찌보면 가장 큰 수확은 가죽 주머니 바로 그 자체일 수도 있었다. 가죽 주머니를 뒤집어 탈탈 턴 다음, 지금까지 들고 다니던 구운 고기 묶음을 그 안에 집어 넣고 주머니에 달린 끈을 허리춤에 묶어 고정했다. 한결 움직임이 편해진 느낌이다. 남자는 다시 목창과 횃불을 양손에 들었다. 목창을 들다가 그제서야 검치호의 이빨로 창촉을 만들었으면 좋았으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쳇.” 혀를 차며 남자는 혹시나 뭔가 달리 챙겨갈 것이 없나 살폈지만, 달리 챙겨갈 만한 것이 없었다. 남자는 다시 동굴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구석으로 향하자 처음 들어왔던 곳보다 널찍한 통로 하나가 눈에 띄었다. 가만히 횃불을 앞세우고 안으로 들어서려는데... 횃불의 빛에 놀랐는지 무언가가 찍찍거리며 도망치는 기척이 느껴진다. 괴물 쥐라도 살고 있는 것일까.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자 새송이버섯을 연상시키는 커다란 버섯이 군락을 이룬 채 자라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하지만 남자는 버섯에 손을 대지 않았다. 전문가, 특히나 이 지역에서 오래 살아 경험이 많은 전문가가 아니면 처음 보는 버섯이 독버섯인지 아닌지를 판별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곳은 검치호처럼 본래대로라면 존재할 수 없는 동물조차 사는 곳. 그런 점을 감안하면 어설픈 지식으로 독버섯인지 아닌지를 판별하려 드는 것은 너무나 위험한 행위다. 오죽하면 생존왕이라 불리는 모 다큐멘터리의 어떤 분조차 버섯은 손에도 대지 않으실까. 게다가 대부분의 독버섯은 대부분 만성의 독을 가지고 있어서 먹을 때는 별 이상이 없는 듯 싶다가 갑자기 중독증상이 일어나 요단강을 건너는 경우도 흔하다. 목질 버섯이라면 불을 붙이기 위한 용도라도 있지, 그 외의 버섯은 생존이 걸린 상황이라면 그냥 손을 대지 않는 것이 가장 확실하다. 남자는 다시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버섯 군락에서 조금 안쪽으로 들어가자 다시 괴물 쥐 서너마리가 찍찍거리며 도망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횃불 때문에 감히 접근은 하지 못하면서도 어둠 속에 숨어 붉은 눈동자를 희번뜩거리는 모습이 제법 섬뜩하다. “음...” 점점 괴물 쥐의 숫자가 많아지는 느낌이라 좀 불안하기는 했지만, 남자는 안쪽으로 계속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얼마나 이동했을까. 점점 동굴의 폭이 좁아지더니 사람 하나가 겨우 통과할 정도가 되었다. 거기서 조금 더 이동하자, 그나마도 종유석이 내려와 가로 막은 탓에 기어야 겨우 지날 정도로 좁아지고 말았다. “...” 남자는 말없이 폭포처럼 흘러내려 앞을 가로막은 종유석을 살폈다. 다행히 종유석은 그리 두껍지 않았기에 이 정도면 충분히 부수고 나갈 수 있을 듯 싶었다. 남자는 발을 들어 종유석을 부수려다가, 그 건너편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붉은 눈동자를 발견하고 흠칫 굳어 버렸다. 얼른 횃불을 들이대자... 몸 크기가 거의 도사견만한 거대한 괴물 쥐가 구석에 웅크린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녀석의 주위에는 다른 작은 괴물 쥐들 대여섯마리가 찍찍거리며 모여 있었다. 지금까지 동굴 안으로 들어와서 마주쳤던 쥐들이 모두 모여 있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남자는 눈 앞을 가로 막은 종유석을 부숴버리려던 것을 멈추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음...” 그리고 횃불을 이리저리 비춰 거대 괴물 쥐가 도사리고 있는 동굴 안쪽을 살펴 보았지만 달리 출구가 보이지 않았다. 저런 괴물 쥐가 있는데 어째서 입구의 침상에 그런 미이라가 방치되어 있는지 조금 의문이긴 했지만, 남자는 아마도 히든 퀘스트에서 원하는 목표가 저 녀석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냥 종유석을 부수고 안으로 들어가 저 거대 괴물 쥐와 싸워볼까 하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솔직히 저런 커다란 놈을 상대로 싸워 이길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늑대와 싸워 이기긴 했지만, 검치호와 싸우느라 한쪽 다리가 이미 부러진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야말로 악전고투 끝에 간신히 이길 수 있었던 걸 생각하면... 이 동굴의 왕으로 군림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 저런 괴물과는 직접 싸워서 이길 수 있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남자는 잠시 생각하다가, 다른 방법을 쓰기로 했다. 들어왔던 입구 쪽으로 급히 발걸음을 돌린 남자는 지나오며 발견했던 버섯 군락으로 향했다. 그리고 상자에서 발견한 주머니의 내용물을 꺼내고 그것을 뒤집은 후, 그것을 장갑처럼 사용해 버섯을 전부 따서 종유석이 가로 막고 있는 맨 끝방으로 옮겼다. 이내 종유석으로 가로 막힌 마지막 방 입구는 하얀 버섯으로 하나 가득 채워졌다. 저런 괴물 쥐들이 있는데도 버섯들이 하나 가득 군락을 이룬 채 자라는 것을 보니, 역시 독버섯이 맞는 모양이다. 남자는 버섯 중간 중간에 관솔 조각과 침상으로부터 가져온 마른 풀을 채워 넣었다. “후...” 남자는 구멍 너머에서 여전히 붉은 눈을 번뜩이고 있는 거대 괴물 쥐와 눈을 마주치며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아디오스.” 그리고 곧바로 마른 풀 더미에 불을 붙였다. 마른 풀들은 조금 눅눅한 동굴의 습기 탓에 처음에는 불이 잘 붙지 않았지만, 관솔 조각에 불이 붙자 이내 자욱한 연기를 내며 타오르기 시작했다. 남자는 맹렬하게 불이 타오르기 시작하자 곧바로 그곳을 벗어났다. 다급하게 자리를 벗어난 남자는 침상이 있는 곳까지 되돌아 왔다. 희미하기는 했지만, 침상이 있는 이곳 위쪽에는 희미하게나마 빛이 새어들어오는 구멍이 존재하고 있었다. 남자는 그곳에서 느긋하게 연기가 멎기를 기다렸다. 결국 한 시간 가까이나 걸려서야 자욱하게 피어오르던 연기는 더 이상 흘러나오지 않게 되었다. 남자는 조금 더 기다렸다가 완전히 연기가 멎은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입과 코를 가린 채 천천히 거대 괴물 쥐가 있던 동굴로 향했다. 입구에는 수북하게 타고 남은 재가 쌓여 있었다. 남자가 목창으로 대충 재들을 안쪽으로 밀어 버리자 열기 때문에 부서진 것으로 보이는 종유석의 잔해와 죽어버린 괴물 쥐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혹시나 죽지 않고 기절만 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남자는 목창으로 괴물 쥐들의 몸을 찔러 확인 사살을 했다. 거대 괴물 쥐는 물론이고 나머지 쥐들까지 모조리 확인 사살을 마친 뒤에야 남자는 연기가 완전히 빠지지 않아 매캐한 냄새가 가득 차 있는 마지막 방을 살폈다. 하지만 남자의 기대와는 달리 특별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혹시 숨겨진 벽 같은 것이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샅샅이 뒤져 보았지만, 아무것도 눈에 띄는 것이 없었다. “쳇...” 허탕인건가. 하지만, 여전히 퀘스트 알림은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남자는 자신이 뭔가 놓치고 있는 것이 없나 하고 다시 주위를 살피다가... 거대 괴물 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든다. 방의 구조를 보면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갈 공간이 있는데... 왜 저 괴물 쥐들은 저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은 채 그대로 죽어버린 것일까. 그런 생각이 들자 남자는 바로 목창을 휘둘러 괴물 쥐들의 몸을 옆으로 치웠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거대 괴물 쥐의 시체 아래 깔려있는 작은 목함 같은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건가.” 남자가 담배갑 정도 크기의 목함을 집어들자 그제서야 메시지가 들어왔다. 튜토리얼을 시작합니다. 5. 숲을 통과하십시오. - 지금까지의 경험을 토대로 눈앞에 보이는 숲을 통과하십시오. 숲에는 예상치 못한 여러 가지 장애물과 강력한 야수들이 존재하므로 충분히 주의하셔야만 합니다. ->미완료. (Hidden) 숲에 숨겨진 모든 흉악한 장애물을 제거하십시오. ->완료! (Hidden) 숲에 숨어 있는 모든 흉악한 야수들을 제거하십시오. ->완료! (Hidden) 장애물과 야수들이 사라지자 숲에 숨겨져 있던 알 수 없는 던전의 입구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안쪽을 탐사하여 그 비밀을 밝혀 내십시오. [던전 위치 정보 확인은 이곳을 누르십시오.] ->완료! “아자!” 남자는 목함을 열어보았다. 그 안에는 작고 새카만 씨앗 같은 것이 담겨져 있었다. “흠...” 남자는 그것을 본 순간 반지에 끼워져 있던 무언가와 닮았다는 생각을 떠올렸지만, 일단 목함을 닫은 뒤 바지 주머니에 집어 넣은 후 곧바로 동굴을 빠져 나왔다. 어두운 동굴을 빠져 나오자 제법 밝아진 바깥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어느새 정오가 가까워 오고 있는 모양이었다. 남자는 다시 출구를 찾기 위해 숲을 이리저리 뛰어다녀야 했고, 그 결과 약 한 시간 만에 출구를 발견할 수 있었다. “허...” 이곳이 출구입니다 같은 이정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대신 주위의 어두운 풍경과는 이질적인 푸른 빛이 흘러나오는 기묘한 구멍을 발견함과 동시에 퀘스트 완료 메시지가 도착했다. 튜토리얼을 시작합니다. 5. 숲을 통과하십시오. - 지금까지의 경험을 토대로 눈앞에 보이는 숲을 통과하십시오. 숲에는 예상치 못한 여러 가지 장애물과 강력한 야수들이 존재하므로 충분히 주의하셔야만 합니다. ->완료. (Hidden) 숲에 숨겨진 모든 흉악한 장애물을 제거하십시오. ->완료! (Hidden) 숲에 숨어 있는 모든 흉악한 야수들을 제거하십시오. ->완료! (Hidden) 장애물과 야수들이 사라지자 숲에 숨겨져 있던 알 수 없는 던전의 입구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안쪽을 탐사하여 그 비밀을 밝혀 내십시오. [던전 위치 정보 확인은 이곳을 누르십시오.] ->완료! 보상:경험치 제법 많이, 추가 보상 상자 x2, 추가 보상 상자(R) x1 -> 보상을 지금 수령하시겠습니까? (Y/n) _ (주의) 수령하지 않은 보상은 7일후 자동 소거됩니다. “아잣!”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고 쾌재를 올렸다. 이번에는 조금도 아니고 제법 많이다. 게다가 추가 보상 상자 두 개에 레어 표시가 붙은 추가 보상 상자도 덧붙여져 있었다. “후후...” 남자는 Y를 눌러 바로 보상을 수령했다. 그러자 예의 흰 빛이 남자의 몸을 감싸며 레벨 업 메시지가 추가로 도착한다. 남자는 우선 레벨 업 보상인 랜덤 카드부터 수령했다. 하지만... “아놔...” 무슨 피칠갑 못 먹어서 죽은 귀신이라도 붙은 건가. 이번에도 남자가 뽑은 카드는 피칠갑이었다. 남자가 무슨 욕을 해야 좋을지 고민하는데 다시금 레벨 업 메시지가 도착했다. “후우... 침착, 침착.” 심호흡을 하고 다시 랜덤 카드를 뽑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남자의 기대대로 새로운 카드가 등장했다. 카드정보 명칭 : 2연격 레벨 : 1Lv 경험치 : 0 등급 : Common 분류 : 스킬 성장 : 일반(소) 속성 : 없음 효과 : 대상이 되는 적 1개체에게 연속 2회 공격을 가한다. (쿨타임 3초) Cost : 5 Seed : 1슬롯 00008 트롤러 ========================================================================= “으음...” 뭔가 미묘한 느낌. 레어 카드 같은 걸 봐버려서 그런지 이런 보통 카드는 그다지 확 와 닿지가 않는다. 게다가 물어뜯기처럼 공격력 상승 옵션도 없이 단순히 연속 2회 공격이라니. 남자가 입맛을 다시는 동안 또 한번 레벨업 메시지가 도착한다. 벌써 세 번째. 다시 한 번 Y를 누르자 이번에도 새로운 카드가 등장했다. 카드정보 명칭 : 크림슨 울프 레벨 : 1Lv 경험치 : 0 등급 : Common 분류 : 소환 성장 : 조숙(중) 속성 : 없음 효과 : 붉은 늑대 1개체를 소환합니다. Cost : 20 Seed : 1슬롯 “아까 그 늑대인가.” 튜토리얼에 나오는 늑대가 강해봐야 얼마나 강하겠나 싶은 느낌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름은 제법 훌륭하다. 어차피 그래봐야 빨강 늑대라는 뜻이지만. 이 정도면 슬슬 끝나지 않을까 싶었지만, 다시 한번 레벨업 메시지가 도착했다. 이로써 네 번째. 남자는 지금까지 나온 카드 개수를 확인해 보았다. 물어뜯기 한 장, 피칠갑 세 장, 피칠갑(R) 한 장, 2연격 한 장, 빨강 늑대 한 장. 이번까지 치면 총 일곱 번 레벨업을 했으니 현재 레벨은 8인 셈이다. “캐릭터 정보가 안 나오니 좀 불편하네.” 경험치도 수치가 아니라 약간, 조금, 제법 많이... 이런 식으로 표현되는 걸 보면 일부러 정확한 수치는 알려주지 않으려고 그러는 건지도 모르겠다고 남자는 생각했다. 남자는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다시 보상을 수령했다. 다행히 피칠갑은 아니었지만, 가장 처음에 나왔던 물어뜯기 카드가 나왔다. “쩝...” 남자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지만 더 이상의 레벨업 메시지는 도착하지 않았다. 하지만 보상 수령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히든 퀘스트를 해결하면서 얻은 보상 상자가 세 개 남았기 때문이다. 랜덤 카드가 아니라 보상 상자인걸 보면 이번에는 아이템이 나올 지도 모른다. 남자는 첫 번째 보상 상자를 열었다. 축하합니다! 추가 보상 상자에서 ‘힐링 포션’’를 획득했습니다. :힐링 포션은 외상 치유에 탁월한 효과가 있습니다. [카드 상세 정보 확인은 이곳을 누르십시오.] 힐링 포션이 나오기는 했지만, 이번에도 역시나 카드 형태였다. 힐링 포션 카드는 총 10번에 걸쳐 사용할 수 있으며, 모두 사용하고 나면 소멸된다. 이번에는 뭐가 나올까 싶은 마음에 상자를 열었지만... 결과를 보는 순간 남자는 좌절하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상자에서 나온 것은 예의 피칠갑 카드였기 때문이다. “왜 안 나오나 했다...” 남자는 만사 포기한 표정으로 마지막 레어 상자를 열었다. 축하합니다! 추가 보상 상자(R)에서 ‘광폭’을 획득했습니다. :스킬카드는 카드 슬롯에 장착하여 그 능력을 사용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스킬카드를 카드 슬롯에 장착하시겠습니까? (Y/n) _ [카드 상세 정보 확인은 이곳을 누르십시오.] “광폭이라...” 남자는 일단 상세 정보를 확인해 보았다. 카드정보 명칭 : 광폭 레벨 : 1Lv 경험치 : 0 등급 : Uncommon 분류 : 스킬 성장 : 일반(중) 속성 : 없음 효과 : 광폭 상태를 활성화합니다. Cost : 10 Seed : 2슬롯 남자는 다시 광폭 상태에 대한 상세정보를 확인했다. 광폭:자신의 피 속에 흐르는 맹목적인 파괴 본능을 불러 일으킵니다. -기본지속시간 : 1분 -공격력 상승 50%, 갑옷 효과 감소 50% “흠...” 1분간 공격력을 대폭 증가시키는 대신 방어력이 감소하는 셈이다. 확인해 본 결과 언커먼 등급은 커먼보다 높고 레어보다는 낮은 등급이었다. 꼭 필요한 상황에서 사용한다면 일발역전도 가능한 제법 쓸만한 카드인 셈이지만, 등급도 애매한데다 기왕이면 아이템 같은 걸 원했기에 남자로서는 다소 실망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쩝... 아깝지만 할 수 없지.” 모든 보상을 수령했기 때문에 휴대폰을 다시 집어넣으려는데... 문득 새로운 메시지가 나타났다. 남자는 뭔가 싶어 얼른 살펴보았다. 축하합니다! :콤보 카드를 조합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현재 조합 가능한 콤보 카드는 다음과 같습니다. 1. 하리아스의 미친개 [상세 확인] 2. 얀트훈센의 광전사 [상세 확인] -콤보 카드 조합을 원하시면 해당 번호를 누르시고, 만약 조합을 원치 않으신다면 n을 누르세요(1/2/n) _ “콤보 카드?” 남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일단 상세한 내용을 확인해 보았다. 하리아스의 미친개 -투견으로 이름 높은 하리아스에서도 불패의 신화를 자랑하던 어떤 미친개의 능력을 본뜬 카드 조합입니다. 물어뜯기 공격에 특화 되어 있습니다. [조합상세] 물어뜯기, 2연격, 광폭, 피칠갑, 피칠갑 -효과: 1. ‘물어뜯기’시 추가공격속도 100퍼센트 증가. 2. ‘물어뜯기’시 추가공격력 50퍼센트 증가. 3. ‘물어뜯기’시 추가 공포 유발 확률 20% 증가. “...” 남자는 잠시 말문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좋긴 좋은데... 도저히 다른 사람이 보는 상황에서는 쓸 엄두가 나지 않는 카드 조합이다. “...” 남자는 잠시 하늘을 가만히 올려 보다가 다음 조합의 상세를 확인했다. 얀트훈센의 광전사 -북방의 광전사들은 죽음을 불사한 맹목적인 공격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과시합니다. 그들에게 있어 피와 죽음은 스테이크에 뿌리는 양념일 뿐입니다. [조합상세] 광폭, 피칠갑, 피칠갑, 피칠갑 -효과: 1. 추가 공격력 100퍼센트 증가. 추가 공포 유발 확률 30% 증가 2. 장착중인 모든 갑옷 해제. 3. 모든 물리 공격 스킬의 쿨타임 50퍼센트 감소. “으음...” 공격력을 두 배로 뻥튀기 해주고, 물리 공격 스킬 쿨타임을 절반으로 줄여주는 건 확실히 대단하지만, 장착중인 모든 갑옷이 해제되는 건 아무래도 난감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당장 남자는 갑옷 같은 건 장착하지도 않은 상태이니 그냥 써도 별 문제는 없을 듯 하다. “일단은 광전사가 낫겠군.” 미친개는... 효과 자체는 나쁘지 않지만 아무래도 심리적인 거부감이 상당했기에 남자는 광전사를 선택했다. ‘얀트훈센의 광전사’를 선택하자, 갑자기 힘이 불끈 불끈 솟아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오오오!” 남자는 끓어오르는 힘에 도취되어 잠시 펄쩍펄쩍 뛰다가 잠시 시간이 지나서야 겨우 진정이 되었다. “크흠...” 남자는 정신을 차리자 다시 카드 슬롯을 살펴 보았다. 사용할 수 있는 카드 슬롯은 모두 열 개. 그 중 다섯 개는 스킬 카드를 등록하는 자리였고, 나머지 다섯은 스킬 카드 외의 다른 카드를 등록해 사용할 수 있었다. 남자는 일단 크림슨 울프와 힐링 포션을 비어 있는 슬롯에 등록했다. 스킬 카드는 모두 다섯 개를 등록할 수 있었는데, 현재 광전사 카드 조합을 위해 네 개가 들어가 있었고 하나가 비어있는 상태였다. 남자는 그 비어있는 슬롯에 2연격 카드를 집어 넣었다 본래 2연격의 스킬 쿨타임은 3초. 여기에 광전사 콤보의 효과가 추가되면 스킬 쿨타임은 1.5초로 줄어든다. 그에 반해 피칠갑 카드의 공포 유발 효과는 1초간 지속이므로, 운이 좋으면 적의 반격을 완전히 봉쇄한 상태로 무한에 가까운 연타가 가능해진다. “이거... 쓸만 할지도 모르겠는데.” 피칠갑 카드가 세 개나 들어가지만, 어차피 가장 높은 등급의 카드만 효과가 발휘되므로, 실질적으로 현재 공포 유발 효과의 총합은 60퍼센트. 만약 공포 유발 효과과 스킬 쿨타임 감소 효과를 더 추가할 수만 있다면 그야말로 사기 콤보가 될 수도 있다. 뭔가 방법이 없을까 하고 남자가 고민에 잠기려 하는 바로 그때. 다시금 메시지가 휴대폰으로 전달되었다. 축하합니다! :당신은 처음으로 ‘얀트훈센의 광전사’ 조합에 성공했습니다! -당신의 위업을 찬양하며 ‘첫 번째 광전사’ 칭호를 부여합니다. [칭호 상세 정보 확인은 이곳을 누르십시오.] “오오!” 남자는 얼른 칭호의 상세 정보를 확인했다. [첫 번째 광전사] :‘얀트훈센의 광전사’ 조합을 첫 번째로 성공한 자에게 부여되는 칭호. -효과: 추가 공포 유발 확률 5% 증가 -칭호는 획득시 자동으로 효과가 적용됩니다. 남자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광전사 조합을 첫 번째로 성공했을 때 칭호가 부여된다면... 미친개 조합에서 칭호가 있을 것이 당연한 일이지 않은가. 남자는 얼른 카드 슬롯을 미친개 조합으로 채웠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곧바로 첫 번째 조합에 성공했다는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남자는 바로 칭호의 상세 정보를 확인했다. [첫 번째 미친개] :‘하리아스의 미친개’ 조합을 첫 번째로 성공한 자에게 부여되는 칭호. -효과: 추가 공포 유발 확률 10% 증가 -칭호는 획득시 자동으로 효과가 적용됩니다. “오오오!” 어째서 광전사보다 미친개의 공포 유발 확률이 더 높은 건지는 조금 의문이었지만, 이로써 남자는 공포 유발 효과 75퍼센트를 달성했다. 물론 이건 광전사 조합일 때의 얘기고... 만약 미친개 조합이라면 65퍼센트의 공포 유발 효과를 얻게 된다. 남자는 다시 광전사 조합으로 카드 슬롯을 채우다가 음성 명령으로 원하는 카드 조합을 설정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 “첫 번째는 광전사, 두 번째는 미친개.” 남자는 음성 명령을 설정한 뒤에야 눈앞에 나타나 있는 출구로 시선을 돌렸다. “그럼... 가볼까.” 남자는 크게 심호흡을 한 뒤 밝게 빛나는 출구를 향해 발걸음을 내딛었다. “...” 통로를 넘어서자 그곳은 어두운 석실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벽에 횃불이 밝혀져 있어서 주위를 확인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는 점이었다. 남자가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는데... 다시금 휴대폰으로 메시지가 전해진다. 튜토리얼을 시작합니다. 6. 보스를 쓰러뜨리십시오. - 드디어 마지막 관문입니다. 당신은 지금까지 얻은 능력을 바탕으로 시련의 던전을 돌파해야만 합니다. 마지막 출구를 지키고 있는 보스는 매우 강력하니 충분히 준비를 갖추어야만 합니다. “드디어 보스인가.” 남자는 목창을 그러 쥐었다. 아무래도 무기가 영 시원치 않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전의 퀘스트에서 보상을 하나 가듣 받은 덕분에 마음만은 든든했다. 남자는 석실 한쪽에 있는 석문으로 다가선 뒤 천천히 문을 밀었다. 그러자 돌쩌귀가 마찰되는 거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바로 보스가 나오나 했지만, 아무래도 이 통로를 돌파해야 보스가 있는 곳에 도착할 수 있는 모양이다. 남자는 석실로 돌아가 벽에 걸린 횃불을 하나 꺼내어 들었다. 스스로 만든 횃불이 있기는 했지만, 얼기설기 덤불을 엮은 후 관솔을 넣어 만든 것이다보니 화력에서부터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어두운 곳에서 자칫 조명이 꺼지기라도 하면 골치 아픈 일이니 미리미리 대비할 필요가 있었다. 남자는 통로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00009 트롤러 ========================================================================= 통로 안쪽은 석벽으로 둘러싸인 네모 반듯한 석실이었는데 전후좌우로 통로가 연결되어 있었다. “음...” 남자는 미로 찾기의 기본을 떠올렸다. 여러 개의 갈림길이 있을 경우 한쪽 방향의 벽을 짚고 계속 이동하다 보면, 구조가 복잡한 곳이라도 헤매지 않고 길을 찾을 수 있다. 이러한 방법을 왼손을 짚고 이동한다 해서 보통 좌수법이라고 하는데, 이 방법에는 한 가지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한번 지나간 루트를 반드시 기억하고 있어야만 한다는 점이다. 미로를 만드는 사람들은 바보가 아니다. 뻔히 좌수법을 쓸 것을 아는데 그것을 방해할 방법을 마련해 두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남자는 혹시나 해서 가지고 있던 횃불의 숯검댕이를 이용해 바닥과 벽에 간단한 표시를 한 뒤, 휴대폰을 열어 자신이 지나간 길에 대한 약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이것이 보통의 게임이라면 자동으로 미니맵이 작성되겠지만, 불행히도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수동 미니맵이라도 만들기로 한 것이다. 남자는 먼저 왼쪽의 갈림길로 들어갔다. 그러자 이번에도 역시 긴 통로가 눈에 들어왔다. 일단 휴대폰을 집어넣은 남자는 주위를 경계하며 천천히 발걸음을 움직였다. 숲에 야수와 함께 장애물이 있었던 것처럼, 이곳에도 함정이 존재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최대한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는 순간 바닥에 깔린 돌이 마치 스위치처럼 덜컥 하고 내려 앉는다. 기겁하며 얼른 뒤로 물러서는데... 통로 한쪽 벽이 드르륵 소리와 함께 미닫이처럼 열리며 무언가가 밖으로 걸어 나왔다. “...” 검게 변색된 피부와 다 헤어진 옷가지. 느릿하게 흐느적거리며 걸어나오는 그것을 보는 순간 남자는 바로 좀비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음...” 다 썩어가는 시체긴 해도 인간의 형상을 지닌 존재들이라 어찌해야할지 망설이고 있는 동안 좀비들은 은신처로부터 통로로 걸어 나오더니, 이내 남자를 발견하고는 괴성을 지르며 다가왔다. 그래봐야 느려터지긴 매한가지 였지만, 시체들이 팔을 휘저으며 절뚝 절뚝 다가오는 모습은 묘하게 박력이 있었다. “후우...” 가볍게 숨을 내쉰 남자는 그대로 숨을 참으며 가장 가까운 좀비를 향해 2연격을 떠올리며 목창을 휘둘렀다. 마치 몽둥이를 휘두르는 듯이 내려쳐진 그의 목창은 정확하게 좀비의 머리에 직격했다. 움찔하기라도 하면 다행이다 싶었지만, 이게 왠일일까. 좀비의 머리는 두 번째 공격이 가해지는 순간 그대로 수박처럼 깨져 나가고 말았다. 털썩. 머리가 깨진 좀비는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체액을 사방 팔방으로 흩어 놓으며 썩은 고목처럼 그대로 엎어지고 말았다. 남자는 그 모습을 보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좀비의 머리가 터지는 순간 목창을 통해 손끝으로 전해지는 그 끔찍한 감각이라니! 하지만 그렇게 잠시 굳어 있는 중에도 좀비들은 팔을 내저으며 남자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그어어... 여자인지 머리를 덮수룩하게 기른 좀비가 내지르는 소리를 듣고서야 남자는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손끝으로 전해진 감각도, 코로 통해 흘러들어오는 악취도 모두 끔찍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물러설 수는 없는 일. 남자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긴 머리의 좀비를 향해 목창을 내리쳤다. 하지만 이게 왠일. 좀비는 고개를 슬쩍 젖혀 피했고, 목표를 잃은 목창은 좀비의 어깨를 내리쳤다. 순간 우지끈하며 좀비의 빗장뼈가 부러진다. 하지만 남자가 다시 목창을 회수하려는 순간 좀비가 자신의 어깨뼈를 부순 목창을 다른 손으로 움켜쥐었다. “헛!” 설마 좀비에게 목창이 잡히리라고는 예상치 못한 탓에 남자는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다급하게 목창을 끌어당겼지만... 좀비는 그 힘을 거스르지 않고 그대로 남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어! 누렇게 변색된 이빨을 드러낸 채 좀비가 달려들자 남자는 기겁하며 목창을 놓아버린 뒤 반사적으로 다른 손에 쥐고 있던 횃불을 좀비의 입 안에 쑤셔 넣었다. 그러자 곧바로 통로가 어둠에 휩싸인다. 횃불은 좀비의 이빨을 부수고 들어가 좀비의 머리 안에 정확히 쑤셔 박혔지만, 그로 인해 불이 꺼지고 만 것이다. “이런!” 남자는 갑자기 시야가 어두워지자 당황하고 말았다. 얼른 불이 밝혀져 있는 처음의 교차로로 돌아가려 했지만, 좀비들은 주위가 어두워지자 마치 제 세상을 만난 것처럼 빠르게 남자를 향해 달려든다. “젠장!” 남자는 다급하게 외쳤다. “오픈 크림슨 울프!” 그러자 남자의 눈앞에 작은 빛의 기둥 하나가 솟아오르더니, 그 안에서 붉은 털의 늑대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남자는 늑대를 보며 외쳤다. “놈들을 막아!” 늑대는 남자의 외침을 듣고는 벼락처럼 허공을 날아 남자의 뒤를 쫓는 좀비들을 덮쳐 갔다. 하지만 늑대 한 마리로는 쫓아오는 좀비들을 모두 막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남자는 몇 걸음 더 가지도 못한 채 뒤따르는 좀비들에게 따라 잡히고 말았다. 늑대가 이러저리 날뛰며 좀비의 목덜미를 물어 뜯고 있었지만, 그 와중에도 두 마리의 좀비가 남자를 따라 잡은 것이다. “큭!” 어깨를 움켜쥐는 좀비의 손을 느낀 남자는 바로 돌아서며 2연격을 떠올리며 좀비의 머리를 주먹으로 후려쳤다. 하지만 목창으로 후려쳤을 때와는 달리, 좀비는 눈 사이에 정확하게 펀치를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비틀거리기만 할 뿐 쓰러지지 않았다. 앞선 좀비가 비틀거리는 순간 뒤따라오던 좀비가 자세를 낮춘 채 마치 태클을 걸 듯이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남자는 이미 그러한 좀비의 움직임을 눈치 챈 상태였다. “죽엇!” 한줄기 외침과 함께 있는 힘껏 사커킥을 날리자 발끝에 묵직하게 무언가가 걸리는 느낌이 전해진다. 퍽! 좀비는 달려들던 자세 그대로 공중에서 몸이 확 뒤집어 지더니 남자를 지나쳐 바닥에 뒹굴었다. 사커킥으로 머리가 부숴졌는지, 아니면 떨어지는 순간 목이 꺾인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좀비는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하지만 남자의 위기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머리에 주먹을 얻어맞은 좀비가 다시 팔을 내저으며 달려든 것이다. 타격은 그렇다 치더라도 공포 유발은 어찌된 것일까. 확률이 75퍼센트나 되는데 왜 안터지냔 말이다! 남자는 그렇게 속으로 부르짖었지만, 아쉽게도 좀비와 같은 언데드들은 공포 유발 효과에 대해 면역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이성이 있어야 공포를 느끼든 말든 할 것이 아닌가. “오냐. 이판사판이다!” 남자는 주먹을 불끈 쥐며 다시 2연격을 발동했다. 마음을 다잡은 덕분일까. 아니면 먼저 가했던 2연격에 의한 충격이 누적되었던 탓일까.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남자가 뻗은 주먹은 그대로 좀비의 인중을 부수어 버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추가타! 아래쪽에서 솟아오르듯이 후려갈긴 어퍼컷이 그대로 좀비의 턱에 직격한다. 주먹은 거칠 것 없이 위로 뻗어나가며 좀비의 턱을 부수고 그 머리를 통째로 박살내 버렸다. “...” 남자는 자신이 해놓고도 다시 어안이 벙벙해지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썩었어도 좀비는 결국 사람의 시체다. 즉, 남자는 맨주먹으로 후려갈긴 펀치 만으로 사람의 머리통을 부숴버린 셈이니 어찌 당황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이건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남자는 미처 몰랐지만, 이 던전은 기본적으로 3~4 레벨 정도의 레벨을 감안하고 만들어진 곳이었다. 하지만 남자는 각종 히든 퀘스트를 연이어 클리어하며 그 두 배인 8레벨에 이른 상태. 게다가 레벨 뿐만이 아니다. 남자는 본래대로라면 엄청난 운이 있지 않고서는 튜토리얼에서는 조합이 불가능한 콤보 카드를 두 개나 가지고 있었다. 더군다나 남자가 현재 사용하는 콤보 카드는 무려 추가 공격력 100퍼센트를 부여하는 광전사. 3~4 레벨을 상대하기 위해 배치된 좀비의 머리통 따위가 전력을 다한 펀치를 버텨내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 아니겠는가. 괴기스러운 좀비 두 마리가 자신의 발길질과 주먹질에 힘없이 쓰러지자 남자는 손발로 전해지는 그 끔찍한 촉감에 잠시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한 차례 심호흡으로 마음을 가라앉힌 남자는 좀비의 체액으로 범벅이 된 주먹을 바라보며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하앗!” 어릴 때 잠깐 배웠던 태권도를 떠올리며 남자는 아랫배에 힘을 주고 한 차례 기합을 넣은 다음, 늑대가 가로 막고 있는 좀비들을 향해 달려갔다. “으랴아앗!” 그리고 달려가는 속도 그대로 허공에 몸을 띄워 좀비의 머리통을 향해 돌려차기를 날렸다. 좀비는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남자의 발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이내 으직 하는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팔뼈가 부러지며 그대로 머리에 킥을 허용하고 말았다. 좀비는 발차기의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한쪽 구석으로 쓰러졌지만, 남자는 가차없이 쓰러진 좀비에게로 다가가 그 머리에 사커킥을 날렸다. 퍼걱! 그러자 좀비의 머리통은 그대로 몸통에서 분리되며 허공으로 튀어 올랐고, 머리를 잃은 몸통은 그대로 힘없이 주저앉고 말았다. 남자는 자세를 바로 잡은 뒤 몸을 돌리려 했다. 하지만 바로 그때. 남자의 등 뒤로 접근한 또 다른 좀비가 팔을 뻗어 남자의 몸을 껴안더니 어깨를 그대로 물어뜯었다. “으아악! 이 빌어먹을 자식이!” 남자는 그대로 뒤쪽으로 몸을 날려 등에 달라붙은 좀비를 벽으로 밀어붙인 후 몸을 감고 있는 팔을 아래로 확 잡아 내렸다. 우두둑! 그 힘을 견디지 못한 좀비의 팔은 그대로 몸체에서 떨어져 나왔다. 남자는 몸이 자유로워지자 자신의 어깨에 이빨을 박아 넣고 있는 좀비의 멱살을 잡은 뒤 그 머리통에 미친 듯이 주먹을 퍼부었다. 퍽! 퍽! 퍽! 퍽! 망치로 무언가를 내리치는 듯한 소음이 연거푸 울리는가 싶더니, 좀비의 머리통은 더 이상 그 충격량을 견디지 못하고 퍼석 하는 기분 나쁜 소음과 함께 으깨지고 말았다. “헉... 헉...” 남자는 좀비에게 물린 어깨를 감싸 쥐었다. 설마... 영화에서처럼 자신도 좀비가 되는 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고개를 돌려 상처를 바라보는 순간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상처에서 흰 연기 같은 것이 나고 있었다. 처음에는 어두워서 뭔가 잘못 본 것이 아닌가 싶었지만, 다음 순간 그 현상의 의미를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피칠갑(R) 카드가 지닌 재생률 증가의 효과였다. 고작 10퍼센트라 별 볼 일 없을 줄 알았는데... 그게 단순히 고작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 남자는 얼굴에 묻은 좀비의 썩은 체액을 손으로 쓰윽 닦아내며 씩 웃었다. 그리고 늑대가 맞서 싸우고 있는 남은 세 마리의 좀비들을 향해 다가섰다. 자신들에게 다가서는 남자의 모습을 알아차린 좀비 한 마리가 하나뿐인 팔을 내저으며 달려들었지만, 남자는 팔이 없는 쪽으로 몸을 움직이며 놈의 얼굴에 다시 2연격을 적중시켰다. 그리고 충격을 이기지 못해 비틀거리는 놈의 목덜미를 잡아 챈 후 그대로 안면을 벽에 찍어 버렸다. 콰직! 안면이 주저앉는 소음이 들려왔지만, 남자는 손을 멈추지 않고 다시금 좀비의 머리를 벽에 찍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충격을 견디지 못한 좀비의 목이 우둑 소리를 내며 부러져 버렸다. 남자가 좀비 하나를 해치워 버리자 비로소 어느 정도 몸이 자유로워진 늑대가 그 거대한 몸을 날려 남은 좀비 중 하나의 목을 물었다. 목을 무는데 성공하자, 이전에 검치호의 엉덩이를 물어 뜯었던 늑대처럼 몸을 공중에 띄워 맹렬하게 회전시켰다. 늑대의 체중이 전부 실린 이 공격에 좀비의 목은 힘없이 잘려져 나갔다. 그리고, 늑대의 이빨에 한쪽 다리를 잃고 엉금엉금 기던 마지막 좀비는 남자가 힘껏 내려 찍은 발에 밟혀 머리가 으깨지고 말았다. 00010 트롤러 ========================================================================= 더 이상 움직이는 적이 없음을 확인한 남자는 그대로 벽을 기댄 채 주저앉았다. 손과 발에 남아 있는 질척한 느낌과 어깨의 통증에 몸서리를 쳤지만, 어쨌든 중요한 것은 다수의 적을 상대로 이겼다는 점이었다. “허억... 허억...” 격렬한 움직임 탓에 가빠진 호흡을 추스르고 나자 어깨의 통증도 많이 가라앉았다. 남자는 자신의 곁을 기웃거리는 늑대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다음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을 뒹굴고 있는 목창과 횃불부터 챙겼다. 그리고 다시 원래의 교차로로 돌아가 벽에 꽂혀있는 횃불로 꺼진 불을 되살린 후 좀비가 출현했던 곳으로 돌아왔다. 벽이 열린 곳을 살펴 봤지만 별다른 것은 보이지 않았다. 남자는 다시 발밑에 있을지도 모르는 함정을 조심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기나긴 통로를 빠져 나오자 다시 새로운 교차로가 나타났다. 남자는 휴대폰을 열어 약도의 내용을 기입한 후, 숯덩이로 길을 표시하고 나서야 다시 이동을 계속했다. 그렇게 두 번째 교차로를 지나고 다시 세 번째와 네 번째 교차로를 지나 다섯 번째 교차로에서 남자는 새로운 적과 조우했다. “음...” 적의 수는 셋. 느릿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니 이전과 마찬가지로 좀비인 듯 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교차로라서 아까처럼 횃불이 꺼지는 바람에 당황할 일은 없다는 점. 남자는 왼손에 들고 있던 횃불을 바닥에 내려놓은 후, 목창을 거머쥐었다. 맨손으로 싸우는 것이 오히려 더 편한 감이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다수와 대적하는 상황에서 목창이 주는 거리의 이점을 함부로 버릴 수는 없었다. “후우...” 가볍게 심호흡을 한 남자는 늑대에게 명령을 내렸다. “공격!” 그러자 붉은 늑대가 쏜살 같이 앞으로 달려 나간다. 늑대는 등을 보이고 있는 좀비 하나에게 달려들어 그 어깨를 물어 뜯었다. 기습을 당한 좀비들은 양팔을 휘두르며 늑대에게 덤벼들었지만, 그렇게 주의를 집중하는 동안 다시 몰래 접근한 남자가 좀비의 등을 목창으로 찌른다. 부욱! 물에 불린 신문지를 찢는 듯한 느낌이 손끝으로 전해지며 목창은 정확히 좀비의 등을 꿰뚫었지만, 인간이라면 치명상임에 틀림없는 그런 상처에도 불구하고 좀비는 몸을 돌려 반격을 하려 들었다. “쳇!” 남자는 혀를 차며 목창을 뽑아 두 손으로 단단히 잡은 후 좀비의 머리를 향해 내리쳤다. 하지만 좀비의 빠른 움직임 탓인지 이번에는 제대로 맞추지 못하고 어깨만 조금 두드리고 말았다. 아무래도 나뭇가지를 대충 잘라 만든 목창으로는 여러모로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었다. “...” 좀비는 거리가 좁혀지자 남자를 향해 이빨을 드러냈다. 남자는 내밀어진 목창을 그대로 놓아 버린 뒤 자신을 향해 내밀어진 좀비의 얼굴에 빠르게 2연격을 날렸다. 퍼퍽! 머리에 무슨 기름칠이라도 했는지 이번에도 첫 번째 일격은 미끄러지며 빗나갔지만, 두 번째 스트레이트는 정확히 좀비의 인중에 꽂혔다. 남자는 비틀거리며 물러서는 좀비를 향해 다시 후속타를 가하려고 했지만, 그때 옆에서 새로운 좀비가 남자를 향해 팔을 휘저으며 달려들었다.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일단 물러서서 태세를 바로 잡을 것인가. 순간 갈등했지만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흐압!” 남자는 몸을 숙이며 눈앞에서 비틀거리는 좀비의 하반신을 노리고 태클을 가했다. 하복부를 어깨로 들이 받으며 무릎 뒤쪽을 낚아채는 남자의 일격에 좀비는 힘없이 뒤로 넘어가고 말았다. 좀비와 한 덩어리가 되어 쓰러지는 바람에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남자는 급히 몸을 일으키며 좀비의 몸에 올라탄 후 그 머리를 주먹으로 후려쳤다. 퍽! 좀비의 머리가 힘없이 옆으로 팩 돌아가는 모습을 보며 남자는 쿨타임이 끝난 2연격을 좀비의 관자놀이에 사정없이 내리 꽂았다. 콰직! 첫 번째 일격에 금이 가고, 퍼석! 두 번째 일격에 부스러졌다. 남자는 좀비의 움직임이 멈춘 것을 주먹으로부터 전해지는 감각으로 확인하기가 무섭게 앞으로 몸을 던졌다. 한바퀴 몸을 굴려 일어나자 자신의 등의 노리고 덤벼들었던 좀비가 움직임이 멈춘 좀비의 몸을 덮치며 허우적거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남자는 쓰러져 버둥거리는 좀비에게 달려가 슛을 날리듯 그 머리통에 사커킥을 날렸다. 퍼걱! 어김없이 남자의 발이 작렬하는 순간, 좀비의 머리통은 그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머리로부터 분리되어 허공을 날더니 벽에 부딪혀 떨어졌다. 남자는 고개를 돌려 나머지 좀비 하나를 찾았다. 세 번째 좀비는 어깨를 물린 상태였지만, 팔을 뻗어 늑대의 몸을 끌어안고 뒹굴며 그 몸을 마구 물어뜯고 있었다. “칫!” 남자는 옆에 떨어져 있는 목창을 잡은 후 급히 달려갔다. 그리고 늑대와 함께 바닥을 뒹굴고 있는 놈의 목을 발로 밟은 후 발악하는 놈의 눈에 있는 힘껏 목창을 내리 찍었다. 콰직! 목창이 눈을 뚫고 들어가자 좀비는 잠시 버둥거리다가 그대로 축 늘어지고 말았다. “후우...” 좀비에게 잡혀 있던 늑대는 준상이 손을 풀어주자 낑낑거리며 한쪽 발을 절룩거렸다. 늑대와 좀비의 이빨 대결이라니. 준상은 혀를 차며 일단 상처를 살폈다. 그러자 문득 휴대폰으로 새로운 메시지가 전해졌다. 소환물이 경상을 입었습니다. :부상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역소환 할 필요가 있습니다. 완치까지 약 15분이 소요됩니다. 역소환 하시겠습니까? (Y/n) _ “15분이라...” 계속된 전투로 자신도 좀 지친 상황이었기에 남자는 Y를 눌러 역소환을 실행한 후, 그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후우...” 좀비의 머리통에서 목창을 뽑아 보니 너무 세게 내리찍은 탓에 불로 그을린 목창의 앞쪽이 뭉개져 있었다. 남자는 허리춤에서 멀티툴을 꺼내 뭉개진 목창의 앞부분을 다듬으려 했지만 생각처럼 잘 되지 않았다. 여기서 나가면 이런 장난감 같은 놈 말고 제대로 된 멀티툴부터 구해야겠다는 생각을 떠올리며 남자는 주머니에서 구운 늑대 고기를 꺼내 씹으며 묵묵히 자신의 하나뿐인 무기를 다듬었다. 결국 20분이나 걸려서 목창의 수리를 끝낸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늑대를 소환한 후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남자는 얼마 지나지 않아 막다른 골목에 도착했다. 혹시 숨겨진 무언가가 없는지 면밀히 살폈지만 아쉽게도 그런 것은 보이지 않았다. 다섯 번째 교차로로 되돌아 온 남자는 아직 가보지 않은 갈림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이번에는 작은 방이 하나 나왔다. 적이 숨어 있지는 않은지 잠시 살펴 봤지만 가운데에 놓여진 작은 상자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혹시 함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남자는 조심스럽게 상자로 다가가 목창으로 상자를 툭 쳐보았지만 별다른 반응은 일어나지 않았다. 상자가 옆으로 완전히 밀려 났음에도 아무런 반응이 일어나지 않자 남자는 그제서야 상자를 열어 보았다. 그 안에는 휴대폰 정도 크기의 작은 석판 하나가 놓여져 있었다. 뭔가 싶어 손을 대자, 갑자기 석판이 옅은 빛을 뿜어내더니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어?” 이게 뭔가 싶어서 어리둥절해 하는데 휴대폰에 메시지가 도착했다. 축하합니다! 특수카드 ‘아이템 확인’을 획득했습니다. :특수카드를 획득하면 봉인된 특수기능을 해제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특수기능 ‘아이템 확인’이 개방됩니다. -현재 확인 가능한 아이템은 모두 3가지입니다. 1.미확인 반지 2.미확인 반지 3.미확인 시드 -아이템 확인을 원하시면 해당 번호를 누르시고, 만약 확인을 원치 않으신다면 n을 누르세요(1/2/3/n) _ “오오...” 남자는 얼른 1번을 선택했다. 그러자 새로운 메시지가 나타났다. 아이템 확인을 시작합니다 :아이템 확인에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현재 0% 진행중입니다. 남자는 메시지에 나와 있는 수치가 100퍼센트가 될 때까지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렇게 약 30초 정도 시간이 흐르자 새로운 메시지가 이어졌다. 아이템 확인이 끝났습니다. ======================== 아이템정보 명칭 : 생명의 반지 레벨제한 : 없음 종류 : 반지 등급 : Common 효과 : 생명력 강화 5% Seed : 1슬롯 설명 : 착용자의 생명력을 일깨우는 반지. 가운데 있는 홈에 시드를 장착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생명력 강화라...” 남자는 이 말이 이를테면 피통을 늘려주는 효과가 아닐까 싶었다. 정확한 캐릭터 정보를 알 수 없는 상황이라 정확한 수치를 알 수는 없지만, 많든 적든 피통이 늘어나서 나쁠 일은 없다. 남자는 가지고 있던 반지 가운데 메시지에 첨부된 사진에 나온 홈이 파진 반지를 손가락에 끼웠다. 그러자 피로했던 몸에 어쩐지 조금이나마 활력이 돌아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남자는 이어서 다음 아이템도 확인했다. 아이템정보 명칭 : 불저항의 반지 레벨제한 : 없음 종류 : 반지 등급 : Common 효과 : 불 저항력 강화 5% Seed : 1슬롯 (재생률 강화 5%) 설명 : 착용자의 불 저항력을 일깨우는 반지. 시드가 장착되어 있습니다. “재생률!” 이전의 전투에서 재생률의 효과를 똑똑히 확인하지 않았던가. 고작 5퍼센트에 불과하긴 하지만, 피칠갑(R) 카드가 가진 효과와 합치면 15퍼센트가 된다. 남자는 이 반지 역시 왼손에 낀 다음, 마지막 아이템을 확인했다. 아이템정보 명칭 : 뱀파이어릭 시드 레벨제한 : 없음 종류 : 시드 등급 : Uncommon+ 효과 : 생명력 흡수 5% 설명 : 동굴의 주인이 가지고 있던 시드입니다. Seed 슬롯이 있는 아이템이나 카드에 장착하여 능력을 강화할 수 있습니다. 한번 장착한 시드를 분리하기 위해서는 특수기능 ‘분리’가 필요합니다. [이 시드를 아이템이나 카드에 장착하시려면 이곳을 누르십시오.] 뱀파이어릭 시드는 동굴에서 거대 괴물 쥐가 가지고 있던 목갑 안에 담겨 있던 바로 그 아이템이었다. 생명력 흡수는 재생률과 마찬가지로 전투시 생존률을 크게 높혀주는 능력이다. 남자는 잠시 고민하다가 뱀파이어릭 시드를 피칠갑(R) 카드에 장착하기로 마음 먹었다. 아이템에 장착하면 부서질 가능성이 있는데다 피칠갑(R) 카드는 자신이 가진 가장 강력한 카드이므로 이후에도 계속 사용할 가능성이 높았다. 물론 ‘분리’라는 특수기능을 얻으면 장착했던 시드를 분리하는 것이 가능하다고는 하지만, 언제 얻을지도 알 수 없는 기능을 무턱대고 믿을 수만은 없는 일이다. 남자는 아이템 정보 하단의 장착 명령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그러자 바로 장착 가능한 아이템과 카드 목록이 화면에 나타난다. 아이템으로는 생명의 반지가 유일하고, 그 외에는 모두 카드들이었다. 남자는 카드 가운데 가장 마지막에 위치한 피칠갑(R) 카드를 선택했다. 시드를 장착합니다. : ‘피칠갑(R)’ 카드는 총 5개의 슬롯이 있습니다. 현재 사용가능한 슬롯은 모두 5개입니다. 시드를 장착하면 특수기능 ‘분리’를 얻을 때까지는 장착을 해제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뱀파이어릭 시드’를 ‘피칠갑(R)’ 카드에 장착하시겠습니까? (Y/n) _ 남자가 Y를 누르자 시드를 휴대폰 화면에 올려놓으라는 메시지가 이어졌고, 지시대로 올려놓자 화면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며 시드가 눈앞에서 사라지더니 장착 성공 메시지가 이어졌다. 자신이 얻은 아이템들의 확인과 장착이 모두 끝나자 남자는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 나왔다. 천천히 약도를 작성하며 그렇게 던전을 헤매기를 얼마나 했을까. 두 번 정도 더 좀비들과 전투를 치른 남자는 다소 지친 표정으로 새로운 교차로에 접어 들었다. 00011 트롤러 ========================================================================= 목이 탄다. 생각해보니 이 이상한 곳에 들어온 뒤로 한 모금의 물도 마시지 못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흔히 하는 말로 333 법칙이란 것이 있다. 공기 없이 3분, 물 없이 3일, 음식 없이 3주. 간혹 이 세 가지 대신 저체온증이 들어가는 경우도 있지만, 대충 이런 식이다. 보통은 음식에 어느 정도 수분이 포함되기 마련이기 때문에 잊고 있는 경우가 많지만 절대적으로 열악한 상황에서 우선시 되어야 할 것은 식량보다는 우선 물이 맞다. “...” 남자는 주머니에서 늑대 고기를 조금 꺼내어 껌처럼 우물 우물 씹기 시작했다. 음식을 먹으면 자연스럽게 나오는 침으로 갈증을 모면해 볼 생각이었지만... 그 때문에 새로운 교차로에 대한 주의가 다소 흐트러지고 말았고, 이 때문에 기습을 허용하고 말았다. 하지만 다행히도, 남자의 곁에는 크림슨 울프라는 소환물이 대기하는 중이었다. -크아앙! 남자는 옆에서 조용히 따라오던 늑대가 갑자기 울부짖으며 앞으로 뛰쳐나가다가 검은 그림자 같은 것이 휘두른 주먹에 얻어 맞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하지만 곧바로 깨갱거리는 소리와 함께 옆으로 나뒹구는 늑대의 모습을 보며 풀어져 있던 정신의 끈을 팽팽하게 당겼다. “크르르...” 남자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보통의 좀비와는 다른 근육질의 체구를 가진 인간 형태의 무언가를 자세히 살폈다. 다른 것은 몸집 뿐만이 아니었다. 야수와도 같은 붉은 안광이 어둠 속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으며, 차갑게 말라붙은 좀비들과는 달리 그 몸으로부터 기이한 열기가 흘러 넘친다. 말라 붙어 검게 변한 좀비들의 피부와는 달리, 창백한 푸른 피부를 지닌 기이한 존재. 남자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이 녀석이 바로 이 던전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 흘깃 바라보니 늑대는 첫 일격에 심한 부상을 당한 모양인지 절뚝거리며 제대로 일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현재 상황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편이라 할 수 있는 소환물이 너무나 어이없이 무력화되어 버린 셈이지만, 방금 전의 기습을 미리 알아차리고 막아낸 것만으로도 크림슨 울프는 충분히 제 몫을 한 셈이다. 남자는 들고 있던 횃불을 놈에게 던졌다. 어차피 이곳은 서너개의 횃불로 환하게 밝혀진 곳이었기 때문에 굳이 횃불을 들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남자는 푸른 피부의 괴물은 남자가 던진 횃불을 가볍게 한 손으로 쳐내는 것을 바라보며 양손으로 목창을 단단하게 붙잡았다. 그리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짧게 들이쉬고 길게 내쉬는 호흡을 통해 긴장감을 고조시키려 했지만, 그 목적을 달성하기도 전에 괴물이 먼저 움직였다. 주먹이라기 보다는 해머라는 말이 어울릴 듯한 괴물의 펀치가 날아들자 남자는 목창을 앞으로 내밀면서 옆으로 피하려 했다. 하지만 괴물의 펀치는 생각보다 더 강력했다. 조악하기는 해도 지금까지 남자의 든든한 무기가 되어 주었던 목창이 그 일격에 맞는 순간 힘 없이 부러져 버렸다. “칫!” 부러지긴 했지만 남자는 목창을 버리지 않았다. 오히려 부러지는 바람에 날카롭게 꺾인 부분을 창처럼 사용하여, 펀치를 휘두르느라 드러난 괴물의 옆구리에 힘껏 찔러 넣었다. 카각! 모처럼 찔러 넣은 회심의 일격이었지만, 목창은 마치 나무껍질을 긁어대는 듯한 소음과 함께 미끄러졌으며, 충격이 그대로 손아귀로 전해지는 바람에 남자는 부러진 목창의 한 조각을 손에서 놓치고 말았다. “...” 남자는 얼굴을 찌푸렸다. 얼얼하게 통증이 전해져 오는 손아귀도 문제였지만... 그보다도 보통의 인간과는 달리 놈의 피부가 생각보다 훨씬 단단하다는 사실이 더 심각한 문제였다. 괴물이 다른 주먹을 휘둘렀다. 부웅! 커다란 해머 같은 주먹이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가는 섬뜩한 느낌에 남자의 등에서는 식은 땀이 흘렀다. 얼른 고개를 숙이고 뒤로 물러나며 피했지만, 남자는 자신이 어느새 벽을 등지고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크앗!” 괴물은 다시금 남자의 머리를 노리고 그 커다란 주먹을 휘둘렀다. 도저히 맞받을 엄두가 안 나는 일격이었기에 남자는 얼른 고개를 숙이고 옆으로 굴러 피했다. 퍼걱! 그러자 남자의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간 주먹이 벽을 부수는 소음이 이어진다. 좀비들의 머리를 주먹이나 발로 수박 깨뜨리듯 부숴버렸던 것처럼 자신 역시 그런 꼴을 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남자는 그 일격을 통해 똑똑히 인지할 수 있었다. 게다가... 저 정도의 일격이라면 팔을 들어 막는 순간 팔이 부러질 것이 뻔했다. 돌벽마저 일격에 부숴버리는 우월한 공격력. 거기에 기회를 노리고 찔러들어간 목창을 튕겨버리는 방어력까지. 이 괴물은 지금까지 상대해 왔던 좀비들과는 격이 다른 존재였다. 남자는 돌벽을 부순 뒤 자신을 향해 천천히 돌아서는 괴물을 보며 무슨 수를 써야 이 놈을 쓰러뜨릴 수 있을지 생각했다. 해답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피부가 견고하다면, 견고하지 못한 부분을 공략하면 되는 일 아니겠는가. 괴물은 남자를 향해 다시 손을 들어올렸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부상을 입고 한쪽으로 물러나 있던 크림슨 울프가 괴물의 빈틈을 노리고 뛰쳐 올랐다. 늑대는 목을 노렸으나 괴물이 기척을 깨닫고 몸을 트는 바람에 그 기습은 성공하지 못했다. 하지만 괴물이 완전히 늑대의 기습을 피해낸 것은 아니었다. 늑대의 이빨이 괴물의 뭉툭한 귀를 물고 늘어졌기 때문이다. “쿠워어어!” 어찌나 가죽이 질긴지 늑대에게 물리고도 괴물의 귀는 잘리지 않았다. 하지만 커다란 체구의 늑대가 한쪽 귀를 물고 늘어지자 이 터무니 없는 괴물도 고통을 견디기 어려웠는지 몸부림을 치며 늑대를 떼어내려 애쓰기 시작했다. 남자가 움직인 것은 바로 그 때였다. “흡!” 가볍게 숨을 멈춘 남자는 몸을 낮추고 달려들어 괴물의 가랑이 사이로 빠져 나오면서 들고 있던 부러진 목창을 양손으로 잡고 힘껏 위로 찔렀다. 푹! 손끝으로 젖은 가죽이 찢어지는 느낌이 전해짐과 동시에 귀를 물고 늘어지는 늑대를 떼어내기 위해 몸부림을 치던 괴물의 입에서 고통에 찬 비명이 터져 나왔다. “크와아아악!” 괴물은 통증을 견디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괴물은 늑대의 몸을 붙잡아 바닥에 패대기 치는 괴력을 보여 주었다. “캐앵!” 늑대는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바닥을 뒹굴었고, 몇 번 일어나려고 움찔거리다가 이내 빛으로 화해 사라지고 말았다. 남자는 휴대폰을 통해 무언가 메시지가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아챘지만, 지금 일일이 휴대폰을 꺼내 메시지를 확인할 여유따윈 없었다. 괴물의 귀에서는 검은 체액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바닥에 패대기 쳐지면서도 늑대가 물고 있던 이빨을 풀지 않은 덕분이다. “크르륵...” 괴물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몸을 일으키더니 항문에 꽂힌 목창을 뽑아냈다. 생각보다 그리 깊이 꽂히지 않은 탓에 목창은 어렵지 않게 빠져 나왔지만, 괴물은 다시 한번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남자는 괴물이 고통으로 울부짖는 틈을 타 몸을 날렸다. “하아앗!” 2연격이 발동되며 주먹이 연거푸 괴물의 머리를 두들겼다. 하지만 괴물은 비틀거리면서도 손을 뻗어 남자의 뻗어진 팔을 움켜 잡았다. 무시무시한 손아귀 힘이 팔목을 움켜쥐자 남자는 고통과 당혹감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큭!” 급히 다른 손을 뻗어 자신의 팔을 잡고 있는 괴물의 손목을 내리쳤지만, 괴물은 머리를 얻어 맞아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그 손마저 잡아채고 말았다. 남자는 이제 크게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이 괴물의 괴력이라면... 자신의 몸을 산채로 잡아 찢는 것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기 때문이다. “...” 이대로라면 틀림없이 죽는다! 아무리 재생력이 있고 포션 마저 갖추어져 있는 상태라고 한들... 몸이 양갈래로 찢겨져 버리면 상처고 나발이고 간에 그냥 죽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눈앞에 닥쳐온, 죽음이라는 명제에 당황한 남자의 머리 속에 한 가지 방법이 떠오른 것은 바로 그 때였다. “미친개!” 남자의 입에서 그 말이 터져 나온 순간 현재 카드 슬롯에 장착된 카드들이 자동으로 해제되었고, 연이어 새로운 카드들이 슬롯 안에 장착되었다. 물어뜯기, 2연격, 광폭, 피칠갑, 피칠갑(R). 이 다섯 개의 카드가 슬롯에 장착되는 순간, 콤보 카드가 발동되었다. 그 이름은 다름 아닌 ‘하리아스의 미친개’! 남자는 콤보 카드가 발동됨과 동시에 입을 벌려 자신의 손목을 잡고 있는 괴물의 손을 콱 물어 버렸다. 콤보 카드로 인해 빨라진 공격 속도는 괴물에게 손을 빼낼 틈조차 주지 않았다. 우드득! 윗턱과 아래턱이 마주치는 순간, 마치 강철과도 같았던 괴물의 손가락은 맥없이 부서지며 그 힘을 잃었다. 하지만 남자의 반격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다른 한 쪽 팔을 잡고 있는 손 역시 남자의 이빨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우지직! 괴물은 순식간에 양손의 손가락을 모두 잃고 말았고, 그 고통으로 인해 비명을 지르며 비틀 비틀 물러섰다. 남자는 입 안에 고인 괴물의 검붉은 체액이 주는 역겨운 냄새에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놈의 눈빛에 서린 미약한 공포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상대를 반격 불가 상태로 만드는 공포 유발! 바로 그 특성이 지금 이 순간 발휘된 것이다. 남자는 벼락같이 몸을 날리며 외쳤다. “광전사!” 다시금 카드들이 슬롯에서 빠져나오며 새로운 카드들이 그 자리를 채웠다. 광폭, 피칠갑, 피칠갑, 피칠갑(R). 이렇게 네 장의 카드가 슬롯에 장착되는 순간 콤보 카드 ‘얀트훈센의 광전사’가 발동하며 추가 공격력 100퍼센트 증가, 추가 공포 유발 30퍼센트 증가, 물리 공격 스킬의 쿨타임 50퍼센트 감소의 효과가 차례로 남자의 몸에 적용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리잡은 2연격 스킬이 남자의 두 주먹으로부터 터져 나왔다. 괴물은 급히 몸을 피하려 했지만, 가랑이에 입은 상처가 놈의 발을 둔하게 만든 탓에 그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퍼퍽! 숙련된 권투 선수의 그것처럼 빠르게 작렬한 원투 스트레이트는 괴물의 인중에 다시금 직격했고, 그 강력한 연타에 얻어 맞은 괴물은 일시적인 뇌진탕과 더불어 다시금 공포 유발 상태에 빠졌다. 남자는 기우뚱 거리는 놈의 몸을 어깨로 들어받았다. 이미 하체의 힘이 풀려 있던 괴물은 그 태클을 견디지 못하고 풀썩 뒤로 주저 앉았고, 남자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놈의 몸 위로 올라탔다. 그리고 놈의 머리에 연거푸 주먹을 내리 찍었다. 쾅! 쾅! 쾅! 강력하고 빠른 일격이 계속해서 내리쳐지자 괴물은 공포 유발의 효과로 인해 반격조차 하지 못한 채 공격을 연이어 허용할 수 밖에 없었다. 남자는 초점이 풀린 놈의 머리통에 쿨타임이 끝난 2연격을 사용했다. 퍼걱! 결국 괴물의 머리는 누적된 충격을 견디지 못한 채 섬뜩한 소리와 함께 부서져 버렸다. “헉... 헉...” 남자는 괴물의 머리 속으로 파고 들어간 주먹을 천천히 빼냈다. 그러자, 전투의 끝을 알리듯이 휴대폰에서 메시지의 도착을 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00012 트롤러 ========================================================================= 남자는 비틀거리며 일어나더니, 괴물의 주먹에 의해 일부가 부서진 벽에 몸을 기대며 앉았다. 그리고 잠시 눈을 감은 채 전투로 인해 달구어졌던 몸을 식혔다. 차가운 돌벽으로부터 전해지는 차가운 느낌을 만끽하던 남자는 제법 시간이 지난 뒤에야 주머니에 손을 넣어 휴대폰을 꺼냈다. 경고! : ‘크림슨 울프’가 심각한 피해를 입어 강제로 역소환되었습니다. 강제 역소환으로 인해 ‘크림슨 울프’는 1일간 재소환이 불가능합니다. -소환물이 강제 역소환될 경우 낮은 확률로 카드가 파괴될 수 있으니 주의하십시오. 가장 위에 나타나 있는 메시지는 크림슨 울프가 강제로 역소환되었다는 내용이었다. 남자는 강제 역소환의 패널티를 기억한 후 다음 메시지를 확인했다. 튜토리얼을 시작합니다. 6. 보스를 쓰러뜨리십시오. - 드디어 마지막 관문입니다. 당신은 지금까지 얻은 능력을 바탕으로 시련의 던전을 돌파해야만 합니다. 마지막 출구를 지키고 있는 보스는 매우 강력하니 충분히 준비를 갖추어야만 합니다. -> 완료. 보상 : 경험치 조금. -> 보상을 지금 수령하시겠습니까? (Y/n) _ (주의) 수령하지 않은 보상은 7일후 자동 소거됩니다. “...” 남자는 얼굴을 찌푸렸다. 마지막 관문이라더니 튜토리얼이 끝났다는 얘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보상 역시 경험치 조금이 고작이었다. “쩝...” 입맛을 다시며 보상을 수령하자 다시금 레벨업 메시지가 흘러나왔다. “이로써 9레벨인가.” 레벨이 제대로 안 나오니 여러모로 불편하다. 남자는 휴대폰에 자신의 레벨과 현재 지닌 것들에 대해 메모한 뒤 랜덤 카드를 뽑았다. 카드정보 명칭 : 도깨비불 레벨 : 1Lv 경험치 : 0 등급 : Common 분류 : 소환 성장 : 대기만성(소) 속성 : 불 효과 : 작은 불의 정령 1개체를 소환합니다. Cost : 10 Seed : 1슬롯 “흠...” 남자는 말없이 도깨비불 카드를 비어있는 일반 슬롯에 장착했다. “오픈 도깨비불.” 그리고 소환 명령을 내리자, 눈앞에 촛불 정도 크기의 작은 불꽃이 소환되었다. 전투력은 별로 기대할 수 없을 것 같지만 제법 빛이 강해서 이런 던전에서 조명 대신으로 쓰면 그만일 듯 싶었다. 횃불의 경우는 손으로 들어야 하기 때문에 전투시 아무래도 걸리적거릴 수 밖에 없는데, 이 도깨비불은 스스로 움직이므로 그런 문제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게다가 이 녀석이 있으면 숲에서 그랬던 것처럼 불 피운다고 난리를 칠 필요도 없다. “괜찮군.”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이는데, 문득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했다. 튜토리얼을 마칩니다. : 출구로 나가십시오. - 보스를 물리친 장소 근처에 있는 출구로 나가면 튜토리얼이 끝납니다. 튜토리얼이 완료되면 이 장소로는 다시 돌아올 수 없으니 빠진 것이 없는지 확인하는 것을 잊지 마세요! 특히, 강력한 몬스터의 머리 속에서는 이따금 시드가 발견되는 경우가 있으니 나가기 전에 잊지 말고 확인해 보세요. “머리 속?” 남자는 얼굴을 찌푸렸다. 설마 저 괴물의 머리 속을 헤집어서 시드를 찾으라 이건가. 자신의 손으로 곤죽을 만들어 버리기는 했지만... 그건 생사를 건 싸움의 와중에 벌어진 일이었다. “...” 남자는 잠시 고민했지만... 이렇게 메시지에 나올 정도라면 저 괴물의 머리 속에는 확실히 시드가 있다고 봐도 무방하리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미치겠군.” 난감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시드 하나를 그냥 버릴 수는 없는 일. 남자는 욕지기를 참으면서 괴물의 머리 속을 손으로 헤집었다. “우읍...” 그렇게 얼마나 속을 헤집었을까. 결국 남자는 검은 색의 작은 씨앗 비슷한 모양의 시드를 발견할 수 있었다. “후...” 체액으로 범벅이 된 손을 돌바닥에 대충 문질러 닦은 후 아이템 확인을 시도했다. 아이템정보 명칭 : 스피드업 시드 레벨제한 : 없음 종류 : 시드 등급 : Uncommon 효과 : 전체 속도 2% 설명 : 던전의 주인이 가지고 있던 시드입니다. Seed 슬롯이 있는 아이템이나 카드에 장착하여 능력을 강화할 수 있습니다. 한번 장착한 시드를 분리하기 위해서는 특수기능 ‘분리’가 필요합니다. [이 시드를 아이템이나 카드에 장착하시려면 이곳을 누르십시오.] “전체 속도라...” 이 시드는 공격 속도와 이동 속도를 포함해 개체의 속도 그 자체를 높여주는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남자는 이 시드를 피칠갑(R) 카드의 두 번째 슬롯에 장착한 다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메시지가 지시한 대로 출구를 향해 나가려다가 문득 한 가지 생각을 떠올리며 멈추었다. 출구를 통해 나가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는 내용이 바로 그것이었다. 남자는 아직 이 던전을 완전히 다 살펴본 것이 아니다. 물론 이 지긋지긋한 곳에서 한시라도 빨리 빠져 나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아이템 확인’과 같은 숨겨진 보상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이를테면... ‘분리’ 같은 특수기능 같은 것이 숨겨져 있을 경우, 지금 획득해두지 않으면 나중에 귀찮아질지도 모른다. “챙길 수 있는 건 전부 챙기는 편이 좋겠지.” 출구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지만, 남자는 출구로 나가지 않고 던전의 남은 지역을 뒤졌다. 그리고 하는 김에 지금까지 처치했던 좀비들의 시체 역시 빠짐없이 확인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남자의 생각이 맞았다. 아직 돌아보지 않은 구역에서 특수기능 ‘분리’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축하합니다! 특수카드 ‘분리’를 획득했습니다. :특수카드를 획득하면 봉인된 특수기능을 해제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특수기능 ‘분리’가 개방됩니다. “좋군.” 이로써 언제든 이미 장착한 시드를 빼내는 것 역시 가능해졌다. 남자는 내친 김에 자신이 쓰러뜨린 좀비들의 시체 역시 일일이 확인했다. 혹시라도 시드가 남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구역질을 참으며 시체를 뒤지기를 얼마나 했을까. 노력이 헛되지는 않았는지 좀비의 시체로부터 시드 하나를 더 발견할 수 있었다. 아이템정보 명칭 : 쉘 시드 레벨제한 : 없음 종류 : 시드 등급 : common 효과 : 물리 저항 5% 설명 : 물리적인 피해를 줄여주는 시드입니다. Seed 슬롯이 있는 아이템이나 카드에 장착하여 능력을 강화할 수 있습니다. 한번 장착한 시드를 분리하기 위해서는 특수기능 ‘분리’가 필요합니다. [이 시드를 아이템이나 카드에 장착하시려면 이곳을 누르십시오.] 변변한 방어구도 없는 상태에서 맨몸으로 싸워야 하는 남자로서는 고생한 보람이 느껴지는 수확이었다. 남자는 새로 얻은 시드 역시 피칠갑(R) 카드의 남은 슬롯에 장착한 뒤에야 비로소 출구로 향했다. 출구는 이전에 숲에서 보았던 그것과 마찬가지로 밝게 빛나고 있었다. “후우...” 가볍게 심호흡을 한 뒤 안으로 들어서자, 남자는 새로운 장소로 이동했다. “...” 지금까지 지나 왔던 어두컴컴한 곳과는 달리 온통 반짝이는 빛으로 가득한 곳이었기에 잠시 어리둥절해 있는데, 다시금 메시지가 휴대폰에 도착했다. 튜토리얼을 마칩니다. : 출구로 나가십시오. - 보스를 물리친 장소 근처에 있는 출구로 나가면 튜토리얼이 끝납니다. 튜토리얼이 완료되면 이 장소로는 다시 돌아올 수 없으니 빠진 것이 없는지 확인하는 것을 잊지 마세요! 특히, 강력한 몬스터의 머리 속에서는 이따금 시드가 발견되는 경우가 있으니 나가기 전에 잊지 말고 확인해 보세요. -> 완료! - 당신이 튜토리얼에서 보여준 행동과 성과를 정산합니다. 이 과정은 약간의 시간이 소요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 남자는 말없이 가만히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반짝거리는 빛으로 가득 찬 공간은 처음에는 매우 신비롭게 느껴졌지만, 계속 보니 그것도 왠지 시들해졌다. 조금 지루해진 탓에 하품을 하려는데... 그제서야 메시지가 갱신되었다. 축하합니다! : 당신의 랭크는 S입니다. -당신은 튜토리얼 전과정을 매우 훌륭한 성적으로 통과했습니다. 기본 보상 외에 추가 보상이 지급됩니다. 보상 : 경험치 조금, 튜토리얼 보상 상자, 튜토리얼 보상 상자(S랭크) -> 보상을 지금 수령하시겠습니까? (Y/n) _ (주의) 수령하지 않은 보상은 7일후 자동 소거됩니다. “...” 남자는 생각하고 말고 할 것도 없이 바로 보상을 수령했다. 그러자,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레벨 업이 되었다. “이로써 10레벨.” 남자는 먼저 튜토리얼 보상 상자를 열었다. 그러자 휴대폰 위로 빛이 뿜어져 나오며 구리 반지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이템정보 명칭 : 의지의 반지 레벨제한 : 없음 종류 : 반지 등급 : Common 효과 : 스턴 저항 3% Seed : 1슬롯 설명 : 기절 상태를 유발하는 공격에 대한 저항력을 높여주는 반지. 가운데 있는 홈에 시드를 장착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흠...” 구리 반지라서 그런지 이전에 얻었던 금반지들에 비해 저항 수치가 조금 낮았다. 남자는 반지를 집어 왼손에 끼었다. 평생 끼어본 적도 없던 반지를 세 개나 끼고 있으려니 남자는 뭔가 좀 어색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냥 무시하고 S랭크 보상 상자를 마저 열었다. 축하합니다! 튜토리얼 보상 상자(S랭크)에서 특수카드 ‘인벤토리’를 획득했습니다. :특수카드를 획득하면 봉인된 특수기능을 해제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특수기능 ‘인벤토리’가 개방됩니다. -인벤토리에는 서로 종류가 다른 10가지 물품을 등록하여 사용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인벤토리...” 생각보다 양이 작기는 했지만, 일일이 손에 들고 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점은 마음에 들었다. 남자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물품들을 모두 인벤토리에 넣었다. 마지막으로 랜덤카드를 열었지만 이전에 나왔던 2연격이 다시 나왔다. 그러자 다시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했다. 튜토리얼이 완료되었습니다. :당신은 튜토리얼 전과정을 수료했습니다. 이제 본래 당신이 있어야 할 장소로 돌아가야 할 시간입니다. 당신의 앞길에 행운이 함께 하기를 빕니다. (남은 시간 : 10초) 남자가 메시지를 확인하자 남은 시간이 카운트되기 시작했고, 10초가 지나자 남자는 눈앞에서 아롱거리던 빛들이 일시에 폭발하는 것을 느끼며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남자는 자신이 병원 침대 위에 누워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으음...” 남자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통에 잠시 인상을 썼지만, 통증은 오래지 않아 곧 사라졌다. 오른손으로 몸을 지탱한 채 왼손을 들어 머리를 감싸쥐던 남자는 이마에 닿는 금속의 감촉을 느끼고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금반지 두 개와 구리 반지 하나가 가지런히 끼워져 있었다. “이건...” 멍하니 자신의 손에 끼워진 반지를 바라보고 있는데, 문득 문이 열리며 간호사 하나가 들어오다가 그가 깨어난 것을 발견하고는 놀란 표정을 짓더니 다시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잠시후 한 무리의 사람들이 그의 병실 안으로 밀어 닥쳤다. 흰 가운을 입은 중년의 남자 의사가 한 명, 그리고 그의 뒤를 따라서 들어온 간호사가 두명이었고, 뒤이어 검은 양복 차림의 건장한 남자 두 명이 보인다. 의사는 가만히 남자에게 다가와 몇가지를 확인하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실례입니다만, 성함이 기억나십니까?” 남자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의사는 다시 물었다. “그럼 자기 이름을 한번 말씀해 보십시오.” 남자는 의사를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박준상입니다.” 00013 트롤러 ========================================================================= 자신의 이름을 말하자 의사는 옆에 서서 지켜보던 검은 양복의 남자들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남자에게 말했다. “좋습니다. 박준상씨, 혹시 지금까지의 일을 기억하십니까?”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벼랑에서 정신을 든 이후의 일이 하나 하나 뇌리에 되살아 나고 있었지만, 자신조차도 현실인지 믿기 어려운 일들을 지금 주절주절 말한다고 이들이 이해할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손에 끼워진 반지라는 결정적인 증거가 있기는 했지만, 그것은 박준상이라는 남자가 스스로의 상황을 인식하기 위한 증거일 뿐이다. 게다가, 설령 저들이 자신이 처했던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더라도, 자신이 얻은 새로운 능력에 대해 욕심을 낼 것은 분명한 일. 준상은 그런 식으로 몰모트가 되고 싶은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었다. 의사는 준상의 흔들림 없는 시선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옆에 서 있는 남자들은 여전히 표정 없는 얼굴로 준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의사는 간호사들에게 무언가를 적어서 넘겨준 다음, 양복 남자들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사가 밖으로 나가자 두 남자 중 젊은 쪽이 병실 입구로 가서 문을 닫았고, 약간 나이 들어 보이는 쪽은 의자를 가져다가 준상의 옆에 놓은 후 가만히 말문을 열었다. “박준상씨.” “네.” “정말로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습니까?” 준상은 국가 기관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는, 머리를 짧게 깎은 다부진 인상의 남자를 바라보며 조용히 대답했다. “실례지만 누구신지.” “...” 준상의 질문에 남자는 잠시 아무런 대답도 않다가, 조금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품에서 경찰 신분증을 꺼내어 보여주며 말했다. “경찰입니다.” 준상은 신분증에 적혀 있는 김명석이라는 이름을 확인한 후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말없이 자신을 바라만 보자 김명석은 석연치 않다는 듯이 고개를 한번 갸웃거리고는 준상을 향해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박준상씨.” “네.” “XX월 XX일의 일에 대해 생각 나시는 대로 말씀을 좀 해주십시오.” 준상은 가만히 대답했다. “이건, 심문입니까?” “...” “영문을 모르겠지만... XX일이라면, 아침까지 편의점에서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교대를 한 다음, 자전거를 타고...” 준상은 거기까지 말하고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잠시 얼굴을 찌푸리고 말이 없던 준상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그 이후의 일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음...” 김명석은 살짝 입술을 깨물고 뭔가를 생각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협조에 감사드립니다.” 준상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그것에 대해서라면...” 김명석은 잠시 난처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옆에 놓여 있던 리모컨을 준상에게 건네 주었다. “제가 일일이 말하는 것보다는 이쪽이 나을 것 같습니다.” “...” 뭔가 성의 없는 대응이었지만, 준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김명석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수첩에 전화번호 하나를 적어서 준상에게 건넸다. “제 연락처입니다. 뭔가 기억 나시는 것이 있다면 연락해 주십시오.” “네.” 김명석과 또 다른 사내 한 명이 밖으로 나가자 준상은 티비를 켰다. 그러자 바로 뉴스 속보가 화면에 나오기 시작한다. -...속보입니다. XX일 대규모 실종 사건의 피해자 들이 세계 각지에서 속속 발견되고 있다는 내용은 이미 전해드렸습니다만, 드디어 우리나라에서도 그 가운데 한 명이 발견되었습니다. 경찰청에 나가 있는 XXX 기자를 연결합니다. XXX 기자? -네, XXX입니다. 지금 막 경찰청에서 긴급 기자 회견이 열렸습니다. 발견된 것은 서울 거주의 20대 남성인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경찰청에서는... “...” 준상은 이 속보에서 말하고 있는 인물이 자신임을 바로 깨달았다. 경찰청의 기자 회견 내용은 별 것 없었다. 피해자로 보이는 20대 남성이 실종되었던 장소 부근에서 발견되어 긴급히 보호한 상태라는 내용이 전부였다. 아마도 자신이 깨어났다는 사실까지는 아직 전달되지 않은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남자는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 대규모 실종 사건이라 불리는 일에 대해 알아보려 했지만, 이내 앵무새처럼 경찰청 기자 회견 내용만 반복하는 뉴스 내용에 질려버렸다. 잠시 고민하던 준상은 인벤토리 안에 휴대폰이 보관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준상은 바로 인벤토리를 열까 하다가... 누군가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고 행동을 멈추었다. “할수없군.” 당장이라도 휴대폰을 꺼내어 인터넷을 검색해 보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지금까지 없었던 휴대폰이 갑자기 생겨나는 모습을 다른 이에게 들키고 싶지는 않았다. 준상은 가만히 뉴스를 보며 그 내용을 머리 속으로 정리했다. 약 한달 전인 XX일, 준상이 겪었던 것과 같은 일이 세계 각지에서 수만명을 대상으로 발생했다. 이 전대미문의 실종 사건으로 인해 한동안 휴거니 뭐니 해서 극도의 혼란이 벌어지다가 겨우 진정이 되는가 싶었는데... 요 며칠 동안 그 당시 실종되었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발견되기 시작했고, 한국에서는 준상이 가장 처음이었다. “흠...” 자신보다 빠르게 튜토리얼을 클리어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준상은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뭔가 이상했다. 준상이 튜토리얼에 참여한 시간은 고작해야 이틀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곳에서의 시간은 이미 한 달이 지난 상태. 이 시간의 간격을 감안하면 지금 발견되는 순서가 곧 클리어 순서라고 보기는 여러모로 애매한 점이 많다. 준상은 가만히 자신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반지들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그대로 침대에 누운 채 티비 화면에서 흘러나오는 내용들을 무미건조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 뒤로 많은 사람들이 준상을 찾았다. 티비 화면으로만 보았던 국무총리를 시작으로 국회의원들이 줄을 이어 그를 찾아와 얘기를 나누고 사진을 찍었다. 하지만 그것도 며칠 뒤 또 다른 실종자들이 줄지어 발견되기 시작하자, 이내 발길이 뚝 끊기고 말았다. 재생 능력 덕분에 특별히 아픈 곳도 없이 심신안정이라는 이유로 입원해 있던 준상은 발견된 실종자의 수가 두 자리 수가 되자 미련 없이 의사에게 퇴원 신청을 했다. 병원 측에서는 생각보다 선선히 준상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준상이 나이롱 환자라는 건 병원 측이 더 잘 알고 있었고, 정부 측에서 그의 병원비를 더 이상 지불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얘기도 흘러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명의 기적적인 생존자라면 이용할 만한 가치가 있지만, 수많은 생존자 가운데 하나여서는 별 의미가 없었다. 병원에서 퇴원한 준상은 자신의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한달간 인적이 끊겼던 방안에는 먼지가 소복하게 쌓여 있었다. 누군가가 들어와 물건을 뒤진 흔적이 있었지만, 다행히 사라진 물건은 보이지 않았다. “...” 준상은 일단 방 청소부터 시작했다. 빗자루로 쓸고 걸레로 닦고 있자니 바깥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거기 누구 있어요?” 목소리를 들어보니 주인 아주머니인 듯 했다. “네.” 준상은 얼른 대답하고 문을 열었다. 그러자 투실투실하게 살이 찐 주인 아주머니가 화들짝 놀라는 표정으로 준상을 바라보았다. “세상에, 진짜 돌아왔네?” “네.” “사람이 왔으면 말이라도 해야지. 갑자기 인기척이 들려서 놀랐잖아.” “죄송합니다.” 주인 아주머니는 준상에게 그 동안 어디 있었는지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실종 사건의 당사자로 의심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준상은 그냥 배낭 여행을 다녀왔다고 얼버무렸다. “배낭 여행?” “네. 가을이 되니 훌쩍 떠나고 싶어지더군요.” “...” 뭔가 미심쩍어 하는 표정이 역력했지만, 주인 아주머니는 더 이상 캐묻지 않고 선선히 물러섰다. “그나저나... 이거 수도세 밀린 거.” “아, 죄송합니다.” 준상은 주인 아주머니가 내민 쪽지에 적힌 금액을 지갑에서 꺼내 주었다. 입원해 있는 처음 며칠 동안 이런 저런 사람들이 위로금이니 성금이니 해서 제법 많은 돈을 안긴 덕분에 지금 준상의 지갑 상황은 무척이나 풍족했다. “그럼 쉬어. 다음에는 여행 가기 전에 꼭 연락하고.” “네.” 준상은 문을 닫고 청소를 마저 끝낸 뒤 집을 나섰다. 튜토리얼이란 본 게임 전에 규칙이나 게임 방법 등을 설명하기 위한 과정이다. 이것은 원래의 세계로 돌아오기는 했어도, 그곳에서 얻은 물품이나 능력이 그대로 남아 있는 이상 언제든 본 게임이 시작될 수도 있다는 의미이다. 학교는 이미 휴학한 상태. 어릴 때 부모님을 잃고 고모 집에서 더부살이를 하다가 독립한지 이제 일 년이 조금 지났지만, 소식이 끊긴지 한 달이 넘었는데도 연락조차 없는 그런 사이니 신경 쓰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준상은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서 언제 본 게임이 시작되어도 문제가 없도록 준비를 해두기로 했다. 가장 먼저 멀티툴을 장만했다. 이런 저런 모델이 있었지만 준상이 고른 것은 빅토리녹스의 헌터 모델이었다. 이 모델은 111밀리짜리 나이프가 달려있는 모델이며 거팅 블레이드라고 해서 사냥감의 가죽을 벗기는 칼도 달려있는 것이 특색이다. 그 외에 로프와 우의, 침낭, 정수 살균제 등 생존에 필요한 물품들을 사서 인벤토리에 채운 후 준상은 운동을 시작했다. 가장 먼저 자취방 근처의 산을 달리기 시작했다. 튜토리얼 과정 중에도 느낀 것이지만, 준상은 지구력이 다소 부족한 상태였다. 고작 하나의 적을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체력이 떨어져서 헉헉대기 일쑤여서는 앞으로의 본 게임에 대응하기 힘들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준상에게는 재생 능력이 있다는 점이었다. 근육은 운동이라는 형태의 적당한 손상을 주면 더욱더 힘세고 강한 근육으로 변화하는데, 준상의 경우에는 그 회복의 주기가 보통의 사람보다 훨씬 빠르다는 장점이 있었다. 더불어 준상은 집 근처의 종합 격투기 체육관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저 본능적인 주먹질과 발차기가 아닌, 제대로 된 격투기를 배우기 위해서였다. 검도나 사격술 같은 것을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무기들은 우리나라에서는 구하기도 어렵고 설령 구하더라도 관리 또한 문제였다. 그리고... 준상이 이곳으로 돌아온 것도 한 달이 넘은 어느 날. 남대문 시장에서 구한 군화를 신고 산악 구보를 위해 집을 나서려는데 휴대폰에서 메시지 알림음이 전해져 왔다. 준상은 직감적으로 드디어 올 것이 왔음을 깨달았다. 아니나 다를까. 휴대폰에는 이런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새로운 퀘스트가 도착했습니다 -10초뒤 퀘스트 수행을 위한 장소로 전송됩니다. 안전한 장소로 이동해 주십시오. (남은시간: 10초) 00014 트롤러 ========================================================================= 준상은 급히 신던 군화를 마저 신었다. 하지만 마음이 급해서인지 그 단순한 일마저 자꾸 손이 엇나간다. “제길.” 시간을 주려면 많이나 줄 것이지. 고작 10초 가지고 뭘 하라는 건가. 결국 준상은 군화 끈을 매다가 이전에 레벨 업을 할 때처럼 자신의 몸이 흰 빛으로 감싸이는 것을 깨달았고, 이내 자신이 집과는 전혀 상관없는 어두운 숲 속으로 옮겨졌음을 깨달았다. 완전히 캄캄한 어둠 속은 아니다. 구름이 잔뜩 낀 것처럼 어두운 데다, 주위를 둘러 싼 높은 나무들로 인해 그늘이 진 탓에 초저녁 정도의 밝기만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 상태였다. 얼른 군화 끈을 마저 매고 일어서자 휴대폰에서 다시금 메시지 알림이 전해진다. 숲을 정화하십시오. :어둠의 힘에 의해 숲이 오염되었습니다. 아름다웠던 숲은 이제 되살아난 시체들이 가득한 지옥이 되었습니다. 어둠의 근원을 제거하여 이전의 모습으로 되돌리십시오. [이 퀘스트는 여러 명의 인원이 동시에 참여합니다.] “...” 준상은 얼굴을 찌푸렸다. 퀘스트의 내용은 숲에서 출현하는 좀비들을 제거하고 그와 같은 현상을 일으킨 어둠의 근원을 제거하는, 다소 간단한 내용이었다. 문제는 여러 명의 인원이 동시에 참여한다는 부분이었다. 그는 아직까지 여기 저기에서 실종자들의 귀환이 계속 이어지고 있음을 알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들 역시 준상과 마찬가지로 퀘스트를 해결했으리라는 점이다. 튜토리얼은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상당히 어려운 목표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처음에 벼랑을 기어오를 생각을 하지 못한다면 튜토리얼은 시작도 해보지 못하고 그대로 지쳐서 굶어죽었을 것이다. 설령 튜토리얼을 시작하더라도 마찬가지다. 괴물 쥐와의 전투에서 살아 남아야 하고, 자신이 가진 것을 총동원해서 불을 피워야 하며, 야수들의 시선 속에서 불을 지켜야만 했다. 그것이 끝나면 함정과 야수들이 득실거리는 숲을 가로 질러야 하며, 마지막에는 좀비와 던전 보스를 쓰러뜨려야만 한다. 특히나... 다른 건 어떻게 요행으로 넘어갈 수 있다 쳐도, 던전 보스 만큼은 스스로의 능력으로 물리쳐야만 한다. 튜토리얼에서 살아 남았다는 것은, 바로 그런 의미인 것이다. “...” 이 게임의 주최자가 무슨 생각으로 하나의 퀘스트에 다수의 플레이어를 풀어 놨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준상으로서는 안면도 없는 인물을 같은 퀘스트를 수행한다고 전적으로 믿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먼저 손을 보호하기 위해 징박힌 가죽 장갑을 꼈다. 그리고, 도깨비불과 크림슨 울프 가운데 어느 쪽을 소환하는 것이 좀비들을 찾는데 이로울지에 대해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그건 쓸 데 없는 고민이었다. 좀비 쪽에서 먼저 준상을 찾아왔기 때문이다. “그어어...” 붉은 안광을 번뜩이는 좀비는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는 소리와 함께 뻣뻣한 팔을 휘두르며 곧장 달려 들었다. 하지만, 준상은 이미 한 달 전의 서툴기만 하던 그가 아니었다. “광전사.” 조용히 그가 입을 열자, 평소에 비워두었던 카드 슬롯에 정해진 순서대로 카드가 꼽혔다. 광폭, 피칠갑, 피칠갑, 피칠갑(R). 네 장의 카드가 슬롯에 자리잡은 순간, 콤보 카드 ‘얀트훈센의 광전사’가 발동했다. “흡!” 가볍게 숨을 들이쉰 그는 양팔을 겨드랑이에 붙이고 몸을 낮춘 채 좀비들에게 쇄도했다. 앞서 있던 좀비가 그런 준상을 향해 가로로 팔을 휘둘렀다. 하지만 준상은 몸을 낮춰 그 공격을 피한 뒤 곧바로 솟구치며 좀비의 턱에 강력한 어퍼컷을 가했다. 몸 전체로 뛰어오르듯이 가한 그 일격에 좀비의 머리통은 힘없이 몸으로부터 분리되어 날아가 버렸고, 머리를 잃은 몸통은 그 여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썩은 통나무처럼 쓰러졌다. “후웁... 후웁...” 준상은 길게 숨을 뿜으며 거칠어진 호흡을 정리했다. 머리를 잃은 좀비의 몸은 잠시 꿈틀대다가 이내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는 그제서야 자세를 풀고 날아가 버린 좀비의 머리로 다가가 군화발로 단숨에 머리뼈를 부순 후 시드가 있는지 확인해 보았지만, 이번에는 허탕이었다. “...” 좀비의 체액으로 더럽혀진 주먹을 마른 풀에 쓱쓱 문질러 닦은 준상은, 조용한 목소리로 소환 명령을 내렸다. “오픈 크림슨 울프.” 그러자 준상의 눈 앞에 피처럼 붉은 털을 지닌 늑대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낸다. 준상은 멀티툴을 꺼내 좀비가 입고 있던 누더기의 일부를 잘라낸 후 크림슨 울프에게 내밀었다. “이 냄새를 찾아라.” 크림슨 울프는 잠시 누더기의 냄새를 맡더니 이내 몸을 돌려 어디론가 달려가기 시작했다. “...” 그는 바로 붉은 털의 늑대 뒤를 쫓았다. 좀비들은 생각보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이번에는 세 마리! -크와앙! 늑대가 거대한 몸을 날려 선두의 좀비에게 달려들었다. 거대한 늑대의 체중을 견디지 못한 좀비가 쓰러지자, 빠르게 달려간 준상이 군화발로 있는 힘껏 걷어찼다. 공격력 강화 효과로 증폭된 준상의 일격이 바닥에 쓰러진 좀비의 머리통에 직격하는 순간, 으직하는 소리와 함께 머리뼈의 일부가 함몰되는 느낌과 함께 목이 있을 수 없는 방향으로 꺾이자 좀비는 이내 움직임을 멈추었다. 빠르게 좀비 하나를 해치운 준상은 뒤늦게 반격을 시작한 좀비의 품으로 다가서며 그 머리에 2연격을 가했다. 퍼퍽! 빠르게 뻗어간 준상의 펀치는 어김없이 좀비의 머리에 작렬했다. 좀비가 그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순간, 준상의 발이 좀비의 정강이에 작렬하며 다리뼈를 부러뜨리고 말았다. 기우뚱하며 쓰러지는 좀비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하려는 순간, 준상은 등 뒤에 무언가가 다가오는 것을 깨닫고 얼른 앞으로 몸을 굴렸다. “...” 땅바닥을 한 바퀴 구른 준상은 바로 몸을 일으켜 자신이 있던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두 마리의 좀비가 서로 뒤엉켜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준상이 몸을 일으키는 순간, 크림슨 울프가 뒤늦게 좀비들을 향해 달려 들었다. 손발을 허우적거리며 일어서려던 좀비는 그대로 크림슨 울프에게 깔려 나뒹굴기 시작했고, 준상은 좀비들이 서로 떨어진 틈을 타 다리뼈가 부러진 좀비의 머리를 군화발로 있는 힘껏 걷어찼다. 하지만 이번의 일격은 빗나가고 말았다. 좀비가 팔다리를 휘저으며 몸부림을 치는 바람에 머리가 아닌 어깨에 맞은 것이다. 하지만 준상은 들어 올려진 발을 그대로 접으며 무릎으로 좀비의 머리를 내리 찍었다. 퍼석! 그 강력한 일격에 적중한 좀비의 머리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그대로 으스러져 버렸고, 머리가 박살나자 발버둥치던 팔다리도 이내 잠잠해졌다. “후우... 후우...” 호흡을 조절하며 마지막 남은 좀비를 향해 다가갔다. 하지만 준상이 손을 쓸 필요도 없이 좀비는 크림슨 울프의 이빨에게 목뼈가 으스러지며 움직임을 멈추고 말았다. “잘 했다.” 그렇게 말하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크림슨 울프는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숙여 복종의 뜻을 표했다. 준상은 다시금 좀비들의 머리 속을 손으로 헤집었지만, 이번에도 허탕이었다. “역시... 보스를 잡아야 하나.” 혀를 차며 몸을 일으키는데, 문득 어디선가 찢어지는 듯한 비명 소리가 들려온다. 다른 플레이어일까. 연이어 터져 나오는 비명 소리는 젊은 남자의 그것이었다. 준상은 잠시 고민했다. 그대로 모른 척 해야 할까. 아니면 가서 구해줘야 할까. 하지만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뭐라해도, 이 비명 소리가 들려오는 곳에 좀비가 있으리란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준상은 먼저 크림슨 울프를 소환 해제 한 다음, 비명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향했다. 호흡을 조절하며 얼마 정도 숲을 달리자, 이내 화려한 빛을 번쩍이며 한 남자가 좀비들과 악전고투를 벌이는 장면을 목격할 수 있었다. 남자는 좀비에게 물렸는지 오른쪽 팔을 늘어 뜨린 상태였지만, 다른 손으로 연신 하얀 빛을 뿜어내는 무언가를 쏘아대고 있었다. 제법 위력이 강해서 맞을 때 마다 움찔거리기는 했지만, 부상을 입은 탓인지 머리에 제대로 맞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상대의 속도를 늦추는 효과가 있는지 좀비들의 움직임이 그리 빠르지 못했다. “호오...” 저건 혹시 마법인걸까. 준상이 지켜보는 가운데 남자는 계속해서 마법으로 보이는 빛을 쏴대더니 힘이 떨어졌는지 이내 그것조차 멈추어 버렸다. 가만히 좀비들의 수를 세어 보았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모두 여섯 마리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남자가 계속 비명을 질러 댄다면 사방 팔방에서 좀비들이 몰려들 것은 뻔한 일이다. 그대로 남자를 미끼로 쓰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그냥 해치우는 것이 나을까. 하지만 준상은 더 이상 모이면 자신도 상대하기 버거울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결정이 내려지자 곧바로 몸을 날려 좀비들을 기습했다. 뒤에서 목덜미를 확 낚아 채 쓰러뜨린 후, 마치 바닥에 놓인 기왓장을 격파하듯이 주먹을 내리 찍었다. 퍼석! 순식간에 좀비 하나를 물리치자 뒤쳐져 있던 좀비 하나가 준상에게 반응하며 몸을 돌렸다. 하지만, 좀비는 몸을 완전히 돌리기도 전에 마치 해머와도 같은 준상의 펀치에 얻어 맞으며 옆으로 비틀거렸다. 승기를 잡은 준상은 한 손으로 좀비의 멱살을 움켜 쥐고 연겨푸 주먹을 날렸다. 퍽! 퍽! 퍼걱! 좀비는 연이어 퍼부어진 펀치를 견디지 못하고 머리뼈가 으스러지고 말았다. 준상은 잡고 있던 손을 확 뿌리쳐 좀비를 쓰러뜨린 후, 군화발로 세차게 밟는 것으로 확인 사살을 했다. 남은 좀비는 이제 넷! 준상이 몸을 일으키는 순간 부상 당한 남자가 쏘아낸 마법이 드디어 좀비 중 하나의 머리를 부숴버렸다. 멀리서 봤을 때는 미처 몰랐지만, 가까이서 보니 남자가 쏘는 것은 손가락 두 개를 합친 정도의 크기를 지닌 얼음 조각임을 알 수 있었다. 남자는 가까스로 좀비 하나를 쓰러뜨린 후 준상을 향해 외쳤다. “도와주세요!” 이제 와서 무슨 뒷북이냐는 생각이 떠올랐지만 준상은 묵묵히 남은 세 마리의 좀비 중 하나의 머리에 체중을 실은 강력한 훅을 날렸다. 아래턱에 해머처럼 휘둘러진 훅이 명중하자 좀비는 머리가 묘한 방향으로 꺾이며 돌아가 버렸다. 좀비가 기우뚱거리자 준상은 휘청거리는 상대의 다리에 로우킥을 가해 쓰러뜨린 후 사커킥으로 마무리했다. 그 때 다시 남자의 마법이 좀비 중 하나의 몸에 작렬했다. 머리에 제대로 명중시키지는 못했지만, 냉기로 몸이 굳어지게 만든 덕분에 준상은 한결 편하게 일대일 상황을 만들 수 있었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좀비들이 쓰러지자, 마법을 쓰던 남자는 그제서야 살았다는 듯이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았다. “사, 살았다...” 미처 몰랐는데, 조금 어려 보이는 이 남자는 몸에 환자복을 걸치고 있었다. 귀환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불려온 것일까. 준상은 그제서야 자신이 빨리 돌아온 것 또한 하나의 보상임을 깨달았다. 전투가 끝나자 준상은 이전에 그랬듯이 좀비들의 머리 속을 헤집었다. “우웁...” 그러자 못 볼 것을 봤다는 듯이 남자가 토악질을 하기 시작했지만, 준상은 묵묵히 자신의 할 일을 계속했다. “...” 이번에는 허탕이 아니었다. 준상은 바로 휴대폰을 꺼내어 새로 발견한 시드를 확인했다. 아이템정보 명칭 : 레디니스 시드 레벨제한 : 없음 종류 : 시드 등급 : Uncommon 효과 : 물리공격 계열 스킬 쿨타임 3% 감소 설명 : 물리공격 계열의 스킬 재사용에 걸리는 시간을 줄여주는 시드입니다. Seed 슬롯이 있는 아이템이나 카드에 장착하여 능력을 강화할 수 있습니다. 한번 장착한 시드를 분리하기 위해서는 특수기능 ‘분리’가 필요합니다. [이 시드를 아이템이나 카드에 장착하시려면 이곳을 누르십시오.] 00015 트롤러 ========================================================================= “...” 준상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물리 스킬 한정이라는 제약이 붙었고, 생각보다 그리 수치가 높지 않은 건 사실이었지만, 쿨타임 감소는 광전사 콤보를 사용하는 그에게는 무척이나 절실한 시드이다. 얼른 새로 얻은 시드를 피칠갑(R)의 비어있는 슬롯에 장착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다른 좀비를 찾으려고 일어서는데 환자복을 입은 남자가 그를 불러 세웠다. “자, 잠깐만요.” 하지만 준상은 그냥 무시한 채 기척을 살피다가 무언가 금속성이 들려오는 것을 깨닫고 그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헉! 같이 가요!” “...” 환자복을 입은 남자는 기겁하며 준상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준상은 남자가 따라오는 소리를 듣고 얼굴을 찌푸리며 잠시 고민했다. 한 대 패서 눕혀 놓고 가는 것이 나을지, 아니면 그냥 모르는 척 따라오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좋을지에 대해서. 마법을 쓴다고는 하지만 준상의 일격에 맞으면 단순히 기절하는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설령 죽지는 않더라도 이런 숲속에서 정신을 잃고 기절해 있는 건 좀비들에게 나 잡아 잡수 하는 꼴 밖에는 안 된다. 환자복을 입은 남자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생사의 고비를 다시 한 번 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헐떡거리며 준상을 불러세우려 했다. “자, 잠깐만요! 잠깐만 거기...” 정말 튜토리얼을 클리어한 것이 맞는 걸까. 준상은 짜증이 치미는 것을 느끼며 걸음을 멈추었다. “아, 다행...” 남자는 준상이 멈추자 반색하며 무어라 말을 하려 했지만, 채 말을 잇기도 전에 준상이 뻗은 손에 멱살을 잡혔고, 이어서 번쩍 공중으로 들려지는가 싶더니 그대로 땅바닥에 세차게 등을 부딪혔다. “컥!” 숨이 턱 하고 막히는 강렬한 충격에 놀라 눈을 부릅뜬 남자의 목을 지그시 발로 밟으며 준상은 조용히 말했다. “닥쳐.” 남자는 얼굴이 헬쓱해졌다. 안 그래도 방금의 타격으로 호흡이 곤란한 마당에 목까지 짓눌리고 있으니 질식해버리는 건 당연한 일. “사, 살려...” 준상은 차가운 눈으로 남자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발을 떼었고, 남자는 그제서야 몸을 옆으로 둥글게 만 채로 컥컥거리기 시작한다. 이 남자가 가진 마법 능력은 특별했다. 좀비와 같은 상대가 목표라면 원거리에서 무빙샷을 날리는 것만으로 쉽게 처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위력도 훌륭해서 제대로 머리를 맞추면 일격에 좀비를 무력화시키는 것도 가능했다. 다른 부위에 맞더라도 빙결 효과로 속도를 늦출 수 있으니, 준상처럼 피 튀겨 가며 육박전을 벌일 필요도 없다. 또 어떤 능력이 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그 한 가지 만으로도 충분히 던전의 주인을 상대할 만하다는 것이 준상의 판단이었다. 환자복을 입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병원에 누워있다가 갑자기 전송되었을 것이고, 그 때문에 제대로 준비를 하지 못해 당황한 것은 이해가 가지만... 맨손으로 아무것도 없이 시작한 것은 튜토리얼 역시 마찬가지가 아니던가. 준상은 조금 싸워본 결과 이번 퀘스트의 목적이 일종의 워밍업이라고 이해하고 있었다. 튜토리얼을 마치고 원래의 세계로 복귀하면서 생겨난 공백을 해소하고, 자신의 능력을 되돌아 보기 위한 워밍업. 던전의 주인을 쓰러뜨리고, 그 보상을 얻은 플레이어라면 숲에서 흐느적거리며 돌아다니는 좀비들 따위는 사실 샌드백 이상의 의미가 없다. 물론 방금 전처럼 많은 수가 몰리면 위험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 해도 당황할 필요는 없다는 얘기다. 준상은 눈앞에서 여전히 호흡 곤란으로 인해 컥컥거리고 있는 남자를 말없이 바라보다가 자신들에게 누군가가 접근하고 있음을 깨닫고 고개를 돌렸다. “...” “...” 순간 준상은 한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발밑에 쓰러져 있는 남자와 마찬가지로 환자복을 입은, 역시나 조금 앳되어 보이는 여자였다. 양갈래로 묶은 머리와 갸름한 계란형의 얼굴, 동글동글한 눈과 그 밑의 애교살까지 더해져서 제법 귀여운 인상이었다. 여자는 말없이 준상과 남자의 모습을 살피더니, 손에 들고 있던 몽둥이를 준상에게 겨누며 말했다. “성진이니?” 바닥을 뒹굴고 있던 남자가 그 목소리에 반응했다. “으으... 수, 수연이?” 준상은 얼굴을 찌푸렸다. 일이 묘하게 꼬였다는 것을 깨달은 탓이다. “당신이 성진이를 공격한 건가요?” “...” 준상이 대답하지 않자, 수연은 대뜸 손에 쥐고 있던 몽둥이를 준상에게 휘둘렀다. 머리 위로부터 빠르게 내려오는 몽둥이의 움직임을 보는 순간, 준상은 이 여자가 검도를 제대로 배운 인물임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판단이 내려진 순간, 준상은 이미 반격을 시작하고 있었다. 두 팔을 옆구리에 붙이고 자세를 낮춘 채로 몸을 좌우로 흔들며 수연을 향해 쇄도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른바 덕위빙이라고 불리는 동작이 펼쳐지는 순간 수연은 마치 눈 앞에서 준상의 모습이 사라진 듯한 착각을 느꼈다. “헉!” 수연은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하고 몸을 빼내려 했지만, 그때는 이미 준상이 수연의 턱 밑까지 접근한 상황이었다. 퍽! 단 한 방이었다. 준상의 손에서 뻗어나간 리버블로 한 방에 수연은 눈앞이 노래지는 착각을 느끼며 그대로 무너졌다. “쿨럭!” 뭘 어떻게 해볼 사이도 없이 손에서 몽둥이가 떨어져 나가고 무릎이 푹 꺾여 버렸다. 수연은 그대로 머리를 땅바닥에 박으며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수, 수연아!” 성진은 기겁해서 여자의 이름을 불렀지만, 이내 그녀의 입에서 작은 신음 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을 듣고는 덜컥 내려 앉았던 가슴을 추슬렀다. 그리고 그 놀랐던 감정은 준상에 대한 분노로 바뀌었다. “도대체 왜!” “시끄럽게 굴지 마라.” “뭐?” “주위의 좀비들을 모조리 불러 모을 셈이냐?” “...” 성진은 그제서야 준상이 왜 과격하게 손을 쓴 것인지 깨달았다. 게다가 수연 역시 먼저 공격을 가했기 때문에 반격을 당한 것이다. 하지만 때로는 머리로 상황을 이해해도 감정이 따라주지 않는 경우가 있는 법. 하긴 그렇게 얻어맞고 화가 치밀어 오르지 않으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인지도 모른다. 굼벵이도 밟으면 꿈틀하는 판에, 카드라는 전대미문의 힘을 얻은 사람이라면야! “...” 성진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준상을 노려 보았다. 하지만 준상은 그런 행동을 용납할 생각이 없었다. “눈 깔아라.” “...” “아니면, 정말로 죽고 싶은 건가.” “...” 성진은 문득 준상의 몸에서 무언가 아지랑이 같은 것이 피어오른다고 느꼈다. 그리고, 뒤늦게 다시 깨달았다. 정말로 준상에게 그럴 마음이 있었다면, 자신과 수연은 고통을 느낄 틈도 없이 이미 죽어 뒹구는 시체가 되었으리라는 사실을. 워낙 경황중이라 잠시 잊고 있었지만, 방금 전 좀비들을 학살하던 준상의 모습을 뒤늦게서야 떠올린 것이다. “...” 결국 성진은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었다. 준상은 그런 성진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등을 돌려 사라졌다. 성진은 그가 발걸음을 돌리자 얼른 쓰러져 있는 수연에게로 다가가 그를 부축했다. “괜찮아?” “으...” 수연은 성진이 다독이자 그제서야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성진이?” “응, 정신이 들어?” “...” 수연은 얼굴을 찌푸리다가 이내 성진의 어깨에 난 상처를 발견했다. “너, 그 상처는...” “아아... 자다가 이곳에 불려오는 바람에 당해버렸지 뭐야.” “...” 성진의 대답을 들은 수연은 다시 얼굴을 찌푸렸다. “방금 그 남자는 도대체 뭐야?” “그게...” 수연의 말에 성진은 잠시 머뭇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도 아는 바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좀비 들한테 쫓기는 걸 구해줬어.” “구해줬다고?” “응.” 성진은 자신이 개념 없이 소리 지르다가 준상에게 얻어맞았다는 사실은 입에 담지 않았다. 그러나 이 정도의 설명 만으로도 수연은 자신이 크게 착각을 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 허나, 오해가 있었으면 풀 생각을 해야지 어떻게 사람을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팬단 말인가. 수연은 자신이 먼저 공격을 가했다는 사실은 쏙 빼놓은 채 쑤셔오는 옆구리를 어루만지며 얼굴을 찌푸렸다. “일어날래.” “...” 수연은 아직도 얼얼한 옆구리를 어루만지며 몸을 일으켰고, 성진 역시 그녀를 따라 일어나며 말했다. “어떻게 할래?” 뜬금없는 성진의 말에 수연은 다시 얼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뭐가?” 말을 할 때마다 준상에게 두들겨 맞은 자리가 쑤셔서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성진은 그런 수연의 표정을 개의치 않는 모습으로 말을 이었다. “우린 지금 메시지를 받을 휴대폰은커녕 아무런 물품도 없어.” “그래서?” “다행히 이 퀘스트가 빨리 끝나면 모르지만...” “...” 그 다음 말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수연은 옆구리를 어루만지다가 바닥에 떨군 몽둥이를 집어 들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뭔데?” 그러자 성진은 조금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그 남자... 강해 보였지?” 수연은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강해 보이는 정도가 아니야. 그건 정말로 강한 거라고.” 그렇지 않다면 검도 유단자인 자신이 일격에 쓰러질 일이 없지 않은가. 게다가 지금의 수연은 카드라는 전대미문의 힘까지 얻은 상태. 흔히 하는 말로 검도삼배단이라는 것이 있다. 검도유단자를 맨손으로 상대하려면 세 배의 단수가 필요하다는 말인데, 그 진위여부는 둘째로 치더라도 수연 정도의 실력자를 맨손으로 일격에 잠재울 만한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은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게다가 그 사람 차려 입은 것 봤지? 그거 완전히 이번 같은 일에 대한 준비가 끝난 거라고 봐야해.” “...” 사실 징 박힌 장갑이나 군화 같은 건 일상 생활에서는 상당히 거추장스러운 물건이다. 게다가 환자복이 아닌 것만 봐도 자신들보다 먼저 귀환해서 이런 저런 준비를 했으리란 것은 명백한 사실. 수연은 불쾌한 표정으로 성진에게 말했다. “넌 남자가 배알도 없니?” “무슨 소리야?” “그 사람한테 빌붙자는 얘길 하고 싶은 거 아니야?” 성진은 직설적인 수연의 말에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뭐... 표현이 너무 적나라한 것 같기는 하지만, 틀린 얘기는 아니야.” 순순히 인정하는 성진의 모습을 흘겨보며 수연은 고개를 홱 돌렸다. “난 싫어.” “왜?” “여자한테 손찌검하는 남자치고 제대로 된 남자 못 봤어. 그게 이유야.” “...” 성진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너는 싫더라도 난 빌붙어야겠어.” “너...” “어쩔 수 없어. 난 죽고 싶지 않으니까.” “...” 진지한 성진의 표정에 수연은 표정이 굳어 버렸다. 성진은 그런 수연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다고 그렇게 심각해질 건 없고.” 수연은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심각해지긴 누가...” “아니면 됐고.” “칫.” 수연은 툴툴거리며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성진의 상처를 동여맸다. “윽...” “참아.” “네, 네...” 간단하게 응급처치를 마치자 성진과 수연은 준상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그를 뒤쫓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살이 찢기고 뼈가 부서지는 소음을 따라가면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성진과 수연이 준상을 따라잡았을 때, 그는 서너 마리의 좀비들을 해치우고 그 머리 속에서 시드를 찾는 중이었다. 00016 트롤러 ========================================================================= 조용히 뒤를 따르던 성진과 수연은, 준상이 좀비의 머리 속을 손가락으로 헤집는 모습을 보고자 욕지기가 치밀었다. “우읍...” “웁!” 당연히 그 소리는 작업에 열중하던 준상의 귀에도 들어갔다. “...” 가만히 몸을 일으킨 준상은 두 사람을 가만히 노려보며 자세를 잡았다. 어차피 이곳은 다른 자들의 이목이 닿지 않는 곳. 설령 플레이어 간의 살인이 일어난다 해도 원래의 세상에서는 그와 같은 사실을 알 수 없다. 준상의 눈에서 안광이 번뜩인다고 느껴진 순간 성진은 급히 두 손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자, 잠깐만요.” “...” “그러니까, 잠시만 제 말을 들어주세요.” 준상은 얼굴을 찌푸리고는 바로 대답했다. “싫다.” “...” “싸울 건가?” 성진은 준상의 몸에서 다시 한 번 아지랑이 같은 것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끼고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수연은 자신도 모르게 그런 성진의 앞으로 나서며 몽둥이를 앞으로 내밀었다. 만약의 경우 준상이 공격을 시작하면 마법사인 성진으로서는 일격을 견뎌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성진은 다시 한번 분위기가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치달아 가자 당황해서 얼른 말했다. “안 싸워요. 그러니까 저희는 그냥...” 하지만 성진이 채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찢어지는 여자의 비명 소리가 숲 속에 울려 퍼졌다. “아아아아아악!” 순간 세 사람은 움찔하며 자신들도 모르게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에 주의를 집중시켰지만, 먼저 움직이지는 않았다. 그러자 여성의 비명 소리는 점차 잦아들기 시작했다. 아니, 그것은 더 이상 비명 소리가 아니었다. 이제 막 숨이 넘어가기 직전에 내뱉는 단말마였다. 세 사람은 다시 한번 서로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비명 소리가 들려오는 장소를 향해 내달렸다. “세, 세상에...” 성진은 갑자기 바람처럼 앞으로 내달리는 준상의 모습에 탄성을 지를 수 밖에 없었다. 똑같이 달리기 시작했는데 어느 틈엔가 저 앞으로 쭉쭉 뻗어나가고 있으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엄청나네...” 수연 역시 이번 만큼은 툴툴거리지 않고 순수하게 탄복하고 말았다. 모르긴 해도... 저 정도 주력이면 어지간한 단거리 육상 선수는 뺨 칠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은 미처 모르고 있었다. 한 달 전만 해도 준상 역시 다른 사람들과 그다지 큰 차이가 없었다는 사실을 이런 변화는 지난 한 달 간 근육 파열을 각오하고 미친 듯이 수련에 전념한 결과였다. 하지만 준상은 뒤에서 감탄하거나 말거나 순식간에 숲을 가로질러 비명이 들려오는 장소를 향해 달려갔다. 이윽고. 그는 좀비 세 마리가 마치 고스톱이라도 치는 것처럼 한 사람의 몸 위에 머리를 처박고 올라 앉아 있는 광경을 목격했다. “훕!” 준상은 숨을 멈추며 가장 가까이 있는 좀비의 목덜미를 잡아 뒤로 팽개친 다음 슬며시 고개를 처드는 좀비의 머리를 군화발로 있는 힘껏 걷어 찼다. 퍼걱! 안전화처럼 특별히 앞쪽을 강화시킨 군화는 반쯤 썩어버린 좀비의 입안을 부수고 들어가 그대로 입 위쪽을 마치 잡아 뜯듯이 부숴버렸다. 순식간에 함께 있던 좀비 두 마리가 내동댕이쳐졌음에도 불구하고 남은 좀비 한 마리는 밑에 깔려 있는 사람의 몸을 게걸스럽게 뜯어먹고 있었다. 준상은 곧바로 몸을 돌려 머리를 처박고 있는 놈의 뒷덜미를 잡아 일으킨 다음 그 머리를 양손으로 잡고 무릎으로 연거푸 찍어 버렸다. 빠각! 그러자 안면의 뼈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좀비는 힘없이 움직임을 멈추어 버렸다. 그리고 완전히 움직임을 멈춘 놈을 군화발로 차서 밀어버릴 즈음 뒤늦게 성진과 수연이 도착했다. “핫!” 처음에 준상에 의해 나동그라진 좀비는 비척거리며 몸을 일으키다가 등 뒤에서 성진이 날린 얼음덩이에 맞아 몸이 굳었고, 그 틈을 노려 수연이 몽둥이를 휘둘러 놈의 머리를 야구공 마냥 날려 버렸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날려버린 머리통이 준상을 향해 날아들 건 또 뭔지. 준상은 침착하게 두 사람의 전투 광경을 지켜보다가 갑자기 자신에게 머리통이 날아들자 그대로 주먹을 뻗어 그 머리통을 부숴버렸다. 퍼석! 그리고 자신에게 머리통을 날린 수연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수연은 그 시선을 마주하자 순간 아차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모르는 척 얼른 시선을 돌려 버렸다. 준상은 잠시 수연을 노려보다가 몸을 돌려 쓰러져 있는 사람에게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삼십대 정도로 보이는 여자가 속옷 차림으로 쓰러져 있었다. “사, 사려...” 여자는 준상을 향해 필사적으로 말을 건넸지만... 불행히도 그녀의 상태는 이미 회생 불가능이나 다름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뱃가죽이 찢겨 창자가 모두 뽑혀 있었기 때문이다. 좀비들이 게걸스럽게 뜯어 먹고 있었던 것은 바로 그녀의 내장이었다. 준상은 착잡한 표정으로 그녀의 손을 잡아 주었다. 그에게 포션이 있기는 하지만... 이런 식의 상처에는 의미가 없다. “웁! 우욱!” 수연은 뒤늦게서야 그 참상을 보았고, 이내 파랗게 질려 토악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성진은 토악질까지는 아니지만 감히 직시할 엄두를 내지 못한 채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여자는 뭔가 더 말을 하려고 입술을 움찔거리다가 그대로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리고 뭘 어떻게 하기도 전에 천천히 빛으로 화해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져 갔다. “후우...” 좀비들을 석고 인형 마냥 부숴대던 준상조차도 이런 식으로 다른 플레이어의 죽음을 실제로 눈앞에서 확인하고 덤덤하게 있을 수는 없었다. “싫어... 이딴 거... 이제 싫어... 흑...” 수연은 주저앉은 채 울기 시작했고, 성진은 입술을 깨문 채 어두운 하늘을 올려다 보기만 했다. 세 사람은 미처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이번에 희생당한 여성은 튜토리얼을 거치면서 받은 정신적인 피로를 극복하기 위해 수면제를 다량 섭취한 상태였다. 때문에 메시지는커녕 자신이 전송되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참변을 당했던 것이다. “후우...” 이러한 자세한 내막까지는 알지 못했지만, 준상은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 상황인지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었다. 메시지 도착 후 전송에 걸리는 시간은 10초. 날아드는 퀘스트를 거부할 방법도 없고, 설령 자신이 무엇을 하던 중이라도 전송은 어김없이 이루어진다. 식사 중이거나, 목욕 중이거나, 용변을 보던 중이거나, 잠을 자던 중이거나, 혹은 연인과 사랑을 나누던 중일지라도... 이 잔혹한 퀘스트는 메시지 도착 10초 후에 어김없이 발생되어 버린다. 이것은 다시 말해, 평범한 일상으로는 이제 절대로 돌아갈 수 없다는 의미였다. “...” 준상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쓰러진 좀비들에게로 다가가 그 머리속을 헤집었다. 수연은 그런 준상의 모습을 보고 외쳤다. “이 자식아! 사람이 죽었잖아!” 준상은 그녀를 돌아보며 대답했다. “그래서?” 수연도 알고는 있다. 비명 소리를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날 듯이 뛰어간 사람이 바로 준상이라는 사실을. 하지만 눈앞에서 사람이 죽었는데도 태연하게 좀비들의 머리속을 헤집고 있는 그를 보니 알 수 없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니... 정확히는 속에서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미는데 마침 준상의 행동이 눈에 들어왔다는 편이 맞을 것이다. “성진아, 가자.” “뭐?” 성진은 갑작스레 일어나 어디론가 걸어가는 수연의 모습에 당황했지만, 이내 준상을 향해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여 보인 뒤 그녀의 뒤를 따랐다. “...” 준상은 말없이 그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그들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자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오픈 크림슨 울프.” 그러자 핏빛처럼 붉은 늑대 한 마리가 준상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준상은 좀비들이 입고 있던 누더기를 늑대의 코에 가져다 댄 후 명령했다. “놈들을 찾아라. 하나도 남김없이.” 그 역시 몸 안에서 피어오르는 분노를 해소할 대상이 필요했고, 좀비는 그 대상으로 더 할 나위 없었다. 크림슨 울프는 누더기의 냄새를 맡더니 곧바로 달려 가기 시작했고, 그 뒤를 따라 달리던 준상은 오래지 않아 한 무리의 좀비들과 조우했다. “하아압!” 준상은 가장 앞에 선 좀비의 머리에 주먹을 날렸다. 그리고 좀비의 인중에 정확히 적중한 주먹을 그대로 땅바닥에 패대기 치듯이 내려꽂자, 좀비는 썩은 나무토막 마냥 바닥으로 쓰러지며 목이 부러지고 머리뼈가 으스러졌다. -그아아아! 그제서야 기습을 알아차린 좀비 한 마리가 무릎을 꿇은 자세로 앉아 있는 준상을 향해 몸을 돌렸지만, 놈은 준상의 머리 위로 도약한 붉은 늑대의 육중한 돌격을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나뒹굴어 버렸다. 준상은 곧바로 양팔을 옆구리에 붙인 채 몸을 일으키며 좀비들을 향해 쇄도했다. 좀비들은 팔을 휘둘러 그를 잡으려고 했지만... 바로 그 순간. 준상의 몸이 좌우로 흔들리는가 싶더니 곧장 아래로 쑥 꺼지며 좀비들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수연의 공격에 반격을 가할 때 사용했던 덕위빙을 다시 한 번 펼친 것이다. 준상이 지난 한 달간 가장 공들여 익힌 것이 바로 이 기술이다. 이상하게 뽑는 카드마다 공격 일변도인데다 광전사 콤보의 경우에는 아예 사용시 방어구 해제라는 옵션마저 붙어 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바로 지금 사용하는 회피 기술이다. 허리를 기점으로 상체를 U자 형으로 흔들어 적의 공격을 피하는 위빙. 순간적으로 무릎을 굽히는 방법으로 몸을 낮추는 더킹. 그리고 이 두 가지를 섞어 사용하는 덕위빙. 특히나 강한 근력을 바탕으로 돌진하며 구사하는 준상의 덕위빙은 당하는 입장에서는 순간적으로 이형환위를 구사하는 것처럼 느껴질 만큼 위협적이었다. 이런 기술을 한 달 만에 익힌 것부터가 이미 일반인의 상식을 까마득히 뛰어넘는 일이었다. 재생력이라는 사기스러운 능력과 준상의 끈기가 이루어낸 기적이라고나 할까. 검도 유단자인 수연조차도 미처 대비를 못할 정도의 이 놀라운 회피기가 펼쳐지자 아무래도 반응이 느릴 수 밖에 없는 좀비들로서는 그야말로 속수무책일 수 밖에 없었다. 퍽퍼퍽! 좀비 하나가 마치 환영처럼 뻗어 나온 준상의 2연격을 맞고 비틀거린다. 준상은 2연격 이후 곧바로 놈의 발을 밟아 고정시킨 채 마치 거대한 해머를 휘두르는 듯한 강렬한 훅을 좀비의 머리에 선사했고, 이 일격이 관자놀이에 직격하자 좀비의 머리는 그대로 수박처럼 터져 나갔다. 그가 좀비 하나를 박살내는 틈을 타서 또 다른 좀비가 괴성과 함께 팔을 허우적거리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준상은 얼른 몸을 숙이며 뒤로 몸을 크게 젖혔다. 그리고 코앞으로 좀비의 팔이 스쳐지나가자, 마치 스프링이 튕겨 나오는 듯한 모습으로 좀비의 품 안으로 달려들며 쿨타임이 끝난 2연격을 터뜨렸다. 뻐벅! 달려들던 기세 때문이었을까. 좀비는 그대로 목이 뒤로 꺾여지며 앞으로 힘 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순식간에 세 마리의 좀비를 해치운 준상은 늑대에게 목을 물린 채 질질 끌려 다니는 나머지 한 마리의 좀비에게 다가가 군화발로 그 머리를 짓밟아 버리는 것으로 전투를 마쳤다. “후우...” 이번에도 좀비들의 머리 속에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발길을 돌리려는 준상의 눈에 뭔가 반짝이는 금속 조각 하나가 보였다. 뭔가 싶어 다가가 주워 들었다. “동전?” 좀비들이 지니고 있던 것이었는지 체액으로 지저분해져 있기는 했지만, 색깔로 봐서는 금으로 만들어진 주화였다. 저승길 노자 돈 쯤 되는 걸까. 순도는 잘 모르겠지만, 이 정도면 한 돈은 충분히 되는 느낌이다. 00017 트롤러 ========================================================================= “칫...” 의외의 소득이긴 했지만 준상은 오히려 혀를 찼다. 당연한 얘기지만, 한 달간의 실종으로 인해 편의점 아르바이트는 이미 잘린 상태. 물론 그 정도 아르바이트야 다시 구하는 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진짜 문제는 이 빌어먹을 퀘스트가 언제 발동될지 알 수가 없다는 점이고, 그런 불규칙성은 사회 생활에는 치명적인 악영향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금 한 돈...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액수이다. 이 정도 금액을 지속적으로 얻을 수 있다면, 큰 돈은 벌지 못하더라도 호구지책은 될 수 있을 터. 하지만 준상은 오히려 다른 일은 집어 치우고 퀘스트에만 전념하라는 의미인 것 같아서 기분 나빴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 게임의 주최자가 원하는 대로 끌려가야만 한다는 사실이 짜증스럽다. “후...” 준상은 몸을 일으킨 뒤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크림슨 울프를 바라보며 말했다. “다음.” 크림슨 울프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좀비의 누더기를 흔들어 보이자 그제서야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들고 냄새를 맡더니 또다시 어디론가 달려가기 시작한다. 연이은 질주와 격투로 준상은 조금씩 숨이 가빠오는 것을 느꼈지만, 가만히 호흡을 조절하며 크림슨 울프의 뒤를 쫓는다. 하지만 모처럼 발견한 좀비는 이미 누군가에 의해 쓰러지는 중이었다. 퍽! 그 사람은 손에 무언가 철퇴 같은 것을 들고서 좀비들의 머리를 부수는 중이었다. 거리가 있는데다 어둡기까지 해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잠시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던 준상은 그 둔기가 블랙잭임을 알 수 있었다. 블랙잭은 가장 손쉽게 만들 수 있는 둔기로 주머니에 모래나 자갈, 동전 등을 넣어 만든다. 굉장히 허술해 보이지만 만들기 쉬운데다 휴대성이 높고 위력도 강력하다는 장점이 있다. 준상은 아마도 자신이 신고 있던 양말에 모래나 돌을 담아 저것을 만들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블랙잭을 휘두르던 사람은 좀비들을 모두 쓰러뜨리자 헉헉거리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잠시 지켜보던 준상은 호리호리한 체구의 그 사람이 주변의 좀비들을 모두 쓰러뜨리자 미련 없이 그 자리로부터 벗어났다. 굳이 방금 전의 두 아이들과 같은 해프닝을 일으킬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몸을 돌리려는 찰나, 그쪽에서 먼저 말을 걸었다. “거기, 누구죠?” “...” 준상은 들려오는 목소리가 젊은 여자의 그것임을 깨달았지만, 그냥 모르는 척 자리를 빠져 나왔다. 이로써 준상까지 포함하면 다섯 명. 제법 숲이 넓다고는 하지만 조우의 빈도로 미루어 봤을 때 제법 많은 수의 플레이어가 투입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준상은 크림슨 울프를 재촉해 다른 목표물을 찾았다. 크림슨 울프는 준상의 명령에 따라 다시 질주하다가 어느 시점이 되자 갑자기 멈추어서더니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리기 시작한다. 이전까지와는 다른 반응에 준상은 정신이 퍼뜩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지금까지 상대했던 보통의 좀비들과는 다른, 특별한 놈이 모습을 드러냈다. -끄어어엉! 얼핏 둔해 보이는 그 거대한 몸이 모습을 드러내자 준상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못해도 삼 미터는 되는 거대한 곰이 앞발을 들고 일어나 포효하는 모습은, 이제 제법 전투에 익숙해졌다는 생각마저 들었던 준상으로서도 심장이 오그라드는 공포를 느끼게 만들 정도였다. 좀비들이야 어렵지 않게 이겼지만, 과연 이런 무지막지한 괴물도 상대할 수 있을까. 준상은 아직 어렵다는 판단을 내렸다. 모르긴 해도 이 터무니없는 괴물이 지닌 힘은 자신보다 못하지 않을 터. 그에 반해 준상의 펀치와 킥이 이 괴물 곰에게 얼마나 유효할지는 미지수인 상태이므로, 이 싸움은 피하는 편이 맞다. 하지만, 괴물 곰의 생각은 준상과 달랐다. 가뜩이나 좀비들이 설치고 다녀서 짜증나는데, 좀비 비슷하게 생긴 놈이 손과 발에서 좀비 냄새를 풀풀 풍기며 다가서니 또 다른 적으로 인식한 것이다. -쿠어어엉! 황갈색의 털을 지닌 거대한 곰이 겅중겅중 뛰며 자신에게로 달려들자 준상은 혀를 찰 수 밖에 없었다. “쳇!” 하지만 이대로 저 곰의 돌격을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 따로 명령한 것도 아니건만, 준상과 크림슨 울프는 좌우로 갈라지며 괴물 곰의 돌격 범위로부터 벗어났다. 곰은 갑자기 목표가 두 방향으로 갈라지자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내 준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바로 그 때, 준상의 입에서 명령어가 튀어 나왔다. “오픈 도깨비불.” 순간 준상의 눈앞에 붉은 빛을 내뿜는 도깨비불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가라!” 연이어 괴물 곰을 가리키며 준상이 명령을 내리자 도깨비불은 괴물 곰의 머리를 향해 날아들었다. -쿠어엉! 괴물 곰은 갑자기 밝은 빛이 나타나 자신에게로 날아들자 깜짝 놀라며 뒤로 물러섰지만, 도깨비불은 준상의 명령에 따라 곧장 괴물 곰의 머리를 향해 날아가 자신의 몸을 부딪혔다. 팟! 물리적인 위력은 거의 없었지만, 도깨비불은 계속해서 살아있는 공처럼 괴물 곰의 머리에 자신의 몸을 부딪혔고 그때마다 괴물 곰은 자신의 피부와 털을 태우는 열기에 어쩔 줄을 몰라했다. 앞발을 휘저어 도깨비불을 쫓으려 했지만, 도깨비불은 요리조리 잘도 피하며 괴물 곰을 괴롭혔다. “허...” 좀 놀래키기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훨씬 선전하는 모습에 준상은 감탄했다. 준상으로서는 적당히 놀래서 도망치기를 바랬지만, 곰은 오히려 흉성을 폭발시키며 사납게 날뛰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주위를 돌며 기회를 엿보던 크림슨 울프가 곰에게 달려 들었다. 가뜩이나 도깨비불 때문에 화가 나있던 곰은 붉은 늑대가 눈앞에서 깔짝대자 짜증 부리듯이 앞발을 휘둘렀다. 하지만 늑대는 교묘하게 곰의 신경을 거스르며 치고 빠지기를 계속했다. 도깨비불과 크림슨 울프에 의해 곰의 시선이 완전히 자신에게서 벗어났음을 깨달은 준상은 그제서야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자세를 잡았다. “훅... 훅...” 호흡을 조절하며 자세를 잡자 온 몸의 모공이 올올이 일어서는 듯한 착각과 함께 정신이 또렷해진다. 기회를 엿보던 준상은 곰이 도깨비불을 향해 한쪽 발을 휘젖는 순간 그대로 화살처럼 회색 곰을 향해 쇄도했다. 곰은 뒤늦게서야 준상의 쇄도를 깨달았지만, 다시 앞발을 들기에는 늦었기 때문에 이빨을 드러내며 위협을 가했다. 하지만 그 정도 위협에 눌릴 정도라면 애초에 공격을 시도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압!” 기합 소리와 함께 준상의 주먹에서 2연격이 터져 나왔다. 빠르게 쏘아진 준상의 주먹은 곰의 눈 아래쪽에 연이어 적중했다. -크어엉! 곰은 적지 않은 충격에 당황하며 다시 앞발을 들었지만, 바로 그때 다시금 도깨비불이 곰의 시야를 스쳐 지나가자 모처럼 들어 올린 앞발은 다시금 헛되이 허공을 가르고 말았다. 곰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자, 뒤로 돌아간 크림슨 울프는 곰의 연약한 엉덩이 살을 물고 늘어지기 시작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곰은 도저히 안되겠다 싶었던지 몸을 번쩍 일으켜 세웠다. 위협을 겸해 도깨비불과 준상의 공격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행동이었으며, 또한 치명적인 앞발 공격을 위한 예비 동작이기도 했다. 곰은 몸을 일으키는 순가 도깨비불로부터 시야가 자유로워지자 눈앞에 서 있는 인간을 향해 체중을 담아 앞발을 휘둘렀다. “흡!” 준상은 순간 공기를 발기 발기 찢으며 날아드는 거대한 앞발을 보며 눈을 부릅 떴다. 저 앞발에 맞으면 준상의 머리뼈 정도는 단숨에 박살이 날 것이다. 아니, 머리뼈 이전에 충격을 견디지 못한 목뼈부터 부러질 것이 뻔하다. 설령 일격을 견디더라도 저 체구에 짓눌리면 죽는 것은 마찬가지. 호랑이나 사자와 같은 고양이 과의 생물과는 달리, 곰은 사냥감을 앞발로 눌러 놓고 산 채로 뜯어먹는다. 준상은 빠르게 몸을 웅크렸다. 그리고 곰의 앞발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순간 마치 스프링이 튕기듯 겨드랑이 아래쪽으로 빠져 나갔다. 곰은 체중을 실은 일격이 빗나감과 동시에 눈앞에서 준상의 모습이 사라지자 급히 고개를 돌려 준상을 찾으려 했지만, 다시금 날아든 도깨비불에 의해 시야가 가로 막히고 말았다. 그 틈을 노려 뒤로 돌아간 준상은 곰의 널찍한 등판이 모습을 드러내자 거의 반사적으로 뛰어 올라 곰의 목을 뒤에서 조르기 시작했다. 이른바 백초크가 작렬한 것이다! -끄어엉! 곰은 갑자기 단단한 팔이 자신의 목을 조르기 시작하자 아우성치며 등 뒤에 달라붙은 준성을 떼어내려 했지만, 이미 완벽하게 들어간 백초크를 풀어내기에는 곰의 앞발은 너무 짧았다. 게다가... 준상의 무기는 올가미처럼 탄탄하게 곰의 목을 조르고 있는 두 팔만이 아니었다. “미친개!” 준상의 입에서 그 명령어가 튀어 나옴과 동시에 카드 슬롯이 비워지고 새로운 카드들이 그 자리에 자리잡았다. 물어뜯기, 2연격, 광폭, 피칠갑, 피칠갑(R). 이 다섯 장의 카드가 순서대로 슬롯에 장착되자, 콤보카드 ‘하리아스의 미친개’가 발동했다. 보통의 작은 생물이라면 백초크를 걸어도 준상의 머리 위치가 상대보다 높기 때문에 별 의미가 없는 일이겠지만... 이 괴물 곰의 커다란 머리는 백초크 상태에서도 후두부가 준상의 머리와 거의 같은 높이를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고 있었다. -콰직! 준상의 이빨은 머리 뒤와 척수가 연결되는 부분을 정확히 파고 들었고, 이내 뭉텅이로 떨어져 나간 살점으로부터 붉은 피가 솟구쳐 준상의 얼굴을 적셨다. -크아아앙! 괴물 곰은 목덜미의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끔찍한 고통에 광분하며 다시 몸을 일으켰지만, 그 행동은 오히려 준상의 팔이 더욱더 확실하게 몸을 조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고 말았다. 게다가, 입 안에 가득한 살점을 내뱉은 준상은 다시금 곰의 목을 물어 뜯었다. 으적! 이번에는 이빨이 곰의 목뼈에 닿는 느낌이 전해져 왔다. 곰은 이제 반쯤 정신이 나가 앞발을 허우적거렸지만, 자신의 몸 움직임조차 조절하지 못한 채 그저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리고 이어진 세 번째 물어뜯기에 마침내 곰의 목뼈가 기괴한 소리를 내며 어긋나자 곰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앞으로 쓰러졌다. 준상은 곰이 앞으로 쓰러지자 이빨을 벌려 후두부의 연골을 물어 뜯었고, 후두부의 근육이 완전히 잘려나가자 곰의 머리는 자신의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앞으로 쏠리며 스스로 뇌로 향하는 혈관의 폐쇄를 도왔다. 이미 곰은 거의 반실신 상태였지만, 준상은 눈앞에 완전히 드러난 곰의 속살을 다시 한번 물어뜯었다. 으적! 그것이 치명타였다. 머리와 목을 연결하던 뼈가 어긋나며 끊어지자 그 안에 들어있던 척수도 함께 끊겨 나간 것이다. “...” 곰의 움직임은 이제 완전히 멈추었지만, 만약을 대비해서 계속 목을 조르던 준상은 어느 순간 자신의 몸을 하얀 빛이 휘감으며 피로가 가시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바로 레벨 업. 이 거대한 괴물 곰을 죽인 경험치를 통해 11레벨로 올라섰음을 의미하는 신호였다. ============================ 작품 후기 ============================ 실제로 2013년에 보스니아에서 그르코비치라는 사람이 저런 식으로 곰의 목을 졸라 죽인 예가 있습니다. 믿거나 말거나죠. 00018 트롤러 ========================================================================= 자신의 몸에서 레벨 업 현상을 확인하자 준상은 그제서야 괴물 곰의 목으로부터 몸을 일으켰다. “...” 레벨 업 현상으로 피로는 가신 상태였지만, 차갑게 식어가는 괴물 곰의 거대한 시체를 보고서야 준상은 자신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일을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어쩐지 포효를 지르고 싶었지만, 준상은 그냥 두 주먹을 꽉 쥐고 하늘을 우러르며 몸을 부르르 떠는 것으로 승리의 쾌감을 표현했다. 잠시 눈을 감고 몸속으로 휘몰아치는 쾌감을 즐기던 준상은 그 여운이 가신 뒤에야 휴대폰을 열어 레벨 업 메시지를 확인하고 보상인 랜덤카드를 뽑았다. 카드정보 명칭 : 숄더차지 레벨 : 1Lv 경험치 : 0 등급 : Common+ 분류 : 스킬 성장 : 일반(소) 속성 : 없음 효과 : 적을 어깨로 강하게 들이받아 현재 공격력의 150% 데미지를 가한다. (쿨타임: 4초) Cost : 10 Seed : 2슬롯 “괜찮군.” 공격 스킬이 물어뜯기와 2연격 뿐이었는데 마침 쓸만한 기술이 추가된 셈이다. 미친개처럼 모든 슬롯이 꽉 차버리는 경우에는 사용하기 어렵겠지만, 광전사와 같이 슬롯이 하나 비는 경우라면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다. 물론 사용할 때마다 카드 슬롯의 내용을 바꿔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기는 하지만 그 정도는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다. 보상의 수령이 끝나자 준상은 괴물 곰의 사체를 어떻게 처리해야할지 고민했다. 왠지 그냥 이대로 버리고 가기엔 아깝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들어가려나.” 혹시나 해서 인벤토리에 집어넣어 보았다. 그러자 이게 웬걸. 쑥 하고 들어가 버리는 것이 아닌가! “오!” 이 정도 크기의 녀석이 단숨에 들어갈 정도라면... 차나 오토바이 같은 탈 것을 인벤토리에 집어넣고 다녀도 된다는 뜻이다. 고작 열칸 밖에 안 되기에 너무 적다고 생각했던 그의 불평을 일소하는 발견이 아닐 수 없다. 왜 진작 이걸 시험해 보지 않았을까. 준상은 자신의 어리석음에 혀를 찼지만, 지금에서라도 알게 되었으니 다행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괴물 곰의 시체를 인벤토리에 집어넣은 준상은 일단 너무 눈에 띄는 도깨비불을 역소환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퀘스트의 내용을 확인했다. “음...” 사실 좀비의 섬멸은 이 퀘스트의 진짜 목표가 아니다. 진짜 목표는 어둠의 근원이라는 정체불명의 무언가를 제거하여 좀비가 발생하게 만든 원인 그 자체를 제거하는 것이다. 하지만 준상으로서는 어둠의 근원이 무엇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대충 형태라도 알면 찾아보겠지만... 어둠의 근원이라는 말 외에는 아는 것이 없으니, 지금으로서는 숲을 돌아다니며 좀비를 사냥하면서 단서를 찾을 수밖에 없다. “...” 잠시 휴대폰에 나타난 퀘스트 내용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던 준상은 크림슨 울프에게 다시금 좀비를 찾아보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크림슨 울프는 붉은 털을 휘날리며 다시 앞장 서서 달리기 시작한다. 붉은 늑대의 뒤를 따라 달리던 준상은 얼마 지나지 않아 좀비가 무언가와 싸우는 모습을 발견했다. 작은 빛 가루 같은 걸 흩뿌리며 조그마한 날파리 같은 것이 좀비에게 무언가를 쏘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그것과 상대하는 좀비는 귀찮다는 듯이 느리게 손을 내저을 뿐, 제대로 싸우려 들지 않고 있었다. “...” 잠시 저게 뭔가 싶어 바라보는데... 뭔가 어린 여자 아이 목소리 같은 것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얍! 얍! 야, 이 나쁜 놈아! 빨리 가버려!” “...” 설마 아까 싸울 때 뒤집어 쓴 괴물 곰의 피에 방사능이라도 섞여 있었던 것일까. 잠시 얼굴을 찌푸리던 준상은 일단 좀비부터 때려잡기로 했다. “광전사.” 조용히 준상의 입이 움직이자, 슬롯에 꽂혀 있던 카드들이 빠져 나가고 그 자리에 새로운 카드들이 자리 잡았다. 광폭, 피칠갑, 피칠갑, 피칠갑(R). 그리고 마침내 콤보 카드 ‘얀트훈센의 광전사’가 발동됨과 동시에 준상은 다시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오픈 숄더차지.” 그러자 나머지 슬롯 하나를 채우고 있던 2연격 카드가 빠지고 그 자리에 숄더차지 카드가 꼽혔다. 이로써 모든 준비가 완료되자 준상은 옆구리에 두 팔을 붙인 채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날파리 같은 것을 쫒기 위해 흐느적거리며 손을 움직이던 좀비는 느닷없이 수풀 속에서 뛰쳐나온 준상의 모습을 미처 알아차리지도 못한 채 기습을 당해야만 했다. 준상은 달려다가던 속도 그대로 숄더차지를 발동했다. 그러자 몸 주위에 알 수 없는 기막 같은 것이 형성되며 마치 포탄처럼 좀비를 향해 날아들었다. 뻐억! 준상은 자신의 어깨에 좀비의 몸체가 부딪히는 순간 이 되살아난 시체의 가슴이 그대로 함몰되었음을 느꼈고, 숄더 차지에 직격당한 좀비는 그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뒤로 날아가더니 그대로 구겨지듯 처박혀 버렸다. 그 강렬한 파괴력에 준상은 스스로도 놀랐지만, 곧바로 바닥을 뒹굴고 있는 좀비에게로 다가가 그 머리를 군화발로 밟아 으깨 버렸다. “후...” 생각보다 괜찮은 스킬을 얻었다고 생각하며 좀비의 으깨진 머리 속을 뒤적이는데, 문득 뒤통수가 모기에 물린 것처럼 따끔한 감각이 전해져 온다. 습관적으로 비어 있는 손을 들어 뒤통수를 찰싹 때리자, 기겁하는 비명 소리가 들려온다. “꺄악!” “...” 준상은 그제서야 고개를 돌려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바라 보았다. 그곳에는 아까 좀비를 귀찮게 하던 날파리 같은 것이 앵앵거리며 날아다니고 있었다. 아니, 날파리는 날파리인데 뭔가 좀 특이하다. 곤충의 몸이 있어야 할 자리에 붉은 머리 카락을 가진 여자 아이가 매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보자 준상은 한 가지 단어를 연상했다. “요정?” 그러자 여자 아이는 말했다. “훗! 이 몸으로 말하실 것 같으면!” 하지만 준상은 아이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손을 들어 그 날개를 낚아챘다. “아앗! 무슨 짓이에요, 이 불한당!” 그러자 여자 아이는 몸을 버둥거리며 빛가루 같은 것을 쏘아 댔다. 맞으니까 벌레에 쏘인 것처럼 따끔거리더니 이내 팅팅 부어오르기 시작한다. “...” 잘은 모르겠지만 눈에 맞으면 상당히 괴로워질 것 같다는 생각에 준상은 일단 날개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아 주었다. 그러자 요정은 바닥에 주저 앉아 울기 시작했다. “흑흑... 아직 시집도 못 갔는데 날개를 잡혀 버렸어... 어떡해... 으앙...” “...” “영웅 요정의 후손인 내가 이런 불한당에게 날개를 잡히다니... 엉엉엉...” “...” 영웅 요정이 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준상은 일단 하던 일을 마저 하기로 했다. 좀비의 머리 속을 뒤적거리는 그 모습을 본 요정은 이내 입을 다물었지만, 아쉽게도 이 좀비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흠...” 준상이 몸을 일으키자 요정은 미심쩍어 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당신... 누구에요?” “그러는 너는 누구지?” 준상이 되묻자 요정은 그 조막만한 가슴을 앞으로 쭉 내밀며 대답했다. “훗! 이 몸으로 말하실 것 같으면!” “...” “영웅 요정의 후손인 위대한 요정족의 용사 이니아님이에요!” 준상은 왠지 계속 얘기해봐야 귀찮아질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말없이 몸을 돌렸다. 하지만 이니아는 준상을 그냥 놔줄 생각이 없었다. “아앗! 잠깐!” “...” “그냥 가버리면 어떡해요! 내 말 듣고 가야지!” “...” “자, 잠깐! 무시하지 말라니까요!” 하지만 막상 준상이 자신에게로 고개를 돌리자 그 눈빛에 위축되었는지 이니아는 흠칫 놀랐고, 그 틈을 타서 준상은 다시 이니아의 날개를 붙잡았다. “아앗! 또 날개 잡았어!” “조용히 안하면 날개를 뽑아 버릴 수도 있다.” “흡!” 그 말에 이니아는 파랗게 질리며 자신의 입을 두 손으로 막았다. 준상은 무심하게 이니아를 바라보다가 날개를 놔주고 크림슨 울프에게 새로운 목표를 찾도록 지시를 내리려고 했다. “자, 잠깐만...” 이니아는 겁먹은 듯한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혹시 저 괴물들 없애려고 온 거에요?” “그렇다면?” “그, 그럼 저를 좀 도와주세요.” “...” 그러자 휴대폰에서 메시지 알림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설마 아니겠지... 하는 심정으로 준상은 휴대폰을 열었지만, 그의 예상은 어김없이 들어맞았다. (서브) 이니아의 부탁을 들어주세요. :이니아는 이 숲에 살던 요정이지만, 갑자기 나타난 암흑의 근원 때문에 난처해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고 특별한 보상을 획득하세요. “...” 준상은 잠시 퀘스트 내용을 바라보다가 이니아를 바라 보았다. 그러자 이니아는 방긋 방긋 웃으며 예쁜 척을 하기 시작한다. 준상은 그 앙큼 떠는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부탁이 뭐지?” “음, 그게요...” 이니아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렇게 말했다. “실은... 제가 저 괴물들한테 쫓기느라 마법 지팡이를 떨궜거든요. 그걸 좀 찾아주세요.” “지팡이?” “네. 이만한 크기인데요. 가운데 붉은 색 보석이 박혀 있는 예쁜 지팡이에요.” “어디서 잃어 버렸는지는 알고?” “그, 그게... 헤헤...” 뭔가 귀찮아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옆에서 명령을 기다리는 크림슨 울프를 보자 생각이 바뀌었다. 준상은 손을 뻗어 이니아의 날개를 다시 잡아챘다. “꺄악! 또, 또 날개를 잡다니!” “시끄럽게 굴면 어떻게 한다고 했지?” “...” 이니아는 얼른 자신의 입을 두 손으로 막았다. 준상은 이니아를 크림슨 울프의 코 언저리에 가져가며 명령했다. “이 냄새를 찾아라.” “히이익!” 이니아는 크림슨 울프가 자신에게 코를 들이대며 냄새를 맡자 눈을 질끈 감으며 몸을 떨었다. 하지만, 붉은 털의 늑대는 이내 준상이 명령한 대로 그녀의 냄새를 쫓아 어딘가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준상은 이니아를 어깨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꽉 잡아.” “네?” 이니아는 당황한 표정이 되었지만, 이내 준상이 크림슨 울프의 뒤를 따라 바람처럼 달리기 시작하자 필사적으로 그의 옷깃에 매달려야만 했다. “으와와와앗!” “조용히.” “헙!” 크림슨 울프는 준상의 명령을 충실하게 수행했다. 덕분에 준상은 얼마 지나지 않아 풀 숲에 떨어져 있는 이니아의 마법 지팡이를 찾아낼 수 있었다. 모르긴 해도 크림슨 울프가 없었다면 찾느라 고생 좀 했을 것이다. “와아! 마법 지팡이다!” “...” 이니아는 팔짝 팔짝 뛰며 기뻐했고, 그녀의 손에 마법 지팡이가 쥐어지자 다시 휴대폰에 메시지가 도착했다. (서브) 이니아의 부탁을 들어주세요. :이니아는 이 숲에 살던 요정이지만, 갑자기 나타난 암흑의 근원 때문에 난처해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고 특별한 보상을 획득하세요. -> 완료! 보상: 이니아의 특별한 선물. 이 보상은 이니아에게 직접 받으십시오. 준상은 휴대폰을 닫은 후 이니아에게 말했다. “이제 됐나?” “네! 정말로 감사합니다!” 이니아는 준상에게 꾸벅 인사를 하더니 뽀르르 날아와 그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 갑작스런 이니아의 행동에 준상은 살짝 당황했지만, 다시금 휴대폰으로 메시지가 들어오자 우선 그것부터 확인했다. ‘요정의 키스’가 각인되었습니다. :요정의 호의가 담긴 키스가 당신에게 행운을 부여합니다. 이것은 일종의 각인이므로 절대 지워지지 않습니다. ‘요정의 키스’는 다른 요정 들에게 당신이 요정의 친구임을 어필합니다. “...” 이게 그 특별한 선물이라는 건가. 준상은 이니아의 입술이 닿았던 이마를 쓰다듬으며 다시 물었다. “암흑의 근원이 어디 있는지 아나?” “네! 물론이죠! 제가 도와 드릴게요!” “...” 이니아는 그렇게 말하고는 얼른 준상의 어깨로 날아와 옷깃을 단단히 붙잡으며 말했다. “저쪽! 저쪽이에요!” “...” “저는 준비됐어요! 자, 달려요!” “...” 00019 트롤러 ========================================================================= 준상은 고개를 돌려 이니아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자 이니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 안 달려요?” “...” 이니아는 아무래도 안되겠다 싶었던지 눈을 깜박거리며 다시 이쁜 척을 하기 시작한다. 저러는 건 도대체 어디서 배운 걸까. 준상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피식 웃으며 이니아에게 말했다. “저쪽이라고?” “네!” “꽉 잡아라.” “네엣!” 이니아는 허락이 떨어지자 마치 적진에 돌격하기 직전의 기사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준상의 옷깃을 꽉 잡았다. 준상은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다시 입술이 꿈틀거렸지만 억지로 웃음을 눌러 참은 뒤 이니아가 가리킨 방향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우! 오오오...” “...” 이니아는 소리를 지르려다가 날개를 뽑아버린다는 준상의 말을 뒤늦게 되새기며 목소리가 쪼그라들었다. 그렇게 달리는데 문득 길 잃은 좀비 한 마리가 어기적거리며 걸어 다니는 모습이 눈에 띈다. 준상은 달리던 속도 그대로 숄더 차지를 발동했다. 한쪽 팔을 감싸 안고 어깨를 내밀며 숄더 차지를 발동하자, 내달리던 준상의 몸이 마치 번지듯이 앞으로 쭉 뻗어 나가며 좀비에게 직격한다. 뻐걱! 좀비는 숄더 차지가 직격하는 순간 어딘가가 부러지는 기묘한 소리와 함께 바닥을 나뒹굴었고, 속도를 잃지 않고 그대로 뒤따라간 준상의 사커킥에 목이 부러지며 움직임이 멈추었다. “...” 준상은 습관처럼 좀비의 머리를 부수고 그 안을 확인했다. 숄더 차지의 급가속과 이어지는 격렬한 움직임에 잠시 넋이 나가 있던 이니아는 헤롱거리다가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준상에게 물었다. “으... 뭐하는 거에요?” “...” 하지만 준상은 말없이 좀비의 머리를 뒤적이다가 이번에도 허탕이라는 것을 깨닫자 대충 마른 풀에 손을 닦고는 일어섰다. “치...” 이니아는 자신의 말이 무시를 당하자 툴툴거리며 불만을 표시했지만, “꽉 잡아라.” “넷!” 다시 들려온 준상의 말에 얼른 옷깃에 달라붙었다. 준상은 이니아가 자세를 잡자 다시금 질주하기 시작했다. 다리를 뻗을 때 마다 쭉쭉 뒤로 밀려나는 주위의 풍경과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을 느끼며 달리기를 얼마나 했을까. 마침내 이니아가 말한 암흑의 근원이 무엇인지 준상 역시 알아볼 수 있었다. “흠...” 그곳은 작은 호수였다. 사람 키 만한 작은 폭포 아래 자리 잡은, 한 이십평 남짓 될까 싶은 호수 안에 서 있는 그 모습은 튜토리얼 마지막에 보았던 던전의 주인과 매우 흡사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가슴에 무언가 불길한 빛을 띄는 검은 보석 같은 것이 박혀 있으며, 던전의 주인과는 달리 십여 개체에 이르는 좀비들을 데리고 있다는 것 정도다. 암흑의 근원이라는 것은, 아마도 저 가슴에 박힌 검은 보석을 말하는 것이리라. “음...” 이래서 여러 명의 플레이어가 필요했던 것일까. 일대일이라면 모를까 저 정도의 수가 한꺼번에 덤비면 준상으로서도 위험할 수 밖에 없는 일이다. 잠시 적의 상황을 살피던 준상은 조용히 이니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 “...” 준상과 눈이 마주친 이니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조금 지난 뒤에야 불길한 예감이 들었는지 어색하게 웃기 시작했다. “저, 저기...” “...” “설마... 그건 아니겠죠?” “...” 가타부타 대답이 없는 준상의 모습에 이니아는 식은땀을 주륵 흘렸다. “하... 하하... 서, 설마 이렇게 귀엽고 깜찍한 요정한테...” 하지만 준상은 말없이 그녀의 날개를 낚아챘다. “아앗! 자, 잠깐...” 이니아는 발버둥을 쳤지만, 이내 준상의 투박한 손에 의해 크림슨 울프의 머리 위에 앉혀졌다. 준상은 곧이어 주머니에서 미리 준비해 두었던 신발 끈 하나를 꺼내어 이니아의 몸을 묶고 그것을 크림슨 울프의 머리에 고정시켰다. “이, 이거... 농담이죠? 그렇죠?” 이니아는 이제 울먹이며 그렇게 말했지만, 준상은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적당히 가서 헤집어 놔.” “하, 하지만...” “이건 굉장히 중요한 임무다.” “그게...” 이니아는 울상이 되어 다시 뭐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준상은 곧바로 크림슨 울프에게 명령을 내렸다. “가라!” 명령이 떨어지자 크림슨 울프는 망설임 없이 그대로 작은 호수를 향해 뛰쳐 나갔다. “꺄아아아악! 시, 싫어! 살려 줘!” 그리고 이어지는 이니아의 비명. 커다란 늑대와 그로부터 터져 나온 이니아의 비명은 좀비들의 시선을 끌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하지만 이런 와중에도 암흑의 근원을 가슴에 박은 놈은 우두커니 서서 반응하지 않고 있었다. 좀비들은 팔다리를 휘적거리며 크림슨 울프에게 달려들었고, 십여 마리에 이르는 좀비들이 끔찍한 몰골로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모습에 이니아는 그야말로 경기를 일으키듯 비명을 질러댔다. “...” 좀비 한 마리한테 열심히 시비를 걸기에 제법 용기가 있나 싶었는데... 그렇지도 않았던 모양이다. 준상이 가만히 지켜보는 가운데 크림슨 울프는 이러저리 내달리며 좀비들을 물고 할퀴다가 이내 이니아에 의해 지시를 받았는지 한쪽 방향을 향해 슬금 슬금 뒷걸음치더니 그대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좀비들이 어느 정도 호수로부터 멀어지자 그제서야 준상은 우두커니 서 있는 보스를 노리고 뛰쳐 나갔다. 그가 뛰쳐나가자 보스는 비로소 몸을 돌리며 포효했다. -크아아아앙! 준상은 가까이 다가서자 이 녀석이 던전의 주인과 많이 닮아 있음을 다시 한번 느꼈다. 보스는 준상을 향해 달려들며 주먹을 휘두르려 했지만, 그 팔이 예비 동작을 위해 뒤로 젖혀지는 순간 준상은 숄더 차지를 발동했다. 그러자 어깨를 앞으로 내민 준상의 급가속하며 앞으로 쭉 뻗어나가 보스의 젖혀진 몸에 직격했다. 보스는 예비 동작을 위해 팔을 뒤로 젖히고 있다가 준상의 숄더 차지에 옆구리를 가격 당했다. 퍼억! 격돌의 순간 준상은 단단하기 이를 데 없는 그 피부의 질감을 어깨로 느꼈다. 그리고 그 충격에 보스가 뒤로 튕겨나가는 순간 준상의 입이 다시 열렸다. “오픈 2연격.” 명령이 떨어지자 쿨타임 재장전에 들어간 숄더 차지가 슬롯에서 빠져 나가고 2연격 카드가 그 자리에 자리 잡는다. 준상은 새로운 공격 스킬을 장전함과 동시에 두 팔을 옆구리에 붙인 채 숄더 차지의 충격으로 비틀거리는 보스를 따라 붙었다. 보스는 손가락을 펼친 채로 팔을 휘둘러 그런 준상의 머리를 할퀴려고 들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보스는 시야에서 준상을 놓치고 말았다. 팔이 휘둘러지는 순간 준상이 무릎을 굽히며 더킹을 시도했고, 그렇게 중심이 갑자기 낮아지자 보스는 자신이 휘두른 팔에 시야가 막혀 준상의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그야말로 눈 뜬 장님이 되어버린 보스를 준상이 가만 놔둘 이유가 없었다. 앞으로 달려들던 가속력을 그대로 펀치에 실어 다시 한번 드러난 옆구리에 2연격을 작렬시킨 것이다. 뻐거걱! 같은 장소에 연거푸 펀치가 격돌하자 보스는 일순 몸이 옆으로 꺾이며 중심을 잃었다. 상체가 한쪽으로 크게 기울자, 반대편 옆구리가 준상의 시야에 크게 노출되었다. 준상은 돌진의 여력을 살려 크게 몸을 휘돌렸다. 마치 뫼비우스의 띠를 연상시키는 그 회전이 일어나는 순간, 축이 되는 허리와 무릎에 강렬한 부담이 가해지며 손상이 일어났다. “큭!” 하지만 이내 준상의 몸에서는 재생력이 발동하며 그 손상을 스스로 치료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만들어진 회전력은 그대로 준상의 펀치에 담겨져 다시 한 번 보스의 몸에 작렬했다. 뿌각! 보스는 연이은 타격을 견디지 못하고 휘청거리며 물러섰다. 때문에 다시 거리가 벌어졌지만 준상은 한번 잡은 승기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게다가... 준상은 보았다. 이 괴물의 눈에 두려움이 서려 있는 것을. 보스는 공포 유발의 효과가 발생해 반격 불가 상태에 빠진 것이다. “오픈 숄더차지.” 그의 입에서 명령이 떨어지자, 2연격이 빠지고 다시 한번 숄더 차지가 슬롯에 장착되었다. 본래 4초의 쿨타임을 가지는 숄더 차지지만, 콤보 카드와 시드의 스킬 쿨타임 감소 효과에 의해 현재는 1.88초의 쿨타임을 가지게 된 상태. 준상은 쿨타임이 끝난 숄더 차지를 다시 한 번 발동했다. -쿠아악! 포탄처럼 쏘아져 나간 숄더 차지에 가슴을 직격당한 보스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뒹굴었고, 그 위로 기세가 전혀 줄어들지 않은 준상의 몸이 떨어져 내렸다. 준상은 무릎으로 놈의 가슴에 박힌 보석 부분을 그대로 찍어 버렸다. -꺄아아아악! 그러자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마치 한 맺힌 여인이 비명을 지르는 듯한 끔찍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준상은 갑작스런 그 비명에 깜짝 놀랐지만 공격의 고삐를 늦출 생각이 없었다. 그대로 놈의 몸 위에 올라탄 채 말했다. “오픈 2연격.” 스킬 쿨타임 감소 효과로 1.41초의 쿨타임을 가지게 된 2연격이 놈의 머리에 내리 꽂힌다. 보스는 이제 연속된 타격으로 중첩된 공포 유발로 인해 준상에 대한 반격의 의지를 완전히 꺾여 버리고 말았다. 그야 말로 살아있는 샌드백이나 다름없는 꼴이 되어 버린 것이다! 퍽! 퍼퍽! 무자비하게 내리쳐지는 준상의 연이은 펀치의 타격력은 단단하기 그지없는 놈의 머리뼈에 균열을 일으켰고, 그 안에 자리 잡은 부드러운 뇌를 곤죽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마침내 더 이상 그 충격을 감당할 수 없게 되자, 놈의 머리뼈는 마치 폭죽이 터지듯이 산산히 부서지고 말았다. “후우...” 준상은 완전히 움직임이 멈춘 보스의 가슴에 박혀 있는 암흑의 근원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사이한 검은 연기 같은 것이 준상의 팔을 휘감기 시작한다. 그것은 쓰러진 보스를 대신할 새로운 숙주를 향한 검은 유혹이었다. “...” 준상은 그 꺼림직하면서도 기묘한 유혹에 잠시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주먹을 말아쥔 준상은 보스의 가슴에 박힌 암흑의 근원을 향해 주먹을 내리쳤다. -꺄아아아악! 그러자 다시금 끔찍한 비명 소리가 암흑의 근원으로부터 터져 나온다. 준상은 소름끼치는 그 소리를 무시하고 계속해서 암흑의 근원을 두들겼고, 마침내 충격을 견뎌 내지 못한 암흑의 근원은 산산히 부서지고 말았다. -쩌엉! 마치 빙하가 깨져 나가는 듯한 커다란 울림과 함께 검은 안개 같은 것이 부서진 암흑의 근원으로부터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그리고 그 검은 안개가 완전히 준상의 시야에서 사라지자... 어둡기만 하던 숲의 하늘에 서서히 눈부신 빛이 새어들어오기 시작했다. 준상은 묵묵히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박살이 난 보스의 머리를 뒤져 시드 하나를 찾아냈다. 그리고 휴대폰을 꺼내 그 확인해 보려는데... 저만치서 들리는 이니아의 비명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으아아앙! 잘못했어요! 그러니까 이제 그만 쫓아오라고, 이 나쁜 놈들아!” “...” 하지만 본래 그것을 탄생하게 만들었던 암흑의 근원이 사라지고, 하늘로부터 눈부신 빛이 쏟아지기 시작하자 좀비들은 마치 봄눈 녹듯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어? 어어?” 이니아는 자신을 쫓던 좀비들이 녹아 사라지는 것을 보고서야 입을 다물었고, 적이 사라지자 크림슨 울프는 곧장 준상에게로 돌아왔다. “이, 이긴 거에요?” “덕분에.”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닦을 생각도 않고 얼빠진 표정으로 묻는 이니아에게 준상은 무뚝뚝하게 대답한 후, 이니아의 몸을 묶고 있던 신발끈을 풀어주었다. “돌아가라.” 그리고 크림슨 울프를 역소환하자, 그제서야 휴대폰으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했다. 숲을 정화하십시오. :어둠의 힘에 의해 숲이 오염되었습니다. 아름다웠던 숲은 이제 되살아난 시체들이 가득한 지옥이 되었습니다. 어둠의 근원을 제거하여 이전의 모습으로 되돌리십시오. [이 퀘스트는 여러 명의 인원이 동시에 참여합니다.] -완료! - 당신이 이번 퀘스트에서 보여준 행동과 성과를 정산합니다. 이 과정은 약간의 시간이 소요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준상은 잠시 기다리면서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엉망이 된 이니아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이니아는 흠칫 놀라면서도 감히 준상의 손길을 피하지 못했다. 그렇게 얼굴을 다 닦아줄 즈음이 되자 새로운 메시지가 나타났다. 축하합니다! : 당신의 랭크는 S입니다. -당신은 이번 퀘스트를 수행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해냈습니다. 기본 보상 외에 추가 보상이 지급됩니다. 보상 : 경험치 조금, 특수기능 ‘파티’, 추가 보상 상자(S랭크) -> 보상을 지금 수령하시겠습니까? (Y/n) _ (주의) 수령하지 않은 보상은 7일후 자동 소거됩니다. 보상을 수령하자 다시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했다. 퀘스트가 완료되었습니다. :당신은 할당된 퀘스트를 모두 완료했습니다. 이제 본래 당신이 있어야 할 장소로 돌아가야 할 시간입니다. 당신의 앞길에 행운이 함께 하기를 빕니다. (남은 시간 : 10초) 남은 시간이 카운트되기 시작하자, 준상은 이니아에게 말했다. “그럼 잘 지내라.” “네?” “까불다 다치지 말고.” “무슨...” 이니아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카운트가 모두 끝나고 준상의 모습이 빛에 감싸여 사라지자 그제서야 그 말이 작별인사라는 것을 깨닫고 멍한 표정으로 준상이 서 있던 자리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00020 트롤러 ========================================================================= 준상은 눈앞에서 이니아의 모습이 사라지고 자신의 집 현관으로 돌아왔음을 깨닫자 그대로 털썩 주저앉았다가 아예 드러누워 버렸다. “후...” 어쨌든 이번에도 살아남은 건가. 눈을 감으니 자신의 눈앞에서 숨을 거둔 이름 모를 여인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준상은 눈을 떴다. 그리고 일단 진흙과 좀비의 체액으로 지저분해진 군화를 벗었고, 장갑 역시 벗은 다음 일단 종이 상자를 가져와 그 안에 집어넣었다. 잠시 상자에 담긴 장갑과 군화를 바라보던 준상은 이내 입고 있던 옷을 마저 벗어서 그 안에 넣은 후 인벤토리에 수납한 뒤 목욕을 시작했다. 우울한 기분을 흘려버리려는 듯 제법 길게 샤워를 한 준상은 옷을 챙겨 입고는 옷장 안의 옷과 속옷, 양말 같은 것을 정리해서 박스에 꽉꽉 쟁여 넣었다. 그리고 아까 인벤토리에 넣었던 상자를 꺼내 새로 정리한 옷상자를 대신 넣은 후 세탁기에 입었던 옷을 넣고 세탁을 하면서 장갑과 군화를 손질했다. 그리고 그 모든 작업을 끝내고 나서야 보상을 확인했다. “파티...”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특수기능 ‘파티’였다. 축하합니다! 퀘스트 보상으로 특수카드 ‘파티’를 획득했습니다. :특수카드를 획득하면 봉인된 특수기능을 해제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특수기능 ‘파티’가 개방됩니다. -마음 맞는 동료가 있으면 파티를 맺어 보십시오. 파티를 맺게 되면 퀘스트 발동시 같은 파티원끼리 참여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 준상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사용하기에 따라서는 매우 유용한 기능이 될 수도 있겠지만... 지금으로서는 딱히 파티를 맺고 싶은 인물이 없었다. 그가 지금까지 마주친 플레이어는 고작 네 명. 얼음 마법을 사용하는 성진이라는 남자 아이와, 검도를 익힌 수연이라는 여자 아이는 서로 파티를 맺을 것이 분명하다. 원거리 스킬과 근거리 스킬의 조합이라면 상성도 맞는 편이고, 비슷한 또래에다 친분마저 있는 사이이니 별다른 거부감도 없을 터. 하지만 준상으로서는 파티를 맺는다 해도 솔직히 이렇다 할 메리트를 생각하기 힘들다. 다른 두 명 중 하나는 만나자 마자 사망으로 리타이어했고, 양말로 급조한 블랙잭을 사용하던 여성은 바로 물러났기 때문에 이름은커녕 얼굴조차 제대로 보지 못했다. “...” 준상은 일단 파티에 대한 생각은 옆으로 치워버리고 추가 보상 상자를 열어보았다. 축하합니다! 추가 보상 상자(S랭크)에서 아이템 카드 ‘강력한 곰의 영혼’을 획득했습니다. :아이템 카드는 기타 슬롯에 장착하여 그 능력을 사용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아이템 카드를 카드 슬롯에 장착하시겠습니까? (Y/n) _ [카드 상세 정보 확인은 이곳을 누르십시오.] “...” 아마도 이번 퀘스트에서 쓰러뜨린 괴물 곰과 관련이 있는 아이템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떠올리며 준상은 카드 상세 정보를 열어 보았다. 카드정보 명칭 : 강력한 곰의 영혼 레벨 : 1Lv 경험치 : 0 등급 : Uncommon+ 분류 : 아이템 성장 : 일반(중) 속성 : 없음 효과 : 장착시 강력한 곰의 영혼이 사용자에게 빙의하여 방어도와 인내력이 상승합니다. Cost : 20 Seed : 3슬롯 “오...” 꽉 다물어져 있던 준상의 입도 이번 만큼은 탄성을 터뜨릴 수 밖에 없었다. 구체적인 수치는 나와 있지 않지만, 방어구를 입을 수 없는 준성에게는 그 수치가 얼마가 되었든 간에 정말 가뭄에 단비 같은 효과가 아닐 수 없다. 얼른 슬롯에 장착하자 어쩐지 몸이 좀 더 탄탄해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좋군.” 한 자리를 빼고 꽉꽉 채워진 카드 슬롯을 바라보던 준상은, 문득 2연격 카드가 깜빡거리며 빛나는 것을 발견했다. 뭔가 싶어 카드를 열어보자, 카드의 레벨이 올라갔다는 내용의 팝업 창이 나타난다. “...” 이번에 2연격을 제법 많이 썼다는 생각을 떠올리며 준상은 카드의 레벨이 올라가면서 변동된 내용을 확인했다. 축하합니다! 스킬카드 ‘2연격’의 레벨이 올라갔습니다. :카드의 레벨이 올라가면 여러 가지 효과가 추가됩니다. -‘2연격’ 발동시 쿨타임이 1퍼센트 감소합니다. -‘2연격’ 발동시 추가 공격력이 2퍼센트 증가합니다. “...” 1퍼센트라니. 메시지에 비하면 별 것 아닌 내용이었지만, 이로써 2연격의 스킬 쿨타임은 1.41초에서 1.38초로 줄어든 셈이다. 게다가 본래 빠르게 2연타를 날린다는 것을 빼면 아무런 부가 효과가 없던 2연격에 얼마 안되지만 추가 데미지가 생겨난 것도 괄목할 만한 일이었다. 증가폭이 균등하다고 가정할 경우, 10레벨로만 올려도 쿨타임 10퍼센트 감소에 추가 데미지 20퍼센트 증가인데,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봐도 이것은 절대로 무시할 만한 수치가 아니었다. “흠...” 준상은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이 정체 불명의 게임은 다른 일반적인 RPG나 온라인 게임과는 달리 클래스의 개념이 없었다. 준상의 레벨은 현재 11. 처음에는 클래스가 없더라도 보통 이쯤 되면 1차 전직 같은 것이 나타날 법도 한데... 이 게임에는 그런 전직이나 클래스 같은 개념이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물론 아직 레벨이 부족해서일수도 있겠지만... 준상은 뭔가 다를 수도 있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이를테면, 콤보 카드가 클래스의 역할을 대신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다면... 현재 준상이 얻은 두 가지 콤보 카드의 장단점은 이렇다. 먼저 광전사의 경우... 이 콤보 카드는 광폭, 피칠갑, 피칠갑, 피칠갑의 카드 네 장으로 구성된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카드를 중복해서 장착하게 되면 실제로는 중복된 카드 가운데 가장 높은 등급의 카드만 적용된다는 문제가 있다. 즉, 실제로 레벨을 올려서 그 효과를 적용받을 수 있는 것은 광폭과 가장 등급이 높은 피칠갑 카드 한 장뿐인 셈이다. 이것은 다시 말하자면, 초반에는 쉽게 콤보 카드를 완성해 사용할 수 있더라도, 나중에는 레벨업 효과를 적용받을 수 있는 카드가 두 장 뿐이므로 성장폭이 둔화되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흠...” 미친 개 역시 마찬가지다. 물어뜯기라는 스킬의 엽기성은 일단 논외로 치더라도, 피칠갑 카드가 중복되기 때문이 이 콤보카드 역시 카드의 레벨업 효과가 적용되는 것은 네 장으로 한정되며, 이것은 광전사 카드보다 두 배의 성장률을 가진다는 뜻도 된다. “뭔가 복잡하군.” 준상은 입맛을 다시며 일단 카드 슬롯을 닫은 후 이번에는 보스에게서 얻은 시드를 확인했다. 아이템정보 명칭 : 스턴 시드 레벨제한 : 10 종류 : 시드 등급 : Uncommon 효과 : 공격 성공시 5퍼센트 확률로 2초간 스턴 유발. 설명 : 이 시드는 공격 성공시 적에게 기절 상태를 유발합니다. Seed 슬롯이 있는 아이템이나 카드에 장착하여 능력을 강화할 수 있습니다. 한번 장착한 시드를 분리하기 위해서는 특수기능 ‘분리’가 필요합니다. [이 시드를 아이템이나 카드에 장착하시려면 이곳을 누르십시오.] “나쁘지 않군.” 확률은 상당히 낮은 편이지만, 근접전을 치러야 하는 준상으로서는 이런 상태 이상 효과는 확률이 적더라도 많이 가지고 있는 편이 좋았다. 이번에 싸웠던 보스만 보더라도 공포 유발 덕분에 별다른 피해 없이 쉽게 이기지 않았던가. 준상은 시드를 휴대폰 위에 올려놓은 뒤 피칠갑(R) 카드의 마지막 하나 남은 슬롯에 장착했다. 피칠갑(R) 카드의 시드 슬롯에는 현재 타격시 체력을 흡수하는 뱀파이어릭 시드와 전체 속도를 높여주는 스피드업 시드, 물리적 피해를 줄여주는 쉘 시드, 물리 계열 스킬 쿨타임을 줄여주는 레디니스 시드와 이번에 얻은 스턴 시드, 이렇게 다섯 개가 장착되어 있었다. 시드의 확인과 장착을 끝낸 준상은 인벤토리에 들어 있는 괴물 곰의 시신을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좀비 같은 몬스터가 아닌 야수지만 엄청나게 강했던 것만은 사실이니 시드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떠올린 탓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집 안에서 그런 괴물 곰의 사체를 도축하기는 좀 난감하다. 피와 살점이 튀는 거야 그렇다 치더라도, 그 커다란 놈을 내려 놓을 만한 공간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퀘스트 진행 중에 아예 도축까지 해버릴 걸 잘못했다는 후회가 들었지만... 언제 습격을 받을지 모르는 상황에 맘 편히 도축이나 하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라 준상으로서는 최선의 선택을 한 셈이다. “난감하군.” 준상은 결국 운동하러 다니는 산속에서 곰의 머리 속만 열어보기로 했다. 대충 집에 있는 음식으로 요기를 한 준상은 곧바로 운동하러 다니는 집 근처의 산으로 올라갔다. 다행히 산악 구보를 하면서 인적이 드문 장소를 봐두었기 때문에 곰의 머리 속을 열어볼 장소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일단 바닥에 판초 우의를 깐 준상은 곰의 시체를 인벤토리에서 꺼낸 후 망치와 끌로 곰의 머리뼈를 부수고 그 안을 뒤적거렸다. 하지만 아쉽게도 곰의 머리 속에서는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았다. “역시... 몬스터에게서만 나오는 건가.” 모르긴 해도 이 괴물 곰은 일반적인 생물 중에서는 그야말로 최강에 가까운 힘을 지닌 존재일터. 운이 좋으면 좀비에게서도 나오는 시드가 이 정도로 강력한 야수에게서는 나오지 않았다는 얘기는, 몬스터가 아닌 야수에게서는 시드가 나오지 않는다는 뜻이나 다름없다. “아니, 단정하기는 이르지.” 아쉬운 건 사실이지만 고작 한 마리 잡아보고 단정하기는 이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준상은 일단 곰의 사체와 피에 젖은 판초 우의를 다시 인벤토리에 챙겨 넣은 후 비상용으로 넣어 뒀던 물로 손을 씻었다. 그리고 여느 때와 다름없이 산악 구보와 수련을 시작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다시 일주일 정도가 지났을 무렵. 수련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준상은 집 앞 골목에서 양복을 차려 입은 심상치 않은 남자 서너 명이 앞뒤로 길을 막는 것을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준상이 걸음을 멈추자 그들 가운데 한 명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박준상씨, 맞습니까?” “그렇습니다만.” 준상이 대답하자 남자는 옆사람을 보고 고개를 끄덕인 후 다시 말했다. “실례지만 잠시 같이 가주셨으면 합니다.” 내용은 권유지만 말투는 명백한 명령이다. 물론 준상은 그들의 말에 순순히 따를 생각이 전혀 없었다. “거절하겠습니다.” 조용한 준상의 대답에 남자는 다시 말했다. “다시 한 번 말하겠습니다.” “...” “좋은 말로 할 때 협조해주시죠.” 이제는 명령에서 협박으로 넘어가는 남자의 말에 준상은 피식 웃어 버렸다. “싫다면?” “...” 그러자 남자는 가소롭다는 듯이 웃음을 짓더니 다짜고짜 손을 뻗어 준상의 멱살을 잡으려 들었다. 하지만, 목숨이 오고가는 실전으로 단련된 준상에게 그 손은 좀비들의 흐느적거리는 손보다도 느리게 보였다. “...” 가볍게 고개를 틀어 남자의 손을 피한 준상은 오른 손으로 상대의 옆구리를 가볍게 어루만져 주었다. “커헉!” 있는 힘껏 쳤다가는 그대로 요단강을 건널 것 같아서 힘 조절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그대로 무너지듯 주저 않으며 속에 있는 것을 게워내기 시작한다. 00021 트롤러 ========================================================================= “이 자식!” 자신들의 동료가 쓰러지자 사내들은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하며 자세를 잡는다. 상대가 다수라서 준상도 처음에는 다소 긴장했지만, 직접 맞부딪혀 보니 생각보다 약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상대가 약한 것이 아니라 준상 자신이 강하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준상은 자신을 에워싸는 인물 들의 자세를 확인했다. 앞쪽의 인물은 유도나 레슬링 계열인 듯하다. 뒤쪽에는 두 명이 있는데 한 명은 접이식 삼단봉을 펴든 채였고, 또 한 명은 권투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잘은 모르겠지만, 제대로 격투기를 배운 인물들이라는 느낌이 전해진다. “훕!” 먼저 움직인 쪽은 삼단봉을 든 남자였다. 한 손을 앞으로 내민 자세에서 다른 한 손으로 삼단봉을 빠르게 가로로 휘두르는 폼이 예사롭지 않다. 접이식 안테나를 연상시키는 삼단봉은 모양은 별 거 아닌 듯이 보여도 근력이 뒷받침될 경우 무서운 무기로 변한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자면 준상의 주먹과 발도 이미 훌륭한 살상 무기다. 준상은 팔꿈치를 허리에 붙인 자세로 몸을 크게 뒤로 젖혀 자신을 노리는 삼단봉의 공격을 피한 후, 마치 스프링이 튕겨나가듯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헛!” 삼단봉을 휘두른 남자는 보통의 사람으로서는 흉내내기조차 어려운 그 빠른 공수 전환에 당황하며 빈손으로 일단 방어를 해보려 했지만, 준상의 공격은 손이 아닌 발로부터 시작되었다. 뻐억! 낮게 깔린 로우킥이 상대의 정강이를 가격하는 순간 삼단봉을 휘두르던 남자의 발이 휘청이며 중심이 흐트러졌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바로 그 순간 준상이 가진 능력 가운데 하나인 공포 유발이 발동해 버린 것이다. “...” 남자는 갑자기 자신의 몸을 옥죄는 듯한 기묘한 공포에 등골이 서늘해짐과 동시에 다음에 이어가야할 동작을 잊고 몸이 굳어 버렸고, 그 짧은 순간의 경직은 준상에게 큰 기회가 되었다. 퍼벅! 준상의 양손에서 번개처럼 뻗어간 2연격이 양 옆구리를 번개처럼 가격하자, 남자는 숨이 턱 하고 막히는 충격을 받으며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감히!” 순식간에 삼단봉을 든 남자를 무력화시키고 뒤로 물러나자 앞쪽에 서 있던 남자가 자세를 낮추며 황소처럼 돌진해 오기 시작한다. 하지만 준상은 그를 무시하고 전면에서 그와 마찬가지로 복싱 자세를 취하며 접근해 오는 남자를 바라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오픈 숄더 차지.” 그리고 명령어가 실행되어 카드 슬롯에 숄더 차지 카드가 장착되자, 바로 몸을 낮추며 숄더 차지를 실행했다. 오른쪽 어깨를 내미는가 싶더니 도움닫기도 없이 갑자기 화살처럼 돌진해 오는 준상의 모습에 그와 맞서려던 복싱 자세의 남자는 물론이거니와 황소처럼 돌진해 오던 남자마저도 크게 당황해 버렸다. 복싱 자세의 남자는 준상이 너무나 빠르게 쇄도해 오자 두 팔로 몸의 전면을 가리며 방어 자세를 취했지만, 불행히도 그 정도의 방어 자세로 준상의 숄더 차지를 막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퍽! 마치 트럭이 와서 부딪히는 듯한 둔중한 충격에 복싱 자세의 남자는 내장이 격탕되는 듯한 충격을 느끼며 그대로 튕겨져 나가 버렸다. 준상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마지막 남은 한 사람을 돌아 보았다. 그 오연한 모습에 남자는 성난 황소처럼 다시금 돌진했지만, 준상은 유연하게 옆으로 돌아 그의 돌진을 피하며 관자놀이에 마치 해머를 휘두르는 것 같은 둔중한 훅을 선사했다. “이...” 남자는 급히 손을 뻗어 준상을 붙잡으려 했지만, 어째서인지 몸이 기울며 그대로 바닥에 널브러지고 말았다. “어? 어어?” 남자는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생각과는 달리 이미 다리가 풀려 일어날 수가 없었다. 준상의 강력한 훅이 머리를 강하게 타격하는 바람에 뇌진탕을 일으킨 탓이다. “...” 준상이 자세를 풀고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문득 한쪽에서 박수 소리가 들려온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일전의 퀘스트에서 마주 쳤던 성진이라는 녀석이다. “넌...” 준상이 얼굴을 찌푸리며 바라보자 성진은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원래는 이러려던 것이 아니었는데, 굳이 이분들이 준상이 형을 시험해 봐야겠다고 해서 말이죠.” 준상이 가만히 성진을 바라보며 물었다. “너, 도대체 뭐하는 놈이냐.” 아무리 봐도 고등학생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 모습.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덩치들을 대동하고 다닌다는 것은 분명 심상치 않은 신분을 지니고 있다는 의미다. 성진은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게... 아버지가 조금 높으신 분입니다.” “그래서?” “아시겠지만, 제가 이번에 어깨를 좀 다쳤잖아요. 근데... 제가 불려갈 때 옆에 어머니가 계셨던 모양입니다.” “...” 대충 상황이 이해가 된다. 귀한 집 자식이 한 달간이나 실종되었다가 돌아왔는데, 병원에서 데려다 놓은 녀석이 눈앞에서 사라졌다가 상당한 시간이 지나서야 어깨에 부상을 입고 돌아왔으니 부모로서는 그야말로 까무라칠 일이 아닐 수 없을 터. 준상은 가만히 성진에게 물었다. “그거랑 지금 이 상황이 무슨 연관이 있는 거지?” 성진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이번에 새로운 기능이 생겼죠.” “파티 말인가.” “네. 제가 이렇게 형을 찾아온 건 파티를 맺고 싶어서입니다.” “...” 그제서야 준상에게 얻어맞은 네 남자들이 비틀거리며 하나 둘씩 몸을 일으켰다. 준상은 그들을 무시한 채 성진에게 다시 물었다. “여긴 어떻게 찾은 거지?” 그 물음에 성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미 짐작하고 계실 겁니다. 권력의 힘이란 거죠.” “...” “다행히 찾기는 쉬웠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귀환하신 분이라 이런 저런 기록도 많았구요.” “그랬군.” 준상이 고개를 끄덕이자, 성진은 손을 내저어 남자들을 물러서게 한 뒤 다시 말을 이었다. “이해하실 거라 믿습니다만, 본의 아니게 전송되는 모습을 들키는 바람에 부모님의 걱정이 말도 못하십니다. 덕분에 제가 가진 능력도 들켜 버렸죠.” “그래서, 날 경호원으로 추천한 건가?” 성진은 준상의 물음에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셈입니다. 일단 아는 사람도 몇 안 될 뿐더러... 제가 보기에 형만큼 강한 사람을 찾기도 쉬운 일이 아닐 듯 해서요.” “...” “이번 퀘스트, 형이 해결하셨죠?” 준상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성진은 감탄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대단하네요. 전 뭐부터 손을 대야할지 감도 안 잡히던데.” “...” “갑자기 하늘 위에서 햇살이 내리쬐더니 좀비들이 녹아버리면서 퀘스트가 완료되었다고 뜨는 바람에 얼마나 놀랐었는지...” 성진은 들뜬 모습으로 그렇게 말을 계속했지만, 준상은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았다. “그만.” “...” “파티는 거절하겠다.” 냉담한 준상의 말에 성진은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네? 어째서?” “...” “실력을 보인 이상 대우는 확실하게 해드릴 겁니다. 어차피 퀘스트 때문에 학교도 쉬는 중이시고 제대로 일도 못하실 텐데 저와 함께 파티를 맺으시면 그런 금전적인 부분이라든가...” 성진은 열띤 어조로 설득을 시작했지만, 준상은 다시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았다. “거절한다.” “어, 어째서...” 잘라내는 듯한 말에 성진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준상은 말없이 그를 지나쳐 집으로 향했다. 그러자 옆구리를 부여잡고 있던 남자 가운데 한 명이 화를 내며 말했다. “저 자식이 어디 감히...” 하지만 성진은 손을 들어 그런 남자의 말을 막았다. “조용.” “...” 그리고는 준상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미치겠네.” “...” “간신히 아버지와 어머니를 설득해서 찾아왔더니 본인에게 퇴짜를 맞을 줄이야. 후우...” 그렇게 중얼거리던 성진은 시야에서 준상의 모습이 사라지자 남자들을 데리고 그 자리에서 물러났다. 한편, 준상은 집으로 돌아온 뒤 간단하게 씻고 나서 자리에 누워 생각에 잠겼다. “...” 따지고 보면 성진의 권유 자체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뭐라해도 이대로 버는 것 없이 쓰기만 한다면 자금이 비는 건 순식간이고, 어차피 퀘스트에 얽매여 있을 바에야 든든한 권력자의 비호를 받으며 월급이라도 받으면 그야말로 일거양득이다. 하지만, 자신의 의향과는 상관없이 이미 결정된 일이라는 듯이 통보받는 건 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성진이 자신의 부모에게 능력을 들켰다는 점 또한 가볍게 생각하고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후우...” 가만히 한숨을 몰아쉬며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 있는데... 문득 휴대폰에서 메시지가 도착했음을 알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젠장!” 준상은 빠르게 일어나 곧장 현관으로 달려가 군화부터 챙겨 신었다. 하지만 아무리 빠르게 손을 놀려도 10초안에 군화를 챙겨 신는 건 역시 무리였고, 군화끈을 당기는 순간에는 이미 빛이 몸을 감싸며 어딘가로 이동을 시작한 뒤였다. 그리고 전송이 완료되자 준상은 자신이 새까만 어둠 속에 주저 앉아 있음을 깨달았다. “...” 가만히 주위를 둘러 봤지만, 아주 미약한 빛조차 흘러들어오지 않는 완벽한 암흑 속이었다. 준상은 잠시 주위의 기척을 살피다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그제서야 조용히 중얼거렸다. “오픈 도깨비불.” 그러자 갑자기 눈앞이 확하고 밝아지며 도깨비불이 모습을 드러낸다. “여긴...” 그제서야 준상은 자신이 위치한 곳이 어디인지 알 수 있었다. 그곳은 어딘지 모를 광산의 갱도 안이었다. 준상은 우선 매던 군화끈을 완전히 맸다. 그러자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했음을 알리는 소리가 갱도 안에 울려퍼진다. “...” 준상은 휴대폰의 알림 설정을 진동으로 바꾼 다음 메시지를 확인했다. 가장 처음에는 새로운 퀘스트의 도착을 알리는 메시지가 나타나 있었고, 그 다음에는 퀘스트의 내용이 적혀 있었다. 광산의 몬스터를 소탕하십시오. :소리 없이 모여든 몬스터들로 인해 광산이 점령당했습니다. 광산 안에 숨어있는 몬스터들을 소탕하십시오 (남은 몬스터 : 56마리) [이 퀘스트는 단독 퀘스트입니다.] “음...” 몬스터 토벌이라. 여러 명이 도전하는 퀘스트가 아닌 걸 보면 그리 강력한 몬스터가 나올 것 같지는 않았지만... 파티 기능이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단독 퀘스트가 떴다는 사실이 뭔가 석연치 않다. 혹시, 혼자만 레벨이 너무 높아서 이런 상황이 발생한 것은 아닐까. 준상은 그런 생각을 떠올리면서 조용히 중얼거렸다. “오픈 크림슨 울프.” 명령어가 발동되자 준상의 눈앞에 붉은 털을 지닌 늑대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준상은 늑대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준 다음, 멀티 툴을 꺼내 옆에 놓인 갱목에 1이라는 숫자를 새겨 넣었다. 본래부터 미로로 지어진 곳은 아니지만, 빛이 들어오지 않고 위치를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 아니, 어떻게 보면 지하로 파고들어가는 광산의 구조상 미로보다 더 까다로울 수도 있었다. 00022 트롤러 ========================================================================= 준상은 장갑을 꺼내 착용하고 손가락을 움직여 보았다. 수련을 막 마치고 돌아온 참이라 조금 피곤하기는 했지만, 덕분에 따로 워밍업은 할 필요가 없을 듯 하다. “가자.”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조용히 중얼거렸지만, 그 말을 들은 도깨비불과 크림슨 울프는 기다렸다는 듯이 준상의 앞에서 길을 인도하기 시작한다. 조금 걷자 점차 갱도가 아래쪽으로 기운다. “흠...” 준상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그냥 차라리 연기를 피워서 질식하게 만드는 것은 어떨까. 그러나 준상은 이내 고개를 저어 그런 생각을 떨쳐 버렸다. 퀘스트를 달성하고 레벨 업만 하고 말 거라면 그래도 상관없다. 하지만 몬스터가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시드를 생각하면... 그건 아무래도 너무 아까운 짓이었다. 임의로 귀환 시간을 조절할 수 있다면 모를까. 퀘스트가 요구하는 달성 목표를 채우고 나면 자동으로 귀환이 이루어지는 이상, 그와 같은 방법은 56마리 분의 보상을 포기하는 짓이나 다름없다. “후...” 게다가... 카드의 레벨업을 위해서도 전투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전진을 계속하는데... 문득 앞쪽에서 녹슨 기계가 삐걱거리는 듯한 기묘한 소음이 들려오는가 싶더니 눈이 붉게 빛나는 기묘한 괴물들이 준상의 앞을 가로 막는다. “...” 뾰족한 코와 흡사 개를 연상시키는 길쭉한 두상, 그리고 성인 남자의 절반 정도 밖에는 되어 보이지 않는 왜소한 체구의 그 괴물들은 나무판을 엮어 만든 조악한 갑옷을 걸친 채 단검과 방패로 무장하고 있었다. 준상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전신을 긴장시켰다. 생각보다 왜소한 괴물들인데다 굉장히 조악해 보이는 무기를 지니고 있었지만, 저런 작은 단검이라도 급소에 찔리면 죽는 건 마찬가지다. -키릭키릭. 괴물들은 자기들끼리 뭐라 뭐라 떠들기 시작하더니 슬금 슬금 뒤로 물러나기 시작한다. 아무래도 커다란 크림슨 울프의 모습에 위압감을 느낀 모양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처럼 찾는 적을 그냥 놓아줄 이유는 없다. 준상은 우선 크림슨 울프로 놈들의 실력을 확인해 보기로 했다. “가라.” 그의 명령이 내려지자 크림슨 울프는 커다란 몸을 날려 괴물들을 덮쳤다. -키야아! -키리야! 괴물들은 혼비 백산하며 얼른 주위로 흩어졌지만, 늑대는 그들 중 하나를 따라잡아 어깨를 콱 깨물어 버렸다. -키야아아아! 동료가 늑대에게 공격받자 그제서야 괴물들은 돌아서며 방패를 앞세운 채 달려들었다. 마치 전경들이 스크럼을 짜듯이 방패를 앞세운 채 그 틈으로 단검을 찌르기 시작하자 늑대는 물고 있던 괴물을 놓고 뒤로 물러설 수 밖에 없었다. 늑대가 뒤로 물러서자 괴물들은 다시금 알 수 없는 소리를 지르며 기세를 올리기 시작한다. “흠...” 제법 흥미롭기는 했지만, 몸집이 작아서 그런지 그리 대단해 보이지는 않는다. 준상은 가볍게 손목과 발목을 풀어준 다음, 자세를 낮춘 상태에서 괴물들의 방패진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키야악! 준상이 쇄도하는 모습을 보고 괴물들은 위협의 소리를 지르며 방패를 앞으로 내밀었다. 하지만, 그건 오히려 준상이 바라던 바였다. 준상은 눈앞에 나타난 방패 들을 향해 숄더 차지를 발동시켰다. 그러자 쇄도하던 준상의 몸이 주욱 번지듯 앞으로 쏘아져 나가며 괴물들의 방패진을 들이받는다. 콰앙! -키야아아! 마치 포탄이 작렬하는 듯한 소리와 함께 괴물들은 비명을 지르며 마치 볼링핀처럼 우르르 나뒹굴며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본래부터 신체 능력이 미약한 괴물들로서는 진형이 무너졌다는 것은 사형 선고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준상은 가장 가까이에 쓰러져 있는 괴물을 향해 사커킥을 가했다. 괴물은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방패를 들어 자신의 머리를 향해 날아드는 발을 막으려 했지만, 검은색 군화는 어김없이 조악한 나무껍질 방패를 부수고 들어가 놈의 턱을 짓이겨 버렸다. -켁! 괴물은 외마디 비명과 함께 목이 부러지며 그대로 움직임을 멈추었다. 하지만 괴물은 그 놈 하나뿐만이 아니었다. -키약! 곧바로 또다른 괴물 하나가 방패를 버린 채 단검을 양손으로 잡고 찔러 들어온다. 준상은 곧바로 몸을 젖혀 자신의 배를 노리고 찔러오는 단검을 피한 뒤 손을 뻗어 괴물의 뒷덜미를 잡았다. 괴물은 뒷덜미를 잡혀 덜렁 들어 올려지자 당황해 하며 자신을 붙잡은 준상의 팔을 향해 단검을 휘두르려 했지만, 미처 손을 움직이기도 전에 근처의 바위 벽과 장렬한 키스를 나누고 말았다. -콰직! 머리뼈가 짓이겨지는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준상에게 뒷덜미를 잡힌 괴물은 그대로 축 늘어지고 말았다. -크앙! 크림슨 울프 역시 전열이 무너진 괴물 들에게 달려들어 한 놈의 목을 으스러 뜨리고는 승리의 포효를 터뜨린다. 그야말로 어른과 아이의 싸움과도 같은 상황. 무기와 방어구를 지니고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좀비보다도 약한 느낌이다. 하지만 그런 느낌도 잠시. 피잉! 무언가가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것을 느낀 준상은 얼른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준상 뒤쪽의 벽에 무언가가 날아와 부딪히는 소리가 들린다. 얼른 살펴보니, 그것은 매우 조악하게 만들어진 화살이었다. “칫!” 준상은 혀를 찰 수 밖에 없었다. 근접전 만이라면 몰라도 이런 식으로 활 같은 원거리 무기까지 동원되면 준상으로서는 불리할 수 밖에 없는 상황. “도깨비불, 저곳으로!” 준상은 허공에 둥둥 뜬 채 조명의 역할만을 하고 있던 도깨비불에게 화살이 날아온 방향으로 갈 것을 명령했고, 도깨비불은 그 명령에 따라 빠르게 숨어서 준상을 노린 적을 향해 날아들었다. 밝게 타오르는 불덩어리가 자신들을 향해 날아들자 엄폐물 뒤에 숨어서 화살을 날린 괴물들은 혼비백산해 버렸다. 준상은 그 틈을 타 활을 지닌 괴물들에게 달려들었다. “오픈 2연격!”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명령어에 따라 카드 슬롯에서 숄더 차지가 빠지고 레벨 업된 2연격이 대신 장착되었다. 준상은 빠르게 엄폐물을 뛰어 넘은 후 도깨비불에 놀라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괴물 들에게 벼락 같은 2연타를 선사했다. -케엑! 첫 일격은 배에 틀어박혔고, 그 공격으로 떠오른 괴물의 머리에 다시 두 번째 공격이 적중했다. 좁은 공간이었던 탓에 준상의 주먹은 그대로 괴물의 머리를 밀어붙이며 석벽까지 닿았고, 바위벽과 주먹 사이에 끼인 괴물의 머리는 단숨에 으깨지고 말았다. 남은 괴물 하나는 동료의 비참한 죽음에 놀라 도망치려 했지만, 준상은 뒤돌아서 도망치는 놈의 뒷덜미를 잡아 바닥에 내동댕이친 후 그대로 목을 밟아 부러뜨렸다. 활을 가진 놈들을 처리하자 괴물들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쳇.” 준상은 놈들이 도망치자 다시 혀를 차며 크림슨 울프에게 명령했다. “쫓아!” 그러자 크림슨 울프는 크게 울부짖으며 도망치는 두 놈의 뒤를 순식간에 따라 잡아 앞을 가로 막았다. -크와앙! -키에엑! 크림슨 울프가 울부짖으며 위협하자 도망치던 놈들은 준상과 늑대 사이에 끼어 어쩔 줄을 몰랐다. 하지만, 정말 도망치려고 마음 먹었다면 가로 막든 말든 발을 멈추지 말았어야 했다. 그들이 잠시 발을 멈추고 망설이는 동안 준상이 그 뒤를 따라 잡았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괴물들의 등 뒤에서 검은 악령처럼 모습을 드러낸 준상은 몸을 휘돌리며 괴물 들에게 강렬한 훅과 어퍼컷을 선사했다. 훅에 얻어맞은 놈은 그대로 석벽까지 날아가 버렸고, 어퍼컷에 맞은 놈은 천장까지 튕겨져 올랐다가 떨어진다. 준상은 벽에 기댄 놈의 머리를 군화발로 짓뭉개 버린 후, 떨어져 내리는 놈의 머리를 축구공 걷어차듯이 날려버렸다. 뻐걱! 머리뼈가 으스러지는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마침내 전투는 끝을 맺었다. “후우...” 준상은 작게 심호흡을 하며 호흡을 가다듬은 후, 죽은 놈들의 시신을 확인했다. 갑옷이나 방패는 나무판자 같은 것을 얼기설기 엮어 만든 것이라 전리품으로서의 가치가 없었다. 활과 화살 역시 어린 아이 장난감보다 조금 나은 수준이라 이런 좁은 갱도 안이라면 몰라도 넓은 곳에서는 별로 쓸모가 없는 듯 하다. 단검도 조악하기는 마찬가지라 그냥 버릴까 싶었지만, 그래도 고철로서의 가치는 있겠다 싶어 일단 모아 두었다. 재미 있는 것은... 몇몇 놈들이 지니고 있던 작은 가죽 주머니였다. 주머니를 열어보자 그 안에서 뭔가 반짝이는 돌맹이 같은 것과 손가락 마디 하나 정도 되는 크기의 바둑알 같은 금붙이가 나온 것이다. “호오...” 돌맹이가 보석인지는 확실치 않았지만, 금붙이는 예상치 못한 의외의 소득이다. 준상은 돌맹이와 금붙이를 따로 작은 주머니에 담은 후, 이번에는 놈들의 머리 속을 뒤져 보았다. 으깨져서 곤죽이 되어 버린 머리 속을 헤집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소름 끼치는 일이었지만, 썩은 내 풀풀 풍기는 좀비의 시체에 비하면 이런 놈들은 차라리 나았다. 아니, 어쩌면 생김새 자체가 인간과 달라서 조금이나마 마음이 편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음...” 아쉽게도 일곱 마리나 되는 괴물 가운데 시드를 가진 놈은 단 하나도 없었다. 너무 약해서 그런 걸까. 준상은 혀를 차며 인벤토리에서 전리품 용으로 따로 마련해둔 상자에 일단 챙겨 놓은 단검과 돌맹이, 그리고 금붙이를 옮겨 담았다. 다시 상자를 인벤토리에 넣은 준상은 남은 괴물의 숫자를 확인했다. 순식간에 일곱 마리를 잡은 탓에 이제 남은 괴물의 숫자는 49마리가 되어 있었다. 활을 가진 놈들이 다소 걸리적거리기는 하지만, 한꺼번에 49마리가 덤비지 않는 이상 이 정도라면 큰 문제가 되지 않을 듯 싶었다. 준상은 다시 크림슨 울프와 도깨비불을 앞세우고 앞으로 전진했다. 다시 조금 더 아래로 내려가자, 이번에는 약간 넓은 공터 같은 곳이 나왔다. 준상은 그곳에서 모닥불을 피우고 무언가를 먹고 있는 괴물들의 모습을 발견했다.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고기를 막대에 끼워 바비큐처럼 굽고 있었는데, 그 냄새가 제법 그럴 듯 해서 준상은 물론이고 크림슨 울프마저 군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 준상과 크림슨 울프는 잠시 서로를 바라보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먹고 마시느라 정신이 없는 괴물들을 향해 돌진했다. 벼락 같이 쏘아져 나간 둘의 모습은 술병 같은 것을 기울이고 있던 한 놈에게 바로 발각되었다. 하지만 놈이 채 소리를 지르기도 전에 준상은 바닥에 떨어져 있던 주먹 만한 돌맹이를 집어 풀스윙으로 힘차게 던졌다. 퍼걱! 그러나 컨트롤이 그다지 좋지 않았던 탓일까. 돌맹이는 준상을 발견한 놈이 아니라, 그 앞에서 고기를 뜯고 있던 괴물의 뒤통수를 박살내 버리고 말았다. 신나게 먹고 마시던 괴물들은 갑자기 눈앞에서 동료의 머리가 박살나 그 피를 뒤집어 쓰자 잠시 당황해서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했고, 그렇게 굳어 있는 괴물 들에게 크림슨 울프와 준상이 덮쳐 들었다. 00023 트롤러 ========================================================================= 준상은 가장 덩치가 큰 놈을 먼저 노렸다. 가장 크다고 해봐야 다른 놈보다 머리 반 개 정도가 더 큰 정도에 불과했지만, 상대의 전의를 꺾기 위해서도 이런 놈은 우선적으로 제거할 필요가 있다. 뒤돌아 앉아 있다가 옆에서 신나게 고기를 뜯던 놈의 머리가 박살나며 붉은 피가 확 피어오르자 괴물은 다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그전에 준상의 오른손이 놈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키야아악! 갑자기 몸이 붕 떠오르자 놈은 기겁하며 소리를 질렀으나, 준상은 온몸을 마치 거대한 풍차처럼 회전시키며 놈을 힘껏 들어 올렸다가 그 회전력을 담아 그대로 내려 찍었다. 단순히 덩치만 큰 것은 아니었던지, 놈은 그 터무니 없는 일격에도 즉사하지 않고 살아서 꿈틀거렸지만, 곧바로 마치 쌓아놓은 벽돌을 격파하듯이 내려꽂힌 준상의 주먹에 머리가 짓뭉개지며 숨이 끊어졌다. 준상이 가장 덩치가 큰 놈을 쓰러뜨리는 사이 크림슨 울프는 허공을 높이 뛰어올라 그 커다란 덩치로 술병을 든 놈을 깔고 앉은 후 발버둥치는 놈의 목을 물어뜯었다. 이제 남은 괴물은 단 하나. 그러나 놈은 순식간에 자신 주위에 있던 동료들이 뭘 해볼 틈도 없이 피곤죽이 되어 쓰러지자 얼이 빠진 채 소변을 지리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덩치 큰 놈을 쓰러뜨린 준상이 몸을 일으키며 자신을 바라보자, 놈은 부들 부들 떨며 들고 있던 조악한 나무 그릇을 떨어뜨렸다. 완전히 공포에 질려 손도 발도 움직이지 못하는 괴물의 모습에 준상은 어쩐지 입맛이 쓰게 느껴졌지만, 말없이 다가가 놈의 멱살을 잡아 들어 올린 후, 그 얼굴에 일격을 선사하여 단숨에 목숨을 끊어 주었다. “후...” 준상은 잠시 눈을 감고 깊게 심호흡을 한 뒤, 전리품을 챙겼다. 이번에는 금붙이 여러 개가 담긴 주머니와 조악한 손도끼 하나, 그리고 단검 세 자루를 얻었다. 전리품 상자에 그것을 챙겨 넣은 준상은 다시 괴물들의 머리 속을 뒤졌다. 그러자 가장 덩치가 큰 놈의 머리에서 시드 하나가 발견되었다. 아이템정보 명칭 : 안티포이즌 시드 레벨제한 : 없음 종류 : 시드 등급 : Common 효과 : 독 저항 5% 설명 : 독에 대한 저항력을 높여주는 시드입니다. Seed 슬롯이 있는 아이템이나 카드에 장착하여 능력을 강화할 수 있습니다. 한번 장착한 시드를 분리하기 위해서는 특수기능 ‘분리’가 필요합니다. [이 시드를 아이템이나 카드에 장착하시려면 이곳을 누르십시오.] “...” 준상은 새로 얻은 시드를 어디에 장착할까 고민했다. 가장 등급이 높은 카드인 피칠갑(R)은 이미 모든 슬롯을 다 채운 상황이라 다른 카드에 시드를 장착할 필요가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준상은 최근 새로 얻은 ‘강력한 곰의 영혼’ 카드에 시드를 장착했다. 시드의 장착을 마친 준상은 그 자리에서 벗어나려다가, 괴물들이 구우려고 놔둔 정체불명의 생고기를 보며 군침을 흘리고 있는 늑대의 모습을 보았다. “...” “...” 가만히 바라보자 늑대는 무언가 호소하는 듯한 시선으로 주인을 마주 바라본다. 그 모습에 준상은 어째서인지 얼마 전 숲 속에서 만났던 이니아의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훗.” 자신도 모르게 이쁜 척을 하는 이니아의 모습을 떠올린 준상은 피식 웃어 버렸고, 괴물들이 피워놓은 모닥불 옆에 앉아 늑대에게 생고기를 건네주었다. “자, 먹어봐.” 허락이 떨어지자 늑대는 꼬리까지 흔들며 냉큼 준상이 내민 생고기를 먹기 시작했다. 늑대가 열심히 고기를 먹는 모습을 보자 어쩐지 준상도 배가 고파왔다. 그제서야 수련을 마치고 막 돌아온 상태에서 퀘스트가 발동되는 바람에 식사조차 제대로 못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준상은 일단 자리에서 일어나 피비린내 나는 괴물들의 시체를 한켠으로 치운 뒤, 꼬치에 고기를 꿰어 모닥불에 굽기 시작했다. 인벤토리에 쟁여둔 비상 식량을 꺼내볼까 하는 생각이 났지만, 그건 정말 위급한 상황에서 사용해야 할 물자라는 생각에 그냥 구운 고기로 만족하기로 했다. “흠...” 모닥불에 지글지글 구워지는 고기를 보자... 준상은 이 빌어먹을 퀘스트가 발동된 후 처음으로 느긋하게 식사 준비를 하고 있는 자신을 깨달았다. 그가 본래 있던 세상에서는 언제 퀘스트가 발동될지 모르는 상황이다보니 마음 편하게 음식을 해먹기도 쉽지 않았던 탓이다. 그런 점을 감안해보면... 차라리 퀘스트로 불려와 있는 동안은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으니 오히려 이런 점에서는 나을수도 있었다. 물론 그것도 이런 행동의 와중에 습격을 당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서의 얘기겠지만 말이다. “...” 준상은 인벤토리에서 식료품이 담긴 상자를 꺼내 거기에서 소금과 후추를 꺼낸 후 구워진 고기에 간을 했다. 다시 식료품 상자를 인벤토리에 집어넣은 준상은 기름기가 잘잘 흐르는 구운 고기의 맛을 보았다. 누린내가 나기는 했지만, 이전에 튜토리얼을 수행할 때 먹었던 쥐고기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맛이다. 모처럼 마음 편하게 포식을 하고 나자 어쩐지 졸린 기분이 들었지만, 준상은 자신의 뺨을 찰싹 때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재 남은 괴물의 수는 45마리. 아직도 가야할 길이 태산인 것이다. 준상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모닥불 옆에서 꾸벅거리며 졸던 크림슨 울프는 눈을 반짝 뜨고는 서둘러 준상을 따라 몸을 일으켰다. 튜토리얼 때는 불을 두려워해서 차마 가까이 오지도 못하더니... 이제는 완전히 집에서 기르는 개나 다름없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어쩐지 천연덕스러운 크림슨 울프의 모습에 준상은 다시 피식 웃어 버리고 말았다. “후우...” 가볍게 심호흡을 마친 준상은 모닥불에 모래를 덮고 불씨를 발로 비벼 끈 다음 다시 동굴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공터를 지나 안쪽으로 들어서서 조금 걷고 있는데, 크림슨 울프가 고개를 쳐들고 앞을 바라보았다. 뭔가 싶어서 주의 깊게 이목을 집중하자 문득 작게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준상은 얼른 도깨비불을 역소환한 뒤 무엇이 다가오는지 확인해 보았다. -키릭 키키... -키리릭! 조심스럽게 살펴보니 괴물 두 마리가 등에 곡괭이를 짊어진 채 자신들끼리 뭐라 떠들며 다가오고 있었다. 준상은 크림슨 울프마저 역소환한 상태로 바위 뒤에 몸을 숨긴 채 놈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이 자신의 옆을 스치고 지나가자 놈들의 뒷덜미를 양손에 하나씩 잡은 후 그대로 바닥에 내리 찍었다. -키엑!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미처 알아차릴 사이도 없이 돌바닥에 머리를 처박으며 두 놈은 숨이 끊어졌다. “흠...” 아까 때려잡은 놈들은 전사고 이놈들은 광부 쯤 되는 걸까. 이 괴물들은 단순히 광산을 던전 대용으로 쓰는 정도가 아니라, 이곳에서 광석을 캐고 있었던 모양이다. 준상은 조악한 형태의 곡괭이 두 자루를 우선 챙긴 후, 다시 소지품을 살펴봤지만 금붙이나 반짝이는 돌은 나오지 않았고, 시드 역시 찾을 수 없었다. 전리품 획득이 끝나자 준상은 다시 크림슨 울프와 도깨비불을 소환한 후 전진을 계속했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열심히 광석을 캐고 있는 괴물들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모닥불이 드문 드문 밝혀진 제법 넓은 공간에서 열 마리 정도의 괴물이 광석을 캐고 있었고, 두 마리 정도는 단검과 방패를 갖춘 채 안쪽의 입구 근처에서 경비를 서고 있었다. “...” 준상은 잠시 고민하다가 도깨비불과 크림슨 울프를 역소환했다. 한꺼번에 상대하기에는 수가 제법 많은 데다, 소리를 듣고 다른 괴물들이 몰려 나오기라도 하면 곤란했기 때문이다. “후...” 가볍게 심호흡을 해서 숨을 가라앉힌 준상은 조심스럽게 그늘 속을 움직여 삽질을 하느라 정신이 없는 괴물의 등 뒤로 다가섰다. 가만히 다가간 준상은 뒤에서 괴물의 목을 움켜쥔 후 놈의 머리를 마치 잼뚜껑 돌려 따듯이 비틀었다. 으직! 그러자 괴물은 목뼈가 으스러지는 작은 소리와 함께 그대로 축 늘어지고 말았다. 그런 식으로 준상은 하나씩 하나씩 놈들을 제거했지만... 다섯 마리 째에서 실수를 하고 말았다. 곡괭이를 지닌 놈을 죽이는 과정에서 목을 제대로 잡지 못해 비명이 새어나간 것이다. -키릭? 그 소리를 들었는지 경비를 서던 괴물 두 마리 중 하나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쯧...” 준상은 혀를 차며 죽어버린 괴물의 시체를 옆에 조심스럽게 내려 놓은 뒤 단검과 방패를 들고 다가오는 괴물이 접근하기를 기다렸다. 괴물은 다가오다가 바닥에 쓰러진 괴물 중 하나를 발견했다. 하지만 놈이 소리를 지르려는 찰나, 준상이 벼락처럼 뛰쳐 나가 놈의 목덜미를 잡은 후 그대로 바닥에 내려 찍었다. 쿠직! 단 일격에 목이 부러져 축 늘어진 놈을 내던지며 준상은 안쪽 입구에 서 있는 괴물을 향해 바람처럼 쇄도했다. 어둠 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와 자신의 동료를 죽여 버린 준상의 모습에 놈은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방패를 앞세우고 싸우기 위한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그건 놈의 실수였다. 이 상황에서 놈이 해야할 행동은 싸우기 위한 자세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고함을 질러 적의 침입을 알리는 것이었다. 준상은 놈이 방패를 내밀고 방어 자세를 취하자 곧바로 입을 열었다. “오픈 숄더 차지.” 그러자 2연격이 슬롯에서 빠져 나가고 숄더 차지가 슬롯에 장착되었다. 카드의 장착과 동시에 준상은 숄더 차지를 발동했다. 그러자 안 그래도 빠르게 쇄도하던 준상의 몸이 폭발적으로 가속하며 괴물에게 날아들었다. -키... 놈은 그제서야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에 입을 열었지만, 그 순간 준상의 어깨가 방패를 부수며 밀고 들어왔고, 놈은 그대로 준상의 어깨와 벽 사이에 끼어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압사 당하고 말았다. 준상은 경비병을 해치우자 다시 말했다. “오픈 크림슨 울프, 오픈 도깨비불.” 그러자 그의 주위에 두 소환물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낸다. 준상은 소환물들이 나타나자 그들을 향해 말했다. “너는 이곳을 막아라, 도깨비불 너는 저쪽 입구를 막는다.” 명령이 하달되자 도깨비불은 준상이 들어왔던 입구를 향해 빠르게 날아갔고, 그제서야 이변을 알아차린 괴물 광부들이 하나 둘씩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폈다. 괴물 광부들은 잠시 어떻게 된 일인지 어리둥절해 하다가, 이내 주위에 널브러져 있는 동료 괴물들의 모습을 보자 패닉에 빠져 버렸다. -키릭! -키리릭! 준상은 입구가 봉쇄되자 빠르게 움직이며 놈들을 향해 뛰어 들었다. 대충 눈으로 훑어보니, 남은 것은 약 7마리 정도였다. 그가 달려오자 가장 앞에 서 있던 괴물은 곡괭이를 휘둘러 그에게 대항하려 했다. 하지만 괴물의 작은 몸에 비해 곡괭이는 지나치게 컸기 때문에 무기로 사용하기에는 아무래도 부족한 점이 많았고, 미처 뒤로 젖혀진 곡괭이를 앞으로 휘두르기도 전에 준상의 군화발에 치여 뒤로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자신의 동료가 마치 종잇장처럼 허공을 날아 벽에 처박히자 몇몇 놈은 얼른 고개를 돌려 도망치려 했고, 또 몇몇은 그대로 석상처럼 굳어버렸으며, 개중에 용기가 있는 두 놈 정도는 삽과 곡괭이를 들고 발악하듯이 준상에게 달려들었다. 준상은 가볍게 몸을 틀어 자신에게 날아드는 삽자루를 피한 후, 오히려 그것을 빼앗아 괴물의 머리에 휘둘렀다. 퍽! 투박한 삽날이 머리 속으로 파고 들자 괴물은 그대로 픽 쓰러져 버렸다. 곡괭이를 휘두르려고 폼을 잡던 놈은 자신의 동료가 스스로의 무기에 의해 어이없이 숨이 끊기자 곡괭이를 떨어뜨리며 뒤도 돌아 보지 않고 도망치기 시작한다. 하지만 단순히 속도로만 따지자면 이 안에서 준상을 따라 잡을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었다. 준상은 곧바로 쿨타임이 끝난 숄더 차지를 다시 발동했고, 그 강렬한 일격을 등으로 받은 괴물을 앞서와 마찬가지로 허공을 날아 바위에 머리를 부딪히며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그나마 싸우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던 괴물 들이 그렇게 처참한 최후를 맞이하자 이제 괴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도망치려 들었다. 그러나 이미 입구는 크림슨 울프와 도깨비불에 의해 봉쇄되어 있는 상황이었고, 결국 퇴로가 끊긴 괴물들은 하나 둘씩 준상의 손에 의해 숨이 끊기고야 말았다. ============================ 작품 후기 ============================ 남은 괴물의 수 : 29마리. 00024 트롤러 ========================================================================= 전투가 끝나자 준상은 몸에 흰 빛이 감싸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다시 한 계단 더 레벨이 올라간 것이다. “후우...” 준상은 고개를 들고 눈을 감은 채 레벨 업과 함께 피로가 씻겨 나가는 그 감각을 즐기다가 여운이 완전히 사라지자 그제서야 레벨 업 보상인 랜덤 카드를 수령했다. 카드정보 명칭 : 강타 레벨 : 1Lv 경험치 : 0 등급 : Uncommon 분류 : 스킬 성장 : 조숙(대) 속성 : 없음 효과 : 힘을 모아 강력한 일격을 가한다. (3단계 차지, 쿨타임: 10초) Cost : 10 Seed : 3슬롯 “흠...” 힘을 모아 친다라... 설명이 상당히 빈약한 편이었기 때문에, 준상은 한번 시험해 보기로 했다. “오픈 강타.” 명령어가 준상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숄더 차지 카드가 빠지고 그 자리에 강타가 장착되었다. 카드의 장착이 끝나자 준상은 바로 스킬을 발동시켰다. “후웁...” 강타 스킬이 발동되고 힘을 모으기 시작하자 준상은 주위의 기운이 자신과 함께 공명하는 것을 느꼈다. 웅웅거리는 이명이 들리는가 싶더니... 창! 모여 들던 힘이 몸에 깃들어 하나의 결정으로 굳어지는 심상이 준상의 머리 속에 만들어졌다. 이것이 일단계. 그리고 다시 계속해서 웅웅거리는 이명이 들리더니, 또 한 번 창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일단계까지 걸리는 시간이 약 1초. 일단계에서 이단계까지 걸리는 시간이 또다시 1초. 그리고 마지막 삼단계까지 걸리는 시간이 1초. 그렇게 약 삼초의 시간이 흐르자 모아진 힘으로 인해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지며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큿!” 전신의 기운이 한점에 집중되는 듯한 그 감각을 느끼며 준상은 이제 이 모아진 힘을 방출해야 할 시간임을 깨달았다. “하앗!” 한 줄기 기합과 함께 준상은 마침내 주먹을 내질렀다. 공기를 찢으며 날아든 주먹이 바위에 격돌하자 광산 안에는 그로 인한 충격파가 우렁거리며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 주먹에 직격당한 거대한 바위는 폭풍과도 같은 위력에 휩쓸려 가루가 되어 버렸다. “헉... 헉...” 준상은 주먹을 내뻗은 채로 잠시 거친 숨을 몰아 쉬었다. 그의 몸에서는 과부하가 걸린 신체를 치유하기 위해 재생이 시작되며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위력도 위력이지만, 풀 차지로 사용할 경우 신체에 가해지는 충격도 만만치 않았다. 준상은 숨을 몰아쉬며 자신과 거의 비슷한 크기의 바위가 형체도 없이 사라져 버린 그 광경을 바라보며 알 수 없는 희열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방금 전에 터져 나온 충격파에 의해 괴물 들의 주의를 끌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준상은 먼저 크림슨 울프를 안쪽으로 통하는 입구로 보내 적이 다가오는지 경계하도록 한 다음 서둘러 전리품을 챙겼다. 단검과 곡괭이를 모으고, 괴물들이 지니고 있던 반짝이는 돌과 금붙이를 챙긴 준상은 마지막으로 머리 속을 뒤져보았으나 이번에도 허탕이었다. 괴물 들이 캐고 있던 광석도 살펴 보았으나, 지금으로서는 무슨 광석인지 알아볼 방도가 없어서 그냥 놔두기로 했다. 전리품을 모두 챙기고 나자, 입구 쪽을 경계하던 크림슨 울프에게서 경계의 신호가 보내진다. 준상은 크림슨 울프와 도깨비불을 불러들인 후 괴물 광부들이 광석을 캐서 쌓아둔 곳 뒤쪽에 몸을 숨겼다. 가만히 기다리자 여섯 마리의 괴물이 예의 나무 갑옷과 방패로 몸을 가린 채 조심스럽게 갱도로 들어서는 것이 보인다. 여섯 마리라면 한번의 전투로 상대하기에는 조금 많은 느낌이긴 하지만, 지금의 준상이라면 충분히 감당할 만한 수준이다. -키릭! -킥! 키리야! 괴물들은 갱도로 들어서자 그 안에서 벌어진 참상을 보고 난리 법석을 피우기 시작했다. 준상은 그들의 시선이 시체들로 향해 있는 틈을 노려 그들이 나온 입구 쪽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한 놈이 다른 동료들에게 알리기 위해 움직이려는 것을 발견하고 놈을 덮쳐 갔다. “오픈 숄더 차지.” 카드 슬롯으로부터 강타 카드가 빠지고 그곳에 숄더 차지 스킬이 장착되는 순간, 준상의 몸이 쭉 뻗어 나오며 괴물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급히 동료들에게 이곳에서 벌어진 참상을 알리기 위해 움직이던 괴물은 옆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준상의 모습을 알아차릴 틈도 없이 그대로 준상의 어깨에 들이 받혔고, 그 강력한 충격에 밀려나며 그대로 갱도의 석벽과 준상 사이에 끼어 압사하고 말았다. 준상은 빠르게 한 놈을 해치운 후, 다시 말했다. “오픈 크림슨 울프, 오픈 도깨비불.” 또 한 번 아까와 마찬 가지로 독 안에 든 쥐 꼴이 되어버린 괴물은 잠시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준상이 자신들의 동료를 이 꼴로 만든 장본인임을 알아차리자 분노를 일깨우며 함성을 질렀다. -키야악! -키리야! 하지만 그런 위협은 준상에게는 별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준상은 다시 말했다. “오픈 2연격.” 쿨타임에 들어간 숄더 차지 대신 이번에는 2연격이 카드 슬롯에 자리 잡았고, 그와 같은 카드 교체가 일어나는 동안 준상은 자신과 가장 가까운 괴물을 향해 쇄도했다. 괴물은 자신을 향해 준상이 몸을 날리자, 반사적으로 지니고 있던 단검을 내밀었다. 하지만 제대로 된 공격도 아니고 그저 견제를 위해 내밀어진 단검은 준상에는 별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가볍게 손을 저어 단검을 쥔 손을 쳐낸 준상은 괴물을 향해 2연격을 터뜨렸다. 순식간에 좌우 몸통에 2연격이 꽂히자 괴물은 내장이 터져나가는 끔찍한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쓰러져 피를 토했고, 이어진 사커킥에 목뼈가 부러지며 즉사했다. 괴물들은 자신의 동료 하나가 뭘 어떻게 했는지도 모르는 사이에 피를 토하며 즉사하자, 흠칫하며 놀랐다. 문득 괴물 하나가 바로 등으로 돌려 도망치려드는 모습이 준상의 눈에 띄었다. 도깨비불에게 다시금 출구를 봉쇄하라고 명령을 내리기는 했지만, 아직 제대로 위치에 도착하지 못한 상태임을 확인한 준상은 바닥에 굴러다니는 광석 덩어리 하나를 집어 도망치는 괴물을 향해 집어 던졌다. 광석은 공기를 찢으며 날아들었지만, 괴물의 머리를 맞추지는 못했다. 대신... 괴물의 머리를 스쳐 지나가며 갱도를 받치고 있던 갱목 하나를 그대로 박살내 버렸다. “이크.” 준상은 갱목이 부서지며 갱도 한켠이 우르르 무너지자 아차 싶었지만, 그 터무니없는 위력은 괴물들로 하여금 등골에 식은땀이 흐르도록 만들기에 충분했고, 그 잠깐의 멈칫거림을 틈타 도깨비불은 무사히 출구를 봉쇄하기 위한 위치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까도 엉뚱한 놈의 뒤통수를 날려버렸던 일을 떠올리며 준상은 돌팔매질도 연습해둘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건 나중의 일. 당장은 눈앞에서 얼이 빠진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괴물들을 해치우는 일이 먼저였다. 준상이 다시 몸을 날리자, 괴물들은 그제서야 퍼뜩 정신을 차리며 대항하려 했지만 그건 이미 늦어도 한참은 늦은 일이었다. 빠르게 다가선 준상은 다시금 쿨타임이 끝난 2연격을 터뜨렸다. 괴물은 방패를 들어 막으려 했지만, 얇은 나무판자를 덧대 만든 방패로 준상의 주먹을 막는 건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방패와 함께 그 안쪽의 팔까지 부숴버리자, 괴물은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이어진 펀치에 광대뼈가 주저앉으며 그대로 의식이 끊어지고 말았다. 괴물 하나가 발악하듯 소리를 지르며 준상을 향해 단검을 찔러 왔지만, 준상은 마치 투우사처럼 몸을 한 바퀴 회전시키며 그 단검을 피한 후 강렬한 훅을 놈의 관자놀이에 직격시켰다. -꺼억... 일격에 숨 넘어 가는 소리와 함께 괴물이 쓰러지는 모습에 남은 두 마리의 괴물은 창백하게 질린 표정으로 준상을 향해 단검을 찔렀다. 공포에 질린 상황에서도 반격의 틈을 놓치지 않는 그 모습은 지금까지 보아 왔던 다른 괴물들과는 차원이 다른 모습이었지만, 불행히도 그들은 상대가 너무 나빴다. 준상은 상하로 나누어 단검이 찔러 들어오자 일단 뒤로 물러나 그 공격을 피한 후 괴물들이 단검을 다시 거둬들이는 타이밍에 맞춰서 반격을 가했다. 애초에 팔다리의 길이에서부터 차이가 나는 터라, 괴물 들은 마치 채찍처럼 휘둘러 오는 준상의 주먹을 피하지 못하고 각기 일격을 허용하고 말았고, 그 충격으로 비틀거리는 동안 날아든 마무리 일격에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후우...” 역시 여섯 명은 좀 많았나. 준상은 심호흡을 하며 거칠어진 숨을 되돌린 후 입구를 막고 있던 크림슨 울프와 도깨비불을 도로 불러들인 다음 전리품을 챙겼다. 단검 여섯 자루와 금붙이 약간을 챙겨 넣은 준상은 괴물 들의 머리 속을 확인했지만, 이번에도 시드는 나오지 않았다. 벌써 반수 이상을 쓰러뜨렸음에도 고작 시드 하나 밖에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에 준상을 슬그머니 짜증이 났지만, 좀비들에 비하면 다른 부수입이 많다는 사실로 위안을 삼기로 했다. 준상은 다시 안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이번에는 다른 문제가 생겼다. 지금까지 쭉 일방통행이었던 갱도가 둘로 갈라진 것이다. “음...” 둘 중 하나를 고르는 거야 문제가 아니다. 진짜 문제는 준상이 한쪽으로 간 사이에 다른 한쪽에 있던 괴물이 광산을 빠져 나갈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준상은 이 갈림길에 크림슨 울프를 남겨두기로 했다. 최소한의 대비를 한 준상은 도깨비불을 데리고 빠르게 왼쪽 갱도를 따라 내려갔다. 그러자 안쪽에서 광석을 캐고 있는 괴물들 몇이 시야에 들어온다. 준상은 기척을 알아챌 틈도 주지 않고 곧바로 공격을 가했다. 첫 번째 괴물은 캐낸 광석을 들여다 보다가 영문도 모르고 뒷덜미를 잡혀 얼굴을 석벽에 강하게 부딪히며 절명했고, 두 번째 괴물은 뒤를 돌아보다가 얼굴에 일격을 맞고 그대로 털썩 주저 앉았다. 순식간에 괴물 둘을 해치운 준상은 곡괭이질 등으로 소란스러운 점을 이용해 괴물들을 하나씩 해치워 버렸다. 아까와는 달리 따로 경비병이 없었던 탓에 다시 괴물 일곱 마리를 손쉽게 해치운 준상은 곡괭이와 금붙이 하나를 전리품으로 얻었다. 그리고 다시 괴물들의 머리를 뒤지자 마침내 고대하던 시드 하나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아이템정보 명칭 : 마인드 시드 레벨제한 : 10 종류 : 시드 등급 : Uncommon 효과 : 마법 공격력 3% 증가 설명 : 공격 마법을 사용할 경우 위력을 증가시켜주는 시드입니다. Seed 슬롯이 있는 아이템이나 카드에 장착하여 능력을 강화할 수 있습니다. 한번 장착한 시드를 분리하기 위해서는 특수기능 ‘분리’가 필요합니다. [이 시드를 아이템이나 카드에 장착하시려면 이곳을 누르십시오.] “...” 공격력 자체를 상승시켜주는 시드는 확실히 귀한 물건이긴 하지만, 불행히도 준상은 공격 마법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야말로 그림에 떡이라고나 할까. 일단 시드를 따로 주머니에 담아 보관한 뒤,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이 갱도는 광부들이 있던 곳에서 얼마 더 들어가지 않은 지점에서 끝나 있었다. 준상은 얼른 뒤로 돌아 크림슨 울프가 기다리고 있는 갈림길로 향했다. 갈림길로 다가가자, 이미 크림슨 울프는 한 무리의 괴물들과 전투를 치르는 중이었다. 괴물들은 창으로 늑대를 위협하며 화살을 쏘아대고 있었는데, 크림슨 울프는 화살에 맞으면서도 갈림길에서 한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있었다. “...” 준상은 빠르게 달려가 늑대를 뛰어 넘은 다음 창으로 위협을 가하고 있는 괴물들 위로 떨어져 내렸다. ============================ 작품 후기 ============================ 남은 괴물의 수 : 16 마리 00025 트롤러 ========================================================================= 괴물들은 열심히 창으로 눈앞의 붉은 늑대를 위협하며 활을 쏘다가 갑자기 주위가 어두워지는 느낌에 고개를 들었다. 그들은 보았다. 시퍼런 안광을 번쩍이며 자신을 향해 떨어져 내리는 악마를. 악마는 주먹을 휘둘러 창을 들고 있던 동료 둘을 순식간에 피떡으로 만들어 버리더니, 이내 떨어뜨린 창을 빼앗아 멀찍이서 활을 쏘고 있던 동료를 꼬치로 만들어 버렸다. 바로 그 악마, 준상은 조악한 괴물들의 창이 의외로 던지기에 좋다는 것을 깨닫고는 닥치는대로 창을 빼앗아 뒤쪽에서 활을 쏘고 있던 괴물들에게 던졌다. -키야악! 어깨를 완전히 젖히고 체중을 실어 던진 창은 공기를 찢고 날아가 괴물의 가슴을 뚫고도 그 기세를 죽이지 않은 채 계속 날아갔지만, 창날의 강도가 석벽을 뚫을 정도는 아니었기에 불꽃을 튕기며 떨어졌다. 순간 뭔가가 번쩍하며 날아와 가슴을 꿰뚫어 버린 것도 모자라 뒤쪽의 벽까지 밀려버린 그 충격에 괴물은 폐에서 역류한 피를 왈칵 쏟으며 정신을 잃었다. 순식간에 네 명의 궁수 가운데 반이 쓰러지자 활을 들고 있던 다른 두 명의 괴물들은 준상을 견제해야 한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허둥거리며 주위의 바위 뒤로 숨었다. 그렇게 견제하던 궁수들이 무력화되자 준상은 창을 들고 우왕좌왕하고 있는 괴물들 사이로 뛰쳐 들어갔고, 그에 질세라 길목을 지키고 있던 늑대도 마침내 공격으로 전환했다. 그것은, 그야말로 양떼 속에 뛰어든 늑대와도 같은 형상이었다. 퍼걱!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시커먼 군화발을 막아보려고 창을 들어올렸던 괴물은 눈앞에서 창이 부러지는 것을 본 것이 이 생에서의 마지막 기억이 되었다. 동료를 군화발로 짓이기는 모습을 보고 그 등 뒤를 노리던 괴물은 상처를 입어 성난 늑대의 이빨에 목을 물어뜯기고는 선혈을 뿜어내며 쓰러졌다. 궁수들이 준상의 동태를 살피려고 다시 고개를 쳐들었을 때는, 창을 들고 있던 모든 동료들이 처참한 시체로 변한 뒤였다. 두 마리의 괴물 궁수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 보았다. 그리고, 지금 이곳에 난입한 이 정체불명의 침입자들이 도저히 자신들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자들이란 사실을 서로의 눈빛에서 확인했다. 그렇게 결론이 나자, 두 괴물 궁수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비명을 지르며 광산 안쪽으로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준상은 떨어져 있는 창을 들어 도망치는 괴물 궁수의 뒤를 노렸지만, 아쉽게도 이번에는 빗나가고 말았다. “칫.” 이제 남은 괴물의 수는 모두 열. 한 번에 상대하기에는 다소 애매한 수였지만, 일단 준상은 전리품부터 챙기기로 했다. 창과 단도 몇 개, 그리고 금붙이 두 개를 얻었고 시드는 나오지 않았다. 전리품을 모두 챙긴 준상은 부상을 입은 늑대를 살폈다. 몇 군데 찢긴 상처가 있고 두 발의 화살이 얕게 박혀 있었지만, 대단한 상처는 없었다. 준상은 이왕 들킨 김에 늑대의 부상을 치유하기 위해 역소환시킨 뒤, 갈림길에서 대기했다. 여덟 마리가 와서 손도 써보지 못하고 당했으니, 남은 열 마리로는 감히 덤비지 못하리라는 계산에서였다. 생각대로 괴물들은 감히 갈림길 부근으로 올 생각을 못했고, 약 십분 정도 시간이 지나자 크림슨 울프는 완치되었다. “오픈 크림슨 울프.” 준상은 붉은 털의 늑대를 소환한 후, 천천히 광산의 깊은 곳을 향해 이동했다. 그렇게 한 오분 정도 아래로 내려가자, 준상은 한 무리의 괴물들이 조악한 목책위에 방패를 둘러 장애물을 만들고 그 안에서 기세를 올리는 모습을 발견했다. “흠...” 확실히... 저런 곳에 웅크린 채로 화살이나 창을 던지면 준상이라 해도 접근하기가 까다롭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준상이 정직하게 정면 승부를 시도한다는 전제하에서의 얘기지만 말이다. 준상은 턱을 가만히 쓰다듬다가 옆쪽의 석벽에 대고 주먹을 휘둘렀다. 쾅! 사람의 주먹이 만들어낸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울림과 함께 갱도에서 우수수 먼지가 쏟아진다. 그 모습에 괴물들은 괴성을 지르며 기세를 올리던 것을 멈추었다. 준상은 다시 한 번 벽에 주먹을 내질렀다. 쾅! 그러자 약한 벽의 일부가 부서지며 바위 조각이 우수수 쏟아져 내린다. 준상은 몇 번 더 바위를 후려친 후, 부서져 흘러내린 바위 조각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허리를 힘껏 젖히는가 싶더니 온 몸의 체중을 실어 괴물들의 장애물을 향해 집어 던졌다. 콰직! 바위 조각은 장애물 위에 둘러놓은 방패를 부수고 들어가 안쪽에서 웅크리고 있던 괴물 하나를 피떡으로 만들어 버렸다. “...” 괴물 들은 순간 자신들도 모르게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또다시 바위 조각이 날아와 방패를 부수고 그 안쪽에서 불안한 표정으로 눈동자를 굴리던 동료의 머리마저 부숴 버리는 모습을 보고 패닉에 빠져 버렸다. 마침내 준상이 세 번째 바위 조각을 집어드는 모습을 본 괴물들은 기겁을 하며 다시 안쪽을 향해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로써 남은 괴물의 수는 여덟. 준상은 전리품을 챙긴 후 유유히 산책하듯이 다시 갱도를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제법 깊은 곳인지 슬슬 공기가 탁해지기 시작한다. 손으로 코와 입을 가린 채 조금 더 안으로 내려가자, 지금까지의 갱도와는 다른 느낌의 동굴이 모습을 드러낸다. “흠...” 아무래도 갱도를 파내려가다가 자연 동굴과 만난 모양이다. 안쪽으로 들어가자 조금 넓은 공간 안에 지하 수맥으로 보이는 하천이 나타났다. 준상은 그곳에서 부서진 나무 다리의 잔해 같은 것을 발견했다. 그의 진격을 막기 위해 괴물들이 지하 수맥을 건너기 위한 다리를 파괴한 것이다. 하지만 지하 수맥 너머에도 다른 출구가 없기는 마찬가지. 괴물 들로서는 최후의 수단으로 지하 수맥이라는 지형 지물을 이용한 농성을 시작한 셈이다. -키야악! -키야아! 그가 부서진 다리 근처에서 생각에 잠겨 있자, 멀리서 그것을 지켜보며 괴물들이 환호성을 지른다. “이거 참...” 준상은 잠시 생각하다가 인벤토리의 전리품 상자에서 아까 주운 창 하나를 꺼내 물의 깊이를 재보았다. “...” 물의 깊이는 생각보다 깊었다. 못해도 일미터 이상은 되는 깊이인데다 물살도 제법 빨라서 이대로 들어갔다가는 자칫 물살에 휩쓸려 떠내려갈 위험이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준상의 눈에 갱도를 파다가 생겨난 것으로 보이는 바위 더미가 보였다. 그것을 보자 준상은 생각을 굳혔다. 다리가 부서졌으면, 만들면 되는 일 아니겠는가. 괴물들은 준상이 바위 더미로 다가가자 설마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기 시작했지만... 이내 그가 바위를 들어 지하 수맥을 향해 던지기 시작하자 안색이 새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물이 제법 깊기는 했지만, 적당히 얕은 곳도 존재했기에 준상은 그런 곳에 바위를 던져 징검다리를 만들었다. 괴물들은 이제 완전히 당황해서 화살과 창으로 준상을 견제하려 했지만, 그들이 고개를 내밀면 엄청난 위력의 돌팔매가 날아왔다. 명중률이야 그렇다 쳐도...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드는 돌맹이는 보는 순간 오줌을 찔끔거릴 정도로 위협적이었기에 괴물들은 제대로 손도 써보지 못한 채 징검다리가 완성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준상은 징검다리가 완성된 이후에도 그곳을 건널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갑자기 발길을 돌려 위쪽으로 되돌아가기 시작한다. -키릭? -킥? 이젠 꼼짝없이 죽었구나 하며 절망적인 표정을 짓고 있던 괴물들은 갑자기 준상이 발길을 돌리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새로 만들어진 징검다리를 타고 건너가서 확인해 볼 엄두는 내지 못했다. 혹시 함정일 가능성을 염두에 둔 까닭이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기다리자 준상이 돌아오더니 갑자기 허공에서 나무를 하나 가득 꺼냈다. 그것은 방금 전에 방책을 만들기 위해 쌓아두었던 나무들이었다. 준상은 그 나무들로 모닥불을 피우더니 그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다시 인벤토리에 넣어 두었던 괴물 곰의 시체를 꺼내 손질하기 시작한다. 괴물들은 준상의 행동을 보고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 불길한 예감의 실체는, 조금 지나서 준상이 곰고기를 모닥불에 굽기 시작하자 확실해졌다. 급하게 도망치다보니 미처 식량을 챙기지 못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하지만 준상은 괴물들이 절망해서 주저 앉아 머리를 감싸쥐거나 말거나 곰의 가죽을 벗기는 작업에 전념했다. 현실 세계에서는 언제 퀘스트가 발동되어 소환될지 모르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여유롭게 가죽을 손질하거나 고기를 잘라내는 건 엄두도 낼 수 없었지만, 이곳에서라면 아무 문제가 없었다. “...” 멀티 툴의 거팅 블레이드로 가죽을 손질하는 일은 영 쉽지 않았지만, 자신이 잡은 가장 커다란 포획물의 가죽이기에 준상은 정성스럽게 손질을 계속했다. 고기는 적당한 크기로 잘라 비닐봉지에 담은 후 인벤토리 안에 넣어둔 커다란 아이스박스에 넣었다. “이게 웅담인가.” 워낙에 덩치가 큰 놈이다 보니 쓸개도 제법 컸다. 살점이 붙은 커다란 곰 뼈 하나를 크림슨 울프에게 던져 준 준상은 벗겨낸 가죽을 일단 챙겨서 인벤토리에 넣었다. 가죽은 어찌 어찌 벗겨냈지만 무두질까지는 엄두를 내지 못한 탓이다. 대충 정리가 끝나자 준상은 곰고기 한 덩어리를 불에 구워 먹고는 소화가 될 때까지 휴식을 취했다. “후...” 준상은 대충 소화가 되자 그제서야 몸을 일으켰다. 이제 슬슬 퀘스트를 끝내야 할 시간이었다. 가벼운 준비 운동으로 몸을 풀자 괴물들은 호들갑을 떨며 싸울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준상은 우선 크림슨 울프를 역소환한 뒤, 곧바로 징검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다. 괴물들은 활과 창으로 준상을 방해하려 했지만, 미처 뭘 어떻게 해보기도 전에 준상은 지하 수맥을 건너 버렸다. “오픈 크림슨 울프.” 다시 붉은 늑대를 소환한 준상이 다가서자, 괴물들 가운데 가장 몸집이 큰 놈이 커다란 도끼를 들고 괴성을 질렀고 두려운 눈으로 준상을 바라보던 괴물들은 그 외침에 떠밀리듯이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자신을 향해 찔러 들어오는 창을 손으로 쳐버린 준상은 괴물의 배를 걷어찼다.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괴물 하나가 뒤로 날아가자 그 뒤에서 달려오던, 아마도 이들의 대장으로 보이는 괴물이 커다란 도끼를 휘둘렀다. “이크.” 상당히 강맹한 위력이었기에 준상은 슬쩍 몸을 뒤로 빼며 그 도끼를 피했다. 그러자 틈을 노린 궁수들이 준상을 향해 화살을 날렸다. “...”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준상은 휘두른 도끼를 회수하기 위해 힘을 쓰는 대장 괴물을 향해 숄더 차지를 발동했다. -키릭! 준상은 예비동작도 없이 갑자기 자신에게 어깨를 내밀며 쇄도하는 준상의 모습에 기겁해서 도끼를 버리고 옆으로 피하려 했지만, 발이 땅에서 떨어짐과 동시에 준상의 어깨가 대장 괴물의 가슴을 그대로 들이받았다. -케엑! 일격에 자신들의 대장이 비명을 지르며 나가떨어지자 괴물들의 안색은 핼쓱해졌다. 그리고, 그렇게 얼빠진 표정으로 준상과 대장 괴물의 대결을 지켜보는 괴물들의 등 뒤를 붉은 털의 늑대가 덮쳤다. 콰직! 목덜미에 제대로 이빨이 박히자 괴물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목뼈가 부러지며 절명했고, 준상 외에도 적이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달은 괴물들은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도망칠 곳도 없고, 우두머리도 쓰러졌으며, 기세까지 꺾인 상태에서 더 이상 괴물 들은 저항할 방법을 찾지 못한 채 하나 하나 준상의 주먹과 크림슨 울프의 이빨 아래 쓰러졌다. “후우...” 준상은 마지막 괴물을 쓰러뜨리기가 바쁘게 전리품을 수집하기 위해 움직였다. 단검과 금붙이 외에도 대장 괴물에게서 시드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미처 시드를 확인할 틈도 없이 휴대폰에 메시지가 들어왔다. 광산의 몬스터를 소탕하십시오. :소리 없이 모여든 몬스터들로 인해 광산이 점령당했습니다. 광산 안에 숨어있는 몬스터들을 소탕하십시오 (남은 몬스터 : 0마리) [이 퀘스트는 단독 퀘스트입니다.] -> 완료 - 당신이 이번 퀘스트에서 보여준 행동과 성과를 정산합니다. 이 과정은 약간의 시간이 소요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준상은 메시지를 확인하며 크림슨 울프와 도깨비불의 소환을 해제했다. 그리고 빼먹은 것이 없는지 천천히 확인하다보니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했다. 축하합니다! : 당신의 랭크는 S입니다. -당신은 이번 퀘스트의 목표를 완벽하게 수행했습니다. 기본 보상 외에 추가 보상이 지급됩니다. 보상 : 경험치 약간, 추가 보상 상자(S랭크) -> 보상을 지금 수령하시겠습니까? (Y/n) _ (주의) 수령하지 않은 보상은 7일후 자동 소거됩니다. 그리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퀘스트 완료 메시지가 도착했다. 퀘스트가 완료되었습니다. :당신은 할당된 퀘스트를 모두 완료했습니다. 이제 본래 당신이 있어야 할 장소로 돌아가야 할 시간입니다. 당신의 앞길에 행운이 함께 하기를 빕니다. (남은 시간 : 10초) 그리고, 10초의 카운트 다운이 끝나자 준상은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00026 트롤러 ========================================================================= “후...” 뭐랄까... 준상은 자신의 레벨이 평균보다 높다는 사실을 이번 퀘스트를 통해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이번에 마주쳤던 괴물들은 어떻게 생각을 해봐도 자신의 상대라기엔 너무 약했기 때문이다. 괴물들의 대장이 숄더 차지 한 방에 정신을 잃는 그 모습이라니. 단독 퀘스트라 난이도가 다른 퀘스트에 비해 낮았으리라는 점을 감안해도 그래도 나름 보스였을 텐데 그리 쉽게 무너질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준상은 피와 진흙이 엉겨 붙은 군화를 닦고 옷을 갈아 입은 후 간단하게 몸을 씻은 뒤에야 비로소 이번에 얻은 보상을 확인했다. 우선 추가 보상 상자를 열자 카드 한 장이 새로 나왔다. 카드정보 명칭 : 팀버 울프 레벨 : 1Lv 경험치 : 0 등급 : Common 분류 : 소환 성장 : 조숙(소) 속성 : 없음 효과 : 회색 늑대 1개체를 소환합니다. Cost : 10 Seed : 1슬롯 “...” 회색 늑대라... 크림슨 울프와 등급도 같고 비슷한 종류의 소환물이라는 느낌이다. 지금까지 퀘스트를 진행하면서 크림슨 울프의 도움을 많이 받았던 터라 준상은 별 생각 없기타 슬롯의 나머지 빈 칸에 카드를 장착하려 했다. 하지만 카드를 장착하려 하자 메시지가 나타났다. 주의! 카드 슬롯에는 자신의 레벨 x 10 만큼의 코스트에 해당하는 카드만 장착할 수 있습니다. -현재 장착되어 있는 카드의 코스트 총합은 ‘110’입니다. -소환물 카드 ‘팀버 울프’의 장착에 실패했습니다. “응?” 준상은 얼굴을 찌푸렸다. 지금껏 생각도 않고 있던 문제가 갑자기 튀어 나왔기 때문이었다. 잠시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것은 일종의 밸런싱을 위한 제약이 아닐까 싶었다. 클래스는 물론이고 능력의 형태까지 모두 카드로 결정되는 이상, 저레벨이라도 강력한 카드를 다수 장착하면 그만큼 큰 위력을 낼 수 있었다. 때문에 코스트라는 형태로 카드 장착에 제한을 둔 것은 아닐까. 확인해 보니 크림슨 울프와 강력한 곰의 영혼, 그리고 피칠갑(R)의 코스트가 20이나 차지하고 있었다. 어느 것도 지금의 준상으로서는 포기하기 어려운 카드들 뿐이다. 잠시 고민하던 준상은 경우에 따라 도깨비불과 팀버 울프를 번갈아 쓰기로 결정했다. 물론 1레벨만 더 올리면 팀버 울프 역시 카드 슬롯에 장착할 수 있으니 그때까지만 참으면 된다. 카드 슬롯을 닫으려던 준상은 이전에 2연격이 그랬듯이 크림슨 울프와 피칠갑(R)이 반짝이는 것을 발견했다. 축하합니다! 소환물 ‘크림슨 울프’의 레벨이 올라갔습니다. :카드의 레벨이 올라가면 여러 가지 효과가 추가됩니다. -소환된 ‘크림슨 울프’의 공격력이 상승합니다. -소환된 ‘크림슨 울프’의 탐지 범위가 넓어집니다. “오...” 공격력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탐지 범위가 넓어지는 건 그야말로 금상첨화다. 준상은 피칠갑(R)의 레벨업 메시지도 확인해 보았다. 축하합니다! 스킬카드 ‘피칠갑(R)’의 레벨이 올라갔습니다. :카드의 레벨이 올라가면 여러 가지 효과가 추가됩니다. -‘피칠갑(R)’ 장착시 생명력 흡수 효과가 1퍼센트 상승합니다. -‘피칠갑(R)’ 장착시 재생률이 1퍼센트 상승합니다. 생명력 흡수나 재생률 모두 매우 중요한 옵션이긴 하지만, 등락폭이 1퍼센트 밖에 안 되는 건 조금 아쉬웠다. “그러고 보니...” 성장이라는 항목에 피칠갑은 대기만성이라고 되어 있었다. 초기 성장 폭이 적은 것은 아마도 이때문인 모양이다. 카드의 레벨업을 확인한 준상은 대장 괴물에게서 얻은 시드를 확인해 보았다. 아이템정보 명칭 : 라이프 시드 레벨제한 : 10 종류 : 시드 등급 : Common 효과 : 생명력 강화 5% 설명 : 착용자의 생명력을 일깨우는 시드. Seed 슬롯이 있는 아이템이나 카드에 장착하여 능력을 강화할 수 있습니다. 한번 장착한 시드를 분리하기 위해서는 특수기능 ‘분리’가 필요합니다. [이 시드를 아이템이나 카드에 장착하시려면 이곳을 누르십시오.] “흠...” 이것은 준상이 끼고 있는 세 개의 반지 가운데 생명의 반지와 옵션이 같다. 준상은 새로 얻은 시드를 ‘강력한 곰의 영혼’ 카드에 장착함으로써 보상과 전리품의 정리를 끝맺었다. 아니, 끝맺으려다가 괴물들에게서 얻은 반짝이는 돌과 금붙이를 떠올렸다. 전리품 상자 한 켠에 따로 보관해둔 가죽 주머니에서 금붙이와 돌을 꺼낸 준상은 방바닥에 누워 그것을 형광등 불빛에 비추어 보았다. 돌맹이는 그렇다 치더라도 바둑돌 모양의 이 금붙이 역시 준상으로서는 진짜 금이 맞는지 확인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잠시 돌맹이와 금붙이를 손가락으로 집어서 만지작거리던 준상은 진품인지 확인해 볼까 하는 생각을 떠올렸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아직은 자금에 여유가 있는 상황이니 급하게 처분하기 보다는 좀 더 두고 보기로 한 것이다. 특히나 금이나 보석 같은 것은 잘못 처분하게 되면 여러 가지로 귀찮아질 가능성이 많다. 준상은 새로 얻은 팀버 울프를 살펴 보기로 했다. 우선 카드 슬롯을 조작해 ‘광전사’나 ‘미친개’와 같은 명령어를 새로 두 개 더 만들었다. 새로 만든 명령어는 ‘늑불’과 ‘쌍늑’. 명령어의 조합이 끝나자 준상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쌍늑.” 그러자 카드 슬롯에서 도깨비불이 빠지고 그 안에 팀버 울프가 자리했다. 카드 장착이 끝나자 준상은 다시 말했다. “오픈 팀버 울프.” 소환 명령이 발동되자 준상의 눈 앞에 커다란 잿빛 늑대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준상은 소환된 팀버 울프를 잠시 바라보다가 붉은 늑대 역시 소환했다. “오픈 크림슨 울프.” 소환된 두 마리의 늑대를 보니 확실히 차이를 알 수 있었다. 단순히 털빛 뿐만이 아니라, 크림슨 울프 쪽이 머리 반개 정도는 더 큰 체구를 가지고 있었다. 크림슨 울프가 모습을 드러내자 팀버 울프는 대번에 꼬리를 말고 고개를 숙였고, 크림슨 울프는 마치 왕이 기사에게 작위를 수여하는 것처럼 어깨에 한쪽 발을 얹었다. “훗.” 진지한 태도로 그렇게 서로의 우열을 가리는 모습을 보고 준상은 어쩐지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어느새 새벽이다. 준상은 두 마리의 늑대를 역소환한 뒤, 이불도 덮지 않은 채 그대로 잠을 청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그날은 더 이상 퀘스트가 발동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이 되었다. 조금 늦잠을 잔 준상은 길게 하품을 하며 오늘도 어김없이 산악구보를 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쉬운 상대였다 할지라도 목숨을 내놓고 사투를 벌인 것은 분명한 일이었고, 재생력 덕분에 자는 동안 육체적인 피로는 대부분 회복이 되었더라도 정신적인 피로만큼은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다. 때문에 오늘은 그냥 집에서 쉴까 하는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몸, 특히 근육이란 것은 쉬면 쉬는 만큼 퇴화하는 것이기에 특히나 준상처럼 맨몸으로 싸우는 자에게 나태는 그야말로 독약과도 같았다. 따지고 보면, 이번 퀘스트를 쉽게 해결할 수 있었던 것도 튜토리얼이 끝난 이후 불철주야 수련에 몰두한 덕분이다. 천천히 달려서 산 입구로 향하는데... 문득 주머니에 넣어둔 휴대폰에서 메시지가 왔음을 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쯧...” 바로 어제 그 난리를 쳤는데, 오늘 또 퀘스트란 말인가. 혀를 차며 휴대폰을 열어본 준상의 얼굴은 또 한 번 굳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에 도착한 메시지는 퀘스트의 도착을 알리는 내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준상이 형. 저 성진이에요. 어제는 갑자기 찾아가서 실례가 많았습니다. 실은... 저희 아버지가 형을 한 번 만나보고 싶어 하십니다. 귀찮으시더라도 시간을 좀 내주셨으면 합니다. 답변 기다리겠습니다. “...” 준상은 얼굴을 찌푸렸다. 이미 한 번 거절한 일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것도 그렇고, 알게 모르게 거절하리라는 생각은 염두에 두지 않은 듯한 말투도 거슬렸다. 게다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기에 다짜고짜 사람을 오라 가라 하는 건지. 무턱대고 남의 개인 정보를 빼내 이런 식으로 메시지를 보내는 행동거지도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준상은 그냥 메시지를 무시하기로 마음먹었다. 아니, 방금 전처럼 낚이는 경우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아예 스팸으로 등록해 버린 후 여느 때처럼 산악 구보를 시작했다. 그렇게 다시 하루가 지나고 또 이틀이 지났다. 준상은 여느 때처럼 산악 구보를 하다가 왠 나이 지긋한 사람 하나가 운동복을 입은 채 건장한 남자들을 데리고 자신이 뛰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운동복 차림이기는 하지만, 아무리 봐도 운동하러 나온 사람 같지가 않다. 혹시나 해서 자세히 보니... 일전에 성진과 함께 왔던 남자 들이 그 안에 섞여 있었다. 준성은 괜히 입 섞어 말해봐야 귀찮아지리란 느낌에 얼른 다른 곳으로 가려 했지만, 그런 그의 앞길을 운동복 차림의 남자 두 명이 가로 막는다. “잠깐 시간 좀 내주시죠.” 산에 운동하러 나온 사람들이 그들을 힐끗거리는 모습이 준상의 시야에 들어왔다. “싫다면?” “...” 준상의 대답에 남자들은 얼굴을 찌푸렸지만, 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준상의 뒤에서 조금 걸걸한 음성이 들려 왔다. “듣던 대로 성격이 보통이 아니군.” “...”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예의 나이 지긋한 사람이 준상을 향해 한 손을 내밀며 말했다. “나, 성진이 애비 되는 사람일세.” “...” 준상은 그 손을 잡지 않고 성진의 아버지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를 빤히 바라만 보았다. 그러자 옆에서 그를 호위하듯이 둘러 서 있던 남자들의 얼굴이 험악해진다. “감히! 이 분이 누구신줄 알고.” 그 말에 준상은 조용히 대답했다. “성진이 아버님 아니십니까?” “...” 남자들은 준상의 대답에 일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고, 당사자는 껄껄거리며 웃었다. “하하... 자네 말이 맞아. 지금 여기 있는 나는 국회의원 김종경이 아니라 김성진의 아버지일 뿐이지.” “...” 국회의원이라... 대범한 척 말하고 있기는 하지만, 김종경은 자신의 직위를 준상에게 넌지시 알리고 있었다. 준상은 별 흥미 없다는 표정으로 무심하게 바라봤지만, 김종경은 계속해서 웃으며 말했다. “운동을 방해할 생각은 없네. 그저 잠시 자네와 얘기를 좀 나눴으면 하는데...” 그 말에 준상은 이렇게 대답했다. “조건이 있습니다.” 김종경은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바로 대답했다. “뭔가. 어서 말해 보게.” “저는 지금 수련중입니다. 제 수련을 방해하지 않으신다면 그 대화, 못 할 이유가 없죠.” “무슨...” “지금부터 달릴 겁니다. 하실 말이 있으시면 제 옆에서 함께 달리면서 하십시오.” “...” 그 말을 끝으로 준상은 바람처럼 산을 타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뒤에서 김종경의 성난 외침이 들렸다. “잡아!” 00027 트롤러 ========================================================================= 김종경의 외침과 함께 남자들이 우르르 움직였다. 하지만 그들은 평지처럼 산을 내달리는 준상의 모습에 넋이 나가고 말았다. 모두들 어느 정도는 자신의 몸을 다루는데 일가견이 있는 자들이었지만, 준상의 페이스를 따라잡기는커녕 채 삼십분도 되기 전에 줄줄이 낙오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윽고 산기슭에는 운동복 차림의 건장한 남자들이 시체처럼 뒹굴기 시작했다. “허...” 한참이나 지나서야 그와 같은 참극을 알아차린 김종경은 그저 망연할 수밖에 없었다. 저쪽 세계에 임의로 사람을 보낼 수만 있다면 사실 준상 같은 반골을 자기 아들의 경호원으로 삼는 일은 절대로 없었을 것이다. 그에게는 이전부터 자신을 돕던 든든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탐탁치않아 하면서도 이렇게 몸소 준상을 마지못해 찾아왔던 것인데, 실제로 준상이 산을 내달리는 모습을 보자 자신의 판단에 다소 착오가 있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전에 딸려 보낸 네 명의 경호원을 단숨에 때려눕힐 정도의 실력에 이 정도의 산을 내달리면서도 지치지 않는 체력이라면... 적어도 그가 알고 있는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능력이다. 김종경은 슬그머니 준상이라는 인물에 대해 욕심이 생겼다. 그도 허투루 세월을 먹지는 않은 인물이다. 만약 그랬다면 3선 의원에 여당 중진이라는 명함을 가지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거참...” 준상 같은 인물은 억누르면 오히려 튀어 오른다. 억눌러서라도 자신의 것으로 할 수 있다면 모르되, 그렇지 않다면 오히려 반감만 심해지는 것이다. 게다가... 만에 하나 경호를 맡기로 해놓고 저쪽 세계에서 해코지라도 하면 어찌 되겠는가.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아들인 김성진의 안위다. 자신의 말을 콧등으로도 듣지 않는 준상의 행동이 괘씸하기는 해도, 지금 상황에서 그에게 함부로 손을 대는 것은 김성진의 안위에 오히려 악영향을 가져올 수도 있었다. 김종경은 시체처럼 실려 나오는 남자들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다가 이윽고 결정을 내렸다. “돌아간다.” 준상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수련을 마친 후 집으로 돌아왔다. 집 앞에 진을 치고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의외로 집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흠...” 너무 깔끔한 철수에 준상은 다소 의문이 생겼지만 그로서는 김종경의 생각을 파악하기 어려웠고 그럴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준상에게 주목하고 있는 것은 김종경 부자 뿐만이 아니었다. 대규모 실종과 귀환, 그리고 돌아온 자들의 죽음으로 경찰들은 그야말로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격이었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들로 인해 수사가 미궁에 빠지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귀환자들에게 강도 높은 조사를 실시해야 한다는 여론이 경찰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준상은 그런 주위의 상황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그에게 당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해야 조금이라도 더 강해져서 앞으로의 퀘스트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점뿐이었고, 그런 점은 대부분의 생존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훅... 훅...” 김종경이 데려온 남자들과 벌어졌던 죽음의 산악구보를 통해 준상은 이미 산을 오르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명물처럼 인식되고 있었다. 하지만 당사자인 준상은 그런 점 따위는 신경 쓰지 않은 채 오늘도 산악 구보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처음 산악 구보를 시작할 때는 중턱도 못가서 체력이 다해 널브러졌지만... 지금의 준상은 전력질주로 단숨에 산을 오를 수 있을 정도로 체력이 늘어난 상태였다. “후우...” 정상에 오른 준상은 크게 심호흡을 하며 약간 흐린 산 아래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은 알지 못했지만, 그의 몸에서는 옅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며 재생력이 발휘되고 있는 상태였고, 이러한 과정을 거칠 때마다 준상은 한층 더 강해지는 중이었다. 간단하게 몸을 푼 준상은 다시 산 아래를 향해 달려 내려갈 준비를 했다. 하지만, 바로 그때. 주머니 안의 핸드폰에서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알림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준상은 얼른 손을 넣어 핸드폰 화면을 확인했다. 새로운 퀘스트가 도착했습니다 -10초뒤 퀘스트 수행을 위한 장소로 전송됩니다. 안전한 장소로 이동해 주십시오. (남은시간: 10초) “왔군.” 준상은 얼른 등산로에서 벗어나 사람의 시선이 닿지 않는 바위 뒤에 몸을 숨겼다. 아직 흐린 하늘을 바라보며 가볍게 심호흡을 하자, 이윽고 카운트다운이 끝나고 전송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전송이 끝나자, 준상은 자신이 어느 허름한 뒷골목에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건...” 지금까지 이니아를 제외하고는 지성을 갖춘 인물을 만나지 못했던 준상으로서는 갑자기 눈앞에 드러난 문명의 모습에 조금 놀랐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었다. 광산은 물론이거니와 좀비라는 존재 역시 결국 인간이라는 생명체가 존재한다는 증거나 다름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준상은 휴대폰으로 다시 메시지가 도착하자 얼른 확인해 보았다. 마을을 방어하십시오. :범람하는 암흑의 힘에 의해 움직이는 저주받은 군대가 마을을 침공하고 있습니다. 도시로부터 구원병이 올 때까지 마을을 지켜내십시오. [남은 시간:72시간 36분] [이 퀘스트는 여러 명의 인원이 동시에 참여합니다.] 다인 퀘스트. 그것도 단순히 적을 쓰러뜨리는 것이 아니라 한 지점을 방어하는 역할이다. 어떻게 보면 튜토리얼 당시 야수들에게서 모닥불을 지켜내던 일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지만, 이번에는 모닥불과 같은 절대적인 보호를 보장해 주는 수단이 없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음...” 준상은 일단 골목에서 벗어났다. 그러자 곧바로 어수선한 전장의 분위기가 피부로 전해진다. 허름한 옷을 입은 일단의 사람들이 가죽 갑옷을 받쳐 입은 몇몇 사람의 지시에 따라 목책을 손질하고 돌담을 보수하느라 여념이 없었으며, 다른 사람들도 문과 창문을 걸어 잠그고 무기를 손질하는 등 전투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준상은 말없이 그 모든 모습을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었다. 사람들은 갑자기 나타난 이방인의 모습을 흘깃거리면서도 준상의 분위기에 압도된 것인지 감히 말을 걸거나 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준상은 가만히 자신 외에 전송된 다른 사람이 없는지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저쪽 골목에서 석궁을 든 남자 하나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입고 있는 옷차림부터 시작해서, 스코프가 달린 카본제 석궁은 그의 모습을 더욱 이질적으로 만들어 주고 있었다. 가는 눈이 조금 가벼워 보이는 인상의 그 남자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이윽고 준상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조심스럽게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그쪽도 저와 같은 곳에서 온 것 같은데... 맞습니까?” “...” 준상이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는 석궁을 다른 손으로 옮겨 쥐고는 악수를 청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임서윤이라고 합니다.” “박준상입니다.” 임서윤은 준상의 모습을 살펴보더니 다시 말했다. “장비는... 그게 전부십니까?” “...”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준상의 모습에 서윤은 머쓱했는지 뒤통수를 긁으며 준상 옆에 서서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두 남자가 어색하게 서 있는데, 이번에는 청바지와 면티를 입고 그 위에 검은색 재킷을 받쳐 입은 단발머리의 여자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 역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준상과 서윤의 모습을 발견하고 성큼 성큼 다가와 인사를 건넨다. “안녕하세요.” 다소 쾌활한 그 모습에, 지금까지 준상의 기묘한 침묵에 짓눌려 있던 서윤이 반색하며 인사를 받았다. “안녕하십니까. 만나서 반갑습니다. 임서윤이라고 합니다.” 여자는 생긋 웃으며 서윤에게 대답했다. “반가워요. 저는 진세아라고 해요.” 진세아는 서윤과 인사를 나눈 후 준상에게 말을 걸었다. “그쪽의 무게 잡고 계신 분은?” “박준상입니다.” 그러자 진세아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내 생각 났다는 듯이 손뼉을 치며 말했다. “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귀환한 그분?” 서윤 역시 그 말을 듣고서는 반색하며 말했다. “아아... 어디서 들어본 이름이다 했더니, 역시 그랬군요.” 준상은 서윤의 추임새를 들으며 속으로 피식 웃었다. 들어보기는 개뿔. 모르긴 해도 저 서윤이라는 남자는 자신의 이름을 들은 적이 없으리라고 준상은 생각했다. 어쨌거나 세아라는 이름의 여자는 잠시 준상의 모습을 살펴보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장비는 그게 전부인가요?” “...”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다시 질문이 이어졌다. “마법? 아니면 맨손 격투?” “그쪽은?” “전 마법이에요. 화염 계열이죠.” 진세아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손바닥 위에 불꽃을 피워 보였다. 이 기묘한 세 명의 이방인을 흘깃거리던 마을 사람들은 진세아가 손바닥에서 불꽃을 피워 올리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사람들의 반응으로 미루어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곳에서도 마법 사용자는 그리 흔한 존재가 아닌 모양이라고 준상은 생각했다. 진세아는 자신의 능력을 선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준상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살짝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함께 싸우려면 서로의 능력이 뭔지 알아두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그제서야 준상은 대답했다. “맨손입니다.” “아아...” 진세아는 잘되었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원거리에서 싸워야 하는 그녀로서는 앞에서 든든하게 적을 막아줄 대상이 절실했기 때문이리라. 그렇게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다시 한 사람이 흐느적거리며 그들에게 다가섰다. 마치 유령과도 같은 그 움직임에 준상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당사자가 접근할 때까지 미처 알아차리지도 못할 정도였다. “안녕... 하세요.” 그녀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을 건넬 때까지도 인기척을 느끼지 못하고 있던 임서윤과 진세아는 그제서야 화들짝 놀라며 돌아보았다. 걸리적거리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긴 머리를 치렁 치렁 기르고 하얀 원피스를 입은 그녀는 사람들이 주목하자 부끄러운지 몸을 움츠리며 자신의 소개를 했다. “저는... 서유미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갑자기 품에서 천으로 둘둘 감긴 무언가를 꺼내더니 그것을 풀어 보였다. “무기는... 이겁니다.” 그녀가 꺼내 보인 무기는... 날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 식칼이었다. 00028 트롤러 ========================================================================= 임서윤이나 진세아는 물론이고 준상마저도 시퍼런 식칼을 꺼내들고 배시시 웃는 서유미의 모습에 흠칫 몸을 떨 수밖에 없었다. “...” 안 그래도 분위기 잡고 있는 준상 때문에 썰렁하던 분위기가 서유미의 등장으로 완전히 얼어 버렸다. 임서윤과 진세아는 또 다른 누군가가 나타나서 이런 분위기를 녹여 주기를 바랬지만, 아쉽게도 더 이상은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참다 못한 진세아가 그나마 말을 붙여 볼만한 임서윤에게 물었다. “석궁이 주무기인가요?” 그러자 임서윤이 반색하며 대답했다. “네.” 대답한 것 까지는 좋았는데, 아쉽게도 임서윤에게는 이제 막 만난 묘령의 아가씨와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나갈 능력이 없었다. 진세아는 단답형으로 짧게 대답한 뒤 자신을 계속 바라보고 있는 이 말주변 없는 새우눈 남자를 속으로 욕했지만, 결국 어쩔 수 없이 대화를 이어 나갈 수밖에 없었다. “화살 때문에 문제가 있지 않겠어요? 이번 퀘스트 상당히 길던데.” 삼십 몇분은 준비를 위한 시간이라고 생각하고, 실질적으로 퀘스트에 걸리는 시간은 3일. 얼마나 많은 적이 올지는 모르지만, 한 사람이 소지할 수 있는 수의 화살 가지고 그 시간을 버티기는 어렵지 않을까. 진세아가 묻고 싶었던 것은 바로 이런 점이었다. 물론 임서윤도 튜토리얼과 뒤이은 한번의 퀘스트에서 무사히 살아남은 자이기에 진세아가 묻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아, 그거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고는 갑자기 허공에서 커다란 캐비닛 하나를 꺼내 놓는다. “앗!” 갑작스런 캐비닛의 등장에 진세아는 물론이고 있는 듯 없는 듯 소리 없이 한 켠에 자리하고 있던 서유미까지도 크게 놀랐다. “이, 이건?” 임서윤은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특수기능인 인벤토리입니다. 꼴랑 2칸 짜리라 인벤토리라기보다는 퀵 슬롯에 가깝기는 하지만, 그래도 넣을 수 있는 물건의 크기가 제법 되기 때문에 굉장히 유용하죠.” 그렇게 간단하게 설명을 마친 임서윤은 캐비닛을 열었다. 그곳에는 여벌의 석궁과 헌팅 나이프, 그리고 석궁용 화살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창고 역할은 물론이거니와 강철 후판으로 보강해서 유사시에는 엄폐물로 쓸 수도 있습니다. 제법 훌륭하죠?” “우와...” 진세아는 간탄한 표정을 지었고, 준상에게는 좋은 참고가 되었다. 게다가 2칸 짜리 인벤토리라니... 인벤토리라고 다 같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 또한 준상은 알 수 있었다. 임서윤이 다시 캐비닛을 인벤토리에 집어넣자, 이들을 흘깃거리던 마을 사람들은 이제 이 이방인들이 보통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하게 인지한 모습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가죽을 겹쳐 만든 제법 튼튼해 보이는 갑옷을 입은 중년의 한 남자가 그들을 향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옅은 갈색의 부드러운 머리카락과 텁수룩하게 수염을 기른 북구 계통의 외모였지만, 어딘지 모르게 그리 믿음직스럽지 못한 인상의 남자다. 남자는 일행들을 살피다가 누구에게 말을 걸어야 할지 망설이기 시작했다. 준상은 척 보기에도 뭔가 분위기가 장난 아니고... 임서윤은 방금 전에 허공에서 캐비닛을 꺼낸 장본인인데다, 진세아는 아까 손바닥에 불꽃을 피워올리는 행동을 통해 자신이 마법 사용자임을 알렸다. 남자의 시선이 서유미에게로 옮겨가자, 그녀는 나름대로 호의의 뜻을 가득 담아 배시시 웃어 보였지만... 불행하게도 남자는 그 순간 등골에 차가운 기운이 스치고 지나가는 듯한 감각을 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얼른 눈을 피하고 말았다. 결국 누구 하나 쉽게 말을 걸어볼 만한 사람이 없다는 사실에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우물쭈물거리기만 하다가, 결국 그 모습을 보다 못한 진세아가 나서서 말을 걸었다. “무슨 일이죠?” 진세아의 말에 남자는 움찔 놀라며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저... 실례지만 여행자십니까?” 여행자라는 말에 진세아는 잠시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싶어 임서윤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임서윤이 대신해서 답했다. “맞습니다.” 임서윤으로서는 그냥 이방인 정도의 의미로 생각하고 대답한 것이었지만, 이 마을 사람들에게 있어 여행자라는 말은 고되고 위험한 외부 세계를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강자를 의미하는 말이었다. 남자는 임서윤의 대답에 반색했다. “그랬군요! 아, 정말 신의 보살핌이십니다. 정말 잘되었군요. 하하하!” 남자는 그렇게 혼자 뭐라뭐라 떠들다가 멀찍이서 흘깃거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달려가 이 기쁜(?) 소식을 전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뻘쭘해진 것은 임서윤이었다. “왜... 저러지?” 그의 혼잣말에 진세아가 대답했다. “여행자라는 말이 그 여행자가 아닌가 본데요.” “그런 거 같죠?” 그렇게 조금은 얼빠진 대화를 하다가 다시 대화가 끊기고 말았다. 조금 서먹한 상태로 이제는 왠지 부담스러워진 마을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한 켠에 멀뚱히 서있는데... 의외의 인물이 그 침묵을 깼다. “저...” 진세아와 임서윤은 차마 무시할 수 없는 묘한 박력에 식은 땀을 흘리며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서유미는 두 남녀의 시선을 받자 부끄럽다는 듯이 몸을 베베 꼬기만 할 뿐 막상 본론을 꺼내지 않고 있었다. 참다 못한 진세아가 먼저 물었다. “뭔가... 할 말이라도?” 그제서야 서유미는 자신의 손에 들린 식칼의 시퍼런 날을 만지작거리며 말문을 열었다. “저... 두 분은... 파티를 맺으신 건가요?” 그거 묻는데 왜 식칼은 만지작거리냐고 묻고 싶은 것을 꾹 눌러 참으며 진세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이제 막 처음 만난 사이인데요.” 그러자 서유미는 놀랍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대, 대단해요!” “뭐가요?” “처음 본 사람들끼리... 그렇게 자연스럽게... 대화를 할 수 있다니...” “...” 그리고는 어째서인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이는 그 모습이라니... 진세아는 어쩐지 이번 퀘스트가 상당히 고달파질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 때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임서윤이 말했다. “저... 파티 맺어 보신 분 있으십니까?” 진세아는 얼른 임서윤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대답했다. “아뇨. 그쪽은?” “저도 물론 없습니다.” “한번 시험해 볼까요? 함께 퀘스트에 입장하는 것 빼고 무슨 기능이 더 있는지 알고 싶은데.” “아, 저도 궁금하던 참입니다.” 진세아는 휴대폰을 열어 파티 신청을 하려다가 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흠칫 놀라고 말았다. “저, 저도...” “...” 싫다고 했다가는 들고 있는 식칼로 뭔가 저지를 듯한 불길한 느낌에 진세아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럼 신청할게요.” “감사합니다.” 뭐가 감사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임서윤은 진세아의 파티 신청을 받아들이며 희희낙락한 표정을 지었고, 서유미 역시 배시시 웃으며 기쁨을 표했다. 어쩐지 심난해지는 그들의 모습에 진세아는 고개를 저으며 휴대폰을 이리저리 조작해 보더니 이내 혀를 찼다. “아무래도 함께 퀘스트에 입장하는 것 말고 다른 기능은 없는 것 같네요. 달리 뭔가 찾은 게 있나요?” 그 말에 임서윤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저도 없습니다.” 그러자 아무도 묻지 않았음에도 서유미 역시 작은 목소리로 수줍게 대답했다. “저도...” 진세아는 한쪽에 서서 묵묵히 주위를 살피고 있는 준상에게 말을 걸었다. “준상씨라고 했죠? 혹시 뭔가 있을지 모르니 그쪽도 파티를 걸어두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어때요?” 준상은 고개를 돌려 진세아를 빤히 바라보았다. 진세아는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준상의 시선에 살짝 당황했다. “왜, 왜 그렇게 보는 거에요?” “...” 얼굴을 살짝 붉힌 채 몸을 움츠리는 그녀의 모습에 준상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좋을대로.” “...” 진세아는 어쩐지 굉장히 손해를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칫.” 하지만 자신이 먼저 제안한 일이었기에 그녀는 투덜거리면서도 파티 신청을 걸었고, 준상은 말 없이 그것을 수락한 후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뭔가 달라진 것이 있는지 확인해 보았다. 그러나 앞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준상 역시 달라진 점을 찾을 수가 없었다. 보통의 게임처럼 아이템 분배 같은 기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경험치 분배 같은 옵션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준상은 잠시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가 별 다른 점이 없음을 확인하자 바로 파티를 탈퇴해 버렸다. “어엇!” 갑자기 준상이 파티를 탈퇴했다는 메시지가 각자의 휴대폰에 전달되자 임서윤과 서유미는 물론이고 그에게 파티를 권유했던 진세아 역시 크게 당황했다. “아니, 왜...” 진세아는 준상에게 왜 파티에서 탈퇴했냐고 물으려 했지만... 바로 그 순간, 마을 중앙의 종탑에서 요란하게 종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댕댕댕댕댕! 그 급박한 소리가 울려 퍼지자 다소 느슨해져 있던 마을의 분위기는 곧바로 돌변했다. 드디어 적이 출현한 것이다. 준상은 잠시 사람들의 움직임을 살펴보더니, 지붕 난간을 손으로 잡고는 암벽 등반의 기술을 살려 순식간에 지붕 위로 올라갔다. “오오... 대단하군요.” 그의 날렵한 몸놀림에 임서윤이 탄성을 터뜨리자 말을 걸려다가 닭 쫓던 개꼴이 되어버린 진세아는 속으로 불만을 삼킬 수 밖에 없었다. 준상은 지붕 위로 올라가 적의 동태를 살폈다. “흠...” 목책 너머로 시선을 집중하자, 대여섯 마리 정도의 좀비가 비척거리며 다가오는 모습이 보인다. “좀비인가.” 그의 중얼거림을 들은 다른 사람들은 그제서야 살짝 안도의 기색을 내비쳤다. 어떤 적이 습격해 오는지 몰라 솔직히 좀 불안해 하던 참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좀비라고 해도 방심하면 죽는 건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전혀 모르는 상대와 마주치는 것보다는 나았다. “...” 준상은 잠시 주위를 살피다가, 이내 지붕 위에서 떨어져 내리더니 빠르게 목책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혼자 달려 나가는 그 모습을 보고 임서윤이 얼른 말했다. “저희도...” 하지만 그가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두 여자는 이미 준상의 뒤를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쩝...” 임서윤은 입맛을 다시며 그 뒤를 따랐다. 마을 사람들은 드디어 등장한 적의 모습에 긴장하며 목책 뒤에서 자신의 무장을 점검했다. 처음 모습을 드러낸 여섯 마리의 좀비는 느릿한 걸음으로 비틀거리며 움직이다가... 어느 정도 가까워지자 목책 뒤에 숨어 있는 사람들의 신선한 생명의 기운을 느끼자 갑자기 돌변하여 빠르게 달려오기 시작했다. “흠...” 목책 근처로 달려온 준상은 갑자기 돌변한 좀비들의 모습을 보자, 이들이 이제까지 자신이 상대해왔던 좀비들과는 뭔가 다른 종류의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전투 준비! 전투 준비!” 옆에서는 아까 자신들에게 말을 걸어왔던 중년 남자가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고는 그렇게 외치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준상은 긴장으로 굳어진 마을 사람들의 모습을 흘깃 보더니... 그대로 훌쩍 목책을 뛰어 넘었다. “어엇!” 사람들은 갑자기 거대한 무언가가 목책을 뛰어 넘어 밖으로 나가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준상은 그렇게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목책을 향해 돌진해 오는 좀비들을 향해 달려나갔다. “오픈 숄더 차지.” 조용한 그의 목소리에 반응해 카드 슬롯에 숄더 차지 카드가 장착되자, 준상은 가장 앞서 달려오는 좀비를 향해 숄더 차지를 발동했다. ============================ 작품 후기 ============================ 남은 시간 : 72시간 06분 00029 트롤러 ========================================================================= 후왁! 준상은 순간 자신의 눈앞에서 공기가 둘로 갈라지는 기묘한 체험을 했다. 지금까지 숄더 차지를 여러번 사용하기는 했어도 이런 식으로 공기를 가르는 느낌은 처음이었다. 그래서일까. 좀비의 몸이 어깨와 와닿는 순간, 준상은 이 공격이 이전과는 다른 효과를 내리라는 것을 알았다. 퍼억! 그것은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준상이 앞으로 달려 나가고 어깨를 내미는 동작을 보이는가 싶더니 마치 화살처럼 한 단계 더 가속한다. 거기까지만으로도 지켜보던 사람들로서는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터뜨릴 만한 모습이었지만, 그렇게 뻗어나간 준상의 몸과 마주친 순간 좀비의 몸이 마치 폭발하듯 오체분시되어 흩어져 버렸다. “저... 저....” 임서윤은 손가락을 들어 준상을 가리키며 그런 의미 불명의 소리만 흘리고 있었으며, “...” 그나마 진세아는 먼지가 들어가는 것도 모르게 입만 딱 벌린 채 소리를 내지도 못했다. “아아...” 반면 서유미는 얼마나 갈아댔는지 시퍼렇다 못해 번쩍이는 식칼을 양손으로 붙잡은 채 황홀한 표정으로 준상의 뒷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좀비들을 때려잡고 여기까지 온 세 사람의 반응이 이 정도이니 다른 사람들이야 말할 필요도 없는 일. 하지만 준상의 활극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오픈 2연격.” 숄더 차지 카드를 2연격 카드로 변경한 준상은 방향을 틀어 자신에게로 향하는 좀비의 무릎에 로우킥을 날렸다. 군화의 단단한 앞부리에 맞은 것도 아니고... 준상의 종아리 부분에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좀비의 무릎은 힘없이 꺾어지며 그대로 끊어져 버렸다. 기우뚱! 한쪽 다리가 그렇게 무지막지한 킥에 의해 끊겨 나가자 좀비의 몸은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그리고 그렇게 낮아진 좀비의 머리 위로 준상의 주먹이 내려 꽂혔다. 콰직! 격파 시범을 보이듯이 머리 뒤에서 귀 뒤를 스쳐 지면을 향해 수직으로 내려꽂힌 준상의 주먹은 좀비의 관자놀이를 부수다 못해 마치 못을 박듯이 좀비의 머리를 지면에 박아 넣었다. 준상이 한쪽 무릎을 꿇은 자세가 되자 그 틈을 노리고 다시 좀비 하나가 허공으로 몸을 날려 덮쳐 왔다. 호쾌한 일격 뒤에 찾아온 위기 상황에 사람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지만, 준상에게는 아직 남은 카드가 있었다. 숄더 차지에서 2연격으로 카드를 교체한 후 아직까지 사용하지 않은 상태였던 것이다. “흡!” 준상은 몸을 일으키며 자신을 향해 몸을 던지는 좀비를 향해 2연격을 가했다. 첫 번째 주먹은 좀비의 입에 적중했다. 순간 좀비의 누런 이빨이 부서져 허공에 날리며 입이 귀까지 길게 찢어져 버렸고, 여기에 또다시 두 번째 주먹이 작렬했다. 강렬한 주먹은 좀비의 콧잔등을 으스러뜨리며 밀고 들어가 그대로 입 위쪽의 머리를 마치 잘라내듯 떼어내 버렸다. 하지만 순식간에 세 마리의 좀비를 해치우는 동안에도 나머지 좀비들은 거의 맹목적이다 싶은 움직임으로 목책을 향해 달려갔다. 준상은 얼굴을 찌푸리며 몸을 돌려 그 좀비들 역시 해치우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허공을 찢고 붉은 화염의 화살이 날아가 좀비의 몸을 불태웠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또 한 마리의 좀비는 소리 없이 날아온 화살을 머리에 꽂고 허우적거리다가 쓰러졌으며, 마지막 좀비는 어느 틈엔가 목책을 넘어온 흰 원피스의 여인에 의해 해체되고 있었다. “우후후...” 재미있다는 듯이 팔 다리를 하나씩 자르고 바닥을 꿈틀거리는 좀비의 목을 톱질하듯이 썰고 있는 여인, 서유미의 모습은 어떤 의미에서는 준상보다도 강렬한 임팩트를 주고 있었다. “...” 준상은 서유미의 모습을 보고 잠시 얼굴을 찌푸리다가 천천히 몸을 돌려 자신이 쓰러뜨린 좀비들의 머리를 부수고 그 안의 내용물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시드를 찾기 위한 당연한 행동이었지만... 묵묵히 좀비들의 머리를 깨부수고 그 속에 손을 넣어 뒤적거리는 준상의 모습에 마을 사람들은 서유미와 그가 같은 부류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어쨌거나... 좀비들의 머리 속을 뒤져 봤지만 아무것도 얻을 수 없었다. 서유미는 사지가 잘린 채 버둥거리는 좀비를 가지고 놀다가 준상이 목책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자 그제서야 머리를 반으로 갈라 그 안을 확인했다. “으음... 허탕이네요.” 아쉬운 듯한 표정을 짓던 서유미는 준상의 뒤를 따라 목책 안으로 들어가려다가 진세아와 임서윤이 쓰러뜨린 좀비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을 보고는 웃으며 그 둘에게 말했다. “저거... 제가 확인해 드릴까요?” “...” 진세아와 임서윤은 그녀의 과도한 친절이 못내 부담스러웠지만 마을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준상이나 서유미처럼 당당하게 좀비의 머리를 부수고 그 안의 내용물을 확인하기도 난처한지라 그냥 선선히 허락할 수 밖에 없었다. 두 사람의 허락을 받자 서유미는 콧노래마저 흥얼거리며 좀비들의 머리를 갈라 내용물을 확인했다. 하지만 그런 서유미의 노고에도 불구하고 두 좀비의 머리 속에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죄송해요...” 진세아는 눈물마저 글썽이며 자신을 바라보는 서유미의 모습이 너무나도 부담스러웠지만, 차마 내색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괘,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죠.” 어쨌거나... 네 사람의 활약으로 순식간에 좀비들이 쓰러지자 마을 사람들의 표정에는 희망이 담기기 시작했다. 특히, 가장 먼저 뛰쳐나가 좀비들을 박살내 버린 준상은 그들에게 있어 공포와 경의라는 기묘한 두 가지 감정을 갖도록 만들었다. 물론... 그래봐야 준상에게는 별 감흥이 없는 일이었지만 말이다. 준상은 주위의 상황이 잘 내려다보이는 지붕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어쩐지 한 마리 고고한 늑대를 연상시키는 그 모습에 진세아는 혀를 찼다. “쳇... 같이 놀기 싫다 이건가 보네.” 그러자 옆에서 조심스럽게 하얀 손수건으로 식칼을 닦고 있던 서유미가 그 말을 받았다. “하지만... 아깐 정말 멋있었어요.” “...” 또 무슨 엉뚱한 소리를 하려고 이러나 싶어 빤히 바라보는 진세아에게 서유미는 다시 이렇게 말했다. “자르는 것도 아니고... 사람의 몸을 그런 식으로 두들겨 부술 수 있다니... 정말 대단하지 않아요?” “그야 뭐...” 좀비라는 건 결국 사람의 시체가 되살아난 몬스터를 말한다. 부패되기는 했어도 사람의 몸이기는 마찬가지라는 얘기인데, 그게 그런 식으로 박살이 날 수도 있다는 사실에 진세아 역시 충격을 받은 것은 사실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힘이 세야 그런 일이 가능한 것일까. 아무래도 서유미는 다른 부분에 감탄하고 있는 것 같지만 말이다. 그렇게 약 5분 정도 지났을까. 다시금 종탑에서 종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한다. 그 소리를 듣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숲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음...” 준상은 얼굴을 찌푸렸다. 아까와는 달리... 제법 많은 수의 좀비들이 숲 너머로부터 몰려오는 것을 확인한 탓이다. 이십? 아니... 더 많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 뒤로도 숲 너머에서 무언가가 꾸역 꾸역 다가오고 있음을 준상은 알 수 있었다. “후...” 손목을 푼 준상은 지붕 위에서 뛰어 내린 후 곧장 목책을 뛰어 넘어 밖으로 나갔다. 아까는 갑자기 뛰쳐나가는 그의 모습에 기겁했던 사람들도 이번에는 묘한 기대감을 품은 채 그의 탄탄한 등근육을 말없이 응시하고 있었다. 준상이 목책 앞에 버티고 서자, 어느 새인가 소리도 없이 목책을 넘어온 서유미가 배시시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같이... 가요.” 지켜보던 사람들은 이 상황에서 왜 수줍은 듯이 얼굴을 붉히는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이 와중에 그녀에게 그런 일을 서슴없이 물어볼 만큼 담이 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준상은 서유미를 흘깃 돌아본 뒤 다시 앞을 바라보며 말했다. “죽지 않을 자신이 있다면.” 그러자 서유미는 웃음소리로 답했다. “우후후후...” 서유미의 웃음 소리를 들으며 준상은 앞으로 달려 나갔다. “오픈 숄더 차지.” 그리고 아까와 마찬가지로 숄더 차지를 카드 슬롯에 장착하고는 곧바로 포탄처럼 쏘아져 나갔다. 다시 한번 눈앞의 공기가 갈라지는 느낌이 전해져 온다. 준상은 아까의 그 감각이 착각이 아니었음을 확인하며 좀비의 몸을 분쇄했다. “오픈 2연격.” 그리고 곧바로 2연격으로 카드를 교체한 후, 괴성을 지르며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두 마리의 좀비의 머리에 강렬한 훅을 하나씩 선사했다. 퍼걱. 빡! 그렇게 준상이 앞선 세 마리를 순식간에 정리하는 사이에 서유미는 마치 유령과도 같은 움직임으로 소리 없이 움직이며 좀비들의 머리를 자른다. 움직임의 효율성만을 놓고 보자면, 오히려 준상보다도 효과적으로 적을 처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두 사람의 무시무시한 위력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지나친 좀비 몇 마리가 목책을 달려드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쳇...” 어쩐지 주역의 자리를 빼앗긴 듯한 느낌에 진세아가 혀를 차며 마법을 발사하자, 그 옆에서 화살을 날려 좀비의 머리를 정확히 꿰뚫어 버린 임서윤이 웃으며 말했다. “하하... 저 두 사람, 대단한데요.” 임서윤은 별 생각 없이 그렇게 감탄했지만, 진세아는 준상과 서유미의 모습에 한편으로는 걱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게요. 하지만 저런 식으로 처음부터 나서면 금새 지쳐 버릴텐데... 어쩌려는 건지.” 그 말에 임서윤은 화살을 재장전하며 대답했다. “뭔가 생각이 있으니 저러는 거겠죠. 어쩌면 레벨 업을 염두에 두고 있는 건지도 모르고.” “아... 그게 있었지 참.” 누가 먼저 그렇게 하자고 제안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네 사람의 움직임은 제법 유기적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가장 앞에서 준상이 일차로 적을 분쇄하고, 그런 준상을 서유미가 보조한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이 놓친 나머지 좀비들은 진세아와 임서윤이 목책에 닿기 전에 원거리에서 처리하는 식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달려드는 좀비의 수가 점차로 많아지자 준상은 아무래도 손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흠...” 결국 준상은 나중을 위해 숨겨 두려던 카드를 꺼내들기로 했다. “쌍늑.” 그의 조용한 목소리에 반응하여 도깨비불이 카드 슬롯에서 빠지고 대신 팀버 울프가 그 자리를 채웠다. 카드가 장착되자, 준상은 다시 입을 열었다. “오픈 크림슨 울프, 오픈 팀버 울프.” 그러자 그의 눈앞에서 작은 빛과 함께 붉은 털의 늑대와 잿빛 늑대가 각각 한 마리씩 모습을 드러낸다. “와아!” 준상을 뒤에서 보조하고 있던 서유미는 갑자기 준상의 좌우에 모습을 드러낸 커다란 두 마리 늑대의 모습에 탄성을 터뜨렸고, 그것은 뒤에서 정신없이 좀비들을 요격하고 있던 진세아와 임서윤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오! 소환이라니!” 소환이 끝나자 벼락 같이 좀비들에게 달려 들어 목을 물어 뜯는 늑대들의 모습에 감탄하며 임서윤이 소리를 지르자, 진세아 역시 놀란 표정으로 그 말을 받았다. “저런 것도 가능한 건가요?” “가, 가능하니까 소환한 거 아닐까요?” “...” 하지만 준상은 다른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든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전투에 계속 집중했다. 자신을 향해 몸을 날리는 좀비의 머리를 붙잡아 바닥에 내동댕이친 후 그 머리를 사커킥으로 날려 버린다. 그리고 다시 옆에서 이빨을 들이미는 좀비의 입을 팔꿈치로 쳐서 뭉개버린 후 정수리에 정권을 질러 박살내 버렸다. 그렇게 눈앞의 적을 정리하던 준상은, 문득 숲속에서 좀비와는 다른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크림슨 울프보다도 거대한 육체, 그리고 입가에 비어져 나온 거대한 송곳니. 그것은 바로 이전에 튜토리얼에서 마주친 바 있었던 검치호의 좀비였다. 00030 트롤러 ========================================================================= 야수라고 부르기도 난감한, 그야말로 괴수라는 말이 어울리는 거대한 검치호의 좀비가 모습을 드러내자 전투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준상은 좀비들은 두 마리 늑대와 서유미에게 맡긴 채, 천천히 검치호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검치호 역시 낮게 으르렁거리며 준상을 향해 다가선다. -크와앙! 먼저 움직인 쪽은 검치호였다. 빠르게 앞으로 나서며 거대한 앞발로 준상을 후려친 것이다. 어지간한 나무도 단숨에 부러뜨릴 만한 위력을 지닌 일격이었지만, 준상은 그것을 피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주먹을 뻗어 검치호의 앞발을 후려쳤다. 뻐걱! 체중을 실은 준상의 훅이 검치호의 앞발과 마주치는 순간, 격렬한 충격음이 울려퍼졌다. 결과는 준상의 승리였다. -크르르... 검치호는 주먹과 맞부딪혔던 앞발을 절뚝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준상은 감히 자신에게 발톱을 드러낸 괴수가 물러나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보지 못했다. 검치호는 감히 겁도 없이 자신에게 달려들자 입을 크게 벌려 날카로운 송곳니를 그의 몸에 박아 넣으려 했지만, 미처 입을 채 다 벌리기도 전에 날아든 준상의 주먹이 검치호의 콧잔등을 두들겼다. 퍼퍽! 순식간에 검치호의 콧잔등은 처참하게 뭉개졌지만, 이미 고통을 모르는 좀비가 되어버린 검치호는 자신의 얼굴이 뭉개지는데도 불구하고 준상의 몸에서 흐르는 피를 만끽하겠다는 일념으로 덤벼들었다. 그런 검치호의 턱에 다시금 준상의 주먹이 날아들었다. 아래에서 위로 쳐올리는 주먹에 명중된 순간, 검치호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고개가 번쩍 쳐들렸고, 여기에 다시 준상의 체중이 실린 어퍼컷이 작렬하자 검치호의 거대한 몸은 그대로 공중으로 떠올랐다. “아...” 그 거대한 몸이 중력을 무시한 채 공중으로 떠오르자 사람들은 잠시 싸움조차 잊고 그 장대한 광경을 눈으로 쫓았다. 하지만 다른 모든 사람들의 눈이 자신이 해놓은 이 터무니 없는 일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동안, 당사자인 준상은 전혀 다른 행동을 취하고 있었다. “오픈 강타.” 그의 입에서 말이 떨어지는 순간, 카드 슬롯에서 2연격이 빠지고 그 자리에 강타가 자리 잡았다. 그리고, 카드가 장착되자 준상은 곧바로 힘을 모으기 시작했다. 1초, 2초, 그리고 3초. 온몸의 힘이 불끈 쥔 주먹에 결집되자 준상은 그 모든 힘을 이제 허공을 날아 지면으로 추락하고 있는 검치호를 향해 내뿜었다. 꽈앙! 마치 막대한 양의 폭약이 폭발하는 듯한 굉음과 함께 그의 주먹으로부터 강렬한 힘이 분출되어 검치호의 육신을 문자 그대로 분쇄해 버렸다. 순식간에 목 아래 상반신이 형체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검치호는 하반신과 머리 만이 바닥에 힘없이 떨어져 내렸다. “저, 저, 저게...” 순간 사람들은 자신이 뭔가 헛것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바, 방금 그건 도대체?” 임서윤은 화살을 쏘다 말고 얼이 빠져서 그렇게 중얼거렸지만, 진세아는 그가 옆에서 그런 말을 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한 채 입만 쩍 벌리고 있는 중이었다. 하다못해 서유미조차 눈을 비비며 자신의 볼을 꼬집어 보고 있는 상황이니 말해 무엇하겠는가. 하지만 당사자인 준상은 풀 차지의 강타를 사용한 후유증으로 인해 파열되어 버린 근육들을 재생시키느라 잠시 꼼짝도 못한 채로 재생이 끝나기를 기다리고만 있었다. 준상은 약 오초 가량의 시간이 더 지나서야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지만, 그 와중에도 계속 몸에서 아지랑이와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후우...” 그가 숨을 몰아쉬며 주위를 돌아보자 어느새 대부분의 좀비들이 쓰러져 있었고, 남은 좀비들 역시 늑대들과 서유미에 의해 쓰러지는 중이었다. 다시 숲으로 시선을 돌렸지만, 새로운 무언가가 나타날 조짐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준상은 천천히 바닥을 뒹굴고 있는 검치호의 머리로 다가가 그 머리를 부수고 안을 헤집었다. 그러자 손 안에 시드 하나가 잡힌다. 준상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시드를 확인해 보았다. 아이템정보 명칭 : 안티파이어 시드 레벨제한 : 없음 종류 : 시드 등급 : Common 효과 : 불 저항 5% 설명 : 불에 대한 저항력을 높여주는 시드입니다. Seed 슬롯이 있는 아이템이나 카드에 장착하여 능력을 강화할 수 있습니다. 한번 장착한 시드를 분리하기 위해서는 특수기능 ‘분리’가 필요합니다. [이 시드를 아이템이나 카드에 장착하시려면 이곳을 누르십시오.] “흠...” 준상은 이 시드를 어디에 끼워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피칠갑(R) 카드와 강력한 곰의 영혼 카드는 슬롯이 모두 가득 찬 상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해답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광전사와 미친개 콤보 가운데 중복되는 카드는 피칠갑을 제외하면 광폭이 유일했기 때문이다. 새로 얻은 시드를 광폭 카드에 장착하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어느새 전투는 끝나 있었다. 준상은 자신에게로 돌아온 늑대 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다음 천천히 좀비들의 머리 속을 뒤지기 시작했고, 서유미가 그 뒤를 따랐다. 누가 어떤 좀비를 쓰러뜨린 것인지 확인하는 건 무척이나 쉬웠다. 준상이 쓰러뜨린 좀비는 어딘가가 부러지거나 박살이 나 있었다. 서유미는 대부분 목을 깔끔하게 잘라냈고, 불에 탄 좀비는 진세아, 머리에 화살이 꽂힌 좀비는 임서윤의 작품이다. 제법 많은 수의 좀비를 쓰러뜨렸지만, 그 가운데 시드를 가지고 있는 것은 진세아가 쓰러뜨린 좀비 가운데 하나 뿐이었다. “득템... 축하 드려요.” 검붉은 좀비의 체액을 뒤집어 쓴 채로 배시시 웃으며 자신에게 시드를 건네는 서유미의 모습에 진세아는 잠시 이걸 받아도 좋은 건지 고민해야만 했다. 목책 안에서 하는 일 없이 구경만 하고 있던 사람들은 준상과 서유미가 목책 안으로 돌아오자 그제서야 밖으로 나와 쓰러진 좀비들의 잔해를 모아 불에 태우기 시작했고, 진세아와 임서윤은 그런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잠시 목책 주위에서 대기했다. 준상이 다시 지붕 위에 자리를 잡고 앉자, 어느 틈엔가 다가온 서유미가 그에게 나무 컵 하나를 건네 주었다. “...” 이게 뭔가 싶어 빤히 바라보자 서유미는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맥주... 라고...” “...” 컵을 받아들고 보니 미적지근한 것이 그다지 맛이 있을 것 같지가 않다. 하지만 강타를 사용한 후유증 때문에 적잖이 목이 말라 있던 준상은 나무 컵 안에 든 이곳의 맥주를 꿀꺽 꿀꺽 들이켰다. “...” 맛 없다. 미적지근한 건 둘째치고 김도 다 빠져서 차마 맥주라고 부르기가 민망할 정도다. 준상은 비어버린 나무 컵을 되돌려 주었지만, 서유미는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아니,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식칼을 만지작거리며 그를 흘끔흘끔 쳐다보고 있었다. 도대체 이 여자가 왜 이러는 걸까. 준상은 왠지 심란해지는 마음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그녀에게 물었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라도?” 그러자 서유미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저기... 괜찮으시다면...” “...” “늑대들 좀 쓰다듬어 봐도 될까요?” 어째서인지는 모르지만 준상은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야 말았다. 준상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자 서유미는 환호성을 지르며 지붕에서 펄쩍 뛰어내리더니 그 밑에서 웅크리고 앉아 있던 늑대들에게 다갔다. “예쁘지. 우르르르... 쫑쫑.” 그리고 의미불명의 소리를 중얼거리며 조심스럽게 붉은 털을 지닌 크림슨 울프의 머리에 손을 가져갔다. 크림슨 울프는 어쩐지 귀찮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그 손길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우흐흐흐...” 크고 아름다운 붉은 털의 늑대가 자신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치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노닥거리고 있는 동안에도 좀비의 잔해를 수거하는 작업은 계속되었고, 그 일이 끝마칠 즈음에는 이미 해가 점차 기울고 있었다. 가만히 지붕 위에서 주위를 살펴보고 있는 준상에게 지금껏 목책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진세아가 돌아와 말을 걸었다. “자경단장이 목욕물을 준비해 준다는데 어떻게 할래요?” 준상이 슬쩍 시선을 돌려 바라보자, 그녀는 당장이라도 가서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싶다는 표정이었다. 하긴, 본래 그들이 있어야 할 세상에서는 언제 퀘스트가 발동될지 모르니 목욕도 제대로 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준상이야 넉넉한 공간의 인벤토리가 있으니 차라리 다행이지만, 그나마도 없는 이들은 목욕은커녕 샤워조차도 제대로 하기 힘든 것이 사실이었다. 때문에 자경단장이 목욕물을 준비했다는 말에 이렇게 반색할 수밖에 없었다. “먼저 하시죠.” 준상이 선선히 순번을 양보하자 진세아는 굉장히 기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럼 여자들 먼저 하고 올게요. 수고하세요.” “네.” 서유미는 늑대들과 떨어지기 싫어하는 기색이었지만, 진세아는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굉장한 기세를 발휘해 그녀를 끌고 가버렸다. 여자들이 목욕을 하러 가자 이번에는 임서윤이 어디서 났는지 따뜻한 빵 한 조각과 스프 비스무리 한 것을 준상에게 가져다 주었다. “식사 하시죠.” “감사합니다.” 준상은 그에게서 빵과 스프를 받아 들고 살짝 맛을 보았다. 향신료에 적응된 현대인의 미각을 만족시키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한 맛이었지만, 허기를 채우기에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임서윤은 준상의 옆에 앉아 음식을 먹으며 마을을 돌아보다가 다시 말했다. “이곳은 도대체 어떤 곳일까요.” “...” 물론 준상이 어떤 대답을 하리라 생각하고 건넨 질문은 아니었다. 그냥 답답한 김에 입에서 나온 혼잣말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결국 임서윤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겠는지 아래로 내려가 마을 사람들을 붙잡고 이것 저것 물어보기 시작한다. 여자들이 목욕을 마치고 돌아온 것은 제법 긴 시간이 지나고 난 뒤의 일이었다. 살짝 물기를 머금은 피부와 머릿결, 그리고 상기된 얼굴을 보니 제법 만족스러운 목욕이었던 모양이다. “자, 이젠 우리가 지켜볼테니 남자들도 가서 씻어요.” “후... 이게 도대체 얼마만의 호사인지 모르겠군요. 하하...” 임서윤은 옳다구나 하고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준상은 그냥 못 들은 척 주위를 살피고만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다 못한 진세아가 다시 준상에게 뭐라고 말을 하려는데... 문득 준상이 벌떡 일어나더니 곧바로 목책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한다. “젠장...” 그 행동이 의미하는 바는 결국 하나 뿐이었기 때문에 임서윤은 목욕하러 가려다 말고 다시 발걸음을 돌려 목책으로 달려갈 수밖에 없었다. “에이씨... 이제 막 목욕했는데.” 진세아는 그렇게 투덜거리며 그 뒤를 따랐고, 서유미는 그 와중에도 늑대들에게 달라붙어 머리를 쓰다듬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들이 목책을 향해 달려가자 아무 피해 없이 하루를 무사히 넘겼다는 안도감에 젖어있던 마을 사람들 역시 얼른 정신을 추스르고 전투 준비를 서두른다. 종이 울리고, 마을 사람들이 허둥지둥 무장을 갖추는 동안 준상은 천천히 목책 앞으로 나섰다. 아무래도 오늘 밤은 무척이나 길어지겠다는 생각을 떠올리며 준상은 천천히 손목을 풀었다. 그러자 숲 속에서 마치 환영처럼 붉은 눈동자가 하나 둘씩 그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순간 그 모습을 지켜보던 마을 사람들은 마른 침을 꿀꺽 삼킬 수 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에 모습을 드러낸 좀비의 수는 대충 살펴보기에도 세 자리 수를 가뿐하게 넘어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00031 트롤러 ========================================================================= 준상의 곁으로 두 마리의 늑대가 다가온다. 그 와중에 붉은 털의 늑대에게 이상한 여자가 달라붙어 있는 것은 덤이다. 까드드득... 그가 주먹을 힘주어 쥐자, 기다렸다는 듯이 좀비들이 괴성을 지르며 달려든다. 이미 어두워진 탓일까. 좀비들은 더욱 흉폭한 기세로 준상과 그의 양 옆에 선 늑대들을 향해 쇄도했다. 그리고, 뻐억! 마치 커다란 해머와도 같은 준상의 주먹이 앞장 선 좀비의 머리를 부수는 것을 신호로 전투가 시작되었다. “씨이... 더 쓰다듬고 싶었는데...” 붉은 털의 늑대가 좀비들을 향해 달려들자 그때까지도 그 털을 쓰다듬느라 정신을 못차리던 서유미가 투덜거리며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좀비를 향해 식칼을 대각선으로 내리 그었다. 그 간결한 동작에 의해, 그녀에게 몸을 날리던 좀비는 대각선으로 머리가 잘린 채 그대로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감히... 감히...” 서유미는 좀비들을 향해 웃으며 중얼거렸다. “나와... 쫑이의 시간을 방해하다니...” 주인 허락도 없이 벌써 이름까지 붙인 모양이다. 준상이나 당사자인 크림슨 울프가 그 말을 들었다면 대번에 얼굴을 구겼겠지만, 불행히도 서유미의 말을 들은 것은 그녀를 향해 쇄도하는 좀비들 뿐이었다. 하지만 좀비들은 그 말을 다른 이에게 옮길 수가 없었다. 말을 못하는 거야 둘째로 치더라도 분노한 서유미의 식칼에 썰려 나가며 바닥을 뒹구는 것을 끝으로 더 이상 움직일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설렁 설렁 노는 느낌으로 전투에 임했던 그녀였지만, 지금은 그야말로 유령과도 같은 움직임으로 좀비들을 썰어 버리고 있었다. “무, 무섭군요.” “그러게요.” 하지만 그런 서유미의 각성(?)이 더해졌어도 그 전부를 처리하기에는 달려드는 좀비들의 수가 너무 많았고, 이내 십여 구에 이르는 좀비들이 준상과 서유미의 벽을 뚫고 목책을 향해 달려 들었다. 진세아와 임서윤은 최선을 다해 그들을 저격했지만, 진세아의 화염 화살 스킬은 쿨타임 때문에 이런 식으로 다수의 적을 상대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았고, 임서윤의 석궁 역시 재장전이라는 단점이 있었다. 결국 이번에는 목책 뒤에서 긴장하며 숨을 죽이고 있던 마을 사람들 또한 힘을 합쳐 좀비들을 상대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목책 덕분에 그나마 버틸만 했지만, 살아 남아 목책에 도달하는 좀비의 수가 점점 늘어나자 상황은 점점 위태로워졌다. 바로 그때, 진세아가 임서윤을 향해 말했다. “이봐요!” “네?” “나 지켜줄 수 있어요?” “네?” 임서윤은 가뜩이나 정신 없는 판국에 이 여자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싶어 재장전을 하다 말고 그녀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뭘 멍하니 있는 거에요!” “아니, 그게...” “나 지켜 줄 수 있냐고요!” 왜 그런 걸 묻는 거냐고 반문하고 싶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임서윤은 일단 그녀의 질문에 대답부터 했다. “지켜 드리겠습니다!” 그러자 진세아는 씩 웃더니 목책 너머의 좀비들을 바라보았다. “칫... 모처럼 목욕까지 했는데...” 그렇게 중얼거린 진세아는 목책을 향해 손을 뻗으며 힘을 모으기 시작했다. 순간, 임서윤은 그녀의 몸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것을 깨달았다. “하앗!” 진세아는 손을 뻗은 채 눈을 감고 무언가를 중얼거리더니 가벼운 기합 소리와 함께 모았던 힘을 방출했다. 그러자, 목책 앞으로 마치 분수대를 연상시키는 불의 벽이 솟아오른다. 그렇게 하나의 벽이 솟아오르는가 싶더니, 다시 그 바깥쪽으로 불의 벽이 차례로 솟아올라 목책에 달라붙은 좀비들을 태우기 시작했다. 총 세 번에 걸쳐 솟아난 불의 벽은 목책 바깥쪽을 완전히 감싸는 형태로 완성되었다. “으으으...” 진세아는 손을 뻗은 채 얼굴을 찌푸렸다. 불의 벽에 갇힌 좀비들의 몸이 타는 냄새가 그녀의 주위로 흘러 들어 왔기 때문이다. 사람의 뼈와 살이 타는 그 냄새가 몸에 배길 생각을 하니 진세아로서는 절로 소름이 돋았지만, 좀비들을 막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대, 대단하군요.” 눈앞에서 피어올라 좀비들을 태워버리는 불의 벽을 보고 임서윤이 감탄하자 진세아는 투덜거리며 대답했다. “나 이 기술 쓰면 꼼짝도 못하니까 서윤씨가 지켜 줘야 해요.” “아... 그런 거라면 문제 없습니다.” 어쩐지 조금 기대가 무너진 느낌이라 맥이 빠지긴 했지만, 사람 좋은 임서윤은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의 앞에서 온몸에 불이 붙었으면서도 목책을 향해 달려드는 좀비들을 거꾸러 뜨렸다. 진세아가 불의 벽이라는 필살기를 꺼낸 덕분에 목책 쪽의 방어가 견고해지자, 그 바깥에서 싸우던 준상과 서유미는 더 이상 뒤가 뚫리는 것을 걱정할 필요 없이 전력으로 좀비들을 상대할 수 있게 되었다. 준상은 자신에게 달려드는 좀비의 정수리를 위에서 내려찍으며 그 반동으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공중에서 몸을 한바퀴 회전시키며 군화발로 뒤이어 달려오는 좀비의 어깨를 내리찍어 주저앉힌 후, 정권을 질러 머리를 부숴 버렸다. “오픈 숄더 차지.” 쿨타임에 들어간 2연격 대신 숄더 차지를 카드 슬롯에 넣은 준상은 한 무더기로 쏟아져 나오는 좀비들을 향해 포탄처럼 쏘아져 나갔다. 퍼퍽! 떼를 지어 덤벼들던 좀비들은 준상의 강렬한 숄더 차지에 직격 당하자 마치 볼링핀처럼 흩어져 나뒹굴었고, 그렇게 쓰러진 좀비들은 뒤이어 몸을 날린 늑대들에 의해 목이 물어 뜯기며 움직임을 멈추었다. “오픈 2연격.” 꾸물거리며 바닥을 기는 좀비의 머리를 군화발로 짓밟은 준상은 숄더 차지 카드 자리에 다시 2연격을 장착했다. 그리고 양팔을 옆구리에 붙인 채 몸을 낮추어 좀비들의 허우적거리는 팔을 피하며 두 손으로 번갈아 훅을 휘둘렀다. 죽은 지 오래되어서일까. 심각하게 부패되어 있던 좀비는 옆구리에 준상의 주먹이 꽂히자 그대로 허리가 접히며 몸이 기울어졌고, 그렇게 접혀진 허리에 다시 한 번 펀치가 작렬하자 아예 허리가 끊어지고 말았다. 준상은 바닥으로 떨어지는 좀비의 상반신을 군화발로 으깨어 마무리한 후, 또다시 그를 향해 덮쳐 오는 좀비의 허우적거리는 팔을 피해 그 얼굴에 카운터를 작렬시켰다. 으직! 정확히 안면에 작렬한 준상의 카운터는 좀비의 코를 으스러뜨리는 것도 모자라 그대로 머리 뼈를 통째로 박살나며 지나가 버린다. 폭풍처럼 한 무리의 좀비를 박살낸 준상은, 문득 어두운 와중에도 한쪽에서 새하얀 원피스를 입은 채 식칼을 휘두르고 있는 서유미에게로 시선이 갔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녀의 몸 주위에서 퍼져 나온 하얀 빛에 눈길이 갔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호오...” 저 흰빛은 분명히 레벨 업의 빛. 하긴 이 정도의 전투라면 빠른 레벨 업도 당연한 일이다. 서유미는 레벨 업의 빛이 자신의 몸을 타고 흐르자 얼른 휴대폰을 꺼내더니 식칼을 쥐지 않은 한 손으로 조작을 시작했다. “쫑이 나와라... 쫑이 나와라...” 하지만 그녀의 간절한 기원에도 아랑곳없이 랜덤 상자에서는 삼단 베기라는 스킬이 툭 하고 튀어 나왔다. “아아...” 서유미는 마치 세상 전부를 잃은 사람처럼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좌절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오픈 삼단 베기.” 새로 얻은 스킬을 장착하기가 무섭게 그녀는 자신의 분노를 다시 한 번 주위의 좀비들에게 표출하기 시작한다. “어째서... 어째서어어어!” 광분한 서유미의 식칼은 과연 무서웠다. 순식간에 그녀의 주위에는 토막한 좀비들의 신체가 쌓이기 시작했고, 불의 벽 너머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더 이상 그녀를 직시하지 못하고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무, 무섭네요.” “그러게요...” 진세아와 임서윤이 그렇게 얼빠진 대화를 나누는데, 이번에는 진세아에게서 레벨 업의 빛이 뿜어져 나왔다. “오오...” 마을 사람들은 그녀의 몸을 흰 빛이 감싸고 지나가자 경외의 시선을 던졌다. “이거... 어째 부끄러운데요.” “하하, 축하합니다.” 하지만 불의 벽을 발동하고 있는 동안에는 손을 쓸 수가 없는 터라 서유미처럼 바로 랜덤 카드를 뽑을 수는 없었다. “이거... 저도 분발해야겠습니다.” “후후.” 아니나 다를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임서윤의 몸에서도 레벨 업의 빛이 뿜어져 나온다. “아, 축하드려요.” “하하... 이거 오늘 제대로 광렙 하겠는데요.” “그러게요. 후후...” 하지만 그렇게 대화를 나누던 진세아는 문득 한 가지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들 한 번씩 레벨 업을 했는데, 막상 가장 많은 수의 좀비를 쓰러뜨린 준상에게서는 아직까지 레벨 업 현상이 일어나지 않고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커다란 늑대 두 마리까지 함께 좀비를 때려잡고 있기에 그가 쓰러뜨린 수는 다른 세 사람이 쓰러뜨린 좀비의 수와 거의 비슷할 정도였다. 뿐인가. 아까 전에는 거의 중간 보스라고 해도 좋을 만한 검치호의 좀비까지 터무니없는 일격으로 박살을 내버리기도 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레벨 업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결국 한 가지 의미로 귀결된다. “도대체 레벨이 얼마나 되길래...” 그녀가 중얼거리는 소리에 임서윤이 바로 반응했다. “네?”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진세아는 얼른 얼버무렸지만, 임서윤은 이내 그 의미를 알아차렸다. “준상씨 말씀이신가요.” “네, 뭐...” “그러고 보니 이상하네요. 가장 먼저 레벨 업을 했어야 하는데...” 임서윤은 석궁에 새로운 화살을 끼우며 말했다. “있다가 물어 볼까요? 몇 레벨이나 되는지.” 그 말에 진세아는 고개를 저었다. “관둬요. 물어본다고 대답할 사람도 아니고.” “그렇긴 하죠. 하하...” 진세아가 처음부터 불의 벽을 사용하지 않은 것은 만약의 경우 앞에 나선 두 사람이 위기에 처했을 때 오히려 그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장애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준상과 서유미는 진세아가 걱정할 만큼 약한 자들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한 차원 더 강한 존재라고 부르는 편이 옳았다. 한편, 목책까지 좀비들이 다가왔을 때는 이젠 끝장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이제 두런두런 얘기까지 나눠가면서 좀비들을 쓰러뜨리는 그들을 찬탄과 경외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고, 그런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네 사람은 차근차근 좀비들을 쓰러뜨렸다. 그리고 약 십여분 가량 더 이어지던 혈전은 마지막 좀비가 준상의 주먹에 박살이 나면서 끝을 맺었다. “후우...” 준상의 몸에서는 옅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레벨 업이라는 과정을 통해 중간에 피로를 푸는 것이 가능했지만, 준상은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몸이 스스로 회복을 시작한 것이다. 준상은 주위를 둘러보고는 천천히 좀비들의 머리를 확인하기 시작했고, 서유미는 시드 따위는 관심도 없다는 듯이 얼른 크림슨 울프에게 다가가 그 털에 묻은 좀비의 체액을 닦아 주기 시작했다. 보통은 자기 몸부터 닦지 않나. 진세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불의 벽을 끈 후 준상에게 외쳤다. “위험하니까 나중에 하고 일단 돌아오세요!” 하지만 준상은 진세아를 한번 쓱 돌아보더니 그대로 확인 작업을 이어갔다. “잘났어 정말.” “하하...” 결국 한참이 지나서야 확인 작업을 마친 준상이 마을로 돌아왔고, 그가 돌아오자 그때까지 크림슨 울프의 털을 닦는다며 수선을 피우던 서유미 역시 따라 들어왔다. “둘 다 고생했어요.” 먼저 휴식을 취하고 있던 진세아와 임서윤이 두 사람에게 간단하게 씻을 물을 가져다 주었다. 준상은 가법게 고개를 끄덕여 감사의 뜻을 표한 후 좀비의 체액으로 더러워진 몸을 간단하게 씻었다. “후...” 문득 그 모습을 보며 진세아가 투덜거렸다.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 난리를 쳐야 하는 건지.” 그러자 자기 닦으라고 준 수건에 물을 묻혀서 크림슨 울프의 털을 닦아주던 서유미가 대답했다. “저는... 오히려 지금이 좋아요.” “...” “만약 이 게임이 없었다면 전 연쇄 살인마가 되었을지도 모르니까요.” 순간 모두의 분위기가 싸해졌다. 그러자 서유미는 어색하게 웃으며 다시 말했다. “농담... 인데요. 이 대사 모르세요? 꽤 유명한 대사인데." 하지만 진세아나 임서윤은 물론이거니와 준상마저도 도무지 그녀의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적어도 식칼을 들고 날뛰는 그녀의 모습을 한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방금 전 그녀의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단 하나도 없을 것이다. 00032 트롤러 ========================================================================= 썰렁해진 분위기를 견디다 못한 진세아가 다른 화제를 꺼냈다. “그런데 이거... 어떻게 쓰는지 아시는 분.” 그녀가 꺼낸 것은 아까 서유미가 건네주었던 시드였다. “아... 그, 아이템 확인으로 확인한 다음 카드에 끼워서 쓰면 되는데... 아이템에 끼울 수도 있다는데 그건 본적이 없구요. 혹시 아이템 확인 기능 못 얻으셨어요?” 임서윤의 대답에 진세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임서윤은 다시 말했다. “튜토리얼에서 미궁 돌다 보면 나오는 건데.” 진세아는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거기서 못 얻으면 다시는 못 구하는 건가요?” “그, 그게... 그건 저도 잘...” 임서윤이 머리를 긁적이자, 진세아는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참고 더 돌아보는 건데... 휴...” “그럼 보스한테서 나온 것도 확인 못하셨겠네요?” “네.” “일단 줘보세요. 제가 확인해 드릴테니.” “잠시만요.” 진세아는 호주머니에서 작은 복주머니 같은 것을 꺼내더니 그 안에서 시드 하나를 꺼내 임서윤에게 건네주었다. 임서윤은 그녀에게서 두 개의 시드를 건네받고는 그것을 휴대폰 위에 얹으며 말했다. “그래도 보스한테서 시드를 챙기긴 하셨네요. 저도 머리 속을 뒤지려니까 잘 엄두가 안 나던데.” “그, 그게... 그때는 저도 악이 받쳐 있었기 때문에...” “하긴 그렇죠.” 임서윤은 시드를 확인한 후 그녀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이건... 라이프 시드라고 해서 생명력을 증가시켜 주는 거구요. 이건 안티프로즌 시드라고 냉기 저항을 올려주는군요.” “좋은 건가요?” “글쎄요. 저도 몇 개 못 먹어봐서 좋은 건지는 잘...” “아무튼 감사합니다.” “별 말씀을.” 둘이서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 동안 준상은 휴대폰을 열었다. 스스로의 레벨은 올리지 못했지만, 카드의 레벨은 이런 전투의 와중에도 확실하게 오르고 있었다. 준상은 새로 레벨이 오른 광폭 카드를 확인했다. 축하합니다! 스킬카드 ‘광폭’의 레벨이 올라갔습니다. :카드의 레벨이 올라가면 여러 가지 효과가 추가됩니다. -‘광폭’ 장착시 공격력 상승 효과가 2퍼센트 상승합니다. -‘광폭’ 장착시 갑옷 효과 감소 패널티가 2퍼센트 감소합니다. 어차피 광전사 콤보를 쓰는 이상 갑옷 효과는 별 의미가 없는 일이었지만, 공격력 상승은 바라마지 않던 일이다. 준상은 카드의 확인이 끝나자 새로 찾은 두 개의 시드를 물로 잘 씻은 후 휴대폰에 장착했다. 아이템정보 명칭 : 피지컬 시드 레벨제한 : 10 종류 : 시드 등급 : Uncommon 효과 : 물리 공격력 3% 증가 설명 : 물리 공격을 사용할 경우 위력을 증가시켜주는 시드입니다. Seed 슬롯이 있는 아이템이나 카드에 장착하여 능력을 강화할 수 있습니다. 한번 장착한 시드를 분리하기 위해서는 특수기능 ‘분리’가 필요합니다. [이 시드를 아이템이나 카드에 장착하시려면 이곳을 누르십시오.] 아이템정보 명칭 : 어택스피드 시드 레벨제한 : 없음 종류 : 시드 등급 : Common+ 효과 : 공격 속도 2% 설명 : 공격 속도를 높여주는 시드입니다. Seed 슬롯이 있는 아이템이나 카드에 장착하여 능력을 강화할 수 있습니다. 한번 장착한 시드를 분리하기 위해서는 특수기능 ‘분리’가 필요합니다. [이 시드를 아이템이나 카드에 장착하시려면 이곳을 누르십시오.] 지금 자신이 얻은 시드에 대해 이런 저런 얘기를 하고 있는 임서윤이 이 시드들을 봤다면 대번에 입이 쩍 벌어질 정도의 득템이었지만, 준상은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은 채 광폭 카드에 박혀 있던 안티파이어 시드를 빼낸 후, 그곳에 새로 얻은 두 개의 시드를 넣었다. 남은 하나의 시드를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준상은 슬롯이 비어 있는 생명의 반지에 끼우기로 결정했다. 준상의 행동을 별 생각 없이 지켜보던 진세아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다시 질문했다. “그거 설마... 시드 끼울 수 있는 반지에요?” “...” 준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옆에서 지켜보던 임서윤이 바로 반응했다. “오! 잠깐 좀 봐도 될까요?” 임서윤은 물론이고 진세아마저도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부담스러운 시선을 보냈지만 준상은 그 말을 무시한 채 지붕 아래에서 서유미에게 시달리고 있는 두 마리의 늑대 들을 향해 말했다. “적이 오면 깨워라.” 그리고 늑대들이 자신의 명령을 이해했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그대로 지붕 위에 누워 잠을 청하기 시작했다. 이번 퀘스트는 무려 3일에 걸쳐 진행되기 때문에 틈틈이 체력을 보존시킬 필요가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레벨 업을 거치면서 피로를 날려버렸지만, 준상으로서는 좀비들을 사냥해서 레벨 업이 가능한지도 불투명한 상태이니 어쩔 수 없었다. “...” “...” 덕분에 준상에게 부담스런 시선을 열심히 보내던 진세아와 임서윤은 그대로 닭 쫓던 개가 되고 말았다. “쳇...” “하하...” 하지만 그들로서도 준상의 피로 회복을 방해해 가며 반지를 살피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누가 뭐래도 지금 이렇게 노닥거리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 자체가 그의 무지막지한 강력함 덕분이라는 것을 부정할 만큼 염치가 없지는 않았던 것이다. 진세아에게 불의 벽이라는 스킬이 있고, 서유미 역시 다른 이에 비해서 섬뜩할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만약 준상이 앞으로 나서서 절반 이상의 좀비들을 학살하지 않았더라면 마을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자신들 중에서도 희생자가 나왔을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이런 모든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이렇게 대놓고 무시를 당하는 일이 꼭 기분 좋을 수만은 없는 일이다. 특히나 나름 자신의 외모에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던 진세아로서는 조금은 자존심마저 상하는 일이었다. “잘났어, 정말.” “하하...” 다행스럽게도 그날 밤에는 더 이상의 공격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한쪽 하늘이 서서히 밝아오는 새벽녘이 되자 그때까지 가만히 앉아서 주위를 경계하던 두 마리의 늑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길게 울부짖기 시작한다. “꺅!” 덕분에 크림슨 울프에게 기대 졸고 있던 서유미가 뒤로 발라당 뒤집어지며 나뒹구는 참사가 일어나기는 했지만, 어쨌든 두 마리 늑대의 울음소리는 조용하던 마을의 적막을 깨우기에는 충분한 신호였다. 가장 먼저 반응한 사람은 바로 준상이었다. 준상은 늑대들의 울음소리가 들리기가 무섭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그대로 지붕 아래로 뛰어내렸다. “이크...” 깜빡 졸고 있던 진세아와 임서윤도 몸에 두르고 있던 허름한 담요를 치워버리고 급히 몸을 일으켜 준상의 뒤를 따랐다. “아우우... 쫑아, 같이 가...” 오직 서유미만이 잠이 덜 깬 모습으로 크림슨 울프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리고 각기 모닥불 주위에 흩어져 졸고 있던 마을 사람들이 전부 일어나기도 전에 전투는 시작되었다. “이건...” 목책 앞으로 다가온 진세아와 임서윤은 새로운 적의 모습을 보고 흠칫 놀랐다. 지금까지 상대해 왔던 좀비와는 전혀 다른 존재가 준상의 주먹에 박살이 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살점이라고는 하나도 남지 않은 해골 병사였다. 그냥 뼈만 남아 덜그럭거리는 것도 아니고, 조악하기는 하지만 방패와 칼, 그리고 갑옷 마저 두르고 있는 상태였다. “해골... 아니, 이 경우엔 스켈레톤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으려나.” 임서윤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의 화살은 살아있거나 그에 준하는 존재를 상대하기에는 매우 적합했지만, 저런 식으로 뼈다귀만 남아서 덜그럭거리는 존재를 상대하는 일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난감해 하는 것은 임서윤 만이 아니었다. 진세아 역시 해골 병사를 향해 화염 화살을 날렸지만 불꽃에 휩싸이고서도 여전히 전진을 멈추지 않는 해골 병사의 모습에 당황해 버렸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좀비들과는 달리 수가 그리 많지 않다는 정도. 하지만 그것도 그리 안심할 일은 아니었다. 좀비들도 처음에는 적은 수가 나타났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많아지지 않았던가. 잠시 상황을 지켜보던 임서윤은 잠시 호흡을 가다듬더니 석궁에 알 수 없는 힘을 담아 사격을 했다. 그렇게 쏘아진 화살은 목표에 맞는 순간 작은 폭발을 일으켰고, 그 폭발에 의해 해골 병사의 머리는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다시 불의 벽을 실행하려고 준비를 하던 진세아는 그 대단한 위력에 놀라며 임서윤을 향해 말했다. “그런 스킬이 있으면 진작 써야죠!” 그러자 임서윤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게... 이번에 레벨 업 하면서 얻은 스킬이라서요.” “아... 크흠.” 진세아는 머쓱해져서 괜히 헛기침을 하며 다시 한 번 불의 벽을 발동했다. 화염 화살은 그냥 무시하며 달려들던 해골 병사들도 이 불의 벽만큼은 견딜 재간이 없는지 멈칫거리며 다가서지를 않았다. 은밀하게 마을에 다가서던 해골 병사들이 다시 한 번 솟아난 불의 벽에 의해 저지되자 준상은 마음 놓고 전투에 임할 수 있게 되었다. “후우...” 호흡을 가다듬으며 두 팔을 옆구리에 붙인 채 스텝을 밟는다. 다른 이들은 보통의 공격이 먹히지 않는데다 무기마저 지닌 해골 병사의 등장에 당황하고 있었지만, 준상은 이미 광산에서 무기를 든 상대와 싸워본 경험도 있는데다 원래부터 베거나 찌르는 것이 아닌 때려 부수는 공격 스타일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큰 문제가 없었다. 다만, 광산의 개머리 괴물들과는 달리 이들의 방어구는 허름하기는 해도 쇠로 보강되어 보다 단단해 보였고, 무기의 길이도 훨씬 길었기 때문에 주의할 필요가 있었다. 시퍼런 인광을 검게 패인 눈 안쪽에서 번뜩이던 해골 병사는 방패를 앞으로 내밀어 자신의 몸을 가린 채 준상을 향해 돌진해 왔다. 방패로 적의 공격을 막는 동시에 상대를 밀쳐내 자세를 무너뜨린 후 검으로 찌르거나 베는 이 공격 방법은 고전적이기는 하지만 매우 효과적이어서 준상으로서도 좀처럼 틈을 찾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틈이 없다면 만들면 되는 일. 준상은 그러기에 충분한 힘을 갖추고 있었다. “훗.” 자신을 향해 방패를 내밀고 돌진해 오는 해골 병사의 모습에 준상은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오픈 숄더 차지.” 그리고 카드의 장착이 끝나기가 무섭게 해골 병사의 방패를 향해 숄더 차지를 발동했다. 녹이 조금 슬기는 했지만, 단단한 쇠로 보강된 나무 방패와 인간의 어깨가 부딪히면 일반적인 경우 방패가 이길 수밖에 없는 노릇이지만, 준상은 그런 일반적인 경우에서 살짝 벗어난 인간이었다. 콰직! 준상의 어깨는 곧바로 해골 병사의 방패를 부순 후 그대로 밀고 들어가 그 갈비뼈를 박살냈다. 해골 병사를 이루던 뼈 조각들은 그 일격에 산산이 부서져 사방으로 튕겨져 나갔고, 준상은 그 와중에도 새파란 인광을 뿜어내는 해골바가지를 찾아내 주먹으로 깔끔하게 으깨버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새로운 적을 찾아 시선을 돌리는 준상의 눈에 크림슨 울프가 해골 병사를 향해 달려드는 모습이 비쳤다. 해골 병사는 이내 커다란 붉은 털의 늑대에게 깔려 버렸지만, 그 와중에도 검을 휘둘러 크림슨 울프의 몸에 상처를 입혔다. 그러자, 그때까지 잠자코 있던 서유미의 눈이 번쩍하고 빛난다. “감히... 감히 쫑이의 몸에 상처를 내다니!” 옆에서 해골 병사 한 마리가 크림슨 울프에게 시선을 빼앗기고 있는 서유미의 등을 노렸지만,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식칼을 휘둘러 해골 병사의 검을 쳐내더니 유령처럼 뒤로 돌아가 머리뼈를 반으로 갈라 버렸다. 순식간에 해골 병사 하나를 해치운 서유미는 얼른 크림슨 울프가 깔고 앉은 해골 병사에게로 다가가 마치 마늘을 빻듯이 그 머리를 식칼 손잡이로 두들겼고, 이내 해골 병사는 머리가 박살나며 그대로 움직임이 멈춰 버렸다. “쫑아. 많이 아파?” 서유미는 얼른 품에서 천 조각 하나를 꺼내 크림슨 울프의 몸에 난 상처를 동여매려고 했지만, 매정한 크림슨 울프는 곧바로 다음 적을 찾아 움직였다. “쫑아! 어디가! 이거 묶고 가야지!” 이것을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 준상은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젓다가 자신을 노리며 찔러드는 검을 손등으로 가볍게 쳐낸 후 해골바가지를 잡고 그대로 몸에서 뽑아냈다. 해골바가지는 몸에서 분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시퍼런 안광을 뿜어내며 턱을 덜그럭거리고 있었지만, 이내 군화 발에 짓밟혀 박살이 나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곧이어 레벨 업의 흰 빛이 준상의 몸을 감싸며 지나간다. 00033 트롤러 ========================================================================= 레벨 업을 알리는 흰 빛이 몸을 휘감으며 불편한 잠자리로 인해 찌부둥하던 몸의 피로를 단숨에 씻어내린다. 그 짜릿한 쾌감을 잠시 음미하던 준상은 다른 해골 병사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몰래 마을을 기습하려고 들었던 해골 병사들은 시뻘겋게 타오르는 불의 벽과 준상이라는 예상치 못한 두 가지 장애물에 갇힌 채 우왕좌왕하다가 이내 진형을 갖추고 준상을 향해 돌아섰다. 활활 타오르는 불의 벽보다는 인간을 상대하는 것이 나으리란 판단에서 취한 행동이었지만, 불행히도 해골 병사들의 이 선택은 크나큰 실수였다. 이제야 잠에서 깨어나 마을 밖에서 벌어지는 전투에 시선을 던지기 시작하던 마을 사람들은 해골 병사들을 향해 다가서는 준상의 몸에서 어떤 알 수 없는 기운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압박감. 아니, 압박감이라기 보다는 존재감이었다. 문득 해골 병사 하나가 발악하듯 앞으로 나서며 준상에게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준상은 마치 귀찮은 날파리를 쫓듯이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검을 쳐냈다. 그리고 검이 내쳐진 충격에 중심이 흔들려 비틀거리는 해골의 관자놀이를 향해 주먹을 휘두르자, 해골 병사는 대번에 머리가 부서지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남은 두 마리의 해골 병사가 동시에 나섰다. 한 마리는 방패를 앞세우며 마치 태클을 하듯이 덤벼들었고, 또 다른 한 마리는 그 해골 병사의 등을 밟고 뛰어올라 준상의 머리를 노렸다. 하지만 준상은 그대로 발을 들어 방패를 앞세운 해골 병사를 방패째로 걷어차 밀어낸 후 머리 위에서 칼을 휘두르는 해골 병사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퍼걱! 주먹은 정확히 칼을 쥐고 있던 해골 병사의 손을 부숴버렸고, 이어서 뻗어나간 주먹에 의해 척추가 끊어졌다. 상반신과 하반신이 분리되어 바닥을 뒹구는 해골 병사의 머리를 군화발로 으깨버린 준상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려는 해골 병사에게 다가가 사커킥을 날렸다. 해골 병사는 방패를 들어 막으려 했으나 쇠로 테두리를 보강한 나무 방패는 준상의 발차기를 막지 못하고 부서져 버렸으며, 그 충격을 견디지 못한 해골 병사는 다시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준상은 방패를 잃고 바닥에 나동그라진 해골 병사에게 다가가 가루가 되도록 발로 밟는 것으로 전투를 마무리 지었다. “후우...” 더 이상 움직이는 해골 병사가 없음을 확인한 준상은 해골 병사의 잔해를 뒤적거렸다. 보통은 뇌 속에 파묻혀 있는 편이었지만, 이번에는 머리속이 빈 해골 병사라 조금은 확인이 편했다. “...” 결국 시드 하나를 더 찾아낸 준상은 먼저 그것을 확인했지만 이번에 나온 것은 생명력을 증가시켜주는 라이프 시드였다. 준상은 라이프 시드를 튜토리얼 보상 상자에서 얻었던 구리 반지에 장착한 후에야 레벨 업 보상인 랜덤 카드를 열었다. 카드정보 명칭 : 다이어 울프 레벨 : 1Lv 경험치 : 0 등급 : Uncommon 분류 : 소환 성장 : 조숙(대) 속성 : 없음 효과 : 다이어 울프 1개체를 소환합니다. Cost : 20 Seed : 2슬롯 “...” 또 늑대인가. 소환물이 늘어나는 건 좋은 일이었지만, 저만치서 크림슨 울프에게 붕대를 감아주겠다며 쫓아다니고 있는 서유미의 모습을 보니 은근히 골치가 아파온다. 게다가 이번에 얻은 다이어울프의 코스트는 무려 20. 현재 코스트 총합 110을 맞추고 있는 준상으로서는 이 다이어울프까지 소환하려면 역시나 10의 코스트가 부족한 상황이다. 일단 놔뒀다가 레벨이 오른 다음에 써야할까. 아니면 그냥 팀버 울프를 빼고 사용하는 것이 나을까. 그렇게 잠시 고민하고 있는데, 문득 새로운 메시지가 나타났다. 축하합니다! :콤보 카드를 조합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현재 조합 가능한 콤보 카드는 다음과 같습니다. 1. 군랑맹진 [상세 확인] -콤보 카드 조합을 원하시면 해당 번호를 누르시고, 만약 조합을 원치 않으신다면 n을 누르세요(1/n) _ “엇!” 예상치 못한 콤보 카드의 발견에 준상은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소리를 냈다. 준상은 일단 상세 정보를 확인했다. 군랑맹진 -다른 야수들과는 달리 늑대는 무리를 짓는 습성이 있습니다. 이렇게 무리를 지은 늑대 떼는 때로 다른 강력한 야수들보다 훨씬 강력한 위력을 발휘합니다. [조합상세] 늑대류의 소환물 카드 3종 이상. -효과: 1. 늑대류의 소환물 카드 장착시 코스트 50퍼센트 감소. 2. 장착한 늑대류의 소환물 공격력 상승. 3. 사용자에게 특수 버프 ‘늑대의 영혼’ 발동. “...” 코스트 감소라니! 준상은 다시 한번 탄성이 터지려는 것을 억지로 꾹 눌러 참았다. 아마도 코스트가 높은 카드들을 한꺼번에 장착하는 부담을 줄여주기 위한 효과가 아닐까 생각하며 준상은 일단 강력한 곰의 영혼 카드를 뺀 후 그 자리에 다이어 울프 카드를 장착했다. 그러자 또다시 메시지가 휴대폰에 도착했다. 축하합니다! :당신은 처음으로 ‘군랑맹진’ 조합에 성공했습니다! -당신의 위업을 찬양하며 ‘첫 번째 울프마스터’ 칭호를 부여합니다. [칭호 상세 정보 확인은 이곳을 누르십시오.] “오!” 준상은 바로 상세 정보를 확인했다. [첫 번째 울프마스터] :‘군랑맹진’ 조합을 첫 번째로 성공한 자에게 부여되는 칭호. -효과: 늑대류 소환물을 1개체 소환할 때마다 치명타 발생 확률 2% 증가. -칭호는 획득시 자동으로 효과가 적용됩니다. “하하...” 준상은 일단 빈 슬롯에 ‘강력한 곰의 영혼’ 카드를 다시 장착했다. 이렇게 하자 카드의 숫자는 늘었지만, 콤보 카드의 효과로 인해 전체 코스트는 오히려 105로 줄어들었다. 여기에 이전에 만들었던 ‘늑불’과 ‘쌍늑’ 명령을 지우고 힐링 포션과 도깨비불을 상황에 맞게 토글해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카드 정리를 마친 준상은 ‘늑대의 영혼’이라는 특수 버프 효과 내용을 확인했다. 늑대의 영혼 : 선조 늑대들의 영혼이 사용자에게 늑대의 힘을 부여합니다. -늑대류 소환물을 1개체 소환할 때마다 공격력 3% 증가. -늑대류 소환물을 1개체 소환할 때마다 이동 속도 2% 증가. “멋지군.” 준상은 모든 메시지의 확인이 끝나자 그제서야 휴대폰을 집어넣고 목책 안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곧바로 자신에게 돌아온 크림슨 울프부터 소환을 해제했다. “아앗! 쪼, 쫑이가...” 크림슨 울프에게 어떻게든 붕대를 감아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던 서유미는 눈앞에서 붉은 털의 늑대가 모습을 감추자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엎드려 자신이 얼마나 좌절했는지를 표현했다. 그리고 구슬픈 표정을 지으며 준상을 바라보았다. 결국 그녀가 뿜어내는 묘한 압박감을 견디다 못한 준상은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었다. “부상을 치료하려고 잠시 소환 해제를 한 것 뿐입니다.” 하지만 그 말은 서유미에게 다시 한 번 좌절을 안겨 주었다. “아아... 내가 치료해 주고 싶었는데...” “...” 결국 준상은 한숨을 몰아쉬며 이번에 새로 얻은 다이어 울프를 소환했다. “오픈 다이어 울프.” 그의 입에서 소환의 명령이 나오자 크림슨 울프와 비슷한 몸집을 지닌, 은빛 털을 가진 아름다운 늑대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낸다. “아아...” 그 모습이 얼마나 훌륭했던지, 멀뚱히 준상과 서유미의 모습을 지켜보던 진세아와 임서윤는 물론이고 멀리서 힐끔거리던 마을 사람들까지 감탄할 정도였다. 하지만 정작 서유미는 그런 다이어 울프의 아름다운 모습에도 아랑곳없이 바닥에 주저 앉은 채로 연신 쫑이만을 부르고 있었다. 치렁거리는 긴 머리를 앞으로 흘러내린 채 소복을 연상시키는 흰 원피스를 입고 꺼이 꺼이 울고 있으니 그야말로 전설의 고향이 따로 없다. “흑... 쫑이야...” “...” 준상은 한숨을 푸욱 내쉬고는 그냥 모르는 척 지붕 위로 올라가 버렸다. 결국 서유미의 통곡은 크림슨 울프가 회복을 끝내고 재소환될 때까지 이어졌다. “우르르르... 쫑쫑!” “...” 언제 그랬냐는 듯이 크림슨 울프에게 달라붙어 털을 빗겨 주는 서유미의 모습에 진세아나 임서윤은 물론이고 준상 마저도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마을 사람들이 그들에게 아침 식사를 가져다 주었다. 지난 저녁과 마찬가지로 방금 구운 빵과 밍밍한 스프가 고작이었지만, 한뎃잠을 잔 탓에 찌부둥한 몸을 녹이는 데는 그만한 성찬이 따로 없었다. “이번 퀘스트가 좋은 건 그나마 따뜻한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점 정도인 것 같아요.” “그러고 보니 퀘스트 중에 따뜻한 음식을 먹어보는 건 이번이 처음인 것 같네요.” 진세아와 임서윤은 입이 녹기 시작했는지 다시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제가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봤는데... 저 좀비나 해골 같은 건 죽음의 계곡이라는 곳에서 흘러나온 모양입니다.” 임서윤의 말에 진세아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꽤 고전적인 이름인데요.” “그렇죠. 아무튼 지금까지는 그런 곳이 있어도 밖으로 언데드들이 몰려나오거나 한 적은 없었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도 이상해 하더군요.” “하긴 그러니까 이런데 마을이 있는 거겠죠.” “맞는 말씀이십니다.” 임서윤은 진세아의 말에 맞장구를 친 후, 스프에 빵을 찍어 먹고 있는 준상에게 말했다. “아까 레벨 업 하셨죠? 늦었지만 축하드립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진세아도 준상에게 축하의 말을 건넸다. “축하드려요.” 준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준상이 선선히 대답을 하자 임서윤은 이때다 싶었는지 그에게 다시 말을 붙이려고 했다. “혹시 지금 레벨이...” 하지만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지붕 아래 앉아 있던 늑대들이 벌떡 몸을 일으켰고, 준상은 빵과 스프를 지붕에 버려둔 채 바로 뛰쳐나갔다. “이거 참.” 임서윤이 입맛을 다시며 석궁을 집어들자 진세아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포기하면 편하다니까요.” “하하...” 이번에 등장한 적은 좀비와 해골 병사의 조합이었다. 진세아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목책 앞에 불의 벽을 일으켜 적의 진격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한줄기 검은 섬광이 그녀의 어깨를 꿰뚫었다. “아악!” 비명을 지르며 나동그라진 그녀의 어깨에는 다 삭아버린 화살 하나가 박혀 있었다. “이건...” 임서윤은 급히 캐비닛을 인벤토리에서 꺼내 그녀의 몸을 가린 후, 입술을 깨물고 있는 진세아에게 물었다. “괜찮아요?” “끄응... 전혀요.” 준상은 이번에 등장한 해골 병사 가운데 몇몇이 활을 가지고 있음을 파악하자 늑대들과 서유미에게 마을 부근으로 달려드는 좀비를 맡긴 후 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해골 병사들은 궁수를 향해 달려드는 준상을 보고는 방패를 세워 그의 돌격을 막으려 했다. “오픈 숄더 차지.” 순간 눈앞에서 공기가 갈라지는 느낌과 함께 준상의 몸은 빛살과도 같은 모습으로 가속해 해골 병사들의 방패진을 향해 날아들었다. 콰앙! 강렬한 폭음과 함께 해골 병사 하나가 산산조각 났고, 주위의 네 마리는 무너지듯 와르르 넘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방패진을 돌파한 바로 그 순간, 궁수들이 발사한 화살들이 준상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준상은 자신의 눈앞으로 검은 화살들이 날아들자 급히 몸을 낮추며 바닥을 굴렀다. 그러자 화살 들은 아슬아슬 하게 그의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가 땅바닥에 박힌다. 뭔가 굉장히 허술해 보이는 화살임에도 불구하고 그 날아드는 속도나 위력은 전혀 허술하지 않았기에 준상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00034 트롤러 ========================================================================= 해골 궁수들은 새로운 화살을 장전하고 다시 준상을 향해 활을 당기려 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빠르게 날아온 무언가에 의해 해골 궁수 가운데 하나의 머리가 작은 폭발과 함께 부서진다. 바로 임서윤의 저격이 작렬한 것이다. 준상은 저격으로 만들어진 틈을 타 빠르게 궁수들에게 다가섰다. 궁수들은 활대와 단검 등으로 준상을 막아보려 했지만, 미처 무기를 고쳐 잡기도 전에 성난 이리와 같은 준상의 습격을 받아야만 했다. 퍼걱! 뛰어오른 준상의 다리가 반원을 그리자 그 궤적안에 들어온 해골 궁수 두 마리의 머리가 폭발하듯 부서져 나간다. 그리고 이어진 준상의 펀치에 의해 남은 두 마리의 궁수 역시 척추와 쇄골이 부러지며 전투 불능이 되었다. “오픈 2연격.” 준상은 바닥을 세차게 굴러 상반신이 바닥으로 굴러 떨어진 해골 궁수의 머리를 으깨버리고는 남은 한 마리의 해골 궁수에게 2연격을 작렬시켰다. 퍼퍽! 부서진 뼈조각이 사방으로 튀어오르며 머리를 잃은 해골 궁수의 머리가 힘없이 뒤로 넘어가는 동안, 준상은 몸을 돌려 아까 넘어뜨렸던 네 마리의 해골 병사들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네 마리의 해골 병사 가운데 두 마리는 준상이 해골 병사를 처리 하는 사이에 임서윤이 저격으로 박살내 버린 뒤였다. 준상은 방패를 세우고 임서윤의 저격을 경계하느라 자신을 미처 살피지 못하고 있는 해골 병사들의 뒤를 덮쳤다. 퍽! 태풍처럼 몰아치며 휘두르는 강렬한 훅에 얻어 맞은 해골 병사는 그대로 머리가 부서지며 주저 앉았고, 동료가 쓰러지는 모습에 급히 몸을 돌리던 마지막 해골 병사 역시 기습적인 로우킥에 무릎이 부서졌다. 한쪽 다리를 잃은 해골 병사가 기우뚱하며 쓰러지자 준상은 공중으로 뛰어올라 세차게 그 머리를 밟아 으깨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후우...” 고개를 돌려 목책 쪽을 바라보자 어깨에 화살을 꽂은 채 불의 벽을 불러 일으키는 진세아와 그녀의 앞을 막아선 채 좀비들을 화살로 쓰러뜨리는 임서윤의 모습이 보인다. 문득 임서윤이 그의 시선을 눈치 챘는지 엄지 손가락을 치켜 올린다. “...” 준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한 뒤, 좀비들을 쓰러뜨리고 있는 서유미와 늑대들을 돕기 위해 다시 움직였다. 그가 돌입하자 그렇지 않아도 서유미와 늑대들에게 터무니 없이 밀리고 있던 좀비들은 얼마 버티지도 못하고 그대로 박살이 나고 말았다. “후우...” 아까 잔뜩 득템을 한 탓인지, 부상자까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시드를 가지고 있는 놈이 없었다. 목책 안으로 돌아오자 임서윤이 진세아의 어깨에서 화살을 뽑고 약을 발라주고 있었다. “으윽...” 진세아는 나뭇가지를 입에 문 채 땀을 뻘뻘 흘리며 고통을 억지로 참고 있었다. “후... 끝났습니다. 잘 참으셨습니다.” “으으...” 준상은 잠시 그들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제안을 하나 하겠습니다.” “...” 그가 먼저 말을 거는 것 자체가 처음인데다, 그 내용이 제안이라는 사실에 임서윤과 진세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준상은 또다시 크림슨 울프를 닦아 준다고 수선을 피우고 있는 서유미 또한 손짓으로 불러들였다. 서유미는 거부의 몸짓을 보이려다가 심상치 않은 준상의 표정을 보고는 말없이 진세아의 옆에 다가와 앉았다. 모두가 모이자 준상은 그들을 향해 말했다. “죽음의 계곡이란 곳을 가보려고 합니다.” 사람들은 잠시 준상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몰라 어리둥절했지만, 이내 아까 대화에 나왔던 언데드들의 본거지가 그런 이름을 가지고 있음을 떠올리고는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노, 농담이죠?” 진세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되물었지만, 준상은 고개를 저으며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리고는 임서윤을 향해 물었다. “위치는 알아 두셨겠죠?” 임서윤은 자신에게 시선이 모이자 난처해하며 대답했다. “그게...” 하지만 준상은 그의 말을 자르고는 다시 말했다. “처음부터 제가 나서기를 바라고 그 얘기를 꺼내셨던 것이 아닙니까. 임서윤씨.” “네?”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이 임서윤이 반문하자 옆에서 듣고 있던 진세아가 말했다. “당신이 강한 건 알겠어요. 하지만 여길 비워두면 퀘스트 자체가 실패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하시나요?” 그 말에 준상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답했다. “그건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저 혼자 갈테니까요.” “네?” “게다가 제가 빠져도 이곳의 방어는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게 무슨...” 준상은 다시 임서윤에게 말했다. “이쪽 분께서 자기 실력을 전부 꺼내 놓는다는 전제하에서의 얘기겠지만 말입니다.” “...” 다시 자신에게 시선이 쏠리자 임서윤은 난처하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무슨 오해가 있으신 모양인데...” 하지만 이번에도 준상은 다시 말을 잘랐다. “인벤토리가 두 개라고 하셨죠?” “그렇습니다만...” “나머지 하나의 인벤토리에는 무엇이 들어 있습니까.” “...” 그제서야 진세아와 서유미는 깨달았다. 그가 지금까지 꺼내 보인 캐비닛은 두 칸의 인벤토리 가운데 단 하나만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준상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게다가... 원래 꺼내 놓은 캐비닛 안에는 헌팅 나이프도 있었죠?” 임서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준상은 대답을 들은 후 다시 말을 이었다. “지금은 석궁을 쓰고 계시지만, 저런 살상이 가능한 석궁은 일상생활 중에 들고 다닐 만한 물건이 아닙니다.” “...” “즉, 당신은 튜토리얼 당시 석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얘기가 됩니다. 그럼 여기서 문제입니다.” 준상은 잠시 말을 멈추고는 임서윤을 똑바로 응시하며 질문을 던졌다. “과연 당신은 그 험난한 튜토리얼을 어떻게 클리어했던 걸까요?” 진세아는 자기도 모르게 준상의 말을 받았다. “그게 바로 헌팅 나이프란 건가요?”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했다. “애초에 인벤토리는 보통의 플레이로는 얻을 수 없는 기능입니다. 그것을 튜토리얼에서 얻었다는 것은 숲을 통과할 때 그냥 횃불 들고 조용히 지나가는 식의 플레이를 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얘기가 됩니다.” “...” 임서윤은 손가락으로 이마를 긁적이기 시작했고 준상은 그런 임서윤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상의 내용. 틀립니까?” 준상의 말과 함께 진세아와 서유미 또한 시선을 임서윤에게 집중했다. “이거야 원...” 난처해 하며 이마를 긁적이던 임서윤은 잠시 그들에게서 한걸음 물러서더니, 두 개의 캐비닛을 허공에서 꺼냈다. 처음의 캐비닛에서는 이전에 보았던 대로 석궁과 헌팅 나이프, 그리고 석궁용 화살 등이 빼곡하게 들어 있었고, 두 번째 캐비닛에는 종류를 알 수 없는 소총과 권총, 그리고 큼지막한 로켓 런처와 그 탄약, 마지막으로 용도를 알수 없는, 아마도 폭약이라도 생각되는 물건이 빼곡하게 들어 있었다. “...” 진세아와 서유미는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현대 화기의 모습에 놀라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의문은 도대체 저런 걸 어떻게 구한 것일까 하는 점이었지만, 그녀들은 차마 그것까지 물어볼 정도의 용기는 없었다. 임서윤은 그녀들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짓더니 다시 캐비닛을 인벤토리에 수납한 후 정중한 태도로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다시 소개드리겠습니다. 제가 사용하고 있는 콤보 카드는 ‘칼카스의 웨폰마스터’. 이름대로 무기 사용의 전문가쯤으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러자 가만히 듣고 있던 서유미가 오른손을 번쩍 들고 말했다. “질문이요!” “말씀하십시오.” “콤보 카드가 뭐죠? 그리고 웨폰 마스터라뇨?” “...” 임서윤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진세아씨는 그렇다 쳐도 서유미씨가 그걸 모를 줄은 미처 몰랐군요.” “...” 그건 준상 역시 의외였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영락없이 ‘미친년’이나 ‘연쇄 살인마’ 같은 콤보 카드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 남자의 반응에 이번에는 진세아가 물었다. “그거... 좋은 건가요?” 임서윤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보통의 카드만으로 낼 수 있는 위력이 70퍼센트라면, 콤보 카드가 완성되는 순간 100이나 120퍼센트의 효율을 낼 수 있다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아...” “콤보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복수의 카드를 조합해서 더 강력한 효과를 내는 방식이죠. 자세한 내용은 말씀 드릴 수 없습니다만, 웨폰 마스터의 경우에는 네 가지 스킬카드를 조합함으로서 발동됩니다.” 임서윤은 그렇게 말하고는 준상을 향해 말했다. “준상씨는 어떤 콤보 카드를 쓰고 계십니까?” 진세아와 서유미는 기대에 찬 표정으로 준상을 바라보았지만, 그의 입술은 꽉 다물어진 채 움직일 줄을 몰랐다. 잠시 기다리던 진세아는 그가 대답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돌리고 투덜거렸다. “잘났어, 정말.” 하지만 준상은 이 임서윤이라는 서글서글한 눈매의 남자가 처음부터 자신을 탐색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자신의 정보를 알려줄 생각이 없었다. 진세아를 자극해서 레벨을 캐묻는다든가 하는 식의 탐색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워서 이용당한 당사자인 진세아조차도 자신이 이용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정도였다. 준상은 대충 콤보 카드에 대한 얘기가 끝나자 다시 말했다. “임서윤씨.” “네.” “당신이 원하는 것은 추가 보상이겠죠?” “...” 임서윤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안다는 건 박준상씨도 추가 보상을 얻어 본 경험이 있으시다는 거군요.” “...” 준상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임서윤은 크게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후... 이렇게까지 까발려지면 부정하기도 쉽지 않군요. 준상씨 말씀이 다 맞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준상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나름대로 잘 숨겼다고 생각했는데... 눈썰미가 대단하시군요. 하긴, 그러니까 그 정도의 강함을 얻을 수 있으셨겠지만.”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진세아가 다시 손을 들었다. “추가 보상은 또 뭐죠?” 임서윤은 선선히 대답해 주었다. “처음 메시지에 나온 퀘스트 목표는 가장 기본적인 내용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실제 퀘스트를 진행하다보면 히든 퀘스트라든가 서브 퀘스트 같은 것이 숨겨져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튜토리얼의 경우에는 숲을 통과할 때 그 안에 살고 있는 야수를 전멸시키는 퀘스트가 숨어 있었죠.” “아...” 임서윤은 진세아에게 그렇게 설명하고 난 뒤 준상을 바라보더니 진지하게 물었다. “말씀하신대로... 제 능력을 전부 사용하면 쳐들어가는 건 무리라도 이곳을 요새화하고 방어하는 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행이군요.” “하지만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충분히 강한 분이라는 건 누차 봐서 알고 있습니다만, 죽음의 계곡을 혼자서 정리하는 건 정말로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자칫하면 수많은 적들 속에서 혼자 고립될 수도 있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그 말에 준상은 조용히 대답했다. “정말 걱정이 되서 물으시는 겁니까?” “...” “쓸 데 없는 소리는 관두고 지도나 주시죠.” 임서윤은 쓴웃음을 지으며 품에서 죽음의 계곡의 위치가 기록된 지도를 꺼내 준상에게 주었다. 00035 트롤러 ========================================================================= 준상은 서윤이 내민 지도를 잡았다. 하지만 서윤은 준상이 지도를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손을 놓지 않았다. “...” 그리고 준상이 가만히 바라보자 웃으며 말했다. “이걸 드리기 전에... 실은 저도 잘 모르는 것이 있어서 말씀입니다.” “뭡니까.” “히든 퀘스트... 이걸 준상씨 혼자 깨버렸을 때 그 보상을 저희도 함께 받을 수 있느냐는 점이죠.” “흠...” 준상은 얼굴을 찌푸렸다. 불행히도 이것에 관해서는 그도 정확히 알고 있는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튜토리얼은 애초에 혼자 수행하는 퀘스트라 이런 경우 해답이 될 수가 없다. 다만 한 가지 비슷한 예를 찾자면, 이전에 숲의 정화 퀘스트를 수행할 당시 서브 퀘스트로 나왔던 이니아의 부탁은 그가 혼자 수행해서 혼자 보상을 받았던 경험이 있다. 게다가 문제는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준상은 이 퀘스트에 적어도 두 가지의 히든 퀘스트가 존재하고 있으리라 예상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임서윤이 마을 사람들에게 알아낸 정보대로 언데드의 본거지라 할 수 있는 죽음의 계곡 토벌이고, 나머지 하나는 마을 방어시 마을 사람들의 희생을 일정 수준 이하로 낮추는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이 경우 준상이 지금 죽음의 계곡으로 향하게 되면 마을 방어에 대한 기여도가 낮아져서 이후의 평가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준상은 서윤에게 물었다. “생각이 있으니 말을 꺼낸 것이겠죠?” 서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간단합니다. 게임이라면 보통 이런 경우 한 가지 방법으로 해결이 가능하죠.” 준상은 바로 알아들었다. “파티 말이군요.” “맞습니다.” 나머지 세 사람은 처음에 진세아의 제의에 따라 파티를 맺은 채 아직 그대로 유지하고 있지만 준상은 바로 풀어버린 상태였다. 그러고 보면, 처음 파티를 맺는 일에 대해 운을 띄운 것도 서윤이다. “처음부터 이렇게 될 것을 예상하신 겁니까?” 준상의 말에 서윤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설마요.” 옆에서 두 남자가 대화를 주고받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진세아가 문득 한숨을 푸욱 내쉬며 말했다. “저도 나름 명문대 나와서 머리 좋다는 소리 듣고 살던 여잔데... 두 분을 보니 왠지 스스로에 대해 자신이 없어지네요.” “...” 그나마 진세아는 이해라도 했지, 서유미는 그냥 고개만 갸우뚱거리고 있다. 준상은 피식 웃으며 진세아에게 말했다. “파티 거세요.” “네?” 진세아는 왜 하필 자신인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지만, 서윤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일단 그 말대로 준상에게 파티를 걸었다. 준상이 파티를 수락한 뒤에야 임서윤은 지도를 잡은 손을 놓으며 말했다. “그럼 건투를 빌겠습니다.” “...” 준상은 이것이 하나의 시험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정말로 그곳을 혼자 정리할 수 있는가. 아니면 괜한 자신감의 결과로 처참한 최후를 맞이할 것인가. 성공한다면 손쉽게 추가 보상을 얻을 수 있을 것이고, 실패한다면 강력한 경쟁자를 손끝 하나 안 대고 제거할 수 있다. 결국 임서윤의 입장으로는 어느 쪽이 되었든 손해 볼 일이 없는 셈이다. 그야말로 소리장도. 웃음 속에 칼을 감추고 있다는 말은 임서윤 같은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리라. 그러나 반대로 생각하면 이것은 준상에게도 하나의 기회가 된다. 레벨 차이가 너무 나기 때문에 좀비 정도는 떼거지로 몰아 잡아도 레벨 업 하기가 힘든 상황이라 더 강력한 몬스터를 잡을 필요가 있었고, 강력한 몬스터는 그만큼 좋은 아이템을 떨어뜨릴 가능성도 많았다. 더구나 튜토리얼에서 숨겨진 동굴을 탐험했던 일을 떠올려 보면, 시드 외에 다른 아이템을 얻을 가능성도 높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매우 위험한 도전임에 분명하지만, 그만큼의 보상이 약속되어 있는 셈이다. “...” 준상은 말없이 지도부터 펼쳤다. 그곳에는 무척이나 조악한 필치로 주변의 지형이 그려져 있었다. 현대인의 관점으로는 지도라기 보다는 그냥 대충 그린 약도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 수준이었지만, 지금으로서는 이 정도라도 있는게 다행이다. 지도를 다시 접어 품에 넣고 늑대들을 불러들였다. 그러자 대번에 서유미가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저, 저도 같이 가면...” “...” 준상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 말했다. “방해됩니다.” 너무나도 단호한 그 말에 서유미의 얼굴은 울상이 되었고, 진세아는 이마를 감싸 쥐었으며, 임서윤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세 사람의 그런 반응을 무시한 채 준상은 곧바로 목책을 넘어 늑대들과 숲쪽으로 향했다. “괜찮을까 걱정이네요.” 임서윤은 웃으며 대답했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어째서요?” “자신의 실력을 숨긴 것이 저뿐이라고 생각하십니까?” “...” 진세아는 말도 안 된다는 듯이 그저 입만 쩍 벌린 채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서, 설마...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건가요?” “아마도요.” “말도 안 돼...” “그렇지 않고서는 저렇게 망설임 없이 갈 수가 없죠. 당연한 일입니다.” “세상에...” 임서윤의 말에 진세아는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시야에서 멀어져 가는 준상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한편, 준상은 마을에서 어느 정도 거리가 떨어지자 늑대들을 앞세운 채 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얼마 지나지 않아 크림슨 울프가 한 무리의 좀비들과 해골 병사들이 흐느적거리며 이동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번에는 아까보다도 수가 많아서 좀비만 헤아려 봐도 세 자리 수는 가뿐하게 넘는다. “...” 하지만 준상은 멀찌감치서 언데드 무리를 가만히 지켜보다가 그냥 지나쳐 버렸다. 백여마리의 좀비들이라고는 해도, 폭약을 적당히 사용한다면 해치우는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실 이건 준상이 임서윤에게 내리는 소소한 벌이라 할 수 있다. 저 정도 무장을 갖추려면 모르긴 해도 상당한 금액이 깨졌을터. 준상 없이 혼자 저 많은 수를 감당하려면 보유한 무장의 상당수를 소비해야만 하는데 결국은 그게 다 돈이다. 준상은 지도에 표시된 곳을 향해 이동을 계속하며 다시 두 번 정도 언데드 무리와 마주쳤지만 모두 멀리서 지켜보기만 하며 그대로 지나쳤다. 생각보다 제법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산악 구보로 단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준상이 죽음의 계곡이라 불리는 언데드의 본거지에 도착한 것은 정오가 다 되어서의 일이었다. “후우...” 격한 강행군의 여파로 준상의 몸에서는 아지랑이처럼 열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체력이 많이 떨어진 상황이었기 때문에 준상은 일단 휴식을 취한 후 계곡 안으로 진입하기로 결정했다. 인벤토리에 넣어둔 아이스박스를 열어 곰 고기와 뼈다귀를 꺼내 늑대들에게 나눠준 준상은 비상식으로 넣어둔 음식을 꺼내어 먹으며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약 한 시간에 걸쳐 천천히 식사와 휴식을 가지고서야 준상은 늑대들을 앞세운 채 천천히 안으로 진입했다. 계곡 안으로 들어서자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짙은 안개 때문인지 저녁 어스름이 낀 것처럼 어두웠다. “...” 정 안되면 튜토리얼 때처럼 불이라도 질러 버릴까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안개가 껴있다면 그런 방법을 쓰기도 곤란하다. 게다가 안에서 풍겨 나오는 죽음의 기운 때문인지 불이 붙을 만한 나무나 풀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준상은 계속해서 안으로 들어가다가 한 무리의 좀비와 마주쳤다. 좀비들은 말라붙은 고목처럼 우두커니 서 있다가 준상과 늑대들이 접근하자 눈을 붉게 빛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준상과 늑대들에게 있어 이 정도의 좀비들은 이미 별다른 위협이 되지 않았다. -커헝! 준상이 나서기도 전에 세 마리의 늑대들이 앞으로 튀어 나가며 좀비 들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한 발 늦어버린 준상은 가볍게 스텝을 밟으며 늑대들의 공격으로 우왕좌왕하고 있는 좀비들을 향해 다가섰다. “오픈 2연격.” 2연격 카드를 장착하고 있는데 앞선 좀비 하나가 팔을 허우적거리며 준상에게 덤벼들었다. 하지만 준상은 손등으로 좀비의 팔을 가볍게 쳐낸 후 좀비의 머리에 양손으로 스트레이트를 날렸다. 퍼퍽! 가볍게 뻗은 원투 스트레이트였지만, 그 위력까지 가벼운 것은 아니었다. 좀비는 준상의 펀치로부터 전해진 힘을 견디지 못하고 목이 뒤로 꺾어지며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다시 우측에서 좀비가 양 팔을 벌리고 마치 포옹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달려 들었다. 준상은 몸을 최대한 낮춰 그 팔 아래로 빠져 나오면서 손을 뻗어 좀비의 목을 아래쪽에서 움켜잡은 후 그대로 바닥에 내리 꽂았다. 모양은 조금 틀리지만 일종의 초크 슬램이라 봐도 무방한 공격. 콰직! 낙법 같은 걸 알 리 없는 좀비는 그대로 뒤통수가 뭉개지며 움직임을 멈추었다. 자세를 낮춘 준상을 향해 다시 두 마리의 좀비가 동시에 달려들었다. 이번에는 위빙과 함께 양 훅이 작렬하며 좀비들의 머리를 부숴버렸다. 순식간에 네 마리의 좀비를 쓰러뜨리자 이내 각기 한 마리씩의 좀비들을 해치운 늑대들이 준상의 옆으로 호위하듯이 돌아와 섰다. 준상은 일단 쓰러진 좀비들의 머리를 부숴 그 안을 살폈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확인을 끝내고 몸을 일으키는데... 문득 저 멀리에서 다시 수십에 이르는 좀비들이 비척거리며 모습을 드러낸다. “...” 도대체 이 수많은 언데드들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지금까지 쓰러뜨린 좀비만 해도 수백은 족히 될 터. 과거에 고대 도시 같은 것이라도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그렇다고 보기엔 좀비들의 상태가 너무 양호하다. 마치 누군가가 계속해서 언데드들을 소환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아...” 왜 진작 그걸 생각하지 못했을까. 준상은 그제서야 이 비상식적인 언데드들의 범람이 소환이나 그에 준한 수단에 의한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렇다면? 해결 방법은 간단하다. 이전에 숲의 정화 퀘스트에서와 같이 암흑의 근원과 같은 원인이 되는 물체를 제거하거나 언데드들을 소환하고 있는 곳을 찾아 분쇄하면 되는 것이다. 방침이 결정되자 준상은 늑대들을 역소환한 뒤 능선 쪽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최대한 언데드들의 시야에 잡히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이동을 시작했다. 간간히 길 잃은 언데드 몇이 준상의 앞길을 가로 막았지만, 그 정도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계곡을 거슬러 올라갔을까. 준상은 마침내 언데드들이 걸어 나오는, 어두운 기운을 뿜어내는 매우 수상한 동굴 하나를 발견했다. 바위 뒤에 잠복한 채 잠시 지켜본 결과 언데드들은 분명히 그 동굴 안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소환 지점으로 추정되는 곳이 확인되자 준상은 조용히 말했다. “오픈 크림슨 울프, 오픈 팀버 울프, 오픈 다이어 울프.” 연달아 세 마리의 늑대가 준상의 말과 함께 소환되어 모습을 드러냈다. 준상은 늑대의 소환이 끝나자 곧바로 그들과 함께 계곡 아래의 언데드들을 향해 벼락처럼 몸을 날렸다. 가장 첫 번째 목표는 우두커니 서 있던 해골 병사였다. 퍼걱! 마치 과학실의 인체 골격 표본처럼 멍하니 서있던 해골 병사는 맞잡은 채 해머처럼 내리치는 준상의 양손에 뒤통수를 맞으며 그대로 허물어졌다. 해골 병사 하나를 일격에 해치운 준상은 그제서야 자신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검을 치켜든 채 달려오는 해골 병사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오픈 숄더 차지.” 그리고 숄더 차지 카드가 슬롯에 장착됨과 동시에 빛살처럼 공기를 가르며 뻗어나가 해골의 가슴을 어깨로 들이받았다. 퍽! 폭죽이 터지듯이 산산이 부서지는 해골 조각들 사이에서 눈구멍으로 푸르게 인광을 뿜어내는 머리를 찾아 주먹으로 부숴버린 준상은 이빨을 들이대며 몸을 날리는 좀비의 입을 주먹으로 뭉개 버렸다. “오픈 2연격.” 그리고 다시 2연격 카드를 슬롯에 장착한 뒤 무차별로 좀비들을 향해 펀치를 쏟아 붓기 시작한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동굴 입구 부근의 언데드들은 모조리 박살이 나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후우...” 깊게 숨을 들이쉬며 호흡을 가다듬은 준상은 마침내 음습한 검은 기운이 흘러나오는 동굴 입구를 향해 다가섰다. “음...” 동굴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검은 기운에 닿는 순간 준상은 피부로 전해지는 오싹한 느낌에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00036 트롤러 ========================================================================= 아니, 처음에는 단지 오싹함 정도였지만 계속 검은 기운에 노출되자 마치 뜨거운 그릇에 물을 부은 것처럼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이것은 바로 재생력이 발휘되고 있다는 의미. 아마 준상이 아닌 다른 자였다면 얼마 못 가 검은 기운에 생명력을 빼앗기고 그로 인해 저하된 신체능력으로 말미암아 안에서 꾸역꾸역 쏟아지는 언데드들에게 죽임을 면치 못했으리라. 안쪽으로 더 들어가자 검은 기운은 단순히 체력을 빼앗는 것을 넘어서 시야를 가리는 역할까지 하기 시작했다. “오픈 도깨비불.” 준상의 명령에 따라 환영과도 같은 작은 불덩이 하나가 모습을 드러낸다. 횃불을 대신할 조명 도구로 사용하기 위해 불러낸 것이었지만, 타다다닥! 도깨비불이 모습을 드러내자 주위에 농밀하게 흐르던 검은 기운이 작은 불꽃과 함께 타서 사라진다. 아마도 이 검은 기운의 약점은 불이었던 모양이다. 도깨비불 덕분에 준상과 늑대들의 체력을 빼앗던 검은 기운이 함부로 접근하기가 어려워졌고, 검은 기운이 물러난 만큼 시야도 더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드러난 동굴의 내부는 의외로 넓어서 예닐곱 명이 어깨를 나란히 한 채 걸을 수 있을 정도였다. 준상은 예상치 못한 기습과 함정에 대비하며 조심스럽게 내부로 진입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좀비 하나가 비틀거리며 걸어 나오는 것을 발견했다. -크왕! 하지만 이 좀비는 굳이 준상을 손을 쓸 필요도 없었다. 준상을 앞서가던 세 마리 늑대들이 일시에 달려든 탓이다. 커다란 늑대 세 마리가 동시에 덤벼들자 좀비는 팔을 허우적거리며 쓰러진 후 순식간에 사지가 뜯겨 나가며 그대로 분해되어 버렸다. 준상은 늑대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후 좀비의 사체를 뒤졌다. 땡그랑. 머리 속에서는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았지만, 조각난 시체 사이에 흩어진 반짝이는 주화 두 개를 주울 수 있었다. 집어 올려 살펴보니 이전에 숲의 정화 퀘스트 때 주운 적이 있었던 금화였다. “...” 동굴에 진입해서 처음 잡은 몬스터의 보상 치고는 제법 쏠쏠하다. 준상은 금화를 챙겨 넣은 후 다시 전진을 계속했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동굴이 넓어지며 제법 정교하게 만들어진 석실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건...” 준상은 한 눈에 이 석실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매끈하게 다듬어진 벽과 바닥, 그리고 아마도 석관으로 보이는 것이 벽 아래 자리 잡고 있었으며 석관 옆에는 부장품으로 보이는 항아리와 상자가 놓여 있었다. 준상은 전면에 보이는 출구에 늑대들을 배치해 경계토록 한 다음 먼저 상자와 항아리들을 살펴 보았다. “음...” 항아리에서는 썩은 물 같은 것만 나왔지만, 상자 안에서는 금으로 만들어진 장신구들 몇 개를 찾을 수 있었다. 혹시 아이템이 아닐까 싶어 확인해 봤지만, 아쉽게도 그냥 보통의 장신구였다. 준상은 다시 석관을 열어 보았다. 아마도 사암이 아닐까 싶은 커다란 석관의 뚜껑을 열자 그 안에서 제법 오래된 것으로 보이는 미이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준상은 잠시 고개를 숙여 고인에 대한 묵념을 한 후 미이라를 살펴 보았고, 이내 미이라의 손에 끼워진 반지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고양이의 눈을 연상시키는 보석이 박힌 은빛의 반지는 이런 장신구에 대해 잘 모르는 준상이 보기에도 상당히 고급스러워 보였다. “...” 준상은 바로 미이라의 손가락으로부터 반지를 빼내어 확인해 보았다. 아이템정보 명칭 : 수호의 묘안석 반지 레벨제한 : 10 종류 : 반지 등급 : Rare 효과 : 생명력 강화 5%, 독 저항 10%, 마법 저항 5% Seed : 3슬롯 설명 : 착용자를 은밀한 위협으로부터 수호하는 반지. 묘안석 주위의 홈에 시드를 장착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오!” 생명력 강화에 독과 마법에 대한 저항이 담겨 있고, 여기에 시드 슬롯까지 세 개나 뚫려 있었다. 등급에 비해서는 다소 성능이 낮은 느낌이기는 했지만 지금까지 얻은 세 개의 악세사리를 모두 합친 것보다도 오히려 뛰어난 성능인 것만은 사실이었다. 준상은 혹시나 싶은 마음에 석관 안을 더 꼼꼼히 살폈고, 그 결과 저승길 노자돈이 아닐까 싶은 금화가 담긴 작은 주머니를 발견했다. 주머니에 담긴 금화는 모두 열 개. 다 헐어서 구멍이 숭숭 난 주머니는 버리고 금화만 챙겨 넣은 준상은 원래대로 석관의 뚜껑을 제자리로 돌려 놓은 후 맞은 편의 석관을 다시 열어 보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반지와 비슷한 묘안석이 달린 은빛 목걸이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이템정보 명칭 : 수호의 묘안석 목걸이 레벨제한 : 10 종류 : 목걸이 등급 : Rare 효과 : 생명력 강화 5%, 독 저항 5%, 마법 저항 10% Seed : 3슬롯 설명 : 착용자를 은밀한 위협으로부터 수호하는 목걸이. 묘안석 주위의 홈에 시드를 장착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세트인가?” 준상은 저쪽의 미이라가 끼고 있던 반지와는 독 저항과 마법 저항의 수치만 미묘하게 다를 뿐 거의 비슷한 성능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름도 비슷했다. 준상은 목걸이와 반지를 착용해 보았다. 그러자 바로 휴대폰으로 메시지 하나가 도착한다. 세트 아이템을 장착했습니다. :아이템 중에는 다수의 아이템이 하나의 세트를 이루는 것이 존재합니다. 세트를 완성하면 그에 걸맞는 세트 효과가 부여됩니다. 현재 완성된 세트 아이템은 다음과 같습니다. 1.수호의 인장 [상세 정보] -세트 아이템의 정보를 원하시면 상세 정보를 확인하십시오. “...” 준상은 바로 상세 정보를 눌러보았다. 세트아이템 정보 수호의 인장 :묘안석에 담긴 신비한 마력이 사용자의 신체를 보호합니다. -구성품 1.수호의 묘안석 목걸이 [상세 정보] 2.수호의 묘안석 반지 [상세 정보] -세트효과 1.모든 기술의 쿨타임 5% 감소 2.모든 속성 저항 10% 증가 “훌륭하군.” 세트 효과를 확인한 순간 준상은 자신도 모르게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기술의 쿨타임 효과는 말할 것도 없고, 모든 속성에 대한 저항 효과도 맨몸으로 싸우는 준상에게는 너무나 어울리는 특성이 아닐 수 없다. 레어 등급의 아이템 치고는 조금 성능이 떨어지는가 싶더니 이런 효과가 있을 줄이야. 준상은 석관 안에 누운 미이라에게 감사의 뜻을 담아 묵념을 한 후 석관의 뚜껑을 원래대로 되돌려 놓고 다시 전진을 시작했다. 석관을 들추느라 시간을 소모한 탓일까. 얼마 바로 두 마리의 해골 병사와 마주쳤다. 해골 병사들은 어깨를 맞주한 채 칼과 방패를 들고 통로를 따라오다가 준상과 마주치자 기세를 드높이며 돌격해왔다. “...” 준상은 이번에도 먼저 앞으로 달려 나가려는 늑대들에게 손을 뻗어 대기시킨 후 스스로 해골 병사들을 향해 마주쳐 갔다. “오픈 숄더 차지.” 해골 병사들은 방패를 앞세운 채 그 뒤로부터 검을 찌르려고 준비하고 있었지만, 어깨를 내미는가 싶더니 갑자기 자신들에게로 쭈욱 뻗어 나오는 준상의 신형에 공격의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콰앙! 그리고 준상의 어깨와 해골 병사들의 방패가 마주친 순간 철로 보강된 나무 방패는 볼 품 없이 박살이 나버렸고, 뒤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던 해골 병사들도 하나는 순식간에 산산조각이 나버렸으며, 나머지 하나의 해골 병사 역시 방패를 들고 있던 손이 부서져 외팔이가 된 채 바닥을 나뒹굴었다. 쓰러진 해골 병사는 얼른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칼을 든 손으로 바닥을 짚는 순간 날아든 준상의 군화발에 팔꿈치가 부서지며 다시 쓰러지고 말았고, 이어서 시야를 가리는 시커먼 군화 바닥에 밟혀 머리가 박살나면서 움직임을 멈췄다. 준상은 해골 병사들의 머리를 확인했지만 이번에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해골 병사들을 해치우고 좀 더 안으로 들어가자, 이번에는 아까의 석실보다 넓은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전의 석실이 인공적인 구조물이었다면, 이번에는 자연적인 동굴이라는 점이 다를 뿐이었다. 동굴 안은 통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검은 기운이 자욱하게 서려서 먼 곳을 살피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음...” 준상은 잠시 생각하다가 인벤토리에서 휴대용 고체 연료를 하나 꺼내 도깨비불로 점화했다. 그렇게 불이 붙은 고체 연료를 횃불 대신 들고 도깨비불을 동굴 안쪽으로 날려 보내자, 빠바바바바박! 그야말로 콩 볶는 소리라는 말이 어울리는 소음과 함께 도깨비불이 지나가는 곳마다 현란한 불꽃놀이가 동굴 안에 펼쳐지기 시작한다. 검은 기운이 도깨비불에 맹렬하게 반응하며 불꽃을 피우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데, 문득 안쪽에서 커다란 포효가 울려 퍼진다. -크워어어엉! 그리고 소리가 들려오기 무섭게 자욱한 검은 기운 안쪽에서 시커먼 무언가가 도깨비불을 향해 달려들며 거대한 참마도를 휘둘렀다. “저건...” 그 괴물은 녹이 잔뜩 슬어 검게 부식된 갑옷을 걸치고 있었으며, 그 안쪽에 드러난 피부 역시 부패된 채 녹아내려 그 안의 뼈가 드러나 있었다. 순간 준상은 아차 싶었지만, 도깨비불은 마치 봄바람에 흩날리는 꽃잎처럼 유연하게 괴물의 참마도를 피했다. 괴물은 다시 참마도를 이리저리 휘둘러 도깨비불을 베려 했지만, 그 거대한 무기는 도깨비불처럼 가볍게 날아다니는 물체를 베기에는 너무 둔중했다. 준상은 고체 연료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곧바로 도깨비불을 공격하고 있는 갑옷 괴물을 향해 달려나가려 했지만, 바로 그 순간 또 다른 갑옷 괴물이 나타나 도깨비불을 협공하기 시작한다. 갑옷 괴물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도깨비불이 움직일 때마다 동굴 안을 채우고 있던 검은 기운은 불꽃을 튀기며 소멸하고 있었고, 오래지 않아 준상은 동굴 안의 모습을 완전히 시야에 담을 수 있게 되었다. “...” 갑옷 괴물과 닮은, 하지만 키가 1.5배는 더 커 보이는 괴물이 동굴 한 켠에 커다란 도끼로 바닥을 짚은 채 앉아 있었다. 준상은 그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은 기운을 보는 순간 이 커다란 갑옷 괴물이 이번 퀘스트의 최종 보스임을 직감했다. 바로 그때. 보스가 쓰고 있던 검게 녹슨 투구 안쪽에서 두 개의 시뻘건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준상과 눈이 마주쳤다. 준상은 순간 전신을 옭아매는 듯한 오싹한 기운을 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지만, 이내 착용하고 있던 반지와 목걸이로부터 청량한 기운이 뿜어져 나와 그런 준상의 마음을 가라앉혔다. 보스의 알 수 없는 정신 공격에 수호의 인장이 반응한 것이다. 쿵! 정신공격이 무효로 돌아가자 보스는 바닥을 도끼로 쿵 하고 내리 찍었다. 그러자 동굴 바닥으로부터 검은 연기 같은 것이 피어오르더니 다섯 구 정도의 언데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언데드들은 절규하듯이 몸을 꿈틀거리더니 이내 붉은 안광을 번뜩이며 준상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세 마리의 늑대들이 그런 언데드들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늑대와 언데드들이 맞붙어 싸우기 시작하는 것을 지켜보며 준상은 마침내 앞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한 발자국. 그리고 또 한 발자국. 보스는 주위의 공간을 찢어발길 듯한 시선으로 준상을 노려보다가, 이윽고 그 무거운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끼이이익! 녹슨 갑옷으로부터 마치 악령의 비명소리와도 같은 소음이 울려 퍼지자 준상은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보스가 허리를 펴기 위해 엉거주춤한 자세를 취하자, 그의 몸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화살처럼 쏘아져 나갔다. 00037 트롤러 ========================================================================= 덩치가 크고 느린 보스가 완전히 자세를 갖추기 전에 무력화시키기 위해 기습을 시도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준상이 빠르게 돌진하자 보스는 느릿한 동작으로 바닥을 짚고 있던 도끼 끝을 툭 하고 걷어찼다. 별 것 아닌 동작처럼 보였지만, 그 결과 도끼는 반원을 그리며 준상을 향해 솟아 올랐다. 도끼의 날 부분이 아니라고 무시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었다. 넓은 부분이 공기를 부욱하고 가르며 솟아오르자, 준상은 기습은커녕 시야조차 가려져 접근조차 어렵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잠시 주춤하는 사이, 보스는 완전히 자리에서 일어나 솟아오른 도끼의 자루를 양손으로 잡고 섰다. “칫.” 처음의 돌진이 완전히 무용지물이 되어 멈춰선 준상이 혀를 차는 순간 보스는 한 쪽 발을 앞으로 내밀면서 양손으로 든 도끼를 준상에게 내리쳤다. 붉은 안광을 줄기줄기 뿜어내면서 그 거대한 몸의 체중을 실어 단숨에 내려치는 그 호쾌한 공격은, 먹이가 된 대상으로 하여금 자신이 공격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꼼짝 달싹 하지 못할 정도의 박력이 있었다. 하지만, 준상은 먹이가 아니다. 오히려 포식자라 불리기에 적합한, 그런 존재다. “...” 입을 닫고 숨을 멈춘 준상은 섬광과도 같은 도끼의 일격을 지켜보며 오른쪽으로 몸을 피했다. 그러자 엄청난 풍압과 함께 거대한 도끼가 공기를 가르며 바닥을 부순다. 콰앙! 도끼가 바닥과 부딪히며 지면과 멈춘 바로 그 순간, 준상은 왼손을 뻗어 도끼의 자루를 눌렀다. 그리고 그 지점을 축으로 폭풍처럼 몸을 회전시키며 그 힘을 온전히 오른 주먹에 담아 도끼 자루를 잡고 있는 보스의 손을 노렸다. 콰직! 온 몸의 힘은 물론이거니와 회전력을 통해 체중까지 완전히 실은 준상의 훅은 도끼 자루를 잡고 있던 보스의 오른손을 그대로 으깨 버렸다. 하지만 준상의 공격은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몸의 회전을 죽이지 않은 채 그대로 한 바퀴를 돌아 이번에는 왼쪽 주먹의 손등으로 여전히 도끼자루를 잡고 있는 보스의 왼쪽 손등을 노렸다. 이 공격 또한 훌륭하게 성공했다. 퍼걱! 하지만 처음의 일격으로 회전력이 많이 상실된 탓일까. 보스의 손등은 뼈가 부러지기는 했어도 완전히 으깨지지는 않았다. 연속으로 양 손에 데미지를 입은 보스는 그제서야 도끼를 내려치는 동작으로 인해 앞으로 쏠렸던 중심을 뒤로 이동시키며 물러서려 했지만, 준상의 몰아치는 공격은 그런 보스를 놓아주지 않았다. 이번에는 보스의 무릎을 노린 로우킥이었다. 부욱! 공기를 가르고 들어간 준상의 시커먼 군화발이 보스의 무릎을 정확히 가격했다. 퍽! 하지만 그 거대한 체구를 지탱하는 보스의 무릎은 제대로 준상의 공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강건하게 버텨냈다. 준상은 계속해서 오른손으로 훅을 날렸지만, 이미 보스는 무게 중심을 뒤로 완전히 옮긴 상태였기에 그 주먹은 허공을 가르고 말았다. 순식간에 보스의 양손을 부숴서 도끼를 놓고 물러나도록 만든 준상은 물러나는 보스를 향해 추가 공격을 이어가려 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보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 기운이 준상의 몸을 감쌌다. 치이익! “큭!” 검은 기운이 피부에 닿는 순간 처음 동굴에 들어섰을 때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강렬한 통증이 전해진다. 곧바로 닿은 피부를 통해 연기와도 같은 짙은 아지랑이가 피어나며 재생이 시작되었지만, 타는 듯한 그 통증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기에 준상은 신음을 흘리며 멈칫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검은 기운의 효과는 단지 접촉한 상대의 생명력을 훼손시키는 것만이 아니었다. 치이이이... 손상을 입은 보스의 두 손이 검은 기운에 휘감기는가 싶더니, 부러졌던 손가락이 제 모습을 찾아가기 시작한다. 그렇다. 검은 기운의 진짜 용도는 상대의 생명력을 빼앗아 보스의 몸을 복구하는데 있었던 것이다. 기껏 부순 손이 다시 회복되는 모습에 준상은 입술을 깨물 수밖에 없었다. 도끼를 빼앗기는 했어도 저 검은 기운을 어떻게 하지 않는 이상 오히려 자신의 생명력만 보스에게 헌납하는 꼴이다. 저 검은 기운을 제압하는 방법은? 바로 불이다. 준상은 보스가 다시 도끼를 집지 못하도록 막아서면서 주위를 살폈다. 세 마리 늑대들이 보스가 소환한 언데드들을 거의 쓰러뜨린 것을 확인한 준상은 그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저 시꺼먼 놈들을 공격해!” 명령이 떨어지자 그를 돕기 위해 준상에게로 달려오던 늑대들이 일제히 방향을 돌려 거대한 검을 휘두르는 갑옷 괴물을 향해 돌진했다. 갑옷 괴물들은 도깨비불을 쫓다가 자신들을 향해 거대한 늑대들이 덤벼들자 우왕좌왕하기 시작했고, 그틈을 타서 준상은 도깨비불을 자신에게로 불러들였다. 보스는 잠시 몸이 회복될 때까지 기다리다가 이내 쿵 하고 한쪽 발을 내딛으며 준상에게 다시 다가오기 시작했다. 도끼를 다시 집으려는 심산이겠지만, 이미 준상에게는 검은 기운을 막을 도깨비불이 있는 상태였다. 따다다다닥! 준상에게로 뻗어 나오던 검은 기운은 도깨비불과 맞닿는 순간 격렬한 불꽃을 튀기며 터져 나갔고, 그렇게 드러난 틈을 향해 다시금 준상이 쇄도했다. 보스는 그런 준상을 향해 몸을 젖히며 오른 주먹을 크게 휘둘렀다. 보는 것만으로 질릴 듯한 격렬한 펀치. 하지만 준상은 대기를 짓뭉개며 날아드는 그 펀치를 피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오른 주먹을 뻗어 보스의 주먹을 후려 쳤다! 콰앙! 강렬한 굉응과 함께 주먹이 격돌했고, 그 충격에 의해 준상과 보스는 뒤로 물러나야만 했다. “크윽...” 준상은 주먹을 통해 전해지는 충격에 얼굴을 찡그렸지만, 이 격돌은 그의 승리였다. 보스는 온전히 준상의 주먹에 타격점을 집중하지 못했고, 그 결과 준상의 주먹과 마주친 손가락 부분이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부서져 버린 탓이다. -크아아아아! 다시금 손상을 입자 분노를 참지 못하고 포효를 터뜨리며 사방으로 검은 기운을 뿜어냈지만, 바쁘게 날아다니는 도깨비불에 의해 그 공격은 준상에게 닿기 전에 모조리 차단되었다. 준상은 얼굴을 찡그리며 주먹으로 전해진 충격이 수그러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재생이 채 끝나기도 전에 보스의 포효를 들은 갑옷 괴물들이 물고 늘어지는 늑대들을 무시한 채 준상을 향해 돌진해 왔다. “젠장...” 커다란 두 개의 참마도를 들고 달려오는 갑옷 괴물들의 모습을 본 순간 준상은 짜증이 났다. 그런 준상의 눈에... 바닥에 비스듬히 박힌 채 버려져 있는 보스의 도끼가 비쳤다. 어째서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그 도끼를 보는 순간 준상은 손을 뻗었을 뿐이다. 그리고, 마침내 도끼 자루를 손으로 움켜쥐는 순간! 쏴아아아아! 갑자기 준상의 시야가 붉은 색으로 물들어 가기 시작한다. “으아아아아!” 단순히 시야만 붉게 변한 것이 아니었다. 알 수 없는 기운이 도끼를 잡은 손으로부터 흘러들어와 준상의 몸 속에 흐르는 피를 달구기 시작한다. 혈관을 타고 흐르던 모든 피가 일시에 끓어올라 기화되는 듯한 그 말도 안 되는 감각은 준상에게 잠시 시간이 멈춘 듯한 착각마저 일으켰다. 그 감각은 그대로 혈관을 타고 올라오며 준상의 이성을 침식하려 했지만, 준상이 착용하고 있던 두 개의 장신구로부터 다시금 청량한 기운이 퍼져 나오며 그 불길하고 치명적인 감각을 차단했다. “크윽...” 갑작스러운 감각의 폭발에 잠시 정신줄을 놓았던 준상의 눈에, 어느샌가 코앞까지 다가와 자신을 향해 참마도를 내리치려 드는 두 갑옷 괴물이 잡혔다. 절체절명의 위기였지만... 어째서인지 준상은 안광을 줄기줄기 뿜어내며 덤벼드는 갑옷 괴물이 두렵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 준상은 거의 반사적으로 손에 잡힌 도끼를 휘둘렀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거대한 도끼가 준상의 손에 들려진 채 대기를 찢으며 두 개의 참마도와 마주쳤다. 파캉! 그리고 한순간 격렬한 불꽃이 튀기는가 싶더니, 갑옷 괴물들이 휘두르던 거대한 참마도는 유리처럼 깨진 채 허공으로 비산했다. 준상은 거대한 도끼를 휘두른 여력을 그대로 담아 몸을 회전시키며 다시금 갑옷 괴물을 향해 도끼를 수평으로 휘둘렀다. 갑옷 괴물들은 엉겁결에 날부분이 깨져버린 참마도의 자루로 준상이 휘두르는 도끼를 막아내려 했다. 하지만, 그건 처음부터 될 일이 아니었다. 콰가각! 거대한 도끼는 그대로 두 괴물들이 입고 있던 갑옷을 뭉개버렸고, 갑옷 괴물들은 터무니 없는 도끼의 위력에 장작처럼 쪼개지며 박살이 나버렸다. 순식간에 갑옷 괴물 두 마리를 해치운 준상은 도끼를 바닥에 질질 끄는 채로 보스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보스는 지금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그저 멍하니 준상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어째서일까. 준상은 지금 이 거대한 보스가 자신에게 겁을 집어 먹고 있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저벅... 도끼를 바닥에 끌며 준상은 보스를 향해 한 걸음 내딛었다. 그러자 보스는 흠칫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큭큭...” 준상은 어쩐지 즐거워졌다. 겁먹은 보스라니. 어디 가서 이런 재미있는 것을 볼 수 있단 말인가. 준상은 다시 한 걸음 내딛으려 했지만... 순간 덮쳐온 현기증에 발을 헛디디며 그대로 주저앉았다. “으윽...” 준상은 한쪽 무릎을 꿇으며 바닥에 주저앉는 바람에 도끼에서 손을 놓았다. 그러자, 온 몸을 태울 듯한 엄청난 격통이 그의 감각을 갈기갈기 찢어놓기 시작한다. “으아아악!” 준상은 그제서야 깨달았다. 자신의 몸에서 마치 불이 붙은 것처럼 솟아오르는 흰 연기를. 하지만 고통으로 인해 이성이 끊어질 듯한 상황에서도 준상의 두뇌는 그 원인을 분석하고 마침내 해답을 찾았다. 바로 저 도끼. 보스가 들고 있던 저 도끼가 이 모든 현상의 해답이었던 것이다. 정확한 원리 따위 알 도리가 없었지만, 저 도끼는 사용자의 생명력을 흡수해 그것을 바탕으로 엄청난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만드는 마물이었다. 보통의 생물이라면 아주 잠깐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치명적일 수 있지만, 보스는 몸으로부터 뿜어내는 검은 기운을 통해 다른 생명체의 생명력을 흡수함으로서 그 단점을 상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나마 준상이 이 정도라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재생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보스는 겁이 나서 뒤로 물러섰던 것이 아니었다. 준상이 자멸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다. 쿵. 보스는 준상이 온 몸으로 흰 연기를 뿜어내며 주저앉자 앞으로 발을 내딛으며 다가섰다. 그것은, 이미 도끼로 인해 생명력이 고갈되었을 준상에게 최후의 일격을 날리기 위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준상에게는 아직 남은 카드가 있었다. “빨간 약.” 약속된 명령어가 실행되자 도깨비불이 역소환되고, 그 대신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사용되지 않았던 힐링 포션이 카드 슬롯에 장착되었다. “오픈 힐링 포션.” 그리고 뒤이은 준상의 명령에 의해 힐링 포션은 준상의 고갈된 생명력을 급속하게 채우기 시작했다. 준상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오픈 강타.” 이번에는 숄더 차지 카드가 빠지고 그 자리에 강타 카드가 자리 잡았다. 이미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이 없다 생각되었던 준상이 몸을 일으키자 보스는 흠칫하며 다가오던 걸음을 멈추었다. 그런 보스를 향해 준상이 뛰어들었다. 부웅! 마치 파리를 잡듯이 보스의 왼손바닥이 준상을 향해 휘둘러졌지만 준상은 가볍게 머리를 숙이며 최소한의 동작으로 그 공격을 피한 후 보스의 옆에 달라붙더니 주먹을 뻗어 리버 블로를 작렬시켰다. 보스는 옆구리를 파고 들어오는 준상의 주먹으로 인해 휘청거리며 옆으로 밀려났다. “오픈 도깨비불.” 힐링 포션이 빠지고 다시 도깨비불이 소환되며 보스가 뿜어내는 검은 기운이 격렬한 불꽃과 함께 사라진다. 그리고 지금까지 준상이 뿜어내던 사악한 기운에 짓눌려 움직이지 못하던 세 마리 늑대가 그제서야 도깨비불이 만든 틈을 노려 보스에게 뛰어들었다. 보스는 거대한 세 마리 늑대의 협공에 당황하며 손을 내저었지만, 어느새 접근해온 준상의 주먹이 보스의 무릎에 작렬했다. 뻐벅! 연속으로 퍼부어진 타격을 견디지 못하고 보스는 그대로 중심을 잃은 채 주저앉았다. 보스의 다리가 봉쇄되자 준상은 그제서야 강타를 발동 했다. 웅웅... 웅웅! 준상의 몸으로 힘이 모여들기 시작하자 공간이 일그러지는 듯한 착각마저 일어나기 시작한다. 1초, 2초, 그리고 3초. 준상은 늑대들을 물러나게 한 다음 모여진 힘을 움직이지 못하는 보스를 향해 뿜어내었다. 꽈앙! 동굴을 뒤흔드는 격렬한 폭발음과 함께 자욱한 먼지가 흩날렸다. 그리고 그 먼지 속에서 왼쪽 상반신이 통째로 사라진 보스가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지는 모습이 보였다. “헉... 헉...” 풀 차지의 강타를 사용한 후유증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준상의 몸을 괴롭혔다. 과열된 자동차의 엔진처럼 달궈진 그의 몸으로부터 재생이 시작되며 흰 연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지만, 그것도 잠시. 은은한 흰 빛이 몸을 감싸며 과부하가 걸린 그의 몸을 치유한다. 00038 트롤러 ========================================================================= “후우우...” 도끼로 인해 체력이 급격히 저하된 상태에서, 비록 힐링 포션을 사용했다고는 하지만 곧바로 풀 차지의 강타까지 썼으니 이 때문에 생긴 몸의 부담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였다. 바로 그 때 발휘된 것이 ‘강력한 곰의 영혼’. 우직한 곰의 인내력이 발휘되지 않았더라면 도끼로 인해 생명력이 고갈된 시점에서 그 끔찍한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기절해 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레벨 업 덕분에 몸의 부담이 상당 부분 사라지자, 준상은 일종의 쾌감 같은 것마저 느끼며 얼른 몸을 일으켰다. 아직 확인해 보지는 않았지만, 레벨 업과 동시에 휴대폰으로 연달아 두 번이나 메시지가 도착한 상태. 언제 퀘스트 완료가 뜰지 모르는 상황이니 빠르게 움직여야만 했다. 우선 커다란 도끼를 인벤토리에 우겨 넣는다. 그리고 쓰러진 보스와 갑옷 괴물의 머리를 뒤져 세 개의 시드를 손에 넣은 뒤 보스가 있던 장소를 샅샅이 뒤져 봤지만 달리 쓸만한 것은 찾을 수 없었다. “후...” 그렇게 동굴 안을 뒤지던 준상은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퀘스트가 완료된 것 치고는 메시지가 별로 들어오지 않은데다, 시간으로 따져 보더라도 벌써 전송되고 남았어야 했다. “...” 준상은 그제서야 품에서 휴대폰을 꺼내 메시지를 확인해 보았다. 첫 번째 메시지는 예상대로 레벨 업을 알리는 것이었지만, 두 번째 메시지는 준상의 생각과는 달리 메인 퀘스트의 완료를 알리는 메시지가 아니었다. 마을을 방어하십시오. :범람하는 암흑의 힘에 의해 움직이는 저주받은 군대가 마을을 침공하고 있습니다. 도시로부터 구원병이 올 때까지 마을을 지켜내십시오. [남은 시간:53시간 18분] [이 퀘스트는 여러 명의 인원이 동시에 참여합니다.] ->미완료 (Hidden) 죽음의 계곡에서 숨겨진 비밀을 밝혀내십시오. (협력) ->완료! (Hidden) 죽음의 계곡 주인을 토벌하십시오. (단독) ->완료! (Hidden) 죽음의 계곡 주인을 지키는 하수인을 토벌하십시오. (단독) ->완료! “이건...” 하나가 아니다. 메시지에는 무려 세 개나 되는 히든 퀘스트가 달성되었다고 나와 있었다. ‘협력’ 퀘스트가 하나, ‘단독’ 퀘스트가 둘. 이렇게 되면 준상은 모두 세 개의 추가 보상 상자를 받게 되지만, 죽음의 계곡 주인을 토벌하는데 참가하지 않은 다른 세 명의 파티원들은 ‘협력’ 항목으로 인한 추가 보상만 받게 된다. 하긴 혼자서 그 고생을 하고 때려 잡았는데 마을에 남은 세 사람과 보상이 같으면 확실히 억울한 일이긴 하다. 그나저나... 죽음의 계곡 보스를 쓰러뜨리면 당연히 바로 퀘스트 완료가 될 줄 알았는데, 이대로라면 구원군이 마을에 도착할 때까지 꼼짝없이 기다려야만 할 모양이다. 준상은 일단 퀘스트 메시지를 닫은 뒤 랜덤 카드를 열었다. 카드정보 명칭 : 카운터 레벨 : 1Lv 경험치 : 0 등급 : Uncommon 분류 : 스킬 성장 : 일반(대) 속성 : 없음 효과 : 적이 공격하는 타이밍에 맞춰 강력한 반격을 가한다. (쿨타임: 2초) Cost : 10 Seed : 3슬롯 적의 공격력에 자신의 공격력을 합쳐 되돌려 주는 강력한 반격기인 셈이다. “괜찮군.” 만족하며 카드 정보를 닫는데 다시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축하합니다! :콤보 카드를 조합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현재 조합 가능한 콤보 카드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지하 격투장의 암흑 무투가 [상세 확인] -콤보 카드 조합을 원하시면 해당 번호를 누르시고, 만약 조합을 원치 않으신다면 n을 누르세요(1/n) _ “엇...” 예상치 못한 또 다른 콤보 카드의 출현에 준상은 깜짝 놀라 얼른 상세 정보를 확인해 보앗다. 지하 격투장의 암흑 무투가 -피와 살이 튀는 지하의 격투장에서 불패의 신화를 쌓은 위대한 암흑 무투가의 힘이 담긴 카드 조합입니다. 이 콤보는 무투 계열의 스킬 사용에 특화 되어 있습니다. [조합상세] 광폭, 카운터, 숄더 차지, 강타, (야수의 영혼 효과 1종 이상) -효과: 1. 카운터, 숄더 차지, 강타의 위력 상승 (영혼 효과의 수 X 100%) 2. 카운터, 숄더 차지, 강타의 스킬 쿨타임 50퍼센트 감소 3. 카운터, 숄더 차지, 강타 사용시 치명타 발생 확율 증가. 일반 공격까지 모두 공격력 상승의 효과를 부여하는 광전사와는 달리 카운터와 숄더 차지, 강타의 스킬 공격력을 증폭시켜주는 역할 뿐이지만, 그냥 사용해도 엄청난 파괴력을 발휘하는 스킬들을 더욱 강력하게 증폭시켜 준다는 장점이 있었다. 특히나 준상의 경우에는 늑대의 영혼과 곰의 영혼, 이렇게 두 가지 영혼 효과를 지니고 있는 상태이므로 그 상승 효과는 무려 200퍼센트. 이 무투가 콤보를 쓴 상태에서 강타를 사용하면... 적어도 광전사 콤보를 쓸 때 보다 1.5배 더 강력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게다가 치명타 발생 확률까지 감안하면... 사실상 2배 이상의 위력을 뽑아낼 수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여기에 무투가 콤보의 경우에는 방어구 장착 불가라는 광전사 패널티로부터 자유롭다는 장점이 있다. 물론 광폭 카드로 인해 효과가 반감된다는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이것은 큰 장점이라 할 수 있다. 준상은 곧바로 카드 슬롯을 비우고 새로운 무투가 조합을 장착했다. 비어있는 하나의 카드 슬롯은 당연히 피칠갑(R). 이렇게 되면 2연격을 사용할 수 없다는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다른 공격 스킬들이 모두 무투가 조합에 속하므로 아예 광전사 콤보 전용 공격스킬로 장착하면 된다. 카드를 장착하자, 아니나 다를까 다시 메시지가 들어온다. 축하합니다! :당신은 처음으로 ‘지하 격투장의 암흑 무투가’ 조합에 성공했습니다! -당신의 위업을 찬양하며 ‘첫 번째 암흑 무투가’ 칭호를 부여합니다. [칭호 상세 정보 확인은 이곳을 누르십시오.] “하하...” 다른 조건은 그렇다 쳐도 야수의 영혼 효과는 군랑맹진이나 강력한 곰의 영혼 카드 같은 특정 카드를 손에 넣어야만 가능하다. 준상은 얼른 칭호 효과를 확인해 보았다. [첫 번째 암흑 무투가] :‘첫 번째 암흑 무투가’ 조합을 첫 번째로 성공한 자에게 부여되는 칭호. -효과: 야수의 영혼 효과를 하나 달성할 때마다 전체 속도 2퍼센트 증가. -칭호는 획득시 자동으로 효과가 적용됩니다. “오...” 이것은 영혼 효과를 적용 중일 때가 아니라 달성할 때마다 2퍼센트씩 전체 속도 증가 효과가 누적된다는 의미다. 즉, 준상의 경우에는 늑대의 영혼과 곰의 영혼, 이렇게 두 가지를 달성한 상태이므로 나중에 이 두 가지 효과를 해제하더라도 총 4퍼센트의 전체 속도 증가 효과를 유지하게 되는 셈이다. “좋군.” 준상은 카드 슬롯을 정리해 미친개, 광전사, 무투가의 세 가지 콤보를 각각의 단축 명령으로 간단하게 교체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카드 정리가 끝나자 준상은 다시 인벤토리에 넣어두었던 보스의 도끼를 꺼내 확인을 해보았다. 아이템정보 명칭 : 블러드서커 레벨제한 : 없음 종류 : 무기 등급 : Unique 공격력 : ?-? 효과 : 장착시 폭혈 발동. Seed : 5슬롯 설명 : 이것은 언제나 피를 갈구하는 마물입니다. 위력에 취해 남용한다면 당신은 영원히 암흑 속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게 됩니다. “유니크?” 준상은 아이템의 등급을 보고 깜짝 놀랐다. 지금까지 그가 얻은 카드와 아이템 가운데 가장 등급이 높았던 것은 투 플러스 레어 등급의 피칠갑이었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유니크 등급의 아이템을 발견한 것이다. “음...” 데미지 표시도 그냥 물음표로 나와 있고, 아이템 효과도 폭혈 하나 뿐이다. 혹시나 해서 폭혈을 찍어 보았다. 폭혈 : 피에 잠재되어 있는 힘을 폭발시켜 강력한 힘을 발산합니다. -많은 생명력을 소모할수록 더 높은 증폭률을 발휘합니다. -많은 생명력을 가지고 있을수록 한 번에 소모되는 생명력의 양이 증가합니다. [경고!] 폭혈 사용으로 생명력이 한계까지 고갈되면 사용자는 즉사합니다. 이 경우, 사용자는 언데드로 변화하여 어둠의 노예로 전락합니다. “...” 준상은 순간 소름이 돋았다. 단순히 좀 지치는 것을 넘어서... 사용자를 죽일 수도 있는 무기라니. 그렇게 난감해 하고 있는데, 문득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했다. 축하합니다! :당신은 처음으로 유니크 아이템을 획득했습니다! -당신의 위업을 찬양하며 ‘첫 번째 유니크 습득자’ 칭호를 부여합니다. [칭호 상세 정보 확인은 이곳을 누르십시오.] “...” 준상은 일단 효과를 확인해 보았다. [첫 번째 유니크 습득자] :유니크 아이템을 처음으로 습득한 자에게 부여되는 칭호. -효과: 시드 습득률 증가 -칭호는 획득시 자동으로 효과가 적용됩니다. 역시나 정확한 수치는 나와 있지 않지만 더 많은 시드를 습득할 기회가 생긴다는 건 매우 훌륭한 효과라 할 수 있다. “그러고 보니...” 준상은 자신이 착용하고 있는 수호의 인장을 바라보았다. 등급은 레어지만 그래도 세트 아이템인데, 이것을 습득할 때는 따로 칭호가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뒤늦게서야 떠올린 것이다. “누군가 나보다 먼저 세트 아이템을 완성했다는 뜻인가.” 조금 아쉽기는 했지만, 준상은 일단 도끼를 인벤토리에 보관했다. 어쩌다 한 번 사용하는 것이라면 몰라도 늘상 들고 다니며 사용하기에는 아무래도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적어도 이곳의 보스처럼 생명력을 보충할 방법, 이를테면 생명력 흡수나 재생률을 필요한 수준까지 끌어올리지 않고서는, 이따금 비장의 무기로 사용하는 정도가 최선이 아닐까 싶다. 준상은 다시 이곳에서 얻은 시드 세 가지를 꺼내어 확인을 시작했다. 시드들은 각기 생명력 흡수 7퍼센트짜리 뱀파이어릭 시드와 물리 공격력 4퍼센트 증가의 피지컬 시드, 물리 저항 6퍼센트의 쉘 시드였다. 이 시드들은 이전에도 한 번씩 나왔던 적이 있었지만, 예전에 나왔던 것들은 이번에 나왔던 것보다 효과가 떨어졌었다. 일례로 이전에 튜토리얼에서 동굴을 탐사하고 얻었던 뱀파이어릭 시드의 경우에는 흡수율이 5퍼센트에 지나지 않았었다. 준상은 새로 얻은 세 개의 시드를 모두 묘안석 목걸이에 장착했다. “후...” 각종 보상과 아이템 확인을 모두 마친 준상은 늑대들과 함께 동굴 밖으로 나왔다. 원래는 후딱 보스만 잡으려는 생각이었지만, 퀘스트 내용으로 봐서는 별 수 없이 50시간 이상을 버텨야만 할 모양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보스를 쓰러뜨린 이상 더는 언데드가 늘어나지 않으리라는 점이다. 잠시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준상은 시드 습득률 증가 효과도 확인할 겸 계곡 안에 남아있는 나머지 언데드를 청소하기로 마음먹었다. 하는 김에 새로 얻은 무투가 콤보의 위력도 확인해 볼 생각이었다. 00039 트롤러 ========================================================================= 세 마리의 늑대를 이끌고 계곡에 여전히 남아 있는 검은 기운을 도깨비불로 태워버리면서 내려가던 준상은, 이윽고 한 무리의 언데드들을 발견했다. 하지만 도깨비불이 검은 기운을 태워버리는 요란한 소리 때문인지, 언데드들도 거의 동시에 준상을 발견하고 달려왔다. “후우...” 먼저 가볍게 심호흡을 해 마음을 가라앉힌 준상은 늑대들과 함께 앞으로 내달렸다. 무투가 콤보를 장착한 준상은 가장 앞서 달려오는 좀비를 향해 숄더 차지를 발동하는 것을 전투의 시작으로 삼았다. 콰앙! 대포알처럼 뻗어나간 준상의 몸이 사나운 좀비의 몸통과 겹쳐지는 순간, 폭음이 터져 나왔다. 소리만 요란한 것이 아니었다. 숄더 차지가 가슴에 작렬하는 순간 좀비의 몸은 부서지고 찢어져 사방으로 터져 나가 버렸다. “흠...” 준상은 고개를 갸웃했다. 위력이 강해진 것 같기는 한데... 상대가 너무 약해서인지 얼마나 강해진 건지 좀처럼 파악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 해골 병사 하나가 준상을 향해 곧장 뛰어들며 검을 찔러 왔다. 준상은 얼른 두 팔을 옆구리에 붙이며 자세를 취한 뒤, 자신의 얼굴을 노린 채 찔러 들어오는 칼날을 흘리며 카운터를 발동했다. 퍽! 일직선으로 찔러 오는 칼날과 엇갈리며 뻗어간 준상의 펀치는 곧장 해골 병사의 아래턱을 부수고 들어가 목뼈를 부러뜨렸고, 그 파괴력을 견디지 못한 해골 병사의 머리는 몸 뒤로 날아가 버렸다. “흠...” 처음 써본 것 치고는 제법 훌륭한 카운터 였지만, 준상은 왠지 만족스럽지가 않았다. 이 느낌을 뭐라고 해야 할까. 깔끔하지가 않다고 해야 하나. 날아오는 공을 방망이로 맞춰서 멀리 날리긴 했는데, 뭔가 타격감이 깨끗하지 않고 억지로 힘을 써서 날린 듯한... 그런 느낌이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준상을 향해 이번에는 좀비 세 마리가 동시에 공격을 가해왔다. 준상은 뒤에서 달려든 좀비의 손목을 낚아채 앞으로 끌어당기며 팔꿈치로 일격을 가해 머리를 부숴버린 후, 그 몸을 앞으로 끌어당겨 방패로 삼았다. 그리고 앞에서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몸을 날리던 좀비가 그 몸에 가로 막혀 멈칫 하는 사이, 허리를 껴안으려는 듯이 낮은 자세로 돌진해 오는 또 다른 좀비를 향해 몸을 돌린 후 그 머리를 붙잡아 무릎으로 박살내 버렸다. 정면에서 달려들던 좀비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머리 잃은 몸뚱이를 옆으로 치워버린 후 사납게 팔을 뻗었지만, 순식간에 쿨타임이 끝난 준상의 카운터를 얻어맞고 자신 역시 머리가 박살나 버리고 말았다. “음...” 모두 일격에 잠재우기는 했지만, 난전 중에는 쿨타임에 맞춰 카운터 타이밍을 잡기가 어려워서 그냥 막싸움이 되어버리는 경향이 있었다. 이래서는 무투가 콤보를 사용하는 의미가 없다. 물론 난전 중에는 광전사 콤보 쪽이 훨씬 효율적인 것이 사실이지만, 준상은 아무래도 불만스러운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이 카운터라는 기술은 기존에 사용하던 다른 기술들과는 달리 상당한 연습이 필요할 듯 싶었다. 하긴... 격투기 도장에서도 카운터만큼은 고급 기술이라고 해서 쉽게 가르치려 하지 않았었다. 당시에는 일부러 안 가르쳐 주는 건가 싶었는데, 막상 사용해 보니 상대의 공격 타이밍을 정확히 파악하는 일부터가 어지간한 경험 가지고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전술 따위는 없이 맹목적으로 돌격해 오는 좀비를 상대로도 이 정도인데, 머리가 좀 돌아가는 상대라면 카운터 타이밍을 잡기도 어려울 것이다. “할 수 없군.” 다행히 연습할 상대는 지천에 널려 있다. 어차피 50여시간 동안은 현실 세계로 돌아가지도 못하니, 이참에 카운터라는 기술을 완전히 숙달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이다. 준상은 가볍게 손목을 털어낸 후,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좀비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한편. 이보다 앞서, 준상이 막 보스를 쓰러뜨리고 있을 때. 마을에서는 한창 언데드들을 상대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후아암...” 서유미는 이전과는 달리 목책 밖으로 뛰쳐나가지 않은 채 대기하고 있었다. 준상이 빠지고 대신 임서윤이 전투를 주도하게 되면서 전술 자체에도 변화가 생긴 탓이다. 사실 전술이라고 해도 별 것 없었다. 강철 캐비닛 뒤에 몸을 숨긴 진세아가 불의 벽으로 목책 앞을 막고, 언데드들을 최대한 그 앞으로 끌어들인 다음 미리 설치한 크레모아 두 개를 단숨에 격발시켜 꾸역꾸역 모여든 언데드들을 단숨에 쓸어버리는 것이 바로 지금 사용하는 전술의 전부였다. 임서윤은 좀비와 해골 병사로 이루어진 병사들이 최대한 크레모아의 살상 반경 안에 들어오기를 기다리면서 뒤쪽에서 화살을 쏴대는 해골 궁수들을 저격으로 하나씩 쓰러뜨리다가 하품을 하고 있는 서유미를 보며 피식 웃었다. “지루하세요?” “...” 서유미는 하품을 하던 모습을 들킨 것이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힌 채 고개를 숙였다. 임서윤은 그 모습을 보며 웃다가 새로 장전한 화살로 마지막 남은 해골 궁수를 쓰러뜨린 후, 언데드들의 위치를 확인했다. “격발합니다. 준비하세요.” “네.” 폭약을 사용하기에 앞서 도움이 되지 않는 마을 주민들은 아예 2차 방어선 뒤로 물려 버렸다. 폭약을 설치하는 모습이라든가 그걸 사용하는 모습을 들키면 괜히 여러모로 일이 번거로워질 수 있기 때문에 아예 뒤로 물린 것이다. 임서윤은 목책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한 번 더 언데드들의 위치를 살핀 후, 손에 쥐고 있던 두 개의 격발기를 힘주어 눌렀다. 그러자, 꽈광! 격렬한 폭음과 함께 목책 밖에 사선이 X자 모양으로 엇갈리게 설치되어 있던 두 개의 크레모아가 일제히 폭발하며 그 안에 머금고 있던 강철 구슬들을 사방으로 뿜어내었다. 수백 개의 강철 구슬들은 허공을 날아 좀비들의 살을 뚫고 해골 병사들의 뼈를 부수었다. 임서윤은 성공적으로 크레모아가 폭발하자 다시 고개를 들어 목책 밖을 살폈다. 대부분의 언데드들이 폭발에 휩쓸려 박살이 나버렸지만, 여전히 예닐곱 마리의 언데드들이 비틀거리며 움직이는 모습이 보인다. 임서윤은 캐비닛 뒤에서 불의 벽을 유지하고 있는 진세아에게 손을 들어 보이며 외쳤다. “지금입니다!” “네!” 진세아는 임서윤의 신호에 맞춰 불의 벽을 해제했다. 그러자 폭발음에 깜짝 놀라 고개를 숙이고 있던 서유미가 그제서야 몸을 일으키며 밖으로 나갔다. 서유미는 불의 벽 때문에 달궈진 공기 속을 뚫고 터덜터덜 밖으로 걸어 나가 크레모아의 폭발 속에서도 살아남은 나머지 언데드 들을 정리했다.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마지막 한 놈까지 정리를 끝낸 서유미가 목책 안으로 돌아오자 진세아가 다가와 마실 것을 건넨다. “수고하셨어요.” “네...” 진세아는 이전과는 달리 기운이 하나도 없어 보이는 서유미의 모습에 쓴 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그 빨간 늑대가 그렇게 좋아요?” “...” 진세아의 물음에 서유미는 볼을 발갛게 물들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손에 든 식칼만 아니면 영락없이 사랑에 빠진 소녀의 모습이다. “그나저나... 정말 혼자서 괜찮을지 모르겠네요.” “준상씨요?” “네. 서윤씨는 걱정 말라고 하지만, 그래도 역시 혼자서는...” 하지만 바로 그때. 그녀들의 휴대폰이 일제히 울리기 시작한다. 바로 메시지 알림이었다. “뭐지?” 뭔가 싶어 휴대폰을 열어보던 진세아는 메시지 내용을 확인하고는 입이 떡 벌어졌다. “헉!” 그녀들의 휴대폰은 이런 내용이 찍혀 있었다. 마을을 방어하십시오. :범람하는 암흑의 힘에 의해 움직이는 저주받은 군대가 마을을 침공하고 있습니다. 도시로부터 구원병이 올 때까지 마을을 지켜내십시오. [남은 시간:53시간 18분] [이 퀘스트는 여러 명의 인원이 동시에 참여합니다.] ->미완료 (Hidden) 죽음의 계곡에서 숨겨진 비밀을 밝혀내십시오. (협력) ->완료! “세, 세상에...” “벌써...” 자세한 내용은 없었지만, 그 메시지가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 준상이 죽음의 계곡이란 곳에 대한 토벌을 성공했음을 뜻한다. 진세아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혼자 끝장 내버리다니... 이건 괴물도 아니고.” 그러자 서유미가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방해된다고 하시더니... 정말이었네요.” “...” 준상이 마을에서 벗어난지 고작 몇 시간 밖에 흐르지 않은 상황. 그 시간 동안 언데드들이 우글거리는 숲과 산을 지나 계곡을 정리하다니... 도대체 얼마나 강해야 그런 일이 가능한지 진세아로서는 감히 상상이 되지 않았다. 둘이 메시지를 보며 잠시 충격에 빠져 있는데, 목책 밖에서 크레모아 설치를 마친 임서윤이 돌아왔다. “메시지 보셨습니까.” 목책 안으로 돌아오자마자 대뜸 그것부터 묻는 임서윤에게 진세아는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봤어요.” 임서윤은 마주 웃으며 말했다. “후... 대단한 줄은 알았지만, 정말 엄청나군요.” 그 말에 진세아는 샐쭉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치... 서윤씨가 그렇게 말하면 저는 뭐가 되요?” “하하... 얘기가 그렇게 되나요.” 임서윤은 어색하게 웃으며 얼버무렸고, 진세아는 그를 한번 째려본 후 다시 목책 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나저나... 죽음의 계곡을 정리했는데도 퀘스트 완료가 되지 않을 걸 보면, 구원군이 올 때까지 그냥 죽치고 기다려야 하는 건가요.” 그 말을 들은 임서윤은 턱을 만지작거리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글쎄요... 어쩌면 이런 걸 수도 있겠네요.” “뭔데요?” “애초에 이 퀘스트 자체가 언데드들로부터 마을을 방어하는 거잖아요.” “그렇죠.” “그건 다시 말해서 죽음의 계곡이 정리되었어도 언데드들이 남아 있는 이상은 마을을 방어해야할 필요성이 있다는 의미가 되죠.” “아...” “모르긴 해도 박준상씨는 아마 최대한 빨리 죽음의 계곡에 도착하기 위해 중간에 마주치는 언데드들은 그냥 지나쳤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게 빨리 히든 퀘스트를 완료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죠.” “그렇군요.” 진세아는 이해가 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임서윤은 속으로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준상이 일부러 언데드들을 처리 않고 지나친 데에는 자신을 골탕 먹이려는 의도도 있다는 사실을 진작에 눈치 챈 탓이다. “이거 참... 곤란한 일이네요.” 임서윤의 혼잣말에 진세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묻는다. “네? 뭐가요?” 그 모습이 상당히 귀여웠기 때문에 임서윤은 다시 웃을 수밖에 없었다. “하하... 아무것도 아닙니다.” “치...” 어쨌거나, 히든 퀘스트 달성으로부터 약 네 시간 정도 시간이 다시 지났다. 이 시간 동안 마을에는 한 차례의 습격이 더 있었지만, 역시나 크레모아를 사용한 전술로 어렵지 않게 쓸어 버렸다. 크레모아라는 무기 자체가 많은 수의 적이 밀집되어 있을수록 위력을 발휘하는 무기이기 때문에 별다른 위험은 없었지만, 맹렬한 폭음과 함께 언데드들이 박살나는 모습은 마을 사람들로 하여금 일행에 대해 경외를 넘어서 두려움마저 느끼도록 만들기에 충분했다. 아쉬운 것은 임서윤이 준비한 크레모아가 네 개 뿐이라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발사형 무기를 사용해야 한다는 점이다. “슬슬 준상씨가 돌아올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요.” 진세아의 말에 임서윤은 시계를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이 마을에 온지도 하루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음... 확실히 그렇군요.” 마을을 출발해서 죽음의 계곡을 정리하는데 걸린 시간을 감안하면 이미 도착하고도 남았어야 할 시간이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걱정스러운 기색이 역력한 진세아의 말에 지루한 표정으로 꾸벅꾸벅 졸고 있던 서유미가 화들짝 잠이 깬 모습으로 고개를 들었다. 임서윤은 그녀들의 모습에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아마 그건 아닐 겁니다.” “하지만...” “제 생각엔 준상씨가 바깥에서 나머지 언데드들을 처리하고 있는 중이 아닐까 싶네요.” “혼자서요?” “혼자서요.” 충분히 가능한 일이긴 하지만, 점점 날도 어두워지고 있는데 많은 수의 언데드들을 혼자 상대하는 건 역시나 위험천만한 일이라고 진세아는 생각했다. 물론 그 커다란 늑대들이 있으니 완전히 혼자는 아니지만 말이다. 바로 그때, 그들의 휴대폰이 일제히 울리기 시작한다. 뭔가 싶어 휴대폰을 열어본 그들은 예상치 못한 내용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마을을 방어하십시오. :범람하는 암흑의 힘에 의해 움직이는 저주받은 군대가 마을을 침공하고 있습니다. 도시로부터 구원병이 올 때까지 마을을 지켜내십시오. [남은 시간:48시간 08분] [이 퀘스트는 여러 명의 인원이 동시에 참여합니다.] ->완료! (Hidden) 죽음의 계곡에서 숨겨진 비밀을 밝혀내십시오. (협력) ->완료! (Hidden) 마을 주민의 피해를 최소화 하십시오 (10명 이하) (헙력) ->완료! (Hidden) 제한 시간 이내에 모든 언데드들을 섬멸하십시오 (협력) ->완료! - 당신이 이번 퀘스트에서 보여준 행동과 성과를 정산합니다. 이 과정은 약간의 시간이 소요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이건...” 진세아의 놀란 표정을 보며 임서윤은 다시 쓴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밖에 돌아다니던 언데드들을 혼자서 다 쓸어버린 모양이네요, 준상씨가.” “세상에...”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메시지는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전 B랭크네요. 서윤씨는요?” “전 A랭크입니다.” “와... 저도 B랭크인데...” “그래요? 서유미씨도 A랭크일줄 알았는데.” 그들이 얘기를 나누는 와중에도 메시지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고, 이윽고 귀환을 위한 카운트 다운이 시작되었다. 진세아는 임서윤과 서유미를 향해 먼저 작별의 인사를 했다. “함께 해서 즐거웠어요. 다음에... 또 볼 수 있으면 좋겠네요.” “...” “...” 임서윤과 서유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때까지 죽지 않고 몸 건강히 살아남아야만 한다는 전제가 있긴 했지만, 그들은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다만, 전송되기 직전에 서유미는 준상이 떠나갔던 방향을 바라보며 작은 목소리로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다음에 또 보자, 쫑아.” 00040 트롤러 ========================================================================= 카운트 다운이 끝나자 플레이어들은 본래 자신이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갔고, 그것은 준상 역시 마찬가지였다. “후우...” 등산로 옆의 바위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준상은 그대로 낙엽을 깔고 앉은 채 산의 공기를 깊이 들이마시며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잠시 서늘한 바위에 기댄 채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던 준상은 뜨거운 차 한 잔을 마실 정도의 시간이 지나서야 휴대폰을 꺼내어 쌓여 있는 메시지를 하나씩 확인하기 시작했다. 마을을 방어하십시오. :범람하는 암흑의 힘에 의해 움직이는 저주받은 군대가 마을을 침공하고 있습니다. 도시로부터 구원병이 올 때까지 마을을 지켜내십시오. [남은 시간:48시간 08분] [이 퀘스트는 여러 명의 인원이 동시에 참여합니다.] ->완료! (Hidden) 죽음의 계곡에서 숨겨진 비밀을 밝혀내십시오. (협력) ->완료! (Hidden) 죽음의 계곡 주인을 토벌하십시오. (단독) ->완료! (Hidden) 죽음의 계곡 주인을 지키는 하수인을 토벌하십시오. (단독) ->완료! (Hidden) 죽음의 계곡 근처의 모든 언데드들을 섬멸하십시오 (단독) ->완료! (Hidden) 마을 주민의 피해를 최소화 하십시오 (10명 이하) (협력) ->완료! (Hidden) 제한 시간 이내에 모든 언데드들을 섬멸하십시오 (협력) ->완료! - 당신이 이번 퀘스트에서 보여준 행동과 성과를 정산합니다. 이 과정은 약간의 시간이 소요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 카운터 연습을 하다 보니 이렇게 되기는 했지만, 이번에 준상이 달성한 히든 퀘스트의 수는 무려 6개나 되었다. 축하합니다! : 당신의 랭크는 SSS입니다. -당신은 이번 퀘스트의 목표를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완벽하게 수행했습니다. 기본 보상 외에 추가 보상이 지급됩니다. 보상 : 경험치 많이, 추가 보상 상자(협력)x3, 추가 보상 상자(단독)x3, 추가 보상 상자(SSS랭크) -> 보상을 지금 수령하시겠습니까? (Y/n) _ (주의) 수령하지 않은 보상은 7일후 자동 소거됩니다. “호오...” S랭크가 끝이 아니었던 건가. 이번 퀘스트에서 준상의 평가는 무려 트리플 S 랭크였다. 준상은 느긋하게 추가 보상 상자들을 열어 보기 시작했다. 아이템정보 명칭 : 리제네레이션 시드 레벨제한 : 10 종류 : 시드 등급 : Uncommon 효과 : 재생률 7% 증가 설명 : 재생률을 증가시켜주는 시드입니다. Seed 슬롯이 있는 아이템이나 카드에 장착하여 능력을 강화할 수 있습니다. 한번 장착한 시드를 분리하기 위해서는 특수기능 ‘분리’가 필요합니다. [이 시드를 아이템이나 카드에 장착하시려면 이곳을 누르십시오.] “오!” 별 생각 없이 상자를 열었는데 처음부터 대박이 터졌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나온 적이 없었던 재생률 증가 시드가 나온 것이다. 그것도 무려 7퍼센트나 되는 대단한 수치! 동굴에서 얻었던 불저항의 반지에 재생률 강화 시드가 박혀 있기는 했지만, 수치는 5퍼센트에 불과했었다. 이로써 준상의 재생률 총합은 단숨에 23퍼센트까지 오르게 되었다. 준상은 기대를 품고 두 번째 협력 상자를 열었다. 카드정보 명칭 : 피칠갑 레벨 : 1Lv 경험치 : 0 등급 : Uncommon 분류 : 스킬 성장 : 대기만성(중) 속성 : 없음 효과 : 공격 성공시 적에게 5% 확률로 공포 유발 Cost : 15 Seed : 2슬롯 “...” 그러면 그렇지... 왜 이게 한동안 안 나오나 했다. 그나마 이전에는 나온 적이 없었던 언커먼 등급이라는 점이 다르긴 했지만, 이미 레어 등급의 피칠갑이 있는 이상 별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혹시나 피칠갑을 등급 별로 갖추면 뭔가 다른 콤보나 칭호가 나오지는 않을까 하고 잠시 기다려 봤지만, 불행히도 휴대폰에는 아무런 메시지도 날아들지 않았다. “쯧.” 준상은 혀를 차며 다음 상자를 열었다. 축하합니다! 특수카드 ‘레벨 업’을 획득했습니다. :특수카드를 획득하면 봉인된 특수기능을 해제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특수기능 ‘레벨 업’이 활성화됩니다. -이 기능은 임의의 카드 하나를 무조건 1레벨 상승시킵니다. 레벨을 올리고 싶은 카드가 있으십니까? (Y/n) _ (현재 남은 횟수 : 1회) “호오...” 무조건 카드 레벨을 1레벨 올려주는 기능이라니... 준상은 일단 n을 선택했다. 아직은 초반이라 카드의 레벨을 올리는 것이 그다지 어렵지 않은 탓에, 나중에 레벨 업이 힘들어지거나 한계 레벨에 도달했을 때 사용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물론 한계 레벨 같은 것이 정말로 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만약 존재한다면 이 카드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값진 보상이 될 수 있었다. 준상은 이어서 단독 퀘스트 보상 상자를 열기 시작했다. 아이템정보 명칭 : 미친개의 발톱 레벨제한 : 10 종류 : 무기 등급 : Uncommon+ 공격력 : 9-20 효과 : 적중시 출혈 확률 15% 증가, 극대화 피해 20% 증가 Seed : 3슬롯 설명 : 미친개라고 물기만 하란 법은 없습니다. 이 무기를 장착하면 추가로 미친개 관련 칭호의 효과를 두 배로 증가시켜 줍니다. “...” 준상은 휴대폰에서 튀어나온 장갑과 일체형으로 만들어진 너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둥그스름한 철로 보강된 주먹 부분에는 큼직한 마름쇠 모양의 쐐기가 세 개나 달려 있어서 얼핏 보기에도 지금 준상이 사용하는 징 박힌 가죽 장갑보다 훨씬 강력한 느낌이다. 게다가 추가로 출혈 효과가 부여되어 있는데다, 굳이 미친개 콤보를 장착해야만 착용할 수 있다는 제한도 없고, 장갑 형태라 이것을 착용하더라도 다른 무기를 사용하는데 큰 불편이 없다는 것 또한 장점이었다. 여기에 미친개 관련 칭호의 효과를 두 배로 증폭시켜 주는 효과까지 있으니... 명칭이나 설명만 빼면 준상으로서는 그야말로 안성맞춤에 가까운 무기인 셈이다. 준상은 일단 인벤토리에 너클을 집어넣은 후 다음 상자를 열었다. 하지만 이번에 나온 카드는 이미 준상이 보유하고 있는 ‘강타’ 카드였다. “쩝...” 준상은 입맛을 다시며 마지막 상자를 열었다. 그러자 또다시 힐링 포션 카드가 튀어나온다. 비상용 포션이야 많을수록 좋다. 그렇지 않아도 이번에 그 덕을 톡톡히 보지 않았던가. 이미 가지고 있는 카드라 조금 아쉽기는 해도 그리 나쁜 보상은 아니었다. “후우...” 이제 남은 상자는 SSS랭크 보상 상자. 준상은 어쩐지 조금 떨리는 기분을 느끼며 상자를 열었다. 그러자, 갑자기 무언가가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축하합니다! 특수카드 ‘미니맵’을 획득했습니다. :특수카드를 획득하면 봉인된 특수기능을 해제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특수기능 ‘미니맵’이 개방됩니다. -미니맵은 이미 지나친 지형을 자동으로 지도에 기록하는 기능입니다. 가장 먼저 나온 것은 바로 미니맵이었다. 멀리 있는 적을 미리 탐지하는 레이더의 기능까지는 갖추고 있지 않았지만, 이미 지나간 곳의 지형을 자동으로 기록해주는 기능만으로도 대단히 쓸모 있는 기능이라 할 수 있다. 축하합니다! :당신은 처음으로 SSS랭크를 달성했습니다! -당신의 위업을 찬양하며 ‘아주 아주 특별한’ 칭호를 부여합니다. [칭호 상세 정보 확인은 이곳을 누르십시오.] 이런 것도 칭호가 부여되는 건가. 준상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칭호의 정보를 확인해 보았다. [아주 아주 특별한] :SSS랭크를 처음으로 달성한 자에게 부여되는 칭호. -효과: 현재 달성 가능한 모든 숨겨진 퀘스트의 목록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칭호는 획득시 자동으로 효과가 적용됩니다. “헉!” 준상은 효과를 확인하고는 그만 헛숨을 들이키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모든 숨겨진 퀘스트를 미리 알 수 있다니! 지금까지 준상이 다른 자들보다 빠른 성장을 보일 수 있었던 것은 재생력을 이용한 혹독한 수련의 덕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숨겨진 퀘스트를 남들보다 많이 수행해 더 많은 보상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런 숨겨진 퀘스트를 일일이 찾아다닐 필요 없이 바로 확인할 수 있다니! 이건 어떤 의미로는 지금까지 나왔던 그 어떤 보상보다도 값진 보상이라 할 수 있었다. “멋지군.”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축하합니다! 특수카드 ‘랜덤시드’를 획득했습니다. :특수카드를 획득하면 봉인된 특수기능을 해제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특수기능 ‘랜덤시드’가 개방됩니다. -랜덤시드는 사용하지 않는 시드 두 개를 합성해 새로운 속성의 시드 하나를 얻는 기능입니다. “오...” 원래대로라면 이런 도박성이 강한 기능은 별 의미가 없는 일이겠지만, 이번에 유니크 습득자 칭호를 얻으면서 시드 습득률이 현저하게 올라간 준상에게는 제법 쓸만한 기능이라 할 수 있었다. 실제로 죽음의 계곡과 거기서 흘러나온 언데드들을 쓸어버리면서 준상은 무려 12개나 되는 시드를 얻었고, 이번 퀘스트를 통틀어 계산하면 스무 개가 넘는 시드를 수확했었다. 그 중에는 생명력 흡수 기능을 가진 뱀파이어릭 시드나 재생률 증가의 리제네레이션 시드처럼 준상에게 꼭 필요한 것도 있었지만, 1~2퍼센트 짜리 속성 저항은 솔직히 장착해도 별 의미가 없는 시드들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쓸모 없는 시드들을 활용해 보다 강력한 시드들을 얻을 수 있다면, 준상으로서는 훨씬 남는 장사인 셈이다. “좋군.” 준상은 다시 새롭게 레벨이 오른 스킬 카드들을 확인했다. 죽음의 계곡과 거기서 흘러나온 언데드들을 상대하면서 레벨이 오른 카드는 모두 두 가지인데, 하나는 숄더 차지이며 또 하나는 카운터이다. 숄더 차지야 이전부터 써왔던 기술이라 슬슬 레벨 업이 될 시기가 되었었지만, 카운터는 이제 막 얻은 스킬임을 감안해 보면 준상이 이번에 카운터라는 스킬을 체득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다. 축하합니다! 스킬카드 ‘숄더 차지’의 레벨이 올라갔습니다. :카드의 레벨이 올라가면 여러 가지 효과가 추가됩니다. -‘숄더 차지’ 발동시 추가 공격력이 2퍼센트 증가합니다. -‘숄더 차지’ 명중시 스턴 확률이 2퍼센트 증가합니다. 현재까지는 대부분의 경우 숄더 차지에 맞으면 일격에 분쇄되는 일이 많지만, 앞으로 좀 더 강한 적이 나타날 경우를 상정해보면 스턴 확률 역시 버릴 수 없는 기능이다. 축하합니다! 스킬카드 ‘카운터’의 레벨이 올라갔습니다. :카드의 레벨이 올라가면 여러 가지 효과가 추가됩니다. -‘카운터’ 발동시 추가 공격력이 2퍼센트 증가합니다. -‘카운터’ 발동시 치명타 발생 확률이 2퍼센트 증가합니다. 수치는 낮지만 치명타 발생 확률은 직접적으로 데미지 증가와 연결되는 부분이기 때문에 이것 역시 소홀히 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준상은 이번 퀘스트에서 얻은 것들을 모두 정리하자 그제서야 자리에서 일어나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낸 뒤 파티를 풀고 집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옆에 작품설정이라는 메뉴 보이시나요? 척 보기에는 아무것도 등록이 되어 있지 않은 걸로 나옵니다만... 초기 화면에 목록이 나타나는 것은 전체설정 뿐입니다. 편당 설정은 목록에 나타나지 않도록 되어 있죠. 작품설정을 클릭해 보시면 몇편에서 무엇을 얻었고 어떤 메시지가 나왔는지 일목요연하게 확인하실 수 있으니 주인공이 언제 무엇을 얻었는지 보다 쉽게 알 수 있으실 겁니다. 00041 트롤러 ========================================================================= 하지만 집으로 향하던 준상은 남자 두 명이 집 앞에서 서성이는 것을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 어쩐지 낯이 익은 느낌. 잠시 기억을 더듬던 준상은 그들이 이전에 병원에서 깨어났을 때 만났던 경찰들임을 알아 볼 수 있었다. 그때와는 달리 사복 차림이라 쉽게 떠올리지 못한 것이다. 준상은 얼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이전에는 성진이란 놈과 그 애비라는 작자가 귀찮게 하더니, 이제는 경찰들까지 찾아오고 있다. 이대로라면 내일 당장 서유미나 임서윤이 초인종을 눌러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다. “역시... 집을 정리해야 하나.” 슬며시 짜증이 나기 시작한다.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강해져서 살아남을까를 생각하기도 바쁜 판에, 자꾸 옆에서 걸리적거리면 아무리 성격이 좋아도 짜증이 날 수 밖에 없는 일이다. 준상은 일단 자리를 피할까 하는 생각을 떠올렸다. 분명 저 경찰들은 죽어나간 귀환자들의 진실에 대해 캐묻고자 할 터. 사실... 귀환자들의 진실은 언제가 되었든 밝혀지기 마련이다. 귀환자들 자체가 모두 튜토리얼이라는 혹독한 관문을 뚫고 살아남은 자들이라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 모두가 준상처럼 견고한 정신력을 가지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숲에서의 퀘스트 도중 죽어버린 여자처럼, 튜토리얼은 어찌어찌 넘겼어도 계속 되는 시련을 견디다 못해 지쳐버리는 인물이 없으리라고는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그들이 자신이 처한 현실을 밝힌다 해도 그걸 곧이 곧대로 즉시 받아들이는 사람도 없겠지만, 성진의 경우처럼 눈앞에서 사라졌다가 나타나게 되면 결국 믿지 않을 수 없을터. 그렇게 되면 국내 최초의 귀환자인 준상에게도 다시 시선이 돌아오지 않는다고는 장담하기 어려워진다. 하지만 이대로 준상이 잠적하더라도 한 가지 문제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휴대폰 위치 추적이다. 퀘스트 메시지를 수령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휴대폰을 켜두어야만 하는 플레이어들의 입장상 경찰이나 기타 공권력이 마음먹고 휴대폰 위치 추적을 나설 경우 이것을 막을 방법이 없다. “음...” 생각을 이어가던 준상은 문득 위치 추적이 먹히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휴대폰이 충전 없이도 계속 꺼지지 않는 것을 감안하면, 누군가 어떤 방식으로든 휴대폰에 손을 써놨다는 뜻이 된다. “이건 확인해 봐야겠군.” 확인 자체는 생각보다 그리 어렵지 않다. 일례로 뽀글 같은 서비스에서는 기본적으로 자신의 스마트폰 기기를 뽀글 맵으로 탐색할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준상은 일단 생각을 정리한 후 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길목에서 대기하고 있던 두 남자가 준상에게 다가와 말을 건넨다. “안녕하십니까. 혹시 저 기억하시는지요.” “...” 준상이 말없이 바라만 보자 남자는 머쓱한 표정으로 자신의 소개를 했다. “옷차림이 이래서 그런가... 일전에 병원에서 뵈었는데 기억 안 나십니까?” “절 병원에서 보셨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는지도 기억하실 텐데요.” “...” 남자는 그만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준상의 말대로 최초의 귀환자다 뭐다 해서 정치인이며 기자들이 수두룩히 다녀갔던 것을 뻔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준상은 남자가 대답을 하지 못하자 그대로 지나쳐 가려 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남자가 갑자기 준상의 팔을 잡는다. “어?” 말도 없이 그냥 가버리려는 것을 막으려도 엉겁결에 취한 행동이었지만, 남자는 순간 옷 너머로 전해지는 단단한 근육의 감촉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뭡니까.” 그리고 돌아오는 준상의 시선. 무표정하게 바라보는 그 시선과 눈이 마주친 순간, 남자는 마치 누군가가 전신을 밧줄로 옭아맨 것처럼 꼼짝도 못한 채 그대로 굳어버릴 수밖에 없었고, 덕분에 기껏 붙잡은 옷자락 마저 놓쳐 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옆에서 지켜보던 처음의 남자가 준상을 향해 급히 말했다. “경찰입니다. 협조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만.” 하지만 준상은 돌아보지도 않은 채 대답했다. “거절합니다.” 그리고는 곧장 집으로 향한다. 옷자락을 잡으려다 놓친 남자는 그제서야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우와... 무슨 눈빛이... 저 사람 전에는 저렇지가 않았던 것 같은데...” “음...” 처음의 남자, 김명석은 사라진 준상의 뒷모습을 보며 턱을 긁적거렸다. “어떻게 하나 같이 저 모양인지 모르겠군.” “그러게 말입니다.” “뭔가 있는데... 왜 아무도 말을 안 하는 거지.” 그러자 그의 동료가 말했다. “이쯤 해두죠. 위에서도 섣부르게 건드리지 말라는 지침이 내려온 상황이기도 하고...” “쯧...” 김명석은 알지 못했지만, 귀환자들에 대한 수사와 보도를 막은 것은 바로 성진의 아버지인 김종경이었다. 그는 준상의 포섭에 실패하자 다른 귀환자들을 포섭해 하나의 단체를 설립하려는 중이었는데, 이런 은밀한 움직임은 미국이나 일본, 중국 등 다른 나라에서도 과정이나 목적은 달랐지만 모두 일어나고 있는 현상 중 하나였다. 귀환자들에 대한 수사 자제 요청과 보도 관제는 바로 그러한 과정을 진행시키기 위한 밑작업이었다. 준상은 창가에서 김명석과 그의 동료가 철수하는 모습을 확인한 후, 일단 컴퓨터를 켜고 자신의 휴대폰에 대한 위치 추적을 시험해 보았다. 결과는 그의 예상대로였다. “잡히지 않는군.” 위치 추적이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확인한 준상은 바로 방을 뺄 준비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대학가 근처라 자취방 수요가 많아서 생각보다 방을 처분하기가 쉬웠다는 점 정도다. 준상은 집을 처분하는 한편 임서윤이 그랬던 것처럼 전용의 강철 캐비닛을 다섯 개 구입해서 그 안에 물품들을 보관했다. 책과 기타 자질구레한 물품은 모두 싼 값에 처분하거나 재활용품으로 내놓은 후 그달치 세금을 정리하고 새로운 임차인에게서 보증금을 돌려받자 방을 빼는 일은 순식간에 끝나버리고 말았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요?” 준상이 하도 빠르게 일을 처리하자 주인집 아주머니는 궁금해 하는 표정을 지으며 그렇게 물어볼 정도였다. “잠시 집에 내려가 쉴 생각입니다.” “하긴 휴학했다고 그랬지.” “네.” 어쨌든 방을 정리하는 작업을 끝낸 준상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집을 빠져나와 강원도 쪽을 향해 정처 없이 걷기 시작했다. 목표는 오대산. 낮에는 운동을 겸해 달리고, 밤에는 여관을 잡아 투숙했다. 처음에는 돈도 아낄 겸 찜질방을 생각했지만, 탈의실이 개방되어 있어서 장비를 인벤토리에 보관하기가 번거로운데다 옷을 벗고 자다가 퀘스트가 발동되어 전송이 이루어지면 그것도 낭패스러운 일이라 어쩔 수 없었다. 조금은 느긋한 기분으로 양평 정도에 도달했을 즈음. 문득 휴대폰으로 메시지가 전해졌다. 퀘스트인가 싶어 얼른 살펴보니... 이번에도 역시나 김성진이다. 아마도 이전의 번호가 차단되자 새로운 번호로 보낸 모양이다. 준상이형. 차단까지 하실 줄이야... 좀 섭섭하네요. 실은 제가 이번에 길드를 만들어 보기로 했습니다. 집에 들러봤더니 이미 나가셨더군요. 혹시나 이 메시지를 받으신다면 꼭 좀 연락 바랍니다. “쯧...” 준상은 혀를 차며 성진의 메시지를 차단해 버렸다. 이후로도 성진은 끈질기게 번호를 바꿔가며 메시지를 보냈지만, 준상은 오는 족족 차단해 버렸다. 그렇게 십여 차례 정도 차단을 반복하자 나중에는 포기했는지 더 이상 연락을 해오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며칠이 지나서야 준상은 마침내 오대산에 도착했다. 이곳에 눌러 앉을 생각으로 찾아온 것은 아니다. 그저, 중학교 때 수학여행을 가지 못했던 일이 떠올라 이번 기회에 천천히 둘러보자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시설과 친척집을 전전하다가 결국 수학여행마저 놓쳐 버렸던 기억이 나서 와보기는 했지만, 막상 와서 보니 생각보다 별로 대단하다는 느낌은 받을 수가 없었다. 이게 뭐라고 그렇게 섭섭했었던 걸까. 하지만 막상 와놓고 올라가 보지 않는 것도 예의는 아니다. 날씨가 제법 쌀쌀하긴 했지만, 준상은 터벅터벅 산길을 올랐다. 그렇게 잠시 산을 헤매다가 어느 이름모를 작은 암자에서 조금 떨어진 오솔길 어귀의 바위 위에서 잠시 쉬려고 멈추어 섰는데, 문득 휴대폰에서 메시지가 도착했음을 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또 성진이 녀석인가 싶은 마음에 휴대폰을 열어 보았지만, 이번에는 퀘스트가 맞았다. 준상은 가만히 바위에 앉은 채로 나무 숲 너머로 보이는 석양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카운트다운이 끝나자 준상은 새로운 퀘스트가 벌어지는 장소로 이동했다. “...” 몸을 감싸던 하얀 빛이 사라지자 준상은 너른 밀밭이 보이는 평야 한 구석에 도착했음을 깨달았다. 준상은 우선 휴대폰을 열어 퀘스트 내용부터 확인을 해보았다. 습지의 괴물을 토벌하십시오. :습지에 갑자기 나타난 괴물들로 인해서 마을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습지에 도사린 위험을 제거하십시오. (남은 괴물 수 : 103마리) [이 퀘스트는 여러 명의 인원이 동시에 참여합니다.] (Sub) 제시의 부탁. ->대화 필요. (Sub) 일마렌의 부탁. ->대화 필요. (Sub) 게덴의 부탁. ->대화 필요. (Hidden) 습지 주위에 출몰하는 괴물 멧돼지를 토벌하십시오. (단독) ->미완료. (Hidden) 습지 주위에 피어난 독초 군락을 불태우십시오. (단독) ->미완료. 광산 토벌 퀘스트와 비슷하지만 필드에서 벌어진다는 점이 다르고, 복수의 인원이 참여하는 것으로 미루어 상당히 강력한 보스가 기다리고 있음을 예상할 수 있었다. 기본적인 토벌 퀘스트 외에 5개의 퀘스트가 별도로 존재하는데 그 중 세 개는 이전에 이니아의 부탁과 같은 서브 퀘스트이고, 히든 퀘스트는 두 개 뿐이었다. 퀘스트를 확인한 준상은 너클을 꺼내어 손에 낀 후 미니맵을 열었다. 아직 가보지 않은 장소까지는 무리였지만 시야가 닿는 곳의 지형은 미니맵을 통해 단숨에 확인할 수 있었다. 준상은 일단 주위를 둘러 보았고 머지 않은 곳에 작은 마을이 있는 것을 어렵지 않게 발견했다. 바로 마을을 향해 이동하려 하는데, 문득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앗! 저기 있다! 이봐!” 그냥 얼핏 듣기에도 조금 경망스러운 느낌의 남자 목소리. 준상은 고개만 살짝 돌려 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는 익숙한 지구의 옷차림을 한 네 명의 남녀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삼남 일녀였는데, 준상을 향해 이리 오라 손짓을 하고 있었다. 이번 퀘스트에 동원된 인원은 모두 다섯 명. 이전의 마을 방어가 네 명짜리 퀘스트였음을 감안하면 난이도가 만만치 않을 것 같다. “...” 준상은 그들을 흘깃 보며 그런 생각을 떠올렸지만, 그대로 몸을 돌려 곧장 마을로 향해 달려갔다. “어? 어어? 이봐! 어디 가냐고!”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준상은 돌아보지 않았다. 다른 퀘스트도 마찬가지지만 서브 퀘스트의 경우에는 먼저 가서 받는 사람이 임자이니 빠르게 움직일 필요가 있었던 탓이다. 하지만 그런 상황을 모르는 사람들은 바로 달려가 버리는 준상의 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뭐 저런 자식이 다 있어?” “그러게요. 힘을 합쳐도 모자랄 판에.” “진짜... 파티 잘 만나는 것도 운이라더니, 여기서도 트롤 짓 하는 놈을 만날 줄이야.” “휴... 할 수 없죠. 우리라도 정신 바짝 차리는 수밖에.” 00042 트롤러 ========================================================================= 준상의 달려가는 모습을 보며 한 마디씩 던지던 네 사람은 이내 각자가 지닌 능력을 토대로 파티에서의 역할 분담을 하기 시작했지지만, 그들이 자랑스럽게 자신이 지닌 스킬들에 대해서 떠벌리기 시작할 즈음 준상은 이미 마을에 도착해 서브 퀘스트를 가진 인물을 찾기 시작했다. 허름하고 낮은 돌담으로 둘러싸인, 풀잎을 엮은 초가집들이 옹기 종기 모인 마을에 들어서자 사람들은 이질적인 그의 모습에 경계의 눈초리를 보냈다. “음...” 준상은 혹시나 하는 느낌에 휴대폰을 열어 미니맵을 살펴보았다. 그러자 미니맵 한 켠에 노란 느낌표가 반짝이는 것을 발견했다. 게임을 조금만 해본 사람이라면 이 노란 느낌표가 퀘스트 표시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미니맵에서의 위치를 가늠해 퀘스트를 지닌 사람을 찾으려는데, 문득 머리가 희끗한 사람 하나가 다가와 준상에게 말을 건넸다. “저... 실례지만, 혹시 여행자...” 하지만 준상은 남자가 말을 다 끝나기도 전에 서브 퀘스트를 찾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 저기...” 당황한 남자는 엉겁결에 준상에게 손을 뻗어 그를 붙잡으려 했다. 그러나 미처 옷자락을 잡기도 전에 고개를 돌려 바라보는 준상의 시선과 마주치자 그대로 굳어 버렸다. “...” “...” 준상은 잠시 남자를 바라보다가 그대로 미니맵의 퀘스트 표시를 향해 움직였다. 남자는 준상이 멀어지자 그제서야 가슴을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휴... 무슨 눈빛이...” 한편 준상은 미니맵을 따라 어느 작은 집 앞에 도착했다. “여긴가.” 미니맵대로 라면 바로 이 집 안에 서브 퀘스트를 가진 인물이 있을 터. 준상은 다시 한 번 미니맵을 확인한 후 곧바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가자 삶에 지친 기색이 역력한 여인 하나가 바닥을 쓸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았다. “누, 누구...” 준상은 미니맵을 다시 확인한 뒤 그녀에게 말했다. “제시, 맞나?” “마, 맞는데요.” “여행자다. 부탁이 있다면 도와주마.” “...” 제시는 갑작스레 들이닥친 이 남자의 모습에 당황했지만, 그의 이질적인 차림새와 옷 안쪽으로 드러나는 탄탄한 체구, 그리고 여행자라는 말에 반응했다. “여행자... 시라구요?” “...” 준상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제시는 얼른 그에게 매달리며 간곡하게 부탁했다. “여행자님! 제발 저 좀 도와주세요!” 준상은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대답했다. “도와준다니까.” “아, 그러셨죠. 참.” 제시는 얼른 몸을 일으키며 말을 시작했다. “실은 저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어요. 원래 그런 애가 아니었는데 언젠가부터...” 그녀는 절절한 어투로 말을 시작했지만, 준상은 손을 들어 그녀의 말을 막았다. “본론만.” 제시는 당황했지만, 역시나 오랜 세월을 살아온 연륜 덕분인지 바로 준상이 말하는 바를 알아차렸다. “그, 그러니까... 습지의 괴물을 처치하러 간다고 뛰쳐나간 제 아들을 구해주세요! 어떻게 생겼냐면...” 하지만 준상은 이번에도 손을 들어 제시의 말을 막은 후, 휴대폰에 들어온 메시지를 확인했다. (Sub) 제시의 부탁. ->제시는 자신의 아들인 디안이 습지의 괴물을 처치하겠다고 뛰쳐나가는 바람에 걱정이 태산입니다. 그녀의 아들이 무사히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준상은 퀘스트가 갱신된 것을 확인하자 불안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제시를 향해 말했다. “디안의 옷가지나 소지품이 있나?” “네?” 제시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기 아들 이름을 저 여행자에게 말했던 적이 있었나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준상은 그녀가 의문을 해소할 틈을 주지 않았다. “있나, 없나.” “이, 있어요.” 제시는 얼른 선반에서 고랑내 나는 신발 한 켤레를 꺼내 주었다. “...” 준상이 가만히 얼굴을 찌푸린 채 바라보자 제시는 이건 아닌가 싶었던지 얼른 걸레로나 쓰면 딱 좋을 듯한 허름한 상의 하나를 꺼내 주었다. “이, 이것도 안 되나요?” 제시는 왠지 벼룩이 금방이라도 튀어오를 것 같은 옷가지를 준상이 말없이 바라보자 아무래도 안되겠다 싶었던지 그제서야 그나마 조금 깨끗해 보이는 손수건 하나를 꺼내 주었다. “이, 이거라면...” 준상은 그제서야 손수건을 낚아채며 말했다. “디안은 돌아올 것이다.” “네?” 그리고 바로 집 밖으로 달려 나갔다. 제시는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저 멍하니 준상의 뒷모습을 바라만 보았다. 모르긴 해도 누가 이 광경을 보았다면 퀘스트를 받는 게 아니라 강탈하는 줄 알았을 것이다. 준상은 제시의 집에서 나오자마자 마을에 다른 퀘스트 표시가 없는지 살폈다. “음...” 그러나 아무리 살펴봐도 마을에서는 더 이상 퀘스트 표시가 보이지 않았다. 준상은 주위를 살펴보다가 근처 담벼락에 숨어서 자신을 구경하는 아이들에게 물었다. “습지가 어느 쪽이지?” 그러자 아이들은 자신들끼리 얼굴을 마주보다가 한쪽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쪽이요!” “고맙다.” 준상은 그렇게 말하고는 아이들이 가리킨 방향을 향해 바람처럼 내달리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오대산까지 달려간 전적이 있는 준상이다보니, 마을에서 습지까지 달려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준상은 거무스름한 안개에 휩싸인 습지가 눈에 들어오자 다시 휴대폰을 열어 미니맵을 살폈다. 그러자 덤불이 우거진 습지 안쪽에서 붉은 느낌표 하나가 느리게 움직이는 것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준상은 미니맵을 살피며 그대로 붉은 느낌표가 움직이는 장소를 향해 달려갔다. 혹시 제시의 아들 디안이 아닐까 싶었지만... 그곳에 있었던 것은 그야말로 집채만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법한 괴물 멧돼지 였다. 이전에 보았던 괴물 곰보다는 좀 작았지만, 붉은 안광을 번뜩이며 날카로운 어금니를 앞세운 그 모습은 전차나 장갑차를 연상시키기에 충분했다. 괴물 멧돼지는 진흙 속에 주둥이를 처박은 채 무언가를 우걱거리며 먹고 있었다. “무투가.” 준상의 입에서 짧은 명령어가 나오자, 카드 슬롯이 활성화되며 기존에 꽂혀있던 카드들이 빠져 나오고 그 안에 새로운 카드들이 장착되었다. 광폭, 카운터, 숄더 차지, 강타. 그리고 기타 슬롯에 이미 장착되어 있던 카드들의 영혼 효과가 합쳐지며 콤보 카드 ‘지하 격투장의 암흑 무투가’가 발동되었다. 콤보 카드가 활성화 되자, 준상은 훤히 드러난 괴물 멧돼지의 옆구리를 향해 숄더 차지를 발동했다. 순간 눈앞의 공기가 좌우로 갈라지며 준상과 멧돼지를 연결하는 하나의 길이 생겨났고, 마치 누군가가 앞에서 줄을 연결해 끌어당기듯 준상의 몸은 멧돼지를 향해 열린 길을 통해 주욱 뻗어 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준상이 그 길의 끝에 도달하자, 콰앙! 격렬한 폭음과 함께 멧돼지는 그대로 옆으로 튕겨 나갔다. -꽤애애애액! 불의의 기습을 받은 멧돼지는 다리를 버둥거리며 비명을 질렀지만, 그 입에서는 어느 새인가 붉은 피거품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무방비 상태에서 터진 기습에 무투가 콤보를 통한 데미지 증폭, 여기에 치명타까지 겹치자 일격에 멧돼지의 갈비뼈는 산산조각이 나버렸으며, 부서진 늑골은 그대로 멧돼지의 폐와 간을 찔러 들어가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제 아무리 괴물 멧돼지라도 이것은 치명상일 수밖에 없다. 준상은 천천히 괴물 멧돼지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괴물 멧돼지는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며 어떻게든 일어나보려 애를 썼지만, 다가선 준상의 일격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다. (Hidden) 습지 주위에 출몰하는 괴물 멧돼지를 토벌하십시오. (단독) ->완료! 순식간에 히든 퀘스트 하나를 해결한 준상은 다시 미니맵을 살피며 또 다른 퀘스트 표식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그의 눈앞에 이번에는 마치 손발이 달린 이구아나 같은 모양의 괴이한 생명체들 십여마리가 나타났다. -키이이익! 나름대로 단창 같은 것으로 무장한 채 소리를 지르며 준상을 위협하고는 있었지만, 준상으로서는 그저 가소로울 뿐이다. “울프팩.” 그의 입에서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갑자기 허공에서 거대한 늑대 세 마리가 모습을 드러낸다. 일일이 세 마리 늑대를 오픈 명령으로 불러내기 귀찮아서 방법을 찾던 준상은 기존의 미친개나 광전사 같은 단축 명령으로 늑대를 한꺼번에 소환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냈고, 그 방법을 써서 새로 만든 명령이 바로 울프팩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거대한 늑대들의 모습에 놀란 괴물들은 흠칫하며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그 순간에는 이미 늑대들과 준상이 형형한 안광을 뿜어내며 동시에 달려들고 있었다. -키익! 이구아나 괴물은 기겁하면서도 얼른 준상에게 창을 찔렀다. 창끝이 흔들리지 않고 곧바로 눈을 향해 찔러오는 모습을 보고 준상은 생각 외로 이 이구아나 괴물의 창을 찌르는 솜씨가 제법 매섭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준상은 고개를 살짝 틀어 창끝을 피하면서 괴물을 향해 카운터를 발동했다. 퍽! 창끝과 엇갈리듯 뻗어나간 준상의 너클은 괴물의 머리를 단숨에 박살냈다. 그야말로 일격 필살! 순식간에 자신들의 동료가 머리에서 누런 뇌수와 푸른 피가 범벅이 된 액체를 뿜어내며 쓰러지자, 괴물들의 눈에 동요의 빛이 떠올랐지만 그러면서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확실히... 이전에 광산에서 때려잡았던 개머리 괴물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느끼며 준상은 다음 괴물을 향해 달려들었다. 괴물들은 급히 모여들어 고슴도치처럼 단창을 세우며 준상의 공격을 막으려했지만, 그들이 열을 맞춰서면서 준상을 향해 창을 들이대는 순간 주위를 멤돌던 늑대들이 괴물들의 등을 노리고 진형으로 뛰어들었다. -키악! 거대한 붉은 늑대가 허공을 박차고 뛰어올라 괴물들의 머리 위로 떨어졌고, 이어서 은빛 늑대와 잿빛 늑대가 진형 외곽에 서있던 괴물의 목덜미를 단숨에 콱 물어 버렸다. 늑대들에 의해 진형이 허물어지자 마침내 준상이 괴물들 속으로 뛰어들었다. -키익! 세 마리 늑대들에 의해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이구아나 머리의 괴물 중 하나가 달려드는 준상을 향해 창을 내질렀다. 준상은 자신의 가슴을 향해 창이 뻗어 나오자 피하는 대신 그 창날을 너클로 후려쳤다. 갑자기 들고 있던 창대의 끝이 한쪽 방향으로 휙 젖혀지자 괴물은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고, 그 틈을 타 난입한 준상의 팔꿈치가 놈의 머리를 그대로 짓뭉개 버린다. 준상의 난입으로 진형이 완전히 깨지자 괴물들은 더 이상 이런 식의 전투로는 승산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급히 몸을 날려 주위의 늪지와 물가를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모양새만 봐도 땅보다는 물속에서 더 강할 것이 분명한 녀석들인지라 준상은 바닥에 떨어진 단창들을 집어 그런 놈들의 뒤통수를 노렸다. -키엑! 운 좋게 두 마리를 더 단창으로 잡는 데는 성공했지만, 준상의 투창 실력으로 죽어라 내빼는 놈들을 모조리 잡는 것은 무리였다. “쯧...” 준상은 혀를 차며 인벤토리에서 캐비닛을 하나 꺼내더니 그 안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기 시작했다. 늪과 물속으로 뛰어든 괴물들은 일단 한숨을 돌리면서 준상이 다가오면 물속으로 끌어들이든가 안 되면 기습이라도 할 생각으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하지만 준상은 캐비닛에서 꺼낸 물품들을 착용하더니 물가로 다가와 기다란 막대기를 물속에 집어넣고는, 그대로 스위치를 눌렀다. 빠지지직! 순간 괴물들은 무언가 짜릿하다 못해 온몸이 파들파들 떨리는 느낌을 받으며 정신을 잃어 버렸다. 준상이 꺼낸 장비는 바로 배터리를 이용해 물고기를 잡는 일종의 전기 충격기와 고무장화 등이었다. 일반적인 물고기 잡이용 전기 충격기보다 출력을 높인 건 당연지사. 맨몸으로 적을 상대해야 하는 상황이고 보니 여러 가지 난처한 경우가 있을 것을 감안해서 이런 저런 준비를 해둔 것이 빛을 발한 셈이다. 만약 이게 안통하면 물에 농약을 풀어 버릴 생각까지 하고 있었으니 말 다한 것 아니겠는가. 준상은 바로 배터리의 스위치를 끄고는 늑대들에게 떠오른 괴물들을 건져오게 한 다음 장비의 물기를 닦고 다시 캐비닛에 보관했다. 준상은 물 위로 떠오른 물고기를 늑대들에게 상으로 주고는 괴물들의 머리를 열어 시드를 습득했다. “제법 쏠쏠한걸.” 좀비보다는 나름 강한 축에 들어가는 몬스터인지 제법 시드가 나온다. 물론 그래봐야 잡속성 시드들이긴 하지만 말이다. 준상은 대충 정리를 마친 후 제시의 부탁을 해결하기 위해 그녀의 아들 디안에 대한 탐색을 시작했다. 늑대들을 동원해 손수건의 냄새를 찾도록 시켰지만, 물이 많은 습지라 그런지 좀처럼 디안의 위치는 찾을 수가 없었다. 탐색을 계속하던 준상은 미니맵 상에서 노란색 느낌표 하나가 물가를 따라 이동하는 것을 발견했다. “이건...” 노란색 표시로 미루어 또 다른 서브 퀘스트란 사실을 알아차린 준상은 늑대들과 함께 급히 미니맵 상의 노란색 느낌표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00043 트롤러 ========================================================================= 미니맵에 나타난 퀘스트 표시를 따라 달리던 준상은 문득 묘한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알아차렸다. “으에에엥! 저리 가! 저리 가란 말이야!” 순간 준상은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아니나 다를까. 물가에 도착한 준상은 반짝거리는 날파리 같은 것이 앵앵거리며 이구아나 머리의 괴물 두 마리에게서 도망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기시감의 정체는 바로 이것이었던가. 준상은 곧장 요정을 쫓느라 정신없는 괴물들을 옆에서 들이쳤다. -키익? 창을 휘저으며 요정을 쫓던 괴물은 문득 주위가 어두워지는 느낌에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괴물의 눈에는 시커먼 무언가가 안광을 번뜩이며 자신을 향해 떨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괴물은 기겁해서 창을 돌리려 했지만, 그때는 이미 뛰어내린 준상의 팔꿈치가 정수리에 작렬하고 있었다. 콰직! 대번에 머리통이 빠개진 괴물이 썩은 고목처럼 쓰러지자 옆에 있던 괴물이 얼른 준상을 향해 창을 찌르기 위해 예비동작을 취했다. 하지만 뒤로 당겨진 창이 앞으로 나아가기도 전에 준상의 로우킥이 괴물의 다소 빈약해 보이는 다리를 우직 하는 소리와 함께 부러뜨리고 말았다. -키약!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괴물의 가슴에 곧바로 시커먼 군화발이 떨어져 내렸고, 그 묵직한 충격에 늑골로 보호되던 내장이 짓뭉개지자 괴물은 그대로 즉사하고 말았다. “후...” 괴물들을 해치운 준상이 고개를 돌리자, 날파리처럼 날개를 파닥거리는 요정이 돌아와 그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구해 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나는 일마렌이라고 해요!” “...” 혹시나 했지만 역시 이니아와는 다른 요정이다. 많이 닮기는 했지만, 이니아의 붉은 머리색과는 확연하게 다른 투명한 하늘색의 머리카락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을 보며 숲의 정화 퀘스트에서 만났던 이니아를 떠올리고 있는데, 문득 일마렌이 준상의 이마를 가리키며 빽 소리를 질렀다. “아앗! 그 이마! 그 이마의 자국!” “...” 준상은 일마렌의 말을 듣고 자신도 모르게 이마를 만졌다. 어쩐지 일전에 이니아의 입술이 닿았을 때의 감촉이 떠오르는 느낌이다. “이니아 언니가 말했던 바로 그 사람이군요!” “날 아나?” “응! 지팡이를 찾아준 친절하지만 과격한 사람!” “...” 친절하지만 과격하다는 이니아의 평가에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흘리자 일마렌이 양손을 모은 채 눈을 반짝거리며 간절하게 말했다. “나 좀 도와줘요! 부탁이에요!” 귀여운 척 하면서 부탁하는 것까지 이니아와 판박이다. 설마 클론 요정이라든가 그런 건 아닐까. 준상은 그런 시시껄렁한 잡념을 떠올리며 조용히 물었다. “너도 뭘 잃어버린 거냐?” “어엇! 어떻게 알았어요?” “...” 게다가 퀘스트 내용까지 판박이다. 설마 보상까지 판박이인 건 아니겠지 싶은 마음으로 다시 물었다. “뭘 잃어버린 거지?” “신발이요!” 그러자 곧바로 휴대폰에 퀘스트가 갱신되었음을 알리는 메시지가 도착했다. (Sub) 일마렌의 부탁. :습지의 요정 일마렌은 갑자기 나타난 괴물들에게 쫓기다가 생일에 선물 받은 예쁜 신발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녀의 신발을 찾아주세요. 준상은 퀘스트가 제대로 들어왔음을 확인한 후 곧바로 일마렌의 날개를 움켜잡았다. “꺄악! 나, 난폭한 건 싫어요!” “...” 이 조막만한 요정이 뭐라는 건지. 준상은 일마렌의 날개를 잡고 크림슨 울프에게 냄새를 맡게 했다. “꺄하하... 역시 이니아 언니 말대로네요! 꺄하하하!” “...” 도대체 이니아가 요정들에게 자신을 뭐라고 소문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마렌은 눈앞에서 커다란 늑대가 자신의 냄새를 킁킁거리며 맡고 있는데도 무서워하기는커녕 까르륵거리며 웃기 바쁘다. 어쩐지 깊게 생각하기도 귀찮아진 준상은 크림슨 울프가 냄새를 다 맡자 바로 명령을 내렸다. “찾아라!” 크림슨 울프가 허공을 향해 이리저리 고개를 저으며 탐색을 시작하자, 일마렌은 얼른 준상의 어깨 위에 올라와 옷자락을 붙잡은 채 말했다. “자, 준비 완료! 언제든 달리세요!” “...” 준상이 고개를 돌려 빤히 쳐다보자 일마렌은 그 시선에 움찔하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그러자 일마렌은 두 손으로 볼을 감싼 채 예쁜 척을 하며 말했다. “나, 나도... 타보고 싶었단 말이에요... 안돼요?” 하지만 준상이 뭐라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마침내 일마렌의 자취를 찾아낸 크림슨 울프가 한 방향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준상이 그 뒤를 따라 달리자, 방금 전까지 예쁜 척을 하던 일마렌은 다시 까르륵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꺄하하하하! 와아아아아!” 어째... 처음부터 신발보다는 그냥 자신의 어깨에 타보고 싶어서 부탁을 한 것이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다. 아무튼, 습지인 탓에 크림슨 울프는 다소 애를 먹기는 했지만, 어렵지 않게 일마렌의 신발을 찾아낼 수 있었다. 풀잎 위에 떨어진 작은 신발을 집어 건네주자 일마렌은 다소 아쉬워하는 모습으로 감사의 뜻을 표했다. “감사합니다...” (Sub) 일마렌의 부탁. :습지의 요정 일마렌은 갑자기 나타난 괴물들에게 쫓기다가 생일에 선물 받은 예쁜 신발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녀의 신발을 찾아주세요. -> 완료! 보상: 일마렌의 특별한 선물. 이 보상은 일마렌에게 직접 받으십시오. “...” 휴대폰에 나타난 메시지를 보고 있는 준상의 오른쪽 뺨에 작고 촉촉한 무언가가 와 닿는다. 일마렌이 살며시 다가와 입을 맞추자 역시나 이번에도 메시지가 들어왔다. ‘요정의 키스’가 각인되었습니다. :요정의 호의가 담긴 키스가 당신에게 행운을 부여합니다. 이것은 일종의 각인이므로 절대 지워지지 않습니다. ‘요정의 키스’는 다른 요정 들에게 당신이 요정의 친구임을 어필합니다. “...” 이니아 때와 토씨 하나 틀리지 않은 내용이었지만, 준상은 어쩐지 이 요정의 키스가 일종의 ‘참 잘했어요’ 도장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설마 키스 몇 번을 모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든가 그런 식은 아닐까. 준상은 다시금 그런 시시껄렁한 생각을 떠올리다가, 어느새인가 다시 자신의 어깨 위에 자리를 잡고 있는 일마렌의 존재를 깨달았다. “...” 말없이 바라보자 일마렌은 다시 양손으로 볼을 감싼 채 예쁜 척을 하며 말했다. “지금부터 괴물들을 해치울 거죠? 제가 놈들의 대장이 있는 곳을 아니까 안내해 드릴게요.” “...” 아아... 역시 이렇게 되는 건가 싶은 마음에 한숨을 푸욱 내쉬자, 일마렌이 다시 말했다. “아, 안될까요?” 안된다고 하면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흘릴 것 같은 표정이다. 귀여운 척이 안 통하니 이번에는 눈물인가. 준상은 결국 이 영악한 요정의 모습에 다시금 피식 웃어 버리고 말았다. 하긴, 미니맵이 있다 해도 넓은 습지를 일일이 뒤지는 것보다는 길 안내를 받는 쪽이 더 빠른 것이 사실이니 준상으로서는 나쁜 거래가 아니다. “안내해라.” “만세! 으앗!” 준상이 허락을 내리자 일마렌은 손을 번쩍 들고 소리를 치다가 중심을 잃고 앞으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얼른 손을 뻗어 받아냈지만, 떨어진 자세가 좋지 않았던 탓에 입고 있던 원피스가 훌러덩 뒤집히고 말았다. “아으으... 아파라...” 떨어지면서 머리를 부딪혔는지 얼굴을 찌푸리던 일마렌은 원피스가 뒤집혀서 속옷이 보이는 것을 깨닫고는 슬그머니 옷자락을 끌어내리고는 준상에게 물었다. “봐, 봤어요?” “...” 하지만 준상은 조용히 손바닥을 올려 그녀를 다시 어깨 위에 올려 주었다. “봤군요.” 별 것 아닌 친절이었지만, 이전의 무뚝뚝한 모습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일마렌은 이 친절이 자신의 속옷을 본 것에 대한 보상이라 생각했다. 물론 준상으로서는 조막만한 요정의 속옷 따위 보이거나 말거나 신경도 쓰지 않았고, 어깨로 올려준 것 역시 아무 생각 없이 한 행동이었지만 말이다. 일마렌이 착각을 하거나 말거나, 준상은 다시 말했다. “안내해라.” 무뚝뚝한 그의 말에 일마렌은 입을 삐죽거리며 투덜거리다가 한쪽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쪽이요.” 준상은 일마렌이 가리킨 방향을 따라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게 달려가던 준상은 질척거리는 물가에서 다시금 한 무리의 괴물들과 마주치고 말았다. “흠...” 준상은 일단 늑대들을 되돌려 보냈다. 그리고 인벤토리에서 캐비닛을 꺼낸 후 그 안에 보관해둔 전기충격기 세트를 몸에 걸쳤다. “와! 그건 뭐에요?” “...” 허공에서 캐비닛을 꺼내고 그 안에서 처음 보는 이상한 물건을 꺼내자 일마렌은 다시 흥분하며 재잘거리기 시작했지만, 준상은 묵묵히 양식장 같은 곳에서 쓰는 고무 재질의 가슴 장화를 착용한 후 배터리를 등에 매고 양손에 금속 막대를 들었다. 준비가 끝나자 준상은 일마렌에게 말했다. “위험하니까 여기 있어라.” “네?” “죽기 싫으면 내 말대로 해.” “...” 일마렌은 싫다고 땡깡을 부리려 했으나 준상의 말투가 너무나 진지했기 때문에 결국 그 말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준비가 끝나자 준상은 천천히 물가로 다가갔다. 그러자 물가에 모여 있던 이구아나 머리의 괴물들이 그제서야 준상을 발견하고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어떤 놈은 첨벙 거리며 달려들고, 또 어떤 놈은 얕은 물속에 엎드린 채 기듯이 헤엄쳐서 다가온다. 준상은 가만히 놈들이 가까이 오기를 기다리다가... 어느 정도 거리가 되자 금속 막대를 물에 담그고 스위치를 눌렀다. 그러자. 빠지지직! 격렬한 불꽃이 번쩍이더니 짙은 오존 냄새가 사방에 퍼졌고, 그와 동시에 준상을 향해 달려오던 괴물들이 몸을 파들파들 떨며 물 위로 첨벙거리며 쓰러지기 시작한다. “와아...” 준상은 주위에 달리 움직이는 괴물들이 없는지 확인한 뒤에야 다시 늑대들을 불러 괴물들의 몸을 뭍 위로 끌어내도록 한 다음 자신은 장비들의 물기를 닦아 다시 캐비닛에 보관했다. “바, 방금 그건... 도대체...” “...” 일마렌이 조금 질린 표정으로 그렇게 물었지만, 준상은 묵묵하게 캐비닛을 다시 인벤토리에 넣은 후에야 입을 열었다. “타.” 일마렌은 그 말대로 준상의 어깨에 자리를 잡았다. 준상은 정신을 잃은 괴물들의 머리를 열어 시드를 수거했다. “우으...” 그 잔인한 모습에 일마렌의 얼굴은 다시 핼쓱해지고 말았지만, 그러면서도 한사코 준상의 어깨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으니 참 묘한 일이다. 뒷정리를 끝낸 준상은 괴물들의 무기인 단창을 수거해서 보관한 후에야 다시 일마렌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이동을 하던 준상은... 무심코 미니맵을 확인하다가 동그란 테두리가 둘러진 느낌표 하나가 나타나 있는 것을 발견했다. “...” 지금까지 보았던 일반적인 퀘스트 표시와는 달랐기 때문에 준상은 일단 보스에게로 향하던 것을 멈추고 그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곳은 습지 안에 솟아오른 작은 섬과도 같은 곳이었는데, 퀘스트 표시는 그 위에 솟아오른 바위 뒤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늑대들을 데리고 다가선 준상은 바위틈에 몸을 숨긴 채 오들오들 떨고 있는 남자 아이를 발견했다. 아이는 손에 제법 날카로워 보이는 짧은 검 하나를 들고 있다가 준상을 뒤늦게 발견하고는 얼른 칼을 내밀며 외쳤다. “누, 누구야!” “...” 준상은 어렵지 않게 이 아이가 제시의 아들 디안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용케 숨어들어오긴 했어도 아까의 괴물들에게 둘러싸이자 오도 가도 못한 채 여기 숨어있었던 모양이다. 준상은 인벤토리에서 캐비닛 하나를 새로 꺼낸 후 그 안에서 튼튼한 밧줄 하나를 꺼냈다. “누, 누구냐고!” 갑자기 허공에서 강철 상자 같은 것을 꺼내는 모습에 디안은 깜짝 놀라며 다시 짧은 검을 내밀며 위협의 동작을 취했지만, 앗 하는 순간 준상의 손이 그의 손목을 붙잡자 그 악력이 주는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검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준상은 그대로 손을 묶어버린 다음 다이어 울프를 불러 그 위에 디안을 태우고 말했다. “죽고 싶지 않으면 꽉 붙들어라.” “에? 무, 무슨...” 하지만 준상은 다른 설명 없이 곧바로 다이어 울프에게 명령했다. “마을에 떨구고 와라.” 준상의 명령이 떨어지자 다이어 울프는 곧바로 몸을 돌려 마을 방향으로 질풍처럼 달려가기 시작했다. 00044 트롤러 ========================================================================= “우아아아아아!” 다이어 울프의 등에 올라탄 다인은 갑작스런 가속에 놀라 비명을 질렀지만, 이내 눈을 감고 입술을 깨문 채 필사적으로 은빛 늑대의 등에 매달렸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얼굴로 스치는 바람의 냄새에서 눅눅한 습기가 사라지자 그제서야 다인은 슬그머니 눈을 떴다. 그리고 어느새 음습한 안개가 가득한 습지를 빠져 나왔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고개를 들었다. “읏!” 강한 맞바람에 떠밀려 하마터면 다이어 울프의 털을 잡고 있는 손을 놓칠 뻔 했으나, 자신이 마을로 돌아가고 있음을 깨닫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커다란 은빛 늑대가 갑자기 습지 쪽에서 질주해오자 그렇지 않아도 습지의 괴물 때문에 불안해 하고 있던 마을 사람들은 난리가 났다. 급히 마을 입구를 목책으로 가리고 조악한 화살이라도 날리려고 준비를 시작했지만, 하지만 그것도 잠시. 늑대의 등에 타고 있는 다인의 모습을 발견한 사람들은 다급하게 화살을 날리려던 사람들의 손을 만류했다. 다이어 울프는 마을 입구로 들어서려다 사람들이 활을 가지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멈춰서더니 그대로 홱 몸을 털었다. “으악!” 필사적으로 매달려 있던 다인은 순간 몸이 붕 뜨며 그대로 바닥에 곧두박질치자 비명을 지르다가, 이내 자신이 마을 입구에 도착했음을 깨닫고는 얼떨떨한 표정이 되었다. 다이어 울프는 준상의 명령을 완수하자 곧바로 몸을 돌렸다. “자, 잠깐...” 다인은 자신도 모르게 묶인 손을 뻗으며 이 아름다운 은빛 늑대를 불러세우려 했지만, 다이어 울프는 들은 척도 않은 채 곧바로 습지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 순식간에 시야에서 멀어지는 은빛 늑대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그제서야 마을 사람들이 달려나와 다인을 야단치기 시작한다. “이 녀석! 거길 어디라고 함부로 들어가! 제시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마을 사람들은 그렇게 야단을 치면서도 묶인 손을 풀어주고는 다친 곳이 없는지 꼼꼼히 살피며 다인을 마을 안으로 데리고 갔다. 다인은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그제서야 자신이 검을 떨구고 왔음을 깨달았지만, 아버지의 하나뿐인 유품을 잃어 버렸음에도 어쩐지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다인!” 그제서야 소식을 들은 제시가 달려왔다. 다인은 혼이 날 것이라 예상하고 눈을 질끈 감았지만, 제시는 곧바로 달려와 자신의 아들을 품에 끌어안고 눈물을 펑펑 흘리기 시작한다. 다인이 거대한 은빛 늑대를 타고 돌아온 탓에 마을 전체가 난리 법석이 나 있는 동안, 반대쪽 입구에서는 그제서야 자기소개와 역할 분담을 끝낸 네 명의 여행자들이 마을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어째... 마을이 좀 썰렁한데요.” “습지의 괴물 때문이겠죠. 일단 이곳에서 정보를 모으고 필요한 물자를 보충한 다음 출발하도록 합시다.” “여관이 있을라나 모르겠네요. 기왕 온 김에 사냥 전에 목욕이라도 좀 했으면 좋겠는데.” “좋은 생각이군요. 요즘 제대로 씻지를 못해서 근질근질하던 참인데.” 네 명의 여행자들이 그렇게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며 마을 안으로 접어들 즈음, 준상은 습지의 주인이 있는 곳을 향해 가면서 갱신된 퀘스트 메시지를 확인하고 있었다. (Sub) 제시의 부탁. :제시는 자신의 아들인 디안이 습지의 괴물을 처치하겠다고 뛰쳐나가는 바람에 걱정이 태산입니다. 그녀의 아들이 무사히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 완료! 보상: 경험치 약간, (디안의 짧고 예리한 검) -> 보상을 지금 수령하시겠습니까? (Y/n) _ (주의) 수령하지 않은 보상은 7일후 자동 소거됩니다. “이것도 추가 보상 중 하나였나 보군.” 준상은 디안이 떨구고 간 짧은 검을 떠올리고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인벤토리에서 짧은 검을 꺼내어 아이템 확인을 실행시킨다. 아이템정보 명칭 : 디안의 짧고 예리한 검 레벨제한 : 없음 종류 : 무기 등급 : Common 공격력 : 5-12 효과 : 야수에 대해 150% 피해. Seed : 1슬롯 설명 : 사냥꾼이 사용하던 짧은 검. “...” 이전에 나온 너클에 비해 등급도 낮고 성능 역시 떨어진다. 야수에 대한 데미지 증폭이 있기는 하지만, 그걸 따져도 너클의 기본 데미지보다 떨어지니 말 다한 것 아니겠는가. 그럭저럭 모양이 예쁘장해서 장식용으로나 쓰면 모를까, 준상으로서는 여러모로 그리 만족스럽지 않은 보상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경험치 보상이 있다는 정도. 준상은 입맛을 다시며 보상을 수령했다. 그러자 갑자기 그의 몸에서 흰빛이 뿜어져 나온다. “아앗! 뭐, 뭐죠?” 어깨 위에 매달려 있던 일마렌은 갑자기 준상의 몸에서 빛이 흘러나오자 깜짝 놀라며 호들갑을 떨었지만, 준상은 묵묵히 열네 번째 레벨 업 보상인 랜덤카드를 열었다. 지난번 퀘스트에서 많은 경험치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보스 격퇴 후 바로 레벨 업을 한 영향 때문인지 레벨 업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는데 이제야 레벨이 오른 것이다. 카드정보 명칭 : 질주 레벨 : 1Lv 경험치 : 0 등급 : Common 분류 : 스킬 성장 : 조숙(중) 속성 : 없음 효과 : 장착시 이동속도 20퍼센트 증가. Cost : 10 Seed : 1슬롯 “...” 나쁘지 않다. 등급이 낮은 카드이긴 하지만, 미니맵과 칭호 덕분에 빠르게 퀘스트를 얻고 해결하는 것이 가능해진 만큼 이동속도의 증가는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스킬 카드이기 때문에 미친개 같이 다섯 장짜리 조합의 경우엔 질주를 사용하기 위해 슬롯 하나를 할당하게 되면 아예 콤보 효과 자체가 사라져 버린다. 광전사나 무투가 같은 네 장짜리 콤보라면 슬롯이 하나 비기 때문에 콤보 효과를 유지하는 것은 지장이 없다. 물론 이 경우에도 문제가 있다. 광전사 같은 경우에는 질주를 사용하는 대신 공격 스킬을 빼야 하고, 무투가의 경우엔 피칠갑(R)을 빼야 하기 때문에 그만큼 전력이 약화되는 것이다. 활용하기 위해서는 여러모로 주의가 필요하다고나 할까. 별도의 콤보를 얻기 전에는 아무래도 사용이 번거로울 것 같다. 준상은 새로 얻은 카드를 시험해 보기로 했다. “오픈 질주.” 피칠갑(R) 카드가 빠지고 질주 카드가 장착되자 준상은 가볍게 심호흡을 한 뒤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우와아아아아앗!” 갑작스런 가속에 일마렌은 비명인지 환호성인지 모를 소리를 지르며 어깨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이제 겨우 준상의 달리는 속도에 익숙해졌는데 한층 더 빨라지자 조그마한 요정의 몸으로는 맞바람을 버티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을 정도다. 그 때. 문득 준상이 왼손을 뻗어 일마렌이 올라타 있는 왼쪽 어깨를 손바닥으로 가려 주었다. 일마렌은 필사적으로 맞바람을 버티며 옷자락을 붙잡고 있다가 갑자기 바람이 약해지고 그것이 준상의 손바닥 때문이란 것을 깨닫자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이내 얼굴에 홍조가 어렸다. 준상으로서는 바로 귀 옆에서 빽빽거리며 소리를 지르자 시끄러워서 한 일에 불과했지만, 이 작은 요정은 그것을 자신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새로운 스킬을 얻은 덕분에 한층 빠르게 달릴 수 있게 되기는 했지만, 애초에 지형 자체가 질척한 습지이다 보니 최고 속도로 달리는 것에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었다. 어쨌든, 그렇게 달리던 준상은 마침내 습지의 얼마 되지 않는 마른 땅 중 일부에 자리잡은 굉장히 허술해 보이는 주거지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여기에요. 여기에 괴물들의 대장이 있어요.” “...” 인간이 만든 집이라기 보다는 비버 같은 동물의 집을 연상시키는, 움집 비슷한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그 모습을 바라보던 준상은 질주 대신 피칠갑(R) 카드를 다시 장착한 뒤 일마렌에게 말했다. “여기 있어라.” “네.” 아까 전기 충격기를 사용할 때의 일을 떠올린 일마렌은 조금 아쉬워 하는 표정으로 준상의 어깨에서 내려와 근처의 나뭇가지로 올라갔다. 준상은 격한 질주로 흐트러진 호흡을 잠시 가다듬은 다음, 호흡이 평상시와 마찬가지가 되자 늑대들을 일마렌 옆에 놔둔 채 괴물들의 마을로 스며들었다. 보스를 쓰러뜨리기 전에 최대한 마을 안에 있는 괴물들의 수를 줄일 심산이었다. “...” 괴물들은 단창을 들고 한두 마리씩 마을 안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준상은 움집 옆에 몸을 숨긴 채 그렇게 돌아다니는 괴물들을 한 마리씩 조용히 처리하기 시작했다. 으직! 뒤쪽에서 접근한 준상의 우악스런 손이 목을 부러뜨리자 괴물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그대로 털썩 쓰러져 버렸다. 그런 식으로 조용히 처리를 해나가다가... 열두 마리째를 해치울 즈음이 되어서야 시체를 발견한 괴물들이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 준상은 가만히 집 안에서 뛰쳐나오는 괴물들의 수를 확인해 보았다. 열 마리 넘게 해치웠는데도 불구하고 아직 그보다 많은 약 스무 마리 가량의 괴물이 남아 있었다. 뭐가 이리도 많은지. 하긴 처음 퀘스트에서 알려온 숫자가 103마리였으니 괴물들의 본거지에 남은 숫자 치고는 적은 수인지도 모른다. 준상은 뒤를 돌아보며 짧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숨어있던 두 마리 늑대가 벼락처럼 뛰쳐나와 마을 외곽의 괴물들에게 달려들었다. 거대한 두 마리 늑대가 모습을 드러내자 안 그래도 법석을 떨던 괴물들은 늑대들을 막기 위해 우르르 몰려가기 시작한다. 그 틈을 타서 준상은 조용히 마을 중심부로 스며 들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습지 퀘스트의 최종 보스를 발견할 수 있었다. 보스는 이구아나 모습의 다른 괴물들 보다 두 배는 큰 몸뚱이를 지니고 있었으며, 다른 괴물들과는 달리 굉장히 단단해 보이는 검은 비늘을 몸에 두르고 있었다. 팔다리는 보통의 육지 생물보다 상당히 빈약해 보였지만, 커다란 나무 몽둥이를 든 모습을 보니 완력이 그리 부족하지는 않은 듯 했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데, 전령으로 보이는 괴물 몇 마리가 달려와 끽끽거리는 목소리로 뭐라 말을 전한다. 그것을 들은 보스는 호위로 보이는 다섯 마리의 괴물들과 함께 늑대가 나타난 곳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준상은 잠시 움집 뒤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보스가 자신을 지나쳐 등을 보일 때 뛰쳐나오며 숄더 차지를 발동했다. 눈앞의 공기가 갈라지며 빠르게 쇄도한 준상의 어깨는 그대로 보스의 등에 직격했다. -케엑! 불의의 일격을 받은 보스는 곧장 앞으로 데굴데굴 굴렀지만, 이내 화가 잔뜩 난 모습으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쯧...” 제대로 기습이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타격을 받지 않은 모습에 준상은 얼굴을 찌푸렸다. 괴물 멧돼지조차 무방비 상태에서 숄더 차지로 기습을 받고 그 한방에 곧장 전투 불능이 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 보스의 방어력은 실로 대단한 바가 있었다. 하긴, 명색이 보스인데 단 한 방에 쓰러지면 그것도 웃긴 일이긴 하다. 준상은 괴성을 지르며 달려드는 호위의 단창을 왼손으로 잡은 후, 오른손을 뻗어 목을 붙잡아 바닥에 패대기쳤다. -키엑! 그리고 비명을 지르는 괴물의 목을 밟아 으스러뜨린 후 왼손으로 잡고 있던 단창을 달려드는 괴물을 향해 던졌다. -껙! 준상이 던진 단창에 가슴이 꿰뚤린 괴물은 그대로 몸을 뒤집으며 절명했고, 단창을 던진 틈을 노려 또 다른 괴물이 창을 찔러오자 준상은 그것을 피하며 카운터를 발동했다. 고개를 젖혀 단창을 피하며 주먹을 내지르자 괴물은 일격에 콧잔등이 뭉개지며 고개가 휙 하고 돌아가더니 그대로 목까지 꺾이며 절명하고 말았다. 품에 안기는 모양새로 죽은 괴물의 몸을 움켜잡은 준상은 남은 두 마리의 호위를 향해 괴물의 시체를 밀어냈다.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던 두 마리의 괴물은 동료의 시체가 날아오자 당황하며 그 몸을 받았고, 뒤따라 덮쳐온 준상에게 차례로 목을 잡혀 바닥에 내동댕이 쳐지고 이어 시커먼 군화발에 목과 머리를 밟히며 죽음을 당했다. 순식간에 호위병들을 쓰러뜨린 준상은 보스를 향해 다가갔다. -키야아아아! 보스는 사기를 돋우려는 건지, 아니면 멀리 있는 다른 부하들을 부르려는 것인지는 몰라도 몽둥이를 들고 크게 소리를 한 번 지르더니... 갑자기 아르마딜로처럼 몸을 둥글게 말고 거대한 수레바퀴와 같은 형상으로 몸을 회전시키며 준상을 향해 돌격했다. “쯧.” 준상은 혀를 차며 일단 보스의 돌격을 피했다. 무투가 콤보로 증폭된 기습적인 숄더 차지를 맞고도 생채기 하나 나지 않은 보스의 방어력을 생각하면 풀 차지의 강타가 아닌 이상 저 공격을 그대로 맞받아 쳐봐야 손해였다. 준상이 돌격을 피하자 보스는 움집 하나를 산산조각내고 이 와중에도 움집 안에서 곤히 잠들어 있던 신경 굵은 괴물 부부 하나를 밟아 으깨버린 후에야 겨우 회전을 멈추고 둥글게 말았던 몸을 본래대로 되돌렸다. 그리고는... 어지러운지 술 취한 것처럼 비틀거리기 시작한다. “...” 여러모로 좀 어이가 없기는 했지만, 그런 빈틈을 놓칠 수야 없는 일. 준상은 곧바로 쏘아진 화살처럼 몸을 날리며 숄더 차지를 발동했다. 이번에도 준상의 공격은 어김없이 보스의 가슴에 직격했고,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한 보스는 그대로 뒤로 튕겨 나갔다. 준상은 앞으로 달려 나가며 조용히 말했다. “광전사.” 그 말이 나옴과 동시에 카드 슬롯이 비워지며 그 안에 새로운 카드들이 장착되었다. 광폭, 피칠갑, 피칠갑(UC), 피칠갑(R). 이렇게 네 장의 카드에 이어 2연격 카드가 마지막 슬롯에 장착되자 준상은 뛰어 올라 버둥거리는 보스의 몸 위에 떨어져 내렸다. 순간, 보스의 시각에는 두 눈에서 섬뜩한 안광을 뿜어내며 자신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는 한 인간의 모습이 비쳤다. 그리고, 뒤이어... 강렬한 펀치가 자신의 머리를 두드리는 충격이 느껴졌다. 펀치가 주는 충격은 그대로 괴물의 머리 속으로 파고들면서 그의 마음 속 깊이 감추어져 있던 한 가지 감정을 정신이라는 수면 위로 밀어 올렸다. 그것은 바로, 공포였다. 공포라는 이름의 너무나도 생소한 감정이었다. 00045 트롤러 ========================================================================= 쾅! 콰쾅!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펀치 세례. 아니, 그것은 단순히 소나기라는 일상적이고 구태의연한 단어 하나로 표현하고 넘어갈 정도의 것이 아니었다. 굳이 비라는 형태의 무언가로 비교를 해야 한다면, 이것은 천둥과 번개, 그리고 주먹만한 우박을 동반한 열대성 호우라고 부르는 편이 옳았다. 준상은 무심하게 보스의 길쭉한 안면에 계속해서 주먹을 내리꽂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오픈 강타.” 2연격이 빠지고 강타가 카드 슬롯에 장착되면서 연타의 속도가 떨어졌다. 그러자 보스는 공포 유발 상태에 빠지고서도 계속 팔다리를 움찔거리며 어떻게든 방어나 회피를 해보려는 의지를 보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계속된 난타는 단지 공포 유발 상태를 유지시키는 것으로만 끝나지 않았다. 고작 5퍼센트 확률의 발동 조건을 가진 스턴 시드. 이것을 단순히 스무 번 때리면 그 중 한 번은 반드시 발생한다고 이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그 숫자가 오십 번이 되고 백 번이 되면? 적어도 한 번은 반드시 발생하기 마련이다. 바로 그, 확률 낮은 스턴 상태가 지금 보스에게 발생했다. 준상은 계속 움찔거리며 방어나 회피의 의지를 보이던 보스의 사지가 어느 순간 그대로 멈추자 계속 주먹을 내지르다가 우뚝 주먹을 멈추었다. 1초, 그리고 2초. 아주 잠깐 의식을 잃었다가 다시 눈을 떴을 때, 보스는 자신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새하얗게 빛나는 주먹을 보았다. 엉겁결에 손을 들어 막아보려 했지만... 그때는 이미 무자비하게 떨어진 준상의 주먹이 보스의 안면을 작렬한 후였다. -키에에엑! 풀 차지도 아니었고, 무투가 콤보로 완전 증폭된 상태도 아니었지만... 광전사 콤보의 2단계 차지 만으로도 단단한 비늘 아래 숨겨진 보스의 머리 속에 타격을 주기에는 충분한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뇌진탕 상태에 빠진 보스를 바라보며, 준상은 다시 작게 말했다. “무투가.” 그러자 슬롯에 꽂혀 있던 카드들이 우르르 빠져 나오며 새로운 카드들이 장착된다. 광폭, 카운터, 숄더 차지, 강타. 여기에 늑대의 영혼과 강력한 곰의 영혼이 합쳐지며 콤보 카드 ‘지하 격투장의 암흑 무투가’ 발동! 준상은 2단계 차지 강타의 영향으로 인해 아직 열기가 식지 않은 온몸의 근육을 긴장시키며 강타를 발동했다. 웅웅, 웅웅웅! 준상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가 대기와 공명하며 요동친다. 그렇게 1초가 지나고, 다시 2초가 되었으며, 마침내 3초의 시간에 도달하여 풀 차지가 완성되었다. 보스는 뇌진탕의 충격으로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자신의 몸 위에 올라탄 준상의 주먹이 거대한 유성처럼 자신에게 떨어져 내리는 것을 보았다. 비명을 지를 틈도, 손을 뻗어 밀쳐낼 틈도 없었다. 보스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린 채 자신의 단단한 비늘이 이 일격을 견뎌낼 수 있기를 기원하는 일 뿐이었다. 콰앙! 마을 외곽에서 늑대들을 상대하고 있던 괴물들은 순간 커다란 폭음과 함께 자신들이 밟고 있던 땅이 들썩거리는 기묘한 현상을 경험했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린 그들은 보스의 거처 근처에서 피어오른 먼지 구름을 볼 수 있었다. 그 먼지 구름 속에서 준상은 풀 차지의 강타를 사용한 뒤의 후유증을 조용히 감내하는 중이었고, 그의 발아래에는 무참하게 머리가 으깨져 버린 보스가 사지를 쭉 뻗은 채 누워있었다. “후욱... 쿨룩! 쿨룩!” 버릇처럼 심호흡을 하던 준상은 자욱한 먼지를 들이마시자 연신 기침을 해댔다. 항상 축축한 안개가 희미하게나마 끼어있는 습지의 땅이었지만, 준상이 쏟아낸 강렬한 에너지와 직면하는 순간 머금고 있던 수분이 단숨에 기화되어 사라져 버린 탓에 이런 자욱한 먼지가 생겨난 것이다. 이런 현상을 고작 인간의 주먹질이 만들어 냈다는 사실을 과연 누가 믿을 것인가. “후우...” 준상은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곤죽이 되어 버린 보스의 머리 속에서 시드를 찾아냈다. 그리고 바로 일어서려는데... 문득 보스의 검은 비늘이 눈에 들어왔다. 무투가 콤보로 강화된 풀 차지의 강타에도 불구하고 조금(?) 뭉개지기만 했을 뿐 그 형체를 유지하고 있는 모습을 보자, 왠지 이대로 버려두기는 아깝다는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준상은 잠시 보스의 시체를 바라보다가, 인벤토리를 열어 그 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즈음이 되어서야 비로소 이변을 알아차린 이구아나 머리의 괴물들이 자욱한 먼지 속을 탐색하며 다가왔다. 아직 풀 차지의 강타를 사용한 후유증이 남아 있기는 했지만, 높아진 재생률은 지금 이 순간에도 그의 몸에 걸린 과부하를 빠른 속도로 치유하고 있었고, 그 정도 만으로도 이런 잡몹들을 상대하기에는 충분했다. -키릭? 자신의 눈앞에 뭔가 거무스름한 그림자 같은 것이 나타나자 들고 있던 창을 급히 그곳으로 향했던 이구아나 머리의 괴물은, 내밀었던 창이 갑자기 휙 당겨지자 중심을 잃고 그대로 딸려 나갔고, 아차 하는 사이에 강렬한 펀치에 맞아 머리가 으깨지며 죽음을 당했다. 준상은 괴물로부터 빼앗은 단창을 들고 가장 가까이에 있는 괴물을 향해 던졌다. 먼 곳의 목표라면 몰라도 이렇게 가까운 곳이라면 빗나갈 이유가 없다. 순식간에 단창에 몸통을 꿰뚫린 괴물이 허파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주저앉는 것을 시작으로 준상은 자욱한 먼지 속에서 뛰쳐나와 괴물들을 박살내기 시작했고, 여기에 뒤늦게 도착한 다이어 울프와 다른 두 마리 늑대가 달려와 퇴로를 막자, 괴물들은 물가로 도망치지도 못한 채 고스란히 몰살당할 수밖에 없었다. “후...” 준상은 마을 안의 괴물들을 모조리 해치우고 나서야 호흡을 고르며 과부하가 걸린 몸에 휴식의 시간을 줄 수 있었다. 다섯 명짜리 퀘스트라서 지난 번의 퀘스트보다 난이도가 높을 거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더 쉬운 느낌이라 준상은 살짝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준상은 마을 방어에서 마주쳤던 보스가 히든 퀘스트에 속해 있기 때문에 보통은 상대하지 않고 그냥 넘어간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번에 마주친 이구아나 머리의 괴물들은 본래 마른 땅이 아닌 어느 정도 깊이가 있는 물가나 발이 푹푹 빠지는 늪지가 주무대였고, 그런 곳에 숨어서 기습을 가한다는 점과 습지의 넓이가 생각보다 엄청나게 넓다는 점까지 감안하면 준상 같은 예외적인 인물이 아닌 이상은 다섯 명의 플레이어로도 다소 부족한 감이 있었다. 어쨌거나 마을의 괴물들을 일소한 준상은 전리품으로 삼을 만한 것이 없을까 하고 마을을 뒤져 봤지만, 딱히 돈이 될만한 것은 찾을 수가 없었다. 괴물들의 머리 속을 뒤져 시드를 회수한 준상은 마을 밖에서 이제나 저제나 하며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일마렌에게로 돌아갔다. “이, 이겼나요?” “...”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일마렌은 탄성을 지르며 준상의 주위를 한 바퀴 돌고는 마치 자신의 지정석을 찾아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어깨 위에 내려 앉았다. 준상은 일마렌이 어깨 위에 앉자 조용히 물었다. “이 근처에 독초가 피어나는 곳이 있나?” “아! 있어요!” “안내해라.” “네!” 어쩌면 이니아나 일마렌 같은 요정의 진짜 용도는 이런 네비게이션 역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떠올리며 준상은 다시 질주를 장착하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달려가던 준상은 미니맵을 살피다가 또다시 노란색 느낌표 하나가 바쁘게 이동하는 것을 발견하고는 방향을 틀었다. “어어? 그쪽 아닌데요?” “잠시 들렀다 갈 곳이 있다.” “아, 예...” 준상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부진 체격의 한 남자가 괴물들에게 쫓기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남자는 긴 자루가 달린 망치를 휘두르며 괴물들에게 대항했지만, 수에서 워낙 밀리다 보니 여기저기 상처를 입은 채 결국 도망치던 중이었다. 바로 그곳에, 세 마리의 거대한 늑대를 대동한 준상이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준상은 가타부타 말도 없이 바람처럼 휘몰아치며 늑대들과 함께 괴물들을 쓸어버렸다. “허...” 나타났나 싶었더니 대여섯 마리나 되는 괴물들을 문자 그대로 분쇄해버리는 준상의 모습을 남자는 그저 놀란 표정으로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준상은 괴물들이 모두 쓰러지자 그 머리를 뒤져 시드를 획득한 다음 남자를 돌아보며 말했다. “게덴, 맞나?” “어? 내 이름, 아니 제 이름을 어떻게 아십니까?” 게덴은 평소 하던대로 반말을 하려다가 준상의 번뜩이는 눈과 마주치자 급히 말을 올렸다. 하지만 준상은 게덴의 말투 따위는 처음부터 관심이 없었다. 그에게 관심이 있는 것은, 게덴을 통해 얻게 될 서브 퀘스트 뿐이었다. “부탁해라.” “네? 그게 무슨...” 밑도 끝도 없는 준상의 말에 게덴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부탁할 일이 있을텐데?” “...” 무심한 눈길로 바라보며 말하는 준상의 박력에 게덴은 자신이 이곳에 들어온 이유를 우선 말하기 시작했다. “시, 실은... 이 습지에서만 나는 맛있는 고급 버섯이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캐다가 파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데...” 하지만 준상은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은 후 다시 말했다. “본론만.” 게덴은 정말 부탁해도 좋은걸까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당장 버섯을 구해다 팔지 못하면 화가 난 영주에게 목이 잘린다는 사실이 떠오르자 체면 불구하고 고개를 숙이며 외쳤다. “버섯을 구해 주십시오! 도와주시면 사례는 충분히 하겠습니다!” “...” 하지만 준상은 대답하지 않고 휴대폰에 들어온 메시지부터 확인했다. (Sub) 게덴의 부탁. :게덴은 습지에서 나는 고급 버섯을 따다가 파는 사람이지만, 최근 나타난 괴물들 때문에 생계는 물론이고 목숨마저 위협받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를 도와 버섯을 구해주세요. “쯧...” 피터지게 싸우다 말고 버섯이나 캐야 하는 상황이 되자 준상은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 “어떻게 생긴 버섯이지?” “아, 이... 이겁니다.” 게덴이 둘러메고 있던 배낭에서 옅은 갈색을 띄는 커다란 생강 같은 모양의 버섯을 꺼내자 향기로운 냄새가 은은하게 퍼져 나온다. 준상은 냄새를 맡고는 바로 크림슨 울프를 불렀다. “힉!” 게덴은 갑자기 커다란 늑대가 다가와 손에 들린 버섯의 냄새를 맡자 하얗게 질려버렸다. “킥킥...” 그 모습이 우스웠던지 게덴의 모습을 보고 준상의 머리 뒤에 숨어 있던 일마렌이 작은 소리로 키득거린다. 안 그래도 커다란 붉은 늑대 때문에 정신이 없는데 이번에는 어디선가 여자 아이의 숨죽인 웃음소리 같은 것이 들려오자, 게덴은 전신에 소름이 돋는 느낌을 받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준상은 팀버 울프와 다이어 울프도 불러서 냄새를 기억시키는 작업을 거친 다음 곧장 늑대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찾아라.” 그러자 세 마리 늑대들은 곧장 사방으로 흩어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입 주위에 진흙을 잔뜩 묻힌 채로 게덴이 보여주었던 것보다 훨씬 큰 버섯을 입에 물고 돌아왔다. 게덴이 보여 주었던 것이 호두보다 조금 큰 정도라면, 이것은 성인 남자의 주먹 두개를 합친 것보다 더 큰 수준이다. “어, 어어!” 게덴은 지금껏 본 중에 가장 큰 버섯이 연이어 세 개나 출현하자 놀라 말문을 잃었다. 준상은 그런 게덴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 정도면 되겠나?” 준상의 말에 게덴은 화들짝 정신을 차리며 말했다. “네? 아... 예! 충분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게덴은 연신 고개를 숙이며 준상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지만, 이번에도 준상은 휴대폰의 메시지부터 확인했다. (Sub) 게덴의 부탁. :게덴은 습지에서 나는 고급 버섯을 따다가 파는 사람이지만, 최근 나타난 괴물들 때문에 생계는 물론이고 목숨마저 위협받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를 도와 버섯을 구해주세요. -> 완료! 보상: 경험치 약간, (금화) -> 보상을 지금 수령하시겠습니까? (Y/n) _ (주의) 수령하지 않은 보상은 7일후 자동 소거됩니다. 준상은 바로 보상을 수령했지만, 금화는 나타나지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일까. 하지만 해답은 간단했다. 괄호가 쳐져 있는 것으로 미루어 아마도 디안의 검처럼 퀘스트를 부여한 당사자에게 직접 받는 것이 아닐까. “...” 그런 생각을 떠올린 준상은 말없이 게덴에게 손을 내밀었다. 게덴은 인사를 하다가 준상이 손을 내밀자 잠시 무슨 의미인지 몰라 어리둥절 했지만, 이것이 사례를 요구하는 행동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얼른 품을 뒤져 가지고 있는 돈 주머니에서 금화를 꺼내어 준상의 손에 얹었다. “...” 하지만 준상은 손을 거두지 앉은 채 계속 게덴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 압박감을 견디지 못한 게덴은 눈치를 보며 다시 주머니에서 금화 두 개를 꺼내어 준상의 손에 올렸다. “...” 하지만 준상의 손은 그래도 거둬지지 않았다. 이제 울상이 된 게덴은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주머니를 통째로 준상의 손 위에 얹었다. 준상은 그제서야 내밀었던 손을 거둬들인 후, 게덴에게 버섯을 건네주고 늑대들과 함께 바람처럼 달려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게덴은 그렇게 멀어져 가는 준상을 그냥 멀거니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00046 트롤러 ========================================================================= 게덴의 부탁을 해결하면서 이제 메인 퀘스트 외에 남은 것은 독초를 불태우는 일 하나 뿐이었다. 준상은 일마렌의 안내를 받아 독초가 자라고 있는 습지 외곽으로 향했다. “멈추세요!” 열심히 뛰어가고 있는데 문득 일마렌이 빽 하고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준상은 발걸음을 멈추었다. “무슨 일이지?” “더 이상 가면 중독되거든요.” “...” 준상은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별다른 불쾌감은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일마렌의 말을 무시할 수도 없는 일이라, 일단 조금 높은 곳에 올라 주위를 살펴보기로 했다. 근처를 둘러보던 준상은 약간 높은 둔덕 위에 솟은 바위를 발견하고는 그 위에 올라갔다. 그러자 곧바로 일마렌이 한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저기, 저기에요.” “...” 준상이 바라보자 아닌 게 아니라 습지 한 켠에 보통의 안개와는 다른 조금 거뭇한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저게 바로 독 안개에요.” 일마렌의 말을 들은 준상은 얼굴을 찌푸렸다. 규모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저 정도의 독 안개를 만들어낼 정도의 독초라면 분명 보통의 것은 아닐 터. 게다가 저런 독 안개가 깔려 있으면 모르고 접근했다가는 중독되기 쉽기 때문에 불을 피우기도 까다롭다. 물론, 이런 것도 어디까지나 보통 사람들의 관점에서의 이야기지만 말이다. “오픈 도깨비불.” 준상이 도깨비불을 소환하자 일마렌은 깜짝 놀라며 탄성을 질렀다. “와앗!” 하지만 준상은 일마렌이 의미를 알 수 없는 소리를 지르며 호들갑을 떨거나 말거나 곧바로 도깨비불에게 독 안개가 퍼져 있는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가서 저기 있는 풀과 나무를 모조리 태워라.” 도깨비불은 준상의 명령이 떨어지자 곧바로 허공을 가르며 날아가 독 안개가 피어오른 곳의 나무와 풀을 닥치는 대로 태웠다. 축축한 안개가 깔린 곳이라 생각처럼 불이 크게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준상의 휴대폰에는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했다. (Hidden) 습지 주위에 피어난 독초 군락을 불태우십시오. (단독) ->완료! 이로써 이번 퀘스트에 숨겨진 숨은 임무를 모두 해결한 준상은 도깨비불에게 남은 독 안개 역시 말끔하게 날려버리도록 지시한 후, 마지막 남은 메인 퀘스트를 해결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편,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거의 모든 퀘스트가 해결되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 마을에 들어선 네 명의 여행자들은 촌장을 만나 습지의 괴물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촌장은 새로운 여행자가 네 명이나 도착한 것에 대해 기꺼워하면서 장장 십여분에 걸쳐 습지에 나타난 괴물들의 모습과 그들의 대략적인 출현 위치 역시 알려주었다. “도움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가 기필코 그 괴물들을 말끔하게 처리하겠습니다.” “아이고,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할지.” 의례적인 말이었지만, 여행자들은 그 말을 듣고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저, 실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만.” “네? 말씀하시죠.” “사실은 저희가 먼 길을 와서 조금 피곤합니다. 그래서 일단 간단하게나마 씻고 휴식을 취한 다음 일을 시작해 볼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촌장으로서는 처음에 왔던 여행자와는 달리 싹싹한 이들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마을이라 이곳에는 달리 묵을 만한 여관이 없습니다만, 그런 일이라면 저희 집으로 모시겠습니다. 따라 오십시오.” “아, 정말 감사합니다!” 네 여행자들은 반색하며 촌장의 집으로 향했다. 마을의 여느 집과 마찬가지로 촌장의 집도 풀을 이어 지붕을 덮은 초가집이었지만, 그래도 간간히 마을에 들르는 여행자나 상인들을 위한 작은 별채 정도는 가지고 있었다. 촌장은 네 여행자들을 그 별채로 안내한 후 목욕물을 덥히고 식사를 준비한다고 수선을 떨었다. 네 여행자들은 촌장의 환대를 받으며 맘 편하게 식사를 하고 뜨겁게 덥힌 물에 목욕을 하는 호사를 누렸다. 일행 가운데 홍일점인 정다빈은 남자들이 한 차례 목욕을 마치고 나서야 새로 데운 물로 가득 채운 나무 욕조 안에 들어갔다. “아... 좋다.” 악몽 같은 튜토리얼인지 뭔지가 있은 후로 두 차례의 퀘스트를 거치면서 언제 소환될지 모른다는 강박감에 시달려 왔던 그녀였기에 잠시나마 찾은 이런 여유가 더욱 고마웠다. “오픈 산들바람.” 그녀의 작은 목소리와 함께 어디선가 청량한 바람 한 줄기가 욕실인지 헛간인지 모를 공간 안으로 흘러들어온다. “혹시 모르니까 주위를 잘 살펴줘.” 산들바람은 그녀의 주위를 맴돌며 만에 하나 있을지도 모르는 불청객을 살피기 시작했다. 다빈은 산들바람이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기 시작하자, 벗어두었던 허리가방에서 세면도구가 담긴 지퍼백을 꺼낸 후 먼저 삼푸로 머리를 감기 시작했다. “룰룰루...” 오랜만에 마음 편히 하는 목욕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하지만, 모처럼 여유롭던 다빈의 목욕은 갑자기 울린 휴대폰의 메시지 알림에 의해 산산히 깨어지고 말았다. “어? 어?” 샴푸 거품 때문에 눈이 매운 와중에도 다빈은 휴대폰의 메시지 알림에 즉각 반응했다. 눈이 따가운 것을 무릅쓰고 얼른 손을 뻗어 집어든 휴대폰에는 이런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습지의 괴물을 토벌하십시오. :습지에 갑자기 나타난 괴물들로 인해서 마을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습지에 도사린 위험을 제거하십시오. (남은 괴물 수 : 0마리) [이 퀘스트는 여러 명의 인원이 동시에 참여합니다.] -> 완료! - 당신이 이번 퀘스트에서 보여준 행동과 성과를 정산합니다. 이 과정은 약간의 시간이 소요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뭐?” 당황스러운 와중에도 다빈은 머리의 샴푸 거품조차 헹굴 생각을 못한 채 허겁지겁 속옷부터 챙겨 입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가 간신히 속옷을 입고 바지를 입기 위해 집어든 순간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했다. 축하합니다! : 당신의 랭크는 F입니다. -당신은 이번 퀘스트의 달성에 대해 손톱만큼의 기여도 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식이면 곤란합니다. 좀 더 분발해 주세요. 보상 : 없음. 다빈은 바지에 다리를 끼우면서 흘깃 본 새로운 메시지의 내용에 비명 같은 외침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이게 무슨 헛소리야!” 이제 막 도착해서 씻고 좀 쉬어보려는데 퀘스트가 이미 완료되었다고? 도대체 뭐가 어떻게... 하지만 바로 그 순간, 다빈은 한 사람이 머리 속에 떠올랐다. 자신과 다른 플레이어들의 부름을 무시한 채 마을 쪽으로 달려가던, 한 남자. 영락없이 트롤이라고만 생각했던 그 남자! 설마, 설마... 그가 혼자서 이 퀘스트를, 이렇게 빠르게 해치워 버렸단 말인가! 하지만 그렇게 놀라고 있는 와중에도 메시지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퀘스트가 완료되었습니다. :당신은 할당된 퀘스트를 모두 완료했습니다. 이제 본래 당신이 있어야 할 장소로 돌아가야 할 시간입니다. 당신의 앞길에 행운이 함께 하기를 빕니다. (남은 시간 : 10초) 그리고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자 다빈은 일단 벗어두었던 옷가지와 소지품을 양손에 끌어안았다. 미처 헹구지 못한 샴푸 거품이 흘러내려 눈이 따가웠고, 물기를 닦아내지도 못한 채 입은 속옷은 이미 축축하게 젖어있었지만, 다른 걸 생각을 틈조차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마침내 전송이 이루어졌다. “...” 다빈은 어느새 집 근처의 뒷골목으로 돌아와 있는 자신을 깨닫고는 그대로 털썩 주저앉았다. 머리에는 샴푸 거품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다, 물에 젖은 속옷만 입은 채 옷가지와 소지품을 끌어안은 그녀의 모습은 영락없이 목욕하다 불나서 도망친 여자의 그것이었다. 이미 해가 져서 어두운 가운데, 가로등 위에 매달린 CCTV 만이 그런 다빈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다빈은 우선 옷부터 챙겨 입은 뒤 도망치듯 집을 향해 달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제일 먼저 씻는 건데!” 퀘스트는 둘째 치고, 모처럼 느긋하게 목욕할 기회를 놓쳤다는 사실이 다빈에게는 가장 아쉬웠던 모양이다. 한편, 이 모든 상황을 초래한 장본인은 그 즈음이 되어서야 오대산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떠나올 때 아름다운 석양이 드리워졌던 오대산은 이미 한 치 앞을 살피기 어려울 정도로 캄캄함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준상은 느긋하게 바위에 걸터앉아 잠시 떠나올 때 보았던 일마렌의 아쉬워하는 모습을 떠올리다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메시지를 확인했다. 습지의 괴물을 토벌하십시오. :습지에 갑자기 나타난 괴물들로 인해서 마을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습지에 도사린 위험을 제거하십시오. (남은 괴물 수 : 0마리) [이 퀘스트는 여러 명의 인원이 동시에 참여합니다.] ->완료! (Sub) 제시의 부탁. ->완료! (Sub) 일마렌의 부탁. ->완료! (Sub) 게덴의 부탁. ->완료! (Hidden) 습지 주위에 출몰하는 괴물 멧돼지를 토벌하십시오. (단독) ->완료! (Hidden) 습지 주위에 피어난 독초 군락을 불태우십시오. (단독) ->완료! - 당신이 이번 퀘스트에서 보여준 행동과 성과를 정산합니다. 이 과정은 약간의 시간이 소요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준상은 모든 퀘스트에 완료 표시가 떠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다음 메시지를 확인했다. 축하합니다! : 당신의 랭크는 SSS입니다. -당신은 이번 퀘스트의 목표를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완벽하게 수행했습니다. 기본 보상 외에 추가 보상이 지급됩니다. 보상 : 경험치 많이, 추가 보상 상자(단독)x2, 추가 보상 상자(SSS랭크) -> 보상을 지금 수령하시겠습니까? (Y/n) _ (주의) 수령하지 않은 보상은 7일후 자동 소거됩니다. 서브 퀘스트의 보상은 이미 따로 받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추가로 지급되는 보상 상자는 두 개에 불과했다. 일장일단이 있겠지만, 금화나 요정의 키스 같은 보상은 추가 보상 상자로는 얻을 수 없는 것이었기에 준상으로서도 그다지 불만은 없었다. 준상은 먼저 추가 보상 상자를 열었다. 카드정보 명칭 : 저돌적인 멧돼지의 영혼 레벨 : 1Lv 경험치 : 0 등급 : Uncommon 분류 : 아이템 성장 : 조숙(중) 속성 : 없음 효과 : 장착시 저돌적인 멧돼지의 영혼이 사용자에게 빙의하여 돌격계통의 기술 발동시 공격력과 방어력을 크게 상승시킵니다. Cost : 20 Seed : 3슬롯 “흠...” 전에 괴물 곰을 쓰러뜨렸을 때를 떠올린 준상은 히든 퀘스트로 이런 야수들을 쓰러뜨리면 그에 걸맞는 스킬 카드를 얻는 것이 가능한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숄더 차지 외에 다른 돌격기술이 뭐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나중에 돌격 계통의 콤보 카드를 얻는다면 크게 도움이 될만한 카드다. 현재로서는 무투가 콤보 장착시 숄더 차지를 사용할 때 곰의 영혼 대신 불러 사용하는 정도가 어울리는 사용법이지만 말이다. 준상은 다음 상자를 열었다. 카드정보 명칭 : 도약 레벨 : 1Lv 경험치 : 0 등급 : Common 분류 : 스킬 성장 : 대기만성(중) 속성 : 없음 효과 : 장착시 도약력 20퍼센트 증가. Cost : 10 Seed : 1슬롯 질주만큼은 아니지만 이것도 그리 나쁘지 않은 스킬이다. 아직까지는 던전 같은 곳의 난이도가 높지 않아서 그런 경우가 없었지만, 복잡하고 위험한 지형지물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이런 스킬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 준상은 마지막 남은 트리플 S 랭크 상자를 열었다. 그러자 이전과 마찬가지로 무언가가 우르르 쏟아져 나온다. 축하합니다! 대기시간 ‘5분’을 획득했습니다. :퀘스트 시작과 종료시 전송 대기 시간이 ‘5분’으로 늘어납니다. 이제 좀 더 여유롭게 새로운 임무를 대비하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5분...” 확실히 10초보다는 긴 시간이지만, SSS등급의 보상으로는 뭔가 좀 많이 부족하다는 느낌이다. 하지만 이걸 바꿔 생각해 보면, 앞으로도 이번과 같이 퀘스트 달성도를 유지할 경우 이 시간을 계속 늘려갈 수 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다. 5분은 짧지만, 10분이 되고 한 시간이 되면 더 이상 언제 퀘스트가 뜰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물론 계속 보상으로 대기 시간이 나온다는 전제하에서의 얘기지만 말이다. 준상은 다음 메시지를 확인해 보았다. 축하합니다! 스킬카드 ‘피칠갑(SR)’를 획득했습니다. :스킬카드는 카드 슬롯에 장착하여 그 능력을 사용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스킬카드를 카드 슬롯에 장착하시겠습니까? (Y/n) _ [카드 상세 정보 확인은 이곳을 누르십시오.] “...” 또 피칠갑이냐 하려다가 뒤에 붙은 (SR)이라는 표시를 보고 우선 카드 정보를 확인해 보았다. 카드정보 명칭 : 피칠갑(SR) 레벨 : 1Lv 경험치 : 0 등급 : Super Rare 분류 : 스킬 성장 : 대기만성(대) 속성 : 불 효과 : 1. 공격 성공시 적에게 35% 확률로 공포 유발 2. 재생률 15% 상승 3. 공격력 10% 상승 4. 공격 성공시 5% 생명력 흡수 Cost : 25 Seed : 5슬롯 “오!” 기본적으로 기존의 피칠갑 레어와 효과의 종류는 대동소이했지만, 기존의 효과들은 모두 5퍼센트씩 상승했고 여기에 생명력 흡수 5퍼센트가 추가되었다. 코스트가 5 상승하기는 했지만, 이 정도 성능 향상이라면 충분히 감내할 만한 수준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준상이 피칠갑(SR)의 확인을 끝내자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했다. 축하합니다! :당신은 한 종류의 카드를 네 등급에 걸쳐 획득했습니다. -당신의 위업을 찬양하며 ‘카드 수집가’ 칭호를 부여합니다. [칭호 상세 정보 확인은 이곳을 누르십시오.] “음?” 이건 또 뭔가 싶어 얼른 칭호 정보를 열어보았다. [카드 수집가] :한 종류의 카드를 네 등급에 걸쳐 획득한 자에게 부여되는 칭호. -효과: 특수 기능 ‘카드 조합’이 개방됩니다. -칭호는 획득시 자동으로 효과가 적용됩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축하합니다! :당신은 최초로 ‘카드 수집가’ 칭호를 획득했습니다. -당신의 위업을 찬양하며 ‘최초의 카드 수집가’ 칭호를 부여합니다. [칭호 상세 정보 확인은 이곳을 누르십시오.] 뭔가 정신이 없었지만 준상은 이것 역시 정보를 확인해 보았다. [최초의 카드 수집가] :카드 수집가 칭호를 최초로 획득한 자에게 부여되는 칭호. -효과: 랜덤카드나 보상상자에서 이미 소유 중인 카드가 나왔을 경우, 재시도가 가능합니다. -칭호는 획득시 자동으로 효과가 적용됩니다. “오!” 이번만큼은 준상도 탄성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 작품 후기 ============================ 요새 인터넷 때문에 암 걸릴 것 같네요. 슬슬 바꿀 때가 온건가... 00047 트롤러 ========================================================================= 카드 조합 기능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된다. 하나는 랜덤시드와 마찬가지로 쓸모없는 카드 두 장을 조합해 새로운 카드를 얻는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같은 종류의 하위 카드를 상위 카드와 조합해 상위 카드의 경험치를 높이는 방법이다. “으음...” 사실 중복되는 카드라고 해봐야 피칠갑 외에는 한 두 장 정도 뿐이다. 문제는 이번처럼 같은 종류의 카드를 등급 별로 갖추었을 때 생기는 보너스가 더 있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현재까지 준상이 획득한 카드의 등급은 모두 네 가지이다. 하지만 아직 게임은 초반에 불과하기 때문에 아직 나오지 않은 등급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네 가지 등급을 모았을 때 칭호가 나왔다면, 다섯 가지나 그 이상의 등급을 모았을 때도 나올 가능성이 있다. 더군다나 광전사나 미친개처럼 중복된 카드 조합이 필요한 또 다른 콤보가 없다고 단정할 수도 없는 일. 그렇다면 결국 현재 카드 조합에 사용할 수 있는 카드는 여분의 피칠갑 카드 뿐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피칠갑 카드가 많이 나오기는 했지만, 여러 등급에 걸쳐 나오다 보니 실제로 조합에 사용할 수 있는 커먼 등급의 카드는 고작 세 장에 불과했다. 그냥 경험치로 바꿔 버리는 것보다는 새로운 스킬 카드를 얻는 쪽이 아무래도 이득이기에, 준상은 두 장을 소모해 새로운 카드를 뽑는 기능을 사용해 보기로 했다. 카드 조합을 시작합니다. : ‘피칠갑’과 ‘피칠갑’을 합성해 새로운 임의의 카드를 생성합니다. 정말로 합성을 시작하시겠습니까? (Y/n) _ “후우...” 준상은 크게 심호흡을 한 뒤 눈을 질끈 감고 Y를 눌렀다. 그리고 잠시 뒤에 슬그머니 눈을 뜨며 메시지를 확인해 보았다. 축하합니다! : ‘피칠갑’과 ‘피칠갑’을 합성해 새로운 카드 ‘피칠갑’을 손에 넣었습니다. [카드 상세 정보 확인을 원하시면 이곳을 누르십시오.] 합성을 계속 하시겠습니까? (Y/n) _ “...” 준상은 잠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정말 무슨 피칠갑 못 먹어서 죽은 귀신이 붙은 것도 아니고! 어떻게 피칠갑이랑 피칠갑을 합성했는데 또 다시 피칠갑이 나온단 말인가! 준상은 자신도 모르게 휴대폰을 집어 던지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제했다. 솟구치는 짜증에 바로 합성을 중단하려다가... 피칠갑이 다시 나옴으로 인해 이전에 한 장 남아있던 피칠갑과 다시 합성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으음...” 질러볼 것인가, 말 것인가. 잠시 고민하던 준상은 어차피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Y를 눌러 합성을 다시 시도했다. 카드 조합을 시작합니다. : ‘피칠갑’과 ‘피칠갑’을 합성해 새로운 임의의 카드를 생성합니다. 정말로 합성을 시작하시겠습니까? (Y/n) _ 문득 보스랑 싸울 때도 이렇게 긴장이 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준상은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어 버리고 말았다. “후우...” 길게 심호흡은 한 준상은 휴대폰을 노려 보며 Y를 눌렀다. 그러자 두 개의 피칠갑 카드가 빙글 빙글 돌더니 서서히 하나로 합쳐졌고, 이내 결과가 메시지로 출력되었다. 축하합니다! : ‘피칠갑’과 ‘피칠갑’을 합성해 새로운 카드 ‘투석’을 손에 넣었습니다. [카드 상세 정보 확인을 원하시면 이곳을 누르십시오.] 합성을 계속 하시겠습니까? (Y/n) _ “투석?” 준상은 얼른 정보를 확인했다. 카드정보 명칭 : 투석 레벨 : 1Lv 경험치 : 0 등급 : Common 분류 : 스킬 성장 : 일반(소) 속성 : 없음 효과 : 기본 공격력의 105퍼센트 위력으로 돌멩이를 던져 원거리의 적을 제압합니다. Cost : 10 Seed : 1슬롯 “좋군.” 그렇지 않아도 원거리에 대응할 만한 스킬이 필요했던 참이었기에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감을 표시했다. 결과적으로 피칠갑 카드 3장을 소모해 새로운 스킬 카드를 얻은 셈이니 그리 효율이 좋다고 보기는 어려웠지만, 그래도 기존에 없던 스킬을 새로 얻은 것이니 전력이 증가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준상은 새로 얻은 카드를 정리해 단축 명령을 조금 손 본 다음에야 보스에게서 얻은 시드를 확인했다. 아이템정보 명칭 : 쉘 시드 레벨제한 : 없음 종류 : 시드 등급 : common 효과 : 물리 저항 7% 설명 : 물리적인 피해를 줄여주는 시드입니다. Seed 슬롯이 있는 아이템이나 카드에 장착하여 능력을 강화할 수 있습니다. 한번 장착한 시드를 분리하기 위해서는 특수기능 ‘분리’가 필요합니다. [이 시드를 아이템이나 카드에 장착하시려면 이곳을 누르십시오.] 이전에도 한 번 얻은 적이 있었던 물리 저항 시드였지만, 이번에는 효과가 무려 7퍼센트였다. 시드의 확인을 마친 준상은 그제서야 비로소 몸을 일으켰다. 별이 하나 가득 떠 있기는 했지만, 숲 속에서의 밤은 한 치 앞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도깨비불을 불러내어 길잡이로 삼은 준상은 근처에 불이 밝혀진 작은 암자를 찾아가 하루 밤을 묵은 후, 다음날 아침 일찍 동해 쪽을 바라보며 길을 나섰다. 고개를 넘는 일이 제법 힘겹기는 했지만, 어차피 수련을 겸하는 일이었기에 그리 큰 부담은 되지 않았다. 그렇게 다시 며칠 정도 산길을 걷고 나서야 준상은 바다가 보이는 해안의 작은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후우...” 그야말로 산 넘고 물 건너는 강행군이다 보니 제 아무리 준상이라도 피로가 쌓일 수밖에 없었다. 피서철이 지나서인지 어렵지 않게 민박을 잡은 준상은 그곳에서 잠시 머물면서 피로를 풀기로 했다. 민박집 아주머니는 혼자서 뭔 청승인가 싶은 표정으로 준상을 흘깃거렸다. 차를 타고 온 것도 아니고, 맨손으로 터덜 터덜 걸어오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자살이라도 하러 온건가 싶었던 모양이지만, 준상은 그러거나 말거나 일단 몸부터 대충 씻은 후 안내 받은 방으로 들어가 뜨끈한 아랫목에 몸을 뉘었다. 티비를 켜자 뉴스가 나온다. -다음 소식입니다. 대규모 실종 사건에 대한 사후 대책을 위한 특별법 제정의 실무 협상이 모레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XXX당 김종경 의원의 주도로 이루어지는 이번 실무 협상에서... 준상은 얼굴을 찌푸리며 티비를 껐다. 그렇게 귀찮게 하더니 이제는 티비에서까지 저 얼굴이 나오고 있었다. 특별법이니 뭐니 하는 것도 마찬가지. 실종 사건의 희생자와 귀환자를 위한다는 명분이기는 하지만 결국은 길드를 만들기 위한 사전 정지 작업에 불과하다. “아, 좋다...” 매서운 바닷바람에 굳었던 몸이 좌악 풀리는 느낌에 준상은 자신도 모르게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한참을 뒹굴거리던 준상은 문득 인벤토리에서 지금껏 모아온 시드들을 꺼내놓더니 그것을 하나씩 확인하며 분류하기 시작했다. 칭호 효과 때문에 시드 습득률이 대폭 늘어나기는 했지만, 상대하는 몬스터들의 레벨이 아직 낮은 탓인지 5퍼센트 이상의 효과를 지닌 시드는 얼마 되지 않았고, 그 미만인 경우가 많았다. 준상은 상태 이상을 유발하는 특별한 시드들을 따로 빼낸 뒤 거기서 다시 효과가 5퍼센트 미만인 시드들을 걸러냈다. 이제껏 사용하지 않았던 랜덤시드를 실행해 보기 위해서였다. “어디보자...” 개수를 세어보니 제법 걸러냈음에도 불구하고 무려 16개가 남았다. 그냥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좀 알이 굵은 해바라기 씨앗인가 싶은 형상이지만, 준상과 같은 사람에게는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귀중한 아이템. 하지만 고작 1~2% 짜리로 한정된 시드 슬롯을 채우는 것은 사실 낭비에 가까운 일이다. 준상은 시드 두 개를 집어낸 다음 랜덤 시드를 실행했다. 랜덤시드를 실행합니다. : ‘안티파이어(1%)’와 ‘안티프로즌(2%)’을 합성해 새로운 임의의 시드를 생성합니다. 정말로 랜덤시드를 실행하시겠습니까? (Y/n) _ 준상은 잠시 고민했다. 카드와는 달리 시드들은 다른 플레이어들과 교환이 가능하다. 자신이야 칭호 효과로 이렇게 시드가 넘치지만, 과연 다른 사람도 그럴까? 차라리 이 시드들을 다른 플레이어들에게 파는 건 어떨까. 하지만 준상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시드가 귀하다고는 해도 1~2% 짜리를 살만한 사람이 과연 누가 있을까 싶었고, 산다해도 가격 역시 그리 높지 않을 것 같았다. 물론 이런 정체불명의 물건에 대해 호기심을 가질 만한 과학자들에게 연구용으로 판매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해 설명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되면, 모르긴 해도 과학자들이 관심을 가지는 건 시드보다 준상의 신체 바로 그 자체가 될 가능성이 높다. 준상은 고개를 저어 잡념을 떨쳐 버리고 곧바로 랜덤시드를 실행했다. 그러자 휴대폰 위에 올려둔 시드 두 개가 밝은 빛을 뿜어내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하나로 합쳐져 하나의 새로운 시드로 바뀌었다. 준상은 바로 확인을 해보았다. “오!” 새로 만들어진 것은 3퍼센트짜리 스턴 시드였다. 수치 상으로 봐서는 대단치 않지만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 제대로 파악하기도 힘든 속성 저항과는 달리 이런 상태 이상을 유발하는 시드들은 단 1퍼센트라도 많이 갖추는 편이 유리하다. 얼마 전에 물리쳤던 습지 보스만 해도 고작 2퍼센트짜리 스턴 시드가 효과를 발휘한 덕분에 강타를 준비할 시간을 얻을 수 있지 않았던가. 준상은 계속해서 랜덤시드를 실행했고, 그 결과 스턴 시드 2개, 물리 저항 시드 1개, 화염 저항 7퍼센트 시드 1개, 이동 속도 시드 1개, 공격 속도 시드 1개를 얻었다. 16개를 합성한 것 치고는 상당히 훌륭한 성과인 셈이다. 기존에 장착되어 있던 시드들 역시 모두 분리한 뒤 카드의 성격에 맞게 재장착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었기 때문에 이것을 끝내자 어느새 저녁 시간이 다 되어 있었다. 밖으로 나와 식사를 한 뒤, 가만히 해안을 거닐었다. 하지만 아직 겨울이 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바닷바람이 상당히 매서웠기 때문에 낭만이나 정취를 느껴보기도 전에 다시 민박집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얼마 바람을 쐬지도 않았는데 벌써 소금기로 인해 옷과 피부가 끈적거린다. 다시 몸을 씻은 후 옷을 갈아입고 뜨끈한 아랫목에 누웠다. 배부르고 등이 따뜻하니 슬슬 잠이 오기 시작한다. 하지만 바로 그때, 휴대폰으로부터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했음을 알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쳇.” 혀를 차며 휴대폰을 열어본다. 아니나 다를까. 퀘스트가 도착했음을 알리는 메시지였다. 준상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켜 바깥에 벗어 두었던 군화를 신었다. 벗어둔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군화는 이미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대기시간을 보상으로 얻은 탓에 이전처럼 허겁지겁 신지 않아도 된다는 정도일까. 5분이라는 시간도 그리 넉넉하다고는 볼 수 없었지만, 10초에 비하면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다. 준상은 숙련된 동작으로 빠르게 군화를 신고 집 뒤의 인적이 드문 뒷골목으로 갔다. “음...” 휴대폰을 살펴보니 이렇게 느긋하게 움직였는데도 아직 15초나 남아 있었다. 예전 같으면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준상은 어둑해지는 하늘을 보며 전송을 기다렸다. 마침내 카운트 다운이 끝나자, 준상의 모습은 해안가의 어느 작은 마을에서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 준상은 자신의 몸을 감싸던 빛이 사라지자 주위를 돌아보다가 흠칫 놀랐다. 그도 그럴 것이... 바로 조금 떨어진 장소에서 너무나도 낯익은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검은 머리를 치렁치렁하게 기르고, 소복을 연상시키는 하얀 원피스를 입은 여인. 그녀의 이름은 바로, 서유미였다. 준상은 그녀의 모습을 확인하기가 무섭게 곧바로 눈앞에 드러나 있는 동굴로 뛰어 들었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앗! 주... 준상씨! 같이 가요!” 그 짧은 순간에 준상을 알아본 서유미가 뒤를 쫓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두 남녀가 동굴 속으로 자취를 감춘 후에야 비로소 또 다른 남자 두 명이 한줄기 빛과 함께 그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두 남자는 퀘스트를 확인하며 잠시 기다리다가 더 이상의 사람이 보이지 않자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기왕 두 명짜리 퀘스트라면 아리따운 아가씨와 함께였으면 더 좋았으리라 생각하면서. 하지만 그들은 몰랐다. 그들이 바라던 아리따운 아가씨는, 이미 눈앞의 동굴 속에서 식칼을 뽑아 든 채 장절한 추격전을 시작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 작품 후기 ============================ 인터넷 새로 깔았습니다. 00048 트롤러 ========================================================================= “서란 말이에요!” 준상은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흠칫 놀라며 얼른 카드를 열었다. “오픈 질주, 오픈 도깨비불.” 도깨비불로 주위를 밝히고 질주로 속도를 높였다. 하지만 준상이 속도를 높이자 기다렸다는 듯이 서유미의 입에서도 카드를 불러내는 말이 튀어나왔다. “나도, 오픈 질주!” “...” 서유미도 질주 카드를 가지고 있었단 말인가. 생각해 보면 서유미는 콤보 카드가 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좀비와 해골들을 무 썰듯이 썰어대던 여자다. 이후로 퀘스트를 한 번 더 수행했을테니, 지금쯤은 콤보 카드를 얻었을지도 모르는 상황.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준상의 눈앞에 갑자기 커다란 나무 둥치가 떨어져 내린다. 이것은 명백한 함정! 하지만 준상은 자신의 눈앞으로 떨어지는 어른 몸통보다도 더 큰 나무 둥치를 보고는 그대로 숄더 차지를 발동했다. 그러자 곧바로 준상의 몸이 주욱 번지듯 앞으로 쏘아져 나갔고, 나무 둥치는 그 뒤에서 바짝 쫓아오던 서유미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곧바로 피떡이 되어 날아가는 서유미의 모습을 상상했을 만큼 위험천만한 모습이었지만, “핫!” 한 줄기 기합 소리와 함께 그녀의 손이 휘둘러지며 무언가 번쩍이는가 싶더니 커다란 나무 둥치는 그대로 두 쪽으로 쪼개지며 튕겨나가고 말았다. 실로 놀라운 괴력! 아니, 괴력 이전에 식칼로 이런 신기를 보여줄 수 있다는 자체가 이미 인간의 범주를 넘어선 능력이었다. “칫!” 준상은 혀를 차며 달리다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구덩이를 보고 전력으로 그것을 뛰어넘었다. 여자가 뛰어넘기에는 제법 넓은 구덩이였지만, 이번에도 서유미는 원피스 자락을 두 손으로 잡고는 가뿐하게 그것을 뛰어 넘었다. “왜 도망치는 거에요!” “그러는 당신은 왜 쫓아오는 겁니까.” “도망치니까요!” “...” 준상은 너무나 당당한 그녀의 말에 잠시 말문을 잃었다. 그런 준상에게 이번에는 투창이 날아오기 시작한다. “흡!” 준상은 두 팔을 옆구리에 붙인 채 몸을 U자 형태로 흔드는 위빙과 무릎을 굽혀 자세를 낮추는 더킹을 구사해 날아오는 투창을 피했다. 하지만 서유미는 그런 거 없다. 그저 보이는 대로 썰어버릴 뿐. “...” 등 뒤에서 투창이 박살나는 굉음이 들리자 준상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퀘스트 확인해야 하는데... 안되면 최소한 미니맵이라도 봐야 하는데! 등 뒤에서 식칼을 들고 바짝 쫓아오는 서유미 때문에 그럴 틈이 없다. 차라리 때려눕히고 갈까 하는 생각을 떠올리는데, 갑자기 눈앞에서 마치 셔터처럼 바위 문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돼지!” 두꺼운 바위 문을 보고 준상은 급히 ‘저돌적인 멧돼지의 영혼’을 장착한 후, 몸을 낮추며 숄더 차지를 발동했다. 그러자 준상의 눈 앞에서 공기가 둘로 갈라지며 순식간에 바위 문과 격돌이 이루어졌고, 무투가와 저돌적인 멧돼지의 영혼으로 강화된 숄더 차지의 위력에 바위 문은 마치 폭탄이라도 맞은 것처럼 산산히 부서지고 말았다. “쳇!” 가장 좋은 것은 바위 문이 완전히 내려오기 전에 아래쪽으로 빠져 나오는 것이었지만, 그런 곡예를 보일 정도의 여유조차 주지 않고 바위 문이 내려오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부숴버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내려오는 바위문은 시작에 불과했다. 이번에는 좌우에서 서너 개의 바위 문이 동시에 미닫이 문처럼 밀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준상은 쿨타임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시 한 번 숄더 차지를 발동했다. 콰과광! 누가 봤으면 그냥 석고 조각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바위 문들은 너무나도 간단하게 박살이 나버렸다. “준상씨! 지금 나한테 돼지라고 한건가요?” “...” 준상이 앞에서 장애물들을 부수며 전진하는 통에 서유미는 오히려 느긋하게 그 뒤를 쫓을 수 있었다. 뭔가 이게 아닌 것 같다 싶기는 했지만, 그런 생각이 구체화되어 머리 속에 떠오르기도 전에 이번에는 해골 병사들이 방패와 칼을 들고 줄지어 나타나 길을 막는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준상은 물론이고 서유미의 발걸음도 늦추지 못한다. 쾅! 방패를 앞세우고 길을 가로 막던 해골 병사는 준상의 발길질 한 번에 망가진 장난감처럼 부서져 버렸고, 그나마 준상의 손이 닿지 않은 해골 병사 역시 뒤따라 달려오는 서유미의 식칼에 썰려 나갔다. 해골 병사들을 부수고 앞으로 달려 나가는 준상의 뒤쪽에서 서너 개의 창이 불쑥 튀어 나와 서유미의 앞을 가로 막았지만, 다시 한 번 그녀의 식칼이 번뜩이자 수수깡처럼 잘려 나가고 말았다. 이렇게 미친 듯한 속도로 던전 안을 폭주하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함정을 장치한 사람이 노린 것은 천천히 주위를 살피며 전진하는 사람이지, 이렇게 전부 무시하고 엄청난 속도로 질주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저 돼지 아니거든요?”” “...” “나 사실은 엄청 날씬하단 말이에요!” “...” 그래서 어쩌라는 거냐 싶었지만 그 생각을 입으로 내뱉기도 전에 다시 눈앞의 공간이 확 넓어지며 한 무리의 몬스터들이 길을 가로 막았다. 십여 구의 해골 병사들 사이에 왠 시커먼 이불보 같은 걸 뒤집어쓰고 제법 화려한 모양의 지팡이를 든 인물 하나가 서 있었다. “후후후... 여기까지 용케도... 헉!” 하지만 그는 끝까지 말을 마치지 못했다. 순식간에 달려 나오며 숄더 차지를 발동한 준상의 모습이 갑자기 눈앞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자, 잠... 꽥!” 눈앞을 가로 막는 해골 병사들을 볼링 핀처럼 날려 버리며 돌진한 준상은 곧바로 이불보 뒤집어 쓴 인물의 가슴에 숄더 차지를 명중시켰다. 원래 이 자는 이 던전의 중간 보스로서 해골 병사를 벽으로 삼아 뒤에서 마법을 날리는 패턴을 가지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이 중간 보스가 쏴대는 전격 마법에 제법 고생을 했어야겠지만, 아쉽게도 준상은 물론이고 그 뒤를 따르는 서유미조차도 정상이라든가 일반 같은 말과는 여러모로 거리가 있는 인물들이었다. 두꺼운 바위 벽도 단숨에 부숴버리는 숄더 차지에 가슴을 명중 당했지만, 그래도 나름 중간 보스라서 그런지 좀비나 해골 병사처럼 단숨에 박살이 나거나 하지는 않았다. 물론 그렇다 치더라도 가슴이 함몰되어 늑골이 부서지고 그 안의 내장이 피곤죽이 되는 건 피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크륵... 비, 비겁한... 말하고 있는데...” 하지만 중간 보스는 그 말조차 끝을 맺지 못했다. 숄더 차지의 반동으로 날아가 버린 중간 보스를 뒤쫓아 날아온 준상의 무릎이 그대로 고릴라를 닮은 중간 보스의 머리를 짓뭉개 버린 탓이다. 앞을 가로 막는 해골 병사들을 상대로 서유미가 식칼 쇼를 보이는 틈을 타 보스에게서 지팡이와 시드를 취한 준상은 급히 출구를 찾다가 약 오 미터 위 바위 벽에 뚫린 또 다른 동굴을 발견했다. “오픈 도약.” 질주 대신 도약을 슬롯에 장착한 준상은 벽에 튀어 나와 있는 바위들을 껑충 껑충 뛰어 올라 순식간에 출구로 올라갔다. “아앗! 기다려요!” 해골 병사들을 썰어버리느라 시간을 지체한 서유미가 손을 뻗으며 그렇게 외쳤지만, 준상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시 질주를 사용해 달려나갔다. “아이 참!” 서유미는 얼굴을 찌푸리더니 벽으로 다가가 식칼로 바위를 푹푹 찍어대며 위쪽 출구를 향해 기어오르기 시작한다. 바위 벽 덕분에 간신히 서유미와의 거리를 벌린 준상은 그제서야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퀘스트를 확인했다. 던전에 숨은 사악한 마법사를 처단하십시오. :수많은 사람을 해친 사악한 마법사가 던전을 만들고자 합니다. 마법 함정이 완성되기 전에 사악한 마법사를 처단하세요. [이 퀘스트는 여러 명의 인원이 동시에 참여합니다.] (Hidden) 키메라 마법사를 처단하십시오. (협력) ->완료! (Hidden) 쌍둥이 키메라를 처단하십시오. (협력) ->미완료. (Hidden) 숨겨진 고대 유물을 탐색하십시오. (단독) ->미완료. (Hidden) 중앙 통제실을 파괴하십시오. (단독) ->미완료. 아까 한 방에 나가떨어진 마법사가 실은 키메라였던 모양이다. 준상은 미니맵을 확인하면서 계속 함정을 부수며 앞으로 달려나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앞쪽에 붉은 색 느낌표가 반짝이는 것을 확인하고는 휴대폰을 닫았다. 안경 형태로 된 스마트 기기 같은 것도 요새 슬슬 나오던데, 그런 거라도 하나 사야 하나. 휴대폰을 사용하게 되면 한손이 묶여 버리기 때문에 아까처럼 급하게 싸우며 질주하는 중에는 사실상 사용이 거의 불가능하다. 안경은 좀 그렇고, 고글 모양으로 된 것이 있다면 좋을 텐데.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준상의 눈앞에 키메라 마법사가 있던 공간과 비슷한 곳이 나타났다. 안으로 들어가자 해골 병사에게 둘러싸인 두 명의 중간 보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 중간 보스들은 일전에 숲에서 쓰러뜨렸던 보스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다른 점이 있다면 거의 자신의 신장 만큼이나 되는 커다란 팔을 하나씩 달고 있다는 점이었다. 준상은 앞을 막아서는 해골 병사들을 숄더 차지로 밀어 버리고 곧바로 중간 보스에게 다가갔다. 중간 보스들은 준상이 자신들을 향해 쇄도하자 각자 거대한 팔을 망치처럼 휘두르며 공격을 해왔다. “...” 피할 곳조차 주지 않은 채 상하로 나누어 질러오는 두 개의 거대한 주먹을 보며 준상은 얼굴을 찌푸렸다. 카운터를 걸기에는 상대의 팔이 너무 길어서 거리를 잡기가 힘들고, 숄더 차지는 아직 쿨타임이 끝나지 않았다. 준상은 일단 뛰어올라 아래쪽의 펀치를 피하며 위쪽의 펀치를 주먹으로 후려쳤다. 콰앙! 그러자 강렬한 폭음과 함께 중간 보스와 준상이 뒤로 튕겨 나갔다. “음...” 광전사처럼 일반 공격까지 강화시켜 주지 않는 무투가 콤보라서 그런 걸까. 준상은 은근히 주먹에 통증마저 느끼고 있었다. 살펴보니 역시나 재생이 시작되어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중이다. 아무래도 두 명을 한꺼번에 상대하는 건 번거로운 일이라는 판단에 준상은 지금껏 소환하지 않고 있던 늑대들을 불러냈다. “울프팩.” 그의 입에서 명령어가 나오자, 세 마리 늑대가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쳐라!” 준상이 중간 보스 중 하나를 가리키며 공격을 명하자, 늑대들은 일제히 중간보스를 향해 뛰어올랐다. 중간 보스들은 갑자기 나타난 늑대들의 모습에 당황하며 함께 늑대들을 방어하려 했지만, 잠시 시야가 늑대들에게로 쏠린 틈을 타 준상이 오른쪽 중간 보스에게 달려들었다. 중간보스는 반사적으로 준상에게 주먹을 휘둘렀지만, 안쪽으로 파고든 준상은 거대한 주먹을 머리 위로 흘리며 카운터를 발동했다. 퍼억! 강렬한 훅이 턱 아래를 후려치며 지나가자, 그 충격에 뇌가 흔들린 중간 보스는 뇌진탕을 일으키며 비틀 비틀 뒤로 물러섰다. 물론, 그런 빈틈을 놓칠 만큼 준상은 어수룩하지 않았다. 곧바로 따라 붙으며 쿨타임이 끝난 숄더 차지를 발동한 것이다. 콰앙! 허우적거리던 중간 보스는 가슴을 파고드는 처절한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벽으로 날아가 부딪혔고, 곧바로 뒤를 쫓아 다가간 준상의 팔꿈치가 인중을 찍어 버리자 안면이 뭉개지며 그대로 절명하고 말았다. 일단 한 놈을 쓰러뜨리자 그 다음은 쉬웠다. 늑대에게 정신이 팔린 중간 보스의 뒤로 천천히 다가간 준상은 훌쩍 뛰어올라 팔꿈치로 뒤통수를 내리찍었다. 목과 머리를 잇는 부위를 정통으로 가격 당하자 중간 보스는 그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풀썩 무릎을 꿇고 말았다. 준상은 털썩 주저앉은 중간 보스의 등을 발로 차서 쓰러뜨린 후, 앞으로 고꾸라진 중간 보스의 목을 군화발로 세차게 밟아 부러뜨렸다. “후...” 잠시 숨을 고르며 중간 보스의 머리에서 시드를 찾아 획득하던 준상은 이 중간 보스의 시드가 보통의 것보다 더 크고 검다는 것을 그제서야 깨달았다. 이상하다 싶어 좀 더 자세히 살펴보려는데, 입구 쪽에서 문득 한줄기 외침이 들려왔다. “쫑아!” “...” 준상은 얼른 늑대들을 역소환한 뒤 아까와 마찬가지로 도약을 써서 얼른 출구로 나가 버렸다. “헉... 헉... 이씨... 또 놓쳤잖아.” 뒤늦게서야 중간 보스의 방에 도착한 서유미는 또다시 눈앞에 우뚝 솟아 있는 바위벽을 원망스럽게 바라보았지만, 결국 다시금 식칼로 벽을 푹푹 찍으며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서유미가 씨근덕거리며 바위 벽을 오르는 동안 준상은 또다시 몰아치는 함정과 격투를 벌이고 있었다. 날아드는 통나무를 부수고, 화살을 쳐 떨어뜨리며 전진하던 준상은 미니맵에 또다시 빨간색 느낌표가 반짝이는 것을 발견했다. 하지만, 뭔가 이상하다. 그 표시는 통로와는 거리가 떨어진 바위 속에서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 고민하던 준상은 가장 간단한 방법을 사용하기로 했다. “후읍...” 강타를 발동한 것이다. 곧바로 1초가 지나고, 2초를 넘어, 3초가 되자 준상은 길 옆의 바위 벽에 대고 풀 차지의 강타를 터뜨렸다. 콰과광! 그 격렬한 파괴력에 동굴은 마치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렸고, 모처럼 바위 벽을 거의 다 올라갔던 서유미 역시 그대로 주르륵 미끄러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으... 아파.” 서유미는 울상이 되어 바위에 스쳐 피가 배어나오는 무릎을 어루만졌다. 하지만 그녀가 손을 뻗어 무릎을 감싸자 그곳으로부터 은은한 빛이 흘러나와 무릎의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한다. 바로 회복 마법이었다. “치... 쫑이 한 번 보기가 이렇게 어려워서야.” 서유미는 상처를 치료하자 다시금 벽에 식칼을 푹푹 꽂으며 기어오르기 시작한다. 그 즈음 준상은 부서진 바위벽 속에서 고대의 유물이 숨겨진 방을 발견했다. “이건가.” 작은 상자를 손으로 들어 올리자 원래의 숨겨진 입구가 쾅쾅거리며 닫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물론 그래봐야 벽을 부수고 들어온 준상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지만 말이다. 준상은 퀘스트가 갱신된 것을 확인한 후 상자를 인벤토리에 넣고 다시 마지막 남은 히든 퀘스트를 찾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준상이 벽을 부수는 소리는 이제 막 입구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서던 두 남자에게도 들렸다. “웃!” “헛!” 갑자기 동굴이 우릉거리며 흔들리자 두 남자는 기겁해서 얼른 벽으로 붙었다가 떨어진다. “이거... 괜찮은 건지 모르겠네요.” “그러게요. 사람 불안하게...” 두 남자는 혹시 동굴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한층 더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00049 트롤러 ========================================================================= 준상은 그 즈음, 곧바로 중앙 통제실을 들이치고 있었다. 붉은 색 느낌표가 있는 곳으로 곧장 달려 들어간 준상은 그곳에서 마법진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수정 기둥을 발견하자 곧장 숄더 차지로 들이 받았다. 일꾼으로 보이는 해골 들이 필사적으로 준상의 앞을 가로 막았지만, 무기 조차 지니지 않은 해골 일꾼들은 준상에게는 수수깡 인형에 불과했다. 콰광! 전력으로 수정 기둥을 들이 받았지만, 수정 기둥은 간단하게 파괴되지 않았다. 대신 주위를 돌며 깜빡이던 마법진 몇 개가 소멸한 것이 고작이다. “음...” 하지만 도망도 못 가는 무생물에 딱히 자기 보호를 위한 별도의 설비조차 갖추지 못한 대상에게 시간을 끌 이유가 없다. 준상은 곧바로 강타를 발동했다. 그리고 3초의 시간에 걸쳐 풀 차지를 건 다음, 곧바로 수정 기둥을 향해 모아진 힘을 뿜어냈다. 꽈광! 숄더 차지까지 막아낸 마법진이었지만, 무투가 콤보로 강화된 풀 차지까지 버텨내기엔 무리였고, 봄 눈 녹듯이 마법진이 소멸되며 강타의 폭발적인 힘에 수정 기둥이 그대로 노출되었다. 콰지직! 결국 수정 기둥은 단숨에 균열이 일어나는가 싶더니, 콰창! 깨진 얼음 조각처럼 사방으로 비산하며 박살이 나버렸다. “후욱... 후욱...” 연속으로 두 번이나 풀 차지를 사용한 탓에 준상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일단 과부하가 걸린 몸부터 회복해야만 했다. 그리고 마침내 온 몸에서 뿜어지던 새하얀 연기 같은 아지랑이가 사그라 들자 그제서야 호흡을 가다듬으며 퀘스트를 확인했다. 마지막 히든 퀘스트까지 모두 달성했음을 확인한 준상은 주위의 부서진 바위 조각들은 인벤토리에 끌어 담은 후 최후의 보스인 사악한 마법사가 기다리고 있는 마지막 구역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통제실을 빠져 나와 커다란 광장 같은 홀 안에 진입하자 수십의 해골 병사에 둘러싸인 채 시커먼 이불보를 뒤집어 쓴 인물이 서 있었다. 준상이 나타나자 보스는 곧바로 하늘로 떠오르며 웃어댔다. “음하하하하! 여기가지 용케도 왔구나! 하지만 네 행운도 이제 마지막이다!” “쯧...” 준상은 가볍게 혀를 찼다. 저렇게 공중으로 떠오르면 근거리 격투를 기본으로 하는 준상의 전투 스타일로는 아무래도 공격을 가하기가 쉽지 않은 탓이다. 하지만 상대가 마법사라는 정보를 입수한 시점에서 이 정도 상황은 준상 역시 예상하고 있었다. “울프팩.” 준상은 늑대들을 일제히 불러낸 후 그들에게 달려드는 해골 병사를 맡겼다. 그리고 자신은 인벤토리에 담아두었던 바위 조각을 꺼내어 수북하게 쌓아 올린 후 여전히 하늘에서 바람 빠진 소리로 웃고 있는 보스를 바라보았다. “광전사.” 그의 입에서 명령어가 나오자 기존에 장착되어 있던 무투가 콤보가 빠지고 광전사 콤보가 장착된다. 광폭, 피칠갑(UC), 피칠갑(R), 피칠갑(SR). 이렇게 네 장이 모여 ‘얀트훈센의 광전사’ 완성! 준상은 광전사 콤보가 완성되자 다시 말했다. “오픈 투석.” 그러자 광전사 콤보의 기본 공격 스킬이었던 2연격이 빠지고 그 자리에 투석이 자리잡는다. 모든 준비가 마쳐지자 준상은 옆에 쌓아올린 바위 덩어리를 집어든 후, 보스를 향해 투석 스킬을 발동했다. “음하하... 핫! 켁켁!” 보스는 자신을 향해 돌멩이를 던지는 준상의 모습을 보고 가소롭다는 듯이 웃다가, 그 돌멩이가 빛살과도 같은 속도로 날아와 자신의 몸 주위에 두른 방어막을 때리자 당황한 나머지 사레가 들려버리고 말았다. “이, 이건?” 보스는 당황했다. 고작 돌팔매질 한 방에 자신의 몸 주위에 둘러져 있던 방어막의 힘이 절반에 가깝게 소모되었기 때문이다. 더욱 당황스러운 것은... 그 무시무시한 돌팔매질이 계속해서 날아오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히익!” 방어막을 사용하고 있는 중에는 마법사 자신도 공격 마법을 사용할 수가 없다. 아니, 정확히는 마법을 사용해도 자신의 방어막에 가로막혀 무용지물이 되버리고 만다. 그래서 공중으로 몸을 띄우고 해골 병사들을 풀어 놓으며 상황을 살피고자 했던 것인데, 눈앞의 침입자는 그런 자신을 오히려 궁지에 몰아 넣고 있었다. 얼른 몸을 피하자 마법사를 지나간 바위 덩어리가 반원형의 천장에 맞아 굉음을 내며 박살이 났다. 어찌나 위력이 엄청난지 천장이 흔들리며 돌가루가 우수수 흘러내릴 정도다. “쯧.” 준상은 혀를 차며 다시금 바위 조각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한쪽 발을 높이 들어 올리며 와인드 업 모션을 취하며 있는 힘껏 보스를 향해 투석 스킬을 사용했다. 콰아아아! 하지만 투석 스킬을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공기를 찢으며 날아간 돌멩이는 준상이 노렸던 지점과는 조금 떨어진 곳을 향해 날아갔고, 이번에도 천장에 부딪히며 박살이 났다. 콰광! 균열을 일으키며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이 흔들리는 천장의 모습에 보스는 기겁을 하며 외칠 수밖에 없었다. “이 미친 놈! 전부 무너뜨릴 생각이냐!” “...” 아무리 미친개에 미친 전사까지 쌍으로 미친 콤보를 사용하고 있는 준상이었지만, 이렇게 면전에서 미쳤다는 말을 들으면 살짝 화가 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대답해 주었다. 방금 전보다 더 큰 돌멩이를 더 강하게 집어 던지는 것으로! 이번에는 컨트롤이 좀 먹혔는지, 정확하게 보스를 향해 날아갔다. “허억!” 보스는 급히 몸을 피하려 했지만, 엄청난 속도로 날아온 돌멩이는 그대로 보스의 방어막에 직격했다. 꽈광! 그러자 이미 한 번 직격당해 균열을 일으키고 있던 방어막이 그대로 깨져버리고 말았다. “컥” 타의에 의해 마법이 깨지자 그 반동이 마법사에게로 돌아와 타격을 입혔고, 내상을 입은 마법사는 가슴을 손으로 감싸며 통증을 억눌렀다. “이, 이... 놈이 감히!” 방어막이 깨진 이상 더는 공격 마법을 아낄 필요가 없다. 화가 난 마법사는 자신의 특기인 전격 마법을 준상을 향해 뿌려 댔다. “음!” 준상은 마법사의 손에서 강렬한 전격 마법이 뿜어져 나오자 얼른 몸을 옆으로 굴려 그것을 피한 후 다시 돌멩이를 던졌다. 하지만 이번에 던진 돌멩이는 자세가 나빴던 탓에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가 다시 천장을 때렸다. “어림없다!” 준상의 돌멩이가 형편없이 빗나가자 마법사는 득의양양한 모습으로 외치며 양손으로 전격 마법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빠지직! 빠직! 금새 주위의 공간은 오존 냄새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오존은 폐에 해롭고 호흡기 전반에 악영향을 주며 장시간 흡입하면 사망에 이를 수 있는 유해한 가스다. 준상은 얼굴을 찌푸린 채 계속해서 돌멩이를 던졌다. 하지만 문자 그대로 빗살처럼 내리치는 번개를 피하며 돌멩이를 정확하게 보스에게 명중시키는 건 지금의 준상으로서는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크크크! 죽어라!” 준상의 반격이 계속해서 엉뚱한 방향으로 빗나가자 마법사는 진작에 이럴 걸 잘못했다 생각하며 계속해서 전격 마법을 무차별 난사했다. 그러자 이제는 준상은 물론이고 해골 병사와 늑대들 마저 떨어지는 번개를 피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칫...” 준상은 이를 악물고 계속해서 투석을 실행했다. 얼핏 보면 무의미한 행동처럼 보일 정도였지만, 이윽고 그 노력이 하늘을 감동시켰다. 아니, 정확히는 천장을 진동시켰다! “응?” 보스는 갑자기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는 돌가루의 양이 많아지자 엉겁결에 고개를 들었다. 그런 보스의 눈에, 계속된 투석으로 인해 무너져 내린 거대한 바위 덩어리의 모습이 비쳤다. “어?” 거대한 트럭이 돌진할 때, 사람은 뻔히 그것을 보고서도 피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지금의 보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신을 향해 떨어져 내리는 집채만한 바위를 보는 순간 그의 이성은 정지해 버렸고, 아차 싶었을 때는 이미 바위가 그의 몸을 짓누르며 내려 꽂히고 있었다. 콰과광! “...” 그리고 소환자인 마법사가 사망하자 그에 의해 움직이고 있던 해골 병사들은 잡동사니처럼 부서져 쓰러졌다. 준상은 바위가 무너져 내리고 그 밑에 보스가 깔리는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휴대폰에서 메시지가 도착했음을 알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자 급히 부서진 바위 조각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전과는 달리 준상에게는 대기 시간으로 5분의 시간이 주어져 있다는 점이다. 그대신, 던전 입구에 들어서고 있던 두 남자가 먼저 영문도 모른 채 퀘스트 완료를 알리는 메시지를 받았다. 던전에 숨은 사악한 마법사를 처단하십시오. :수많은 사람을 해친 사악한 마법사가 던전을 만들고자 합니다. 마법 함정이 완성되기 전에 사악한 마법사를 처단하세요. [이 퀘스트는 여러 명의 인원이 동시에 참여합니다.] -> 완료! - 당신이 이번 퀘스트에서 보여준 행동과 성과를 정산합니다. 이 과정은 약간의 시간이 소요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엥?” 두 남자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는 사이에도 메시지는 어김없이 이어졌다. 축하합니다! : 당신의 랭크는 F입니다. -당신은 이번 퀘스트의 달성에 대해 손톱만큼의 기여도 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식이면 곤란합니다. 좀 더 분발해 주세요. 보상 : 없음. 두 남자는 절규했다. “이게 뭔 소리야!” 하지만, 퀘스트 완료 메시지는 그 뒤로도 어김없이 이어졌고 두 남자는 뭘 해볼 틈도 없이 본래 그들이 있던 장소로 전송되었다. 절규하고 있는 것은 그들 만이 아니었다. “쫑아!” 그나마 서유미는 해골 병사 몇을 처치하고 함정을 부순 것이 참작되었는지 F가 되는 신세는 면했지만, 그래봐야 E 랭크에 불과했다. “...” 준상은 입구쪽에서 들려오는 서유미의 목소리를 무시한 채 작업을 계속했다. 서둘러 바위조각을 치우고 그 안에서 보스의 납작하게 눌린 시체를 발견한 준상은 급히 머리 속에서 시드를 찾아 챙기고 이어서 보스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반지 두 개 역시 습득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이 끝나자 그제서야 준상 역시 전송이 시작되었다. 온 몸을 감싸던 빛이 사라지자, 준상은 자신이 떠나왔던 민박집 뒷골목에 도착했음을 깨달았다. “후...” 돌가루에 오존 냄새에... 모처럼 깨끗이 씻은 몸이 단숨에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준상은 다시 민박집으로 돌아가 몸부터 깨끗이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제서야 이번에 얻은 성과들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던전에 숨은 사악한 마법사를 처단하십시오. :수많은 사람을 해친 사악한 마법사가 던전을 만들고자 합니다. 마법 함정이 완성되기 전에 사악한 마법사를 처단하세요. [이 퀘스트는 여러 명의 인원이 동시에 참여합니다.] ->완료! (Hidden) 키메라 마법사를 처단하십시오. (협력) ->완료! (Hidden) 쌍둥이 키메라를 처단하십시오. (협력) ->완료! (Hidden) 숨겨진 고대 유물을 탐색하십시오. (단독) ->완료! (Hidden) 중앙 통제실을 파괴하십시오. (단독) ->완료! - 당신이 이번 퀘스트에서 보여준 행동과 성과를 정산합니다. 이 과정은 약간의 시간이 소요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메인 퀘스트 외에 네 개의 히든 퀘스트 모두 성공적으로 완수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축하합니다! : 당신의 랭크는 SSS입니다. -당신은 이번 퀘스트의 목표를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완벽하게 수행했습니다. 기본 보상 외에 추가 보상이 지급됩니다. 보상 : 경험치 많이, 추가 보상 상자(협력)x2, 추가 보상 상자(단독)x2, 추가 보상 상자(SSS랭크) -> 보상을 지금 수령하시겠습니까? (Y/n) _ (주의) 수령하지 않은 보상은 7일후 자동 소거됩니다. 그리고 보상을 수령하자, 또다시 레벨 업의 하얀 빛이 준상의 몸을 감싸며 휘몰아쳤다. 00050 트롤러 ========================================================================= “후우...” 휘황찬란하지는 않지만 은은하게 온 몸을 덥혀주는 느낌의 흰 빛이 머물렀다 사라지자, 준상은 조금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한 채 보상을 확인했다. 벼랑에서 정신을 차리고 그 악몽 같던 튜토리얼을 시작했던 일이 어제 같은데, 벌써 16레벨이다. 준상은 우선 협력 퀘스트의 보상 상자부터 확인했다. 축하합니다! 스킬카드 ‘피칠갑(R)’을 획득했습니다. :스킬카드는 카드 슬롯에 장착하여 그 능력을 사용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이 카드는 이미 소유한 카드입니다. 재시도를 하시겠습니까? (Y/n) _ [카드 상세 정보 확인은 이곳을 누르십시오.] “음...” 레어는 레어인데... 이미 있는 레어라 뭔가 좀 난감하다. 하지만 그냥 재시도를 하기에는, 모처럼 나온 레어 카드를 버리는 것 같아서 좀 아까운 기분이 든다. 지금은 불가능하지만 나중에라도 카드 거래 같은 것이 가능해질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준상은 잠시 고민하다가 일단 보관해 두기로 하고 다음 상자를 열었다. 카드정보 명칭 : 철면피 레벨 : 1Lv 경험치 : 0 등급 : Uncommon 분류 : 스킬 성장 : 일반(중) 속성 : 없음 효과 : 1. 정신 공격에 대한 내성 20% 증가 2. 도발, 매도 등의 행위에 대해 완전 면역. Cost : 15 Seed : 2슬롯 이번에도 스킬이 나오긴 했는데... 뭔가 이름부터가 미묘하다. 정신 공격에 대한 내성 증가는 그럭저럭 쓸만하다지만, 도발과 매도에 대해 완전 면역이라니... 마치 욕먹을 것을 전제한 스킬 같지 않은가. “쩝...” 준상은 입맛을 다시며 이번에는 단독 퀘스트의 보상 상자를 열었다. 카드정보 명칭 : 산들바람 레벨 : 1Lv 경험치 : 0 등급 : Uncommon 분류 : 소환 성장 : 일반(중) 속성 : 바람 효과 : 바람의 정령 1개체를 소환합니다. Cost : 15 Seed : 2슬롯 “산들바람?” 오늘은 여러모로 카드가 풍년인 듯 싶다. 준상은 도깨비불 대신 산들바람을 장착한 후 소환을 실행해 보았다. “오픈 산들바람.” 그러자 방 안의 공기가 흔들리며 움직이기 시작한다. 대충 선풍기 바람으로 비교하자면 미풍보다는 강한 약풍 정도의 느낌이랄까. 하지만 이걸 가지고 흔히 소설 같은 곳에 나오는 바람의 칼날 같은 걸 만들기에는 아무래도 힘이 부족한 느낌이다. 일전에 습지에서 봤던 독 안개 같은 것을 밀어낸다든가, 눈에 띄지 않으니 주위에 풀어 놓고 은밀하게 경보를 발하는 정도가 당장 떠오르는 전부다. 도깨비불이 나오고 다음에 산들바람이 나왔으니, 이것도 모으면 늑대들처럼 콤보가 생기지 않을까 싶지만 당장은 아직 큰 활용을 기대하기는 힘들 것 같다. 준상은 마지막 남은 단독 퀘스트 보상 상자를 열었다. 축하합니다! 스킬카드 ‘피칠갑’을 획득했습니다. :스킬카드는 카드 슬롯에 장착하여 그 능력을 사용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이 카드는 이미 소유한 카드입니다. 재시도를 하시겠습니까? (Y/n) _ [카드 상세 정보 확인은 이곳을 누르십시오.] “...” 다른 카드라면 중복을 통한 콤보 가능성이 있기에 일단 놔두겠지만, 커먼 등급의 피칠갑이라면 망설일 필요조차 없다. 곧바로 Y를 눌러 재시도를 실행하자, 새로운 카드가 나타났다. 축하합니다! 특수카드 ‘안목’을 획득했습니다. :특수카드를 획득하면 봉인된 특수기능을 해제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특수기능 ‘안목’이 개방됩니다. -안목은 가치가 있는 물건을 빠르게 알아보는 능력입니다. -당신의 안목 레벨은 1입니다. 준상은 시험 삼아 인벤토리에 보관하고 있던 이번 퀘스트에서 습득한 물품 들을 방 안에 늘어놓았다. 그러자 시드나 지팡이 같은 물품들이 은은한 빛을 뿜어내기 시작한다. 특이한 점이라면 지팡이나 보통의 시드들과는 달리 중간 보스와 보스들에게서 나온 크고 검은 시드들은 검은 색 빛을 뿜어내고 있다는 점이다. “괜찮군.” 이런 식으로만 표시 되어도 이번처럼 빠르게 퀘스트를 진행할 때는 큰 도움이 된다. 몬스터의 머리 속에 들어있는 시드도 표시가 되는지는 모르지만, 만약 그것마저 가능하다면 일일이 시체들의 머리를 부셔서 확인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단독 퀘스트와 협력 퀘스트의 추가 보상 상자를 모두 연 준상은 이제 마지막 남은 트리플 S급 추가 보상 상자를 열었다. 이번에도 역시나 무언가가 후두둑 쏟아져 나온다. 카드정보 명칭 : 광폭 레벨 : 1Lv 경험치 : 0 등급 : Rare 분류 : 스킬 성장 : 일반(대) 속성 : 없음 효과 : 향상된 광폭 상태를 활성화합니다. Cost : 20 Seed : 3슬롯 “오...” 피칠갑을 제외하고는 첫 번째 레어 카드가 나온 셈이다. 준상은 일단 향상된 광폭 상태에 대한 내용을 확인해 보았다. 향상된 광폭 : 자신의 피 속에 흐르는 맹목적인 파괴 본능을 불러 일으킵니다. -기본지속시간 : 1분 -공격력 상승 60%, 갑옷 효과 감소 40% -모든 종류의 피해량 10퍼센트 감소. 공격력은 상승하고 패널티는 줄었다. 여기에 추가로 모든 종류에 대한 피해량 10퍼센트 감소가 붙어 있다. 이것은 어떤 공격이든 간에 100의 피해를 입을 만한 공격을 받았을 경우 그 피해를 무조건 90으로 낮춰준다는 의미이다. 대단치 않은 효과라고 생각될 수도 있지만, 이 얼마 안되는 양 때문에 즉사하느냐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느냐의 갈림길에 설 수도 있는 법이다. 어떻게든 즉사만 면한다면, 재생력이든, 생명력 흡수든, 힐링 포션이든... 회복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흡족한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이는데, 문득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했다. 축하합니다! :콤보카드를 조합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현재 조합 가능한 콤보 카드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얀트훈센의 블러드로드 [상세 확인] -콤보 카드 조합을 원하시면 해당 번호를 누르시고, 만약 조합을 원치 않으신다면 n을 누르세요(1/n) _ “음?” 콤보 카드의 이름이 왠지 낯익다. 그러고 보니 광전사 콤보의 본래 이름이 ‘얀트훈센의 광전사’ 였던가? 준상은 얼른 상세 정보를 확인해 보았다. 얀트훈센의 블러드로드 -북방의 광전사들은 죽음을 불사한 맹목적인 공격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과시합니다. 블러드로드는 이러한 광전사들이 추앙하는 강력한 대전사입니다. [조합상세] 광폭, 피칠갑, 피칠갑, 피칠갑 (네 가지 모두 레어 등급 이상) -효과: 1. 추가 공격력 150퍼센트 증가. 추가 공포 유발 확률 40% 증가 2. 장착중인 모든 갑옷 해제. 3. 모든 물리 공격 스킬의 쿨타임 60퍼센트 감소. 4. 피나 체액을 뒤집어 쓸 경우 재생률 10퍼센트 증가. “이건...” 만약 처음에 피칠갑(R)이 나왔을 때 재시도를 했었다면 이 콤보는 얻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하며 준상은 효과를 자세히 확인했다. 추가 공격력과 공포 유발 확률이 증가하고 스킬 쿨타임이 더욱 감소하며, 여기에 피나 체액을 뒤집어 쓸 경우 재생률이 추가로 증가한다. 그야말로 피의 군주라는 말이 어울리는 콤보 카드. 준상은 묵묵히 새로운 콤보 카드의 조합을 실행했다. 그러자, 역시나 또다른 메시지가 도착했다. 축하합니다! :당신은 처음으로 ‘얀트훈센의 블러드로드’ 조합에 성공했습니다! -당신의 위업을 찬양하며 ‘최초의 블러드로드’ 칭호를 부여합니다. [칭호 상세 정보 확인은 이곳을 누르십시오.] 준상은 바로 칭호 효과를 확인했다. [최초의 블러드로드] :블러드로드 조합을 최초로 성공한 자에게 부여되는 칭호. -효과: 추가 재생률 10퍼센트 증가 -칭호는 획득시 자동으로 효과가 적용됩니다. “오...” 준상은 고개를 끄덕여 만족감을 표시했다. 피칠갑(SR)의 재생률 15퍼센트에, 재생률 7퍼센트와 5퍼센트의 시드를 더하고 마지막으로 칭호 효과까지 추가하자 기본 재생률만 37퍼센트에 육박한다. 여기에 피나 체액을 뒤집어 쓸 경우 추가로 10퍼센트의 재생률이 추가되므로, 총 재생률은 47퍼센트나 되는 셈이다. 준상은 이어서 SSS급 보상 상자에서 나온 두 번째 보상을 확인했다. 축하합니다! 특수카드 ‘통찰’을 획득했습니다. :특수카드를 획득하면 봉인된 특수기능을 해제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특수기능 ‘통찰’이 개방됩니다. -통찰은 상대의 능력을 빠르게 알아보는 능력입니다. -당신의 통찰 레벨은 1입니다. “좋군.” 이것도 괜찮은 보상이다. 상대의 능력을 빠르게 알아볼 수 있는 능력은 특히나 만수무강에 도움이 된다. 지금까지는 적이 얼마나 강한지 확인해 보려면 직접 부딪혀 보는 수밖에 없었는데, 이것은 사실 굉장히 위험한 일이었다. 이런 저런 추가 보상으로 강해진 준상이 아니었다면, 목숨이 몇 개 있어도 부족했을 것이다. 준상은 이제 마지막으로 랜덤 카드를 열었다. 축하합니다! 스킬카드 ‘물어뜯기’를 획득했습니다. “스킬카드는 카드 슬롯에 장착하여 그 능력을 사용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이 카드는 이미 소유한 카드입니다. 재시도를 하시겠습니까? (Y/n) _ [카드 상세 정보 확인은 이곳을 누르십시오.] “쯧...” 물어뜯기 역시 이미 여분으로 한 장 더 가지고 있는 카드였기에 준상은 바로 재시도를 눌렀다. 카드정보 명칭 : 은신 레벨 : 1Lv 경험치 : 0 등급 : Common 분류 : 스킬 성장 : 조숙(소) 속성 : 없음 효과 : 적의 시선을 피해 몸을 숨깁니다. (실행시 이동불가) Cost : 10 Seed : 1슬롯 “...” 귀찮은 적을 피할 때라든가 기습 전에 사용하면 그럭저럭 쓸모가 있을 것 같은 스킬이다. 준상은 모든 보상을 확인하고 나자 이제 아이템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보스로부터 얻은 반지였는데, 이들은 모두 시드 슬롯이 하나씩 달린 생명력 증가 5퍼센트짜리 반지였다. “반지가 너무 많은걸.” 금반지만도 벌써 네 개째고, 여기에 구리 반지와 묘안석 반지까지 더해져서 벌써 반지만도 여섯 개째라 뭔가 좀 번거로운 느낌이다. 준상은 한 손에 세 개씩 반지를 나누어 낀 다음 이번에는 지팡이를 확인했다. 아이템정보 명칭 : 전격의 지팡이 레벨제한 : 10 종류 : 무기 등급 : Uncommon 공격력 : 4-13 효과 : 전격 마법 사용시 쿨타임 10퍼센트 감소 Seed : 2슬롯 설명 : 키메라 마법사가 사용하던 지팡이 전격 마법의 쿨타임을 감소시키는 능력은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편이지만, 마법을 쓸 줄 모르는 준상에게는 그저 그림의 떡일 뿐이다. 인벤토리에서 캐비닛을 꺼내어 지팡이를 보관한 준상은 이제 보스와 중간 보스들에게서 얻은 시드들을 확인했다. 보통의 것보다 크고 검은 시드를 휴대폰 위에 올리고 아이템 확인을 실행하자 곧바로 정보가 출력되었다. 아이템정보 명칭 : 다크 시드 레벨제한 : 불명 종류 : 시드 등급 : 불명 효과 : 불명 설명 : 키메라 마법사의 몸에서 나온 시드입니다. “음?” 시드임에도 불구하고 장착이나 분리에 대한 설명이 없는데다 레벨제한이나 등급, 효과가 모조리 불명이다. 이전에는 없던 일이라 이상하게 여기고 있는데, 아이템 정보 위로 경고 창이 뜬다. [경고!] 이것은 사악한 방법으로 제련된 어둠의 씨앗입니다. 이 시드를 사용하는 자는 엄중한 제재의 대상이 됩니다. 10초후 소유하고 있는 모든 다크 시드가 자동으로 회수됩니다. [남은 시간: 10초] “이건...” 준상은 이 다크 시드라는 물건이 뭔가 심상치 않은 물건임을 깨달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다짜고짜 회수할 리가 없지 않은가. 혹시나 해서 급히 다크 시드 네 개를 주머니에 넣어 전리품을 보관한 캐비닛에 넣은 후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하지만 10초가 지난 후 꺼내보자 주머니는 텅텅 비어버린 상태였다. “흠...” 준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처음부터 다크 시드의 회수가 목적이었다면, 퀘스트에 명시되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퀘스트에서는 아무 소리가 없다가 아이템 확인을 실행하자 갑자기 경고와 함께 회수되어 버렸다. 차라리 이럴 바에야 획득했을 때 회수하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여러 가지 의문이 떠오르기는 했지만, 지금으로서는 달리 내막을 알 도리가 없다. 궁금한 건 둘째 치고 보상을 도둑맞은 듯한 느낌까지 든다. “쯧...” 준상은 혀를 차며 이번에는 던전에서 얻었던 작은 상자를 꺼내 보았다. 고리 모양의 걸쇠를 벗기고 상자를 열자 그 안에서 은으로 상감된 것으로 보이는 금팔찌 하나가 나왔다. “...” 설마 이것도 다크 시드 마냥 강제로 회수되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확인을 해보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일단 아이템 확인을 실행해 보았다. 아이템정보 명칭 : 휴대용 마법 인터페이스 레벨제한 : 10 종류 : 팔찌 등급 : Rare 효과 : 퀘스트 보조. Seed : 없음 설명 : 기존에 휴대폰으로 전달되던 메시지와 정보를 사용자의 신체에 직접 연동하여 확인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마법 기기입니다. “이건...” 이번처럼 퀘스트를 빠르게 해결하려 할 경우 휴대폰으로 정보나 메시지를 확인하는 것은 상당히 번거로운 일이라, 그렇지 않아도 휴대폰과 연결되는 고글 같은 스마트 기기를 알아보려던 참이었다. 준상은 팔찌를 손목에 차보았다. 상당히 헐거운 느낌이라 이게 오히려 더 번거롭지 않을까 싶었지만, 팔찌는 가볍게 진동하더니 크기가 줄어들면서 손목에 착 하고 감겨 움직이지 않는가 싶었지만 이내 모습마저 희미하게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 그리고, 팔찌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짐과 동시에, 준상의 시야에는 마치 게임 화면을 보는 듯한 여러 가지 인터페이스가 나타났다. 우측 상단에는 미니맵이 자리잡고 있었으며, 하단에는 현재 장착 중인 카드 슬롯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었다. 또한 카드 슬롯의 좌우로는 현재 사용가능한 특수 기능들이 줄을 지어 나열 되어 있었다. 홀린 듯이 눈앞에 나타난 영상을 바라보고 있는데 문득 투명한 메시지가 좌측 시야에 나타났다. 축하합니다! :휴대용 마법 인터페이스가 성공적으로 설치되었습니다. 만약 이 인터페이스의 사용을 원치 않으신다면, 하단의 설정 메뉴에서 설치 해제를 선택하시면 됩니다. 인터페이스의 조작은 모두 생각만으로 가능하며, 전투시가 아닐 경우 인터페이스를 자동으로 숨기는 것도 가능합니다. 자동 숨김 기능을 사용하시겠습니까 (Y/n) _ 준상이 생각으로 Y를 선택하자, 곧바로 시야에 드러나 있던 인터페이스들이 시야에서 사라진다. 홀린 듯이 눈앞에 나타난 인터페이스를 시험해 보던 준상은 문득 휴대폰을 열어보았다. 하지만 이미 그 역할을 다한 탓인지 휴대폰에서는 더 이상 퀘스트나 카드에 관한 내용을 찾아볼 수 없었다. 준상은 잠시 생각하다가 휴대폰을 끈 다음 전리품을 담은 캐비닛에 넣었다. 모든 전리품과 보상에 대한 확인이 끝나자, 준상은 캐비닛을 인벤토리에 집어 넣고 휴식을 취했다. 지금까지의 전례로 봐서 당분간은 퀘스트가 없으리란 생각에 조금은 홀가분한 마음까지 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민박집을 나선 준상은 해안 도로를 따라 천천히 남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바다는 구름이 낮게 깔려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고, 소금기를 잔뜩 머금은 세찬 바람은 금새 몸을 끈적끈적하게 만들어 버린다. 아무리 봐도 낭만이라고는 쥐뿔도 보이지 않는, 조금은 처량한 발걸음. 그냥 차를 타고 움직이는 것이 나을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문득 준상의 눈에 이상한 것이 보였다. “...” 바닷가를 따라 한 쌍의 남녀가 걷고 있었다. 뭐가 좋다고 이 추운 바람 맞으며 바닷가를 거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지만, 사실 여기까지는 별로 이상할 것이 없었다. 이상한 것은, 저 두 사람 가운데 남자 쪽의 머리에서 희미한 검은 빛이 흘러나오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 뭔가 잘못 봤나 싶어 준상은 눈을 비볐다. 덕분에 짠 소금기가 눈에 들어가 눈물이 찔끔 나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준상의 눈에 보이는 그 기묘한 모습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이건 도대체...” 그것은 마치, 안목의 능력으로 다크 시드를 바라보았을 때의 느낌과 흡사했다. 하지만 이곳은 퀘스트가 실행되는 장소가 아닌 현실 세계.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던 준상은 갑자기 눈앞에 인터페이스가 화악 떠오르며 좌측 시야에 메시지가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이런 메시지였다. [당신은 특수 임무 발동 조건을 만족하고 있습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하지만 그 의문을 해결하기도 전에, 뒤이어 새로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다크 시드를 회수하십시오. :이 사악한 어둠의 씨앗은 본래 이 세계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물건입니다. 사용자를 제재하고 다크 시드를 회수하십시오. [이 퀘스트는 단독 퀘스트입니다.] 00051 트롤러 ========================================================================= “...” 준상은 머리 속이 복잡해졌다. 갑자기 보이기 시작한 다크 시드의 검은 빛.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특수 임무 발동 조건을 만족한다는 메시지와 함께 나타난 퀘스트 정보. 단순한 우연? 아니다. 다크 시드가 강제 회수된 시점에서 뭔가 묘한 느낌이 들었다. 그 묘한 느낌이 이런 식으로 현실화될 줄은 미처 몰랐지만, 결국 이것은 다크 시드를 회수하고 그것을 인식한 시점에서 이미 예정되어 있었던 일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차라리 단순한 인과 관계로 이해하고 넘어갈 수도 있다. 지금 준상의 머리 속을 어지럽히는 것은, 다크 시드 습득 이전의 문제였다. “음...” 이번 퀘스트의 목표는 인간이다. 퀘스트를 완수하기 위해서는 저 남자의 머리를 부수고 그 머리 속에 자리 잡고 있는 다크 시드를 꺼내야 한다. 준상이 만약 정교한 외과 수술, 그 중에서도 뇌수술의 권위자쯤 되는 인물이라면 다른 방법을 사용할 여지라도 있겠지만... 지금 그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단 하나, 좀비나 다른 괴물들에게 그러했듯이 머리를 부수고 그 안에서 강제로 다크 시드를 끄집어내는 방법뿐이다. 이것은 명백한 살인 행위라 할 수 있다. 물론, 이제 와서 사람의 머리를 부수는 행위를 못하겠다는 건 아니다. 그는 지금까지의 퀘스트에서 본래 사람이었거나 사람과 닮은 자들의 머리를 부수고 그 안에서 시드를 꺼내는 일을 수없이 해왔다.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해온 일들이지만, 분명한 것은 준상이 그 작업 자체에 이미 익숙해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문제는 바로 그것이다. 사람의 머리를 부수는 행위가 너무나도 익숙해져 버렸다는 점, 바로 그것이 문제인 것이다. “...” 어쩌면 자신을 퀘스트라는 피할 수 없는 올가미로 끌어들인 자가 원했던 것이 바로 그것이 아니었을까. 사람의 머리를 당연하다는 듯이 부수고, 거기서 시드를 꺼내는 행위를 스스럼없이 저지르는 그런 존재가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것이 달성되자 다크 시드라는 목표물을 퀘스트라는 행위로 인식시키는 과정을 거쳐 이렇게 자신의 눈앞에 진짜 목표물을 드러나게 한 것은 아닐까. 아니, 애초에 막무가내로 서울을 떠나 동쪽으로 발걸음을 내딛은 일 자체도 알 수 없는 무언가의 조종을 받았던 일은 아닐까! “후...” 준상은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처음 벼랑에서 정신을 차렸던 일부터 시작해서, 얼마 전의 퀘스트에 이르기까지 지금까지 퀘스트라는 이름 아래 겪어왔던 모든 일들이 정신없이 머리속을 헤집고 다니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몰아치는 생각들 중 하나가 문득 준상의 마음을 유혹한다. 차라리 이 퀘스트를 거부하는 것은 어떨까. 사악한 어둠의 씨앗이라는 말로 매도하고 있기는 하지만, 지금 준상의 눈앞에 보이는 저 남녀는 아무리 봐도 그저 남몰래 시간을 내어 바닷가에 놀러온 연인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퀘스트 자체에도 어떠한 강제적인 내용이 없었다.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는다든가. 제한 시간 내에 퀘스트를 수행하지 않으면 그에 따른 패널티를 받는다든가... 그런 식의 강제 조항이 보이지 않았다. 퀘스트를 위해 전송된 공간에서는 그냥 이 모든 것은 게임에 불과하다고 자위하며 생각 없이 지시에 따를 수 있었다. 그래야 그곳에서 빠져 나올 수 있고, 성공적으로 수행하면 그만큼 좋은 보상을 얻을 수 있으며, 좋은 보상을 얻으면 그만큼 강해지고, 강해지면 또한 그만큼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몰라도, 당장 살아남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는 준상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명분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현실이다. 현실에서도 과연 그런 식의 논리로 자신과 상관없는 사람을 퀘스트라는 명목 하에 죽여도 좋은 것일까. 지금까지처럼 이대로 퀘스트가 지시하는 내용을 영문도 모르고 맹목적으로 따라야만 하는 것일까. 준상은 이제 해안에서 올라와 도로를 걷고 있는 남자를 가만히 주시했다. 인터페이스에서는 이미 그 남자의 머리 위에 노란색 깃발이 펄럭이는 표시가 나타나 있었다. 이 깃발은 통찰의 능력을 통해 인터페이스를 장착한 사용자와 적의 능력을 비교하는 하나의 기준이다. 준상이 지닌 통찰의 능력은 현재 1레벨. 1레벨의 통찰에서는 이런 식으로 간단한 색깔을 통해 적과 자신의 능력을 비교하게 되는데, 노란색은 적의 능력이 자신과 동등하거나 비슷한 수준임을 암시한다. 멀리서 남자를 주시하며 뒤를 쫓는 준상의 머리속에 또 다른 생각이 떠오른다. 그것은, 과연 저 남자가 어떻게 다크 시드를 손에 넣었을까 하는 점이다. 가장 간단한 추측은 준상과 마찬가지로 퀘스트에서 손에 넣은 후 그것을 바로 자신에게 사용했다는 것이겠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것은 별로 가능성이 없는 일이다. 시드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일단 확인을 해야 한다. 물론 확인을 하지 않고 무턱대고 사용하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애초에 다크 시드는 아이템이나 카드에 장착할 수 있는지 조차 의문인 물건이고, 그런 식으로 사용했다면 지금 저런 식으로 남자의 머리속에 자리를 잡을 일도 없다. 의문은 또 있었다. 그것은 저 남자의 머리 위에 있는 노란색 깃발이다. 자랑은 아니지만, 준상은 지금 자신이 다른 모든 귀환자들 가운데서도 손꼽힐 정도의 강함을 지니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진행되는 퀘스트의 난이도를 봐도 알 수 있다. 만약 다른 이들도 준상 정도의 강함을 손에 넣었다면, 그에 걸맞는 난이도의 퀘스트가 나와야 하건만 지금까지는 그런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었다. 물론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준상처럼 죽을힘을 다해 퀘스트에 전력을 다했다면 비슷한 능력을 지닌 자가 나오지 말란 법도 없으니까. 하지만 지금 자신의 연인과 웃으며 해안을 거닐고 있는 저 남자의 모습을 보면, 그것 또한 가능성이 적어 보인다. 과연 저 모습 어디에 휴대폰을 통해 언제 퀘스트가 날아올지 몰라 불안해하는 기색이 있단 말인가. 아니다. 이것도 가능성이 전혀 없는 얘기는 아니다. 여자 역시 귀환자라면 혹시 가능한 얘기일지도 모른다. 함께 파티를 맺은 사이라면 죽든 살든 함께 하겠다는 마음으로 지금 이 순간을 즐기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준상의 시야에 펼쳐진 인터페이스는 저 여자가 흰색 깃발로 표현되고 있었다. 흰색 깃발은 전력을 비교할 가치도 없는 일반인이라는 의미이다. 자신이라면 아무것도 모르는 연인을 상대로 저렇게 시름없이 웃고 즐길 수 있을까? 아니, 이것도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자신들의 인연을 조금이나마 이어가기 위해 해맑은 연인을 연기하고 잇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은가. 준상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쥐며 계속해서 두 남녀의 뒤를 쫓았다. 해안에 길게 이어진 도로를 걷다보니 어느새 우중충하게 드리워져 있던 구름이 사라지고 밝은 햇살이 주위를 밝히기 시작한다. 두 남녀는 잠시 더 길을 걷더니 문득 근처의 작은 야산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 준상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오픈 산들바람.” 그러자 여전히 불어오는 바닷바람과는 다른, 조금 훈훈한 바람 한줄기가 준상의 몸을 에워싼다. 똑같은 바람이기는 하지만, 소금기 때문에 끈적거리고 불쾌한 느낌이 드는 바닷바람과는 다른 쾌적하고 편안한 느낌의 바람이다. 준상은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소환할 걸 그랬다는 생각을 떠올리며 산들바람에게 명령했다. “조심스럽게 저들의 뒤를 쫓아라.” 그러자 그 실체가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한줄기 바람이 두 남녀의 뒤를 쫓는 것이 인터페이스 상에 표시된다. 퀘스트 표식이 미니맵 상에 표시되기는 하지만, 자칫 그 범위를 벗어나기라도 하면 난감한 일이라 안전장치를 마련한 것이다. 준상은 적당히 거리를 둔 채 미니맵에 표시된 퀘스트 표식과 산들바람의 위치를 가늠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남자는 어느 정도 인적이 드문 방풍림 안에 들어가자 이동을 멈추었다. 준상은 조심스럽게 산들바람을 다시 불러들인 후, 두 남녀가 있는 곳을 향해 다가갔다. 그렇게 조금씩 거리를 좁히던 준상의 귀에 문득 두 남녀가 내뱉은 거친 호흡 소리가 들려왔다. “헉... 헉...” “으음...” 준상은 그들의 모습이 보이는 위치로 다가가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오픈 은신.” 그러자 준상의 모습이 주위의 방풍림과 동화되며 모습을 감춘다. 두 남녀는 가쁜 호흡을 내뱉으며 한참 서로를 애무하느라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준상은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리려 했지만, 바로 그 순간. “읍!” 가쁜 숨소리를 내뱉고 있던 여자가 갑자기 무언가로 입을 틀어막은 듯한 억눌린 소리를 냈다. “...” 다시 시선을 돌린 준상의 눈에 공포로 물들어 치떠진 여자의 눈동자가 보였다. 여자는 도대체 무엇을 보고 저렇게 두려움에 떠는 것일까. 하지만 굳이 궁금해할 필요가 없었다. 곧바로 남자의 변화한 모습이 준상의 위치에서도 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건...” 준수했던 남자의 머리가 둘로 갈라지고 마치 상어의 그것을 연상시키는 날카로운 이빨이 갈라진 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여자는 그 끔찍한 모습을 직시하지 못하고 그대로 기절해 버렸고, 괴수로 변화한 남자가 그런 여자의 머리를 먹어치우려는 순간 준상이 포탄처럼 튀어나갔다. -크륵? 거의 완벽한 기습이었지만, 괴수는 가볍게 뒤로 펄쩍 뛰는 것으로 준상의 숄더 차지를 피해냈다. 준상은 일단 여자의 상태를 살핀 후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자 인벤토리에서 너클을 꺼내 손에 끼었다. 저 모습을 보자 지금까지 복잡하게 뒤엉켜 있던 머리속의 생각들은 마치 따사로운 햇살에 봄눈이 녹아내리듯이 말끔하게 사라져 버렸다. 더 이상 인간이 아니게 된 괴물이 상대라면, 사람을 잡아먹으려 드는 괴물이 상대라면! 준상으로서도 더 이상 고민할 이유가 없다. 모처럼의 식사를 방해받은 남자는 갈라졌던 머리를 원래대로 되돌린 후 말했다. “누구냐, 너.” 그 말에 준상은 이렇게 대답했다. “블러드로드.” 그 단어가 준상의 입에서 나온 순간, 카드 슬롯이 비워지고 그곳에 새로운 카드들이 장착되었다. 광폭(R), 피칠갑(R), 피칠갑(R), 피칠갑(SR). 이 네 장의 카드가 장착되며 콤보 카드 ‘얀트훈센의 블러드로드’가 이 세상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블러드로드? 그게 무슨...” 남자는 얼굴을 찌푸리며 그렇게 말했지만, 준상은 더 이상 대화를 할 생각이 없었다. 좋은 주먹 놔두고 굳이 입 아프게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준상은 옆구리에 양팔을 붙인 채 몸을 숙이고 남자를 향해 돌진했다. 그러자 남자는 짧은 기합 소리와 함께 자신의 몸을 변화시켰다. 쫘아악! 남자의 하체를 감싸고 있던 면바지가 부풀어 오르는가 싶더니, 이내 갈기갈기 찢어지며 검붉은 파충류의 그것을 연상시키는 두꺼운 다리가 모습을 드러냈고, 신체의 변화가 끝나기가 무섭게 남자는 통나무처럼 두꺼워진 다리를 들어 자세를 낮추며 돌진해 오는 준상을 걷어찼다. “...” 하지만 준상은 급격하게 몸을 틀어 무시무시한 풍압과 함께 날아드는 다리를 피하며 발차기로 인해 드러난 남자의 둔부를 향해 몸을 부딪혔다. 미처 숄더 차지 카드를 장착할 틈이 없었지만, 이 정도 위력이라면 한쪽 발을 치켜든 상대 정도는 능히 날려버릴 수 있을 터. 하지만 상대의 둔부를 들이받은 준상은 마치 단단한 바위벽에 부딪힌 듯한 감각을 느끼며 오히려 튕겨나가 버리고 말았다. “...” 준상은 얼굴을 찌푸렸고, 남자는 득의의 표정을 지었다. “훗.” 가소롭다는 듯이 씩 웃음을 지은 남자는 가볍게 숨을 멈추는가 싶더니 다리를 원래대로 되돌리고 이번에는 한쪽 팔을 변화시켰다. 성인 남자의 키만큼이나 길어지고 한아름은 되는 통나무처럼 두꺼워진 그 팔의 모습은 일전에 준상이 쓰러뜨렸던 키메라 쌍둥이의 그것과 매우 흡사했다. 남자는 거대화한 팔을 붕붕 휘두르더니 그것을 준상에게 휘둘렀다. 그 펀치는 앞쪽의 공기를 뭉개버리며 곧장 준상을 향해 날아들었지만, 준상은 허리를 숙여 그것을 간단히 피한 후 남자의 품으로 뛰어들어 2연격을 발동했다. 퍼퍽! “커헉!” 순식간에 뻗어나간 2연격이 양 옆구리를 후려치자 남자는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추가타를 위해 준상이 또 한 번 손을 뻗은 순간, 남자의 가슴이 쩍 벌어지며 날카로운 이빨이 가득 박힌 입 하나가 모습을 드러내더니 준상의 팔을 콱 물어버렸다. “큭!” 준상은 끔찍한 통증을 느끼며 자신의 팔이 잘려나가는 모습을 보아야만 했다. 00052 트롤러 ========================================================================= 준상이 팔이 잘려진 채 고통을 참으며 뒤로 물러나자, 남자는 가슴에 생겨난 입 안에 들어있던 팔을 뱉어냈다. “쯧, 입맛 버렸군. 남자는 비려서 영...” “...” 준상은 조심스럽게 잘린 팔을 집어 들었다. “왜? 병원 가서 붙여보기라도 하게? 쿡쿡...” 남자는 그렇게 비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준상은 그런 비웃음을 무시하며 집어든 팔을 잘린 부위에 가져다 대었다. “빨간 약.” “빨간 약?” “오픈 힐링 포션.” “뭔 소리야?” 그러자, 잘려진 부위가 서로 격렬하게 반응하며 흰 연기를 뿜어내기 시작한다. “크윽...” 준상은 격렬한 통증에 얼굴을 찌푸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남자는 그런 준상의 모습을 보며 그제서야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네놈... 보통 인간이 아니었구나!” 준상은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을 훔치며 남자에게 말했다. “그걸 이제 알았나.” “...” 대답을 들은 남자는 그제서야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랬군. 애초에 이런 내 모습을 보고도 덤비는 것 자체가 보통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지. 쿡쿡...” 남자는 그렇게 실없이 웃더니 준상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네놈의 힘은... 그 재생력인가. 좋군. 아주 좋아.” “...” 준상은 말없이 다시 붙은 팔을 움직여 보았다. 접합면에 아직 통증이 남아 있는데다 근육의 재생이 완벽하지 않아 힘이 다소 떨어지는 느낌이고 뼈도 완전히 붙지 않았는지 저릿저릿 하기는 했지만, 무참하게 찢기며 잘려졌던 팔이 순식간에 이 정도로 회복되어버린 것은 당사자인 준상으로서도 놀랍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현재 준상의 재생력은 37퍼센트. 이 정도만으로도 잘렸던 팔이 붙을 정도라면, 이후는 어느 정도일까. 준상은 좀 더 완전하게 회복되기를 기다리고 싶었지만, 남자는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 힘, 내가 먹어주마!” 남자는 다시금 팔을 거대하게 변화시켜 준상을 공격했지만, 준상은 머리를 젖혀 그 공격을 피하며 남자의 무릎을 로우킥으로 가격했다. “큭!” 남자는 급히 다리를 번형하며 반격을 시도했지만, 이번에는 준상의 펀치가 그의 옆구리를 가격한다. “커헉!” 자세를 낮춘 준상은 뒤로 물러서는 남자를 쫓으며 주먹을 휘둘렀다. 그 모습을 보고 남자가 주먹이 닿는 지점에 다시금 커다란 입을 만들었지만, 준상의 움직임은 페인트였다. “컥!” 주먹 대신 이어지는 로우킥에 무릎을 얻어맞고 휘청거리던 남자는 절뚝거리며 뒤로 물러나 경악한 표정으로 준상을 바라보았다. “어, 어떻게?”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는데, 아니, 오히려 팔이 잘렸다가 붙은 준상 쪽이 훨씬 불리한데 어째서 자신이 이렇게 형편없이 밀리는 것일까.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남자를 보며 준상이 담담하게 말했다. “한 번에 하나. 그것도 몸 전체는 안 되고.” 뜬금없는 얘기였지만 남자는 그 말의 의미를 바로 알아들었다. 바로 자신이 지닌 능력의 한계였기 때문이다. 준상은 팔이 잘려버린 고통의 와중에도 남자의 싸우는 모습에서 그와 같은 한계를 파악해냈고 지금 그것을 시험해 보았다. 결과는 대성공. 변형된 부위의 신체는 인간의 그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견고하고 단단해서 제 아무리 준상이라 해도 쉽게 상대할 수 없을 정도의 위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변형이 되지 않은 다른 부분은 인간의 그것보다는 조금 더 견고할 뿐 준상과 비교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크아아아!” 남자는 괴성을 지르며 다시 팔을 변형시키더니 그것을 미친 듯이 휘둘러댔다. 그 서슬에 휘말려 순식간에 방풍림의 나무들이 꺾이고 부러져 버렸지만, 준상은 유유히 그 모든 공격을 피하며 다시금 몸 안쪽으로 다가섰다. “오픈 산들바람.” 하지만 준상이 몸 안쪽으로 파고 들자 갑자기 남자가 준상을 껴안으려는 듯이 와락 몸을 던졌다. 어느 새인가 그의 몸에는 날카로운 이빨들이 돋아난 입이 생겨나 있었다. “걸렸다, 이놈!” 남자는 그렇게 외쳤지만, 준상은 그 모습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산들바람, 밀어내라.” “뭐?” 남자는 무슨 소린가 싶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자신의 몸이 무언가 푹신한 바람 같은 것에 부딪혀 주욱 밀려나가자 경악하고 말았다. “이, 이건?” 하지만 준상은 잘렸던 팔의 손가락을 구부렸다 폈다 하며 상태를 살핀 후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음을 확인하고는 다시 말했다. “울프팩.” 준상의 말에 따라 거대한 늑대 세 마리가 한줄기 빛과 함께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도대체... 이건...” 남자는 또다시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 벌어지자 당황하며 어쩔 줄 몰라 하기 시작했다. 그런 남자를 가리키며 준상은 다시 말했다. “물어라.” 늑대들은 명령이 떨어지자 남자를 향해 벼락 같이 달려들었다. 남자는 당황해서 팔을 변형시킨 후 이리저리 휘둘러대고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거대한 야수들과의 전투 경험이 없었던 탓에 연신 상처를 입으며 밀리기 시작했다. “너, 넌 도대체!” 준상은 그런 남자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인터페이스도 믿을 것이 못되는군.” 단순히 힘이나 민첩성만을 따져보자면 확실히 남자의 능력은 준상과 비슷한 수준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피와 살이 튀는 전투를 몇 번이나 거쳐 온 준상과는 달리 그는 철저하게 약자만 잡아먹었기 때문에 궁지에 몰렸을 때 그것을 타개하는 능력이 부족했다. 단적인 예로, 만약 준상이 남자의 입장이었다면 팔이 잘린 시점에서 전투를 확실하게 마무리 지었을 테지만, 남자는 알량한 자만심과 궁금함을 채우느라 그 천금 같은 기회를 날려 버렸다. “크악!” 늑대들은 집단 사냥에 능하다. 하나가 미끼가 되고 다른 하나가 적의 숨통을 끊는 식의 전법은 늑대들에게 있어 그리 대단한 전술도 아니었다. 하지만 경험이 부족한 남자는 이런 늑대들의 전법에 깜박 속아 넘어가 버렸고, 그 결과 허점을 노린 팀버 울프의 이빨에 물려 어깨의 살점이 뭉텅이로 떨어져 나가고 말았다. 상처를 입자 남자는 자신을 둘러싼 늑대들의 눈동자를 보며 두려움에 휩싸였다. 한번 공포라는 감정에 잠식되기 시작하자, 남자는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능해지고 말았고 다시 무턱대고 팔을 휘두르다가 이번에는 크림슨 울프에게 허벅지를 물리고 말았다. “크악!” 남자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모습을 보며 준상은 다시금 손가락을 움직여 보았다. 잘린 부위에서 뿜어져 나오던 아지랑이도 이제는 거의 사라진 상황이고, 근육이나 뼈에도 달리 이상이 느껴지지 않았다. 준상은 완전히 팔이 회복되었음을 깨닫자 천천히 남자에게 다가갔다. 남자는 준상이 다가오자 다시 한 번 몸에 커다란 입을 만들어 내고는 팔을 벌리며 준상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준상은 그것을 피하지 않았다. 산들바람을 불러내어 밀어내지도 않았다. 대신 손을 뻗어 세로로 벌려진 입을 마치 미닫이문을 여는 듯한 자세로 움켜잡고는, 그대로 좌우로 벌리기 시작했다. “크아아악!” 남자는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을 쳤다. 이런 식으로 벌려진 상태에서는 원래대로 되돌리지도 못하기에 남자는 안간 힘을 쓰며 준상을 그 큰 입으로 씹어 먹으려 들었다. 하지만, “광폭.” 준상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옴과 동시에 서릿발 같던 두 눈에서 붉은 기운이 용솟음치며 흘러나왔다. 변화한 것은 단지 눈빛만이 아니었다. 양 팔로 뻗어간 압도적인 힘이 남자의 입을 양쪽으로 벌리기 시작한 것이다. 남자는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이 입을 벌리기 시작하자 자신에게 죽음이 다가왔음을 피부로 느꼈다. “사, 살려...” 하지만 준상은 남자의 애원을 무시한 채 세로로 벌려진 입을 좌우로 벌려 찢어 버렸다. “끄아아악!” 몸에 세로로 생겨나 있던 입이 찢겨지자 남자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닥쳐라.” 준상은 남자의 목을 한 손으로 움켜잡았다. 몸에 생겨났던 입이 찢겨진 탓에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도, 그렇다고 다른 부분을 변형하는 것도 하지 못하게 된 남자는 자신의 목을 움켜진 준상을 공포에 질린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괴, 괴물...” “...” “이 괴물 같은 자식!” 준상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너클을 쥔 손으로 그의 인중을 세차게 후려쳤을 뿐. “커헉!” 이빨이 송두리째 부러져 나가고 입이 뭉개지는 상황에서도 남자는 의식을 잃지 않았다. 하지만 다시금 미간에 작렬한 펀치에는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늘어져 버리고 말았다. “후...” 준상은 자신의 손에 잡힌 남자의 피범벅이 된 얼굴을 착잡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금 작렬한 주먹이 남자의 머리뼈를 부숴버림과 동시에 마침내 전투가 끝을 맺었다. “...” 준상은 처참한 모습으로 쓰러진 남자의 모습을 바라보며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만약 이 남자가 상상한 이미지가 이런 괴물이 아니었더라도 이렇게 거침없이 목숨을 끊어 버릴 수 있었을까. 이 남자의 괴이한 욕망이 식인이라는 형태로 분출되지 않았더라도 과연 이렇게 쉽게 죽여 버릴 수 있었을까. 아니, 남자가 보여주었던 그 모든 모습은 다크 시드가 지닌 본연의 힘인지도 모른다. 확실한 건 단 하나. 귀환자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카드의 능력을 그가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는 사실 뿐이다. 하지만 귀환자가 아니라면 어떻게 다크 시드를 손에 넣은 것일까. 준상은 머리 속을 잠식해 들어오는 복잡한 생각들을 떨쳐 버리며 남자의 머리 속에서 다크 시드를 꺼냈다. 그러자 곧바로 팔찌가 반응하며 손에 들린 다크 시드가 사라지는가 싶더니 좌측 시야에 새로운 메시지가 나타난다. 다크 시드를 회수하십시오. :이 사악한 어둠의 씨앗은 본래 이 세계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물건입니다. 사용자를 제재하고 다크 시드를 회수하십시오. [이 퀘스트는 단독 퀘스트입니다.] -> 완료! 보상 : 경험치 많이, 특수 임무 보상 상자. -> 보상을 지금 수령하시겠습니까? (Y/n) _ (주의) 수령하지 않은 보상은 7일후 자동 소거됩니다. 다른 퀘스트와는 달리 기여도 정산의 과정이 없이 바로 보상이 나왔다. 준상은 바로 보상을 수령한 후 보상 상자는 일단 놔둔 채 남자의 시체를 인벤토리에 집어 넣고 늑대들을 돌려보냈다. “후...” 준상은 다시 캐비닛을 꺼내어 삽과 자루를 꺼낸 후 남자의 피가 묻은 흙까지 담아 넣는 것으로 주위를 정리했다. “...” 준상은 잠시 주위를 살피다가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여자에게 다가가 맥을 살폈다. 혹시라도 깨어있다면... 따로 뒤처리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자는 여전히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그것은 준상에게도 여자에게도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 준상은 산들바람에게 혹시라도 다른 목격자가 없는지 살피게 한 다음,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자 곧바로 그 자리를 벗어났다. 산들바람을 통해 인적이 없는 곳을 찾아서 이동하면서 준상은 일단 피로 얼룩진 옷을 갈아입은 후 일이 벌어졌던 방풍림에서 제법 먼 작은 마을 근처에 도착해서야 비로소 특수 임무 보상 상자를 열었다. 축하합니다! 대기시간 ‘5분’을 획득했습니다. :이미 대기시간이 적용되어 있으므로, 여기에 ‘5분’을 추가합니다. 현재 대기시간은 총 ‘10분’입니다. 이제 좀 더 여유롭게 새로운 임무를 대비하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훗...” 자신도 모르게 실소가 새어 나왔다. 사람의 목숨에 대한 가치가 고작 5분이라는 시간과 동등하다는 사실이 허탈했고, 겨우 5분의 대기 시간이 늘어난 것을 기뻐하는 자신의 모습이 또한 너무나 허탈했다. 준상은 햇살이 가시고 다시 구름에 의해 가려지기 시작한 하늘을 보며 과연 자신의 목숨은 어느 정도의 가치를 지니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떠올렸다. 말없이 한참을 걸었다. 그렇게 한 시간 넘게 도로를 따라 내려가다가 작은 소도시에 들어서자 준상은 곧바로 모텔에 방을 잡았다. 준상은 들어가기가 무섭게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았다. 그리고 입고 있던 옷과 군화를 인벤토리에 보관한 후 욕조에 몸을 담갔다. 금방이라도 화상을 입을 듯한 열기가 준상의 피부를 달궜지만, 이내 아지랑이가 피어나 그렇게 달궈진 피부를 치유하기 시작한다. “후우...” 모처럼 뜨거운 물에 실컷 몸을 담근 준상은 전화기 옆에 놓인 음식점 전화번호를 뒤져 중국 음식을 시켰다. 30분 정도 시간이 지나자 배달이 왔다. 준상은 새 옷으로 갈아입은 후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후...” 간짜장에 탕수육까지 싹싹 긁어서 비운 후에야 준상은 푹신한 침대에 몸을 눕힌 채 잠을 청했다. 몸도 마음도 녹초가 된 탓일까. 아니면 대기 시간이 10분으로 늘어난 탓일까. 모처럼 깊은 잠에 빠져 들 수 있었다. 준상은 결국 다음날 저녁이 되어서야 깨어났다. 스스로도 그렇게 오랫동안 잠이 들었다는 사실에 당황할 정도였다. 곤란하다. 대기 시간이 늘어났다고는 해도, 전송 자체를 피할 수는 없는 일. 만약 이렇게 누가 업어 가도 모를 정도로 푹 잠 들었을 때 전송이 이루어졌다면, 그리고 그런 와중에 기습을 받아 사지 중에 한 군데가 떨어져 나가거나 일전에 죽었던 여자처럼 내장이 뜯겨 나가거나 하는 상처를 입었다면 제 아무래 준상이라 해도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 “곤란하군.” 준상은 이런 저런 일로 인해 느슨해진 정신을 다시 가다듬었다. 모텔을 빠져 나와 산악구보를 실시했다. 숨이 턱에 차도록 미친 듯이 산을 헤집고 다니자 잠깐의 안락함에 편안해졌던 근육들이 아우성치며 재생을 시작했다. 고통이라면 고통이라고 할 수도 있는 그 감각을 느끼며 준상은 차라리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하긴, 아직 준상은 이런 저런 일로 고민할 상황이 아니다. 아니... 고민한다는 자체가 아직 약하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준상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어차피 처음부터 강했던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약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진정으로 부끄러운 것은 약한 자신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것. 준상이 산 아래로 펼쳐진 운해를 바라보며 그런 생각들을 마음 속에 새겨 넣을 즈음, 새로운 메시지가 좌측 시야에 나타났다. 00053 트롤러 ========================================================================= 새로운 퀘스트가 도착했습니다. -10분 뒤 퀘스트를 위한 장소로 전송됩니다. 안전한 장소로 이동해 주십시오. (남은시간: 10분) “...” 막상 대기 시간이 십분으로 늘어나니 뭔가 난감하다. 애초에 인적이 드문 산 속인데다 당장 급히 몸을 피할 만큼 위험한 지역도 아니다보니 굳이 어디로 이동할 필요조차 없는 상황. 게다가 한창 운동하고 난 뒤라 따로 워밍업을 할 필요도 없다. 준상은 일단 수분을 보충하고 몸에서 흐른 땀을 닦았다. 그래도 시간이 남는다. “10분이 이렇게 길었나.” 준상은 다시 한 번 군화 끈을 고쳐 신은 뒤 인벤토리에서 너클을 꺼내어 손에 꼈다. 하지만 그래도 시간이 남는다. 차라리 휴대폰으로 메시지가 도착했을 때는 차라리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갔는데, 이렇게 눈앞에 시간이 카운트 다운되는 모습이 계속 비치니 오히려 시간이 더 안 가는 것 같다. 전송 시간이 길게 느껴지는 날이 올 줄이야. 정말 사람은 오래 살고 볼 일인 듯 하다. 전송이 1분 앞으로 다가오자 준상은 가볍게 몸을 풀며 마음의 준비를 했다. 마침내 카운트 다운이 끝나고 흰 빛이 몸을 감싸기 시작한다. 담담하게 주변의 모습이 변화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 하지만 그리 크게 풍경이 변화하지는 않았다. 그가 도착한 곳은 원래 있던 곳과 마찬가지로 어느 한적한 산길이었기 때문이다. 준상은 우선 좌측 시야에 나타난 퀘스트 정보부터 확인했다. 에픽 퀘스트 – 여명 1. 미니맵에 표시된 지역까지 이동하십시오. (미달성) “에픽 퀘스트?” 지금까지와는 다른 퀘스트 정보에 준상은 고개를 갸웃거릴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히든 퀘스트도 서브 퀘스트도 달리 나타나 있지 았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런 형태의 퀘스트가 처음은 아니다. 튜토리얼 역시 이런 형식의 연계 퀘스트였기 때문이다. 준상은 시야의 우측 상단에 표시된 파란색 느낌표를 확인했다. “미니맵이라...” 일전의 특수 임무와 마찬가지로 이 에픽 퀘스트라는 것 역시 일정 조건을 만족한 자에게만 발동되는 퀘스트인 모양이다. 하지만 퀘스트 정보를 보던 준상은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이번 퀘스트는 몇 명이 수행하는지 명시되어 있지 않음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지금까지는 단독이면 단독, 복수면 복수라는 식으로 퀘스트 정보 하단에 그러한 내용이 명기 되어있었지만, 이번에는 그런 식의 정보가 나타나 있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이것 역시 튜토리얼과 마찬가지이다. “흠...” 준상은 이 퀘스트가 이전까지와는 달리 상당히 오랜 기간을 필요로 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에픽 퀘스트는 보통 커다란 게임에서 중심에 되는 줄거리를 일컫는 경우가 많다. 잠시 이번 퀘스트에 대해 생각에 잠겨 있던 준상은 다른 이들이 도착할 기미가 보이지 않음을 확인하고는 우선 인벤토리에서 삽과 흙이 든 자루를 꺼냈다. “오픈 산들바람.” 준상의 입에서 명령어가 나오자 그의 몸 주위로 한 줄기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한다. “주위를 경계하도록.” 산들바람은 준상의 명령을 받고는 주위에 다른 무언가가 접근하지 않는지 감시하기 시작했다. 보초를 세워 만약을 대비한 준상은 삽을 들고 곧장 땅을 파기 시작했다. 대충 사람 하나가 드러 누울 정도의 공간을 판 준상은 인벤토리에서 남자의 시체를 꺼내어 그곳에 묻었다. 그리고 다시 피가 묻은 흙을 시체 위에 쏟아 부은 다음, 산짐승이 파헤치지 못하도록 그 위에 돌을 쌓았다. 조악하게나마 무덤을 완성한 준상은 수건을 꺼내 땀과 흙먼지를 대충 닦아낸 후 삽과 자루를 다시 인벤토리에 보관한 뒤에야 퀘스트가 지시하는 방향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이전과는 달리 조금 느긋하기까지 한 걸음으로 그렇게 미니맵에 나타난 파란 느낌표를 향해 걷던 준상은 약 10분 정도 걷고 나서야 마침내 지정된 위치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자 어디선가 전투가 벌어지는 소리가 들려오며 퀘스트가 갱신되었다. 에픽 퀘스트 – 여명 1. 미니맵에 표시된 지역까지 이동하십시오. (달성) -> 완료! 보상: 경험치 아주 약간 -> 보상을 지금 수령하시겠습니까? (Y/n) _ (주의) 수령하지 않은 보상은 7일후 자동 소거됩니다. 바로 보상을 수령하자 다음 퀘스트가 나타났다. 에픽 퀘스트 – 여명 2. 어디선가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듯 합니다. - 조심스럽게 접근해 상황을 살피십시오. (미달성) 뭔가 상투적인 진행이라 느끼면서도 어느 새인가 준상은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바람처럼 산기슭을 타고 내려가자 이내 작은 계곡 안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흠...” 계곡에 나 있는 도로 안에 작은 마차가 한 대 서 있었다. 전투는 마차를 호위하는 이들로 보이는 한 무리의 사람들과 그들을 앞뒤로 포위한 몬스터들 사이에 벌어지고 있었다. 몬스터들은 불독과 비슷한 머리와 짧은 목, 그리고 갈색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키는 성인 남자의 어깨 정도밖에는 되지 않지만 팔다리 근육에 제법 알차게 영글어 있는 것이 상당히 단단해 보이는 체형이다. 적의 모습이 확인되자 곧바로 통찰의 능력이 발휘되었다. 괴물들의 머리 위에는 준상보다 조금 약하다는 의미를 지닌 녹색 깃발이 나타나 있었고, 개중에는 훨씬 약하다는 의미를 지닌 파란색 깃발을 지닌 놈들도 있었다. 생각보다 그리 강하지는 않은 모양이었지만, 앞뒤로 십여 마리나 되는 괴물들에 둘러싸인 탓에 대여섯명에 불과한 호위들은 좀처럼 몬스터들을 쉽게 처리하지 못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가만히 지켜보던 준상의 시야에 계곡 위에서 바위를 굴리려고 준비하는 괴물들 서너마리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퀘스트 정보가 갱신되었다. 에픽 퀘스트 – 여명 2. 어디선가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듯 합니다. - 조심스럽게 접근해 상황을 살피십시오. (달성) -> 몬스터들이 기습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기습을 저지하십시오. (미달성) “...” 괴물들은 준상이 위치한 산기슭과는 반대편에 위치하고 있었다. 하늘을 나는 능력을 갖추지 않은 이상 저곳으로 이동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기에 준상은 다른 방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굵직한 돌멩이 하나를 집어든 준상은 낑낑거리며 바위를 옮기고 있는 괴물들 가운데 하나를 골라 머리를 노리고 투석을 실행했다. 쐐액! 바람을 가르고 날아간 돌멩이는 준상이 노린 대로 정확하게 괴물의 머리에 직격했다. -케엑! 산을 오르며 틈틈이 연습한 보람이 있었다. 준상은 자신감을 가지고 다시 두 번째 돌멩이를 던졌지만, 이번에는 힘이 과했는지 영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케에엑! 하지만 바위를 굴리려고 한 곳에 모여 있었던 탓에 준상이 던진 돌멩이는 또다른 괴물의 다리를 부수는데 성공했다. 그렇게 두 마리의 괴물이 무력화되자, 괴물들은 굴리려고 하던 커다란 바위를 포기하고 준상을 향해 돌팔매로 반격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의 제구력은 준상보다도 더 떨어지는 수준이었다. “후우...” 준상은 호흡을 가다듬은 후 다시 한 번 투석을 실행했다. 쐐액! 유성처럼 바람을 가르고 날아간 돌멩이는 어김없이 또다른 괴물의 머리통을 박살내 버렸고, 상황이 이렇게 되자 괴물은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었던지 부상을 입은 동료를 데리고 후다닥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다시 퀘스트 정보가 갱신되었다. 에픽 퀘스트 – 여명 2. 어디선가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듯 합니다. - 조심스럽게 접근해 상황을 살피십시오. (달성) -> 몬스터들이 기습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기습을 저지하십시오. (달성) -> 마차를 포위한 몬스터들을 처치하십시오. (미달성) 준상은 다시 돌멩이를 던질까 하다가, 괴물들의 실력도 알아볼 겸 직접 손을 쓰기로 했다. “블러드로드.” 그의 입에서 명령어가 나오자 기존의 카드들이 빠져나오고 그 자리에 새로운 카드들이 장착되었다. 광폭(R), 피칠갑(R), 피칠갑(R), 그리고 피칠갑(SR). 이 네 장의 카드가 장착되자 콤보 카드 ‘얀트훈센의 블러드로드’가 발동되었다. 준상은 몸 안에서 힘이 끓어오르는 것을 느끼며 그대로 계곡 아래로 몸을 날렸다. 한창 기세를 돋우며 호위들을 밀어붙이고 있던 괴물들은 갑자기 등 뒤에서 무언가가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떨어지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눈에서 시퍼런 안광을 뿜어내고 있는 한 남자의 모습이 그들의 시야에 들어왔다. “후우...” 아무래도 높이를 잘못 계산한 탓인지 낙하의 충격을 완전히 해소하지 못한 준상의 몸에서는 재생을 위해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습이 오히려 괴물들에게는 더 공포스럽게 비춰지고 있었다. 몸 전체에서 아지랑이를 뿜어내며 시퍼런 안광을 번뜩이는 그 모습은 마치 지옥불 속에서 막 뛰쳐나온 악마의 그것과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크롸악! 하지만 갑자기 나타난 준상의 모습에 위축되어 있던 괴물들은 우두머리로 보이는 덩치 큰 괴물의 고함이 울려퍼지자 퍼뜩 정신을 차리고 준상을 향해 도끼를 휘두르며 달려들기 시작했다. “...” 괴물 하나가 허공으로 뛰어오르며 들고 있던 손도끼를 내리쳤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준상은 가볍게 스탭을 밟으며 뒤로 물러난 후 크게 헛손질을 하며 땅바닥에 내려서는 괴물의 배를 군화발로 걷어찼다. -케엑! 괴물은 그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마치 공처럼 둥실 허공에 떠올랐다. 준상은 떠오른 괴물의 머리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펀치는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며 괴물의 머리에 직격하더니, 그대로 괴물의 몸을 땅바닥까지 끌고 내려가 지면과 격돌시켰다. 퍼걱! 그러자 제법 단단해 보이던 괴물의 머리는 으깨진 수박처럼 그 안의 내용물을 사방으로 터뜨리며 박살이 나버렸다. 흠칫! 괴물들은 동료의 처참한 죽음을 목격하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그리고 뿜어져 나온 동료의 피와 체액을 뒤집어 쓴 채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준상의 모습을 보며 다시 한 번 부르르 몸을 떨었다. 몸을 일으킨 준상은 괴물들을 향해 한 발자국을 내딛었다. 그 행동을 보고서야 정신을 퍼뜩 차린 괴물들은 발악하듯 고함을 지르며 일제히 준상을 향해 달려들었다. “후우...” 준상은 주먹을 가볍게 말아쥐었다. 그리고 양 팔꿈치를 옆구리에 붙인 후, 자신을 향해 도끼를 휘두르며 달려드는 괴물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가장 앞선 괴물이 휘두른 도끼를 위빙으로 가볍게 피한 준상은 몸을 회전시키며 상대의 드러난 옆구리에 강렬한 훅을 선사했다. 우직! 몸 안의 뼈가 부러지는 감각과 소리가 너클 너머로 전해지는 것을 느끼며 충격으로 몸이 접혀진 괴물의 코를 향해 팔꿈치를 휘두른다. 콰직! 단 두 번의 일격에 불과했지만 괴물은 눈에서 초점이 사라지며 그대로 썩은 나무토막처럼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렇게 쓰러진 괴물의 머리 위로 시커먼 군화발이 떨어진다. 퍼걱! 두개골이 으스러지는 무시무시한 소리를 뒤로 한 채 준상은 방금 괴물의 머리를 으깨버린 발을 들어 달려드는 상대의 무릎에 로우킥을 구사했다. 뿌칵! 모처럼 빈틈을 노리고 도끼를 휘두르려고 팔을 번쩍 치켜들었던 불독 머리의 괴물은 준상의 무지막지한 로우킥에 무릎 뼈가 꺾이자 그대로 중심을 잃고 옆으로 쓰러졌다. 괴물은 쓰러지는 와중에도 허우적거리는 듯한 손짓으로 도끼를 휘둘렀지만, 준상은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며 그것을 피하는가 싶더니 다시 앞으로 발을 내딛으며 도끼를 쥔 팔을 그대로 밟아 으깨버렸다. -크라악! 팔꿈치를 밟아 완전히 으깨버린 준상은 그 발을 디딤발로 삼아 다시 괴물의 머리에 사커킥을 날렸다. 괴물은 시커먼 군화발이 자신의 미간을 향해 날아오는 것을 보고는 남은 손을 들어 그것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괴물은 미처 몰랐지만, 그것은 바로 준상이 지닌 공포 유발의 효과였다. 그리고 그렇게 굳어버린 괴물의 향해 날아간 준상의 킥은 정확히 미간을 파고 들어가 머리뼈를 뭉개버렸다. “저, 저건...” 힘겹게 괴물들을 막아서고 있던 호위들은 계곡 위쪽에서 무언가 소리가 들려올 때만 해도 이제 다 죽었구나 싶은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위쪽에서 비명이 몇 번 들려오는가 싶더니 갑자기 하늘에서 무언가 쿵 소리와 함께 떨어졌다. 그것은 한 남자였다. 눈에서 푸른 안광을 번뜩이며 몸에서 짙은 아지랑이를 뿜어내던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칼로 베어도 좀처럼 자르기 힘든 두꺼운 머리뼈를 지닌 괴물들의 머리를 무슨 썩은 과일 터뜨리듯이 부수기 시작했다. “이, 이럴수가.” 순식간에 피와 살이 허공으로 터져 나오는가 싶더니 괴물들의 단단한 몸이 허공으로 튕겨져 나가기 시작했다. 아니, 그렇게 느꼈을 때는 이미 앞쪽을 가로막고 있던 괴물들의 반수 이상이 문자 그대로 피떡이 되어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뭘 멍청하게 보고 있나! 정신 차려!” 호위 대장은 앞쪽의 괴물들이 갑자기 나타난 남자에게 쓸려 나가기 시작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만약 저 남자에게 그럴 마음이 있다면, 자신들은 결코 당해내지 못하리란 것을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00054 트롤러 ========================================================================= 놀란 것은 호위들의 대장만이 아니었다. 괴물들의 대장 역시 준상의 터무니없는 힘에 놀라고 있었다. 순식간에 괴물들이 반수 가까이 쓸려나가자 붉은 털빛을 자랑하는 불독 머리의 괴물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커다란 양날 도끼를 휘두르며 준상에게 달려 들었다. “흠...” 통찰은 이 불독 대장의 능력을 녹색으로 표시하고 있었지만, 준상은 바람을 가르며 날아드는 거대한 양날 도끼를 보자 가볍게 여길 수 없었다. 대각선으로 공간을 베어오는 양날 도끼를 우선 사이드 스텝으로 피했다. 그리고 곧장 허리를 틀어 짧은 훅으로 도끼를 쥐고 있는 괴물의 손을 끊어 친다. 콰직! 얼핏 보기엔 견제성의 짧은 단타였지만, 실제로는 허리를 틀어 체중을 실은 강력한 일격이었기에, 괴물의 손은 물론이거니와 단단한 나무로 만들어진 두꺼운 도끼 자루까지 단숨에 부러지고 말았다. -크와악! 불독 대장은 순식간에 자신의 손과 도끼 자루가 부러지자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준상은 모처럼의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허리를 U자로 휘저으며 펀치의 여력을 응축된 스프링처럼 근육에 담아낸 후, 다급하게 물러나는 불독 대장을 따라 잡으며 그 몸통에 강력한 리버 블로를 명중시켰다. -컥! 불독 대장은 내장이 가닥가닥 끊기는 듯한 통증과 함께 시야가 하얗게 변하는 착각을 느꼈다. 그 와중에도 다급하게 뒤로 물러나 눈앞에서 푸른 안광을 번뜩이며 다가오는 준상의 주먹을 피해보려 했지만, 공포 유발로 인해 경직된 근육은 주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 상태에서 시커먼 군화발이 무릎에 작렬하자 풀려버린 다리가 그대로 접히며 바닥을 나뒹굴고 말았다. 불독 대장이 쓰러지자 준상은 곧장 놈의 몸 위에 올라타 놈의 커다란 머리에 2연격을 퍼부었다. 퍼퍽! 섬광 같은 두 번의 펀치가 양쪽 관자놀이를 두들기자 불독 대장의 의식은 그대로 날아가 버렸다. 준상은 살짝 뛰어오르며 마치 격파 시범을 보이듯이 주먹을 내리 찍었다. 콰직! 머리 뒤로부터 뻗어 나와 귀 옆을 스치며 떨어져 내린 주먹은 불독 대장의 미간을 그대로 분쇄해 버렸다. 순식간에 대장이 쓰러지자, 호위들과 준상 사이에 끼인 채 어쩔 줄 몰라 하던 세 마리의 괴물들은 발악하듯 괴성을 지르며 준상을 향해 달려들었다. “쯧...” 준상은 가볍게 혀를 차며 그런 괴물들에게 일일이 주먹을 선사해 주었다. 결국 앞쪽에서 공격을 가하던 괴물들을 모조리 쓰러뜨린 준상은 천천히 마차를 지나쳐 뒤쪽으로 이동했다. “...” 호위들은 이미 앞쪽의 괴물들이 모조리 쓰러졌음에도 불구하고 감히 뒤쪽에서의 전투를 구원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아무리 자신들을 도와준 사람이라 할지라도 갑자기 나타난 생면부지의 사람을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호위 대장은 마차로 다가서는 준상은 바라보며 말했다. “머, 멈추시오.” 하지만 준상은 멈추지 않았다. “서지 않으면...” 호위 대장은 다시 그렇게 입을 열었지만, “않으면?” “...” 반문하는 준상의 말에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서지 않는다고 먼저 공격하는 건 그야말로 최악의 대응이다. 제압할 자신이 있다면 모르되, 그렇지 않다면 공연히 야수의 콧털을 뽑는 일 밖에는 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호위 대장은 준상을 막는 것을 포기하고, 대신 손을 벌려 마차 입구를 막아섰다. 그리고 고작 이것이 지금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이란 사실에 좌절했다. “...” 준상은 호위 대장의 행동을 모른 척 한 채 그대로 마차를 지나쳐 뒤쪽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투에 끼어들었다. 뒤쪽을 공격하던 다섯 마리의 괴물들은 앞을 막아선 두 명의 호위들과 접전을 벌이다가 갑자기 나타난 준상에게 기습을 당하자 별다른 저항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차가운 바닥에 몸을 뉘였다. 준상은 전투가 끝나자 주위를 둘러보더니 앞쪽에 쓰러진 불독 대장에게로 돌아갔다. 열 마리가 넘는 괴물들 가운데 시드를 가지고 있는 불독 대장 단 하나 뿐이었기 때문이다. 시드를 회수하자 그제서야 퀘스트가 갱신되었다. 에픽 퀘스트 – 여명 2. 어디선가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듯 합니다. - 조심스럽게 접근해 상황을 살피십시오. (달성) -> 몬스터들이 기습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기습을 저지하십시오. (달성) -> 마차를 포위한 몬스터들을 처치하십시오. (달성) -> 완료! 보상: 경험치 조금 -> 보상을 지금 수령하시겠습니까? (Y/n) _ (주의) 수령하지 않은 보상은 7일후 자동 소거됩니다. “...” 아까보다 보상 경험치가 늘어난 것에 위안을 삼아야 하나. 입맛을 다시며 보상을 수령하자 다시 새로운 퀘스트 정보가 좌측 시야에 나타났다. 에픽 퀘스트 – 여명 3. 모든 이야기는 만남으로부터 시작됩니다. -> 용병 대장과 대화하십시오. (미달성) “...” 준상은 살짝 얼굴을 찌푸린 후 우선 불독 괴물들의 몸을 뒤졌다. 조악한 손도끼와 자루가 부러진 양날 도끼들을 챙기고 다시 불독 대장이 지니고 있던 금화 세 개를 손에 넣은 준상은 그제서야 불안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호위들에게로 다가갔다. 그러자 호위 대장이 얼른 앞으로 나와 준상에게 말을 걸었다. “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그 말을 들은 준상은 이렇게 대답했다. “부탁해라.” “...” 면전에서 그 말을 들은 호위 대장은 물론이고 가만히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부상을 치료하던 호위들 또한 잠시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뭐라고...” “보답을 하고 싶다면 부탁해라.” “...” 호위 대장을 비롯한 호위들은 머리 속이 복잡해졌다. 보답을 하고 싶으면 부탁을 하라니? 보답을 하고 싶다고 부탁을 하란 말인가. 아니면 보답 대신 부탁을 하라는 말인가. 사실 부탁거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갑작스런 괴물의 습격으로 마차를 끌던 두 마리의 말들이 죽어 버린 이상, 이 여행이 무척이나 괴롭고 힘들어질 것은 따로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그런 상황에서 준상과 같은 압도적인 무력의 소유자의 존재는 지금처럼 흉흉한 시기에는 그 무엇보다도 강력한 도움이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제 처음 만난, 누가 봐도 수상하기 그지 없는 사람에게 자신들의 안위를 맡기기는 여러모로 곤란했다. 그 압도적인 무력으로 자신들을, 그리고 자신들이 모시고 있는 분을 노린다면 어찌할 것인가. 차라리 이대로 이전의 마을로 되돌아 가서 다른 운송 수단을 알아보는 편이 호위 대장으로서는 훨씬 안전하게 느껴졌다. “죄송하지만...” 그러나 바로 그때. 마차의 문이 열리며 두 명의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 명은 은은한 보랏빛의 치렁거리는 드레스를 입은 묘령의 갈색 머리 여성이었고, 또 한 명은 수수한 하얀색 드레스를 입은 조금 나이가 있는 탁한 금발의 중년 여성이었다. “아, 아가씨!” 호위 대장은 기겁을 하며 얼른 자신이 아가씨라고 부른 여성에게 달려갔다. “이, 이렇게 나오시면...” 하지만 갈색 머리의 여성은 금방이라도 자신을 다시 마차 안으로 밀어 넣을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호위 대장을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어차피 말도 다 죽은 마당에 마차에 타고 있어봐야 소용없잖아요.” “그거야 그렇지만...” 갈색 머리의 여성은 멀뚱히 바라보고 있는 준상에게 다가와 드레스 자락을 양 손으로 잡으며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헤네스 브레아라고 합니다.” “...” 준상은 아직 젖살이 빠지지 않은 듯 동글동글한 귀여운 얼굴의 여성에게 그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호위 대장과 뒤따라 나온 중년 여성은 준상의 그런 모습에 얼굴을 찌푸렸지만, 헤네스는 재미있다는 듯이 밝게 웃으며 다시 말했다. “굉장히 과묵하시네요.” 그 말에 준상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다.” “그럼요?” “그저 필요 없는 말은 하지 않을 뿐이다.” 그러자 헤네스는 웃으며 대답했다. “보통 그런 걸 과묵하다고 그러지 않나요.” “...” 준상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헤네스는 전혀 개의치 않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까 저희 대장님과 나누는 얘기를 얼핏 들었어요.” “...” “부탁하라고 하셨죠?” 준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헤네스는 알았다는 듯이 마주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말했다. “실은 저희가 좀 곤란한 상황이에요. 그래서 감히 부탁드리겠습니다. 저희가 무사히 목적지까지 도착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그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좌측 시야의 퀘스트 정보가 갱신되었다. 에픽 퀘스트 – 여명 3. 모든 이야기는 만남으로부터 시작됩니다. -> 용병 대장과 대화하십시오. (달성) -> 헤네스 브레아를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데려다 주십시오 (미달성) “...” 일종의 호위 임무라고 생각하면 그만일 수도 있겠지만... 헤네스가 차려입은 모습을 보니 이대로는 퀘스트 하나 깨는데 몇 달이 걸려도 이상하지 않을 듯하다. 당연한 얘기지만 준상은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퀘스트 하나에 그렇게 오랜 시간을 허비할 생각이 없었다. 준상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울프팩.” 헤네스는 자신의 말에는 대답하지도 않고 가만히 허공을 바라보던 준상이 갑자기 영문 모를 말을 중얼거리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준상의 주위에 흰 빛과 함께 거대한 늑대 세 마리가 모습을 드러내자 그녀는 물론이거니와 불안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사람들 역시 경악하고 말았다. “허억!” “저, 저건!” 하지만 준상은 사람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헤네스를 번쩍 안아 올려 소환된 크림슨 울프의 등에 태웠다. “자, 잠깐...” 헤네스는 준상이 갑자기 자신을 안아 올리자 당황하며 그렇게 소리를 지르려다가 이내 크림슨 울프의 등 위에 앉혀지자 입을 닫았다. 자기 정도의 여자 아이는 한 입에 물어 죽일 것만 같은 어마 어마한 덩치를 지닌 늑대의 모습에 기가 질린 탓이다. “아가씨!” “이게 무슨...” 그 모습을 보고 중년 여인과 호위 대장이 기겁하며 헤네스를 향해 움직였다. 하지만 바로 그때, 준상의 입에서 다시 한 마디의 말이 흘러나왔다. “산들바람, 밀어내라.” 그러자 헤네스를 향해 움직이던 사람들은 전신을 감싸는 부드럽게 푹신한 무언가에 의해 주르륵 뒤로 밀려나고 말았다. 어차피 퀘스트에는 헤네스 브레아를 목적지까지 데려다 주라고만 나와 있다. 그렇다면 굳이 걸리적거리는 다른 놈들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는 일이다. 준상은 사람들은 밀어낸 후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는 헤네스에게 다시 말했다. “길은 알고 있나?” “네? 아니, 그게... 그러니까...” 헤네스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했지만, “아나, 모르나.” 준상이 안광을 번뜩이며 묻자 자신도 모르게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아, 알아요!” “어느 방향이지?” “저, 저쪽이요.”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했다. “오픈 질주.” “네?” 헤네스는 무슨 소린가 했지만, 다음 순간 준상은 곧바로 늑대들과 함께 헤네스가 가리킨 방향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꺄악!” 졸지에 안장도 없이 바람처럼 달리는 늑대의 등에 올라타게 된 헤네스는 비명인지 환호성인지 모를 소리를 지르며 붉은 털 위에 매달렸다. “아, 아가씨!” 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크게 놀라며 어떻게든 뒤를 쫓으려 했지만, 준상과 늑대들은 바람처럼 달려 순식간에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호위 대장은 바로 결단을 내렸다. “아, 안되겠다. 너, 너! 돈 줄 테니까 가서 말부터 사와!” “알겠습니다!” “유모님은 마차 안에서 기다리십시오. 너, 그리고 너도 유모님을 지켜라.” “네!” 언제 또 다른 괴물들이 나타날지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헤네스를 정체불명의 남자에게 납치 당한 판국에 더 이상 무엇을 망설이겠는가. “우리들은 먼저 아가씨를 뒤쫓겠다. 표식을 남겨 둘 테니 말을 구해서 빨리 따라오도록!” “알겠습니다!” “가자!” 헤네스는 붉은 털의 늑대에게 태워지고 그 늑대가 바람처럼 달리기 시작하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물론 그녀 역시 숙녀의 소양으로 승마를 익히고 있었지만, 이 붉은 늑대의 등은 말보다 훨씬 낮은 데다 움직임도 훨씬 역동적이었다. 안장이나 등자, 고삐 같은 것도 없이 오로지 자신의 팔 다리 힘만으로 버텨야 하니 적어도 얌전한 규방 처자를 목표로 지금까지 자라온 헤네스로서는 이만 저만한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그녀는 감히 불평을 할 수가 없었다. 바로 옆에 맨몸으로 늑대와 같은 속력을 내며 달리는 준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방향이 맞나?” “그, 그게...” 휘날리는 바람 때문에 똑바로 앞으로 바라보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준상은 다시 조용히 말했다. “산들 바람, 막아서라.” 그 말이 끝나자 헤네스는 자신의 몸 주위를 마구 헤집고 돌아다니던 바람이 어느 순간 자취를 감추어 버렸음을 깨달았다. 혹시 멈추어 선 것인가 하고 다시 고개를 들어 바라보았지만, 자신이 탄 붉은 늑대는 현기증이 날 정도로 빠르게 산을 내려가는 중이었다. “이, 이건...” 헤네스는 그제서야 이 남자가 마법을 사용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이 방향이 맞나?” “네... 맞아요.” 얼굴로 몰아치는 바람이 사라지자 헤네스는 조금이나마 안정적으로 주위를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처음에는 납치를 당하는 것인가 싶은 마음도 들었지만, 무심하기까지 한 표정으로 계속해서 방향을 묻는 그의 모습을 보자 어쩐지 그런 의심도 점차 사그라 들기 시작한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처한 탓일까. 놀람과 두려움으로 인해 두방망이치던 가슴이 진정되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호기심의 유혹에 넘어가 옆에서 바람처럼 내달리고 있는 남자를 훔쳐보기 시작했다. 실눈을 뜬 그녀는 가장 먼저 준상의 옷차림을 살폈다. 격하게 움직이는 탓에 미처 몰랐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이 남자가 입고 있는 옷은 무척이나 섬세하게 재봉되어 있었다. 옷깃 하나도 허투루 박음질된 곳이 없었고, 솔기 하나 터진 곳이 없었다. 그토록 섬세하게 바느질이 되어 있으면서도 저렇게 격렬한 움직임을 무리 없이 소화할 수 있다니. 이 정도의 재봉 실력은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도대체 이 남자는 정체가 뭘까. 헤네스가 그런 생각을 떠올리고 있을 즈음, 준상은 시야의 우측 상단에 위치한 미니맵에 노란색 느낌표가 후두둑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 그냥 느낌표만 뜨고 마는 것이 아니라 퀘스트 정보 역시 새로 업데이트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에픽 퀘스트 – 여명 3. 모든 이야기는 만남으로부터 시작됩니다. -> 용병 대장과 대화하십시오. (달성) -> 헤네스 브레아를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데려다 주십시오 (미달성) (Sub) 시라스의 부탁 ->대화 필요. (Sub) 엔델의 부탁 ->대화 필요. (Sub) 반데스의 부탁 ->대화 필요. (Sub) 코렌의 부탁 ->대화 필요. (Sub) 이겔의 부탁 ->대화 필요. 준상은 급히 걸음을 멈추었다. 그가 질주를 멈추자 크림슨 울프도 덩달아 멈추어 섰다. “꺅!” 그러자, 준상의 모습을 훔쳐보는데 정신이 팔려 있던 헤네스는 갑작스레 몰아치는 관성의 힘을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허공을 한 바퀴 돌며 화려하게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지고 말았다. ============================ 작품 후기 ============================ 하나~둘 일이삼 네에! 호이! 이요~~~~옷 폰 핫 핫 핫 핫 핫 핫 하이야 핫 핫 핫 핫 핫 핫 우~ 자, 자, 자, 지금부터 보시게 될 것은 '약빨중독자'들의 영고성쇠 시대는 언제나 일진월보 들어 봐요 남녀노소 언뜻 보면 권선징악 나쁜 놈들을 일도양단 “근데 정말 약빨만으로 버틸 거야?” 이젠 뭐냐 해도 묵묵부답 핫 핫 핫 핫 핫 핫 하이야 핫 핫 핫 핫 이요~~~~옷 폰! 난데없이 나타나선 바로 어딘가로 가 버려서 신출귀몰 연참를 기다리자니 일일천추 쫓아가면 이리저리 동분서주 시대는 항상 끝없이 천변만화 사람의 마음은 복잡괴기 “근데 진심으로 그 약 빨거야?” 이젠 뭘 해도 만신창이 아, 돌고 돌아서 밤거리 너는 거하게 약을 빨고 연참하기 시작하네 약~ 빨아라 빨아라 빨아라 빨아라 빨아라 빨아라 빨아라 빨아라 빨아라! 화려하게 쌍코피 터뜨리듯이 빨아라 빨아라 빨아라 빨아라 빨아라 빨아라 빨아라 빨아라 빨아라! 머리도 흩날리면서 그저께, 어제, 오늘도 내일도 모레에도 이 연참은 계속돼 약 빨아라, 연참해, 일사분란하게 약을 빨아라! 오늘 밤은 무간진! 호이! 이요~~~~옷 폰! 핫 핫 핫 핫 핫 핫 하이야 핫 핫 핫 핫 핫 핫 우~ 있잖아 있잖아 있잖아 이 세상에 안녕이 찾아올까? 쉴새없고 끊임없는 갑론을박 병사들도 천객만래 북적거리는 군웅할거 짝인가 홀인가 일확천금 정신차리니까 절체절명 “근데 그 약, 맛은 어때?” 이젠 정말이지 기상천외 아, 다다르고 다다라서 밤거리 망설임 하나 없이 약을 빨기 시작하네 약~ 빨아라 빨아라 빨아라 빨아라 빨아라 빨아라 빨아라 빨아라 빨아라! 화려하게 쌍코피 터뜨리듯이 빨아라 빨아라 빨아라 빨아라 빨아라 빨아라 빨아라 빨아라 빨아라! 머리도 흩날리면서 그저께, 어제, 오늘도 내일도 모레에도 이 연참은 계속돼 약 빨아라, 연참해, 일사분란하게 약을 빨아라! 오늘 밤은 무간진! 핫 핫 핫 핫 핫 핫 하이야 핫 핫 핫 핫 핫 핫 사 사 사 핫 핫 핫 핫 핫 핫 하이야 핫 핫 핫 핫 핫 핫 박카스로 하나, 레드불로 둘 손뼉을 쳐 소리내고 몬스터로 셋, 아, 쿠즈하즙으로 넷 울려라 울려라…… 박카스로 하나, 레드불로 둘 손뼉을 쳐 소리내고 몬스터로 셋, 아, 쿠즈하즙으로 넷 울려라 울려라…… 이 약을 빨아라 빨아라 빨아라 빨아라 빨아라 빨아라 빨아라 빨아라 빨아라! 화려하게 쌍코피 터뜨리듯이 빨아라 빨아라 빨아라 빨아라 빨아라 빨아라 빨아라 빨아라 빨아라! 머리도 흩날리면서 그저께, 어제, 오늘도 내일도 모레에도 이 연참은 계속돼 약 빨아라, 연참해, 마구마구 약을 빨아라! 오늘 밤은 무슨 요일이지? 수 목 금? 토 일 월 화? 핫 핫 핫 핫 핫 핫 하이야 핫 핫 핫 핫 핫 핫 호이! 이요~~~~옷 폰! 00055 트롤러 ========================================================================= 낙법 따위 알 리 없는 헤네스가 붉은 늑대의 등에서 떨어진 충격으로 헤롱거리고 있는 동안 준상은 새롭게 나타난 서브 퀘스트를 보며 잠시 고민에 빠졌다. 우선, 보통의 퀘스트와는 달리 에픽 퀘스트는 진행되는 지역이 넓은 이상 한 번에 모든 퀘스트의 정보가 뜨지 않고 일정 범위 안에 들어왔을 때에만 나타난다는 걸 추측해 볼 수 있었다. 문제는 이런 서브 퀘스트를 일일이 해결하고 가야 할지 아니면 빠르게 메인 퀘스트만 해결하고 말 것인가 하는 점이다. 그렇지 않아도 계속해서 퀘스트가 이어지는 에픽 퀘스트의 특성 상 수행 기간이 얼마나 길어질지 모르는 판국인데, 서브 퀘스트까지 일일이 찾아서 수행하게 되면 이 수행 기간은 더욱 더 길어질 수밖에 없다. 이런 생각이 들자 준상은 다시 한 가지 가정을 떠올렸다. 혹시... 너무 빠른 레벨 업이 문제가 된 것은 아닐까. 아니면 협력 퀘스트를 혼자서만 빠르게 처리한 것이 문제가 된 것은 아닐까. 모르긴 해도 자신이 높은 평가를 받은 이상 다른 이들은 그만큼 낮은 평가를 받았을 테니 이런 식으로 일반 퀘스트에서 떼어 놓은 것은 아닐까. “쯧...” 하지만 그렇다고 눈앞에 벌려진 밥상을 그냥 무시하고 지나치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다. 아니, 반대로 생각하면 이런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여행자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친 퀘스트 들을 마저 정리하는 역할이라든가, 아니면 반드시 해결해야 할 퀘스트가 제대로 해결되지 못한 상황을 처리하기 위한 역할이라든가. 그런 식으로 일종의 핀치 히터로서 투입된 것인지도 모른다. 준상이 그렇게 머리 속으로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늑대의 등에서 굴러 떨어진 충격으로 끙끙거리던 헤네스는 그제서야 겨우 몸을 일으켰다. “아으으으...” 등을 세차게 부딪힌 탓에 숨이 콱콱 막히자 얌전하게 자란 헤네스로서는 정말 눈앞이 아득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렇게 겨우 고통을 참고 몸을 일으킨 헤네스에게 돌아온 것은 준상의 무심한 눈길 뿐이었다. “잠시 들렀다 갈 곳이 있다. 타라.” “...” 순간 헤네스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부르르 쥐었다. 이 정체 모를 남자의 머리를 마구 쥐어박고 싶다는 생각이 마음속에서 불끈 불끈 일어났지만, 헤네스는 그것을 간신히 억누르는데 성공했다. “후우...” 심호흡을 하며 다시 한 번 마음을 진정시킨 헤네스였지만 그렇다고 준상에게 반항의 뜻을 보인다거나 하지는 못했다. 다만, 아까 성급하게 모습을 드러내어 말을 건넸던 것만큼은 이미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었다. 그냥 유모 말대로 마차 안에서 가만히 일이 수습되기를 기다릴 걸. 바람처럼 나타난 의문의 투사와 위기에 처한 아름다운 소녀의 로맨스 따위를 기대하고 모습을 드러내는 바람에 이런 터무니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자책할 뿐이다. 하지만 그런 소녀의 복잡한 심리를 알 리 없는, 아니 알 필요조차 없다고 생각하는 준상은 헤네스가 머뭇거리며 시간을 끌자 다시금 그녀의 몸을 번쩍 들어 올려 붉은 늑대의 등 위에 태웠다. “딴 데 정신 팔지 말고 꽉 잡아라.” “...” 그래도 걱정은 되는 걸까 싶어 헤네스는 입을 삐죽거렸지만, 준상의 말대로 단단하게 붉은 늑대의 목을 끌어안았다. 덕분에 어째 영 볼 품 없는 모양새가 되기는 했지만, 의외로 이 붉은 늑대의 털에서는 다른 털가죽과는 달리 깨끗하고 부드러운, 마치 잘 세탁한 담요 같은 느낌이 전해져 왔다. 준상은 헤네스가 다시 크림슨 울프의 등에 오르자 일단 현재 위치를 미니맵에 표시한 뒤 서브 퀘스트가 나타난 지역을 향해 바람처럼 내달리기 시작했다. 계곡 옆의 작은 능선을 넘자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화전민촌이 나타났다. 고작해야 십여 가구가 될까 싶은 작은 마을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갑자기 시퍼런 안광을 번뜩이는 건장한 남자가 붉은 늑대의 등 위에 아리따운 여성을 태우고 나타나자 눈이 휘둥그레질 수밖에 없었다. 준상은 붉은 늑대를 데리고 조악한 화전민촌의 목책을 단숨에 뛰어 넘어 안으로 들어섰다. 사람들은 다급하게 밖으로 나와 무기나 무기를 대신할 만한 물건을 들고 그런 준상을 경계했다. 모처럼의 여행자라고 환대하기에는 준상의 분위기가 너무 심상치 않았던 탓이다. 하지만 막상 그렇게 경계의 대상이 된 당사자는 그런 분위기 따위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여기서 기다려라.” 헤네스는 순간 그의 말이 자신을 향한 것인지 자신이 타고 있는 붉은 늑대를 향한 것인지 헷갈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준상은 그녀가 헷갈리거나 말거나 다시 산들바람에게 명령을 내렸다. “산들 바람, 그녀를 지켜라.” 그 말이 끝나자 산들 바람이 헤네스의 몸 주위를 감싸며 흐르기 시작한다. 대략의 준비를 마친 준상은 곧바로 퀘스트 목표를 향해 움직였다. 가장 첫 번째 목표는 눈앞에서 갈퀴를 들고 준상을 경계하고 있는 중년 남자였다. 남자는 갑자기 준상이 갑자기 자신을 향해 다가오자 갈퀴를 창처럼 움켜잡고 위협을 했다. “머, 멈춰!” 물론 준상은 그런 남자의 말 따위 깨끗하게 무시하고 다가가며 말했다. “부탁해라.” “그, 그게 무슨?” 밑도 끝도 없는 준상의 말에 남자는 당혹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부탁할 것이 있을텐데?” “...” 눈에서 시퍼런 안광을 줄기줄기 뿜어내며 말하는 준상의 박력에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지금 가지고 있는 골치 아픈 문제를 주절주절 말하기 시작했다. “시, 실은... 제가 작은 밭을 하나 일구고 있는데, 얼마 전부터...” 하지만 준상은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은 후 다시 말했다. “본론만.” 남자는 자신이 왜 이런 식으로 협박당하는 듯한 상황에 몰린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떠올릴 틈도 없이 즉각 준상의 말에 반응하며 말했다. “밭에 나타난 멧돼지를 잡아 주십시오!” “...” 하지만 준상은 대답하지 않고 먼저 좌측 시야에 갱신된 메시지부터 확인했다. (Sub) 반데스의 부탁 :반데스는 얼마 전부터 자신의 밭에 나타나 농작물들을 먹어 치우는 멧돼지 일가족 때문에 골치를 썩이고 있습니다. 덫이나 울타리 정도는 우습게 부수고 들어와 작물을 해치는 괴물 멧돼지 일가족을 사냥하십시오. 준상은 퀘스트 정보가 갱신되자 가타부타 말도 없이 반데스를 버려 두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여인에게 다가가 다시 말을 걸었다. “부탁해라.” “...” 여인은 갑자기 자신에게 다가와 영문 모를 소리를 하는 준상의 모습에 화들짝 놀라며 주위에 도움을 청하는 시선을 보냈다. 어리둥절한 건 마을 사람들 뿐만이 아니었다. 갑자기 마을에 들어와 마치 협박하는 듯한 모습으로 그들의 고민거리를 강제로 듣고 있는 준상의 모습에 헤네스 역시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고 보면... 그녀에게도 저런 식으로 부탁할 것을 강요했었다. 하지만 준상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보건 간에 마을을 휘젓고 다니며 강제로 퀘스트를 강탈한 후 신속하게 그것을 해결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엔델의 집이었다. (Sub) 엔델의 부탁 :타지에서 생활하던 엔델은 얼마 전 이곳으로 돌아와 남겨진 조부의 유산을 상속 받았습니다. 하지만 장난기가 심했던 조부는 그의 유산 대부분을 집안 어디엔가 숨겨두었습니다. 엔델을 도와 조부의 유산이 숨겨진 곳을 찾아주세요. 준상은 잠시 고민하다가 헤네스를 보호하고 있던 산들 바람에게 명령했다. “숨겨진 공간을 찾아라.” 명령이 떨어지자 산들 바람은 곧바로 엔델의 집과 그 옆에 딸린 창고를 헤집고 다니며 무언가를 숨겨둘 만한 장소들을 준상에게 알려왔다. 준상은 집 뒤로 가서 작은 바위을 들쳐 보았다. 하지만 그곳에 숨겨져 있던 것은 조부의 유산이 아니라 팔뚝만한 두께의 구렁이였다. “힉!” 엔델은 집 옆에 그런 커다란 구렁이가 있었다는 사실에 기겁했지만, 준상은 무심한 표정으로 구렁이를 잡아 죽인 후 다른 장소를 확인하기 위해 움직였다. 산들 바람이 찾은 두 번째 장소는 집 옆의 허름한 창고 안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자욱하게 쌓인 먼지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산들 바람, 치워라.” 그의 말이 떨어지자 은은하게 불어오던 산들바람은 격하게 창고 안을 휘몰아치며 그 안에 쌓여 있던 먼지를 창고 밖으로 날려 버렸다. 순식간에 묵은 먼지를 깨끗이 털어 버린 준상은 쌓아올린 건초 더미를 파헤지더니 느닷없이 창고 바닥의 판자를 내리쳐 부숴버렸다. “앗! 이런 곳에!” 엔델은 부서진 판자 아래로 돌계단 하나가 모습을 드러내자 화들짝 놀라며 얼른 그 아래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간 그의 눈에 비쳐진 것은 대여섯개의 술통과 곡식의 씨앗이 담긴 포대였다. “아...” 엔델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부가 남긴 유산을 잠시 살펴보더니 이내 기쁜 표정으로 준상에게 돌아와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조부가 남기신 유산을 무사히 찾을 수 있었습니다.” “이게 맞나?” 준상의 물음에 엔델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이 술들은 저와 제 가족들이 태어났을 때마다 빚어두었던 것들입니다. 저희 가족에게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보물들이죠.” “...” 준상은 고개를 끄덕인 후 퀘스트 정보를 확인했다. (Sub) 엔델의 부탁 :타지에서 생활하던 엔델은 얼마전 이곳으로 돌아와 남겨진 조부의 유산을 상속 받았습니다. 하지만 장난기가 심했던 조부는 그의 유산 대부분을 집안 어디엔가 숨겨두었습니다. 엔델을 도와 조부의 유산이 숨겨진 곳을 찾아주세요. ->완료! 보상: 경험치 약간, (엔델의 소개장) -> 보상을 지금 수령하시겠습니까? (Y/n) _ (주의) 수령하지 않은 보상은 7일후 자동 소거됩니다 준상은 먼저 경험치를 수령한 후 엔델에게 손을 내밀었다. “소개장.” 엔델은 숨간 움찔했다. “소, 소개장이라뇨?” “...”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준상의 모습에 엔델은 설마 같은 업계의 사람이었나 싶어 허둥거릴 수밖에 없었다. 조부의 죽음을 기회로 모처럼 이전의 생활을 청산하고 은거할 생각으로 이곳을 찾아온 것이었기에 엔델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준상의 모습에 엔델은 결국 한숨을 내쉬며 이렇게 대답하고 말았다. “알겠습니다. 일단 집으로 가시죠.” 집으로 준상을 데리고 간 엔델은 종이 하나를 꺼내어 간단하게 몇 마디 말을 적은 후 준상에게 건네주었다. “어떻게 알고 찾아오신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이미 길드에서 은퇴한 몸이라 별다른 영향력이 없습니다. 이것으로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 준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후 엔델의 집에서 나와 이번에는 반데스의 밭으로 향했다. 이제나 저제나 하고 기다리고 있던 반데스는 준상이 붉은 늑대 위에 올라탄 헤네스와 함께 당도하자 얼른 달려가 맞아들였다. “마침 잘 오셨습니다. 저기, 저 놈들입니다.” 반데스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니 그곳에는 커다란 멧돼지 한 마리가 새끼로 보이는 작은 돼지들을 이끌고 밭을 열심히 헤집고 있었다. 살펴보니 확실히 괴물이라고 부를 만한 몸집을 지니고는 있었지만 이전에 습지에서 때려잡았던 놈과 비교하니 그다지 크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무투가, 돼지.” “네?” 혹시나 싶어 준상의 뒤를 따르던 반데스는 갑자기 그가 의미 모를 소리를 중얼거리자 자신도 모르게 반문했지만, 다음 순간 벼락 같이 뛰쳐나가 괴물 멧돼지의 옆구리를 어깨로 들이받는 준상의 모습에 입이 떡 벌어지고 말았다. 꽤애애액! 괴물 멧돼지는 준상에게 들이받힌 충격으로 단숨에 절명하고 말았다. 새끼 돼지들은 느닷없이 어미가 죽어버리자 당황해서 이리저리 흩어져 도망쳤지만, 준상의 명령을 받은 다이어 울프와 팀버 울프에게 모조리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멧돼지의 사체를 자루에 담아 인벤토리에 보관한 준상은 엔델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반데스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반데스는 허겁지겁 품안에 고이 모셔뒀던 은반지 하나를 꺼내어 준상에게 건넸다. “제가 드릴 거라고는 이 반지 밖에는...” 준상은 곧바로 반데스가 건네준 반지를 확인했다. 아이템정보 명칭 : 반데스의 반지 레벨제한 : 10 종류 : 반지 등급 : Uncommon 효과 : 석화 저항 5%, 공포 저항 5% Seed : 1슬롯 설명 : 반데스가 우연히 산에서 주운 반지. 가운데 있는 홈에 시드를 장착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00056 트롤러 ========================================================================= 상태 이상에 대한 저항 속성이 둘이나 붙어있다. 지금까지 준상이 얻은 반지 들 가운데 이런 식으로 속성이 둘 이상 붙어 있는 반지는 수호의 묘안석 반지 이후로 처음이었다. 이런 반지를 이런 작은 화전민촌의 평범한 남자가 가지고 있다? 숲에서 우연히 주웠다는 아이템 설명을 보자 준상은 이 화전민촌이 접하고 있는 숲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지만, 당장 퀘스트 정보가 나타나지 않는 이상 일부러 찾아다닐 만한 여유까지는 없었다. 준상은 반데스의 반지를 손가락에 꼈다. 왼손 중지와 약지에 반지를 두 개씩 끼우자 역시 좀 불편한 느낌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반지가 지닌 능력을 포기하기 힘든 것도 사실. “...” 나머지 세 개의 퀘스트는 별 것 없었다. 시라스에게는 아이의 열을 낮춰줄 해열제 성분의 약초를 찾아주었고, 코렌은 노후화된 목책의 일부를 수리해주길 원했으며, 이겔은 숲에서 잃어버린 부인의 목걸이를 찾고 있었다. 준상은 그들의 부탁을 해결해주고 시라스에게는 특제 양념을, 코렌에게서는 크림슨 울프의 등에 채울만한 간이형 안장을, 이겔에게서는 제법 큰 관솔 덩어리로 만든 향초를 보상으로 받았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이 끝나자, 처음 이곳에 왔을 때처럼 바람 같이 달려서 사라져 버렸다. “도대체... 그 사람은 누구지?” “그, 글쎄요.” 마을 사람들은 그제서야 이 정체불명의 남자가 이름조차 밝히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서 달리 알아볼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한편, 헤네스는 크림슨 울프의 등에 안장이 채워진 덕분에 아까보다 한결 편안하게 길을 가고 있었다. 그녀는 고민했다. 도대체 이 남자의 정체가 무엇일까 하고. 뜬금없이 숲 속 깊은 곳에 위치한 화전민촌으로 쳐들어가더니, 원래 알고 있었다는 듯이 마을 주민의 고민거리를 해결해 주고는 대단치도 않아 보이는 보상을 받고 그대로 빠져 나왔다. 퀘스트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 그녀로서는 준상의 행동은 그야말로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준상은 옆에서 헤네스가 그렇게 빤히 쳐다보거나 말거나 묵묵하게 계속 질주를 계속하다가 해가 저물자 그제서야 걸음을 멈추고 야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준상은 우선 캐비닛에서 삽을 꺼내 땅바닥을 파고 그 위에 낙엽을 하나 가득 채워넣은 다음, 방수포를 덮고 나서야 비로소 원터치형 텐트를 설치했다. “와...” 헤네스는 뭔가 뚝딱거리더니 순식간에 잠자리가 만들어지는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특히나 순식간에 확 하고 펼쳐지는 원터치형 텐트는 너무나 신기할 따름이었다. 준상은 잠자리가 마련되자 곧바로 남은 두 마리의 늑대를 마저 불러낸 후, 곰의 영혼을 빼고 도깨비불을 불러냈다. 준상은 우선 산들 바람에게 명령을 내렸다. “산들 바람, 주위를 경계하고 침입자를 막아라.” 산들 바람이 그의 명령을 받고 사라지자 준상은 다시 세 마리 늑대에게 명령했다. “주위를 경계하라.” 그러자 늑대들은 텐트 주위를 세 방향으로 나누어 서서 주변을 경계하기 시작한다. 그 모든 작업이 끝나고 나서야 준상은 구덩이를 파고 돌로 주위를 둘러 간단한 화덕을 만든 후 땔감으로 쓸만한 나뭇가지를 모아 모닥불을 피웠다. 멀티툴로 나무를 깎아 두 개의 받침대를 세우고 그곳에 반합을 건 다음 물을 끓인다. 헤네스는 한켠에 선 채로 마치 마법처럼 순식간에 그 모든 일들이 벌어지는 광경을 멍하니 지쳐보고만 있었다. 준상은 대략의 준비가 끝나고 나서야 그녀를 손짓해 불렀다. “왜... 요?” 머뭇거리며 헤네스가 다가서자 준상은 캐비닛에서 트레이닝복 하나를 꺼내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이걸 입어라.” “...” 헤네스는 자신에게 건네진 옷을 살펴보았다. “이걸... 입으라고요?” “그대로 잘 거면 그러던가.” “...” 준상의 말에 헤네스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텐트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좁은 공간에서, 그것도 혼자 드레스를 벗는 일은 무척이나 번거롭고 어려운 일이라 제법 시간이 많이 지난 뒤에야 헤네스는 간신히 옷을 갈아입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그 동안 준상은 반데스의 밭에서 잡았던 멧돼지 들을 해체한 후 그 고기를 굽고 있었다. 준상은 반합 뚜껑에 시라스의 특제 양념을 발라 구운 고기를 잘라 담은 후, 머그컵에 끓인 물을 붓고 즉석 스프를 타서 헤네스에게 건네주었다. “아...” 익숙하지 않은 트레이닝복 차림 탓에 쭈뼛거리며 다가서던 헤네스는 자신에게 건네진 음식들의 냄새로 인해 그때까지 지니고 있던 경계심을 잊고 말았다. 순식간에 자신의 몫을 먹어치운 헤네스는 마치 소가 되새김질 하듯이 고기를 천천히 씹고 있는 준상의 모습을 흘깃 바라보며 말을 걸었다. “아까... 그 마을에는 왜 갔던 거죠?” 원래부터 용무가 있었다고 보기에는 여러모로 기묘한 행동이었기에 던진 질문이었지만, 준상의 대답은 간단했다. “필요한 일이었으니까.” “...” 헤네스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뭔가 더 말을 걸기가 뭐한, 더 이상 묻지 말라는 뉘앙스가 담긴 듯한 대답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헤네스는 다시 용기를 내어 다시 말했다. “필요한 행동이었던 것 치고는 너무 무뚝뚝했던 것 같은데요.” 하지만 이번에도 준상의 대답은 간결했다. “필요 없는 일이었으니까.” “...” 헤네스는 너무나 간결한 대답에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그의 말에 담긴 속뜻을 해결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러니까, 준상의 말은 이런 뜻이었다. 부탁을 들어주는 행위 자체는 필요한 일이었지만, 친근하게 대하거나 하는 일은 필요 없는 일이니까 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 말의 뉘앙스를 곰곰이 생각해 보던 헤네스는 다시 준상에게 말을 걸었다. “음... 저는 아직 어려서 잘은 모르지만요.” “...” 운을 떼자 가만히 모닥불을 바라보고 있던 준상의 시선이 헤네스에게로 향했다. 헤네스는 낮에 보았던 안광이 번뜩이는 눈빛을 연상하고 흠칫 놀랐지만, 이내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낮에 보았던 그것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고 용기를 내어 말을 이었다. “아버지가 그러셨어요.” “뭐라고?” “기왕 해야 할 일이라면 애정을 가지고 하는 편이 즐거운 법이라고요.” “...” 그랬다. 헤네스가 보기에 준상은 마치 싫은 일을 억지로 하는 듯한 모습을 풍기고 있었다. 아니, 뭔가 틀리다. 단순히 하기 싫어서 짜증을 부린다고 이해하고 넘어가기에는 뭔가 미묘하게 다른 느낌. 그러다보니 마을 사람들의 부탁을 들어주면서도 딱딱하고 경직된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었고, 좋은 일을 하면서도 마치 협박하는 모양새가 되어버리고 만다. 헤네스는 그것이 안타까웠다. 조금만 부드럽게 대했다면, 조금만 친절하게 말을 건넸다면... 마을 사람들도 그렇게 경계하는 시선으로 그들을 떠나보내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준상은 그녀의 말을 듣고 쓴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이 세계에 대해 애정을 가지라니, 너무 무리한 요구로군.” “네?” 헤네스는 무슨 말인가 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준상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자라. 내일도 하루 종일 달려야 할 테니까.” “...” 준상은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늑대들에게 멧돼지의 고기와 뼈를 나누어 주었다. 헤네스는 뭔가 더 말을 붙여볼까 하다가 다시 서늘하게 가라앉은 그의 눈빛을 보고는 그만 두었다. 텐트 안으로 들어간 헤네스는 푹신한 침낭 안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후...” 몸이 피곤한 탓일까. 머리 속이 복잡하기는 했지만, 생각보다 잠자리가 포근했던 탓인지 헤네스는 금방 잠이 들고 말았다. 그리고 다음 날. 그녀는 새벽에 요의를 느끼고 잠에서 깨어났다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바로 옆에서 준상이 침낭 속에 들어가 잠을 자고 있었기 때문이다. “...” 헤네스는 잠시 고민했다. 여기서 비명을 지르는 것이 맞을까, 아니면 그냥 모르는 척 일을 보고 와서 다시 자는 것이 맞을까. 뭔가 애매한 문제다. 설령 무슨 일이 벌어지지 않았더라도 남자와 함께 밀폐된 공간에서 잠을 잤다는 그 행위 자체만으로도 그녀의 청정이 더럽혀질 가능성이 있음을 감안한다면, 여기서는 일단 비명을 지르고 그가 나가든 그녀가 나가든 양단간에 택일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만드는 것이 옳다. 헤네스는 그런 생각을 떠올리고 나서야 깨달았는지 자신의 옷매무새를 살폈다. 하지만 딱히 손을 댄 흔적은 느껴지지 않았다. 손을 대지 않은 이상 굳이 여기서 소란을 일으킬 필요가 있을까. 하지만 반대로 이 상황을 그냥 용납한다면 자신이 상대를 받아들인다는 뜻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끙끙거리며 고민하던 헤네스는 일단 요의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조심스럽게 텐트 밖으로 기어나온 헤네스는 신발을 신고 천막에서 나왔다. 그녀가 텐트 밖으로 나오자 모닥불 근처에서 엎드려 있던 회색 늑대가 몸을 일으키더니 마치 호위병처럼 조금 떨어진 곳에 버티고 섰다. “...” 헤네스는 늑대가 지켜보는 모습을 보고 어쩐지 창피해졌지만, 더 이상 참기 어려웠던 탓에 일단 수풀로 들어가 일을 보았다. 혹시나 소리가 들릴까 싶어 조심스럽게 일을 마치고 나온 헤네스는 불길이 많이 약해진 모닥불로 다가가 땔감을 몇 개 집어넣었다. 그리고 모닥불을 바라보며 고민에 빠졌다. 이대로 다시 들어가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그냥 모닥불 옆에서 나머지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을까. 하지만 그녀의 고민은 얼마 지나지 않아 서늘한 바람이 불빛이 닿지 않는 등골을 스치고 지나가자 사라지고 말았다. “그래, 깨지 않도록 조심하면 되잖아.” 헤네스는 그렇게 결정을 내리고 조심스럽게 텐트로 들어가 푸근한 침낭 안에 몸을 집어 넣었다. “후우...” 침낭 안에 돋아나 있는 부슬부슬한 솜털에 몸이 닿자 헤네스는 그 포근함에 취해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바로 그때였다. “쿡쿡...” 영락없이 자고 있으리라 생각했던 준상의 입에서 웃음소리가 새어나온 것이다. “...” 당황한 헤네스는 마치 고치 속으로 숨어드는 애벌레처럼 침낭 속으로 머리를 숨겼다. 그런 그녀에게 준상의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넌 요정을 닮았구나.” “...” 준상은 헤네스의 행동이 이전에 보았던 이니아나 일마렌 같은 요정들의 행동거지와 닮았다는 의미로 말한 것이었지만, 그와 요정들 사이에 있었던 일에 대해 전혀 모르는 헤네스는 갑작스런 그의 말에 헷갈릴 수밖에 없었다. 요정이랑 닮았다니. 도대체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준상은 그 말을 남긴 후 다시 잠이 들어 버렸지만, 머리 속이 복잡해진 헤네스는 쉽게 잠이 들지 못했다. 00057 트롤러 ========================================================================= 아침이 되었다. 준상은 주위가 밝아오자 자리에서 일어나 모닥불의 불씨를 살린 뒤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 새벽에 깨서 그때까지 잠들지 못하고 있던 헤네스는 그가 태연하게 침낭을 정리하고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모습을 보자 왠지 심통이 났다. “치...” 침낭 속에 숨은 채 텐트 밖에서 무언가 구수한 것을 끓이고 있는 준상에게 꿀밤을 먹이는 시늉을 하던 헤네스는, 갑자기 시선을 돌린 그와 눈이 마주치자 얼른 자는 척 몸을 숨겼다. “일어났으면 그만 나와. 바로 출발해야 하니까.” “...” 헤네스는 새벽 내내 뒤척거리며 깨어 있던 것도 이미 다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안 나오면 아침 식사는 없다.” “나, 나가요!” 안 그래도 뭔지 모를 구수한 냄새 때문에 군침이 슬며시 입 안에 고이던 참이었던 헤네스는 기겁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텐트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준상은 그런 헤네스에게 다시 말했다. “침낭.” “...” 헤네스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준상이 해놓은 것을 참고로 해서 침낭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해봐도 준상이 말아놓은 것처럼 예쁘게 각이 잡히지를 않는다. “이씨...” 그렇게 투덜대며 풀었다 묶었다를 반복하고 있는데 다시 준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충 하고 와라.” “...” 결국 헤네스는 만족스럽지 않은 표정으로 침낭 정리를 마친 후 텐트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준상은 그런 그녀에게 묘한 재질의 컵 하나와 스푼을 건네주었다. “이건... 뭐죠?” “아침 식사.” “...” 헤네스는 그제서야 준상 역시 자신과 비슷한 컵을 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준상은 마치 그녀에게 잘 보라는 듯이 컵 위에 덮여 있는 검은 뚜껑을 연 뒤, 그 안에 든 내용물을 한 번 휘휘 저어 보이고는 스푼으로 떠먹기 시작한다. 헤네스는 그 모습을 유심히 살핀 후 그대로 따라해 보았다. 안에 뜨거운 것이 들어 있음을 알기에 조심스럽게 검은 뚜껑을 연 다음 스푼으로 내용물을 한 번 저은 뒤 우선 국물을 한 스푼 떠서 마셔 보았다. “음?” 부드러우면서도 고소한데다 개운하기까지. 헤네스는 난생처음 먹어보는 신기한 맛에 놀라 준상에게 물었다. “이, 이게 뭐죠?” “아침 식사.” “아니, 그러니까... 요리 이름이요.” “콩나물 북어국.” “콩나... 무르... 크흠.” 맛만큼이나 생소한 이름이라 헤네스는 그만 혀를 씹을 뻔 했다. 준상은 그런 헤네스의 모습을 보며 피식 웃은 뒤 천천히 밥알을 씹었다. 헤네스는 괜히 음식 이름 따라 하다가 부끄러운 꼴을 당할 뻔 하자 이후로는 묵묵히 손 안에 든 아침 식사를 음미하기만 했다. 준상은 식사가 끝나자 늑대들에게 다시 멧돼지 고기를 나누어 주고는 어제 머물렀던 자리를 정리했다. 침낭을 챙기고 텐트를 접은 후 바닥에 깔았던 방수포를 걷어낸다. 인벤토리에서 캐비닛을 꺼내 물품들을 집어넣은 준상은 반합을 비롯한 취사 도구들 역시 따로 챙겨 넣은 다음 쓰레기 역시 비닐 봉투에 담아 정리했다. 헤네스는 자신이 음식을 다 먹기도 전에 출발 준비가 끝나자 당황했다. “아, 아직... 다 못 먹었는데...” “천천히 먹어라. 할 일이 있으니.” “네...” 준상은 잠자리를 정리하기가 무섭게 체조로 간단하게 몸을 풀기 시작했다. 헤네스는 그제서야 안도하며 조심스럽게 식사를 이어갈 수 있었다. 그녀가 식사를 마치자 준상은 용기와 스푼을 정리한 후 캐비닛을 다시 인벤토리에 넣고 출발 준비를 시작했다. 그런 준상을 향해 헤네스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저... 제 드레스는...” “그 불편한 걸 다시 입고 저걸 타겠다고?” “...” 준상의 말이 맞기는 한데... 뭔가 잠옷만 입고 나다니는 듯한 기분이라 좀 찜찜하다. 헤네스의 그런 모습을 흘깃 본 준상은 다시 캐비닛을 하나 꺼내더니 오리털 파카 하나를 꺼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남자용이라 그런지 얼결에 입고 나자 그대로 옷 속에 파묻힌 듯한 형상이 되어 버렸다. “이제 문제없지?” 원래 이런 것을 원했던 것은 아니지만, 무뚝뚝한 그가 이 정도까지 신경을 써주었는데 아니라고 하는 것도 난감한 일이다. “네...” 헤네스는 그렇게 대답한 후 스스로 크림슨 울프의 등에 채워진 안장에 올라탔다. 크림슨 울프는 흘깃 뒤돌아보는가 싶더니 헤네스가 자세를 잡자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준상이 천천히 달리기 시작한다. 크림슨 울프 역시 그 뒤를 따른다. 처음에는 천천히 달리는가 싶더니, 이내 준상이 질주를 발동하자 그들은 다시금 바람을 뚫고 황야를 달리기 시작했다. 헤네스는 말없이 준상의 달리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다가, 문득 자신이 아직 이 남자의 이름조차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세상에. 이름도 모르는 남자랑 밤을 함께 보내고 아침을 맞이하다니. 헤네스는 그런 생각을 떠올리다가 그 말의 묘한 뉘앙스에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크흠... 저기요.” “...” 준상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헤네스는 다시 말했다. “하나만 물어볼게요.” “...” “이름이 어떻게 되요?” 참 빨리도 묻는다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준상은 선선히 이름을 말해 주었다. “박준상.” “박... 크흠...” 다시 한 번 혀를 씹을 뻔한 헤네스는 속으로 투덜거릴 수밖에 없었다. 음식이름도 그렇고, 어떻게 이름이 전부 하나 같이 그렇게 괴상한 건지. 아무래도 저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려면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떠올리던 헤네스는 다른 말을 꺼냈다. “그렇게 달리는 것도 필요한 일인가요?” 사실 어제부터 좀 이상하게 느꼈었다. 그는 자신이 타고 있는 붉은 늑대 말고도 비슷한 체구를 지닌 아름다운 은색 털빛의 늑대 또한 불러낼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물론 체구 자체가 자신과 다르긴 하지만 그래도 타려고 마음먹으면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 같은데... 준상은 그런 것은 전혀 고려하지도 않는다는 듯이 그저 묵묵히 달리고 또 달릴 뿐이었다. “필요한 일이다.” 여전히 단답형이기는 했지만 그냥 고개를 끄덕이거나 하지 않은 것만도 어디인지. 헤네스는 반색하며 다시 물었다. “힘들지 않아요? 그냥 저처럼 늑대를 불러 타고 가는 편이 나을 것 같은데.” 그 말을 들은 준상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힘든 만큼 강해지니까.” “아...” 달리는 것 자체가 수련의 일종이라면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다. 평소에도 쉬지 않고 단련을 하니까 그만큼 강한 것이 아닐까. 어쨌거나 일단 준상의 말문을 여는데 성공한 헤네스는 달리는 내내 계속해서 준상에게 말을 건넸다. 자기가 다니던 기숙학교의 일이라든가, 그녀가 태어난 고향의 일이라든가... 지치지도 않고 계속해서 말을 건네는 그녀의 모습에 준상은 피식 웃어 버리고 말았다. 어쩐지 어깨 위에 올라 앉아 열심히 재잘대던 요정들의 모습이 다시금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렇게 오전 내내 달리던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한적한 작은 개울에 도착할 수 있었다. 태양의 높이를 가늠하던 준상은 일단 멈추어서더니 헤네스에게 말했다. “이곳에서 쉬었다 간다.” “네!” 헤네스가 크림슨 울프의 등에서 내리는 동안 준상은 성큼 성큼 개울가로 다가가더니 그대로 땀에 젖은 상의를 벗고 몸을 씻기 시작했다. 늑대 등에서 내려서던 헤네스는 갑자기 그가 웃통을 훌렁 벗고 몸을 씻기 시작하자 당황해서 얼른 몸을 돌렸다. “후아...” 헤네스는 놀랜 가슴을 진정시키면서도 은근히 호기심이 일어났다.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훔쳐보자 우람한 그의 등 근육이 한 눈에 들어온다. 꿀꺽. 헤네스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남자 몸이란 것이 원래 저랬었나.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준상의 뒷모습을 훔쳐보던 헤네스는 그가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자 화들짝 놀래며 다시 뒤돌아섰다. “...” 준상은 모르는 척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씻어라.” “네? 아니... 그게... 저는...” “머리라도 감아. 냄새 난다.” “...” 아름답다는 말은 못할망정, 냄새가 난다니... 하긴 기숙 학교를 출발한 이후 제대로 머리를 감지 못한 건 사실이지만, 적당히 에둘러 말 할 수도 있는 일 아닌가. 하지만 헤네스는 이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애초에 그 정도의 배려를 해줄 정도의 남자였다면 말문 좀 열어주겠다고 자신이 오전 내내 입 아프게 떠들 일도 없었으리라는 생각을 떠올린 탓이다. 헤네스는 입고 있던 오리털 파카를 벗어 안장 위에 걸쳐 두고 물가로 나왔다. 그런 그녀에게 준상이 무언가 통 같은 것을 건네주었다. “이건...” “머리 감을 때 써라.” “...” 건네 준 통을 보니 모양이 어쩐지 빨래 방망이처럼 생겼다. 설마 빨래하듯이 이걸로 머리를 두들겨 대라는 건 아니겠지 하면서 멀뚱히 바라보자, 준상은 피식 웃으며 다시 말했다. “손.” “여, 여기요.” 헤네스가 손을 내밀자 준상은 그녀의 손에 샴푸를 짜 주었다. “음? 이건...” “먼저 물로 머리를 적신 다음 그걸 문질러라.” “...” 헤네스는 미심쩍어 하면서도 호기심이 일어 그의 말대로 해보았다. 그랬더니... 세상에! 이 짙은 향기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 부드러운 거품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그렇게 마음속으로 탄성을 지르며 머리를 감고 나자 준상은 다시 또다른 통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손.” “...” 이번에는 망설임 없이 손을 내밀었다. 준상은 어쩐지 강아지 길들이는 듯한 느낌이란 생각에 피식 웃으며 그녀의 손에 린스를 짜주었다. “이걸로 머리를 문지른 다음 다시 헹궈내.” “네!” 헤네스는 열심히 그의 말대로 손에 담긴 무언가를 머리카락에 문질렀다. 아까처럼 거품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향기는 오히려 더 진하게 느껴진다. 린스까지 마치고 머리를 물로 헹구자 준상은 다시 비누를 건네주었다. “이건 손과 얼굴을 닦는 물건이다.” “...” 개울물이라 그런지 생각처럼 거품이 잘 나지는 않았지만, 헤네스는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준상의 행동을 지켜보고는 그대로 따라 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이 남자는... 마치 이야기 속에 나오는 마법의 요정 같다고. 부탁만 하면 뭐든지 들어주는, 그런 마법의 요정 말이다. 다만 사근사근하게 소원을 묻는 마법의 요정과는 달리, 협박하듯 소원을 묻는다는 것이 다른 점이긴 하지만 말이다. 헤네스는 준상이 사근사근한 말투로 소원을 묻는 장면을 연상하다가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푸훗!” “...” 준상은 손 씻다 말고 웃음을 터뜨리는 그녀의 모습을 보았지만 모르는 척 캐비닛에서 잘 마른 수건을 꺼내어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다 씻으면 그걸로 닦아.” “네.” 아, 수건 또한 어찌 이리 부드러운지. 절로 콧노래가 나올 정도다. 준상은 간단하게 구덩이를 파고 불을 피우다가 헤네스가 다가오자 가만히 입을 열었다. “산들 바람, 머리 좀 말려 주도록.” “네?” 갑자기 무슨 소린가 싶었지만,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조금 세찬 바람이 그녀의 머리를 이리저리 헝클어뜨리며 물기를 말리기 시작했다. “우읏!” 뭔가 정신없이 불어대더니 순식간에 머리카락의 물기가 사라져 버린다. 준상은 머리가 마르자 그녀에게 빗과 손거울을 꺼내 주었다. “빗어라.” “와아!” 헤네스는 투명하게 비치는 거울을 보고는 다시 한 번 탄성을 터뜨렸다. 세상에! 이렇게 깨끗하게 비치는 거울이라니! 헤네스가 거울을 보며 바람 때문에 제멋대로 헝클어진 머리를 빗으로 정리하는 동안 준상은 간단하게 점심 식사를 준비했다. 그래봐야 시라스의 특제 양념을 바른 구운 멧돼지 고기와 컵에 담은 즉석 스프였지만 헤네스는 보는 사람이 절로 흐뭇해질 정도로 맛있게 식사를 마쳤다. “후아...” “...” 말끔하게 몸을 씻고 맛있는 식사까지 하고 난 헤네스는 준상이 식기를 물에 닦는 것을 도우면서 슬그머니 말을 꺼냈다. “있잖아요. 제가 생각해 봤는데요.” “...” 또 무슨 얘기를 꺼내려고 그러는 것일까. 준상은 모르는 척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그... 부탁 들어주는 거 말이에요.” “그게 왜?” “일일이 말을 들어주는 것이 귀찮으시면... 그 역할, 제가 하면 어떨까요?” “...”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헤네스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생각해보니까요. 하는 것도 없이 그냥 이렇게 도움만 받는 것도 뭐하고...” “...” “제가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듣는 동안 다른 사람의 부탁을 해결하고, 그런 식으로 일을 나눠서 해보면 어떨까 하는데요.” 준상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신경 쓸 필요 없다. 어차피 보상을 받을 테니까.” 이 보상이라는 말에 경험치라는 것이 포함된다는 것을 모르는 헤네스는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그거야 그렇지만... 그래도 가는 동안만이라도 뭔가 도움이 되고 싶어요.” “...” “안될까요?” 안될거야 없다. 불필요하게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에 시간을 빼앗길 이유가 없으니 그로서는 오히려 일이 편해진다. 구질구질한 긴 얘기는 그녀가 전부 듣고, 자신의 요약된 내용만 전달 받으면 끝이니 말이다. 게다가, 그녀는 플레이어도 아니니 퀘스트의 보상을 나누어줄 필요도 없다. “멋대로 해.” “감사합니다!” 00058 트롤러 ========================================================================= 그녀가 활약할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설거지가 끝나자 준상은 새로 물을 받아 정수제로 소독을 마친 후, 다른 짐들과 함께 보관한 후 다시 천천히 이동을 시작했다. 아무리 준상이 철혈의 체력을 지녔어도 식사를 마치고 바로 전력 질주를 하는 건 무리가 있었기 때문에 조금은 느긋하게 이동을 하고 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시야에 새로운 퀘스트의 정보가 나타났다. (Sub) 대상을 구원하라. :황야를 횡단하던 상단이 몬스터 무리의 습격을 받고 있습니다. 몬스터들을 물리쳐 그들을 구원하십시오. (Sub) 게트로의 부탁 -> 대화 필요. 퀘스트 목록을 확인하기가 무섭게 준상은 헤네스에게 말했다. “달린다. 꽉 잡아라.” 헤네스는 모처럼 느긋하게 주위의 풍경을 감상하고 있다가 준상의 말을 듣고는 화들짝 놀라며 안장의 손잡이를 단단히 움켜 잡았다. 그녀가 준비를 마치자 준상은 곧바로 미니맵에 나타난 노란색 화살표를 향해 전력 질주를 시작했다. “우아아앗!” 한동안 좀 느긋하게 이동했던 반동일까. 헤네스는 갑작스런 전력 질주에 놀라 크게 소리를 지르다가 스스로도 깜짝 놀라며 입을 다물었다. 준상은 입을 다물고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헤네스의 모습에 다시금 요정들과의 일이 떠올라 피식 웃어 버렸다. 물론 그래봐야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수준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아무튼, 준상과 헤네스는 오래지 않아 습격을 당하고 있는 한 무리의 상단과 조우했다. 상단은 마차를 둥글게 모아 방벽으로 삼은 뒤, 커다란 하이에나 같은 모습을 지닌 한 무리의 야수들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준상은 두 개의 퀘스트 표식이 모두 상단 안쪽에 표시되어 있음을 확인한 후 헤네스에게 말했다. “그대로 안으로 들어가 게트로라는 사람과 대화하도록.” 헤네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떻게 이름을 알고 있는 것일까. 원래부터 저 상단의 인물과 알고 지내는 사이였던 걸까? 뭔가 잔뜩 의문이 생기긴 했지만, 지금은 그걸 따질 상황이 아닌데다 처음으로 부탁을 대신 들어주는 임무를 수행할 기회가 왔다는 사실 또한 깨달았다. “맡겨주세요!” “좋아. 산들 바람, 그녀를 지켜라! 가라!” 준상의 명령과 함께 그녀의 앞에서 바람 막이 역할을 하고 있던 산들 바람은 방어 태세로 전환되었고 크림슨 울프는 곧장 야수들을 돌파하기 시작했다. “으앗!” 둥글게 세워진 마차 안쪽에서 야수들과 대치하고 있던 사람들은 피처럼 붉은 털을 지닌 거대한 늑대가 다가오자 화살을 쏘려 했지만, 이내 그 등에 채워진 안장에 긴 갈색 머리를 깃발처럼 펄럭이는 소녀가 앉아 있음을 알아보았다. “저, 저건?” 늑대를 말처럼 타고 다니는 소녀라니? 당황해서 잠시 공격할 기회를 놓친 틈을 타 붉은 늑대는 마차를 훌쩍 뛰어 넘었다. “적이 아니에요! 도우러 왔어요!” 헤네스는 얼른 늑대의 등에서 뛰어 내리며 다시 말했다. “게트로씨, 게트로씨 계신가요?” 그녀의 목소리에 반응해 중년 남자 하나가 사람들 틈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대답했다. “내가 게트로요. 그 붉은 늑대는...” 하지만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마차 방벽 바깥에서 야수들의 비명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한다. -캐앵! -캐갱! 폭풍이 몰아친다. 마치 거대한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치는 한 사람이 야수들을 덮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준상이었다. 푸른 안광을 번뜩이며, 야수들에게 폭풍처럼 달려 들어 단숨에 때려 눕히는 그 모습에 사람들은 자신들의 처지조차 잊고 그저 멍한 시선을 보낼 수 밖에 없었다. 헤네스는 준상의 모습을 보고 주먹을 불끈 쥐더니 다시 게트로에게 말했다. “바깥의 야수들은 저 분에게 맡기시면 되니까 걱정 마세요.” “다, 당신들은 도대체...” “저희들의 정체는 중요한 것이 아니에요. 그보다 중요하고 급한 일이 있지 않나요? 게트로씨.” “...” 게트로는 마치 회오리바람에 휘말린 잡동사니처럼 이리 저리 날아가 버리는 야수들의 모습과, 눈앞에서 자신 만만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 소녀의 모습을 보고 잠시 혼란에 빠졌다. 하지만 헤네스는 그런 게트로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희에게 부탁하세요. 그럼 이루어질 거에요.” “...” 어떻게 보면 그것은 준상이 퀘스트를 강탈할 때마다 던지던 ‘부탁해라’라는 말과 그리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헤네스의 부드러운 미소가 더해지자 그 말의 의미는 증폭되어 하나의 복음처럼 사람들의 가슴 속에 각인되었다. 게트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헤네스를 향해 말했다. “알겠소. 그렇다면 내 부탁하리다.” 헤네스는 고개를 끄덕인 후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 말을 기다렸어요.” 헤네스가 게트로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준상은 빠르게 야수들을 정리했다. -크와앙! 전면에서 야수가 커다란 입을 벌리며 달려들자, 준상은 침착하게 우측으로 몸을 숙이더니 그 반동을 이용해 야수의 머리에 강렬한 훅을 선사했다. 퍼걱! 순식간에 머리뼈와 턱뼈를 잇는 부위에 적중한 준상의 주먹은 그대로 뼈를 부수고 틀어박혔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땅바닥에 처박힌 야수에게 다가가 그 목을 짓밟아 부러뜨린 준상은 곧바로 숄더 차지를 발동해 틈을 보인 또 다른 야수의 옆구리를 들이받았다. -캐앵! 포탄처럼 쏘아져 나간 준상에게 들이받힌 야수는 비명을 지르며 튕겨 나갔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또 다른 한 마리의 야수가 숄더 차지로 인해 자세가 흐트러진 준상의 등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피하기는 이미 늦은 상황이었지만 준상은 침착하게 뒤로 돌아서며 자신의 목을 노리고 달려드는 야수의 길쭉한 입을 양손으로 낚아챘다. -크와아앙! 야수는 자신의 입이 잡히자 발톱을 세워 준상의 팔뚝을 할퀴었다. 하지만 준상은 그런 상처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야수의 윗 턱과 아래 턱을 붙잡은 손에 힘을 주어 그대로 찢어 버렸다. -케에엑! 턱이 빠지고 입이 찢어지자 야수는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을 쳤지만, 곧바로 준상의 시커먼 군화발이 그 배에 틀어박히자 마치 축구공처럼 허공을 날아 상인들이 방벽 대신 세워놓은 마차와 격돌했다. 크르륵. 야수는 내장이 파열되어 피거품을 뿜으면서도 어떻게든 몸을 일으켜 세우려 했지만, 결국 그대로 쓰러져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야수의 발톱에 의해 할퀴어진 준상의 팔뚝이 흰 연기를 뿜으며 재생에 들어갔다. 몸에서 아지랑이와 흰 연기를 뿜어내며 푸른 안광을 번뜩이는 준상의 모습에, 야수들은 도저히 자신들의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그제서야 깨닫고는 곧장 꼬리를 말며 도망치기 시작한다. 뒤를 쫓아 섬멸해야 할지 고민하는데 좌측 시야에 나타나 있던 퀘스트 정보가 갱신되었다. (Sub) 대상을 구원하라. :황야를 횡단하던 상단이 몬스터 무리의 습격을 받고 있습니다. 몬스터들을 물리쳐 그들을 구원하십시오. ->완료! 보상: 경험치 조금, (금화) -> 보상을 지금 수령하시겠습니까? (Y/n) _ (주의) 수령하지 않은 보상은 7일후 자동 소거됩니다. 그리고 곧바로 마차 방벽 안으로 들어갔던 헤네스가 크림슨 울프에 탄 채 준상에게 달려왔다. 그녀는 급하게 늑대에서 내리더니 팔의 상처부터 살폈다. “괜찮...” 하지만 이내 흰 연기와 함께 무서울 정도의 속도로 아물어 가는 상처를 보고 크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세, 세상에...” 준상은 속으로 쓴웃음을 삼키며 그녀에게 말했다. “갔던 일은?” “네? 아... 그게 말이죠. 후발대로 손녀분이 따라오고 있는데, 무사한지 걱정하고 있더라구요.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들을 호위해서 자신들에게 데려다 주기를 바라던데요.” “...” 헤네스의 말이 끝나자 곧바로 퀘스트 정보가 갱신되었다. (Sub) 게트로의 부탁 :원래 이 평원은 몬스터나 야수들이 출몰하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게트로는 몸이 안 좋아서 뒤처지게 된 손녀 때문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후발대를 찾아내 본대와 무사히 합류시키십시오. 준상이 고개를 끄덕이자 헤네스는 품에서 가죽 주머니 하나를 꺼내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이건 방금의 보답을 겸해서 호위료 선불이래요.” “...” 받아들고 보니 꽤나 묵직하다. 하지만 보답은 그렇다 치더라도 선불이라니? 의아해 하는 시선으로 바라보자 헤네스는 옆구리에 손을 척 얹은 자세로 잘난 척을 했다. “엣헴. 브레아 가문이라고 하면 이벨류아 지방에서는 제법 알아주는 명문가랍니다. 제가 브레아 가문의 막내딸이라고 하니까 게트로씨도 놀라더라구요.” “훗.” 그냥 떼어 먹고 도망이라도 치면 어쩌려고 선불까지 받아왔나 싶었지만, 준상은 그냥 모르는 척 헤네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수고했다.” 헤네스는 커다란 준상의 손에 머리 위에 얹어지자 당황하며 어쩔 줄을 몰랐다. “아, 아뇨. 수고랄 것 까지야... 앗!” 하지만 준상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녀의 몸을 번쩍 안아올려 크림슨 울프의 등에 태우며 말했다. “바로 출발할 테니 꽉 잡아라.” “...” 헤네스는 어쩐지 어린애 취급 당하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는 입을 삐죽거렸지만, 그래도 볼썽 사납게 굴러 떨어지고 싶지는 않았던지 안장의 손잡이를 꽉 움켜잡았다. 준상은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고는 곧바로 미니맵을 통해 방향을 가늠한 뒤 질주를 시작했다. 물론, 이번에도 그저 입 꼬리가 미미하게 올라간 정도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 남겨진 상단의 사람들은 폭풍처럼 나타나 순식간에 야수 떼를 휩쓸고 사라진 강렬한 인상의 한 남자와, 이상한 옷을 입고 붉은 늑대의 등에 탄 채 모습을 드러낸 브레아 가문의 막내딸이, 나타났을 때처럼 질풍 같은 속도로 시야에서 멀어지자 그저 멀거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문득 한 사람이 게트로에게 말을 건넸다. “정말 브레아 가문의 막내 따님이 맞는 걸까요?” 게트로는 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모습은 좀 생소했지만 그 목에 걸린 목걸이의 문장은 틀림없이 브레아 가문의 것이었다. 게다가 외모도 듣던 대로고.” 그러자 다른 사람이 또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 남자는 도대체...” 무기 하나 제대로 지니지 않은 맨몸으로 저 흉폭한 야수떼를 혼자서 박살내 쫓아버리다니, 일꾼들은 물론이고 호위들 또한 아직까지 자신들이 본 것을 믿지 못한 채 눈을 비벼대고 있었다. “글쎄다. 아마도 저 아가씨를 호위하는 무사가 아닌가 싶었는데, 막상 둘이 대화하는 모습을 보니 아닌 것도 같고.” “...” “아무튼 일단 주위부터 정리하도록 하자. 피냄새를 맡고 다른 몬스터나 야수들이 오면 큰일이니까.” “알겠습니다.” 게트로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얼른 주위로 흩어지며 아직도 얼떨떨해 하고 있는 일꾼과 호위병들에게 소리를 쳤다. “뭘 멀뚱히 보고만 있는 거냐! 얼른 야수들의 시체를 묻어라! 어서 움직여!” 한편, 준상과 헤네스는 오래지 않아 후발대로 보이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들은 한 대의 마차와 그것을 호위하는 대여섯명의 기마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무언가에 쫓기듯 전속력으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헤네스.” “네!” “너는 저들을 따라가라. 나는 뒤를 맡겠다.” “네, 맡겨주세요!” 헤네스는 곧바로 붉은 늑대를 탄 채 질주하는 마차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고, 준상은 곧바로 그들을 지나쳐 행렬의 뒤를 추격하고 있는 한 마리 야수를 향해 그대로 돌진했다. 00059 트롤러 ========================================================================= 검치호. 준상은 시야 안에서 급격하게 확대되는 야수의 모습을 보고 그것이 이전에도 몇 번 본 적이 있었던 검치호임을 알 수 있었다. 인간의 몇 배는 되는 거대한 체구와 몸무게, 그리고 입 밖으로 길게 뻗어 나온 칼날 같은 송곳니. 검치호는 감히 겁도 없이 자신을 향해 돌진해 오는 준상의 모습에 성을 내며 눈앞에서 치워버리겠다는 듯이 앞발을 휘둘렀다. 후왁! 거칠 것 없이 질주하던 속도와 거대한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 강력한 일격은, 능히 아름드리 거목도 단숨에 꺾어 버릴 정도의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보는 것만으로도 몸이 굳어버릴 듯한 위력. 하지만 준상은 지금까지 검치호가 봐왔던, 보통의 인간과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문자 그대로 차원이 다른 인간이었다. 준상은 팔꿈치를 옆으로 붙인 자세를 취한 후, 마치 바닥을 향해 뛰어들 듯이 극단적으로 자세를 낮추었다. 그리고 머리 위로 검치호의 앞발이 바람을 가르며 스치고 지나가자, 한껏 응축되었던 용수철처럼 허리와 다리를 펴며 튕겨 올라 검치호의 면전으로 솟아올랐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대번에 근육 파열을 일으킬 정도의 극한에 달한 움직임. 검치호는 눈앞에서 준상의 모습이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런 검치호의 턱 밑으로 너클에 감싸인 준상의 주먹이 작렬했다. -커헝! 검치호는 달려오던 속도 그대로 몸이 거꾸로 뒤집히더니 곧장 바닥에 처박히며 나뒹굴었다. 이 거대한 야수와 감히 겨룰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도망치던 사람들은 그 말도 안되는 모습에 입이 딱 벌어지고 말았다. “저, 저럴 수가...” 바로 그때, 붉은 늑대에 탄 헤네스가 마차 옆으로 달려왔다. “게트로님의 부탁을 받고 왔어요!” “아!” 사람들은 느닷없이 나타나 거대한 검치호를 일격에 때려눕힌 남자와, 거대한 붉은 늑대의 등에 탄 채 갈색 머리카락을 승리의 깃발처럼 나부끼며 행렬 옆으로 다가서는 소녀가 일행임을 깨닫고 다시 눈이 휘둥그레졌다. “안내할게요! 따라오세요!” “아, 알겠습니다!” 헤네스가 후발대를 이끌고 본대를 향해 달려가는 것을 바라보며, 준상은 쓰러진 검치호의 끝장내기 위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검치호는 머리가 울리고 내장이 진탕되는 충격 속에서도 다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간신히 몸만 일으킨 것에 불과하지만, 준상의 그 격렬한 일격을 맞고도 몸을 일으켰다는 자체가 이미 맷집이 보통이 아님을 증명하는 일이었다. 검치호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다가 푸른 안광을 번뜩이며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인간의 모습을 보았다. 그 와중에도 검치호는 이빨을 드러내며 위협의 몸짓을 보였다. 허나, 그것이 고작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검치호의 전면으로 다가선 준상은 자신을 향해 이빨을 드러낸 야수의 콧잔등을 오른 주먹으로 후려 갈겼다. 퍽! 검치호는 순간 자신의 시야가 스스로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오른쪽으로 홱 꺾이는 것을 느꼈다. 급히 고개를 돌리려고 했지만, 어째서인지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순간 공포 유발의 효과가 이 거대한 야수의 몸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문을 알 리 없는 검치호는 자신의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살아생전 처음으로 느껴보는 그 기묘한 감각으로 인해 또다른 공포의 늪으로 빠져 버렸다. 그것은 바로, 공포의 연쇄. 그리고 마치 사슬을 이어 붙이듯이 준상의 주먹이 쏟아지자 검치호의 머리 속은 이제 완전히 하얀색으로 탈색 되어 버렸다. 준상은 반항조차 하지 못한 채 경련을 일으키며 바닥에 널브러진 검치호의 정수리를 주먹으로 내리쳐 부숴버리는 것으로 전투를 끝마쳤다. “후욱... 후욱...” 깊게 숨을 내뱉으며 격한 동작으로 인해 거칠어진 호흡을 다스린 준상은 검치호의 시체를 인벤토리에 보관한 다음 먼저 본대를 향해 달려간 후발대의 뒤를 쫓았다. 생각보다 후발대는 그리 멀리 가지 못했다. 준상이 순식간에 검치호를 쓰러뜨린 탓도 있지만, 헤네스가 적당히 후발대의 속도를 조절한 것도 한 가지 이유였다. 헤네스는 뒤를 돌아보다가 먼지 구름을 일으키며 다가 오는 준상의 모습에 입이 딱 벌어졌다. “세상에...” 그 엄청난 속도를 보고서야 헤네스는 지금까지 늑대의 등에 타는 것에 익숙치 못한 자신을 배려해 달리는 속도를 조절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짧은 기간이지만 함께 지내며 놀라운 능력을 계속 옆에서 지켜봤던 헤네스조차 입이 딱 벌어질 정도인데, 다른 사람들의 놀람이야 말로 표현할 수도 없을 지경이다. “마, 말도 안 돼...” 아까처럼 목숨을 건 질주는 아니지만 달리는 말을 두 다리만으로 따라 잡을 수 있는 인간을 직접 두 눈으로 보고서야, 후발대의 사람들은 아까 검치호를 단숨에 때려 눕혔던 것이 우연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준상이 붉은 늑대의 옆으로 따라 붙자 헤네스가 질문을 던졌다. “벌써 쓰러뜨리고 온 거에요?” 헤네스는 질문을 던지고 나서야 그의 몸에서 짙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는 것을 알아보았다. 아무리 초인적인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그 정도의 속력이라면 당연히 지칠 수밖에 없는 일. 헤네스는 그것을 미처 알아보지 못하고 궁금증을 먼저 해결하려 한 자신의 아둔함이 부끄러웠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만큼 준상의 호흡은 거칠어진 상태가 아니었다. 몸에서 풍겨 나오는 아지랑이 또한 격렬한 움직임 뒤에 곧바로 질주를 시작한 영향일 뿐이다. 때문에 준상은 헤네스의 질문에 대수롭지 않게 대답할 수 있었다. “물론.” 그래봐야 짧은 단어 하나 뿐이지만, 예전 같았으면 대답 없이 그저 고개만 끄덕이고 말았으리라는 사실을 준상 자신도, 그 대답을 들은 헤네스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준상과 헤네스에 의해 인도된 후발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무사히 본대를 따라잡았다. 게트로는 언제든 출발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가 먼지 구름을 일으키며 다가오는 후발대의 모습을 보고 크게 기뻐했다. “오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후발대는 곧바로 환대를 받으며 합류했고, 그들을 구해 돌아온 준상과 헤네스 역시 사람들에게 크게 환영받았다. 게트로는 우선 후발대의 마차로 가서 손녀의 안위를 살폈다. 이제 예닐곱살이나 되었을까. 작은 인형 같은 금발 머리의 아이 하나가 핼쑥해진 얼굴로 게트로의 손에 이끌려 마차에서 내려왔다. 안 그래도 급한 여정에 몸에 무리가 와서 후발대로 천천히 따라오고 있던 참이었는데, 검치호의 추격을 받게 되자 격렬한 마차의 진동을 견디지 못하고 멀미를 일으킨 탓이다.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데, 준상의 시야에 다시 새로운 퀘스트 정보가 나타났다. (Sub) 제린의 멀미 :격렬한 마차의 움직임으로 인해 생긴 제린의 멀미를 진정시켜 주세요. “...” 준상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런 식으로 퀘스트가 느닷없이 나타난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트리플 S 달성의 보상으로 얻은 ‘아주 아주 특별한’이라는 칭호의 효과는 숨겨진 퀘스트를 미리 알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즉, 이 퀘스트가 원래부터 있었던 것이라면 저 꼬마의 모습을 보기 전부터 준상의 퀘스트 정보에 나타나 있었어야 한다는 뜻이 된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이것은 다시 말해, 지금 나타난 이 퀘스트가 방금 전에 새로 생겨난 퀘스트라는 의미가 된다. 게다가 멀미를 진정시키라니? 차라리 검치호 같은 야수를 때려잡는 일이라면 모를까, 이건 어떤 의미에서는 준상에게 있어 기존의 다른 퀘스트보다 훨씬 난감한 임무일 수도 있었다. “음...” 캐비닛에 만약의 경우를 대비한 상비약이 마련되어 있기는 했지만, 멀미 같은 증상에 효험을 보일만한 것은 딱히 가지고 있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준상은 문득 일전에 화전민촌에서 목걸이를 찾아주고 보상으로 받은 관솔 향초가 떠올랐다. 준상은 혹시나 싶어 인벤토리에서 캐비닛을 꺼낸 후 그 안에서 관솔 향초를 집어 들었다. 갑작스럽게 허공에서 커다란 철 상자를 꺼내는 준상의 모습을 본 사람들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준상은 모르는 척 안색이 파리하게 질린 꼬마 숙녀에게 다가가 그 손에 관솔 향초를 쥐어 주었다. 갑자기 자신의 손에 쥐어진 관솔 향초를 바라보던 제린은 거기서 풍겨 나오는 냄새를 맡자 어쩐지 메스껍고 어지럽던 머리가 조금은 편안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감사합니다.” 제린이 고개를 숙이며 감사의 뜻을 표하자 준상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다음 몸을 일으켰다. 손녀의 안색이 점차 원래대로 되돌아오기 시작하는 모습을 본 게트로는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다. “아!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 하지만 준상은 대답하지 않고 헤네스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 뜻을 알아챈 헤네스가 바로 다가와 게트로와 대화를 시작한다. 준상은 두 사람의 대화를 한 귀로 흘려들으며 조금 지친 기색을 보이고 있는 크림슨 울프에게 다가갔다. 캐비닛을 열어 그 안에 보관해둔 살점이 잔뜩 붙은 멧돼지 뼈 하나를 꺼내주자 크림슨 울프는 기뻐하며 그것을 뜯는다. 가만히 옆에 앉아 붉은 털을 쓰다듬어 주고 있는 준상의 옆으로 관솔 향초를 두 손으로 소중하게 쥔 꼬마 숙녀 제린이 다가와 앉았다. “...” 준상이 말없이 바라보자 제린 역시 그를 바라보더니 이렇게 물었다. “강아지에요?” “...” 강아지라니... 이 커다란 붉은 늑대의 어디에서 강아지라는 단어가 연상되나 싶기는 했지만, 어린 아이에게 그런 걸 따질 필요는 없는 일이라 준상은 속으로 피식 새어나오는 웃음을 삼키며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제린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키더니 열심히 멧돼지뼈를 뜯고 있는 크림슨 울프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콧잔등을 향해 손을 뻗었다. “강아지야. 착하지...” 크림슨 울프는 겁도 없이 자신의 콧잔등을 만지려 드는 꼬마 숙녀를 귀찮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지만, 준상이 가볍게 인상을 쓰자 이내 고개를 숙이며 그 손길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준상과 꼬마 숙녀가 붉은 털의 늑대를 데리고 노닥거리고 있는데, 그제서야 얘기를 마친 헤네스가 두둑한 돈주머니를 들고 준상에게로 돌아왔다. “짜잔! 어때요. 제 실력이.” “...” 준상은 그녀의 말과 동시에 두 개의 퀘스트가 한꺼번에 갱신되는 것을 확인하고는 보상을 수령했다. 그러자 갑자기 준상의 몸 주위에 흰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남아 있던 피로가 단숨에 씻겨 내려간다. “앗!” 갑작스럽게 뿜어져 나온 빛의 향연에 헤네스는 물론이고 겁 없이 늑대의 콧잔등을 쓰다듬고 있던 제린 역시 눈이 휘둥그레졌다. “음...” 놀란 것은 준상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잘한 퀘스트를 제법 많이 수행하기는 했지만, 이전 레벨에 걸린 시간을 고려해 보면 레벨 업을 하기에는 한참 이른 시점이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된 일일까. 후발대의 호위나 제린의 멀미를 진정시키는 퀘스트 모두 보상에 나타난 경험치는 ‘조금’ 수준이었다. 사실 이 보상 경험치 표시 방식은 좀 미묘한 부분이 많았다. 조금이라는 말만 따져 보더라도, 실제로 그 경험치의 양이 ‘약간’에 가까운 조금인지, 아니면 ‘많이’에 가까운 조금인지 알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흠...” 준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세상에 이유 없는 일은 없을 터. 이전과 다르게 빠른 레벨 업이 이루어졌다면, 여기에도 자신이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일까. 해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이전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에게 다른 점이 있다면, 퀘스트를 받고 해결하는 과정에서 헤네스라는 변수가 생겼다는 점뿐이다. 그녀의 존재가 퀘스트 보상에 변화를 가져온 것은 아닐까. “왜... 그렇게 쳐다보세요.” 헤네스는 갑자기 준상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자 얼굴을 붉히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준상은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고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수고했다.” “아, 아뇨. 별 말씀을.”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 헤네스는 이어진 말을 듣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는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밝은 목소리로 힘차게 준상의 말에 대답했다. “네! 맡겨 주세요!” 준상은 고개를 끄덕인 후 랜덤카드를 뽑았다. 카드정보 명칭 : 새벽이슬 레벨 : 1Lv 경험치 : 0 등급 : Common 분류 : 소환 성장 : 대기만성(소) 속성 : 물 효과 : 작은 물의 정령 1개체를 소환합니다. Cost : 10 Seed : 1슬롯 “...” 준상은 일단 나중에 성능을 시험해 보기로 하고 정보창을 닫았지만 곧바로 새로운 메시지가 좌측 시야에 나타났다. 축하합니다! :콤보카드를 조합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현재 조합 가능한 콤보 카드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아겔라한의 정령사 [상세 확인] -콤보 카드 조합을 원하시면 해당 번호를 누르시고, 만약 조합을 원치 않으신다면 n을 누르세요(1/n) _ “호오...” 새로운 콤보 카드의 등장에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며 얼른 정보를 확인했다. 아겔라한의 정령사 -아겔라한의 숲에는 예로부터 정령사들의 전설이 전해집니다. 그들은 자연과 소통하여 그 본질적인 힘을 사용하는 신비로운 자들입니다. [조합상세] 정령류의 소환물 카드 3종 이상. -효과: 1. 정령 1개체를 소환할 때마다 해당 속성에 대한 저항력 10% 증가 2. 소환한 정령의 속성력을 무기에 부여하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생각보다 콤보 효과가 별로다. 기타 슬롯을 세 개 들여서 소환하기에는 아무래도 메리트가 부족하다고나 할까. 물론 속성력 부여나 저항력 증가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늑대들을 소환하는 것에 비하면 아무래도 비교가 될 수밖에 없었다. “흠...” 준상이 다시 소리를 내자 늑대를 데리고 놀고 있던 헤네스와 제린이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린다. “...” 준상은 모르는 척 고개를 돌린 후, 시험 삼아 콤보를 발동해 보았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새로운 메시지가 나타난다. 축하합니다! :당신은 처음으로 ‘아겔라한의 정령사’ 조합에 성공했습니다! -당신의 위업을 찬양하며 ‘정령의 첫 번째 친구’ 칭호를 부여합니다. [칭호 상세 정보 확인은 이곳을 누르십시오.]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며 칭호 정보를 확인했다. [정령의 첫 번째 친구] :‘아겔라한의 정령사’ 조합을 첫 번째로 성공한 자에게 부여되는 칭호. -효과: 카드 슬롯에 장착하지 않고도 정령의 소환과 이를 통한 콤보 효과 발동이 가능해집니다. -칭호는 획득시 자동으로 효과가 적용됩니다. “헉!” 준상은 칭호 효과를 보고 깜짝 놀랐다. 슬롯에 장착하지 않고도 소환이 가능하다니. 게다가 그런 식으로 소환을 해도 콤보 효과까지 그대로 적용된다. 소환 가능한 정령의 숫자에 대한 제한이 없다는 점까지 감안한다면, 이건 정말 사기스런 칭호라는 말 밖에 나오지 않는다. 정령들의 공격력이 다소 약하기는 하지만 등급이 올라가고 숫자까지 더해지면 어지간한 마법과 비교해서 결코 밀리지 않는 전력이 될 것이다. 아니, 공격력은 둘째 치고... 소환되는 정령의 개체 수만큼 속성 저항력이 올라가는 콤보 효과를 생각하면, 가히 마법사의 천적이나 다름없는 효과가 아닐 수 없다. 물론, 그만큼의 정령을 소환할 만큼의 카드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붙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 정도의 카드를 수집하려면 어지간한 레벨로는 불가능하다는 점이 문제라고나 할까. 하지만 그런 걸 감안하더라도 사기인 것 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멋지군.” 퀘스트를 통해 얻은 보상의 정리가 끝나자 준상과 헤네스는 상단과 헤어질 준비를 했다. 게트로는 그런 두 사람을 보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동행을 부탁드리고 싶지만, 이벨류아의 본가로 가신다니 어쩔 수 없군요. 나중에 기회가 되면 찾아뵙겠습니다.” “네, 꼭 들려주세요.” 헤네스는 게트로와 작별 인사를 나눈 후 준상이 준 관솔 향초를 두 손으로 꼭 쥐고 있는 제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제린도 잘 지내.” “응.” 작별 인사를 끝낸 헤네스가 붉은 늑대의 등에 올라타자 제린이 종종 걸음으로 다가와 크림슨 울프에게 말을 걸었다. “강아지야. 잘 가.” 쫑이 다음은 강아지인가. 그러고 보면 크림슨 울프도 참 여러모로 수난이라는 생각을 떠올리며 준상은 헤네스에게 말했다. “가자.” “네!” 준상은 천천히 목적지인 이벨류아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고, 헤네스는 상단의 사람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인 후 붉은 늑대를 타고 그 뒤를 따랐다. 00060 트롤러 ========================================================================= 게트로의 상단과 헤어진 두 사람은 하루 정도를 더 달리고 나서야 목적지인 이벨류아 근처에 도달할 수 있었다. 곡식이 영글어 가는 너른 밭에 다가서자 헤네스는 옆에서 달리고 있던 준상에게 말했다. “잠시만 멈춰보세요.” “...” 멀리 이벨류아의 성곽이 보이는 지점이었지만 준상은 일단 그녀의 말대로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자 헤네스는 타고 있던 붉은 늑대의 등에서 내리더니 허벅지를 주무르며 말했다. “여기서부터는 걸어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어째서?” “굳이 귀찮은 일을 만들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요.” “...” 아무리 헤네스가 이 근방에서 알아주는 집안의 영애라고는 해도 이런 커다란 붉은 늑대를 성안에 마음대로 들여놓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공연히 일이 번거로워질 것을 감안한다면, 여기서는 좀 힘들더라도 천천히 걸어가는 편이 옳다. 준상은 고개를 끄덕인 후 인벤토리에서 캐비닛을 꺼내고, 그 안에 보관해 두었던 헤네스의 드레스를 건네주었다. 그리고 그녀가 옷을 갈아 입을 수 있도록 텐트를 꺼내 설치했다. “...” 헤네스는 입고 있던 트레이닝복과 오리털 파카를 아쉬운 듯한 손길로 잠시 쓰다듬다가 텐트의 설치가 끝나자 그 안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아무래도 공간이 비좁은 데다 드레스라는 옷 자체가 혼자 입기에는 만만치 않은 물건이라 제법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준상은 그녀가 옷을 다 갈아입기를 기다리면서 간단하게 차를 끓였다. 구덩이를 파고 땔감을 가져다가 도깨비불로 불을 붙이는 것까지는 마찬가지였지만, 주전자에 담긴 것은 물의 정령인 새벽이슬이 주위에서 끌어온 것이었다. 아무래도 카드의 등급이 낮아서인지 이런 식으로 물을 끌어오는 것 외에는 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적은 양의 물이라면 일일이 물을 길어오거나 저장된 물을 쓸 필요가 없으니 나름대로 편리하기는 하다. 작은 주전자에 물이 끓고, 그 물로 티백에 담긴 차를 우려낸 다음 한 잔을 다 비울 즈음이 되어서야 헤네스는 땀을 뻘뻘 흘리며 텐트 밖으로 나왔다. “휴우...” 안 입은지 며칠 되지도 않았건만, 그 며칠 사이에 트레이닝복의 편리함에 익숙해진 몸을 드레스라는 거추장스러운 복식에 끼워 맞추려다보니 정말 악전고투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다. “산들바람.” 준상이 조용히 부르자 근처를 배회하던 산들바람이 땀으로 얼룩진 헤네스의 얼굴을 식혀주었다. “감사합니다.” “...” 헤네스는 그렇게 인사를 한 후 준상이 건네준 녹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식어서 미지근해진 상태이긴 하지만, 갈증이 나는 목을 적시기엔 오히려 이쪽이 안성맞춤이다. 헤네스는 두 손으로 컵을 잡은 채 녹차를 음미하다가 멀리 보이는 이벨류아의 성곽을 바라보며 준상에게 물었다. “도착하고 나면... 떠나실 건가요.”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는 헤네스의 모습을 모른 척 하며 준상은 대수롭지 않은 듯한 말투로 조용히 대답했다. “글쎄.” 사실 그건 준상으로서도 알 수 없는 일이다. 헤네스를 저곳으로 데려다 주는 것으로 이번 퀘스트가 그대로 끝날지, 아니면 새로운 단계로 이행될지 준상으로서는 전혀 알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모든 퀘스트가 완료되면 준상은 원래 있어야 할 장소로 돌아가야만 한다는 사실 뿐이다. 때문에 어쩐지 무성의한 대답이 되어버리고 말았지만, 그런 사실을 알 리 없는 헤네스로서는 조금 서운할 수밖에 없었다. 언제나 먼저 말을 걸어오던 헤네스의 입이 다물어지자, 그들은 조금 서먹한 상태로 밭 사이에 펼쳐진 대로를 따라 이벨류아라는 이름의 성곽 도시를 향해 걸었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점점 길을 지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한다. 건장하고 이질적인 외모를 지닌 준상과, 고급스러운 보랏빛의 드레스를 입은 헤네스의 모습은 그런 행인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한 모습이었다. 문득 지나가던 마차 한 대가 그들 옆에 멈춰섰다. “혹시... 헤네스 아가씨 아니십니까?” 헤네스는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채 길을 걷다가 옆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스로덴 아저씨?” 스로덴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노인은 급히 마차를 길가에 멈춰 세우고는 헤네스에게로 다가왔다. “역시 아가씨가 맞으시군요. 그런데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말없이 헤네스 옆에 서있는 준상의 모습을 흘깃거리며 말끝을 얼버무리자 헤네스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어쩌다 보니 일이 그렇게 됐네요.” “아, 예... 일단 이거라도 타시죠. 힘드실텐데.” “감사합니다.” 헤네스는 먼저 감사의 뜻을 표한 후 준상에게 말했다. “같이 타고 가요.” 하지만 준상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다.” “...” 헤네스는 입을 삐죽거리고는 조금 삐친 표정으로 혼자 마부석에 올라탔다. 얼마 뒤면 헤어질지도 모르는데... 조금쯤은 따뜻하게 대해줘도 좋은 일 아닌가. “타기 싫대요. 아저씨, 출발하세요.” “네? 아, 알겠습니다.” 스로덴은 어쩐지 심상치 않은 두 사람의 분위기를 보고는 그냥 조용히 입을 다물기로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어리고 착하기만 하던 막내 아가씨가 어느새 사람 사이의 감정을 느낄 나이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속으로 조금 씁쓸한 웃음을 삼켜야만 했다. 짐마차는 천천히 길을 달려 곧장 이벨류아의 성문으로 향했다. 성벽의 높이는 대략 삼사 미터 전후이고, 성의 넓이 또한 생각보다 그리 넓지는 않았지만 퀘스트가 시작된 이래로 이런 식의 제대로 된 성곽 도시는 처음이라 준상은 천천히 그 전경을 시야에 집어 넣었다. 성문에 도달하자 드나드는 사람을 살피던 경비병들이 헤네스의 모습을 보고는 화들짝 놀라며 자세를 바로 했다. “수고하시네요. 이쪽은 제 일행이니까 신경 쓰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아, 알겠습니다.” 성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그녀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네는 사람이 많아졌다. 헤네스는 사람들의 인사를 일일이 받아주며 슬며시 준상을 훔쳐 보았다. 그 시선 속에 숨은 의미를 굳이 말로 표현하자면, ‘제가 원래 이렇게 인기 있는 여자에요.’ 정도의 의미가 되겠지만, 준상은 지금 한창 다른 일에 신경이 팔려 있는 상황이었다. (Sub) 베르스의 부탁 ->대화 필요. (Sub) 호엔의 부탁 ->대화 필요. (Sub) 바렌딜의 부탁 ->대화 필요. (Sub) 미아의... 성문 안을 통과해 방어용의 회랑에 들어서자 거의 십여개에 이르는 서브 퀘스트들이 그야말로 후두둑 쏟아지는 것처럼 미니맵과 퀘스트 정보 창을 가득 채운다. 많은 사람이 사는 도시인 만큼, 서브 퀘스트도 많은 것일까. 이걸 먼저 바로 처리하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우선 메인이 되는 헤네스의 호위를 마치는 것이 좋을까 하며 고민하는 준상에게 헤네스가 결국 참지 못하고 먼저 말을 걸었다. “거의 다 왔어요. 저기 보이시죠? 갈색 벽돌로 지어진 저택이요.” “...”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니 조금 우중충해 보이는 고풍스런 저택이 눈에 들어온다. 뭔가 딴생각에 잠겨 있었던 준상의 관심을 돌리는데 성공한 헤네스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에게 다시 말했다. “딱히 예정이 없으시다면 잠시 묵었다 가세요. 제가 잘 대접해 드릴게요.” “봐서.” “...” 헤네스는 성의 없는 준상의 말에 다시금 입을 삐죽거릴 수밖에 없었다. 옆에서 말을 몰던 스로덴은 두 남녀의 그런 모습을 보며 슬그머니 미소짓다가, 헤네스의 시선을 느끼고는 얼른 입가에서 웃음을 지웠다. 저택의 입구를 지나 조금 과하게 넓다 싶은 정원을 지나 건물 앞에 도착하자 기별을 받은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헤네스를 맞이했다. “어서오세요. 아가씨.” “어떻게 된 거에요? 혼자 이렇게 오시다니.” 시녀들로 보이는 여자들이 우르르 달려나와 그녀에게 말을 건네자 헤네스는 말없이 뒤를 따르는 준상을 흘깃 보더니 한숨을 푸욱 내쉬며 대답했다. “그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아버지는?” “기별을 받으셨으니 금방... 아, 저기 나오시네요.” 곧바로 건물 입구로부터 건장한 체구의 중년 남성 한 명이 모습을 드러내더니 헤네스를 향해 양 손을 벌리며 외친다. “헤네스!” “아버지!” 두 부녀는 마치 십년은 못 본 사이처럼 서로에게 달려가 부둥켜안고 감격적인 상봉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뒤를 따르던 고아한 모습의 중년 부인이 그 모습을 보고는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다. “어휴... 모처럼 기숙학교까지 보냈는데도 어쩜 달라진 게 하나도 없는지.” 그러자 헤네스는 아버지의 품에서 벗어나며 혀를 내밀더니 얼른 어머니의 품에 안기며 애교를 부렸다. “우웅... 보고 싶었어요.” “얘도 참.” 준상으로서는 뭔가 이런 분위기 자체가 참 낯설다. 잠깐의 어린 시절 이후로는 이런 따뜻한 가정의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분위기에 녹아들지 못한 채 멀뚱거리고만 있는데, 그제서야 준상의 존재를 알아차린 헤네스의 아버지가 그를 바라보며 말을 걸었다. “그런데, 저분은 뉘신가?” 그제서야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헤네스의 어머니도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유모는 어딨니? 데한씨는?” “그, 그게...” 헤네스는 난처해 하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일단... 안에 들어가요. 제가 다 설명해 드릴테니.” 그리고는 의혹어린 표정을 짓고 있는 부모님들의 팔을 잡아끌면서 다른 시녀들에게 말했다. “시에나, 그 분 좀 손님 방으로 모셔 드려. 부탁할게.” “네, 아가씨.” 준상은 곧바로 시에나라는 시녀의 손에 이끌려 손님 방으로 안내되었다. 혼자 쓰기에는 아무래도 좀 넓다 싶은 느낌이라 좀 썰렁하기는 했지만, 제법 고풍스러운 느낌을 자아내는 고급스러운 방이었다. 오래된 이야기 책에나 나올 법한 휘장이 달린 커다란 침대에 걸터앉은 준상은 그 안락함에 잠시 눈을 감고 휴식을 취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조심스럽게 문이 열리는 소리에 준상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바라보니 헤네스가 시녀 두 명과 함께 방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어느 새인가 원래 입고 있던 보라색의 드레스가 아닌 레이스가 많이 달린 하얀색의 드레스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아... 자는 중이었어요?” “아니.” 다시금 단답형의 대답이 돌아오자 헤네스는 입을 삐죽거리며 테이블 옆의 의자에 앉았다. 준상은 문가에 서서 감시하듯이 자신을 살피는 두 시녀의 모습을 보고 속으로 쓴웃음을 삼켜야 했다. 하기야, 이런 커다란 저택의 귀한 막내 따님이 느닷없이 호위들을 팽개치고 정체불명의 남자와 단둘이 돌아왔으니, 당장 난리가 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일까. 헤네스는 한숨을 푸욱 내쉬고는 문가에 서있던 시녀 중 하나를 손짓해 불렀다. 시녀는 쟁반에 가죽 주머니를 하나 받쳐 들고 있었는데, 척 보기에도 제법 두둑해 보인다. “일단 보수부터 챙겨 왔어요.” “...” 준상이 말없이 가죽 주머니를 받아들자 헤네스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감사의 뜻을 표했다. “구해주시고, 이곳까지 안전하게 데려다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러자 곧바로 퀘스트 정보가 갱신되었다. 에픽 퀘스트 – 여명 3. 모든 이야기는 만남으로부터 시작됩니다. -> 용병 대장과 대화하십시오. (달성) -> 헤네스 브레아를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데려다 주십시오 (달성) -> 완료! 보상: 경험치 많이, (금화) -> 보상을 지금 수령하시겠습니까? (Y/n) _ (주의) 수령하지 않은 보상은 7일후 자동 소거됩니다. 준상이 보상을 수령하자 곧바로 퀘스트 정보가 갱신되었다. 에픽 퀘스트 – 여명 4. 어둠의 군세로부터 도시를 지켜내십시오. :강대한 어둠의 군대가 성곽도시 이벨류아를 노리고 진격해 오고 있습니다. 그들의 침공을 막아내십시오. (침공까지 남은 시간 : 68시간 16분) 00061 트롤러 ========================================================================= 새로 갱신된 퀘스트 정보를 보고 준상은 얼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어둠의 군세라는 구태의연한 이름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전의 다른 협력 퀘스트들과는 달리 지금 자신은 혼자 이곳에 와 있는 상태. 물론 일대일이라면 어지간한 상대에게는 지지 않으리라는 자신감이 있었지만, 그 대상이 군대라는 이름이 붙은 집단이라면 아무래도 지금까지의 퀘스트와는 다른 상황이 전개될 가능성이 높다. “음...” 준상의 얼굴이 찌푸려지자 헤네스는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보수가... 마음에 안 드시나요?” “아니. 그런 게 아니야.” “하지만...” “...” 준상은 손을 들어 이어지는 헤네스의 말을 일단 막은 다음, 잠시 더 생각하다가 조용히 물었다. “헤네스.” “네.” “이곳에 군대는 얼마나 있지?” “네?” 보상이 마음에 안 들어서 기분이 상했나 하고 가슴을 졸이던 헤네스는 난데없는 그의 말에 화들짝 정신이 들었다. “군대요?” “그래.” “그, 그건... 저로서는 잘...” 헤네스가 난처한 표정으로 말을 얼버무리자, 준상은 다시 물었다. “알 만한 사람은?” “글쎄요. 아버지라면 혹시 아실지도 모르지만...” 자신 없는 목소리로 헤네스가 대답하자 준상은 비로소 이 퀘스트의 인과관계를 깨달았다. 헤네스의 호위는 처음부터 그 부친과의 연결 고리를 만들기 위한 장치였던 것이다. 처음 만났을 때의 상황을 고려해 보면 다시 말을 구해 마차로 이동했을 경우, 이곳에 거의 도달했을 즈음에는 이미 전투가 진행 중이거나 벌어지기 직전의 상황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즉, 본래대로라면 헤네스의 호위는 적진을 돌파해 도시로 진입하는 것으로 끝났을지도 모른다는 얘기다. 만약 그렇게 되었다면 굳이 설득의 과정이 필요 없이 준상이 지닌 무력 만으로도 강한 인상을 심어주었을 것이고, 이어지는 공방전에서도 헤네스와 그녀의 부친으로부터 쉽게 지지를 얻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결국, 너무 빨리 도착하는 바람에 본래 예정되어 있던 일의 순서가 뒤엉켜 버린 셈이다. “곤란하군.” 하지만 꼭 나쁜 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먼저 도착한 만큼 미리 대비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아직 히든 퀘스트가 나타나지는 않은 상태지만, 이전의 마을 방어 때를 감안해 보면 피해를 줄일수록 더 높은 평가를 받게 되리라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준상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헤네스에게 말했다. “안내해라.” “네?” 밑도 끝도 없는 준상의 말에 헤네스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전후 상황을 되새겨보고는 그것이 자신의 아버지를 만나겠다는 뜻임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렸다. “아버지를 만나보실 생각이세요?” “그래.” 단호한 대답이 이어지자 헤네스는 이것이 준상에게 있어 ‘필요한’ 일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것을 깨달은 순간 헤네스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대답했다. “알았어요. 저를 따라오세요.” “...” 준상은 헤네스의 안내를 받아 그녀의 부친이 있는 서재로 발걸음을 옮겼다. 헤네스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무언가 언짢은 표정을 지은 채 책상을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리고 있던 그녀의 부친은, 두 사람이 함께 서재로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와락 표정을 구겼다. “무슨 일이시오.” 대뜸 적의 넘치는 말투가 날아들자 헤네스는 난처한 표정으로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아버지, 제가 잘 설명 드렸는데도 그러세요.” “너한테 한 말 아니니까 물러나 있거라.” “아버지!” “어허!” 나름 가장의 위엄을 뿜어내며 호통을 쳐봤지만, 헤네스는 오히려 양 손을 옆구리에 척 올리고는 으름장을 놓았다. “이러시면 저 화낼 거에요!” “허어...” 딸자식 키워봐야 소용없다더니... 헤네스의 부친은 그만 좌절하고 말았다. 부친이 망연자실해 있는 틈을 타 팔을 잡아 끌어 소파에 앉힌 헤네스는, 이내 준상 역시 소파에 데려다 앉혔다. 그리고는 얼른 준상의 옆자리를 차지하더니, 대뜸 부친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 박씨가 드릴 말씀이 있다니까 들어주세요.” 박씨... 라니. 보통 외국의 경우 이름을 막 부르는 것이 결례이기 때문에 당사자가 미리 허락한 경우가 아니면 성이나 직위로 호칭하는 경우가 많다는 건 알고 있다. 헤네스가 그를 박씨라고 부른 것도 그런 의미겠지만, 준상으로서는 어쩐지 머슴 취급당하는 느낌이라 기분이 별로다. 그래서 말했다. “준상이라고 불러라.” “네?” “이름으로 부르라고.” “아...” 하지만 그런 내막을 알 리 없는 헤네스는 이것을 하나의 신호라고 이해하고 얼굴을 붉혔다. 당연한 얘기지만, 곱게 키운 딸자식이 그렇게 남자 옆에 찰싹 붙어 앉아서 발그레하니 얼굴을 붉히는 모습을 보자 그녀의 부친은 다시 속이 뒤집혀 버렸다. “끙... 그래, 하고 싶은 말이 뭔가.” 얼른 얘기를 들어주고 내보내는 것이 상책이라는 생각에 말을 꺼냈다. 그러자, 준상은 이렇게 대답했다. “앞으로 약 3일후, 이 도시는 적의 공격을 받게 된다.” “...” 헤네스는 물론이거니와 그녀의 부친 역시 그 말을 듣는 순간 얼굴이 굳어버렸다. 세상에.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리라 생각은 했지만, 이런 얘기였다니! 하지만 놀란 것은 헤네스의 부친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런 저런 일로 세상이 제법 어수선한 것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갑자기 이게 무슨 말인가. 헤네스의 부친은 잠시 준상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차갑게 가라앉은, 농담 같은 건 아예 염두에도 없는 듯한 진지한 시선. 탐색하듯 한동안 그렇게 준상과 시선을 주고받던 헤네스의 부친은 문득 이렇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아직 통성명도 하지 않았군. 나는 제스터 발란 브레아. 외람되지만 이곳 이벨류아의 내정에 관여하는 사람 중 하나일세.” 준상은 미처 알지 못했지만, 헤네스가 속한 브레아라는 가문은 이곳 이벨류아의 전통적인 호족으로서 적어도 이곳의 내정에 관해서는 중앙에서 파견된 집정관보다도 더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곳이었다. 실질적으로 이벨류아에 거주하는 인구의 삼분의 일 가량은 이 브레아 가문과 어떤 식으로든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혈연 관계를 두 세 다리 정도 건너면 대부분의 시민들과 관련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그 뿐만이 아니다. 이벨류아에 속한 농지의 반 이상이 브레아나 그로부터 분가한 가문의 소유였고, 성 안의 상점들 또한 어떤 식으로든 브레아라는 이름과 관련이 있었다. 실질적인 이벨류아의 주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라고나 할까. 하지만 그런 상황을 모르는 준상은 대수롭지 않게 그 소개를 받아들인 후, 자신의 소개를 했다. “박준상.” “...” 순간 헤네스는 자신도 모르게 이마를 감싸 쥐었고, 그녀의 부친 제스터는 눈을 감고 가볍게 심호흡을 했다. “후우... 생소한 이름이군. 혹시 가문에 대해 알 수 있겠나?” 가문이라... 준상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박씨는 본래 천년왕국 신라의 왕족이다. 본관은 밀양. 시조는 박혁거세이다. 중시조로는 30세손이며, 시조로부터는 75세손에 해당된다.” “...” 두 부녀는 다시 한 번 깜짝 놀랐다. “와, 왕족이셨어요?” 헤네스가 놀라서 되묻자 준상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꾸했다. “신경 쓸 필요 없다. 어차피 이곳에서는 찾아가기도 쉽지 않은 곳이니.” “크흠...” 거짓말은 아니다. 밀양 박씨는 신라 왕족으로부터 시작된 성씨이고, 더불어 모든 박씨의 대종인 것 또한 틀림없는 사실이니까. 물론 준상으로서야 가문 따위 어찌 되든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헤네스의 부친인 제스터가 가문으로 찍어 누르려는 기미가 보이자 그의 족보를 읊은 것 뿐이다. 하긴 한국 사람치고 족보 따지고 올라가면 명문가 아닌 집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만은. 나중에 다른 여행자들에 의해 들통이 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어차피 나중의 일이다. “...” 제스터는 가만히 준상을 바라보았다. 정말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신라라는 나라 이름 자체를 들어본 적이 없는데다, 박이라는 성씨 또한 들어본 적이 없기는 매한가지다. 하지만 그냥 거짓말이라고 치부하기에는... 헤네스로부터 전해들은 그의 신비한 능력이라든가, 당장 그가 입고 있는 복색조차도 생소하기 짝이 없다. “혹시... 신분을 증명할 만한 것이 있겠습니까?” “...” 준상은 잠시 얼굴을 찌푸리더니 인벤토리에서 캐비닛을 꺼낸 후, 전투 중에 훼손될지도 몰라 그 안에 넣어두었던 지갑을 꺼내어 그 안의 내용물을 보여주었다. 가장 먼저 만원권과 오만원권 지폐를 꺼내 보여주었다. “이것은 내가 살던 곳의 돈이다.” “오오...” 두 부녀는 정교한 도안이 새겨진 지폐의 모습에 감탄했다. 하지만 준상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오픈 도깨비불.” 명령어가 그의 입에서 나오자 그들의 눈앞에 작은 불덩어리 하나가 모습을 드러낸다. “이, 이건... 정령입니까?” “정령을 아나?” 준상이 되묻자 제스터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아겔라한의 숲에 정령사들이 존재한다는 전설을 어린 시절에 얼핏 들은 기억이 나는군요. 그때는 그저 동화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스스로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제스터는 어느 새인가 자연스럽게 준상에게 존대를 하고 있었다. 준상은 그런 제스터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했다. “그 돈을 불빛에 비춰보도록.” “...” 두 부녀는 준상의 말에 따라 지폐를 손으로 집어 허공에 떠 있는 도깨비불에 비쳐 보고는 깜짝 놀랐다. 그 안에서 사람의 얼굴이 마술처럼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이런 물건, 전에도 본 적이 있나.” “...” 당연히 없다. 아직 이곳에는 이런 식의 정교한 지폐를 만들 수 있는 기술이 없다. 준상은 말없이 손 안에 든 지폐를 바라보는 제스터를 향해 이번에는 신분증을 꺼내어 들었다. “신분의 증거라면... 이것이 좋겠군.” “...” 준상이 꺼내 보인 것은 주민등록증과 운전면허증, 그리고 학생증이었다. 두 부녀는 준상의 얼굴 모습이 정교하게 찍혀 있는, 도대체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재질로 만들어진 세 장의 신분증을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이것 역시 이전에는 전혀 보지 못한 종류의 물건이다. “이제 내 말을 믿겠나?” 준상이 신분증과 지폐를 지갑에 넣자 제스터는 가볍게 헛기침을 하며 다시 물었다. “하지만 저로서는 신라라는 국명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당연한 일이다.” “네?” “이곳에 있는 나라가 아니니까.” “그게 무슨...” 준상은 캐비닛을 인벤토리에 다시 넣은 후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나는 다른 세상에서 왔다.” “...” 헤네스는 그 말을 듣고 이제야 알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지금까지 보았던 신기한 물품이나 어쩐지 이곳에 익숙하지 못한 듯 보이는 준상의 행동 같은 것이 모조리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음...” 하지만 그런 경험이 없는 제스터는 얼굴을 찌푸린 채 잠시 고민하더니 다시 준상에게 물었다. “정말 믿기 어려운 일 뿐이군요. 어쨌든 좋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하신 말씀을 전부 믿는다 쳐도, 3일 후에 적의 공격이 있으리라는 것은 어떻게 아신 겁니까.” 그 말에 준상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냥.” “...” 순간 제스터의 이마에 핏줄이 빠직하며 솟아오르자 지켜보던 헤네스가 얼른 옆에서 끼어 들었다. “준상씨는 그런 일들을 미리 알아내는 능력이 있어요!” “그게 무슨 소리지?” 부친의 물음에 헤네스는 볼을 긁적이며 생각나는 대로 대답했다. “이를테면... 예지라고 해야 하나. 아니, 그거랑은 좀 다른데... 누군가 곤란한 일이 생기면 그걸 미리 아는 능력이라고 해야 하나...”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횡설수설이었지만, 제스터는 딸의 얘기를 듣고는 준상에게 물었다. “정말입니까.” “물론.” 당연하다는 듯한 대답에 제스터는 다시 물었다. “증명하실 수 있겠습니까?” 준상은 곧바로 헤네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헤네스.” “네?” “받아 적어라.” “자, 잠깐만요.” 헤네스는 급히 일어나 아버지의 책상으로 다가가더니 종이와 펜, 그리고 잉크를 가지고 준상의 옆자리로 돌아왔다. “말씀하세요.” 헤네스가 준비를 마치자 준상은 조용히 좌측 시야에 나타나 있는 서브 퀘스트 목록에서 이름을 읊었다. “베르스, 호엔, 바렌딜, 미아...” “...” 갑자기 준상의 입에서 이름들이 줄줄 흘러나오자 제스터는 이게 뭔 짓인가 싶었지만, 헤네스가 진지하게 이름을 받아 적는 모습에 일단 가만히 지켜 보기로 했다. 준상은 한 차례 이름을 부르고는 다시 한 번 반복하더니 헤네스에게 물었다. “다 적었나?” “네!” “그럼 확인하도록.” “네, 맡겨 주세요!” 그대로 후다닥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는 딸의 모습에 제스터는 얼른 그녀를 불러 세웠다. “헤네스, 방금 그 이름은...” “아...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요.” “뭐?” 헤네스는 씩 웃으며 자신의 아버지를 향해 또박또박 이렇게 말했다. “이건 지금 이 이벨류아에 있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의 명단이에요.” “...” 제스터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준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준상은 당연하다는 듯이 그 시선을 받아들였다. 두 남자가 서로 시선을 교환하는 동안 헤네스는 급히 바깥으로 뛰어 나가 시녀들과 시종들을 동원해 명단에 기록된 사람들을 불러 모으도록 지시했다. 앞서도 말했지만, 브레아 가문은 이곳 이벨류아에 사는 사람들과 한 두 다리 건너면 전부 아는 사람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의 영향력을 지닌 가문이다. 때문에 시녀와 시종들이 급히 시내로 뛰쳐나간지 채 얼마 되지도 않아 명단의 사람들이 브레아 가문의 저택으로 속속 모여들기 시작했고, 헤네스는 그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다. “저희에게 부탁하세요. 그러면 이루어질 거에요.” 그 광경을 보자 제스터는 이제 준상의 말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3일 후에 이곳이 공격 받는 겁니까?” 준상은 다시 한 번 되묻는 제스터를 향해 귀찮다는 듯이 이렇게 대답했다. “3일 후면 알게 될 일이다.” 00062 트롤러 ========================================================================= 준상은 헤네스가 모아온 퀘스트 정보들을 하나씩 열람하고 그 모든 것을 빠르게 처리하기 시작했다. 본래 서브 퀘스트가 다 그러하듯이 별 것 아닌 소소한 일부터 시작해서, 제법 난해한 일까지 다양한 부탁들이 있었지만 준상은 얼굴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그 모든 일들을 묵묵히 전부 수행했다. 그렇게 열두 가지 퀘스트를 전부 수행하고 나자, 다시 한 번 레벨 업의 빛이 그의 몸을 휘감고 사라진다. “오...” 정령과 커다란 늑대들을 소환해 빠르게 일을 처리하는 것도 신기하기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인데, 그 모든 일을 처리하고 나서 갑자기 은은한 흰 빛에 감싸이는 모습까지 연출하자 헤네스의 아버지인 제스터는 더 이상 준상의 예언(?)을 부정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지금 즉시 장로회를 소집하도록.” “네!” 장로회. 그것은 브레아 가문의 중진들과 이 가문에서 분가해 나간 가문들의 가주들이 한 데 모이는 자리이다. 평소에는 그저 친목을 도모하는 정도의 역할에 지나지 않지만, 지금과 같은 비상시국에는 이벨류아의 앞길을 밝히는 등대의 역할을 수행한다. 아버지가 마침내 장로회를 소집했다는 사실은 곧바로 헤네스의 귀에 들어갔다. “됐어요! 아버지가 장로회를 소집하신대요.” “...” 헤네스는 기뻐하며 준상에게 바로 그 사실을 알렸지만 준상은 새로 뽑은 스킬 카드의 효과를 시험하는 중이라 건성으로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카드정보 명칭 : 염동력 레벨 : 1Lv 경험치 : 0 등급 : Uncommon 분류 : 스킬 성장 : 일반(중) 속성 : 없음 효과 : 반경 10미터 안쪽의 가벼운 물체 1개를 움직입니다. Cost : 15 Seed : 2슬롯 “으음...” 유효 범위 10미터 안쪽의 가벼운 물체를 움직이는 것 뿐이지만, 투석이나 정령 외에 달리 원거리 공격 능력이 없는 준상으로서는 매우 활용도가 높은 기술이었다. 준상이 특히 심혈을 들여 연습하고 있는 것은, 멀리 떨어진 적을 자신에게로 끌어당기는 기술이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활용 방법이 있겠지만, 스킬의 등급이나 레벨이 높지 않아서 정교한 힘의 조절이 불가능한 탓에 그저 생각으로만 머물 뿐이다. 정원에서 멀리 떨어진 돌멩이를 염동력으로 끌어당기는 이 간단한 연습조차도 열 번 하면 서너번은 엉뚱한 곳으로 날아갈 지경이니 말해 무엇 하겠는가. 모처럼 신이 나서 소식을 가져 왔는데, 제대로 대꾸도 하지 않고 수련에만 집중하는 준상의 모습에 헤네스는 다시금 입을 삐죽거렸다. “신경 안 쓰이세요?” 헤네스가 다시 묻자 그제서야 준상의 입이 열렸다. “신경을 쓰면?” “네?” “내가 신경을 쓴다고 뭔가가 달라지나?” “그건...” “아니면 내가 앞장서서 그들을 이끌기라도 하란 말인가?” 준상의 말에 헤네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걸 원하시는 게 아니었나요?” “내가?” 준상은 헤네스를 돌아보며 말했다. “난 군대를 지휘해 본적도 없고, 그럴 능력도 없다.” “그럼...” “나중에는 어찌 될지 모르는 일이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눈앞의 적을 쳐부수는 것. 그 하나뿐이다.” “...” 어설픈 장수가 이끄는 강병과, 숙련된 장수가 이끄는 약병이 맞붙으면 어느 쪽이 이길까. 흔한 얘기이기는 하지만, 이런 상황이 제시되면 대부분의 경우는 숙련된 장수가 이끄는 약병이 이길 것이라 예측한다. 물론 준상의 무력이야 비할 데 없이 매우 특별한 수준의 것이지만, 그것은 개인의 무력일 뿐 군대를 지휘하는 일과는 무관하다. 지금처럼 적의 규모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그저 무력만 믿고 병력의 운용을 맡기는 것은 그야말로 자살 행위나 다름없는 일. 헤네스는 준상이 말하는 바를 이해했지만, 그래도 불만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공연히 모처럼의 주역을 빼앗긴 듯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애꿎은 정원석만 발로 툭툭 걷어차고 있는데, 다시 준상의 말이 이어졌다. “사람들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나?” “네.” 준상은 서브 퀘스트를 해결하는 동안 헤네스에게 이벨류아 인근에 흩어진 마을이나 장원, 그리고 관문 등의 요충지에 사람을 보내 주변의 정황을 확인하도록 지시했다. 적이 3일이 채 되지 않는 거리에 도달해 있다면, 이미 근처의 마을이나 장원 중 그들의 습격을 받은 곳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확인되면 더 이상 준상의 말에 대한 신뢰성 여부를 따질 필요도 없을뿐더러, 적의 진행 방향으로 미리 나아가 타격을 하는 것도 가능해진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준상은 여전히 브레아 가문의 저택에서 이렇게 스킬 연습을 하며 시간을 때우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준상의 속셈을 꿰뚫어 보고 있는 헤네스로서는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혼자... 가실 건가요?” “물론.” 당연하다는 듯한 준상의 대답에 헤네스는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강하다는 것은 충분히 알고 있지만, 어느새인가 준상에게 마음이 기울고 있는 헤네스로서는 그를 만류하지 못하는 자신이 그저 답답할 따름이다. 헤네스가 입을 다물자 둘의 분위기는 다시 서먹해지고 말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문득 시종 하나가 정원 안으로 급하게 달려와 헤네스에게 소식을 전했다. “찾았습니다!” 헤네스는 시종의 외침에 화들짝 놀라며 정원석에서 얼른 일어났다. “어디지?” “비덴 계곡의 관문에서 반나절 거리입니다!” “아버지께는 말씀 드렸어?” “네! 바로 사람이 갔으니 지금쯤이면 이미...” 옆에서 가만히 그 대화를 듣고 있던 준상은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으며 헤네스에게 물었다. “비덴 계곡이 어디지?” “여기서 북쪽으로 걸어서 하루 정도 거리에 있는 관문이에요. 이벨류아와 금단의 숲 사이에 있는 세 개의 관문 가운데 가장 북쪽에 위치한 곳이죠.” “간단한 지도를 구할 수 있겠나?” 준상의 물음에 헤네스는 난처해하며 대답했다. “그게... 지도의 유출은 집정관의 허가가 있어야만 해요.” “정밀한 지도까지는 필요 없다. 간단한 약도 정도만 되어도 충분해.” 어차피 이곳의 기술 수준으로 미루어 정밀한 지도까지는 기대하기 힘든 것도 사실이고, 미니맵이 있는 준상으로서는 지형지물을 통해 대략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약도만 있어도 충분한 일이었다. “그거라면... 제가 그려드릴 수 있어요.” 헤네스는 시종에게 종이와 필기구를 가져올 것을 지시하려 했지만, 준상은 손을 들어 그녀를 말린 후 인벤토리에서 캐비닛을 꺼냈다. 그 안에서 집을 정리할 때 보관해 두었던 연습장과 볼펜을 꺼내주었다. “이걸 써라.” 준상이 볼펜의 사용법을 알려주자, 헤네스는 그 부드러운 필기감에 놀라며 연습장에 비덴 계곡으로 향하는 길을 간단하게 그려내며 설명을 덧붙였다. “이쪽 방향으로 쭈욱 내려가시다 보면 작은 마을 두 개가 나와요. 여기서 이쪽 갈림길로 다시 몇 시간 정도를 가시면 계곡 입구에 마련된 관문이 보일 거에요.” 작은 정원석 위에 연습장으로 올려놓고 그렇게 설명을 하던 헤네스는 열심히 설명을 하고서 고개를 들다가 준상의 얼굴이 바로 코앞에 다가와 있음을 깨닫고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그렇군.” 준상은 그녀가 그린 약도를 연습장에서 찢어 갈무리한 후 귀밑까지 붉어진 채 어쩔 줄 몰라하는 헤네스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고맙다.” “아, 아뇨. 별말씀을...” 머리에 와닿은 준상의 손길에 어쩔 줄 몰라 하는 헤네스의 모습을 보자, 준상은 자신도 모르게 이 귀여운 갈색 머리 아가씨를 향해 잔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헤네스는 준상이 자신을 향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미처 눈치 채지 못한 채 그저 자신의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정신이 없었다. “조심해라. 괜히 설치다가 다치지 말고.” “네?” 헤네스는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그 말에 담긴 뉘앙스를 깨닫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자, 잠깐만요. 정말 혼자서 그곳에 가실...” 그러자 준상은 담담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아까 말했을 텐데.” “무슨...”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눈앞의 적을 쳐부수는 일 뿐이다.” “아...” “이제 적이 나타났으니, 나는 가서 싸울 뿐이다.” 헤네스는 당황해서 다시 말했다. “하, 하지만...” 그러나 헤네스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준상이 그녀의 머리를 끌어당겨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기 때문이다. “...” 갑작스런 그 행동에 그대로 굳어버린 헤네스를 바라보며 준상은 조용히 말했다. “다녀오마.” 준상은 그 말을 남긴 채 곧바로 비덴 계곡이 있는 방향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고, 이내 저택의 담장을 훌쩍 뛰어 넘으며 헤네스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헤네스는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자신의 이마를 손으로 어루만졌다. 그리고 찰나의 순간 와닿았던 입술의 감촉과 부드러운 속삭임을 한참이나 되새겼다. 준상은 이벨류아의 성문을 빠져 나오자 곧바로 스킬을 발동했다. “오픈 질주.” 그러자 곧바로 그의 몸은 빛살처럼 가속하며 성문을 지나던 사람들의 시야에서 멀어져 갔다. “바, 방금... 뭐가 지나갔지?” “그, 글쎄... 워낙 순식간의 일이라...” 경비병들이 그렇게 얼빠진 대화를 나누고 있는 동안 준상은 헤네스가 그려준 약도를 따라 비덴 계곡의 관문을 향해 북쪽으로 질주하고 있었다. “훅... 후욱...” 몸에서는 어느새 짙은 아지랑이가 연기처럼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아니, 몸뿐만이 아니다. 마치 증기기관차의 굴뚝에서 뿜어져 나오는 흰 연기처럼 그의 입에서도 한줄기 흰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야말로 폭주하는 인간 기관차라는 말이 어울릴 법한 질주. 인간의 신체가 낼 수 있는 극한의 속도로 준상은 이벨류아와 비덴을 잇는 가도를 빠르게 주파했다. 시종의 보고에 따르면 적의 위치는 비덴에서 반 나절 정도 떨어져 있었고, 다시 비덴과 이벨류아의 거리를 가늠한다면 최대한 빠르게 계곡으로 이동할 필요가 있었다. 관문 안쪽은 그야말로 허허벌판. 그곳이 뚫리면 이벨류아까지는 그야말로 거칠 것 없는 진격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준상은 순식간에 작은 마을 하나를 지나쳤다. 눈에서는 시퍼런 안광을, 입으로는 흰 연기를 뿜어내며 질주하는 준상의 모습에 고작 열 가구가 될까 싶은 작은 마을의 주민들은 기겁하며 얼른 길에서 비켜날 수밖에 없었다. “바, 방금 그게 뭐였지?” “그, 글쎄... 사람 같았는데...” 그런 식으로 또다시 작은 마을을 하나 지나가고 나자, 비로소 준상의 시야에 거대한 숲으로 통하는 관문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순식간에 끌어당겨지듯 관문을 향해 쇄도한 준상은 그 폭발적인 힘을 담아 고작해야 이삼미터나 될까 싶은 관문의 성벽 위로 훌쩍 뛰어 올랐다. “히익!” 관문 위에서 긴장된 시선으로 금단의 숲을 바라보고 있던 경비병은 갑자기 시커먼 무언가가 그의 옆으로 뛰어오르자 기겁하며 놀랐다. 너무나 놀란 탓에 뒷걸음질을 치다가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어버린 경비병은 화들짝 몸을 일으키며 들고 있던 창을 준상에게 겨누었다. 사람을 닮기는 했는데... 눈에서 푸른 안광을 번뜩이는 모습이라든가, 불이라도 난 것처럼 몸에서 흰 연기를 내뿜고 있는 모습을 보니 도저히 자신과 같은 사람처럼 느껴지지가 않는다. 하지만 준상은 경비병이 옆에서 그러거나 말거나 금단의 숲 방향을 주시하기만 했다. 곧바로 관문의 성벽 위로 다른 경비병 들이 다가와 준상을 에워싼다. “누,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하지만 준상은 바로 그 순간, 좌측 시야와 미니맵을 가득 채우기 시작한 히든 퀘스트들을 확인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00063 트롤러 ========================================================================= 에픽 퀘스트 – 여명 4. 어둠의 군세로부터 도시를 지켜내십시오. :강대한 어둠의 군대가 성곽도시 이벨류아를 노리고 진격해 오고 있습니다. 그들의 침공을 막아내십시오. (침공까지 남은 시간 : 61시간 23분) (Hidden) 장군 칼카쉬를 처치하십시오. (협력) ->미완료. (Hidden) 호위대장 아뉴트를 처치하십시오. (협력) ->미완료. (Hidden) 해골 마법사 10명을 처치하십시오. (협력) ->미완료. (Hidden) 보급대장 부카를 처치하십시오. (협력) ->미완료. (Hidden) 선봉대장 랑다잘을 처치하십시오. (협력) ->미완료. (Hidden) 정찰대장 그룬발을 처치하십시오. (협력) ->미완료. (Hidden) 정찰대 10명을 처치하십시오. (협력) ->미완료. (Hidden) 하이에나 20마리를 처치하십시오. (협력) ->미완료. 단독은 하나도 없고 모조리 협력이다. 게다가 퀘스트에 나열된 이름으로 미루어 말로만 어둠의 군세 어쩌구가 아니라 제대로 편제된 군대라는 점도 알 수 있었다. 최종 보스는 장군 칼카쉬이며, 이름이 있는 중간 보스급만도 네 명이나 된다. “후우우...” 준상은 호흡을 길게 내뿜으며 과부하가 걸린 몸을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온몸으로 연기를 뿜어내고 있는 준상의 기괴한 모습에 놀란 병사들은 계속해서 그에게 창을 들이대며 위협을 가했다. “누, 누구냐니까!” “...” 준상은 고개를 돌려 경비병들을 바라보았다. 반짝거리는 투구를 쓰고 몸에는 징 박힌 가죽 갑옷을 입은 그들의 모습은 이벨류아의 부유함을 상징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었지만, 덜덜 떨리는 무릎을 봐서는 아무리 높게 쳐줘도 정예병이라고 부르기 힘들 듯 싶었다. 숫자라도 많으면 모르겠지만, 당장 눈에 보이는 경비병은 고작해야 열 명 안팎에 불과했다. 이 정도로는, 히든 퀘스트 가운데 최하단에 위치한 하이에나 스무 마리의 상대조차 버거운 수준이다. 물론 관문이 있으니 잘 하면 방어가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희망사항일 뿐이다. “흠...”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미니맵에 나타난 표적의 위치를 가늠했다. 아직 시야에 적이 들어오지 않은 상황이라 붉은 색의 히든 퀘스트 표식 역시 미니맵의 경계 부근에 빽빽하게 몰려 있다. 준상은 잠시 고민했다. 이대로 관문을 등지고 방어전을 펼 것인가. 아니면 길목에서 적을 기습할 것인가. 하지만, 사실 고민하고 말고 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어엇!” 갑자기 준상이 성벽 아래로 훌쩍 뛰어내리자, 경비병들은 당황해 하며 눈으로 그의 모습을 쫓았다. 몸에서 나던 연기도 거의 사라지고 이제는 희미한 아지랑이만 피어날 뿐이다. 준상은 그대로 그늘진 숲 속으로 들어가 버렸고, 경비병 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어찌 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어, 어쩌지?” “일단... 보고부터 하자.” “그래야겠지?” 준상은 몸의 회복이 거의 끝나자 빠르게 숲을 가로 질러 퀘스트 표식을 향해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약 삼십분 정도를 이동하자, 비로소 미니맵에 붉은 퀘스트 표식들이 한데 몰려 다가오는 것이 포착되었다. 상당한 숫자가 빠르게 몰려오는 것으로 보아 하이에나가 아닐까 싶다. 준상은 곧바로 늑대들을 소환했다. “울프팩.” 명령어가 준상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그의 주위에 세 마리의 늑대들이 한줄기 빛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다. 준상은 그들을 내려 보내 길을 막도록 한 다음, 산들바람에게 다시 명령했다. “산들바람, 길을 막아라.” 만약의 경우 하이에나들이 늑대들을 빠져 나갈 경우를 감안해 산들바람으로 바람의 장벽을 만들도록 지시한 것이다. 여러 마리를 동시에 막아내기는 어렵겠지만, 잠시 발을 묶는 정도라면 산들바람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렇게 길을 막아 놓고 잠시 기다리자, 하이에나들이 무언가에 쫓기듯 헐레벌떡 달려오다가 길을 막아선 늑대들을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크르르릉! 하이에나들은 자신들보다 커다란 몸집을 가진 늑대의 모습에 잠시 틈을 엿보듯 오락가락하다가, 자신들의 숫자가 더 많다는 사실을 깨닫자 이빨을 드러내며 천천히 다가서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길 옆에 도사리고 있던 준상이 벼락 같이 튀어나가며 하이에나들을 덮쳤다. 퍼걱! 순식간에 하이에나 한 마리가 준상의 숄더 차지에 직격 당해 길 옆으로 튕겨 나갔고, 그것을 신호로 늑대들 역시 하이에나들을 향해 화살처럼 쏘아져 나갔다. -크왕! 겁도 없이 자신들을 기습한 준상의 모습에 하이에나 한 마리 성을 내며 풀쩍 뛰어올랐다. 하지만 하이에나는 준상의 몸에 그 누런 이빨을 박아 넣기도 전에 커다란 해머처럼 휘둘러진 너클에 맞아 구겨진 신문지처럼 바닥을 뒹굴었다. “흐읍...” 준상은 가볍게 숨을 멈춘 후 그대로 팔꿈치를 옆구리에 붙인 채 자세를 낮추고 하이에나들에게 쇄도했다. 퍽! 퍼퍽! 두 방도 필요 없었다. 하이에나들은 날아드는 준상의 주먹에 맞을 때마다 그대로 날아가 처박히며 숨이 끊어졌다. 일단 진형이 무너지자, 하이에나들이 지니고 있던 수적인 우위도 물거품이 되었고, 결국 순식간에 도륙 당하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아무래도 안되겠다 싶었던지 하이에나 한 마리가 꼬리를 말고 재빨리 뒤로 돌아 도망치려 했다. “오픈 염동력.” 준상의 입에서 명령어가 나오자, 카드 슬롯에 장착되어 있던 숄더 차지가 빠져 나오고 그 자리에 염동력이 자리한다. 카드가 장착되었음을 확인한 준상은 왼손을 뻗어 움켜쥐는 듯한 동작을 취했다. 그러자, 하이에나는 곧바로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끌어당겨져 준상에게로 날아왔다. “후...” 준상은 짧은 심호흡과 함께 자세를 낮춘 후,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하이에나를 향해 정권을 내질렀다. 퍽! 염동력에 의한 운동 에너지와 준상의 손에서 뻗어나간 충격 에너지가 하이에나의 머리에서 합쳐지자, 이 연약한 야수의 머리는 그 힘을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폭죽처럼 터져 나가고 말았다. 하이에나의 뜨거운 피와 뇌수가 확 터져 나오며 그대로 준상의 몸을 흠뻑 적신다. “괜찮군.” 준상은 또다시 꼬리를 말고 도망치는 하이에나를 향해 염동력을 발동했다. 이번에는 머리가 아닌 배에 적중했지만, 부드러운 뱃가죽은 준상의 주먹에 맞는 순간 갈기갈기 찢겨져 그 안에 든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창자들을 허공에 흩뿌리고 말았다. 준상은 이제 완전히 그 자리에 멈춰선 채, 하이에나를 한 마리씩 끌어당겨 처치하기 시작했다. 염동력의 사용이 아직 익숙하지 않아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가는 경우도 많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준상은 이 새로운 스킬이 꽤 마음에 들었다. 마침내 모든 하이에나들이 문자 그대로 어육이 되어 피와 살을 땅에 흩뿌린 채 주검으로 변하고 나서야 준상은 겨우 움직임을 멈추었다. “후우...” 계속 해서 연거푸 염동력을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몸에 가해지는 부담이 그리 크지 않았다. 준상은 이것이 몸에 뒤집어쓴 하이에나의 피 때문임을 깨달았다. 솔직히 냄새도 그렇고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앞으로 있을 전투를 생각하면 미리 이런 식으로 피를 뒤집어쓰는 것도 나쁘지 않다. 피 냄새가 좀 역겹기는 하지만, 적어도 언데드들의 체액 보다는 나을테니 말이다. 준상은 히든 퀘스트 목록 최하단의 하이에나 처치 항목이 완료된 것을 확인한 후 다시 미니맵으로 시야를 돌렸다. 그러자 한데 뭉쳐서 달려왔던 하이에나와는 달리 넓게 흩어져서 움직이는 한 무리의 퀘스트 표식을 발견했다. 준상은 퀘스트 표식들이 천천히 다가오는 것을 확인하자 늑대들을 역소환하고 산들바람을 방어로 돌린 후 수풀에 몸을 숨겼다. “오픈 은신.” 짧은 명령어가 준상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염동력 카드가 빠져 나가고 그 자리에 은신이 장착되었다. 카드의 장착이 완료되자 준상은 곧바로 은신을 펼쳐 기척을 숨겼다. 괴물들은 대로가 아닌 숲 그늘 사이를 조심스럽게 이동하다가 길 한복판에 흩뿌려진 하이에나들의 주검을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준상은 괴물들의 모습을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 겉모습은 이전에 마주쳤던 튜토리얼의 보스나 숲의 정화 때 보았던 보스와 유사했지만, 체구가 훨씬 작고 날렵해 보였으며, 손에는 날카로운 손톱이 길게 나 있었다. 괴물들은 조심스럽게 하이에나들의 시체를 확인하더니 이내 그 중 한 마리가 보고를 하려는지 뒤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칫!” 준상은 혀를 차며 곧바로 은신을 풀고 몸을 일으켰다. “오픈 염동력.” 그리고 곧바로 은신 카드 대신 염동력 카드를 장착한 다음 뒤쪽을 향해 달려가는 괴물을 자신에게로 끌어당겼다. -켁! 괴물은 갑자기 뒷덜미가 잡힌 것처럼 끌어당겨지자 깜짝 놀라며 억눌린 비명을 질렀지만, 이내 준상의 주먹이 작렬하자 머리통이 부서지며 그대로 바닥을 뒹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동료가 쓰러지자 남은 괴물이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목줄을 단숨에 끊어버리겠다는 듯이 손톱을 휘둘렀지만, 준상은 몸을 숙이며 뛰어오른 놈의 다리를 잡아 그대로 바닥에 패대기쳤다. -케엑! 두세 번 정도 바닥에 강하게 패대기치자 괴물은 그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침 맞은 지네 마냥 그대로 움직임을 멈춰 버렸다. 준상은 뻗어버린 괴물의 머리를 군화발로 으깨버리고 시드를 꺼낸 다음, 천천히 수풀 속으로 들어갔다. 괴물들은 모두 어두운 숲 그늘에 몸을 숨기고 있었지만, 미니맵과 안목의 능력이 있는 준상의 시야에서는 벗어날 수 없었다. 준상은 마치 숨은 그림 찾기를 하듯이 숲 그늘에 숨은 나머지 여덟 마리의 괴물들을 염동력으로 하나씩 끌어내 친절하게 머리를 박살내 버렸다. 그리고 마지막 한 마리의 괴물을 해치운 다음 퀘스트를 확인하며 느긋하게 시드를 뽑아내고 있는데, 문득 등골이 서늘해지는 알 수 없는 감각이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흣!” 얼른 몸을 숙이며 앞으로 한 바퀴 구르자 자신이 서 있던 자리를 시커먼 무언가가 덮치다가 보이지 않는 바람의 벽에 튕겨나가는 장면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그렇게 놈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오고 나서야 준상은 비로소 미니맵에 새로운 붉은 색 느낌표가 나타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준상은 얼른 뒤로 물러서는 놈에게 염동력을 써서 자신에게로 끌어들이려 했지만, 놈은 다음 순간 숲의 허공으로 모습을 감추더니 또다시 미니맵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이건...” 준상은 얼굴을 찌푸렸다. 미니맵으로도 위치를 확인할 수 없는 능력이라니. 게다가 지형지물에 몸을 감추는 수준도 아니고, 허공 속으로 녹아들 듯이 사라지는 그 능력은 단순한 은신 기술로 생각할 수 없었다. “울프팩.” 하지만 준상은 당황하지 않고 다시금 늑대들을 소환했다. 그리고 빛과 함께 자신의 주위에 모습을 드러낸 늑대들을 향해 명령했다. “찾아라!” 아니나 다를까. 준상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늑대들은 조금 떨어진 허공을 향해 맹렬하게 울부짖더니 이빨을 드러내고 곧장 뛰어올랐다. -키익! 늑대 세 마리가 순차적으로 몸을 날리자 견디지 못한 괴물이 비로소 허공으로부터 모습을 드러냈다. 생각대로다. 이 괴물의 은신 능력은 시각으로부터는 자유로울지 몰라도 후각이나 청각에 의한 탐지까지 벗어날 수는 없었다. 준상은 괴물의 모습을 눈으로 쫓다가 한 가지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놈이 걸치고 있는 검은 망토에서 환영과도 같은 희미한 빛이 흘러나오고 있음을 뒤늦게 알아차린 것이다. 이것이 가치 있는 물건을 빠르게 알아보는 안목의 시각 효과임을 깨달은 준상은 직감적으로 괴물의 은신 능력이 저 망토와 관련이 있음을 또한 깨달았다. 준상은 곧바로 손을 뻗어 괴물을 자신에게로 끌어당겼다. 하지만, 괴물은 자신의 몸에 가해지는 염동력을 뿌리치고 숲을 향해 달리기 시작한다. “쯧.” 준상은 혀를 차며 새로운 콤보를 발동했다. “무투가.” 그러자 기존의 카드들이 와르르 뽑히고 그곳에 새로운 카드들이 장착된다. 광폭(R), 카운터, 숄더 차지, 강타. 이 네 장의 카드와 늑대, 곰, 멧돼지의 영혼이 결합하자 지하 격투장의 암흑 무투가 콤보가 발동되었다. 준상은 도망치는 망토 괴물을 향해 곧바로 숄더 차지를 발동했다. 부와악! 순간 준상의 눈앞에서 공기가 둘로 갈라지며 도망치는 괴물의 모습이 크게 증폭되었다. 괴물은 다급하게 숲 그늘을 향해 몸을 날리다가 공기를 가르며 포탄처럼 날아드는 준상의 어깨에 그대로 격중되었다. 늑대의 영혼에 의해 치명타 확률이 증가하고, 곰의 영혼에 의해 공격력이 강화되었으며, 다시 멧돼지의 영혼에 의해 돌격시 공격력이 크게 증폭되었다. 이것 뿐만이 아니다. 세 가지 영혼이 장착되었으므로 다시 무투가 콤보에 의해 이 모든 공격력이 다시 삼백 퍼센트로 증폭된 숄더 차지의 파괴력은 능히 거대한 바위를 순식간에 가루로 만들어 버릴 정도의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야 말로 인간 포탄이라는 말이 부족하지 않은 위력! -크아악! 괴물은 등뼈가 분쇄되고 내장이 뒤엉키는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을 굴러 수풀 속에 처박히고 말았다. “후우...” 준상은 반신불수가 되어 버린 괴물을 염동력으로 끌어왔다. 괴물은 버둥거리며 염동력에 저항하려 했지만, 척추가 분쇄된 상태에서는 헛된 몸부림에 지나지 않았다. 준상은 염동력에 의해 끌려온 괴물의 목을 잡은 후 무심한 표정으로 그 머리를 후려쳤다. 퍽! 퍼퍽! 일반 공격은 증폭시켜 주지 않는 무투가 콤보 탓인지, 아니면 보통의 괴물보다 단단한 머리뼈를 지닌 탓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괴물은 제법 오래 준상의 주먹을 버텨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결국 계속된 충격을 견디지 못한 괴물의 머리는 준상의 손아래 산산조각으로 부서지고 말았다. 준상은 천천히 놈의 머리 속에서 시드를 회수한 다음, 놈이 걸치고 있던 망토를 벗겨 아이템 확인을 시도했다. 아이템정보 명칭 : 그룬발의 망토 레벨제한 : 10 종류 : 망토 등급 : Rare 효과 : 착용시 투명화 상태 활성화 가능. Seed : 3슬롯 설명 : 정찰대장 그룬발의 망토 “이 놈이 그룬발이었나.” 중간 보스 치고는 약한 편이었지만, 늑대가 없었다면 정말 고전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게다가, 미리 나와서 처치하지 않았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만약 이놈이 성벽을 몰래 넘어 들어와 난동을 부렸다면, 얼마나 큰 피해가 생겼을지 감히 상상하기도 어려울 정도다. 준상은 곧바로 투명화 효과에 대한 정보 또한 확인해 보았다. 투명화 : 적의 시야로부터 자신의 모습을 감춥니다. 다음과 같은 상황에서는 투명화 상태가 해제됩니다. -상대방과 접촉할 경우. -마법이나 기타 공격을 시도할 경우. -걷지 않고 뛸 경우. “좋군.” 여러 가지 제한 사항이 있기는 했지만, 은밀하게 이동이 가능하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물건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미니맵의 탐지 능력에 사각이 있다는 것을 알아낸 것 또한 큰 수확이었다. 준상은 곧바로 그룬발의 망토를 몸에 걸친 뒤, 다음 목표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00064 트롤러 ========================================================================= 퀘스트 정보로 미루어 봤을 때, 그룬발의 정찰대 다음은 아마도 랑다잘이라는 이름의 중간보스가 이끄는 선발대일 가능성이 높았다. 준상은 미니맵에 나타난 퀘스트 표식을 따라 빠르게 이동을 시작했지만 선발대는 좀처럼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결국 숲을 거의 반나절 동안이나 가로지르고 나서야 준상은 선발대의 실체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이건...” 선발대로 추측되는 적의 군세를 처음 본 순간, 준상의 머리 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단 하나 뿐이었다. 많다. 어떻게 수를 세어 보기도 난감할 정도로 많다. 마치 바퀴벌레 떼가 바글거리며 몰려오는 느낌이랄까. 흔히 많은 사람을 가리킬 때, 사람의 물결이라는 뜻으로 인파(人波)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이렇게 숫자를 가늠하기가 난감할 정도로 몰려오는 적의 모습을 보자 제아무리 준상이라도 등골이 서늘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느릿한 걸음걸이로 미루어 반수 이상은 좀비로 보인다는 정도다. 하지만 저렇게 느릿하게 걷는 것도 보통 때나 그렇지 전투 상황이 되면 또 달라진다. “후우...” 준상은 일단 퀘스트 표식을 확인했다. 저 정도의 병력을 일일이 다 때려잡기도 난감한 노릇이니 히든 퀘스트에 나타난 중간 보스만이라도 잡아볼까 하는 생각에서였지만, 아쉽게도 선봉대장 랑다잘로 추측되는 퀘스트 표식은 어깨 디밀 틈도 없이 빽빽하게 서 있는 저 병력들 한복판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룬발의 망토가 지닌 투명 망토의 힘은 누군가와 접촉하게 되면 풀려버린다. 즉, 잠입을 통해 랑다잘만 잡고 나오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쯧...” 숲 전체를 은은하게 감싸고 있는 희미한 안개를 생각해보면 불을 지르는 것도 그리 효과적이지 않아 보인다. 마땅한 방법을 찾지 못한 채 고민하고 있는 준상의 눈에, 문득 선발대의 병력 중 일부가 갑자기 빠르게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설마 자신의 위치가 발각된 것인가 싶었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앞선 병력 중 일부가 산짐승을 발견하자 제 멋대로 움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 움직임은 사슴인지 노루인지 알 수 없는 동물 하나가 갈가리 찢겨져 좀비들의 입 속으로 들어가면서 끝을 맺었다. “이건...” 준상은 생각했다. 이것은 이른바 메뚜기 떼를 몰아오는 것과 마찬가지의 전술이라고. 아마도 저 선봉대장과 그에 딸린 부하들의 역할은 이 좀비 떼들을 몰아 이벨류아의 영역 안에 풀어 놓는 것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생명에 대한 끝없는 증오를 품은 이 언데드들은 제어가 풀리는 순간 제멋대로 흩어져 살아 있는 자들을 공격할 것이고, 이것은 이벨류아의 영역 전체에 통제 불가능한 상황을 연출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혼란스러워진 상황에서 정찰대가 미리 잠입해 기다리고 있다가 본대의 공격에 발맞추어 성문을 장악한다면... 별다른 대책이 없는 상황이라면 이벨류아 정도의 성곽 도시가 함락되는 것은 그야말로 순식간이다. “선발대장만 잡는다고 끝나는 일이 아니었군.” 준상은 결국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저들을 천천히 축차소모시키는 방법을 쓰기로 결정했다. “울프팩.” 그의 입에서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허공에서 빛과 함께 세 마리의 커다란 늑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크림슨 울프, 가서 몇 놈 끌어와라.” 명령이 떨어지자 붉은 털의 늑대는 곧바로 흐느적거리며 걸어가는 좀비들을 향해 움직였다. 비척거리며 걸어 다니던 좀비들은 눈앞에 커다란 붉은 늑대가 모습을 드러내자 그 피와 살이 뿜어내는 생명력에 이끌려 우르르 몰려오기 시작했다. 선발대 가운데 극히 일부만이 움직였을 뿐인데도, 대략 가늠해보니 거의 백여 구에 육박할 정도다. “정말 많기는 더럽게 많군.” 크림슨 울프는 노련하게 미끼 역할을 수행했다. 그렇게 선발대의 다른 좀비들의 시야에서 완전히 벗어난 지역까지 끌어 들이자 준상은 허우적거리며 달려오는 좀비들을 향해 뛰어들었다. 가장 먼저 발동된 기술은 바로 숄더 차지였다. 후와악! 순식간에 공기를 가르며 포탄처럼 쏘아져 나간 준상은 그대로 서너 마리의 좀비를 산산이 분쇄하고 나서야 움직임을 멈추었다. 하지만 좀비들은 갑자기 나타난 준상의 모습에 당황하기는커녕, 오히려 맛있는 성찬이 나타났음을 기뻐하듯이 괴성을 지르며 달려 들었다. 준상은 먼저 왼손을 뻗어 염동력을 발동했다. 그러자 앞서서 달려들던 좀비 두 마리의 진로가 서로 뒤엉키며 널부러졌고, 뒤따르던 좀비들 역시 그들의 몸에 걸려 우르르 넘어지기 시작한다. 그 모습을 보며, 준상은 자세를 낮춘 후 강타를 발동했다. “후으으읍!” 허공을 잡아 찢으며 끌어내리는 듯한 손동작과 함께 그의 근육이 긴장하며 힘을 비축하기 시작한다. 1초, 2초, 그리고 3초. 마침내 전신의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지며 최고조로 힘이 모아지자, 준상은 그것을 한데 뒤엉켜 나뒹구는 좀비들을 향해 뿜어내었다. 꽈릉! 주먹이 뻗어나가며 뿜어져 나간 힘의 여파로 주위의 공기가 급격하게 팽창하자, 마치 천둥이 울리는 듯한 소리와 함께 한줄기 섬광이 한데 뒤엉켜 나뒹굴고 있던 좀비들에게 작렬했다. 반항 자체를 용납하지 않는 압도적인 힘! 그 힘의 폭발에 휘말린 좀비들의 신체는 그대로 형체조차 남기지 못한 채 갈기갈기 찢겨져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후우우우...” 풀 차지의 강타를 사용한 후유증으로 과부하에 걸린 준상이 온 몸으로 연기를 뿜어내는 동안, 세 마리 늑대와 세 가지 정령들이 힘을 합쳐 달려드는 좀비들을 막아냈다. 몸에 뒤집어쓴 하이에나의 피는 이미 말라붙어서 처음처럼 재생률을 최대로 증폭시켜주지는 못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보통 때보다는 훨씬 빠르게 재생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준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정도면, 해볼 만하다. 준상은 몸에 걸린 과부하게 해소되기가 무섭게 다시 좀비들을 향해 뛰어들었다. 한편, 준상이 그렇게 선발대를 끌어들여 축차소모를 유도하고 있는 동안, 이벨류아에서는 전시 상황을 선포하는 문제로 제스터와 집정관이 마주 앉아 있었다. “으음... 생각보다 인원이 그리 많지 않군요.” 제스터가 병력 현황을 살피며 얼굴을 찌푸리자, 집정관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많지 않다니요. 무려 천 명입니다. 절대로 적은 수가 아닙니다.” 확실히 천 명이나 되는 병력은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그나마도 이벨류아가 제법 부유한 도시인데다 금단의 숲이라는 마경을 코앞에 두고 있기 때문에 이 정도 병력이라도 보유를 하고 있는 것이지, 비슷한 수준의 다른 도시들은 많아야 사오백이고, 적으면 이삼백 정도의 병력만을 운용하고 있는 곳이 태반이었다. 제스터도 집정관이 말하는 바는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심 불안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집정관 역시 불만인건 마찬가지였다. 중앙에서 임명 받은 직책을 지닌 자신이 이런 촌구석의 일개 호족에게 이런 식으로 무언가를 확인받는다는 행위 자체가 기분이 나쁘다고나 할까. “음...” 바로 그때. 전령 하나가 헐레벌떡 달려와 집정관에게 보고를 올렸다. “보, 보고 합니다!” “말하라.” 집정관이 신경질적으로 대답하자 전령은 떨리는 목소리로 손에 든 보고서를 읽었다. “적 병력 확인. 추정 1만 이상!” 순간 집정관은 물론이고 그 앞에서 턱을 쓰다듬고 있던 제스터마저도 깜짝 놀라고 말았다. “지, 지금 뭐라고?” “이, 일만 이상...” 떨리는 전령의 목소리에 집정관은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말았고, 제스터 역시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디서... 올라온 보고인가.” 제스터의 물음에 전령은 보고서를 다시 살피더니 바로 대답했다. “북방 제3초소입니다!” “...” 제스터는 얼른 몸을 일으켜 집정관실에 붙어있는 지도를 확인했다. “빠르면 하루, 늦어도 이틀인가.” 그제서야 정신이 돌아온 집정관이 제스터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 어떻게 해야...” “...” 제스터는 금방이라도 문을 박차고 도망칠 것 같은 표정의 집정관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곧바로 관문 내의 모든 마을에 대피령을 내리고 가능한 한 모든 물자를 성곽 안에 비축해야 합니다. 또한 전시 상황을 선포하고 징집 가능한 모든 병력을 끌어 모아야 합니다.” 그러자 징집관은 파리하게 질린 표정으로 잠시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병력 차가 너무 큽니다. 역시 이 상황에서는 일단 이곳을 빠져나가는 쪽이...” “허튼 소리!” 제스터는 불 같이 성을 내며 집정관을 향해 말했다. “이곳은 우리의 터전이자 고향이오! 여길 버리고 어디로 간단 말이오!” “...” “당신은 이 도시를 수호할 책임을 지닌 집정관이오! 당신이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다 죽는다는 걸 왜 몰라!” 그 위엄에 눌린 집정관은 감히 대꾸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고, 제스터는 장로회에게 이 위급한 상황을 알리기 위해 급히 집정관실을 빠져 나왔다. “쯧...” 제스터는 혀를 차며 저택으로 돌아와 그곳에 모여 있는 장로회의 인원들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협조를 요청했다. 하지만 그런 제스터의 움직임에 찬물을 끼얹는 사태가 발생했다. “지금... 뭐라고?” “집정관이... 도망쳤습니다!” 남쪽 성문을 맡고 있던 브레아 가문의 방계 출신 지휘관이 내뱉은 말에 사람들은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도망... 이라니? 그럴 리가...” “원군을 부르겠다는 명분을 내세우기는 했지만, 원군을 부르는데 자신의 가족과 재산을 모조리 챙겨서 갈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허...” 제스터는 눈을 감고 입술을 깨문 채 잠시 속으로 분을 삭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병력은... 얼마나 데리고 갔지?” 지휘관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오백... 입니다.” “허!” 각 초소나 관문에 나가 있는 병력을 감안하면, 사실상 지금 이 성곽도시에 남아 있는 병력은 고작 백여명 안팎에 불과한 셈이다. 모두의 표정은 침통하게 가라 앉았다. “정녕... 신께서는 이벨류아를 버리셨단 말인가.” 누군가의 입에서 흘러나온 작은 한탄이 사람들의 가슴을 더욱 쓰리게 만든다. 하지만, 바로 그때. 다시 병사 하나가 허겁지겁 달려와 그들에게 말을 전했다. “크, 큰 일 났습니다!” “무슨 일인가!” “그, 그것이... 일단 나와 보십시오!” “...” 영문을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사람들은 무언가에 홀리듯이 그 병사의 말에 따라 저택의 테라스로 향했다. “이, 이건...” 그들은 보았다. 어두워지는 성 안 곳곳에, 마치 하늘의 별이 내려온 것과도 같은 흰 빛이 명멸하고 있는 모습을. “저게... 뭐지?” 제스터의 물음에 병사가 대답했다. “알 수 없는 옷차림의 사람들이... 저 빛과 함께 도시 곳곳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람들... 이라고?” 사람들은 이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제스터는 이미 저런 빛의 분출을 본 적이 있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신의 귀여운 막내딸이 데려온 정체불명의 남자. 신라라는 이름의 나라에서 온 왕족이라던 바로 그 남자! 제스터는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을 바로 코앞에서 보았었다. 설마... 그와 같은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가능성이 있다. 만약 저들에게 그 남자처럼 신비한 능력이 있다면. 이 싸움, 충분히 해볼 만하다. 신은 아직 이벨류아를 버리지 않은 것이다! 제스터는 곧바로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갑시다! 그들을 만나 봐야겠소!” 00065 트롤러 ========================================================================= 제스터가 장로회의 사람들과 급히 저택을 나서려고 준비하고 있을 때, 한 남자가 이벨류아의 동문 근처에서 흰 빛과 함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끙... 이건 정말 아무리 해도 적응이 안 되는군.” 남자의 이름은 임서윤. 콤보 카드 ‘칼카스의 웨폰 마스터’를 사용하는 플레이어로서 그 이름대로 무기 사용의 전문가이다. 임서윤은 쉬다가 온 탓인지 복장이 제법 흐트러져 있었지만, 급히 주변을 살핀 후 위험 지역이 아님을 확인하자 곧바로 인벤토리에서 캐비닛을 꺼내 전투 복장을 챙기기 시작했다. 애용하는 카본제의 석궁과 화살을 챙기고 여기에 헌팅 나이프를 꺼내 어깨 부근에 장착 하고 나서야 비로소 휴대폰을 열어 퀘스트 확인을 했다. 어둠의 군세로부터 도시를 지켜내십시오. :강대한 어둠의 군대가 성곽도시 이벨류아를 노리고 진격해 오고 있습니다. 그들의 침공을 막아내십시오. (침공까지 남은 시간 : 54시간 11분) [이 퀘스트는 대규모의 인원이 동시에 참여합니다.] “대규모?” 서윤은 그런가 보다 하면서 퀘스트 정보를 읽다가 마지막 줄에 나와 있는 내용을 보고 깜짝 놀랐다. 참가하는 사람의 수가 많을수록 퀘스트의 난이도가 높은 것은 당연한 일. 그와 같은 사실로 미루어 보면, 이번 퀘스트의 난이도는 이제까지 겪었던 그 어떤 임무보다도 어려울 것임을 쉽게 추측할 수 있다. “이거야 원...” 서윤은 잠시 난처한 표정으로 턱을 긁적이며 휴대폰을 바라보다가 일단 골목을 나가 어떤 사람들이 와 있는지 확인해 보기로 했다. 조금은 어둑한 골목을 빠져 나가자 곧바로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정말로 사람이 많았다. 퀘스트를 오가며 보았던 이쪽 세계의 사람들도 많았지만, 지구에서나 보았을 법한 복장을 입은 사람들까지 바글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대충 봐도 이십여명은 되어 보이는 숫자. 이것은 서윤이 지금까지 임무를 수행하며 마주쳤던 사람들을 전부 합친 것보다도 많은 수였다. “이건... 도대체...” 이쯤 되자 항상 웃는 표정을 짓고 다니던 서윤조차 표정이 굳을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때. 누군가가 서윤의 이름을 부른다. “아! 서윤씨! 서윤씨 맞죠?” 임서윤은 어쩐지 귀에 익은 목소리임을 깨닫고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하얀 블라우스와 면바지 위에 청재킷을 걸친 단발 머리의 여성이 눈에 들어온다. 임서윤은 어두운 와중에도 홀로 빛을 발하는 듯한 그녀의 미모를 보자 바로 그 이름을 떠올릴 수 있었다. “아... 세아씨군요.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진세아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별로요.” “네? 무슨 일이라도...” “후우... 말도 마세요. 모처럼 마음먹고 우아하게 스테이크 좀 썰어볼까 하다가 불려왔거든요.” “하하, 그것 참 불행이군요.” 서윤의 말에 진세아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딱히 불행이랄 건 없어요. 덕분에 돈 굳었다고 생각하면 그만이니까. 그 레스토랑의 종업원들은 갑자기 화장실에서 사라진 정체불명의 여자 때문에 골치가 아프겠지만요.” “하하...” 잠시 그렇게 가벼운 대화를 건네던 진세아는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플레이어들의 모습을 보고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이번 퀘스트... 아무래도 만만치 않겠죠?” 임서윤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후... 이제 좀 익숙해졌나 싶었더니...” 조금은 지친 표정으로 진세아가 그렇게 한숨을 푸욱 내쉬는데, 문득 사람들 사이로 이질적인 인물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허리까지 치렁치렁하게 길게 기른 검은 색 머리카락. 그리고 소복을 연상시키는 하얀색 원피스. 임서윤과 진세아는 그 모습을 보는 순간 그녀가 누구인지 단박에 알아차렸다. “...” 임서윤과 진세아는 자신도 모르게 얼른 그녀로부터 고개를 돌렸지만, 서유미는 마치 유령처럼 스윽 나타나 두 사람의 등 뒤에서 조용히 말을 걸었다. “아, 안녕... 하세요...” 속삭이는 듯한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임서윤과 진세아는 등골에 소름이 좌륵 돋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하하하... 안녕... 하세요.” 자신도 모르게 외면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임서윤은 얼른 고개를 돌리며 인사를 했지만, 바로 그 순간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배시시 웃고 있는 눈과 시선이 마주치자 등골에 식은땀이 주륵 흘러내린다. “잘... 지냈어요? 유미씨.” “네. 세아씨도 잘 지내셨죠?” “예... 뭐... 그럭저럭...” 서유미의 등장으로 인해 나름 화기애애하던 서윤과 세아 주변의 분위기는 급속도로 냉각되었다. 이 분위기를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 싶어 곤란해 하는데, 문득 대로 저편에서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왔다. “연합에 소속되신 분들은 도시 중앙으로 모여 주십시오! 연합 소속 분들, 오셨으면 도시 중앙으로 오십시오!” 그 말을 듣고 서유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연합?” 그러자 이때다 싶었던지 얼른 임서윤이 대답했다. “아아... 그 국회의원 아들내미가 만든 길드를 말하는 겁니다. 본래 이름이 대한민국 귀환자 연합이라던가 그랬던 것 같군요. 여러분에게도 연락이 가지 않았습니까?” 그 말을 듣자 그제서야 생각났다는 듯이 진세아가 손뼉을 치며 대답했다. “아, 왔어요. 실은 저도 가입할까 말까 고민하던 중이었거든요.” “하긴, 조건이 제법 좋긴 하죠.” 두 사람의 말을 듣고 서유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저는... 처음 들어요.” “...” 순간 임서윤과 진세아는 동시에 같은 모습을 머리속에 떠올렸다. 말하러 왔다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으흐흐 웃으면서 식칼을 가는 모습을 보고 도망가는 사람들의 모습 말이다. “크흠... 뭐, 조만간 서유미씨에게도 연락이 갈 겁니다. 그 특별법인지 뭔지를 설명한다면서 말이죠.” 그제서야 서유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건 알아요. 특별법.” 임서윤은 도시 한가운데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사실... 이 빌어먹을 퀘스트 때문에 경제활동이고 사회생활이고 간에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잖습니까. 저야 뭐... 집이 그럭저럭 살기 때문에 좀 낫기는 합니다만, 다른 사람들은 당장 먹고 사는 문제부터가 큰일이죠.” “...” 두 여성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임서윤이 다시 말했다. “그런 와중에 국비 지원을 명목으로 길드라는 걸 만드니 사람들로서는 혹할 수밖에 없죠.” 그러자 가만히 듣고 있던 진세아가 임서윤에게 물었다. “서윤씨는... 연합이라는 길드가 별로 마음에 안 드시나 봐요.” “네. 솔직히 말해서, 무척 마음에 안 듭니다.” “어째서요?” “겉으로 보기에는 보통의 생활이 불가능해진 플레이어들을 지원하는 형태를 띄고 있습니다만, 실제로는 사실상 새롭게 탄생한 플레이어라는 이름의 이능력자들의 발목에 족쇄를 채우는 짓이나 마찬가지니까요.” “아...” 서유미는 무슨 소린가 하고 멀뚱거리는 표정이었지만, 진세아는 서윤의 말을 듣고는 표정이 어두워졌다. 솔직히 그녀도 그리 집안 형편이 부유한 편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후우... 큰일이네요. 일단 벌어놓은 돈이 있긴 하지만, 언제까지 계속 그걸 까먹고만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 말에 서윤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나마 우리나라는 좀 나은 편입니다. 중국 같은 곳에서는 그냥 강제로 전부 플레이어들을 끌어가 버렸다더군요.” “세상에...” 서윤은 그렇게 얘기를 하다가 잠시 주위를 돌아보더니 다시 말했다. “그런데... 박준상씨가 안 보이는 군요.” “박준상씨라면... 아, 그 남자요?” 진세아는 그제서야 생각났다는 듯이 주위를 둘러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게요. 정말 안보이네요. 설마 그 동안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테고...” 순간 분위기가 싸해진다.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자신들이 항상 죽음이라는 존재와 직면하고 있다는 사실을 되새겼기 때문이다. 진세아 역시 생각 없이 말을 했다가 뒤늦게 그 점을 깨닫고 얼른 두 사람에게 사과했다. “죄, 죄송해요. 생각 없이 말을 꺼내서...” 임서윤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뇨. 뭐... 틀린 말도 아니니까요.” 그리고는 씩 웃으며 말을 잇는다. “게다가... 준상씨는 어지간한 일로는 죽지도 않을 것 같고요.” 그 말을 듣고 진세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하긴, 좀 잘나긴 했죠. 그 사람.” 그때 옆에서 가만히 듣고만 있던 서유미가 손을 들어보이며 말했다. “저... 한 번 본 적 있어요.” 임서윤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오, 그래요?” “네.” “잘 지내던가요?” 그러자 서유미는 우울한 표정으로 이렇게 대답했다. “그게... 말도 제대로 못 붙여 봤어요.” “네? 그게 무슨...” “갑자기 막 뛰어가 버리더라구요. 쫓아가 보기는 했는데... 뭘 어떻게 해볼 틈도 없이 순식간에 퀘스트가 끝나서... 결국 쫑이는 제대로 보지도 못했어요.” “...” 임서윤과 진세아는 다시 한 번 어떤 모습이 떠올랐다. 검은 머리를 치렁거리며, 하얀 소복을 연상시키는 원피스를 입은 서유미가 식칼을 빼들고 준상의 뒤를 쫓는 모습을 말이다. 순간 다시 한 번 분위기가 썰렁해지자, 임서윤은 가볍게 헛기침을 하며 두 여성에게 말했다. “크흠, 다른 사람들도 저쪽으로 모이는 것 같은데 한번 가보죠.” “네.” 세 사람은 조용히 걸음을 옮겨 도시 중앙의 광장으로 향했다. 때마침, 그곳에는 도시의 대표로 제스터가 장로회의 사람들을 이끌고 나오던 중이었다. “역시...” 제스터는 광장에 모인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는 이들이 준상과 같은 곳에서 온 사람들임을 어렵지 않게 알아보았다. 복식은 물론이거니와 그 외모 또한 한 눈에 보기에도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제스터는 고개를 끄덕이며 플레이어들을 한 번 쓰윽 훑어 본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대표가 누구십니까.” 그러자 플레이어들은 서로를 돌아보았다. 연합이라는 형태의 조직을 만들기는 했지만, 아직 이런 식으로 모여본 적이 없다보니 누가 누군지 바로 알아보기가 어려웠던 탓이다. 그러자 문득 건장한 중년 남자 하나가 옆에 서있는 조금 어린 인상의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길드장이 나서야 할 때인 것 같군요.” 바로 그 도련님, 김성진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 같은 애송이가 나서봐야 무시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죠.” “하지만...” “아버지 말씀은 신경 쓰지 마세요. 이런 대규모 전면전이라면 권 소령님의 지식이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성진의 말에 권 소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리고는 제스터를 향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대한민국 육군 특수전사령부 소속의 권형식 소령이오. 당신은 누구십니까.” 순간 제스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대한민국이라니. 준상과 같은 신라라는 나라의 사람들이 아니었단 말인가. 만약 서로 다른 나라에 소속된 사람이라면, 저들의 역학 관계를 알지 못하는 자신이 괜히 입을 놀렸다가는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제스터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소개를 했다. “저는 이벨류아에 기반을 둔 브레아라는 가문을 책임지고 있는 몸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야말로.” 한 눈에 보기에도 선이 굵은 남자다운 인상의 권형식 소령의 모습에 제스터는 왠지 보기만해도 마음이 든든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제스터는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어쩐 일로 이런 누추한 곳에 방문하신 것인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권형식은 잠시 고개를 돌려 김성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김성진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서야 자신들이 부여받은 퀘스트에 대해 말했다. “쉽게 믿기는 어려우시겠지만, 이 도시는 약 오십여시간 뒤에 대규모의 적으로부터 공격을 받게 됩니다. 우리들은 그것을 막아내기 위해 이곳에 불려왔습니다.” 솔직히, 말하는 권형식 소령도 그것을 듣는 플레이어들도 이런 식의 얘기가 단번에 받아들여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게 왠일. 권형식 소령의 말이 끝나자 장로회의 사람들은 대번에 안색이 밝아지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아닌가. “아! 역시 그러셨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역시 신은 이벨류아를 버리신 것이 아니었군요!” “네?” 의심하고 적대하지나 않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권형식 소령은 이 이해할 수 없는 반응에 잠시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다른 플레이어들 역시 마찬가지여서, 그들 중에는 순간 이것이 일종의 함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떠오른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제스터는 그들의 눈빛에서 경계하는 기색을 느꼈지만 모르는 척 다시 말했다. “실례지만 몇 분이나 되시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권형식 소령은 난색을 표했다. “글쎄요. 저희도 막 불려온 참이나 정확한 인원수는 파악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아, 그러셨군요. 그럼 일단 날도 저물었으니 저희가 숙소를 제공하도록 하겠습니다. 어떻습니까.” “그래주시면 저희들이야 고마운 일이죠.” 제스터는 잠시 생각하더니 집정관의 관사와 그의 가족들이 머물던 저택을 떠올렸다. 어차피 적을 앞에 두고 도망쳤으니, 그는 이미 반역자와 동급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이고, 그것은 저택을 징발할 명분으로 충분한 이유가 된다. “그럼 안내하겠습니다. 여보게, 먼저 가서 집정관의 저택을 확보하도록. 자네는 가서 집기들이 어느 정도 남아있는지 살피고.” “알겠습니다.” 제스터는 사람들을 보내 서둘러 숙소를 준비하게끔 하고는 권형식 소령을 직접 안내하며 말했다. “사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정말 어쩌나 싶었는데, 이렇게 여러분이 와주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아, 예. 별말씀을.” “후... 일만이나 되는 적이 몰려온다는 소리에 가슴이 철렁했던 걸 생각하면, 지금도 식은땀이 나는 군요. 하하하...” “...” 순간, 권형식 소령은 물론이거니와 그의 뒤를 따르고 있던 플레이어들은 일제히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일만이라니! 그제서야 플레이어들은 깨달았다. 이 사람들은 지금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자신들이 바로 그 지푸라기가 되었다는 사실을. 하지만 그들은 또한 알지 못했다. 그 일만의 선발대가 이미 누군가의 손에 산산이 부서지고 있다는 사실을. 00066 트롤러 ========================================================================= “지금... 들었어요?” 진세아의 말에 임서윤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들었습니다.” “일만이라니... 가능할까요?” 임서윤은 주위를 둘러보고는 대답했다. “대충 백 명은 넘는 것 같으니... 한 사람당 백 마리 정도 상대해야 할 것 같군요.” “백 마리...” “적이 지난 번 같은 구성이라면 어떻게 될 것도 같지만, 다른 사람들의 실력을 모르니 장담은 못하겠네요.” “후...” 그때 옆에 있던 서유미가 말했다. “준상씨... 안 보여요.” “그러게요. 묘하군요. 당연히 있을 줄 알았는데.” 임서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하자 진세아가 다시 말을 받았다. “안 불려왔나 보죠. 그보다... 우리도 따라가야 하지 않나요?” “음...” 잠시 얼굴을 찌푸리던 임서윤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어째... 연합의 들러리가 된 것 같아서 기분이 좀 그렇지만, 이대로 여기서 밤을 지샐 수는 없는 노릇이니 별 수 없군요.” “할 수 없죠. 먼저 조직을 만든데다 나라에서 지원까지 하고 있으니.” 진세아의 말에 임서윤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확 저도 길드나 하나 만들까요?” 천천히 연합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기던 진세아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서윤씨가요?” “네. 뭐... 적당히 법인 등록 하나 한 다음, 함께 퀘스트도 하면서 전리품 분배도 하고 그런 식으로 말이죠.” 임서윤의 말에 진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음... 법인이라. 하지만 수익모델이 마땅치 않을 것 같은데요.” 그녀의 말에 임서윤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전에 보니까 금화 같은 걸 가진 놈들도 있는 것 같더군요. 그리고 시드 같은 걸 대량으로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걸 플레이어들에게 되파는 방법도 있겠군요. 뭐... 처음에는 어느 정도 적자를 감안해야겠지만, 길드원들의 실력만 제대로 받쳐준다면 수익을 내는 건 문제가 없을 것 같네요.” 임서윤의 말에 진세아가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그럴 듯 하기는 하지만... 역시 처음이 문제겠네요. 길드 만든다고 은행에 대출해 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거라면... 제가 어떻게 해볼 수는 있습니다만.” “서윤씨가요?” “일이년 정도는 저 혼자서도 어떻게든 될 것 같은데 말이죠.” “정말요?” 진세아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서윤씨 부자였어요?” “좀 사는 편이긴 합니다.” 임서윤은 대단치 않다는 듯이 말하긴 했지만, 진세아는 그제서야 그가 지닌 여러 가지 무기들을 떠올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총기 소유에 대해 엄격한 규제가 이뤄지고 있는 나라에서 자동소총이나 로켓포 같은 무기를 캐비닛에 쟁여두고 다닐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권력이나 금력 같은 힘을 통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진세아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지금이야 살아남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는 상황이지만 플레이어들의 가치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면 이러한 길드 사업은 지금까지는 없었던 혁명적인 수익모델이 될 수도 있었다. 금화나 시드 같은 건 둘째 치고, 누구도 갈 수 없는 곳에 정기적으로 왕복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의 독점 사업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새로운 생물, 새로운 물질, 새로운 학문! 지금이야 당장 눈에 들어오지 않더라도, 찾아보면 그 가치는 무궁무진하다. 아, 왜 진작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진세아는 눈을 반짝이며 임서윤에게 말했다. “서윤씨.” “네.” “한번 해보죠.” “정말요?” “제가 이래 보여도 돈 계산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아요. 길드장은 서윤씨가 하세요. 제가 총무 할 테니까.” 적극적인 진세아의 모습에 임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진세아는 모르고 있었지만 임서윤은 이전의 만남 이후로 진세아나 박준상처럼 자신이 만난 인물에 대해서 어느 정도 조사를 마친 상태였고, 지금의 대화도 사실 그런 정보를 기반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진세아. 나이 26세. 대학 졸업 후 XX증권의 자기계정운용부에 재직 중이었지만 대규모 실종 사건에 휘말린 후 휴직 중. 능력은 화염 마법이 주종. 이외에도 여러 사람을 만나보기는 했지만, 외모도 아름답고 성격도 원만해서 단번에 임서윤에게 낙점되었다. 하지만, 계획대로라고 생각하며 속으로 흐뭇해하는 서윤의 귀에 조심스러운 목소리 하나가 들려왔다. “길드... 만들어요?” “...” 서윤은 돌아보지 않아도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알 수 있었다. 바로 서유미다. “네... 뭐...” “...” 임서윤이 그렇게 대답하자 서유미는 품에서 천으로 둘둘 만 식칼을 꺼내더니 말없이 만지작거리기 시작한다. “...” “...” 어색한 침묵. 뭐라고 대놓고 말하는 것도 아닌데, 왠지 무시할 수 없는 그 묘한 박력에 임서윤은 물론이거니와 진세아마저도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서유미. 나이 22세. 고등학교 졸업 후 평택의 전원주택에서 고령의 관리인 부부와 함께 생활하고 있는 중. 성은 죽은 어머니의 것을 따랐지만, 소문에는 모 재벌 회장의 숨겨진 딸이라는 얘기가 있다. 외모도, 성격도, 능력도, 거기에 배경까지도 임서윤에게는 부담스럽기 그지없는 상대인지라 가급적이면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랄까. 어쩌면 연합에서 서유미에게 곧바로 손을 뻗지 않았던 것 자체가 그런 껄끄러운 배경 탓일수도 있었다. 하지만 임서윤의 그런 속내를 알 리 없는 진세아가 일을 키웠다. “유미씨도... 함께 할래요?” 압박을 견디지 못한 진세아가 조심스럽게 묻자 서유미는 눈을 반짝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 임서윤은 속으로 가슴이 철렁 주저앉았지만, 별수 없이 웃는 표정으로 마주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플레이어들은 제스터의 안내를 받아 이전에 집정관의 가족들이 머물렀던 호화로운 저택에 발을 들였다. 대리석으로 보이는 하얀 돌로 겉을 치장한 호화롭고 고풍스러운 저택의 모습에 플레이어들은 우울했던 기분을 조금은 떨쳐 버릴 수 있었다. 제스터는 먼저 보냈던 사람들에게 남아있는 집기라든가 이곳에서 일하는 고용인들의 현황을 확인한 후 권형식 소령에게 다가와 말했다. “이 건물을 자유롭게 사용하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식사나 목욕물을 준비하려면 대략이라도 인원수를 알아야 할 듯 합니다만...” “알겠습니다. 바로 확인해서 알려드리겠습니다.” 두 사람은 일단 식사를 마친 후 장로회와 연합의 중진들이 모인 자리에서 앞으로의 대책에 관해 논의하기로 결정했다. 연합의 사람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인원을 파악하기 시작했고, 그 조사내용을 바탕으로 방 배정이 이루어졌다. 일만의 적을 상대해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던 플레이어들은 안락한 잠자리와 풍성한 식사, 그리고 따뜻한 목욕물에 잠시나마 시름을 잊고 환호했다. 그 중에는 이전에 준상과 같은 습지 퀘스트에 참가했다가 F랭크를 받고 되돌려 보내졌던 정다빈도 있었다. “아... 좋다.” 다른 여성 플레이어들은 낯선 곳에서 함부로 몸을 드러내는 것을 꺼려 한 탓에 목욕을 나중으로 미루었지만, 정다빈은 그렇게 미루다가 한바탕 고생을 했던 경험 때문인지 목욕물이 데워지자마자 곧바로 욕실에 들어와 몸을 씻는 중이었다. 둥그런 나무 욕조 안에 들어가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자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기분마저 들 정도다. “룰룰루...” 콧노래마저 흥얼거리며 그렇게 목욕을 하고 있는데, 문득 욕실의 문이 벌컥 열린다. “누, 누구세요!” 화들짝 놀란 정다빈이 그렇게 소리를 지르자 곧바로 조금은 껄렁한 남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 사람이 있는 모양인데?” “여자 목소리인데?” “오! 그거 잘됐네. 흐흐흐...” 정다빈은 갑자기 헐벗은 남자 세 명이 욕실 안으로 밀고 들어오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뭐, 뭐하는 거에요! 사람 있는 거 안 보여요?” 하지만 남자들은 피식 웃으며 그런 다빈을 훑어보았다. “이야... 앙칼스러운 게 딱 내 취향인데.” “너무 그렇게 싫은 척 하지 말라고. 어차피 낼 모레면 다 죽어 나갈지도 모르는 사이끼리.” 밖으로 나갈 생각이 없는 그들의 모습에 다빈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오픈 산들바람. 오픈 산들바람.” “응?” 그녀의 입에서 카드 명령어가 연거푸 흘러나오자 세 남자들은 아차 싶었던지 얼른 그녀에게 달려들고자 했다. “얘들아, 밀어내버려!” 하지만, 다음 순간 다빈의 입에서 다시 한줄기 외침이 터지자 그들은 보이지 않는 부드러운 벽에 가로막힌 채 주르륵 뒤로 밀려나갔다. “어엇!” “뭐, 뭐야. 이거!” 그들은 뭘 어떻게 해 볼 틈도 없이 그대로 통로까지 밀려나갔고, 하필 바로 그 순간 통로를 지나던 두 여성의 눈앞에 흉물스런 몸을 보여주고 말았다. “꺅!” 진세아는 얼른 눈을 가리며 몸을 돌렸지만, “누구 없어요! 도와주세요!” 다음 순간 욕실 안에서 정다빈의 비명이 울려퍼지자, 서유미는 말없이 품에서 식칼을 품에서 꺼내더니 날에 감겨진 천을 벗겨내고는 그들에게 다가섰다. 자신도 모르게 눈을 돌렸던 진세아 역시 그 소리를 듣고는 바로 상황을 깨닫고 손바닥을 펼쳐 불의 화살을 만들어 내었다. 검은 머리를 치렁치렁하게 기르고 소복을 연상시키는 하얀 원피스를 입은 채 시퍼렇게 날이 선 식칼을 들고 서 있는 서유미와, 이글거리는 불의 화살을 손에 든 진세아를 본 세 남자는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었던지 다급하게 반대 출구로 도망쳤다. 하지만, 서유미는 그들을 쉽게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곧바로 검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그들의 뒤를 쫓기 시작한 것이다! “쯧...” 진세아는 혀를 차더니 바로 다빈이 있는 욕실로 들어갔다. “괜찮으세요?” “예... 덕분에...” 정령을 써서 바로 쫓아내기는 했지만, 얼마나 놀랬던지 다빈의 얼굴을 여전히 파랗게 질린 상태였다. “쫓아 버렸으니까 진정하세요.” “감사합니다.” 다빈은 바로 몸을 일으켜 욕조에서 나오려고 했지만, 진세아가 그녀를 만류했다. “그대로 있어요.” “하지만...” “그 사람들이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되요. 무서운 사람이 쫓아갔으니.” “그래도...” “모처럼 맘 편하게 목욕할 수 있는 기회를 그런 놈들 때문에 놓치기는 아깝잖아요?” “...” 모르긴 해도 그 세 사람은 오늘 밤 편히 자기는 글렀다고 봐야 한다. 아니, 오늘 하루로 끝나면 차라리 다행이다. 운이 없으면 평생 식칼 들고 따라오는 미친년의 모습이 트라우마로 자리잡을 지도 모른다. 진세아는 일단 욕실의 문을 다시 한 번 단속한 다음 천천히 옷을 벗고 그곳에서 몸을 씻기 시작했다. 다빈은 그 여유로운 모습을 보고서야 겨우 마음의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늦어서 죄송합니다. 숙취 때문에 하루종일 끙끙 앓다가 이제 겨우 좀 정신을 차렸네요. 00067 트롤러 ========================================================================= 진세아는 그대로 정다빈과 함께 목욕을 한 뒤, 그녀를 데리고 자신들에게 배정된 방으로 돌아왔다. 임서윤은 소파에 걸터앉은 채 도무지 글자를 알아볼 수 없는 책을 뒤적이다가, 그녀들이 방으로 들어오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욕은 잘 하셨습니까?” “네, 간만에 푹 담그고 오니까 정말 살 맛 나네요.” “하하... 그런데, 그 분은?” 정다빈은 언니 같은 느낌의 진세아를 따라 왔다가 방에 있는 남자의 모습을 보고는 흠칫 놀라며 뒤에 숨었다. 진세아는 그런 다빈을 보며 쓴웃음을 짓더니 임서윤에게 그녀를 소개했다. “욕실에서 만났어요. 저처럼 마법 계열이에요. 속성은 전격. 정령도 부리고요.” “오, 그건 정말 대단하군요.” 임서윤은 반색했다. 은밀히 살펴본 바에 따르면 마법 계열의 플레이어는 전체 사용자 가운데서도 제법 수가 적은 편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전격 계열은 공격 마법 중에서도 특히나 활용도와 공격력이 높은 축에 속한다. 거기에 정령이라는 보조수단까지 갖추고 있다니! 이것은 상당한 고급전력이라 할 수 있었다. “임서윤이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정다빈... 입니다.” 원래는 이렇게 소극적인 성격이 아니었지만, 욕실에서의 일이 아직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은 탓에 다빈은 서윤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있었다. 서윤은 세아의 쓴웃음 지은 표정을 통해 뭔가 일이 있었음을 눈치 채고는 바로 말을 돌렸다. “그런데 유미씨는 어디 가셨습니까?” “예, 중간에 좀 어디를 가느라... 슬슬 올 때가 된 것 같지만요.”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서유미가 조용히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왔다. 머리카락에 붙은 나뭇잎이나 옷에 살짝 묻어 있는 피를 보고 다빈은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세아는 다시 쓴웃음을 지으며 유미에게 물었다. “어떻게 됐어요?” 그러자 유미가 별 일 아니라는 듯 조용히 대답했다. “죽이진... 않았어요.” “...” 죽이진 않았다니... 잘은 모르지만 어쩐지 그 세 남자가 차라리 죽여 달라고 소리치는 모습이 세 남녀의 머리 속에 연상되었다. “크흠... 그럼 저도 씻고 오겠습니다.” 임서윤이 헛기침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서자, 서유미가 따라나섰다. “저도...” “네?” 임서윤은 순간 자신과 같이 씻겠다는 말인 줄 알고 흠칫 놀랐다. 하지만 서유미는 담담하게 그런 임서윤을 향해 말했다. “그 놈들 잡느라 못 씻어서...” “아, 예...” 어쩐지 착각을 했다는 사실 자체가 난감해진 임서윤은 서둘러 방을 빠져 나갔고, 서유미는 그런 서윤의 뒤를 그림자처럼 쫓았다. 세아는 못 말리겠다는 듯이 고개를 설레설레 젓다가 여전히 자신의 등 뒤에 숨어 있는 다빈을 향해 말했다. “재미있는 사람들이죠?” “네, 뭐...” 아무리 봐도 처녀 귀신 코스프레라고 밖에 생각이 안 되는 서유미의 모습이라든가, 당황한 상황에서도 실눈을 뜬 채 얼굴에서 웃음을 지우지 않는 임서윤의 모습이 과연 단지 ‘재미있는’ 사람들 수준의 개성일까 싶었지만, 다빈은 그냥 모르는 척 그렇게 대답했다. 세아는 다빈의 그런 반응을 보고 다시 쓴웃음을 짓더니, 그녀를 데려다 소파에 앉혔다. “좀 특이한 사람들이지만, 저분들은 저와 같은 길드 소속이에요.” “길드요?” “모르시나요?” “아뇨. 예전에 온라인 게임 해본 적이 있어서...” “네, 바로 그 길드 맞아요.” “그렇군요.” 다빈이 고개를 끄덕이자 세아가 다시 말했다. “다빈씨도 괜찮으시면 저희 길드에 들어오시지 않을래요?” “저도요?” “네. 수가 적어서 좀 미덥지 않으실지도 모르지만, 저래 보여도 저 두 사람은 정말 실력이 대단해요.” “아...” “임서윤씨는 사실 좀 속이 시커먼 능구렁이긴 하지만, 부자인데다 실력도 대단하죠. 서유미씨는... 솔직히 무슨 생각하는지 통 모르겠지만, 역시 대단한 실력의 소유자구요.” 다빈은 얼굴을 찌푸렸다. “능구렁이요?” “척 보기에도 속이 시커매 보이지 않아요? 실눈 뜨고 살살 웃는 게.” “푸훗!” 다빈이 웃음을 터뜨리자 세아는 마주 웃으며 말을 이었다. “뭐... 당장 결정하라는 얘기는 아니에요. 어차피 이것도 인연이고, 달리 파티할 사람이 없다면 일단 저희랑 같이 지내면서 지켜보시라는 거에요.” 그러자 다빈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 연합이랑 비슷한 건가요?” “비슷하긴 하죠. 다만 그쪽은 규모가 크고 이쪽은 규모가 작다는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요.” “아하...” “사실 저희도 뭉친지 얼마 안 되어서 어떤 형식으로 길드를 운영할지는 아직 정하지 않았지만, 금전적인 문제라면 서윤씨가 당분간은 지원을 해줄 거에요. 나중에 기틀이 잡히면 그때부터는 지분을 나눠서 수익 배분이 이루어질 거구요.” “그렇군요.” 다빈은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연합에서도 제의가 들어오기는 했지만, 아까 같은 일을 당하고 보니 모르는 사람이 바글거리는 곳에는 왠지 가고 싶지가 않았다. 더구나 이쪽은 여성의 비중도 높은 편이고, 언니 같은 느낌의 세아도 있으니 여러모로 마음이 끌린다. 잠시 고민하던 다빈은 결국 결단을 내렸다. “가입할게요.” “정말요? 다행이네요. 싫다고 그러면 어쩌나 조마조마했는데.” “말 놓으세요. 제가 동생인데.” “그럴까? 그럼 다빈이도 그냥 편하게 말해.” “그래도 되요?” “물론이지.” 이로써 이름조차 아직 정해지지 않은 길드의 장인 임서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네 번째 길드원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목욕을 마치고 돌아온 임서윤은 어쩐지 뭔가 말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모처럼의 마법 사용자를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웃는 얼굴로 다빈을 받아들였다. 이렇게 플레이어들의 이합집산과 함께 식사와 목욕이 끝나자, 연합에서는 앞으로의 대책을 수립하기 위한 회의를 개최할 것임을 알려왔다. “가 보실 건가요?” 진세아의 물음에 임서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야겠죠. 적어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아야 어떻게 움직일지를 결정할 수 있을테니까요.” 그 말을 들은 진세아는 서유미와 정다빈에게 말했다. “그럼 모두 함께 가요. 어차피 나중에 전해들을 바에야 모두 함께 듣는 편이 낫지 않겠어요.” 서유미는 그 말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정다빈도 동의의 뜻을 비추었다. 네 사람은 함께 관사의 회의실로 가서 벽에 기대어 섰다. 회의실에는 그들과 마찬가지 생각을 가진 플레이어들이 하나 가득 자리해 있었다. 모두가 자리를 잡자, 제스터가 앞으로 나와 현재 밝혀진 적의 위치와 이벨류아가 가진 물자, 병력에 대해 설명을 했다. “음...” 임서윤은 가만히 그 설명을 들어며 턱을 쓰다듬었다. 그 모습을 보고 진세아가 물었다. “왜요?” “뭔가... 석연치가 않아서요.” “뭐가요?” “저 제스터라는 사람... 뭔가 숨기고 있는 것이 있는 듯 한데, 그게 뭔지 영 감이 잡히질 않는군요.” “숨기는 것이 있다구요?” 진세아의 말에 임서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그게... 그냥 느낌이랄까.” “흠...” 임서윤은 벽에 기대있던 몸을 일으키며 다시 말했다. “어쨌거나... 이런 상황이라면 성벽에 의지해서 방어전을 펴는 방법 밖에는 없겠네요. 이렇게 숫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는 따로 기책을 쓰기도 어려우니까요.” “그렇군요.” “희생을 전제로 하면야 게릴라 전술 같은 걸 쓸 수도 있겠지만, 솔직히 지금 상황에서 그런 지시를 내린다고 따를 플레이어도 없을테구요.” “하긴, 길드는 군대가 아니니까요.” “그 말대로입니다.” 임서윤은 고개를 끄덕인 후 벽에 기대 졸고 있는 서유미와 정다빈을 보며 말했다. “깨우죠. 어차피 더 들어봐야 별 내용도 없을 것 같으니.” “그래요.” 진세아는 서유미와 정다빈을 깨운 후 조용히 임서윤의 뒤를 따라 회의장을 벗어났다. 그리고 관사를 나와 다시 집정관의 저택으로 향하려는데, 문득 관사 입구에서 갈색 머리의 잘 차려입은 여성 하나가 시녀로 보이는 여성들과 실랑이를 벌이는 모습을 발견했다. “이거 놔! 놓으라고!” “아가씨! 이러시면 안 된다니까요!” “놓으라니까!” 무슨 일인가 싶어 다가가자 그 갈색 머리의 여성 또한 서윤 일행을 알아보고는 곧장 시녀들을 떼어놓고 후다닥 달려왔다. “다른 세계에서 오신 분들 맞죠?” 그 갈색 머리의 여성은 바로 브레아 가문의 막내딸, 헤네스였다. “그걸 어떻게?” 벌써 소문이 퍼진건가 싶어 진세아가 묻자 헤네스는 반색하며 대답했다. “맞죠? 마침 잘 됐네요. 제 부탁을 들어주세요!” “그게 무슨...” “준상씨를 도와주세요!” “네?” 정다빈은 준상이 누군가 싶어 고개를 갸우뚱거렸지만, 다른 세 사람은 앳된 인상을 지닌 다른 세계의 소녀에게서 자신들이 잘 아는 사람의 이름이 나오자 당황해 버렸다. 당황스러운 일은 그 뿐만이 아니었다. 갑자기 네 사람의 휴대폰이 일시에 울리기 시작한 것이다. 거의 조건 반사처럼 휴대폰을 열어 확인해 보자, 이런 메시지가 들어와 있었다. (Sub) 헤네스의 부탁 :헤네스는 혼자서 적진에 쳐들어간 박준상의 일이 걱정되어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습니다. 혼자서 어둠의 군세와 대적하고 있을 박준상을 찾아 헤네스가 걱정하고 있음을 알리고 그를 도와주십시오. “허...” 임서윤은 뒤통수를 맞은 듯한 충격에 말을 잊지 못했고, “어째 안 보인다 했더니...” 진세아는 혀를 차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 그리고 서유미는 바로 품에서 식칼을 꺼내 들고 달려갈 준비를 했다. “박준상? 서브 퀘스트? 이게 도대체 뭐죠?” 오직 상황 파악이 안 되는 정다빈 만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을 뿐이다. 진세아는 바로 쫑이를 외치며 달려갈 기세인 서유미의 뒷덜미를 잡은 채 임서윤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실래요?” “끄응...” 임서윤은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이 난데없는 서브 퀘스트를 어떻게 처리해야 좋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때 서유미가 외쳤다. “빨리 가야 되요! 안 그러면 또 순식간에 퀘스트가 끝나 버린다구요!” “네?” 진세아는 잠시 이게 무슨 소린가 싶다가 이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한 가지 생각에 정신이 멍해졌다. “하, 하하... 설마... 아무리 준상씨라도 일만이나 되는 적을 혼자...” 그러자 서윤이 고개를 저었다. “음...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네?” 진세아가 되묻자 임서윤은 진지한 말투로 대답했다. “일전에 마을 방어 때의 일을 잊으셨습니까?” “그거야...” “적의 병력 조합이 그때와 비슷한 수준이라면, 게다가 바로 그 준상씨라면 절대로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 “실제로 백 단위로 밀려오는 적을 뚫고 들어가 본거지를 쓸어버렸던 사람입니다. 한꺼번에 일만을 상대하는 건 무리겠지만, 늑대 같은 걸 이용해서 적을 끌어와 상대한다면...” “하, 하하...” 진세아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또한 한편으로는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헤네스가 물었다. 말도 안했는데 준상이 혼자 쳐들어간 걸 알고 있는 걸 보니 역시 준상과 같은 힘을 가진 사람들인가보다 하면서. “저... 준상씨를... 아세요?” 조심스러운 그 물음에 임서윤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네, 일단은... 같이 싸운 적도 있는 사이입니다.” “아! 그랬군요!” 임서윤은 반색하는 갈색 머리 아가씨의 모습에 한숨을 푸욱 내쉬고는 서유미의 뒷덜미를 잡은 채 우왕좌왕하고 있는 진세아를 향해 말했다. “일단... 한 번 가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노, 농담이죠?”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진세아는 다시 말했다. “아까 봤잖아요. 걸어서 하루 정도 되는 거리라는데, 그 정도 거리라면 이동하다가 허허벌판에서 적들과 마주치게 될 수도 있어요. 그런 상황은 감안하지 않으시는 건가요?” 그러자 임서윤이 대답했다. “물론 그건 세아씨 말이 맞습니다. 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걸어갈 때의 얘기죠.” “네?” “저도 이걸 곧바로 쓰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임서윤은 그렇게 말하고는 관사 입구로 내려가 허공에서 커다란 물체 하나를 꺼냈다. 지켜보던 사람들은 갑자기 드러난, 커다란 쇳덩이의 모습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 이건...” 정다빈의 얼떨떨한 목소리에 임서윤은 웃으며 대답했다. “정식 명칭은 고기동 다목적 차량(High-Mobility Multipurpose Wheeled Vehicle), 줄여서 HMMWV, 애칭은 험비입니다.” “...” 임서윤이 꺼내놓은 험비는 엠뷸런스 버전을 개조한 것으로 뒤쪽의 화물칸을 넓혀 더 많은 인원과 물자를 적재할 수 있었다. 진세아는 입을 딱 벌리고 서윤을 바라보다가 간신히 이렇게 말했다. “이거... 알아요.” “오, 아십니까? 여성 분들은 잘 모르는...” 임서윤이 반색하며 말했지만, 진세아는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고는 말을 이었다. “연비가 살인적이라던데...” “크흠... 좀 많이 먹기는 합니다만...” “서윤씨... 진짜 부자였군요.” “크흠, 크흠흠.” “게다가 진동이 엄청나서 오프로드에서는 방탄모를 반드시 써야 한다고...” “크흠!” 임서윤은 진세아의 말에 계속해서 헛기침을 하다가, 그녀의 말이 끝나고 나서야 이렇게 말했다. “잘... 아시는 군요.” “예, 뭐... 일하던 곳의 동료 중에 이런 쪽에 빠진 사람이 있어서...” “크흠...” 임서윤은 다시 한 번 헛기침을 하다가,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었던지 다시 말했다. “어쨌거나, 이 놈이라면 설령 일만의 적들 사이에 준상씨가 고립되어 있더라도 바로 데리고 나올 수 있습니다.” 진세아도 그것만큼은 부정하지 못했다. “확실히... 그렇겠네요.” 임서윤은 그제서야 자신감을 회복하고는 차문을 열어 보이며 말했다. “자, 타시죠. 기왕 퀘스트를 받았으니 해결하는 것이 도리 아니겠습니까.” “...” 진세아는 서유미와 정다빈을 돌아보았다. 바둥거리며 그녀의 손에서 벗어나려 애쓰던 서유미는 곧바로 험비의 뒷문을 열고 들어가 앉았고, 다빈의 경우에는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상황파악이 전혀 안 되는 얼굴로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휴... 할 수 없군요.” 진세아가 한숨을 푸욱 내쉬며 비어 있는 앞좌석의 문을 열자,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헤네스가 그들에게 말했다. “저도 갈게요!” “네?” 임서윤은 아름다운 선홍빛 드레스를 갖춰 입은 이 갈색머리 소녀의 말에 얼굴을 찌푸렸다. “아가씨. 이건 굉장히 위험한...” 그러자 헤네스는 곧바로 품속에서 작은 가죽 주머니 하나를 꺼내어 임서윤에게 내용물을 보여주었다. “헉!” 그 안에는 빛나는 금화가 하나 가득 들어있었다. “어차피 그곳까지 가려면 길안내가 필요하시지 않겠어요?” “그거야...” “만약 저도 데려가 주신다면, 이만큼의 금화를 더 드릴게요.” “...” 임서윤은 진세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크흠, 총무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만...” “크흠, 저렇게까지 부탁하면... 어쩔 수 없네요.” 그러자 옆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시녀들이 기겁하며 헤네스를 뜯어 말렸다. “아, 아가씨! 아버님이 이 일을 아시면 어쩌시려고... 게다가 그거 아버님 비상금...” 그 모습을 본 진세아가 때마침 머뭇거리며 서유미 옆에 자리를 잡고 있던 다빈을 향해 말했다. “다빈아.” “네? 언니.” “부탁할게.” “...”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던 정다빈은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헤네스와 시녀들을 보고는 무슨 말인지 바로 이해했다. “얘들아, 떼어내주렴.” 그러자 시녀들은 부드러운 무언가에 떠밀리는 바람에 헤네스로부터 주르륵 밀려나 버렸고, 헤네스는 그 틈을 타 얼른 험비에 올라탔다. 서윤은 모든 준비가 끝나자, 시동을 걸고 이렇게 말했다. “문 꼭 닫으시고요. 뒤쪽에 보면 방탄모가 있습니다. 하나씩 꺼내서 써주세요. 저도 하나 주시고요.” “네!” 그녀들이 모두 준비를 끝내자, 서윤은 곧바로 기어를 넣고 북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무리의 파티가 북쪽으로 향하고 있을 즈음, 준상은 이미 선발대장 랑다잘과의 전투에 돌입하고 있었다. 00068 트롤러 ========================================================================= “후욱... 후욱... 후욱...” 이번이 네 번째던가, 아니면 다섯 번째던가. 사실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중요한 건 늑대를 쫓아간 좀비들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랑다잘이 직접 부하들을 이끌고 늑대들을 쫓아왔다는 사실이다. -쿠와아악! 사실 준상으로서는 잘된 일이다. 잡아봐야 경험치도 거의 못 받는 듯한 느낌의 좀비들을 대량학살하는 것보다 이런 알맹이를 빼먹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생각보다 랑다잘이 훨씬 강하다는 점 정도일까. 랑다잘의 양손에는 직경이 거의 일 미터는 넘을 듯한 철구를 연결한 긴 사슬이 마치 족쇄처럼 연결되어 있었다. 비정상적으로 발달한 상반신과 팔근육에 대비되어 훨씬 작아 보이는 머리. 그리고 그런 거대한 몸뚱이를 대지에 뿌리박듯 버티고 선 짧고 굵은 두 다리. 랑다잘은 그런 기형적인 몸을 가진 괴물이었다. 훙... 훙... 훙... 두 개의 철구가 공중에서 휘돌면서 내는 기묘한 소리가 사방을 가득 채운다. 흔히 모닝스타라는 명칭으로 많이 불리는, 뾰족한 가시가 튀어나온 저 거대한 철구는 단지 스치는 것만으로도 준상의 팔근육을 발기발기 찢어 버릴 정도의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급히 힐링 포션을 사용하고 재생력으로 치유를 계속하고 있었지만, 그 끔찍한 고통은 여전히 준상의 호흡을 거칠어지게끔 하고 있었다. “후욱... 후욱...” 무기의 형태만 보고 근거리 접전을 위해 달려들었다가 낭패를 본 준상은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할지 고민했지만, 그의 고민이 미처 다 끝나기도 전에 랑다잘은 다시금 공격을 시작했다. 마치 도리깨질을 하듯 거대한 철구가 거대한 포물선을 그리며 준상을 향해 날아든다. “칫!” 혀를 차며 재빨리 옆으로 피했지만, 이번에는 마치 거대한 덤프트럭이 돌진하는 듯한 기세로 준상의 정면을 향해 또 다른 철구가 날아든다. 정면으로 받아내는 것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엄청난 위압감! 게다가 첫 번째 철구를 피하기 위해 몸을 날리는 위치를 감안한 공격이었기에 당장 피하기도 쉽지 않을 정도였다. 실제로, 처음에 팔에 부상을 입었던 것도 근거리에서 이런 패턴에 휘말렸기 때문이다. “흡!” 준상은 거대한 철구가 눈앞으로 다가오자 급히 숨을 멈추며 숄더 차지를 발동했다. 그러자 그의 몸이 번지듯이 주욱 앞으로 뻗어나가며 돌진하는 철구의 궤적으로부터 벗어난다. -콰앙! 준상이 피한 철구는 그대로 포탄처럼 쏘아져 나가 거대한 바위를 부수고, 그것도 모자라 뒤에 늘어선 아름드리 나무들을 산산조각으로 부숴버렸다. 차라리 하나의 공성병기라고 부르는 것이 나을 듯한 위력! 준상은 이 랑다잘이라는 놈이 선발대장이 된 이유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정찰대장 그룬발의 잠입이 실패로 돌아갔을 경우, 이벨류아의 성곽 바로 그 자체를 때려 부수는 것이 바로 선발대장 랑다잘의 역할이었던 것이다. 준상은 두 개의 철구를 피하자 곧바로 랑다잘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랑다잘의 팔이 한번 떨쳐지자 바닥에 떨어져 뒹굴던 두 개의 철구가 마치 살아있는 뱀처럼 차례로 일어나 준상의 뒤를 노린다. 준상은 곧바로 주먹을 들어 랑다잘을 가격하려다가 철구와 연결된 쇠사슬들이 또아리를 튼 방울뱀 같은 소리를 내자 다급히 몸을 날려야만 했다. 랑다잘은 거리가 가까워지자, 철구와 쇠사슬을 연결하는 작은 손잡이를 마치 메이스처럼 잡고 그대로 준상의 머리를 노렸다. “쯧...” 이대로 피하기만 해서는 답이 없다. 늑대와 정령들은 랑다잘의 부하들을 견제하고 있는 상황. 숫자 상으로 크게 불리하기 때문에 어느 하나라도 빼내었다가는 늑대들이 순식간에 밀려 버릴 수도 있었다. “그걸... 쓸 수밖에 없나.” 지금까지 맨손으로 대부분의 상황을 버텨왔지만, 저 빌어먹을 두 개의 철구들을 봉쇄하지 않는 이상 계속 수세에 몰릴 수밖에 없었다. 준상은 결국 결단을 내렸다. 일단 랑다잘과의 거리를 벌린 준상은 인벤토리에서 지금껏 봉인해 두었던 악마의 무기를 꺼냈다. 거무튀튀한 거대한 양날 도끼가 마침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자, 그 강렬한 사기에 침식된 풀과 나무들이 순식간에 시들어가기 시작한다. 피를 갈구하는 암흑의 마물. 그 이름은 바로 블러드서커! “후우우...” 준상은 자신을 유혹하는 이 암흑의 마물을 바라보며 한 차례 심호흡을 한 후,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리고, 마침내 도끼 자루를 손으로 움켜쥐는 순간! 콰아아아아! 마치 해일처럼 밀려온 붉은 색의 무언가가 준상의 시야를 물들인다. 뜨겁다. 도끼 자루를 잡은 손이 너무나도 뜨겁다! 그 뜨거운 감각은 그대로 준상의 혈관을 거슬러 올라와 순식간에 몸 전체를 달구기 시작한다. “크아아아아!” 준상은 혈관 속에 흐르는 피가 일시에 기화해 폭발하는 듯한 그 감각을 견디지 못하고 크게 고함을 질렀다. 지금이라면, 지금이라면 세상 모든 것을 부수고 태워버릴 것만 같은 기분! 블러드서커의 마력은 준상의 몸과 정신 안에 내재되어 있는 파괴의 본능을 불러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곧이어 어디선가 흘러나온 청량한 두 줄기 기운이 그렇게 달아오른 피를 진정시키기 시작한다. 그것은 바로 준상이 착용하고 있는 수호의 인장이 지닌 힘이었다. “후욱...” 블러드서커가 일깨운 파괴의 본능을 수호의 인장이 지닌 힘을 통해 간신히 잠재운 준상의 시야에 거대한 철구가 정면으로 날아드는 모습이 잡혔다. 하지만, 폭혈이라는 금단의 힘을 일깨우고 블러드서커라는 이름의 마물을 손에 쥔 준상에게 그것은 더 이상 감히 마주치기 두려운 공포스런 무기로 보이지 않았다. 준상은 블러드서커를 들어올려 날아드는 철구를 향해 그대로 휘둘렀다. 쩌어엉! 마치 거대한 종이 울리는 듯한. 아니, 거대한 빙하가 깨어져 나가며 내지르는 비명과도 같은 소리가 공기를 발기발기 찢으며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너무나도 강렬한 그 충격파를 코앞에서 맞이한 준상의 귀와 눈에서 한줄기 핏물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렇게 흘러내린 피들은 마치 뜨거운 후라이팬에 떨어진 한 방울의 물처럼 순식간에 기화하며 자취를 감추었다. 아니, 그 현상은 단지 귀와 눈에서만 벌어지는 현상이 아니었다. 마치 온 몸에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한쪽 무릎을 꿇은 준상의 온 몸에서 흰 연기가 솟구치기 시작한 것이다. 머리 속이 울리고, 귀가 멍멍한데다, 시야까지 흐려진 상황. “큭... 오픈... 힐링포션.” 준상은 블러드서커를 사용한 후유증으로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간신히 추스르며 힐링포션을 사용해 고갈된 생명력을 채워나갔다. 하지만, 차라리 준상은 나은 편이었다. -쿠억... 암흑의 마물 블러드서커와 마주쳐 거대한 충격파를 발생시킨 철구는 그 강렬한 충격에 그대로 튕겨져 나가 주인인 랑다잘의 상체에 직격했다. 블러드서커가 지닌 폭혈의 마력과 거대한 철구의 운동에너지가 합쳐진 이 강렬한 일격에 가격당한 랑다잘은 뭘 어떻게 해볼 틈도 없이 거대한 포탄에 맞은 것처럼 좌측 상반신이 날아 가버리고 말았다. 아무리 터무니없는 괴물이라도, 이것은 어떻게 회생할 방법이 없는 치명상이다. “후우...” 폭혈의 후유증을 갈무리한 준상이 굽혔던 무릎을 펴며 일어서는 순간, 랑다잘의 거대한 몸은 그대로 썩은 고목처럼 뒤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쿠웅! 그리고 마침내 랑다잘이 쓰러져 숨을 거두자, 준상은 그제서야 손에 쥐고 있던 블러드서커를 다시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후...” 위력이 대단하기는 하지만, 역시 후유증이 너무 심하다. 강해질수록 소모되는 생명력이 늘어나면서 그만큼 위력도 상승한다는 장점이 있긴 하지만, 끝없는 수련을 통해 어지간한 고통은 내색 않고 견딜 수 있게된 준상으로서도 이 후유증만큼은 도무지 쉽게 감당이 되지 않았다. 아직까지도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면 말 다한 것 아니겠는가. 랑다잘이 순식간에 처참한 모습으로 쓰러지자, 그 수하 괴물들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리고 잠시 눈치를 살피는가 싶더니, 문득 괴물 중 하나가 뒤로 돌아 도망치기 시작한다. 물론, 준상은 그들을 이대로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좀비들이야 잡아봐야 귀찮기만 할 뿐 별로 득될 것이 없다지만, 이 랑다잘의 수하들은 그렇지가 않기 때문이다. 준상은 재빨리 왼손을 뻗어 염동력을 발휘했다. 그러자 도망치던 괴물이 마치 누군가에게 목덜미를 잡힌 것처럼 훌떡 몸을 뒤집으며 쓰러진다. “쳇.” 블러드서커를 사용한 후유증 때문일까. 아니면 아직 저 정도의 괴물들을 단숨에 끌어오기엔 염동력의 위력이 부족한 탓일까. 어느 쪽인지는 확실치 않았지만, 준상은 곧장 앞으로 내달리며 숄더 차지를 발동해 곧바로 버둥거리며 몸을 일으키는 괴물의 등을 들이받았다. -케엑! 순식간에 등골이 부서지고 내장이 곤죽이 된 괴물은 비명을 지르며 땅바닥을 나뒹굴었다. “후우... 후우...” 여전히 손발이 떨리고는 있었지만, 이 정도면 해볼만 하다. 준상은 뒤로 돌아서서 주춤거리는 괴물들을 향해 다가섰다. 괴물들은 서로 눈치를 보다가 이내 괴성을 지르며 준상을 향해 일제히 달려들었다. 아마도 지친 듯 보이는 그의 모습에서 용기를 일깨웠던 것이리라. “후우...” 준상은 숨을 깊게 들이쉰 다음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괴물의 송곳 같은 창을 피하며 카운터를 발동시켰다. -켁! 곧바로 날아든 준상의 주먹은 괴물의 턱뼈를 부수고도 모자라 목을 뒤로 꺾어 버렸고, 그 충격을 견디지 못한 괴물은 달려오던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몸을 거꾸로 뒤집으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준상이 괴물들을 때려눕히기 시작하자, 온몸에 상처를 입고 수세에 몰려있던 늑대들이 다시 괴물들의 뒤를 노렸다. 그러자 랑다잘의 수하들은 채 얼마 버티지도 못하고 그대로 어육이 되어 자신들의 대장처럼 바닥에 몸을 눕히고야 말았다. “후우...” 비로소 랑다잘의 수하들까지 온전히 모두 쓰러뜨리자, 준상은 사지를 쭉 펴고 대지 위에 누운 채 이미 어두워진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무겁게만 느껴지던 몸이 다소 가벼워지자, 준상은 그제서야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무방비 상태로 땅바닥에 누워버린 주인을 지키던 세 마리 늑대가 얼른 그를 돌아본다. “수고했다. 쉬다 오도록.” 준상은 상처 입은 늑대들의 머리를 한 번씩 쓰다듬어 준 후, 그들이 부상을 회복할 수 있도록 역소환을 실행했다. 그런 후에야 갱신된 퀘스트 정보를 시야에서 치워버리고 전리품을 수거하기 시작했다. “음...” 가장 먼저 집어든 것은 랑다잘의 거대한 철퇴였다. 아이템정보 명칭 : 랑다잘의 족쇄(R) 레벨제한 : 10 종류 : 무기 등급 : Rare 공격력 : 35-40 효과 : 극대화 피해 40% 증가 Seed : 4슬롯 설명 : 랑다잘의 오른쪽 팔을 구속하던 족쇄. 어지간한 힘으로는 이것을 무기로 사용하기는커녕 움직이기도 쉽지 않을 듯 합니다. 블러드서커와 직접 충돌하고도 부서지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무기가 지닌 뛰어난 내구성을 알 수 있었다. 왼쪽 족쇄마저 손으로 집어들자 곧바로 새로운 메시지가 나타난다. 세트 아이템을 장착했습니다. :아이템 중에는 다수의 아이템이 하나의 세트를 이루는 것이 존재합니다. 세트를 완성하면 그에 걸맞는 세트 효과가 부여됩니다. 현재 완성된 세트 아이템은 다음과 같습니다. 1.랑다잘의 분노 [상세 정보] 2.수호의 인장 [상세 정보] -세트 아이템의 정보를 원하시면 상세 정보를 확인하십시오. 준상은 천천히 상세 정보를 확인했다. 세트아이템 정보 랑다잘의 분노 :천년의 뇌옥에 갇혔던 거인 랑다잘의 분노가 세상을 떨쳐 울립니다. -구성품 1.랑다잘의 족쇄(R) [상세 정보] 2.랑다잘의 족쇄(L) [상세 정보] -세트효과 1.시설 파괴시 200퍼센트 공격력 증가. 2.명중시 파쇄 효과 발동. 00069 트롤러 ========================================================================= “흠...” 시설 파괴시 데미지 증가 200퍼센트라는 부분만 봐도 이 세트 아이템의 용도가 무엇인지 확실해 진다.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며 파쇄 효과에 대해 확인해 보았다. 파쇄 : 단순히 적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넘어 그 표피나 장갑, 방어구등을 분쇄하는 2차 피해를 발생시킵니다. -파쇄로 인한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서는 보통의 피해보다 더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합니다. -파쇄로 인해 파괴된 방어구는 본래대로 복구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음...” 준상은 자신도 모르게 아까 부상을 입었던 부위를 쓰다듬었다. 방어력이나 물리 내성 효과가 상승해서 어지간해서는 긁힌 상처도 잘 나지 않는 자신의 몸이 단숨에 찢겨 나간 것에는 이런 파쇄 효과의 영향이 있었던 것이다. 준상은 두 개의 철퇴를 하나씩 들어 보았다. “끄응...” 단순히 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팔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다. 이런 무기를 양손도 아니고 한손으로 다루려면 도대체 근력이 어느 정도나 되어야 할지. 시험삼아 오른손에 든 철구를 머리 위로 들어 올린 후 내리쳐 보았다. “큭!” 그러자 팔 근육이 뒤틀리는 듯한 통증과 함께 허리가 휘청거리며 그대로 몸이 철구가 움직이는 방향으로 딸려가 버린다. “장난이 아닌데.” 휘청거리던 준상은 간신히 중심을 잡은 후 일단 두 개의 철구를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수련용으로 쓰면 그만일 듯 하지만, 당장은 쓰러뜨린 적들에게서 시드를 습득하는 일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랑다잘의 거대한 시체로 다가가 머리를 부수고 시드를 꺼냈다. “흠...” 꺼내놓고 보니 지금까지 보았던 다른 시드들과는 어째 느낌이 다르다. 어두운 기운이 흐르는 다크 시드와는 정 반대로 약한 무지개 빛 서광이 비친다고나 할까. 준상은 곧바로 이 범상치 않은 시드를 확인해 보았다. 명칭 : 거인의 집념 레벨제한 : 15 종류 : 시드 등급 : Rare 효과 : 1. 근력 증가 10% 2. 체력 증가 6% 3. 물리 공격력 증폭 7% 설명 : 선발대장 랑다잘이 가지고 있던 특별한 시드입니다. Seed 슬롯이 있는 아이템이나 카드에 장착하여 능력을 강화할 수 있습니다. 한번 장착한 시드를 분리하기 위해서는 특수기능 ‘분리’가 필요합니다. [이 시드를 아이템이나 카드에 장착하시려면 이곳을 누르십시오.] “헛!” 뭔가 심상치 않다고는 생각했지만, 무려 레어 시드일 줄이야! 게다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던 근력 증가와 체력 증가 옵션까지 붙어있었다. 옵션 하나 하나만 따져도 지존급인데, 이 모든 효과를 고작 시드 슬롯 하나로 해결할 수 있다니! 준상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 특별한 시드를 광폭 카드에 장착하기로 했다. 미친개, 블러드로드, 무투가의 세 가지 콤보에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카드가 바로 광폭이었기 때문이다. 손목에 찬 인터페이스를 통해 광폭 카드에 시드를 장착하자, 준상은 순간 몸 속에서 힘이 불끈 솟아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오오!” 시험 삼아 인벤토리에 넣어두었던 철구를 꺼내어 오른손에 쥐어 보았다. 머리 위로 들어 올려 내리쳐 봤지만, 아까처럼 몸 전체가 딸려가며 휘청거리지는 않게 되었다. “정말 멋지군!” 준상은 곧바로 철구를 양손으로 들고 마치 아령을 쥔 것처럼 팔을 굽혔다 폈다 하기 시작했다. 랑다잘의 머리속에서 나온 시드를 통해 근력이 향상되었어도 여전히 팔과 허리의 근육이 뻐근해지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그것은 이전과는 달리 근육이 활성화되어 강해지고 있음이 전해져 오는 기분 좋은 뻐근함이었다. “후우...” 곧바로 준상의 몸에서는 뿌연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과열된 근육이 재생에 들어가며 더욱더 질기고 탄탄해지고 있다는 신호였다. 준상은 어느 정도 몸 전체의 근육이 팽팽하게 부풀어 오르자, 다시 철구를 인벤토리에 집어넣은 후 랑다잘의 수하들이 지니고 있던 시드들을 습득했다. 수하들이 지닌 시드들 역시 좀비들에게서 얻을 수 있는 보통의 시드들보다 평균적으로 높은 능력치를 가지고 있었다. 준상은 잠시 휴식을 취하며 현재 장착하고 있는 시드들을 빼고 새로 얻은 시드들을 카드와 아이템에 장착한 후에야 다시 철구를 들고 운동을 시작했다. 준상은 늑대들이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간단하게나마 운동을 반복하며 눈으로는 이번 전투를 통해 새로 레벨업한 카드들을 확인했다. 늑대들이 모두 한 단계씩 레벨이 오르고 광폭 레어와 피칠갑 슈퍼 레어, 그리고 멧돼지의 영혼 이렇게 세 가지 카드가 새롭게 레벨이 올랐다. 제법 고생하기는 했지만, 이 정도면 어지간한 보통 퀘스트의 보스보다도 더 많은 수확을 얻은 셈이다. “울프팩.” 준상은 늑대들을 불러들인 후 캐비닛을 꺼내 고기가 잔뜩 붙은 멧돼지뼈를 하나씩 던져준 후, 다시 늑대들이 식사를 마칠 때까지 철구를 들고 운동을 계속했다. 그러자 준상의 상반신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팽팽하게 근육이 부풀어 올랐다. “음...” 이 정도면 한 번 해볼 만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히든 퀘스트의 목표인 랑다잘도 잡은 상태이니 만큼, 수만 많고 귀찮기만 한 좀비들은 일단 방황하도록 내버려 두고 다음 히든 퀘스트를 목표로 움직여 볼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몰아 잡자니 연속해서 강타의 후유증을 감내하기가 짜증나고, 그렇다고 한 마리씩 때려잡자니 1초에 한 마리씩 잡는다 쳐도 일만 마리를 모두 잡으려면 두세시간은 걸리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두 개의 철구를 쓰면 어떨까. 좀비 사냥 정도는 그야말로 모기장에 들러붙은 하루살이들에게 모기약을 뿌리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 될 것이다. “해보자.” 준상은 결정을 내리고 숲을 내려가 무리를 인도하던 선발대장이 죽은 뒤 그대로 목표를 잃고 방황하던 좀비들을 두 개의 철구로 때려잡기 시작했다. 퍼퍽! 준상은 양손으로 가볍게 철구를 휘두르자, 철구에 닿은 좀비들이 퍽퍽 소리를 터져 나간다. 그것은 바로 세트 아이템 효과 중 하나인 파쇄에 의한 현상이었다. “좋군.” 휘두를 때마다 팔과 허리의 근육이 뻐근하기는 하지만, 이 정도는 블러드서커의 후유증에 비하면 부작용 축에도 들지 않을 정도다. 일단 속도가 붙기 시작하자, 준상은 늑대들로 하여금 흩어지기 시작한 좀비들을 몰아오도록 지시한 후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좀비들을 두 개의 철구로 쓸어버리기 시작했다. 퍼퍼퍽! 한 방에 두세 마리는 예사고, 운이 좋으면 네다섯 마리도 박살날 정도다. 그리고 그렇게 휘두르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준상의 몸은 점차 철구의 무게에 익숙해졌다. 다만 좋지 않은 점을 한 가지 꼽자면, 퍽퍽 터져 나가는 좀비의 몸뚱이에서 썩은 내 가득한 체액이 뿜어져 나온 덕분에 철구와 준상의 몸이 금새 흥건하게 젖어 버렸다는 것 정도였다. 물론 이것도 블러드로드 콤보의 재생률 증가를 감안하면 나쁘지는 않은 일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썩은 내 가득한 체액을 뒤집어쓰는 건 역시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좀비들을 박살내던 준상은 문득 시선 아래쪽의 카드 슬롯에 장착된 카드들이 반짝 반짝 빛을 발하기 시작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카드들이 레벨업을 했다는 표시였다. “오!” 준상의 레벨업에는 그리 도움이 되지 않는 좀비들이었지만, 뽑은 지 얼마 안 되는 카드들의 레벨을 올리기에는 충분한 대상이었던 것이다. 조금은 무의미해 보이던 이 좀비 학살이 의외로 스킬 카드의 레벨을 올리는데 효과적이라는 것을 깨달은 준상은 카드를 바꿔가며 신나게 좀비들을 때려잡기 시작했다. 결국 한 시간 정도가 지나 선발대에 속한 일만의 좀비들이 모두 박살이 났을 때, 준상은 소유한 카드들 가운데 질주나 도약, 물어뜯기 같은 것을 제외한 대부분의 카드들을 모두 3레벨까지 끌어올릴 수 있었다. 아쉬운 점이라면 좀비들의 레벨이 낮은 탓인지 그 이상은 올릴 수가 없었다는 사실 정도다. “후우...” 준상은 일단 철구를 다시 인벤토리에 집어넣은 후, 좀비들의 부서진 육체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는 숲 속을 돌아다니며 시드들을 수거하기 시작했다. 마치 폭탄이라도 맞은 것처럼 여기저기 팔다리들이 흩어져 있는 광경이 그로테스크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보다도 준상을 짜증나게 하는 것은 좀비들의 몸이 그렇게 터져나가면서 그들이 가지고 있던 시드들도 죄다 사방팔방으로 흩어져 버렸다는 사실이었다. “뭐든 좋기만 한건 아니군.” 준상은 혀를 차며 다시 상당한 시간이 걸려서야 시드의 수집을 모두 완료하고 미니맵에 찍힌 퀘스트 표식을 따라 다음 목표를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가 그렇게 선발대에 속한 모든 적들을 어육으로 만들고 다음 장소로 이동하고 있을 즈음, 임서윤과 그의 동료들은 이벨류아에서 북쪽의 관문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첫 번째 마을에 도착해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이미 두 번째 마을을 거쳐 관문에 거의 도달해 있어야 할 시간이었지만, 그들은 예상외의 복병을 만나 고전하고 있었다. 그 복병은 바로, 멀미였다. “우웁...” 아리따운 네 명의 미녀가 여기저기 흩어져 토악질을 해대는 모습은 역시 썩 보기 좋은 종류의 것은 아니다. 게다가 그 광경을 지켜보는 입장에 있는 사람이 그녀들을 그렇게 만든 장본인이라면 더욱더 그러하다. 기세 좋게 달려 나온 것까지는 좋았다. 성문을 지키던 경비병들은 기괴한 강철 수레의 등장에 놀라고, 다시 그 안에 타고 있는 브레아 가문의 금지옥엽의 모습에 놀라 얼결에 문을 열어주었다. 문제는 성문을 빠져 나와 길을 달리면서부터 시작되었다. 험머라고 불리는 민수용의 험비는 그나마 이런 점이 좀 덜하기는 하지만, 서윤이 가지고 온 이 험비는 군용을 조금 개조한 수준에 불과하기 때문에 정말 승차감이 어마어마할 정도로 나빴고, 이런 점이 제대로 포장되지 않은 이벨류아의 도로 사정과 결합하자 두근거리던 그녀들의 가슴은 그 진동을 견디지 못하고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더욱더 불운했던 점은 그녀들이 저녁을 먹은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결국 어떻게든 버텨보려 애쓰던 그녀들은 첫 번째 마을에 도달한 시점에서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서윤에게 차를 세울 것을 명했고, 그 이후 지금까지 줄곧 이런 광경이 이어지고 있는 중이다. “크흠... 괜찮으십니까?” 가서 등을 두드려주기도 묘하고, 그렇다고 그냥 모른 척 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 차 옆에 어정쩡하게 서있던 서윤은 간신히 토악질을 멈추고 시큼한 냄새를 입가에서 풍기며 돌아온 진세아에게 그렇게 물었다. 하지만. “지금... 괜찮은 걸로 보여요?” “...” 곧바로 돌아온 진세아의 날선 대답에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진세아는 서윤이 말없이 건네준 생수로 입안을 행군 후 다시 말했다. “서윤씨.” “네.” “웬만하면... 차 바꾸세요.” “네...” 저 차를 구하느라 돈이 얼마나 들었는데. 증가 장갑을 붙이고 MG50을 터렛 형태로 장착할 계획까지 세워뒀단 말이다!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온 것을 간신히 억누르며 서윤은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그렇게 잠시 시간이 지나자 다른 여성들도 하나둘씩 차로 돌아왔다. “그나저나... 금방이라도 뒤쫓아 올 줄 알았는데 용케도 안 쫓아오는 군요.” “그러게요.” 그들은 성문을 빠져나오고 나서야 시녀들이 말하던 ‘아버님’이 바로 현재 이벨류아의 최고 실권자인 제스터임을 알았다. 왠지 똥 밟았다는 느낌에 얼굴을 구겼던 그들이었지만, 멀미 때문에 이곳에서 제법 시간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추격대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물론 여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시녀들에게서 헤네스의 얘기를 들은 제스터가 그대로 뒷목을 잡고 쓰러져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이고, 연합의 중진들이 헤네스에 대한 추격을 완강하게 거부했다는 것이 두 번째 이유였다. 김성진이나 권형식을 비롯한 연합의 중진들은 안 그래도 전력이 부족한 상황에 철모르는 계집애 하나 때문에 굳이 전력을 낭비할 생각이 없었고, 그들이 그렇게 나오자 제스터가 부재중인 장로회의 구성원들은 연합의 태도에 의구심을 느끼며 얼마 되지도 않는 경비 인력을 또다시 나누기를 꺼려했다. 서윤과 그의 동료들은 다시 차에 올라, 이번에는 아까보다 조금 천천히 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헤네스로서는 조금이라도 더 빨리 준상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불행히도 몸이 생각을 따라주지 않았다. 결국 그들이 관문에 도착한 것은 다시 수시간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관문은 이미 비워져 있었다. 일만이나 되는 적에게 열 명도 안 되는 병력으로 막아서봐야 될 일도 아니고, 얼마 되지 않는 병력을 그런 식으로 소모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었기 때문에 일찌감치 후퇴 명령이 내려진 것이다. 서윤은 일단 차에서 내려 닫힌 관문을 연 다음 차를 관문 밖으로 조심스럽게 몰아가기 시작했다. 이미 사방이 캄캄하게 어두워진 상황이기에 아까처럼 달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긴장된 시선으로 주위를 살피며 천천히 전진하던 그들은 문득 길가에 널브러져 있는 하이에나들의 시체를 발견했다. “음... 그대로 계세요. 제가 나가보겠습니다.” “네.” 서윤은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가 하이에나들의 시체를 살폈다. 하나 같이 어딘가 박살나고 부러진 시체들의 모습에, 그는 한 사람의 전투 장면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역시 이곳에 온 것이 맞는 모양이군.” 서윤은 시체의 확인이 끝나자 다시 차로 돌아와 말했다. “준상씨의 흔적이 맞는 것 같습니다. 저렇게 야수들을 박살내 죽이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죠.” 그렇게 운을 뗀 서윤은 다시 헤네스를 보며 말했다. “일단 안으로 더 들어가 보기는 하겠습니다만, 이런 지형에서는 밤중에 속도를 내기가 어렵습니다. 조금 천천히 가더라도 양해 바랍니다.” “네.” 헤네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서윤은 다시 험비를 조심스럽게 전진시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느릿느릿 전진하고 있는 동안, 준상은 이미 그 다음 적과 마주하고 있었다. “음...” 준상은 얼굴을 찌푸렸다. 어두워서 제대로 알아보기는 어려웠지만 한 무리의 적들이 그가 숨어있는 곳 아래쪽을 천천히 지나고 있었다. 생각보다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고작해야 백여명이 될까 싶은 정도. 물론 그것도 적은 수는 아니지만, 조금 전에 일만이나 되는 좀비들을 문자 그대로 분쇄해버린 참이라 그런지 이 정도 수로는 별로 대단해 보이질 않는다. 하지만 준상은 함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저 얼마 안 되는 무리 속에 무려 열한 개나 되는 퀘스트 표식이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먼저 주의 깊게 적의 모습을 관찰했다. 열 개의 퀘스트 표식이 해골 마법사를 가리킨다는 사실은 그들의 외모만으로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순서상으로 미루어 봤을 때, 저기 거들먹거리며 뒤뚱뒤뚱 걸어가는 두꺼비 머리의 배불뚝이 괴물이 바로 보급대장 부카일 것이다. 통찰의 능력은 그 괴물의 머리 위에 노란 색의 깃발을 표시하고 있었다. 이것은 저 우스꽝스럽게 생긴 중간보스의 능력이 준상과 거의 비슷한 수준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참고일 뿐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지만, 똑같이 노란 색 깃발로 표시되던 랑다잘의 능력을 감안해 보면 충분히 주의할 필요가 있었다. 찬찬히 보급대의 면면을 살펴보던 준상은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보급대라면 무언가 물자를 운송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하지만 그는 이내 인벤토리의 존재를 떠올렸다. 어쩌면 저 부카라는 녀석 또한 인벤토리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충분히 가능한 얘기다. 인벤토리라는 것은 결국 개인에게 귀속된 아공간. 그런 것을 반드시 플레이어만 가지고 있으라는 법은 없지 않겠는가. 준상은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은 후, 인벤토리에서 랑다잘의 분노라 이름 붙은 두 개의 철구를 꺼내 손에 들었다. 카드 슬롯에는 이미 블러드로드라는 이름의 콤보 카드가 장착되어 있는 상태. 모든 준비가 끝났음을 확인한 그는 소리 없이 투명화를 펼쳐 어둠 속에 모습을 감춘 채, 부카가 이끄는 보급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00070 트롤러 ========================================================================= 그룬발의 망토를 착용한 준상은 투명화 상태로 천천히,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중앙의 부카와 해골 마법사들을 호위하는 형태로 창이나 칼 같은 무기를 든 괴물들이 도열해 있는 모습을 길옆에 우뚝 솟아난 바위 위에서 말없이 바라보던 준상은, 부카와 해골 마법사들이 자신의 발밑에 도달했을 때 미끄러지듯이 스윽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땅바닥에 발이 닿기가 무섭게 두 개의 철구를 쥔 팔을 크게 펼치며 그 자리에서 크게 몸을 휘돌린다. 마치 발레 무용수의 춤사위 같은 모양새였지만, 준상의 강화된 팔과 허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회전력과 철구의 육중한 무게감이 더해지는 순간 그 자리에 하나의 돌풍이 생겨났다. 그리고 회전력이 정점에 이르렀을 때, 두 개의 철구가 준상의 손에서 벗어나 그대로 사방을 휘저어 버린다. 두 개의 철구는 저마다의 방향으로 빠르게 날아가다가 연결된 쇠사슬에 의해 멈추며 회전 운동을 시작했다. 그러자 그 중심에서 축 역할을 하고 있는 준상의 손목과 어깨는 곧바로 격렬한 통증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큭!” 하지만 준상은 회전을 멈추지 않은 채 그대로 손목에 채운 족쇄에 반동을 주어 두 개의 철구를 순차적으로 끌어당겼다. 팔 근육이 금방이라도 파열될 것처럼 부풀어 오르는 와중에도 준상은 자신을 향해 되돌아 오는 철구를 주의 깊게 바라보다가 손잡이를 낚아챘다. 그렇게 두 개의 철구를 모두 손에 쥐고 나서야, 비로소 준상은 회전을 멈추고 철구로 바닥을 짚은 채 숨을 몰아쉬었다. “후우...” 단 한번 공격을 가했을 뿐이지만, 이미 주위는 준상이 만들어낸 거대한 소용돌이에 의해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열 마리의 해골 마법사들은 뭘 어떻게 해볼 틈도 없이 믹서기에 갈려진 뼛가루 신세가 되어 주위에 흩날리고 있었으며, 그 주위를 호위하던 괴물들 역시 피와 체액을 흩뿌리며 육편 조각이 되어 나뒹굴고 있었다. 준상이 만들어낸 그 살육의 폭풍 안에서 살아남은 것은, 오직 하나. 두꺼비 머리의 배불뚝이 괴물, 부카 뿐이었다. 몸 주위에 펼쳐져 있던 방어벽이 철구의 공격에 의해 파괴되는 순간 기적적으로 몸을 빼낼 수 있었던 것이다. -부카! 부카는 갑자기 나타나 자신의 부하들을 박살내 버린 이 괴한을 향해 성을 내며 발을 굴렀다. 욱신거리는 손목을 잠시 주무르다가 다시 공격을 나서려던 준상은, 순간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했다. 부카가 발을 구르며 괴성은 몇 번 지르자 박살이 나 흩어졌던 해골 마법사와 괴물들의 몸이 재조립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건...” 그 뿐만이 아니었다. 부카는 다시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주변에 마구 흩뿌리며 계속해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그러자 그 흩뿌려진 조각들이 제각각 부서졌던 해골 마법사처럼 재조립되며 해골 병사의 모양으로 형태를 갖춰가기 시작한다. 그 모습을 보고, 준상은 비로소 이 보급대의 역할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병력 대부분이 언데드이거나 그와 비슷한 형태의 괴물들인 상황에서 필요한 보급품이 무엇일까. 식량? 언데드들이 빵을 구워 먹을 것인가, 아니면 스테이크를 구워 먹을 것인가. 애초에 이 어둠의 군세에는 식량이라는 형태의 보급품은 의미가 없다. 그들의 보급품은, 바로 병력 그 자체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앞서가는 병력들이 죽인 시체를 되살려 새로운 병력으로 만들어내는 일이 바로 이 보급대의 역할이었던 것이다. “울프팩!” 준상은 혀를 차며 늑대들을 소환해 정령들과 함께 자신의 뒤를 받치도록 한 후, 곧바로 부카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 두꺼비 괴물을 먼저 쓰러뜨리지 않는 이상 계속해서 방금 전과 같은 일을 반복할 뿐이라는 사실을 인지했기 때문이다. 준상이 두 개의 철구를 들고 달려들자, 부카는 덩실덩실 춤추던 것을 멈추고 몸 주위에 새로운 방어벽을 펼쳤다. -부카! 부카카! 두꺼비 괴물이 짧은 두 팔로 원을 그리자 그 주위의 풍경이 묘한 이질감과 함께 일그러졌다. 준상은 즉시 오른손에 들고 있던 철구를 부카에게 내던졌다. 그러자 부카의 앞에서 형체를 갖추고 있던 해골 병사들은 날아드는 철구를 향해 주저없이 몸을 날렸다. 퍼퍼퍽! 직경이 일미터 가량이나 되는 거대한 철구는 마치 거대한 볼링공처럼 날아가 해골 병사들을 박살 냈다. 하지만 사방으로 뼈조각을 흩어버리며 날아간 철구는 부카의 눈앞에서 보이지 않은 벽에 가로막힌 것처럼 움직임을 멈추더니, 부드러운 쿠션에 부딪힌 것처럼 튕겨 나왔다. 촤창! 그리고 다음 순간, 부카의 몸 주위에 펼쳐져 있던 방어벽이 유리조각처럼 깨어지며 사방으로 흩어진다. -부카! 부카는 다시금 춤을 추려고 짧은 다리를 들어 올렸다가 단숨에 방어벽이 깨지는 모습을 보고는 허둥대며 손을 내저어 방어벽부터 새로 만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이어 준상의 손에서 벋어난 두 번째 철구가 부카에게로 날아들었다. -부, 부카! 급히 방어벽을 완성하기는 했지만, 마음이 급했던 탓인지 이번의 방어벽은 방금 전처럼 훌륭하게 그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다. 촹! 순식간에 방어벽을 뚫고 들어간 철구가 그대로 부카의 배에 직격한 것이다. 퍽! 준상은 철구가 두꺼비 괴물의 배에 직격하는 순간, 그 둥그런 뱃가죽이 터지며 내용물이 쏟아져 나오는 광경을 예상했다. 하지만 어이없게도 부카의 배는 다소의 긁힌 상처만을 남긴 채 철구를 튕겨내고 말았다. -부카! 부카카! 부카는 공격을 허용하자 펄쩍 뛰며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곧바로 혀를 내밀어 짤막한 손에 침을 잔뜩 발라 상처를 쓱쓱 문지른다. 그러자, 그나마 나 있던 배의 상처조차 순식간에 아물어 버렸다. “허...” 준상이 그 광경에 어이없어 하며 혀를 차는 동안 부카는 손을 뻗어 새로운 방어벽을 완성시키고는 다시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그러자 박살이 나 흩어졌던 해골 병사들이 다시금 조립되며 형체를 갖추어 나가기 시작한다.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상대가 지닌 대략의 능력을 확인한 준상은 곧바로 몸을 날려 거리를 좁혔다. 그가 달려오자 해골 병사들이 일제히 무기를 들고 달려들었다. 하지만 준상은 양손에 든 철구를 휘둘러 해골 병사들을 간단하게 부숴버리고는 그대로 부카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곧바로 이질적인 투명한 막을 향해 철구를 휘둘렀다. 카캉! 한 차례 격렬한 소음이 터지는가 싶더니 다시 한 번 방어벽이 산산조각나며 부서져 내린다. 준상은 부카에게 일격을 가하려 했지만, 바로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부카가 마법을 발동했다. -부카아아! 부카가 그 짧은 양손을 번쩍 치켜들고 마치 만세를 부르는 듯한 동작을 취하자, 화아악! 거대한 두꺼비 괴물의 주위로 둥글게 불의 장막이 펼쳐지더니 그대로 파도처럼 주위를 휩쓸며 퍼져 나갔다. “큭!” 준상은 다급하게 철구로 몸 앞을 가렸다. 하지만 불길은 어김없이 준상의 몸을 훑고 지나가 버렸다. -부카카! 부카는 불의 파도에 휩쓸려 새카맣게 그을린 채 새하얀 연기를 뿜어내는 준상의 모습을 보고는 그 두툼한 배를 움켜잡고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건 너무 이른 웃음이었다. 투둑... 준상의 몸에서 새카만 그을음이 툭툭 떨어져 내리기 시작하더니, 붉게 달아오른 그의 피부가 모습을 드러낸다. -부카? 그제서야 뭔가 이상하다 싶었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는 부카의 눈이 순간 철구 사이로 새파랗게 빛나는 준상의 눈과 마주쳤다. 줄기줄기 뿜어져 나오는 그 섬뜩한 안광에 부카가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서는 순간, 준상은 마치 알을 깨고 나오는 것처럼 몸을 뒤덮은 그을음을 부수며 부카에게 달려들었다. 순간적으로 작렬한 고온에 입고 있던 망토를 제외하고 입고 있던 옷이 모조리 타버리긴 했지만, 그의 몸은 머리카락이 약간 그을렸을 뿐, 큰 피해를 입지 않은 상황이었다. 카드와 아이템에 장착된 화염 저항과 정령사 콤보의 효과가 서로 맞물리면서 기습적으로 발현된 화염 마법의 피해를 경감시킨 것이다. 물론 그렇게 줄어든 피해만으로도 보통 사람이라면 대번에 까무라칠 정도의 고통이 전해져 왔지만, 준상이 지닌 재생 능력은 지금 이 순간에도 열기로 달궈진 몸을 회복시키고 있었다. 몸에서 연기를 뿜어내며 망토만 걸친 알몸의 남자가 두 개의 거대한 철구를 들고 날아들자 부카는 정신이 퍼뜩 들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이 두꺼비 머리의 배불뚝이 괴물은 더 이상 준상의 공격을 방어할 어떠한 수단도 갖추고 있지 못했다. 방어벽을 만들기에도 늦었으며, 다른 마법을 펼치기에도 너무 늦었다. 부카는 자신의 미끌거리는 살가죽이 이 알몸의 괴한이 퍼붓는 공격을 조금이나마 막아주기를 바랄 도리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기대는 너무도 허무하게 물거품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준상이 휘두른 철구는 마치 거대한 야수가 할퀴고 지나간 것처럼, 그 표면에 나있는 쐐기로 두꺼비 괴물의 뱃가죽을 잡아 찢어버렸기 때문이다. -부카아! 두꺼비 괴물은 그 끔찍한 고통에 펄쩍 뛰더니 침을 바르기 위해 혀를 내밀었다. 하지만 준상은 녀석이 그런 행동을 하도록 가만 내버려 두지 않았다. 곧바로 오른손에 든 철구를 찢겨진 부카의 뱃가죽에 쑤셔 박고는 곧장 뛰어올라 침을 바르기 위해 내밀어진 부카의 긴 혀를 빈 손으로 잡아채 버린 것이다. 부카는 벌레를 잡아먹으려고 혀를 내뻗었다가 수습 못하는 개구리 꼴이 되어 버렸다. -어부... 어부부... 부카는 혀를 잡히자 당황하며 손을 휘저었지만, 그 손이 몸에 닿기도 전에 준상은 다른 손으로 들고 있던 철구를 휘둘러 놈의 혀를 끊어 버렸다. -케에에엑! 철구는 그대로 몇 미터는 되는 부카의 긴 혀를 잡아 뜯어 버렸다. 혀가 잘린 것도 아니고 뿌리째 뜯겨져 나간 부카는 고통스런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주저앉았다. 준상은 땅으로 내려 앉으며 부카의 배에 박혀 있던 철구를 뽑아내더니 이렇게 중얼거렸다. “무투가.” 새로운 명령어를 받아들인 인터페이스는 곧바로 지금까지 장착되어 있던 카드들을 슬롯에서 비우고 새로운 카드들을 장착했다. 광폭(R), 카운터, 숄더 차지, 강타. 그리고 여기에 늑대와 곰, 멧돼지의 영혼이 결합함으로서 ‘지하 격투장의 암흑 무투가’ 콤보가 완성되었다. 준상은 혀가 뽑힌 충격에 주저 앉아 어쩔 줄 몰라하는 부카를 바라보며 철구를 쥔 손에 힘을 모았다. 1초, 2초, 그리고 3초의 시간이 흘러 몸 안의 힘이 한 점에 응축되자, 준상은 곧바로 그것을 오른손에 든 철구로 집중하여 뿜어내었다. 꽈르릉! 순간, 지상에 한줄기 우레가 강림했다. 순식간에 주위의 공기를 태우고 뻗어나간 그 우레는 부카의 커다란 몸을 그대로 산산이 부숴버렸다. 그러자, 숲에 부카의 진득한 체액이 마치 비처럼 쏟아지기 시작한다. “후우...” 준상은 강타의 후유증을 감내하기 위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히든 퀘스트의 항목이 갱신되는가 싶더니 흰 빛이 준상을 감싸며 과부하가 걸린 그 몸을 치유하기 시작한다. “호...” 그리고 다음 순간, 준상은 레벨업 메시지와 함께 새로운 메시지가 눈앞에 나타난 것을 발견했다. 축하합니다! :당신은 처음으로 ‘20레벨’에 도달했습니다. -당신의 위업을 찬양하며 ‘내가 제일 잘 나가’ 칭호를 부여합니다. [칭호 상세 정보 확인은 이곳을 누르십시오.] “20레벨?” 준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19레벨이 맞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계산을 잘못한 건가?” 그러고 보면 정확한 레벨 수치가 메시지 상에 나타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닐까 싶다. 준상은 의아한 중에도 일단 늑대들이 막고 있는 남은 보급대의 적들을 쓸어버리기 위해 몸을 날렸다. 00071 트롤러 ========================================================================= 준상이 두 개의 철구를 들고 달려들자, 부카의 죽음으로 사기가 떨어져 있던 보급대의 괴물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산산이 부서진 채 길바닥에 그 몸의 잔해를 흩어놓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후우...” 준상은 우선 상처 입은 늑대들을 회복시키기 위해 역소환한 다음 물의 정령에게 명령했다. “새벽이슬, 몸을 좀 식혀줘.” 명령을 받은 물의 정령은 부카가 발현한 화염 마법의 영향으로 달궈져 있던 준상의 몸을 천천히 식혀 주었다.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묘하긴 하지만, 준상은 새벽이슬이 몸을 식혀주자 마치 열탕에 담그고 있다가 다시 냉탕에 들어간 듯한 짜릿함을 느꼈다. “후...” 대충 달아오른 몸이 식혀지자, 준상은 그제서야 몸에 붙은 그을음을 적당히 떼어낸 후 캐비닛을 꺼내 새 옷을 꺼내 입고 군화를 챙겨 신었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이 끝난 다음에야 전리품을 챙기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챙긴 것은 바로 부카의 끈적거리는 긴 혀였다. “...” 부카는 풀 차지의 강타를 맞고 폭발하듯 몸이 박살나 버렸지만, 이 끈적거리는 긴 혀는 그 전에 뜯겨져 나갔기 때문에 별다른 상처가 없었다. 문제는 준상이 지닌 안목 스킬이 이 길고 끈적거리는 혀를 아이템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뭔가 상당히 찜찜하기는 했지만, 일단 집어든 다음 아이템 확인을 해보았다. 아이템정보 명칭 : 부카의 혀 레벨제한 : 10 종류 : 무기 등급 : Rare 공격력 : 0-0 효과 : 상처를 매우 효과적으로 치료하는 끈적한 침을 발라줍니다. Seed : 슬롯 없음 설명 : 보급대장 부카의 채찍처럼 긴 혀. 효과는 둘째 치고 이걸로 맞으면 상당히 기분이 나쁠 것 같습니다. “...” 준상은 말없이 이 기괴한 아이템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아까의 전투에서 보았던 그 대단한 치유력을 감안한다면, 효과 하나는 달리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역시 마음대로 꺼내놓고 쓰기에는 뭔가 참 난감한 아이템이다. 일단 대충 둘둘 말아서 인벤토리에 던져 넣은 준상은 곧바로 부카의 머리에서 시드를 꺼냈다. 부카의 머리에서 나온 시드 역시 랑다잘의 그것처럼 제법 영롱한 서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명칭 : 두꺼비의 여유 레벨제한 : 15 종류 : 시드 등급 : Rare 효과 : 1. 물리 저항력 증가 7% 2. 화염 저항력 증가 8% 3. 재생률 증가 10% 설명 : 보급대장 부카가 지니고 있던 특별한 시드입니다. Seed 슬롯이 있는 아이템이나 카드에 장착하여 능력을 강화할 수 있습니다. 한번 장착한 시드를 분리하기 위해서는 특수기능 ‘분리’가 필요합니다. [이 시드를 아이템이나 카드에 장착하시려면 이곳을 누르십시오.] “역시!” 준상은 곧바로 광폭(R)의 슬롯을 하나 비운 후 이 시드를 장착했다.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좌측 시야에서 반짝이고 있는 메시지들을 확인했다. 최상단에 올라와 있는 레벨업 메시지를 확인한 준상은 보상인 랜덤 카드를 뽑았다. 카드정보 명칭 : 듀얼스톰 레벨 : 1Lv 경험치 : 0 등급 : Uncommon 분류 : 스킬 성장 : 일반(대) 속성 : 없음 효과 : 양손에 무기를 들고 회오리바람처럼 돌면서 110퍼센트의 위력으로 공격합니다. Cost : 15 Seed : 2슬롯 “듀얼스톰이라...” 이것은 굳이 어떤 스킬인지 확인해 볼 필요도 없었다. 보급대를 기습할 때 취했던 동작이 스킬로 구현된 것이거나, 비슷한 형태의 스킬임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준상은 이로써 한 가지 가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랜덤 카드라는 이름이 붙기는 했지만, 이 레벨 업 보상으로 얻게 되는 카드는 해당 레벨 구간에서 보여주었던 행동 중 하나가 스킬의 형태로 나타난다는 가설이 바로 그것이었다. 물론 이 가설만 가지고는 마법이나 정령 같은 다른 스킬이 나타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지만, 그것은 해당 플레이어의 속성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하는 정도의 추측만 해볼 뿐이다. 정말로 단순히 무작위 선택일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듀얼스톰이라는 스킬이 떡하니 나온 걸 보면 최소한 어느 정도의 연관성은 있지 않을까 싶다. 준상은 이제 그 다음에 나와 있는 칭호 메시지를 다시 확인했다. “내가 제일 잘 나가...” 어딘가에서 많이 들어 본 듯한 느낌이긴 했지만, 준상은 일단 무시하고 상세 정보로 넘어갔다. [내가 제일 잘 나가] :처음으로 20레벨에 도달한 자에게 부여되는 칭호. -효과: 특수 보상 ‘주머니 다람쥐’를 습득할 수 있습니다. -특수 보상 ‘주머니 다람쥐’를 지금 바로 습득하시겠습니까? (Y/n) _ “주머니 다람쥐?” 이게 뭔가 싶은 마음에 일단 Y를 눌러 보았다. 그러자 곧바로 새로운 메시지가 후두둑 쏟아지기 시작한다. 축하합니다! 특수 보상 ‘주머니 다람쥐’를 획득했습니다. :‘주머니 다람쥐’는 두 가지 특수 스킬을 갖춘 복합형 펫입니다. -특수기능 ‘펫 관리’가 개방됩니다. -현재 소환 가능한 펫의 숫자는 1마리입니다. “펫이라...” 소환물과는 뭐가 다른 걸까. 준상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음 메시지를 확인했다. 축하합니다! 특수기능 ‘펫 관리’가 개방됩니다. :펫은 플레이어가 데리고 다닐 수 있는 애완동물을 말합니다. -‘펫 목걸이’ 1개가 주어집니다. -현재 동시 소환 가능한 펫의 숫자는 1마리입니다. -현재 소환 가능한 펫은 모두 1마리입니다. 1.주머니 다람쥐 [상세 정보] -펫 소환을 원하시면 해당 번호를 누르시고, 만약 소환을 원치 않으신다면 n을 누르세요(1/n) _ 준상은 우선 주머니 다람쥐의 상세 정보를 확인했다. 펫 정보 이름 : [없음] 종류 : 주머니 다람쥐 레벨 : 1Lv 경험치 : 0 등급 : Rare 분류 : 복합 성장 : 일반(중) 속성 : 땅 스킬 : 안목 1Lv, 보관 1Lv [정보] 호감도 : 50 충성도 : 50 카드슬롯 : 2개 [정보] 설명 : 배에 주머니를 가지고 있는 이 귀여운 다람쥐는 가치 있는 아이템을 알아보는 능력과 수집한 아이템을 보관하는 아공간 주머니를 가진, 마법으로 변형된 희귀종입니다. 이 주머니는 기본적으로 1세제곱미터 부피의 아이템을 보관할 수 있으며, 허용된 부피 안에서라면 그 안에 수납 가능한 아이템의 종류나 개수에 제한이 없습니다. “오!” 그렇지 않아도 일일이 좀비들의 머리를 부수고 다니며 시드를 습득하는 것이 짜증스러웠는데, 이제부터는 그럴 필요가 없을 듯하다. 주머니의 크기로 미루어 봤을 때 랑다잘의 분노나 블러드서커 같은 대형 아이템까지는 무리겠지만, 그외의 방어구나 장신구 정도는 어렵지 않게 습득과 보관이 가능할 것이다.. 준상은 곧바로 주머니 다람쥐를 소환했다. 그러자 늑대들처럼 흰 빛을 뿜어내며 준상의 어깨 위에 작은 목걸이를 달고 있는 다람쥐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준상은 다람쥐에게 바로 명령했다. “자, 가서 아이템을 모아와라.” 그러자 다람쥐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그의 어깨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려니, 다람쥐는 부카의 부하 중 하나의 머리 부근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우물쭈물하기만 했다. “음...” 준상은 턱을 쓰다듬으며 잠시 고민했다. 그냥 땅에 떨어져 있는 아이템이라면 몰라도 저렇게 괴물의 머리 속에 있는 시드를 습득하려면 일단 머리를 부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음? 잠깐만...” 고민하던 준상은 문득 주머니 다람쥐의 정보창에 카드 슬롯이라는 부분에 눈길이 갔다. 설마... 소환물과는 달리 펫은 카드의 장착이 가능한 것일까? 준상은 펫 정보의 카드 슬롯 부분의 정보 버튼을 눌러보았다. 그러자 두 개의 카드 슬롯이 덩그러니 열린다. “오오...” 준상은 안 쓰는 카드들을 살펴보았다. 물어뜯기와 2연격, 광폭, 피칠갑, 강타 카드가 콤보에 쓸 것을 제외하고도 하나씩 남아 있는 상태였고, 그 외에 한 번도 써본 적이 없는 철면피 같은 카드도 있었다. 준상은 잠시 생각하다가 광폭과 물어뜯기 카드를 다람쥐에게 장착시켜 주었다. 그러자, 다람쥐의 눈에서 갑자기 붉은 안광이 뻗어 나오는가 싶더니, 괴물의 머리를 앞니로 사정없이 갉아대기 시작한다. 바각바각바각바각. “...” 다람쥐는 순식간에 괴물의 머리뼈를 갉아내고 진득한 뇌수 속에서 시드를 꺼내 자신의 배에 달린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뭔가... 대단하긴 한데, 한편으로는 난감한 기분이다. 어쩐지 미성년자의 정서함양에 심대한 악영향을 끼칠 것 같은 모습이라고나 할까. 준상은 다람쥐가 괴물들의 머리뼈를 갉아대는 엽기적인 소리를 들으며 다음 메시지를 확인했다. 축하합니다! 아이템카드 ‘펫 목걸이’를 습득하였습니다. :마음에 드는 동물을 길들여 펫으로 삼아보세요. -강제로 펫을 만들기 위해서는 해당 동물의 체력이 10퍼센트 이하가 되어야 합니다. -몬스터나 언데드는 펫으로 만들 수 없습니다. -사용자에게 높은 호감도를 지니고 있다면, 체력여부에 상관없이 일정 확률로 펫을 만드는 것이 가능합니다. 단, 이 경우 행운 수치의 영향을 받을 수 있습니다. “흐음...” 준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딱히 뭔가를 애완동물로 삼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안 그래도 늑대 세 마리에 다람쥐까지 나와서 동물의 왕국 같은 분위기인데 여기에 새로 동물을 추가할 필요가 있을까 싶은 것도 사실이다. 혹시 소환된 늑대 같은 동물을 펫으로 만드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떠올렸지만, 이제 와서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에 고개를 저었다. 특히나 어떤 특수 스킬이 생길지 모르는 상황에서 모처럼 얻은 펫 목걸이를 소비하기는 왠지 좀 아까운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준상은 일단 다음 메시지를 확인했다. 축하합니다! :당신은 최초로 복합형 펫을 획득했습니다. -당신의 위업을 찬양하며 ‘둘이라서 행복해요’ 칭호를 부여합니다. [칭호 상세 정보 확인은 이곳을 누르십시오.] “풋...” 준상은 칭호명을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둘이라서 행복하다니... 어쩐지 혼자 낯선 세계를 쏘다니는 자신을 비꼬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탓이다. 하지만 일단 새로운 칭호를 얻었으니 정보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둘이라서 행복해요] :최초로 복합형 펫을 획득한 자에게 부여되는 칭호. -효과: 동시 소환 가능한 펫의 숫자가 1 증가합니다. -칭호는 획득시 자동으로 효과가 적용됩니다. “동시 소환이라...” 그럼 한 번에 펫을 두 마리 소환할 수 있게 된 것인가. 준상은 메시지의 확인이 끝나자 다람쥐가 시드들을 모두 모아오기를 기다리며 잠시 휴식을 취했다. 그러고 보니... 여태 저녁도 안 먹고 싸우고 있었음을 뒤늦게서야 깨달았다. 준상은 캐비닛을 꺼내 비상식으로 넣어둔 음식을 몇 가지 꺼내 씹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문득 깨달았다. 어느 새인가 괴물들의 피와 살점이 널려 있는 곳에서 이렇게 태연하게 식사를 할 수 있게 되어 버린 자신의 모습을. “훗...” 잠시 시간이 지나자 늑대들의 회복이 끝났다. 준상은 늑대들에게 다시 살점이 두둑하게 붙은 멧돼지 뼈를 하나씩 던져 주었다. 그렇게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입가에 피와 살점이 덕지덕지 붙은 채로 주머니 다람쥐가 준상을 향해 쪼르르 달려왔다. 정말... 묘하게 엽기적이다. “새벽이슬, 씻겨 줘라.” 준상의 명령에 따라 물의 정령이 더럽혀진 다람쥐의 몸을 천천히 씻겨 주었다. 등급이 낮은 탓에 많은 양의 물을 모을 수는 없어도 이 작은 다람쥐의 몸을 씻겨 주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자, 꺼내놔 봐.” 그러자 다람쥐는 자신의 배에 달리 주머니에서 수십 개의 시드들을 땅바닥에 쏟아내었다. 모르긴 해도 이걸 다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준상은 시드들을 대충 주머니에 쓸어 담은 다음, 캐비닛에 보관했다. 그리고는 비상식으로 넣어두었던 볶은 땅콩을 한 줌 꺼내 다람쥐에게 건네주었다. 다람쥐는 그것을 받아 자신의 주머니에 넣더니, 하나씩 꺼내 앞발로 쥐고 갉아먹기 시작한다. “그럼... 다시 가볼까.” 준상은 다람쥐를 어깨 위에 올린 후 다시 늑대들을 역소환했다. “오픈 질주.” 그리고 곧바로 질주 스킬을 발동한 채 미니맵에 나타나 있는 퀘스트 표식을 향해 어두운 산길을 달렸다. 한편, 준상이 마지막 목표를 위해 달리고 있을 즈음, 서윤이 모는 험비는 그의 동료들을 태운 채 거친 산길을 천천히 따라 올라가고 있었다. “설마 길을 잘못 든 건 아닐까요.” 하이에나의 시체가 흩어져 있던 곳에서 제법 멀리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흔적이 보이지 않자 세아가 그렇게 말했다. “글쎄요... 지금으로선 딱히 뭐라고 말할...” 조금은 졸린 듯한 표정으로 그렇게 대답하던 서윤의 눈이 한순간 반짝 빛난다. “잠시만요.” “...” 긴장된 그 목소리에 뒤에서 졸고 있던 세 여성들은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서윤은 천천히 차를 몰아가더니 이내 무언가 걸레 조각 같은 것이 마구 흩어져 있는 곳 앞에서 차를 멈춰 세웠다. “이건...” “저게 뭐죠?” 정다빈이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지만, 서윤은 대답하지 않은 채 차에서 내리더니 손전등을 꺼내 들고는 주위에 흩어져 있는 잔해들을 살폈다. “허...” 이것은 죽은 인간의 사체, 그것도 상당히 오래되어 부패된 사체였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이것은 좀비의 잔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문제는... 이 모든 것이 마치 폭발에 휘말린 것처럼 산산이 부서져 흩어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서윤은 후레쉬를 들고 주위를 한 바퀴 훑어보았다. “엄청나군...” 서윤은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솔직히 지금까지는 인간이 맨손으로 아무리 강해져 봐야 총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자신이라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자신감은 지금 눈앞에 펼쳐진 이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좀비들의 흔적 앞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과연... 이것이 인간으로서 가능한 일일까. 서윤은 굳은 표정으로 차에 돌아왔다. 그리고 일제히 자신을 향해 시선을 던지는 네 여성들을 향해 말했다. “정확한 건 날이 밝은 후 자세히 확인해 봐야 알겠지만... 아마도 이곳에서 준상씨가 좀비들과 싸웠던 모양입니다.” “준상씨가 근처에 있나요?” 다급하게 헤네스가 질문을 던졌지만, 서윤은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 움직이는 좀비나 몬스터가 없는 것으로 봐서는 이미 전부 해치우고 이동 중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서유미가 말했다. “혹시... 다쳐서 쓰러져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그러자 다빈이 바로 말했다. “될지는 모르지만, 정령들에게 한번 부탁해 볼게요.” “가능하겠습니까?” 서윤의 물음에 다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사람이 여럿 있다면 구분하기 힘들겠지만, 그냥 사람 하나가 근처에 있느냐고 묻는 정도는 가능할 거에요.” 그러자 세아가 바로 말했다. “그럼 좀 부탁할게. 다빈아.” “네, 언니.” 다빈은 곧바로 자신이 부리는 두 바람의 정령에게 부탁했다. “얘들아. 혹시 이 근처에 사람이 있는지 찾아줄래.” 그러자 산들바람들은 곧바로 주위로 퍼져나가 사람의 흔적을 찾기 시작했지만, 이내 돌아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다빈에게 알려왔다. “죄송해요. 이 근처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아요.” “아닙니다. 정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서윤은 곧바로 다시 시동을 넣고는 다시금 산길을 거슬러 이동하기 시작했다. 긴장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던 여성들은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사람의 팔다리 같은 잔해들의 모습을 보고 얼굴이 굳었고, 그와 같은 풍경이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또 한 번 경악했다. “분명히... 혼자라고 하지 않았어요?” 질린 표정으로 다빈이 묻자 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이 정도일 줄은...” 질리기는 헤네스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녀는 이내 가만히 손을 모은 채 준상이 아무 탈 없기를 기원했다. 한편, 그들이 좀비들의 잔해를 넘어 보급대의 시신이 있는 곳에 접근할 즈음. 빠르게 질주를 거듭하던 준상은 머리 위에 붉은 달이 떠올라 사방에 음산한 빛을 뿌려댈 즈음이 되어서야 비로소 남은 두 개의 퀘스트 목표를 시야에 담을 수 있었다. 장군 칼카쉬와 호위대장 아뉴트가 바로 그들이었다. “음...”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들 주위에 모여 있는 엄청난 수의 괴물들이었다. 앞서 준상이 분쇄해 버린 일만의 좀비들보다 수는 적어 보였지만, 이들은 모두 제대로 된 무장을 갖춘 병력이었다. 문자 그대로, 진짜 군대인 셈이다. 준상은 진지를 갖춘 채 내일의 진군을 위해 휴식을 취하고 있는 괴물들의 모습을 보며 고민에 잠겼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곧바로 적과 정면 대결을 벌이는 것이겠지만, 본능만으로 움직이는 좀비들도 아니고 제대로 된 대규모의 군대를 상대로 그런 일을 벌이는 것은 문자 그대로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더구나, 아직 능력을 정확히 알지 못하는 장군 칼카쉬와 호위대장 아뉴트가 건재한 상황에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결국 남은 것은 괴물들이 휴식하는 틈을 타서 조용히 기습을 가하는 방법 뿐이다. 준상은 가만히 그룬발의 망토를 두른 채 투명화 상태로 괴물들이 잠들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잠시 시간이 흐르자, 떠들썩하던 적의 진지는 이내 적막이 감돌기 시작했고, 그제서야 준상은 조심스럽게 발걸음 소리를 죽이며 적의 진지를 향해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곧바로 시큼한 냄새가 준상의 코를 자극한다. 무언가 썩는 듯한 그런 냄새. 준상은 얼굴을 찡그리며 말없이 두 개의 퀘스트 목표 가운데 작은 막사 쪽을 살폈다. 한꺼번에 칼카쉬와 아뉴트를 상대하는 것은 그야말로 바보짓. 그렇다면 다소 경비가 소홀한 아뉴트 쪽을 먼저 노릴 필요가 있었다. 소리를 죽인 채 걸음을 옮기고 있는데, 문득 잠들어 있던 괴물 하나가 고개를 들고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혹시, 자신의 냄새를 맡은 것일까. 준상은 그대로 멈춰 서서 잠시 기다렸다. 그러자 괴물은 잠시 코를 킁킁거리더니 다시 한 번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잠을 청했다. “...”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쉰 준상은 더욱더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한참이나 걸려서야 비로소 적의 진지 한복판에 자리 잡은, 아뉴트의 것으로 보이는 작은 막사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후우...” 작게 숨을 들이쉰 준상은 인벤토리에서 철구를 꺼내 양손에 쥔 다음, 미니맵을 살피며 아뉴트의 위치를 가늠했다. 그리 넓지 않은 막사이긴 했지만, 그래도 단 한 방에 적을 분쇄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정확하게 적을 가격할 필요가 있었다. 마침내 아뉴트의 위치에 대해 어느 정도 확신이 서자, 준상은 천천히 자세를 낮추며 힘을 끌어 모았다. 00072 트롤러 ========================================================================= “...” 준상은 호흡을 죽인 채 천천히 강타를 발동했다. 1초, 2초, 그리고 3초. 팽팽하게 당겨진 근육들의 잔떨림 사이로 작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며 주위의 공기를 달구는 순간, 철구를 잡은 손이 뻗어 나가며 응축된 힘이 일시에 분출되었다. 콰웅! 조용하던 적의 진지 속에서 한 줄기 천둥소리가 울려 퍼지자, 호위대장 아뉴트의 막사는 거대한 태풍에 휘말린 것처럼 순식간에 날아가 버렸다. 조만간 다가올 전투를 대비해 꿀맛 같은 휴식에 취해있던 아뉴트는 갑작스럽게 몰아치는 살기에 번쩍 정신을 차리며 눈을 떴지만, 채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준상이 뿜어낸 힘의 격류에 휩쓸려 버렸다. -끄으... 뭘 어떻게 해볼 틈도 없이 아뉴트의 복부 대부분이 거대한 야수에게 뜯겨져 나간 것처럼 소멸해 버렸다. 비명을 지르고 싶어도 숨을 들이쉬는 것도 내뱉는 것도 불가능해진 아뉴트는 입을 뻐끔거리며 작은 신음 소리를 연발할 뿐 차마 움직일 엄두도 내지 못했다. “후우...” 준상은 강타의 후유증으로 인해 과부하가 걸린 몸을 억지로 움직였다. 그리고는 땅바닥을 기고 있는 기다란 목을 가진 기묘한 형태의 괴물에게 다가가 그 목을 군화발로 짓이겨 버렸다. 콱! 콱! 콰직! 진각을 밟는 것처럼 세 번이나 발을 내리찍고 나서야 호위대장 아뉴트는 그 움직임이 완전히 멎어 버렸다. 준상이 아뉴트를 처치하자, 그의 어깨 위에 앉아 땅콩을 갉아먹고 있던 다람쥐가 폴짝 뛰어 내리더니 곧바로 두 눈에서 붉은 안광을 뿜어내며 아뉴트의 머리를 갉아대기 시작했다. 다람쥐는 곧바로 아뉴트의 머리에서 시드를 뽑아내고는 주위를 바쁘게 돌아다니며 몇 가지 아이템을 챙겼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이 끝나고 나서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준상의 어깨 위로 돌아와 다시 천연덕스럽게 땅콩을 갉아먹기 시작한다. “훗...” 준상은 과부하로 달궈진 몸이 식기를 기다리며 다람쥐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작은 웃음을 터뜨린 후 곧바로 그룬발의 망토를 사용해 모습을 감추었다. 갑작스런 굉음은 곧바로 진지 안에서 곤히 잠들어 있던 괴물들의 잠을 깨웠고, 그 소리가 아뉴트의 막사에서 들려왔음을 깨달은 괴물들이 다급하게 무장을 갖추고 달려왔을 때 그들이 본 것은, 목이 부러지고 복부가 찢겨진 채 죽어 있는 아뉴트와 그 막사 부근에서 잠을 자다가 준상이 뿜어낸 풀 차지의 강타에 휩쓸려 비명횡사한 괴물들의 박살난 시체 뿐이었다. -카악! -카아악! 괴물 들이 시끄럽게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며 준상은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풀 차지의 강타를 사용한 후유증이 아직 완전히 가시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일단 몸을 뺄 생각이었지만, 우르르 몰려든 괴물들 때문에 그 의도는 틀어지고 말았다. 천천히 걸어가던 준상을 향해 한 떼의 괴물들이 몰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투명화 상태가 들킨 것은 아니었다. 그저 길을 메운 채 몰려오던 괴물들과 그대로 마주친 것일 뿐. “칫.” 이대로라면 저들과 부딪혀 투명화 상태가 풀릴 수 밖에 없다. 차라리 그렇다면, 아직 저들이 눈치채지 못했을 때 기습을 거는 편이 유리하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준상은 곧바로 카드 슬롯을 교체했다. “블러드로드, 오픈 듀얼스톰.” 그의 입에서 짤막한 말이 흘러나오자 기존에 장착되어 있던 무투가 콤보의 카드들이 빠져 나오고 새로운 카드들이 차례로 장착되었다. 광폭(R), 피칠갑(R), 피칠갑(R), 피칠갑(SR), 그리고 여기에 새로 얻은 듀얼스톰까지. 이렇게 카드들이 장착되며 콤보카드 ‘얀트훈센의 블러드로드’가 완성되는 순간 준상의 눈에서 붉은 안광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후읍...” 준상은 짧게 숨을 들이킨 후, 자신의 눈앞으로 쏟아져 나오는 괴물들을 바라보며 듀얼스톰을 발동했다. 갑작스런 굉음 소리에 놀라 달려오던 괴물들은 아무것도 없던 허공 속에서 갑자기 붉은 안광을 뿜어내는 사내 하나가 나타나자 깜짝 놀랐다. 어깨에는 검은 망토를 드리우고, 다시 두 손에 거대한 철구를 쥔 그 남자의 섬뜩한 붉은 안광이 마치 도깨비불처럼 옆으로 주욱 번져나가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온 순간, 괴물들은 그대로 거대한 돌풍에 휘말려 온 몸이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앞열들은 그나마 나았다. 최소한 자신이 누구의 손에 의해 박살이 나는 것인지는 볼 수 있었으니까. 바쁘게 뒤를 따르던 괴물들은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깨달을 틈도 없이 준상의 손에서 벗어난 철구에 얻어맞으며 몸이 박살나 버렸다. “후우...” 한 차례의 공격이 끝나고 문자 그대로 폭풍처럼 주위를 휩쓸어 버린 준상은 손목을 튕겨 철구들을 회수한 후, 다시 투명화 상태로 전환해 모습을 숨겼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괴물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의 우두머리 중 하나인 아뉴트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의 공격을 받아 반항조차 해보지 못한 채 숨을 거두었고, 뒤이어 진지 한복판에서 마치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것 같은 현상이 일어나 다시 수십의 괴물들이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한 채 어육이 되었기 때문이다. 괴물들은 음산한 붉은 달빛 아래에서 그 처참한 현상을 바라보는 순간 깨달았다. 지금 이곳에 한 마리 맹수가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어둠 속에 숨은 그 맹수가 자신들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예상치 못한 상황에 괴물들이 우왕좌왕하기 시작하자, 지금껏 진지 중앙의 거대한 막사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던 장군 칼카쉬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갑옷과도 같은 울퉁불퉁한 검은 피부를 지닌, 보통의 사람보다 서너 배는 더 큰 체구의 괴물. 그 머리에는 갈기와도 같은 형상을 지닌 네 개의 뿔이 이마로부터 머리 뒤쪽까지 줄지어 나 있었으며, 어깨와 등에는 황소의 그것처럼 굽어진 뿔이 네 개나 솟아있었다. 머리에는 모두 세 개의 붉은 눈이 번뜩이고 있었는데, 이마 아래 세로로 열린 붉은 눈에서는 쉴 새 없이 사이한 기운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칼카쉬는 막사에서 나오기가 무섭게 공성추처럼 거대한 두 주먹을 허공으로 치켜 올리며 고함을 질렀다. -쿠와아아아! 괴성이 사방에 울려 퍼지자, 지금껏 예상치 못한 상황에 직면해 당황하던 괴물들의 눈에서 불안과 두려움이 씻은 듯이 사라져 간다. 칼카쉬는 단 한 번의 고함을 통해 수하 괴물들의 불안을 날려버리더니, 두 주먹을 마주치며 다시 한 번 커다란 함성을 터뜨렸다. -크허엉! 마치 사자의 포효를 연상시키는 그 함성 소리를 들은 괴물들의 눈에서는 칼카쉬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과 비슷한 붉은 안광이 줄기줄기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분노! 아니, 분노를 넘어선 격노의 힘이었다. “쯧...” 준상은 괴물들의 몸에서 넘실넘실 흘러나오는 힘의 정체를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었다. 자신도 이미 몇 번이나 그와 유사한 힘을 사용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힘의 정체는 다름 아닌 광폭. 장군 칼카쉬는 함성을 통해 휘하 병력을 단숨에 광폭 상태로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장군이었나.” 준상은 혀를 차며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였다. 지금 당장 저들을 상대하는 것은 너무나 위험천만한 일이다. 광폭은 방어력을 희생해 공격력을 증폭시키는 기술. 물론 낮아진 방어력만큼 더 쉽게 해치울 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그렇게 증폭된 적의 공격을 단 한 번이라도 허용하게 된다면 준상 또한 위험한 상황에 처할 수 있었다. 굳이 한껏 기세가 오른 적을 상대할 필요는 없는 일. 어차피 광폭의 유효 시간은 그리 길지 않으니, 잠시 기다렸다가 다시 기세가 사라지고 저들이 허탈감에 빠졌을 때 상대하면 그만큼 더 효과적으로 저들을 사기를 떨어뜨릴 수 있다. 준상은 조용히 어둠 속에 모습을 숨긴 채 기다렸다. 괴물들은 붉은 안광을 두 눈에서 줄기줄기 뿜어내며 미친 듯이 주변을 헤집고 다녔지만, 아무도 그늘 속에 모습을 숨긴 준상을 발견할 수 없었다. 칼카쉬는 부하들이 문자 그대로 혈안이 되어 주변을 뒤지는 모습을 보고는 다시 자신의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그렇게 약 오분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칼카쉬가 일깨운 광폭의 기운은 점차 괴물들의 눈에서 사라져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신 갑자기 힘이 쭉 빠져나가는 듯한 허탈감이 괴물들을 지배하기 시작한다. 바로 그때. 준상이 다시금 움직였다. 허탈감에 빠져 흐느적거리는 괴물들의 한복판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간 준상은, 그곳에서 다시금 듀얼스톰을 전개했다. 괴물들은 또다시 보았다. 두 눈에서 시뻘건 안광을 뿜어내는 검은 망토의 사나이가 두 개의 거대한 철구를 들고 진지 한복판에서 한바탕 춤사위를 펼치는 모습을. 붉은 달빛 아래 펼쳐진 파괴의 춤은 순식간에 괴물들을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후 다시 자취를 감추었다. 괴물들은 자신들이 지금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방금 일어난 이 현상을 이해할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꿈이 아니었다. 바로 옆에 서있던 동료들이 순식간에 뼈와 살이 분리되며 해체되버리는 광경을 목격한 괴물들은 그것을 더욱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주춤. 문득 괴물 하나가 자신도 모르게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곧바로 그 행동이 모여 있던 모든 괴물들에게 전염되기 시작한다. 주춤주춤. 광폭의 후유증으로 인한 허탈감은 그런 괴물들의 마음속에 생겨난 두려움을 더욱더 증폭시키고 있었다. 바로 그때. 준상이 다시 모습을 나타냈다. 이번에도 소리 없이 붉은 안광을 뿜어내며 나타난 그는 검은 망토를 깃발처럼 펄럭이며 다시 한번 파괴의 춤사위를 펼쳤다. 콰콰콰콰! 뭘 어떻게 해볼 틈도 없이 다시금 한 무리의 괴물들이 어육으로 변해 사방으로 흩어져 버렸다. 그제서야 괴물들은 깨달았다. 모여 있으면 안된다. 모여 있으면 저 사신이 나타나 죽음의 춤으로 모든 것을 부숴 버린다! 그것을 깨달은 괴물들은 자신도 모르게 주춤 주춤 동료들과 거리를 벌렸다. 하지만 그 행동은 오히려 준상의 움직임을 자유롭게 만들어주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준상은 말없이 거리를 벌려서는 괴물들의 틈으로 걸어 들어가 다시 한번 듀얼스톰을 펼쳤다. 콰아아! 또 한 번 몰아친 죽음의 폭풍에 괴물들은 이제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로서는 도저히 이 허깨비 같은 적을 상대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그제서야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문득 두세 마리의 괴물들이 다급히 장군 칼카쉬의 막사로 달려 들어갔다. 그러자, 곧바로 거대한 체구의 칼카쉬가 다시 한 번 모습을 드러냈다. -크아아아! 칼카쉬는 모습을 드러내기가 무섭게 마치 꾸짖듯이 자신의 부하들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두려움에 빠져 있던 괴물들의 눈빛이 다시 서서히 정상으로 돌아오기 시작한다. 칼카쉬는 자신의 위대한 능력에 만족감을 표하듯 가슴을 두드렸다. 하지만 그는 미처 모르고 있었다. 이 모든 상황을 만든 당사자가 바로 자신의 코앞에서 힘을 모으고 있는 중이라는 사실을. 칼카쉬는 고함을 질러 부하들의 힘을 끌어내기 위해 다시 한 번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바로 그 순간, 다시 무투가 콤보로 카드를 교체한 준상이 장군 칼카쉬를 향해 한껏 모은 힘을 단숨에 분출했다. 번쩍! 자신들을 이끄는 장군이 지닌 권능이 다시 한 번 펼쳐지기를 기대하며 칼카쉬를 바라보던 괴물들은 순간 한줄기 섬광이 시야에서 터져 나오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곧바로 대기를 찢어발기는 듯한 천둥소리가 터져 나오더니, 칼카쉬의 거대한 몸이 뒤로 튕겨 나가며 그 자신이 머물고 있던 막사를 그대로 부숴버린다. 괴물들은 그대로 입만 쩍 벌린 채 방금 일어난 현상을 초래한 한 남자를 바라보았다. “쯧...” 하지만, 그렇게 괴물들을 당혹감 속에 몰아넣은 당사자인 준상은 얼굴을 찌푸리며 혀를 차고 있었다. 칼카쉬는 강타에 직격당한 반동으로 튕겨나간 것이 아니었다. 엄청난 위력의 공격이 눈앞에서 쏟아져 나오자 반사적으로 몸을 날려 충격을 해소하고 공격 반경에서 벗어난 것이다. 칼카쉬는 뒤통수를 쓰다듬으며 천천히 멀쩡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풀 차지의 강타를 사용한 후유증으로 인해 온 몸에서 아지랑이를 피워올린 채 굳어있는 준상을 향해 씩 웃었다. 00073 트롤러 ========================================================================= “...” 강타를 사용한 후유증으로 몸에 걸린 과부하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게 온몸에서 아지랑이를 뿜어내며 굳어있는 준상을 칼카쉬는 세 번째 눈으로 노려보았다. “큭...” 칼카쉬의 이마 정 가운데 열려있는 붉은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준상은 과부하가 걸려 부들부들 떨리는 몸 위로 마치 전기가 훑고 지나가는 것처럼 짜릿한 감각이 전해지는 것을 느꼈다. 준상은 미처 몰랐지만, 그것은 칼카쉬의 세 번째 눈이 지닌 스턴 효과였다. 칼카쉬는 준상이 과부하로 인해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은 미처 몰랐지만, 자신의 세 번째 눈이 지닌 스턴 효과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알고 있었고, 시선이 마주친 순간 준상의 몸이 움찔하자 그것이 의미하는 바 역시 제대로 알고 있었다. 아무리 무지막지한 공격력을 갖췄더라도, 움직이지 못한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 칼카쉬는 자신의 승리를 예상하며 곧바로 준상을 향해 뛰어들었다. 하지만, 그 순간 준상의 두 눈에서 붉은 안광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칼카쉬가 그 거대한 주먹을 휘두르기 위해 두 팔을 번쩍 치켜 올린 순간, 빛살 같은 속도로 상대의 가슴을 향해 숄더 차지를 발동했다. 칼카쉬는 당황했다. 스턴에 걸리고서도 저렇게 빠르게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믿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칼카쉬의 착각이었다. 처음부터, 준상은 스턴에 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해답은 바로 수호의 인장이었다. 칼카쉬의 세 번째 눈과 시선이 마주친 순간, 준상의 목과 손가락에 장비되어 있던 두 개의 악세사리가 반응했다. 목걸이와 반지에 끼워진 묘안석이 반짝하고 빛을 발하는 순간, 청량한 한 줄기 기운이 스턴의 기운을 몰아내고 몸의 자유를 되찾아 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칼카쉬도 멍하니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처음 강타를 피했던 것처럼, 도저히 사람의 몇 배나 되는 거대한 몸뚱이를 지니고 있다고는 상상도 되지 않을 정도의 민첩함을 보여주며 몸을 틀어 준상의 숄더 차지를 피해낸 것이다! “이런!” 준상은 곧바로 땅바닥을 철구로 찍으며 튀어 올라 다시 자세를 잡았다. 그에 반해 칼카쉬는 무리하게 몸을 틀어서인지 멍하니 두 괴수의 싸움을 지켜보던 부하들의 몸을 그 거대한 몸으로 짓이기며 나뒹굴었다. “헉... 헉...” 하지만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은 준상 역시 마찬가지였다. 강타를 사용하고 나서 몸에 걸린 과부하를 완전히 해소하기도 전에 숄더 차지 같은 큰 기술을 걸었으니 차라리 그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준상은 땅에 내려서자 곧바로 그룬발의 망토를 사용해 몸을 숨겼다. 우선 몸이 회복될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칼카쉬는 땅바닥을 나뒹굴다 벌떡 일어났지만, 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준상이 검은 망토로 몸을 가리며 어둠속에 스며드는 장면 뿐이었다. -카아아아아! 칼카쉬는 발광하며 애꿎은 주위의 부하들에게 화풀이를 하기 시작했다. 준상은 어둠 속에서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뭔가 허전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느 틈엔가 그의 어깨 위에 앉아 있던 주머니 다람쥐가 사라져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설마 방금 전 칼카쉬와의 격투 때 어딘가에 흘리고 온 것일까. “...” 잠시 주위를 훑어보던 준상은 기묘한 장면을 목격했다. 무언가 작은 생물이 발광하는 칼카쉬의 발밑에서 요리조리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준상의 어깨 위에 있었어야 할 주머니 다람쥐였다. 다람쥐는 칼카쉬의 발밑을 빠르게 오가며 괴물들의 머리 속에서 시드를 꺼내고 땅에 흩어진 아이템들을 주워 모으느라 정신이 없었다. “푸훗...” 준상은 과부하로 인해 몸이 뻐근한 와중에도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바쁘게 움직이는 다람쥐의 모습을 눈으로 쫓던 준상은, 어느 새인가 몸에 걸려 있던 과부하 현상이 사라졌음을 깨달았다. “후...” 칼카쉬는 광분하던 것을 멈추고 주위를 세심하고 살피고 있었다. 준상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칼카쉬의 곁으로 마치 산책하듯이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블러드로드. 오픈 듀얼스톰.” 그리고는 기존에 장착되어 있던 무투가 콤보 대신 블러드로드 콤보로 바꾼 다음 천천히 칼카쉬를 향해 다가갔다. 물론 칼카쉬도 바보는 아니었다. 모습을 감춘 준상을 경계하기 위해, 자신의 주위에 부하들로 하여금 인의 장벽을 쌓도록 만든 것이다. “흠...” 저 부하들을 뚫지 않고서는 칼카쉬에게 다가갈 수가 없다. 그렇다면? 저 고기 방패가 걸림돌이라면, 그것을 부수면 될 일이다. 준상은 천천히 칼카쉬의 뒤쪽으로 걸어간 후, 어깨가 서로 맞닿을 정도로 다가선 채 겁에 질린 시선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는 괴물들의 코앞까지 다가갔다. 그리고 곧바로 듀얼스톰을 발동했다. 콰가가가각! 허공 속에서 환영처럼 준상의 붉은 안광이 드러나는 순간 다시 한 번 거대한 철구가 폭풍처럼 주위를 휩쓸었다. 괴물들은 다급히 무기와 방패를 치켜 올리며 자신을 향해 연달아 날아드는 두 개의 거대한 철구를 막아보려 했지만, 그건 처음부터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뾰족한 가시가 돋아나 있는, 랑다잘의 분노라 이름붙은 이 무기들은 순식간에 괴물들이 치켜든 무기와 방패와 갑옷을 산산이 부숴버리더니, 그 안에 숨어 있던 괴물들의 살점을 분쇄해 버린다. 칼카쉬는 주위를 돌아보다가, 뒤쪽에서 강렬한 파열음과 함께 부하들의 육편들이 튀어 나오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칼카쉬는 다시금 허공 속으로 스며들 듯이 사라지는 준상의 붉은 안광을 잠시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크아아아! 순식간에 인의 장벽을 이루고 있던 수십의 부하들이 문자 그대로 어육이 되어 흩어지자 칼카쉬는 다시 광분하더니 손을 뻗어 아무거나 집히는 대로 준상이 사라진 곳에 집어 던지기 시작했다. 부하들은 영문도 모른 채 생체 포탄이 되어 사방으로 내던져졌다. 일견 어이없는 짓처럼 보이기는 해도 이것은 칼카쉬가 취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탐색 방법이었다. 물론, 아직 준상이 그곳에 있다는 전제하에서의 일이지만 말이다. “...” 준상은 천천히 구멍 뚫린 인의 장벽을 통과해 칼카쉬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시 한 번 기습적으로 듀얼스톰을 전개했다. 칼카쉬는 손을 뻗어 부하들을 집어던지다가, 갑작스럽게 그 기습을 받았다. 퍽! 첫 번째 철구가 칼카쉬의 무릎을 두들겼다. 그리고 다시 뭘 해볼 틈도 없이 두 번째 철구가 칼카쉬의 허벅지를 강타한다. 칼카쉬는 기겁하며 몸을 돌려 공격을 피했지만, 이 두 개의 철구들은 그런 칼카쉬의 뒤를 쫒듯이 다시 원을 그리며 날아들었다. 칼카쉬는 도저히 피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날아드는 철구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쩌엉! 종이 울리는 듯한 커다란 소리와 함께 칼카쉬의 거대한 주먹에서 팍 하고 피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것 뿐이었다. 손가락 뼈가 두 개 정도 부서지고, 피부가 터져나가긴 했지만 치명상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그 일격으로 인해 철구는 속도를 잃고 바닥에 나뒹굴었다. 칼카쉬는 위험한 공격을 막아낸 것에 안도했지만, 불행히도 철구는 하나가 아니었다. 두 번째 철구가 날아들어 칼카쉬의 팔에 휘리릭 감기기 시작한 것이다. -크허어엉! 칼카쉬는 자신의 팔에 거대한 철구가 휘감기자 크게 고함을 지르며 팔을 끌어당겼다. 준상은 얼굴을 찌푸렸지만, 족쇄처럼 연결된 쇠사슬이 그의 몸을 끌어당기는 것을 거부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 힘을 이용해 칼카쉬에게 달려들었다. 칼카쉬는 검은 망토를 뒤집어 쓴 적이 붉은 안광을 내뿜으며 자신을 향해 날아들자 자유로운 왼손을 번쩍 들어 그대로 내질렀다. 랑다잘의 분노에 직격하고서도 완전히 파괴되지 않은 칼카쉬의 거대한 주먹은 그 자체로 치명적인 무기였다. 하지만, 준상에게는 더욱더 치명적인 무기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피에 취한 마물, 블러드서커였다. 허공에서 검은 색을 발하는 거대한 도끼가 나타나 준상의 손에 쥐어진다. 그리고 그것이 쥐어진 순간, 준상의 몸속을 타고 오르는 모든 피가 한번에 끓어오르며 무지막지한 파괴력으로 승화된다. 이것이야말로 금단의 힘이라 불리는 폭혈! 준상은 그 끓어오르는 파괴의 본능을 담아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칼카쉬의 주먹을 향해 휘둘렀다. 콰가가가가각! 그 단단하던 칼카쉬의 주먹이, 마치 무 썰리듯 단숨에 쪼개진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가차 없이 휘둘러진 도끼 날은 그대로 밀고 들어가 칼카쉬의 가슴을 단숨에 쪼개 버리고 만 것이다. -커어어어... 칼카쉬는 가슴에서 분수처럼 피를 뿜어내며 주춤 주춤 뒤로 물러섰고, 준상은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로 온몸을 적시며 바닥에 내려 앉았다. “크윽...” 바닥에 내려서기가 무섭게 우선 블러드서커를 인벤토리로 되돌렸지만,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에 휩싸인 준상은, 칼카쉬가 뒤로 넘어가며 쓰러지자 그 팔에 연결된 사슬로 인해 그대로 휙 딸려 나가며 앞으로 널브러지고 말았다. “오픈... 힐링 포션.” 몸에 잔뜩 피를 뒤집어 쓴 채, 힐링 포션을 사용하자 블러드서커로 인해 소모되었던 생명력이 빠른 속도로 채워지기 시작한다. 주위를 에워싸고 있던 괴물들은 갑자기 뭔가 폭음이 연거푸 터지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고 다시 자신들의 장군이 무언가와 투닥거리는가 싶더니 곧장 가슴에서 피를 분수처럼 뿜어내며 쓰러지는 모습에 그만 얼이 빠지고 말았다. 아니, 그렇게 구경이라도 할 수 있었던 괴물들은 차라리 다행이었다. 칼카쉬가 뒤로 넘어가는 바람에 그 거대한 몸에 깔리고 뿔에 찔려 죽어버린 괴물들로서는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정적이 흐르는 가운에, 온몸에서 불 붙은 것처럼 연기를 뿜어내던 준상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헉... 헉...” 블러드서커를 사용하고 난 뒤의 후유증은 여전히 끔찍하기 짝이 없었지만, 부카에게서 얻은 레어시드를 장착한 덕분인지 온 몸에 피를 뒤집어 쓴 것을 감안하더라도 이전보다 훨씬 빠르게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자, 그의 몸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괴물 하나가 갑자기 괴성을 터뜨리며 그를 향해 창을 들고 돌진해왔다. 하지만 준상은 거들떠도 보지 않은 채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울프팩.” 그러자 허공에서 흰 빛과 함께 커다란 세 마리 늑대가 나타나 괴물의 앞을 가로 막는다. 커헝! 감히 자신의 주인에게 무기를 들이미는 괴물의 모습을 본 크림슨 울프는 단숨에 뛰어올라 괴물의 목을 물어 뜯었다. 그 기습적인 공격에 괴물은 그대로 목의 살점이 한 주먹이나 떨어져 나가며 바닥을 나뒹굴어야만 했다. 괴물들은 갑작스런 늑대들의 등장에 다시 주춤했지만, 준상의 소환물은 늑대 뿐만이 아니었다. 어디선가 한줄기 바람이 불어오는가 싶더니, 지금껏 모습을 감추고 있던 도깨비불과 산들바람, 그리고 새벽이슬이 준상의 주위를 멤돌기 시작한 것이다. 준상은 늑대들과 정령들의 보호를 받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겨 칼카쉬의 팔에 얽혀 있는 철구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지휘자를 잃어버린 괴물들은 그 모습을 보고 어찌해야 좋을지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몸이 정상이 아닌 것 같기는 한데, 그렇다고 칼카쉬를 저렇게 죽여 버린 강자에게 덤벼들 자신이 없었던 탓이다. 하다못해 호위대장이라도 살아 있었다면 죽은 칼카쉬를 대신해 병력들을 지휘했겠지만, 그 역시 처음에 기습을 받아 끽 소리도 못한 채 죽어버린 상황이다. 준상은 괴물들이 머뭇거리는 사이에 칼카쉬의 팔에서 철구를 완전히 풀어내었다. 그리고는 어느 틈엔가 칼카쉬의 머리 부근에서 들려오는 바각거리는 소리에 피식 웃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다시 늑대와 정령들을 불러 들였다. “후우...” 좌측 시야에 드러난 퀘스트 정보에는 어느새인가 모든 히든 퀘스트가 완료 되어 있었다. 남은 것은 이제 단 하나. 지금 눈앞에서 사기를 잃은 채 머뭇거리는 잔존 병력들의 완전한 분쇄 뿐이다. 준상은 천천히 양손에 두 개의 철구를 거머 쥐었다. 그리고 다시금 두 눈에서 붉은 안광을 내뿜으며 맹렬한 피의 폭풍을 불러 일으켰다. 한편, 임서윤과 그의 동료들은 끝도 없는 좀비들의 사체를 넘어 한참을 달리고 나서야 겨우 보급대의 흔적에 도달할 수 있었다. “으음...” 서윤은 마치 폭탄이라도 터진 것처럼 사방팔방에 흩어져 있는 육편들의 모습을 보며 침음성을 삼켰다. “아까 그 좀비들이 끝이 아니었던 모양이죠?” “그러게 말입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적이 몰려 나왔다는 건지...” 진짜 문제는 그 많은 좀비들이 단 한 사람의 손에 의해 분쇄되어 버렸다는 점이겠지만, 지금 이 차 안의 그 누구도 그 말만큼은 다시 언급하지 않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잠시 주위를 둘러보던 서윤이 아무런 인기척이 없음을 확인하고 다시 차에 오르려는 순간, 그들의 귀에 멀리서 천둥이 치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비가 오려나?” 서윤은 고개를 내밀어 하늘을 바라 보았지만, 하늘에는 붉은 달이 음산한 모습으로 떠 있을 뿐, 구름 한 점 보이지 않고 있었다. “혹시... 누군가 싸우는 소리가 아닐까요?” “글쎄요. 누가 폭약이라도 터뜨리면 몰라도.” 서윤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다시 차에 시동을 걸었다. 하지만 어둠 속을 뚫고 조심스럽게 전진하던 그들은 이내 폭음과는 전혀 다른, 거대한 포효를 들을 수 있었다. “이건?” 차 안에 타고 있던 모두의 시선이 서로 마주치는 순간, 그들은 방금 전의 소리를 자기 혼자만 들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서윤씨!” 세아가 이름을 부르자, 서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크게 외쳤다. “꽉 잡으십시오!” 서윤은 곧바로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가늠하더니 어두운 산길 속을 빠르게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마치 그들의 움직임에 화답하듯이 다시 한 번 커다란 포효 소리가 울려 퍼진다. “저쪽이에요!” “저도 들었습니다!” 들썩거리는 험비의 반동에 연신 천장에 방탄모를 쓴 머리가 부딪히면서도 이번에는 누구 하나 멀미 기운을 느낄 수 없었다. 그리고 잠시 후 고개를 하나 넘는 순간, 저 멀리서 무언가 번쩍하는 섬광이 터져나오더니 예의 천둥치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봤어요?” “네! 봤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미친 듯이 질주하던 험비가 널따란 적의 진지에 도달했을 때. 그들은 비로소 지금까지 마음 한켠에서 부정하고 있던 진실의 실체를 목격할 수 있었다. “아...” 가장 먼저 진세아가 탄성을 터뜨렸고, “허...” 조금은 허탈한 듯한 음성이 서윤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뒷좌석에서 이제나 저제나 하며 가슴을 졸이고 있던 헤네스는 어둠 속에서 붉은 안광을 뿜어내며 폭풍과도 같은 춤사위를 펼치는 한 사람의 모습을 보자, 절로 그 이름을 불렀다. “준상씨...” 다빈은 여전히 상황 파악이 안 되는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주위에 흩어져 있는 육편들을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서유미는 그저 말 없이 준상의 모습을 서늘한 눈으로 바라만 보고 있었다. 서윤은 준상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 차를 세운 후, 천천히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그의 뒤를 따라 차에서 내렸다. 준상은 마지막 남은 한 무리의 괴물들을 단숨에 갈아버린 뒤에야 비로소 헤드라이트를 켜고 나타난 서윤의 차에 시선을 던졌다. “...” 준상은 그들의 모습을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애초에 이 퀘스트에 다른 사람이 참가한다는 사실을 몰랐던 그로서는 이들의 등장이 의외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를 향해 서윤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서윤과 그의 동료들이 지니고 있던 휴대폰이 일시에 울리기 시작한다. 반사적으로 얼른 꺼내어 메시지를 확인하던 그들은 이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어둠의 군세로부터 도시를 지켜내십시오. :강대한 어둠의 군대가 성곽도시 이벨류아를 노리고 진격해 오고 있습니다. 그들의 침공을 막아내십시오. (침공까지 남은 시간 : 45시간 38분) [이 퀘스트는 대규모의 인원이 동시에 참여합니다.] -> 완료! - 당신이 이번 퀘스트에서 보여준 행동과 성과를 정산합니다. 이 과정은 약간의 시간이 소요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어?” 서윤과 그의 동료들은 느닷없이 나타난 메시지에 당황했다. 하지만 그들 중에 가장 크게 놀란 것은 다름 아닌 정다빈이었다. 다빈은 뒤에서 불안한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동료들을 따라오다가, 휴대폰에 들어온 메시지를 확인한 순간 전에도 이런 식의 상황을 경험한 적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쳐든 그녀의 눈에 기형적일 정도로 커다란 두 개의 철구를 손에 든 사람의 모습이 달빛에 모습을 드러내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앗! 바로 그 트롤!” “네?” 이게 뭔 소린가 싶어 어리둥절해 하는 순간, 다시금 그들의 휴대폰에 새로운 메시지가 들어왔다. 축하합니다! : 당신의 랭크는 E입니다. -당신은 이번 퀘스트의 달성에 대해 쥐꼬리만큼의 기여 밖에 하지 못했습니다. 참가하는데 의의를 둬서는 곤란하지 않을까요. 좀 더 노력해 주십시오. 보상 : 경험치 아주 약간. -> 보상을 지금 수령하시겠습니까? (Y/n) _ (주의) 수령하지 않은 보상은 7일후 자동 소거됩니다. 서윤은 휴대폰의 메시지를 흘깃 보고는 복잡한 표정으로 말없이 준상을 바라보았다. 준상은 그런 서윤의 시선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다가, 그들 속에 헤네스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헤네스?” “준상씨...” 헤네스는 울먹이는 표정으로 준상에게 달려와 칼카쉬의 피에 흠뻑 젖은 그의 품에 와락 안겨 들었다. “...” 준상은 그녀가 지금 여기 있다는 사실에 놀라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바로 그 때 서윤과 그의 동료들의 몸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그대로 모습을 감추어 버린다. 서윤과 그의 동료들은 자신들이 느낀 당혹감을 제대로 표현하지도 못한 채 지구로 되돌려 보내졌다. 하지만, 그곳에서 멀리 떨어진 이벨류아의 성곽 안은 그 즈음 혼란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었다. 모처럼 편하게 자려고 자리에 누워 있는데, 갑자기 백여명의 휴대폰이 일시에 울리더니 난데없이 퀘스트 완료 메시지를 보내온 것이다. 그들의 휴대폰에는 하나도 빠짐없이 F랭크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이게 뭔 소리야!” 하지만 머나먼 이벨류아의 성벽 안에서 내지르는 플레이어들의 고함은 금단의 숲 너머에 있는 어둠의 군세 진지까지는 전달되지 못했다. “음...” 준상 역시 퀘스트 완료 메시지를 받은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그에게는 아직 대기 시간 10분이 남아있었다. “헤네스, 어떻게 된 거지?” “준상씨가... 너무 걱정 되서...” “후...” 준상은 이 철모르는 소녀의 모습을 보고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은 이제 약 10분 뒤면 본래 있어야 할 장소로 돌아가야 할 몸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이 요정을 닮은 귀여운 소녀는 아무도 없는 황량한 금단의 땅 한복판에 무방비 상태로 남겨지게 된다. 운이 정말 좋다면, 그녀의 본가가 있는 이벨류아로 돌아갈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못하면, 이 아름다운 갈색 머리의 소녀는 금단의 땅에서 야수와 몬스터들의 먹이가 되고 말 것이다. “바보 같은 짓이었다.” 준상의 말에 헤네스는 울상이 되어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하지만...” “후...” 준상의 시야에 서윤이 깜빡 잊은 채 놓고 간 험비가 들어왔다. 하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헤네스가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지금껏 만져 본 적도 없는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였다. 입가에 피와 체액을 잔뜩 뒤집어 쓴 줄무늬 다람쥐가 준상의 어깨로 폴짝 뛰어 올랐다. “...” 헤네스는 갑자기 나타난 이 엽기적인 모습의 다람쥐를 보고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바로 그 순간 준상은 한 가지 생각을 머리 속에 떠올렸다. 그것은 바로 펫 목걸이였다. 분명 주의사항에는 이렇게 씌여 있었다. 몬스터와 언데드는 펫이 될 수 없다고. 그것은 바꿔 말하자면, 몬스터와 언데드를 제외한 다른 모든 생물들이 펫으로 등록이 가능하다는 뜻은 아닐까? 준상은 곧바로 헤네스의 어깨를 두 손으로 꽉 잡은 채 말했다. “헤네스.” “네?” 헤네스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준상을 바라보았다. 준상은 그런 헤네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나와 함께 하지 않겠나?” “...” 헤네스는 잠시 머리가 멍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물론 준상으로서는 자기와 함께 일단 지구로 가지 않겠느냐는 의미로 한 말이었지만, 헤네스는 이것을 영락없이 고백으로 받아들이고 말았다. 헤네스는 끓어 오르는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결국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대답했다. “네. 함께 할게요.” 헤네스의 대답을 들은 준상은 곧바로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오픈 펫 목걸이.” “네?” 영문 모를 준상의 말에 헤네스는 다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다음 순간 하나의 가죽 목걸이가 그녀의 목에 걸리며 준상의 시야에 새로운 메시지가 나타났다. 축하합니다! :헤네스 브레아를 새로운 펫으로 삼는데 성공했습니다. -현재 동시 소환 가능한 펫의 숫자는 둘입니다. -현재 소환 가능한 펫은 모두 둘입니다 1.주머니 다람쥐 [상세 정보] 2.헤네스 브레아 [상세 정보] -펫 소환을 원하시면 해당 번호를 누르시고, 만약 소환을 원치 않으신다면 n을 누르세요 (1/2/n) _ “...” 준상은 수북하게 쌓인 메시지를 치워버린 뒤 그녀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그럼 다시 부를테니 잠시 들어가 있어.” “네?” 들어가 있으라는 말에 헤네스는 다시금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다음 순간 준상이 모든 펫을 소환해제 시키자 곧바로 작은 빛을 뿜어내며 모습이 사라져 버렸다. 준상은 일단 눈앞에 헤드라이트를 켠 채 서 있는 험비로 다가가 시동을 끈 후, 인벤에 집어 넣었다. 그리고 혹시 다람쥐가 빼놓고 간 아이템이 없는지 면밀하게 살핀 후에야 비로소 전송에 임했다. ============================ 작품 후기 ============================ 제스터의 비상금은 과연 어디로? 00074 트롤러 ========================================================================= 흰 빛과 함께 다시 동해에 인접한 어느 산속에 모습을 드러낸 준상은 몸에 묻은 오물부터 씻어냈다. 칼카쉬의 피와 괴물들의 살점이 덕지덕지 붙은 지금의 모습으로 마을에 내려갔다가는 대번에 신고를 당하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우선 옷을 갈아입고 드러난 부분을 비축해 둔 물로 대충 씻은 준상은 곧바로 산을 내려가 여관을 잡았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더러워진 몸을 씻었다. 피와 오물들을 박박 씻어내고 다시 그쪽 세계에서 입었던 옷들까지 말끔히 세탁을 마친 다음에야 욕조에 받아놓은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근 채 읽지 않고 치워두었던 메시지들을 하나씩 꺼내 열람하기 시작한다. 에픽 퀘스트 – 여명 4. 어둠의 군세로부터 도시를 지켜내십시오. :강대한 어둠의 군대가 성곽도시 이벨류아를 노리고 진격해 오고 있습니다. 그들의 침공을 막아내십시오. (침공까지 남은 시간 : 45시간 38분) -> 완료! (Hidden) 장군 칼카쉬를 처치하십시오. (협력) ->완료! (Hidden) 호위대장 아뉴트를 처치하십시오. (협력) ->완료! (Hidden) 해골 마법사 10명을 처치하십시오. (협력) ->완료! (Hidden) 보급대장 부카를 처치하십시오. (협력) ->완료! (Hidden) 선봉대장 랑다잘을 처치하십시오. (협력) ->완료! (Hidden) 정찰대장 그룬발을 처치하십시오. (협력) ->완료! (Hidden) 정찰대 10명을 처치하십시오. (협력) ->완료! (Hidden) 하이에나 20마리를 처치하십시오. (협력) ->완료! - 당신이 이번 퀘스트에서 보여준 행동과 성과를 정산합니다. 이 과정은 약간의 시간이 소요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축하합니다! : 당신의 랭크는 Ex:Hero입니다. -당신은 영웅적인 행동으로 세계를 위협에서 구해냈습니다. 기본 보상 외에 추가 보상이 지급됩니다. 보상 : 경험치 매우 많이, 추가 보상 상자(협력)x8, 추가 보상 상자(Ex:Hero), 칭호[이벨류아의 구세주] -> 보상을 지금 수령하시겠습니까? (Y/n) _ (주의) 수령하지 않은 보상은 7일후 자동 소거됩니다. “매우 많이...” 지금까지 나왔던 경험치와 관련된 표현들과는 다른 말이 언급되어 있음을 확인한 준상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일단 보상을 수령했다. 그러자, 곧바로 연거푸 세 번의 레벨업 현상이 준상의 몸으로부터 발현되었다. “허...” 처음 한 번은 아마도 칼카쉬를 비롯한 어둠의 군세를 혼자 쓸어버린 경험치가 누적된 것이 아닐까 싶었지만, 그것을 포함하고서도 두 번 더 레벨업이 이루어진 셈이다. 이런 일은 튜토리얼을 진행할 때도 경험한 적이 있지만, 당시에는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까마득한 저렙이었음을 감안한다면 이것은 충분히 놀랄 만한 일이었다. “그럼... 이제 23레벨이 된건가.” 20레벨 칭호를 얻은 뒤 연거푸 세 번 레벨업을 했으니 아마도 맞을 것이다. 준상은 먼저 상자를 열기 전에 칭호부터 확인해 보았다. 축하합니다! :당신은 에픽 퀘스트 – 여명을 해결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기여를 했습니다. -당신의 위업을 찬양하며 ‘이벨류아의 구세주’ 칭호를 부여합니다. [칭호 상세 정보 확인은 이곳을 누르십시오.] 준상은 바로 상세 정보를 띄웠다. [이벨류아의 구세주] :에픽퀘스트 – 여명에서 결정적인 기여를 한 자 1인에게 부여되는 칭호. -효과: 이벨류아가 속한 국가인 ‘델로드란’에서 퀘스트 완료시 경험치 보상 10퍼센트 증가. -칭호는 획득시 자동으로 효과가 적용됩니다. “보상 증가라...” 성곽도시 이벨류아가 속해 있는 국가 한정이기는 하지만, 다른 사람보다 앞서서 퀘스트를 독점할 수 있는 준상에게는 상당히 만족스러운 보상이라 할 수 있었다. 칭호를 확인한 준상은 먼저 협력 퀘스트의 보상 상자를 열기로 했다. 상자의 개수는 무려 여덟 개. 이걸 열어 보는 것만으로도 큰 일이 아닐 수 없다. 축하합니다! 추가 보상 상자(협력)에서 ‘힐링 포션’을 획득했습니다. :힐링 포션은 외상 치유에 탁월한 효과가 있습니다. [카드 상세 정보 확인은 이곳을 누르십시오.] “좋군.” 여분의 힐링 포션 카드가 한 장 더 있기는 했지만, 힐링 포션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카드이다. 준상은 다시 두 번째 상자를 열었다. 카드정보 명칭 : 도발 레벨 : 1Lv 경험치 : 0 등급 : Common 분류 : 스킬 성장 : 일반(소) 속성 : 없음 효과 : 적을 도발하여 상태이상을 초래합니다. Cost : 10 Seed : 1슬롯 “흠...” 직접 공격이 아닌 정신 공격의 일종인 것 같기는 한데, 이런 것을 할 시간이 있으면 주먹질을 한 번 더 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은 느낌이다. 물론 대규모의 적을 상대로 할 때 아군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에게 시선을 돌리는 용도로 사용할 수는 있겠지만, 그 외에는 달리 용도가 떠오르지 않는다. 준상은 다시 세 번째 상자를 열었다. 아이템정보 명칭 : 어쌔신 나이프 레벨제한 : 10 종류 : 무기 등급 : Uncommon 공격력 : 9-16 효과 : 치명타 확률 10% 증가 Seed : 2슬롯 설명 : 암살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날카로운 단도입니다. “쯧...” 치명타 확률을 무려 10퍼센트나 올려주기는 하지만, 자신의 성향과는 그리 맞지 않는 무기인지라 준상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준상은 어느 틈엔가 손위에 올려져 있는 거무튀튀한 날의 날카로운 단도를 잠시 살펴보았다. 하기야 뭐... 언제나 마음에 드는 보상이 나오라는 법도 없는 일 아니겠는가. 준상은 아쉬운 마음에 혀를 차며 단도를 일단 옆으로 치워 놓은 후 네 번째 상자를 열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생명력 흡수 7퍼센트짜리 시드가 나왔다. “좋군.” 생명력을 소모하거나 몸에 무리가 많이 가는 기술을 즐겨 사용하는 준상으로서는 생명력 흡수나 재생률은 높을수록 이득이다. 다섯 번째 상자에서는 카드가 나왔다. 카드정보 명칭 : 순간가속 레벨 : 1Lv 경험치 : 0 등급 : Uncommon 분류 : 스킬 성장 : 조숙(중) 속성 : 바람 효과 : 사용자의 속도가 10초간 20퍼센트 증가합니다. (쿨타임:30초) Cost : 10 Seed : 2슬롯 “이것도 좋군.” 쿨타임이 다소 길기는 하지만, 위급한 상황을 회피하거나 적에게 빠르게 접근하는 용도로 사용하면 제격이다. 게다가 이동 속도와 공격 속도를 함께 증가시켜 주기 때문에 빠른 연타가 필요할 때 사용해도 제법 효과가 있지 않을까 싶다. 카드정보 명칭 : 눈꽃송이 레벨 : 1Lv 경험치 : 0 등급 : Uncommon 분류 : 소환 성장 : 조숙(중) 속성 : 얼음 효과 : 작은 얼음의 정령 1개체를 소환합니다. Cost : 10 Seed : 2슬롯 여섯 번째 상자에서는 새로운 정령이 나왔다. 소환해 보니 작은 눈의 결정 같은 것이 사락사락 내리는 듯한 형태를 띄고 있었는데, 뜨거운 김이 가득 찬 욕실이라 그런지 무척이나 힘겨워 보인다. 준상은 눈꽃송이를 욕실 밖으로 내보낸 후 일곱 번째 상자를 열었다. 축하합니다! 추가 보상 상자(협력)에서 ‘시커 포션’을 획득했습니다. :시커 포션은 초상감각을 일깨우는 데 탁월한 효과가 있습니다. [카드 상세 정보 확인은 이곳을 누르십시오.] “음? 초상감각?” 준상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상세 정보를 확인했다. 아이템정보 명칭 : 시커 포션 레벨제한 : 10 종류 : 포션 등급 : Uncommon 효과 : 초상감각을 일깨웁니다. 지속시간 : 5분 재사용 대기시간 : 10분 남은 사용횟수 : 10회 설명 : 사용자의 감각을 증폭시키고, 육감을 개방시킵니다. 이 포션을 사용하게 되면 일종의 각성 상태가 되어 본래는 느낄 수 없었던 여러 가지를 느낄 수 있게 됩니다. 이 포션은 주로 투명화나 은신 등으로 숨어있는 적을 발견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됩니다. “나쁘지 않군.” 정령이나 늑대 같은 소환물이 있기는 하지만,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이런 포션이 하나쯤 있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니다.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마지막 협력 퀘스트 보상 상자를 열었다. 카드정보 명칭 : 매도 레벨 : 1Lv 경험치 : 0 등급 : Uncommon 분류 : 스킬 성장 : 일반(중) 속성 : 없음 효과 : 적을 욕하고 꾸짖어 상태이상을 초래합니다. Cost : 15 Seed : 2슬롯 여덟 번째 상자에서 나온 것은 도발과 비슷한 종류의 정신 공격 카드였다. 조금 아쉬운 마음에 입맛을 다시는데, 갑자기 새로운 메시지가 나타난다. “뭐지?” 축하합니다! :콤보카드를 조합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현재 조합 가능한 콤보 카드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도깨비시장의 욕쟁이 할매 [상세 확인] -콤보 카드 조합을 원하시면 해당 번호를 누르시고, 만약 조합을 원치 않으신다면 n을 누르세요(1/n) _ “...” 준상은 뭔가 난감한 콤보 카드 명칭에 얼굴을 찌푸렸다. 도깨비시장의 욕쟁이 할매 -도깨비시장의 욕쟁이 할매 앞에서는 모두 어린애가 됩니다. [조합상세] 도발, 매도, 2연격, 철면피 -효과: 1. 정신 공격시 목소리가 닿는 범위 안의 모든 대상에게 각각 10퍼센트 확률로 혼란 발생. 2. 정신 공격 효과 50퍼센트 증가. 3. 정신 공격시 목소리가 닿는 범위 안의 적의 공격력과 방어력 20퍼센트 감소. 뭔가 쓸데없이 대단한 느낌이다. 적아를 구분하지 않는 혼란 발생률은 물론이거니와 목소리가 닿는 범위의 적에게 강력한 디버프를 가하는 점도 대단하다. 준상은 일단 칭호가 있을까 싶어 콤보 카드를 장착해 봤지만, 의외로 이 카드는 첫 번째 조합에 대한 칭호가 나타나지 않았다. “아쉽군.” 콤보 카드를 사용하지는 않는다 해도 칭호 효과는 일단 받아두면 어떻게든 쓸모가 있다. 때문에 준상은 아쉬운 기분에 입맛을 다실 수 밖에 없었다. 이제 보상 상자 중에 남은 것은 Ex:Hero급 보상 상자 뿐이다. 트리플 S급 보상 상자에서는 두 가지 보상이 나오곤 했었다. 물론 Ex:Hero급이 트리플 S급 바로 위의 등급인지, 에픽 퀘스트에만 존재하는 특수한 등급 가운데 어느 정도 위치에 속한 건지 지금의 준상으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지만, 어쨌든 트리플 S급보다는 좋은 아이템이나 카드가 나올 가능성이 높은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러자 또다시 새로운 메시지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온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황금빛으로 찬란히 빛나는 카드였다. 카드정보 명칭 : 피칠갑(H) 레벨 : 1Lv 경험치 : 0 등급 : Hero 분류 : 스킬 성장 : 대기만성(극대) 속성 : 불 효과 : 1. 공격 성공시 적에게 45% 확률로 공포 유발 2. 재생률 20% 상승 3. 공격력 15% 상승 4. 공격 성공시 10% 생명력 흡수 5. 공포의 시선 활성화 가능. Cost : 40 Seed : 10슬롯 “허...” 왜 안 나오나 싶었다. 카드의 효과는 둘째 치고, 또 피칠갑 카드라니. 준상은 어쩐지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나저나, Ex:Hero급 상자에서 나온 것이라 등급도 영웅급인 건가. 효과가 무지막지한 만큼, 코스트도 무지막지하고 시드 슬롯도 수퍼 레어급의 두 배나 되었다. 준상은 일단 공포의 시선 효과에 대해 확인해 보았다. 공포의 시선 : 그 섬뜩한 시선과 마주치는 순간, 적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몸이 굳어 버립니다.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자신보다 레벨이 낮은 적에게 무조건 공포 유발 상태 초래. (기본 지속 시간 : 1초, 중첩가능) -기타 수단에 의한 공포유발 확률과 효과 50퍼센트 증폭. “허...” 기타 수단이라는 것은 준상이 지금껏 유용하게 사용해 왔던 공격시 공포 유발 효과를 말하는 것이리라. 즉, 보는 것만으로도 자신보다 레벨이 낮은 적에게 무조건 공포 유발을 초래하고, 비슷하거나 높은 적에게도 기존에 가지고 있던 공격 성공시 공포 유발 효과와 확률을 50퍼센트 증폭해준다. 준상은 이 카드가 지닌 효과를 이해하자 자신도 모르게 혀를 내두를 수 밖에 없었다. “대단하군.” 00075 트롤러 ========================================================================= 하지만 아직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준상은 곧바로 다음 메시지를 확인했다. 축하합니다! :당신은 처음으로 영웅급 카드를 획득했습니다! -당신의 위업을 찬양하며 ‘첫 번째 영웅 카드 습득자’ 칭호를 부여합니다. [칭호 상세 정보 확인은 이곳을 누르십시오.] “역시 나왔군.” 준상은 바로 상세 정보를 확인했다. [첫 번째 영웅 카드 습득자] :영웅급 카드를 처음으로 습득한 자에게 부여되는 칭호. -효과: 랜덤카드 선택시 높은 등급의 카드가 나올 확률이 증가합니다. -칭호는 획득시 자동으로 효과가 적용됩니다. “...” 준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낮은 등급 카드도 그 나름대로의 쓰임이 있기는 하지만, 이십 레벨이 넘은 보상으로 커먼 등급 카드 같은 것이 나오면 솔직히 좀 허탈할 때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영웅급 카드를 뽑음으로서 생겨난 칭호는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카드 연구가] :한 종류의 카드를 다섯 등급에 걸쳐 획득한 자에게 부여되는 칭호. -효과: 특수 기능 ‘카드 강화’가 개방됩니다. -칭호는 획득시 자동으로 효과가 적용됩니다. “카드 강화?” 조합과 다른 건가 싶은 마음에 준상은 자세한 정보를 찾아보았다. 카드 강화 :카드 강화는 같은 등급의 같은 카드 세 장을 조합해 상위 등급의 카드를 생성하는 기능입니다. 단, 레어 등급 이상의 카드는 강화시 실패 확률이 있습니다. 강화를 시도할 경우 성패 여부에 상관없이 재료로 투입된 카드는 모두 소멸합니다. 만약 당신의 행운 수치가 높다면, 한 단계 더 높은 등급의 카드가 나올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것도 가능한 건가.” 한번 시험해 봤으면 싶었지만, 아쉽게도 현재 준상에게는 카드 강화를 시험해 볼 만한 여유 카드가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다. 여분의 피칠갑 카드 세 장이 있었지만 카드 조합을 시험하다가 모두 날려버렸기 때문이다. 준상은 다음 메시지로 넘어갔다. [카드 연구의 선구자] :카드 연구가 칭호를 최초로 획득한 자에게 부여되는 칭호. -효과: 카드 강화시 실패 확률이 대폭 감소합니다. -칭호는 획득시 자동으로 효과가 적용됩니다. “선구자라...” 이 칭호도 제법 훌륭하다. 지금이야 어떨지 몰라도 나중에 레벨이 더 높아지고 나면 카드 조합이나 강화도 쓸 일이 많아질지도 모르는데, 모처럼 마음먹고 레어 등급 이상의 카드를 강화하려고 했다가 실패해서 날려버리기라도 하면 아무래도 속이 쓰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칭호 세 개를 확인하고 나자, 그제서야 EX:Hero 등급의 추가 보상으로 얻은 또다른 카드가 모습을 드러낸다. 카드정보 명칭 : 강타(SR) 레벨 : 1Lv 경험치 : 0 등급 : Super Rare 분류 : 스킬 성장 : 조숙(대) 속성 : 땅 효과 : 1. 힘을 모아 강력한 일격을 가한다. (5단계 차지, 쿨타임: 10초) 2. 경직 시간 20퍼센트 감소. 3. 차지 상태로도 걷기가 가능해집니다. Cost : 30 Seed : 5슬롯 “오!” 최근 준상이 애용하는 스킬중 하나인 강타의 슈퍼 레어 버전이 새롭게 등장했다. 언커먼 등급의 강타가 3단계까지 차지가 가능했다면, 슈퍼 레어 등급의 강타는 그보다 두 단계 높은 5단계 차지가 가능해졌으며, 또한 사용 후 경직 시간이 20퍼센트 감소하는 효과까지 추가되었다. 물론 위력이 증가한 만큼 사용후 몸에 가해지는 과부하 현상도 훨씬 심해지겠지만, 이전처럼 3단계까지만 사용할 경우에는 오히려 경직 시간이 줄어드는 셈이니 무작정 풀 차지를 남발하기 보다는 적절히 상황에 따라 사용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차지 상태에서 걸어 다닐 수 있다니. 정말 엄청나다는 말 밖에 나오지 않는다. 준상은 다음 메시지로 넘어갔다. 축하합니다! 추가 보상 상자(EX:Hero랭크)에서 특수카드 ‘인벤토리’를 획득했습니다. :특수카드를 획득하면 봉인된 특수기능을 해제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이미 특수기능 ‘인벤토리’가 개방되어 있으므로 인벤토리 용량을 5칸 확장합니다. -현재 당신의 인벤토리에는 서로 종류가 다른 15가지 물품을 등록하여 사용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인벤토리 5칸이라...” 캐비닛에 물품을 담아 보관하기 때문에 지금까지는 열칸의 인벤토리로도 지금까지는 딱히 부족함을 느끼지 못했지만, 사용하는 무기나 장비의 수가 늘어나면서 그것도 조금 빠듯하던 참이었기 때문에 준상은 인벤토리의 확장이 반가웠다. 이로써 추가 보상 상자는 모두 열어본 셈이지만, 아직 메시지는 하나 가득 남아 있었다. 그 가장 첫 번째 메시지는 역시나 칭호에 관한 것이었다. [시작의 영웅] :EX:Hero랭크를 처음으로 달성한 자에게 부여되는 칭호. -효과: 새로운 퀘스트의 발생과 조우할 확률이 증가합니다. -칭호는 획득시 자동으로 효과가 적용됩니다. “이건...” 준상은 이전에 거쳐 왔던 일들을 통해 퀘스트 목록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항상 새롭게 갱신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요컨대, 이 칭호는 기존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퀘스트가 발생하는 상황과 마주칠 가능성이 증가하도록 만들어 주는 셈이다. 단순한 사냥보다 퀘스트로 인한 보상이 훨씬 짭짤한 지금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이것 또한 무척이나 유용한 효과가 아닐 수 없다.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메시지로 넘어갔다. “레벨업 보상인가.” 메시지를 확인한 준상은 곧바로 자신에게 주어진 세 번의 랜덤 카드를 실행했다. 카드정보 명칭 : 순간가속 레벨 : 1Lv 경험치 : 0 등급 : Rare 분류 : 스킬 성장 : 조숙(중) 속성 : 바람 효과 : 1. 사용자의 속도가 10초간 30퍼센트 증가합니다. (쿨타임:30초) 2. 간혹, 카드 효과가 두 배로 증폭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Cost : 20 Seed : 3슬롯 “오!” 시작하자마자 곧바로 레어 카드가 터져 나왔다. 좀 전에 추가 보상 상자에서 뽑았던 종류의 카드라서 뭔가 조금 손해본 듯한 느낌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카드를 뽑기가 무섭게 새로운 메시지가 후두둑 생겨나는 모습을 보자 그런 기분도 사라져 버린다. 카드를 뽑았을 때 새로운 메시지가 터져 나오는 경우는 단 하나 뿐이기 때문이다. 축하합니다! :콤보카드를 조합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현재 조합 가능한 콤보 카드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데안달라스의 파발꾼 [상세 확인] -콤보 카드 조합을 원하시면 해당 번호를 누르시고, 만약 조합을 원치 않으신다면 n을 누르세요(1/n) _ 준상은 우선 상세 정보부터 확인했다. 데안달라스의 파발꾼 -고대 데안달라스 제국의 파발꾼들은 초인적인 주력으로 황제의 명령을 제국 각지에 빠르게 전달했다고 전해집니다. [조합상세] 질주, 도약, 순간가속, 순간가속 -효과: 1. 이동 속도, 도약력 50퍼센트 증가. 2. 질주시 원거리 공격에 의한 피격 확률 20퍼센트 감소. 3. 질주시 스테미너 소모 20퍼센트 감소. “허...” 그야말로 질주의, 질주에 의한, 질주를 위한 콤보 카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동 속도에 도약력까지 증가되는 것은 물론이고, 원거리 공격에 의한 피격 확률과 스테미너까지 감소시켜 주니, 타임 어택처럼 위험지역을 빠르게 돌파해야할 필요가 있을 경우에 특히 유용하다. 준상은 다음 메시지를 확인했지만, 이번에도 역시 칭호는 나오지 않았다. 하긴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났으니 콤보 카드의 첫 번째 습득과 관련된 모든 칭호를 획득하기를 바라는 것은 조금 무리인지도 모르겠다. 준상은 입맛을 다시며 두 번째 랜덤 카드를 뽑았다. 카드정보 명칭 : 2연격 레벨 : 1Lv 경험치 : 0 등급 : Rare 분류 : 스킬 성장 : 일반(중) 속성 : 바람 효과 : 1. 대상이 되는 적 1개체에게 120퍼센트 위력으로 연속 2회 공격을 가한다. (쿨타임 3초) 2. 치명타 발생 확률 10퍼센트 증가. 3. 간혹, 공격 명중시 쿨타임이 초기화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Cost : 15 Seed : 3슬롯 “하하...” 칭호 효과로 높은 등급 카드가 나올 확률이 높아졌다고는 해도 연속으로 두 번이나 레어 카드가 나오는 건 역시 쉬운 일이 아니다. 역시 요정들에게서 받은 두 번의 키스가 효과를 발휘한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피식 웃는 준상의 시야에 다시 한 번 새로운 메시지가 후두둑 터져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또 칭호인가?” 준상은 얼른 메시지를 확인했다. 축하합니다! :콤보카드를 조합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현재 조합 가능한 콤보 카드는 다음과 같습니다. 1. 하리아스의 미친개 2세 [상세 확인] -콤보 카드 조합을 원하시면 해당 번호를 누르시고, 만약 조합을 원치 않으신다면 n을 누르세요(1/n) _ “...” 왠지... 정보를 열어보고 싶지 않아진다. 보는 순간 미친개 콤보의 레어 등급 콤보 카드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직관적인 명칭이 특색이라면 특색일까. “후...” 준상은 한숨을 푸욱 내쉬며 일단 정보부터 확인했다. 하리아스의 미친개 2세 -불패의 신화를 자랑하던 어떤 미친개의 우월한 능력만을 물려받은 미친개 2세의 전설은 아직도 투견으로 유명한 하리아스 지방에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립니다. 마찬가지로 물어뜯기 공격에 특화 되어 있습니다. [조합상세] 물어뜯기, 2연격, 광폭, 피칠갑, 피칠갑 (레어 등급 이상인 카드가 네 가지 이상) -효과: 1. ‘물어뜯기’시 추가공격속도 150퍼센트 증가. 2. ‘물어뜯기’시 추가공격력 100퍼센트 증가. 3. ‘물어뜯기’시 추가 공포 유발 확률 30퍼센트 증가. 4. ‘물어뜯기’시 생명력 흡수 10퍼센트 증가. “...” 단순히 물어뜯는 것을 넘어서 상대를 거의 뜯어먹는 수준에 도달했다고 이해하면 딱 어울릴 듯 싶다. “끙...” 일단 카드를 장착해서 콤보를 완성하자 곧바로 새로운 칭호가 나왔다. [한 번 미친개는 영원한 미친개] :하리아스의 미친개 2세 조합을 최초로 성공한 자에게 부여되는 칭호. -효과: 추가 공포 유발 확률 10퍼센트 증가. -칭호는 획득시 자동으로 효과가 적용됩니다. “...” 효과는 참 좋은데, 이름 자체가 참... 준상은 말없이 메시지를 닫은 후 세 번째 랜덤카드를 열었다. 카드정보 명칭 : 도깨비불 레벨 : 1Lv 경험치 : 0 등급 : Uncommon 분류 : 소환 성장 : 대기만성(소) 속성 : 불 효과 : 불의 정령 1개체를 소환합니다. Cost : 10 Seed : 2슬롯 기존에 가지고 있던 도깨비불이 커먼 등급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이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다. 특히나 정령의 경우에는 콤보나 칭호 효과로 인해 많으면 많을수록 이득이다. “휴... 이제 겨우 보상을 다 열어본 건가.” 준상은 천천히 욕조에서 몸을 일으킨 후 물의 정령을 불러 물기를 말리게끔 했다. 그리고 더러워진 물을 버리고 욕실을 대충 청소한 다음 가운을 걸치고 밖으로 나와 그제서야 주머니 다람쥐와 헤네스를 불러들였다. “어?” 한줄기 빛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헤네스는 자신이 영문 모를 장소에 서 있음을 깨닫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가운을 입은 채 침대에 앉아 자신을 바라보는 준상을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라 몸을 돌렸다. “여, 여, 여긴... 도대체...” 어찌나 놀랐는지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는 헤네스의 모습에 준상은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일단 그 옷은 벗고 가서 씻어라. 세탁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 준상이 그렇게 말하며 여관에서 비치해둔 가운과 수건을 건네주었지만, 헤네스는 상황 파악이 전혀 안되는 얼굴로 우왕좌왕하기만 했다. 옷을 벗으라니! 씻고 오라니! 하지만 준상은 이 귀여운 소녀의 머리 속에서 샘솟듯이 터져 나오는 앙큼한 상상들에 대해서는 예상조차 못한 채, 다시 그녀에게 말했다. “내가 씻겨 줄까?” “아, 아뇨! 제, 제, 제가 씻을 수 있어요!” “훗...” 준상은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그녀를 안내했다. “여기 이걸 누르면, 이런 식으로 뜨거운 물이 나와. 여기 이건 차가운 물. 이건 전에 써봤지? 샴푸와 린스다. 이건 몸을 닦는데 쓰는 물 비누. 욕조에 물을 받을 때는 이렇게 하면 되고, 이렇게 하면 여기서 물이 나오니까... 듣고 있어?” “네! 드, 드, 듣고 있어요!” “...” 준상은 잔뜩 얼어버린 이 갈색머리 소녀의 모습을 보고 쓴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천천히 씻고 나와. 누가 안 잡아 가니까.” “네...” 준상은 그녀가 몸을 씻을 수 있도록 문을 닫고 밖으로 나온 후 새벽이슬을 불러 우선 피와 살점으로 얼룩진 엽기적인 다람쥐부터 씻기기로 했다. “새벽이슬, 얘 좀 씻겨라.” 그러자 허공에서 물방울들이 엉겨 다람쥐의 몸을 씻기기 시작한다. 준상은 테이블을 치우고 그곳에 야영할 때 쓰는 깔개를 펼쳐 놓은 후 다람쥐에게 말했다. “자, 꺼내 놔봐.” “...” 다람쥐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자신의 배에 달린 주머니 속 물건을 깔개 위해 풀어놓았다. 우르르르... 준상은 수북하게 쌓인 시드와 아이템을 보고 잠시 말문을 잃었다. 모르긴 해도 백 개는 충분히 될 것 같은 엄청난 양의 시드와 단검 한 자루, 반지나 팔찌 같은 악세사리, 그리고 금화가 눈에 들어온다. 열심히 혼자 빨빨거리고 쏘다니더니, 참 많이도 주워 모았다. 준상은 우선 시드 더미 속에서 은은한 서기를 발하고 있는 것 두 개를 골라 확인해 보았다. 명칭 : 독사의 이빨 레벨제한 : 15 종류 : 시드 등급 : Rare 효과 : 1. 공격시 중독 확률 7% 2. 독 저항력 증가 10% 3. 민첩 증가 8% 설명 : 호위대장 아뉴트가 지니고 있던 특별한 시드입니다. Seed 슬롯이 있는 아이템이나 카드에 장착하여 능력을 강화할 수 있습니다. 한번 장착한 시드를 분리하기 위해서는 특수기능 ‘분리’가 필요합니다. [이 시드를 아이템이나 카드에 장착하시려면 이곳을 누르십시오.] “독과 민첩이라...” 자고 있는 걸 단숨에 죽여버려서 어떤 놈인지도 알 수 없었는데, 이 시드를 보니 대충 어떤 성향의 괴물이었는지 짐작이 간다. 준상은 이것을 다른 레어 시드들과 함께 광폭 카드에 장착한 후, 또 다른 시드를 확인했다. 명칭 : 사악한 눈알 레벨제한 : 20 종류 : 시드 등급 : Rare 효과 : 1. 사안(邪眼) 활성화 가능 2. 물리 저항력 증가 10% 3. 민첩 증가 15% 설명 : 장군 칼카쉬가 지니고 있던 특별한 시드입니다. Seed 슬롯이 있는 아이템이나 카드에 장착하여 능력을 강화할 수 있습니다. 한번 장착한 시드를 분리하기 위해서는 특수기능 ‘분리’가 필요합니다. [이 시드를 아이템이나 카드에 장착하시려면 이곳을 누르십시오.] “사안?” 준상은 곧바로 정보를 확인해 보았다. 사안(邪眼) : 그 사악한 시선과 마주치는 순간, 대상자는 자신의 의도와는 다른 행동을 취하는 자신을 깨닫게 됩니다. -20퍼센트 확률로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스턴, 혼란, 착란 중 한 가지 상태 이상 유발. (기본 지속 시간 10초, 중첩 가능.) “호오...” 공포의 시선보다 확률 자체는 낮지만 더 다양한 상태 이상을 유발한다. 사안 역시 공포의 시선처럼 중첩이 가능한 것으로 보아, 전투시 이 두 가지 효과를 사용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이것도 아주 훌륭하군.” 그러고 보면 이번 에픽 퀘스트의 중간 보스들은 모조리 레어 시드들을 하나씩 던져준 셈이다. 확실히 퀘스트의 규모가 커서 그런지, 나오는 아이템들도 제법 훌륭하다. 준상은 다시 시드 더미 속에 숨어있는 단검을 꺼내어 확인해 보았다. 이 단검은 호화로운 검집에 들어 있었는데, 꺼내어 살펴보니 이전에 나왔던 어쌔신 나이프보다 작고 예리한 느낌이다. 아이템정보 명칭 : 무한의 연쇄 레벨제한 : 15 종류 : 무기 등급 : Rare 공격력 : 11-25 효과 : 1. 투척 후 칼집에 자동으로 귀환시키는 것이 가능합니다. 2. 치명타 확률 10% 증가 3. 치명타 피해 20% 증가 Seed : 4슬롯 설명 : 호위대장 아뉴트가 즐겨 사용하던 투척용 단검입니다. “투척용 단검이라...” 적당한 원거리 무기가 없었던 터라 무척이나 반가웠지만, 아쉽게도 준상에게는 이 단검을 제대로 활용할 만한 스킬이 없었다. 하지만 듀얼 스톰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이것 또한 자꾸 쓰다보면 스킬이 나오지 않을까 싶다. 준상은 이전에 다람쥐가 모아왔던 시드들도 깔개 위에 한꺼번에 쏟아 놓은 후 일일이 하나씩 확인과 분류를 시작했다. 그렇게 바닥에 앉아 시드들과 악세사리를 확인하고 분류하기를 얼마나 했을까. 문득 욕실의 문이 열리며 목욕을 마친 헤네스가 머뭇머뭇 모습을 드러냈다. 헤네스는 몸에 걸친 가운이 영 못 미더운지 자꾸만 앞섶을 가리고 있었지만, 준상은 그런 그녀를 한 번 쓱 훑어 본 후 새벽이슬에게 명령했다. “새벽이슬, 물기 좀 말려줘.” 그러자 헤네스는 몸 위에 여전히 촉촉하게 남아있던 물기들이 천천히 말라가는 것을 느꼈다. 준상은 여전히 시드의 확인을 계속하며 말했다. “거기 앉아서 잠깐 기다려. 이거 끝나면 식사하러 가자.” “네...” 헤네스는 일단 준상이 가리키는 대로 침대 모서리에 살짝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솔직히 목욕을 하고 있을 때는 이제 어쩌나 싶은 생각에 미친 듯이 뛰는 가슴을 주체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었는데, 지금 저렇게 자신을 본 척 만 척 하는 모습을 보니 뭔가 심각하게 손해를 본 듯한 느낌마저 든다. ============================ 작품 후기 ============================ 그런 장면이 나오면 따로 예고 하겠지만, 이번은 아닙니다. 00076 트롤러 ========================================================================= 헤네스는 고개를 돌려 방 안을 둘러 보았다. 아까는 경황이 없어 미처 알아보지 못했지만, 제법 호화롭게 꾸며진 러브호텔의 모습은 지금까지 그녀가 살아오면서 처음 보는 종류의 인테리어였다. 물론 아직 어린 탓에 여러 곳을 다녀보지 못한 것도 한 가지 이유라면 이유겠지만, 고급스럽게 마무리된 목재의 유려한 선이라든가, 벽에 아로새겨진 아름다운 무늬, 도대체 어떤 방식인지 추측조차 되지 않은 부드러운 조명은 그녀로서는 절로 탄성이 나올 정도로 아름다웠다. 게다가 지금 엉덩이를 걸치고 앉은 침대는 또 얼마나 부드럽고 안락한지. 좀 위태로울 정도로 출렁거리며 흔들리는 물침대의 감촉은 차라리 동화 속에 나오는 공주님의 그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벽 한쪽에는 이전에도 감탄한 바가 있는 깨끗하고 투명한 거울이 무려 그녀의 전신을 다 비추고도 남을 만큼 커다랗게 자리 잡고 있었으며, 또 다른 벽에는 보는 것만으로도 신비로운 반투명한 커튼이 창문을 가리고 있었다. 침대 뒤쪽에는 누가 그렸는지 모를 유려한 풍경화가 자리 잡고 있었으며, 전면에는 거울과 비슷하지만 좀 더 어두운 느낌의 커다란 무언가가 걸려있었다. 헤네스는 그 모든 것을 살펴보고 난 뒤에야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이, 이전에 살던 곳과는 전혀 다른 문화와 기술이 숨 쉬는 장소임을 확연하게 인지할 수 있었다. 이런 느낌은 방금 몸을 씻고 나온 욕실의 신기한 여러 가지 물품들로도 받을 수 있었겠지만, 사실 몸을 씻고 있을 때는 다른 것에 신경을 쓸 수 없을 정도로 경황이 없었기 때문에 미처 깨닫지 못한 부분도 있다. 혹시, 이곳이 바로 신라라는 나라의 왕족들이 사는 곳일까. 방이 비좁은 느낌이긴 하지만, 이 정도의 시설을 갖춘 곳이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헤네스는 생각했다. 어느 정도 여유를 되찾은 헤네스는 이제 다시 고개를 돌려 바닥에 쭈그리고 앉은 채 뭔가 검은 색의 씨앗 같은 것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건장한 남자의 널따란 등판을 바라보았다. 헤네스는 문득 깨달았다. 준상이 그 피비린내 나는 금단의 숲 한복판에서 했던 말이, 단순한 고백 같은 것이 아니었음을. 자신과 함께, 자신이 살던 세상으로 가자는 뜻이라는 사실을 이제야 새삼스레 깨달았다고나 할까. 그것을 깨닫자 헤네스는 문득 불안감을 느꼈다. 앞으로 전혀 모르는 세상에서 전혀 모르는 사람들과 지금까지와는 다른 생활을 이어가야 한다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형제자매들. 그들은 자신이 이런 상황에 처해 있으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그저, 금단의 숲 한복판에서 길을 잃은 채 헤매고만 있으리라 생각하겠지. “...” 헤네스는 이런 모든 일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자신을 느닷없이 침실 한복판으로 끌고 온 이 남자에 대해 살짝 화가 치밀었다. 말이 없는 것은 알았지만, 이 정도로 설명이 부족한 건 좀 너무 하다 싶을 정도다. 게다가 그렇게 끌고 와 놓고서 저렇게 무심한 태도라니! 헤네스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고는 무심하게 뒤돌아 앉아서 계속 무언가를 만지작거리는 데만 몰두하고 있는 덩치 큰 남자의 뒤통수를 때리는 시늉을 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그런 모습이 한 쪽 면을 장식한 거울에 그대로 비치고 있음을 미처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준상은 거울에 비친 그녀의 모습을 보고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헤네스.” “네넷?” “심심하냐?” “...” 헤네스는 모르는 척 딴청을 피우기 시작했지만, 준상은 옆으로 치워둔 탁자 위에 놓인 리모컨들을 염동력으로 끌어내어 손에 쥔 다음 티비를 켰다. “이거라도 보고 있어라.” “...” 뭘 보라는 건가 싶어 주위를 둘러보던 헤네스는 몇 초 후에 갑자기 한 쪽 면을 장식하고 있던 시커먼 판떼기에서 갑자기 영상과 함께 소리가 흘러나오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어? 저, 저건?” “...” 준상은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짓는 헤네스를 보며 피식 웃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다. “...” 헤네스는 갑자기 준상의 건장한 몸이 남자의 향기를 물씬 풍기며 다가서자 눈만 커다랗게 뜬 채 그대로 굳어 버렸다. 드, 드디어... 드디어 올 것이 왔다! 헤네스는 설렘인지 두려움인지 아니면 그 둘 다인지 모를, 생전처음 느끼는 감각에 당황해 어쩔줄 모르다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준상은 그녀의 머리 속에 다시금 자리 잡은 앙큼한 상상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그녀에게 리모컨을 쥐어 주며 설명을 시작했다. “이걸 누르면 영상이 바뀌고, 이걸 누르면 소리 크기를 바꿀 수 있다.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헤네스?” “넷!” “왜 눈을 감고 있어? 다시 설명해 줄 테니까 잘 봐.” “...” 헤네스는 그제서야 조심스럽게 눈을 뜨고 준상의 설명을 들었다. 하지만 바로 코앞에서 가운 하나만 달랑 걸친 남자가 서 있는 와중에 그런 설명이 제대로 귀에 들어올 리가 없다. 아니, 설명은 둘째 치고 가운 속으로 은근히 비치는 탄탄한 가슴팍의 모습에 헤네스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알겠어?” 설명을 마치고 준상이 바라보자, 헤네스는 일단 지금의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무조건 고개부터 끄덕였다. “네, 알아요.” “...” 뭔가 신경이 딴 데로 가있는 듯한 그녀의 모습에 준상은 어깨를 으쓱이며 다시 깔개로 돌아가 시드의 확인을 계속했다. “후...” 헤네스는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준상처럼 이 모든 상황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기에는, 아직 이 소녀는 경험해봐야 할 것이 너무나도 많이 남은 것 같다. 헤네스는 자신의 손에 쥐어진, 표면에 뭔가 이상한 돌기가 잔뜩 나있는 길고 검은 데다 뭉툭하기까지 한 막대기를 바라보았다. “...” 아까 뭐라고 했더라. 정신이 온통 딴 데 가 있다 보니 설명을 제대로 듣기는커녕 전부 한 귀로 흘려버린 상황이라 뭔가 좀 난감하다. 하지만 무식하면 용감한 법이라지 않은가. 헤네스는 벽에 붙은 기묘한 장치에서 흘러나오는 영상과 소리를 보며 길쭉한 돌기를 눌러 보았다. 그러자 영상이 바뀌며 왠 헐벗은 여성들이 가슴과 국부만을 작은 천조각으로 가린 채 서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 헤네스는 그만 입이 떡 벌어지고 말았다. 물론 자신도 시녀들이 옷을 갈아입혀 줄 때 저런 식으로 자세를 취하거나 하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그런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보인다는 건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저 영상 속의 여성들은 오히려 담담하게 미소마저 지은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지금껏 이런 란제리는 없었다! 세계 최초! 꿈의 란제리! 놀라지 마시라, XX 란제리 한 세트를 파격가 삼만 구천 팔백 원. 삼만 구천 팔백 원에... 준상은 시드를 계속해서 확인하다가 옆에서 홈쇼핑 광고소리가 흘러나오자 거울 너머로 헤네스가 입만 쩍 벌린 채 홀린 듯이 티비에 몰두해 있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준상은 생각했다. 어리긴 해도 여자는 맞는 모양이라고. 그리고, 어차피 다음에 퀘스트가 발동될 때까지는 꼼짝없이 이쪽에 머물러야 하니 있다가 나가서 그녀에게 맞는 옷가지도 사두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헙!” 자신도 모르게 입을 쩍 벌린 채 멍하니 티비를 바라보던 헤네스는 뒤늦게서야 자신의 추태를 깨닫고는 다급하게 입을 닫았다. 그리고 혹시나 준상이 그런 자신의 모습을 봤을까 싶어 얼른 눈치를 살핀다. “휴...” 다행히 준상이 고개를 돌린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헤네스는 얼른 아까 눌렀던 버튼을 다시 눌러 영상을 바꾸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무언가 쿵짝거리는 소리와 함께 화려한 조명 속에서 한 무리의 여성들이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 헤네스의 입은 다시 한 번 쩍 벌어지고 말았다. 세, 세상에... 잘은 모르겠지만, 아까의 벌거벗었던 여자들보다 입기는 더 입었는데 뭔가 엄청나게 야하다. 뱀처럼 몸을 꿈틀거리며 자신의 몸을 쓰다듬는 그 기묘한 율동이 주는 문화적 충격에 헤네스는 다시금 머리속이 하얗게 탈색되었다. 하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고 처음의 충격이 가시기 시작하자, 헤네스는 그제서야 준상의 조금은 무심한 듯한 태도가 어디서 기인한 것인지 제멋대로 추측하기 시작했다. 설마... 저 정도의 노출은 되어야 반응을 하는 것일까! 그러고 보면 이전에 자신을 금단의 숲 안쪽까지 데려다 줬던 일행의 여성들도 묘하게 몸매가 드러나는 옷을 입고 있었다. 진세아의 조금 풍성한 듯 하면서도 몸매가 잘 드러난 면바지라든가, 서유미의 무릎 위를 살짝 덮은 하얀 원피스라든가, 정다빈의 노골적으로 짝 달라붙은 청바지라든가! “아아...” 헤네스는 깨달음을 얻었다. 상당히 왜곡되고 터무니없는 깨달음이란 사실을 본인은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지만, 어쨌거나 일단은 그것이 헤네스가 이 세계로 넘어와서 얻은 첫 번째 깨달음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준상은 티비에서 흘러나오는 경쾌한 음악 소리를 들으며 사는 세계가 달라도 역시 음악은 통하는 법이라는 헛된 망상에 사로잡힌 채, 시드 속에 묻혀 있는 금화를 골라 한 쪽에 모아두었다. 헤네스는 잠시 깨달음에 취해 멍하니 티비 화면을 바라보다가, 그 짤랑거리는 소리를 듣고는 그제서야 자신의 드레스 안에 남아 있는 금화 주머니를 떠올렸다. “아! 맞다!” 무슨 소린가 싶어 준상이 고개를 들었을 때, 헤네스는 욕실 앞에 벗어서 개어두었던 드레스 속을 뒤지더니 이내 작은 가죽 주머니를 꺼내왔다. “그건?” 준상이 묻자 헤네스는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실은... 저를 그곳에 데려다 주는 대신 이 금화를 보상으로 주기로 했었거든요. 그런데 경황이 없어서 미처 건네주질 못했어요.” 헤네스의 말을 들은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밀었다. “나중에 내가 전해주도록 하지.” “그래 주시겠어요?” 어차피 부탁이 이루어진 시점에서 그녀가 몰래 빼낸 제스터의 비상금은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될 예정이었기 때문에, 헤네스는 미련 없이 주머니를 준상에게 건넸다. 주머니를 받아 든 준상은 끈을 풀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 안에 가득 든 금화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내 옆에 따로 모아둔 금화더미 옆에 내려 놓았다. 당연한 얘기지만, 아마도 이 금화 주머니가 임서윤의 손에 들어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아니, 철 모르는 아이가 한 부탁을 들어주는 바람에 지금의 상황을 초래한 것을 생각하면 오히려 추가 금액을 요구하고 싶을 정도다. 한참이 걸려서야 겨우 시드의 확인과 분류를 끝낸 준상은 캐비닛에서 간편한 트레이닝복을 꺼내 몸에 걸친 후, 헤네스에게도 비슷한 형태의 것을 꺼내 주었다. “일단 이걸 입고 있어라.” “네.” 이전에도 이벨류아로의 여정을 함께 하는 동안 입어본 적이 있는 옷이라 헤네스는 거부감 없이 그것을 건네받은 후 화장실에서 챙겨 입었다. 대충 준비가 끝나자, 준상은 켜져 있던 티비를 끄고 바닥에 펼쳐져 있던 깔개와 헤네스가 벗어둔 옷가지를 챙겨 캐비닛에 보관했다. 그리고 트레이닝복을 입은 헤네스가 화장실에서 나오자 가만히 질문했다. “헤네스.” “네?” “그... 아까 들어가 있으라고 한 뒤의 일, 혹시 기억나나?” “...” 역소환되었을 때의 상황에 대해 준상이 묻자 헤네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대답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뭔가 기분 좋게 한숨 푹 자고 나온 듯한 느낌이었어요.” “달리 생각나는 건 없고?” “네.”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말했다. “일단 이곳에서 나가야 하니까, 이번에도 잠깐만 들어가 있어라.” “음... 그냥 같이 가면 안되나요?” “안돼.” “...” 헤네스는 입을 삐죽거렸지만, 딱히 거부감은 느껴지지 않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준상은 헤네스의 대답을 듣자 그제서야 모든 펫의 소환을 해제했다. 그리고 일단 여관에서 나온 후 인적이 없는 골목 어귀에서 다시 헤네스를 불러냈다. “음?” 하얀 빛과 함께 다시 모습을 드러낸 헤네스는 또다시 새로운 장소에 자신이 와있음을 깨닫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준상은 그런 헤네스를 향해 말했다. “가자, 밥 먹으러.” “네.” 00077 트롤러 ========================================================================= 대로변으로 나오자 곧바로 푸른 동해안의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일전에 혼자 바닷가를 거닐 때는 잔뜩 안개가 끼어 우중충하기 짝이 없더니, 이렇게 헤네스와 함께 나오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맑게 개어 있다. “읏...” 헤네스는 눈앞에 드러난 푸른 바다의 모습에 감탄하다가 이내 싸늘한 바닷바람이 강하게 불어오자 추운지 몸을 움츠렸다. 이번에 눈꽃송이라는 이름의 얼음 정령을 얻어서인지, 별로 추위를 느끼지 못하고 있던 준상은 그제서야 아차 싶었다. 아차 싶은 마음에 파카를 꺼내주다가 문득 다른 정령이 생각났다. “산들바람. 바람 좀 막아봐.” 그러자 한 줄기 바람이 그들을 감싸며 세찬 바닷바람을 가로 막는다. 아무래도 힘이 부족한 탓인지 세차게 불어오는 바닷바람을 완전히 막아내지는 못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불어오는 바람이 훨씬 약해졌다. “후우... 엄청 춥네요.” 헤네스는 준상이 꺼내준 파카를 몸에 걸치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원래 바닷바람이 좀 세긴 하지.” “아... 이게 바다인가요?” “응, 본 적 없어?” “네. 큰 강이라면 본 적이 있긴 하지만.” “그렇군.” 해안가를 조금 걷자 도로변에 줄 지어 서있는 식당들이 눈에 들어온다. 역시나 바다 근처라 그런지 대부분 해산물을 다루고 있었다. “바다가 처음이면 해산물도 별로 못 먹어봤겠군.” “해산물이요?” “물고기라던가, 조개 같은 거.” 헤네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강에서 잡은 물고기라면 먹어 본 적이 있지만, 비린데다 가시가 많아서 전 별로 맛있게 느껴지진 않더라구요.” “그런가.” 준상은 잠시 주위를 돌아보았다. 아무래도 고추 같은 자극적인 향신료는 헤네스가 감당하기 어려우리라 생각한 준상은 무난하게 조개 구이 집으로 찾아 들어갔다. 헤네스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가자 주인 아주머니가 반갑게 맞이한다. “어서 오세요. 두 분?” “네.” “바람이 차죠? 아유, 이 아가씨는 볼이 새파랗게 질렸네. 저쪽으로 들어가세요.” “...” 준상과 헤네스는 아주머니가 이끄는 대로 안쪽 자리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뭐 드실래요?” “뭐가 맛있습니까.” “요샌 양미리랑 도루묵이 제철이죠. 가리비도 맛있고.” 준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먹을 만큼 조금씩 가져다주세요. 먹고 맛있으면 더 시킬테니.” “그럼 양미리랑 도루묵, 가리비 각각 작은 걸로 하나씩?” “그러세요.” 주문을 마치자 아주머니는 자리를 뜨더니 반찬을 가져와서 상에 늘어놓기 시작한다. 헤네스는 여기저기서 왁자하게 떠들며 음식을 먹는 사람들의 모습에 놀라고, 스스럼없이 아주머니와 대화를 나누는 준상의 모습에 다시 한 번 놀랐다. 적어도 헤네스의 기억으로는, 준상이 한 번에 이렇게 많은 말을 입 밖으로 내는 것을 본 적이 없다. 헤네스는 조심스럽게 준상에게 물었다. “말... 잘 하네요?” “...” 무슨 당연한 소리를 하냐는 듯한 표정으로 준상이 말없이 바라보자 헤네스는 입을 삐죽거리며 삐친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린다. “훗.” 준상은 그 모습에 피식 웃었다. 그리고 물을 따라 그녀 앞에 내주며 입을 열었다. “듣고 싶은 게 있다.” “...” “그날, 나와 헤어진 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헤네스는 일단 시원한 물을 한 모금 들이킨 후 준상의 물음에 답했다. “그러니까... 그렇게 갑자기 가버리신 다음 저녁 즈음이 되었을 때였어요...” 조용한 말투로 헤네스는 준상이 도시를 떠나 금단의 숲으로 향하고 난 뒤의 일을 설명했다. 집정관이 도망친 일부터 시작해서, 신비로운 빛과 함께 백여명의 사람들이 이벨류아에 나타나고, 제스터가 그들을 집정관의 저택에 머물게 한 일들을 헤네스로부터 간략하게 전해들은 준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말없이 마주 앉은 그들 앞에 어느 새인가 숯불이 피워지고 불그스름한 알을 품은 도루묵와 커다란 가리비, 그리고 미리 초벌로 살짝 구워진 양미리들이 그 위에 얹어져 맛있는 냄새를 풍기기 시작한다. “일단 먹자.” “네.” 준상은 우선 알이 꽉 차 배 밖으로 튀어나온 도루묵을 헤네스의 접시에 얹어 주었다. 헤네스는 자신의 접시에 놓여진 생선을 보고는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하기 시작한다. 젓가락과 숟가락이 옆에 놓여져 있기는 했지만, 숟가락은 그렇다 쳐도 젓가락은 도대체 어떻게 쓰는 식사도구인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그냥 손으로 잡고 먹어도 돼.” “손으로요?” “그래.” 헤네스는 머뭇거리며 잘 구워진 도루묵을 손으로 잡고 알이 있는 부분을 한 입 베어 먹었다. 그러자 짭쪼름하면서도 담백한 도루묵의 맛과 톡톡 터지는 알의 식감이 마치 불꽃놀이처럼 그녀의 미각을 밝힌다. “으음!” 예상치 못한 맛과 식감에 눈을 동그랗게 뜬 헤네스의 모습을 바라보던 준상은, 그녀가 순식간에 한 마리를 해치우자 다시 그녀의 접시에 양미리와 도루묵을 한 마리씩 얹어주며 말했다. “먹으면서 들어라.” “...” 헤네스는 손가락을 쪽쪽 빨고는 다시 새로운 도루묵으로 손을 뻗다가 준상의 말에 멈칫하며 손을 멈추었다. 준상은 슬며시 눈치를 보는 그녀의 모습에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지금 네가 어떻게 이곳에 있게 된 건지 말해주마.” “...” 헤네스는 진지한 표정으로 가만히 준상을 바라보았다. 준상은 그녀의 눈빛을 가만히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네가 살던 세계를 마음대로 왕복할 수가 없다. 가는 것도, 오는 것도, 그리고 싸우는 것도 사실상 강제로 이루어지는 일이지.” “강제로...” 준상은 지글거리며 익기 시작한 가리비를 가장자리로 밀어내며 말을 이었다. “아까 말했지? 갑자기 사람들이 도시에 나타났다고.” “네.” “금단의 땅에서 널 데리고 왔던 사람들이 갑자기 사라지는 것도 봤을 거다.” “봤어요.” “나도 다를 것이 없다고 보면 된다.” “...” 헤네스는 그 몇 마디 되지 않는 말을 통해 깨달았다. 바로 이것이 그로 하여금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저어하게 만드는 원인이라는 사실을. 잘은 모르지만, 준상이 언제나 피와 살육의 한복판에 서 있다는 사실만큼은 금단의 땅으로 그를 찾아가는 여정 중에 이미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물론 준상은 상대가 누구라 할지라도 쉽게 지지 않을 정도의 강한 힘을 지니고 있지만, 그것이 꼭 반드시 이긴다는 보장과 연결되지는 않는다. 싸우다 죽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차라리 그게 자신의 운명이라고 체념이라도 할 수 있으니까. 문제는, 그 뒤에 남겨진 사람들이 지니게 될 아픔이다. 그는 사람을 기피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을 사귐으로서 짊어지게 될 책임감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닐까. 준상은 어두워진 헤네스의 표정을 보며 쓴웃음을 지은 채 말을 이었다. “그렇게 심각한 표정을 지을 필요는 없다.” “하지만...” 헤네스는 뭔가 말하려 했지만, 준상은 고개를 저으며 말을 돌렸다. “중요한 건 지금 네 상황이다.” “저요?” “그래.” 목이 타는지 물을 한 모금 마신 준상은 천천히 말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자유롭게 그곳을 왕래할 수가 없다. 부르면 가고, 가서 일이 끝나면 돌아오는 식이지.” “그럼...” “맞아. 네가 찾아왔을 때 나는 바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먼저 돌아가 버렸던 그 사람들처럼.” “...” “나 혼자 돌아오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넌 금단의 땅이라 불리는 깊숙한 곳에서 혼자 남겨졌겠지. 물론 네가 그곳에서 스스로 집에 돌아갈 수 있을 정도의, 아니 최소한 그곳을 찾아올지도 모르는 누군가를 기다릴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이 있었다면 지금 같은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을 거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고, 따라서 나는 가능한 방법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다.” 준상의 설명을 차분히 듣고 있던 헤네스는 자신의 목에 채워진 가죽 목걸이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게... 이 목걸이인가요?” 헤네스의 말에 준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이게... 뭐죠?” “그것을 차고 있는 동안, 그 생명체는 나에게 귀속된다. 다시 말해 내가 이곳으로 돌아올 때, 널 그곳에 남겨두지 않고 데리고 올 수 있게 되는 거지.” “...” 헤네스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준상은 그것을 보고는 다시 말했다. “미리 말을 하지 않은 건 미안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남겨진 시간이 촉박해서 길게 설명을 할 만한 상황도 아니었고, 설명을 했다면 오히려 과정이 더 복잡해졌을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이 달리 있는 것도 아니었다.” “...” 그래, 준상은 이런 사람이었다. 언제 어느 상황이건 간에 가장 효과적이고 빠른 길을 찾는다. 오죽하면 '본론만'이 그의 입버릇이겠는가. 어떻게 보면 이렇게 자신에게 길게 얘기를 늘어놓는 것 자체가, 그로서는 일반적이지 않은 일임을 헤네스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나로서도 언제 다시 그곳으로 불려갈지 알 수 없는 상황이라 장담할 수는 없다. 하지만, 델로드란이라고 했던가? 그 나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이 생기면 책임지고 무사히 집으로 돌려보내 주겠다. 이것은 분명하게 약속하마.” 하지만 헤네스는 어두운 표정으로 말없이 고개를 끄덕일 뿐 대답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대화는 그것으로 끝났다. 그리고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식사를 마친 후, 식당을 빠져 나와 조용히 해안 도로를 걷기 시작했다. 준상은 식당에서부터 줄곧 말이 없는 헤네스의 모습을 보자 기분이 착잡해졌다. 한참이나 말없이 해안 도로를 걷던 두 사람은 날이 어두워지자 다시 근처의 모텔로 향했다. 준상은 일단 밖에서 역소환을 한 다음, 안에 들어와 다시 헤네스를 불러냈다. “먼저 씻어라.” “네...” 헤네스는 여전히 어두운 표정으로 그렇게 대답한 후 욕실로 들어가 몸을 씻기 시작했다. “후...” 욕조 안에 차오르는 뜨거운 물을 보며 헤네스는 다시금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자신이 준상에게 귀속되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조금 놀라기는 했지만, 뭔가 악의가 있어서 그런 것도 아니고 자신을 구하기 위해서 한 일이었기에 별로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따지고 보면 그러한 모든 일의 원인은 결국 자신이 무턱대고 금단의 땅이라는 위험한 곳에 찾아들어간 것 때문이니, 누굴 원망하고 말고 할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마음 한 구석에 실망감이 자리 잡는 이유는 무엇일까. 영락없이 고백이라고만 생각했던 그 말이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는 점 때문일까. 아니면, 이런 상황에서도 걱정하고 있을 가족들은커녕 오직 그의 마음만 신경 쓰는 자신에 대한 환멸일까. 헤네스는 한숨을 푸욱 내쉬며 차오르는 욕조의 물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바로 그 때였다. 준상이 욕실의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것은. 헤네스는 깜짝 놀라며 몸을 일으키려다가 그만 욕실 바닥에서 주욱 미끄러져 넘어지고 말았다. “꺅!” 다가올 고통을 예감하고 눈을 질끈 감는 순간, 탄탄한 팔이 그녀의 몸을 안아든다. 헤네스가 살며시 눈을 뜨자 준상이 바로 말했다. “헤네스.” “네?” “잠시 들어가 있어야 할 것 같다.” “그게 무슨...” 어리둥절해 하는 헤네스의 얼굴을 바라보며 준상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다시 그곳으로 불려가게 되었다.” “...” 헤네스는 그제서야 준상이 다급하게 욕실로 쳐들어온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럼... 이제 헤어져야 하는 건가요?” “...” 준상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헤네스는 이내 씁쓸한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알았어요.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시고 원하는 대로 하세요.” “...” 애써 밝게 말하는 헤네스의 모습에 준상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후 그녀를 역소환했다. “후...” 가볍게 한숨을 내쉰 준상은 캐비닛을 열어 그 안에서 전투 복장을 꺼내 챙겨 입은 다음, 곧바로 방을 빠져 나갔다. 들어오기가 무섭게 나가버리는 준상의 모습에 여관 주인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렇다고 그를 다시 불러 세우지는 않았다. 준상은 여관을 빠져나와 인적이 드문 골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기다리자 그는 한줄기 빛과 함께 퀘스트를 위해 전송되었다. 전송이 끝나는 순간 준상의 귀에 가장 먼저 들려온 것은 비명이었다. “으아아아악!” 그리고 곧바로 총성과 포성이 이어진다. 흡사 지구의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그 정신없는 소음에 준상은 잠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준상은 일단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자 조금 낯선 형태의 건축물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지구에 이런 건축양식이 있었던가? 하지만 그가 어떤 판단을 내리기도 전에 그의 시야에 퀘스트 목록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둠의 군세로부터 도시를 지켜내십시오. :강대한 어둠의 군대가 교역도시 벨카라스를 노리고 진격해 오고 있습니다. 그들의 침공을 막아내십시오. (침공까지 남은 시간 : 0시간 0분) [이 퀘스트는 대규모의 인원이 동시에 참여합니다.] (Hidden) 장군 사파탄를 처치하십시오. (협력) ->미완료 (Hidden) 친위대장 타샤스를 처치하십시오. (협력) ->미완료 (Hidden) 뱀머리 주술사 10명을 처치하십시오. (협력) ->미완료 (Hidden) 보급대장 후카를 처치하십시오. (협력) ->미완료 (Hidden) 돌격대장 아문간을 처치하십시오. (협력) ->미완료 (Hidden) 유격대장 애쉬달을 처치하십시오. (협력) ->미완료 “...” 에픽 퀘스트는 아니지만, 그 내용은 마치 판박이처럼 닮아 있었다. 차이가 있다면 보스급 인물들의 이름이 다르고, 침공 받은 도시의 이름이 이벨류아가 아닌 벨카라스라는 것 정도다. 준상은 일단 골목을 빠져 나가려다, 문득 미니맵 위에 붉은 색 표식이 근처에 갑자기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꺄아악!” 하지만 퀘스트 표식은 바로 지척에서 찢어지는 여자의 비명소리와 함께 다시 모습을 감추었다. 이런 현상, 이전에도 본 적이 있다. “벌써... 들어와 있는 건가.” 준상은 일단 근처의 벽을 짚고 지붕 위로 뛰어올라 주위를 바라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림자 사이로 무언가가 유령처럼 스르르 모습을 드러내는가 싶더니 근처의 사람 하나를 찔러 죽인 후 다시 모습을 감춘다. “유격대장 애쉬달.” 정찰대장 그룬발과 비슷한 행동 양식. 하지만 투명화와는 또 뭔가 다른 느낌이다. 물론 준상은 이것에 대한 해결책을 이미 두 가지나 가지고 있었다. 준상은 우선 그 중 가장 손쉽게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꺼내 들었다. “울프팩.” 그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흰 빛과 함께 거대한 세 마리 늑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찾아라!” 늑대들은 준상의 명령이 떨어짐과 동시에 곧바로 지붕 위에서 뛰어내려 적의 위치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늑대들이 채 위치를 찾아내기도 전에, 마치 그들을 희롱하듯이 어둠 속에서 작달막한 체구를 지닌 존재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이전에 광산에서 보았던, 개머리를 한 괴물이었다. -킥킥! 선혈이 채 마르지도 않은 기다란 쇠꼬챙이를 든 애쉬달이 모습을 드러내자 늑대들은 곧바로 달려들었다. 하지만 애쉬달은 그런 늑대들을 비웃듯이 곧바로 어둠 속에 모습을 감추었고, 늑대들은 놈이 사라진 곳 주위를 돌아다닐 뿐 제대로 놈의 위치를 찾아내지 못했다. 준상은 그 모습을 보고 깨달았다. 놈이 지닌 능력은 그룬발 같은 투명화 능력이 아니란 사실을. 아니나 다를까. 열심히 땅에 코를 처박고 냄새를 맡고 있던 팀버 울프의 뒤에서 애쉬달이 유령처럼 모습을 나타냈다. 팀버 울프는 곧바로 몸을 돌리려 했지만, 그보다 애쉬달의 공격이 더 빨랐다. -깨개개갱! 그리고 이어지는 메시지. 경고! : ‘팀버 울프’가 심각한 피해를 입어 강제로 역소환되었습니다. 강제 역소환으로 인해 ‘팀버 울프’는 1일간 재소환이 불가능합니다. -소환물이 강제 역소환될 경우 낮은 확률로 카드가 파괴될 수 있으니 주의하십시오. 그리고, 팀버 울프의 강제 역소환에 준상이 얼굴을 찌푸리는 순간, 커다란 굉음과 함께 벨카라스의 성벽이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00078 트롤러 ========================================================================= “쯧.” 가볍게 혀를 찬 준상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무너진 성벽 방향을 바라보자, 성벽으로부터 두 발의 로켓포가 섬광을 뿜으며 성벽 아래로 날아가는 모습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비춰졌다. 어째서 이곳에 로켓 같은 무기가 있는지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두 발의 로켓은 무너진 성벽 부근에 작렬하며 굉음과 함께 폭발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맹렬한 총성. 준상은 얼굴을 찌푸리며 일단 우왕좌왕하고 있는 늑대들부터 역소환한 뒤, 곧바로 시커 포션을 사용했다. “오픈 시커 포션.” 약효가 발휘되기도 전에 준상은 서둘러 투명 망토를 꺼내 몸에 걸쳤다. 검은 망토가 어깨에 걸쳐지는 순간, 갑자기 머리가 띵해지는 느낌과 함께 이명이 울리기 시작한다. “윽...” 하지만 그것도 잠시. 준상은 갑자기 주위 사물들이 자신에게 확 안겨 오는 듯한 착각과 함께 새로운 감각의 세계로 빠져 들었다. 본래 사람의 감각은 무의식적으로 주위에서 들어오는 자극을 한 차례 걸러내는 경우가 많다. 준상은 휘몰아치는 감각 속에서 깨달았다. 초상감각이란 자신이 지금껏 무의식중에 걸러왔던 아주 사소한 것들을 더욱 세세하게 보고 듣고 느낄 수 있게끔 되는 상태를 말한다. 준상은 마치 레이더처럼 가만히 주위의 모든 정보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마치 문을 열고 나오듯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애쉬달의 모습이 그의 감각 속에 잡혔다. 순간, 준상의 눈에서 붉은 안광이 줄기줄기 뻗어 나온다. 고통의 시선과 사안이 동시에 펼쳐지기 시작한 것이다. 애쉬달은 다음 목표를 찾기 위해 어둠의 문을 통과해 빠져 나오다가,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그대로 몸이 굳었다. -킥?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애쉬달은 주위의 풍경이 일그러지는 듯한 착각을 느끼며 비틀거리기 시작한다. 사안의 효과중 하나인 착란이 일어난 것이다. 준상은 애쉬달이 사안에 걸려들자 곧바로 지붕 위에서 몸을 날려 애쉬달의 등 뒤로 날아들었다. 공중에서 두 개의 철구를 인벤토리로부터 꺼내 손에 쥔 준상은 머리를 부여잡고 비틀거리는 애쉬달을 향해 그것을 내리찍었다. 애쉬달은 흠칫 놀라 고개를 돌리다 보았다. 붉은 안광을 뿜어내는 시커먼 무언가가 자신에게 떨어져 내리는 것을. 하지만 그 이상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자신의 몸 만큼이나 거대한 철구가 자비없이 그의 왜소한 몸을 내리찍었기 때문이다. 콰직! 단 일격! 그룬발도 그랬지만, 애쉬달 역시 신체 자체의 능력은 너무나 보잘 것 없었다. 준상은 그대로 박살이 나버린 애쉬달의 시체 속에서 체액과 살점으로 더럽혀진 채 은은한 서기를 발하고 있는 탄탄하게 생긴 부츠와 시드 하나를 발견했다. 준상은 부츠 안에 남아 있던 애쉬달의 발을 빼내고 겉에 묻은 살점들을 털어낸 후 조용히 입을 열었다. “새벽이슬.” 작은 물의 정령이 조용히 날아와 부츠를 물로 씻어내자 준상은 천천히 정보를 확인해 보았다. 아이템정보 명칭 : 애쉬달의 부츠 레벨제한 : 20 종류 : 부츠 등급 : Rare 효과 : 착용시 반경 10미터 내의 그림자 안으로 위상전이 가능. Seed : 3슬롯 설명 : 유격대장 애쉬달의 부츠 “위상전이?” 준상은 생소한 단어를 발견하자 곧바로 그 내용을 확인해 보았다. 위상전이(Phase Shift) : 이 놀라운 능력을 얻게 되는 순간, 당신은 공간과 공간 사이에 임의의 입구와 출구를 만들어 그 사이를 자유로이 이동할 수 있습니다. 개념상의 문제로 다소의 위험성과 제약을 가진 순간 이동과는 달리, 이것은 매우 안전한 이동 방법 중 하나입니다. “허...” 다시 말해, 이것은 공간 안에 웜홀과 비슷한 일종의 통로를 만들어내는 기술이라 볼 수 있다. 웜홀이라니! 10미터 안쪽의 그림자 안으로만 가능하다는 제약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이것은 엄청난 능력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그룬발의 망토를 착용한 준상이 이 부츠마저 착용하게 되면, 투명화 사용시 순간 이동에 버금가는 빠른 이동까지 가능해진다. 준상은 얼른 군화를 벗고 애쉬달의 부츠를 발에 가져다 댔다. 그러자 조금 작아보이던 이 부츠는 스스로 크기를 키워 새로운 주인의 발을 받아들였다. 사이즈마저 자유자재라니! 준상은 이 놀라운 부츠의 성능에 다시 혀를 내둘렀다. 이어서 시드도 확인해 보았다. 아이템정보 명칭 : 크리티컬 시드 레벨제한 : 20 종류 : 시드 등급 : Uncommon 효과 : 치명타 발생 확률 7% 증가 설명 : 치명타 발생 확률을 증가시켜주는 시드입니다. Seed 슬롯이 있는 아이템이나 카드에 장착하여 능력을 강화할 수 있습니다. 한번 장착한 시드를 분리하기 위해서는 특수기능 ‘분리’가 필요합니다. [이 시드를 아이템이나 카드에 장착하시려면 이곳을 누르십시오.] 다른 보스들처럼 레어 시드는 아니었지만, 치명타 발생 확률 시드는 매우 희귀한 것 중 하나이다. 준상은 일단 시드를 챙겨 넣은 후, 파괴된 성벽 쪽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격렬한 총성이 울려 퍼지고는 있었지만, 처음보다 어쩐지 그 기세가 많이 줄어든 것 같은 느낌이다. 준상은 다시 망토를 사용해 투명화를 실행한 다음, 부츠의 기능인 위상전이를 실행했다. 그러자 준상의 시야에 출구를 지정하라는 간략한 메시지가 나타난다. 인터페이스를 통해 출구의 위치를 지정하자 곧바로 준상의 옆에 드리워져 있던 건물의 그림자 속에 시커먼 입구 하나가 모습을 드러낸다. 준상은 주저 없이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러자 출구로 지정했던 장소로 곧바로 빠져 나온다. “멋지군.” 준상은 투명화 상태로 위상전이 능력을 사용해 빠르게 총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성벽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출구를 지정하고 그곳으로 옮겨가는 일련의 행동이 다소 거추장스럽게 느껴졌지만, 인터페이스를 통한 빠른 입력에 익숙해지자 이내 순간이동에 버금가는 속력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성벽에 접근하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지구의 복장을 걸쳐 입은 사람들이 벽 뒤에 몸을 숨긴 채 맹렬하게 총격을 가하는 모습이었다. “왜 안 죽는 거야!” “저놈들 또 살아난다! 뭐해! 쏘라고!” “젠장! 총알이 없단 말이다!” 금발의 서양인 한 사람과 흑인이 비명처럼 내지르는 소리를 들으며 준상은 이들이 대충 어떤 지역에서 온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미국 쪽인가.” 어째서인지 본래 영어로 들려야할 그들의 말이 또렷하게 한국말로 들리고 있었지만, 다른 세계의 사람인 헤네스와도 아무런 장애 없이 대화가 가능했던 것으로 미루어보면 차라리 이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무너진 성벽에서는 그 와중에도 꾸역꾸역 좀비들이 밀려들어오고 있었다. 좀비들은 가차 없는 총격에 박살나 쓰러졌다가도 이내 다시 재생되어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런 현상 역시, 준상은 이미 경험한 적이 있다. 미국인들은 무너진 성벽으로 밀려들어오는 좀비들에게 계속해서 총탄을 퍼부었지만, 그들이 지닌 탄약의 수는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격렬하던 총격도 어느새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이, 이젠... 끝장이다.” “빌어먹을... 이렇게 죽는 건가.” 준상은 총격이 완전히 멈추자, 그제서야 주머니 다람쥐를 소환한 후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괴성을 지르며 달려드는 좀비들을 향해 듀얼스톰을 발동했다. 콰가가가각! 절망에 빠졌던 미국인들은 어느 순간 갑자기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낸 한 남자의 위용에 전율했다. 붉은 안광을 줄기줄기 뿜어내며 직경이 일 미터는 되는 커다란 철구를 들고 파괴의 춤을 추자, 좀비들은 폭풍에 휩쓸린 쓰레기 더미처럼 분쇄되어 사방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준상은 성벽 안으로 들어온 좀비들을 단숨에 박살내 버린 후, 다시금 투명화 능력을 펼치고 위상전이 능력을 이용해 성벽 밖으로 이동했다. 좀비들은 다시 재생을 시도했지만, 너무나 확실하게 박살이 나버려서 형체를 갖추려면 그만큼 더 오랜 시간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인들은 갑자기 나타나 좀비들을 갈아 버리고 다시 모습을 감춘 준상의 모습을 보고 얼이 빠져 버렸다. “바, 방금 그게 뭐였지?” “그, 글쎄... 너무 순식간의 일이라.” 하지만 그들은 그 와중에도 좀비들 사이를 오가며 머리뼈를 바각바각 갉아대는 다람쥐의 모습은 미처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다. 준상은 위상전이를 통해 성벽 밖으로 나가자마자, 코앞에 붉은 색 퀘스트 표식이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콰앙! 그곳에서는 거대한 코뿔소의 형상을 닮은 괴물 하나가 장갑차를 들이받아 뒤집어 놓고 있었다. 강렬한 운동 에너지의 충격에 휩쓸린 장갑차는 종잇장처럼 구겨진 채 굴러가 버렸고, 그 안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기겁해서 밖으로 도망쳐 나오고 있었다. “저놈이 돌격대장 아문간이군.” 준상이 그렇게 고개를 끄덕이며 바라보는 순간에도 미국인 들은 자신들이 가진 화력을 아문간에게 쏟아 붓고 있었다. 총만 쏴대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구한건지 도대체 짐작도 가지 않는 66mm LAW 로켓탄 하나가 성벽에서 발사 되어 아문간을 향해 날아간다. 장갑차를 뒤집어 버린 후 가슴을 두드리며 포효하고 있던 아문간은 피할 생각도 하지 않고 눈앞에서 뻔히 날아오는 로켓탄을 그대로 맞이했다. -꽈광! 무유도 로켓임에도 불구하고 LAW는 훌륭하게 아문간의 몸에 직격했다. 하지만 미국인들은 환호할 수 없었다. 폭발과 화염을 뚫고 아문간이 멀쩡한 모습으로 걸어 나왔기 때문이다. “말도 안 돼...” 총은커녕 로켓탄에 맞아도 끄떡없는 아문간의 모습에 미국인들은 질려 버렸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에 절망이 드리우는 바로 그 순간, 준상이 아문간의 거대한 그림자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붉은 안광을 줄기줄기 뿜으며, 손에 든 거대한 도끼로 아문간의 뒤통수를 그대로 갈라버렸다. 콰자자작! 아문간은 가슴을 두드리며 다시 성벽을 향해 돌진을 준비하다가 갑자기 뒤통수가 갈라지며 그대로 절명해 버리고 말았다. 아문간의 두껍고 강인한 피부는 총탄과 로켓탄도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탄탄했지만, 피에 물든 마물인 블러드서커의 섬뜩한 검은 날 앞에서는 한낱 종이조각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후우...” 준상은 빠르게 힐링포션을 사용한 후 다시 투명화 상태로 돌아갔다. 사람들은 가슴을 두드리며 돌격을 준비하던 아문간이 갑자기 반으로 쪼개지며 그 거대하고 육중한 체구를 바닥에 눕히자 다시금 얼이 빠졌다. “바, 방금 뭐가 어떻게 된 거지?” “그, 글쎄.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그들이 얼빠진 대화를 나누고 있을 동안 준상은 블러드서커를 사용하고 난 후유증을 갈무리하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몸에서는 아직 자욱하게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지만, 재생률과 생명력 흡수 비율이 높아진 덕분인지 후유증의 지속시간도 강도도 많이 줄어든 상태였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어느샌가 달려온 다람쥐가 아문간의 머리에서 은은한 서기를 내뿜고 있는 시드를 꺼내 챙기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훗.” 준상은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은 뒤, 아문간의 시체를 인벤토리에 챙겨 넣었다. 로켓탄마저 견뎌내는 단단한 피부라면 나중에 어떤 식으로든 쓸모가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후우...” 준상은 다음 목표를 찾기 위해 미니맵으로 시야를 돌렸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숲 너머에 열한 개의 퀘스트 표식이 숨어 있는 것을 확인했다. 00079 트롤러 ========================================================================= 열한 개의 퀘스트 표식. 이전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자면 보급대장과 뱀머리 주술사들이 분명하다. 준상은 위상전이를 통해 빠르게 숲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몇 개의 출입구를 통과하자 준상은 어느 틈엔가 거대한 교역도시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로 이동해 있었다. 준상은 그곳에서, 화려한 망토를 몸에 걸친 채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는 두꺼비 괴물 하나와, 그를 둘러싼 뱀머리 주술사들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다. 걸치고 있는 옷은 달랐지만, 저 개성 넘치는 모습은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다. “보급대장 후카.” 혹시 이전에 해치운 부카와 쌍둥이라든가 그런 식의 숨겨진 이야기가 않을까 싶기도 했지만, 준상은 속으로 피식 웃으며 조용히 인벤토리에서 두 개의 철구를 꺼내 손에 쥐었다. 모습도 능력도 비슷하다면, 공략법 역시 비슷하다고 봐야한다. 준상은 위상전이를 통해 후카의 그림자 속으로 이동한 후, 곧바로 슈퍼 레어로 업그레이드된 강타의 발동을 준비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강타를 발동하기 시작한 준상은 천천히 몸 안에 존재하는 기운을 응축시키며 후카를 향해 한걸음씩 다가섰다. 그의 몸에 기운이 응축되기 시작할수록 주변의 대기는 끓어오르며 쌓여만 가는 강대한 힘과 공명한다. 웅... 우웅... 5초의 시간이 거의 다 되었을 즈음, 흥에 취해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던 후카는 등 뒤에서 느껴지는 기묘한 힘의 울림을 느꼈다. 그래서 춤을 추다 말고 고개를 돌려 바라보며 말했다. -후카?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마지막 유언이 될 줄은 후카도 그 주위를 에워싸고 있던 뱀머리 주술사들도 미처 예상치 못했다. 후카의 시야에 먼저 들어온 것은 짙게 드리워진 자신의 그림자였다. 하지만, 이내 그 안에서 붉은 안광을 번뜩이는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갑작스런 등장에 놀라 얼른 몸을 움직이려 했으나, 불행하게도 이성보다 공포의 시선이라는 명칭을 가진 이능이 먼저 그의 몸에 대한 통제권을 빼앗았다. 후카는 눈앞에 나타난 붉은 눈의 천적이 쥐고 있는 둥근 철구에서 새하얀 벼락같은 강렬한 힘의 분출이 이루어지는 것을,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노란 눈알을 희번덕거리며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곧바로 그곳에 우레와 같은 침묵이 강림했다. 스쳐지나가는 모든 것을 침묵 속에 잠기게 만드는 그 섬광은 그대로 뻗어나가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그리고, 마침내 침묵이 사라지자 급격한 힘의 분출의 영향으로 팽창된 공기가 주위로 터져 나가며 천둥소리를 일으킨다. 꽈르릉! 뱀머리 주술사들은 갑작스레 터져 나온 섬광과 천둥소리에 당황하다가, 이내 산산조각이 난 채 자신들에게 날아와 부딪히는 후카의 신체 조각에 기겁했다. 하지만 그들에게 닥쳐올 재앙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후우욱...” 5단계의 풀 차지 강타를 사용한 후유증이 몰아닥침에도 불구하고, 준상은 깊게 숨을 들이킨 후 온몸에서 연기가 뿜어져 나오는 채로 듀얼스톰을 발동했다. 무서운 속도로 회전하며 뻗어져 나간 두 개의 거대한 철구들은 그 뾰족한 가시로 뱀머리 주술사들의 가죽과 뼈를 곤죽으로 만들며 휘몰아쳤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이 끝났을 때, 후카와 주술사들이 있던 자리에는 걸레처럼 누더기가 된 그들의 신체 조각만이 마치 휴지조각처럼 흩날리고 있었다. 준상은 듀얼스톰의 발동이 끝나자 한쪽 무릎을 꿇으며 주저앉았다. “후우우우...” 그리고 길게 숨을 내뱉자, 그 입을 통해 증기기관차의 화통처럼 짙은 연기가 뿜어져 나온다. 풀 차지 강타를 사용한 다음, 후유증이 채 가시기도 전에 무리하게 듀얼스톰을 운용한 탓이다. 하지만 성과는 충분히 있었다. 후카와 주술사들이 일거에 쓸려 나가자 아무리 부숴도 끊임없이 다시 일어나던 언데드들의 재생이 멈춰버렸다. 미국인들로 구성된 플레이어들은 한 줄기 섬광과 함께 터져 나온 우레 소리와 함께 좀비들의 재생이 멈추자 환호하며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탄약을 아낌없이 좀비들에게 쏟아부었다. “그만! 총알 아껴! 아직 끝난 것이 아닐 수도 있다고!” 몇몇 사람들이 그렇게 외치고는 있었지만, 그것은 아주 소수에 불과했다. 격렬한 후유증이 덮쳐 오긴 했지만, 준상의 인간 같지 않은 재생력은 그런 과부하로 인한 모든 증상들을 빠르게 잠재우고 있었다. 물론, 그런 재생력이 고통까지 잠재워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아직 연속기는 무리인건가.”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가 어느 정도 가라앉자, 그제서야 준상은 땀으로 흠뻑 젖은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새벽이슬. 땀 좀 닦아줘.” 준상의 말이 끝나자 물의 정령이 흠뻑 젖은 그의 몸에서 물기를 빨아들인다. 흠뻑 젖었던 몸이 천천히 말라가는 감각을 즐기며 아직도 뻐근하게 느껴지는 관절들을 풀어주는데, 문득 그의 어깨에 폴짝하고 다람쥐가 올라와 앉는다. 입가에 피와 살점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엽기적인 모습인데도 불구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신을 바라보는 그 모습에 준상은 피식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어디 보자...” 준상은 일단 주위를 훑어보았다. 시드들은 이미 다람쥐가 챙겼는지 보이지 않았고, 후카와 주술사들의 육편들 사이로 밧줄처럼 돌돌 말린 아주 익숙한 모양의 무언가가 눈에 띈다. 하긴, 부카와 생긴 것도 판박이였으니 나오는 아이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준상은 혹시나 하고 정보를 확인해 보았다. 하지만 역시나 예상대로 후카의 혀는 부카의 그것과 이름만 조금 다를 뿐 똑같은 성능을 지니고 있었다. 물론 회복 효과를 생각하면 이것 역시 대단한 아이템인 것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부상을 치료한답시고 이 두 개의 혀를 채찍처럼 휘두르고 다닌다면 어떤 의미로 사람들의 뇌리 속에 각인될지... 상상만으로도 그저 암담할 뿐이다. 미니맵을 살펴보니 아직 친위대장 타샤스와 장군 사파탄, 그리고 그들이 이끄는 본대는 벨카라스에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준상은 우선 아문간과 후카에게서 얻은 시드들을 확인하기로 했다. “자, 꺼내놔 봐.” 명령이 떨어지자 다람쥐는 준상의 어깨에서 폴짝 뛰어내리더니 자신의 주머니 속에 담겨 있던 아이템과 시드들을 바닥에 쏟아 놓았다. 그 짧은 순간에 참 많이도 모았다. 준상은 일단 금화 같은 것을 옆으로 밀어놓은 다음 시드들 속에서 유난히 서기를 짙게 발하고 있는 시드들을 꺼냈다. “세 개?” 애쉬달에게서는 일반 시드가 나온 상황이므로 후카와 아문간을 포함하더라도 레어 시드는 두 개가 되어야 맞는데 지금 그의 손에는 세 개의 레어 시드가 쥐어져 있었다. 준상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확인을 시작했다. 명칭 : 두꺼비의 넉살 레벨제한 : 15 종류 : 시드 등급 : Rare 효과 : 1. 물리 저항력 증가 8% 2. 독 저항력 증가 7% 3. 재생률 증가 10% 설명 : 보급대장 후카가 지니고 있던 특별한 시드입니다. Seed 슬롯이 있는 아이템이나 카드에 장착하여 능력을 강화할 수 있습니다. 한번 장착한 시드를 분리하기 위해서는 특수기능 ‘분리’가 필요합니다. [이 시드를 아이템이나 카드에 장착하시려면 이곳을 누르십시오.] 첫 번째 시드는 보급대장 후카의 것이었다. 화염 저항이 붙어있던 부카의 그것과는 달리 후카의 시드는 독 저항력이 붙어 있는 점을 빼고는 능력치에 큰 차이가 없었다.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며 두 번째 시드를 확인했다. 명칭 : 죽음의 증거 레벨제한 : 5 종류 : 시드 등급 : Rare 효과 : 1. 독 저항력 증가 5% 2. 저주 저항력 증가 7% 3. 생명력 흡수 4% 설명 : 좀비에게서 아주 낮은 확률로 얻을 수 있는 특별한 시드입니다. Seed 슬롯이 있는 아이템이나 카드에 장착하여 능력을 강화할 수 있습니다. 한번 장착한 시드를 분리하기 위해서는 특수기능 ‘분리’가 필요합니다. [이 시드를 아이템이나 카드에 장착하시려면 이곳을 누르십시오.] “좀비?” 그동안 좀비를 만 마리 이상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레어 시드가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도대체 확률이 얼마나 낮은 건지 계산조차 되지 않지만, 무엇보다도 보기 드문 저주 저항과 생명력 흡수 옵션이 같이 붙어 있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비록 수치가 좀 낮은 것이 흠이긴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일반 시드들이 가지는 최고 수치가 7퍼센트 정도인 점을 감안하고, 여기에 제한 레벨이 겨우 5레벨 밖에 안 된다는 점까지 감안하면 그 활용도는 더욱 늘어나게 된다.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머지 하나의 레어 시드도 마저 확인했다. 명칭 : 거인의 뚝심 레벨제한 : 15 종류 : 시드 등급 : Rare 효과 : 1. 체력 증가 7% 2. 물리 저항력 증가 11% 3. 물리 공격력 증폭 6% 설명 : 돌격대장 아문간이 가지고 있던 특별한 시드입니다. Seed 슬롯이 있는 아이템이나 카드에 장착하여 능력을 강화할 수 있습니다. 한번 장착한 시드를 분리하기 위해서는 특수기능 ‘분리’가 필요합니다. [이 시드를 아이템이나 카드에 장착하시려면 이곳을 누르십시오.] 아문간의 시드는 근력 증가 옵션이 붙어있던 랑다잘의 그것과는 달리 물리 저항력이 붙어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준상은 세 개의 시드를 새로 얻은 영웅 등급의 피칠갑 카드의 슬롯에 장착한 다음, 다람쥐가 꺼내놓은 나머지 물품들을 정리해 캐비닛에 보관했다. 그리고 곧바로 본대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려다가 잠시 걸음을 멈췄다. “음...” 원래대로라면 파발꾼 콤보를 이용해 적에게 접근한 다음, 빠르게 적을 해치우고 사라지는 것이 준상의 행동 패턴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는 헤네스의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곳이 그녀의 고향과 과연 얼마나 떨어져 있는 곳인지, 아니 그녀가 속해있던 국가가 맞는지조차 모르는 상황이긴 했지만, 다음에 또 언제 퀘스트가 발동될지 모르는 상황인 점을 감안하면 일단 여기서는 바로 본대를 찾아갈 것이 아니라 일단 벨카라스로 돌아가 정보를 모을 필요가 있었다. 준상은 피와 살점으로 얼룩진 다람쥐의 입을 새벽이슬로 씻긴 다음, 곧바로 헤네스를 소환했다. 그러자 트레이닝복 차림의 헤네스가 빛무리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다. “여긴...” 헤네스는 낯선 거리의 풍경에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일단 신발부터 신어라.” “네.” 준상은 캐비닛을 꺼내 그녀의 신발을 꺼내준 다음, 조용히 말했다. “이곳은 교역도시 벨카라스라는 곳이다. 알고 있나?” “...” 헤네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학교에서 배웠던 지식 가운데 벨카라스라는 지명을 떠올렸다. “음... 들은 적이 있어요. 저희 델로드란이 있는 곳에서 동쪽으로 한참을 가다보면 피부가 붉은 사람들이 사는 제르틴스카야라는 나라가 나오는데, 그곳에서 가장 큰 무역항이 바로 벨카라스라는 이름이었어요.” “한참이라면... 마차로 얼마나 걸리는 거지?” 그 말에 헤네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글쎄요. 대륙의 남서쪽 산맥 아래에 위치한 델로드란에서 대륙의 거의 동남쪽 해안에 위치한 제르틴스카야까지는 배를 타도 몇 달은 넘게 걸릴 거에요.” “...” 이곳의 조선 기술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배를 타고 몇 달이 넘게 걸릴 정도면 마차 같은 교통수단을 사용했을 경우 일 년은 족히 넘어 간다고 봐야 한다. 운송수단이 발달하지 않은 이 세계의 여건을 감안한다면, 헤네스가 이곳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것이 오히려 신기할 정도다. 준상은 얼굴을 찌푸렸다. 헤네스는 그런 준상을 보며 조용히 말했다. “설마... 절 이곳에 두고 가실 생각이신가요?” “두고 가면, 돌아갈 수는 있겠나?” 준상의 물음에 헤네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마 어렵겠죠. 이벨류아의 브레아 가문이라고 해봐야 여기서 알아줄 사람도 없고, 특히나 이곳은 노예 매매가 융성한 곳이라...” “...” 뒷말은 들어보지 않아도 알만하다. 자신을 지킬 만한 힘이 없는, 게다가 그녀가 여기 있다는 것을 누구 하나 알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노예 상인들의 좋은 먹잇감이 될 뿐이다. 물론 가장 좋은 방법은 준상이 직접 데려다 주는 것이겠지만, 그것은 현실적으로 이루어지기 힘든 일이다. 물론 퀘스트를 포기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일 수 있겠지만, 어떤 형태의 패널티가 가해질지 전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함부로 모험을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준상은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말했다. “돌아가지는 못하더라도, 편지 정도는 맡겨볼 수 있지 않을까?” “편지요?” “물론 그 전에 이벨류아 근처에서 다시 임무를 맡게 될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못하게 될 수도 있으니까. 배편으로 편지를 보내면, 적어도 몇 달 안에는 도착할 수 있을 것이고.” 헤네스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밝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고마워요. 신경 써 주셔서.”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다.” 준상은 헤네스를 일단 역소환한 후, 투명화를 실행한 상태로 위상전이를 펼쳐 벨카라스의 도심으로 스며들었다. 골목에서 다시 헤네스를 소환하자, 그녀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더니 준상에게 이렇게 말했다. “죄송하지만 예전에 제가 입었던 드레스를 다시 꺼내주시겠어요?” “드레스?” “네. 선홍빛 드레스요.” “하지만 그건, 피에 젖어서 세탁을 하기로...” “괜찮아요. 오히려 그쪽이 더 강한 인상을 줄 수도 있으니까요.” “...” 준상은 아직 젖살도 빠지지 않은 이 귀여운 소녀의 의도를 깨닫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그런데 갈아입을 만한 장소가...” “텐트 있잖아요.” “불편할 텐데.” “괜찮아요. 처음도 아니고.” “...” 준상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그녀의 선홍빛 드레스와 텐트를 꺼내 주었다. “고마워요.” 헤네스는 곧바로 텐트 속에 들어가서 트레이닝복을 후다닥 벗고 드레스를 대충 걸친 다음 텐트를 빠져 나왔다. 그리고는 그녀의 헐벗은 모습을 보고 얼른 눈을 돌리는 준상에게 등을 들이대며 말했다. “좀 도와주세요.” “...” 준상은 속으로 이 소녀의 대담한 행동에 혀를 내두르면서도 무표정을 가장한 채 그녀의 등으로 손을 뻗어 여러 가닥의 끈을 매주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그녀가 갓 성년식을 치른 소녀인 탓에 드레스 자체도 그리 복잡하지 않은 종류의 것이라는 점이다. 만약 그녀가 혼기가 꽉 차 매의 눈으로 신랑감을 찾는 처지였다면, 이런 식으로 간단하게 드레스를 입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참고로, 이벨류아의 소녀들은 만 열일곱 살에 성년식을 치른다. 끈을 모두 졸라매자 헤네스는 돌아서며 말했다. “머리를 빗을 만한 것이 있을까요?” “...” 준상은 다시 캐비닛에서 빗과 거울을 꺼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헤네스는 그것을 건네받아 헝클어진 머리를 정성스럽게 빗어 정돈하는 것으로 모든 준비를 마쳤다. 선홍빛의 드레스 곳곳에 검붉은 핏자국이 남아있긴 했지만, 그것은 지금 이 순간 오히려 피비린내 나는 전장을 헤쳐 나온 레이디와 같은 강한 인상을 전해 주고 있었다. “가요. 이곳의 최고 실권자가 있는 곳으로.” “최고 실권자?” “상인들에게 부탁할 수도 있겠지만, 기왕이면 가장 확실한 방법을 찾는 것이 좋지 않겠어요?” “그야 그렇지.” 준상이 고개를 끄덕이자 헤네스는 밝게 웃으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게다가, 운이 좋으면 혹시 또 다른 부탁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 그런 속셈도 있었던 건가. 준상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그리고 어차피 돌려보낼 것이라는 생각에 지금까지 열어보지 않았던 그녀의 능력치를 살짝 열어 보았다. 펫 정보 이름 : 헤네스 브레아 종류 : 히딕스인 레벨 : 1Lv 경험치 : 0 등급 : 불명 분류 : 복합 성장 : 조숙(대) 속성 : 물 스킬 : 교섭 2Lv, 인맥 1Lv [정보] 호감도 : 90 충성도 : 55 카드슬롯 : 5개 [정보] 설명 : 행성 히딕스의 중앙대륙 남서부에 위치한 델로드란 태생. 금단의 숲과 마주하고 있는 성곽도시 이벨류아의 실질적인 지배자인 브레아 가문에서 막내딸로 태어나, 명문가 영애들에 대한 수준 높은 교육으로 이름 높은 린더젤 기숙학교 2학년에 재학 중. 타고난 친화력을 바탕으로 한 높은 교섭 능력과 그러한 교섭을 통해 사람 사이의 관계를 구축하고 활용하는 인맥 능력은 그녀가 지닌 능력 가운데서도 특히 주목할 만하다. 00080 트롤러 ========================================================================= 교섭과 인맥. 여기에 타고난 친화력까지. 어떻게 보면 준상이 지금껏 살아오면서 의도적으로 무시해왔던 것들이다. 게다가 다람쥐와는 달리 다섯 개의 카드 슬롯을 가지고 있다는 점도 특징이다. 다람쥐의 경우에는 슬롯이 두 개뿐이라 콤보는 시도해 볼 엄두도 내지 못했지만, 다섯 개의 슬롯을 가지고 있다면 한 번 시도해 볼 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어차피 당장은 돌아가기 힘든 마당이니,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수단 한 가지는 가지고 있는 편이 좋다. 준상은 말없이 헤네스와 함께 거리를 걸으면서 현재 쓰지 않는 카드들을 확인했다. 일단, 다람쥐가 현재 장착하고 있는 물어뜯기 카드와 광폭 카드까지 포함한다면, 현재 준상이 쓰지 않는 카드로만 조합하더라도 미친개, 광전사 등이 가능하고, 여기에 단 한 번도 써 본 적이 없는 콤보까지 포함하면 욕쟁이 할매와 파발꾼 정도가 포함된다. 욕쟁이 할매의 경우 직접적인 전투에 사용하기 보다는 후방 지원 쪽에 가깝고, 파발꾼 역시 전투보다는 질주라는 특수 목적에 특화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사실 전투 용도로 사용하자면 미친개와 광전사 만한 콤보가 없다. 당장 준상만 하더라도 그 두 가지 콤보 카드를 토대로 지금의 능력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물론 싸움은커녕 다른 사람 뺨이라도 한 대 때려본 적이 있을까 싶은 양가집 규수인 헤네스에게는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긴 하지만, 그렇게 따지자면 준상 역시 그 빌어먹을 튜토리얼에 진입하기 전까지 그런 식의 피비린내 나는 살육의 현장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이 두 가지 콤보를 헤네스에게 장착시키기 위해서는 다람쥐에게 장착된 물어뜯기 카드와 광폭 카드가 반드시 필요하다. 문제는, 이렇게 될 경우 다람쥐의 약한 공격력으로는 머리뼈를 부수고 그 안의 시드를 습득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는 점이다. 하다 못해 광폭 카드 하나만 더 나와 줘도 문제가 없을텐데... “곤란한데...” 준상이 문득 그렇게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리자, 옆에서 어깨를 나란히 한 채 걷고 있던 헤네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뭐가요? 뭐가 곤란한데요?” “그게...” “말해봐요. 제가 도움이 될지도 모르잖아요.” “...” 준상은 마치 사탕 달라고 조르는 아이 같은 헤네스의 모습에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헤네스는 준상이 자신을 보고 입가에 살짝 웃음을 띄우자 이내 삐친 얼굴로 입을 삐죽거린다. “치... 맨날 혼자만...” 맨날 혼자 알아서 생각하고 알아서 결정해 버리고... 헤네스는 왠지 자신을 어린애로만 여기는 것 같아서 속이 상했다. 준상은 그녀의 토라진 모습을 보고서야 다시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실은... 너에게도 스스로를 지킬 만한 힘이 필요할 것 같아서,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하던 중이다.” “...” 헤네스는 차분한 준상의 말에 눈이 동그래졌다. “힘이라구요?” “그래.” “그런 걸 나눠주는 것도 가능한 건가요?” 준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네가 거기에 맞는 노력을 해야겠지만, 기반을 잡아주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다.” “와아!” “다만, 아무한테나 가능한 건 아니고... 그 목걸이를 하고 있는 대상에게만 가능한 일이다.” “...” 헤네스는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준상씨에게 귀속되었기 때문에 그런 것도 가능하다는 뜻이군요.” “그 말대로다.” 준상은 펫이라는 말의 어감을 떠올리며 조금 씁쓸한 표정을 지었지만, 헤네스는 별로 개의치 않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어떤 것이 있는데요?” “음... 그게...” 준상은 천천히 그가 헤네스에게 부여해 줄 수 있는 콤보 카드 이름들을 말해 주었다. 미친개, 광전사, 욕쟁이 할매, 파발꾼... 헤네스는 대번에 얼굴이 찌푸려졌다. “이름이 죄다 왜 이래요?” “글쎄. 어쩌다 보니.” 사실은 준상 역시 지켜보는 누군가가 있다면 진지하게 묻고 싶다. 왜 자신에게는 이런 콤보 카드만 나오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헤네스는 준상의 표정을 보고 놀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는지 이내 한숨을 푸욱 내쉬며 물었다. “그럼 각각 어떤 종류의 것인지 말해주세요.” “음... 우선 하리아스의 미친개는...” 준상은 천천히 길을 걸으며 네 가지 콤보에 대한 것을 설명해 주었다. 나름 진지하고 친절한 설명이었지만, 헤네스는 설명을 들을수록 울상이 되었다. “이름만... 이상한 것이 아니었군요.” “동감이야.” “휴...” 그나마 가장 정상적인 것을 꼽으라면 역시 파발꾼 정도겠지만, 단순히 도망 다니는 것이라면 몰라도 준상에게는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전투에 적합한 것을 꼽자면 역시 미친개와 광전사 정도겠지만... 따로 수련을 거친 뒤라면 몰라도 지금의 자신으로서는 그런 능력을 제대로 활용할 기반이 갖춰져 있지 않다. 결국 지금 상황에서 당장 준상과 자신에게 도움이 될 만 한 것을 꼽으라면 역시 단 하나 뿐인 셈이다. “우선은 욕쟁이 할매로 할게요.” “마음에 들지 않으면 관둬도 상관없다.” 준상의 말에 헤네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저도 그런 힘이 있으면 좋겠다 싶었던 참이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 헤네스의 단호한 말투에 준상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정말 정말 솔직하게 말하자면, 미친개니 욕쟁이 할매니 하는 이름들이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의 능력을 갖추지 못하면 언제까지나 혼자서 싸우러 나가는 준상의 모습만 바라봐야 한다. 그런 점을 감안한다면, 좀 엽기적인 그런 이름들 따위는 차라리 감내할 만 하다. 어차피 준상 외에 다른 누군가가 그걸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더욱더 그러하다. 적어도 지금 이순간 헤네스는 그렇게 자신의 마음을 다잡고 있었다. “그럼, 잠시만 기다려봐.” “네.” 준상은 천천히 그녀의 카드 슬롯을 연 다음 그곳에 욕쟁이 할매 콤보에 해당하는 카드를 하나 하나 장착시켜 주었다. 도발, 매도, 2연격, 철면피. 이렇게 네 장의 카드를 장착하자 콤보 카드 ‘도깨비 시장의 욕쟁이 할매’가 헤네스에게서 활성화되었다. 준상은 남은 카드를 살펴보다가 이번에 영웅급 카드를 얻으면서 한 장이 남게 된 피칠갑 레어 카드를 남은 슬롯에 장착시켰다. 피칠갑 레어에는 재생률 증가 옵션이 붙어있다. 고작 10퍼센트에 불과하지만, 준상이 그 10퍼센트 덕분에 목숨을 건진 적이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이것은 절대로 무시할 수 있는 수치가 아니다. 게다가 명중시 공포 확률이라든가, 5퍼센트 밖에 안 되기는 하지만 공격력 증가 옵션까지 있고 시드 슬롯도 넉넉하지 어설프게 다른 카드를 장착하는 것보다는 훨씬 효율적이다. 준상은 카드의 장착이 완료되자 헤네스에게 물었다. “자, 어때?” “네? 아...” 헤네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허공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얼굴을 찌푸렸다. 아마도 현재 자신에게 장착된 카드들의 내용을 확인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준상은 생각했다. 잠시 그렇게 허공을 바라보던 헤네스는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뭔가... 이름들이 좀...” “하하...” 욕쟁이 할매도 난감한데 거기에 철면피니 피칠갑이니 하는 카드 이름까지. 헤네스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다시 말했다. “근데... 도발이나 매도 같은 건 어떻게 써야 하는 거죠?” “글쎄.” 준상도 써본 일이 없어서 영 감이 잡히질 않는다. “음... 일단 욕을 한 번 해봐.” “욕이요?” “그래.” “...” 헤네스는 다시 얼굴을 찌푸리더니, 머뭇거리며 말했다. “저기... 죄송한데요.” “응?” “실은... 욕을 별로 해 본 적이 없어서...” 준상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별로 안 해 봤다는 얘기는 해 본 적이 있기는 하다는 뜻이겠네?” “그, 그게...” “괜찮아. 사람이 살다보면 욕 한두 번쯤은 할 수도 있는 거지.” “...” “어차피 효과도 시험해 봐야 하니 잘 됐네. 나한테 한 번 해봐.” “준상씨... 한테요?” “그래. 자, 어서.” 준상이 손을 벌리고 자세를 취해보였지만, 헤네스는 머뭇거리며 좀처럼 입을 떼지 못했다. “어서?” “하지만...” “괜찮다니까. 해봐.” “...” 준상이 재촉하자 헤네스는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었던지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바, 바보.” “...” 순간 준상은 어째서인지 가슴 한 켠이 쿵 하고 내려앉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그건 아주 한 순간의 일이었고, 순식간에 목걸이와 반지에서 퍼져나온 청량한 기운이 그렇게 흔들린 마음을 다잡아 주었다. 그리 대단한 느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별 거 아닌 말 한 마디로 아이템에 카드에 시드까지 이것저것 처바른 준상의 마음을 흔들어 놓을 수 있다는 자체가 엄청난 일인지도 모른다. 준상은 다시 한 번 확인해 볼 필요를 느꼈다. “음? 잘 안 들리는데?” “...” “좀 크게 말해봐. 그래서야 어디 들리겠어?” “하지만...” “배에 힘을 꽉 준 다음. 힘껏 소리를 질러봐.” 준상의 말에 헤네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먹을 불끈 쥐더니 양손을 꽉 움켜쥔 채 소리를 빽 질렀다. “바보! 멍청이! 돌머리! 또, 똥벌레!” “...” 뭐랄까. 거친 현대인의 상식으로는 뭔가 2퍼센트 부족한 욕인 것 같은데, 그녀의 입에서 한 마디씩 터져 나올 때마다 가슴 한켠이 쿵쿵 내려앉는 느낌이다. 하지만 준상이 느낀 기분은 차라리 별것 아니었다. 성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총성과 포성 소리에 불안한 표정으로 거리를 기웃거리던 사람들은, 어디선가 소녀의 고운 목소리가 들려오자 이내 저마다 가슴을 부여잡으며 새파랗게 안색이 질린 모습으로 그대로 털썩 털썩 주저앉기 시작했다. “크윽... 가, 가슴이...” “커흑...” 준상은 주위를 돌아보고는 그 넓은 대로변에 제대로 서 있는 것이 오직 자신과 헤네스 뿐임을 깨달았다.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참 쓸 데 없이 대단하다는 말 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크흠... 잘했다.” “죄, 죄송해요. 그렇게 심한 욕을 함부로...” “...” 준상은 헤네스의 미안해하는 표정을 보며 피식 웃어버렸다. “가자. 할 일이 많다.” “네.” 준상은 가면서 인벤토리에 보관된 무기들을 떠올렸다. “흠...” “왜요?” “네가 쓸 만한 무기가 없을까 해서.” “...” “혹시 무기 다루는 법을 따로 배워본 적이 있니?” “아뇨.” 헤네스는 이럴 줄 알았으면 오빠한테 검술 교습이라도 받아둘 걸 그랬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고개를 저어 보이는 헤네스의 모습에 준상은 일단 작은 단도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이건?” “투척용 단검. 던지고 나면 알아서 되돌아오는 능력이 있지.” “정말요?” “당장은 좀 쓰기 힘들겠지만, 틈틈이 연습해 두도록 해. 아니면 그냥 호신용으로 쓰던가.” 헤네스는 얼굴을 살짝 붉힌 채 준상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다. “감사합니다. 정말 귀한 걸 텐데.” “...” 준상은 말없이 그녀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주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00081 트롤러 ========================================================================= 헤네스의 모국인 델로드란이 표면적으로나마 중앙 집권을 표방하고 있다면, 이곳 벨카라스가 속한 제르틴스카야는 지방 분권적 성향이 매우 강한 나라이다. 이것은 내륙 지방이 대부분 사막, 또는 그에 준하는 건조 기후인 것도 한 가지 이유이다. 유목민은 물론이거니와 거대한 오아시스의 주인, 그리고 해안 지방의 풍족한 자원을 바탕으로 할거하는 성주들이 흩어지지 않고 하나의 나라 안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 자체가 어찌 보면 불가사의하게 느껴질 정도이니,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이곳 벨카라스의 성주 술라스 하먼은 제르틴스카야의 전형적인 지배자중 하나라고 할만하다. “누가 왔다고?” “이방인인 듯한데, 긴히 부탁드릴 일이 있다고...” 술라스 하먼은 얼굴을 찌푸렸다. 어둠의 군세라는 초유의 사태를 맞이한 상황에서 강대한 무력을 지닌 이방인들의 출현은 손익을 따지기 매우 애매한 부분 중 하나이다. 술라스 하먼은 열두 명에 달하는 애첩중 하나가 입에 넣어주는 과일을 우물우물 씹다가 시종에게 대답했다. “기껏해야 금이나 좀 달라는 소리겠지. 집사장에게 알아서 하라고 전해라.” 하지만 시종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움직일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 그것이...” “왜?” “도, 도련님께서...” 시종의 말에 술라스 하먼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하란? 그 녀석이 왜?” 그러자 시종은 안절부절하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이방인의 일행인 듯한... 여자를 자신에게 팔라고 했다가...” “했다가?” “지, 지금... 그 여자에게 채찍으로 맞고 계십... 으악!” 술라스 하먼은 옆에 놓인 청동 술잔을 시종의 머리에 집어 던져 그의 이마를 찢어 놓은 후, 크게 소리쳤다. “이 멍청한 놈! 그런 일이 있으면 진작 말해야 할 것이 아닌가!” “주, 죽을 죄를...” “여봐라! 병사들을 모조리 불러라! 감히 이 술라스 하먼의 아들을 건드리다니!” 불 같이 노한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치자, 곧바로 주위의 시종들이 허겁지겁 밖으로 달려 나갔고, 애첩들 또한 눈치를 보며 방에서 얼른 빠져 나갔다. 썰물처럼 사람들이 빠져 나가고, 이내 갑옷과 칼을 찬 건장한 중년 무사가 안으로 들어오자 술라스 하먼은 씩 웃으며 대답했다. “기잔.” “네, 주인님.” “그 멍청한 이방인들이 주제를 모르고 내 아들을 건드렸다. 내가 참아야 하나?” “참으시면 안 됩니다. 위엄으로 다스리시지 않으면 이후에 또 같은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그 말대로다.” 곧바로 시종들이 들어와 술라스 하먼의 몸에 갑옷을 입히고 칼을 건네주었다. “몇 놈이라고 했지?” 그러자 시종이 급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남녀 각 한 명씩이라고 들었습니다.” “대담하군. 따로 숨어든 놈들이 있는 건 아니고?” “모든 병사들이 철통 같이 경계에 임하고 있으니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만약 숨어들었다 하더라도 그 수는 얼마 되지 않을 것입니다.” 술라스 하먼이 다시 물었다. “그들의 화력을 생각해 보면 적은 수라도 위험하지 않겠나?” 그 말에 기잔이 대답했다. “성주님의 말씀이 지당합니다. 허나 저들이 갑옷을 입지 않는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다소의 희생이 있더라도 제압하는 데는 지장이 없을 것입니다.” “좋아. 아주 좋아.” 술라스 하먼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기잔의 어깨를 두드렸다. 모르긴 해도 저 이방인들이 되살아난 시체를 해치우겠다고 알아서 나선 것에 대해서는 거부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그것을 빌미로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은 가만히 두고 볼 수 없는 일. 하물며 이 성 안에서 자신의 아들에게 감히 채찍질을 하다니. 그것도 하찮은 여자 따위가! 술라스 하먼은 병사들을 거느리고 그 남녀가 있다는 곳으로 향했다. 그런데... 막상 병사들을 거느리고 위풍당당하게 중앙의 정원으로 들어서기는 했는데, 뭔가 분위기가 묘하다. 포위하라고 보낸 병사들은 죄다 가슴을 부여잡은 채 주저앉아 있고, 아들놈은 뭔가 끈적거리는 액체를 온 몸에 처바른 채로 바닥에 엎드려, 치렁치렁한 선홍빛 옷을 입은 갈색 머리 소녀의 손에 쥐어진 두 개의 채찍에 얻어맞고 있다. “후우... 후우...” 소녀는 땀을 뻘뻘 흘리며 몸에서 기이한 아지랑이 같은 것을 뿜어내고 있었고, 그녀의 등 뒤에는 무심한 표정을 지은 한 남자가 그 모든 광경을 담담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기잔.” “네, 성주님.” “내가 나이를 먹기는 했나봐. 자꾸 헛것이 보이는 걸 보니.” “...” 술라스 하먼이 그 모든 상황을 보고 어이없어 하는 말투로 그렇게 입을 열자, 기잔은 급히 앞으로 나서며 갈색 머리 소녀를 향해 칼을 뽑았다. “멈추지 못할까! 어디 감히...” 하지만 그는 하고 싶었던 말을 끝까지 입에 담지 못했다. 무심한 표정을 지은 채 소녀의 등 뒤에 서있던 남자. 그의 시선과 마주치는 순간, 기잔은 그대로 몸이 굳어버렸다. “으으...” 기잔은 전신의 피가 그대로 썰물처럼 휩쓸려 내려가 발끝으로 빠져 나가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휘청. 기잔은 자신도 모르게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남자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안광은 그의 몸에 대한 통제권을 한사코 놓아주지 않았다. 기잔은 이내 붉은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지며 창백하게 질리더니, 결국 그 숨 막히는 공포가 주는 압박감을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정원 바닥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이건...” 술라스 하먼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을 깨달았다. 기잔은 그가 데리고 있는 무사들 가운데서도 손꼽히는 실력의 소유자. 과거, 자신의 동생이 보낸 열 명의 암살자를 단신으로 쓰러뜨릴 정도의 실력을 가진, 그야말로 일당십의 무사가 아니던가. 그런 기잔이, 말 한 마디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눈빛에 압도되어 쓰러졌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한단 말인가. 술라스 하먼은 상황이 좋지 않음을 깨닫고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바로 그때, “변태 똥벌레!” 소녀의 입에서 그 말이 흘러나왔다. “커헉!” 순간 술라스 하먼은 가슴이 덜컥 주저앉는 느낌을 받으며 자신도 모르게 털썩 주저앉았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살기등등한 모습으로 술라스 하먼과 기잔을 따라 왔던 병사들 역시 신음 소리를 터뜨리며 그대로 무릎을 꿇는다. “도, 도대체... 이건...”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고개를 든 술라스 하먼의 시야에, 씩씩 거리는 소녀와 그녀에게 다가서며 말을 건네는 남자의 모습이 비쳤다. “그쯤 하면 됐다.” 준상은 그렇게 말하며 산들바람으로 하여금 약한 바람을 불어오게 하고, 새벽이슬에게는 그녀의 땀을 닦아주도록 했다. “죄, 죄송해요. 하지만 너무 화가 나서...” “이해하니 신경 쓰지 말아라.” “네...” 헤네스는 머뭇거리며 손에 쥐고 있던 두 개의 혀를 준상에게 내밀었다. “이거... 잘 썼어요.” 하지만 준상은 피식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그냥 너 써.” “네?” “봐서 알겠지만 그걸로 때리면 상처를 빠르게 회복시킬 수 있다. 나는 딱히 쓸 일이 없으니, 네가 쓰는 것도 괜찮겠다 싶은데.” “아...” 준상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끈적한 액체를 몸에 가득 바른 채 숨을 헐떡이고 있는 청년에게 물었다. “지금 온 사람 중에 네 아버지가 있나?” 술라스 하먼의 아들, 하란은 감히 준상과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그게...” 모른다고 하기엔 준상이 너무 무섭고, 맞다고 하기엔 후환이 두렵다. 때문에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었던 것이지만, 준상은 그 모습을 보고 저 중에 성주라는 작자가 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아낼 수 있었다. “성주가 누구냐.” “...” 붉은 안광을 줄기줄기 뿜어내며 준상이 말하자, 술라스 하먼은 자신이 오늘 너무나도 크나큰 실수를 저질렀음을 깨달았다. 이 자는... 인간의 범주를 벗어난 자이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서는 눈을 마주친 것 만으로도 이렇게 공포에 질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준상의 모습을 보며 이미 죽어버린 아버지를 떠올렸다.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두려워 결국 자신의 손으로 독살해 버렸던 바로 그 아버지가! “으, 으으...” 준상은 병사들을 쓰윽 훑어보다가 화려한 갑옷을 입은 중년의 사내를 발견했다. 척 보기에도 대단히 화려한 갑옷을 갖춘 것이 제법 지위가 있어 보인다. “네놈이 성주냐.” “그, 그렇... 습니다.” 평소대로 평대를 하려다, 얼른 말투를 고친다. 이유 따윈 없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저 붉은 눈의 악마가 자신을 갈기갈기 찢어 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헤네스를 돌아보며 말했다. “저 놈이 맞는 모양이니, 잘 말해 봐라.” “네, 맡겨 주세요.” 헤네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성주님.” “무, 무슨... 일이냐?” “...” 헤네스는 술라스 하먼의 말투가 다시 반말로 돌아오자 허리에 손을 척 얹으면서 얼굴을 찌푸렸다. “바보에요? 상황이 눈에 안 들어오시나요?” “커헉!” 술라스 하먼은 헤네스의 입에서 다시 한 번 바보라는 말이 나오자 그대로 가슴이 부여잡으며 몸을 움츠렸다. 아아... 이 여자도 악마였구나. 어찌 미처 알아보지 못했단 말인가. “마, 말씀하십시오.” 그제서야 공손한 말이 돌아오자 헤네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진작 이렇게 서로를 존중했으면 얘기가 쉬웠을 텐데 말이에요.” “죄송... 합니다.” “그리고 아들 교육 좀 똑바로 시켜요. 레이디보고 넌 얼마짜리냐니, 도대체 어떻게 배워먹어야 그딴 말이 입에서 나오는 건가요?” “면목... 없습니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고개를 조아리는 술라스 하먼의 모습을 보자 헤네스는 어쩐지 더 화를 낼 생각이 들지 않았다. “우선 일어나세요.” “감사합니다.” 술라스 하먼은 머뭇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헤네스는 그런 술라스 하먼을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 “실은 제가 급하게 집을 나오는 바람에 제대로 연락을 못했어요. 죄송하지만 저희 집까지 편지를 보내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무, 물론입니다. 그런데... 어디로...” “델로드란의 이벨류아요. 그곳에 계신 제스터 발란 브레아라는 분이 제 아버님이세요.” “그, 그러셨군요. 델로드란의 이벨류아...” 술라스 하먼은 얼른 그 이름들을 머리 속에 기억했다. “음... 그러고 보니 편지를 아직 안 썼네요. 저 변태 때문에 괜히 시간을 낭비하는 바람에...” “커헉!” 그녀의 입에서 변태라는 말이 흘러나오자 간신히 한숨 돌리고 있던 주위의 사람들은 또다시 가슴이 주저앉는 듯한 충격을 느끼며 비명을 질렀다. 헤네스는 준상을 향해 혀를 쏙 내밀어 보이며 말했다. “준상씨, 편지를 쓰고 싶어요. 종이랑 펜 좀 빌려주실래요?” “...” 준상은 말없이 인벤토리에서 캐비닛을 꺼내 그 안에서 노트와 볼펜을 꺼내 주었다. 그리고 그녀가 편하게 글을 쓸 수 있도록 정원 한 켠에 놓여진 작은 탁자와 의자를 그녀 앞에 염동력으로 가져다 놓았다. 헤네스는 준상의 그런 작은 친절들에 함박웃음으로 답했다. “감사합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준상이나 헤네스로서는 그 모든 일들이 아주 일상적인 모습에 지나지 않았으나, 지켜보던 사람들로서는 눈이 휘둥그레지다 못해 벌린 입에서 침이 줄줄 흘러나올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허공에서 갑자기 철 상자를 꺼내고, 다시 손도 대지 않은 채 탁자와 의자를 가져다 놓는 그 모습은 옛날 얘기 속에서나 들었을 법한 마술사의 그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헤네스는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든지 신경조차 쓰지 않은 채, 준상이 준 노트를 펼쳐 그곳에 정성스럽게 부모님과 형제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적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결국 뜨거운 차 두세 잔 정도를 마실 정도의 시간이 흘러서야 헤네스는 편지의 작성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 죄송해요. 쓸 얘기가 많다보니 너무 시간이 걸려버렸어요.” “신경 쓰지 마라.” 준상은 그녀의 편지가 물에 젖지 않도록 지퍼 백에 잘 담은 후 술라스 하먼을 향해 말했다. “성주.” “네!” “어디에 보내야 한다고?” 준상의 조용한 물음에 술라스 하먼은 방금 전입해 들어온 신병처럼 부동자세를 취하며 크게 대답했다. “델로드란의 이벨류아! 제스터 발란 브레아님께 보내야 합니다!” “잘 기억하고 있군.” 고개를 끄덕이며 편지가 담긴 지퍼 백을 건네주자, 술라스 하먼은 공손하게 두 손으로 그것을 받았다. 그리고 또 한 번 놀랐다. 세상의 모든 부가 모인다는 말조차 있을 정도인 이곳 벨카라스에서조차, 이런 재질의 물건은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최상급의 유리처럼 속이 환하게 비치는 투명한 재질, 하지만 그러면서도 부드럽고 유연하게 휘어지는 그 탄력성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목숨처럼 여겨라.” “무, 물론입니다!”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말했다. “지금부터 내가 부르는 사람들을 이곳으로 불러들여라.” “네?” “구트, 길라, 즈다스...” 준상이 십여명의 이름을 부르자 술라스 하먼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그 이름을 기억하고는 급히 병사들에게 그런 이름을 가진 자를 데리고 오도록 명령했다. 헤네스는 준상의 옆으로 다가와 조용히 물었다. “부탁을 받으시려고요?” “물론.” 준상은 다시 캐비닛을 꺼내더니 그 안에서 주전자와 찻잔, 그리고 휴대용 버너를 꺼냈다. “시간이 좀 걸릴테니 차나 한 잔 하자.” “네!” 편지를 쓰기 위해 가져다 놓았던 작은 탁자에 둘러앉은 두 사람은 멀거니 자신들을 지켜보는 병사들을 무시한 채 두 사람만의 티타임을 벌였다. 그렇게 잠시 시간이 지나자 병사들이 겁에 질린 사람들을 데리고 정원으로 돌아왔다. 그 모습을 보자 헤네스가 바로 말했다. “그 분들을 모두 이리로 데리고 오세요.” “네.” 헤네스는 겁에 질려 어쩔 줄 몰라 하는 사람들을 향해 미소띤 얼굴로 조용히 말했다. “겁먹으실 것 없어요.” “...” “곤란한 일이 있으시죠? 저희에게 부탁하세요. 그러면 이루어질 거에요.” 사람들은 이 영문 모를 상황에 잠시 당황했지만, 온화한 헤네스의 미소에 이끌려 지금 자신들에게 닥친 곤란한 사정을 마치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털어놓기 시작했다. 헤네스는 그 모든 얘기를 차분하게 듣고는 내용을 정리해 준상에게 말해 주었다. “별 것 아니군.” 준상은 갱신된 서브 퀘스트의 내용을 확인한 후 빠르게 일을 처리하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성 안에 존재하던 서브 퀘스트들은 모조리 완료되었다. 준상으로서는 사실 안 해도 그만인 퀘스트들이었지만, 헤네스는 그 퀘스트들이 완료되자 곧바로 레벨이 오르고 특수 스킬인 교섭의 레벨도 3으로 올라갔다. “앗?” 헤네스는 갑자기 자신의 몸에서 하얀 빛이 뿜어져 나오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그것이 일전에 준상에게서 나타났던 현상중 하나임을 깨닫고 기쁜 표정을 지었다. 레벨업의 효과로 몸이 가뿐해진 건 둘째 치고, 조금이나마 준상과 더 가까워졌다는 사실이 기꺼웠던 것이다. 서브 퀘스트가 모두 완료되자, 준상과 헤네스는 그제서야 벨카라스를 벗어났다. 안절부절하며 그들의 뒤를 따라다니던 술라스 하먼은 그들이 어두운 숲속으로 모습을 감추자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정말 십년감수했군.” “다행히 그리 악한 사람들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따로 배상을 요구하지도 않은 걸 보면.” 기잔의 말에 술라스 하먼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러게나 말이다. 게다가 그 바쁜 와중에도 사람들의 고민을 해결해주고 가다니... 세상에는 저런 사람들도 있었구나.” 하지만 그들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성을 빠져 나갈 즈음, 입가에 쇳가루와 돌가루를 잔뜩 묻힌 다람쥐 한 마리가 준상의 어깨 위로 폴짝 뛰어 올라갔다는 사실을 말이다. 참고로, 이 다람쥐는 안목 3레벨, 보관 2레벨의 능력을 지니고 있다. 00082 트롤러 ========================================================================= “새벽이슬.” 준상은 조용히 물의 정령을 불러 다람쥐의 입을 씻기게 한 후, 옆 자리를 지키고 있는 헤네스에게 말했다. “그럼 이만 들어가 있어라.” 헤네스는 우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저도 같이...” “안 돼.” 물론 욕쟁이 할매라든가, 채찍이라든가, 단검이라든가... 여러 가지 대비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녀를 피와 살이 튀기는 전장에 세우는 건 여러 모로 문제가 있다. 좀비들 상대로도 불안하기 짝이 없는 판에 보스 급이 둘이나 있는 전장이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단호한 준상의 대답에 헤네스는 우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아직 자신은 짐 덩어리가 아닌가 싶은 까닭이다. 준상은 그런 헤네스를 보며 쓴 웃음을 지으며 가만히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네가 옆에 있으면 싸움에 집중할 수가 없다.” “역시... 제가 부담스러우신 건가요.” 헤네스의 말에 준상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럼...” “걱정스러워서다.” “...” 어떻게 보면 별로 다를 것이 없는 말일 수도 있지만, 헤네스는 그 안에 담겨진 준상의 마음을 느끼고는 밝게 미소를 지었다. “알았어요. 그렇게까지 말씀해 주신다면.” “이해해 줘서 고맙다.” 헤네스는 가만히 양손을 모은 자세로 눈을 감고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준상은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조용히 역소환을 실행했다. 헤네스의 몸이 빛과 함께 모습을 감추자, 준상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어깨 위에 앉아 있는 다람쥐를 향해 입을 열었다. “자, 꺼내 놔봐.” 다람쥐는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그대로 땅바닥으로 뛰어내리더니, 주머니 속에 들어 있던 물건을 우르르 쏟아내었다. “...” 그러자 준상의 눈앞에 금괴와 보석이 수북하게 쌓였다. 가슴까지 올라오는 금은보화의 산을 보고 준상은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성주 아들 놈의 행동이 괘씸해서 다람쥐에게 가서 대충 집어 오라고 명령한 것이 자신이긴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미처 몰랐기 때문이다. “수고했다.” 준상은 캐비닛을 꺼내 호두 몇 알을 다람쥐에게 상으로 주었다. 다람쥐는 그것을 받아 자신의 주머니에 보관한 후 하나씩 꺼내 껍데기를 갉아대기 시작한다. “어디보자...” 준상은 금괴와 보석을 일단 분류한 다음, 적당한 상자에 그것을 나누어 담기 시작했다. 양이 상당한 탓에 이것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제법 시간이 걸렸지만, 이 정도 양이라면 당분간 돈 때문에 걱정할 일은 없을 듯하다. 물론... 쉽게 처분할 방법이 있다는 전제 하에서의 일이지만 말이다. 금괴와 보석들을 분류해서 챙겨 넣은 뒤에야 준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도 잠시 들어가 있어라.” 호두를 열심히 파먹던 다람쥐는 그의 말을 듣고는 남은 호두알을 후다닥 먹어치운 뒤 부스러기가 남아있는 입가를 작은 앞발로 열심히 문질러 닦았다. 준상은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웃은 뒤, 다람쥐가 모든 준비를 마친 뒤에야 비로소 역소환을 실행했다. 그렇게 모든 준비를 마친 뒤에야 준상의 입에서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파발꾼.” 그의 목소리가 흘러나옴과 동시에 기존에 장착되어 있던 스킬 카드들이 일제히 빠지고 그 자리에 새로운 카드들이 장착된다. 질주, 도약, 순간가속, 순간가속(R). 이렇게 네 장의 카드가 슬롯에 채워지는 순간, 콤보 카드 ‘데안달라스의 파발꾼’이 완성되었다. 준상은 남은 한 칸의 카드 슬롯에 피칠갑(H)를 장착하게끔 단축 명령을 수정한 후, 가만히 몸을 풀었다. “그럼... 달려 볼까.” 깊게 숨을 들이쉰 준상은 천천히 자세를 낮추다가 일순 땅을 박차며 미니맵에 표시된 붉은 퀘스트 표식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준상은 콤보 없이 질주 만으로도 폭주하는 기관차 같은 속도를 냈었다. 하지만 데안달라스의 파발꾼이라는 콤보 카드를 장착하자 그는 이제 기관차를 넘어 가히 인간 탄환이라는 말이 부족할 정도의 엄청난 가속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이동 속도와 도약력, 모두 50퍼센트 증가. 그러면서도 스테미너의 소모는 오히려 전보다 20퍼센트가 감소했으니 이 콤보의 효율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새삼 설명할 필요가 없는 일이다. 준상은 숲의 나무들을 이리저리 가로 지르며 빠르게 나아갔다. 그리고 마침 숲으로 접어드는 어둠의 군세를 오래지 않아 발견할 수 있었다. “후우...” 급히 걸음을 멈춘 준상은 급가속으로 달궈진 호흡을 내뱉으며 천천히 멈추어 선 다음 그룬발의 망토를 사용해 모습을 감추었다. 그리고 가만히 퀘스트 표식을 통해 새로운 적들의 위치를 조용히 가늠해 보았다. 보스 들의 위치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멧돼지처럼 아래쪽 송곳니가 불쑥 튀어 나온 우락부락한 얼굴 모습에, 두툼한 뱃살을 출렁이며 걸어오는 거대한 괴물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놈의 손에는 차라리 기둥이라고 부르는 편이 나을 법한 두꺼운 장대가 들려 있었는데, 그 꼭대기에는 피와 어둠이 휘몰아치는 듯한 기묘한 깃발이 황무지에서 불어오는 거친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날렵하게 보이는 가는 체구를 가진 괴물 하나가 등 뒤에 기다란 칼 두 자루를 맨 모습으로 조용히 걸음을 옮기고 있다. 통찰의 능력은 깃발을 가진 거구 쪽을 노란색으로, 날렵해 보이는 가는 체구의 괴물을 녹색으로 표시하고 있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저 덩치 쪽이 장군 사파탄이고 날렵해 보이는 뱀 머리 쪽이 친위대장 타샤스가 아닐까 싶다. “...” 준상은 이미 충분히 강해진 상황이지만, 그렇다고 보스급의 괴물 두 마리를 동시에 상대하는 위험을 감수할 생각은 없었다. 강한 적을 만났을 때는 정면으로 공격하기 보다는 약한 곳을 먼저 찾아내 두들겨야 하는 법. 그렇다면, 역시 첫 목표는 친위대장 타샤스가 될 수밖에 없다. 목표를 정한 준상은 투명화 상태로 위상전이를 실행했다. 숲의 그림자 속으로 유령처럼 통과하며 순식간에 적의 후방으로 빠져나온 준상은 천천히 걸어가고 있는 타샤스의 등을 바라보며 조용히 무투가로 콤보를 바꾸었다. 그리고 곧바로 위상전이를 통해 타샤스의 등 뒤로 이동하기가 무섭게 숄더 차지를 발동했다. 가장 강력한 위력을 가진 것은 역시 강타나 블러드 서커겠지만, 바로 옆에 사파탄이 있음을 감안하면 사용한 다음 후유증을 유발하는 기술을 쓰는 것은 역시 너무 위험천만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후와악! 순식간에 눈앞의 공기가 갈라지며 준상의 몸이 빛살처럼 타샤스의 등을 노리고 쏘아져 나갔다. 제로 거리나 다름없는 지척에서 발동했으니 제 아무리 뛰어난 감각을 가지고 있어도 감히 피할 도리가 없었다. -키악! 타샤스는 이상한 기척을 느끼고 그 기다란 목을 틀어 뒤를 돌아보려 했으나, 채 목이 완전히 돌아가기도 전에 등골에 강력한 일격을 받고는 그대로 날아가 버렸다. “쯧!” 준상은 혀를 찼다. 어깨로 전해지는 느낌이 너무 얕았기 때문이다. 곧바로 인벤토리에서 랑다잘의 분노를 꺼내 손에 쥔 채로 앞으로 데굴데굴 굴러가는 타샤스를 향해 쇄도했다. 하지만, 그 순간 준상의 눈앞에 거대한 깃대가 날아들었다. 기습을 알아차린 사파탄이 타샤스를 구원하기 위해 손에 들고 있던 깃대를 휘두른 것이다. “큭!” 준상은 자신의 몸통을 노리고 날아드는 거대한 통나무 같은 깃대를 향해 철구를 휘둘렀다. 그러자, -꽈광! 거대한 폭음이 터지며 준상의 몸이 뒤로 주욱 밀려나 버렸다. “칫!” 준상은 혀를 찼지만, 타샤스는 잠시 신체의 자유를 구속하고 있던 공포 유발에서 벗어나 몸을 일으키더니 등에 메고 있던 두 개의 큰 칼을 빼들었다. 아니, 빼들다가 도신이 부러진 채 뽑혀 나온 두 개의 칼을 보고는 성이나 괴성을 마구 질러대기 시작한다. 어깨에 가해지는 느낌이 얕았던 것은 저 두 개의 큰 칼이 숄더 차지의 충격을 흡수했기 때문이리라. 준상은 급히 투명화를 펼친 후 위상전이로 그 자리를 벗어났다. 아니나 다를까. 사파탄은 깃발을 자신의 발 옆에 쿡 박아 넣더니, 옆에 솟아있던 나무 한 그루를 통째로 뽑아 준상이 있던 자리에 집어 던졌다. 준상은 거대한 나무 둥치가 자신이 있던 장소를 덮치는 모습을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모처럼의 기습이 실패한 탓에 주위의 괴물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낙담할 필요는 없는 일이다. 달리 엄폐물을 찾기 힘든 숲 너머의 황무지나 그 너머의 사막과는 달리, 이곳은 준상이 몸을 숨길 장소가 얼마든지 있었기 때문이다. “후우...” 준상은 가볍게 숨을 몰아쉰 후 조용히 위상전이를 펼쳐 모여드는 괴물들의 한복판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양손에 두 개의 거대한 철구를 쥔 채로 듀얼 스톰을 전개했다. 콰가가각! 두 개의 철구는 준상의 손에서 벗어나며 주위의 거치적거리는 물체들을 모조리 파괴하며 휘몰아쳤다. 나무, 바위, 그리고 괴물들의 몸. 그 무엇도 강렬한 위력의 폭풍에서 견디지 못하고 순식간에 박살이 나버렸다. 마침내 준상의 손으로 두 개의 철구가 돌아왔을 때. 거대한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남은 것은 오직 부서진 파편들 뿐이었다. 준상은 듀얼 스톰의 시전이 끝나자 다시 투명화로 모습을 감춘 후 줄기가 부서져 쓰러지고 있는 거대한 나무의 그늘을 통해 위상전이를 펼쳤다. 괴물들은 잠시 얼이 빠졌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아차릴 틈도 없이 자신의 동료들이 순식간에 저민 고기조각으로 변해 버린 탓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사파탄과 타샤스는 서로 등을 마주한 채로 주위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은 별로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서로의 등을 지켜주기에는 둘의 체구 차이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준상은 사파탄의 거대한 등에 진 그늘 속으로 위상전이를 시도했다. 그리고 허공에서 떨어져 내리며 곧장 듀얼 스톰을 펼쳤다. 타샤스는 부하에게서 빼앗은 큰 칼을 손에 쥐고 있었지만, 공중에서 갑자기 떨어져 내리며 휘몰아치는 두 개의 철구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촤캉! 타샤스의 손에 쥐어진 큰 칼은 다시금 유리 조각처럼 부서져 나갔다. 하지만, 민첩한 몸놀림을 지닌 타샤스는 그 반탄력을 이용해 다시금 철구의 공격 범위에서 벗어났다. 정말이지 미꾸라지 같은 놈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준상은 미처 놈을 욕할 틈이 없었다. 곧바로 사파탄이 허공에서 떨어져 내리는 준상을 향해 커다란 깃대를 휘둘렀기 때문이다. “칫!” 준상은 다급하게 위상전이를 펼쳐 그 공격을 피한 후, 모습을 드러내기가 무섭게 다시 투명화를 펼쳐 몸을 숨겼다. 역시 두 놈이 함께 있으니 상대하기가 무척 까다롭다. 이 난처한 상황을 어떻게 타개하는 것이 좋을지 고민하던 준상의 머리 속에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조금 위험하기는 하지만, 충분히 해볼 만 하다. 그렇게 판단한 준상은 곧바로 높은 나무위로 이동한 뒤, 그곳에서 헤네스를 불러냈다. “읍!” 갑자기 높은 나무 위에서 모습을 드러내자 헤네스는 자신도 모르게 놀라 비명을 터뜨릴 뻔 했지만 준상은 얼른 그녀의 허리를 낚아챈 후 손으로 입을 막아 버렸다. 준상은 그 상태로 조용히 헤네스에게 말했다. “조용히.” 헤네스는 나무 아래 바글거리는 괴물들의 모습과 더불어 자신의 허리에 감긴 준상의 손 때문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다가, 귓가에 들려오는 나직한 목소리를 듣고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준상은 자신을 바라보는 헤네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그녀의 입을 막고 있던 손을 떼어낸 다음 조용히 속삭였다. “헤네스.” “네.” “욕해봐.” “네?” 헤네스는 준상의 뜬금없는 말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이내 무슨 뜻인지를 깨달았다. 그녀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나무 아래를 바라보며 가슴 가득히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리고 눈을 질끈 감은 뒤 있는 힘껏 소리쳤다. “이 똥벌레들아아아아아!” 00083 트롤러 ========================================================================= 순간, 숲이 흔들렸다. 헤네스의 입에서 그 말이 터져 나오는 순간, 어째서인지 준상은 마음 속에서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이 울려 퍼지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꽈과과광! 혼신의 힘을 다한, 괴물에 대한 혐오감을 가득 담은 헤네스의 외침은 단단하게 무장된 준상의 마음 속에 깊고 깊은 파문을 남길 정도의 위력을 갖추고 있었다. 하물며, 그렇지 못한 자들이 받은 충격이야 어찌 필설로 설명이 가능하겠는가. -크악! -케에엑! 느닷없는 소녀의 외침 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던 괴물들은 순간 가슴에서 심장이 튀어나와 땅바닥에 굴러 떨어지는 듯한 착각을 느끼며 그대로 주저앉았다. 보스들조차 예외는 아니었다. 다른 졸개들에 비하면 강건한 마음을 가지고 있던 사파탄조차 갑작스럽게 휘몰아치는 알 수 없는 혼란으로 인해 비틀거렸고, 그 옆에 서 있는 타샤스는 어쩐지 참을 수 없는 슬픔이 몰려와 눈물을 글썽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놀라운 효과! 준상은 괴물들이 혼란에 빠지자 고개를 끄덕이며 헤네스에게 말했다. “잘했다.” “이거면 되나요?” “그래, 다시 부를테니 일단 돌아가 있어라.” “네.” 준상은 헤네스를 급히 역소환했다. 그리고 곧바로 투명화를 펼친 후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는 타샤스의 등 뒤로 위상전이를 실행했다. 타샤스는 등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을 듣고 급히 몸을 돌려 피하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두 개의 철구가 거의 동시에 타샤스의 길쭉한 몸을 후려쳤다. 무방비 상태에서, 더구나 헤네스의 매도로 인해 방어력까지 낮아진 상황이다 보니 타샤스는 그 일격을 도저히 견뎌낼 방법이 없었다. 결국 남은 것은 비명을 지르며 말라비틀어진 낙엽처럼 구겨져 바닥을 뒹구는 것 뿐이다. -크아아악! 그래도 중간 보스 급이라고 한 방에 죽지는 않았다. 하지만 블러드로드로 강화된 듀얼 스톰의 파괴력은 타샤스의 갈비뼈를 부수고 그 안의 내장을 곤죽으로 만들기에 충분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살아있으나, 이미 죽은 것이나 진배 없는 상황. 하지만 준상은 타샤스를 단숨에 전투 불능으로 만들었음에도 만족하지 않고 곧장 위상전이를 펼쳐 바닥을 구르는 타샤스의 앞쪽으로 이동한 다음 마치 마늘 빻듯이 철구로 그 머리를 짓이겨 끝장을 내 버렸다. 바로 그 때. 사파탄의 커다란 외침이 울려 퍼졌다. -크허어엉! 역시나, 이 놈 역시 장군이라는 명칭에 걸맞게 고함을 터뜨려 사기를 북돋우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숲의 나뭇잎들이 우수수 떨어지는 사이로 혼란에 빠졌던 괴물들이 정신을 차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준상은 혀를 차며 일단 투명화로 모습을 감추었다. 아니나 다를까. 타샤스가 절명한 것을 보고 상황이 급박함을 깨달은 사파탄의 입에서 또 한 번의 외침이 터져 나온다. -크와앙! 맹수의 포효와도 같은 그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혼란에서 막 벗어나던 졸개들의 눈에서 시뻘건 안광이 촛농처럼 뚝뚝 떨어져 내리기 시작한다. “훗.” 성이 공격 받던 상황이라면, 이런 식으로 방어를 포기하고 죽음을 도외시한 채 공격력을 상승시키는 모습에 위기감을 느꼈겠지만, 지금 이 어두운 숲속에서 저 괴물들은 공격자의 입장이 아니라 공격 받는 방어자의 입장이었다. 준상은 다시 나무 위로 이동했다. 그리고 조용히 저들에게 덧씌워진 광폭의 기운이 사그라 들기를 기다렸다. 이미 저들은 준상에게 사냥감 이상도 이하도 아닌 존재들이 되어 버린 것이다. 사파탄은 고작 인간 한 명에게 자신의 강대한 군대가 농락당하자 화를 내며 애꿎은 숲의 나무들을 깃대로 부숴 버리고 있었다. 제 딴에는 숨어있는 습격자를 찾으려는 발버둥이었지만, 투명화에 위상전이 능력까지 갖춰버린 준상을 그런 식으로 찾아내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문자 그대로 두 눈이 혈안이 된 채 습격자를 찾아 숲을 뒤지고 있던 졸개들은 어느 순간이 되자 뿜어져 나오던 안광이 사그라 들면서 허탈감에 빠져 들었다. 준상은 그 모습을 보면서 두 개의 철구를 인벤토리에 넣었다. 그리고 장군 사파탄이 거대한 나무 숲 그늘 안으로 들어온 것을 확인한 후 위상전이를 펼쳤다. 어두운 그림자 속을 통과하자 준상의 몸은 사파탄의 머리위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준상은 그 상황에서 자신이 가진 최고의 공격 수단을 꺼내 들었다. 그것은 바로 블러드 서커. 적은 물론이거니와 사용하는 자 마저도 거역이 불가능한, 피에 취한 마물이 다시금 준상의 손에 쥐어진 것이다. “큭!” 거무튀튀한 색깔의 양날 도끼를 손에 잡는 순간, 준상의 몸속에 흐르는 피는 불꽃처럼 타오르며 그 안에 숨어있던 파괴의 본능을 불러일으켰다. 사파탄은 갑자기 뒷골이 저릿해지는 느낌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다가 크고 시커먼 무언가가 떨어져 내리는 것을 보았다. 피하기엔 늦었다. 그렇다면? 막아보는 수밖에 없다. 사파탄은 어둠의 군세를 상징하는 깃발을 쳐들어 자신의 정수리로 떨어져 내리는 도끼를 막아갔다. 크고 강대한 사파탄의 근육은 위기의 순간에도 착실하게 그 역할을 수행해 아름드리 거목과 같은 두꺼운 깃대를 원하는 위치까지 옮기도록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사파탄의 두꺼운 근육이 지닌 폭발적인 힘으로도 준상의 생명력을 듬뿍 빨아들인 블러드 서커라는 이름의 마물이 뿜어내는 힘에는 대적할 수가 없었던 탓이다. 콰직! 순식간에 두꺼운 깃대가 잘려나갔다.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은 사파탄의 정수리에 블러드 서커가 내려꽂힌다. 단숨에 거대한 사파탄의 몸을 반토막 내면서도 블러드 서커를 쥔 손으로부터 저항감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시커먼 양날 도끼는 사파탄의 정수리로부터 그 사타구니까지 단숨에 갈라버린 것이다. 준상은 땅바닥에 내려앉기가 무섭게 블러드 서커를 다시 인벤토리에 수납했다. 쏴아아아아! 마치 뜨거운 용암이 솟구쳐 나오는 것처럼 갈라진 사파탄의 몸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준상은 한쪽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아 몸에서 흰 연기를 뿜어내는 모습으로 그 피와 체액을 고스란히 뒤집어 썼다. 시원하다. 분명 뜨겁게 맥동하는 피일텐데도, 역겨운 비린내가 진동하는 피일텐데도... 지금 이 순간 준상은 그 모든 것이 너무나 시원하게 느껴졌다. 그만큼 강대한 보스의 피를 뒤집어썼기 때문일까. 아니면 준상이 지닌 재생률 증가와 생명력 흡수의 효과 때문일까. 잘은 모르겠지만, 여기에 힐링 포션까지 사용하고 나자 준상의 몸은 빠른 속도로 회복되어 가기 시작했다. 사파탄의 몸은 천천히 뒤로 넘어가다가 어느 순간 급히 가속하며 굉음과 함께 바닥에 쓰러졌다. 쾅! 그리고, 그렇게 쓰러진 사파탄의 시체 앞에서 온 몸에 피를 잔뜩 뒤집어 쓴 채 흰 연기를 뿜어내던 준상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후우우...” 준상은 길게 심호흡을 하며 투명화 마법을 펼친 뒤 위상전이를 통해 다시 나무 위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리고, 혹시라도 격렬한 싸움에 휘말릴까 싶어 여태 소환하지 않고 있던 주머니 다람쥐를 소환했다. “가라.” 준상의 작은 목소리를 들은 주머니 다람쥐는 고개를 한 번 갸웃거리더니 이내 쏜살같이 나무를 타고 내려가 모습을 감추어 버린다. 그러고 보니... 여태 저 녀석 이름도 지어주지 못했었다. 뭔가 적당한 이름을 지어주는 것이 나을 것 같은데, 과연 뭐가 좋을까. 헤네스에게 지어 보라고 하면 어떨까. 그녀라면 기쁜 표정으로 내 부탁을 받아들이지 않을까 싶다. “후우우...” 준상은 이런 저런 생각을 떠올리며 몸이 완전히 회복되기를 기다렸다. 헤네스를 불러서 채찍으로 때려 달라고 하면 더 회복이 빨라지지 않을까. “훗.” 문득 그런 생각을 떠올린 준상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을 채찍으로 때려 달라고 하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바로 연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모르긴 해도, 울상이 된 채로 정말 해야 되냐고 두 번 세 번 되묻지 않을까. 이렇게 다소 느긋하기까지 한 모습으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준상과는 달리, 보스 둘을 아차 하는 순간에 잃어버린 괴물들은 우왕좌왕하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이대로 그냥 계속 진격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우선 보이지 않는 적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나야 할 것인가. 적어도 둘 중 하나는 선택을 해야만 했지만, 불행히도 그들 중에는 선택이라는 특권을 경험해 본 자가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괴물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사파탄의 피로 몸을 흠뻑 적신 준상이 회복을 마치고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후우우우...” 길게 숨을 내뿜은 준상은 위상전이를 통해 우왕좌왕하는 괴물들의 한 가운데 모습을 드러냈다. 인벤토리에서 랑다잘의 분노라는 이름이 붙은 두 개의 철구를 꺼내 손에 쥔 준상은, 곧바로 가차 없이 듀얼 스톰이라는 이름의 광역기를 발동시켰다. 그러자, 다시 한 번 폭풍이 숲 속에 휘몰아친다. 괴물들은 각자 지니고 있던 무기를 들어 이 터무니없는 폭풍에 항거해 보려 했지만, 그것은 그들을 이끌던 장군조차 감히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두 개의 거대한 철구는 그들의 육신을 짓이기다가 이내 파쇄의 효과를 발동시키며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마침내 그 폭풍이 가라앉았을 때, 그 공간에 남은 것은 휘날리는 피와 살점, 그리고 침묵 뿐이었다. 준상은 더 이상 모습을 감추지 않았다. 다만 오연한 모습으로 살아남은 괴물들을 바라보기만 했다. 괴물들은 우왕좌왕하던 것을 멈추었다. 그리고 살기를 폭발시키며 굳게 버티고 선 준상을 향해 일제히 달려들었다. 한편, 준상이 어둠의 군세와 충돌하고 있을 즈음 벨카라스에서는 미국인 플레이어들이 무너진 성벽에 바리케이드를 쌓는 작업에 한창 몰두하고 있었다. 뒤집어진 장갑차는 일단 회수 되어 사망자를 위한 임시 보관소로 쓰이고 있었다. “사상자 집계는 끝났나?” “네. 중령님.” 미국 측 플레이어의 대표는 해병대 출신 장교인 윌킨슨 중령이 맡고 있었다. 그는 임시 부관의 직책을 수행중인 딜런 소위로부터 사상자 집계 현황을 적은 서류를 건네 받고는 얼굴을 찌푸렸다. “레이먼드 중위... 결국 죽은 건가.” “네, 불행히도.” 한국에 준상이라는 존재가 있다면, 미국에는 게럿 레이먼드라는 이름의 플레이어가 있었다. 그는 미국에서 가장 먼저 귀환한 자였으며, 지금껏 모든 퀘스트를 S급으로 돌파한 능력 있는 저격수였다. 이번 작전에서 그는 에픽 퀘스트라는 이름의 장기 임무를 수행하며 이곳 벨카라스에 도착했지만, 첫 번째 전투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습격을 받아 폐와 간을 관통 당하는 중상을 입었다가 결국 전투 도중에 사망한 것이다. “젠장...” 윌킨슨 중령으로서는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시체들과 로켓탄마저 견디는 터무니없는 괴물로 인해 수십 명의 미국인이 사망했다는 사실보다도 미국을 대표하는 최상위 등급의 플레이어를 어이없이 잃었다는 사실이 오히려 더 가슴 아팠다. “탄약 현황은 어떤가.” 윌킨슨 중령의 질문에 딜런 소위는 어두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좋지 않습니다.” “어느 정도 길래?” “재분배를 하더라도 개인당 오십여 발 정도 밖에는...” “젠장...” 그렇게 만류를 했건만 막판에 좀비들이 다시 되살아나지 않게 되자 미국인들은 죽은 동료들의 원수를 갚겠다는 미명 하에 남아 있는 총탄을 모조리 좀비들에게 퍼부어 댔다. 오십여 발이라니. 만약 다시 한 번 아까와 비슷한 규모의 적이 몰려온다면, 이 정도의 탄약으로는 전멸이라는 결과가 기다릴 뿐이다. “이건... 실책이로군.” 딜런 소위는 사격 관제 임무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질책이라 생각했지만, 지금 이 순간 윌킨슨 중령이 떠올리는 것은 화력의 우세를 맹신한 나머지 육체의 단련을 소홀히 한 미국의 선택이었다. 탄약은 무한하지 않다. 인벤토리 기능을 가진 자가 열 명이나 되는 와중에도 이렇게 탄약의 부족을 느낄 정도라면, 앞으로 퀘스트를 수행하는데 있어서 근본적인 전술의 변화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윌킨슨 중령은 턱을 가만히 쓰다듬다가 다시 물었다. “그 갑옷 괴물이 왜 갑자기 죽어 넘어진 것인지는 아직 알아내지 못한 건가?” 딜런 소위는 얼른 대답했다. “알아봤습니다. 당시 장갑차 탑승 인원 가운데 한 명이 부상으로 미처 도망치지 못하고 있다가 그 모습을 목격했다고 합니다.” “그래? 뭐라던가.” 윌킨슨 중령의 말에 딜런 소위는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그게... 눈에서 붉은 안광을 뿜어내는 악마가 커다란 도끼를 휘둘러 괴물을 단숨에 갈라버렸다고.” “...” 윌킨슨 중령은 얼굴을 찌푸렸다. 상당히 허무맹랑한 얘기였지만, 그 괴물이 두 쪽으로 갈라져 쓰러지는 모습은 그도 성루에서 쌍안경을 통해 지켜봤었다. 하지만, 도끼를 휘둘러 단숨에 갈라 버렸다니? 게다가 자신은 그런 자가 적에게로 다가서는 모습을 전혀 보지 못했었다. “설마... 에스퍼인가?” “네?” 윌킨슨 중령의 혼잣말에 딜런 소위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중령은 풋내기 소위의 얼빠진 모습 따위는 신경 쓰지도 않은 채 자신 만의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 코뿔소를 닮은 괴물은 66밀리 LAW에 직격 당하고서도 생채기는커녕 비틀거리는 모습조차 보여주지 않았다. 그런 괴물을 도끼질 한 방에 둘로 갈라 버린다? 그것이 정말 인간으로서 가능한 일일까? 장갑차에 남아 있던 생존자가 보았던 것은 환각일 수도 있다. 하지만 괴물이 두 조각이 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고, 또한 눈 깜짝 할 사이에 그 시체가 사라져 버렸던 것도 현실이다. 그렇다면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하나. 자신들의 통제에서 벗어난 또 다른 플레이어가 개입했을 가능성 뿐이다. 문제는, 과연 누가 그런 터무니없는 능력을 소유했냐는 것이다. 다른 이들의 이목에서 자유로운 은신 능력. 여기에 순간 이동 능력이 더해지고, 또한 로켓탄의 공격도 견뎌내는 괴물을 단숨에 쪼개버리는 공격력까지 가지고 있다면... 그가 미국이라는 국가의 적이 되었을 경우, 과연 막아낼 방법이 있을까? 윌킨슨 중령은 혀를 찼다. 이럴 줄 알았으면, 육체와 정신의 단련을 우선하자던 블레이크 중사의 의견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었다고 후회를 했다. 미국은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 하지만 늦은 것은 아니다. 아직은 잘못을 바로 잡을 기회가 있는 것이다. “딜런 소위.” “네, 중령님.” “부끄러운 일이지만, 여기서는 일단 실리를 따지는 편이 좋겠지. 가서 성주와의 회견을 요청하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딜런 소위는 윌킨슨 중령에게 경례를 한 다음 지휘 막사를 빠져 나가려고 몸을 돌렸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그들이 지니고 있던 휴대폰이 일시에 울리기 시작한다. “...” 윌킨슨 중령과 딜런 소위는 물론이거니와, 한창 바쁘게 전투 준비를 진행하던 미국인들은 거의 동시에 일사불란한 동작으로 자신의 휴대폰을 꺼내 메시지를 확인했다. 어둠의 군세로부터 도시를 지켜내십시오. :강대한 어둠의 군대가 교역도시 벨카라스를 노리고 진격해 오고 있습니다. 그들의 침공을 막아내십시오. (침공까지 남은 시간 : 0시간 0분) [이 퀘스트는 대규모의 인원이 동시에 참여합니다.] -> 완료! (Hidden) 유격대 20명을 처치하십시오. (협력) ->완료! (Hidden) 회색 늑대 15마리를 처치하십시오. (협력) ->완료! - 당신이 이번 퀘스트에서 보여준 행동과 성과를 정산합니다. 이 과정은 약간의 시간이 소요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이건?” 갑자기 전달된 퀘스트 완료 메시지에 윌킨슨 중령은 얼굴을 찌푸렸다.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이제 와서 완료 메시지라니? 하지만 중령은 이 메시지의 의미를 생각할 틈이 없었다. “이런! 당장 물품과 화기를 수납하고 철수 준비를 하도록! 특히 화기는 반드시 전부 수거해야만 한다! 수거가 어렵다면 파괴하도록!” “아,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동안에도 무심한 메시지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축하합니다! : 당신의 랭크는 D입니다. -당신은 이번 퀘스트의 달성에 대해 그리 큰 기여를 하지 못했습니다. 좀 더 적극적으로 퀘스트에 임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보상 : 경험치 약간. -> 보상을 지금 수령하시겠습니까? (Y/n) _ (주의) 수령하지 않은 보상은 7일후 자동 소거됩니다. “...” 윌킨슨 중령은 얼굴을 찌푸렸다. 뭔가가 잘못 되었다. 일만이 넘어가는 좀비들을 모조리 학살했는데도 고작 D랭크라니? 하지만 윌킨슨 중령이 다른 생각을 떠올리기도 전에, 벨카라스에 등장했던 미국인들은 한 줄기 빛과 함께 그들이 본래 있던 장소로 귀환을 시작했다. 00084 트롤러 ========================================================================= 바로 그 시간, 벨카라스로부터 조금 떨어진 숲 속에서는 준상이 피로 온 몸을 흠뻑 적신 채 깊은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후우우...” 부서져 흩어진 육편들이 즐비하게 쌓여 있는 곳에서 준상은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 퀘스트 완료 메시지를 확인하고 있었다. 어둠의 군세로부터 도시를 지켜내십시오. :강대한 어둠의 군대가 교역도시 벨카라스를 노리고 진격해 오고 있습니다. 그들의 침공을 막아내십시오. (침공까지 남은 시간 : 0시간 0분) [이 퀘스트는 대규모의 인원이 동시에 참여합니다.] ->완료! (Hidden) 장군 사파탄를 처치하십시오. (협력) ->완료! (Hidden) 친위대장 타샤스를 처치하십시오. (협력) ->완료! (Hidden) 뱀머리 주술사 10명을 처치하십시오. (협력) ->완료! (Hidden) 보급대장 후카를 처치하십시오. (협력) ->완료! (Hidden) 돌격대장 아문간을 처치하십시오. (협력) ->완료! (Hidden) 유격대장 애쉬달을 처치하십시오. (협력) ->완료! - 당신이 이번 퀘스트에서 보여준 행동과 성과를 정산합니다. 이 과정은 약간의 시간이 소요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잠시 기다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메시지가 준상의 좌측 시야에 나타났다. 축하합니다! : 당신의 랭크는 Ex:Savior입니다. -당신은 영웅적인 행동으로 세계를 위협에서 구해냈습니다. 기본 보상 외에 추가 보상이 지급됩니다. 보상 : 경험치 매우 많이, 추가 보상 상자(협력)x6, 추가 보상 상자(Ex:Savior), 칭호[벨카라스의 구세주] -> 보상을 지금 수령하시겠습니까? (Y/n) _ (주의) 수령하지 않은 보상은 7일후 자동 소거됩니다. “세이비어... 구원자, 아니 구세주인가?” 트리플 S급이거나 히어로일거라 생각했던 준상은 새로운 등급인 세이비어가 나오자 이것이 어느 정도의 등급인지 궁금해졌다. 이번에 준상이 받은 퀘스트는 에픽이 아닌 일반 퀘스트지만, 본래 이번 전투는 누군가의 에픽 퀘스트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중간에 난입해 에픽 퀘스트 수행자의 역할을 대신할 경우 구원자라는 뜻의 등급이 매겨지는 것은 아닐까. 당장 떠오르는 것은 그 정도 추측 뿐이다. 준상은 일단 보상과 메시지는 나중에 확인하기로 하고 주위를 돌아보았다. 다람쥐가 대부분의 아이템은 수거했지만, 녀석의 아공간 주머니에 담을 수 없는 대형 아이템은 직접 수거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장군 사파탄이 들고 있었던 깃대였다. “쯧...” 파쇄 능력이 있는 랑다잘의 분노와 직접 충돌하고도 견뎌낼 정도라면 분명 훌륭한 위력을 가진 아이템이겠지만, 불행히도 마지막 순간 블러드 서커와 충돌하면서 그대로 두 동강이 나버린 상태이다. 잘려진 단면을 보니, 재질 자체는 보통의 통나무였던 모양이다. 아쉬운 기분에 입맛을 다시는 준상의 눈에, 깃대 끝에 매달린 깃발이 보였다. 아이템으로서의 가치가 사라져 빛을 잃어버린 깃대와는 달리 깃발은 여전히 은은한 흰색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깃발이라...” 준상은 피와 어둠이 소용돌이치는 문양의 깃발을 깃대에서 끌러낸 후 아이템 확인을 시도했다. 아이템정보 명칭 : 피와 혼돈의 깃발 레벨제한 : 20 종류 : 깃발 등급 : Rare 효과 : 1. 깃발이 보이는 위치에 있는 아군의 쿨타임 10퍼센트 감소. 2. 깃발이 보이는 위치에 있는 아군의 공격력, 방어력 10퍼센트 증가. 3. 깃발이 달린 아이템의 내구도 극대화 Seed : 슬롯 없음 설명 : 피와 혼돈이 소용돌이 치는 문양이 그려진 깃발 “이게 진짜였군.” 사파탄이 굵고 튼튼한 깃대에 이것을 매달고 다녔던 것은 이 깃발의 효과를 가능한 한 많은 부하들에게 부여하기 위해서였던 모양이다.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며 깃발을 챙겨 넣은 다음, 다시 주위를 둘러 보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친위대장 타샤스가 등에 메고 있던 두 자루의 검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이것 역시 준상이 기습적으로 발동한 숄더 차지에 의해 부러진지 오래라 안목의 능력에는 아무런 빛도 비치지 않고 있었다. “아쉽군.” 혹시나 싶어 타샤스의 몸을 뒤집어 봤지만, 그 외에는 딱히 아이템이라고 할 만한 것이 눈에 띄지 않았다. 숄더 차지 한 방에 박살이 날 정도면 대단한 아이템은 아니었겠지만, 그래도 아까운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혀를 차며 몸을 일으키는데, 입가에 피와 살점을 덕지덕지 바른 다람쥐가 후다닥 달려와 그의 어깨 위로 올라왔다. “훗.” 준상은 천연덕스러운 다람쥐의 모습에 피식 웃은 후 물의 정령을 불러 녀석의 입가를 닦아 주었다. 어쨌든, 이로써 한 건 해결인가. 어서 가서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목욕이나 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나무에 기대어 어느새 저물어 가는 하늘을 바라보던 준상은 한 줄기 빛과 함께 본래 있어야 할 곳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음...” 여관 뒷골목에서 모습을 드러낸 준상은 다시 여관으로 들어가 방을 잡으려다가 자신의 몸이 온통 사파탄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피로 흠뻑 젖어 있음을 깨달았다. 이래서는 방을 잡기는커녕 당장 경찰에 신고부터 당할 판이다. 준상은 얼른 투명화 마법으로 몸을 숨긴 후 몸을 씻을 만한 곳이 없는지 둘러보았다. 마침 딱 한 군데 있기는 하다. 바로 해안 도로 저편에 펼쳐진 푸른 바다가. 매서운 바닷 바람이 씽씽 불어오는 초겨울의 동해 바다라니. 차라리 주인 몰래 들어가서 일단 간단하게라도 씻고 다시 방을 구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떠올리는데... 아직 확인하지 않은 메시지 위로 새로운 메시지가 나타났다. 새로운 퀘스트가 도착했습니다 -10분뒤 퀘스트 수행을 위한 장소로 전송됩니다. 안전한 장소로 이동해 주십시오. (남은시간: 10분) “...” 준상은 잠시 얼이 빠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그의 입에서는 분노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런 미친!” 돌아온지 얼마나 됐다고, 또다시 불러낸단 말인가. 아직 보상 확인도 다 안했단 말이다! “젠장...” 준상은 정말 모든 것이 지긋지긋해지는 느낌이었지만, 억지로 끓어오르는 화를 참으며 일단 이전의 퀘스트에서 받은 보상부터 빠르게 확인을 하기 시작했다. 우선 퀘스트 보상을 수령하자, 곧바로 두 번의 레벨업 현상이 발생했다. 준상은 우선 새로 얻은 칭호부터 확인했다. [벨카라스의 구세주] :벨카라스 방어에서 결정적인 기여를 한 자 1인에게 부여되는 칭호. -효과: 벨카라스가 속한 국가인 ‘제르틴스카야’에서 퀘스트 완료시 경험치 보상 10퍼센트 증가. -칭호는 획득시 자동으로 효과가 적용됩니다. 벨카라스의 구세주는 기존에 획득했던 이벨류아의 구세주와 적용되는 국가만 다를 뿐 효과 자체는 큰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새로 얻은 칭호는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첫 번째 구원자] :Ex:Savior 랭크를 처음으로 달성한 자에게 부여되는 칭호. -효과: 자신과 반경 10미터 이내의 아군에게 ‘불굴의 의지’ 효과 발생. -칭호는 획득시 자동으로 효과가 적용됩니다. “불굴의 의지?” 준상은 얼른 자세한 효과를 확인해 보았다. 불굴의 의지 : 어떠한 악조건 속에서도 결코 굴하지 않는 의지를 부여합니다. -모든 저항력 10퍼센트 증가. -생명력이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을 경우, 공격력과 방어력 20퍼센트 증가. 유효 반경이 짧은 것이 흠이랄 수도 있지만, 모든 저항력 10퍼센트 증가는 수호의 인장이 지닌 효과와 맞먹는 수준의 것이다. 그가 블러드 서커가 지닌 어둠의 마력에 현혹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 수호의 인장 덕분임을 감안한다면, 이것은 무척이나 유용한 효과라 할 수 있다. 칭호의 확인이 끝나자 준상은 곧바로 구원자 등급의 추가 보상 상자부터 열었다. 그러자 다시 메시지가 후두둑 쏟아져 나온다. 카드정보 명칭 : 광폭 레벨 : 1Lv 경험치 : 0 등급 : Hero 분류 : 스킬 성장 : 일반(극대) 속성 : 불 효과 : 맹렬한 광폭 상태를 활성화합니다. Cost : 40 Seed : 5슬롯 “맹렬한...” 어쩐지 코스트 합계가 좀 아슬아슬하지 않을까 싶기는 했지만, 준상은 우선 효과부터 확인해 보았다. 맹렬한 광폭 : 자신의 피 속에 흐르는 맹목적인 파괴 본능을 불러 일으킵니다. -기본지속시간 : 1분 -공격력 상승 80%, 갑옷 효과 감소 20% -모든 종류의 피해량 20퍼센트 감소. -극대화 피해 확률 10퍼센트 증가. 기존의 광폭 레어보다 위력은 증가하고 패널티는 감소했다. 사실 광폭은 짧은 지속 시간과 사용 후에 찾아오는 극도의 허탈감 때문에 콤보 카드로만 사용할 뿐 독자적으로는 잘 쓰지 않는 카드지만, 이 정도 효과라면 그런 패널티 정도는 무시하고 써볼만 하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카드정보 명칭 : 듀얼스톰 레벨 : 1Lv 경험치 : 0 등급 : Super Rare 분류 : 스킬 성장 : 일반(대) 속성 : 바람 효과 : 1. 양손에 무기를 들고 회오리바람처럼 돌면서 150퍼센트의 위력으로 공격합니다. 2. 발동 후 평상시 이동 속도의 50퍼센트 속도로 이동이 가능합니다. Cost : 20 Seed : 3슬롯 두 번째 카드는 듀얼 스톰의 슈퍼 레어 등급 카드였다. 기존에 사용하던 언커먼 등급에 비해 위력이 한층 증가했으며 느리긴 하지만 이동까지 가능해져서 보다 넓은 범위의 적을 효율적으로 격살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준상은 다시 구원자 등급의 추가 보상 상자에서 나온 세 번째 보상을 확인했다. 축하합니다! 아이템카드 ‘펫 목걸이’를 습득하였습니다. :마음에 드는 동물을 길들여 펫으로 삼아보세요. -강제로 펫을 만들기 위해서는 해당 동물의 체력이 10퍼센트 이하가 되어야 합니다. -몬스터나 언데드는 펫으로 만들 수 없습니다. -사용자에게 높은 호감도를 지니고 있다면, 체력여부에 상관없이 일정 확률로 펫을 만드는 것이 가능합니다. 단, 이 경우 행운 수치의 영향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세 번째 보상은 이전에도 한 번 얻은 적이 있었던 펫 목걸이였다. 일단 구원자 등급의 추가 보상 상자부터 확인을 마친 준상은 급히 카드 슬롯의 단축 명령들을 새로 얻은 카드들로 교체한 다음 기존에 장착되었던 시드들을 빼서 새로운 카드의 슬롯에 장착했다. 그리고 다람쥐를 불러내 새로 얻은 시드를 확인하려 했지만, 어느새 십 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었다. “쯧...” 준상은 혀를 차며 일단 시드들을 따로 보관했다. 곧바로 그의 몸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며 전송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전송이 끝나기가 무섭게, -크와악! 준상은 눈앞에서 누런 이빨을 들이밀고 달려드는 좀비와 조우해야만 했다. 반사적으로 주먹을 휘둘러 좀비의 머리를 박살내자 곧바로 또 다른 좀비들이 우르르 그의 등 뒤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준상은 곧바로 인벤토리에서 랑다잘의 분노를 꺼내어 든 후, 자신을 노리고 달려드는 좀비들을 그대로 짓이겨 버렸다. “젠장...” 괴물들을 모두 처치한 준상은 일단 근처의 지붕 위로 올라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온통 불길에 휩싸인 도시는 매캐한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으며, 그렇게 어둠과 불길이 혼재된 도시 속에 괴물들의 괴성과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연신 터져 나오고 있었다. 도대체 어디부터 손을 대야할지 감도 잡히지 않을 정도로 혼란에 빠진 도시의 전경을 바라보며 혀를 차고 있는 준상의 눈에 마침내 새로운 퀘스트 목록이 나타났다. 어둠의 군세로부터 도시를 지켜내십시오. :강대한 어둠의 군대가 요새도시 하를라간을 노리고 진격해 오고 있습니다. 그들의 침공을 막아내십시오. (침공까지 남은 시간 : 0시간 0분) [이 퀘스트는 대규모의 인원이 동시에 참여합니다.] (Hidden) 장군 사르가를 처치하십시오. (협력) ->미완료 (Hidden) 지원대장 벨바란을 처치하십시오. (협력) ->미완료 (Hidden) 기갑대장 하툼을 처치하십시오. (협력) ->미완료 남은 보스급은 세 명. 하지만 이들의 위치를 뜻하는 세 개의 붉은 퀘스트 표식은 이미 모두 도시 안에 들어와 있는 상태였다. 00085 트롤러 ========================================================================= “음...” 지금까지 두 번의 방어전을 치르면서 봤던 대로라면, 저 세 보스들의 조합은 생각보다 상당히 처리하기 귀찮을지도 모른다. 지원대장은 이전에 두꺼비 머리의 괴물들처럼 부활과 회복을 맡고 있을 가능성이 높고, 기갑대장은 그 별칭에서 미루어 보아 벨카라스에서 처치한 코뿔소 괴물과 비슷한 성향일 가능성이 높다. 준상은 혀를 차며 일단 투명화를 통해 몸을 숨긴 다음, 위상전이를 펼쳐 놈들이 있는 장소로 빠르게 접근했다. 폭격이라도 맞은 것처럼 박살이 난 성벽 근처로 접근하자, 한창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준상은 우선 퀘스트 표식을 참고로 각 보스들의 위치부터 가늠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키가 거의 성벽과 맞먹는 흑갈색의 거인이었다. 놈은 머리에 산양의 그것과 같은 뿔을 네 개나 달고 있었는데, 몸에는 흑갈색의 비늘이 마치 갑옷처럼 돋아나 있었다. 거인을 제외하면 나머지 두 놈은 의외로 크기가 작았다. 물론 거인에 비해서 작다는 것일 뿐, 보통 인간보다 1.5배 정도는 큰 신장을 가지고 있었다. 한 놈은 온 몸에 불길한 불꽃을 뿜어내는 불길한 검은 갑주를 입고 있었는데, 방패와 검을 쥐고 눈에서 푸른 불길을 뿜어내는 유령말에 올라탄 채로 자신과 닮은 모습의 흑기사들을 지휘해 플레이어로 보이는 사람들을 도륙하고 있었다. 또 다른 한 놈은 거인의 한 쪽 어깨 위에 올라서 있었는데, 방금 되살아난 미이라처럼 해골에 가죽만 씌워놓은 듯한 얼굴 모습을 지니고 있었으며, 또한 발목까지 오는 치렁치렁한 백발이 불어오는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외모만 봐서는 어느 쪽이 장군인지 구분하기가 애매했지만, 다른 도시의 침공군 장군이었던 칼카쉬나 사파탄의 외모를 생각해보면 거인 쪽이 장군 사르가일 가능성이 높다. 준상은 흑기사들에게 여지없이 밀리고 있는 검은 피부의 사람들을 무심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흑인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운 외모. 아마도 동남아시아 쪽 사람들이 아닐까 싶다. 그들은 미국인들과는 달리 냉병기와 열병기를 고루 갖추고 있었지만, 어쩐지 화합하지 못하고 저마다 따로 따로 노는 경향이 강했다. 이 절박한 상황에서도 패를 갈라 따로 움직이는 느낌이랄까. “쯧.” 준상은 혀를 차며 사람들에게서 시선을 돌려 다시 보스들을 바라보았다. 역시 가장 먼저 공략해야할 대상은 지원대장으로 보이는 저 미이라 괴물이다. 놈은 검은 연기와도 같은 영기를 뿜어내며 연신 음울한 주문 같은 것을 외우고 있었는데, 그 소리가 닿는 곳의 좀비와 괴물들은 피해를 입는 순간 몸에서 검은 연기가 솟아나며 원래대로 회복되고 있었다. 준상은 잠시 적의 전투 장면을 좀 더 지켜보다가, 성벽 위로 자리를 옮겼다. “헤네스.” 그가 작은 목소리로 부르자 옅은 빛이 뿜어져 나오며 붉은 드레스의 소녀 하나가 모습을 드러낸다. 헤네스는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성벽 아래 펼쳐진 불타는 도시의 모습과 그 화염을 배경으로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입술을 깨물었다. “어떻게 된 거죠?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거죠? 설마... 못 막아내신 건가요?” 헤네스의 물음이 쏟아지자 준상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시간은 얼마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이곳은 벨카라스가 아닌 하를라간이다.” “네?” 준상의 담담한 대답에 헤네스는 해연히 놀라며 되물었다. “또... 다른 곳에 불려왔단 말씀이신가요?” “맞아.” “...” 헤네스는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숙였다. 그 끔찍한 괴물들과 싸운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다시 이런 식으로 전투에 불려온단 말인가. 이 남자는... 계속 이런 삶을 살아오고 있었단 말인가. 준상은 헤네스의 우울한 표정을 보고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런 표정 지을 것 없다.” “하지만...” “이렇게 연속으로 불려온 것은 나도 이번이 처음이다.” “정말... 인가요?” “지금 내가 거짓말할 필요가 있나?” “...” 헤네스는 고개를 저었다. 준상은 필요 없는 일은 하지 않는 사람이고, 지금 그녀에게 굳이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어쨌든, 이번에도 잠시 날 도와줘야겠다.” 준상은 그렇게 말한 뒤 크림슨 울프를 불러 등에 안장을 채웠다. 그리고 성벽에 굴러다니고 있던 단창 하나를 집어 그곳에 피와 혼돈의 깃발을 달았다. “이건 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아군에게 큰 힘을 부여하는 깃발이다.” “아...” “싸울 필요는 없다. 다만 적당히 거리를 벌린 상태에서 계속 저들을 향해 욕만 해주면 된다.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 소환 해제를 할 테니 아무래도 더 이상 못 피하겠다 싶으면 바로 나를 부르고.” “그럴게요.” 헤네스는 깃발을 맨 단창을 두 손으로 꼭 쥔 채 크림슨 울프의 등에 탔다. 준상은 그녀가 늑대의 등에 타자 정령들을 모조리 불러 부탁했다. “너희들은 그녀를 지켜주도록 해라.” 그러자 두 개의 도깨비불과 새벽이슬, 산들바람, 눈꽃송이가 그녀에게 옮겨갔다. 준상은 헤네스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 주며 당부했다. “정말 못 피하겠다 싶으면 바로 불러야 한다. 잊지 마라.” “네, 걱정마세요.” 헤네스는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고는 안장의 손잡이를 잡고 크림슨 울프에게 명령했다. “가자!” 붉은 털의 늑대는 헤네스의 명령이 떨어지자 성벽으로부터 근처의 지붕으로 훌쩍 뛰어 내렸다. 준상은 그녀를 태운 늑대가 멀어지는 모습을 보며 다시 투명화로 모습을 숨겼다. 그러자, 곧바로 헤네스의 고함 소리가 전장에 울려 퍼지기 시작한다. “바보바보바보바보바보오오오!” 그녀의 높은 목소리가 사방에 퍼지는 순간, 한참 전투에 몰입해 있던 자들은 갑자기 가슴 한켠을 누군가 발로 마구 짓밟는 듯한 충격을 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비틀거렸다. 바로 그 순간 준상이 움직였다 곧바로 위상전이를 펼쳐 거인의 어깨 위에 서있는 미이라 괴물의 등 뒤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준상은 공중에 뜬 상태로 듀얼 스톰을 펼쳤다. 그의 손을 벗어난 두 개의 철구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미이라 괴물을 향해 날아든다. 헤네스의 갑작스런 정신 공격에 노출되어 비틀거리던 미이라 괴물은 미처 피할 사이도 없이 두 개의 철구에 연속으로 피격 당했다. 다행히 첫 번째 철구는 미리 펼쳐 두었던 방어막이 막아내 주었다. 하지만 방어막이 유리처럼 깨져 나가는 순간 다시 날아든 두 번째 철구는 도저히 피할 도리가 없었다. 지원대장 벨바란은 자신도 모르게 문자 그대로 뼈와 가죽 밖에 남지 않은 손을 뻗었지만, 섬뜩한 가시가 돋아난 철구는 그런 벨바란의 손을 뭉개고 들어와 말라붙은 피부를 찢어버리고 그 안에 들어있던 뼈들을 단숨에 가루로 만들어 버렸다. 장군 사르가는 갑작스런 헤네스의 외침에 성을 내며 고함을 치려다가 갑자기 어깨 위에 서있던 벨바란이 박살나고 그 여세를 몰아 철구들이 자신의 등판을 가격하자 놀라서 펄쩍 뛰었다. 예상보다 훨씬 간단하게 벨바란을 박살내 버린 준상은 곧바로 사르가의 그림자를 통해 위상전이를 펼친 다음 유령마를 몰고 검은 피부의 사람들을 학살하고 있는 흑기사들 사이에 모습을 드러냈다. 생각보다 새로 얻은 슈퍼 레어 등급의 듀얼 스톰의 위력이 매우 훌륭하다는 것을 깨달은 준상은, 머뭇거리지 않고 다람쥐를 소환해 풀어 놓은 다음 곧장 흑기사들을 향해 듀얼 스톰을 펼치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콰가가가각! 순식간에 흑기사들의 갑옷이 쪼개지고 유령마들이 박살나며 쓰러지기 시작한다. 검은 피부의 사람들은 갑자기 들려온 소녀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가, 자신들을 밀어붙이고 있던 흑기사들이 단숨에 박살나 쓰러지는 모습에 얼이 빠졌다. 하지만 그들이 미처 준상의 모습을 눈에 담기도 전에, 다시금 헤네스가 있는 힘껏 고함을 질렀다. “바보 똥벌레들아아아아아!” 헤네스가 알고 있는 가장 치욕스럽고 가장 추잡한 욕이 터져 나오자,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심장이 멎는 듯한 충격이 적아를 구분하지 않고 덮쳐왔다. 검은 피부의 사람들은 가슴을 부여잡고 주저앉으며 그제서야 붉은 야수를 탄 채 다섯 가지 신비로운 기운으로 몸을 감싼 소녀의 모습을 보았다. “두, 두르가!” 누가 먼저 그 말을 꺼낸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욕쟁이 할매의 효과로 인해 혼란에 빠진 사람들은 지금 이 순간 그녀가 탄 붉은 늑대가 사자나 호랑이처럼 보였고, 그녀의 손에 들린 깃발이 여신의 권위를 나타내는 상징으로 보였다. 처음에는 그런 증상을 보이는 사람이 한두 명 뿐이었지만, 그녀의 입에서 계속해서 욕이 퍼부어지자 사람들은 하나둘씩 계속해서 혼란에 빠지기 시작했고, 앞서의 사람들이 두르가를 연호하자 무언가에 홀린 듯이 그 이름을 따라 외치기 시작했다. “크흠... 아우, 목 아파.” 헤네스는 목을 주무르다가 자신을 향해 절을 올리는 사람들을 보았다. “왜 저러지?” 고개를 갸웃거리던 헤네스는 준상이 흑기사들과 맞붙어 싸우는 모습을 보자 퍼뜩 정신을 차리고 다시 욕을 시작했다. “바보! 멍청이! 못 생긴 똥벌레들아아아!” 그녀가 열과 성을 다해 욕을 해준 덕분에 흑기사들은 패닉 상태에 빠진 채 준상이 휘두르는 두 개의 철구에 분쇄되었다. 그들의 갑옷은 너무나도 강인해서 어지간한 충격에는 끄떡도 하지 않았지만, 랑다잘의 분노라 이름 붙은 거대한 철구는 처음부터 그런 견고한 방어구나 시설물들을 파괴하기 위해 만들어진 무기였다. 장군 사르가의 고함이 터진 건 바로 그 때였다. -크허어엉! 고함 소리가 터져 나오자 혼란에 빠져 있던 흑기사들은 이내 투구 안에 감춰진 검붉은 두 눈에서 다시 살기를 피워 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이 다시 정신을 완전히 다잡기도 전에 헤네스의 욕설이 또다시 터져 나왔다. “시끄러워! 이 덩치만 큰 바보야!” 어째서일까. 사르가는 붉은 늑대의 등에 탄 소녀의 입에서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이 터져 나오는 순간, 무언가 아주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듯한 상실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사르가는 자신의 정신을 갉아 먹는 기묘한 힘을 떨쳐버리고 다시금 크게 포효했다. -커허어엉! 물론 헤네스도 물러설 이유가 없다. “바보오오오!” 준상은 헤네스와 사르가의 설전을 들으며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의 입가에서 웃음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기갑대장 하툼이 거대한 유령 말을 몰아 준상에게 돌진해 왔다. 물론 준상은 놈을 기다려 주는 친절 따위는 베풀지 않았다. 곧바로 오른 손에 쥐고 있던 철구를 놈이 탄 유령 말에게 집어던진 것이다. 포탄처럼 쏘아져 날아간, 직경이 일 미터나 되는 거대한 철구가 기갑대장 하툼이 타고 있는 유령말을 짓이겨 버린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하툼은 자신의 애마가 박살나자 분노하며 준상을 향해 몸을 날렸다. 놈의 투구 안쪽에서 붉은 안광이 폭사되며 사방에 살기를 퍼뜨리기 시작했지만, 불행히도 하툼보다 준상의 눈빛이 훨씬 더 강렬했다. 준상은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하툼을 바라보며 공포의 시선과 사안을 동시에 발동했다. 마침내 두 시선이 마주친 순간, 하툼은 자신의 몸을 죄어오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힘에 크게 놀랐다. 눈을 통해 파고든 공포의 힘은 치유할 수 없는 독처럼 하툼의 사지로 퍼져 나갔다. 하툼은 비로소 깨달았다. 이 남자가 자신보다 강한 존재라는 사실을. 준상은 몸의 자유를 잃고 허우적거리며 바닥으로 추락해 나뒹구는 하툼을 바라보며 집어던졌던 철구를 다시 회수한 다음 곧바로 강타를 발동했다. 한 걸음, 그리고 두 걸음. 일 초에 한 걸음씩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준상은 마침내 다섯 걸음 째에 이르러 온몸의 근육에 응축된 거대한 힘을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하툼을 향해 방출했다. 번쩍! 전투와 파괴로 인해 혼란에 빠져 있던 하를라간의 도심 안에 한 줄기 빛이 강림했다. 그 빛은 그대로 주위의 모든 소란을 집어 삼키고 사위를 침묵으로 이끄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그렇게 모아진 소리들을 한 데 모아 포효를 터뜨렸다. 꽈릉! 갑작스럽게 터져 나온 그 천둥소리에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박살이 난 하툼의 갑옷 조각들이 폭탄의 파편처럼 사방으로 터져 나간 뒤였다. “후우...” 준상이 온몸에서 흰 연기를 내뿜으며 한 쪽 무릎을 바닥에 댄 채 주저앉자, 사르가와 한참 목소리 경쟁을 벌이고 있던 헤네스가 얼른 그에게 달려왔다. “괘, 괜찮으세요?” “별로.” 헤네스는 얼른 늑대에서 내려 준상을 부축하려 했지만, 준상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헤네스에게 말했다. “수고했다. 끝나면 바로 다시 부를게.” “네?” 헤네스는 갑작스런 준상의 말에 눈이 동그래졌다가, 이내 화를 내며 달려오는 사르가의 모습을 바라보며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제서야 사르가를 놔두고 달려온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다시 뭔가 말할 틈도 없이, 준상은 헤네스와 크림슨 울프를 바로 역소환시키고는 위상전이를 통해 그 자리에서 빠져 나왔다. 사르가는 화가 잔뜩 나서 하툼을 쓰러뜨린 남자와 붉은 늑대를 탄 여자를 향해 달려오다가, 그들이 갑자기 모습을 감추자 얼른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순간 준상은 이미 몇 번의 위상전이를 통해 다시 성벽 위로 이동한 상태였다. “후우...” 준상은 크게 숨을 몰아쉬며 과부하가 걸린 몸이 본래대로 되돌아오기를 기다렸다. 힐링 포션이나 헤네스가 지닌 채찍을 사용하면 좀 더 빠르게 회복시키는 것이 가능하겠지만, 준상은 서두르지 않았다. 굳이 그래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탓이다. 화가 나서 건물들을 때려 부수던 사르가는 헤네스로 인해 혼란이 걸려 있던 사람들이 그제서야 허겁지겁 몸을 일으켜 도망치는 모습을 보았다. -크허어엉! 사르가는 몇 남지 않은 흑기사들을 몰아 그들을 쫓았다. 쿵! 쿵! 쿵! 커다란 발걸음 소리를 울리며 작고 연약한 인간들의 뒤를 뒤쫓아 그 가운데 한 명을 손으로 낚아챈 사르가는, 그대로 손아귀에 힘을 주어 이 보잘 것 없는 생명체를 쥐어 터뜨리려 했다. 하지만 그는 몰랐다. 바로 그때 자신의 등 뒤에 나찰과 같은 섬뜩한 안광을 뿜어내는 한 남자가 떨어져 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의 손에, 피에 굶주린 어둠의 마물이 쥐어져 있다는 사실을! 검은 색의 양날 도끼는 가차 없이 사르가의 목을 날려 버렸다. 사르가는 자신의 손 안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는 인간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주위의 풍경이 빙글 빙글 도는 것을 깨달았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것일까. 하지만 다른 생각을 떠올릴 틈도 없이 사르가의 머리는 곧장 피와 살점으로 질척해진 땅바닥에 처박혔다. 사르가는 보았다. 자신을 향해 붉은 눈을 번뜩이는 작은 생물 하나가 빠르게 달려오는 것을. 그것이 그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준상은 사르가의 목을 단숨에 날려 버리자 곧바로 블러드 서커를 인벤토리로 되돌리고 땅바닥에 내려섰다. “후우... 후우...” 머리를 잃은 사르가의 몸은 비틀 비틀 거리면서도 쉽게 쓰러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놈의 몸은 거대한 굉음과 함께 애꿎은 건물 하나를 부숴버리며 쓰러졌다. 준상은 다시금 투명화로 모습을 감추고 위상전이를 이용해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아직 흑기사들이 몇 남아 있기는 했지만, 저 정도 숫자라면 남은 플레이어들 만으로도 충분하다. 아마 그럴 것이다. 준상은 성루의 지붕 위로 올라가 그대로 하늘을 바라보며 누워버렸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어디선가 자그마한 생명체 하나가 후다닥 준상에게로 달려오더니 가슴 위로 폴짝 뛰어올라왔다. 바라보니 입가에 피와 살점을 잔뜩 묻힌 엽기적인 모습의 다람쥐다. “수고했다.” 준상은 물의 정령을 불러 입가를 닦아주었다. 상으로 땅콩이라도 한 줌 쥐어 주고 싶은데, 어쩐지 그 이상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가 싫다. 00086 트롤러 ========================================================================= 너무 자주 몸을 한계 상황으로 밀어붙인 탓일까. 과부하가 걸렸던 몸이 정상으로 돌아오고 나서도 무기력함은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전투의 소음은 많이 줄어 들었지만, 도시 곳곳에 숨어든 잔적들을 소탕하는 데는 아직 시간이 좀 더 필요한 모양이다. 하긴, 미로처럼 얽힌 시가지에 숨어든 적을 찾아내는 건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준상은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다시 헤네스를 불렀다. 헤네스는 다시 모습을 드러내자 잠시 주위를 둘러보더니 성벽 위에 앉아 있는 준상의 옆에 다가와 쪼그리고 앉았다. “전투는...” “내가 할 일은 끝났다.” “아...” “다만 잔적을 소탕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리는 모양이다.” “그렇군요.” 헤네스는 그제서야 편한 자세로 준상 옆에 조신하게 앉았다. 그리고는 피로 얼룩진 준상의 모습에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씻어야겠어요.” “괜찮아.” “하지만...” “어차피 또 바로 불려갈지도 모르니까 일단은 있어보고.” “...” 준상은 먼지와 피로 얼룩진 헤네스의 드레스를 보고는 이번에 돌아가서 시간이 남으면 그녀를 데리고 도시로 가서 옷이라도 몇 벌 사줘야겠다고 생각했다. 혼자서는 그냥 산에서 바람 맞으며 침낭 생활을 해도 상관이 없지만, 귀하게 자란 그녀에게 자신과 같은 혹독한 생활을 강요할 수는 없는 일. 숙식에 관해서도 따로 대책을 세워 두는 편이 좋을 듯 하다. “그나저나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말씀하세요.” “이곳은 네 고향에서 얼마나 떨어진 곳이지?” 헤네스는 준상의 말을 듣고 그가 어째서 이런 것을 묻는지 바로 이해했다. “여기서도 편지를 보내라구요?” “시간이 충분할지는 모르겠지만, 가능하면 시도는 해보는 것이 좋겠지.” 하지만 헤네스는 좀처럼 이 생소한 지명이 어느 곳에 위치하고 있는지 떠올릴 수 없었다. “하를라간... 음... 잘 모르겠네요. 이 정도 규모의 도시라면 분명히 유명할 텐데.” “요새도시라는 별칭이 있더군.” “그것도... 기억에 없네요.” “그런가.” 이런 상황이라면 몇 가지 경우의 수가 존재한다. 그녀가 살던 대륙과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어서 미처 알지 못하는 경우가 그 첫 번째이고, 아예 그녀가 살던 행성과 다른 곳일 가능성이 두 번째이다. 사실 어느 쪽이건 간에 고향의 집에 안부 편지를 전하겠다는 그들의 목적이 실현되기 어려운 건 마찬가지지만 말이다. 헤네스는 불타는 도시의 모습을 바라보며, 가만히 준상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바로 피비린내가 확 올라와 후각을 어지럽히고, 완전히 굳지 않아 미끌거리는 체액이 머리카락을 더럽혔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준상은 그녀와 함께 성벽에 앉은 채로 미뤄 두었던 메시지들을 하나씩 처리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손을 댄 것은 이전 퀘스트에서 얻었던 협력 퀘스트의 추가 보상 상자 여섯 개였다. 카드정보 명칭 : 웨펀차지 레벨 : 1Lv 경험치 : 0 등급 : Uncommon 분류 : 스킬 성장 : 일반(중) 속성 : 없음 효과 : 손에 무기를 든 채 적에게 돌격하여 현재 공격력의 170% 데미지를 가한다. (쿨타임: 4초) Cost : 15 Seed : 3슬롯 강력한 무기들을 손에 넣은 이후부터는 맨손으로 싸울 일이 줄어들었지만, 돌격계 기술은 그대로 숄더 차지 하나 뿐이라 다소 불균형을 이루고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이것도 그리 나쁘지 않은 보상이다. 아직 숄더 차지처럼 전용의 콤보 효과를 노리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기는 하지만, 블러드로드 콤보의 데미지 증폭 효과와 연계해서 사용하면 되니 크게 문제 되지는 않는다. 카드정보 명칭 : 마파람 레벨 : 1Lv 경험치 : 0 등급 : Rare 분류 : 소환 성장 : 일반(대) 속성 : 바람, 얼음 효과 : 차가운 겨울 바람의 정령 1개체를 소환합니다. Cost : 20 Seed : 4슬롯 두 번째 상자에서는 새로운 정령이 나왔다. 정령 자체는 이전에도 여럿 나왔지만, 레어 등급인데다 속성이 두 가지나 된다는 점이 특이하다. 소환 가능한 개체수가 카드 슬롯 숫자를 통해 제한되는 시스템임을 감안해 보면 등급이 높아질수록 이런 식으로 복합적인 속성이 부여되는 것은 차라리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다만 궁금한 것이라면, 이럴 경우 콤보 효과를 통한 저항력 강화는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가 하는 점이겠지만 이미 뽑은 카드가 도망가는 것도 아닌 이상 나중에 천천히 알아봐도 될 일이다. 카드정보 명칭 : 매도 레벨 : 1Lv 경험치 : 0 등급 : Rare 분류 : 스킬 성장 : 일반(대) 속성 : 없음 효과 : 적을 욕하고 꾸짖어 복합적인 상태이상을 초래합니다. Cost : 20 Seed : 3슬롯 세 번째 상자에서 나온 것은 매도의 레어 등급 카드였다. 이전에서 사용하던 언커먼 등급과 달라진 점이라면 효과에 ‘복합적인’이라는 말이 붙은 것 정도이다. 정확한 성공 확률이나 상태이상의 종류는 나와 있지 않았지만, 실제로 헤네스가 욕쟁이 할매를 사용할 때의 모습을 보면 무시할만한 수준은 아니다. 준상은 헤네스의 카드 슬롯에 꽂혀 있는 매도 카드를 빼고 새로 얻은 레어 등급의 매도 카드를 장착시켜 준 다음, 네 번째 상자를 열었다. 축하합니다! 특수카드 ‘메신저’을 획득했습니다. :특수카드를 획득하면 봉인된 특수기능을 해제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특수기능 ‘메신저’가 개방됩니다. -메신저 기능을 이용하면 먼 곳에 있는 플레이어와 문자나 음성을 실시간으로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메신저에 플레이어를 등록하기 위해서는 10미터 이내 거리에서 등록을 요청해야 하며, 이때 상대가 거부할 경우 등록이 불가능합니다. 당장 쓸 데는 없지만, 파티 플레이를 주로 하는 사람들이라면 상당히 유용한 기능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단순히 퀘스트 수행 중에만 국한되는 일이 아니다. 지구에서도 언제 어떤 식으로 추적을 당할지 알 수 없는 상황임을 감안하면, 감청이 불가능한 이런 통신 수단이 하나쯤 있어서 손해 볼 일은 없을 것이다. 다만 조금 불편한 점이라면 반드시 10미터 거리 안쪽에서 요청과 수락을 거쳐야 한다는 것 정도겠지만, 이것 또한 무작위로 아무나 등록할 수 없으니 준상에게는 오히려 장점으로 느껴졌다. 카드정보 명칭 : 무기방어 레벨 : 1Lv 경험치 : 0 등급 : Uncommon 분류 : 스킬 성장 : 일반(중) 속성 : 없음 효과 : 손에 든 무기로 적의 공격을 막아냅니다. Cost : 15 Seed : 3슬롯 다섯 번째 상자에서도 새로운 스킬 카드가 나왔다. 현재까지는 워낙 준상의 공격력이 월등해서 이런 방어 스킬을 써야할 상황이 거의 없었지만, 나중에는 또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니 이것 역시 가지고 있어서 손해날 일은 없을 것이다. 여섯 번째 상자에서는 아이템이 나왔다. 아이템정보 명칭 : 안티도트 포션 레벨제한 : 10 종류 : 포션 등급 : Uncommon 효과 : 중급 이하의 독을 해독합니다. 지속시간 : 즉시 재사용 대기시간 : 10분 남은 사용횟수 : 10회 설명 : 이 만능 해독제는 중급 이하의 독을 빠르게 해독시키는 효과가 있습니다. 중급이라는 것이 어떤 수준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해독제 역시 가지고 있어서 손해날 일은 없는 아이템이다. 이로써 보상 상자는 모두 열었지만, 아직 레벨업 보상인 랜덤 카드가 두 개 남아 있었다. 카드정보 명칭 : 염동력 레벨 : 1Lv 경험치 : 0 등급 : Rare 분류 : 스킬 성장 : 일반(중) 속성 : 없음 효과 : 시야가 닿는 범위에 존재하는 적당한 무게의 물체 1개를 움직입니다. Cost : 20 Seed : 3슬롯 첫 번째 랜덤카드에서는 레어 등급의 염동력 카드가 나왔다. 언커먼 등급에서 존재하던 10미터 반경의 범위 제한이 사라지고 대신 시야가 닿는 범위로 늘어났으며, ‘가벼운’이라는 형식으로 붙어있던 무게 제한 역시 사라졌다. 다만 이 ‘가벼운’이나 ‘적당한’ 같은 형용사는 몇 킬로그램까지 가능하다는 식의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 사용해 보면 여러 가지로 애매한 점이 많다. 준상은 마지막 랜덤 카드를 뽑았다. 축하합니다! 특수카드 ‘아이템 강화’를 획득했습니다. :특수카드를 획득하면 봉인된 특수기능을 해제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특수기능 ‘아이템 강화’가 개방됩니다. -아이템 강화에는 시드 세 개가 소모됩니다. -높은 등급의 시드일수록 강화 성공 확률이 높습니다. 아이템 강화라... 그렇지 않아도 시드가 너무 많아서 처치 곤란이었는데 잘되었다고 해야할까. 게다가 이런 기능을 다른 플레이어들도 획득하게 된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시드 수요가 생기게 되리란 건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는 일이었다. 준상은 시험 삼아 이전에 획득했던 디안의 짧고 예리한 검을 꺼내어 강화를 시도해 보았다. 처음 강화를 시도하자 바로 이런 경고 문구가 나왔다. 강화를 시작합니다. -강화에는 시드 세 개가 소모됩니다. -높은 등급의 시드일수록 강화 성공 확률이 높습니다. :강화에 성공하면 다음의 세 가지 효과중 하나가 부여될 수 있습니다. 1. 새로운 옵션 1개 추가 2. 공격력, 또는 방어력 증가 3. 아이템 내구도 상승 (주의) 강화에 실패하게 되면 당신의 아이템에는 여러모로 안 좋은 일이 생겨납니다. “...” 여러모로 안 좋은 일이라니, 직접적으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려 주는 것보다 더 불안한 말이다. 준상이 갑자기 칼을 꺼내들고 가만히 노려보자,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던 헤네스가 불안한 표정으로 가만히 물었다. “왜요?” 준상은 피식 웃으며 디안의 검을 다시 캐비닛에 집어넣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하긴, 당장 꼭 필요하지도 않은 상황인데 괜히 위험을 자초할 필요가 있겠는가. 더군다나 지금 준상이 가지고 있는 아이템들은 굳이 강화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강한 위력을 가지고 있으니 무리할 필요가 없다. 준상이 다시 캐비닛을 인벤토리에 넣자, 그제서야 퀘스트 완료 메시지가 준상의 시야에 나타났다. “헤네스.” “네.”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간인 모양이다.” “...” 헤네스는 가만히 준상의 어깨에서 머리를 떼며 말했다. “바로 불러주세요.” “알았다.” 준상은 헤네스를 역소환한 다음 다람쥐에게 말했다. “자, 꺼내놔 봐.” 그러자 다람쥐는 고개를 한 번 갸웃거리고는 자신의 주머니 안에 담겨져 있는 물품들을 와르르 쏟아냈다. “...” 이번에는 시드 뿐만 아니라 흑기사들이 사용하던 무기나 방어구 같은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나 기갑대장 하툼의 것으로 보이는 안장은 화려한 문양이 상감되어 척 보기에도 매우 고급스러운 느낌이었다. 준상은 우선 시드와 금화 따위를 주머니에 담은 후 무기와 방어구는 따로 자루를 꺼내어 그 안에 쓸어 담았다. 그렇게 전리품의 정리가 끝난 뒤 준상은 다람쥐에게 구운 땅콩 한 줌을 쥐어 준 다음 대기 시간이 모두 지나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잠시 시간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준상은 지구로 귀환할 수 있었다. 한 줄기 빛과 함께 다시 여관 뒷 골목에 모습을 드러낸 준상은 그대로 투명화를 펼쳐 모습을 숨긴 채 잠시 그대로 대기했다. 곧바로 다시 퀘스트가 날아들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지금 뒤집어 쓰고 있는 피와 체액을 씻어내지 않는 쪽이 차라리 전투에 유리하다. 하지만 십 분이 지나고, 다시 이십 분이 지나도 새로운 퀘스트 메시지는 도착하지 않았다. “이걸로 끝인가.” 준상은 삼십 분을 채운 뒤에야 인적이 드문 방풍림 속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몸을 대충 씻은 후 다시 여관 방을 잡았다. 00087 트롤러 ========================================================================= 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잠근 준상은 우선 헤네스를 소환했다. 한줄기 빛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헤네스는 자신이 화려하게 꾸며진 방 안에 들어와 있음을 알아차리고는 이제야 겨우 전투가 끝난 것인가 하는 마음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먼저 씻어라. 나는 할 일이 있으니.” 준상은 가운의 비닐 포장을 뜯어 주며 그렇게 말했다. “전 괜찮아요. 피곤하실 텐데 먼저 씻으시는 것이...” 이제는 그녀도 언제 또 다시 불려갈지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사양했지만, 준상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그래. 지금 뜨거운 물에 들어가면 그대로 잠들어 버릴 것 같거든.” 헤네스는 그 쓴웃음을 보자 어쩐지 더 이상 사양할 수가 없었다. “알았어요. 그럼 먼저 할게요.” “그래.” 준상은 소파에 앉아서 우선 쌓여 있는 메시지부터 확인했다. 어둠의 군세로부터 도시를 지켜내십시오. :강대한 어둠의 군대가 요새도시 하를라간을 노리고 진격해 오고 있습니다. 그들의 침공을 막아내십시오. (침공까지 남은 시간 : 0시간 0분) [이 퀘스트는 대규모의 인원이 동시에 참여합니다.] ->완료! (Hidden) 장군 사르가를 처치하십시오. (협력) ->완료! (Hidden) 지원대장 벨바란을 처치하십시오. (협력) ->완료! (Hidden) 기갑대장 하툼을 처치하십시오. (협력) ->완료! - 당신이 이번 퀘스트에서 보여준 행동과 성과를 정산합니다. 이 과정은 약간의 시간이 소요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축하합니다! : 당신의 랭크는 Ex:Savior입니다. -당신은 영웅적인 행동으로 세계를 위협에서 구해냈습니다. 기본 보상 외에 추가 보상이 지급됩니다. 보상 : 경험치 많이, 추가 보상 상자(협력)x3, 추가 보상 상자(Ex:Savior), 칭호[하를라간의 구세주] -> 보상을 지금 수령하시겠습니까? (Y/n) _ (주의) 수령하지 않은 보상은 7일후 자동 소거됩니다. 보스급을 셋 밖에 처치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등급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구원자라고 되어 있었고, 대신 경험치가 매우 많이에서 많이로 줄었다. 준상은 우선 새로 얻은 칭호부터 확인했다. [하를라간의 구세주] :하를라간 방어에서 결정적인 기여를 한 자 1인에게 부여되는 칭호. -효과: 하를라간이 속한 국가인 ‘시헬반트’에서 퀘스트 완료시 경험치 보상 10퍼센트 증가. -칭호는 획득시 자동으로 효과가 적용됩니다. 시헬반트는 또 어딘지. 이러다가 저쪽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국가에서 구세주 칭호를 받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물론 그때까지 살아남는다는 전제가 붙기는 하지만 말이다. “후...” 보상은 나중에 받을까. 경험치가 좀 줄었으니 2업까지는 무리더라도 1업 정도는 가능할 것 같다. 지금까지는 언제 레벨업이 될지 예측하기도 힘든 상황이다 보니 그냥 무시하고 바로 보상을 받았지만, 이번 퀘스트 같은 경우에는 경험치의 양도 많으니 적당한 시기에 보상을 수령하면 정말 위급한 상황이 닥쳤을 때 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선택적으로 보상을 받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그건 불가능한 일. 잠시 고민하던 준상은 일단 보상 습득을 미뤄두고 이번에 새로 얻은 레어 시드들을 먼저 확인했다. 탁자를 치우고 깔개를 깐 다음, 그 위에 새로 습득한 시드들을 쏟아 놓았다. 그리고 그 안에서 옅은 서기를 발하고 있는 레어 시드 다섯 개를 골라 확인을 실행했다. 명칭 : 기괴한 심장 레벨제한 : 20 종류 : 시드 등급 : Rare 효과 : 1. 근력 증가 15% 2. 물리 공격력 증가 7% 3. 물리 저항력 증가 6% 설명 : 장군 사파탄이 지니고 있던 특별한 시드입니다. Seed 슬롯이 있는 아이템이나 카드에 장착하여 능력을 강화할 수 있습니다. 한번 장착한 시드를 분리하기 위해서는 특수기능 ‘분리’가 필요합니다. [이 시드를 아이템이나 카드에 장착하시려면 이곳을 누르십시오.] 명칭 : 도마뱀의 꼬리 레벨제한 : 15 종류 : 시드 등급 : Rare 효과 : 1. 회피율 증가 10% 2. 치명타 발생률 증가 7% 3. 민첩 증가 6% 설명 : 친위대장 타샤스가 지니고 있던 특별한 시드입니다. Seed 슬롯이 있는 아이템이나 카드에 장착하여 능력을 강화할 수 있습니다. 한번 장착한 시드를 분리하기 위해서는 특수기능 ‘분리’가 필요합니다. [이 시드를 아이템이나 카드에 장착하시려면 이곳을 누르십시오.] 명칭 : 타락의 증거 레벨제한 : 15 종류 : 시드 등급 : Rare 효과 : 1. 방어구 효과 증폭 10% 2. 블록 확률 증가 7% 3. 맷집 증가 8% 설명 : 기갑대장 하툼이 지니고 있던 특별한 시드입니다. Seed 슬롯이 있는 아이템이나 카드에 장착하여 능력을 강화할 수 있습니다. 한번 장착한 시드를 분리하기 위해서는 특수기능 ‘분리’가 필요합니다. [이 시드를 아이템이나 카드에 장착하시려면 이곳을 누르십시오.] 명칭 : 음울한 노래 레벨제한 : 15 종류 : 시드 등급 : Rare 효과 : 1. 소환물/펫 방어 증가 5% 2. 소환물/펫 맷집 증가 7% 3. 소환물/펫 스킬 효율 증가 9% 설명 : 지원대장 벨바란이 지니고 있던 특별한 시드입니다. Seed 슬롯이 있는 아이템이나 카드에 장착하여 능력을 강화할 수 있습니다. 한번 장착한 시드를 분리하기 위해서는 특수기능 ‘분리’가 필요합니다. [이 시드를 아이템이나 카드에 장착하시려면 이곳을 누르십시오.] 명칭 : 섬뜩한 뿔 레벨제한 : 20 종류 : 시드 등급 : Rare 효과 : 1. 돌격시 공격력 증가 15% 2. 물리 저항력 증가 6% 3. 소환물의 공격력 증가 9% 설명 : 장군 사르가가 지니고 있던 특별한 시드입니다. Seed 슬롯이 있는 아이템이나 카드에 장착하여 능력을 강화할 수 있습니다. 한번 장착한 시드를 분리하기 위해서는 특수기능 ‘분리’가 필요합니다. [이 시드를 아이템이나 카드에 장착하시려면 이곳을 누르십시오.] 모르긴 해도 이 정도의 시드라면 정말 부르는 것이 값이 아닐까 싶다. 이벨류아, 벨카라스, 그리고 하를라간. 이 세 군데의 퀘스트에서 얻은 레어 시드의 수는 모두 열두 개. 하지만 영웅 등급의 카드 두 장에 꽉꽉 눌러 채웠는데도 슬롯 세 개가 남는다. 그러고 보면 영웅 등급 피칠갑 카드는 시드 슬롯이 열 개나 되니 정말 사기라 할 만 하다. 레어 시드의 확인이 끝나자 준상은 시드의 확인 작업을 시작하려다가 먼저 하툼의 것으로 보이는 안장을 꺼내 살펴보았다. 아이템정보 명칭 : 악몽의 안장 레벨제한 : 15 종류 : 안장 등급 : Rare 효과 : 흉폭한 유령 말을 소환할 수 있습니다. Seed : 3슬롯 설명 : 기갑대장 하툼의 안장 “유령 말?” 준상은 하툼이 타고 다니던 커다란 유령말을 떠올렸다. 촛농처럼 뚝뚝 떨어지는 푸른 안광을 뿜어내는 괴기스러운 형상. 하지만 체구가 대단히 커서 상당한 체격의 거한이라도 무리 없이 태우고 다닐 만한 수준이었다. 인벤토리가 없는 상황이라면 소환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 커다란 안장을 지고 다녀야 하기 때문에 꼴이 우스워질 수도 있겠지만, 준상이라면 이미 열다섯 칸이나 되는 인벤토리를 가지고 있는 상황이니 매우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다. 나머지 갑옷이나 칼, 그리고 방패는 그리 대단치 않은 물건이었다. 하기야 이것도 어디까지나 준상의 입장에서의 얘기일 뿐, 다른 플레이어들이라면 안광을 번뜩이며 덤벼들지 않을까 싶다. 대충 아이템의 확인을 끝낸 후 시드들을 확인하려는데 헤네스가 젖은 머리를 한 채 가운을 입고 욕실에서 나왔다. “벌써 다 씻었어?” “네.” 가운을 입은 모습이 부끄러운지 헤네스는 가만히 얼굴을 붉히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그렇게 대답했다. 준상은 일단 나중에 확인을 마치기로 하고 시드들을 다시 담아 캐비닛에 보관한 다음, 욕실로 향했다. 들어가자 미리 헤네스가 물을 받아둔 모양인지 욕조에 물이 차 있었다. 시간 상으로 미루어 볼 때, 그녀는 욕조를 사용하지 않고 그냥 샤워만 한 것이 아닐까 싶다. “느긋하게 해도 된다니까.” 준상은 혀를 찼지만, 헤네스의 이런 배려가 그리 싫지 않았다. 천천히 옷을 벗고 일단 샤워를 먼저 한 다음, 욕조에 몸을 담갔다. 대충 씻는다고 씻었음에도 불구하고 몸을 담그자 채 닦이지 않은 혈흔과 그을음 같은 것이 몸에서 떨어져 나온다. “후우...” 몇 번이나 반복해서 혹사당했던 몸의 근육들이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듯한 느낌에 준상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인지 한숨인지 모를 소리를 내고 말았다. 생각 같아서는 이대로 잠들어 버리고 싶을 정도였지만, 아쉽게도 아직 준상에게는 그런 식의 여유가 허락되어 있지 않았다. 몇 분 정도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던 준상은 물에서 빠져 나와 다시 머리를 감고 샤워를 한 다음, 수건으로 대충 물을 닦고 가운을 걸친 채 밖으로 나갔다. 그가 욕실 문을 열고 나가자, 침대에 앉아 리모컨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헤네스가 화들짝 놀라며 자세를 바로하고는 가운의 앞섶을 다시 한 번 여민다. 준상은 속으로 피식 웃음이 나왔지만, 모르는 척 정령을 불렀다. “산들바람, 새벽이슬.” 그리고 정령에게 그녀의 머리를 말려주도록 지시한 후 말했다. “피곤할텐데, 이만 자라. 난 할 일이 있다.” “아, 안 졸려요.” “그럼 티비라도 보고 있던가.” “네...” 헤네스는 왠지 불만인 듯한 표정으로 입을 삐죽거렸지만, 준상은 모르는 척 아까 하던 시드 확인 작업을 계속했다. 에픽 퀘스트 두 개 분량의 시드를 한 번에 확인하려다 보니 시간이 제법 많이 걸렸다. 어쩐지 좀 허리가 뻐근해져서 크게 기지개를 켜는데, 헤네스가 침대에 모로 쓰러져 잠들어 있는 모습이 보인다. “...” 가운의 앞섶이 벌어져 그녀의 앙가슴과 허벅지가 훤히 드러나 있는 모습이 준상의 눈에 그대로 들어왔다. 만지면 물기가 묻어날 것 같은 새하얀 속살. 아직 어린 탓일까. 보는 것 만으로도 마음이 촉촉해지는 듯한 피부다. “크흠...” 자신도 모르게 벌어진 가운 안을 바라보고 있던 준상은 추태를 깨닫고는 얼른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헤네스는 깊이 잠이 들었는지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후...” 준상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우선 벌어진 앞섶을 염동력으로 오므려 준 다음, 그녀를 안아 올려 침대에 바로 눕히고 이불을 덮어 주었다. 그 과정에서 맨살끼리 접촉이 조금 있기는 했지만, 이건 불가항력이다. “으음...” 헤네스는 작게 신음을 흘렸지만,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뭘 믿고 이렇게 태평하게 잠이 들어버린 건지. 경계심이 지나친 것도 귀찮지만, 너무 부족한 것도 골치 아픈 일이다. 준상은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하지만 이내 티비와 불을 끈 다음, 자신 역시 그녀의 옆에 몸을 눕히고 그대로 잠을 청했다. 언제 다시 퀘스트가 발동될지 모르니 깊은 잠은 들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어쩐지 예전보다는 마음이 편하다. 아마도, 옆에 누군가가 누워 있다는 사실 때문은 아닐까. 준상은 새근거리는 헤네스의 숨소리를 자장가 삼아, 조용히 잠 속으로 빠져 들었다. 그리고 다음날. 헤네스는 문득 누군가의 피부가 얼굴에 닿아 있는 것을 느끼고는 천천히 잠에서 깨어났다. “...” 너무 놀라면 비명소리도 나오지 않는 법이라던가. 헤네스는 자신이 준상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잠들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 그대로 굳어버렸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걸까. 무심하게 등을 돌린 채 자기 할 일만 하는 준상을 마음속으로 욕하다가 졸려서 침대에 누운 것 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이후의 일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젯밤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인가! 헤네스는 조심스럽게 준상의 몸에서 떨어져 나오다가 그만 발을 헛디뎌 침대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꺅!” 잘못 떨어지는 바람에 뒤통수를 바닥에 부딪힌 헤네스가 비명을 지르자, 준상은 그제서야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옆에 헤네스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몸을 일으키다가 침대 아래에서 그녀가 뒤통수를 두 손으로 감싼 채 둥글게 몸을 말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 어쩐지 여기서는 그냥 못 본 척 하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에 준상은 얼른 다시 누워서 자는 척을 하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눈물을 글썽이는 헤네스의 눈과 마주치고 말았다. 헤네스는 준상과 눈이 마주치자 침대에서 굴러 떨어지는 바람에 벌어진 앞섶부터 다시 여몄다. “괜찮아?” 얼른 시선을 돌리며 준상이 그렇게 묻자, 헤네스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뇨...” “푸훗!” 어째 웃으면 안될 것 같은데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오고 말았다. 그러자 헤네스는 아픈 와중에도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확 붉어지더니 이내 발소리를 쿵쾅거리며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이런.” 준상은 그녀가 욕실에 숨어버리자 왠지 미안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이미 새어나와 버린 웃음을 없던 일로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다행히 헤네스는 간단하게 세면을 마친 후 시치미를 뚝 떼고 욕실 밖으로 나왔다. 준상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캐비닛을 인벤토리에서 꺼낸 후, 거기서 자신이 입던 티셔츠와 바지를 꺼내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일단 이걸 입어.” “네.” 준상이 간단하게 몸을 씻고 나오자 그녀는 준상이 꺼내준 옷을 입고는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 어때요?” 체격 차이가 워낙 커서 어른 옷을 입혀 놓은 아이처럼 보이긴 했지만, 원판이 워낙 귀여워서인지 별로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혹시 이런 걸 두고 콩깍지가 씌었다고 하는 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준상은 일단 고개를 끄덕이며 잘 어울린다고 대답해 주었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먼저 역소환을 한 다음, 여관을 빠져 나와 인적이 드문 골목에서 다시 헤네스를 불러낸 준상은 이전에 습득했던 험비를 인벤토리에서 꺼냈다. “타라.” “네.” 이미 한 번 타본 적이 있어서인지 헤네스는 능숙하게 조수석에 올라탔다. 물론 준상이 손을 뻗어 안전벨트를 매주자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하긴 했지만 말이다. 준상은 그대로 험비를 북쪽으로 몰아 강릉으로 향했다. 그리고 곧바로 의류 쇼핑몰을 찾아가 그녀에게 필요한 여러 가지 옷가지를 사들이기 시작했다. 헤네스는 수많은 사람들과 처음 보는 신기한 형태의 건물, 그리고 그 안에 가득 들어찬 셀 수도 없을 만큼의 옷가지들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지만, 이내 소녀다운 활달함을 보이며 이 세계에 동화되기 시작했다. 준상은 그대로 강릉에 머물면서 헤네스와 자신에게 필요한 여러 가지 물품을 사들이며 간만에 찾아온 휴식을 유감없이 즐겼다. 그렇게 사흘째 되던 날. 험비를 세워둔 주차장으로 내려오자 예상했던 인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박준상씨.” 그는 바로 임서윤이었다. 준상은 그를 보며 말했다. “생각보다 많이 늦었군요.” 대놓고 험비를 몰아 강릉까지 달린 것에는 이런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임서윤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안팎으로 바쁜 일이 많아서 말이죠.” 그리고는 다시 이렇게 말을 이었다. “저를 일부러 부르신 이유를 들을 수 있을까요?” “일단 조용한 곳으로 가죠.” 준상의 말에 임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제가 잘 아는 곳이 있습니다. 안내해도 되겠습니까?” “편한대로.” 임서윤은 자신이 타고 온 차에 올라 앞장을 섰고, 준상 역시 험비를 타고 그 뒤를 쫓았다. 임서윤은 강릉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요정으로 그를 데리고 갔다. 방을 잡아 들어간 후 자리를 나눠 앉자 서윤이 먼저 입을 열었다. “실은... 그렇지 않아도 찾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어째서?” 준상의 말에 서윤은 메뉴를 뒤적이며 대답했다. “요며칠 사이, 세계 각국의 귀환자들이 떼죽음을 당한 일을 알고 계십니까?” 짐작 가는 바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준상은 고개를 저었다. “적게는 수십명에서 많게는 백여명에 이르는 귀환자들이 퀘스트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떼죽음을 당했죠. 거의 피해가 없었던 것은 오직 우리나라가 유일합니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지?” 준상의 말에 서윤은 쓴웃음을 지었다. “뭐... 말하고 싶지 않으시면 저로선 어쩔 수 없는 일이겠죠.” 서윤은 그렇게 말한 후 음식을 시키고는 다시 말했다. “그나저나, 이제 본론을 듣고 싶습니다만.” 준상은 물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대답했다. “처분하고 싶은 물건이 있습니다.” “어떤?” “금과 보석.” “그곳에서 얻은 건가요?” “...” 준상이 고개를 끄덕이자 서윤은 턱을 쓰다듬더니 다시 말했다. “그런 일이라면 저로선 환영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그런 일을 하는 업체를 한번 만들어 볼까 하던 참이거든요.” 그리고는 물을 한 모금 들이킨 후 말을 이었다. “양이 얼마나 되는지?” 그 말에 준상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얼마나 가능한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인벤토리에서 바로 물건을 꺼내려다가 음식이 들어오자 일단 손을 멈추었다. 음식이 차려지고 다시 문이 닫히고 나자, 준상은 그제서야 캐비닛을 꺼내 그 안에서 금괴를 하나씩 꺼내어 상 위에 올려놓기 시작했다. 한 개, 두 개, 세 개... 처음에는 담담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서윤도 1킬로그램은 충분히 넘어가 보이는 금괴의 숫자가 스무 개를 훨씬 넘어가기 시작하자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세상에, 보물 창고라도 턴 겁니까?” 준상은 그의 놀라운 통찰력에 속으로 찬사를 보냈지만, 모르는 척 담담하게 말했다. “가능하겠습니까?” “물, 물론입니다.” “...” 준상은 고개를 끄덕인 후 다시 금괴를 캐비닛에 집어넣고 그마저도 인벤토리로 되돌려 버렸다. 서윤은 입맛을 다셨지만, 그렇다고 그걸 말리지는 못했다. “그리고... 구했으면 하는 물건이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컨테이너 하우스라는 거... 구할 수 있겠습니까?” 서윤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준비해둔 것이 있습니다. 원래는 제가 쓰려고 준비해 둔 것이었는데, 모처럼의 큰 거래이고 하니, 적당히 가격을 맞춰주시면 그걸 넘겨 드리도록 하죠.” “좋군요.” 어차피 재고 말고 할 것도 없는 일이라 거래는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서윤은 준상에게 술을 한 잔 따라주며 말했다. “실은 저도 부탁이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저희 길드에 들어오실 생각 없으십니까?” “없습니다.” 간단명료한 준상의 대답에 서윤은 입맛을 다셨다. 모르긴 해도 지난 번 퀘스트에서 한국만 피해가 전무했던 것이 준상의 작품이란 것을 알게 된 이후로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를 길드에 끌어들이리라 마음먹었었다. 하지만 이렇게 단호하게 거절을 하면 왠지 다시 말을 붙여 보기가 난감하다. 서윤은 여러 가지 강압적인 방법도 떠올려 봤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강압적인 방법이 통할 사람 같았으면, 이렇게 은거하듯 숨어 지내지도 않았으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혼자서 어둠의 군세를 쓸어버릴 정도의 인물에게 그런 짓을 했다가는 스스로 죽여 달라고 목을 내놓는 짓이나 다름없다. 어차피 거래를 튼 이상, 이번에는 연결 고리가 생긴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준상은 간단하게 식사를 마치고는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 “수락하십시오.” “네?” 뭔가 싶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서윤은 이내 휴대폰에 새로운 메시지가 들어와 있음을 깨닫고 얼른 확인했다. 박준상 님이 메신저 등록을 요청했습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Y/n) _ “이건...” 갑자기 이게 뭔가 싶어 바라보자 준상이 대답했다. “그 게임에서 지원하는 메신저입니다. 모르긴 해도 그걸 통해 연락을 보내면 감청 받을 일은 없을 겁니다.” “아하...” “아직 메신저 기능이 오픈되지 않았다면 저에게 연락을 보내는 건 무리겠지만, 요청이 제대로 간 것으로 봐서는 제 연락을 받는 건 충분히 가능할 것 같군요.” 준상은 말을 마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건은 언제 준비되겠습니까?” 서윤은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나며 대답했다. “서울에 있는 걸 실어 와야 하니, 빨라도 내일은 되어야 도착할 겁니다.” “그럼 내일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제 물건도 그때 거래하도록 합시다.” “알겠습니다.” 준상과 서윤은 천천히 방에서 빠져 나와 주차장으로 나왔다. “저 차는 그냥 준상씨가 타도록 하십시오.” 서윤의 말에 준상은 쓴웃음을 지었다. “어쩐지 족쇄 같군요.” “하하...” 준상의 말에 서윤이 난처한 표정으로 뒤통수를 긁적이고 있을 때였다. 접대를 왔는지 한 무리의 사람들이 차에서 내려 요정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는데, 문득 그 중 한 사람에게서 이변이 일어났다. 갑자기 몸에서 빛을 뿜어내더니 그대로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서윤과 준상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설마?” “...” 하지만 설마가 아니었다. 바로 그 시각. 세계 곳곳에서 방금과 같은 현상이 일어나며 사람들이 사라지고 있었다. 그제서야 사람들은 깨달았다. 처음의 실종 사건은 시작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그리고, 자신이 다음 차례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00088 트롤러 ========================================================================= 두 번째 대규모 실종 사건이 벌어진지 세 시간 후. 미국 백악관 웨스트윙 지하에 위치한 백악관 상황실에서는 긴급히 국가 안전 보장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이 모든 상황을 공개해야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적어도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국민들이 알아야만 합니다.” “말 같은 소리를 하십시오! 그랬다가 어떤 일이 일어날지 뻔히 아시는 분이!” “아니까 하는 소리 아닙니까! 언제까지 정보 통제가 먹힐 거라 생각하십니까?” 의견은 크게 둘로 나뉘어 있었다. 지금이라도 당장 투명하게 정보를 공개하고 한 명이라도 생존자를 늘리는 방향으로 일을 추진해야 한다는 국방장관과 사회에 미칠 파급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라도 가능한 한 정보를 통제해야만 한다는 재무장관의 의견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국방장관이 사람의 목숨을 대단히 소중하게 여기거나 해서 생존자를 늘리자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플레이어를 확보하는 것이 차후 미국의 안보를 유지하는데 더 큰 도움이 된다고 여기는 것일 뿐이랄까. 논쟁이 길어지자 참고인으로 배석하고 있던 윌킨슨 중령은 잠시 휴식을 취하기 위해 회의실을 빠져 나왔다. 그러자 눈치를 보고 있던 딜런 소위가 얼른 그의 뒤를 따른다. 윌킨슨 중령이 주머니에서 담배를 빼어 물자, 딜런 소위가 얼른 불을 붙여 주었다. 매캐한 담배 연기를 깊이 빨아들인 윌킨슨 중령은 이내 크게 숨을 내쉬며 연기를 내뱉었다. “후우우...” 그러자 옆에서 딜런 소위가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젠장... 이렇게 서로 잘났다고 떠들고만 있을 때가 아닌데.” “...” “하긴 빨리 비행기 타고 날아오라고 할 때부터 알아 봤지만...” “그만 하게.” “하지만...” “그만 하라니까.” “네...” 보통 사람들이라면 문제될 일이 없다. 하지만 플레이어들은 비행기나 배를 타는 일 자체가 그야말로 목숨을 거는 일이다. 수천 미터 상공의 비행기 안에서 갑자기 퀘스트가 발동되면 어떻게 될까. 퀘스트가 발동되어 불려가는 것 까지는 괜찮다. 그곳에서 죽을 고생을 하고 돌아온 다음이 문제일 뿐. 간신히 살아 왔는데, 돌아온 곳이 수천 미터 상공이라면... 지구로 돌아오기가 무섭게 하늘에서 곤두박질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배도 마찬가지다. 배 위에서 전송되었다고 다시 배 위로 돌아올 리가 없다. 그나마 강 위에서라면 좀 나을지도 모르겠지만, 망망대해에서 전송당하면 아무리 수영을 잘해봐야 결국은 저체온증으로 죽을 수밖에 없다. 만약 경험 많은 플레이어들이라면 이런 상황을 대비해서 낙하산이나 구명보트 같은 것을 챙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 새로 실종된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일을 당하고 있는 건지 제대로 알지조차 못하는 상태이니, 이런 식으로 비행기나 배 위에서 전송되어 버린 사람들은 설사 튜토리얼에서 살아남더라도 귀환 즉시 죽은 목숨이라고 봐야 한다. 윌킨슨 중령은 여전히 불만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애송이 소위에게 담배를 권했다. “감사합니다.” 니코틴의 진정 효과 때문일까. 딜런 소위의 불퉁했던 표정이 그나마 수그러든다. “아마... 공개 쪽으로 가닥이 잡힐 거야.” “하지만...” “다른 누군가 선수를 쳐버리면 나라꼴은 둘째 치고 내년 재선에 영향이 있을테니까.” 윌킨슨 중령의 말에 딜런 소위의 얼굴이 참혹하게 구겨진다. “빌어먹을...” 입 밖으로는 내지 않았지만 윌킨슨 중령 역시 같은 소리를 마음속으로 되뇌이고 있었다. 미국은 물론이고 세계 각국의 지도자들이 그렇게 정보 공개 여부를 놓고 고심하는 동안 다시 하루의 시간이 지났다. 세계 각국의 미디어들은 일제히 어제 일어난 두 번째 실종 사건을 놓고 갑론을박하고 있는 중이었다. 정부들이 중요 정보를 통제하고는 있었지만, 눈앞에서 사람이 빛을 뿜어내며 사라지는 모습을 수천만의 사람들이 목격한 마당이고, 그 소식이 소셜 네트워크를 타고 번져 나가자 언론들도 마냥 입을 다물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세상이 그렇게 두 번째 실종 사건을 두고 시끄럽게 요동치고 있을 즈음 준상은 거래를 마무리 짓기 위해 다시 임서윤과 만나고 있었다. “이겁니다.” “...” 임서윤은 자랑스럽게 자신이 개조한 컨테이너 하우스를 소개했다. “열 평짜리 컨테이너 하우스 두 개를 합쳤습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서 외벽은 압축 강판과 복합 장갑으로 마무리해서 어지간한 충격에는 끄떡없습니다. 보일러와 발전기는 물론 장비되어 있고, 연료가 떨어졌을 경우를 감안해서 지붕에 태양열 전지판을 장착했으며, 필요할 경우에는 장작 같은 원시적인 땔감으로 난방이나 발전을 할 수도 있습니다.” “대단하군요.” 자기가 쓰려고 준비해둔 것이라더니 과연 필요한 설비가 잘 갖추어져 있었다. 거실과 침실을 겸하는 앞쪽의 공간에는 티비와 오디오, 홈 시어터, 위성 수신기 등의 설비까지 완벽하게 마련되어 있었다. 임서윤은 한쪽 구석의 문을 열고 내부를 보여주었다. “이쪽은 욕실입니다. 수세식 변기는 물론이고 샤워 또한 가능합니다. 물탱크에는 아껴 쓰면 두 사람이 따로 보충 없이 일주일가량 사용할 수 있는 양의 물이 저장되어 있습니다. 침대와 책상 같은 가구는 벽에 접어 넣을 수 있도록 되어 있죠.” 임서윤은 벽 한 켠에 장치된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작은 소음과 함께 벽 한 켠이 펼쳐지며 테라스로 모습을 바꾼다. “이쪽 벽면은 이런 식으로 펼쳐서 테라스로 사용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이 유리창은 소총탄을 막을 수 있는 방탄 유리 재질입니다.” 서윤은 전면의 유리창문을 열고 나간 후 위쪽에 마련된 차양을 작동시켰다. “이런 식으로 테라스 위에 차양을 펼칠 수도 있습니다. 비좁은 내부 공간에 질리면 이런 식으로 분위기를 내보는 것도 괜찮겠죠. 물론 안전이 확보된 상황에서의 일이겠습니다만.” 이번에는 컨테이너 안쪽의 문을 열고 뒤쪽으로 들어갔다. “앞쪽이 주된 생활공간이라면 뒤쪽에는 주방과 기계실과 물탱크, 그리고 기타 용도로 사용할 수 있는 다용도실 두 개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이쪽이 다용도실인데, 보시면 벽에 접이식의 간이침대가 양 편에 두 개씩 모두 네 개가 설치되어 있어서 필요할 경우 방 하나에 네 명의 인원이 숙박할 수 있습니다.” 다용도실을 돌아본 후 임서윤은 기계실을 보여 주었다. “이곳이 기계실입니다. 보일러와 발전기, 그리고 장작을 태울 수 있는 아궁이가 설치되어 있죠. 가급적 구조가 간단하고 내구성이 강한 설비들로 채워뒀기 때문에 간단한 고장 정도는 여기 비치된 매뉴얼을 보시면 수리가 가능합니다. 비상용 예비 부품은 이쪽에 마련되어 있습니다.” 준상은 컨테이너 하우스를 돌아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 드는 군요.” “인벤토리만 많았어도 진작에 가지고 다녔을 텐데, 아쉽게도 두 개뿐이라 여유가 되질 않더군요. 지난번의 퀘스트처럼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경우가 별로 없었던 것도 이유겠지만요.” 준상은 고개를 끄덕인 후, 다시 주생활 공간이 있는 곳으로 나오며 말했다. “이번엔 제 물건을 보여드릴 차례겠군요.”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현금은 얼마나 준비되셨습니까?” “일전에 보여주신 분량이라면 지금 바로 지불할 수 있습니다.” “좋군요.” 임서윤은 곧바로 벽에 접혀 있던 탁자를 펼쳤고, 준상은 그곳에 벨카라스의 술라스 하먼에게서 빼앗아온 금괴 스무 개를 꺼내 놓았다. “순도 확인을 해보는 것이 먼저겠습니다만, 일단 첫 거래이고 하니 24K로 쳐서 계산해 드리겠습니다.” “편한 대로 하십시오.” 이렇게만 놓고 보면 임서윤이 손해를 보는 것 같지만, 원래 지금처럼 세상이 어수선할 때는 현금보다는 현물 자산의 가치가 더 높아지는 법이다. 게다가, 설령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이 정도의 손해를 발판으로 박준상 정도의 거물과 친분을 다질 수 있다면 그것 만으도 큰 이득이 된다. 준상은 임서윤에게서 현금을 건네받은 후 말했다. “요새도 총 쓰십니까?” “네? 예, 그렇습니다만.” 뜬금없는 말에 어리둥절해 하는 임서윤을 향해 준상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기왕 거래를 튼 김에 하나 충고해 드리죠. 총기에 너무 의존하지 마십시오.” “그게 무슨...” “이유가 궁금하시다면 미국 측의 동향을 한 번 살펴보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 임서윤이 마음에 들어서 이런 충고를 해준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정도의 능력을 지닌 거래처를 다시 구하기는 힘들 거란 생각에 한 마디 던져 준 것일 뿐. 거래를 마친 두 사람은 서로의 인벤토리에 바로 물건을 담았다. “좋은 거래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처분하실 물건이 있으시면 언제든 불러 주십시오.” 임서윤의 말에 준상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굳이 이렇게 벌지 않아도 이미 충분히 부자이신 듯 합니다만.” 그 말을 듣고 임서윤은 마주 웃었다. “원래 그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어떤?” “있는 놈이 더하다구요. 하하하.” “후후...” 두 사람은 간단하게 악수를 하고 바로 헤어졌다. 준상은 그대로 험비를 몰고 산맥 방향으로 차를 몰고 들어간 후, 인벤토리에 험비를 집어 놓고 산속으로 한참을 들어가 어느 작은 계곡에 접한 공터에서 발을 멈추었다. “이쯤이 좋겠군.” 준상은 공터의 지반을 살핀 후 그곳에 새로 얻은 컨테이너 하우스를 꺼내 놓았다. 고급 외장재를 쓴 탓인지 컨테이너 하우스보다는 고급 펜션 같은 느낌이다. 컨테이너 하우스의 설치가 끝나자, 준상은 그제서야 자신에게 속한 모든 소환물과 펫을 그곳에 불러들였다. “앗? 이곳은...” 빛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헤네스는 주위의 모습을 둘러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도 그럴 것이 요 며칠간 각진 건물과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만 보다가 이런 식으로 아름다운 자연이 살아있는 장소와 마주하니 이질감이 생긴 탓이다. “당분간 이곳에서 지낼 생각이다. 어때?” 준상의 말에 헤네스는 팔을 펼쳐 산 속의 싱그러운 공기를 한껏 들이마시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너무 좋아요. 사실 그동안 눈도 따갑고 목도 좀 아팠거든요.” “다행이군.” 준상은 일단 정령과 늑대들에게 주위를 경계하도록 했다. 그리고는 앞발을 모은 채 멀뚱히 서 있는 다람쥐에게 말했다. “그동안 고생했으니 너도 근처에서 놀다 와라.” 다람쥐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내 근처의 숲으로 후다닥 뛰어 들어갔다. “괜찮을까요? 혼자 저렇게 내보내도.” 헤네스가 걱정스럽게 말했지만, 준상은 피식 웃어 버렸다. “괜찮아.” 강력한 괴물들의 두개골도 가차 없이 갉아대는 녀석이 이런 산골의 연약한 들짐승에게 설마 지기야 하겠는가. 준상은 펜션의 벽을 열고 차양을 펼쳐 테라스를 완성한 후, 그곳에 탁자와 의자를 가져다 놓았다. 그러자 바로 헤네스가 나서며 말했다. “차는 제가 끓여 올게요.” “그래주면 고맙고.” 헤네스는 준상이 꺼내준 버너를 능숙하게 조작해 물을 끓이고 티백에 담긴 차를 우려냈다. 준상은 그녀가 끓여준 차를 마시며 조용히 말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당분간 이곳에서 머물면서 수련을 할 생각이다.” 헤네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어떨지 몰라도, 준상은 아직 자신이 충분히 강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 작품 후기 ============================ 읽으시는 분들은 몰라도 쓰는 입장에서는 사실 아이템이나 보상 내용 쓰는게 가장 머리 아프고 시간도 많이 잡아먹습니다. 그냥 그렇다구요. 00089 트롤러 ========================================================================= 준상이 다시 말했다. “그래서 당분간은 좀 불편하더라도 양해해 주길 바란다.” 헤네스는 고개를 저으며 미소를 지었다. “도시의 모습이 신기하기는 하지만, 아직은 저도 이런 풍경 쪽이 더 익숙한 걸요. 아까도 말했지만 이쪽이 훨씬 공기도 좋구요.” “그렇게 생각해 주면 다행이고.” 대답은 저렇게 해도 문명이라는 것이 한 번 맛을 들이면 빠져 나오기 힘든 것임을 알기에 준상은 역시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혹시 필요한 건 더 없나?” 헤네스는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없어요. 뭐가 필요한지조차 모를 정도인걸요.” 이것은 겸양이 아니었다. 지난 며칠간 헤네스는 자신이 살던 곳과 이곳의 문명 차이를 여실히 절감하고 있었다. 부드럽고 따뜻한 옷부터 시작해서, 피부를 촉촉하게 유지시켜 주는 화장품에 이르기까지, 상황이 조금만 여유로웠더라도 저쪽 세상의 금을 모두 끌어 모을 정도로 신기한 물품들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로 속옷만 해도 그렇다. 브래지어나 팬티는 말할 것도 없고, 거들이니 네글리제니... 정말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돌아가 버릴 정도의 정교함과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것들은 저쪽 세상에서는 만들고 싶어도 흉내조차 내지 못할 종류의 물건이다. 어쨌거나... 헤네스는 차를 다시 한 모금 들이킨 후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 “왜?” “저도... 수련을 해보고 싶어요.” “...” 안 될 것은 없다. 준상의 수련이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광전사 계열의 콤보를 장착한 상태로 활성화된 재생력을 이용해 최대한 몸을 혹사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준상과 함께 수련을 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광전사 콤보가 필요한데, 이 부분은 얼마 전에 영웅 등급의 광폭 카드를 얻음으로서 충족이 되었다. 만약 그녀가 준상의 반, 아니 반의 반 만큼의 능력만 지니게 되어도 퀘스트를 수행함에 있어서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잠깐 동안 불러내어 욕쟁이 할매의 콤보 효과만을 사용하는 것이 아닌 이상, 계속해서 불러내기 위해서는 늑대라든가 정령으로 그녀를 보호할 필요가 있는데, 좀비 정도만 스스로 이겨낼 수 있어도 그런 식의 전력 분산을 최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까지는 혼자 힘으로도 어떻게든 밀어붙여 임무를 수행했지만, 물리적으로 두 사람 이상이 힘을 합치지 않으면 진행이 불가능한 경우가 생길 수도 있다. “흠...” 어차피 그녀의 고향인 이벨류아나 그곳이 속한 국가인 델로드란에 언제 돌아가게 될지 모르는 이상, 자신을 지킬 정도의 능력을 지녀서 손해될 일은 없다. 하지만 문제는, 과연 곱게 자란 양가집 규수인 헤네스가 거친 준상의 수련을 따라 올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내 수련은 굉장히 힘들다.” 준상의 말에 헤네스는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노력할게요. 뭐부터 하면 되죠?” 마치 일생일대의 중요한 결정을 눈앞에 둔 것 같은 헤네스의 모습에 준상은 피식 웃어 버렸다. “수련은 내일부터 할 생각이니, 미리 힘 뺄 필요 없다.” “아...” “오늘은 일단... 사온 물품들도 정리해서 이곳에 채워넣고, 빨래들도 말리고 해야겠지. 도와주겠지?” “네! 물론이죠!” 준상과 헤네스는 티타임을 마친 뒤, 인벤토리에 쌓여있는 물품들을 꺼내 컨테이너 하우스 안에 수납하기 시작했다. 준상은 기존에 사용하던 다섯 개의 캐비닛을 모두 꺼낸 다음 그 안에 쟁여둔 물품들을 분류했다. 야전에서 급할 때 바로 꺼내 쓸 수 있는 물품과 옷가지, 비상식량 들을 하나로 합쳐 캐비닛 하나에 담아 넣고, 나머지 캐비닛은 전리품 위주로 채워 넣은 뒤 컨테이너 하우스 안의 다용도실 하나를 비워 그 안에 모셔두기로 했다. 준상은 전리품을 정리하다가 생명력 증가 5퍼센트짜리 은반지 하나를 하나 집어 들고는 추가 생명력 7퍼센트짜리 시드 하나를 장착한 다음 헤네스를 불렀다. “헤네스!” 헤네스는 밖에서 빨래를 널고 있다가 준상의 외침을 듣자 바로 달려왔다. “네?” 무슨 일인가 싶어 어리둥절해 하는 헤네스를 향해 준상은 손에 들고 있던 은반지를 던져 주었다. “이거 써라.” “...” 헤네스는 준상이 갑자기 반지를 던져주자 화들짝 놀랐다. “이, 이건...” “생명력을 높여주는 반지다. 대단한 건 아니지만 끼고 다니면 몸을 단련하는데 도움이 될 거다.” “네...” 특별한 의미가 있는 건 아니라는 듯한 준상의 말에 실망한 헤네스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삐죽거리다가 문득 결연한 표정으로 반지와 손을 함께 내밀며 말했다. “끼워 주세요.” “뭐?” 준상은 당돌한 헤네스의 말에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헤네스는 다시 한 번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끼워 주세요. 직접.” 마치 떼어 먹은 돈 갚으라는 듯한 헤네스의 모습에 준상은 피식 웃으며 손을 뻗어 그녀의 왼쪽 검지손가락에 반지를 끼워 주었다. 헤네스는 손가락에 반지가 끼워지자 어쩐지 몸에서 활력이 샘솟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반지 자체의 효과와 시드가 지닌 능력을 합쳐 12퍼센트나 되는 생명력이 일시에 증가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현상이다. “됐니?” “네!” 헤네스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손가락에 끼워진 은반지를 만지작거리다가 이내 후다닥 밖으로 달려 나갔다. “녀석.” 준상은 피식 웃고는 다시 전리품 정리를 계속했다. “룰룰루...” 헤네스는 신바람이 나서 어제 밤에 티비에서 흘러나왔던 흥겨운 리듬을 자신도 모르게 흥얼거렸다. 뭐랄까. 어쩐지 말로만 듣던 신혼 생활 같은 느낌이랄까. “꺄아!” 헤네스는 머리속에 떠오른 신혼이라는 말에 자신도 모르게 달아오른 뺨을 두 손으로 부여잡고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렇게 붕붕 떠 있는 듯한 기분으로 빨래를 하나 가득 줄에 내걸고 있는데, 문득 숲이 들썩거리더니 조그마한 생물 하나가 툭 하고 튀어 나왔다. 테라스에서 졸린 표정으로 늘어져 있던 늑대들이 일시에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새로 나타난 것은 다름 아닌 주머니 다람쥐였다. 다람쥐는 탁자 위로 폴짝 뛰어 올라가더니 콧노래를 부르며 빨래를 널고 있는 헤네스를 향해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내 주머니에서 도토리 하나를 꺼내어 껍질을 갉아대기 시작한다. 헤네스는 빨래를 하다 말고 바각대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응? 언제 왔니?” 헤네스가 물었지만, 다람쥐는 거들떠도 보지 않고 도토리를 갉아대는 일에만 정신이 팔려 있다. “...” 어쩜 저렇게 주인이랑 행동이 똑같은지. 자신은 신경도 쓰지 않고 자기 할 일만 하고 있는 다람쥐의 모습에 헤네스는 한숨을 푸욱 내쉬고야 말았다. “에휴...” 헤네스가 한숨을 푸욱 내쉬자 마침 전리품 정리를 끝내고 밖으로 나오던 준상이 물었다. “왜 한숨을 내쉬고 그래?” “그냥요. 그쪽 일은 다 끝나신 건가요?” “그럭저럭. 빨래는 이게 단가?” “네.” 준상은 헤네스가 차마 손대지 못하고 한쪽에 놔둔 자신의 속옷을 빨랫줄에 걸며 말했다. “점심은 뭐 먹을래?” “음... 잘 모르겠어요.” “음식 이름을 모르는 거야? 아니면 뭘 먹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거야?” “둘 다요.” “훗.” 준상은 해맑게 웃으며 대답하는 헤네스의 모습에 마주 미소를 지어 보이다가, 탁자 위에서 벌써 몇 개째 도토리를 까먹느라 정신없는 다람쥐를 발견했다. 나가 놀라고 했더니, 어디 다른 다람쥐들의 창고라도 털어온 건 아닐까. 주머니에서 계속해서 도토리가 쏟아져 나오는 걸 보니 어쩐지 예전에 봤던 만화 캐릭터가 떠오른다. 그러고 보니 이름 지어주겠다고 해놓고 지금까지 잊고 있었다. “이름이라...” 준상이 다람쥐를 보며 중얼거리자 헤네스가 바로 되물었다. “네? 이름이요?” “응. 이 녀석에게 이름을 지어준다고 해놓고 잊고 있었거든.” “아하, 어떻게 지으시게요?” “몽이가 어떨까 하는데.” “몽이요?” 헤네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다시 말했다. “한 글자는 너무 외로워 보여요.” “그럼?” “몽몽 어때요?” “...” 몽이나 몽몽이나 그게 그거 아닌가 싶기는 했지만 어차피 만화 캐릭터에서 끝자만 따온 자신도 성의 없기는 마찬가지다. “괜찮군.” “헤헤...” 준상은 다람쥐에게 다가가서 펫 정보를 띄운 후 이름을 새겨 넣었다. “자, 앞으로 네 이름은 몽몽이다.” 하지만 다람쥐는 그렇게 말하는 준상을 바라보며 한 번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내 주머니에서 커다란 밤톨을 꺼내 다시 열심히 갉아대기 시작한다. “이거야 원, 알아 듣는 건지 못 알아 듣는 건지.” “후후훗!” 아무튼 짐을 정리하고 쌓아두었던 빨래를 말리다 보니 하루가 훌쩍 가버렸다. 곱게 자란 아가씨라 그런지는 몰라도, 헤네스는 저녁을 먹고 나자 피곤한지 이내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헤네스?” “음... 네?” “졸리면 가서 씻고 자.” “후아아암... 네...” 헤네스는 졸린 눈으로 비틀거리며 욕실에 들어가서 대충 몸을 씻기 시작했다. 준상은 그런 헤네스의 모습에 피식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벽에 수납된 침대를 펼친 후 베게를 꺼내 그 위에 올려두었다. 헤네스는 몸을 씻고 잠옷으로 갈아입은 뒤 반쯤 감긴 눈으로 욕실을 빠져 나왔다. “죄송해요. 먼저 잘게요.” “그래.” 헤네스가 침대 안으로 기어들어가는 모습을 흘깃 바라보던 준상은 방의 불을 끄고 티비를 켰다. 그러자 곧바로 속보가 흘러나온다. “...XXX 백악관 대변인은 오늘 저녁 기자 회견을 열어 지난 일련의 실종 사건에 대한 정보를 공개했습니다. 백악관의 발표가 있자 우리 정부 또한 공식 논평을 통해 이와 같은 사실을...” 생각보다 며칠 더 걸리기는 했지만, 역시나 정보가 공개되고 있었다. 귀환자들이 겪었던 일들에 대해 밝혀진다는 것은 한국의 첫 번째 귀환자로 여러 매체에 이름이 알려진 준상의 행적 또한 재조명 받게 된다는 의미다. “아무래도 일이 골치 아파지겠군.” 준상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채널을 돌렸다. 하지만 모든 방송에서 백악관과 청와대에서 흘러나온 내용을 앵무새마냥 반복하고 있었다. 특히 중점적으로 다뤄지고 있는 것은 튜토리얼에 관한 내용이었다. “흠...” 어쩐지 예전에 자신이 겪었던 일들이 떠올라 준상은 얼굴을 찌푸렸다. 사실, 이런 식으로 튜토리얼에 대해 설명하는 건 어쩌면 의미 없는 일일 수도 있다. 바보가 아닌 이상 지금 알려지고 있는 튜토리얼의 내용이 그대로 반복되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시험이란 무언가를 가려내기 위해 존재하는 것. 이미 모든 사람이 그 문제의 답을 전부 다 알고 있다면 더 이상 변별력을 기대하기 어려운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런 점을 생각해 보더라도 이전의 시험 내용을 살펴보는 것이 완전히 불필요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적어도 상대가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알 수 있다면, 그에 걸맞은 해답을 찾기가 한결 쉬울 수밖에 없는 일. 이번에는 불행히도 그런 준비가 갖추어지지 못했지만, 다음에 또 이번과 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그때는 좀 더 살아 돌아오는 사람이 많아지리라. 준상은 혹시 자신이 모르는 정보가 있나 하고 잠시 더 지켜보다가 결국 티비를 끄고 말았다. “후...” 욕실로 들어가 간단하게 샤워를 한 뒤 침대로 다가갔다. 두꺼운 이불이 덥게 느껴졌던 걸까. 헤네스는 이불을 걷어 찬 채 잠옷이 뒤집어져 배를 드러내 놓고 있었다. “못 말리겠군.” 정말 뭘 믿고 이렇게 무방비한 건지. 쓴웃음을 지은 채 헤네스를 바라보던 준상은 염동력으로 잠옷을 다시 원래대로 고쳐준 다음, 벽장에서 좀 더 얇은 이불을 꺼내 원래의 것과 바꾸었다. 그리고는 조용히 침대 위로 올라가 잠이 들었다. 그렇게 다시 별 일 없이 하루가 지나고, 아침이 밝았다. 준상은 날이 밝아오자 바로 눈을 떴다. 그리고는 헤네스가 깨지 않도록 조심조심 욕실로 들어가 대충 몸을 씻은 후 운동복으로 갈아입었다.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오자, 그 소리를 들었는지 헤네스가 반쯤 감긴 눈으로 몸을 일으켰다. “후아아암... 안녕히 주무셨어요.” “그래.” “어디 가세요?” “운동하러.” “잠깐만요... 저도 같이 가요.” “...” 헤네스는 비틀비틀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나 준상에게 다가왔다. “피곤하면 더 자도 된다.” 하지만 헤네스는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이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같이 수련하기로 했잖아요.” 그리고는 곧바로 욕실로 들어가더니 대충 얼굴만 씻은 다음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후아아암...” 말총머리를 한 모습으로 늘어지게 하품을 한 헤네스는 준상의 팔에 팔짱을 끼며 말했다. “가요.” “그래.” 두 사람은 간단하게 산악구보부터 시작했다. 물론 간단하게라는 말은 어디까지나 준상에게나 해당되는 것이지 이런 격한 운동을 처음 해보는 헤네스에게는 그야말로 지옥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헉... 헉...” 결국 얼마 가지도 못하고 온몸에서 아지랑이를 가득 피워 올리며 늘어지고 말았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헤네스를 바라보며 준상이 말했다. “이만하면 됐다. 오늘은 늑대를 타고 따라와라.” “하지만...” “말 들어.” “네...” 결국 헤네스는 중간부터는 크림슨 울프의 등에 탄 채로 준상이 달리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우우... 입맛이 없어요.” 갑자기 격한 운동을 한 탓에 입맛마저 날아가 버렸지만, 준상은 가차 없었다. “먹어.” “...” 엄한 표정으로 수저를 들이미는 준상의 모습을 보고, 헤네스는 그제서야 후회했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수련 전에 미리 준상이 그녀의 콤보 카드를 광전사로 바꿔둔 탓에 재생률의 덕을 볼 수 있었다는 점이다. 수련은 그 뒤로 며칠간 계속 이어졌다.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째서인지 새로운 퀘스트는 날아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우우... 먼저 잘게요.” “그래.” 녹초가 되어 거의 기다시피 침대로 들어가는 헤네스의 모습에 피식 웃던 준상은 보상 습득 기한이 거의 끝나감을 깨달았다. 나중을 위한 대비로 남겨두려 했었던 것이지만, 이래서야 시간 낭비만 한 꼴이다. 준상은 입맛을 다시며 하를라간 방어 퀘스트의 보상을 수령했다. 그러자 이내 한 줄기 빛과 함께 한 차례 레벨업 현상이 발생했다. 피로가 사라지며 몸이 가뿐하게 회복되자 준상은 먼저 구원자 등급의 추가 보상 상자부터 열었다. 카드정보 명칭 : 강력한 곰의 영혼 레벨 : 1Lv 경험치 : 0 등급 : Super Rare 분류 : 아이템 성장 : 일반(대) 속성 : 땅 효과 : 장착시 강력한 곰이 영혼이 사용자에게 빙의하여 방어도와 인내력이 크게 상승하고, 저항력과 공격력이 추가로 상승합니다. Cost : 30 Seed : 4슬롯 “슈퍼 레어?” 첫 번째 카드가 영웅급이 아니라는 사실에 준상은 얼굴을 찌푸렸다. 기존에 사용하던 언커먼 등급의 카드보다 성능은 확실히 나아졌지만, 어쩐지 좀 손해 본 듯한 기분이다. 카드정보 명칭 : 포박 레벨 : 1Lv 경험치 : 0 등급 : Uncommon 분류 : 스킬 성장 : 일반(중) 속성 : 없음 효과 : 상대의 목을 잡아 들어올려 움직이지 못하게 만듭니다. Cost : 15 Seed : 3슬롯 “포박이라...” 뭔가 좀 미묘한 느낌이다. 상대를 움직이지 못하게 한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쓸모가 없어 보인다고나 할까. 준상은 입맛을 다시며 다음 보상을 확인했다. 아이템정보 명칭 : 축복의 성수 레벨제한 : 10 종류 : 포션 등급 : Uncommon 효과 : 복용시 모든 상태이상에 대한 저항력을 상승시킵니다. 지속시간 : 5분 재사용 대기시간 : 10분 남은 사용횟수 : 10회 설명 : 이 축복받은 성수는 모든 나쁜 기운으로부터 사용자를 보호합니다. “으음...” 나름 쓸모는 있겠지만, 구원자 등급의 보상 상자에서 나온 보상치고는 역시 뭔가 아쉬운 느낌을 저버릴 수가 없다. 상자를 늦게 열어서 그런 건 아닐까. 준상은 그런 생각까지 떠올리며 나머지 히든 퀘스트 보상도 확인했지만, 언커먼 등급의 듀얼스톰 카드와 산들바람 카드가 하나 더 나왔을 뿐이다. “오늘은 영 운이 안 좋군.” 준상은 랜덤카드를 뽑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하나 남은 걸 놔두기도 뭐해서 그냥 열어 버렸다. 카드정보 명칭 : 물어뜯기 레벨 : 1Lv 경험치 : 0 등급 : Rare 분류 : 스킬 성장 : 조숙(대) 속성 : 없음 효과 : 1. 대상이 되는 적 1개체를 물어뜯어 교상을 입힌다. 2. 기본 공격력 10% 상승. 3. 공격속도 10% 상승 Cost : 15 Seed : 3슬롯 레어 카드가 나오긴 했는데 하필이면 이젠 잘 쓰지도 않는 물어뜯기다. “...” 어쩐지 퀘스트 자체도 별로 수행하고 싶지 않더니, 보상도 하나 같이 마음에 안 든다. 그나마 시드나 아이템은 괜찮은 것이 나왔으니 다행인가. 준상은 입 안이 텁텁해졌다. 어쩐지 한 잔 마시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느낌. “맥주가...” 주방의 소형 냉장고를 열어서 맥주캔을 찾았다. 그리고 밖으로 나와 오랜만에 달빛을 바라보며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면 이렇게 느긋하게 술을 마시는 것도 오랜만이 아닐까 싶다. 준상은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며 마지막까지 캔을 비운 후 몸을 씻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에게 새로운 퀘스트가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다시 사흘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00090 트롤러 ========================================================================= 그날도 준상은 오전의 수련을 간단하게 마치고 헉헉대며 정신 못 차리는 헤네스에게 강제로 점심을 먹이고 있었다. “먹으면 토할 것 같단 말이에요.” 예전 같으면 식탁에서 이런 식의 말은 절대로 하지 못했겠지만, 지금은 그런 예의나 체면을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준상은 헤네스의 울상이 된 표정에도 굴하지 않고 그녀에게 수저를 내밀었다. 결국 헤네스는 억지로 밥 한 그릇을 비울 수밖에 없었다. “우우...” 식사가 끝나기가 무섭게 헤네스는 침대 위에 널브러져 버렸다. 준상은 헤네스의 그런 모습을 보고 피식 웃은 후, 탁자에 놓인 식기를 대충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침대에 누워 있던 헤네스가 비척거리며 몸을 일으키더니 싱크대로 다가온다. “됐으니 가서 쉬어라.” 준상이 만류했지만, 헤네스는 고개를 저었다. “싫어요.” “...” 그러고 보면 헤네스도 준상과 닮은 점이 하나 있다. 일단 하겠다고 마음먹은 일에 대해서는 절대로 물러서지 않는다는 것이 바로 그런 점이다. 하기야 그런 고집이라도 있지 않은 이상은 준상의 수련을 단 며칠이라도 버텨내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겠지만 말이다. 준상과 헤네스는 좁은 주방의 싱크대에 나란히 선 채 함께 설거지를 했다. 설거지를 마친 다음 따뜻한 우유라도 한 잔 줘야겠다는 생각을 떠올리던 준상은 문득 눈앞에 퀘스트 메시지가 도착한 것을 보고 몸이 굳었다. “후우...” 준상이 한숨을 푸욱 내쉬자 옆에서 말없이 설거지를 돕던 헤네스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채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요?” “퀘스트다.” “...” 헤네스의 표정이 이내 딱딱하게 굳었다. “마무리 지어라. 난 바깥을 정리하고 오마.” “네.” 준상은 곧바로 바깥에 놔둔 탁자와 의자를 실내로 가져다 놓고, 빨래줄을 걷은 다음 테라스를 접었다. 그리고 바깥에서 빈둥거리던 늑대들과 몽몽이를 소환해제한 다음 안으로 돌아와 펼쳐놨던 침대와 탁자를 다시 접고 보일러와 발전기를 껐다. 헤네스는 설거지를 마친 후 식기장을 걸어 잠그고 나왔다. “물은 잠궜지?” “네. 염려 마세요.” “그럼 일단 들어가 있어라.” “네.” 헤네스가 가슴에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은 채 한줄기 빛을 뿜으며 역소환되자, 준상은 빼먹은 것이 없는지 내부를 다시 점검한 다음 밖으로 나와 인벤토리에 컨테이너 하우스를 수납했다. 그러자 며칠간 두 사람의 보금자리가 되었던 산속 작은 계곡은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어쩐지 조금 쓸쓸한 기분을 느끼며 그 풍경을 바라보던 준상은 캐비닛을 꺼내 전투 장비를 몸에 착용했다. 애쉬달의 부츠를 신고, 다시 그룬발의 망토를 두른 준상은 남은 시간 동안 잠시 휴식을 취하다가 전송에 임했다. 마침내 시간이 되어 한 줄기 빛이 몸을 감싸더니, 이내 준상은 지금까지 있던 산 속이 아닌 어느 황량하고 장대한 계곡 위에 걸쳐진 구름다리에 도착해 있었다. “...” 계곡 위를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 때문에 다리가 흔들리자 준상은 얼른 옆의 밧줄을 잡으며 몸을 지탱했다. 다리의 폭은 성인 남자 네 명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갈 수 있을 정도였으며, 길이는 약 백 미터 가량 되어 보인다. 준상은 일단 만약을 대비해 투명화로 모습을 숨긴 다음 시야에 나타나는 퀘스트 정보를 확인했다. 천상의 다리를 수호하십시오. :안제르망 대협곡에 만들어져 있는 이곳 천상의 다리는, 에슈탈렌 북부와 중부를 잇는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입니다. 어둠의 군세에게 장악 당한 북부 지방의 수복을 위해서도, 그들에게서 도망쳐 나오는 피난민들의 수용을 위해서도 이곳은 절대로 수호되어야만 합니다. 저들의 군세에 놀라 도망친 수비대를 대신해 중앙군이 도착할 때까지 다리를 지키십시오. [중앙군 도착까지 남은 시간:67시간 36분] [이 퀘스트는 여러 명의 인원이 동시에 참여합니다.] (Hidden) 추격대장 갈란드를 처치하십시오. (협력) ->미완료. (Hidden) 추격대에 쫓기는 피난민을 구출해 남쪽으로 호송하십시오. (협력) ->미완료. (Hidden) 갈란드로부터 적의 작전 계획서를 습득하여 중앙군에게 전달하십시오. (단독) ->미완료. “...” 퀘스트 정보를 확인한 준상은 미니맵을 통해 북쪽을 가늠한 다음 천천히 다리를 건넜다. 투명화 자체의 제약 때문에 다소 느긋하게 다리 끝에 도달하자 먼저 도착한 것으로 보이는 플레이어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모두 2남 1녀. 준상까지 합치면 이번 퀘스트는 네 명이 진행하도록 되어 있는 모양이다. “한 명이 안 보이네요.” 보이시한 숏컷의 헤어스타일을 한 채 패딩 점퍼로 몸을 감싼 여성이 그렇게 입을 열자 남자 중 하나가 얼씨구나 하고 대답했다. “설마 도착하다가 잘못 해서 떨어진 건 아닐까요. 하하...” 나름 농담이었던 모양이지만 다른 두 사람의 반응은 싸늘하기만 했다. “그걸 지금 농담이라고 하는 건가요?” 여자가 한심하다는 듯이 쏘아 붙이자 말을 꺼냈던 조금 경박한 분위기의 남자는 자기가 생각해도 좀 아니었다 싶었는지 머리를 긁적이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나쁜 뜻으로 한 말은...” “됐어요.” “...” 이번에는 침묵을 지키고 있던 건장한 체구의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그는 등에 커다란 짐을 메고 있었는데, 형태로 보아서는 검과 방패인 듯 싶었다. “저번에 이벨류아인가, 그곳의 퀘스트에 참여하셨던 분 계십니까?” 그러자 바로 여자가 대답했다. “저요. 모처럼 편히 자겠다 싶었는데 갑자기 완료되어 버렸죠. 아저씨도 그곳에 계셨었나요?” 아저씨라는 말에 남자가 쓴웃음을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저 아직 서른도 안됐습니다.” “그래요? 하지만 남자는 군대 다녀오면 다 아저씨라던데요.” “크흠...” 당연하다는 듯한 여자의 말에 남자는 잠시 헛기침을 하고는 말을 돌렸다. 준상은 투명화로 몸을 숨긴 채 통찰의 능력으로 가만히 그들의 능력을 가늠해 보았다. 경박한 분위기의 남자는 아예 파란색이고, 다른 두 사람은 그나마 녹색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어쨌거나, 함께 힘을 합쳐야 하니 서로 통성명이라도 해요. 전 이민서라고 해요.” 여자의 말에 건장한 체구의 남자가 대답했다. “송동준입니다.” 그러자 옆에서 눈치를 보고 있던 경박한 분위기의 남자도 얼른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저는 주광명이라고 합니다. 빛 광자에 밝을 명, 그야말로 광명이죠. 하하.” “안 물어 봤거든요?” “아, 예...” 그들이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 모습을 지켜보던 준상은 이 퀘스트를 어떻게 해결할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자신은 일단 논외로 치더라도, 다른 세 사람의 모습을 봐서는 그다지 난이도가 높을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그냥 이전처럼 빠르게 퀘스트를 해치우고 귀환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하지만 당장 미니맵에 퀘스트 표식이 나타나지 않는 이상 무턱대고 움직이기도 힘든 상황. 게다가 히든 퀘스트 중에 하나는 보스로부터 작전 계획서를 탈취해 후에 도착할 중앙군에게 전달하는 것이 목표였다. 즉, 준상 혼자 앞서 나가 적을 분쇄한다고 해도 중앙군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려야만 퀘스트가 끝날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굳이 앞서 나가서 고생하느니 차라리 이곳에서 조금 느긋하게 기다려 보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에픽 퀘스트처럼 엄청난 보상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사서 고생할 필요는 없는 일이라고나 할까. 게다가 급히 돌아가 봐야 또 언제 불려올지 몰라 전전긍긍해야 하는 건 마찬가지. 준상은 마침내 결론을 내리자 투명화를 풀고 다리 앞에 넓게 펼쳐진 공터로 걸음을 옮겼다. 이번 퀘스트를 어떻게 수행할지에 대해 의견을 나누어 볼 생각으로 막 입을 열려고 하던 이민서는 갑자기 뒤에서 준상이 쓰윽 자신을 지나쳐 앞으로 걸어나가자 화들짝 놀랐다. “까, 깜짝이야!” 그나마 이민서는 나은 편이었다. 그녀를 훔쳐보고 있던 주광명은 허공에서 갑자기 준상의 모습이 쓰윽하고 나타나는 모습에 기겁해 버리고 말았다. “유, 유령?” 송동준 역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지만, 다리 앞의 공터를 살피는 준상의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기만 했다. 이민서는 놀란 가슴을 진정되자 대뜸 준상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이봐요! 사람을 놀래켰으면...” 하지만 그녀는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갑자기 준상의 앞에 왠 커다란 집 한 채가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어? 어? 저, 저거?” 하지만 준상은 그러거나 말거나 다시 주위에 늑대들을 소환해 풀어 놓고는 그대로 집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저, 저거... 뭐가 어떻게 된 거죠?” 그러자 송동준이 조용히 말했다. “컨테이너 하우스군요. 그것도 꽤 고급사양의.” “그게 아니라요! 저런 것도 가능한 건가요? 허공에서 갑자기 튀어 나왔잖아요!” 이민서의 외침에 송동준은 턱을 쓰다듬더니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일전에 이벨류아에서 연합 사람들에게 들은 적이 있습니다. 상위 랭크의 플레이어 중에는 보상으로 인벤토리를 습득한 사람들이 있다고요. 아마도 그걸 사용한 것이 아닐까요.” “인벤토리요?” “저도 그냥 그런 게 있다는 걸 듣기만 해서 자세히는 모릅니다.” “와...” 하지만 준상은 밖에서 세 사람이 자신을 두고 입방아를 찧거나 말거나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안으로 들어와 의자에 앉은 다음 헤네스와 몽몽을 불러냈다. 이미 집 주위에는 늑대들과 정령들을 풀어둔 상태라 그의 허락이 없이 다른 사람은 접근할 수 없는 상태다. 헤네스는 한 줄기 빛과 함께 모습을 드러내자 이내 눈앞에 앉아 있는 준상을 향해 물었다. “어? 다시 집 안이네요?” “그래.” “설마 벌써 퀘스트가 끝난 건가요?” “아니.” 준상은 고개를 저어보이고는 이번 퀘스트의 내용을 간단하게 설명했다. “음... 그럼 어찌 되었든 사흘 정도는 이곳에서 지내야 한다는 얘기군요.” “그 말대로다. 일단 앉아라.” “네.” 헤네스는 준상이 손짓으로 의자를 권하자 자리에 앉았다. “그래서 말이다만, 나는 이번 퀘스트에서 중요한 일 이외에는 나서지 않을 생각이다.” “네? 하지만...” “물론 보스나 추가 목표는 내가 해치우겠지만, 그 외의 자잘한 적들은 네가 맡아 봤으면 한다.” “제가요?” “그래.” 준상은 헤네스를 바라보며 계속 말했다. “지난 며칠간 고된 수련을 따라오느라 고생이 많았다.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수련을 해도 실전을 거치지 않으면 소용없는 일. 마침 이번 퀘스트의 난이도가 너에게 적합한 것 같으니 앞으로를 위해서도 실전을 경험해 두는 편이 좋을 것 같다.” “...” 어차피 준상은 현재 레벨이 너무 급격하게 오른 상황이라 어지간한 적을 사냥하는 것으로는 변변하게 경험치를 얻지도 못한다. “강요할 생각은 없다. 싫으면 그냥 이곳에서 편히 지내다 가도 상관없다.” 준상의 말에 헤네스는 잠시 생각하다가 가슴에 손을 얹고 심호흡을 한 번 하더니 주먹을 불끈 쥐며 대답했다. “저, 한 번 해볼게요.” 그리고 다시 뭐라고 말하려는데, 밖에서 누군가 시끄럽게 고함을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봐요! 좀 나와 봐요!” 목소리를 들어보니 이민서라는 여자인 듯 하다. 물론 준상은 그러거나 말거나 다시 헤네스에게 뭔가를 말하려 했지만, 또다시 이민서의 고함소리가 문 밖에서 들려온다. “사람 말 안 들려요? 좀 나와 보라니까요!” “...” 아무래도 가만히 놔뒀다가는 밤새 저러고 떠들어댈 것 같은 분위기다. 준상은 얼굴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켰다. “저...” “앉아 있어.” 헤네스는 준상을 따라 몸을 일으키려다가 차갑게 가라앉은 그의 눈빛을 보고는 그대로 다시 주저 앉았다. 준상은 그대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늑대들과 대치하고 있는 세 사람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앗, 나왔다! 이봐요! 우선 이 늑대들부터 좀...” 이민서는 준상이 모습을 드러내자 바로 그렇게 입을 열었지만, 이번에도 그녀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어, 어어...” 말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준상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안광을 마주하는 순간, 그대로 몸이 굳어버린 탓이다. 이민서의 뒤를 따르던 두 남자 역시 상황은 마찬가지. 준상은 잠시 말없이 그들을 바라보다가, 다시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갔다. 00091 트롤러 ========================================================================= 준상이 다시 집 안으로 모습을 감추고 나서야 민서는 지금까지 멈춰져 있던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흐어억...” 그리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패딩 점퍼의 속주머니에 들어있던 약통을 꺼낸다. 약통을 털어 그 안에 담겨 있는 흰 알약을 펼쳐진 손바닥으로 옮기려 했지만, 덜덜 떨리는 손은 마음먹은 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민서는 약을 쏟아 버리고 말았다. 송동준은 준상의 시선으로부터 쏟아지는 끔찍한 공포에서 겨우 벗어나자 목덜미에 솟은 식은땀을 닦았다. 그러다가 앞에 서있던 민서가 땅바닥에 무언가를 쏟아버리더니 그대로 주저앉는 모습을 보고는 얼른 그녀에게 다가가 앉았다. “야, 약을...” 조금은 오지랖 있어 보이던 그녀의 모습은 간데없이 창백해진 얼굴로 벌벌 떨고 있는 모습에 송동준은 혀를 차며 땅바닥에 떨어진 흰 알약들 가운데 몇 개를 집어 그녀의 입에 가져다주었다. 그러자 민서는 그 가운데 두 개를 얼른 받아 삼켰다. 민서가 약을 삼키자 동준은 다시 여기저기 흩어진 알약들을 약통에 주워 담았다. 그리고, 그가 약을 거의 다 담았을 즈음이 되어서야 민서의 손떨림이 겨우 멎기 시작했다. “죄송... 합니다.” 민서의 말에 동준은 고개를 저으며 약통을 건네주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이거...” “감사합니다.” 민서는 동준으로부터 약통을 받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무슨 약일지는 대충 짐작이 간다. 동준 역시 튜토리얼인지 뭔지를 거치고 나서 한동안 안정제를 입에 달고 살았던 전력이 있기 때문이다. 하물며 지금껏 이런 일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던 평범한 여자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는 일. 아마도 처음에 과하게 나섰던 것은 그런 자신을 부인하기 위한 무의식적인 행동이 아니었을까 싶다. 동준이 민서를 부축해 일으키자, 그때까지 별 말없이 있던 주광명이 입을 열었다. “와, 저 형님 무섭네요. 눈에서 그냥 붉은 빛이 쏴하고 쏟아져 나오는 것이 아주 그냥...” 민서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다시 흠칫 몸을 떨었고, 송동준은 그 모습을 보고는 광명에게 넌지시 말했다. “그쯤 해두시죠.” “예? 아, 예...” 민서는 약 십여분 정도가 더 지나서야 겨우 이전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후... 말 한 번 걸어 보려고 했다가 죽을 뻔 했네요.” “...” 동준이 말없이 바라보자 민서는 쓴웃음을 지으며 다시 말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요. 내가 비정상인거 나도 잘 아니까.” 민서의 말에 동준은 조용히 말했다. “어떤 약인지는 모르지만, 중독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죽는 것보다는 낫잖아요?” “...” 동준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민서는 혀를 찼다. “농담도 못하겠네. 하긴 이런 걸 농담이라고 떠드는 나도 웃기지만.” “맞습니다. 하하...” 여전히 분위기 파악 못하며 웃는 광명의 모습에 동준과 민서는 다시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저 남자, 도대체 얼마나 강한 걸까요.” 민서의 말에 동준은 컨테이너 하우스쪽을 잠시 바라보다가 말했다. “모르긴 해도 아까 그 눈빛... 아, 죄송합니다.” “아뇨, 괜찮아요. 계속 말해 봐요.” “네. 저런 식의 특수 능력을 본 적은 없지만, 우리가 느꼈던 공포가 그의 능력중 하나라면, 그것만 가지고도 어지간한 적들은 가볍게 때려잡을 수 있을 겁니다.” 민서는 동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가 있네요.” 그리고는 컨테이너 하우스 쪽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 눈빛을 마구 뿌리면서 저 늑대들만 조종해도 어지간한 상대들은 그냥 죽어 넘어가겠죠?” “아마도...” “좋겠다. 나도 저런 능력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우... 그나저나 바람 좀 덜 부는 곳으로 가요. 여기 너무 춥네요.” “그럽시다.” 거칠 것 없는 협곡 위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찬바람이 쌩쌩 몰아치자 뼛속까지 시려온다. 세 사람은 일단 바람이 좀 덜한 바위 뒤로 자리를 옮겼다. “음... 각자 어떤 능력이 있는지는 알아야겠죠?” 민서의 말에 동준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등에 지고 있던 짐을 풀어 보이며 말했다. “보시다시피 전 검사입니다. 검과 방패를 사용하죠. 아쉽게도 갑옷은 구하질 못했습니다만.” “그거 좋은 거에요?” “별로 좋은 건 아닙니다. 어쩌다가 그냥 퀘스트 중에 얻은 물건이죠.” 그런가 하며 고개를 끄덕이던 민서는 뒤이어 자신의 능력을 공개했다. “전 격투 쪽이에요. 어릴 때 태권도를 조금 배웠었는데, 아마 그것 때문이 아닐까 싶네요.” “격투 쪽은 실력이 없으면 흉내 내기도 힘들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냥 좀... 어릴 때 상 몇 번 타본 적이 있긴 해요.” “역시 그랬군요.” 동준은 멀뚱히 지켜보며 눈치를 살피고 있는 광명에게 물었다. “광명씨는 어떤 능력입니까.” 그러자 광명은 기다렸다는 듯이 품에서 회칼 하나를 꺼내 보여 주었다. “제가 다른 건 몰라도 이걸로 나쁜 놈들 배때기 찌르는 거 하나는 기가 막힙니다. 하하...” “...” 어쩐지 전직이 의심스러워지는 발언이다. 이렇게 되고 나니 뭔가 나사가 하나 빠진 듯 보이던 것조차 섬뜩하게 느껴진다. 동준은 일부러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크흠, 어쩌다 보니 전부 근접 계열이군요. 이렇게 되면 역시 전술은 한 가지 뿐이겠는데요.” “다리 입구를 막는 건가요?” “일단 제가 방패를 가지고 있으니 앞에서 막고 두 분이 치고 빠지는 식이면 될 것 같습니다만. 문제는 역시 적이 원거리 무기를 가지고 있을 경우겠군요.” 그 말이 나오자 세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컨테이너 하우스 쪽을 바라보았다. 동준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물론 저 사람이 전혀 개입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서의 얘기겠지만요.” 동준의 말에 민서 역시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어쩐지 들러리가 된 느낌인데요.” 그리고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들러리건 뭐건 간에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상관이야 없지만요.” “동감입니다.” 바로 그때. 컨테이너 하우스의 문이 다시 열렸다. 먼저 준상이 모습을 드러냈고, 뒤를 이어 갈색 머리를 하나로 묶은 헤네스가 나왔다. “어?” 처음에는 그런가 보다 하고 멀뚱히 바라보던 세 사람은 이내 눈을 비볐다. “저 여자애... 누구죠?” “그, 글쎄요. 아까는 분명히 없었는데.” 두 사람은 갑자기 나타난 정체불명의 소녀를 보고 당혹해 했지만, 광명은 부럽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캬... 저런 집을 들고 다니는 것도 모자라서, 저런 깔쌈한 여자애까지 옆에 끼고 다니는 건가요. 와, 진짜 저 형님 완전 부럽네.” “...” 어쨌건 헤네스는 세 사람이 주목하는 가운데 붉은 늑대의 등에 안장을 채우고 거기에 올라 앉았다. 헤네스가 준비를 마치자, 준상은 인벤토리에서 안장을 꺼내어 유령 말을 소환했다. “헉!” 늑대 등에 안장을 채워서 타고 다니는 거야 뭐 그럴 수도 있다 치지만, 갑자기 유령 말을 소환해 내는 모습에 세 사람은 다시 눈이 휘둥그레졌다. 준상은 유령 말의 소환이 끝나자 천천히 고삐를 움직여 말을 몰아보더니, 이내 컨테이너 하우스를 다시 인벤토리에 수납했다. 그리고 어깨에 몽몽이가 폴짝 뛰어 오르자, 준상은 헤네스와 함께 북쪽 방향으로 말을 몰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디를 가는 거죠?” “그, 글쎄요.” 순간 민서와 동준은 아차 싶었다. 성격은 좀 지랄 맞아도 저 정도의 고수가 있으면 이번 퀘스트는 좀 편하겠다 싶었는데, 갑자기 말도 안하고 떠나버리니 당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자, 잠깐...” 하지만 민서가 다시 다급하게 손을 내밀며 외쳤을 즈음에는 이미 준상과 헤네스는 시야 저편으로 사라져 가는 중이었다. “어, 어쩌죠?” “...” 민서가 말했지만, 동준이라고 딱히 할 말이 있을 턱이 없다. 헤네스가 그렇게 망연히 자신들을 바라보는 세 사람의 모습을 돌아보며 말했다. “어디 간다고 얘기라도 해주고 와야 하는 거 아닐까요?” 하지만 준상은 신경 쓸 필요 없다는 듯이 짧게 대답했다. “필요 없다.” “...” 매몰차게 느껴지는 준상의 말에 헤네스는 입을 삐죽거렸다. 하지만 준상은 헤네스가 그러거나 말거나 말을 몰아 주위의 지형을 살피기 시작했다. 대략의 지형을 확인하며 주위를 확인하고 있는데, 문득 수레에 짐과 어린 아이들을 싣고 이쪽으로 급히 달려오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헤네스.” “네.” 준상이 이름을 부르자 헤네스는 알았다는 듯이 바로 붉은 늑대를 몰아 그들에게 달려갔다. 수레를 끌고 오던 사람들은 갑자기 커다란 붉은 늑대가 달려오자 기겁했다가, 다시 그 위에 올라탄 갈색 머리의 소녀를 보고 크게 놀랐다. “강아지, 강아지...” 수레에 탄 꼬마가 붉은 늑대를 보며 그렇게 말하자, 헤네스는 밝게 웃으며 그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천상의 다리로 가시는 건가요?” 친절한 헤네스의 말에 가장으로 보이는 중년 남자가 얼른 대답했다. “네, 맞습니다.” 헤네스는 바로 그 말을 받았다. “잘됐네요. 저희가 도와드릴게요.” 그리고는 준상의 뒤를 조용히 따르고 있던 다른 두 마리 늑대들에게 손짓했다. “얘들아. 이리 와봐!” 준상이 고개를 끄덕이자 두 마리 늑대는 곧바로 헤네스의 옆으로 다가왔다. 송아지만한 늑대들이 다가오자 사람들은 다시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헤네스는 중년 남자를 향해 말했다. “멍에는 있나요?” “예? 이, 있습니다.” 남자는 얼른 수레에 실려 있던 멍에를 꺼내왔다. 헤네스는 덩치가 큰 다이어 울프에게 멍에를 매도록 한 다음, 수레 옆에 서서 길을 인도했다. 준상은 가만히 그녀의 행동을 지켜보며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추격자들을 경계했다.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천상의 다리에 도착했다. 갑자기 준상과 헤네스가 사라지자 안절부절하던 세 사람은 그들이 한 무리의 피난민을 데리고 돌아오자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리에 도착하자 헤네스는 수레를 끌던 다이어 울프에게서 멍에를 풀어준 뒤 피난민들에게 말했다. “다리를 건너가시면 이제 괜찮을 거에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피난민들은 헤네스에게 인사를 한 뒤 얼른 수레를 끌고 바람에 흔들리는 다리를 위태한 모습으로 건너갔다. 이들이 시작이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수많은 사람들이 손에 짐을 들거나 수레를 끌고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헤네스는 붉은 늑대를 탄 채로 다른 늑대들을 몰아 그런 피난민들을 다리로 인도했고, 준상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주위를 경계했다. 이렇게 되자 이민서와 송동준, 그리고 주광명, 이렇게 세 사람은 꿔둔 보리자루 마냥 멍하니 다리 옆에 쭈그리고 앉아 준상과 헤네스의 모습을 구경만 해야 했다. “어쩐지... 들러리가 된 느낌인데요.” “느낌만 그런 게 아니라, 들러리가 된 것이 맞아요.” 피난민들의 행렬은 그날 밤 늦게까지 이어지다가, 새벽이 될 즈음에 이르러서야 겨우 끝이 났다. 밤새 피난민들을 인도하느라 정신없이 뛰어다니던 헤네스는, 더 이상 천상의 다리로 오는 사람들의 모습을 찾을 수 없게 되자 그제서야 다시 준상이 꺼내놓은 컨테이너 하우스로 돌아와 휴식을 취했다. “좋겠다. 저런 집에서 잘 수도 있고.” “뭐... 그만큼 고생했으니까요.”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부러운 건 어쩔 수 없네요.” 준상은 늑대들로 하여금 컨테이너 하우스를 지키게 한 다음, 정령들은 다리 주위에 넓게 배치시켜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추격자들을 경계했다. 그렇게 다시 시간이 지나고, 아침이 밝아올 무렵이 되어서야 비로소 추격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준상은 피로로 인해 곯아 떨어져 있던 헤네스를 조용히 깨웠다. “헤네스.” “으음...” “적이다.” “...” 적이라는 말에 헤네스는 번쩍 눈을 뜨고 얼른 침대에서 일어났다. “어, 어디요?” “오는 중이다. 준비해라.” “네.” 헤네스는 얼른 욕실로 들어가 세수를 하고는 준상이 챙겨준 장비들을 하나씩 몸에 걸쳤다. 그녀의 발에 맞게 제작한 군화에, 이전에 준상이 사용하던 것과 비슷한 징박힌 가죽 장갑을 끼고 나자 준상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처음이니 무리하지 말고 경험을 쌓는 일에만 집중해라. 다치지 말고.” “네.” 헤네스는 준상의 말에 바로 대답했지만, 동작은 몇 년 동안 기름칠이라고는 전혀 하지 않은 로봇마냥 삐걱대고 있었다. “긴장되나?” “아, 아뇨.” 준상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아무리 스스로가 바란 일이라고는 해도, 지금 이 소녀를 이렇게 자신과 같은 길로 인도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직접 피와 살이 튀는 전투 속에서 적의 뼈를 부수고 그 생명을 취하는 그 모든 일들을 과연 이 소녀가 감당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런 길로 인도한 자신을 그녀는 정말 원망하지 않을 것인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을 보자, 이 눈치 빠른 소녀는 준상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헤네스는 가만히 손을 뻗어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준상의 손을 잡더니 그대로 끌어내려 그 손가락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잠시 기도를 드리듯 그렇게 준상의 손가락에 입을 맞추고 있던 헤네스는 이내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키스해 주세요. 그날 밤처럼.” 그날 밤이라... 어차피 준상이 헤네스에게 키스 비슷한 행위를 한 것은 단 한 번 뿐이다. 어둠의 군세를 해치우기 위해 홀로 금단의 숲으로 향하던 날, 이벨류아를 떠나며 그녀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어 준 일이 바로 그것이다. 준상으로서는 이 갈색 머리 소녀의 앞길에 행운이 가득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요정 들이 그에게 해 주었던 행위를 흉내낸 것에 불과했지만, 따지고 보면 지금 헤네스가 이렇게 준상과 함께 지내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라 할 수도 있다. 준상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헤네스의 눈을 바라보던 그는 가만히 머리를 끌어당긴 다음 눈을 감고 이마에 입을 맞추어 주었다. 그리고 천천히 이마에서 입술을 떼는데... 갑자기 헤네스의 두 손이 숙여진 준상의 목을 휘감았다. 준상은 깜짝 놀라 눈을 뜨다가, 부드럽고 촉촉한 입술이 자신의 입술에 겹쳐지는 것을 느꼈다. 00092 트롤러 ========================================================================= 잠시 후, 헤네스는 준상에게서 떨어지더니 이내 고개를 푹 숙인다. 필사적으로 용기를 내어 그의 입술을 훔치는 것까지는 성공했지만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너무 대담한 짓이었다 싶었던 탓이다. “저... 가벼운 여자 아니거든요?” 말 해놓고도 이게 무슨 소린가 싶다. “아니, 제 말은 그게 아니라... 그러니까...” 잠시 얼이 빠져 있던 준상은, 기세 좋게 입술을 빼앗아 놓고 그렇게 갈팡질팡하는 헤네스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훗.” “우, 웃지 말아요.” “푸후후...” “웃지 말라니까요.” “푸하하하하하!” 헤네스는 얼굴이 잔뜩 새빨개진 채로 폭소를 터뜨리는 준상을 노려보았다. “씨이... 웃지 말...” 하지만 그녀는 갑자기 자신의 몸을 강하게 껴안는 준상의 행동에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헤네스는 갑작스런 준상의 행동에 잠시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이내 귓가에 들려오는 준상의 목소리에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헤네스.” “네!” 군기가 바짝 든 신병 같은 대답에 준상은 다시 한 번 피식 웃다가 그녀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다치지 마라.” 이전보다 훨씬 다정한 그의 말에 헤네스는 가만히 손을 들어 그의 등을 감싸 안으며 대답했다. “네...” 잠시 그렇게 서로의 체온을 만끽하던 두 사람은 집 밖에 대기하고 있던 늑대들이 일제히 짖어 대기 시작하자 그제서야 아쉬운 표정으로 떨어졌다. “가자.” “네.” 밖에서 모닥불을 피워놓은 채 떨고 있던 세 사람은 갑자기 늑대들이 짖어대는 소리를 듣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 뭐지?” “일어나요. 혹시 모르니까.” 세 사람은 계곡에서 불어오는 추운 바람에 굳어버린 몸을 급히 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이 몸을 채 다 풀기도 전에, 저 멀리 능선 쪽에서 검은 그림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 놈들은 잠도 없나.” “그러게 말이에요.” 투덜거리면서도 신경을 곤두세우며 각자의 장비를 점검하는데, 그제서야 컨테이너 하우스의 문이 열리며 갈색 머리의 소녀와 예의 무서운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두 사람은 뭔가 얘기를 나누는가 싶더니, 이내 남자 쪽이 갑자기 모습을 감추었다. “엇!” “사, 사라졌다?” 처음 봤을 때 유령처럼 사라졌던 걸 기억하고 있던 그들이었지만, 뻔히 보는 앞에서 허깨비처럼 준상의 모습이 사라지자 다시금 놀라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세 사람이 다리 입구를 막아선 채 그렇게 수군거리고 있을 때, 헤네스는 저 너머에서 천천히 다가오는 검은 그림자들을 보며 주먹을 꼭 쥐었다. 준상에게 수련을 받고 여기에 피칠갑 카드나 광전사 콤보가 지닌 재생률 덕분에 신체 능력이 빠르게 상승하기는 했지만, 그녀는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그 작은 주먹으로 누군가를 때린다는 일은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던 양갓집 규수였다. “후우우우...” 헤네스는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저 멀리에서 다가오는 적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바로 그때, 갑자기 적진 한복판에 준상이 모습을 드러내더니, 인벤토리에서 두 개의 철구를 꺼내 들고 그대로 듀얼스톰을 펼친다. 다리를 공격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접근하던 괴물 십여 마리는 갑작스런 준상의 기습에 대항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박살이 나버렸다. “어?” “저, 저거...” 긴장하며 다리 입구를 지키고 있던 세 사람은 그대로 얼이 빠졌다. 뭔가 휙 하고 나타나는가 싶더니, 그대로 괴물들이 부서져 나가버렸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거죠?” “그, 글쎄요.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하지만 그들이 얼빠진 대화를 나누거나 말거나, 준상은 포박을 펼쳐 일부러 남겨둔 괴물 한 마리의 목을 잡아 챈 후, 그대로 위상전이를 통해 헤네스의 곁으로 돌아왔다. “헤네스.” “네.” “상대해 봐라.” “...” 준상은 그렇게 말한 후 잡아온 괴물을 그녀 앞에 던져 주었다. 괴물은 잠시 얼이 빠져 있다가, 동료들을 순식간에 피떡으로 만들어버린 남자의 손에서 풀려나자 헐레벌떡 도망치려 들었다. 하지만 그런 괴물의 앞길을 늑대와 정령들이 가로 막았다. 순식간에 적에게 포위되었음을 깨달은 괴물은 당황했다. 얼른 허리춤에서 조악한 단검을 꺼내 위협을 가해 봤지만, 주위를 둘러싼 존재들 중 그 누구도 반응하지 않았다. 오직 하나, 헤네스만 빼고. -키야악! 괴물은 그 같은 모습을 보고 즉시 알아챘다. 이 가운데 가장 약한 것이 바로 이 인간 여자라는 사실을. 이 여자를 인질로 삼으면 도망칠 수도 있지 않을까. 괴물은 그런 생각이 떠오르자 곧바로 괴성을 지르며 눈앞의 인간 여자, 헤네스를 향해 달려 들었다. -키약! 키가 작은 괴물이 한층 더 자세를 낮추며 달려들자 헤네스는 흠칫 몸을 떨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준상의 가르침을 떠올리며 자세를 잡았다. -방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로부터 몸의 중심선을 차단하는 것이다. -중심선이란 몸을 반으로 접는다고 가정했을 때 생기는 접힌 선을 생각하면 되겠지. 물론 실제로 그렇게 몸을 접으면 죽겠지만. -몸의 중심선에는 대부분의 치명적인 급소들이 존재한다. 정수리, 미간, 인중, 인후, 명치, 기해, 회음 같은 곳이 바로 그곳이다. -이런 급소들은 강하게 직격 당할 경우 호흡 장애나 운동 장애를 일으킬 수도 있고, 크게는 즉사할 수도 있는 치명적인 곳이다. -격투의 기본은 나의 중심선을 보호하면서, 상대의 중심선을 제압하는 것이다. -전투에 들어서면 항상 발꿈치를 들어라. 발바닥을 온전하게 땅에 붙이고 있으면 그만큼 반응 속도가 느려진다. -무게 중심은 항상 앞쪽에 삼분의 이를 둔다. 무게 중심이 뒤로 쏠리게 되면 방어는 견고해질지 몰라도 이동과 방향 전환이 느려진다. -눈은 적의 눈을 향하되, 시야는 항상 적의 몸 전체를 담을 수 있어야 한다. 헤네스는 그 모든 말들을 하나하나 되새기며 자세를 잡았다. 양 팔꿈치를 옆구리에 붙이고 자세를 낮춘 헤네스의 시야에 괴물의 손에 들린 단검이 빠르게 찔러오는 것이 보였다. 순간, 헤네스의 입에서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바보.” 그러자 살기등등하게 단검을 찔러오던 괴물이 일순 멈칫한다. 헤네스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좌우로 몸을 흔들며 괴물에게 달려들었다. 괴물은 갑작스럽게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 듯한 느낌에 당혹해 하다가, 인간 여자가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며 달려들자 허겁지겁 단검을 끌어당겨 자신의 몸을 보호하려 했다. 하지만 바로 그때, 헤네스의 입에서 또다시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멍청이.” 괴물은 다시 한 번 몸이 굳는 것을 느꼈고, 그 틈을 타고 헤네스의 주먹이 괴물의 복부에 틀어박혔다. -케엑! 명치에서 조금 빗나가긴 했지만, 헤네스의 작은 주먹은 괴물의 갈비뼈 아래를 파고 들었다. 괴물에게는 불운하게도 그곳은 바로 간과 쓸개가 위치한 곳이었다. 헤네스는 몸을 구부리며 뒤로 물러나는 괴물에게 다시 추가 공격을 가하려 했으나, 괴물이 발악하듯 휘두른 단검에 뺨을 베이고 말았다. “읏!” 피칠갑 카드가 지닌 재생력의 효과 덕분에 상처는 빠르게 아물어 갔지만, 피부를 스치고 지나가는 날붙이의 섬뜩한 느낌은 아직 전투에 익숙하지 않은 헤네스를 멈칫거리도록 만들었다. 뒤늦게서야 자신이 좋은 기회를 놓쳤음을 깨달았지만 이미 괴물은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 다시 자세를 잡고 있었다. 헤네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괴물은 이제 헤네스가 생각보다 훨씬 만만치 않은 존재임을 깨닫고 공격보다는 수비에 집중하고 있었다. 무게 중심을 뒤로 둔 채 단검을 좌우로 휘두르니 맨손인 헤네스로서는 좀처럼 다시 파고 들기가 쉽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헤네스는 맨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기가 없는 것은 아니다. “똥벌레.” -킥? 속삭이듯 흘러나온 말에 괴물은 움찔하며 반응했고, 헤네스는 그 틈을 노려 군화발로 내밀어진 단검을 걷어차 버렸다. “힉!” 뭐하는 짓인가 싶어 멀뚱히 바라보던 주광명이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단검에 놀라 펄쩍 뛰었지만, 그 순간 헤네스는 양 팔꿈치를 옆구리에 붙인 상태로 자세를 낮춘 채 무장이 해제된 괴물을 향해 빠르게 다가서고 있었다. 괴물은 유일한 무기인 단검을 놓치자 당황해 하며 손을 휘저었지만, 제대로 방어 자세를 취하기도 전에 헤네스의 두 주먹이 놈의 머리에 연거푸 작렬했다. -케엑! 완전히 기선을 잡았음을 깨달은 헤네스의 입에서 다시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광전사.” 그러자 기존에 그녀가 장착하고 있던 욕쟁이 할매 카드들이 빠져 나오고, 그 자리에 얀트훈센의 광전사 콤보가 장착되었다. 추가 공격력 100퍼센트 증가, 그리고 여기에 추가 공포 유발 확률 30퍼센트까지. 헤네스는 자신의 몸에 강력한 힘이 충만하는 것을 느끼며 팔을 휘둘러 괴물의 턱을 팔꿈치로 찍어 버렸다. 그러자 괴물은 강렬한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목이 획 돌아가며 그대로 바닥을 나뒹굴었다 “훅... 후욱...” 정신을 잃은 채 바닥에 널브러진 괴물의 모습을 본 헤네스는 준상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하자, 준상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죽여라.” “...” 헤네스는 조금은 냉막한 그 말에 잠시 움찔했다. 싸워서 이기긴 했으나, 그것이 끝이 아님을 깨달은 탓이다. 하지만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헤네스는 입술을 잘근 깨물고는 괴물에게로 다가가 그 머리를 있는 힘껏 걷어찼다. 그러나 그녀의 힘으로는 한 번에 괴물을 죽일 수 없었다. 그래서 두 번, 세 번 연거푸 공격을 가해야만 했다. 결국 계속된 타격으로 인해 괴물은 머리뼈가 함몰되고 목뼈가 부러지면서 절명하고 말았다. 그녀가 괴물을 완전히 끝장내자, 그제서야 준상이 다가와 그녀의 머리를 끌어당겨 가슴에 안았다. “수고했다.” “...” 헤네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몸을 가늘게 떨며 준상의 허리를 감싸 안았을 뿐이다. 준상은 몸 전체로 흐느끼듯 떨고 있는 헤네스를 데리고 천천히 컨테이너 하우스로 들어가 버렸다. 다리 입구에서 멀뚱히 그 모습을 바라보던 세 사람은 그제서야 입을 열었다. “어째 굉장히 소외 받는 느낌인데요.” “들러리니까요.” “...” 준상은 컨테이너 하우스 안으로 들어오자, 다시 헤네스에게 말했다. “이만 씻고 쉬어라.” 하지만 헤네스는 준상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잠시 주저하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그냥... 이대로 있고 싶어요.” “...”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가만히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소리 없이 시간은 흘러 이내 새벽이 지나고 아침이 밝아 오기 시작했다. 조용한 컨테이너 하우스 안에서 서로의 체온을 음미하고 있던 두 사람은 문득 뭔가가 문을 바각거리며 갉아대는 소리를 들었다. “...” 준상과 헤네스는 서로를 바라보고는 피식 웃어 버리고 말았다. “제가 열어줄게요.” “그래.” 헤네스는 조금 아쉬운 표정으로 준상을 안고 있던 손을 풀어낸 후 몸을 돌려 문을 열었다. 그러자 작은 무언가가 쏜살같이 달려 들어와 펼쳐져 있던 탁자 위로 냉큼 뛰어오른다. 그것은 다름 아닌 몽몽이였다. 작은 다람쥐 몽몽이는 탁자에 올라앉더니 추운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는 자신을 잊고 가버린 것에 대해 항의하듯 앞발로 탁자를 탁탁 두드린다. “풋!” 준상과 헤네스는 몽몽이의 그런 모습에 결국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00093 트롤러 ========================================================================= 준상은 추운 바깥에서 고생하고 들어온 다람쥐에게 호두와 땅콩을 한줌씩 쥐어 건네주었다. 몽몽이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탁자를 팡팡 두드리고 있다가, 호두와 땅콩이 눈앞에 잔뜩 쌓이자 얼른 그것들을 자신의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시치미를 뚝 떼며 그것들을 하나씩 꺼내 까먹기 시작한다. 그 모습을 웃음 띤 얼굴로 바라보고 있던 헤네스는 준상이 자신에게 다가와 가만히 장갑을 벗기자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준상은 그런 그녀의 반응을 무시한 채 불그스름하게 달아오른 손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재생 능력 덕분에 많이 가라앉기는 했지만, 여전히 조금은 부어 있는 듯한 느낌이다. “주, 준상씨.” 갑작스런 그 행동에 놀란 헤네스가 그렇게 이름을 부르자, 준상은 밖에서 주위를 경계중이던 정령 가운데 눈꽃송이를 불러 들였다. “눈꽃송이, 식혀 줘라.” 그러자 작은 얼음의 정령이 그녀의 손으로 내려 앉아 부어오른 손을 식히기 시작한다. “읏...” 헤네스가 차가운 감촉에 움찔하며 손을 움츠리자 준상이 가만히 말했다. “역시 무기를 쓰는 편이 좋지 않겠어?” 하지만 헤네스는 당치도 않다는 듯이 바로 거부의 뜻을 비췄다. “싫어요.” 그렇게 되면 당신에게 배울 수가 없잖아요. 헤네스는 그렇게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삼키며 완강하게 몇 번이고 고개를 저었다. “후...” 그런 헤네스를 보며 준상은 한숨을 내쉬었다. 흔히 만류귀종이니 뭐니 해서 검이 손의 연장이니 뭐니 하면서 검술 잘하면 주먹도 잘 쓴다는 식으로 말하는 경우가 간혹 있다. 하지만 애초에 만류귀종 운운 자체가 정말 경지가 극에 달해서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는 사람한테나 해당되는 말이 아니던가. 적어도 처음 무술을 익히는 사람에게 적용할 수는 없는 말이다. 애초에 무기술과 격투는 주로 사용하는 근육 자체가 다르다. 무기술만 놓고 보더라도 이건 마찬가지다. 기본적인 걷는 법부터 시작해서, 무기를 쥐는 법, 시선, 그리고 무게 중심까지... 어떤 무기를 쓰느냐에 따라 단련법도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준상이 익힌 것은 복싱을 기반으로 한 격투. 무기술은 기본적으로 무기를 잃으면 그 힘이 반감된다는 점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건 그 위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격투를 선택한 것이다. 요즘 들어서 랑다잘의 분노라든가 블러드서커 같은 무기를 주로 쓰고는 있지만, 이런 무기들은 기본적으로 강력한 힘을 기반으로 적을 단숨에 부숴버리는 종류의 것이라 기술의 정묘함은 그다지 찾아보기 힘든 것이 사실이고, 어쨌든 현재도 준상이 지닌 힘의 기반은 격투술이라 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준상이 헤네스에게 가르쳐 줄 수 있는 것도 오직 하나 격투술 뿐이었다. “고집하고는...” “...” 준상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하긴, 첫 전투를 무사히 마친 것만도 어딘가. 준상은 다시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에 남은 희미한 자국을 쓰다듬었다. “아팠니?” 헤네스는 준상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아플 틈도 없었어요.” “...” 그만큼 전투에 몰입했다는 뜻이리라. 준상은 고개를 끄덕인 다음 차분하게 말했다. “쉬어라. 다시 적이 나타나면 부를테니까.” “네.” 헤네스는 군화를 신은 채로 침대 위에 털썩 누웠다. 그리고 눈을 감으려다가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혼자 이렇게 침대에 누워 있으니 왠지 허전했다. 왜일까. 이유는 간단했다. 어느 틈엔가 그와 한 침대를 쓰는 것이 너무 자연스러워졌기 때문이었다. “...” 헤네스는 순간 자신이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 부끄러워서 얼른 손을 뻗어 베개를 집은 후 얼굴을 가렸다. 그리고 소리를 내지 않은 채 속으로 꺅꺅거리며 침대 위를 뒹굴기 시작한다. “...” 준상은 혼자 침대 위에서 베개를 감싸 안고 뒹굴뒹굴하는 헤네스의 모습을 보고 피식 웃어버렸다. 그리고 안도했다. 다행히 첫 살육의 충격이 그리 크지 않은 듯 했기 때문이다. 완전히 잠이 깨버린 모양이니 따뜻한 코코아라도 한 잔 타줄까.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일으키던 준상은 문득 주위를 경계하던 정령들로부터 다시금 멀리서 무언가가 급하게 접근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음...” 준상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베개를 안고 혼자 속으로 꺅꺅거리고 있던 헤네스가 얼른 반응했다. “적인가요?” “글쎄. 잘 모르겠다. 일단 나가 볼테니, 넌 쉬고 있어라.” “하지만...” “말 들어.” “네.” 강압적인 준상의 말에 헤네스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몸을 돌려 이불 속에 얼굴을 파묻었다. 모처럼 키스도 했는데. 뽀뽀도 아니고 키스였는데. 게다가 한참이나 서로 포옹까지 하고 있었는데. 여전히 자신을 아이 취급하고 있는 준상의 말투에 헤네스는 실망했다. 물론 자신이 뽀뽀와 키스의 차이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사실 따위, 헤네스는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녀가 어떤 생각을 떠올리고 있는지 눈곱만치도 예상하지 못하고 있던 준상은 그대로 컨테이너 하우스 밖으로 나와 곧바로 유령 말을 소환해 올라탔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몽몽이가 후다닥 달려와 당연하다는 듯이 준상의 어깨 위에 올라왔다. 다 꺼져 가는 모닥불 옆에서 뼈 속까지 스며들어오는 새벽의 한기에 몸을 오들오들 떨고 있던 세 사람은 다시 준상이 밖으로 나오자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무슨 일이지?” ”글쎄요.“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자기들끼리 수군거리거나 말거나, 준상은 늑대들을 컨테이너 하우스 주위에 남겨둔 채 유령 말을 몰아 북쪽으로 달려갔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무리의 사람들이 괴물들에게 쫒기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앞서서 도망치는 것은 조금 고급스러워 보이는 옷을 차려 입은 한 무리의 사람들이었고, 그들의 뒤에서 무장한 서너 명의 병사들이 뒤쫓는 괴물들을 막아내며 힘겹게 도주하고 있었다. 준상은 그 모습을 발견하자 곧바로 유령 말을 역소환 한 다음 그룬발의 망토를 사용해 몸을 가렸다. 그리고 위상전이를 연거푸 사용해 순식간에 괴물들 속으로 이동했다. 신나게 병사들의 뒤를 쫓으며 조악한 활로 화살을 쏘아대던 괴물들은 갑자기 자신들의 진형 한복판에 시커먼 이불보 같은 망토를 뒤집어 쓴 남자 하나가 모습을 드러내자 깜짝 놀라며 소리를 질렀다. -키야악! 다른 동료들에게 경계의 신호를 보냄은 물론이거니와 새로 나타난 적을 위협하기 위한 괴성이었지만, 불행히도 그것이 그들의 마지막 유언이 되고 말았다. 준상은 가차 없이 랑다잘의 분노를 들고 듀얼 스톰을 펼쳤다. 콰가가가각! 직경이 일 미터나 되는 거대한 철구는 무자비하게 공기를 가르며 괴물들의 몸을 짓이기고 분쇄해 버렸다. 그러자 멀찍이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몽몽이가 달려와 그런 괴물들의 머리 속에 있는 시드와 주위에 흩어진 아이템 들을 주워 모으기 시작한다. 헐레벌떡 도망치고 있던 사람들은 무언가가 터지고 갈려나가는 듯한 소음에 무심코 뒤를 돌아보다가, 폭풍처럼 휘몰아치며 괴물들을 휩쓸어 버리는 준상의 모습을 발견했다. “저, 저게 도대체...” 그리고 괴물들을 박살내 버린 준상이 다시 랑다잘의 분노를 인벤토리에 집어넣고 다가오자,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피난민들인가?” 그 말에 이들을 이끌고 여기까지 도망쳐 온 중년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소. 나는...” 남자가 자신의 소개를 하려고 했지만, 준상은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았다. “천상의 다리로 안내하겠다. 따라오도록.” “...” 남자의 옆에 서 있던 병사 하나가 준상의 말에 발끈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방금 전에 봤던 무시무시한 모습을 떠올리고는 얼른 입을 닫았다. 준상은 다시 유령 말을 소환한 후 그 위에 올라탔다. 그러자 아이템 습득을 마친 몽몽이 얼른 준상의 어깨 위로 올라온다. 그가 다시 한 무리의 피난민들을 이끌고 다리로 돌아오자, 컨테이너 하우스 앞에 앉아 있던 늑대들이 일제히 일어나더니 주인을 향해 달려왔다. 갑자기 송아지만한 늑대들이 몰려들자 피난민들은 기절할 듯이 놀랐지만, 이내 늑대들이 준상을 호위하듯 늘어서는 모습을 보자 다시 한 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준상은 천상의 다리 앞에 도착하자 피난민을 향해 말했다. “잠시 기다리도록.” 그리고는 유령 말을 역소환 하더니 그대로 컨테이너 하우스로 들어가 버렸다. 그냥 무시하고 가자니 준상의 무력이 두렵고, 그렇다고 계속 서있자니 계곡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에 뼈가 시린다. 난감해 하며 그렇게 서있는데, 다시 컨테이너 하우스의 문이 열리더니 준상과 함께 헤네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준상은 곧바로 컨테이너 하우스를 다시 인벤토리에 집어넣고는 헤네스와 함께 피난민들을 이끌고 있던 중년 남자에게로 다가왔다. 그러자 헤네스가 준상에게 물었다. “이 분이신가요?” “그래.” 준상이 고개를 끄덕이자 헤네스는 밝게 미소를 지으며 중년 남자에게 말했다. “던스렐씨죠?” 느닷없이 갈색 머리 소녀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던스렐은 깜짝 놀랐다. “그, 그렇소만?” “만나서 반가워요.” “바, 반갑소.” “부탁할 일이 있으실 거에요. 말씀해 보세요.” “...” 난데없는 헤네스의 말에 던스렐은 당황했지만, 이것도 이방인들이 지닌 신비한 능력이겠거니 하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하긴, 커다란 집도 한 순간에 사라지게 만드는데 자기 이름 정도 아는게 무슨 대수겠는가. “우선 내 소개를 하겠소. 나는 이곳 에슈탈렌 왕실의 제2왕자 던스렐이라고 하오.” 그 말에 헤네스는 깜짝 놀랐다. 설마 상대가 이곳 에슈탈렌의 왕자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탓이다. 헤네스는 얼른 양손을 가슴에 대고는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미처 알아 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놀란 것은 던스렐도 마찬가지였다. 영락없이 빛과 함께 나타난 이방인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갑자기 대륙 남부의 예법으로 인사를 해왔기 때문이다. 던스렐은 헤네스가 했던 것처럼 양손을 가슴에 대고는 살짝 고개를 숙인 후 대답했다. “괜찮으니 몸을 바로 하시오.” “감사합니다.” 던스렐은 잠시 헛기침을 하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외람되지만, 부탁을 하나 하고 싶소.” “말씀하세요.” “지금 저 남쪽에서는 지금쯤 중앙군이 이곳을 향해 진군 중일 것이오. 나는 여기 남아 다리를 지키는데 힘을 보탤 생각이지만, 내 가솔들을 이대로 그냥 보내려니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질 않소. 부탁인데, 내 가족들을 중앙군이 있는 곳까지 호위해 주지 않겠소?” “...” 헤네스는 대답하지 않은 채 준상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자기 멋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판단한 탓이다. 준상은 가만히 갱신된 퀘스트 정보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거절한다.” 가차 없는 준상의 말에 던스렐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 역시...” 그러나 준상의 말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일을 수행할 만한 사람을 소개해 줄 수는 있다.” “그게 무슨...” 준상은 고개를 돌려 다리 옆에 쪼그리고 앉아 모닥불을 쬐고 있는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 민서와 동준, 그리고 광명은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자신들에게로 향하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뭐, 뭐죠?” “글쎄요?” 왠지 눈치가 보여서 세 사람은 쭈뼛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준상은 어쩐지 별로 미덥지 않은 그들을 보며 잠시 혀를 차더니 던스렐에게 말했다. “저들을 데리고 가라.” “음...” 미덥지 않기는 던스렐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이방인인 것은 분명하기에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그리하리다.” 준상은 던스렐이 고개를 끄덕이자 다시 말했다. “그리고, 당신도 같이 가도록.” “나도... 말이오?” “다리를 지키는 일은 나와 이 아이만으로도 충분하다.” “하지만...” 던스렐이 급히 반박하려 했지만, 준상은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았다. 그리고는 곧바로 다시 말했다. “당신들이...” 당신들이 여기 남아봐야 방해만 될 뿐이라는 말을 하려 했던 것이지만, 준상은 말을 완전히 끝마치지 못했다. 옆에서 듣고 있던 헤네스가 얼른 끼어들어 그의 말을 막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지금 당장 지켜야할 대상은 다리가 아니라 가족이라는 말이에요.” “아...” “이곳은 저희들만으로 충분하니까, 안심하시고 가족을 보살피세요.” 던스렐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족이 걱정스러워 강대한 무력을 지닌 준상에게 그들의 호위를 부탁하려 했던 것이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지금처럼 급박한 상황에서 그처럼 강한 사람을 고작 호위 따위에 쓰는 건 낭비 밖에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알겠소. 그럼 그리 하리다.” “이해해 주셔서 다행이에요.” 헤네스는 밝게 미소 지은 얼굴로 던스렐에게 대답한 후, 그를 이끌고 모닥불 옆에 멀뚱거리며 서있는 세 사람에게 다가갔다. “여러분에게 한 가지 임무를 부탁드릴게요.” 그 말에 이민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임무요?” “네. 여기 던스렐 왕자님과 그 가족분들을 지금 북상중인 중앙군에게로 안전하게 호위하는 일이에요. 저희들이 이곳을 지키고 있는 이상 별다른 위험은 없을 거라 생각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여러분께서 함께 해주셨으면 해요.” 헤네스의 말이 끝나자 세 사람의 휴대폰이 일시에 울리며 새로운 서브 퀘스트의 도착을 알렸다. (Sub) 던스렐의 부탁 :에슈탈렌의 제2왕자 던스렐은 피난 중에 혹시라도 가족들에게 위협이 닥쳐올까 걱정하고 있습니다. 이들을 안전하게 호위하여 중앙군에게 인도하십시오. “앗!” 이대로 찬바람에 부들부들 떨다가 그대로 퀘스트가 끝나는 것 아닌가 싶었던 세 사람은 갑자기 나타난 서브 퀘스트를 보고 깜짝 놀랐다. 중앙군 도착까지는 아직 40시간이 남은 상태. 따라서 조금 긴 여행이 되긴 하겠지만, 준상이 이곳을 막고 있는 이상 이건 누워서 떡먹기나 다름없는 퀘스트다. “할게요! 하겠습니다!” 이민서가 손을 번쩍 들고 외치자, 송동준과 주광명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도 하겠습니다.” 그러자 던스렐은 기뻐하며 그들의 손을 잡았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별말씀을.” 간단하게 세 사람과 수인사를 나눈 던스렐은 미소를 지은 채 자신들을 바라보는 헤네스를 향해 조용히 물었다. “실례지만... 하나 물어도 되겠소이까?” “말씀하세요.” 던스렐은 헤네스의 허락이 떨어지자 무심한 눈길로 피난민들을 바라보고 있는 준상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부모님을 빼고 나한테 이토록 자연스럽게 하대를 하는 사람은 처음 보았소. 분명 신분이 범상치 않을 듯 한데, 혹시 알려줄 수 있겠소?” 그 말에 헤네스는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실 이건 비밀인데... 왕자님께만 알려드릴게요.” “오, 고맙소. 그래, 어디 한 번 말해 보시오.” 헤네스는 던스렐의 귀에 대고 이렇게 속삭였다. “사실 저분은...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천년왕국 신라의 왕족이세요.” “오오... 천년왕국 신라!” “비밀이에요. 아셨죠?” “알겠소. 나만 알고 있겠소이다.” 하지만 원래 모든 비밀이 다 그렇듯이 이날의 대화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게 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준상은 던스렐이 세 사람과 함께 가솔들을 거느리고 다리를 건너자 조용히 헤네스에게 물었다. “아까 귓속말을 하는 것 같던데, 무슨 말을 한 거지?” 그 말에 헤네스는 한쪽 눈을 찡긋해 보이며 대답했다. “거짓말이요.” “거짓말?” “그런 게 있어요.” “...” 00094 트롤러 ========================================================================= 어쨌거나, 모두가 떠나고 나자 다리 앞에는 이제 정말로 준상과 헤네스 단 둘만 남게 되었다. 준상은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던 컨테이너 하우스를 다시 꺼낸 다음, 간단하게 아침 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언제 전투가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이기에 거창한 음식은 무리인지라 비축해 두었던 전투식량을 꺼냈다. “이건 뭐에요?” “전투식량. 전투 중에 간단하게 먹을 수 있도록 만든 식사야.” “헤에...” 설명을 듣기는 했어도 뭔지는 잘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헤네스의 모습에 피식 웃어버린 준상은 도깨비불을 불러 반합에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시간이 지나 물이 대충 끓자, 봉지를 뜯고 물을 붓고 스프를 넣은 다음 지퍼백을 여몄다. “이걸로 준비 끝. 잠시 기다렸다가 먹으면 돼.” “오오!” 봉지를 뜯고 물만 부으면 끝이라니! 호시탐탐 요리를 해보고 싶어서 기회를 노리던 헤네스로서는 정말 대단한 발견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단순히 물을 끓여서 붓는 행위를 요리라고 부를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애매한 점이 많지만, 일단 시작이 중요한 일 아니겠는가. “저도 한 번 해볼래요.” 눈을 반짝이며 말했지만, 준상은 고개를 저었다. “다음에.” “우웅...” 어쨌거나 적당히 내용물이 물에 불려지자 준상은 지퍼백을 열고 마지막으로 참기름을 투하한 다음 헤네스에게 수저와 함께 건네주었다. “비벼 먹으면 된다.” “네!” 헤네스는 수저를 들고 준상을 따라서 열심히 내용물을 비빈 다음 조심스럽게 내용물을 떠 먹었다. “으음...” 뭔가 미묘한 느낌. 날이 추워서 그런지 뜨거운 물을 부었음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쌀이 잘 불려지지 않은 탓이다. 한동안 준상이 신경 써서 음식을 장만해준 탓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입이 고급이 되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맛이 없어도 일단 먹어둬. 돌아가면 맛있는 걸 사줄테니까.” 준상이 넌지시 한 마디 건네자, 헤네스가 얼른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뇨! 맛있어요!” 그리고는 허겁지겁 수저를 움직여 자신 몫의 음식을 비우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식감이 별로였지만, 그렇게 먹다보니 묘하게 맛이 있는 느낌이 드는 것도 같다. 준상은 그런 헤네스의 모습에 쓴웃음을 짓고는 비상식량 가운데 초코바를 하나 꺼내 그녀 앞에 내밀었다. “이건 디저트.” 헤네스는 초코바를 보자 일전에 시내에 나갔을 때 군것질 삼아 한 번 먹어 본적이 있었던 음식임을 알아차렸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식사를 하고 있는데, 문득 옆에 몽몽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초코바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헤네스는 자신들의 식사 모습을 멀뚱거리며 지켜보고 있는 이 작은 다람쥐가 어쩐지 눈에 밟혔다. “너도 먹을래?” 헤네스는 무심결에 자기 몫의 초코바를 조금 잘라 몽몽이에게 건넸다. 그러자 몽몽이는 이게 뭔가 싶었던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조심스럽게 헤네스에게서 초코바를 받아 앞발로 잡고 살짝 갉아 먹었다. 바로 그 순간. 몽몽이의 눈에서 번쩍 눈빛이 터져 나왔다. “응?” 갑자기 앞발을 부르르 떠는 모습에 헤네스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몽몽이는 얼른 자기 몫의 초코바를 주머니 속에 챙기더니 앞발을 마주 잡고 눈망울을 반짝이며 헤네스를 바라보았다. 더 주세요. 어쩐지 헤네스는 직접 말소리가 들린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귓가에 그런 환청이 들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 기묘한 압박을 견디지 못한 헤네스는 슬그머니 남은 초코바 조각을 몽몽이에게 내밀며 말했다. “더... 먹을래?” 그러자 몽몽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나운 맹수처럼 돌변해 자신 앞에 내밀어진 초코바를 강탈한 뒤 그대로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 헤네스는 잠시 얼이 빠져서 몽몽이가 사라져 버린 탁자 위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준상에게 말했다. “하나 더... 주시면 안 될까요?” 어쩐지 울상이 된 헤네스의 모습에 준상은 피식 웃으며 초코바를 하나 더 꺼내 주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몽몽이가 초콜릿 맛을 알아버린 이상, 디저트 관리에 좀 더 신경을 써야할 것 같다고 말이다. 어쨌든 조금 부산스럽게 아침 식사가 끝나고 나자, 대충 뒷정리를 끝낸 헤네스는 침대 위에 다시 벌러덩 누워 버렸다. “우아... 이상하게 배부르네요, 그 음식.” “그런가.” 따뜻한 녹차를 한 잔 타서 건네주자 헤네스는 그것을 받아 향기를 음미했다. 두 손으로 찻잔을 쥔 채 그 온기를 손으로 받아들이고 있던 헤네스가 문득 입을 열었다. “그 사람들... 무사하겠죠?” “아마도.” 무심한 준상의 대답에 헤네스는 입을 삐죽거리고는 다시 말했다. “그나저나 왕자님이라니, 아깐 정말 깜짝 놀랬지 뭐에요.” “어째서?” “음... 뭐랄까. 보통 왕자님이라고 하면 젊고 잘 생기고 그런 사람을 연상하잖아요. 근데 이번에 만난 그 분은 그냥 털털한 동네 아저씨 같은 느낌이더라구요.” “실망했나?” “실망이라기 보다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느꼈다고나 할까요.” “보통은 그런 걸 실망이라고 하지.” “그런가요? 후후...” 확실히 준상의 말이 맞기는 하지만, 굳이 실망감이라고 표현할 정도까지는 아니었다는 것이 헤네스의 생각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미 이상의 왕자 따위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 맞겠지만 말이다. 찻잔을 정리하기 위해 일어나 등을 돌리는 준상의 얄미운 뒷모습에 대고 습관적으로 꿀밤을 먹이는 시늉을 하던 헤네스는 다시 그대로 침대에 벌러덩 누워 버렸다. 옷은커녕 신발도 벗지 않은 채로 식사 후에 침대에서 뒹굴거리는 지금의 모습을 만약 유모가 보기라도 했다면 바로 불벼락이 떨어졌으리라. 문득 그런 생각을 떠올린 헤네스는, 왠지 피난민들의 모습이 고향에 남아있는 사람들의 모습과 겹쳐지는 것을 느꼈다. “에잇!” 헤네스는 어쩐지 조금 우울해지는 기분을 느끼자 작은 기합 소리와 함께 벌떡 일어나 준상에게 배운 체조를 하기 시작했다. 찻잔을 정리하고 주방에서 나오던 준상은 난데없이 혼자 도수체조를 하고 있는 헤네스의 모습을 보고 피식 웃었다. “왜? 좀 더 쉬지 않고.” “먹고서 바로 누우면 살찐다더라구요.” “어디서?” “티비에서요.” “...” 준상은 피식하고 다시 한번 입가에 웃음을 띄우다가, 이내 정령들이 보내오는 신호가 미니맵에 나타나자, 얼굴이 굳었다. 그 같은 표정 변화를 본 헤네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적인가요?” “아마도.” 헤네스는 준상의 대답을 듣자, 곧바로 군화끈이 풀어지지는 않았는지, 복장은 흐트러지지 않았는지 살폈다. “가자.” 그리고 준상이 그렇게 말하자,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준상은 헤네스와 함께 밖으로 나오자 다시 컨테이너 하우스를 인벤토리에 집어넣은 다음 그룬발의 망토를 몸에 둘렀다. “일단 들어가 있어라.” “네? 하지만...” 자신도 이젠 싸울 수 있다고 말하려던 헤네스는 담담한 준상의 표정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하긴. 이제 고작 괴물 한 마리 해치워본 것이 전부 아니던가. 한두 마리 상대하고 마는 거라면 몰라도, 대규모 접전에 준상과 함께 뛰어들 정도는 아닌 것이다. “기다릴게요.” “그래.” 헤네스가 작은 목소리로 말하자, 준상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그대로 역소환했다. 준상은 컨테이너 하우스 주위에서 대기하고 있던 늑대들 역시 그대로 역소환 한 다음, 투명화로 모습을 감춘 채 다가오는 적들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번에 등장한 적은 약 백여 마리. 그 중심에는 히든 퀘스트의 표적임을 뜻하는 붉은 색의 느낌표도 섞여 있었다. 준상은 소리 없이 길옆으로 다가간 후 미니맵을 통해 표적을 확인했다. “저 놈이 추격대장 갈란드인가.” 놈은 매부리코에 길쭉한 귀, 그리고 암록색의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키는 대충 성인보다 좀 작은 수준이었는데, 머리가 상당히 큰 탓에 원근감이 묘하게 뒤틀린 듯한 착각마저 느끼게 하고 있었다. 등에는 무장으로 보이는 단창 다섯 개를 마치 부챗살처럼 펼친 채 메고 있다. 그의 주위에 서 있는 괴물들 역시 대부분 활과 단창으로 무장하고 있었는데, 특이한 것은 그 행렬 가운데 왠 수레가 하나 위치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저건...” 수레 안에는 토기로 보이는 작은 항아리가 잔뜩 실려 있었다. 내용물을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항아리 입구를 막고 있는 천조각으로 봐서는 아마도 화염병과 비슷한 용도의 물건이 아닐까 싶다. “화공을 할 셈인가.” 이번 퀘스트의 목적은 다리의 수호. 적을 다 쳐부수더라도 다리가 불타 사라지면 퀘스트는 실패로 돌아가 버리고 만다. 아까의 세 사람처럼 무조건 다리 입구만 막아섰다가는 정말 큰 낭패를 당했으리라. 준상은 우선 저 수레를 먼저 태워 버리기로 했다. “도깨비불.” 작은 목소리로 부르자 거센 바람에 깜박이는 두 개의 도깨비불이 환영처럼 준상 주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가서 저 수레를 태워 버려라.” 명령이 떨어지자 두 개의 도깨비불은 마치 유성처럼 수레를 향해 곧장 날아갔다. 그러자 조심스럽게 주위를 경계하던 괴물들이 바로 도깨비불을 발견하고는 괴성을 질러댔다. -키약! -키리약! 괴물들은 이내 지니고 있던 활을 들어 도깨비불에게 화살을 쏘기 시작했지만, 조악한 그들의 화살로는 정령체인 도깨비불에게 피해를 줄 수 없었다. 하지만 바로 그때. 보스인 갈란드가 나섰다. 갈란드는 등에 메고 있던 단창 가운데 하나를 뽑아들고 자세를 취하더니 끙끙거리며 힘을 주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단창에 희미하게 검은 빛이 불꽃처럼 피어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저건...” 준상이 얼굴을 찌푸리는 순간 단창은 검은 불꽃을 주위에 흩뿌리며 도깨비불에게 날아갔다. 맹목적으로 수레를 향해 날아가던 도깨비불은 갈란드가 던진 단창에 꿰뚫리더니 그대로 심지가 잘린 촛불처럼 사그라 들었다. 그리고 곧바로 준상의 시야에 메시지 하나가 날아들었다. 경고! : ‘도깨비불’이 심각한 피해를 입어 강제로 역소환되었습니다. 강제 역소환으로 인해 ‘도깨비불’은 1일간 재소환이 불가능합니다. -소환물이 강제 역소환될 경우 낮은 확률로 카드가 파괴될 수 있으니 주의하십시오. 직접 공격도 아니고 원거리에서 단창을 던져 도깨비불을 단숨에 역소환시키다니. 갈란드는 자신의 뛰어난 실력에 만족했는지 배를 잡고 깔깔대며 웃기 시작했지만, 그 사이 남은 하나의 도깨비불이 수레 위에 그대로 직격했다. 처음에는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내 수레를 이루고 있는 나무에서 불길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곧바로 그 안에 담겨 있던 항아리들이 산산조각으로 깨지며 불꽃을 주위로 터뜨린다. -캬? 갈란드는 배를 잡고 웃다가 수레가 불타는 모습을 보고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괴물들은 부산을 떨며 몸에 걸치고 있던 누더기로 수레의 불을 꺼보려고 애썼지만, 이미 때늦은 발악에 불과했다. -키야악! 갈란드는 그제서야 분통이 터지는지 길길이 날뛰며 소리를 질렀다. 준상은 그런 갈란드를 이렇게 평가했다. “멍청한 놈.” 그리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킨 다음 위상전이를 펼쳐 수레의 불꽃으로 인해 만들어진 괴물들의 그림자 속으로 스며들었다. 곧바로 인벤토리에서 랑다잘의 분노를 꺼내들고 듀얼 스톰을 펼치려 하는데, 갑자기 뒷덜미에 느껴지는 섬뜩한 느낌에 준상은 얼른 두 개의 철구를 앞에 내밀어 자신의 몸을 방어했다. 그러자, -카앙! 철구에 무언가가 강렬하게 충돌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건...” 바라보니, 양 손에 하나씩 단창을 쥔 갈란드가 사나운 표정을 지은 채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기습을 저지당한 것 자체가 처음이라 준상은 속으로 조금 놀랐다. 설마, 저 녀석은 투명화 상태를 알아보는 능력을 지니고 있는 걸까.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시커 포션 같은 형태의 약물이 존재하는 이상, 그런 감각을 괴물들이 가지고 있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원거리에서 도깨비불을 단숨에 명중시켰던 것도 그런 감각의 도움이 아니었을까. “제법이군.” 준상은 앞으로 내밀고 있던 철구를 천천히 내린 다음, 억눌러 두고 있던 공포의 시선을 활성화했다. 00095 트롤러 ========================================================================= 콰아아아. 느닷없이 난입한 준상을 향해 무기를 들이밀며 기세를 올리던 괴물들은, 순간 준상의 눈으로부터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무언가가 쏟아져 나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지 이해하려는 엄두를 내기도 전에, 압도당했다. 준상은 천천히 앞으로 한 발자국을 내딛었다. 그의 발에 밟힌 잔가지 하나가 비명을 지르며 으스러진다. 으직. 어째서일까. 평소라면 그저 들려도 무시하고 지나쳤을 그 소리가 괴물들에게는 천둥처럼 들려왔다. 준상이 다시 한 발을 내딛었다. 그러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괴물들은 자신도 모르게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하지만 그것도 처음의 한 번 뿐이었다. 또다시 준상의 발이 한 걸음 내딛어졌을 때, 그의 시선과 마주한 괴물들 가운데 자신의 뜻대로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아니,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 추적대를 이끄는 대장, 갈란드는 준상의 눈에서 쏟아지는 공포의 시선에 짓눌리면서도 필사적으로 몸을 움직이며 고함을 질렀다. -키약! 하지만 불행히도 주위에 늘어선 부하들 가운데 그 외침에 호응할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었다. 대신 준상의 등 뒤에 서서 갑자기 굳어버린 동료들의 모습을 어리둥절한 시선으로 보고 있던 괴물들이 그 외침을 듣고 몸을 움직였다. 가장 먼저 괴물 하나가 단창을 들고 준상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준상은 곁눈으로 슬쩍 그 괴물을 바라보고는 마치 파리를 쫓는 듯한 동작으로 철구를 휘둘렀다. 무심하게 보일 정도로 가벼운 움직임. 하지만 결과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퍽! 커다란 철구는 괴물의 몸을 짓이기는 것도 모자라 파쇄의 능력으로 그 몸을 산산이 부숴버렸다. 괴물들은 순식간에 동료의 몸이 터져나가고 그 피와 육편이 쏟아지자 그대로 얼이 빠지고 말았다. 준상은 다시 자신의 앞을 가로 막고 있는 괴물들에게 철구를 휘둘렀다. 퍽! 이번에도 어김없이 무자비한 일격에 괴물 하나가 박살나 버린다. 그러자 압박감을 견디다 못한 갈란드가 고함을 지르며 들고 있던 단창을 준상에게 던졌다. -키야악! 단창은 위협적인 검은 불꽃을 넘실거리며 준상을 향해 날아들었지만, 준상은 그저 철구를 들어 올리는 것만으로 그것을 막아버렸다. 카가각! 단창의 날과 철구가 마찰하며 불꽃을 튀기더니 그대로 땅바닥에 푹 하고 박혀 버린다. “흠...” 혹시 쓸 만 한 아이템인가 싶어 바라보았지만, 검은 불꽃이 사라진 단창에서는 아무런 빛이 뿜어져 나오지 않고 있었다. 혹시나 하고 살펴봤지만, 어설프게 나무를 깎고 거기에 투박한 창날을 고정한 것이 전부였다. 준상이 단창에 시선을 주자 갈란드와 그 부하들은 자신을 속박하고 있던 공포가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키약! 갈란드의 외침이 터져 나오자 부하들은 이를 악물고 준상을 향해 동시에 덤벼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도 무모한 돌진이었다. 준상은 괴물들이 일시에 자신을 향해 달려들자 기다렸다는 듯이 듀얼 스톰을 펼쳤다. 벌려진 두 팔에서 거대한 철구가 포탄처럼 쏘아져 나가며 주위를 휩쓸었다. 괴물들은 항거할 수 없는 그 거력에 휩쓸려 그대로 산산조각이 나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듀얼 스톰에 의한 회전이 끝날 즈음, 다시금 준상을 향해 검은 불꽃을 머금은 단창이 날아들었다. 기술이 끝나는 순간 손이 비어버린 틈을 노린 훌륭한 기습. 하지만 준상의 손이 한 번 떨쳐지자 그 손목에 연결되어 있던 쇠사슬이 마치 살아있는 뱀처럼 꿈틀거리며 튕겨져 단창을 휘감았다. 그리고 뒤이어 날아온 철구가 그렇게 꼼짝 달싹 못하게 된 단창을 부숴버렸다. 준상은 다시 한 번 양손의 손목을 튕겨 철구를 회수한 다음, 피와 살점에 의해 붉게 물든 대지를 짓밟으며 갈란드를 향해 움직였다. -크으... 갈란드는 준상의 눈과 다시 마주치자 신음을 흘리더니 이내 눈을 질끈 감았다.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자신의 몸을 파고드는 공포라는 감정을 차단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을 사용한 것이다. 물론 이것은 보통의 경우라면 아주 어리석은 짓이다. 준상 정도의 강자와 상대하며 눈을 감다니, 그냥 목숨을 내놓는 짓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지만 갈란드는 시각을 대신할 만한 강력한 초감각을 가지고 있었다. 보지 않아도 볼 수 있고, 듣지 않아도 들을 수 있는, 상대의 존재 자체를 느끼는 초감각. 눈을 감은 갈란드의 감각에 준상의 강대한 존재감이 잡혔다. -키릭. 갈란드는 숨 막힐 듯한 공포로부터 벗어나자 곧바로 손에 쥐고 있던 단창을 준상에게 집어 던진 후, 등에 메고 있던 나머지 두 개의 단창을 양손에 쥐고 달려들었다. 준상은 다시금 눈앞으로 검은 불꽃을 뿜으며 날아드는 단창을 철구로 쳐냈다. 그리고는 눈을 감고 자신에게 달려드는 갈란드의 몸을 짓이겨 버리기 위해 철구를 치켜 들었다. 하지만, 준상은 그 순간 남은 하나의 히든 퀘스트를 떠올렸다. (Hidden) 갈란드로부터 적의 작전 계획서를 습득하여 중앙군에게 전달하십시오. (단독) “쯧...” 이대로 철구를 휘둘러 갈란드를 짓이겨 버리는 것은 간단한 일이지만, 그렇게 되면 놈이 지니고 있을 작전 계획서 또한 산산이 으깨져 버릴 것이다. 그와 같은 사실을 깨달은 준상은 랑다잘의 분노를 인벤토리에 집어넣은 후 조용히 말했다. “오픈 포박.” 그러자 카드 슬롯에 장착되어 있던 듀얼 스톰 카드가 빠져 나오고 그 자리에 포박이 자리를 잡는다. 준상은 양손을 얼굴 앞에 모으고, 팔꿈치를 옆구리에 붙였다. 그리고 얼굴을 향해 곧장 찔러 들어오는 갈란드의 단창을 고개를 젖혀 피한 뒤, 갈란드의 몸통에 리버 블로를 작렬시켰다. -케엑! 갈란드는 갑자기 몸통에 가해지는 강렬한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며 튕겨 나갔다. 준상은 몸을 숙이며 놈을 따라붙었다. 갈란드는 뒤로 데굴데굴 구르다가 벌떡 몸을 일으키며 쥐고 있던 두 개의 단창 가운데 하나를 자신에게 쇄도하는 준상에게 집어 던졌다. 코앞에서 검은 불꽃을 뿜어내며 날아드는 단창에 준상은 크게 놀랐다. 급히 몸을 젖혀 피했으나 단창은 여지없이 그의 뺨을 긁으며 지나갔다. “큭!” 어지간한 공격에는 생채기도 나지 않는 준상의 뺨이 부욱 찢어지며 피가 확 피어올랐다. 아마도 단창에 스며 있던 검은 불꽃의 탓이리라. 준상이 단창을 피하느라 몸을 틀자 자신들의 대장을 돕기 위해 괴물들이 일제히 화살과 단창을 날렸다. 피하기엔 이미 늦은 상황. 그렇다고 위상전이를 펼칠 만한 그늘조차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기에 준상은 곧바로 인벤토리에서 랑다잘의 분노를 꺼낸 후 외쳤다. “오픈 무기방어!” 그의 명령에 따라 포박 대신 무기 방어 카드가 슬롯에 장착되자, 준상은 랑다잘의 분노를 들고 날아드는 화살과 단창 들을 단숨에 쳐냈다. 두 개의 철구는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허공을 수놓았고, 날아들던 화살과 단창들은 마치 전기파리채에 사로잡힌 하루살이처럼 퍽퍽 소리를 내며 터져 나갔다. 쏟아지는 화살비를 모두 쳐낸 준상은 다시 랑다잘의 분노를 인벤토리에 집어넣고, 무기방어 카드 대신 포박 카드를 장착한 후 비틀비틀 뒷걸음질 치고 있는 갈란드를 향해 쇄도했다. 갈란드는 준상을 향해 남은 하나의 단창을 휘둘렀지만, 오히려 짧게 끊어친 준상의 펀치에 단창을 쥐고 있던 손이 으깨지고 말았다. -캬아악! 손가락이 모조리 으스러지는 끔찍한 고통에 비명을 지르던 갈란드는 억세고 단단한 갈고리 같은 무언가가 자신의 목을 콱 움켜잡자 그대로 기운이 쭉 빠져 나가 버렸다. 갈란드는 준상의 손에서 빠져 나가기 위해 발버둥을 쳤지만, 다음 순간 준상의 주먹이 관자놀이에 틀어박히자 머리 속을 뒤흔드는 그 충격에 넋이 나가고 말았다. 퍽! 퍼퍽! 준상은 자신의 손에 사로잡힌 채 축 늘어진 갈란드의 머리를 무심한 표정으로 몇 번 더 후려쳤다. 그러자, 계속된 충격을 견디지 못한 갈란드의 머리는 잘 익은 수박처럼 새빨간 속살을 드러내며 부서지고 말았다. “후우우...” 그렇게 강한 것 같지 않은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상대하기가 제법 까다로웠다. 자신이 투명화 능력을 이용한 기습에 너무 의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준상은 그렇게 스스로를 반성하며 일단 갈란드의 시체를 인벤토리에 집어넣은 후 랑다잘의 분노를 꺼내 양손에 쥐었다. 골치 아프던 갈란드가 쓰러진 이상, 이제 남은 것은 학살 뿐. 준상은 공포의 시선과 사안을 동시에 활성화시켜 남은 졸개들이 지니고 있던 신체의 자유를 박탈한 후, 천천히 그들의 몸을 하나씩 차근차근 박살냈다. 결국 십여분 가량이 걸려 모든 잔적의 소탕이 끝나자, 준상은 그제서야 숨을 몰아쉬며 랑다잘의 분노를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지치는군.” 준상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인벤토리 안에 넣어두었던 갈란드의 시체를 꺼냈다. 품을 뒤지자 누더기 같은 서류 한 장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건가.” 종이를 펼쳐 봤지만 아쉽게도 그 내용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준상은 캐비닛을 꺼내 그 안에서 지퍼백 하나를 집어든 후 작전계획서를 조심스럽게 갈무리했다. 그리고 퀘스트 정보가 갱신된 것을 확인한 후 천천히 뒤돌아서자, 어느 틈엔가 아이템 수집을 모두 끝낸 몽몽이가 그의 어깨위로 폴짝 뛰어 오른다. 준상은 새벽이슬을 불러 몽몽이의 입을 씻겨주었다. 유령 말을 소환해 천천히 다리 앞으로 돌아온 준상은 다시 늑대들과 정령들을 풀어 놓았다. 추격대장 갈란드는 제거했지만, 아직 퀘스트가 완료되지 않은 상황에서 자리를 비울 수는 없는 노릇.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흩어져 있던 다른 추격대가 한 놈이라도 숨어들어와 불이라도 붙이는 날에는 지금까지 고생한 것이 전부 헛수고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준상은 컨테이너 하우스를 꺼내 놓은 다음, 헤네스를 소환했다. 헤네스는 가만히 양손을 모으고 눈을 감은 채 모습을 드러내더니, 자신이 집 안에 있음을 깨닫고 준상에게 물었다. “전투는... 끝난 건가요?”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고 의자에 앉으며 대답했다. “아마도. 대장도 처리했으니 별다른 일이 없는 한 이제 중앙군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될 것 같다.” “고생하셨어요.” 헤네스는 준상의 등 뒤로 다가가 작고 고운 손으로 준상의 어깨를 가볍게 주물러 주기 시작했다. 워낙에 레어 시드를 떡칠해서 그런지 헤네스의 힘 정도로는 준상에게 시원한 느낌을 주기에는 아무래도 역부족이었지만, 작고 부드러운 손이 어깨를 조물조물하는 감각만으로도 안락한 기분을 느끼기에는 충분했다. 준상은 잠시 눈을 감은 채 그 안락함을 만끽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바로 눈을 뜨고는 조용히 말했다. “이제 충분하니 그만 하렴.” “네...” 하지만 헤네스는 어깨에서 손을 떼는 대신 가만히 뒤에서 준상의 목을 감싸 안았다. 그리고 가만히 준상의 머리카락 위로 볼을 비볐다. “...” 준상은 가만히 손을 들어 자신의 목을 감싸고 있는 헤네스의 손을 어루만졌다. 한참을 그렇게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시간을 보내던 두 사람은, 문득 어디선가 바각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깨달았다. “설마... 또 밖에 놔두고 오신건가요?” 헤네스가 묻자 준상은 고개를 저었다. “분명히 함께 들어왔...” 그렇게 말하던 준상은 아차 싶은 생각이 떠올랐다. “이런!” 급히 의자에서 일어난 준상은 디저트를 보관해 두었던 찬장을 열었다. 그러자 무언가가 후다닥 숨는 소리가 들려왔다. 준상은 얼른 초코바를 담아 두었던 상자를 열어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상자는 구석 모서리에 구멍이 뚫린 채 텅 비어 있었다. “허...” 준상은 허탈한 표정으로 상자를 바라보다가 몽몽이를 호출했다. 그러자 몽몽이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이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기만 했다. 준상은 가만히 몽몽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꺼내 놔.” 그러자 몽몽이는 방금 전 전투에서 얻었던 시드들을 탁자 위에 쏟아놓았다. 하지만 준상은 고개를 저었다. “그거 말고.” 몽몽이는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준상이 아무 말없이 지그시 바라보자, 이내 앞발로 눈을 가리며 숨는 시늉을 했다. 하지만 준상은 그런 몽몽이의 귀여운 행동에 현혹되지 않았다. “꺼내 놓지 않으면 앞으로는 밥 없다.” 준상이 다시 그렇게 말하자, 몽몽이는 그제서야 머뭇거리며 주머니 속에서 초코바들을 우르르 쏟아 놓았다. 그리고는 미련이 뚝뚝 흐르는 시선으로 쏟아놓은 초코바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금방이라도 커다란 두 눈에서 눈물이 뚝뚝 흐를 것만 같은 그 모습에 준상은 한숨을 푸욱 내쉬고는 꺼내놓은 초코바 가운데 하나를 집어 몽몽이에게 내밀었다. “많이 먹으면 몸에 안 좋아. 먹고 싶을 때 하나씩 줄테니까 그렇게 알아라.” 몽몽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심스레 준상이 내민 초코바를 받아 자신의 주머니에 넣었다. 준상은 피식 웃고는 초코바들을 다시 찬장으로 되돌려 놓은 뒤, 몽몽이가 꺼내놓은 시드들을 살펴 보았다. 하지만 레어 시드로 보이는 것은 눈에 띄지 않았다. 준상은 나중에 확인해 보기로 하고 대충 시드들을 주머니에 담은 다음 다용도실로 가서 전리품을 보관하는 캐비닛에 넣고서야 거실로 돌아왔다. 그러자 헤네스가 따뜻한 코코아를 한 잔 타서 그에게 건넨다. “고마워.” “별말씀을요.” 헤네스는 준상의 앞 자리에 앉아 코코아를 한 모금 들이킨 다음 조심스럽게 물었다. “중앙군이 올 때까지 계속 여기서 기다려야 하는 건가요?” “아마도.” 준상은 그렇게 대답하다가 문득 작전 계획서를 떠올리고는 품에서 지퍼백에 담긴 그것을 꺼내 헤네스에게 보여 주었다. “이거, 읽을 수 있겠어?” “줘보세요.” 헤네스는 지퍼백을 받아들고는 그 안에 담긴 서류를 조심스럽게 펴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건...” “왜?” “확실치는 않지만... 어쩐지 예전에 배웠던 고대 문자 가운데 하나같아요.” “고대 문자?” “네. 죄송하지만 한 번 제가 해석해 봐도 될까요?” “상관없다. 훼손되지만 않는다면.” 준상은 그렇게 대답하고는 필기구와 연습장을 꺼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감사합니다.” 헤네스는 그것을 받아들고는 곧바로 해석을 시작했다. “고대 문자라는 거 요새도 쓰는 데가 있나?” 준상의 말에 헤네스는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대답했다. “아뇨. 선택과목으로 가끔 가르치는 곳이 있기는 한데, 실제로 쓰이는 곳은 거의 없어요. 간혹 잘난 척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쓰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요.” “그렇군.” 이 서류 하나만을 가지고 판단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겠지만, 중요한 작전계획서가 고대 문자로 쓰여졌다는 것은 일단 기억해둘 필요가 있을 듯 하다. 헤네스는 제법 시간이 지난 뒤에야 몇 줄의 내용을 해석해냈다. “제 실력으로는 이 정도가 한계인 것 같네요.” “무슨 내용이지?” “음... 일단 확실한 내용만 말씀드릴게요.” “그래.” 준상이 지켜보는 가운데, 헤네스는 자신이 해석한 내용을 낭랑한 목소리로 읽어내렸다. “갈란드에게, 천상의 다리로 추격하여... 불을 질러 파괴할 것. 대기하며 유인하라. 침묵의 습지로 우회.” 그러자, 준상의 눈앞에 나타나 있던 퀘스트 정보가 갱신되었다. (Hidden) 갈란드로부터 적의 작전 계획서를 습득하여 중앙군에게 전달하십시오. (단독) ->갈란드가 지니고 있던 작전 계획서를 해독한 결과, 천상의 다리를 노리던 추격대는 처음부터 중앙군의 이목을 끌기 위한 미끼였음이 밝혀졌습니다. 안제르망 대협곡을 우회하여 침묵의 습지로 은밀히 이동 중인 적의 본대를 추격해 그들의 위치를 확인하십시오. ->미완료. 00096 트롤러 ========================================================================= “이런 거였나.” 어쩐지 시간이 많이 남는다 했더니 이런 식으로 퀘스트가 이어질 줄은 미처 몰랐다. 준상은 잠시 눈을 감고 곰곰이 이번 퀘스트에 대한 인과 관계를 추론해 보았다. 이번 퀘스트의 키포인트는 바로 던스렐 왕자였다. 별 거 아닌 듯한 퀘스트에 갑자기 왕자가 툭 튀어나오는 것이 이상하다 싶었더니, 바로 뒤에 이어지는 사건 때문이었던 모양이다. 왕자는 가족들을 보내고 난 다음 함께 다리를 지키겠다고 했었다. 준상은 그와 같은 제안을 거부하고 멀뚱거리던 플레이어들에게 그를 호위시켜 중앙군으로 보내버렸지만, 만약 이번 퀘스트를 수행하던 인원들에 준상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을까. 대부분의 경우, 왕자나 그가 데리고 있던 병사들과 함께 다리를 지키는 쪽을 선택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메인 퀘스트의 목표가 다리의 수호인 이상, 이것은 생각해 볼 필요도 없는 일이다. 그리고 그렇게 함께 싸워가는 과정에서 왕자는 플레이어들이 지닌 능력에 대한 신뢰든 뭐든 느끼게 되었을 테고, 그 전투가 끝나 갈란드의 편지를 손에 넣었을 때 이 위험한 임무를 맡길 만한 대상으로 플레이어들을 떠올리게 되었으리라. 헤네스가 완벽하지는 않지만 고대 문자를 부분적으로나마 해석해냈던 것처럼, 고등 교육을 받은 왕자나 그의 측근이라면 작전 계획서를 어느 정도는 읽을 수 있었을 터. 만약 이와 같은 순서대로 사건이 이어지는 것이 올바른 퀘스트 진행 방향이었다면, 왕자를 중앙군에게 보내버리는 바람에 모조리 뒤엉켜 엉망진창이 되었을 테지만, 헤네스의 존재가 그 뒤엉킨 순서를 바로잡고 원래대로 되돌린 셈이다. 준상은 생각을 마치자 가만히 눈을 떴다. “헤네스.” “네?” “고맙다.” 그 말에 헤네스는 부끄러운지 살짝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대단한 일도 아닌데요 뭘.” 준상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아.” “...” “어쩌면 넌 내가 이곳에 와서 얻은 가장 큰 보상인 듯 싶다.” 헤네스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너무 너무 부끄러워져서 그대로 땅바닥으로 파고들어가 버리는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기숙학교에서 모두의 앞에 나가서 상장을 받았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별거 아닌 듯한 말 한 마디에 이렇게 붕붕 날아오르는 기분이 되는 걸 보면, 역시 정상은 아니구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그때 준상이 다시 말했다. “그나저나... 모처럼 느긋하게 지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싶었는데, 다시 움직여야 하니 그건 좀 아쉬운 일이구나.” “...” 마치 등에 날개가 돋아 하늘로 날아오를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던 헤네스는 그 말을 듣자 아차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냥 편지의 내용을 모른 척 했으면 하루 이상을 느긋하게 준상과 지낼 수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탓이다. 바보. 모처럼 분위기 정말 좋았는데. 이대로라면 키스 이상의 일을 경험하게 될 수도 있었는데! 그런 생각을 떠올리던 헤네스는 키스 이상의 일이라는 단어를 연상하자 다시 얼굴이 새빨개지고 말았다. 그렇다. 지금까지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미처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준상과 만약 여기서 단계를 더 밟아 나가게 된다면 이렇고 저렇고 그런 일들을 경험하게 될지도 모른다! 헤네스는 어쩐지 너무 부끄러워서 준상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탁자에 얼굴을 처박았다. 준상은 본대를 추적할 채비를 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갑자기 탁자에 머리를 쿵 하고 처박는 헤네스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헤네스?” “네?” “괜찮아?” “괘, 괜찮아요. 아무것도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 얼른 얼버무리는 헤네스의 모습에 준상은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저 나이 또래의 여자 아이가 지닌 복잡하고 미묘한 마음과 행동을 이해하는 건 너무도 어려운 일이라고. 어쨌거나. 준상과 헤네스는 곧바로 본대를 추격할 준비를 마치고 컨테이너 하우스를 나왔다. 인벤토리에 컨테이너 하우스를 수납한 준상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헤네스에게 물었다. “괜찮겠어? 날도 추운데 차라리 그냥 들어가 있는 편이...” “싫어요.” 상황이 위험하다면 모를까, 그것도 아닌데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상태가 되기는 싫었다. “후... 하여튼 고집은.” 준상은 유령 말을 소환하려다가 생각을 바꾸어 험비를 꺼냈다. 승차감은 좀 열악해도 찬바람을 맞는 것보다는 나으리라. “타라.” “네.” 이미 몇 번이나 타봐서인지 헤네스는 능숙하고 조수석의 문을 열고 들어가 자리를 잡고는 안전벨트를 맸다. 준상은 그녀가 준비를 마치자 시동을 걸려다가 문득 말했다. “근데... 침묵의 습지가 어느 방향이지?” 불행히도 미니맵에는 본대의 위치나 근처의 지도까지는 나타나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헤네스가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 싶더니 이렇게 말했다. “음... 제 기억이 맞다면 침묵의 습지는 안제르망 대협곡을 따라 흐르는 강의 하류 쪽일 거에요.” “하류라고?” “네. 이벨류아 근처에 있던 금단의 숲처럼 침묵의 습지도 오지로 유명하거든요. 그래서 기억하고 있어요.” “...” 준상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 후 이 요정을 닮은 귀여운 소녀의 머리를 다시 한 번 쓰다듬어 주었다. “고맙다.” “별 말씀을.” 어쩐지 어린애 취급당하는 것 같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네스는 준상의 커다란 손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것이 싫지 않았다. 두 사람이 서로 미소를 띤 채 바라보고 있는데, 문득 조그마한 무언가가 대시보드 위로 폴짝 뛰어 올랐다. 바라보니 다름 아닌 몽몽이다. 몽몽이는 대시 보드 위에 앉은 채 두 사람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치 빨리 안 가고 뭐하느냐는 듯한 표정이다. “푸훗!” 헤네스가 웃음을 터뜨리자 준상 역시 피식 웃으며 시동을 걸었다. “가자.” “네!” 준상과 헤네스가 험비를 타고 협곡의 하류를 향해 달리기 시작할 즈음, 던스렐 왕자와 그의 가족들을 호위하기 위해 따라 나선 세 사람은 흔들리는 포장 마차 안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남쪽이 역시 좋긴 좋네요. 춥지도 않고.” “그 말대로군요.” 던스렐 왕자는 천상의 다리에서 남쪽으로 몇 시간 정도 거리에 있는 마을에 도착한 후 그곳에서 마차를 구입해 이동 중이었다. 제대로 된 쿠션도, 완충 장치도 없는 달구지 수준의 포장 마차라 안락함은 기대하기 힘들었지만, 그래도 하루 종일 걷는 것보다는 백 배 낫다. 마차는 한참을 더 그렇게 덜컹거리며 달리다가 어느 순간이 되자 급히 멈추어 섰다. “벌써 식사시간인가?” 송동준의 혼잣말에 옆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이민서가 고개를 번쩍 쳐들더니 시간을 확인했다. “글쎄요. 아직 시간이 좀 이른 것 같은데.” 아니나 다를까. 급히 병사 하나가 뒤쪽의 마차 입구로 얼굴을 내밀며 말했다. “중앙군 선봉부대의 위치가 확인되었습니다. 지금부터 급행할 예정이니 꼭 잡아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아예 꿈나라로 가버린 주광명을 제외한 두 사람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내 마차가 최고 속도로 달리기 시작하자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꽉 잡으라는 게 이런 의미였다니!” “이러다 마차 부서지는 거 아닌가요?”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미친 듯이 요동치며 삐걱거리는 마차 안에서 거의 바닥을 기다시피 하는 자세로 간신히 버티는 것 정도였다. 병사의 말을 듣지 못했던 주광명은 꾸벅거리며 졸다가 그대로 마차 밖으로 튕겨나갈 뻔 했을 정도다. 결국 그런 지옥 같은 질주를 수 시간이나 더 겪고 나서야 던스렐 왕자가 이끄는 한 무리의 피난민들을 중앙군의 선발대와 합류할 수 있었다. 이민서와 송동준, 그리고 주광명 이렇게 세 사람은 마차가 멈추고 후다닥 달려 나온 병사로부터 중앙군의 선발대와 합류했다는 말을 듣자마자, 구르듯이 마차 밖으로 나와 뱃속에 든 것을 모조리 게워내야만 했다. “으으... 내 다시는 마차 타나 봐라.” “동감입니다.” 그렇게 투덜거리며 몸을 일으키던 세 사람은 문득 묘한 것을 발견했다. 번쩍이는 갑옷으로 무장한 기마대들 뒤쪽에 왠 장갑차 같은 것들이 도열해 있었던 것이다. “저거... 장갑차 맞죠?” “맞습니다.” 장갑차는 장갑차인데, 어쩐지 모양이 좀 낯설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바라보던 두 사람은 장갑차에 걸린 깃발을 보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저거... 제가 아는 깃발 맞죠?” “네. 아마도.” 노란색의 큰 별 하나와 그 주위를 둘러싼 작은 별 네 개. 그리고 그 모두를 감싼 붉은 색의 깃발. 일명 오성홍기라고 부르는 중화인민 공화국의 깃발이 장갑차 위에 펄럭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곳에 중국군이라니...” 게다가 단순한 플레이어들도 아니고, 장갑차까지 갖춘 기계화 부대라니. 예상치 못했던 것을 발견한 두 사람이 그대로 굳어서 말을 잊지 못하는 동안, 그제서야 속에 든 것을 모조리 게워낸 주광명이 비틀거리며 그들에게 다가오다가 마찬가지로 장갑차를 발견했다. “어? 저거 장갑차 아닙니까?” 이민서가 대답했다. “맞아요.” “저게 왜 여기 있죠?” 그러자 다시 이민서가 대답했다. “몰라요. 묻지 말아요. 안 그래도 머리 속 복잡하니까.” “...” 느닷없이 나타난 현대식 기계화 부대의 모습에 충격을 먹고 굳어 있는 세 사람에게 던스렐이 몇 사람을 데리고 다가왔다. 그가 데리고 온 사람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은빛 갑옷을 몸에 걸친 금발의 미녀였다. 그녀는 이곳의 여성으로서는 보기 드문 170센티미터의 장신을 지니고 있었으며 금발의 머리를 뒤로 단정하게 틀어 올린 상태였다. 반짝거리는 은빛의 갑옷은 전신을 감싸는 판금 갑옷이었는데, 금이 상감되어 매우 고급스러워 보였다. 왠지 보는 것만으로도 압도되는 느낌의 미녀라고나 할까. 그녀의 뒤에는 얼룩무늬 군복을 입은 군인 몇이 따르고 있었는데 딱 보기에도 동북아시아 쪽의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아아... 역시나 중국군이 맞았던 모양이다. “에롤. 인사하거라. 이쪽은 나를 이곳까지 호위해준 분들이다.” 던스렐의 말에 금발 미녀는 조금 미심쩍은 표정으로 세 사람을 살펴 보다가 이내 표정을 바로하고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오라버니를 호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에롤로미네 브리즈 바힘 에슈탈렌. 에슈탈렌 왕국의 제1왕녀입니다.” 00097 트롤러 ========================================================================= 세 사람은 얼른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다음, 슬그머니 던스렐과 에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 그 시선의 의미, 던스렐이 어찌 모르겠는가. “친동생 맞으니 그런 눈으로 보지 말게나.” “죄, 죄송합니다.” “미안해 할 것 없네. 이 녀석이 우리 가족들 중에서도 특출 나게 예쁜 건 사실이니까. 하하하하!” 가만히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에롤이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오라버니.” 그러자 던스렐은 얼른 헛기침을 하며 웃음을 멈춘 후, 다시 말했다. “크흠, 근데 뭐... 성격이 보다시피 이래 놔서. 누가 데려갈지 참...” “오라버니!” “알았다. 알았으니까 그만 노려 보거라.” “어휴...” 에롤로미네 왕녀는 철없는 팔불출 오빠의 모습에 한숨을 푸욱 내쉬더니 이내 멀뚱거리는 세 사람을 향해 말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다만 현재 급하게 달려 나온 상황이라 제대로 대접을 해드리지 못하는 것이 그저 죄송할 뿐입니다. 부디 이 점 양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녀가 정중한 말투로 그렇게 말하며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이자, 송동준은 뒤통수를 긁적이며 바로 대답했다. “아닙니다. 별로 한 것도 없는... 윽!” 하지만 그는 말을 제대로 끝마치지 못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이민서가 그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찍어 버렸기 때문이다. “...” 맨손 격투 쪽이라더니 위력이 장난 아니다. 송동준은 숨이 턱 막히는 통증에 놀라 옆구리를 부여잡은 채 말도 못하고 그저 끙끙대며 왜 그러느냐는 시선으로 이민서를 바라볼 뿐이었다. 하지만 이민서는 그의 시선을 모른 척 한 채 조용히 말했다. “말씀 감사합니다. 높으신 지위에 있으시면서도 저희 같은 사람에게 이렇게 좋게 대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당치 않습니다. 여러분은 오라버니와 그 가솔들을 구해주신 분들이십니다. 어찌 가족의 은인에게 함부로 대하겠습니까.” “저희는 그저 부탁 받은 일을 수행했을 뿐입니다.” 에롤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말했다. “이제 막 일을 마치신 분들께 감히 이런 말씀을 드리기가 저어됩니다만, 부탁을 좀 드려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십시오.” “보시다시피 저희들은 천상의 다리로 가서 적의 추격대를 쳐부수고 북부를 유린하고 있는 어둠의 군세를 이 땅에서 몰아내기 위해 행군 중입니다. 부디 여러분의 그 출중한 실력으로 저희들을 도와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이민서는 잠시 생각하더니 다시 말했다. “우선은 저희도 천상의 다리까지 돌아가야 하니 동행하겠습니다. 이후의 일은 그곳에 남아 있는 일행과 상의한 후 말씀드리겠습니다.” 에롤은 바로 수긍하며 대답했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죠.” 에롤은 이민서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 간단하게 예를 표했다. 그리고는 멀뚱히 서 있는 송동준과 주광명에게도 마찬가지로 번갈아 가며 인사를 한 다음, 부관을 데리고 자신의 말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녀를 따라왔던 중국군 장교들은 세 사람을 보고 피식 웃더니 이내 자기들끼리 뭐라 지껄이며 에롤의 뒤를 따랐다. 그 모든 상황을 멀뚱히 지켜보던 던스렐이 세 사람에게 말했다. “저 사람들, 자네들과는 다른 곳에서 온 이방인들인가?” 이민서가 바로 대답했다. “네, 인접국이긴 하지만요.” “그랬군.” 던스렐은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다시 말했다. “어쨌든 당분간 또 함께 하게 생겼군.” “잘 부탁드립니다. 그런데, 다만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뭔가. 말해보게.” “좀 안락한 마차 없을까요?” 이민서의 말에 던스렐은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그거라면 걱정 말게. 마침 보급대에 왕실 마차가 포함되어 있으니, 그걸 타고 가면 될 걸세.” “아, 정말 감사합니다.” “그럼 바로 마차를 보내겠네.” “네.” 던스렐이 물러가자 멀뚱히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송동준이 이민서에게 물었다. “아까는 왜 그런 겁니까?” 그러자 이민서가 대답했다. “당신, 서브 퀘스트 한 번도 안 해봤어요?” “네, 뭐... 일단은.” “후우...” 이민서는 한숨을 푸욱 내쉬고는 다시 말했다. “서브 퀘스트는 다른 퀘스트들이랑 달라서 어떻게 말을 하느냐에 따라 보상이 달라져요. 경험치 외의 다른 보상은 알아서 받아내야만 하는 거죠.” “정말요?” “네. 히든 퀘스트 같은 건 나중에 퀘스트 전부 끝나고 완료될 때 보상 상자가 따로 주어지지만 서브 퀘스트는 그런 것도 없죠.” “아...” “만약 아까 당신처럼 그렇게 말했다가, 저 공주님이 정말로 ‘그럼 당연한 일을 했으니 보상도 필요 없겠네요.’라고 하면 경험치 보상 좀 얻는 거 빼고는 정말 손가락만 빨게 될 수도 있는 거에요.” 송동준은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래서 부탁 받은 일을 수행했을 뿐이라고 말한 거군요.” “맞아요. 뭐... 알아서 보상하라는 걸 그런 식으로 돌려 말한 거죠.” 송동준은 에롤로미네 왕녀와 이민서의 대화를 곱씹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지만, 뭔소린지 당최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멀뚱히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주광명은 자신의 말에 올라타 부관에게 뭔가 지시를 내리고 있는 공주의 모습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햐... 근데 인터넷 같은데서 보면 공주라고 해도 이쁜 거 모르겠던데, 저 아가씨는 그냥 몸매고 얼굴이고 죄다 착한 게 보기만 해도 그냥 힘이 불끈 불끈 솟네요.” 그 나름대로는 표현할 수 있는 최상의 극찬이었지만, 이민서는 한숨을 푸욱 내쉬며 주광명을 노려 보았다. “저 기병대랑 정면 대결 하고 싶지 않으면 저 사람들 앞에서는 절대로 그런 말 하지 말아요. 광명씨.” “죄, 죄송합니다.” 그들이 그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마차 한 대가 다가왔다. 전투중임을 감안해서 화려한 치장이 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어지간한 충격에는 흠집도 나지 않을 것처럼 매우 견고해 보이는 4두 마차였다. 마차가 멈추어 서자 시종으로 보이는 남자가 얼른 내려 그들을 맞아 들였다. “던스렐 왕자님께서 보내셨습니다. 타십시오.” “감사합니다.” 이민서는 대표로 나서서 시종에게 인사한 후 두 남자들과 함께 마차에 탔다. 한편, 멀찍이서 자신의 말에 올라탄 채 세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던 에롤로미네 왕녀에게 철혈 은장 기사단의 단장인 타마레르가 조용히 물었다. “어째서 저들에게 동행을 청하셨는지, 감히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조금 텁수룩해 보일 정도로 수염을 길렀음에도 매우 중후한 느낌을 풍기는 이 기사단장의 말에 에롤은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대답했다. “그냥요.” 너무나 무성의한 대답에 타마레르는 얼굴을 찌푸렸다. “소장은 왕녀님처럼 명석하지 않습니다. 조금만 배려해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그 말에 에롤은 웃으며 대답했다. “만약에 대한 대비라고 해두죠.” “대비라구요?” 타마레르는 그들 뒤에 도열한 장갑차들을 흘깃 보고는 다시 말했다. “왕녀님께서는 저들을 믿지 못하시는 겁니까.” “네. 여러 가지 의미에서요.” “샤린델에서의 참극 때문이군요.” 에롤은 묵묵히 앞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음...” 타마레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주일 전, 북방의 주도였던 샤린델이 어둠의 군세에 떨어졌을 때도 지금 자신들과 대동하고 있는 이방인들과 같은 자들이 함께였음을 떠올린 것이다. 던스렐에게 들은 바로는, 그 당시에도 저런 강철 마차를 지닌 이방인들이 있었지만 적의 대장으로 보이는 괴물에게 변변한 저항도 하지 못한 채 몰살당했다고 한다. 물론 이번에 새로 온 이방인들은 그들에 비해 훨씬 많은 수의 강철 마차를 지니고 있었고, 훨씬 강력한 무기도 지니고 있었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아무래도 안심하기가 힘들다. 게다가 문제는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만약의 경우, 저 강력한 무기를 지닌 이방인들이 허튼 생각을 품으면 어찌 되겠는가. 그렇게 않아도 어둠의 군세로 인해 나라 전체가 휘청거리고 있는 에슈탈렌으로서는 존폐 위기를 맞게 될 수도 있다. 당장 힘이 필요해서 손을 잡고 있기는 하지만, 난데없이 나타난 이방인들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건 너무나 위험천만한 일이다. 여러모로 저들을 믿기 어렵다는 말은, 그런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에롤이 굳이 별로 미덥지 않아 보이는 세 사람을 데리고 가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비록 그들은 대단치 않아 보였지만, 던스렐에게 들은 바대로라면 현재 다리를 지키고 있는 저들의 동료(?)는 혼자서 수십마리의 괴물들을 일순간에 처치해 버릴 정도의 강자. 물론 그 자 역시 무조건적으로 신뢰하기 어려운 건 매한가지지만, 지금과 같이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전쟁에서라면 숨겨둔 카드는 많을수록 좋은 법이다. “피난민들의 후송을 위한 준비가 끝났습니다.” 전령의 보고에 타마레르는 바로 대답했다. “즉각 출발시키도록.” “네.” 전령이 달려가자 타마레르는 에롤을 향해 말했다. “왕녀님. 이제 그만 출발하겠습니다.” “저에게 그런걸 말씀하시면 곤란합니다. 이 선봉부대의 대장은 단장님이시고, 전 평기사에 불과하잖아요.” “...” 타마레르는 쓴웃음을 지었다. 정말 모르고 하는 얘기일까. 기사단장인 자신을 포함한, 철혈 은장 기사단에 속한 자들의 대부분이 그녀에게 매혹되어 있다는 사실을. 하지만 타마레르는 이내 얼굴에서 웃음을 지우고는 진지한 표정으로 손을 높이 든 후 외쳤다. “빛나는 은빛 검에 영광 있기를, 출발한다!” “빛나는 은빛 검에 영광 있기를!” 기사들은 손을 번쩍 들어 그 외침에 화답한 후, 천천히 대형을 이루며 다시 전진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기사단의 옆으로 모두 열한 대의 장갑차가 이동을 시작했고, 그 뒤를 따라 마차들이 줄지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중에는 이민서와 송동준, 그리고 주광명이 탄 마차도 있었다. “저런 걸 여기 가져올 생각을 하다니... 정말 대단하네요.” “그러게요.” 송동준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민서는 다시 물었다. “열한 대면 대충 병력이 어떻게 되는 거죠?” 가만히 턱을 쓰다듬으며 머리 속으로 병력을 계산해 보고는 바로 대답했다. “대충... 장갑차 한 대에 일개 분대 정도가 탑승하니까, 지휘 차량이나 구난 차량, 그리고 보급 차량을 제외하더라도 대충 완편된 1개 중대에는 다소 모자라는 수준이 아닐까 싶네요.” 그러자 민서가 조용히 말했다. “동준씨.” “네?” “제가 군대 다녀온 남자로 보여요?” 하긴 중대라고 해봐야 군대도 다녀오지 않은 민서가 그 인원수를 어찌 알 수 있겠는가. “그러니까, 대충 백 명 안팎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후아... 저만한 인원이 한 번에...” 민서가 고개를 저으며 혀를 내두르자, 동준이 다시 추가 설명을 했다. “그래서 대단한 거죠. 애초에 퀘스트라는 것이 이번에 누가 소환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파티를 맺으면 함께 퀘스트를 하는 것이 가능하기는 하지만, 한꺼번에 저 정도 인원이 동일한 무장으로 움직이려면...” 동준은 말을 하다 말고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러자 가만히 듣고 있던 민서가 물었다. “왜 말을 하다 말아요?” “음... 그게... 한 가지 말도 안 되는 가정이 떠올라서요. 아니, 중국에서라면 말이 될 수도 있겠군요.” 민서는 동준의 표정을 보고는 뭔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닫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소리에요?” 동준은 가만히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하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무작위로 백 명 안팎의 인원이 소환되었는데, 그들이 모두 동일한 복장과 무장을 하는 것이 가능하려면...” “아!” 민서는 그제서야 동준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깨닫고 역시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귀환자들을 강제로 징집해서 군대를 만들었다는 얘긴가요?” “아마도요. 그렇지 않고서는 저들의 무장이나 편제를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 민서는 입술을 잘근 깨물고는 마차 밖에서 먼지를 일으키며 달리고 있는 장갑차들을 바라보았다. 난데없이 튜토리얼에 끌려가 영문 모를 퀘스트 때문에 사회생활이고 뭐고 다 엉망진창이 된 것도 서러운 판에, 아예 강제 징집되어 군대라는 숨 막히는 곳에서 생활해야 하다니... 민서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이 한국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에 대해 감사했다. 하지만 동준은 그 순간 또 다른 가정을 떠올리고 있었다. 중국에서 저런 식으로 플레이어들을 운용하는 것이 밝혀지고, 그것이 실효를 거두었음이 알려지게 되면 어떻게 될까. 대번에 따라하려는 자들이 생기게 마련이다. 당장 같은 전체주의 국가들에서 먼저 시작할 것이고, 그들이 시작하면 다른 나라에서도 따라하려 들 것이다. 아니, 이미 그런 과정은 시작되고 있는지도 몰랐다. 이를테면, 그 국회의원 아들이 주도하고 있는 연합 같은 형태로 말이다. “후우...” 제대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어쩌면 또다시 그 숨 막히는 생활로 돌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생각을 하니 동준은 어쩐지 앞길이 막막하게 느껴졌다. 하긴, 언제 퀘스트에 불려 올지 모르는 지금 생활도 그리 자유롭지 않기는 매한가지지만 말이다. “이야... 이거 진짜 금 맞네. 정말 땡 잡았네요. 하하하.” 마차 구석에서 시종이 건네준 금화 주머니를 안고 희희낙락하고 있는 주광명이 어쩐지 부러울 지경이다. 저 정도로 생각이 없으면 차라리 고민도 없었을 텐데. 송동준은 쓴웃음을 지으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추위에 떠느라 잠을 제대로 자두지 못했던 것을 떠올리고 지금이라도 보충할 셈이었지만, 이런 저런 잡념이 많은 탓인지 좀처럼 잠들기가 어려웠다. 그 즈음, 준상과 헤네스는 험비에 탄 채로 안제르망 대협곡을 따라 하류 쪽으로 이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나름 신경을 써서 운전을 하고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봐야 탑승감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험비로 오프로드를 달리고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우으으...” 제법 오래 버티긴 했지만, 헤네스는 갈수록 얼굴이 핼쑥해지기 시작한다. “잠시 쉬어갈까?” “괘, 괜찮아요. 끄떡... 없어요.” 헤네스는 그렇게 고집을 부렸지만, 준상은 그대로 차를 멈추었다. 그리고는 헤네스를 데리고 차에서 내렸다. 공짜라서 타고는 다녔지만, 아무래도 이번에 돌아가면 험비는 서윤에게 돌려주고 새로 승차감이 좋은 차를 하나 구해보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으으...” “속이 안 좋으면...” “괘, 괜찮아요!” 처음 험비에 탔을 때는 어쩔 수 없었다지만, 준상이 뻔히 보고 있는 상황에서 속을 게워낼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완강한 헤네스의 반응에 준상은 한숨을 푸욱 내쉬고는, 이내 험비를 인벤토리로 되돌려 버렸다. 그리고는 헤네스 앞에 앉아서 등을 내밀었다. “자, 업혀라.” “네? 하, 하지만...” “아니면 그냥 들어가 있던가.” “그, 그건 싫어요!” 헤네스는 잠시 주저 하다가 눈을 질끈 감고는 준상의 등에 와락 매달렸다. 준상은 헤네스를 등에 업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무, 무겁지 않아요?” “전혀.” 헤네스는 가만히 준상의 목에 팔을 두른 채 그의 등에 얼굴을 묻은 채 눈을 감았다. 그러자 울렁거리던 속이 어쩐지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준상은 헤네스를 등에 업은 채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냥 가만히 걷기만 하더니, 헤네스가 어느 정도 업힌 자세에 익숙해지자 천천히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헤네스는 눈을 감고 있다가 어쩐지 기분이 이상해서 살짝 눈을 떴다. “헛!” 그녀는 깜짝 놀랐다. 체감 속도의 차이인지도 모르겠지만, 어쩐지 아까 차를 타고 갈 때보다 훨씬 빠른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 하면 안 될지도 모르겠지만... 험비보다도, 늑대보다도, 그리고 말이나 마차보다도 준상의 등에 업히는 쪽이 훨씬 안락하고 빠른 것 같다고 헤네스는 생각했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마침내 준상과 헤네스의 눈앞에 검게 펼쳐진 거대한 습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곳이 바로, 금단의 숲과 함께 대륙의 비경 중 하나로 일컬어지는 침묵의 습지였다. 00098 트롤러 ========================================================================= 대지 위에 새겨진 주름살과도 같은 깊은 협곡이 부채살 모양으로 갈라지는 대지 위에, 마치 밤하늘의 짙은 어둠을 끌어다 놓은 듯한 거대한 습지. 준상과 헤네스는 협곡의 끄트머리에 위치한 거대한 절벽 위에서 침묵의 습지라 이름 붙여진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불모지를 잠시 가만히 바라보았다. 헤네스는 준상의 등에서 내려와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가만히 중얼거렸다. “여기가 침묵의 습지...” 비경이니 뭐니 해서 이름은 유명하지만 너무나 위험한 곳이라 대부분의 경우 실제로 보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하는 곳. 가만히 발아래 펼쳐진 침묵의 습지를 바라보고 있는 헤네스에게 준상이 물었다. “아는 바가 있나?” “조금요.” 헤네스는 일전에 읽어 두었던 책의 내용을 머리 속에서 힘겹게 끄집어 내었다. “금단의 숲에 버금 갈 정도로 넓은 곳이고, 땅 아래에서 장기(瘴氣)라는 독 기운이 올라오기 때문에 대비 없이 들어갔다가는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진대요. 보통의 습지에 비해 늪의 비율이 높은데다, 독충이나 독사 같은 것도 아주 많다고...” 뭔가 두서없는 말이긴 했지만 그녀의 말을 듣자 준상은 이 습지가 가지고 있는 ‘침묵’이라는 말의 의미를 대충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군. 설명 고맙다.” “별말씀을요.” 헤네스는 그렇게 말하고는 조금 우울한 얼굴로 다시 말했다. “이만 들어가 있을게요. 고집 피워서 미안해요.” “괜찮다.” 준상은 헤네스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어 주고는 역소환을 실행했다. “독이라...” 습지에서 올라오는 독 기운이라고 했던가. 일반적인 상식으로 생각해 봤을 때, 이 독 기운은 생물의 사체가 물속에서 부패하여 생긴 가스 종류일 가능성이 높다. 유해 가스에 대한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라면 그것을 독 기운이라는 형태로 인식해도 이상한 일은 아닐 터. 그 외의 가능성이라면 벌레나 물을 통해 전염되는 풍토병 정도일 것이다. 준상은 여러 가지 시드를 장착한 덕분에 제법 높은 수준의 독 저항 능력을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상황이 이렇다면 과연 독 저항 능력만으로 습지의 환경에서 무사히 버텨낼 수 있을지 장담하기는 힘들다. 준상은 우선 정령들을 불러 모아 자신을 보호하도록 했다. 산들바람과 마파람이라면 작은 벌레나 유해 가스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만들 수 있고, 도깨비불 역시 그런 것들을 태워버리기에는 아주 적당하다. 습지의 위험 요소에 대한 준비를 마친 준상은 이제 벼랑을 내려갈 방도를 찾기 시작했다. 높이가 수십미터나 되는 까마득한 절벽인지라 위상전이는 처음부터 무리였고, 지니고 있는 로프를 사용하기에도 뭔가 불안하다. 게다가 적의 본대가 이곳을 통해 진군했다면 그 흔적을 찾을 수도 있으니 그야말로 일석이조. 준상은 그런 점을 염두에 두고 가만히 주위를 탐색했다. 그 결과, 협곡에서 제법 떨어진 곳에서 습지로 내려가는 길 같은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곧바로 그곳으로 이동하던 준상은 문득 기묘한 것을 발견했다. “이건...” 멀리서 봤을 때는 그저 벼랑의 일부가 침식으로 인해 무너진 것처럼 보였지만, 가까이 다가가서 살펴보니 마치 무언가 거대한 해일 같은 것이 벼랑을 휩쓸고 지나간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음...” 당연한 일이지만, 이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습지 끄트머리까지 해일이 밀려왔을 리는 없는 일. 아마도 이곳을 통해 이동한 적의 본대가 만들어 놓은 자취라고 이해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준상은 잠시 무너진 곳을 살피다가 그룬발의 망토로 가만히 몸을 숨긴 후 습지로 통하는 길로 향했다. 통로 입구에 다다르자, 근처의 잡초들이 밟히고 꺾여 있는 모습이 눈에 띈다. 추적술이 없더라도, 이 정도의 흔적이라면 상당한 인원의 발걸음이 지나쳐 갔음을 알아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준상은 주위를 경계하며 통로를 따라 습지로 내려갔다. 구불구불한 비탈길을 한참이나 구르듯이 내려가자 얼마 지나지 않아 곰팡이 냄새 비슷한 것이 후각을 자극하기 시작한다. 정령으로 주위의 공기를 차단하고 있는데도 이 정도라니... 대비 없이 들어갔다면 뭐가 어떻게 되었는지도 모르고 가스에 중독되어 의식을 잃었을 것 같다. 준상은 일단 적당한 장소에서 캐비닛을 꺼내 비상용으로 준비해둔 마스크를 착용한 다음 계속해서 아래로 이동했다. 그렇게 한참을 내려가고 나서야 비로소 습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일단 바닥을 살피자, 수많은 인원이 밟고 지나간 것 같은 발자국이 물기를 머금은 채 나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겉으로만 봐서는 늪지대와 진창을 구분하기가 힘들었지만, 이렇게 희미하게나마 발자국이 남아있는 상태라면 문제될 것이 없다. 저들의 군세가 만들어 놓은 발자국을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준상은 비탈길을 내려오는 도중에 어느 틈엔가 풀어져 버린 투명화를 다시 실행하고는 조용히 발자국을 뒤따랐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적의 후미에 도달할 수 있었다. “...” 잡목과 갈대 같은 것으로 인해 시야가 가려져서 정확한 수를 알기는 어려웠지만, 대충 보는 것만으로도 이전에 에픽 퀘스트에서 해치웠던 적의 군세와 비슷하거나 많은 수준으로 보인다. 전방에는 좀비들이 허우적거리며 길을 열고 있었고, 그렇게 언데드들이 탄탄한 길을 발견하면 본대가 뒤를 따르는 방식이다. 다만, 문제라면 대장으로 생각되는 놈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 정도. 그렇게 가만히 놈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시야 한쪽에 나타나 있던 퀘스트 정보가 반짝이며 갱신되었음을 알려왔다. (Hidden) 갈란드로부터 적의 작전 계획서를 습득하여 중앙군에게 전달하십시오. (단독) ->갈란드가 지니고 있던 작전 계획서를 해독한 결과, 천상의 다리를 노리던 추격대는 처음부터 중앙군의 이목을 끌기 위한 미끼였음이 밝혀졌습니다. 안제르망 대협곡을 우회하여 침묵의 습지로 은밀히 이동 중인 적의 본대를 추격해 그들의 위치를 확인하십시오. ->계획서에 나와 있는 대로, 적의 본대는 현재 침묵의 습지를 횡단하는 중입니다. 이 정도 속도로 계속 이동한다면 머지않아 습지를 횡단할 것이 분명합니다. 지금 즉시 다리로 돌아가 행군중인 중앙군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합니다. ->미완료. “...” 준상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냥 이대로 적의 군세를 분쇄해버리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겪었던 대로라면, 제대로 기습을 가할 경우 이 정도 병력을 격파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준상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딱히 보상도 없는 일에 위험을 자초할 필요가 있을까. 더군다나, 적의 대장급이 눈에 띄지 않는 것도 마음에 걸린다. 퀘스트가 걸려 있다면야 표식을 통해 바로 알아볼 수 있겠지만, 그렇지도 않은 상황이기 때문이다. 졸개들을 잡겠다고 기습을 가했다가, 모습을 감추고 있던 대장급의 괴물들에게 협공을 받는다면, 익숙하지 않은 이곳 습지에서의 싸움은 득보다 실이 많을 가능성이 크다. 자신의 절대 목표는 어디까지나 생존. 보상도 없는 일에 목숨을 걸 이유가 없다. 준상은 그 사실을 마음속에 되새기고는 소리 없이 뒤로 물러나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습지를 빠져 나와 비탈길을 빠르게 올라간 준상은, 협곡 위로 올라서자마자 곧바로 콤보 카드를 변경했다. “파발꾼.” 그의 입에서 하나의 단어가 흘러나오자 곧바로 기존에 장착되어 있던 카드들이 빠져 나가고 새로운 카드들이 슬롯에 장착되었다. 질주, 도약, 순간가속, 순간가속(R). 이렇게 네 장의 카드가 장착되자, 콤보 카드 ‘데안달라스의 파발꾼’이 완성되었다. 콤보 카드의 효과로 이동속도가 오십 퍼센트 증폭되자, 준상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흐으읍...” 온 몸의 힘을 끌어 모은 다음 단숨에 대지를 박차며 달려 나갔다. 콰과과과과! 발이 지면에 닿을 때마다 마치 폭격을 맞은 것처럼 땅바닥이 움푹 움푹 패이며 자국을 남긴다. 눈앞에서 바람이 갈기갈기 찢겨지며 흩어진다. 느닷없이 횡액을 당한 바람은 준상의 귓가에 애통한 비명소리를 남겼지만, 너무나 빠른 준상의 몸은 그 소리가 닿기도 전에 이미 저만큼 앞질러 가고 있었다. 어느새 준상의 몸에서는 희미한 아지랑이가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한다. 이것은 육체의 한계를 극한까지 밀어붙이고 있다는 증거. 처음에는 눈에 보이기도 전에 사라져 버리는 미약한 수준에 불과했지만, 내딛는 발걸음이 더해질수록 그 농도는 짙어지기 시작했고, 어느 틈엔가 준상의 몸은 마치 로켓처럼 흰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야말로, 스스로의 몸을 태워 질주하는 로켓 자동차라는 말이 어울릴 법한 질주! 단순히 파발꾼의 효과 때문일까. 아니면 준상의 몸이 지닌 능력이 한층 더 발전한 덕분일까. 정확한 이유는 그 자신도 알 수 없었지만, 분명한 것은 험비를 타고 수 시간이나 걸쳐 달려왔던 길을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돌파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미칠듯한 속도로 황야를 질주하던 준상의 눈에, 마침내 목적지인 천상의 다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준상은 순식간에 확대되어 오는 다리의 모습을 보고 급히 멈추어 섰다. 콰가가가가각! 그의 굳건한 두 다리는 마치 거대한 괴수가 할퀴고 지나간 것과 같은 깊은 흔적을 남겼다. “후우... 후우...” 이윽고 완전히 멈추어 서자, 준상은 몸에서 흰 연기를 뿜으며 한참이나 거칠게 숨을 몰아쉬다가 과부하가 걸린 몸이 어느 정도 안정을 찾기 시작하자 그제서야 몸을 일으키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건가.” 퀘스트 정보에 나타난 대로라면 중앙군 도착까지는 아직 20여시간이 남은 상태. 준상은 잠시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가, 중앙군을 직접 찾아 나서기로 결정했다. 비록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눈앞에 적을 놔두고 왔던 일이 아무래도 가슴 한 구석에 꺼림직한 느낌을 남기고 있었던 탓이다. 준상은 천천히 흔들리는 다리 위를 걸었다. 그리고 완전히 다리를 건너자, 이전에 지나갔던 피난민이나 왕자 일행의 자취를 탐색했다. 흔적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대략의 방향을 확인한 준상은 다시금 질주를 시작했다. 왕자 일행이 남긴 흔적을 추적하다보니 아까보다 속도는 다소 줄어 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준상은 미니맵에 나타난 퀘스트 표식을 확인할 수 있었다. 확실한 위치가 파악되자 준상은 곧바로 속력을 올렸다. 쾅! 그의 발이 있는 힘껏 대지를 박차고 나가자, 연약한 지면은 다시 한번 폭탄이 터진 것 같은 굉음과 함께 부서져 나갔다. 그 소리는 기사단의 선두에서 진군하고 있던 에롤의 귀에도 들렸다. “이게 무슨 소리죠?” 에롤이 묻자 철혈 은장 기사단의 단장 타마레르는 얼굴을 찌푸리더니 즉시 기사단을 돌아 보며 명했다. “전원! 경계 태세로!” 하지만 그의 명령이 기사단 전원에게 채 하달되기도 전에, 전방에서 거대한 흙먼지와 함께 질주해 오는 무언가가 시야에 들어왔다. 에롤은 자신들을 향해 질주해 오는 그 무언가를 발견한 순간 자신도 모르게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빼들었다. 창! 그녀의 예민한 감각이, 당장 검을 뽑지 않으면 위험하다고 경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타마레르는 뒤를 돌아보며 명령을 내리다가 갑자기 에롤이 검을 뽑아들자 흠칫하며 얼른 뒤를 돌아보았다. 순간. 그는 보았다. 두 눈에서 섬뜩한 안광을 뿜어내며 자신들을 향해 달려오는 한 사람의 모습을. 바로 그 사람, 준상은 기사단의 모습을 확인하자 급히 발을 멈추었다. 콰가가가가각! 연약한 대지에 다시 한 번 거대한 흉터를 남긴 준상은 자신이 만들어낸 흙먼지 속에 우뚝 선 채 오연한 표정으로 기사단을 한번 돌아본 후, 조용히 말했다. “에슈탈렌의 중앙군, 맞나?” 00099 트롤러 ========================================================================= 전력질주를 한 시간이 짧았던 탓에 아까처럼 몸에서 흰 연기를 뭉게뭉게 뿜어내지는 않고 있었지만, 주위를 뒤덮은 자욱한 먼지 탓에 그의 몸에서 실타래처럼 뿜어져 나오는 아지랑이의 모습은 더욱 선명하게 기사단의 눈에 각인되고 있었다. 그 뿐 만이 아니다. 차갑게 가라앉은 두 눈과 마주 하는 순간, 기사들은 알 수 없는 전율을 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강자. 일생을 검에 바쳐온 그들이기에 준상의 모습에서 그의 강함을 엿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한 사람, 에롤로미네 왕녀의 충격은 다른 누구보다도 대단했다. 그녀의 머리 속은 한 순간 백지처럼 탈색되어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모든 감상을 유발한 원인인 준상의 표정은 서서히 찌푸려지기 시작했다. “맞냐고 물었을 텐데.” 그제서야 화들짝 정신을 차린 에롤이 다급하게 대답했다. “마, 맞아요.” 하지만 준상의 찌푸려진 얼굴은 펴지지 않았다. “네가 이 부대의 책임자인가?” 에롤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닙니다.” 그 말을 들은 준상은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닥치고 있어라.” “...” 가차 없는 준상의 말에 에롤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인해 붉게 물 드는 모습을 본 타마레르는 격분해 준상을 향해 크게 외쳤다. “네 이놈! 감히 누구에게 대고...” 하지만 그는 말을 끝마칠 수 없었다. 준상의 눈에서 섬뜩한 붉은 안광이 쏟아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공포의 시선을 발동한 채 준상은 타마레르를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넌 누구냐.” 타마레르는 이를 악물고 준상이 뿜어내는 공포의 시선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크으으...” 얼굴과 목에 핏줄이 곤두서고, 실핏줄이 터지는 바람에 눈이 붉게 물든 채로 타마레르는 자신을 옭아매는 알 수 없는 기운에 항거하며 크게 외쳤다. “나는... 나는.... 타마레르다!” 그런 타마레르의 모습을 보고 준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지금까지 만나왔던 인간 중에 스스로 공포의 시선을 떨쳐낸 것은 그가 유일했기 때문이다. 보스 중에서도 그 기운에 대항하는 자가 그리 많지 않았던 점을 감안하면, 이 중년 남자는 지금까지 준상이 본 중에서도 가장 강한 마음을 지니고 있는 자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제법이군.” 준상은 공포의 시선을 거둔 후 타마레르를 향해 조용히 말했다. “이 부대의 지휘관이나 던스렐 왕자를 만나고 싶다. 데려오도록.” 타마레르는 준상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던 붉은 안광이 사라지고, 다시 그의 입에서 던스렐 왕자의 이름이 나오자 숨을 몰아쉬며 의혹어린 시선을 던졌다. “왕자님은 왜 찾는... 것이오?” 타마레르는 감히 말을 낮출 엄두가 나지 않았다. 준상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자신을 바라보는 타마레르에게 위에서 내려다 보는 듯한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긴히 할 얘기가 있다. 어둠의 군세에 관해서.” 그러자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에롤이 급히 물었다. “어둠의 군세라고요?” 하지만 준상은 그녀가 대화에 끼어드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닥치라고 했을텐데.” 에롤은 자신을 향한 준상의 눈에서 섬뜩한 붉은 안광이 쏟아져 나오자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순간 아무것도,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비명을 지르기는커녕, 눈을 깜빡이지도 손을 까딱이지도 못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눈에 보이지 않는 거미줄에 꽁꽁 묶여버린 불쌍한 나비처럼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두려움에 떠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제서야 에롤에게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눈치 챈 타마레르가 급히 그녀와 준상 사이로 몸을 던지며 외쳤다. “그만! 그만 두시오!” 앞을 가린 타마레르로 인해 시야에서 준상의 모습이 사라지자, 에롤은 그제서야 크게 숨을 몰아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강하리라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자신이 눈빛조차 감당하지 못할 강자라니! 이런 자가 어디서 나타났단 말인가! 하지만 에롤은 공포로 인해 짓눌려 있던 사고가 봇물 터지듯이 이어지기 시작하자 이내 어렵지 않게 그의 정체를 추론할 수 있었다. “서, 설마... 다리를 지키고 있다던 이방인?” 등 뒤에서 들려오는 에롤의 중얼거림을 들은 타마레르는 그제서야 준상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렇다. 그렇다면 던스렐 왕자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것도 설명이 된다! 타마레르는 그것을 깨닫자 바로 외쳤다. “바로 왕자님을 모셔 오겠소! 잠시만 기다려 주시오!” 준상은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이고는 차갑게 가라앉은 시선을 거두고 주위로 시선을 돌렸다. 타마레르는 급히 부관에게 후방의 보급대로 내려가 있는 던스렐 왕자에게 기별을 보내도록 지시한 다음에야 비로소, 여전히 창백한 얼굴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에롤을 바라보았다. “괜찮으십니까?” “괜찮... 아요.” 말로는 괜찮다고 하고 있었지만, 안색은 전혀 그렇지가 못하다. 타마레르는 가볍게 한숨을 쉬고는 준상이 듣지 못하게끔 조용히 말했다. “성격이 보통이 아닙니다. 위험할 수도 있으니 일단 자리를 피하시는 것이...” 하지만 에롤은 입술을 잘근 깨물며 대답했다. “그럴 수 없어요.” “왕녀님.” “전 지금 왕녀로서 여기 서 있는 것이 아니에요. 기사로서 있는 거라구요.” 그러자 타마레르의 시선은 차갑게 가라앉았다. “좋습니다. 왕녀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감사합...” “평기사 에롤로미네 브리즈 바힘 에슈탈렌.” 지금까지의 따뜻하던 말투가 아니었기 때문에 에롤은 당황했다. “단장님?” 그래서 당혹스런 표정으로 바라봤지만 타마레르는 냉정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복창은?” 그제서야 에롤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평기사 에롤로미네 브리즈 바힘 에슈탈렌, 명을 받듭니다.” “지금 곧 후위로 위치 변경을 명한다.” 에롤은 입술을 깨물고는 그 말을 복창했다. “후위로 위치 변경을 명받았습니다.” “실시.” “실시!” 에롤은 고삐를 당겨 후위로 말을 몰아갔다. 타마레르는 어깨가 축 처진 채 후위로 터덜터덜 자리를 옮기는 에롤의 모습을 보고 그제서야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후우...” 그리고는 고개를 저으며 말머리를 돌리는데, 멈추어선 강철 마차에서 몇 사람이 내려 다가오는 모습과, 그 너머에서 헐레벌떡 말을 몰아 달려오는 던스렐 왕자의 모습이 동시에 보였다. 일단 가만히 기다리자, 말을 탄 던스렐 왕자가 먼저 도착했다. “이방인이 날 찾는다구요?” 던스렐의 말에 타마레르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등을 돌린 채 가만히 먼 곳을 응시하고 있는 준상을 가리키며 말했다. “네, 저기 저 사람이...” 그러자 던스렐은 준상의 모습을 한 눈에 알아보고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니! 다리는 어떻게 하고 여기에 오신 겁니까?” 준상은 그제서야 몸을 돌리더니 얼른 말에서 내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던스렐에게 말했다. “긴히 할 말이 있다.” “무슨...” “추격대는 처음부터 미끼였다. 적의 본대는 협곡을 우회해 침묵의 습지를 돌파중이다.” 그 말에 던스렐과 타마레르는 깜짝 놀랐다. “그, 그런 말도 안 되는!” 던스렐의 외침에 준상이 조용히 물었다. “어째서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거지?” 그 말에 던스렐을 따라 말에서 내린 타마레르가 얼른 대답했다. “침묵의 습지는 인간이 함부로 횡단할 수 없는 곳입니다. 인근의 경험 많은 길잡이를 대동해도 독 기운과 늪지 때문에 자칫하면 몰살을 당할 수 있습니다. 하물며 대규모의 군사가 이동하는 건...” 일견 타당한 의견이었지만, 준상은 담담하게 그 말에 대답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대는 한 가지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던스렐은 되물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준상은 조용히 말을 던졌다. “저들은 인간의 군대가 아니다.” “...” 준상이 던진 그 한 마디 말은, 던스렐과 타마레르의 입을 그대로 다물도록 만들어 버렸다. 그렇다. 어둠의 군세는 인간들로 이루어진 군대가 아니다. 그런 자들을 인간의 잣대로 판단하는 것 자체가 중대한 오류였던 것이다. “이, 이런...” 안색이 창백하게 질려버린 던스렐을 향해 준상이 다시 말했다. “이것은 적의 추격대로부터 얻은 것이다.” 그렇게 말하며 지퍼백에 담긴 작전 계획서를 꺼내 던스렐에게 넘겨 주었다. 던스렐은 고대 문자로 되어 있는 지령서의 내용을 살피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말씀대로군요.” 헤네스조차 제법 시간이 걸려서야 해독했던 계획서의 내용을 단숨에 읽어 내리는 던스렐의 모습에 준상의 눈에 살짝 이채가 서렸다. 하지만 그는 모르는 척 다시 타마레르에게 물었다. “습지 인근을 표시한 지도가 있나?” 타마레르는 불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지도는 왜...” “그들의 대략적인 위치를 살펴보고 오는 중이다. 지도에 표시해 줄 테니 참고하도록.” “...” 타마레르는 그 말을 듣자마자 얼른 뒤로 돌아 부관에게 명령을 내렸다. “작전 지도를 가져오라! 빨리!” 부관이 허둥지둥 지도를 가져와 펼쳐 보이자, 준상은 미니맵에 나타났던 지형을 참고 하여 적의 본대가 위치했던 지점을 손으로 가리켰다. “여기, 이 지점이다. 진행 방향은 이쪽이었고.” “그, 그럴 수가!” 던스렐과 타마레르는 다시 창백하게 질렸다. 예상보다 적이 훨씬 깊숙이 들어와 있다는 것에 놀라버린 것이다. 지도 위에 적의 위치를 짚어주자 준상의 시야 한쪽에 나타나 있던 퀘스트 정보가 다시 갱신되었다. (Hidden) 갈란드로부터 적의 작전 계획서를 습득하여 중앙군에게 전달하십시오. (단독) ->갈란드가 지니고 있던 작전 계획서를 해독한 결과, 천상의 다리를 노리던 추격대는 처음부터 중앙군의 이목을 끌기 위한 미끼였음이 밝혀졌습니다. 안제르망 대협곡을 우회하여 침묵의 습지로 은밀히 이동 중인 적의 본대를 추격해 그들의 위치를 확인하십시오. ->계획서에 나와 있는 대로, 적의 본대는 현재 침묵의 습지를 횡단하는 중입니다. 이 정도 속도로 계속 이동한다면 머지않아 습지를 횡단할 것이 분명합니다. 지금 즉시 다리로 돌아가 행군중인 중앙군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합니다. ->완료! “...” 또 뭔가 귀찮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싶었던 준상은, 별다른 내용 없이 그대로 히든 퀘스트가 완료되자 고개를 끄덕이고는 미련 없이 던스렐에게 작별을 고했다. 혹시 헤네스를 불러내면 새로운 퀘스트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몰랐지만, 거들먹거리며 다가오는 중국군들의 모습을 보자 괜히 일만 복잡해질 것 같아서 그만 두었다 흔히 떠올리기 쉬운 권위에 찌든 왕족의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털털한 던스렐의 태도는 그럭저럭 마음에 들었지만, 그렇다고 일일이 쫓아다니며 보살필 정도의 친밀함을 느끼는 것도 아니다. 이번에 준상이 받은 메인 퀘스트는 어디까지나 천상의 다리를 수호하는 것이다. “이것으로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모두 끝났다. 나머지는 알아서 잘 해보도록.” 준상은 그렇게 말하고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네? 아니, 잠깐...” 던스렐이 깜짝 놀라 얼른 준상을 붙잡으려 했지만, 그가 손을 내뻗기도 전에 준상은 이미 엄청난 속도로 천상의 다리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던스렐은 순식간에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그대로 얼이 빠졌다. “저, 저럴 수가...” 준상이 강하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인간이 두 다리만으로 저렇게 빠르게 달려 사라질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던스렐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그렇게 멀거니 바라보고 있는데, 그제서야 중국군 장교들이 거드름을 피우며 다가왔다. “무슨 일입니까?” “아...” 타마레르는 당혹한 표정으로 지도를 바라보다가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는 얼른 고개를 들었다. “음... 그것이 새로운 첩보가 들어왔습니다.” “첩보라구요?” 타마레르는 중국군 장교들에게 준상이 말해준 적의 위치와 진군 방향에 대해 설명했다. 얘기를 전해들은 중국군 장교들은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확실히 일리 있는 얘기입니다. 하지만 그냥 무조건 신뢰하기는 어렵지 않을까요.” “음...” 그 점에 있어서는 타마레르도 마찬가지 생각이었다. 우선, 안면도 없는 인물의 말을 믿고 이제와서 부대의 진군 방향을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다가 만약 천상의 다리가 파괴되기라도 하면, 북부 지역으로 통하는 교두보를 얻기 위해 앞으로 얼마나 큰 피해를 감수해야할지 감히 짐작도 되지 않는다. 또한, 추격대에게서 손에 넣은 작전 계획서 또한 적의 기만일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는 일. 하지만 바로 그때, 타마레르와 장교들의 말을 듣고 있던 던스렐이 말했다. “이렇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쏠리자 던스렐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어차피 천상의 다리는 지형을 감안하면 방어에 그리 많은 병력을 필요로 하는 곳이 아닙니다. 그러니 기사단의 일부와 보급대를 보내 거점을 만들어 방어에 힘쓰도록 하고, 기사단의 주력과 함께 여러분들이 기동력을 살려 예상되는 적의 출몰지점을 살피는 겁니다.” 전력의 분산은 그리 탐탁지 않은 일이었지만, 장갑차라는 물건 자체가 거점 방어보다는 기동전에 어울리는 물건이고, 그러한 점은 기사단 역시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상황이 여의치 않을 경우 장갑차의 수륙양용 성능을 이용해 역으로 늪지를 돌파하는 전술을 구사할 수도 있으리라. 그리 된다면, 이것이 적의 기만전술이더라도 역으로 적의 배후를 들이치는 것이 가능해진다. 중국군 장교들은 그런 점들을 머리속에 떠올리며 던스렐의 의견에 찬성했다. “저희는 그 의견에 찬성입니다.” 타마레르도 달리 이견이 없었다. “저 역시 그 방법이 좋을 듯 싶습니다.” 모두의 의견이 찬성으로 기울자, 중국군 장교들은 변경된 작전 계획을 알리기 위해 자신의 부대로 돌아갔다. 타마레르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 “왕자님.” “네.” “다리 쪽으로 보낼 분견대의 인선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그 말에 던스렐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역시 제가 갈 수밖에 없겠죠.” “직접 말씀이십니까?” “네. 그나마 안면을 튼 사이이기도 하고, 그의 신분을 생각하면 격에 맞는 인물이 저나 에롤 정도인데, 그 녀석만 덜렁 보내기도 어쩐지 불안하니 제가 갈 수 밖에 없죠. 그러니 녀석 좀 잘 부탁합니다.” “그건 걱정 마십시오.” 던스렐은 그렇게 말하다가 그제서야 에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물었다. “그런데... 에롤은 어디에?” 그 말에 타마레르는 쓴웃음을 지었다. “잠시 후위로 보냈습니다.” “흠, 뭔가 잘못이라도?” “아까 그 사람과 조금 문제가 있어서 그랬습니다.” 타마레르는 그렇게 대답하다가 문득 생각이 났는지 던스렐에게 물었다. “그런데... 그 남자, 이름이 뭔지 혹시 아십니까?” 던스렐은 그 질문을 듣고 나서야 자신이 준상의 이름을 들은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글쎄요. 그러고 보니 저도 그 사람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군요. 다만 하나 아는 것이 있긴 한데...” “그게 뭡니까?” 던스렐은 주위를 둘러보고는 은밀히 타마레르의 귀에 이렇게 속삭였다. “이건 비밀인데... 음, 사실 그 남자는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천년 왕국 신라의 왕족이라더군요.” “아아...” 타마레르는 그제서야 준상의 오연한 태도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게, 헤네스가 뿌려 놓은 씨앗은 점점 더 많은 사람에게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어쨌거나. 던스렐의 제안에 따라 기사단 일부와 보급대는 선봉부대에서 분리되어 다리를 향해 곧장 나아가기로 하고, 중국군과 기사단 주력은 그대로 적의 예상 출몰 지점을 향해 출발했다. 보급대를 따라가는 왕실 마차 안에서 꾸벅 꾸벅 졸고 있던 이민서는, 갑자기 중국군과 기사단이 부대에서 이탈해 다른 곳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을 보고 화들짝 정신이 들었다. “동준씨! 일어나요!” “음! 무, 무슨 일이죠?” “저기 봐요, 저기!” 민서가 가리킨 방향을 보던 동준은 중국군의 장갑차와 함께 기사단이 떠나가는 모습을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어디 가는 거죠?” “몰라요. 나도 지금 막 봤어요.” “...” 동준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말했다. “뭐... 중요한 일이면 누가 와서 알려주겠죠. 우리는 그냥 다리까지 가기만 하면 되잖아요.” “그거야 그렇지만...” “중요한 일이면 와서 알려줬겠죠. 그냥 신경 끄고 휴식이나 좀 더 취해 둬요.” “흠...” 민서는 뭔가 탐탁지 않다는 표정이었지만, 동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팔짱을 낀 채 몸을 웅크리고 눈을 감았다. 하지만 동준의 생각과는 달리, 그들에게 소식을 전하지 않았던 이유는 사안의 중요성과 전혀 관계가 없었다. 단지, 아무도 그들의 존재를 떠올리지 못했을 뿐이다. 00100 트롤러 ========================================================================= 기사단장 타마레르의 명에 의해 행렬의 후위로 내려가 있던 에롤은 기사단 일부를 제외한 선봉부대의 주요 전력 대부분이 침묵의 습지로 향한다는 사실을 전달받고 크게 놀랐다. “역시... 그 남자가?” 갑작스럽게 이런 전술의 변화가 생긴 이유는 달리 그것 외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 남자가 전해준 내용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이것 역시 그리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아마도 어둠의 군세가 침묵의 습지를 가로 지르고 있는 것이리라. “아!” 에롤은 그제서야 탄성을 터뜨렸다. 그리고 자신을 포함한 에슈탈렌의 그 누구도 이런 상황을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는 점을 깨닫고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것은 아마도, 머리 속에 너무나 선명하게 박힌 비역의 이미지 때문이었으리라. 앞서가는 선배 기사들의 뒤를 따라 열심히 말을 달리며 그런 생각들을 떠올리던 에롤은 얼마 뒤에 지친 말을 교체하기 위한 휴식을 갖던 도중 다시 타마레르의 명을 받았다. “앞열로 돌아오시라는 명입니다.” “앞열로 돌아오라는 명, 제대로 전달 받았습니다.” 에롤은 선배 기사에게 정중하게 명령을 복창한 후, 긴장한 표정으로 종자들이 마구를 교체하는 동안 지도를 들여다 보고 있는 타마레르에게 명했다. “평기사 에롤로미네 브리즈 바힘 에슈탈렌, 기사단장님의 명을 받고 왔습니다.” “...” 타마레르는 다소 경직된 에롤의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말씀 편하게 하셔도 됩니다. 아까는 상황이 상황이었던지라...” 하지만 에롤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지금껏 제가 너무 무례하게 굴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단장님.” 화가 났다거나 일부러 고집을 부리는 모습은 아니었다. 지금껏 그녀는 스스로를 왕녀보다는 철혈 은장 기사단의 평기사로 불러주기를 원했었다. 하지만 어느 틈엔가 왕녀 대접 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번 일로 깨닫고 새롭게 마음을 다잡은 것이다. 타마레르는 그것을 이해했지만, 그래도 역시 이전의 모습이 좋았다고 속으로 생각하며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용서하고 말고 할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신경 쓰지 마십시오.” 타마레르는 그렇게 말하고는 지도를 보여주었다. “대충 돌아가는 상황을 아셔야 할 것 같아서 불렀습니다. 보시지요.” 그리고는 천천히 현재 상황을 그녀에게 알려 주었다. “음...” 에롤은 지도를 바라보며 타마레르의 설명을 듣다가 조용히 물었다. “외람되지만, 혹시 적의 병력 구성에 대한 정보는 없었습니까?” “아쉽게도... 다만 던스렐 왕자님께 듣기로 이전의 전투에서는 되살아난 시체들이 선두에 섰던 모양입니다.” “되살아난 시체라...” 이미 죽어버린 자이기에 아무리 죽여도 다시 되살아나는 저주받은 마물.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한 일이지만, 에롤은 그것이 저 어둠의 군세가 지닌 전력의 전부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되살아난 시체만으로 샤린델의 그 단단한 성벽을 부수는 것은 불가능한 일. 에롤은 아무래도 그 부분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그녀가 턱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부관이 지친 말을 교체하는 작업이 끝났음을 알려 왔다. “출발 준비!” “출발 준비!” 타마레르의 명에 따라 에롤을 비롯한 기사들은 다시금 말에 올라타며 대열을 정비했다. 그리고 곧바로 이어진 명에 따라 기사들은 천천히 열을 지어 말을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두 번 정도 더 말을 갈아타고 나서야 에슈탈렌의 선봉 부대와 중국의 장갑차 부대는 적이 출몰할 것으로 예상되는 지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준상이 첩보를 가져온지 약 십여시간 만의 일이었다. “척후를 보내라.” “척후를 보내겠습니다!” 타마레르는 우선 습지가 한눈에 보이는 언덕에 기사단을 정렬시킨 후, 후위의 경기병 부대로 하여금 척후에 임하도록 했다. 그들이 멈추어 서자, 곧바로 중국군 장교들이 장갑차에서 내려 다가왔다. “어서 오십시오.” 타마레르가 그들을 맞이하자, 장교들은 손을 들어 간단하게 경례를 해보인 다음 본론을 말했다. “저곳이 침묵의 습지입니까?” “그렇습니다. 대륙의 금지된 비경 가운데 한 곳이죠.” “저희 나라에도 이런 곳이 몇 군데 있기는 합니다만, 직접 보기는 처음인 듯 합니다.” “...” 다른 건 몰라도 이 이방인들의 허풍만큼은 아무래도 적응하기 힘들다고 타마레르는 생각했지만, 그런 생각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일단 척후를 보냈으니, 잠시 휴식을 취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타마레르가 말하자, 장교 중 하나가 바로 대답했다. “저희 쪽에서도 두 대 정도를 빼서 척후를 보낼 생각인데, 어떠십니까?” “척후를요?” “네. 양쪽으로 한 대씩. 저희는 딱히 말을 갈아탈 필요도 없고 무장이나 방어도 더 강력하니 초기 대응에도 훨씬 유리할 겁니다.” “...” 사실대로 말하자면, 에슈탈렌의 수도로부터 여기까지 이어진 장거리 이동으로 인해 차축이며 베어링이며 과부하가 걸린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지만, 타마레르로서는 그런 사정을 알 방법이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타마레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말씀대로 해주신다면 저희로서는 큰 도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꼭 부탁드립니다.” “하하, 맡겨 두십시오.” 그렇게 말하며 중국군 장교들이 물러가자 에롤이 물었다. “왜 저 자들 말에 따르시는 겁니까?” 타마레르는 씩 웃으며 대답했다. “스스로 어려운 일에 뛰어 들겠다는데 거부할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적어도 저희 병사들이 죽고 다치는 것보다는 나은 일이죠.” “겸사겸사 저들의 허실도 살피고요?” “말씀대로입니다.” 타마레르의 말에 에롤은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곧바로 중국군의 장갑차 가운데 그나마 상태가 나은 두 대가 대열에서 빠져 나와 습지 주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경기병과 두 대의 장갑차 들이 척후를 시작한지 약 삼십분 정도가 지난 시점에서 최초의 총성이 터져 나왔다. 타마레르는 지도를 살피고 있다가 고개를 번쩍 들고는 소리쳤다. “어디지?” 에롤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동쪽 같은데... 소리가 너무 울려서 확실치 않네요.” 하지만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동쪽으로부터 기관총의 소음이 연거푸 터져 나오기 시작했고, 이어서 중국군에서 전령이 달려와 적의 위치를 알렸다. “동쪽으로 보냈던 척후로부터 적과 조우했다는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혹시 양동이 있을지도 모르니 여러분은 이곳에 계시기 바랍니다. 저희가 먼저 가보겠습니다.” “...” 양해를 구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결정 사항을 전달하는 내용에 지나지 않는다. 타마레르는 얼굴을 찌푸렸지만, 고개를 끄덕이고는 전령을 돌려보냈다. “어째서 그냥 돌려보내신 겁니까?” “이미 출발하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 무슨 말을 한다고 듣겠습니까?” “...” “다만, 저렇게 공에 눈이 멀어 있는 것이 본성이라면, 저들과 앞으로 큰일을 함께 하는 건 어려울지도 모르겠군요.” 타마레르는 그렇게 말한 다음, 휴식을 취하고 있던 기사단에게 출격 준비를 명한 다음 천천히 중국군을 뒤따르기 시작했다. 조금 이동하자 중국군들의 장갑차가 작은 여울목을 사이에 두고 몰려오는 좀비들에 대해 포화를 퍼붓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장갑차에 장착된 저압포와 기관총은 물론이고 개개인이 장비하고 있는 소총과 수류탄까지 총동원된 중국군의 압도적인 화력은, 문자 그대로 불의 비처럼 쏟아져 내려 여울목을 허우적거리며 건너오는 좀비들을 산산조각내고 있었다. “...” 타마레르는 물론이고 에롤 또한 그 압도적인 위력에 말문을 잃었다. “저것이... 다른 세계의 무기.” 에롤은 입술을 깨물었다. 과연 저런 위력의 무기를 지닌 자들이 적일 경우, 자신이 속한 철혈 은장 기사단이 힘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을까. 에롤은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기존에 사용되던 어떠한 무기와 전술로도 저 압도적인 화력을 감당할 방법이 없음을 그녀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으음...” 표정이 어두운 것은 타마레르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언덕 위에서 기사단들이 지켜보고 있는 모습은 바로 중국군 장교들에게도 확인되었다. “후후후... 소교 동지, 저 놈들 얼빠진 표정 좀 보십시오.” 쌍안경을 든 젊은 소위의 말에 이번 작전의 총 지휘를 맡고 있는 탕치양(唐志揚) 소교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소위, 딴 데 신경 쓸 겨를 있으면 전선에 우선 집중하라.” “죄, 죄송합니다.” 전투 상황은 순조로웠지만, 탕 소교는 아무래도 샤린델이라는 곳에서 벌어진 전투의 패배가 마음에 걸렸다. 비록 화력이 다소 부족했다고는 하지만, 현대 화기로 무장하고 정규 군사 훈련을 받은 병력들이 저렇게 흐느적거리는 시체 따위에게 전멸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그로서는 아무래도 믿기 어려웠다. 때문에 다른 장교들이 초반의 긴장을 풀고 마음껏 화력을 투사하며 학살을 즐기고 있는 상황에서도 탕 소교 만큼은 긴장을 풀지 않은 채 전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눈에 문득 기묘한 것이 보였다. “음?” 그것은 벌거벗은 여인이었다. 얼굴은 해초처럼 늘어진 긴 머리카락에 가리워져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그 아래 드러난 나신은 제법 먼 거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시체들과는 달리 매우 탐스럽고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저것도 살아있는 시체의 일종일까 고개를 갸웃거리던 탕 소교는 쌍안경을 들어 그 여인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러자 문득 해초처럼 흘러내린 머리카락들 사이로, 붉은 입술이 눈에 비쳤다. 입술은 탕 소교의 시선을 빼앗은 채 가만히 다물어져 있다가, 마치 햇살에 피어나는 꽃송이처럼 조용히 열렸다. 쿵! 순간 탕 소교는 그런 소리가 들린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분명 귀로는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무언가가 머리 속을 헤집고 들어와 그의 마음을 마구 헝클어뜨리기 시작했다. “이, 이건... 도대체?” 손이 부르르 떨리며 쌍안경이 그의 손으로부터 떨어져 내렸다. 그 순간, 탕 소교는 다시 한 번 크게 놀랐다. 하나가 아니었다. 좀비들의 잔해들 뒤로 자신이 보았던 여인의 나신이 마치 허깨비처럼 솟아나 중국군들의 시야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선명하게 반짝이는 붉은 입술이 일제히 벌어지자, 들리지 않는 노래 소리가 총성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중국군들의 머리 속을 헤집어 놓기 시작한다. “으, 으아아아아!” 최전선에서 싸우고 있던 병사 하나가 갑자기 괴성을 지르며 벌떡 일어서더니 주위의 동료들에게 총기를 난사하기 시작한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장갑차에 장착된 저압포를 장전하던 탄약수가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장갑차 안에 수류탄을 던져 넣었다. 중국군이 그렇게 파괴와 혼란의 구렁텅이로 곤두박질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 이것이었나.” 탕 소교는 그제서야 샤린델에 소환되었던 중국군이 순식간에 괴멸된 이유를 깨달았지만, 그것은 이미 너무 늦은 일이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자신의 소총을 들어 나체의 여인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퍽! 손이 떨리는 와중에도 그가 쏜 탄환은 정확히 여인의 탐스러운 젖가슴을 짓뭉개 버렸다. 하지만, 여인은 인간이라면 단숨에 절명해 버렸을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상황에서도 뻐끔거리는 입술의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정신 차려라! 저 여자들을 죽...” 탕 소교는 목이 터져라 그렇게 외쳤지만, 등 뒤에서 쏘아진 탄환이 그의 이마를 꿰뚫자 그대로 눈을 부릅뜬 채 쓰러지고 말았다. 그의 등 뒤에서는, 아까 기사단의 얼빠진 표정을 보며 비웃다가 주의를 받았던 소위가 헤실헤실 웃으며 자신의 머리에 대고 권총 방아쇠를 당기고 있었다. 00101 트롤러 ========================================================================= “이런!” 타마레르는 중국군이 갑자기 혼란에 빠져 뭘 어떻게 해볼 틈도 없이 순식간에 자멸해버리는 모습을 보고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지니고 있는 무기가 강력한 만큼, 그것이 아군에게로 향했을 때의 피해 역시 상상을 초월한다. 타마레르는 머리 속이 복잡해졌지만, 갑자기 저들이 혼란에 빠진 이유가 습지에서 모습을 나타낸 벌거벗은 여자들 때문임을 알아차리고 옆에서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 에롤을 향해 말했다. “왕녀님.” “네.” “부탁드리겠습니다.” “맡겨주세요.” 에롤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갑옷 안쪽에 집어넣고 있던 목걸이 형태의 성표를 꺼내어 입을 맞춘 뒤 고대어로 이루어진 송시(頌詩)를 읊조리기 시작한다. “게렌 마라스 오브라디스 니헬 샤...” 중국군의 진지에서 들려오는 총성과 폭음이 점점 작아지는 것과는 반대로, 그녀의 선창을 따라 송시를 읊조리는 기사단의 목소리는 점점 더 커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 목소리가 하나로 울려 퍼지며 조화를 이루는 순간, 에롤을 시작으로 희미한 은빛의 영기(靈氣)가 퍼져 나가며 기사단 전체를 감싸기 시작했다. 반질반질하게 닦여 은빛으로 빛나는 갑옷 때문도 아니다. 은빛으로 번쩍이는 무기 때문도 아니다. 그들의 몸을 감싼 은빛의 영기야 말로 이 기사단이 은장(銀裝)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진짜 이유였다. 이 은빛의 영기는 에슈탈렌의 국조신(國祖神) 니헬 샤의 축복을 빌어 그 몸에 용기를 북돋우고 사악한 기운이 함부로 침범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에슈탈렌 왕실의 직계 중에서도 여성에게만 전해지는 특수한 능력. 이름 하여, 은장의 축성(祝聖: Consecration of Silver Armor). 기사단장인 타마레르나 그 외의 기사들이 어리고 미숙한 그녀를 함부로 하지 못하고, 나아가 은연중에 추앙하는 것에는 이런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다만 한 가지 단점이 있다면, 축성의 의식에 다소의 시간이 걸린다는 점. 그녀가 준상이 뿜어내는 공포의 시선에 대항하지 못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고, 타마레르가 힘겹게나마 준상의 시선으로부터 버틸 수 있었던 이유 또한 오랜 시간에 걸쳐 이루어진 수많은 축성의 의식이 그 마음을 강건하게 만든 덕분이었다. 타마레르는 에롤의 축성 의식이 끝나자 검을 높이 치켜들고 외쳤다. “빛나는 은빛 검에 영광 있기를!” 그러자 에롤을 비롯한 기사들 모두가 은빛을 뿜어내는 각자의 무기를 높이 치켜들고 그 말을 복창했다. “빛나는 은빛 검에 영광 있기를!” 타마레르는 투구의 바이저를 내리고 가장 먼저 박차를 가해 언덕 위로 말을 몰아내려 갔다. 그가 앞장서자, 다른 기사들 역시 은은한 빛을 뿜어내는 각자의 무기를 치켜든 채로 언덕을 질주해 중국군에게 다가서는 나체의 여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차앗!” 타마레르의 검이 한 차례 휘둘러지자, 다리조차 움직이지 않고 뻣뻣하게 습지 위를 미끄러지듯 이동하던 여인의 목이 단숨에 잘려 나갔다. 뒤를 이은 기사단들 역시 여인들의 모습이나 들리지 않는 기묘한 무언가에 현혹되지 않고 은빛으로 빛나는 무기를 휘둘렀다. 하지만 기사들 가운데 타마레르를 포함한 일부의 인원들은 공격이 성공하는 순간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어째서?” 인체는 뼈와 살로 구성되어 있다. 살을 이루는 피부나 근육은 일단 논외로 치더라도, 뼈라는 것은 상당한 강도를 지니고 있어서 생각처럼 쉽게 잘리지 않는다. 에롤처럼 아직 전장을 경험해 보지 않은 풋내기 기사들은 미처 그런 것을 느낄 틈이 없었지만, 타마레르처럼 다년간 수많은 전장을 오갔던 노련한 기사들은 무기로 전해지는 감촉이 보통의 인간을 베는 느낌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너무 쉽게 잘린다.’ 그것이 바로 나체의 여인을 베었을 때의 느낌이었다. 마치 뼈가 없는 연체동물을 벤 것과 같은 기묘한 느낌. 하지만 타마레르는 이내 고개를 저어 그런 생각을 떨쳐 버렸다. 인간의 형상을 하기는 하였으되, 저들이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되새긴 것이다. 여하튼 측면에서 난입한 기사단의 돌격은 아비규환에 빠진 중국군의 정신을 일순간이나마 적의 영향력으로부터 되돌리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그것이 곧바로 그들을 정상으로 되돌렸다는 의미는 아니다. 정신 지배로부터 벗어난 중국군들은 자신의 주위에 널린 동료들의 끔찍한 시체에 몸서리쳤고, 잠시 정신을 잃은 사이에 이와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는 것에 경악했다. “꺄아아악!” 한 여성의 찢어질 듯한 비명이 터져 나옴과 동시에, 정신 지배와는 또 다른 격렬한 무언가가 중국군들의 나약한 정신을 갈가리 찢어 놓았다. 애초에 그들은 오랜 세월 동안 단련된 정규병들이 아니다. 느닷없이 튜토리얼이라는 전대미문의 사태에 휩쓸려 버렸고, 그 지옥과도 같은 경험을 마치고 귀환하자 중국군에게 강제로 징집되어 병사가 되었을 뿐이다. 튜토리얼을 통과했다는 것 자체가 다른 보통의 사람들보다 한 가지 이상의 강인한 면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는 하지만, 그들은 그와 같은 강인함을 스스로 단련하기도 전에 군대라는 조직에 예속되어 그 부속품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그런 그들에게 남은 수순은 단 하나. 패닉. 그 빌어먹을 정신의 오염은 순식간에 살아남은 병사들에게 전염되어 버렸고, 그것을 진정시킬 지휘자마저 사라져 버린 중국군은 곧바로 군대로서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해 버렸다. 남은 것은 오직 패주 뿐. “쯧!” 타마레르는 무기고 뭐고 내팽개친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는 중국군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혀를 차고 말았다. 하지만 그 역시 남 걱정을 해줄 처지가 아니었다. 여인의 형체를 한 이 기묘한 물체는 목이 잘리고 가슴이 베어지자 체액을 흩뿌리고는 그대로 물속으로 숨어 버렸다. 문제는 바로 그 다음이었다. 여인의 형체가 사라지자, 다시 습지의 탁한 물속에서 거대한 촉수가 튀어나와 채찍처럼 기사들을 후려치기 시작한 것이다. 타마레르는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촉수를 검으로 단숨에 베어버리고는 목이 터져라 외쳤다. “그대로 나아가며 우선회 한다! 서둘러라!” 하지만 그 말을 외치는 순간 또 다른 촉수 하나가 물속에서 불쑥 튀어나와 타마레르가 타고 있는 말을 순식간에 휘감아 올려버리고 말았다. “크악!” 질퍽한 습지로 뛰어들면서 속도가 많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달리던 말 위에서 떨어지는 충격은 둔중한 해머에 두들겨 맞는 것에 버금간다. 타마레르는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런 그에게 해초 같은 검은 머리를 치렁거리는 나체의 여인 하나가 손을 뻗으며 다가섰다. “이 요물!” 타마레르는 악을 쓰며 여인에게 검을 휘둘렀고, 나체의 여인은 어깨로부터 겨드랑이까지의 부분이 비스듬하게 잘려나가는가 싶더니 그대로 물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헉... 헉...” 낙마의 충격으로 인해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만, 그나마 다행이라면 아직 은장의 축성이 효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타마레르는 검을 휘둘러 다리 사이로 솟아오르는 촉수를 일격에 갈라 버리다가, 에롤로미네 왕녀가 타고 있던 말이 촉수에 휘감겨 솟아오르는 것을 보았다. “왕녀님!” 그녀 뿐만이 아니었다. 물속에서 마치 들판의 잡초처럼 솟아오른 수많은 촉수들에 의해 기사단이 타고 있던 말들이 순식간에 무력화되고 있었다. 다행히 낙마로 인한 피해는 크지 않은 듯 했지만, 말을 잃은 기사단은 그 자체만으로도 전투력이 반감되는 법이다. “마른 땅으로 올라가라! 서둘러!” 타마레르는 말에서 떨어진 기사들에게 그렇게 소리치며 촉수에 휘감겨 올라가는 에롤로미네 왕녀를 향해 달려갔다. “하아압!” 그의 빛나는 은빛 검은 단숨에 서너 개의 촉수들을 잘라버렸고, 에롤은 다행히 위기로부터 구출될 수 있었다. “가, 감사합니다.” “어서 마른 땅으로 올라가십시오.” “네.” 에롤은 타마레르에 의해 위기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지만, 모든 기사들이 그런 행운을 얻은 것은 아니었다. “아아악!” 기사 하나가 사지에 촉수를 휘감은 채 떠오르더니 그대로 오체분시되어 버렸다. 어떤 기사는 촉수에 휘감기자 마자 그대로 물속으로 끌려 들어가 버렸고, 또 어떤 기사들은 늪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은장의 축성이 풀리는 순간 그대로 여인의 품에 안겨 가라앉아 버리고 말았다. “젠장!” 타마레르는 최선을 다해 뒤에 남은 기사들을 하나라도 더 구하려 애썼지만, 결국 약 삼분의 일에 해당하는 기사들은 다시 뭍 위로 올라오지 못한 채 물속으로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하지만, 아직 악몽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마른 땅으로 올라왔다고 안심하던 기사들의 발밑에서 다시금 촉수들이 솟아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다시금 물속에서 되살아난 시체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때 언덕 위에서 전투를 지켜보던 종자들이 급히 예비말을 이끌고 달려 내려오기 시작했다. 나름대로 자신이 모시는 기사들을 구하기 위한 행동이었지만, 불행히도 그것은 헛수고에 불과했다. 물 위에서처럼 갑자기 땅 위로 모습을 드러낸 나체의 여성들이 그들의 앞길을 가로 막은 탓이다. 길게 내려뜨린 검은 머리카락 속에서 붉은 입술이 유혹하듯 그 속살을 드러내자, 축성의 가호를 받지 못한 종자들은 반수 이상이 혼란에 빠져 말 위에서 우르르 떨어지고 말았다. 이번에 낙마한 종자들은 운이 없었다. 곧바로 그들의 머리 위에 말발굽이 떨어져 내린 탓이다. “으아아악!” 순식간에 종자들의 반수 이상이 어떻게 손도 써보지 못하고 죽음을 당하고, 그 시체가 여인들의 손에 감싸여 땅 밑으로 사라져 버리자,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자신의 검을 휘두르던 에롤은 절망에 빠지고 말았다. “아아... 니헬 샤여!” 그녀는 국조신의 이름을 외쳤지만, 그 순간에도 기사단에 속한 자들은 하나 둘씩 촉수와 여인의 손에 죽임을 당하고 있었다. 에롤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이 비참한 전장의 한복판에 내던져진 자들의 운명이 그녀를 슬프게 했다. 그런 운명을 지켜봐야 하는 자신의 운명이 그녀의 가슴을 잡아 찢었다. 그렇게 소리 없이 흐느끼며 검을 휘두르는데, 문득 타마레르가 어떻게 구했는지 말 한 마리를 이끌고 그녀 앞에 나타났다. “왕녀님!” “네, 단장님!” “어서 이 말에 타십시오. 소장이 뒤를 맡겠습니다.” “그, 그런...” 누가 봐도 이 전장은 더 이상 가망이 없었다. 적국의 왕제를 감탄케 하여 은장의 축성이라는 이름이 붙은 국조신의 가호는 여인이 내지르는 소리 없는 저주를 막아낼 수는 있어도 땅속에서 창처럼 솟아오르는 촉수들과 되살아난 시체의 누런 이빨을 막아주지는 못했다. 그런 와중에 뒤를 맡겠다니. 죽겠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지만 타마레르는 엄한 표정을 지은 채 눈물로 얼굴이 온통 범벅이 되어 버린 왕녀를 향해 외쳤다. “평기사 에롤로미네 브리즈 바힘 에슈탈렌!” 그 준엄한 목소리에 에롤은 반사적으로 복창했다. “평기사 에롤로미네 브리즈 바힘 에슈탈렌, 명을... 받듭니다.” 울먹이는 그녀의 목소리에 타마레르는 쓴웃음을 지으며 명령했다. “경은 지금 즉시 전장에서 물러나 이곳의 상황을 본대에 알리도록. 이것은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중대한 임무이니 부디 명심하라.” “명을... 받듭니다.” 에롤은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대답하고는 타마레르가 건네주는 고삐를 받아 쥐었다. 그녀는 말이 끝나자 마자 곧바로 돌아서서 습지를 향해 달려가는 타마레르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갑옷 속에 넣어두었던 목걸이 형태의 성표를 꺼내 눈을 감고 입을 맞추며 말했다. “니헬 샤여. 지금 여기서 간절히 소망합니다. 부디... 부디 우리들을 구원하소서.” 그리고 다시 한 번 성표에 입을 맞추던 그녀는 눈을 뜨는 순간 한 줄기 빛이 자신의 눈앞에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그 빛은 이내 한 사람의 모습으로 변했다. “아!” 에롤은 그가 누구인지 한 눈에 알아보았다. 자신을 눈빛 하나만으로 꼼짝 못하게 만들었던, 이름 모를 이방인. 그가 바로 이 순간 빛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쯧...” 바로 그 이방인, 준상은 짜증스러운 시선으로 주위를 한 번 돌아보고는 눈앞에 나타난 퀘스트 정보를 우선 확인했다. 습지의 재앙을 토벌하십시오. :침묵의 습지에 재앙이 출몰했습니다. 이 재앙이 대지로 퍼져 나가지 않도록 막아주십시오. [이 퀘스트는 단독 퀘스트입니다.] (Hidden) 크롤로바간을 처치하십시오. ->미완료. (Hidden) 가희(歌姬)를 파괴하십시오. (0/30) ->미완료. (Hidden) 촉수를 파괴하십시오. (0/30) ->미완료. 에롤은 빛과 함께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 준상의 모습을 보자 자신의 기도가 이루어진 것이라 믿었다. “저, 저희들을... 구해주세요!” 하지만 준상은 얼굴이 온통 눈물과 습지의 진흙으로 범벅이 되어 버린 에롤이 이전에 만났던 그 여성임을 미처 알아보지 못했다. 하긴, 알아 봤어도 반응이 달라지지는 않았겠지만 말이다. 준상은 주위를 한번 돌아보더니 이내 전장이 한눈에 보이는 언덕을 향해 움직였다. 에롤은 자신의 말을 귓등으로도 들은 척조차 않는 준상을 향해 다시 무언가 말을 던지려다가 그가 휙하고 어디론가 달려가 버리자 얼이 빠져 버렸다. “자, 잠시만요!” 그녀는 놀라서 얼른 말에 올라 준상의 뒤를 쫓았다. 준상은 언덕에 오르기가 무섭게 헤네스를 소환했다. “엇? 여긴?” 헤네스는 주위를 돌아보다가 아래쪽에서 사람들이 벌이는 전투를 보고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준상은 근처에 떨어져 있는 기병용 창을 집어 거기에 피와 혼돈의 깃발을 맨 다음, 그대로 땅에 콱 하고 박아 넣었다. 그리고는 헤네스에게 확성기를 건네주었다. 헤네스는 그것을 받아들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욕하라구요?” 준상은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그리고 늑대들을 불러 줄테니, 이곳에서 절대 움직이지 마라.” “네.” “끝나면 아까 먹으려던 스테이크, 곱빼기로 사주마.” “안 그러셔도 되는데... 감사합니다.” 말은 그렇게 해도 헤네스는 준상의 말에 기쁜 표정을 지었다. 퀘스트가 종료되고도 한 시간 넘게 별 다른 일이 없길래 불안한 가운데서도 근처의 맛집을 찾아간 두 사람이었지만,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퀘스트가 날아오는 바람에 도망치듯이 레스토랑을 빠져 나와야만 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에롤이 말을 몰아 그들에게로 달려왔다. 그녀는 얼른 말에서 내려 급히 준상에게 매달리며 외쳤다. “도와주세요! 제발 부탁드려요!” 하지만 준상은 그녀의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할 말이 있으면 이 녀석에게 해라.” “네?” 에롤은 어느 틈엔가 준상의 옆에 자리 잡고 있는 갈색 머리 소녀를 보고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이 소녀는 또 어디서 나타났단 말인가. 하지만 그녀의 의문이 해소되기도 전에, 준상은 정령들과 늑대들을 소환해 헤네스를 보호하도록 지시한 뒤 인벤토리에서 랑다잘의 분노를 꺼내들고 언덕을 달려 내려갔다. “저, 저기...” 에롤은 급히 준상의 뒤를 쫓으려 했지만, 헤네스가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헤네스는 에롤을 향해 방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분에게 부탁하실 일이 있으시면, 저에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 “하지만... 그 전에 할 일이 있으니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에롤은 어째서인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헤네스의 미소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묘한 압박감에 짓눌려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헤네스는 언덕 위에 선 채로 확성기를 손에 쥔 채 일단 목을 가다듬었다. “아, 아, 마이크 테스트. 하나, 둘, 셋.” 이 확성기라는 물건을 잡으면 이 말을 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으니 참으로 묘한 일이다. 헤네스는 목을 가다듬은 후, 확성기의 스위치를 누른 채 크게 외쳤다. “이 바보 똥벌레들아아아아!” 곧바로 그녀가 지닌 ‘도깨비 시장의 욕쟁이 할매’ 콤보의 효과가 전장 구석구석까지 전달되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녀의 욕설은 적에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기사단 역시 은장의 축성 효과가 남아 있어서 별다른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고, 대신 말을 전해주러 갔다가 싸움에 휩쓸린 종자들만이 몸이 굳거나 혼란에 빠져 위험에 처했다. “어, 어라?” 헤네스는 상황이 이전과 뭔가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이번에 나타난 적들에게는 그녀의 욕설이 아무런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이게 아닌데... 어쩌지?” 당황해하던 헤네스의 눈에 문득 부상을 당해 쓰러진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비록 욕설은 통하지 않았지만, 아직 헤네스가 할 수 있는 일은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깨달은 헤네스는 다시 확성기의 스위치를 누른 채로 크게 외쳤다. “부상병들은 이쪽으로! 이쪽으로 오세요!” 그렇게 크게 몇 번 외친 다음, 이게 뭔짓인가 하는 표정으로 멀뚱히 바라보고 있는 에롤에게 외쳤다. “거기서 그러지 말고, 내려가서 부상병들을 이곳으로 데리고 와요! 빨리요!” “네? 아, 알겠습니다.” 에롤은 허겁지겁 말을 타고 내려가 부상을 입고 쓰러져 있는 사람들을 말에 실어 위로 올라왔다. 그러자 아직 스스로 걸을 수 있는 부상자들 역시 언덕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후... 이건 정말 쓰고 싶지 않았는데.” 헤네스는 한숨을 푸욱 내쉬고는 허리춤에 매달아 두었던 두 개의 채찍을 꺼냈다. 그리고 뭘 하려는 건가 싶은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기사를 향해 채찍을 휘둘렀다. 처덕! 처덕! 신음을 흘리며 누워있다가 난데없이 채찍질을 당한 중년의 기사는 얼굴이 시뻘개지며 버럭 화를 냈다. “이게 무슨 짓... 어라?” 그러다가 깨달았다. 창끝과도 같은 촉수에 찔려 불로 지진듯한 통증을 일으키고 있던 가슴의 상처가 엄청난 속도로 아물기 시작한 것을 말이다. 그 놀라운 효과에 사람들은 얼빠진 표정으로 헤네스를 바라보았다. 헤네스는 옆구리에 손을 척 올리고는 말했다. “자, 다음 환자!” 헤네스가 그렇게 언덕 위에서 부상병들을 치료하는 동안 준상은 랑다잘의 분노를 손에 쥔 채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나체의 여인과 촉수들을 하나 하나 분쇄하고 있었다. “흠...” 퍽퍽 소리를 내며 터져나가기를 얼마나 했을까. 가희와 촉수를 파괴하라는 두 개의 히든 퀘스트가 완료되자, 발밑에서 솟아나오는 촉수의 숫자가 눈에 띄게 줄어들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것은 전투의 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갑자기 지면이 거세게 진동하기 시작하자 준상은 얼굴을 찌푸리며 얼른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그가 서 있던 자리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지면을 뚫고 모습을 드러냈다. 준상은 깨달았다. 촉수는 그렇다 치더라도, 어째서 가희 역시 ‘파괴’의 대상이었는지를. 처음부터 저 벌거벗은 여인의 형상은 별개의 생명체가 아니었다. 촉수와 마찬가지로, 다른 생명체들을 끌어들여 현혹하기 위한 미끼에 불과했던 것이다. “크롤로바간...” 준상이 그 이름을 중얼거리자, 마치 화답하듯이 거대한 마수가 괴성을 터뜨렸다. ============================ 작품 후기 ============================ 100회 축하해주신 모든 분들께 짧게나마 감사의 인사 올립니다. 00102 트롤러 ========================================================================= -가아아아아아아! 괴물의 입에서 낮고 기묘한 괴성이 터져 나오자, 준상을 비롯한 철혈 은장 기사단의 생존자들은 뒤로 주르륵 밀려나기 시작한다. 준상은 철구를 땅에 내려찍어 밀려나는 것을 막으며, 놈의 모습을 가만히 관찰했다. 전체적인 모양새는 등에 수많은 촉수가 난 해삼을 닮아 있었다. 하지만 동굴처럼 커다랗게 벌려진 입은 해삼보다는 개불 쪽에 가까운 느낌. 미끌미끌한 느낌의 피부라든가, 등에 기생충 같이 돋아나 있는 촉수들이라든가... 여하튼 절대로 호감 가는 외모가 아니다. 괴물을 한참이나 괴성을 뿜어내 주위의 적들을 밀어내는가 싶더니, 갑자기 입에서 흰색의 실 같은 것을 분수처럼 뿜어내기 시작했다. “칫!” 거미줄을 연상시키는 흰색의 실이 뿜어져 나오자 준상은 얼른 위상전이를 이용해 몸을 피했다. 하지만 다른 기사들은 괴성에 의해 밀려나던 와중이라 미처 그것을 피해내지 못했다. “크악!” “컥!” 끈적거리는 실을 연상시키던 흰색의 무언가는 예상과는 전혀 다른 엄청난 관통력으로 기사들의 몸을 꼬치처럼 꿰어 버렸다. 그리고, 몸이 관통 당한 고통으로 허우적거리는 기사들의 몸을 휙 하고 잡아 당겨 입 안으로 끌어들였다. “으아악!” 기사들이 개구리 혀에 잡힌 벌레마냥 줄줄이 꿰어 입 안으로 끌려 들어가자, 분노한 기사들이 동료를 구하기 위해 나섰다. “이 노옴!” 그때까지도 혈기왕성하게 살아남아 있던 기사단장 타마레르 역시 얼른 검을 휘둘러 크롤로바간이라는 이름의 이 괴물이 입에서 뿜어낸 흰색 실을 자르려 했다. 하지만, 팅! 마치 피아노 현이 튕기는 듯한 소리와 함께 타마레르의 검이 오히려 튕겨 나가버리고 말았다. “이건... 도대체?” 다른 기사들 역시 상황은 마찬가지. 하지만 그렇게 당혹해 하는 와중에 다시 새로운 흰색 실이 크롤로바간의 입에서 뿜어져 나왔다. “큭!” “커헉!” 타마레르는 빠드득 소리가 나도록 이를 갈았다. 가까이 다가서려 하면 괴성을 질러 뒤로 밀어내고, 그렇게 거리를 띄운 상태에서 흰색 실을 뿜어내어 상대를 낚아 올리는 크롤로바간의 사냥 방법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기사들의 모습에 분통이 터진 탓이다. 하지만 바로 그때. 준상이 위상전이를 통해 괴물의 입 근처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흡!” 동굴과도 같은 입에서 실타래처럼 뻗어 나온 흰색 실을 향해 준상은 랑다잘의 분노를 내리쳤다. 처음에는 타마레르의 검에 직격되었을 때처럼 랑다잘의 분노 역시 튕겨져 나가는가 싶었지만, 바로 그 순간 철구 안에 내재되어 있던 파쇄의 힘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팍! 파쇄의 힘에 의해 흰색 실은 마치 콩알탄이 터지는 듯한 폭음과 함께 끊어졌다. 준상은 이 질기고 탄력 넘치는 흰색 실에도 파쇄의 힘이 먹힌다는 사실을 확인하기가 무섭게 질풍처럼 철구를 휘둘러 길게 늘어진 실들을 일제히 끊어 나가기 시작했다. -기아아아아아! 크롤로바간은 괴성을 질러 준상을 밀어내려 했지만, 그는 오히려 입가에 늘어진 흰색 실을 밧줄처럼 붙잡은 채로 절단을 이어갔다. 준상은 흰색 실을 일일이 끊으며 기사단을 향해 외쳤다. “방해된다! 꺼져라!” “...” 타마레르는 그 말을 듣는 순간 굴욕감에 입술을 깨물었지만, 당장의 상황만 보더라도 그의 도움이 되기는커녕 발목만 잡고 있는 상황임을 부정할 수 없었다. 결국 타마레르는 숨을 헐떡이고 있는 기사들을 향해 이렇게 명령을 내렸다. “전원 후퇴! 언덕으로 물러난다! 돌아보지 말고 달려라!” 기사들은 타마레르의 명이 떨어지자 눈을 질끈 감고는 그대로 언덕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준상은 기사들이 전장에서 물러나자 남은 흰색 실들을 모조리 끊어버리는 일에 박차를 가했다. -키아아아아! 크롤로바간은 먹이들이 도망가는 것을 깨달았는지, 이번에는 거대한 동굴같은 입을 크게 벌려 주위의 공기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칫!” 마치 진공청소기처럼 주위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그 터무니없는 공격에, 준상은 혀를 차고는 흰색 실을 자르던 것을 멈추고 급히 위상전이를 펼쳐 위험 지역을 벗어났다. 그리고는 그룬발의 망토를 사용해 투명화를 실행한 다음 놈의 몸 근처로 다시 위상전이를 펼쳤다. 하지만 위상전이를 통해 놈의 그림자 속에서 몸을 솟구친 순간, 크롤로바간의 찐득거리는 몸에서 마치 물이 끓어오르는 것처럼 두드러기 같은 것이 불뚝불뚝 솟아나더니 그 모든 것이 촉수로 변해 날카로운 창과 같이 준상을 향해 날아들었다. “오픈 무기 방어!” 위상 전이를 막 사용하고 난 상황이라 준상은 두 개의 철구를 사용해 무기 방어를 펼치며 그 공격을 막아낼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융단폭격처럼 쏟아지는 촉수의 공격을 막아낼 수는 있었지만, 모처럼 은밀하게 접근해 치명타를 가하려던 시도는 완전히 수포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골치 아프군.” 크롤로바간은 눈이 없다. 때문에 공포의 시선이나 사안 같은 기술이 전혀 먹히지 않는다. 또한 눈이 없는 대신 무언가 다른 방법으로 상대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투명화 역시 의미가 없다. 그동안 공포의 시선이나 투명화를 이용해 간단하게 적을 요리해 왔던 준상에게 있어, 이것은 매우 커다란 패널티가 아닐 수 없다. 준상은 다시금 크롤로바간의 커다란 입이 자신을 향하자, 얼른 위상전이로 그 위치에서 벗어났다. 아니나 다를까. 다시 한 번 놈의 입에서 거대한 괴성이 터져 나오자 습지 주위의 모든 것이 폭풍에 휩쓸린 것처럼 날아가 버린다. “타앗!” 준상은 위상전이를 통해 놈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모습을 드러낸 후, 놈의 드러난 옆구리를 향해 철구를 집어 던졌다. 직경이 일미터나 되는 거대한 철구는, 마치 하늘에서 떨어지는 운석처럼 크롤로바간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퍼퍼퍽! 명중과 동시에 파쇄의 힘이 격발되어 크롤로바간의 찐득한 피부가 폭죽처럼 터져 나간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오히려 주위의 멀쩡한 피부들이 빠르게 솟아나 철구를 그대로 집어 삼키려 들었다. “이런!” 얼른 손목을 튕겨 철구를 회수하려 했지만, 돌아오는 철구의 뒤를 다시 수많은 촉수들이 추격하듯 날아든다. 준상은 철구를 회수하자마자 위상전이를 펼쳐 다시 한 번 위기에서 벗어났다. “젠장...” 어디서부터 뭘 어떻게 공략해야할지 난감한 상황. 하지만 그렇다고 물러날 수도 없는 상황이라 일단 준상은 철구를 이용해 치고 빠지는 식으로 공격을 이어갔지만, 크롤로바간을 성나게 하는 이상의 효과는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그아아아아! 크롤로바간은 다시 한 번 커다란 입을 통해 주위의 사물을 빨아들였다. 물론 준상은 얼른 위상전이로 위험 지역을 벗어났고, 대신 파괴되어 불타고 있던 중국군 장갑차가 그 거대한 입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준상은 장갑차조차 통째로 삼켜버리는 그 모습에 혀를 내두르다가, 크롤로바간이 얼른 장갑차를 뱉어 내는 광경을 목격했다. “이건...” 돌이고 나무고 상관없이 마구 집어삼키던 놈이, 마치 혀를 데기라도 한 것처럼 장갑차를 뱉어내는 모습이 너무도 기묘하게 느껴졌다. 쇠를 싫어하는 것일까. 그건 아닐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갑옷을 입은 기사들 역시 바로 뱉어냈을 테니까. 그렇다면? 혹시 불이 붙어서는 아닐까? 준상은 그런 생각을 떠올리기가 무섭게 소환해 두었던 정령을 불러들였다. 그리고 콤보 카드 ‘아겔라한의 정령사’가 지닌 두 번째 효과를 사용했다. 지금까지 사용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그 기술의 이름은, 다름 아닌 속성 부여! 준상에게 다가선 두 개의 도깨비불이 랑다잘의 분노에 스며들었다. 그러자 거대한 두 개의 철구는 붉은 화염에 휩싸여 활활 타오르기 시작한다. “하앗!” 준상은 화염의 속성이 부여된 철구를 크롤로바간에게 집어 던졌다. 퍼퍼퍼퍽! 그러자, 이전과는 달리 강렬한 폭음이 터져 나오며 놈의 옆구리에 커다란 상처가 생겼다. -가아아악! 확실히 효과가 있다. 하지만, 준상은 단순히 불이 두려워서 장갑차를 뱉어낸 것은 아니리라는 생각을 다시 떠올렸다. 어차피 놈의 축축하게 젖은 거대한 몸이라면, 작은 불꽃 따위가 두려워 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준상은 불타는 장갑차를 다시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문득 예전에 그런 얘기를 들었던 기억이 난다. 해삼은 기름과 상극이라던가. 때문에 기름을 많이 쓰는 중국 요리에서는 말린 해삼을 다룰 때 극히 주의가 필요하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있다. 그렇다면 놈이 장갑차를 뱉어낸 이유는 장갑차에서 흘러내린 연료 때문이 아니었을까? 물론 석유와 보통의 기름은 전혀 다르지만, 확인해 볼 가치는 충분하다. 준상은 위상전이를 통해 얼른 중국군이 버리고 간 멀쩡한 장갑차 쪽으로 몸을 옮긴 다음, 일단 랑다잘의 분노를 인벤토리에 집어 넣고 대신 장갑차 안에서 예비 연료가 담긴 통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곧바로 불 속성이 부여된 랑다잘의 분노에 당해 발에 밟힌 지렁이처럼 몸을 뒤틀고 있는 크롤로바간의 옆구리에 모습을 드러낸 후, 통 안에 담긴 경유를 놈의 몸에 뿌렸다. 놈의 피부는 즉각 준상의 동작을 파악하고 촉수를 뿜어내려 했지만, 두드러기처럼 솟아오르던 끈적한 피부는 경유에 적셔진 순간 순식간에 기세를 잃고 녹아내리기 시작한다. -가아아아아악! 크롤로바간은 옆구리에 구멍이 뚫렸을 때보다 더 큰 비명을 질러대기 시작했고, 준상은 얼른 몸부림치는 놈의 몸 주위에서 물러나며 랑다잘의 분노를 꺼내 불 속성을 부여한 다음 경유에 녹아내리고 있는 놈의 옆구리를 공격했다. 그러자, 꽝!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엄청난 폭음과 함께 크롤로바간의 옆구리 일부가 통째로 날아가 버린다. “역시, 이거였군.” 준상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언덕 위에서 자신과 크롤로바간의 전투를 멀거니 바라보고 있는 일단의 사람들을 발견했다. 약점을 찾기는 했지만, 혼자서 처리하기에는 놈의 덩치가 너무 크다. 더구나, 우물쭈물하다가 놈이 땅속으로 들어가 도망치기라도 하는 날에는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 버리고 만다. 한꺼번에 화력을 집중시켜 단숨에 해치우지 않으면 안된다. 준상은 머리 속에서 대략의 계획이 성립되기가 무섭게 중국군이 버리고 간 장갑차에서 연료통을 모조리 끌어 모은 후, 위상전이를 거듭 펼쳐 언덕 위로 이동했다. 헤네스에 의해 부상을 치료 받은 후, 준상과 크롤로바간의 전투를 입만 쩍 벌린 채 바라보고 있던 기사들은 잘 싸우고 있던 준상이 갑자기 자신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자 화들짝 놀랐다. “들어라!” 준상은 급히 자신이 떠올린 작전을 그들에게 설명한 후, 모아온 연료통을 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주의해라! 이것은 불에 매우 취약하다. 자칫 잘못해서 불이 옮겨 붙으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니 충분히 주의하도록!” 그들의 머리 속에는 이미 방해된다는 말에 굴욕감을 느꼈던 일 따위는 지워진지 오래였다. 그저, 이 강력한 힘을 지닌 다른 세계의 용자와 함께 역사에 남을 새로운 전설을 쓰는데 일조할 수 있다는 사실 만이 뇌리에 가득할 뿐이었다. “맡겨주십시오!” 혼자서 저 거대한 괴물을 농락하는 준상의 모습에 완전히 매료되어 어느 틈엔가 추종자가 되어버린 타마레르의 외침에 준상은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다시 위상 전이를 펼쳐 화가 잔뜩 난 크롤로바간에게로 향했다. 00103 트롤러 ========================================================================= 기사단이 준비를 마치려면 다소의 시간이 필요하기에 준상은 최대한 크롤로바간의 이목을 자신에게로 집중시키는 일에 전념했다. 화염의 속성으로 강화된 두 개의 철구가 유성처럼 날아가 놈의 미끈거리는 몸에 직격했다. -가아아아악! 크롤로바간은 잔뜩 성이 나서 마치 고슴도치처럼 촉수를 뻗어냈지만, 아무리 수많은 촉수를 한꺼번에 쏟아 부어도 위상전이를 펼치는 준상을 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크롤로바간에게 인간 수준의 지능이 있었다면 준상이 펼치는 위상전이의 약점을 알아채고 주위의 그가 이동할 수 있는 그늘을 먼저 없애 버렸겠지만, 불행히도 이 거대한 괴수의 지능은 그런 인과관계를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나지 못했다. 크롤로바간은 화가 나 커다란 괴성을 터뜨리며 다시 주변을 쑥대밭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거대한 동굴과도 같은 입에서 바람을 내뱉고 다시 빨아들이는 패턴이라든가, 그 입에서 얇고 강인한 실을 뿜어내어 적을 낚아 올리는 방법은 더 이상 준상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러자 크롤로바간은 일반적인 촉수 대신 여인의 형상으로 촉수를 만들어내 준상을 유혹하는 한편, 그 촉수로부터 들리지 않는 음파를 쏘아내 정신 공격을 가해왔다. 하지만 이것 역시도 준상에게는 의미 없는 일이었다. 수많은 나체의 여인이 손을 허우적거리며 달려드는 광경이 펼쳐졌음에도 불구하고 준상이 보인 반응은 가볍게 콧방귀를 뀌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준상은 철구를 짧게 고쳐 잡고 여인의 형상을 모조리 깨부수고는 다시금 불길에 휩싸인 철구로 코롤로바간의 몸을 두들겨 대며 흘깃 언덕 쪽을 바라보았다. “아직 멀었나.” 그러자, 마치 그 중얼거림에 호응하듯이 헤네스가 나타나 확성기를 입에 대고 크게 외쳤다. “준비 끝났어요!” 준상은 그 외침에 화답하듯 손을 번쩍 치켜 올리고는 얼른 크롤로바간으로부터 거리를 벌렸다. 긴장된 표정으로 헤네스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타마레르는 즉시 손을 들어 올리며 명령을 내렸다. “준비!” 그러자 기사단의 손에 쥐어진 무기들이 일제히 하늘로 향했고, “발사!” 이어서 발사 명령이 떨어지자 창과 화살들이 제각기 모포와 깃발 같은 것을 매단 채 하늘로 쏘아져 나갔다. 크롤로바간은 하늘로부터 무언가가 떨어져 내린다는 것을 알았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근처에서 알짱거리는 짜증나는 인간 하나를 제외하면 자신에게 큰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전의 전투로 파악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오산이었다. 소나기처럼 쏟아진 화살과 창을 적시고 있던 경유는 여지없이 크롤로바간의 미끈거리는 피부를 녹이며 얼핏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는 무기들을 그 피부 속 깊은 곳까지 박혀 들도록 만들었다.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두 개의 창에 연결 되어 넓게 펼쳐진 모포가 마치 습포제처럼 철썩 피부에 들러붙자, 모포에 적셔져 있던 경유 또한 크롤로바간의 몸을 녹여대기 시작한다. -가아아아악! 빗나간 것도 제법 많았지만, 반수 이상의 모포와 깃발들이 몸에 거머리처럼 처덕처덕 달라붙어 그 몸을 녹이기 시작하자, 크롤로바간은 그 끔찍한 고통에 놀라 불에 데인 구더기마냥 몸부림을 쳐댔다. “발사!” 타마레르의 명령에 따라 다시 한 번 화살과 창이 하늘을 검게 물들이며 날아들었다. 이번에도 여지없이 화살과 창들은 크롤로바간의 몸을 파고 들었고, 모포와 깃발들 역시 크롤로바간의 몸에 처덕처덕 달라붙어 그 몸을 녹여댔다. 그렇게 두 번의 일제사격에 의해 크롤로바간의 몸이 경유에 적셔져 녹여지자, 그제서야 물러나 있던 준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픈 도약.” 준상은 도약 카드를 장착한 후, 랑다잘의 분노를 인벤토리로 되돌리며 몸부림치고 있는 크롤로바간의 몸을 향해 뛰어들었다. “무투가.” 그의 말이 입에서 흘러나오자 카드 들이 교체되며 ‘지하 격투장의 암흑 무투가’ 콤보가 활성화되었다. 콤보 카드를 교체한 준상은 크롤로바간의 몸에 박혀 있는 창대를 징검다리 삼아 올라가더니, 정점에 도달하자 그대로 도약을 발동해 로켓처럼 하늘 높이 뛰어올랐다. 준상은 지지대로 삼고 있던 창대로부터 발이 떨어지는 순간, 인벤토리에 보관중이던 마물 블러드서커를 꺼냈다. 피를 갈구하는 거대한 검은 도끼가 모습을 드러내자, 주위의 공기가 놀라 흩어진다. 손을 뻗어 블러드서커의 손잡이를 움켜잡은 다음, 그곳에 화염의 속성을 부여했다. 그리고 폭발하듯 터져 나오는 폭혈의 힘을 갈무리하며 강타를 발동했다. 1초, 2초, 3초... 도약의 힘이 모자랐던 탓일까. 체공시간이 부족했던 탓에 풀 차지에 도달하지는 못했지만, 준상은 하늘 위에서 떨어져 내리며 블러드서커를 휘둘러 땅속으로 숨어들고자 하는 크롤로바간의 등판을 내리찍었다. 번쩍! 언덕 위에서 숨조차 멈춘 채 그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은, 순간 크롤로바간의 등에서 섬광 하나가 터져 나오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뒤이어 거대한 폭음이 날아들며 그들의 청각을 마비시켜 버렸다. 폭풍이 불어 닥쳤다. “꺄악!” 마음을 졸이며 준상의 모습을 지켜보던 헤네스는 갑작스럽게 불어 닥친 바람에 밀려 났다가, 누군가와 부딪혀 쓰러지고 말았다. 귀가 멍멍하고 머리가 울리는 와중에도 헤네스는 자신이 날려가지 않도록 받쳐준 인물이 바로 에롤임을 알아보았다. 헤네스는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얼른 허리춤에 매고 있던 채찍을 꺼내 자신의 머리에 톡톡 두들겼다. 그러자, 머리 속에서 정신없이 울려대던 이명이 점차 사라지고 사람들의 신음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으으으...” “크윽.” 사람들은 갑작스럽게 터져 나온 폭발의 충격을 견디지 못한 채 쓰러져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헤네스는 얼굴을 찌푸린 채 몸을 일으킨 다음 괴물이 있던 자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움푹 패인 거대한 대지의 상처 한가운데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한 사람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미 그곳은 더 이상 습지가 아니었다. 질척하게 바닥을 적시던 물은 이미 증발되어 사라진지 오래였고, 괴물의 잔해는 사방으로 터져 나가 부글거리며 녹아내리고 있었다. 헤네스는 급히 옆에 서 있던 거대한 붉은 늑대 등에 올라타 준상에게로 달려갔다. “준상씨!” 하지만 준상은 마치 불이라도 난 것처럼 온몸에서 흰 연기를 뿜어내며 그대로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앉아만 있었다. 헤네스는 구르듯이 붉은 늑대의 등에서 내려와 허리 춤에 차고 있던 채찍을 꺼내 그의 등을 마구 후려치기 시작했다. “정신 차려요! 제발! 제발!” 뭔가 그림이 요상하기는 했지만, 그런 헤네스의 헌신적인 채찍질(?) 덕분이었는지 준상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연기는 빠르게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후우우우우...” 그리고 마침내 입에서 짙은 담배 연기 같은 것이 뿜어내며 준상이 정신을 차렸다. 처음 시도해 본 것이었지만, 블러드서커와 강타의 연계는 그야말로 가공할 만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경유에 녹아내리던 크롤로바간의 몸은 그 강렬한 타격이 가해지자 마치 폭약처럼 연쇄적으로 반응을 일으키며 폭발했다. 차라리 풀 차지가 아닌 것이 다행이었다. 만약 풀 차지 상태였다면, 아무리 준상이라 해도 강타와 블러드서커와 크롤로바간의 몸이 폭발함으로서 발생한 엄청난 반동을 감당해 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준상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울상이 되어 자신을 채찍질하고 있는 헤네스를 바라보았다. “이제 그만해도 된다.” 그러자 헤네스는 손에 들고 있던 채찍을 내팽개치고 준상의 품에 와락 안겨 들며 울음을 터뜨렸다. “바보! 바보! 바보!” 헤네스의 입에서 바보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그 말이 가슴에 쿡쿡 박혀드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준상은 어쩐지 그 느낌이 싫지 않았다. 준상은 품에 안긴 헤네스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으며 좌측 시야에 나타난 퀘스트 정보가 갱신되는 것을 확인했다. 습지의 재앙을 토벌하십시오. :침묵의 습지에 재앙이 출몰했습니다. 이 재앙이 대지로 퍼져 나가지 않도록 막아주십시오. [이 퀘스트는 단독 퀘스트입니다.] ->완료! (Hidden) 크롤로바간을 처치하십시오. ->완료! (Hidden) 가희(歌姬)를 파괴하십시오. (78/30) ->완료! (Hidden) 촉수를 파괴하십시오. (113/30) ->완료! - 당신이 이번 퀘스트에서 보여준 행동과 성과를 정산합니다. 이 과정은 약간의 시간이 소요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준상은 성과가 정산되기를 기다리며, 몽몽이를 소환했다. 품 안에 헤네스가 안겨 있기도 했고, 이렇게 박살이 나버린 크롤로바간의 몸체에서 시드라든가 아이템을 찾는 것도 난감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몽몽이는 소환되자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내 어디론가 빠르게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준상이 그렇게 울먹이는 헤네스를 부둥켜 안고 있는 동안, 언덕 위의 사람들도 하나 둘씩 정신을 차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들은 경악했다. 형체조차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박살이 나버린 괴수의 잔해를 보고 경악했으며, 대지에 새겨진 거대한 크레이터를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습지의 일부가 증발해 사라져 버린 것에 놀랐고, 그런 와중에서도 당당히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준상의 모습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멍하니 지켜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한참이나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던 타마레르가 문득 중얼거렸다. “이것이야 말로... 전설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타마레르의 말에서 그 말이 흘러나오자,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신들이 이 새로운 전설의 한 자락에 힘을 보탰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 했다. 에롤은 준상과 헤네스의 모습을 감격에 찬 모습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사람들을 돌아 보며 말했다. “여러분. 제 말을 들어주세요.” 결의에 찬 음성이 울려 퍼지자, 사람들은 일제히 그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에롤은 갑옷 속에 감추어져 있던 성표를 꺼내어 그곳에 입을 맞추고는, 조용히 말을 시작했다. “저는 오늘 크게 절망했었습니다. 자신의 무력함에...” “왕녀님...” 타마레르가 안쓰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부르자, 에롤은 쓴웃음을 지으며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중대한 명령을 받고서도 그것을 수행하지 않았으니... 입이 열 개라도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타마레르는 급히 손을 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제가 그런 명령을 내린 것은 왕녀님이 무사하기를 바랬기 때문이니,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에롤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설령 그런 의도였더라도 명령을 무시하고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것은 기사로서 있을 수 없는 일.” “...” “때문에 오늘 저는 이 자리에서 철혈 은장 기사단으로서의 직위를 내려놓고자 합니다.” 사람들은 갑작스런 그녀의 선언에 깜짝 놀랐다. “말도 안 됩니다! 은장의 이름이 어떻게 계승되어 온 것인지 잊으셨습니까?” 그 말에 에롤은 바로 대답했다. “그것이라면 제 동생이 남아 있으니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타마레르는 그 말을 듣자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깨달았다. “왕녀님... 설마 떠나시려는 겁니까?” 에롤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리고 아연해 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는 오늘 절망속에 빠진 채 국조신 니헬 샤께 기원했습니다. 제발 이 고난에서 우리를 구원해 달라고. 그러자, 갑자기 눈앞에서 한 줄기 빛과 함께 저분이 모습을 드러내셨습니다.” “오오! 그런 놀라운 일이!” 사람들이 탄성을 터뜨리자 에롤은 성표를 두 손으로 꼭 쥔 채 경건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저는 이것을 단순한 우연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분은 분명 니헬 샤께서 우리 에슈탈렌을 구원하기 위해 내려 보내신 용자임이 분명합니다. 그런 분을 어찌 이대로 떠나보낼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에롤은 결의에 찬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선언했다. “그렇습니다. 저는 오늘부터 저분을 수행하여 그가 걸어갈 앞길을 함께 할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제가 이 땅에 태어난 이유가 아닐까 합니다.” 그녀는 준상이 꽂아 놓았던 창을 뽑아 들었다. “저는 앞으로 저분의 기수가 되어 그의 깃발을...” 에롤은 그렇게 말하며 창에 꽂혀 있던 깃발을 바라보았지만, 이미 준상이 매달아 놓았던 피와 혼돈의 깃발은 그곳에 남아 있지 않았다. 당황한 그녀는 얼른 주위 사람에게 물었다. “기, 깃발이... 어디 갔죠?” “그, 글쎄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알 턱이 있겠는가. 몸놀림이 재빠른 다람쥐 한 마리가 후다닥 달려와 순식간에 깃발을 챙겨갔으리라는 사실을 지금 상황에서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에롤은 어쩐지 불길한 예감에 급히 준상이 있던 자리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황량한 바람이 몰아치는 크레이터 위에 어느새 스며들기 시작한 습지의 진득한 흙탕물 뿐이었다. “...” 당황한 에롤은 물론이거니와 다른 사람들 역시 급히 주위를 돌아보았지만, 더 이상 준상은 물론이거니와 헤네스와 그녀가 데리고 있던 늑대들의 모습 또한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에롤이 한창 사람들에게 일장 연설을 늘어놓는 동안, 퀘스트 정산을 마친 준상은 챙길 수 있는 것들을 모조리 챙겨 넣은 후 그가 본래 있어야 할 자리로 귀환해 버렸기 때문이다. “이, 이럴수가.” 말도 없이 준상이 떠나버렸다는 사실을 깨닫자, 에롤은 허탈한 기분을 감추지 못하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그러자 씁쓸한 표정으로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던 타마레르가 문득 한 가지 사실을 떠올리며 그녀에게 급히 말했다. “실은... 제가 들은 얘기가 하나 있습니다.” “...”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에롤의 표정을 보며 타마레르는 급히 말을 이었다. “일전에 그와 처음 만났을 때, 던스렐 왕자님이 그의 정체에 대해 몰래 알려주신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뭐죠?” 타마레르는 매우 비밀스런 표정을 지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는 사실...” “사실?”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천년왕국 신라의 왕족이라고 합니다.” “아!” 에롤은 물론이거니와 주위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사람들 모두가 그 말을 듣고 탄성을 터뜨렸다. 과연! 그래서였나! 그 당당함은 역시 그런 고귀한 핏줄로부터 은연중에 뿜어져 나오는 것이었던가! 에롤은 준상이 대충 눈에 띄는 대로 집어서 깃대로 재활용한 기마용 장창을 두 손에 꼭 쥔 채 먼 하늘을 바라보며 가만히 다짐했다. “언젠가... 언젠가 다시 한 번 만나게 될 날이 있다면, 지금보다 훨씬 강인해진 모습으로 반드시 당신의 뒤를 따르겠습니다.” 헤네스가 퍼뜨린 거짓말은 그렇게 한 여인의 가슴 속에 터무니없이 증폭되어 퍼져나가고 있었다. 물론 준상은 통성명조차 해본 적이 없는 묘령의 왕녀 하나가 자신을 향해 어떤 맹세를 하든 신경도 쓰지 않았겠지만, 에롤은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시각, 중국 인민해방군 선양 군구 제40집단군 81054부대 사령부의 한 사무실에서는 한 사나이가 침통한 표정으로 보고를 받고 있었다. “탕 소교는?” “귀환하지 못했습니다.” “으음...” 남자는 모자를 벗고 어느새 흥건하게 흘러내린 땀을 닦았다. 중국은 대규모 실종 사건의 희생자들이 귀환한 뒤 그들에게 이능력이 생긴 것을 확인하기가 무섭게 그들을 검역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강제로 모아들인 후, 곧바로 군에 배속시켰다. 그리고 파티 시스템이 확인되기가 무섭게 고위 장교들에게 노골적인 공적 몰아주기를 실시하였다. 중국군이 특히 주목한 것은 바로 인벤토리 기능. 그 어떤 탐지 장비로도 탐색이 불가능한 이 전천후 휴대 능력은 그들이 생각하기에 현존하는 그 어떤 무기보다도 강력한 전략적 효용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탄생한 것이 제201기동사단. 이 부대의 탑 플레이어가 바로 최초의 대규모 퀘스트 당시 동원되었던 첸요우쉬엔 중교와 이번에 투입되었던 탕치양 소교이다. 이들은 수차례에 걸쳐 이루어진 공적 몰아주기를 통해 대량의 인벤토리를 습득하는데 성공했고, 중국은 그들을 진급시키는 한편 인벤토리 보유자를 늘려 제201기동사단을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형태의 부대로 조직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두 차례에 걸친 대규모 퀘스트의 실패로 지금까지 중국이 해왔던 모든 계획은 단숨에 수포로 돌아가 버린 셈이다. “후우...” 남자는 부관을 내보냈다. 세계 인구의 셋 중 하나는 중국이나 인도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때문에 무작위로 이루어진 실종사건에서도 중국은 다른 어떤 나라보다 우월한 인적자원을 획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두 번의 실패로 중국은 상위 5퍼센트에 해당하는 핵심 플레이어들의 대부분을 잃고 말았다. 이 중대한 사태에 대한 책임, 누군가는 져야만 한다. 남자는 자신의 집무실과 연결된 복도를 통해 다수의 사람들이 다급하게 달려오는 소리를 전해 듣자, 천천히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는 권총 한 자루가 들어있었다. 한편, 준상은 그 즈음 속초의 으슥한 골목 한복판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엉망진창이 된 자신의 옷차림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이런 차림으로 고급 식당에 갔다가는 부랑자 취급 받기 딱 알맞다. 아무래도, 오늘은 스테이크 곱빼기를 사주겠다는 헤네스와의 약속을 지키기 어려울 듯 싶다. 준상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엉망이 된 겉옷을 대충 갈아입은 후, 근처의 여관으로 향했다. 방을 잡고 들어간 준상은 곧바로 헤네스부터 소환했다. “음? 여긴?” “오늘은 아무래도 늦은 것 같으니, 여기서 묵었다가 내일 다시 가보자.” 애초에 스테이크가 먹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준상과 분위기를 잡아 보고 싶었던 것이었기에 헤네스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먼저 씻어라. 갈아입을 옷은 문 옆에 꺼내두마.” “네!” 헤네스는 얼른 욕실로 들어가 먼지로 얼룩진 옷을 벗으며 욕조에 물을 받았다. 준상은 욕실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오자, 몽몽이를 소환했다. “꺼내봐.” 그러자, 몽몽이는 깃발을 비롯한 여러 가지 물품을 방바닥에 우르르 쏟아 놓았다. 00104 트롤러 =========================================================================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역시 은은한 서기를 뿜고 있는 큼지막한 시드다. 명칭 : 사이한 촉수 레벨제한 : 20 종류 : 시드 등급 : Rare 효과 : 1. 독 저항력 증가 15% 2. 디코이 1레벨 상승 3. 초감각 1레벨 상승 설명 : 마수 크롤로바간이 지니고 있던 특별한 시드입니다. Seed 슬롯이 있는 아이템이나 카드에 장착하여 능력을 강화할 수 있습니다. 한번 장착한 시드를 분리하기 위해서는 특수기능 ‘분리’가 필요합니다. [이 시드를 아이템이나 카드에 장착하시려면 이곳을 누르십시오.] “디코이?” 독 저항은 말할 필요도 없고, 초감각 역시 시커 포션의 효능과 비슷한 형태의 스킬이나 특수기능이라고 이해하면 간단하지만, 디코이는 자세한 효과를 특정하기가 애매하다. 아마도 여성의 모습으로 의태했던 촉수의 기능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떠올리며 준상은 디코이에 관한 정보를 확인했다. 디코이(decoy) : 범위 내 존재하는 특정 사물의 모습을 변화시켜 표적 1개체를 유인합니다. -스킬 레벨 당 1개의 디코이를 활성화할 수 있습니다. -디코이는 표적과 접촉하는 순간 해제됩니다. “유인이라...” 사용하기 나름이겠지만, 전투에 혼자 나서는 일이 많은 준상으로서는 사용하기에 따라 여러모로 쓸모가 많을 듯한 기능이다. 정식으로 획득한 스킬이 아니라서 별도로 레벨을 올릴 수 없다는 것이 다소 문제일뿐. 준상은 비어 있는 영웅 카드의 슬롯에 새로 얻은 크롤로바간의 시드를 장착했다. 그러자, 이전에 시커 포션을 마셨을 때처럼 주위의 정보가 준상에게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한다. “음...” 준상은 일단 눈을 감았다. 그러자 곧바로 주위의 정보들이 시각적 이미지로 형상화 되어 캄캄한 시야 속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준상은 이내 벽 너머에서 헤네스가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는 모습을 느낄 수 있었다. -역시 가슴이 작아서 그런 걸까... 헤네스는 봉긋하게 솟은 가슴을 그녀의 작은 손으로 쥐어 보고는 한숨을 푸욱 내쉬고 있었다. 사실 그녀의 가슴은 또래에 비해 그리 작은 편은 아니다. 다만 비교할 대상이 티비 같은 곳에 나오는 풍만한 체형의 여자들이다보니 상대적으로 작아 보이는 것일 뿐, 한 손 안에 딱 들어오는 아담한 사이즈라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크흠...” 준상은 얼른 눈을 뜨며 초감각을 해제했다. 여러모로 쓸모가 많은 능력이고 기습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평상시에도 익숙해지는 것이 좋을 듯 하지만, 일단 지금은 꺼두는 편이 좋을 듯 하다. 준상은 깃발을 챙겨 넣고 다른 시드들을 살폈지만, 별로 대단한 것은 눈에 띄지 않았다. 시드를 주머니에 담아 보관한 준상은 몽몽이와는 별도로 자신이 따로 챙겨 두었던 물품들을 꺼내 살펴 보았다. 가장 먼저 꺼낸 것은 흰색의 큼직한 실타래였다. 이것은 크롤로바간의 입에서 뿜어져 나왔던 흰색 실을 모아 뭉쳐 놓은 것인데, 신축성이 뛰어나고 어지간해서는 끊어지지 않을 정도로 질긴 데다, 그 끝은 기사들의 갑옷을 꿰뚫을 정도로 날카롭기까지 하다. 크롤로바간과의 전투에서 이 실이 지닌 효능을 눈여겨 봐두었던 준상은 전투 중에 흰색 실을 끊고 다니면서 그것을 버리지 않고 한 데 모아두었던 것이다. 당장은 어떻게 가공할 방법이 없기는 하지만, 이것도 아문간의 시체처럼 나중에 유용하게 쓰일 것 같다. 준상은 실 뭉치를 잘 보관한 다음, 힘들게 찾아낸 수류탄 상자 하나를 확인했다. 크롤로바간에 의해 패주한 중국군이 남긴 장비 가운데, 블러드서커로 인해 발생한 대폭발 속에서 그나마 온전하게 준상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이 정도가 고작이었다. 상자를 열자 그 안에 길쭉한 둥근 통이 가득 차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통 하나를 집어 뚜껑을 열자, 마치 굵직한 송이버섯처럼 생긴 막대형 수류탄이 나왔다. “77-1식...” 현재 그의 능력이라면 굳이 이런 수류탄 같은 것을 쓸 일이 있을까 싶기는 하지만, 그래도 나중 일은 또 모르는 것이니 일단 보관해 두기로 했다. 준상은 꺼내놓은 수류탄을 통 안에 갈무리 한 다음 상자째로 인벤토리에 보관했다. 그리고는 퀘스트 완료 메시지를 확인하며 보상 내용을 확인했다. 일단 경험치는 각각 조금과 많이로 나온 상태.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힘들지만 크롤로바간 같은 거대 마수를 해치운 경험치까지 합산하면 이 보상을 획득할 경우 레벨업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많다. 이전의 경우에는 다음 퀘스트까지의 시간이 7일을 초과하는 바람에 별 의미 없는 일이 되어버렸지만, 준상은 만약을 대비해 한 번 더 보상 획득을 미루어 두기로 했다. 추가 보상 상자 여섯 개, 트리플 S급 보상 상자가 한 개, 여기에 구원자 등급의 보상 상자와 에슈탈렌의 구세주 칭호의 획득은 그렇게 다음 기회로 미루어졌다. 준상이 대충 전리품의 정리를 마치자, 헤네스가 가운을 입은 채 욕실에서 나왔다. “후우... 저 끝났어요.” “그래.” 준상은 몸을 일으킨 후 욕실로 들어가 몸을 씻었다. 간단하게 몸을 씻고 나온 준상은 탁자 위에 올려진 배달 목록을 뒤져 돈까스를 시켰다. 조금 눅눅한 것이 별로 맛은 없었지만, 시장이 반찬인지라 두 사람은 허겁지겁 식사를 마친 다음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준상은 메신저를 통해 서윤에게 연락을 넣었다. ‘서울로 올라간다. 저녁 XX시, XX역 앞에서 기다리겠다.’ 일방적인 통고이긴 했지만, 준상은 서윤이 시간에 맞춰 나올 것임을 의심치 않았다. “좀 시간이 걸릴 테니까, 힘들 것 같으면 들어가 있어라.” 준상은 헤네스에게 그렇게 말했지만, 그녀는 어째서인지 눈 밑에 다크 서클이 잔뜩 낀 채로 고개를 저었다. “싫어요.” “...” 준상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험비를 몰아 강릉으로 향했다. 영동 고속도로를 타고 서울로 가려는 생각이었다. 넉넉하게 약속 시간을 잡아두었기 때문에 느긋하게 차를 몰던 준상은 강릉에 거의 도착할 무렵이 되었을 즈음, 험비의 앞뒤로 검은 색 밴이 달리고 있는 것을 뒤늦게서야 알아차렸다. “이건...” 꼼짝없이 앞뒤로 포위된 험비는 앞선 차량이 유도하는 대로 길가에 차를 멈추어 설 수 밖에 없었다. 벌써 자신이 이 험비를 타고 다닌다는 것이 발각된 것일까. 준상은 옆 자리에서 꾸벅거리며 졸고 있던 헤네스를 급히 역소환한 다음, 천천히 차에서 내렸다. 그러자 앞뒤의 밴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와 그를 에워싸기 시작한다. 검은색 정장을 걸쳐 입은 건장한 사내 하나가 그를 향해 말을 걸어왔다. “박준상씨, 맞습니까?” “그렇다면?” “만나고자 하는 분이 계십니다. 따라와 주십시오.” “...” 존댓말이긴 했지만, 역시나 준상의 의향 따위는 명백하게 무시하고 있다. 이전에도 준상은 이런 식의 초대를 받아본 경험이 있다. “싫다면?” 그러자 그의 주위를 둘러싼 검은색 정장 차림의 남자들의 입가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온다. “당신이 꽤 강하다는 얘기는 이미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혼자 잘났다고 뻗대도 좋을 만큼 세상이 만만치 않다는 거... 그 정도는 대충 알 만한 나이 아닙니까?”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품에서 테이저를 슬쩍 꺼내 보였다. 테이저란 원거리에서 전선으로 연결된 두 개의 전극을 발사해 상대를 무력화 시키는 병기의 일종이다. 일반적으로 전기 충격기라고 일컬어지는 스턴건과는 달리 원거리에서도 적을 효과적으로 무력화할 수 있는 것이 장점. 앞으로 나선 남자가 테이저를 꺼내 보이자, 기다렸다는 듯이 다른 남자들 역시 품 안에 감추어진 테이저를 슬쩍 꺼내 보인다. 하지만 준상은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웃어 버렸다. 뭐랄까. 가소롭다고 해야 하나. 이 정도까지 준비를 한 걸 보면 누가 보낸 것인지 대략 감이 잡힌다. “김종경, 그 정신 나간 인간이 보냈나?” “...” 김종경은 연합의 길드장인 김성진의 아버지로 현역 국회의원이며, 귀환자 특별법을 주도한 인물이다. 순간 정장 남자의 눈썹이 꿈틀한다. “어째... 좀 아픈 맛을 봐야 정신을 차리실 모양이군요.” “훗.” 준상은 그 말을 듣고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곧바로 공포의 시선을 발동했다. “컥!” 남자는 품속에 손을 집어넣어 테이저를 꺼내려다가 준상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공포의 시선과 마주하는 순간 그대로 굳어버렸다. 준상은 포박 카드를 장착한 다음, 천천히 남자에게 다가서서 그 목을 손으로 움켜 쥐었다. “크으윽...” 남자는 이제 자신의 의지로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 “아픈 맛이라고 했나?” 그때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남자 하나가 준상을 향해 테이저를 발사했다. 순식간에 쏘아져 나간 두 개의 바늘은 곧바로 준상의 어깨에 명중했다. 하지만 이게 어찌된 일일까. 바늘은 준상의 피부를 뚫지 못하고 그대로 튕겨져 나가고 말았다. 비록 방어구를 착용하지는 않았으나, 그가 지닌 물리 저항력은 무려 79퍼센트. 그의 강인한 육체가 지닌 자체적인 방어력을 제외한 물리 저항력만 계산하더라도, 일반적인 물리적 타격의 5분의 4는 그의 피부에 닿는 순간 소멸해 버린다. 하물며 고작해야 바늘 따위가 어찌 그의 피부를 뚫을 수 있겠는가. 그것을 알 리 없는 남자들은 차례대로 준상에게 연이어 테이저를 발사했지만, 그 어느 것도 준상의 피부에 박히지 않았다. 옷 위에 몇 개의 바늘이 박히기는 했지만, 전기를 흘려보내도 준상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차라리 강한 전류를 흘려보내는 스턴건이라면 어찌 되었을지 모르는 일이지만, 상대적으로 적은 양의 전류를 사용하는 테이저로 준상에게 어떠한 타격을 가하는 건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테이저는 인간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무기. 하지만 준상은 이미 보통의 인간이 지닌 능력을 초월한지 오래이다. 사실 테이저는 비치사성 무기 가운데 가장 높은 효율을 가진 무기이다. 그것도 보통 사람은 맞으면 나무토막처럼 쓰러져 버리는 수준의. 연합에 능력자들이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 인간의 범주를 벗어난 수준의 능력자도 없는 상태이고, 십여명이 테이저를 일시에 쏘면 보통 사람은 죽을 수도 있다. 네 차례나 에픽급 퀘스트의 보상을 싹쓸이한 준상이기에 맞고도 끄떡없는 것이지, 김종경으로서는 충분히 과잉 전력을 퍼부은 셈이라고나 할까. “그게 끝인가?” 준상이 한 손에 남자를 들어 올린 채 고개를 돌리자, 남자들은 그가 뿜어내는 공포의 시선에 정신이 오염되며 그대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준상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자신의 손아귀에 잡힌 채 부르르 떨고만 있는 남자를 돌아보며 다시 말했다. “김종경은 어디있나.” “...” 하지만 남자는 대답하지 못했다. 공포의 시선이 그의 몸에서 신체의 자유를 완전히 앗아가 버린 탓이다. 준상은 그것을 깨닫자 일단 공포의 시선을 거둔 후 다시 물었다. “김종경은 어디 있나.” 남자는 그제서야 더듬거리는 말투로 대답했다. “그, 그건...”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갈팡질팡하는 남자의 모습을 보며 준상은 다시 말했다. “어디 있는지 말해야 내가 찾아갈 것이 아닌가.” “...” 남자는 부들부들 떨다가 그제서야 더듬거리며 김종경의 사무실 위치를 알려주었다. 준상은 대답을 듣고 나자 그를 길 옆의 수풀 위로 던져 버리고는 험비 앞을 가로 막고 있는 검은 색 밴에 다가갔다. 그리고는 몸을 숙여 범퍼를 한 손으로 잡더니 그대로 들어올려 밴을 길 옆으로 뒤집어엎어 버렸다. 무슨 밥상 뒤집어엎듯이 커다란 밴을 단숨에 던져 버리는 준상의 행동에 남자들은 얼이 빠지고 말았다. 준상은 그들을 돌아보며 한 마디 말을 남겼다. “김종경에게 전해라. 조만간 내가 찾아가겠다고.” “...” 남자들은 그의 눈빛에 짓눌려 대답조차 하지 못한 채 고개만 끄덕였다. 준상은 험비로 다가가 문을 열다가 다시 말했다. “한 가지 더.” “...” “내가 무척 화가 난 모양이니, 대비를 확실하게 해두라는 말도 잊지 말도록.” 준상은 그렇게 말한 뒤, 험비를 몰고 그곳을 떠났다. 00105 트롤러 ========================================================================= 한 손으로 밴을 뒤집어 버리는 준상의 인간 같지 않은 면모에 질렸던 것일까. 아니면 곰도 제압할 정도의 위력을 가진 테이저를 무더기로 맞으면서도 꿈쩍은커녕 생채기 하나 나지 않는 모습에 질렸던 것일까. 어느 쪽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밴을 탄 남자들은 더 이상 준상이 탄 험비를 추격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준상은 강릉 시내에 들어서자 일단 차를 멈추고 헤네스를 다시 소환했다. “우음...” 헤네스는 잠을 못 자서인지, 아니면 멀미 때문인지 자신이 역소환되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녀석...” 준상은 손을 뻗어 우선 안전벨트부터 다시 매주었다. 하지만 바로 그때, 공교롭게도 헤네스가 깨어났다. “...” 헤네스는 자신의 가슴 어림을 지나치는 준상의 손을 느끼고는 흠칫 놀랐다. 어느 정도냐면 가슴이 덜컹 주저앉을 정도로. 그 손길이 안전벨트를 매주기 위한 것임을 깨닫는 것에는 그리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았지만, 머리 속으로 몰려들던 잠기운이 단숨에 날아가 버린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아, 깼나. 미안.” 준상은 그렇게 덤덤한 말투로 사과했지만, 헤네스는 어쩐지 그런 말투가 더 얄미웠다. 아아... 정말 어젯밤 그렇게 가슴을 졸이며 밤을 새운 것이 누구 때문인데! 헤네스는 그 징그러운 모습의 괴물과 벌어졌던 싸움이 끝난 뒤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고 나서야 자신이 얼마나 노골적으로 그에게 마음을 내비쳤는지 깨달았다. 게다가 울면서 채찍질이라니. 비록 그것이 준상의 몸을 조금이라도 빨리 회복시키기 위한 행동이긴 했지만, 자신의 그 행동을 다시 떠올렸을 때 헤네스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처음 밤을 같이 보냈을 때처럼 얇은 가운 하나만 입은 채 좁은 침대에 둘이 눕게 되자, 헤네스는 머리속에서 떠오르는 오만가지 생각을 주체하지 못하다가 결국 밤을 꼴딱 세워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하지만, 막상 아침이 되자 준상은 아주 개운하게 잘 잤다는 듯이 상쾌한 표정으로 깨어났다. 그 모습을 보자 어찌나 얄밉던지. 헤네스는 난생 처음 누군가를 마구 때려 주고 싶다는 충동이 마구 솟아올랐었다. “에휴...” 사랑을 하면 바보가 된다더니, 정말 딱 그짝이다. 평소에 연애에 빠진 주위의 친구들이 별 시답지 않은 걸 가지고 하루 종일 머리를 감싼 채 고민하는 걸 보고 참 웃기지도 않는다 생각했었는데... 만약 돌아가게 되면 그 친구들에게 먼저 사과를 해야겠다고 헤네스는 생각했다. 헤네스가 한숨을 푸욱 내쉬고 자신에게서 몸을 돌리는 모습에 준상은 피식 웃고는 다시 핸들을 잡았다. 준상과 헤네스가 탄 험비는 강릉에서 영동 고속도로로 접어들어 서울로 향했다. 사실 준상으로서는 면허를 딴 이후로 고속도로 운행을 별로 해본 경험이 없는터라 다소 긴장하며 핸들을 잡았지만, 여러 가지로 다양하게 강화된 그의 감각과 운동 신경은 그런 긴장감 속에서도 유연한 운행을 가능하도록 만들어 주고 있었다. 하긴, 초감각도 얻은 상태이니 마음 먹기에 따라서는 정말 눈 감고 운전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두 시간 반 정도 고속도로를 타고 이동하고 나서야 두 사람이 탄 험비는 드디어 서울에 도착했다. 준상은 시내로 차를 몰아 서윤과 만나기로 한 지하철 역 입구로 차를 몰았다. 젊은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이라 그런지, 대낮인데도 사람들이 바글거린다. 준상은 천천히 역 근처로 차를 몰아가다가, 반대편 입구에서 초조한 표정으로 주위를 돌아보고 있는 임서윤을 발견했다. 준상은 그를 발견하기가 무섭게 메신저로 다시 연락을 넣었다. ‘반대편에 있다. 건너오도록.’ 메시지를 넣자 주위를 임서윤은 화들짝 놀라며 휴대폰을 얼른 꺼내더니 이내 안도의 한숨을 푸욱 내쉬고는 얼른 지하도를 건너왔다. 아마도 퀘스트가 도착한 것이 아닌가 싶었던 모양이다. 임서윤은 지하도를 건너오기가 무섭게 험비 안으로 고개를 내밀고 준상에게 인사를 하려다, 강릉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에 눈이 휘둥그레져 있던 헤네스를 발견했다. “어?” 임서윤은 우선 저 무뚝뚝한 준상이 옆 좌석에 묘령의 아가씨를 태우고 있다는 사실에 우선 놀라고, 이어서 그 아가씨의 모습이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라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랐다. “아가씨는... 분명히...” 하지만 그의 입에서 말이 다 나오기도 전에 준상이 먼저 입을 열었다. “타라.” “...” 짧고 명료한 그의 말에 서윤은 뭔가 머쓱해져서 뒤통수를 긁다가 얼른 뒷좌석을 열고 차에 올라탔다. “어디로 가면 되나.” 임서윤 정도 되는 사람이 맨발로 뚜벅뚜벅 걸어왔으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일. 준상이 그렇게 말하자, 서윤은 앞으로 고개를 내밀고는 사거리 근처의 빌딩 하나를 가리켰다. “저기 극장 보이십니까?” “...” 준상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서윤은 다시 말했다. “그곳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워 두고 왔습니다.” 준상은 다시 고개를 끄덕이고는 차를 극장 앞으로 몰아갔다. 극장 앞에 도착하자 서윤은 얼른 차에서 내리고는 준상에게 말했다.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서윤이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자 헤네스가 입을 열었다. “뭔가... 정신없는 곳이네요.” 한참이나 서울 시내를 달렸음에도 그녀의 표정은 아직 얼떨떨하기만 하다. 준상은 그런 헤네스의 말에 조용히 대답했다. “많이 시끄럽고 번잡하기는 하지만, 그래봐야 사람 사는 곳인 건 마찬가지다.” “그렇군요.” 사람들은 보기 드문 군용 험비 안에 귀여운 아가씨가 탄 채 고개를 창밖으로 내밀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신기한지 길을 지나치며 헤네스의 모습을 흘깃거리고 있었다. 그렇게 잠시 시간이 지나자, 지하 주차장에서 낯선 외양의 SUV 한 대가 나오더니 험비 옆으로 다가왔다. “안내 하겠습니다. 따라 오십시오.” “...” 준상이 고개를 끄덕이자, 서윤은 차를 몰고 앞장서서 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십여분 정도를 더 달리고 나자, 두 대의 차는 유원지가 옆에 달린 특1급 호텔의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서윤은 얼른 차를 대고는 험비 옆으로 다가와 준상에게 말을 걸었다. “연락을 받고 깜짝 놀랐습니다. 갑자기 어쩐 일...” 하지만 서윤은 말을 잇지 못했다. 느닷없이 준상의 손이 그의 멱살을 잡고 들어올렸기 때문이다. “준상씨?” 그의 갑작스런 행동에 차에서 내리던 헤네스가 놀라 소리쳤지만, 준상은 손을 들어 보이고는 서윤에게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내 행적을 발설했나?” “네?” 서윤은 느닷없는 준상의 행동에 놀랐고, 이어서 멱살이 잡혀 들어 올려진 순간 사지에 힘이 빠져 나가며 꼼짝 못하게 되자 또다시 놀랐다. “갑자기 그게 무슨...”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서윤이 되묻자, 준상은 즉시 대답했다. “너에게 연락을 하고 나서 얼마 뒤에, 김종경이 보낸 자들이 나를 찾아 왔다.” “아...” 서윤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그 자식들... 저희 길드의 뒷조사를 하는 것 같더니, 그런 일을...” “...” 준상이 말없이 가만히 노려보자, 서윤은 급히 말을 이었다 “전 정말 모르는 일입니다. 험비가 단서가 되었을지도 모르지만, 맹세코 저는 정보를 흘린 일이 절대로 없습니다.” “정말인가?” “물론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제가 무슨 수로 준상씨의 위치를 알아내겠습니까? 험비에 위치 추적기를 달아 놓은 것도 아니고.” “...” 그 말을 들은 준상의 눈빛에 의심의 기운이 스며들자, 서윤은 아차 싶었던지 다시 말했다. “그런 거 달아 놓은 적 없습니다! 정말입니다. 안 믿겨지신다면 직접 확인해 보셔도 됩니다.” “...” 준상은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이고는 서윤을 내려놓았다. “후우...” 겨우 몸이 원래대로 움직이는 것을 확인한 서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 준상은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며 말했다. “저 차는 돌려주겠다.” “...” 의심이 풀렸다고는 해도, 임서윤도 김종경도 저 험비의 존재를 토대로 준상의 위치를 파악했으니, 더 이상 드러내놓고 타고 다니기는 곤란하다. 서윤도 그런 사실을 이해했는지 바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그리고는 어느새 흘러내린 식은땀을 닦아내며 말을 이었다. “따라 오십시오. 조용한 곳으로 안내하겠습니다.” “...” 준상은 서윤을 향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후, 차 옆에서 불안한 표정으로 서있는 헤네스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헤네스는 갑자기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안절부절하며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준상이 손을 내밀자 그 의미를 몰라 잠시 멀뚱히 바라만 보았다. 그 모습을 보고 준상이 다시 말했다. “이리 와.” “...” 그제서야 헤네스는 그의 행동이 손을 잡으라는 뜻임을 깨달았다. 헤네스는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다가가 준상의 손을 잡았다. 이미 키스도 했고, 포옹도 몇 번이나 했는데... 겨우 손 하나 잡는 일이 뭐가 어렵다고 이렇게 가슴이 쿵쾅거리는지. 헤네스는 준상의 손을 잡고 주차장을 나오자 어쩐지 사람들이 죄다 자신을 바라보는 것만 같아서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서윤은 그들의 그 미묘한 모습을 보다가 그제서야 겨우 이 갈색 머리의 소녀를 어디서 봤는지 깨달았다. “아!” 어찌나 놀랐는지, 언제나 실실 웃는 듯한 그의 가는 눈이 이번만큼은 눈동자가 보일 정도로 크게 떠졌다. “호, 혹시... 그때 그 아가씨?” 서윤의 말에 준상은 짧게 대답했다. “맞다.” “어, 어떻게. 분명 그쪽 사람은, 그러니까... 이벨류아였던가? 아무튼, 이곳에 마음대로 오지 못하는 것이...” 서윤은 당황해서 그답지 않게 횡설수설하고 있었지만 준상은 다시 짧게 대답했다. “알 것 없다.” “...” “어서 안내나 해라.” “아, 알겠습니다.” 하지만 계속 앞서 걸어가면서도 서윤은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쪽에서 갈 수는 있어도, 저쪽에서 함부로 넘어오지는 못한다. 그것이 그가 알고 있던 퀘스트의 한 가지 규칙. 하지만 그 규칙을 어떻게 깨뜨렸는지, 지금 준상의 옆에는 그쪽 세계의 소녀가 분명하게 실재하고 있었다. 이것은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하나의 변혁이 될 수도 있다. 적어도 다른 세계의 인간이 최초로 이 지구 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을 준상처럼 담담하고 무감각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하지만 서윤이 그런 생각을 떠올리거나 말거나, 준상은 헤네스의 손을 잡고 당당하게 호텔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서윤은 시계를 잠시 들여다보더니 그를 레스토랑으로 이끌었다. 입구에서 안내를 맡은 종업원은 서윤을 보더니 화들짝 놀라며 극진한 태도로 안내를 했다. “일단 간단하게 식사라도 하면서 얘기를 나누도록 하죠.” “그러지.” 헤네스는 화려하고 눈부신 조명에 잠시 얼이 빠져 있다가 준상의 손에 이끌려 창가의 식탁에 자리를 잡았다. “와아...” 커다란 전면 유리를 통해 바쁘게 돌아가는 도심의 모습이 비치자, 헤네스는 어린 아이처럼 창문에 달라붙어 바깥을 구경하느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주문은...” “알아서 시켜라.” “네.” 서윤은 세 사람 분의 식사를 적당히 주문한 다음, 사람이 물러가자 준상에게 조용히 물었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준상은 창문에 매달려 바깥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는 헤네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일단은 김종경부터.” “연합이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가만 안 있으면?” “...” 하긴, 그들이 나선다고 준상을 어쩌지는 못한다. 서윤은 방금 전 주차장에서의 일로 그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자신이 손가락 하나 까딱 할 수 없을 정도라니... 서윤은 속으로 쓴웃음을 삼키며 다시 말했다. “그나저나... 저에게 연락하신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준상은 조용히 대답했다. “차를 한 대 구했으면 한다.” “차라면...” “저건 못 쓰겠더군. 너무 심하게 흔들려.” “아, 예...” 서윤은 속으로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험비는 애초에 안락한 탑승감을 위해 만들어진 차가 아니다. 이 차의 놀라운 점은 40센티미터의 최저 지상고와 60퍼센트의 등판능력, 40퍼센트의 비탈길 주행능력, 46센티미터의 수직 장애물 통과능력과, 76센티미터 깊이의 참호 통과 능력이지, 안락하고 편안한 아웃도어 라이프를 위한 차가 아니란 말이다! ...라고 서윤은 마음속으로 절규했지만 그 외침을 들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준상은 말을 꺼내려다 종업원이 음료를 가지고 오자 일단 말을 멈추었다. 종업원이 샴페인을 따라주고 물러나자, 준상은 그것으로 입을 적신 후에야 다시 말했다. “그 연합이란 거, 어디 있는 거지?” 서윤은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설마...” 그러자 준상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차피 손을 볼 거라면 시간 끌 필요는 없는 일이지.” 그것은 마치 이곳의 디저트가 맛있냐는 듯한 너무나도 일상적인 말투였지만, 그렇기 때문에 서윤으로서는 오히려 더 섬뜩하게 느껴졌다. 이 남자는... 도대체 얼마나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서윤은 어쩐지 목이 타는 느낌에 샴페인 잔으로 손을 뻗었다. 00106 트롤러 ========================================================================= 마침내 음식이 나오기 시작한다. 헤네스는 창밖의 풍경에 정신이 팔려 있다가 음식이 차려지기 시작하자 다소곳이 식탁에 자리 잡았다. 하지만 나이프며 포크, 스푼이 열 개 넘게 차려져 있는 모습을 보자, 헤네스는 다시 눈이 휘둥그레졌다. 가지런하게 차려져 있는 모습만 봐도 뭔가 순서나 격식이 있는 것 같은데, 그걸 알 도리가 없으니 헤네스는 준상과 서윤의 번갈아 훔쳐 보며 우물쭈물 하고만 있었다. 그러자 서윤이 그 모습을 보고는 살짝 미소 지으며 말해 주었다. “신경 쓰지 마시고 편하게 드십시오.” “그래도... 되나요?” 헤네스가 조심스럽게 묻자, 서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산 하나만 넘어도 상차림이 바뀌는 것이 당연한데, 하물며 다른 세계에서 오신 분께 이곳의 식사 예절을 강요할 수는 없는 일. 사실 따져보면 이 테이블 매너가 완성된 것도 이제 고작 일이백년 정도 되었을 뿐이고, 다시 그만큼의 시간이 지나면 또 어떤 모습이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죠. 신경 쓰지 마시고 맛있게 드시기만 하면 됩니다.” “말씀 감사합니다.” 서윤의 친절한 말에 헤네스는 미소를 지어 대답한 후, 무표정한 얼굴로 자기 몫의 요리를 조용히 음미하고 있는 준상을 흘깃 바라보았다. 단 둘이 있을 때는 안 그런데, 다른 사람이 끼면 꼭 저렇게 나무토막 같이 변하더라. 헤네스는 그렇게 속으로 생각이 떠오르자 입을 삐죽거리며 스프를 입에 떠 넣었다. 그렇게 시작된 식사는 매우 만족스러웠다. 디저트로 나온 달콤하고 부드러운 푸딩의 식감에 매료되어 연신 탄성을 발하는 헤네스를 놔둔 채, 두 남자는 다시 조심스럽게 대화를 이어갔다. “당장... 실행하실 겁니까?” 서윤의 말에 준상은 고개를 저었다. “준비할 시간은 줘야겠지. 대비 없이 기습당해서 졌다는 핑계는 듣고 싶지 않으니.” “...” 이 끝도 없는 자신감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하긴 일만이 넘는 어둠의 군세를 홀로 도륙한 사람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일수도 있겠지만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윤은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그럼... 오늘은 일단 이곳에서 묵으십시오. 방을 마련해 두겠습니다.” “좋을대로.” 하고 싶으면 하고, 말고 싶으면 말라는 듯한 준상의 말에 서윤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식사를 모두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서자 서윤은 먼저 계산을 마친 후, 스위트룸 하나를 마련했다. “위쪽에 방을 잡았으니, 체크인 할 때 제 이름을 말씀하시면 알아서 안내를 해줄 겁니다.” “고맙다.” “차에 관한 건 내일 카탈로그를 가져오겠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준상은 일단 인적이 드문 복도로 헤네스를 데리고 들어가 그녀를 역소환했다. 스스로는 성인식을 치른 어른이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증명할 신분증이 없는데다 어떻게 봐도 아직 청소년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헤네스를 데리고 호텔에 들어갔다가는 대번에 경찰이 출동할지도 모른다. 서윤은 준상이 홀로 복도에서 나오자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 분은...” “잠시 볼 일이 있어서.” “아, 예...” 뭔가 미심쩍기는 한데 대놓고 물어볼 수가 없으니 난감하다. 어쨌든 임서윤은 준상을 호텔 입구까지 데려다 준 다음 직원이 그를 안내하는 모습을 보고서야 몸을 돌려 그곳을 빠져 나왔다. “후우...” 분명 준상은 특급 고객이긴 하지만, 그가 마치 비서가 된 것처럼 따라다니며 수행할 정도냐면 그건 아니었다. 서윤은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주차장으로 발걸음을 옮기다가 그제서야 오늘 준상이 시종일관 자신에게 반말을 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일전에 컨테이너 하우스와 금괴를 거래할 때만 하더라도, 두 사람은 서로에게 존댓말을 했었다. “허어...” 서윤은 이제야 그 사실을 깨닫고 다시 허탈한 표정을 지울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하대를 받으면서도 그걸 미처 깨닫지 못했다는 사실이 더 충격적이었다. 반말이 저렇게 자연스러울 수도 있는 건가. 서윤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 주차장에 내려왔다. 그리고 자신의 차로 향하다가 한쪽 구석에 처량하게 버려져 있는 험비를 보고 다시 한 번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저건... 나중에 사람을 시켜서 가지고 오던가 해야겠군.” 서윤이 자신의 차에 올라 시동을 걸 즈음, 준상은 로열 스위트룸 안에 들어와 있었다. 직원이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가자, 준상은 우선 문단속 다시 한 번 한 다음 헤네스를 소환했다. 헤네스는 컨테이너 하우스나 러브호텔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격조 높은 인테리어를 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창가로 다가가 부드럽게 사부작거리는 커튼을 열자 호수의 전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와아...” 탄성을 발하고 있는 헤네스에게 준상이 말했다. “마음에 드나?” “네!” “다행이군.” 준상이 소파로 가서 자리를 잡고 앉자, 헤네스가 얼른 다가와 그의 옆에 찰싹 붙어 앉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또... 싸우러 가실 건가요?” “...” 걱정스런 헤네스의 말에 준상은 가만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싫으냐?” “...” 헤네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다른 세계로 불려가고, 그곳에서 항상 강대한 적들과 피 튀기는 혈전을 벌이는 준상이 이 세계에서조차 싸움을 하려 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은 탓이다. 하지만 준상은 흘러내린 헤네스의 갈색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겨주면서 조용히 말했다. “나도 이런 식으로 싸움을 벌이기는 싫다.” “그럼...” “하지만, 때로는 힘을 보여주는 것이 싸움을 피하는 길이 될 수도 있는 법이다.” “...” 헤네스는 어리석지 않다. 아니, 오히려 또래 중에서는 총명하다고 자부해도 좋을 정도의 명석한 아가씨다. 때문에 준상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바로 알아들었지만, 머리로는 이해해도 가슴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세상에는 종종 있는 법이다. 헤네스가 우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자, 준상은 그녀의 머리를 다시 한 번 쓰다듬어 주면서 말했다. “피곤할 텐데 일단 씻어라. 그리고 옷을 갈아입고 아래로 내려가서 영화를 보자.” “영화요?” “그래. 티비에서 본 적 있지? 극장.” “네.” 보긴 했다. 주로 연인들이 데이트라는 걸 하는 장면에서. 헤네스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달려갔다. 준상은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전화벨 소리가 울리자 소파 옆에 놓여진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무슨 일이지?” “임서윤님이 서류를 보내오셨습니다. 방으로 가져다 드려도 되겠습니까?” “가져오도록.” 벌써 아지트로 돌아간 모양이다. 틈만 나면 잔머리를 굴리려고 드는 것이 눈에 보인다는 점을 빼면, 역시 일처리 하나는 마음에 든다. 잠시 기다리자 밖에서 기척이 들려왔다. 문을 열고 나가자 직원이 인사를 하며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수고했다.” “별말씀을.” 서류를 받아들고 문을 다시 닫은 준상은 안에 들어 있는 내용물을 확인했다. 그 안에는 연합이 본부로 사용하고 있는 건물의 위치와 구조, 그리고 김종경의 사무실이 위치한 건물의 위치와 구조 같은 것이 하나 가득 들어있었다. 짧은 시간 동안 준비한 것 치고는 상당히 자세하고 면밀한 것이, 이미 전부터 조사를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정확한 역학 관계까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임서윤의 뒷조사 도중에 자신의 행적이 밝혀졌다는 것으로만 미루어 보더라도 두 집안 사이에 이전부터 알력이 있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혹시 이 모든 것이 임서윤의 자작극은 아닐까. 하지만 준상은 이내 그와 같은 의심을 머리 속에서 지웠다. 짧은 시간 동안 엄청나게 변모한 자신에 대한 정보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김종경이라면 모를까, 임서윤은 자신의 실체를 일부나마 직접 목격한 인물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 가만히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는데, 샤워를 마친 헤네스가 가운을 걸친 채 욕실을 나왔다. “벌써 끝난 거냐? 좀 느긋하게 하지 않고.” “괜찮아요. 빨리 옷부터 꺼내 주세요.” “알았다.” 준상은 옷을 꺼내려다가 아차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새로 갈아입을 옷은 모조리 컨테이너 하우스의 옷장 안에 들어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런...” 난감해 하던 준상은 일단 캐비닛을 꺼내 자신의 예비 옷을 몇 벌 꺼내 준 다음 말했다. “일단 그걸로 입고 있어라. 나가서 새 옷을 사줄테니.” “네!” 준상은 미안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지만, 헤네스는 오히려 기쁜 표정으로 웃었다. 어쩐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준상의 옷을 입었던 일이 떠올랐던 탓이다. 헤네스가 대충 옷을 챙겨 입자, 준상은 그녀가 벗어놓은 옷을 대충 싸서 캐비닛에 넣었다. 그리고 그녀를 역소환 한 다음, 쇼핑몰이 있는 아래층으로 향했다. 인적이 없는 계단에서 다시 헤네스를 소환한 준상은 그녀와 함께 쇼핑몰을 돌며 옷을 골랐다. 준상으로서는 모처럼 고급 의류를 살 수 있는 곳에 왔으니 좀 더 예쁘고 아름다운 옷을 사주고 싶었지만, 헤네스는 밝고 부드러운 색감의 원피스 두 벌을 사는 것으로 쇼핑을 마쳤다. “그걸로 되겠어?” “충분해요.” 두 사람은 곧바로 극장으로 들어가 영화를 관람했다. 헤네스는 은연중에 모처럼 어두운 곳에 들어간 틈을 타 분위기를 잡아보려는 속셈이 있었지만, 불행히도 그녀는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 하필이면 아무거나 대충 고른 영화가 헐리우드에서 만들어진 액션물이었기 때문이다. 시종일관 터져 나오는 폭음과 압도적인 영상에 휘둘린 헤네스는 분위기를 잡을 틈조차 얻을 수가 없었다. “에휴...” 헤네스는 영화관을 나오며 다시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왜? 재미없었어?” “아뇨. 그런 게 아니에요. 에휴...” “...” 준상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더 묻지 않았다. 두 사람은 거리로 나와 호숫가로 향했다. 그리고 어느새 노을이 지기 시작한 도시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준상씨.” “응?” “이제 그만 들어가 있을게요.” “그래.” 헤네스는 준상에게 다가가 그의 가슴에 살짝 손을 얹은 채로 말했다. “혹시라도 위험해지면... 꼭 저를 불러주세요. 그리 큰 도움은 안되겠지만...” 준상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조용히 대답했다. “걱정마라.” “...” 헤네스가 가만히 눈을 감자, 준상은 비로소 그녀의 소환을 해제했다. 그리고 인벤토리에 보관되어 있던 그룬발의 망토로 몸을 감싼 후,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곳은 우선 김종경의 의원 사무실 근처였다. 사무실 주위에는 연락을 받았는지 검은 양복을 입은 경호원들이 진을 치고 있었지만, 위상전이를 통해 안으로 스며든 준상의 시야에 김종경이나 그 아들 김성진의 모습은 눈에 띄지 않았다. “흠...” 준상은 사무실 안에서 초조한 표정으로 왔다 갔다 하고 있는 젊은 남자에게 다가가 그의 목을 움켜 잡았다. “히익!” 남자는 어둠 속에서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며 자신의 목을 움켜쥐는 준상의 모습에 놀라 크게 숨을 들이켰다. “조용히.” “...” 준상의 입에서 말이 흘러나오자, 남자는 얼른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김종경은?” “여, 연합 본부로 가셨습니다.” 역시나 그랬던 건가. 하긴, 지금 상황에서 가장 확실한 안전을 보장 받을 수 있는 곳은 준상과 같은 능력자들이 모여있는 연합 본부 정도 밖에는 없다. 준상은 고개를 끄덕인 후, 남자에게 다시 말했다. “김종경에게 전해라. 지금 막 출발했다고.” “아, 알겠습니다.” 준상은 남자의 대답을 듣자 그의 목을 놓아주고는 다시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00107 트롤러 ========================================================================= “헉, 헉...” 남자는 자신이 방금 겪었던 일이 진실인지 아닌지 구분조차 되지 않았다. 얼른 문을 열고 나갔다. 그러자 비서실을 가득 메운 경호원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 일제히 돌아본다. “하... 하하...” 그래, 꿈이다. 꿈인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사람이 바글거리는 비서실을 뚫고 방 안에 들어와서 자신에게만 말을 하고 갈 수 있겠는가. 남자는 다시 집무실로 들어와 불을 켰다. 그리고는 꽉 졸라매어져 있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고 집무실 한쪽에 자리 잡은 책상으로 다가갔다. 그러다가, 그는 흠칫 굳어 버렸다. 책상 위에 한 장의 종이가 놓여 있었다. 그곳에는 어느 틈엔가 흘려 쓴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잊지 말고 전해라, 김종경에게.’ 이럴수가. 꿈이 아니었던 것이다. 방금 전의 그 일은 현실이었던 것이다. 남자는 황급히 주위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창문이 열린 흔적도 어딘가 벽이 부서진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이, 이럴수가.” 남자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집었다. 그리고, 김종경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잠시 신호가 가더니, 이내 짜증 섞인 김종경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무슨 일인가.” 남자는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그가... 왔다 갔습니다.” “언제?” “바, 방금 전에...” 겁에 잔뜩 질린 남자의 목소리를 들은 김종경은 잠시 말이 없다가 다시 조용히 물었다. “경호원들은?” “그, 그것이...” “더듬지 말고 똑바로 말해! 경호원들은?” 남자는 크게 심호흡을 한 다음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복도와 비서실에 있는 그 누구도... 그가 왔다 간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 김종경은 잠시 말이 없다가 침중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게... 정말인가?” “네. 갑자기 어둠 속에서 나타나서 제 목을 콱 움켜쥐고는 의원님의 행방을 물었습니다.” “으음...” 김종경은 신음 소리를 내며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남자는 그런 김종경에게 다시 말했다. “그가... 전하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 말에 김종경은 바로 반응했다. “말해 보게.” 남자는 다시 한 번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준상이 했던 말을 천천히 되뇌였다. “지금 막 출발했다고... 그렇게 전하라고 했습니다.” “...” 김종경은 잠시 말이 없다가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수고가 많았네. 이만 가서 쉬도록.” 그러자 남자가 다급하게 말했다. “의, 의원님. 만약 그 자가 허튼 마음을 먹는다면...” 하지만 김종경은 그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다시 말했다. “알았으니까, 가서 쉬도록 하게.” “아, 알겠습니다.” 김종경은 전화를 끊고는 잠시 의자에 기댄 채 눈을 감았다. 그러자, 앞쪽 소파에 앉아 있던 그의 아들 김성진이 급히 물었다. “집무실에서 온 연락인가요?” “그래.” 김종경은 손가락으로 미간을 주무르고는 눈을 뜨며 말을 이었다. “복도와 비서실의 그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에 집무실에 스며들었던 모양이더구나. 이 비서 그 친구가 아주 겁에 질려서 전화를 했어.” “그런...” 김종경의 말에 김성진은 물론이거니와 그 옆에 앉아 있던 권형식 소령 또한 크게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침투에 특화된 능력자인 모양이군요.” 그러자 김성진이 고개를 저었다. “제가 알기로 그 분은 육체 강화 계열이었습니다만... 새로운 능력에 눈을 뜬 것인지도 모르겠군요.” 김종경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권형식 소령에게 물었다. “귀환자들은 얼마나 집결했소?” 그 말에 권형식 소령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이... 약 이십퍼센트 정도 밖에는...” “겨우?” “본래 한 십퍼센트 정도가 이 건물 안에서 숙식을 하고 있었고, 긴급 호출을 보내기는 했지만 모인 인원은 십퍼센트 정도가 고작입니다.” “허...” 귀환자 특별법을 제정하기는 했지만, 이 법은 명분상 일반적인 사회활동이 불가능하게 된 귀환자들에 대한 경제적, 사회적 지원을 목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행동을 강제할 만한 구속력까지는 지니고 있지 못했다. 그러자 김성진이 다시 말했다. “아버지, 괜찮을 거에요. 연합 전체 인원의 20퍼센트라고는 해도, 그 수를 다 합치면 족히 오십명은 됩니다. 게다가 이곳에서 숙식하며 훈련하는 사람들은 그 중에서도 고르고 고른 정예입니다.” 그 말을 들은 권형식도 덧붙였다. “테이저를 맞고도 끄떡없었다는 말에는 저도 놀랐습니다만, 개인이 아무리 강해도 결국은 개인일 뿐입니다. 염려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으음...” 김종경은 그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어쩐지 마음 한 구석에 남아 있는 불안감이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이들이 있는 연합 본부는 서울시 외곽의 청소년 수련원을 사들여 개조한 곳으로서 수련원 면적만도 만 칠천 제곱미터에 달하며, 부대 시설로 육천 제곱미터의 유격장과 이만 제곱미터의 저수지를 가지고 있다. 여기에 사백 제곱 미터의 수영장과 생활관 여섯 개 동, 야외 학습장 세 개 동, 오백명 규모의 대강당 한 개 동에, 삼백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식당과 샤워장, 세면장 등의 부대시설 또한 충실하게 갖추어져 있다. 본래 이곳 생활관의 수용 정원은 오백명 규모로서 생각보다 많은 편이기는 하지만, 단체 합숙을 전제로 지어진 곳인지라 이후를 대비해 개인실 형태로 시설을 변경할 예정 또한 잡혀 있었다. 김종경 부자와 권형식 소령이 비서로부터 준상에 대한 얘기를 전해들은 지 약 한 시간 정도가 지났을 즈음, 드디어 연합 본부의 정문에 준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정문에는 이전에 강원도에서 준상의 차를 가로 막았던 것과 비슷한 형태의 검은 색 밴 두 대가 바리케이드처럼 길을 막고 세워져 있었으며, 주위에는 점퍼 차림의 경호원들이 가스총 같은 것을 들고 보초를 서고 있었다. 아마도 테이저가 아무런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자, 가스총으로 장비를 바꾼 모양이다. 하긴 시 외곽이라고는 해도, 대놓고 총질을 해대면 뒷감당하기가 난감할 테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준상은 어둠 속에서 잠시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능력자로 보이는 인물들이 눈에 띄지 않는 것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집무실에 소리없이 잠입했다는 얘기를 전해 듣자 바깥에서 대기중에던 능력자들을 모조리 건물 안으로 불러들인 것이리라. 준상은 대충 확인이 끝나자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뒤 천천히 정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으으... 추워라.” “젠장, 날도 추운데 이게 무슨 꼴인지.” “내 말이.” 싸늘한 초겨울 날씨에 이런 곳에 불려나와서 떨고 있는 자신들의 신세를 한탄하던 경호원 가운데 한 명이 바로 그 때, 정문을 향해 다가오는 준상의 모습을 발견했다. “뭐야 저거.” “뭐가?” “왠 미친 놈이 등에 이불보를 매고 다니는데?” “뭐?” 무슨 소리냐는 듯이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리던 경호원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파랗게 질려간다. “그, 그 놈이다.”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테이저 십여 발에 맞고도 눈썹 하나 꿈쩍이지 않던 저 얼굴을! “무슨 소리야?”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된 동료가 다시 묻자, 그는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 놈이라고! 어서 경보 울려!” “아, 알았어.” 동료가 후다닥 정문에 부착된 비상 벨을 누르기 위해 달려가자 경호원은 들고 있던 가스총을 준상에게 겨누며 외쳤다. “소, 손들어! 움직이면 쏜다! 움직이지 마!” 그러자 준상이 한 손을 들었다. 물론 겁에 질린 경호원의 말에 따르기 위함은 아니었다. 경호원은 준상이 한 손을 드는 순간 자신의 몸이 갑자기 휙 딸려 가는 것을 느꼈다. “헉!” 중심을 잃고 허우적거리던 경호원은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알아차릴 틈도 없이 순식간에 준상의 손아귀에 목덜미가 잡힌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준상이 단숨에 경호원 하나를 사로잡자 그 때까지도 상황 파악이 안 되서 멀뚱히 지켜보고 있던 다른 경호원들은 그제서야 화들짝 놀라며 일제히 준상을 향해 가스총을 겨누었다. “손들어!” 하지만 경호원들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그들은 똑똑히 보았다. 준상이 손을 내뻗자 가스총을 겨누고 있던 자신들의 동료가 갑자기 휙 딸려가 그 손에 잡히는 것을. 게다가 사람을 한 손으로 들고서도 힘든 기색 하나 보이지 않는 그 모습이라니! 동료가 잡혀 있어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때문인지 쉽게 대응하지 못하는 다른 경호원들의 모습에 준상은 피식 웃으며 자신에게 잡힌 경호원에게 말했다. “가서 전해라. 내가 왔노라고.” “아, 알겠습니다.” 손가락의 힘이 풀려 가스총은 이미 바닥을 구르고 있는지 오래. 경호원은 준상의 손에서 풀려나자 비틀거리며 정문 쪽으로 뒷걸음질을 치더니 이내 김종경이 있는 본관 건물을 향해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준상은 그 모습을 보며 인벤토리에서 랑다잘의 분노를 꺼냈다. “헉!” 경호원들은 갑자기 허공에서 직경이 일 미터나 되는 거대한 철구 두 개가 모습을 드러내는 모습에 놀라고, 다시 그 거대한 철구를 장난감처럼 붕붕 휘두르는 준상의 모습에 기함했다. “가, 가짜 아닐까?” “이를테면 풍선이라든가... 그렇겠지?” 하지만 준상은 마치 그런 경호원들의 말을 듣기라도 한 듯이 철구 하나로 땅을 후려쳤다. 꽝! 순간 들썩하며 지면이 흔들리는 그 느낌을 경호원들은 똑똑히 느꼈다. “비, 빌어먹을... 저런 괴물을 어떻게 상대하라는 거야?” 경호원 중 하나가 그렇게 중얼거리자 안 그래도 점차 사람 같지 않은 준상의 모습에 질려가던 경호원들의 등 뒤로 차가운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준상은 그런 경호원들을 보며 땅바닥에 박혀 있던 철구를 끌어당겨 손에 쥐더니 빙빙 돌리고 있던 다른 철구를 또다시 내리쳤다. 철구는 어둠을 가로질러 커다란 포물선을 그리며 바리케이드 대신 길을 막고 있던 밴을 내리쳤다. 꽝! 두 번도 필요 없었다. 단 한 번 내리 찍었을 뿐이지만, 검은 색 밴은 순식간에 형체를 잃고 짓밟힌 개구리 꼴이 되어 그 안의 기계 부속들을 내장처럼 사방으로 뿜어내었다. “으악!” 파편에 맞은 경호원들이 비명을 지르며 널브러지자, 준상은 다시 철구를 끌어당겨 손에 쥔 다음, 남은 한 대의 밴에 또다시 철퇴를 내렸다. 이번에도, 거대한 철구는 검은 색 밴 한 대를 짓뭉개 버렸다. 경호원들은 이제 완전히 얼이 빠졌다. 만약 저 철구가 자신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면 어찌 되었을까. 그건 정말 상상만으로도 너무나 끔찍한 일이었다. 준상은 부상을 입고 나뒹구는 경호원들의 모습을 보고는 얼굴을 찌푸렸다. “헤네스.” 그가 조용히 이름을 부르자, 한줄기 빛과 함께 갈색 머리의 소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처참하게 부서진 두 대의 차를 보고는 표정이 굳었다. “이건...” 준상은 그녀에게 조용히 말했다. “치료해줘라.” “...” 헤네스는 이내 울상이 되었다. 말이 쉽지, 치료를 하려면 또 그걸 꺼내서 휘둘러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당장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이 그것인 것을. 헤네스는 한숨을 푸욱 내쉬고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채찍 두 개를 꺼내며 넘어져 있는 경호원들에게 다가갔다. 경호원들은 갑자기 허공에서 빛과 함께 소녀가 나타나는 이해할 수 없는 광경에 아픈 것도 잊고 눈을 비비다가, 그 소녀가 뭔가 기분 나쁠 정도로 번들거리는 채찍 두 개를 들고 다가서자 설마 싶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옛 성현이 이르기를, 원래 설마라는 말은 사람의 기대를 저버리기 위해 존재하는 단어다. 처덕, 처덕. 헤네스가 휘두른 채찍에 얻어맞자 경호원은 그 기분 나쁜 느낌에 지금 상황조차 잊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게 무슨 짓...” 하지만 다음 순간, 파편에 맞아 길게 찢어 졌던 가슴과 팔의 상처가 멀쩡하게 아물어 버리는 것을 보자 그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시간 없으니까 줄 서요. 싫으면 그냥 가시던가.” 헤네스가 귀찮다는 듯이 그렇게 말하자, 경호원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아픈 몸을 이끌고 줄을 서서 차례대로 그녀의 채찍을 맞고는 상처가 아물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갔다. 개중에는 그날의 일을 계기로 특별한 감각에 눈을 뜬 경호원들이 몇몇 있다고는 하는데, 어디까지나 믿거나 말거나다. 어차피 저들도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 김종경이라면 모를까, 준상은 대항할 의지조차 잃은 자들에게 화풀이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경호원들이 모두 모습을 감추자, 준상은 헉헉 거리며 숨을 몰아쉬고 있는 헤네스에게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수고했다.” “치...” 헤네스는 입을 삐죽거렸지만, 머리를 쓰다듬는 준상의 손이 싫지는 않았는지 잠시 가만히 서서 숨을 골랐다. “다시 부르마.” “네.” 준상은 헤네스를 역소환한 다음, 다시 철구를 휘둘러 정문의 시설들을 완전히 가루가 되도록 부숴버린 뒤에야 안으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러자 본관 건물 앞에 수십 명의 사람들이 나와 있는 모습이 눈에 띈다. 중년의 남성으로부터 십대로 보이는 여학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이 나와 있는 모습을 보자 준상은 그들이 귀환자들임을 어렵지 않게 알아보았다. 그들은 멀리서 준상이 정문을 부수는 모습을 지켜본 탓인지 긴장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준상은 가만히 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싸울 건가?” 그러자 앞에 나와 있던 중년 남성이 입고 있던 점퍼를 벗으며 앞으로 나섰다. “당신은 이곳을 부수고자 온 것이오?” “그렇다면?” “사람을 때리고 싶지는 않지만, 당신이 그런 목적을 가지고 있다면 이대로 방관할 수는 없소.” 제법 열심히 단련을 한 모양인지 중년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역삼각형의 멋진 몸매를 자랑하고 있었다. 다리가 좀 짧아 보이는 것이 흠이긴 하지만, 저 정도면 충분히 자랑스러워 할 정도라고나 할까. 준상은 그의 모습을 보고는 랑다잘의 분노를 인벤토리에 다시 집어 넣었다. 남자는 준상의 손에 쥐어져 있던 두 개의 철구가 사라지자 얼굴을 찌푸리더니, 바로 스텝을 밟으며 쇄도해 왔다. 퍽! 그의 주먹은 정확히 준상의 미간에 적중했다. 하지만, 준상은 강력한 펀치에 직격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서 있었다. “이, 이건...” 남자는 당황했다. 주먹이 닿는 순간 마치 스펀지에 닿는 것처럼 충격이 흡수 되는 기이한 느낌을 받은 탓이다. 준상은 주먹을 내지른 채 멈춰선 남자를 향해 조용히 말했다. “이게 끝인가?” 남자는 준상의 평온한 목소리를 듣자 속에서 불꽃 같은 것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끼며 있는 힘껏 준상의 턱을 올려쳤다. 하지만, 결과는 마찬 가지였다. 체중을 잔뜩 실어 올려친 그의 주먹은 준상의 턱에 닿는 순간 소리 없이 기세가 줄어들며 그대로 멈춰 버린 것이다. 그는 믿을 수가 없었다. 헤스카드의 권투사라는 콤보 카드를 사용하는 그의 주먹은 좀비의 머리뼈 정도는 일격에 부술 수 있을 정도의 위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눈앞에서 권태로운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이 남자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79퍼센트의 물리 저항 능력은 남자의 펀치력 대부분을 상쇄시켰고, 남은 힘 또한 준상의 몸이 지닌 자체적인 방어력을 넘어서지 못했다. 거듭해서 한계를 넘어서고 다시 재생하기를 수십차례나 반복해 왔던 준상의 신체는 이미 인간의 그것을 초월한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준상은 다시 말했다. “계속 할 셈인가?” “...” 남자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조용히 주먹을 내리고 옆으로 물러서는 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행동의 전부였다. ============================ 작품 후기 ============================ 우리우리 우-! 약빨약빨 냐-! 세계는 약빨! (연참!) (」·ω·)」우-! (/·ω·)/냐-! (」·ω·)」우-! (/·ω·)/냐-! (」·ω·)」우-! (/·ω·)/냐-! (/>ω<)/Let’s 냐-! 약빨이 좋아좋아 현탐은 시러시러 나도 당신도 쉽게 겁 많은 괴짜 연참이 바글바글 현자들이 도망치면 나와 당신은 무간지옥에서 데이트를 즐 겁 네 불타버려 녹아내려 (인간이 아니야!) 뼛속이 조마조마 그래도 좋아요 내가 제일 원하는건 약빨이야 연참이 와글와글 그러면 가볼까요 뭐가 나에게 가장 잘 어울릴까나 그것은 박카스 거울에는 (누 누 누구야?) 비치지않아 (누구야? 싫어싫어) 욕망은 확실히 말을 안하면 우-! 거봐 냐-! 사라져 버리지? Let’s 냐-! 태양 따위 눈만 부셔서 어둠인 편이 무한해요! (두근두근) 태양 따윈 눈부셔서 어둠인 편이 멋져 (뭐어~?) CHAOS CHAOS I wanna CHAOS 불타는 혼돈의 약빨 무적이에요 (콩닥콩닥) CHAOS CHAOS una sera CHAOS 불타는 듯한게 기분 좋아 (왜에~?) 우리에게 (우-!) 보내면 파괴! (냐-!) 세계는 약빨! (연참!) (」·ω·)」우-! (/·ω·)/냐-! (」·ω·)」우-! (/·ω·)/냐-! (」·ω·)」우-! (/·ω·)/냐-! (/>ω<)/Let’s 냐-! 쌍화탕이 따듯따듯 무모한 레드불들 나와 당신은 목표가 다르군요 약빨이 울렁울렁 무리하게 되기 쉽상 제가 당신을 지킨다해도 pinchi 이 상 하 네 도망치자 끙끙거리자 (통조림이 되었네) 현탐이 이따금씩 여기까지 왔어요 저는 조용히 적들을 물리쳐요 약빨이 불타올라 여기는 안돼요 저에게는 말도 없이 무한도핑은 하지마요 원한다면 (전 전 전멸!) 할게요 (적이야? 이런이런) 부탁한다면 남김없이 우-! 어라 냐-! 필요없겠네요? Let’s 냐-! 지금 엄청 위험했어요 빛속성 레드불을 주세요 (피카피카) 지금 엄청 위험했어요 빛속성 레드불로 자극을 (냐루빔?) MADNESS MADNESS You wanna MADNESS 부르면 모독의 약빨 과격해요 (오싹오싹) MADNESS MADNESS ennui MADNESS 부르면 분명히 마 지 막 (약이에요!) 기어오는! 우-! 혼돈의 약빨! 냐-! 니알약토! 텝-! (」·ω·)」우-! (/·ω·)/냐-! (」·ω·)」우-! (/·ω·)/냐-! (」·ω·)」우-! (/·ω·)/냐-! (」·ω·)」우-! (/·ω·)/냐-! (」·ω·)」우-! (/·ω·)/냐-! (」·ω·)」우-! (/·ω·)/냐-! (」·ω·)」우-! (/·ω·)/냐-! (/>ω<)/Let’s 냐-! 태양 따위 눈 부셔서 어둠인 편이 무한해요! (두근두근) 태양 따윈 눈 부셔서 어둠인 편이 멋져 (뭐어~?) CHAOS CHAOS I wanna CHAOS 불타는 혼돈의 약빨 무적이에요 (콩닥콩닥) CHAOS CHAOS 시끄럽구나 CHAOS 불타는 듯한게 기분 좋아 (왜에~?) 기어오는! 우-! 혼돈의 약빨! 냐-! 니알약토! 텝-! 00108 트롤러 ========================================================================= 남자가 옆으로 비켜서자, 준상은 주위에 모인 사람들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너희들은 왜 나를 막는 것인가.” 그러자 사람들은 서로를 돌아보았다. 사실 그들로서도 이렇게 준상과 싸워야만 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탓이다. 수련원 안에서 이제나 저제나 하며 언제 퀘스트가 날아올지 몰라 전전긍긍하고 있던 사람들은, 권형식 소령을 위시한 연합의 간부들이 소집 명령을 내리자 영문도 모른 채 옷을 입고 밖으로 나왔을 뿐이다. 외부에서 기거하다가 소집 명령을 받고 급히 달려온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들은 정보라고는, 그저 침입자가 있으니 함께 힘을 합쳐 방어해야만 한다는 것 정도가 전부였다. 때문에 그들은 대답할 수 없었다. 어째서 자신을 가로 막느냐는 준상의 물음에. 단 한 사람, 한 명의 여고생을 제외하고는. “당신이 연합을 부수려 하기 때문이에요.” 그녀는 바로 수연이라는 이름을 가진, 성진과 같은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것이 인연이 되어 연합에 소속된 여고생이었다. 준상은 그녀의 모습을 보고는, 이전에 숲의 정화 퀘스트에서 성진과 함께 환자복을 입고 소환되었던 여고생임을 알아보았다. “그게 어째서 이유가 되는 것이지?” 그러자 수연은 말했다. “당신은 괜찮은 모양이군요.” “뭐가?” “이 빌어먹을 퀘스트 때문에, 우리는 학교도, 직장도, 아니 그 어떤 사회생활도 불가능하게 되었어요.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이제 더 이상 원래대로 되돌아 갈 수 없단 말이에요.” 준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다.” 수연은 그 대답을 듣고는 다시 말했다. “전 아직도 밤에 잠을 설쳐요. 저기 근육 덩이 아저씨는 여전히 남몰래 신경 안정제를 먹고 있죠. 얘는 아직도 밥을 제대로 못 먹어요.” 준상은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한다.” 수연은 그런 준상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연합은 그런 우리들이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환경을 만들어 주고 있어요. 기초 수급자 수준에 불과하지만... 다달이 돈도 나오고, 이곳에 있으면 처지가 같은 사람들끼리 돕는 것도 가능해요.” 준상은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수연은 그런 담담한 준상의 반응에 질린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하긴... 당신은 처음 봤을 때부터 대수롭지 않게 좀비의 머리를 헤집고 다녔으니 이런 우리 심정을 모르겠죠. 그러니까, 이렇게 연합을 부수겠다며 온 것이겠고.” 그 말에 준상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게 전부인가?” “...” 수연은 잠시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준상을 바라보다가 들고 있던 목검을 내밀며 말했다. “그래요. 전부에요. 이제 어쩔 건가요. 우리들을 전부 죽이고 이곳을 불살라 버릴 건가요?” 그러자 사람들은 조심스럽게 준상을 향해 자세를 잡았다. 솔직히 싸우고 싶지는 않지만... 정말로 준상이 이대로 연합을 부숴 버린다면 안 그래도 팍팍한 자신들의 삶이 얼마나 더 거칠어질지 깨달은 탓이다. 하지만 준상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군.” “필요라구요?” “그래. 필요.” 준상은 그렇게 말하고는 이렇게 결론 지었다. “결국 너희들에게 연합이 필요한 이유는 돈 때문이란 얘기가 아닌가.” “...” 너무나 간단명료한 결론에 사람들은 잠시 멍해졌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너무 직설적이라고나 할까. 준상은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며 다시 말했다. “아까 돈을 얼마나 받는다고 했지? 기초 수급자 수준?” “그, 그래요.” “그 정도의 돈이라면 내가 지불할 수 있다.” “...” 순간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최소 사십만으로만 잡는다고 해도 연합의 인원이 약 삼백명 정도니까, 한 달에 들어가는 비용만 계산해도 약 일억 이천만원 정도다. 게다가 이 비용은 말 그대로 그냥 퍼붓는 돈이다. 돌아오는 수익이 전혀 없다는 뜻이다. 그런 비용을... 혼자 부담하겠다니. “지금... 자랑질 하러 온 건가요?” 수연의 말에 준상은 고개를 저었다. “물론 아니다. 더군다나, 나는 다른 사람에게 자선 사업을 할 생각도 없다.” 수연은 얼굴을 찌푸렸다. “말장난이라면 그만 둬요. 짜증 나니까.” 하지만 준상은 계속 말했다. “나는 지금 너희에게 제안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제안이라구요? 무슨...” 수연의 말에 준상은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시드를 가져와라. 그럼 내가 사겠다.” 예상 외의 말에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난데없이 시드라니? 어차피 한 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시드의 갯수에는 한계가 있다. 그런 걸 사 모아서 어쩌겠다는 건가. “시드요?”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수연이 묻자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래. 어떤 옵션이든 상관없다. 가격은 옵션의 퍼센티지를 N이라 했을 때 2의 N-1제곱에 다시 십만을 곱한 수만큼 쳐주지.” 순간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준상이 말한 가격이 대충 어느 정도인지 바로 와 닿지 않은 탓이다. “그, 그럼 도대체 얼마란 얘기지?” “글쎄?” 그러자 옆으로 물러나 있던 처음의 근육질 남자가 중얼거리며 계산을 시작했다. “그러니까... 1퍼센트 짜리면 2의 0승 곱하기 십만이니까, 십만원이고.” 그 말을 옆에 서 있던 남자가 받았다. “2퍼센트 짜리면 2의 1승 곱하기 십만이니까, 이십만원...” 이번에는 그 옆에 서 있던 여자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만약 10퍼센트 짜리면... 2의 9승 곱하기 십만이니까... 헉!” 가만히 속으로 계산을 해보던 여자는 너무 놀라 헛숨을 들이켰다. “얼만데 그래요?” 그녀는 옆 사람이 넌지시 묻자 그제서야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오, 오천 백 이십 만원...” “헉!” 사람들은 그제서야 이 계산법이 얼마나 터무니 없는지 깨달았다. 만약 11퍼센트 짜리 시드가 나온다면... 단숨에 1억이 넘는 돈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다! 준상은 사람들이 시드 가격의 계산을 끝내자 조용히 말했다. “이 정도면, 적어도 연합에 매여 종살이 하면서 이렇게 끌려 다닐 이유는 없을 듯 한데. 내 생각이 틀렸나?” 물론 레어가 아닌 일반 시드의 경우 7퍼센트 이상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준상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걸 지금 여기서 말할 필요는 없는 일. 사실 7퍼센트만 되도 육백 사십 만원이니 그것만으로도 수입으로는 차고 넘친다. 꿀꺽. 사람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이런 걸 두고 새옹지마라고 하던가. 방금 전까지 인생을 비관하게 만들던 자신들의 처지가 순식간에 대기업 사원 못지 않은 수준으로 뛰어오른 셈이다. 물론 돈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지만, 돈이 있으면 인생이 그만큼 윤택해지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수연은 잠시 아무 말도 못 한 채 준상을 바라만 보다가 떨리는 음성으로 다시 말문을 열었다. “자, 장난치지 말아요. 그깟 부스러기를 그렇게 비싸게 살 이유가 없잖아요?” “그럼 넌 팔지 않으면 되겠군.” “...” 수연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렇다. 그렇게 사들인 시드를 가지고 공기놀이를 하든 땅따먹기를 하든, 그건 어디까지나 준상의 마음이 아니던가. 자신들은 그에게 시드를 팔고 수익을 챙기면 그만이다. 사람들은 준상이 미쳤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이건 그로서는 몇 배나 남는 장사다. 지금도 준상에게는 시드가 굉장히 많이 있다. 당연하다. 에픽 퀘스트 네 개 분량의 시드를 싹쓸이해서 긁어 모았으니 그게 얼마나 되겠는가. 원래대로라면 사개국에 골고루 분배되어야 했던 시드를 준상 혼자 쓸어 담은 상태다. 이걸 그대로 쌓아두기만 하면 말 그대로 잡동사니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수요를 창출할 수 있다면 이것은 큰 돈이 될 수 있다. 문제는 수요를 창출하기 위한 전제 조건에 어떻게 도달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시드의 효용을 제대로 알고, 아이템 강화나 시드 조합 같은 걸 할 정도의 수준이 되려면 일단 플레이어들이 강해져야 한다. 하지만 지금처럼 생활이 불안정하고 그로 인해 심리적 안정을 찾지 못하게 될 경우 마음 잡고 수련을 할 수도 없고 그만큼 강해지는데도 시간이 걸린다. 게다가, 강해지면 무얼 하겠는가. 당장 살아남기만 급급해서는 될 일도 안 된다. 그러나, 만약 이들에게 동기가 부여된다면 어떨까. 어차피 퀘스트로부터 벗어날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 퀘스트를 통해 돈을 벌 수 있다면 어떨까. 그렇다. 이것은 일종의 투자였다. 당장은 시드를 사들이는 준상이 손해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일이십만원 짜리 시드를 사서 그걸로 생명력 강화 같은 반지를 강화해서 판매하면 어떨까. 딱히 플레이어들이 아니라도, 생명력 증가 같은 옵션의 경우 살 사람이 부지기수다. 생명력이 증가하면 달랑 게임처럼 피통 좀 늘고 마는 것이 아니다. 생명력이란 다시 말해 활력, 즉 스테미너에도 영향을 미친다. 전 세기를 통틀어 남자들의 최대 관심사가 무엇이던가. 바로 정력이다. 이것 역시 결국에는 스테미너의 한 종류일 뿐이 아니던가. 게다가 이것은 추가 비용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비아그라나 비타민제나 기타 자양강장제처럼 늘상 입에 달고 살아야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사서 손가락에 끼우기만 하면 끝이다. 이런 반지, 과연 시장에 나온다면 사지 않을 부자가 있을까? 없다. 효능이 증명되기만 한다면 억만금을 주고라도 사려고 들것이다. 생명력 증가 같은 경우는 차라리 대단치 않은 예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준상이 지닌 아이템들만 보더라도 그건 분명한 사실이다. 물론 플레이어들이 많아지면 이런 반지의 공급도 늘어나겠지만, 아이템의 효능을 높이기 위해서는 또다시 시드를 필요로 한다. 즉, 공급과 수요가 선순환을 일으키면서 계속해서 시장이 확대되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가장 큰 이득을 보는 것은 과연 누굴까. 바로 시드를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준상이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시간이 오래 걸릴 수도 있는 일이지만, 어차피 그냥 쌓아두기만 해서는 의미가 없는 일. 게다가 이것은 결국 누가 방아쇠를 당기느냐의 문제일 뿐 언젠가는 벌어질 일이고, 준상은 그것을 좀 더 앞당기려는 것 뿐이다. 하지만 이런 준상의 계획을 알 리 없는 사람들은 너무나 솔깃한 그의 얘기에 반신 반의하는 표정을 지을 뿐 쉽게 동조하려 들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특히 수연이 가장 의심스러운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요. 하지만 당신이 그걸 사들일 만한 재력이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 먼저 아닐까요?” 그러자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인벤토리에서 캐비닛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이게 뭔가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캐비닛을 열어 그 안에 들어있는 가방 하나를 열어 보여 주었다. “구억원이 좀 넘는다. 당장은 현금이 별로 필요 없어서 이 정도만 가지고 있지만, 필요하다면 더 구하는 건 문제가 아니다.” “...” 준상은 다시 돈이 담긴 가방을 캐비닛에 넣고, 다시 그 캐비닛을 인벤토리로 되돌린 다음 사람들을 돌아 보며 말했다. “더 궁금한 것이 있나?” “...” 수연도 더 이상은 나서지 못했다. 준상은 그런 사람들을 향해 다시 말했다. “그럼 가서 각자의 물건을 챙겨 가지고 나오도록. 저 건물은 오늘 밤 사라질 테니.” 그러자 사람들은 잠시 눈치를 보는가 싶더니, 이내 우르르 건물 안으로 들어가 자신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00109 트롤러 ========================================================================= 건물 안쪽에서 초조하게 적의 침입을 대비하고 있던 사람들은, 갑자기 건물 밖에서 대기하던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와 숙소 쪽으로 달려가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차라리 흠씬 두들겨 맞아서 도망가는 모양새라면 모르겠는데, 누구 하나 다친 모습을 보이지도 않고 있었다. 게다가 뭔가 상황이 발생했다면 조장 같은 인물 들에게 먼저 알리는 것이 순서일텐데, 그런 행동을 보이는 인물도 없다. 다만 친한 귀환자 몇몇에게 다가가 귓속말로 뭔가 속닥거리는 것이 전부. 기묘한 것은 그렇게 귓속말을 전해들은 귀환자들 역시 후다닥 대열에서 이탈하여 자신의 짐을 챙기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몇 명만 그러나 싶었더니, 이상을 눈치 챈 조장들이 움직였을 때는 이미 대부분의 귀환자들이 짐을 챙겨 밖으로 나가버린 뒤였다. “이봐! 무슨 일이야?” 조장 하나가 얼른 나서며 말했지만, 사람들은 발걸음을 옮기며 그의 말을 들은 척 조차 하지 않았다. “썅! 무슨 일이냐고 묻는 말 안 들려?” 권중현은 능력보다는 연합 최상층부의 권형식 소령과 같은 집 안 사람이라 조장으로 선발된 인물이다. 여성 귀환자들에게 집적거리는 일도 많고, 이래저래 귀환자들 사이에서 비호감으로 손꼽히던 인물. 평소대로라면 똥이 더러워서 피하느냐는 식으로 그저 기피하고 말았겠지만, 오늘 만큼은 사정이 달랐다. 준상에게 도전했다가 펀치 두 번 날리고 스스로 물러났던 ‘헤스카드의 권투사’, 윤성렬이 여성 귀환자의 어깨를 향해 뻗어 나가던 권중현의 손목을 움켜쥐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꺼져라. 두들겨 맞고 싶지 않으면.” 머리가 나쁘면 눈치라도 빨라야 하는 법인데, 그 잠깐 사이에 사람들 머리 위에 서는 일에 익숙해져 버린 이 멍청이는 윤성렬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이한 살기를 미처 눈치 채지 못했다. 그래서 도리어 윤성렬을 향해 소리쳤다. “아악! 이 영감탱이가 미쳤나! 감히 누구한테 대고...” 하지만 그는 말을 미처 다 마치지 못했다. 윤성렬의 커다란 주먹이 그 관자놀이를 꿀밤 먹이듯 쥐어 박자 그대로 개구리처럼 쭉 뻗어 버린 탓이다. “병신 같은 놈이 어디서...” 윤성렬은 그대로 무너지는 건물에 깔려 버리도록 놔두고 갈까 하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하지만 괜히 죽는 사람이 나오면 일이 골치 아파진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축 늘어져 버린 권중현을 어깨에 둘러멘 채 밖으로 나왔다. 이런 상황은 비단 권중현과 윤성렬 사이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었다. 한편, 평소에 기피 대상이 되었던 앞잡이 수준의 조장 몇을 제외한 귀환자 대부분이 건물 밖으로 짐을 챙겨 나오는 동안 준상은 서윤에게 연락을 넣었다. ‘연합으로 와라. 맡길 일이 있다.’ 시드 매입에 관한 계획을 밝히기는 하였으되, 준상이 그 모든 일을 전담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앞으로 어떤 적이 나타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현실에 안주해 돈 놀이나 하고 있을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었기 때문이다. 임서윤은 어차피 그쪽의 일을 진행하려고 움직이는 중이었고, 능력으로보나 배경으로보나 준상이 계획한 시드 매입을 맡기기에는 가장 최적의 인물이었다. 시드의 매입은 보유하고 있는 자금과 시드를 투자해 더 큰 이익을 얻기 위한 일이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연합이라는 단체의 존립 기반 자체를 무너뜨리기 위한 일. 현재 귀환자들이 연합에 묶여 있는 가장 큰 이유가 경제적 곤란함이니 그들이 스스로 자립하게 되면 더 이상 누군가에 매여 있을 필요가 없게 된다. 물론 권력이나 기타 다른 유혹에 넘어가 개인적으로 힘을 빌려주는 일 까지 준상이 일일이 나서서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최소한 지금처럼 국가 권력 등에 의해 반강제적인 동원이 일어날 가능성은 현저하게 낮아진다. 이것은 이후에 귀환자들이 스스로 결집해 단체를 만들게 되더라도 마찬가지다. 오늘 준상이 압도적이고 초월적인 힘을 보여주게 되면, 그들로서는 설사 준상을 집적거리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도 한 번 쯤 고민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한 번 망설일 여지를 준다는 것 만으로도 준상으로서는 앞으로 벌어질 수 있는 귀찮은 일들을 최소화할 수 있게 되니 이것 또한 일거양득. 물론 이런 식으로 지명도가 생기게 되면 다른 국가들의 간섭이 일어날 여지가 생긴다는 문제가 있다. 하지만 그들이 강제력을 동원하려 해도 비행기나 배 같은 장거리 운송수단을 함부로 사용하기 힘든 귀환자의 특성을 고려하면 기존의 군사력이나 경찰력을 동원하는 방법 뿐인데... 솔직히 융단 폭격 같은 걸 퍼부어 대지 않는 이상 지금의 준상이 위협을 느낄만한 수단은 거의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즉, 시내에서 전쟁이라도 벌일 각오로 덤비지 않는 이상 지금의 준상에게 강제력을 부여할 만한 수단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한 일. 때로는 힘을 보여주는 것이 싸움을 피하는 길이 되기도 한다. 준상이 헤네스에게 했던 짤막한 말은 이런 의미들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대부분의 인원이 건물 밖으로 나오자 준상은 초감각을 발동했다. 그러자 벽으로 가려진 건물 안쪽의 상황이 마치 눈으로 보는 것처럼 세세하게 그의 뇌리 속에 전해진다. 준상은 일부러 짧게 위상전이를 반복하여 건물 지붕으로 이동했다. “어?” “지, 지금 어떻게 한 거지?” “장난 아니다. 순간 이동이잖아, 저거?” 아래쪽에서 귀환자들이 그렇게 웅성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준상은 랑다잘의 분노를 꺼내 들었다. “헉!” 순식간에 직경이 일미터나 되는, 뾰족한 돌기가 섬뜩하게 돋아난 철구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헛숨을 삼켰다. 앞서 건물 밖에 나와 있던 사람들은 이미 준상이 지금 손에 들고 있는 말도 안 되는 크기의 철구들을 휘둘러 자동차 두 대와 정문을 문자 그대로 으깨 버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건물 안에 있던 사람들은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준상은 그들이 잘 볼 수 있도록 철구를 천천히 들어 올린 후, 옥상으로 통하는 입구를 향해 철구를 내리쳤다. 꽝! 역시나 두 번도 필요 없었다. 시설물 파괴시 이백퍼센트 데미지 증가의 효과를 지니고 있는 랑다잘의 분노는 단 한 번의 일격으로 옥상으로 통하는 출입구를 가루로 만들어 버렸다. 수련관 최상층에서 보고조차 받지 못한 채 이제나 저제나 하며 불안에 떨고 있던 김종경과 권형식, 그리고 김종경의 아들 김성진은 갑작스러운 굉음과 함께 건물이 흔들리자 기절할 정도로 놀랐다. “무슨 일이지?” “알아보겠습니다.” 권형식은 급히 전화기를 들어 우선 권중현에게 연락을 넣었다. 하지만 그 즈음 권중현은 이미 윤성렬에게 얻어맞은 후 정신을 잃고 건물 바깥의 잔디 운동장 위에 뻗어 있는 상태였다. 권중현에게 연락이 되지 않자, 권형식은 혀를 차며 몸을 일으켜 문 밖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가 문고리를 잡는 순간, 다시 한 번 커다란 굉음과 함께 건물이 흔들린다. 흠칫 놀라 몸을 숙이던 세 사람은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었던지 얼른 집무실을 빠져 나와 복도로 나섰다. 그러자 창문 밖으로 입만 쩍 벌린 채 위쪽을 쳐다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권형식 소령은 얼른 창문을 열고 고개를 밖으로 내밀었다. 하지만 그가 있는 위치에서는 준상의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권형식은 다시 고개를 돌려 아래쪽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왜 모두들 밖에 나가 있는 건가!” 그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권형식을 비롯한 김종경 부자가 건물 안에 남아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들은 그들에 대한 악감정도 잊고 큰 소리로 외쳤다. “나와요!” “얼른 나와요! 거기 곧 무너질 거에요!” 권형식은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 없었다. 무슨 소린가 싶어 다시 물으려는데... 왼쪽으로 이어진 복도 끝의 천장 부분이 갑자기 굉음과 함께 우르르 무너져 내린다. “헉!” 세 사람은 그 모습을 보자 더 따질 엄두를 내지 못하고 급히 비상구를 향해 달렸다. 초감각을 통해 세 사람이 비상구로 도망치는 것을 확인하자 무너진 복도를 통해 건물 최상층으로 내려왔다. 준상은 복도에 서서 건물의 면적을 어림잡은 다음, 듀얼 스톰을 펼쳤다. 콰콰콰콱! 회전하는 두 개의 철구는 건물 그 자체를 통째로 갈아마셨다. 철근 콘크리트와 전선과 내장재들이 철구와 맞닿는 순간 폭죽처럼 터져 나가며 파괴되었다. 마침내 한 바탕 휘몰아치던 폭풍이 멈추었을 때, 사람들은 수련관 최상층의 반이 사라져 버렸음을 깨달았다. “허...” 윤성렬은 자신도 모르게 뒷목을 쓰다듬었다. 저런 사람에게 뭣도 모르고 주먹질을 해댔다니... 그야말로 죽으려고 환장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등골이 서늘하기는 수연도 마찬가지였다. 어쩐지 볼 때마다 울컥하는 뭔가가 있어서 나서기는 했지만, 설마 저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을 줄은 미처 몰랐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깨달았다. 그가 자신들을 상대로 힘을 내보였다면, 지금 이 가운데 살아남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리라는 사실을. 준상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건물 중심부로 이동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듀얼 스톰을 펼쳐 나머지 최상층의 반을 부숴버린 다음, 초감각을 펼쳐 건물 안에 남아 있는 사람이 없는지 확인했다. 마지막까지 건물 안에 남아있던 권형식과 김종경 부자가 비상구를 통해 건물을 빠져 나가는 것을 확인한 준상은 마지막 피날레를 준비했다. “후우우우우...” 가장 먼저 무투가 콤보를 장착했다. 사람들은 이미 건물에서 멀찍이 떨어진 상태. 준상은 권형식과 김종경 부자가 귀환자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는 모습을 확인하고는 가만히 강타를 발동했다. 그리고 천천히 숫자를 헤아렸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마침내 풀 차지 상태에 이르자 준상은 거대한 철구를 번쩍 치켜 들고는 그대로 자신이 밟고 있는 건물을 향해 내리쳤다. 순간 사람들은 보았다. 어두운 하늘로부터 한 줄기 벼락이 수련관을 향해 내리치는 것을. 그 벼락은 단숨에 건물의 골조를 꿰뚫고 들어가 지반을 관통했다. 우릉! 준상의 힘을 감당 못한 기반암이 크게 흔들린다. 건물은 이미 으깨진 두부처럼 변해있었고, 무너지지 않은 것이라고는 준상이 있는 곳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모서리의 기둥 정도가 전부였다. 아. 이것이 과연 인간의 힘이란 말인가. “후우우우...” 준상은 몸에서 흰 연기를 뿜어내며 천천히 무너진 건물 속에서 걸어 나왔다. 사람들은 어느새 두 개의 철구를 되돌린 채 맨 손으로 걸어나오는 준상의 모습을 보고 다시 깨달았다. 자신들이 보았던 모든 것들이 현실이라는 사실을. 준상은 천천히 단상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는 지금 공포의 시선도, 사안도 펼치지 않고 있는 상태. 하지만 사람들은 그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번뜩이는 안광과 마주한 순간 그대로 석상처럼 굳어 버렸다. 공포? 아니다. 그것은 전율이었다. 인간이 이처럼 강해질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를 통해 증명한 강자에 대한 전율이었다. 그때 준상이 입을 열었다. “보았는가?”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대답했다. “보았습니다.”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말했다. “느꼈는가?” 이번에도 사람들은 무언가에 홀린 듯이 대답했다. “느꼈습니다.” 준상은 천천히 사람들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잊지 마라. 너희들이 그 혹독한 튜토리얼에서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아...” “잊지 마라.” “...” “너희들은 승리자다.” 사람들은 그말을 듣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00110 트롤러 ========================================================================= <기존에 109편에 작성되어 있던 공지는 삭제되었으니, 아직 109편을 읽지 않으신 분은 먼저 읽고 오세요> 지금까지 현실과 이계라는 두 공간 안에서 혹독한 생존이라는 명제에 휩쓸려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일으키고 있던 자들에게 있어, 준상이 보여준 인간을 초월한 힘은 그 자체로 하나의 등대와 같은 이정표가 되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뒤에 이어진 승리자라는 한 마디 말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을 지금까지 퀘스트라는 알 수 없는 현상에 휘말려 수동적인 피해자에서 그러한 모진 고난을 딛고 일어선 능동적인 개척자로 순식간에 뒤바꾸어 버렸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변혁이었다. 무너지는 건물로부터 도망쳐 나와 그 모든 일들을 지켜보고 있던 김종경은 사람들의 죽어 있던 눈빛이 준상의 행동과 말에 의해 순식간에 생기, 아니 열기라고 부르는 편이 나을 정도로 변모하는 것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허어...” 끝났다. 준상은 김종경이 일구어 놓은 연합이라는 형태의 성과물을 단 몇 시간 만에 형체조차 남기지 않고 부숴버렸다. 김종경은 이미 이곳에 모인 귀환자들의 마음이 자신에게서 완전히 떠나 버렸음을 확실하게 인지했다. 마음을 잃은 이상, 그들을 옭아맬 수 있는 단 하나의 수단은 얼마 되지 않는 지원금 정도가 고작일까. 하지만 그 단 하나의 수단마저도 이미 무력화되었음을 파악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부서진 정문으로 레인지로버 한 대가 빠르게 다가와 단상 아래에 멈추어 섰다. 사막의 롤스로이스라 불리는 이 고급 SUV의 정체를 단숨에 알아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적어도 김종경은 그 차에서 내리는 한 남자를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었다. “설마...” 그 남자, 임서윤은 묘령의 여인 세 명과 함께 차에서 내리고는 잠시 가루가 되어 버린 연합 본부의 모습을 놀란 눈으로 지켜보다가 단상 위에서 사람들을 내려다 보고 있는 준상에게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빨리 왔군.” 준상의 말에 임서윤은 짧은 헛기침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크흠. 그게...” 연락을 받고 아무리 서둘렀더라도 이렇게 빠르게 도착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 한 일. 사실 임서윤과 그의 동료들은 이미 준상이 정문을 때려 부수고 있을 때부터 근처에서 대기하던 중이었다. 준상은 그런 임서윤의 행동을 모른 척 하며 다시 말했다. “어쨌든 빨리 와서 다행이다. 실은...” 준상은 아까 사람들에게 말했던 시드 매입에 관한 건을 임서윤에게 설명했다. “그런...” 임서윤도 물론 시드라든가 아이템 같은 퀘스트의 부산물에 대한 거래를 생각하고 길드를 만들기는 했지만, 아직 구체적인 수익 모델을 완성하지 못해 본격적인 사업에 뛰어들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느닷없이 시드 매입이라니? 게다가 이런 터무니없는 가격 설정이라니... 아직 아이템 강화라든가 시드 조합에 대해 모르는 임서윤으로서는 솔직히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저... 연합에 대한 반감은 저도 이해합니다만, 이건 좀 무리가 아닐지...” 하지만 준상은 그의 우려에 대해 이렇게 대답했다. “대금은 현물로 지급하겠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 임서윤은 순간 단순히 카드나 아이템에 장착하는 것을 넘어선 시드의 활용법이 있으리라는 느낌이 왔다. 생각해보면 그로서는 손해날 일이 없다. 어차피 그는 거래를 중계하고 중간에서 차익을 얻는 것 뿐이니 대금 지급만 순조롭게 이루어진다면 문제될 일이 없다. 특히나 이전에 금괴 이십 개를 매수해서 제법 짭짤한 이득을 봤던 서윤으로서는 현물 지급이라는 부분에서 특히 구미가 당겼다. “으음...” 서윤은 자신의 뒤에서 멀뚱거리고 있는 세 여성을 바라보았다. 진세아, 서유미, 정다빈. 일단 시드의 성능을 파악하기 위한 아이템 확인 같은 부분은 그녀들 만으로도 충분하지만 그 외의 일반 사무 같은 것을 맡기려면 능력자가 아닌 일반인 인력도 고용을 해야 할 것이고, 서윤을 포함한 네 명의 길드 인원이 모두 하나의 파티에 속해 있는 상태인지라 그들이 퀘스트에 불려갔을 때를 대비해서 아이템 확인을 위한 예비 길드원을 추가로 뽑을 필요도 있다. 사실 아이템 확인이야 일단 일반 사무원이 물품을 접수한 다음 천천히 해도 되는 일이긴 하지만, 어쨌든 이것저것 준비할 일이 많은 건 분명한 일이다. “못 하겠나?” 서윤이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자 준상은 권태로운 목소리로 그렇게 물었다. 싫으면 바로 딴 사람을 찾아보겠다는 식의 말투였기에 서윤은 고민하던 것을 멈추고 얼른 대답했다. “아닙니다. 할 수 있습니다.” 대금 지급만 확실하다면 그야말로 땅 짚고 헤엄치는 일인 건 분명한 사실. 게다가 이런 식으로 플레이어들에게 인지도를 쌓아두면 나중에 자신만의 사업을 진행하기도 훨씬 편해진다. “잘 생각했다.” 준상은 그렇게 말하고는 모여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며 다시 말했다. “말 나온 김에 바로 매입을 시작하도록. 대금은 여기 있다.” “알겠습니다.” “알아서 하겠지만, 딴 짓을 해도 상관은 없다.” “...” “다만 걸리지는 마라. 무슨 말인지 알겠지?” “아, 알겠습니다.” 서윤은 준상에게 돈 가방을 건네받은 다음, 이곳에 모인 사람들을 대상으로 곧장 매입을 시작했다. 멀찌감치 떨어져서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김종경은 임서윤이 사람들을 모아놓고 무언가를 설명하고는 곧장 매입을 시작하자 마지막 남아 있던 족쇄인 지원금조차 무용지물이 되었음을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었다. “허허... 이런 식으로...” 물론 사람들이 곧장 연합에서 탈퇴하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탈퇴할 이유가 없다. 어차피 이 지원금은 연합에 가입한 귀환자들의 복리 차원에서 지급되는 돈이기 때문이다. 본래는 특별법에 일정 수준 이상 연합에서 부여하는 업무를 수행하는 것 역시 조건에 넣으려 했었지만, 능력을 지닌 귀환자들이 김종경의 사병으로 전락하는 것을 우려한 다른 의원들의 견제로 말미암아 이것은 성사되지 못했다. 이 수련원을 매입하고 다시 귀환자들을 위한 시설로 바꾸는 데 들어간 예산만 약 백억 원. 그리고 이곳을 유지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과 귀환자들에게 지급될 지원금이 또한 수십억 원. 이 모든 것들이 전부 김종경의 책임 하에 들어가는 돈이다. 돈은 돈대로 들어가고, 그렇다고 점점 강해지는 귀환자들에게 무언가를 강제할 수도 없다. 이제 와서 업무 수행을 조건으로 넣는다고 해봐야 귀환자들의 반발만 살 뿐이고, 오히려 연합으로부터의 탈퇴를 부추기는 행동이 될 뿐이다. 이런 일련의 과정과 결과는 정적들에게 있어 김종경의 무능을 증명하는 아주 좋은 증거가 될 터. “끝났군.” 김종경은 탄식하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권형식이 말했다. “이건 테러에 준하는 행위입니다. 마땅히 법으로 심판해야 합니다.” 그 말에 김성진이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어떻게 심판하실 건데요?” “네? 그거야...” “감옥에 가두실 겁니까? 벌금형을 내리실 겁니까?” “...” “심판했다 쳐도 문제입니다. 그가 가만히 있겠습니까?” “그건...” 그는 이미 김종경의 집무실에서 자신의 잠입 능력을 선보였다. 단순히 숨어들어 가는 차원이 아니라, 물리적으로 완전히 폐쇄되어 있는 공간을 자유자재로 드나들 수 있는 수준임을 감안하면, 감옥은 그에게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그렇다면 벌금형이라도 내리는 수밖에 없겠지만... 무슨 수로 그에게 벌금을 징수한단 말인가. 그의 명의로 된 계좌도, 부동산도 그 어느 것도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무슨 수로? 아니, 그런 것이 가능해서 했다 치자. 그런 행위에 앙심을 품고 밤에 몰래 숨어 들어오기라도 하면 그것을 막아낼 방도는 있는가. 없다. 기존의 방범 체계 정도로 잡을 수 있는 자가 아님을 감안한다면, 이것은 그야 말로 죽여달라고 목을 내미는 행위나 마찬가지. 최악의 경우 정말 그가 나쁜 마음을 먹는다면 김종경 부자를 죽인 다음 그 시체를 인벤토리에 담아 이계에 가져다 버리는 식의 행위도 가능하다. 권형식은 그제서야 준상을 건드리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 뼈저리게 깨달았다. 김종경은 단상에 선 채 자신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 준상의 모습을 보며 조용히 말했다. “나도 물러날 때가 된 모양이군.” “네? 그게 무슨...” 권형식이 놀란 표정을 짓자, 김종경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고, 시세를 살피지 못한다면 그건 정치인으로서는 생명이 다 했다는 뜻이야.” “하지만...” “가세. 오늘은 어쩐지 취하고 싶군.” “...” 김종경이 몸을 돌리자, 권형식과 김성진은 우울한 표정으로 그 뒤를 따랐다. 다행히 준상은 그들의 존재 자체를 잊은 것인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것인지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있었다. 김종경 부자는 권형식이 모는 차를 타고 서울에 있는 본가로 돌아왔다. “너무 우울한 표정 짓지 말거라.” “하지만...” “당분간은 좀 조용히 지내야겠지만, 그 정도야 어쩔 수 없는 일이지.” “...” 김종경은 권형식과 마주 앉아 아주 오랜 만에 날이 새도록 술을 마셨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이, 이럴 수가...” 김종경은 뭔가 묘한 기분이 들어서 자신의 방에 설치된 비밀 금고를 열어보다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깨끗하다. 그야 말로 먼지 한 톨 남기지 않은 채 완전히 텅 비어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일까. 그는 순간 준상의 존재를 떠올렸다. 하지만 설령 그가 몰래 이곳에 숨어 들어왔다 하더라도, 이 금고는 김종경의 지문과 홍채가 있어야만 열리는 최신형이다. 금고 자체도 콘크리트 벽 안에 숨겨져 있는데다, 정상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무리하게 열고자 할 경우에는 온 집안의 비상벨이 모조리 울리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텅 비어 있다. 금괴도. 유가증권도. 비밀스런 거래 내역이 담긴 장부도. 그 무엇도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이것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김종경은 망연한 표정으로 금고 안을 바라보다가 기묘한 것을 발견했다. “구멍?” 마치 쥐가 갉아먹은 듯한 기묘한 구멍이 금고 안쪽에 나 있었던 것이다. 김종경은 설마 하는 심정으로 다른 금고 역시 확인해 보았다. 계란은 한 바구니에 담지 않는다는 철칙 하에 그의 자택에 숨겨진 금고만도 다섯 개. 하지만 불행히도 김종경이 확인했을 때 그 금고들은 쥐가 파먹은 듯한 구멍만을 남긴 채 모조리 비어 있었다. “어억!” 김종경은 결국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뒷목을 잡으며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00111 트롤러 ========================================================================= 김종경이 비어버린 금고를 보고 그대로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 가고 있을 즈음, 준상은 헤네스와 함께 호텔 스위트룸에서 우아하게 브런치를 즐기고 있었다. 식탁 옆에는 마치 공처럼 배가 불룩 튀어나온 다람쥐 한 마리가 초코바와 호두알 사이에서 공처럼 뒹굴거리고 있었다. 헤네스는 머리에 수건을 돌돌 말고 가운을 입은 채로 우유를 마시다가 그렇게 뒹굴 거리고 있는 몽몽이의 배를 콕 누르며 말했다. “너 그렇게 과식하다가 나중에 배 뽈록 나온 아저씨 다람쥐 되서 예쁜 다람쥐들한테 놀림 받게 될 걸?” 물론 몽몽이는 헤네스가 그런 말을 하거나 말거나 호두알과 초코바 사이에서 뒹굴 거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앞발로 볼록하게 부풀어 오른 배를 두드리며 포만감을 과시할 뿐이다. 탁구공을 삼킨 것처럼 볼록 튀어나온 몽몽이의 배 위로 앞발을 스윽스윽 문지르는 모양새가 얼마나 자연스러운지 헤네스는 결국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풋!” 준상은 몽몽이가 챙겨온 서류를 몇 장 훑어보다가 이내 흥미를 잃고는 캐비닛에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헤네스가 클로티드 크림을 잔뜩 바른 스콘을 건네주자 보지도 않은 채 입을 내밀어 받아먹었다. “맛있죠?” “그래.” 한 것이라고는 클로티드 크림을 스콘에 발라 건네준 것 밖에 없지만, 헤네스는 마치 새벽에 일어나 정성스럽게 아침 식사를 준비한 새댁마냥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다시 스콘을 집어 들었다. “오늘은 느긋하게 쉴 수 있는 건가요?” “아마도.” 심드렁한 준상의 대답에 헤네스는 머뭇거리다가 슬며시 제안을 던졌다. “그럼 이거 다 먹고 우리 나가요.” 나름 에둘러서 데이트 신청을 한 셈이지만, 이 무신경한 남자는 고민하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고 이렇게 대답했다. “지금은 곤란해.” 헤네스는 얼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왜요?” 그러자 준상은 별일 아니라는 듯이 대답했다. “조금 있다가 누가 오기로 했거든.” “우웅...” 헤네스가 볼을 부풀리며 불만을 표시하는데, 누군가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준상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은 채 초감각으로 문 밖에 서 있는 인물들의 면면을 확인한 후 바로 대답했다. “들어와.” 스콘에 클로티드 크림을 열심히 처덕처덕 바르고 있던 헤네스는 너무나 일상적인 준상의 모습에 방심하고 있다가 문이 열리고 한 무리의 사람이 안으로 들어오자 기겁을 했다. “꺄악!” 헤네스가 비명을 지르며 후다닥 침실로 도망쳐 들어가자, 사람들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크흠... 죄송합니다. 너무 일찍 찾아온 모양이군요.” 임서윤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그렇게 말하자 옆에 서 있던 진세아가 그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 찌른다. 지금 시간은 오전 10시. 너무 일찍이라는 표현을 쓰기는 아무래도 좀 힘든 시간대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경우에나 해당되는 일이고, 한창 좋을 때의 연인이나 신혼부부에게 있어서는 역시 방문객이 찾아들기에는 좀 이른 시간일지도 모른다. “쓸 데 없는 소리 말고 와서 앉아라.” “네.” 그 말에 다섯 명의 사람들은 머뭇거리며 다가와 소파에 엉덩이를 걸쳤다. 준상은 탁자에 놓여진 홍차를 한 모금 들이킨 후 다섯 명의 면면을 돌아보았다. “그쪽의 두 사람은?” 임서윤, 진세아, 서유미의 세 명은 함께 퀘스트를 한 경험이 있어서 낯이 익었지만, 그 옆에 앉은 두 남녀는 그렇지 않았다. 준상의 말에 일단 가장 끝에 앉은 건장한 체구의 남성이 자신의 소개를 했다. “윤성렬이라고 합니다. 지난 밤에는 무례를 저질러서 죄송합니다.” “아... 그 사람이었군.” 준상은 그제서야 이 건장한 체구의 남성이 어제 자신에게 주먹을 날렸던 그 남자임을 알아보았다. 어제는 깎지 않은 수염 탓인지 영락없이 중년으로 보였는데, 오늘은 말쑥하게 차려 입은 것이 제법 젊어 보인다. 그래봐야 호박에 줄 그은 수준이긴 하지만 말이다. 윤성렬이 소개를 마치자 그 옆에 앉은 젊은 여성이 쭈뼛거리며 자신의 소개를 했다. “정다빈... 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려요.” “...” 준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세아가 보충 설명을 해주었다. “윤성렬씨는 헤스카드의 권투사라는 콤보를 쓰고 있고, 다빈이는 지라스의 내리치는 포효라는 콤보를 쓰고 있어요.” “내리치는 포효?” 권투사 같이 이름만으로 단숨에 그 효과를 이해하기 힘든 표현. 진세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자세한 설명을 덧붙였다. “저희도 뭔가 싶었는데, 번개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더군요. 주력은 번개 마법이고 거기에 공기 계열의 정령이 추가되는 식이에요.” “그렇군.” 화염마법을 쓰는 진세아는 물론이거니와 번개마법을 쓰는 정다빈까지. 준상이 지금까지 본 세 명의 마법 사용자 가운데 두 명이 이 길드에 속해 있으니, 임서윤도 나름 인복이 있기는 한 모양이다. “제법 잘 끌어 모았군.” “하하... 어쩌다 보니.” 하지만 사실 임서윤도 불만이 많았다. 원래 이런 말이 있다. 남자가 바글거리는 곳에 여자가 하나 앉아 있으면, 그 여자는 여왕이 된다. 그럼, 여자가 바글거리는 곳에 남자 하나를 덜렁 던져 놓으면 그 남자는 왕이나 왕자가 될까? 천만에 말씀. 그 남자는 머슴이 되어 버린다. 임서윤의 신세가 바로 딱 그 짝이었다. 그래서 영입했다. 척 보기에도 한 몸매 자랑하는 남성미 물씬 풍기는 윤성렬을! 하지만 이게 웬걸. 윤성렬은 길드에 가입하기가 무섭게 스스로 마당쇠를 자청하며 진세아를 여왕으로 받들고 정다빈을 공주로 모시고 있었다. 서유미는 뭐... 일반적인 감성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의 특이한 개성의 소유자라 일단 열외. 그나마 진세아도 정다빈도 별로 남자를 휘두르는 타입이 아니라서 다행이지, 만약 조금이라도 성격이 뭐 같은 여자가 섞여 있었다면 아마 지금쯤 난리도 아니었을 것이다. 어쨌든 결론은, 남들이 보기에는 부러움의 대상인 여초길드의 장으로서 서윤도 의외로 마음 고생이 만만치 않다는 점이다. 그렇게 소개를 하고 나서야 옷을 다 챙겨 입은 헤네스가 머뭇거리며 침실에서 나왔다. 사람들은 어른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2프로, 아니 10프로는 부족한 느낌의 헤네스를 보고는 다시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준상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준상이 어디 그런 시선에 꿈쩍이라도 할 사람인가. “그 눈빛의 의미는 뭐지?” 안광을 번뜩이며 오히려 그렇게 되묻자 소파에 앉은 다섯 사람은 꼬리를 말고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조금 묘한 분위기였지만, 헤네스는 얼른 작은 의자를 끌어와서 준상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경계하는 시선으로 소파에 앉은 세 여성의 모습을 훔쳐 본다. 서윤은 어째 분위기가 이상해지는 것을 느끼고는 얼른 가지고 온 것들을 탁자 위에 늘어 놓았다. “크흠... 일단 어제 매입한 시드와 목록이니 확인 부탁드립니다.” “...” 준상은 대충 목록을 훑어 보았다. 예상대로 대단한 성능의 시드는 별로 없었다. 3에서 4퍼센트 정도의 시드가 대부분이고 개중에는 1~2 퍼센트 짜리 시드도 섞여 있었다. 수량은 전체 다 합해서 약 백여개. 어제 연합에 있던 사람이 약 오십명 정도이니 한 명 당 평균 두 개 정도의 시드를 판 셈이다. “수고했다.” “별 말씀을.” 준상이 하나 하나 종류와 효과를 적은 종이와 함께 지퍼백에 정성스럽게 담긴 시드들을 살펴보자, 이것을 지켜보고 있던 진세아가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하나 궁금한 것이 있는데요.” “뭐지?” “그거... 어디에 쓰실 건가요?” “...” 임서윤이 얼른 진세아의 팔을 툭 치며 말렸지만, 그녀는 그런 임서윤의 행동에도 아랑곳 없이 준상을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알고 싶나?” 그리고 준상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자 진세아는 기다렸다는 듯이 얼른 대답했다. “네, 알고 싶어요.” “...”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이템을 하나 꺼내려다가 안 쓰는 아이템은 대부분 컨테이너 하우스에 보관중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흠...” 잠시 일행을 돌아보던 준상은 진세아의 귀에 걸린 조금 투박한 느낌의 귀걸이를 보며 말했다. “그 귀걸이 잠시 줘봐.” “이, 이거요?” 진세아는 가장 아끼는 아이템을 준상이 대뜸 지목하자 화들짝 놀랐지만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자 머뭇거리며 귀걸이를 풀어 준상에게 건네주었다. 준상은 아이템 확인을 실행하여 귀걸이의 옵션을 확인했다. 아이템정보 명칭 : 에린 델의 귀걸이 레벨제한 : 5 종류 : 귀걸이 등급 : Uncommon 효과 : 캐스팅 시간 5% 감소 Seed : 1슬롯 (생명력 증가 6%) 설명 : 유랑 마법사 에린 델이 지니고 있던 유품 “좋은 아이템이군.”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지퍼 백에 담긴 시드 가운데 1~2 퍼센트 짜리 저급 시드 세 개를 꺼내어 들었다. “뭘... 하시려고요?” 진세아가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지만, 준상은 말없이 특수 기능 아이템 강화를 실행했다. 강화를 시작합니다. -강화에는 시드 세 개가 소모됩니다. -높은 등급의 시드일수록 강화 성공 확률이 높습니다. :강화에 성공하면 다음의 세 가지 효과중 하나가 부여될 수 있습니다. 1. 새로운 옵션 1개 추가 2. 공격력, 또는 방어력 증가 3. 아이템 내구도 상승 (주의) 강화에 실패하게 되면 당신의 아이템에는 여러모로 안 좋은 일이 생겨납니다. 언제 봐도 불안함이 증폭되는 메시지지만, 굳이 진세아에게 이 내용을 알려줄 필요는 없을 듯 하다. 준상은 말없이 아이템 강화를 실행했다. 그러자 순간 귀걸이에서 빛이 번뜩이는가 싶더니 주위에 늘어놓았던 시드 세 개가 사라져 버린다. “바, 방금 그건 뭐죠?” “...” 진세아가 놀라 소리쳤지만, 준상은 아이템 확인을 실행해 귀걸이의 정보를 다시 확인했다. 아이템정보 명칭 : 에린 델의 귀걸이 +1 레벨제한 : 5 종류 : 귀걸이 등급 : Uncommon 효과 : 1. 캐스팅 시간 5% 감소 2. 재생률 1% 증가 Seed : 1슬롯 (생명력 증가 6%) 설명 : 유랑 마법사 에린 델이 지니고 있던 유품 별로 안 좋은 시드를 써서 그런지 새로 생긴 옵션의 수치가 영 별로다. 실패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긴 하지만, 조금 아쉽다고나 할까. 준상은 말없이 강화가 완료된 귀걸이를 진세아에게 돌려주었다. 진세아는 얼른 귀걸이를 받아들고 확인해 보더니 놀라서 입이 쩍 벌어졌다. “이, 이게... 도대체?” “아이템 강화다. 특수 기능 중 하나지.” “가, 강화라구요?” 서윤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얼른 진세아에게서 귀걸이를 빼앗아 확인을 해보더니 입이 쩍 벌어졌다. “허어... 그래서 시드를 모은 거였군요?” 서윤의 말에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말했다. “그외에도 시드를 조합해 새로운 시드를 만들어 내는 기능도 있다.” “시드끼리 조합도 가능하단 말입니까?” 서윤은 입이 떡 벌어졌다. 그가 시드를 이용한 사업을 구상함에 있어서 가장 문제가 되었던 점은 시드가 소비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돈도 많이 모이면 가치가 하락하듯이, 시드 역시 모이기만 하고 소비되지 않으면 가치가 하락하는 것은 당연한 일. 하지만 아이템 강화나 시드 조합을 통해 소비가 된다면 어떨까. 서윤은 그제서야 귀환자들에게 동기를 부여한 준상의 의도를 깨달았다. “대, 대단하군요.” 서유미나 정다빈, 윤성렬은 무슨 얘긴지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임서윤과 진세아는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앞으로도 매입에 힘써주기 바란다.” “아, 알겠습니다.” 대충 용무가 끝나자 서윤은 헤네스가 타주는 차를 마시며 넌지시 준상에게 권유를 했다. “저... 혹시 괜찮으시다면 저희 길드에 들어오시는 건 어떻습니까?” “길드에?” “일단 뭐... 그냥 이름만 올려두는 식이어도 괜찮지 않을까 싶습니다. 시드를 팔러 오는 사람에게도 뭔가 더 신뢰감을 줄 수도 있을테고.” 하지만 준상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가입하지 않는 편이 낫다.” “네? 어째서...” “그래야 핑계를 댈 수 있으니까.” “...” 짧은 대답이었지만, 서윤은 어렵지 않게 그 의미를 추측할 수 있었다. 이번에 충돌한 김종경의 경우에는 일이 쉽게 해결되었지만, 사업의 규모가 커지면 막무가내로 물고 늘어지는 진상이 생길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 특히나 귀환자들의 힘이 강해질수록 국가 기관에서의 간섭도 점점 심해질 것은 분명한 일. 그렇게 되면 귀환자들의 우상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준상이 표적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되면 준상의 성격상 타협하기 보다는 때려부수는 쪽을 선택할 것이 분명하니, 불똥을 피하기 위해서도 일단 공식적으로는 거리를 두는 편이 옳다. 서윤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아쉽지만 할 수 없군요.” 준상은 차를 한 모금 마신 다음 다시 말했다. “카탈로그는 가지고 왔나?” “아, 깜박 잊고 있었군요.” 서윤은 얼른 차량 카탈로그를 준상에게 건네 주었다. 준상은 그것을 받아들고는 다시 멀뚱히 바라보고 있는 여성들을 향해 말했다. “괜찮다면 부탁 하나 해도 되겠나?” “무슨...” 준상은 헤네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남자다 보니 여자에게 필요한 것에 대해 잘 모른다. 나도 나름대로 신경은 쓰고 있지만, 남자인 나에게는 말하기 힘든 것도 있지 않을까 싶군.” “아아...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헤네스에 대해서는 이미 이벨류아에서 서브 퀘스트를 받으면서 안면이 있는 사이이다. 이곳에 와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는 했지만, 준상의 능력을 그나마 가장 잘 알고 있는 그들로서는 이제와서 놀라는 것도 새삼스러운 일이었다. 진세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서윤씨.” “네?” “법인카드 좀 줘봐요.” “카드는 왜...” 불안한 표정으로 서윤이 되묻자, 진세아는 바로 이유를 설명했다. “준상씨는 카드 쓰기가 어렵잖아요. 그렇다고 현금을 바리바리 싸들고 다니기도 그렇고.” “아아...” 서윤은 이해했다는 듯이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주었다. 준상은 그것을 보며 말했다. “번거롭게 해서 미안하군.” “별말씀을요.” 진세아는 어리둥절해 하는 헤네스에게 다가가 그 팔을 잡아 일으키며 말했다. “후후후... 가보실까요, 아가씨?” “자, 잠깐만요. 준상씨!” 헤네스는 진세아의 심상치 않은 웃음소리에 불안함을 느끼며 얼른 준상을 불렀지만, 그는 매정하게도 카탈로그로부터 눈도 떼지 않은 채 손을 들어 보이며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다녀와.” 결국 헤네스는 진세아와 정다빈에게 팔 한쪽씩을 잡힌 채 그대로 끌려가고 말았다. 서유미는 말없이 주위를 돌아보다가 준상과 서윤, 그리고 윤성렬이 카탈로그를 바라보며 남자들만의 세계로 빠져들자, 소리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앞서 나간 여성들의 뒤를 따라 나섰다. 00112 트롤러 ========================================================================= 여성들이 모두 나가자, 서윤은 카탈로그를 들여다 보고 있는 준상에게 말했다. “참 예쁜 아가씨더군요.” 남자들만의 주제라면 차도 있겠지만, 역시 여자 얘기를 빼놓을 수 없다. 특히나 준상의 곁에는 헤네스라는 다른 세계에서 건너온 아주 특별한 아가씨가 있으니 더욱 흥미진진할 수밖에 없는 일. “그렇지.” 하지만 준상의 반응은 심드렁했다. 서윤은 다시 한 번 찔러 보았다. “귀여우면서도 뭐랄까. 아기 고양이 같다고 해야 하나.” “그런 면도 있긴 하지.” “...” 긍정을 하고 있긴 한데, 뭔가 무미건조한 준상의 반응에 서윤과 성렬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서윤은 혹시나 하고 물어 보았다. “설마... 아무 일도 없었던 겁니까?” “물론.” “...” 서윤과 성렬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그럴 수가! 그렇게 항상 준상씨에 대해 러브러브라는 이름의 하트빛 시선을 쏟아붓고 있는데, 같은 방 같은 침실을 사용하면서 지금까지 아무 일도 없었단 말입니까? 그거 진심이에요?” ‘당신 안의 사내는 도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고자입니까?’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려는 걸 간신히 억누른 것만도 대단한 일이다. 하지만 다음 순간 준상의 눈과 마주친 순간, 서윤은 자신이 입을 함부로 놀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크흠... 아니, 그러니까 제말은...” 하지만 준상은 그를 흘깃 바라보고는 다시 카탈로그로 눈을 돌리며 대답했다. “그 애가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니다.” “하지만...” “더군다나, 난 미래가 불투명한 사람이고.” “...” 그 말에 두 남자는 입을 다물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준상이 강하다고는 하지만, 언제 어디서 어떤 위협을 만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 게다가...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임신 같은 일이라도 발생하면 여성에게는 더욱더 치명적이다. 생리 주기만 되도 몸의 컨디션이 현저하게 저하되는 판에, 임신까지 해버린다면 이건 정말 생존에 직결되는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서윤이나 성렬은 그제서야 준상이 헤네스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을 여자라면, 나중 일이야 어찌 되든 일단 저지르고 보겠지만... 그렇지 않기 때문에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서윤이 뭔가 다시 말하려 하자 옆에 앉아 있던 윤성렬이 얼른 그의 팔을 툭 치며 말렸다. 분위기상 더 얘기를 끌어봐야 좋을 것이 없다는 판단에서였겠지만, 서윤은 그렇게 눈치를 주는 것을 무시한 채 계속 말을 이었다. “그녀가 이대로 그냥 돌아간다 해도 문제가 되지 않겠습니까?” “무슨 소리지?” “잘은 모릅니다만, 그녀가 보통 집안사람이더라도 이렇게 오랜 시간 다른 남자와 바깥에서 나돌던 것은 충분한 추문의 사유가 됩니다.” “...” 준상은 잠시 말없이 카탈로그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알았으니 그만 해라.” “네.” “그나저나... 가지고 온 카탈로그는 이것 뿐인가?” “마음에 안 드십니까?” 준상은 카탈로그로부터 시선을 떼며 대답했다. “잠시 동안이지만 험비를 타고 다녀서 그런지 영 가벼워 보이는군.” “하하...” 이제야 험비의 매력을 이해해 준 것인가. “그럼 차라리 그냥 험비를 계속 타시는 편이...” “그건 안 돼. 헤네스가 버티질 못하니까. 게다가 너무 알려져 있기도 하고.” “하긴...” 서윤은 잠시 고민하더니 다른 카탈로그를 꺼냈다. “혹시나 하고 가져와 보긴 했습니다만, 이런 건 어떻겠습니까?” “...” 준상이 바라보자 거기에는 묵직한 느낌의 커다란 차들의 사진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건?” “픽업 트럭이라고 불리는 차종입니다. 트럭이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흔히 생각하는 트럭과는 좀 다른 차종이죠. 올바른 비유는 아니지만 SUV와 경트럭이 결합한 형태라고 하면 이해하면 좀 쉬울지도 모르겠습니다.” “좀 더 자세한 설명이 듣고 싶군.” 준상이 관심을 보이자 서윤은 카탈로그를 들어 보이며 설명을 시작했다. “우리나라 같은 곳 보다는, 미국이나 호주처럼 영토가 넓은 나라들에서 많이 사용되는 차종입니다. 화물 운송보다는 오프로드 주행이나 견인 등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이 특색이죠. 흔히 테러리스트 삼종 세트라고 하면 AK와 알라신의 요술봉, 그리고 픽업 트럭을 개조한 테크니컬을 일컫기도 합니다. 실제로 리비아와 차드의 분쟁 때는 차드가 백여대의 토요타 픽업트럭을 개조해서 리비아의 기갑사단을 박살낸 전례도 있습니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토요타 전쟁인데...” 하지만 서윤의 말이 삼천포로 빠지기 시작하자 얼른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았다. “그만, 거기까지.” “...” “그러니까, 험비와 비슷하면서도 탑승감은 좋은 편이다 이건가?” 간단하게 요점 정리를 해버리는 준상의 모습에 서윤은 다소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네, 뭐... 일단은.” “대표적으로 어떤 차종이 있지?” “우선... 포드의 F시리즈와 쉐보레의 실버라도 시리즈, 그리고 크라이슬러 산하의 브랜드인 닷지 램, 폭스바겐의 아마록 같은 것이 유명합니다. 최근에는 토요타의 툰드라도 제법 잘 팔리는 편이고요.” “흠...” “차종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견인중량 4.5톤 이상에 최고출력 350마력, 최대토크 55 kg.m 정도의 성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성능 위주라 연비가 좀 떨어지긴 합니다만, 그래도 험비보다는 나은 편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힘든 편이지만, 올해 미국 상반기 자동차 판매순위만 보더라도 일위와 이위는 픽업 트럭이었습니다.” “그렇군.”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물었다. “추천을 한다면?” “역시 픽업 트럭의 대명사라면 포드의 F150 시리즈겠죠. 실제로 올해 상반기 미국 자동차 판매 순위에서도 1위를 차지한 바가 있고, 역사만 해도 60년이 넘는 베스트 셀러니까요.” “그렇군.” “솔직히 저도 픽업 트럭류는 몰아본 적이 없어서... 다른 차종과의 장단점까지 비교해서 말씀드리기는 좀 어렵습니다.” 서윤은 그렇게 운을 띄운 후 휴대폰을 열어 픽업 트럭류의 차종에 관한 정보를 인터넷에서 찾아 준상에게 하나씩 설명하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아예 호텔 측에서 노트북까지 대여 받아 티비에 연결한 상태로 열띤 토론을 벌이기까지 했다. 그렇게 몇 시간이나 걸쳐서 정보를 모으고 분석하던 세 남자는 갑자기 울린 전화소리를 듣고 나서야 겨우 이성을 되찾았다. “여보세요.” “뭐해요? 점심시간 다 됐는데. 아직 안 끝났어요?” “아...” 서윤은 물론이거니와 다른 두 남자도 그제서야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진세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다시 말했다. “내려와요. 지금 다들 아이스링크에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서윤은 전화를 끊고는 다른 두 사람에게 말했다. “점심시간 되었으니 내려오라는 군요. 스케이트장에 있나 봅니다.” 브런치를 먹어서 별로 배가 고프지는 않았지만, 헤네스의 일도 궁금한 터라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침실로 가서 벗어 두었던 옷을 챙겨 입은 다음, 여전히 탁자 위에서 초코바와 호두 속에 파묻혀 뒹굴거리고 있는 몽몽이에게 말했다. “그만 뒹굴거리고 이리와. 나가봐야 하니까.” 그러자 몽몽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후다닥 일어나 탁자 위의 초코바와 호두를 자신의 주머니에 챙겨 넣고는 준상의 어깨 위로 폴짝 뛰어 올라가 자리를 잡았다. “다람쥐인 것 같은데, 뭔가 신기하군요.” 탁자 위에 어질러져 있던 초코바와 호두알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모습에 서윤이 신기해하며 물었지만, 준상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을 돌렸다. “이만 가지.” “네.” 세 남자는 스위트룸에서 나와 호텔과 연결된 유원지 쪽으로 향했다. 진세아가 말했던 스케이트장에 들어서자, 그녀들 주위에 남자들이 모여서 치근덕거리는 모습이 보인다. “일행 있다니까요.” “에이, 그러지 말고... 누님, 같이 좀 놀자니까요.” 이제 잘 해야 고등학생이나 되었을까 싶은 녀석들이다. 진세아는 짜증스러운 얼굴로 이 녀석들을 쥐어 팰까 말까 고민하다가, 스케이트장 입구에 세 남자가 들어서는 것을 보고는 얼른 손을 들어 보였다. “여기에요! 여기!” 그러자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남자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 그리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세 남자 가운데 가장 호리호리한 체격을 가진 것은 서윤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다른 두 사람과 비교했을 때의 일이고, 그 역시 무기술의 달인인데다 일전에 준상에게 들은 충고대로 최근에는 육체 단련에 열중하는 중이라 보통 남성과는 탄탄함 자체가 차원이 달랐다. 가장 몸집이 좋은 걸로 따지면 윤성렬을 꼽을 수 있다. 이 남자는 옷을 걸친 상태에서도 역삼각형의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는 체형인데다, 팔뚝이 어지간한 남자 허벅지보다도 굵을 정도라 단순히 보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이 느껴질 정도다. 하지만 역시 가장 강렬한 것은 준상이다. 평범한 셔츠와 바지를 입었을 뿐이지만, 한걸음 옮길 때마다 옷이 당겨지며 만들어지는 야성미 넘치는 굴곡은 물론이거니와,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상대를 압도해 버리는 강렬한 눈빛과 마주하게 되면 아무리 눈치가 없는 사람이라도 그가 보통 사람으로서는 범접할 수 없는 종류의 인간임을 인지할 수밖에 없다. 그런 세 사람이 나란히 다가서자, 지금까지 네 여성에게 치근덕거리고 있던 남자들은 자신도 모르게 등 뒤로 식은땀이 주륵 흐르는 것을 느꼈다. 객기도 부릴 만한 상대가 있는 법. “하... 하하... 정말 일행이 있으셨군요. 저희는 그것도 모르고...” “죄, 죄송합니다.” 굳이 힘을 과시할 필요도 없이 그들은 얼른 진세아와 다른 여성들에게 넙죽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그대로 달아나 버렸다. “에휴... 왜 이제야 왔어요?”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됐네요. 그나저나 혼 좀 내주지 그랬어요? 다시는 얼씬 못하게.” 서윤의 말에 진세아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저희들 능력이란 것이 함부로 내보일 만한 게 아니잖아요. 그렇다고 유미씨 보고 칼 뽑으라 할 수도 없는 일이고.” “하하...” 하긴 진세아나 정다빈은 마법 계열의 사용자이고, 서유미 같은 경우엔 능력을 내보였다간 바로 경찰부터 달려 올테니 당장 목숨이 걸린 일이 아니고서야 능력을 내보이기가 난감했을 것이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세 여성들 뒤에 숨어 있던 헤네스가 슬그머니 앞으로 나서며 준상에게 다가섰다. “저... 어때요?” “...” 준상은 잠시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리 많은 변화를 준 것은 아니었다. 그저... 고운 갈색 머리에 웨이브를 조금 넣고, 붉은 입술에 연한 색의 립글로스를 조금 바른 정도? 물론 지금 헤네스의 얼굴에는 최대한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끌어내기 위한 고차원적인 다양한 화장술이 시전되어 있었지만 준상은 그런 것까지 알아볼 정도로 화장에 대해 조예가 깊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준상의 막눈에도, 지금의 헤네스는 언제나 봤던 어린 아이 같은 소녀의 모습에서 이제 막 피어나기 시작한 아름다운 처녀로 변모해 있었다. “별로에요?” 준상은 고개를 저으며 짧게 감상을 말했다. “예쁘군. 몰라 보겠어.” 헤네스는 그제서야 불안한 표정을 지우고 밝게 미소를 지었다. 00113 트롤러 =========================================================================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뭔가 흐뭇한 것 같은데, 보면 볼수록 옆구리가 시린 그 이율배반적인 감정에 지켜보던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하긴 지금 이렇게 준상과 헤네스가 연출하는 달달한 분위기를 보고 부러움을 느낄 수 있다는 자체가, 퀘스트를 처음 접했을 때와는 달리 조금이나마 여유를 가지게 된 증거라고 할 수 있으리라. 그들은 근처의 패스트푸드 점에서 햄버거와 음료를 사서 간단하게 식사를 했다. “그러고 보니, 저 이런데 들어와서 햄버거 사먹는 거 진짜 오랜 만인 거 같네요.” 진세아의 말을 임서윤이 받았다. “왜요? 자주 사 먹었을 것 같으신데.” 그 말에 진세아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그런거 있잖아요. 보통 밥집 같은 건 안 그런데, 이런 식으로 젊은 애들 많은 패스트푸드점 같은 곳은 혼자 오기가 좀 뭐하다고나 할까.” “응? 언니는 그래요? 전 오히려 밥집 같은 데 혼자 들어가기가 더 뭐하던데.” 정다빈이 그렇게 말하자 임서윤은 잘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 잘 모르겠군요. 하긴 평소에 패스트푸드 자체를 잘 안 먹다보니...” 그 말에 진세아는 마치 임서윤을 어르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어이구, 어련하시겠어요. 도련님.” “킁.” 그렇게 다른 사람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을 보던 헤네스는 감자튀김을 케찹에 찍은 다음 준상에게 내밀었다. “아, 하세요.” 준상은 얼굴을 찌푸리고는 손을 들어 그녀가 내민 감자튀김을 집으려 했지만, 헤네스는 얼른 그의 손을 피하고는 다시 말했다. “빨리요오.” 누구한테 어디서 배웠는지 몸을 흔들며 아양을 떠는 헤네스의 모습에 준상은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그리고 자신들을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다른 일행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준상의 시선이 자신들을 향하자 그들은 얼른 멈추었던 대화를 재개했다. “크흠.” “아, 이거 정말 오랜 만에 먹으니까 맛있네.” “그쵸? 우리 치킨 하나 더 시켜 먹을래요?” “살찌지 않겠어요?” “봐줄 사람도 없는걸요. 그냥 먹고 찔래요.” 나름대로 열심히 대화를 나누는 척 하고 있기는 하지만, 어쩐지 눈에 죄다 웃음이 배어있다. 헤네스도 눈치를 챘는지 얼굴을 살짝 붉히고는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준상에게 입을 벌릴 것을 요구했다. “자요. 아...” “...” 받아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다섯 사람들은 그런 대사를 머리 속에서 연상하며 곁눈질로 준상과 헤네스를 훔쳐 보았다. 과연 저 무뚝뚝한 준상이 헤네스의 애정 공세에 굴복할 것인가! 하지만 다섯 명의 그런 흥미진진한 기대를 여지없이 깨뜨리는 존재가 있었으니, 그 이름은 바로 몽몽이였다. 준상의 어깨 위에 앉아 있던 몽몽이는 눈앞에서 뭔가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것이 왔다 갔다 하자 냉큼 달려들어 그것을 물고 도망쳤다. “앗!” 헤네스가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지만, 이미 몽몽이는 앞발로 감자튀김을 감싸 쥔 채 냠냠거리며 맛있게 먹어 치우고 있는 중이었다. “이씨... 몽몽이, 너!” 헤네스가 옆구리에 손을 척 올린 채 노려보며 그렇게 말했지만, 몽몽이는 그러거나 말거나 마치 피리를 부는 것처럼 감자튀김을 앞발로 붙잡은 채 열심히 갉아먹느라 여념이 없다. “에휴...” 결국 헤네스의 일차 공세는 몽몽의 난입으로 인해 그렇게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자, 진세아는 다시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모처럼 여기까지 왔는데, 우리 안에 들어가서 좀 놀다 가죠. 놀이 기구 타본지도 꽤 오래 된 것 같은데.” 그러자 대번에 정다빈이 말했다. "탔다가 소환되면 어쩌려구요?" "그, 그런가. 에이씨... 안되면 구경이라도 하면 되지."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윤성렬이 진세아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오, 그거 아주 좋은 생각이십니다. 한번쯤은 이런 미인 분들을 에스코트해서 유원지를 가보는 것이 학교 다닐 때부터의 제 꿈이었죠.” 뭔가 심상치 않은 그의 말에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정다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떤 학교를 다니셨길래...” 그러자 윤성렬은 쑥쓰러운 듯한 표정으로 이렇게 대답했다. “그냥 평범하게 남중, 남고, 공대, 군대를 거쳐서 토목 현장에서 근무를 좀...” “...” 임서윤은 그제서야 윤성렬의 프로필을 좀 더 꼼꼼하게 살피지 않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어쩐지 길드에 들어오기가 무섭게 마당쇠 포지션을 찾아가더라니... 왜 진작 저 처절한 모태솔로의 오러를 미처 알아보지 못했단 말인가. 어쨌거나 진세아의 제안은 윤성렬의 열렬한 찬성과 더불어 나머지 여성들의 압도적인 지지에 의해 통과되었다. 사실 준상도 이 제안에 대해서는 그다지 반대할 생각이 없었다. 이왕 여기까지 왔는데 한번쯤은 헤네스에게 이 세계의 유원지를 구경시켜 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진작부터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대기시간이 있으니 딱히 놀이기구를 타는 것이 문제되지 않는다. 준상이 거부의 의사를 보이지 않자, 그들은 곧바로 기세를 타고 유원지 안으로 진입했다. “일단 놀이동산에 왔으면 역시 바이킹이 먼저죠.” 진세아의 말에 정다빈이 바로 반박했다. “무슨 소리에요. 여기 왔으면 일단 후렌치 레볼루션이 먼저죠.” 그러자 조용히 뒤에서 따라오던 서유미가 말했다. “저기... 저는 회전 목마...” 결국 곧바로 세 여성의 의견대립이 시작되었다. “바이킹이 먼저라니까.” “당연히 후렌치 레볼루션이죠.” “회전 목마...” 그때 헤네스가 말했다. “저게 뭐죠? 재미있어 보여요.” 그녀가 가리킨 것은 바로 물살을 가르며 떨어지는 놀이기구인 후룸라이드였다. “타볼래?” “네!” 준상과 헤네스가 그렇게 결정을 해버리자, 자기들끼리 싸우고 있던 세 여성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후우... 바이킹이 먼저인데...” “유원지에 왔으면 롤러코스터, 이곳의 롤러코스터하면 후렌치 레볼루션인데...” “회전 목마...” 하지만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그녀들은 결국 양보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이 유원지 탐사 계획은 처음부터 준상과 헤네스의 친밀감을 높이려는 계획의 일환이었기 때문이다. 처음 진세아와 정다빈이 쇼핑몰로 헤네스를 연행했을 때, 그녀들이 가장 먼저 물은 것은 옷에 대한 취향이었다. 헤네스는 먹이를 노리는 매의 눈빛으로 바라보는 그녀들의 시선에 놀랐지만, 이내 조심스러운 말투로 이렇게 대답했다. “좀 어른스러워 보이는 옷이면 좋겠어요.” “...” 두 마디도 필요 없었다. 진세아와 정다빈은 헤네스의 머뭇거리는 말에서 전해지는 풋풋한 사랑의 기운을 캐치하자 몸을 부르르 떨더니 이내 콧김을 뿜어내며 그녀를 귀여운 소녀에서 사랑스러운 처녀로 업그레이드 시키는 작업에 돌입했던 것이다. 부드러운 색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여성스러운 몸매를 부각시키는 옷과 조금 어른스러운 느낌의 속옷, 그리고 자연스러우면서도 살짝 색기를 머금은 화장까지... 진세아와 정다빈의 열광적인 지원에 의해 탄생한 헤네스의 모습은 같은 여자가 보기에도 너무나 예쁘고 사랑스러워서 꽉 깨물어 주고 싶을 정도였다. “휴우...” 뭔가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두 여성의 극성스러움에 휘둘리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던 헤네스에게 말없이 그것을 지켜보고만 있던 서유미가 다가와 물었다. “후회... 하지 않나요?” 아무래도 남다른 분위기를 가진 그녀의 말이었기에 헤네스는 살짝 놀랐지만, 이내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 “...” 서유미는 주저 없는 그 모습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힘든 일이 있으면... 말해요.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도와줄테니.” “감사합니다.” 어쨌거나. 그렇게 쇼핑몰을 돌며 세 여성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낸 헤네스는 준상의 옆자리를 차지한 채 먼저 후룸라이드부터 탑승을 시작했다. “꺄아아아악!” “...” 그리고 차례로 놀이기구를 섭렵하기 시작했다. 후룸라이드까지는 괜찮았다. 하지만 진세아의 강력한 주장에 의해 바이킹을 타고난 뒤부터가 문제였다. “헤네스.” “네...” “힘들면 좀 쉴까?” “우읍... 네.” 무서운 건 둘째 치고 멀미가 헤네스를 덮쳐온 탓이다. 하지만 준상이 헤네스와 함께 벤치에 자리를 잡자, 진세아는 기다렸다는 듯이 다른 일행들에게 말했다. “두 사람은 여기서 쉬라고 하고 우리는 딴데 가서 구경이나 하죠.” "뭘요?" "유령의 집이라든가... 아, 진짜... 뭘 따져요?" “그래요! 시간은 금이다!” “하하...” 어쩐지 너무 속보인다 싶었지만, 서윤 역시 준상과 헤네스가 잘됐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던 터라 두 말 없이 그녀들의 말에 따랐다. 결국 준상과 헤네스는 유원히 한켠의 벤치에 단 둘이 남겨지게 되었다. “죄송해요.” “뭐가?” “그냥요.” “신경 쓰지 마라.” 준상은 그렇게 말하고는 옆 자리에 앉은 헤네스의 손을 가볍게 잡아 주었다. 헤네스는 갑작스런 접촉에 잠시 움찔 놀란 기색을 보였지만, 이내 가만히 손을 움직여 준상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리고 가만히 주위의 모습을 지켜 보았다. 가족 단위로 유원지를 찾은 사람들. 친구와 함께 와서 깔깔거리며 웃는 소녀들. 조금은 머쓱한 표정으로 손을 잡은 채 바쁘게 걸음을 옮기는 연인들. 그 모든 사람들의 모습을 준상과 헤네스는 서로 손을 맞잡은 채 지켜보았다. 그렇게 잠시 지켜보는데... 1층에서 퍼레이드가 시작되었다. 흥겨운 음악과 함께 여러 가지 모습으로 분장한 사람들의 행렬이 시작되자 헤네스는 신기한 듯 두 눈을 반짝이기 시작했다. 준상은 그 모습을 보고는 피식 웃었다. “가서 볼래?” “그래도 되나요?” “물론이지.” “그럼, 우리 같이 가요.” “그래.” 헤네스는 다리를 훤히 내놓은 여성 무용수들의 모습에 눈이 휘둥그레졌지만, 이내 즐거워 하며 그 행렬을 열심히 구경했다. 하지만 바로 그때. 준상의 어깨에 앉아 있던 몽몽이가 갑자기 고개를 한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무언가를 발견한 듯이 찍찍거리며 울기 시작한다. “...” 무슨 일인가 싶어 준상은 몽몽이가 바라보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곧바로 그의 시야에 기묘한 것이 보였다. 그것은 아지랑이. 검은 아지랑이였다. 새롭게 등장한 무용수 가운데 한 사람의 머리 뒤에서 마치 검은 색의 후광과도 같은 시커먼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런 현상, 전에도 본 적이 있다. 바다 바람이 거칠게 불어오던 동해의 어느 바닷가에서. “이건...” 혹시나 잘못 본 것인가 싶어 눈을 비볐지만, 불행히도 그것은 착시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곧바로 준상의 시야 한 켠에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함으로써 그것은 더욱더 명확해졌다. [당신은 특수 임무 발동 조건을 만족하고 있습니다.] 짤막한 하나의 메시지. 그리고 그 뒤를 이은 퀘스트 정보. 다크 시드를 회수하십시오. :이 사악한 어둠의 씨앗은 본래 이 세계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물건입니다. 사용자를 제재하고 다크 시드를 회수하십시오. [이 퀘스트는 단독 퀘스트입니다.] “...” 준상은 얼굴을 찌푸렸다. 하필 이런 때, 이런 장소에서 퀘스트라니. 그것도 보통의 퀘스트가 아니다. 무려 다크 시드의 회수 퀘스트였다. 헤네스는 멀미가 났던 것도 잊고 즐거운 표정으로 퍼레이드를 즐기다가 문득 준상을 돌아보다가 딱딱하게 굳은 그의 표정을 발견했다. 순간 그녀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설마... 퀘스트인가요?” 준상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바로 출발해야 하나요?” “아니. 그건 아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까. 잠시 고민하던 준상은 일단 헤네스에게 말했다. “잠시 들어가 있어라.” “네.” 하지만 헤네스를 역소환하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람이 너무 많은 곳이라 마땅한 장소를 찾기가 힘든 탓이다. 준상은 어렵사리 비상구 근처에서 헤네스를 역소환한 다음, 곧바로 서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먼저 간다. 나중에 보자.’ 그리고는 미니맵에 표시된 타겟의 위치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타겟은 여전히 퍼레이드에 속한 채로 춤을 추며 유원지를 돌고 있는 중이었다. 머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은 아지랑이만 아니라면, 조금 몸매가 좋은 여자 무용수에 불과한 모습. 하지만 이전에 싸웠던 적을 감안해 보면, 저런 외형은 아무런 판단의 근거가 되지 않는다. “음...” 준상은 통찰의 능력으로 상대를 확인했다. 그 결과는 역시나 노란색. 자신과 동등하거나 비슷한 수준의 적이라는 의미다. 지금의 준상이 처음 다크 시드를 접했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성장했음을 감안한다면... 이건 절대로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일이었다. 준상은 그제서야 특수 임무 발동 조건이란 말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무작정 저런 적이 보인다고 퀘스트를 남발하면 어떻게 될까. 수행은커녕 곧바로 먹이가 될 뿐이다. 이것은 다시 말해 어느 정도 상대가 될만한 자에게만 이런 다크 시드 관련 퀘스트가 내려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준상이 다른 보통의 귀환자들과 비슷한 정도의 실력이었다면, 다크 시드 소유자를 안목의 능력으로 발견했더라도 퀘스트 대신 경고 메시지가 나오지 않았을까.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추측이다. 하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준상은 생각했다. 조건이란 것이 그의 예상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이 추측이 현재로서는 가장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싶다. 준상은 퍼레이드에 속해 즐거운 표정으로 춤을 추고 있는 적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여기서 바로 공격을 가하기는 힘들다. 이목도 너무 많고, 자칫 잘못하면 다른 일반인들을 인질로 잡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결국 준상에게 남은 방법은 하나뿐. 상대가 혼자 남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 뿐이다. “...” 그렇게 결정을 내리고 가만히 인파에 섞여 상대를 주시하던 준상은 문득 표적과 눈이 마주 쳤다. 순간. 그 눈 속에 빨려 들어가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어떻게 보면 그냥 좀 예쁘다 싶을 정도의 외모. 하지만 그 눈빛 속에는 이해하기 힘든 사이한 무언가가 섞여 있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이것은 아마도 정신 공격의 일종. 준상이 아니었다면 뭔가 특이한 반응을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준상을 향해 매혹적인 미소를 던지더니 이내 다른 사람들에게로 시선을 던진다. 우연일까. 아니면, 상대에게 정체를 파악 당한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단순히 먹이를 유혹하기 위한 미끼인 것일까. 어느 쪽이 되었든 좀 더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준상은 사람들 속에서 잠시 기회를 살피다가 이내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00114 트롤러 ========================================================================= 유원지 안을 한 바퀴 돌고 무대에서 간단한 공연을 마치고 나서야 퍼레이드는 끝을 맺었다. 퍼레이드에 참가했던 연기자들이 모습을 감추자 청소를 담당하는 아르바이트 생들이 견인줄마저 완전히 철거하자 유원지 안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준상은 연기자들이 들어간 곳으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휴식을 취하는 연기자들 사이를 지나 미니맵을 통해 전달되는 표적의 움직임을 추적했다. 표적은 다른 연기자들과는 달리 바로 탈의실에 들어가 옷을 갈아 입더니, 이내 유원지를 벗어나기 시작한다. “...” 준상은 투명화 상태로 표적의 시야 밖에서 천천히 그 뒤를 추적했다. 아까 눈이 마주쳤던 일을 감안한 행동이었다. 물론 투명화를 펼치고는 있었지만, 적이 자신과 동급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초감각 같은 탐지 능력이 있을지도 모르니 이것 또한 감안을 해야했다. 표적은 이내 유원지 밖으로 나가더니 천천히 도심을 걷기 시작한다. 준상은 그 모습을 보면서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이전에 바닷가에서 여자를 유혹하고 있던 남성과 마찬가지로, 이번에 나타난 표적 역시 지구의 문물에 아주 익숙한 행태를 보이고 있었다. 퀘스트 정보에는 표적의 정체를 사용자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면 정말 단순히 다크 시드를 자신의 몸에 이식한 것 뿐일까. 카드나 아이템에 시드를 장착하는 것처럼? 그런 생각을 떠올리던 준상은 문득 기묘한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표적의 뒤를 말없이 따르는 몇 명의 남자들이었다. “이건...” 얼핏 봐서는 별다른 이상이 없는 듯한 모습이지만, 자세히 살펴 보면 세 명 정도의 남자가 홀린 듯한 모습으로 표적의 뒤를 따르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들은 천천히 시내를 걸어서 어디론가 이동했다. 가만히 뒤를 따르자, 표적은 유원지 인근의 호수 근변으로 이동하는가 싶더니, 두 개의 호수를 연결하는 다리를 건너 공사 중인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 뒤를 어김없이 세 명의 남자가 따라 붙었다. “...” 준상은 위상전이를 통해 그들의 뒤를 따라 붙었다. 공사가 중지된 것인지, 짓다만 건물 안에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표적은 지하실 안에 가만히 서 있다가 세 남자가 안으로 들어오자 다소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오늘은 생각보다 수확이 적은 편이네. 아쉬워라.” 그리고는 멍한 표정으로 서 있는 남자들을 향해 말했다. “어때요. 나... 아름다운가요?” 그러자 남자들은 멍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름답... 습니다...” “후후후...” 표적은 만족스럽다는 듯이 미소를 지은 뒤, 천천히 옷을 벗었다. 붉은 원피스가 마치 뱀의 허물처럼 바닥으로 흘러내리고, 검은 색 속옷으로 감싼 몸이 드러나자 남자들은 황홀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부르르 떨었다. “자, 이리 와요. 와서 나를 사랑해 줘요.” 표적의 붉은 입술이 그렇게 속삭이자, 남자들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그녀에게 다가갔다. “...” 준상은 그 모습을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일전에 쓰러뜨렸던 다크 시드 사용자가 이성을 유혹해 먹이로 삼았던 일이 떠오른 탓이다. 다크 시드의 부작용일까. 아니면 단순히 저 표적이 지닌 내재된 욕망의 표출일까.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었지만, 준상은 조용히 어둠 속을 이동해 표적의 등 뒤로 다가갔다. 어차피 해치울 것이라면 조용히, 확실하게 끝장을 봐야한다.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무투가로 콤보 카드를 바꾸는데, 문득 표적의 입에서 작은 웃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후후후... 불청객이 있군요.” “...” 순간 준상은 뭔가 잘못 되었음을 깨닫고 얼른 위상전이를 통해 그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보았다. 표적이 벗어 놓았던 붉은 원피스가 마치 피어나는 꽃잎처럼 확 펼쳐지더니 준상이 있던 자리로 날아드는 모습을. “평범한 불나방은 아니었던 모양이군요.” 표적은 다가드는 남자들의 손에 몸을 맡긴 채, 준상이 있는 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정확히 눈이 마주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준상이 있는 곳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표적은 다시 말했다. “그가 보냈나요?” “...” “아닌가 보군요.” 그? 그는 또 누구인가. 하지만 준상이 그 말을 듣고 얼굴을 찌푸릴 찰나, 표적의 팔이 채찍처럼 휘둘러지며 날아들었다. 마치 파리를 쫓는 듯한 허공을 휘젖는 한가로운 동작. 그냥은 도저히 닿을 수 없는 거리였지만, 그녀의 팔은 마치 개구리의 혀처럼 쭈욱 늘어나며 곧장 준상을 향해 날아들었다. “...” 준상은 말없이 위상전이를 통해 그 공격을 피했다. 그러자 표적의 눈에 이채가 서린다. “이제 보니 제법 흥미로운 능력을 가졌네요.” 하지만 그 표정은 놀랍다기 보다는 재미있다는 감정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경솔하군요.” 여자의 입에서 미소가 지어지자, 갑자기 지하실 입구에서 덩굴 같은 것이 솟아나와 입구를 막아버렸다. 준상은 얼굴을 찌푸리며 초감각을 활성화했다. 막힌 벽의 두께를 확인해 보기 위해서였다. “...” 준상은 속으로 놀라움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어느 틈엔가, 이 건물의 지하실 전체를 하나의 이질적인 무언가가 감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 지하실은, 그 자체로 저 여자의 형태를 한 괴물의 위장이었던 것이다. “그런 것이었나.” 준상은 입을 열었다. 표적이 자신의 위치를 알아차린 방법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간단했다. 하늘을 날지 못하는 이상, 설령 모습을 감추고 있더라도 땅에 발을 디뎌야만 한다. 표적은 자신의 위장 속에 느껴지는 준상의 몸무게를 통해 그 위치를 파악한 것이다. “매력적인 목소리네요. 자, 이리 와서 나를 즐겁게 해주지 않겠어요?” “싫다면?” “강제로 할 수 밖에요.” 그 말이 끝나는 순간, 준상의 위치를 향해 사방에서 촉수가 뻗어 나왔다. 단순한 촉수가 아니다. 하나 하나가 비수와도 같은 날카로움을 지니고 있었다. 준상은 곧바로 랑다잘의 분노를 꺼낸 다음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촉수들을 후려쳤다. 거대한 두 개의 철구에 부딪힌 촉수들은 날카로운 금속성을 내며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순간 자신에게 홀린 남자의 입술을 핥고 있던 표적의 얼굴이 찌푸려진다. “당신... 낯이 익군요. 아아... 아까 거기서 봤던 남자?” “...” “어쩐지, 단번에 넘어오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 싶더니...” “...” “아하, 귀환자였군! 그런 거였나!” 표적의 말과 함께 지하실에 새로운 형상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꽃이었다. 그녀가 벗어 놓은 붉은 원피스처럼 새빨간 꽃잎을 지닌. 그 꽃들은 형태가 완성되자 곧바로 붉은 안개 같은 것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것이 어떤 작용을 일으키는 것인지 바로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분명한 건 준상에게 그리 이로운 것은 아닐 것이다. 준상은 우선 이 공간으로부터 벗어나기로 마음을 먹었다. 지금으로서는 저 여인의 형상이 본체인지조차 불확실한 상황. 그도 그럴 것이, 마치 검은 후광처럼 흘러나오던 시커먼 아지랑이가 이미 그녀의 머리 위에서 사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크 시드가 여인의 머리로부터 어딘가로 이동했다는 의미. 가능성은 크게 두 가지다. 다크 시드의 위치를 자유 자재로 이동 가능한 것이 그 첫 번째이고, 저 여인의 형상 자체가 일종의 의태일 가능성이 두 번째이다. 어느 쪽이 되었든, 결국 이 안에서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 아직까지도 정신을 못 차린 채 여인의 몸을 더듬느라 정신이 없는 세 남자에게는 안 된 일이지만, 투명화나 위상전이의 이점마저 활용할 수 없는 공간에서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싸울 필요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위상전이를 펼치기 위해서는 시야가 닿는 곳의 그늘진 곳을 지정해 입구와 출구를 지정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지금 이곳은 완전히 사방이 막힌 공간. 시야가 방해를 받으니 외부의 출구를 지정할 방법이 없다. 하지만 준상은 바로 해결책을 찾아냈다. 그것은 바로 초감각을 이용하는 방법이었다. 초감각으로 양지와 음지를 구분할 방법은 없지만, 달리 조명이 없는 건물 안이라면 필히 그늘이 만들어져 있을 것이다. 판단이 서자, 준상은 바로 행동을 시작했다. 초감각을 통해 가장 벽이 얇은 곳을 파악한 다음 그곳을 향해 곧장 뛰어들었다. 여인은 준상의 의도를 바로 깨닫고는 소리쳤다. “어림없다!” 그리고 곧바로 벽으로부터 날카로운 창과 같은 촉수를 뻗어내어 준상을 공격했다. 준상은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촉수들을 향해 무기방어를 발동했다. 촤차차창! 날카로운 촉수들은 두 개의 철구에 가로막혀 그 의도를 달성하지 못했다. 여인은 혀를 차며 다시 천장과 바닥으로부터 촉수를 뻗었지만, 그 순간 준상은 이미 초감각을 발동하여 위상전이의 출구를 설정하고 있었다. 콰가각! 수많은 촉수들이 날아들어 준상이 서 있던 자리에 마치 불어터진 면발마냥 얽혀들었지만, 이미 그의 모습은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린 뒤였다. 준상은 짓다만 건물의 1층에 모습을 드러낸 다음 곧바로 밖으로 달려나갔다. 그러자 마치 그 뒤를 쫓듯이 바닥으로부터 촉수들이 발라낸 생선의 가시처럼 위로 솟구쳤다. 준상은 일단 위상전이를 펼쳐 촉수의 사정권에서 벗어난 다음, 곧바로 투명화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리고 다시 연거푸 위상전이를 펼쳐 자신의 흔적을 완전히 지운 뒤에야 다시 초감각으로 상대의 위치를 확인했다.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짓다만 건물이 크게 진동하는가 싶더니, 이내 굉음과 함께 무너져 내린다. 그리고 그 아래에서 시뻘건 살덩이 같은 것으로 뭉쳐진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 붉은 살덩이 위에 벗은 몸을 드러낸 여인의 형상이 나타났다. 그녀는 주위를 돌아보며 말했다. “귀환자 나부랭이 따위가 감히 나에게서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은가!” “...” “이미 금기는 깨졌다. 더 이상 나를 가로 막을 것은 아무것도 없단 말이다!” 그렇게 외친 표적은 스스로의 모습을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그것은... 하나의 거대한 꽃이었다. 열대의 정글에 자생하는 라플레시아와 같은 거대한 꽃이 무너진 건물의 잔해로부터 피어나고 있었다. 모습을 숨긴 채 다크 시드의 위치를 초감각으로 탐색하던 준상은 다시 얼굴을 찌푸릴 수 밖에 없었다. 거대한 붉은 꽃으로부터 아까와 같은 붉은 안개 같은 것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붉은 안개는 뭉글거리며 뿜어져 나왔다. 무생물은 닿아도 딱히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곤충이나 잡초와 같은 생물은 그 붉은 안개에 닿는 순간 마치 촛농처럼 녹아내렸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녹아내린다기 보다는 붉은 안개와 동화되어 그 일부가 되고 있었다. 여인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외쳤다. “나와라! 그렇지 않으면 오늘 이 도시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나의 일부가 되리라!” 00115 트롤러 ========================================================================= 여인의 외침에 준상은 얼굴을 찌푸렸다. 인적 없는 지하실까지 남자들을 끌어들이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기에, 뭔가 행동에 제약이 있으리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저렇게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내다니. 표적은 분명이 이렇게 말했다. 금기가 깨졌다고. 그렇기 때문에 더 이상 자신을 가로 막을 수 있는 것은 없다고. 그것은 다시 말해 지금까지 금기라 불리는 무언가에 의해 행동이 제약 받고 있었으며, 준상에 의해 그것이 깨어졌음을 의미한다. 이렇게 되면, 차라리 건드리지 않은 것만 못하게 되었다. 어설프게 벌집을 건드린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준상이 그늘 속에 모습을 감춘 채 그렇게 혀를 차고 있을 때. 주위를 지나던 사람들은 갑자기 건설 중이던 건물이 무너지고 그 안에서 정체 불명의 거대한 꽃이 모습을 드러내는 모습에 놀랐다. 개중에는 기괴하고 거대한 꽃의 모습에 놀라 일단 도망치는 사람도 있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오히려 흥미를 보이며 휴대폰을 꺼내 그 모습을 촬영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도 아주 잠시. 휘둥그레진 눈으로 창문 밖을 바라보던, 근처 건물에 입주해 있던 사람들이 거대한 꽃으로부터 튀어나온 촉수에 사로잡혀 끌려 나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다시 준상이 뭔가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그렇게 사로잡힌 시민들의 일부가 촉수에 의해 찢겨 죽음을 당했다. 촉수에 잡혀 있던 다른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을 치기 시작하자, 그제서야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이 놀라 도망치기 시작한다. 표적은 시민들의 뼈와 살로 목을 축이며 크게 웃었다. “캬하하하하!” 이건 인질도 뭣도 아니다. 준상의 존재를 핑계로 본격적인 사냥에 돌입한 것일뿐. 어쩌면 놈은 오늘의 상황을 만들기 위해 일부러 유동인구가 많은 유원지에서 무희 흉내를 내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군이나 경찰의 움직임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가급적이면 다크 시드의 위치라든가, 어느 정도 약점을 찾은 상태에서 공략에 임하고 싶었지만 이대로 가만히 지켜봐도 스스로 약점을 드러낼 가능성은 별로 없을 듯 하다. 준상은 인벤토리에 넣어 두었던 수류탄 상자를 꺼냈다. 과연 이것이 얼마나 효력을 발휘할 지는 미지수였지만, 적어도 현재 상황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로 타격을 가할 가장 강력한 수단 가운데 하나임은 분명하다. 준상은 상자에서 막대형 수류탄을 하나 꺼냈다. 보통의 수류탄은 안전핀을 제거하고 던지면 그만이지만, 막대형 수류탄은 조금 사용방법이 다르다. 먼저 막대 뒤쪽의 병뚜껑 같은 것을 돌려 연 다음, 그 안에 들어 있는 안전끈을 잡아 당긴 후 투척해야만 하는 것이다. 아무래도 사용하기가 일반적인 계란형 수류탄보다 불편하지만, 그만큼 더 멀리 더 정확히 던질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사실 이런 장점은 현대전에서는 큰 의미가 없기 때문에 대부분의 국가에서 막대형 수류탄은 도태되어 버린 상황이고, 오직 중국군만이 제식 채용하여 사용하고 있는 상황.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면 일반인 보다 수십배는 더 강력한 근력을 지닌 준상에게는 엄청난 장점이 될 수 있었다. 준상은 안전끈을 당긴 다음, 먼 거리에서 표적을 향해 수류탄을 던진 후 곧바로 모습을 감추었다. 수류탄은 빠른 속도로 표적의 머리를 향해 날아갔다. “음?” 표적은 자신을 향해 무언가가 빠르게 날아오자, 얼른 촉수를 뻗어 그것을 낚아 챘다. 그리고는 촉수에 잡힌 송이 버섯, 아니 좀 더 적나라하게 말하면 남성의 성기와 비슷한 형상의 괴상한 물체를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건?” 하지만 다음 순간, 촉수에 잡혀 있던 수류탄이 굉음을 내며 폭발했다. 갑자기 수류탄이 코앞에서 폭발하며 파편과 섬광을 쏟아내자, 놈은 그것을 고스란히 뒤집어 쓰고 말았다. “큭! 감히 이런 장난감 따위를!” 놈은 길길이 날뛰며 화를 냈지만, 수류탄이 폭발하는 순간 준상은 표적의 주위를 감싸고 있던 붉은 안개가 빠르게 움직여 붉은 꽃잎과도 같은 몸체를 보호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현대 무기가 전혀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현대 무기로 본체에 타격을 가하기 위해서는 저 붉은 안개를 먼저 무력화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그렇게 고민하고 있는데, 시끄러운 사이렌 소리와 함께 경찰차 몇 대가 현장에 도착했다. “쯧...” 준상은 조그마한 권총을 빼들고 어쩔 줄 몰라 하는 경찰들의 모습을 보고 혀를 찼다. 이렇게 빠르게 도착한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긴 하지만, 저런 무장 상태로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한다. 아니나 다를까. 시끄러운 사이렌 소리를 들은 표적이 경찰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네놈들이냐!” 곧바로 땅 속에서 거대한 나무 줄기 같은 촉수들이 튀어나와 성난 파도와 같이 경찰들을 향해 덮쳐 갔다. “히이익!” 너무나 압도적인 무언가가 자신을 향해 달려들면 사람은 그대로 굳어 버린다. 마치 해일과도 같이 하늘 위에서 쏟아져 내리는 촉수들의 모습을 직면한 대부분의 경찰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몇몇 경찰들이 그나마 촉수들을 향해 총을 쏘아댔지만 쏘고 있는 자신들조차도 그것이 어떤 효과를 발휘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고 있었다. 그저, 거대한 코끼리의 발에 짓밟히기 전에 병정개미들이 집게 턱을 들이대는 것이나 다름 없는 행위. 이렇게 죽는 것일까. 하늘을 가리며 날아드는 촉수들의 모습을 보며 경찰들이 그런 생각을 떠올릴 찰나. 그림자 속에서 한 사람의 모습이 불쑥 튀어 나오더니 거대한 두 개의 철구를 휘둘러 떨어져 내리는 촉수들을 막아내었다. 바로 그 사람, 준상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무기 방어로 촉수를 막아내며 등 뒤의 경찰들을 향해 외쳤다. “구역을 폐쇄하고 사람들을 피난 시켜라!” 경찰들은 망토를 두른 채 직경이 일 미터는 되어 보이는 커다란 철구를 휘둘러 촉수를 막아내고 있는 준상의 외침을 듣고서야 자신이 살아있음을 인지했다. “서둘러라! 어서!” “아, 알겠습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자신들의 능력 범위를 벗어난 현상임을 뼈저리게 깨달은 경찰들은 준상의 명령에 따라 인근 지역을 폐쇄하고 사람들을 피난시키기 위해 자리를 피했다. “드디어 나왔구나! 이 귀환자 나부랭이!” 표적은 모습을 드러낸 준상을 바라보며 크게 소리치더니 대지 위에 뿌리 박혀 있던 몸을 천천히 들어 올리기 시작했다. 썩은 향취를 풍기는 붉은 꽃이 몸을 일으키는 순간, 준상의 눈이 반짝 이채를 발했다. 지금까지 모습이 보이지 않던 다크 시드의 위치가 한 순간 시야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거기였나.” 다크 시드는 붉은 꽃과 뿌리를 연결하는 몸체의 중심부에서 검은 서광을 뿜어내며 그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준상은 드디어 목표를 발견하자 공략 방법을 머리 속에 떠올렸다. 완전하게 변이를 마친 표적은 생각보다 이동 속도가 느렸다. 하지만 땅 속에 뿌리박은 수많은 촉수들이 존재하는 한, 놈의 약점인 다크 시드에 접근하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촉수들의 움직임이 너무나 격렬한 탓에 위상 전이를 펼치기도 쉽지 않은 상황. 그렇다고 이 많은 촉수들을 전부 부숴버릴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좋을까. 무기 방어를 펼쳐 촉수를 쳐내던 준상의 눈에 문득 하나의 길이 보였다. 바람 부는 언덕 위에 피어난 잡초들처럼 빽빽하게 들어찬 촉수들과 그 사이를 감도는 붉은 안개의 틈으로 보인 한 줄기 길. 일부러 준상을 끌어들이기 위해 틈을 보인 것일까. 아니면 놈의 신체 구조상 어쩔 수 없이 만들어진 길일까. 어느 쪽인지 확인할 길은 없었지만, 그 길은 눈 깜짝할 사이에 다시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준상은 우선 거세게 촉수들을 몰아붙인 다음 투명화와 위상전이를 통해 촉수들의 사정거리로부터 몸을 피했다. “이 노옴!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으냐!” 표적은 광분하며 붉은 안개를 휘둘러 준상이 모습을 숨길 만한 곳을 휩쓸어 가기 시작했다. 무작정 원거리에서 강타나 블러드 서커를 사용하기는 힘들다. 사정거리도 문제지만, 단숨에 유효타를 내지 않을 경우 오히려 반격을 받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즉, 단숨에 유효한 타격을 가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놈의 약점에 근접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위상 전이를 사용하기조차 어려울 만큼 난무하는 촉수들 틈에서 어떻게? 바로 그 순간, 그것이 다시 드러났다. 촉수와 붉은 안개들이 휘몰아치는 틈 속에서 다시 한 번 어두운 숲 속에 난 오솔길과 같은 한 줄기 통로. 보통의 인간으로서는 어림도 없는 일. 돌파는커녕 곧바로 촉수와 붉은 안개에 휩싸여 버릴 가능성이 더 높다. 하지만, 준상은 보통의 인간이 아니다. 준상은 우선 콤보 카드를 바꾸었다. 질주. 도약. 순간가속. 순간가속(R). 이렇게 네 장의 카드가 모여, 데안달라스의 파발꾼이 완성되었다. 준상은 마지막으로 웨펀 차지를 장착했다. 그리고 가만히 다시 한 번 그 통로가 모습을 드러내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바로 그 때. 어디서 많이 본 레인지로버 한 대가 혼란에 빠진 도심을 질주해 모습을 드러낸다. “에이... 그 인간은 꼭 필요할 땐 없더라.” “준비하십시오!” “네!” 서윤과 그의 동료들은 후다닥 레인지로버에서 내리더니 곧바로 전투 준비에 들어갔다. 그것은 준상이 보기에 너무나 무모한 일이었지만, 그들은 두려움을 떨치지 못한 상황에서도 도심에 나타난 거대한 괴물 꽃을 향해 자신이 지닌 무기를 들이대고 있었다. 가장 처음 공격을 시작한 것은 바로 서윤이었다. “가급적이면 안 쓰려고 했지만, 어쩔 수 없군.” 그는 캐비닛 속에서 커다란 대전차 미사일 하나를 꺼내어 어깨에 걸머진 채 조준을 시작했다. “뭐해요! 뒤에 있으면 안된다구요!” “아, 죄송합니다.” 윤성렬은 느닷없이 서윤이 대전차 미사일을 꺼내어 조준을 시작하자 놀란 표정으로 그것을 바라보다가 정다빈의 말을 듣고는 얼른 후폭풍 범위에서 벗어났다. “쏩니다!” 서윤은 그렇게 외친 후, 준상을 찾기 위해 광분하며 건물을 파괴하고 있는 괴물 꽃을 향해 발사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불꽃이 작렬하며 대전차 미사일이 발사되었다. “응?” 표적은 자신을 향해 또다시 무언가가 날아들자 얼굴을 찌푸리며 촉수를 휘둘러 그것을 막아냈다. 그러자 또다시 섬광과 폭발을 동반한 파편 더미가 여인의 얼굴 위로 쏟아져 내린다. “거기냐!” 표적은 그렇게 외치며 몸을 돌려 대전차 미사일이 날아온 곳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내 준상이 아닌 대여섯 명의 남녀가 서 있는 모습을 보고는 성을 냈다. “감히 하루살이들 따위가!” 여인의 입에서 성난 고함이 터져 나옴과 동시에 다시금 땅 속에서 대여섯개의 촉수가 솟구쳐 서윤들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그러자 미리 준비하고 있던 진세아가 앞으로 나서며 마법을 사용했다. “가랏!” 그녀의 짧은 외침과 함께 커다란 화염구 서너개가 촉수들을 향해 날아갔다.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이야압!” 정다빈의 입에서 한 줄기 기합성이 터져 나오자, 갑자기 주위가 어두워지는가 싶더니 하늘로부터 한 줄기 벼락이 괴물 꽃을 향해 떨어져 내린다. “이, 이건?” 꽃 위에 벗은 상반신을 드러내고 있던 표적은 하늘로부터 갑자기 벼락이 떨어져 내리자 놀라며 얼른 붉은 안개로 자신의 몸을 가렸다. 그로 인해 서윤들을 향해 날아들던 촉수들은 일순 기세가 꺾였고, 곧바로 화염구들이 작렬함과 동시에 흰 원피스를 입고 머리를 길게 기른 서유미가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천천히 품에서 흰 천으로 감싼 식칼을 꺼내어 들더니 그 천들을 풀어내었다. 그리고 가만히 몸을 낮추며 발도술을 준비하더니, 일행을 향해 날아드는 하나의 촉수를 향해 번개처럼 식칼을 휘둘렀다. 스칵! 그러자 한 줄기 섬광이 뻗어나가며 날아드는 촉수를 단숨에 갈라버린다. 서유미의 식칼에 잘린 촉수 하나가 막 건져낸 생선처럼 퍼덕거리며 바닥을 뒹구는 순간 벼락에 맞아 머리가 그을린 여인의 형체가 분노의 고함을 터뜨렸다. “너희들도 귀환자였구나!” 여인은 준상의 일을 잠시 잊고 새롭게 나타난 귀환자 파티를 향해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로 그 순간. 기회를 노리고 있던 준상의 눈앞에 다시금 그 길이 모습을 드러냈다. 준상은 곧바로 쏘아진 화살처럼 달려 나갔다. 데안달라스의 파발꾼이 지닌 효과로 인해 강화된 질주 효과는 준상의 몸을 빛살처럼 빠르게 나아가게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부족했다. 어느 틈엔가 촉수와 붉은 안개들이 준상의 눈앞을 가로 막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준상은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두 개의 거대한 철구를 앞으로 내밀며 웨펀 차지를 발동했다. 순간 준상은 기묘한 체험을 했다. 그의 주위를 흐르는 공간과 시간으로부터 벗어나는 듯한, 그런 기묘한 감각. 하지만 그 감각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어느 틈엔가 준상의 시야에는 다크 시드가 뿜어내는 검은 아지랑이가 하나 가득 자리하고 있었다. 준상은 랑다잘의 분노를 인벤토리로 되돌린 후, 블러드서커를 꺼냈다. 그리고, 눈앞으로 다가온 다크 시드를 향해 한 점 망설임 없이 저주 받은 마물을 휘둘렀다. 준상은 느꼈다. 블러드서커의 검은 날이 괴물 꽃의 줄기를 단숨에 갈라버리는 것을. 그리고 곧바로 다크 시드를 향해 날아드는 것을. 하지만 바로 그 순간. 검은 아지랑이를 뿜어내고 있던 다크 시드가 스스로 움직여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블러드 서커의 날을 피했다. 준상은 회심의 일격이 실패했음을 깨닫자 얼른 위상전이를 펼치려 했지만, 불행히도 사방 십미터 이내에 그가 이동할 만한 그늘은 이 순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그의 머리 위에서 분노에 찬 여인의 음성이 터져 나왔다. “크아아악! 감히 네 놈이!” 준상은 블러드서커의 후유증이 전신에 휘몰아치는 것을 깨닫자 곧바로 힐링 포션을 사용했다. 곧바로 힐링 포션이 지닌 생명력이 과부하에 삐걱대는 몸 구석구석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미처 준상의 몸이 블러드서커의 후유증에서 회복되기도 전에 발밑에서 촉수 한다발이 뻗어 나와 준상의 다리를 휘감았다. “잡았다! 이놈!” 후유증이 풀리지 않아 머리 아래로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상황. 그런 상황 속에서 준상은 보았다. 꽃 위에 벗은 상반신을 드러낸 여인의 머리에서 어느 새인가 다시 검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는 모습을. 그것은 바로 다크 시드의 흔적. 그런 그녀의 머리 뒤에서는 마치 후광처럼 태양이 한껏 빛을 발하고 있었다. 준상은 곧바로 카드를 교체한 다음, 그녀의 몸이 만든 그림자 속으로 위상전이를 펼쳤다. 그리고 크게 놀라 눈을 치뜨고 바라보는 여인의 목을 이빨로 사납게 물어뜯었다. “크아아아악!” 여인은 비명을 지르며 손과 촉수를 뻗어 준상의 몸을 자신에게서 떼어내려 했다. 하지만 준상은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에 온 몸을 흠뻑 적신 채, 더욱더 사납게 그 목을 물어뜯었다. 콰직! 콰지직! 이빨로부터 부드러운 여인의 속살이 찢기고 그 뼈가 부서지는 것이 느껴진다. 찢겨진 동맥에서는 울컥대며 뜨거운 피가 솟아나왔다. 단순한 의태가 아니었던 것인가. 하지만 준상은 그런 감상에 휘둘리지 않았다. 하리아스의 미친 개 2세. 마치 그 화신이라도 된 것처럼 여인의 목을 미친 듯이 물어뜯을 뿐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블러드 서커의 후유증에서 벗어나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자, 곧바로 양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채와 어깨를 각각 움켜 쥐었다. “자, 잠깐... 사, 살려...” 여인은 두려움에 떨며 그렇게 말했지만, 준상의 두 팔은 가차 없이 검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그 머리를 몸통으로부터 잡아 뜯어 버렸다. 00116 트롤러 ========================================================================= 콰드드득! 다크 시드가 들어있는 머리가 몸체로부터 분리되자, 괴물 꽃의 움직임이 마치 시간이 멈춰진 것처럼 정지하더니 천천히 촛농이 흘러내리듯이 흐물흐물 녹아내리기 시작한다. “퉷!” 준상은 입 안 가득 스며든 피와 살점을 마치 토악질을 하듯이 뱉어 냈다. 그리고는 손 안에 들린 표적의 머리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검은 아지랑이를 뿜어내고 있는 여인의 머리는 몸통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이 순간에도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입술을 움찔거리고 있었다. 실로 놀라운 생명력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이라도 다시 몸체에 가져다 대면 원래대로 붙어 버리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실제로 뜯겨져 나간 목에서는 이 순간에도 튀어나온 혈관이 촉수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준상은 무심한 눈길로 그것을 바라보다가, 머리를 한 손에 쥐고 다른 한 손으로 내려치기 시작했다. 퍽, 퍽퍽! 그렇게 소름끼치는 소리가 몇 번이나 더 울려퍼지고 나서야, 비로소 머리뼈가 부서지며 그 안에 숨겨져 있던 다크 시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일반적인 시드가 해바라기씨 정도의 크기라면, 지금 드러난 이 다크 시드의 크기는 거의 서리태 정도의 크기였다. 크기가 크면 그만큼 더 강력한 것일까. 준상이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순간, 팔찌가 반응하면서 손에 들린 다크 시드가 사라지고 시야 한켠에서 퀘스트 정보가 갱신되었다. 다크 시드를 회수하십시오. :이 사악한 어둠의 씨앗은 본래 이 세계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물건입니다. 사용자를 제재하고 다크 시드를 회수하십시오. [이 퀘스트는 단독 퀘스트입니다.] -> 완료! 보상 : 경험치 많이, 특수 임무 보상 상자. -> 보상을 지금 수령하시겠습니까? (Y/n) _ (주의) 수령하지 않은 보상은 7일후 자동 소거됩니다. 준상은 그 메시지를 보고 나서야 아직 수령하지 않은 퀘스트 보상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위기 상황에서 레벨 업 효과를 얻기 위해 남겨 두었던 보상이었건만, 정작 필요할 때는 미처 떠올리지 못한 것이다. 실로 멍청한 짓이 아닐 수 없다. 주위를 돌아보니 이미 괴물 꽃의 몸체 대부분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쭈그러든 채 물 위로 나온 해파리처럼 늘어져 있었다. 위상전이를 펼칠 만한 공간이 없는 관계로 천천히 그 찐득거리는 기분 나쁜 잔해들 속을 걸어 나오던 준상은 자신을 질린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서윤 일행을 깨달았다. 그런가. 전부 다 보았던 것인가. 준상은 속으로 쓴웃음을 삼켰다. 하긴, 이제 와서 이런 모습을 보인다 한들 문제될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는 적당한 위치에 들어서자 그룬발의 망토를 사용해 모습을 숨긴 후, 위상전이로 그곳을 빠져 나갔다. 잠시 얼이 빠져 있던 서윤 일행은 그가 모습을 감추자 그제서야 정신이 퍼뜩 들었다. “그거... 그 사람 맞죠?” “아, 아마도요...” “세상에...” 이렇다 저렇다 다른 사람을 평가할 계제는 아니지만, 갑자기 나타나 커다란 도끼를 휘두르는 모습이나 괴물 꽃 위에 자리잡고 있던 여인의 형체에 달려들어 그 목을 잡아 뜯는 장면은 그들 모두의 시야에 확실하게 각인되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준상이 여인의 목을 미친 듯이 물어뜯는 모습까지는 눈앞에서 넘실대는 촉수들과 등을 돌리고 서 있던 준상의 자세나 위치 때문에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는 정도일까. 하지만 얼굴과 상체를 온통 피로 적신 채 괴물 꽃의 잔해 속을 걸어 나오는 모습 만으로도 그들은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완전히 흐물흐물해진 괴물 꽃의 잔해를 바라보며 모두들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는데, 문득 서유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 사람은... 지금까지 혼자서... 이런 것들과 싸워온 것일까요.” “...” 그제서야 그들은 또다시 깨달았다. 이런 괴물이 현실에서 나타난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그러고 보니... 그 괴물이 우릴 보고 너희도 귀환자냐라고 했었지.” 진세아가 중얼거리자, 정다빈이 바로 맞장구를 쳤다. “맞아요. 분명히 그랬어요.” 너희도 귀환자냐. 그것은 다시 말해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귀환자와 싸우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만약 그렇다면 그 귀환자일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은 괴물 꽃을 해치운 준상이다. “허...” 윤성렬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자신은 지금까지 기껏해야 좀비나 해골, 그리고 그보다 조금 강한 두목 괴물 정도와 싸워본 것이 고작이었는데, 준상은 이런 터무니없는 괴물과 싸워오고 있었던 것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긴... 그러니까 그렇게 강한 것이겠지만. 그렇게 저마다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 있는데, 도로 저편에서 경찰차와 경찰 기동대의 것으로 보이는 검은 색의 장갑차들이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다. 그들은 이미 흐물흐물해진 괴물 꽃에서 제법 멀리 떨어진 곳에 급히 저지선을 만든 후 서윤 일행을 향해 총을 들이대며 외쳤다. “꼼짝마! 움직이면 쏜다!” “...” 완전히 번지수를 잘못 짚은 그들의 행동에 일행은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 도착한 것만 해도 저 번잡한 서울 도심의 교통 상황을 고려하면 대단한 일이긴 하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자칫하면 준상이 해치운 괴물까지 자신들이 한 일이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그제서야 준상이 왜 말도 없이 모습을 숨긴 채 사라졌는지 깨달았지만 그건 이미 늦어도 한참 늦은 깨달음이었다. “이거... 어쩌죠?” “글쎄요.” 진세아의 말에 임서윤은 어깨를 으쓱거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이래저래... 우리는 아무래도 준상씨 뒷감당을 하는 역할인 모양입니다.” “끙...” 서윤 일행이 경찰들에게 에워싸이는 동안 준상은 호숫가에서 비상용으로 보관해 둔 물로 대충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은 후 호텔로 돌아왔다. “후...” 준상은 일단 욕실로 들어가 욕조에 물을 받았다. 그런 다음 헤네스와 몽몽이를 소환했다. “준상씨?” 헤네스는 자신이 소환된 곳이 호텔 스위트룸이라는 사실에 살짝 놀라고, 어쩐지 피곤해 보이는 준상의 모습에 또 한 번 놀랐다. “저... 퀘스트는...” “잘 끝났으니 걱정할 필요 없다.” “그렇군요.” “난 씻고 좀 쉴테니 너도 쉬도록 해.” “네.” 준상은 그렇게 말하고는 욕실로 향했다. 옷을 벗고 아직 물이 반도 차오르지 않은 욕조에 들어갔다. 그리고 천천히 물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후우...” 모르긴 해도 이번 일의 파장이 결코 적지는 않을 것이다. 준상으로서는 이미 두 번째지만, 다른 사람들로서는 현실에 그런 터무니없는 괴물이 나타났다는 사실 자체가 경악할 만한 사건일 것은 굳이 따로 생각할 필요도 없는 일. 증거가 없으면 그냥 헛소리로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괴물의 사체를 남겨두고 온 이상 정보 통제가 이루어지더라도 정부만큼은 이 사태를 가볍게 넘기지 못할 것이다. 문제는 정부가 이번 일의 원인을 파악하고 대책을 수립한답시고 귀환자들을 귀찮게 하는 상황 정도일까. “서윤이 알아서 잘 하겠지.” 생각해 보면 다들 도망치기 바쁜 상황에서 그렇게 달려올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다. 준상이야 퀘스트를 받았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지만, 그들은 그런 것도 아니지 않은가. 물론 자신들의 실력을 고려하지 않은 무모한 짓이기는 하지만, 이번 일을 기회로 자신의 능력을 돌아볼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는 않은 일이다. 어쨌든 현재 정부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 정도가 아닐까 싶다. 하나는 사건 자체를 은닉하고 내밀하게 조사를 진행하는 것. 또 하나는 아예 사건을 완전히 까발린 후 서윤 일행을 영웅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 하지만 사건을 은닉하는 일은 그리 만만치가 않다. 처음에 괴물 꽃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이미 많은 사람들의 눈에 띄어버렸기 때문이다. 요즘처럼 미디어가 발달한 시기라면, 이미 동영상이나 사진이 세계 각지로 퍼져 나갔어도 이상하지 않은 일. 이미 귀환자라는 불가사의한 현상이 공론화된 상황임을 감안한다면, 차라리 인정하고 영웅을 만들어 버리는 편이 좀 더 손 쉬운 해결책이다. 서윤이나 그 일행들이야 앞으로 좀 골치 아파지겠지만, 그들의 지명도가 올라가면 시드 매입 같은 일을 진행하기도 좀 더 쉬워질테니 일거양득이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사실 그게 아니지.” 이번 일을 통해 준상은 다크 시드가 보통의 시드와는 차원이 다른 무엇임을 알게 되었다. 준상은 지금까지의 퀘스트를 통해 강력한 효과를 가진 레어 시드를 다수 획득한 바가 있다. 하지만, 그 중 어떤 것도 이번에 등장한 다크 시드처럼 강력한 효과를 지닌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단 하나의 시드로 그런 엄청난 능력을 가질 수 있다니. 힘에 목마른 자라면 그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는 배길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표적이 된 여자가 했던 말도 신경이 쓰인다. 그녀는 준상의 존재를 느끼자 바로 이런 말을 했었다. -그가 보내서 왔나요? 그것은 여자가 다른 누군가와 접촉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며, 또한 ‘그’에게 협력하거나 그 명령을 수행하는 존재가 여럿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녀는 또한 이런 말도 했었다. -이미 금기는 깨졌다. 더 이상 나를 가로 막을 것은 아무것도 없단 말이다! 이 말은 그녀가 지금까지 무희로 지내며 조심스럽게 인간을 사냥할 수 밖에 없었던 원인을 설명해 준다. 문제는 금기가 깨지는 조건 정도겠지만, 생각해보면 해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목숨이 위협을 받는 상황에서도 적용되지는 않을테니, 일종의 정당방위와 같은 형태로 금기에도 예외가 있지 않을까. 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이것은 문제가 있다. 퀘스트가 내려지는 것이 은밀히 숨어서 움직이던 다크 시드 사용자들의 행동을 구속하는 족쇄가 풀린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얼마 안 되는 단서를 조합해낸 정도의 추측에 불과하기 때문에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고작 이 정도가 현재 준상이 낼 수 있는 최선의 답이기도 했다. “골치 아프군.” 그렇게 눈을 감고 뜨거운 물속에 몸을 담근 채 생각에 잠겨 있는데, 문득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에 반응해 눈을 뜨던 준상은 헤네스가 빼꼼히 욕실 안으로 고개를 내밀다가 벗은 자신의 몸을 보고는 얼른 숨어 버리는 모습을 발견했다. “무슨 일이지?” 준상이 묻자 헤네스는 심하게 말을 더듬으며 대답했다. “그, 그게... 그러니까... 저기...” “...” 말없이 잠시 기다리자, 이내 문 뒤에서 헤네스가 버럭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드, 등 밀어 드릴게요!” “...” 준상은 속으로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대충 어떻게 된 일인지 짐작이 간다. 필요한 물건을 사주라고 같이 보냈더니, 쓸데없는 지식까지 주입을 시킨 것이리라.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마.” “네에...” 어쩐지 문 밖에서 어깨가 축 처진 채 대답하는 헤네스의 눈으로 본 것처럼 선명하게 떠올라 준상은 속으로 피식 웃음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느긋하게 목욕을 마친 다음 밖으로 나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헤네스가 다가와 어깨를 주물러 주었다. 그래봐야 실질적으로 마사지의 효과가 거의 전무한 것은 이전과 마찬가지였지만, 그녀의 부드러운 손길이 와 닿자 아직까지 전투의 여운이 가시지 않아 날이 서있던 준상의 마음이 조금씩 평온하게 가라앉는다. 준상은 그녀의 부드러운 손길이 조물조물 어깨를 주무르는 그 감각 자체를 즐기며 리모컨을 들었다. 티비를 켜자, 역시나 방금 전의 일이 속보로 흘러나온다. 00117 트롤러 ========================================================================= “지금 보시는 영상은...” 리포터의 격앙된 목소리와 함께 휴대폰으로 찍은 것이 아닐까 싶은 괴물 꽃의 영상이 티비 화면에 나타난다. 처음에는 그나마 또렷하게 잡히는가 싶더니, 이내 촉수들이 솟구치는 장면과 함께 화면이 심하게 흔들리고는 그대로 다른 사람이 찍은 화면으로 이어졌다. “그 사이에 많이도 끌어 모았군.” 적극적인 정보 통제를 하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일부러 통제를 하지 않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저런 식으로 괴물 꽃의 영상을 여과 없이 내보내는 것을 보면 대략 정부의 방침이 어느 쪽인지 감이 잡힌다. 알몸이 드러난 여성의 상반신 부분은 그 와중에도 모자이크 처리를 했으니 나름대로는 여과를 한 것으로 쳐야할까. 채널을 돌리자 여기저기에서 끌어 모은 동영상들이 되풀이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와중에도 아직 정부의 공식적인 발표는 나오지 않고 있었다. 뒤에서 준상의 어깨를 주무르고 있던 헤네스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저 괴물과... 싸우고 오신 건가요?” “그래.” “괴물이 여기에도 나오게 된 건가요?” “그런 셈이지.” 준상은 손을 올려 어깨를 주무르고 있는 헤네스의 손을 가볍게 어루만지며 말을 이었다. “걱정마.” “네...” 가만히 헤네스의 손을 어루만지며 그 부드러운 촉감을 즐기던 준상은 서윤에게 간단하게 메시지를 넣었다. ‘시간이 되면 내일 다시 들려라.’ 그리고는 가만히 소파에서 일어났다. “저녁 식사 전에 깨워줄래?” “네. 맡겨 주세요.” 준상은 침대로 가서 그대로 누운 후 눈을 감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살짝 잠이 들었던 준상은 품 안에 무엇인가 부드러운 것이 안겨 있는 것을 깨닫고는 천천히 눈을 떴다. 바라보니, 어느 틈엔가 헤네스가 그의 품 안으로 비집고 들어와 새근거리며 잠들어 있었다. “...” 그가 잠 든 사이 몸을 씻었는지, 헤네스의 머리 결에서 샴푸 냄새가 은은하게 전해져 오고 있었다. 처음에는 같은 침대 안에 눕는 것만으로도 어색해서 어쩔 줄 모르더니, 이제는 이렇게 품에 안겨 잠드는 것이 일상처럼 되어 버렸다. 준상은 가만히 손을 뻗어 부드러운 헤네스의 머릿결을 어루만졌다. 그러자 살짝 잠이 들어있던 헤네스가 얼른 반응하며 후다닥 몸을 일으킨다. “버, 벌써 시간이 이렇게... 죄송해요. 깨워 달라 그러셨는데.” “...” 헤네스는 당황해 하며 침대에서 곧장 일어나려 했지만, 준상은 그런 헤네스의 팔을 잡아 당겨 품에 안았다. “주, 준상씨?” 당황한 헤네스가 이름을 불렀지만, 준상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그녀의 머리 카락을 쓰다듬기만 했다. 그러자 처음에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던 헤네스도, 이내 가만히 눈을 감은 채 준상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준상은 한참이나 그렇게 가만히 헤네스를 품에 안고 있다가 주위가 완전히 어두워지자 그제서야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미안, 배고프지?” “아, 아뇨. 괜찮아요. 하나도 배 안 고파요.” 준상은 얼른 몸을 일으키며 그렇게 말하는 헤네스의 모습을 보며 피식 웃고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옷 입어라. 나가서 맛있는 거 먹고 오자.” “괘, 괜찮은데.” “내가 배고파서 그래.” “네...” 헤네스는 어쩐지 기대가 어긋났다는 듯한 표정으로 입술을 삐죽거리며 벗어둔 옷을 챙기러 침실에서 빠져 나갔다. “후우...” 준상은 헤네스가 침실에서 빠져 나가자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귀여운 갈색 머리 아가씨는 가끔 놀라울 정도로 여성스러운 느낌을 풍길 때가 있어서, 그럴 때마다 준상은 몸 안에서 끓어오르는 욕망을 억누르느라 심력을 쏟아 부어야만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방금도 제법 위험했다. 준상은 잡념을 떨쳐 버릴 겸 침대에서 일어나 간단하게 몸을 풀었다. 그리고 벗어둔 옷을 챙겨 입은 다음 불을 켜고 거실로 나갔다. 그러자 탁자 위에서 뒹굴거리고 있는 몽몽이의 모습이 보인다. “...” 준상은 손가락을 뻗어 탁구공을 삼킨 것 마냥 동그랗게 튀어나온 몽몽이의 배를 살짝 눌러보았다. -끽? 그러자 몽몽이가 앞발을 내밀어 준상의 손가락을 덥석 움켜잡았다. 손가락을 들어 올리자, 마치 낚시줄에 걸린 물고기마냥 대롱거리며 딸려온다. 그렇게 손가락을 들었다 놨다 하며 몽몽이랑 놀고 있는데 옷을 갖춰 입은 헤네스가 거실로 나왔다. “저 준비 끝났어요.” “천천히 해도 되는데.” “배고파서요.” “...” 준상은 헤네스를 보며 고개를 끄덕인 후, 배가 볼록 튀어나와 있는 몽몽이를 윗옷 주머니에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자.” 준상이 그렇게 말하며 손을 뻗자, 헤네스는 밝게 웃으며 그의 손을 맞잡았다. 그들은 유원지와 맞닿아 있는 식당가로 향했다. 근처에서 괴물 꽃이 출현한 탓인지 유원지는 상당히 한산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지만, 덕분에 두 사람은 조금은 느긋한 분위기를 연출하며 식사 시간을 만끽할 수 있었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다시 방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간단하게 몸을 씻고 잠자리에 들었다. 준상은 그대로 다시 잠을 청하려 했지만, 문득 그의 품에 파고들던 헤네스가 몸을 일으키더니 그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준상씨.” “응?” “저 부탁 하나만 해도 되요?” “말해봐.” 헤네스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용히 말했다. “키스 한 번만 해주세요.” “...” 한 침대에 누운 상태로 서로의 체온을 느끼면서 그냥 키스 한 번만 하고 넘어가는 것이 남자에게 얼마나 고역인지 이 소녀는 정말 모르는 걸까. 준상은 한숨을 푸욱 내쉰 다음 그녀의 얼굴을 끌어당겨 촉촉하게 젖은 그 입술에 살짝 입을 맞춰 주었다. “됐니?” “네!” 헤네스는 발그레하니 얼굴을 붉히고는 행복한 표정으로 그의 가슴에 얼굴을 기댔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잠을 청하려 하는 준상의 눈앞에 메시지가 나타났다. 축하합니다! 펫 ‘헤네스 브레아’의 호감도가 100이 되었습니다. :호감도가 높을수록 펫의 성장이 빨라집니다. -호감도는 최대 120까지 상승 가능합니다. -호감도가 100이상일 경우 펫의 속성에 따라 특정 능력이 증폭될 수 있습니다. “...” 준상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삼켰다. 사람의 마음을 수치로 나타낸다는 것 역시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가보다 하고 그냥 창을 닫으려는데, 다시금 메시지 하나가 그의 시야에 나타났다. 축하합니다! :당신은 처음으로 펫 호감도 100에 도달했습니다. -당신의 위업을 찬양하며 ‘너무 멋진 주인님’ 칭호를 부여합니다. [칭호 상세 정보 확인은 이곳을 누르십시오.] “...” 갈수록 태산이다. 준상은 피식 웃으며 칭호의 정보를 확인했다. [너무 멋진 주인님] :처음으로 펫 호감도 100에 도달한 자에게 부여되는 칭호. -효과: 동시 소환 가능한 펫의 숫자가 1 증가합니다. -칭호는 획득시 자동으로 효과가 적용됩니다. 동시 소환 가능한 펫의 숫자가 또다시 하나 증가했다. 이렇게 되면 현재 준상이 동시에 소환할 수 있는 펫의 숫자는 모두 셋. 준상은 생각이 난 김에 헤네스의 정보를 살짝 들여다보았다. 펫 정보 이름 : 헤네스 브레아 종류 : 히딕스인 레벨 : 8Lv 경험치 : 1572 등급 : 불명 분류 : 복합 성장 : 조숙(대) 속성 : 물 스킬 : 교섭 7Lv, 인맥 4Lv [정보] 호감도 : 101 충성도 : 81 카드슬롯 : 5개 [정보] 설명 : 행성 히딕스의 중앙대륙 남서부에 위치한 델로드란 태생. 금단의 숲과 마주하고 있는 성곽도시 이벨류아의 실질적인 지배자인 브레아 가문에서 막내딸로 태어나, 명문가 영애들에 대한 수준 높은 교육으로 이름 높은 린더젤 기숙학교 2학년에 재학 중. 타고난 친화력을 바탕으로 한 높은 교섭 능력과 그러한 교섭을 통해 사람 사이의 관계를 구축하고 활용하는 인맥 능력은 그녀가 지닌 능력 가운데서도 특히 주목할 만하다. 이런 저런 일이 많이 있었던 탓인지, 레벨이 어느새 상당히 높아져 있었다. 준상은 이왕 살펴보는 김에 몽몽이의 정보도 확인해 보았다. 펫 정보 이름 : 몽몽 종류 : 주머니 다람쥐 레벨 : 13Lv 경험치 : 6211 등급 : Rare 분류 : 복합 성장 : 일반(중) 속성 : 땅 스킬 : 안목 11Lv, 보관 8Lv [정보] 호감도 : 81 충성도 : 89 카드슬롯 : 2개 [정보] 설명 : 배에 주머니를 가지고 있는 이 귀여운 다람쥐는 가치 있는 아이템을 알아보는 능력과 수집한 아이템을 보관하는 아공간 주머니를 가진, 마법으로 변형된 희귀종입니다. 이 주머니는 기본적으로 1세제곱미터 부피의 아이템을 보관할 수 있으며, 허용된 부피 안에서라면 그 안에 수납 가능한 아이템의 종류나 개수에 제한이 없습니다. 몽몽이의 경우에는 헤네스와는 달리 호감도 보다 충성도가 더 높았다. 게다가 레벨은 무려 13. 헤네스보다 월등하게 높은 수준이었고, 그에 비례해서 스킬 레벨 역시 상당히 높은 수준이었다. 자신의 안목 레벨이 이제 고작 5레벨 정도인 것을 감안하면, 몽몽이의 안목 레벨은 가히 엄청난 수준인 셈이다. 그러고 보면... 유원지에서 다크 시드의 기척을 가장 먼저 인식했던 것도 바로 몽몽이였다. “그래서였군.” “네? 뭐가요?” “그냥 혼잣말이야.” “...” 준상은 눈앞에 펼쳐져 있던 메시지 창을 닫은 후 헤네스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으며 잠을 청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다시 다음날. 오늘도 어김없이 조금 늦은 시간에 브런치를 먹고 있는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운을 입고 머리 수건을 감은 채 허니브레드를 먹으며 기쁨의 탄성을 토하고 있던 헤네스는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자 화들짝 놀라며 얼른 침실로 도망쳐 들어갔다. 준상은 그 모습을 보며 소리 없이 웃음을 짓다가 조용히 대답했다. “들어와.” 그러자 어제와 마찬가지로 서윤과 그의 길드원 네 명이 스위트룸 안으로 들어온다. 다만 어제와 다른 점이 있다면 얼굴이 시커멓게 죽어 있다는 정도. 모르긴 해도 밤새도록 꽤나 시달렸던 모양이다. “많이 피곤해 보이는군.” 준상이 자리를 권하며 말하자 서윤은 자리에 앉으며 대답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고생했다.” 어차피 돌아가는 상황을 뻔히 아는터라 길게 이러니 저러니 얘기할 필요가 없었다. 준상은 자리에서 일어나 캐비닛을 인벤토리에서 꺼내더니 서윤에게 서류를 한아름 안겨 주었다. “이건?” 갑자기 이게 뭔가 싶은 표정으로 서윤이 묻자, 준상은 서류를 다 꺼낸 뒤 캐비닛을 인벤토리로 되돌린 다음에야 자리에 앉으며 대답했다. “김종경의 금고 안에 있던 서류들이다.” “네?” 서윤은 화들짝 놀라며 얼른 서류의 내용을 확인했다. 준상은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나는 봐도 뭐가 뭔지 모르겠더군. 하지만 금고 속에 보관해 둘 정도라면 보통 물건은 아닐 거다.” “그, 그렇군요.” 그러자 서윤의 옆에서 눈가에 기미가 잔뜩 낀 채로 앉아 있던 진세아가 뭔가 하는 표정으로 서류 하나를 집어 들더니 이내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이, 이건...” 그녀는 얼른 서류들을 파라락 펼쳐 보더니 이를 부드득 갈았다. “이 개자식들... 이래 놓고 그렇게 발뺌을... 아우, 속 터져.” 준상은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시 말했다. “쓸모가 있겠나?” “있다 뿐이겠습니까. 이거면 당분간 어르신들 입이 쑥 들어갈 겁니다.” “다행이군.” 김종경은 준상이 처리를 했지만, 이번에 괴물 꽃이 등장함에 따라 정치인들의 관심이 다시금 귀환자들의 능력으로 집중되고 있었다. 어떤 자들은 중국과 미국처럼 귀환자들로 특수 부대를 창설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들고 나온 상황인데다, 서윤과 그의 길드원들에게는 그런 일들을 추진함에 있어 앞잡이 노릇을 하라는 압력까지 들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이 서류들을 무기로 사용한다면, 적어도 당분간은 그런 압력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준상은 다시 말했다. “뉴스에서 봤다. 특수 부대 창설의 논의가 있다고?” 서윤은 한숨을 푸욱 내쉬며 대답했다. “네. 사실 그게 제일 골치입니다. 중국과 미국의 선례를 따르자는 식인데다 이런 식의 문제는 거부하면 애국심이 의심 받기 때문에 여론이라든가...” “그거라면 걱정할 필요 없다.” “네? 어째서...” “중국과 미국의 시도는 이미 실패했다. 그쪽에서는 숨기고 있겠지만, 확인할 방법이 아주 없지는 않을테니 그걸 이용해 보도록.” 준상의 말에 서윤은 놀란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큰 도움이 될 겁니다. 그런데... 정말 신뢰할 수 있는 정보입니까?” “물론. 내가 직접 보았다.” “직접... 보셨다구요?” “그래.” 다른 사람들은 뭔 소린가 싶은 표정이었지만, 서윤은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일전에 준상이 총에 너무 의존하지 말라고 하면서 미국의 정황을 살피라고 한 적이 있다. 그것을 기회로 서윤은 다른 나라의 귀환자들에 대한 정보를 모았는데, 그 와중에 몇 가지 규칙성을 발견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퀘스트는 가급적 같은 나라 사람들끼리 수행하게 된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준상은 그런 규칙성을 무시한 채 다른 나라의 인원들을 퀘스트에서 보았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준상은 일반적인 퀘스트의 규칙성조차 무시할 정도의 존재라는 의미가 된다. 서윤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다시 물었다. “설마... 어제 나타난 그 괴물도 퀘스트의 일환인 겁니까?” 준상은 바로 대답했다. “그렇다.” “역시 그랬군요.” 고개를 끄덕이는 서윤을 바라보며 준상은 다시 말했다. “때문에 너희들은 앞으로 더 강해질 필요가 있다.” 졸린 얼굴을 하고 있던 다른 길드원들은 준상의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고, 다시 서윤이 그들을 대표해서 준상에게 질문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준상은 조용히 대답했다. “아직 언론에 너희들의 존재가 발표되지는 않았지만, 그건 조금만 조사해 보면 알게 될 일이겠지.” “네, 뭐... 아마 내일쯤 해서 공식 발표가 나갈 겁니다. 어떻게 이름이 직접 나가는 것까지는 간신히 막았지만, 알아보려고 마음먹는다면...” 거기까지 말을 하던 서윤은 아차 싶은 표정을 짓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설마... 그 놈들이 저희를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말씀이십니까?” 준상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00118 트롤러 ========================================================================= 서윤과 다른 네 명의 길드원은 침묵에 잠겼다. 방송에서는 여전히 현대에 나타난 괴물에 대해 이래저래 말이 많았지만, 실질적으로 그것이 얼마나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있는 것은 여기 모인 사람들 뿐이었다. 그런 괴물이, 다른 세계도 아니고 바로 이곳으로 직접 찾아온다니. 이건 다시 말하자면, 더 이상 그들에게 안락한 휴식 따위는 남아있지 않다는 말이나 다름 없었다. “저희가... 이길 수 있겠습니까?” 이미 그 답은 말을 꺼낸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지만, 서윤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준상에게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대답은 예상을 벗어나지 못했다. “무리겠지.” “...” “괴물 꽃의 소식을 듣고 너희들을 찾아올 정도라면, 적어도 그 놈보다 약한 놈은 아닐테니까.” “으음...” 그 정도의 상대라면, 이기는 건 둘째 치고 살아남을 방법을 걱정하는 것이 옳다. 준상은 어둡게 가라앉은 다른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 “어째서 그곳으로 달려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경솔한 행동이었다.” 서윤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유원지에서 나오다가 도망치는 사람들을 보고 반쯤은 호기심으로 달려갔었던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준상은 다시 말했다. “어쨌든, 일이 기왕 이렇게 된 이상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너희들은 지금보다 훨씬 강해져야만 한다.” 그러자 가만히 듣고 있던 서유미가 물었다. “방법이 있을까요?” 준상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으로선 너희들이 그 괴물 꽃과 같은 상대와 직접 맞싸워 이길 가능성은 사실상 전무하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 “하지만 단순히 살아남는 것이 목적이라면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 말에 서윤이 대답했다. “시간을 끌라는 말씀이시군요.” 준상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대로다. 하지만 결국 이것도 완벽한 대책은 아니다.” “어째서입니까.” “만에 하나,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놈들이 찾아온다면 어찌 되겠나.” “아...” 뭐라해도 그들은 언제 퀘스트에 불려갈지 모르는 상황. 준상 역시 예외일 수 없었다. 그때 침실에서 헤네스가 쭈뼛거리며 걸어 나와 준상 옆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 앉았다. 준상은 그런 헤네스를 보더니 이내 윤성렬을 가리키며 말했다. “헤네스.” “네?” “저기 저 남자랑 팔씨름 한 번 해봐.” “팔씨름이요?” 난데없는 준상의 말에 헤네스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까지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준상은 진지한 표정으로 팔씨름 하는 방법을 헤네스에게 설명해 주었다. 헤네스는 척 보기에도 팔뚝이 자기 허리 두께는 되어 보이는 윤성렬의 모습을 보더니 울상이 되어 준상에게 되물었다. “농담이죠?” “진담이다.” “...” 너무나 담담한 준상의 대답에 헤네스는 완전히 겁먹은 표정이 되었고, 윤성렬 역시 난감해 하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기... 무슨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지만 준상은 손을 들어보이며 그의 말을 끊어 먹었다. “하라면 해.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 결국 헤네스와 윤성렬은 탁자를 마주 보고 앉아 팔씨름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헤네스.” “네?” “광전사 콤보를 쓰도록.” “그럴게요.” 헤네스는 손을 잡기 전에 콤보 카드를 욕쟁이 할매에서 광전사로 바꾸고는 윤성렬과 손을 맞잡았다. 윤성렬은 살짝 자존심이 상한 모습으로 헤네스의 작고 부드러운 손을 잡았다. 준상이 강한 것은 이미 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런 연약한 아가씨와 팔씨름이라니. 그로서는 자신을 너무 무시한다는 생각을 감출 수 없었다. “시작.” 하지만 준상의 조용한 말과 함께 팔씨름이 시작되자 윤성렬의 표정은 급변했다. 생각보다 헤네스의 악력과 팔 힘이 상당했기 때문이다. “으음...” 윤성렬은 상대를 얕보던 기분을 버리고 진지한 태도로 팔씨름에 임했다. 그러자 초반에 살짝 우세를 보이던 헤네스의 팔은 천천히 뒤로 넘어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탁자 위에 손등이 닿고 말았다. 어떻게 보면 싱거운 결말이었지만, 윤성렬은 알 수 있었다. 이 아가씨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팔씨름을 해본 일이 없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단순히 힘만 세면 장땡일 것 같지만 대부분의 운동이나 시합이 그렇듯이 힘이 대등하다면 경험 많은 사람이 우세한 건 팔씨름도 마찬가지. 근육의 절대량만 보더라도 헤네스가 윤성렬과 대등하게 힘을 겨루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믿기 어려운 수준의 일이다. 하지만, 정말 놀랄 일은 그 이후에 벌어졌다. “헤네스는 본격적인 수련을 시작한지 고작 한 달도 되지 않았다.” “네?” 준상의 말에 윤성렬은 놀라서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로 되묻고 말았다. 다른 사람들은 이게 뭔소린가 싶은 표정이었지만, 직접 손을 맞잡고 힘을 겨루어본 윤성렬로서는 도저히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준상은 다시 말했다. “원래 근육이란 것은 손상과 재생을 반복하면서 강해지기 마련이다. 보통 사람들은 이 사이클이 상당히 느리기 때문에 무리한 수련을 할 경우 오히려 몸에 악영향을 초래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들은 그런 보통 사람의 범주에서 이미 벗어난 존재다.” “아...” “우리가 처한 현실을 감안해 보면 카드나 시드를 많이 가진 쪽이 더 유리한 건 당연한 일이겠지만, 사실 이런 것들은 추가적인 단련의 여지가 없는 부분들이지.” “확실히... 말씀대로입니다.” 준상은 다시 그들에게 물었다. “너희들은 이상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나?” “무슨...” “보통 게임이라고 하면, 당연히 있어야 할 것이 우리들이 진행하는 퀘스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스테이터스, 곧 개개인의 능력치 정보다.” “네?” 준상은 가만히 설명을 시작했다. 그들이 처해있는 상황은 게임과 매우 유사하다. 퀘스트도 있고, 인벤토리도 있고, 스킬 역시 카드라는 형태로 존재한다. 그런데 오직 하나, 개개의 인물들이 지닌 능력을 표시하는 스테이터스만은 지금껏 본 적이 없었다. 물론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아직 그것에 해당하는 특수 카드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기능이 개방되지 않은 것으로 여길 수도 있겠지만, 준상처럼 높은 레벨을 달성하고 수많은 추가 보상을 받은 사람조차 그와 같은 기능이 개방되어 있지 않은 건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그래서 준상은 생각했다. 아예 처음부터 능력치를 보는 기능 자체가 없었던 것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그 대신 존재하는 것이, 상대의 능력과 자신의 능력을 대략적으로 비교하는 통찰의 능력이 아닐까. 보통 게임에서는 레벨 업을 할 경우 스탯 보너스를 부여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해당 레벨로 올라갈 동안의 행동 성과를 스탯 보너스라는 형태로 부여함으로서 캐릭터의 성장 방향을 유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만드는 일종의 규약인 셈이다. 귀환자들이 수행하고 있는 이 퀘스트들 속에서도 레벨은 그 간의 행동을 평가하는 등급 체계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여기서 흔히 생각하는 일반적인 게임과 다른 점이 드러난다. 레벨이 상승하더라도 스테이터스 변화가 표면적으로 나타나지 않고 랜덤 카드라는 형태의 보상만 주어지기 때문이다. 물론 겉으로만 보여지지 않을 뿐, 내부적으로는 변화가 일어났을 수도 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면, 이 퀘스트 속에서 레벨은 오직 카드라는 형태로 주어지는 스킬에만 영향을 끼칠 뿐 스테이터스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가정 역시 가능하다. 일반적인 게임에서 능력치란 것은 한번 올라가면 다시는 내려가지 않는 공산품 가격과도 같다. 하지만 실제로는 어떨까. 하루 동안 운동을 쉬면 일주일을 보충해야 한다는 것이 통설이다. 물론 몇몇 게임에서는 육체적인 노쇠함이나 성별, 종족, 부상 등에 의한 능력치 변화나 패널티를 부여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것은 실시간으로 변화하는 능력치를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어서 사용되는 편법일 뿐이다. 실제로 흔히 사용되는 근력이라는 형태의 능력치만 해도 사실 하나의 수치로 표현하기에는 애매한 부분이 많다. 똑같이 힘이 강한 사람이라도 팔이나 허리, 다리 등 특히 강한 부분이 구분된다. 이런 사람들의 힘을 일률적인 하나의 수치로 표현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똑같이 90의 근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지닌 모든 신체 부위의 근력이 동일한 것일까. 그래서 준상은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이 게임에서의 레벨이란 오직 그 레벨에 도달하기까지의 행동 평가일 뿐이고, 때문에 레벨이 올라도 새로운 카드의 습득과 장착 가능한 카드의 코스트 증가만이 이루어질 뿐 스테이터스의 변화는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아닐까 하고. 이것은 펫으로 묶여 있는 헤네스에게도 적용이 된다. 그녀는 카드를 장착할 수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주인으로 설정된 준상의 힘을 빌려오는 것에 불과하다. 경험치를 쌓고 레벨을 올림으로서 실질적인 향상이 이루어지는 부분은 교섭이나 인맥과 같이 그녀가 고유하게 지니고 있는 스킬 뿐이다. 이와 같은 상황을 종합해 보면, 단순히 능력치 만이라면 레벨과 상관없이 최대한 끌어올리는 것이 가능하다는 가정이 성립된다. 어떻게 보면 말이 안 되는 얘기 같지만, 실제로 준상은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지금의 강함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으음...” 임서윤과 다른 네 사람의 길드원들은 준상의 설명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저희도 고된 수련을 통해 지금보다 훨씬 더 강해질 수 있다는 뜻이군요.” 준상은 바로 대답했다. “그 말대로다. 단, 여기에는 하나의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길드원들 가운데 가장 육체 능력에 관심이 많은 윤성렬이 바로 반응했다. “그게 무엇입니까.” “바로 몸의 재생 능력이다.” “재생 능력...” 준상은 모두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몸이 회복할 여지가 없이 그저 혹사하기만 한다면, 그건 단순히 자학일 뿐이다. 하지만 그때 그때 바로바로 회복할 수 있다면 보통의 단련보다 수십 배는 더 강력한 효과를 얻을 수 있게 되지.” “아...” 그때, 가만히 듣고 있던 진세아가 물었다. “잠깐만요.” “뭐지?” “서윤씨나 성렬씨, 그리고 유미씨까지는 원래 육체 능력을 사용하는 쪽이니 그 말씀대로겠지만, 저나 다빈이처럼 마법을 사용하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그 말에 준상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모른다.” “네?” “나는 마법을 쓰지 못한다. 알 턱이 없지 않은가.” “...” 준상은 그렇게 말하고는 문득 떠올랐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마법 사용자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 있긴 하군.” “그게 뭐죠?” 진세아는 혹시나 하고 바로 물었다. 하지만 준상은 담담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마법 사용자도 칼에 찔리거나 머리가 박살나면 죽는 건 마찬가지라는 사실.” “끙...” 진세아가 신음 소리를 내며 입을 다물자, 준상은 다시 말했다. “나는 지금껏 누군가와 함께 힘을 합쳐 싸워본 적이 없다. 때문에 너희들의 전법이나 수련 방식에 대한 직접적인 조언은 불가능하다.” “...” “시드나 아이템 강화 같은 부분의 지원도 가능하긴 하지만, 그보다 본질적인 것은 너희들이 스스로 얼마나 강해지고자 노력하는가 하는 점이겠지.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이게 전부다.” 00119 트롤러 ========================================================================= 준상이 말을 마치고 등받이에 등을 기대자, 서윤과 그의 길드원들은 잠시 아무 말 없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하지만 사실, 고민하고 말고 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요즘 들어 이런 저런 일이 많이 일어나서 분주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어찌 되었든 준상을 포함한 모든 귀환자들의 궁극적인 최종 목표는 이 빌어먹을 게임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는 것이기 때문이다. “해보겠습니다. 결과가 불확실하다면 모를까, 이미 성공한 사람마저 있는데 포기하는 건 말이 안되죠.” 서윤이 먼저 말을 꺼내자, 나머지 길드원들도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인다. 준상은 가만히 그들을 돌아본 다음, 다시 입을 열었다. “앞서도 말했지만, 구체적인 수련 과정까지 도움을 주기는 힘들다.” “아닙니다. 충분히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준상은 잠시 생각하더니 서윤에게 물었다. “근처에 컨테이너 하우스를 꺼낼 만한 장소가 있을까.” “컨테이너 하우스요?” 서윤은 잠시 턱을 쓰다듬더니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옥상은 위험할테고... 호숫가 주변의 공터가 낫겠군요.” “어제 일로 사람이 붐비지 않을까.” “그건...” 서윤은 얼굴을 찌푸리더니 다시 말했다.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근처에는 아무래도 마땅한 곳이 없습니다. 저녁이나 밤시간대라면 근처 초등학교나 고수부지 같은 곳을 이용할 수는 있겠습니다만, 지금 시간대에는... 교외라면 모를까.” “그렇군.” 준상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럼 잠시 나갔다 오도록 하지. 바람도 쏘일 겸.” “알겠습니다.” 침실로 들어가 옷을 챙겨 입고 나오자, 탁자 위에 쇼핑백이 한 보따리 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건?” 준상의 물음에 진세아가 얼른 대답했다. “어제 쇼핑한 물건들이에요. 건네준다는 걸 깜박 잊는 바람에.” “그랬군.” 바로 캐비닛을 꺼내 쇼핑백들을 챙겨 넣은 준상은 모두와 함께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혹시나 해서 험비 대신 제가 전에 타던 차를 가져 왔습니다.” “고맙다.” 서윤에게 키를 건네받은 준상은 헤네스와 함께 은회색 세단에 탑승한 다음, 서윤을 따라 주차장을 나섰다. 그들은 약 삼십분 정도 차를 달려 한적한 교외의 산길로 접어들었다. 산 아래에 차를 멈추고 십여분 정도 산을 오른 그들은 이내 인적이 드문 공터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준상은 주위를 둘러본 다음 별다른 인적이 없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인벤토리에서 컨테이너 하우스를 꺼냈다. 서윤을 제외한 다른 길드원들은 커다란 컨테이너 하우스가 갑자기 허공에서 불쑥 튀어나오자 탄성을 질렀다. “와...” 준상은 천천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불을 켰다. “서윤.” “네.” “의자를 꺼내서 적당히 앉아 있어라.” “알겠습니다.” 서윤이 벽장 안에서 접이식 의자를 꺼내주는 모습을 뒤로 한 채 준상은 안쪽의 문을 열고 들어가 다용도실에 들여놓은 캐비닛을 열었다. 그 안에는 준상이 지금까지 습득했던 시드들과 아이템이 가득 차 있었다. “흠...” 준상은 잠시 시드와 아이템 들을 살펴보다가, 조용히 몽몽이를 소환했다. 몽몽이는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내기가 무섭게 후다닥 준상의 몸을 타고 올라 어깨 위에 자리를 잡았다. “자, 받아라.” 준상은 어깨 위에 앉은 몽몽이네게 시드를 담은 주머니와 아이템들을 건넸고, 몽몽이는 그것을 받아 자신의 주머니에 보관했다. 대충 필요한 아이템들을 챙긴 준상은 다시 캐비닛을 닫은 후 거실로 돌아왔다. 사람들은 거실 탁자 주위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서 컨테이너 하우스 내부를 신기한 듯이 돌아보던 중에 준상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자 얼른 자세를 바로 하며 그에게 주목했다. 어쩐지 영화나 드라마 속에 나오는 어설픈 신병들 같은 모습을 바라보며 준상은 탁자 위에 몽몽이를 내려 놓았다. “꺼내봐라.” 준상의 명령이 떨어지자 몽몽이는 자신의 주머니 안에 담겨 있던 아이템들을 탁자 위에 우르르 쏟아 놓았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하나의 커다란 자루였다. 사람들은 무슨 약 같은 건가 하며 바라보다가 준상이 자루를 열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헉!” “이, 이게 전부... 시드란 말입니까?” “말도 안돼...” 도대체 뭘 얼마나 때려 잡아야 저 정도의 양이 나올 수 있는 걸까 싶을 정도의 무지막지한 양에 서윤과 그의 동료들은 입이 쩍 벌어지고 말았다. 일전에 연합에서 사람들에게 매입한 시드도 많다 싶었던 그들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준상은 그들이 놀라거나 말거나 자루 옆의 아이템 가운데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것은 거무튀튀한 색을 띈 볼품없는 모양의 지팡이였다. 준상은 그것을 정다빈에게 건넸다. “이게... 뭐죠?” 정다빈은 갑자기 자신에게 왠지 꺼림직한 느낌의 지팡이가 건네지자 머뭇거리며 준상에게 물었다. 하지만 준상은 담담한 표정으로 이렇게 대답했다. “확인해 봐라.” “...” 하긴, 물을 필요가 뭐 있는가. 예전에는 아이템 확인 기능이 개방 안 돼서 그랬다 쳐도, 지금은 엄연히 그녀 역시 아이템 확인 능력이 있는데. 정다빈은 왠지 뻘쭘해져서 휴대폰을 꺼낸 다음 아이템 확인을 실행했다. 그리고, 잠시 뒤 아이템의 정보가 화면에 나타나자 입이 쩍 벌어지고 말았다. “헉! 이... 이건...” 준상은 다빈이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자 조용히 말했다. “선불이다.” “네?” “선불이다.” “...” 다빈은 처음에 준상이 선물이라고 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이어진 그의 말은 선물이 아닌, 선불이었다. “어, 얼마나...” “모르는 사이도 아니니 원가만 받도록 하지.” “원가... 라뇨?” “계산법. 잊은 건가?” “...” 정다빈에게 건네진 전격의 지팡이는 전격 마법 사용시 쿨타임 10퍼센트를 감소시키는 효과가 있다. 이전에 시드를 매입할 때 준상이 제시했던 계산법을 적용할 경우 2의 9승 곱하기 십만이니까... “오천 백 이십 만원...” 정다빈은 기절할 것 같은 가격에 그대로 절망했다. 확실히 전격 마법을 사용하는 그녀로서는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사고 싶은 물건이었지만, 말이 오천 만원이지, 당장 수입이 전무한 그녀로서는 그야말로 눈이 돌아갈 정도의 가격이다. “조, 조금만 깎아 주시면...” “불가.” “크흑...” “하지만 모르는 사이도 아니니, 48개월 할부로 해주지.” “...” 정다빈은 얼른 휴대폰의 계산기를 두들겨 보았다. 하지만 절망스럽기는 마찬가지. 48개월로 나눠서 낸다 쳐도 100만원 이상을 매달 납부해야만 한다. “끙...” 정다빈은 앓는 소리를 냈다. 사실 이전 같았으면 이런 거금을 내고 아이템을 장만하거나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까짓 쿨타임 10퍼센트 정도 없어도 그냥 몸으로 때우면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어제 같은 괴물이 다시 나타난다면 쿨타임 10퍼센트 때문에 목숨이 왔다 갔다 할 수도 있었다. 준상은 갈등하는 그녀를 보고 치명타를 날렸다. “지금 사면 마법 공격력 3퍼센트 증가 시드 2개를 끼워주도록 하지.” 마법 공격력 증가라니! 그런 시드도 있었단 말인가! 준상의 계산법 대로라면 하나에 사십만원 짜리에 불과하지만, 정다빈은 지금까지 그런 종류의 시드는 구경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3퍼센트가 두 개면 무려 6퍼센트! 희귀성을 감안하면 실제 가치는 준상의 계산법보다 몇 배는 뛰어오를 수도 있었다. 결국 정다빈은 준상의 유혹에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 “사, 살게요.” “잘 생각했다.” 준상은 전격의 지팡이에 마법 공격력을 높여주는 마인드 시드 두 개를 끼워 정다빈에게 건네주었다. 그 모습을 처음부터 지켜보던 다른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준상은 다시 길이가 약 이십 센티미터 정도 되는 단도 하나를 꺼내들고는 임서윤과 서유미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것은 치명타 확률을 10퍼센트 높여주는 단도다. 누가 쓰겠나.” “...” 순간 임서윤과 서유미의 눈에서 불꽃이 튕겨 올랐다. 임서윤. 나이 27세. 재계 서열 2위인 XX그룹의 늦둥이 막내아들. 어렸을 때부터 무기에 큰 관심을 보여서 현대 화기부터 시작해서 고대의 병기에 이르기까지 무기에 관해서는 따라올 사람이 없을 정도의 해박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다. 쉽게 말해, 밀덕. 사용 중인 콤보 카드는 칼카스의 웨펀 마스터. 얼핏 보기에는 재벌가 막내아들인 임서윤이 압도적으로 유리해 보이지만, 사실 서유미도 떳떳하게 밝히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재벌회장의 딸인 것은 마찬가지다. 그녀는 부친의 돈을 쓰는 걸 별로 내켜하지 않았지만, 이런 상황에서조차 거부할 정도는 아니다. “유미씨는 애용하는 식칼이 있으시잖습니까. 그냥 그거 쓰시죠.” 임서윤이 넌지시 말했지만, 서유미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싫어요. 저도... 필요해요.” 그러자 곧바로 두 사람 사이에 뜨거운 열기 같은 것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육천 내겠습니다.” 가장 먼저 임서윤이 말했다. 준상의 계산법대로라면 이 단검의 기본 가격은 정다빈이 산 지팡이와 마찬가지로 오천 백 이십 만원. 정다빈이 그 가격을 듣고 기절할 뻔 했던 걸 생각하면, 서윤의 행동은 돈지랄이나 다름 없었다. 그러자 서유미가 질 수 없다는 듯이 머뭇거리며 그 말을 받았다. “칠천... 이요.” 하지만 그녀의 말이 나오기 무섭게 서윤은 기다렸다는 듯이 가격을 올렸다. “팔천!” “크윽...” 서유미는 입술을 깨물어야만 했다. 용돈이랍시고 보내온 돈을 지금까지 한푼도 쓰지 않고 모아뒀으나, 그걸 전부 합쳐도 서윤이 제시한 금액을 넘기는 힘들었다. 평택의 집을 처분하면 가능하기는 하지만, 자신을 키워준 노부부를 생각하면 그것도 못할 짓. 결국 이 대결은 서윤의 승리로 싱겁게 끝이 나버렸다. 서유미는 우울한 표정으로 옷자락을 만지작거렸다. 그러자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헤네스가 서윤에게 단도를 건네주는 준상에게 말했다. “저... 준상씨.” “왜?” “이거... 유미씨한테 빌려드려도 되나요?” “...” 그녀가 꺼낸 것은 준상에게 받은 단검이었다. 이 무한의 연쇄라는 이름의 단검은 호위대장 아뉴트가 사용하던 것으로서 투척후 칼집으로 되돌아오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어쌔신 나이프와 마찬가지로 치명타 확률 10퍼센트를 높여주고, 여기에 추가로 치명타 피해를 20퍼센트 증가시켜 주는 기능까지 있다. 굳이 준상의 계산법을 적용하면, 귀환 기능을 제외하고도 그 가격이 무려 107조를 넘는 어마어마한 물건. 하지만 준상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그건 이미 너한테 준 물건이니, 일일이 나에게 물을 필요 없다.” “감사합니다!” 헤네스는 얼른 자신이 가지고 있던 단검을 끌러 유미에게 내밀었다. “당분간 빌려드릴게요. 잘 쓰고 돌려주세요.” “고, 고마워요...” 서유미는 헤네스가 건네준 예쁘장한 작은 단검을 받아들고는 기쁜 표정으로 잠시 그것을 쓰다듬었다. “확인해 보세요.” “네.” 서유미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어 아이템 확인을 해보았다. “...” 그녀는 화면에 나타난 아이템 정보를 확인한 순간, 그대로 굳어 버렸다. “이, 이건...” “쉿.” “쉬, 쉿.” 서유미는 얼른 손가락을 들어 헤네스의 동작을 따라해 보인 후, 단검을 소중하게 품안에 갈무리 했다. 준상은 다시 길이가 일 미터가 안 되는 짧은 검 하나를 꺼내어 들었다. “이건 야수에 대해 150퍼센트 피해를 입히는 검이다. 누가 쓰겠나.” 그러자 이번에도 서윤이 번쩍 손을 들었다. “저요! 제가 쓰겠습니다.” 그러면서 서유미를 바라 봤지만 그녀는 행복한 표정으로 가슴 어림을 쓰다듬을 뿐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있었다. 뭔가 이상하다 싶었지만, 서윤은 손을 내리지 않았다. “그럼 네가 쓰도록. 등급이 낮으니 가격은 아까의 절반만 받겠다.” “감사합니다.” 아이템 판매는 그렇게 저녁이 될 때까지 이어졌다. 진세아와 윤성렬은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에게 알맞은 아이템을 얻지는 못했지만, 대신 +2 강화된 반지와 시드를 여러 개 사들여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보충할 수 있었다. 어쩐지 바가지를 쓰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하지만 어차피 정해진 가격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달리 구할 방법이 있는 물건도 아니니 준상이 정한 가격을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보면 이런 물건을 지금 구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행운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 저희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래.” 임서윤과 그 일행이 레인지로버를 타고 먼저 출발하는 모습을 지켜본 준상과 헤네스는 은회색의 세단을 타고 천천히 호텔로 돌아갔다. 호텔 스위트룸에 돌아오자 헤네스는 가만히 준상의 옆에 앉아서 말을 건넸다. “멋대로 나서서 죄송해요.” “뭐가?” “그 단검이요. 모처럼 주신건데.” “신경 쓰지 마라.” 헤네스는 밝게 미소를 짓더니 이내 소파에 앉은 준상의 무릎에 머리를 기댄 채 그대로 누워 버렸다. 준상은 무릎 위에 흘러내린 그녀의 갈색 머리를 쓰다듬으며 조용히 티비를 보다가, 어느새 천상의 다리 수호 퀘스트와 크롤로바간 퇴치 퀘스트의 보상 습득 기한이 다 되어 감을 깨달았다. 잠시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준상은 그냥 지금 보상을 습득하기로 마음먹었다. 곧바로 세 가지 퀘스트의 보상을 수령하자, 준상의 몸에서 레벨 업을 뜻하는 흰 빛이 뿜어져 나왔다. “준상씨?” 가만히 준상의 무릎을 베고 있던 헤네스는 갑자기 그의 몸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자 화들짝 놀라며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괜찮으니 그대로 있어.” “네...” 준상은 헤네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보상 상자를 확인해 보았다. 퀘스트가 쌓인 탓에 열어야 할 보상 상자의 개수가 제법 많았다. 히든 퀘스트 달성으로 인한 추가 보상 상자만 여섯 개에, 트리플 S급 보상 상자가 하나, 여기에 구원자 등급의 보상 상자와 특수 임무 보상 상자까지 모두 합해 아홉 개나 된다. 여기에 레벨 업 보상인 랜덤 카드와 에슈탈렌의 구세주 칭호는 덤이다. 에슈탈렌의 구세주 칭호는 이전의 다른 구세주 칭호들과 마찬가지로 에슈탈렌 지역에서 퀘스트 달성시 경험치 보상을 늘려주는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준상은 먼저 추가 보상 상자부터 열어 보았다. 축하합니다! 추가 보상 상자에서 특수카드 ‘인벤토리’를 획득했습니다. :특수카드를 획득하면 봉인된 특수기능을 해제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이미 특수기능 ‘인벤토리’가 개방되어 있으므로 인벤토리 용량을 2칸 확장합니다. -현재 당신의 인벤토리에는 서로 종류가 다른 17가지 물품을 등록하여 사용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첫 번째 보상 상자에서 대뜸 인벤토리 카드가 나왔다. 특정 등급을 달성했을 때 나오는 인벤토리 카드와는 달리 겨우 두 칸 짜리에 불과했지만, 인벤토리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기능 중 하나이다. 어쩐지 시작이 좋다는 느낌을 받으며 준상은 두 번째 상자를 열었다. 카드정보 명칭 : 관통 레벨 : 1Lv 경험치 : 0 등급 : Uncommon 분류 : 스킬 성장 : 일반(중) 속성 : 없음 효과 : 치명타 발생시 방어가 20퍼센트 무시됩니다. Cost : 15 Seed : 2슬롯 새로운 스킬이 나왔지만 뭔가 미묘한 느낌이다. 효과 자체는 무척 좋은 편이다. 치명타 발생이라는 조건이 붙기는 했지만, 상대의 방어도를 일정 부분 무시할 수 있다면 그만큼 더 큰 피해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제한된 스킬 슬롯이다. 준상이 주력으로 사용하는 카드 조합을 감안해 보면, 영웅 등급의 피칠갑 카드나 슈퍼 레어 급의 듀얼 스톰 카드 같은 것을 빼고 이것을 장착하는 건 별로 좋은 선택이 아니다. 일단 현재로서는 새로운 콤보 카드 조합이 나오기를 기대할 수밖에 없을 듯 하다. 준상은 입맛을 다시며 세 번째 상자를 열었다. 카드정보 명칭 : 반딧불이 레벨 : 1Lv 경험치 : 0 등급 : Uncommon 분류 : 소환 성장 : 일반(소) 속성 : 빛 효과 : 반짝이는 빛의 정령 1개체를 소환합니다. Cost : 10 Seed : 2슬롯 이번에 나온 것은 새로운 정령이었다. 이름만 봐도 대충 어떤 정령인지 감이 잡히기는 하지만, 일단 시험 삼아 반딧불이를 소환해 보았다. 그러자 준상의 눈앞에 깜박이는 빛 덩어리 하나가 모습을 드러낸다. 어쩐지 레벨 업 현상이나 소환시 나타나는 빛과 비슷한, 눈부시기 보다는 부드러운 느낌의 은은한 빛이다. 가만히 준상의 무릎을 베고 티비를 보던 헤네스는 머리 위에 갑자기 나타난 작은 빛 덩어리를 보자 신기해 했다. “이게 뭐죠?” “빛의 정령.” “아... 정말 예뻐요.” 헤네스가 손을 뻗자 반딧불이는 그녀의 손 주위에 하얀 빛가루를 뿌리며 춤추듯 흔들리기 시작했다. 준상은 헤네스가 반딧불이와 노는 모습을 지켜보며 네 번째 상자를 열었다. 카드정보 명칭 : 은신 레벨 : 1Lv 경험치 : 0 등급 : Uncommon 분류 : 스킬 성장 : 조숙(중) 속성 : 그림자 효과 : 적의 시선을 피해 몸을 숨깁니다. (실행시 이동불가) Cost : 15 Seed : 2슬롯 그러자 이전에 나온 적이 있는 은신 카드가 다시 한 번 모습을 드러낸다. 다른 점이 있다면 전과는 달리 언커먼 등급이라는 것 정도인데, 효과의 설명은 바뀐 것이 없었다. 속성이 없었던 것과는 달리 그림자 속성이 부여되고 여기에 코스트와 시드 슬롯이 조금 증가한 것이 눈에 보이는 차이점의 전부인데, 그룬발의 망토가 지닌 투명화 효과에 비하면 역시 부족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나중에 더 높은 등급의 카드가 나오면 모를까, 지금으로서는 별로 쓸 일이 없을 듯 하다. 00120 트롤러 ========================================================================= 카드정보 명칭 : 질주 레벨 : 1Lv 경험치 : 0 등급 : Rare 분류 : 스킬 성장 : 조숙(대) 속성 : 바람 효과 : 장착시 이동속도 40퍼센트 증가. Cost : 20 Seed : 3슬롯 다섯 번째 카드는 질주 레어. 원래 가지고 있던 커먼 등급의 카드보다 효과가 두 배로 늘어난 것이 특징이다. 준상은 데안달라스의 파발꾼 콤보의 구성 카드를 수정한 다음 마지막 여섯 번째 상자를 열었다. 하지만 여섯 번째 카드는 이미 가지고 있는 언커먼 등급의 포박 카드였다. 다시 시도를 하자, 이번에는 힐링 포션이 나왔다. 힐링 포션 역시 많이 있어서 나쁠 것이 없는 카드. 준상은 입맛을 다시며 트리플 S급 보상 상자를 열었다. 축하합니다! 특수 보상 ‘엘리멘탈 드래곤’을 획득했습니다. :‘엘리멘탈 드래곤’는 한 가지 특수 스킬을 갖춘 공격형 펫입니다. -현재 소환 가능한 펫의 숫자는 3마리입니다. “헛!” 드래곤이라니? 이런 것도 펫으로 부릴 수 있는 건가? “왜요?” “음... 그게... 아무것도 아니니까 신경 쓰지마.” “...” 헤네스는 준상이 뭔가 딴 짓을 하고 있음을 깨달았는지 입을 삐죽거리며 다시 티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준상은 쓴웃음을 지은 채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우선 펫 관리 화면을 열어 보았다. 축하합니다! :엘리멘탈 드래곤이 새로운 펫으로 등록되었습니다. -현재 동시 소환 가능한 펫의 숫자는 셋입니다. -현재 소환 가능한 펫은 모두 셋입니다 1.주머니 다람쥐 [상세 정보] 2.헤네스 브레아 [상세 정보] 3.엘리멘탈 드래곤 [상세 정보] -펫 소환을 원하시면 해당 번호를 누르시고, 만약 소환을 원치 않으신다면 n을 누르세요 (1/2/3/n) _ 엘리멘탈 드래곤이 펫으로 등록된 것을 확인한 준상은 상세 정보를 열어 보았다. 펫 정보 이름 : [없음] 종류 : 엘리멘탈 드래곤 레벨 : 1Lv 경험치 : 0 등급 : Rare 분류 : 공격 성장 : 대기만성(대) 속성 : 없음 스킬 : 정령증폭 1Lv [정보] 호감도 : 50 충성도 : 50 카드슬롯 : 3개 [정보] 설명 : 투명한 몸과 잠자리 같은 얇은 날개를 가진 작고 귀여운 이 드래곤은 흔히 요정용이라고도 불리는 보기 드문 희귀종입니다. 엘리멘탈 드래곤의 본체는 매우 약하고 여리지만, 그렇다고 우습게봐서는 곤란합니다. 이 작고 귀여운 드래곤은 정령과 합체함으로서 그 정령이 지닌 힘을 증폭시키는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정령증폭은 정령 본연의 힘이 강할수록, 정령증폭 스킬의 레벨이 높을수록 강한 위력을 발휘합니다. 설명만 봐서는 그가 익히 소설이나 영화 같은 곳에서 봤던 크고 강력한 드래곤과는 뭔가 본질적으로 다른 종류의 것인 듯한 느낌이다. 투명한 몸과 잠자리 같은 얇은 날개를 가진 작고 귀여운 드래곤. 백문이 불여일견. 크기가 크면 몰라도 작다고 묘사되어 있으니 여기서 한 번 불러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준상은 곧바로 소환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허공에 또다시 은은한 빛이 서리며 작은 생물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입을 삐죽거리며 반딧불이와 놀고 있던 헤네스는 다시 허공에서 빛이 뿌려지며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내자 얼른 고개를 돌려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이내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아!” 마치 그림 속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투명한 몸체를 지닌 작은 드래곤이 요정의 그것과 같은 투명한 날개를 파닥이며 하늘을 날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애는 또 뭐죠?” “엘리멘탈 드래곤.” “드래곤이요?” “나도 잘은 모르겠지만 일단은 그렇다는데.” “와아...” 헤네스는 반딧불이에게 했듯이 엘리멘탈 드래곤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엘리멘탈 드래곤은 그녀의 손을 피해 준상의 머리 뒤로 숨어버렸다. “칫...” 아쉬운 듯한 모습으로 입을 삐죽거리는 헤네스의 모습에 준상은 속으로 웃음을 삼키며 엘리멘탈 드래곤에게 다시 눈앞으로 나오도록 인터페이스를 통해 지시를 내렸다. 그러자 엘리멘탈 드래곤은 작은 날개를 파닥거리며 다시 준상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준상은 우선 정령증폭이란 것을 시험해 보기로 했다. 대상은 이미 소환되어 있는 반딧불이. 명령을 실행하고 대상을 지정하자 엘리멘탈 드래곤은 반딧불이와 서로 마주보며 허공을 빙글빙글 돌더니 이내 하나로 모습이 합쳐졌다. 그러자 원래부터 희미한 빛을 뿌리고 있던 엘리멘탈 드래곤의 몸이 마치 반딧불이처럼 환한 빛으로 감싸인 채 빛나기 시작한다. “바, 방금 뭐가 어떻게 된거죠?” “반딧불이와 합체한거야.” “그런 것도 가능해요?” “이 녀석의 특기인가봐.” 공격력도 시험해 보고 싶었지만, 호텔 방 안에서 시험해 보기는 곤란했기 때문에 일단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했다. 헤네스는 엘리멘탈 드래곤을 향해 다시 손을 뻗었지만, 이 작고 귀여운 드래곤은 사람의 손이 익숙하지 않은 모양인지 다시금 그녀의 손을 피해 얼른 도망쳤다. “치...” 결국 몇 번 더 시도해보던 헤네스는 아쉬운 표정으로 다시 티비를 향해 돌아누웠다. 준상은 그런 헤네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번에는 구원자 등급의 보상 상자를 열었다. 카드정보 명칭 : 강타(H) 레벨 : 1Lv 경험치 : 0 등급 : Hero 분류 : 스킬 성장 : 조숙(극대) 속성 : 땅 효과 : 1. 힘을 모아 강력한 일격을 가한다. (5단계 차지, 쿨타임: 5초) 2. 경직 시간 40퍼센트 감소. 3. 차지 상태로도 걷기가 가능해집니다. 4. 발동시 반경 10미터 이내의 적에게 광역 스턴이 발생합니다. (기본지속시간 2초, 중첩가능) Cost : 40 Seed : 5슬롯 마침내 세 번째 영웅 카드가 등장했다. 그것은 바로 강타. 이전에 사용하던 슈퍼 레어급 강타와 비교하면 쿨타임은 반으로 줄었고, 경직시간 감소 효과는 두 배로 늘었다. 여기에 강타 발동시 반경 십 미터 이내의 적에게 광역 스턴이 발생하는 부가 효과까지! 준상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무투가 콤보의 구성을 변경한 다음 마지막 남은 특수 임무 보상 상자를 열었다. 카드정보 명칭 : 물어뜯기 레벨 : 1Lv 경험치 : 0 등급 : Hero 분류 : 스킬 성장 : 조숙(극대) 속성 : 없음 효과 : 1. 대상이 되는 적 1개체를 물어뜯어 교상을 입힌다. 2. 기본 공격력 20% 상승. 3. 공격속도 20% 상승 4. 상대의 체액을 마실 경우 생명력 흡수 효과 부여. Cost : 20 Seed : 5슬롯 “...” 준상은 자신도 모르게 이마를 감싸 쥐었다. 하지만 무심하게도 영웅 등급의 물어뜯기 카드가 등장하자 눈앞에 또다시 메시지가 우르르 쏟아지기 시작한다. 준상은 새로운 메시지를 열어보았다. 축하합니다! :콤보카드를 조합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현재 조합 가능한 콤보 카드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돌아온 미친개 [상세 확인] -콤보 카드 조합을 원하시면 해당 번호를 누르시고, 만약 조합을 원치 않으신다면 n을 누르세요(1/n) _ 어쩐지 그럴 것 같더라니. 준상은 일단 상세 정보를 확인해 보았다. 돌아온 미친개 -하리아스 지방의 전설적인 미친개! 그가 돌아왔다! 피로 물든 검붉은 이빨은 불패의 상징이며 또한 공포의 신화이다. 경배하라! 여기 진정한 미친개가 돌아왔다! [조합상세] 물어뜯기, 2연격, 광폭, 피칠갑, 피칠갑 (영웅 등급 이상인 카드가 세 가지 이상) -효과: 1. ‘물어뜯기’시 추가공격속도 200퍼센트 증가. 2. ‘물어뜯기’시 추가공격력 200퍼센트 증가. 3. ‘물어뜯기’시 추가 공포 유발 확률 45퍼센트 증가. 4. ‘물어뜯기’시 생명력 흡수 20퍼센트 증가. 5. ‘광견의 위엄’ 활성화 가능. “...” 그야말로 어마어마하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효과의 향연이다. 영웅 등급 콤보 카드란 이런 것이다 라는 느낌. 하지만 하필 첫 번째 얻은 영웅 콤보가 미친개라니... 어쩐지 준상은 자신의 존재 의의에 회의가 느껴질 지경이었다. 게다가 광견의 위엄이라니. 준상은 한숨을 푸욱 내쉬면서 효과를 확인해 보았다. 광견의 위엄 : 미친개는 피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그 모습을 눈에 담는 순간, 사용자보다 레벨이 낮은 존재들은 도망치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끼게 됩니다. -물어뜯기 스킬 발동시 이 효과는 더욱더 극대화됩니다. “...” 준상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감싸 쥐었다. “왜 그러세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 준상은 한숨을 푸욱 내쉬며 다음 메시지를 확인했다. 축하합니다! :당신은 처음으로 ‘돌아온 미친개’ 조합에 성공했습니다! -당신의 위업을 찬양하며 ‘진정한 미친개’ 칭호를 부여합니다. [칭호 상세 정보 확인은 이곳을 누르십시오.] 어쩐지 상세 정보를 확인하기 싫어지는 칭호다. [진정한 미친개] :돌아온 미친개 조합을 최초로 성공한 자에게 부여되는 칭호. -효과: 추가 공포 유발 확률 10퍼센트 증가 -칭호는 획득시 자동으로 효과가 적용됩니다. 추가 공포 확률이 또 올랐다. 준상은 곰곰이 현재 공포 유발 확률을 계산해 보았다. 피칠갑 영웅 카드가 45퍼센트. 여기에 돌아온 미친개 콤보가 또 45퍼센트. 미친개 관련 칭호의 공포 유발 효과가 30퍼센트인데 발톱 효과로 인해 다시 두 배로 증폭되었으니 60퍼센트. 그리고 광전사 칭호의 공포 유발 효과가 5퍼센트. 결국 돌아온 미친개 콤보를 사용할 경우 공포 유발 확률은 모두 155퍼센트나 되는 셈이다. 블러드로드 콤보를 사용하더라도 150퍼센트. 이 정도면 동급의 적이라 해도 공포 유발에서 벗어나기는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칭호나 콤보 이름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효과만은 역시 인정할 수밖에 없을 듯 하다. “후우...” 준상은 가볍게 한숨을 몰아쉰 후 다음 메시지를 확인했다. 축하합니다! :당신은 처음으로 영웅급 콤보 카드를 완성했습니다! -당신의 위업을 찬양하며 ‘진정한 영웅’ 칭호를 부여합니다. [칭호 상세 정보 확인은 이곳을 누르십시오.] 레어급 콤보를 달성했을 때는 이런 것이 없었던 것 같은데... 준상보다 먼저 레어급 콤보를 달성한 사람이 있었다고는 생각하기 힘드니 아마도 영웅 콤보부터만 적용되는 특전이 아닐까 싶다. [진정한 영웅] :영웅급 콤보 카드를 처음으로 완성한 자에게 부여되는 칭호. -효과: 사용자에게 ‘불굴’ 특성이 부여됩니다. -칭호는 획득시 자동으로 효과가 적용됩니다. 불굴? 이 짧은 하나의 단어만으로는 내용을 이해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준상은 상세 정보를 확인해 보았다. 불굴 : 영웅의 진정한 무서움은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는 불굴의 의지입니다. -이 특성을 가지고 있는 자는, 사망에 이르는 피해를 입더라도 최소한의 생명력을 유지한 채 한번 부활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발동 후 한 달이 지나야만 재발동이 가능합니다. “헛!” 준상은 깜짝 놀랐다. 죽어도 다시 살아날 수 있는 특성이라니! 이런 것조차 가능하단 말인가! 표현이 복잡하기는 했지만, 결국 요약하면 여벌의 목숨을 하나 더 부여받은 것이나 마찬가지. 한 달이라는 재발동 기간이 부여되어 있기는 하지만 지금까지 나왔던 그 어떤 것보다도 더 엄청난 보상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이것만 믿고 나댈 수는 없는 일이겠지만, 그래도 마지막 히든 카드로서 더할 나위 없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마지막 남은 랜덤 카드를 뽑았다. 카드정보 명칭 : 도약 레벨 : 1Lv 경험치 : 0 등급 : Rare 분류 : 스킬 성장 : 대기만성(중) 속성 : 없음 효과 : 장착시 도약력 40퍼센트 증가. Cost : 20 Seed : 3슬롯 랜덤 카드에서 나온 것은 도약 레어. 준상은 파발꾼 콤보의 구성을 변경함으로써 보상의 정리를 모두 마쳤다. 00121 트롤러 =========================================================================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다음 날. 이번에는 서윤이 혼자 찾아왔다. “일전에 살펴보신 차들에 대한 구체적인 옵션 정보입니다.” “수고했다.” 준상이 팜플렛을 받아들자 서윤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건네주신 서류들은 잘 활용하고 있습니다.” “쓸모가 있었다니 다행이군.” 준상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지만, 서윤은 난처한 표정으로 그 말을 받았다. “그런데... 조금 문제가 생길 것 같습니다.” 준상은 팜플렛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물었다. “문제라면?” 서윤은 가볍게 한숨을 쉬고는 대답했다. “새로운 귀환자들에게 눈을 돌리는 듯 합니다.” 준상은 그제서야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아직 돌아오지 않은 자들을 말하는 건가?” 서윤은 씁쓸한 표정으로 그 말에 대답했다. “네. 이번에 연합이 사실상 붕괴하면서 기존에 있던 귀환자들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자 새로운 귀환자들에게 눈을 돌린 거죠.” “문제로군.” “병원에서 비몽사몽 헤매고 있을 때 대충 설명해주고 사인하라고 시키면 뭔지도 모르고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긴... 준상도 병원에 있을 때 시달렸던 걸 생각하면 아직까지도 치가 떨린다. 생각해 보면 지금 그가 다른 사람들을 차갑게 대하는 것도 당시 느꼈던 환멸감의 영향이 크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환멸감 때문에 지금까지 억눌러 두었던 감정들이 되살아났다고 하는 편이 맞을지도 모른다. “대책은?” 서윤은 헤네스가 차를 타서 가져오자 그녀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인 다음 대답했다. “아시다시피 모든 불공정한 계약은 무지에서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준상은 턱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보를 더 공개하자는 건가?” “그렇습니다. 귀환자가 어느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는지, 그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들이 얻을 수 있는 보상이 무엇인지... 귀환자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 모두가 자세히 알고 있다면 그만큼 자신의 가치에 대해 이해하기가 쉬워질 겁니다.” 확실히... 귀환자들이 자신의 가치에 대해 명확히 이해하고 있다면 그만큼 정부의 농간에 놀아날 가능성이 줄어든다. “통할까?” “이미 귀환자에 대해서는 각국 정부가 시인을 한 상태이고, 튜토리얼에 대해서도 대략적인 내용이 공개되어 있는 상황이니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다만...” “다만?” 준상의 물음에 서윤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시드를 매입하는 이유가 문제입니다.” “흠...” 준상은 가만히 찻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서윤은 그런 준상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번에 괴물 꽃이 나타나면서 SNS상에 이런 저런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어떤?” “시드를 복용하면 귀환자 같은 힘을 사용할 수 있게 된다는 얘기도 있고, 잘못 복용하면 괴물 꽃 같은 것이 된다는 식의 얘기도 있습니다.” “...” 누가 소문을 낸 것인지는 몰라도 의외로 제법 날카로운 구석이 있다. 실제로 다크 시드의 사용법이 그와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크 시드와 일반 시드의 차이에 대해서는 준상 옆에서 다른 귀환자들에 비해서도 많은 정보를 접하고 있는 서윤이나 그의 길드원들도 모르는 얘기다. 이건 과연... 우연일까? 서윤은 준상의 표정이 무거워지는 것을 보고 다시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제 생각에는 귀환자들의 이탈을 막기 위해 정보 기관 등에서 의도적으로 퍼뜨린 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만, 어쨌든 이런 소문들이 난무하는 상황이니 귀환자에 대한 일반인의 시각도 별로 좋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괴물 꽃이 사실은 폭주한 귀환자라든가... 그런 식의 비약도 있겠군.” “말씀대로입니다.” 단순한 초자연적인 현상도 아니고, 수만명이 한 날 한 시에 빛을 뿜으며 사라지는 현상이니 그만큼 음모론도 풍성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준상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아예 대놓고 까발리자 이거로군.” 서윤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 셈입니다. 물론 이렇게 정보를 공개한다 해도 의심이 쉽게 수그러들 것 같지는 않지만요.” “하긴.” 준상은 소파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혹시 내 이름을 팔고 싶은 건가?” 서윤은 얼른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럼 왜 이런 얘기들을 나에게 묻는 거지?” 준상의 담담한 말에, 서윤은 뒤통수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현재 우리나라의 귀환자를 대표하는 분이니까요.” 하지만 그런 서윤의 말에 준상은 고개를 저었다. “단순히 상징적인 의미라면 몰라도, 나는 그런 식의 책임감을 떠맡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서윤은 그 말에 대해 반박하려 했지만 준상은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았다. “그만. 필요한 일이라면 스스로 판단해서 하면 될 일.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그것 뿐이다.” “...” “시드 매입의 이유는 적당히 연구 목적이라고 둘러대도록. 실제로 그러려는 사람도 많을테니.” 단호한 준상의 말에 서윤은 한숨을 푸욱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알아서 하도록 하죠.” 준상은 옵션 정보를 확인한 후 실물을 살피기 위해 자동차 매장을 방문했다. 정장도 아니고 대충 셔츠 위에 점퍼를 챙겨 입은 채 헤네스와 함께 손을 잡고 매장에 들어서자 지루한지 하품을 하고 있던 직원이 자세를 바로하고 정중한 모습으로 그들을 맞이한다. “어서 오십시오. 저희 매장을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 별로 눈에 띄는 옷차림도 아닌데 어쩐지 과잉 친절이 물씬 느껴지는 직원의 응대. 하지만 뒤따라온 서윤은 그 모습을 보고도 별로 새삼스러울 것이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이런 저런 요구를 한 다음 준상에게 말했다. “원래 이런 비싼 수입차 매장에서는 일상복 차림의 방문객을 더 신경 쓰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째서?” “말쑥하게 차려 입고 오는 사람들은 오히려 한두푼씩 열심히 모은 돈으로 차를 장만하러 오는 경우가 많죠. 하지만 저나 준상씨처럼 대충 일상복을 입고 온다는 건 이런데 들어오는 것에 대해 그리 긴장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졸부거나 돈 많은 집 자식일 가능성이 높다는 얘긴가.” 노골적인 준상의 말에 서윤은 쓴웃음을 지었다. “뭐... 까놓고 말하자면 그런 셈입니다.” “흠...” 사실 따지고 보면 준상도 졸부 맞다. 얼마 전까지는 고작해야 자취방 하나가 재산의 전부였던 몸이니 말이다. 어쨌거나 준상은 서윤이 이끄는 대로 몇 군데 전시장을 돌아본 다음 결국 포드 F150 랩터로 낙착을 보았다. 너무 눈에 띄는 차를 선택한 것이 아닌가 싶기는 했지만, 연합을 무너뜨린 일로 그의 존재에 대해 은근히 입소문이 나있기도 한 상황이고, 어중간한 존재들은 그의 존재를 추적하거나 하기도 어려운 상황이기에 그냥 마음에 드는 차를 선택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본래 랩터 같은 수입차량은 계약을 하더라도 미국으로부터 물량이 건너오는 시간 때문에 약 6주에서 7주 뒤에나 차량은 인도 받을 수 있지만, 마침 이전에 수입된 물량이 남은 것이 있어서 이 시간을 좀 더 단축할 수 있었다.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귀찮게 해서 미안하군.” “별 말씀을요.” 준상은 서윤에게 뒷일을 맡긴 후 헤네스와 함께 매장을 빠져 나왔다. 조금 지루한 표정을 짓고 있던 헤네스는 매장 밖으로 나오자 크게 기지개를 켰다. “으으음...” “지루했지?” “조금요.” 혀를 살짝 내밀며 웃는 헤네스의 모습에 준상은 마주 미소를 지었다. “좀 늦었지만 점심 먹으러 가자.” 그러자 헤네스는 얼굴을 찌푸렸다. “저 이러다 살찌겠어요.” “왜?” “맨날 너무 맛있는 것만 먹다보니 식욕에 대한 절제심이 없어지는 것 같거든요.” 준상은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 “그럼 굶을까.” 그러자 헤네스는 말도 안된다는 듯이 얼른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럴 순 없죠. 얼른 가요. 배고프단 말이에요.” “후후...” 두 사람은 천천히 시내를 돌아보며 나름 즐겁게 시간을 보내다가 날이 어둑어둑해져서야 호텔로 돌아왔다. 그들이 호텔 안으로 들어서자 기다렸다는 듯이 직원이 말했다. “임서윤님과 그 일행 분들이 5층 수영장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 준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헤네스와 함께 5층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에서 내리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직원이 그들을 수영장으로 인도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하얀 대리석으로 치장된 실내 수영장이 모습을 드러낸다. “아, 오셨습니까.” 준상과 헤네스가 들어서자 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던 윤성렬이 벌떡 일어나 인사를 했다. 헤네스는 갑자기 거구의 윤성렬이 수영복만 입은 채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기겁하며 준상의 등 뒤로 숨었다. 준상은 그런 헤네스의 손을 가볍게 쥐어 주며 윤성렬을 향해 물었다. “뭐하는 거지?” 헤네스의 반응을 본 윤성렬은 얼른 가운을 걸쳐 자신의 몸을 가리며 대답했다. “그게... 고강도 전신 운동으로 수영만한 것이 없다고 서윤씨가...” “...” 확실히 수영은 일반적인 육상 운동에 비해 체력 소모가 극심한 운동이다. 단적인 예로 근력 운동을 전혀 하지 않은 상태로 수영만 계속하더라도 골격근량이 상당한 수준으로 상승할 정도니 효율 면에서는 정말 더 할 나위가 없다. 게다가 생존을 염두에 둔다면, 수영을 배워두는 것 자체만으로도 큰 도움이 된다. 물론 이런 식으로 호텔 수영장을 전세 내서 수련을 한다는 것 자체가 서윤 같은 부르주아에게나 가능한 발상이긴 하지만 말이다. 준상은 고개를 돌려 실내 수영장 안을 살펴보았다. 그곳에서는 임서윤과 진세아, 정다빈, 그리고 서유미가 온몸에서 희미한 아지랑이를 피워 올리며 열심히 수영에 전념하고 있었다. 준상에 비하면 어린애 걸음마 수준이긴 하지만, 그들 역시 재생률의 효과를 보고 있는 것이다. “이리 앉으시죠.” 윤성렬의 말에 따라 준상과 헤네스는 파라솔 아래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헤네스는 윤성렬이 깔아준 수건 위에 살짝 앉은 후 조심스럽게 준상에게 물었다. “준상씨.” “응?” “여긴 뭐하는 곳이에요?” “수영장. 헤엄 쳐본 적 없어?” “네...” 하긴 그녀가 살던 곳에 이런 식의 수영장이 있을 리도 없고, 고작해야 강이나 호수에서 물놀이를 하는 것이 전부일 것이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모를까, 헤네스 같은 양갓집 규수가 다른 사람들 앞에 벗은 몸을 드러내고 물놀이를 즐기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니 그녀가 헤엄을 쳐본 적이 없는 건 차라리 당연한 일이다. 그때 수영모자와 물안경을 착용한 채 열심히 수영을 하던 진세아가 물 밖으로 나오더니 수영장 바닥에 벌렁 누우며 이렇게 소리쳤다. “아우우우... 이젠 정말 때려 죽여도 못해!” 헤네스는 그녀의 수영복 차림을 보고는 다시 흠칫 놀라더니 이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진세아가 입은 수영복은 비키니도, 그렇다고 하이레그도 아닌 평범한 감청색 원피스 수영복이었지만, 훤히 드러난 허벅지나 어깨만으로도 헤네스는 감히 똑바로 그녀의 모습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럼 다음은 제가...” “네.” 옅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모습으로 바닥에 누운 진세아의 모습을 본 윤성렬은 몸에 두르고 있던 가운을 벗어 놓고 옆에 놓인 새 가운을 그녀의 몸 위에 덮어준 다음 비어있는 레인으로 몸을 던지더니 호쾌하게 접영을 펼쳐 보인다. 진세아는 숨을 헐떡거리며 물안경을 벗고 몸을 일으키다가 윤성렬의 모습을 보고는 피식 웃어버렸다. “헤네스양 오니까 신났네. 하여튼 모태솔로들은 저래서 안 된다니까. 후우우...” 그녀는 깊게 심호흡을 한 다음 몸을 일으키더니 헤네스 옆으로 다가와 앉더니 수영모자를 벗어 탁자에 올려두며 말했다. “헤네스양도 한번 해봐요.” “저, 저는 괜찮아요.” 기겁을 하며 손을 내젓는 헤네스의 모습에 진세아는 피식 웃고는 그대로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아우우우... 죽겠다.” 그리고 앓는 소리를 내자 헤네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많이 힘들어요?” “네. 아주 온 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그렇군요...” “하지만 뭐... 이참에 다이어트한다고 생각하면 그뿐일 수도 있고...” 진세아의 말에 헤네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이어트가 뭐에요?” “음... 쉽게 말하면 살빼기?” “살빼기요?” 순간 헤네스의 눈이 반짝 빛났다. 아까는 농담 삼아 말했지만, 사실 자꾸만 맛있는 걸 사주는 준상 때문에 살짝 고민 중이었기 때문이다. 모처럼 자기 생각해서 맛있는 걸 사주는데 거부하기도 그렇고, 그냥 마구 먹자니 살찔까봐 무섭고... 그러던 차에 수영이 살빼기에 아주 좋다는 말이 들려오니 솔깃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실 굳이 수영을 하지 않더라도 이전에 했던 것처럼 준상과 함께 수련에 매진하면 될 일이었지만, 헤네스는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정말... 살이 빠지나요?” “물론이죠.” 진세아는 이 순진한 소녀의 반응에 씩 웃으며 말했다. “해볼래요?” “하, 하지만...” “사실은, 이미 헤네스양 수영복도 준비해뒀거든요.” “네?” 그제서야 헤네스는 아차 싶었지만, 이미 진세아는 씩 웃으며 그녀의 손목을 잡은 상태였다. “주, 준상씨...” 헤네스는 준상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준상은 오히려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대답했다. “배워둬서 나쁠 것은 없지. 해봐.” 준상의 허락이 떨어지자 진세아는 씩 웃으며 헤네스의 손목을 잡아 끌었다. “자, 그럼 가실까요. 공주님.” “저는 역시... 그냥...” “이제 와서 그런 소리 해봐야 늦었어요.” “...” 결국 헤네스는 진세아의 손에 이끌려 그대로 탈의실로 끌려가고 말았다. 기운이 하나도 없다더니. 헤네스는 그제서야 진세아가 처음부터 자신을 노리고 물 밖으로 나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떠올렸지만, 그건 이미 한참이나 늦어버린 깨달음이었다. ============================ 작품 후기 ============================ 레에나아아아아아아아아아 흐아아아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아아아아아아 어어어어어어어어어 뚤훍뚤훍뚥(읗) 뚤훍뚤훍뚥(읗) 뚤훍뚤훍뚥따다다 뚤훍뚤훍뚥(읗) 뚤훍뚤훍뚥(읗) 뚤훍뚤훍뚥따다다 뚤훍뚤훍뚥(읗) 뚤훍뚤훍뚥(읗) 뚤훍뚤훍뚥따다다 뚤훍뚤훍뚥(읗) 뚤훍뚤훍뚥(읗) 뚤훍뚤훍뚥따다다 뚤훍뚤훍뚥(읗) 뚤훍뚤훍뚥(읗) 뚤훍뚤훍뚥따다다 돌날라봤자 뚱배발이빠순이 연참을빨하자 빨을렐예뺘아~ 돌날라봤자 뚱배발이빠순이 연참을빨하자 빨을렐예뺘아~ 돌날라봤자 뚱배발이빠순이 연참을빨하자 빨을렐예뺘아~ 돌날라봤자 뚱배발이빠순이 연참을빨하자 빨을렐예뺘아~ 돌날라아아아~ 뚤훍뚤훍뚥(읗) 뚤훍뚤훍뚥(읗) 뚤훍뚤훍뚥따다다 뚤훍뚤훍뚥(읗) 뚤훍뚤훍뚥(읗) 뚤훍뚤훍뚥따다다 뚤훍뚤훍뚥(읗) 뚤훍뚤훍뚥(읗) 뚤훍뚤훍뚥따다다 (옭ㅎ옭ㅎ옭ㅎ옭ㅎ옭ㅎ옭ㅎ옭ㅎ옭ㅎ) 뚤훍뚤훍뚥(읗) 뚤훍뚤훍뚥(읗) 뚤훍뚤훍뚥따다다 (옭ㅎ옭ㅎ옭ㅎ옭ㅎ옭ㅎ옭ㅎ옭ㅎ옭ㅎ) 횽이야 야라나이카 방귀남이 베리나이야 청개구리야 야라나이카 방귀남이 베리나이야 청개구리야 야라나이카 방귀남이 베리나이야 청개구리야 야라나이카 방귀남이 베리나이야 청개구리야 술을열어볼래 해굿바람에비다야라 뚤훍뚤훍뚥(읗) 뚤훍뚤훍뚥(읗) 뚤훍뚤훍뚥따다다 뚤훍뚤훍뚥(읗) 뚤훍뚤훍뚥(읗) 뚤훍뚤훍뚥따다다 뚤훍뚤훍뚥(읗) 뚤훍뚤훍뚥(읗) 뚤훍뚤훍뚥따다다 (옭ㅎ옭ㅎ옭ㅎ옭ㅎ옭ㅎ옭ㅎ옭ㅎ옭ㅎ) 뚤훍뚤훍뚥(읗) 뚤훍뚤훍뚥(읗) 뚤훍뚤훍뚥따다다 (옭ㅎ옭ㅎ옭ㅎ옭ㅎ옭ㅎ옭ㅎ옭ㅎ옭ㅎ) 돌날라간때 멜에날에삼연참했누 댈래발이가슴일때 베리메리파스~ 돌날라간때 멜에날에삼연참했누 댈래발이가슴일때 베리메리파스~ 돌날라간때 멜에날에삼연참했누 댈래발이가슴일때 베리메리파스~ 돌날라간때 멜에날에삼연참했누 댈래발이가슴일때 베리메리파스~ 돌날라아아아~ 뚤훍뚤훍뚥(읗) 뚤훍뚤훍뚥(읗) 뚤훍뚤훍뚥따다다 뚤훍뚤훍뚥(읗) 뚤훍뚤훍뚥(읗) 뚤훍뚤훍뚥따다다 뚤훍뚤훍뚥(읗) 뚤훍뚤훍뚥(읗) 뚤훍뚤훍뚥따다다 (옭ㅎ옭ㅎ옭ㅎ옭ㅎ옭ㅎ옭ㅎ옭ㅎ옭ㅎ) 뚤훍뚤훍뚥(읗) 뚤훍뚤훍뚥(읗) 뚤훍뚤훍뚥따다다 (옭ㅎ옭ㅎ옭ㅎ옭ㅎ옭ㅎ옭ㅎ옭ㅎ옭ㅎ) 돌날랐구 짠놈맞춰껐얼때 말일가나올릴게 락히삭히고 돌날랐구 짠놈맞춰껐얼때 말일가나올릴게 락히삭히고 돌날랐구 짠놈맞춰껐얼때 말일가나올릴게 락히삭히고 돌날랐구 짠놈맞춰껐얼때 말일가나올릴게 락히삭히고 돌날라아아아~ 뚤훍뚤훍뚥(읗) 뚤훍뚤훍뚥(읗) 뚤훍뚤훍뚥따다다 뚤훍뚤훍뚥(읗) 뚤훍뚤훍뚥(읗) 뚤훍뚤훍뚥따다다 뚤훍뚤훍뚥(읗) 뚤훍뚤훍뚥(읗) 뚤훍뚤훍뚥따다다 (옭ㅎ옭ㅎ옭ㅎ옭ㅎ옭ㅎ옭ㅎ옭ㅎ옭ㅎ) 뚤훍뚤훍뚥(읗) 뚤훍뚤훍뚥(읗) 뚤훍뚤훍뚥따다다 (옭ㅎ옭ㅎ옭ㅎ옭ㅎ옭ㅎ옭ㅎ옭ㅎ옭ㅎ) 횽이야 야라나이카 방귀남이 베리나이야 청개구리야 야라나이카 방귀남이 베리나이야 청개구리야 야라나이카 방귀남이 베리나이야 청개구리야 야라나이카 방귀남이 베리나이야 청개구리야 술을열어볼래 해굿바람에비다야라 뚤훍뚤훍뚥(읗) 뚤훍뚤훍뚥(읗) 뚤훍뚤훍뚥따다다 뚤훍뚤훍뚥(읗) 뚤훍뚤훍뚥(읗) 뚤훍뚤훍뚥따다다 뚤훍뚤훍뚥(읗) 뚤훍뚤훍뚥(읗) 뚤훍뚤훍뚥따다다 (옭ㅎ옭ㅎ옭ㅎ옭ㅎ옭ㅎ옭ㅎ옭ㅎ옭ㅎ) 뚤훍뚤훍뚥(읗) 뚤훍뚤훍뚥(읗) 뚤훍뚤훍뚥따다다 (옭ㅎ옭ㅎ옭ㅎ옭ㅎ옭ㅎ옭ㅎ옭ㅎ옭ㅎ) <연참은 아침 시간에 이루어질 예정입니다. 푹 주무시고 아침에 확인해 보세요.> 00122 트롤러 ========================================================================= 잠시 뒤, 진세아는 부끄러워 어쩔 줄 모르는 헤네스의 손을 잡아 끌고 수영장으로 돌아왔다. “준상씨, 어때요?” 진세아의 말에 준상은 헤네스의 모습을 살펴 보았다. 수영복은 가장자리에 흰색 테두리가 있는 검은 색이었는데, 경기용에 가까운 디자인이라 몸매가 드러난다는 것을 제외하면 그다지 야한 느낌이 없었고, 그나마도 하체에는 파레오를 둘러서 허벅지 부분을 완전히 가리고 있었다. 이런 식의 노출을 해본 적이 없는 그녀를 위해 진세아 나름대로 신경을 써준 것이 눈에 보였지만, 그럼에도 헤네스는 얼굴이 잔뜩 붉어진 채 자꾸만 벌어지려고 하는 파레오 끝자락을 엉거주춤한 자세로 붙잡고 있었다. 약간 유아체형이란 느낌이 남아 있기는 했어도 수영복 밖으로 부드러운 곡선이 살아나는 모습을 보니 은근히 한창 때의 숙녀라는 느낌이 물씬 풍긴다. “예쁘군.” 준상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짧은 감상을 말하자,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하던 헤네스의 입가에도 살짝 미소가 어린다. 그 모든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진세아는 이내 자신의 어깨를 부여잡고 부르르 몸을 떨었다. “우으으... 이거 짝 없는 사람은 서러워서 못 살겠네. 어휴...” 그리고는 더 이상 눈꼴 신 모습은 못 봐주겠다는 듯이 얼른 헤네스의 손을 잡고 풀장으로 이끌었다. “자, 일단 준비 운동부터 해요.” “네...” 헤네스는 여전히 처음 입어보는 수영복이 어색한지 파레오 자락을 손으로 잡은 채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있었지만, 진세아가 앞에서 준비 운동을 해보이자 머뭇거리며 따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준비 운동이 끝나자, 헤네스는 진세아의 손에 이끌려 풀장으로 들어갔고, 그 대신 임서윤이 풀장 밖으로 나왔다. “후우...” 임서윤은 몸에서 아지랑이를 잔뜩 피워 올리며 가쁜 숨을 몰아쉬다가, 어느 정도 진정이 되자 그제서야 수영 모자를 벗으며 준상에게 다가왔다. “이거 수영도 오랜만에 하니까 영 쉽지 않군요.” “예전에 했었나?” “네, 학교 다닐 때 잠깐.” 서윤은 그렇게 말하고는 캐비닛에서 서류 봉투 하나를 꺼내 준상에게 건넸다. “관련 서류입니다. 보험이라든가, 자동차 등록이라든가... 일단 제가 다 끝내뒀습니다. 그리고 키는 여기 있습니다.” “고맙다.” “별 말씀을.” 준상은 서류와 열쇠를 받은 후 그것을 캐비닛에 보관한 다음, 열쇠는 몽몽이에게 건네주었다. 서윤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다시 시드 한 뭉치를 꺼내 준상에게 건넸다. “그리고 이건 오늘까지 매입한 시드들입니다.” “수고했다.” 준상은 시드들을 건네받은 후, 캐비닛에서 금괴가 담긴 가방을 꺼내 서윤에게 넘겼다. “대금이다.” “어이쿠, 감사합니다.” 서윤은 다른 사람이 볼 새라 얼른 가방을 열어 금괴를 확인하고는 자신의 캐비닛에 챙겨 넣었다. “일단 가서 무게를 확인한 후 정산해 드리겠습니다.” “천천히 해도 된다.” “그럴 수야 없죠. 제 신조가 가까운 사람일수록 돈 계산은 철저하게입니다.” “하긴.” 준상은 서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가까운 사이라면 가급적 금전 관계는 맺지 않는 게 여러모로 좋지만, 피치 못할 경우엔 깔끔하게 마무리를 지어야 나중에 뒷말이 나오지 않는 법이다. 간단하게 거래가 끝나자 서윤이 다시 말했다. “일단... 시드 구입을 위해서 시내에 작은 사무실을 하나 마련했습니다.” “빠르군.” “시간 끌 이유가 없으니까요. 다만... 문제는 지방에 있는 귀환자들인데, 지점을 세우는 건 좀 천천히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타산이 안 맞는 건가?” “좀 그런 면이 있습니다. 인건비라든가 사무실 유지비라든가... 귀환자가 그렇게 흔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하긴.” 서윤은 잠시 대화를 멈추더니 목에 걸고 있던 주머니 속에서 휴대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아, 접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식사는 이쪽으로. 네. 네.” 그렇게 짧게 통화를 마친 서윤은 준상에게 넌지시 말했다. “이쪽으로 식사를 가져오도록 시켰습니다. 함께 드시고 올라가십시오.” “그러지.” 잠시 기다리자 직원들이 간단한 저녁 식사를 가지고 들어왔다. 식사가 오자 그때까지 열심히 수영에 몰두하던 정다빈과 서유미, 그리고 윤성렬이 차례로 풀장 밖으로 나왔고, 진세아와 헤네스도 그 뒤를 따랐다. 누가 볼새라 얼른 허리에 파레오를 두르고 몸 위에 가운을 걸치는 헤네스의 모습에 살짝 미소를 짓던 준상은 그녀가 조심스럽게 옆에 다가와 앉자 조용히 말을 건넸다. “어때, 해 볼만 해?” “네...” 헤네스는 물이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문지르다가 준상의 물음에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며 다시 한 번 가운의 앞자락을 여몄다. “자, 수고하셨습니다. 먹고 좀 쉬었다가 계속 합시다.” “우으으... 살려주세요.” 서윤의 말에 정다빈이 앓는 소리를 내자 사람들은 밝은 표정으로 웃음을 터뜨리며 식사를 시작했다. 훈련을 위해서인지 음식들은 영양 밸런스를 최대한 고려한 메뉴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역시나 일류 호텔의 주방장들이 심혈을 기울인 음식답게 아주 맛있었다. 준상은 아주 맛있게 식사에 열중하는 헤네스를 보면서 문득 살 뺀다고 물에 들어갔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떠올랐지만, 그냥 모른 척 했다. 그들은 천천히 식사를 마친 후, 잠시 소화를 시키며 휴식을 취하다가 다시 천천히 수영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준상도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풀장으로 나왔다. “오오...” 임서윤은 물론이거니와 좀 과할 정도의 근육을 지닌 윤성렬도 준상의 모습을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터뜨렸다. 너무 우락부락하지 않으면서도, 보는 순간 이것이 남자의 몸매다 라는 느낌이 피부로 전해진다. 단순히 몸이 좋다든가 그런 식으로 표현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꿈틀거리는 근육을 통해 은연중에 뿜어져 나오는 기세는 보는 사람의 시선을 조용히 압도하는 불가사의한 마력마저 갖추고 있었다. 준상은 그렇게 다른 사람들이 숨죽이며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몸을 풀고는 이내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처음에는 우선 폼을 가다듬었다. 본격적으로 수영을 해본 것이 제법 오래되었기 때문에 예전에 수영을 처음 배울 때의 기억을 되살리고자 한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두세 번 정도 레인을 왕복하고, 어느 정도 자세가 잡히기 시작하자 준상은 천천히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이야...” 사실 그렇게 속도가 빠른 건 아니었다. 다만 근력이 엄청나다보니 물살을 가르고 나아가는 모습이 엄청나게 박진감 넘칠 뿐이다. 정다빈은 준상의 수영 모습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렇게 말했다. “뭐랄까... 확실히 운동량 하나는 끝내주겠네요.” “하하...” 그렇게 서너 번 정도 레인을 반복한 준상이 물 위로 올라오자, 잠시 휴식을 취하던 다빈이 다시 물속으로 들어갔다. “후우...” 오랜만에 해봐서 그런지 생각처럼 쉽지가 않다. 준상은 의자에 앉아 가볍게 심호흡을 하며 한쪽에서 헤네스가 열심히 수영을 배우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열심히 물장구를 치고는 있는데 생각처럼 쉽지 않은 모양이다. 물속에 얼굴을 담그고 서너번 정도 물장구를 치다가 이내 잠수함처럼 물속으로 모습을 감추는 헤네스의 모습을 보던 준상은 음료수를 마시다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풉!” 그 바람에 음료수가 뿜어져 나오는 바람에 얼른 수건으로 닦고 있는데, 갑자기 수영장 안에 서너개의 휴대폰 벨 소리가 일시에 울려 퍼지기 시작한다. 얼른 고개를 들고 바라보니 물속에서 수영을 하고 있던 서윤 일행이 일제히 목에 걸린 휴대폰을 꺼내들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빛을 뿜으며 모습을 감추었다. “이건...” 윤성렬은 긴장한 표정으로 그들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고 있었고, 수영을 가르쳐 주던 진세아가 갑자기 눈앞에서 모습을 감추자 당황한 헤네스 역시 얼른 물 밖으로 나와 준상에게 다가왔다. “퀘스트... 인가요?” “맞아.” 헤네스는 불안한 표정으로 그들이 있었던 수영장 안으로 가만히 바라보았다. 준상은 가만히 손을 뻗어 그런 헤네스의 머리를 끌어당겨 가슴에 안으며 말해다. “괜찮을거다. 그러니 걱정 말아라.” “네...” 따지고 보면 그들은 준상을 제외하고는 헤네스가 이곳에서 사귄 유일한 사람들이었다. 준상은 일단 직원에게 연락해서 방금 전 이곳에서 있었던 일을 알렸다. “그 문제라면...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당분간 임서윤님이 이곳을 완전히 빌리기로 하셨으니까요.” “다행이군.” 사실 임서윤으로서는 호텔에 머물면서 길드원들과 함께 집중훈련을 할 생각으로 그런 조치를 취했던 것인데 결과적으로 일이 이상하게 되어버렸다. 준상은 낙동강 오리알 마냥 혼자 남겨진 윤성렬과 함께 헤네스를 데리고 다음날도 수영장에서 훈련에 임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났다. 하지만 서윤 일행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들은 사라진지 이틀째가 되어서야 마침내 수영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가장 먼저 한줄기 빛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것은 임서윤이었다. 그는 물속에서 모습을 드러내기가 무섭게 바깥에 있던 준상과 헤네스를 향해 외쳤다. “빨리! 유미씨를!” “...” 준상은 그 외침을 듣자마자 서유미가 사라졌던 장소를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한줄기 빛과 함께 하얀 원피스를 입은 서유미가 모습을 드러내자 얼른 물속으로 뛰어들어 그녀를 건져냈다. “크흡...” 그녀의 가슴 위에는 붉은 피가 점점이 번져 나오고 있었고, 폐가 상한 것인지 쿨럭거리며 피를 뱉어내고 있었다. 준상은 그 모습을 보기가 무섭게 헤네스를 향해 외쳤다. “헤네스!” “네!” 헤네스는 곧바로 허리춤에 차고 있던 두 개의 채찍을 끌러 서유미에게 휘둘렀다. 다른 사람들은 당황한 와중에도 저게 뭔짓인가 싶었지만, 이내 채찍에 맞은 서유미의 안색이 평안해지자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준상은 서유미의 상의를 젖혀 상처를 살폈다. 뽀얀 젖가슴 위로 화살에 맞은 듯한 상처가 나있었지만, 채찍질과 재생력 덕분에 상처는 빠르게 아물어 가고 있었다. 준상은 다른 부상이 없는지 확인하고는 옷깃을 여며준 다음,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임서윤을 향해 물었다. “어떻게 된 거지?” 그러자 임서윤 옆에서 물에 홀딱 젖은 채 울먹이고 있던 정다빈이 대답했다. “저... 저 때문에...” 하지만 임서윤은 얼른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다빈씨 때문이 아닙니다. 제가 경계를 늦춘 탓입니다.” “하지만...” 아직 격한 감정이 가라앉지 않은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준상은 손을 들어 보이며 말을 막았다. “그만.” 그리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는 진세아에게 물었다. “따로 회복 수단이 없었던 건가?” 진세아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힐링 포션은 다른 사람에게는 쓸 수가 없고, 유미씨에게 회복 마법이 있기는 했지만...” “그랬군.” 준상은 정신을 잃은 서유미를 안아 올리며 일어섰다. “일단 지쳤을 테니 먼저 휴식부터 취하도록.” “알겠습니다.” 서윤이 미리 잡아뒀던 방에 서유미를 데려다 놓은 준상은 여자들이 그녀의 옷을 갈아입히게끔 한 다음 방 밖으로 나왔다. “우선 옷부터 갈아입고 와. 얘기는 그 다음에 해도 되니까.” “네.” 서윤은 그제서야 자신이 흠뻑 젖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옷을 갈아입기 위해 서둘러 옆방으로 들어갔다. 00123 트롤러 ========================================================================= 준상 역시 서유미를 건져 내느라 물에 빠진 탓에 일단 옷을 갈아 입고 다시 내려 왔다. 그러자 조금 안색이 창백해진 서유미가 다가와 준상과 헤네스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준상은 서유미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인다음 서윤에게 다시 말했다. “어떻게 된 일이지?” “그게...” 서윤은 간단하게 이번에 자신들이 치른 퀘스트에 대해 설명했다. 일전의 대공세는 준상의 활약으로 어떻게든 봉합이 되었지만, 아직 대륙에는 소규모의 적들이 남아 분탕질을 치고 있는 곳이 많은 상태였다. 네 사람은 어느 고개에 출몰하는 소규모 집단의 토벌을 맡았는데, 이 괴물들이 대부분 숲이나 계곡 등에 은신해 있는 경우가 많아서 일일이 찾아 없애는데 상당히 고생을 했던 모양이다. 마지막에 서유미가 부상을 입은 것도 그렇게 숨어 있던 적에게 정다빈이 암습 당하려는 것을 몸으로 막은 탓이었다. “흠...” 준상은 서윤의 설명을 듣고는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너희들은 어째서 몸을 보호할 만한 방어구를 입지 않는 거지?” 그 말에 서윤이 대답했다. “그렇지 않아도 준비를 하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이미 시판중인 방검복이나 방탄복이 없는 건 아닙니다만... 생각보다 그리 만족스러운 성능을 지닌 것이 없어서 사실 좀 고민 중이었습니다.” 방검복은 대부분 포켓 나이프를 이용한 공격을 막는 수준의 성능으로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고 도끼나 도검, 창, 총검, 곡괭이 같은 본격적인 냉병기에는 거의 무용지물이나 다름없다. 지구에서와 같은 곳에서는 사실상 이런 터무니 없는 냉병기를 사용하는 경우가 거의 없으니 그 정도의 방검복 만으로도 어느 정도 효과를 기대할 수 있지만, 이들이 가는 곳에서는 포켓 나이프를 막는 수준의 방검복은 거의 의미가 없다. 방탄방검복이란 것도 존재하기는 하지만, 이런 것은 대부분 방탄 성능이 주라서 방검 성능은 최소한의 수준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 “그렇군.” 준상의 경우에는 광전사 계열의 콤보가 기본적으로 방어구 착용 금지의 제한이 붙어 있기 때문에 아예 그런 것들을 알아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었다. 어떻게 보면 그 덕분에 신체의 자체 방어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리는 터무니없는 상황이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준상에게나 해당되는 사항이고 서윤이나 그의 동료들은 경우가 다르다. “자리를 좀 만들어 보도록.” 그의 말에 윤성렬은 방 한 가운데의 탁자를 움직여 넓은 공간을 만들었다. 준상은 그곳에 깔판을 깔고는 인벤토리에 보관되어 있는 물품 하나를 꺼내 놓았다. “헉!” “이, 이건...” 사람들은 갑자기 방 한 가운데 모습을 드러낸 커다란 괴물의 사체에 입이 떡 벌어지고 말았다. 대충 보기에도 굉장히 단단할 것 같은 외피를 가진 거대한 코뿔소 형상의 괴물이 반토막이 나서 죽어 있는 모습은 이런 저런 퀘스트를 제법 섭렵한 그들로서도 난생 처음 보는 종류의 것이었다. “내가 일전에 벨카라스라는 곳에서 처치한 보스급 괴물 중 하나다. 이름은 아문간.” 그런가보다 하고 고개를 끄덕이던 사람들은 이어진 말에 입이 쩍 벌어지고 말았다. “이렇게 반토막이 나긴 했지만, 당시 이 녀석은 미국 플레이어들이 사용한 로켓탄 같은 중화기도 아무렇지 않게 맨몸으로 받아냈었다.” “로켓탄... 말씀이십니까?” “그래. 내가 직접 봤으니 틀림없는 사실이다.” “허...” 서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어 보이다가 얼른 아문간의 사체로 다가가 그 피부를 살펴보고는 준상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음... 죄송하지만, 이걸 좀 가져가서 연구해 봐도 되겠습니까?” 준상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상관없다. 이걸로 갑옷 같은 걸 만들 수 없을까 하고 꺼내놓은 것이니.” “역시 그러셨군요.” “내 것과 헤네스 것. 우선 이렇게 두 벌을 만들고 나머지는 적당한 가격에 넘기도록 하겠다.” 상당히 큰 덩치의 괴물이긴 하지만, 두 사람 분의 방호복을 만들면 사실 남는 부위라고 해봐야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서윤은 별로 상관하지 않았다. 어차피 급소만 확실하게 막을 수 있다면 다른 신체 부위는 기존의 소재로 만들어도 상관이 없다. 게다가 정말로 로켓탄을 상처 하나 없이 막을 정도의 방호력을 가지고 있다면, 이것을 분석해 그 절반의 성능만 구현할 수 있어도 서윤에게는 남는 장사였다. 준상은 다시 아문간의 시체 옆에 검은색의 갑옷을 한 무더기 꺼내 놓았다. “이것은 하를라간이라는 곳에서 구한 것이다. 특별한 옵션은 붙어있지 않지만, 이것을 입고 총기를 가진 플레이어들과 대등하게 싸우고 있었던 것을 보면 제법 강인한 소재가 아닐까 싶더군. 하는 김에 이것도 가져가서 연구해 보도록.” “아, 정말 감사합니다.” 사실 그렇지 않아도 서윤은 아버지나 가문의 다른 친족들로부터 다른 세계의 물품들을 구해보라는 압력을 받고 있었다. 신대륙으로부터 감자나 옥수수, 고추 같은 작물이 들어와 식량 생산에 일대 전기가 마련되었던 것처럼, 지금까지 접촉한 적이 없던 세계의 문화나 물질의 유입은 혁신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지금 준상이 꺼내놓은 괴물의 사체나 갑주 역시 마찬가지다. 분석을 해보아야겠지만, 이것이 준상이 말한 것의 절반 정도의 효과만 가지고 있더라도 현대 무기 체계는 엄청난 진보를 이룰 수 있게 된다. 만들어진지 근 반세기가 넘어가는 AK소총이나 알라신의 요술봉 같은 무기가 여전히 판을 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아직까지 그것을 완전하게 막아낼 만한 방어 체계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응 장갑이란 것이 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일회용. 실제로 그로즈니에서 체첸 반군들이 러시아 전차를 사냥할 때, 이런 약점이 크게 노출된 전례가 있다. 2회 이상 피탄 되더라도 방어가 가능한 전기 반응 장갑 같은 개념도 있지만, 아직 완성된 것도 아니고 엄청난 양의 전기를 소모한다는 문제점도 존재한다. 게다가 이런 것들은 애초에 인간이 착용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 모든 문제를 단숨에 해결할 수 있는 열쇠가 등장했으니, 타고난 밀덕인 서윤이 어찌 흥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말 나온 김에 저희 연구소에 직접 가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연구소에?” “네. 어차피 두 분의 방호복을 만들기 위해서는 신체 사이즈도 확인을 해야 하니...” “알았다.” 서윤은 신이 나서 전화기를 들고 연구소로 미리 연락을 하기 위해 방을 나갔다. 준상은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초췌한 모습으로 가만히 앉아 있는 서유미를 바라보았다. 부상은 회복이 되었지만, 재생력이든 혀 채찍이든 간에 기본은 신체의 회복력을 극대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체력의 소모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나마 보통 사람과는 본질적으로 육체의 스펙에서 차이가 나는 귀환자이기에 지금 이렇게 앉아 있을 수 있는 것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상처가 봉합되었더라도 꼬박 며칠을 앓아야만 했을 것이다. 준상이 생각하기에 서유미의 행동은 사실 바보 같은 짓이었다. 상황이 어찌 되었든 간에 사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생명이다. 게다가 서유미는 파티원 가운데 유일하게 회복 마법을 지닌 인물. 어떻게 보면 달리 탱커 역할을 맡을 만한 파티원이 없기 때문에 벌어진 일일 수도 있지만, 파티 전체를 생각한다면 몸으로 막기보다는 다른 방법을 찾는 것이 옳았다. 정다빈이 서유미에게 있어 그 정도로 중요한 인물이었던 것도 아니지 않은가. 준상은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일단 꺼내놓은 아문간의 사체와 검은 색의 갑주들을 다시 인벤토리에 보관하고 깔개를 회수했다. 방안의 정리가 끝나자 서윤이 통화를 마치고 돌아왔다. “가시죠.” “얘기는 끝났나?” “네. 어서 빨리 모셔오라고 난리입니다.”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헤네스와 함께 방을 나섰고, 나머지 인원들도 그 뒤를 따랐다. “유미씨는 남아서 쉬는 편이 낫지 않겠어요?” 헤네스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지만, 서유미는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고마워요... 신경 써줘서.” “고맙긴요. 당연한 일인데.” “그래도요.” 어쩐비 별로 어울리지 않는 조합인 듯 하면서도, 의외로 헤네스는 다른 여성들보다 서유미와 더 친한 듯한 느낌이다. 하긴 보기만 하면 야수처럼 돌변해서 옷을 벗기고 자신들의 취향으로 갈아입히는 만행을 저지르는 진세아나 그녀에게 동조하는 정다빈의 모습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것도 전장에서 식칼을 들고 설치는 서유미를 보면 또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주차장으로 내려온 준상은 인벤토리에 보관중이던 F150 랩터를 꺼내 놓았다. “오... 정말 멋지군요!” 길드원 가운데 혼자만 파티에 속하지 못한 상태라 어쩐지 따돌림 당하는 느낌을 받고 있던 윤성렬은 준상이 꺼내놓은 커다란 픽업 트럭을 보자 바로 탄성을 터뜨렸다. 뭐랄까. 마초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육중한 모습에 그대로 홀딱 반해 버렸다고 하는 편이 맞을 듯 싶다. “타보겠나?” “네!” 그 커다란 덩치로 서윤의 레인지로버 뒷자석에 여자들과 끼어 않기가 사실 좀 난감하던 것도 사실이다. 물론 아리따운 한창 때의 여성들과 낑겨 앉는 것도 모태솔로인 그로서는 행복에 겨운 일이었지만, 그것도 한두 번이지 같은 상황이 계속되면 어쩐지 좀 자존심이 상하는 기분이 들게 마련이다. 준상은 뒷좌석에 윤성렬을 태우고는 앞서가는 서윤의 레인지로버를 따라 차를 몰았다. 레인지로버와 랩터, 이 두 대의 차가 나란히 길을 달리자 어쩐지 차선이 꽉 차버리는 느낌이다. 윤성렬은 연신 탄성을 터뜨리며 자신도 언젠가는 이런 차를 사겠노라 마음 속으로 굳게 다짐했다. 두 대의 차는 곧장 도로를 달려 서울 외곽의 위성 도시에 위치한 한 연구소를 방문했다. 차가 들어서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달려 나와 서윤 일행을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작달막한 체구의, 머리가 살짝 벗겨진 중년 남자가 그렇게 말하며 다가오자 서윤이 꾸벅 인사를 했다. “오랜 만이네요. 아저씨.” “그러게 말입니다. 막내 도련님이 중학교 들어갈 때 뵙고 처음인 것 같군요.” “으... 그만 두세요. 그 도련님이란 말은.” “하하, 여전하시군요. 자, 저를 따라 오시죠.” “네.” 중년 남자는 그들을 일단 사무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이렇게 보니 모두들 미남 미녀로군요. 저는 이 연구소의 소장을 맡고 있는 맹진우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소장인 맹진우가 자신의 소개를 하자, 서윤이 한 사람씩 가리키며 일행을 소개했다. “이쪽은 박준상씨입니다. 말씀 드렸던 그 분입니다.” “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맹진우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박준상입니다.” 뭐라고 소개를 했는지 살짝 의심스러워지기는 했지만, 준상은 담담하게 자신의 이름을 말하는 것으로 소개를 대신했다. “이쪽은 헤네스 양. 보시다시피 외국에서 오신 분이라 우리 말은 잘 못하십니다. 양해해 주십시오.” “아, 그렇군요. 반갑습니다.” “...” 눈치가 빠른 헤네스는 어째서 서윤이 자신을 그런 식으로 소개했는지 이해하고는 그냥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사실 말이 나와서 얘기지, 헤네스 역시 이들 연구자들의 눈에는 엄청난 연구 소재이다. 지구와는 다른 세계에서 방문한 이계인. 모르긴 해도 당장 해부하자고 달려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라고나 할까. 때문에 서윤은 그녀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은닉할 수 밖에 없었다. 그녀의 정보가 밝혀지는 건 사실 문제가 아니다. 다만 그렇게 되었을 때, 그녀에게 위협이 가해지는 것을 과연 준상이 가만 보고 있을까가 문제일 뿐. 자칫하면 연합 본부처럼 이 연구소 자체가 박살날 수도 있는 일이기에 서윤으로서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00124 트롤러 ========================================================================= 진세아와 정다빈, 서유미, 그리고 윤성렬에 대한 소개가 끝나자 연구원 하나가 간단한 다과를 가지고 사무실로 들어왔다. 맹진우는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실... 도련님께 전화를 받고 좀 놀랐습니다.” 그렇게 운을 띄운 맹진우는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원래 저희들 같은 사람이 좀 그렇습니다. 뭔가 얘기를 들으면 우선 의문을 품는 것이 일이라고나 할까요. 그런 것이 정말 가능한 것일까, 가능하다면 거기에는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일까... 대충 그런 식이죠.” 맹진우의 말에 준상은 조용히 대답했다. “어떤 점이 궁금하신 겁니까.” 그러자 맹진우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우선... 사실 총탄을 막아내는 방탄 성능의 의류는 이미 여러 가지가 개발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번 경우에는 총탄이 아니라 로켓탄이라는 점이 다릅니다만, 어쨌든 단순히 막아내는 것 뿐이라면 현재 존재하는 소재들만으로도 어떻게든 구현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죠. 영화 같은 걸 보면 그런 거 많이 나오잖습니까. 방탄 조끼를 입고 총을 맞았는데 갈비뼈가 부러졌다든가...” 그러자 얼른 임서윤이 끼어들었다. “전달되는 물리적 에너지를 어떻게 해소하느냐가 궁금하시다는 말씀이신가요.” “바로 그겁니다. 그런데 그 괴물이 맞았다는 로켓탄이 어떤 건지 혹시 알 수 있겠습니까?” 맹진우의 돌연한 질문에 준상은 잠시 기억을 떠올리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둥근 통 같은 걸 어깨 위에 얹고 쏘던 것 같더군요.” “아... 잠시만요.” 맹진우는 자신의 책상으로 가더니 스크랩북 몇 개를 가져와서 준상의 눈앞에 사진을 펼쳐 놓았다. “혹시 이 중에 있습니까?” 준상은 가만히 사진을 훑어보다가 하나를 지목했다. “이게 아닐까 싶습니다.” “아... M72 LAW군요. 하긴 이거라면 처음 만들어진 것은 오래 되었어도 가볍고 사용하기 편리한 데다 비축된 양도 많으니 쓸 만하죠. 다만 현용 전차에 사용하기에는 다소 위력이 부족한 느낌이지만, 아직도 보병 제압이나 화력 지원 등의 용도라면 제법 쓸 만한 무기입니다.” 어쩐지 혼자 신이 나서 이런 저런 얘기를 꺼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임서윤이 그렇게 무기에 심취해 있는 것이 누구의 영향인지 조금은 상상이 간다. 임서윤 역시 그 사실을 깨달았는지 얼른 헛기침을 하며 맹진우를 재촉했다. “저... 아저씨. 아니, 소장님. 여기서 이럴 것이 아니라...” 맹진우는 사진을 보며 혼자 고개를 끄덕끄덕하는 모습으로 뭔가를 생각하고 있다가 임서윤의 말을 듣고는 그제서야 생각났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아, 그렇군요. 여기서 이럴 때가 아니지. 가시죠.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뭔가 정신이 없는 그의 모습에 임서윤은 난처한 표정으로 일행들에게 살짝 사과의 몸동작을 해보였다. 준상과 헤네스는 맹진우의 안내를 받아 연구소 안으로 들어섰다. 커다란 기계설비가 죽 늘어선 모습이 연구소라기 보다는 공장을 연상시키는 곳이었지만, 맹진우는 매우 자랑스러워 하는 모습으로 그들을 한 켠으로 이끌더니 바닥에 노란 색으로 표시가 된 채 깔판이 깔려 있는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일단... 그 샘플을 좀 보여주시겠습니까.” “그러죠.” 준상은 곧바로 인벤토리 안에 담겨져 있던 아문간의 사체를 바닥에 꺼내 놓았다. 이미 서윤을 통해 인벤토리 기능은 본 적이 있는지, 맹진우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무언가가 나타났다는 사실보다는, 그렇게 모습을 드러낸 괴물의 괴물의 사체에 더 큰 관심을 보였다. “오오! 이것이!” 맹진우는 얼른 호주머니에서 비닐팩 안에 들어있는 노란 색 고무장갑을 꺼내더니, 그것을 손에 끼고는 아문간의 사체를 살피더니 이내 근처의 연구원들에게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이봐! 거기! 가서 카메라! 카메라 가지고 와! 생물 팀 당장 이리로 불러오고! 절단기! 절단기 어딨어!” 뭔가 정신없이 떠드는 그 모습에 임서윤은 쓴웃음을 지었지만, 준상은 연구원들이 몰려오자 아문간의 시체를 다시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어, 어어?” 맹진우는 갑자기 눈앞에서 괴물의 사체가 사라지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준상에게 물었다. “도로... 집어넣으신 겁니까?” “그렇습니다.” “어째서?” “보여드리기는 했습니다만, 그것을 연구하거나 분해해도 좋다고 허락한 적은 없습니다.” “...” 맹진우는 장난감을 빼앗긴 어린 아이처럼 울상이 되었다. 하긴 보자마자 허락도 받지 않고 달려들어 해부를 하려고 들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결국 맹진우는 손수건을 꺼내 이마에 흘러내린 땀을 닦은 뒤 준상에게 사과했다. “휴우... 죄송합니다. 제가 한번 뭔가가 눈에 들어오면 다른 건 보이지가 않는 성격이라.” “괜찮습니다.” 맹진우는 뒤늦게 달려온 연구원들을 향해 손짓을 해서 물러나도록 한 다음, 임서윤을 향해 말했다. “도련님. 계약 조건은 정해졌습니까?” “아직입니다.” “음... 제가 너무 서둘렀군요. 그럼 일단... 여긴 좀 시끄러우니 다시 사무실로 가시죠. 죄송합니다.” “알겠습니다.” 일행은 다시 맹진우의 사무실로 돌아가 자리에 앉았다. “크흠... 자세한 내용은 따로 정해야 겠습니다만, 우선 원하시는 조건을 말씀해 주십시오.” 맹진우의 말에 준상은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우선... 그 사체의 가죽으로 저와 헤네스의 방호복을 만들었으면 합니다.” “전신으로요?” “네, 전신으로.” 맹진우는 얼굴을 찌푸린 채 손가락으로 턱을 북북 긁다가 다시 말했다. “그 외에는?” “이 괴물의 사체를 연구해서 나오는 수익의 일정 부분을 원합니다.” “음... 일종의 로열티가 되겠군요.” 맹진우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말했다. “보통 이런 경우 두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픽스드 로열티라고 해서 처음에 정액으로 한꺼번에 지불을 하는 경우가 있고, 러닝 로열티라고 해서 수익이 생기면 매출액의 일부를 그때 그때 나누어 지급하는 방식도 있습니다. 준상씨는 이 가운데 후자를 원하시는 겁니까?” 준상은 바로 대답했다. “저희 두 사람의 방호복을 만들 재료를 제외한 사체를 넘기는 가격은 별도이고, 그 외에 러닝 로열티를 추가로 원합니다.” “끙...” 돌려 말하긴 했지만 결국 둘 다 내놓으라는 말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맹진우는 다시 얼굴을 찌푸렸다. “그럼... 구체적인 금액은 얼마나...” “제시해 주십시오.” “...” 맹진우는 입을 다물었다. 제시라니. 이렇게 애매한 말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사실 아문간의 사체는 현재로서는 간단하게 그 가치를 매길 수 없는 종류의 물건이었다. 확실히 드러난 것은 생물체의 가죽인 주제에 로켓이나 총탄을 가볍게 무시하는 터무니없는 방호력 정도. 물론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것이 사실이지만, 그 외의 부분 또한 연구를 해보면 뭐가 나올지 모르는 일이다. 때문에 준상은 사체를 넘기는 가격과 이후에 아문간의 사체를 연구해서 얻어지는 수익의 일부분을 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잠시 미간을 손가락으로 움켜쥔 채 고민하던 맹진우는 한숨을 푸욱 내쉬며 이렇게 말했다. “아무래도 이 계약은 제가 임의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듯 싶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상관 없습니다.” “그럼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맹진우가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가자 임서윤이 서둘러 그 뒤를 따랐다. 그러자 가만히 듣고 있던 진세아가 준상에게 말했다. “싸게 넘기시면 안되요. 그만한 가치가 없다면 모를까 이건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준상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예상 가격을 생각해 본다면?” 그 말에 진세아는 신이 나서 설명을 시작했다. “로열티라고 해도 종류가 여러 가지 있어요. 상표권료라든가 특허권료, 저작권료, 하다못해 캐릭터 상품의 의장 사용료 같은 것도 전부 로열티라고 불러요. 이 경우에는 일단 산업재산권의 사용료로 이해할 수 있겠죠.” “사용료라...” “우리나라의 프랜차이즈 로열티 같은 경우는 2퍼센트에서 5퍼센트 정도지만 사실 이건 정률 방식의 러닝 로열티 보다는 정액 방식인 가맹비를 받는 경우가 많아서 그런 거고... 보통 특허권료나 의장 사용료 같은 경우는 매출액의 5퍼센트에서 12퍼센트 정도를 로열티로 지급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렇군.”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며 되물었다. “그럼 어느 정도를 받는 것이 좋을까.” 진세아는 문 쪽을 살짝 바라보더니 조용히 말했다. “15퍼센트 부르세요.” 준상은 피식 웃었다. “바가지라도 씌우라는 건가?” 그러자 진세아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싫으세요?” “그럴 리가.” “후후...” 두 사람의 대화를 옆에서 듣고 있던 헤네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세아씨.” “네?” “서윤씨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요?” “무, 무, 무슨 그런 말을?” 진세아가 당황해서 말을 더듬자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정다빈과 서유미가 킥킥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 그런거 아니거든요? 생사람 잡고 있어, 정말.” “정말요?” “물론이죠. 제가 왜 저 속 시커먼 능구렁이를.” “흐음...” 헤네스는 의심스럽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진세아는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다시 말했다. “아, 아무튼... 제 의견은 그래요. 이상!” 준상은 그런 진세아에게 이렇게 말했다. “16퍼센트를 부르도록 하지.” 겨우 일이 퍼센트 차이라고 말하면 그뿐일지 몰라도, 그로 인해 나중에 수백억이 왔다 갔다 할 수도 있는 문제라 진세아는 살짝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더구나 이번에는 사체를 매입하는데 별도의 비용을 청구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그녀로서도 이건 좀 과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건 좀...” 하지만 곧바로 이어진 준상의 말에 진세아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1퍼센트는 당신에게 주겠다.” “네?” “상담료. 부족한가?” “그, 그, 그럴 리가요.” 나이야 별 차이 없을지 몰라도, 준상은 독립해서 스스로 학비를 벌어 학업을 이어가다가 그나마도 제대로 끝마치지 못한 상황이었고, 진세아는 금융 업계에서 다년간의 실무 경험까지 쌓은 베테랑이다. 능력이 있다면 그에 걸맞는 대우를 해주는 것이 당연한 일. 게다가 진세아로서는 사실 그냥 입을 다물고 있어도 아무 문제가 없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준상에게 호의를 보인 것이니 그것에 대한 보상도 할 필요가 있었다. 이번 일을 옆에서 지켜본 정다빈이나 윤성렬, 그리고 서유미까지 고려하면 준상으로서는 1퍼센트 정도 떼어주는 건 그리 문제가 아니다. 적절한 도움이 있으면 그에 상응하는 보상이 주어진다는 사실이 그들의 머리 속에 입력되었을 것이고, 나중에 비슷한 일이 생겼을 경우 진세아는 물론이거니와 다른 세 사람의 자발적인 도움도 조금이나마 기대할 수 있을테니 이것 또한 일거양득. 맹진우와 임서윤은 제법 시간이 흐른 뒤에야 다시 사무실로 돌아왔다. “죄송합니다. 얘기가 길어져서...” “괜찮습니다.” 맹진우는 준상이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사과를 받아들이자, 자신이 준비해온 조건을 말했다. “음... 일단 러닝 로열티는 10퍼센트가 어떨지.” 그 말에 준상은 고개를 저었다. “거절합니다.” 그리고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모습을 본 맹진우는 기겁을 하며 얼른 몸을 일으켜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준상을 말렸다. “자, 잠깐만. 아니, 사람이 왜 그렇게 성미가 급하십니까. 얘기는 마저 듣고 가셔야죠.” 그 말에 준상은 다시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저는 농담을 싫어합니다.” 그리고는 이번에 얻은 광견의 위엄을 발동했다. 안 그래도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는 준상의 모습에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아서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던 맹진우는 갑자기 준상에게서 엄청나게 꺼림직한 느낌이 쏟아져 나오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괜히 공포의 시선이나 사안 같은 걸 썼다가 심장 마비로 쓰러지면 그것도 골치 아픈 일이라 광견의 위엄을 사용한 것이지만, 이것 역시 상태 이상을 초래하는 기술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이 터무니없는 기술은 욕쟁이 할매의 매도처럼 적아의 구분조차 없다. “으으음...” 사무실에 앉아 있던 서윤과 그의 동료들은 자신도 모르게 준상에게서 멀리 도망치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오직 헤네스만이 눈을 꼭 감은 채 준상의 옷자락을 붙들고 있을 뿐이다. 보통 사람보다 월등한 능력을 지닌 귀환자들도 그 모양인데 평범한 보통 사람인 맹진우가 그것을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그, 그럼... 얼마를 원하시는 겁니까?” 이렇게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 것만으로도 이미 보통 일이 아니다. 준상은 그런 맹진우를 바라보며 조용히 대답했다. “16퍼센트. 사체의 매입 대금은 별도.” “...” 밖에서 그룹 임원들과 대화를 나누며 정한 마지노선은 13퍼센트. 물론 준상은 그 대화마저도 초감각을 통해 이미 다 들은 뒤였다. 그렇기 때문에 진세아의 조언에 거짓이 없다는 사실 또한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그건...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맹진우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자 준상은 다시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안 그래도 준상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이한 위압감에 짓눌려 있던 맹진우로서는 그를 다시 붙잡아 앉히는 것만으로 심력이 바닥날 지경이었다. “아... 그러니까 제 말은...” 식은 땀을 뻘뻘 흘리며 자신의 옷자락을 붙잡는 맹진우를 향해 준상은 담담한 말투로 다시 이렇게 말했다. “16퍼센트. 사체의 매입 대금은 별도.” “...” 결국 맹진우는 아무래도 안되겠다 싶었던지 준상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다시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다시 한참 동안 전화기를 붙잡고 대화를 나누는가 싶더니, 진이 쏙 빠진 얼굴로 돌아와 준상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후우...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준상은 그제서야 광견의 위엄을 해제했다. 00125 트롤러 ========================================================================= “후우...” 맹진우는 자신을 짓누르던 정체를 알 수 없는 위압감이 사라지자 그제서야 크게 숨을 내쉬며 안도했다. 원래는 귀환자 가운데서도 특히 강한 힘을 지닌 것으로 보이는 이 박준상이라는 자에 대한 연구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조금은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 한 번 겪어 보고 나니 그런 생각이 쑥 들어가 버린다. 궁금한 건 못 참는다고 말은 했었지만, 목숨까지 걸어가며 연구에 매진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계약의 핵심 사항이 합의되었어도 아직 일이 많이 남아 있었다. 계약서를 작성한 다음 세부적인 계약 사항을 점검하고 다시 절충의 과정을 거친 다음 서명과 함께 공증까지 마쳐야 했기 때문이다. 사실 준상으로서는 이런 세세한 부분까지는 별로 신경 쓰고 싶은 생각이 없었지만, 진세아는 가만히 지켜보다가 안 되겠다 싶었던지 스스로 나서서 마지막 과정까지 완벽하게 마무리를 지었다. “허허... 보통이 아니군요. 원래 이런 일을 하셨던 분이십니까?” “네, XX증권 자기계정운용부에 있었습니다.” “역시 그랬군요. 어쩐지 능숙하시다 했습니다.” 하긴 귀환자라고는 해도 모두 원래의 직업과 생활이 있던 사람들이다. 어쨌든 계약이 끝나자 맹진우는 입맛을 다시며 준상을 재촉했다. “자, 이제 꺼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아문간의 사체를 꺼내주자 맹진우는 준상의 기세에 짓눌려 꼼짝 못하던 사람이 맞는가 싶을 정도로 쌩쌩하게 되살아나 사체에 달려들었다. 임서윤은 파리떼처럼 아문간의 사체에 달라붙는 연구원들의 모습을 보며 쓴웃음을 짓다가 준상과 헤네스에게 말했다. “아마 당분간은 말을 걸어도 대답도 제대로 안 할 겁니다. 원래 연구를 시작하면 그야말로 눈에 뵈는 것이 없는 분이죠.” “그렇군.” “저를 따라 오십시오. 방호복을 만들려면 신체 사이즈를 꼼꼼하게 재둘 필요가 있습니다. 모처럼 왔으니 저와 길드원들도 재고 가야겠네요.” “알았다.” 서윤은 일행을 다른 연구동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한 명씩 꼼꼼하게 신체 사이즈를 측정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줄자 가지고 재는 정도가 아니라, 정밀 기계를 이용해서 골격의 형태까지 완벽하게 측정했기 때문에 생각보다 제법 시간이 걸렸다. 준상은 측정을 마치고 잠시 휴식을 취하며 연구소 내부를 돌아보다가 벽에 진열된 묘한 디자인의 옷을 보며 물었다. “이건 뭐지?” 전체적으로는 아웃도어 웨어 같은 디자인인데, 그 위에 울룩불룩한 두터운 조끼와 아대 등으로 보강되어 있었다. “아... 일전에 시험 삼아 만들었던 방호복 샘플입니다.” 서윤은 샘플 앞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아라미드 소재로 만들어서 옷깃이나 소매 등에도 기본적인 방탄 성능을 부여했고, 몸통 부분은 방검 성능을 극대화한 조끼로 보호를 하는 형태죠.” 모양만 봐서는 제법 그럴 듯하다. “실용화에 실패한 건가?” 준상의 물음에 서윤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대량으로 양산하기에는 너무 비싸고, 그렇다고 성능을 극대화해서 소량만 주문 생산하기에도 수지가 안 맞고 해서... 생각보다 성능이 그리 높지 않은 것도 사실 문제였습니다.” “어느 정도길래?” “그게...” 서윤은 잠시 난처한 표정을 지어 보이다가 말을 이었다. “일단 방탄 성능의 경우에는 기본적으로 권총탄 정도를 막을 수 있는 효과를 지니고 있습니다. 다만 앞서도 말했듯이 물리력을 완전히 해소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타박상이나 내출혈, 골절 등이 일어날 소지가 있고, 소총탄 방어를 위해서는 방탄판을 추가로 주머니에 넣어야 하는데 이것의 무게가 만만치 않습니다. 최근에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존의 섬유를 나노튜브로 보강한 형태의 것이 나오고 있습니다만, 기반 기술을 획득하는 문제도 있고... 아무튼 좀 여러 가지로 복잡합니다.” “그렇군.” 그렇게 얘기를 나누다 보니 다른 사람들도 측정을 끝내고 하나 둘씩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그들이 모두 측정을 끝내자 다시 연구원들이 무언가를 바리바리 싸들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이건 뭐지?” “방금 보여드렸던 방호복입니다. 좀 거추장스러운 면도 있고, 그리 만족스럽지도 않은 느낌이라 지금까지 묵혀 두고 있었습니다만, 그래도 새로운 방호복이 나오기 전까지는 이거라도 입는 편이 낫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죠. 지금은 모두 체력 훈련도 하고 있는 중이고, 치명적인 상처만 아니라면 재생력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 말에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한번 입어 보시죠. 방금 측정한 사이즈로 골라오기는 했는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직접 입어 보시고 말씀을 주십시오.” 서윤의 말에 따라 사람들은 모두들 자기 이름이 표시된 보퉁이를 챙겨들었고, 헤네스는 준상의 옷자락을 잡으며 눈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물어왔다. “가서 입어봐.” “...” 헤네스는 별로 내키지 않아 하는 표정이었지만, 준상은 모르는 척 진세아에게 그녀를 맡겼다. “부탁한다.” “후후... 맡겨 주세요.” 진세아는 눈빛을 빛내며 헤네스의 손을 잡고 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준상 역시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군복보다는 아웃도어 스타일로 디자인된 탓인지 생각보다 착용감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다만 여름에 입으면 엄청나게 더울 것 같다는 느낌이랄까. 겨울이라 해도 이거 입고 조금 뛰면 금새 땀으로 범벅이 되지 않을까 싶다. 대충 다 챙겨 입고 나오자 서윤이 보충 설명을 했다. “일단 나누어 드리긴 했지만, 너무 이것을 맹신하시지는 마십시오. 조끼 부분을 제외하고는 아주 기초적인 수준의 방검 능력 밖에 없는데다, 조끼 부분 역시 어른이 작은 칼을 들고 양손으로 내리찍는 걸 어느 정도 막아내는 수준의 방어력 밖에 없습니다. 도끼나 창 같은 본격적인 냉병기에는 그냥 뚫려 버릴 수도 있으니 주의하셔야 합니다.” “네.” 일행들은 방호복을 자신의 체형에 맞게 조절한 다음 다시 임서윤에게 건네 주었다. 정원 때문에 파티에 끼지 못한 윤성렬은 꼼짝없이 직접 지고 다녀야만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임서윤의 인벤토리를 이용하는 것이 여러모로 편했다. 하지만 그때, 서유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무슨 일인가 하고 돌아보자 그녀는 부끄러운 듯이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말을 이었다. “저도 이번에... 인벤토리를 얻었어요.” “오! 그거 대단하군요. 축하합니다!” 임서윤은 과하다 싶을 정도로 격한 반응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인벤토리를 가진 사람이 그 하나 뿐이라 이래저래 짐꾼 취급을 당했던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달랑 두 칸 밖에 없는데, 이것저것 집어 넣다보니 정작 자신에게 필요한 건 제외되는 경우가 많았던 것도 원인이다. “두 칸짜리인가요?” 임서윤이 묻자 서유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오! 정말 좋군요. 그럼 이럴 것이 아니라 일단 캐비닛부터...” 서윤은 얼른 사람들을 시켜 예비로 마련해 둔 캐비닛을 가지고 오도록 한 다음 기존에 자신이 가지고 다니던 짐을 나누어 정리했다. 장비들이야 어쩔 수 없다 쳐도, 여성 길드원들의 속옷이나 일상용품 같은 경우에는 들고 다니는 사람이나 꺼내 달라는 사람이나 사실 좀 난감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좀 시간이 지체되기는 했지만, 대충 정리가 끝나자 그들은 비로소 차를 나누어 타고 서울로 돌아올 수 있었다. 준상과 헤네스는 돌아오기가 무섭게 일단 대충 몸을 씻은 후 모두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아래 층으로 내려갔다. 하지만 그들이 엘리베이터에서 막 내려서는 찰나, 준상의 시야에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그것은 바로 새로운 퀘스트의 도착을 알리는 메시지였다. “이런...” 어쩐지 한동안 소식이 없다 싶더라니. 다크 시드 관련 퀘스트가 있기는 했지만, 일전에 연속해서 퀘스트가 몰아치던 때에 비하면 확실히 공백이 제법 길었었다. “헤네스.” “네?” “퀘스트다.” “...” 오늘 식사는 뭘까 하면 기대에 부풀어 있던 헤네스의 얼굴이 삽시간에 어두워진다. “일단 들어가 있어라. 바로 부를테니.” “네.” 준상은 헤네스를 역소환한 다음 서윤에게 메시지를 넣었다. ‘퀘스트다. 다녀 올테니 그렇게 알고 있어라.’ 그리고는 비상 계단으로 들어가 캐비닛을 꺼내 넣어두었던 장비들을 챙겨 입기 시작했다. “후우...” 모든 준비가 끝나자 준상은 가만히 어두워지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대기 시간이 짧을 때는 너무 짧아서 문제였지만, 너무 많은 것도 문제다. 전송을 기다리는 동안 이런 저런 잡생각들이 머리 속을 복잡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잠시 그렇게 계단에 앉아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던 준상은 시간이 되자 흰 빛을 뿜어내며 전송이 되었다. 눈앞을 어지럽히던 빛이 사라지자, 준상은 자신이 아름다운 숲의 초입에 도착해 있음을 깨달았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다른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잠시 기다리자, 눈앞에 퀘스트 정보가 나타났다. 에픽 퀘스트 – 망각 1. 미니맵에 표시된 지역까지 이동하십시오. “...” 준상은 얼굴을 찌푸렸다. 에픽 퀘스트. 이것은 보통의 퀘스트와는 전혀 다른 규모의 사건이 또다시 벌어진다는 의미와도 같았다. 준상은 우선 펫을 모두 소환했다. 그러자 헤네스와 몽몽이, 그리고 아직 이름을 짓지 않은 엘리멘탈 드래곤이 모습을 드러낸다. 몽몽이와 엘리멘탈 드래곤은 당연하다는 듯이 준상의 어깨를 하나씩 차지하고 앉았으나, 헤네스는 처음 보는 풍경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준상에게 물었다. “여긴... 어디죠?” 하지만 준상도 모르기는 매한가지였다. “아직 잘 모르겠다.” “그렇군요.” 준상은 우선 미니맵에 표시된 위치를 확인했다. 표식은 숲 안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흠...” 아무리 오프로드 주행에 특화된 차량이라도 길도 없는 숲을 운행하는 건 무리가 있었다. 준상은 결국 랩터 대신 안장을 꺼내 유령말을 소환한 다음 헤네스를 등 뒤에 태우고 천천히 숲 안으로 향했다. 이전에도 퀘스트로 숲에 불려온 적이 있기는 했지만, 어둠의 근원에 침식되어 불길한 분위기를 풍기던 그곳과는 달리, 이곳은 척 보기에도 매우 아름답고 생동감이 넘치는 곳이었다. 준상과 헤네스는 유령말을 탄 채 천천히 표식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생각보다 제법 거리가 멀었던 탓에 그들은 제법 시간이 걸려서야 퀘스트 표식 근처에 도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걸음을 멈추어야만 했다. 숲의 주인들이 일제히 나타나 그들의 앞길을 막아섰기 때문이다.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 조금은 앙칼진 목소리. 손에는 날카로워 보이는 검을 들고, 몸에는 제법 탄탄해 보이는 갑옷을 걸치고 있었다. 하지만 무섭다거나 강해보인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조막만한 요정이었기 때문이다. ============================ 작품 후기 ============================ 늦어서 죄송합니다. 00126 트롤러 ========================================================================= 나름 위협을 하는 것 같기는 한데, 준상이나 헤네스의 머리 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두려움이 아닌 귀여움이었다. 특히나 헤네스의 경우에는 그 앙증맞은 귀여움에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 정도였다. 그때, 앞으로 나서서 외쳤던 요정에게 또 다른 요정 하나가 다가가 조용히 귓속말을 건넸다. “미아라님, 저거 보세요. 저거.” “뭐?” “저 남자 볼따구요. 게다가 이마에도! 그리고 어깨도 보세요!” “엥?” 미아라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품에서 작은 안경을 꺼내어 준상을 가만히 살펴보았다. “엇! 요정용이다! 게다가 이마와 볼의 그 자국은... 설마 당신이 이니아와 일마렌을 도와줬다는 그 사람?” 이니아와 일마렌. 각각 숲의 정화와 습지 토벌 퀘스트에서 만났던 요정들이다. 준상이 고개를 끄덕이자, 미아라는 얼른 검을 집어넣고 요란하게 손을 내저으며 허리를 숙여 보였다. “이런... 미안해요. 요정의 친구를 몰라보고 그만 실례를... 보시다시피 제가 눈이 좀 나쁜 편이라...” “괜찮다.” “저희 마을에 초대하고 싶은데요. 괜찮으세요?” 미아라가 가리켜 보이는 방향을 보니 마침 퀘스트 표식이 가리키는 곳과 일치하고 있었다. 아마도 이 에픽 퀘스트의 시작은 요정의 마을에 도착하는 것부터인 모양이다. “기꺼이.” 준상이 승낙의 뜻을 보이자 미아라는 기쁘게 웃으며 얼른 감사의 뜻을 표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는 주위에 날아다니던 요정들을 향해 외쳤다. “자! 얘들아! 요정의 친구다! 요정용의 주인이다!” 그러자 요정들은 일제히 왁자하게 떠들며 정신없이 준상과 헤네스의 주위를 맴돌기 시작한다. 몇몇 호기심 많은 요정들은 준상과 헤네스의 머리 카락을 만져보기도 하고, 더 용감한 요정들은 그들이 입고 있는 옷을 들춰 보기도 했다. “그, 그러지 마세요. 요정님.” 헤네스는 요정들이 자꾸만 치마를 들추려고 들자 당황하며 그렇게 외쳤다. 하지만 헤네스가 곤란해 하는 모습이 재미있는지 요정들은 더 신이 나서 그녀의 옷을 들춰 보기 시작한다. “주, 준상씨...” 견디다 못한 헤네스가 손으로 옷자락을 누르며 그렇게 도움을 청하자, 준상은 가만히 광견의 위엄을 발동했다. “헉!” 그러자 정신없이 장난을 치던 요정들이 기겁을 하며 그들에게서 물러난다. 준상은 그 모습을 보고 문득 이런 생각을 떠올렸다. 이름은 뭐 같지만 모기나 날파리를 쫓는데 사용하면 의외로 쓸모가 있을 것 같다고 말이다. 어쨌거나 두 사람은 유령말에 탄 채로 미아라의 안내를 받아 요정의 마을로 들어섰다. “와아...” 헤네스는 마을로 들어서자 그 아름다운 풍경에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터뜨리고 말았다. 마을이라고 불리기는 하지만, 준상이 보기에 그곳은 꽃밭이었다. 거의 주먹 만한 크기의, 은방울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꽃밭. 그 꽃들이야말로 요정들의 집이었던 것이다. 준상은 먼저 광견의 위엄을 해제했다. 그리고 유령말에서 내린 다음 헤네스를 말에서 내려 주었다. 그대로 들어갔다가는 말발굽에 마을이 짓밟힐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미아라는 그들이 말에서 내려 마을로 들어서자 다시 한번 요란스럽게 팔을 휘저으며 허리를 숙여 보였다. “환영합니다. 요정의 친구이며 또한 요정용의 주인이신 여행자시여. 저는 영웅 요정의 후예이며 요정 기사의 자격을 지닌 미아라입니다.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이에요.” 그 말에 준상은 미아라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 답한 다음 조용히 대답했다. “준상이다.” 그러자 헤네스도 얼른 자신의 소개를 했다. “헤네스라고 해요.” 그렇게 통성명을 하는 동안 준상의 시야에서는 퀘스트 정보의 갱신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에픽 퀘스트 – 망각 1. 미니맵에 표시된 지역까지 이동하십시오. (달성) -> 완료! 보상: 경험치 아주 약간 -> 보상을 지금 수령하시겠습니까? (Y/n) _ (주의) 수령하지 않은 보상은 7일후 자동 소거됩니다. 준상이 보상을 수령하자, 곧바로 다음 퀘스트가 나타났다. 에픽 퀘스트 – 망각 2. 미아라와 대화를 나누십시오. -아겔라한의 숲을 수호하는 요정 기사 미아라는 요즘 숲을 어지럽히는 침입자들 때문에 골치를 썩이고 있습니다. 그녀의 얘기를 들어주세요. (Sub) 미니아의 부탁 ->대화 필요. (Sub) 리피의 부탁 ->대화 필요. (Sub) 유니아란의... “...” 미아라까지는 그런가보다 하겠는데... 그 뒤에 이어진 그야말로 끝도 없이 이어진 서브 퀘스트의 향연에 준상은 자신도 모르게 이마를 감싸 쥐고 말았다. 대충 헤아려 봐도 약 스무 개. 에픽 퀘스트 때문에 커다란 성곽 도시를 몇 개나 방문한 전적이 있는 준상이지만, 단숨에 이 정도로 많은 서브 퀘스트가 목록에 나타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준상의 곁에는 이런 일을 전문으로 하는 훌륭한 도우미가 있었다. “헤네스.” “네.” “네가 좀 도와줘야겠다.” “네! 말씀만 하세요!” 준상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미아라를 무시한 채 캐비닛을 꺼내 그 안에서 수첩과 필기구를 꺼내 그것을 헤네스에게 건네주었다. “자, 받아 적어라.” 척하면 척. 헤네스는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고는 얼른 볼펜의 뚜껑을 연 다음 수첩을 펼쳤다. “불러주세요!” 그녀가 준비를 마치자 준상은 퀘스트 정보에 나타난 이름들을 하나씩 불러주기 시작했다. “미니아, 리피, 유니아란...” 그러자 옆에서 멀뚱히 지켜보고 있던 미아라가 물었다. “지금... 뭐하세요? 그 이름들은... 우리 애들 이름 같은데...” 하지만 준상은 미아라의 말을 무시한 채 퀘스트 정보에 나타나 있는 이름들을 모두 불러주고 난 다음에야 다시 헤네스에게 말했다. “어떻게 해야하는지 알지?” “물론이죠!” “아, 여기 미아라도 포함이니까 잊지 말고.” “네! 맡겨주세요!” 헤네스는 모처럼 준상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신이 나 있었다. “자! 요정 여러분! 드릴 말씀이 있어요! 모여주세요!” 그러자 요정들은 방금전에 광견의 위엄에 놀라 도망쳤던 것도 잊고 호들갑을 떨며 그녀의 주위에 모여들었다. “뭐지?” “몰라!” “나도 몰라!” “묻지마!” “하긴 넌 바보니까.” “뭐야! 이 먹보 요정이!” “아! 말한다. 조용히 해봐!” 준상은 잠시 그들에게서 물러나 마을 입구의 바위에 걸터앉은 채 헤네스가 요정들의 얘기를 듣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요정을 닮은 소녀가 요정의 마을 속에서 요정들에게 둘러싸인 채 그들의 말을 듣고 있는 그 모습이라니. 평소에 셀카든 뭐든 간에 사진과는 거리가 멀었던 준상조차도 이 모습은 어쩐지 자신만 보기 아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음... 휴대폰을 어디에 넣어 뒀더라.” 준상은 캐비닛을 꺼내 휴대폰을 찾아보았다. 덕분에 퀘스트 관련 기능이 사라진 뒤로 위치 추적 등을 우려해 처박아 놓고 쓰지 않고 있던 휴대폰이 오랜 만에 바깥에 모습을 드러냈다. 준상은 휴대폰을 켠 다음 카메라 기능을 사용해 헤네스와 요정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다. 해상도가 좀 아쉽기는 했지만, 지금은 이것으로도 감지덕지다. 혹시나 해서 준상은 서너 장 정도 연속해서 사진을 찍은 다음에야 휴대폰을 원래대로 보관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하게 헤네스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헤네스는 준상이 자신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었으리라는 사실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채, 요정들의 수다스러운 얘기를 하나도 빠짐없이 꼼꼼하게 듣고 요점을 기록한 뒤에야 준상에게로 돌아왔다. “수고했다.” “별 말씀을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요.” 밝게 미소짓는 헤네스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준 준상은, 그제서야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미아라의 일은 맨 나중에. 그럼 뭐부터 해야 하지?” 그러자 헤네스는 얼른 수첩을 넘기며 대답했다. “음... 그럼 먼저 미니아씨의 부탁부터 시작할게요.” “그래.” 준상은 곧바로 요정들의 부탁을 하나씩 해결하기 시작했다. “정말 고마워요! 역시 요정의 친구세요!” “...” 모자를 찾아달라고 부탁했던 미니아의 보상은 이니아나 일마렌과 마찬가지로 요정의 키스였다. 미니아는 준상의 볼에 살짝 입을 맞추고는 부끄러운 듯이 얼른 근처의 은방울꽃 속으로 숨어버렸다. ‘요정의 키스’가 각인되었습니다. :요정의 호의가 담긴 키스가 당신에게 행운을 부여합니다. 이것은 일종의 각인이므로 절대 지워지지 않습니다. ‘요정의 키스’는 다른 요정들에게 당신이 요정의 친구임을 어필합니다. 메시지 또한 이니아나 일마렌 때와 달라진 것이 없었다. 리피의 부탁은 멧돼지의 발에 짓밝혀 버린 샘물을 원래대로 되돌려 달라는 것이었다. 이 부탁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새벽이슬.” 준상은 물의 정령을 불러낸 다음 엘리멘탈 드래곤과 합체시켰다. 엘리멘탈 드래곤은 새벽 이슬과 합체하자 싱그러운 물방울과도 같은 형상으로 모습을 변화시켰다. 물의 정령과 합체한 요정용이 샘 근처에 날아들자 지켜보던 요정들은 다시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오오! 요정용이다!” “와, 진짜 멋있다.” “그치? 근데... 나 사실 요정용 처음 봐.” “너도? 사실은 나도 이번이 처음이야.” “영웅 요정이 요정용을 타고 다녔다던데. 나도 저런 요정용 한 마리 가지고 싶다.” “네 몸무게를 견딜만한 요정용이 있을까?” “우쒸!” 요정들이 그렇게 왁자하게 떠들고 있는 동안 준상은 원래 샘물이 솟아나던 자리의 땅을 야삽으로 간단하게 파서 정리한 다음 주위에 돌을 깔아 이번처럼 쉽게 어지럽혀지는 일이 없도록 만들었다. 대략의 작업이 끝나자 준상은 물의 정령과 합체한 엘리멘탈 드래곤에게 명령을 내렸다. “자, 이제 물을 끌어와라.” 명령을 받은 작은 요정용은 샘이 있던 자리에 마치 알을 품듯이 가만히 내려앉더니 이내 날개를 퍼득이며 날아올랐다. 그러자, 엘리멘탈 드래곤의 뒤를 따르듯이 작은 물줄기가 솟아올랐다. “와아! 샘물이 다시 솟았다!” “만세! 샘물이 다시 솟았다!” 요정들은 새벽 이슬처럼 깨끗한 샘물이 솟아나자 호들갑을 떨며 주위를 정신없이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리피는 샘물이 원래보다 더 깨끗하고 많이 솟아나게 되자 기쁜 표정을 지으며 준상을 향해 뽀르르 날아왔다. “정말 너무 너무 감사합니다!” 그리고는 역시나 준상의 뺨에 키스를 한 뒤 살짝 얼굴을 붉히며 다시 말했다. “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요. 잠시 와주실래요?” 준다는 걸 거부할 필요가 있겠는가. 준상은 헤네스와 함께 리피가 이끄는 대로 다시 은방울꽃이 하나 가득 피어있는 요정의 마을로 돌아왔다. 리피는 자신이 집으로 삼고 있는 은방울 꽃 아래에서 작은 물병 하나를 꺼내 준상에게 건네 주었다. “이건?” 도자기 비슷한 재질로 만들어진 물병을 건네받은 준상이 묻자, 리피는 부끄럽다는 듯이 몸을 꼬며 대답했다. “새벽에 가장 먼저 맺혀진 첫 이슬과 은방울꽃의 꿀로 빚은 요정의 술이에요. 제 자신작이랍니다!” 기껏해야 한 모금이나 될까 싶은 양에 불과했지만, 안목의 능력이 발동해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을 보니 보통 물건은 아닌 듯 싶다. “고맙다. 잘 마시도록 하지.” “별 말씀을요.” 리피에게 감사의 뜻을 표한 준상은 아이템 확인을 실행해 보았다. 아이템정보 명칭 : 요정의 술 레벨제한 : 없음 종류 : 술 등급 : Rare 효과 : 사용자에게 잠시 동안 비행 능력을 부여합니다. (지속시간: 10분) 지속시간 : 즉시 재사용 대기시간 : 없음 남은 사용횟수 : 1회 설명 : 너무 맛있어서 한 모금 넘기는 순간 그대로 하늘을 날아오를 것만 같은 술입니다. 단점이라면 맛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정말로 하늘로 날아올라 버린다는 점 정도겠군요. “허...” 비행 능력이라니? 준상은 이 요정들이 의외로 시끄럽기만 한 민폐 종족이 아니라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 세 번째 서브 퀘스트의 주인공은 풍만한 체구를 지닌 아줌마 요정 유니아란이었다. “아유... 미안해서 어쩌나.” “...” 유니아란의 부탁은 새 집 마련이었다. 비만으로 몸집이 커져서 이전에 살던 집이 너무 비좁아졌다나 뭐라나. 그래서 집을 삼을 만한 은방울꽃을 바뒀는데, 마을에서 너무 떨어진 곳이라 난처해 하던 참이란다. 이 부탁도 사실 준상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문제의 은방울꽃이 피어있는 곳으로 찾아가 삽으로 뿌리째 푹 떠서 마을에 옮겨 심기만 하면 되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간단하게 부탁을 해결하자 유니아란은 기다렸다는 듯이 준상의 볼에 키스를 하고는 부끄럽다는 듯이 몸을 베베 꼬았다. “실은 저도 따로 준비한 것이 있는데, 받아 주실래요?” “...” 준상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유니아란은 원래의 집 아래에서 파란색 병 하나를 꺼내 준상에게 건네 주었다. “깨끗한 샘물로 몸을 씻은 후 거기서 나온 가루만 모았어요. 이름 하여 요정의 가루! 효과 하나는 끝내준 답니다.” “...” 몸을 씻은 후 나온 가루라니? 준상은 얼른 거기서 사고를 멈추었다. 어쩐지 더 이상 생각을 이어가면 안 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니아란의 말이 거짓은 아니었던 모양인지 이 파란색 병 역시 안목의 능력이 발동해 은은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준상은 일단 아이템 확인을 실행해 보았다. 아이템정보 명칭 : 요정의 가루 레벨제한 : 없음 종류 : 약 등급 : Rare 효과 : 1. 모든 상태이상 즉시 해제 2. 상태이상 해제시 해당 효과에 대해 10분간 면역. 지속시간 : 즉시 재사용 대기시간 : 없음 남은 사용횟수 : 1회 설명 : 요정의 가루는 요정의 생명력 그 자체가 형상화된 매우 희귀한 영약입니다. 뭔가 좀 꺼림직하기는 했지만, 역시나 효과 하나는 정말 끝내준다. 준상은 요정의 가루를 챙겨 넣은 다음 다른 요정들의 부탁 역시 하나씩 해결해 주었다. 다른 요정들 역시 미니아와 리피, 유니아란처럼 저마다 보상을 주었는데, 여덟 번째 요정인 이오라가 준상의 뺨에 입을 맞추자 준상의 눈앞에 메시지 하나가 나타났다. 축하합니다! :당신은 열 명의 요정에게서 키스를 받았습니다! -당신의 위업을 찬양하며 ‘요정의 은인’ 칭호를 부여합니다. [칭호 상세 정보 확인은 이곳을 누르십시오.] “이런 것도 있었나.” 준상은 효과를 확인해 보았다. [요정의 은인] :열 명의 요정에게서 키스를 받은 자에게 부여되는 칭호. -효과: 사용자에게 ‘뽀샤시’ 효과가 부여됩니다. -칭호는 획득시 자동으로 효과가 적용됩니다. “...” 뽀샤시라니. 준상은 설마하며 효과를 확인해 보았다. 뽀샤시 : 요정들의 호의가 담긴 키스가 엉뚱한 부작용을 낳았습니다. -원래보다 더 피부가 깨끗해 보입니다. -그 모습을 눈에 담는 순간, 사용자보다 레벨이 낮은 존재들은 자기도 모르게 미약한 호의를 느끼게 됩니다. “...” 혹시나 했지만, 결과는 역시나였다. 00127 트롤러 ========================================================================= 준상은 옆에 서 있는 헤네스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차라리 앞으로 요정의 키스는 헤네스에게 받게 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떠올린 탓이다. “혹시 뭐라도 묻었나요?” 헤네스는 준상이 갑자기 자신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부끄러워하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아니.” “그럼 왜...” “그냥.” “...” 헤네스는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이럴 때 예쁘다든가 귀엽다든가... 그런 말 한 마디 정도는 해줘도 되지 않나. 하긴 준상이 그런 말을 스스럼없이 입에 담는 모습은 어쩐지 상상하기 힘들지만, 그래도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만약 이 순간 준상이 자신에 대해 ‘그냥도 예쁜데 뭐...’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헤네스가 알았다면 또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모를 일이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준상은 다음 메시지를 확인했다. 축하합니다! :당신은 최초로 ‘요정의 은인’ 칭호를 받았습니다! -당신의 위업을 찬양하며 ‘요정 키스의 선구자’ 칭호를 부여합니다. [칭호 상세 정보 확인은 이곳을 누르십시오.] 하긴 이런 식으로 요정 들에게 무더기 키스를 받을 만한 귀환자가 또 있으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우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준상은 얼른 상세 정보를 확인했다. [요정 키스의 선구자] :‘요정의 은인’ 칭호를 가장 먼저 받은 자에게 부여되는 칭호. -효과: 요정으로부터의 퀘스트를 부여받을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칭호는 획득시 자동으로 효과가 적용됩니다. “...” 준상은 어쩐지 효과를 보는 순간 부익부빈익빈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요정들로부터 퀘스트를 받게 되면, 나중에는 그의 얼굴에 더 이상 키스를 받을 자리가 남아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얼핏 들 정도였다. 어쨌거나 칭호의 확인을 마친 준상은 나머지 요정들의 퀘스트도 빠르게 수행했고, 그 결과 모두 스물 두 번의 키스와 요정의 술 다섯 병, 그리고 요정의 가루 아홉 병을 얻을 수 있었다. 요정의 가루를 많이 받은 건 샘이 막히는 바람에 요정들이 한동안 목욕을 제대로 못한 것이 이유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문득 스치고 지나갔지만 얼른 머리 속을 비웠다. 깊게 생각해봐야 별로 이로울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준상은 서브 퀘스트를 모두 완료하고 나서야 본론인 미아라의 퀘스트 내용을 헤네스로부터 전해 받았다. 미아라는 꽃그늘에서 꾸벅 꾸벅 졸고 있다가 자신의 차례가 되자 얼른 날아올라 준상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미아라씨의 얘기로는...” 그렇게 시작된 헤네스의 짧은 설명이 끝나자 퀘스트 정보가 갱신되었다. 에픽 퀘스트 – 망각 2. 미아라와 대화를 나누십시오. -아겔라한의 숲을 수호하는 요정 기사 미아라는 요즘 숲을 어지럽히는 침입자들 때문에 골치를 썩이고 있습니다. 그녀의 얘기를 들어주세요. (달성) ->완료! 보상: 경험치 아주 약간 -> 보상을 지금 수령하시겠습니까? (Y/n) _ (주의) 수령하지 않은 보상은 7일후 자동 소거됩니다. 준상이 보상을 수령하자 다음 퀘스트가 나타났다. 3. 침입자들을 몰아내십시오. -과거에 이곳 아겔라한이 정령사의 숲으로 유명했던 것은 요정계나 정령계 같은 곳을 내왕할 수 있는 정령의 문이 존재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최근 침입자들이 숲으로 들어와 이 정령의 문을 찾고 있습니다. 요정들은 안락한 자신들의 삶이 침범당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침입자들을 찾아내 숲 밖으로 몰아내 주십시오. 얼핏 생각하면 침입자들을 찾아내 처치하면 될 것 같지만, 퀘스트의 내용은 그냥 몰아내라고만 되어 있었다. 죽이지 말란 얘기가 없으니 상관없을 것 같기도 하지만, 계속 퀘스트가 연결되는 에픽 퀘스트의 특성상 그런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면 뒤에 이어질 사건들이 꼬일 가능성이 컸다. 이를테면, 이전에 헤네스를 만났을 때처럼 말이다. 그러고 보니... 아겔라한이라는 이름을 어디서 많이 들었다 싶었는데, 그가 가진 정령사 콤보에 언급된 지명이었다. 그러고보니 이전에 헤네스의 부친인 제스터를 만났을 때도 준상이 정령을 부리는 것을 보고 아겔라한의 숲을 언급했었던 적이 있다. 역시 콤보 카드에 나온 지명들은 모두 이 세계에서 유래한 것일까. 욕쟁이 할매의 경우를 보면 반드시 그런 것 같지만은 않지만, 어쨌든 이런 식으로 자신이 사용하는 콤보 카드와 관련된 곳을 찾게 되자 조금은 감회가 새로웠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준상은 미아라에게 물었다. “침입자들은 어디에 있지?” 그러자 이 작은 요정 기사는 기다렸다는 듯이 눈을 빛내며 대답했다.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알았다.” 준상이 고개를 끄덕이자, 미아라는 당연하다는 듯이 엘리멘탈 드래곤이 앉아 있는 준상의 어깨 위에 자리를 잡더니 마치 대군을 인솔하는 장군처럼 자랑스럽게 손을 뻗으며 외쳤다. “자, 준비 완료! 출발하세요!” “...” 어쩐지 묘한 기시감이 느껴진다. 기억을 되살려 보니 습지에서 만났던 요정인 일마렌도 그랬었다. “저, 저도... 한 번 타보고 싶었단 말이에요. 안되나요?” “...” 두 볼을 감싼 채 예쁜 척 하는 모습까지. 완전히 일마렌이 했던 행동과 판박이다. 아무래도 이건 일마렌한테 배운 행동이 아닐까 싶지만, 이전과 다른 점도 있었다. “나도!” “나도 갈래!” “와아아!” “이게 그렇게 재미있다면서?” 미아라가 어깨 위에 자리를 잡자 기다렸던 것처럼 지켜보던 요정들이 일제히 준상의 몸 이곳 저곳에 달라붙기 시작한 것이다. “푸훕!” 옆에서 이 모든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헤네스는 요정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준상의 모습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준상은 헤네스의 웃는 모습을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이마를 감싸 쥐며 신음 소리를 내고야 말았다. “끙...” 헤네스는 입을 막고 웃음을 삼키면서도 난감해 하는 준상의 모습을 부드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귀찮으면 그냥 아까처럼 껄끄러운 기운을 뿜어내어 떨쳐 버리면 그만일텐데, 의외로 이 작은 요정들에게 모질게 굴지 못하는 준상의 모습에서 그의 새로운 일면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문득 그와 예전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처음으로 같은 곳에서 밤을 지새던 날, 준상은 헤네스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넌 요정을 닮았구나.’ 생각해 보면 그를 이성으로 인식하게 된 계기였던 바로 그 말. 그때는 단순히 일종의 비유 같은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준상을 무서워하지 않고 저렇게 달라붙는 귀여운 요정들의 모습을 보니 어쩐지 이제야 그 의미를 조금은 이해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렇게 헤네스가 조금은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동안, 준상은 도저히 안되겠다 싶었던지 드디어 광견의 위엄을 발동했다. 하지만, 이 요정들은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우웃!” 준상의 몸에서 꺼림직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자 놀라서 얼른 흩어지는 듯 싶더니, 이내 일마렌이 그랬던 것처럼 양 볼을 손으로 감싼 채 귀여운 척을 한다. “우우... 한번만 태워주세요.” “부탁드릴게요. 네?” “아이이이잉.” 준상은 인상을 쓰려다가 갑자기 눈앞에 우르르 쏟아지는 퀘스트 메시지에 당혹해 했다. (Sub) 시밀의 부탁 ->한번만 태워주세요. (Sub) 셀마이드의 부탁 ->태워주면 뽀뽀해줄게요. (Sub) 루론의... “...” 아주 작정하고 나섰는지 마을의 모든 요정들의 이름들이 우르르 쏟아지며 퀘스트 정보가 계속 갱신되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뽀샤시 효과와 요정 키스의 선구자 칭호가 서로 반응하며 이런 식의 사태가 일어난 것은 아닐까. 아니... 어쩌면 이니아나 일마렌으로부터 흘러나온 얘기가 요정들의 귀에 들어간 순간부터 이런 사태는 예고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후우...” 준상은 결국 쏟아지는 퀘스트 정보에 항복하고 말았다. 그가 광견의 위엄을 거두어들이자, 요정들은 와 하고 몰려 들어 또다시 그의 몸 여기저기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헤네스는 그런 준상의 모습에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억지로 삼키다가 눈이 마주치자 얼른 표정을 얼버무리려 했지만, 그래봐야 눈이 웃고 있어서 별 의미가 없었다. 준상은 다시 한숨을 푸욱 내쉬고는 크림슨 울프를 불러 그 등에 안장을 채워주었다. 그러자 자리가 모자라 준상의 등에 매달리지 못하고 있던 요정들이 우르르 늑대쪽으로 몰린다. “와! 이게 그 늑대구나!” “나도 어깨 위에 타고 싶었는데.” “할 수 없지. 늑대로 만족할 수밖에.” 크림슨 울프에게로 한 무리의 요정들이 떨어져 나가자, 준상은 이거다 싶어서 한동안 소환하지 않았던 나머지 늑대들 또한 일시에 소환했다. 그렇게 세 마리의 늑대를 소환하고, 다시 크림슨 울프의 등에 헤네스가 올라타자 그제서야 준상의 몸에 바글바글하게 달라붙던 요정들이 어느 정도 적절하게 분배가 되었다. “그럼... 달린다.” 준상이 그렇게 말하자, 요정들은 일제히 한손을 치켜 들면서 외쳤다. “준비완료!” “언제든지 달려주세요!” “달려! 달려!” 마치 단체로 소풍이라도 나가는 듯한 요정들의 모습에 준상은 다시 한 번 한숨을 몰아 쉬었고, 헤네스는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마침내 준상이 천천히 숲을 달리기 시작하자, 요정들은 난생 처음 느껴보는 속도감에 환호성을 질렀다. “으아앗! 떨어질 것 같아!” “꽉 잡아!” “꺄하하하하하!” 나름 이것도 퀘스트인지라 준상은 적당하게 속도를 유지하느라 신경을 써야만 했다. 사실 그가 마음 먹고 최고 속도를 내기 시작하면, 그로 인해 전달되는 압력이나 가속도를 요정들이 견뎌낼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아무튼 미아라의 인도를 받아가며 그렇게 잠시 달리던 준상은 이내 침입자가 자주 출몰한다는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자, 이내 요정들의 불만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너무 짧아!” “더! 더! 더!” “우리는 질주를 원한다!” “한 번 더 달리는 건가요?” “아이이이잉!” 쏟아지는 협박과 아양과 재촉의 소용돌이에 준상은 인상을 썼지만, 행운인지 불운인지 문제의 침입자는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결국 준상은 요정들의 요구에 따라 숲을 한 바퀴 정도 더 돈 뒤에야 그들의 보상을 받을 수 있었다. 요정들은 자신을 태워준 준상과 헤네스와 늑대에게 각자 키스를 해준 뒤에야 아쉬워하는 모습으로 그들에게서 떨어졌다. “...” 그러자 준상에게 다시 한 번 메시지가 전해진다. 축하합니다! :당신은 백 명의 요정에게서 키스를 받았습니다! -당신의 위업을 찬양하며 ‘요정의 연인’ 칭호를 부여합니다. [칭호 상세 정보 확인은 이곳을 누르십시오.] 연인이라니... 준상은 칭호 명칭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요정의 연인] :백 명의 요정에게서 키스를 받은 자에게 부여되는 칭호. -효과: 요정들은 이제 사용자에게 일족과 다름없는 친밀감을 느끼게 됩니다. -칭호는 획득시 자동으로 효과가 적용됩니다. 상세 정보를 확인한 준상은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뽀샤시 같이 이상한 것이 나오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히도 조금은 정상적인 효과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축하합니다! :당신은 최초로 ‘요정의 연인’ 칭호를 받았습니다! -당신의 위업을 찬양하며 ‘요정 키스의 달인’ 칭호를 부여합니다. [칭호 상세 정보 확인은 이곳을 누르십시오.] 달인이라니... 준상은 피식 웃으며 상세 정보를 확인했다. [요정 키스의 달인] :‘요정의 연인’ 칭호를 가장 먼저 받은 자에게 부여되는 칭호. -효과: ‘요정의 키스’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단, 효과는 1인당 1회만 적용됩니다.) -칭호는 획득시 자동으로 효과가 적용됩니다. “...” 능력이 생기는 건 좋은 일이지만, 이건 좀...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준상이 쓰기에는 여러모로 난감한 능력이다. 어쨌거나, 준상은 정신없던 요정들이 물러가자 그제서야 미아라에게 물었다. “그 침입자들은 보통 언제 나타나지?” 그러자 미아라는 감히 준상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몸을 베베 꼬며 대답했다. “조, 조금 있으면... 올 거에요.” “...” 준상은 미아라의 모습을 보자 순간 한 가지 느낌이 머리 속에 스치고 지나갔다. 설마... 일족과 다름없는 친밀감이라는 것이 이런 의미였단 말인가! 00128 트롤러 ========================================================================= 그러면 그렇지. 뽀샤시의 상위 칭호인데 평범할 리가 없지 않은가. 백 명 이상의 요정들에게 키스를 받았으니 행운은 그만큼 올라갔을 테지만, 어째 부작용이 만만치 않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는 부러워할 수도 있겠지만, 준상에게는 골치 아픈 일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어쨌거나, 준상과 헤네스는 요정 기사 미아라와 함께 침입자가 자주 나타난다는 오솔길 옆의 바위 위에 모습을 숨긴 채 대기했다. “정말 이곳에 오는 게 맞나?” 하지만 제법 시간이 지났는데도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에 준상은 다시 미아라에게 물었다. 그러자 미아라는 기다렸다는 듯이 얼른 대답했다. “네. 어제도 왔었고요, 그제도 왔었어요.” “흠...” 매일 같이 들른다면 근처에 마을이나 베이스캠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들바람, 마파람.” 준상은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의 정령 둘을 소환해 주위로 정찰을 보냈다. 그러자 얼마 되지 않아 정령들은 한 무리의 사람들이 숲으로 들어오고 있음을 알려왔다. 정령을 통한 정찰로는 정확한 인원수까지 파악하는 것은 무리였지만, 대략의 위치를 확인한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준상은 어깨 위에서 자신을 몰래몰래 훔쳐보고 있는 미아라에게 말했다. “침입자를 찾았다. 이동할테니 꽉 잡아라.” “네!” 미아라의 대답을 들은 준상은 얼른 크림슨 울프에 올라타는 헤네스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인 다음, 조심스럽게 숲을 가로질러 침입자들에게로 향했다. 바람의 정령들이 빠르게 포착한 덕분에 침입자들은 아직 숲 외곽을 지나는 중이었다. “근데 진짜 정령의 문이란 게 있기는 한 거야?” “대장이 있다잖냐. 나야 그런가보다 하는 거지.” 준상이 바라보니 너저분한 차림새의 용병 한 무리가 투덜거리며 숲 안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등에 무기를 지고 있지 않으면, 용병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거지 떼가 어울릴 듯한 느낌. 준상은 일단 통찰의 능력으로 용병들 전체를 확인해 보았지만, 대부분 그저 그런 실력의 소유자들이었다. 하긴 정말 뛰어난 실력의 소유자들이라면 지금처럼 대륙이 혼란에 빠져 있을 때 이런 외딴 숲에서 노닥거리고 있을 이유가 없다. 대충 용병 무리들을 둘러보던 준상은 말 한 마리가 끄는 수레 하나를 발견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수레라기 보다는 사극에서 죄인들을 실어 나르는 용도로 쓰이는 함거에 가까운 모양새였다. 좀 더 자세히 살피자 그 안에 조그마한 아이 하나가 쭈그리고 앉아 있는 모습이 보인다. “저들이 맞나?” “네, 맞아요. 저렇게 이 길을 따라 올라와서 저녁 때까지 땅을 파다가 돌아가곤 해요.” “그렇군.” 준상은 고개를 끄덕인 다음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다시 말했다. “여기 있어라. 바로 쫓아 버리고 올 테니.” “네!” “다녀오세요.” 미아라와 헤네스의 대답을 들은 준산은 곧장 위상전이를 펼쳐 순식간에 용병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어엇!” “뭐, 뭐야!” 투덜거리며 오솔길을 이동하던 용병들은 갑자기 눈앞에 준상이 모습을 드러내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으슥한 숲 그림자 속에서 문자 그대로 튀어나왔으니 그들로서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누구냐!” 앞장 선 용병이 얼른 칼과 방패를 움켜쥐며 호기롭게 외쳤으나, 준상은 그 말에 입을 열어 답하는 대신 공포의 시선과 사안과 광견의 위엄을 동시에 발동했다. “흐억!” 용병들은 자신도 모르게 헛숨을 들이켰다. 이전에는 본적이 없는 이질적인 외모라든가 옷차림까지는 어떻게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갈 수도 있었다. 어둠 속에서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것도 자신들이 뭔가 잘못 봤다고 하면 그뿐이었다. 하지만 이 순간 준상의 두 눈에서 줄기줄기 뿜어져 나오는 시뻘건 안광은 절대로 착각 같은 것이 아니었다. 온몸의 피가 그대로 혈관을 타고 흘러내려가 발가락 끝으로 빠져 나가 버리는 듯한 그 느낌이라니! 나름대로는 칼 하나에 의지해 아수라장을 해쳐 나온 용병들이었지만... 아니, 그런 자들이었기에 더더욱 준상의 눈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안광과 그 몸에서 쏟아져 나오는 기운이 지닌 위험성을 더 잘 깨달을 수 있었다. “제, 젠장.” 힘으로 겨뤄서 이길 상대가 아니다. 숫자로 밀어 붙여서 감당할 수 있는 상대도 아니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도망치는 것 뿐이다. 가장 앞에 서서 칼과 방패를 뽑아들고 준상에게 소리를 질렀던 용병은 그와 같은 판단이 서자 그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을 치고 말았다. 행렬을 이끄는 자가 말도 없이 그렇게 도망치자, 다른 자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으, 으아아아!” “젠장! 어째 이럴 것 같더라니!” 다른 용병들은 그렇게 인상을 구기며 다른 사람에게 뒤질새라 얼른 도망치기 시작했다. 준상은 용병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줄행랑을 치자 그제서야 상태 이상을 유발하는 모든 능력을 해제했다. 그러자 바위 뒤에서 이 모든 일을 지켜보고 있던 미아라가 얼른 날아와 준상을 치하했다. “와! 정말 대단해요! 저 인간들을 그렇게 단숨에 쫓아 내다니!” 하지만 준상은 고개를 저었다. “완전히 쫓아 버린 것이 아니다.” “네?” “아마 사람들을 더 모아서 오던가 하겠지.” “아... 그렇겠네요.” 퀘스트 정보가 갱신되지 않은 것만 봐도 이런 식으로 겁을 줘서 한번 쫓아낸 것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는 것을 어렵지 파악할 수 있었다. 준상은 헤네스 역시 늑대를 타고 바위 위에서 내려오자, 용병들이 끌고 오던 함거로 다가갔다. 그러자, 순간 함거로부터 한줄기 바람이 뿜어져 나와 준상을 밀어내려 했다. 준상보다도 그의 어깨 위에 앉아 있던 미아라가 먼저 반응했다. “바람의 정령?” 미아라의 말에 준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것 같군.” 힘이 미약하긴 했지만, 이 부자연스러운 바람의 움직임은 확실히 바람의 정령이 맞았다. 다만 준상이 지닌 정령 가운데 최하 등급인 커먼 보다도 미약한 힘이라 성인 남자만 되어도 별다른 위협이 되기 어렵다는 것이 문제랄까. 하물며 준상 같은 사람을 밀어내기에는 한참이나 부족한 위력이었다. 준상이 다가가자 바람의 정령이 다시 한 번 바람을 불러 일으켰지만, 역시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준상은 함거 안에 웅크리고 있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이제 고작 예닐곱살이나 되었을까. 누더기로 국부만을 간신히 가리고, 온몸이 땟구정물로 더럽혀진 아이의 모습에 준상은 얼굴을 찌푸렸다. “크르르...” 함거 안에 쭈그리고 앉아 있던 아이는 몸을 낮춘 채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냈다. “...” 준상은 그 모습을 보고 한 번 더 얼굴을 찌푸렸다. 아무리 봐도 정상적인 인간이라고는 보기 힘든 반응이었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떠오른 단어는 늑대소년. 가장 유명한 것은 역시 키플링의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이겠지만, 실제로 1300년 이후 약 30건 정도의 사례가 있다고 전해진다. 조금은 착잡한 표정으로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데, 문득 어깨 위에 앉아 있던 미아라가 말했다. “음... 정령사의 후예인가 봐요.” “정령사?” 준상이 묻자 미아라는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오래된 얘기긴 하지만, 문이 열려 있을 때는 지금보다 정령의 힘도 강했고... 그런 정령들과 소통하려는 사람들이 이 근처에 마을을 만들어 살기도 했었어요.” “이 아이가 그들의 후손이라는 얘긴가?” “아마도요.” 미아라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다시 말했다. “하지만 달리 누구에게 배우지 않고 태어났을 때부터 정령을 다룰 수 있게 되었다면... 저희 요정들과의 혼혈일 가능성도 있겠네요.” 순간 준상은 물론이고 헤네스 역시 깜짝 놀랐다. “지금... 뭐라고요?” 헤네스가 얼른 되묻자 미아라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대답했다. “네? 뭐가요?” 헤네스는 준상의 표정을 얼른 살피고는 미이라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요정과... 인간의 혼혈이라고 했잖아요.” 그제서야 미아라는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역시나 준상을 살짝 훔쳐 보며 대답했다. “문이 열려 있을 때는 인간도 요정계나 정령계를 내왕하는 것이 가능했거든요. 이곳에서는 무리지만 요정계에서라면 인간과 요정이 사랑을 나누고 아이를 낳는 것도 가능했다고 들은 적이 있어요.” “그런...” 준상은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어 그와 같은 생각을 떨쳐 버렸다. “크흠... 그럼 용병들이 이 아이를 데리고 있었던 이유는?” 자신이 말해 놓고도 부끄러워서 몸을 베베 꼬던 미아라는 준상의 말에 바로 대답했다. “요정의 피가 흐르고 있으니 정령의 문이 반응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요?” “과연...” 충분히 일리가 있는 얘기였다. 성공 가능성은 둘째로 치더라도 달리 열쇠가 없다면 한번쯤 시도해 볼 만한 방법이라고나 할까. 준상은 함거로 다가가 조악하게 만들어진 나무 우리를 간단하게 부숴버렸다. 구석에 웅크린 채 준상을 향해 으르렁거리던 아이는 그 모습을 보고는 화들짝 놀라 입을 다물어 버렸다. 자신의 힘으로는 꿈쩍도 안하던 우리를 갈대 잎 꺾는 것보다 더 간단하게 해체해 버리는 모습을 보고 상대가 지니고 있는 힘을 알아차린 탓이다. “바보는 아닌 모양이군.” 준상은 그렇게 말하며 우리를 완전히 부숴버린 다음 물러나며 말했다. “가고 싶은 곳으로 가라.” “...” 어찌된 영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이는 다른 인간들과는 달리 준상의 말은 바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의심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아이는 조심스럽게 자신을 가두고 있던 함거로부터 빠져 나왔다. 그리고는 얼른 숲으로 도망치려다가... 헤네스가 타고 있는 커다란 붉은 늑대를 보았다. “커헝!” 아이는 너무나도 기쁜 나머지 얼른 달려가 붉은 늑대를 얼싸 안았다. “...” 준상은 그 모습을 보며 어쩐지 서유미를 떠올리고 말았다. 그리고 예전에는 자기 마음대로 쫑이라는 이름까지 붙여가며 크림슨 울프에게 달려들던 여자가 요며칠 함께 얼굴을 마주하고 지내는 동안 한 번도 늑대를 불러달라고 보채지 않았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어쨌거나 준상이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동안 아이는 크림슨 울프의 몸에 자신의 몸을 부비며 계속해서 반가움을 표시했다. 크림슨 울프는 별로 달갑지 않은 듯한 기색이었지만, 준상도 헤네스도 별 다른 말이 없었기 때문에 아이의 행동을 내버려 두었다. 사실 헤네스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도 이런 식의 야생아에 대한 얘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보통 사람들이라면 이성적으로 그 존재를 인정하기보다는 마귀에 홀렸다는 식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았겠지만, 헤네스는 이 세계에서도 제법 고등교육을 받던 양가집 규수인지라 이런 야생아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전해들은 바가 있었다. “붉은 늑대들 속에서 자랐나 보네요.” 헤네스는 준상에게 한 말이었지만, 아이는 그 말을 듣더니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내 말... 알아듣는 거니?” 역시나 이번에도 아이는 고개를 마구 끄덕여 자신의 의사를 표현했다. 헤네스는 그것을 확인하고는 준상에게 말했다. “이 아이... 원래 말을 배웠던 모양인데요.” 하지만 준상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닐걸.” “네?” “잊었나? 너와 나는 별다른 도움 없이 다른 세계의 존재와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아...” 준상은 귀환자가 되면서 그런 능력이 생겼고, 헤네스는 원래 그런 능력이 없었지만 펫으로 귀속되면서 의사소통의 문제가 해결되었다. 하지만 이유야 어찌 되었든 간에, 아이로서는 누군가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태어나서 처음 겪는 신비한 경험이었다. 헤네스는 가만히 쪼그리고 앉아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고는 이런 저런 얘기를 물었다. 어디서 나고, 어떻게 자랐으며, 어째서 이런 모습으로 여기에 있게 된 것인지. 원래부터 타고난 친화력이 있는데다, 바로 얼마 전에 요정들로부터 무더기 키스를 받으면서 엉겁결에 뽀샤시 효과도 부여된 상태라 그런지 아이는 손짓 발짓을 동원해 가며 그녀의 말에 성심껏 대답했다. 사실 그리 특별한 내용은 없었다. 그들이 이미 추측했던 것처럼 아이는 붉은 늑대들 속에서 자라다가 사냥을 나왔던 용병들에게 사로잡히는 신세가 되었고, 원래 살던 숲에서 너무 멀리 떠나온 터라 돌아가는 길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어쩌죠?” 헤네스가 물었지만 준상이라고 딱히 좋은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뭐라 해도 그들은 퀘스트가 끝나는 즉시 돌아가야만 하는 이방인이기 때문이다. “일단은... 용병들의 본거지부터 확인하도록 하자.” “네.” 그들은 일단 용병들을 처음 발견했던 장소를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헤네스는 아이를 붉은 늑대의 등에 태우고, 자신은 준상과 함께 유령말을 타는 쪽을 선택했다. 오래지 않아 그들은 처음 정령들이 용병들을 발견했던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준상은 그곳에서부터 다시 발자국이나 냄새를 추적해 용병들의 본거지를 확인할 생각이었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도망쳤던 용병들이 자신들의 패거리를 이끌고 우르르 몰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준상의 눈빛 한 번에 질려 도망쳤던 자들이 이런 식으로 몰려올 때는 무언가 믿는 바가 있어서이다. 그것은 숫자일 수도 있고, 그들 안에 존재하는 뛰어난 실력의 강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느 쪽이 되었든 준상으로서는 귀찮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차라리 좀비들은 때려 잡으면 낮은 확률로 시드라도 나오지. 저런 거지 꼴의 용병들에게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들이 사용하는 조악한 무기와 얼마 안 되는 돈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준상은 헤네스를 유령말에서 내려주고는 말했다. “헤네스.” “네.” “아이랑 적당한 곳에 숨어 있어라.” “네. 걱정 마세요.” 헤네스는 얼른 붉은 늑대에게로 다가가 아이를 데리고 수풀 속으로 몸을 감추었다. 준상은 그들이 몸을 숨기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숲을 향해 다가오는 용병들을 향해 걸음을 내딛었다. 준상이 모습을 보이자, 용병들은 걸음을 멈추고는 무기를 치켜들었다. 그 수는 대략 백여 명. 확실히 상식적으로는 혼자 상대하기 버거운 수였지만, 불행히도 준상은 그런 일반적인 경우를 초월한 존재였다. 준상이 다가서자 용병들 가운데 특히 덩치가 큰 인물 하나가 앞으로 나서며 외쳤다. “네놈은 누구냐! 누군데 감히 우리...” 얼핏 보기에도 거의 윤성렬과 비슷할 정도의 장대한 체구를 가진 남자는 우선 용병단과 그 용병단을 이끄는 자신의 이름을 외치려 했다. 그러나, “헛!” 그가 말을 끝마치는 것보다 준상의 행동이 더 빨랐다. 남자는 갑자기 자신의 몸이 획 하고 딸려 나가는 것을 느끼고는 얼른 자세를 고쳐 잡았다. “쯧...” 준상은 혀를 찼다. 두목으로 보이는 남자를 단숨에 염동력으로 끌어내어 포박하려는 시도가 어이없이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염동력의 힘이 부족했던 것일까. 아니면 남자의 몸무게가 생각보다 더 무거웠던 것일까. 준상이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얼굴을 찌푸리자, 그것을 본 남자는 불안한 표정을 지우고 크게 외쳤다. “쫄지마! 놈은 별 볼 일 없는 속임수를 쓰는 사기꾼이다! 단숨에 들이쳐서 밟아버려라!” 그러자 용병들은 방패를 앞세운 채 준상을 향해 일제히 돌격을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준상은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사기꾼이라...” 그리고는 어깨 위에 앉아 있는 엘리멘탈 드래곤을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 “그것도 나쁘지 않겠군.” 어차피 한번쯤은 위력을 시험해 볼 생각이었는데, 마침 잘 된 일이다. 물론 그 시험대상이 될 용병들로서는 불행한 일이겠지만 말이다. 00129 트롤러 ========================================================================= 준상은 자신이 보유한 모든 정령들을 일시에 소환했다. 도깨비불부터 시작해서 눈꽃송이, 새벽이슬, 산들바람, 반딧불이, 그리고 유일한 레어급 정령인 마파람에 이르기까지. 갑자기 준상 주위에 여러 가지 정령들이 한꺼번에 모습을 드러내자 부하들을 돌진시켰던 용병단 두목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서, 설마?” 하지만 그가 뭔가 다른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준상은 곧바로 다음 행동을 시작했다. “먼저 산들바람부터.” 준상의 명령이 떨어지자 엘리멘탈 드래곤은 작은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올라 산들바람과 합체했다. 안 그래도 투명하게 빛나던 엘리멘탈 드래곤의 모습이 산들바람과 합체된 이후에는 정말 가까이서 눈을 들이대지 않고는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희미해졌다. 하지만 그 힘은 희미해진 모습과는 정반대로 매우 강하고 격렬해졌다. “시작해라.” 다시 준상의 명령이 이어지자, 엘리멘탈 드래곤은 숨을 한번 깊게 들이쉬더니 그 입을 통해 세찬 바람을 뿜어냈다. 기존의 산들바람이 문자 그대로 살랑살랑 불어오는 여린 바람이라면, 엘리멘탈 드래곤과 합체하여 증폭된 그 힘은 하나의 폭풍과도 같은 강렬함을 가지고 있었다. “으와앗!” 방패를 앞세우고 돌진하던 용병들은 갑자기 강렬한 바람이 방패를 밀어내자 크게 당황했다. “뭐, 뭐야. 갑자기 왠 바람이?” “멈추지 마! 달리란 말이다!” 갑작스러운 바람에 밀려 걸음을 멈추었던 용병들은 허리에 힘을 준 상태로 방패를 밀어내며 다시 전진하려 했지만, 갑자기 풍압이 증가하자 그 힘을 버티지 못하고 우르르 넘어지고 말았다. “으앗! 내 방패!” 용병들의 대열이 무너지고 다시 그들이 서로 뒤엉켜 넘어지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훌륭하군.” 본래 산들바람의 힘이 사람 하나를 간신히 밀어내는 정도였던 것을 감안하면 엘리멘탈 드래곤의 정령증폭으로 강화된 정령의 힘은 거의 자연재해를 연상시킬 정도의 강력함을 가지고 있었다. 준상은 만족스러움을 표시하며 다른 정령을 호명했다. “도깨비불.” 그러자 크고 작은 두 개의 불덩이가 준상 앞으로 나섰다. 준상은 그 가운데 큰 불덩이를 엘리멘탈 드래곤과 합체시켰다. 하지만 그렇게 새로운 공격을 준비하기 위해 바람을 멈추자 용병들은 얼른 몸을 일으키며 대열을 정비했다. 용병들은 방금 전에 경험했던 바람의 힘이 인위적인 현상이라는 것을 깨닫자 불안해 하며 중얼거렸다. “제, 젠장! 이거 얘기가 틀리잖아! 저게 무슨 속임수라는 거야?” “젠장... 설마 진짜 정령사인가?” 그들이 붙잡았던 꼬마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엄청난 바람의 힘에 용병들은 살짝 겁을 먹은 상태였다. 그러자 지켜보고 있던 두목이 앞으로 나서며 다시 말했다. “그래봐야 밀어내는 것이 고작이다! 봐라! 누가 죽기라도 했나? 저 놈의 힘은 이게 전부란 말이다! 계속 밀어 붙이면 언젠가 힘이 다해서...” 하지만 그가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옆에 서있던 졸개 하나가 얼른 그의 옷자락을 당기며 말했다. “두, 두목.” “이 자식이... 감히 두목이 말하는데 어딜 감히...” “그, 그게... 저길 좀....” “뭔데?” 두목은 졸개가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헛숨을 들이켰다. “헉!” 그곳에 있는 것은 맹렬하게 타오르는 불덩어리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언커먼급의 도깨비불과 합체한 엘리멘탈 드래곤이었지만, 용병들의 눈에는 준상의 어깨 위에 시뻘건 불덩이가 떠올라 넘실거리는 것으로 보였다. “...” 준상은 말없이 손가락을 들어 두목을 가리켰다. 그러자 엘리멘탈 드래곤이 입을 열어 불길을 뿜어내었다. 화아아악! 화염방사기를 연상시키는 맹렬한 불줄기가 그대로 쭉 뻗어 나와 두목을 덮쳤다. “으악!” 두목은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며 얼른 옆에 서있던 졸개의 방패를 빼앗아 몸을 가린 다음 얼른 옆으로 뛰었다. 그것은 무척이나 날렵한 행동이었지만, 불행히도 별로 좋은 대응 방법은 아니었다. 엘리멘탈 드래곤은 도망치는 두목을 향해 고개를 아주 살짝 돌렸다. 그러자 불길의 방향이 급격하게 틀어지며 두목의 꽁무니를 쫓기 시작한다. “아뜨뜨뜨!” 불줄기에 맞아 순식간에 방패가 달궈지기 시작하자 가죽으로 덧대놓은 방패 손잡이 역시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두목은 방패를 놓을 수 없었다. 잡고 있으면 손에 화상 좀 입는 걸로 끝나지만, 놓게 되면 그대로 통구이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준상은 펄쩍펄쩍 뛰며 도망다니는 두목을 보며 피식 웃다가 살짝 손을 들어 엘리멘탈 드래곤의 행동을 멈추었다. “으, 으으으...” 두목은 바짝 달아올라 열기를 뿜어내고 있는 방패 너머로 무심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준상의 모습을 질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잘못 건드렸다. 그 야생아 꼬맹이 같은 어설픈 정령사가 아니었다. 이 남자는... 전설에나 나올 법한 진짜 정령사였던 것이다. “새벽이슬.” 준상은 새로운 정령을 다시 엘리멘탈 드래곤과 합체시켰다. 그리고는 뜨겁게 달아오른 두목의 방패를 향해 다시 한 번 공격을 실행시켰다. “으앗!” 또다시 무언가가 자신을 향해 주욱 뻗어 나오자 두목은 기겁하며 방패를 들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치이이익! 열기를 뿜어내던 방패가 물줄기에 맞아 식어가는 소음을 듣고는 몸이 굳어 버렸다. 그제서야 두목은 정말 일이 단단히 꼬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나도 아니고... 무려 세 가지 속성을 다루는 정령사라니! 다른 부하들은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있었지만, 정령의 문에 대한 정보를 얻어서 이곳까지 부하들을 이끌고 온 당사자이기에 두목은 이것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일인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금 깨달았다. 이 남자는... 자신들과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자신들을 데리고 놀고 있는 것 뿐이다! 그와 같은 판단이 서자 두목은 얼른 방패를 집어 던지고 그 자리에 납작 엎드렸다. “자, 잘못 했습니다! 그저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갑자기 돌변한 두목의 태도에 어리둥절해진 건 오히려 부하들 쪽이었다. 타오르는 불줄기가 날아드는 건 확실히 무서웠지만, 그 뒤에 날아든 물줄기는 별로 무서워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 저러는 거지?” “글쎄. 물에 약이라도 탄 건가?” 용병들이 그렇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우왕좌왕하고 있는 동안 준상은 자신이 가장 가장 강력한 정령을 엘리멘탈 드래곤과 합체시키고 있었다. 그 이름은 바로 마파람. 냉기와 바람의 두 가지 속성을 가진, 레어급 정령이다. 엘리멘탈 드래곤은 마파람과 합체하자 몸에 서릿발 같은 냉기를 두른 반투명한 모습으로 변화했다. 준상은 보는 것만으로도 어쩐지 시린 느낌이 전해지는 엘리멘탈 드래곤의 모습을 보고 만족스러워 하며 명령을 내렸다. “날려버려라.” 그러자 엘리멘탈 드래곤은 준상의 몸 주위를 한 바퀴 휘감으며 날아오르더니 하늘을 향해 입을 벌려 차가운 북풍을 쏟아내었다. 바람은 하늘 위로 솟아올라 주위를 한번 휘감는가 싶더니, 이내 사납게 몰아치며 쏟아져 내렸다. “으아아앗!” “가, 갑자기 뭐야!” 용병들은 그야말로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한겨울에 북쪽 지방에서나 경험할 수 있는 매서운 눈보라가 휘몰아치기 시작한 탓이다. “제, 젠장...” 바닥에 엎드려 빌던 두목은 자신도 모르게 부르르 떨었다. 추운 탓도 있지만... 이 정도 힘을 가진 정령사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전율을 느낀 탓이다. 설마... 정령의 문이 어딘가에 벌써 열린 것일까. 그렇지 않고서는 이 정도의 힘을 정령사가 발휘할 수 있는 이유를 설명할 도리가 없었다. “빌어먹을...” 하지만 두목은 이내 실망감에 빠졌다. 그가 정령의 문을 찾으려던 이유는, 자신의 핏속에 잠들었을지도 모르는 정령사의 힘을 깨우기 위해서였다. 지금처럼 대륙이 혼란에 빠진 상황이라면 정령사의 힘 같은 특수한 능력은 그 어떤 것보다 더 큰 재산이 된다. 굳이 전설의 용사 같은 것이 되지는 못하더라도, 그 정도의 힘이라면 한 지역의 패자가 되기에는 부족함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모든 기대가 지금 무너져 버렸다. 이미 정령의 문이 열려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힘도 깨닫지 못했다면, 그에게는 정령사의 자질이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 야생아 꼬맹이라도 잘 가르쳐서 데리고 있을 걸. 두목은 그런 후회마저 떠올리고 있었지만 이미 늦어버린 일이었다. 하지만 준상은 자신이 한 남자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는 사실은 눈곱만큼도 눈치 채지 못한 채 엘리멘탈 드래곤이 만들어낸 거대한 눈보라를 감상하고 있었다. “그럭저럭이군.” 겉보기에는 화려했지만, 실질적인 위력은 생각보다 그리 강하지 않은 탓에 준상은 조금 실망하고 있었다. 물론 저렇게 놔두면 언젠가는 모두 얼어 죽겠지만, 준상이 원했던 것은 거대한 태풍처럼 몰아쳐 단숨에 용병들을 날려버릴 정도의 위력이었다. “역시 정령의 문이란 걸 열어야 하는 건가.” 준상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엘리멘탈 드래곤을 다시 불러들였다. 용병들은 매서운 눈보라가 사라지자 거의 반쯤 죽다 살아난 심정으로 몸을 부르르 떨며 준상을 바라보았다. 준상은 용병들이 자신을 바라보자 억눌러 두었던 세 가지 능력을 일시에 발동했다. 엘리멘탈 드래곤의 시험가동이 끝났으니 더 이상 노닥거릴 이유가 없어진 탓이다. 공포의 시선, 사안, 그리고 광견의 위엄. 이 세 가지 효과가 일시에 뿜어져 나오자 안 그래도 위축되어 있던 용병들은 감히 항거할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머리를 감싸 쥐고 뒤돌아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마침내 퀘스트 정보가 갱신되었다. 에픽 퀘스트 – 망각 3. 침입자들을 몰아내십시오. -과거에 이곳 아겔라한이 정령사의 숲으로 유명했던 것은 요정계나 정령계 같은 곳을 내왕할 수 있는 정령의 문이 존재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최근 침입자들이 숲으로 들어와 이 정령의 문을 찾고 있습니다. 요정들은 안락한 자신들의 삶이 침범당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침입자들을 찾아내 숲 밖으로 몰아내 주십시오. (달성) ->완료! 보상: 경험치 약간 -> 보상을 지금 수령하시겠습니까? (Y/n) _ (주의) 수령하지 않은 보상은 7일후 자동 소거됩니다. 그리고 보상을 수령하자 곧바로 새로운 퀘스트 정보가 눈앞에 나타났다. 에픽 퀘스트 – 망각 4. 정보를 수집하십시오. -침입자를 몰아내는 과정에서 당신은 정령의 문에 대한 단서를 입수했습니다. 현세에 정령사의 힘이 미약한 것은 틀림없이 이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우선 요정들과 대화를 나눠 더 많은 정보를 모으십시오. “역시 이렇게 되는 건가.” 준상은 대충 이번에 부여받은 에픽 퀘스트의 목적에 대해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에픽 퀘스트가 본질적으로 보통의 퀘스트와 무엇이 다른지도 짐작이 되었다. 일반 퀘스트가 그저 어떤 지역에 존재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불과하다면, 에픽 퀘스트는 세계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를 해결하는 임무가 아닐까. 지난 번에 겪었던 에픽 퀘스트가 어둠의 군세라는 초유의 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이번 에픽 퀘스트는 아마도 닫힌 정령의 문을 개방해 약화된 정령의 힘을 일깨우는 것에 그 목적이 있는 듯 하다. 이런 점을 감안해 보면 이번 퀘스트에 자신이 불려온 이유 또한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준상만큼 다양하고 많은 수의 정령을 한꺼번에 부리는 사용자가 달리 또 있을리 없으니 이번 퀘스트에 그가 불려온 것은 차라리 당연한 일이라고 봐야 한다. 나쁜 일은 아니다. 오히려 준상으로서는 무척이나 잘 된 일이다. 많은 수의 정령을 부리는 만큼, 정령의 힘이 강해지면 그만큼 그의 힘도 더 강해지기 때문이다. 00130 트롤러 ========================================================================= 용병들을 쫒아내고 돌아오자, 바위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헤네스와 미아라, 그리고 늑대의 등에 탄 아이가 차례로 내려왔다. 먼저 헤네스가 물었다. “끝난 건가요?” “아마도.” 그러자 미아라가 반색하며 미소를 지었다. “정말 너무 너무 고마워요! 이 고마운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자신을 기사라고 소개했던 것으로 미루어보면 요정들 중에서는 나름 힘 좀 쓰는 위치일텐데도 이렇게 몸을 베베 꼬며 말하는 모습을 보면 전혀 그런 느낌이 들지 않는다. 역시 사이즈 차이 때문일까. 준상은 자신의 주위를 바쁘게 날아다니며 관심을 표하는 미아라에게서, 붉은 늑대의 등에 탄 채 자신을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는 아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흠...” 이 아이를 어찌 하면 좋을까. 보통 아이들과는 달리 야수들 틈에서 자랐다고는 해도, 이제 고작 예닐곱살 정도 밖에 안 된 아이를 숲에 버려두는 건 역시 별로 내키지 않는 일이다. 더구나 지금부터 준상이 찾으려고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정령의 문. 물론 준상 역시 정령을 사용할 수는 있지만, 선천적으로 정령사의 능력을 가진 이 아이와는 아무래도 다를 수밖에 없는 일이니 만약을 대비해서도 역시 데리고 있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결정을 내리자 준상은 아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까 그 놈들이 가려던 곳이 어디지?” “...” 아이는 준상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오솔길 저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미아라를 향해 말했다. “용병들이 정령의 문을 찾던 곳으로 가봐야겠다. 미아라, 같이 가겠나?” 그러자 미아라는 당연하다는 듯이 얼른 대답했다. “물론이죠! 저도 대충 위치를 알고 있으니까, 안내해 드릴게요.” “그래주면 나야 고맙지.” 준상이 대답하자 미아라는 기다렸다는 듯이 얼른 준상의 어깨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자, 저쪽이에요! 저는 준비됐으니 언제라도 달려주세요!” “...” 그러면 그렇지. 미아라의 행동에 준상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설레설레 젓자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헤네스는 다시 킥킥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귀찮다. 그냥 걸어가자.” “네? 그럴수가!” 미아라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듯이 소리를 질렀지만, 준상은 그러거나 말거나 헤네스를 향해 한손을 뻗었다. 물론 헤네스가 얼른 그 손을 맞잡은 것은 당연한 일. 두 사람은 그렇게 숲에 나있는 오솔길을 모처럼 조금은 느긋한 걸음걸이로 산보하듯 걸어가기 시작했고, 아이를 등에 태운 크림슨 울프가 그 뒤를 따랐다. “안 달려요?” “...” “정말 안 달려요?” “...” “정말 정말 안 달려요?” 대꾸를 안하고 그냥 넘어갈래도 자꾸만 귀옆에서 그렇게 칭얼거리면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다. 준상은 결국 참지 못하고 잠자리 잡듯이 미아라의 날개를 잡아 눈앞으로 가져왔다. 그랬더니 이 요정, 반응이 가관이다. “아잉, 살살... 거친 건 싫어요.” 얼굴을 발그레하니 붉힌 채 몸을 베베 꼬며 코맹맹이 소리를 내고 있는 미아라의 모습을 보자 준상은 자신도 모르게 다시 한숨을 푸욱 내쉬고 말았다. “후...” 하지만 옆에서 지켜보는 헤네스는 준상과 요정의 그런 실랑이에 다시금 웃음이 터져 나왔다. “쿡쿡...” 흔히 그녀 또래를 가리켜 나뭇잎이 구르는 것만 봐도 웃음이 터져 나오는 나이라고 한다. 물론 과장이 어느 정도 섞인 표현이기는 하지만, 그만큼 순수하고 밝은 시기인 것만은 분명한 일. 그런 헤네스에게 무뚝뚝한 준상과 조그마한 요정 간에 벌어지는 그 기막힌 실랑이를 보고도 웃지 말라는 건 차라리 고문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죄, 죄송해요. 그게...” 헤네스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고는 아차 싶었던지 얼른 준상에게 사과를 했다. 하지만 준상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그리고는 날개를 잡힌 채 여전히 몸을 베베 꼬며 코맹맹이 소리를 내고 있는 미아라에게 물었다. “미아라.” “네?” “묻고 싶은 것이 있다.” “뭔데요?” “정령의 문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있나?” 하지만 미아라는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딱히 기억나는 것이 없는데요.” “그런가.”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를 어깨 위에 가만히 되돌려 놓았다. 그러자 미아라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가 싶더니 다시 말했다. “음... 유니아란 아줌마라면 알고 있을지도 몰라요.” “유니아란?” 그게 누군가 하고 잠시 기억을 되짚던 준상은 이내 요정의 가루를 처음 건네주었던 풍만한 체구의 아줌마 요정을 떠올리고는 이내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미아라는 그런 준상의 기색을 눈곱만큼도 눈치채지 못한 채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 아줌마가 현재 마을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요정이에요.” 그러고 보면 죄다 아이들만 바글거리는 느낌의 마을에서 유독 그녀만 아줌마 스타일이긴 하다. “역시 그랬군.” 준상이 어쩐지 납득이 간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미아라는 얼른 말을 받았다. “그리고요. 마법도 제일 잘 해요.” “마법?” “네. 제가 요정 기사이긴 하지만, 사실 제대로 싸우면 그 아줌마한테는 상대도 안 될 정도에요. 전에는 이만한 쥐를 혼자서 마법으로 쫓아낸 적도 있어요.” “...” 헤네스는 그런가보다 하는 표정이었지만, 준상은 쥐라는 단어가 나오자 튜토리얼 당시 겪었던 쥐와의 싸움이 다시 떠올라 얼굴을 찌푸리고 말았다. 어쨌거나, 그렇게 대화를 나누며 조용히 오솔길을 걷던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용병들이 발굴 작업을 벌이던 동굴 앞 공터에 도달하게 되었다. 준상이 대충 살펴보니 아예 이곳에 야영지를 만들 생각이었는지 제법 넓은 공터가 만들어져 있었고, 한켠에는 갱도에 받치는 용도로 보이는 통나무가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 “당분간 이곳에서 지내는 것이 좋겠군.” 준상은 곧바로 인벤토리에서 컨테이너 하우스를 꺼내 공터에 내려놓았다. 헤네스야 이미 몇 번이나 봤던 모습이지만, 요정 기사인 미아라나 붉은 늑대 위에 올라타 있던 아이에게는 너무나 신기한 장면이었다. “우와아! 뭐에요? 방금 그거 어떻게 한 거에요?” 미아라는 호들갑을 떨며 바쁘게 컨테이너 하우스 주위를 돌아다녔지만, 준상은 그러거나 말거나 문을 열어 보이며 헤네스에게 말했다. “헤네스.” “네.” “한 가지만 부탁해도 될까?” “물론이죠. 말씀하세요.” “저 아이 좀 데려다 씻겼으면 하는데.” 헤네스는 입을 쩍 벌린 채 컨테이너 하우스를 바라보느라 정신이 없는 아이를 돌아보고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야 쉽죠. 맡겨주세요.” 준상은 미소를 지으며 헤네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말로야 쉽다지만 아이를 씻기는 일이 어디 그리 만만한 일이던가. 게다가 그녀는 흔한 말로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자라는 양갓집 규수로 자라난 아가씨다. “고맙다.” “별 말씀을요.” 헤네스는 얼굴을 살짝 붉히며 준상의 손길을 받아들이다가 그가 손을 거둬들이자, 얼른 아이에게로 다가가 가만히 말했다. “자, 이리 오렴.” 아이는 여전히 경계하는 기색을 보였지만, 헤네스의 손길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헤네스는 준상이 자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아이를 늑대 등에서 내려 준 다음, 그 작은 손을 잡고 컨테이너 하우스 안으로 들어갔다. “보일러 켤 테니까 잠시만 기다려라.” “네. 준비하고 있을게요.” 헤네스가 아이를 데리고 탈의실로 들어가자 준상은 일단 기계실로 가서 보일러부터 켠 다음 물탱크에 물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확인했다. “흠...” 서울에 올라간 뒤 주로 호텔 생활을 한 탓인지 물탱크가 많이 비어 있었다. 준상은 엘리멘탈 드래곤을 불러 새벽이슬을 합체 시킨 다음 물탱크를 채워 넣었다. 그 일을 마치고 다시 거실로 나오자 이곳 저곳을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기웃거리고 있는 미아라를 발견할 수 있었다. 특히 그녀의 관심을 끈 것은 벽 한 켠에 자리잡은 커다란 거울이었다. “우와! 우와! 어쩜 이럴 수가!” 양 볼을 두 손으로 감싼 채 연신 감탄을 터뜨리고 있는 그 모습을 보니 어쩐지 예전에 헤네스가 처음 손거울을 봤을 때가 떠올라 피식 웃음을 짓고 말았다. 준상은 늑대들을 모두 소환해 컨테이너 하우스 주위에 풀어둔 다음, 몽몽이와 엘리멘탈 드래곤에게도 자유 시간을 주었다. 어차피 퀘스트에 시간제한이 있는 것도 아니니, 하루 정도는 느긋하게 쉬어도 상관없으리라는 판단에서였다. 몽몽이는 소환되자 얼른 탁자 위에 올라서더니 작은 날개를 파닥이며 컨테이너 하우스 안을 날아다니는 미아라에게 잠시 시선을 던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몽몽이는 이내 흥미를 잃고는 자신의 주머니 안에서 초코바를 하나 꺼내 아작아작 갉아먹기 시작했다. 미아라는 컨테이너 하우스 안을 살피다가 다람쥐가 뭔가 정체불명의 시커먼 덩어리를 갉아 먹는 모습을 보고 흥미를 느꼈다. “그거 뭐야? 맛있어?” “...” 하지만 몽몽이는 미아라의 말을 무시한 채 벌렁 드러누워 배 위에 초코바를 얹어 놓고는 앞발로 그것을 잡고 갉아먹는 일에만 열중했다. 그렇게 무시를 당하자 미아라는 발끈하며 소리쳤다. “감히 다람쥐 주제에 영웅 요정의 후손인 나 미아라를 무시하다니! 혼날래?” 몽몽이는 옆에서 자꾸 뭐가 앵앵거리며 귀찮게 굴자 벌렁 누운 채로 슬쩍 고개를 돌리며 미아라를 바라보았다. 너무나 태연자약한 그 태도에 다시 소리를 버럭 지르려다가 순간 다람쥐의 눈에서 번쩍하며 붉은 안광이 터져 나오자 미아라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뒤늦게서야 깨달았다. 저 다람쥐는 엘리멘탈 드래곤처럼 준상이 기르는 동물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말이다. “칫... 먹고 배탈이나 나라.” 결국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렇게 투덜거리며 몽몽이의 모습을 구경하는 일 뿐이었다. 준상은 그와 같은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문득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미아라.” “네?” “이게 먹고 싶은 거니?” 준상의 손에는 어느 틈엔가 먹음직스러운 초코바 조각 하나가 들려 있었다. “아니... 뭐... 딱히 먹고 싶다기 보다는...” 사실 딱히 맛있는 냄새가 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상큼한 과일처럼 빛깔이 좋은 것도 아니지만 몽몽이가 너무나 맛있게 냠냠거리며 먹는 모습을 보니 호기심이 솟았다고나 할까. 미아라가 그렇게 자신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우물쭈물하자, 준상은 다시 말했다. “먹기 싫은 건가. 그럼 할 수 없군. 이 녀석한테나 주는 수밖에.” 결국 미아라는 영웅 요정의 후손의 자존심과 요정 기사의 명예 대신 호기심의 충족을 선택하고야 말았다. “저, 저기...” “응?”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성의를 봐서라도 맛 정도는 봐드릴게요.” “...” 준상은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조용히 웃으며 작은 접시 위에 초코바 조각을 올려 미아라에게 건네주었다. 미아라는 접시 위에 놓인 초코바 조각을 보더니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집에서 검을 뽑아 귀퉁이를 한 조각 잘라내었다. “그럼... 잘 먹겠습니다.” 예의바르게 인사를 마친 미아라는 초코바 조각을 조심스럽게 입안에 집어넣었다. “!” 순간 미아라의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이내 표정이 풀리며 헤벌쭉한 미소를 짓는다. “우헤헤...” “...” 단순히 맛있어서 짓는 표정이라기엔 뭔가 묘한 모습. 하지만 그것도 잠시 미아라는 다시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더니 현란한 솜씨로 초코바를 조각조각 낸 다음 접시 위에 퍼질러 앉아 행복한 모습으로 그것을 먹기 시작했다. 한 입 먹고 헤벌쭉. 다시 또 한 입 먹고 헤벌쭉. 그렇게 뭔가 나사 하나 풀린 듯한 동작을 반복하던 미아라는 마침내 접시 위에 놓여져 있던 초코바 조각을 다 먹었음을 깨닫자 지금까지 행복에 잠겨 있던 표정 대신 절망에 가득 찬 표정을 지었다. “버, 벌써... 다 먹었다니...” 어쩐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모습에 준상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먹을 만하니?” 그러자 미아라는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열심히 끄덕여 보이며 대답했다. “네! 너무 너무 너무 맛있어요!” “다행이군.” 준상은 간절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미아라를 향해 다시 말했다. “더 먹고 싶니?” “네!” “흠... 근데 이게 워낙 귀한 거라서 말이지...” “여, 역시 그런가요?” 준상은 난처해 하는 표정을 짓다가 다시 미아라에게 말했다. “실은... 아까도 말했지만, 정령의 문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거든. 마을로 가서 그것에 대해 아는 요정들을 좀 불러다 줬으면 싶은데. 해 줄 수 있겠니?” 그러자 미아라는 벌떡 일어나 처음 요정 기사에 임명되었을 때처럼 각 잡힌 모습으로 대답했다. “맡겨만 주세요! 영웅 요정의 이름을 걸고 이 미아라가 반드시 임무를 완수하겠습니다!” 준상은 그 말을 듣고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고작 초코바 한 조각에 팔려나가는 이름이라니. 영웅 요정이 지금 이 모습을 보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진다. 어쨌거나 거래는 성립되었다. “그럼 부탁한다.” “네!” 미아라는 곧바로 날개를 파닥이며 컨테이너 하우스 밖으로 나갔다. 준상은 미아라가 나가고 컨테이너 하우스 안이 조용해지자 어쩐지 좀 피곤한 느낌이 들었다. 곰곰이 따져보니, 저녁을 먹으러 내려오다가 퀘스트를 받고 이곳으로 왔음을 감안하면 이미 식사를 마치고 취침을 시작했을 시간이다. 이런 것이 시차인가. 준상은 일단 천천히 저녁 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안 되는 기간 동안이긴 해도 고급 호텔의 전문 요리에 길들여진 탓에 보관해 놓은 즉석요리를 보니 어쩐지 초라한 느낌을 감출 수 없다. 물론 처음에 튜토리얼에서 쥐고기를 뜯어 먹던 일을 생각하면 즉석이든 뭐든 제대로 된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사치겠지만, 헤네스에게 먹일 생각을 하니 뭔가 역시 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어쨌거나 그렇게 저녁을 준비하고 있는데, 욕실의 문이 열리며 헤네스와 아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헤네스는 가운으로 몸을 감싼 채 커다란 흰색 티셔츠로 몸을 감싼 아이의 손을 잡고 욕실을 나오다가, 주방에서 식사를 준비하는 준상을 발견했다. “준상씨, 어때요? 몰라볼 정도죠?” “...” 헤네스의 말에 준상은 아이의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녀의 말대로 깨끗하게 씻겨 놓으니 아이는 제법 귀티마저 날 정도로 예쁘장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제멋대로 더부룩하게 자란 머리가 좀 흠이긴 하지만, 커다란 푸른 눈망울과 작고 도톰한 붉은 입술은 삭막한 감성의 소유자인 준상에게도 무척이나 귀엽게 느껴졌다.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며 헤네스를 향해 말했다. “고생했다. 가서 기다려라. 금방 준비 끝나니까.” “네!” 헤네스는 밝은 목소리로 대답한 뒤 아이를 데리고 침대가 있는 쪽으로 가려다가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이 준상을 돌아보며 말했다. “아, 맞다. 준상씨.” “응?” “혹시 알고 계셨어요?” “뭘?” “이 아이... 여자 아이던데요.” 헤네스는 뭔가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말했지만, 준상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랬군.” 이미 다 알고서 자신에게 목욕을 맡겼던 것이 아닐까 싶었던 헤네스는 너무나 담담한 그 반응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삐죽거렸다. 00131 트롤러 ========================================================================= 헤네스는 접혀 있던 침대를 펼친 후, 그곳에 아이를 앉히고 수건으로 머리를 한 번 더 닦아준 다음 주방에서 식사준비중인 준상을 향해 말했다. “바람의 정령 좀 불러 주실래요?” “알았다.” 준상이 바람의 정령을 불러주자, 헤네스는 정령을 이용해 아이의 머리를 말린 다음 덤으로 자기 머리까지 말렸다. 그러자 그 과정을 지켜보던 아이가 자신이 부리던 바람의 정령을 불러 헤네스를 향해 바람을 일으킨다. 그냥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면 그만일 수도 있겠지만, 아이가 자신에게 뭔가 보답을 하려는 행동을 보이자 헤네스는 준상이 자신에게 했던 것처럼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도와줘서 고마워. 착한 아이구나.” 아이는 착하다는 뜻은 몰랐지만, 그것이 칭찬의 의미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헤네스는 머리를 다 말리자 빗으로 제멋대로 자란 아이의 머리를 정돈해 주고는 옷장에서 자신이 입던 옷 몇 가지를 꺼내 아이에게 입혔다. “으으음...” 하지만 생각만큼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머리카락은 머리를 감기고 바람으로 말리자 마치 용수철처럼 제 멋대로 뻗치기 시작했고, 그나마 어울릴 것 같아서 입힌 옷들도 뭔가 아이와는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하긴 이런 식으로 누군가를 꾸미고 단장시키는 것 자체가 처음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다. 그렇게 자기 옷조차 챙겨 입지 못하고 아이에게 매달려 있는데, 주방에서 준상이 요리 몇 가지를 가지고 나와 탁자 위에 벌여 놓는다. “그만 하고 와라.” “네!” 헤네스는 조금 아쉬운 느낌이었지만, 아이를 데리고 식탁으로 다가와 앉았다. 오늘의 메뉴는 쇠고기 미역국에 흰 밥과 미트볼, 그리고 야채 피클이다. 차려 놓고 보니 뭔가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라 얼굴을 찌푸렸지만, 헤네스는 그런 준상을 향해 밝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와, 맛있겠다. 잘 먹겠습니다.” “그래.” 헤네스는 아이의 손에 스푼을 쥐어 준 다음, 먹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아이는 제법 머리가 좋은 모양인지 헤네스가 몇 번 시범을 보이자 곧잘 스푼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준상이 어렵게 느껴지는지 은연중에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행동하던 아이는, 헤네스를 따라 미역국에 만 밥을 스푼에 떠서 입에 넣자 대번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맛있지?” 헤네스의 말에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 이것도 먹어봐.” “...” 헤네스가 미트볼을 작게 잘라 스푼에 올려주자 아이는 처음 맡아보는 냄새에 잠시 얼굴을 찌푸리더니 천천히 그것을 입 안에 넣었다. 순간 아이의 눈이 다시금 휘둥그레진다. “어때? 먹을 만 해?” 아이는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입가에 미트볼 소스를 묻힌 채 푸른 눈을 반짝이는 그 모습이 얼마나 귀여운지, 헤네스는 자신도 모르게 부르르 떨며 감격을 온 몸으로 표현하고 말았다. “아우, 어쩜 이렇게 귀여울까.” “...” 준상은 그 모습을 보며 조용히 미소를 짓다가 헤네스에게 말했다. “그만 하고 너도 먹어. 식는다.” “네.” 양파와 무, 오이 등을 식초에 절인 야채 피클은 별로 인기가 없었지만 어쨌든 나름대로 만족스러운 식사시간이 끝나자 헤네스가 자리에서 후다닥 일어나며 말했다. “제가 정리할 테니 씻으세요.” “그래.” 준상은 헤네스에게 식탁 정리를 맡기고는 욕실로 들어가 간단하게 샤워를 한 다음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침대 위에 헤네스와 아이가 서로를 꼭 껴안은 채 잠들어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탁자에 앉아 간단하게 차 한 잔을 마시면서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데, 이내 바깥이 어수선해지는 것 같더니 미아라의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 “계세요오! 저 왔어요오!” 준상은 얼른 몸을 일으키며 문 밖을 향해 말했다. “조용히.” 그러자 얼른 밖에서 미아라의 대답이 들려온다. “네, 조용히.” 준상이 문을 열자, 양손으로 입을 막은 채 날고 있는 미아라와 척 보기에도 다른 요정들과는 체급이 달라 보이는 아줌마 요정 유니아란이 모습을 드러냈다. “애들이 자고 있으니 조용히 들어와라.” “네에...” 두 요정은 조심조심 안으로 들어와서 탁자 모서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준상은 먼저 미아라를 향해 말했다. “알아 봤나?” 그 말에 미아라가 얼른 대답했다. “네! 하지만... 유니아란 아줌마 빼고는 별로 아는 얘기가 없어서 이렇게 데리고 왔어요.” “그랬군.”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까 미아라에게 한 조각 잘라주었던 초코바를 꺼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수고 했다. 이거 가지고 가서 먹어라.” “감사합니다!” 미아라는 유니아란이 손을 뻗을 틈도 주지 않고 얼른 초코바를 품에 안은 채 날아올라 벽장 위로 모습을 감추었다. “쳇.” 유니아란은 그 모습을 보고 혀를 차더니 이내 준상을 향해 온화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정령의 문에 대해 알고 싶으신가요?” “그래.” “으음... 당신 정도라면 이미 우리 요정들이나 다름없는 분이니 상관없겠네요. 사실... 그리 대단한 비밀인 것도 아니고.” 유니아란은 조금은 차분한 태도로 그렇게 운을 뗀 후, 다시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그 차, 향기가 제법 좋은 것 같은데 한 모금 마셔 봐도 괜찮을까요?” 그럼 그렇지. 아무리 점잔을 떨어도 먹보 요정이라는 본질은 변하지 않는 모양이다. 준상은 쓴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위해 작은 찻잔에 녹차를 타고, 거기에 곁들일 연양갱을 마련했다. 유니아란은 따뜻하게 우린 녹차를 빨대로 한 모금 들이키고 이어서 연양갱 한 조각을 먹더니 묘한 비음을 터뜨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세상에... 어쩜 이런... 하아아아아...” “...” 아무래도 다른 요정들과는 나이 차이가 있는 듯해서 좀 고전적인 조합을 시도해 본 것이 훌륭하게 먹혀 들어간 모양이다. 결국 유니아란은 녹차 한 잔과 연양갱 하나를 통째로 다 먹어치우고 나서야 볼록하게 튀어나온 배를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하아아... 정말 만족스러운 식사였어요.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어쩐지 이곳에 온 목적 따위는 까맣게 잊어버린 듯한 그 말에 준상은 속으로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역시 이런 일은 자신이 직접 하기보다는 헤네스에게 맡기는 편이 백 배 나은 것 같다는 생각을 떠올리며 준상은 입을 열었다. “정령의 문...” 하지만 준상이 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유니아란은 그제서야 떠올랐다는 듯이 손뼉을 치며 대답했다. “아! 내 정신 좀 봐. 그것 때문에 여기 와 놓고서. 다과가 너무 맛있어서 나도 모르게 깜빡해 버렸네요. 오호호호!” “...” 유니아란은 그렇게 호들갑을 떨어 보이고는 곧바로 정령의 문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사실 정령의 문은 형체를 가진 무언가를 말 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럼?” “정령계나 요정계를 오가기 위한 통로인 것은 분명하지만, 흔히 생각하는 문이라는 형태는 가지고 있지 않아요. 여기서 땅을 파헤치던 사람들은 그런 사실까지는 몰랐던 것 같네요.” “그렇군.” 그런가보다 하고 준상이 고개를 끄덕이자, 유니아란이 다시 말했다. “일단... 정령의 문을 열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해요.” “그게 뭐지?” “생명력이 가득 넘쳐흐르는 공간, 그리고 촉매 작용을 할 수 있는 요정의 생명력, 이렇게 두 가지죠.” “흠...” 생각보다 조건들이 추상적이라는 느낌이라 준상이 얼굴을 찌푸리자 유니아란이 얼른 보충 설명을 했다. “생명력이 가득 넘쳐흐르는 공간은 바로 숲을 의미해요. 그 바보 같은 사람들은 이런 사실도 모르고 애꿎은 나무들을 모조리 베어버렸죠. 정령의 문이 저런 동굴 속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다니, 도대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지.” “그럼... 이곳에는 다시 정령의 문을 열 수 없는 건가?” 준상의 물음에 유니아란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에요. 다만 숲의 생명력을 모으고 지탱하려면 그만큼 강인한 생명력을 지닌 무언가가 필요한데... 저들이 이곳에 있던 오래된 나무를 베어 버리는 바람에 그것을 대신할 만한 무언가를 다시 찾는 일이 골치 아플 뿐이죠.” 준상은 유니아란의 말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군. 그럼 요정의 생명력은?” “그건...” 유니아란은 뭔가 은밀한 얘기를 꺼내려는 듯이 주위를 조심스럽게 살피더니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비밀이니까 꼭 지켜주셔야 해요.” 애초에 이렇게 쉽게 발설할 정도라면 그다지 중요한 비밀인 것 같지는 않았지만, 준상은 일단 유니아란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었다. “걱정마라.” 그러자 유니아란은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리듯이 말했다. “어떻게 보면 정령의 문을 여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요정의 생명력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필요한 만큼의 생명력을 모으는 건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죠. 그래서 예전에는 나쁜 마법사들이 강제로 정령의 문을 열려고 요정들을 잡아가는 일도 많았어요. 정말 끔찍한 얘기죠?” 뭔가 사설이 길다는 느낌이라 준상은 조금은 성의 없는 태도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서?” 하지만 유니아란은 그런 준상의 태도에도 아랑곳없이 비밀을 발설하는 역할에 몰두해서 계속 이야기를 이어갔다. “요정의 가루가 사실은 요정의 생명력이 형상화된 물질이란 것은 이미 알고 계시죠?”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 얘기긴 했지만 준상은 이번에도 맞장구를 쳐주었다. “일단은.” “하지만 정령의 문을 열기 위해서는 요정의 가루보다 더 강력한 촉매가 필요해요. 그것이 바로!” “바로?” “요정의 돌이랍니다.” “...” 준상은 뭔가 별로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유니아란은 그런 준상의 기분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오래전부터 요정들이 사용하던 목욕탕이 있어요. 그 바닥을 잘 살펴보시면 오랜 시간 응축되고 다시 숲의 생명력에 동화되어 단단하게 굳어진 요정의 돌을 찾을 수 있을 거에요. 정령의 문을 열기 위해서는 적어도 그런 돌이 세 개 이상은 있어야만 해요.” “...” 어째서 나쁜 예감은 이리도 잘 들어맞는 것인지. 준상은 자기도 모르게 손을 들어 이마를 감싸고 말았다. 이젠 하다하다 못해서 요정들 목욕탕 청소까지 해야만 하는 자신의 처지가 암담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니아란은 그런 준상의 모습에도 아랑곳없이 다시 이렇게 말했다. “근데... 이거 또 없나요? 먹어도 먹어도 먹은 것 같지가 않네요. 아유, 더 살 찌면 곤란한데.” “...” 그 모습을 보고 준상은 깨달았다. 굳이 직접 찾아 나설 이유가 없지 않은가. “유니아란.” “네?” “찾아와라.” “뭘요?” “요정의 돌.” “...” 유니아란은 이내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버리더니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오호호, 농담도...” 하지만 그녀는 이내 준상에 쥐어진, 금색 포장지에 쌓여있는 연양갱의 모습에 시선을 빼앗긴 채 입을 닫아 버렸다. “요정의 돌 하나당 연양갱 하나.” “으으음...” 유니아란은 얼굴을 찌푸리고는 잠시 고민하더니 슬그머니 손가락 두 개를 펼쳐 보였다. “두, 두 개로는 안 될까요?” “...” 하지만 준상이 대답없이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자 유니아란은 얼른 부연설명을 덧붙였다. “그, 그게... 저희는 몸도 작고 아실런지는 모르지만 이게 알게 모르게 엄청 힘든 일이라...” 그 말에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하나 반.” 그러자 유니아란은 기다렸다는 듯이 외쳤다. “하나 반! 잊지 마세요! 하나 반이에요!” “그래.” 준상이 고개를 끄덕이자 유니아란은 그 커다란 몸집에 어울리지 않는 엄청난 속도로 컨테이너 하우스를 빠져 나갔다. 00132 트롤러 ========================================================================= 유니아란이 나가자 준상은 눈앞에서 퀘스트 정보가 갱신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에픽 퀘스트 – 망각 4. 정보를 수집하십시오. -침입자를 몰아내는 과정에서 당신은 정령의 문에 대한 단서를 입수했습니다. 현세에 정령사의 힘이 미약한 것은 틀림없이 이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우선 요정들과 대화를 나눠 더 많은 정보를 모으십시오. (달성) ->완료! 보상: 경험치 아주 약간 -> 보상을 지금 수령하시겠습니까? (Y/n) _ (주의) 수령하지 않은 보상은 7일후 자동 소거됩니다. 보상을 수령하자 다시 새로운 퀘스트 정보가 나타났다. 에픽 퀘스트 – 망각 5. 정령의 문 -요정들과의 대화를 통해 정령의 문을 복원하는 방법을 알아냈습니다. 이제 필요한 재료들을 모아 정령의 문을 복원할 차례입니다. 이것이 성공한다면, 미약했던 정령의 힘을 본래의 그것으로 되살릴 수 있게 됩니다. “...” 준상은 퀘스트의 내용을 확인하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전에 그가 겪었던 에픽 퀘스트들에 비하면 이번 퀘스트는 상당히 난이도가 낮은 편이다. 물론 준상의 경우 이전에 이미 이니아와 일마렌이라는 두 요정을 도운 답례로 키스를 받은 덕분에 보다 쉽게 요정들과의 친밀도를 올릴 수 있었고, 덕분에 더 퀘스트 진행이 쉬워진 것도 사실이지만 어쨌든 퀘스트 자체가 쉽다는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것은 어쩌면 약화된 정령사의 힘을 감안한 것이 아닐까. 준상이야 이것저것 워낙에 보상을 많이 받아서 어지간한 적들은 가볍게 물리칠 정도의 실력을 갖추게 되었지만, 순수하게 정령의 힘만 사용하는 사람이었다면 용병단을 물리치는 일을 그리 간단하게 해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처치가 아니었던 건가.” 하긴 이제 와서 이런 일들을 되새겨 봐야 의미 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준상은 벽장 위를 올려 보았다. 그러자 미아라와 몽몽이가 입가에 초콜릿을 잔뜩 묻히고 서로 몸을 기댄 채 잠들어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피식 웃고 지나치려던 준상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는 미아라를 깨웠다. “미아라.” “우웅... 네?” “잘 거면 가서 이 닦고 자라.” “왜요?” “초콜릿 먹고 그냥 바로 자면 이 썩는다.” “...” 미아라는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준상은 그녀에게 물 한 컵을 떠 준 다음 침대로 다가갔다. 그리고 침대의 빈 공간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그러자 곤히 자고 있던 헤네스가 졸린 눈을 뜨며 배시시 웃었다. “음... 오셨어요.” “그래.” 헤네스는 준상이 내민 팔에 머리를 기댄 채 다시 눈을 감았다. 준상은 그녀가 아이를 품에 안고 잠든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미아라가 팔랑팔랑 날아서 몽몽이 옆에 다시 눕는 것을 본 뒤에야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한참 곤하게 잠을 자다가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준상은 잠에서 깨어났다. “으음...” 그가 눈을 뜨자 덩달아 헤네스도 깨어났지만 준상은 몸을 일으키려는 그녀의 머리를 살짝 눌러 다시 눕혔다. “더 자. 내가 나가 볼 테니.” “네...” 준상은 침대에서 빠져 나와 흐트러진 가운 앞을 다시 여민다음 우선 초감각을 통해 밖의 상황을 확인하다가 깜짝 놀랐다. “응?” 다른 침입자라면 늑대들이 알아서 경고를 했을 테니 요정이 찾아왔으리라는 예측은 이미 한 상태였다. 하지만, 이렇게 떼거지로 몰려오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 준상은 어쩐지 잠이 확 달아나는 기분에 머리를 긁적이며 조심스럽게 문으로 다가갔다. 그가 천천히 문을 열자 맨 앞에 서있던 유니아란이 대뜸 외쳤다. “여기 요정의 돌...” 하지만 준상은 얼른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가며 말했다. “쉿! 애들 자니까 조용.” 그러자 기대에 찬 눈으로 물에 흠뻑 젖은 채 저마다 요정의 돌을 하나씩 들고 있던 요정들은 얼른 준상의 말을 따라하며 입을 다물었다. “쉿!” “쉿쉿!” “근데 쉿이 뭐야?” “몰라, 묻지마!” “넌 대체 아는 게 뭐야?” 자기들 나름대로 조용히 소근거린다고는 하는데, 수십 명의 요정들이 한꺼번에 그렇게 떠들어대니 결국 시끄러운 건 마찬가지였다. “조용히. 지금부터 내 허락 없이 말하는 요정에게는 보상이 없으니 그런 줄 알아.” “...” 그러자 요정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입을 꾹 다물고 서로 눈알만 데굴데굴 굴리고 있었다. 준상은 그 모습을 보고나서야 요정들은 집안으로 들였다. 물에 흠쩍 젖은 채 찬 밤바람을 맞고 있던 요정들은 따뜻한 집 안으로 들어오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준상은 우선 그들이 몸을 닦을 수 있도록 마른 수건을 몇 장 꺼내 준 다음 주방에서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추운데 고생했다. 차를 끓일 테니 일단 거기서 쉬고 있도록.” “네!” 유니아란의 대답을 들은 준상은 여러 개의 잔에 녹차를 타서 식탁으로 옮겼다. 그러자 수건 위에서 뒹굴거리며 장난을 치고 있던 요정들이 얼른 달려와 녹차에 꽂아둔 빨대를 하나씩 잡는다. “오오! 따뜻해!” “이게 뭐지?” “몰라!” “나도 몰라!” 요정들은 따뜻하고 향기로운 차의 맛에 방금 전에 떠들지 말라고 했던 준상의 말을 또다시 잊어 버렸다. “조용.” 하지만 다시 준상이 그렇게 짧게 주의를 주자 일제히 손으로 입을 막는 시늉을 한다. 그 모습을 보고 준상이 피식 웃고 있는데, 몽몽이의 몸에 기대 잠을 자고 있던 미아라가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키더니 식탁 위에 바글거리는 요정들을 보고는 얼굴을 찌푸렸다. “왜 이렇게 시끄러운가 했더니... 후아아암...” 미아라는 찢어지게 하품을 하더니 이내 돌아 누워 다시 잠을 청했다. 준상은 완전히 자기 집인 것처럼 구는 미아라의 모습에 고개를 저어 보이고는 따뜻한 녹차 향을 느긋하게 즐기고 있는 유니아란에게 물었다. “이게 전부 요정의 돌인가?” 그러자 유니아란은 화들짝 정신을 차리며 대답했다. “네. 오랫동안 목욕탕 청소를 안했더니 생각보다 꽤 많이 있더라고요. 오호호...” “...” 여기서 잘못 대답을 했다가는 별로 알고 싶지 않은 내용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올 것 같았기 때문에, 준상은 얼른 화제를 바꾸었다. “모두 몇 개지?” 그러자 유니아란이 눈을 빛내며 대답했다. “서른다섯 개요.” 세 개만 있으면 된다고 했었던 것 같은데. 하긴 뭐 준상으로서야 나쁘지 않은 일이지만 말이다. 준상은 일단 식탁 위에 놓여진 요정의 돌을 하나 집어 들었다. 모양은 대충 갈색의 얼음사탕을 닮았고, 크기는 생각보다 제법 커서 손톱 하나 정도는 되었다. 이것 하나가 만들어지려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요정의 가루가 필요할까. 자신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떠올리던 준상은 얼른 고개를 저어 머리 속을 비워 버린 다음 아이템 확인을 실행했다. 아이템정보 명칭 : 요정의 돌 레벨제한 : 없음 종류 : 보석 등급 : Rare+ 효과 : 저주 저항력 증가. 설명 : 요정의 돌은 생명력이 매우 오랜 시간에 걸쳐 응축된 매우 신비로운 보석입니다. 이 보석은 매우 희귀하며, 일설에는 이것을 인위적으로 만들기 위해 마법사들이 오랜 시간 노력한 결과물이 바로 현자의 돌이라는 얘기도 있습니다만, 신빙성은 다소 떨어집니다. 요정의 돌은 아이템의 제작이나 마법의 촉매, 특별한 의식의 제물 등으로 많이 쓰이며, 가공하지 않고 그냥 가지고만 있을 경우에는 저주에 대한 저항력을 높여주는 효과가 있습니다. “저주라...” 만들어지는 과정이 영 꺼림직한데다 눈앞에 서른 개가 넘게 쌓여 있는 걸 보니 정말로 희귀한 걸까 싶은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어쨌든 소지하고만 있어도 저주 저항력이 증가한다고 하니 가지고 있어서 해 될 일은 없을 듯 하다. 준상은 커다란 가죽 주머니를 하나 꺼내 그 안에 요정의 돌을 쓸어 담았다. 그러자 지켜보고 있던 유니아란이 조용히 물었다. “그런데... 보상은?” “아... 잠깐만 기다려라. 금방 가지고 올 테니.” “오호호... 개수는 알고 계시겠죠?” “물론.” 개당 한 개 반으로 계약을 하기는 했지만, 동원된 요정의 수가 많은 걸 보니 준상으로서도 살짝 양심이 찔리는 터라 조금 더 베풀기로 했다. “원래 개당 한 개 반이었지만, 날도 추운데 고생했으니 두 개씩 쳐 주도록 하지.” “오호호! 아이, 안 그러셔도 되는데! 오호호호호호!” 말로는 괜찮다고 하면서도 연신 높은 목소리로 웃음을 터뜨리는 걸 보니 기분이 아주 좋은 모양이다. 물론 준상은 그녀가 웃음을 터뜨리기가 무섭게 주의를 주었다. “조용.” “네, 물론이죠. 얘들아, 조용히 해.” “...” 뭔 소린가 싶어 눈알만 뒤룩뒤룩 굴리고 있는 다른 요정들을 향해 자기는 상관없다는 듯이 주의를 주는 유니아란의 모습을 보고 준상은 결국 피식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준상은 일단 요정의 돌은 캐비닛에 보관한 다음, 주방의 찬장에 보관해 두었던 연양갱 상자를 열고 그 안에서 일흔 개를 꺼내서 들고 나왔다. “오오오오!” 유니아란은 산처럼 쌓인 연양갱을 보고는 다시 탄성을 터뜨렸다. “마을로 가져다 줄까?” 준상이 묻자 유니아란은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냥 애들을 불러오는 편이 낫겠네요.” 그리고는 옆에서 멀뚱거리고 있는 요정 가운데 한 명에게 지시를 내렸다. “너!” “네? 저요?” “그래. 너 가서 마을에 있는 애들 좀 이리로 데리고 오렴.” “전부요?” “그래, 전부.” 지목된 요정은 귀찮은 표정을 지었지만, 싫다고 할 수는 없었던 모양인지 얼른 날개를 퍼득여 밖으로 날아갔다. “전부 불러서 뭐하게?” 준상이 묻자 유니아란은 푸근한 표정으로 웃으며 대답했다. “뭘 하긴요. 잔치를 해야죠. 애들이 아주 좋아할 거에요.” “...” 당연하다는 듯한 그 대답에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마주 웃음을 지었다. 하기야 보상은 이미 지불되었으니 어떻게 하든 그녀 마음이 아니겠는가. 숨겨두고 혼자 다 먹어치우리라는 예상이 틀린 것은 확실히 의외였지만, 이런 식의 반전이라면 준상도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준상과 유니아란이 그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역시 북적거리는 소란스러움을 견디기 힘들었는지 헤네스가 침대에서 부스스한 모습으로 몸을 일으켰다. “으음...” 그러자 그녀의 품에 안겨 잠들어 있던 아이도 얼른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다. “...” 아이는 낯선 주위의 풍경을 보고 잠시 혼란스러워하는 듯 싶더니 이내 잠들기 전의 기억이 되살아났는지 헤네스의 품에 몸을 기댔다. 준상은 그들의 모습을 보고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미안. 좀 소란스러웠지?” “아뇨.” 헤네스는 잠이 덜 깬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탁자 위에 바글바글하게 모여 있는 요정들의 모습을 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그게...” 준상은 그녀가 잠들어 있는 동안 유니아란과 있었던 일을 얘기한 다음, 본의 아니게 이곳에서 요정들이 잔치를 벌일 것 같다는 내용을 천천히 말해 주었다. “추울텐데. 요정들이 고생했겠네요.” “아마도.” 헤네스는 살짝 벌어진 가운 앞자락을 다시 여미며 말했다. “먼저 옷부터 갈아입고 올게요.” “안자고?” “벌써 다 깼어요.” “...” 그녀와 아이가 잠들어 있으면 요정들이 이 안에서 마음껏 놀기는 힘들어지니 나름대로 마음을 써준 것이리라. “고맙다.” “별말씀을요.” 준상은 헤네스가 아이를 데리고 탈의실로 들어가는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문이 닫히자 그제서야 몸을 일으켰다. 요정들은 그리 오래지 않아서 우르르 컨테이너 하우스 안으로 몰려들었다. “우와! 따뜻하다!” “뭐지? 맛있는 냄새가 나!” 그러자 유니아란이 풍만한 가슴을 앞으로 쭉 내밀며 말했다. “얘들아!” “네?” “잔치다!” “와아아아아!” 참으로 단순 명료한 유니아란의 선언이 울려 퍼지자 요정들은 기뻐하며 잔치를 시작했다. 그래봐야 고작해야 연양갱과 녹차, 그리고 추가로 준상이 꺼내 놓은 주스를 나누어 마시는 것에 불과했지만, 요정들은 마치 세상을 다 얻은 듯이 기쁜 표정을 지으며 보는 사람이 다 행복해질 정도로 잔치를 즐겼다. 헤네스는 요정들에게 연양갱을 잘라 나누어주는 일을 하다가 그들의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며 잔잔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쩐지 제가 부끄러워지네요.” “왜?” 준상이 되묻자 헤네스는 그를 향해 혀를 살짝 내밀어 보이고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냥요. 후후후.” “...” 그렇게 시작된 잔치는 결국 하룻밤 내내 이어지다가 새벽 무렵이 되어서야 끝을 맺었다. 준상과 헤네스는 상자 몇 개를 가져가다 그 위에 모포와 수건을 깔아 요정들이 누울 수 있게 만든 다음, 거실 여기저기에 제멋대로 흩어져 잠들어 있는 요정들을 하나씩 옮겼다. 그렇게 모든 요정들을 다 옮기고 나자 어느새 아침 해가 밝아오기 시작한다. “수고했다. 피곤하지?” “조금요.” 아이는 잔치로 소란스러운 와중에도 역시 피곤을 이기지 못한 탓인지 침대에 누운 채 잠들어 있었다. 먼저 헤네스가 간단하게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나왔고, 준상이 뒤를 이었다. 그러자 먼저 샤워를 마치고 나와 침대에 누워있던 헤네스가 반쯤 감긴 눈으로 침대에 다가오는 준상을 향해 말했다. “준상씨.” “응?” “키스해주세요.” “...” 당돌한 요구. 준상은 쓴웃음을 지으며 침대 안으로 들어가 그녀의 어깨를 가만히 감싸며 입을 맞추었다. “헤헤...” 헤네스는 반쯤 눈이 감긴 상태에서도 만족스러운 듯한 표정으로 그렇게 어린애처럼 웃더니 이내 준상의 가슴에 머리를 기댄 채 잠이 들었다. 준상은 그녀가 잠이 들자 마찬가지로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하지만, 어쩐지 쉽게 잠이 들 수 없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에서 풍겨지는 은은한 샴푸 향기. 조금 전에 살짝 맞닿았던 부드럽고 촉촉한 입술의 감촉. 그리고, 벌어진 가운 너머로 살짝 내비치는 앙가슴. 이 모든 것들이 자꾸만 준상의 감각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후...” 준상은 자신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억지로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00133 트롤러 ========================================================================= 요정들은 한낮이 되어서야 하나 둘씩 깨어났다. “후아암... 잘 잤다.” “우웅... 어라, 여기가 어디지?” “몰라, 난 더 잘래.” 처음에는 더 자겠다고 버티는 요정도 있었지만, 하나 둘 씩 깨어나 거실 안이 북적대기 시작하자 결국 모두 깨어나고야 말았다. “아차... 이슬 따야 되는데.” “나는 꿀 따러 가야 하는데.” “근데 나갈 수가 없잖아.” “어쩌지? 어쩌지?” 밤늦게까지 잔치를 벌이느라 늦잠을 자버린 것 까지는 좋았지만 맨날 핑핑 노는 것 같이 보이는 요정들도 나름대로의 일과라는 것이 있는 건 사람과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밖으로 나가려고 해도 컨테이너 하우스의 문이 문제였다. 이 금속 문은 너무나 크고 단단해서 조그마한 그들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끙... 할 수 없지.” 아줌마 요정 유니아란은 별 수 없이 준상을 깨우기로 했다. 그녀의 생각으로는 어제 그들의 뒤치다꺼리를 한다고 고생했으니 이대로 더 휴식을 취하도록 놔두고 싶었지만, 이대로 집 안에 갇혀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미아라, 가서 깨워봐.” 초코바를 먹고 잔치 하는 동안 내내 퍼질러 자던 요정 기사 미아라는 그렇게 자 놓고도 여전히 졸린지 눈을 비비고 있다가 유니아란이 자신을 지명하자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네? 제가요?” “그래, 너.” “히잉...” 미아라는 귀찮은 표정을 지어보이며 준상에게 다가가 그의 이마를 손으로 톡톡 건드리며 말했다. “저기요. 좀 일어나 봐요.”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감겨 있던 준상의 눈이 번쩍 뜨여진다. 하지만 눈앞에서 앵앵거리며 날아다니는 미아라의 모습을 보고는 대번에 얼굴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지?” 미아라는 준상의 눈빛을 보는 순간 움찔하며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지만, 모르는 척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희 그만 가보려고 하는데... 문을 열 수가 없어서...” “...” 준상은 창밖으로 흘러들어오는 햇빛을 보고는 가만히 한 손을 뻗어 염동력으로 문을 열어 주었다. “됐나?” “네. 감사합니다.” “...” 요정들은 문이 열리자 우르르 밖으로 몰려 나갔다. 유니아란과 미아라는 아직까지 구석에 처박혀 잠들어 있는 요정이 없는지 한 바퀴 둘러 본 뒤에야 비로소 준상에게 인사를 한 뒤 밖으로 나갔다. “후...” 준상은 요정들이 모두 밖으로 나가자 염동력으로 다시 문을 닫았다. 그리고 적막한 방 안을 돌아보다가 자신의 품에 안겨 세상모른 채 곤히 잠들어 있는 헤네스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어느 틈엔가 자신과 그녀 사이로 기어들어와 잠들어 있는 아이의 모습을 발견했다. 아이가 두 사람 사이로 기어들어온 것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다만 그 과정에서 헤네스의 앞섶이 풀어져 뽀얀 가슴 한 쪽이 드러나 버렸다는 것이 문제였을 뿐이다. 준상은 아담하게 솟은 봉긋한 헤네스의 가슴과 그 끝에 도드라져 있는 연한 빛깔의 돌기에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 하지만 그것도 잠시, 준상은 그런 자신을 깨닫고는 얼른 눈을 돌려 천장을 바라보았다. 이거 참... 준상은 자신도 모르게 다시 얕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역시 너무 오래 굶었나.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는 지금껏 이성에 대해 그리 진지한 생각을 품어 본 적이 없었다. 대학 들어가서도,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이따금 여자와 사귀어 보긴 했지만 그냥 다른 사람들이 다 사귀니까 대세에 휩쓸린 듯한 느낌에 가까웠다. 있으면 귀찮고, 없어도 별로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는... 딱 그 정도의 느낌이랄까. 하지만 지금 준상의 품에 안긴 채 무방비한 모습으로 잠들어 있는 이 소녀는 그런 준상의 관념을 뿌리부터 뒤흔들고 있었다. “후...” 준상은 가볍게 심호흡을 한 다음 벌어진 헤네스의 앞섶을 여며 주기 위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의 손이 가운 앞섶을 잡고 당기는 순간, 헤네스가 부스스한 표정으로 눈을 뜨다가 자신의 가슴 어림에 닿아 있는 준상의 손을 보았다. “...” “...” 어째서 하필 깨어나도 딱 이런 타이밍에 깨어나는 것인지. 하지만 준상은 태연을 가장한 채 그녀의 앞섶을 여며 주고는 어느 새인가 눈을 크게 뜨고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헤네스를 향해 말했다. “깼니?” “네, 네...” 반사적으로 대답하기는 했지만, 당황하기는 헤네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잠시 두 명은 아무런 말도 못하고 서로 시선을 외면한 채 그대로 누워 있었다. 뭔가 말이든 행동이든 해야 할 것 같은데, 누군가 머리 속에 하얀색 페인트를 뒤집어 씌운 것처럼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헤네스는 잠시 그렇게 공황상태에 빠져 있다가, 슬며시 고개를 들어 준상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준상도 기다렸다는 듯이 헤네스와 시선을 마주했다. 심장이 뛴다. 세찬 고동이 혈액을 뿜어내어 전신을 달구기 시작한다. 호흡이 가빠진다.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한 혈액 탓에 뿜어지는 숨결 또한 점점 뜨거워지기 시작한다. 단지 시선을 마주한 것뿐인데 두 사람의 몸은 자연스럽게 그와 같은 반응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헤네스는 자신도 모르게 상반신을 일으켜 준상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애써 여며주었던 가운의 앞섶이 벌어지며 그녀의 부드러운 앙가슴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지만 준상 역시 그녀의 눈을 바라보느라 미처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준상은 무언가에 이끌리든 가만히 손을 뻗었다. 그리고 가만히 그녀의 볼과, 귓가와, 뒷목과, 그 모두를 감싸고 있는 부드러운 갈색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헤네스는 가만히 눈을 감은 채 조금은 거칠게 느껴지는 그 촉감을 가만히 느끼다가 이내 한 손을 들어 그 손을 감싸며 눈을 떴다. “...” “...” 준상은 그녀와 시선을 마주하자, 가슴 속에 잠자고 있던 열기가 천천히 끓어오르는 것을 느끼며 그녀의 머리를 천천히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헤네스는 당연하다는 듯이 그 손길이 이끄는 대로 마치 가파른 산을 오르듯 그의 가슴 위로 올라갔다. 준상은 자신의 눈앞에 헤네스의 갈색 머리가 마치 커튼처럼 흘러내리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두 사람의 입술이 천천히 맞닿았다. 여기까지는 이전에 그들이 해왔던 가벼운 키스와 다를 것이 없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준상과 헤네스는 서로의 몸을 꽉 끌어안으며 마치 아기 새가 톡톡 먹이를 쪼듯이 짧은 키스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세 번. 두 사람은 키스를 계속했지만, 그런 가벼운 키스로는 이미 두 사람의 가슴 속에 피어나기 시작한 불꽃을 잠재우기에는 아무래도 역부족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두 사람은 엇갈리듯 고개를 젖히며 깊은 키스를 나누기 시작했다. 헤네스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처음 키스를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어느 정도 이성이 남아 있는 상태였지만, 이내 짧은 키스가 시작되다가 깊은 키스로 이어지자 그 한 가닥 남았던 이성은 순식간에 날아가 버린 상태였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입술과 겹쳐진 준상의 입술 속에서 뜨거운 혀가 밀려들어와 자신의 이빨과 혀와 입 천정을 유린하기 시작하자, 헤네스는 연신 가쁜 숨을 몰아쉬며 준상의 목을 꼭 끌어안는 것 외에는 달리 무언가를 할 엄두조자 낼 수 없었다. 난생 처음 겪어보는, 그야말로 무언가에 홀리지 않고는 엄두조차 내지 못할 것만 같은 격렬한 사랑의 표현. 준상은 그렇게 한참이나 헤네스의 입술을 탐닉하다가 어느 순간 정신이 퍼뜩 돌아왔다. 아차. 저질러 버렸구나. 뒤늦게서야 그것을 깨닫고 키스를 멈추었지만, 이미 헤네스는 몽롱하게 취한 시선으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순간 준상은 격렬한 자기 혐오감에 빠졌다. 아직 채 어른이 되지도 못한 소녀에게 이 무슨 짓이란 말인가. 하지만 그런 마음과는 달리 가슴 한 구석에서는 채 불사르지 못한 욕망이 꿈틀대며 피어올랐다. 헤네스는 거부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이 열정적으로 그의 입술을 받아들였다. 애써 억누르고 있었지만, 그녀가 자신에게 계속 신호를 보내고 있다는 사실은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지 않았던가. 아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어른인 자신이 절도를 지켜야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준상은 더 이상의 생각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한 번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던 것인지 헤네스가 입을 맞춰 왔기 때문이다. 준상은 얼른 그녀의 어깨를 잡고 밀어내려다가 입술 사이로 그녀의 작고 촉촉한 혀가 밀려들어오자 그대로 움찔하며 굳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이 눈치 빠르고 영리한 소녀는 단 한 번 경험한 깊은 키스를 통해 그 묘리를 깨우쳐 버렸던 것이다. 헤네스의 어깨를 움켜쥐었던 준상의 손아귀에서 점점 힘이 빠져 나간다. 아니, 그렇게 느낀 순간 준상의 손은 흘러내린 헤네스의 가운 속으로 비집고 들어가 드러난 어깨를 감싸쥐고 있었다. 자신의 맨살 위에 준상의 거친 손바닥이 닿자 헤네스는 자신도 모르게 움찔하고 말았다. 그것은 본능적인 두려움이었다. 이제껏 가보지 못한 미답의 세계에 한 발자국 들어섰을 때, 누구라도 느낄 수밖에 없는 그런 두려움. 그러나 헤네스는 가슴 속에 피어난 그 한 줄기 두려움을 스스로 억눌렀다. 아니, 지금 서로의 혀끝으로부터 전해지는 그 감미로운 달콤함을 통해 두려움 자체를 잊으려 했다. 하지만 바로 그때, 준상의 손이 천천히 움직이며 헤네스의 가운을 천천히 아래로 밀어냈다. “...” 헤네스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단순히 가운이 벗겨지며 쌀쌀한 공기가 피부에 직접 와 닿은 느낌 때문만은 아니었다. 무엇인가 말로는 쉽게 표현하지 못할 기묘한 전율. 기대. 두려움. 부끄러움. 그리고 일말의 망설임. 이 모든 것이 하나로 뒤섞인 채 그녀의 머리 속을 마구 휘젓고 있었던 것이다. 헤네스는 키스를 멈추고 천천히 상반신을 일으켰다. 가운이 흘러내려 봉긋한 가슴이 준상의 시야에 그대로 들어왔지만, 그녀는 이 순간 그것조차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헤네스.” 그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준상씨.” 그 말에 대답하듯 그녀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두 사람의 시선이 격렬하게 얽히던 바로 그 순간. “우웅...” 침대 한 켠에 방치된 채 잠들어 있던 아이가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켰다. 준상과 헤네스는 서로를 열렬한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아이가 눈을 뜨자 화들짝 정신을 차리고 말았다. 아이는 두 사람을 흘깃 보다가 이내 침대에서 내려가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어쩔 줄을 몰라하더니 거실 한 켠에 소변을 보기 시작한다. “...” 거실 안에 싸한 냄새가 퍼져 나가자 모처럼 달아올랐던 분위기 또한 오줌발에 맞은 모닥불처럼 푸시식 꺼져 버렸다. 00134 트롤러 ========================================================================= 한참 머리에 열이 올라 있을 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갑작스런 아이의 행동으로 인해 제 정신이 돌아오자 헤네스는 반사적으로 드러난 자신의 상반신부터 손으로 가렸다. 비명은 지르지 않았지만, 부끄러움을 견디다 못해 얼굴이 잔뜩 붉어진 헤네스의 모습을 보고 나서야 준상 역시 자신들의 상황을 다시금 깨닫고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둘 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이 내쉰 한숨의 의미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준상은 일단 고개를 돌린 채 얼른 침대에서 빠져 나와 등을 보인 채 돌아섰다. 준상이 그렇게 몸을 돌리자 헤네스는 얼른 가운을 제대로 다시 걸친 후 소변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아이에게로 다가갔다. “가서 씻자. 그리고 용변 보는 곳도 알려줄게.” “...” 헤네스가 아이를 데리고 욕실로 향하자, 준상은 그녀 몰래 다시금 한숨을 푸욱 내쉬고는 엘리멘탈 드래곤과 물의 정령을 합체시켜 아이가 저질러 놓은 일을 처리하도록 지시했다. 위험했다. 이번엔 정말 위험했다. 비록 지금 헤네스와 함께 지내고 있기는 하지만, 준상의 마음속에는 그녀가 언젠가는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계속 족쇄처럼 본능을 억누르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준상은 깨달았다. 더 이상 억누르고 말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상황이 아니라는 사실을. 고민스럽기는 헤네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이에게 좌변기의 사용법을 알려주면서 헤네스는 진작에 용변 보는 곳을 알려주지 않은 걸 후회했다. 하긴 그 상황에서 아이가 벌떡 일어나 용변을 보고 돌아오는 것을 뻔히 보고도 계속 아까의 행위를 이어갔을지는 의문이긴 하지만 여러 가지 의미에서 아쉬운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헤네스는 옷을 벗고 아이와 함께 몸을 씻으며 다시 생각에 잠겼다. 과연 그대로 행위를 이어갔어도 괜찮았을까 하는 작은 불안감이 헤네스의 마음 속에 자리 잡았다. 준상은 지금 무척이나 불안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중이다. 그런 그에게 자신과의 관계가 부담이 되지는 않을까. 그런 부담감이 지금껏 유지되고 있던 위태로운 균형을 무너뜨리는 것을 아닐까. 준상은 귀찮은 일을 싫어한다. 그리고 무슨 일이건 효율과 필요성을 최우선으로 따진다. 만약 방금의 일과 그로 인해 생겨날 수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준상이 귀찮고 필요 없는 일이라 판단하게 되면 자신은 어떻게 해야할까. “후...” 헤네스는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그리고 마치 마음을 좀 먹는 녹처럼 번져나가는 불안을 일단 억눌렀다. 어차피 혼자 낑낑대며 고민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헤네스가 아이와 함께 몸을 씻고 나오자, 준상은 컨테이너 하우스의 테라스를 개방한 다음 식탁과 의자를 가져다 놓은 채 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금방 끝나니까 기다려.” “네.” 헤네스는 조용히 대답한 다음 아이와 함께 머리를 말리고 옷을 갈아입은 뒤에야 준상과 함께 식탁에 마주 앉았다. 서로의 감정을 완전히 풀어놓지 못하고 어설프게 불발로 끝난 탓일까. 이전과는 달리 두 사람 사이에는 다소의 어색함이 흐르고 있었다. 그렇게 말없이 식사를 나누고 있는데, 문득 숲 속에서 낯익은 커다란 몸집의 요정 하나가 그들을 향해 날아왔다. “아, 식사 중이었나 보네요. 오호호... 내가 시간은 참 잘 맞춘다니까.” 아줌마 요정 유니아란은 넉살도 좋게 식탁 한켠에 자리를 잡았다. “좀... 드실래요?” “아유, 뭘 이런 걸 다. 으으음! 이거 맛있네요.” “...” 보통 때라면 느닷없이 난입한 이 수다쟁이 아줌마 요정이 무척이나 귀찮았겠지만, 지금 이 순간 만큼은 준상도 그녀가 찾아와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런데, 어쩐 일로?” 준상이 묻자 유니아란은 비스킷 가루와 딸기잼을 입가에 잔뜩 묻힌 채 식사에 열중하다가 그제서야 생각났다는 듯이 손뼉을 마주치며 외쳤다. “아참참. 내 정신 좀 봐. 정령의 문 만드는 법을 알려주러 와놓고선 이러고 있었네.” “...” 그 말을 듣고 준상은 자신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지신이 왜 여기 와 있는지 잠시 잊고 있었음을 그제서야 깨달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만드는데?” 준상이 묻자 유니아란은 천천히 설명을 시작했다. “그건 말이죠...” 정령의 문을 만드는 법은 간단했다. 먼저 활기찬 생명력을 지닌 울창한 숲이 필요하다. 이 조건이 만족했다면 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숲의 생명력을 집중시킬 강인한 생명체이다. 동물이든 식물이든 상관없지만, 제어하기 힘든 동물 보다는 오래 묵은 커다란 나무쪽이 아무래도 관리하기도 편하기 때문에 많이 선택된다. 일단 문이 될 매개체가 선택되었다면 요정의 돌을 가져다 놓고 요정들이 한데 어울려 의식을 치루는 것으로 정령의 문을 열 수 있게 된다고 한다. “생각보다 너무 쉬운데.” 준상의 말에 유니아란은 고개를 저었다. “그게 그렇게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에요.” “어째서?” “애초에 이 정도로 큰 숲이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니고, 설령 있다 하더라도 요정이 이렇게 많이 모여 사는 곳도 드물죠. 게다가 요정의 돌이란 것도 그리 쉽게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고.” 얘기를 들어보면 그럴 듯 하기는 한데, 그래봐야 이 숲이 이미 그런 조건들을 다 갖추고 있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건 그렇다 치고, 왜 진작 정령의 문을 열지 않은 거지?” 그러자 유니아란은 머뭇거리며 준상의 시선을 피했다. “아니 뭐... 열지 않았다기 보다는, 귀찮기도 하고... 아무튼 여기엔 여러 가지 사정이...” “...” 확실히 뭔가 밝히기 어려운 사정이 있는 것은 분명한 모양이다. “위험한 건 아니겠지?” “물론이죠.” 당연하다는 듯한 유니아란의 말에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말했다. “알았다. 그럼 일단 식사를 마친 다음 본격적으로 준비를 해 보도록 하자.” “네.” 서둘러 식사를 마친 준상은 꺼내 놓았던 컨테이너 하우스를 다시 집어넣은 다음, 우선 문의 매개체가 될 만한 나무를 찾아 갔다. “이 나무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아요.” 유니아란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곳은 요정들의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곳이었다. “크군.” 준상의 말에 유니아란은 자랑스럽다는 듯이 풍만한 가슴을 내밀며 대답했다. “예전에 문으로 삼았던 나무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이 나무도 숲이 처음 만들어졌을 당시에 피어난 작은 싹 가운데 하나죠. 그야말로 이 숲의 역사나 다름없죠.” “그렇군.” 아닌게 아니라 나무 둘레만도 성인 남자 두세 명이 서로 팔을 벌려야 겨우 닿을 정도의 거목이다. “이제 요정의 돌을 준비할 차례에요.” 유니아란의 말에 준상은 돌을 모아놓은 주머니를 펼쳐 보이며 말했다. “어느 정도면 되지?” “음...” 그녀는 여러 개의 돌 가운데 중간 정도의 돌 세 개를 골랐다. “이 정도면 되겠네요. 이리로 좀 가져와 주시겠어요?” “그러지.” 유니아란이 지시하는 곳에 요정의 돌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나무껍질 사이로 새 순이 돋아나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요정의 돌이 나무껍질에 삼켜지듯 사라져 버린다. “여기도요.” “그래.” 요정의 돌 세 개를 그런 식으로 모두 이식하고 나서야 유니아란은 준상을 향해 다시 말했다. “준비는 모두 끝났어요. 이제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의식을 치루기만 하면 되요. 잠시 기다리고 계세요. 금방 가서 데리고 올게요.” “고맙다.” “별 말씀을요. 오히려 제가 고맙지요.” 유니아란은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빠르게 하늘을 날아 마을로 돌아갔다. 그녀가 모습을 감추자 아이의 손을 잡고 늑대들과 함께 말없이 뒤따르던 헤네스가 준상에게로 다가왔다. “끝난 건가요?” 헤네스의 말에 준상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직 의식이 남아 있어.” “그렇군요.” “...” “...” 호들갑스럽던 유니아란이 사라진 탓인지 다시금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준상은 캐비닛을 꺼내 거기서 깔개를 찾아낸 다음, 평상처럼 놓여진 널따란 바위 위에 그것을 깔았다. “앉자.” “네.” 준상과 헤네스가 자리에 앉자, 그 주위를 호위하듯이 늑대 들이 둘러앉았다. 아이는 헤네스가 손을 놓아주자 크림슨 울프의 등에 몸을 기댔다. 아무래도 아직은 사람보다는 늑대에게 더 친밀감을 느끼는 모양이다. 다소곳이 앉아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 문득 무릎 위에 다소곳이 놓여진 헤네스의 작은 손 위로 준상의 커다란 손이 얹어진다. 헤네스는 자신도 모르게 흠칫 놀랐지만, 이내 준상의 손을 통해 그의 뜨거운 체온이 느껴지자 어째서인지 아까부터 마음 한 구석에 소리 없이 차오르던 불안이 소리 없이 녹아내리기 시작한다. “...” 헤네스는 가만히 준상의 어깨에 몸을 기댄 채 평화로운 숲의 정경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문득 준상의 낮은 목소리가 헤네스가 기댄 어깨를 통해 울려왔다. “미안하다.” “...” 순간 헤네스는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어째서 사과를 하는 것일까. 하지만 그녀가 미처 생각을 이어가기도 전에 다시 준상의 말이 이어졌다. “아까는... 나도 모르게 그만 실수를 하고 말았다.” 아아... 헤네스는 어쩐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실수라니. 물론 헤네스도 알고는 있었다. 나이 차이도 있고, 이런 저런 상황을 고려한다면 준상이 자신을 진지하게 생각하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장애물이 있다는 사실을. 하지만 단순히 알고 있는 것과 직접 상대의 입으로 그 사실을 전해듣는 것에는 너무나 큰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헤네스가 끓어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 입술을 잘근 깨무는 순간, 준상의 말이 이어졌다. “그래서 결정을 내렸다.” “무슨...” “앞으로 같은 침대를 쓰는 것은 가급적 자제하는 편이 좋겠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헤네스는 울컥하고 말았다. “어째서요?” 격하게 반발하는 헤네스의 모습에 준상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건... 더 이상 나 자신을 제어할 수 없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 순간 헤네스는 잠시 멍한 기분이 들었다. “그, 그건... 하지만...” 준상은 혼란에 빠진 헤네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난 네가 좋다. 헤네스.” 순간 헤네스는 가슴 한켠이 쿵 하고 내려앉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준상은 그런 헤네스를 향해 계속 말했다. “이것은 이제 막 깨어난 감정이 아니다. 다만...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 자신도 이것이 정확히 어떤 감정인지 지금도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그래서 혼란스러웠고, 그래서 머뭇거렸다.” “...” “하지만 이번의 일로 한 가지를 깨달았다. 그건... 지금까지 만나온 수많은 사람 가운데 가장 소중하고, 또 그 가운데 가장 지켜주고 싶은 사람이 바로 너라는 사실을 말이다.” 헤네스는 자신도 모르게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 것을 느꼈다. 어째서일까. 너무 너무 기쁜데 어째서 이렇게 눈물이 쏟아져 내리는 것일까. “헤네스?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갑자기 헤네스가 눈물을 펑펑 쏟기 시작하자 준상은 당황해서 얼른 호주머니를 뒤져 티슈를 꺼내 그녀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헤네스는 그렇게 당황해 하는 준상의 모습을 보며 두 눈에 눈물을 가득 머금은 채 미소를 지어 보였다. “...” 준상은 그 모습을 보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분명히 눈물로 범벅이 되어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 얼굴인데... 어째서 이렇게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일까. 마치 빛이 뿜어져 나오는 듯한 그 미소에 준상은 자신도 모르게 매혹되어 버렸다. 헤네스는 준상을 향해 밝게 웃으며 말했다. “준상씨.” “...” “거절하겠어요.” “응?” 헤네스의 갑작스런 말에 준상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뭐라고?” 조금은 얼빠진 듯 보이는 준상의 말에 헤네스는 혀를 살짝 내밀어 보이고는 티슈로 눈물을 닦으며 대답했다. “침대 따로 쓰자면서요. 전 싫어요. 고백 받자마자 각방이라니, 그건 너무 심하잖아요.” 그제서야 준상은 헤네스가 말한 거절의 의미를 깨닫고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어느 쪽이든 난감하긴 마찬가지였다. “아니, 그건...” 하지만 헤네스는 손가락을 들어 준상의 입술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쉿.” “...” “제가 말 안 했나요?” “뭘?” 헤네스는 당당한 표정으로 준상을 향해 말했다. “전 이미 성인식을 치른지 오래에요. 합법적으로 자신의 뜻에 따라 반려를 찾을 수 있는 권리가 있는 몸이라고요.” “그건...” 준상이 다시 뭔가 말하려 했지만 헤네스는 다시금 손가락을 뻗어 그의 입술을 막은 뒤 고개를 저으며 다시 말했다. “전 어린 아이가 아니에요.” “...” “잊지 마세요. 전 이미 자신의 일을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어른이라는 사실을.” 헤네스는 그렇게 말하고는 스스로 몸을 일으켜 준상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쥔 다음 그 입술에 천천히 입을 맞추었다. 아아... 결국 이렇게 되고 마는 것인가. 준상은 더 이상 이 아름다운 숙녀가 지닌 매력에 항거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내 무언가에 이끌리듯 천천히 한 손을 뻗어 헤네스의 목을 감싸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러자 그의 행동에 반응하듯이 헤네스는 천천히 준상의 머리카락을 양손으로 쓰다듬으며 키스에 몰두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정신없이 서로의 입술을 탐닉하고 있던 두 사람의 귀에 작은 소음이 들려왔다. “저게 뭐하는 거지?” “보면 몰라? 뽀뽀하는 거잖아.” “뽀뽀를 왜 저렇게 오래 해?”‘ “몰라.” “나도 몰라.” “도대체 넌 아는 게 뭐니?” 준상과 헤네스는 그 소리를 듣고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뜨며 키스를 멈추었다. 어떻게 보면 아까와 같이 모처럼의 좋은 시간을 방해받은 상황. 하지만 금방 어색해져 버렸던 아까와는 달리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크흠... 끝나셨나요?” 유니아란이 헛기침을 하며 그렇게 묻자 헤네스는 이내 얼굴이 빨개져서 고개를 숙였고, 준상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 작품 후기 ============================ 어젯밤에 눈 맞고 쏘다녀서 그런지 하루 종일 몸 상태가 메롱이네요. 킁; 00135 트롤러 ========================================================================= “얘들아! 시작하자!” “와아아!” 유니아란이 외치자 수풀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요정들이 우르르 몰려 나오더니 서로 손을 잡고 요정의 돌이 이식된 나무를 몇 겹으로 에워싸기 시작한다. 준상은 넓적한 바위 위에 앉아 그것을 지켜보다가 문득 붉은 늑대의 등에 기대 꾸벅거리며 졸고 있는 아이를 보고는 아차 싶은 생각이 들었다. “유니아란.” “네?” 유니아란은 정신없이 떠들기 시작한 요정들을 바라보며 의식을 시작하려다가 준상의 부름을 듣고는 몸을 돌려 날아왔다. “무슨 일이죠?” 준상은 뚱뚱한 아줌마 요정을 바라보며 말했다.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다.” “말씀하세요.” 준상은 아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정령의 문이 열리면 아마도 우리는 돌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아...” 준상의 말에 헤네스는 그제서야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고, 유니아란은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당신의 목적은 역시 정령의 힘을 원래대로 되돌리는 것이겠죠?” “아마도.” “그렇다면... 아마 정령의 문이 열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할 거에요.” “그게 무슨...” 유니아란의 말에 준상은 얼굴을 찌푸리다가 그제서야 미처 생각지 못하고 있던 문제를 떠올렸다. 이곳 아겔라한의 숲은 그럴 생각만 있었다면 이미 오래 전부터 정령의 문을 열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령의 문을 지금껏 열지 않고 있었다면, 그에 걸맞는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어떻게 된 일이지?” 준상이 묻자 유니아란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것은... 지금 제 입으로는 말씀드리기 어려워요. 다만 한 가지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저는 지금껏 당신 같은 분이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 “자세한 건... 우선 정령의 문을 열고 난 뒤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전에 없이 진지한 유니아란의 말에 준상과 헤네스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알았다. 그럼 기다리도록 하지.”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유니아란은 준상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보인 다음, 다른 요정들의 준비를 마친 상태로 대기하고 있는 요정 기사 미아라에게 손을 들어 보이며 외쳤다. “자! 숲의 아이들아! 의식을 시작하자!” “와아아!” 유니아란의 외침을 들은 요정들은 서로 손을 맞잡은 채 마치 강강술래를 하듯이 나무 주위를 빙빙 돌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XxxxXXXxxx XXxxXxxxxx...” 인간의 목소리로는 표현하기 힘든 기묘한 울림이 숲속에 메아리치듯 퍼져 나가자, 나무에 이식되어 있던 요정의 돌이 공명하듯 떨려온다. “이게... 무슨 뜻이죠?” “글쎄. 잘 모르겠군.” 준상과 헤네스에게는 다른 이성적인 존재의 말을 자연스럽게 알 수 있는 능력이 부여되어 있었지만, 그런 그들조차도 요정들의 노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범주의 것이었다. 두 사람이 가만히 서로의 손을 맞잡고 지켜보는 가운데 요정들이 만들어낸 고리는 점점 더 속도를 더해갔으며, 그에 따라 노래 소리 역시 점점 더 커져만 갔다. 그렇게 춤과 노래가 계속 되기를 얼마나 했을까. 의식을 주재하는 유니아란의 얼굴에서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히기 시작할 무렵, 마침내 요정의 돌이 이식된 나무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웅웅웅... 마치 벌통 속에서 성난 벌들이 일제히 날개 짓 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는가 싶더니, 이내 나무로부터 환영처럼 은은한 녹색 빛을 뿜어져 나온다. “아...” 나무가 은은한 녹색 빛으로 완전히 감싸이자 헤네스는 그 신비하고도 아름다운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터뜨렸다. 하지만 요정들의 춤과 노래는 그 순간을 기점으로 점차 느려지고 작아지기 시작했고, 그에 맞추어 나무로부터 뿜어져 나오던 녹색 빛도 점차 사그라 들었다. “후우...” 그리고 마침내, 요정들의 춤과 노래가 완전히 끝나자 의식을 주재하던 유니아란은 이마에 흘러내린 땀을 손으로 닦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그에 맞추어 준상의 시야 좌측에 떠있던 퀘스트 정보도 새롭게 갱신되었다. 에픽 퀘스트 – 망각 5. 정령의 문 -요정들과의 대화를 통해 정령의 문을 복원하는 방법을 알아냈습니다. 이제 필요한 재료들을 모아 정령의 문을 복원할 차례입니다. 이것이 성공한다면, 미약했던 정령의 힘을 본래의 그것으로 되살릴 수 있게 됩니다. (달성) ->완료! 보상: 경험치 약간 -> 보상을 지금 수령하시겠습니까? (Y/n) _ (주의) 수령하지 않은 보상은 7일후 자동 소거됩니다. “...” 유니아란의 말대로 역시나 정령의 문이 열리는 것만으로는 퀘스트가 끝나지 않았다. 보상을 수령하자, 다시 새로운 퀘스트 정보가 나타났다. 에픽 퀘스트 – 망각 6. 요정계의 이변. -정령의 문을 여는 데는 성공했지만, 정령의 힘은 원래대로 되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요정계에 뭔가 이변이 생긴 듯 싶습니다. 우선 요정들과 대화를 나눠 보세요. 준상은 퀘스트 정보를 확인한 뒤 유니아란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일이지?” 그러자 유니아란이 우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사실... 저희 여왕님께서는 지금 깊은 잠에 빠져 계십니다.” “어째서?” 유니아란은 준상이 이유를 묻자 살짝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후...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우선 요정계나 정령계에 대해 조금 설명할 필요가 있어요. 들어 주시겠습니까?” “말해봐.” 준상의 허락이 떨어지자 유니아란은 천천히 설명을 시작했다. “요정계나 정령계는 하나의 독립된 세계로 존재하는 곳이지만, 완전히 따로 존재하는 곳이 아닙니다. 좀 복잡한 얘기긴 합니다만 원래부터 상호의존적인 형태로 만들어진 세계이고... 그 때문에 다른 세계와의 교류를 통해 그 존재 의의를 인정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바로 그 교류를 통해 여러 가지 다른 세계로부터 정보가 유입됨으로서 벌어지는 부작용이었다. 새로운 지식이나 정보는 요정계와 정령계에 영향을 미쳐 새로운 정령을 출현시키기도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먼저 새로운 지식이나 정보를 받아들여 그것을 요정계나 정령계에 반영할 수 있는 초월적인 존재를 필요로 하게 된다. 요정계에서는 그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이 바로 요정의 여왕이라 불리는 존재이고, 정령계에서는 정령왕이라 불리는 존재가 그 일을 맡고 있었다. 처음에는 이런 시스템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다른 세계로부터 유입되는 정보나 지식의 양이 급증하면서 이런 체계에 과부하가 생기기 시작했다. “정령계에서는 이런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기존에 혼자서 모든 일을 처리하던 정령왕의 존재를 분화시켜 대정령을 탄생시키고, 그렇게 태어난 대정령들이 기존에 정령왕이 수행하던 직무를 나누어 수행하는 체제가 들어섰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여러 대정령들을 정령왕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본래 정령왕은 오직 하나뿐인 존재를 의미하던 말이었죠.” “그랬군. 그렇다면 요정계는?” 준상의 물음에 유니아란이 바로 대답했다. “정령은 본래 분명한 실체를 가진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런 식의 분화가 가능했지만, 요정은 분명한 실체를 가진 존재이기에 그런 식의 대응은 불가능했습니다. 게다가 정령계는 요정계의 하위 차원이기에 변화에 대한 부하 역시 적게 받습니다. 아무튼... 이런 여러가지 복잡한 문제 때문에 여왕께서는 스스로 변화하는 세계에 걸맞는 존재가 되기 위해 진화를 선택하셨죠. 하지만 문제는 여왕께서 잠들어 계신 동안 요정계를 관리할 방법이 없다는 점이었고, 그래서 여왕께서는 그분께서 합당한 자격을 갖추어 깨어나실 때까지 요정계를 동결하기로 결정하시고 이것을 실행해 옮겼습니다만, 여기서 다시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게 뭐지?” “세계의 변화가 예상보다 너무 급격해서 여왕님의 진화가 그 속도를 따르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음...” 어떻게 된 일인지 대충 감이 잡힌다. 그것이 문명이든 생명체의 진화이든 간에, 한번 발전에 가속도가 붙으면 그것을 따라잡기는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내가 할 일은 뭐지?” 유니아란은 조심스럽게 답했다. “여왕님을 깨워 주십시오.” 준상은 얼굴을 찌푸렸다. “깨우라고? 문제가 해결된 것도 아닌데?” 그 말에 유니아란은 씁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처음부터 여왕님 혼자 모든 일을 떠맡도록 놔둔 것부터가 잘못이었습니다. 저희가 어리석어 여왕님께 너무 과중한 부담을 지웠던 것이죠.” “흠...”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물었다. “하지만 그런 일이라면 너희들이 직접 해도 됐을텐데?” 그 말에 유니아란은 고개를 저었다. “이미 오랜 세월을 다른 세계에 몸담아 왔다고는 하지만, 저희들은 본디 요정계에 속한 몸이기에 요정계 안으로 들어가면 그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동결되고 맙니다.” 준상은 다시 물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다. 하지만, 그런 거라면 다른 인간들에게 진작 도움을 청해도 되는 일이 아니겠나.” 이번에도 유니아란은 고개를 저었다. “보통의 인간은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이지만 요정과 같은 자격을 가진 자, 구체적으로는 요정의 키스가 가능한 자여야만 합니다.” “아...” 준상은 자신이 얼마 전에 얻은 칭호의 용도가 무엇인지 이제야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내가 그 자격을 가지고 있는 것을 어떻게 알았지?” 그 말에 유니아란은 고개를 저었다. “가지고 있는 것을 알아 본 것이 아닙니다.” “아니라고?” “네. 처음 이니아가 당신을 만난 날로부터 계속해서 저희는 당신을 시험했습니다. 귀찮은 일을 맡기고 생활을 지켜보고 일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그 모든 것을 보고 합당하다 여긴 요정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키스를 당신에게 베풀었고, 그 결과가 지금 당신에게 주어진 자격입니다.” “...” 그런 것이었나. 그냥 철딱서니 없어 보이기만 하던 요정들의 행동에 그런 이유가 있었다니. 준상은 그제서야 조금은 느슨해 보이던 퀘스트들의 인과관계를 확연하게 깨달았다. 유니아란은 납득했다는 표정의 준상에게서 숨을 헉헉 몰아쉬며 여기 저기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는 요정들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다시 말했다. “물론... 쟤들은 이런 내막 같은 건 모릅니다. 원래 비밀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은 것이고, 시험을 위해서도 저 아이들은 본래의 모습 그대로 있어야할 필요가 있으니까요.” “그랬군.” 준상은 바위로부터 몸을 일으키며 유니아란에게 물었다. “그럼, 저 안으로 들어가서 요정의 여왕을 깨우면 되는 건가?” 그 말에 유니아란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다만... 혹시 모르니 이전에 드렸던 요정의 돌을 반드시 몸에 지니고 계세요. 요정계가 동결된 이후 그 안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그래서 어떤 위협이 생겼는지는 저로서도 알지 못합니다.” “하긴... 당연한 일이겠지.” 대화가 끝나자 그제서야 퀘스트 정보가 갱신되었다. 에픽 퀘스트 – 망각 6. 요정계의 이변. -정령의 문을 여는 데는 성공했지만, 정령의 힘은 원래대로 되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요정계에 뭔가 이변이 생긴 듯 싶습니다. 우선 요정들과 대화를 나눠 보세요. (달성) -요정계로 들어가 요정들의 여왕을 깨우십시오. 준상은 주머니에서 요정의 돌을 몇 개 꺼내 헤네스에게 건네주고는 크림슨 울프의 등에 매달려 잠들어 있는 아이를 유니아란에게 부탁했다. “다녀올 동안 아이를 맡아다오.” 그러자 유니아란이 난처해 하며 대답했다. “상관은 없습니다만... 과연 저 아이가 저희들을 따르려 할지.” “...” “차라리 여왕님께 부탁을 드려 보시는 건 어떠시겠습니까. 요정의 피를 이어받은 아이라면 여왕님께서도 박대하지는 않으실 겁니다.” 돌려 말하기는 했지만, 몸집이 작은 아이라고는 해도 작은 요정들로서는 사실 감당하기 어려운 점이 많다. 만약 아이가 땡깡이라도 부린다면 어찌 될까. 요정들의 마을 정도는 순식간에 박살이 나버리고 말 것이다. “할 수 없군.” 준상이 고개를 끄덕이자, 헤네스는 얼른 다가가 잠들어 있는 아이를 품에 안은 후, 아이의 옷 주머니에 요정의 돌을 하나 넣어 주었다. 그렇게 준비를 마치자, 준상은 늑대들을 역소환한 다음 헤네스의 손을 잡고 정령의 문으로 깨어난 나무 앞에 다가서며 물었다. “문은 어디있지?” 유니아란은 대답했다. “이미 열려 있습니다. 단지 보이지 않을 뿐.” “...”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헤네스의 손을 잡고 나무를 향해 한 걸음 내딛었다. 그러자, 갑자기 시야가 확 바뀌며 회색으로 물든 기묘한 세계가 눈앞에 드러났다. 00136 트롤러 ========================================================================= 이 느낌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어린이 사생대회 수상작 전시회에 가서 크레파스로 그려놓은 애들 그림 사이에, 어린 아이의 것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유려한 수채화가 한 폭 덜렁 놓여있는 느낌이 아마 이렇지 않을까 싶다. 더구나 그 모든 것이 오직 회색의 음영 하나로 표현되어 있으니 그렇지 않아도 기괴한 풍경이 더 기묘하게 느껴진다. 뒤를 돌아보자 은은한 녹색의 빛을 뿜어내는 나무 한 그루가 보인다. 바로 그들이 정령의 문으로 사용한 나무였다. “이상한... 곳이네요.” 헤네스는 너무나도 이질적인 요정계의 모습에 불안함을 느낀 탓인지 준상에게 몸을 밀착시켰다. “불안하면 들어가 있어라. 어차피 금방 끝날 테니까.” 하지만 헤네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 정도는 아니에요.” “...” 준상은 헤네스의 손을 조금 더 힘주어 잡은 다음 우선 미니맵을 살폈다. 다행히 미니맵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었고, 아마도 여왕의 위치가 아닐까 싶은 퀘스트의 표식도 제대로 표시가 되어 있었다. “아이는 이리 주렴.” “네.” 준상은 헤네스에게서 아이를 건네받아 한 손으로 안아 올린 다음 나머지 한 손으로 헤네스의 손을 잡고 천천히 미니맵에 표시된 느낌표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두 사람은 작은 수풀을 넘는 순간 그나마 낯익은 풍경 하나를 발견했다. “이건...” 그곳에는 요정의 집으로 보이는 은방울꽃이 하나 가득 피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익히 알고 있는 요정의 집과는 한 가지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크기였다. 아겔라한의 숲에서 보았던, 요정들이 집으로 사용하는 은방울꽃은 기껏해야 주먹 크기 정도였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보통의 은방울꽃보다 훨씬 크다고 할 수 있지만, 지금 눈앞에 나타난 은방울꽃은 거의 사람 하나가 통째로 들어가고도 남을 정도의 크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이쯤 되면 은방울꽃이라기 보다는 에밀레종꽃이라고 부르는 편이 나을 것 같다는 실없는 생각을 준상이 떠올렸을 정도다. 천천히 거대한 은방울꽃으로 나가간 헤네스는 호기심이 생겼는지 슬쩍 고개를 내밀어 그 안을 올려다 보았다. 그러자 몸을 둥글게 만 상태로 꽃 안에 잠들어 있는, 거의 사람과 동등한 크기의 요정이 보였다. 준상은 헤네스를 따라 안을 들여다보고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쯤 되면 우리가 작아진 건지, 아니면 요정들이 커진 건지도 구분이 안 가는군.” 그 말을 들은 헤네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그런 일이... 정말로 가능한 걸까요?” “글쎄. 나도 잘은 모르겠지만, 애초에 이런 풍경 자체가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하긴... 그렇긴 하네요.” 두 사람은 천천히 모두가 잠들어버린 요정의 마을을 지나쳐 걸음을 옮기다가 이내 담쟁이 덩굴로 뒤덮인 커다란 벽과 마주쳤다. 대충 봐도 삼사 미터는 될 듯한 높이인데다 달리 입구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준상은 벽을 뛰어 넘기로 결정했다. “헤네스, 이리 와.” “네...” 자신의 손길이 이끄는 대로 헤네스의 부드러운 몸이 안겨오자, 준상은 그녀의 허리를 안은 채 도약을 사용하여 담장을 훌쩍 뛰어 넘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담장의 높이가 갑자기 주욱 늘어나며 준상을 가로 막았다. 덕분에 그는 얼른 발로 벽을 차며 튕겨 나와야만 했다. “이건...” 준상은 다시 한 번 시도해 봤지만 결과는 역시나 마찬가지였다. “어쩌죠?” 헤네스가 묻자 준상은 일단 그녀에게 아이를 맡긴 후, 벽을 살펴보았다. 하나 가득 뒤덮인 담쟁이 덩굴을 손으로 젖히자 아마도 대리석이 아닐까 싶은 하얀 돌로 만들어진 벽이 눈에 들어왔다. “음...” 미니맵을 다시 확인해 봤지만 요정의 여왕이 이 벽 안쪽에 있는 것은 확실해 보였다. 아마도 잠들어 버린 여왕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일종의 방어벽이 아닐까 싶다. “어쩐다.” 하지만 고민을 짧았다. 벽이 가로 막는다면, 부숴버리면 그만 아니겠는가. “헤네스, 물러서라.” “네.” 헤네스가 멀찍이 물러서자, 준상은 인벤토리에서 랑다잘의 분노를 꺼내들었다. 이 두 개의 거대한 철구는 세트로 장착할 경우 시설물 파괴시 200퍼센트 공격력 증가와 더불어 파쇄 효과가 발동되는 터무니없는 공성 무기이다. 훙훙훙... 공기를 찢어발기며 휘돌던 두 개의 철구는 준상이 손을 뻗자 벽을 향해 벼락처럼 떨어져 내렸다. 쩡! 철구는 강렬한 소음과 함께 튕겨 나왔다. “...” 준상은 다시 수차례에 걸쳐 철구를 휘둘러 벽을 두들겼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평범한 타격으로 무리라면, 강타를 사용해 보는 건 어떨까. 어차피 달리 적이라 할 만한 존재도 없는 상황이니 망설일 이유도 없다. “헤네스.” 그녀의 품에 안겨 있던 아이는 철구가 벽을 두들기는 소리에 놀라 깨버린지 오래였고, 헤네스 역시 연거푸 울려 퍼지는 커다란 소음에 조금 질린 듯한 표정으로 귀를 막고 있다가 준상의 부름에 얼른 대답했다. “네.” “큰 기술을 써야겠다.” “아...” 자세한 설명은 없었지만 헤네스는 준상이 말하는 큰 기술이 무엇인지 바로 깨닫고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두 개의 채찍을 풀어 손에 쥐었다. “저는 준비 됐어요.” “좋아.” 준상은 무투가로 콤보 카드를 변경한 후 두 개의 철구를 손에 쥐고 벽 앞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강타를 발동했다. “후우우...” 준상은 천천히 숨을 깊게 들이쉬며 힘을 모았다. 그리고 5초의 시간이 흐르자 전신에 응축된 힘을 모아 단숨에 벽을 향해 뿜어내었다. 꽈릉! 회색빛으로 물들어 있던 어두컴컴한 세상에 한 줄기 벼락이 뿜어져 나왔다. 무투가 콤보와 영웅급 카드의 조화가 만들어낸 파괴력은 여왕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견고한 흰색 벽을 거침없이 두들겼다. 헤네스는 준상이 강타를 발동하고 그 후폭풍이 몰아치기가 무섭게 달려가 온몸에서 희뿌연 연기를 뿜어내고 있는 그의 등을 채찍으로 후려쳤다. “후우우우...” 준상은 이전에 비해 훨씬 과부하 증상이 심해졌음을 느꼈다. 상대가 무생물이라 생명력 흡수 효과를 얻지 못한데다, 영웅급 카드라서 그만큼 더 몸에 과부하가 생긴 탓이 아닐까 싶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헤네스가 제때 채찍을 사용해준 덕분에 순식간에 체력이 회복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어느 정도 체력이 회복되자 준상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고, 그제서야 헤네스는 채찍질을 멈추고 얼른 준상에게로 다가왔다. “괜찮으세요?” “덕분에.” 준상은 헤네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벽을 살폈다. 벽을 뒤덮고 있던 담쟁이 덩굴은 영웅급 강타의 위력을 견디지 못하고 산산이 부서져 흩어진지 오래였고, 덕분에 아름다운 흰색 벽이 준상과 헤네스의 시야에 완전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허...” 블러드서커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생명체가 아닌 시설물이 대상이라면 랑다잘의 분노가 지닌 파괴력은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의 것이었다. 더구나 보통의 일격도 아니고, 무투가 콤보로 증폭된 영웅급 강타의 직격을 견뎌 내다니! 철구가 직격된 자리에 조금 부서진 흔적이 생기긴 했지만, 확실히 터무니없는 방어력이 아닐 수 없었다. 준상이 혀를 차며 벽을 바라보고 있는데, 문득 헤네스가 벽 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준상씨, 저기 보세요.” “응?” 헤네스가 가리킨 곳을 바라보던 준상은 하얀색 벽 위에 손바닥 같은 형상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혹시... 저게 벽을 여는 장치가 아닐까요?” “...” 이런 곳에 숨겨두면 어찌 안단 말인가. 최소한 표지판이든 안내문구든 마련해 놔야 알아볼 것이 아닌가. 준상은 속으로 그렇게 투덜거리며 천천히 손바닥 형상이 있는 곳으로 다가섰다. “물러나 있어라.” “네.” 헤네스가 아이와 함께 물러나자, 준상은 가만히 손을 뻗어 벽에 새겨진 형상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작은 진동과 함께 흰 색의 벽이 좌악 갈라지더니 하나의 통로가 모습을 드러낸다. 안쪽으로 나있는 어두운 통로의 모습을 확인한 준상은 반딧불이를 불러 주위를 밝히고는 헤네스를 향해 손을 뻗었다. “가자.” “네.” 헤네스는 아이를 데리고 얼른 달려와 뻗어진 손을 잡자, 준상은 반딧불이를 앞세운 채 천천히 통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여기까지 와서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에 하나 침입자들을 막아내기 위한 함정 같은 것이 존재할 수도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준상은 초감각을 발휘해 주위의 작은 움직임을 세세하게 살펴가며 발걸음을 옮겼다. 무엇으로 만들어진 것인지조자 짐작이 되지 않는 어두운 통로를 지나 몇 번인가 꺾어진 길을 통과하고 나자 비로소 밝은 빛이 비치는 출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 준상과 아이의 손을 잡은 채 조심스럽게 출구를 빠져 나온 헤네스는 눈앞에 펼쳐진 모습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터뜨렸다. 그곳은 투명하고 매끄러운 하얀색 벽이 천장을 구형으로 감싼 커다란 방이었다. 방 중앙에는 은방울꽃의 형상을 한 천개가 드리워져 있었으며, 그 아래쪽에는 구름의 형상을 한 푹신한 무언가가 하나가득 깔려 있었다. 중요한 것은 그 구름 위에 단정한 자세로 누워있는 한 명의 여인이었다. 배 위에 두 손을 얹고 옅은 무지개빛이 은은하게 뿜어져 나오는 기다란 머리카락을 폭포수처럼 드리운 채 가만히 잠들어 있는 여인의 모습은 같은 여성인 헤네스가 보기에도 너무나 고귀하고 아름다웠다. 헤네스는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아래로 내려 자신의 가슴을 바라보며 울상이 되었다. “...” 안 그래도 가슴이 너무 작아서 준상이 자신을 여자로 의식하지 않는 것인가 하는 고민을 하고 있던 그녀에게 있어, 누워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기 좋게 부풀어 있는 여인의 가슴은 부러움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 헤네스는 살며시 고개를 들어 준상의 표정을 훔쳐 보았다. 하지만 다행히도 준상은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지 담담하기 그지 없었다. 아니,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얼굴을 살짝 찌푸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헤네스는 그나마 조금 안심이 되었다. “...” 헤네스가 느낀 대로 준상은 별로 탐탁지 않은 기분이었다. 보통 사람 크기의 요정 들을 보고 이렇게 되지 않을까 예상을 하긴 했어도, 막상 인간 여성과 다를 바 없는 여왕의 모습을 보니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기 시작한 탓이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놓고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는 일. 준상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헤네스에게 말했다. “여기서 기다려. 여왕을 깨워야겠다.” “네.” “미안.” “괜찮아요. 필요한 일이잖아요.” “...” 어른스러운 건지, 아니면 어른스러운 척 하는 건지. 어느 쪽이 되었든 이제 막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상황에서, 본의 아닌 일이라고는 하지만 다른 여인에게 입을 맞추는 모습을 보여주고 보여지는 행위가 기꺼울 리 없다. 준상은 여왕에게 다가서려다 먼저 헤네스의 이마를 끌어당겨 입을 맞추었다. “준상씨?” 난데없는 준상의 입맞춤에 헤네스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보며 준상은 조용히 대답했다. “첫 번째 요정의 키스는 역시 너에게 해주는 것이 낫겠다 싶어서.” “...” 헤네스는 조금은 우울해졌던 마음이 활짝 개이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두 사람의 귀에 처절한 절규가 들려왔다. “안 돼에에에에!” 준상과 헤네스는 물론이거니와 멀뚱거리며 헤네스의 손을 잡고 있던 아이마저도 흠칫 놀라며 그 절규가 들려온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절규의 주인공은, 놀랍게도 잠들어 있다고만 여겼던 여왕이었다. 여왕은 그 아름다운 얼굴을 와락 구긴 채 준상과 헤네스를 향해 외쳤다. “이, 이... 연놈들이... 어디 만년 묵은 노처녀 앞에서 염장질이야! 약 올리는 거니? 약 올라 죽으라고 일부러 그러는 거야? 응?” “...” “...” 사람이 너무 놀라면 오히려 아무 말도 못하는 경우가 있다. 지금의 준상과 헤네스가 딱 그런 상황이었다. 그나마 먼저 정신을 차린 준상이 여왕에게 물었다. “자는 거... 아니었습니까?” 그러자 여왕이 대뜸 소리쳤다. “자고 있었지. 자고 있었는데, 어떤 놈이 냅다 담장을 때려 부수려고 난리를 치고 코앞에서 염장질을 하는 바람에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깨버렸다. 어쩔래?” “...” “게, 게다가... 요정의 첫 번째 키스를... 아아...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기회를 날려버리다니. 이건 저주야.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운명의 장난이... 으헝헝헝헝...” 여왕은 그렇게 혼자 중얼거리다가 이내 서럽게 엉엉 울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멀거니 바라보고 있는 준상의 눈앞에 퀘스트 정보가 갱신되었다. 에픽 퀘스트 – 망각 6. 요정계의 이변. -정령의 문을 여는 데는 성공했지만, 정령의 힘은 원래대로 되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요정계에 뭔가 이변이 생긴 듯 싶습니다. 우선 요정들과 대화를 나눠 보세요. (달성) -요정계로 들어가 요정들의 여왕을 깨우십시오. (달성) ->완료! 보상: 경험치 조금 -> 보상을 지금 수령하시겠습니까? (Y/n) _ (주의) 수령하지 않은 보상은 7일후 자동 소거됩니다. 준상은 퀘스트 정보를 확인하다가 뭔가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에픽 퀘스트가 끝났으면 그에 걸맞은 보상이 나와야 하는데, 그런 것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설마... 이게 끝이 아니었던 것일까. 얼굴을 찌푸리며 보상을 수령하자 역시나 새로운 퀘스트의 정보가 눈앞에 나타났다. 에픽 퀘스트 – 망각 7. 여왕의 소원. -여왕은 한 가지 소망을 이루기 위해 오늘을 기다려 왔습니다. 그녀와 대화를 나누어 보십시오. 그 내용을 읽는 순간 준상은 한 가지 불길함 예감이 머리 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방금 전 여왕이 했던 말을 다시 떠올리고, 여기에 유니아란이 말한 시험의 의미를 되새기자 그 불길한 예감은 이내 하나의 확신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준상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이번 에픽 퀘스트에서 벌어졌던 모든 일들이 퍼즐 조각처럼 제 자리를 찾아가며 하나의 결론을 도출해내기 시작한다. 준상은 그렇게 형태를 갖춰가는 그림을 억지로 머리 속에서 지워버렸다.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목을 놓아 울던 여왕이 준상을 가리키며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이대로는 억울해서 못 살아. 너! 당장 이리 와서 나한테 키스해!” “...” “그리고... 내 반려가 되어줘!” 아아... 역시나 그랬던 것이다. 요정들의 시험은 저 말괄량이 여왕의 성격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 그녀의 터무니없는 부탁을 얼마나 성실하게 수행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한 것이었다. 요정계가 동결 상태에 들어간 것은 여왕이 자신의 소원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일종의 파업 투쟁에 들어간 것이 아니었을까. 여왕의 반려가 되면 그것은 다시 말해 요정계 역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싸움의 한 축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정 자체의 전투력은 그리 기대할 수 없을지 몰라도 그 하위 차원인 정령계의 힘까지 감안하면 이것은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사건이 될 터. 단순히 정령사의 힘을 강화하는 것을 넘어서, 새로운 세력의 참전을 유도하는 일이니 에픽 퀘스트의 결과로서 부족함이 없다. “그 망할 뚱땡이 요정이...” 준상은 자신도 모르게 이마를 감싸 쥐었다. 물론 유니아란이 그를 속이거나 한 것은 아니다. 어떤 면이 어떻게 마음에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로서는 준상이야말로 변덕스러운 철부지 여왕의 반려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에 이렇게 요정계 안으로 들여보낸 것이리라. 이러니저러니 해도 여왕의 반려란 요정들에게 있어 가볍지 않은 위치일테니 그녀로서는 자신이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호의가 아니었을까. 문제는 그 호의가 상대의 의향을 전혀 반영하지 않았다는 점이지만 말이다. 준상은 한숨을 푸욱 내쉬고는 불안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헤네스의 손을 꽉 잡은 채 여왕을 향해 당당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거절한다!” 여왕은 준상의 대답을 듣고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다시 외쳤다. “어째서!” 준상은 대답했다. “나는 책임감 없는 자가 싫다. 그것이 이유다.” 그 말을 들은 여왕은 이내 아무 대답도 못한 채 눈물만 주륵주륵 흘리기 시작했다. 00137 트롤러 ========================================================================= 잠시 말없이 보는 사람의 마음이 아플 정도로 눈물만 흘리던 여왕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일만 년이야. 알아? 일만 년 동안 이 좁아터진 요정계에 틀어박혀 다른 건 생각도 못하고 일만 했어.” “...” 준상과 헤네스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여왕은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혼자 계속 말을 이어갔다. “나 정말 열심히 일했어. 근데 말이야...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들더라. 난 도대체 무엇 때문에 여기서 이 짓을 하고 있는 건가... 라고 말이야.” “...” “그래도 난 자부심이 있었어. 남들 놀 때 열심히 일해서 요정계를 이 정도로 꾸렸으니까. 그런데 어떤 애들이 그러더라. 만년 묵은 노처녀가 그런 재주도 없으면 뭐에 쓰냐고.” 아직 나이가 어려서 잘 알 수는 없었지만, 헤네스는 여왕의 말을 듣자 어쩐지 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만 년이나 되는 시간을 요정계에 바쳤는데, 돌아온 말이 그런 식이라면 솔직히 여왕이 아닌 다른 누구라 해도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 나 만년 묵은 노처녀야. 누군 노처녀가 되고 싶어서 된 건 줄 알아? 처음엔 노처녀가 뭔지도 몰랐어. 일 때문에 다른 건 신경 쓸 겨를도 없었거든. 오죽하면 지금 이 상황에도 요정계를 버려두고 갈 수가 없어서 이렇게 동결시켜둔 상태로 지키고 있겠어.” “...” “근데... 뭐? 책임감이 없어? 그거 지금 나보고 한 소리니? 응? 일만 년 동안 뼈 빠지게 일하다가 겨우 천년 동안 잠 좀 잔 거 가지고, 뭐? 책임감?” “겨우 천년이라니...” 준상은 자신도 모르게 혀를 차며 그렇게 대답했다. 만년이란 시간은 무척이나 긴 것처럼 말하다가 천년은 겨우라고 말하는 여왕의 말에 모순을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중얼거림이 여왕의 화를 돋우었다. “겨우지 그럼! 만년 동안 휴일 한 번 없이 일만 했어! 열흘에 한 번 휴일을 쉬었어도 합치면 천년은 됐을 거야. 그런데 그게 뭐가 문제야? 응? 말해봐! 내가 잘못 한 거니?” “...” 뭔가 역린을 건드렸다 싶은 생각에 준상은 입을 다물었지만, 여왕은 이미 분노로 반쯤 눈이 뒤집혀 버린 상태였다. “그래. 거기 너 계집애. 그렇게 남자 품에 안겨 있으니 좋아? 연애 하니까 세상이 다 장밋빛으로 보이니? 그렇게 재미있으면 나도 좀 해보자. 이젠 다 싫어, 여왕이고 뭐고 다 싫다고! 그러니까 네가 여왕 해. 난 이제 못하겠어! 아아아악!” 준상은 아무래도 여왕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을 느끼고는 얼른 헤네스를 역소환했다. 여왕은 머리에 쓰고 있던 작은 서클릿을 홱 하고 벗어들고는 그것을 분노 섞인 감정으로 지켜보다가 이내 헤네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준상이 헤네스를 역소환시킨 뒤였다. “어디 갔어?” “...” “그 계집애 어디 갔냐고? 행복에 겨워서 만년 묵은 노처녀를 불쌍하다는 식으로 바라보던 그 망할 계집애 어디 갔어!” 물론 준상은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여왕은 준상 옆에서 분위기 파악을 못 한 채 손가락을 입에 물고 있는 아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하, 너도 여자 애구나. 잘 됐네. 하긴 누구든 상관없지. 나만 아니면 되는 것 아니겠어?” 준상은 아차 싶은 마음에 아이에게로 손을 뻗었지만, 여왕이 가볍게 손짓하자 아이는 순식간에 준상 앞에서 모습을 감추었고, 다음 순간에는 이미 여왕의 품 안에 안겨 있었다. “이건...” 준상은 깜짝 놀랐다. 염동력이나 순간 이동 능력과는 전혀 달랐다. 아이는 옮겨지거나 이동한 것이 아니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아이가 존재하던 공간 좌표 자체가 순식간에 고쳐 써진 듯 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준상은 그제서야 깨달았다. 요정계에서 여왕의 존재는 단순히 군림하는 군주 정도의 위치가 아니라는 사실을. 적어도 동결된 이 회색빛 공간 안에서, 여왕은 신에 버금가는 존재였던 것이다. 하지만 준상이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동안, 여왕은 눈물이 범벅된 얼굴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아이에게 자신이 쓰고 있던 작고 아름다운 서클릿을 보여주며 마치 어르는 듯한 모습으로 말을 걸고 있었다. “이거 예쁘지?” “...” 물론 아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여왕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여왕 역시 준상이나 헤네스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의사를 전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의사 소통의 방법이 아닌, 그 말이 지닌 의미였다. 문명 세계에서 동떨어진 생활을 너무나 오래 해왔던 아이에게 예쁘다는 형용사는 생각처럼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의미였던 것이다. 하지만 여왕은 그런 소소한 문제 따위는 상관없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이걸 머리에 쓰면 넌 이 세상 누구보다도 존귀한 존재가 될 수 있단다. 어때, 한 번 써보고 싶지 않니?” 그것은 단순한 서클릿이 아니었다. 요정계의 여왕을 뜻하는 증표이며, 또한 그 권능을 집약시킨 성물이기도 했다. 그런 물건이기에, 이것은 상호 동의 없이는 절대로 양도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이는 영롱한 빛을 뿜어내고 있는 서클릿에 마음을 빼앗겼다. “자아... 만져 보렴. 그것만으로도 이 아름다운 장난감은 영원히 너의 것이 될테니까.” “...” 유혹하는 듯한 여왕의 목소리에 이끌려 아이는 서클릿을 향해 손을 뻗었다. 어느 틈엔가 방 한 구석으로 밀려난 준상이 뭔가 소리를 지르고 있었지만, 그 말은 이미 여왕의 권능에 의해 차단되어 아이에게 전해지지 못하고 있었다. “자아... 어서.” 다시 한 번 여왕의 재촉이 이어지자, 아이는 마침내 서클릿에 손을 대었다. 바로 그 순간 서클릿으로부터 휘황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여왕은 서클릿이 아이에게 반응하는 모습을 보자 더욱더 기꺼워 했다. “너... 요정의 피를 이었구나! 아하하하! 과연! 이거야 말로 운명이 아니고 뭐겠어! 아하하하하하!” 여왕은 웃음을 터뜨리며 아이의 이마에 서클릿을 씌워 주었다. 이마에 서클릿이 씌워지자, 그 순간 아이로부터 회색으로 물들어 있던 요정계를 향해 하나의 파문이 퍼져 나갔다. 파문은 퍼져 나가며 음울한 모노톤의 요정계에 그들이 본래 지니고 있어야 할 색깔을 돌려 주었으며, 그와 함께 지금껏 잠들어 있던 이 세계의 주민들이 하나 둘씩 기지개를 펴며 깨어나기 시작했다. “좋아! 아주 훌륭해! 왜 진작 이런 생각을 못했을까! 아하하하!” 여왕, 아니 이제 전 여왕이 된 여인은 기뻐하며 크게 웃었다. “...” 준상은 이제 입을 다물었다. 모든 상황을 이해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미 그가 손을 쓰기엔 늦었다는 것 만큼은 확실히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 시간이 지나자 통로로부터 다른 요정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여왕님, 드디어 깨어 나셨... 어라?” “아... 이제야 드디어 깨어 나셨... 엥?” “뭐야? 다들 왜... 으잉?” 요정들은 호들갑을 떨며 여왕에게 인사를 하다가 그녀의 머리에 씌워져 있던 서클릿이 처음 보는 아이의 머리 위에 자리한 것을 보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마치 석화의 저주에라도 걸린 것처럼 굳어 있던 요정들은 한참이나 지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서, 설마... 이것은...” “노, 농담이시죠? 여왕님?” 하지만 이전에 그들의 여왕이었던 요정은 웃으며 대답했다. “농담이긴? 이것은 현실이다! 난 이미 여왕이 아니라고! 아하하하!” 아아... 정말로 넘겨 버린 것인가. 요정들은 이 황당한 사태를 어떻게 이해해야 좋을지 몰라 혼란에 빠져 버렸다. 하지만 여왕은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손으로 쓰윽 쓰윽 닦아내더니 준상에게 하느작거리며 다가와 그의 팔에 팔짱을 끼며 다시 선언했다. “난 이제 이 남자와 결혼할거야! 그러니 이 빌어먹을 요정계는 너희들이 말아 먹든 말든 마음대로 해!” 요정들은 그 말에 다시 기겁하고 말았다. “그런!” “자, 잘못했습니다. 여왕님, 저희가 다 잘못했으니 제발 그런 악질적인 농담만은...” 하지만 여왕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듯이 그들의 애원을 뿌리쳤다. “농담은 무슨! 게다가 다시 말하지만 난 더 이상 여왕이 아니야! 지금의 여왕은 저기 저 애라고!” 요정들은 침대 위에 오도카니 앉아서 손가락을 빨고 있는 아이를 보고는 모두들 연습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이마를 감싸 쥐며 신음을 흘렸다. “이, 이럴수가...” “어찌 이런 일이...” 하지만 여왕은 다른 요정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준상의 팔에 보기 좋게 부푼 가슴을 밀어붙이며 말했다. “전 이제 모든 걸 버렸어요. 부디 절 받아주세요!” “...” 준상은 말없이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정말 모든 걸 버렸나?” 여왕은 바로 대답했다. “물론이죠! 전 이제 평범한 한 명의 요정일 뿐이에요!” “정말로?” “정말로!” 준상은 다시 물었다. “정말 날 따라올 생각인가?” 여왕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듯이 선언했다. “물론이죠!” 확고한 여왕의 말에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의 눈앞에 가죽 목걸이 하나를 꺼내 보였다. “정말로 날 따를 생각이라면, 받아들여라.” “이건... 뭐죠?” “내 것이 되겠다는 증표.” “...” 여왕은 그 말을 듣고는 해맑은 미소를 짓더니 바로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의 동의가 이루어지자 가죽 목걸이는 곧바로 여왕의 목에 채워졌다. 성공적으로 절차가 마무리 되자, 준상은 곧바로 여왕을 향해 명령했다. “들어가 있어라.” “에?” 여왕은 갑자기 어딜 들어가 있으라는 건가 싶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 의문을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하기도 전에 순식간에 준상의 시야에서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후...” 여왕이 모습을 감추고 나자 준상은 그제서야 깊은 한숨을 몰아쉬었다. 결과적으로 여왕을 속인 꼴이 되기는 했지만, 방금 전에 아이에게 서클릿을 씌워줄 때 요정계의 여왕이 어떤 힘을 지녔는지 절실하게 깨달았던 준상으로서는 이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나마 결혼이라는 단어에 눈이 뒤집혀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고 여왕이 정말로 분노해서 그들을 공격했다면, 제 아무리 준상이라 해도 살아남기 힘들었을 것이다. 요정들은 자신들의 눈앞에서 여왕이 갑자기 모습을 감추자 다시 당황하며 준상에게 물었다. “여, 여왕님은 어디에?” 준상은 당황한 요정들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저기 있잖은가.” “네?” 준상이 가리킨 곳에는 여전히 상황 파악이 안 되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손가락만 쪽쪽 빨고 있는 아이가 있을 뿐이었다. “노, 농담하지 마십시오.” 하지만 준상은 다시 말했다. “차라리 잘된 것 아닌가? 그런 살짝 정신 나간 여왕보다야... 철 모르는 아이쪽이 훨씬 다루기 쉬울 텐데.” “그건...” 준상의 말은 무척이나 달콤했지만, 요정들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동안 그 분이 얼마나 고생을 하셨는데... 저희는 아직 제대로 보답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흠...” 정신이 나가버린 것 치고는 그럭저럭 제법 인망이 있었던 모양이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일은 확실히 했던 것이 아닐까. 준상은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다시 요정들에게 말했다. “그럼 이러면 어떨까.” “말씀하십시오.” “당분간은 저 아이를 데리고 너희들이 요정계의 일을 처리하도록 해라. 뭐... 처음에야 좀 힘들겠지만, 어쨌든 새로운 체제를 만들고자 한다면 이건 좋은 기회가 되지 않을까 싶은데.” “그럼... 여왕님은?” “내가 잠시 데리고 다니면서 바깥 구경이라도 시켜 주는 걸로 하지. 휴가 겸 해서 정신 교육도 좀 시키고.” “흠...” 제법 솔깃한 제안이 아닐 수 없다. 다른 보통의 인간이 이런 제안을 했다면 일단 의심부터 하고 봤겠지만, 속내야 어쨌든 간에 준상은 얼굴에 백여 명의 요정들에게 받은 키스 자국이 도배되어 있는 인간이었다. 요정들은 잠시 자기들끼리 숙덕거리며 의논을 하는가 싶더니, 이내 준상의 제안에 동의했다. “그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잘 생각했다.” 준상은 요정들과의 대화를 끝낸 후, 새로 탄생한 요정계의 여왕을 바라보았다. 퀘스트의 완료 조건은 여왕의 소원을 들어주는 것. 하지만 그 조건에는 그 여왕이 어떤 여왕인지 명시되어 있지 않았다. “이제... 그만 이 퀘스트를 끝낼 때가 온 것 같군.” 준상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새로운 요정 여왕을 향해 다가섰다. 00138 트롤러 ========================================================================= 엉겁결에, 스스로의 의지와는 전혀 무관하게 비록 작기는 해도 하나의 세계를 책임지는 위치에 올라선 아이. 준상은 구름을 닮은 침대 위에 멀뚱히 앉아 있는 새로운 요정 여왕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그제서야 새삼스럽게 이 아이에게 아직 이름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이 아이는 준상의 말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는 있어도 아직 언어라는 것 또한 배우지 못한 상태였다. 할 수 있는 것은 고작해야 몸동작이나 표정으로 자신의 의사를 알리는 정도. 사실 여왕의 소원이라는 것은 이 요정계를 원래의 상태로 되돌리고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제시된 것이지만, 전대 여왕이 그 직위를 때려치우고 다시 준상의 펫이 되면서 퀘스트는 물론이고 소원이 지닌 목적 또한 완전히 뒤엉켜 버렸다. 물론 그렇다고 다시 전대 여왕을 불러내기에는 너무 먼 길을 와버린 상태. 준상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아이를 향해 쪼그려 앉으며 조용히 물었다. “소원이 뭐냐.” “...” 가타부타 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화법은 준상을 아는 자라면 별로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었지만, 언어 능력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아이가 쉽게 이해하기에는 여러모로 어려운 점이 많았다. 이 아이의 의사소통 능력은, 우선 소원이라는 단어를 이해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 “...” 물론 그렇다고 준상이 그런 귀찮은 일까지 전부 자상하게 챙겨줄 만한 사람인 것도 아니다. 헤네스라면 몰라도, 이 아이는 아직 준상의 울타리 안에 들어와 있지 않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결국 준상은 차선책으로 이런 일에 대한 전문가인 헤네스를 다시 불러들일 수밖에 없었다. 헤네스는 준상이 말도 없이 갑자기 역소환을 실행했었던 탓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은 채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준상이 무사하다는 사실에 일단 안도하고, 또한 회색빛에 물들어 있던 요정계가 이전과는 달리 아름다운 본연의 색을 발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으며, 다시 여왕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의문을 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헤네스의 물음에 준상은 방금 전에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런...”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으면 폭주한 여왕이 무슨 짓을 저질렀을지 감도 잡히지 않으니.” “...” 서클릿을 아이에게 넘겼다고는 하지만 그녀가 보여주었던 능력이 서클릿에서 나오는 것인지, 아니면 그녀가 본래 지니고 있는 능력인지는 알 수 없는 일. 그것에 대한 것은 이제부터 차차 알아봐야겠지만, 어쨌든 여왕의 신병을 구속하는 일이 전제되지 않고는 달리 그 상황을 정리할 방법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여왕님이... 너무 불쌍하네요.” “...” 헤네스의 말에 준상은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이 좀 심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준상은 지금의 결과에 대해 후회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자칫하면 저기 앉아서 멀뚱거리고 있는 아이 대신 헤네스가 저 서클릿을 썼을지도 모르는 일. 정신이 약간 이상해진 생면부지의 여왕과 헤네스, 이렇게 두 사람 가운데 하나를 고르라면 준상은 일고의 여지도 없이 헤네스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어쨌거나. 준상은 헤네스에게 이번 퀘스트에 관한 일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음... 소원이 뭔지 물어보면 되는 건가요?” 헤네스의 말에 준상은 바로 긍정의 뜻을 보인 후 다시 조건 하나를 추가했다. “가급적 너무 난해하지 않은 소원이면 더 좋겠지.” “그렇군요.” 헤네스는 잠시 생각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았어요. 맡겨주세요.” 준상은 헤네스의 볼을 가만히 쓰다듬으며 감사의 뜻을 표했다. “고맙다.” 헤네스는 요정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런 식의 스킨십을 스스럼없이 행하는 준상의 행동이 조금은 부끄러웠지만, 마음 한 편으로 행복한 기분이 스며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당연한 일인걸요.” 준상은 헤네스에게 아이와의 대화를 맡기고 한 걸음 물러나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러자 자기들끼리 뭔가 대화를 나누던 요정들이 준상에게 다가와 말했다. “저... 잠시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뭐지?” 척 보기에도 비서라는 느낌이 전해지는 조금 날카로운 눈매의 요정은 우선 자신의 이름부터 밝혔다. “우선 제 소개를 하겠습니다. 리체스 여왕님의 수석 보좌관이었던 셀라라고 합니다.” 수석 보좌관이라. 하긴 만년동안 요정계를 다스렸다는데 그 정도의 직함이나 체계가 없으면 그것도 이상한 일이다. 준상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준상이다.” 셀라는 준상을 향해 깊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말을 이었다. “준상님, 제가 여쭙고 싶은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뭐지?” 셀라는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여왕님께서는 안전하십니까?” “...” 아마도 이 요정들은 자신이 여왕을 어디론가 이동시켰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하긴 이상한 일은 아니다. 자신들이 보는 앞에서 갑자기 모습을 감추었으니 이들로서는 그것이 가장 합리적인 생각이 아닐까. 사실 그리 틀린 말도 아니다. 정확히는 준상도 알지 못하지만, 어쨌든 펫이 대기하는 공간으로 날려버린 건 맞기 때문이다. “물론. 적어도 내 신상에 문제가 생기지 않는 이상은.” “...” 셀라는 담담하게 대답하는 준상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하긴 여왕이 사라졌는데 구출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면 그것도 이상한 일이다. 그래서인지 셀라는 곧바로 이런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여왕님을 인질로 삼으실 생각이십니까?” 준상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글쎄.” “...” “인질이 될지, 노예가 될지, 아니면 동료가 될지... 그건 너나 그녀의 행동에 달려있는 일 아닐까?” 그것은 듣기에 따라서는 협박이기도 했으며, 또한 권고이기도 했다. 셀라는 대번에 입술을 깨물며 노려보았지만, 준상은 그 정도 시선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말했을텐데. 그녀에 대한 처우가 어찌될지는 너나 그녀의 행동에 달려 있다고.” 준상이 다시 한 번 그렇게 말하자, 셀라는 눈을 감고 몸을 부르르 떨며 마음을 가라앉힌 뒤에야 다시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제 태도가 무례하게 느껴지셨다면 사과의 말씀 올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알면 됐다.” 사실 준상으로서도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다. 하지만 은연중에 셀라가 위협하려는 기색을 보였기에 그에 맞게 대응했을 뿐. 여왕에 대한 충성심은 이해하지만, 그것을 이해하는 것과 받아들이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준상은 셀라가 정중하게 사과하자 다시 입을 열었다. “어쨌건 이곳과의 연락 방법이나 이동 수단은 미리 마련해 두는 편이 좋겠지. 나로서도 그 골치 아픈 짐덩이를 언제까지고 데리고 다닐 생각은 없으니까.” “...” 셀라는 자신이 모시던 여왕에 대해 준상이 골치 아픈 짐덩이라는 표현을 쓰자 다시 한번 눈썹을 움찔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준상은 그녀의 그런 모습을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 “왜? 내 말이 틀리나?” “아닙... 니다. 말씀대로입니다.” “아무튼, 간단한 연락 방법이나 이동 수단이 있다면 말해 보도록.” 셀라는 바로 대답했다. “가장 간단한 방법이 있기는 합니다.” “그게 뭐지?” “정령의 문을 만드는 것입니다.” 준상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거... 만들려면 여러 가지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고 아는데.” “물론입니다. 하지만 물질의 전송이 아닌 간단한 음성의 전송이라면 그렇게 거창하게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흠...” “원리는 간단합니다. 강력한 생명력을 지닌 나무나 동물 대신, 요정이 스스로 자신의 몸을 매개체로 삼아 정령의 문을 여는 방법입니다. 준상님이 이곳에 오실 때 사용하셨으리라 생각되는 정령의 문처럼 클 필요도 없고, 영속적으로 유지할 필요도 없습니다.” “아하.” 셀라의 설명에 준상은 이전부터 의아하게 여겼던 의문 하나를 해결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처음에 그가 만났던 이니아나 일마렌과의 일을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요정들이 어떻게 죄다 알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음성을 전달할 수 있는 수준의 작은 문을 자신의 몸에 열 수 있다면, 요정계를 중계기지로 삼아 얼마든지 의사소통을 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여기까지 생각을 떠올린 준상은 문득 한 가지 발상을 떠올렸다. 사실 이 퀘스트에는 한 가지 커다란 맹점이 있었다. 요정계가 정상으로 돌아오고 아겔라한의 숲에 정령의 문이 만들어지더라도 그 효과는 어디까지나 아겔라한이 위치한 이 행성에만 국한되는 일이다. 즉, 퀘스트가 아니라면 지구에 있어야만 하는 준상이나 다른 귀환자들에게는 사실상 그 효과가 반감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아니... 지구가 아닌 이 행성의 경우만 하더라도, 물리적으로 정령의 문과 멀리 떨어질수록 그 효과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만약 준상이 스스로의 몸에 그가 이곳으로 들어오는데 사용했던 규모의 문을 열 수 있다면 어떨까. 그야말로 지구건 어디건 상관없이 정령의 온전한 힘을 어디서든 뽑아낼 수 있게 된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요정의 돌을 몸에 이식하는 꺼림직한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 문제이긴 하지만, 필요하다면 스스로의 몸을 통해 요정들의 인력을 끌어다 쓰는 것조차 가능해진다. “그거... 안전한가?” 그러자 셀라가 얼른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필요하다면 지금 당장 시연을 보여드릴 수도 있습니다.” 그녀는 준상이 이것을 일종의 함정이 아닐까 의심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물론 어느 쪽이 되었든, 준상으로서는 한번쯤 저들의 시연을 봐둘 필요가 있었다. “시연이라고? 그거 나쁘지 않군. 한 번 해봐.” “알겠습니다.” 셀라는 곧바로 아직 어린 요정 하나를 불러 자신의 몸에 정령의 문을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고 실제로 의사소통을 나누는 과정 또한 보여주었다. 단순히 연락을 취하는 수단 정도라면 따로 요정의 돌을 이식할 필요는 없는 모양이다. 하기야... 요정의 돌 자체가 본래 요정의 몸으로부터 나온 것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간단하군.” “그렇습니다. 이것은 아주 간단하고 안전한 방법입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군.” “네? 무슨...” “난 요정이 아니야. 때문에 요정의 생명력을 기반으로 한 수단은 바로 사용하기가 어렵지.” 셀라가 얼른 대답했다. “그거라면... 요정의 가루나 요정의 돌 같은 것을 사용하시면 됩니다.” “둘 다 가능한가?” “그렇습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요정의 가루는 일회용에 가깝고 요정의 돌은 한번 이식하면 계속해서 사용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렇군.” 준상은 고개를 끄덕인 다음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기왕 만드는 김에 제대로 된 정령의 문을 만드는 것은 어떨까?” 셀라는 준상의 말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네? 그, 그건...” “충분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으면 되는 일 아닌가?” “그렇긴 합니다만... 그런 식으로 물질 전송을 할 수 있는 규모의 생명력은 평범한 인간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준상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오면서 벽이 부서진 자국을 보지 못했나?” 셀라는 왜 여기서 그런 말을 꺼내나 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흠칫 놀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서, 설마...” 준상은 바로 대답했다. “그 설마가 맞아. 바로 내가 한 짓이지.” “그럴수가...” 준상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셀라를 향해 광견의 위엄을 발산했다. 갑자기 폭풍처럼 뿜어져 나오는 꺼림직하고 강렬한 파동에 손 쓸 틈조차 없이 휩쓸려 버린 셀라는 그대로 말문을 잃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준상은 그런 셀라를 말없이 바라보다가 광견의 위엄을 해제한 뒤 조용히 물었다. “어때, 이래도 아직 내가 평범한 인간으로 보이나?” “죄, 죄송합니다.” 그때, 아이와의 대화를 어렵사리 마친 헤네스가 준상과 셀라를 향해 다가왔다. “준상씨. 대충 얘기 끝났어요.” 준상은 바로 헤네스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래? 소원이 뭐라던가.” “자기를 길러줬던 어미 늑대가 보고 싶대요.” “아...” 준상이 소환한 크림슨 울프가 있기는 했지만, 실제로 자신을 길러준 어미 늑대보다 나을 수는 없는 일이니 이것 역시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사실 이곳이 인간의 사회였다면 이것은 아이나 늑대 모두에게 그다지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겠지만, 이곳은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요정들의 세상이니 늑대 몇 마리 정도 불러와서 같이 사는 것 정도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 문제는 아이를 길러주었던 어미 늑대를 어떻게 찾느냐인데... 사실 이건 준상이 직접 나설 필요도 없는 문제였다. “셀라.” “네.” “너희들의 새로운 여왕이 자신을 길러주었던 어미 늑대를 보고 싶어 한다. 찾을 수 있겠나?” 셀라는 바로 대답했다. “시간은 조금 걸리겠지만, 정령의 문이 열린 지금이라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잘됐군. 바로 시행하도록.” “네.” 셀라는 대답하고 나서야 자신이 예전에 여왕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준상의 명령에 대답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그렇다고 다시 거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뭐라 해도 준상은 전대 여왕의 신병을 구속하고 있는 상태이며, 또한 새로운 여왕의 후견인이나 다름없는 몸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말이 신병의 구속이지 그 과정을 지켜봤던 셀라로서는 준상이 여왕의 반려로 선택되었다는 점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사항이었다. “아... 그리고.” 셀라가 다른 요정들에게 지시를 하다가 준상이 부르는 소리를 듣고는 얼른 반응했다. “말씀하십시오.” “정령의 문, 지금 당장 개통했으면 하는데. 그리고, 내가 원할 때 열고 닫을 수 있는 기능도 추가하면 좋겠군.” 물론 이것 역시 거부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대로 연락과 소통이 끊기면 난감해지는 것은 준상이 아니라 요정들 쪽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00139 트롤러 ========================================================================= 어미 늑대를 찾는 일도, 준상의 몸에 정령의 문을 개통하는 일도... 어느 쪽이 되었든 요정들로서는 상당한 수의 인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고, 여왕의 땡깡 때문에 천년 가량 잠들어 있었던 요정들은 깨어나자 마자 정신없이 노동에 시달려야만 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요정계 안에서 잠들어 있던 자라고 해서 요정이 지닌 근본적인 성격이나 행동방식에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우... 힘 들어.” “어떻게 된 거지? 여왕님 이제 깨어나신 것 아닌가?” “몰라.” “나도 몰라.” “졸려. 더 자고 싶어.” 요정들은 쉴 새 없이 투덜거렸지만, 그래도 셀라를 필두로 한 보좌관들이 성심껏 움직인 덕분에 어떻게든 일은 차근 차근 진행되었다. “의식을 시작하겠습니다. 밖으로 나와 주십시오.” “그러지.” 감히 무엄하게도 여왕님의 침실에서, 그것도 여왕님이 아닌 다른 여자와 벌러덩 누워서 휴식을 취하던 이 남자는, 셀라가 속으로 분노를 삼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연한 모습으로 기지개를 켜며 몸을 일으켰다. “그거... 꼭 하셔야 하나요?” 헤네스는 준상이 몸에 대고 뭔가를 하는 것 자체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지 그렇게 물었다. “필요한 일이니까.” “그렇군요.” 준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결정했다면, 헤네스로서는 그것을 말릴 명분이 없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다른 사람이 침범하는 것을 달가와 하지 않는 영역이 금기처럼 존재하는데, 준상은 그런 울타리가 좀 더 넓고 견고한 편이다. 비록 그 안에 들어오는 것을 어느 정도 인정 받았다고는 해도, 그 울타리 자체를 간섭하는 것까지 허락받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헤네스는 아주 잘 이해하고 있었다. 역으로 생각해보면 그런 헤네스였기 때문에 준상의 마음이 열린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준상은 밖으로 나가 웃옷을 벗은 채 요정들이 만든 원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요정의 돌은 가지고 계십니까?” 셀라가 조용히 다가서며 묻자, 준상은 지니고 있던 요정의 돌을 보여주었다. 주머니 가득 들어있는 요정의 돌을 보고 셀라는 잠시 놀란 기색을 보였지만, 이내 표정을 지우고 주머니 안에서 세 개의 돌을 꺼내 들었다. “이미 아시겠지만, 정령의 문을 개통하기 위해서는 요정의 돌을 몸에 이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혹시나 싶어 다시 한 번 언급하는 셀라의 말에 준상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알고 있다.” 솔직히 말해서 요정의 돌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너무나도 생생하게 이해하고 있는 상황이라 그것을 이식하는 일 자체는 그리 탐탁지 않았지만, 그런 꺼림직함보다는 정령의 문을 개통함으로서 얻어지는 이득이 훨씬 크니 그냥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일이다. 준상의 대답이 나오자 셀라는 가만히 그의 배꼽 주위에 삼각형을 그리듯 요정의 돌을 이식했다. 셀라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요정의 돌을 배 위에 대자 이전에 나무에 이식할 때처럼 물속으로 가라앉듯이 모습을 감추었다. “흠...” 준상은 손을 들어 요정의 돌이 이식된 배 위를 쓰다듬었지만 무언가가 들어간 듯한 이물감 같은 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고 다시 셀라가 부연설명을 했다. “본래 요정의 본질 중 하나가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요정의 돌은 그런 요정의 생명력이 응축된 것이니 그 속성 또한 당연히 가지고 있는 것이죠.”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다라...” 사실 이것이야 말로 연약한 요정이 바깥세상에서 그다지 위험이란 걸 모르고 살아갈 수 있는 이유 중 하나였지만, 준상은 미처 그것까지는 알지 못했다. 요정의 돌이 이식이 끝나자 셀라는 준상에게 다시 말했다. “이제 의식을 시작하겠습니다.” “알았다.” 셀라가 천천히 준상에게서 물러나자 대기하고 있던 다른 보좌관들이 요정들을 지휘해 의식을 시작했다. 준상과 헤네스는 이미 바깥 세상에서 유니아란이 요정들을 지휘해 정령의 문을 여는 모습을 지켜본 바가 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요정들의 사이즈 자체가 차이가 나다보니 고작해야 반딧불이 모여 춤추는 것과 같았던 이전의 의식과는 뭔가 느낌 자체가 달랐다. “XXXxxxX XXxXxXxxXXxxxxX...” 손을 맞잡은 채 천천히 준상의 주위를 돌며 요정들은 여전히 이해가 불가능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준상은 가만히 선 채로 담담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지만, 어느 시점에 이르자 배꼽 주위에 이식되어 있던 요정의 돌들이 부르르 떨며 공명하는 것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요정들의 춤과 노래가 점차 빠르고 격렬해짐에 맞추어 요정의 돌이 조금씩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아니, 그렇게 느껴지는 순간에는 이미 배꼽을 주위로 녹색 빛이 피어올라 준상의 몸을 천천히 에워싸고 있었다. “...” 준상은 말없이 손을 들어 자신의 몸 주위에 은은하게 피어난 초록빛 영기를 바라보았다. 신기한 것은 둘째 치고 뭔가 편안한 느낌을 주는 기운이었다. 요정들의 춤과 노래는 격하게 끓어오르며 초록빛 영기를 끌어내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전원이 끊긴 것처럼 딱 멈추어 버렸다. 춤과 노래가 끝나자 준상의 몸에서 피어나던 녹색 빛은 천천히 사그라 들면서 이내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끝난 건가?” 준상의 말에 셀라는 조금 피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몸에 부담이 오거나 하지는 않으십니까?” 준상은 고개를 저었다. “별로.” 셀라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대단하군요. 전혀 부담을 느끼지 않으실 정도라니...” 하지만 준상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다시 웃옷을 걸쳐 입은 뒤 말했다. “정령의 문을 열고 닫는 건 어떻게 하면 되지?” 셀라는 놀라워 하던 표정을 수습한 뒤 바로 대답했다. “배 위에 손을 얹고 의념을 집중하시면 됩니다. 문을 열고 닫는 것은 기본적으로 저희들이 소통하는 법과 거의 다르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좀 어렵게 느껴지실 수도 있지만, 익숙해지시면 손을 얹지 않은 상태에서 의념 만으로도 가능해지실 겁니다.” “그렇군.” 정령의 문을 개통한 기념으로 뭔가 칭호 같은 것이 나오지는 않을까 싶었지만, 인터페이스는 그저 잠잠하기만 했다. 아마도 정령의 문을 몸에 직접 만드는 행위는 이 퀘스트를 기획한 자로서도 미처 염두에 두지 않았던 일인 모양이다. 준상은 다시 말했다. “수고했다. 잠시 공간을 좀 비워줄 수 있겠나?” “공간이라면...” “좀 꺼낼 것이 있어서.” “알겠습니다.” 셀라는 조금 미심쩍어 하는 표정이었지만, 곧바로 요정들을 물려 의식이 치루어진 공간을 비워주었다. 충분한 공간이 마련되자 준상은 바로 컨테이너 하우스를 그곳에 꺼내 놓았다. “헛!” “이, 이건?” “뭐지? 방금 뭐였지?” “몰라!” “나도 몰라!” 그리고 요정들이 호들갑을 떠는 것을 무시한 채 안으로 들어가 찬장에 보관되어 있던 초코바 박스를 하나 가지고 나왔다. 의식을 위해 모여든 요정의 수에 비하면 누구 코에 붙일까 싶을 정도로 적은 양이긴 했지만, 남은 것은 어미 늑대를 찾는 일에 동원된 요정들에게 나누어줄 생각이었다. “이건...” “수고한 답례다.” 미심쩍어 하는 셀라의 모습에 준상은 박스에서 초코바 하나를 꺼낸 뒤 봉지를 까서 그녀에게 내밀었다. 셀라는 시커멓고 윤기가 나는 굵은 막대 모양의 우둘투둘한 무언가가 얼굴을 향해 내밀어지자 자신도 모르게 얼른 한 발자국 물러나며 말했다. “무, 무슨 짓을...” “잔말 말고 먹어.” 준상은 염동력을 발휘해 그녀를 그대로 옭아맨 다음 입 안에 초코바를 강제로 밀어넣었다. “으읍!” 셀라는 당황해서 비명을 지르려 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혀끝으로 느껴지는 감미로운 달콤함에 눈을 부릅뜨고 말았다. “...” 준상은 그제서야 염동력을 해제한 다음 말했다. “혼자 먹지 말고 의식에 참여한 애들끼리 나눠 먹어라.” 그리고는 곧바로 컨테이너 하우스를 도로 인벤토리에 집어 넣은 다음 헤네스와 함께 여왕의 침실로 들어가 버렸다. “...” 셀라는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입에 물려진 검고 시커먼 막대기를 잡았다. “이, 이건... 도대체...” 그러자 지켜보고 있던 보좌관들이 얼른 그녀에게 달려왔다. “괜찮으세요? 셀라님.” 셀라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검은 막대기를 입에 물고는 혀로 그 맛을 음미했다. “아...” 셀라의 모습을 본 보좌관들은 그녀가 뭔가 아주 나쁜 마법에 걸린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언제나 냉철한 모습을 보여주던 그녀가 볼을 살짝 붉힌 채 가늘게 몸을 떠는 모습 자체가 그녀들로서는 너무나도 생경했던 탓이다. 셀라는 가볍게 몸을 떨며 초코바의 달콤함을 음미하다가 한참 뒤에야 입에서 초코바를 빼내고는 상기된 얼굴로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많은 종류의 꿀을 먹어본 바가 있지만, 이런 식으로 의식이 가물거릴 정도의 감미로운 맛은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일까. 문득 저 상자 안에 든 것을 혼자 독점하고 싶다는 욕심이 그녀의 머리 속에 생겨났다. 하지만 셀라는 이내 고개를 저어 그런 욕심을 떨쳐 버렸다. 준상이 다시 안으로 들어가며 했던 말을 떠올린 탓이다. “후...” 셀라는 아쉬운 마음에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고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다른 요정들에게 말했다. “이것은... 그분께서 내리신 선물이다.” “선물이라구요?” “그래. 상자 안에 몇 개가 들어있는지 확인한 다음, 여기 모인 모든 요정들에게 공평하게 나누어 주도록.” “아, 알겠습니다.” 요정들은 의구심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여왕의 오른팔이라 불리던 수석보좌관 셀라의 지시를 무시하지 못했다. 그렇게 초코바가 나누어지자 요정들은 셀라가 그랬던 것처럼 의구심 어린 표정으로 그것을 입에 가져갔다. 그리고, 너나 할 것 없이 그 감미로운 달콤함에 몸을 떨었다. “아아...” “이, 이건... 도대체...” 요정들의 수가 많았던 탓에 그들 몫으로 돌아간 초코바는 얼마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요정들은 더욱더 그 맛을 갈구하게 되었다. “더 먹고 싶어!” “왜 이렇게 조금 밖에 안주는 거야?” “이거 어디 가야 구할 수 있는거지?” 물론 이런 요정들의 물음에 셀라가 해줄 수 있는 대답은 하나 뿐이었다. “이것은 그분이 내리신 보상이다. 그러니 그분의 부탁을 해결하면 이것을 얻으리라.” 준상이 초코바라는 이름을 알려주지 않은 탓에 그냥 이것이라 칭할 수밖에 없었지만, 요정들은 모두 그 의미를 똑똑히 알아들었다. “어미 늑대를 찾는다고 하셨지?” “찾아! 빨리 찾아!” 원래대로라면 시큰둥해 하며 귀찮아했을 일이었지만, 식탐에 눈이 먼 요정들은 지금까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보인 적이 없던 열의를 불사르며 어미 늑대를 찾는 일에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 결과, 그 날이 채 지나가기도 전에 요정들은 어미 늑대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것은 지금까지 방만하게 유지되어 왔던 요정들의 사회를 일신하는 하나의 혁명이었지만, 아직 요정들은 그 의미를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드디어 내일,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00140 트롤러 ========================================================================= 요정들이 초코바에 대한 열정을 불태운 덕분에 아이는 생각보다 훨씬 빨리 소원을 이룰 수 있었다. 요정들이 마법으로 어르고 달래서 데리고 온, 늑대로서는 이제 고령의 나이에 접어든 붉은 털의 어미 늑대는 잃어버렸던 아이를 되찾자 온 몸으로 기쁨을 표현하며 아이의 얼굴을 핥았다. 아이 역시 어미 늑대의 모습을 보자 영문 모를 장소에 와있다는 불안함이 사라진 덕분인지 해맑게 웃으며 어미 늑대의 품에 안겼다. 헤네스는 지금까지 아이의 웃는 모습을 바라보며, 한동안 보지 못했던 이벨류아의 부모님 생각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준상의 손을 꼭 잡으며 그의 팔에 살짝 몸을 기대는 것으로 마음 속에 떠오른 작은 아쉬움을 달랬다. 에픽 퀘스트 – 망각 7. 여왕의 소원. -여왕은 한 가지 소망을 이루기 위해 오늘을 기다려 왔습니다. 그녀와 대화를 나누어 보십시오 (달성) ->완료! - 당신이 이번 퀘스트에서 보여준 행동과 성과를 정산합니다. 이 과정은 약간의 시간이 소요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정산 메시지를 보자 준상은 이번에야 말로 진짜 퀘스트 달성임을 알 수 있었다. 전투다운 전투는 없었지만 지금까지와는 달리 단순히 때려 부수는 것에서 벗어난 내용과 진행 방식 때문에 다소 느긋하게 진행이 되기는 했으나, 그렇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더 난해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퀘스트였다. 잠시 기다리자 얼마 안 있어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했다. 축하합니다! : 당신의 랭크는 Ex:Hero입니다. 당신은 영웅적인 행동으로 세계의 변혁을 이루어냈습니다. -요정계가 정상화됨에 따라 정령의 문이 각지에 열립니다. -정령이 지닌 본래의 힘이 복원됩니다. -원소마법의 공격력이 10퍼센트 강화됩니다. -요정의 전투력이 일부 상향됩니다. 기본 보상 외에 추가 보상이 지급됩니다. 정령이 지닌 본래의 힘이 복원되는 것은 예상했던 결과지만, 원소마법의 공격력 강화나 요정의 전투력 상향을 조금 의외의 내용이었다. 요정들이야 지금 상황에서 더 강해진다고 해봐야 도토리 키재기가 아닐까 싶긴 하지만, 원소 마법의 공격력 강화는 가볍게 생각하고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정산 결과가 나오자 바로 보상 내용이 시야에 나타났다. 보상: 경험치 많이, 추가 보상 상자(정령)x3, 추가 보상 상자(Ex:Hero), 칭호[요정의 반려] -> 보상을 지금 수령하시겠습니까? (Y/n) _ (주의) 수령하지 않은 보상은 7일후 자동 소거됩니다. “응?” 히든 퀘스트가 따로 없었기 때문에 영웅급 보상 상자 하나 나오고 말겠거니 했는데, 의외로 추가 보상 상자가 세 개나 더 포함이 되어 있었다. 이번에도 아껴 뒀다가 나중에 받을까 하는 생각이 잠시 떠올랐지만, 준상은 이내 고개를 저으며 곧바로 보상을 수령했다. 그러자, 역시나 기다렸다는 듯이 레벨 업 효과가 준상에게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전투가 없었던 탓인지 단 한 번 밖에는 레벨 업이 되지 않았으나, 이로써 준상은 28레벨에 도달하게 된 셈이다. 준상의 몸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자, 헤네스는 이제 아이와 작별할 시간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우린 이제 그만 가볼게. 잘 지내렴.” “...” 아이는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얼마 안 되는 짧은 시간이긴 했지만 이들이 자신을 붙잡아 끌고 다니던 용병들에게서 구해주었으며, 다시 먹고 입는 것부터 시작해서 정성을 다해 자신을 보살펴 주었다는 사실까지 모를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던 탓이다. 헤네스는 아이를 살짝 안아주는 것으로 아쉬움을 표현했다. 정령의 문이 있으니 언제든 연락이 가능하고, 필요하면 문의 주체가 되는 준상은 몰라도 헤네스 정도는 언제든 왕래가 가능하겠지만, 그래도 아쉬운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언제든 필요한 것이 있으면 연락해. 알았지?” 아이는 먼저 그녀처럼 말하는 방법부터 배워야겠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고, 헤네스는 준상이 자신에게 해주었던 것처럼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춰주다가 문득 이 아이에게 아직 이름이 없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준상씨.” “응?” “저... 이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 주어도 괜찮을까요?” 준상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원한다면.” 헤네스는 준상의 허락을 받자 잠시 고민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리시스. 늑대의 딸이라는 뜻이야. 네 이름으로 삼아줄래?” 아이는 무엇보다도 뜻이 마음에 들었다. 자신이 다른 늑대들과 다르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아이는 이 리시스라는 이름이 더 마음에 들었다. “리시스라...” 준상이 가만히 그 이름을 되뇌이자, 옆에서 말없이 지켜보고 있던 셀라가 입을 열었다. “전대 여왕님의 성함이신 리체스 또한 고대어로 자연의 딸이라는 의미였습니다.” “그랬군.” 준상은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지만, 셀라는 새로운 여왕이 전대 여왕과 비슷한 이름을 받은 것이 우연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뭔가... 그들로서는 알 수 없는 필연이 작용한 것은 아니었을까. 물론 근거 따위는 없는 막연한 추측에 불과했지만, 셀라의 머리 속에서는 자꾸만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준상은 미리 준비해 두었던 나머지 초코바 상자를 꺼내 셀라에게 건네주었다. “어미 늑대를 찾느라 수고 많았다.” “가, 감사합니다.” 셀라는 혹시라도 준상의 마음이 바뀔까 두려웠는지 얼른 그의 손에서 상자를 받아들었다. 준상은 아이와 다시 한 번 포옹을 나누고 몸을 일으키는 헤네스에게 다가가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셀라를 향해 한 마디를 툭 던졌다. “여기서 먹지 말고 밖에 나가서 먹어라.” 셀라는 무슨 소린가 싶다가, 이내 밖으로 나갔을 때 자신들의 몸이 작아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인데, 너무 오랫동안 밖에 나가지 않은 탓에 잊고 있었던 것이다. 하긴 천년이라는 시간동안 강제로 여왕과 함께 잠들어 있었으니, 아무런 후유증이 없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리라. 준상과 헤네스는 아이와의 작별이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몸에서 빛을 뿜어내며 요정계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한 줄기 빛과 함께 준상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 곳은 호텔의 비상 계단이었다. 준상은 우선 착용하고 있던 망토나 부츠 같은 장비들을 벗어 캐비닛에 보관한 다음 보통의 신발을 챙겨 신고 계단을 빠져 나오며 임서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돌아왔다. 로비로 내려가 있겠다.’ 이곳이 자신의 집이라면 다른 것을 생각할 필요도 없이 바로 방으로 들어가면 그만이겠지만, 호텔인 이상 그들이 자리를 비운 동안 객실에 변동이 생겼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만 했다. 계단을 내려가 로비로 나오자, 입구 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직원 하나가 그를 알아보고는 얼른 달려와 말했다. “박준상님, 어서 오십시오.” 준상은 직원의 인사에 답례한 다음 조용히 물었다. “서윤은?” “5층에서 훈련 중이십니다. 옷을 갈아입어야 하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전언을 보내셨습니다.” “수영장인가?” “네.” “그럼 굳이 내려올 것 없다고 전하도록. 내가 올라갈테니.” “알겠습니다.” 준상은 열어보지 않고 놔둔 보상들을 확인하면서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 가장 먼저 열어본 것인 정령이라는 딱지가 붙은 추가 보상 상자들이었다. 카드정보 명칭 : 날벼락 레벨 : 1Lv 경험치 : 0 등급 : Uncommon 분류 : 소환 성장 : 조숙(중) 속성 : 번개 효과 : 번개의 정령 1개체를 소환합니다. Cost : 15 Seed : 3슬롯 가장 처음에 나온 것은 번개의 정령이었다. 등급은 언커먼에 불과했지만, 번개 자체의 위력도 만만치 않은데다 정령이 지닌 본래의 힘이 되살아나고 여기에 엘리멘탈 드래곤의 정령 증폭 능력까지 감안하면 상당한 수준의 공격력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카드정보 명칭 : 어둑발이 레벨 : 1Lv 경험치 : 0 등급 : Uncommon 분류 : 소환 성장 : 대기만성(중) 속성 : 어둠 효과 : 어둠의 정령 1개체를 소환합니다. Cost : 10 Seed : 2슬롯 두 번째 나온 것은 어둠의 정령이었다. 빛의 정령이 나왔으니 당연히 이런 것도 있겠거니 하고 다음 상자를 열려던 준상은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깨달았다. “이거... 혹시?” 애쉬달의 부츠가 가진 위상전이 효과의 가장 큰 약점 가운데 하나는 이동할 수 있는 위치가 10미터 이내의 그림자로 제한된다는 점이다. 때문에 한 낮에 햇볕이 가득 내려쬐는 사막 같은 장소에서는 어쩔 수 없이 용도가 제한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라도 이 어둠의 정령이 있다면 어떨까. 물론 정령의 위치로 인해 다음 이동 장소가 사전에 드러날 수도 있으니 마구 남발하기도 어렵고 완전한 대비라고 할 수도 없겠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급히 몸을 피하는 용도라면 매우 훌륭한 수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준상은 일단 시험 삼아 어둑발이를 소환해 보았다. “음?” 처음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준상은 이내 조명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그림자 위치가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런 거였군.” 준상이 인터페이스를 통해 지시를 내리자, 준상의 그림자는 마치 별개의 생명체처럼 준상에게서 떨어져 나와 준상 앞에 자리를 잡았다. 이 정도면 제법, 아니 상당히 쓸만하다는 생각에 준상은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상자를 열었다. 카드정보 명칭 : 모래무지 레벨 : 1Lv 경험치 : 0 등급 : Uncommon 분류 : 소환 성장 : 대기만성(중) 속성 : 땅 효과 : 땅의 정령 1개체를 소환합니다. Cost : 15 Seed : 3슬롯 마지막 정령 상자에서 나온 것은 땅의 정령이었다. 모조리 언커먼 등급인 것이 조금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번에 새로운 정령들이 추가되면서 흔히 사대속성이라고 일컫는 불, 바람, 물, 땅의 정령이 모두 모였을 뿐만 아니라 빛과 어둠, 번개의 정령까지 갖추게 되었다. 물론 이 일곱 가지 이외에 얼마나 더 많은 속성이 존재하는지는 아직 미지수였지만, 다양한 속성을 갖추면 그만큼 대응할 수 있는 수단이 많아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특히나 준상의 경우에는 콤보와 칭호 효과 덕분에 정령을 코스트나 카드 슬롯의 제한 없이 소환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고, 동시에 많은 양의 정령을 소환할수록 저항력에 가산점이 부여되는 보너스 역시 갖추고 있었다. 그뿐인가. 아직 몇 번 사용해 보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공격에 정령의 속성을 부여하는 것도 가능하고 정령 증폭이 가능한 엘리멘탈 드래곤 역시 펫으로 부리고 있으니 사실상 그 어떤 귀환자보다도 정령을 다양하게 활용하는 것이 가능하다. 준상은 영웅급 보상 상자를 확인하려다가 어느새 실내 수영장이 위치한 5층에 도달했음을 깨닫고 일단 확인을 멈추었다. 문을 열고 계단에서 빠져 나오자 엘리베이터 앞에서 대기중이던 직원이 그 소리를 듣고는 얼른 달려온다. “어서 오십시오. 임서윤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준상은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직원을 따라 수영장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기다리고 있던 임서윤이 얼른 다가와 인사했다. “수고하셨습니다. 별 일 없으셨습니까?”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냥 의례적으로 하는 인사겠지만, 퀘스트를 마치고 온 귀환자들에게는 그렇지가 못하다. “덕분에. 이쪽도 별 일 없었지?” “네. 일단 앉으시죠.” “그러지.” 안내를 맡은 직원이 밖으로 나가자, 한쪽 구석에서 슬며시 눈치를 보고 있던 사람 두 명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한 명은 조금 앳되어 보이는 인상의 남성이었고, 또 한 명은 상당히 발달된 근육을 가진 조금 괄괄해 보이는 인상의 여성이었다. 임서윤이 손짓하자 그들은 준상을 향해 얼른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그리고는 먼저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앳된 인상의 남성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 안녕하세요. 저는 이번에 새로 가입한 이한서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전 손가은이에요.” 두 사람이 자신의 소개를 하자 임서윤은 바로 추가 설명을 했다. “아시겠지만, 파티 정원이 네 명으로 한정되어 있는지라 성렬씨 혼자 다녀야만 하는 문제가 있어서 이번에 새로 인원을 뽑았습니다. 이한서군은 검도 유단자이고, 손가은 양은 무에타이를 기반으로 한 이종 격투기를 익히고 있습니다.”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을 향해 말했다. “난 박준상이라고 한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이한서가 눈을 빛내며 대답했다. “바, 반갑습니다. 기억 못하시겠지만, 사실은 그날 저도 연합에 있었습니다. 이렇게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그러자 옆에 서있던 손가은 역시 말했다. “실은 저도 거기 있었어요. 잘 부탁드려요.” 준상은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다시 임서윤에게 말했다. “오늘은 피곤하니 나중에 계속 하도록 하지.” 그러자 임서윤이 얼른 일어나며 대답했다. “아, 제가 미처 생각 못했군요. 방은 예전에 쓰시던 그곳을 그대로 쓰시면 됩니다.” “고맙다.” 준상은 세 사람을 향해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이고는 수영장을 빠져 나갔다. 이한서는 준상이 밖으로 나가자 그제서야 숨을 크게 몰아쉬며 말했다. “후아... 긴장 되서 죽는 줄 알았네.” “호들갑은.” 옆에 서있던 손가은은 동생뻘 되는 이한서의 말에 피식 웃었지만, 사실 그녀 역시 긴장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그날 연합의 건물을 혼자 힘으로 부수어 버렸던 준상의 모습은 지금 다시 떠올려도 어쩐지 가슴이 두근거리도록 만드는 마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준상은 수영장을 나와 자신이 머물던 스위트룸으로 돌아온 다음 곧바로 헤네스부터 다시 소환했다. “먼저 씻어라. 나는 아직 할 일이 조금 남았으니.” “네.” 헤네스가 욕실로 향하자, 준상은 나머지 보상을 마저 확인했다. [요정의 반려] :정령의 문 복원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자에게 부여되는 칭호. -효과: 1. 요정과 관련된 아이템, 칭호 등의 효과 증폭. 2. 요정과의 호감도 상승폭 증가. -칭호는 획득시 자동으로 효과가 적용됩니다. “...” 아이템이나 칭호 등의 효과 증폭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요정과의 호감도 상승폭 증가라니... 다분히 요정 여왕과의 관계를 염두에 둔 보상이란 생각이 들어 준상은 자신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 작품 후기 ============================ 다음 편은 드디어 대망의 첫날밤입니다. 이런 걸 싫어하실 분도 계시겠지만 모쪼록 양해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00141 트롤러 ========================================================================= 준상은 마지막 남은 영웅급 보상 상자를 열었다. 카드정보 명칭 : 철면피 레벨 : 1Lv 경험치 : 0 등급 : Hero 분류 : 스킬 성장 : 일반(극대) 속성 : 어둠 효과 : 1. 정신 공격에 대한 내성 60% 증가 2. 도발, 매도 등의 행위에 대해 완전 면역. 3. 정신 공격를 가한 적에 대해 30% 확률로 효과 되돌리기. 4. 정신 공격를 가한 적에 대해 10% 확률로 혼란 유발. Cost : 20 Seed : 5슬롯 “...” 준상은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새로 나온 카드를 멀거니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하필 하고 많은 카드들 가운데 철면피라니. 물론 이번 퀘스트에서 요정들을 대상으로 다소 안면 몰수의 경향을 보이기는 했지만 설마 이런 식으로 보상이 나올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더 난감한 것은 이 카드가 나오는 순간 다시 메시지가 후두둑 쏟아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축하합니다! :콤보카드를 조합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현재 조합 가능한 콤보 카드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원조 욕쟁이 할매 [상세 확인] -콤보 카드 조합을 원하시면 해당 번호를 누르시고, 만약 조합을 원치 않으신다면 n을 누르세요(1/n) _ “...”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더욱 큰 문제는 이 콤보 카드를 사용하는 대상이 바로 헤네스라는 점이다. 욕쟁이 할매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난감해 하는 상황이건만 그것이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 되었음을 알리면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지. 준상은 일단 상세 정보부터 확인해 보았다. 원조 욕쟁이 할매 -짝퉁은 가라! 욕이라고 다 같은 욕이 아니다! XX년 전통의 원조 욕쟁이 할매를 모르고 어찌 욕을 논한단 말인가! [조합상세] 도발, 매도, 2연격, 철면피 (레어 등급 이상인 카드가 세 가지 이상) -효과: 1. 정신 공격시 목소리가 닿는 범위 안의 모든 대상에게 각각 20퍼센트 확률로 혼란 발생. 2. 정신 공격 효과 60퍼센트 증가. 3. 정신 공격시 목소리가 닿는 범위 안의 적의 공격력과 방어력 30퍼센트 감소. 4. 정신 공격시 목소리가 닿는 범위 안의 모든 대상에게 각각 10퍼센트 확률로 매혹 발생. “허...” 기존의 다른 효과들이 업그레이드된 것은 일단 제쳐 두고, 새로 추가된 매혹 효과를 보는 순간 준상은 자신도 모르게 이마를 감싸 쥐었다. 바보거리며 채찍을 휘두르는 헤네스를 보고 침을 줄줄 흘리는 괴물들의 모습이 연상되었기 때문이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난감한 일이지만, 아직 메시지는 끝난 것이 아니었다. 축하합니다! :당신은 처음으로 ‘원조 욕쟁이 할매’ 조합에 성공했습니다! -당신의 위업을 찬양하며 ‘짝퉁은 가라!’ 칭호를 부여합니다. [칭호 상세 정보 확인은 이곳을 누르십시오.] “미치겠군.” 준상은 한숨을 푸욱 내쉬며 상세 정보를 확인했다. [짝퉁은 가라!] :‘원조 욕쟁이 할매’ 조합을 최초로 성공한 자에게 부여되는 칭호. -효과: 다른 자가 발동한 ‘도깨비시장의 욕쟁이 할매’ 콤보 효과를 무효화합니다. -칭호는 획득시 자동으로 효과가 적용됩니다. “이런 것도 가능한 건가.” 칭호 효과로 하위 콤보의 효과를 무효화하는 것이 가능하다니. 게다가 이런 효과는 자칫하면 아군의 전력을 깎아 먹을 수도 있다는 문제가 있었다. “그러고 보니...” 처음에 욕쟁이 할매 콤보를 얻었을 때 최초 조합에 대한 칭호가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준상은 문득 깨달았다. 연합 사건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같은 귀환자라고 해서 무조건 아군일 수는 없는 일. 만약 준상보다 먼저 욕쟁이 할매의 조합에 성공한 자가 적대적 입장이라면 이 칭호는 매우 큰 무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칭호의 확인을 마치자 영웅급 보상 상자에서 나온 두 번째 보상이 준상의 시야에 나타났다. 카드정보 명칭 : 철벽 레벨 : 1Lv 경험치 : 0 등급 : Rare 분류 : 스킬 성장 : 일반(대) 속성 : 땅 효과 : 1. 장착시 방어력 50퍼센트 증가. 2. 방어시에도 걷기가 가능해집니다. 3. 모든 저항 10퍼센트 증가. Cost : 20 Seed : 3슬롯 “철벽이라...” 준상은 스킬의 이름을 확인한 순간 여왕의 거처를 보호하고 있던 흰색 벽을 떠올렸다. 무기 방어 외에 별다른 방어 기술이 없던 준상으로서는 제법 나쁘지 않은 수확이었다. 특히나 모든 저항 10퍼센트 효과까지 감안하면, 철벽을 발동했을 경우 준상의 물리 저항 능력은 무려 89퍼센트에 이르게 된다. “이제 하나 남았군.” 퀘스트의 보상을 모두 확인한 준상은 마지막으로 레벨 업 보상인 랜덤 카드를 뽑았다. 카드정보 명칭 : 크림슨 울프 리더 레벨 : 1Lv 경험치 : 0 등급 : Rare 분류 : 소환 성장 : 조숙(대) 속성 : 불 효과 : 붉은 늑대 우두머리 1개체를 소환합니다. Cost : 30 Seed : 3슬롯 “이건...” 오랜만에 새로운 늑대 카드가 보상으로 나왔다. 그것도 레어 등급으로! 이렇게 되면 준상은 총 네 마리의 늑대 카드를 보유하게 되지만, 실제로는 곰과 멧돼지의 영혼을 장착하고 있는 탓에 세 마리까지만 소환하는 것이 가능했다. 군랑맹진 콤보에 부여된 늑대의 영혼 효과는 늑대류 소환물을 1개체 소환할 때마다 추가 보너스로 공격력과 이동속도가 업그레이드 되는 효과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늑대 한 마리를 포기하면 공격력 3퍼센트와 이동력 2퍼센트 증가를 표기하는 셈이나 마찬가지다. 물론 곰과 멧돼지의 영혼에 비하면 별 거 아닌 수준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아까운 건 아까운 것이다. 뭔가 해결책이 없을까 고민하던 준상은 문득, 엘리멘탈 드래곤에게 아직 카드를 장착해 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소환물이지만 카드인 건 분명한 일이니 장착이 가능할 것이고 장착이 된다면 소환도 가능할 것이다. 문제는 펫이 장착한 소환물 카드의 보너스 역시 적용이 가능한 것인가 하는 점인데... 솔직히 이것은 스테이터스 변화를 측정할 수 없기 때문에 바로 확인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래도... 역시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 준상은 가장 레벨이 낮고 공격력도 낮은 팀버 울프를 빼고 그 자리에 크림슨 울프 리더를 장착한 다음, 팀버 울프는 엘리멘탈 드래곤의 슬롯에 장착함으로써 카드 정리를 마무리 지었다. 보상의 확인을 모두 끝내자 헤네스가 목욕을 마치고 가운을 입은 채 욕실에서 나왔다. “벌써 다 했어?” 준상이 묻자 헤네스는 부끄러운지 얼굴을 살짝 붉히며 대답했다. “네. 준상씨도 어서 씻으세요.” “그래.” 준상은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헤네스는 준상이 욕실로 들어가자 소파에 가만히 앉아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아...” 그리고 마침내 준상의 모습이 완전히 욕실 안으로 사라지자 헤네스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을 누르며 심호흡을 했다. 자신도 모르게 긴장한 탓이다. 이전에도 준상과 한 방을 쓰고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잤지만... 오늘은 아무래도 마음의 준비를 할 필요가 있었다. 숲에서는 리시스와 요정들 때문에 모처럼의 기회가 불발로 끝났지만, 이곳에는 그런 식으로 두 사람을 방해할 만한 장애물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리라. “후우...” 헤네스는 다시 한 번 크게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하지만 두근거리는 가슴은 좀처럼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은 마음에 헤네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진세아에게 배웠던 준비 운동을 시작했다. 그렇게 조금 몸을 움직이자 긴장되었던 몸과 마음이 조금은 풀어지는 느낌이다. 하지만 헤네스는 이내 아차 싶은 생각이 들었다. 모처럼 깨끗하게 씻고 나왔는데 땀냄새라도 배면 큰일 아니겠는가. 뭐라해도 오늘은 준상과 자신의 첫날밤. 그런 날 준상의 기억 속에 남은 자신의 체취가 땀냄새여서는 정말 곤란한 일이다. “...” 하지만 다음 순간 헤네스는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의 기억 속에 남은 자신의 체취라니!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너무 야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견디다 못한 헤네스는 옆에 놓여져 있던 쿠션에 얼굴을 묻었다. 그대로 얼굴을 드러내고 있기가 너무 부끄러웠던 탓이다. 도저히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던 헤네스는 생각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티비를 켰다. 그러자... 때마침 티비 화면 한 가운데에서 두 사람의 연인이 어두운 방안에서 서로를 감싸 안은 채 눈빛을 교환하는 장면이 툭 튀어 나왔다. “...” 하필 왜 나와도 저런 장면이 나오는 건지. 헤네스는 그런 생각을 떠올리면서도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티비에서 흘러나오는 영화의 한 장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두 연인은 가만히 이마를 맞대고 몇 마디 대화를 나누는가 싶더니, 이내 열렬하게 키스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헤네스는 자신도 모르게 컨테이너 하우스에서 준상과 나누었던 격렬한 키스의 감촉을 되새기고 말았다. “아...” 나도 그때 저런 모습이었던 걸까. 헤네스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손가락을 들어 자신의 입술을 어루만졌다. 하지만 뭔가 느낌이 달랐다. 그때, 준상의 입술이 맞닿았던 그 느낌이 아니었다. 그때는 좀더... 그러니까 머리 속의 생각이 확 하고 날아가 버릴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그저 입술에 무언가가 닿았다 싶은 감촉 밖에는 전해지지 않았다. 헤네스가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자신의 입술을 만지는 동안, 화면에서는 두 연인이 마침내 본격적인 베드신으로 돌입하고 있었다. “세, 세상에...” 헤네스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들어 두 눈을 가렸다. 하지만 티비에서는 두 남녀가 내뱉는 가쁜 호흡 소리가 음악과 뒤섞여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당황한 헤네스는 얼른 리모컨을 들어 채널을 바꾸었다. “...” 하지만 한 번 귓속으로 파고든 두 남녀의 신음 소리는 마치 각인처럼 헤네스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말았다. 헤네스는 다시 한 번 미지에 대한 두려움을 느꼈다. 준상이라면... 그녀가 이런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순간 자신의 욕망을 억누를 것이다. 그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그것은 지금까지 그의 행동만 보더라도 알 수 있는 일. 하지만 그것은 헤네스가 바라는 결과가 아니었다. “하아... 후우...” 헤네스는 다시 한번 가슴을 손으로 누르며 깊게 숨을 들이쉬고 다시 내쉬었다. 그녀는 천천히 일어나 우선 티비를 끈 다음, 침실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입고 있던 가운을 벗어 가지런히 개어 놓은 다음, 침대 안으로 들어가서 준상이 목욕을 마치고 나올 때까지 가만히 숨을 죽인 채 눈을 감고 기다렸다. 두근. 두근. 그렇게 가슴 속에서 시계 초침처럼 울리는 심장의 고동을 느끼며 기다리기를 얼마나 했을까. 마침내 욕실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헤네스의 귓가에 천둥처럼 울려 퍼졌다. 헤네스는 다시 한 번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하지만 심장은 더욱 세차게 울리며 마치 머리 속에서 누군가 북을 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크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헤네스는 자신의 고동 소리를 이런 식으로 들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오늘에서야 처음 알게 되었다. 혹시나 이 소리를 준상도 듣는 건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마저 떠올라 마음을 다잡으려 했지만 역시나 허사였다. 저벅. 그런 헤네스의 귓가에 준상의 발걸음 소리가 다시 한 번 전해져 왔다. 헤네스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에 두 손을 모은 채 눈을 꼭 감았다. 이것을 설레임이라 해야할지, 아니면 두려움이라 해야할지... 아직 어린 그녀로서는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구분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지만, 그러고 있는 동안에도 준상의 발걸음 소리는 어김없이 침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저 이 심장의 고동소리가 준상에게 들리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라는 것이 지금 이순간 그녀가 할 수 있는 행동의 전부였다. 마침내... 시트가 젖혀지며 준상이 침대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헤네스는 어쩐지 급하게 요의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너무 긴장한 탓일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당혹스러웠지만, 그녀는 지금 자신이 가운마저 모두 벗어버린 상태임을 깨닫자 이제는 이마에서 식은땀마저 흐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무심한 준상은 헤네스가 어떤 상태인지 짐작조차 하지 못한 채 시트 위로 드러난 헤네스의 머리카락을 살짝 쓰다듬는가 싶더니 그대로 자세를 바로 하며 잠을 청하기 시작했다. 헤네스는 정신이 없는 경황중에도 준상이 그대로 잠들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세상에. 자신이 지금까지 어떤 심정으로 이 순간만을 기다려 왔는데! 그런 생각이 떠오르자 그녀는 방금 전까지 자신을 괴롭히고 있던 요의마저 잊은 채 얼른 몸을 돌려 그의 팔을 무턱대고 끌어안았다. 준상은 몸을 돌린 채 머리카락만 내놓고 누워있는 헤네스의 모습을 보고 피곤해서 먼저 잠들었나 싶었다가 갑자기 팔에 부드럽고 촉촉한 감촉이 와락 덮쳐오자 크게 놀랐다. “헤네스?” 얼른 고개를 돌려 바라보던 준상의 시야에 자신을 올려다보는 헤네스의 흔들리는 눈망울이 비친다. 시트 아래로 드러난 그녀의 부드러운 신체의 곡선과, 팔을 통해 전해지는 감미로운 촉감. 준상이 상황을 파악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사실 다른 건 다 필요없었다. 그저 헤네스의 필사적인 시선을 보는 순간, 준상은 그녀가 자신을 얼마나 원하고 있는지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 준상은 헤네스에게 잡힌 왼손 대신, 오른손을 들어 천천히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별 것 아닌 아주 간단한 스킨십. 그 손길이 자신의 얼굴을 스치자 헤네스는 자신도 모르게 움찔하고 말았다. 하지만 다음 순간 헤네스는 눈을 감은 채 한 손을 들어 그 손을 감싸며 그로부터 전해져 오는 감촉을 천천히 음미했다. 그것은 오히려 몇 마디 말보다 더 강력한 신뢰의 표현이었고,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준상은 가슴 속에서 뭔가 덜컥 내려앉는 듯한 작은 충격을 받았다. 준상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헤네스의 작은 몸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자세가 되었다. 헤네스는 준상이 자신의 몸 위에서 내려다 보는 모습이 너무나도 낯설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의 얼굴이 천천히 다가오자 자신도 모르게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눈을 질끈 감은 채 그의 입술을 맞이하고 말았다. 준상의 입술은 천천히 헤네스의 작고 부드러운 입술 위로 겹쳐졌다. 처음에는 천천히 음미하듯 마주하는가 싶더니, 이내 헤네스의 작은 입술 속을 비집고 준상의 혀가 밀려들어왔다. 준상의 혀가 입 안으로 거침없이 침범해 들어오자 그 움직임에 동조하는 것만으로도 헤네스는 점점 숨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헤네스가 더 이상 거칠어진 숨소리를 참을 수 없게 되었을 때, 문득 준상의 입술이 미끄러지듯 그녀의 입술로부터 턱선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 헤네스는 끝나버린 키스에 대한 아쉬움으로 인해 자신도 모르게 작은 소리를 내고 말았지만, 그의 입술이 턱을 따라 움직이다가 귓불에 이르자 무언가 짜릿한 감각이 전신을 관통하는 느낌에 자신도 모르게 헛숨을 들이키고 말았다. “흣!” 생전 처음 느껴보는 짜릿한 감각도 문제였지만, 헤네스는 순간 자신의 입에서 그렇게 색기어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는 사실에 더 크게 놀랐다. 하지만 준상은 그녀가 당혹함을 추스를 틈조차 주지 않은 채 곧바로 그녀의 귓불을 살짝 깨물었다. “하윽!” 억누를 겨를도 없었다. 다시 한번 그녀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비음이 그녀의 입을 통해 터져 나온 것이다. 헤네스는 마치 자신의 몸이 아닌 것처럼 통제불능이 되어 미쳐 날뛰는 감각에 겁이 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귓불과 목덜미를 통해 전해지는 감각은 그녀의 몸 속 깊은 곳에 숨겨진 감각을 더욱더 강렬하게 일깨우고 있었다. 게다가 이건 고작 시작에 불과했다. 헤네스는 준상의 입술과 혀와 이빨에 농락당하다가 문득 자신의 가슴에 그의 손이 닿았음을 깨달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또 다른 한 손이 그녀의 등 뒤로 숨어 들어와 등골을 천천히 위 아래로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렇게 자신의 몸이 만져지기 시작하자 헤네스는 이제 정말 어디에 반응해야 좋을지 알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준상의 입술은 천천히 움직여 쇄골에 도달했고, 아차 싶은 순간에는 그녀의 앙가슴을 지나고 있었다. 모순되게도 그의 입술이 심장 위를 지나는 감각을 느끼고 나서야 헤네스는 간신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헤네스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살짝 눈을 떴다. 그러자 자신의 가슴에 입을 맞추고 있는 준상의 뒤통수가 살짝 보였다. 어째서일까. 정말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엉뚱하고 영문 모를 생각이었지만, 이 순간 헤네스는 그 뒤통수가 너무나도 귀엽게 느껴졌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준상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하지만 다음 순간, 헤네스는 가슴을 통해 귓불에서 전해졌던 것과 같은 짜릿한 감각이 전해지자 또다시 헛숨을 들이키고 말았다. “흑!” 그리고 준상이 가슴 위에 자리 잡은 작은 돌기를 깨물고 핥기 시작하자 전신을 관통하는 형언할 수 없는 감각의 소용돌이로 인해 이리저리 몸을 뒤틀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 본론은 시작도 하지 않았다. 헤네스는 문득 준상의 손이 자신의 무릎을 가만히 쓰다듬는가 싶더니 그대로 허벅지 안쪽을 타고 서서히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천천히 움직이던 손은 마침내 그녀의 비밀스러운 숲에 도달했다. “자, 잠깐.” 헤네스는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외쳤지만, 준상의 손은 그대로 숲 안쪽에 자리 잡은 샘으로 거침없이 밀려들어왔다. 순식간에 샘 주위에 있던 꽃잎들은 이리저리 이지러지며 유린당했다. 헤네스는 너무나 강렬해서 짜릿하다 못해 아프기까지 한 그 감각을 견디다 못해 이렇게 말했다. “아, 아파요.” 아직 이런 경험이 없는 헤네스로서는 그런 거친 움직임을 감내할 수 없었던 탓이다. 준상은 아차 싶었던지 곧바로 자극의 수위를 낮췄고, 그제서야 헤네스는 어느 정도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결전의 시간이 왔다. 준상은 침대 옆 서랍 속에서 작은 봉지를 꺼내 그 안에 들어있던 내용물을 자신의 몸에 장착했다. 헤네스는 그가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미처 알지 못했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허락을 구하는 듯한 그 시선과 마주한 순간, 헤네스는 입술을 잘근 깨문 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준상은 천천히 그녀의 몸 위에 자신의 몸을 겹쳤고, 헤네스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꼭 감았다. “큭!” 헤네스는 순간 자신의 몸 안으로 밀려들어오는 뜨거운 무언가의 감각에 까무라칠 뻔했다. 아픈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런 식의 감각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놀라웠던 탓이다. 삽입의 순간은 찰나에 불과했지만, 헤네스는 그 감각을 감내하기 위해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했다. 다행히도, 재생 능력이 발휘되자 하복부에서 뜨거운 감각이 전해지며 빠르게 통증이 사라졌다. 헤네스는 통증이 사라지자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야 비로소 이 의식이 끝났구나. 드디어 완전히 이 남자의 여자가 되었구나.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헤네스는 손을 뻗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준상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수줍게 처음으로 그 한 마디를 입에 담았다. “사랑해요.” 이런 상황에서 이런 말을 입에 담았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부끄럽게 느껴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네스는 더 알맞은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준상은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에 닿은 그녀의 손을 감싸며 그 수줍은 고백에 답했다. “나 역시.” 헤네스는 어쩐지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안아 주세요.” 준상은 천천히 몸을 숙여 그녀를 품에 안았다. 헤네스는 그의 등 뒤로 손을 뻗어 손끝에서 전해지는 탄탄한 등근육의 감촉을 즐겼다. 그리고 가슴 속으로 한 마디 단어를 되뇌였다. 이 남자가 바로 내 남자다. 헤네스는 자신이 떠올리고서도 너무나 부끄러운 나머지 어쩔 줄 몰라했다. 하지만 그녀는 한 가지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들의 행위는 이제 막 본론이 시작되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헉!” 헤네스는 갑자기 하복부를 가득 채우고 있던 무언가가 천천히 진퇴를 시작하자 그 터무니 없는 감각에 자신도 모르게 기겁을 하고 말았다. 하지만 준상은 헤네스의 몸을 꽉 끌어안은 채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헤네스는 이것이야 말로 남녀가 치르는 본격적인 사랑의 의식임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건 너무나도 늦은 깨달음이었다. 게다가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준상의 체력이 어디 보통 체력인가. 그 엄청난 체력에 제대로 불이 붙었으니, 그것을 감당하는 일 또한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비록 준상에게 어느 정도 수련을 받기는 했지만, 그래봐야 헤네스의 체력은 준상과 비교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결국 헤네스는 그날 밤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준상의 공격에 시달리다가 몰아치는 감각의 소용돌이를 견디다 못해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다. 00142 트롤러 ========================================================================= 다음날. 헤네스는 제법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겨우 눈을 떴다. “...” 잠이 덜 깨서 잠시 몽롱한 표정으로 준상의 단단한 가슴에 기댄 채 누워 있던 그녀는, 평소와는 얼굴에 와 닿는 감촉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차츰 정신이 돌아오면서 어젯밤에 있었던 일들이 눈앞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지자 그녀는 화들짝 잠에서 깨버리고 말았다. 그녀가 가장 먼저 한 것은 그녀의 몸 주변을 더듬어 살피는 일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침대는 물론이고 시트마저 아주 뽀송뽀송하게 잘 말라 있었다. 보통의 경우 이 정도로 뽀송뽀송한 감촉이 느껴지면 뭔가 이상하다 싶은 생각이 먼저 들었을 것이다. 허나, 지금의 그녀는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휴...”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푸욱 내쉬다가 헤네스는 얼른 입을 닫았다. 혹시라도 준상이 깨어나면 어쩌나 싶었던 까닭이다. 헤네스는 조심스럽게 준상의 품에서 벗어나 침대를 빠져 나왔다. 하지만 침대로부터 발을 내딛는 순간 그녀는 그대로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이런...” 재생력 덕분에 몸이 아프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겉모습일 뿐, 그녀의 다리는 완전히 풀려있는 상태였다. “끙...” 헤네스는 간신히 낑낑거리며 몸을 일으켜 일단 개어 놓았던 가운을 집어 몸에 걸쳤다. 지난 밤에 어찌나 시달렸는지, 정말 몸에 힘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후우...” 간신히 가운을 몸에 걸친 헤네스는 침대 위에 여전히 잠들어 있는 준상을 보자 얄밉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이렇게 힘들어 죽겠는데, 그렇게 만든 당사자는 저렇게 편안하게 누워있으니 심통이 난 것이다. 헤네스는 눈을 흘기며 멀찍이서 준상의 머리를 쥐어박는 시늉을 해보이다가 준상이 슬쩍 몸을 뒤척이자 화들짝 놀라 얼른 욕실로 향했다. 하체에 힘이 없어서 몇 번이나 다리가 꼬일 뻔한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헤네스는 불굴의 의지로 욕실 안에 무사히 들어설 수 있었다. “에고고...” 고작 그거 좀 걸었는데 벌써부터 녹초가 되어 버렸다. 헤네스는 일단 가운을 벗어 벽걸이에 걸어 놓은 후, 욕조에 물을 받으며 샤워를 시작했다. 따뜻한 물이 몸을 적시자 몸 안 구석구석 저며든 피로가 그나마 좀 가시는 기분이다. 헤네스는 머리를 감고 몸을 적당히 씻은 후, 아직 다 채워지지 않은 욕조 안으로 들어섰다. “아... 좋다.” 고작해야 하체 일부분이 잠기는 정도에 불과했지만 그것만으로도 한결 기분이 편안해진다. 잠시 눈을 감고 따뜻한 물이 피부를 간질이며 점차 욕조 안을 채우는 감각을 즐기던 헤네스의 눈앞에 불현듯 어젯밤의 일이 다시금 떠올랐다. 화들짝 놀라 얼른 눈을 뜬 헤네스는 두 손으로 볼을 감싼 채 어쩔줄 몰라 하다가 문득 자신의 벗은 몸을 바라보았다. 재생력 때문에 흔적이 남지는 않았지만 준상의 손과 입술이 닿았던 감각이 낙인처럼 다시 되살아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헤네스. 정신 차려.” 헤네스는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 듯 그렇게 소리내어 말했다. 말해놓고 생각보다 목소리가 커서 살짝 당황하긴 했지만 그래도 덕분에 머리 속에서 샘솟듯이 마구마구 되살아나는 어젯밤의 기억을 억누를 수 있었다. 하지만 헤네스의 생각은 이내 다른 방향으로 뻗어나갔다. 세상의 연인이나 부부들은 모두 그런 밤을 보내는 것일까... 라는 의문이 그녀의 머리 속에 떠오른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어젯밤 같은 나날이 계속 반복된다면 자신이 과연 버텨낼 수 있을까라는 생각 또한 떠올랐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준상이 보통의 인간과는 차원이 다른 체력을 지니고 있는 탓에 벌어진 일이지만 남녀의 성적 결합이 단순히 삽입만으로 끝나는 줄 알고 있던 헤네스로서는 미처 거기까지 생각이 뻗어가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헤네스 자신이 과연 앞으로 펼쳐질 시련의 밤을 무사히 견뎌낼 수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체력이 딸려서 사랑하는 이와 맺어지지 못하다니, 이런 터무니없는 일이 어디 있는가! 사실 결론은 간단했다. 준상의 체력을 견뎌낼 수 있을 정도로 헤네스 역시 체력을 갖추면 되는 일 아니겠는가. “으으음...” 헤네스는 잠시 인상을 쓰고 대책을 골몰했지만 여러모로 경험이 일천한 그녀가 당장 내놓을 수 있는 결론은 그 정도가 고작이었다. “좋아. 해보자!” 헤네스는 주먹을 불끈 쥐고는 갑자기 몸을 일으키더니 욕조 난간을 잡고 팔굽혀 펴기를 하기 시작했다. “헛둘, 헛둘.” 운동이 되는지는 둘째 치고서라도 남들 앞에서는 절대로 보여줄 수 없는 모습이다. 헤네스 역시 그런 점을 잘 알고 있었으나, 문이 잠긴 욕실 안이라는 점이 그녀를 방심케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준상이 지닌 초감각은 이런 얇은 벽 따위는 단숨에 뚫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세세하게 관찰할 수 있는 수준이라는 사실을. “푸훕!” 준상은 헤네스가 휘청거리며 욕실 안에 들어가서 한참 동안 소식이 없는 것을 보고 혹시나 싶어 욕실 안을 살피다가, 갑자기 그녀가 벌떡 일어나 팔굽혀 펴기를 하자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대충 어떻게 된 일인지 짐작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어젯밤의 일은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좀 너무 심했다고 여기던 참이었으니 말이다. 헤네스가 반쯤 정신이 나가서 오줌을 지리며 기절할 때는 한동안 꾹꾹 눌러 참기만 했던 욕구를 해소하는데 몰두하던 준상조차도 기겁을 하며 얼른 행동을 멈추었을 정도다. 얼른 물의 정령과 엘리멘탈 드래곤을 불러 뒤처리를 시키고 채찍을 가져다 마사지까지 하고 나서야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긴 했지만, 정신을 잃고 늘어진 헤네스의 모습을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내가 미쳤지...” 별다른 후유증은 없어 보이니 다행이지만, 한편으로는 너무나 격렬했던 첫날밤 때문에 그녀가 남녀 관계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게 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있었다. 방금 전 그녀가 침대 밖으로 나가다 휘청거리며 넘어질 때는 자신도 모르게 벌떡 몸을 일으킬 뻔 했었다. 하지만 저렇게 욕실 안에서 팔굽혀 펴기를 하는 모습을 보니 한편으로는 역시 그녀 답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은 저 나이 때 어떠했었나. 지금의 헤네스와 과거 자신의 모습을 비교하던 준상은 이내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후...” 준상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일어난 다음 아무렇게나 바닥에 내팽개쳐진 가운을 집어든 다음 몸에 걸쳤다. 시계를 살피니 벌써 정오가 거의 다 되었다. 준상은 룸서비스로 간단한 식사를 주문한 다음, 혹시라도 흔적이 남지 않았는지 꼼꼼하게 살핀 뒤에야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티비를 켜자, 뉴스에서 실종자 가족들에 대한 짧은 뉴스가 흘러나왔다. 어느 성당에서 실종자의 무사 귀환을 기원하는 기도회가 열렸다든가, 또 어느 절에서는 대법회가 열렸다는 식의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채널을 돌리자 이번에는 귀환자 관련 광고가 흘러나왔다. 공익광고를 연상시키는 짤막한 광고에는 귀환자가 어떤 힘을 가지게 되며, 또한 그것을 어떻게 활용해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지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흠...” 일전에 임서윤과 이런 내용에 대해 얘기를 나누기는 했지만, 어쩐지 귀환자가 처한 현실을 대중에게 알린다기 보다는 그 힘을 사익이 아닌 공익에 투자해야 한다는 뉘앙스를 지울 수 없었다. “묘하군.” 나름대로 타협의 결과물이라고 이해하면 그뿐일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준상으로서는 어쩐지 찝찝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자기 나라를 사랑한다는데 그걸 말릴 이유는 없다. 하지만 그것을 핑계로 자신의 잇속을 챙기려드는 것은 문제가 된다. 지금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다. 실상 귀환자들이 능력을 지니게 된 것은 처절한 튜토리얼에서 살아남은 것에 대한 보상이고, 그렇게 살아남은 뒤로도 계속해서 생존을 위해 긴장된 삶을 살아야만 한다. 준상이야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또 그만큼 강해진 덕분에 이렇게 조금이나마 여유를 찾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귀환자들은 아직 밤잠을 설치고 몸도 제대로 씻지 못한 채 긴장된 삶을 이어가고 있다. 막말로 내가 살아야 애국이든 공익이든 실현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쯧...” 언짢은 기분에 혀를 차며 채널을 돌리는데, 문득 욕실의 문이 열리더니 헤네스가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여전히 다리에 힘이 없는지 벽을 짚으며 천천히 걷다가 이내 소파에 앉아 있는 준상의 모습을 보고는 화들짝 놀랐다. “이, 일어나셨어요.” “그래.” 준상은 천천히 일어나더니 부끄러워서 차마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는 헤네스를 번쩍 안아 올렸다. “주, 준상씨?” “괜찮으니까 이대로 있어.” “...” 헤네스는 갑자기 자신을 안아드는 준상의 모습에 당황해 하다가 이내 조용히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준상은 천천히 그녀를 안아서 소파에 데려다 놓았다. “피곤할테니 오늘은 다른 건 생각하지 말고 편히 쉬어.” “네...” “달리 이상한 데는 없고?” “어, 없어요.” “다행이군.” “...” “...”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이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얼굴을 마주하며 입술을 겹쳤다. 너무 진하지 않은, 하지만 감미로운 입맞춤. 헤네스는 입술에 와닿는 감촉을 음미하며 이 순간이 언제까지고 계속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녀의 마음이 그렇게 행복감에 젖어드는 순간, 준상의 시야에 메시지 하나가 나타났다. 축하합니다! 펫 ‘헤네스 브레아’의 호감도가 최대수치인 120에 도달했습니다. :호감도가 높을수록 펫의 성장이 빨라집니다. -호감도는 최대 120까지 상승 가능합니다. -호감도가 100이상일 경우 펫의 속성에 따라 특정 능력이 증폭될 수 있습니다. 준상은 갑자기 시야에 나타난 메시지를 보고 살짝 놀랐으나, 내색하지 않고 바로 눈앞에서 치워버렸다. 하지만 메시지는 그것 하나만이 아니었다. 축하합니다! :당신은 처음으로 펫 호감도 120에 도달했습니다. -당신의 위업을 찬양하며 ‘사랑하는 나의 주인님’ 칭호를 부여합니다. [칭호 상세 정보 확인은 이곳을 누르십시오.] 이것 역시 바로 치워버리려다가 일단 효과는 확인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사랑하는 나의 주인님] :처음으로 펫 호감도 120에 도달한 자에게 부여되는 칭호. -효과: 동시 소환 가능한 펫의 숫자가 1 증가합니다. -칭호는 획득시 자동으로 효과가 적용됩니다. 효과는 이전에 나왔던 칭호와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되면 리체스라는 이름을 가진 요정 여왕까지 전부 한꺼번에 소환하는 것이 가능하게 된 셈이지만, 준상은 역시나 내용을 확인하기가 무섭게 메시지를 눈앞에서 치워버렸다. “헤네스.” “준상씨...” 두 사람은 감미로운 키스를 마치고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순간,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오자 헤네스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준상이 말릴 틈도 없이 후다닥 몸을 일으켜 침실로 모습을 감추어 버리고 말았다. “...” 하체가 풀려서 다리에 힘이 하나도 없었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의 너무나도 민첩한 움직임. 물론 그 짧은 순간 체력이 모조리 회복되었을 리는 없으니, 아마도 위기 상황에 직면했을 때 발휘되는 초인적인 행동 같은 종류의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풉!” 얼른 손으로 입을 막아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견뎌낸 준상은 잠시 자꾸만 미소가 지어지려고 드는 얼굴 근육을 간신히 원상태로 되돌린 다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문을 열었다. 바라보니 문 밖에는 룸서비스 온 직원이 카트를 가지고 서 있었고, 그 옆에 서윤이 조금 초조한 표정을 지은 채 서 있었다. 서윤은 준상을 보자 반색하며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덕분에.” 준상은 짧게 대답한 다음 우선 직원에게서 카트를 건네받았다. 매번 이런 식으로 룸서비스를 시키다 보니 직원도 이젠 그러려니 하며 준상에게 카트를 넘기고는 그대로 물러났다. 준상은 카트를 잡은 채로 서윤에게 물었다. “급한 일인가?” “네? 아니, 뭐... 그리 급한 건 아니지만...” 사실 이건 의례적인 말이다. 중요한 일이 아니면 이런 식으로 일일이 직접 찾아올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준상은 그런 의례적인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럼 나중에 얘기하지. 지금은 피곤해서.” “네? 자, 잠깐...” 서윤은 손을 뻗으며 그렇게 말했지만, 준상은 이미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가 버린 뒤였다. 준상은 카트를 밀고 들어가 식탁에 가져다 놓고 그 안에 든 내용물을 꺼내 놓았다. 방금 구운 스콘에 뻑뻑한 클로티드 크림. 여기에 살짝 데운 우유와 과일 샐러드, 따끈한 단호박 수프를 곁들인 메뉴가 식탁에 차려지자 침실에 숨어 있던 헤네스가 냄새를 맡고는 빠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갔어요?” “응.” 준상이 대답하자 헤네스는 얼른 달려 나와 식탁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와, 맛있겠다.” 빈말이 아니다. 헤네스는 별로 음식을 가리거나 하지는 않지만, 방금 구운 스콘에 뻑뻑한 클로티드 크림을 발라 먹는 그 맛을 특히 더 좋아해서 언제나 브런치 메뉴에 반드시 포함시키곤 했다. 그에 반해 준상은 베이글 샌드위치 같이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종류의 것을 좋아하는 편이다. 준상은 자리에 앉자 몽몽이와 엘리멘탈 드래곤 역시 소환해서 음식을 조금 나누어 준 다음 식사를 시작했다. 몽몽이는 당연하다는 듯이 큼지막한 사과 조각 하나를 앞발로 잡고 갉아먹기 시작했고, 엘리멘탈 드래곤은 베이글 샌드위치 안에 들어있던 스테이크 조각을 한쪽 발로 누른 채 조금씩 뜯어 먹었다. 헤네스는 스콘에 클로티드 크림을 잔뜩 바르며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문득 생각이 났는지 조심스럽게 준상에게 물었다. “저기... 여왕님은 안 부르나요?” “당분간은.” “어째서요?” “불러봐야 성가시기만 하니까.” “...” 준상으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지만 헤네스는 조심스럽게 다시 말했다. “그래도... 일단 불러서 얘기를 나눠 보는 게...” 이번에는 준상이 물었다. “어째서?” 헤네스는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말했다. “천년이나 잠들었다가 깨어났는데... 그런 식으로 다시 처박아 두는 건 너무 불쌍하잖아요.” “흠...” 어쨌든 펫이 된 이상 말을 안 들으면 다시 역소환을 해버리면 그뿐이니 상관은 없었다. 다만 불러서 다시 얘기를 나누는 그 과정이 귀찮을 뿐이다. 그런 준상의 생각을 알아챘는지 얼른 헤네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제가 잘 말해볼게요.” 헤네스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이상 준상으로서도 딱히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알았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준상은 곧바로 전대 요정 여왕 리체스를 소환했다. 그러자 두 사람의 눈앞에서 작은 빛이 뿜어져 나오는가 싶더니 아름다운 무지개빛 머릿결을 늘어뜨린 작은 요정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 어라?” 리체스는 눈앞에 펼쳐진 영문 모를 장소와 작아져 버린 자신의 사이즈에 당황하다가 준상과 함께 있는 헤네스를 발견하고는 대뜸 손가락질을 하며 소리를 질렀다. “너! 이 계집애! 잘 만...” 하지만 그녀는 그말을 채 끝내지 못하고 그대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대뜸 헤네스를 향해 삿대질을 하는 모습을 보고 준상이 곧장 역소환을 했기 때문이다. 헤네스는 리체스의 반응에 잠시 놀랐다가 그녀가 사라졌을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고는 쓴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두 사람에게는 하룻밤이 훨씬 지나고 난 시점이지만, 리체스에게는 자신의 침실에서 히스테리를 부리던 직후라는 사실을 깨달은 탓이다. “준상씨. 다시 불러주세요.” “...” 헤네스의 부름에 준상은 얼굴을 찌푸렸지만 잠자코 그녀의 말대로 리체스를 다시 소환했다. 그러자 리체스는 방금 전 사라졌을 때의 모습 그대로 다시 빛을 뿜어내며 나타났다. “...났다. 어라?” 리체스는 그제서야 뭔가 상황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준상이 조용히 말했다. “리체스.” 여왕은 준상이 대뜸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화들짝 놀랐다. 그리고 자신이 이름을 가르쳐 준 적이 있었는지 곰곰이 생각을 더듬어 봤지만, 아무래도 그런 기억은 떠오르지 않았다. “어, 어떻게 내 이름을?” “그건 중요한 일이 아니다.” “그게 무슨...” “중요한 건, 네가 내 펫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준상의 선언에 여왕은 일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00143 트롤러 ========================================================================= 준상은 여왕이 아무 말도 못하고 굳어버린 채 천천히 식탁 위로 내려 앉아 그대로 풀썩 주저앉는 모습을 준엄하게 바라보았다. 여왕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넋 놓고 앉은 채 중얼거렸다. “내가... 펫... 이라고?” 그리고는 떠들거나 말거나 식탁 위에서 자기 몫의 음식을 맛있게 먹고 있는 몽몽이와 엘리멘탈 드래곤을 보고, 다시 자신을 걱정스런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헤네스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보았다. 여왕은 그녀의 목에 걸린 가죽 목걸이가 준상이 자신에게 채웠던 그것과 같은 것임을 어렵지 않게 알아보았다. “설마... 이게 그런 의미였나?” 그것을 깨닫자 얼른 손을 뻗어 목걸이를 벗기려 했다. 물론 그것은 의미없는 행동이었다. 잠시 낑낑거리며 목걸이를 벗으려 애쓰던 여왕은 그제서야 이것이 단순한 목걸이가 아님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런 일이...” 요정계에서라면, 아직 서클릿을 착용한 상태였더라면 또 혹시 모를 일이지만 지금의 상태에서는 도저히 이 가죽 목걸이를 벗을 방법이 없음을 여왕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준상은 커피를 마시며 그녀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이윽고 모든 시도가 허탕으로 끝나고 체념한 듯 손을 멈추고 나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 “다 끝났나?” “...” 여왕은 입술을 깨물며 준상을 노려 보았다. “날... 어쩔 셈이지?” 물론 준상은 그렇게 노려본다고 눈 하나 깜짝할 사람이 아니다. “그건 너 하기에 달린 일이겠지.” “무슨...” “펫으로서 맘 편하게 지내다가 돌아가게 될지, 아니면 이것으로 바깥 세상 구경 자체가 마지막이 될지... 너에게 달렸다는 얘기다.” “...” 여왕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서... 설마... 날 이대로 봉인이라도 하겠단 말이냐?” 준상은 심각한 그녀의 표정을 보고는 피식 웃었다. “상관없지 않나? 천년 동안의 잠을 고작이라고 표현할 정도니까. 이번엔 좀 길게 자는 거라고 생각하면 그뿐이겠지.” “...” 여왕은 다시 한 번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사실 그녀로서도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일 뿐, 천년이라는 시간 동안 잠이 들었던 건 의도한 바가 아니었다. 다만 스스로도 아차 싶은 생각이 들던 차에 준상이 책임감이 없다고 하니까 울컥해서 그런 말이 나왔던 것일뿐. 하지만 그렇게 잠이 드는 것과 완전히 모든 감각이 지워진 채 봉인 당해 잊혀지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나, 난... 그저...” 여왕은 다시 뭔가 말하려 했지만, 준상은 그녀가 더듬거리며 입을 열자 단호하게 그 말을 잘랐다. “우선 호칭부터 바꿀 필요가 있겠군.” “뭐?” “나는 네 주인이다. 그리고 너는 현재로서는 데리고 있어봐야 귀찮기만 한 애완 동물이지.” “뭐라?” 여왕은 발끈하며 소리치려 했지만, 준상은 손을 들어 보이며 그 말을 다시 막았다. “그것이 싫다면 그냥 들어가 있으면 그 뿐이다. 나로서도 귀찮은 날파리가 앵앵거리며 날아다니는 걸 안 봐서 좋고, 너 역시 굴욕을 안 당해서 좋으니 서로에게 좋은 일 아니겠나?” “...” 감히 자신을 귀찮은 날파리라 부르다니... 여왕은 분노로 몸을 부르르 떨었지만 그렇다고 준상의 말에 반박하지는 못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영락해 버린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눈물을 흘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여왕이 말도 못하고 그대로 주저앉아 엉엉 울기 시작하자,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헤네스가 얼른 준상을 말렸다. “준상씨... 이제 됐으니까 그만 하세요.” “알았다.” 채찍은 이 정도면 충분하니 이제 당근이 나설 차례다. 준상은 헤네스에게 나머지 일을 맡긴 후 천천히 베이글 샌드위치를 한 입 깨물었다. 헤네스는 준상이 쓰고 남은 일회용 크림 용기를 물의 정령에게 부탁해 깨끗하게 씻은 다음, 거기에 따뜻한 우유를 조금 부어 여왕에게 건넸다. 여왕은 자신에게 건네진 우유와 그것을 건넨 헤네스를 흘깃하며 번갈아 바라보았다. 감정이 격렬하게 부딪히는 상황에서 괜히 이런 저런 말을 꺼내는 것은 불붙은 자리에 기름을 끼얹는 일이 될 수도 있는 법. 이럴 때는 오히려 따뜻한 음료 한 잔을 마시며 마음을 진정시킨 다음 이야기를 진행하는 편이 서로에게 도움이 된다. “...” 아니나 다를까. 눈앞에서 따뜻하게 덥혀진 우유가 놓여지자 금새 몸이 먼저 반응을 했다. 자신도 모르게 군침을 꿀꺽 삼킨 여왕은 그제서야 배가 무척 고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 안 그렇겠는가. 근 천 년 동안 음식이라고는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않은 데다, 깨어나자 고함을 바락바락 지르며 있는 힘껏 감정을 배출했으니 여왕이 아니라 다른 누구라도 배가 고플 수밖에 없는 일이다. 꼴딱. 여왕은 자신도 모르게 다시 한 번 군침을 꿀꺽 삼키다가 준상을 힐끗 바라보았다. 무심한 준상은 이미 여왕 따위에게는 관심조차 없다는 듯이 식사와 함께 배달된 신문을 보고 있었다. 영악한 헤네스는 여왕이 우유에 반응을 보이자, 이번에는 막 구운 스콘을 조금 잘라 그 위에 클로티드 크림을 바른 다음 다시 여왕 앞에 내려 놓았다. 꼴딱. 우유 만으로도 군침을 참기가 어려운 판에 막 구워진 따끈한 스콘의 향기까지 어우러지자 여왕으로서는 정말로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여왕은 식욕을 억누르지 못하고 음식에 손을 뻗고야 말았다. “아...” 이 따뜻하고 부드러운 맛이라니. 게다가 이 보들보들한 음식은 또 어떤가. 전대 여왕 리체스는 방금 전까지 자신을 괴롭혔던 모든 어두운 감정을 잊은 채 천년 만의 식사에 몰두했다. 여왕이라 해도 요정은 요정. 그녀 또한 식탐의 약점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헤네스는 여왕이 포식할 때까지 가만히 놔두었다가 그녀가 식사를 마칠 즈음이 되어서야 비워진 우유를 다시 채워주며 입을 열었다. “여왕님.” “...” 배를 두드리며 오랜만의 식사에 대한 만족감을 표하던 여왕은 헤네스가 조용한 목소리로 부르자 화들짝 정신을 차리며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헤네스는 그녀를 향해 살짝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여왕님께서는 왜 반려를 맞이하고 싶으셨나요?” “그건...” 사실 그건 여왕으로서도 몇 마디 말로 간단하게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부러웠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너무 오랜 시간 동안 홀로 지내왔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순간 갑자기 외로움이 사무쳤다고 해야 하나. 쉽게 대답을 하지 못하고 우물거리는 여왕을 보며 헤네스는 다시 말했다. “일단... 지금 요정계가 어떻게 되었는지부터 말씀드릴게요.” 헤네스는 늑대소녀 리시스가 새로운 요정의 여왕이 되었다는 사실과, 그동안 동결되었던 요정계와 정령계가 다시 정상으로 돌아갔다는 점, 그리고 보좌관과 다른 요정들이 힘을 합쳐 그녀가 해왔던 일들을 처리하고 있다는 점 등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여왕은 가만히 헤네스의 설명을 듣다가 조용히 물었다.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거지?” 마침내 반응이 나오자 헤네스는 얼른 대답했다. “생각하기에 따라 이건 기회일 수도 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에요.” 여왕은 얼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기회라니?” 그러자 헤네스는 본격적으로 설득에 돌입했다. “여왕님께서는 그동안 계속 요정계에만 계셨죠?” “그랬지.” “형식적으로는 일단 준상씨의 펫이라는 제약이 있기는 하지만, 그동안 여왕님을 짓누르던 다른 여러 가지 제약에 비하면 오히려 가벼울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드시나요?” “...” 그랬다. 여왕이라는 지위가 있다고는 하지만, 그녀가 생각하기에 그건 어디까지나 허울뿐인 직위였다. 실제로는 요정계라는 감옥에 갇혀서 과중한 업무에 치인 채 변화 없는 매일을 보내는 단순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여왕이 입을 다물자 헤네스는 그런 그녀를 향해 다시 조용히 말했다. “반려를 찾고 싶다고 하셨죠?” “맞아.” “준상씨는 서로 다른 세계의 이곳 저곳을 항상 오가는 분이세요.” “...” “외람되긴 하지만, 기왕 반려를 찾으실 생각이시라면 요정계에서 잠자코 기다리기 보다는 직접 여러 세계를 돌아보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그건...” 확실히 일리 있는 얘기였다. 물론 그녀도 이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그러기엔 여왕이라는 직위와 요정계라는 책임이 너무 무거웠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여왕이라는 직위도 요정계라는 책임도 이미 벗어던진 상태. 대신 펫의 신세로 영락하기는 했지만 똑같이 펫의 목걸이를 하고 있는 이 여자 아이의 모습을 봐서는 자신이 어떻게 행동하느냐 따라 그 대우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사실도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었다. “으음...” 여왕은 다시 준상을 힐긋 바라보았다. 준상은 여전히 신문을 펼쳐 든 채 여왕과 헤네스의 대화에서는 한발 물러서 있는 모습이었다. 여왕은 다시 헤네스를 살펴 보았다. 이전의 분위기를 봐서는 이 두 사람은 아마도 연인이 맞을 것이다. 이런 풋내 나는 어린애에게 자신이 밀리다니. 살짝 기분이 나쁘긴 했지만, 진지하게 생각해보니 이미 연인이 있음에도 대뜸 자신의 유혹에 넘어올 정도로 엉덩이가 가벼운 남자가 자신의 반려가 되면 그것도 큰일이다. 아무리 궁해도 무조건 남자이기만 하면 좋은 것은 아니다. 그것을 깨닫자 여왕은 비로소 자신이 너무 남자에 대한 상식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었다. “음...” 여왕은 헤네스가 따라준 우유를 한 모금 마신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 나쁘지는 않을 것 같네.” 헤네스는 여왕의 말에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죠?” “뭐... 그럭저럭.” “그럼 앞으로 저희와 함께 해주시는 거죠?” “일단은.” 뭔가 대답이 시원치 않기는 했지만, 어쨌든 긍정은 긍정이다. 헤네스는 설득이 끝나자 소개를 시작했다. “저는 헤네스 브레아라고 해요. 이벨류아 출신이에요.” 먼저 자신의 소개를 한 헤네스는 준상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쪽은 박준상씨. 성이 박이고 이름이 준상이에요. 참고로 천년왕국 신라의 왕족이시죠.” “오...” 헤네스의 말에 설득이 되기는 했어도 내심 자신이 겨우 평범한 인간 따위에게 펫으로 부려진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여왕은 준상이 왕족이라는 말을 듣고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 직위라면 그럭저럭 봐줄만 하다고나 할까. 물론 헤네스는 천년왕국의 왕족이라는 말에 만족한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여왕의 모습을 보고는 속으로 웃음을 참느라 고역이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쪽은 몽몽이. 펫으로는 저희보다 선배 격이겠네요.” “...” “마지막으로 이 예쁜 아이는 엘리멘탈 드래곤이에요. 아직 이름은 정해지지 않았구요.” “오...” 희귀한 요정용까지 부리다니. 여왕은 준상이 생각보다 훨씬 더 대단한 인간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준상은 헤네스가 성공적으로 여왕과의 교섭을 마무리하자, 그제서야 여왕의 정보를 확인했다. 펫 정보 이름 : 리체스 르아테미시스 종류 : 요정여왕 레벨 : 99Lv 경험치 : ? 등급 : 불명 분류 : 복합 성장 : 대기만성(초월) 속성 : 신성 스킬 : 마법 99Lv(-50), 기적 1Lv(-1) [정보] 호감도 : 60 충성도 : 20 카드슬롯 : 10개 [정보] 설명 : 요정계의 전대 여왕. 만년 동안의 업무에 지쳐 다시 천년간 잠이 들었다가 깨어났다. 명실상부한 반신급의 존재지만 요정계 밖에서는 그 힘에 제약을 받는다. 00144 트롤러 ========================================================================= “헉!” 별 생각 없이 정보를 확인해 보았던 준상은 자신도 모르게 헛숨을 들이키고 말았다. 갑자기 준상이 놀라는 모습을 보이자 전대 요정 여왕 리체스에게 우유를 따라주던 헤네스는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나 싶었던지 얼른 반응했다. “준상씨, 무슨 일이라도?” “아, 아니. 아무것도.” 준상은 얼른 얼버무린 다음, 여왕의 기색을 살폈다. 하지만 여왕은 자기 몫의 우유를 꿀떡꿀떡 삼키느라 정신이 없었다. 과연 요정답다고 해야 하나. 어떻게 잘 속여서 펫으로 만들기는 했지만 설마 반신급의 존재였을 줄이야. 레벨은 99이고 경험치는 표시조차 어려운지 아예 물음표다. 등급은 헤네스와 마찬가지로 불명. 거기에 스킬은 마법이 99레벨이고, 겨우 1레벨에 불과하기는 했지만 기적을 스킬로 가지고 있었다. 물론 요정계에서 벗어난 탓에 스킬 레벨이 절반으로 줄어든 상태긴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아마 지금 존재하는 다른 모든 귀환자들보다 강력한 마법 능력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카드 슬롯은 무려 열 개. 헤네스의 두 배이고, 준상과는 동등한 수준이다. 스킬 슬롯과 아이템 슬롯의 구분이 없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한 번에 두 개의 콤보 카드를 장착하는 것조차 가능해진다. 여러모로 규격 외라는 말이 어울리는 초월자였던 것이다. 하기야 만년이라는 세월을 살아온 데다 작기는 해도 하나의 세계를 책임지는 입장에 있는 존재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런 존재를 펫으로 삼다니. 정말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 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반신급 씩이나 되는 존재가 고작해야 펫 목걸이에 묶인 것을 풀지 못할 정도라면... 도대체 자신이 수행하고 있는 퀘스트는 누구의 작품이란 말인가. 애초에 수만명 규모의 인력을 동시다발 적으로 다른 세계에 전송할 수 있는 능력 자체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긴 했지만, 이런 초월자조차 그 시스템에서 벗어나지 못할 정도의 강제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준상은 얼굴이 굳을 수밖에 없었다. 이래서야 언제 퀘스트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후...” 준상은 신문을 접어서 옆에 놔둔 채 우유를 배불리 먹고 만족한 표정을 짓고 있던 전대 요정 여왕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전대 요정 여왕 리체스는 식사를 마치고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가 준상이 다소 복잡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리고 얼른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 “왜,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거지?” 준상은 피식 웃어버렸다. 하긴 저렇게만 보면 무지개 빛으로 빛나는 머리카락을 제외하고는 그저 귀엽고 먹성 좋은 요정일 뿐이다. “지, 지금 비웃은 거냐? 감히 이 몸을 보고?” 리체스가 소리를 버럭 지르자 준상은 웃음을 지우고 조용히 대답했다. “그래서?” “그래서라니...” “주인이 펫의 재롱을 보고 피식 웃은 것 정도로 일일이 시끄럽게 굴지 마라” “컥.” 리체스는 준상의 말에 그대로 털썩 주저앉으며 좌절했다. 그랬다. 모처럼 무거운 책임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대신 저 악마 같은 남자의 손아귀에 사로잡힌 신세가 되었음을 여왕은 처절하게 절감했다. “준상씨.” 모처럼 겨우 달래놨는데 말 한 마디로 다시 격침시켜 버리는 준상의 모습에 헤네스는 쓴웃음을 지었지만, 준상은 모르는 척 자기 몫의 베이글 샌드위치로 손을 가져가며 다시 말했다. “넌 이미 요정 여왕의 직위를 벗어던졌던 것이 아닌가?” “그건...” “언제까지고 과거에 얽매여 있어서는 곤란하지 않겠나.” “...” 리체스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결국 요정 여왕이라는 직위에 가장 얽매여 있었던 것은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그녀 역시 만년 동안 요정계를 이끌어 왔던 존재, 준상이 하고자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그, 그래도... 역시 펫은 좀...” 바로 펫이라는 말 자체가 지닌 어감이었다. 하지만 준상은 그녀의 말에 대해 대뜸 이렇게 답했다. “싫으면 들어가 있던가.” “끙...” “아니면 잔말 말고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피차 편하지 않겠나.” “...” 역시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인간이다. 그것은 여러 가지 의미로 아주 적절한 표현이었지만, 어쨌든 리체스는 결국 지위 격상을 위한 투쟁을 포기하고 준상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잠을 자는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허무 속에서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내봐야 자신만 손해기 때문이다. “후... 할 수 없지. 준상이라고 했나. 잘 부탁한다.” 하지만 준상은 이번에도 가차없었다. “주인님.” “응?” “주인님이라고 불러라.” “...” “싫으면 들어가 있던가.” “으으...” 둘의 실랑이를 보며 난처한 표정으로 웃을 수밖에 없었다. 준상이 조막만한 요정과 한 치도 물러섬 없이 기싸움을 하는 모습이 뭔가 신선하기도 했고, 조금이라도 현재의 지위를 격상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여왕의 모습도 뭔가 애처로우면서도 귀여운 상황이라 감히 끼어 들 엄두가 나지 않았다. 당연한 얘기지만, 역소환이라는 절대적인 권한을 쥐고 있는 준상에게 리체스는 결국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주, 주인님.” 얼굴을 잔뜩 붉힌 리체스의 입에서 그 한 마디가 나오자 준상은 그제서야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 그렇게 하면 된다.” “...” 이 굴욕 언젠가는 반드시 설욕해 주마. 리체스는 작은 주먹을 불끈 쥐며 그렇게 다짐했다. 하지만 그녀의 굳은 다짐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자, 상이다.” 준상이 뭔가 굵고 검은 우둘투둘한 무언가를 그녀 앞에 불쑥 내밀었기 때문이다. “이, 이건?” “잔말 말고 먹어봐.” “...” 리체스는 뭔가 미심쩍은 느낌이었지만 머뭇거리며 준상이 내민 그것을 한 입 깨물었다. 순간. 리체스는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했던 새로운 맛이 혀를 통해 천둥처럼 내리치는 것을 느꼈다. “이, 이, 이, 이, 이건!” 준상은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리체스에게 말했다. “초코바다.” “초, 초코바!” “이 세계는 이런 먹거리가 넘치는 곳이지.” “그, 그럴 수가.” 리체스는 그렇게 대화를 나누면서도 준상이 흔들어 보이고 있는 초코바로부터 눈을 떼지 못한 채 군침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 헤네스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더 이상은 웃음을 터뜨리지 않고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은 채 지켜보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준상의 조련은 계속 되고 있었다. “자, 내가 누구라고?” 리체스는 갈등했다. 고결한 요정 여왕으로서의 자존심을 지킬 것인가. 아니면 잠시의 굴욕을 참고 이 달콤함에 빠져들 것인가. 물론,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주, 주인님.” 반강제긴 했지만, 이미 한 번 입 밖으로 내뱉었던 말이라 그런지 아까보다는 훨씬 저항감이 약했다. 사실 호칭 따위야 어찌되든 자신이 전대 요정 여왕이란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전대 요정 여왕 리체스는 그렇게 자위하며 현재의 쾌락을 선택했다. 굳이 비유하자면 이몽룡의 목에 칼을 들이밀고 있는 변사또 앞에서 옷을 벗는 성춘향의 심정으로 주인님이라는 단어를 입 밖에 냈던 여왕님이었지만, 준상은 이번에도 가차 없었다. “뭐라고? 잘 안 들리는데.” 처음이 어려운 거지, 두 번째는 쉬운 법이다. “주인... 님.”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며 리체스에게 초코바를 건네주었다. “좋아. 잘했다.” “감사... 합니다.” 순결하고 고결하던 요정의 여왕은 결국 초코바라는 악마의 음식에 의해 그렇게 타락하고 말았다. 어쨌거나. 식사가 끝나고 카트를 방 밖에 내놓던 준상은 문 밖에서 불쌍하게 쪼그리고 앉아 있는 임서윤을 발견하고는 흠칫 놀랐다. “아직까지... 기다리고 있었던 거냐?” “하하...” “급하면 부르지 않고.” 임서윤은 난처한 표정으로 웃음을 지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게... 오붓한 시간을 방해하면 안 될 것 같아서.” “일단 들어와라.” “네.” 임서윤이 방 안으로 들어오자 가운 차림이던 헤네스는 화들짝 놀라며 후다닥 침실로 도망쳐 들어갔다. “언제나와 다름 없는 모습... 어라?” 그렇게 말하던 임서윤은 이상한 것이 날아다니는 모습을 발견하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것은 바로 엘리멘탈 드래곤과 전대 요정 여왕 리체스였다. “...” 다람쥐까지야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잠자리 날개의 미니 드래곤에 요정이라니. “이, 이, 이건...” “별 거 아니니 신경 쓰지 말고 앉아라.” “...” 별 거 아니라니. 저런 것이 세상에 드러나면 어찌 될 지는 알고 하는 소립니까!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솟구쳤지만 임서윤은 꾹 눌러 참을 수밖에 없었다. “앉아라.” “네.” 임서윤은 자꾸만 요정 쪽으로 시선이 가려는 것을 억지로 눌러 참으며 자리에 앉았다. “그래, 무슨 일이지?” 준상의 말에 임서윤은 정색하며 대답했다. “실은... 경찰로부터 수사 협조 요청이 있었습니다.” 그 말을 듣자 준상은 대번에 얼굴을 찌푸렸다. “꽃 때문인가?” 최근의 일이긴 하지만 준상은 바로 이 호텔 근처에서 괴물 꽃과 싸워 그것을 쓰러뜨린 바가 있다. 설마 괴물 꽃을 쓰러뜨린 경위를 발설한 것인가. 서윤은 준상의 표정이 급격하게 굳어가자 얼른 손을 저으며 부정했다. “아, 아닙니다. 관계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일은 전혀 다른 일입니다.” 하지만 준상은 여전히 굳은 표정을 풀지 않은 채 말했다. “설명해 봐라.” “네. 일단 발단은 괴물 꽃이 맞습니다. 하지만 경찰에서 협조 요청이 온 것은...” 서윤은 천천히 설명을 시작했다. 앞서 말 한 대로 발단은 괴물 꽃이 맞았다. 그 사건 이후로 경찰은 형체도 없이 먹혀 버린 희생자를 조사하던 중에, 그런 식으로 실종되어 버린 사람들이 의외로 상당히 많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경찰은 다크 시드나 귀환자들에 대한 제대로 된 정보가 없다보니 처음에는 이것이 폭주한 귀환자들의 소행일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염두에 두고 수사를 진행했다. 하지만 파고들수록 일반적이지 않은 초자연적인 무언가가 개입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떠올리게 되었고, 수사를 진행하던 형사들과 그들의 지원요청을 받고 출동한 경찰 기동대 일개 중대가 한꺼번에 실종되는 사태가 발생하자 이전에 괴물 꽃을 해치운 것으로 알려진 서윤 일행에게 협조라는 이름의 구원 요청을 하게 된 것이다. “그랬군.” 준상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다크 시드의 사용자가 인간 사회에 잠식해 들어와 있으리라는 점은 준상으로서도 어느 정도 예상했던 점이지만, 이런 식으로 경찰의 수사력이 꼬리를 잡을 수 있으리라고는 예상치 못한 탓이다. 경찰의 수사력을 얕본다기 보다는... 그렇게 간단하게 꼬리를 잡힐 정도로 허술한 놈들이 아니라는 느낌이 맞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함정이 아닐까. 다크 시드 사용자들의 직접적인 활동을 막고 있는 금제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경찰 기동대가 실종되었다는 점이 마음에 좀 걸리기는 하지만, 이것이 현재로서는 가장 타당한 추측이 아닐까 싶다. “자세한 자료가 있나?” 준상이 흥미를 보이자 서윤은 얼른 캐비닛을 꺼내 경찰로부터 건네받은 자료를 탁자에 꺼내놓았다. “...” 준상은 탁자 위에 수북하게 쌓인 클리어 파일들을 보고는 얼굴을 찌푸렸다. “지금 나보고 이걸 다 읽어보라는 얘긴가?” “그, 그게...” 임서윤은 식은땀을 삐질 흘렸다. 급한 마음에 전부 가져오기는 했지만, 자기가 보기에도 단 시간에 읽고 내용을 파악하는 건 무리라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기 때문이다. 준상은 난처해 하는 서윤을 향해 조용히 말했다. “요약해 와라.” “네...” 산더미 같은 자료들을 다시 챙겨 넣으며 울상이 된 임서윤에게 준상은 다시 말했다. “난 우선 경찰 기동대가 실종되었다는 장소를 확인해 보겠다.” 서윤은 대번에 반색하며 자료를 뒤적거리더니 지도 하나를 꺼내 준상에게 건네주었다. “그거라면 여기... 이걸 보시면 됩니다.” “이건 찾아봤던 모양이군.” “하하...” 어떻게 보면 이렇게 적의 함정일지도 모르는 장소를 스스로 찾아가는 건 바보 같은 짓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자신에게 위협이 되는 적이 코앞에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확실한 내용을 알지 못하는 금제라는 것 하나만 믿고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을 만큼 준상은 신경이 굵지 못했다. “보수는 알아서 챙겨오도록.” “아, 알겠습니다.” 임서윤이 인사를 하고 방을 나가자, 준상은 뒤늦게 옷을 갖춰 입고 침대에서 나오는 헤네스를 바라보았다. 헤네스는 준상의 표정을 보고는 심상치 않은 일이 발생했음을 즉각 알아보았다. “싸움... 이군요.” “그래.” 헤네스는 잠시 우울한 표정을 짓는가 싶더니 얼른 표정을 지우고는 활기찬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요. 얼른 가요.” “미안. 모처럼인데 편히 쉬지도 못하고.”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말아요.” 준상은 다가선 헤네스의 손을 잡은 채 식탁 위에 뒹굴고 있는 다른 펫들을 하나씩 역소환했다. 그러자 벌러덩 뒤집어진 채 뒹굴거리고 있던 몽몽이가 가장 먼저 모습을 감추었고, 이어서 엘리멘탈 드래곤 역시 빛을 뿌리며 시야에서 사라졌다 리체스는 초코바 조각을 양손으로 붙잡고 헤벌쭉한 미소를 짓고 있다가 갑자기 눈 앞에서 다른 펫들이 모습을 감추자 기겁하며 외쳤다. “자, 잠깐!” 준상은 그녀의 외침을 듣고는 역소환을 멈추었다. “왜?” 리체스는 얼른 말했다. “설마 저도 다시 들어가라는 건 아니겠죠?” “그렇다면?”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듯한 준상의 말에 리체스는 바로 되물었다. “어, 어째서요? 주인님이라고 부르는 대신 안 들어가도 되는 거 아니었나요?” 준상은 당연한 걸 왜 묻냐는 듯이 대답했다. “하지만 넌 너무 눈에 띄어. 너 같은 존재가 돌아다니는 걸 드러내놓고 보이기는 곤란하거든.” 그 말에 리체스는 즉각 반응했다. “그거라면 문제 없어요!” “어째서?” 리체스는 얼른 요정이 지닌 능력 중 하나를 준상에게 설명했다. “기본적으로 요정은 자신이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상대에게는 보이지 않으니까요. 아까는 별 말이 없길래 그냥 있었지만, 다른 사람의 눈에 띄는 게 싫다면 그렇게 할게요.” “호오...” 요정에게 그런 능력이 있었던 것인가. 마법이라도 쓰려는 걸까 싶었던 준상으로서는 조금 의외였지만, 하긴 99레벨인 여왕은 그렇다 치더라도 다른 연약한 요정들은 그런 능력이 없다면 무척 살아가기 힘들 것이다. “그런 능력이 있다면 상관 없겠군. 이리 와.” “네.” 리체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조심스럽게 준상의 어깨 위에 내려 앉았고, 준상은 그대로 헤네스의 손을 잡은 채 방을 빠져 나갔다. 00145 트롤러 ========================================================================= 준상과 헤네스는 곧바로 지하의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 중간에 몇몇 사람과 지나쳤지만 준상의 어깨에 앉은 리체스는 알아보지 못했다. 투명화나 은신을 사용하면 모두에게 보이지 않을 수는 있어도 이런 식으로 원하는 사람에게만 보이거나 할 수는 없다. 원리가 궁금해진 준상은 어깨 위에 앉아 다리를 흔들고 있는 리체스에게 물었다. “정말이군. 어떻게 그런 것이 가능한 거지?” “뭐가요?” “원하는 사람에게만 보일 수 있는 능력 말이다.” “아아... 그냥요. 원래 가능해요.” “...” 리체스의 성의 없는 대답에 준상은 잠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물론 보통의 요정이라면 당연히 나올만한 대답이긴 했지만 리체스는 그런 보통이란 분류로 구분되기 힘든 경험과 지위를 가진 요정이었다. “들어가 있고 싶은가 보군.” 다시 이어진 준상의 말에 리체스는 결국 입을 삐죽거리며 귀찮다는 듯이 설명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칫... 그러니까, 음... 대충 이런 거에요. 사람은 항상 앞을 보고 걷지만 반드시 앞에 있는 모든 것을 본다고 할 수는 없죠. 그러니까...” 원래 본성이 그런 건지 일단 설명을 시작하자 나름대로 진지하게 말을 시작한 리체스였지만 이번에는 준상이 문제였다. “요점만.” “...” 리체스는 잠시 고개를 돌리고 속으로 꿍얼대다가 준상이 원하는 대로 간단하게 요점을 정리했다. “그러니까, 간단하게 말하자면 상대의 인식에서 벗어나는 거에요. 그런 경우 있잖아요. 바로 코앞에 찾는 물건을 놔두고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해서 하루 종일 찾아다니는 경우. 그거랑 마찬가지에요.” “그런 게 의도적으로 가능하다고.” “요정이니까요.” “...” 대충 어떤 원리인지는 알 수 있게 되었지만, 결국 요정이어야만 쓸 수 있다는 얘기다. 어쨌거나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지하의 주차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준상은 지나다니는 사람이나 카메라 같은 것이 없는지 확인한 다음 주차장의 빈 공간에 랩터를 꺼내 놓았다. 갑자기 허공에서 거대하고 묵직한 느낌의 물체가 나타나자 리체스는 탄성을 터뜨렸다. “우와! 그거 어떻게 한 거에요?” 그 말에 준상은 바로 대답했다. “그냥.” “...” 리체스는 얼굴을 찌푸렸다. 아까 자신이 그냥이라고 대답했던 걸 이런 식으로 복수하다니. 이 남자, 은근히 속이 좁은 건지도 모르겠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것은 오해였다. 준상으로서도 인벤토리의 동작 원리 따위는 알지 못하는 데다, 그걸 또 일일이 설명하려면 자신이 지금까지 겪어왔던 일들을 구구절절이 늘어놔야 하니 귀찮은 마음에 아주 간단하게 요약한 것이 바로 그 대답이었던 것이다. 옆에서 준상과 리체스의 대화를 듣고 있던 헤네스는 얼른 손으로 입을 막고 웃음을 참으며 랩터의 조수석에 올라탔다. 준상은 헤네스가 안전벨트를 제대로 했는지 꼼꼼하게 확인하는 동안, 리체스는 차 안을 정신 사납게 돌아다니며 구경하기 시작했다. 나름대로 티를 안 내려고 노력은 했지만 사실 그녀는 이런 식으로 요정계가 아닌 장소를 구경하는 것 자체가 처음이다. 게다가 다른 요정들이 많이 가봤던, 헤네스가 살던 곳도 아닌 전혀 다른 문물로 가득 찬 지구의 모습은 요정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강렬한 호기심에 불을 지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우와! 우와! 우와!” 그렇게 의미 모를 탄성을 지르며 차 안을 정신없이 날아다니는 모습에 준상은 얼굴을 찌푸렸지만 그냥 모르는 척 시동을 걸고 천천히 차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와아아아! 이거 수레였어요? 근데 말도 없이 어떻게 움직이는 거죠?” 리체스가 다시 물었지만 이번에도 준상의 대답은 마찬가지였다. “그냥.” “...” 어쩔 수 없다. 준상이 전공도 아닌 차의 구동 원리 같은 걸 일일이 다 꿰고 있을 턱이 없지 않은가. 물론 연료를 태워서 그 폭발력을 회전력으로 바꾼다는 식으로 대충 설명하는 건 가능하겠지만 이 호기심 넘치는 요정의 질문이 계속 이어질 것을 생각하면 어설프게 설명하느니 여기서 끊는 게 여러 모로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된다. “치...” 리체스는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볼을 부풀린 채 대시보드 앞에 앉아서 그를 노려봤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준상은 차를 몰고 호텔을 빠져 나갔다. 차가 밖으로 나오자 리체스는 방금 전까지 자신이 토라졌었던 것조차 잊은 채 바깥을 스쳐 지나가는 풍경에 다시 빠져 들었다. 수많은 차들이 마구 뒤섞여 빠르게 움직이는 모습부터 시작해서, 북적이는 사람들과 그들이 입고 있는 옷에 이르기까지 아주 사소한 것 하나도 놓치지 않고 일일이 감격하는 모습을 보고 헤네스는 그녀가 요정계 안에서 얼마나 바깥 세상을 동경하고 있었는지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준상은 곧바로 지도에 표시된, 경찰 기동대가 실종된 장소로 향하려다가 대형 마트의 간판을 보고 생각을 바꾸었다. 이번에 요정들을 부려 먹느라 초코바를 대량으로 소모한 것도 있고,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음식이나 식재료를 저장해 둬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 들렀다 가겠다.” “네.” 준상은 곧바로 마트 주차장으로 차를 몰아갔다. 위압감 넘치는 픽업 트럭이 주차장 안으로 들어오자 사람들은 흘깃하고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내 차창 안으로 보이는 준상의 단단한 체구와 가라앉은 눈빛을 보고는 흠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굳이 광견의 위엄 같은 걸 내뿜지 않더라도, 준상의 눈빛은 이미 보통 사람으로서는 쉽게 감당하기 어려운 종류의 것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계속해서 공포의 시선이나 사안, 그리고 광견의 위엄 같은 상태 이상 기술을 계속 남발하다보니 그 강렬한 위압감이 어느새 조금씩 몸에 배이고 있다는 쪽이 맞았다. 줄곧 함께 지내는 헤네스야 이미 눈에 콩깍지가 씌인 상태인데다 어느 정도 그런 느낌 자체에 익숙해져 있는 상황이고 덤으로 철면피 카드까지 상비중이니 문제가 없다. 뿐인가. 리체스 역시 요정계는 아니더라도 초월자의 경지에 오른 존재이니 그 정도는 가볍게 무시할 수 있었다. 하지만 보통의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어쨌거나, 준상은 사람이 없는 곳에 차를 세운 다음 헤네스와 리체스가 내리자 바로 인벤토리에 차를 보관했다. 세워놓고 가도 상관은 없지만, 혹시라도 퀘스트가 발생하게 되면 다시 차를 가지러 오는 일이 번거롭기 때문이다. 준상이 차를 다시 인벤토리에 집어넣자, 당연하다는 듯이 헤네스가 다가와 손을 맞잡았고 리체스 역시 준상의 어깨 위에 자리를 잡았다. 헤네스는 어째서 만나는 요정마다 항상 준상의 어깨에 앉지 못해 안달일까 싶은 생각이 문득 들었다. 정말로 그렇게 편안한 걸까. 자신도 한 번 저런 식으로 준상의 어깨에 앉아 보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떠오른다. 준상과 헤네스가 자동문 안으로 들어서자 사람들의 이목이 다시 한 번 쏠렸다. 단단한 체구와 날카로운 눈빛을 지닌 준상과 이국적인 외모의 갈색 머리 미소녀가 다정하게 손을 맞잡고 들어오는 모습은 확실히 보기 드문 광경 중에 하나였지만, 사람들은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준상의 몸에서 은연중에 뿜어져 나오는 기운에 압도되어 얼른 고개를 돌려야만 했다. 준상은 카트 하나를 꺼내 손으로 밀고 가며 필요한 물품을 하나씩 챙기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집어든 것은 역시 요정들을 엮어내기 위한 무기인 초코바. 열 몇 개가 들어있는 작은 박스가 아닌, 그런 작은 박스가 가득 들어 있는 큰 박스를 통째로 카트에 밀어 넣은 준상은 우선 신선한 과일들 위주로 카트에 챙겨 넣기 시작했다. 즉석식이 간단하고 편하기는 하지만 여유가 있다면 굳이 그런 걸 고집할 이유가 없다. 특히나 과일 같은 경우는 특별히 요리를 하지 않더라도 그 자체만으로 충분히 사용이 가능하니 일석이조다. 전에는 인벤토리가 몇 개 안 되서 그 중 하나에 식재료만 담는 건 엄두도 내지 못했지만, 지금이라면 충분히 가능하다. “필요한 것 없어?” 준상은 대충 먹을 거리를 다 챙기자 헤네스에게 물었다. 일전에 진세아를 통해서 여성용품을 챙겨주긴 했지만 혹시 떨어진 것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헤네스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별로요. 딱히 생각나는 것이 없네요.” “...” 리체스는 마트 안에 구비된 여러 가지 물품에 눈이 휘둥그레져서 연신 탄성을 발하다가 또다시 자신들만의 세계로 빠진 연인들의 모습에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저기요!” “...” 잠시 리체스가 어깨 위에 앉아 있다는 것조차 잊고 있던 준상은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뭐지?” 그러자 리체스는 얼른 마트 한 구석에 놓여져 있는, 투명한 컵에 담겨진 솜사탕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거 뭐에요?” 준상은 그녀가 가리킨 곳을 흘깃 바라보며 대답했다. “솜사탕.” 물론 이렇게만 대답하면 리체스가 알아들을 수가 없다. 요정계에 솜사탕이라는 것이 이미 존재하지 않는 한은 말이다. “그게 뭔데요?” “먹을 거.” “저걸 먹는다구요?” “...” 일일이 설명하기 귀찮았던 탓에 준상은 진열된 솜사탕을 몇 개 집어 카트에 넣으며 다시 말했다. “있다가 줄 테니 직접 먹어봐라.” “네!” 리체스는 그제서야 새로운 먹거리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차 입을 다물었다. 쇼핑을 마친 준상은 일단 주차장으로 가서 랩터를 꺼내 놓은 다음, 구입한 것들을 뒤쪽의 화물칸에 실었다. 그리고 준비가 끝나자 다시 차를 끌고 주차장을 빠져 나왔다. 리체스는 헤네스가 컵의 뚜껑을 열어주자 그 안에 들어있는 몽실몽실한 구름 모양의 솜사탕을 손으로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오오오!” 혀에 닿자마자 사르르 녹아버리는 그 식감이라니! 초코바도 좋지만 이것 역시 또 다른 혁명이 아닐 수 없었다. 리체스는 헤네스가 들고 있는 컵 주위를 바쁘게 날아다니며 솜사탕이라는 먹을 거리가 주는 마력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너무나 열렬히 빠져든 탓에 정말로 솜사탕 속으로 파고들었던 것이다. “으... 이게 뭐야.” 리체스는 온 몸에 끈적한 설탕기가 묻어 나오자 울상을 짓더니 마법으로 몸을 씻었다. 준상은 운전하다가 그 모습을 보고는 그녀에게 물었다. “정령은 쓰지 않는 거냐?” “정령이요? 요정계에서라면 몰라도 이곳에서는 불러오기가 귀찮아서.” “정령의 문이 있어도?” 리체스는 무슨 소린가 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다, 당신... 도대체 몸에다 무슨 짓을 한 거에요?” 아마도 그제서야 준상의 몸에 이식된 요정의 돌을 알아챘던 모양이다. “뭐긴. 정령의 문이지.” “그, 그럴 수가...” 동물에게 정령의 문을 이식하지 않는 건 관리하기가 귀찮아서라는 문제도 있지만, 오래된 나무 만큼 강인한 생명력을 지닌 개체를 찾기가 쉽지 않은 탓이다. 생명력과 체력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다른 개념인데다, 동물은 식물과는 달리 격렬한 삶을 사는 탓인지 나이를 먹을수록 더 생명력이 약해지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터무니없는 남자는 자신의 몸 안에 정령의 문을 만들어 달고 다닌다. 이런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이것은 어디까지나 그가 장착한 시드나 아이템의 생명력 강화와 더불어 고된 수련과 실전을 통해 증폭된 신체 능력 덕분이었지만, 아직 준상이 지닌 힘의 진면목을 모르는 여왕으로서는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정말 아무 이상 없나요?” “그다지. 왜? 무슨 부작용 같은 거라도 있나?” 리체스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런 건 아니지만... 신기해서.” “...” 리체스는 운전에 집중하고 있는 준상을 흘끔거리며 살피기 시작했다. 방식이야 어찌 되었든 자신을 엮어 두었다는 사실부터가 이미 보통의 인간이 아니라는 증거이다. 리체스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이내 고개를 젓더니 다시금 솜사탕이 주는 달콤함 속으로 빠져 들었다. 00146 트롤러 ========================================================================= 그들이 탄 차는 시내를 빠져나가 경기도 외곽으로 향했다. 북적거리는 도심을 벗어나자 솜사탕의 마력에 흠뻑 취해있던 리체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곳곳에 펼쳐진 논과 밭, 그리고 작은 규모의 숲들을 바라보았다. “여기도 숲이 있네요?” “물론.” 시내에도 공원 같은 것이 있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인공적인 면모가 강할 수밖에 없어서 평범한 숲은 없는 줄 알았던 모양이다. 그들을 태우고 도로를 달리던 랩터는 펜션이 밀집된 휴양지 인근에 도착하고 나서야 비로소 차를 멈추었다. “...” 준상은 일단 교차로에 차를 세운 다음, 경찰 기동대의 실종 장소가 표시된 지도를 한 번 더 살핀 뒤에야 지금까지와는 달리 조금 느릿한 속도로 차를 몰아 이동하기 시작했다. 조금 더 달리자 푸른 색으로 도색된 현대적인 느낌의 역사 하나가 모습을 드러낸다. 관광지로 유명한 곳이라 그런지 날씨가 제법 추운데도 불구하고 제법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준상은 잠시 역 앞에 차를 대놓고 다시 지도를 살피더니 펜션이 밀집된 지역으로 차를 몰고 좀 더 들어가다가 경찰들이 한데 모여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는 차를 멈췄다. 경찰 기동대 중대 하나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더 이상 진입하는 것은 무리인 듯 싶자 준상은 차를 돌려 나온 다음, 인적이 드문 곳에 멈추어 섰다. “내려라.” “네.” 준상은 헤네스와 리체스가 내리자 차를 인벤토리에 집어넣은 다음, 몽몽이를 소환했다. 몽몽이는 준상보다도 뛰어난 안목 능력을 지니고 있으니 만에 하나 준상이 파악 못한 다크 시드 소유자가 있더라도 바로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준비를 모두 마친 준상은 헤네스와 함께 관광객을 가장한 채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MT 등으로 유명한 곳이긴 하지만 아직 철이 아니어서인지 학생들보다는 가족끼리 온 사람들이 더 많이 보였다. 생각보다 사람이 많아서 무슨 일인가 하고 알아보니 근처 수목원에서 오색 별빛 축제라는 것이 열리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준상은 일단 그 내용을 기억해 두고는 경찰들이 모여있는 곳 근처에서 망토를 꺼내어 착용하며 헤네스에게 말했다. “헤네스.” 준상이 망토를 꺼내드는 모습을 본 헤네스는 그의 얼굴을 한번 쓰다듬고는 조용히 말했다. “조심하세요.” “그래.” 준상은 헤네스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어 주고는 그녀를 역소환했다. 그러자 옆에서 지켜보던 리체스가 투덜거리며 중얼거린다. “누가 보면 한 백년쯤 헤어져 있는 줄 알겠네.” 하지만 이내 준상의 시선과 마주치자 찔끔하며 얼른 두 손으로 입을 가린다. “너도 들어가 있어라.” “네? 하지만...” 리체스는 반발했지만, 준상이 역소환을 실행하자 곧바로 모습을 감추었다. 헤네스와 리체스를 역소환한 준상은 몽몽이만을 데리고 조용히 숲 속으로 진입했다. 사건이 벌어진 곳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숲으로 들어간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마치 폭격이라도 맞은 것처럼 이리저리 파헤쳐지고 부서진 펜션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준상은 일단 몽몽이를 근처에 대기시킨 다음 모습을 숨긴 채 부서진 펜션 안으로 진입했다. 안에서는 화생방 방호복으로 몸을 감싼 관계자들이 이런 저런 조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밖에서 봤을 때는 몰랐지만, 안에 들어서니 사방에 혈흔이 낭자하게 흩어져 있었다. 신체 조각 같은 것은 눈에 띄지 않았지만, 이 정도로 피가 튀었다면 역시 온전하게 살아남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될 것이다. “...” 준상은 부서진 펜션의 기둥을 살펴보았다. 기둥은 예리한 무언가에 단숨에 잘린 듯한 흔적이 남아있었고, 그런 흔적이 부서진 펜션 이곳저곳에 남아 있었다. 급히 움직이는 사람들과 부딪히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현장을 살펴본 준상은 이내 몇 가지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우선, 이번에 나타난 자는 지난 번에 괴물 꽃처럼 거대화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였다. 물론 지하에 숨어드는 방식을 사용했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었지만, 부서진 펜션의 잔해로 봐서는 그런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공격 방법은 날카로운 무언가를 이용한 절단으로 추정되었다. 다크 시드 사용자들의 특성을 감안한다면, 이것은 검과 같은 무기를 사용한 것이라기 보다는 신체 일부를 변형하여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상당히 먼 거리의 구조물을 한 번에 베어낸 것으로 보이는 흔적이 남아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면, 공격의 사정거리 역시 상당한 수준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준상은 일단 그 정도의 내용을 확인하고는 사건 현장을 빠져 나와 몽몽이가 대기하고 있는 숲으로 이동했다. 더 이상은 전문적으로 수사 기법을 익히지도 않은 준상이 확인하기 어려운 부분이라, 일단 근처에 머물면서 임서윤이 요약해서 보내줄 정보를 활용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준상은 숲을 빠져 나오자 망토와 부츠를 인벤토리에 집어 넣은 다음, 헤네스와 리체스를 다시 소환했다. 헤네스는 별 탈 없어 보이는 준상의 모습에 안도하며 그에게 다가와 안겼지만, 리체스는 자신을 역소환했다는 사실에 화를 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뭐가?” “내가 이렇게 꼬박 꼬박 존댓말도 하고... 그러니까, 주인... 님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그렇게 다짜고짜 역소환을 하면...” “그래서?” “...” 리체스는 귀찮다는 기색을 보이는 준상의 대답에 볼을 부풀렸고, 그런 둘의 모습을 보다 못한 헤네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준상씨. 그러지 말고 이유를 설명해 주시는 것이...” “...” 준상은 귀찮다는 표정이었지만 헤네스의 말까지 무시하지는 않았다. “모습을 숨겨야 하는데, 너는 너무 눈에 띄거든.” 그러자 리체스는 바로 반박했다. “다른 사람에게는 안 보인다니까요?” “사람 눈에는 안 보여도 다른 것에는 보일 수 있으니까 하는 말이다.” “그게 무슨...” 아무래도 말로만 설명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는 터라, 준상은 캐비닛 안에 잠자고 있던 휴대폰을 켠 다음 리체스에게 말했다. “자, 모습을 숨겨봐. 움직이지는 말고.” “좋아요.” 그러자 리체스는 그것을 자신에 대한 도전이라 여겼는지 얼른 준상의 시야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순식간에 리체스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준상은 살짝 놀랐지만, 얼른 휴대폰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예상대로 잔뜩 삐친 모습의 리체스가 선명하게 화면에 나타나 있었다. 준상은 그대로 사진을 찍은 다음 리체스에게 말했다. “됐다. 와서 봐라.” “...” 리체스는 여전히 불퉁한 표정을 지은 모습으로 다시 나타나 준상이 내미는 휴대폰을 보더니 이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죠?” 준상은 간단하게 설명했다. “이건 생명체가 아니기 때문에 인식이건 뭐건 그냥 있는대로 주위의 사물을 기록할 수 있거든.” “아...” “네가 투명화 마법 같은 걸 쓸 수 있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은 이상은 어쩔 수 없는 거다.” “그렇군요.” 물론 리체스는 투명화 마법을 쓸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힘의 제약을 받지 않는 요정계에서의 일이고, 이곳에서는 환영마법으로 흐릿하게 보이는 것 정도가 한계였다. 이런 이유가 있다면 그녀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물론 그렇다 해도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미, 미리 설명해 주면 좋았잖아요.” 하지만 역시나 준상은 가차 없었다. “귀찮아.” “끙...” 헤네스는 둘의 실랑이를 보며 조용히 미소를 짓고 있다가, 준상이 돌아보자 얼굴에서 얼른 웃음을 지웠다. “아무래도 시간이 걸릴 것 같으니, 일단 숙소부터 정하자.” “네.” 예전 같으면 이런 식으로 당일 숙박 가능한 빈 방을 찾으려면 이곳 저곳 상당히 발품을 팔아야만 했겠지만, 요새는 인터넷을 통해 실시간으로 빈 방을 알아 볼 수가 있다. 준상은 휴대폰을 켠 김에 얼른 빈 방을 알아 찾아 예약한 다음 랩터를 꺼냈다. “방 잡았다. 가자.” “네.” 2인실로 잡기는 했지만, 서윤의 도움을 받아 머물던 호텔과는 달리 이곳에서는 헤네스의 신분에 대해 확인이 들어오면 상당히 귀찮아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입구 근처에서 일단 역소환한 다음 안에 들어가서 다시 소환하는 방법을 취해야만 했다. 헤네스는 예전에 둘이서 여관을 전전하던 시기가 떠올랐는지 잠깐 추억에 잠긴 표정을 지을 뿐이었지만, 옆에서 그 과정을 지켜보고 있던 리체스는 동정어린 표정으로 헤네스를 바라보았다. “은근히 너도 참 고생이었구나.” “그런가요?” 리체스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가 싶더니, 짐칸에 넣어둔 과일을 안으로 들여오는 준상을 향해 말했다. “저기... 하나만 부탁해도 될까요?” “뭘?” 준상의 말에 리체스는 잠시 주저하다가 말했다. “잠깐 정령의 문을 좀 썼으면 싶은데.” “이유는?” 이곳에서야 무리겠지만, 정령의 문을 통해 요정계로 돌아가면 제약을 받는 그녀의 힘이 완전히 되살아난다. 지금이야 준상에게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지만 요정계에서의 그녀는 사실상 신이나 다름 없는 존재. 아마도 그곳에 돌아가면 펫 목걸이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준상은 떠올렸다. 리체스 역시 그런 준상의 생각을 모르지 않기 때문에 얼른 설명을 했다. “그러니까... 음, 투명화 마법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해주는 물건이 있거든요. 그걸 가져오면 일일이 왔다 갔다 할 때마다 역소환을 하고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 “그런 게 있다고?” 하기야 만년 묵은 요정계의 여왕이고 마법레벨이 99라면 그 정도 물건도 없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준상은 고개를 끄덕인 다음 다시 물었다. “댓가는?” “댓가요?” 리체스는 그저 매번 역소환과 소환을 되풀이하는 헤네스가 안 되어 보인 것도 있고, 자신 역시 아까처럼 그런 식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이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런 제안을 한 것 뿐이었다. “아니, 뭐... 딱히 댓가가 필요한 건 아니고...” 하지만 준상은 안으로 들여온 상자를 열어 그 안에 들어있던 작은 상자를 하나 건넸다. “투명화 마법이 걸린 아이템 하나당 이 상자 하나를 주지.” “이건 뭐죠?” “이 상자 안에는 초코바 25개가 들어있다.” “...” 리체스는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고작 초코바 하나에 자존심을 굽히고 주인님이라는 말을 입에 담았던 그녀로서는 무려 25개나 되는 초코바를 단숨에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준상은 리체스가 대답이 없는 모습을 보고 너무 싸게 불렀나 싶었던지 다시 한 번 더 제시를 했다. “마음에 안 드나? 그럼 한 상자 더 주지.” “허억!” 한 상자 더라니? 그럼 오십 개란 말인가! 하지만 그래도 승낙이 떨어지지 않자 준상은 다시 말했다. “싫어? 싫으면...” 싫으면 아예 이걸 통째로 다 줄 수도 있다는 말을 하려 했지만, 리체스는 잠시 소풍 나갔던 넋을 후다닥 챙기며 허겁지겁 대답했다. “조, 좋아요! 초코바 두 상자! 절대 무르기 없기에요!” “물론.” 어차피 초코바 두 상자라고 해봐야 투명화 아이템이 지닌 가치에 비하면 그야말로 초코바 값에 불과하다. 경매에 붙이면 도대체 가격이 얼마나 나올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 그런 아이템이 아니던가. 리체스는 별로 가치를 두지 않는 모습이었지만 그건 무언가를 팔고 산다는 개념이 희박한 요정이니까 가능한 일이다. “혹시 요정계로 도망칠 생각은 아니겠지?” 준상의 말에 리체스는 입을 삐죽거리며 대답했다. “그렇게 자꾸 구박하면 그런 생각이 들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어째서?” “솔직히 돌아간다고 해봐야 재미도 없고... 기왕 이렇게 나왔는데 다시 돌아가기도 뭐하고... 아무튼 그래요.” “...”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언제나 자신을 신처럼 떠받드는 요정들과는 달리 준상이나 헤네스와 투닥거리는 것이 나름 신선하고 재미있는데다, 모처럼 여기까지 왔는데 다른 세계의 문물을 좀 더 즐기다 가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라는 것도 한 가지 이유였다. 하지만 그런 내막을 모르는 준상이 미심쩍어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리체스는 소리를 버럭 질렀다. “도망 안 간다니까요. 저 리체스는 허락 없이 도망가지 않을 것을 주인님께 맹세합니다! 됐죠?” “...” 처음에는 그렇게 입에 담기 힘들어 하던 주인님이란 말이 생각 외로 아주 술술 나오자 리체스 자신도 말해 놓고 살짝 놀랐다. 허락 받고 도망가면 그게 도망이냐 싶기는 했지만, 준상으로서도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계속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기가 뭐했다. 어차피 이 지구상에 제대로 된 정령의 문은 준상이 지닌 것 하나 뿐이니 그럴 낌새가 보이면 얼른 문을 닫고 역소환을 해버리면 그만이기도 하다. “알았다. 믿어 보도록 하지.” “치...” 리체스는 입을 삐죽거리고는 곧바로 자신의 수석보좌관이었던 셀라에게 연락을 취했다. “셀라?” 셀라는 새로운 여왕인 늑대 소녀 리시스를 대신해 요정계의 업무를 나누고 그것을 총괄하는 일로 눈 코 뜰 새 없는 나날을 보내다가 전대 여왕의 연락을 받자 화들짝 놀라며 부동자세로 대답했다. “여, 여왕님이십니까?” 셀라의 대답에 리체스는 쓴웃음을 삼키며 대답했다. “이젠 아니지. 그러니까 그냥 리체스라고 불러.” 물론 그 말은 씨도 먹히지 않았다. “여왕님! 무사 하셨군요! 말씀하세요! 바로 구출 작전을...” 셀라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렇게 말을 시작했지만, 리체스는 얼른 그녀의 말을 막았다. “됐어. 난 한 동안 여기서 지낼 거니까 그렇게 알아.” “여왕님!” 셀라는 참지 못하고 큰 소리를 냈지만, 리체스는 미련 없는 태도로 담담하게 선언했다. “나 이제 여왕 아니라니까 그러네.” “...” 셀라는 리체스의 선언에 낙담하고 말았다. 비록 리시스가 새로운 여왕이 되기는 했어도 저 악마 같은 준상의 구속에서 풀려나기만 하면 리체스가 바로 돌아와 여왕의 자리에 다시 오르리란 기대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리체스는 그런 기대를 산산이 부수며 설명을 이어갔다. “아무튼 이번에 연락한 건... 내 방 침대 옆에 보면 작은 서랍 있잖아. 거기 보면 빨간 보석이 달린 작은 귀걸이 세트가 두 개 있으니까 그거 찾아서 정령의 문으로 보내줘.” “귀걸이... 말씀이신가요?” “그래. 빨간 보석이 달린 은색 귀걸이. 나도 오래 돼서 기억이 잘 안 나기는 하는데, 아마 거기 있을거야.” 셀라는 결국 만사 체념한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찾으면 다시 연락 드릴게요.” “그래. 고마워.” 준상은 옆에서 그 대화를 들으면서 요정들이 지닌 가치가 생각보다 훨씬 더 대단하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요정의 가루나 요정의 돌, 요정의 술 같은 것을 거래할 생각은 그로서도 가지고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구하기 힘든 아이템의 입수 경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은 미처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당장 자신이 가장 많이 쓰는 아이템에 강화를 시도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이던가. 혹시라도 강화가 실패해서 중요한 옵션이 사라지기라도 하면 곧바로 엄청난 전력 손실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다수의 아이템을 확보할 수 있다면, 좀 더 다양한 시도를 해볼 수도 있다. 준상은 리체스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거 혹시... 네가 만든 거냐?” 리체스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네. 예전에 마법 공부할 때 시험 삼아 만들어 본 거긴 하지만, 그럭저럭 쓸 만 할 거에요.” “...” 준상은 허리에 손을 척 얹은 채 코를 치켜 들고 잘난 척 하고 있는 이 전대 요정 여왕에게서 갑자기 금덩이보다 더 눈부신 광채가 뿜어져 나오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00147 트롤러 ========================================================================= 그야말로 호박이 넝쿨째 들어온 느낌. 준상은 조금은 조심스러워진 말투로 질문을 던졌다. “그거... 여기서도 만들 수 있나?” 그 말에 리체스는 바로 대답했다. “여기서는 무리에요. 재료도 문제거니와 힘도 제약을 받거든요. 간단한 수준이라면 몰라도 그 마법 을 쓰지 못하는 상황에서 동등한 효과를 지닌 물건을 만드는 건 무리죠.” “...” 하긴 온전하게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요정계가 아니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래도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가 요정계로 돌아가 버리는 건 준상도 리체스 자신도 별로 원치 않는 일이었다. 생각 같아서야 요정계에 가둬놓고 마구마구 물품을 뽑아내고 싶지만 애초에 그녀는 과로에 시달리다가 천년 동안 파업을 벌인 요정이 아니던가. “그럼 여기선 어느 정도까지 가능하지?” 리체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잠시 간단하게 몇 가지를 확인한 다음 대답했다. “그리 대단한 건 어려울 것 같아요.” “구체적으로?” “간단한 공격 마법이나 육체 강화, 그리고 회복 정도겠네요.” 리체스는 대단한 수준이 아니라고 했지만, 그 정도면 이곳에서는 충분히 대단한 수준이다. “사용하는데 제한은 없나?” “제한이요?” 리체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다시 대답했다. “딱히 제한은 없었던 것 같은데... 마법에 소질이 있으면 좀 더 효과가 좋아지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걸 제한이라고 하긴 좀 그렇겠네요.” 착용 제한조차 없단 말인가! “대단하군.” 준상이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감탄의 뜻을 보이자 리체스는 다시 한 번 허리에 손을 척 얹고는 콧대를 치켜들고 잘난 척을 했다. “엣헴! 이제 제가 좀 달라 보이나요?” 준상은 이것도 순순히 인정했다. “그래. 솔직히 좀 놀랐다. 너 정말 대단한 요정이었구나.” 리체스는 의외로 준상이 간단하게 자신을 인정하자 어쩐지 좀 쑥스러워졌다. “크흠! 얘는 왜 이리 늦나 몰라.” 괜히 헛기침을 하며 그렇게 중얼거리자 때맞춰 수석보좌관 셀라로부터 다시 연락이 들어왔다. “여왕님! 찾았습니다!” 리체스는 셀라에게 주의를 주었다. “나 이제 여왕 아니라니까. 그냥 이름 불러.” “네? 하지만...” 머뭇거리는 셀라의 목소리에 리체스는 속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는가 싶더니 이렇게 말했다. “따라 해봐. 리체스님.” “그, 그런... 감히 제가 어떻게.” “해보라니까?” “...” 리체스의 강요가 이어지자 셀라는 더 이상 거부하지 못하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리, 리체스님.” “좋아. 잘했어. 앞으로 그렇게 불러.” “네...” 셀라는 잔뜩 풀 죽은 목소리로 그렇게 대답하고는 다시 본론을 꺼냈다. “저... 귀걸이는 어떻게 보낼까요?” “당연히 정령의 문이지. 아까 말했잖아.” “그랬죠, 참.” 리체스는 셀라와의 대화를 잠시 멈추고 준상을 바라보며 말했다. “정령의 문 좀 잠시 열어 줄래요?” “알았다.” 준상이 문을 열자, 리체스는 다시 셀라에게 말했다. “지금 열어 놨으니까 얼른 가져와.” “알겠습니다.” 그리고 조금 시간이 지나자 준상의 배꼽에서 안경을 쓴 작은 요정 하나가 손가락 두 개를 겹쳐 놓은 듯한 크기의 붉은 색 상자 두 개를 낑낑거리며 짊어진 채 나타났다. 상자 무게에 짓눌릴 듯한 모습으로 휘청거리며 날아다니는 모습을 본 준상과 헤네스는 얼른 셀라로부터 상자를 받아 들었다. “후아... 무거워라.” 갑작스런 신체 변화 때문에 정신 없어 하던 셀라는 무지개빛 머리카락을 휘날리고 있는 리체스를 발견하자 얼른 다가가 그녀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여왕님... 아니, 리체스님을 뵙습니다.” “됐으니까 앞으로는 이러지마.” “하지만...” 리체스는 셀라를 향해 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어허, 자꾸 그러면 다시는 안 부른다?” “아, 알겠습니다.” 리체스는 그렇게 다시 한 번 주의를 주고는 준상에게 말했다. “초코바 주세요.” “알았다.” 준상은 상자에서 초코바 25개가 들어있는 작은 상자 두 개를 꺼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리체스는 상자가 놓여지자 그 중 하나를 마법으로 띄워올려 셀라에게 건네주었다. “자, 수고했으니 이거 가지고 돌아가.” “이건...” 이게 뭔가 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셀라를 향해 리체스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설명을 해주었다. “초코바라고 하던데. 굉장히 맛있더라. 그 안에 25개가 들었다니까 가서 애들이랑 나눠 먹어.” 초코바라니! 바로 정령의 문을 만들었을 때 보상으로 나누어 주었던 그 맛있는 음식이 아닌가! 요정계에는 지금도 그 맛을 잊지 못해 금단증상을 보이는 요정들까지 있을 정도였다. “여왕... 아니, 리체스님.” 셀라는 감격한 표정으로 리체스를 바라보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저 나쁜 남자에게 붙잡혀 괴롭힘을 당하는 와중에도 요정계를 생각해서 이런 귀한 음식을 나누어 주다니... 역시 요정계에 어울리는 여왕은 이 분 뿐이라고 셀라는 생각했다. 리체스는 그런 셀라의 눈물을 손가락으로 닦아주며 말했다. “바쁠 텐데 불러서 미안.” 셀라는 아쉬운 표정이었지만 이내 감정을 억누르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언제든 필요하신 것이 있으시면 또 불러 주십시오. 기쁘게 달려오겠습니다.” 리체스는 그런 셀라를 조금 미안해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다시 말했다. “그래주면 나야 고맙지. 어쨌든 바쁠테니 이만 돌아가 봐.” “알겠습니다.” 셀라는 리체스에게 예를 취하고는 다시 리체스가 건네준 초코바 상자를 낑낑거리며 짊어진 채 준상의 배꼽 어림으로 뛰어들어 모습을 감추었다. “괜찮겠나?” 준상이 묻자 리체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뭐가요?” “네 몫을 그렇게 많이 넘겨 줘도.” 그러자 리체스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에이. 그렇게 많은 걸 어떻게 혼자 다 먹어요.” “...” 그리고는 준상과 헤네스가 들고 있는 상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거 하나는 나 줘요.” “알았다.” 준상이 상자를 건네주자, 리체스는 다시 마법으로 뚜껑을 연 다음 그 안에 들어있는 붉은 색의 작은 구슬이 달린 귀걸이 두 개를 꺼냈다. 인간 사이즈에 맞춰진 크기라 요정 모습의 그녀가 착용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리체스의 손에 닿자 거짓말처럼 크기가 줄어들면서 요정 사이즈에 맞게 변했다. 리체스는 그것을 가져다 귀에 걸고는 다시 말했다. “그것도 잠깐 이리 줘봐요. 설정을 좀 바꿔야 하니까.” “설정?” “주인 외에는 함부로 착용할 수 없게 되어 있거든요.” “주인이 아닌 자가 착용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데?” 리체스는 헤네스에게서 귀걸이가 든 상자를 건네받아 그것을 열어보면서 말했다. “착용 자체도 마법을 쓰는 방식인데다 설령 억지로 착용했다 쳐도 효과를 사용할 수 없어요. 주인 외에는 그냥 예쁘장한 귀걸이일 뿐이죠.” “그렇군.” 리체스는 귀걸이를 만지며 무언가 조작하는가 싶더니, 이내 상자에서 물러나며 헤네스에게 말했다. “자, 이제 가져가서 귀에다 대 봐.” “감사합니다.” 헤네스는 리체스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는 상자 안에 들어있는 귀걸이를 집어 들었다. 붉은 보석 외에는 별다른 장식이 없는 손톱 크기의 작은 귀걸이를 잠시 바라보던 헤네스는 , 보통의 귀걸이와는 달리 착용을 위한 바늘이나 집게 같은 것이 없는 것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방금 전에 리체스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조심스럽게 귀에 가져다 대자, 귀걸이는 거짓말처럼 헤네스의 귀에 달라붙었다. 헤네스는 신기해하며 다른 한 쪽도 마저 착용한 다음 준상에게 보여 주었다. “어때요?” 작은 귀걸이 하나를 착용했을 뿐인데, 어쩐지 훨씬 성숙해진 듯한 느낌이다. “예쁘군.” “치.” 조금은 성의 없는 준상의 감상에 헤네스는 입을 삐죽거리고는 리체스를 향해 다시 사의를 표했다. “예쁜 귀걸이를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괜찮아. 어차피 공짜도 아닌데.” 정확히는 공짜에 가까울 정도로 헐값이란 것이 맞는 표현이겠지만 어쨌든 리체스 본인은 제법 만족스러운 모습이었다. “투명화 능력을 어떻게 사용하는 거지?” 이어진 준상의 물음에 리체스는 바로 대답했다. “간단해요. 귀걸이를 손으로 만지면서 마음 속으로 ‘사라져라’라고 말하면 되요.” “사용하는 언어는 상관이 없는 건가?” “아마도요.” 준상은 헤네스를 돌아보며 말했다. “한 번 시험해봐.” “네.” 헤네스는 한 손을 들어올려 귀에 착용한 귀걸이를 만지작거리며 마음 속으로 살짝 외쳤다. ‘사라져라!’ 순간, 헤네스의 모습이 준상과 리체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준상은 바로 초감각을 펼쳐 확인해 보았다. 그러자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헤네스가 그곳에 있는 것이 바로 감지되었다. “대단한걸.” 별다른 이질감조차 없는 투명화 기능에 준상은 살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살짝 손을 뻗어 헤네스의 어깨를 만지자 이내 투명화가 깨지며 다시 모습이 드러났다. 그 모습을 보고 리체스가 설명을 덧붙였다. “아, 그런 식으로 누군가와 접촉하거나 하면 효과가 풀리니까 주의해야 되요. 사용자 인식 기능이나 착용 방법을 제외하면 일반적인 투명화 마법과 주의사항은 동일하다고 볼 수 있죠. 물론 스스로 투명화 마법을 사용할 수 있을 정도의 마법 능력이 있다면 이런 문제를 상쇄시킬 수도 있지만요.” 준상은 가만히 손을 뻗어 헤네스가 착용한 귀걸이에 손을 가져갔다. “...” 헤네스는 준상의 손길이 귓가를 스치자 부끄러운지 고개를 숙였지만 준상의 목적은 귀걸이의 아이템 정보를 확인하는데 있었다. 아이템정보 명칭 : 붉은 눈의 귀걸이 레벨제한 : 없음 종류 : 귀걸이 등급 : Rare 효과 : 1. 착용시 투명화 상태 활성화 가능. (단, 사용자의 마법능력이 높을수록 효과 증폭) 2. 사용자 인식(현재: 헤네스 브레아) 3. 강제 착용 해제 방지. Seed : 슬롯없음 설명 : 요정 여왕 리체스 르아테미시스가 만든 악세사리. 양쪽 귀에 전부 착용해야 효과가 발휘된다. “이건...” 준상은 놀란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리체스가 만든 이 귀걸이에는 정말로 레벨 제한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레벨과 관계없이 이런 터무니없는 아이템을 착용할 수 있다니... 아까 제한이 없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어느 정도의 패널티 정도는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정말로 아무 제한없이 이런 터무니없는 아이템을 착용할 수 있을 줄이야. “이거... 또 없나?” 준상은 혹시나 하고 물었지만, 리체스는 고개를 저었다. “두 개가 전부에요.” “...” 준상은 아쉬운 느낌에 입맛을 쩍 다셨다. “다른 건?” “다른 거라뇨?” “이전에 만든 마법 물품은 이것 뿐인가?” 리체스는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이렇게 대답했다. “모르겠어요. 하도 오래 전 일이라. 가서 찾아보면 또 모르지만.” “...” 정말로 없는 걸까, 아니면 이 이상 꺼내놓기 싫다는 걸까. 찾아보기 귀찮아서가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리체스 본인이 저렇게 나오면 더 이상은 캐묻기가 곤란하다. 조금 아쉽기는 해도 어차피 오늘 내일 보고 말 사이도 아니니 천천히 구슬려서 보따리를 풀도록 만들면 된다고 준상은 생각했다. 중요한 건 리체스가 레벨 제한이 없는 아이템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을 확인했다는 사실 아니겠는가. 00148 트롤러 ========================================================================= 준상이 레벨제한 없는 아이템의 제작 능력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면, 헤네스는 이런 아이템을 준 리체스에게 정말로 감사하고 있었다. 어쩌면 리체스가 역소환을 싫어하는 것처럼 사실 헤네스도 역소환을 그리 달가와 하지 않았다. 물론 리체스와는 이유가 달랐다. 자신이 인식할 수 없는 시간의 결락을 좋아할 사람은 없지만, 헤네스는 자신이 모르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준상이 홀로 고난을 겪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못내 불안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퀘스트로 인한 전송의 짧은 시간을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결락 없이 함께 지낼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리체스가 준 귀걸이 덕분이었다. “정말 고마워요. 리체스님.” “그, 그래.” 볼까지 발그레하게 붉힌 채 그렇게 몇 번이고 감사의 뜻을 표하는 헤네스의 모습이 리체스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여왕으로서 요정들에게 이런 저런 일들을 베푼 적은 많았지만 이렇게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정말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어쨌거나 리체스의 귀걸이 덕분에 여러모로 화기애애해진 그들은 간단하게 휴식을 취한 다음 식사를 하러 나갔다. 물론 이번에는 문 밖을 나갈 때 번거로운 역소환의 과정 대신 투명화 마법을 사용했다. 차를 타고 역 근처로 나간 그들은 음식점을 찾았다. 춘천에 가까운 곳이라 그런지 아무래도 고기집이 많은 편이었고, 어딜가나 막국수라는 메뉴가 붙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고기 밖에 없는 것 같은데, 괜찮겠나.” 아무래도 요정이라고 하면 채식을 떠올리기 마련이라 그렇게 물었는데 의외로 리체스는 별로 상관없다는 듯이 이렇게 대답했다. “물론이죠. 저 음식 별로 안 가려요. 달콤한 걸 특히 더 좋아하기는 하지만요.” “...” 아무래도 고기가 뭔지 모르는 듯한 표정은 아니었기 때문에 준상은 일단 근처에 널려 있는 닭갈비 집 가운데 비교적 규모가 큰 곳으로 찾아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은 준상은 점원에게 일단 닭갈비 2인분과 함께 막국수를 시켰다. 점원이 이국적인 외모의 헤네스를 흘깃거리는 모습에 준상은 한 마디 덧붙였다. “막국수는 너무 맵지 않게 해주시겠습니까.” “물론이죠. 걱정마세요. 저희 집은 외국인 분들도 많이 찾는 곳이랍니다.” “...” 뭔가 묘하게 초점이 어긋난 느낌이었지만 준상은 그러려니 하며 주문을 마쳤다. 잠시 기다리자 반찬이 차려진다. 리체스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요정의 능력을 사용한 채 식탁에 앉아 기다리다가 갖가지 음식이 차려지자 눈이 휘둥그레져서 이것 저것 묻기 시작했다. “이거. 이건 뭐야?” 헤네스의 외모를 보고 특별히 신경을 써준 것인지 다른 반찬보다 특히 샐러드가 풍성하게 남겨 있었다. 그 모습에 준상 대신 헤네스가 대답했다. “샐러드라는 거에요. 한 번 먹어볼래요?” “응!” 헤네스는 마요네즈에 야채와 과일을 버무린 샐러드를 고기용 접시에 조금 덜어낸 다음 리체스가 먹기 좋게 야채를 가위로 작게 잘랐다. 그리고 주위를 살피다가 이쑤시개 하나를 꺼내 리체스의 손에 쥐어 주었다. “이걸로 이렇게 찍어 드세요.” “고마워!” “별 말씀을요.” 리체스는 이쑤시개로 작은 사과조각을 콕 찍어 올린다음 입을 크게 벌리고 한 입 베어 먹었다. “우으으으으!” 초콜릿과는 또다른 감미로운 풍미가 입 안 가득 퍼지자 리체스는 몸을 부르르 떨며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처음에는 헤네스가 쥐어준 이쑤시개로 콕콕 찍어 먹었지만, 나중에는 그것도 귀찮은지 마법으로 집어 올려서 먹었다. 어찌나 맛있게 먹는지 헤네스와 준상조차 입맛이 동할 정도다. 곧이어 닭갈비가 나왔다. 맵지 않게 해달라고 한 덕분인지 고춧가루는 좀 적게 들어간 것 같았지만, 그래도 불그스름하긴 마찬가지. “매우면 너무 무리하진 말고.” “네.” 익은 걸 먹어보니 색깔에 비해선 그리 맵지 않은 느낌이었지만 이런 음식에 그리 익숙하지 않은 헤네스는 역시 조금 매웠던 모양인지 몇 번이나 물컵을 입으로 가져갔다. 닭갈비를 다 먹고 나자 이어서 막국수가 나왔다. 준상은 보기에도 화끈해 보이는 비빔 막국수였고, 헤네스는 사각거리는 동치미 육수가 담긴 물 막국수였다. 둘이서 닭갈비를 먹는 동안 샐러드 한 접시를 다 비우고 배를 두드리던 리체스는 지금껏 보지 못했던 새로운 형태의 음식이 나오자 곧바로 관심을 보였다. “그건 뭐야? 응?” 혼자서 샐러드 한 접시를 다 먹어 놓고 다시 새로운 음식에 흥미를 보이는 리체스의 모습에 헤네스는 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그녀답게 내색하지 않고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한 번 먹어 보실래요?” “응!” 헤네스는 작은 접시에 막국수를 포크로 조금 떠올려 육수와 함께 담아주었다. 리체스는 마법으로 국수 가락을 떠올려 먹기 시작했다. 사이즈 탓에 국수라기 보다는 떡볶기이나 가래떡을 베어 먹는 형상이었지만, 제법 입맛에 맞았던 모양인지 이내 마구 흡입하기 시작한다. 준상은 그 모습을 보며 이 요정 여왕의 위장 속에 혹시 정령의 문이 감추어져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떠올렸을 정도다. 아무튼 그렇게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친 셋은 음식점을 나와 잠시 차를 타고 천천히 주위를 돌아 보았다. 이때만큼은 식사 시간에 부르지 못한 몽몽이와 엘리멘탈 드래곤도 차 안에 소환해 둔 상태였다. 헤네스가 펫 두 마리에게 먹을거리를 나누어 주는 동안, 준상은 근처의 강변으로 차를 몰아갔다. 준상으로서는 임서윤에게서 사건의 내용을 요약한 내용을 받아보려면 아직 시간이 좀 필요했기 때문에 천천히 드라이브를 즐기며 휴식을 취할 요량이었다. 하지만. 헤네스가 건네주는 아몬드 조각을 열심히 받아먹던 몽몽이가 갑자기 고개를 휙 돌리는가 싶더니 대시 보드 위로 올라가 길 건너편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까, 깜짝이야!” 샐러드와 막국수를 배불리 먹고 대시 보드 위에서 졸고 있던 리체스는 물론이거니와 땅콩을 까서 건네주던 헤네스나 운전 중이던 준상 역시 몽몽이의 갑작스런 행동에 반응을 보였다. 준상은 곧바로 안목의 능력을 발동해 주위를 돌아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허름한 운동복 차림의 한 남자가 머리에서 검은 아지랑이를 피워올리며 터덜터덜 강변을 걸어가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준상의 시야에 그 모습이 잡히기가 무섭게 메시지가 눈앞에 나타났다. [당신은 특수 임무 발동 조건을 만족하고 있습니다.] 그런 메시지가 눈앞에 나타나기가 무섭게 새로운 퀘스트 정보가 도착했다. 다크 시드를 회수하십시오. :이 사악한 어둠의 씨앗은 본래 이 세계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물건입니다. 사용자를 제재하고 다크 시드를 회수하십시오. [이 퀘스트는 단독 퀘스트입니다.] “...” 준상은 다시 통찰의 능력으로 상대의 역량을 확인했다. 그러자 녹색 깃발이 표적의 머리 위에 떠오른다. 녹색은 준상보다 한 수 아래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뜻.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참고일 뿐, 다크 시드가 가진 터무니 없는 능력을 감안하면 방심은 금물이었다. 어쨌든 예상치 못한 곳에서 생각보다 훨씬 간단하게 이번 여행의 목표를 찾아낸 준상은 곧장 골목으로 차를 몰고 들어가 인적이 없는 곳에 멈춰섰다. 그리고 차에서 내리기가 무섭게 리체스에게 말했다. “헤네스. 모습을 숨기고 리체스와 함께 있어라.” “조심하세요.” “알았다.” 다소 위험하긴 했지만, 새로 얻은 투명화 아이템은 물론이고 리체스의 마법 능력도 시험해 볼 필요가 있었다. 요정계가 아니기에 제약을 받기는 해도 무려 49레벨이나 되는 마법 능력을 그대로 묵혀둘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준상은 곧바로 망토와 부츠를 착용한 다음 모습을 감춘 상태로 목표의 뒤를 쫓았고, 그의 뒤를 따라 헤네스와 리체스가 역시나 모습을 숨긴 채 조금 떨어진 곳에서 움직였다. 준상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목표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 상대는 피곤에 지친 듯한 모습의 중년 남자였다. 어디서 대충 주워 입은 것처럼 보이는 허름한 운동복으로 몸을 감싼 그는 어두운 표정을 지은 채 강변을 터덜터덜 걷고 있었다. 혹시 사건 현장을 다시 살피기 위해 움직였던 것은 아닐까. 굳이 범인은 범행 현장에 반드시 돌아온다는 말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자신이 저지른 일의 이후 상황을 확인하고자 하는 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습성이다. 목표는 강변을 조금 더 걷다가 잠시 주위를 살피는가 싶더니 길옆에 난 작은 오솔길로 방향을 틀었다. 혹시 들킨 것일까. 준상은 요정들의 대화법으로 리체스에게 지시를 내렸다. -따라 들어가겠다. 여기서 기다리도록. -네. 리체스의 대답이 들려오기가 무섭게 준상은 위상전이를 펼쳐 숲으로 들어갔다. 오솔길 근처의 숲으로 들어가자, 목표가 멈춰서서 다시 한 번 주위를 살피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 가만히 숨죽인 채 기회를 살피는데, 문득 목표가 신발과 양말을 벗는가 싶더니 이어서 운동복 하의를 벗는 모습이 보였다. 갑자기 저게 뭐하는 짓인가 하며 준상이 바라보고 있는 동안, 남자는 속옷마저 벗더니 그대로 하체를 변화시켰다. 갑자기 남자의 하체가 통나무처럼 굵고 시커멓게 변하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준상은 그가 뭘 하려는 것인지 깨달았다. 놈은 이곳에서 전속력으로 도망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사실을 깨닫기가 무섭게 곧바로 인벤토리에서 랑다잘의 분노를 꺼내 들었지만, 준상이 거대한 철구의 손잡이를 잡는 순간 이미 목표는 엄청난 도약력을 선보이며 산을 향해 뛰어오르고 있었다. “젠장.” 저런 엄청난 도약력을 지닌 채 숲과 산을 뛰어넘는다면 경찰이 제아무리 주위를 에워싸도 잡을 방법이 없다. 준상은 곧바로 데안달라스의 파발꾼으로 콤보 카드를 바꾸었다. 위상전이로는 추격에 한계가 있다고 느낀 탓이다. 그리고 동시에 리체스에게 통보했다. -역소환한다. -네? 리체스는 놀란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지만, 준상은 곧바로 헤네스와 리체스를 포함한 다른 모든 펫을 역소환한 다음 미니맵에서 빠른 속도로 사라지는 목표를 향해 질주를 시작했다. 비록 숲과 지형이 장애물로 앞을 가로 막았지만, 준상의 엄청난 신체능력을 기반으로 한 파발꾼 콤보는 도망치는 목표를 추적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물론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준상이 질주로 뒤를 따르자 곧바로 놈이 눈치를 챈 것이다. “누, 누구냐!” “...” 놈은 당황한 목소리로 그렇게 외쳤지만 준상은 대답하지 않은 채 묵묵히 뒤를 쫓았다. 그러자 놈이 다시 외쳤다. “그가 보낸 거냐?” “...”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다만 또다시 나온 ‘그’라는 말을 듣는 순간 표정이 굳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순간적으로 변화하는 준상의 표정을 보았던 것일까. 놈은 더욱 빠르게 도망치며 다시 외쳤다. “어쩔 수 없었어! 나도 이럴 생각은 아니었다고!” “...” “젠장, 실수였다니까! 안 그래도 슬슬 자리를 옮길 생각이었다고!” “...” 놈은 아마도 금제라는 것을 어기는 바람에 ‘그’라는 존재로부터 내려올 제재를 두려워하고 있는 듯 했다. 준상이 계속 말없이 추격을 이어가자 놈은 안 되겠다 싶었던지 널따란 공터에 내려앉으며 멈추어 섰다. “알았어. 그래, 말해봐. 그렇게 입 꾹 다물고 쫓아오지만 말고 그가 뭐라고 했는지 말해 보라고.” “...” 놈은 준상의 몸이 변화하지 않은 것을 보고도 이상하게 생각지 않는 모습이었다. 혹시... 고위급 다크 시드 사용자들은 저런 식으로 신체를 변이하지 않고도 능력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닐까. 만약 그런 능력자가 자신의 능력을 감춘 채 암약하고 있다면 이것은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다. “젠장... 벙어리냐? 왜 말을 안 해?” 놈은 불안한 표정으로 다시 그렇게 다그쳤다. 준상은 잠시 갈등했다. 잠시 더 대화를 이어가며 놈에게 정보를 끌어내는 편이 좋을까. 아니면 방심하고 있는 동안 놈을 처치하는 것이 좋을까. 하지만 준상이 미처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놈의 태도에 변화가 일어났다. “자, 잠깐... 몸이 변하지 않은 채로 날 쫓아왔다고?” “...” “서, 설마... 칠성좌십니까?” 칠성좌라니.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어디 만화 같은 데나 나올 법한 중2병스러운 그 명칭을 듣는 순간 준상은 다시금 얼굴을 찌푸렸고, 그 모습을 본 표적은 그대로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외쳤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미처 몰라 뵙고... 이렇게 몸소 오실 줄은 정말 미처 몰랐던 터라...”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기는 했지만, 준상으로서는 나쁘지 않은 일이다. 준상은 놈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 염동력으로 놈을 일으킨 다음 그 목을 포박의 능력으로 붙잡아 일으켰다. “커억!” 역시 준상보다 능력이 낮아서인지, 놈은 포박에 걸리자 그대로 몸을 축 늘어뜨리며 들어올려졌다. 준상은 간단하게 놈을 제압하는데 성공하자 조용히 입을 열었다. “칠성좌가 뭐지?” “...” 순간 놈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뭔가 일이 이상하게 꼬였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깨달은 탓이다. “그, 그게 무슨...” “말해라. 칠성좌가 무엇인지.” “...” 놈은 설마 하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발악하는 듯한 큰 목소리로 외쳤다. “너... 넌 도대체 누구냐! 누군데 이런...” 물론 준상은 놈과 평범하게 대화를 나눌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억눌러 두고 있던 공포의 시선과 사안, 그리고 광견의 위엄을 동시에 뿜어내었다. “컥!” 준상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괴랄할 정도로 끔찍한 위압감과 더불어 그 두 눈에서 불길처럼 뻗어 나오는 안광이 시야를 가득 메우자 놈은 부르르 떨며 그대로 공포에 짓눌려 버리고 말았다. “말해라. 칠성좌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는 또 누구인지.” 하지만 그렇게 공포에 짓눌려 온몸을 덜덜 떠는 와중에도, 놈은 준상을 비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네 놈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서둘지 않아도... 언젠가는...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다... 큭큭큭.” “...” “젠장... 이제 얼마 남지 않았는데... 빌어먹을.” 준상이 그 말에서 뭔가 이상한 낌새를 깨닫고 얼굴을 찌푸리는 순간, 갑자기 놈의 몸이 검은 섬광과 함께 폭발했다. 00149 트롤러 ========================================================================= 순식간에 어둠은 주위의 사물들을 집어 삼키며 그 세력을 팽창시키다가 결국 거대한 폭음과 숲 일부를 소멸시키고 사라졌다. “큭...” 준상은 폭발이 사라지자 폭심에서 조금 떨어진 장소에서 벌거숭이가 된 채 주저앉았다. 바로 코앞에서 그런 식으로 자폭을 할 줄이야. 이전에 상대했던 자들이 최후의 순간까지 삶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것을 생각하면 이건 정말 쉽게 예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게다가 이 터무니없는 위력이라니. 미처 피할 틈조차 없이 일이 벌어진 상황이었지만, 준상은 그 순간 얼마 전에 새로 얻은 카드를 떠올리고 급히 장착을 시도했다. 그 카드의 이름은 철벽. 방어력을 향상시켜 줄 뿐만 아니라 모든 속성에 대한 저항력을 올려주는 방어카드다. 이 카드를 장착할 경우 준상은 무려 89퍼센트의 물리 저항력을 얻게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폭으로 인한 피해를 완전히 막아내지 못했다. 만약 준상이 아닌 다른 귀환자였다면, 그대로 형체도 없이 찢겨져 죽었으리라. “후...” 우선 인벤토리를 열어 망토와 부츠가 무사한지 확인했다. 경황 중에도 얼른 인벤토리에 집어넣은 덕분에 이 두 아이템은 별로 손상을 입지 않았다. 준상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만약 이 두 아이템이 손상되었다면 아까워서 밤잠을 설쳤을 것이다. 꼴이 우습긴 했지만, 다시 망토와 부츠를 착용하고 서둘러 그 자리를 벗어나려다 문득 바닥에 떨어진 다크 시드를 발견했다. 폭발의 영향인지 뿜어져 나오던 검은 아지랑이는 매우 희미해져 있었지만, 손으로 집어 살펴보니 생채기 하나 없이 깨끗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도대체 이것의 정체가 무엇이길래. 하지만 그런 의문을 풀 겨를도 없이 다크 시드는 준상의 손 위에서 사라졌고, 이어서 퀘스트 정보가 갱신되며 완료 메시지가 나타났다. 다크 시드를 회수하십시오. :이 사악한 어둠의 씨앗은 본래 이 세계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물건입니다. 사용자를 제재하고 다크 시드를 회수하십시오. [이 퀘스트는 단독 퀘스트입니다.] -> 완료! 보상 : 경험치 조금, 특수 임무 보상 상자. -> 보상을 지금 수령하시겠습니까? (Y/n) _ (주의) 수령하지 않은 보상은 7일후 자동 소거됩니다. “...” 별 다른 싸움이 없었던 탓인지, 아니면 상대가 약해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제까지의 다크 시드 회수 퀘스트와는 달리 경험치가 조금이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아까운 옷만 버렸다는 생각에 입맛을 다시며 일단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기 전에 모습을 감추었다. 그리고 얼른 그 자리에서 벗어나려는데, 하늘로부터 커다란 날개짓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얼른 고개를 들고 살펴보니, 사람의 몸체에 커다란 새의 날개를 한 괴이한 모습을 지닌 자 두 명이 하늘을 날아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 두 명 또한 어김없이 머리에서 검은 아지랑이를 마치 후광처럼 뿜어내고 있었다. [당신은 특수 임무 발동 조건을 만족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특수 임무 발동 조건을 만족하고 있습니다.] 연거푸 두 번이나 같은 메시지가 튀어나오고, 다시 그 뒤를 이어 다크 시드 회수의 퀘스트가 두 번 연속으로 발동되자 준상은 얼굴을 찌푸렸다. 하나씩 상대하는 것도 짜증나는 판에, 한꺼번에 두 명이라니. 준상은 일단 폭심으로부터 이탈해 숲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놈들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거... 설마 자폭한 건가?” 가장 먼저 하늘을 내려온 단발 머리의 여자가 날개를 팔로 변형시키며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뒤따라 내려온 긴 머리의 여자가 마찬가지로 신체를 변화시키며 대답했다. “너도 아까 그 검은 폭발 봤잖아. 그런 건 자폭이 아니면 일어날 수 없는 현상이라고.” “그렇기는 한데... 그 메뚜기 자식이 자폭이라니, 도무지 믿기질 않아서 말이야.” “하긴.” 이 추운 날에 나시 하나 덜렁 입은 채로 돌아다니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멀리서 보기에도 요사스러운 느낌이 물씬 풍기는 외모가 가장 먼저 눈에 띈다. 그녀들은 잠시 주위를 살피더니 다시 두 팔을 날개로 변화시켰다. “이 정도면 확실히 뒤졌겠지?” “그러라고 있는 자폭이니까.” “껄떡대기는 해도 도망치는 것 하나는 수준급인 놈이었는데. 좀 씁쓸하긴 하네.” “가자. 사람들 몰려오기 전에.” “그래.” 두 여자들은 그대로 날아 올라 숲 위를 낮게 활공하며 어디론가 이동하기 시작했다. 준상은 옷을 챙겨 입을 틈도 없이 그런 둘의 뒤를 위상전이로 추적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한 탓인지 나무 사이로 숨어들며 빠르게 이동하기는 했지만, 아까 자폭한 놈보다는 느린 편이었고 설령 시야에서 놓쳐도 미니맵에는 계속 표식이 나타나고 있었기 때문에 추적하는 것에는 큰 무리가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이동하던 두 여자는 숲 속의 작은 집 위로 날아 내렸다. 지은 지 제법 오래되어 보이는 낡은 집인데다 관리도 별로 안 되어 있어서 폐가라는 말이 더 어울릴 듯한 느낌이다. 준상은 두 여자의 움직임을 나타내는 표식이 폐가 안에서 멈추자 일단 추적을 멈추고 캐비닛을 꺼내 옷부터 꺼내 입었다. 어째 기시감이 든다. 전에도 한 번 이런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준상은 그런 생각들을 떠올리다가 이내 고개를 저으며 옷이 담긴 캐비닛을 인벤토리로 되돌렸다. 코앞에서 터진 폭발로 인해 문자 그대로 머리가 폭탄 맞은 것처럼 솟구치고 몸 여기저기에 검댕이 좀 뭍긴 했지만, 그것까지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옷을 챙겨 입는 일이 끝나자 준상은 위상전이를 통해 폐가 안으로 잠입했다. 잡초가 무성하게 피어난 마당을 조용히 지나치자 이내 유리창이 다 깨진 거실 안에서 몇 사람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메뚜기가 자폭을 했다고? 그거 확실해?” “못 믿겠으면 네가 직접 가서 보든가.” 준상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들의 모습을 확인하는 순간 또다시 눈앞에 메시지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당신은 특수 임무 발동 조건을 만족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특수 임무 발동 조건을 만족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등장한 것은 조금 얍실하게 생긴 남자와 등을 구부정하게 하고 침울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작은 체구의 남자, 이렇게 두 명이었다. 통찰의 능력으로 살펴보니 아까 자폭한 놈과 마찬가지로 이놈들 역시 모두 녹색의 깃발로 능력치가 표시되어 있었다. 하지만, 준상보다 능력이 떨어진다 해도 한꺼번에 네 명이라니. 게다가 얘기하는 것으로 봐서는 아까 그 놈도 이들과 함께 행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어떻게 된 거지? 그럴 놈이 아니잖아?” 얍실한 외모의 남자의 말에 침울한 표정의 남자가 더듬거리며 말을 받았다. “게다가... 그 놈이 작정하고 도망치면... 아무도 못 잡는다고...” 그때, 남자들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단발머리의 여자가 조심스러운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역시... 그가 온 것 아닐까.” “...” 그 말에 거실 안에 모여 있던 네 남녀의 표정이 일시에 굳어 버린다. 잠시 침묵이 감도는가 싶더니 긴 머리의 여자가 불안한 표정을 지은 채로 말했다. “설마. 아무리 금기를 어겼다고는 해도...” 그러자 얍실한 표정의 남자가 상소리를 입에 담았다. “X팔. 그러니까 좀 작작 처먹으라 그랬잖아!” 긴 머리의 여자는 그 말을 듣자 바로 발끈했다. “이 개새끼가 어디서 욕질이야? 그리고 나만 먹었니? 응? 나만 먹었냐고! 맨 처음에 여경들 잡아다가 좋다고 실실거리며 처먹다가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든 게 어디의 누구니? 응? 말 좀 해봐!” “빌어먹을...” 준상은 가만히 그늘 속에 몸을 숨긴 채로 놈들의 대화를 들으며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대로 뛰쳐나가서 동시에 저들을 상대하는 것은 아무리 준상이라도 너무 위험한 일이다. 그렇다면 저들이 따로 나뉠 때를 기다려야 하는데... 들려오는 얘기로 봐서는 이전부터 한 데 몰려 다니는 놈들인 듯 하니 혼자 되기를 기다리는 것도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문득 가만히 앉아 있던 침울한 표정의 남자가 코를 킁킁거리는가 싶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누... 누구냐!” 준상은 얼굴을 찌푸렸다. 투명화의 약점은 시각을 제외한 다른 감각의 탐지에는 무용지물이란 점인데, 아마도 저 놈의 능력 가운데 그런 식의 탐지 능력이 있는 모양이었다. 이대로 뛰쳐나가서 들이쳐야 할까. 하지만 바로 그때. 침울한 표정의 남자가 다시 코를 킁킁거리더니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이, 이건... 메뚜기의 냄새?” “뭐?” 남자의 말에 조심스럽게 기세를 끌어올리며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던 다른 세 남녀의 표정이 참혹하게 굳어졌다. “서, 설마... 그...” 남자는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이내 고개를 저으며 다시 말했다. “아니야. 이 냄새는 그가 아니야... 하지만 그렇다면...” 저 놈에게 후각이라는 감각이 존재하는 이상 투명화를 통한 기습은 먹히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잠시 고민하던 준상은 문득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어차피 들킨 상황. 그렇다면 더 많은 정보를 얻기 위해서라도 모험을 해볼 필요가 있다고 준상은 결론지었다. “...” 일단 한 번 결단을 내리자, 준상의 행동은 빨랐다. 곧바로 공포의 시선과 사안, 그리고 광견의 위엄을 동시에 뿜어내며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헉!” “이, 이건...” 네 남녀는 갑자기 망토를 몸에 걸치고 머리가 사자처럼 치솟아 오른 거무스름한 피부의 남자가 붉은 안광을 뿜어내며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거짓말처럼 모습을 드러내자 헛숨을 들이켰다. 다크 시드의 능력 때문인지 보통의 사람들처럼 단숨에 상태 이상에 빠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공포가 뇌수를 침범해 들어와 사지의 신경이 마비되고, 더불어 준상의 몸에서 뿜어지는 꺼림직함에 금방이라도 도망치고 싶어지는 기분이 드는 건 그들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누가 과연 이런 엄청난 능력을 지닐 수 있겠는가. 귀환자? 어림도 없다. 적어도 그들이 알기에 귀환자는 아직 그 정도의 힘이 없었다. 얼마 전에 서울에서 자신들과 같은 존재 하나가 귀환자들에게 사냥 당했다는 얘기가 있기는 했지만, 그것도 혼자서가 아니라 여럿이 몰려들어 처치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렇다면 이 남자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누구길래 단숨에 그 존재감만으로 자신들을 두려움에 떨도록 만드는 것일까. 네 남녀는 동시에 그런 의문을 떠올렸고, 이내 자신들이 알고 있는 지식 안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 “무, 무례를 용서 하십시오. 칠성좌시여.” 침울한 표정의 남자가 그렇게 외치며 머리를 조아리자, 다른 세 남녀도 얼른 고개를 숙이며 외쳤다. “미, 미처 알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칠성좌님을 뵙습니다.” “일곱 별의 주인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준상은 네 남녀가 이구동성으로 그런 말을 외치자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하필 착각을 해도 그따위 중2병스러운 별칭을 가진 놈들이라니. 칠성좌. 일곱 별의 주인. 정말 자다가도 이불을 걷어차며 벌떡 일어나 달밤에 체조를 하고 싶어지는 별칭이 아닌가. 하지만 준상이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표정을 구기자, 네 남녀들은 얼른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그들은 생각했다. 메뚜기는 아마도 이 남자의 신경을 건드렸던 모양이라고. 어째서 자폭이라는 최악의 수단으로 스스로 죽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최후는 분명 이 남자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그들은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또 한 편으로는 자신들에게 내려질 제재를 피할 방법을 모색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00150 트롤러 =========================================================================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침울한 얼굴의 몸집 작은 사내였다. “그...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심려를 끼쳐 드려서... 정말 죄송합니다.” 그가 조금 어눌한 말투로 그렇게 사죄의 말을 하며 깊이 고개를 조아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다른 세 남녀도 이구동성으로 사죄를 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한번만 용서해 주세요.” “다신 금기를 깨지 않겠습니다. 약속드릴게요.” 준상은 대답하지 않은 채 이들의 태도와 말에서 정보를 끌어내어 분석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이들이 어떤 형태의 조직을 이루고 있는 것은 확실한 듯 했다. 지금까지 그가 사냥했던 두 명의 다크 시드 사용자들에게서는 그런 내용을 파악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들은 그 두 명과는 달리 아예 처음부터 다섯 명이 한 데 뭉쳐 활동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귀환자들이 파티를 짜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이들을 직접적으로 통제하는 것이 바로 ‘그’라고 칭해지는 존재로 보인다. 그렇다면 칠성좌는 또 무엇일까. 이것 역시 확실한 내용을 파악할 수는 없지만, 당장 공격할지도 모르는 상대를 앞에 두고 이렇게 엎드려서 사죄하는 것을 보면 단순히 무리의 우두머리나 강자 정도의 존재가 아니라 생사여탈의 권한을 지닌 존재가 아닐까 싶다. 물론 그런 존재의 인상착의조차 모른다는 건 조금 의문스러운 일이긴 했지만, 그들의 조직이 비밀스러운 형태의 것이라면 말단 조직원이 최상층부의 실권자에 대한 정보를 제대로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은 차라리 당연한 일일수도 있다. 여기까지 생각을 정리한 준상은 일단 자신의 추론이 맞는지 시험해볼 필요를 느꼈다. 그리고 그가 그런 생각을 떠올렸을 때, 처음 입을 열었던 작은 체구의 남자가 뭔가 다시 말하려고 비굴한 표정으로 슬며시 고개를 들다가 준상과 눈이 딱 마주쳤다. 순간 준상은 결정했다. 첫 제물은 바로 이 놈으로 해야겠다고. 이 작은 체구의 사내가 어떤 능력을 지녔는지는 확실치 않았지만, 적어도 후각 등으로 투명화 상태의 준상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혹시라도 일이 틀어져서 정체가 발각되었을 경우를 대비한다면, 역시 가장 먼저 처치할 필요가 있었다. 남자는 준상과 눈이 마주치자 얼른 고개를 내리 깔았지만, 다음 순간 자신의 몸이 준상에게로 확 딸려가는 것을 느끼자 기겁하며 용서를 구했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감히... 주제도 모르고... 컥!” 사내는 기겁하며 용서를 구했지만 준상이 발휘한 염동력의 힘에 끌려 들어가 순식간에 멱살을 잡히고 말았다. 그렇게 한 번 잡히고 나자 곧바로 포박의 힘에 제압되어 사지의 힘이 쭉 빠져나갔다. “으, 으으으...” 남자는 공포에 빠졌다. 모처럼 다크 시드가 준상이 발하고 있는 세 가지 상태 이상 능력을 막아주고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멱살이 잡힌 채 죽음이 코앞에 다가온 상황에서는 다크 시드가 아닌 그 무엇의 도움을 받더라도 골수까지 치밀어 오르는 공포를 감당할 방법이 없다. 그리고 마침내 생존 본능이 이성을 억누르자 남자의 몸은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변이를 시작했다. 주둥이가 쭈욱 길어지고 콧잔등은 반들반들하게 변했다. 앞니가 길게 솟아나고 손에서는 날카로운 발톱이 뻗어 나왔다. 순식간에 온 몸에 털이 자라났으며 입고 있던 허름한 옷은 부풀어 오른 근육에 의해 찢겨 나가고 말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 모든 변이가 끝나자 준상은 자신이 튜토리얼에서 물어 죽인 바 있는 괴물 쥐가 떠올랐다. 이런 걸 뭐라고 하더라. 쥐 인간? 아니면 웨어랫? 물론 보통 몬스터라고 불리는 그런 존재와는 다르다고 봐야 한다. 다크 시드가 형상화하는 것은 사용자가 지닌 욕망. 어째서 그의 욕망이 이런 쥐 인간의 형상으로 구현되었는지는 알 도리가 없으나, 준상으로서는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최소한 자신과 같은 인간을 죽인다는 죄책감은 느끼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 쥐 인간은 꿈틀거리며 골수 안으로 침범해 들어온 공포라는 감정을 몰아내고 신체의 자유를 획득하려 했으나, 그보다 준상의 주먹이 먼저 움직였다. 퍽! 퍼걱! 준사은 쥐 인간의 거대한 몸을 공중으로 들어올린 상태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그 얼굴을 연이어 후려쳤다. 이미 인간의 형상을 버렸으니, 그로서는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케엑! 케게겍! 구강 구조가 바뀌어 버린 탓에 인간의 비명조차 지를 수 없게 된 쥐 인간은, 준상이 묵묵히 휘두르는 주먹에 맞으며 괴성을 지르다가 마침내 어느 순간에 이르자 팔을 움직여 자신의 목을 움켜쥐고 있는 준상의 팔에 발톱을 박았다. 하지만 다음 순간. 퍼석! 수박이 아스팔트 위에 떨어지며 그 잘 익은 빨간 속을 사방에 흩어 놓듯이, 쥐 인간의 머리는 온 몸의 솜털이 곤두서는 끔찍한 소음과 함께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세 남녀는 이제 고개를 처들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부들부들 떨기만 했다. 단지 눈이 마주쳤다는 이유 만으로, 눈 앞에서 자신의 동료 하나가 맞아 죽었는데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준상은 선명한 분홍빛을 발하는 쥐 인간의 뇌수 속에서 큼지막한 다크 시드를 꺼냈다. 그러자 그의 좌측 시야에 나타나 있던 네 개의 퀘스트 중 하나가 완료 메시지를 띄운다. 이제 남은 것은 세 명. 준상은 일단 손에 들고 있던 쥐 인간의 시체를 옆으로 획 집어 던진 다음 바닥에 납작 엎드려 떨고 있는 세 남녀를 바라 보았다. 두 여자들은 하피처럼 두 팔이 날개로 변하는 모습을 이미 보았으니, 사건 현장에 남아 있던 예리하게 절단된 흔적은 아마도 얍실하게 생긴 남자의 능력일 가능성이 높았다. 준상은 쥐 인간의 발톱이 후벼 판 팔의 상처가 재생력에 의해 빠르게 수복되는 것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저 남자 녀석의 능력이 그와 같다면, 방금 전 같은 방식으로 처리하기는 어렵다. 쥐 인간의 경우만 보더라도 죽음에 직면하자 공포에 완전히 짓눌려 있던 상태에서 스스로 벗어나 준상의 팔에 상처를 입히지 않았던가. 만약 코앞에서 그런 식으로 절단 능력을 마구 펼친다면 설령 철벽을 사용하더라도 아무런 피해 없이 버티기는 어려울 지도 모른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준상은 엎드려 있는 세 남녀를 바라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셋 남았군.” “...” 메뚜기라 불리던 녀석의 자폭을 코앞에서 견디면서 먼지를 잔뜩 먹은 탓인지 목소리가 갈라진다. 하지만 그냥도 묵직하기 이를 데 없는 준상의 목소리가 그렇게 갈라져서 쇳소리를 내자 세 남녀에게는 마치 저승사자의 속삭임처럼 끔찍한 느낌으로 전해졌다. 준상은 꼼짝도 못하는 세 남녀를 무시한 채 집 안으로 들어가 어디서 구해놨는지 모를 고급 소파 위에 앉으며 다시 말했다. “귀찮군.” 귀찮다니. 설마 우리들을 죽이기조차 귀찮다는 말일까. 세 남녀는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준상의 말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알아서 한 놈 더 죽어라.” “...” 알아서 죽으라니. 순간 세 남녀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 말에 숨겨진 또 하나의 뜻을 깨닫자 세 남녀는 후다닥 일어나 서로를 바라보았다. 준상은 분명히 한 놈 더라고 말했다. 그것은, 다시 말해 셋 중에 둘은 살려주겠다는 뜻이 아닌가. 세 남녀는 서로를 노려보며 살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단발머리 여자였다. “애초에 이 일의 시작은 네 녀석이 여경을 끌고 와 잡아먹은 일 때문이었어.” 그러자 남자도 지지 않고 말했다. “지랄하네. 작작 좀 처먹으라고 그렇게 말해도 한 귀로 흘렸던 년이 누구였는데?” 단발머리 여자는 발끈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긴 머리 여자와 눈빛을 교환했다. 사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여자들 가운데 하나가 남자와 손을 잡고 나머지 한 명을 해치우는 방법이다. 하지만 이 두 여자들은 얍실한 표정의 남자와 그리 사이가 좋지 못했다. 가장 강하다는 이유로 사사건건 두목 행세를 하려 들었던 것도 문제였고, 그런 주제에 틈만 나면 그녀들을 침대로 끌어들이려고 수작을 거는 것도 문제였다. 지금까지는 두 여자가 힘을 합쳐서 남자의 그런 시도를 막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그녀들 중 하나가 죽게 된다면 소파에 앉아 권태로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칠성좌의 일인이 사라지는 순간 살아남은 여인은 저 얍실한 남자의 장난감이 되고 말 것이다. 스스로 자청해서 누군가의 장난감이 될 것이라면, 차라리 지금 이 자리에서 이 얍실한 놈을 해치운 다음 귀찮은 기색을 팍팍 풍기고 있는 칠성좌의 일인을 유혹하는 편이 백번 낫다. 그런 생각을 떠올리자 두 여자는 몸이 후끈 달아오르는 기분마저 들었다. 남자는 가장 강한 자신에게 적어도 한 명은 붙으리라 생각했지만, 두 여자가 눈빛을 교환하는 모습을 보고 도리어 자신이 목표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이... 잡년 들이.” 남자가 그렇게 중얼거리자 두 여자는 곧바로 팔을 날개로 바꾸며 날아오르며 준상의 눈치를 살폈다. 도망가는 걸로 보여서 추격이라도 당하면 낭패이기 때문에 혹시나 하고 바라봤지만, 준상은 오히려 입을 쩍 벌리며 하품을 하고 있었다. 자신들 따위는 도망쳐 봐야 손바닥 위라는 뜻일까. 얼핏 생각하기에는 굉장히 모욕적인 일일수도 있었지만, 두 여자는 오히려 준상의 그런 자심감에 빠져들었다. 이건 준상조차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지만, 이것은 은연중에 요정 키스의 부작용으로 생긴 뽀샤시의 효과가 두 여자의 심리에 영향을 주는 바람에 생겨난 심리 변화였다. 어쨌건, 적아가 확실하게 구분되자 세 남녀는 더 이상 주저하지 않고 곧바로 전투에 돌입했다. “이 망할 년들! 죽어라!” 남자는 두 팔을 날카로운 칼처럼 변형시키더니 허공을 향해 휘둘렀다. 그러자 남자의 팔은 마치 채찍처럼 길게 늘어나며 여자들을 향해 날아들었다. “어림없다!” 여자들은 급히 날개를 움직여 그 공격을 피한 다음, 두 다리를 변이시켰다. 곧바로 여자들이 입고 있던 허름한 면바지가 찢겨지며 털이 덥수룩하게 난 독수리의 다리로 모습이 바뀌었다. 준상은 그 모습을 보고 이내 한 가지 단어를 떠올렸다. 그것은 바로 하피. 여자와 새의 몸이 합쳐진 그리스 신화의 괴물이다. 쥐 인간 다음엔 하피인가. 메두사 같은 형상이 아닌 건 다행이지만, 기왕 육체를 변이시킬 것이라면 어째서 좀 더 아름다운 쪽으로 선택하지 않는가 하는 의문이 살짝 들었다. 가능성은 두 가지. 원래부터 저 두 여자가 이런 엽기적인 형상을 좋아했으리라는 것이 첫 번째이고, 두 번째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변이되는 신체의 형태를 임의로 선택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다. 처음에 처치했던 입 괴물과 두 번째 처치했던 괴물 꽃을 생각해 보면, 아무래도 가능성이 높은 것은 변이시 신체의 형태를 임의로 선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쪽이 아닐까 싶다. 준상이 그렇게 느긋한 태도로 그들이 지닌 능력의 허실을 파악하고 있는 동안 세 남녀는 상대를 쓰러뜨리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 하고 있었다. -카아아아아! 정말로 처음부터 하피의 그것을 기반으로 한 것인지, 여자들은 입을 크게 벌리고 괴성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준상은 그 괴성을 듣자 피부를 통해 살짝 저릿한 느낌이 전해지는 것을 느끼고 이것이 일종의 정신 공격임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굳이 비교를 하자면, 이전에 헤네스가 사용했던 욕쟁이 할매 콤보보다 한 단계 낮은 수준이 아닐까 싶다. “크윽! 이 망할 년들이!” 남자의 절단 공격은 확실히 넓은 범위를 한 번에 쓸어버릴 정도의 위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길게 늘어난 팔은 개구리의 혀처럼 너무 먼 거리를 공격하면 위력과 속도가 반감되는 단점이 있었다. 여자들은 빠르게 하늘을 날면서 정신 공격을 가하다가 빈틈이 보이면 솔개처럼 내리 꽂히며 남자의 머리를 노렸지만 쉽게 공격을 성공시키지 못했다. 뭐라해도 남자의 절단 공격은 단숨에 그녀들의 몸을 반토막으로 내고도 남을 만한 위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세 남녀의 싸움은 점차로 치열해졌고, 이내 그들의 몸에는 상처가 하나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물론 다크 시드의 치유력은 그런 상처들을 빠르게 치유시켰지만, 시간이 지나 점차 상처가 늘어나기 시작하자 단순히 치유력만으로는 버티기 어려운 지경에 도달했다. 이렇게 되자, 불리해지는 건 혼자서 두 여자의 공격을 감당해야만 하는 남자 쪽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체력이 떨어지자 위력적이던 절단 공격에도 힘이 빠지기 시작했고, 거기에 여자들의 정신 공격까지 가해지자 점점 몸이 무거워졌다. 아니나 다를까. 기회를 노리던 긴 머리 여자가 벼락 같이 내리꽂히며 강철 같은 발톱으로 남자의 어깨를 잡아 부쉈다. “크아아악!” 원래는 머리를 노린 공격이었지만, 그 정도만 해도 인간이라면 단숨에 전투 불능이 될 정도의 치명상이었다. 물론 다크 시드의 힘을 지닌 남자에게 있어 그 정도의 상처는 잠시의 시간만 주면 얼마든지 스스로 복구가 가능한 수준의 상처였지만, 불행히도 이 남자에게 그 정도의 여유 시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한쪽 어깨가 부숴져서 두 팔 가운데 하나를 쓰지 못하게 되자, 여자들은 지친 와중에도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맹공을 퍼부어 댔다. 남자는 점차 자신에게 드리우기 시작한 죽음의 그림자를 깨달았다. “이, 이러지 마. 우리들은 동료잖아.” 이제 와서 그런 얘기 해봐야 소용없다는 것은 여자들은 물론이거니와 그 말을 입에 담은 남자 역시 절실하게 깨닫고 있었지만, 당장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런 말이라도 해서 시간을 끄는 정도 밖에는 없었다. 물론 여자들은 그런 말 따위에 현혹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심리적으로 위축된 모습을 보이자 더욱더 강력한 정신 공격을 뿜어내며 공격을 계속했다. 결국 남자는 두 여자의 원독 어린 눈길을 받으며 그녀들의 발톱 아래 갈가리 찢긴 채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헉.... 헉...” “이, 이겼다.” 여자들은 원래의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찢겨진 남자의 시신을 바라보며 승리의 기쁨을 만끽했다. 준상은 그 모습을 끝까지 가만히 지켜보다가, 싸움이 끝나자 천천히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런 그의 손에는, 어느 틈엔가 랑다잘의 분노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거대한 두 개의 철구가 양손에 하나씩 쥐어져 있었다. 00151 트롤러 ========================================================================= 준상이 몸을 일으키자 두 여자는 화들짝 놀라며 얼른 몸을 인간의 형태로 되돌렸다. 그러다가 그의 두 손에 쥐어진 거대한 철구를 보았다. 저런 게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왔는지 모를 일이었지만 자신들의 몸이 변형하는 것과 마찬가지 종류의 것이 아닐까 싶었다. 문제는 저것을 왜 꺼내어 들었는가 하는 점. 의문은 생겼지만 어쨌든 그의 말대로 한 명은 알아서 죽은 셈이고, 처음에 쥐 인간이 눈을 마주쳤다는 이유만으로 죽었던 것을 생각하면 괜히 나서는 건 스스로 화를 불러 일으키는 일이었다. 단발머리 여자는 눈을 질끈 감은 채 얼른 소리내어 외쳤다. “마, 말씀대로 한 명은 알아서 처리했습니다.” “...” 준상은 일단 걸음을 멈추고 그녀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인간의 모습으로 되돌아 오자, 찢겨진 하의 아래로 희멀건 하체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음욕이 짙은 자들이라면 대번에 군침이 동할 만한 모습. 하지만 준상은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녀들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어째서 금기를 지켜야만 하는가.” 두 여자는 갑작스런 준상의 물음에 잠시 당황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이것이 일종의 훈시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금기를 깬 자들에게 제재를 가하는 입장이라면, 용서를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명분이 있어야만 하는 법. 지금의 질문은 그런 명분을 만들기 위한 과정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떠올린 여자들은 그대로 납작 엎드린 채 마치 대기업에 면접시험을 보러온 사회초년생들처럼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급히 입에 담았다. “그, 그러니까... 고귀하신 일곱별의 주인들께서 친히 정하신 바이기 때문에...” 먼저 단발머리 여자가 그렇게 말했지만 준상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물론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는 것일 뿐, 머리 속으로는 그녀들의 말을 정리해 정보를 취합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준상으로부터 별다른 반응이 없자, 이번에는 긴 머리 여자가 급히 말했다. “다가올... 다가올 수확의 날에 차질 없이 대비하고자 함입니다.” 수확의 날. 이건 또 무슨 말일까. 준상은 이것에 대해 묻고 싶은 마음이 일었지만, 금기에 대해 묻는 와중에 다시 수확의 날을 캐묻는 건 그리 자연스럽지 못한 행동이었다. 또 뭔가 나올 말이 없나 싶어 잠시 기다렸다. 그러나 여자들은 그 이상 아는 것이 없는지 불안해 하는 기색으로 눈치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준상은 일단 질문을 바꾸었다. “금기란 무엇인가.” 준상의 입에서 새로운 질문이 나오자 불안에 떨던 두 여자들은 첫 번째 질문을 통과했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합당한 이유가 없는 이상, 함부로 저들의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칠 만한 일을 저지르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 힘을 기르되, 수확의 날 이전에 저들이 경각심을 가지는 일이 없도록 행동에 주의해야 합니다.” 표현은 다소 달랐지만 대충 의미하는 바는 비슷했다. 문제는 또다시 언급된 수확의 날. 과연 저들이 수확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 간혹 과학 소설 등을 보면 지구에 대해 인간의 신체를 이용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만든 목장 같은 것으로 설명하는 경우가 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역시 그런 식의 일이겠지만 그런 이유라면 굳이 수확의 날까지 기다려야 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 의문이었다. 단순히 신체를 이용하는 것 뿐이라면 지금 저들이 가진 힘 만으로도 충분히 목적을 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운송 수단을 기다린다든가,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가 있을 수는 있겠지만 저들이 만약 귀환자 발생 이전부터 존재했던 자들이라면 굳이 위협 요소가 발생하기를 기다리기 보다는 가급적 신속하게 일을 처리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준상이 다시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자 두 여자들은 자신들이 혹시 뭔가 대답을 잘못했나 싶어 부르르 몸을 떨었다. 다행히도, 준상의 입에서 새로운 말이 흘러 나왔다. “너희들은 왜 이곳에 있는가.” 세 번째 질문이 나오자 두 여자는 이번에도 자신이 아는 바를 급히 입에 올렸다. “수확의 날에 대비하기 위함입니다.” 단발머리 여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그렇게 대답했지만, 아무래도 모자라다 여겼는지 긴 머리 여자가 부연 설명을 했다. “다가올 그날, 일곱 별의 주인들께서 벌이시는 일에 차질이 없도록 힘을 기르고 준비하기 위해서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단 하나. 수확의 날이라는 단어 하나 뿐이다. 그리고 정말 중요한 정보는 일곱 별의 주인이나 지금 눈앞에 있는 여자들과 같이 각지에 퍼져 있으리라 생각되는 다크 시드 사용자들을 직접적으로 관리하는 ‘그’라는 존재가 아니면 알아내기 어려울 것 같았다. 어느 정도 정보를 캐낸 준상은 그녀들로부터는 이 이상의 정보는 나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인지했다. 굳이 생각해 본다면 다크 시드의 입수 경로 정도가 있겠지만, 대화의 흐름상 어울리지도 않는 질문이었고,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그’라는 대답이 나오리란 것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때문에 준상은 잠시 두 여자들을 바라보다가 다시 이렇게 말했다. “기회를 주겠다.” “...” 그 말을 듣는 순간 두 여자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기회라는 말에서 자신들을 살려주겠다는 의도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세 번의 기회를 주겠다. 내가 누구인지 맞춰보도록.” “...” 하지만 이어진 준상의 말에 두 여자는 다시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일곱 별의 주인은 모두 여덟 명. 그 이름은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는 북두칠성의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서 일곱 별의 주인이라 부름에도 불구하고 여덟 명이나 되는 것은 육안으로는 잘 보이지 않는 또 하나의 별이 있기 때문이다. 이 별들의 명칭은 문화에 따라 각각 다른데, 흔히 동양권에서 사용되는 명칭은 탐랑, 거문, 녹존, 문곡, 염정, 무곡, 파군의 일곱 별에 여덟 번째인 사조성이 포함된다. 서양권에서는 마찬가지로 두베, 메라크, 페크다, 메그레즈, 알리오츠, 미자르, 알카이드라는 이름이 있고 사조성에 해당하는 알코르라는 명칭 역시 존재한다. 문제는 과연 이 여덟 가지 중에 이 남자가 어디에 속하는가 하는 점. 흔히 일곱 별의 주인이라고 말은 하지만 두 여자는 그들을 본 적도 없고 인상착의에 대해 들은 바도 없었다. 때문에 자신들보다 훨씬 강해 보이는 준상을 대번에 칠성좌가 아닐까 하고 착각한 것이지만, 세 번의 기회를 준다는 그의 말에 이제 이 여자들의 머리 속에서는 자신들도 모르게 준상이 칠성좌의 일인이라는 가정을 사실로 확정지어 버렸다. “잠시만... 상의할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단발 머리 여자가 아무래도 안되겠다 싶었는지 얼른 손을 들고 그렇게 질문을 했지만 준상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공포의 시선과 사안과 광견의 위엄을 더 강렬하게 뿜어내었다. “힉!” 단발머리 여자는 자신을 찍어 누르는 듯한 준상의 위압감에 더 이상 입을 열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바닥에 머리를 처박으며 잘못을 빌었다. “죄, 죄송합니다. 부디 용서를.” 기회를 준 것만으로도 큰 은혜를 입은 셈인데 주제도 모르고 감히 질문질 따위를 하다니. 단발머리 여자는 주책맞은 자신의 입을 꿰매 버리고 싶은 충동마저 느끼며 그렇게 간곡하게 사죄했지만, 이번에도 준상은 가차 없이 말했다. “두 번 남았다.” “...”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던 긴 머리 여자는 슬쩍 고개를 돌려 단발머리 여자를 원망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피 같은 세 번의 기회 가운데 한 번의 기회를 어이 없이 날려버린 것에 대한 분노 때문이었다. 긴 머리 여자는 단발머리 여자를 잠시 노려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파군성, 그러니까 알카이드 님이 아니십니까?” 파군성은 북두의 일곱 번째로서 싸움과 훼멸, 파괴를 주관한다. 속성으로 따져도 금(金)에 해당하니 커다란 두 개의 철구를 쥔 준상의 모습에 그럭저럭 맞아 들어가는 명칭인 셈이다. 긴 머리 여자는 나름대로 아는 것 모르는 것 전부 짜깁기해서 대답한 셈이지만, 준상은 그 대답을 통해 일곱 별이라는 것이 북두칠성을 가리킨다는 것을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준상은 조용히 대답했다. “한 번 남았다.” “...” 세 번의 기회를 얻었을 때는 뛸 듯이 기뻤지만, 두 번의 기회를 모두 날리고 한 번의 기회만을 남겨 놓은 상황이 되자 두 여자들은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기 시작했다. 물론 준상은 처음부터 이들을 살려줄 생각이 없었다. 자신이 누구인지 맞춰 보라 한 것 역시 일곱 별의 주인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정보를 얻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런 내막을 알 리 없는 두 여자는 고민을 거듭하다가 이내 자신들끼리 눈짓과 손짓을 교환하더니, 입을 모아 이렇게 대답했다. “여, 여덟 번째 주인이신... 사조성... 그러니까 알코르 님이 아니십니까?” 그녀들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그 대답에는 확신이 전혀 없었다. 다만 이렇게 은밀하게 나와 금기를 어긴 자들을 제재하는 것으로 봐서는 일곱 별의 주인 가장 비밀스럽고 불길한 존재인 여덟 번째 별의 주인이 아닐까 하는 것이 그녀들의 추측이었다. 물론 준상의 대답은 간단했다. “틀렸다.” 그의 말이 떨어지자 두 여자는 머리 속에서 천둥이 치는 듯한 착각이 일며 절망의 늪으로 빠져 들었다. 모처럼 천신만고 끝에 얻은 세 번의 기회가 모두 날아가 버렸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준상이 철구를 천천히 들어 올리자, 단발머리 여자가 급히 준상의 다리를 붙잡고 늘어지며 애원했다. “제, 제발 살려주세요. 원하시는 일이라면 뭐든지 다 하겠습니다. 그러니...” 단발머리 여자는 그렇게 말하며 그나마 걸치고 있던 웃옷을 마저 벗어 버리고 뽀얀 살결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최후의 순간이 되자 지금껏 지켜왔던 자존심마저 모두 버리고 유일하게 남은 수단인 미인계를 사용하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단발머리 여자가 그렇게 육탄 공격으로 나오자 긴 머리 여자도 이거다 싶었던지 급히 옷을 벗어 던지며 준상의 발에 매달렸다. “노예가 되라면 되겠습니다. 아니, 가축 취급을 하셔도 좋습니다. 살려만 주세요.” 방금 전의 전투로 인해 자잘한 상처와 흙먼지가 남아있기는 했지만 두 여자의 몸은 남자라면 한 번쯤은 자신도 모르게 돌아볼 정도의 매력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준상의 시선은 싸늘하기만 했다. 물론 이 여자들을 하수인으로 삼아 저들의 정보를 캐내거나 암약시키는 방법을 떠올리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여자들을 감시할 수단이나 그 행동을 강제할 수단이 준상에게는 없었다. 펫 목걸이만 하더라도 요정 여왕 리체스를 복종시키는 용도로 이미 모두 소모해 버린 상황이 아니던가. 게다가 설사 펫 목걸이에 여유가 있다 할지라도 준상으로서는 이 여자들을 전혀 신뢰할 수가 없었다. 그녀들은 자신의 생존이 걸리자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지금까지 동고동락해온 동료를 참살했다. 물론 대화 내용으로 미루어 보면 그들 사이에 알력이 있었음은 이해할 수 있었지만, 설령 그렇다 할지라도 이들이 동료를 헌신짝처럼 내버렸다는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결국 그녀들은 준상에게 복종하더라도 같은 상황이 벌어지면 또다시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배신을 할 것이 분명했다. 과연 준상이 무엇을 보고 그녀들을 믿을 수 있겠는가. 여자들은 신발을 핥을 기세로, 아니 실제로 준상의 부츠를 혀로 핥으며 애원했지만 준상은 싸늘한 시선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며 양손에 든 철구를 발밑에 엎드려 있는 그녀들을 향해 내리쳤다. 00152 트롤러 ========================================================================= 거대한 두 개의 철구는 준상의 발을 끌어안은 채 엎드려 있던 두 여자의 허리 위로 무자비하게 떨어져 내렸다. 콰드득! “꺄아아악!” “컥!” 철구는 그대로 소름 끼치는 소음과 함께 두 여자의 등을 짓뭉개고 들어가 뼈를 부수고 그 안의 내장을 갈가리 찢어 놓았다. 그녀들의 몸은 뼈와 살이 부서지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변이를 시작했지만,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다시 한 번 떨어져 내린 철구가 그녀들의 머리를 으깨버린 탓이다. “후우우...” 준상은 아직 신경이 살아남아 파들파들 떨고 있는, 변이가 되다만 괴이한 형태의 신체를 바라보며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뱉었다. 머리를 써서 다섯이나 되는 다크 시드 사용자를 간단하게 해치워 버렸으나 육체의 소모가 없었던 대신 정신의 소모가 컸던 탓이다. 준상은 우선 부서지고 으깨진 여자들의 시체에서 다크 시드를 회수하고, 다시 밖에 쓰러져 있던 남자의 시신에서도 같은 일을 반복했다. 그리고는 자루를 꺼내 기괴한 괴물의 형상을 한 네 명의 시신을 담은 다음 인벤토리에 보관하고 새벽이슬과 엘리멘탈 드래곤을 불러 혈흔을 깨끗이 청소하도록 지시했다. 엘리멘탈 드래곤이 물을 분사해 주변을 씻기는 장면을 지켜보던 준상은 혹시나 하는 기분에 몽몽이를 불러내었다. 아이템 같은 것은 없겠지만 이들이 도피 생활을 위해 숨겨둔 무언가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몽몽이는 그런 기대에 확실하게 보답했다. 소파 아래쪽 공간에 숨겨진 가방 하나를 찾아낸 것이다. “잘 했다.” 준상은 몽몽이에게 상으로 초코바 하나를 건네준 다음 일단 가방을 캐비닛에 챙겨 넣고 모습을 감춘 채 그 장소를 빠져 나왔다. 숲을 따라 밖으로 나오다 보니 처음 자폭이 일어났던 장소 부근으로 소방차와 구급차, 그리고 경찰차가 몰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준상은 자폭이 일어난 곳 부근에서 혹시나 다른 다크 시드 사용자가 접근하지는 않는지 잠시 확인해 보았으나 그런 기색은 찾을 수가 없었다. 숲을 빠져 나와 강변을 타고 조금 이동한 준상은 시끌벅적한 자폭 현장에서 한참 떨어진 인적이 드문 장소에 도달하고 나서야 비로소 모습을 드러냈다. 일단 망토와 부츠를 벗어 보관한 그는, 이어서 랩터를 꺼내놓고 그 안에 탑승한 다음 헤네스와 리체스를 소환했다. “엇!” “아...” 헤네스는 차 안에서 다시 소환되자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준상의 안색을 살폈다. 아까와는 다른 옷을 입고 있는데다 다소 피로가 깃든 안색을 보고 그녀는 자신들이 역소환되어 있는 동안 큰 싸움이 있었음을 어렵지 않게 추측했다. “고생하셨어요.” 리체스 역시 헤네스처럼 상세하게는 아니지만 뭔가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챘다. 하지만 그녀는 또다시 역소환되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불퉁거리는 표정으로 준상을 째려볼 뿐이었다. “가자.” “네.” 준상은 천천히 차를 몰아 펜션으로 돌아갔다. 가면서 그는 임서윤에게 메시지를 넣었다. ‘처리 완료.’ 짧은 내용이었지만 필요한 내용은 모두 담겨 있는 셈이다. 사람들을 부려서 경찰측 자료를 읽고 분류하는 일을 감독하고 있던 임서윤은 갑자기 전화기로 전달된 준상의 메시지를 보고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간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일을 처리했다는 건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불가라는 말 밖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이 정도면 정말 대단하다는 말을 넘어서 엄청나다는 말 밖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휴... 상황종료 되었습니다. 정리하세요.” 임서윤의 말에 느닷없이 불려와 서류를 읽고 요약하는 일에 매달려 있던 그룹 비서실 인원들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임서윤도 난처하긴 매한가지였다. 혼자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고, 그렇다고 훈련에 매진하고 있는 길드원들을 부르기는 뭐한 상황. 급한대로 일단 집에 연락을 해서 그룹 비서실의 인원들을 데려다 일을 맡겼는데, 수사 자료를 요약하는 일이 끝나기도 전에 준상이 일을 매듭지어 버릴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위급한 일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회장 아들의 개인적인 용무에 끌려와 영문도 모를 경찰 측 수사 자료를 정리하는 일에 투입되어 있던 비서실 직원들은 올 때와 마찬가지로 느닷없이 가란 말이 나오자 얼굴을 찌푸렸다. 임서윤은 일단 직원들에게 사과의 말을 건넸다. “죄송합니다. 가면서 회식이라도 하세요. 비용은 제가 부담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찜찜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성의를 보이는데 계속 불퉁거릴 수는 없는 일이다. “자세한 건 다시 수사결과가 발표되겠습니다만, 일단 오늘 본 자료들에 대해서는 함구해 주시기 바랍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임서윤은 직원들을 돌려보낸 다음 속으로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뭐랄까. 갈수록 준상과 차이가 벌어지는 느낌에 조금 허탈함을 느꼈다고 하는 편이 맞을 듯 싶다. 처음에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서윤은 입맛을 다시며 다시 훈련을 하기 위해 수영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즈음, 준상은 펜션 근처에 도착해 차를 다시 인벤토리에 넣은 다음 헤네스와 함께 걸어서 펜션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펜션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준상은 헤네스와 리체스가 방 안쪽에서 모습을 드러내자 주위를 살핀 다음 문을 닫고 커튼을 쳤다. 준상은 아까 사놓은 음료와 다과를 꺼내놓고는 욕실로 들어가며 말했다. “먼저 씻을테니 쉬고 있어라.” “네. 염려마세요.” 헤네스의 대답을 듣고 준상이 욕실로 사라지자 리체스는 그제서야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칫. 기껏 귀걸이까지 가져다 줬는데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역소환이라니. 정말 너무 하지 않아?” 감히 준상의 면전에서는 말을 꺼내지 못하고, 그가 욕실 안으로 들어가고 나서야 자신에게 동의를 구하듯이 말을 꺼내는 작은 요정 여왕의 모습에 헤네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겠죠.” 헤네스는 좋은 말로 리체스를 달래려고 했지만 살짝 골이 난 요정 여왕의 눈에는 자기 남자라고 두둔하려는 모습으로 보였다. “조막만한 애가 그래도 자기 남자라고 감싸는 것 좀 봐. 에휴... 내 팔자야.” “...” 사실 조막만한 것은 리체스 쪽이었지만 만년이 넘게 살아온 그녀의 눈으로 보면 아직 스무살도 되지 않은 헤네스는 조막만한 꼬맹이인 것도 사실이다. 헤네스는 여왕의 귀여운 투정을 보다가 준상이 꺼내놓고 간 음료와 다과를 그녀 앞에 내밀었다. “화 푸시고 이것 좀 드세요.” “이게 뭔데?” 잔뜩 삐진 상황에서도 맛있는 향기가 솔솔 풍겨 나오는 과일들이 놓여지자 리체스는 바로 흥미를 보였다. 식탐이 심해 슬픈 요정이여, 그 이름은 리체스일지니.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리체스는 방금 전까지 삐쳐 있었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헤네스가 깎아주는 맛있는 과일의 맛에 홀딱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 간단하게 샤워를 한 다음 욕조 안에 누운 채 뜨거운 물이 점차로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초감각으로 그녀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준상은 그런 리체스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짓고 말았다. “후우...”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어느 정도 마음 속에 쌓였던 피로가 조금씩 풀리기 시작하자 준상은 아직 수령하지 않은 이번 퀘스트의 보상들을 일제히 수령했다. 준상보다 약한 자들이 상대였기 때문일까, 아니면 회수된 다크 시드들이 그리 강력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일까. 무려 다섯 개의 퀘스트의 보상을 동시에 수령했음에도 불구하고 준상의 레벨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의 레벨은 이미 28. 다른 귀환자들의 레벨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는 모르겠지만 준상의 생각으로는 제법 강한 축에 속하는 임서윤이나 그의 동료들과 비교하더라도 넉넉잡아 두 배 수준은 되지 않을까 예상하고 있었다. 그 정도로 레벨 차이가 현격한 상황이니 에픽 퀘스트나 그에 준하는 난이도의 퀘스트가 아닌 이상 레벨 업도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었다. 사실 실제로 중요한 것은 레벨 그 자체보다는 보상으로 주어지는 상자 쪽이다. 레벨이 올라감으로서 얻어지는 효과라고 해봐야 실질적으로 코스트 증가나 레벨 제한을 넘어서는 정도에 불과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많은 수의 카드와 그것을 통한 다양한 조합이야 말로 실질적인 힘의 척도가 된다. 준상은 그런 생각들을 떠올리며 이번 퀘스트를 통해 얻은 다섯 개의 특수 임무 보상 상자를 하나씩 확인했다. 축하합니다! 특수 임무 보상 상자에서 특수카드 ‘인벤토리’를 획득했습니다. :특수카드를 획득하면 봉인된 특수기능을 해제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이미 특수기능 ‘인벤토리’가 개방되어 있으므로 인벤토리 용량을 4칸 확장합니다. -현재 당신의 인벤토리에는 서로 종류가 다른 21가지 물품을 등록하여 사용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첫 번째 상자에서는 인벤토리 카드가 나왔다. 이번에 확장된 것은 네 칸. 단순히 무작위로 확장 개수가 정해지는 것인지, 아니면 보상 상자의 등급이나 종류에 따라 확장 개수에도 차이가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인벤토리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준상은 두 번째 상자를 열었다. 카드정보 명칭 : 근성 레벨 : 1Lv 경험치 : 0 등급 : Uncommon 분류 : 스킬 성장 : 일반(중) 속성 : 땅 효과 : 치명타 피해 50퍼센트 감소. Cost : 10 Seed : 2슬롯 스킬 자체는 그런가 보다 싶은 느낌이었지만, 상자에서 스킬이 나오기가 무섭게 새로운 메시지가 나타났다. 이런 현상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다. 축하합니다! :콤보카드를 조합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현재 조합 가능한 콤보 카드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델로드란의 수호자 [상세 확인] -콤보 카드 조합을 원하시면 해당 번호를 누르시고, 만약 조합을 원치 않으신다면 n을 누르세요(1/n) _ 메시지를 확인해 보니 역시나 새로운 콤보 카드가 나와 있었다. 준상은 곧바로 상세 정보를 확인했다. 델로드란의 수호자 -델로드란 왕국에는 나라에 어려운 일이 일어났을 때 앞장 서서 적을 쳐부수는 위대한 수호자의 전설이 전해집니다. 버티고 서면 성벽과 같은 강인함으로 아군을 수호하고, 나아가면 그 앞을 가로 막을 자 없으니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수호자라 부릅니다. [조합상세] -웨펀차지, 관통, 철벽, 근성 -효과: 1. 웨펀차지시 관통 효과 100퍼센트 증가. 2. 치명타 무시 확률, 갑옷 효과 50% 증가. 3. 모든 저항 10% 증가. 공격 능력은 웨펀 차지를 발동했을 때 치명타가 발생하면 적의 방어를 무시하는 관통 효과가 100퍼센트 증가하는 옵션 뿐이지만, 방어 능력에 있어서는 치명타 무시 확률과 갑옷 효과를 증폭함과 더불어 추가로 모든 저항 10퍼센트 증가의 옵션이 붙어있다. 만약 준상이 이 콤보를 발동하게 되면 무려 99퍼센트의 물리 저항 능력을 가지게 되는 셈이다. 물론 관통과 비슷한 형태로 저항을 파훼하거나 무시하는 스킬이 있지 않을까 싶기는 하지만 그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무지막지한 방어력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지금까지 아무래도 공격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어서 철벽이나 무기 방어 외에는 별다른 방어 방법이나 스킬이 없었던 준상으로서는 새로운 콤보의 출현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새로운 콤보 카드의 습득으로 인한 칭호가 나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칭호 효과의 덕을 톡톡히 보았기 때문에 아무래도 아쉬운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세 번째 상자를 열기 위해 인터페이스를 조작하려던 준상은 문득 델로드란이라는 이름이 제법 낯익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디서 들었던 이름일까. 의문은 그리 어렵지 않게 풀렸다. 헤네스의 고향인 성곽도시 이벨류아가 속한 나라의 이름이 바로 델로드란이었기 때문이다. “허...” 정령의 문을 여는 에픽 퀘스트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칭호에 등장하는 지명 같은 것이 그곳 세계와 연관이 되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그것을 재확인하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델로드란의 수호자라... 헤네스가 들으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준상은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다음 상자를 열었다. 카드정보 명칭 : 농락 레벨 : 1Lv 경험치 : 0 등급 : Rare 분류 : 스킬 성장 : 일반(대) 속성 : 어둠 효과 : 대화시 제법 높은 확률로 적에게 내분을 일으킵니다. Cost : 20 Seed : 3슬롯 성공 확률이 명시되지는 않았지만 매도나 도발과 같은 정신 공격의 일종이란 점을 감안하면 별로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아무래도 말보다는 몸이 먼저 움직이는 준상의 성격상 자주 쓰일 것 같지는 않지만 이번 같은 경우가 또 없으리란 법은 없으니 잘만 사용하면 비장의 한 수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카드정보 명칭 : 매혹 레벨 : 1Lv 경험치 : 0 등급 : Uncommon 분류 : 스킬 성장 : 조숙(중) 속성 : 빛 효과 : 상대를 매혹해 자신에 대한 호감도를 높입니다. Cost : 20 Seed : 3슬롯 “...” 이건 또 무슨 제비족에게나 어울릴 법한 스킬인지. 네 번째 상자에서 나온 것은 무려 매혹이었다. 뽀샤시 효과와 병용하면 이것 역시 상당히 강력한 정신 공격의 일종이 될 수 있을 것 같지만, 준상으로서는 아무래도 별로 내키지 않는 능력이다. 준상은 입맛을 다시며 마지막 상자를 열었다. 축하합니다! 대기시간 ‘10분’을 획득했습니다. :이미 대기시간이 적용되어 있으므로, 여기에 ‘10분’을 추가합니다. 현재 대기시간은 총 ‘20분’입니다. 이제 좀 더 여유롭게 새로운 임무를 대비하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20분이라...” 처음에 메시지 도착 후 10초 만에 전송되었던 걸 생각하면 정말 격세지감이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다. 20분이면 막말로 퍼질러 자다가 일어나서 씻고 난 다음 밥 먹고 느긋하게 출발해도 될 정도의 시간이다. 물론 그렇다고 긴장을 풀고 있으면 곤란하겠지만, 이제 조금은 여유를 가지고 생활에 임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준상은 모든 상자의 확인이 끝나자 그제서야 욕조에서 몸을 일으킨 다음 다시 한 번 간단하게 샤워를 하고 나서야 가운을 걸치고 욕실 밖으로 나갔다. 00153 트롤러 ========================================================================= 준상이 목욕을 마치고 조금이나마 개운해진 마음으로 밖에 나가자, 하나 가득 과일을 입에 물고 개구리마냥 볼을 부풀린 채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던 리체스는 얼른 입 안에 든 것을 씹어 삼킨 후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홱 하고 돌렸다. 과일에 넋이 나가긴 했어도 무턱대고 역소환시킨 것에 대한 불만은 풀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헤네스는 난처한 표정으로 웃어 보였지만 준상은 그러거나 말거나 침대 위에 걸터 앉으며 조용히 말했다. “씻어.” “네.” 헤네스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리체스에게 말했다. “여왕님도 같이 가세요. 제가 씻겨 드릴게요.” 그러자 리체스는 자신이 삐진 표정을 짓거나 말거나 상관없다는 표정의 준상의 모습을 흘깃 보고는 입을 삐죽거리며 말없이 그녀의 뒤를 따라 나섰다. 둘이 욕실 안으로 사라지자 준상은 몽몽이와 엘리멘탈 드래곤을 소환해서 풀어놓고 헤네스가 깎아놓은 과일을 나누어 준 다음 침대에 들어가 누웠다. 확실히 대기 시간이 늘어나니 마음부터가 느긋해지는 느낌이다. 잠시 침대에 누워 그렇게 느긋하게 휴식을 즐기던 준상은 문득 몽몽이가 찾아냈던 가방의 내용물이 궁금해졌다. 얼른 몸을 일으킨 준상은 바닥에 깔개를 편다음 그 위에 가방을 꺼내 놓고 내용물을 살펴 보았다. “...” 안에는 약간의 현금과 몇 장의 신분증, 그리고 옷가지 같은 것이 들어 있었다. 얼마 안 되는 현금은 옆으로 치워놓고 신분증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그 안에 찍혀 있는 사진의 모습은 준상이 해치운 자들의 외모와는 아무래도 차이가 있었고, 인원수도 맞지 않았다. 자신들의 것이 아니라면, 그들의 먹이가 되어버린 희생자의 것은 아닐까. 신분증에 대한 것은 나중에 서윤에게 조사를 맡기기로 하고 준상은 달리 숨겨진 무언가가 없는지 꼼꼼히 살폈다. 하지만 더 이상의 무언가를 발견할 수 없었다. 이게 전부는 아닐텐데... 잠시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가방을 바라보던 준상은, 테이블 위에 벌렁 누워서 해달처럼 과일 조각을 배 위에 얹어 놓은 채 식도락을 즐기고 있던 몽몽이를 불렀다. “이리 와.” 몽몽이는 준상이 부르자 앞발로 들고 있던 과일 조각을 얼른 주머니에 집어 넣고는 후다닥 달려와서 왜 불렀냐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기 뭔가 숨겨져 있는 거냐?” 그러자 몽몽이는 다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얼른 가방 앞으로 다가가 가죽으로 만들어진 겉표면을 갉아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얼마 되지 않아서 준상 앞에 작은 금속판 하나를 가져다 놓았다. “이건...” 준상은 금속판을 집어 들고 안목의 능력으로 확인해 보았다. 그러자 희미한 빛이 금속판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잘 했다. 상을 주마.” 준상은 몽몽이에게 초코바를 하나 꺼내 주고 아이템 확인을 실행하려 했다. 그러나 미처 인터페이스의 명령을 실행하기도 전에 메시지가 후두둑 준상의 시야에 쏟아졌다. 축하합니다! 펫 ‘몽몽’의 충성도가 100에 도달했습니다. :충성도가 높을수록 펫의 스킬 효율이 높아집니다. -충성도는 최대 120까지 상승 가능합니다. -충성도가 100이상인 상태로 특정 조건이 만족될 경우 스킬이 진화할 수 있습니다. 그런가보다 하고 메시지를 넘기려던 준상은 마지막 줄의 내용에서 멈칫했다. 스킬 진화라니? 펫이 지니고 있는 스킬을 진화시키는 것도 가능하단 말인가. 특정 조건이 만족되어야 한다는 단서가 붙기는 했지만, 이건 분명히 유용한 정보가 아닐 수 없었다. 축하합니다! :당신은 처음으로 펫 충성도 100에 도달했습니다. -당신의 위업을 찬양하며 ‘충성!’ 칭호를 부여합니다. [칭호 상세 정보 확인은 이곳을 누르십시오.] 예상대로 새로운 칭호가 부여되었다. 준상은 상세 정보를 확인해 보았다. [충성!] :처음으로 펫 충성도 100에 도달한 자에게 부여되는 칭호. -효과: 동시 소환 가능한 펫의 숫자가 1 증가합니다. -칭호는 획득시 자동으로 효과가 적용됩니다. 이번에도 역시나 동시 소환 가능한 펫의 숫자가 증가했다. 아무래도 펫 관련 칭호는 모두 이런 식으로 동시 소환 가능한 펫의 숫자를 증가시키는 효과가 있는 모양이다. 이로써 현재 동시 소환 가능한 펫의 수는 모두 다섯. 펫 목걸이가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이것은 당분간 공석일 수밖에 없지만 어쨌든 이것 역시 인벤토리처럼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임에 틀림없다. 준상은 초코바를 주머니에 집어넣고 다시 과일을 꺼내 앞발로 잡은 채 아작아작 갉아 먹고 있는 몽몽이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준 다음, 녀석이 찾아낸 금속판에 아이템 확인을 실행했다. 아이템정보 명칭 : 조잡한 통신 마법진 레벨제한 : 없음 종류 : 통신기 등급 : Common 효과 : 간단한 메시지 수신 기능 Seed : 없음 설명 : 길지 않은 단문의 메시지를 수신하는 기능을 가진 조잡한 통신 마법진입니다. 이 마법진에는 고유의 일련 번호가 부여되어 있으며, 송신은 불가능하고 오직 수신만 가능한 조잡한 수준의 통신기입니다. “...” 아이템 자체로는 그리 대단할 것이 없었다. 성능만 따지자면 휴대폰은커녕 삐삐라고 불리던 호출기 정도 밖에는 되지 않는 수준. 아마도 놈들은 이것을 통해 ‘그’로부터 지령을 받았던 것이 아닐까. 수신만 가능한 수준이라는 것이 문제긴 하지만, 잘 하면 베일에 감추어져 있던 놈들의 꼬리를 잡을 강력한 수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정말 잘 했다.” 준상이 다시 한 번 그렇게 말하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몽몽이는 고개를 한번 갸웃거리고는 다시 과일을 먹는 일에 몰두했다. 그나저나... 문제는 이걸 사용해서 어떻게 놈들의 정보나 움직임을 얻어내는가 하는 점이다. 하지만 해결 방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마법에 관한한 이 세상의 다른 누구도 비교될 수 없을 정도의 강력한 능력을 지닌 존재가 마침 펫이라는 형태로 준상에게 귀속되어 있지 않은가. 그것은 바로 요정 여왕 리체스였다. “이거 참...” 확실히 리체스라면 이 정도의 조잡한 마법진을 분석하는 것은 일도 아닐 것이다. 요정계가 아니기에 그 능력에 제한을 받는다 쳐도 마법에 대한 지식 그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직 좀 불퉁거리는 면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적절한 대가를 제시한다면 거절하지는 않을 터. 잠시 시간이 지나자 간단하게 몸을 씻은 헤네스와 리체스가 욕실에서 나왔다. 리체스는 마법으로 물기를 말리고 다시 하늘거리는 옷을 입은 채였지만, 헤네스는 아직 촉촉하게 물기를 머금은 피부 위에 가운만 걸친 채 밖으로 나왔다. 준상은 일단 꺼내놓은 내용물을 겉가죽이 뜯겨진 가방 안에 밀어넣어 정리한 다음, 리체스를 불렀다. “리체스.” “네?” 리체스는 개운한지 기분 좋은 표정을 지은 채 준상에게 반사적으로 대답했다가, 아직 자신이 준상에게 삐져 있는 상태라는 것을 뒤늦게 떠올리고는 얼른 고개를 돌린다. 헤네스는 그 귀여운 모습을 보고 다시 미소를 지었지만, 준상으로서는 리체스가 그렇게 불퉁한 태도로 나오는 것이 좀 귀찮게 느껴졌다. 그러다 문득 떠올랐다. 이번에 새로운 스킬을 하나 얻었다는 사실을. 99레벨의 리체스에게 과연 효과가 있을지는 솔직히 준상으로서도 의문이었지만, 요정의 키스도 잔뜩 받은 데다 그 부작용으로 뽀샤시 효과까지 얻은 상태이니 시도해 본다고 손해볼 일은 아니었다. 안 되면 뭐... 초코바라도 잔뜩 안겨주면 될 일이 아니겠는가. 인플레가 살짝 걱정이 되기는 하지만, 저 먹성 좋은 요정이라면 먹을 걸 거절하지는 못할 것이다. 준상은 곧바로 매혹 스킬을 장착한 다음 리체스를 불렀다. “리체스.” “...” 리체스는 준상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흘깃하고 그를 바라보다가 흠칫 놀랐다. 어째서인지는 모르지만, 갑자기 그의 얼굴에서 환한 빛이 쏟아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던 탓이다. “무, 무슨...” 준상의 표정은 여전히 무미건조하고 무뚝뚝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그런 목석같은 얼굴이 어째서 지금 이 순간 이렇게 멋져 보이는지. 사실 리체스는 준상이 그렇게 싫지 않았다. 정말로 싫었다면 정령의 문이 그의 몸에 존재하는 것을 알아차린 순간 바로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가 요정계로 돌아갔을 것이다. 일단 요정계로 돌아가기만 하면 반신의 경지에 오르며 얻은 기적의 능력의 사용할 수 있으니 펫 목걸이는 풀지 못하더라도 그 영향을 최소화하는 것 자체는 가능하리라고 그녀는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너무나 따분한 요정계로 돌아가 다시금 여왕의 책무를 짊어지는 것이 싫었던 까닭도 있지만, 요정들이 기껏 자신의 반려로 골라 보낸 준상을 좀 더 알고 싶었던 이유도 있었다. 물론 그의 곁에는 헤네스라는 이름의 소녀가 이미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만년을 넘게 살아왔던 요정 여왕에게 길어봐야 백년 남짓 밖에 살지 못하는 인간 따위는 처음부터 사랑의 라이벌이 될 수 없었다. 만년 동안 요정계에 처박혀 일을 하고, 다시 천년 동안 잠을 잔 그녀가 아니던가. 애초에 인간과는 시간의 개념 자체가 다른 것이다. 역소환에 반발하고 삐친 모습을 보이는 이유도 결국은 준상에게 관심이 있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 그런 그녀이기 때문에 매혹이라는 작은 방아쇠가 당겨지자 곧바로 그것에 반응한 것이다. 그것은 옆에서 둘의 모습을 지켜보던 헤네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원래부터 그녀는 이미 몸도 마음도 준상에게 홀딱 빠져 있는 상황이긴 했지만, 이미 콩깍지가 씌여진 탓인지는 몰라도 헤네스는 이 순간 준상의 모습을 바라보며 황홀한 기분마저 느끼고 있었다. “...” 얼굴을 붉힌 채 흘깃거리며 자신의 모습을 훔쳐보는 리체스와 아예 몽롱하게 풀린 시선으로 금방이라도 품 안에 뛰어들 것 같은 헤네스의 모습을 보고 준상은 스킬이 제대로 먹혔음을 어렵지 않게 알아보았다. “리체스.” 다시 한 번 이름을 부르자 리체스는 잔뜩 상기된 얼굴로 더듬거리며 준상의 말에 대답했다. “왜요?” 감히 제대로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리체스에게 준상은 몽몽이 찾아낸 금속판을 보여 주었다. “이거 분석할 수 있겠나?” “...” 리체스는 금속판을 흘깃 보더니 바로 대답했다. “통신 마법진인가요? 상당히 조잡하군요.” 역시나 요정 여왕. 별다른 확인 절차조차 없이 한번 힐끗 본 것 만으로 대번에 용도를 알아내다니. 과연 명불허전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은 능력이다. 하지만 다음 순간. 갑자기 옆에서 안절부절하던 헤네스가 준상의 품에 와락 안겨 들었다. “헤네스?” 준상이 이름을 부르자 헤네스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 기분이 이상해요...” “...” 준상은 그제서야 아차 싶은 기분에 얼른 매혹 스킬을 해제했지만, 이미 그것은 한참이나 때늦은 일이었다. ============================ 작품 후기 ============================ 따로 설명이 必要韓紙? 00154 트롤러 ========================================================================= “이런...” 준상은 품에 안긴 헤네스로부터 화악하고 어떤 열기 같은 것이 뿜어져 나오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아니, 그것은 열기라기보다는 새벽이슬에 촉촉하게 젖은 꽃봉오리가 아침 햇살에 젖은 꽃잎을 펼칠 때 흘러나오는 수줍은 향기와도 같았다. 어서 오라고. 어서 와서 나의 꿀을 취하라고. 굳게 다물었던 꽃잎을 펼쳐 벌과 나비들을 유혹하는 듯한 농염한 향기가, 지금 이 순간 헤네스라 이름 붙은 작은 소녀의 몸에서 마치 아지랑이처럼 형상화되어 준상의 눈과 코와 입과 그 외의 다른 모든 감각들을 자극하고 있는 것이다. 꿀꺽. 준상은 자신도 모르게 전신의 긴장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것을 느끼며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하아...” 그때 헤네스의 달아오른 숨이 준상의 벌어진 가운 사이로 밀려들어와 가슴팍을 간지럽혔다. 피부에 와닿은 그 뜨거운 숨결이 준상의 가슴 속에 불씨를 일으키는 순간, 헤네스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조금 몽롱해진 물기 가득한 커다란 눈망울로 준상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시선이 마주치자 두 사람의 가슴 속에서는 물리적인 현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화학반응이 거칠게 일어났다. 그것은 마치 도화선처럼 타들어가 두 사람의 마음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던 욕망이라는 이름의 화약고에 불을 붙였다. 다른 사람의 이목이 닿지 않는, 커튼으로 사방이 막힌 좁은 공간. 방금 전에 목욕을 마치고 가운 하나만 몸에 걸친 채 서로에게 몸을 기댄 젊은 남녀. 그리고, 가슴 속에 활활 타오르는 감정. 이 모든 것들이 하나로 갖춰진 상태에서 다음에 이루어질 사건은 단 하나 밖에 없었다. 준상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헤네스는 눈을 감은 채 준상의 가슴에 기대며 발돋움을 했다. 그것이야 말로 입맞춤이라 불리는 연인들의 대화. 키스라 불리는 사랑의 유희이다. “...” 리체스는 자신의 존재조차 잊은 채 순식간에 자신들만의 세계로 몰입하는 두 연인들의 모습에 그대로 굳어 버렸다. 두 사람이 연인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눈앞에서 감히 범접조차 할 엄두가 안 나는 분위기를 뿜어내며 입술을 마주치는 모습을 보니 다시금 그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리체스는 두 사람이 입맞춤을 나누는 장면을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게 손을 들어 스스로의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요정들도 키스를 나눈다. 이른바 요정의 키스라고 불리는 것이 바로 그 행위다. 하지만 경애의 상징으로서 상대의 이마나 뺨에 하는 그런 입맞춤과, 지금 눈앞에서 두 연인이 서로의 목과 허리를 끌어안은 채 벌이는, 그냥 옆에서 보기에도 어쩐지 가슴 속이 간질간질하고 목이 타는 갈증을 느끼게 만드는 농염한 키스는 똑같이 입을 맞추는 행위라고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본질적인 차이가 있었다. 하고 싶다. 나도 저런 키스가 하고 싶다. 천년 동안 잠들어 있는 동안 내내 꿈꿔왔던 행위. 그것이 바로 저 키스가 아닐까. 하지만 리체스는 미처 몰랐다. 이 두 연인이 벌이는 사랑의 유희는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헤네스는 준상의 목에 팔을 두른 채 그에게 매달리듯 키스에 몰두했다. 정신없이 자신의 입술과 마주치는 준상의 입술과 그 사이로 밀려들어오는 부드러운 혀의 감촉에 취해 있던 그녀는, 부드럽게 자신의 등을 쓰다듬던 준상의 손이 위로 올라와 어깨를 어루만지는 것을 느꼈다. 헤네스는 다음에 이루어질 과정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하지만 그녀가 미처 어떤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준상의 손은 그녀의 어깨 위에 걸쳐져 있던 가운을 부드럽게 아래로 밀어냈다. 가운은 천천히 아래로 흘러내리며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그녀의 둥근 어깨를 바깥으로 드러냈다. 아직 어두워지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하다. 헤네스는 아직 완전히 어두워지지 않은 공간 안에서 자신의 벗은 몸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 너무나 부끄러웠던 탓에 절로 몸이 움츠려졌다. 그러나 준상의 손길이 드러난 어깨 위를 지나며 조금 거친 촉감으로 부드럽게 쓰다듬는 것이 느껴지자 마음 속에 조금이나마 생겨났던 경계심은 다시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헤네스는 가늘게 몸을 떨다가, 이내 준상이 그랬던 것처럼 그의 목에 둘려져 있던 가운에 손을 뻗어 그것을 아래로 밀어 내었다. 눈으로 본 것은 아니지만, 그녀의 손길은 준상의 강인한 목과 움푹 들어간 쇄골과 탄탄한 근육으로 둘러싸인 어깨의 형상을 머리 속에 여과없이 그대로 전달해 주었다. 아아... 이것이 바로 내 남자의 몸이구나. 달콤한 작은 감동이 그녀의 마음 속에 피어나며 더욱더 전신의 감각을 달아오르게 만든다. 하지만 그녀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준상의 가운을 벗기는 것까지는 좋았지만, 그로 인해 이미 흘러내려 팔꿈치에 간신히 걸쳐져 있던 그녀의 가운이 더욱더 아래로 흘러내려가 버린 것이다. 가운은 이제 완전히 흘러내려 허리에 간신히 걸쳐져 있을 뿐이었다. 헤네스는 뒤늦게서야 그 같은 사실을 깨달았지만, 다른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준상의 입술이 그녀의 드러난 목덜미에 와닿았다. “자, 잠깐...” 입맞춤으로부터 해방된 그녀의 입술이 반짝이는 타액을 머금은 채 그렇게 속삭였지만, 준상은 그녀의 가는 목에 마치 흡혈귀가 되기라도 한 것처럼 입을 맞춘 채 떨어질 줄을 몰랐다. “아...” 헤네스는 경동맥을 타고 전해지는 뜨거운 입김과 감촉에 이제 정신마저 혼미해질 지경이 되어 부끄러움을 느낄 겨를조차 없어지고 말았다. 리체스는 당혹스러웠다. 이젠 누가 봐도 단순히 키스만으로는 끝나지 않을 상황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자신의 존재를 완전히 잊은 채 서로에게 몰두하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에 대한 질투는 둘째 치고, 눈앞에서 이렇게 라이브로 연인들의 격렬한 애정 행각을 직접 목격하게 될 줄은 만년을 산 그녀로서도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꼴깍. 리체스의 목울대가 소리를 내며 마른 침을 삼켰다. 어째서일까. 자신이 호감을 가진 상대가 다른 여자와 저렇게 애정 행각을 벌이고 있는데 이렇게 몸 한 구석이 뜨거워지는 이유는. 하지만 그렇게 리체스가 이율배반적인 자신의 감정에 곤혹스러워하고 있는 동안에도 준상과 헤네스는 계속해서 서로를 갈구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헛!” 준상의 손이 허리 위에 간신히 걸쳐진 가운 손으로 밀려 들어오자 헤네스는 벼락을 맞은 것처럼 움찔하며 반응했다. 하지만 그녀의 그런 반응에도 불구하고 준상은 가차없이 손을 움직여 필사적으로 그녀의 하반신을 가려주고 있던 가운을 둔부 아래로 밀어내 버렸다. 그리고 이어서 손에 걸쳐 있던 팔부분마저 완전히 빼내자 헤네스는 이제 실오라기 하나 남기지 않은 모습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헤네스는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자신의 벗은 모습이 완전히 드러나는 것이 두려워 준상의 몸을 꽉 끌어 안았다. 하지만 그것은 실수였다. 목에 키스를 퍼붓다가 팔에 걸린 가운을 벗겨주기 위해 잠시 떨어져 있던 준상의 가슴에 몸을 던진 순간, 그녀의 하복부에 뜨겁고 단단한 무언가가 와닿았던 것이다. 헤네스는 그 두꺼운 무언가의 감촉이 여과 없이 자신의 하복부에 와닿자 다시 기겁을 하고 놀랐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전에 자신의 몸 안으로 밀려들어왔던, 준상의 신체 일부가 바로 이것이라는 사실을. “으음...” 준상은 작은 신음을 흘렸다. 헤네스의 부드러운 몸이 신체 일부에 직접 강하게 밀착하는 감각이 너무나 감미로웠던 탓에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내고 말았던 것이다. 하지만 헤네스는 그 소리를 듣자 자신이 너무 세게 누르는 탓에 준상이 고통을 느낀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전에 시녀들이 그런 말을 했었다. 치한이 못되게 굴면 거기를 있는 힘껏 차주라고. 그때는 그냥 웃고 말았었지만, 막상 그 대상이 자신의 연인이 되니 정신이 번쩍 들 수밖에 없었다. “죄, 죄송해요. 괜찮으세요?” 헤네스는 얼른 손을 움직여 그것을 가만히 보듬었다. “...” 그것은 너무나도 강렬한 자극이었다. 작고 예쁜 두 손의 감촉이 신체 일부를 부드럽게 쓰다듬기 시작하자, 준상의 가슴 속에서 고동치고 있던 심장은 마치 활화산처럼 강하게 분화하며 욕망이라는 이름의 피를 몸 구석구석으로 뿜어내었다. “어?” 손 안에 쥐어져 있던 준상의 신체가 꿈틀거리며 비할 데 없이 단단해지자 헤네스는 자신이 뭔가 실수를 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하지만 그녀가 뭔가 다른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준상은 거칠게 그녀의 몸을 번쩍 안아 올린 다음 그대로 침대 위에 눕혔다. “꺅!” 준상은 작은 비명을 흘리며 침대에 눕혀진 헤네스의 몸 위로 올라서며 그녀의 가슴을 깨물었다. “주, 준상씨... 아흑!” 어째서인지도 모르고 갑작스럽게 돌변한 준상의 모습에 당혹해 하던 헤네스는 부풀어 오른 가슴에 가해지는 준상의 이빨의 감촉에 소스라치게 놀라 그의 이름을 부르다가 다음 순간 다리 사이로 파고드는 손가락의 움직임에 자신도 모르게 비음을 흘리고 말았다. 준상의 손은 헤네스의 부드러운 허벅지 안쪽을 쓰다듬다가, 이윽고 두 다리가 갈라지는 곳에 위치한 작은 숲속으로 들어섰다. 헤네스는 거침없이 밀려들어오는 손가락의 감촉에 본능적으로 다리를 움츠렸지만, 그녀의 힘으로 준상의 움직임을 막아내는 건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고, 이내 물기를 머금은 꽃잎 사이로 손가락이 밀려들자 그 감각에 굴복해 저항을 포기 하고 말았다. “아, 아파요... 살살...” 준상은 거칠게 헤네스의 몸을 유린하다가 그녀의 말을 듣고서야 머리 속에 몰린 피가 조금 가시는 것을 느끼며 움직임의 강도를 낮추었다. 헤네스는 손을 뻗어 자신의 가슴을 농락하고 있는 준상의 머리를 감싸 안은 채 눈을 감고 다리 사이를 파고들어오는 손가락의 감촉을 견디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아무리 입술을 깨물어 억지로 입을 닫으려고 해도 몸 안 깊숙한 곳에서 꿈틀거리며 민감한 속살을 헤집는 그 터무니없는 감각을 버텨내는 건 처음부터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결국 견디지 못한 헤네스는 자신이 왜 그러는지조차 모른 채 허리를 뒤틀며 숨죽인 비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흐... 흐읏... 하우읏....” 리체스는 아무런 말도 못한 채 이 두 연인의 행각을 뚫어지듯 바라보다가 헤네스가 비음을 터뜨리며 몸을 뒤척이기 시작하자 입에서 흘러내리는 침을 깨닫고 얼른 그것을 닦았다. 다른 사람의 행위를 보고 침을 흘리다니. 이게 무슨 추태란 말인가. 하지만 리체스는 그런 생각을 떠올리기보다는 어느새 조금씩 열기가 치솟아 오르기 시작하는 하복부의 감각 때문에 곤혹스러워 하고 있었다. 찌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준상의 손가락이 헤네스의 다리 사이를 농락하는 모습이 그녀의 두 눈 속에 마치 화인처럼 자리 잡았다. 리체스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다리 사이로 움직이다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하지만 열락에 물들어 몸을 뒤틀며 가쁜 숨을 토해내는 헤네스의 모습을 보며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들었다. 나도... 저런 기분을 느껴보고 싶어. 리체스는 자신의 머리 속에 떠오른 그런 생각에 기겁했다. 하지만 그 순간 요정이 지닌 강렬한 호기심이 그녀를 유혹했다. 그냥 살짝 한 번만 시험해보는 건 어떨까. 리체스는 몇 번이고 고개를 저어 그런 생각을 떨쳐 버리려 애썼지만 그럴수록 헤네스의 숨죽인 비음과 준상의 헐떡이는 숨소리가 그녀의 머리 속을 마구 헤집으며 이성을 마비시켰다. 준상과 헤네스가 뿜어낸 열락의 기운은 마치 몹쓸 전염병처럼 리체스의 이성을 갉아먹었고, 그녀가 아차 싶었을 때는 이미 손가락이 옷 속으로 파고 들어가 그녀의 비밀스러운 곳을 자극하고 있었다. 한껏 달아오른 리체스의 몸은 그 손길에 바로 반응을 보였다. “아!” 리체스는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터뜨리다가 스스로 그 소리에 놀라 얼른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얼른 침대 위의 두 남녀를 살펴 보았지만, 그들은 서로에게 탐닉하느라 리체스가 내지른 탄성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리체스는 순간 머리 속으로 확하고 열기가 치솟아 오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심장이 거칠게 뛰며 얼굴이 화끈거렸다. 만년을 살아오면서 이렇게 부끄러웠던 적이 또 있었을까. 하지만 그런 기분 한편으로는 우울한 기분마저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뻔히 옆에 있는데 자신이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다니... 정말 너무하지 않은가. 그런 생각이 들자 리체스는 다시금 입술을 깨물었다. 처음에는 나중을 위해서 미리 예습하는 셈 치자고 생각했었지만 이 순간 생각이 바뀌었다. “...” 리체스는 잠시 가슴에 손을 얹고 두방망이치는 가슴을 억눌렀다. 하지만 화끈거리는 얼굴의 느낌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잠시 더 두근거리는 가슴의 떨림을 진정시키려 애쓰던 리체스는 그것이 전혀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자 이를 악문 채 결단을 내렸다. 그녀는 곧장 허공을 날아 준상에게로 날아들었다. 헤네스의 가슴을 농락하던 준상은 갑자기 눈앞에 살랑거리는 작은 공기의 떨림과 함께 무지개빛 머리카락을 나부끼며 리체스가 날아들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너...” 하지만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마치 육탄돌격을 하듯이 리체스가 날아들며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그 순간 준상의 시야에 메시지 하나가 나타났다. ‘요정여왕의 키스’가 각인되었습니다. :요정여왕의 호의가 담긴 키스가 당신에게 행운을 부여합니다. 이것은 일종의 각인이므로 절대 지워지지 않습니다. 요정여왕이 만년간 아껴둔 키스의 힘은 다른 요정들보다 월등히 강력한 효과를 지니고 있습니다. “...” 이걸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갑작스런 리체스의 행동에 난감해하던 준상은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에 잠시 얼이 빠졌다. 하지만 메시지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축하합니다! :당신은 요정여왕으로부터 처음으로 키스를 받았습니다. -당신의 위업을 찬양하며 ‘요정여왕의 피앙세’ 칭호를 부여합니다. [칭호 상세 정보 확인은 이곳을 누르십시오.] 처음이라니? 만년간 아껴둔 키스라고 했을 때는 그런가보다 했는데, 아예 처음이라고 명시되어 있는 메시지 내용을 보고 준상은 연거푸 카운터를 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그걸 위업이라 부르며 찬양 운운하는 건 또 뭔지. 준상은 얼이 빠진 와중에도 조건반사처럼 상세 정보를 확인했다. [요정여왕의 피앙세] :처음으로 요정여왕으로부터 키스를 받은 자에게 부여되는 칭호. -효과: 요정들에게 요정여왕에 준하는 신분으로 인식됩니다. -칭호는 획득시 자동으로 효과가 적용됩니다. 하지만 아직 놀랄 일은 이게 전부가 아니었다. 쏟아지는 메시지에 놀라 움직임을 멈춘 준상과 가쁜 숨을 헐떡이다 간신히 몰아치는 감각의 소용돌이로부터 빠져 나온 헤네스가 바라보는 와중에, 리체스는 공중 제비를 넘듯이 허공을 한 바퀴 돌았다. 그러자, 갑자기 주위의 공간이 환한 빛으로 물들며 밝아지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공간의 변화에 놀라는 준상의 시야에 다시금 새로운 메시지가 나타났다. 요정결계가 활성화되었습니다. :요정여왕은 요정계를 이끄는 실질적인 주인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상징적인 의미를 넘어서 그녀 자신이 요정계의 중심임을 의미합니다. 이 힘을 이용해 요정여왕은 일시적으로 요정계가 아닌 다른 장소에 결계를 활성화시켜 요정계와 같은 환경으로 만드는 것이 가능합니다. 이 능력은 한달에 한 번 밖에 사용할 수 없지만, 이 공간 안에서라면 요정여왕은 본래 지닌 힘을 80퍼센트까지 활용할 수 있습니다. “허...” 이런 것조차 가능했단 말인가. 한달에 한번이라는 제약이 붙어있긴 하지만, 요정계에서 그녀가 지닌 힘이 사실상 반신이나 다름없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엄청난 능력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정말로 놀랄 일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날개를 파닥이며 하늘을 날고 있던 리체스의 몸이 갑자기 눈 안으로 뛰어드는 것처럼 확 커졌기 때문이다. “...” “...” 준상과 헤네스는 침대 옆으로 내려앉으며 날개를 몸 안으로 접어 넣는 리체스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그대로 얼이 빠졌다. 리체스는 그런 그들을 바라보며 얼굴을 붉인 채 이렇게 말했다. “무시하지마.” “...” “그, 그리고... 나도... 그러니까...” 그리고는 잠시 준상을 흘깃 보더니 눈을 질끈 감고는 입고 있던 하늘거리는 옷을 확 벗어 던졌다. 00155 트롤러 ========================================================================= 무지개빛 머리카락이 폭포처럼 흘러내리며 만지면 분이라도 묻어날 것 같은 뽀얀 피부를 커튼처럼 수줍게 가렸지만, 그 정도로는 만년 동안 누구 하나 손 댄 적이 없는 리체스의 아름다운 처녀림을 완전히 감추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갑작스런 사태에 얼이 빠져 있던 준상과 헤네스는 모처럼 어둑어둑해지던 방 안이 요정의 결계로 확 밝아진 상황에서 날씬하고 아름다운 리체스의 몸이 눈앞에 여과없이 드러나자 시야가 확 밝아지는 듯한 착각마저 느껴졌다. 헤네스는 자신 역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모습이라는 사실조차 잊은 채 리체스의 아름다운 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너무 작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커서 부담스럽지도 않은, 한 손으로 쥐면 조금 남을 듯한 느낌의 가슴. 잡티 하나 없이 깨끗한 피부와 역시 요정이라는 말이 절로 나올 법한 날씬한 몸매. 아무래도 몸매에 다소 유아 체형인 듯한 느낌이 남아 있는 헤네스로서는 정말로 꿈에서나 그렸던 그런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한 몸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일까. 헤네스는 드러난 리체스의 아름다운 몸을 넋 놓고 바라보다가 다소 불안한 표정으로 준상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준상은 그 순간 알몸이 된 채 감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얼굴을 돌리고 있는 리체스를 향해 얼굴을 찌푸린 채 복잡한 의미가 담겨진 듯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헤네스는 속으로 살짝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그렇지. 리체스는 정말로 아름다운 사람, 아니 요정이었지만 내 남자는 그런 것에 쉽게 현혹되는 사람이 아니다. 어쩐지 기분이 좋아진 헤네스는 몸을 일으켜 준상의 팔을 끌어안으려다가 자신이 이 밝은 공간 안에서 알몸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깨닫고 얼른 시트로 몸을 가렸다. 헤네스가 그렇게 시트 아래로 숨는 동안 준상은 고민하고 있었다. 리체스가 이런 식으로 비장의 한 수를 숨겨두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란 탓이다. 이대로 다시 목걸이의 힘을 이용해 역소환을 하는 것은 어떨까. 어떻게 보면 그것이 가장 손쉬운 방법이긴 했지만, 그렇게 되면 안 그래도 위태롭게 줄타기를 하고 있는 리체스와의 관계가 완전히 틀어질 가능성이 있었다. 이런 숨겨둔 한 수가 있음에도 사용하지 않고 자신의 말에 순순히 따랐다는 것은 준상에 대해 호의가 있음을 분명하게 나타내는 의미이다. 요정계를 벗어나 반감된 그녀의 능력만으로도 충분히 엄청난 전력인데, 비록 한 달에 한 번이라는 제약이 붙기는 했어도 이런 식으로 본래 능력의 팔 할을 사용할 수 있는 비장의 한 수마저 가지고 있는 상황이라면 그렇지 않아도 높았던 그녀의 전략적 가치를 더 높여주게 된다. 그것은 칭호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이미 리시스에게 요정 여왕의 자리를 넘겨준 시점에서도 여전히 요정 여왕과 관련된 칭호를 사용하고 그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이것은 요정 여왕이라는 자리가 단순히 서클릿 하나를 주고받는 식으로 양도되는 자리가 아니라는 뜻이 된다. 물론 리시스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으로 요정 여왕과 관련된 퀘스트가 해결된 것을 보면 서클릿을 넘겨준 행위 자체는 유효한 행위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표면적으로 드러난 지위일 뿐, 리시스가 정말로 능력을 개화시켜 실질적인 요정계의 주인이 되지 않는 이상 리체스가 지닌 지위와 능력은 여전히 유효한 것이 아닐까. 보좌관 셀라가 끝까지 그녀를 여왕으로 대접했던 것은 단순히 예우나 인정의 차원을 넘어서 그런 부분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런 상황이고 보면 막무가내라는 말 밖에 떠오르지 않는 리체스의 행위를 무작정 무시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 하지만 사실 리체스도 난감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기세좋게 옷을 벗어 던진 것 까지는 좋았는데, 저질러 놓고 보니 자신이 얼마나 터무니 없는 짓을 한 건지 여실히 깨달아 버린 탓이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없던 것으로 하기도 그렇다. 무엇보다도 한 달에 한 번 밖에 사용할 수 없는 필살기(?)가 아까운 것은 물론이거니와, 기껏 이렇게 수치를 무릅쓰고 일을 벌려 놓은 마당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냥 물러날 수도 없는 일이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결국 리체스 역시 여자다. 머리에 피가 몰리면 다소 충동적으로 스스로 감당하기 힘든 일을 벌이는 경향이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한테나 이런 식으로 옷을 훌러덩 벗고 달려들지는 못한다. 그녀가 그렇게 가벼운 여자였다면 만년이 지난 지금까지 처녀성을 유지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솔직한 심정으로, 일이 이렇게까지 되어 버린 것에 대해 그녀 자신도 놀라고 당황한 상태기는 마찬가지. 리체스는 어색하게 침묵이 흐르는 분위기를 감당못하고 슬쩍 눈을 돌려 준상을 훔쳐 보았다. 그러다가, 복잡한 표정으로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 준상과 눈이 마주쳤다. “...” 굳이 여러 말도 필요없었다. 그 표정만으로도 리체스는 준상이 이 상황을 얼마나 난감해 하고 있는지 여실히 깨달았다. 순간, 그녀의 마음 속에 자괴감이 일었다.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걸까. 이렇게 옷을 벗고 덤벼든다고 얼씨구나 하며 달려들 사람이 아닌 건 이미 알고 있었던 일 아닌가. 하지만 리체스는 다시 이를 악물었다. 이대로 여기서 물러나면, 준상은 자신을 그저 귀찮고 쓸모없는 여자로만 여길 것임을 깨달은 탓이다. 비록 무시를 당했다고는 하지만, 한창 격정적인 사랑의 행위에 빠져 있던 두 사람에게 다짜고짜 뛰어든 것은 분명한 사실. 리체스는 명백한 자신의 잘못조차 인정하지 않을 정도로 막무가내는 아니었다. “미안... 해요.” 리체스는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어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준상의 표정에는 별다른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리체스는 잠시 입술을 깨문 채 망설이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나도... 내가 염치없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한 달에 한 번... 한 달에 한 번만 나를 봐줄 수는 없는 건가요?” “...” 리체스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그렇게 말했지만, 준상은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오히려 반응한 것은 헤네스 쪽이었다. 물론 그녀 입장에서는 이런 식으로 느닷없이 난입한 리체스를 절대로 고운 시선으로 봐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냥 잘됐다고 생각하며 무시해 버리기에는 리체스의 모습이 너무 안 되어 보였던 것도 사실이다. 게다가 굳이 한 달에 한 번이라는 단서를 다는 이유도 궁금했다. 그래서 망설이다가 물어보았다. “저... 한 달에 한 번이란 건 어째서죠?” “그건...” 준상은 천천히 헤네스에게 한 달에 한 번이라는 단서가 붙은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리체스는 그 말을 들으면서 속으로 다시 놀랐다. 어떻게 요정 결계에 대해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는 건지는 둘째 치고서라도 그런 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지금까지 자신을 그대로 방치해둔 준상의 대범함에 놀란 것이다. 물론 그것은 리체스의 터무니 없는 착각이었지만, 어쨌든 그로 인해 준상에 대한 호감이 다시 올라가 버린 것 또한 사실이었다. 이것은 뽀샤시나 각종 요정 관련 칭호, 그리고 아직 남아 있는 매혹 스킬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지만 이 안에 있는 그 누구도 그런 사실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음...” 준상의 설명을 들은 헤네스는 고민에 빠졌다. 단순한 먹보 요정이 아니라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리체스가 반신급에 달하는 엄청난 존재라는 사실에 헤네스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존재가 자신의 남자에게 이토록 강렬한 구애를 던지다니... 이걸 자랑스러워 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곤란해 해야 하는 건지조차 아직 나이 어린 헤네스는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있었다. 그녀가 준상의 곁에 남는다면, 그가 혹독한 퀘스트라는 이름의 시련에서 살아남을 가능성이 훨씬 높아진다는 점이다. 준상에게 가장 당면한 과제는 여자도 아니고 돈도 아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생존, 바로 그 자체였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사실 짐덩이나 다름 없는 자신보다는 리체스가 준상에게 더 어울리는 여자일 수도 있었다. 수련도 받고 이런 저런 능력이나 아이템도 준상으로부터 얻은 상태지만, 그는 언제나 중요한 시점에서는 자신을 역소환한다. 물론 그것은 그가 헤네스를 아끼는 마음에 혹시라도 다칠까 싶어 취하는 행동이긴 했지만, 바꿔 말하자면 그가 싸우는데 방해가 되기 때문이라는 의미로 생각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리체스라면? 비록 요정계 밖에서는 힘이 반감된다는 약점이 있기는 하지만 한 세계를 책임지는 초월자의 능력과 지식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한 달에 한 번, 본래 지닌 힘의 팔 할을 발휘할 수 있는 비장의 한 수마저 가지고 있다. 뿐인가. 비록 여왕의 권좌에서 스스로 물러나기는 했지만, 요정 들은 여전히 여왕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늑대 소녀인 리시스보다 전대 여왕인 리체스를 먼저 떠올린다. 단지 그녀 하나를 곁에 두는 것만으로 준상은 이 모든 것을 손에 넣을 수 있고, 그것은 그에게 강력한 힘을 부여해 줄 것이다. 헤네스는 가만히 가슴에 손을 얹고 심호흡을 했다. 솔직히 말해서, 별로 달갑지 않다. 아니, 정말로 싫다. 하지만 그를 생각한다면... 지금 자신이 고집을 부려서는 안 된다. 헤네스는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려 애썼지만, 아무리 이성적으로 생각을 다잡아도 마음이 좀처럼 따라주지 않았다. 결국 한참이나 지나서야 겨우 들끓는 마음을 진정시킨 헤네스는 조용한 목소리로 준상에게 말했다. “준상씨.” “...” “그녀를 받아들이세요.” 준상은 물론이거니와 비참한 마음에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것만 같은 눈물을 억지로 참고 있던 리체스마저 헤네스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헤네스, 너...” 준상이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입을 열었지만, 헤네스는 손가락을 뻗어 그의 입을 막으며 다시 말했다. “저 사랑하시죠?” “물론.” “그렇다면 상관없어요. 여왕님께도 그 사랑, 조금만 나눠주세요.” “...” 헤네스는 잔뜩 굳어버린 준상의 표정을 보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과연 이 남자는 지금 내 말을 듣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 속내가 못내 궁금했지만, 그녀는 꾹 눌러 참은 채 애써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솔직하게 말할게요. 첫날밤에 제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세요?” “그, 그건...” 준상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터져 나오는 욕망을 주체하지 못해 헤네스를 인사불성으로 만들어버린 그날의 일은 아무리 생각해도 반론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헤네스는 귀엽게 눈을 흘기며 다시 말했다. “너무 심했던 거, 인정하시죠.” “크흠...” “후... 솔직히 전 그날 이후로 밤이 무서워요. 또 그렇게 정신 못 차리고 만신창이가 돼서 기절해 버릴까봐요.” “...” 입이 열 개 있어도 할 말이 있을 리 없다. 그렇게 준상의 입을 막아버린 헤네스는 다시 리체스에게 말했다. “여왕님.” “으, 응?” 리체스는 난데없이 가장 강력한 장애물이었던 헤네스가 자신에게 호의적인 모습을 보이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헤네스는 그렇게 당황해 하며 감히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는 리체스를 향해 잔잔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한 달에 한 번이라고 하셨죠?” “그, 그랬지...” “그러지 마세요. 모처럼 비장의 한 수인데 그런 식으로 소모해버리는 건 너무 아깝잖아요.” “하지만...” 리체스는 울상이 되었다. 물론 헤네스의 말대로 비장의 한 수를 그런 식으로 쓰는 건 아까운 일이지만, 그렇지 않고서는 준상과 자신이 맺어질 방법이 없었다. 요정의 결계를 발동하지 않는 이상 요정계가 아닌 다른 곳에서 이런 식으로 몸의 크기를 키울 방법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요정의 결계를 쓰지 말란 얘기는 자신과 준상의 관계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 아닌가. 헤네스는 울상이 된 리체스를 바라보며 다시 이렇게 말했다. “두 분 사이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얘기가 아니에요.” “그럼?” “그럴 일이 있다면, 요정계로 가면 되는 일이잖아요.” “그, 그건...” 헤네스의 말에 준상과 리체스는 망치로 머리를 두들겨 맞은 듯한 표정이 되었다. 확실히... 그게 가장 합리적인 해결 방안이다. 요정의 결계라는 비장의 한 수를 무의미하게 소모하지 않으면서도 두 사람이 맺어지기에는. 하지만 여기에는 절대적인 한 가지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그것은 바로 리체스가 절대로 준상에게서 벗어나지 않으리라는 신뢰. 두 사람 사이에 그런 절대적인 신뢰가 전제되지 않는 이상 이것은 이루어지기 힘든 일이었다. 헤네스는 다시 리체스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여왕님, 기회가 되면 준상씨를 떠나실 건가요?” “그, 그럴 리가.” “그럼 아무 문제없지 않나요?” “...” 리체스는 자기 나이의 백분의 일도 안되는 세월 밖에 살지 못한 조그마한 여자 아이의 말에 그대로 꿀먹은 벙어리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준상이 다시 말했다. “헤네스...” 하지만 헤네스는 이번에도 고개를 저으며 다시 준상에게 말했다. “준상씨, 생각해 보세요.” “뭘?” “준상씨가 요정계에 다시 가기 위해서는 어떤 전제 조건이 필요하죠?” “그건...” 준상은 순간 다시 한번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현재로서는 그의 몸에 정령의 문이 설치된 관계로 다른 누군가를 요정계로 보내는 것은 가능하지만 준상 자신이 요정계로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가 요정계로 다시 가기 위한 전제 조건. 그것은 자신의 몸 이외의 장소에 마련된 또다른 요정의 문이다. 만약 그런 것을 이 지구 곳곳에 설치할 수만 있다면 어떨까. 요정계를 중간 경유지로 삼아 어느 곳이든 순식간에 이동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귀환자들이 당면한 문제 가운데 하나가 무엇이던가. 비행기나 철도, 배 같은 운송 수단을 사용하기가 여의치 않다는 점이다. 하지만 정령의 문을 통한다면 어떻게 될까. 지금까지의 그 어떤 운송수단과도 비교할 수 없는 혁명적인 운송 혁명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총괄하는 것은, 두 명의 요정 여왕을 실질적으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준상 자신이다. 이것은 단순히 지구 상에서의 운송에서만 국한되는 일이 아니다. 지금까지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오직 퀘스트를 통해서만 오갈 수 있던, 본래 헤네스가 살고 있던 세상까지도 원하는 시간과 장소를 선택해 이동하는 것이 가능해진다는 의미가 된다. “...” 준상은 자신도 모르게 혀를 내둘렀다. 작고 귀엽게만 생각했던 이 아름다운 소녀의 진면목을 이제야 깨달은 느낌이랄까. 어쩌면 그가 첫 번째로 수행했던 퀘스트의 진정한 목적은 이벨류아의 구원이 아닌 이 소녀의 구원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하지만 헤네스의 결정타는 아직 남아 있었다. “준상씨. 솔직하게 말하세요.” “뭘?” “단숨에 거절하지 않은 건 어째서죠?” “...” 그야말로 유구무언. 너무나도 강렬한 돌직구에 준상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헤네스는 가만히 몸을 움직여 준상의 입술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고는 리체스를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 “여왕님.” “응?” “이리 오세요.” “...” 리체스는 헤네스의 말에 준상의 눈치를 흘깃 살폈지만, 그가 달리 반응을 보이지 않자 용기를 내어 침대 위로 올라와 헤네스 옆에 다소곳이 앉았다. 헤네스는 손을 뻗어 그녀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추고는 다시 말했다. “우리... 잘 지내봐요.” “미, 미안.” “잘 지내기 싫으시다구요?”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일이 이렇게 되어버려서 미안하다고.” “괜찮아요.” 헤네스는 쓴웃음을 입가에 머금은 채 그렇게 대답한 다음, 짐짓 엄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말했다. “그래도 처음은 저에요. 이건 양보 못해요.” “무, 물론이지.” 헤네스는 준상과 사랑을 나누는 순서를 말한 것이지만, 리체스는 그것을 일종의 서열에 대한 선언으로 이해했다. 준상은 자신이 뭘 어쩔 사이도 없이 여자들끼리 그렇게 순식간에 모든 결론을 지어버리자 고개를 설레설레 저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난 대단한 아이에게 마음을 빼앗긴 모양이라고. 헤네스는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준상을 향해 수줍은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준상씨.” “응?” “이제... 하던 걸 마저...” 지금까지 대담하게 상황을 주도하던 모습은 어디에 두었는지 귀까지 얼굴이 새빨개진 채 그렇게 말을 건네는 헤네스의 사랑스러운 모습에 준상은 그제서야 비로소 굳어있던 표정을 풀고 잔잔하게 미소를 지었다. ============================ 작품 후기 ============================ <코감기가 지독하게 걸려버렸습니다. 훌쩍.> <한 회분 연재도 쉬었고, 덤으로 주말이기도 하니 오랜 만에...> 얼쑤 핫 핫 핫 헤야 핫 헤야 핫 헤야 하 해야라 연참바라 참바라 참바라 헤야하 헤야라 연참바라 참바라 참바라 헤야하 헤야라 연참바라 참바라 참바라 헤야하 약빨이 기가 막혀 약빨이 기가 막혀 약빨이 기가 막혀 약빨이 기가 막혀 약빨이 기가 막혀 약빨이 기가 막혀 약빨이 기가 막혀 아이고 형님 약을 사오라고 하니 어느 곳으로 가오리오 이 엄동설한에 어느 곳으로 가면 산단 말이오 파는 곳이나 일러주오 지리산으로 가오리까 백이숙제 주려 죽던 수양산으로 가오리까 아따 이놈아 내가 약 살 곳까지 일러주냐 잔소리말고 썩 사오거라 해지는 겨울 들녁 스며드는 바람에 초라한 내 몸 하나 둘곳 어데요~ 어디로~ ~ ~ ~ ~ 아~ ~ ~ 이젠 난 어~디로 가~나~ 이제 떠나가는 지금 허이어~ ~ 하 굳게 다문 입술 사이로 쉬어진 눈물이 머금어진다 무거워진 가슴을 어루만져 멀어진 기억속에 담근다 어슴프레져간 노을 넘어로 소리내어 빌어본다 어디서부터 잘못됐나 이제 나는 어디로 가나 갈 곳없는 나를 떠밀면 이제 난 어디로 가나 안으로 들어가며 아이고 여보 마누라 형님이 약 사오라고 하니 어느 명이라 안가것소 자식들을 챙겨보오 큰 자식아 어디갔나 둘째 놈아 이리 오너라 약값을 짊어지고 놀부 앞에다 늘어 놓고~ ~ 형님 나 갈라요 해지는 겨울 들녁 스며드는 바람에 초라한 내 몸 하나 둘곳 어데요~ 어디로~ ~ ~ ~ ~ 아~ ~ ~ 이젠 난 어~디로 가~나 ~ 이제 떠나가는 지금 허이어~ ~ 약빨이 기가 막혀 약빨이 기가 막혀 약빨이 기가 막혀 약빨이 기가 막혀 약빨이 기가 막혀 약빨이 기가 막혀 약빨이 기가 막혀 00156 트롤러 ========================================================================= 두 사람이 다시 자신들만의 공간 안으로 빠져 드는 모습을 리체스는 가만히 지켜보았다. 어떻게 보면 아까와 그리 다를 것이 없는 상황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리체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까는 완전히 존재 자체가 잊혀진 상태였다면, 지금은 이들과 함께 자리하고 있음을 인정받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헤네스는 가만히 침대 위에 누우며 문득 리체스를 바라보더니 작은 손으로 그녀에게 손짓했다. 거기서 그러지 말고 이리로 오라고. 이리 와서 함께 하자고. 비록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아니었지만, 리체스는 직접 귀에 대고 속삭인 것처럼 그녀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었다. “...” 리체스는 눈물이 날 뻔했다. 자기라면 저럴 수 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올랐지만 리체스는 이내 그렇지 않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어째서 준상 같은 무뚝뚝하고 감정 표현이 옅은 남자가 헤네스 앞에만 서면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저렇게 귀여운 소녀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리체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헤네스의 옆으로 다가가 그녀의 머리맡에 가만히 무릎을 꿇고 앉았다. 헤네스가 한 손을 뻗어 리체스의 무릎 위에 살포시 손을 얹자 리체스는 가만히 그녀의 손을 두 손으로 소중하게 맞잡았다. 준상은 솔직히 이 상황이 상당히 뻘쭘스러웠다. 아까는 경황중이라 미처 의식을 못했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지금은 아예 머리맡에 다른 여자가 앉아서 지켜보는 가운데 행사를 치러야 하니 본래부터 그런 취향을 가진 사람이 아니고서야 당황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런 준상의 상태를 알아챈 것일까. 헤네스는 준상을 향해 남은 한 손을 뻗으며 말했다. “키스해 주세요.” “...” 준상은 결국 천천히 몸을 기울였다. 그리고 헤네스의 몸 위에 엎드리듯 다가서며 가만히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 리체스의 갑작스런 난입으로 인해 흐지부지 되어 버리긴 했지만, 조금 전까지 나누었던 이런 저런 행위의 흔적들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채 그들의 몸 안에 남아있었고, 이내 두 사람은 점점 가빠오는 호흡을 느끼며 키스에 열중했다. 리체스는 두 사람이 키스를 나누는 모습을 바라보며 다시금 자신의 입술을 쓰다듬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리체스가 그렇게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지자 두 사람은 아까보다 더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달라진 것은 없다. 그저 또다른 한 사람이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것 뿐이건만, 어째서 이렇게 가슴이 심하게 뛰는 걸까. 그것은 마치 어린 시절 누구나 한 번쯤 해보았을 못된 장난을 다른 사람 몰래 성공시켰을 때 느꼈던 쾌감과도 같았다. 준상은 다시금 천천히 가슴 속의 불길이 지펴지는 것을 느끼자 헤네스의 몸을 덮고 있던 시트를 밀쳐 내었다. “아...” 헤네스는 이 밝은 와중에 자신의 알몸이 그대로 준상의 시야 속에 드러났음을 깨닫자 부끄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비어 있는 한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그 모습을 보자 준상은 이전에 찬장에 넣어둔 초코바를 털어먹은 것을 들킨 몽몽이가 자신의 눈을 가리던 모습이 떠올라 살짝 웃음을 짓고 말았지만, 이내 몸을 움직여 그녀의 드러난 몸 위에 정성어린 키스를 선사하기 시작했다. 곧바로 손을 아래로 뻗어 그녀의 허벅지 안쪽을 부드럽게 쓰다듬기 시작하자, 헤네스는 더 이상 가빠오는 호흡을 참지 못하고 뜨거운 숨을 터뜨렸다. 리체스는 맞잡은 헤네스의 손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전해지는 것은 떨림 뿐만이 아니었다. 호흡이 가빠지고 혈류가 가속하면서 헤네스의 손 역시 점차 열기를 뿜어내기 시작한다. 준상은 조심스럽게 헤네스의 다리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 넣었다. 두 개가 한꺼번에 들어가기에는 너무 빠듯한 좁은 틈 사이로 준상의 손가락 하나가 밀려들어가자, 여린 속살로부터 전해지는 강렬한 자극을 견디지 못한 헤네스는 허리가 치켜 올리며 작은 비음을 토해냈다. “흣!” 아까 치루었던 전희의 여운이 남아 있었던 탓일까. 준상은 훨씬 신중한 모습으로 움직이고 있었지만, 헤네스의 반응은 아까보다 훨씬 더 격렬했다.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손가락이 심처 내벽을 훑듯이 마찰하며 움직이고, 다시 꽃잎 사이로 드러난 민감한 돌기에 준상이 입을 맞추자 헤네스는 스스로도 놀랄 만큼 큰 소리를 내고 말았다. “하후읏!” 놀란 헤네스는 눈을 가리고 있던 손으로 얼른 입을 막았지만, 계속해서 집요하게 움직이는 준상의 입술과 손가락에 의해 그녀의 여린 속살은 무참하게 유린당하고 있었고, 그럴 때마다 터져 나오는 비음을 삼키는 것만으로도 헤네스는 남은 자제심의 거의 대부분을 소모해야만 했다. 본래 같은 자극이 계속되면 신경은 점차로 무뎌지는 것이 이치. 하지만 헤네스를 괴롭히는 격렬한 자극은 시간이 더해갈수록 그녀의 몸 안을 더더욱 뜨겁게 달굴 뿐 식을 줄을 몰랐다. 그리고. 마침내 어느 순간에 이르자 헤네스는 알 수 없는 감각의 폭풍이 아랫배로부터 터져 나와 간신히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 머리 속을 완전히 휘저어 버리는 것을 느꼈다. 등이 활처럼 휘고, 전신의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진다. 발가락은 있는 힘껏 오므려지고, 손은 리체스의 두 손을 있는 힘껏 움켜 쥐었다. “...” 너무나 격렬한 감각의 폭풍은 헤네스로 하여금 신음 소리조차 낼 수 없도록 만들었다. 그저 입을 벌린 채 턱을 바르르 떨다가, 절정의 순간이 지나쳐 가고 나서야 크게 한숨을 내뱉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아... 하아...” 처음으로 느껴본 절정의 여운에 젖어 헤네스는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지만, 준상은 천천히 염동력으로 짐 속에서 미리 챙겨온 물건을 꺼내더니, 그의 신체에 그것을 끼웠다. 헤네스는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그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깨닫고 당황했다. 지금 그녀의 몸은 절정의 여운으로 인해 극도로 민감해진 상태. 그런 상황에서 준상과 결합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자, 잠깐...” 헤네스는 얼른 그렇게 말했지만, 그녀가 채 말을 끝맺기도 전에 준상은 그녀의 무릎 안쪽을 두 손으로 잡고 들어올리고는 그대로 자신의 몸을 진입시켰다. “헉!” 아픈 것이 아니다. 너무나 다리가 저려서 꼼짝도 못하는 상황인데 누군가 슬쩍 치고 지나가면 어떻게 될까. 말은커녕 호흡마저 멈춘 채 그대로 부르르 떨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적절한 비유라고 하기는 어렵겠지만, 지금 헤네스가 느끼는 감각은 그것과 비슷했다. 리체스는 헤네스가 경악한 표정으로 준상을 바라보며 제대로 숨도 못 쉬는 모습을 보자 살며시 두려움이 일기 시작했다. 만년을 살았으면 뭐하나. 경험이 전혀 없는데. 더구나 요정계에는 달리 그녀에게 성교육을 시켜줄 사람도 없었다. 즉, 다시 말해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상황이 그녀가 얻을 수 있는 정보의 전부란 의미가 되는 셈이다. 그런 그녀의 눈으로 보기에, 헤네스의 모습은 극도의 고통을 필사적으로 참아내는 듯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리체스는 그렇게 미지에 대한 작은 두려움을 느끼는 와중에도 갈수록 격해지는 두 사람의 움직임을 보며 아까처럼 아랫배가 저릿하는 느낌과 함께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일까. 그녀는 스스로 의식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손가락을 움직여 자신의 은밀한 부위를 조심스럽게 자극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리체스가 스스로를 자극하며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이제 준상과 헤네스는 서로를 얼싸 안은 채 가쁜 숨을 몰아쉬며 격렬한 움직임을 이어가고 있었다. 헤네스는 리체스에게 맡기고 있던 손을 뻗어 준상의 등을 있는 힘껏 감싸 안았다. 하복부 안으로 밀어닥치는 굵고 뜨거운 불덩이의 생생한 느낌과 두 신체가 마찰을 일으킬 때마다 들려오는 질걱거리는 소음 속에서 헤네스는 준상의 몸에 매달린 채 가쁜 숨을 몰아쉬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준상이 체위에 변화를 주었다. 헤네스를 안은 채 마치 레슬링 기술을 펼치듯 그대로 빙글 돌아 누운 것이다. 그러자 헤네스는 이제 신체가 결합된 상태로 준상 위에 엎드린 형국이 되고 말았다. 준상은 헤네스의 둔부를 두 손으로 잡은 채 아래에서 위로 쳐올리기 시작했다. “아...” 헤네스는 자신의 몸 안을 휘젓던 뜨거운 불덩이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곳을 마찰하기 시작하자 다시금 몸을 부르르 떨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마치 보물찾기와 같았다. 준상의 몸은 그녀의 몸 속 깊은 곳에 숨겨진 연약한 부위들을 남김없이 공략하며 그녀를 감각의 홍수 속으로 밀어 넣었다. 헤네스는 나름대로 그것을 견뎌보려 애썼으나, 거대한 해일처럼 연거푸 덮쳐오는 감각을 견디지 못하고 가쁜 숨을 몰아쉬다가 결국 크게 경련을 일으키더니 이내 풀어진 눈으로 준상을 바라보며 축 늘어지고 말았다. “이런...” 준상은 더 이상 그녀와 몸을 섞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깨닫고 행동을 멈추었다. 욕정에 겨워 무작정 힘으로만 밀어붙였던 첫 날 밤의 일을 반성하며 차근차근 천천히 함께 즐기려던 그의 계획은 그렇게 무산되고 말았다. 아쉽기는 했지만, 준상은 아직 식지 않은 몸을 그대로 헤네스와 결합시킨 채 축 늘어진 그녀의 작은 몸을 안고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다가, 문득 작은 소리를 들었다. 고개를 돌리던 준상은 무릎을 꿇고 앉은 채 눈을 감고 스스로의 몸을 자극하고 있는 리체스의 모습을 발견했다. “...” 무지개빛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린 채 자신의 몸을 어루만지며 달뜬 호흡을 내뱉고 있는 리체스의 모습은 아직 욕망을 완전히 배설하지 못한 준상에게 너무나 자극적이었다. 준상은 조심스럽게 헤네스의 몸으로부터 자신의 신체를 이탈시켰다. 그리고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를 조심스럽게 침대에 눕힌 다음,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리체스는 주위의 일도 잊은 채 난생처음 느껴보는 쾌락의 향연에 젖어 있다가 문득 침대가 출렁거리는 느낌에 놀라 화들짝 눈을 떴다가 준상과 눈이 마주쳤다. “...” 리체스의 얼굴은 순식간에 그보다 더 붉을 수 없을 정도로 확 달아올랐다. 세상에. 이게 무슨 추태란 말인가. 당황해서 얼른 고개를 돌리려 했지만, 준상은 그녀의 어깨를 잡아 난폭하게 침대에 눕혀 버렸다. “앗!” 깜짝 놀란 리체스는 숨죽인 비명을 터뜨렸지만, 다음 순간 준상의 입술이 그녀의 입을 덮어 버렸다. 리체스는 뜨거운 입술의 감촉에 당혹해하다가, 이내 그 사이를 촉수처럼 비집고 들어오는 물컹거리는 혀의 감촉에 기겁했다. 준상의 혀는 리체스의 입 안을 종횡무진 밀고들어와 그녀의 혀와 뒤엉켰다. 하지만 리체스가 난생처음 겪어보는 깊은 키스의 경이로운 감각에 놀랄 틈도 없이 준상은 손을 움직여 그녀의 다리 사이를 어루만졌다. 쉴 틈도 없이 몰아치는 준상의 공격에 리체스는 두 눈을 부릅 떴지만, 어째서인지 그의 움직임이 이어질수록 손발의 힘이 쫙쫙 빠져 나갔다. 준상은 리체스의 몸을 안아 올렸다. 그리고 앉은 자세로 그녀의 허리를 잡고 들어올렸다가, 이미 흥건하게 젖은 그녀의 몸 속으로 자신의 신체를 밀어넣었다. “...” 리체스는 다리 사이에서 전해져 오는 격렬한 고통에 크게 놀랐다. 너무 아프면 오히려 비명조차 나오지 않는 법. 그녀는 입만 뻐끔거리다가 손을 뻗어 하복부에 대고 회복 마법을 전개했다. 보통은 그 정도로 격렬한 통증을 느끼는 경우가 오히려 흔치 않다. 하지만 만년이라는 기간동안 독수공방을 한 탓인지 그녀의 신체는 이미 처녀라는 상황에 완전히 적응해서 준상의 무지막지한 흉기가 밀고 들어오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던 탓에 그녀는 더 큰 고통을 느껴야만 했다. 파과의 통증이 겨우 지나가고 나자 리체스는 자신의 몸 안으로 뜨겁고 두꺼운 무언가가 들어와 있음을 깨달았다. 준상은 그대로 마치 잘 익은 복숭아처럼 매혹적으로 영근 리체스의 가슴 사이에 얼굴을 묻은 채 그녀의 둔부를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리체스는 자신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뜨거운 숨을 뿜어내고 있는 준상의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 안았다. 그제서야 그녀는 비로소 실감했다. 자신이 준상과 한 몸이 되었다는 사실을. 준상은 천천히 그녀의 몸을 탐닉하다가 다시 몸을 빼내더니 그녀를 엎드리게 한 다음 뒤에서 다시 진입했다. “흑!” 방금 전의 자세에서는 그저 뜨거운 무언가가 자신의 몸 안을 가득 채우는 정도의 충만함 밖에 느끼지 못했던 리체스였지만, 이 자세로 다시금 준상의 몸을 받아들이자 이전의 자세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짜릿한 어떤 감각이 등골을 관통해 머리 속으로 치고 올라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흐윽! 하으읏!” 그래서일까. 고작해야 가쁜 숨소리 밖에 나오지 않았던 그녀의 입에서 마치 흐느끼는 듯한 격한 신음 소리가 연이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리체스는 자신이 그런 소리를 내고 있다는 사실조차 미처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지만, 엄청난 쾌락의 홍수에 치여 반쯤 넋을 잃고 있던 헤네스는 꿈결 속을 헤매다가 그 소리를 듣고는 차츰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후우우...” 아직 온 몸이 저릿저릿하기는 했지만, 헤네스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몸을 일으켰다. 그런 그녀의 눈앞에, 마치 짐승처럼 엎드려 격한 신음을 토하고 있는 두 남녀의 모습이 보였다. “...” 헤네스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 위를 한 손으로 가만히 눌렀다. 어째서일까. 갑자기 가슴 속을 송곳으로 후벼 파는 듯한 감각이 느껴지는 이유는. 하지만 헤네스는 이내 입술을 깨물고는 떨리는 몸을 이끌고 준상의 등뒤로 다가가 그의 몸을 조심스럽게 감싸 안았다. 준상은 정신없이 리체스를 몰아붙이고 있다가 갑자기 등 뒤에서 부드러운 작은 몸이 감싸오는 것을 느끼고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얼른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 헤네스의 씁쓸한 표정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준상은 자신도 모르게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러자 헤네스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멈추지 말아요.” “...” “대신... 키스해주세요.” “헤네스.” “얼른요.” “...” 준상은 헤네스의 요구대로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 헤네스는 키스를 받고 나자 그의 몸을 꼭 끌어 안은 채로 그가 자신에게 해주었던 것처럼 귀와 목에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준상은 헤네스의 감미로운 애무를 받으며 마지막 스퍼트를 올리기 시작했고,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리체스의 몸 안에서 작은 폭발을 일으키며 움직임을 멈추었다. 일련의 행위가 모두 끝나자, 세 남녀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대로 침대 위에 쓰러졌다. 헤네스는 준상의 가슴팍에 몸을 기댄 채 그의 고동소리를 들으며 잠을 청했고, 처음 느껴보는 쾌락에 몸도 마음도 녹초가 되어 버린 리체스 역시 다른 한 쪽 가슴을 차지한 상태로 잠이 들어 버렸다. 준상은 그런 둘의 작은 숨소리가 가슴을 간질이는 소리를 듣다가 어느 순간 주위를 감싸고 있던 요정결계가 사라지며 리체스의 몸이 원래대로 다시 작아지는 것을 보았다. “...” 준상은 염동력으로 작아진 리체스의 몸을 자신의 가슴 위에 얹어 놓고는 시트를 끌어와 헤네스와 자신의 몸을 덮고 나서야 겨우 눈을 감고 잠을 청할 수 있었다. 00157 트롤러 ========================================================================= 아침이 되었을 때, 리체스는 온 몸이 욱신거리는 느낌에 잠에서 깨어났다. “에고고...” 리체스는 일단 자신의 몸에 회복 마법과 피로를 풀어주는 마법을 연달아 시전하고 난 후에야 날개를 펴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평온한 얼굴로 가슴에 얼굴을 기댄 채 잠들어 있는 헤네스와 잘 때 조차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는 준상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 리체스는 어쩐지 어젯밤의 일이 꿈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온 몸에 남아있는 저릿한 쾌락의 흔적과 회복마법을 펼쳤음에도 남아있는 하복부의 뻐근한 느낌은 어젯밤의 일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었다. 리체스는 일단 날개를 펴고 날아올라 바닥에 아무렇게나 떨어져 있는 옷가지를 집어든 다음 먼지를 털어내고 몸에 걸쳤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탁자 위에 배를 드러낸 채 벌러덩 누워있는 몽몽이와 그 옆에 또아리를 튼 채 잠들어 있는 엘리멘탈 드래곤의 모습이 보인다. 너무 일찍 일어나 버렸나. 그런 생각을 떠올린 리체스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용히 준상의 가슴 위에 내려 앉아 그곳에 몸을 기댄 채 누웠다. 두근, 두근. 그러자 가슴을 통해 준상의 고동 소리가 천천히 그녀의 귓가에 울려 퍼진다. 리체스는 따뜻한 온기가 뿜어져 나오는 준상의 가슴 위에 가만히 얼굴을 기대고 있다가 한참이나 지나서야 준상과 헤네스가 몸을 뒤척이며 깨어나자 얼른 날아올라 모르는 척 딴청을 피웠다. “후아암... 아우으으...” 헤네스는 몸을 일으키자 마자 두 팔을 내밀어 기지개를 펴다가 역시나 몸이 결리는지 신음소리를 냈다. “괜찮아?” “네, 괜찮...” 준상의 말에 대답하려던 헤네스는 자신의 벗은 몸이 그대로 드러나 있음을 깨닫고는 얼른 시트를 끌어 당겨 몸을 가렸다. 벌써 몇 번이나 관계를 가졌음에도 부끄러움은 여전한 모양이다. 헤네스는 빨개진 얼굴로 어쩔 줄을 몰라하다가 이내 뭔가 허전한 기분을 느끼고는 주위를 둘러 보았다. “여왕님?”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리체스는 그제서야 머뭇거리며 헤네스 앞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불렀어?” “아...” 헤네스는 다시 원래대로 작아진 리체스의 모습에 깜짝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몸은 괜찮으세요?” 그녀의 물음에 리체스는 괜시리 부끄러워져서 대답을 얼버무렸다. “뭐... 그럭저럭.” 헤네스는 그런 리체스의 태도를 보고는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의 첫날밤이 떠오른 탓이다. 헤네스는 바닥에 굴러다니는 가운을 집어 몸에 걸친 다음, 리체스에게 말했다. “씻을 건데, 같이 가실래요?” “응.” 준상은 헤네스가 리체스를 챙기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그녀들이 욕실로 사라지자 그제서야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후...” 간단한 준비운동으로 몸을 푼 준상은 가운을 걸친 다음, 간단하게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 대충 준비가 끝나자 몸을 씻은 헤네스와 리체스가 욕실에서 나왔다. “먹어라.” 리체스는 평소와 다름없이 무뚝뚝한 태도로 말을 건네는 준상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입을 삐죽거리고 말았지만, 이내 자기 몫으로 과일을 작게 잘라 만든 샐러드를 보자 다시 입이 쑥 들어가고 말았다. 헤네스는 그런 리체스의 반응을 재미있다는 듯이 바라보다가 준상에게 말했다. “잘 먹을게요.” “그래.” 그들은 식사를 마치고 난 다음 간단하게 짐을 정리하고 펜션을 빠져 나왔다. 생각 같아서는 그곳에서 좀 더 머물며 달콤한 시간을 보내고 싶은 생각도 있었지만, 다크 시드에 관한 것을 해결한 마당에 계속 눌러 앉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그들에게는 할 일이 있었다. 바로 정령의 문을 각지에 개통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었다. 정령의 문을 만들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정령의 문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생명력을 갖춘 충분한 규모의 숲이다. 준상은 일단 지도책을 펼쳐 대상이 될 만한 곳을 찾아보았다. 단순히 생명력이 풍부한 숲이라고 하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감을 잡기가 곤란하지만, 우리나라에는 다행스럽게도 자연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지정된 국립공원이란 것이 존재하고 있었다. 대한민국의 국립공원은 모두 21곳. 그 중에서 한려해상이나 다도해, 변산반도, 태안, 경주 등의 다섯 곳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명산으로 손꼽히는 곳이다. 준상은 일단 수도권에 위치한 북한산 국립공원을 가장 첫 번째 목표로 삼았다. 헤네스와 리체스는 아직 어젯밤의 피로가 덜 풀렸던 모양인지 차에 오르자 마자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정확히는 피곤하다기 보다는 나른하다는 쪽이 맞을 지도 모르겠다. “...” 준상은 헤네스의 몸에 채워진 안전벨트를 다시 점검한 다음 랩터를 몰고 천천히 북한산으로 향하다가 중간에 다시 대형 마트에 들렸다. “으음...” 차가 멈추자 헤네스가 먼저 부스스한 눈으로 잠에서 깨어났고, 이어서 그녀의 윗 주머니에 들어가 잠을 자고 있던 리체스 역시 깨어났다. 준상은 그녀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피곤하면 그냥 차에 있어. 금방 다녀 올테니.” 하지만 헤네스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많이 잤어요.” “...” 결국 준상은 둘을 모두 데리고 장을 볼 수밖에 없었다. 피곤한 기색을 잔뜩 보이던 리체스는 식료품 매장으로 들어서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눈빛이 번쩍거리기 시작한다. “이, 이건 뭐에요?” 빨갛게 잘 익은 방울 토마토와 그 옆에 자리 잡은 하우스 딸기. 그리고 노란 빛을 뿜어내는 망고 등이 연이어 그녀의 후각을 강렬하게 자극한 탓이다. “과일. 먹어 볼래?” “네!” 준상은 시식 코너에 마련된 딸기 조각을 하나 집어 먹는 척 하며 다른 사람들의 시야로부터 모습을 감춘 리체스에게 건네주었다. “...” 리체스는 작은 딸기 조각을 입에 넣기가 무섭게 손발을 바둥거리며 온 몸으로 감격을 표현했다.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헤네스는 웃음을 참기 위해 제법 고생해야만 했다. 결국 준상은 초코바와 더불어 각종 과일, 그리고 덤으로 후르츠 칵테일 등을 하나 가득 챙겨 넣고 나서야 쇼핑을 마칠 수 있었다. 준상이 그렇게 먹거리를 챙기는 모습을 보고 헤네스는 그가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바로 알아차렸다. “정령의 문인가요?” “그래.” “어디에 만들지는 이미 정하신 건가요.” “대충 정하기는 했는데, 일단 가서 자세히 살펴 봐야 할 것 같아.” “그렇군요.” 준상은 다시 차를 출발시키려다가 잘라 놓은 방울 토마토 조각을 마치 수박 먹듯이 파먹고 있는 리체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리체스.” “네?” “가면서 이것 좀 살펴 볼래?” 준상이 꺼내 놓은 것은 요전에 다크 시드 사용자들로부터 얻었던 금속판으로 된 통신용 마법진이었다. “뭘 알아보면 되는 거죠?” 리체스의 말에 준상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그거 고유의 일련 번호를 통해서 정해진 통신만 받을 수 있게 되어 있지?” “네, 일단은.” “그걸 이용해서 다른 자들에게 전해지는 통신을 감청하도록 만드는 건 어려운 일일까?” “음...” 리체스는 잠시 턱을 쓰다듬으며 준상이 꺼내놓은 금속판을 이리저리 살피다가 다시 말했다. “당장은 어려워요. 이곳은 도구나 재료 같은 것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럼?” 준상의 물음에 리체스는 조심스러운 말투로 대답했다. “요정계에 가면 제가 쓰던 것이 있어요.” “잘 됐군.” “네?” “안 그래도 다시 한 번 들르려던 참이었으니까.” “...” 리체스는 당연하다는 듯한 준상의 말에 어쩐지 조금은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제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기는 했지만, 자신이 임의로 요정계를 출입하는 것을 이렇게 간단하게 허락할 줄은 미처 몰랐기 때문이다. 조금은 둘 사이에 신뢰가 생겼다고 봐도 좋지 않을까. 어쨌든, 준상은 그대로 차를 몰아 북한산으로 향했다. 일단 초입까지 차를 몰고 들어간 준상은 인적이 드문 장소에서 차를 인벤토리에 집어넣은 다음 헤네스와 함께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처음 준상을 막 따라나섰을 때의 헤네스라면 얼마 못가 낙오하고 말았겠지만, 어느 정도 수련으로 단련된 지금은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체력을 갖추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 해도 숨이 거칠어지고 온몸이 땀으로 범벅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말이다. “괜찮아?” “네, 걱정마세요.” 열기를 뿜어내다 못해 온몸에서 재생의 효과가 발휘되어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지만, 헤네스는 이를 악물고 준상의 뒤를 따라 가파른 산 속 이곳 저곳을 헤맸다. 준상은 그 모습을 보고 이참에 한동안 중지되었던 그녀의 수련을 병행하기로 했다. 조금씩 속도를 높이자 헤네스의 몸에선 더욱더 짙은 아지랑이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한다. 그러자, 보다 못한 리체스가 온통 땀으로 범벅된 헤네스에게 피로 회복의 마법을 걸어주었다. 가쁘게 숨을 몰아쉬고 있던 헤네스는 온몸을 짓누르던 피로가 단숨에 씻겨 내려가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건... 마법인가요?” “응. 한 번 더 해줄까?” “네.” 리체스는 곧바로 헤네스에게 피로 회복의 마법을 다시 한 번 걸어준 다음, 덤으로 회복 마법까지 걸어 주었다. “어때?” “정말 대단해요. 역시 여왕님은 대단한 마법사였군요?” “헤헤...” 리체스는 쑥스러움에 몸 둘 바를 몰랐다. 오랜 세월 동안 마법을 익혀 오긴 했지만,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보일 기회가 별로 없었던 그녀로서는 이런 칭찬을 듣는 것 자체가 너무나 신선한 경험이었다. 물론 요정들에게도 실력을 보인 적이 있긴 하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여왕이 그 정도 실력을 지닌 것은 아주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에 실력을 평가하는 것 자체를 무례한 일로 여겼었다. 아무튼, 리체스가 지닌 피로 회복 마법의 도움을 받자 산행의 속도는 더욱 빨라졌고,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정령의 문을 만들 수 있을 정도의 나무를 발견할 수 있었다. “결계 같은 걸 칠 수 있을까?” “결계요? 어떤?” “이 나무를 사람들의 이목으로부터 숨기고 싶다. 기왕이면 요정들이 자신의 모습을 숨기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형태로.” 준상의 말에 리체스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라면 어렵지 않아요. 어차피 나무에 요정의 돌을 이식해야 하니까 그 힘을 살짝 비트는 정도로도 쉽게 구현할 수 있을 거에요.” “대단하군.” “헤헤...” 리체스가 쑥스러운 듯이 웃는 모습을 보며 준상은 일단 셀라에게 연락을 넣었다. “셀라.” 연락을 받은 셀라는 당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엇! 가, 갑자기 무슨 일로...” 준상은 단도직입적으로 용건을 말했다. “정령의 문을 만들고 싶다. 요정들을 불러줄 수 있겠나?” “바로요?” “바로.” “그게...” 셀라는 별로 탐탁지 않은 듯이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준상은 이미 예상했다는 듯이 조건을 말했다. “요정 한 명당 초코바 한 개.” 그러자 곧바로 셀라의 대답이 이어졌다.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문을 열어 두십시오.” 준상이 자신의 몸에 이식된 정령의 문을 활성화시키자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무리의 요정들이 왁자지껄한 모습으로 준상의 배꼽을 통해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앗! 여왕님이다!” “정말! 여왕님, 안녕하세요!” “그래.” 리체스는 법석을 떠는 요정들의 인사를 일일이 받다가 뒤이어 나타난 셀라와 인사를 나눈 뒤 이곳에서 해야 할 일을 지시했다. “이 나무에 정령의 문을 열면 돼.” “어렵지 않은 일이네요.” 셀라는 준상이 지니고 있던 요정의 돌 세 개를 건네 받은 다음 요정들을 지휘해 정령의 문을 개통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북한산 기슭에 자리 잡은 오래된 나무 한 그루에 지구 최초로 정령의 문이 설치 되었다. 개통이 끝나자 셀라는 준상에게 말했다. “모두 끝났어요.” “수고했다.” 준상은 그렇게 대답한 다음 다시 말을 이었다. “보상은 요정계에서 주도록 하지.” “네... 에엣?” 셀라는 그런가 보다 하고 건성으로 대답하다가 그 의미를 깨닫고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지금... 뭐라고 하신거죠?” 하지만 준상은 그녀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헤네스와 리체스를 데리고 곧바로 정령의 문을 통해 요정계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 작품 후기 ============================ 오늘 연재는 이것으로 끝. 이제 하루 종일 푹 쉬는 일만 남았네요. 그럼 이만... 00158 트롤러 ========================================================================= 요정계를 드나드는 데 따로 자격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딱히 있다면 요정의 키스 정도? 물론 얼굴에 하나 가득 요정의 키스로 떡칠하고 있는 준상이니 절차 상으로 문제될 것은 전혀 없다. 문제는 바로 준상 옆에서 살짝 얼굴을 붉힌 채 헤실거리고 있는 리체스다. 어떤 방법을 사용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녀는 지금 준상에게 신체의 자유가 구속되어 있는 상태. 여왕의 수석 보좌관인 셀라가 준상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이유도 사실 그 때문이다. 어떻게든 요정계에 다시 리체스를 되돌려 놓을 수만 있다면, 그녀가 지닌 놀라운 능력으로 그 구속을 푸는 것도 가능하리라는 생각으로 나름대로 계략마저 준비하고 있던 셀라의 눈앞에서 마치 소풍을 가는 듯한 모습으로 요정계를 향해 발을 내딛고 있으니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하며 얼이 빠져 있는 동안, 이미 준상 일행은 정령의 문을 통과해 요정계로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이, 이런!" 셀라는 나무 주위에서 힘들다며 투정을 부리고 있는 요정들을 다독여 요정계로 되돌려 보낸 다음 자신 역시 얼른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요정계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준상과 리체스의 모습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조차 없었다. 준상 일행은 정령의 문 안쪽에 상자들을 꺼내 놓은 채 요정들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셀라는 얼른 리체스의 모습부터 살폈다. 그녀가 알고 있던 요정 여왕 리체스는 가끔 자기 성질을 견디다 못해 신경질을 부리는 경향이 있기는 하지만, 가만히만 있으면 조금 도도한 느낌의 정말 요정의 귀감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아름다운 존재였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눈앞에 있는 리체스는 마치 첫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헤실거리며 준상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느라 여념이 없었다. 아무리 봐도 그녀가 알던 도도한 느낌의 아름다운 요정 여왕과는 분위기 자체가 다르다. “이건...” 남녀 관계에 대해서는 리체스와 마찬가지로 거의 백지나 다름없는 셀라조차 그 생경한 느낌을 바로 이해할 수 있을 정도다. 이건 분명히 뭔가 있다. 저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준상에게로 시선을 돌리던 셀라는, 그제서야 지금까지 놓치고 있던 중대한 증거를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준상의 입술 위쪽에 살짝 흔적이 남아 있는 강력한 키스의 흔적이었다. 아! 어째서 저것을 진작 알아보지 못했단 말인가. 셀라는 그제서야 리체스의 태도 변화와 스스럼없이 요정계로 발을 내딛은 준상의 행동이 지닌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여왕님!” 셀라는 눈물마저 글썽이며 리체스에게 달려갔다. 갑자기 울먹이는 표정으로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보좌관을 보며 리체스는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우앗! 깜짝이야. 왜 그래? 무슨 일이라도?” 그러자 셀라는 감격한 표정으로 이렇게 대답했다. “드디어 해내셨군요. 정말 잘 됐습니다. 흑흑...” “...” 리체스는 갑자기 자신을 붙잡고 엉엉 울기 시작하는 셀라의 모습에 당혹해 하다가, 준상이 고개를 돌려 물끄러미 바라보자 난처한 표정으로 웃음을 지었다. “그, 그게... 헤헤...” 왠 호들갑인가 싶기는 했지만, 만년에 걸친 히스테리와 다시 천년의 잠 동안 간간히 깨어나 그녀의 수발을 들었던 것이 바로 이 셀라이고 보면, 이렇게 리체스가 드디어 제 짝을 찾았다는 사실에 도가 지나칠 정도로 감격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셀라는 잠시 눈물을 쏟다가, 부끄럽기도 하고 쑥스러운 데다 난처하기까지 한 복잡한 감정에 어쩔 줄 몰라하는 리체스를 향해 다시 말했다. “이제 짝을 찾으셨으니, 여왕님으로 돌아오실 거죠?” 리체스는 그 말을 듣고 정신이 확 들었다. 원래대로 라면 셀라의 말대로 하는 것이 옳았다. 늑대소녀 리시스에게 여왕의 서클릿을 넘겼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이 자리를 비운 동안을 대비한 임시 방편이기 때문이다. 리체스는 잠시 준상 옆에 다소곳한 모습으로 서 있는 갈색 머리의 소녀를 흘깃 바라보았다. 아무리 눈치가 없는 먹보 요정이라도 지금 자신이 준상과 이렇게라도 맺어진 것이 누구의 허락 때문인지, 그리고 그렇게 허락을 받은 진정한 이유가 무엇인지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준상이 아직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 또한 누구보다 더 뼈저리게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의 관계를 굳이 말로 표현하자면, 그저 육체로만 아슬아슬하게 이어진 외줄 같은 그런 관계라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그녀가 다시 여왕의 자리로 돌아가게 된다면, 준상은 자신과 그런 일이 있었다는 일 자체를 오래지 않아 잊어버릴 지도 모른다. 그건 곤란하다. 정말로 곤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셀라.” “네?” “미안하지만 그건 아직 곤란해.” “...” 셀라는 진지한 리체스의 말에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은 채 말문을 잃었다. 리체스는 씁쓸한 표정으로 그런 셀라에게 다시 말했다. “당장 복귀하기는 어렵겠지만, 그래도 종종 들를 테니까 그렇게만 알아.” “...” 셀라는 아쉬운 와중에도 그녀의 씁쓸한 표정을 보고는 뭔가 이유가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미안.” “아뇨. 제가 뭣도 모르고 함부로 입을 놀려서 심기를 어지럽혔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 둘이서 그렇게 대화를 나누는 동안 준상과 헤네스는 요정계로 복귀하는 요정들에게 초코바를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이 끝나자, 준상은 비어버린 상자를 정리한 다음 리체스에게 말했다. “리체스.” “네!” “연구실이 어디 있지?” “안내해 드릴게요. 이쪽으로 오세요.” “그래.” 준상은 헤네스와 함께 리체스가 이끄는 대로 요정계 안쪽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었다. 초코바를 받아들고 이걸 바로 먹을까 아니면 어디 밖으로 나가서 조금씩 뜯어 먹을까 고민하고 있던 요정들은 준상의 입술에 찍힌 요정 여왕의 키스를 흘깃거리며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 “역시 저분이 여왕님의 반려가 되신 건가.” “보면 모르니? 입술에 도장 쾅 찍혀 있잖아.” “헤에... 근데 왜 입술이지? 보통 이마에 하지 않나?” “여왕님이잖아.” “아, 그렇구나.” 요정들은 그렇게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다가 셀라가 해산을 명하자 보상으로 받은 초코바를 하나씩 들고 행복한 표정으로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갔다. 리체스가 가장 먼저 준상과 헤네스를 데리고 간 곳은 이전에도 온 적이 있었던, 흰 벽으로 둘러싸인 여왕의 거처였다. 그들에 다가가자 문득 벽 한쪽이 열리며 머리에 서클릿을 착용하고 하늘거리는 요정의 옷을 걸친 여자 아이가 툭 튀어 나와 헤네스의 품에 안겼다. 얼마 되지 않은 짧은 시간 동안 몰라볼 정도로 귀여워진 이 늑대 소녀의 모습에 헤네스는 놀란 표정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리시스?” 하지만 더 놀라운 일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리시스가 그 작은 입술을 오물거리며 서툰 말투로 헤네스의 부름에 대답한 것이다. “응. 나... 리시스.” “...” 헤네스는 물론이고 준상마저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얼마 전에 헤어질 때만 해도 간단한 말은커녕 벙어리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입을 꼭 다물고 있었던 아이가 그 짧은 시간동안 단순하기는 하지만 자신의 의사를 전달할 정도로 무언가를 익혔으니 어찌 놀랍지 않겠는가. “리시스. 말 배운 거야?” “응!” 사실 리시스의 언어능력은 이제 막 개화하기 시작한 터라 막상 말을 가르치기는 했어도 요정들로서는 제대로 의사를 전달하기에 여러모로 어려운 점이 많았다. 하지만, 가르치는 입장인 요정들 못지않게 배우는 리시스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 헤네스나 준상이 했던 말은 다른 복잡한 과정을 거치지 않고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는데 요정들의 말은 알아듣기가 어려우니 어린 그녀도 나름 마음고생이 심했다. 그래도 열심히 노력한 끝에 자신과 보좌관의 이름, 그리고 긍정과 부정에 불과하기는 하지만 짧은 말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게 되었는데, 마침 말이 잘 통하는 헤네스와 준상이 요정계로 들어서자 기쁜 마음에 이렇게 달려 나온 것이다. 헤네스가 리시스에게 이런 저런 말을 걸고 있는데, 느릿한 걸음으로 벽 안쪽에서 늙은 늑대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바로 리시스를 키웠던 어미 늑대였다. 어미 늑대는 리시스와 함께 있는 준상과 헤네스를 향해 살짝 이빨을 드러내며 경계의 뜻을 비추었지만, 준상과 눈빛이 마주치자 얼른 머리를 수그리며 눈을 피한다. 동물의 예리한 본능을 통해 준상의 강대함을 바로 눈치챈 탓이다. 리체스는 잠시 헤네스와 리시스의 해후를 지켜보다가, 멀리서 셀라가 요정들을 되돌려 보내고 허겁지겁 달려오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벽으로 다가서서 일부분에 손을 살짝 가져다 대었다. 그러자, 흰 벽은 거짓말처럼 갈라지며 리시스가 나왔던 곳과는 다른 통로를 드러낸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죠.” “그래.”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헤네스와 리시스를 데리고 리체스의 뒤를 따랐다. 여왕의 침실로 들어가는 통로가 수평으로 이어져 있다면, 연구실로 향하는 통로는 약간 아래쪽으로 경사진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조금 어두웠던 통로는 리체스가 허공에 손을 규칙적으로 몇 번 흔들자 이내 벽 자체에서 은은한 빛을 뿜으며 환하게 밝아졌다. “와...” 헤네스가 경이로운 그 광경에 감탄하자 리체스는 뿌듯해 하며 그들을 이끌었다. 통로를 따라 아래로 내려가자 작은 거실 같은 곳이 나왔다. 리체스는 거실 한쪽에 마련된 문을 열고 안쪽의 불을 켠 다음 다시 말했다. “이쪽이에요.” 안으로 들어가자 그곳에는 정원 같은 것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아니, 이건 그냥 정원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또 다른 세계라고 부르는 것이 어울릴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하늘이 있고 땅이 있으며 넓은 강이 흐르고 있는 곳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여긴...” 갑자기 문 안쪽에서 이런 것이 튀어나오리라고는 예상치 못한 탓에 헤네스의 눈이 휘둥그레지자, 리체스는 허리에 손을 척 얹고 코를 치켜 세운 채 잘난 척을 했다. “에헴. 어때요. 멋지죠?” 준상에게 한 말이었지만, 대답은 헤네스에게서 나왔다. “설마... 이것도 마법으로 만든 건가요?” 리체스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준상을 향해 입을 삐죽거리고는 헤네스에게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응. 대단한 건 아니고, 그냥 일종의 환영 마법 같은 거야. 다만 보통의 환영과는 달리 정말로 만지고 느낄 수 있다는 정도가 다를 뿐이지.” “와아...” 별로 내색하지는 않고 있었지만 사실 준상도 놀라기는 매한가지였는데, 이어진 그녀의 설명을 듣고 더욱더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이 공간에 존재하는 것들은 단순히 시각을 현혹하는 것을 넘어서 다른 감각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뜻이 아닌가. 이쯤 되면 단순한 환영이라기 보다는 가상 현실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다. “이곳은 일종의 보안 장치 역할도 하고 있어. 지금은 이런 풍경이지만 허락 받지 않은 존재가 들어오면 아주 무서운 곳으로 변하지.” “아...” 리체스는 다시 몇 발자국 앞으로 나서는가 싶더니 허공에 감추어진 작은 문을 열었다. “자, 이쪽으로 오세요.” 그녀가 열어준 문 안으로 들어서자 여러 가지 빛이 어우러진 또다른 신비로운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심코 발을 내딛던 준상과 헤네스는 깜짝 놀랐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이 들어선 이 새로운 공간은 따로 발을 디딜만한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 기묘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리체스는 앞으로 나서며 다시 말했다. “괜찮아요. 떨어지거나 하지는 않으니까 그냥 들어오시면 되요.” “...” 리체스의 말에 따라 한발 내딛자 마치 허공을 딛는 듯한 기묘한 감각이 발바닥을 통해 전해진다. 분명히 닿는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발을 딛고 걸을 수 있다고 해야 하나. 난생 처음 경험하는 기묘한 감각에 헤네스는 물론이거니와 준상조차도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리체스는 불안해하는 그들을 보며 다시 말했다. “여기가 바로 제 연구실이에요. 좀 느낌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실지는 모르지만, 필요한 건 거의 다 갖추어져 있죠.” “...”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품 안에 지니고 있던 금속판을 꺼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리체스는 그것을 받아들더니 이내 공중으로 휙 집어 던졌다. “무슨...” 준상은 얼굴을 찌푸리며 그렇게 말하려다가, 공중으로 떠오른 금속판 주위에 은은한 빛이 어리는 것을 보고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리체스는 가만히 허공에 대고 손을 몇 번 움직이더니, 다시 준상에게 말했다. “마법진 자체는 조잡해도 안에 숨겨진 보안 장치는 제법 정교하네요. 아무래도 시간이 좀 걸리겠는데요.” “얼마나?” 준상의 말에 리체스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바로 대답했다. “대충 반나절 정도요.” “옆에서 지키고 있어야 하나?” 리체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럴 필요는 없어요. 돌발 상황이 일어날 수도 있긴 하지만, 저 정도면 뭐... 별로 문제가 될 건 없을 듯 하네요.” “그렇군.” 준상이 고개를 끄덕이자, 리체스는 잠시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조심스러운 말투로 제안했다. “저... 어차피 시간이 좀 걸릴 테니, 잠시 쉬었다 가시는 건 어떨까요?” 오랜 만에 산행을 하느라 지친 헤네스는 물론이거니와 모처럼 이렇게 집에 돌아왔으니 뭐라도 대접하고 싶은 생각에 그렇게 제안한 것이지만, 준상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 “나중에.” “...” “따로 옆에서 지키고 있을 필요가 없다면, 일단 나가지. 계속해서 정령의 문을 만들려면 바쁘게 움직여야 하니까.” 전국을 돌며 각지에 정령의 문을 만들려면 느긋하게 쉬고 있을 틈이 없었다. 지금은 좀 귀찮고 힘들더라도 일단 만들어 두면 이후에는 어디든 간단하게 이동할 수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일단 전국 각지에 정령의 문을 만든 다음에는 헤네스의 고향인 이벨류아 근처에도 정령의 문을 만들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런 준상의 마음 속을 알 리 없는 리체스는 풀 죽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00159 트롤러 ========================================================================= 셀라의 배웅을 받으며 곧바로 요정계를 빠져 나온 준상은 일단 지도를 살피며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전국에 소재한 국립공원의 수는 모두 21개. 그 가운데 해상 국립공원 네 곳과 경주를 제외하면 모두 열여섯 곳인데, 한 곳은 이미 만들었으니 남은 장소는 모두 열다섯이다. 준상은 지도를 살피다가 우선 최북단에 위치한 설악산을 시작으로 백두대간을 따라 오대산, 소백산, 월악산으로 이어지는 경로를 설정했다. 이런 식으로 충북에서 충남, 전북을 돌아 주왕산을 마지막으로 내륙 지방의 설치는 마무리를 지으면 될 듯 하다. 문제는 제주도에 위치한 한라산. 예전 같으면 엄두도 내지 못했겠지만, 지금은 대기 시간 이십 분이 존재하는 관계로 살짝 고민이 되었다. 하지만 준상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직접 달려가는 것이라면 모르되, 비행기는 아직 엄두도 못 내고 배는 최저 서너 시간은 걸리니 역시 무리다.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자동차처럼 보트 같은 것을 인벤토리에 넣고 다니면 설사 바다 위에서 퀘스트가 발동하더라도 상황에 맞게 대응할 수 있다. 하지만 배 역시 자동차처럼 조종 면허가 필요한 것은 마찬가지. 이론이나 실기 등을 통해 면허를 따려면 최소 한 달은 잡고 공부를 해야 한다. 뭔가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고나 할까. 물론 나중에 혹시 있을지도 모를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는 셈치고 미리 준비해 두면 그것도 나쁘지는 않은 일이겠지만, 당장 반드시 필요한가라고 묻는다면 역시 아직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어쨌든 대략의 계획을 잡은 준상은 북한산에서 내려와 곧장 차를 타고 설악산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자동차를 타고 길을 달리는 것만으로도 신기해하며 법석을 떨었던 리체스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자 그것도 지루해졌는지 대시보드 위에서 꾸벅 꾸벅 졸기 시작한다. 헤네스 역시 오랜 만의 산행에 지친 것인지, 아니면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멀미 탓인지 좌석에 앉아서 꾸벅거리며 졸기는 마찬가지. 직접 운전을 하는 상황이라 준상은 좀 나은 편이었지만, 옆에서 그렇게 둘이 졸고 있으니 준상 또한 따분한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그냥 그러려니 했지만, 아무래도 안되겠어서 결국 준상은 음악이라도 들을까 하는 생각에 DMB를 켰다. “음?”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대시보드 위에서 꾸벅거리며 졸고 있던 리체스였다.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이내 대시보드에서 날아오르더니 아래쪽에서 흘러나오는 걸그룹의 영상을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여기 왜 사람들이 들어가 있죠?” 그러고 보니 호텔에서는 이런 저런 일 때문에 미처 티비를 볼 틈조차 없었다. 준상은 조선 시대에서 시간 이동을 한 사람에게나 어울릴 법한 말을 하는 리체스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설마 정말로 저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정확히 말하자면 사람이 아닌 요정이지만 말이다. 리체스는 헤네스가 처음 티비를 봤을 때와는 달리 화면에 나오는 인물의 신체 노출에 대해서는 그다지 거부감이 없는 모양이었다. 아니, 오히려 조금 어색한 몸짓으로 영상에 나오는 걸그룹들의 율동을 흥얼거리며 따라하기까지 한다. 헤네스는 몽롱한 표정으로 잠에서 깨어나다가 화면 앞에서 혼자 어깨를 들썩거리며 어색하게 춤을 추고 있는 리체스의 모습에 빙그레 웃었다. “깼니.” “네. 제가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나요?” “아니.” 그렇게 음악을 틀어 놓고 소소한 대화를 나누며 길을 달리는데, 문득 길가에 꽃과 사진 같은 것이 놓여져 있고 그 옆에 사람들이 천막을 친 상태로 초조하게 무언가를 기다리는 모습이 보였다.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헤네스였다. “저건... 뭐죠?” 준상은 흘깃 길가의 모습을 바라보고는 대답했다. “글쎄. 예전 같으면 사고가 난 거라고 생각했겠지만...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보니 아마도 저 곳에서 누군가 튜토리얼에 끌려 간 것이 아닐까.” “...” 그러고 보니 두 번째 대규모 실종이 이루어진지도 어느새 근 한 달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첫 번째 실종 때를 감안하면, 이제 슬슬 귀환자가 하나 둘 씩 모습을 드러낼 시점이다. “리체스, 잠시만.” “네.” 준상은 한창 음악에 심취해 있던 리체스에게 양해를 구하고 채널을 바꾸어 뉴스를 들어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뉴스에서는 한창 두 번째 귀환자들에 대한 내용을 보도하고 있었다. 두 번째 실종에서 가장 먼저 돌아온 최초의 귀환자는 정보가 통제되어 있는 상황이긴 했으나 독일인으로 추정되고 있었다. 물론 이런 식으로 방송 매체에 노출되지 않은 제3세계의 인물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중요한 것은 두 번째 실종자들 중에서도 귀환자가 하나 둘씩 나오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잘 하고 있는지 모르겠군.” 임서윤에게 일처리를 맡겨 두기는 했지만 정부에서도 그리고 다른 여러 이익 단체에서도 귀환자들을 끌어 들이기 위해 벌써부터 바쁘게 움직이고 있을 것이 눈에 선했다. 방금 지나친 길가만 하더라도 벌써부터 친지라고는 보기 힘든 여러 인물들이 초조한 표정으로 진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준상은 그대로 차를 달려 설악산에 도착했고, 급하게 산을 타다가 거의 해질 무렵이 되어서야 겨우 새로운 정령의 문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후우... 후우...” 헤네스는 온 몸에서 어두워진 와중에도 명백하게 눈에 들어올 정도로 짙은 아지랑이를 뿜어내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옆에서 리체스가 연거푸 마법을 사용하자 헤네스는 겨우 숨을 몰아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준상은 주위를 돌아보다가 말했다. “오늘은 이쯤하고 쉬는 것이 낫겠군.” 그러자 헤네스가 급히 말했다. “저는 괜찮아요. 그러니...” 하지만 준상은 고개를 저으며 그녀의 말을 막았다. “무리할 것 없다. 차근차근 해도 돼.” “네...” 준상은 주위를 돌아보며 컨테이너 하우스를 꺼낼 만한 장소를 찾아 보았지만, 깊은 산 중이라 그런지 그 정도 넓이를 가진 공터를 찾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긴, 굳이 장소를 찾을 필요는 없는 일이었다. 왁자지껄하게 떠들어 대며 정령의 문을 통해 자신들의 보금자리로 돌아가고 있는 요정들을 따라 가면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오늘은 아무래도 요정계에서 신세를 져야 할 것 같군. 괜찮을까?” 준상의 말에 리체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반색하며 대답했다. “물론이죠! 신세라뇨. 무슨 그런 말씀을. 자, 어서 가요. 오늘은 제가 대접해 드릴게요.” “...” 준상은 호들갑을 떠는 리체스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인 후 아직 가쁜 숨을 토하고 있는 헤네스를 번쩍 안아들었다. “주, 준상씨?” 헤네스가 당황해 하며 그렇게 이름을 불렀지만, 준상은 모르는 척 그녀를 안고 리체스의 뒤를 따라 요정계로 다시 들어섰다. 정령의 문 안으로 들어서자 어둑어둑했던 숲의 풍경에서 금새 어린 아이가 제멋대로 낙서해 놓은 것 같은 모습으로 시야가 확 바뀐다. 리체스는 어느새 성숙한 여인의 형체로 모습을 바꾼 뒤 그런 두 사람을 자신의 거처로 인도했다. “피곤할 텐데 일단 목욕부터 해요. 제가 아주 심혈을 들여 만들어 놓은 따뜻한 온천이 있거든요. 거기서 목욕을 하면 피부가 아주 매끈매끈해진 답니다.” “...” 준상은 그런가보다 하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리체스는 그런 준상의 반응에도 아랑곳 없이 몸을 베베 꼬며 다시 말했다. “괘, 괜찮으시면 제가 목욕을 도와드려도...” 그러자 준상에게 안겨 있던 헤네스가 참지 못하고 소리를 빽 질렀다. “여왕님!” “응.” “어, 어, 어떻게 그, 그런 말을!” 헤네스는 당황해 하며 얼굴을 잔뜩 붉힌 채 그렇게 소리를 치고 있었지만, 그러는 자신도 이전에 준상의 욕실에 난입하려고 했던 과거가 있음을 지금 이 순간 그녀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렇게 조금은 소란스러운 모습으로 준상과 헤네스는 이전에도 와보았던 여왕의 침실로 인도되었다. 원래는 현재의 여왕인 리시스가 사용해야 할 장소였지만, 그녀는 이런 사방이 막힌 공간 보다는 넓게 트인 숲 쪽을 더 좋아해서 아예 그쪽에 새로운 거처를 마련한 상태였다. 리체스는 뭐가 좋은지 아까 DMB를 통해 들었던 음악을 콧노래로 흥얼거리며 그들을 인도했지만, 준상은 일단 헤네스를 침대 위에 내려놓자 곧바로 이렇게 말했다. “분석은 다 끝났을까?” “그, 글쎄요. 아마 지금쯤이면 다 되지 않았을까요?” “씻기 전에 확인해 보고 싶은데.” “네...” 리체스는 입을 삐죽거리고는 잠시 모습을 감추었다가 다시 준상 앞에 나타났다. “여기요.” 금속판을 잠시 만지작거리더니 준상에게 그것을 되돌려 주었다. “분석은 끝났어요. 감청을 원하신다고 그랬죠?” “그래.” 준상이 고개를 끄덕이자 리체스는 다시 말했다. “거기 담겨진 마법진을 수정해서 사용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제 생각엔 아예 새로운 감청 장치를 따로 만드는 편이 낫지 않을까 싶네요.” “어째서?” “일단 크기나 형태가 너무 눈에 띄는지라 계속 가지고 다니기도 불편하고, 마법진 자체가 너무 조악해서 새로운 몇 가지 기능을 추가하기도 불편하니까요.” “확실히.” 준상이 납득했다는 표정을 짓자 리체스는 다시 조심스럽게 말했다. “원하시는 형태가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최대한 감안해서 만들어 볼게요.” “흠...” 간단하게 휴대하자면 역시 악세사리 형태를 하고 있는 편이 낫다. 하지만 반지나 목걸이는 이미 하나 가득 하고 있는 상태이니, 휴대용 인터페이스처럼 팔찌 형태를 하면 어떨까 싶었다. “팔찌가 좋겠군. 가능할까.” “물론이죠.”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지.” “맡겨 주세요.” 대충 얘기가 끝나자 리체스는 다시 진지한 표정을 지우고 밝게 웃으며 그들을 온천으로 이끌었다. 하얀 김이 자욱하게 뿜어져 나오는 우윳빛의 온천을 보자 헤네스는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터뜨렸다. “아...” “어때?” “정말 멋져요.” “그렇지?” 허리에 손을 첫 얹고 우쭐대는 리체스의 모습에 헤네스는 살짝 미소를 짓다가, 준상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그리 썩 밝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준상씨?” 무슨 일인가 싶어 헤네스가 긴장한 표정으로 묻자, 준상은 조용히 그녀에게 말했다. “퀘스트다.” “...” 그 말에 헤네스 역시 표정이 굳었다. 새로운 퀘스트가 도착했습니다 -20분뒤 퀘스트 수행을 위한 장소로 전송됩니다. 안전한 장소로 이동해 주십시오. (남은시간: 19분 27초) 준상은 일단 눈앞에 나타나 있는 메시지부터 치웠다. 대기 시간이 이십 분으로 늘어났을 때는 이 정도 시간이면 어지간한 건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막상 그 상황이 되자 이제 와서 뭔가를 하기엔 영 미묘한 느낌이다. “일단 방으로 가자.” “네.” 준상은 일단 침실로 돌아온 다음 장비를 챙기는 것으로 준비를 시작했다. 사실 요정계로 들어오면서 그런 마음도 조금은 있었다. 지구가 아닌 다른 세계라면 퀘스트 발동을 피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말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런 기대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리체스.” “네?” “현재 정령의 문이 열려 있는 위치가 담긴 지도 같은 것이 혹시 있을까?” “음... 잠시만요.” 리체스가 셀라를 불러 몇 마디 말을 건네자 오래지 않아 준상의 손에 그다지 질이 좋지 않은 지도 하나가 건네어졌다. 지도라기 보다는 어린애가 낙서를 해놓은 듯한 느낌이긴 했지만, 그 안에는 헤네스가 살고 있던 히딕스라는 이름을 가진 별의 간략한 지도와 함께 현재 열려진 정령의 문에 대한 대략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었다. 준상은 그것을 대충 살펴보고는 헤네스에게 지도를 넘겼고, 그녀는 잠시 그것을 살펴보다가 탄성을 터뜨렸다. “아!” 무슨 일인가 싶어 바라보자, 그녀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금단의 숲... 그러니까, 이벨류아 근처에도 이미 정령의 문이 열려 있어서... 조금 놀랐어요.” “...” 이벨류아. 바로 헤네스의 고향을 가리키는 지명이다. 헤네스는 조금 불안한 표정으로 준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후회했다. 괜히 말한 것이 아닐까. 이대로 자신을 돌려보내면 어떻게 해야 하나. 하지만 준상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 “잘됐군. 그렇다면 이번 퀘스트가 끝난 다음 한 번 들러보자.” “...” 헤네스는 자신도 모르게 밝은 미소를 지었다. 준상의 말에서 자신과 헤어지지 않겠다는 의도를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00160 트롤러 ========================================================================= 준상은 천천히 준비 운동을 하며 몸을 풀기 시작했다. 어떤 퀘스트가 발동할지 예상할 수는 없는 이상 전송이 이루어진 직후 어떤 상황이든 바로 대처할 수 있도록 준비할 필요가 있었다. 하기야 이것도 대기 시간이 넉넉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다른 뭔가를 하기에는 남은 시간이 영 애매하기 때문에 이 정도 밖에는 할 것이 없다는 쪽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최소한 가만히 앉아서 멍하니 시간이 가기만을 기다리는 것보다는 나을테니 말이다. 헤네스는 가만히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준상이 남은 시간을 확인하고 고개를 돌리자 긴장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리체스는 갑자기 목욕도 그만 두고 긴장한 표정을 짓고 있는 두 사람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내 헤네스가 가만히 준상이 처한 현실에 대해 설명을 해주자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일이...” “그러니까, 앞으로 여왕님이 많이 도와주셔야 해요.” “...” 리체스는 그제서야 알 수 있었다. 이 소녀가 자신의 억지를 받아들인 까닭을. “역시... 못 당하겠네.” “네?” 헤네스는 씁쓸한 표정으로 웃으며 말하는 리체스의 모습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요정 여왕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이렇게 말했다. “알았어. 최선을 다할게.” “감사합니다.” 그렇게 몸을 풀고 얘기를 나누던 그들은 초조하게 시간이 흘러가기를 기다렸고, 마침내 시간이 되자 준상은 헤네스와 리체스에게 말했다. “금방 다시 부르겠다.” “네.” 둘 다 역소환이라는 절차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이번만큼은 조금은 자기 멋대로인 리체스조차 불만을 표하지 못했다. “...”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고 준상은 손을 뻗어 그녀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녀들을 남겨두고 전송되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에 대해 준상은 알지 못한다. 물론 궁금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 궁금증을 해결하자고 그녀들이나 다른 펫들을 대상으로 시험을 해볼 생각도 없었다. 잘 되어 봐야 본전이고, 만에 하나 잘못되기라도 하면 안 하느니만 못한 일을 굳이 시험해 볼 필요가 있겠는가. 헤네스와 리체스는 준상의 손길을 느끼며 가만히 눈을 감은 채 역소환의 과정을 거치며 준상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차라리 대기 시간 중에 준비가 마쳐지면 바로 전송이 이루어지면 좋을 텐데. 준상은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가만히 시간이 되기를 기다렸고, 마침내 남은 시간이 완전히 소진되자 준상의 몸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며 전송이 이루어졌다. 그가 도착한 것은 어두운 숲속에 자리 잡은 동굴 입구였다. 준상은 새로운 장소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우선 망토를 사용해 모습을 감춘 다음 퀘스트 내용을 확인했다. 의식을 저지하십시오. :정령의 문이 열리고 봉인되었던 정령의 힘이 활성화된 것처럼 이곳 어두운 고대 왕의 미로 한 구석에서 악령의 문을 열기 위한 의식이 대륙 각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미로를 돌파하여 고대 왕의 석실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의식을 저지하십시오. [이 퀘스트는 여러 명의 인원이 동시에 참여합니다.] (Hidden) 악령의 사제 운델을 처치하십시오. (협력) (Hidden) 저주받은 왕 엠후라를 처치하십시오. (협력) (Hidden) 호위장 큐롤을 처치하십시오. (협력) (Hidden) 헬하운드를 처치하십시오. (0/4) (협력) (Hidden) 제물로 잡혀온 처녀들을 구출하십시오. (0/7) (협력) (Hidden) 일곱 개의 수호석을 파괴하십시오. (협력) 악령의 문이라니. 준상은 퀘스트 내용을 확인하고는 얼굴을 찌푸렸다. 에픽이 아닌 일반 퀘스트. 하지만 히든 퀘스트가 여섯 개나 되는 것을 보면 단순한 일반 퀘스트라고 보기는 어려운 점이 많았다. 게다가 퀘스트 설명에는 이런 의식이 대륙 각지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벌어지고 있다고 되어 있었다. 이런 식의 퀘스트, 준상은 이미 뼈저리게 몇 번이나 겪어본 적이 있다. “쯧...” 준상이 혀를 차고 있는 동안 다른 귀환자들 역시 속속 도착했다. 그 수는 준상을 제외하고도 무려 일곱 명. 즉, 이 퀘스트는 통상 퀘스트보다 최소 두 배 이상의 난이도를 지니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이거... 만만치 않을 것 같군요.” “그러게요. 일곱 명짜리 퀘스트라니...” 왜 여덟 명이 아닌 일곱 명인지 의아해 하는 사람도 물론 있었다. 일반적인 퀘스트에 동원되는 인원은 보통 네 명. 때문에 파티 역시 그에 맞춰서 네 명으로 구성되는 경우가 많다. 그 이상의 수로 구성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되면 그때 그때 참여인원이 달라지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다. 다섯 명으로 파티를 구성한 상태에서 네 명이 전송되었는데 빠진 한 명이 힐러라면 어찌 되겠는가. 물론 이건 극단적인 경우가 되겠지만, 그런 상황이 생기면 전력에 차질을 빚는 것을 넘어서 파티 전원의 생사가 갈릴 수도 있다. 그럴 바에는 아예 처음부터 네 명 단위로 파티를 구성하고 그에 맞춰 팀웍을 쌓는 편이 훨씬 효율이 높은 것은 당연한 이치다. 어쨌든. 일반적인 경우라면 네 명의 두 배인 여덟 명이 되는 것이 자연스럽고, 실제로 이번 퀘스트에 동원된 인원은 여덟 명이 맞았다. 준상은 다른 귀환자들의 능력을 확인했다. 반은 녹색이고 개중에 한두 명은 아예 파란색이다. 파란색은 자신과 비교할 가치조차 없을 정도로 낮은 수준의 능력을 뜻한다. 물론 개개인이 갖추고 있는 능력을 단순히 수치로만 비교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고, 지금까지 준상의 시야에 노란색으로 표시되는 자가 에픽 퀘스트의 보스급이나 다크 시드 사용자 정도였던 것을 감안하면 차라리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저들이 준상과 함께 팀을 이뤄 어떤 도움이 되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해 보인다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준상은 이미 혼자가 아니다. 그에게는 네 마리의 늑대와 더불어 모두 열 개체에 달하는 정령이 있고, 다시 펫이 넷이나 된다. 준상은 이번 퀘스트에 불려온 귀환자들의 능력 확인이 끝나자 미련 없이 위상전이를 펼쳐 동굴 안으로 이동했다. 어차피 해야할 것이라면 빠르게 해치워 버리는 것이 상책. 동굴 안으로 들어서자 어두운 자연동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전 같았으면 도깨비불이나 반딧불이 같은 정령들을 불러내 빛을 밝혔겠지만, 이미 초감각을 가진 준상은 따로 조명을 켜지 않아도 일정 거리 안의 상황을 눈으로 본 것보다 더 확실하게 살필 수 있었다. 그는 곧바로 위상전이를 펼치며 빠르게 동굴 안으로 이동했다. 동굴 안으로 좀 더 진입하자, 내부가 넓어지며 넓은 빈 공간이 드러났다. 그리고 그 안에 첫 번째 적인 좀비들이 어기적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이 정도의 상대라면 굳이 시간을 끌 필요조차 없다. 하지만 곧바로 박살을 내고 이동하려던 준상은 문득 이참에 강화된 정령들의 능력을 확인해 보기로 했다. 정령의 문이 열리기 전까지 정령들의 힘은 혼자서 좀비 한 마리도 제대로 쓰러뜨리기 힘든 수준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떨까. 대략적인 정보는 알고 있었지만, 한번쯤 실제로 싸움을 통해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준상은 생각을 마치자 곧바로 모든 정령을 일시에 소환했다. 그러자 어두웠던 동굴 안이 환하게 밝혀지며 정령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좀비들은 어기적거리며 움직이다가 갑자기 동굴 안에 정령들이 나타나자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빛의 정령인 반딧불이였다. 반딧불이는 마치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듯이 한순간 짧은 빛을 터뜨렸다. 보통의 생물이라면 단숨에 시력을 앗아갈 정도의 섬광이 터졌지만, 불행히도 좀비들의 썩어 문드러진 눈알에는 그다지 큰 피해를 주지 못했다. 좀비들은 갑자기 빛이 터져 나오자 움찔하며 동작이 멈추나 싶더니 이내 다시금 괴성을 지르며 움직이려 했다. 하지만 그들은 발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어느 새인가 그들이 딛고 있는 지면이 마치 모래늪처럼 변해 그들의 다리를 빨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땅의 정령인 모래무지의 힘이었다. 물에 빠진 사람처럼 허우적대는 좀비들을 향해 이번에는 차디찬 북풍이 화악 몰아치기 시작한다. 이것은 마파람과 눈꽃송이, 그리고 산들바람이 동시에 힘을 발휘한 효과였다. 좀비들은 허우적거리다가 차가운 바람에 썩은 살점이 얼어붙으며 그대로 동상처럼 굳어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굳어버린 좀비들에게 날벼락이 떨어졌다. 매캐한 오존 냄새를 풍기며 번개가 동굴 안에 번개가 한바탕 퍼부어지자 굳어 있던 좀비들은 마치 폭죽이 터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그대로 산산이 부서졌다. 마지막은 도깨비불이었다. 환영과도 같은 붉은 불꽃이 좀비들의 부서진 몸을 활활 태워버리자, 산들바람이 그 매캐한 연기를 동굴 밖으로 밀어내 버렸다. “...” 투명화조차 풀지 않은 상태에서 약 이십여 마리의 좀비들이 순식간에 사라지자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감을 표시했다. 이 정도 수준이라면, 이전에 엘리멘탈 드래곤으로 정령 증폭을 실행했을 때보다도 더 강력한 수준의 위력이다. 하물며 지금 엘리멘탈 드래곤을 통해 정령 증폭이 이루어진다면 어떨까. 어지간한 보스급도 감히 그 공격을 받아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준상은 몽몽이를 불러 시드를 수집하게 한 다음, 헤네스와 리체스 역시 소환했다. 그러자 곧바로 갈색 머리 소녀와 무지개빛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작은 요정 여왕이 빛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여긴...” 헤네스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하자, 준상은 이번 퀘스트의 내용을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리체스가 바로 반응했다. “악령의 문이라니... 그런 미친 짓을 하는 인간이 정말로 있을 줄이야.” 리체스의 말에 준상은 고개를 저었다. “반드시 인간이라고 단정 짓기는 어렵다.” “네? 그럼...” “글쎄. 나도 그들이 정확히 어떤 존재인지는 모른다. 그저 쓰러뜨려야 할 적이라는 것 밖에는.” “음...” 몽몽이가 시드를 모아오자 준상은 그녀들에게 다시 말했다. “가자.” “네.” 준상은 다시 늑대들을 불러 앞에 세우고 정령들을 자신과 헤네스의 주위에 배치한 다음, 리체스와 엘리멘탈 드래곤에게 뒤를 맡기고 빠르게 동굴을 돌파하기 시작했다.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자 이번에는 좀비들을 앞세운 해골 병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적의 모습이 확인되었지만 굳이 준상이 움직일 필요도 없었다. 그가 한 일이라고는 오직 하나. “공격.” 짧은 한 마디 명령을 입으로 내뱉은 것 뿐이었다. 얼핏 무미건조하기까지 한 말투로 내뱉은 짤막한 단어 하나. 하지만 그 말이 떨어진 순간 네 마리의 거대한 늑대와 정령 열 개체가 적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어어어! 좀비들은 팔을 허우적거리며 늑대들을 향해 달려들었지만, 모래무지가 만든 모래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늑대들에게 목이 물어 뜯기며 그대로 동작을 멈추었다. 해골 병사들도 처지는 그리 다르지 않았다. 칼과 방패를 앞세운 채 성난 기세로 달려드는 늑대들을 향해 용감하게 돌진했지만, 바람에 밀려 진형이 무너지고 그 위로 전기와 불꽃과 얼음의 향연이 퍼부어지자 순식간에 박살이 나 버린 것이다. “우와...” 준상과 함께 하는 첫 번째 전투라서 조금은 긴장한 표정을 짓고 있던 리체스는 순식간에 적이 쓸려 나가는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딱히 전투라서 긴장한 것은 아니다. 다만 언제 나서야 준상에게 확실한 눈도장을 찍을 수 있을지를 가늠하다 보니 아무래도 긴장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눈에도 늑대와 정령이 힘을 합쳐 순식간에 언데드들을 쓸어버리는 모습은 솔직히 놀라울 뿐이었다. 늑대는 그렇다 쳐도 무려 열이나 되는 수의 정령을 한꺼번에 부리다니. 엘리멘탈 드래곤을 부리는 모습만으로도 뭔가 대단하다 싶었는데, 이 정도일 줄은 미처 몰랐다고 해야 하나. 전투가 끝나고 몽몽이가 다시 아이템 수집을 위해 달려 나가자 헤네스는 몇몇 늑대가 상처 입은 모습을 보고는 허리춤에서 채찍을 풀어냈다. 촤착! 리체스는 갑자기 헤네스가 늑대들에게 채찍질을 하자 저게 뭐하는 짓인가 싶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늑대들의 몸에 난 생채기가 순식간에 아무는 모습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우와... 그거 어떻게 한 거야?” 헤네스는 리체스의 감탄 섞인 말을 듣자 난처해하며 대답했다. “그냥... 이 채찍이 원래 그런 물건이에요.” “신기하네.” 몽몽이가 아이템 수집을 마치자 준상은 미니맵을 살피며 길을 인도했고, 그들은 두 세 번의 전투를 더 거쳐서 마침내 미로의 입구에 도착했다. “흠...” 미니맵에 확대 기능이 없어서 자세한 구조를 알 수는 없었지만, 히든 퀘스트의 목표를 나타내는 붉은 색 표식을 통해 대략적인 위치를 가늠하는 것은 가능했다. 준상은 눈앞에 펼쳐진 미로를 보며 튜토리얼 때의 일을 떠올렸다. 그 당시에는 벽을 짚으며 미로를 일일이 탐사했지만, 지금의 준상은 그때와는 차원이 다른 힘을 지니고 있었다. 준상은 미니맵과 초감각을 통해 먼저 벽의 두께를 가늠했다. 그리고 다시 아래 위를 살펴 벽이 무너졌을 때의 여파를 고려했다. 그 모습을 보고 옆에서 멀뚱거리고 있던 리체스가 얼른 말했다. “이건 마법으로 강화되어 있네요.” “그래?” 뜻밖의 정보에 준상은 얼굴을 찌푸리며 다시 말했다. “너희 집보다 단단한가?” 그것은 리체스의 거처 주위를 둘러싼 흰 벽과 비교했을 때 어느 정도 수준이냐는 질문이었다. 그 정도 강도라면 부수고 들어가기는 아무래도 난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리체스는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손을 내저으며 대답했다. “에이, 설마요. 이런 조잡한 수준의 마법과 비교를 하시면 정말 곤란해요. 제가 얼마나 심혈을 들여서 만들어 놓은 건데.” “그렇군.”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인벤토리에서 랑다잘의 분노를 꺼내어 들고 말했다. “물러서라.” 리체스는 당혹할 수밖에 없었다. “서, 설마?” 하지만 그 설마가 맞았다. 헤네스가 얼린 리체스를 뒤로 끌어당기자, 준상은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 미로의 벽을 거대한 철구로 후려쳤다. 일단 어느 정도의 강도를 지녔는지 확인해 보기 위해 가볍게 두들긴 정도였지만, 그 가벼운 일격에 벽을 보호하고 있던 마법은 격렬한 반응을 일으키더니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하... 하하...” 뭐 저런 무식한... 리체스는 그런 생각을 머리 속으로 떠올렸다. 조잡한 수준이라고 말은 했지만, 그건 만년을 살아온 리체스이기에 가능한 표현이다. 그런데 가볍게 한 번 두들겨서 아예 마법을 파괴해버릴 줄이야. 하지만 그녀가 놀란 표정을 정리하기도 전에 재차 휘둘러진 철구가 벽을 파괴하며 구멍을 만들어 내었다. 차라리 마법으로 보호되지 않는 미로였다면 이런 식의 충격이 가해졌을 때 천장이 무너지기라도 하지 않았을까. 리체스가 그런 생각을 떠올리고 있을 때, 준상은 랑다잘의 분노를 다시 인벤토리로 되돌린 다음 자신이 만들어 놓은 구멍 안으로 늑대들과 정령들을 들여보내며 뒤로 물러선 헤네스와 리체스를 향해 말했다. “가자.” “네...” 00161 트롤러 ========================================================================= 미로 안으로 들어서자 다시 적의 수준이 한 단계 올라갔다. 맨몸으로 덜그럭거리며 움직이던 해골 병사들이 조잡한 수준이긴 하지만 갑옷을 걸친 채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그래봐야 늑대와 정령의 합동 공격에 의해 박살나는 것은 매한가지지만 말이다. 준상은 싸움에서 한 발 물러난 상태로 미니맵에 표시된 퀘스트 표식을 향해 일직선으로 벽을 뚫는 작업에만 전념했고, 늑대와 정령의 보조는 헤네스와 리체스의 역할로 맡겨졌다. 헤네스는 전투가 끝나자 부상을 입은 늑대들을 치료한 다음 리체스에게 말했다. “혹시 도움이 될 만한 마법이 없을까요?” “어떤?” “아무래도 맨몸으로 싸우다 보니 늑대들이 상처를 많이 입는 것 같아서요.” “흠...” 리체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늑대들을 향해 마법을 실행했다. 늑대들은 연한 녹색의 기운이 몸을 감싸자 고개를 갸웃했지만 별다른 변화는 느끼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무슨 마법이죠?” “대단한 건 아니야. 단단한 피부라고 하는 건데, 약간이지만 방어력을 올려주는 마법이지.” “와! 정말 대단해요!” 헤네스가 반색하자 리체스는 쑥스러운지 뒤통수를 긁으며 대답했다. “헤헤...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야. 원래 실력을 발휘할 수 있다면 더 좋은 마법이 있긴 하지만, 지금으로선 이 정도가 고작이라서. 미안.” “아뇨. 별 말씀을요. 아마 큰 도움이 될 거에요.” 리체스의 말대로 방어력이 강해진 늑대들은 전투에서 더 큰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낮은 수준의 마법이라서 그런지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마법을 갱신해야 한다는 문제가 있었지만, 어느 정도 자체적인 방어력의 수준이 높아지자 늑대들의 공격은 더욱 과감해졌고 그만큼 전투에 걸리는 시간도 짧아졌다. “여긴가.” 전투를 늑대와 정령들에게 맡겨둔 상태로 벽을 뚫는 일에 전념하던 준상은 마침내 최초의 목표지점에 도착했다. “이건...” 벽을 통해 안으로 들어서던 헤네스는 눈앞에서 은은한 빛을 뿜어내고 있는 거대한 비석을 보고 불안한 느낌을 받았다. 다소 넓은 석실 중앙에 세워진 검은 색의 비석으로부터 은은한 흰색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는데, 전체적으로는 조금 신비로운 느낌을 풍길 뿐이었지만 계속 응시하다보면 어쩐지 등골이 오싹한 기이한 불길함이 느껴진다. “이게 수호석인 모양이군.” 준상은 우선 늑대와 정령들을 수호석 근처로 이동시켰다. 혹시라도 함정이 있다면 그들의 움직임에 의해 반응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의외로 수호석에는 별다른 함정이 존재하지 않았다. 준상은 곧바로 랑다잘의 분노를 휘둘러 수호석을 파괴하려 했다. 하지만 바로 그때. 수호석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리체스가 그의 행동을 막았다. “잠시만요.” “...” 준상은 잠시 손을 멈추고 그녀가 수호석을 살펴보는 것을 지켜보았다. 리체스는 잠시 수호석 이곳 저곳을 살피더니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이거... 보통 물건이 아닌데요?” “함정인가?” 리체스는 준상의 말에 난처한 표정을 짓더니 다시 대답했다. “함정이라고 해야 하나. 일단 설명을 드릴게요.” “그래.” “이건 여러 가지 복합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어요.” 리체스의 설명에 따르면, 이 비석은 수호석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이 미로를 핵심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었다. 수호석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우선 미로의 유지 보수를 들 수 있다. 준상이 파괴한 벽을 보호하고 있던 마법 역시 이 수호석이 중심이 되어 발생되고 유지되는 것이었으며, 만약 파괴되더라도 일정 시간이 지나면 수호석에 마련된 마법의 힘으로 다시 복원이 가능했다. 여기까지는 별다를 것이 없지만 문제는 이 수호석이 파괴될 때 발동되는 복합적인 마법이다. “우선 이 수호석 자체에도 자동 복원 기능이 붙어 있어요. 복원에 걸리는 시간은 약 한 시간.” “흠...” “그리고 그렇게 수호석이 복원됨과 동시에 일정 구역 내의 모든 언데드 역시 다시 복원되고 미로의 형태가 바뀌어요. 그것도 전보다 약 일할 정도 더 강해진 상태로. 이건 던전 안에 존재하는 모든 침입자가 사라질 때까지 되풀이 되죠.” 준상은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그제서야 이 퀘스트에 하나 이상의 파티가 필요한 이유를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거였군.” “뭐가요?” 헤네스의 물음에 준상은 신중한 태도로 대답했다. “지금까지 별 다른 함정이 없었던 이유. 그리고 많은 인원이 필요했던 이유.” “...” 잘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헤네스를 향해 준상은 이렇게 말했다. “이 미로 안에는 모두 일곱 개의 수호석이 있다.” 그 말을 듣고 리체스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일곱 개라구요? 이런 게?” “그래.” 준상은 그제서야 이 퀘스트에 두 개 파티가 필요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일반적인 진행이라면 비석을 하나씩 부수며 지나가면 그뿐이겠지만, 수호석이 복원될 때마다 몬스터가 부활하고 미로의 형태가 바뀐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니, 준상의 경우에는 리체스가 수호석에 각인된 마법을 해석한 덕분에 이렇게 미리 그 내용을 알 수 있었지만, 보통의 경우라면 처음 파괴한 수호석이 복원되고서야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났을 것이고 그 이유를 알아내는 것도 수호석이 복원되는 모습을 직접 보기 전에는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파괴와 복원이 되풀이 되는 동안 전력은 점차로 소모될 것이고, 반복된 횟수만큼 언데드들은 더 강해져 있을 테니 그야말로 사면초가. “그럼... 모든 수호석을 일시에 파괴하는 수밖에 없는 건가요?” 헤네스의 말에 준상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 사실은 그거야 말로 이 미로를 만든 자가 원하는 일이겠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헤네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째서요?” 준상은 조용히 자신이 생각한 바를 설명했다. “일시에 파괴하기 위해서는 안 그래도 부족한 전력을 다시 분산해야만 한다. 만약 그런 상황에서 다시 한 번 미로의 형태가 바뀌고 모든 언데드가 최고 수준으로 강화되어 부활한다면 어떻게 될까.” 헤네스는 준상의 설명을 듣고 그 광경을 머리 속에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질린 표정이 되어 버렸다. “그, 그런...” 준상은 굳은 표정으로 설명을 마무리 지었다. “수호석을 파괴할 때 아무런 변화가 없었던 것. 이것 자체가 사실상 이 미로가 가진 가장 중요한 심리적인 함정이 아닐까 싶군.” 준상이 그렇게 말하며 리체스를 바라보자, 그녀는 감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안 되는 단서만으로도 이 정도로 핵심을 짚어낼 수 있다니. 여왕은 어쩐지 그런 준상의 모습에 자신이 칭찬을 받은 것처럼 어깨가 으쓱해지는 기분이 되어 보충 설명을 했다. “그 말대로에요. 이 수호석은 하나씩 개별적으로 파괴될 때는 아까 말한 대로의 과정을 되풀이 할 뿐이지만, 일정 시간 안에 수호석들이 일시에 파괴되면 1시간의 여유 시간 없이 곧바로 복원이 시작되면서 최고 수준으로 미로가 강화되죠.” “세상에...” 헤네스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어야만 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수호석을 부수기 위해 분산된 전력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것이고 변형된 미로의 형태로 인해 다시 집결하지 못한 채 그대로 각개격파되어 죽음을 당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럼 이 수호석은 영원히 파괴되지 않는 건가요?” 질린 표정으로 묻는 헤네스의 말에 리체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는 않아. 아마도 이 미로 안쪽에 수호석에 설치된 마법진의 핵심을 이루는 무언가가 있겠지. 그것을 파괴하면 이 미로는 작동은 멈추고 수호석 역시 더 이상 복원되지 않을거야.” “하지만 그러려면...” 리체스는 굳은 표정으로 헤네스에게 말했다. “첫 번째 수호석이 부서지고 그것이 완전히 복원되는데 필요한 한 시간 동안에 모든 수호석을 파괴하고 안으로 들어가서 미로의 핵심을 이루는 요소를 파괴해야만 하겠지.” “세상에...” 그런 터무니 없는 일이 정말 가능한 걸까. 헤네스는 슬그머니 준상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준상은 담담한 표정으로 잠시 미니맵을 살피더니 그녀들에게 말했다. “느긋하게 가볼까 했지만, 상황이 별로 여의치 않군. 좀 급하게 가야겠다.” “네?” 리체스는 잠시 말문을 잃었다. 이게 느긋한 거라고? 미로를 헤매기도 귀찮아서 일직선으로 벽을 뚫고 왔으면서? 리체스는 준상의 말에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는 요정 여왕의 반응은 신경조차 쓰지 않은 채 캐비닛에서 헤네스를 위한 안장을 꺼내 붉은 늑대의 등에 매어 주었다. “타라.” “네.” 헤네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크림슨 울프의 등에 올라탔다. 그렇게 준비가 마쳐지자, 준상은 미니맵으로 수호석의 위치를 가늠하더니 콤보 카드를 수호자로 바꾸었다. 얼마 전에 새로 얻은 델로드란의 수호자 콤보는 웨펀 차지시 치명타가 터질 경우 방어를 무시하는 특성이 있다. 원래는 대규모의 적을 돌파하는 용도로 사용하는 기술. 준상은 이 기술과 시설물 파괴시 추가 데미지를 부여하는 속성을 가진 랑다잘의 분노라는 이름을 가진 공성 병기를 결합시켜, 미로라는 이름의 적을 쳐부수기로 결정한 것이다. “여왕님. 이리 오세요.” “어? 응...” 리체스는 이런 준상의 속내를 이해하지 못한 채 어떻게 하려는 건가 싶은 생각으로 멀거니 바라만 보다가 헤네스가 손짓하자 얼른 그녀가 타고 있는 붉은 늑대의 머리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준비가 갖춰지자, 준상은 랑다잘의 분노를 휘둘러 우선 수호석을 단숨에 부숴버렸다. 수호석은 준상이 휘두른 거대한 철구의 위력 앞에 유리처럼 깨어지며 단숨에 박살이 나버리더니 이내 기묘한 공명음과 같은 소리를 내며 뿜어내던 빛이 사그라들었다. 준상은 첫 번째 수호석이 파괴되자 곧바로 미니맵을 통해 미리 가늠해둔 방향으로 달리며 웨펀 차지를 발동했다. 그러자 그의 몸이 일순간에 화살처럼 앞으로 쭈욱 뻗어나가더니, 그대로 보호하던 마법과 더불어 벽을 단숨에 관통하며 사라진다. “허...” 무슨 종이를 찢듯이 벽을 뚫고 순식간에 사라지는 준상의 모습에 리체스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때, 뒤에서 헤네스의 외침이 들려왔다. “꽉 잡아요.” “응?” 헤네스는 곧바로 붉은 늑대를 몰아 빠르게 벽을 뚫고 앞서나가는 준상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우와아아아!” 리체스는 붉은 늑대가 전속력으로 달리자 그 갈기에 매달린 채 비명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놀라서 비명을 질러대던 것도 잠시. 그녀는 이내 준상의 어깨에 탄 채 환호성을 질러대던 요정들과 마찬가지로 속도 그 자체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물론 그녀 스스로도 빠른 속도로 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살아있는 생물의 등에 탄 채로 달리는 건 뭔가 감각 자체가 다른 느낌이다. “끄, 끝내준다! 달려! 달려!” “하하...” 헤네스는 리체스의 환호하는 모습을 보며 역시 그녀도 요정은 요정이구나 라는 생각을 떠올렸다. 그렇게 둘이 뒤를 따르는 동안 준상은 화살처럼 뻗어나가 순식간에 다음 수호석에 도착했다. 그는 일고의 여지도 없이 두 번째 수호석을 박살낸 다음 곧바로 방향을 틀어 세 번째 수호석으로 향했다. 수호석을 지키던 언데드들이 앞을 가로막았지만, 역시나 날카로운 창과 같이 날아드는 준상의 신형 앞에 흩날리는 꽃잎마냥 박살나서 흩어질 뿐이었다. 결국 준상은 채 십여 분도 지나기 전에 거대한 미로 안에 존재하는 모든 수호석을 남김 없이 박살내고 말았다. 00162 트롤러 ========================================================================= “하... 하하... 세상에...” 설마 정말로 그 짧은 시간에 수호석들을 모조리 파괴할 줄이야. 그나마도 동시 파괴로 인해 최후의 함정이 발동하지 않도록 리체스가 마지막 수호석의 파괴를 늦췄기에 십여 분이나 걸린 것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십 분이란 시간의 벽도 우습게 깨버렸을 것이다. “정말... 인간 맞아요?” “아니면?” 준상이 되묻자 리체스는 손가락을 입에 물고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렇게 말했다. “신의 아들이라든가, 옛날 얘기 보면 그런 거 많잖아요.” 스스로 말을 꺼내 놓고도 터무니없다 싶었다. 하지만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맞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준상의 대답에 리체스는 과연 그랬던 것인가 하고 머리를 끄덕였다. “역시 그랬... 에? 자, 잠깐. 뭐라구요?” 하지만 그녀는 이내 그 의미를 깨닫고는 비명을 질렀다. 그런 리체스의 모습을 보며 준상은 피식 웃었다. “맞다고. 신의 아들.” “커헉!” 리체스가 충격을 받으며 헛숨을 들이키자, 옆에서 듣고 있던 헤네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설마... 그것도 왕족 얘기 비슷한 건가요?” “...” 준상은 헤네스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설마 그 왕족 얘기가 거짓말이라는 걸 알고 있었던 건가. 아니, 사실 따지고 보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헤네스가 준상과 함께 지구에서 생활한 것이 벌써 며칠인데 그만한 일조차 알아채지 못할까. 준상은 쓴웃음을 지으며 헤네스에게 대답했다. “맞아.” “역시 그랬네요.” 헤네스는 준상으로부터 자백을 받자 여전히 놀란 표정을 가누지 못하고 있는 리체스에게 말했다. “여왕님.” “응?” “농담이래요.” “...” 리체스는 그 말에 다시 여러 가지 의미로 놀랐다. 그 중에서도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준상이 자신을 상대로 농담을 했다는 사실이 가장 큰 충격이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놀림을 받은 것으로 여길 수도 있는 일이겠지만, 바꿔 말하자면 조금쯤은 자신에게 마음을 허락하기 시작했다는 뜻이 될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자 리체스는 어쩐지 가슴 한 구석이 조금 아려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감각, 너무 낯설다. 하지만 준상은 요정 여왕의 그런 내심은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채, 미니맵을 통해 새롭게 등장한 네 개의 표적을 확인하고 있었다. 순서와 숫자로 봐서는 헬하운드가 틀림 없을 것이다. “가자.” “네.” 준상은 다시 앞장 서서 미로의 벽을 부수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준상은 입에서 불길을 뿜어내고 있던 붉은 색의 개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딱히 설명을 듣지 않아도, 저것이 바로 퀘스트 상에 표시된 헬하운드임을 준상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지옥의 번견, 헬하운드.” 리체스가 옆에서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준상은 우선 처음과 마찬가지로 늑대와 정령을 앞으로 내보내 헬하운드를 공격했다. 헬하운드는 늑대들에 비하면 몸집 자체는 그리 크지 않았다. 늑대들은 능히 사람을 태우고 다닐 수 있을 정도의 크기를 가지고 있었지만, 헬하운드는 입으로부터 불꽃이 넘실거린다는 점을 제외하면 그냥 조금 덩치 큰 사냥개 정도의 크기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미로 안에 나타났던 언데드들과는 달리, 헬하운드는 그 자체로 강대한 속성력을 지니고 있는데다, 정령과 늑대들이 동시에 달려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대단하군.” 눈꽃송이나 날벼락의 등급이 좀 더 높았으면 어떨까 싶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빠르고 날렵하게 자신들보다 큰 늑대들에게 대항하는 모습에 준상은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헬하운드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고 있는 리체스는 오히려 이 지옥의 번견들에게도 그리 밀리지 않는 늑대들의 모습에 더 감탄하고 있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헬하운드는 엄연히 환수의 반열에 속한 생명체이다. 정령이 돕고 있다고는 해도 일반적인 야수가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의 존재들이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헬하운드가 뿜어내는 불길에 상처를 입으면서도 물러서지 않는 늑대들의 모습에 리체스는 솔직히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내심 늑대들을 속으로 응원하며 싸움을 지켜보던 리체스는 문득 헬하운드의 몸에서 특이한 마법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저기...” 리체스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자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개싸움을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준상이 반응했다. “왜?” “아무래도 저 녀석들, 수호석의 핵심 마법진이 몸에 새겨져 있는 것 같은데요?” “...” 준상은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봤지만, 그의 능력으로는 헬하운드의 몸에 새겨진 마법의 흔적을 파악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어쨌든 리체스의 말대로 저 지옥의 번견들에게 수호석의 핵심 마법진이 새겨져 있다면, 얘기는 간단하다. “저 녀석들을 해치우면 미로는 완전히 정지한다는 뜻인가.” “아마도요.”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목을 한 바퀴 돌리며 몸을 풀기 시작했다. 스스로 저 개싸움에 뛰어들어 전투를 빠르게 종결짓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본 리체스가 얼른 다시 말했다. “저기요!” “왜?” “제가 힘을 좀 써 봐도 될까요?” “...” 리체스가 강대한 힘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여기 있는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지금껏 그녀가 본격적으로 힘을 구사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던 탓에 그것이 어느 정도의 힘인지 준상은 자세히 알지 못했다. 앞으로 그녀와 함께 싸워 나가자면 그녀가 지닌 역량도 정확히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런 생각을 떠올린 준상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물러났다. “해봐.” “네!” 허락을 받은 리체스는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작은 손을 죽 펼치며 마법을 구현하기 시작했다. 촹! 곧바로 그녀 주위에 작은 마법진 하나가 나타났다. 마법진은 무지개빛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공중에 정지해 있는 리체스를 중심으로 펼쳐진 채 스스로 빙글 빙글 돌아가고 있었다. 그 기묘하고 신기한 모습을 향해 준상과 헤네스가 시선을 던질 찰나, 곧바로 두 번째 마법진이 첫 번째 마법진 주위로 퍼지며 모습을 드러냈고, 이어서 세 번째와 네 번째 마법진 역시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겹쳐진 네 개의 마법진들은 마치 리체스라는 이름의 항성 주위를 도는 행성의 궤도처럼 이리저리 요동치며 흔들리다가 마침내 그녀가 작은 두 손을 앞으로 모으자 차례로 정렬되며 전면을 향해 차례로 나열되었다. 모든 마법진의 정렬이 끝나자, 리체스의 입에서 한 마디 노래와 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불어라, 불어라. 냉혹한 칼바람이여. 세상을 얼려 겨울 여왕의 궁전으로 삼을지니.” 그러자 줄지어 늘어선 네 개의 마법진들이 연이어 반응하며 빛을 발하는가 싶더니 차가운 눈보라가 그 안에서 뿜어져 나왔다. 얼핏 보기엔 바람과 얼음이 결합된 마파람과 비슷한 느낌. 하지만 그 위력은 전혀 차원이 달랐다. 헬하운드가 지닌 강력한 불의 속성력으로 인해 별다른 피해를 주지 못하고 있던 마파람과는 달리, 요정 여왕이 발현한 냉혹한 칼바람은 순식간에 몰아치며 헬하운드의 몸을 하얀 얼음으로 뒤덮어 버리기 시작한 것이다. 냉혹한 칼바람은 그녀가 요정계가 아닌 다른 세상에서 사용할 수 있는 49레벨의 마법 가운데 가장 강력한 것 중 하나이다. “...” 준상과 헤네스는 순식간에 얼음 동상이 되어버린 헬하운드들을 보고 잠시 말문을 잃었다. 엘리멘탈 드래곤이 지닌 정령 증폭을 통해 마파람을 발동하면 비슷한 위력이 나오지 않을까 싶기는 했지만, 리체스가 지닌 마법은 이게 전부가 아닐뿐더러 한 달에 한 번 사용할 수 있는 요정 결계까지 더해지면 그 위력은 훨씬 더 막강해진다. “휴우... 힘들다.” 솔직히 리체스로서도 좀 무리하기는 했다. 준상에게 자신의 존재감을 확실하게 보여주기 위해 현재 사용할 수 있는 마법 가운데 가장 강력한 것을 사용한 탓이다. 하지만 그런 노력이 헛되지 않았는지, 준상도 헤네스도 리체스를 보는 눈이 조금은 달라진 듯한 느낌이다. “에헴! 어때요?” “풋!” 허리에 손을 척 얹고 콧대를 드높이고 있는 리체스의 모습에 헤네스는 그만 웃음을 터뜨렸고, 저 무뚝뚝한 준상마저 피식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대단하군.” “헤헤...” 준상은 앞으로 나서서 얼음 동상이 되어버린 헬하운드들을 향해 가볍게 주먹을 휘둘러 모두 박살내 버렸다. 그러자 곧바로 두 개의 히든 퀘스트에 완료 메시지가 나타났다. 헬하운드 처치와, 수호석 파괴 퀘스트가 바로 그것이었다. (Hidden) 헬하운드를 처치하십시오. (4/4) (협력) ->완료! (Hidden) 일곱 개의 수호석을 파괴하십시오. (협력) ->완료! 퀘스트 완료 메시지를 확인하는 준상의 귀에 우웅거리며 미로 전체가 공명하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빙하 속에 사로잡힌 거대한 괴수가 외치는 비명처럼 섬뜩한 느낌이었다. 잠시 얼굴을 찌푸리며 미로가 외치는 단말마를 듣고 있던 준상은 소리가 멈추자 다시 정령과 늑대를 앞세운 다음 헤네스와 리체스를 향해 말했다. “가자.” “네!” 그들이 미로의 작동을 중지시키고 다음 단계로 이행할 즈음, 일곱 명의 귀환자들은 조심스럽게 동굴을 통과하고 있었다. “이제야 조용해졌네요.” “그러게요.” 그들은 방금 전까지 동굴 안쪽에서 들려오던 쿵쿵거리는 소리가 멈추자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계속 규칙적으로 들려오던 것이 멈추었다는 것은 앞쪽에서 뭔가 이변이 생겼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귀환자들은 금방이라도 발소리를 쿵쾅거리며 거인 같은 것이 튀어나오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긴장하며 조심스럽게 동굴을 전진했다. 동굴 안으로 들어오며 그들은 아무런 전투의 흔적도 찾아내지 못했다. 해치운 좀비들을 모조리 태워버리고 그 잔해들마저 땅속에 깔끔하게 묻어버리고 지나간 탓이다. 좀비들을 태워버린 냄새를 산들바람이 밖으로 밀어내긴 했지만, 그것은 이들이 동굴 안으로 들어서기 전의 일이었기에, 결과적으로 완벽한 증거인멸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들은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은 동굴을 통과했고, 오래지 않아 미로의 입구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들은 곧바로 미로 안으로 들어서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입구 바로 옆에 보란 듯이 커다란 구멍이 뻥 하고 뚫려 있었기 때문이다. “이건...” 도대체 이 구멍은 무엇일까. 미로야 그렇다 쳐도 이런 것이 뻥 뚫려 있는 것은 너무나 부자연스럽지 않은가. 구멍을 발견한 모두의 머리 속에 그런 생각이 자리 잡는 순간 안경 쓴 남자 하나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이건, 함정이군요.” “함정이라구요?” 앞서 귀환자들끼리 소개를 할 때 국내 제일의 명문대 대학원 법학과에 재학중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던 남자는, 자신만만한 태도로 콧잔등에 걸쳐진 안경을 밀어올리며 말했다. “실로 고차원적인 함정입니다. 인간의 심리를 이용한 트릭이라고 할 수 있죠.” “트릭이라면...” 남자는 자신의 추리를 천천히 설명했다. “누군가 앞서 가며 통로를 개척해 놓은 것은 아닐까 라는 막연한 기대감을 부여해 안으로 들어온 상대로 하여금 미로 통과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그래서 어려운 갈림길에 도달할 때마다 역시 그 구멍으로 들어가 봤어야 했다고 갈등하게 만드는, 그런 아주 무서운 트릭입니다.” “아...” 사람들은 탄성을 터뜨렸다. 남자는 그런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이런 미로에서는 파티 구성원 하나 하나가 마음을 하나로 합치지 않으면 위험합니다. 입구부터 이런 식으로 분열을 획책하다니, 이 미로의 설계자는 실로 음흉한 바가 있군요.” “세상에.” 듣고 보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건축이나 토목, 또는 던전에 관해 해박한 전문가가 혹시 있었다면 부서진 흔적을 보고 이것이 최근에 파괴된 것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겠지만, 불행히도 이 일곱 명의 귀환자들은 대부분 문과 계통의 학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일행 중 하나가 묻자 안경 쓴 남자는 자신만만한 태도로 말했다. “모름지기 모든 미로에는 길이 있기 마련입니다. 애초에 정말로 들어오기를 원치 않았다면 이런 미로를 만들 것이 아니라 모든 길을 완전히 막는 편이 옳은 일이죠. 우리가 할 일은 모두의 지혜를 합쳐 이 미로를 돌파하는 일 뿐입니다.” “오오!” 사람들은 남자의 말에 박수를 치며 호응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우우웅! 미로의 벽이 진동하며 소름끼치는 단말마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박수를 치다 말고 움찔하며 긴장한 표정으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들의 시야에는 무엇 하나 움직이는 기색이 잡히지 않았다. “뭐, 뭐죠?” “글쎄요...” 안경 쓴 남자는 침착한 표정으로 잠시 생각하더니 다시 말했다. “어쨌든, 적의 실체를 알 수 없는 이상, 최대한 조심해서 전진하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함정이 있을지도 모르니 모두들 조심하십시오.” “네.” 그들은 각자 무기를 단단하게 움켜쥔 채 안경 남자의 뒤를 따라 조심스럽게 미로 안으로 발을 디뎠다. 하지만. 우려와는 달리 그들은 미로 안에서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준상이 수호석과 헬하운드를 모두 박살낸 순간, 미로의 기능이 정지하며 그 안에 예속되어 있던 언데드들도 모두 한 줌 재가 되어 사라져 버린 탓이다. 몽몽이가 있었다면 미로의 돌 틈새에 끼어있는 몇 개 안되는 시드들을 찾아낼 수 있었겠지만, 이 파티 안에는 안목의 능력조차 가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뭔가 나와야 하는데 아무것도 나오지 않으면 사람은 안도하기 보다는 오히려 더 불안해지기 마련이다. “혹시... 길을 잘못 든 건 아닐까요?” 누군가가 그렇게 중얼거리자 앞서 가던 남자가 다시 콧잔등에 걸쳐진 안경을 밀어올리며 말했다. “정말로 무섭군요. 이건 대단한 심리 트릭입니다.” “그게 무슨...” 남자는 진지한 말투로 설명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렇게 아무것도 없으면 언제 뭐가 나올지 몰라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스트레스가 심해질수록 체력이 저하되고, 체력이 저하될수록 우리들의 전투력이 낮아질 것은 당연한 일. 모름지기 병법이 이르기를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선이라 하지 않습니까. 스스로 지쳐 물러나게 할 수 있다면 굳이 자원을 소모할 필요가 없으니 그야말로 최선의 승리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신경을 바짝 곤두세운 탓에 그들은 지금 무척이나 목마르고 피곤한 상태였던 것이다. “일단 이곳에서 잠시 쉬도록 합시다. 이 싸움이 지구전이라면 먼저 체력을 든든히 보전할 필요가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사람들은 각자 준비해온 식량과 음료수를 조금씩 섭취하며 휴식을 취하기 시작했다. 다른 일곱 명의 귀환자들이 그렇게 완전히 헛다리를 짚고 있을 때, 준상은 미로의 다음 구획을 빠르게 돌파해 다음 목표로 다가가고 있었다. 준상은 일단 초감각을 통해 적이 있음을 확인하자, 눈에 띄는 정령들을 일단 돌려 보낸 다음 늑대들을 앞세운 채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그런 그의 시야에, 한 무리의 괴물들이 줄을 지어 어디론가 향하는 모습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 괴물들 사이에 헐벗은 모습으로 줄줄이 사슬에 묶인 채 겁먹은 표정으로 끌려가는 일곱 명의 여자들이 있었다. “저건...” 헤네스의 말에 준상이 조용히 대답했다. “제물이다.” “그럴 수가.” 헤네스는 물론이고 리체스도 표정이 굳을 수밖에 없었다. 인질이 있는 상태에서의 전투는 평소보다 훨씬 힘이 들 수밖에 없음을 잘 알고 있는 탓이다. 하지만, 정작 준상은 별로 걱정스러운 기색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혹시 인질들을 희생시키려는 것은 아닐까. 리체스는 그런 불안한 예감이 들어 준상에게 말을 걸었다. “저...” 하지만 준상은 그녀가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갑자기 그 자리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준상은 위상전이를 연거푸 펼쳐 순식간에 여자들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곧바로 모습을 드러내며 그녀들을 끌고가던 괴물의 머리를 박살내고는 놈이 들고 있던 줄을 확 낚아챘다. “꺄악!” 헐벗은 여자들은 갑자기 눈앞에 시커먼 망토를 뒤집어 쓴 남자가 모습을 드러내는가 싶더니 그가 괴물로부터 줄을 빼앗아 확 끌어당기자 비명을 지르며 준상의 힘에 딸려 갔다. 가장 앞에 서 있던, 빛바랜 금발 머리의 처녀는 준상의 힘에 딸려가자 이내 그의 가슴팍에 몸이 부딪힐 것을 예상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이게 왠일. 준상의 품에 안기는 순간 갑자기 시야가 확 바뀌며 생전 처음 보는, 마치 아이들이 제멋대로 낙서 해놓은 것 같은 풍경의 장소가 나타나는 것을 느끼며 그대로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연이어 다른 처녀들이 우르르 그녀의 등 위로 쏟아져 내렸다. 그녀들은 쓰러진 충격에 잠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가 제법 시간이 지난 뒤에야 간신히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여긴... 도대체...” 당혹스러워 하는 그녀들 주위에는 어느 새인가 호기심 많은 요정들이 빠꼼히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하지만 당황한 것은 제물이 될 뻔한 처녀들 만이 아니었다. 그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헤네스와 리체스 또한 눈앞에서 찰나의 순간 벌어진 광경에 입만 쩍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세상에. 정령의 문을 저런 식으로 사용할 줄이야. 확실히 그녀들의 안전을 생각한다면 가장 간단하고 효율적인 방법이다. 그녀들을 보호한다 치더라도 전투가 벌어지면 어디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 하지만 잠시 그녀들을 요정계로 옮겨 둘 수 있다면, 그런 만약의 사태를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준상이 지닌 힘을 최대한 살릴 수 있게 된다. 준상은 처녀들을 모두 요정계로 옮기자 지체 없이 인벤토리에서 랑다잘의 분노를 꺼내들고 갑작스런 사태에 얼이 빠진 괴물들을 향해 듀얼 스톰을 펼쳤다. 그러자 방어고 뭐고 할 틈도 없이 괴물들은 순식간에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두 개의 철구에 문자 그대로 갈려나가고 말았다. 준상은 몽몽이를 불러 아이템을 챙기게 한 다음 모래무지를 시켜 괴물들의 잔해를 땅속에 묻은 다음에야 숨어있던 헤네스와 리체스를 불렀다. 00163 트롤러 ========================================================================= (Hidden) 제물로 잡혀온 처녀들을 구출하십시오. (7/7) (협력) ->완료! 헤네스와 리체스가 다가오는 동안 준상은 퀘스트가 갱신되는 것을 확인했다. 이전에 습지에서 다인을 구출하는 퀘스트의 경우 온전히 마을까지 데려다 주고 난 뒤에야 비로소 퀘스트 완료가 떴던 것을 생각해 보면 이것은 의외의 일이었다. 일단 완전히 안전지대로 이동되었으므로 퀘스트의 목적인 구출을 달성한 것으로 인식한 것일까. 잘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완료된 이상 따로 신경 쓸 필요는 없으니 다행이다. 처녀들이야 나중에 요정들을 시켜서 그녀들이 살던 곳 근처의 숲 같은 곳으로 보내면 되는 일이다. “대단해요.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 했어요?” 리체스가 호들갑을 떨며 그렇게 말했지만 준상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말투로 이렇게 대답할 뿐이었다. “그냥.” “...” 리체스는 입을 삐죽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 모습을 보고 헤네스가 쓴웃음을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신경 쓰지 말아요. 저한테도 가끔 저러거든요.” “그래?” “지금은 그래도 좀 덜한 거에요. 전에는 대꾸조차 안하고 무시하기 일쑤였다니까요.” “헤에...” 둘이서 그렇게 대화를 시작했지만 이미 준상은 다시 미니맵을 살피며 다음 목표를 확인하고 있었다. “가자.” “네.” 준상의 말에 둘은 얼른 대화를 마치고 그의 뒤를 따라 나섰다. 길게 아래쪽으로 이어진 오래된 계단을 따라 한참을 내려가자 마침내 작은 홀 같은 것이 나타났다. 양옆으로 기사의 모습을 한 석상이 줄을 지어 서 있었고, 맞은 편 출구 앞에는 그 석상을 그대로 작게 축소해서 옮겨 놓은 듯한 인물 하나가 할버드를 든 채 버티고 서 있었다. 차이가 있다면, 얼굴에 기이한 분위기의 사자가면을 쓰고 있다는 정도. “...” 녹이 잔뜩 슬기는 했지만 기사의 갑옷을 입고 있는 것으로 봐서는 아마도 호위장 큐롤인 듯 싶었다. 큐롤은 준상의 모습을 확인하자 할버드를 한 차례 크게 휘둘러 보이고는, 어서 덤비라는 듯이 손을 까딱거렸다. 하지만 준상은 그 도발에 대응하지 않았다. 대신 지금까지 일행의 뒤를 졸졸 따라오고 있던 엘리멘탈 드래곤을 불렀다. 정령이나 리체스의 힘은 이미 확인이 끝났지만, 엘리멘탈 드래곤이 강화된 정령의 힘을 얼마나 더 증폭시킬 수 있을지는 아직 확인이 되지 않은 탓이다. 준상은 엘리멘탈 드래곤에게 정령들을 붙여준 다음, 명령했다. “치워라.” 그러자 엘리멘탈 드래곤은 곧바로 땅의 정령인 모래무지와 합체하더니 단단한 석실 안에 거대한 모래지옥을 만들어 내었다. 순식간에 소용돌이치는 모래지옥에 휩쓸린 호위장 큐롤은 당혹해 하며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지만, 무거운 중갑을 착용한 탓에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았다. 엘리멘탈 드래곤은 큐롤이 계속해서 모래무지의 힘을 증폭하다가, 큐롤이 머리만 남기고 완전히 모래 속에 파묻히고 나서야 비로소 모래무지와의 합체를 끝났다. 큐롤은 모래지옥의 움직임이 멎자 곧바로 팔을 뻗어 밖으로 빠져 나오려고 했지만, 놈이 완전히 빠져 나오기도 전에 엘리멘탈 드래곤의 입에서 강력한 번개가 대기를 뚫고 쏘아져 나왔다. 꽈릉! 아까까지 날벼락이 뿜어내던 것이 번개 비슷한 뇌전의 일종이었다면, 지금 엘리멘탈 드래곤의 입에서 뿜어져 나온 것은 가감할 필요조차 없는, 문자 그대로 날벼락이었다. 대기를 찢으며 날아간 날벼락은 그대로 큐롤의 몸을 두들겼다. 큐롤은 소리 없는 비명을 온몸으로 지르며 발악했지만, 세 번 네 번 연거푸 벼락에 맞자 얼마 못가 타는 냄새를 풍기며 움직임이 멈추고 말았다. 하지만 엘리멘탈 드래곤은 놈의 움직임이 멈추고도 몇 번이나 더 벼락을 쏟아부었고, 결국 큐롤은 뼈속 깊은 곳까지 완전히 탄화된 목이 몸체로부터 굴러 떨어지고 나서야 엘리멘탈 드래곤의 공격을 더 이상 받지 않게 되었다. “허...” 상성이 좋지는 않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보스급을 이렇게 간단하게 쓰러뜨리다니. 준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수 밖에 없었다. 놀란 것은 준상 뿐만이 아니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헤네스는 물론이거니와 정령계를 하위 차원으로 두고 있는 요정계의 전직 여왕인 리체스마저도 엘리멘탈 드래곤의 강력한 공격 능력에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괜히 신수라고 불리던 것이 아니었구나.” “네? 신수요?” 헤네스가 묻자 리체스는 대답했다. “몰랐어? 예전에는 인간계에서 신수로 불리곤 했었는데.” 하지만 나름 고등교육을 받은 양갓집 규수인 헤네스로서도 그런 얘기는 금시초문이다. “그런가요? 전 처음 들었는데.” “그래? 이상하네.” 사실 이상할 건 없는 일이다. 리체스가 알고 있는 상식이라고 해봐야 기본이 백년 단위의 과거사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인간들이 살고 있는 세상에 엘리멘탈 드래곤이 나타난 가장 최근의 사례가 천년 단위의 과거임을 감안하면, 환수나 신수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을 쌓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알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둘이서 그렇게 얘기를 나누는 동안 준상은 엘리멘탈 드래곤에게 바닥을 원상 복구하도록 지시한 다음, 탄 냄새를 잔뜩 풍기고 있는 큐롤의 사체에게로 다가가 습득할 만한 아이템이 있는지 확인했다. 그 결과 준상은 시드 하나와 큐롤이 쓰고 있던 사자 가면, 그리고 할버드 하나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명칭 : 썩어버린 긍지 레벨제한 : 5 종류 : 시드 등급 : Rare 효과 : 1. 저주 저항력 증가 5% 2. 근력 증가 7% 3. 생명력 증가 6% 설명 : 호위장 큐롤이 지니고 있던 특별한 시드입니다. Seed 슬롯이 있는 아이템이나 카드에 장착하여 능력을 강화할 수 있습니다. 한번 장착한 시드를 분리하기 위해서는 특수기능 ‘분리’가 필요합니다. [이 시드를 아이템이나 카드에 장착하시려면 이곳을 누르십시오.] 은은한 서기를 발하는 것을 보고 예상은 했지만, 오랜만에 레어 시드임을 확인하자 준상은 만족스러웠다. 생각보다 그리 수치가 높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레어 시드 자체가 보기 드문 이상 득템인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볼 것 없이 얼른 새로 얻은 시드를 카드에 장착한 준상은 다시 사자 가면을 확인했다. 아이템정보 명칭 : 피 끓는 사자의 가면 레벨제한 : 10 종류 : 가면 등급 : Rare 효과 : 1.공격 속도 6% 증가 2.체력 증가 5% 3.초감각 1레벨 상승 Seed : 3슬롯 설명 : 젊은 사자의 영혼이 담긴 강력한 마법의 가면. 그런가보다 하고 옵션을 살피던 준상의 눈이 반짝 빛났다. 공격 속도나 체력 증가는 그렇다 치더라도, 마지막의 초감각 1레벨 상승이라는 문구가 시선을 붙잡은 탓이다. 준상이 현재 지니고 있는 초감각은 1레벨. 초감각이 카드처럼 적용되는 스킬인지, 아니면 안목이나 통찰과 같은 개념의 능력인지는 아직 정식으로 초감각이라는 능력을 얻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준상으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그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초감각은 마수 크롤로바간의 시드에 부여된 옵션의 일부일 뿐이다. 준상은 새벽이슬을 불러 가면에 남은 재를 털어낸 다음 천천히 얼굴에 가져갔다. 그러자, 딱히 줄 같은 것으로 고정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맞춘 듯이 얼굴에 착 달라 붙었다. 그 모습에 리체스가 바로 반응했다. “오오! 멋진데요? 게다가 마법도 부여되어 있는 것 같고.” “알아보겠나?” “으음...” 리체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요. 뭔가 특이한데... 신체 능력을 향상시키는 건 알겠는데, 그 외에도 뭔가 더 있는 것 같네요. 이건 분석을 해봐야겠는데요.” “그렇군.” 마법에 관해서는 따를 자가 없는 리체스조차 한 눈에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만 봐도 이 가면의 가치를 알 수 있다. 아이템 설명에 큐롤의 이름이 없는 것으로 봐서는 그 역시 어딘가 다른 장소에서 이것을 습득한 것이 아닐까 싶다. 준상은 의외의 장소에서 제법 훌륭한 아이템을 얻었다는 것에 만족해하며 남은 하나의 아이템인 할버드를 마저 확인했다. 아이템정보 명칭 : 호위장의 미늘창 레벨제한 : 10 종류 : 무기 등급 : Uncommon 공격력 : 12-23 효과 : 치명타 피해 15% 증가 Seed : 2슬롯 설명 : 호위장 큐롤의 미늘창. 강력한 위력을 가졌지만 어지간한 힘으로는 다루기조차 어렵다. “흠...” 가면이 워낙 대단한 아이템이어서 그런지 무기는 별로 눈에 차지 않았다. 뭐라해도 그에게는 이미 랑다잘의 분노나 블러드 서커 같은 엄청난 무기들이 있다보니 새로운 무기를 얻어도 그것들과 비교가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준상은 무기를 인벤토리의 빈 공간에 던져 넣고 나서야 미니맵을 확인해 다음 목표를 탐색했다. 남은 목표는 저주받은 왕과 악령의 사제. 미니맵을 살펴보지 이 둘은 같은 장소에 자리 잡고 있었다. 아무래도 의식이 벌어지고 있는 장소일 가능성이 높다. 처녀들을 구출한 이상 사실상 의식은 이미 저지한 것이나 다름없지만, 그것을 주재하는 악령의 사제를 처치하지 않는 이상 어디서 또다른 제물을 끌고 올지 모르는 일이다. “가자.” “네.” 준상은 헤네스와 리체스를 데리고 다시 아래층으로 이어진 계단을 천천히 내려갔다. 사자의 가면 덕분에 초감각의 레벨이 높아진 덕분인지 제법 먼 거리의 상황도 눈으로 본 것처럼 확연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준상은 계단 아래쪽에 매복이 숨어있는 것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수는 모두 여섯. 아마도 암살자 계열인 듯 어둠 속에 모습을 자연스럽게 모습을 숨긴 채 기세를 죽이고 있었다. 제법 높은 은신 능력을 지녀서 초감각이 아니었다면 발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준상은 숨은 적들의 존재를 파악하자 우선 손을 뻗어 뒤따라서 계단을 내려오던 헤네스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 헤네스는 대번에 긴장된 표정을 지으며 주위를 살폈지만, 그녀의 능력으로 숨은 적들을 파악하는 건 무리였다. 준상은 그대로 멈추어 선 채 다시 한 번 정령들을 움직였다. 이번에도 가장 먼저 나선 것은 반딧불이였다. 언데드들에게는 별다른 효과를 얻지 못했지만, 시각을 가진 생명체에게 있어 반딧불이의 섬광 공격은 훌륭한 기습 효과를 발휘한다. 번쩍! 소리 없는 섬광은 순식간에 숨어있던 적들의 시각을 마비시켰고, 곧바로 네 마리의 늑대가 잘 훈련된 사냥개처럼 달려나가며 후각으로 숨어있는 적들을 찾아내어 달려들었다. 거대한 네 마리 늑대가 달려들자, 적들은 더 이상 숨어있을 수만은 없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자, 기다리고 있던 정령들이 곧바로 집중 포화를 퍼붓기 시작한다. 얼음과 불, 바람, 그리고 뇌전의 다채로운 융단 폭격이 이어지자 적들은 결국 얼마 버티지 못하고 전투력이 상실되었고, 그런 그들의 목을 늑대들이 거칠게 물어뜯는 것으로 마침내 전투가 종결되었다. 헤네스가 암살자들과 싸우는 과정에서 생긴 늑대들의 상처를 치료하자, 준상은 다시 계속해서 계단을 내려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마침내 던전의 최하층 광장에 도달하게 되었다. “...”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주위를 환하게 밝히고 있는 횃불이었다. 그리고 횃불로 밝혀진 광장 중앙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백골이라기 보다는 미이라라는 말이 어울릴 법한, 바짝 마른 갈색 피부가 간신히 해골 위를 덮고 있는 듯한 모습의 인물이 머리에 금관을 모티브로 한 투구와 사슬갑옷을 착용한 채 두꺼운 검을 짚고 서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검은 망토를 뒤집어쓰고 지팡이를 짚은 사람 하나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저주받은 왕 엠후라와 악령의 사제 운델이었다. 00164 트롤러 ========================================================================= “...” 준상이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가자, 뒤쪽에 서 있던 운델이 입을 열었다. “후. 후. 후. 어쩐지 위쪽이 소란스럽다 싶더니, 불청객이 있었군. 네 놈들은 누구냐!” “...” 물론 준상은 대답하지 않았다. 애초에 이런 걸 묻는 것 자체가 시간을 끌기 위한 수작임을 뻔히 알고 있는 탓이다. 귀가 먹지 않았다면 통로의 암살자들이 도륙 당하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고, 그렇게 불문곡직 다 때려잡아 버린다면 적이란 건 따로 생각할 필요도 없는 일. 또한 상대가 적이라면 전투 직전에 통성명 따위를 하는 예의 바른 짓도 의미가 없다. 정 궁금하면 잡아다 놓고 고문이든 뭐든 해서 알아내면 될 일이니, 지금 이런 저런 얘길 나누어 봐야 결국 헛짓거리 밖에 되지 않는 셈이다. 헤네스와 리체스는 입구 근처에 멈추어 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 준상이 앞으로 나가기 전에 손을 뻗어 멈추라는 신호를 보냈기 때문이다. “이것들이! 누군지 썩 고하지 못할까!” “...” 준상이 말없이 계속 앞으로 걸어나오자 운델은 당황한 표정으로 그렇게 외치며 뒤를 흘끔거렸다. 그러자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리체스가 준상에게 요정의 의사소통 방식으로 속삭였다. “저 자의 뒤에서 마력의 흐름이 느껴져요.” “...” 준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다음 적절한 위치에 도달하자 곧바로 자신의 발치에 늘어져 있던 어둠의 정령인 어둑발이를 이용해 위상전이를 펼쳤다. 악령의 사제 운델은 준상이 갑자기 어둠 속으로 스며들어 모습을 감추자 기겁하며 소리쳤다. “놈을 막아!” 그 소리가 광장 안에 울려 퍼지자, 그 중앙에 두꺼운 검을 짚고 서 있던 저주받은 왕 엠후라의 썩어버린 두 눈에서 푸른 인광이 번뜩이더니, 그대로 검을 뽑아 휘둘렀다. “응?” 위상전이를 통해 어둠 속을 통과하던 준상은 눈앞으로 시퍼런 무언가가 번뜩이며 날아들자 얼른 랑다잘의 분노를 꺼내들고 무기 방어를 펼쳤다. 쩌엉! 그러자 곧바로 금속음이 울려퍼지며 광장 안에 강렬한 충격파가 몰아쳤다. 준상은 기습적인 공격에 의해 모습이 드러나고 다시 뒤로 서너 발자국 정도 물러난 상태로 엠후라의 연속 공격을 막아내야만 했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할지. 엠후라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뿜어져 나오는 시퍼런 기운을 보는 순간, 가장 먼저 준상의 머리 속에 떠오르는 단어는 검기 정도가 고작이었다. 준상의 움직임이 멈추자 뒤쪽에 서 있던 운델은 안도한 기색을 보이며 다시 외쳤다. “하하하하! 어리석은 놈. 그 자는 과거 인간들 가운데 최강의 칭호를 얻었던 검호 가운데 한 명인 검왕 엠후라다. 네 놈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검을 넘어서지는 못할 것이다!” “...” 혼자 무협지 찍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싶더니 제법 별칭이 대단하다. 하지만 준상은 귀찮다는 표정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그리고 계획을 바꾸어 엠후라를 먼저 쓰러뜨리기로 마음먹었다. 마음 속에서 결정이 내려지자, 준상은 랑다잘의 분노를 앞세운 채 달려 나가며 말했다. “리체스.” “네.” “저 놈을 맡아라.” “네!” 리체스는 준상의 지시가 떨어지자 곧바로 무지개빛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허공을 날아올랐고, 정령과 늑대들은 뒤에 남아 헤네스를 보호했다. -그오오오! 엠후라는 준상이 자신을 향해 정면으로 달려들자 검기를 뿜어내던 것을 멈추었다. 대신 두꺼운 검을 머리 위로 치켜 올린 채 기운을 모으기 시작했다. 웅! 웅웅! 검에서 예사롭지 않은 푸른 기운이 뿜어져 나옴과 동시에 대기가 들끓으며 공명하기 시작한다. 이런 현상, 준상도 익히 알고 있다. 그가 강타를 발동하기 전에 힘을 모을 때와 거의 판박이나 다름없는 현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엠후라의 기술은 준상과는 또 달랐다. 기운을 모으는가 싶더니, 곧바로 검을 거꾸로 쥔 채 지면에 내리 찍었기 때문이다. -콰아아아아! 모여진 힘은 그대로 광장의 바닥에 거대한 균열을 일으키며 마치 거미줄이 펼쳐지는 것처럼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쯧.” 준상은 혀를 차며 손에 들고 있던 철구 가운데 하나로 지면을 내리 찍었다. 그리고 곧바로 지면을 타고 흘러나온 푸른 기운이 철구를 때리는 충격을 막아내며 다른 하나의 철구를 엠후라에게 던졌다. “흡!” 준상의 손에서 뻗어나간 거대한 철구는 그대로 엠후라의 시야를 가리며 날아들었다. 자신을 향해 거대한 철구가 날아들자, 엠후라는 지면에 박아 넣었던 검을 뽑으며 그대로 아래에서 위로 올려쳤다. 두꺼운 검이 반원을 그리며 허공에 궤적을 만들어 내자, 쩌엉! 다시 한 번 거대한 충격파가 울려 퍼지며 철구는 본래의 궤도에서 벗어나 엠후라의 옆으로 흘러가며 지면을 부수고 틀어박힌다. 콰가가각! 하지만 준상의 공격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철구가 엠후라의 시야를 가린 틈을 타, 그대로 돌진해왔던 것이다. 엠후라는 철구를 쳐내기 위해 검을 치켜 올린 상태에서 준상의 돌격을 막아내야만 하는 상황에 처했다는 사실을 깨닫자 급격하게 검의 궤도를 바꾸려 했다. 콰드득! 말라붙은 근육과 뼈들이 금방이라도 부스러질 것처럼 비명을 질러댔지만, 엠후라는 내뻗은 검의 궤적을 자신이 원하는대로 바꾸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엠후라의 썩은 눈에서 뿜어져 나오던 푸른 인광과 준상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안광이 허공에서 서로 충돌을 일으켰다. 움찔! 순간 엠후라는 아주 잠깐 동안 멈칫하며 동작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너무나도 찰나의 순간 벌어진, 아주 작은 머뭇거림. 하지만 그 결과는 너무도 참혹했다. 준상의 손에 의해 휘둘러진 거대한 철구가 그 짧은 틈을 노려 다시 한 번 엠후라를 향해 날아든 것이다. 휘둘러진 검을 차마 회수하지도 못한 채, 아주 잠깐에 불과하지만 움직임이 멈추어 버린 상태로 엠후라가 그 무지막지한 공격을 막아낼 방법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콰드드득! 거대한 철구는 그대로 엠후라의 몸을 짓이겼다. 랑다잘의 분노가 가진 파쇄의 힘은 순식간에 엠후라의 몸을 감싸고 있던 사슬갑옷을 분쇄하고 그 안에 들어있던 말라빠진 몸을 갈가리 찢어 버렸다. -크르륵... 그래도 검왕이라는 칭호답게 엠후라는 일격에 박살이 나지는 않았지만, 갑옷이 박살나고 뼈와 살이 찢겨지자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든 상태가 되어 버렸다. 원래대로라면 이 정도 피해를 입을 경우 악령의 사제 운델이 힘을 발휘해 그 신체를 수복해 줘야 한다. 하지만 운델은 지금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없는 상태였다. “크아악! 차, 차라리 죽여라!” “시끄러!” “...” 리체스에 의해 이미 완전히 제압되어 버린 상태였기 때문이다. 요정 여왕이 운델에게 사용한 마법은 단 하나 뿐이었다. 그것은 바로 덩굴 묶기. 지면에 씨를 뿌린 다음, 싹을 터뜨려 그 덩굴로 적을 묶는 마법이다. 단순하다면 단순한 마법이지만, 요정 여왕이 발휘한 이 마법은 그냥 몸을 묶는 정도로 끝나는 수준이 아니다. 마법에 의해 강화된 덩굴이 적의 마력을 봉쇄하는 효과까지 덤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악령의 사제 운델은 팔뚝 두께의 덩굴에 온몸이 완전히 묶인 채 마법은커녕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물론 운델의 능력이 리체스보다 뛰어났다면, 이 정도 마법은 간단하게 벗어날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불행히도 악령의 사제가 지닌 마법적 능력은 요정계를 벗어나 절반의 위력 밖에 발휘하지 못하는 요정 여왕에게도 크게 뒤지는 상태였다. 어쨌거나. 운델이 신체를 수복하지 못하게 된 이상, 치명적인 일격을 허용한 엠후라에게 남은 운명은 단 한 가지 뿐이었다. -그어어어. 저주받은 왕 엠후라는 비틀거리며 입을 열어 그렇게 의미를 알 수 없는 괴성을 질렀지만, 준상은 천천히 그에게 다가가 들고 있던 철구를 놈의 머리 위에 내리찍었다. 콰지직! 결국 엠후라는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린 거대한 철구의 위력 앞에 그대로 박살이 나며 쓰러지고 말았다. (Hidden) 저주받은 왕 엠후라를 처치하십시오. (협력) ->완료! 준상은 몽몽이를 불러 엠후라의 아이템을 회수하게 한 다음,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던 헤네스를 부른 다음, 함께 리체스가 제압한 운델에게로 다가갔다. “제, 제법이구나. 이름 모를 불청객이여.” “...” 운델은 이런 상황에서도 입을 나불거렸지만, 준상은 신경조차 쓰지 않은 채 리체스에게 물었다. “놈이 숨기고 있던 것이 뭐지?” 리체스는 바로 손가락으로 작은 구슬 하나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붉은 보자기 위에 요사스런 기운을 뿜어내고 있는 검은 색의 수정 구슬 하나가 놓여 있었다. 크기는 고작해야 손톱보다 조금 더 큰 정도. 어떻게 보면 구슬이라기 보다는 흑진주에 더 가까운 모습을 가지고 있다. “이게 뭐지?” 리체스는 준상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마법이 적용된 것 같지는 않은데... 아마도 악령의 문을 열기 위한 촉매 같은 것이 아닐까요?” “요정의 돌 같은?” “아마도요.” 그렇게 얘기를 나누자 기다렸다는 듯이 운델이 다시 입을 열었다. “후. 후. 후. 악령의 구슬조차 모르는 무식한 놈들에게 당하다니, 오늘 이 운델의 꼴이 말이 아니로군.” “...” 옆에서 듣고 있던 헤네스가 그것을 듣고 말했다. “악령의 구슬이라는데요.” “그렇군.” 구슬이 뿜어내는 요사스런 기운 때문에 안목으로는 아이템이 맞는지 확인하기가 어려웠지만, 준상은 일단 아이템 확인을 실행해 그 정보를 확인했다. 아이템정보 명칭 : 악령의 구슬 레벨제한 : 없음 종류 : 보석 등급 : Rare+ 효과 : 저주 연성 설명 : 악령의 구슬은 음차원의 기운이 오랜 시간에 걸쳐 응축된 저주 받은 보석입니다. 이 보석은 매우 희귀하며 일설에는 오래된 악령의 구슬에서 악마가 잉태될 수도 있다고도 전해지지만, 진실 여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악령의 구슬은 아이템의 제작이나 마법의 촉매, 특별한 의식의 제물 등으로 많이 쓰이며, 가공하지 않고 그냥 가지고만 있을 경우 접촉한 존재가 지닌 모든 긍정적인 영향을 순차적으로 봉쇄하고 그 효과를 서서히 저주로 변성시키는 성질이 있으며, 만약 파괴할 경우, 파괴한 당사자는 평소보다 수십 배는 증폭된 저주 연성 효과에 직면하게 됩니다. 준상이 가만히 악령의 구슬을 바라보고 있자 운델이 말했다. “후. 후. 후. 자, 어디 한 번 부숴볼 테면 부숴봐라. 네 놈이 어둠의 영역에 속한 자가 아니라면, 그것에 손을 대는 순간 네 놈이 지니고 있던 모든 행운은 불운으로 바뀔 것이고, 네 놈이 지니고 있던 모든 축복은 또한 저주로 변할 것이다. 과연 네 놈은 세상을 위해 자신의 운명을 희생할 수 있을까? 후. 후. 후.” “...” 확실히 아이템 설명만 봐도 이 악령의 구슬이라는 물건이 지닌 괴악한 효과는 부정할 필요가 없을 듯 하다. 준상은 퀘스트 정보를 다시 확인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의식을 저지하라고만 되어 있을 뿐, 악령의 구슬을 부수라는 말은 없었다. 그렇다면? 해결 방법은 간단하다. 준상은 말없이 인벤토리를 열어 악령의 구슬을 그 안에 수납했다. “...” 운델은 준상의 손짓 한 번에 악령의 구슬이 사라지자 일순 말문을 잃고 멍한 표정이 되었다. “어, 어라?” 악령의 구슬이 파괴된 것이라면 그 안에 내재되어 있던 음차원의 기운이 뿜어져 나와 준상의 몸을 휘감고 그의 신체와 영혼을 타락시켜야만 한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그런 기색은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마치, 원래 그 자리에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악령의 구슬만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 이게 도대체...” 운델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준상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준상은 악령의 구슬이 인벤토리에 수납된 순간 갱신된 퀘스트 정보를 확인하는 중이었다. 의식을 저지하십시오. :정령의 문이 열리고 봉인되었던 정령의 힘이 활성화된 것처럼 이곳 어두운 고대 왕의 미로 한 구석에서 악령의 문을 열기 위한 의식이 대륙 각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미로를 돌파하여 고대 왕의 석실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의식을 저지하십시오. [이 퀘스트는 여러 명의 인원이 동시에 참여합니다.] -> 완료! (Hidden) 악령의 사제 운델을 처치하십시오. (협력) -> 미완료. (Hidden) 저주받은 왕 엠후라를 처치하십시오. (협력) -> 완료! (Hidden) 호위장 큐롤을 처치하십시오. (협력) -> 완료! (Hidden) 헬하운드를 처치하십시오. (4/4) (협력) -> 완료! (Hidden) 제물로 잡혀온 처녀들을 구출하십시오. (7/7) (협력) -> 완료! (Hidden) 일곱 개의 수호석을 파괴하십시오. (협력) -> 완료! - 당신이 이번 퀘스트에서 보여준 행동과 성과를 정산합니다. 이 과정은 약간의 시간이 소요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준상의 시야에 그와 같은 메시지가 나타날 즈음, 그때까지도 아직 미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일곱 귀환자들은 자신의 주머니 속에 들어있던 휴대폰들이 일시에 울리기 시작하자 깜짝 놀라며 얼른 메시지를 확인하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아직 적과 한 번 싸워보지도 못했는데 갑자기 퀘스트 완료 메시지가 뜬 탓이다. “이, 이게 도대체?” 사람들은 일제히 선두에 서있던 안경 쓴 남자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명문대 대학원 출신이라고 해봐야 영문을 알 수 없기는 매한가지다. 당황한 그가 뒤죽박죽이 되어 버린 머리 속의 혼란을 바로 잡고 이 상황에 맞는 결론을 도출하기도 전에, 그들의 행동 성과를 정산하는 메시지가 휴대폰에 출력되었다. 축하합니다! : 당신의 랭크는 F입니다. -당신은 이번 퀘스트의 달성에 대해 손톱만큼의 기여도 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식이면 곤란합니다. 좀 더 분발해 주세요. 보상 : 없음. F라니. 일곱 귀환자들은 아연한 표정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이 퀘스트를 통해 F랭크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 하나만을 확인한 채, 곧바로 원래 그들이 있어야 할 곳으로 전송되기 시작했다. 한편. 이 모든 결과를 초래한 당사자인 준상은, 완료 메시지가 뜨자 곧바로 몸을 돌려 운델을 바라보았다. 하나 남은 히든 퀘스트를 해결하기 위함이었다. 운델은 가면 아래 드러난 차가운 눈빛과 마주치는 순간, 그 안에 내재된 살기를 깨닫고 얼른 소리를 질렀다. “자, 잠깐... 내 배후라든가, 그런 건 궁금하지 않은 거냐?” “...” 준상은 살짝 어이가 없었지만 잠자코 말없이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자 운델은 기회다 싶었던지 주절주절 자신이 아는 바를 떠벌이기 시작했다. “그, 그러니까... 사실 나는 악령의...” 하지만 운델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을 끝까지 입에 담지 못했다. 어느 순간 갑자기 그의 머리에서 시커먼 연기가 뿜어져 나오며 그의 머리 속을 태우기 시작한 것이다. “끄아아아아!” 헤네스와 리체스는 얼른 이 참혹한 광경으로부터 시선을 돌렸다. 전투에 참여하기는 했지만, 이런 식으로 눈앞에서 누군가의 생명이 처참하게 끊어지는 모습을 직시할 정도로 그녀들의 감성은 아직 무뎌지지 않은 상태였다. 준상은 얼굴을 찌푸렸다. 어쩐지 너무 쉽다 싶었다. 하지만 놈에게 이런 식으로 금제가 걸려 있을 줄이야. 결국 그렇게 마지막 히든 퀘스트의 목표인 운델마저 사망하고 나서야 비로소 메시지가 나타났다. 축하합니다! : 당신의 랭크는 SSS입니다. -당신은 이번 퀘스트의 목표를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완벽하게 수행했습니다. 기본 보상 외에 추가 보상이 지급됩니다. 보상 : 경험치 많이, 추가 보상 상자(협력)x6, 추가 보상 상자(SSS랭크) -> 보상을 지금 수령하시겠습니까? (Y/n) _ (주의) 수령하지 않은 보상은 7일후 자동 소거됩니다. 준상은 일단 보상 수령을 미루어 둔 채 몽몽이에게 운델의 시드를 습득하도록 했다. 그리고 대충 정리가 끝나자 그제서야 헤네스와 리체스를 향해 말했다. “모두 수고했다. 이제 돌아가도록 하자.” “네.” 눈앞에서 끔찍한 몰골로 죽음을 맞이한 운델의 모습에 리체스는 조금 질린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얼른 고개를 저으며 준상의 어깨 위에 자리를 잡았다. 00165 트롤러 ========================================================================= 평소보다 대기 시간이 두 배로 늘어난 탓인지 퀘스트 완료 후에 전송이 이루어질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더욱 지루하게 느껴진다. 기다리는 시간 동안 퀘스트 보상이라도 확인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가로 저었다. 대륙에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다는 퀘스트 설명으로 미루어 볼 때, 이번에 발동한 악령의 문 퀘스트 역시 이전에 경험했던 어둠의 군세 퀘스트처럼 전개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였다. 그것을 감안한다면, 이번 만큼은 보상 습득을 미뤄두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이다. 이곳에서야 준상이 가세한 덕분에 비교적 간단하게 퀘스트가 끝났지만, 다른 지역에서도 그렇게 쉽게 클리어될지는 의문이다. 만약 미로와 수호석 같은 장애물이 다른 곳에도 존재한다면, 그리고 조기에 그 파훼법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매우 곤란한 상황에 처할 것은 당연한 일이고 그렇게 되면 제 때 악령의 문의 발동을 막아내지 못하는 경우가 생겨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정령의 문이 열리기 전까지 정령의 힘은 그리 강하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악령의 문이 열리게 되면 그에 걸맞는 수준의 힘이 개방될 것은 분명한 일. 그렇다면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위기가 닥칠 것에 대해 하나쯤은 대비를 해둘 필요가 있다. 대신 준상은 남은 시간 동안 아직 확인하지 않은 아이템 들을 살펴 보기로 했다. 그렇게 결정을 내리자 곧바로 몽몽이를 가까이 부른 후 말했다. “꺼내봐.” 준상의 말에 몽몽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몇 개의 시드와 아이템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제법 알이 굵은, 은은한 서기를 뿜어내는 레어 시드. “하나 뿐이군.” 준상은 아쉬운 기분에 입맛을 다시며 확인을 했다. 명칭 : 저주받은 왕권 레벨제한 : 15 종류 : 시드 등급 : Rare 효과 : 1. 스킬 쿨타임 6% 감소 2. 스킬 공격력 7% 증가 3. 소환물/펫 스킬 효율 증가 11% 설명 : 저주받은 왕 엠후라가 지니고 있던 특별한 시드입니다. Seed 슬롯이 있는 아이템이나 카드에 장착하여 능력을 강화할 수 있습니다. 한번 장착한 시드를 분리하기 위해서는 특수기능 ‘분리’가 필요합니다. [이 시드를 아이템이나 카드에 장착하시려면 이곳을 누르십시오.] 엠후라 자체가 생각보다 그리 강하다는 느낌이 없었던 탓에 별다른 기대 없이 확인을 해보던 준상은 의외의 효과에 조금 놀랐다. 자신 뿐만 아니라 소환물이나 펫의 스킬 효율까지 증가시켜 주다니. 의외의 수확이란 건 이럴 때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이로써 준상이 지닌 레어 시드는 모두 열다섯 개. 이제야 비로소 영웅 등급의 광폭과 피칠갑에 존재하는 시드 슬롯을 레어로 가득 채울 수 있게 된 셈이다. 카드의 종류가 많아지고 다양한 콤보 카드를 사용하게 되었지만, 이러니 저러니 해도 결국 준상이 가장 애용하는 주력 콤보는 역시 광전사였다. 새로 얻은 시드의 장착을 끝낸 준상은 다른 일반 시드들을 확인하고 정리한 다음에야 다른 아이템의 확인에 들어갔다. 아까의 싸움에서 엠후라의 검이 제법 훌륭해 보였는데, 몽몽이가 꺼내놓은 아이템 중에는 그런 두꺼운 검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전투 중에 부서져 버렸던 걸까. 그러고 보면 준상은 지금까지 방어구를 전투 중에 습득한 경우가 매우 드물다. 괴물들이 방어구를 잘 사용하지 않는 것도 한 가지 이유지만, 랑다잘의 분노나 블러드서커 같은 아이템을 사용할 경우 성하게 남아나는 방어구가 거의 없는 것도 한 가지 이유였다. 아마 이번에도 전투 중에 파괴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 준상은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바닥에 놓인 평범한 모양의 검을 집어 아이템 확인을 했다. 아이템정보 명칭 : 어나이얼레이터 레벨제한 : 없음 종류 : 무기 등급 : Unique 공격력 : 15-20 효과 : 베어버린 적의 수가 많아질수록 위력이 강해집니다. (현재 1단계) Seed : 5슬롯 설명 : 이 무기는 주인과 함께 성장합니다. 베어버린 적의 수가 많을수록, 빨아들인 영혼의 수가 많을수록 위력이 증가합니다. 단순히 검을 들고 휘두르는 연습만 해도 신체능력이 빠르게 향상되는 효과가 있으나, 자칫하면 검의 마력에 홀려 살육의 쾌락에 빠지는 경우가 있으니 충분히 주의하셔야 합니다. “헛!” 난데없이 유니크라니? 준상은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내고 말았다. 조금 무료한 표정으로 전송을 기다리던 헤네스와 리체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준상의 안색을 살폈다. “왜 그러세요?” 준상은 손에 들린 평범한 모양의 검을 그녀들에게 보여주며 대답했다. “이것 때문에.” “...” 헤네스는 그저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지만, 리체스는 날개를 펼쳐 검 주위를 돌며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탄성을 지르며 말했다. “와... 모양이 평범해서 미처 못 알아 봤는데, 이거 아까 그 칼이네요?” “그래.” 역시 마법적 능력이 우월한 리체스는 단숨에 이 검이 엠후라의 것임을 알아보았다. “신기하네요. 자세한 건 분석해 봐야겠지만, 보통 물건은 아닌 듯 싶어요.” “그 말대로다.” 준상과 리체스가 죽이 맞아서 검에 대해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자 헤네스는 어쩐지 소외감을 느끼며 입을 삐죽거렸다. 리체스는 어나이얼레이터를 가만히 살피며 준상과 얘기를 나누다가 그런 헤네스의 모습을 보더니, 이내 곰곰이 무엇을 생각하다가 다시 말했다. “저기...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뭔데?” 리체스는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아까... 그... 악령의 돌인지 구슬인지 하는 물건 말인데요.” “그게 왜?” “달리 쓰실 데가 없다면, 제가 그걸로 아이템을 한번 만들어 보면 어떨까 싶은데... 어떠세요?” “아이템?” 그녀에게 아이템 제작 능력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스스로 나서서 뭔가를 만들어 보고 싶다는 제안을 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뭘 만들려고?” “그게...” 리체스는 머뭇거리며 쉽게 대답을 못했다. “실은 저도 이게 가능할지 아직 확신할 수가 없어서요. 그냥 속는 셈 치고 한 번 맡겨 보시면...” 자신도 말이 안 된다 싶었던지 점점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흠...” 준상이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바라보자 리체스는 얼른 다시 말했다. “아, 안되나요?” 악령의 구슬은 매우 위험한 물건이다. 접촉하는 순간 상대를 저주의 구렁텅이에 빠뜨리는데다, 이번처럼 악령의 문을 여는 촉매로 사용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강한 힘을 지닌 물건인 만큼, 아이템으로 만들었을 때의 효과는 상상을 초월할 수밖에 없다. 지금이야 이런 작은 꼬맹이 요정의 모습이지만, 요정계에서 이런 재료를 가지고 그녀가 지닌 실력을 모두 발휘한다면 이번에 얻은 어나이얼레이터에 못지 않은 아이템이 나오지 않을까. 물론 실패할 가능성도 있지만, 어차피 이대로 가지고만 있어서는 별 의미가 없다. 준상의 주된 적이 인간이라면 상대에게 염동력으로 휙 집어 던지는 것 만으로도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겠지만, 그렇지도 않은 이상은 괜히 인벤토리 공간만 잡아먹는 애물단지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한번쯤 맡겨 봐도 좋지 않을까. “좋아. 그럼 한 번 맡겨 보도록 하지.” “정말요?” “그래. 하지만 이곳에서 건네주긴 위험하니 연구실에 가서 주겠다.” “네! 그거야 당연하죠!” 리체스는 상기된 표정으로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나머지 아이템들은 별로 대단한 것이 없었다. 아이템정보 명칭 : 어쌔신 나이프 레벨제한 : 5 종류 : 무기 등급 : Common 공격력 : 7-13 효과 : 치명타 확률 4% 증가 Seed : 1슬롯 설명 : 암살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날카로운 단도입니다. 이것은 통로에 숨어있던 암살자들의 무기인데 이전에 서윤에게 비싼 값에 팔았던 어쌔신 나이프의 열화판이라 할 수 있었다. 위안이 되는 점이라면 한꺼번에 세 개나 얻었다는 것 정도 뿐이다. 아이템정보 명칭 : 엠후라의 상감된 전투 완갑 레벨제한 : 5 종류 : 완갑 등급 : Common 방어력 : 낮음 효과 : 근력 증가 3% Seed : 2슬롯 설명 : 저주받은 왕 엠후라가 생전에 착용하던 완갑입니다. 아름다운 무늬가 상감되어 높은 예술적 가치를 지닙니다. 장식에 치중한 탓인지 방어력도 그리 높지 않은데다, 옵션도 근력 증가 3퍼센트라는 뭔가 미묘한 수준의 효과 밖에 지니고 있지 않았다. 광전사 계열 콤보를 포기하지 않는 이상 방어구는 그림의 떡일 뿐이니 어차피 상관은 없지만 말이다. 준상은 캐비닛을 꺼내 아이템을 모조리 챙겨 넣었다. 시간을 확인하니 얼추 대기 시간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다시 부를테니, 잠시 들어가 있어라.” “네.” 헤네스와 리체스는 그의 말에 따라 가만히 눈을 감고 역소환을 기다렸다. 준상은 그런 그녀들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역소환을 실행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역시 한줄기 빛과 함께 던전 안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그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곳은 요정계에 존재하는 요정의 침실이었다. 준상은 헤네스와 리체스를 부르기에 앞서 여왕 보좌관인 셀라를 요정들의 대화 방법으로 호출했다. “셀라.” “네? 아... 돌아오셨군요.” 셀라는 갑작스런 준상의 호출에 당황한 기색이었으나 이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준상은 그런 셀라에게 한 가지 지시를 내렸다. “정령의 문을 통해 여자들이 들어왔을 것이다. 알고 있겠지?” “네, 안 그래도 그것을 여쭈려던 참이었습니다.” “일단 불안해 하지 않도록 먹이고 씻긴 다음 이곳으로 데리고 오도록.” “알겠습니다.” 일방적인 지시였지만, 셀라는 감히 말대꾸를 하지 못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그는 리체스의 반려. 리체스가 그의 지위를 박탈하지 않는 이상, 요정계에서 그의 위치는 사실상 여왕과 동급이라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조금 강압적인 면이 있기는 해도 그는 지금까지 요정들에게 무엇을 시키면 항상 그에 걸맞는 보상을 내려 주었기 때문에 다른 요정들 사이에서도 의외로 평판이 좋았다. 아무튼, 제물이 될 뻔한 처녀들에 대한 지시를 내린 준상은 그제서야 헤네스와 리체스를 다시 자신이 있는 공간 안에 소환했다. 그녀들은 다시 소환되자 주위를 돌아보고는 여왕의 침실임을 확인하자 살짝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들을 향해 준상은 이렇게 말했다. “미안하지만, 다시 또 불려갈 수 있으니 이대로 대기해야겠다.” “네.” 이전에도 몇 번이나 이런 일을 겪어본 적이 있는 헤네스는 이미 만성이 되었는지 그런가보다 하는 표정이었지만, 리체스는 속으로 살짝 놀랐다. 이 두 사람은 하루에도 몇 번이나 이런 일을 겪으며 지내 왔던 것인가. 하지만 리체스는 그런 생각을 속으로 감추며 준상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저... 아까 말씀드렸던 것을...” 준상은 리체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꺼내 놓기는 너무 위험하니 연구실로 가자.” “네.” 그들은 곧바로 리체스의 연구실로 향했다. 아름다운 정원의 모습을 한 공간을 통과해 바닥도 천장도 없는 기묘한 연구실에 도착하자, 준상은 그제서야 인벤토리에서 악령의 구슬을 꺼냈다. 그러자 곧바로 구슬로부터 사악한 기운이 스멀스멀 뻗어 나온다. 리체스는 준상이 구슬을 꺼내자 얼른 그것을 마법으로 감싸 사악한 기운이 퍼지는 것을 막았다. “휴... 이제 됐어요. 감사합니다.” 리체스가 감사의 뜻을 표하자 준상은 조용히 그녀에게 물었다. “무엇을 만들고자 하는 거지?” “그게...” 아까는 미처 말을 못했지만, 물건까지 넘겨 받은 마당에 그냥 입을 다물고 있기가 좀 그렇다. 결국 리체스는 헤네스를 힐끗 훔쳐 보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걸 뭐라고 불러야 할지 저도 아직 잘 모르겠지만,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일종의 분신을 만들어 보려고 생각중이에요.” “분신?” 준상의 말에 리체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들어오시면서 정원을 보셨죠? 단순히 보는 것을 넘어 만지고 느낄 수 있는 환상의 정원.” “물론.” 리체스는 곧바로 자세한 설명을 덧붙였다. “원리를 따지자면 그것과 비슷해요. 사람의 모습을 복제해서 상대를 혼란에 빠뜨리는 거울의 환상과 비슷하지만, 실체처럼 만지고 느낄 수 있는 분신이라고나 할까요. 이 악령의 구슬이 지닌 강력한 힘을 요정의 돌이나 정령의 힘으로 제어하면 어떻게 되지 않을까 싶긴 한데... 제대로 될지 안 될지는 일단 직접 시험해 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00166 트롤러 ========================================================================= 준상은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리체스가 구현하고자 하는 분신이 어느 정도의 수준인지는 마법에 대해 문외한인 그가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많았다. 굳이 생각을 떠올려 보자면 크롤로바간의 시드가 가지고 있는 디코이의 발전된 형태가 아닐까 하는 정도. 물론 악령의 구슬 정도의 강력한 힘을 지닌 소재를 이용해 만들어내는 것인 만큼, 움직이지도 못하고 고정된 상태로 적을 유인하는 것이 고작인 디코이보다는 낫지 않을까 싶기는 해도 과연 얼마나 큰 효용이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준상의 착각이었다. 리체스가 만들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눈속임 정도의 물건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힘을 제대로 선보일 기회가 없어서 드러나지 않았을 뿐, 그녀는 하나의 세계를 지배하고 통제하는 초월자이다. 이것은 단순히 군주나 통치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 세계를 구성하는 기본 요소나 법칙에 관여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이 정도의 능력을 가진 이가 고작 간단한 눈속임 정도를 만들고자 악령의 구슬 같은 물건을 달라고 했을까. 단순한 눈속임 정도의 물건을 만드는 것 뿐이라면 이미 연구실 밖의 정원을 만들었던 것처럼 간단하게 만들어 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오해는 준상의 이해가 부족한 탓만은 아니었다. 이것은 분신이라는 애매모호한 단어로 설명을 얼버무린 리체스의 탓도 조금은 있었다. 어째서 그녀는 자신이 만들고자 하는 것에 대해 준상에게 정확한 설명을 하지 않은 것일까. 그 이유는 간단했다.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그녀가 만들고자 하는 것은 문자 그대로 또 하나의 몸이었다. 단순히 보고 듣고 만지는 것을 넘어서, 사용자의 몸을 하나 더 이 세상에 구현해 내는 것. 그것이 바로 리체스가 말한 ‘분신’의 진정한 실체였다. 사실 이쯤 되면 분신이라기 보다는 ‘화신(化身)’, 또는 아바타(Avatar) 정도의 표현이 더 정확한 표현이라고 봐야 한다. 그야말로 요정계를 다스리는 초월자이기에 가능한 발상. 그녀는 이전에 잠자리에 난입한 이후로 줄곧 헤네스에게 미안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서 그 일을 없었던 것으로 하기는 어렵다. 이미 저질러 버린 일을 말 한 마디로 무마할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아무리 그녀가 막무가내라도 할 수 없는 일이었고, 또한 간단하게 포기할 수 있을 정도로 준상에 대한 마음이 얕지 않았던 탓이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어느 쪽이 되었든 결국 점점 더 깊은 상처를 입게 될 것은 분명한 일. 그런 와중에 눈에 들어온 것이 바로 악령의 구슬이다. 굉장히 사악한 기운을 품고는 있었지만, 그 안에 내재된 엄청난 힘은 지금까지 그녀가 상상으로만 여겨왔던 여러 가지 일들을 가능하게 만들 수 있을 정도였다. 그것을 보자 그녀는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그녀에게는 미약하기는 하지만 마법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기적이라는 힘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녀로서도 이제껏 시도해 보지 않은 일이긴 하지만, 만약 제대로 성공만 한다면 준상은 본래의 신체 외에 따로 움직일 수 있는 하나의 몸을 더 갖게 된다. 물론 몸이 둘이 된다 해도 마음까지 둘이 되는 것이 아니고, 마음이 둘이 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또 하나의 준상이 아니겠지만, 이제 막 알콩달콩한 사랑에 눈이 멀기 시작한 리체스는 미처 거기까지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얼마나 걸릴까.” 준상의 물음에 리체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다시 말했다. “확실한 건 해봐야 알 것 같아요.” “그렇군.” 그들은 일단 연구실을 빠져 나와 다시 여왕의 침실로 향했다. 침실 안으로 들어가자 준상이 미리 지시했던대로 제물이 될 뻔했던 처녀 일곱을 셀라가 데리고 와 있었다. 그녀들은 넝마가 된 옷 대신 요정들이 입는 하늘거리는 옷을 입은 채였다. 나풀거리는 건 물론이거니와 어깨와 다리가 훤히 드러나는 옷을 입혀 놓은 채 갑자기 침실 같은 곳으로 끌고 오자, 그녀들은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자신들을 이곳으로 보낸 준상이 아름다운 두 명의 여성과 함께 침실 안으로 들어오자 처녀들은 얼른 손을 아래로 뻗어 드러난 허벅지를 가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준상은 그녀들을 한 번 훑어 보고는 다시 말했다. “다친 곳은 없었나?” “네. 긁힌 상처가 조금 있기는 했지만 그 외에는 이상이 없었습니다.” “다행이군. 어디 사는지는 알아 봤고?” 준상의 말에 셀라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일단은 말이 통하지 않는터라...” “그렇군.” 언어 소통의 능력은 간단한 것 같으면서도 제법 고난도의 능력에 속한다. 요정계에서도 이것을 구현할 수 있는 이는 높은 마법 실력을 가진 리체스 정도이니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들의 대화를 듣고 헤네스가 앞으로 나섰다. “제가 얘기를 나눠 봐도 될까요?” 준상은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허락했다. 뭐라 해도 여기서 가장 훌륭한 교섭 능력을 가진 것이 헤네스이니 거부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준상의 허락을 받은 헤네스는 불안한 표정을 자신들을 바라보는 처녀들에게 다가가 미소를 지으며 그녀들에게 말을 걸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는 여러분을 도우려는 거니까요.” “...” 처녀들은 그제서야 이 아름다운 갈색 머리 소녀가 요정이 아니라 자신들과 비슷한 사람임을 깨달았다. 헤네스가 처녀들을 데리고 대화를 시작하자, 준상은 그들에게서 잠시 신경을 끄고 인벤토리에 넣어 두었던 평범한 모양의 검을 꺼내어 들었다. 이것의 이름은 어나이얼레이터. 베면 벨수록 위력이 강해지는, 준상이 두 번째로 얻은 유니크 아이템이다. 준상은 사이하게 빛나는 검날을 보며 문득 예전에 읽었던 하나의 고사를 떠올렸다. 공자의 후손이 살던 공부라는 곳이 있다. 그곳의 벽 한 켠에는 용의 머리, 개의 몸, 원숭이의 꼬리, 소의 발굽, 그리고 뱀의 비늘을 지닌 탐이라는 상상의 동물을 그린 계탐도라는 그림이 있다. 탐(貪)은 뭐든지 욕심을 내며 먹어치우는 일종의 걸신이다. 너무나 욕심이 많았던 탐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먹어치운다. 하늘은 물론이고, 해와 달과 별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모든 것을 먹어치우고 나자 어느새 세상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탐은 깨달았다. 아직 자신의 몸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결국 탐은 식욕을 견디지 못하고 자신의 몸마저 먹어치웠고, 그 결과 세상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곳이 되어 버린다. 준상은 이 어나이얼레이터라는 이름을 가진 검이 바로 그 탐과 같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스스로 강해지는 것에 취해 다른 모든 존재를 베어 버리다가, 더 이상 벨 것이 남지 않게 되면 결국 자신마저 베어 버리게 되는 마물. 절멸자라는 이름은 아마도 그래서 붙은 이름이 아닐까. 피와 생명력을 끊임없이 빨아들이는 블러드서커도 터무니없는 마물이지만, 어나이얼레이터 역시 그와 별로 다를 바가 없는 마물인 셈이다. 준상은 자신의 손 안에서 사이한 빛을 뿜으며 잘게 떨고 있는 마검을 조용히 바라보다가, 그것을 두 손으로 가볍게 감싸 쥐고 천천히 휘둘러 보았다. 사악! 그러자 공기가 갈라지는 감각과 함께 몸 안에 알 수 없는 힘이 스며드는 느낌이 전해진다. 그냥 검을 휘두르는 연습만 해도 신체능력이 향상된다는 것은 이런 의미였던가. 공기든, 물이든,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허공이든.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어쨌든 검을 휘두르는 순간 무언가를 베는 것은 마찬가지이고 그 베어내는 동작 자체가 사용자에게 힘을 부여하는 형식인 모양이다. 그저 허공을 베어냈을 뿐인데도 이 정도라면, 살아있는 생명체를 베었을 때는 과연 어느 정도의 힘이 전해지는 것일까. 준상의 마음 속에 그런 의문이 떠오르자 이내 검으로부터 사이한 어떤 느낌이 스며들어와 그를 유혹한다. 궁금한가. 궁금하면 지금 당장 누군가를 베어보면 될 일이다. 지금 저렇게 눈앞에 생명력 넘치는 제물들이 가득하지 않은가. “쯧...” 하지만 준상은 이내 혀를 차며 검을 다시 검집 안에 갈무리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겉보기에는 평범하지만, 이 마검은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다른 생각을 할 틈조차 없는 블러드서커보다 더 질이 나쁜 마물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때, 처녀들과 간단하게 대화를 마친 헤네스가 준상을 향해 다가왔다. “사는 곳을 알아냈어요.” “수고했다.” 준상은 헤네스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다음, 멀뚱히 서있는 셀라에게 다시 말했다. “셀라.” “네.” “헤네스와 상의해서 조속히 그녀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낼 수 있도록 조치하라.” “알겠습니다.” 셀라는 준상의 옆에 서서 뭐가 그리도 좋은지 헤실헤실 웃음을 짓고 있는 리체스를 살짝 훔쳐보며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이젠 별 수 없다. 사실상 요정계라는 세계가 통째로 저 준상이라는 남자의 손아귀에 들어간 것이나 다름 없다는 사실을. 아직 말도 제대로 못하는 현직 여왕은 이미 논외이고, 그녀를 꼭두각시로 세워놓은 당사자인 전직 여왕마저 저 모양이면 사실상 준상의 전횡을 가로 막을 방법은 아예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준상이 전횡을 하든 농단을 하든 다른 요정들은 그냥 그런가보다 하는 것도 사실이다. 이러니 중간에 끼인 셀라로서는 그저 한숨만 나올 수밖에. 어쨌거나 처녀들에 관한 일을 처리하고 나자 다시 침실에는 준상과 헤네스, 그리고 리체스의 세 명만 남게 되었다. “쉬고 있어라.” “준상씨는요?” “난 잠시 수련을 좀 해야겠다.” “네...” 헤네스와 리체스는 가만히 침대에 앉아 준상이 검을 뽑아들고 그것을 휘두르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검을 휘두르는 준상의 모습이 다소 어색해 보였다. 당연한 일이다. 격투기에 관해서는 조금이나마 배울 여유가 있었지만, 검도는 아예 손도 대보지 않은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검을 휘두르는 준상의 자세는 점점 자연스러워지기 시작했다. 헤네스와 리체스는 그런가보다 하며 멀뚱히 그 변화를 바라볼 뿐이었지만, 사실 이것이야 말로 어나이얼레이터라는 이름을 지닌 마검이 지닌 능력 가운데 하나였다. 저주받은 왕 엠후라 역시, 이 마검의 힘을 통해 검왕이라는 지고한 칭호에 이르게 되었으니 말해 무엇하겠는가. 시간은 천천히 흘렀다. 하지만 준상의 모습을 지켜보던 리체스가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고 하품을 할 즈음에는 이미 수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린 상태였다. “후아암...” “...” 늘어지게 하품을 하던 리체스는 준상이 자신을 돌아보자 얼른 손으로 입을 가렸다. “쉬고 있으라니까.” “헤헤...” 준상의 말하자 리체스는 쑥스러워하며 아름다운 무지개빛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웃은 준상은 그 옆에서 꾸벅거리며 졸고 있는 헤네스의 모습을 보고는 결국 검을 다시 검집에 집어넣었다. 이 정도 기다렸는데도 퀘스트가 날아들지 않는 걸 보면 아무래도 시간이 좀 더 걸릴 모양이라고 생각한 준상이었지만, 그가 검을 갈무리하기가 무섭게 그의 시야에 메시지가 도착했다. 새로운 퀘스트가 도착했습니다 -20분뒤 퀘스트 수행을 위한 장소로 전송됩니다. 안전한 장소로 이동해 주십시오. (남은시간: 19분 54초) “...” 일어날 일은 언제든 일어나는 법이라든가. 하지만 이쯤 되고 보면 준상으로서도 한숨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다. 갑자기 준상이 한숨을 푸욱 내쉬자, 리체스는 움찔한 표정으로 물었다. “죄, 죄송해요...” 자신이 하품을 해서 기분이 언짢아졌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게 아니라... 새로운 퀘스트가 지금 막 도착했다.” “아...” 퀘스트라는 말이 들리자 꾸벅거리며 졸고 있던 헤네스가 화들짝 놀라며 깨어났다. 준상은 그녀들의 반응을 보며 쓴웃음을 삼키다가 침대로 다가와서 드러누우며 말했다. “쉬고 있어. 출발할 때 다시 말할 테니.” “네.” 헤네스와 리체스는 서로를 바라보더니 이내 준상 옆으로 다가와 그의 팔 하나씩을 차지한 채 가만히 드러누웠다. 그녀들의 체온이 전해진 탓일까. 다시 날아든 퀘스트 알림 때문에 언짢아져 있던 준상의 기분도 조금씩 가라 앉기 시작한다. 마침내 시간이 되자 준상은 그녀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일단 역소환을 실행한 다음, 전송에 임했다. 한줄기 빛과 함께 새로운 장소로 이동한 준상은 곧바로 진득한 유황 냄새와 함께 후끈한 열기가 확 몰아치는 느낌에 얼굴을 찌푸렸다. “이건...” 그의 눈앞에는 밝은 빛을 뿜어내며 부글거리는 용암의 강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전의 퀘스트와 비슷한 형태의 던전이 아닐까 하던 준상은 갑작스럽게 모습을 드러낸 용암의 강에 당혹할 수밖에 없었다. 악령의 문을 막아내십시오. :악령의 사제와 그가 이끄는 언데드들에 의해 음차원과 연결된 악령의 문이 열리고 말았습니다. 의식을 저지하는 것은 이미 늦었지만, 지금이라면 아직 음차원의 힘이 대륙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막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 퀘스트는 단독 퀘스트입니다.] (Hidden) 악령의 사제 게헨을 처치하십시오. (단독) (Hidden) 타락한 화염의 정령을 처치하십시오. (0/3) (단독) 어김없이 날아든 퀘스트 정보에 준상은 다시 얼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이전과는 달리 수호석이나 제물 같은 것은 히든 퀘스트 목록에 나타나 있지 않았지만, 문제는 바로 눈앞에 펼쳐진 용암의 강이었다. 미니맵에 나타난 붉은 퀘스트 표식들은 모조리 이 용암의 강 너머에 자리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 용암들은 그저 조용히 흐르는 것도 아니었다. 불규칙하게 작은 폭발을 일으키며 사방으로 붉은 불덩이를 흩어 놓기까지 한다. 징검다리처럼 군데군데 바위 몇 개가 자리하고는 있었지만, 자칫 발을 헛디뎌 빠지거나 폭발에 휩쓸리면 그대로 즉사인 것은 따로 설명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준상은 잠시 얼굴을 찌푸린 채 눈앞에 펼쳐진 용암의 강을 바라보다가, 이내 자신이 서 있는 공터 한켠에 컨테이너 하우스를 꺼내 놓고 그 안에 들어갔다. 그리고는 다용도실로 들어가 시드를 분류해 놓은 자루를 꺼냈다. 준상은 일단 정령들을 모조리 소환해서 주위를 경계하게 했다. 그리고 블러드로드로 콤보 카드를 변경한 다음, 카드 안에 장착되어 있던 시드들을 빼내기 시작했다. 카드에는 시드를 박아 넣을 수 있는 슬롯이 존재한다. 늑대와 같은 소환물들은 시드를 박아넣으면 소환물 자체가 강화되지만, 곰의 영혼이나 기타 다른 스킬들의 경우에는 사용자인 준상의 속성을 강화하는 효과를 지닌다. 준상이 장착한 블러드로드 콤보는 영웅급 광폭, 피칠갑 레어, 피칠갑 수퍼레어, 그리고 영웅급 피칠갑 카드로 구성된다. 이 카드들은 각기 5, 5, 5, 10의 시드 슬롯을 보유하고 있으며, 여기에 아이템 슬롯에 장착된 곰의 영혼과 멧돼지의 영혼이 지닌 슬롯 개수를 포함시키면 총 32개의 시드 슬롯이 있는 셈이다. 준상은 여기에 추가로 모든 저항 능력이 있는 철벽 카드를 남은 스킬 슬롯에 장착했다. 이로써 준상이 확보한 시드 슬롯의 숫자는 모두 35개. 이 가운데 15개에 레어 시드를 장착한다 해도 20개의 슬롯이 남는 셈이다. 준상은 이렇게 남은 스무개의 슬롯에 화염 저항의 능력을 지닌 안티파이어 시드를 일괄적으로 장착했다. 5퍼센트 저항의 시드만 모조리 박아 넣는다 쳐도 100퍼센트.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7퍼센트 시드 5개와 6퍼센트 시드 8개, 그리고 5퍼센트 시드 7개가 합쳐져 모두 118퍼센트가 된다. 여기에 추가로 부카에게서 얻은 레어 시드에 화염 저항 속성이 8퍼센트 부여되어 있으며, 도깨비불 두 개체를 소환했으니 정령사 콤보로 인해 20퍼센트가 추가된다. 마지막으로 철벽 카드에 붙어있는 모든 저항 10퍼센트마저 추가하면 아이템을 제외하고도 준상이 지닌 화염 저항 능력은 무려 156퍼센트에 이른다. 준상은 시드의 장착이 모두 끝나자 상자 하나를 꺼낸 다음 입고 있던 옷과 장비하고 있던 아이템을 모두 벗어 그 안에 집어넣었다. “후...” 준상은 가볍게 심호흡을 한 다음, 알몸 상태로 용암의 강 옆으로 다가가 연기를 뿜어내고 있는 돌을 우선 만져 보았다. “...” 김이 솔솔 뿜어져 나오는 것으로 봐서는 제법 뜨거울 것 같은데, 직접 만져 보니 좀 따뜻하다는 정도의 느낌밖에 전해지지 않는다. 준상은 이번에는 붉은 빛이 남아 있는 용암 조각에 살짝 손을 대 보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용기를 얻은 준상은 이번에는 아예 붉은 빛을 발하고 있는 용암에 손가락을 대보았다. 그러자, 뭔가 진득하고 따뜻한 느낌이 전해져 온다. 이번엔 아예 손을 쑥 집어넣어 보았지만, 그의 몸은 불타지 않았다. 성공이다. 무려 156퍼센트에 이르는 화염 저항은 훌륭하게 제 기능을 발휘하고 있었다. 확인이 모두 끝나자 준상은 알몸인 채로 천천히 용암 위에 발걸음을 내딛었다. 00167 트롤러 ========================================================================= 찐득한 용암에 발이 빠지는 느낌을 잠시 즐기던 준상은 이내 용암이 자신의 몸에 아무런 악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사실의 확인이 끝나자 곧바로 속도를 높여 타오르는 용암의 강을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징검다리처럼 솟아있는 바위 몇 개를 지나치던 준상은 문득 그 가운데 하나의 바위 위에 타다 남은 시체 하나를 발견했다. 상반신만 겨우 남아 바위 위에 얹어져 있는, 새카맣게 타다 남은 시체를 바라보며 잠시 얼굴을 찌푸리던 준상은 미니맵에 나타난 퀘스트 목표를 향해 다시 걸음을 옮겼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자 징검다리처럼 솟아나 있는 바위 대신 바위벽 옆에 아슬아슬하게 작은 통로가 나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통로라고는 해도 고작해야 사람 하나가 벽에 달라붙어서 느릿하게 움직일 수 있을 정도 밖에는 안된다. 만약 누군가 길목에 숨어서 화살 같은 거라도 날리면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그런 지형이라, 준상은 다시 얼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어떤 면에서는 직전에 그가 파괴했던 미로보다 더 질이 나쁘다. 미로는 최소한 도망갈 길이라도 있지만, 이 불의 강은 그런 여지조차 거의 남겨져 있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조금 더 올라가자 전투가 벌어진 흔적이 나타났다. 통로와 길 주변에 부러진 화살이 꽂혀 있고, 누군가가 피습을 당했는지 용암천의 열기에 말라붙은 혈흔으로 보이는 검은 자국이 군데군데 흩어져 있었다. 그리고 바닥에는 누군가 미끄러져 용암으로 빠진 것으로 보이는, 무언가가 쓸려간 듯한 흔적 또한 남아 있었다. “...” 기습을 가한 적의 위치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준상은 통로에서 조금 떨어진 바위 둔덕으로 기어올랐다. 예상대로 그곳에는 기습을 가했던 것으로 보이는 괴물들의 사체가 몇 남아 있었다. “주먹... 아니, 둔기인가.” 무언가에 머리가 터져 죽은 괴물의 사체를 보는 순간 준상은 이 괴물이 무언가 둔탁한 것에 맞아 죽은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처음에는 자신이 그러하듯 주먹을 쓴 것이 아닌가 싶었지만, 상흔을 조금 살피자 메이스와 같은 류의 둔기에 맞아 죽은 것임을 파악할 수 있었다. 기습이 이루어진 장소에서 이 매복 장소까지 기어올라 적을 처치할 정도면, 이곳에 왔던 귀환자들의 실력도 제법 출중한 수준이 아니었을까 싶다. 준상은 괴물의 사체를 용암 속에 차 넣은 다음 계속해서 용암의 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용암의 강은 조금 폭이 좁아지는가 싶더니, 이내 커다란 용암 호수로 연결되었다. 히든 퀘스트를 뜻하는 붉은 색 퀘스트 표식 세 개는 바로 그 용암 호수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었다,. 간간히 폭죽놀이처럼 작은 폭발을 일으키는 용암 호수 위로 아까와 같은 징검다리가 놓여있는 모습이 보이고, 그 위에 마치 수문장처럼 붉게 타오르는 사람과 동물의 형상을 한 존재들이 서 있었다. “...” 타락한 정령이라길래 도깨비불 같은 것이 검게 물들어 있는 것을 상상했던 준상은 자신이 부리는 정령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그들의 모습에 조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개인지 늑대인지 모를 형상을 하고 있는 놈이 하나. 또 하나는 독수리와 비슷한 맹금류의 형상을 하고 있었고, 마지막은 거인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리체스를 부르면 저것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을 것 같기는 하지만, 간간히 작은 폭발이 터져 나오는 용암 호수 안에서는 작은 요정의 모습을 한 그녀를 부르기도 쉽지 않았다. 화염 저항을 맞춘 상태이긴 하지만, 아이템을 착용하지 않은 상태에서 저들과 싸우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더군다나 점성이 강한 깊은 용암 속에서는 아무래도 움직임이 제한될 수밖에 없다. 준상은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한 가지 해결 방법을 생각해 냈다. 그것은 바로 일전에 요정들에게 퀘스트 보상으로 받았던 요정의 술이었다. 준상은 작은 병에 담긴, 한 모금이나 될까 싶은 요정의 술을 꺼내어 그대로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순간, 입 안에 화악하고 짙은 향기가 퍼져 나간다. “으음...” 너무 맛있어서 날아오를 것 같다는 설명에 허풍이 심하다고 느꼈었는데, 실제로 마셔보니 그것은 절대로 과장이 아니었다. 한 모금 들이키는 순간, 전신의 세포가 하나 하나 꽃내음에 취하는 듯한 그 몽롱함이라니. 꿈결 같은 향기에 잠시 취한 듯이 멍해 있던 준상은 정신을 차리자 자신이 어느새 허공에 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마치 신체가 지니고 있던 모든 무게가 일시에 사라져 버린 듯한 느낌. 이것은 비행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무중력 상태에 가까운 기분이다. 하지만 준상은 지금까지 자신이 얽매여 있던 중력에 대한 해방감을 즐길 여유도 없이, 곧바로 용암 호수 위에 자리 잡은 채 버티고 서 있는 타락한 영혼들을 향해 날아갔다. 요정의 술이 지닌 유효 시간은 십 분.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가장 먼저 마주친 것은, 바로 개의 형상을 한 정령이었다. -크와아아아! 개의 형상을 한 정령은 준상의 모습을 파악하기가 무섭게 그 입으로부터 붉은 불길을 뿜어 내었다. 마치 화염 방사기처럼 일직선으로 뻗어 나오는 불길을 보고 준상은 자신도 모르게 두 팔을 앞으로 내밀며 방어의 동작을 취했다.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의 몸은 이미 어지간한 수준의 화염에 대해서는 완벽한 저항력을 발휘할 수 있는 상태였고, 그 때문에 개의 형상을 한 정령이 뿜어낸 불길은 준상의 몸에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았다. 준상은 눈앞을 어지럽히는 불길이 자신에게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자 그대로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처럼 자신을 태우기 위해 뿜어지는 불길을 타고 올라갔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것을 지켜보던 독수리 형상의 정령이 온몸에서 불길을 뿜어내며 공중으로 솟구치더니, 곧바로 준상을 향해 화살처럼 떨어져 내렸다. 준상은 불길을 거슬러 움직이다가 공중으로부터 시뻘건 불덩이가 위협적인 속도로 내리 꽂히는 모습을 보았다. 이미 정령들의 불꽃이 자신에게 별다른 피해를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준상은 주저 없이 주먹을 휘둘러 내리꽂히는 독수리 형상의 정령을 후려쳤다. 그의 주먹은 어김없이 정령에게 적중했으나, 정령은 마치 허상처럼 그의 주먹을 지나칠 뿐 피해를 입지 않았다. “쯧...” 준상은 혀를 찰 수 밖에 없었다. 그제서야 이들이 실체가 없는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탓이다. 독수리 형상의 정령은 다시금 허공으로 솟구치며 두 번째 공격을 준비했다. 준상은 그 모습을 보며 두 주먹에 정령의 기운을 깃들이게 했다. 불과 상극이라면 역시 얼음. 두 주먹에 얼음의 정령인 눈꽃송이가 깃들자 용암의 열기에 의해 하얀 김이 주먹으로부터 뿜어져 나오기 시작한다. 준상은 그렇게 얼음의 정령이 깃든 주먹으로 날아드는 독수리 형상의 정령을 후려쳤다. 퍽! 이번엔 효과가 있었다. 주먹이 닿는 순간 독수리 형상을 지니고 있던 정령의 모습이 풍선처럼 터져 나간 것이다. 정령은 날개 한쪽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로 비틀거리며 튕겨 나갔다. 그 모습을 보았는지 개의 모습을 한 정령이 다시 준상의 등에 대고 불꽃을 뿜어 댔지만, 그는 그와 같은 공격을 무시한 채 금방이라도 꺼질 것 같은 촛불처럼 위태로운 형상을 하고 있는 독수리 형상의 정령에게 날아들어 재차 주먹을 내질렀다. 이미 몸의 반절이 날아가 버린 정령은 그의 공격을 피하지 못했다. 푸확! 얼음의 정령이 깃든 주먹이 정확하게 몸통에 틀어박히자, 독수리 형상을 하고 있던 정령은 그 일격을 견디지 못하고 화려하게 폭발하며 존재감을 잃어버렸다. 정령 하나를 해치운 준상은 곧바로 방향을 틀어 개 모양의 정령을 향해 날아들었다. 지능이 모자란 것인지, 아니면 이런 식으로 자신이 뿜어대는 불길을 아무렇지도 않게 견뎌낼 수 있는 인간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 자체를 믿을 수 없어서인지 모르지만, 개의 형상을 한 정령은 자신이 뿜어내는 불길을 정면으로 돌파해 날아드는 벌거숭이 인간의 모습에도 도망치지 않았다. 준상은 곧바로 불길을 거슬러 올라가 마찬가지로 개의 형상을 한 정령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푸화학! 이번에도 어김없이 타락한 정령은 화려한 불꽃을 터뜨리며 소멸해 버렸다. 순식간에 정령 둘을 해치운 준상은 곧바로 용암 호수를 가로질러 마지막 남은 거인 형상의 정령을 향해 돌진했다. -그오오오! 다른 두 정령이 소멸할 때까지도 강 건너 불구경하듯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던 거인 형상의 정령은 준상이 자신의 범위에 들어오자 커다란 괴성을 터뜨렸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이것은 귀로 들리는 소리가 아니었다. 마치 몸 전체가 울리는 듯한 기묘한 울림에 준상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지만, 물러서지 않고 곧바로 타락한 불의 정령을 향해 날아들었다. 불의 정령은 자신의 고함소리를 무시하고 날아들자, 마치 날파리를 후려치듯 허공에 손바닥을 휘저었다. 저게 뭐하는 짓인가 싶었던 준상이지만, 그 순간 용암 호수로부터 거대한 용암 줄기 하나가 솟구쳐 자신에게 날아드는 모습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엉겁결에 그 일격을 피하자, 솟구쳐 오른 용암은 굉음과 함께 떨어져 내리며 사방으로 불꽃을 퍼뜨렸다. “이런...” 이건 단순한 불꽃 공격이 아니다. 용암 자체가 지닌 무게까지 감안하면, 개의 모습을 한 정령이 뿜어내던 불길처럼 몸으로 막아냈다가는 상당한 타격을 입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아니, 그냥 맞고 좀 아픈 정도라면 차라리 다행이다. 저 용암의 폭류에 휩쓸려 묻히기라도 하는 날에는 꼼짝없이 용암 호수 속에 가라앉아 버릴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불에 대한 저항이 아무리 높아도 소용이 없다. 용암은 본디 바위가 녹은 것. 제 아무리 준상이라도 용암 호수 밑바닥으로 가라앉으면 그 엄청난 무게에 짓눌려 버릴 수밖에 없고, 거기에 질식까지 추가되면 도저히 살아날 방법이 없게 된다. 저 놈, 단순한 불의 정령이 아니었던 것인가. 저 놈은 바람과 얼음의 이중 속성을 지닌 마파람처럼 불과 대지의 이중 속성을 지닌 정령이었던 모양이다. 이를테면 용암의 정령이라고 해야할까. 마파람이 다른 정령들보다 월등히 등급이 높은 레어급 정령임을 감안하면, 이 녀석의 강함도 어렵지 않게 이해가 된다. 상황 파악이 끝나자 준상은 몰아치는 용암의 폭류를 피하며 두 주먹에 새로운 정령을 불러들였다. 상대가 레어급이라면 이쪽도 레어급을 불러내면 그뿐이다. 마침 준상이 지닌 레어급 정령은 놈의 속성인 불과 땅에 대비되는 얼음과 바람의 속성을 지닌 마파람. 속성 강화가 이루어지자 준상의 두 주먹에는 매서운 겨울 바람의 기운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그오오오오! 준상의 주먹에 깃든, 자신과 상극의 기운을 느낀 것인지 타락한 정령은 다시금 괴성을 터뜨리며 맹렬하게 용암의 폭류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준상은 그 모든 공격들을 유유히 피하며 순식간에 놈의 코앞으로 들이닥쳤다. 타락한 정령은 보았다. 알몸의 인간이 두 눈에서 붉은 섬광을 뿜어내며 자신 앞으로 다가와 주먹을 휘두르는 광경을. 감정이란 것을 지니지 않은 정령이기에 준상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광견의 위엄이나 공포의 시선 같은 것에 영향을 받지는 않았지만, 그의 두 주먹에서 휘몰아치는 차가운 겨울바람의 기운이 자신에게 위협적이라는 사실 정도는 놈도 알고 있었다. 곧바로 정령과 인간의 난투극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퍽! 푸헉! 타락한 정령의 몸이 준상의 주먹질에 맞을 때마다 퍽퍽 터져 나간다. 단순한 불의 정령이 아니라, 용암으로 이루어진 몸이기에 어느 정도 물리적인 방어력도 갖추고 있었지만, 그래봐야 준상의 힘에는 당할 도리가 없었다. 순식간에 타락한 정령의 팔 하나가 떨어져 나갔고, 이어서 다리 한쪽이 터져 나갔다. 타락한 정령은 용암 속으로 들어가 다시 형체를 복구하려 했지만, 그 전에 준상의 손에서 뻗어나온 매서운 겨울 바람이 그의 몸 중앙을 강타하며 뜨겁게 타오르던 불 속에 한줄기 차가운 한기를 밀어넣었다. -그오오오오! 결국 타락한 정령은 그 짤막한 한 마디 단말마를 끝으로 폭발해 버리고 말았다. 00168 트롤러 ========================================================================= “쯧...” 단숨에 타락한 정령을 해치운 것은 나쁘지 않았지만, 준상은 놈이 폭발하면서 터져 나온 불꽃과 용암을 그대로 뒤집어 써야만 했기 때문에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일단 용암의 강에서 벗어난 다음 몸을 씻어내려던 준상은 습관적으로 미니맵을 살피다가 강 건너편에 히든 퀘스트의 표식이 있음을 알아보았다. 일단 고개를 들어 바라보았지만, 아무것도 확인할 수 없었다. 그래서 초감각을 통해 다시 살펴보니, 은신인지 투명화인지 알 수 없는 방법으로 모습을 감춘 자를 하나 발견할 수 있었다. 준상은 일단 모르는 척 용암의 강을 벗어났다. 몸을 숨긴 적은 준상이 다가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모습을 드러내며 마법을 사용했다. 순식간에 커다란 불덩이가 만들어지더니 준상을 향해 곧바로 날아든다. 하지만 처음부터 될 일이 아니었다. 저 강력한 불의 정령조차 아무런 피해를 입히지 못한 마당에, 이런 불덩이를 날려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준상은 귀찮다는 듯이 한 손을 휘둘러 자신에게로 날아드는 불덩이를 쳐냈다. 그러자 여전히 그의 손에 남아 있던 마파람의 기운이 정면으로 불덩이와 출동하더니, 마치 지우개로 지워버린 것처럼 마법을 소멸시켜 버렸다. “네, 네놈은 도대체 누구냐!” 나름 기습이란 걸 해보려고 모습을 드러냈던, 악령의 사제 게헨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마치 비명을 지르는 듯한 날카로운 목소리로 준상을 향해 외쳤다. 여자? 목소리로 봐서는 남자가 아닌 듯 했지만, 어차피 준상에게 그런 것은 별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게헨은 준상을 두 손으로 가리키며 다시 무언가 마법을 발동하려 했지만, 그보다 준상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철벽 카드를 포박으로 교체하기가 무섭게 지면을 박차고 달려들어 놈의 목을 한 손으로 움켜쥔 것이다. “커헉!” 게헨은 만약을 대비해 자신의 몸 주위에 방어막을 펼쳐둔 상태였지만, 그리 대단한 수준은 아니었던 모양인지 준상이 맨 몸으로 달려들자 그대로 유리처럼 깨져 버리고 말았다. 준상은 게헨을 사로잡자, 놈을 한 손에 들고는 천천히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게헨에게 신경을 쓰는 탓에 미처 알아보지 못했던,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검게 탄 잔해들이 눈에 들어온다. 시체라고 하기도 뭐할 정도로 완전히 연소되어 그을음 정도의 흔적만 남은, 그런 잔해들. 아마도 용암의 강 위에 버티고 있던 불의 정령들에게 당한 희생자들이리라. 준상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절벽 안쪽의 빈 공간에 요사스런 기운을 뿜어내는 기이한 문양과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처녀들의 시체, 그리고 문양 한 가운데 자리 잡은 검은 구슬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문양에서는 검은 연기 같은 것이 쉴 새 없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문이 열린지 얼마 안 되어서인지 당장 준상에게 악영향을 끼칠 정도의 실체화된 무언가는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지만, 점차 어두운 기운이 커져가는 것이 피부로 느껴질 정도다. 이것이 활성화된 악령의 문인가. 준상이 문양을 잠자코 바라보자, 그에게 목을 잡힌 채 축 늘어져 있던 게헨이 자랑스러워 하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큭큭... 네 놈이 누군지... 모르겠지만... 이미... 늦었다...” “...” 준상은 말없이 고개를 돌려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는 게헨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놈은 목을 잡혀 호흡이 곤란한 와중에도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세상을 구하고 싶은가? 그럼 저 안으로 들어가 구슬을 집어 들어라... 하지만 명심해라... 문양 안쪽으로 들어가는 순간... 네놈의 강철 같은 몸에 깃든 생명력은 빨려 들어갈 것이고... 구슬에 손을 대는 순간... 네놈의 몸에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저주가 덧씌워질 것이다... 큭큭큭...” “...” 혹시나 싶어 가만히 말하도록 내버려뒀지만, 아마도 처녀들의 피로 그린 것이 아닐까 싶은 문양 안쪽에 들어가면 생명력을 갈취 당한다는 정도를 제외하면 악령의 구슬이 지닌 본연의 힘과 별 차이는 없는 듯 싶었다. 화염 저항을 맞춘 것처럼 저주 저항을 맞추어 보면 어떨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긴 했지만, 굳이 위험을 감수해가며 그런 걸 시험해 볼 이유는 없었다. 그렇게 결론을 내린 준상은 곧바로 염동력 카드를 장착한 다음, 구슬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아마도 문양의 힘이 아닐까 싶은 약간의 저항감이 느껴지긴 했지만, 별다른 어려움 없이 준상은 문양으로부터 구슬을 분리해낼 수 있었다. -그어어어어어... 그러자 마치 지옥 밑바닥에서 무언가가 울부짖는 듯한 소리와 함께 문양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던 검은 기운이 사그라 들기 시작한다. “엥?” 목을 잡힌 채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게헨은 구슬이 갑자기 허공으로 떠오르고 섬뜩한 붉은 빛을 뿜어내던 문양이 힘을 잃기 시작하자 당황해 버렸다. “이, 이게 도대체?” 하지만 준상은 게헨이 그러거나 말거나 악령의 구슬을 자신에게로 끌어온 다음, 적당한 거리에 이르자 이전에 그랬듯이 인벤토리에 덜렁 집어넣고 말았다. “...” 게헨은 자신을 향해 날아들던 악령의 구슬이 갑자기 허공에서 모습을 감추자, 이제 완전히 얼이 빠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제서야 깨달았다. 불타는 용암의 강을 맨몸으로 건너고, 타락한 정령을 맨주먹으로 때려 부수는 자가 보통의 인간일 리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원래대로라면 타락한 불의 정령이 파괴된 순간 이미 깨달았어야 할 사실이지만, 별로 머리가 좋지 않은지 이제야 겨우 깨달은 것이다. 하긴 일찍 깨달았다면 준상에게 화염구 같은 마법을 사용하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겠지만 말이다. 그래서일까. 게헨은 떨리는 목소리로 준상에게 이렇게 물었다. “네, 네놈은... 아니, 당신은... 도대체 누구십니까?” 하지만 준상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주먹을 휘둘러 놈의 머리를 부수어 버렸을 뿐이다. 퍼걱! 악령의 문을 닫음과 동시에 퀘스트가 완료된 이상, 어차피 운델처럼 금제가 걸려 있음이 분명한 이 약간 모자라 보이는 악령의 사제와 구태여 대화를 계속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단 일격에 게헨은 머리가 부서지며 그대로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준상은 죽어버린 게헨의 시체를 아무데나 던져 놓은 다음, 몽몽이를 불러 자신이 미처 알아보지 못한 아이템이 있는지 확인하게 한 다음에야 비로소 물의 정령인 새벽이슬을 불러 몸을 씻기 시작했다. 그의 몸에 묻었던 용암은 이미 어느 정도 식어있는 상태였지만, 대신 굳은 채 말라붙어서 생각처럼 쉽게 떨어지지가 않았다. 특히 머리카락 같은 털에 엉겨 붙은 용암은 간단하게 물로 씻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할 정도였다. “쯧...” 아무래도 여기서 정령으로 간단하게 씻는 정도로는 몸에 엉겨 붙은 용암 찌꺼기를 다 닦아내는 것은 불가능한 듯 싶었다. 몽몽이 역시 별다른 수확이 없는지 곧장 준상에게 돌아왔다. 들인 노력이나 위험성에 비해 여러모로 수확이 부족한 퀘스트가 아닐 수 없다. 악령의 문을 막아내십시오. :악령의 사제와 그가 이끄는 언데드들에 의해 음차원과 연결된 악령의 문이 열리고 말았습니다. 의식을 저지하는 것은 이미 늦었지만, 지금이라면 아직 음차원의 힘이 대륙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막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 퀘스트는 단독 퀘스트입니다.] ->완료! (Hidden) 악령의 사제 게헨을 처치하십시오. (단독) ->완료! (Hidden) 타락한 화염의 정령을 처치하십시오. (3/3) (단독) ->완료! - 당신이 이번 퀘스트에서 보여준 행동과 성과를 정산합니다. 이 과정은 약간의 시간이 소요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축하합니다! : 당신의 랭크는 SSS입니다. -당신은 이번 퀘스트의 목표를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완벽하게 수행했습니다. 기본 보상 외에 추가 보상이 지급됩니다. 보상 : 경험치 보통, 추가 보상 상자(단독)x2, 추가 보상 상자(SSS랭크) -> 보상을 지금 수령하시겠습니까? (Y/n) _ (주의) 수령하지 않은 보상은 7일후 자동 소거됩니다. “쯧...” 이전 퀘스트에서 뜻밖에 유니크 아이템을 얻은 탓에 정령과 싸울 때까지만 해도 그에 준하는 무언가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악령의 구슬 외에는 일반적인 퀘스트 보상 이외의 것은 전혀 습득하지 못했다. 악령의 사제 게헨에게서 나온 것도 저주 저항 5퍼센트 짜리 일반 시드가 고작이니 말해 무엇하겠는가. 준상은 입맛을 다시며 일단 벗어두었던 옷과 장비를 다시 걸친 다음 전송을 기다리다가 시간이 되자 다시 여왕의 침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후...” 도착하기가 무섭게 준상은 헤네스와 리체스를 소환했다. “응?” “어라?” 둘은 역소환되었던 곳에서 그대로 다시 모습을 드러내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이어 용암 찌꺼기가 머리에 엉겨붙어 있는 준상의 모습을 보고 어렵지 않게 상황을 이해했다. 헤네스는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닫았지만, 리체스는 대번에 화난 표정을 지으며 외쳤다. “어째서 절 불러내지 않으신 거에요?” “위험해서.” “...” 너무나 간단명료한 대답에 리체스는 더 이상 뭐라 말을 건넬 수가 없었다. 한 마디 말에 불과했지만, 어쨌든 자신들이 위험에 처할까봐 불러내지 않았다는데 더 이상 뭐라고 따지겠는가. 명색이 요정 여왕인데 너무 약하게만 보는 것이 아닌가 싶긴 했지만, 어찌되었든 자신을 생각해 주는 것이 싫을 이유는 없었다. 결국 리체스는 한숨을 푸욱 내쉬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위험하더라도 일단 불러주세요. 전 주인님 생각보다 훨씬 강하거든요.” “그래.” 리체스는 그렇게 당부라도 했지만, 헤네스는 그럴 수도 없었다. 어떻게 변명을 해도 자신이 약하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대신 그녀는 준상에게 다가가 머리에 엉겨붙은 용암 찌꺼기를 어루만졌다. “이거... 뭐죠?” “용암.” “...” 대답은 간단했지만 그 말이 지닌 바 의미를 깨닫자 질문을 던진 헤네스는 물론이거니와 리체스도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저런 것이 머리에 엉겨 붙다니. “용암 속에서 헤엄이라도 치고 나온 거에요?” 리체스는 설마 하는 심정으로 물었지만, 곧이어 준상이 고개를 끄덕이자 너무나 놀라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세상에. 용암 속에서 헤엄을 치다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헤엄을 친 건 아니고 용암의 강을 헤집고 돌아다니다가 타락한 정령이 폭발하는 바람에 그 찌꺼기를 조금 뒤집어 쓴 것이지만, 준상은 굳이 그런 내용을 시시콜콜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괜히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탓이다. 자신이 한 일을 자랑 삼아 떠벌일 만큼 사교적인 성격도 아닐뿐더러, 그런 말을 한다고 뭔가 바뀌는 것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무미건조한 준상의 반응에 리체스는 다시 한 번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말이 쉽지, 그게 도대체 보통의 인간에게 허락된 일이란 말인가. 놀라기는 헤네스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리체스와 다른 점이라면, 그런 험한 곳이기 때문에 자신들을 다시 불러낼 엄두도 내지 못한 것이라는 점을 확실하게 깨달았다는 정도이다. 하지만 준상은 대수롭지 않은 모습으로 다시 리체스에게 말했다. “리체스.” “네?” “악령의 구슬을 하나 더 얻었다. 기왕 만드는 김에 하나 더 만들어라.” “...” 리체스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밥 차리는 김에 숟가락 하나 더 놓으라는 듯한 일상적인 준상의 말에 잠시 어이가 없어진 탓이다. 말이 쉽지, 그게 얼마나 고차원적인 기술과 지식을 필요로 하는 일인데! “꼭... 필요한가요?” “그래.” “...” 리체스의 말에 준상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리체스는 한숨을 푸욱 내쉬며 그를 다시 연구실로 데리고 간 후 악령의 구슬을 넘겨 받아야 했다. 악령의 구슬을 받아 갈무리하며 그녀의 머리 속에 떠오른 생각은 단 하나. ‘이걸 어느 세월에 다 만드나.’ 이럴 줄 알았으면 괜히 말을 꺼냈다 싶을 뿐이다. 악령의 구슬을 넘겨주자 곧바로 헤네스가 기다렸다는 듯이 리체스에게 말했다. “저... 여왕님.” “응?” 그 말에 헤네스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까 온천이 있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그랬지.” 리체스는 살짝 볼을 붉히며 물어보는 헤네스의 모습에 얘가 또 왜이러나 싶다가 준상의 머리카락에 덕지덕지 엉겨 붙은 용암을 보고서야 질문의 의도를 깨달았다. 사실 저 정도야 요정계 안에서라면 리체스의 마법으로 단숨에 처리가 가능하다. 하지만 리체스는 그 사실을 숨기기로 마음먹었다. 자신의 우월한 마법 실력을 선보이는 수단으로 써먹기 보다는 모처럼 마음먹고 온천에서의 휴식을 제안한 자신의 말을 야멸차게 거절했던 준상에게 모종의 복수를 하는 편이 훨씬 재미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가요. 일단 가서 머리에 붙은 것부터 씻고 와요.” 준상은 리체스가 얼른 팔짱을 끼며 그렇게 말하자 얼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괜찮다.” “어째서요?” “어차피 금방 또 불려갈지도 모르니까.” “...” 듣기에 따라서는 상당히 우울할 수도 있는 얘기였지만, 그것이 준상이라는 이름의 남자가 처한 현실이기도 했다. 리체스는 너무나도 담담한 준상의 말에 잠시 말문이 막혔지만, 옆에서 보고 있던 헤네스가 지원사격을 했다. “그렇게 따지면 금방 배꺼질 텐데 밥은 뭐하러 먹어요?” “...” 뭔가 어거지가 섞인 논리이긴 했지만, 준상은 달리 반박을 하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는 이런 저런 논리를 내세워 반박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이런 식의 심리 상태를 가리켜 다음과 같은 한 마디로 표현하곤 한다. 귀찮아서, 라고. 예전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겠지만, 대기 시간이 이십 분으로 늘어난 상황이니 이 정도 사치는 부려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 사실 머리에 용암 찌꺼기를 달고 다니는 것 자체가 좀 찜찜한 건 분명한 사실이었기 때문에 준상은 더 이상 반론을 내세우지 않고 그녀들이 이끄는 대로 우유빛 물이 솟아나오는 요정 여왕 비장의 온천으로 향했다. 온천에 들어서자 준상은 일단 옷부터 벗기 시작했다. “...” 갑자기 준상이 옷을 벗기 시작하자, 헤네스와 리체스는 자신들이 끌고 와 놓고 깜짝 놀라 얼른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헤네스는 무언가를 결심한 표정으로 두 주먹을 불끈 쥐더니 입고 있던 옷을 벗기 시작했다. 그런 헤네스의 모습을 본 리체스 역시 이내 눈을 질끈 감고는 질 수 없다는 듯이 몸에 걸친 하늘거리는 옷을 벗었다. 먼저 옷을 벗기 시작한 것은 헤네스였지만, 옷을 먼저 다 벗은 쪽은 리체스였다. 아무래도 입고 있는 옷의 가짓수가 많다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리체스는 허둥지둥 브래지어를 풀고 팬티를 벗는 헤네스를 보며 피식 웃다가 슬며시 고개를 돌려 준상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무심하게도 그는 어느 틈엔가 세면도구를 꺼내들고 스스로 머리부터 감고 있었다. 리체스는 구부정하게 주저 앉아서 혼자 머리를 감고 있는 준상의 탄탄한 등 근육을 바라보며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이런 상황에서라면 모르는 척 훔쳐보다가 들키는 정도의 모습 정도는 보이는 것이 예의 아니겠는가! 속으로 그렇게 투덜거리고 있는데, 그제서야 헤네스가 옷을 전부 다 벗고 손으로 가슴과 다리 사이를 가린 채 리체스의 시선을 따라 준상을 바라보았다. 역시나 헤네스도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자신이 어떤 심정으로 이렇게 뻔히 보는 앞에서 옷을 벗었는데. 막상 준상은 아예 관심도 없다는 듯이 혼자 머리를 감고 있으니 한숨이 나오지 않으면 그게 이상한 일이다. 헤네스는 한숨을 푸욱 내쉬다가 이내 자신을 바라보며 웃고 있는 리체스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그녀의 눈동자 속에 스며든 장난기를 읽었다. “...” “...” 의견이 일치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녀들은 씨익 웃고는 뒤에서 자신을 향해 어떤 모략이 세워지고 있는지는 꿈에도 모른 채 머리를 감는데 열중해 있는 준상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00169 트롤러 ========================================================================= 둘은 살금살금 준상의 뒤로 다가갔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로 욕탕에서 머리를 감고 있는 남자에게 장난이라니, 헤네스는 자신의 이런 모습을 부모님이 안다면 어떨 표정을 지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지만, 옆에 서 있는 리체스의 모습을 보고는 질 수 없다는 표정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물론 그녀들이 아무리 발소리를 죽인다고 해봐야 초감각으로 무장한 준상의 이목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럴 마음만 있다면 뒤돌아 있는 상태로도 그녀의 얼굴 표정이나 심박수까지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 바로 초감각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이미 그녀들이 알몸으로 상기된 표정을 한 채 다가오는 것을 진작에 눈치채고 있었지만 그대로 내버려 두고 있었다. 두 명의 장난꾸러기 요정들은 그런 줄도 모르고 서로를 바라보며 킥킥거리다가 기습적으로 준상의 등에 엉덩이를 대고 걸터앉았다. “...” 물이라도 가져다 부으려나 싶었더니, 겨우 이거였나. 등판에 와 닿는 그녀들의 부드러운 둔부의 느낌이 생각보다 자극적이긴 했지만, 준상은 속으로 피식 새어나오는 웃음을 감춘 채 그러거나 말거나 머리를 감는 일에 몰두했다. 생각보다 준상의 등판은 상당히 넓었지만, 그래도 여자 두 명이 동시에 앉기에는 아무래도 부족한 것이 사실이었다. 헤네스와 리체스는 등을 마주한 채 준상의 자리에 앉았지만, 물기에 젖어 있는 것은 물론이고 샴푸의 거품까지 흘러내린 탓에 체중을 실으면 그대로 미끄러질 위험이 있었다. 미끄러져서 엉덩방아를 찧는 거야 상관없지만, 이런 식으로 밀려나는 건 여러모로 상징적인 패배로 여겨질 소지가 다분한 일이었다. 그래서일까. 누가 먼저 말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헤네스와 리체스는 등 뒤에 앉은 자신의 라이벌을 돌아보며 투지를 불태우기 시작했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밀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기 시작했다. “이익...” “끙...” 남의 등판에 앉아서 뭘 하는 건지. 본격적으로 몸싸움이 시작되자 준상은 등으로 전해지는 그녀들의 감촉을 느끼며 난감한 표정이 되어 버렸다. 결국 견디다 못한 준상은 엎드려 있던 몸을 바로 세웠다. “꺅!” “자, 잠깐!” 물론 서로를 밀어내기 위해 몸싸움에 여념이 없던 헤네스와 리체스는 준상이 몸을 바로 세우자 곧바로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지며 엉덩방아를 찧을 수밖에 없었다. “아프잖아요.” “맞아.” 두 여자는 방금 전까지 몸싸움을 벌이던 것조차 잊었는지 이구동성으로 준상에게 비난을 퍼부었다. 물론 그런다고 눈 하나 깜짝할 준상이 아니다. “됐으니까, 와서 좀 도와줘. 생각처럼 잘 안 떨어진다.” “치.” 리체스는 준상의 부탁에 입을 삐죽거렸지만, 말 잘듣는 강아지 마냥 후다닥 달려가는 헤네스를 보고는 질 수 없다는 듯이 그의 등 뒤로 다가가 머리에 엉겨 붙은 용암 조각을 하나 하나 정성스럽게 떼어내기 시작했다. 용암이 머리에 엉긴 채로 굳어 버린 터라 샴푸를 하는 것 정도는 어림없고, 일일이 부수거나 손으로 당겨서 떼어내는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질 수 없다는 경쟁심에 달려들었던 리체스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자 금방 지루해지고 말았다. “여기서 이럴 것이 아니라 온천 안에 들어가서 하면 안 될까요?” “그럴까.” 준상은 리체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갑자기 뒤로 돌아서서 그녀들을 한 쪽 어깨에 한 명씩 앉히고는 욕탕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꺅! 내, 내려 주세요!” 헤네스는 당황한 모습으로 준상의 머리를 감싸 안은 채 비명을 질렀고, “꺄하하!” 리체스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준상은 물에 젖은 욕실 바닥에 미끄러지지 않도록 주의 하면서 천천히 그녀들을 짊어진 채 온천 안으로 들어가 몸을 담갔다. 그러자 뽀얀 우윳빛의 온천물이 세 사람의 몸을 푸근하게 녹이기 시작한다. 헤네스는 온천 안으로 들어오기가 무섭게 준상의 어깨로부터 내려오더니, 아랫입술을 깨물고는 살짝 눈물 맺힌 시선으로 준상을 노려보다가 원망을 담아 말했다. “정말... 깜짝 놀랐잖아요.” 그리고는 다시 준상의 머리에 엉겨 붙은 용암 찌꺼기로 손을 가져갔다. 하지만 그녀와 달리 리체스는 내려올 생각이 없는지 그대로 준상의 어깨 위에 앉은 채 몸만 살짝 돌린 채로 하던 일을 이어갔다. 그 모습을 보자 헤네스는 어쩐지 자신이 더 민망스러웠다. 그도 그럴 것이 리체스의 길고 매끄러운 다리가 준상의 시야에 그대로 노출되는 것은 물론이고, 고개나 눈을 살짝만 돌리며 배꼽 아래 은밀한 부위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자세였기 때문이다. 결국 보다 못한 헤네스가 리체스에게 말했다. “그, 그만 내려오세요.” “어째서?” “그러니까... 무겁지 않겠어요? 그렇게 계속 올라가 있으면.” 나름대로 합리적인 이유라고 생각했지만, 리체스는 천연덕스럽게 준상을 향해 물었다. “주인님, 무거우세요?” “아니.” 요정 자체가 본래 인간보다 가벼운 경향이 있는데다, 사실 준상의 발달된 근력이라면 여자 두 명 정도 짊어지는 건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 헤네스도 그걸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눈치 없이 바로 괜찮다고 대답하는 준상의 태도에 저절로 입이 삐죽거리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준상은 눈을 감은 채 그녀들의 손길이 오가는 감각을 순수하게 즐기기 시작했다. 결국 제법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머리카락에 붙은 용암 찌꺼기는 어렵지 않게 모두 떼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 문제가 남아 있었다. 머리카락 다음으로 털이 많은 부위가 남은 것이다. 뒤통수 같은 부위야 직접 하기엔 여러 가지 불편한 점이 많아서 그녀들의 도움을 받았지만, 아무리 철면피 스킬을 영웅등급으로 연성한 준상이라도 차마 거기까지 해달라고 할 수는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준상은 이 부분은 나중에 물기를 닦을 때 처리하든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헤네스는 더 이상 준상의 머리카락에 용암 찌꺼기가 남지 않게 되자 손을 멈추고 가만히 준상의 옆에 어깨를 기댄 채 앉았다. 함께 목욕을 한다는 것이 못내 부끄러웠는데, 다행히도 우윳빛 온천이 몸을 적당히 가려주고 있어서 그녀는 살짝 한시름 놓은 상태였다. 하지만 문제는 역시 리체스였다. “준상씨.” “응?” “일어나봐요.” “왜?” “그, 그러니까... 아직 남은 곳이 있잖아요.” “...” 자기가 말해놓고도 민망했는지 리체스는 살짝 말을 더듬었다. 하지만 민망하기로 따지자면 당사자인 준상이 더했다. 준상은 헤네스를 슬쩍 돌아봤지만, 그녀는 둘이 말하는 곳이 어딘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어리둥절해 하고 있을 뿐이었다. “크흠... 됐으니까 거긴 나중에 직접...” 준상은 스스로도 어째서인지 모르는 상태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그렇게 얼버무렸지만, 평소에는 흐리멍덩하고 푼수끼가 있던 요정 여왕이 이번 만큼은 완강하게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려 들었다. “안 돼요. 지금 당장 해야 해요. 어서 일어서세요.” 그러자 뭔지도 모르고 헤네스가 그녀의 말을 거들었다. “여왕님 말이 맞아요. 어차피 해야할 일이라면 지금 한꺼번에 하는 편이 낫지 않겠어요?” 그것은 틀림없는 정론이었다. 지금과 같은 상황만 아니라면 말이다. 준상은 결국 둘의 재촉에 한숨을 푸욱 내쉬고는 만사 포기한 심정으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하긴... 이미 밤을 함께 보낸 사이이고, 또한 함께 몸까지 씻는 사이가 되었는데 부끄러워할 필요가 있는가. 그렇게 생각하며 준상이 몸을 일으켜 우윳빛 온천 아래 감추어져 있던 신체를 드러내자, 요정 여왕과 요정을 닮은 갈색 머리 소녀는 그대로 석상처럼 굳어버리고 말았다. “...” “...” 리체스는 눈앞에 드러난 준상의 우람한 신체를 보고 눈이 동그래졌다. 헤네스는 너무나 생생하게 드러난 남자의 신체를 보고는 그만 눈앞이 아찔해지는 충격을 받았다. 거의 반사적으로 눈을 돌린 헤네스와는 달리 리체스는 마른 침을 꼴깍 삼키고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엉겨 붙은 용암 찌꺼기를 떼어내기 시작했다. 그녀가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지자 헤네스는 공황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이대로 그냥 있자니 그녀 혼자 준상의 신체 일부를 주물떡거릴 것은 보지 않아도 뻔한 일. 그렇다고 자신 역시 나서자니 감히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야말로 진퇴양난. 하지만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누가 뭐래도 준상의 첫 번째 상대는 자신이 아니던가. 소중한 그곳이 요정 여왕이라는 이름을 가진 폭군의 손에 유린되도록 놔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결국 헤네스는 이를 악물고 덜덜 떨리는 손을 뻗었다. 하지만 제대로 보지도 않고 뻗은 손이 어디로 가겠는가. 대뜸 준상의 신체 일부와 바로 접촉하고 말았다. “...” 손 끝에 전해지는 너무나 생생한 감각에 헤네스는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이전에도 엉겁결에 만진 적이 있긴 하다. 그때는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그 감촉을 인식할 여유조차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준상의 신체 일부가 헤네스의 손길이 닿기가 무섭게 불뚝거리며 들고 일어서는 그 생생한 감촉이 얼음처럼 굳어버린 그녀의 손을 통해 그대로 전해지고 있다. 어찌 경악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이렇게 되고 보니 애써 평온을 가장한 채 작업에 몰두하고 있던 리체스의 손도 그대로 굳어버렸다. 헤네스는 눈을 돌리고 있었던 탓에 그 모습을 볼 수 없었지만, 덕분에 리체스는 눈앞에서 준상의 신체가 벌떡 일어서는 생생한 현장을 그대로 지켜봐야만 했다. 난감한 것은 준상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국부를 여자들 앞에 드러내놓고 있는 것만으로도 난감한 마당에 애써 억눌러 두고 있던 본능이 헤네스의 손길을 받는 순간 미친 듯이 들고 일어나 버린 탓이다. 그렇게 굳어 버린 세 사람을 구해준 것은 다름 아닌 퀘스트였다. 새로운 퀘스트가 도착했습니다 -20분뒤 퀘스트 수행을 위한 장소로 전송됩니다. 안전한 장소로 이동해 주십시오. (남은시간: 19분 56초) 준상은 처음 튜토리얼을 접한 이래로 이번처럼 퀘스트 안내 메시지가 반가운 적이 없었다. “크흠...” 그는 일단 헛기침을 크게 한 다음, 얼른 몸을 돌리며 다시 말했다. “퀘스트다.” “아...” “...” 그제서야 리체스는 꿈에서 깨어난 듯한 표정으로 작은 소리를 냈고, 헤네스는 화들짝 놀라며 뻗었던 손을 회수했다. 준상은 자신의 신체 일부를 흘깃 바라보았다. 그 경황 중에도 리체스는 제법 꼼꼼한 손길로 엉겨 붙은 용암 찌꺼끼를 깔끔하게 떼어내 주었던 모양이다. 아직 조금 부스러기가 남아 있긴 하지만, 그 정도는 준상 스스로도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었다. 준상은 어쩐지 입가에 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모르는 척 평정을 가장한 모습으로 아직까지도 패닉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그녀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먼저 나간다.” “네...” “...” 리체스는 그의 말에 반사적으로 일단 대답부터 했지만, 헤네스는 준상을 흘끔 훔쳐보더니 화들짝 놀라며 얼른 고개를 돌렸다. 저러다 트라우마라도 남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떠올리며 준상은 온천에서 빠져 나왔다. 우선 새벽이슬을 불러 몸에 묻은 물기를 닦은 다음, 옷을 하나씩 챙겨 입고 다시 직전의 퀘스트에 임하면서 벗어둔 장비 역시 몸에 걸쳤다. 그 모든 것을 끝내고 대충 시간을 살펴보니 십여분 정도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준상은 그녀들이 옷을 입을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준 다음, 직전의 퀘스트와 같은 상황에 빠르게 대처할 수 있도록 속성별로 시드를 분류해서 따로 챙겨두는 작업을 시작했다. 00170 트롤러 ========================================================================= 저주나 독, 빙결, 번개 등의 여러 가지 속성 가운데 우선 정리를 선택한 것은 바로 저주. 다른 속성들도 위험한 것은 마찬가지지만 현재 진행 중인 퀘스트들이 모두 저주의 집합체인 악령의 구슬과 관련된 까닭이다. 퍼센티지가 높은 순으로 스무 개씩의 시드를 골라 바로 바로 장착할 수 있게끔 따로 보관하는 작업을 하고 있자니, 옷을 챙겨 입은 헤네스와 리체스가 쭈뼛거리는 모습으로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냈다. 확실히 요정 여왕이 추천할 만한 온천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습기를 촉촉이 머금은 피부 위로 살짝 상기된 표정이 무척이나 싱그럽게 느껴진다. 그녀들은 방금 전의 일 때문인지 감히 준상과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흘끔거리며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준상은 대충 시드의 정리가 끝나자 자리를 털고 일어난 다음, 장비를 점검하고는 남은 시간을 확인하고 나서야 그녀들에게 말을 걸었다. “그럼, 조금 있다 다시 보자.” “네...” “...” 준상의 말에 헤네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고, 리체스 역시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대답했을 뿐이다. 아무래도 후유증이 제법 오래 갈 것 같다는 생각에 쓴웃음을 삼킨 준상은 그녀들을 역소환한 다음 전송을 기다렸다. 마침내 대기 시간이 모두 소진되자 준상의 몸은 한 줄기 빛과 함께 요정 여왕의 침실에서 사라졌다. 그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곳은 황량하기 이를 데 없는 사막 한 복판이었다. “...” 사막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모래 사막이 떠오르지만, 이곳의 사막은 암석 사막에 가까웠다. 자갈과 바위들이 불규칙하고 광범위하게 드러난 위에 모래가 살짝 뿌려진 듯한 그런 느낌. 첫눈에도 지면 위에 날카로운 바위가 불규칙하게 솟아 있는 모습이 자동차는커녕 사람이 지나다니기조차 힘들어 보일 정도다. 준상은 일단 사자의 가면을 꺼내 얼굴을 보호했다. 가만히 있어도 강한 바람에 모래가 날려와 눈을 뜨기가 곤란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얼굴을 가린 준상은 다시 산들바람을 불러 자신을 향해 몰아치는 모래 바람을 어느 정도 차단한 다음에야 비로소 퀘스트 정보를 확인했다. 부활한 망령에 의해 빙의된 악령의 사제를 처단하십시오. :악령의 문에서 나온 망령들이 그것을 주도한 악령의 사제와 그가 이끌던 언데드들에 빙의되었습니다. 이들은 음차원에서 전해진 순수한 어둠의 힘으로 강화되어 매우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들이 사막의 잊혀진 신전에서 빠져 나오기 전에 격멸해야만 합니다. [이 퀘스트는 여러 명의 인원이 동시에 참여합니다.] (Hidden) 빙의된 악령의 사제 크론바스를 처치하십시오. (협력) (Hidden) 사막의 잊혀진 재보를 회수하십시오. (협력) (Hidden) 마수 보드 리델을 처치하십시오 (협력) (Hidden) 되살아난 처녀들을 처치하십시오. (0/7) (협력) (Hidden) 망령의 기사를 처치하십시오. (0/7) (협력) (Hidden) 강화된 해골 병사를 처치하십시오 (28/132) (협력) “이건...” 단독인 줄 알았건만 퀘스트 정보를 확인하니 협력 퀘스트로 나타나 있었다. 하긴 내용을 보니 그럴 만도 하다. 적의 전력이 소모되기는커녕, 악령의 문이 열리면서 한층 강화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름만 보스에 가까웠던 악령의 사제조차 망령에 빙의되어 그 힘이 강화되어 있는 상태. 여기에 마수 보드리델과 망령의 기사 일곱에 어둠의 힘에 의해 강화된 해골 병사가 백기가 넘으니, 어떻게 보면 이전에 에픽 퀘스트에서 상대했던 어둠의 군세와도 비슷한 규모의 전력인 셈이다. 해골 병사의 수가 조금 줄어 있었지만, 그 정도야 이전에 퀘스트를 진행했던 자들의 흔적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그게 아니라면,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 또 다른 퀘스트 참가자가 해놓은 결과물일 수도 있다. 준상은 잠시 모습을 숨긴 채 주위를 둘러 봤지만, 딱히 인기척이 느껴지지는 않고 있었다. 협력 퀘스트인데 자신만 덜렁 보내졌을 리는 없는 일. 그렇다면 다른 귀환자들은 이미 신전으로 진입하여 전투중일 가능성이 높다. 본래대로라면 함께 보내져야만 하지만, 대기 시간으로 인해 시차가 발생한 것은 아닐까 하는 정도가 지금 준상이 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추측이었다. 준상은 미니맵을 살핀 다음 표적이 있는 방향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바닥에 솟아나 있는 뾰족한 바위들을 피해 조심스럽게 잠시 걸음을 옮기던 준상은 어렵지 않게 바위 틈에 숨겨진 잊혀진 신전의 출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신전의 출구는 종류를 알 수 없는 검은 색의 바위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양 옆에는 뱀을 의인화시킨 것으로 보이는 인물상 두 개가 신전을 수호하듯 자리 잡고 있었다. 입구로 다가가자 거칠게 몰아치던 모래 바람이 조금 약해지며 수그러든다. 준상은 산들바람의 보호를 받으면서 천천히 입구로 다가서다가 안쪽에서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깨달았다. “한 번 더 갑니다! 준비하세요!” “네!” “젠장... 이거 해골 병사 맞나요? 왜 이렇게 안 부서져?” 그리고 이어지는 짤막한 폭음과 총성. 폭음이나 총성은 그렇다 치더라도, 희미하게 들려오는 고함 소리에 준상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도 그럴 것이, 상당히 낯익은 목소리들이었기 때문이다. 준상은 어둠이 드리워진 신전의 통로를 위상전이로 빠르게 통과했다. 그렇게 굽이진 골목 몇 군데를 지나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좁은 통로에서 해골 병사와 대치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차라리 밖으로 끌어내서 싸우는 편이 낫겠어요!” “하지만... 젠장! 또 옵니다!” 목소리가 낯익은 것이 당연했다. 지금 이 통로에서 어두운 기운을 풀풀 풍기며 눈구멍에서 푸른 인광을 번뜩이는 해골 병사들을 상대로 전투를 벌이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서윤과 그의 길드원들이었기 때문이다. 준상은 자신도 모르게 혀를 찼다. 우연히 이런 상황이 만들어질 수는 없다. 뭐라해도 서윤의 길드원들조차 하나의 파티로 조직되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그들이 한 군데 모여 있고, 여기에 그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준상이 본래보다 훨씬 뒤늦게 퀘스트에 불려왔다. 이것을 어찌 우연으로 생각할 수 있겠는가. “쯧...” 준상은 혀를 찼다. 이것은 일종의 경고일 수도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대놓고 무시하기 힘든 자들만 이렇게 모아 놓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준상은 일단 모습을 숨긴 채 그들의 전투를 지켜 보았다. 강력한 마법 전력을 갖추고 있는 길드답게 좁은 지형을 잘 살려서 제법 효율적으로 전투에 임하고 있었다. 진세아가 만들어낸 불의 벽으로 적을 차단한 상태에서 그것을 뚫고 나온 적을 서유미를 비롯한 길드원들이 막아서고 있었으며 가장 후위에서 정다빈이 전격 마법과 바람의 정령으로 그들을 돕고 있었다. 이런 식이라면 시간은 걸리더라도 해골 병사 정도는 무난하게 처치할 수 있을 듯한 느낌. 하지만 열을 지어서 불의 벽으로 뛰어 드는 해골 병사들 때문에 통로가 막혀 있는 상황이라 이대로는 준상 역시 멀뚱히 구경만 해야할 판이다. 귀찮은 것은 질색이지만, 그렇다고 마냥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 게다가 임서윤의 길드는 준상을 대신해 여러 가지 자질구레하고 귀찮은 일들을 처리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 곳이다. 이제 와서 임서윤 정도의 배경과 능력을 지닌 자를 다시 찾기도 힘든 것이 사실이니, 결국 준상의 선택지는 단 하나 뿐이었다. “짜증나는군.” 준상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투명화를 풀고 모습을 드러낸 채 전투를 벌이고 있는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 맨 뒤에서 서서 정신없이 전격 마법을 쏘아대고 산들바람으로 해골 병사들을 밀어내고 있던 정다빈은 갑자기 옆에서 시커먼 망토를 뒤집어 쓰고 황금빛 사자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준상이 스윽 지나쳐 가자 기겁을 하고 놀랐다. “히익!” 준상이 만약 적이었다면 정다빈은 이렇게 놀랄 틈도 없이 단숨에 기습을 당해 죽음을 면치 못했을 터. 누구보다도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정다빈은 모골이 송연해지는 것을 느끼며 얼른 준상을 향해 지팡이를 들이밀었다. 하지만 준상은 정다빈이 그러거나 말거나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계속해서 앞으로 나갔다. “헉! 누, 누구?” 임서윤은 수류탄을 다시 써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다가 옆으로 누군가 스윽 지나가자 깜짝 놀라 그만 손에 들고 있던 수류탄을 놓칠 뻔했다. 준상은 그런 그를 향해 짤막하게 말했다. “시끄럽게 굴지마라. 나다.” “...” 대뜸 나라고 하면 어떻게 알겠는가. 더구나 지금의 준상은 사자 가면을 착용한 상태라서 목소리마저 평소와는 다르게 울리고 있었다. 결국 임서윤은 실눈을 있는 힘껏 부릅뜨고 난 뒤에야 이 사자 가면의 괴인이 준상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어, 어떻게?” 퀘스트를 시작할 때는 분명히 없었던 인물이 느닷없이 나타나다니. 설마 이 남자는 퀘스트에 난입하는 능력이라도 지니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준상은 서윤이 그런 착각을 하거나 말거나 조용히 전투를 지켜보며 다시 말했다. “물러나라. 이제부터는 내가 맡겠다.” “아, 알겠습니다.” 안 그래도 일반적인 해골병사보다 두 배는 더 튼튼한 몸을 지닌 강화된 해골 병사들로 인해 피로가 쌓이고 있던 참이라 서윤은 준상의 지시를 두말 없이 받아들였다. “천천히 물러나십시오! 어서!”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에요?” 전력을 다해 불의 벽을 유지하고 있던 진세아는 갑작스런 외침에 짜증을 부리며 고개를 돌리다가 황금빛 사자 가면을 쓴 준상과 눈이 마주치지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리고 임서윤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얼른 다른 사람들이 물러날 수 있도록 불의 벽을 있는 힘껏 강화하다가 얼른 뒤로 빠졌다. 서유미는 가장 선두에서 해골 병사들을 쓰러뜨리다가 자신의 옆으로 검은 망토를 뒤집어 쓴 누군가가 스윽 스쳐지나가자 화들짝 놀랐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들을 그토록 애먹이고 있던 해골 병사를 단숨에 주먹질 만으로 박살내는 모습에 얼이 빠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준상은 앞으로 나서기가 무섭게 무려 열에 달하는 정령들을 일제히 소환하더니, 그들과 함께 빠른 속도로 해골 병사들을 부숴버리기 시작한 것이다. “뭐, 뭐야... 저거?” “하나, 둘... 도대체 몇 개야?” “세상에...” 하지만 놀라기는 아직 일렀다. 일단 공간이 확보되자, 준상은 이어서 네 마리 늑대를 연이어 소환한 것이다. 커다란 늑대 네 마리가 모습을 드러내자, 순간 좁은 통로가 꽉 차버린 듯한 착각마저 느껴졌다. “쫑이?” 그 모습을 보고 서유미가 얼빠진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자 적을 향해 이를 드러내고 있던 크림슨 울프는 어쩐지 등골이 서늘해지는 느낌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늑대들의 등장은 시작에 불과했다. 커다란 늑대들이 통로 안에 자리를 잡자 그 머리 위에서 다시 두 개의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아름다운 작은 용 한 마리와 무지개빛 머리카락을 나부끼는 요정 여왕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어라? 싸우고 있네?” 전대 요정 여왕 리체스는 소환이 실행되자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준상이 정령과 늑대들을 불러 싸우고 있는 모습을 보자 곧바로 마법을 발동해 그를 돕기 시작했다. “헉!” 뒤에서 이 터무니 없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임서윤과 그의 길드원들은 갑자기 귀여운 요정 하나가 모습을 드러내는가 싶더니 그 주위에 수십여개는 되어 보이는 작은 마법진이 만들어지자 자신도 모르게 헛숨을 들이키고 말았다. “꺄하하핫! 드디어 발동! 쏟아져라, 찬란한 별빛이여!” 그녀의 말과 함께 수십여개의 작은 마법진에서 마치 기관포처럼 빛의 화살이 발사되었다. 이 화살들은 그 하나 하나가 신성의 속성을 지니고 있어서 언데드나 음차원에 상극일 뿐만 아니라, 무려 유도 기능을 가지고 있어서 이렇게 터무니 없는 수를 쏟아 부어도 마법을 시전하는 당사자가 딴청을 피우지 않는 이상 아군에게 피해를 입히지도 않는다. 아니, 사실 딴청을 피워도 별로 상관은 없다. 이 빛의 화살은 언데드나 음차원에 속한 존재가 아닌 보통의 생물이 맞을 경우 오히려 미약한 회복이나 축복 효과가 부여되는 성질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대(對) 언데드 특화 공격마법인 셈이다. 수십 개에 달하는 빛의 화살이 쏟아지자 해골 병사들은 따뜻한 햇살에 녹아내리는 만년설처럼 서서히 부서져 나가다가, 준상이 휘두르는 주먹과 발길질에 그대로 부서져 가루가 되어 버렸다. “...” 임서윤과 그의 길드원들은 그대로 넋이 나갔다. 그들이 도착하고 나서 십여분 이상이나 힘겹게 대치하며 쓰러뜨린 해골 병사의 수보다 지금 준상의 손에 박살 나버린 해골 병사의 수가 더 많으니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렇게 넋이 빠져 있는 그들 앞에 다시 한 줄기 빛이 뿜어지는가 싶더니, 온천에서 방금 나온 탓에 촉촉한 피부를 발그레한 빛으로 물들이고 있는 아름다운 갈색 머리 소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헤네스를 소환한 준상은 뒤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외쳤다. “치료해 줘라!” 소환이 되고 나서 잠시 상황 파악이 안 되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치열한 전투를 바라보던 헤네스는 그제서야 자신의 등 뒤에서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익숙한 외모의 사람들을 보고는 밝게 미소를 지었다. “다치신 분 계세요? 치료해 드릴테니 앞으로 나오세요.” “...” 그 말에 쭈뼛거리며 손에 검을 든 소년이 앞으로 나섰다. 그의 이름은 이한서. 길드에 가입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이런 높은 난이도의 퀘스트에 동원된 탓에 정신이 없던 그는 자신의 또래로 보이는 이국적인 외모의 아름다운 갈색 머리 소녀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아무래도 경험이 부족한 탓에 자잘한 상처를 입고 있던 그는 감히 헤네스와 눈을 마주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내외를 하고 있었다. 헤네스는 그를 바라보며 밝게 미소를 짓더니 허리춤에서 채찍 두 개를 꺼내 들었다. 이한서는 갑자기 그녀가 척 보기에도 뭔가 끈적거리는 느낌의 채찍을 꺼내 양손에 하나씩 쥐자 내외하던 것도 잊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그게 무슨...” 헤네스는 자신이 생각해도 좀 민망했는지 살짝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괜찮아요. 이게 이렇게 보여도 효과는 끝내주거든요.” “...” 그러니까, 왜 하필 채찍인건데? 목구멍까지 튀어나온 그 말을 채 입 밖으로 내기도 전에, 이한서는 헤네스가 휘두르는 채찍에 두들겨 맞아야 했다. “이, 이게 무슨?” 당황스럽다. 이한서는 효과가 끝내준다는 영문 모를 헤네스의 말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채찍에 맞을 때마다 욱신거리던 상처들이 거짓말처럼 아물어 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빛이 있으면 그에 어울리는 어둠이 있는 법. 지금 이 순간 이한서는 뭔가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듯한 기분을 느끼는 것을 넘어서, 이제껏 알지 못했던 어떤 새로운 영역에 발을 딛고 있었다. 헤네스는 자신이 전도유망한 검도 소년에게 금단의 길을 열어 주었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한 채, 이마에 솟은 땀을 훔치며 상큼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때요. 끝내주죠?” “...” 00171 트롤러 ========================================================================= 헤네스가 이한서를 치료하는 동안 준상은 정령과 늑대를 이끌고 엘리멘탈 드래곤과 리체스의 화력 지원을 받아 순식간에 모든 해골 병사들을 박살내 버렸다. 전투가 끝나자 몽몽이를 소환해 아이템의 수거를 맡긴 준상은 뒤쪽에서 멍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임서윤과 그의 길드원들에게 다가갔다. “도착한지 얼마나 되었지?” “한 이십 분 정도 됐습니다.” “흠...” 준상은 다소 실망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십 분 동안 고작 삼십 마리도 안 되는 숫자 밖에 처리하지 못하다니. 생각보다 임서윤과 그의 길드원들이 지닌 실력이 너무 약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건 사실 조금 잘못 된 생각이었다. 이들이 약해 보이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 대상이 준상이기 때문이었다. 객관적으로 비교를 해봐도 길드원들의 전력 구성이나 평균 레벨을 따져 봐도 임서윤이 이끄는 길드는 소수 정예라는 말이 어울리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미로에 투입되었던 귀환자들의 전력과 비교해봐도 명백한 수준이지만, 사실 명확한 레벨이나 능력치를 확인할 수 없는 상태에선 그들이나 지금 눈앞에서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길드원들이나 준상에게는 그저 녹색인 건 매한가지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임서윤은 가면 덕분에 준상의 표정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그의 태도만으로도 탐탁지 않아 하는 기색을 여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로서는 자존심이 상할 틈도 없었다. 혼자인 이상, 그것도 근접 계열의 특기를 가진 이상 마법 전력이 우세한 자신의 길드라면 어느 정도 감당이 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지금 보니 그런 생각조차 터무니 없는 자만이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정령이 열. 거기에 근접 전투를 보조할 늑대가 네 마리. 그리고 원거리 화력 지원을 담당하는 작은 몸집의 드래곤과 요정. 게다가 기괴하기는 하지만 막강한 치유 능력을 가진 갈색 머리 소녀까지. 지금의 준상은 사실상 일인 군단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수준에 도달해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방금 전의 전투만 보더라도, 자신들이 쩔쩔 매고 있던 강화된 해골 병사들을 그는 순식간에 박살내 버리지 않았던가. 임서윤이 그런 생각을 떠올리고 있는 동안, 준상은 가만히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번 퀘스트는 모두 여섯 개의 히든 퀘스트가 할당되어 있다. 이것은 모두 단독이 아닌 협력 퀘스트. 퀘스트 정보를 확인한 준상은 기왕 이렇게 된 마당이니 파티를 맺어서 약간의 도움을 주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을 떠올렸다.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이들을 앞세워서 귀찮은 일을 맡기려 하는 이상, 너무 실력이 떨어지면 정부나 다른 국가의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운 행동을 보장 받기가 힘들다. 물론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준상이 직접 나서야 할 사안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임서윤과 그의 길드원 선에서 어느 정도는 해결하고 정말 곤란한 문제에만 나서는 정도라면 몰라도,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준상의 손에 일임된다면 귀찮은 일을 대신 맡기겠다는 처음의 의도를 완전히 뒤집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혼자서 독식할 퀘스트를 이들과 함께 나누게 되면 랭크가 조금 떨어질 우려가 있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렇다 치더라도 준상이 획득할 보상 상자의 개수에는 차이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번 한 번만 양보해서 이들에게 각기 여섯 개씩의 보상 상자를 추가로 더 안겨주는 편이 훨씬 큰 이득이 아닐까. 상자 여섯 개라면 못해도 카드가 서너장 이상은 더 나올테니, 운이 좋으면 단숨에 새로운 콤보를 완성할 수도 있다. 단순히 카드만 사용하는 것보다 콤보를 발동하는 것이 몇 배나 월등한 전투력을 발휘하는 것을 감안하고, 이런 식으로 단숨에 전력을 증강할 수 있다는 점을 알게 되면 퀘스트에 임하는 자세부터가 달라지리란 점까지 감안하면, 이번 퀘스트는 이들의 전력 증강에 획기적인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이런 생각을 떠올린 준상은 자신을 경외감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임서윤과 그의 길드원들에게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파티를 걸어라.” “네?” 임서윤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파티라니. 지금까지 길드는커녕 다른 누군가와 파티하는 것조차 꺼려왔던 것이 바로 이 준상이라는 남자였기 때문이다. “이번 한번만 도와주도록 하겠다. 그러니 파티를 걸어라.” “아, 알겠습니다.” 정다빈이나 최근에 새로 길드에 가입한 세 사람은 별 반응이 없었지만, 그를 어느 정도 접해본 임서윤이나 진세아, 그리고 서유미는 다소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를 지켜 보는 사람들 가운데 오직 한 명, 헤네스 만이 준상의 그런 모습을 보며 잔잔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임서윤의 길드원들과 파티가 맺어지자 준상은 다시 말했다. “따라와라.” “네.” 준상이 몸을 돌려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헤네스가 얼른 그의 옆에 다가섰고, 리체스 역시 지정석이라는 듯이 그의 한쪽 어깨에 자리를 잡았다. “음... 저 사람들 누구야?” 뒤쪽에서 따라오는 임서윤과 그의 길드원들을 보고 리체스가 작은 목소리로 헤네스에게 물었다. 그러자 헤네스는 살짝 웃으며 역시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준상씨 친구 분들이에요.” 친구는 얼어 죽을. 그저 주고받는 거래 상대일 뿐이라고 준상은 생각했지만, 굳이 그런 말을 지금 이 순간 내뱉을 정도로 어리석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가 아무런 대꾸 없이 계속 발걸음을 옮기자, 리체스는 헤네스의 말을 진실로 받아들였다. “헤에... 친구라...” 행동거지로 봐서는 친구는커녕 머슴이나 대충 그런 정도가 아닐까 싶었던 터라, 리체스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긴 그녀도 남 말할 상황이 아니긴 하다. 친구가 없기는 그녀 역시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물론 준상과 리체스는 경우가 다르기는 하다. 준상이 스스로 다른 사람들과 거리를 두는 쪽이라면, 리체스는 그 지고한 신분 때문에 다른 자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처지였기 때문이다. 셀라 같은 충성스런 보좌관들이 있기는 했지만, 엄밀히 말해서 그들은 부하일 뿐 친구라 불리울 만한 사이는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좀 막 대하는 경향이 있는 준상에게 호감을 느낀 것인지도 모른다. 리체스는 요정이다. 그리고 요정들은 기본적으로 호기심이 왕성한 장난꾸러기들이다.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경계심을 가지고 있던 그녀는 뒤따라 오는 사람들이 이미 헤네스와도 어느 정도 안면이 있는 준상의 친구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이내 호기심을 느끼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그들 가운데 유일하게 정령을 다루는 정다빈이었다. 리체스는 준상의 어깨 위에서 날아올라 정다빈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이름이 뭐야?” “에? 저요?” 정다빈은 무지개빛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작고 아름다운 요정이 자신에게 다가와 말을 걸자 화들짝 놀라며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주위를 돌아보자, 다른 사람들은 오히려 부럽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정다빈... 인데요?” “이상한 이름이네.” “그런... 가요?” “난 리체스. 보시다시피 요정이야.” “아, 예...” 다빈은 이 작은 요정을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다. 뭐라해도 저 무시무시한 준상이 데리고 다니는 존재인데다, 방금 전에 그녀가 선보인 마법만 보더라도 그녀보다 월등히 강한 존재임을 알 수 있었던 탓이다. 정다빈이 쩔쩔 매며 리체스의 관심을 받는 동안, 그 옆에서는 소년 하나가 준상 옆에 찰싹 달라붙어 걷고 있는 헤네스를 보며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었다. 동료들은 그의 모습을 보고 단숨에 이 전도 유망한 검도 소년이 이계의 아름다운 갈색 머리 소녀에게 한눈에 반해 버린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문제는 저 소녀가 준상과 한 침대를 같이 쓰는 사이라는 점. 사실 한 침대를 쓰는 사이라고는 해도 이전까지는 다소 눈에 보이지 않는 벽 같은 것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지곤 했지만, 눈치 빠른 몇몇은 한동안 못 본 사이에 이 두 사람에게 극적인 어떤 진전이 있었음을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었다. 이한서는 그런 추론을 가능하게 할 만한 경험과 정보를 지니고 있지는 않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보더라도 저 아름다운 갈색머리 소녀가 준상에게 강한 호감과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정도는 어렵지 않게 알아 볼 수 있었다. 때문에 이 순진한 검도 소년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는 것이다. “잔잔한 바다에서는 좋은 뱃사공이 만들어지지 않는 법.” 이한서와 함께 이 길드에 들어온, 굳이 따지자면 동기라 할 수 있는 이종 격투기 선수 손가은이 그렇게 혼잣말을 하자 그녀의 옆에서 함께 걷던 윤성렬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네?” 하지만 손가은은 이 눈치 없는 덩치 큰 남자의 물음을 무시하며 앞서가는 준상의 넓은 등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어쨌거나 그렇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일행은 잊혀진 신전 안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다른 사람들은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기는 준상의 모습에 다소 불안감마저 느끼고 있었지만, 미니맵과 함께 2레벨의 초감각마저 갖추고 있는 이상 그의 감각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함정이나 적은 현재로서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정다빈에게 흥미를 잃었는지 어느새인가 준상의 어깨 위로 돌아와 있던 리체스는 다소 지루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어둠 저편에서 전해지는 음울한 기운을 느끼고는 눈빛을 반짝거렸다. “주인님.” “알고 있다.” 리체스와 준상의 대화를 들은 헤네스는 얼른 준상의 뒤로 움직였고, 그런 그녀의 주위를 늑대들이 에워쌌다. 한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바람에 조금 긴장이 풀어져 있던 임서윤과 그의 길드원들은 헤네스의 그같은 움직임을 보고 나서야 화들짝 정신을 차리며 주위를 경계했다. “리체스.” “네.” “저들을 보호해라.” “맡겨주세요.” 리체스가 어깨 위에서 날아올라 헤네스 옆으로 이동하자, 준상은 인벤토리에서 불길한 기운을 뿜어내는 검을 꺼내 들었다. 그 검의 이름은 어나이얼레이터. 베면 벨수록 강해지는, 절멸자라는 이름의 또다른 마물이었다. 준상이 검을 빼들자, 어둠 속에서 절그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한 무리의 적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검은 색의 투구 안쪽에서 뿜어져 나오는 새파란 인광이었으며, 거리가 가까워지자 아지랑이 같은 검은 기운을 뿜어내는 전신 갑옷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모습만으로도 준상은 이들의 정체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히든 퀘스트에 언급된 망령의 기사가 바로 이들이었던 것이다. 망령의 기사 일곱은 어느 정도 거리까지 다가오더니 그대로 일렬로 나란히 선 채 발걸음을 멈추었다. “...” 무슨 수작인가 싶어 가만히 바라보자, 그들 가운데 하나가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 한쪽 손에는 카이트 실드를, 또 한 쪽에는 다소 날이 넓은 검을 손에 쥔 망령의 기사의 모습을 보자 준상은 이들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재미있군.” 한 명씩 상대하겠다 이건가. 하지만 이건 준상에게도 그리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어나이얼레이터는 뛰어난 무기이긴 해도 아직 손에 익지 않은 상태. 때문에 아직 난전에서는 사용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일대일의 승부라면 어떨까. 마검에 대한 숙련도를 높이기 위해서도 한번쯤 해볼 만한 대결이 아닐 수 없다. “조심하세요.” 헤네스의 걱정어린 말에 고개를 끄덕인 준상은 마검을 들고 천천히 망령의 기사에게 다가섰다. 00172 트롤러 ========================================================================= 준상이 검을 들고 앞으로 나서자 첫 번째 망령의 기사는 방패로 왼쪽 가슴을 가리고 검을 들어 바로 겨누었다. 흔히 기수식이라고 불리는 준비 동작보다는 상대에게 예를 갖추는 듯한 행동. 하지만 준상은 그런 망령의 기사를 본 척도 않은 채 가볍게 발을 벌리고 양손으로 검을 든 채 자세를 낮추며 기사를 향해 접근했다. 그렇게 어느 정도 거리까지 다가서자 비로소 망령의 기사가 방패를 앞세운 채 준상을 향해 달려들었다. 전신을 갑옷으로 무장한 것도 모자라 방패를 앞세운 채 돌격해 들어오는 기사의 모습에 준상은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손에 들고 있는 것이 랑다잘의 분노라면 그러거나 말거나 철구를 던져 압살했겠지만, 그의 손에 쥐어진 것은 아직 손에 익지 않은 검 한 자루. 그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 아직 실전에서 확인되지 않은 이상, 이전과 같은 방식의 전투를 치르는 것은 그리 현명하지 못한 행동이다. 준상은 똑바로 상대를 바라보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아!” “저런...” 좌우로 피하는 것이라면 몰라도 상대의 이동 방향과 같은 선상으로 회피하는 것은 그리 현명치 못한 행동으로 보였기 때문에, 지켜보던 이들은 자신도 모르게 안타까움의 탄성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 탄성의 의미가 안타까움에서 경악으로 바뀌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한 발자국 뒤로 내딛는가 싶더니, 어느 틈엔가 준상이 기사의 좌측에서 거짓말처럼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오!” 위상전이를 이용해 이동한 준상은 양손으로 검을 잡은 상태로 기사의 목을 향해 사선으로 검을 내리 그었다. 하지만 망령의 기사 역시 그리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돌진하던 자세에서 그대로 앞으로 뛰어들 듯 몸을 날리며 방패로 몸을 가렸던 것이다. 카가가각! 어나이얼레이터가 방패를 후려치자 그 일격에 담긴 준상의 강력한 힘이 마치 갈퀴처럼 녹슨 방패 표면을 긁어내며 불꽃을 튀긴다. “칫...” 회심의 일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준상은 혀를 차며 자세가 무너진 기사를 향해 다시금 검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랑다잘의 분노나 블러드 서커였다면, 설령 상대가 방어를 하더라도 단숨에 방패째로 갈라버리거나 박살내 버렸을 테지만, 아직 숨겨진 힘이 개방되지 않은 어나이얼레이터로는 방패를 갈라버리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이것은 아직 검에 자신의 힘을 온전하게 싣지 못하는 준상의 미숙함이 낳은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실제로 준상은 방패와 검이 맞닿은 순간 그 반발력으로 인해 하마터면 검을 놓칠 뻔 했다. 악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다. 정확한 타점을 잡지 못한 탓에 자신의 힘이 그대로 되돌아 왔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미숙함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촤창! 기사가 자세를 완전히 바로 잡기 전에 휘둘러진 준상의 검은 다시금 방패에 가로막혔다. 하지만 이번에는 들리는 소리부터가 이전과 달랐다. 타점에 정확하게 힘이 전달되면서 그 충격이 온전히 기사의 방패에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방패가 준상의 검격에 밀려나자 준상은 그 빈틈을 노려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이 회심의 일격은 기사가 휘두른 검에 의해 다시 막히고 말았다. “흠...” 준상이 기사와 검격을 나누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이한서는 뭔가 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다른 사람들은 그런가보다 할 뿐이었지만, 검술을 제대로 기초부터 차근차근 배운 그의 눈에는 뭔가 상당히 어색하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기본적인 보법부터 시작해서 검을 잡고 휘두르는 동작에 이르기까지, 준상의 검격은 아무리 봐도 정통의 검술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확실히 힘은 대단해 보였지만, 검술로만 보자면 아직 초보자라는 느낌. 그래서 이한서는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중얼거렸다. “거만할 정도로 실력이 대단해 보이지는 않는데요.” 물론 그도 수많은 정령들이라든가 늑대라든가 단숨에 해골 병사를 때려부수는 준상의 완력까지 무시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헤네스로 인한 질투와 소년다운 경쟁심이 맞물리는 바람에 충동적으로 그런 말을 입에 담았을 뿐이다. 헤네스는 준상의 능력이 그런 식으로 폄하당하자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녀가 미처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리체스가 빙글빙글 웃으며 이한서에게 말했다. “이봐, 꼬맹아.” 이한서는 얼굴을 찌푸렸다. 확실히 길드원들 가운데 그의 키가 가장 작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아직 성장기라고는 해도 여자 길드원들보다 키가 작은 탓에 조금은 콤플렉스마저 느끼고 있었는데 조막만한 요정에게서 꼬맹이라는 말을 들으니 기분이 좋을 리 없다. 하지만 리체스는 그러거나 말거나 이한서를 향해 다시 말했다. “주인님이 저 검을 손에 넣은게 언제인줄 알아?” “모르겠습니다만.” “아직 하루도 안 지났어.” “...” 이한서는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하루도 안 지났다니? 하지만 리체스의 말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 이전까지는 검을 잡아본 적도 없었지. 저건 그냥 연습 같은 거라고.” “그, 그런...” 이한서는 눈을 부릅 뜰 수 밖에 없었다. 좀 어설픈 느낌이긴 하지만, 저게 검을 처음 잡은 자의 실력이라니. 아니, 이미 그가 느꼈던 어설픈 느낌마저 준상의 검에는 남아 있지 않았다. 마검의 놀라운 능력은 어느 틈엔가 준상에게 가장 걸맞은 형태의 검술을 전수하고 있었던 것이다. 카캉! 아까 들려왔던 소리가 그저 금속이 가볍게 부딪히는 듯한 소리였다면, 지금은 제대로 힘이 실린 검격이 오가고 있었다. 단지 소리만 그런 것이 아니다. 준상의 검이 휘둘러질 때마다 녹슨 기사의 방패는 애처로울 정도로 찌그러지며 그 형체를 잃어 가고 있었다. 방패 뿐만이 아니다. 기사의 검은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처럼 여기 저기 이빨이 빠지고 금이 가있는 상태였고, 그 갑옷도 넝마처럼 누더기로 변해 가고 있었다. 그 모든 변화가, 요정과 대화를 나누느라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 이럴 수가...” 이한서는 아주 잠깐 동안 준상에게 품었던 우월감이 형편없이 구겨진 채 바닥에 처박히는 것을 느꼈다. 정말 같은 인간이 맞기는 한 걸까. 어떻게 인간이 저럴 수가 있단 말인가. “흐흥!” 리체스는 그것보라는 듯이 옆구리에 손을 척 얹은 채 이한서를 향해 콧방귀를 뀌고는 헤네스의 곁으로 날아와 망령의 기사를 몰아붙이는 준상의 모습을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콰득! 결국 어나이얼레이터의 소름끼치는 마력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준상의 괴력을 버티지 못한 기사의 방패는 소름끼치는 파열음과 함께 박살이 나고 말았다. 방패에 의지해 간신히 준상의 검을 막아내고 있던 기사는 방패와 더불어 자신의 왼팔이 잘려나가는 것을 보며 급히 뒤로 물러섰지만, 아차 하는 사이에 다가선 준상의 검격이 그런 기사에게 떨어져 내렸다. 콰가가가각! 어나이얼레이터는 어김없이 기사의 왼쪽 쇄골에 떨어져 내렸고, 그대로 기사의 몸통을 가르며 오른쪽 옆구리로 빠져 나왔다. 그 순간 기사는 그대로 움직임을 멈추었지만 준상은 가차 없이 그 몸통을 발로 차 날려버렸고, 두쪽으로 잘려진 기사의 몸통은 그 힘에 의해 한데 엉켜 바닥을 나뒹굴고 말았다. “후우...” 준상은 가볍게 심호흡을 하며 자신의 손에 쥐어진 마검을 바라보았다. 휘두르면 휘두를수록, 적을 베면 벨수록 강해진다는 것이 이런 의미였던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알 수 없는 어떤 힘이 팔을 타고 전해져 와 그의 몸에 무언가를 각인시키는 듯한 느낌이 전해진다. 그것은 일종의 기억이었다. 두뇌 속에 남는 그런 일반적인 기억이 아니다. 어나이얼레이터라는 이름의 검을 잡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 노리는 위치를 효과적으로 타격하는 가장 효과적인 동선. 어떤 근육을 어떻게 움직여야 하고, 또한 어떤 관절이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 지에 대한, 이른바 체득이라 불리는 형태로 남겨지는 오의들. 그 모든 것이 검을 잡은 그의 몸에 하나 하나 각인되고 있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라운 일이었지만, 준상은 또한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지금 그의 몸에 각인된 기억들은 아직 검을 잡은지 얼마 되지 않은 자를 위한 그야말로 기초적인 것들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하지만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방금 전 기사의 몸을 갈라버릴 때의 그 생생한 감촉이 검을 타고 전달되는 순간, 준상은 극상의 희열이라고 불려도 좋을 법한 어떤 강렬한 쾌감을 느꼈다. 좀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여자를 품고 그 몸 안에 자신의 씨앗을 퍼부을 때와 비슷하다고까지 느꼈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더 자극적이었다. 한순간 몰아친 뒤 허탈감이 찾아오는 정사의 쾌감과는 달리, 이것은 쥐고 있는 손끝으로부터 타고 올라와 척수를 긴장시키고 두뇌를 타오르게 만들면서도 그 여운이 너무나 오랫동안 남겨진다. 실제로, 준상은 아직까지도 그 쾌감의 여운에 휩싸여 가볍게 몸을 떨고 있었다. “...” 준상은 어나이얼레이터가 그에게 이렇게 속삭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베어라. 눈에 띄는 모든 것을 베어라. 그리하면, 너는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했던 극상의 쾌락을 얻게 될 것이다.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속삭이는 듯한 그 유혹에 준상이 얼굴을 찌푸리는 순간, 갑자기 뾰족한 비명과도 같은 외침이 그의 귓가로 전해진다. “준상씨!” 준상은 헤네스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어느 틈엔가 달려 나온 거대한 체구를 지닌 망령의 기사가 그를 향해 세 개의 철추가 달린 플레일을 휘두르고 있었다. 준상은 감히 맞받을 생각을 하지 못하고 급히 위상전이를 펼쳐 그 공격을 피했다. 그러자 기사가 휘두른 철추가 어떤 투명한 막에 튕겨져 나간다. “휴우... 깜짝 놀랬네.” 그것은 바로 리체스의 작품이었다. 손에 쥔 검을 바라보며 얼이 빠져 있는 준상을 위해 그녀가 급히 만들어낸 방어막이었던 것이다. “...” 준상은 정신을 차리기가 무섭게 자신에게 기습을 가한 거대한 체구의 기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콰앙! 기사가 들고 있던 두꺼운 타워 실드와 어나이얼레이터가 마주치자 마치 폭음과도 같은 거대한 충격음이 울려 퍼졌다. 소리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거대한 체구의 기사는 준상이 휘두른 검의 위력에 밀려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나고 있었던 것이다. “허어...” 저 무지막지한 힘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저으며 김빠진 소리를 내고 있는 윤성렬의 옆에서 손가은은 다시 영문 모를 소리를 중얼거렸다. “유혹을 제거하는 단 하나의 방법은 그 유혹에 따르는 것이다. 거부하려 한다면 그것에 대한 갈망으로 영혼이 병 들게 된다.” 그러자 윤성렬이 바로 아는 체를 했다. “아, 그거 압니다. 셰익스피어의 말이었죠?” 하지만 손가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오스카 와일드의 말입니다.” “...” 가은의 말을 들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준상은 지금 이 순간 마검으로부터 전해지는 유혹을 뿌리치지 않고 그것에 순응하며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유혹이 두려웠다면 처음부터 이 마검을 사용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크으으으... 무지막지한 준상의 검격에 정신없이 뒤로 밀리던 거대한 체구의 기사의 입에서 신음과도 같은 음성이 새어 나왔다. 그의 타워 실드는 충분히 두껍고 견고했지만, 준상이 휘두르는 검격을 막아낼 때마다 방패를 든 손으로 충격이 누적되는 것은 막을 방법이 없었다. 기사는 반쯤 감각이 사라진 왼팔을 움직여 필사적으로 준상의 검격을 막으며 빈틈을 노리고 플레일을 휘둘렀지만, 자세가 무너진 상태에서 팔 힘만으로 휘두르는 공격을 순순히 맞아줄 만큼 준상은 느리지 않았다. 결국 한쪽 팔이 완전히 마비되자 타워 실드는 더 이상 치켜올려지지 못한 채 그대로 바닥과 맞닿아 있었고, 그렇게 드러난 공간을 어나이얼레이터는 여지없이 반으로 갈라버렸다. 툭. 단숨에 잘려나간 머리가 바닥에 떨어지자, 기사의 거대한 체구는 스르르 뒤로 넘어가다가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바닥에 나뒹굴었다. “후우...” 준상은 입에서 한 줄기 짙은 연기 같은 것을 뿜어내는가 싶더니, 이내 붉은 안광을 뿜어내며 남아있는 다른 기사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어느 틈엔가 마검 어나이얼레이터는 평범한 보통의 검에서 한 단계 진화하여 그의 눈빛과 비슷한 붉은 기운을 아지랑이처럼 뿜어내고 있었다. 준상이 앞으로 달려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기사 가운데 하나가 곁가지가 달린 십자 모양의 창을 휘두르며 앞으로 나섰다. 창날 옆에 달린 곁가지가 마치 추수를 하는 농부의 낫질처럼 자신의 목을 향해 날아들었지만, 준상은 그것을 피하는 대신 손에 든 검을 휘둘러 그 창날을 쳐올렸다. 캉! 그러자 금속과 금속이 마주치는 강렬한 소음과 함께 기사의 창이 준상의 힘을 견디지 못해 위로 튕겨 올라갔고, 어느 틈엔가 기사의 품안으로 뛰어든 준상의 팔꿈치가 기사의 갑옷 한 복판에 틀어박혔다. 콰드득! 기사는 갑옷이 함몰되는 강렬한 충격을 견디지 못해 뒤로 나뒹굴었다. 그리고 그런 기사의 몸 위로 붉은 기운에 휩싸인 검을 치켜 올린 준상이 떨어져 내렸다. 기사는 놓치지 않고 있던 창을 마치 역기처럼 들어올리며 그 공격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허공에 붉은 선이 한번 그어지는 순간, 마검 어나이얼레이터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창은 물론이거니와 그 아래 쓰러져 있던 기사, 그리고 그 기사가 누워있던 바닥까지 단숨에 두 조각을 내버리고 말았다. “후우우우...” 준상은 어느 새인가 입에서만이 아니라 온 몸에서 희미한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이것은 그의 몸이 과부하에 준하는 상태에 돌입했다는 뜻이며, 또한 그가 지닌 능력이 한 단계가 더 높은 경지로 나아가고 있다는 증명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준상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남은 네 명의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받은 망령의 기사들은 서로를 돌아보더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준상을 향해 달려들었다. 00173 트롤러 ========================================================================= 가장 먼저 준상을 맞이한 것은 서로 길이가 다른 두 자루의 검을 사용하는 기사였다. 길이가 서로 다른, 그 중에서도 짧은 검과 긴 검을 병용하는 형식은 보편적으로 짧은 쪽이 방어, 긴 쪽이 공격을 맡는 경우가 많다. 이 기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는데, 특히 왼손에 들고 있는 단검은 너클 가드라는 형태의 두툼한 방어기제가 추가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하지만 기사는 감히 단검으로 준상의 검을 받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원래 이런 식의 단검은 비슷한 수준의 도검을 막거나 붙잡는 용도로 사용하는 것이지, 방금 전에 두 조각이 나서 쓰러진 십자창 같은 폴암도 단숨에 갈라버리는 무지막지한 검을 막아내기 위한 용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자 기사는 대번에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짧은 찌르기로 견제를 해보았지만, 이미 어나이얼레이터의 마성에 취한 준상은 그 정도의 견제 공격 따위는 그대로 무시한 채 무지막지한 기세로 검을 휘두를 뿐이다. 덕분에 몸 이곳 저곳에 생채기가 나긴 했지만, 그의 몸은 별도의 방어구를 착용할 필요가 없을 정도의 높은 물리 저항력과 방어력을 가지고 있을뿐더러, 어지간한 상처는 순식간에 아물어 버릴 정도의 재생력 또한 갖추고 있었다. 앞을 가로 막고 선 이도류의 기사가 순식간에 수세에 몰리자, 그를 돕기 위해 양손검을 손에 든 기사가 준상의 좌측에서 공격을 가했다. 육중한 파공성과 함께 거대한 양손검이 휘둘러지자, 어나이얼레이터의 마성에 취해있던 준상도 이것만큼은 무시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물러나거나 방어의 동작을 취한 것도 아니다. 곧바로 콤보 카드를 무투가로 변경하고는 카운터를 걸어 버린 것이다. 주먹이 아닌 검으로 카운터를 사용하는 것 자체가 처음이었지만, 수많은 전투로 단련된 감각과 마검에 의해 신체에 각인된 기억이 복합적으로 상승작용을 일으킨 덕분에 준상은 무리 없이 자신의 의도대로 기술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 기사는 준상의 몸이 허깨비처럼 핑그르르 도는가 싶더니 붉은 기운을 뿜어내는 검이 자신의 손가락을 훑고 지나가는 것을 그대로 지켜봐야만 했다. 철컹! 손가락이 후두둑 잘려 나가자 거대한 양손검은 그대로 바닥에 떨어지며 나뒹굴었고, 손가락과 무기를 동시에 잃은 기사는 망연자실해 하다가 뒤이어 휘둘러진 마검에 의해 목이 잘리고 말았다. -우오오오! 뭘 어떻게 해볼 틈도 없이 다시 동료 하나가 쓰러지자, 워해머를 든 기사가 괴성을 지르며 자신을 향해 드러난 준상의 등을 향해 공격을 가했다. 양손검을 든 기사의 목을 날리느라 전력을 다해 검을 휘두른 직후라 준상은 곧바로 이것을 피해낼 방법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 순간 준상의 몸이 갑자기 거짓말처럼 그대로 앞을 향해 쭈욱 뻗어 나가며 양손검을 든 기사 뒤에서 기회를 노리던 또 다른 기사의 품을 향해 뛰어 들었다. 한쪽에만 날이 붙은 폴액스를 손에 들고 있던 기사는 갑자기 준상이 자신의 품 안으로 뛰어 들자 당황하고 말았다. 기사는 엉겁결에 손에 들고 있던 폴액스를 끌어당겨 방어의 자세를 취하려 했지만, 미처 자세를 취하기도 전에 준상의 어깨가 기사의 가슴을 강하게 들이 받았다. 쾅! 사람의 어깨와 금속으로 만들어진 갑주가 충돌한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기 어려운 강렬한 타격음과 함께 기사는 그대로 튕겨 나가버렸다. 가슴을 보호하던 갑주가 우그러들 정도의 충격을 받자 기사는 잠시 정신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곧바로 준상이 날아들며 그대로 검을 내리찍자, 기사는 반항조차 하지 못한 채 마검 어나이얼레이터의 제물이 되며 움직임이 멈추고 말았다. 기사의 가슴을 꿰뚫은 마검 어나이얼레이터는 그대로 변이를 시작했다. 두쿵! 마치 심장이 강하게 맥동하는 듯한 파장이 퍼져 나옴과 동시에, 마검 어나이얼레이터는 기존에 가지고 있던 평범함 외형을 탈피해 그 두께와 길이가 약 1.2배 정도 증가했다. 변한 것은 외형만이 아니었다. 일반적인 보통의 검으로 밖에 보이지 않던 투박한 재질이 금방이라도 피가 뚝뚝 떨어질 것만 같은 검붉은 재질로 뒤바뀌어 버린 것이다. 준상은 기사의 몸에 검을 박아 넣은 채, 그러한 변화가 일어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러자 그 틈을 노린 남은 두 명의 기사가 동시에 준상을 향해 달려들었다. 바로 그때, 준상이 고개를 들어 그들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친 순간, 기사들은 잠시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준상의 두 눈에서 뿜어져 나온, 공포의 시선에 의해 자신도 모르게 경직되어 버린 탓이다. 그들이 멈칫 거린 것은 아주 짧은 순간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들이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준상의 손에 들린 검붉은 검이 그들의 몸을 훑으며 지나가고 있었다. 콰가가각! 준상은 굳어버린 그들의 몸을 눈깜짝할 사이에 수차례나 난도질해 버렸다. 검이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기사의 육체 일부가 잘려서 날아간다. 처음에는 팔, 그 다음에는 다리. 그렇게 몇 차례 검을 휘두르고 나자, 기사들은 사지가 잘린 몸뚱이만 남아 바닥을 나뒹구는 신세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준상은 무심한 표정으로 그렇게 바닥을 기고 있는 기사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머리를 투구째로 밟아 으깬 후 심장에 검을 박아 넣었다. “후우우우...” 준상은 일단 변이된 검의 모습을 바라보며 아이템 확인을 실행했다. 아이템정보 명칭 : 어나이얼레이터 레벨제한 : 없음 종류 : 무기 등급 : Unique 공격력 : 17-24 효과 : 베어버린 적의 수가 많아질수록 위력이 강해집니다. (현재 2단계) Seed : 5슬롯 설명 : 이 무기는 주인과 함께 성장합니다. 베어버린 적의 수가 많을수록, 빨아들인 영혼의 수가 많을수록 위력이 증가합니다. 단순히 검을 들고 휘두르는 연습만 해도 신체능력이 빠르게 향상되는 효과가 있으나, 자칫하면 검의 마력에 홀려 살육의 쾌락에 빠지는 경우가 있으니 충분히 주의하셔야 합니다. 이제 겨우 2단계. 순식간에 몇 단계는 뛰어 오른 줄 알았더니, 겨우 한 단계 밖에 오르지 않았다는 사실에 준상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하긴 저주받은 왕 엠후라가 사용했을 때의 모습과 비교해 보면 아직 한참은 더 변화가 일어나야 하지 않을까 싶긴 하다.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와중에도 마검은 계속해서 준상을 유혹하고 있었다. 아직 살아 있는 자들이 저렇게 많지 않느냐고. 저들의 살을 베고 뼈를 자르며 그 쾌감을 만끽하라고. 하지만 준상은 손에 쥐어진 채 끊임없이 그의 마음을 향해 속삭이는 마검을 바라보며 이렇게 대답했다. “닥쳐라.” 그렇게 말하고 검집에 검을 갈무리하자 어나이얼레이터는 마치 반항하듯이 부르르 떨기 시작한다. 하지만 준상은 그러거나 말거나 어나이얼레이터를 인벤토리에 던져 넣은 다음 몽몽이를 불러 아이템을 모으도록 지시했다. “괜찮으세요.” 어느새 다가와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을 건네는 헤네스의 몸을 끌어당겨 살짝 품에 안았다. 헤네스는 다른 사람의 시선이 의식되는지 당혹해 하는 표정이었지만, 이내 손을 뻗어 그의 몸을 포근하게 안아주었다. 차갑게 내치긴 했지만, 마검이 주었던 살육의 쾌감은 여전히 그의 몸 안을 휘저어 대고 있었다. 하지만 헤네스의 작고 여린 몸을 가슴에 안자, 마음 속에 들어차 있던 그 모든 부정적인 감각과 생각들은 마치 봄날의 햇살에 녹아내리는 만년설처럼 그의 가슴속에서 흘러내려 어둠 저편으로 사라져 갔다. “나도! 나도!”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본 리체스는 질 수 없다는 듯이 얼른 날아와 준상의 이마에 찰쌀 달라붙었다. “푸훗!” 그녀 나름대로의 애정 표현이겠지만, 이마 한 복판에 껌딱지 마냥 붙어서 온몸을 부비적거리고 있는 리체스의 모습에 헤네스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끙...” 준상은 손을 뻗어 리체스의 날개를 잠자리 잡듯이 나꿔채고는 그녀를 억지로 이마에서 떼어냈다. “히잉...” “...” 투정을 부리듯 콧소리를 내는 리체스를 준상은 어깨 위에 올려두고는 쭈뼛거리며 다가서는 임서윤과 그의 길드원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시간을 끌어서 미안하군.” 그러자 임서윤이 얼른 손을 저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알았다.” 준상은 그렇게 대답하고는 아이템 수집을 마친 몽몽이가 돌아오자 다시 전진을 시작했다. 미니맵을 확인하며 조금 더 전진하자 다시 몇 개의 퀘스트 표식이 뭉쳐서 다가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통로를 따라 좀 더 걷자, 그들은 피범벅이 된 채 헐벗은 모습으로 쓰러져 있는 한 무리의 여인들을 발견했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헤네스가 채찍을 꺼내며 다가가려 했지만, 준상은 손을 뻗어 그녀를 막았다. “움직이지 마라.” “네?” 헤네스는 의문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퀘스트 정보를 미리 확인한 준상은 이들이 되살아난 처녀들임을 알고 있었다. “으으으... 도와주세요...” 쓰러져 있던 처녀 중 하나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더니 준상에게 쓰러지듯 안겨 왔다. 하지만 준상은 그런 처녀의 가슴을 그대로 발로 걷어차 버렸다. “꺄악!” 처녀는 비명을 지르며 날아가 그대로 벽에 처박혔고, 지켜보던 사람들은 깜짝 놀란 눈으로 준상을 바라보았다. “이게 무슨...” 보다 못한 진세아가 앞으로 나섰지만, 준상은 다시금 손을 뻗어 그녀의 행동을 막으며 자신이 날려버린 처녀를 가리켰다. “봐라.” “...” 진세아는 얼굴을 찌푸리며 준상이 가리킨 처녀를 바라보다가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준상의 힘이 어디 보통 힘인가. 보통의 평범한 사람이라면 저렇게 날려진 순간 내장 파열을 일으켜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하지만 지금 준상이 가리킨 처녀는 아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준상은 그제서야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은 다른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아직도 저들이 상처 입은 보통 사람으로 보이나?” “...” 처녀들은 자신들의 정체가 드러났음을 깨달았는지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이내 흉성을 터뜨리며 준상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들은 곧바로 쏟아지는 정령들의 공격으로 인해 걸음을 멈추어야만 했다. 불과 물과 얼음과 번개가 쏟아지는 것을 바라보며 준상은 인벤토리에 넣어 두었던 어나이얼레이터를 다시 꺼내 들었다. 어나이얼레이터는 부르르 떨며 준상에게 불만을 표시했지만 검집에서 다시 뽑혀 나오자 그런 불만스러운 몸짓은 금새 수그러들었다. 준상은 정령들의 공격에 의해 갈팡질팡하는 처녀들에게 다가가 천천히 한 명씩 그 가슴에 검을 박아 넣었다. “크륵...” 최후의 순간이 되어서야 정신이 되돌아 온 것일까. 처녀들은 자신의 가슴에 검이 박히자 안타까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몇 번 손을 휘저어 보이다가 그대로 움직임을 멈추었다. 준상은 마지막 한 명의 처녀들까지 그렇게 처리를 한 뒤에야 다시 검을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임서윤과 그의 길드원들은 자신도 모르게 목을 쓰다듬었다. 생각해 보면 이런 던전 안에 일반인이 있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이전의 다른 악령의 문 퀘스트를 수행한 사람들이라면 제물로 잡혀온 처녀들이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으니 속아도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이들은 그런 사전 지식조차 없는 상태. 만약 준상이 먼저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그녀들을 돕겠다고 부축이라도 하다가 그대로 목덜미를 물어 뜯겼어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물론 임서윤과 그의 길드원들은 이런 자세한 사정까지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지만, 어찌 되었든 또 한 번 준상이 위기를 사전에 차단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싸움이야 그렇다 쳐도, 이렇게 단숨에 적의 함정을 알아차리는 안목까지 갖추고 있다니. 하지만 준상은 다른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자신을 보거나 말거나, 다시 앞장 서서 통로를 걷기 시작했다. 00174 트롤러 ========================================================================= 되살아난 일곱 명의 처녀들까지 처치했으니, 퀘스트 정보에 나타난 순서대로라면 다음에 나타날 것은 마수 보드 리델이었다. 지금까지 준상은 수많은 퀘스트를 해결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적들을 쓰러뜨렸다. 하지만 그 가운데 마수라는 이름으로 불리웠던 것은 천상의 다리 퀘스트 이후에 받은 단독 퀘스트에서 처치한 마수 크롤로바간이 유일하다. 마수 크롤로바간은 기계화부대로 편제된 중국군 귀환자들을 단숨에 무력화시키고, 에슈탈렌 중앙군의 선발대를 단숨에 무력화시킨 무서운 상대였다. 만약 이번에 나올 마수 역시 그 정도 힘을 가지고 있다면, 좁은 실내라는 특성상 큰 피해를 입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준상은 미니맵을 확인하다가 어느 정도 다음 목표가 가까워지자 한 손을 뻗어 그들의 걸음을 멈추게 했다. “기다려라.” 그리고는 늑대와 정령, 그리고 몽몽이와 엘리멘탈 드래곤을 역소환 한 다음 임서윤에게 말했다. “정리가 되는대로 메시지를 보낼테니 여기서 대기하도록.” 준상의 성격과 실력을 잘 아는 임서윤 등은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휴식 준비를 했다. 이한서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손가은이 어깨를 짚으며 고개를 가로저어 보이자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주저앉았다. 준상은 우선 헤네스에게 말했다. “이번 상대는 위험할 수도 있으니 일단 들어가 있는 편이 좋겠다.” 헤네스는 별로 내키지 않는 기색이었지만, 지금으로서는 그의 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조심하세요.” “그래.” 준상은 헤네스가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눈을 감자,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다음 역소환을 실행했다. 리체스는 헤네스가 역소환되는 것을 보고는 얼른 말했다. “전 싫어요. 역소환되고 싶지 않아요!” 그 말에 준상은 바로 대답했다. “안 한다.” “그렇게 말해도 소용없어요. 전 절대로... 어라?” “안 한다고.” “...”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싶어서 리체스는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기쁜 표정을 지었다. 드디어 이 무뚝뚝한 남자가 자신의 진가를 알아주었다 싶은 생각에 어쩐지 어깨가 으쓱해질 정도다. 준상이 무지개빛의 요정 하나만을 데리고 통로 저편으로 모습을 감추자, 윤성렬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어쩐지 날로 먹는 기분이군요.” 그러자 정다빈이 조심스럽게 그 말을 받았다. “그러게요. 뭐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닐까요.” 하지만 임서윤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지금으로선 저희들은 그저 방해만 될 뿐이니까요.” 그 말에 진세아나 서유미, 그리고 손가은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어깨가 축 처진 채 주저앉아 있던 이한서는 발끈하며 외쳤다. “하, 하지만... 해 보지 않고는 모르는 거잖아요!” 그러자 진세아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건 네가 그를 잘 몰라서 하는 얘기야.” “뭐가요?” “그는 말이지. 네가 자꾸 귀찮게 굴면 가타부타 말도 없이 단숨에 그 소름끼치는 검으로 베어버릴 수도 있는 사람이야.” “...” “그러니까, 헤네스양이 아무리 마음에 들었어도 괜히 티내고 그러지 말란 얘기야.” “그, 그게 무, 무, 무슨...” 이한서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을 더듬자, 내내 준상의 뒷모습을 쫓느라 미처 길드원들을 살피지 못하고 있던 임서윤이나 눈치가 부족해서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윤성렬 등까지 그랬나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사실... 예전 같았으면... 죽거나 말거나 내버려 두고도 남았을 거에요...” 서유미가 작은 목소리로 말하자 임서윤이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확실히 그 말대로입니다. 아까 그 여자들 일만 하더라도, 그런 식으로 설명을 하고 넘어가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진세아 역시 그 말에 동의했다. “맞아요. 다른 사람이 보기엔 어떨지 몰라도, 처음 봤을 때랑 비교해 보면 저 정도라도 말을 하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죠.” 도대체 예전엔 어느 정도였다는 말인가. 지금도 필요한 말 이외에는 그다지 하지 않는 듯한 모습인데, 그게 예전보다 나아진 거라니. “역시... 헤네스양 때문이겠죠...” 서유미의 이어진 말에 임서윤과 진세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그런 귀여운 소녀가 항상 옆에 붙어서 귀엽게 재잘대는데 아무 말 없이 버티는 것도 쉽지 않은 일 아닐까. 사실 그들로서는 이러한 준상의 변화가 그리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아니, 아주 좋은 변화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까 서유미가 했던 말처럼 그들이 해골 병사에게 밀려 다치거나 죽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을테니 말이다. 임서윤의 경우에는 그가 죽을 경우 맡긴 일들을 대신할 사람을 찾는 것이 귀찮아서 조금 신경을 썼을지도 모르지만, 이런 식으로 순순히 파티를 맺고 퀘스트를 공유하는 경우는 없었을 것이다. 그때,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진세아가 말했다. “그런데, 유미씨.” “네?” “전에는 그렇게 붉은 늑대를 좋아했잖아요? 주인 허락도 없이 쫑이라는 이름도 붙이고.” “그게...” 서유미는 난처한 듯한 표정으로 눈앞을 가린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다가 말했다. “사실은... 무서워요.” “네?” “그냥... 뭐랄까... 예전에 비해서 너무 강해져서... 함부로 하기가...” “아하...” 생각 같아서는 지금이라도 달려가서 쫑이를 내놓으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자신도 모르게 손이 나갈 때마다 본능적인 무언가가 자꾸 경고를 보냈다. 그래서 요즘은 카드를 뽑을 때마다 남몰래 쫑이를 보내달라고 기도를 하고 있었지만, 운이 없는 건지 아니면 인연이 되질 않는 건지 붉은 늑대는커녕 그 비슷한 소환물조차 나오지 않고 있었다. 서유미는 조심스럽게 휴대폰을 열어 현재까지 진행된 퀘스트의 정보를 확인해 보았다. 부활한 망령에 의해 빙의된 악령의 사제를 처단하십시오. :악령의 문에서 나온 망령들이 그것을 주도한 악령의 사제와 그가 이끌던 언데드들에 빙의되었습니다. 이들은 음차원에서 전해진 순수한 어둠의 힘으로 강화되어 매우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들이 사막의 잊혀진 신전에서 빠져 나오기 전에 격멸해야만 합니다. [이 퀘스트는 여러 명의 인원이 동시에 참여합니다.] (Hidden) 되살아난 처녀들을 처치하십시오. (7/7) (협력) ->완료! (Hidden) 망령의 기사를 처치하십시오. (7/7) (협력) ->완료! (Hidden) 강화된 해골 병사를 처치하십시오 (132/132) (협력) ->완료! 어느 틈엔가 세 개의 히든 퀘스트가 달성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처음에 나온 해골 병사와의 전투 이후로는 그야말로 손가락만 빨고 있는 상황이라 그리 높은 등급을 받기는 어려우리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협력 퀘스트의 경우에는 달성 유무만을 따지는 것이기 때문에 추가 보상 상자를 받을 수 있었다. 현재까지 달성된 것이 세 가지이니, 적어도 세 개의 추가 보상 상자는 확보한 셈이다. 서유미는 헤네스가 빌려준 무한의 연쇄라는 이름의 단검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얼른 더 강해져야 이 대단한 아이템을 서슴없이 빌려준 아름다운 갈색 머리 소녀에게 보답을 해줄 수 있을텐데. 그런 생각으로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훈련에 참여하는 그녀였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준상은 점점 더 터무니 없는 수준으로 강해지고 있으니 솔직히 암담한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후우...” 가볍게 한숨을 쉬며 서유미는 휴대폰을 집어넣다가 퀘스트 정보가 갱신되는 것을 보았다. 화면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Hidden) 마수 보드 리델을 처치하십시오 (협력) “마수 보드 리델...” 서유미가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중얼거리자, 다른 길드원들 역시 얼른 휴대폰을 꺼내어 퀘스트 정보를 확인했다. “이것 때문에 여기서 대기하라고 했던 거군요.” 임서윤이 중얼거리자 진세아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마수라니... 저번의 그 괴물 꽃 같은 걸까요.” 그러자 예전 일이 떠올랐는지 정다빈이 흠칫 몸을 떨었다. 확실히 그런 것이 상대여서는 자신들은 걸리적거리기만 할 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데, 문득 그들이 주저앉아 있는 바닥이 부르르 떨리더니 천장으로부터 흙먼지가 우수수 떨어져 내린다. “시작된 모양이군요.” “...” 지금이라도 가서 도대체 얼마나 엄청난 괴물과 싸우고 있는 건지 보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단순한 호기심 때문에 목숨을 걸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뭐라해도 그들 역시 당면한 가장 중대한 목표는 역시 생존이다. 강해지고자 하는 것 또한 따지고 보면 결국은 살아남을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하지만 이들과는 달리 호기심에 죽고 사는 존재도 있었다. “꺄하하하하! 덤벼! 덤벼! 덤벼!” “...” 준상은 호들갑을 떨며 마수 보드 리델을 향해 화려한 마법을 퍼부어 대는 리체스를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녀의 마법 능력은 요정계 밖이라는 패널티로 반감된 상태에서도 매우 훌륭해서 마수 보드 리델을 가볍게 농락하고 있었다. 하긴 그렇게 반감된 마법 레벨조차 준상의 레벨보다 높은 수준이니 이건 차라리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받아라! 암흑을 밝히는 천상의 심판!” 리체스의 작은 손이 마치 파리를 잡듯이 휘저어지자, 보드 리델의 머리 위에 푸른 뇌전이 마치 소나기처럼 퍼부어지기 시작한다. -쿠아아아아! 보드 리델은 머리에 나있는, 촉수라고 해야할지 오징어 다리라고 해야할지 모를 것들을 휘저으며 공중을 빠르게 날아다니는 리체스를 붙잡으려 했지만, 너무나 작고 재빠른 탓에 그것들은 공연히 허공을 휘저을 뿐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수 보드 리델은 기괴한 형태를 하고 있었다. 전체적인 모양새만 따지자면 거대한 뱀과 같은 형태이다. 하지만 그 머리에 마치 오징어의 다리와 같은 촉수가 달려 있기 때문에 뱀이라기 보다는 오징어나 문어 같은 두족류 같은 느낌이다. 기다란 몸통은 마치 갑각류와 비슷한 두꺼운 껍질이 달려 있는데, 그 위에는 작은 뿔과 같은 가늘고 뾰족한 돌기가 마치 털이 난 것처럼 솟아 있었다. 보드 리델은 이 돌기들을 작살처럼 쏘아 보낼 수도 있는데, 돌기와 연결된 생체 조직은 크롤로바간의 실처럼 가늘고 탄력이 높아서 놈이 천장에 수십 개의 돌기들을 동시에 박아 넣고 줄타기를 하듯 움직일 때는 준상조차도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준상은 리체스가 보드 리델을 몰아붙이기 시작하자 정령과 엘리멘탈 드래곤을 소환해 그녀를 돕도록 한 다음 랑다잘의 분노를 꺼내들었다. 검의 능력을 개화시키기 위해서라도 가급적이면 어나이얼레이터를 쓰려고 마음 먹었지만, 촉수를 잘라내는 정도라면 몰라도 이 놈의 두터운 껍질을 베어내는 것은 아직 무리라서 어쩔 수 없었다. 준상은 블러드로드 콤보를 장착한 다음 위상전이를 펼쳐 보드 리델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며 손에 쥔 두 개의 철구를 내리 찍었다. 철퍽! 하지만 보드 리델의 끈적한 몸은 마치 젤리를 내려친 듯한 느낌과 함께 두 개의 철구를 통해 가해진 충격을 어이없을 정도로 간단하게 흡수해 버렸다. “쯧...” 어떻게 되먹은 것이 마수라는 놈들은 죄다 이 모양인지. 준상은 자신을 향해 돌기들이 비처럼 쏟아지자 얼른 위상전이를 통해 몸을 피했다. 이런 상황이라면 몸쪽의 껍질을 부숴봐야 놈의 본체에 타격을 가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방법은 단 하나 뿐이다. 준상은 랑다잘의 분노를 인벤토리로 되돌린 다음 오랜만에 인벤토리안에 잠들어 있던 또다른 마물 블러드서커를 꺼내 들었다. 두쿵! 단순히 손에 쥐었을 뿐인데도 준상은 시야가 붉게 물드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감상 따위를 논할 여유는 없었다. 준상은 모습을 감춘 상태로 거대한 도끼를 양손에 쥔 채로 강타를 발동했다. 두근! 두근!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와 함께 준상의 손에 들린 도끼로 가공할 만한 힘이 모여들자, 모습을 감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드 리델은 그것에 반응하여 돌기들을 쏘아 보냈다. 뾰족한 돌기들이 빗살처럼 쏟아지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준상은, 필요한 만큼의 힘이 모이자 위상전이를 펼쳐 다시 한번 보드 리델의 머리 위로 이동했다. 그리고 떨어지며 그대로 전신에 모인 힘을 단숨에 방출했다. 번쩍! 신나게 보드 리델에게 마법을 쏟아 붓고 있던 리체스는 갑자기 시야가 밝아지자 기겁하며 얼른 자신의 몸 주위에 방어막을 둘렀다. 그러자 순식간에 거대한 폭풍 같은 것이 지하광장을 거칠게 휘몰아쳤다. “미, 미친...” 무너지면 어떻게 하려고! 아니, 그 전에 이게 과연 인간의 힘이 맞긴 한 건가? 리체스는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얼른 폭발을 일어난 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후우우...” 그곳에는 준상이 온 몸에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흰 연기를 뿜어내며 서 있었고, 그의 앞에는 정확히 반으로 잘려진 보드 리델이 놓여 있었다. 아니 정확히 반으로 갈린 것은 머리 부분 뿐이고 몸통 부분은 거의 손상을 입지 않은 상태였지만, 어쨌든 저 물컹거리는 마수를 단숨에 잘라버린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블러드서커는 이미 인벤토리로 되돌린 상태. “해치운건가?” 하지만 리체스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죽은 듯이 늘어져 있던 보드 리델의 몸이 꿈틀거리더니 잘려진 부위에서 부글거리며 재생이 시작되었다. “큭!” 준상은 이 터무니없는 재생력에 당황했다. 몸체는 멀쩡하지만 그래도 머리가 반으로 잘렸는데도 다시 재생이 이루어지다니? 블러드서커로 공격을 했는데도 이 정도면, 준상이 아닌 다른 자들의 공격은 애초에 씨도 먹히지 않을 수준이다. 설마 이 놈도 악령에 의해 강화된 것일까.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을 떠올릴 겨를이 없었다. 준상은 일단 몸을 피하려다가 문득 아직 받지 않은 퀘스트 보상을 떠올렸다. 그렇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쓰려고 놔두었던 퀘스트 보상이 아니던가. 준상은 곧바로 인터페이스를 조작해 미뤄두었던 퀘스트 보상을 수령했다. 첫 번째 보상을 수령했지만, 아무 반응이 없었다. 두 번째 보상의 경험치는 ‘조금’ 수준. 여차하면 바로 위상전이로 움직일 준비를 한 다음 두 번째 보상을 수령했다. 그러자, 곧바로 그의 몸에서 한 줄기 빛이 뿜어지며 과부하에 걸려 손가락 하나 꿈쩍할 수 없었던 몸이 완벽하게 회복되었다. “후우우우...” 준상은 몸 안에 들어차 있던 열기를 입으로 내뱉은 다음 다시 한 번 블러드서커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어느 새 잘려나간 머리 반쪽을 거의 회복한 보드 리델을 향해 다시 도끼를 휘둘렀다. 이번에는 강타를 발동하지 않았다. 이 마물은 단순히 한 번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양의 생명력을 준상의 몸으로부터 빨아들였지만, 그와 동시에 보드 리델의 몸으로부터 흡수된 엄청난 양의 생명력과 재생 능력을 통해 보충된 생명력이 그 빈 자리를 채웠다. 하지만 생명력 흡수와 재생력이 있음에도 블러드서커가 빨아들이는 생명력이 보충되는 생명력보다 많았다. 힐링 포션을 마실까 하던 준상은 역소환 중이던 헤네스를 다시 소환했다. 헤네스는 다시 소환되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온몸에서 하얀 연기를 뿜으며 도끼를 휘두르고 있는 준상을 보고는 바로 자신이 소환된 이유를 깨달았다. 헤네스가 곧바로 두 개의 채찍을 꺼내 준상에게 휘두르자 지금까지의 모든 일을 지켜보며 얼이 빠져 있던 리체스도 그제서야 정신이 화들짝 들었다. “따스한 생명의 기운이여! 여기에 임하소서!” 헤네스가 채찍을 사용하고 리체스가 회복의 주문을 외우자, 그제서야 보충되는 생명력의 양이 빠져 나가는 생명력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유일한 단점이 해소되자, 준상은 더 이상 거칠 것이 없었다. 그가 거대한 도끼를 마구 휘둘러 머리를 채 썰 듯 난자하자, 그제서야 보드 리델은 재생을 멈추고 그대로 숨이 끊어졌다. (Hidden) 마수 보드 리델을 처치하십시오 (협력) ->완료! 눈앞에 히든 퀘스트가 완료되었음을 알리는 메시지가 뜨자, 그제서야 준상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블러드서커를 인벤토리로 되돌린 후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00175 트롤러 ========================================================================= “준상씨!” 준상이 쓰러지는 모습을 본 헤네스는 크게 놀라며 얼른 달려와 그를 부축했다. 리체스 역시 놀라기는 매한가지. 놀란 표정으로 얼른 날아와 연거푸 회복 마법을 펼치자 준상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그거 말고...” “네?” “피로 회복으로 부탁해.” “아...” 아무리 채찍과 마법으로 생명력을 보충했다 하더라도 신체 자체에 가해지는 부하가 어디로 가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강한 철이라도 계속해서 두들기다 보면 언젠가는 부러지는 법. 하물며 인간의 신체야 말할 것도 없는 일이다. 리체스는 얼른 피로 회복을 위한 마법을 준상에게 쏟아 부었다. 준상은 수차례에 걸쳐 리체스에게 마법을 받고 나서야 납덩이 같이 무거워졌던 몸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후... 그만하면 됐다. 고맙다.” 준상은 그렇게 말했지만, 리체스는 한 번 더 그에게 마법을 시전하고 난 후에야 걱정스런 모습으로 물었다. “정말... 괜찮겠어요?” “그래.” 준상은 리체스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자신을 부축하고 있는 헤네스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너무나도 걱정이 된 나머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눈물이 그렁그렁한 상태였다. “괜찮다니까.” “하지만...” 결국 헤네스는 더 이상 안되겠던지 준상의 품에 안긴 채 숨죽여 울기 시작했다. 준상은 쓴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등을 쓰다듬어 줄 수밖에 없었다. 하긴 예전에 비하면 헤네스의 반응도 그나마 나아진 셈이다. 크롤로바간을 처치했을 때는 울면서 채찍질을 했었으니 말이다. 리체스는 둘의 모습을 보고는 입을 삐죽거리더니, 준상의 코앞으로 날아와 그의 코를 주먹으로 때렸다. 물론 조막만한 요정이 주먹질을 해봐야 준상에게는 지나가는 꽃잎이 내려 앉은 정도의 충격도 오지 않는다. 다만 난데없는 손찌검에 좀 당황스러울 뿐이다. 준상이 물끄러미 바라보자, 리체스는 허리에 손을 척 얹은 채로 준상을 야단쳤다. “정말이지... 얼마나 놀랬는 줄 알아요?” “...” “걱정시키지 좀 말라구요. 흥!” 리체스는 그렇게 콧소리를 내며 고개를 홱 하고 돌리다가 곧이어 들려온 준상의 말에 눈이 휘둥그레 졌다. “미안.” “...” 화가 나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 미안하다는 말을 들을 수 있을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던 터라 리체스는 가슴 한켠이 쿵 하고 내려앉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얼마나 당황했는지 리체스는 횡설수설하기 시작한다. “아니, 뭐... 그냥 그렇단 얘기에요. 굳이 꼭 사과를 받겠다는 건 아니고...” “...” 준상은 그런 요정 여왕의 모습에 피식 웃은 뒤 손을 뻗었고, 리체스는 마지못한 듯이 그 손에 자리 를 잡은 다음 그의 손이 이끄는 대로 어깨 위에 자리를 잡았다. “...” 준상은 일단 둘을 그렇게 달랜 다음에야 비로소 몽몽이를 불러 아이템 수거를 지시했다. 그리고는 곤죽이 된 마수의 머리와 뒤에 남은 외골격 등을 바라 보았다. 몸은 이미 크롤로바간처럼 흐물거리며 녹아서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몸통을 덮고 있는 외골격과 그곳에 솟아있는 뾰족한 돌기, 그리고 돌기와 외골격을 잇고 있는 로프 두께의 근섬유 비슷한 느낌의 신체 조직은 녹아내리는 신체와는 달리 여전히 건재한 상태였다. 준상은 자신의 품에 가슴을 묻은 채 소리죽여 흐느끼고 있는 헤네스를 번쩍 안아올렸다. “주, 준상씨?” 헤네스가 눈물이 맺힌 눈으로 놀라서 그렇게 이름을 불렀지만, 준상은 모르는 척 그녀를 안은 채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보드 리델의 잔해를 살펴 보았다. “흠...” 염동력으로 돌기 하나를 집어 올렸다. 멀리서 봤을 때는 그저 길고 가는 원뿔형인줄 알았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역방향으로 작살촉과 같은 작고 촘촘한 미늘이 나 있었는데, 놀랍게도 접고 펼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하긴 이런 구조가 아니고서는 아무리 몸체와 연결된 근섬유가 강인해도 이 거대한 몸을 천장에 매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저기... 그만 내려 주세요.” 헤네스가 부끄러운지 그렇게 말하자, 준상은 그제서야 품에 안고 있던 그녀를 놓아주고는 보드 리델의 외골격을 손으로 툭툭 쳐 보았다. 생각보다 가볍고 단단한 느낌이라 갑옷 같은 방어구를 만들면 제격일 듯 싶다. “리체스.” “네?” “혹시 갑옷 같은 것도 만들 수 있나?” 하지만 리체스는 그 말를 듣고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설마요. 이미 만들어진 것에 마법을 부여하는 정도라면 모를까.” “그렇군.” 준상은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온몸에 끈적이는 점액질을 뒤집어 쓴 채 돌아온 몽몽이를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새벽이슬.” 준상은 곧바로 물의 정령으로 몽몽이를 씻긴 다음, 몸이 깨끗해지자 손을 내밀며 말했다. “꺼내봐.” 그러자 몽몽이는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주머니에서 은은한 서기가 뻗어 나오는 큼지막한 시드 하나를 준상의 손바닥 위에 얹어 놓았다. “수고했다.” 준상이 그렇게 말하자 몽몽이는 앞발로 자신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으며 털을 고르더니 이내 주머니 속에 넣어 두었던 초코바를 꺼내 바각거리며 갉아먹기 시작한다. 리체스는 몽몽이가 초코바를 먹는 모습을 보고는 군침을 꿀꺽 삼키더니 준상에게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요... 주인님?” “응?” “헤헤, 이번엔 저도 꽤 열심히 싸웠으니까 상을 좀 주시면...” “...” 그 말에 준상은 물론이고 헤네스까지 웃음을 짓고 말았다. “알았다.” 준상은 캐비닛을 꺼낸 다음 그 안에 보관해 두었던 특대 초코바 하나를 꺼내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오옷! 크다!” 리체스는 평소 먹던 것보다 곱절은 커 보이는 특대 초코바를 보고는 탄성을 지르더니 이내 마법으로 그것을 받아들고는 정성스럽게 껍질을 벗기기 시작한다. 준상은 어깨 위에서 리체스가 초코바를 먹는 소리를 들으며 손에 들린 보드 리델의 시드를 확인했다. 명칭 : 끈적한 점막 레벨제한 : 20 종류 : 시드 등급 : Rare 효과 : 1. 물리 저항력 증가 9% 2. 재생률 증가 10% 3. 초재생 1레벨 상승 설명 : 마수 보드 리델이 지니고 있던 특별한 시드입니다. Seed 슬롯이 있는 아이템이나 카드에 장착하여 능력을 강화할 수 있습니다. 한번 장착한 시드를 분리하기 위해서는 특수기능 ‘분리’가 필요합니다. [이 시드를 아이템이나 카드에 장착하시려면 이곳을 누르십시오.] 초재생이라... 크롤로바간의 시드가 초감각과 디코이 스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것 역시 새로운 스킬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준상은 초재생 항목을 확인해 보았다. 초재생 : 순간적으로 자신의 재생률을 두 배 상승시킵니다. -지속시간은 5분입니다. -사용후 30분간 재사용이 불가능하며, 이 시간 동안 재생률이 절반으로 감소합니다. 쉽게 말해 짧은 시간 동안 재생률을 두 배로 증폭시키는 대신, 삼십 분동안 패널티를 받는 식이다. 지속시간이 짧기는 하지만, 이 초재생 능력을 쓴 상태로 블러드서커를 사용할 경우 어지간한 적은 5분은커녕 몇 번만 찍어대도 단숨에 죽어 넘어질 수밖에 없다. 물론 리체스의 피로 회복 마법의 도움을 받기는 해야겠지만, 짧은 시간 동안만이라도 블러드서커를 자유자재로 쓸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나게 큰 이점이다. 준상은 새로 얻은 보드 리델의 시드를 카드에 장착한 다음, 그 사체 또한 잘 정리해서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대충 정리가 끝나자 준상은 메신저를 통해 임서윤에게 연락을 보냈다. ‘늑대를 보낼테니 따라 오도록.’ 길을 잃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만약을 대비해 준상은 크림슨 울프를 소환해 임서윤이 있는 곳으로 보냈다. 잠시 기다리자 임서윤 일행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서유미는 오랜 만에 마음껏 쫑이를 쓰다듬은 덕분인지 무척이나 행복해 보이는 모습을 하고 있었고, 크림슨 울프는 오랜만에 시달린 탓에 어쩐지 조금 피곤해 보이는 기색이었다. “가자.” “네.” 준상은 그들을 데리고 다시 신전 안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미니맵을 살핀 그는 이내 최하층에 도사리고 있는 하나의 목표와 광장 옆의 벽 안쪽에 숨겨진 또 하나의 목표를 확인할 수 있었다. 아마도 벽 안쪽에 숨겨진 것이 사막의 잊혀진 재보일 것이라 판단한 준상은 일행을 뒤로 물린 다음 랑다잘의 분노를 꺼내 들었다. “리체스.” “네.” “이 벽을 부숴도 무너지지 않도록 다른 곳을 잠시만 강화할 수는 없을까.” 리체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내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잠깐이라면 문제 없어요.” “그럼 부탁한다.” “네!” 리체스가 주위의 벽과 천장에 강화 마법을 걸자, 준상은 랑다잘의 분노를 들고 목표한 벽을 가볍게 두들겼다. 그러자 파쇄가 발동하면서 단숨에 벽이 박살나며 통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준상은 바로 랑다잘의 분노를 인벤토리에 집어 넣고 통로로 들어서려 했지만, 리체스가 급히 나서며 그를 막았다. “잠깐만요. 뭔가 마법적인 장치가 되어 있어요.” “어떤?” 리체스는 잠시 주위를 살피더니 이렇게 말했다. “음... 아무래도 무게를 감지하는 마법진인 것 같아요. 바닥을 밟으면 뭔가가 발동하는 것 같은데... 낯선 형태의 마법진이라 그 이상은 잘 모르겠네요.” “바닥에 전부 설치되어 있는 건가?” “네.” “흠...” 준상은 일단 초감각을 통해 벽 안쪽을 샅샅이 살폈다. 재보로 보이는 상자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준상은 곧바로 염동력으로 상자를 꺼내오려고 했지만, 바닥에 깔린 마법진의 영향인지 염동력은 제대로 동작하지 않았다. “곤란한데.” 그러자 리체스가 말했다. “저 상자가 필요한 건가요?” “그래.” “제가 가서 가지고 오면 되지 않을까요?” 하지만 준상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순 없다. 위험할 수도 있으니.” “그거야 역소환을 하면...” “들고 오다 바닥에 떨어뜨리면 마법진이 작동하지 않겠나.” “아...” 그 말을 들은 헤네스가 잠시 뭔가를 생각하더니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이러면 어떨까요?” “그러니까... 몽몽이를 저기로 보내면...” “...” 확실히 몽몽이라면 바로 주머니에 상자를 넣을 수가 있으니 역소환하더라도 떨어뜨릴 염려가 없다. 문제는 저기까지 보낼 수단인데... 집어 던지는 건 너무 부정확하고, 염동력도 먹히지 않는데다, 리체스나 엘리멘탈 드래곤이 안고 가기엔 이 먹보 다람쥐의 몸집이 만만치 않다. 준상은 잠시 몽몽이를 바라보다가, 따로 보관해 놓았던 요정의 술을 꺼냈다. 안고 갈 수 없다면, 직접 날아가면 되는 일 아니겠는가. “이걸 먹으면 날 수 있다.” 준상은 고개를 갸웃거리는 몽몽이에게 그렇게 말한 다음, 작은 용기에 담긴 요정의 술을 건네 주었다. 몽몽이는 까먹고 있던 초코바를 주머니 속에 집어넣은 다음, 준상이 주는 요정의 술을 앞발로 받아서 그대로 단숨에 마셨다. 순간 몽몽이의 눈에서 번쩍 빛이 발했다. 너무 맛있어서 펄쩍 날아오를 정도의 맛이 작은 다람쥐의 미각을 완전히 장악한 것이다. “괜찮을까요? 술 같은 걸 먹여도.” 헤네스가 걱정스러운 듯이 말했지만, 준상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몽몽이는 힘차게 하늘을 날아 숨겨진 석실 안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곧바로 그 안에 놓여져 있는 상자를 단숨에 앞발로 잡아 자신의 주머니 속에 집어 넣었다. 구구궁! 몽몽이가 상자를 챙기자 곧바로 석실 안에서 격렬한 진동이 일어나더니 곧바로 몽몽이를 향해 수많은 마법이 쏟아지며 그대로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준상은 몽몽이가 상자를 챙기는 것을 보자마자 곧바로 역소환을 실행했고, 석실 안에서 발동되었던 치명적인 마법들은 모두 빗나가 버리고 말았다. 혹시나 해서 입구에 방어막을 발동하던 리체스는 석실 안쪽이 완전히 무너져 내리고 거기에 더해 마법의 발동까지 완전히 멈추고 나서야 겨우 한숨을 내쉬며 방어막을 거둬들였다. 준상이 다시 몽몽이를 불러내자, 다시 소환된 이 다람쥐는 기운이 넘치는지 정신 없이 날아다니다가, 요정의 술이 지닌 효과가 모두 사라지자 그제서야 지친 듯한 모습으로 곯아 떨어져 버렸다. 그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던 진세아는 이런 감상을 남겼다. “술 먹으면 뛰어다니는 사람 얘기는 들어봤어도, 술 먹고 날아다니는 다람쥐라니...” 00176 트롤러 ========================================================================= 몽몽이가 뻗어 버린 탓에 상자 안에 무엇이 들어있었는지는 오리무중이 되고 말았다. 준상 역시 궁금하기는 했지만, 괜히 지금 꺼내봐야 좋을 것이 없다는 생각에 그만 두었다. 사람이란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욕심이 생기면 그 관계는 쉽게 망가지는 법. 하물며 이해관계로 묶인 사이라면 볼 것도 없는 일이니, 차라리 빌미를 주지 않는 것이 현명한 일이다. 문제는 시야 한쪽을 가득 차지하고 있는 보상 상자와 관련된 메시지들. 어느 정도 수가 적으면 바로 열어 보겠는데... 추가 보상 상자만 여덟 개에 트리플 에스 등급의 보상 상자 두 개와 레벨 업 보상이 하나 더 있는 탓에 얼른 퀘스트를 해결한 다음 느긋하게 열어보기로 마음먹었다. 사막의 재보를 획득하는 일까지 끝마쳤으니, 이제 남은 것은 이번 퀘스트의 마지막 장애물인 악령의 사제 뿐이다. 지난 두 번의 퀘스트로 미루어 보면 악령의 사제라는 이름이 붙은 자들은 약간의 실력을 갖춘 마법사 수준에 불과함을 알 수 있다. 게다가 마법사로서의 실력은 어떨지 몰라도, 실전 감각은 완전히 없는 거나 다름없어서 준상에게는 아무런 방해조차 되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에 상대하는 악령의 사제는 악령의 문으로부터 빠져 나온 망령에 빙의되어 있는 상태. 퀘스트 정보도 열려진 악령의 문보다 빙의된 악령의 사제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는 이상 신중할 필요가 있었다. 준상은 미니맵을 통해 어느 정도 목표와 가까워졌음을 확인하자 손을 뻗어 일행의 발걸음을 멈추고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그들을 현재 위치에서 대기시켰다. “헤네스.” “조심하세요.” “그래.” 준상은 헤네스를 역소환한 다음, 늑대와 정령등의 다른 소환물들도 그녀와 마찬가지로 역소환시켰다. 그리고는 자유롭게 모습을 숨길 수 있으며 충분한 전투 능력을 가진 리체스 한 명만을 데리고 최후의 보스인 악령의 사제가 기다리고 있는 장소로 걸어내려 갔다. 준상이 내려 갔을 때, 악령의 사제는 신전의 최하층 지하실에 석상처럼 우두커니 선 채 굳어 있었다. 만약 퀘스트 목표가 놈의 위치를 지시하고 있지 않았다면, 준상은 검은 연기가 몸 전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길한 석상 정도로 인식했을지도 모른다. “...” 준상은 초감각을 통해 시야가 미치지 않은 곳에서 일단 최하층의 상황을 확인한 다음, 리체스를 향해 말했다. “달리 뭔가 마법적인 함정은 없나.” 그 말을 들은 리체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위를 살피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없어요.” “아무것도?” “네, 아무것도.” “...” 도대체 꿍꿍이가 무엇일까. 준상은 어쩐지 별로 탐탁지 않은 느낌을 받았지만, 이대로 마냥 시간을 끌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결국 기습을 하기로 결정했다. “다녀오마.” 리체스는 한 마디 더 충고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조심하세요. 저주의 농도가 만만치 않아 보여요.” “그래.” 준상이 고개를 끄덕이자, 리체스는 기회다 싶었던지 얼른 준상의 이마에 다가가 입술을 맞추었다. 이미 요정의 키스는 사용한 상황이라 별도의 효과 같은 것은 없었지만, 준상은 이 발칙한 요정 여왕의 행동에 긴장했던 마음이 조금이나마 풀리는 것을 느꼈다. “고맙다.” “별 말씀을요.” 준상은 리체스가 수줍게 웃는 모습을 보고는 곧장 몸을 숨겼다. 그리고 위상전이를 통해 이동하며 인벤토리 안에 넣어 두었던 마검 어나이얼레이터를 꺼내 들었다. 손잡이를 잡는 순간 다시 한 번 소름끼칠 정도로 섬뜩한 어떤 유혹이 그의 마음 속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작은 울림과 같은 형태로 속삭이기 시작한다. 보통 사람이라면 화들짝 놀라 검을 손에서 놓을 정도의, 그런 느낌. 하지만 준상은 놀라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그에게는 이 불길한 기운을 잔뜩 뿜어내고 있는 검붉은 마검조차도 오직 주고받는 거래의 대상일 뿐이었다. 준상은 힘을 원하고, 검은 살육을 원한다. 어찌 보면 단순 명쾌한 관계일 뿐이지만, 단지 마검 어나이얼레이터가 바라는 살육의 양이나 목표가 준상의 허용 범위를 넘어선다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마검은 그 초과되는 양에 대한 보상으로 뼛속까지 저릿한 쾌감을 주겠노라 유혹하고 있는 상태. 하지만 애초에 마음이 없는 쾌락 따위는 준상이 실질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아니었기에 이 교섭은 성사될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준상은 곧바로 검은 기운을 뭉게뭉게 피워내며 우두커니 서있는 악령의 사제의 배후로 이동했다. 그리고 가타부타 말도 없이 곧바로 검을 높이 치켜 든 채 놈의 뒤편에서 떨어져 내리며 그 목을 내리쳤다. 준상이 위상전이로 뒤편에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하지만 검이 내리쳐지는 순간, 악령의 사제를 감싸고 있건 검은 기운이 비로소 반응을 보였다. 콰가각! 검은 연기는 마치 거대한 낫과 같은 형상으로 변해 준상이 내려친 마검을 막아냈다. 아니, 이 사악한 망령의 기운은 단순히 마검을 막아내는 것을 넘어서 마치 살아 움직이는 촉수처럼 휘어지며 검으로 막지 못하는 준상의 신체 부위를 후려쳤다. “큭!” 선박을 묶는데 사용하는 강철 와이어에 얻어맞은 충격에 준상은 뒤로 튕겨 나가고 말았다. 수호자의 콤보와 더불어 보드 리델의 시드를 새로 얻음으로서 물리 저항력이 백퍼센트를 넘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선명하게 피부를 뚫고 저며드는 충격에 준상은 당혹해 할 수 밖에 없었다. 준상이 허공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검을 휘두르다가 악령의 사제가 뿜어낸 검은 기운에 얻어맞아 튕겨 나가자, 리체스는 얼른 준상에게 날아오며 외쳤다. “괜찮으세요?” “끙... 그럭저럭.” 어찌된 영문인지 악령의 사제는 여전히 석상처럼 굳어진 채로 준상과 리체스에게 아무런 위해도 가하지 않고 있었다. 이를테면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힘만 풀려나 자동 방어만이 활성화된 듯한 느낌이다. 리체스는 우선 준상의 몸에 나 있는 검은 자국부터 살펴 보았다. “지독한 저주네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리체스는 곧바로 빛의 마법을 발현해 준상의 몸에 일광욕을 가하듯이 천천히 내리쬐기 시작했다. 준상은 그녀가 발현한 마법이 회복 마법도 아니고, 그렇다고 저주를 해제 하는 다른 특별한 마법도 아닌지라 다소 의아해 했지만, 이내 표백제에 담궈 둔 빨래의 묵은 때가 빠져 나오듯이 사라져 가는 자국을 보고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저주를 막아내는 다른 마법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런 식으로 반대 속성의 힘을 통해 저주 스스로가 물러나게 하는 쪽이 나중을 위해서라도 효과적이에요. 마법도 너무 같은 걸 자주 사용하면 효과가 떨어지는 법이거든요.” “내성이 생기는 건가.” “네.” 본래 생명체는 그것이 어떠한 것이 되었든 간에 같은 종류의 자극이 계속 가해지면 그것에 둔감해 지는 경향이 있다. 따지고 보면 마법도 결국은 이종의 힘으로 신체에 자극을 주는 행위이니, 그런 식으로 내성이 생긴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이라면, 준상의 경우 블러드서커 등을 사용하기 위해 회복 포션이나 기타 생명력 회복 수단을 집중적으로 과하게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준상 역시 이전부터 그런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하고 염두에 두고는 있었지만, 불행히도 그에게는 다른 방법을 선택할 길이 없었다. 리체스는 준상의 몸에 새겨진 저주를 치료하면서 한 마디 더 덧붙였다. “요정들에게 고맙다고 하세요.” “왜?” 준상의 물음에 리체스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요정의 키스가 저주를 어느 정도 막아주었거든요.” “그런 기능도 있었나?” “정확히는 행운으로 저주를 어느 정도 상쇄한 셈이지만, 일단은요.” “대단하군.” 사실 지금까지 요정들에게 키스를 잔뜩 받기는 했어도 그다지 효과를 느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건 사실 준상이 피부로 느끼지 못했다 뿐이지, 실질적으로 지금까지 준상은 여러 가지로 요정들이 안겨준 행운 속성의 도움을 많이 받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가 아무리 퀘스트를 독식했어도 이렇게까지 다양하고 효과적인 능력을 습득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물론 그런 대단한 행운의 도움을 받으면서도 쏟아지는 피칠갑 카드를 거부할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후우...” 준상은 몸에 새겨진 저주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지자, 일단 시드 구성을 저주 저항으로 바꾸었다. 시드 구성의 변경에 필요한 저항 관련 시드들은 이번 퀘스트 전에 따로 준비를 해 둔 터라 단순히 꺼내서 교체하는 것만으로도 어렵지 않게 끝마칠 수 있었다. 시드 구성의 변경이 완료되자, 준상은 일단 안목의 능력을 발동해 주위에 악령의 구슬이나 그것을 발동하기 위한 의식의 장소가 없는지 확인해 보았다. 그 결과 준상은 놀라운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디에서도 흔적을 찾을 수 없었던 악령의 구슬이 사제의 몸에서 발견된 것이다. “설마... 자신의 몸을 매개체로 의식을 구현한 것인가.” 준상 역시 정령의 문을 자신의 몸에 이식해서 사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악령의 문 역시 그런 식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준상과 차이가 있다면, 정령들과는 달리 악령들은 산자의 몸을 매개로 현세에 모습을 드러내기가 무섭게 일단 그것부터 차지하려고 들었다는 점이었다. 지금 저렇게 악령의 사제가 꿈쩍도 않고 있는 것은, 그 내면에서 몸을 차지하려는 악령들과 그들을 제어하여 힘을 얻으려는 사제가 싸움을 벌이고 있는 탓은 아닐까. 그런 추측들을 떠올린 준상은 이것이 좋은 기회임을 의식했다. 높은 방어력과 물리 저항력을 지닌 자신에게조차 부상을 입힐 정도라면, 악령인지 악령들인지 모를 저 존재의 공격을 일반적인 방법으로 막아낼 수 있는 수단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적어도 지금의 준상처럼 저주 저항을 극단적으로 높이지 않는 이상은 말이다. 준상은 일단 거리를 좀 더 띄운 다음 정령과 엘리멘탈 드래곤을 소환했다. “리체스.” “네.” “나에게 썼던 것은 단순한 빛이었나?” 준상의 질문을 바로 이해한 리체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정확히는 태양광을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것이지만, 빛의 정령이라면 원하시는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 거에요.” “그렇군.” 준상은 리체스에게 그와 같은 설명을 듣자 곧바로 엘리멘탈 드래곤에게 빛의 정령인 반딧불이를 합체 시켰다. 그러자 작은 요정용의 몸체가 은은하면서도 환한 빛을 뿜어내며 어두운 신전 최하층을 밝히기 시작한다. -UuuuUuuUUu... 요정용이 빛의 정령과 결합하자, 악령의 사제를 감싸고 있던 검은 기운은 인간의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기이한 울림을 터뜨리며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석상처럼 굳어 있던 악령의 사제는 몸을 뒤덮고 있던 검은 기운이 빛의 정령이 내뿜는 빛에 흔들리자 그제서야 한 백 년은 기름칠을 안 한 양철 인형처럼 꿈틀거렸다. “누... 누구냐...” 쇳소리가 하나 가득 묻어나오는, 그런 까끌거리는 목소리로 악령의 사제 크론바스는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래서 준상은 대답을 해 주었다. 엘리멘탈 드래곤이 뿜어내는 찬란한 빛의 분출로 말이다. 작은 요정용의 입에서 뿜어져 나온 빛은 마치 레이저처럼 뻗어 나가 크론바스의 몸에 직격했다. 물리적인 수단으로는 피할 도리가 없는 강렬한 빛의 홍수에 직격되자 크론바스는 손을 내저으며 비명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끄아아아악!” -UUuuuuUUuUUuuUuuu... 크론바스와 그 몸에 빙의된 악령들은 동시에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치더니 일단 몸을 피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자 지켜보던 리체스가 기다렸다는 듯이 마법 하나를 발동했다. “펼쳐져라, 찬란한 무지개의 요람이여!” 리체스의 말과 함께 최하층의 석실 안은 아름다운 무지개빛으로 가득 차 버리고 말았다. 크론바스는 이제 사방에서 아름다운 자연의 빛이 쏟아지기 시작하자 감당하기 어려운지 손을 마구 내저으며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러대고만 있었다. 준상은 그 모습을 보며 리체스에게 물었다. “악령이란 것이 원래 저렇게 빛에 터무니없이 약한가?” 리체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강한 놈들은 빛을 오히려 어둠으로 먹어치우기도 하지만, 이놈들은 그리 강한 악령이 아닌 것 같아요. 정령으로 치면 최하급들이 엄청나게 우글우글 모여 있는 듯한 느낌?” “그렇군.” 이렇게 되면 마수 보드 리델의 존재가 마음에 걸린다. 원래부터 이 사막의 신전 안에 살던 존재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생각하기에도 너무 압도적으로 강한 능력을 보유한 탓이다. 뭔가 찜찜한 느낌이 들긴 했지만, 준상은 마치 비급 호러 영화에 등장하는 흡혈귀처럼 쏟아지는 빛에 의해 점차 신체가 타들어가는 크론바스를 향해 다가가며 다시금 마검 어나이얼레이터를 뽑아 들었다. 준상이 다가서자 악령은 다시금 어둠의 낫을 뻗어 준상을 공격했다. 하지만 주위에서 쏟아지는 빛에 의해 타들어가고 있던 악령의 기운은 준상의 몸에 별다른 타격을 주지 못했다. 기운 자체가 약해진 탓도 있고, 준상이 시드 구성을 교체함으로서 저주 속성에 대해 거의 면역에 가까운 방어력을 가지게 된 것도 한 가지 이유였다. 악령의 저주가 자신의 몸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확실히 인지한 준상은 이제 거리낌 없이 고통에 몸부림치는 크론바스에게로 다가가 검을 치켜들었다. “자, 잠깐... 살려...” 크론바스는 손을 허우적거리며 쇳소리 가득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지만, 준상은 마검을 휘둘러 단칼에 그의 목을 쳐내고, 이어서 악령의 구슬이 박혀 있는 가슴을 베어냈다. 목이 잘려 나가고, 이어서 악령의 구슬이 크론바스의 몸에서 떨어져 나오자 그의 몸에 달라붙어 있던 악령들은 소름끼치는 비명소리를 터뜨리며 빛 속에서 흩어지며 사라져 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검신을 통해 인간의 뼈와 살이 잘리는 소름끼치는 감각이 타고 올라오더니 일순 준상의 신경을 마비시킬 듯한 강렬한 쾌락을 던져주며 사라졌다. “으음...” 준상은 자신도 모르게 가볍게 몸을 떨다가 곧바로 인벤토리에 붉은 빛을 발하는 마검을 던져 넣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준상의 눈앞에 퀘스트 완료의 메시지가 나타났다. 준상은 일단 퀘스트 정보를 시야 옆으로 치워버린 다음, 임서윤에게 메시지를 넣었다. 정산 등의 메시지가 쏟아지는데다 곧바로 10초의 카운트 다운이 시작될테니 지구로 돌아간 뒤에야 메시지를 확인할 수 있겠지만, 당분간 만나기 어려울지도 모르니 일단 지금 미리 말해둘 필요가 있었다. ‘잠시 지방에 다녀오겠다.’ 그렇게 메시지를 적어 보낸 다음 느긋하게 퀘스트 보상을 알아보려는데, 문득 발밑이 거칠게 흔들리기 시작한다. 우르릉! 마치 천둥이 치는 듯한 소리가 한 차례 울려 퍼지더니, 거대한 지진이 휘몰아치는 것처럼 잊혀진 사막의 신전은 마구 요동쳤다. 이런 상황에서라면 차라리 10초의 대기 시간을 가진 쪽이 편하다. 무너지거나 말거나 곧바로 전송이 이루어져 이 난리로부터 즉각 벗어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려 이십분이나 되는 대기시간을 가지고 있는 준상은 그렇지 않다. “젠장...” 준상은 혀를 차며 우선 목이 잘려 쓰러진 크론바스의 시체에 다가가 그 옆에 떨어져 있는 악령의 구슬을 염동력으로 회수한 다음 리체스에게 말했다. “이리와!” “네, 넷!” 리체스는 미친 듯이 요동치는 주위 모습을 보며 겁에 질려 있다가 준상이 부르자 얼른 그의 어깨에 자리를 잡았다. 그녀가 어깨 위에 자리를 잡자, 준상은 다른 모든 정령과 엘리멘탈 드래곤을 역소환한 다음, 수호자 콤보로 교체하기가 무섭게 출구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렸다. ============================ 작품 후기 ============================ 77페스티벌 1등 통보 받았습니다. 모두 아껴주신 여러분 덕분입니다. 새해에도 더 열심히 약을 빠는 무간진이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빨갛게 피어난 N표시 하나가 달가운 바람에 얼굴을 내밀어 아무 말 못했던 이름도 몰랐던 지나간 날들에 눈물이 흘러 차가운 악플 속에 숨어 있다 한줄기 추천에 몸 녹이다 그렇게 연참은 또 한번 내게 온다 좋았던 기억만 그리운 마음만 니가 떠나간 그 길 위에 이렇게 남아 서 있다 잊혀질 만큼만 괜찮을 만큼만 약빨 머금고 기다린 연참 끝에 다시 나를 피우리라 연참은 피고 또 지는 타버리는 약빨 흘린 박카스에 젖을까 두 눈을 감는다 어리고 작았던 나의 맘에 눈부시게 빛나던 약빨 속에 그렇게 너를 또 한번 불러본다 좋았던 기억만 그리운 마음만 니가 떠나간 그 길 위에 이렇게 남아 서 있다 잊혀질 만큼만 괜찮을 만큼만 약빨 머금고 기다린 연참 끝에 그때 다시 나는 메말라가는 입술 위에 온몸이 타 들어가고 내 손끝에 남은 너의 약빨 흩어져 날아가 떨어져 가는 약통을 다시 채우지 못해 아프다 연참할 만큼만 광참했던 만큼만 먼 훗날 너를 데려다 줄 그 날이 오면 연참을 향해 나 달리리라 00177 트롤러 ========================================================================= 쿠르르릉! 달려가는 그의 눈앞으로 천장을 떠받치고 있던 거대한 기둥이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준상은 거리를 가늠한 다음 어둠의 정령을 이동시켜 기둥이 떨어지는 위치에서 빠르게 벗어났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최하층과 윗층을 연결하는 계단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극심하게 흔들리며 모래 먼지를 흩뿌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준상은 랑다잘의 분노를 꺼내 양손에 거머쥐었다. 그리고 계단의 입구에 도달하기가 무섭게 위쪽 출구를 바라보며 웨폰 차지를 발동했다. “큭!” 직선으로 달리다가 위쪽으로 급격하게 방향을 바꾸며 거대한 철구를 앞세운 채 포탄처럼 쏘아져 나가자, 가속도와 무게를 지탱하는 준상의 두 무릎에 과중한 부하가 걸리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잠시라도 머뭇거리다가는 무너지는 지하 신전에 그대로 깔리게 될 판이다. 물리 저항력과 방어력이 아무리 높아도, 수천톤의 바위 밑에 깔리면 꼼짝없이 죽을 수밖에 없다. 설령 준상의 신체가 그 무게를 견뎌낸다 쳐도, 토사와 바위 밑에 깔리면 호흡 때문에라도 전송이 이루어지기 위한 이십 분의 대기 시간을 버티어낼 가능성은 매우 희박해진다. 방법이 있다면 정령의 문을 통해 호흡에 필요한 공기를 가져오는 정도겠지만, 이것도 토사에 잘못 파묻혀서 배가 가려지게 되면 만사 도루묵이다. 리체스가 방어막을 펼치고 전송이 될 때까지 버티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그녀가 아무리 하나의 세계를 책임지는 초월자라 해도 이십 분이나 되는 시간동안 머리 위를 짓누르는 수천톤의 무게를 버티어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녀가 온전한 힘을 발휘하는 요정계라면 가능성이 있다. 아니, 요정 결계만 사용할 수 있어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일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곳은 요정계가 아니고, 요정 결계 역시 최근에 충동적으로 사용해 버린 상황이었다. 리체스는 준상의 어깨 위에 앉은 채 최소한의 힘으로 눈앞을 가로막는 먼지를 흩어 준상이 탈출하는데 지장이 없도록 만드는 일과 더불어 방어막을 펼쳐 머리 위로 떨어지는 바위를 막아내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단순히 어깨 위에 앉아 달리는 것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격한 스릴. 리체스는 탄생한 이후 살아온 일만년의 세월 동안 이렇게 손과 발의 말초 신경이 찌릿거릴 정도의 강렬한 긴장감을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일까. 평소라면 웃음을 터뜨리며 속도감을 즐겼을 그녀조차 지금만큼은 입을 다문 채 마법으로 준상의 탈출을 보조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준상은 순식간에 계단 최상부에 도달했다. 하지만 무사히 계단을 뚫고 나오나 싶은 순간, 준상의 머리 위로 천장을 덮고 있던 거대한 바위가 준상과 리체스의 시야를 가리며 무너져 내렸다. “꺅!” 요정인 그녀로서는 도대체 얼마나 큰지 가늠조차 안 되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바위가 머리 위를 뒤덮듯이 떨어져 내리자 천하의 요정 여왕도 그 위압감만큼은 감당하지 못하고 자신도 모르게 준상의 목을 안으며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준상은 다시 한 번 웨펀 차지를 발동하며 떨어지는 넓적한 바위를 향해 뛰어 들었다. 콰앙! 내밀어진 거대한 철구는 천장으로부터 떨어진 바위를 여지없이 박살냈고, 준상은 그 여력으로 높이 뛰어 올랐다가 떨어져 내렸다. “미치겠군.” 상황은 무척이나 좋지 않았다. 준상은 다시 한 번 전속력으로 마수 보드 리델이 있던 광장을 질주했고, 리체스는 그제서야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그녀는 자신이 보인 실태를 깨닫고는 스스로를 책망했다. 준상이 헤네스를 비롯한 다른 모든 소환물들을 돌려보내는 와중에도 자신을 이렇게 데리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녀의 능력을 믿고 있기 때문이 아니던가. 그런데도 이렇게 겁에 질려 있으면 어쩌자는 얘긴가. 리체스는 두 손으로 자신의 뺨을 찰싹 때리고는 전력으로 마법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작은 손이 뻗어지자 준상의 주위에 갖가지 마법진이 화려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어떤 것은 시야를 가리는 자욱한 먼지를 흩어버리기 위한 바람을 만들어내는 마법진이었고, 또 어떤 것은 그들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바위들을 사전에 요격하는 마법이었다. 요정계를 벗어나 마법의 위력이 반감되었다 해서 그녀가 만 년 간 습득해온 지식과 경험마저 반감되는 것은 아니다. 때문에 리체스는 효과적으로 마법을 펼쳐 그들의 앞길을 가로 막는 자잘한 장애물들을 효과적으로 처리할 수 있었다. 이렇게 되자, 그냥도 앞길을 가로 막기 힘든 준상의 질주는 더욱더 그 위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꽝! 앞길을 가로 막던 거대한 바위가 랑다잘의 분노를 앞세운 준상의 돌격에 그대로 박살이 나버렸고, 그것을 끝으로 준상은 마침내 광장을 돌파해 통로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위험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피할 공간을 찾기 쉬운 넓은 곳과는 달리, 이 좁은 통로 안에서는 작은 판단 착오만으로도 꼼짝없이 고립되거나 파묻힐 가능성이 매우 컸다. 준상은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미니맵을 확인해 최적의 경로를 산출한 다음 전속력으로 웨폰 차지를 발동해 통로를 뚫고 나갔다. 리체스는 이 상황이 이전에 미로를 뚫고 나가던 과정과 매우 비슷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만 지금과 차이가 있다면, 그때는 벽과 천장이 마법으로 보호되어 무작정 뚫고 나가도 위험이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아!” 리체스는 그것을 떠올린 순간 한 가지 방법을 떠올렸다. 상황이 달라서 위험하다면, 같은 상황을 만들어 내면 될 것이 아닌가. 보통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뛰어난 마법 실력을 지닌 리체스라면 그것을 가능케 할 만한 능력이 있었다. 리체스는 가용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주위의 벽과 천장에 강화 마법을 걸었다. 준상이 워낙 빠르게 질주하는데다, 마법 능력이 반감된 상태였기에 절대 무너지지 않을 정도로 견고하게 강화하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체스의 마법은 잊혀진 신전의 통로가 급속도로 붕괴되는 것을 효과적으로 저지할 수 있었다. 콰광! 마침내 준상은 두 개의 철구를 든 채 눈앞을 가로 막는 거대한 석상을 박살내면서 신전으로부터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헉... 헉...” 준상이 신전에서 벗어나자, 모래 위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던 신전의 입구는 요란한 굉음과 함께 완전히 무너지며 짙은 먼지를 사방으로 뿜어내었다. “후아아...” 리체스는 얼른 바람의 마법으로 자신들을 향해 날아드는 흙먼지를 흩어 버린 다음에야 어느새 이마 위에 송글송글 맺힌 땀을 손으로 훔쳐 내었다. 어느새 그녀의 얇은 옷을 흥건히 적시고 있는 식은 땀 때문인지, 아니면 신경 속에 남은 긴장감이 이제야 머리 속으로 전달되는 탓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리체스는 지금 이 순간 등골이 오싹하다는 말이 뭔지 실로 만년 만에 처음으로 느끼고 있었다. “괜찮나.”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과부하가 걸린 몸을 추스르던 준상이 그렇게 묻자 리체스는 두 팔로 자신의 몸을 감싸 안고 부르르 떨다가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네! 멀쩡해요!” “다행이군. 후우...” 준상은 리체스의 대답을 듣고는 뜨거운 모래 위에 그대로 벌러덩 누웠다. 그러자 등을 통해 후끈거리는 열기가 몸 안으로 파고 들었지만, 이상하게도 보통은 살이 익어도 이상하지 않을 그 뜨거운 느낌이 굉장히 시원하게 느껴졌다. 드디어 미쳐 가는 건가. 준상은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혼자 피식거리며 웃다가, 묘하게 상기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리체스에게 말했다. “수고했다. 덕분에 무사히 빠져 나올 수 있었다.” “별 말씀을요.” 리체스는 쑥스러워서 몸을 베베 꼬았다. 준상에게 드디어 제대로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았다는 사실이 주는 기쁨과 더불어, 생전 처음 느껴보는 엄청난 긴장감과 더불어 그것을 돌파함으로서 얻은 카타르시스 덕분에 그녀는 지금 문자 그대로 흥분의 도가니 속에 빠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리체스는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준상의 가슴 위에 내려앉아 눈을 감은 채 휴식을 즐기고 있는 준상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렇게 열심히 마법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준상의 얼굴과 몸에는 흙먼지가 땀과 함께 잔뜩 엉겨 있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자신도 아마 그런 모습이 아닐까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예전 같으면 그 불쾌한 느낌을 견디다 못해 애꿎은 보좌관들에게 히스테리를 부렸겠지만, 지금은 준상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작은 행복감을 느꼈다. 그래. 난 이런 느낌을 원했던 거야. 리체스는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가만히 준상의 가슴 위로 몸을 눕혔다. 그러자 가슴 위로 두근거리는 준상의 고동소리가 들려왔다. 그녀가 그렇게 가슴 위에 엎드리고 있을 때, 준상은 눈을 감은 채로 미뤄 두었던 보상들을 확인하고 있었다. 이번 퀘스트 보상은 나중을 위해 수령을 미뤄둔다 해도, 그가 당장 열어봐야 할 보상의 개수는 열한 개나 된다. 이쯤 되면 정말 하나씩 열어보는 것조차 일이 아닐 수 없다. 어차피 전송이 이루어질 때까지는 달리 할 일도 없는 상태니 시간을 절약하는 셈 치면 그 뿐이다. 카드정보 명칭 : 웨펀 차지 레벨 : 1Lv 경험치 : 0 등급 : Rare 분류 : 스킬 성장 : 일반(대) 속성 : 없음 효과 : 손에 무기를 든 채 적에게 돌격하여 현재 공격력의 200% 데미지를 가한다. (쿨타임: 4초) Cost : 20 Seed : 4슬롯 첫 번째 추가 보상 상자에서 나온 것은 바로 웨펀 차지. 미로에서는 물론이거니와 이번 퀘스트 역시 마지막에 웨펀 차지 능력이 없었다면 아마 이렇게 쉽게 빠져 나오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카드정보 명칭 : 헬하운드 레벨 : 1Lv 경험치 : 0 등급 : Uncommon 분류 : 소환 성장 : 조숙(중) 속성 : 불 효과 : 불을 뿜는 지옥의 번견 1개체를 소환합니다. Cost : 15 Seed : 3슬롯 두 번째 상자에서 나온 것은 다름 아닌 헬하운드. 늑대들보다 체구는 작지만 강력한 속성력을 지니고 있는 환수이다. 크림슨 울프 리더와도 대등하게 싸웠던 모습이 인상 깊었기 때문에 예상보다 등급이 낮은 것이 조금 의외이긴 하다. 세 번째 상자를 열자 이번에도 얻은 적이 있는 축복의 성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준상은 상자에서 나온 축복의 성수를 보자 비로소 예전에도 이것을 얻은 적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배부른 얘기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워낙 많은 카드를 지니고 있다 보니 그로서도 가끔은 있다는 사실 자체를 잊을 때가 있다. 준상은 곧이어 네 번째 상자를 열었다. 카드정보 명칭 : 장악 레벨 : 1Lv 경험치 : 0 등급 : Uncommon 분류 : 스킬 성장 : 일반(중) 속성 : 없음 효과 : 강력한 존재감을 퍼뜨려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적들의 공격력을 감소시킵니다. Cost : 20 Seed : 3슬롯 이것은 광견의 위엄과 비슷한 형태의 디버프 스킬이라 할 수 있었다. 확실히 이름 자체가 뭔가 꺼림직한 광견의 위엄보다는 정상적인 느낌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이미 있는 능력을 버리고 스킬 슬롯을 할당해 가며 쓰기에는 뭔가 부족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카드정보 명칭 : 파괴 레벨 : 1Lv 경험치 : 0 등급 : Uncommon 분류 : 스킬 성장 : 일반(중) 속성 : 땅 효과 : 비생명체를 빠르고 강력하게 분쇄합니다. Cost : 20 Seed : 3슬롯 다섯 번째 상자에서 나온 것은 랑다잘의 분노에 붙어있는 시설물 파괴시 위력 증가와 비슷한 느낌의 스킬이었다. 달리 스킬이 없는 상황에서도 재앙이나 다름없었는데, 이렇게 제대로 된 스킬까지 갖추어지면, 이제 어지간한 방어 시설은 준상에겐 별다른 의미가 없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카드정보 명칭 : 포박 레벨 : 1Lv 경험치 : 0 등급 : Rare 분류 : 스킬 성장 : 일반(대) 속성 : 없음 효과 : 1. 상대의 목을 잡아 들어 올려 움직이지 못하게 만듭니다. 2. 10퍼센트 확률로 상대에게 공황 상태를 유도합니다. Cost : 20 Seed : 4슬롯 마검 어나이얼레이터를 얻었던 첫 번째 악령의 문 퀘스트의 마지막 추가 보상 상자에서 나온 것은 포박 스킬의 레어 버전이다. 이전과 다른 점이라면, 일정 확률로 포박된 상대를 공황 상태로 만드는 옵션이 추가 되었다는 정도다. 준상은 여기까지 보상을 확인하고는 전송까지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리체스.” “네?” “돌아갈 시간이다.” “네...” 리체스는 조금 아쉬운 듯한 표정이었지만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용히 역소환을 받아들였다. 그녀가 빛과 함께 모습을 감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준상 역시 한 줄기 빛과 함께 뜨거운 사막의 열기 속에서 사라졌다. 00178 트롤러 ========================================================================= 준상은 여왕의 침실에 다시 돌아오자 곧바로 헤네스와 리체스부터 불러냈다. 헤네스는 다시 소환되자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곧이어 꼬질꼬질하게 흙먼지에 범벅이 된 준상과 리체스의 모습을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놀란 표정이 되었다. “아...” 헤네스는 입술을 깨물며 주먹을 꼭 쥐었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역소환되어 있던 그녀는 알 도리가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대로라면 자신은 언제까지나 준상이 위험에 처해 있을 때 이런 식으로 역소환된 채 그가 다시 소환해 주기만을 기다려야 한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리체스처럼 역소환되기 싫다고 투정을 부릴 수도 없다. 자신이 있으면 그만큼 준상에게 더 부담이 간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헤네스의 모습에 준상은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가슴으로 안으며 말했다. “그런 표정 하지 마라.” “죄송해요...” “괜찮으니까 그만 해.” “네...” 준상은 헤네스의 머리카락이 자신 때문에 먼지 투성이가 된 것을 보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안 그래도 온천에서 몸을 씻다가 퀘스트에 불려 갔는데, 지금의 몰골로는 목욕을 하지 않고 버티기가 힘들기 때문이었다. “씻으러 가자.” 준상는 멀뚱히 자신과 헤네스를 바라보고 있는 리체스를 향해 그렇게 말했다. “네?” 당연한 얘기지만 돌연한 준상의 말에 헤네스와 리체스는 눈이 동그래지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퀘스트에 불려갈 때만 해도 억지로 끌고 가다시피 해서 준상을 데리고 온천에 가지 않았던가. “왜, 싫어?” 준상이 그렇게 말하자 리체스는 무슨 말을 하냐는 듯이 얼른 고개를 가로 저었고, 헤네스는 난처한 표정으로 웃음을 지었다. “가자.” “네.” 셋은 일단 셀라에게 자신들이 돌아왔음을 알린 다음, 곧장 온천으로 향했다. 도둑질도 자꾸 하다 보면 느는 법이라던가. 여전히 부끄러워하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처음처럼 어색한 느낌은 많이 희석된 상태로 세 사람은 온천을 즐겼다. 간단하게 머리를 감고 몸을 닦은 세 사람은 함께 우윳빛 온천 안에 몸을 담궜다. 몸을 씻을 때는 벗은 것이 드러나서 부끄러워 하던 헤네스와 리체스도, 온천 안에 몸을 담그자 어느 정도 몸이 가려진다는 사실 때문인지 쾌활하게 웃으며 장난을 치기 시작한다. 사실 준상이 그럴 마음만 있다면, 이런 온천물은커녕 옷을 꽉꽉 껴입어도 특별한 마법적인 방어를 갖추지 않은 이상 그 안의 내용물 정도는 적나라하게 읽어낼 수 있었다. 실제로 지금도 준상은 둘이 물속에서 장난치는 모습을 지켜보며 초감각을 살짝 발동해 그녀들의 몸매를 말없이 감상하고 있었다. “꺅! 자, 잠깐만요!” “무슨 소리! 받아랏!” 갈색 머리의 소녀는 뭐니뭐니해도 젊음의 상징처럼 맑고 투명하게 빛나는 피부가 가장 큰 매력 포인트였다. 살짝 겁먹은 듯 하면서도,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장난기 넘치는 동그란 눈동자는 걸핏하면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히기 일쑤였지만, 그럴 때마다 준상은 가슴이 아프면서도 정확히 뭐라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감각이 가슴을 쿡 쑤시는 듯한 느낌을 받아야 했다. 어쩌면 그녀가 지닌 친화력의 대부분은 그녀의 성격보다도 그 둥글고 투명한 눈동자가 차지하고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헤네스의 눈은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눈 아래 살짝 자리 잡은 애교살은 그녀가 웃을 때마다 눈 모양을 반달 모양으로 잡아 준다. 그리고 의외로 길고 짙은 속눈썹은 그녀가 화를 낼 때마다 그 눈에 담긴 의지를 더욱 강렬하게 전달해 준다. 오똑하다가 보다는 앙증맞은 콧날을 타고 내려와 도톰한 입술에 이르면, 그 모습을 지켜본 사람은 어느 새인가 재잘거리는 그녀의 입술에 시선을 빼앗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밖에 없다. 둥그스름하면서도 윤곽이 뚜렷한 얼굴선을 따라 목을 따라 내려오면 다른 사람은 볼 수 없는, 오직 준상만이 관람을 허락받은 그녀의 귀여운 몸이 드러난다. 아직 조금 어린 탓에 리체스처럼 확연하게 굴곡진 몸매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손을 가져다 대면 살짝 덮일 정도의 작은 가슴과 그곳에 솟아있는 옅은 빛깔의 돌기가 너무나 상큼하게 느껴진다. 굴곡이 부족하다고는 해도, 들어올 곳은 들어가고 나올 곳은 확실히 나온 몸매다. 그 대표적인 곳이 바로 그녀의 가는 허리. 손을 뻗으면 가볍게 한손으로 감아 안을 수 있을 정도라, 준상은 언제나 그녀를 안을 때마다 이 가늘고 연약한 몸이 부러지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을 떠올릴 정도다. 그에 반해 리체스는 헤네스와는 달리, 완연하게 성숙한 몸매를 지니고 있었다. 푸른 하늘에 비눗방울을 날려 본 적이 있는가. 둥근 비눗방울이 둥실 떠 갈 때, 그 방울 속에 굽이치며 흐르는 연한 무지개의 빛깔. 리체스의 머리카락은 언제나 그런 신비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얼핏 보면 성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다가도, 잠시 시선에서 벗어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장난꾸러기로 변모하는 그녀의 모습은 그야말로 팔색조라는 말이 어울리는 다양한 매력을 품고 있었다. 갸름하면서도 표정이 풍부한 얼굴 안에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조각가가 심혈을 기울여 조각한 듯한 영롱한 눈동자가 자리 잡고 있었다. 헤네스보다 실질적으로 눈이 조금 작기는 하지만, 조막만한 얼굴 때문인지 얼핏 봐서는 그런 차이를 쉽게 느낄 수 없었다. 눈썹은 둥글고 완만하게 자리 잡아 그녀를 성스럽게 보이는데 한 몫하고 있었다. 그녀의 무지개빛 머리카락은 매끈한 등의 곡선을 타고 내려가 부드러운 둔부의 곡선에서 멈춘다. 아직 소녀라는 느낌이 남아 있는 헤네스와는 확연하게 구분되는, 이것이 성인 여성이다라는 느낌의 성숙한 몸매. 특히나 긴 팔 다리와 가는 손가락은 언제나 헤네스로 하여금 부러움을 일으키게 하는 그녀만의 매력 요소라 할 수 있었다. 조금은 느긋하게 헤네스와 리체스가 물장난을 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그의 시선을 느낀 탓인지 조금 머쓱한 표정으로 둘이 다가왔다. 헤네스는 아무리 우윳빛 온천이 몸을 가려 주고 있어도 준상이 뻔히 보는 앞에서 벗은 몸으로 장난을 쳤다는 것이 쑥스러운지 볼을 발그레하니 붉히고 있었지만, 리체스는 조금은 뻔뻔하게 가슴을 쭉 펴며 준상에게 물었다. “엣헴! 예쁘죠?” “...” 헤네스로서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뻔뻔한 발언에 준상은 피식 웃음을 짓고 말았다. 리체스는 그런 준상을 보고서야 자신이 생각해도 좀 뻔뻔했다 싶었는지 헛기침을 하며 말을 얼버무렸다. “크흠! 그러니까... 제 말은...” 하지만 그녀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조금은 덤덤한 듯한 느낌의 대답이 들려왔다. “예쁘다. 둘 다. 무척이나.” “...” 어떻게 생각하면 뭐 저런 멋대가리 없는 말이 다 있나 싶을지도 모르지만, 그 말을 꺼낸 것이 준상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무려 세 마디나 되는 말을 그녀들의 외모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했다는 점에 놀랄 수밖에 없다. 난데없는 준상의 닭살 돋는 말 때문이었을까. 조금은 부끄러우면서도, 조금은 훈훈한 분위기가 세 사람을 감쌀 즈음... 갑자기 불청객이 후다닥 온천 안으로 난입했다. “거기 계신가요!” 모처럼의 좋은 분위기를 훼방 놓은 불청객을 리체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보았다. 그 불청객은 다름 아닌 여왕 보좌관인 셀라였다. “무슨 일이지?” 뜨거운 김이 가득 차 있는 온천 안에 금방이라도 겨울 바람이 씽씽 몰아치지나 않을까 싶을 정도로 싸늘한 목소리가 리체스에게서 흘러나오자, 셀라는 움찔하며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다. 그녀 역시 연애 경험이 없기는 매한가지였지만, 그렇게 연애에 대해 쑥맥인 그녀라도 세 명의 남녀가 알몸으로 욕탕 안에서 서로에게 기대있는 것이 어떤 상황을 의미하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나중에 다시...” 리체스는 얼른 가라는 듯이 셀라를 향해 손을 저어 보였지만, 얼른 뒷걸음질쳐서 사라지려는 셀라를 준상이 불러 세웠다. “잠깐.” “...” 이렇게 되자 셀라는 난감한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리체스가 물러가라는 손짓을 했어도, 준상은 그런 전대 여왕을 한 손에 쥐고 흔드는 사람이니 셀라로서는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얼른 리체스의 기색을 살피니, 그녀는 불만이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으면서도 감히 준상의 말에 반박하거나 하지 못하고 있었다. 준상은 셀라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지?” “그게...” 사실 어지간히 급한 일이 아니고서는 이런 식으로 셀라가 당황한 모습으로 그들을 찾을 이유가 없다. 뭐라해도 그녀는 리체스를 도와 요정계를 실질적으로 이끄는 주역 가운데 한 명이고, 실제로 어지간한 일은 그녀 선에서 알아서 처리될 정도의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셀라가 당황했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 준상은 바로 그 점을 파악하고 그녀를 불러 세운 것이다. 셀라는 리체스의 눈치를 살피다가 불만 가득한 표정을 지은 여왕이 마지못한 듯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서야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하지만 준상은 그런 식으로 중언부언하는 말투를 매우 싫어하는 사람이다. “본론만.” “풉!” 헤네스는 오랜만에 듣는 준상의 본론 타령에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예전에 준상과 처음 만났을 당시의 일이 갑자기 떠오른 탓이다. 하지만 막상 그 말을 듣는 당사자인 셀라는 죽을 맛이었다. 간단하게 설명을 하고 싶어도 문자 그대로 요정계가 생긴 이후 처음 발생한 일을 간단하게 몇 마디 말로 설명하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그, 그러니까... 최대한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 이것조차도 사족이 많다고 느끼는 준상이었지만, 이번에는 중간에 끊지 않고 차분하게 셀라의 말을 기다렸다. “요정들이... 들고 일어났습니다.” “들고 일어나?” 예상치 못한 셀라의 말에, 그때까지 마땅찮은 표정으로 듣고 있던 리체스가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들고 일어나다니? 반란이라도 일어났단 말인가? 하지만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애초에 단체 행동 자체가 안 되는 데다 한데 모아다 놔도 전부 제각각 따로 노는 경향이 있는 요정들이 아닌가. 그런 요정들이 들고 일어나다니. 이제까지 귀찮다는 표정을 짓고 있던 리체스도 요정계가 생겨난 이래로 처음 겪는, 말 그대로 사상초유의 사태에 크게 긴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설마 리체스가 자리를 비운 여파가 이제야 일어난 것은 아닐까. 전대 여왕과 그 수석 보좌관의 분위기를 보고 일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뒤늦게서야 깨달은 준상이 다시 셀라를 향해 물었다. “어째서지?”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있게 마련. 요정들이 전에 없던 일을 벌였다면, 그에 걸맞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떠올린 준상의 질문에 셀라는 난처해 하는 표정으로 잠시 머뭇거리다가 아주 힘겹게 대답했다. “그... 그게...” “말해라.” “초, 초코바를 먹고 싶다고...” “...” 순간 준상은 물론이고 헤네스와 리체스마저 벙찐 표정으로 말을 잊었다. 하지만 셀라의 말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리고?” “자기들도 준상님의 어깨에 타보고 싶다고...” “...” 준상은 자신도 모르게 골치가 아파지는 것을 느끼며 손으로 이마를 짚었고, 리체스는 민망했는지 고개를 돌린 채 딴청을 피우기 시작했으며, 헤네스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눌러 참느라 고생을 해야만 했다. 00179 트롤러 ========================================================================= 과연 요정답다고 해야 하나. 들고 일어났다는 말에 긴장한 표정을 짓고 있던 리체스는 준상의 난감해 하는 모습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시선을 피해야만 했다. 사실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만 하더라도 초코바나 솜사탕이나 과일 샐러드나 그 외의 여러 가지 음식들을 맛보며 얼마나 행복했던가. 오죽하면 만년 동안 허벅지를 찌르며 독수공방한 것은 바로 이런 것들을 위해서가 아니었나 싶은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어깨에 타는 일만 해도 그렇다. 탄탄한 어깨 근육이 자리 잡은 둥그스름한 어깨 위에 타는 것도 나름 스릴이 있긴 하지만, 쇄골의 움푹 들어간 곳에 앉아서 준상의 얼굴에 살짝 머리를 기댄 채 그의 호흡을 느끼며 빠르게 흘러가는 주위의 풍경을 바라보는 행위는 스스로 날개를 파닥거리며 날아다니는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흥분되고 재미있는 일이었다. 게다가 방금 전에 사막의 잊혀진 신전을 돌파할 때는 정말 만년을 살아오면서 처음으로 손에 땀을 쥔다는 말이 뭔지 여실히 깨달을 수 있을 정도로 자극적이고 스릴이 넘치는 일이었다. 히스테리가 좀 있긴 해도 요정 중에서는 그나마 이지적이고 지성적이라 할 수 있는 요정 여왕이 이 지경인데, 철딱서니 없는 다른 요정들이야 말할 것도 없는 일이다. “끙...” 준상이 이마를 감싸 쥐고 앓는 소리를 내자, 웃음을 참느라 눈물마저 찔끔거리고 있던 헤네스는 자꾸만 터져 나오려는 입을 손으로 몇 번이나 막은 다음에야 눈을 내리깐 모습으로 셋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셀라에게 말했다. “다들 어디 있죠?” “벽 앞에 모여 있습니다.” 벽이란 여왕의 거처를 둘러싼 하얀 벽을 의미하는 말이리라. 헤네스는 셀라의 말을 듣자 골치 아픈 표정을 짓고 있는 준상을 향해 말했다. “일단 제가 나가서 그분들의 얘기를 들어 볼게요.” 싸움에서 도움이 되지 못한다면, 이런 일이라도 나서야 하지 않겠는가. 헤네스 스스로는 그렇게 자신의 능력을 조금은 폄하하고 있었지만, 대외적인 사교성이 부족한 준상으로서는 그녀의 존재 역시 리체스 못지 않은 큰 도움이 되고 있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었다. “후... 얘기는 들어봐야겠지.” “그럼 다녀 올게요.” 준상이 고개를 끄덕이자 헤네스는 살짝 얼굴을 붉힌 채 가슴과 하복부를 손으로 가린 모습으로 온천으로부터 일어났다. 리체스 혼자 이곳에 남겨 놓기는 싫었지만, 그녀가 사막의 잊혀진 신전에서 준상에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는지를 생각하면 이 정도의 보상은 주어져도 괜찮지 않을까 싶으며 조금 우울해지려는 마음을 억눌렀다. 하지만 준상은 그런 헤네스의 배려를 간단하게 망가뜨리고 말았다. 헤네스가 온천에서 빠져 나오자 곧바로 그 역시 몸을 일으키더니 돌아선 헤네스의 몸을 번쩍 들어 올려 한쪽 어깨 위에 태운 것이다. “주, 준상씨?” 헤네스는 기겁을 하며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준상은 아직 물 속에 몸을 담그고 있는 리체스를 돌아보며 다시 말했다. “이리와.” 당연한 일이지만 리체스가 그와 같은 일을 거부할 이유가 없다. “네!” 바로 반색하며 폴짝 뛰어 올라 스스로 준상의 어깨 위로 올라갔다. “...” 보통 사람 같으면 아무리 가벼운 체중을 지닌 여인이라도 그런 식으로 뛰어 올라 어깨를 짓누르면 그대로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겠지만, 준상은 별다른 내색을 보이지도 않은 채 헤네스와 리체스를 어깨 위에 태운 모습으로 미끄러운 욕실 바닥을 조심스럽게 걸어 나왔다. “힉!” 셀라는 그들의 모습, 그 중에서도 특히 준상의 벗은 몸을 보고는 기겁하며 얼른 고개를 돌렸다. 물론 그런 식으로 고개를 돌린다고 해봐야 이미 볼 건 다 봐버린 상태. 조밀하고 탄탄한 근육과 함께 여실히 드러난 우람한 남성의 모습이 그녀의 뇌리 속에 너무나 강렬하게 각인되어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준상은 그런 셀라의 상태는 물론이고 자신이 알몸이라는 사실조차 신경 쓰지 않는 모습으로 당당하게 말했다. “나가서 기다려라.” “네넷!” 셀라는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듯이 허겁지겁 몸을 돌려 온천에서 빠져 나갔다. 헤네스와 리체스는 그녀가 도망치듯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까르르 웃었다. 준상의 벗은 몸을 보고 얼마나 당황했을지 능히 짐작이 가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도 가자.” “네!” 준상의 탄탄한 손이 그녀들의 허벅지를 감싸 쥐고는 있었지만, 헤네스와 리체스는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감싸 안으며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동시에 한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작아진 모습이 아니라, 이런 식으로 준상의 어깨에 탈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신들 뿐이라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었다. 준상은 그녀들을 어깨에 짊어진 채 온천을 빠져 나와 그대로 침실로 들어가더니 물에 젖은 그녀들의 몸을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수건을 꺼내 일일이 조심스럽게 닦아 주었다. 헤네스는 물론이고, 관계를 가진 후로 조금은 대담해진 리체스조차 그 부드러운 손길과 시선에 몸둘바를 몰라했다. 준상은 그렇게 일일이 그녀들의 몸을 다 닦아준 다음에야 물의 정령과 바람의 정령을 차례로 불러 남은 물기를 완전히 날려 보냈다. 그리고는 캐비닛을 꺼내 헤네스의 옷가지를 꺼내주었다. 헤네스는 이미 부끄러움이 극에 달해 있었기 때문에 얼른 꺼내주는 옷을 챙겨 입었지만, 리체스는 그런 모습을 보며 조금 부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 역시 헤네스처럼 좀 더 다양한 디자인의 옷을 입어 보고 싶었던 까닭이다. 특히나, 정교한 레이스가 달린 네글리제 같은 것은 평생 그런 것을 입어본 적이 없는 리체스로서는 정말 부러움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준상에게 구해달라고 떼를 쓰면 간단한 일이긴 하다. 하지만 그것도 사실 문제가 있었다. 요정계 밖으로 나가면 요정 결계를 쓰지 않는 이상은 작아진 상태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요정들의 옷은 이런 상황을 대비해서 요정계에서 나는 특별한 소재로 만들어져 있다. 때문에 신체의 크기 변화에 맞춰서 옷의 크기도 자연스럽게 변하는 것이지만 밖에서 만들어진 옷은 그렇지가 않다. 물론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조금 번거롭기는 하지만 리체스가 옷에 일일이 크기 변화의 마법을 거는 것이 바로 그 방법이다. 사실 이 과정은 굉장히 번거롭다. 마법 부여라는 일 자체가 단순히 손 한 번 살짝 얹고 마법을 발휘하면 끝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리체스가 손가락을 입에 문 채 자신의 옷 입는 모습을 부러운 듯이 바라보고 있는 것을 알아차린 헤네스는 준상이 꺼내준 옷 가운데 하나를 그녀에게 내밀어 보였다. “입어 보실래요? 아직 저도 입어보지 않은 옷이에요.” 정확히는 입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지금 그녀가 들고 있는 검은색 레이스로 치장된 네글리제는 일전에 쇼핑을 갔을 때 진세아가 승부용으로 쓰라고 골라준 것이었기 때문이다. 앞이 갈라져서 배꼽이 훤히 드러난 것은 물론이고 입어도 가슴의 굴곡이나 그 안에 숨겨진 것들이 그대로 비쳐 보이는 그런 옷이니, 헤네스로서는 아무리 승부용이라 해도 도저히 입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리체스는 헤네스가 옷을 집어 주자 반색하며 대답했다. “정말... 입어 봐도 돼?” “네.” 리체스는 헤네스가 건네준 네글리제를 얼른 받아서 몸에 걸쳐 보았다. 아무래도 가슴이라든가 세세한 사이즈에 차이가 있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워낙 날씬한 몸매를 가지고 있어서인지 별로 어색해 보이지 않았다. “어때요. 예뻐요?” 가슴이 다 비치는 네글리제를 입은 채 준상에게 자랑하는 모습에 헤네스는 되려 자신이 민망해지는 기분이었다. 여자인 자신이 보기에도 너무나 요염한 그 모습에 헤네스의 마음에는 살짝 후회마저 일어났다. 그러나 막상 가장 감동해야 할 대상인 준상은 그런 리체스의 모습을 흘깃 보더니 지나가는 듯한 말투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괜찮군.” “...” 하긴, 저런 남자였지. 자신도 모르게 헤네스는 안도의 한숨을, 리체스는 약간은 체념한 듯한 한숨을 동시에 내쉬다가 서로의 그런 모습을 보고 다시 쓴웃음을 짓고야 만다. 어쨌거나 그렇게 옷을 챙겨 입자 준상은 헤네스와 리체스를 데리고 여왕의 침실과 바깥을 잇는 통로를 걸어 나갔다. 바깥이 가까워지자, 시끌벅적한 요정들의 목소리가 조금씩 전해져 온다. “우리도 초코바를 먹고 싶다!” “먹고 싶다!” “먹고 싶다!” “우리도 준상님의 어깨를 타보고 싶다!” “타보고 싶다!” “타보고 싶다!” “근데 초코바가 뭐야?” “몰라!” “나도 몰라!” “근데 먹고 싶어!” “내 친구가 그러는데 혀가 녹아버리는 것처럼 맛있대!” “아무리 맛있어도 혀가 녹는 건 싫은데.” “그럼 넌 먹지 마!” “그건 싫어!” “근데 준상님이 누구지?” “몰라!” “넌 도대체 아는 게 뭐니?” “몰라! 몰라! 몰라!” 아직 밖에 나간 것도 아니고 그냥 왁자지껄한 요정들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뿐이었지만, 준상은 그것만으로도 다시 머리 속이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떠드는 소리도 뭔가 통일성이 없고, 아예 초코바가 뭔지 준상이 누군지도 모르는 요정들이 태반인 것 같은 느낌. 아마도 이런 식으로 모여서 떠드는 것 자체를 즐기는 것이 아닐까 싶은 의심마저 들 정도다. “끙...” 헤네스는 다시금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꾹꾹 눌러 참느라 가슴이 아플 지경이었고, 리체스는 그런 요정들의 행태가 너무 민망해서 방금 깨끗하게 머리를 감고 나왔음에도 어쩐지 뒤통수가 다 근질거리는 것 같았다. 마침내 셋이 통로를 완전히 빠져 나와 여왕의 거처를 둘러 싸고 있는 하얀 벽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자, 요정들은 전대 여왕인 리체스를 알아보고 인사를 했다. “여왕님!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어, 근데 여왕님 옷이 이상해.” “안에 뭔가 검은 걸 입었어.” “저게 뭐지?” “이상해!” 리체스는 네글리제 위에 요정 들의 하늘거리는 은빛 옷을 걸쳐 입은 것을 알아보고 요정들이 왁자지껄하게 떠들어 대기 시작하자 그 질서 없는 모습에 다시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는 미소 띤 얼굴로 요정들을 향해 조용히 말했다. “여러분. 입 다무세요.” “합!” 요정들은 어쩐지 얼굴은 웃고 있는데, 눈은 사납게 노려보고 있는 듯한 리체스의 모습과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가 주는 묘한 위압감에 자신도 모르게 두 손을 들어 입을 막았다. 바깥이 아닌 요정계인지라 몸의 크기는 보통의 인간과 다를 바가 없었지만, 몸만 커졌을 뿐이지 하는 행동은 마찬가지였다. 헤네스는 두 손으로 입을 막은 채 눈만 말똥말똥 뜬 채로 자신들을 바라보는 요정들의 모습에 다시 한 번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원하시는 것이 있으시다면 저희에게 부탁하세요. 그러면 이루어질 거에요.” “...” 어쩐지 묘한 마력마저 느껴지는 그녀의 잔잔한 미소와 말투에 요정들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입을 다물라는 리체스의 말 때문에 요정들은 여전히 눈동자만 뒤룩뒤룩 굴리며 전대 여왕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말해봐요.” 그러자 가장 앞에 앉아 있던 요정 하나가 슬그머니 입을 막은 손을 풀었고, 뒤따라 다른 요정들도 조심스럽게 헤네스에게로 다가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말하기 시작했다. 물론 처음에만 그랬다는 얘기다. “초코바! 초코바!” “나도! 나도!” “그리고 어깨도!” “어깨도! 어깨도!” 방금 전까지 여왕의 위엄에 눌려 스스로 입을 막고 있었다는 것도 잊은 채 요정들은 그렇게 구호를 외치듯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순간 준상은 눈앞에 떠오르기 시작하는 수많은 퀘스트 정보를 보며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Sub) 이니의 부탁 ->초코바 주세요. (Sub) 알리에라의 부탁 ->한 번만, 아니 두 번 세 번 태워주세요. (Sub) 유미알레의 부탁 ->태워주면 뽀뽀해줄게요. (Sub) 미네의 부탁 ->초코바! 초코바! 그리고 어깨도! (Sub) 길리의... “끙...” 어쩐지 퀘스트 목록이 갱신되는 것만으로도 골치가 아파져서 관자놀이를 주무르던 준상은 한 가지 묘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갱신되는 퀘스트 목록의 움직임이 전혀 멈추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준상은 얼른 셀라를 불렀다. “셀라.” “네?” “혹시... 다른 곳에 나가 있던 요정들까지 모여들고 있는 건가?” 그러자 셀라는 정말 깜짝 놀랐다는 표정으로 준상에게 대답했다. “앗! 어떻게 아셨어요? 미처 말씀드리지도 않았는데.” “...” 이럴 때는 퀘스트도 안 뜬다. 목욕으로 제법 시간이 흘렀음에도 또 다른 악령의 문 관련 퀘스트가 뜨지 않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당분간은 퀘스트로 인해 전송될 일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준상은 차라리 이 순간만큼은 퀘스트가 날아와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간절한 바램에도 불구하고, 퀘스트 목록은 계속 미친 듯한 속도로 갱신되고 있었다. 열 명에게 키스를 받은 순간, 요정의 은인이라는 칭호가 떴었다. 백 명이 넘어가자, 요정의 연인이라는 칭호가 떴다. 그런데, 지금의 추세를 보면 천 명을 넘어 만 명도 가능할 것 같은 분위기다. 혹시나 싶어 준상은 리체스에게 물었다. “리체스.”“네?” “요정들이 전부 해서 몇이나 되지?”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 “...” 만 년이나 요정 여왕 했던 것 맞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사실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일단 요정들은 단체 행동 자체가 안 되는지라 집계라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종족이다. 사실 리체스가 잠들기 전까지는 그럭저럭 어느 정도 대략적인 통계가 가능했지만, 그녀가 천 년 동안 잠들어 있는 동안 요정계 밖에 사는 요정들의 수가 어떻게 변화했는지 알 도리가 없으니 리체스가 정확한 수를 알지 못하는 건 차라리 당연한 일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예전에 했던 것처럼 요정들에게 퀘스트를 받으려던 헤네스로서도 도저히 감당이 되지 않는 상태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결국 헤네스는 울상이 되어 준상에게 도망 올 수밖에 없었다. “죄, 죄송해요.” 준상은 고개를 저으며 미안해하는 헤네스에게 말했다. “후... 할 수 없군.” 결국 준상은 그녀를 다독여준 다음 스스로 앞에 나섰다. “누구지?” “몰라!” “나도 몰라!” “인간이다!” “혹시 그 준상님이라는 사람인가?” “저 사람 어깨에 타는 게 그렇게 재미있다며?” “탈래! 나도 탈래!” 준상이 앞으로 나서자 요정들은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그의 모습을 호기심 넘치는 모습으로 바라보았다. “조용...” 리체스가 다시 앞으로 나서며 상황을 정리하려 했지만, 준상은 손을 뻗어 그녀를 가로 막고는 광견의 위엄을 발동했다. “우웃!” “뭐, 뭐지?” 요정들이 갑자기 퍼져 나오는 꺼림직한 기운에 놀라 흠칫하며 입을 다물자, 준상은 조용히 그들을 향해 말문을 열었다. “초코바가 먹고 싶은 요정은 이쪽, 어깨에 타고 싶은 요정은 이쪽, 둘 다 하고 싶은 요정은 그 가운데에 줄을 서라!” 그 말이 떨어지자, 요정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서로를 돌아보더니 이내 우왕좌왕하며 준상의 말대로 줄을 서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어디에 줄을 서야할지 몰라 갈팡질팡했지만, 이내 리체스의 지시에 따라 보좌관들이 달려 나가 줄을 세우기 시작하자 어느 정도 질서 정연한 모습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헤...” 리체스는 솔직히 놀라고 있었다. 아무리 초코바가 맛있고 어깨에 타는 것이 재미있다지만, 천방지축인 요정들이 이렇게 줄을 서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는 사실 자체를 믿을 수가 없었던 탓이다. 처음에는 초코바나 어깨 탑승, 이렇게 둘 중 하나만을 선택하는 요정도 제법 있었다. 하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자 어느 한쪽만 선택하기 보다는 둘 다 선택하는 것이 이득이라는 것을 깨달았던 모양이다. 결국 조금 시간이 지나고 줄 세우기가 끝나자, 세 가지 선택지 가운데 오직 둘 다 선택하는 쪽만이 남게 되었다. 요정들이 줄지어 선 채 기대에 가득 차 똘망똘망한 눈으로 바라보는 모습을 한 차례 훑어보던 준상은 맨 앞줄에 셀라가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준상은 얼굴을 찌푸리며 여왕의 수석 보좌관인 셀라를 향해 물었다. “셀라.” “네...” “왜 거기 있는 거지?” 그 말에 셀라는 머뭇거리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그, 그냥... 저도... 타 보고 싶어서요.” “...” “초코바도 먹고 싶고...” “...” “안될까요?” “끙...” 00180 트롤러 ========================================================================= 준상은 자신의 눈치를 살피며 그렇게 말하는 셀라의 모습에 다시 골치가 아파지는 것을 느끼다가, 그녀의 등 뒤에 눈에 익은 인물들이 서 있는 것을 알아 보았다. 그들은 바로 리체스가 요정들 줄 세우라고 내보낸 보좌관과 현직 요정 여왕인 리시스였다. “...” 준상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그제서야 상황을 파악한 리체스가 허리에 손을 척 얹은 채 보좌관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희들... 썩 이리 못 나와!” “하, 하지만...” 보좌관들은 움찔하면서도 눈치를 살필 뿐 움직이려는 기색이 없었고, 중간에 낀 늑대 소녀 리시스만 눈을 말똥거리며 준상을 바라볼 뿐이다. “...” 준상이 리시스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 셀라를 포함한 보좌관들은 얼른 그녀 뒤에 숨었다. “끙...” 이번엔 리체스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나왔다. 과정이나 내막이야 어찌 되었든, 늑대 소녀 리시스의 머리에 서클릿이 끼워져 있는 이상은 그녀가 현직 요정 여왕이다. 아무리 만년간 요정계를 이끌어온 전대 여왕이고, 여전히 실질적으로 요정계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몸이라 해도, 자신이 직접 서클릿을 그녀에게 물려준 이상 여왕의 권위를 훼손시키는 행동은 할 수가 없었다. 리체스가 난감해 하는 모습을 보이자 셀라가 용기를 내어 다시 말했다. “저, 저희도 초코바를 누릴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자 그녀의 등 뒤에 줄지어 숨은 다른 보좌관들도 한 목소리로 외쳤다. “오, 옳소!” “우리에게도 초코바를 달라!” 말이 나와서 얘기지만, 보좌관들은 각자 주어진 역할이 있는지라 정령의 문을 개통하는 작업에 참가할 수 없었고 때문에 다른 요정들에게 초코바를 나누어 주는 일을 도와주기는 해도 그것을 먹어볼 기회가 없었다. 만년동안 리체스의 뒤치다꺼리를 한 것은 팔자니 그렇다 치더라도, 다른 요정들이 다 먹는데 자기들만 못 먹는다는 사실이 어지간히 서운했던 모양이다. “끙...”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이제는 단순히 서브 퀘스트의 일환으로 초코바를 나눠주는 정도에서 끝날 문제가 아니게 되었다. 비록 권좌에서 물러났다고는 하지만 만년 동안 수족처럼 부리던 보좌관들이 자신의 명에 거역하는 초유의 사태에 직면하자 리체스는 정말로 당황하고 말았다. “이, 이 녀석들이...” 금방이라도 활화산처럼 폭발할 것처럼 얼굴이 시뻘개진 리체스를 말린 것은 다름 아닌 준상이었다. “그만...” “하, 하지만...” 리체스는 울상이 되었지만, 준상은 아직 상황 파악이 안되어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는 리시스의 뒤에 숨어서 눈치를 보고 있는 수석 보좌관 셀라를 향해 말했다. “권리라고 했나?” “네!” “그럼 권리에는 그에 상응하는 책임과 의무가 따른다는 것을 알고 있겠군.” “그, 그건...” 셀라가 대답하자 준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그렇다면 각 노동에 대한 보상의 기준을 확립하여 보고하라.” “네?” 이게 무슨 소린가 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셀라를 향해 준상은 조용히 설명했다. “초코바는 원하면 언제든 구할 수 있는 음식이 아니다. 요정의 술 같은 물건과 교환을 하든가, 정령의 문을 개통하는 일에 협력하는 대신 보상으로 지급을 받든가. 이런 식으로 그에 상응하는 무언가가 있지 않으면 곤란하다는 얘기다.” “아...” 다른 요정들은 이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지만, 보좌관들은 오랫동안 요정계를 관리한 경력이 있어서인지 준상의 말을 어느 정도는 이해한 표정이었다. 준상은 요정들을 향해 선언하듯 이렇게 말했다. “일 하지 않는 요정에게 초코바는 없다. 이의 있는가?” “으음...” 다른 요정들은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지만, 그들의 의견을 대표해야할 보좌관들은 별다른 이견을 보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요정계에서 가장 일을 많이 하는 것이 누구인가. 요정 여왕? 아니다. 바로 요정 여왕을 돕는 보좌관들이다. 즉, 준상의 말대로 일이 진행된다면 가장 많은 초코바를 얻는 요정은 바로 보좌관들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다른 의견을 내놓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준상은 보좌관들에게 다시 말했다. “각자 특기인 분야를 조사해 인원을 분류하라. 요정의 술을 잘 만드는 자. 요정의 돌을 잘 찾아내는 자. 마법을 잘 사용하는 요정도 있을 것이고, 정 할 줄 아는 것이 없다면 요정의 가루를 만들어서 교환하든가, 정령의 문을 개통하는 작업에 동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요정들의 직무를 나누고 그 현황을 보고하라. 할 수 있겠나?” 준상의 말에 보좌관들은 일제히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맡겨 주십시오.” 보좌관들의 빠릿빠릿한 대답에 준상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지시를 내렸다. “좋아. 그럼 우선 요정들의 전체 인원수부터 정확하게 조사하여 보고하도록. 초코바를 구하려면 우선 얼마나 필요한지부터 알아야 하니까.” “알겠습니다!” 보좌관들은 눈빛을 반짝이며 준상이 지시한 일들을 처리하게 위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 하하...” 리체스는 보좌관들의 빠릿빠릿한 모습을 보고 어이가 없었다. 자신이 히스테리를 부릴 때도 저런 식으로 눈을 빛내며 움직이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준상은 리체스가 자신을 의미심장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을 모른 척 하며, 요정들 틈에 섞여서 서 있는 현직 요정 여왕 리시스에게 손짓했다. “이리 와라.” 그러자 리시스는 머뭇거리며 준상에게로 다가왔고, 헤네스가 얼른 나와 그녀를 안아 올렸다. “시간이 걸릴테니 일단 들어가자.” “네.” 당연한 얘기지만, 요정의 인원수를 파악하고 특기에 맞게 분류하는 일은 하루 이틀 정도로 간단하게 끝날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나마 요정계가 작은 세계고 요정이라는 종족의 수가 그리 많지 않았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단순히 인원수를 파악하는 일만으로도 해를 넘기고 말았을 것이다. 물론 그래봐야 정신없이 바쁜 건 보좌관들이고 준상이야 그들이 넘겨주는 목록대로 초코바를 구해서 공급하기만 하면 되는 일이지만 말이다. “초코바 공장이라도 하나 사들여야 하나.” 준상이 침실 안으로 들어오며 그렇게 중얼거리자, 리체스가 얼른 반응했다. “초코바 공장이 뭐에요?” “초코바를 만드는 곳.” “오오!” 생각해 보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아니, 아예 설비와 원료를 사들여서 요정계 안에 공장을 만들어 버리는 방법도 있었다. 요정계가 아무리 작은 세계라고는 해도, 공장 하나 짓지 못할 정도는 아니고 전력이나 산업 용수의 문제는 리체스의 마법이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정이 만들어내는 여러 가지 물품의 가치와 비교하면 초코바의 원료 가격 정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설비와 원료를 조달하기 위한 경로를 알아보는 것이지만, 이것도 임서윤에게 맡기면 준상이 굳이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 초코바만 계속 먹이면 효과가 반감될 수 있으니 차라리 공장을 세울 돈으로 이런 저런 다양한 먹거리를 대량으로 구입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런 생각을 떠올리던 준상은 헤네스의 옷자락을 잡고 서 있는 늑대 소녀 리시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번에는 어떻게 간단하게 문제를 해결하고 넘어 갔지만, 만약 인간세상이었다면 이렇게 간단하게 넘어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좀 과장되게 말하자면, 자칫 신구 권력의 대립의 불씨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천진난만한 요정들이 권력 따위에 신경 쓸 것 같지는 않지만, 이번처럼 준상으로 인해 변화가 일어나게 되면 절대로 그런 일이 없다고 장담하기는 힘든 일. 하지만 이 문제를 해결하는 간단한 방법을 준상은 알고 있었다. 바로 새로운 권력의 핵심이 될 수 있는 현직 요정 여왕을 장악해 버리면 되는 일이다. 물론 그렇다고 아직 솜털도 벗지 못한 꼬마를 리체스처럼 어떻게 해 볼 생각은 없다. 준상이 어찌 하지 않더라도 리시스를 맡기기에 적격인 인물이 있다. 바로 헤네스이다. 준상 역시 헤네스가 지금 가지고 있는 고민을 잘 알고 있었다. 이벨류아의 명문가에서 태어난 양갓집 규수라고는 해도, 하나의 세계를 책임지는 요정 여왕과 비교하자면 아무래도 격이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고, 능력 또한 만년을 살아온 요정 여왕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다. 물론 아직 스무 살도 되지 않은 헤네스를 리체스와 직접 비교하는 자체가 말이 안되는 일이긴 하지만, 막상 한 남자를 두고 사랑을 다투는 입장에서는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하고 넘어갈 수가 없는 일이었다. 능력의 문제는 준상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격이 모자란 정도라면 어느 정도 해결이 가능하다. 고래로 자신의 권위나 지위가 부족할 때 그것을 해결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다른 사람의 그것을 빌려오는 것이다. 정략결혼이든, 섭정이든 실행하는 형태는 달라도 결국 본질은 마찬가지. 전직 여왕이 상대라면 현직 여왕의 권위를 등에 업으면 될 일 아니겠는가. 명목상 늑대 소녀 리시스의 후견인은 준상이었지만, 리체스의 부군으로서의 지위가 확립된 이상 그것까지 굳이 손에 쥐고 있을 이유가 없다. 차라리 헤네스에게 그 지위를 넘기고 둘 사이에서 균형자의 역할을 맡는 편이 여러모로 효율적이다. 이것은 사실 너무 앞서가는 일이 될 수도 있겠지만, 만약의 사태란 언제든 존재할 수 있는 법이니 미리 대비해 둬서 나쁠 일은 없었다. “헤네스” “네?” “앞으로 리시스는 네가 책임지고 돌봐 주었으면 하는데, 해줄 수 있겠니?” 헤네스는 깊게 생각하지 않고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맡겨 주세요.” “고맙다.” 준상은 그렇게 상황을 정리하고는 자신을 바라보는 크고 작은 세 여자들에게 다시 말했다. “나는 잠시 정리할 것이 있으니 쉬고 있도록.” “네.” 준상은 침대에 벌렁 누워 휴식을 취하며 아직 열어 보지 않은 보상 상자들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추가 보상 상자 여섯 개는 이미 열어 본 상황. 현재 남은 것은 추가 보상 상자 두 개와 트리플 에스급 보상 상자 두 개, 그리고 레벨 업 보상인 랜덤 카드이다. 준상은 보상 상자를 열어 보려다가 문득 몽몽이가 획득한 상자 생각이 떠올랐다. 곧바로 소환을 실행하자, 곧바로 준상의 눈앞에 빛과 함께 다람쥐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역소환 되어 있는 중에 어느 정도 신체의 회복이 이루어진 것일까. 술에 취해 곯아떨어진 모습은 아니었지만, 아직 완전히 술기운에서 깨어난 것은 아닌지 앞발로 머리를 만지며 비틀거리고 있었다. 꿀물이라도 타줘야 하는 건가. 준상은 비틀거리며 자꾸만 고개를 저어대는 다람쥐의 모습을 피식 웃으며 바라보다가,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듯 보이자 그제서야 명령을 내렸다. “일단 상자부터 꺼내 봐.” 그러자 몽몽이는 주머니에서 자신의 몸과 비슷한 크기의 상자를 불쑥 꺼내 내려놓았다. 보석함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큰 느낌이고, 그렇다고 보통의 상자라고 하기엔 너무 작다. 준상은 일단 초감각으로 상자의 내부를 살폈다. 그러자 안쪽에 씨앗 같은 것이 들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설마, 시드인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상자를 열자, 부드러운 솜 같은 것에 감싸인 씨앗 하나가 들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준상은 곧바로 아이템 확인을 실행해 보았다. 아이템정보 명칭 : 신기루 꽃의 씨앗 레벨제한 : 없음 종류 : 특수 등급 : Unique 효과 : 땅에 심으면 신기루 꽃을 피울 수 있습니다. 설명 : 보일 듯 보이지 않는 그 모습 때문에 신기루라는 이름이 붙은 이 꽃은 오직 주인 된 자에게만 꽃봉오리를 열어 보입니다.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어떤 효과를 지니고 있는지는 씨앗을 심어 꽃을 피운 주인만이 알 수 있습니다. 00181 트롤러 ========================================================================= “유니크?” 준상은 이전에 퀘스트에서 지시하는 숨겨진 고대 유물을 탐색해서 획득한 적이 있다. 그것이 바로 지금 휴대폰을 대신해서 퀘스트나 기타 기능을 이용하도록 만들어 주는 휴대용 인터페이스라는 이름의 물품이다. 때문에 준상은 이번에도 그때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의외로 손에 들어온 것은 신기루 꽃이라는 것을 피우기 위한 씨앗이었다. 더구나 레어급이었던 휴대용 인터페이스와는 달리, 이 씨앗은 무려 유니크급이다. 지금까지 준상이 획득한 유니크 급의 아이템은 모두 두 가지. 그 첫 번째는 피를 갈구하는 마물 블러드서커이고, 또 하나는 절멸자라 불리우는 마검 어나이얼레이터이다. 이 둘의 공통점은 무기라는 것 외에도 엄청난 잠재능력을 지닌 밸런스 파괴 급의 아이템이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 씨앗이 그와 동등한 등급인 유니크라니? 준상은 자신의 손에 들린 씨앗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냥 봐서는 용도를 전혀 알 수 없는, 그냥 어딘가의 이름 모를 식물의 씨앗이 아닐까 싶은 형상이다. 하지만 안목의 능력을 발동한 상태에서 바라보면 휘황찬란한 칠채서기가 뻗어나오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준상은 잠시 홀린 듯이 손에 들린 씨앗을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저으며 다시 씨앗에 대한 설명을 확인했다. 효과란에는 이 씨앗을 땅에 심으면 신기루 꽃을 피울 수 있다고만 나와 있을 뿐이다. 다른 보상 상자도 궁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보다는 과연 이 신기루 꽃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고자 하는 열망이 더 컸다. “리체스.” “네?” 헤네스와 함께 리시스를 데리고 놀던 리체스는 준상이 부르자 곧바로 고개를 돌리더니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나 달려왔다. 만약 꼬리가 달려 있다면 맹렬하게 흔들어 대고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의 느낌으로 반색하며 다가서는 리체스의 모습에 준상은 피식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왜요? 왜 부르셨어요?” 리체스의 되풀이되는 물음에 준상은 바로 용건을 말했다. “근처에 씨앗을 심을 만한 장소가 있겠나? 가급적 다른 이들이 쉽게 다가오지 못할 만한 곳으로.” 준상의 뜬금없는 물음에 리체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렇게 되물었다. “다른 이들이 접근하지 못할 만한 곳이라면, 실내로요?” “음...” 리체스의 질문에 준상은 잠시 고민했다. 아이템 정보에는 땅에 심으라고만 나와 있었다. 단순하게 생각하고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이겠지만, 굳이 흙이 아닌 땅이라고 표현한 것에는 어떤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스치고 지나간다. 만약 그렇다면, 실내 보다는 탁 트인 실외가 나을 지도 모른다. 단순히 꽃 한 송이 피고 마는 것이 아니라 커다란 나무일 가능성도 염두에 둔다면 좁은 실내보다는 가급적 넓은 곳을 선택하는 편이 현명할 것이다. “기왕이면 탁 트인 곳으로.” “흐음...” 준상의 말에 리체스는 다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내 양손바닥을 마주치며 대답했다. “있어요! 마침 딱 적당한 곳이.” “잘됐군. 안내해라.”“네!” 그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자, 늑대 소녀와 놀아주던 헤네스도 얼른 따라 나섰고, 침실 입구에 누워 있던 어미 늑대와 아직 숙취가 안 풀려서 비틀거리던 몽몽이 역시 뒤를 따른다. “...” 준상은 어쩐지 자신이 어미 오리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그런 와중에도 비틀거리는 몽몽이를 집어 올려 어깨에 태운 채 리체스의 안내를 받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리체스가 그들을 안내한 곳은 여왕의 거처에서 조금 떨어진 작은 정원이었다. 여러 세계에서 옮겨다 심었는지 기이한 나무와 화초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는 모습이 상당히 신비롭고 아름다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예전에 잠깐 원예를 한 적이 있어요. 한 백 년 정도 가꾸다가 싫증이 나서 보좌관들에게 맡겨둔 상태죠.” “...” 만 년을 살아온 요정 여왕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시간의 단위가 인간과는 차원이 다르다. 리체스도 말하고 나서야 그와 같은 사실을 새삼 깨달았는지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시선을 돌리더니, 이내 한 곳을 가리켰다. “저 곳이라면 어떨까요?” “어디...” 준상이 바라보자 그곳에는 막 새로운 화초를 심으려고 준비해 두었는지 잘 갈아둔 화단이 자리 잡고 있었다. 고작 씨앗 하나 심기에는 너무 넓다 싶은 느낌이긴 하지만, 기왕 저렇게 잘 준비된 공간이 있는데 굳이 다른 곳을 선택할 이유도 없다. “좋군. 고맙다.” “별 말씀을요. 헤헤...” 준상은 버릇처럼 리체스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준 다음, 화단으로 들어가 손가락으로 적당한 깊이의 구멍을 내고는 그곳에 씨앗을 심었다. 씨앗을 심고 그 위에 흙을 살짝 덮은 준상은 물의 정령인 새벽이슬을 불러 그 위에 물을 살짝 뿌렸다. “그게 무슨 씨앗이에요?” 준상은 몸을 일으키며 헤네스의 물음에 답했다. “신기루 꽃이라는데, 나도 잘 몰라서 확인해 보려고.” “신기루 꽃...” 헤네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서 들어본 것 같기는 한데, 잘 기억이 나지 않는 탓이다. 준상은 씨앗을 심고 화단에서 빠져 나와 잠시 화단을 지켜 보았다. 보통의 식물이라면 아무리 빨라도 싹이 트는 데만 거의 삼사 일은 걸린다. 하지만 지금 준상이 심은 것은 보통의 씨앗이 아니다. 때문에 곧바로 무슨 변화가 있지 않을까 하고 잠시 지켜보았지만, 십여분 정도가 지나도 특별한 변화가 느껴지지 않았다. “후아아암...” 가만히 화단을 지켜보는 일이 지루했는지, 쪼그려 앉은 늑대 소녀 리시스가 하품을 했다. 그러자 그 옆에 앉아 있던 어미 늑대와 몽몽이 역시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벌리고 하품을 한다. 내색은 안하고 있었지만, 리체스와 헤네스도 내심 지루한 기색을 억지로 참고 있는 모습이다. “일단 돌아갈까.” “하지만, 지켜봐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렇긴 하지만...” 준상과 헤네스가 그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문득 리체스가 무언가를 느꼈는지 손가락으로 화단을 가리키며 소리를 질렀다. “주, 주인님!” “응?” 준상은 얼른 리체스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장난이라도 치는건가 싶어 리체스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여전히 경악한 표정으로 손가락마저 덜덜 떨며 화단을 가리키고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일까. 준상은 혹시나 하고 초감각을 발동해 보았다. “헉!” 이번에는 준상도 헛숨을 들이킬 수밖에 없었다. 무언가 엄청난 힘이 화단 안에서 꿈틀거리는 것이 초감각을 통해 전해진 탓이다. 일반적인 감각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하지만 초감각을 발동하는 순간 마치 해일처럼 터져 나오는 그 엄청난 힘이라니! 준상은 통상적인 상식으로서는 설명조차 할 수 없는 엄청난 괴리감에 당황하다가,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다른 이들과 아직도 놀란 표정으로 몸을 떨고 있는 리체스를 데리고 얼른 그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 정도의 힘이 자칫 폭발이라도 하는 날에는 감히 그로서도 모두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었다. 허겁지겁 어느 정도 화단에서 물러나자 그제서야 리체스는 몸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저, 저게 도대체 뭐죠?” “말했잖아. 신기루 꽃이라고.” “신기루 꽃?” 준상의 대답에 리체스는 얼굴을 찌푸리고 잠시 고민했지만, 그녀가 기억을 정리하기도 전에 마침내 변화가 일어났다. 촤차찻! 씨앗을 심은 화단의 흙 위로 기이한 몇 가지 문양이 솟아올라 빠르게 나타났다가 그대로 사라진다. “저건... 마법진인가?” 준상이 그렇게 중얼거리자 리체스는 무슨 소리냐는 듯이 되물었다. “마법진이라뇨? 어디요?” “...” 그 말을 들은 준상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렇게 명확하게 화단 위에서 명멸하고 있는 문양들이 설마 이 요정 여왕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말인가. 힘에 제한을 받는 바깥의 세계라면 몰라도 이 요정계 안에서 그녀는 초월자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존재. 그런 리체스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면, 다른 어떤 존재도 볼 수 없어야 정상이다. 하지만 지금 준상의 눈에는 점점 더 많은 수의 문양들이 더 빠르게 펼쳐졌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혹시 자신이 미친 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떠올리던 준상은 뒤늦게서야 씨앗의 아이템 설명에 들어있던 문구를 기억해 냈다. 오직 주인된 자에게만 꽃봉오리를 열어 보인다. 그 말이 바로 이 현상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떠올리고 있는 와중에도 격렬한 변화는 계속해서 이어졌고, 준상이 뭔가 다른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하늘 위로 거대한 빛의 기둥을 쏘아 올렸다. “우읏!” 문양은 보이지 않는 듯 했지만, 화단에서 뻗어 나오는 빛의 기둥이 지닌 힘의 여파는 알아차린 모양인지 리체스는 얼른 두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준상은 아무래도 더 멀리 벗어나는 편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을 떠올리며, 리시스를 안아 올려 무등을 태우고 헤네스와 리체스의 손을 잡았다. 하지만 그가 미쳐 발걸음을 옮기기도 전에, 뿜어져 나오던 빛의 기둥은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어, 어라?” 리체스는 자신을 향해 뻗어 오던 정체를 알 수 없는 압박감이 갑자기 씻은 듯이 사라지자 얼빠진 표정이 되어 씨앗을 심은 화단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방금 전까지 그렇게 강렬하게 느껴지던 그 모든 것들이 마치 거짓이었던 것처럼, 화단을 감싼 울타리는커녕 그 안에 담겨져 있던 흙덩이 하나도 부서진 것이 없었다. 이마에 흘러내린 땀에 아니었다면, 지루함을 견디다 못해 한차례 격렬한 낮꿈이라도 꾸었나 싶을 정도다. “휴우...” 리체스는 준상이 잡지 않은 다른 손으로 이마의 땀을 닦으며 고개를 돌려 다른 사람들을 살폈다. 헤네스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고, 갑자기 목마가 태워진 리시스는 어리둥절한 와중에도 즐거워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단 하나, 오직 준상만은 마치 석상처럼 굳어진 채 정원 위쪽의 상공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리체스는 준상의 시선을 따라 하늘을 올려다 보았지만, 그녀의 시야에는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헤네스 역시 뭔가 이상하다 싶었는지 손을 이마에 댄 채 하늘을 올려다 보았으나, 그녀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조금 장난스러운 느낌으로 그려진 듯한 느낌의 구름 몇 조각 뿐이었다. “뭔가 있나요?” 리체스가 그렇게 묻자, 준상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게... 안 보이나?” “뭐가요?” “...” 준상은 고개를 갸웃거리는 리체스와 헤네스의 모습에서 그녀들의 눈에 정말로 자신이 보고 있는 저 물체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고개를 들어 다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신기루처럼 희미하게 반짝이는 하나의 거대한 구조물이 자리 잡고 있었다. 전체적인 형태는, 아이템 설명에 나와 있는대로 꽃을 닮아 있었다. 넓게 펼쳐진 여섯 장의 꽃잎. 그리고 그 꽃잎 안쪽에 둥근 화관과 더불어 암술, 또는 수술처럼 보이는, 용도를 파악하기 힘든 길쭉한 막대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꽃잎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화관과 꽃잎 위쪽으로는 원뿔형의 구조물이 꽃받침을 닮은 최상부 구조물까지 탑처럼 솟아 있었다.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활짝 핀 수선화를 뒤집어 놓은 듯한 형상. “신기루 꽃이란 건 그런 의미였나.” 보일 듯 보이지 않는, 지상을 향해 피어 있는 거대한 꽃. 이런 거대한 구조물이 하늘에 떠있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인데, 리체스 같은 초월자조차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완벽하게 모습을 감출 수 있다니. 단순히 놀랍다는 말 정도로 표현하는 것은 이 장대하고 아름다운 구조물에 대한 모욕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후...” 준상은 혹시나 하고 뒤늦게서야 눈을 비볐지만, 자신의 눈앞에 드러난 풍경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축하합니다! :신기루 꽃이 성공적으로 개화되었습니다. 신기루 꽃은 차원의 틈에 숨겨진 성채이며, 요새이며, 또한 안식처입니다. 일반적인 차원의 법칙에서 벗어난 구조물이기에 시간과 장소에 구애 받지 않고 항상 당신의 머리 위에 그 모습을 드러낼 것입니다. 이 장대하고 아름다운 구조물은 당신을 주인으로 받아들이고 섬기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신기루 꽃의 주인으로서 각인의 의식을 치르시겠습니까? (Y/n) _ 준상은 메시지 내용을 보고서야 이 아름다운 구조물을 리체스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 신기루 꽃은 지금 준상이 보고 있는 것처럼 이곳 하늘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준상이 보고 있는 모습은 원래 존재하지 않는, 오직 그에게만 보이는 허상. 그러니 준상의 시각을 훔쳐보지 않는 이상, 아무리 반신급의 초월자인 리체스라 해도 볼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원래 그곳에 없으니 또한 그 어떤 방법으로도 탐지할 수단이 없다. 그야말로 최고의 은신처가 아니겠는가. 준상은 일단 생각을 정리한 다음 메시지에 나와 있는대로 각인의 의식을 치루기 위해 Y를 입력했다. 그러자 그의 발밑에서 빛의 고리 하나가 떠올라 마치 몸 전체를 스캔이라도 하는 것처럼 훑는다. 그 과정에 끝나자 다시 한 번 새로운 메시지가 나타났다. 축하합니다! :각인의 의식이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이제 당신은 스스로 그 자격을 포기하거나 양도하지 않는 이상, 신기루 꽃의 주인으로서의 모든 권리와 자격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특수기능 ‘신기루 꽃’이 개방됩니다. -당신의 위업을 찬양하며 칭호 ‘꽃의 주인’이 부여됩니다. [칭호 상세 정보 확인은 이곳을 누르십시오.] 준상은 일단 칭호 정보부터 확인했다. [꽃의 주인] :신기루 꽃을 소유한 자에게 부여되는 칭호. -효과: ‘꽃의 가호’ 효과가 부여됩니다. -칭호는 획득시 자동으로 효과가 적용됩니다. -이 칭호는 신기루 꽃의 소유권을 유지하는 동안에만 적용됩니다. 꽃의 가호라... 이어서 효과 역시 확인해 보았다. 꽃의 가호 : 꽃의 주인 만이 누릴 수 있는 혜택입니다. -본인, 또는 종속된 소환물이나 펫, 그리고 특별히 지정된 파티원이 회피할 수 없는 생명의 위기에 직면할 경우 꽃 내부로 긴급 전송이 이루어집니다. 단, 긴급 전송이 이루어지더라도 생명의 위기를 유발한 원인 자체가 소멸하는 것은 아니니 주의하십시오. -본인, 또는 종속된 소환물이나 펫, 그리고 특별히 지정된 파티원에 한해 모든 속성의 저항력을 약 5퍼센트 가량 강화시키는 것이 가능합니다. 단, 이 효과는 전투 능력 강화 효과와 함께 사용할 수 없습니다. -본인, 또는 종속된 소환물이나 펫, 그리고 특별히 지정된 파티원에 한해 공격력과 방어력 등의 전투 능력을 각각 5퍼센트 강화시킬 수 있습니다. 단, 이 효과는 저항 강화 효과와 함께 사용할 수 없습니다. “허...” 준상에게는 이미 사망에 이르는 피해를 입었을 경우 최소한의 생명력으로 한 번의 부활이 가능한 불굴의 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이 능력은 한 달이라는 쿨타임을 가지는데다, 그렇게 살아나더라도 위기 자체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얻은 꽃의 가호는 자신만이 아니라 자신에게 속한 존재 모두에게 생명의 위기를 회피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한다. 물론 생명의 위기를 유발하는 원인 자체가 소멸하는 것은 아니라는 내용이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위험 지역을 빠르게 벗어날 수 있다는 것 하나 만으로도 충분히 엄청난 기능이라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비록 수치 자체는 그리 높지 않지만 모든 속성의 저항이나 전투 능력 강화 등의 버프 효과까지 부여하는 것이 가능하다. “과연... 이래서 유니크란 건가.” 준상은 칭호 효과의 확인이 끝나자 새로 생긴 신기루 꽃의 기능을 열어 보았다. 그곳에는 버프 효과를 부여할 인원을 지정하는 기능은 물론이고 신기루 꽃 내부로 통하는 문을 호출하는 기능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준상은 대충 기능을 살펴 본 다음, 곧바로 신기루 꽃 내부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그러자 정원 한 가운데에, 고풍스러운 형상으로 조각된 석문 하나가 느닷없이 모습을 드러냈다. ============================ 작품 후기 ============================ 행복한 새해 되세요. 00182 트롤러 ========================================================================= “꺅!” 불안한 표정으로 화단을 살피던 리체스는 갑자기 눈앞에 석문 하나가 모습을 드러내자 화들짝 놀라며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괜찮나?” 준상이 그렇게 말하며 손을 내밀자, 리체스는 그 손을 잡고 일어나며 말했다. “괘, 괜찮아요. 근데 이건...” “일단은 방금 전 그것의 결과물이라고 해두지.” “아...” 씨앗으로부터 터져 나왔던 엄청난 힘의 여파를 느끼지 못한 채 준상과 리체스가 왜 저러나 싶었던 헤네스는 조심스럽게 문으로 다가가 그것을 살펴보았고, 늑대 소녀 리시스 역시 그런 헤네스를 따라 문의 앞 뒤를 번갈아 기웃거렸다. 준상은 일단 그녀들이 문을 살펴 보도록 내버려 둔 상태로 화단으로 가서 씨앗을 심어 두었던 곳을 살폈다. 하지만 씨앗은 이미 그 역할을 다해 버린 것인지 안목의 능력을 켠 상태로 샅샅이 뒤져 보아도 그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몽몽이까지 불러서 씨앗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두 번 세 번 확인하고 나서야 준상은 문으로 돌아왔다. 리체스는 석문을 살피다가 준상이 다가오자 바로 물었다. “이게... 어디로 통하는 문이죠?” “신기루 꽃.” “...” 리체스는 물론이고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헤네스조차도 준상의 대답이 성의없다고 느낀 것인지 볼을 부풀리며 불만을 표시했지만, 이것만큼은 준상 역시 설명해 주고 싶어도 그것 밖에는 달리 해 줄 말이 없었다. 하지만 의문을 풀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직접 들어가 보면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들어가 보자.” “네!” 준상은 석문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자동문은 아닌 모양인지 석문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미닫이인지, 여닫이인지 조차 알 수 없는, 얼핏 봐서는 차라리 그냥 비석 같은 것이 아닐까 싶은 그런 형상의 문인지라 준상은 잠시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혹시나 하고 문에 손을 가져다 대자, 곧바로 문에서 몇 개의 문자가 빛을 발하며 나타나더니 문의 테두리만 남기고 안쪽의 석문은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렇게 석문이 사라진 공간에는 반투명한 장막 같은 것이 드리워져 있었다. 장막은 뒤쪽에 위치한 화원의 모습이 뿌옇게 비쳐 보이는 한편으로, 바람에 살랑거리는 커튼처럼 가볍게 출렁이고 있었다. “헛!” 리체스는 다시 한 번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순간적이기는 했지만, 상당히 고차원적인 마법의 배열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그녀 혼자 유일하게 느낀 것이다. “왜?” “아, 아뇨. 그냥 좀 놀라서...” “...” 준상은 그런가 보다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천천히 앞서서 그 안으로 걸어들어 갔다. 그가 먼저 장막 안으로 사라지자, 남겨진 이들은 서로 눈치를 보다가 이내 눈을 질끈 감고 안으로 뛰어 들었다. 그리고 리시스를 뒤따르던 늙은 어미 늑대까지 모두 안으로 들어가자 장막 대신 석문이 다시 나타나더니, 그마저도 희미한 신기루처럼 여왕의 정원 안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아...” 리체스는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요정계의 영향에서 벗어난 탓인지 몸이 작아져 버렸지만 그런 것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탄성을 터뜨렸다. 반면 헤네스는 질끈 감은 눈을 뜨자 기겁을 하며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녀는 얼마나 놀랐는지 비명조차 나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이건... 대단하군.” 먼저 들어온 준상 역시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은 그녀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들어오자 마자 그가 가장 먼저 받은 느낌은, 허공을 밟고 서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벽과 천장, 그리고 바닥조차도 마치 유리판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여과 없이 바깥의 풍경을 그대로 비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발바닥에 닿는 느낌만 아니라면, 자신이 그저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떠 있다고 생각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그런 풍경인 셈이다. 준상은 잠시 주위를 흘러가는 요정계의 전경을 바라보다가 눈을 질끈 감은 채 바닥에 주저 앉아 있는 헤네스를 보고는 신기루 꽃의 기능을 확인한 뒤 몇 가지를 실행했다. 그러자 이내 투명하게 비춰 보이던 바닥이 푸른 잔디밭으로 모습을 바꾸었고, 원뿔 모양의 벽은 별이 가득 뿌려진 달 밝은 밤하늘로 모습을 바꾸었다. “헤네스. 눈 떠봐.” “...” 헤네스는 준상의 말에 따라 슬그머니 눈을 뜨더니 이내 바뀐 주위 풍경을 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도, 도대체... 여긴...” 헤네스가 아직도 놀람이 완전히 가시지 않았는지 불안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키자, 리체스가 다가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연구실로 향하는 길에 있는 정원과 비슷한 곳인 것 같아.” “아...” 리체스의 연구실로 가는 정원에는 시각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감각을 혼란시켜 환각을 보게 만드는 정원이 존재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기술의 정교함 같은 면에서는 그녀가 만든 환상 정원 쪽이 훨씬 고차원적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마법에 대해 문외한인 헤네스에게 설명시키는데 그런 것까지 일일이 설명할 필요는 없는 일이다. 준상이 다시 기능을 몇 가지 더 조정하자, 원뿔형의 실내 공간 중앙에 위치해 있던 이중 나선 모양의 계단이 모습을 드러낸다. “가자.” “네.” 준상이 앞장서서 계단 위에 올라서자 나머지 일행들도 그 뒤를 따랐다. 하지만 준상은 계단을 걸어 올라가는 대신, 그들이 모두 올라서자 다시 기능 하나를 실행시켰다. 그러자, 이중 나선의 계단이 천천히 에스컬레이터처럼 움직이기 시작한다. “오옷!” 리체스는 계단이 스스로 움직이자 흥미로운 표정으로 이곳 저곳을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고, 헤네스는 불안한 표정으로 리시스의 손을 꼭 잡은 채 남은 한 손으로는 난간을 꽉 움켜 쥐고 있었다. 일전에 백화점에 갔을 때 이런 식의 움직이는 계단을 타 본 적이 있긴 했지만, 그땐 적어도 지금 보는 것처럼 난간 밑이 까마득한 낭떠러지가 아니었다. 준상은 인터페이스를 통해 신기루 꽃의 기능을 이것저것 살피다가 있는 힘껏 난간을 잡고 있는 헤네스를 보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헤네스.” “네...” “이리 와.” “...” 준상이 부르자 헤네스는 떨리는 발걸음으로 그에게 걸어와 그의 팔을 껴안았다. 여전히 무섭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준상의 탄탄한 팔의 근육이 피부에 와닿자 그나마 조금 마음이 놓인다. 원뿔 모양의 실내에는 지금 이들이 타고 있는 중앙의 이중 나선 계단 외에도 외벽을 크게 타고 지나가는 삼중 나선의 계단 또한 설치되어 있었다. 그 계단 중간 중간에 몇 개의 석문이 설치되어 있는 것을 준상은 어렵지 않게 알아 볼 수 있었다. “내려올 때는 저쪽 계단을 타고 와야겠군.” “...” 준상의 혼잣말에 헤네스는 울상이 되었다. 이렇게 안쪽의 계단을 오르는 것만으로도 무서워 죽겠는데, 훨씬 위태로워 보이는 바깥쪽 계단을 타고 내려올 생각을 하니 그것만으로도 다리가 후들후들 떨릴 지경이었다. 준상은 자신의 팔을 통해 전해져 오는 헤네스의 부드러운 살결을 느끼며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런 식으로 계단을 타고 올라갈 필요 없이 계단 안쪽에 자리 잡은 장치를 이용해 엘리베이터를 타듯이 곧바로 올라가는 방법도 있었기 때문이다. “리체스.” “네?” 리체스는 날개까지 꺼낸 채 난간 안팎을 정신없이 날아다니며 신기루 꽃의 내부를 여기저기 살피다가 준상이 부르자 얼른 대답하며 다가왔다. 작은 요정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반투명한 옷 아래 검은색 네글리제가 살짝 비쳐 보이는 모습이 묘하게 어울린다. 다른 사람은 미처 몰랐지만, 리체스는 네글리제가 마음에 들어서 얼른 마법적 처리를 해둔 상태였다. 준상은 모른 척 시선을 바꾸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리체스를 향해 말했다. “안으로 들어와 있어라. 거의 다 왔다.” “아... 죄송해요. 너무 신기해서요. 헤헤...” “괜찮다.” 거의 다 왔다는 준상의 말에 헤네스는 슬며시 눈을 떴다가 난간 아래로 보이는 까마득한 높이에 놀라며 다시금 질끈 눈을 감았다. 예전에 호텔 최상층의 스위트룸에서 머물 때만 해도 이 정도로 높은 곳이 무섭게 느껴지지는 않았는데, 아무래도 도착하자마자 보았던 까마득한 하늘 위의 풍경에 너무 놀란 탓이 아닐까 하고 헤네스는 생각했다. 헤네스가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동안, 이번에는 정말로 최상층에 도착했다. 발밑의 계단이 바닥과 합쳐지며 멈추자 헤네스는 관성에 의해 잠시 비틀거리다가 다시 한 번 슬그머니 눈을 떴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작은 탄성을 터뜨렸다. 그들이 도착한 최상층은 둥근 중정(中庭)을 중심으로 몇 개의 방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천장은 둥글게 돔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아래쪽처럼 외부의 모습을 비출 수 있도록 되어 있었지만, 추가로 꽃받침의 형태로 이중 격벽이 마련되어 있었다. 중정의 정 가운데에는 물이 담겨진 수반(水盤)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그 규모가 거의 일전에 머물렀던 호텔 풀장의 절반에 육박했다. 수반 가장자리에는 앉아서 쉴 수 있는 의자와 함께 기기묘묘한 화초와 나무들이 배치되어 있었으며, 아래쪽과 마찬가지로 외벽을 따라 나선형으로 계단이 설치되어 윗층에 올라갈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와아...” 헤네스는 예상치 못한 아름다운 실내 환경에 탄성을 터뜨렸고, 그것은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리체스 역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그녀는 이내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는 얼굴을 찌푸렸다. 돌아가는 상황으로 봐서는 앞으로 이곳이 준상의 주된 거처가 될 것이 명백한데, 그렇게 되면 요정계를 벗어난 탓에 작은 요정의 모습 밖에 취할 수 없는 자신으로서는 애정 전선에 치명적인 타격을 받게 됨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뭔가 좋은 방법이 없을까. “우으음...” 그녀가 잠시 고민하는 사이, 준상은 천천히 주위를 돌아보고는 예상보다 훨씬 넓은 실내 공간에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넓은 중정이라든가, 그 가운데 위치한 수반을 보니 로마 시대의 건축물과 비슷한 느낌이다. 위층으로 올라가 보았다. 제법 넓은 것이 단순히 테라스를 넘어서 주거 공간으로 사용해도 충분해 보인다. 아래층으로 다시 내려간 준상은 중정의 넓이를 확인한 다음 한쪽에 컨테이너 하우스를 내려 놓았다. 쇠상자로 만들어진 집의 모습이 다소 이질적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신기루 꽃을 손에 넣은 이상 지금까지처럼 굳이 인벤토리에 컨테이너 하우스를 넣고 다닐 이유도 없을뿐더러, 이것을 여기에 설치해 두면 욕실이나 화장실, 주방 같은 편의 시설을 별도로 설치할 필요도 없어진다. 물론 이곳도 주거 용도로 만들어진 곳이니 욕실이나 화장실 정도는 있겠지만, 아무래도 지금까지 사용하던 형태의 것이 훨씬 편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준상이 컨테이너 하우스까지 꺼내놓는 모습을 보자 리체스는 마음이 급해졌다. 그런 그녀의 눈에 리시스와 그녀의 이마에 씌워진 서클릿이 눈에 들어왔다. “으으음...”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막상 그 방법을 쓰자니 너무 노골적이다 싶은 느낌을 저버릴 수 없다. 사실 그냥 지내는 것이라면 요정 모습으로도 아무 문제가 없다. 사이즈 차이가 문제되는 것은 오직 하나, 밤의 일을 치를 때 뿐이지 않은가. 그러나 리체스는 고민하다가 결국 결단을 내렸다. “저기...” “왜?” 준상이 돌아보자 리체스는 주먹을 불끈 쥐고 이렇게 말했다. “여기에 요정 결계를 설치하면 안 될까요?” “요정 결계? 그거... 한 달에 한 번 밖에 안 되는 것 아닌가?” 리체스는 준상의 말에 바로 대답했다. “말씀대로가 맞아요. 다만... 여왕의 서클릿과 충분한 양의 요정의 돌이 모이면 이 정도 크기의 공간에 반영구적인 요정 결계를 만드는 것이 가능해요.” “흠...” 나쁘지 않은 일이다. 아무리 훌륭한 은신처라 해도 만약의 사태란 건 언제든 벌어질 수 있는 일. 그런 상황에서 이곳에 리체스의 능력을 8할까지 끌어낼 수 있는 요정 결계가 반영구적으로 설치되면 최후의 보루로서의 기능 또한 기대할 수 있다. “괜찮군. 한 번 해봐.” 준상의 허락이 떨어지자 리체스는 안도하며 얼른 크게 대답했다. “네! 맡겨 주세요!” 00183 트롤러 ========================================================================= 리체스의 대답을 들은 준상은 신기루 꽃이 가진 기능 중에 마침 알맞은 것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신기루 꽃에는 총 네 개의 출입구가 존재한다. 이중 하나는 준상이 방금 전에 꽃 안으로 들어왔을 때 사용한 출입구이고, 나머지 세 개는 자주 가는 곳을 지정해 상시 출입이 가능하도록 만들 수 있었다. 이렇게 새로운 준상 만의 은신처가 생기긴 했어도, 요정계는 지구와 이세계 간의 중요한 연결 통로로서 구실하게 될 장소이니 만큼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곳이다. “마침 잘 됐군. 생각 난 김에 그쪽 통로부터 여는 것이 좋겠어.” “네?” 준상은 리체스에게 간략하게 출입구에 대한 설명을 했다. “아, 그런 거라면 연구실 쪽에 만드는 편이 낫겠네요.” “연구실?” “네. 환상 정원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다른 자들이 함부로 들어가기도 어렵고, 저 역시 맡기신 일을 하려면 자주 왕복해야 하니까요.” “그렇군. 좋은 생각이야.” “헤헤...” 준상은 일단 자신이 데리고 있는 모든 소환물들을 꽃 최상층에 모조리 풀어 놓았다. 늑대들부터 시작해서 갖가지 정령, 그리고 몽몽이와 엘리멘탈 드래곤, 헬하운드에 이르기까지. 모든 소환물들을 일시에 불러내자 중앙 정원 안이 금새 북적거리기 시작한다. 준상이 갑자기 소환물들을 모두 꺼내놓자, 리시스를 데리고 최상층을 여기 저기 돌아보고 있던 헤네스가 다가와 물었다. “갑자기 무슨 일이라도...” 조금 불안한 표정으로 묻는 헤네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준상이 대답했다. “그런건 아니고. 어쩐지 좀 썰렁해 보여서.” “아...” 헤네스는 그제서야 안도하며 미소를 지었다. “잠시 리체스와 연구실에 다녀올게. 금방 돌아올테니 쉬고 있어.” “네.” 세 번째 악령의 구슬을 리체스에게 건네주는 것을 잊고 있었기 때문에 겸사 겸사 한 번 그녀의 연구실에 다녀올 생각이었다. 단 둘이서만 간다는 말에 헤네스는 살짝 불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준상은 이중 나선의 계단 중앙에 자리 잡은 전송 장치로 리체스와 함께 들어섰다. 이 전송 장치는 단순히 위 아래 층을 순식간에 이동하는 것 뿐만 아니라, 신기루 탑의 요소 요소로 빠르게 이동하는 용도 역시 가지고 있었다. 준상이 전송 장치 중앙에 올라서자 간단한 인증 절차가 먼저 진행되더니 이내 신기루 탑의 구조가 간단한 도해로 표현 되었다. “오오...” 리체스가 흥미로워하며 지켜보는 가운데, 준상은 도해에서 그들이 처음 도착했던 입구 언저리를 손가락으로 선택했다. 이해하기 쉽도록 도해로 표시되어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손가락으로 찍는다고 아무 곳으로나 이동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전송 장치에 탑승한 자가 지닌, 준상이 미리 설정해 둔 사용 등급에 걸맞게 이동이 가능한 곳이 제한되고, 또한 허공 같은 위험한 위치를 선택하면 자동으로 위치가 보정되어 안전한 곳으로 전송이 이루어지도록 되어 있었다. 어쨌거나 이동 장소의 선택이 이루어지자 그곳의 도해가 확대되었고, 확대된 도해에서 이동하고자 하는 위치를 다시 한 번 선택하자 그제서야 전송이 이루어졌다. 신기루가 몸을 감싸는 듯한 신비한 현상과 동시에 준상과 리체스는 순식간에 그들이 도착한 출입구 부근으로 전송되었다. 그들은 곧바로 꽃을 빠져 나와 여왕의 거처로 들어선 다음 환상 정원을 거쳐 연구실로 들어갔다. 연구실 안에 들어서자 준상은 우선 인벤토리에 넣어둔 악령의 구슬을 꺼내 염동력으로 집어 든 다음 리체스에게 그것을 건네주었다. “이걸로 세 개째로군.” “네...” 리체스는 울상이 되었다. 하나 만으로도 만만치 않은 판에 무려 세 개라니. 게다가 아예 꽃으로의 출입구마저 만들어지게 되었으니, 당분간은 꼼짝도 못하고 분신의 제작에만 몰두해야할 판이다. 신체에 닿지 않도록 조심조심 악령의 구슬을 받아 챙긴 리체스는 속으로 한숨을 포옥 내쉬고는 출입구를 만들 장소를 준상에게 알려 주었다. “이쯤이 좋을 것 같아요.” “알았다.” 준상은 인터페이스의 신기루 꽃 기능을 조작해 리체스가 가리킨 장소에 새로운 출입구를 만들었다. 그러자 아까와는 조금 문양이 다른 푸른 빛을 띈 돌로 된 출입구 하나가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문에 손을 대봐.” “네.” 리체스가 문으로 다가가 손을 대자, 석문으로부터 작은 고리가 뻗어 나오더니 단숨에 커지며 그녀의 몸 전체를 훑고 지나갔다. 간단한 인증의 과정이 끝나자 준상은 다시 말했다. “앞으로는 따로 나한테 말 안해도 자유롭게 이 문을 이용할 수 있도록 권한을 설정했다.” “고마워요! 주인님!” 출입구의 설정이 완료되자 리체스는 곧바로 셀라에게 연락을 넣었다. “셀라!” 갑자기 리체스에게서 연락이 들어오자 요정들의 인원수를 파악하고 통계를 내는 일에 정신이 없던 셀라는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네! 말씀하세요.” 리체스는 곧바로 셀라에게 지시를 내렸다. “지금 당장 요정의 돌을 구해와! 챙길 수 있는 만큼 모조리!” “네?” 준상은 리체스가 셀라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한 마디 덧붙였다. “요정의 돌 하나에 초코바 두 개.” “네?” 리체스는 셀라와 얘기를 나누다 말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두, 두 개요?” “그래.” 이 조건은 이전에 아줌마 요정 유니아란과 거래했던 조건인 개당 하나 반 보다 훨씬 나은 것이었지만, 리체스는 미처 그런 내용까지는 알지 못했다. “세, 셀라.” “네?” “요정의 돌 하나 당 초코바 두 개 주신대.” “네에?” 셀라 역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거 하나 먹어 보겠다고 그 난리가 나지 않았던가. 요정의 술이나 요정의 돌과 교환해 주겠다고 준상이 선언하긴 했어도 설마 이런 식으로 통보를 해올 줄이야. “들었어?” 리체스가 묻자 셀라는 정신을 화들짝 차리며 대답했다. “네? 네! 들었어요. 그, 그럼 언제까지...” 셀라의 물음에 리체스는 준상을 돌아보며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어, 언제까지냐고 묻는데요.” 그 물음에 준상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가지고 있는 초코바가 모두 동이 날 때까지.” “...” 리체스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셀라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셀라.” “네.” “내일까지래.” “아, 알겠습니다.” 리체스가 셀라에게 그렇게 말하고 연락을 끊자, 준상은 어떻게 된 일이냐는 듯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리체스는 쑥스러워하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아까 그 조건... 저도 해당되나요?” “...” 준상은 잠시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난감해지고 말았다. 이 먹보 요정 여왕은 초코바를 독차지하기 위해 부하에게 거짓말을 했던 것이다! “아, 안되나요?” 몸을 베베 꼬며 눈치를 살피는 아름다운 요정 여왕의 모습에 준상은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후...” “여, 역시 안 되나요?” 울상이 되어 그렇게 묻는 리체스를 향해 준상은 이렇게 대답했다. “안될 건 없다. 하지만 혼자서 괜찮겠나?” 요정의 돌이야 많이 모아서 손해될 일은 없다. 정령의 문을 개통하는 작업은 물론이고, 꽃의 최상층에 설치하려는 것처럼 반영구적인 요정 결계를 만드는 작업에 반드시 필요한 재료이기 때문이다. 준상의 물음에 리체스는 팔을 걷어붙이며 힘차게 대답했다. “맡겨 주세요!” 리체스는 곧바로 준상을 데리고 자신이 애용하는 온천으로 가더니 마법으로 온천 바닥을 헤집기 시작했다. “...” 뭘 하려고 그러나 싶어 따라왔던 준상은 리체스의 손짓이 허공을 휘저을 때마다 뿌연 온천물 속에서 솟아오르는 영롱한 빛깔의 돌멩이들을 보며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준상은 잠시 아무 말도 못한 채 리체스가 마법으로 요정의 돌을 캐내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이렇게 물었다. “리체스.” “네?” “이 온천... 너 말고 누가 사용하는 거지?” 그러자 리체스는 조금은 수줍어 하는 표정으로 이렇게 대답했다. “저 말고 이 곳을 쓴 사람은 주인님이랑 헤네스, 이렇게 두 뿐이에요.” “만 년 동안?” “만 년 동안.” “...” 준상은 아무 말 없이 리체스가 모아들인, 영롱한 무지개 빛깔을 뿜어내는 돌멩이들을 바라보다가 혹시나 해서 아이템 확인을 실행해 보았다. 아이템정보 명칭 : 여왕의 돌 레벨제한 : 없음 종류 : 보석 등급 : Rare++ 효과 : 저주 저항력 증가. 설명 : 여왕의 돌은 요정의 돌 가운데서도 특히 아름다운 무지개 빛 보석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 보석은 매우 희귀하지만, 사실 효과 자체는 일반적인 요정의 돌과 별다른 차이가 없습니다. 여왕의 돌은 특유의 아름다움 덕분에 장신구 등의 아티팩트를 만드는 용도로 많이 쓰이곤 합니다. 요정의 돌과 마찬가지로 그냥 가지고만 있을 경우에는 저주에 대한 저항력을 높여주는 효과가 있습니다. “...” 이름조차 무려 여왕의 돌이다. 준상은 리체스가 꺼내 놓은 무지개빛 돌멩이들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자신들 역시 이곳을 오래 사용하다보면, 나중에는 준상의 돌이라든가 헤네스의 돌 같은 것도 나오는 것이 아닐까. 그러다가 문득 리체스의 귀에 걸려 있는 붉은 색의 귀걸이가 시야에 들어왔다. “리체스.” “네?” “그 귀걸이... 혹시 이 돌멩이로 만든 거냐?” “물론이죠.” “...” 당연하다는 듯한 리체스의 말에 준상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헤네스에게는 절대 저 돌의 재료에 대해서 말하지 않아야겠다고 말이다. 어쨌거나. 리체스는 온천 속을 샅샅이 헤집어 그 안에 숨어있던 여왕의 돌을 모조리 꺼낸 다음, 그것을 온천물로 깨끗이 씻어서 준상에게 건네주었다. “자, 세어 보세요.” “...” 일만 년 동안 쌓인 것이라 그런지 그야말로 한 아름이다. 준상은 일단 세어 보지 않고 캐비닛을 꺼낸 다음 자루 안에 그것을 담았다. “안 세어 보세요?”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 “왜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 리체스의 모습에 준상은 이렇게 대답했다. “아무리 맛있어도 초코바 하나만 먹으면 질리지 않겠나?” “그거야...” “그러느니 차라리 나가서 네가 원하는 대로 먹을거리를 골라오는 편이 낫지 않을까?” 리체스의 눈이 다시 한 번 반짝 하며 빛났다. “원하는 대로요?” “원하는 대로.” “약속이에요?” “그래.” 준상이 고개를 끄덕이자 리체스는 날아갈 것 같은 표정으로 환호하며 그를 얼싸 안고 그 뺨에 키스를 했다. “고마워요! 주인님!” “...” 과정이야 어찌 되었든, 필요한 만큼 요정의 돌이 모이자 리체스는 곧바로 꽃의 최상부에 요정 결계를 만들고자 했다. 하지만 준상은 조급해 하는 그녀를 말렸다. “잠깐만.” “네?” “그걸 그냥 바로 써버리기에는 좀 아까운 생각이 드는데.” “어째서요?” “그건 특별한 돌멩이잖아.” “...” 준상은 별 생각 없이 한 말이었지만, 리체스는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하긴 요정의 돌이라고 다 같은 요정의 돌은 아니지 않은가. 그녀는 준상이 차츰 자신의 진가를 확실히 깨닫는 듯해서 너무나 기뻤다. “그럼요. 특별한 돌멩이죠. 헤헤...” “그러니 결계는 일단 내일 요정들이 가져오는 돌멩이로 만드는 것으로 하고 그건 아껴 두도록 하자.” “네! 주인님이 원하는 대로 하세요!” 곧바로 신기루 꽃으로 돌아온 준상은 최상층으로 올라가 휴식도 할 겸 미처 열어보지 않은 나머지 보상 상자를 마저 확인했다. 카드정보 명칭 : 끓는 용암 레벨 : 1Lv 경험치 : 0 등급 : Rare 분류 : 소환 성장 : 조숙(대) 속성 : 땅, 불 효과 : 용암의 정령 1개체를 소환합니다. Cost : 20 Seed : 4슬롯 첫 번째 추가 보상 상자에서 나온 것은 그가 용암의 강에서 상대했던 것으로 추측되는 용암의 정령이었다. 레어 급 정령은 마파람에 이어 두 번째. 마파람과 마찬가지로 이 끓는 용암 역시 땅과 불이라는 두 가지 속성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이 상대했던 타락한 정령과 같은 정도의 힘을 지니고 있는지는 확인해 봐야 알 일이겠지만, 정령의 힘이 활성화된 지금의 상태라면 그 정도에는 못 미치더라도 충분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고, 엘리멘탈 드래곤과 합체까지 하게 되면 위력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가 없을 듯 하다. 처음부터 상당히 강력한 카드가 나온 덕분에 준상은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하나 남은 추가 보상 상자를 마저 열었다. 하지만 두 번째 상자에서 나온 것은 언커먼 등급의 포박. 이미 가지고 있는 카드 였기 때문에 준상은 다시 한 번 재선택을 실행했다. 축하합니다! 아이템카드 ‘펫 목걸이’를 습득하였습니다. :마음에 드는 동물을 길들여 펫으로 삼아보세요. -강제로 펫을 만들기 위해서는 해당 동물의 체력이 10퍼센트 이하가 되어야 합니다. -몬스터나 언데드는 펫으로 만들 수 없습니다. -사용자에게 높은 호감도를 지니고 있다면, 체력여부에 상관없이 일정 확률로 펫을 만드는 것이 가능합니다. 단, 이 경우 행운 수치의 영향을 받을 수 있습니다. “펫 목걸이라...” 일전에 몽몽이의 충성도가 100에 도달하면서 동시 소환 가능한 펫의 숫자가 하나 늘어난 상태임을 준상은 되새겼다. 그러고 보니 엘리멘탈 드래곤에게 아직 이름을 지어 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준상은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일일이 엘리멘탈 드래곤이라고 부르기도 뭐한 일이니, 이쯤에서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는 편이 좋지 않을까. 하지만 막상 생각해봐도 좋은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헤네스나 리체스에게 물어볼까 하던 준상은 그냥 엘리멘탈 드래곤이라는 명칭의 앞 두 글자를 따서 ‘엘리’라는 이름을 지어 등록시키는 만행을 저지르고 말았다. 엘리멘탈 드래곤이 자신의 의사를 말할 수 있었다면 대번에 거센 항의를 터뜨렸을 법한 만행을 저질렀다는 자각도 없이 준상은 남은 트리플 에스 급의 보상 상자를 열었다. 축하합니다! 대기시간 ‘5분’을 획득했습니다. :이미 대기시간이 적용되어 있으므로, 여기에 ‘5분’을 추가합니다. 현재 대기시간은 총 ‘25분’입니다. 이제 좀 더 여유롭게 새로운 임무를 대비하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음...” 또다시 대기 시간이 추가 되었다. 하지만 이번에 사막의 잊혀진 신전에서 대기 시간 때문에 위험에 빠졌던 걸 생각하면 무조건 좋기만 한 일로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물론 이건 여전히 10초의 대기시간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배부른 소리로 들릴 수도 있는 일이긴 하다. 사실 잊혀진 신전에서의 일도 몽몽이가 취해서 쓰러지지만 않았다면 신기루 꽃에 대한 것을 보다 빠르게 확인했을 것이고, 그랬다면 그 고생을 할 이유도 없었겠지만 말이다. 준상은 입맛을 다시며 다음 상자를 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상자에서 나온 것은 대기 시간 5분이었다. “쯧...” 스킬 카드라면 재선택이라도 가능하지, 이건 그러지도 못한다. 솔직히 25분이나 30분이나 실질적인 차이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기 때문에 어쩐지 상자 하나를 헛되이 버린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대기시간 추가 메시지를 지우던 준상은 그 밑에 나타나 있던 새로운 메시지 하나를 볼 수 있었다. 축하합니다! 대기시간 ‘30분’을 달성했습니다. :당신은 충분한 대기 시간을 획득했으므로 추가 기능 ‘즉시전송’을 개방합니다. -즉시전송을 선택하면 남은 대기 시간에 관계없이 바로 전송되는 것이 가능합니다. -즉시전송을 사용하더라도 남은 대기 시간이 누적되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이런 거였나...” 삼십 분의 대기 시간을 달성하면 즉시전송이 개방되는 형식이었을 줄이야. 하지만 메시지는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축하합니다! :당신은 처음으로 ‘즉시전송’ 기능을 개방했습니다. -당신의 위업을 찬양하며 ‘빨리빨리’ 칭호를 부여합니다. [칭호 상세 정보 확인은 이곳을 누르십시오.] 00184 트롤러 ========================================================================= 빨리빨리 라니... 하긴 남는 대기 시간 동안 빈둥거리며 그런 생각을 떠올리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이건 좀 너무 노골적인 칭호가 아닌가 하는 생각에 준상은 피식 웃고 말았다. 준상은 곧바로 상세 정보를 확인해 보았다. [빨리빨리] :처음으로 ‘즉시전송’ 기능을 개방한 자에게 부여되는 칭호. -효과: 전송 전에 미리 퀘스트 정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칭호는 획득시 자동으로 효과가 적용됩니다. “이건...” 빨리빨리 라길래 이동 속도 같은 것이 증가하지 않을까 했던 준상은 뒤통수를 맞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전송이 이루어지기 전에 퀘스트 정보를 미리 알 수 있다면, 대기 시간 동안 그에 걸맞는 대비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습지나 사막, 화산 같은 주변 환경에 맞는 시드 세팅은 물론이거니와, 예상되는 전투 양상에 따라 장비 세팅을 미리 다르게 하고 전송이 이루어지자 마자 바로 달릴 수도 있다. 주위를 살피고, 퀘스트 정보를 확인하고, 파티원 유무 등을 확인하는 등의 과정을 거칠 필요조차 없으니 누구보다 빠르게 퀘스트에 진입해서 그것을 클리어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이런 것도 가능했나.” 준상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마지막으로 레벨 업 보상인 랜덤 카드를 확인했다. 축하합니다! 스킬카드 ‘피칠갑(H)’를 획득했습니다 :스킬카드는 카드 슬롯에 장착하여 그 능력을 사용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이 스킬카드는 이미 소유한 카드이므로 재시도가 가능합니다. -랜덤카드를 재시도하시겠습니까? (Y/n) _ “...” 또 피칠갑이다. 그것도 무려 영웅 등급. 어쩐지 한동안 안 나온다 싶더니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칠 줄이야. 에픽 퀘스트를 한 것도 아니고, 무려 랜덤카드에서 영웅급 나온 건 대단한 일이지만 그것이 하필이면 피칠갑일 것은 또 뭔지. 준상은 반사적으로 재시도를 선택하려다가 멈칫했다. 그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콤보 카드의 구성이 불현듯 머리 속을 스치고 지나간 탓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광전사 콤보. 이 콤보는 오직 광폭과 피칠갑, 이 두 가지 카드로만 조합되는 특이한 구성을 가지고 있다. 지금까지 준상이 획득한 콤보 카드의 전례를 살펴 보면, 영웅급 카드 세 장 이상이 조합될 경우 기존의 레어급 콤보를 한 단계 뛰어넘는 영웅급 콤보의 획득이 가능해진다. 게다가 설령 그와 같은 예상이 어긋나더라도 영웅급 피칠갑 카드는 다른 영웅급 카드를 활실히 뛰어넘는 월등한 성능을 가지고 있다. 특히 무려 열 개에 달하는 시드 슬롯은 그 어떤 카드와도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확장성을 보장한다. “으음...” 여기까지 생각이 이어지자, 준상은 결국 내키지 않는 기분을 억누른 채 재시도를 포기하고 말았다. 그러자, 곧바로 새로운 메시지들이 주르륵 시야에 나타난다. 이런 현상이 의미하는 것은 결국 하나 뿐이다. 축하합니다! :콤보카드를 조합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현재 조합 가능한 콤보 카드는 다음과 같습니다. 1. 크림슨드레드 [상세 확인] -콤보 카드 조합을 원하시면 해당 번호를 누르시고, 만약 조합을 원치 않으신다면 n을 누르세요(1/n) _ 역시나 예상대로 새로운 콤보 카드가 떴다. 다만 이전의 획득했던 다른 광전사 콤보와는 달리 얀트훈센이라는 지명이 빠져 있는 것을 보고 준상은 조금 의아한 기분이 들었지만 일단 상세 정보부터 확인했다. 크림슨드레드 -통칭 ‘붉은 공포’. 북방의 광전사들에게 있어 경의와 두려움을 동시에 상징하는 이 단어는 홀로 천 명의 광전사를 상대할 만한 위대한 전사에게만 붙여지는 영광스러운 호칭입니다. 적의 피를 온 몸에 뒤집어 쓴 채, 식지 않은 피로부터 김이 무럭 무럭 솟아나는 그 모습을 보고 두려움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면, 그것은 신이거나 악마 둘 중 하나 뿐일 것입니다. [조합상세] 광폭, 피칠갑, 피칠갑, 피칠갑 (영웅 등급이 세 가지 이상) -효과: 1. 추가 공격력 200퍼센트 증가. 추가 공포 유발 확률 45% 증가 2. 장착중인 모든 갑옷 해제. 3. 모든 물리 공격 스킬의 쿨타임 70퍼센트 감소. 4. 피나 체액을 뒤집어 쓸 경우, 재생률 20퍼센트 증가. 5. 피나 체액을 뒤집어 쓸 경우, 그 모습을 본 적에게 10퍼센트 확률로 공황, 궤주, 전의상실, 공포 가운데 한 가지 상태 이상 유발. (10초마다 재시도, 기본 지속 시간 3초, 중첩 가능) “허...” 역시 영웅 콤보라 그런지 장난이 아니다. 게다가 피나 체액을 뒤집어 쓸 경우 그것을 본 적에게 자동으로 상태 이상이 걸리는 옵션은 어째서 이 콤보 카드의 이름이 붉은 공포인지 여실하게 보여주는 부분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아직 메시지는 끝나지 않았다. 축하합니다! :당신은 처음으로 ‘크림슨드레드’ 조합에 성공했습니다! -당신의 위업을 찬양하며 ‘대지를 석양으로 물들이는 자’ 칭호를 부여합니다. [칭호 상세 정보 확인은 이곳을 누르십시오.] 역시나 최초 조합 성공 칭호가 나왔다. [대지를 석양으로 물들이는 자] :크림슨드레드 조합을 최초로 성공한 자에게 부여되는 칭호. -효과: 추가 재생률 10퍼센트 증가 -칭호는 획득시 자동으로 효과가 적용됩니다. 확인해 보니 효과는 이전의 다른 광전사 조합 성공 칭호와 같음을 알 수 있었다. 이로써 준상이 획득한 영웅급 콤보는 돌아온 미친개와 크림슨드레드, 이렇게 두 가지가 되었다. 돌아온 미친개의 경우 물어뜯기에 특화되어 있는 관계로 일반적인 상황에서 사용하기가 어려운데 반해, 크림슨드레드는 범용성이 훨씬 높은 콤보라는 장점이 있었다. 게다가 새롭게 얻은 영웅급 피칠갑 카드 덕분에 장착 가능한 시드 숫자도 더 늘어났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단순히 콤보 카드가 업그레이드된 것 이상의 효과를 얻게 되었다. 준상은 흡족한 표정으로 보상 확인을 마무리 지은 다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대로 하루 푹 쉴까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내일 돌을 들고 몰려올 요정들에게 줄 보상을 준비하려면 지금 미리 나가서 필요한 만큼의 물건을 사올 필요가 있었다. 일단 초코바라든가 기타 필요한 물품을 사 모은 다음에는 계속해서 전국의 국립 공원을 찾아다니며 정령의 문을 개통하는 작업을 이어가야 하고, 그 작업이 끝나면 비로소 헤네스의 고향인 이벨류아를 방문하는 것으로 계획을 잡았다. 준상은 헤네스와 리체스를 불러 이렇게 물었다. “나가야 될 것 같다. 혹시 쉬고 싶으면 남아서 휴식을 취해도 좋다.” 하지만 둘은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냐는 듯이 바로 고개를 저었다. “같이 갈래요.” “저도요.” 준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바로 갈테니 준비하도록.” “네!” 늑대들을 귀찮게 하고 있던 리시스를 달래서 신기루 꽃에서 데리고 나온 그들은 이내 정령의 문을 빠져 나와 랩터를 타고 한참을 달려 치악산 근처의 도시인 원주로 향했다. 요정들의 숫자를 감안하면 최소한 만 단위는 준비를 해둬야 안심이 되는 상황이라, 준상은 원주 시내의 마트를 샅샅이 훑으며 초코바를 비롯한 달콤한 음식들을 모조리 쓸어 담았다. 랩터의 뒷 화물칸이 가득 찰 정도로 사 모은 다음, 인적이 드문 곳에서 꽃으로 향하는 문을 열고 들어가 그 안에 옮겨 놓고 나오는 식의 행동을 몇 번이나 한 뒤에야 비로소 필요한 만큼의 수량을 구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즐거운 기분으로 쇼핑을 따라 나섰던 헤네스와 리체스였지만, 그와 같은 반복 작업이 계속되자 나중에는 지켜 보는 것만으로도 지쳐서 결국 곯아 떨어지고 말았다. 준상은 그녀들을 꽃의 최상층으로 데려가 재운 다음, 혼자서 치악산을 시작으로 각지의 국립공원을 돌아다니며 정령의 문을 여는 작업에 몰두했다. “자, 시작해라.” “네!” 정령의 문을 여는 작업에 참여하면 초코바가 주어진다는 사실은 이미 요정계에 널리 퍼진 상황이라, 요정들을 불러 모으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참여하고자 하는 요정들이 너무 많은 탓에 셀라를 비롯한 보좌관들이 순번을 정하느라 곤욕을 치러야만 했다. 그런 식으로 첫날에만 치악산과 소백산의 두 곳에 정령의 문을 개통했는데, 준상이 이날 나눠준 초코바의 맛을 본 요정들은 너무나도 달콤하고 고소한 그 맛에 그만 눈이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나는 이제야 진정한 맛의 의미를 알았다!” “그게 뭔데?” “몰라. 말로는 표현할 수 없어.” “쳇. 줄만 잘 섰어도.” “그 얘기 들었어?” “무슨 얘기?” “요정의 돌 하나당 초코바를 두 개씩 준다던데.” “그게 정말이야?” “아까 보좌관들이 그러던데.” “진작 말해줬어야지!” 스님이 고기 맛을 알면 절간에 빈대도 남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하물며 요정들은 그런 식의 계율에도 묶이지 않은 존재. 결국 그날 밤부터 요정계는 물론이고 각지의 요정 마을들까지 요정의 돌을 찾는 일로 인해 일대 소란이 일어나고 말았다. 아름다운 두 여인과 꿀맛 같은 휴식을 취한 뒤 전날 말했던 대로 요정의 돌을 수매하기 위해 방문했을 때, 준상은 자신의 눈앞에 수북히 쌓인 반투명한 구슬의 산에 잠시 넋이 나갔다. 게다가 요정의 돌로 이루어진 산의 뒤에서 눈을 빛내며 일사분란하게 칼로 잰 듯이 줄을 서 있는 요정들의 모습은 제 아무리 준상이라도 흠칫 놀랄 정도로 묘한 압박감마저 풍기고 있었다. “꽤 많군.” 준상의 말에 셀라가 얼른 대답했다. “정확히 1만 2362개입니다.” “...” 이렇지 않을까 예상은 했지만, 실제로 이렇게 많은 양이 쌓여 있는 모습을 보니,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고작 하룻밤 만에 이렇게 많은 양을 모으다니. 요정이 지닌 힘이나 능력에 대해 조금은 판단을 바꿔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다. 그런 생각을 떠올리던 준상은 기대에 찬 요정들의 모습을 다시 한 번 살펴 보았다. 밤을 꼴딱 세운 탓인지, 귀여운 장난꾸러기들의 모습은 간데 없고 다크 서클이 가득한 눈가에 핏발마저 서 있는 모습이 어쩐지 오싹하게 느껴질 정도다. 어제 미리 초코바를 사 놓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모르긴 해도 요정계 최초의 폭동이 일어나지는 않았을까. 준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어제 미리 사놨던 초코바들을 꺼내 놓았다. “대충 삼만 개 정도 될 거다. 우선 앞서 말한대로 요정의 돌 하나당 두 개씩 나눠주도록.” “네!” 보좌관들이 초코바를 나누어주자 그것을 받아든 요정들은 기뻐하며 준상에게 다가와 그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조그마한 요정들일 때는 그냥 귀엽게만 느껴졌었는데, 요정계에서 보통의 인간과 같은 크기로 변한 요정들에게 수없이 키스를 받게 되자 제아무리 준상이라도 조금은 기분이 묘해지는 느낌이었다. 하긴 다크 서클이 잔뜩 끼고 눈에 핏발이 잔뜩 낀 요정들에게 이런 식으로 키스 세례를 받는데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으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한참동안 키스를 받던 준상은 어느 시점에 이르자 새로운 메시지가 뜨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축하합니다! :당신은 만 명의 요정에게서 키스를 받았습니다! -당신의 위업을 찬양하며 ‘요정계의 아이돌’ 칭호를 부여합니다. [칭호 상세 정보 확인은 이곳을 누르십시오.] 아이돌이라니. 준상은 쓴웃음을 지으며 상세 정보를 확인했다. [요정계의 아이돌] :만 명의 요정에게서 키스를 받은 자에게 부여되는 칭호. -효과: 1. 사용자에게 ‘물광’ 효과가 부여됩니다. 2. 이제 요정들은 사용자를 은연중에 흠모하게 됩니다. -칭호는 획득시 자동으로 효과가 적용됩니다 물광이라니. 뽀샤시만으로도 부담스러운 판에 이게 무슨! 준상으로서는 어쩐지 자세한 정보를 확인하고 싶지 않은 효과였다. 하지만, 불행히도 메시지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축하합니다! :당신은 최초로 ‘요정계의 아이돌’ 칭호를 받았습니다! -당신의 위업을 찬양하며 ‘요정 키스의 지존’ 칭호를 부여합니다. [칭호 상세 정보 확인은 이곳을 누르십시오.] “...” 선구자, 그리고 달인 다음은 지존인가. 준상은 이것 역시 상세 정보를 확인했다. [요정 키스의 지존] :‘요정계의 아이돌’ 칭호를 가장 먼저 받은 자에게 부여되는 칭호. -효과: ‘요정의 키스’를 사용하면 상대를 매료시킬 수 있습니다.(단, 1인당 1회만 적용됩니다.) -칭호는 획득시 자동으로 효과가 적용됩니다. 00185 트롤러 ========================================================================= 갈수록 태산이다. 이전에 칭호 효과로 부여되었던 요정의 키스에 아예 매료라는 옵션까지 덤으로 붙어 나왔으니, 이제는 함부로 누군가에게 입을 맞추어 주는 행위도 위험할 지경이다. 뽀샤시에 물광에 매혹에 아이돌에 매료까지...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과는 백만광년쯤 떨어진 개념들이 아닐까 하고 준상은 생각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런 생각과는 달리 요정들이 준상을 보는 눈이 뭔가 묘하게 몽롱해지기 시작한다. “몰랐는데, 어쩐지 좀 멋있어 보이지 않니?” “그치? 나도 그래.” “여왕님은 좋겠다. 저 사람이 맨날 초코바 같은 거 먹여 주겠지?” “네가 초코바를 먹는 모습이 제일 귀여워... 막 이러면서?” “헤헤... 나도 그런 사람 있었으면 좋겠다.” 헤네스와 리체스는 요정들이 속닥거리는 그 소리를 들으면서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느라 고생해야만 했다. 네가 초코바를 먹는 모습이 제일 귀여워 라니. 준상이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며 그런 말을 입에 담는다 생각하니 상상만으로도 그 괴리감이 너무나 자극적이다. 하지만 준상은 자신에 대해 그런 얘기가 오가는 줄도 모르고 얼른 이 볼따구에 와 닿는 요정들의 키스 행렬이 끝나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결국 요정들의 키스는 초코바의 배분이 모두 끝나자 멈추었다. 그러나 그것이 준상의 수난이 끝났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초코바의 맛을 본 요정들이 또 하나의 조건을 상기한 탓이다. 말로만 들었던 초코바가 정말로 이렇게 혀가 녹아 버릴 것처럼 달콤하고 고소한 것이라면, 준상의 어깨에 타는 즐거움 역시 들었던 바대로이리라. 요정들은 그런 생각을 떠올리자 하나 둘 씩 준상을 향해 묘한 열기가 담긴 시선을 보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그들은 알고 있었다. 초코바를 얻기 위해 밤 새워 요정의 돌을 캐야만 했던 것처럼, 저 널찍한 어깨에 타보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는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너무나 천진난만하고 자신이 관심 두는 것 이외에는 아예 신경을 안 쓰는 마음 편한 종족이라 간혹 오해를 받기는 하지만, 요정들은 생각 외로 집요하고 영악한 면까지 갖추고 있는 존재들이다. 결국 요정들의 소리 없는 압박에 눌린 수석 보좌관 셀라가 다시 거처로 돌아가려는 준상의 앞을 막았다. “저기...” “무슨 일이지?” “어깨에 태워주시는 건 어떻게 해야...” “...” 준상은 속으로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만 단위의 요정들을 온 몸에 덕지덕지 붙이고 뛰어다니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어쩐지 암담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음... 그건...” 준상은 그렇게 말하며 셀라의 초롱초롱한 시선을 피하려고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가 그는 보았다. 초코바를 하나씩 잡은 손을 턱 밑에 모은 채 다크서클이 짙게 깔린 커다란 두 눈을 반짝이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만 단위의 요정들을 말이다. “...” 제아무리 준상이라도 이 압박감은 단순히 받아 넘길 수준의 것이 아니었다. 자칫하면 방금 자신이 떠올린 상상이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준상의 두뇌는 민활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건... 일단 정령의 문을 여는 작업에 참여한 요정들부터 순서대로 베풀어 주겠다.” “아...” 정령의 문을 한 번 여는데 동원되는 요정의 수는 약 백 명 가량. 문의 매개체로 사용되는 나무나, 그 주위를 둘러싼 숲의 규모에 따라 가감이 있기는 하지만 대략적인 수는 그 정도이다. 물론 백 명도 결코 적은 수는 아니지만, 그래도 만 단위의 요정들이 단숨에 몰려드는 참사를 맞이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준상의 선언을 들은 요정들은 웅성거리며 자신들끼리 의견을 교환하기 시작했고, 준상은 그 모습을 보며 얼른 그 자리에서 빠져 나왔다. “휴우...” 꽃 안으로 들어오자 헤네스와 리체스가 웃음 띤 얼굴로 그를 다독였다. 사실 정 부담스러우면 그 꺼림직한 기운을 내뿜어 뿌리쳤으면 될 일이다. 하지만 준상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처음 준상을 만났을 때 그 무뚝뚝하던 모습을 아직 기억하고 있는 헤네스는 준상의 이런 변화가 자신으로 인한 것이라는 생각에 나름 뿌듯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자신의 경쟁자가 한꺼번에 너무 많이 늘어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작은 불안감을 느꼈다. 하지만 준상은 자신의 작은 연인이 그런 마음을 지니고 있으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한 채, 리체스를 향해 말했다. “이 정도면 요정 결계를 만드는 데는 부족함이 없겠지?” “당연하죠. 차고 넘쳐요.” “그럼 바로 시작할 수 있겠나?” “물론이에요. 다만 그러려면 리시스를 데리고 와야...” “아, 그랬었지.” 반영구적인 요정 결계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은 충분한 양을 갖춘 요정의 돌과 여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서클릿, 이렇게 두 가지이다. 곧바로 밖으로 나가 리시스를 데리고 들어온 그들은 최상층으로 올라가 요정 결계를 만드는 작업을 시작했다. 요정 결계란, 결국 일정 영역을 요정계와 유사한 지역으로 선언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저 일시적으로 발동하는 정도라면 리체스가 가진 힘 만으로도 충분하지만, 그녀가 있든 없든 반영구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는 힘과 권위가 필요하다. 여기서 힘에 대응하는 것이 요정의 돌이고, 권위에 대응하는 것이 서클릿이다. 리체스는 요정의 돌을 최상층 여기 저기에 가져다 놓고 그것을 보호하며 힘을 끌어내는 마법진을 설치해 숨겼다. 그리고 그 모든 작업이 끝나자 왜 자신이 여기 온 것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늑대소녀 리시스에게 돌아와 그녀가 이마에 쓰고 있는 서클릿에 손을 가져다 대고는, 일반적으로는 알아들을 수 없는 어떤 말을 입에 담았다. 그러자, 곧바로 리시스로부터 작은 파문이 퍼지는가 싶더니 각처에 심어둔 요정의 돌들이 공명하며 그 파문을 키워나갔고, 잠시 웅웅거리는 소리가 이어지기를 반복하다가 어느 순간 하늘을 날고 있던 리체스의 몸이 작은 빛과 함께 인간의 크기로 변화했다. “성공인가?” 가만히 그 과정을 지켜보고 있던 준상이 묻자 리체스는 어느새 이마에 맺힌 땀을 한 손으로 훔쳐내며 싱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네! 보시다시피요.” “수고했다.” “헤헤...” 신기루 꽃의 최상층에 요정 결계를 만드는 작업까지 모두 완료되자, 준상은 곧바로 전국 각지에 정령의 문을 만드는 작업을 이어갔다. 국립 공원을 순회하며 정령의 문을 만들기 위한 적당한 나무를 찾고, 그곳에 마법적인 보호를 두르는 작업을 한 뒤에 요정들을 데려와 문을 개통하고, 뒤이어 작업에 협력한 요정들을 몸에 잔뜩 붙이고 숲을 한 바퀴 도는 그 일련의 일들은 약 일주일간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주왕산을 마지막으로 전국 각지에 정령의 문을 개통하는 작업이 완료되자 그제서야 준상의 강행군도 멈추었다. “이것으로 끝인가요?” “일단은.” “...” 헤네스는 고집스럽게 준상의 강행군에 훈련을 겸해 동참했지만, 일주일이 지난 지금은 몸도 마음도 사실상 녹초가 되어 버린 상태였다. 좀 과장되게 말하자면, 너무 힘들어서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을 정도. “고생했다.” 하지만 준상이 그렇게 말하며 살짝 품에 안아주자 조금은 원망스럽기까지 하던 마음도 아침 햇살에 사라지는 이슬처럼 스르르 사라져 간다. 이 일주일 동안 리체스는 강행군에 동참하지 않았다. 물론 힘들어서는 아니다. 그녀는 그녀 나름대로 할 일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일주일간 준상과 헤네스가 산과 숲을 헤메는 강행군을 계속하고 있었다면, 리체스는 연구실에 틀어박혀 악령의 구슬을 이용해 분신, 또는 아바타라 불리는 무언가를 만드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실로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 반신급에 이른 리체스조차 개념만 정립해 두었을 뿐 직접 시험해 보는 것 자체가 처음이었다. 준상의 어깨에 타며 질주를 즐긴 요정들이 시끌벅적하게 그 흥분되는 경험을 떠들어 대며 정령의 문을 통해 요정계로 귀환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준상은 품에 안겨 있는 자신의 작은 연인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이제 슬슬 때가 된 것 같다.” 갑자기 진지한 준상의 말이 그녀가 기대고 있는 가슴을 통해 울려퍼지자, 헤네스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 보았다. “무슨...” 조금 불안해하는 헤네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준상은 대답했다. “이벨류아.” “아...” 언제고 이런 날이 오지 않을까 생각은 했지만, 막상 현실로 다가오자 헤네스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한 손으로 억누르며 준상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럼... 언제...” “지금 바로는 좀 그렇겠지. 일단 준비해야 할 것도 있고.” “준비요?” 무슨 의도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는 헤네스를 향해 준상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 부모님이나 가족들한테 드릴 선물이라도 좀 사야하지 않겠어?” “...” “이렇게 따님을 예쁘게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라는 뜻으로.” “아...” 직접적으로 표현한 것은 아니지만, 헤네스는 준상의 그 말에서 자신을 되돌려 보내지 않겠다는 의미를 찾아낼 수 있었다. 솔직히 계속 불안했었다. 다시 이벨류아로 가게 되었을 때, 위험하다는 이유로 준상의 곁에서 억지로 떠나보내지는 않을까 하고 말이다. 만약 그렇게 몸이 멀어지면, 준상은 자신을 금방 잊어버리게 되지 않을까. 아름답고 강한 요정 여왕이 옆에 있으니 자신 같은 철부지 어린애는 금방 잊어버리게 되지 않을까. 헤네스가 이 일주일 동안 격렬한 준상의 강행군에 동참한 것은, 자꾸만 머리 속에서 떠오르는 그런 불안감을 떨쳐내기 위한 의도도 있었다. 몸이 힘들면, 그만큼 잡념이 떠오르지 않는 법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밤에 잠이 들 때마다 불안한 상상이 그녀를 괴롭히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괜찮다. 이제는 편안하게 아무 걱정없이 그의 품에 기대어 잠들어도 되는 것이다. 헤네스가 울먹거리며 자신의 품에 얼굴을 묻자 준상은 그녀의 등을 가볍게 쓸어주며 말했다. “자, 일단 오늘은 푹 쉬고, 내일은 쇼핑을 하자. 그리고 모레에는 이벨류아로 가는 거다. 알겠지?” “네...” 준상은 신기루 꽃으로 통하는 문을 열고 헤네스와 함께 그 안으로 들어갔다. 석문을 통과하자, 높고 넓은 공간 안에 우뚝 솟은 두 개의 나선 계단이 눈에 들어온다. 정령의 문을 설치하는 작업도 마무리 지었으니, 이제 이 안도 조금 꾸며 보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을 떠올리며 준상은 이중 나선 형태의 계단 안에 위치한 전송 장치 위에 헤네스와 함께 자리 잡았다. 장치를 조작하자, 둘은 어느 새인가 최상층의 꽃받침 부분에 도달해 있었다. “같이 씻을까?” 준상이 장난스럽게 말하자, 헤네스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이미 몇 번이나 함께 혼욕을 한 경험이 있기는 하지만, 단 둘이서만 몸을 씻은 적은 없기 때문이다. 무척이나 부끄러운 일이었지만, 헤네스는 이것이 기회임을 깨달았다. 모처럼 단 둘이서만 달콤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기회는 흔하게 찾아오는 것이 아니었다. 헤네스가 보일 듯 말 듯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준상은 그녀를 번쩍 들어 공주님처럼 안아 든 상태로 최상층 중앙의 수영장을 닮은 수반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본래라면 최상층의 중앙에는 이중 나선 계단과 전송 장치가 자리 잡아야 하지만, 공간 왜곡이 걸려 있는 것인지 실제로는 계단과 전송 장체가 수반의 한쪽 모서리에 자리 잡은 상태였고, 그 반대편에는 준상이 가져다 놓은 컨테이너 하우스가 놓여 있었다. “주, 준상씨?” 헤네스는 옷도 벗지 않고 곧바로 물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준상의 행동에 당황했지만, 이내 될 대로 되란 심정으로 그냥 가만히 그의 품에 머리를 기댔다. 준상은 허리까지 오는 물 안에 도달하고 나서야 품에 안고 있던 헤네스를 놓아 주고는 천천히 그녀가 입고 있는 옷 위로 손을 가져갔다. 준상의 손이 닿자 헤네스는 이미 몇 번이나 경험해 본 일임에도 불구하고 가슴 속에서 울려퍼지는 고동 소리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손가락이 조심스럽게 움직이며 단추를 풀고, 지퍼를 아래로 내리는 것을 지켜보던 헤네스는 용기를 내어 자신 역시 준상의 옷에 달려 있는 단추로 손을 뻗었다. 물에 흠뻑 젖은 채, 그렇게 조물거리는 손가락들이 서로의 몸을 서서히 달구기 시작한다. 하지만 모든 일이 그러하듯, 좋은 일에는 항상 방해가 따라오는 법이다. 천천히 헤네스의 상의를 벗기고 있던 준상의 시야에 문득 반짝거리는 메시지가 나타난 것이다. 설마 퀘스트인가 싶어 얼른 확인해 보았다. 그러자 느닷없이 시야 한 편에 임서윤의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아! 안녕하십니까?” “...” 순간 준상은 얼굴을 찌푸렸다. 아무리 무덤덤한 그라도 자신의 연인의 모습 위에 실눈을 뜬 남자 모습이 겹쳐 보이는 것은 절대로 유쾌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잠시만.” “네?” 헤네스는 상기된 표정으로 단추를 만지작거리고 있다가, 준상이 얼굴을 와락 구기며 고개를 돌리자 자신이 뭔가 잘못했는가 싶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연락이 들어와서. 먼저 씻고 있어.” “아...” 준상은 조금 실망한 표정의 헤네스에게서 고개를 돌린 다음 수반 모서리로 걸어가며 임서윤을 향해 무시무시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말했다. “무슨 일이지?” “...” 임서윤은 방금 전의 대화를 통해 자신이 아주 좋지 않은 상황에 연락을 넣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로서도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설마 이런 대낮부터 그러고 있을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안 그래도 귀찮아 할까봐 새로 메신저 기능이 개방되고서도 한참이나 일부러 연락을 참고 있었는데, 고르고 골라 연락을 넣은 것이 하필 이런 공교로운 상황이 될 줄은 임서윤도 미처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크흠... 죄송합니다.” 얼른 사과했지만, 준상은 귀찮다는 표정으로 짧게 대답했다. “본론만.” “네...” 임서윤은 몇 번 더 헛기침을 한 다음 준상에게 말했다. “실은, 일전에 맡기셨던 사체 있잖습니까.” 아문간의 사체를 말하는 것인 듯 하다. “그게 왜?” “주문하셨던 방어구가 완성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매입한 시드들도 있고...” 말하는 품이 그 외에도 이런 저런 용건이 있는 듯한 모양새였다. 아무래도 시간이 좀 더 걸리지 않을까 했었는데, 생각보다 빨리 완성된 모양이다. “어디로 가면 되겠나.” 조금 누그러진 준상의 말에 임서윤은 반색하며 대답했다. “저희들은 아직 그 호텔에 그대로 머물고 있습니다.” “알았다.” “그럼, 기다리겠습니다.” “...” 통신을 마치고 돌아보자 헤네스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급한 일인가요?” 준상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리고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작은 연인을 품으로 끌어당기며 촉촉하게 젖은 그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 작품 후기 ============================ 이번 씬은 여기까지만. 여기서 끊고 바로 장면 전환할 예정이니 양해 바랍니다. 00186 트롤러 ========================================================================= 두 사람이 입술을 맞추며 잠시 식었던 분위기를 다시 달구고 있을 때, 준상에게 연락을 넣었다가 다시 한 번 미운 털이 박혀 버린 임서윤은 난처한 표정으로 뒷덜미를 쓰다듬고 있었다. 직접 얼굴을 마주한 것도 아니고 단지 메신저를 통해 서로의 모습과 목소리를 교환했을 뿐인데도 어느 새인가 목덜미에 식은땀이 송글송글 배어 있었다. “이거 참...” 이제는 정말 도저히 따라 잡을 수 없을 정도가 되어 버린 것일까. 임서윤은 입안에 남은 씁쓸한 느낌에 절로 입맛을 다셔졌다. 마침 휴식을 위해 의자로 다가오던 진세아가 물었다. “온대요?” “네.” 진세아는 임서윤의 맞은편에 앉으며 음료수를 한 모금 들이키고는 다시 말했다. “도대체 얼마나 더 강해지려고 호텔에도 안 오고 바깥으로 쏘다니는 걸까요?” 임서윤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글쎄요. 저로서는 알 도리가 없죠.” “하긴.” 준상과 함께 한 퀘스트를 통해 임서윤과 그의 길드원들은 지닌 바 힘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되는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물론 퀘스트 평가는 바닥을 기고 있었지만, 히든 퀘스트 수행을 통한 추가 보상 상자의 습득 덕분에 새로운 카드를 대거 습득한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단 한 번의 파티 플레이 만으로도 이 정도라면, 그를 길드로 끌어 들여 함께 다니게 될 경우 얼마나 큰 이득을 얻을 수 있을까. 솔직히 그런 욕심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불행히도 앞으로도 그런 식으로 도움을 달라고 뻔뻔하게 부탁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사람은 줄곧 그런 식으로 플레이를 하고 보상을 얻어 왔던 거겠죠.” “아마도.” 두 사람은 잠시 말이 없었다. 추가 보상에 대한 것은 그들 역시 모르는 바가 아니었지만, 적극적으로 그것을 찾으려는 노력은 별로 기울인 적이 없다. 보상 하나 때문에 괜히 위험을 무릅쓰고 싶은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준상의 경우에는 아마도 숨겨진 퀘스트를 찾아내는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닐까 싶긴 했지만, 레벨업이든 스킬이든 행동 성과에 따라 주어진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런 능력을 가지게 된 것 역시 충분한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이해하는 편이 옳다. 생각의 차이일 수도 있겠지만, 그런 공격적인 플레이 덕분에 그는 누구보다 강해졌고 또한 누구보다 안전한 플레이가 가능해졌다. 진세아는 풀장 안에서 열심히 체력 단련에 열을 올리고 있는 길드원들을 바라보았다. 아무 것도 못하고 그저 졸졸 따라다니기만 했지만, 준상과의 플레이는 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그 때문에 길드원들은 조금 더 능동적으로 자신의 능력을 개발하는 일에 몰두하는 중이었다. 무엇이든 간에 목표나 기준이 있으면 그만큼 일이 쉬워지는 법이다. 임서윤의 길드원들에게 있어 준상은 그런 기준점이 되어 가고 있는 셈이다. 어쨌거나 그렇게 다시 하루가 지나자, 준상은 연구실에 처박혀 있는 리체스를 불러 앞으로의 일정을 알렸다. 헤네스의 고향에 다녀올 것이라는 준상의 말에 리체스는 조금 씁쓸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어차피 아직 연구도 계속해야 하니까, 전 남아 있을게요.” “미안하군.” “괜찮아요. 억지로 끼어든 건 제 쪽이니까, 이 정도는 감수해야죠.” “...” 준상마저도 이런 여자가 어째서 만년 동안이나 독수공방을 한걸까 싶은 생각을 가끔 떠올린 적이 있을 정도의, 능력과 외모를 두루 갖춘 여자가 바로 리체스이다. “그리고...” “말씀하세요.” “일전에 괴물들의 사체를 이용해서 방어복을 두 벌 가량 만들고자 한 적이 있다. 그것이 완성된 모양인데, 가지고 오면 간단하게 몇 가지 쓸 만한 마법을 좀 부여해 보고 싶다. 가능할까?” 리체스는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바로 대답했다. “그 정도라면 어렵지 않아요. 물론 얼마나 좋은 물건이 될 지는 물건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요.” “고맙다.” “별 말씀을요.” 리체스와의 대화를 마친 준상은 비로소 대강의 준비를 마친 헤네스와 함께 북한산에 위치한 정령의 문을 빠져 나와 임서윤 등이 머물고 있는 호텔로 차를 몰았다. 육중한 체급을 지닌 랩터를 몰고 주차장 안으로 들어선 준상은 헤네스가 내리자 차를 인벤토리 안에 집어넣고 호텔 안으로 들어섰다. 계단을 따라 윗층으로 올라가자 카운터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직원 하나가 준상을 알아보고 얼른 달려와 인사했다. “박준상님,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임서윤은?” “언제나처럼 풀장에서 훈련 중이십니다.” 준상이 고개를 끄덕이자 직원은 얼른 앞장서서 그들을 풀장으로 안내했다. 실내 풀장으로 들어서자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늘어져서 헉헉 거리며 온몸으로 김을 뿜어내고 있던 정다빈이 준상과 헤네스의 모습을 알아보고는 얼른 자세를 바로 했다. 언제나 그를 만날 때마다 뿜어내는 분위기에 압도되는 기분을 느끼긴 했지만, 이번 만큼은 그런 것을 넘어서 뭔가 기묘한 감각이 그녀의 머리 속으로 침범해 들어왔다. ‘뭐, 뭐야. 왜 갑자기 가슴이 뛰고 난리야.’ 정다빈은 고된 훈련에 드디어 자신이 미친건가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준상은 그녀의 그런 기색을 신경조차 쓰지 않은 채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말했다. “서윤은?” “그, 그게... 잠시만요.” 정다빈은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었는지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나 풀장 안에서 힘차게 수영을 하고 있는 임서윤을 불렀다. “길드장님! 준상씨 오셨어요!” 임서윤은 정다빈이 몇 번이나 부르고 나서야 풀장에서 빠져 나왔다. “오셨군요.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금방 씻고 나오겠습니다.” “...”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곧바로 탈의실에 들어갔다. 그가 탈의실로 들어가자 곧바로 수영중이던 진세아 역시 풀장을 빠져 나와 준상과 헤네스에게 인사를 하고는 역시나 탈의실로 모습을 감추었다. 준상과 헤네스는 잠시 의자에 앉아 서윤이 사워를 마치고 나오기를 기다리며 풀장 안을 돌아보았다. 이전과 별로 달라진 것이 없는 듯한 모습이지만, 어느 정도 훈련의 성과는 있었는지 헤엄을 치는 속도라든가 운동의 지속 시간은 확실히 늘어난 듯한 느낌이었다. 잠시 기다리자 씻고 옷을 챙겨 입은 임서윤과 진세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아직.”“그럼 룸서비스를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가시죠.” “...” 준상과 헤네스는 임서윤에게 이끌려 그가 묵고 있는 스위트룸으로 올라갔다. 방 안으로 들어서자 임서윤은 곧바로 전화를 걸어 룸서비스를 부른 다음, 준상과 헤네스를 한쪽으로 데리고 갔다. 그곳에는 락커 룸을 연상시키는 캐비닛이 두 개 놓여져 있었다. “주문하셨던 방어구는 이 안에 넣어 두었습니다. 입어 보시겠습니까?” 임서윤의 말에 준상은 헤네스를 돌아보며 말했다. “입어 봐.” “지금요?” “그래. 어차피 나보다는 너한테 더 필요한 옷이니까.” “아...” 아문간의 사체로 만들어진 옷이 방어구로 분류될지는 미지수였지만, 만약 그렇다면 광전사 콤보를 사용하는 준상으로서는 사실 이런 걸 만들어 봐야 그림의 떡이나 다름없었다. 신체 자체의 물리 저항력이나 방어력이 이미 어지간한 방어구를 입는 것보다 훨씬 뛰어난 수준에 도달한 준상으로서는 입어도 그만 안 입어도 그만이었지만, 헤네스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았다. 때문에 애초에 이 방어복을 만든 것 자체가 그녀를 위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헤네스는 주저하는 기색을 보였지만, 그 모습을 본 진세아가 기다렸다는 듯이 나섰다. 처음부터 그녀가 따라나선 것 자체가 이런 상황을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제가 도울게요. 가요. 헤네스양.” “...” 진세아가 그렇게 나서고 준상이 고개를 끄덕이자 헤네스는 마지못한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들이 커튼이 쳐진 침실 안으로 들어가자 조금 지나서 룸서비스가 도착했다. 간단한 점심 식사가 챙겨지는 것을 지켜보던 준상은 직원이 나가자 서윤에게 물었다. “매입한 시드가 있다고 하지 않았나?” “아! 잊고 있었군요.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서윤은 허둥지둥 다른 방으로 들어가더니 귀환자들로부터 매입한 시드들을 자루에 담아 가지고 나왔다. 준상이 자루를 살짝 열어 보니 그 안에는 지퍼백에 넣어진 시드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이건 이번에 매입한 시드의 종류와 수량입니다.” 서윤이 내민 서류를 잠시 훑어 본 준상은 이번에도 역시나 금괴로 값을 치렀다. 준상이 꺼내놓은 금괴의 휘황찬란한 빛깔에 서윤은 입이 함지막하게 벌어졌다. “하하, 감사합니다.” 서윤이 얼른 금괴를 인벤토리에 쓸어 담자 그제서야 커튼이 열리며 진세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헤네스양은?” 임서윤의 물음에 진세아는 난처한 표정으로 준상의 기색을 살짝 살피더니 이내 커튼을 열어 젖혔다. “...” 헤네스의 모습을 보고 준상이 가장 먼저 떠올린 단어는 레오타드였다. 그것도 몸매가 여실하게 드러나는 검은 색 레오타드. 물론 직접적으로 피부가 노출된 곳은 없었다. 발은 물론이고 손 역시 일체화되어 전신을 빈틈없이 감싸고 있는데다, 다이버의 잠수복처럼 목과 머리까지 확실히 보호되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어깨나 팔꿈치, 무릎, 몸통 등에는 추가 장갑이 덧붙여져 있는 것이 레오타드보다는 잠수복이나 바이크 슈트에 가까운 느낌이다. 헤네스는 몸매가 너무 적나라하게 들어나는 옷차림이 당혹스러운지 감히 준상을 똑바로 쳐다볼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 이제 됐나요?” “...” 준상이 고개를 끄덕이자 헤네스는 얼른 도망치듯 다시 방 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생각했던 것과 좀 다르군.” 임서윤은 얼른 설명을 시작했다. “사체의 가죽을 벗겨 그것을 압착한 다음 그것을 기존 방탄복 소재와 결합했습니다. 상당히 우수한 소재라서 압착했음에도 기존의 어떤 방탄복 소재보다 우수한 방호력을 보이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설명을 가만히 듣고 있던 준상은 바로 질문을 던졌다.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의 무기까지 막아낼 수 있지?” 서윤은 바로 대답했다. “권총탄은 물론이고, 소총탄 정도는 가볍게 막아냅니다. 실질적으로 지구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대인 무기로도 뚫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 다만 문제라면, 뚫지는 못하더라도 그 충격량까지 완전히 해소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겠죠.” 결국 기존의 방탄복이 지닌 단점을 완전히 해결하지는 못했다는 얘기다. 준상은 그 말을 듣고는 턱을 쓰다듬으며 다시 말했다. “놈의 사체를 연구했을텐데?” “말씀대로입니다. 다만 이 괴수의 경우에는 겉으로 드러난 표피 조직 외에도 안쪽에 충격을 흡수하는 이차적인 피하 조직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 조직의 두께가 상당하다는 점이었습니다. 표피와 마찬가지로 압착을 시도해 보기는 했습니다만, 그렇게 되면 충격을 흡수하는 능력이 터무니없이 줄어들더군요.” “흠...” “저 방어복 역시 중요 부위에는 그러한 피하 조직을 부착해 두었습니다만, 관절 부위 같은 부위는 그렇지가 못하니 사용시 주의하셔야 합니다.” 준상은 다시 물었다. “그럼 피하 조직이 부착된 부위의 방어력은 어느 정도지?” “실험 결과 대물 저격총까지는 멍이 약간 드는 정도로 방어하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실질적으로 전차의 철갑탄을 코앞에서 직격당하지 않는 이상 큰 문제는 없으리라 생각됩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라운 수준이긴 합니다만, 연구소에서는 지금보다 더 좋은 성과를 내기 위해 지금도 연구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그렇군.” 신기루 꽃을 얻기 전이라면 이 정도로도 조금은 불안감이 느껴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꽃의 가호까지 있는 이상, 앞으로는 이 방어복을 입는다는 전제로 헤네스 역시 적극적인 전투 참여가 가능해진다. 헤네스가 다시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준상은 방어복이 담긴 캐비닛을 인벤토리에 넣은 다음, 쑥스러운지 여전히 얼굴을 붉히고 있는 헤네스와 함께 식사를 즐기며 현재 하나 둘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새로운 귀환자들에 대한 얘기를 임서윤과 함께 나누었다. 식사가 끝나자, 준상은 헤네스와 함께 근처의 쇼핑몰에 들러 저녁 때까지 그녀의 고향에 가지고 갈 선물을 사 모았다. 쇼핑으로 지친 몸을 이끌고 호텔에서 하룻밤을 지낸 그들은, 마침내 다음 날이 되자 요정계를 경유해 이벨류아 근처에 존재하는 금단의 숲으로 이동했다. 헤네스는 너무나 오랜만에 돌아온, 깊고 어두운 숲의 풍경을 돌아보며 잠시 감회에 젖었다. “가자.” “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준상이 랩터를 인벤토리에서 꺼내며 부르자 헤네스는 주먹을 불끈 쥐고 결의를 다지며 차에 올라탔다. 00187 트롤러 ========================================================================= 언제 다시 퀘스트가 발생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기는 했지만, 준상은 조금은 느긋하게 랩터를 몰고 숲길을 달렸다. 첫 번째 에픽 퀘스트를 치뤘을 때의 일이라든가, 막무가내로 자신을 찾아 따라 온 헤네스를 펫으로 만들었던 일이라든가... 말로 하지는 않았지만, 두 사람은 서로 손을 잡은 채 당시의 일을 떠올리며 추억에 잠겼다. 이곳에 살고 있는 요정의 길 안내를 받아 숲길을 내려온 그들은 관문이 있는 곳 근처에서 길 안내를 해준 요정과 헤어졌다. “수고했다.” 준상이 보수로 초코바를 꺼내 주자 셀라로부터 지시를 받아 길안내를 했던 이름 모를 요정은 입이 함지박만하게 벌어지며 기뻐했다. “오오! 이것이 바로 그 초코바! 감사합니다!” “나야말로.” 낑낑거리며 초코바를 안고 숲으로 사라지는 요정을 보며 웃음 짓던 헤네스는 멀리 보이는 관문의 모습을 보자 이내 긴장한 표정이 되었다. 쌀이 익어서 밥이 되는 것을 넘어 아예 찰떡이 되어 버린 상황인데다,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이기는 해도 결과적으로는 멀쩡한 딸을 꼬셔서 거의 납치하듯 데려갔으니 모르긴 해도 부모님의 심기가 그리 좋지는 않을 것이다. 중간에 편지를 보내기도 했으나, 그것이 제대로 도착했는지도 알 수 없는 상태. 이런 상황이니 집으로 돌아가는 일이 그리 기쁘지만은 않은 건 차라리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헤네스가 다시 차에 타자, 준상은 차에 시동을 걸고는 다시 한 번 그녀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 역시 그답다. 입에 발린 말 한 마디보다는 이렇게 행동으로 보여주는 모습이. 헤네스는 자신을 깊은 눈으로 바라보는 그를 향해 밝게 미소를 지었고, 그제서야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차를 몰아 관문으로 향했다. 관문을 지키던 병사들은 갑자기 숲 쪽에서 커다란 차가 달려오자 화들짝 놀랐다. “저, 저거! 예전에 그 말 없는 수레 아닌가?” “맞아! 뭐하고 있어? 빨리 종을 쳐!” 곧바로 시끄러운 종소리가 울리자 병사들이 후다닥 장벽 위에 활을 들고 자리를 잡는다. 준상은 일단 차를 관문 앞에 멈춰 세운 다음, 산들바람을 불러 만에 하나라도 날아올지 모르는 화살을 방어하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그런게 안전을 위한 조치를 모두 취하고 나서야 비로소 헤네스가 차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저에요! 알아 보시겠어요?” “...” 갑자기 수레 밖으로 고개를 내미는 헤네스의 모습에 병사들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 중에는 분명히 헤네스의 얼굴을 아는 병사도 있었지만, 지구에서의 생활 이후로 헤어스타일이라든가 옷차림 같은 것이 바뀐 것은 물론이거니와 사랑을 알게 되면서 한창 피어나는 꽃봉오리처럼 생동감 넘치는 아름다움마저 가지게 된 헤네스를 단숨에 알아볼 정도로 눈썰미 있는 병사는 거의 없었다. “누, 누구냐!” 한 병사가 그렇게 외치자 헤네스는 바로 대답했다. “제 이름은 헤네스 브레아. 제스터 발란 브레아가 제 아버지세요.” “헉!” 헤네스의 이름을 듣고 나서야 병사들은 그녀를 알아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영락없이 죽었다고만 알고 있었던 브레아 가문의 금지옥엽이 이렇게 느닷없이 모습을 드러냈으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저, 정말... 헤네스 아가씨가 맞으십니까?” “맞아요. 확인해 보고 싶으시면 그래도 좋아요.” “...” 병사들은 잠시 서로의 얼굴을 돌아보았고, 옆에서 말없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수문장이 유심히 헤네스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문을 열어라!” 수문장의 지시가 내려지자 병사들은 허겁지겁 장벽을 내려와 지난 번의 사태 이후로 새롭게 보강된 두꺼운 나무 문을 열어 젖혔다. 준상은 문이 열리자 천천히 그 안으로 차를 몰고 들어갔다. 예전 같으면 문 따위 그냥 때려 부수고 지나갔겠지만, 지금은 이러니 저러니 해도 헤네스의 부모님에게 인사를 드리러 가는 길이니 괜히 일을 크게 만들 이유가 없었다. 차가 관문 안으로 들어오자 병사들은 얼른 관문을 닫고 차 주위로 몰려들었다. 헤네스는 준상이 건네준 꾸러미를 병사들에게 전하며 말했다. “대단치는 않지만 간단한 먹을거리에요. 피곤하실 텐데 일하면서 드세요.” “아니, 무슨 이런 걸 다...” 예전에도 분명히 귀여운 소녀이긴 했지만, 지금 가까이서 보니 소녀라기 보다는 아가씨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라 병사들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옷차림이 좀 이상해 보이긴 했지만, 은연중에 날씬한 몸매가 드러나면서도 천박해 보이지 않으니 젊은 병사들은 그녀의 옷차림만으로도 가슴이 콩닥콩닥 뛰고 있었다. 뿐인가. 준상만큼은 아니지만 요정들의 키스를 받은 덕분에 뽀샤시 효과까지 더해지니 가만히 미소를 짓는 것 뿐인데도 주위가 환하게 밝아지는 듯한 착각마저 느껴진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볼게요. 수고하세요.” “사, 살펴 가십시오!” 노총각 수문장이 긴장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경례를 하자 다른 병사들 역시 얼떨결에 무기를 고쳐 잡고 경례를 했다. 뭔가 상당히 어설픈 모습이지만, 반면에 그들의 순박함이 잘 드러나는 모습이라 헤네스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그들에게 손을 들어 답례했다. 병사들은 헤네스가 차창 밖으로 손을 흔드는 모습을 멀거니 지켜보다가, 차가 완전히 시야 저편으로 사라지고 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후아... 뭐 저렇게 사정 없이 예쁘다냐.” “예끼! 이 놈 말 하는 것 좀 보게. 아가씨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아저씨도 참. 말이 그렇다는 거에요. 제가 뭐 틀린 말 했나요?” 헤네스의 외모에 취해있던 병사들은 그녀가 건네주고 간 꾸러미를 꺼내 들었다. 그 안에는 초코파이가 두 상자 정도 들어있었는데, 병사들은 검붉은 상자를 보고 이게 뭔가 싶다가 안의 내용물을 조심스럽게 꺼내 보았다. “아까 간식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그랬지.” 값비싼 종이 상자야 그렇다 치더라도 그 안에 들어있는 번들거리는 내용물은 도대체 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성급한 몇몇은 포장지째로 입에 넣기도 했지만, 이내 몇몇 똑똑한 병사들이 포장지 뜯는 방법을 알아냈다. 뭔가 시커먼 것이 꼭 방금 싼 말똥을 솜씨 좋게 뭉쳐 놓은 듯한 모양새다. “아까 간식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그, 그랬지.” 모양이 워낙 이질적이라 좀처럼 입에 넣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 향기라도 좋으면 모르겠는데, 딱히 별 냄새도 나지 않으니 더 이것의 정체가 오리무중일 수밖에 없다. 그렇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초코파이를 손에 들고 있던 병사들은 이내 겉을 감싼 초콜릿이 손에 묻자 그 끈적거리는 촉감에 얼굴을 찌푸렸다. 몇몇은 바로 옷에 그것을 쓱쓱 문질러 닦았지만, 호기심 넘치는 몇몇은 그렇게 초콜릿이 묻은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가 맛을 보았다. “어?” 순간 그들은 혀끝을 감싸는 달콤한 느낌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핥으며 그 달짝지근한 맛을 즐기던 그들은 이내 자신의 손에 들린 초코파이를 바라보며 고민하다가 머뭇거리며 살짝 한 입 깨물었다. “이, 이건!” 겉면을 감싼 초콜릿의 달콤함과 그 안에 든 부드러운 속살, 그리고 부드러운 머쉬멜로우의 맛이 합쳐지는 순간, 그들은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했던 천상의 맛을 경험하게 되었다. 요정들은 차라리 꿀이라도 가끔 먹지, 인간들은 그러지도 못한다. 꿀 자체가 워낙에 고가인 까닭이다. 그래서일까. 단 맛에 대한 면역력이 전무한 상황에서 초콜릿이 지닌 그 달콤한 풍미를 접하자 반응이 폭발적인 건 당연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한 사람이 그렇게 정신없이 초코파이의 맛에 빠져들자, 불안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다른 병사들도 그를 따라 손에 들린 것을 입에 넣었다. 미심쩍어 하던 병사들의 표정이 헤벌레 해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오오! 이, 이런 맛이라니!” “아가씨! 이렇게 일용할 간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헤네스 아가씨 만세!” 벌써 시야에서 사라진지 한참이나 지났건만, 병사들은 헤네스의 발이라도 핥을 듯한 기세로 그렇게 칭송을 거듭했다. 물론 헤네스는 자신이 건네준 초코파이가 그 정도의 파괴력을 발휘하리라고는 꿈에도 예상치 못하고 있었다. 대신 점차로 가까워지는 이벨류아의 성벽을 바라보며 긴장으로 인해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정신이 없을 뿐이다. “괜찮아?” “괜찮아요. 준상씨는 괜찮으세요?” “물론.” “...” 헤네스는 살짝 준상이 얄밉게 느껴졌다. 자신은 이렇게 긴장되서 죽을 것 같은데, 준상은 별 감흥이 없다는 듯이 너무나 무덤덤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물어 보았다. “걱정... 안되세요?” “뭐가?” “혹시나 부모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헤네스의 말에 준상은 피식 웃었다. “전에 나한테 뭐라고 그랬는지 기억 안나?” “무슨...” “성인식도 치렀으니 상관없다고 했던 것이 어디의 누구더라?” “...” 준상의 말에 헤네스는 순간 얼굴이 확 붉어졌다. 침대 위에서 그에게 육탄 돌격을 감행하던 상황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준상은 부끄러워서 얼굴을 푹 숙이고 있는 헤네스를 살짝 바라보다가 다시 말했다. “걱정마.” “하지만...” “내 여자를 눈 뜨고 빼앗길 만큼 난 멍청하지 않으니까.” “...” 헤네스는 다시 한 번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녀로서는 이제 완전히 홍당무가 누님하고 부를 정도로 빨개진 얼굴을 감추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을 지경이다. 내 여자라니. 평소에는 그런 기색도 제대로 보이지 않다가, 꼭 이렇게 한 번씩 손발이 오그라들 것만 같은 말을 서슴없이 던져서 사람을 당혹스럽게 한다.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달아오른 얼굴을 손으로 감싸며 고개를 붕붕 저어대다가, 그래도 안 되겠던 모양인지 차창을 열어 바람을 맞고 나서야 겨우 얼굴의 화끈거림이 좀 가라앉는 느낌이다. 준상은 그런 헤네스의 반응을 즐기듯 살짝 웃음을 띤 얼굴로 차를 몰아 이벨류아의 성벽 밑에 다가갔다. 픽업트럭 특유의 육중한 차체가 성벽 밑으로 다가서자, 아까 관문에서와 마찬가지로 성문을 지키던 병사들이 비상에 돌입했다. 헤네스는 얼른 달아오른 볼을 양손으로 감싸다가 병사들이 긴장된 표정으로 다가오자 차창을 열고 그들을 향해 말했다. “반가워요. 별 일 없었죠?” “...” 병사들은 느닷없이 괴물 같은 형상의 말없는 수레에서 아름다운 여성이 친근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어오자 당황했다. “누, 누구신지.” 관문의 수비병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성벽을 지키는 병사들마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자 헤네스는 살짝 볼을 부풀리며 대답했다. “저에요. 헤네스 브레아. 모르시겠어요?” 그제서야 그녀를 알아본 병사들은 부동자세를 취하며 대답했다. “헉! 아, 아가씨! 무사하셨습니까?” “보시다시피요. 집에 가는 길인데 통과해도 될까요?” “무, 물론입니다. 어서 들어가십시오.” 헤네스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초코파이 두 상자 정도를 그들에게 건네며 말했다. “고마워요. 이건 간식인데 심심할 때 드세요.” “가,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살펴 가십시오!” 성문을 통과하며 준상이 말했다. “아무래도 편지가 도착하지 않은 모양이군.” “아니면, 그것을 숨기고 있는 것일수도 있구요.” “흠...” 헤네스의 말에 준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병사들의 반응을 봐서는 제스터 브레아의 신변에 문제가 생기지는 않은 듯 했지만, 그렇다고 아무 일 없이 평온하기만 했던 것 또한 아니라는 느낌을 준상은 물론이고 헤네스 역시 받고 있었다. 성 안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브레아 가문의 저택 앞에 도달하자, 문을 지키고 있던 늙은 문지기가 그녀를 대번에 알아보고는 급히 문을 열어 주고는, 문 옆에 대기하고 있던 젊은 시종에게 이 소식을 안에 전하게 했다. “아, 아가씨. 역시 무사하셨군요!”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처럼 그렁그렁한 눈으로 그렇게 말하는 문지기의 모습에 헤네스는 자신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물론이죠. 모두 잘 계시죠?” “여부가 있겠습니까. 도련님과 아가씨들도 모두 돌아와 계시니 어서 들어가 보시죠.” “오빠랑 언니들이요?” 문지기의 말에 헤네스는 조금 놀란 표정이 되었다. 수도에서 공부 중이던 오빠는 물론이고, 출가해서 집을 떠나있던 언니들까지 돌아와 있다는 말 때문이었다. “이거 심심할 때 드세요.” “아니 뭘 이런 걸 다...” “괜찮으니 받으세요. 선물이에요.”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헤네스가 다시 문지기에게 초코파이를 한 아름 안기자 준상은 그제서야 천천히 차를 몰아 브레아 가문의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마차가 다니도록 정비되어 있는 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자, 먼저 달려간 시종이 소식을 전했는지 저택 안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오는 모습이 보인다. “아...” 헤네스는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 가운데 가족들의 모습을 확인하자 어째서인지 가슴이 먹먹해지는 느낌을 주체하기 어려워졌다. 준상은 말없이 그런 헤네스를 바라보며 천천히 차를 몰아 저택 앞에 멈추었다. 그러자 헤네스가 곧바로 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 나갔고, 그런 그녀를 헤네스의 어머니가 맞아 들였다. “무사했구나. 다행이다.” 헤네스는 조금 수척해진 어머니의 모습을 보는 순간 목이 매여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다가 겨우 한 마디를 할 수 있었다. “다녀왔어요.” “...” 헤네스의 어머니는 그 말을 듣고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죄송하다든가, 잘못했다든가... 그런 말이 나올 줄 알았건만, 딸의 입에서 나온 것은 다녀왔다는 말이었다. 과연 그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겠는가. 헤네스의 어머니는 조금 섭섭한 가운데서도 자신의 품에 안긴, 이제는 더 이상 소녀라고 부르기 어려울 정도로 훌쩍 커버린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고생했다.” “...” 헤네스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너무나 미안하고 죄송스러워서 다시 한 번 가슴이 먹먹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조금 더 어머니의 품이 전해주는 따뜻함을 만끽하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런 그녀의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아버지 제스터의 모습이었다. 그는 헤네스의 달라진 옷차림과, 뒤이어 천천히 차에서 내리는 준상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이렇게 말했다. “일단 들어와라.” “...” 그리고는 헤네스가 대답하기도 전에 그대로 몸을 돌려 저택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제스터가 안으로 들어가자 그제서야 뒤에서 흥미진진하다는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던 두 명의 여성이 헤네스에게로 다가왔다. “요 앙큼한 계집애. 어쩜 그렇게 소식 한 번 없을 수가 있니?” 조금 동글동글한 느낌의 그러면서도 헤네스와 많이 닮은 분위기를 지닌 키 작은 여성이 그렇게 말하자 헤네스는 쑥스러워 하며 대답했다. “그게... 편지를 보내기는 했는데, 워낙 먼 곳이다 보니...” 그러자 그 옆에 서 있던 조금 마른 느낌의 여성이 그녀가 입은 옷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이거 무슨 천이니? 와, 이 바느질 촘촘한 것 좀 봐.” 그 말을 들은 키 작은 여성이 바로 핀잔을 주었다. “얘, 너는 지금 그게 제일 궁금하니? 철 좀 들어라, 제발.” “언니는... 내가 뭐 못할 말 했나.” 그렇게 얘기를 나누던 여성들은 말없이 다가와 헤네스의 등 뒤에 서는 준상의 모습을 흘깃거렸다. 차에서 내릴 때는 잘 몰랐는데,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얼굴에서 반짝 반짝 빛이 나는 것 같은 착각마저 느껴진다. 헤네스의 언니들은 자신도 모르게 잠시 몽롱한 표정으로 준상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옆에서 어머니가 한 마디 하자 그제서야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여기서 이럴게 아니라, 일단 들어가자.” “네.” 00188 트롤러 ========================================================================= 헤네스가 어머니와 언니들에게 둘러싸여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준상은 저택 앞에 세워져 있던 랩터를 인벤토리에 집어넣은 다음 그 뒤를 따랐다. 자동차를 모르는 이곳 사람들이 보기에도 뭔가 위압감 넘치는 체급과 디자인을 가진 F150 랩터가 준상의 손짓 한 번에 사라지자,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헤네스를 비롯한 일가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시종과 시녀들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터뜨렸다. 조용히 문가에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조금 붉은 색의 머리카락을 짧게 자른 남자가 문 안으로 들어서려는 준상에게 말을 걸었다. “통성명이나 합시다. 난 헤네스의 오빠 되는 사람이오. 젤란이라고 불러주면 좋겠소.” “준상이라고 부르시오.” 젤란은 준상의 말투에 잠시 의외라는 듯이 피식 웃었다. “재미있는 친구로군. 보통은 처음 이런 식으로 처가에 오면 긴장해서 말도 제대로 못하는 법인데.” 다분히 자신의 경험담에 비추어 건네는 얘기였지만 준상은 별로 대수롭지 않게 반응했다. “처음이 아니니까.” 자세한 사정도 듣지 않고 당연하다는 듯이 처가라는 말을 사용했는데도 당황하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는 준상의 모습에 말을 꺼낸 젤란이 오히려 더 당황했다. “아... 그러고 보니 그런 얘기를 들은 것도 같긴 하군. 아무튼 앞으로 자주 볼 것 같으니 친하게 지냅시다.” “원한다면.” “...” 무뚝뚝한 준상의 대답에 젤란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대로라면 역시 아버지와의 유혈 난투극은 피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궁금해졌다. 이렇게 당당할 수 있는 이유가 말이다. 정말 동생에게 손끝 하나 대지 않은 상태인걸까. 아니면 손은 댔지만 어떤 비난이나 질책도 신경 쓰지 않고 동생을 보살필 수 있다는 자신감인걸까. 처가라는 말에 반박을 하지 않은 걸 보면 손은 대지 않았더라도 최소한 마음은 주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몇 마디 말로 준상을 떠보려던 젤란이었지만 이래서는 떠보기는커녕 오히려 속내만 드러낸 꼴이다. “이쪽으로.” “...” 젤란이 앞서가자 준상은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기다란 복도를 따라가며 문득 젤란이 말했다. “그나저나... 참 절묘한 시기에 오셨소.” “...” 준상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젤란은 그냥 흘러들어도 상관없다는 듯이 조용히 말을 이어갔다. “일전에 어둠의 군세라는 적들이 몰려온 뒤로 이곳 이벨류아에도 참 여러 가지 일이 있었지. 혹시 들은 바가 있소?” 준상이 고개를 저어 보이자 젤란은 다시 말을 이어갔다. “나도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일단 들은 것만이라도 말해 드리리다.” “...” “어둠의 군세가 몰려온다는 말을 듣고 집정관이 성 안에 남아 있던 경비병 태반을 이끌고 도망을 쳐버렸소. 그 뒤에 아마 당신과 같은 곳에서 왔으리라 생각되는 이방인들이 백여명 가량 도착을 했고.” 그 일에 대해서는 준상도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헤네스와 함께 지내면서 그때의 일을 전해 들은 것도 있고, 임서윤과 그의 길드원들에게도 조금이나마 당시의 정황에 대해서 들은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여러모로 암담한 상황이었지만, 아버지는 이방인들과 협력해서 어둠의 군세를 물리치기 위한 준비를 했소. 문제는 바로 그 때 일어났지.” “...” “헤네스가 당신을 쫓아갔다는 소리를 듣고 아버지가 쓰러지신 거요. 게다가 그 일이 벌어지고 얼마 후에 이방인들 역시 갑자기 한 줄기 빛과 함께 사라져 버리고. 다행히 아버지께서 뒤늦게 정신을 차리시고 그 혼란을 수습하기는 했지만, 언제 어둠의 군세가 몰려올지 모른다는 공포 때문에 당시에는 정말 살아도 산 것 같지가 않았다고들 하더군.” 하긴 다른 귀환자들로서는 느닷없이 퀘스트가 종료된 상황에서 대기 시간 10초 안에 자기 물건을 챙기는 것만으로도 정신없는 상황이었을테니 어둠의 군세가 괴멸되었다는 얘기를 이곳 사람들에게 전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절대적인 열세 중에 그나마 신의 계시라도 받은 것처럼 한 줄기 빛과 함께 이곳을 찾았던 이방인들이 그런 식으로 말도 없이 사라져 버렸을 때, 이곳 사람들의 당황스러움이 얼마나 컸을지는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젤란은 준상이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의 얘기를 듣는 모습을 보고는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렇게 삼일 정도가 지나자 사람들도 그제서야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소. 그리고 조심스럽게 주변을 탐색했지. 그 결과 놀라운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소.” 거기까지 말하고 젤란은 준상을 돌아보았다. “어둠의 군세라는 존재들은 금단의 숲 깊은 곳에서 무언가 알 수 없는 것들에 의해 끔찍한 모습으로 참살되어 있었던 거요. 그제서야 사람들은 알았소. 빛과 함께 나타났던 이방인들은 세가 불리해지자 도망친 것이 아니라, 이곳에 더 이상 남아 있을 이유가 없는 상황이라 그냥 돌아가 버렸을 뿐이라는 것을 말이오.” 준상이 아무 말 없이 듣고만 있자, 젤란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하나 물어도 되겠소?” “얼마든지.” “그 일, 당신이 벌인 일이오?” “...” 어찌 보면 단순한 추론이기는 했지만, 보통은 쉽게 떠올리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금단의 숲에서 참살된 채 발견된 적의 수효는 물경 일만. 능히 만 명을 당할 만한 무사라는 표현이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백 명도 제대로 당해내기 힘든 것이 인간의 무력이다. 하물며 그 백 배에 달하는 적이라니. 하지만 당시 헤네스를 호위해 오기로 되어 있던 호위대의 증언이라든가, 인간으로서는 상상하기도 힘들 정도의 엄청난 속도로 북쪽을 향해 달려갔다는 성문 수비대의 증언 등을 감안하고, 그 외에 달리 그곳으로 향한 인물들이 헤네스를 데리고 갔다고 알려진 한 무리의 이방인들 뿐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어떤 식으로든 눈앞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의 말을 듣고 있는 이 준상이라는 남자가 어둠의 군세가 의문의 몰살을 당한 이면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결론에 어렵지 않게 도달할 수 있었다. 젤란은 시종이 구르듯이 달려 들어와 헤네스가 돌아왔다는 말을 전하자 즉시 저택의 입구로 달려갔다. 그리고 차가 멈추어 서자, 무사한 여동생의 모습 뒤로 한 남자가 차에서 내림과 동시에 직감적으로 바로 그가 어둠의 군세 사건 전에 헤네스와 함께 먼저 도착했다는 이방인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젤란은 수도에서 공부를 하면서 전도유망한 젊은 기사들과 친분을 나눈 바 있었다. 스스로 무의 길을 걷지는 않고 있지만, 그래도 브레아 가문 출신답게 다른 사람의 능력을 알아보는 눈썰미는 가지고 있었던 상태에서 그런 식으로 안목을 쌓을 기회가 주어지자 이제는 외견이나 기세만 보고도 어느 정도 상대의 강함을 알아볼 수 있는 수준에 올라 있었다. 애초에 제스터가 젤란을 수도로 보내 공부하게 한 것도 앞으로 가주가 될 그에게 그런 식으로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을 기르고, 앞으로 가문을 이끌어 가는데 도움이 될 만한 인맥을 쌓도록 하려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젤란으로서도 준상의 능력은 좀처럼 가늠이 되지 않았다. 낯설지만 정갈한 의복 아래로 감추어진 탄탄한 체구나 근육의 움직임만 보더라도 그가 상당한 수련을 쌓았다는 것 정도는 알아볼 수 있었지만, 일만에 달하는 어둠의 군세를 홀로 물리칠 정도의 무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맞느냐는 질문이 던져지면 뭐라 답을 하기가 곤란했다. 때문에 지금 그는 묻고 있는 것이다. 정말로 당신이 바로 그 일만에 달하는 어둠의 군세를 물리친 장본인이냐고 말이다. 준상은 탐색하듯 긴장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젤란을 향해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렇다면?” “...” 젤란은 말문을 잃었다. 대답도 대답이지만, 그런 엄청난 일을 벌인 인물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그의 일상적인 태도에 놀란 탓이다. “저, 정말입니까?” 젤란의 말투가 바뀌었다. 지금까지는 자신의 여동생과 맺어진 반려를 대하는 것이었다면, 이제부터는 홀로 만 명을 상대할 수 있는 위대한 무인을 대하는 태도인 셈이다. 준상은 젤란의 말투가 바뀌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역시 존대로 대답했다. “거짓말을 할 이유가 있습니까?” “허어...” 말 몇 마디만으로 단숨에 믿어버리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젤란은 직감적으로 그의 말에 일말의 거짓도 담겨 있지 않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대화 속에서 상대의 허실을 찾아내는 이런 능력은 브레아 가문의 혈족들이 지닌 유전이라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고, 헤네스와 마찬가지로 젤란 역시 그런 능력을 가진 인물 중 하나였다. 젤란은 잠시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가 이내 기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역시... 내 동생 답군. 하하! 하긴 그 애가 눈썰미가 보통이 아니긴 하지. 그렇지 않습니까?” “물론입니다.” “역시 하늘이 우리 브레아 가문을 버리지는 않으시는군요. 하하하!” “무슨 말입니까?” 준상의 물음에 젤란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현재의 상황을 설명했다. “길게 얘기하자면 좀 복잡합니다만, 일단 간단하게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아까, 집정관이 도망쳤다고 말씀드렸죠?” “그랬죠.” 준상이 순순히 맞장구를 치자 젤란은 신이 나서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바로 그가 문제였습니다. 사흘이 지나도 아무런 소식이 없자 언제 도망쳤냐는 듯이 뻔뻔스럽게 나타나서 이 모든 것이 자신을 음해하기 위한 중상모략이라는 식으로 몰아가기 시작한 겁니다.” “흠...” 적전도주는 군권을 가진 인물로서는 절대로 저질러서는 안 되는 큰 죄가 된다. 실제로 현대의 대한민국에서도 전쟁 중의 군무이탈, 그 중에서도 적전도주는 그 사안의 중대성에 따라 사형까지 처벌이 가능한 중죄로 취급된다. 이곳의 법 체계가 어떤 식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한 지역의 군권을 지닌 이가 적을 앞에 두고 경비병을 빼내 도주를 했다면 그 죄가 절대로 가볍지는 않을 터. 음해건 뭐건 간에 그가 적전도주를 감행했던 사실 자체는 변치 않으니 중상모략이란 말 자체가 이미 성립되지 않는다. “웃기는 일이군요.” 준상이 한 마디로 그와 같이 평하자, 젤란은 곧바로 맞장구를 쳤다. “그렇지요? 그렇게 생각하시지요? 그런데 그 뻔뻔한 놈은 오히려 우리 브레아 가문이 이 이벨류아의 통치권을 되찾기 위해 그런 모략을 저질렀다고 떠벌이고 다녔습니다. 말씀대로 정말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죠.”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젤란은 준상이 묻자 흥분한 표정으로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갔다. “처음에는 저희도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몰라 대응을 못했지만, 금단의 숲으로 사람을 보내 조사를 시작하자 상황은 일목요연해졌습니다. 일만에 달하는 시체가 발견되고 그 뒤에 다시 거대한 괴물들의 사체 역시 발견되었기 때문이죠. 이것은 조작하고 말고 할 것도 없는 일이니까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뻔뻔한 놈은 자신의 도주 사실을 은폐하고 수도의 귀족들에게 청탁을 넣으며 우리 가문을 매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미친 놈이군요.” “그렇죠! 근데 웃기는 건 그 미친 짓거리가 통했다는 점입니다.” “어째서?” 준상의 물음에 젤란은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마땅한 작위가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이벨류아에서 우리 가문을 업신여길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만, 작위만으로 따지면 저희 가문은 고작해야 왕국 기사에 불과합니다. 원래대로 변경백의 작위를 그대로 가지고만 있었어도 이 정도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텐데...” “흠...” 지구에서 사용되던 오등작이 그대로 적용되는 것인지, 아니면 자동으로 그에 걸맞는 단어로 번역된 것인지 준상으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헤네스의 가문이 본래는 변경백에 해당하는 가문이었으나 어떤 이유로 인해서 왕국기사로까지 강등을 당했다는 사실이다. 젤란은 흥분한 표정으로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 미친 놈은 결국 자신의 명예를 훼손했다면서 결투를 청해왔습니다. 그것도 가문 대 가문의 기사대전을 말입니다. 원래부터 우리 가문을 눈의 가시처럼 여기며 호시탐탐 왕국기사 작위마저 빼앗으려고 들던 왕실이 기회다 싶었는지 놈의 주장을 받아들였고, 그 때문에 각지에 흩어져 있던 가문의 식솔들이 모두 모여 대책을 의논하던 중이었습니다.” 젤란은 기대 가득한 표정으로 준상을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 “저희를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은근한 표정으로 묻는 젤란의 모습에 준상은 역시 헤네스의 오빠구나 하는 생각을 떠올렸다. 준상은 대답했다. “그것이라면 저에게 말씀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네?” 젤란은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지금까지의 분위기대로라면 흔쾌히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둠의 군세와도 어느 정도 관련이 있는데다, 이곳은 바로 헤네스의 친가이기도 하다. 그런 브레아 가문이 어려움에 처했는데 이런 반응이라니. 하지만 준상의 말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준상은 그런 젤란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헤네스에게 말씀하십시오. 그녀가 원한다면 저는 도울 것입니다.” 00189 트롤러 ========================================================================= 젤란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준상의 뜻을 깨닫고는 기꺼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헤네스는 준상을 따라 나선 이후 가문 내에서 그리 평판이 좋지 못한 상태였다. 혼기가 가까워진 처녀가 정체도 불분명한 이방인을 따라 무턱대고 야반도주를 한 셈이니 어찌 좋은 말이 나오겠는가. 본래부터 브레아 가문에 좋지 않은 생각을 가지고 있던 자들은 기회다 싶어 이 전대미문의 스캔들을 입에 담았고, 그와 같은 빌미를 제공했다는 사실 때문에 입에만 담지 않을 뿐 가문의 사람들 또한 별로 좋은 감정은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였다. 더구나 지금은 가문이 위기에 처한 상황. 어둠의 군세에 대한 소식을 처음 제스터에게 전한 당사자가 누구인가 하는 점 때문에 이 모든 사태가 결국 준상과 헤네스 탓이라는 식으로 결론 짓는 사람도 있을 정도이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런 상황에서 종적을 감추었던 준상이 다시 돌아오고, 그가 바로 어둠의 군세를 홀로 물리친 사실이 알려지면 어떻게 될까. 지구에도 그런 말이 있다.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고들 하지 않던가. 어떻게 보면 바람난 처녀의 야반도주지만,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충분히 세기의 로맨스로 각색되어도 이상하지 않은 일. 게다가 믿기는 어려운 일이나 준상은 천년왕국 신라의 왕족이라고 자신을 밝힌 바가 있다. 저 까탈스런 자신의 누이들이 그의 외모를 보고 일순 말문을 잃었을 정도고, 지금도 멀리서 시녀들이 흘깃거리는 시선이 느껴질 정도로 준상의 외모는 특별한 점이 있었다. 굳이 말하자면 곱상하다기 보다는 남자답다고 느껴지는 그런 외모임에도 불구하고, 바라보고 있으면 얼굴에서 묘하게 빛이 나는 듯한 그런 치명적인 매력마저 준상은 갖추고 있었다. 단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보는 이의 시선을 사로잡는 매력을 지닌 다른 세계의 왕자. 그것도 단순히 장식품 마냥 곱상하게 길러진 남자가 아니라 홀로 만 명을 상대할 만한 강대한 전사라면? 여기에 그 위대한 전사를 연모하여 가족을 버리고 그의 위대한 행보에 따라나선 아름다운 갈색 머리 소녀가 더해지면 어떨까. 각색하기에 따라서는 지금까지의 오명을 단숨에 뒤집어 버릴 만한 대단한 로맨스가 될 것임에 분명한 일이다. 만약 이와 같은 생각을 준상이 들었다면 외모에 관해서는 제발 좀 참아달라는 말을 덧붙였겠지만, 어쨌든 젤란의 머리 속에서는 그런 식의 구체적인 이야기가 순식간에 정립되어 완성되고 있었다. 더구나 그에게 무언가 부탁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헤네스를 통해야만 한다면? 가문 내에서는 물론이고, 왕국 내에서조차 헤네스의 위상은 수직으로 상승하게 될 것이다. 젤란은 실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부탁을 준상이 그냥 들어주겠다고 했다면 어땠을까. 이런 식의 생각을 떠올리기도 힘들었을뿐더러, 헤네스의 위상을 재고하기 위한 토대를 마련할 수 있는 기회도 동시에 잃어버렸을 것이다. 헤네스는 자신이 이미 성인식을 치렀으니 스스로 배우자를 찾을 권리가 있다고 말은 했지만, 지구든 이곳이든 결혼이란 결국 가문의 결합이라는 성향이 강하다. 핵가족화되어 가정의 위상이 예전 같지 않은 지구에서조차 그런데, 모든 것이 가문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이곳의 통념은 말할 필요도 없는 일. 그런 상황에서 부모의 동의조차 얻지 않고 혼기가 찬 여식을 마음대로 데리고 다녔으니, 어찌 보면 준상은 그들에게 죄를 지은 셈이고 이것은 앞으로의 관계 설정에 있어 큰 약점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준상은 자신에 대한 부탁에 대한 창구로 헤네스를 전면에 내세움으로서 이 모든 문제를 단숨에 해소해 버린 것이다. 헤네스가 자신에게 있어 그토록 중요한 사람임을 어필함과 동시에, 실추된 그녀의 권위를 북돋우고 나아가 가문의 일에 도움까지 주는 셈이니, 그 어떤 부모가 이와 같은 말을 기꺼워하지 않겠는가. 젤란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과연! 과연! 역시 내 동생이 고른 사람이라면 이 정도는 되어야지!” “과찬이십니다.” “가시죠! 아버지가 좀 불퉁거리긴 하겠지만, 제가 잘 설명하도록 할 테니 아무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물론 걱정 따윈 전혀 하지 않고 있었지만, 준상은 의례적으로 그렇게 대답했다. 젤란을 따라 이전에도 한 번 와본 적이 있던 거실 안에 들어서자 먼저 와서 수다꽃을 피우고 있던 여성들의 시선이 다시금 일시에 준상에게 날아든다. 젤란은 얼른 주위를 살폈으나, 아버지인 제스터의 모습은 거실 안에서 찾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무사히 돌아온 딸의 모습에 안도하면서도 그 옆에 버티고 선 준상의 모습에 복잡한 심경을 금할 수 없어서 일단 자리를 피한 듯 싶었다. “일단 얘기들 나누고 계십시오. 전 가서 아버지를 찾아 봐야겠습니다.” 젤란이 그렇게 말하자 헤네스의 어머니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려무나.” “그럼...” 젤란은 어머니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준상을 돌아보며 걱정말라는 듯이 눈짓을 해보인 다음 거실에서 달려 나갔다. 아들이 밖으로 나가자 헤네스의 어머니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준상을 맞아 들였다. “이리 오세요. 안 그래도 준상씨에 대한 얘기를 듣고 있던 참이랍니다.” 준상은 헤네스의 어머니에게 살짝 목례를 해보이고는 조용히 말했다. “마침 선물을 가져온 것이 있는데, 보여 드려도 되겠습니까?” “선물이요?” 준상도 헤네스도 손에 든 것이 아무것도 없다. 헤네스를 데리고 들어오느라 준상이 랩터를 인벤토리에 넣는 광경을 보지 못한 세 모녀는 궁금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달리 손에 든 것이 없다면 품 안에 넣을 수 있는 작은 물건이 아닐까. 그 정도로 작은 물건이라면 아마도 보석 같은 장신구일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을 떠올리며 둘째 언니인 미헬이 얼른 준상에게 대답했다. “어떤 선물인가요? 한 번 보여주세요.” “얘는...” 큰 언니인 헬리아가 다시 눈치를 줬지만, 사실 그녀도 궁금한 건 매한가지였다. 준상은 헤네스의 어머니인 유라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허락의 뜻을 비추자 거실 안의 빈공간을 살피더니 다시 말했다. “이곳은 너무 좁군요. 좀 더 넓은 공간이 필요합니다만.” “...”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헤네스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옆방을 치우면 될 것 같아요. 괜찮겠죠? 어머니.” “상관은 없다만...” 어머니 유라스는 물론이고 언니인 헬리아와 미헬 역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일단 헤네스가 하자는 대로 옆 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안에 들어서자 연회실로 사용하는 곳인 모양인지 기다란 탁자와 의자들이 길게 줄을 지어 자리 잡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유라스는 시종들을 불러 그것을 치우게 하려 했지만, 헤네스가 그것을 말렸다. “가만 지켜 보세요.” “...” 그 말을 듣고 뭘 하려고 그러는 건가 싶어 준상의 모습을 지켜보던 세 모녀는 금새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았다. 준상이 허공에 몇 번 손짓을 하자 의자들이 둥실 둥실 떠올라 한 곳에 차곡 차곡 쌓이는 것이 아닌가! “이, 이건...” 하지만 아직 놀랄 일은 시작도 되지 않았다. 의자를 모두 치우자 준상은 연회실 한 가운데 놓인, 탁자들 역시 염동력으로 들어서 다시 한 곳에 쌓았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탁자와 의자들이 방 구석에 차곡 차곡 쌓여지자, 그렇게 만들어진 빈 공간에 커다란 컨테이너 하나를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내려 놓았다. “헉!” 갑자기 허공에서 커다란 컨테이너 하나가 모습을 드러내며 바닥에 떨어지자 세 모녀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 이게 도대체...” 하지만 준상은 컨테이너의 문을 열어젖힌 후 빛의 정령을 불러 안을 밝힌 다음에야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세 모녀를 향해 말했다. “시간이 없어서 그리 대단한 물건은 장만하지 못했습니다만, 한 번 살펴 보시죠.” “...” 헤네스가 얼른 손을 잡고 이끌자, 세 모녀는 무언가에 홀린 듯한 느낌을 받으며 컨테이너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아름다운 문양이 새겨진 포목들이었다. 처음에는 그냥 옷을 사 갈까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느닷없이 파격적인 디자인의 드레스나 정장을 사봐야 그것을 과연 입을 수나 있을지 의문이란 생각에 아예 직접 만들어 입으라고 고급 천들을 한 뭉텅이 사 모은 것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의식주는 어느 사회이든 간에 사람이 살아가는데 매우 중요한 요소로 취급 받는 품목이고, 특히나 산업 사회 이전에는 천 그 자체가 화폐 대용으로 사용되는 경우도 흔했다. “이, 이건 도대체...” “와... 엄마, 이것 좀 만져 봐요. 이런 촉감이라니...” 준상은 가만히 목례를 취한 다음 컨테이너 밖으로 나갔다. 남자가 설명하기는 좀 난감한 속옷이나 여성 용품 같은 것도 많은데다, 자신이 있으면 그녀들이 마음껏 감동하기 어렵다는 점을 고려한 행동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준상이 컨테이너 밖으로 나가자 현숙한 태도를 보이고 있던 큰 언니마저 눈에서 반짝 반짝 빛을 발하며 준상과 헤네스가 하루를 꼬박 소모해 모아들인 선물들을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다. 뭘로 만들었는지 상상도 되지 않는 반짝거리는 식기부터 시작해서, 아름다운 레이스가 달린 각양각색의 속옷, 그리고 비누와 샴푸를 비롯한 각종 위생 용품에 이르기까지, 실용성과 미적인 감각을 동시에 소유한 우수한 제품들이 세 모녀를 사로잡아 버렸다. “너무 무리한 것 아니니?” 어머니 유라스가 걱정스런 말투로 그렇게 묻자 헤네스가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대답했다. “시간이 별로 없어서 하루 만에 장만하느라 좀 고생을 하긴 했죠.” 그 말에 다시 세 모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 하루 만에? 이걸 전부?” “네.” “농담이지?” “이런 걸로 농담할 필요가 있겠어요?” “...” 헤네스의 천연덕스러운 표정을 보고 세 모녀는 이제 지독한 착각에 빠져 들었다. 천년왕국 신라의 왕족이란 말을 듣기는 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브레아 가문이 이벨류아에서 알아주는 가문이라고는 해도, 이 정도의 재물을 모아들이려면 최소한 몇 달은 작심해야만 한다. 아니, 물품의 질을 생각해 보면 몇 달로 가능할지조차 의문스러운 것이 사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고작 하루만에 모아서 가져왔다니. 물론 어느 정도 허세나 허풍이 섞여 있으리란 점을 감안하더라도 충분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듬직하고 탄탄한 체구에, 마치 얼굴에서 빛이 나는 듯한 외모, 여기에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막대한 재력까지! 둘째 언니 미헬은 헤네스를 향해 살짝 눈을 흘겼다. “이 앙큼한 계집애. 평소엔 그렇게 내숭을 떨던 네가 이런 멋진 남자를 단숨에 움켜잡을 줄이야!” “언니도 참...” 언니들이 단순히 외적인 요소에 감탄하고 있었다면, 어머니인 유라스는 이 선물에 담긴 뜻에 더 신경을 쓰고 있었다. 경위야 어찌 되었던 헤네스가 신원이 불확실한 이방인과 야반도주를 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 다른 세계의 사람이라든가 천년왕국 신라의 왕족이라는 신분 같은 것도 전부 거짓이 아니냐고 매도를 당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들이 살고 있는 국가인 델로드란을 포함해 대륙 각지에서 다른 세계에서 온 것으로 보이는 이방인들의 출현이 속속 알려지고는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풍문에 불과할 뿐 확실한 증거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설령 있다 하더라도 왕실이나 그에 준하는 기관들이 모조리 수거해 비밀리에서 확인과 연구를 벌이고 있는 상황이라 일반인들로서는 뜬구름 잡는 얘기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막대한 양의 선물이 공개되면 어떨까. 어떻게 짠 것인지 감히 상상도 되지 않는 세밀하고 부드러운 데다 질기기까지 한 아름다운 무늬의 천들. 녹슬지 않는 아름다운 광택의 금속제 취사도구와 식기, 그리고 너무나 세밀해서 보는 것만으로도 매혹될 것만 같은 아름다운 속옷들. 무엇 하나 보는 이의 눈을 사로잡지 않는 것이 없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순한 장식을 넘어 실용성마저 극대화되어 있는 물품들은 아무리 억지를 써도 도저히 그들이 살고 있는 세상의 물품으로는 볼 수 없는 것들 뿐이다. 그런 물품들이 대중에게 공개되면 어떤 파장이 일어날까. 모르긴 해도 지금 브레아 가문을 공격하고 있는 집정관처럼 허튼 소리를 하기는 힘들어질 수 밖에 없다. 즉, 이것은 쓰기에 따라 강력한 증거이며 무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미헬.” “네?” “가서 시종과 시녀들을 불러 오거라. 이것들을 가져다 옮겨야 겠다.” “...”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싶은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둘째 딸 대신 첫째 딸 헬리아가 그 말에 반응했다. “옮길 곳은 역시 대연회장이 좋겠죠?” “그래.” “바로 다녀 올게요.” 헬리아가 얼른 치맛자락을 붙잡고 컨테이너 밖으로 나가자 미헬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거릴 뿐이었다. 네 모녀들이 그렇게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고 있을 때, 준상은 마침내 브레아 가문 최후의 관문이라 할 수 있는 제스터와 자리를 마주 하고 있었다. 젤란이 서재에 처박혀 있는 아버지의 목덜미를 끌고 오듯이 억지로 데려와서 성사된 자리였지만, 막상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두 사람은 아무런 말도 입에 담지 않은 채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결국 참도 못한 젤란이 제스터에게 말했다. “아버지! 언제까지 그렇게 꽁해 계실 겁니까?” 하지만 제스터는 준상을 노려보며 이렇게 대답할 뿐이었다. “시끄러우니 넌 닥치고 있어라.” “아버지!” “어허!” “어휴, 정말...” 젤란은 속이 터진다는 듯이 가슴을 두드리고 있었지만, 제스터는 여전히 담담한 표정으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준상의 얄미운 태도에 속으로 이를 갈고 있었다. 헤네스가 어떤 아이던가. 그에게는 헤네스 말고도 자식이 셋이나 더 있었지만, 직접 업어가며 키운 아이는 그녀가 유일했다. 늦게 얻은 자식이기도 했고, 또한 다른 셋 보다 훨씬 영특하고 귀여운 것도 한 가지 이유였다. 그런데 이 불한당 같은 놈은 그런 귀여운 딸 아이를 꼬드껴 함께 야반도주를 해놓고도 마치 자신은 아무 잘못 없다는 듯이 느긋한 표정으로 마주 앉아 있는 것이다. 어찌 얄밉지 않겠는가. “후우...” 제스터는 끓어오르는 울화를 억누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긴 말 하지 않겠소. 조용히 떠나시오.” 옆에서 듣고 있던 젤란이 그 말을 듣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버지! 지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넌 닥치고 있으라니까!” “지금 닥치고 있을 상황이 아니잖습니까! 제 정신이세요?” “어허, 이놈이 듣자 듣자 하니까!” 아무래도 가만히 놔뒀다가는 부자간에 멱살을 잡고 주먹다짐이라도 할 모양새다. 준상은 그런 두 부자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말했다. “그렇게는 할 수 없습니다.” 드디어 준상이 입을 열자 제스터는 기다렸다는 듯이 외쳤다. “어째서!” 하지만 제스터는 그 말을 입 밖에 내는 순간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네, 네 놈... 설마...” 차마 그 말을 입에 담기 어려웠는지 부들부들 떠는 제스터의 모습을 바라보며, 준상은 선언하듯 말했다. “저는 허락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닙니다.” 설마... 아니겠지. 아닐 거다. 아니어야만 한다. 제스터는 그렇게 마음 속으로 되뇌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 그럼?” 하지만 준상은 그런 제스터의 기대를 단숨에 부수며 이렇게 대답했다. “책임을 지겠노라 선언하고자 온 것 뿐입니다.” “...” 제스터는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탈색되는 느낌을 받았다. “커억!” “아, 아버지!” 준상은 뒷목을 잡고 쓰러지는 제스터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눈앞에 놓여있는 찻잔으로 손을 뻗었다. 00190 트롤러 ========================================================================= 제스터가 쓰러졌다는 얘기는 곧바로 대연회장에 선물을 옮기고 있던 모녀들에게 전해졌다. “하여튼...” 분명히 또 제 성질에 못 이겨 쓰러졌으리라는 생각에 어머니 유라스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하긴 딸이 어디 가서 죽든 살든 상관도 않는 사람이라면 지금까지 이렇게 정 주고 살지도 못했겠지만 말이다. 그때 문득 헤네스가 말했다. “제가 가서 보고 올게요.” “...” 유라스는 어느새 훌쩍 커버린 딸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주겠니?” “네.” “그럼 부탁한다.” “...” 헤네스는 어머니와 언니들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급히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큰 언니 헬리아가 유라스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아직 시집가려면 한참 멀었다고 생각했는데, 벌써 저렇게 컸네요.” 그 말에 유라스는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보기엔 너희들도 다 마찬가지야.” “하긴.” 그러자 옆에서 시종과 시녀들이 선물을 옮기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둘째 딸 미헬이 물었다. “근데 이거 왜 여기 옮겨 놓는 거에요? 누구한테 나눠 주기라도 할 것처럼.” 다른 사람한테 보여주는 것도 아깝다는 듯한 말투에 유라스는 잔잔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나눠줄 거다.” “아, 역시 그렇... 네? 뭐라구요? 나눠줘요? 왜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듯 높은 소리로 되묻는 미헬의 모습에 유라스는 조용히 대답했다. “쌓아만 둬서는 의미가 없기 때문이란다.” “으음...” 하지만 미헬은 여전히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듯이 아쉬운 표정으로 대연회장에 쌓여가는 포목과 각종 생활용품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편, 아버지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간 헤네스는 오래지 않아 방 안에서 화기애애한 모습으로 오빠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준상을 찾을 수 있었다. “아, 왔니.” 젤란은 헤네스가 헐레벌떡 달려오자 가만히 웃으며 그녀를 맞이했다. “아버지는?” “저쪽 방에 누워 계신다. 기덴 아저씨가 보고 갔는데, 한두 시간 정도 누워 있으면 괜찮아진다고...” 젤란은 그렇게 차분하게 설명해 주었지만, 헤네스는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얼른 아버지가 누워있는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젤란은 그 모습을 보고는 피식 웃다가 다시 준상을 향해 말했다. “헤네스가 들어갔으니까 아버지도 금방 기운을 차릴 겁니다. 평소에는 똑 부러지는 분이 왜 헤네스만 관련되면 저러시는지 원.” “...” “일단 나갑시다. 우리가 있으면 깨어나서도 모르는 척 그냥 눈 감고 있을 분이니, 자리를 비워주는 편이 나을 것 같군요.” 젤란의 말에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나 다를까, 옆방에 있던 준상과 젤란이 밖으로 나가자 제스터는 그제서야 눈을 떴다. “괜찮으세요.” “...”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귀여운 막내딸의 모습에 제스터는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 한숨을 삼켜야만 했다. 예뻐졌다. 이전에도 귀엽고 예뻤지만, 지금은 마치 얼굴에서 빛이 나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예뻐졌다. 아무리 딸바보인 그라도 이렇게까지 변화한 딸의 모습에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이유가 없다. 아직은 좀 더 곁에 두고 보살펴 주고 싶었는데. 왜 자식들은 서둘러 자신의 곁을 떠나려고 드는 건지. 제스터는 손을 들어 딸의 얼굴을 가만히 어루만졌다. “...” 말없이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는 제스터의 손을 헤네스는 조용히 두 손으로 감싸 쥐며 말했다. “너무 걱정 마세요. 그는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후...” 제스터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다시 한 번 한숨을 푸욱 내쉴 수밖에 없었다. 헤네스가 제스터와 방 안에서 조용히 대화를 나누고 있을 즈음, 준상은 대연회장에서 헤네스의 어머니 유라스와 다시 마주하고 있었다. “선물 잘 받았어요.” 유라스의 말에 준상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시간이 여의치 않은 탓에 그리 대단한 것은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과분할 정도인 걸요.” 유라스는 그렇게 말하고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다시 물었다. “그런데 하나 묻고 싶은 것이 있네요.” “말씀하십시오.” “물품들을 살펴보니 대부분 여자들이 좋아할 물건이더군요. 따로 이유가 있나요?” “...” 준상은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는 유라스의 깊은 눈을 보며 이런 생각을 떠올렸다. 아무래도 헤네스는 아버지보다는 어머니 쪽을 많이 닮은 느낌이라고 말이다. “제가 사는 곳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어떤?” “돈을 벌고 싶다면 여자와 입을 노려라.” “호오...” 유라스는 물론이고 헬리아와 젤란 마저도 고개를 끄덕였다. 준상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 “또 이런 말도 있습니다.” “말해 봐요.” “문화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법이다.” “과연...” 미헬은 이게 무슨 뜬금없는 소리인가 싶은 표정이었지만, 다른 세 사람들은 준상이 하고자 하는 말을 모두 이해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유라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준상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실은 그렇지 않아도 이 물품들을 나눠주려던 생각이었어요.” “탁월한 결정이십니다. 상품이란 돌고 돌아야 가치가 늘어나는 법이니까요.” “사위 생각도 그렇다니 저로서는 한시름 놓았네요.” “따로 필요한 것이 있으시다면 언제든 말씀해 주십시오.” “신경 써줘서 고마워요.” 옆에서 이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하며 뚱한 표정을 짓고 있던 미헬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엄마, 지금 사위라고 그런 거에요?” “그래. 내가 틀린 소리 했니?” “아니, 뭐... 그런 건 아니지만.” 아버지가 들으면 가만 안 있을 것 같다는 말을 삼키며 미헬은 준상의 무덤덤한 모습을 슬쩍 훔쳐보았다. 저 딸바보 아버지를 일대일 대면에서 단숨에 격침시켜 버릴 정도니까 이 정도야 당연한 일인가. 나중에 아버지가 들으면 또 뒷목 잡고 쓰러지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긴 했지만 말이다. 유라스는 곧바로 일족들과 이번 일로 인해 초빙한 귀족들을 모두 불러 모아 연회를 베풀고, 준상이 가지고 온 물품들을 그들에게 선물로 나누어 주었다. 다만 준상과 헤네스는 그 연회에 참석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유라스의 말 때문이었다. “모름지기 좋은 카드는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내놓아야 하는 법 아니겠니.” “...” 제스터는 헤네스와 대화를 나누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준상의 모습이 얄미운지 불퉁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것 뿐이었다. 준상과 헤네스는 본래 헤네스가 지내던 방으로 안내 되었다.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헤네스의 방은 그녀가 자리를 비운지 한참이나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죄송해요. 아버지가 원래 그렇게 말이 안 통하는 분이 아닌데...”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마.” “...” 헤네스는 가만히 준상의 품에 몸을 기댔다. 이미 몇 번이나 안겨 봤던 단단한 가슴팍이지만 어쩐지 오늘따라 그 품이 더 안락하게 느껴진다. 준상은 염동력으로 커튼을 치고는 어두워진 방 안에서 조용히 헤네스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그렇게 하룻밤이 지나고 다음 날. 어젯밤에 급히 치러진 연회 탓인지 조금 부산스러운 와중에 준상이 헤네스와 함께 제스터와 유라스를 찾았다. 헤네스는 이런 식으로 부모님과 마주한 것이 조금 민망한지 얼굴을 붉히고 있었지만, 준상은 당연하다는 듯이 표정 변화 없는 모습으로 제스터를 마주 보고 있었다. “끙...” 헤네스 때문이라도 좋은 태도를 보여주려던 제스터의 인내심은 그 얄미운 모습에 다시금 위기에 봉착했다. “그래, 어젯밤은 잘 쉬었니?” “네...” 유라스의 물음에 헤네스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자 제스터는 자신도 모르게 새어나오려는 한숨을 삼켜야만 했다. 그렇게 조금 어색한 아침 문안이 끝나고 다시 헤네스의 처소로 돌아가려는데, 문득 젤란이 그런 두 사람을 불러 세웠다. “아, 여기 있었군요. 마침 찾던 참인데.” 젤란은 우선 준상에게 가볍게 목례를 해 보이고는 헤네스에게 말했다. “바쁘지 않다면 잠시 같이 가주겠니? 가문의 일로 몇 가지 하고 싶은 얘기가 있는데.” “...” 헤네스는 준상을 바라보며 눈빛으로 허락을 청했고, 준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럼 잠시 다녀올게요.” “그래.” 준상은 젤란이 헤네스를 데려가는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그녀의 방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창가로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와 커튼을 살짝 흔들어 댄다. 준상은 피부를 간질이는 약한 바람과 포근한 햇살을 느끼며 방은 주인을 닮는다는 말이 문득 떠올랐다. 안락의자에 앉아 잠시 나른한 햇살에 꾸벅거리며 졸고 있던 준상은 누군가 방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오는 인기척을 느끼고는 눈을 떴다. “죄송해요. 깼어요?” 바라보니 다름 아닌 헤네스다. “갔던 일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준상의 말에 헤네스는 살짝 입술을 삐죽거리고는 방금 전에 전해 들은 일들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대부분의 내용은 어제 전해들었던 내용이지만, 그녀의 설명이 끝나자 준상은 시야 한 쪽에 퀘스트 정보가 반짝거리며 나타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Sub) 기사 대전에서 승리하십시오. :어둠의 군세가 침공했을 때 적전도주를 감행했던 집정관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감히 브레아 가문에 기사 대전을 신청했습니다. 그는 은밀하게 수도 귀족과 왕족들의 후원을 받고 있는 상황이고, 이 때문에 당대의 쟁쟁한 기사들이 이번 기사 대전에 대거 출전하리라는 정보가 들어와 있는 상황입니다. 기사 대전에 출전하여 그들을 분쇄하고 브레아 가문을 위기에서 구하십시오. 사실 이런 식으로 굳이 헤네스를 통해 퀘스트를 받은 것에는 그녀의 입지를 가문 내에 재확립하는 의도 외에도 언제 다른 퀘스트에 불려갈지 모르는 상황에 대한 대비라는 이유 또한 있었다. 자칫 잘못해서 기사 대전 당일에 준상이 불려가기라도 하면 그만 믿고 있던 브레아 가문으로서는 그야말로 낭패가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서브 퀘스트를 받았다고 다른 퀘스트에 불려가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지만, 그래도 해둘 수 있는 대비는 해두는 편이 좋다. 퀘스트 정보 확인을 마친 준상이 고개를 끄덕이자, 헤네스가 머뭇거리며 다시 말했다. “실은... 한 가지 더 있어요.” “뭔데?” “이번 기사 대전 때문에 초빙한 분들이 있는데... 그 분들이 준상 씨의 실력을 한 번 보고 싶으시다고...” “...” 그러자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퀘스트가 나타난다. (Sub) 대련을 수행하십시오. :지금 브레아 가문에는 기사 대전을 위해 초빙된 기사들이 여럿 와 있습니다. 그들은 갑자기 나타나 기사 대전에 참가하게 된 당신의 실력을 궁금해 하고 있습니다. 젤란은 그들과 대련을 나누어 기사 대전에 참여할 실력이 충분하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확인시켜 주길 바라고 있습니다. 조금 귀찮은 일이긴 했지만, 브레아 가문으로서도 난데없이 나타난 준상을 기사 대전의 인원에 끼워 넣으려면 이 정도의 통과 의례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준상은 귀찮다고 거부하면 어쩌나 하는 표정으로 조마조마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헤네스의 모습에 피식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가자.” “네!” 00191 트롤러 ========================================================================= 준상은 헤네스의 안내를 받아 초빙을 받은 기사들이 머물고 있다는 별채로 향했다. 평평한 돌을 깔아 마련해 놓은 정원의 길을 따라 별채에 도달한 그들이 울타리의 쪽문을 열고 들어가자, 이른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수련에 몰두하고 있는 건장한 남성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웃통을 벗어 젖힌 채 바위를 들었다 놨다 하는 사람도 있고, 가벼운 옷차림으로 간단하게 주위를 달리는 사람도 있었다. 예전 같으면 근육질의 남성들이 그렇게 헐벗은 모습으로 체력 단련하는 모습을 직시하는 일 따위 절대로 불가능했을 헤네스였지만 이번 만큼은 준상의 옆에 달라 붙은 채 의연한 표정으로 그들의 시선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물론 그래봐야 얼굴이 발그레하니 상기되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말이다. “...” 한 눈에 보기에도 이질적인 준상과 헤네스의 옷차림은 어렵지 않게 사내들의 시선을 붙잡았고, 뒤이어 준상의 탄탄한 몸과 서늘한 시선이 그들의 관심을 이끌어 냈다. 헤네스는 자신이 먼저 나서서 준상에 대한 소개를 해야 하나 싶었지만, 다행히 별채 뒤뜰에 먼저 나와 기사들과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던 젤란이 그들의 도착을 알아차리고 앞으로 나섰다. “아, 오셨군요. 안 그래도 기다리던 참이었습니다.” “...” 준상이 그 말에 가볍게 목례로 답하자, 젤란은 기사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어제 말씀드렸던 제 매제입니다. 먼 곳에서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아 이쪽의 풍습에는 익숙하지 못하니 이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가벼운 옷차림의 기사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트라디스 가문의 스칸입니다. 기껏 여기까지 초청 받아 와놓고 당신 덕분에 기사 대전에 나가보지도 못할 처지가 되어 버린 불쌍한 기사지요. 외람되지만 그만한 자격이 되는지 한번 확인해 봐도 되겠습니까?” “...” 준상이 바라보니 스칸 트라디스라는 이 남자는 날렵한 체구에 갸름한 얼굴을 가진 푸른 눈의 미남이었다. 모르긴 해도 제법 여자들에게 인기 있을 법한 얼굴. 혹시나 해서 통찰의 능력을 발휘해 보았지만 그의 머리카락 위에 나부끼는 깃발의 색은 녹색도 아니고 푸른 색에 불과했다. 나름 잘 나가는 기사들이라길래 조금은 기대를 하고 왔건만, 역시 능력자가 아닌 보통 사람들로서는 이 정도가 한계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준상이 말없이 실망스럽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스칸은 말끔한 얼굴을 와락 구기며 소리쳤다. “지금 저를 무시하는 겁니까?” 금방이라도 칼을 뽑을 것 같은 기세로 그렇게 외쳤으나 준상은 외려 담담한 말투로 대답했다. “맞아.” “...” 너무나도 쉽게 자신의 말을 긍정하는 준상의 말에 스칸은 오히려 얼이 빠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스칸은 모욕을 받았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불같이 노했다. “가, 감히...” 스칸은 곧바로 허리에 차고 있던 자신의 검으로 손을 가져갔다. 하지만 채 검의 손잡이를 잡기도 전에, 그는 멈칫하며 굳어버렸다. 갑자기 쏟아져 나온 준상의 섬뜩한 붉은 안광이 그의 시야를 장악했고, 시신경을 타고 흘러 들어간 그 모습은 이내 두뇌를 움켜쥐며 사고를 정지시켜 버렸다. 준상은 굳어버린 스칸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그 칼을 뽑을 수 있겠나.” “...”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다른 사람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스칸은 부들부들 몸을 떨며 비오듯이 식은땀을 흘리기만 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스칸은 이를 악물고 굳어버린 몸을 움직이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불행히도 한번 놓쳐버린 신체의 자유는 두 번 다시 그에게로 돌아오지 않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미 그 과중한 심리적 부담을 견디지 못하고 졸도해 버렸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 그나마 다행이라면 나름 이름 있는 기사라 그런지 얼굴빛이 새하얗게 탈색된 상황에서도 쓰러지지 않고 있다는 정도이다. 스칸은 이를 악물고 자신을 덮쳐오는 준상의 붉은 안광에 대항하려 했지만, 결국 손잡이를 잡아 보지도 못한 채 주저앉아 버렸다. 털썩. 정신력과 체력이 다해 바닥에 주저앉자 그제서야 스칸은 자신의 몸을 옥죄고 있던 준상의 눈빛이 사라졌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 뒤에서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던 젤란은 경악하여 말을 꺼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준상이 홀로 일 만을 상대할 만한 강대한 전사라는 사실은 이미 들어 알고 있었지만, 저 스칸 트라디스를 눈빛만으로 제압할 정도일 줄은 미처 예상치 못한 까닭이다.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스칸을 잠시 바라보던 준상은 주위의 다른 기사들을 향해 조용히 말했다. “아직도 내 실력이 궁금한 자가 남아 있나?” 기사들은 그 말에 감히 대답하지 못했다. 호승심이 일지 않는 것은 아니다. 지금이라도 앞으로 나서서 이 기묘한 옷차림의 이방인과 승부를 겨뤄보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다. 하지만 한 가지 불안함이 그들의 발목을 붙잡았다. 혹시 자신도 저 스칸처럼 검조차 뽑아보지 못하고 패배하는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게 되면 지금껏 힘들게 쌓아올린 명성이 단숨에 허물어지게 된다. 이전의 기사들은 어떠했는지 몰라도, 지금 시대의 기사들은 명성에 죽고 사는 존재였다. 대부분이 승계권에서 밀려난 차남에 속하는 이들은, 무예와 대련을 통해 명성을 쌓아 그것을 통해 입신양명을 노리는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단순히 강한 자에게 패배하는 정도라면 아무 문제가 없다. 오히려 그런 강한 자에게 도전한 용기를 칭송 받을 수 있을테니까. 하지만 저렇게 검조차 뽑아 보지 못하고 눈빛만으로 압도되어서는 얘기가 되지 않는다. 명성은커녕 오욕만 남게 되어 더 이상 기사로 행세하고 다니기조차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한심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사정을 아는 사람이라면 마냥 기사들의 소심함을 비웃을 수만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준상은 그들의 사정에 대해서는 눈곱만큼도 이해할 의향이 없었다. “재미없군.” 그 말 한 마디를 남기며 뒤돌아서는 준상의 모습에 기사들은 속에서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그들 가운데 누군가가 미처 나서기도 전에, 한 사람이 껄껄 웃으며 기사들을 밀치고 앞으로 나섰다. “이거 오랜 만에 정말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났군. 이런 재미있는 일이 있으면 진작에 알려줬어야지. 이 망할 놈들 같으니라구.” “...” 준상은 몸을 돌려 난입한 사람을 살펴보았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보통 사람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 보이는 떡 벌어진 거대한 체구였고, 곧이어 반들반들한 대머리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퉁방울처럼 불거진 둥그런 눈과, 자르면 한 접시는 나올 것 같은, 술에 취한 탓인지 붉게 물든 주먹코, 여기에 드문 드문 부러져 나간 앞니를 덮고 있는 넓적한 입술까지. 아무리 혀에 잔뜩 기름칠을 하더라도 결코 잘생겼다는 말을 입에 담기 어려울 정도의 우락부락한 모습. 통찰의 능력으로 살펴보니, 놀랍게도 그의 머리 위에는 다른 기사들과 다르게 녹색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누구지?” 흥미를 느낀 준상이 그렇게 묻자 대머리 남자 대신 젤란이 얼른 나서며 말했다. “북방 대륙 출신의 이름 높은 용병 기사인 한트님입니다. 이번에 집정관 측에 이름 높은 기사들이 많이 나올 거라는 풍문을 듣고 그들과 싸우고 싶다며 저희 쪽에 가담하신 분이죠.” 요컨대 프리랜서인 셈이다. 프리랜서라고 하면 뭔가 있어 보이지만, 고수익과 고부가가치라는 점을 제외하면 결국은 계약직, 또는 비정규직에 불과한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실제로 기사는 굉장히 많은 비용이 소모되는 직업이다. 말부터 시작해서 갑옷과 무구 같은 것에 소모되는 유지비용만 따져도 상당한 수준에 이른다. 그러나, 봉토도 없고 모시는 주군도 없어서 돈 나올 구석이 없는 가난한 기사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한밑천 벌기 위해 지금과 같은 기사 대전이나 토너먼트를 찾아다니거나, 전쟁에 용병으로 참가하거나, 그마저도 없으면 길 막고 강도짓이라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위와 같은 예는 좀 극단적인 경우이긴 하지만, 결국 젤란이 말한 용병 기사라는 단어는 이런 식으로 살아가는 떠돌이 기사를 좀 에둘러 말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준상이 호기심을 느낀 건 용병 기사라는 대목이 아니었다. 바로 북방 대륙 출신이라는 말이었다. 준상이 자주 사용하는 광전사 콤보의 설명에 자주 등장하는 말이 바로 북방의 광전사 아닌가. 정령사의 경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콤보들의 이름은 실제 존재했던 지명 등에서 유래하는 경우가 많다. 준상은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한트는 씩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어때. 나랑 한번 붙어 볼 텐가? 저 샌님들은 대련 좀 하자고 해도 매번 이리저리 빼기만 해서 재미없던 참인데.” “원한다면.” 준상이 짧게 대답하자 한트는 크게 웃으며 소리쳤다. “좋아! 아주 좋아! 모름지기 기사라면 그래야지! 피와 살이 튀는 싸움을 피한대서야 어찌 기사라는 이름을 달고 다니겠나! 하하하!” 주위에서 지켜보고 있던 기사들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모습에 대련을 주선했던 젤란은 난감해지고 말았다. 가뜩이나 델로드란 왕실이 집정관 뒤에 서 있다는 풍문 때문에 불러 모으려던 기사들의 대부분이 초빙을 거절해서 곤란한 상황인데,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기껏 불러모은 기사들마저 화를 내고 떠나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때, 준상이 입을 열었다. “그만 조잘대고 덤벼라.” “...” 순간 한트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방금 뭐라고 지껄였나.” 준상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두 발을 딛고 선 채 한 손을 내밀어 손가락을 까딱이며 어서 오라 손짓 했을 뿐. 그 모습을 본 한트는 순간 불같은 노호를 터뜨리며 준상을 향해 곧바로 달려들었다. “크와아악!” 보통 사람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거대한 체구의 한트가 괴성을 터뜨리며 달려들자, 젤란은 그 압도적인 박력을 준상의 옆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하얗게 질려버렸다. 바로 그때, 그의 팔을 누군가 끌어당겼다. 얼른 돌아보니 젤란의 팔을 끌어당겨 싸움이 벌어질 장소로부터 벗어나게 한 것은 바로 헤네스였다. “헤네스?” 젤란은 잠시 어리둥절해 있다가, 헤네스가 자신을 한 손만으로 어렵지 않게 끌어 당겨 자리를 옮기도록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예를 수련하지 않아서 좀 비리비리하기는 해도 건장한 성인의 체구를 가진 자신을 한 손의 힘만으로 어렵지 않게 이끌다니? “너... 힘이...” 놀란 표정으로 묻는 오빠의 말에 헤네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준상씨에게 조금 수련을 받았거든요.” “수련을?” “그 얘긴 나중에 하고... 아, 시작 되었네요.” “...” 헤네스의 말에 젤란은 얼른 고개를 돌려 준상과 한트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처절한 난투극 같은 것을 예상했던 그의 생각과는 달리, 싸움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얼굴에 핏줄이 툭툭 불거져 나온 모습으로 두 손을 펼쳐 준상의 손을 맞잡고 짓누르려 드는 한트의 모습이었다. 누가 봐도 어른이 어린 아이를 힘으로 누르려 드는 것과 같은 모습이었지만, 상황은 점차 젤란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변해갔다. “끄으으으...” 준상의 팔을 맞잡고 있던 한트의 몸이 점점 숙여지는가 싶더니, 어느 틈엔가 천천히 무릎을 꿇고 있었던 것이다. “이, 이게?” 젤란이 놀란 표정으로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말하자, 그의 옆에 서있던 헤네스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차라리 격투를 벌이는 편이 나았을 거에요.” “뭐?” “힘으로 준상씨를 이기려 들다니... 어림도 없는 일이죠.” “...” 헤네스의 말을 듣고 얼빠진 표정으로 다시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젤란의 귀에 준상의 작은 말소리가 들려 왔다. “이게 끝인가?” “...” 이를 악물고 무지막지한 준상의 힘에 대항하고 있던 한트는 그 말을 듣자 머리 속에서 신경 한 다발이 툭 끊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크와아악!” 순간 한트의 눈에서 붉은 안광이 줄기줄기 뿜어져 나오는가 싶더니, 그의 몸 근육이 금방이라도 파열을 일으킬 것처럼 섬뜩하게 불거져 나오기 시작했다. “호오...” 준상은 그 모습을 보고 한트가 무엇을 한 것인지 바로 알아보았다. 그것은 바로 광폭. 피 속에 흐르는 맹목적인 파괴 본능을 불러 일으키는 기술이다. “이 정도면... 커먼, 아니 언커먼 정도겠군.” 준상은 광폭 발동과 동시에 늘어난 한트의 힘을 가늠하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물론 그래봐야 재생의 도움을 받아 극한까지 신체 능력을 향상시키고 다시 영웅 등급 카드와 레어 시드로 도배한 준상과 비교할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일반인 상대라면 한트가 지닌 이 광폭의 힘은 충분히 공포스러운 수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크으으으으...” 한트는 있는 힘을 다해 다시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그의 손을 맞잡은 준상의 강철과도 같은 두 손은 끝끝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광폭의 지속시간이 끝나자 한트는 허탈감과 함께 그대로 무너지듯 주저앉고 말았다. 한트는 어느 새인가 손을 풀고 자신을 내려다 보고 있는 준상을 향해 말했다. “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십니까?” 광폭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손가락 하나 까딱 해보지 못하다니. 어떻게 이런 인간이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한트는 도저히 지금 자신이 처한 현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준상은 그렇게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자신을 올려다 보는 한트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묻겠다.” “...” “얀트훈센에서 왔는가?” 준상이 그 지명을 언급하는 순간 한트는 눈을 크게 흡떴다. “어, 어떻게 그 이름을...” 한트의 반응을 보고 준상은 자신의 예상이 맞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준상은 한트에게서 몸을 돌리며 그에게만 들릴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다. “그것은, 내가 바로 붉은 공포이기 때문이다.” ============================ 작품 후기 ============================ 자, 모두 함께 이불킥~ 00192 트롤러 ========================================================================= 그 말을 듣는 순간 한트는 둔기에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붉은 공포라니. 얀트훈센이라는 이름마저 희미해진 지금, 감히 그 이름을 입에 담는 자를 만나게 될 줄이야. 광전사라고 다 똑같은 광전사가 아니다. 광폭의 힘을 손에 넣어 피 속에 잠든 파괴의 본능을 일깨울 수 있는 자가 광전사라 한다면, 피의 본질을 깨달은 강력한 대전사들은 따로 블러드로드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그리고 이 블러드로드들을 뛰어넘는 단 하나의 절대자. 그것이 바로 통칭 붉은 공포라 불리워지는 크림슨드레드이다. “가자.” “네.” 준상은 주위를 한 바퀴 돌아보고는 그대로 헤네스와 함께 별채를 빠져 나갔지만, 한트는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헤네스는 한트의 모습을 흘끔거리며 준상에게 물었다. “괜찮을까요?” 준상은 완료된 대련 퀘스트의 정보를 확인하다가 대답했다. “뭐가?” “그게...” 헤네스가 주위를 살피며 말 꺼내기를 주저하자 옆에서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으로 따라오던 젤란이 대신 말했다. “너무 큰 힘의 격차를 보여주는 바람에 전부 도망치면 어쩌나 하는 거겠지?” 그 말에 헤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 말대로에요.” 그러자 준상이 바로 대답했다. “그거라면 걱정할 필요 없다.” “어째서요?” “자존심 때문에 딸 것이 확실한 도박에서 손을 떼는 바보는 없다는 얘기지.” “아...” 브레아 가문과의 인연을 생각해서 온 기사들도 분명히 있겠지만, 지금 저곳에 모인 기사들의 대부분은 집정관 측의 기사들과 대전을 펼침으로서 명성을 얻고자 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기사가 명성을 쌓기 위해서는 강한 상대와 대전을 나눌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일단 높은 명성을 쌓은 기사들은 굳이 자신보다 격이 낮은 상대와 좀처럼 싸우려 들지 않았다. 이긴다 한들 명성에 보탬이 되지도 않고, 지게 되면 기껏 쌓아올린 명성이 무너지니 굳이 도전을 받아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지금 집정관 쪽에 가세한다고 해봐야 명성 높은 기사들 사이에서 찬밥 신세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열세인 것은 분명하지만, 당장 마음이 급한 브레아 가문으로서는 그들을 홀대할 수 없으니 대접도 융숭한 편이고, 운이 좋아서 대전에 나가 이기기라도 한다면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명성을 쌓을 수 있으리라는 계산인 셈이다. 그런 식으로 조금은 도박하는 심정으로 참여한 상황에서, 준상 같은 절대적인 강자가 출현했다. 자존심이 좀 상하기는 해도 준상의 강력함은 부정할 수 없는 진실. 판돈조차 위태로워 보이던 도박판에서 이길 가능성이 대폭 상승했는데 어찌 그것을 박차고 나갈 수 있겠는가. 준상의 말은 바로 그런 의미였다. “그런가요.” 헤네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준상은 다시 젤란에게 물었다. “기사 대전은 어떤 식으로 치러집니까.” “아... 그걸 아직 설명드리지 않았군요.” 전통적으로 기사 대전은 그것을 요구한 쪽이 장소와 시간을 결정하고, 받아들이는 쪽이 그 형식을 결정하곤 한다. 이와 같은 관례는 이번 역시 마찬가지여서, 집정관 측이 장소와 시간을 정하고 브레아 가문이 그 형식을 결정하기로 되어 있었다. “형식에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준상의 물음에 젤란이 바로 대답했다.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모든 대전자들이 한꺼번에 출전해서 단 한 명의 승자가 남을 때까지 싸우는 방식도 있고, 각기 짝이 되는 대전자끼리 승부를 가려서 그 승패를 합산하는 선승제도 있습니다. 일대일 방식의 예를 따르되, 이긴 사람이 계속 싸워 나가는 승자전의 형태도 있고...” 천천히 설명을 이어가던 젤란은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아, 그러면...” 준상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승자전이라. 나쁘지 않군요.” 확실히 준상과 같은 절대적인 강자가 있는 상황이라면 전체적으로 집정관 측보다 평균 실력이 떨어지는 브레아 가문으로서는 선승제보다는 승자전이 유리하다. “하지만... 괜찮겠습니까? 승자전은 체력적인 부담이 너무 커서 잘 사용하지 않는 방식인데.” 젤란은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렇게 말을 건넸다. 하지만 준상은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이렇게 대답했다. “집정관 측에서 일만 명 넘는 기사를 동원했다면 조금 문제가 될 수는 있겠군요.” “...” 그제서야 젤란은 이 남자가 금단의 숲에서 일만의 적을 홀로 참살한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떠올렸다. 직접 그 싸움을 본 것은 아니지만, 적들이 기사 대전처럼 예를 표하고 하나씩 덤비지는 않았을터. 그에 비하면 이런 기사 대전 정도는 준상에게 있어 아이들 장난 같은 수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젤란은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꿀꺽. 젤란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키고 말았다. 어쩐지 현실감 없게 생각되던 일만이라는 숫자가 비로소 피부로 뚜렷하게 느껴진 탓이다. 준상은 그런 젤란을 향해 다시 말했다. “하나 더 물어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십시오.” “혹시... 저들을 모아 기사단 같은 걸 꾸려볼 생각이십니까?” “그, 그게...” 도대체 이 남자는 어디까지 꿰뚫어 본 것일까. 사실 어둠의 군세 때도 그렇고, 이번 집정관의 일도 그렇고 해서 슬슬 브레아 가문도 자체적인 무력을 키워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던 참이었다. 병력이라면 방계 가문이나 이벨류아 인근에서 어떻게 끌어 모을 수 있다 쳐도, 기사 같은 고급 인력은 유사시에 동원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고작해야 왕국 기사에 불과한 브레아 가문이 고위 귀족들처럼 기사단을 꾸리는 것은 여러 가지로 좋지 않은 소문을 만들어낼 여지가 있는 탓에 아직 제스터 부자나 가문의 몇몇 중진 사이에서만 가능성을 검토하는 중이었고, 만약 이것이 성사될 경우 우선적인 영입 대상은 이번에 초빙된 기사들이 될 공산이 높았다. 준상은 젤란의 표정을 통해 자신의 추측이 맞았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기왕 그럴 생각이 있으시다면, 조금 더 기다려 보시는 편이 나을 듯 싶습니다.” “뭔가 좋은 방법이라도 있으십니까?” 사실 기사들을 영입하려는 생각이 있으면서도 쉽게 손이 나가지 않는 이유는 그들을 쉽게 신뢰할 수 없다는 점 때문이었다. 대부분 귀족 가문 출신이다보니, 기사 개개인이 복잡한 혈연과 지연을 가지고 있었고, 이것은 유사시 그들에게 여러 가지 선택의 기회가 주어진다는 뜻과도 같았다. 기대감 넘치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젤란을 향해 준상은 담담하게 말했다. “아직 확실한 건 아닙니다만... 잘만 된다면 저런 쭉정이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정예 병력을 손에 넣으실 수 있을 겁니다.” “혹시... 그 붉은 공포라는 말과 관련된 것입니까?” 준상은 자신도 모르게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딴에는 다른 사람들 귀에 들리지 않도록 작게 말한 것이건만, 젤란의 귀에는 똑똑히 들렸던 모양이다. “일단은... 그렇습니다.” 준상이 마지못한 듯이 대답하자, 젤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매제의 말대로 하겠습니다.” 사실 기사단 자체가 현재 브레아 가문이 처한 상황을 타개하고자 나온 궁여지책이다. 하지만 이미 브레아 가문은 준상이라는 절대적인 강자와 혈연으로 이어진 상태이니 굳이 위험부담을 무릅쓰고 기사들의 영입을 추진할 이유도 없다. 준상은 젤란과의 대화가 끝나자 다시 헤네스와 함께 그녀의 거처로 돌아갔다. 그녀가 태어나고 자란 곳을 돌아보며 조용히 휴식을 즐기던 준상은, 그날 저녁 한트의 방문을 받았다. 헤네스의 방에 이런 거한을 들여 놓을 수는 없는 일이라, 그녀의 거처에서 조금 떨어진 작은 정원에 자리가 마련되었다. 한트는 시종의 안내를 받아 정원으로 들어오다가, 멀찌감치서 헤네스와 함께 정원이 저녁 노을에 붉게 물들어 가는 것을 감상하고 있던 준상을 발견하자 발소리를 쿵쾅거리며 달려오더니 그대로 준상 앞에 엎드리며 외쳤다. “진정, 진정 붉은 공포가 맞으십니까?” “...” 다짜고짜 바닥에 엎드려 외치는 한트의 모습에 헤네스는 자신도 모르게 살짝 웃음이 나왔다. 비웃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서론 없이 곧장 본론부터 들이대는 모습이 어쩐지 준상과 닮았다고 느껴진 탓이다. 준상은 그를 데리고 온 시종을 손짓으로 물러나게 한 다음, 조용히 대답했다. “네가 말하는 것이 대지를 석양으로 물들이는 자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 말대로다.” 그러자 한트는 고개를 번쩍 치켜 들고는 준상에게 외쳤다. “그 말씀, 증명하실 수 있겠습니까?” 준상은 얼굴을 찌푸렸다. “증명이라... 어떤 식으로?” 한트가 바로 대답했다. “진정 붉은 공포가 맞으시다면, 능히 천 명의 광전사를 홀로 대적할 수 있다 들었습니다.” “아아... 그 얘긴가.” 한트의 실력은 이미 아까의 힘겨루기에서 대략 파악이 끝난 상태다. 물론 전투라는 것은 단순히 근력의 고하만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그러나 피하기보다는 맞받아 때려 부수는 것을 선호하는 광전사의 전투 스타일을 고려하면 충분히 참고가 될 만 한 부분이기도 하다. 준상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과연 지금의 자신이 한트와 같은 광전사 천 명을 이길 수 있을까. “가능하다면?” “오오!” 한트는 감격한 표정으로 탄성을 터뜨리며 바닥에 넙죽 엎드리더니 갑자기 몸을 벌떡 일으켜 어디론가 급히 달려가기 시작했다. 헤네스는 가만히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다가 한트가 갑자기 말도 없이 어디론가 달려가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저분... 어디 가는 거죠?” 준상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아마 친구들이라도 부르러 가는 모양이지.” “친구들이요?”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묻는 헤네스에게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했다. “오빠에게 가서 미리 말해둬. 조만간 저런 대머리들이 우르르 몰려올지도 모르니 준비를 해두라고.” 헤네스는 준상이 말한 대머리가 누구인지 어렵지 않게 알아챘다. 천 명의 광전사. 준상이 오빠에게 말했던, 쭉정이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정예 병력이란 바로 그들을 일컫는 말이었던 것이다. 비록 준상에게 형편없이 깨지긴 했지만, 오빠에게 들은 바대로라면 한트는 이름 높은 기사들도 함부로 적대하기를 꺼린다는 강력한 전사이다. 그런 자가 무려 천 명이나 찾아온다. 걱정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옆에서 지켜본 바대로라면 충분히 승산이 있기에 불러들인 것일터. 만약 그들을 제대로 품에 안을 수만 있다면, 집정관이 아니라 그 뒤에 도사리고 있는 자들로서도 그런 준상을 배경으로 삼고 있는 브레아 가문을 함부로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정말이지... 그와 만나지 못했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고마워요.” 헤네스는 준상의 품에 가만히 몸을 기대며 속삭였다. 준상은 그녀의 등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다.” “...” 말은 쉽지만, 사람들은 보통 그 당연한 일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들어가자.” “네.” 한트는 그 날 이후 브레아 가문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자신의 진영에 속한 가장 강력한 기사 중 하나가 모습을 감추었음에도 브레아 가문은 별로 동요하는 기색이 없었지만, 집정관 측에서는 기회라고 여겼는지 곧바로 기사 대전의 날짜와 장소를 브레아 가문에 통보해 왔다. “의외로군요. 소문을 듣고 좀 더 시간을 끌 줄 알았는데.” 스칸 트라디스를 눈빛만으로 제압하고, 광전사 한트를 완력으로 짓눌러 버린 남자. 준상에 대한 소문은 며칠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이벨류아 성 안에 파다하게 퍼져 있는 상황이었다. 젤란의 말에 준상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과장이라고 여긴 것이겠죠.” 그 말에 젤란은 쓴웃음을 지었다. “하긴, 저 역시 직접 보지 않았다면 믿지 못했을 겁니다.” 00193 트롤러 ========================================================================= 기사 대전이 벌어질 장소는 이벨류아 남문 밖의 평원. 일시는 이틀 뒤이다. 장소를 통보하기 무섭게, 집정관 측은 병사와 시종 등을 동원해 성문 밖의 평원에 천막을 치고 땅을 고르는 등의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대전 형식은 이전에 말씀드린 대로 승자전으로 결정했습니다.” 준상은 그 말을 듣고 다시 물었다. “몇 명이 나올 예정입니까?” “전통적으로 기사 대전은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5대 5로 치러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렇군요.” 준상은 남은 시간 동안 이런 저런 일 때문에 미처 즐기지 못했던 헤네스와의 밀월을 즐겼다. 지금까지 그럴 경황이 없어서 결혼식은커녕 신혼 분위기도 제대로 만끽하지 못했던 것을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이 두 사람은 마음껏 두 사람만의 시간을 즐겼다. 하지만 즐거운 시간은 빨리 지나가는 법. 어느새 결전의 날이 다가오고야 말았다. 아침이 되자 부리나케 달려온 젤란은 평상복 차림으로 헤네스와 함께 거처를 나서는 준상을 보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 정말 갑옷이나 말을 준비하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네.” 준상은 짧게 대답한 다음, 인벤토리에 넣어두었던 안장을 꺼냈다. 말도 없이 안장만 꺼내서 뭘 어쩌려는 건가 싶은 표정으로 바라보던 젤란은 갑자기 눈에서 시퍼런 인광을 뿜어내는 유령말이 모습을 드러내자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이, 이건?” “대단치는 않습니다만, 제가 타고 다니는 말입니다.” “...” 젤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긴, 이런 엄청난 것이 있는데 다른 평범한 말이 눈에 들어올 이유가 없지 않은가. 준상은 자신을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며 말 위에 헤네스를 먼저 태우고는 그 뒤에 자리를 잡았다. “다른 기사들은 준비가 끝났습니까?” 유령말을 얼떨떨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젤란은 화들짝 놀라며 얼른 대답했다. “아... 무장을 갖추느라 조금 시간이 걸릴 겁니다. 일단 저택 입구로 가시죠.” “알겠습니다.” 준상은 헤네스를 앞에 태운 채 천천히 유령말을 몰아 저택의 입구로 향했다. “그냥... 저는 내려서 따로 가는 편이 나을 것 같은데요.” “어째서?” “...” 그럴 필요가 있느냐는 듯한 준상의 말에 헤네스는 고개를 숙였다. 간혹 기사 대전에 출전하는 기사들이 자신의 말에 부인이나 연인을 태우고 행진하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헤네스 역시 그런 경우를 종종 보기는 했지만, 이렇게 막상 준상의 앞에 자리를 잡고 앉으니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시선들을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특히나 헤네스의 경우에는 준상과 함께 야반도주를 감행했다는 식의 꼬리표가 붙어 있는 상황이라 어쩐지 더 쑥스럽고 민망하다. 하지만 준상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헤네스의 작은 몸이 흔들리지 않도록 한 손으로 허리를 감싸 안은 채 다른 한 손으로 고삐를 잡고 유령말을 몰아 저택 입구로 향했다. 입구에 도착하자, 브레아 일가와 초빙 받은 귀족들이 미리 나와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갑옷이나 무기 같은 무장을 전혀 챙기지 않은 모습으로 앞쪽에 헤네스를 태운 채 입에서 푸른 연기 같은 것을 뿜어내는 유령말을 타고 준상이 모습을 드러내자, 사람들은 이질적이면서도 매력적인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터뜨렸다. 보통의 말이라고는 절대 생각할 수 없는, 크고 우람한 체구의 유령말. 그리고 그런 무시무시한 유령말과는 대조적으로, 등장하는 순간 마치 몸 주위에 환한 빛을 두른 것 같은 착각마저 느끼게 만드는 모습의 두 남녀. 항상 준상을 볼 때마다 불퉁스런 표정을 짓기 바쁘던 제스터조차도, 이 순간 만큼은 준상과 헤네스의 모습을 보고 잠시 말문을 잃었을 정도다. 준상이 말을 몰고 나와 기다리자, 잠시 뒤에야 무장을 잔뜩 챙긴 기사들이 헐레벌떡 달려 나왔다. 그들은 시종의 도움을 받아 말을 몰고 나오다가 갑옷은커녕 짧은 검 한 자루조차 몸에 지니지 않은 준상의 모습을 보고 얼굴을 찌푸렸지만, 이내 그가 타고 있는 유령말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직접 말을 몰아 옆에 다가서고 보니 똑같이 말을 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눈높이는 고작 준상의 어깨 정도 밖에 오지 않았다. 그들이 타고 있는 말 역시 나름 혈통이 있는 전투마들이었지만, 이래서야 조랑말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아무튼. 기사 대전에 출전할 자들이 모두 나오자, 브레아 가문의 가주인 제스터가 화려한 옷차림으로 그들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번쩍이는 보석이 박힌 금잔에 술을 담아 그들에게 한 잔씩 건네주었다. 기사들은 순서대로 그 술을 받아 마시며 제스터의 격려를 받았고, 마침내 준상의 차례가 되었다. 제스터는 말없이 금잔에 술을 따라 그것을 준상의 앞자리에 탄 막내딸에게 건네주었고, 헤네스는 그 잔을 받아 준상에게 건네주었다. 준상은 헤네스로부터 건네받은 잔에 입만 살짝 대는 시늉을 해보였을 뿐, 그것을 마시지 않았다. “...” 제스터는 기껏 자신이 따라준 술을 그렇게 되돌려 보내는 준상의 모습에 다시 불퉁스런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한숨을 푸욱 내쉬며 이렇게 말했다. “부탁드립니다.”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맡겨 두십시오.” 대강의 의례가 끝나자, 마침내 기사들은 저택의 문을 빠져 나와 이벨류아 시내를 행진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기사들의 행렬을 보러 나왔다가, 그 행렬의 끝에 단 하나의 무장도 걸치지 않은 채 거대한 유령말을 타고 있는 준상과 헤네스의 모습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처음에는 흡사 악몽에나 등장할 법한 유령말의 위압감 넘치는 거대한 모습에 놀라고, 이어서 그 위에 자리 잡은 매력적인 두 남녀의 모습에 감탄했다. “저 분이 바로 그 분인가 보네.” “뭐가?” “그 소문 못 들었어? 스칸 트라디스 경을 눈빛 만으로 제압하고, 광전사라 불리던 한트 경을 힘으로 찍어 눌렀다던.” “에이... 그게 말이 돼? 상황이 불리하니까 그렇게라도 분위기를 띄우려는 거겠지.”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저 말을 좀 봐.” “음...” 기사들이 지나가자 기다리고 있던 마을 사람들이 그들에게 꽃다발을 가져다 안겨 주기 시작한다. 준상 역시 꽃다발이며 손수건 같은 것을 전하려는 마을 처녀들이 있었지만, 그녀들은 앞자리에 앉아 수줍게 얼굴을 붉히고 있는 헤네스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는 그대로 좌절하며 징표를 전하는 것을 포기하고 말았다. 기사들의 행진은 천천히 이벨류아의 남쪽 성문을 빠져 나왔다. 그러자 이틀 전부터 일꾼들을 동원해 마련해 둔 천막들이 준상과 헤네스의 시야에 들어왔다. “꼭 체육 대회 같군.” 준상의 중얼거림에 헤네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체육 대회요?” “그래.” 다만 차이가 있다면, 이 기사 대전의 결과에 따라 브레아 가문의 앞날이 결정된다는 정도일까. 떠들썩한 분위기 속에서 준상은 기사들과 함께 천막이 줄지어 서 있는 앞에 당도했다. 준상은 그곳에 도착해서 잠시 기다리다가, 브레아 가문의 사람들이 뒤따라 도착해 천막 안에 자리를 잡자, 그제서야 헤네스를 말에서 내려주며 말했다. “금방 끝내고 올게.” “조심하세요.” “걱정마.” 헤네스는 몸을 숙인 준상의 뺨에 살짝 입을 맞춘 다음 마지못한 모습으로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는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준상이 천천히 유령말을 몰아 기사들 옆으로 다가서자, 그 모습을 보고 아무래도 안되겠다 싶었던지 옆에선 나이 지긋한 기사가 한 마디 던졌다. “정말로 그렇게 기사 대전에 나설 셈이오?” “물론.” “...” 나이 지긋한 기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준상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준상이 스칸을 눈빛 만으로 제압하는 것도, 그 미친 한트를 힘으로 찍어 누르는 것도 직접 봤지만, 기마전이란 것은 그렇게 땅 위에서 힘겨루기 하는 것과는 또 다른 법. 하물며 갑옷은커녕 맨 몸이라니. 기사 대전을 얕보는 것인지, 정말 그럴 만한 자신감이 있어서 인지 도대체 영문을 알 수 없을 지경이다. 하지만 준상은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든 신경조차 쓰지 않은 채 어서 대전이 시작되기 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이윽고 사람들이 천막 안에 모두 자리를 잡자, 깃발을 들고 말을 탄 사회자가 두 진영 사이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이 기사 대전이 왕실의 허락에 따라 벌어지는 것임을 천명했다. 이 대전의 결과에 따라 이루어질 조치는 기껏해야 상대에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정도에 불과했지만, 그 잘못이라는 것 자체가 상당히 파급력이 큰 문제들이라 단순하게 생각하고 넘어갈 수가 없었다. 우선 집정관 측은 브레아 가문이 자신을 몰아내고 이벨류아의 패권을 온전히 손아귀에 넣기 위해 어둠의 군세가 침공한다는 식의 모략을 벌였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이것은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역모로까지 몰려도 이상할 것이 없는 일이라, 자칫하면 브레아라는 이름의 가문 자체가 박살날 수도 있었다. 반면 브레아 가문은 집정관이 어둠의 군세라는 강대한 적을 마주한 상황에서 적전도주를 감행해 이벨류아에 큰 위기를 몰고 왔다는 주장을 펴고 있었다. 어느 시기, 어떤 사회이든 간에 군권을 지닌 자의 적전도주는 사안의 중대성에 따라서는 즉결까지 가능한 중죄이므로 이 주장이 사실로 받아 들여질 경우 집정관은 지금까지 쌓아왔던 모든 경력과 명성은 물론이거니와 자칫하면 처형까지도 각오해야만 한다. 이런 중대한 문제를 재판도 아니고 결투로 결정 짓는다는 것 자체가 준상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어쨌거나 사회자의 말이 끝나자, 곧바로 각 진영에서 다시 목청 큰 시종이 달려 나와 자신들의 첫 번째 대전자의 소개를 시작했다. 관례에 따라, 집정관 측의 대전자에 대한 소개가 먼저 이루어졌다. 어느 가문 출신이고, 언제 검을 잡았으며, 처음의 대전에서 누구에게 이겼고, 그런 식으로 지금까지 몇 번을 승리했다는 식의 시시콜콜한 소개가 거의 십 분 넘게 이어지자, 준상은 자신도 모르게 하품을 하고 말았다. “후아암...” 하지만 그런 준상의 반응과는 다르게, 이 싸움을 구경하기 위해 온 사람들은 소개가 이어질 때마다 박수와 환호를 보내며 열광한다. “정말 딱 체육 대회로군.” 집정관 측의, 너무 설명이 장황해서 누군지 이름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 소개가 끝나자 마침내 한 명의 대전자가 번쩍이는 갑옷을 입은 채 말을 타고 앞으로 나왔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브레아 가문에서도 시종 하나가 달려 나와 손에 쥔 종이를 펼쳐 들었다. “...” 시종은 잠시 멍한 표정으로 종이를 바라볼 뿐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하자 시종은 얼른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브레아 가문의 첫 번째 대전자의 이름을 고합니다! 그의 이름은 박! 준! 상! 천년왕국 신라의 왕족입니다.” 시종은 그렇게 외치고는 얼른 종이를 접어 넣고 도망치듯 천막 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사람들은 앞서와는 너무도 다른, 간결한 소개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끝이야? 더 없어?” “신라가 어디야? 들어본 사람 있어?” “모르겠는데.” 그렇게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가운데, 준상은 천천히 거대한 유령말을 몰아 대전장 한복판으로 다가섰다. 갑옷은커녕 짧은 검 한 자루조차 몸에 지니지 않은 그의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전령인가 하고 바라보다가, 그가 집정관 측 대전자를 마주 보고 서자 비로소 그가 대전자인 것을 깨달았다. 설마 저러고 싸우려는 걸까. 사람들은 물론이고 집정관 측의 첫 번째 대전자조차 얼굴을 찌푸리고 바라보고 있었다. “설마, 그 상태로 싸울 셈인가!” 대전자가 그렇게 외치자, 준상은 그제서야 자신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쿵! 쿠궁! 갑자기 허공에서 직경 일 미터의 커다란 철구 두 개가 떨어져 바닥을 울린다. “...” 웅성거리던 사람들은 물론이고, 방금 전 고함을 질렀던 첫 번째 대전자 또한 순간 말문을 잃었다. 준상은 말에 탄 채로 손목을 살짝 튕겨 바닥에 떨어진 두 개의 철구를 들어 올려 손에 쥐더니, 이내 그 중 하나를 천천히 허공에 휘두르기 시작했다. 훙! 훙! 훙! 울퉁불퉁한 가시가 튀어나온 철구가 육중한 무게감을 유감 없이 과시하며 허공을 휘도는 그 모습에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무, 무슨... 저런 말도 안 되는...” 한 사람이 그렇게 중얼거리자, 그 옆 사람이 그제서야 떠올랐다는 듯이 말했다. “그, 그러고 보니... 그런 소문이 있었지?” “무슨?” “스칸 트라디스를 눈빛 만으로 제압하고, 광전사 한트를 힘으로 찍어 눌렀다는...” “아!” 사람들은 그제서야 성 안에 며칠전부터 떠돌던 소문을 머리 속에 떠올렸다. 그리고 깨달았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얘기냐며 그냥 피식 웃고 넘어갔던, 바로 그 소문의 주인공이 지금 눈앞에 있다는 사실을. 준상은 천천히 철구를 휘돌리며 지루한 표정으로 사회자에게 말했다. “시작 안 하나?” “...” 깃발을 들고 두 대전자 사이에 말을 타고 서 있던 사회자는 준상의 말에 화들짝 놀랐다. 저 엄청난 크기의 철구를 휘돌리면서도 호흡은커녕 말 위에 흔들림조차 없이 앉아 있는 그의 모습에 질린 탓이다. 사회자는 얼른 집정관 측의 대전자를 바라보며 의향을 물었다. “시,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 이름이 뭔지도 기억나지 않는 집정관 측의 대전자는 이를 악물고는 쓰고 있던 투구의 바이저를 내리고 손에 든 기병창을 거머쥐었다. 그것을 본 사회자는 그제서야 목에 건 나팔을 입에 물고는 있는 힘껏 숨을 불어 넣었다. 뿌우우우! 나팔 소리가 대전장에 울려 퍼지자, “하!” 집정관측 대전자는 고삐를 당기고 박차를 가하며 준상을 향해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준상은 가만히 멈추어 서 있을 뿐, 달려 나가지 않았다. 그저 천천히 그 자리에서 철구를 휘돌리고 있다가... 상대가 적당한 거리에 들어서자 잡고 있던 쇠사슬을 놓았을 뿐이다. 부우웅!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허공을 날아 내리는 커다란 철구의 궤적을 눈으로 쫓았다. 철구는 푸른 하늘에 커다란 반원을 그리며 솟아 오르는가 싶더니, 이내 벼락 같이 떨어져 내렸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꽝! 하늘로부터 떨어져 내린 철구는 그대로 대전자가 타고 있던 말의 머리를 짓뭉개버렸다. 그 뒤에 타고 있던 대전자는 가까스로 철구의 궤적으로부터 몸을 피할 수 있었지만, 달려오던 기세 그대로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 것까지는 피할 도리가 없었다. “...” 준상은 지루하다는 표정으로 다시 손목을 튕겨 뭉개져 버린 말의 피와 살점으로 범벅이 된 철구를 다시 손에 쥐었다. 사회자는 잠시 얼이 빠진 표정으로 자신의 눈앞에서 펼쳐진 이 말도 안 되는 광경을 바라보고 있다가 집정관 측에서 얼른 시종들이 달려 나가 바닥에 널브러진 채 의식을 잃은 기사를 부축하는 모습을 보고서야 깃발을 휘두르며 브레아 가문의 첫 번째 승리를 선언했다. 00194 트롤러 ========================================================================= “뭐, 뭐야? 지금 그게?” “저게... 말이 돼?” 말이 안 되는 걸로 따지면 직경이 일 미터나 되는 철구를 장난감처럼 가볍게 휘두르는 것부터 문제를 삼아야겠지만, 그보다도 사람들은 단숨에 말 한 마리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짓이겨져 생을 마감한 그 처참하고 충격적인 모습에 넋이 나갔다. 철구 자체가 단순한 눈속임이 아닐까 싶었던 사람들도, 형체조차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짓뭉개진 말의 시체 앞에서는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켜보는 사람들은 그나마 낫다. 그들이 아무리 놀랐다 한들, 대전을 치루기 위해 육중한 갑옷으로 무장한 채 순번을 기다리고 있는 기사들보다 더할 수는 없는 것이다. 미친. 지금 기사들의 머리 속에서 떠오르는 생각이라고는 오직 이 한 가지 단어 뿐이었다. 첫 번째 대전자는 운이 좋았다. 만약 준상이 쇠사슬을 조금만 더 길게 늘여 잡았다면 첫 번째 대전자는 자신이 타고 있던 말처럼 바닥에 늘러붙은 피떡이 되어 누워 있었을 것이다. 아니. 아니다. 정말로 단순히 운이 좋았던 것일까? 마지막 순간에 일말의 자비심을 베풀어 일부러 말만 노렸던 것은 아닐까. 기사들은 그런 생각을 떠올린 순간 등골에서 식은땀이 주륵 흘렀다. 그리고 동시에 깨달았다. 첫 번째 대전자가 살아남은 것 자체가 남은 네 명에 대한 준엄한 경고라는 사실을 말이다. 기사들은 갈등했다. 처음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두 번째 역시 저런 식으로 자비를 베풀 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애시당초 뭔가 비벼볼 구석이 있어야 요행이라도 노릴 텐데, 자칭 신라의 왕족이라 칭한 저 터무니없는 존재에게서는 그런 구석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오직 하나. 자신이 상대가 되지 않음을 인정하고 스스로 물러나는 길 뿐이다. 하지만 이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상대가 강하다고 싸우지 않는다면, 과연 누가 그를 기사라 부를 것인가. 시합이 성사되기 전이라면 어떻게 변명 거리라도 찾을 수 있겠지만, 이렇게 무장을 갖춰 입고 나온 상황에서 그런 행동을 보인다는 것은 집정관이 저지른 적전도주와 다를 바가 없다. 기사로서 그와 같은 행동은 자신이 기사임을 부정하는 짓과 마찬가지. 지금까지 쌓아올린 모든 명성을 스스로 단숨에 진창에 내던지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목숨인가, 명성인가. 기사들이 식은땀을 흘리며 그렇게 갈등하고 있을 때, 문득 준상이 철구를 땅바닥에 내려 놓았다. 쿵! 쿠쿵! 두 개의 철구가 지면에 떨어지는 소리에 잠시 어수선해졌던 대전장에 다시 침묵이 감돌기 시작한다. 숨소리조차 잦아든 대전장 한복판에서 준상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음 차례는 누구인가.” 그러자 멍하니 서있던 사회자가 화들짝 놀라며 얼른 두 번째 대전자의 소개를 시작했다. “두 번째 대전자는...” “그만!” 하지만 그의 말이 제대로 시작되기도 전에 준상이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았다. “무, 무슨...” 사회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준상은 남은 네 명의 대전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필요 없다.” “네?” “공연히 시간 낭비할 필요 없다는 말이다.” “...” 그 말을 듣자 두 번째 대전자는 분노했다. 이름을 들을 가치조차 없단 말인가! 두 번째 대전자는 그런 생각이 떠오르는 순간 이성을 잃었고, 곧바로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소리 높여 외치며 박차를 가해 준상을 향해 달려들었다. “기억하라! 내 이름은 크루젝의 이드갈이다!” 준상은 그의 외침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해 두지.” 그리고는 손목을 튕겨 바닥에 내려 놓았던 철구 가운데 하나를 집어든 후 휘돌리는 동작조차 없이 자신을 향해 기병창을 들고 쇄도하는 이드갈을 향해 던졌다. 아까와는 달리 직선으로 날아드는 철구를 바라보며 이드갈은 급히 고삐를 움켜쥐더니, 기병창을 집어 던지고 검을 뽑아 든 채 말 위에서 뛰어 내렸다. 콰드득! 이드갈이 말에서 뛰어내림과 동시에 철구는 그가 타고 있던 말을 그대로 박살을 내버리고 말았다. 파쇄의 효과로 인해 사방으로 말의 살점과 뼈와 피가 튀어 오르는 가운데, 바닥을 구르던 이드갈이 양손으로 검을 맞잡은 채 준상을 향해 달려들었다. 기병이란 본디 속도를 잃은 상태에서는 그 위력을 잃는 법. 이드갈은 아까부터 준상이 전혀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멈추어 서 있는 것을 보고, 그가 기마전에 그리 익숙하지 않으리라는 판단을 내렸다. 게다가 저 정도 크기의 철구를 던지고 난 뒤라면 반드시 빈틈이 생길 터! 그 틈을 노리고 손목에 숨겨둔 독바늘을 던져 아주 작은 상처만이라도 입힐 수만 있다면, 갑옷을 입지 않은 준상에게는 치명적인 타격이 된다. 분노한 표정으로 달려 나오긴 했지만, 그 짧은 순간 이드갈은 이와 같은 계산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비싼 전투마 한 마리를 제물로 바치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 일이 제대로 성공하면 그는 이벨류아 전역에 분포한 브레아 가문의 넓은 토지 가운데 일부를 장원으로 받을 수 있으니 절대로 손해가 아니다. 이름 높은 기사들이 그저 왕실이나 고위 귀족의 청탁 때문에 이곳에 왔을까? 아니다. 그들에게는 그에 걸맞는 보상이 약속되어 있었다. 이벨류아에 할거한 브레아 가문의 재산을 몰수하고, 그 토지를 빼앗아 명망 높은 기사들에게 장원을 하사한다. 왕실과 고위 귀족들로서는 자신의 입김을 불어 넣을 수 있는 무장 세력을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지방에 심어 놓을 수 있으니 좋은 일이고, 기사들은 꿈에 그리던 자신만의 장원을 손에 넣을 수 있으니 더할 나위 없다. 그야 말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 아니겠는가. 집정관의 터무니없는 청탁과 모략이 성공한 이면에는 이런 계산들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드갈은 몰랐다. 세상 일이란 것이 생각처럼 그리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유령말 위에 느긋하게 탄 채 자신을 바라보는 준상을 향해 이드갈은 손목에 숨기고 있던 독바늘을 던졌다. 어지간해서는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작은 독바늘에는 마취 성분이 들어 있어서 맞는 순간 정신이 몽롱해지고 만다. 이드갈이 기사로서 명성을 드높일 수 있었던 최후의 한 수. 기사들이 전신을 튼튼한 갑옷으로 무장하는 데는, 이런 암수를 피하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다. 그런 기본적인 것도 모르고 기사 대전에 저렇게 맨몸으로 나서다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그러나 그것은 이드갈의 착각이었다. 준상이 갑옷을 입지 않은 것은 단순히 겉멋이 들어서도, 갑옷의 효용성을 몰라서도 아니다. 그가 갑옷을 입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준상은 손을 가볍게 휘저어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바늘을 낚아챘다. 이 정도의 작은 바늘 따위, 맞아도 그의 피부에 생채기 하나 낼 수 없지만 그의 초감각은 그런 작은 빈틈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준상은 달리 확인하지 않고서도 이 작은 바늘의 용도를 알 수 있었다. “쓰레기로군.” 그렇게 중얼거린 그는 마음 속에 품고 있던 일말의 자비를 그대로 내려놓았다. 이드갈은 보았다. 준상의 한 손이 가볍게 튕겨지는 순간, 바닥에 놓여 있던 또다른 철구 하나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리며 떠오르는 것을. “어?” 이드갈은 거대한 철구가 자신의 시야를 가득 메우며 날아드는 모습을 보았다. 그 멍청하기까지 한 외마디 소리가 유언이 될 줄이야 어찌 알았을까. 퍽! 사람들은 보았다. 준상을 향해 달려들던 기사의 거대한 몸이 철구와 격돌하는 순간 원래 그 자리에 없었던 것처럼 지워진다. 아니, 그것은 틀린 말이었다. 랑다잘의 분노라 이름 붙은 이 무기는 그렇게까지 뒤처리가 깔끔한 무기가 아니었다. 곧바로 사람들은 철구가 지나가고 난 자리에 육편과 갑옷조각으로 보이는 쇠부스러기와 피가 후두둑 쏟아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 대전장은 다시금 침묵에 잠겼다. 승리의 환호도 패배의 탄식도 없었다. 그 안에 존재하는 것이라고는 오직 하나. 눈앞에 펼쳐진 참상에 대한 경악 뿐이었다. 준상은 손목을 튕겨 던졌던 철구들을 다시 회수한 뒤 그것들을 한 바퀴 허공에 휘돌려 묻어있는 살점과 피를 털어낸 다음, 어느 새인가 손에 들고 있던 깃발마저 놓친 채 이드갈의 피와 살점을 잔뜩 뒤집어쓰고 있는 사회자를 향해 말했다. “다음.” “...” 하지만 사회자는 그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공포에 절어버린 그는 딱히 공포의 시선을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준상과 눈이 마주친 순간 오줌을 지리며 그대로 기절해 말에서 굴러 떨어져 버린 것이다. “쯧.” 준상은 기절해 버린 사회자를 보며 혀를 차고는 천천히 남은 세 명의 대전자들을 향해 말했다. “다음 차례는 누구인가.” 이드갈의 처참한 최후를 보고 얼이 빠져 있던 세 번째 대전자는 자신을 향해 사람들의 시선이 모아지자 얼른 손에 들고 있던 기병창을 땅바닥에 집어 던지며 외쳤다. “기권! 기권하겠소!”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모를까, 지금 나서봐야 개죽음일 뿐이다. 나만의 장원? 물론 얻을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 없는 일이겠지만, 그것도 살아 있고 나서의 얘기다. 집정관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면 혹시 모를까. 그것도 아닌 이상 일부러 자신의 목숨까지 바쳐 가며 대전에 임해야 할 이유가 없다. “...” 준상은 말없이 그 다음 대전자를 바라 보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결과는 마찬 가지였다. “기권하겠소!” 다섯 번째 대전자는 아예 물어보기도 전에 슬그머니 무기를 땅바닥에 내려놓으며 손을 들어 보인다. “...” 준상은 남은 모든 대전자들이 기권을 선언하자, 한 번 털어냈음에도 불구하고 피가 뚝뚝 떨어지는 두 개의 철구를 손에 든 채 천천히 유령말을 몰아 집정관이 앉아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 집정관은 새파랗게 질린 채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이방인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다가, 주위의 사람들이 슬금슬금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것을 느끼고서야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그는 모든 것이 끝났음을 비로소 깨달았다. 하지만 그는 준상의 차가운 시선을 바라보며 부들부들 떨면서도 어떻게든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머리를 굴렸고, 이내 그 빌미가 될 만한 것을 찾아냈다. “무효다! 이 대전은 무효다!” 벌떡 일어나며 그와 같은 말을 외치는 집정관의 모습에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이드갈의 처참한 죽음으로 인해 몇몇 귀부인이 졸도하기는 했지만 목숨을 걸고 싸우는 기사 대전임을 감안하면 무효를 외칠 정도의 문제는 아니었다. 어디 할 말이 있으면 해보라는 식으로 준상이 가만히 바라보자, 집정관은 얼른 자신이 떠올린 생각을 좌중들에게 알렸다. “저 자는 자격이 없다! 천년왕국 신라의 왕족이라니! 어디 감히 지엄한 왕족을 사칭한단 말인가!” “...”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천년왕국 신라라니. 이 곳에 자리한 그 어떤 귀족들도 그와 같은 나라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단순히 귀족을 사칭하는 것만으로도 큰 죄인데, 하물며 왕족이라니. 충분히 문제 삼을 만한 일이다. 집정관은 사람들이 자신의 말에 수긍하는 기색을 보이자, 기세등등하게 준상을 향해 외쳤다. “지금 당장 증거를 대라! 그렇지 않으면 네놈은 물론이거니와 브레아 가문 역시 지엄한 왕실을 능멸한 댓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설사 진짜 왕족이더라도 그것을 증명하는 일은 결코 간단하지 않고, 그 정도 시간이면 다시 모략을 세워 빠져 나갈 틈을 만드는 정도는 집정관에게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준상은 그 말을 듣고 당황하지도 심각해 하지도 않았다. “훗!” 그저 가소롭다는 듯이 코웃음을 흘렸을 뿐이다. “이, 이놈이!” 집정관은 준상의 태도를 보고 발작하려 했지만 준상은 그가 다시 입을 열기 전에 하늘을 향해 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보아라!” 사람들은 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곳에는 언제 나타난 것인지조차 알 수 없는, 수선화를 뒤집어 놓은 듯한 형상의 거대한 성채가 자리하고 있었다. 보일 듯 보이지 않는, 사막의 보물. 신기루 꽃이라는 이름을 가진 신비로운 천공의 성채가 어느 새인가 허공에 자리한 채 대전장에 모인 사람들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 작품 후기 ============================ 아침부터 이불킥! 00195 트롤러 ========================================================================= 신기루 꽃은 언제나 준상의 머리 위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다만 그것을 볼 수 있는 것은 준상이 허락한 자에게만 한정이 되는데, 지금 이 순간 준상은 신기루 꽃이 가지고 있는 비가시 속성을 해제한 채 그 모습을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 주고 있었다. 사람들은 저런 거대한 구조물이 자신들의 머리 위에 떠 있다는 사실에 한 번 놀랐고, 그런 사실을 지금까지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다시 놀랐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것이 바로 지금 그들의 눈앞에 서 있는 이방인과 관계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이 남자가 자신들이 지금껏 알고 있던 세계와는 전혀 다른 어딘가에서 왔다는 사실 또한 어렵지 않게 이해했다. 아니, 자신들이 인정하지 않았을 뿐 그는 처음부터 다른 자들과 달랐다. 외모가 달랐고, 입고 있는 옷이 달랐으며, 타고 있는 말조차 그들의 상식과 달랐다. 뿐인가. 보통 사람이라면 온 힘을 다해도 들어올리기 힘든 거대한 철구를 무기로 삼는 것 또한 달랐으며, 그런 터무니없는 힘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보통 사람과 다를 바 없는 체구를 지니고 있는 것 또한 달랐다. 어째서 이렇게 간단한 것을 지금껏 깨닫지 못했던 것일까. 아니다. 깨닫지 못했던 것이 아니다. 사실은 이미 그들도 모두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지만 인정하지 않았다. 지금 눈앞에서 집정관을 싸늘한 눈초리로 내려다 보고 있는 이 남자가 사실은 그들이 인지하지 못하는 전혀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찾아온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인식의 벽은, 신기루 꽃이라는 이름을 지닌 신비하고 아름다운 꽃 모양의 구조물에 의해 산산이 부서져 흩어졌고, 이제 그들의 머리 속에 남은 것은 지금까지 그들이 인정하지 않고 이해하려 들지 않았던 진실 뿐이었다. 이런 불가해한 것마저 현실이 되어 모습을 드러내는 판국에, 신라라는 이름을 가진 천년왕국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을까. 준상은 그렇게 사람들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고정관념을 박살내고는 그 안을 교묘히 비집고 들어가 천년왕국 신라의 존재를 단숨에 각인시켜 버렸다. “저, 저게... 도대체...” 집정관은 지금껏 수많은 위기와 역경을 헤쳐 나갈 수 있도록 해준 민활한 두뇌가 완전히 굳어버리는 것을 느끼며 몸을 부들부들 떨고만 있었다. 준상은 백치가 된 것처럼 말조차 제대로 입에 담지 못하는 그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묻겠다.” “...” “왕족을 능멸한 죄를 델로드란은 어떻게 처벌하는가.” “그...” 집정관은 이제 머릿속이 굳어버리다 못해 새하얗게 백짓장처럼 지워지는 듯한 착각마저 느끼고 있었다.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내뱉은 말이 이런 식으로 자신의 목을 짓누르는 두꺼운 칼날이 되어 돌아올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집정관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그대로 털썩 주저앉았다. 끝났다. 이번에야 말로 빠져 나올 구멍조차 없이 완벽하게 끝장이 나버렸다. 그의 뒤를 받쳐 주던 고위 귀족들과 왕실은 자신과 이 터무니없는 존재감의 이방인을 두고 저울질을 할 것이다. 이벨류아라는 군침 도는 먹이를 두고, 자신과 브레아 가문을 저울질 했던 것처럼. “하, 하하...” 집정관은 주저앉은 채 넋이 나간 표정으로 허탈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한동안 이벨류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기사 대전이 마침내 끝을 맺었음을 깨달았다. 기절한 채 말에서 떨어진 사회자를 대신해, 왕실에서 파견된 관리와 귀족들이 기사 대전이 브레아 가문의 승리로 끝났음을 선포하는 데는 조금 더 시간이 걸렸지만, 이미 그런 승패가 지닌 의미 따위는 이미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잊혀진지 오래였다. 왕실과 고위 귀족들이 집정관을 내세워 벌인 기사 대전이라는 이름의 대리전이 브레아 가문의 승리로 끝을 맺은 것은 물론 정계를 강타할 만한 커다란 사건이었지만,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그러한 승리가 오직 한 사람만의 힘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과, 그가 천년왕국 신라라는 지금껏 그들이 알지 못하는 미지의 나라에서 찾아온 이방인이라는 점이었다. 준상은 미처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지만, 강력한 기사는 문화가 아직 융성하지 못한 이 나라 안에서 지구의 스포츠 스타에 버금가는 존재라 할 수 있었다. 그가 상대했던 것은, 왕국 내에 존재하는 모든 기사들 가운데 가장 높은 명성을 지닌 자들이었고, 그런 이들을 갑옷조차 걸치지 않은 모습으로 단숨에 제압해 기사 대전을 승리로 이끈 준상의 이름은 순식간에 전설이 되어 델로드란 각지로 퍼져 나갔다. 왕실은 즉각 기사 대전의 후속 조치를 단행했다. 집정관은 적전도주의 죄를 물음과 동시에, 천년왕국 신라의 왕족인 준상을 능멸하고 매도한 죄까지 추가되어 수도로 압송되었으며, 조만간 처형될 예정이 잡혀 있었다. 집정관의 재산은 모조리 국고로 환수되었으며, 그 가운데 저택은 그가 저지른 모욕에 대한 보상으로 준상에게 주어졌다. 브레아 가문은 어둠의 군세라는 전대미문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이벨류아를 지킨 공로를 인정받아 차후 새로운 집정관이 임명될 때까지 그 직위를 대신할 수 있도록 조치되었다. 이벨류아에 대한 내정과 군정의 권한을 가진 집정관 대리로 임명됨에 따라 이미 근방의 토지 소유권을 장악하고 있던 브레아 가문은 사실상의 영주나 다름없는 권한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비록 이전에 지니고 있던 변경백의 작위를 되돌려 받지는 못했지만, 수도의 정계 안에서 은밀히 작위 복원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소식에 제스터는 물론이고 젤란 마저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어떻습니까?” “괜찮군요.” 이전에 어둠의 군세가 침공했을 당시 귀환자들이 일시적으로 숙소로 사용했던 저택은 이제 온전히 준상에게 소유권이 넘어왔다. 임서윤이나 그의 길드원들이 이와 같은 사실을 알았다면 제법 놀랐겠지만, 당사자인 준상은 별로 크게 의미를 두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나저나 고작 집 한 채라니, 빌어먹을 놈들.” 대리석으로 치장되어 매우 고풍스런 느낌을 자아내는 이 정도의 저택을 고작이라고 말하는 건 아무래도 어폐가 있는 말이었지만, 집정관이 소유하고 있던 것들 가운데 들고 가지 못하는 집을 제외하고는 모조리 왕실에 귀속되어 버린 것이 젤란은 못내 아까운 듯한 표정이었다. “그거라면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무슨...” “그들이 모는 마차가 수도에 도착했을 때, 그 안에 든 것은 오직 빈 상자 뿐일 겁니다.” “...” 젤란은 그 말을 듣고 준상이 이미 무언가 조치를 취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지만, 그것이 지금 준상의 어깨 위에 앉아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다람쥐의 소행이라는 것까지는 전혀 예상치 못하고 있었다. 집정관의 저택을 고쳐 준상과 두 사람의 거처로 탈바꿈시키는 일은 브레아 가문에 속한 사람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아직 다른 사람들의 입에까지 흘러나가지는 않았지만, 저 강대한 어둠의 군세를 홀로 물리치고 집정관의 음모에 맞서 브레아 가문을 위기에서 구한 은인인데다, 본가의 막내딸을 반려로 맞이하여 이미 그들과는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가 된 준상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헤네스.” “네!” 정원에 어떤 꽃을 심으면 좋을까 고민하고 있던 헤네스는 준상이 부르자 얼른 달려와 그의 품에 안겼다. 준상은 자신의 품에 안긴 아름다운 갈색머리 소녀의 등을 가만히 쓰다듬으며 조용히 말했다. “가자. 보여줄 것이 있으니.” “네.” 헤네스는 준상의 팔에 안긴 채 그가 이끄는 대로 저택 안에 들어갔다. 실내는 공사를 진행하는 인부들로 인해 조금 번잡스러운 분위기였지만, 두 사람이 머물고 있는 침실이 있는 본관 3층은 브레아 가문에서 보내어진 시녀들을 통해 철저하게 출입이 통제되고 있었다. 준상은 헤네스를 데리고 곧장 침실로 들어갔다. “...” 설마 이렇게 대낮부터? 헤네스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앙큼한 상상으로 인해 얼굴을 붉혔지만, 아쉽게도 준상의 용건은 그것이 아니었다. 그는 침실 안으로 들어서자 곧장 벽으로 다가서더니 인터페이스를 통해 신기루 꽃의 기능 한 가지를 불러냈다. 그러자 벽 한켠에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고풍스러운 형태의 석문 하나가 모습을 드러낸다. “이건...” 모양만으로도 신기루 꽃으로 통하는 석문이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린 헤네스가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자 준상은 그녀에게 이 문의 용도를 설명했다. “본래 신기루 꽃의 출입구는 모두 네 개가 있는데, 기본적으로 사용되는 출입구를 제외한 세 곳은 정해진 장소에 비치해 두는 것이 가능해. 이것은 그 세 개의 문 가운데 하나지.” “아...” 본래대로라면 이후 다시 이벨류아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이곳에서 멀리 떨어진 금단의 숲 안에 자리 잡은 정령의 문을 통해야만 한다. 언제든 필요할 때 왕래할 수 있다는 점은 나쁘지 않지만, 이벨류아와 금단의 숲까지의 거리를 생각하면 역시 조금 번거로운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렇게 신기루 꽃의 통로를 이용하게 되면 그런 약간의 번거로움조차 사라져 버린다. “자, 여기에 손을.” “네.” 헤네스는 준상이 시키는 대로 석문에 가만히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석문으로부터 작은 파문 같은 것이 퍼져 나와 그녀의 몸 주위를 훑고 지나간다. 준상은 인증이 끝나자 석문을 다시 감추어 버린 다음 헤네스에게 말했다. “문을 열고 싶다면 이곳에 손을 대고 생각을 떠올리면 된다. 해 봐.” “네.” 준상이 시키는 대로 벽에 손을 대고 잠시 생각을 떠올리자, 거짓말처럼 고풍스러운 형태의 석문이 모습을 드러낸다. “좋아. 그렇게 하면 돼.”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인 준상은 곧바로 셀라에게 연락을 넣었다. “셀라.” “네? 아... 준상님, 안녕하세요.” “그래. 내가 말해둔 것은 어떻게 되었지?” “조치해 두었습니다.” “그럼, 지금 문을 열겠다.” “알겠습니다.” 준상은 셀라와의 대화가 끝나자 곧바로 자신의 몸 안에 설치된 정령의 문을 열었다. 그러자 잠시 뒤, 그의 배꼽 어림으로부터 안경을 쓴 작은 요정 하나가 불쑥 모습을 드러낸다. “으앗차! 어엇! 안녕하세요.” “잘 왔다.” 준상은 요정과 인사를 나누고는 헤네스에게 말했다. “전에 아겔라한의 숲에서 만난 적이 있지?” “아!” 그제서야 헤네스는 허리에 작은 칼을 찬 모습으로 우쭐거리고 있는 이 안경 쓴 요정이 누구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미아라님... 맞으시죠?” “네! 제가 바로 영웅 요정의 후예이며 요정 기사의 자격을 지닌 미아라입니다! 두 분을 다시 뵙게 되어 영광이에요.” 미아라는 그렇게 말하고는 준상을 바라보더니 다시 말했다. “그나저나... 전에 봤을 때보다 볼따구의 뽀뽀 자국이 셀 수도 없이 엄청 많이 늘어났네요.” “...” 미아라의 말에 헤네스는 문득 요정들의 눈에 그의 얼굴이 어떻게 보일까 하는 생각을 떠올렸다. “크흠... 왜 널 불렀는지는 셀라에게 들었겠지?” 준상의 말에 미아라는 가슴에 손을 척 올려 보이며 대답했다. “걱정마세요! 이 요정 기사 미아라! 주어진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겠습니다!” 그녀의 말에 헤네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임무라니요?” 준상이 바로 대답했다. “앞으로 자주 이곳을 왕래하게 되겠지만, 아무래도 퀘스트 같은 것으로 불려갈 경우도 있으니 만약을 대비해 항상 연락이 가능하도록 미아라를 브레아 가문에 남겨둘 생각이다.” “아...” 헤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이렇게 평온한 나날을 보내고 있지만, 준상은 당장에라도 퀘스트가 발동되면 또다시 어디론가 불려가야 할 처지다. 물론 방금 설치를 끝낸 신기루 꽃의 통로 같은 것을 통하면 언제든 와 볼 수는 있지만, 이번과 같은 일이 발생했을 경우를 대비해 연락 수단을 마련해 두면 한층 마음이 든든해 질 것이다. “고마워요...” 준상이 이렇게까지 자신과 자신의 가문에 신경을 써주는 것에 대해 헤네스는 조금 미안한 감정마저 느꼈다. “전에도 말했지만, 난 그저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다.” “...” 헤네스는 미처 생각지 못하고 있었지만, 이런 여러 가지 수단을 마련해 두는 것은 단순히 그녀만을 위한 일이 아니었다. 조만간 이곳을 찾아올 일천의 광전사는 물론이거니와 정령의 문을 통해 알게된 아겔라한의 일 같은 것을 감안하더라도 헤네스가 나고 자란 이 세계가 준상에게 퀘스트를 발동시키는 그 무언가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은 이제 추측을 넘어 확신에 가까운 얘기가 되었다. 따라서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이 퀘스트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서라도 준상은 이 세계에 확실한 거점을 만들어둘 필요가 있었다. 문제는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모처럼 이벨류아 지역에 영향력을 확대하려던 왕실의 계획이 준상이라는 존재로 물거품이 되었으니, 조만간 알게 모르게 다시금 왕실이나 고위 귀족들의 손길이 준상이나 이벨류아로 뻗어올 가능성이 높았다. 신기루 꽃의 통로를 개통해 둔 것도, 요정 기사 미아라를 불러 상시 연락이 가능하도록 조치한 것도, 결국은 이런 식으로 돌발적인 사태에 대비하고 앞으로의 계획을 준비하기 위한 발판인 셈이다. “그럼 미아라님은 계속 여기에 계실 예정인가요?” 헤네스의 물음에 미아라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잘 모르겠는데요?” “...” 둘은 이내 준상에게로 시선을 돌렸고, 그는 둘을 향해 바로 대답했다. “내 생각에는 어머님과 지내는 편이 나을 듯 싶은데.” “어머니요?” “그래. 아무래도 가장 마음이 놓인달까.” “...” 하긴 장인인 제스터는 아무래도 직접 대화를 나누기가 좀 껄끄럽고, 젤란은 사람이 좀 가벼워 보이는 경향이 있었다. 그에 반해 헤네스의 어머니 유라스라면 대화를 나누는 데도 부담이 없고, 영향력 또한 절대적이라 여러모로 믿음이 간다. 헤네스는 곰곰이 생각을 하는가 싶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준상의 뜻에 찬성을 표했다. “저도 그러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두 사람은 미아라를 데리고 브레아 가문의 저택으로 찾아가 어머니 유라스에게 미아라를 소개시켜 주었다. 그렇지 않아도 막내인 헤네스마저 준상의 곁으로 보내고 조금 쓸쓸한 기분에 젖어있던 유라스는 이 작은 요정을 소개 받자 매우 마음에 들어 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다시 아침이 밝았다. 준상은 자신의 품에 안긴 헤네스의 부드럽고 따뜻한 몸의 감촉을 느끼며 잠이 들었다가, 갑자기 꿈결 속에서 시야 한 쪽이 반짝거리며 경고음을 발하는 것을 깨닫고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준상씨?” 한 밤 중에 갑자기 벌떡 일어난 준상의 모습에 헤네스는 반쯤 감긴 눈으로 그를 올려다 보다가, 이내 딱딱하게 굳은 그의 표정을 보고 잠이 확 달아났다. “설마...” 준상은 그녀를 향해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퀘스트다.” “...” 그 말을 듣는 순간, 헤네스는 얼른 시트를 걷어붙이고 침대로부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자신의 몸이 드러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기저기에 팽개쳐진 옷가지를 수습했다. 준상은 어둠 속에서 은은하게 빛을 발하는 그녀의 벗은 몸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그렇게 급하게 움직이지 않아도 돼.” “...” 하지만 헤네스는 고개를 저으며 말없이 준상이 옷 입는 것을 도왔다. 그리고 준상이 옷을 모두 챙겨 입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의 옷으로 손을 뻗었다. 준상은 그녀가 등을 돌린 채로 속옷을 갖춰 입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며 눈앞에 나타난 퀘스트 정보를 확인했다. 00196 트롤러 ========================================================================= 화전민촌을 정화하십시오. :어둠의 군세로 인해 파괴된 화전민촌이 악령의 문으로부터 흘러나온 힘에 의해 오염되었습니다. 언데드로 부활한 주민들을 안식의 길로 인도하십시오. [이 퀘스트는 여러 명의 인원이 동시에 참여합니다.] (Hidden) 제한 시간 이내에 숲에 존재하는 모든 언데드들을 섬멸하십시오. (0/107) (남은 시간 24:00) (협력) ->미완료. (Hidden) 악령의 힘에 오염된 검치호를 토벌하십시오. (협력) ->미완료. (Hidden) 희생자 없이 퀘스트를 완료하십시오. (협력) ->미완료. 이렇게 퀘스트 전송 전의 대기 시간에 퀘스트 정보를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은 ‘빨리빨리’라는 이름의 칭호를 손에 넣은 덕분이다. 준상은 퀘스트 정보는 보는 순간, 이전에 자신이 수행했던 퀘스트와 많이 닮아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튜토리얼을 마치고 제법 시간이 흐르고 나서 수행했던, 숲의 정화 퀘스트가 바로 그것이다. 히든 퀘스트 목록을 보더라도 지금까지 준상이 수행했던 다른 퀘스트들과는 달리 보스 급이라고 할 만한 것이 고작 오염된 검치호 하나 뿐이다. 악령에 오염되어 얼마나 강해졌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검치호 정도는 지금의 준상에겐 보스급이라고 부르는 것조차 민망한 수준의 상대다. 언데드의 숫자가 제법 많기는 해도 좀비나 스켈레톤 정도로는 준상의 한 주먹거리도 안 되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 결국 남은 하나의 히든 퀘스트가 사실상 이 퀘스트의 진짜 목적이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보모 노릇이나 하라 이거군.” 그러고 보니 이곳에 오기 얼마 전부터 새로운 귀환자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는 내용의 뉴스를 본 적이 있다. 아마도 이번 퀘스트는 그 새로운 귀환자들과 함께 수행하는 퀘스트가 아닐까 싶다. 헤네스는 셔츠를 입다가 준상이 중얼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지만, 이런 식으로 종종 혼잣말을 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아는 탓인지 달리 물어보지는 않았다. 하지만 준상은 그녀의 모습을 보자 이번 퀘스트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준상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곧바로 허공에 캐비닛 하나를 꺼내 놓았다. 그 안에는 얼마 전에 임서윤에게서 받은 방어복이 들어 있었다. “이걸 입어.” “...” 헤네스는 준상의 의도를 깨닫고는 입고 있던 셔츠를 벗으며 캐비닛으로 다가섰다. 임서윤과 그의 길드원을 데리고 수행했던 악령 퇴치 퀘스트에서 준상은 여섯 개의 추가 보상 상자와 하나의 트리플 에스 급 보상상자를 얻었는데, 그 가운데 지금껏 획득하지 못했던 슈퍼 레어 급의 광폭 카드가 포함되어 있었다. 슈퍼 레어 등급의 광폭 카드 외에는 힐링 포션 두 개, 축복의 성수 하나, 언커먼 등급의 반딧불이와 모래무지, 그리고 역시 레어 등급의 피칠갑 카드 하나가 나왔었다. 언제나 꼭 필요한 카드만 나올 수는 없는 법이지만, 요정들에게 난감함을 무릅쓰고 키스를 잔뜩 받은 상황이라 새로운 콤보 카드 하나 정도는 구성할 수 있을 줄 알았던 준상으로서는 여러모로 입맛이 쓴 일이었다. 그나마 딱 하나 나온 슈퍼 레어 등급의 광폭조차, 준상의 경우에는 이미 영웅 등급의 광폭 카드를 쓰고 있는 상황이기에 별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마침 없는 카드이기도 한 상황이라 재시도조차 불가능하다. 이에 반해, 마지막에 나온 레어급 피칠갑은 이미 두 장이나 가지고 있는 카드였지만 추가로 여분의 블러드로드 콤보를 작성할 수 있음을 깨닫고 재시도를 포기했다. 굳이 의미를 부여해 보자면, 광폭과 피칠갑 카드를 추가로 얻음으로 인해 헤네스에게 레어 등급의 광전사 콤보인 블러드로드를 장착시켜 줄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정도가 고작인 셈이다. 하긴, 레어급 콤보를 고작이라고 표현하는 것 자체가 준상이기에 가능한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헤네스는 준상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심스럽게 방어복을 챙겨 입었다. 온몸에 짤 달라붙는 레이서 슈트 같은 모습의 방어복을 입은 그녀는 몸 앞쪽에 자리 잡은 지퍼를 올린 다음 전용의 부츠와 장갑을 착용했다. 머리카락을 정돈한 다음 목 뒤에 늘어져 있던 후드를 뒤집어쓰자, 어쩐지 조금 중성적인 매력마저 느껴진다. “어때?” “그냥 좀... 부끄러워요.” “...”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닥에 떨어져 있던 셔츠를 집어 그녀에게 입혀주고는 아래쪽의 옷자락을 두 번 정도 단단하게 묶어 주었다. “일단은 이걸로 참아봐. 어차피 나중에 리체스에게 마법을 부여해 달라고 할 참이니까.” “네.” 준상은 헤네스가 복장을 전부 챙기자 그녀의 카드 슬롯에 욕쟁이 할매 대신 블러드로드 콤보를 장착시켰다. 혹시나 하고 발동을 시켜 봤지만, 곧바로 준상의 시야에 경고 메시지가 나타났다. 경고! :콤보 카드 ‘얀트훈센의 블러드로드’는 갑옷을 착용한 상태에서는 발동할 수 없습니다. -장착중인 갑옷을 자동으로 해제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갑옷의 착용을 해제해 주십시오. “역시 안 되나.” 일반적인 갑옷과는 아무래도 형태가 틀린 옷이기 때문에 혹시나 예외가 성립되지 않을까 싶었지만, 불행히도 그런 요행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레어급 피칠갑 카드를 세 장이나 장착하고 있지만, 그래봐야 카드 중첩으로 인해 실제 효과가 발휘되는 것은 한 장 뿐이다. 블러드로드의 공격력 증가 옵션이 아쉽기는 해도 그렇다고 이 방어복이 지닌 막강한 방어력을 포기하고 재생력 10퍼센트에 의지해 헤네스를 피 튀기는 전투 현장에 밀어 넣기는 아무래도 불안한 일이다. 잠시 고민하던 준상은 블러드로드 콤보를 빼내고 대신 델로드란의 수호자 콤보를 그녀의 카드 슬롯에 장착했다. “차라리 이쪽이 낫군.” 델로드란의 수호자는 웨펀차지시 관통 효과가 100퍼센트 증가하고, 다시 치명타 무시 확률과 갑옷 효과가 50퍼센트 증가하며, 추가로 모든 저항이 10퍼센트 증가하는 효과가 있다. 아문간의 표피를 가공해 만든 방어복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라면 차라리 이쪽이 더 실용적인 셈이다. 준상은 만약을 대비해 욕쟁이 할매와 블러드로드, 그리고 델로드란의 수호자 이렇게 세 가지 콤보를 그녀가 자유로이 변경해 사용할 수 있도록 펫 관리 메뉴를 조정한 다음 그녀의 장비를 다시 확인해 보았다. “어디보자...” 준상은 마지막으로 그녀의 손에 자신이 그동안 애용해 왔던 미친개의 발톱을 끼워 주었다. 전투 중에 무기를 사용하게 되면서 격투전을 수행하는 일이 줄어 들었음에도 미친개 관련 칭호의 효과를 두 배 증폭시켜 주는 효과 때문에 지금까지 계속 착용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굳이 이걸 착용하지 않아도 충분한 수준의 공포 유발 효과를 발휘할 수 있으니 그녀에게 잠시 빌려준다 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제법 그럴 듯 한 걸?” “정말요?” “그래.” 준상은 헤네스의 아이템과 카드 슬롯의 점검이 모두 끝나자 그녀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춘 후 머리에 헬멧을 씌워 주었다. “이제 가볼까.” “네!” 준상은 일단 헤네스를 역소환한 다음, 리체스와 연락을 취한 뒤에야 즉시전송 기능을 실행했다. 마침내 한 줄기 빛과 함께 어두컴컴한 숲 한복판에 모습을 드러내자 곧바로 헤네스와 리체스부터 소환했다. “번거롭게 해서 미안하다.” “별 말씀을요. 혹시라도 필요하면 바로 부르세요.” “그래.” 리체스는 간단하게 몇 마디를 나눈 후, 곧바로 정령의 문을 통해 다시 요정계로 돌아갔다. 헤네스는 리체스가 돌아가자, 바이저를 위로 올린 상태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여기는...” 준상은 헤네스에게 이번 퀘스트의 내용을 설명했다. “일단 기본적으로 해야 할 일은 언데드 퇴치다. 어떤 놈들이 나타날지는 미지수지만 되살아난 시체 이상의 적은 없을 듯 싶다.” “그렇군요.” 준상은 미니맵을 살핀 다음, 곧바로 대상이 되는 좀비들이 있는 장소를 파악했다. “가자.” “네!” 준상과 헤네스는 어둑어둑한 숲을 달려 미니맵에 나타난 적을 향해 다가섰다. 예상대로 그들이 마주친 것은 썩어문드러진 채 비틀비틀 걸어다니는 좀비들이었다. “해봐.” “네.” 헤네스는 바이저를 내리고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좀비들을 향해 달려 나가더니, 곧바로 웨펀차지를 발동했다. 그러자 작은 주먹이 쭉 내밀어지며 비틀거리며 서 있던 좀비의 머리를 단숨에 부수어 버린다. “음...” 준상은 약간 아쉬운 느낌이 들었다. 헤네스는 한동안 직접적인 전투에 참여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2연격과 숄더차지 카드를 번갈아 장착하며 좀비들을 무리 없이 쓰러뜨리고 있었지만, 블러드로드를 장착하지 못한 탓에 아무래도 파괴력이 부족해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헤네스는 세 마리의 좀비를 어렵지 않게 쓰러뜨리고는 상기된 표정으로 준상에게 돌아왔다. “잘했다.” “모두 준상씨 덕분이에요.” “가자.” “네!” 준상과 헤네스는 그렇게 숲을 돌아다니며 길을 잃고 방황하는 좀비들을 하나씩 처치했다. 물론 준상은 그 와중에도 정령들을 숲 전체에 넓게 퍼뜨려 귀환자들이 도착하는 것을 살피도록 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약 십여분 정도가 지나가 귀환자들이 한줄기 빛과 함께 숲 한복판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준상은 정령과 미니맵을 통해 첫 번째 귀환자가 모습을 드러내자 곧바로 헤네스의 몸을 안아들었다. “주, 준상씨.” “달린다. 꽉 잡아.” “네!” 준상은 헤네스를 품에 안은 채 곧바로 첫 번째 귀환자가 출현한 곳으로 달렸다. 이미 경험이 많은 귀환자들이라면 모를까, 아직 퀘스트를 경험해 보지 못한 귀환자들은 전송 직후가 가장 위험하고 취약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준상은 첫 번째 퀘스트에서 잠결에 전송되어 반항조차 해보지 못한 채 죽은 여자를 본 적 있다. 이번에도 그런 일이 벌어지지 말란 법은 없는 일이기에, 준상은 이렇게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 준상의 예감은 어김없이 적중했다. 어두운 숲 속을 달리던 두 사람은 이내 한 여성의 찢어질 듯한 비명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준상은 곧바로 인벤토리에서 사자 가면을 꺼내어 얼굴이 눌러 쓴 다음, 비명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향해 돌입했다. “저, 저리가! 으앙! 누구 없어요! 도와줘요!” “...” 목욕하다가 갑자기 불려오기라도 한 것일까. 한 명의 젊은 여성이 상반신을 가리기에도 부족해 보이는 작은 타월과 플라스틱 슬리퍼 하나만을 손에 든 채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좀비들에게서 도망치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헤네스.” “네.” 헤네스는 준상이 땅에 내려주기가 무섭게 달려나가며 웨펀 차지를 발동해 알몸의 여성에게 덤벼드는 좀비의 머리를 단숨에 부숴 버리고는 방어복 위에 걸치고 있던 셔츠를 벗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이거 입어요!” “가, 감사합니다.” 헤네스는 그녀가 얼른 셔츠를 받아들자, 곧바로 앞으로 나서며 뒤따르는 서너 마리의 좀비들을 단숨에 때려잡기 시작했다. 역시나 목욕 중에 불려온 것이 맞았던 모양이다. 여자는 얼른 들고 있던 수건으로 대충 몸을 닦은 다음 헤네스가 건네준 셔츠를 몸에 걸치고는 헤네스가 싸우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퍽! 퍼퍽! 준상과 같은 강렬한 타격감은 전해지지 않았지만, 그녀의 작은 손이 뻗어질 때마다 좀비들은 휘청거리기 바빴다. 헤네스는 2연격으로 시간을 벌고 쿨타임이 차기를 기다려 숄더 차지와 웨펀 차지로 좀비들을 박살냈다. 마침내 전투가 끝나자, 그녀는 살짝 거칠어진 숨을 몰아쉬며 조금은 멍한 표정으로 자신을 지켜보는 여성을 향해 다가왔다. “괜찮아요?” “아... 네! 괜찮아요! 정말... 고마워요.” 가까이서 바라보니 의외로 얼굴이 상당히 앳되다. 키는 확실히 큰 편이지만 헤네스는 이 여성이 자신과 비슷한 또래임을 어쩐지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준상씨. 옷 좀 꺼내 주실래요?” 준상은 귀찮은 일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여성으로부터 모습을 숨기고 있었지만, 헤네스가 부르자 곧바로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커다란 캐비닛을 꺼내 놓았다. “힉!” 여성은 갑자기 사자 가면을 뒤집어 쓴 건장한 남성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자 크게 놀라며 급히 손으로 드러난 하체를 가리더니 곧바로 경계의 눈초리를 보냈다. 하지만 준상은 그녀가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도 쓰지 않는 모습이었고, 헤네스 역시 당연하다는 듯이 그가 꺼내놓은 캐비닛에서 적당한 옷가지를 꺼냈다. “좀 작을지도 모르지만, 일단 입어 봐요.” “가, 감사합니다.” 도대체 이들은 누굴까. 자신을 도와준 걸 보면 적이 아닌 것 같기는 한데... 여러 가지 상상이 여성의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했지만, 그녀는 일단 헤네스가 건네준 옷을 허겁지겁 몸에 걸쳤다. 헤네스는 그녀가 옷을 입는 모습을 보다가 허벅지에 할퀴어진 듯한 큰 상처가 나있는 것을 발견했다. “잠깐만요.” “네?” 건네받은 트레이닝 복을 입으려던 여성은 갑자기 헤네스가 자신의 다리를 붙잡자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헤네스는 상처를 가만히 살피더니 조용히 물었다. “여기 말고 또 다친 데가 있나요?” 여성은 얼른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 아뇨.” “다행이네요.” 헤네스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허리춤에서 채찍을 풀어냈다. “좀 기분 나빠도 참아요.” “네?” 무슨 소린가 싶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여성을 향해 헤네스는 분홍빛이 감도는 두 개의 채찍을 마구 휘두르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자수합니다. 서윤 파티랑 치렀던 퀘스트 보상 습득하는 걸 깜박 잊고 있었습니다. 삐질; 00197 트롤러 ========================================================================= “어? 자, 잠깐?” 영문도 모르고 갑자기 두 개의 채찍에 얻어맞은 여성은 당황해 하며 손을 휘저었지만, 다음 순간 욱신거리던 상처의 통증이 스르르 사라져 가는 현상을 느끼며 눈이 휘둥그레졌다. 미지근한 물에 흠뻑 젖은 듯한, 처덕거리는 채찍의 감촉은 그녀가 상처 입은 허벅지가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올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좀 기분 나빠도 참으란 건 이런 뜻이었던가. 여성은 얼떨떨한 중에도 피부에 와닿는 채찍의 감촉과 그럴 때마다 상처가 사라지고 새 살이 돋는 기이한 감각이 맞물리는 그 기묘한 체험에 넋이 나가고 말았다. 하지만 헤네스는 눈앞의 여성이 약간 얼빠진 표정으로 채찍에 맞을 때마다 움찔거리는 모습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채찍을 휘두르다가, 마침내 상처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손을 멈추었다. “하아...” 헤네스의 손이 멈추자 여성은 묘한 허탈감 같은 걸 느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지금 체험하고 있는 느낌의 정체를 확실히 인지하지 못한 채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 이건 도대체...” 그러자 헤네스는 친절한 목소리로 간단한 설명을 해주었다. “좀 당황스러웠겠지만, 원래 이런 물건이랍니다. 그래도 효과 하나는 끝내주지만요.” “...” 확실히 끝내준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여성은 어쩐지 자꾸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애써 억누르며 일단 헤네스가 건네준 트레이닝 복을 후다닥 갖춰 입었다. “하나 물어도 될까요?”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헤네스가 입을 열자 여성은 얼른 대답했다. “말씀하세요.” “이곳에 불려오셨다면 뭔가 특기가 있으실 텐데...” “아...” 여성은 난처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실은... 양궁을 좀 하거든요. 근데 경황이 없어서 활이랑 화살을 놓고 오는 바람에...” “아...” 양궁이란 단어는 좀 생소했지만, 뒤에 이어진 활과 화살이라는 말을 듣고 헤네스는 그녀의 특기가 궁술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활과 화살이 없는 궁술 보유자. 준상과 헤네스가 얼른 와보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을지 어렵지 않게 짐작이 간다. 여성 역시 그 점을 다시 한 번 깨달았는지, 얼른 그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별 말씀을요.” 그녀들을 조금은 훈훈한 분위기로 대화를 이어가려 했지만, 미니맵을 가만히 살피고 있던 준상은 그곳에서 약간 떨어진 장소에서 다시금 새로운 퀘스트 목표가 출현한 것을 확인했다. 준상은 곧바로 늑대들을 소환했다. “헉!” 갑자기 눈앞에서 커다란 늑대들이 네 마리나 한꺼번에 모습을 드러내자 아직 자기 소개조차 하지 못한 여성은 다시 한 번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타요!” “네?” 어느 틈엔가 헤네스는 사자 가면을 쓰고 있는 준상의 팔에 답싹 안아 올려진 상태로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타라고? 설마 저 늑대에? 당황해서 우물쭈물하고 있는데, 어느 틈엔가 뻗어온 준상의 손이 뒷덜미를 움켜 잡고는 그녀가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번쩍 들어 올려 그대로 커다란 붉은 늑대의 등 위에 올려놓았다. “어?” 그리고 뒤늦게서야 반응을 보이려는 그녀의 귓가에 낮게 깔린 준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꽉 잡아라.” “에?” 얼빠진 소리를 내던 그녀의 두뇌가 미처 자신의 상황을 인지하기도 전에, 부드러우면서도 질긴 모피 아래쪽에 자리 잡은 붉은 늑대의 탄력적인 몸은 그 주인인 준상의 뒤를 따라 앞으로 달려 나가고 있었다. 머리로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갑자기 얼굴로 바람이 확 밀어닥치자 여성은 얼른 고개를 숙이고 떨어지지 않기 위해 늑대의 목을 꽉 껴안았다. 붉은 털의 늑대는 목을 죄는 그녀의 팔에 불쾌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몸을 털어 그녀를 떨구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미 몇 차례나 헤네스를 태우고 다니면서 어느 정도 사람을 실어 나르는 일에 제법 익숙해진 탓이다. 지금 태우고 있는 이 낯선 여성은 헤네스보다 키도 크고 몸무게도 좀 더 나가는 편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미 수차례의 전투로 단련된 건장한 붉은 늑대가 부담스럽게 느낄 정도는 아니었다. 준상은 헤네스를 품에 안은 채 순식간에 두 번째 귀환자가 있는 곳에 도달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 귀환자는 앞서의 조금 얼빠져 보이는 여성과는 다른 능력의 소유자였다. “누구냐!” 인기척이 느껴지자 단검 하나를 역수로 쥔 채 경계의 빛을 발하던 젊은 남성은, 이내 사자 가면을 뒤집어 쓴 준상이 헤네스를 안은 채 수풀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이어서 붉은 늑대 위에 죽을 둥 살 둥 매달린 여성이 뒤를 따르는 모습을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준상은 제법 각이 잡힌 그의 모습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조용히 그를 향해 말했다. “따라와라.” “...” 영문도 알 수 없는 말이었지만, 남자는 준상이 다시 몸을 획 돌려 어디론가 달려가기 시작하고, 늑대들이 그 뒤를 따르자 조심스럽게 그 뒤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조금 더 달리자 준상은 또 하나의 귀환자 하나를 더 발견할 수 있었다. 아직 귀환한지 얼마 되지 않은 것인지 환자복을 입은 그 중년 남자는 배까지 내놓은 채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어 있었다. 준상이 먼저 발견했길래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숲을 배회하던 좀비들에게 발각되어 죽음을 면치 못했으리라. “...” 숨소리조차 내지 않은 채로 세상 모르게 잠들어 있는 그 모습에 준상의 품에 안겨 있던 헤네스는 물론이고 미심쩍은 표정으로 마지못해 그 뒤를 따르고 있던 남자마저도 어이없는 표정을 지을 정도였다. 헤네스는 준상이 내려주자, 여전히 붉은 늑대의 등에 눈을 질끈 감은 채 매달려 있는 여성을 향해 먼저 말을 건넸다. “이제 눈 떠도 괜찮아요.” “네?” 여성은 헤네스의 말을 듣고 나서야 화들짝 놀라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여전히 경계의 빛을 늦추지 않고 있는 조금 차가워 보이는 인상의 남자와, 튀어나온 배를 북북 긁으며 단잠에 빠져 있는 중년 남자의 모습을 차례로 발견했다. 준상은 혹시나 또 다른 귀환자가 있는지 정령과 미니맵을 통해 잠시 탐색하다가, 아무런 반응을 발견하지 못하자 붉은 늑대의 등 위에서 머뭇거리며 땅 위로 내려서는 여성을 향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깨워라.” “네넷!” 여성은 어째서 자신이 준상에게 존댓말을 하는 지도 의식하지 못한 채 반사적으로 얼른 대답하고는 잠꼬대까지 해가며 잠들어 있는 중년 남자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그의 어깨를 흔들었다. “저기... 여보세요? 아저씨?” “으음...” 중년 남자는 약물에라도 취한 것인지 그녀의 부름에도 쉽사리 눈을 뜨지 않았다. 그러자 멀찍이서 지켜보고 있던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가 얼굴을 찌푸리며 다가와 냅다 그의 배를 걷어찼다. “커억!” 중년 남자는 갑작스러운 그 타격에 비명을 질렀고, 난처한 표정으로 그의 어깨를 흔들던 여성은 기겁해서 물러났다. “이... 어떤 자식이...” 배를 감싸 쥐며 벌떡 일어선 중년 남자는 발작하듯 소리를 지르려다가 주위를 감싼 어두운 숲의 풍경과 낯선 사람들의 모습에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여긴...” 약에 취해 잠들어 있긴 했지만, 그 역시 튜토리얼을 통과해 살아남은 귀환자. 아직 퀘스트에 대해 제대로 인지하고 있지는 못했지만, 이 상황이 꿈같은 것이 아니라는 정도는 따로 설명해 주지 않아도 스스로 깨닫고 있었다. 중년 남자가 잠에서 깨어나자, 방어복으로 몸을 감싸고 헬멧으로 얼굴을 가린 헤네스가 앞으로 나서며 그들에게 대략의 설명을 했다. “여러분은 지금 퀘스트를 수행하기 위해 불려온 상황이에요.” “으음...” 약에 취해 잠들어 있던 중년 남자를 제외하고는 바로 그 내용을 알아들었다. 다만 중년 남자만이 귀환 당시 암벽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상처를 입고 병원에 누워 있다가 불려온 관계로 조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 역시 지금의 상황이 튜토리얼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라는 정도의 상황 파악은 하고 있었다. 헤네스는 간략하게 준상으로부터 전해 들은 이번 퀘스트의 목적을 그들에게 설명했다. 원래대로라면 휴대폰을 통해 스스로 내용 확인을 했어야 하지만, 목욕하다가 옷도 제대로 챙겨 입지 못한 채 불려온 여성은 말할 것도 없고, 약에 취해 잠들어 있던 중년 남자 역시 휴대폰을 챙겨오지 못한 상황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으음...” 중년 남자는 욱신거리는 배를 감싸 쥐며 얼굴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가 배를 걷어찬 바람에 수술 자리가 벌어진 모양이다. 그 모습을 보자, 헤네스는 두 말없이 허리춤의 채찍을 풀어냈다. “참으세요.” “무슨...” 중년 남자는 얼굴을 찌푸리며 헤네스를 돌아보다가 그녀의 손에 의해 휘둘러지는 채찍을 보고는 순간적으로 손을 뻗어 그것을 움켜쥐었다. 헤네스는 살짝 놀랐다. 제대로 설명을 하지 않은 것은 분명 그녀의 잘못이지만, 이런 식으로 휘둘러진 채찍을 낚아 채는 사람은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짓이지?” 중년 남자가 낮은 목소리로 묻자, 이미 그 효과를 체험해 본 여성이 얼른 나서며 말했다. “그거 맞으면 상처가 나아요!” “뭐?” 무슨 소리냐는 듯이 중년 남자는 앳되어 보이는 여성을 향해 물었지만, 다음 순간 헤네스의 등 뒤에 서 있던 사자 가면의 남자로부터 알 수 없는 위압감이 뿜어져 나오자 흠칫 놀라고 말았다. 기묘한 느낌을 받고 있긴 했지만, 헤네스의 등 뒤에서 있는 듯 없는 듯 별다른 기척을 내지 않고 있던 준상이 억누르고 있던 자신의 존재감을 유감없이 분출하자 중년 남자는 물론이거니와 다소 귀찮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던 날카로운 인상의 사내 역시 당황한 표정으로 얼른 자세를 낮추며 긴장하기 시작한다. 준상은 중년 남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무슨 짓이냐고 했나.” 중년 남자는 준상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이한 눈빛에 짓눌리는 느낌을 받으며 간신히 입을 열어 대답했다. “그, 그렇소.” 그러자 준상이 바로 대답했다. “맞아보면 안다.” “뭐?” 하지만 중년 남자가 달리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준상의 눈은 붉게 물들기 시작했고, 그것을 보는 순간 사람들은 마치 독사에게 내몰린 개구리 마냥 몸이 굳어 버리고 말았다. “헤네스.” “네!” 헤네스는 중년 남자가 몸을 부르르 떠는 모습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지만, 다시금 채찍을 휘둘러 그의 몸을 때리기 시작했다. 처덕거리는 소음과 함께 채찍이 자신의 몸을 때리자, 준상의 눈빛에 압도되어 꼼짝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중년 남자는 배의 상처로부터 전해지던 욱신거리던 감각이 차차 기이한 쾌감마저 느껴지며 점차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이, 이건...” 그제서야 깨달았다. 여성이 던졌던 상처가 낫는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헤네스가 중년 남자의 외상을 모두 치유하고 채찍을 거둬들이자, 준상은 그제서야 다른 귀환자들을 꼼짝 못하게 만들던 공포의 시선을 거둬들였다. “으음...” 말로 하지는 않았지만, 세 남녀는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었다. 만약 그럴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이 사자 가면을 쓴 남자는 자신들을 장난감 다루듯 가볍게 제압할 수 있었다. 또한 그들은 한 가지 사실을 더 깨달았다. 지금 이 사자 가면이 자신들을 매우 귀찮게 여기고 있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었다. 상대와 자신의 실력 차를 확인한 이상, 공연히 강자의 비위를 건드리는 것은 만수무강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세 남녀는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사자 가면을 쓴 채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있는 준상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준상은 그들이 그런 식으로 바라보거나 말거나 다시 입을 열었다. “휴대폰.” 그 말에 여성은 얼른 양 손을 들어 보이며 대답했다. “없어요.” 중년 남자 역시 품을 뒤져 보더니 난처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나 역시.” 오직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 만이 말없이 주머니 속에 넣어두었던 휴대폰을 꺼내 보였다. “...” 그 모습을 보고 준상은 다시 말했다. “하나만 알려 주도록 하겠다.” “...” “앞으로 무슨 일이 있더라도, 무기와 휴대폰, 이 두 가지는 절대 손에서 놓지 마라. 적어도 살고 싶다는 생각이 그 머릿속에 남아 있는 한.” “음...” 이번 퀘스트가 첫 번째라면 아직 파티 기능이 활성화 되어 있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지만, 준상은 일단 유일하게 휴대폰을 가지고 있는 날카로운 인상의 젊은 남자에게 파티를 걸었다. 다행히 파티 기능이 활성화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걸어오는 파티 요청을 받아들이는 것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역시 완전하지 않은 탓에 상대의 이름이나 정보는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젊은 남자는 휴대폰으로 파티 요청이 들어오자, 얼른 그것을 받아들였다. 이것만으로도 젊은 남자는 히든 퀘스트 세 개 분량의 보상이 예약된 셈. 하지만 다른 두 남녀는 휴대폰이 없는 이상 파티를 걸어주고 싶어도 요청을 받아들일 수단이 없다. 그야말로 복불복. 하긴 준상이 없었다면 확실하게 죽음을 면치 못했을 그들이니, 덤으로 추가 보상 상자를 얻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과욕일지도 모른다. 파티 요청이 마무리되자, 준상은 곧바로 흩어 놓았던 정령들을 통해 숲 여기저기에 남아 있는 좀비들을 한꺼번에 몰아오기 시작했다. “준비해라.” “네!” 준상의 말에 헤네스는 가볍게 몸을 풀며 다가올 전투에 대비했다. 그녀가 몸을 풀기 시작하자, 다른 세 남녀도 눈치껏 긴장으로 굳어 있던 몸을 풀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이 있는 곳을 향해 숲 속을 방황하던 좀비들이 어기적거리며 몰려 들자 헤네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앞으로 뛰쳐나가며 전투를 시작했다. 퍼걱! 헤네스의 작은 주먹이 선두의 좀비를 향해 쭈욱 뻗어나가 그대로 머리를 박살내자 세 남녀는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썩어 문드러진 시체라 할지라도 사람의 머리란 것은 저렇게 간단하게 박살나지 않는다. 적어도 튜토리얼을 거쳐 살아남은 이 세 사람은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으음...” 중년 남자는 침음성을 삼키며 헤네스의 작은 몸이 전투를 벌이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고, 앳된 인상의 여성은 양손을 마주 잡은 채 어째서인지 살짝 상기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중년 남자는 굳이 위험을 무릅써 가며 전투에 뛰어들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반대로 여성의 경우에는 전투에 참가하고 싶어도 무기가 없는 이상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 없는 처지였다. 하지만 날카로운 인상의 젊은 남자는 가만히 헤네스의 전투 장면을 지켜보다가, 헌팅 나이프로 보여지는 단검을 역수로 쥐고는 스스로 전투에 뛰어들었다. “...” 준상은 그 모습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보면 무모한 짓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다. 중년 남자처럼 피할 수 있다면 피하는 것이 현명한 일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 옳다고 단순하게 결정하고 판단할 일이 아닌 것은 분명한 사실. 하지만 준상은 피하지 않고 맞붙어 싸우는 쪽이었고, 그 덕분에 이렇게 강해질 수 있었다. 적절하게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판단력만 잃지 않는다면, 강한 쪽이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은 것은 물론이고 훨씬 더 많은 선택지를 고르는 것을 넘어 상대에게 자신의 선택을 강요할 수도 있게 된다. 지금의 준상처럼 말이다. 준상은 정령과 늑대들을 통해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채 뒤로 물러나 있는 중년 남자와 앳된 인상의 여성을 보호하며, 동시에 헤네스와 젊은 남자가 제대로 자신의 실력을 펼쳐 보일 수 있도록 지원했다. 조금 시간이 오래 걸리기는 했지만, 결국 헤네스와 젊은 남자는 준상의 지원에 힘입어 어렵지 않게 좀비들을 몰살시킬 수 있었다. 준상은 인벤토리에서 캐비닛을 꺼내 헤네스가 목을 축일 수 있도록 음료수를 꺼내주고는 다시 한 병을 더 꺼내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남자에게 던져 주었다. 날아든 음료수 병을 받아 들자, 준상은 낮은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이름이 뭐지?” 그 말에 남자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이승형... 입니다.”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이승형. 기억해 두겠다.” 00198 트롤러 ========================================================================= 중년 남자는 그 문답을 듣고 저게 뭐하는 짓거리인가 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만약 준상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귀환자들 가운데 가장 높은 레벨을 보유하고 있으며, 가장 많은 칭호와 가장 강력한 아이템으로 무장한 터무니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는 무슨 수를 써서든 자신의 이름을 그에게 기억시키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헤네스와 이승형이 휴식을 취하는 동안 정령을 날려보내 천천히 숲을 탐색하던 준상은 마지막 남은 퀘스트 목표인 오염된 검치호의 위치를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었다. “이제 하나 남았군.” “어떤 적이죠?” “오염된 검치호.” “음...” 헤네스는 조금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다. 인간형의 적이 아닌 야수와의 대결은 아무래도 처음이다 보니 아무래도 주저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떻게 할래?” 하지만 준상이 그렇게 묻자, 헤네스는 주먹을 불끈 쥐고 결의를 다졌다. “해볼게요.” “좋아.” 준상은 곧바로 늑대들을 보내 오염된 검치호를 몰아오도록 했다. 커다란 늑대들이 우르르 달려 나가자 자신을 제외한 유일한 여성인 헤네스에게 다시 말을 걸어보려고 다가서던 앳된 얼굴의 여성은 흠칫 놀라며 행동을 멈추었고, 상처는 치유되었지만 부상의 후유증으로 체력이 떨어져 있던 중년 남자 역시 불안한 표정으로 주위를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시간이 지나자 야수들의 거친 울음소리와 함께 숲 저편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한다. “헤네스.” “네!” 호흡을 고르며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던 헤네스는 준상의 부름이 들려오기가 무섭게 자세를 가다듬고 새롭게 나타날 적에 대한 채비를 갖추었다. 그리고 그녀가 자세를 낮추는 순간 수풀 너머에서 늑대들의 모습이 나타났고, 곧이어 온 몸에서 시커먼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거대한 검치호가 모습을 드러냈다. “헉!” 커다란 황소를 연상시키는 거대한 야수가 형형한 안광을 번뜩이며 모습을 드러내자 그렇지 않아도 그 울음소리에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던 세 귀환자들은 화들짝 놀라며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고 말았다. 광기에 젖어 든 포식자의 눈. 하지만 세 명의 귀환자들은 맹수라는 호칭조차 부담스러운 이 거대한 괴물의 눈과 마주치는 순간, 자신들이 이미 그와 같은 시선과 마주한 적이 있음을 깨달았다. 그렇다. 그들은 이미 사자 가면을 쓰고 있는 준상으로부터 이런 시선을 접한 적이 있었다. 아니, 오히려 준상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던 압도적인 위압감에 비하면 이 거대한 괴물의 눈은 차라리 애교스럽게 느껴질 정도다. -쿠와아아아! 검치호는 인간들이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날카로운 검과도 같은 송곳니를 드러내며 포효했다. 바로 그 순간, 헤네스가 그런 검치호의 옆구리를 향해 뛰어들었다. 검치호는 포효를 터뜨리다가 인간들 가운데 가장 작은 체구를 지닌 헤네스가 자신의 옆구리를 노리고 뛰어들자 가소롭다는 듯이 몸을 틀며 그녀를 향해 앞발을 휘둘렀다. 가볍게 대충 한번 휘저은 듯한 모습이었지만, 그 위력은 능히 헤비급 복서가 체중을 실어 날리는 펀치에 비견될 만 했다. 무시무시할 정도의 풍압을 유발하며 날아드는 검치호의 앞발에 헤네스는 순간 마음 속에 두려움이 일었다. 일단 물러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지만 헤네스는 자신의 마음 속에서 들려오는 속삭임을 떨쳐 버리고는 달려 나가던 기세를 죽이지 않은 채 몸을 둥근 공처럼 최대한 웅크렸다. 거대한 검치호의 앞발이 공기를 갈기갈기 찢으며 그녀의 헬멧 위를 스치고 지나간다. 순간, 헤네스는 웅크렸던 몸을 주욱 펴며 웨펀 차지를 발동했다. 스프링처럼 한껏 응축되어 있던 근육이 일시에 최대 출력의 힘을 발휘하며 그녀의 몸을 마치 탄환처럼 검치호의 몸을 향해 쏘아 보낸다. 그리고 마침내 내뻗어진 그녀의 작은 주먹이 검치호의 몸에 닿는 순간, 한 점에 집약된 강력한 힘은 검치호의 몸이 지닌 방어력을 꿰뚫고 들어가 그 신체에 치명적인 상처를 남겼다. 헤네스는 자신의 주먹이 거짓말처럼 검치호의 두꺼운 가죽을 꿰뚫고 들어가는 그 기묘한 촉감에 화들짝 놀랐다. 준상이라면 결코 하지 않았을 실수였지만, 그녀의 그런 반응에 검치호는 치명적인 부상에도 불구하고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참을 수 없는 고통과 충격으로 인해 뒤로 껑충 뛰어오른 검치호는 상황이 불리하다는 것을 깨닫자 곧바로 도주를 마음먹었다. 앞발 밑을 정확히 파고 들어가 갈비뼈를 부수고 폐를 찢어 놓은 헤네스의 일격은 그녀가 멈칫하며 손을 빼지 않았다면 단숨에 심장을 꿰뚫는 것조차 가능했을 정도였다. 델로드란의 수호자가 지닌 강력한 관통의 효과가 빛을 발한 것이다. 보통의 맹수라면 이미 쓰러져 피거품을 물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치명상. 악령의 힘에 오염된 몸은 이미 느릿하게 재생을 시작하고 있었지만 검치호는 단숨에 자신에게 이 정도의 치명상을 안긴 헤네스의 능력에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놈은 도망칠 수 없었다. 주위는 이미 거대한 늑대와 정령들이 에워싸고 있었고, 약해 보이는 인간들의 앞에는 기묘한 존재감을 퍼뜨리고 있는 사자 가면의 인간이 버티고 서 있는 까닭이었다. 그렇게 머뭇거리고 있는 검치호를 향해 다시금 헤네스가 달려들었다. 그녀는 자신이 중요한 기회를 놓쳤다는 것을 이미 깨달은 상태였고, 그 같은 실수를 다시 반복하지 않으리라는 다짐을 한 상태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검치호도 무력하게 당하고 있지 만은 않았다. 몸을 낮추고 다가서는 헤네스를 향해 압도적인 체중을 살려 몸을 날린 것이다. 주춤거리던 검치호가 갑자기 거대한 몸을 날려 덮쳐 오자, 최후의 일격을 날릴 생각으로 접근하던 헤네스는 아차 하는 순간 피할 기회를 놓치고 그 거대한 체중에 짓눌리고 말았다. “큭!” 헤네스는 급히 그 거대한 몸 아래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을 쳤지만, 검치호 역시 이 작고 치명적인 적을 제압하기 위해 입을 크게 벌리고 날카로운 송곳니를 그 목에 박아 넣으려 했다. 어둠 속에서 서슬 퍼렇게 빛나는 거대한 송곳니가 자신의 목을 향해 날아들자 헤네스는 자신도 모르게 팔을 들어 그것을 막았다. 검치호는 저런 가는 팔 따위 자신의 이빨이라면 단숨에 부숴버릴 수 있으리라는 여겼다. 하지만 날카로운 이빨이 그녀의 팔에 닿으려는 순간, 놈은 강력한 무언가가 자신의 벌려진 입을 움켜쥐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크르으으으... 믿을 수 없게도 윗턱과 아랫턱을 잡힌 채 검치호의 거대한 몸이 천천히 허공으로 들어 올려지고 있었다. 헤네스는 눈을 질끈 감고 닥쳐올 고통을 기다리다가, 어느 틈엔가 자신의 머리 맡에 다가와 버티고 선 커다란 남자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는 다름 아닌 준상이었다. 준상은 감히 헤네스의 몸에 이빨을 박아 넣으려 들던 검치호의 위아래 턱을 잡아 들어올리고는 그대로 놈의 입을 찢어 버렸다. 푸학! 제 아무리 악령의 힘에 의해 오염되어 강대한 힘을 지니게 된 야수라 해도 이래서야 버틸 도리가 없다. 검치호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다시금 내뻗어진 준상의 주먹에 머리가 박살나며 숨을 거두고 말았다. 준상은 검치호의 숨이 완전히 끊어진 것을 확인하자 그 사체를 인벤토리에 집어넣은 다음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는 헤네스에게 말했다. “다친 곳은?” “괘, 괜찮아요.” “다행이군.” 준상은 손을 뻗어 헤네스의 몸에 묻은 먼지를 털어 주었다. “죄송해요.” 헤네스는 자신의 실수를 자책하며 그렇게 말했지만, 준상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사실 놈이 그 정도로 강할 줄은 준상도 예상치 못한 바였다. 고작해야 풋내기들의 퀘스트에 등장하는 보스라고 생각하고 헤네스에게 맡긴 것인데, 이 정도면 제법 숙련된 귀환자들도 무시 못 할 정도의 힘이었기 때문에 그녀가 위기에 몰렸을 때는 준상도 조금 놀랄 수밖에 없었다. “허...” 그러나 놀란 걸로 따지자면 그 모든 상황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세 귀환자들이 더 했다. 세상에. 저 터무니없는 괴물의 턱을 붙잡고 그대로 입을 찢어 버리다니. 저게 도대체 인간으로서 가능한 일인가. 조금은 못마땅한 시선으로 준상을 바라보고 있던 중년 남자조차도 방금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에는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준상은 그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퀘스트의 마지막 수순을 밟기 시작했다. 곧바로 미니맵을 살핀 다음, 한두 마리씩 길을 잃고 방황하는 나머지 좀비들에게 정령들을 날려 보낸 것이다. 정령의 문이 열리면서 그 힘이 강화된 정령들은 이제 좀비 정도는 단숨에 파괴할 정도의 힘을 지니고 있었다. 결국 숲에 존재하는 모든 좀비들이 제거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승형은 방금 전에 벌어진 준상의 신위에 놀라 여전히 멍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갑자기 주머니 속에 넣어둔 휴대폰이 시끄럽게 울리기 시작하자 화들짝 정신을 차리며 새로 도착란 메시지를 확인했다. 화전민촌을 정화하십시오. :어둠의 군세로 인해 파괴된 화전민촌이 악령의 문으로부터 흘러나온 힘에 의해 오염되었습니다. 언데드로 부활한 주민들을 안식의 길로 인도하십시오. [이 퀘스트는 여러 명의 인원이 동시에 참여합니다.] ->완료! (Hidden) 제한 시간 이내에 숲에 존재하는 모든 언데드들을 섬멸하십시오. (107/107) (남은 시간 23:28) (협력) ->완료! (Hidden) 악령의 힘에 오염된 검치호를 토벌하십시오. (협력) ->완료! (Hidden) 희생자 없이 퀘스트를 완료하십시오. (협력) ->완료! - 당신이 이번 퀘스트에서 보여준 행동과 성과를 정산합니다. 이 과정은 약간의 시간이 소요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퀘스트 완료...” 이승형이 그렇게 중얼거리자, 여전히 얼이 빠진 모습으로 준상을 바라보고 있던 중년 남자와 앳된 인상의 여성이 화들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네?” “지금... 뭐라고?” 하지만 그들은 이승형으로부터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그의 휴대폰에는 그 순간에도 정산된 랭크와 그가 습득할 수 있는 보상에 대한 메시지가 떠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이승형은 그런 메시지가 아닌, 지금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사자 가면의 남자에게 시선을 빼앗기고 있었다. 그는 도대체 누구일까. 누구이길래 저 정도의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는 것일까. 나 또한, 저런 힘을 얻을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떠올리던 이승형은 이내 밝은 빛을 몸에서 뿜어내며 그가 본래 있어야 할 장소로 전송되었고, 그 뒤를 따라 다른 두 남녀도 각기 빛을 뿜어내며 원래 그들이 있던 장소로 되돌려 보내졌다. 준상은 다른 모든 귀환자들의 전송이 끝나자 몽몽이를 소환해 미처 그가 챙기지 못한 아이템이 없는지 확인하게 했다. “리체스.” “네?” “끝났다. 역소환할테니, 준비하도록.” “네! 주인님!” 요정의 대화법으로 리체스에게 역소환을 대비하도록 지시한 준상은 다시 헤네스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럼, 조금 있다가 보자.” “네.” 준상은 곧바로 헤네스와 리체스를 역소환한 다음, 즉시전송을 실행해 퀘스트 장소로부터 이탈했다. 그리고 다시금 한 줄기 빛과 함께 이벨류아의 저택 안으로 돌아온 준상은 전송이 끝나기가 무섭게 헤네스와 리체스를 다시 소환했다. 리체스는 소환이 되자, 피곤하다는 듯이 어깨를 주무르더니 준상에게 인사했다. “후아아... 수고하셨어요, 주인님.” 그러자 헤네스 역시 헬멧을 벗으며 말했다. “수고하셨어요.” “너야말로.” 준상은 먼저 헤네스에게 대답한 다음, 리체스를 돌아보며 말했다. “번거롭게 해서 미안하다.” 그러자 리체스는 고개를 저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요.” “그렇게 생각해 주면 고맙고.” 준상의 대답에 살짝 미소를 지어 보이던 리체스는 잠시 주저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저... 혹시 지금 시간 되세요?” “왜?” “피곤하시면 나중에 해도 상관은 없지만...” “무슨 일인데?” “실은... 드디어 하나가 완성되었거든요!” “분신?” “네!” 조금 피곤하긴 했지만, 퀘스트 자체의 난이도가 그리 높지 않았던 탓에 곧바로 쓰러져 잠들 정도는 아니었다. 준상은 헤네스를 돌아보며 말했다. “괜찮겠어?” “전 상관 없어요.” 헤네스가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준상은 즉시 꽃으로 향하는 석문을 그 자리에 소환했다. 00199 트롤러 ========================================================================= 석문을 통해 신기루 꽃으로 귀환한 세 명은 곧바로 요정계로 통하는 석문을 통해 요정계에 존재하는 리체스의 연구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뭐가 뭔지 구분이 잘 되지 않는, 울긋불긋한 빛의 환상 속에 존재하는 연구실에 들어가기가 무섭게 몸의 크기가 성인 여성의 그것으로 변화한 리체스는 허공에 대고 한차례 손짓을 함으로서 그녀의 연구실에 숨겨져 있던 물건 하나를 꺼내 들었다. “자, 이거에요. 주인님.” “이건...” 리체스가 건네준 것은 단순한 형태의 팔찌였다. 손가락 하나 굵기보다 조금 더 얇은 굵기에 요정의 돌이 아닐까 싶은 반짝이는 돌이 표면에 박혀 있었고, 한쪽에는 약간 둥글게 솟은 융기가 자리잡고 있었다. 리체스는 허리춤에 손을 척 하고 올리더니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요기 살짝 튀어나온 부위에 악령의 돌이 자리잡고 있어요. 몇 가지 조치를 취해놓은 상태라 더 이상은 만져도 저주에 걸린다거나 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기 때문에 이렇게 주위를 둘러놓았어요. 실은 그 처치에 제일 시간이 많이 걸렸답니다.” 리체스의 설명을 들은 준상은 바로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분신이라고 하지 않았나?” “맞아요. 그걸 착용해 보세요.” “...” 준상은 리체스가 말하는 대로 손목에 팔찌를 착용해 보았다. 그러자 이내 그의 발밑에서 하나의 빛나는 원이 만들어져 머리 위로 스치고 지나간다. “일전에 석문에 사용자 인증을 하던 모습이 인상적이어서 비슷한 방식으로 사용자의 정보를 인식하도록 만들어 봤어요. 이렇게 읽어들인 사용자의 신체 정보를 토대로 분신을 만들어 내는 거죠.” 그 말을 들은 헤네스가 바로 질문했다. “그럼 이걸 착용하면 누구든 분신을 사용할 수 있다는 건가요?” 리체스는 바로 대답했다. “맞아. 다만 그래서는 좀 문제가 있을 것 같아서 정해진 사용자만 쓸 수 있도록 몇 가지 보안 기능을 더 추가해 볼 생각이야. 현재는 일단 가장 중요한 분신 기능만 완성되어 있는 셈이지.” “아하...” 헤네스가 이해했다는 표정을 짓는 동안, 준상은 슬쩍 인터페이스를 통해 팔찌의 정보를 확인해 보았다. 아이템정보 명칭 : 분신의 팔찌 레벨제한 : 없음 종류 : 팔찌 등급 : Rare+ 효과 : 1. 착용시 자동으로 사용자 인식.(현재: 박준상) 2. 사용자의 분신 활성화 가능. Seed : 슬롯없음 설명 : 요정 여왕 리체스 르아테미시스가 만든 악세사리. 악령의 구슬이 지닌 힘을 이용해 실체화된 분신을 불러내는 것이 가능하다. 단, 시험작이므로 사용시 주의 요망. “...” 등급은 일반적인 레어보다 약간 높은 수준이다. 이전에 보여주었던 붉은 눈의 귀걸이처럼 레벨 제한이나 시드 슬롯은 존재하지 않지만, 대신 인위적으로 사용자 인식을 해야만 했던 기능이 자동으로 인식 가능하도록 바뀐 것이 특징이다. 준상이 팔찌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 헤네스의 질문에 대답해 주고 있던 리체스가 그에게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 번 시험해 보세요.” “어떻게?” “그 둥글게 튀어나온 곳에 손가락을 댄 상태에서 ‘분신’이라고 말씀하세요. 이것도 나중에는 생각만으로 가능하도록 방식을 바꿀 생각이지만, 일단은 시험작이니까 조금 불편해도 참아 주세요.” “알았다.” 준상은 리체스가 설명한 대로 팔찌의 불룩 튀어 나온 부분에 손가락을 대고 작게 말했다. “분신.” 그러자 준상의 몸이 살짝 빛을 발하는가 싶더니 잔상과 비슷한 것이 흘러나와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잔상은 처음에는 조금 흐릿하고 투명한 모습을 지니고 있더니, 점차 색이 짙어지다가 그대로 실체화했다. “앗!” 헤네스는 그 모습을 보고는 깜짝 놀라 얼른 두 손으로 눈을 가렸다. “어, 어라?” 리체스 역시 이런 상황은 예상치 못했는지 당황한 표정으로 얼굴을 붉혔지만, 그렇다고 눈을 피하지는 않았다. “...” 당사자인 준상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새롭게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분신은 옷이라고는 실오라기 하나도 걸치지 않은 나체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준상의 찌푸려진 얼굴에 아차 싶었던지 리체스가 얼른 변명했다. “그, 그게... 얼른 완성시킨다고 서두르다보니 신체 외의 의복은 미처 생각을 못했...” “...” 말은 그렇게 하는데 얼굴을 발그레하니 붉힌 채 눈을 떼지 못하는 리체스의 모습을 보니 어쩐지 별로 신뢰가 가질 않는다. 준상은 여전히 자신의 벗은 몸을 흘끔거리고 있는 이 철부지 요정 여왕의 모습에 속으로 한숨을 푸욱 내쉬고는 캐비닛을 꺼내 일단 가운 하나를 집어 들었다. “쩝...” “...” 등 뒤에서 리체스가 입맛을 다시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준상은 모르는 척 분신의 몸에 가운을 걸쳐 주었다. 가운을 걸쳐 주며 만져 보니 확실히 마네킹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다. 피부의 질감부터 시작해서, 체온에 이르기까지. 다만 눈을 감은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준상은 분신의 몸에 가운을 걸쳐 준 다음, 리체스에게 물었다. “어떻게 움직이는 거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고 있던 리체스는 준상의 말에 화들짝 놀라며 얼른 대답했다. “그, 그러니까... 아까처럼 둥글게 튀어나온 부분에 손가락을 대고 기동이라고 말씀하세요. 그러면 분신의 감각이 전해지면서 생각으로 움직일 수 있게 될 거에요.” “흠...” 준상은 미심쩍은 중에도 리체스의 말대로 악령의 구슬이 담겨 있는 것으로 보이는 둥근 부분에 손가락을 대고 말했다. “기동.” 그러자 감겨 있던 분신의 눈이 스르르 떠지는가 싶더니, 준상의 머리 속으로 기묘한 감각들이 소용돌이쳐 들어오기 시작한다. “...” 분명히 자신은 그대로인데, 또 하나의 시각이 그의 감각을 비집고 들어온다. 시각 만이 아니다. 후각, 청각, 촉각 등 다른 모든 감각들이 일시에 그의 머리 속으로 밀려들어오기 시작한다. “으음...” 준상은 자신도 모르게 현기증이 일어나 비틀거렸다. 갑작스럽게 두 개의 몸으로부터 서로 다른 감각이 밀려 들어오자 멀미와 같은 증상이 일어난 탓이다. “준상씨?” 준상과 분신이 동시에 신음소리를 내며 비틀거리자, 헤네스는 얼른 준상을 부축했고, 리체스는 분신의 몸을 붙잡았다. 리체스는 얼른 준상에게 물었다. “괜찮으세요?” 그러자 준상과 분신이 번갈아 입을 열었다. “이거...” “뭔가...” “정신 없군.” 그 모습을 보고 헤네스가 불안한 표정을 짓자, 리체스는 아무래도 안되겠다 싶었던지 강제로 분신을 되돌리려 했다. 하지만 그녀가 팔찌로 손을 뻗자 준상이 그것을 말렸다. “괜찮다.” “하지만...” “원래 뭐든 적응하려면 시간이 필요한 법 아니겠나.” 리체스는 준상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말했다. “뭔가 이상하다 싶으면 바로 손가락을 대고 해제라고 말씀하시면 분신은 사라질 거에요.” “알았다.” 준상은 일단 헤네스의 품에 안긴 채로 그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았다. 아무래도 처음부터 두 개의 몸을 동시에 움직이는 것은 무리인 탓에 가장 편안한 자세를 취한 것이다. “후우... 이제 괜찮으니 놔봐.” 분신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자, 리체스는 조심스럽게 부축하고 있던 손을 떼었다. 준상은 앉은 자세에서 일단 눈을 감아 보았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한쪽의 시각을 차단하자 그를 괴롭히던 어지러움도 조금 줄어들었다. 준상은 분신의 감각 쪽에 정신을 집중하며 천천히 몸을 움직여 보았다. 간단하게 도수체조를 해보니 움직임 자체는 자신의 몸과 그리 다를 바가 없었다. “어떠세요?” 리체스의 물음에 준상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건 정말 놀라운걸. 대단해.” “헤헤...” 준상의 칭찬에 리체스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쑥스러워 했다. 며칠이나 뜬눈으로 지새며 고생하며 쌓인 피로가 별것 아닌 칭찬 몇 마디에 봄눈 녹듯이 사라져 가는 느낌이 살짝 당혹스러울 정도다. 준상은 리체스가 쑥스러워 하는 모습을 보며 피식 웃고는 천천히 분신을 움직여 제자리 뛰기를 시작했다. 역시나 별다른 위화감을 느끼지 못할 정도다. “리체스.” “네?” “이 안에서 좀 뛰어도 상관없을까?” 준상의 말에 리체스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아... 그건 좀.” “하긴.” 준상은 곧바로 석문을 열고는 신기루 꽃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넓은 최하층의 둘레를 분신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천천히 달리며 감각이나 몸의 움직임에 이상이 없는지 확인했지만, 어느 정도 점검이 끝나자 서서히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이 되자 분신의 몸이 하얀 가루 같은 것을 떨구며 흩어지기 시작한다. “이, 이런! 멈추세요!” “...” 준상은 그 말을 듣고 얼른 분신을 멈추려 했다. 하지만, 분신은 어느 순간 통제에서 벗어나는가 싶더니 그대로 빛으로 화하며 사라져 버렸다. “아...” 분신이 사라지자 준상은 천천히 눈을 떴다. 의도하지 않게 분신이 사라지긴 했지만, 다행히 그의 정신이나 감각에는 이상이 없었다. 준상은 몰랐지만, 그건 리체스가 분신의 팔찌를 만들면서 최대한 사용자의 정신의 보호에 초점을 맞춘 덕분이었다. “어떻게 된거지?” 준상의 물음에 리체스는 울상을 지은 채 준상의 손목에 채워진 팔찌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자세한 건 좀더 조사를 해봐야겠지만, 팔찌의 처리 능력이 주인님의 신체 능력을 따라가지 못해서 동기화가 해제되었고, 그 바람에 안전장치가 작동해서 분신이 해제된 것이 아닐까 싶어요.” “흐음...” 이것은 리체스도 미처 예상을 하지 못한 부분이었는데, 사실 일반적인 인간의 신체 능력이라면 이런 식의 문제가 생길 이유가 없었다. “일단 벗어주세요. 아무래도 좀 더 연구를 해봐야겠네요.” “미안하군.” 리체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다시 말했다. “신경 쓰지 마세요. 미리 주인님의 능력을 감안하지 않은 제 탓이니까요. 차라리 다행이죠. 실전에서 이런 문제가 발견되었으면 큰 일 아니겠어요?” “그렇긴 하지만.” 준상이 팔찌를 벗어주자 리체스는 그것을 받아 다시 연구소 안에 보관했다. 그 모습을 보며 헤네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여왕님.” “응?” “많이 피곤하실 것 같은데, 오늘은 그만 하고 쉬세요.” 그녀가 연구실에 틀어박혀 혼자 죽도록 고생하는 동안 자신은 이벨류아에서 신혼 분위기를 만끽하고 있었던 것이 아무래도 미안했던 모양이다. “그러는 것이 좋겠군.” “하지만...” 리체스는 고개를 저으려 했지만, 이어진 준상의 말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렇게 쉬지도 않고 일만 하다가 다시 천년동안 잠이 들어버리면 곤란하거든.” “...” 준상은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힌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그녀의 손을 잡고는 다시 이벨류아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석문을 열고 이전에 집정관의 저택이었다가 준상이 손에 넣은, 대리석으로 치장된 고풍스런 느낌의 저택으로 돌아오자, 리체스는 저택 안팎의 북적거리는 느낌이 신기한지 작아진 몸으로 침실 안을 바쁘게 날아다녔다. “사람들이 많은가 봐요!” “어느새 아침이 된 모양이군.” 준상은 커튼을 젖히고 들창을 열어 막 떠오르기 시작한 아침 햇살을 방 안으로 끌어들였다. 리체스는 창문이 열리자 조심스럽게 바깥으로 나가더니 시녀들이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시종들이 청소를 시작하는 모습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요정계에 있는 그녀의 거처는 물론이고, 준상이 지닌 신기루 꽃 또한 관리에 인력을 거의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아침부터 사람들이 북적거리며 움직이는 모습은 그녀에게 여러 가지로 생소할 수밖에 없었다. 헤네스는 창문에 매달려 바깥을 구경하는 리체스의 모습에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준상이 꺼내준 캐비닛에서 옷을 꺼낸 뒤 입고 있던 방어복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새벽에 잠을 설친데다 격렬한 전투까지 치른 상황이라 헤네스는 다소 피곤한 기분이 들었다. “수고했으니 오늘은 나가지 말고 집안에서 푹 쉬도록 하자.” 준상의 말에 헤네스는 웃으며 대답했다. “사람들이 흉 봐요.” “뭐라고?” “...” 아무리 신혼이라고는 해도 허구헌날 침실에만 틀어박혀 있으면 당연히 구설수에 오를 수밖에 없다. 더구나 외간남자와 야반도주를 감행했다는 소문이 돌았던 헤네스로는 아무래도 다른 사람들의 이목이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지만, 그런 일을 준상에게 말하기는 아무래도 좀 민망한 것도 사실이었다. 두 사람이 그런 대화를 나누는 동안, 리체스는 한동안 연구실에 틀어박혀 있었던 반동인지 평소보다 더 호기심 넘치는 표정을 지은 채 바깥을 바라보다가 준상에게 말했다. “저... 잠깐 바깥 구경 좀 하고 와도 되나요?” “물론. 이곳은 네 집이기도 하니까 그런 건 일일이 물어볼 필요 없다.” “헤헤...” 리체스는 준상의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살짝 상기된 얼굴로 쑥스러워 하다가 이내 도망치듯 창문 밖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잠시 가서 씻고 올게요.” “그래.” 저택에도 욕탕이 있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요정계의 온천이나 신기루 꽃에 가져다 놓은 컨테이너 하우스 안의 샤워실에 비하면 불편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준상도 헤네스도 욕실 만큼은 그곳을 이용하고 있었다. 리체스가 저택 구경을 가고 헤네스가 샤워를 하러 신기루 꽃으로 가버리자, 준상은 오랜만에 혼자 방안에 남겨졌다. “퀘스트 보상이나 확인해 볼까.” 난이도가 난이도인만큼 별로 대단한 보상은 나올 것 같지 않았지만, 준상은 퀘스트의 보상을 확인해 보기로 했다. 예상대로 경험치는 약간 수준이었고, 보상 상자는 협력이 셋, 트리플 에스가 하나였다. 준상은 우선 협력 보상 상자부터 확인해 보았다. 카드정보 명칭 : 검치호 레벨 : 1Lv 경험치 : 0 등급 : Uncommon 분류 : 소환 성장 : 일반(중) 속성 : 없음 효과 : 날카로운 송곳니를 가진 검치호 1개체를 소환합니다. Cost : 15 Seed : 3슬롯 처음에 나온 것은 그동안 수차례 퀘스트에서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나온 적이 없었던 검치호였다. 시험 삼아 슬롯에 장착한 다음 소환해 보니 이번에 상대했던 괴물 같은 크기의 검치호는 아니고, 튜토리얼에서 만났던 녀석과 크기가 비슷했다. 준상은 일단 새로 얻은 검치호 카드를 이미 늑대 카드와 헬하운드를 장착하고 있는 엘리의 남은 슬롯에 장착시키고는 다음 상자를 열었다. 그러자 두 번째 상자에서 축복의 성수가 나왔다. “쯧...” 물론 쓸모가 없는 건 아니지만 지금껏 전투중에 단 한 번도 써본 적이 없는 포션이 줄기차게 나오는 것은 그리 달가운 일이 아니다. 29레벨이 된 이후 벌써 축복의 성수만 세 번째 획득하고 있으니 솔직히 짜증이 날 수밖에 없다. 준상은 혀를 차며 세 번째 상자를 열었다. 축하합니다! 추가 보상 상자(협력)에서 특수카드 ‘인벤토리’를 획득했습니다. :특수카드를 획득하면 봉인된 특수기능을 해제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이미 특수기능 ‘인벤토리’가 개방되어 있으므로 인벤토리 용량을 2칸 확장합니다. -현재 당신의 인벤토리에는 서로 종류가 다른 23가지 물품을 등록하여 사용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마지막 추가 보상 상자에서는 또다시 인벤토리가 나왔다. 이것 역시 처음 퀘스트를 시작한 귀환자들에게는 무척이나 유용한 보상이지만, 이미 이십 칸 넘게 인벤토리를 보유하고 있는 준상으로서는 그냥 그런가보다 할 뿐이다. 카드정보 명칭 : 신뢰 레벨 : 1Lv 경험치 : 0 등급 : Uncommon 분류 : 스킬 성장 : 대기만성(중) 속성 : 빛 효과 : 강력한 존재감을 퍼뜨려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소환물, 펫, 파티원의 공격력과 방어력을 조금 증폭시킵니다. Cost : 15 Seed : 2슬롯 마지막으로 연 트리플 에스급 보상 상자에서는 새로운 스킬이 나왔다. 장착만으로도 충분히 효과를 발휘하는 스킬이라, 준상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것을 지금까지 카드를 장착하지 않고 있던 리체스의 슬롯에 장악, 파괴등의 카드와 함께 장착시키는 것으로 보상 확인을 끝맺었다. 이후로 그들은 며칠 더 이벨류아의 저택에 머물렀다. 다행히 퀘스트도 다시 발동되지 않았기 때문에, 리체스는 석문을 통해 연구실과 저택을 오가며 연구를 계속하고 있었고, 준상은 간간히 그녀의 연구실에 들러 분신의 운용을 연습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동안 가문의 일로 바빠서 내왕이 없던 젤란이 헐레벌떡 저택을 찾아왔다. “왔습니다!” 무슨 소린가 하는 표정으로 준상과 헤네스가 바라보자, 젤란은 가쁜 숨을 달래는가 싶더니 이렇게 말했다. “한트... 한트가 광전사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00200 트롤러 ========================================================================= 그 말을 들은 헤네스는 준상을 바라보았고, 그는 예상보다 좀 빠르다는 느낌에 젤란에게 다시 물었다. “광전사라면... 몇 명이나?” 별로 놀라지 않는 두 사람의 모습에 소식을 듣자마자 헐레벌떡 달려온 젤란은 어쩐지 좀 뻘쭘해졌다. “그, 그게... 약 백 명 정도...” “그렇군요.” 어쩐지 예상보다 좀 빠르다 했더니 전부 모여서 오는 것이 아니라 기별이 닿은 자들부터 순차적으로 몰려오는 모양이었다. 대충 상황을 파악한 준상은 젤란에게 낮은 목소리로 가만히 말했다. “세밀한 인원수까지는 정확히 말씀드리기 어렵지만, 다해서 천 명 정도가 모여들 겁니다.” 준상의 말에 젤란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처, 천 명이나 말입니까?” “네.” 천 명의 광전사. 어둠의 군세가 침공했을 당시 이벨류아는 물론이고 인근의 관문과 초소에 배치되어 있던 병사들을 모두 합친 숫자가 천 명이었다. 게다가 그 개개인들은 명성 높은 기사들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한트와 같은 부류들. 때문에 젤란은 고작 백 명의 광전사들이 이벨류아로 몰려온 것만 가지고도 호들갑을 떨었던 것인데, 준상은 그 열 배를 논하고 있으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호, 혹시 그들이 어떤 목적으로 오는지 알고 계십니까?” 떨리는 목소리로 젤란이 묻자, 가만히 옆에서 듣고 있던 헤네스가 그 말에 대답했다. “그들은 준상씨를 보러 오는 거에요.” 젤란에게 광전사들이 올지도 모른다는 말을 전해 주었던 것이 바로 헤네스다. “매제를?” “네.” “어째서?” 그 말을 들은 헤네스는 준상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짐작이 가는 바는 있었지만, 자신보다는 준상이 더 정확한 답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준상은 두 남매의 시선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며 대답했다. “천 명이 모이게 되면, 그들은 제가 합당한 자격을 갖추고 있는지 시험하기 위해 저와 싸우게 될 겁니다.” 젤란은 잠시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지만, 이내 그 의미를 깨닫고는 크게 외쳤다. “그, 그들과 싸운다고요?” 하지만 준상은 담담하게 그 말에 대답했다. “네.” “처, 천 명의 광전사와?” 믿기지 않는지 다시 한 번 되묻는 젤란을 향해, 준상은 다시 한 마디를 덧붙여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한꺼번에.” “하, 한꺼번에...” 준상이 기사 대전에서 보여준 엄청난 힘은 젤란도 직접 눈으로 확인한 바가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대 일의 대결이었다. 하지만 이번 상대는 무려 천 명. 아무리 실력 좋은 기사도 한 번에 열 명 이상의 적과 맞닥뜨리게 되면 일단 물러나 형세를 살피는 것이 당연한데, 이 터무니 없는 남자는 무려 천 명의 광전사와 한꺼번에 싸울 것이라 말하고 있었다. “괘, 괜찮겠습니까?” 떨리는 젤란의 말에 준상은 오히려 되물었다. “잊으셨습니까?” “무슨...” “금단의 숲에서 제가 어느 정도의 적과 마주했었는지, 잊으신 겁니까?” “아!” 연이은 충격적인 말로 인해 잠시 굳어 있던 젤란의 머리가 다시 민활하게 돌아가며 가지고 있는 정보들을 조합하기 시작한다. 그렇다. 준상은 이미 과거에 일 만에 달하는 어둠의 군세를 혼자서 도륙했던 적이 있는 몸이다. 물론 당시 준상이 상대했던 것은 고작해야 되살아난 시체들인 좀비들이 태반이었지만, 이후 에픽 퀘스트를 연이어 격파하며 폭발적으로 강해진 준상의 힘을 감안하면 지금 일 천의 광전사가 몰려들고 있다는 말에도 준상이 담담한 까닭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젤란은 그렇게까지 세세한 상황은 알지 못하고 있었지만, 동요하는 기색은커녕 담대하기까지 한 준상의 태도를 보자 납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준상은 그런 젤란을 향해 다시 말했다.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젤란은 얼른 혼란스러운 머리 속을 정리한 뒤 대답했다. “말씀하십시오.” “보시다시피, 아직 이곳 저택의 안팎이 아직 어수선합니다.” “아...” 젤란은 준상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바로 이해하고 대답했다. “그 점이라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천 명이라... 확실히 적은 수는 아닙니다만, 미리 준비한다면 대처하지 못할 정도는 아닙니다.” 준상의 말대로 지금 이 저택은 공사라든가 여러 가지 일로 다소 번잡스러운 상황이기는 하다. 그러나 사실 사람을 들이려고 마음 먹는다면 천 명까지는 어렵더라도 그 절반 정도는 받아들일 수 있었다. 아니, 좀 무리를 해서 꽉꽉 눌러 담는다면 천 명을 수용하는 것도 불가능하기만 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준상은 그런 근육질 빡빡이들이 자신과 헤네스, 그리고 리체스가 함께 머무는 이 아름다운 저택의 일부가 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젤란에게 그런 부탁을 한 것이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맡겨 주십시오.” 젤란이 천 명 분의 숙박 계획을 마련하기 위해 허겁지겁 달려 나가자, 헤네스가 준상을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가 한 번 가서 살펴볼까요?” 준상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 없다.” “하지만...” 좀 규격 외이긴 해도 준상을 찾아온 손님이기에 헤네스는 말을 꺼낸 것이었지만, 그의 생각은 좀 달랐다. “어차피 급한 건 이쪽이 아니니까, 게다가... 먼저 움직이지 않더라도 저쪽에서 찾아올 것이다.” “알았어요. 그럼 그렇게 알고 있을게요.” “그래.” 준상의 말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젤란이 한트를 제외하고도 열 명이나 되는 건장한 남자들을 데리고 다시 저택을 방문했다. 체구는 제각각이지만, 하나 같이 울퉁불퉁한 근육이 드러나는 우람한 상반신을 자랑하는 열 명의 사내들을 보자 헤네스는 어쩐지 죄다 형제가 아닌가 싶은 느낌마저 받았다. 한트처럼 머리를 완전히 밀어 버린 사람도 있고, 대머리는 아니지만 손톱 하나 길이도 안 될 정도로 짧게 머리를 자른 사람도 있었지만, 어쨌든 부리부리한 눈에 울퉁불퉁한 근육질이란 점은 매한가지였다. 젤란의 안내를 받아 저택의 거실로 들어온 사내들은 준상을 보자 일제히 한트를 바라보더니,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갑자기 숨막힐 듯한 기세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헉!” 그들을 안내해 왔던 젤란이 기겁을 하며 몸을 움츠리자, 한트가 그를 슬쩍 옆으로 밀쳐냈다. 이런 식으로 살기를 임의로 뿜어내 상대의 정신을 교란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긴 하다. 그러나 준상이 지닌 공포의 시선에 비하면 명확하게 대상을 특정하는 것도 불가능하고, 효과도 그리 대단치 않은 수준. 이 정도 살기로는 준상은커녕 아직 콤보를 수호자에서 변경하지 않고 있는 헤네스에게도 위협이 되지 않는다. “이것은 시험인가?” “...” 이 열 명의 사내들은 먼저 도착한 광전사들 가운데 살기를 임의로 뿜어낼 수 있는 자들로 특별히 고른 자들이었다. 하지만 준상은 물론이고 그 옆에 앉아 있는 갈색 머리 소녀조차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모습을 보고 그들은 속으로 크게 당황하고 있었다. 준상의 말대로 이들은 그의 실력을 확인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한트는 분명히 광전사 가운데도 제법 강한 축에 속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의 말만 믿고 대륙 각지에 흩어져 있는 광전사들을 단숨에 모아 들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때문에 일단 이벨류아가 속한 국가인 델로드란 인근의 광전사들이 먼저 모여 과연 붉은 공포라는 이름에 걸맞은 능력이 있는지 일차적으로 시험할 요량이었다. 광전사들은 대수롭지 않게 자신들의 살기를 받아넘기는 준상의 모습을 보자, 곧바로 주위 사람들을 의식해 억제하고 있던 살기를 모조리 풀어놓았다. 살기의 양이 증폭되자 헤네스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구석에서 덜덜 떨고 있는 오빠에게 다가가 그 앞을 막아섰다. “헤, 헤네스?” 젤란은 자신의 여동생이 앞을 가로막자 겨우 막힌 숨통이 트이는 것을 느끼며 그 이름을 불렀지만, 헤네스는 얼른 손가락으로 그의 입에 가져다 대며 속삭였다. “쉿. 조용히 하세요.” “...” 그 모습을 보고 광전사들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지만, 그 순간 조금 실망스럽다는 표정을 짓고 있던 준상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것이 광전사들의 인사법이라면, 그에 걸맞게 대해주는 것이 도리. 준상은 열 명의 광전사들을 바라보며 말없이 공포의 시선을 발동했다. “큭!” 그의 눈에서 붉은 안광이 폭발하듯 뿜어져 나오자, 정신을 집중해 그에게 살기를 쏘아 보내고 있던 광전사들은 시신경을 타고 흘러들어오는 그 터무니없는 공포에 그대로 압도되어 버리고 말았다. 반항? 그런 걸 생각할 틈도 없었다. 준상의 눈에서 붉은 빛이 번뜩인다고 느낀 순간, 그 감각에 대한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공포라는 이름의 마물이 사고 그 자체를 먹어치워 버린 탓이다. 털썩. 열 명의 광전사들 가운데, 가장 약한 한 사람이 뭘 어떻게 해볼 사이도 없이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흐으읍...” 주저앉은 광전사는 그제서야 어느새 비어버린 허파 안에 잔뜩 공기를 불어 넣었다. 어느 틈엔가 그의 몸은 전력질주를 한 사람처럼 땀에 흥건히 젖어 있었고, 기력이 다한 것처럼 손발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광전사는 함께 온 열 명의 동료 가운데 자신이 가장 먼저 나가떨어졌다는 것에 수치를 느꼈지만, 그런 생각이 사고의 수면 위에서 가라앉기도 전에 다른 광전사들 역시 털썩 털썩 그 자리에 실 끊어진 꼭두각시 인형처럼 널브러지기 시작한다. 그들 역시 바닥에 쓰러지기가 무섭게 크게 숨을 들이키며 헐떡거리기 바빴고, 어느새인가 실내는 그들이 흘린 땀냄새와 거친 숨소리로 가득 차 버렸다. “음...” 이 모든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던 한트는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며 신음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동료들이 내뿜은 살기를 아무렇지 않게 받아내는, 이전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던 갈색 머리 소녀의 존재도 당황스러웠지만, 그보다도 지금 그의 머리 속을 혼란에 몰아넣고 있는 것은 자신이 파악했던 것보다 준상이 훨씬 더 강하다는 사실이었다. 바보 같은 일이지만, 한트는 그제서야 일전에 그와 힘겨루기를 했을 때 그가 얼마나 자신을 봐주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자존심이 상했다.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그의 몸 안에 잠자고 있던 광전사의 피가 들끓기 시작했다. 준상의 말을 믿고 지금 이렇게 델로드란 인근의 광전사들을 끌어 모으기는 했지만, 그런 그의 마음 한 편에는 정말 그가 붉은 공포에 합당한 인물인지에 대해 약간의 의구심이 남아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스칸이라는 젖비린내 나는 애송이는 그렇다 치더라도, 능숙하고 숙련된 상급 광전사들을 이렇게 단숨에 눈빛만으로 제압하다니. 이것은 대전사라 불리는 블러드로드들조차도 불가능한 일. 물론 천 명과 대적하는 일에 비할 수는 없는 일이겠지만, 붉은 공포라는 이름을 가진 자에 대한 증명으로 이보다 더 훌륭한 것이 어디 있을까. “큭...” 생각은 길었지만, 도미노처럼 다른 모든 광전사들이 차례로 쓰러져 바닥을 뒹구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준상은 방 안에 가득한 남자들의 땀 냄새에 얼굴을 찌푸리더니 염동력으로 창문을 열고 산들바람을 불러 방 안을 환기시켰다. 그리고 어느 정도 땀 냄새가 가신 뒤에야 땅바닥에 주저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는 광전사들을 가만히 내려다 보며 말했다.. “더 해볼텐가.” “...” 광전사들은 잔뜩 지친 서로의 몰골을 돌아보더니, 이내 머리를 바닥에 부딪히며 크게 외쳤다. “붉은 공포를 뵙습니다!” ============================ 작품 후기 ============================ 어느새 200회군요. 모두 성원해주신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 00201 트롤러 ========================================================================= 광전사들의 외침을 들은 준상은 한켠으로 물러나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한트를 향해 물었다. “전에 말했던 것보다 숫자가 적은 것 같은데.” 크림슨드레드임을 증명하기 위해 필요한 광전사의 수는 모두 천 명. 물론 준상은 이들이 인근 지역에서 급히 모인 선발대임을 짐작하고 있었지만, 정확한 경과를 확인하게 위해 이들 가운데 유일하게 안면이 있는 한트에게 질문한 것이다. 한트는 얼른 준상의 앞으로 나아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대답했다. “제 독단으로 모을 수 있는 숫자는 이 정도가 전부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시험하신 이들이 나머지 인원들을 불러 모으게 될 것입니다.” 준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소파로 다가가 자리에 앉았다. 그때까지 방 안에 소용돌이치던 살기의 폭풍 속에서 오빠를 지키고 있던 헤네스는 여전히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던 젤란을 데리고 그의 곁에 다가가 앉았다. 헤네스가 자신의 옆으로 돌아오자 준상은 다시 말했다. “얼마나?” “네?” “천 명이 모이려면 얼마나 걸리느냔 말이다.” “아...” 한트는 탈진한 모습으로 엎드려 있는 동료들에게 시선을 돌리더니 그들과 손짓 발짓으로 의견을 교환한 뒤에야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적어도 일년 이상은...” “흠...” 지구처럼 빠른 교통수단이 존재하지 않는 것을 감안하면 각지에 흩어져 있는 광전사들을 불러들이는 것부터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그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준상으로서는 그렇게 느긋하게 이들을 기다려 줄 생각이 없었다. “너무 늦군.” 준상의 말에 한트와 광전사들은 일제히 그 앞에 다시금 머리를 조아리며 외쳤다. “죄,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들로서도 어쩔 수 없는 물리적 한계였기에, 죄송하다는 말 이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런 광전사들을 잠시 바라보던 준상은 저택 어딘가를 돌아다니고 있을 리체스에게 요정들의 방법으로 연락을 넣었다. “리체스.” “네?” 어디서 뭘 하고 있었는지, 리체스는 화들짝 놀란 목소리로 준상의 연락을 받았다. “할 얘기가 있으니 돌아와라.” “네! 잠시만요.” 광전사들은 혼자 중얼중얼거리는 준상의 모습을 보고 의문스런 표정을 지었지만, 가만히 바닥에 엎드려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창가로부터 작은 요정 하나가 날아들었다. 아름다운 무지개빛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날아온 리체스는 급하게 온 탓인지 입가에 장미꽃잼이 살짝 묻어 있는 상태였다. 뭘 하고 있었길래 연락을 넣었을 때 그렇게 화들짝 놀라나 싶었는데, 주방에서 장미꽃잼을 몰래 빼먹고 있었던 모양이다. 헤네스는 리체스의 그런 모습에 쓴웃음을 지으며 얼른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입을 닦아 주었다. “그냥 가져다 달라고 하시면 될 텐데.” “헤헤...” 주는 걸 받아먹는 것보다는 시녀들의 눈을 피해 몰래 빼먹는 건 스릴 넘치지 않느냐는 말을 꾹 눌러 참은 리체스는 헤네스가 입을 다 닦아 주자 곧바로 준상을 바라보며 말했다. “무슨 일이세요?” 준상은 리체스의 목소리를 듣고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는 젤란과 광전사들의 모습을 보며 그녀가 요정의 방법으로 몸을 숨긴 상태임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여기 이들이 보이지?” 준상의 말에 리체스는 고개를 돌려 바닥에 엎드려 있는 광전사들을 바라보았다. “이 사람들과 관련이 있는 일인가요?” “맞아.” 리체스의 물음에 짤막하게 대답한 준상은 곧바로 말을 이었다. “이들이 정령의 문을 사용했으면 하는데, 괜찮을까?” 정령의 문은 요정계로 통해 있으니, 이 말은 곧 이들을 요정계로 들여 놓아도 괜찮냐는 질문이었다. 사실 이전에 미로 속에서 처녀들을 구할 때 독단적으로 그녀들을 자신의 몸에 자리 잡은 정령의 문을 통해 요정계로 들여보낸 적이 있던 준상이었지만, 아무 힘이 없는 연약한 처녀들과 이들은 얘기가 좀 달랐다. 하긴, 따지고 보면 그들이 인간들 가운데 강한 축에 든다고는 해도 초월자의 범주에 들어가는 리체스에 비하면 의미 없는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런 준상의 말에 리체스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웃으며 대답했다. “상관없어요. 주인님이 필요하다고 여기셨다면.” “고맙다.” “별 말씀을요.” 리체스와의 얘기가 끝나자 준상은 다시 한트를 향해 말했다. “일 년이 걸린다고 했지?” “네? 그, 그렇습니다.” “그 기간, 내가 줄여주도록 하지.” “...” 한트는 무슨 소린가 싶어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고, 그것은 대화를 지켜보던 젤란이나 다른 광전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준상은 그런 의문어린 시선들을 무시한 채 리체스에게 다시 말했다. “이들에게 모습을 보여줘.” “네.” 리체스는 준상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 “어엇?” “아...” 젤란이나 광전사들은 그제서야 준상이 누구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무지개빛 머리카락을 지닌, 작고 아름다운 요정이 날개를 파닥이며 허공에 떠 있는 신비한 모습은 방 안에 있던 남자들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안녕하세요. 리체스입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풀잎에 맺힌 이슬 방울이 또르르 구르는 듯한 영롱한 목소리에 젤란은 물론이고 우락부락한 인상의 광전사들마저 허둥거리며 얼른 대답했다. “바, 반갑습니다.” “그러니까... 마,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준상처럼 무뚝뚝한 남자만 보다가 이렇게 숫기 없는 반응을 보니 어쩐지 재미있는 느낌이라 리체스는 그들의 인사를 받으며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서로 인사가 끝나자 준상은 어쩐지 헤벌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광전사들을 향해 다시 말했다. “다른 광전사들을 불러 모으는 데 달리 필요한 것은 없나?” 한트는 준상의 말에 화들짝 놀라며 얼른 대답했다. “여행에 필요한 물품 외에는 달리...” “그렇군.” 하긴 생긴 것 자체가 이렇게 보통 사람과 이질적인데다, 그들만의 독특한 능력이 있으니 따로 증표가 필요하지도 않을 터. 준상은 다시 고개를 수그린 채 리체스를 흘끔거리고 있는 광전사들에게 말했다. “가서 짐을 챙겨 오도록.” “아, 알겠습니다.” 구체적인 방법을 설명해 주지는 않았지만, 지금 모습을 드러낸 요정과 시간을 단축하는 방법이 서로 관련 있음을 이해한 광전사들은 조금 아쉬워하는 모습으로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빠져 나갔다. 광전사들이 모두 물러가자, 젤란은 멋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역시 매제는 대단하군요. 이렇게 아름다운 요정님과도 친분이 있을 줄이야.” 아름답다는 말이 싫지 않았는지, 리체스는 상기된 표정을 지으며 부끄러워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친분을 넘어서 반려가 된 상태지만 굳이 헤네스의 오빠인 젤란에게 그와 같은 사실을 말할 필요는 없는 일이라 준상은 말을 돌렸다. “숙박 시설은 준비가 되었습니까?” 젤란은 얼른 정색하며 대답했다. “일단은 저희 가문의 저택의 남은 방을 우선적으로 사용하고, 주변의 집들을 임대해서 처리할 생각입니다.” “준비에 얼마나 시간이 걸리겠습니까?” “일단 현재 인원들은 남은 방 만으로도 충분히 수용이 가능하고, 남은 인원들은 순차적으로...” 젤란은 거기까지 말하다가 입을 닫았다. 그가 그런 식의 대책을 마련한 것에는, 아까 한트가 말했던 것처럼 각지의 광전사들이 모이는데 걸리는 시간을 감안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좀 전에 준상이 말했듯이 그 시간을 대폭 줄이는 것이 가능하다면, 지금의 대책으로는 금방 한계에 부딪히고 말 것이다. 준상은 그런 젤란의 생각에 쐐기를 박듯이 말했다. “짧으면 이삼일, 길어봐야 칠팔일 정도면 모두 도착하게 될 겁니다.” “그, 그럴 수가...” 못해도 일 년은 걸리리라 예상되었던 시간을 그 정도로 짧게 단축하는 것이 가능하다니. 순간 젤란은 이것을 이용할 여러 가지 방법이 떠올랐지만, 감히 그것을 준상에게 털어놓지는 못했다. 물론 준상은 그런 젤란의 내심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으나 모르는 척 다시 말을 건넸다. “일이 그렇게 되었으니, 조금 번거롭더라도 미리 준비를 해주셨으면 싶습니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가서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준상이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자, 젤란은 얼른 양손을 저어 보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아무튼... 그럼 나중에 다시 찾아 뵙겠습니다.” “살펴 가십시오.” 젤란이 후다닥 방을 빠져 나가자, 헤네스는 그를 배웅한 다음 자리에 돌아와 준상에게 물었다. “괜찮을까요? 함부로 정령의 문에 대한 걸 알려도.” 오빠인 젤란은 그렇다 치더라도 광전사들이 정령의 문을 알게 되면 그것을 악용하려 들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준상은 별로 상관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물론 그에 대한 조치는 취해야겠지.” 그러다 준상의 어깨 위에 내려앉은 리체스가 덧붙였다. “요정들의 안내가 없다면 찾아내는 것도, 그것을 사용하는 것도 불가능하니까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어. 한 번 가봤다고 쉽게 찾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셋은 시녀를 불러 다과를 즐기기 시작했고, 그렇게 잠시 시간이 지나자 한트가 짐을 하나 가득 짊어진 열 명의 광전사를 데리고 다시 준상을 찾았다. “명하신 대로 준비를 마쳤습니다.” “수고했다.” 준상은 그렇게 대답한 다음 리체스에게 말했다. “셀라에게 연락 넣었지?” 장미꽃잼을 잔뜩 바른 비스킷을 양손에 들고 있던 리체스는 당연하다는 듯이 바로 대답했다. “물론이죠. 이미 준비를 마치고 대기 중이에요.” “잘 했다.” “헤헤...” 준상은 리체스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거의 자기 몸집 만큼은 되는 큰 짐을 짊어진 열 명의 광전사들에게 다가서더니 두 팔을 벌리며 말했다. “이리 와라.” “...” 순간 광전사들은 잠시 멍한 표정이 되었다. 이게 무슨 말인가. 설마 자신에게 와서 안기라는 말인가. “그, 그런...” 당혹스러워 하는 표정으로 광전사들은 머뭇거렸지만, 준상은 단호한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어서.” “...” 광전사들은 전장에서 자신을 단련하여 피 속에 숨은 파괴의 본능을 일깨우는 자들이다. 그런 삶을 살다보면 간혹 일반적이지 않은 변태적인 욕망을 가진 이들이 생기기도 한다. 준상은 광전사들의 의혹어린 시선을 보고는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쯧.” 하지만 일일이 설명하는 것은 성격에 맞지 않는 일이라, 결국 준상은 강제적인 수단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와라.” 그렇게 말하며 손을 뻗자, 그가 발출한 염동력에 이끌려 광전사 중 하나가 휙 하고 준상의 품 안으로 딸려 들어왔다. “헉!” 광전사는 순간 울상이 되었다가, 이내 눈을 질끈 감으며 두 손을 가슴에 모았다. 아아... 어떻게 지켜온 동정인데. 결국 여자도 아닌 남자에게 빼앗기게 되는 것인가. 그런 터무니없는 생각을 떠올리며 곧 부딪힐 준상의 단단한 가슴의 감촉을 예상했지만, 광전사를 맞이한 것은 인간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단단함을 지닌 땅바닥이었다. “어이쿠!” 우당탕거리며 바닥을 나뒹군 광전사는 잠시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몰라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가 마치 어린 아이의 낙서로 밖에 보이지 않는 풍경에 대한 사고를 머리 속에 정립하기도 전에 뒤따라 열 명의 광전사들이 순서대로 그 위에 쏟아져 내렸다. “으악!” “자, 잠깐! 비켜봐!” “다리! 다리! 아프다고!” 그렇게 난리법석을 떨던 그들은 문득 주위를 둘러싼 기묘한 풍경들 속에서 수많은 시선들이 자신들에게 쏟아지고 있는 것을 깨닫고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어?” 호기심 넘치는 표정으로 광전사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다름아닌 요정들이었다. “저 머리 좀 봐. 도토리처럼 반들반들해!” “저 사람은 머리가 꼭 까다만 밤송이 같아.” “웃기게 생겼다. 그치?” “웃기게 생겼어. 정말.” 자기들끼리 그렇게 떠들며 까르르 웃어대는, 어른이라고 하기는 뭔가 묘하게 귀엽고, 그렇다고 어른스럽다고 하기에는 아무래도 치기 어린 모습에 광전사들은 얼빠진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것일까. 그 의문의 해답은, 콧잔등에 걸린 안경을 손가락으로 밀어 올리며 나타난 여왕보좌관 셀라에게서 나왔다. “준상님의 연락을 받고 기다리던 참이었습니다. 요정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그제서야 광전사들은 자신들을 둘러싼 이 존재들의 등에 희미하게 비치는 날개들을 알아보았고, 더불어 이곳에 오기 전에 보았던 리체스라는 이름의 요정을 떠올렸다. “서, 설마... 당신들은 요정입니까?” 그 말에 셀라는 미소 띤 얼굴로 대답했다. “네. 그 말씀대로입니다.” 광전사들에게 있어 여자란 그저 성욕을 해소하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가장 처음 정령의 문 안으로 떨어진 광전사처럼 특이한 사고방식을 지닌 채 동정을 지키는 사람도 없는 건 아니었지만, 대부분은 전장의 광기에 지친 정신의 피로를 해소하는 용도로 여자라는 존재를 인식할 뿐이다. 사람의 살을 베고, 그 뼈를 부수는 것을 업으로 하는 삭막한 삶을 사는 자들이다 보니 한 명의 여성에게 안주하는 일 자체가 드물었고, 설령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 한들 이들과 같은 삶을 사는 자들을 받아줄 여성도 거의 없었다. 그런 광전사들에게 있어, 자신들을 향해 스스럼없이 미소를 지어 보이는 이 아름다운 여왕보좌관의 모습은 어쩐지 어두운 폭풍우 속에서 만난 한줄기 등불과도 같은 느낌이었다. “제 얼굴이 뭔가 이상한가요?” 자신을 멍하니 쳐다보는 광전사들의 모습에 셀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그들은 얼른 손을 내저으며 대답했다. “아, 아닙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냥... 너무 예뻐서... 헙!” 광전사 가운데 하나가 자신도 모르게 본심을 말하자, 주위의 다른 광전사들이 그를 노려 보았다. 생긴 건 꼭 멧돼지 잡아먹다 지나가는 마차의 모습에 입에 묻은 기름기도 안 닦고 그대로 달려 내려온 산적 같은 몰골로, 초면에 대뜸 그런 말을 해봐야 일반적인 경우 대부분의 여자들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기 바쁘다. 하지만, 지금 이들을 상대하고 있는 셀라는 그런 일반적인 인간 여성과는 거리가 먼 존재였다. “예쁘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일단 목적지를 말해 주시겠어요? 바쁘시다고 들었는데.” 조금은 사무적인, 하지만 상대의 기분이 나쁘지 않도록 배려하며 미소 짓는 그 모습에 광전사들은 다시금 얼굴을 붉힐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광전사들이 무사히 요정들과 대면하고 있을 때, 그들을 이끌고 준상에게 왔던 한트는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그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준상의 품으로 뛰어든 자신의 동료들이 그의 눈앞에서 마치 세상에서 지워지기라도 한 것처럼 모습을 감추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준상은 가타부타 설명조차 없이 그런 한트를 바라보며 말했다. “더 볼 일이 남았나?” “아, 아닙니다.” “그럼 가봐.” “넷!” 00202 트롤러 ========================================================================= 한트가 헐레벌떡 밖으로 달려 나가자, 준상은 다시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당분간은 요정계에서 지낼까?” 리체스에게 건네줄 비스킷에 잼을 바르고 있던 헤네스가 바로 반응했다. “요정계에서요?” “그래. 지금 간 녀석들이 패거리들을 몰고 올텐데, 괜히 소란을 피울 수도 있으니 내가 가 있는 편이 만약의 상황에 대비도 될 테고, 분신의 연습이라든가 방어복의 강화 같은 것도 하려면 당분간 그쪽에서 지내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사실 이유는 그 뿐만이 아니었다. 요 며칠 사이, 귀족이나 왕실이 보내온 것으로 보이는 자들이 저택 주변을 살피는 모습이 종종 준상의 감각과 풀어 놓은 정령들에 의해 감지되고 있었던 탓이다. 사실 근처의 귀족이나 유력 가문들로부터 무도회나 사교 모임, 사냥 대회, 토너먼트 등에 나와 달라는 요청은 지금도 계속 그 수가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었다. 개중에는 아예 맞선이라도 보겠다는 것인지 묘령의 처녀를 그린 초상화 같은 것을 보내오는 자들도 있었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브레아 가문과 좋지 않은 감정이 생기리란 것 정도는 그들도 모르는 일이 아니겠지만, 설령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준상과 인연을 만들어 두는 쪽이 훨씬 더 이익이 크다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실상 현재 브레아 가문이 성세를 누리는 가장 큰 이유가 준상의 존재이고 보면, 그들의 생각도 전혀 가능성이 없다고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이렇게 준상 하나 만으로도 난리법석인데... 여기에 백 단위, 아니 천 단위의 광전사들이 결집하게 되면 과연 어떤 소동이 벌어질지, 준상으로서도 감히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인지라 일단 소란을 피하기 위해서도 자리를 비우고자 하는 것이다. 리체스는 이런 세세한 내용은 알지 못한 채 그저 준상이 요정계로 와준다는 것이 기쁜 모양이었지만, 돌아가는 사정을 대충 파악하고 있던 헤네스로서는 혹시라도 준상이 혹하지는 않을까 하고 속으로 걱정하고 있던 마음 속에 단숨에 햇살이 확 하고 비치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저야 당연히 좋죠!” “저도...” 둘이 찬성의 뜻을 표하며 금방이라도 일어날 것처럼 엉덩이를 들썩이는 모습에 준상은 피식 웃으며 탁자에 놓인 찻잔을 집어 들었다. “그럼 이거 다 먹고 바로 가도록 하자.” “네!” “네...” 준상은 잠시 느긋하게 다과를 즐기다가, 시녀를 불러 젤란에게 잠시 자리를 비우겠노라 기별하도록 한 다음, 신기루 꽃을 통해 요정계로 돌아갔다. 이틀 정도가 지나자 광전사들이 하나 둘씩 요정계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하나 같이 빡빡이거나 짧게 자른 뻣뻣한 밤송이 같은 머리카락을 지닌 근육질의 사내들이 요정계를 거쳐 금단의 숲에 존재하는 정령의 문으로 이동하자, 준상의 정령의 문 레이스 이후 별다른 재미있는 일이 없었던 요정들은 그들의 특이한 모습을 구경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근데 왜 저렇게 머리가 반들거리는 거지?” “몰라!” “나도 몰라!” “가서 물어 볼까?” “안 돼. 보좌관님이 그러면 초코바 안 준다고 그랬어.” “쳇!” 초코바가 없었으면 저 많은 요정들을 어떻게 통제했을까 하는 생각을 떠올리며 보좌관들은 광전사들을 금단의 숲으로 통하는 정령의 문으로 안내했다. “이리로 나가시면 다른 요정이 기다리고 있을 거에요. 숲을 나가는 길은 그들에게 안내를 받으시면 됩니다.” 찰랑거리는 단발을 지닌 눈망울이 동글동글한 귀염상의 보좌관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문 앞에서 그렇게 말하자, 십 여명의 동료를 이끌고 있던 중년의 광전사가 살짝 얼굴을 붉히며 미리 준비해 둔 꿀 한 병을 그녀에게 건넸다. “이거... 대단한 건 아니지만, 안내해 주신 보답입니다.” “아이, 뭘 이런 걸 다...” 보좌관은 부끄러운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광전사가 건넨 꿀단지를 얼른 품에 감추고는 방긋 웃으며 감사의 뜻을 표했다. “감사합니다. 그럼 나중에 또 뵈요.” “네, 그럼 나중에 또...” 중년의 광전사는 아쉬움이 덕지덕지 남은 얼굴로 머뭇거리다가 이내 눈을 질끈 감고 요정계를 나갔고, 그 뒤를 따라 보좌관의 미모에 홀린 듯 헤벌레한 표정을 짓고 있던 다른 광전사들도 요정계를 빠져 나갔다. 광전사들이 모두 정령의 문을 통해 빠져 나가자, 보좌관은 품에 넣어 두었던 꿀단지를 꺼내 그 안에 담긴 꿀을 손가락으로 찍어서 맛을 보았다. “흠... 그럭저럭이네. 이건 나중에 술이나 담가서 나눠 먹어야겠다.” 요새 워낙에 초코바나 연양갱이니 솜사탕이니 하는 단 음식을 하도 많이 접하다 보니, 이런 잡꿀은 별로 성에 차지 않는 모양이다. 이런 식으로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나자, 대륙 각지에서 광전사들이 이벨류아로 속속 모여들기 시작했고, 그와 같은 소식은 곧바로 델로드란의 정계를 크게 강타했다. 어지간한 기사 한두 명은 혼자서도 쌈싸 먹는다는 광전사들이 한두 명도 아니고 수백을 넘어 그 수가 점점 불어나기 시작하자, 그렇지 않아도 브레아 가문에 대해 어떤 조치를 내려야 할지 골몰하고 있던 왕실과 귀족으로서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정보원들을 통해 그 광전사들의 최종적인 목표가 준상이라는 이름의 이방인이라는 것이 파악되자, 이제는 더 이상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수만은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당장 브레아 가문의 수장을 수도로 소환해야 합니다!” “불러서 뭐하게요? 청문회라도 여실 생각이십니까?” “열어야지요! 그래서 시시비비를 가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시시비비라뇨? 누가 들으면 죄라도 지은 줄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델로드란의 정계가 들썩이고 있는 동안에도 광전사들은 꾸준하게 이동을 계속해 열 명의 광전사들이 처음 요정계에 발을 디딘지 일주일이 지날 즈음이 되자, 정령의 문을 통과한 광전사의 수가 천 명을 넘어섰다. “천 명이 넘었다고?” 느긋하게 여왕의 침실에서 아리따운 두 반려와 늦은 아침을 즐기고 있던 준상은 셀라에게서 보고를 받고 얼굴을 찌푸렸다. “네. 방금 전 정령의 문을 통과한 스물두 명을 포함하면, 현재까지 집계된 인원은 모두 천 명하고도 열세 명입니다.” “그럼 슬슬 돌아갈 때가 된 건가.”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셀라에게 다시 말했다. “그동안 모두 수고했다. 적절한 보상이 있을테니, 기대하도록.” “감사합니다. 그런데...” “뭔가 남았나?” 준상의 말에 셀라는 어젯밤에 잠을 설친 모양인지 피곤한 표정으로 연신 하품을 하고 있는 리체스를 흘깃 보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실은... 요정 몇몇이 인간들을 몰래 따라 나선 모양입니다.” “요정들이?” “물론 잡혀 갔다거나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인간들의 뒤를 몰래 따라간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준상은 리체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자신으로 인한 일이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요정들의 일이니 전대 여왕인 그녀의 의견을 듣고자 하는 것이다. 하지만 리체스는 준상의 시선을 받자 손을 내저으며 이렇게 답했다. “괜찮아요. 어린 애들도 아니고. 적당히 돌아다니다 흥미가 떨어지면 돌아올 거에요.” 준상은 셀라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렇다는군.” 하지만 셀라는 난처한 표정으로 우물쭈물거리다가 다시 말했다. “그, 그게... 실은...” “실은?” “숫자가 좀 많아서...” “얼마나 되길래?” “확인된 것만 백 명이 넘어갑니다.” “...” 이번만큼은 연신 하품을 하고 있던 리체스는 물론이거니와, 역시나 조금 피곤한 모습으로 꾸벅거리며 졸고 있던 헤네스조차도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백 명?” “정확히는 백칠십삼 명입니다.” “...” 이건 백 명이 좀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거의 이백 명에 근접한 숫자다. “끙... 미아라에게는 연락을 해봤고?” 리체스가 묻자, 셀라는 얼른 대답했다. “네. 실은 녀석들이 인간을 따라 간 것도 그녀가 알려준 덕분에 알 수 있었습니다.” “...” “죄, 죄송합니다.” 셀라는 얼른 고개를 숙였지만, 사실 그녀에게 잘못을 물을 일은 아니다. 애초에 자유분방한 요정들에게는 인원파악 같은 개념 자체가 없었고, 준상이 초코바를 미끼로 접촉을 금지시킨 것도 만약에 있을지 모르는 불상사를 대비하기 위한 것일뿐 그리 강력한 강제성은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천년이나 잠들어 있다가 요정계를 통해 인간이 대규모로 왕래하는 상황에서, 이백 명도 안 되는 수의 요정들 밖에 이탈자가 없다는 것이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더 신기한 일일 수도 있었다. 준상은 잠시 생각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일단 미아라에게 연락해서, 이벨류아로 간 요정들은 가급적 내 저택에 모여 있게끔 하는 편이 좋겠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조치하겠습니다.” 셀라가 물러가자, 준상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뒤따라 일어나려는 헤네스와 리체스를 한 팔에 하나씩 단숨에 번쩍 안아들었다. “주, 준상씨.” “주인님.” 어젯밤을 좀 격렬하게 보낸 탓인지, 둘의 표정에는 피곤함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일단 온천에 가서 좀 씻고, 천천히 가도록 하자.” “네.” 셋은 느긋하게 온천을 즐기다가 제법 시간이 지난 뒤에야 이벨류아의 저택으로 향했다. 도착하고 보니, 이벨류아는 이제 막 새벽이 밝아오는 시간이었다. 준상은 헤네스의 손을 잡고, 어깨 위에는 리체스를 앉혀 둔 채로 석문이 설치된 방을 나섰다. 그러자 아침 청소를 위해 복도를 오가던 시녀들이 그들의 모습을 보고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숙인다. 준상은 그들을 바라보며 조용히 지시를 내렸다. “내가 돌아왔음을 알려라.” “알겠습니다.” 시녀들이 종종걸음으로 바삐 물러가자, 준상은 헤네스에게 말했다. “먼저 브레아 가문부터 가보자.” “네!” 준상은 복도를 따라 저택 밖으로 나온 뒤 곧바로 랩터를 인벤토리에서 꺼냈다. 본래 집정관의 저택이었던 이곳은 같은 성 안이기는 해도 브레아 가문의 저택과는 다소 거리가 떨어져 있었다. 물론 산악 구보로 단련된 준상이나 헤네스가 그 정도 거리를 걷지 못할 이유는 없었지만, 그들이 돌아왔음을 확실히 알리려면 조용히 걸어가는 것보다는 척 보기에도 이질적이고 위압적인 모습을 한 자동차를 이용하는 편이 좋다. 차를 몰고 천천히 저택 밖으로 나오자, 이른 아침을 준비하던 성 안의 사람들은 그 거대한 자동차와 그 안에 타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들 가운데는 은연중에 저택을 감시하던 사람들 역시 존재하고 있었고, 그 때문에 준상이 브레아 가문에 도착했을 즈음에는 성 안에서 그의 존재에 신경을 쓰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의 귀환을 알게 되었다. 브레아 가문에 도착하자, 사람들이 나와 그들을 맞아 들였다. 언니들은 기사 대전이 끝나자 이미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간 상황이었지만, 대신 이번에는 젤란의 어린 자식들이 그 대열에 동참하고 있었다. “고모, 안녕하세요!” “헤네스 고모!” 밝은 금발 머리를 한 귀여운 남매가 계단을 아장아장 걸어 내려오는 모습을 발견한 헤네스는 차에서 내리기가 무섭게 몸을 숙이며 자신도 모르게 아이들을 한 손에 하나씩 안아 올렸다. 젤란은 반가운 표정으로 준상과 헤네스를 맞이하다가 그 모습을 보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작은 아이라고는 해도 한 팔에 한 명씩 안아 올리는 건 건장한 성인 남성인 자신조차도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제스, 제린. 잘 지냈니?” “네, 고모!” 조카들과 그렇게 인사를 나누고 있는데, 어머니인 유라스가 어깨에 요정기사 미아라를 앉혀둔 모습으로 가만히 다가와 말했다. “잘 왔다. 들어가자꾸나.” “아버지는요?” “잠시 출타중이시다. 오늘 늦게나 되어야 돌아오실 거야.” “아, 그렇군요.” 아버지가 보이지 않기에 혹시 자신들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일부러 자리를 피한 건 아닐까 싶었던 헤네스는 그제서야 속으로 안도하며 밝게 미소 지었다. 리체스는 헤네스의 가족들을 살피다가 유라스의 어깨에 나른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미아라를 보고는 씩 웃으며 말했다. “미아라.” “헛! 여, 여왕님!” “잠깐 나 좀 볼까?” “그, 그게... 헤헤헤...” 미아라는 슬금슬금 도망치려다 이내 리체스에게 볼따구를 잡히고 말았다. “아, 아파요...” “미아라.” “네...” “일이 생기면 바로 연락하라고 했을 텐데?” “그, 그게...” 미아라는 식은땀을 뻘뻘 흘릴 뿐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헤네스의 어머니인 유라스와 함께 인간 세상을 구경하며 노느라 미처 주위 상황을 파악하는데 소홀했다고는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주인님. 잠시 얘랑 대화 좀 하고 올게요.” 미아라는 손을 내저으며 안 된다는 손짓을 해 보였지만, 무정하게도 준상은 곧장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대답했다. “천천히 다녀와라.” “네!” 00203 트롤러 ========================================================================= 리체스에게 뒷덜미를 잡힌 채 울상을 지으며 끌려가는 미아라의 모습을 일별한 가족들은 안으로 들어가 응접실에 둘러 앉아 잠시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소소한 대화를 나누었다. 어느 정도 대화가 무르익자, 유라스가 준상을 향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요새 이런 저런 곳에서 포목을 구해달라는 요청이 제법 많이 들어오고 있어요.” 조심스러운 말이었지만 준상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바로 대답했다. “적당히 선별해서 목록을 만들어 주십시오. 단, 대금은 현물이어야 합니다.” “그건 걱정하지 말아요.” 준상 덕분에 기사 대전에서 수월하게 이기긴 했지만, 기사들의 초빙과 귀족 간의 교섭으로 인해 브레아 가문도 많은 지출이 있었다. 가문의 존속과 이벨류아의 실질적인 통치권이라는 이득을 얻기는 했지만, 이런 것들이 이미 소모해 버린 자금을 바로 채워주진 못한다. 하지만 토지를 기반으로 한 농업 위주의 산업 기반을 가진 이벨류아에서는 추수가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자금을 융통하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상황이다 보니 준상이 준비해 왔던 선물, 그 중에서도 초빙되었던 귀족들에 의해 널리 그 가치가 증명된 포목의 수요가 급증하는 것은 브레아 가문으로서는 아주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뛰어난, 아니 엄청나다는 말 밖에 나오지 않을 정도의 무용으로 단숨에 기사 대전을 제압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 이후의 문제까지 이렇게 도움을 주고 있으니, 가문 내에서 준상과 헤네스의 입지는 이제 거의 상한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아무튼 광전사에 대한 얘기라든가, 최근 정계의 움직임 같은 이런 저런 얘기들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는데, 리체스가 정원 한 편에서 요정들을 앉혀 놓고 야단을 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준상과 헤네스가 다가가자 리체스가 얼른 반색하며 다가왔다. “얘기는 잘 끝나셨어요?” “그럭저럭. 그런데 수가 늘어난 것 같은데.” “그게 말이죠...” 대충 얘기를 들어보니, 미아라를 통해 유라스와 안면을 익힌 요정들이 간혹 그녀가 대접하는 쿠키나 잼, 허브차 같은 것을 마시려고 이렇게 찾아오는 모양이었다. 충분히 그럴 법한 일이라 고개를 끄덕이며 듣던 준상은 셀라에게 들은 가출 요정의 수를 떠올렸다. “나머지는 어디에 있지?” 그러자 미아라를 비롯한 요정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눈치를 살피기 시작한다. 아무리 봐도 뭔가 숨기는 모양새라, 리체스는 다시 요정들을 다그쳤다. “어서 말하지 못해?” “그, 그게...” 미아라는 난처해 하며 잠시 머뭇거리다가, 리체스가 허리에 손을 얹은 채 한번 인상을 쓰자 흠칫 놀라며 얼른 입을 열었다. “지금쯤이면... 대부분 그 대머리 인간들이랑 성벽 근처에 있을 거에요.” “대머리 인간?” 준상은 미아라의 말을 듣는 순간 그것이 광전사들을 지칭하는 말임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한 번 가볼 필요가 있겠군. 리체스, 가자.” “네.” 리체스는 준상의 어깨 위에 앉으며 미아라를 향해 말했다. “다음부터는 이런 일이 생기면 재깍재깍 보고해. 알았지?” “네!” “그만 손 내리고 가봐.” “휴우...” 요정들은 살았다는 듯이 한숨을 포옥 내쉬며 어깨를 두드렸다. 준상과 헤네스는 리체스와 함께 미아라가 말한 성벽 부근으로 곧장 향했다. 광전사와 요정들을 찾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훅! 훅! 훅! 훅!” 광전사들은 웃통을 걷어붙인 채 아침부터 구슬땀을 흘리며 성벽 밖을 달리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일상적인 체력 훈련 정도로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준상은 그들을 발견한 순간 자신도 모르게 이마를 감싸쥐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성벽 주위를 달리고 있는 광전사들은 하나 같이 어깨나 머리 위에 요정들을 하나씩 앉혀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꺄하하하!” “달려! 달려!”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그 모습에 헤네스는 묘한 기시감마저 느끼며 쓴웃음을 지었고, 리체스는 난처해하며 준상의 기색을 살핀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피부나 그 위에 흠뻑 젖은 땀방울로 봐서는 저렇게 전력질주를 시작한지 상당히 오랜 시간이 지난 듯 하다. 아니나 다를까. 광전사 가운데 하나가 체력에 한계가 왔는지 지친 표정으로 나가 떨어졌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주위에서 대기하고 있던 광전사 하나가 튀어나와 그 자리를 메꾸었고, 탈락한 광전사의 어깨 위에 타고 있던 요정은 냉큼 새로운 광전사의 어깨 위로 자리를 옮겼다. “...” 가만히 바라보니, 성벽 주위에는 제법 많은 수의 광전사들이 이제나 저제나 자신의 차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요정들로서는 절대로 멈추지 않는 끝없는 롤러 코스터에 탄 것이나 마찬가지다. 초코바 지급을 미끼로 걸었음에도 이탈한 요정이 나와서 뭔가 이상하다 싶었더니, 이런 이유 때문이었던 건가. 어째 난감한 상황이긴 했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준상으로서는 그리 나쁜 일이 아니다. 초코바 같은 건 어떻게 물량을 풀어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지만, 어깨 위에 태우고 달리는 것은 일일이 시간을 할애해야만 하는 문제다. 하지만 그렇지 않아도 이것저것 할 일이 많은 준상으로서는 수련의 연장으로 생각한다 치더라도 매일 같이 시간을 내서 요정들을 태우고 달리기는 좀 곤란한 일이었다. 물론 저 우락부락한 인간들의 어깨에 올라 앉아 좋다고 웃어대는 요정들의 모습을 보니 뭔가 괴리감이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귀찮은 일을 대신해 주니 준상으로서는 오히려 적극 장려해도 시원치 않은 일이다. 준상은 발작하려고 하는 리체스를 말린 다음, 조용히 자신의 저택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젤란을 통해 광전사들의 대표들로 하여금 인정의 의식에 대한 일정을 잡도록 했다. 결국 그날 오후가 가기 전에 광전사들과 대화를 마친 젤란이 준상에게 일정을 알려왔다. “내일 아침이라...” 준상이 일정을 전해듣고 그렇게 중얼거리자, 젤란은 급히 말을 덧붙였다. “너무 급한 것이 아닌가 싶어 말을 해봤지만, 이런 건 시간 끌 이유가 없다면서...” “틀린 말은 아니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알고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준상이 선선히 받아들이자, 젤란은 다시 말했다. “장소는 이전에 기사 대전이 벌어졌던 곳입니다.” 그 말을 들은 준상은 살짝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설마 이번에도 행진 같은 걸 해야 합니까?” 젤란은 얼른 손을 저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뭐... 따라와서 구경하려는 사람들은 있겠지만, 그렇게까지 할 이유는 없죠.” “그렇군요.” “자잘한 건 자신들이 알아서 준비할 테니, 시간만 늦지 말아 달라더군요.” “알겠습니다.” 젤란이 돌아가자, 준상은 저택 안에서 조용히 몸을 풀면서 하루를 보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마침내, 날이 밝았다. 헤네스는 조금 긴장한 표정으로 준상의 옷을 챙겨주며 말했다. “조심하세요.” 그가 강하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그래도 천 명이나 되는 광전사와 대결을 벌이는데 걱정이 되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다. “걱정마.” 준상은 그렇게 대답한 다음, 그녀가 내민 셔츠를 몸에 걸쳤다. 간단하게 아침 식사를 마친 준상은, 기사 대전 때와 마찬가지로 헤네스를 앞에 태운 채 유령말을 타고 저택을 나섰다. 그때와 달라진 것이라면 리체스가 어깨 위에 앉아 있다는 정도다. 준상이 대문을 나서자 이제나 저제나 하며 저택 주위를 살피던 사람들은 급히 움직이며 그의 뒤를 따랐다. 기사 대전 때처럼 시끌벅적하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의 얼굴에는 오히려 그때보다 더한 긴장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 천천히 유령말을 몰아 대로를 통과한 준상과 헤네스는 이윽고 성문을 빠져 나와 인정의 의식이 벌어지는 장소로 향했다. 이전에 기사 대전이 벌어졌던 너른 벌판에는 천 명에 이르는 광전사들이 웃통을 걷어붙인 채 줄지어 서서 준상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앞에는 제법 높게 쌓은 모닥불이 하늘 높이 피어오르고 있었고, 그 앞에 마련된 야트막한 단상에는 아름다운 갈기를 가진 흰색 말 한 마리가 자신에게 닥칠 운명도 모른 채 말뚝에 묶여 있었다. 준상은 천천히 유령말을 몰아 가다가, 미리 나와서 기다리고 있던 브레아 가문 사람들 근처에 헤네스를 내려준 다음, 말에서 내려 천천히 단상을 향해 걸어갔다. 그가 다가오자, 희끗희끗한 수염을 기른 광전사 하나가 그에게 다가와 경건한 모습으로 말을 건넸다. “스스로 붉은 공포임을 밝히신 그 분이 맞으십니까.” “맞다.” “이제부터 우리들은 그 말이 맞는지 확인하고자 합니다. 인정의 의식에 응하시겠습니까?” “하겠다.” “단상에 오르십시오. 의식은 그때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 준상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모닥불 앞에 자리 잡은 단상 위로 올라갔다. 그러자 다시 커다란 도끼를 짊어진 광전사 하나가 경건한 표정으로 준상 앞에 나와 고개를 숙여 보이더니, 그 옆에 준비되어 있던 백마의 목을 도끼로 단숨에 날려 버렸다. 푸화아아악! 백마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목이 잘렸고, 광전사들은 백마로부터 뿜어져 나온 피를 조심스럽게 커다란 청동 대야에 받아내더니 그것을 준상의 앞에 가져다 놓았다. “...” 준상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뜨거운 피를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광전사들을 준상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로 붉은 공포가 맞다면 이 다음에 취할 행동은 단 하나임을 그들은 알고 있었고, 그것은 준상 역시 마찬가지였다. “미치겠군.” 준상은 혀를 차고는 천천히 염동력으로 눈앞에 놓인 청동 대야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눈을 가만히 감은 채로 그것을 머리 위에 쏟아 부었다. “오오오!” “으읍...” 광전사들은 준상의 과감한 행동에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고, 영문을 모르는 다른 구경꾼들은 그 모습을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사람들은 준상의 몸에서 기묘한 파동 같은 것이 흘러나오는 것을 느꼈다. 아니, 그것을 느낀 순간에는 이미 자신도 모르게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 버린 뒤였다. 아직까지도 준상이 정말로 붉은 공포를 자칭할 만한 능력이 있는지 반신반의하고 있던 일부의 광전사들은, 피를 뒤집어 쓰는 순간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이한 압력을 깨닫자 그제서야 자신들이 지금껏 목표로 삼아왔고 또한 꿈꿔왔던 목표가 현실로 다가왔음을 인지했다. 구경을 하러, 또는 염탐을 하러 왔던 사람들 중 몇몇은 자신이 왜 그러는지도 모르는 채 뒤돌아 도망치기 시작했고, 또 몇몇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그대로 땅바닥에 주저 앉어 부들부들 떨고만 있었다.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는 사람,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그저 멍하니 바라보는 사람... 한순간 덮쳐온 상태이상의 물결을 견뎌낸 사람들조차도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현상이 절대로 일반적이지 않다는 것 정도는 이해하고 있었다. “...” 준상은 뜨거운 피를 뒤집어 쓴 채 가만히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떴다. 그리고 오연한 표정으로 단상 아래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광전사들을 둘러보았다. 준상은 그들의 얼굴에 드러난 여러 가지 감정들을 살핀 다음, 천천히 발걸음을 내딛어 단상 아래로 걸어 내려갔다. 광전사들은 얼른 뒤로 물러나며 그에게 길을 열어 주었다. 준상은 그들이 내어진 길을 따라 조용히 걸음을 옮기다가, 광전사들의 대열 한복판에 이르고 나서야 발을 멈추고는 주위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덤벼라.” “...” 크림슨드레드. 붉은 공포라 불리는 광전사들의 전설. 그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천 명의 광전사와 싸워 그들을 이겨 내는 것. 광전사들은 어쩐지 보면 볼수록 두려움이 더해지는 준상의 모습을 보며 천천히 자신의 피 안에 잠들어 있던 광기를 일깨우기 시작했다. “흐아압!” 우람한 체구의 광전사 하나가 괴성을 지르며 준상을 향해 달려들더니, 그대로 솥뚜껑만한 주먹을 그의 머리에 대고 휘둘렀다. 하지만 준상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 자리에 꼿꼿이 선 채 자신의 미간을 향해 날아드는 주먹을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퍽! 광전사는 자신의 주먹으로부터 전달되는 기이한 감각에 얼굴을 찌푸렸다. 이건 마치 물에 젖은 솜뭉치를 두드리는 것 같지 않은가! 하지만 다음 순간, 그는 복부로 날아드는 둔중한 충격과 함께 두 발이 지면으로부터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뭐가 어찌된 것인지 이해할 틈도 없이 그대로 허공을 훨훨 날다가 땅바닥에 등을 세차게 부딪히며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광전사들은 흠칫 놀라고 말았다. 그들의 단련된 주먹은 아름드리 나무를 뒤흔들고, 커다란 바위를 능히 부술 수 있었다. 그런 주먹을 꼿꼿이 선 채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흔들림 하나 없는 저 모습이라니. 하지만 준상은 그런 광전사들의 놀라움이 담긴 시선을 담담한 표정으로 받아들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귀찮으니 한꺼번에 와라.” “...” “와서 너희들을 증명해 보여라.” 광전사들은 그 말을 듣고 비로소 깨달았다. 준상은 처음부터 이곳에 그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 온 것이 아니었다. 그가 이곳에 온 것은 광전사들이 정말로 그 명성과 이름대로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너희들이 진정 내 뒤를 따를 만한 자들이더냐. 진정 광전사라 불리우기에 부족함이 없는 자들이더냐. 준상의 눈빛은 그렇게 묻고 있었다. 이 얼마나 터무니 없는 자신감인가. 하지만 광전사들은 그것이 모욕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붉은 공포는 그들의 비원을 실현시키리라 예언된 존재. 그 정도의 강함을 지니지 않으면 곤란한 건 오히려 그들이었다. 광전사들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며 눈짓을 교환하더니, 이내 함성을 울리며 일제히 준상을 향해 달려들었다. 곧바로 광전사들의 주먹과 발과 머리와 어깨가 준상의 몸을 두들기기 시작한다. 하지만 준상은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은 채 그 모든 공격을 몸으로 받아들이며 그들에게 그만큼의 힘으로 돌려주었다. 준상의 주먹과 발이 한 번씩 움직일 때마다 어김없이 광전사의 구릿빛 몸이 허공을 날아 땅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그들은 바닥에 누워 잠시 숨을 헐떡이다가 이내 벌떡 일어나 자신의 몸에 옮겨 묻은 백마의 붉은 피를 보고 피식 웃고는 다시 괴성을 지르며 준상을 향해 달려들었다. 인정의 의식이라는 것을 지켜보기 위해 따라 나왔던 사람들은 그대로 질려 버렸다. 터무니없다. 이 무슨 터무니없는 짓이란 말인가. 천 명이나 되는 광전사들의 주먹을 맨 몸으로 받아내며 꿈쩍도 하지 않는 준상도 터무니 없고, 그런 그에게 얻어맞아 수십 보는 되는 거리를 훨훨 날아 떨어져 내렸음에도 이내 벌떡 일어나 다시 달려드는 광전사들의 모습도 터무니없었다. 사람들은 그제서야 깨달았다. 왜 이들이 미친 전사들이라 불리는 지를, 그들은 지금 너무나도 뼈저리게 깨달으며 금방이라도 이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억눌러야만 했다. ============================ 작품 후기 ============================ (System) 여기 와서 덧글로 여러분의 존재를 증명한 뒤, 이불을 걷어차며 새로운 한 주를 시작하십시오. 00204 트롤러 ========================================================================= “으으...” 제스터의 대리로 인정의 의식을 참관하기 위해 나왔던 젤란은 그 장절한 전투를 보면서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것은 대부분 준상이 지닌 크림슨드레드 콤보의 효과로 인한 현상이었지만, 그런 이유를 모르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잠시 견디어 보려고 애쓰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뒤돌아 도망치기 바빴다. 젤란도 사정은 그리 다를 바가 없었지만, 이내 그의 시야를 가로 막는 작은 인영으로 인해 간신히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괜찮아요?” 부드러운 목소리로 안부를 묻는 목소리는 다름아닌 그의 막내 동생인 헤네스였다. “후우... 도대체 이건...” 준상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젤란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겨우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그런 오빠의 모습을 보며, 헤네스는 아직까지 버티고 있는 주위의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조용히 일러주었다. “도망치고 싶어지는 기분이 드는 건 준상씨의 능력 중 하나에요. 평소에는 발휘되지 않지만, 전투 중에는 종종 발휘되는 경우가 있어요.” “허어...” 젤란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단순히 그 모습을 보는 것 만으로도 도망치고 싶어지도록 만드는 능력이라니. 하지만 젤란은 그제서야 어째서 준상이 천 명의 광전사와 싸우는 일은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싸우기 위해서는 먼저 상대를 직시할 필요가 있다. 이 땅에도 간혹 장님 검사의 얘기 같은 것이 전해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특수한 경우를 제외한다면 일반적인 사람에게 있어 눈이 그 어떤 감각기관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젤란은 미처 모르고 있었다. 지금 준상이 발휘하고 있는 크림슨드레드의 능력은 그가 지닌 상태 이상 기술 가운데 가장 최근에 얻은 한 가지일 뿐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만약 그가 공포의 시선이나 사안, 광견의 위엄 같은 상태 이상 기술을 총동원하고 있었다면, 이곳에 인정의 의식을 바라보고 있는 자들 가운데 지금까지 남아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아니, 보통의 사람들은커녕 지금 그와 주먹을 맞대고 있는 광전사들조차 제대로 움직일 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간단하게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다른 능력을 꺼내지 않는 것은 이것이 크림슨드레드를 위한 인정의 의식이기 때문이었다. “너는... 괜찮은 거니?” 젤란의 말에 헤네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준상씨에게 수련도 받는 중이고... 능력도 나누어 받아서 이 정도는 괜찮아요.” 그녀 스스로는 전투에서 준상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을 자책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사랑하는 이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싶다는 것 때문에 그녀에게 부여된 힘을 아직 제대로 다 발휘하지 못해서일 뿐이다. 만약 그녀가 이곳에서 레어급으로 강화된 욕쟁이 할매 콤보의 기술을 발휘한다면, 가만히 버티고 서 있을 만한 자는 얼마 되지 않기 때문이다. 두 남매가 그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마침내 광전사들 가운데 첫 번째 탈락자가 나왔다. “크윽...” 힘이 부족한 탓에 처음부터 광폭을 써가며 준상에게 달려들었지만, 기술의 지속시간을 고려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달려들었던 탓에 격렬한 파괴력을 지닌 주먹의 힘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진 것이다. “헤네스.” “네?” “저거... 아무래도 위험한 것 아니야?” 헤네스는 오빠와 대화를 나누다가 리체스의 말을 듣고 그녀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주먹에 잘못 맞은 탓인지, 아니면 날려져 떨어질 때 문제가 생긴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녀의 눈 앞에 광전사가 입에서 피를 울컥울컥 뿜어내며 부르르 떨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런!” 그들이 그저 적일 뿐이라면 죽거나 말거나 아무 상관이 없다. 하지만 헤네스는 준상이 이들을 거두어 자신의 수족으로 삼을 생각이란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급히 허리춤에서 채찍을 꺼내어 들었다. “다른 이들도 살펴 주세요.” “알았어!” 헤네스와 리체스는 급히 구경꾼들로부터 이탈해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곳으로 달려 내려갔다. 젤란은 갑작스런 여동생의 행동에 당황했지만, 준상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다시금 마음 속에 공포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끼자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아야만 했다. “정신 차리세요!” 헤네스는 그렇게 외치며 손에 들고 있던 채찍을 광전사에게 휘둘렀다. 상황이 급한지라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생각하지 못하고 일단 행동을 먼저 취한 것이지만, 다행히도 다른 구경꾼들은 이 자리에서 도망치지 않기 위해 버티고 있는 것만으로도 한계인 상황이라 헤네스의 행동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처덕! 처덕! 쿨럭거리며 입으로 피를 뿜어대던 광전사는 무언가 차갑고 끈적거리는 것이 몸에 와 닿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죽는 건가 싶어 하늘이 노랗게 보이는 상황이라 그런 사소한 감각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지만, 조금 지나자 역류하던 피가 멈추고 호흡도 천천히 정상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어떤 부상을 입어야 사람이 죽는지 전장에서 수없이 보아 왔던 광전사는 가슴이 함몰되고 입으로 피가 뿜어져 나오자 자신이 얼마 버티지 못할 것임을 알았다. 그래도 마지막에는 크림슨드레드와 싸워 봤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은 채 조용히 눈을 감으려던 그였지만, 어째서인지 점차로 정신이 말똥말똥해지는 느낌에 결국 다시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괜찮으세요?” 그 순간 그는 눈앞이 환해지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마치 얼굴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는 듯한 아름다운 외모의 갈색 머리 소녀의 걱정스러운 시선과 마주쳤을 때, 그는 자신이 이미 죽어 천사와 마주하고 있는 것이라고까지 생각했다. 헤네스는 잠시 자신을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광전사의 안색을 살피더니 이상이 없다는 판단이 서자 한 마디를 남긴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부상은 치유가 되었지만, 일어서지 말고 그대로 안정을 취하세요. 아셨죠?” “아, 알겠습니다.” 헤네스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부상을 입고 쓰러진 광전사들에게 달려갔다. 상황은 리체스 역시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어때요?” “괴, 굉장합니다. 요정님, 이것은 설마 마법입니까?” “맞아요. 대단하죠?” “대단합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헤네스와는 달리 광전사들의 칭찬에 우쭐해 하고 있다는 정도다. 어쨌든, 헤네스와 리체스 덕분에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광전사들은 빠르게 회복되었다. 상황에 따라서는 곧바로 다시 싸움에 참가할 수도 있었지만, 그들은 조용히 외곽으로 물러나 준상과 다른 광전사들이 벌이는 싸움을 홀린 듯한 눈으로 지켜 보았다. 벌써 수십 분, 아니 한 시간은 족히 지난 것 같은데 아직도 준상은 처음의 그 자리에서 피를 뒤집어 쓴 모습으로 한 발자국도 물러나지 않은 채로 광전사들의 공격을 받아내고 있었다. 난공불락. 지금 이 순간 광전사들의 머리 속에 떠오른 단어는 바로 그것이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이미 짓이겨진 고깃덩이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 하지만 준상은 단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은 채, 바라볼수록 두려움이 느껴지는 기묘한 위압감을 뿜으며 지닌 바 힘을 모조리 끌어낸 광전사들의 공격을 받아내고 그대로 돌려주는 행위를 반복할 뿐이었다. “이것이야 말로... 붉은 공포.” 광전사들 가운데 한 명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처음에는 그저 전설이라고만 여겼다. 스스로가 지닌 광폭한 피의 분노가 얼마나 강렬한 것인지 잘 알고 있는 그들로서는, 자신들과 같은 광전사 천 명을 홀로 당해낼 수 있는 인간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처음에 준상에 대한 소식을 들었을 때는 솔직히 어떤 미친 놈인지 구경이나 해보자는 생각으로 이곳을 찾아온 경우가 많았다. 사실은 아리땁고 귀여운 요정들에게 홀려서 이곳까지 온 자들도 많지만 그건 일단 논외로 치더라도, 당장 오늘 아침에 유령말에 헤네스를 태운 채 성문 밖을 빠져 나오는 준상의 모습을 보고 그러면 그렇지 하고 혀를 차는 자들이 적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이질적인 의복 아래에 숨겨진, 제법 탄탄한 체구는 그럭저럭 봐줄 만 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반인들의 경우와 비교했을 때의 일이지 다년간 전장에서 극한으로 단련된 광전사와 비교하기에는 너무나도 왜소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광전사들은 준상이 피를 뒤집어쓰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런 신성한 자리에 여자를 끼고 나타난 놈의 면상을 박살내주리라 다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백마의 피를 뒤집어쓰는 순간 그들은 준상의 몸에서 퍼져 나오는 강렬한 파동에 긴장하고 말았다. 그것은, 누가 보더라도 애송이의 그것이 아니었다. 절로 몸에 남아 있는 털이라는 털은 모조리 곤두서는 듯한 강자의 느낌. 그것도 목숨을 걸고 덤벼도 승산이 있을지 장담하기 어려운 그런 강력한 힘의 파동이었다. 광전사들은 그 기운에 이끌리듯 자신의 피 안에 숨겨져 있던 파괴의 충동을 끌어냈지만, 결과는 지금 보는 것과 같았다. “저 분이라면... 가능할지도.” 또다시 누군가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물러나 있던 광전사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껏 광전사들이 때를 기다리며 대륙 각지로 흩어져 힘을 길러야만 했던 이유. 미친 전사라 불리며 멸시에 찬 시선을 받으면서도 한사코 전장에서 물러나지 못했던 이유. 하지만, 스스로 지닌 힘이 부족한 탓에 어딘가에서 나타날 붉은 공포의 전설을 기다려야만 했던 그 이유가 지금 광전사들의 머리 속에서 동시에 떠오르고 있었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감히 불가능한 일이라고 여겨졌기에, 이미 수백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그러한 목적 의식조차 어느 새인가 희미해져 가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 저기서 묵묵히 광전사들의 주먹을 받아내고 있는 저 검은 머리의 이방인이라면 혹시 가능하지 않을까. 광전사들은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다시금 몸 속에서 피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시간은 점차로 흘러 마침내 정오에 가까워졌다. 계속해서 끝없이 이어진 전투는 광전사들의 이탈을 불러왔고, 이제 준상의 곁에 남은 것은 모두 다 해서 스물 두 명의 광전사들 뿐이었다. “흠...” 준상은 남은 자들의 면면을 바라보았다. 이들이야 말로 대륙에 흩어진 광전사들을 실질적으로 통제하는 대전사 블러드로드들임을 그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준상처럼 피를 한껏 뒤집어 쓴 그들은, 한계에 도달한 육체가 재생의 과정을 거치고 있음을 나타내는 아지랑이를 온 몸으로 뿜어내고 있었다. 이 재생력이야 말로 보통의 광전사와 블러드로드를 구분 짓는 가장 확실한 표식이며, 또한 다른 자들이 모두 쓰러져 물러났음에도 지금까지 버티고 있게 만들어준 원동력이었다. 준상의 경우에는 광전사 단계에서 이미 레어급의 피칠갑 카드를 입수한 상태였기 때문에 재생력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지만, 그처럼 카드라는 시스템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보통의 사람들에게 있어 이 정도의 재생력은 가히 권능에 가까운 능력이나 다름없었다. 준상은 자신을 둘러싼 채 움직이지 않는 스물 두 명의 블러드로드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다.” “...” “적어도 저 모닥불이 다 탈 때까지는 즐겨봐야 하지 않겠나?” 그러자 블러드로드 가운데 하나가 천천히 그를 향해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남은 스물 한 명의 블러드로드 역시 천천히 하나 둘씩 준상을 향해 무릎을 꿇었고, 그들이 모두 무릎을 꿇자 물러나 있던 다른 광전사들 또한 일제히 무릎을 꿇고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광전사들이 준상에게 머리를 조아림과 동시에, 그들의 입에서 한 줄기 거대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붉은 공포를 뵙습니다!” “붉은 공포를 뵙습니다!” ============================ 작품 후기 ============================ 이래도 이불을 차지 않고 버티시겠습니까? 00205 트롤러 ========================================================================= 모든 광전사들이 준상 앞에 무릎을 꿇음으로써 인정의 의식은 마침내 끝을 맺었다. 준상은 우선 물의 정령인 새벽이슬을 불러 몸에 묻은 피부터 대충 씻어낸 다음, 광전사들의 부상을 치료하느라 수고한 헤네스와 리체스의 곁으로 다가갔다. "둘 다 고생했다." "별 말씀을요." 준상은 사람들이 모여 있던 장소로 시선을 돌렸다. 그가 유령말을 타고 성문을 빠져 나왔을 때만 해도 상당한 수의 사람들이 따르고 있었지만, 지금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는 자들은 고작해야 열댓 명에 지나지 않았다. 준상은 그 가운데 한 명인 젤란에게 다가가 조용히 말을 건넸다. "아직까지 남은 사람들은 아마도 밀정일 가능성이 큽니다." "네?" 젤란은 이게 무슨 소린가 싶은 표정을 지었지만, 방금 전까지 벌어졌던 의식의 영향으로 굳어졌던 머리가 다시 돌아가기 시작하자 어렵지 않게 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만 하더라도, 여동생인 헤네스가 시선을 가로 막지 않았더라면 만사 제쳐 두고 도망가 버리고 싶을 만큼, 피에 젖은 모습의 준상이 뿜어내던 기이한 압박감의 힘은 대단했다. 자신의 피 속에 잠든 파괴의 본능을 끌어내는 광전사들도 감히 견디기 어려울 정도의 힘을 보통 사람이 버티기는 매우 힘든 것이 당연한 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남아 있다는 것은 그것을 견뎌낼 정도의 정신력을 갖추고 있거나, 반드시 이 모든 과정을 지켜봐야만 할 필요가 있거나, 둘 중 하나일 가능성이 높다. 어느 쪽이 되었든 일반적인 보통의 사람이라고 보기는 힘든 노릇이니, 준상의 말대로 목적을 가지고 의식을 참관했다고 보는 편이 옳다. "그럼... 잡아들일까요?" 젤란이 긴장된 목소리로 묻자, 준상은 고개를 저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저들이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을 퍼뜨려 주기를 저는 바라고 있으니까요." "..." "물론 저들의 보고를 완전히 믿어준다는 전제하에서의 일이겠습니다만." "하긴..." 이 모든 과정을 직접 지켜본 자신도 꿈을 꾼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인데, 그렇지 않은 사람이야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게다가 저들을 감시하면 현재 이벨류아에 깔려 있는 첩보원들의 동태를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다. "그럼 일단 인적사항만 확인해 두겠습니다." "그래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준상은 젤란과 대화를 마친 다음, 곧바로 인벤토리에서 랩터를 꺼냈다. 유령말과 마찬가지로 허공에서 커다란 강철의 수레가 모습을 드러내자 남아 있던 자들은 작은 신음 소리를 흘렸다. 준상은 그들의 시선을 모른 척 무시한 채 차 문을 열고 그 안에 헤네스를 태운 다음 젤란에게 말했다. "타시죠. 저택까지 모셔드리겠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사는 세계는 달라도 젤란 역시 남자인 것은 마찬가지라 이 육중한 차량에 자꾸만 눈길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언제고 한 번 얻어타 보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는데 마침내 오늘에서야 그 소원을 이룬 셈이다. 준상이 차에 올라 시동을 걸자, 그때까지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조아리고 있던 광전사들은 서로를 돌아보며 당황스런 표정을 지었다. 천 명의 광전사들을 무릎 꿇게 함으로써 마침내 붉은 공포로 인정을 받았으니, 무슨 말이라도 한 마디 하지 않을까 하면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마치 이것으로 자신의 볼 일은 모두 끝났다는 것처럼 그대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아무래도 안되겠다 싶었던지, 스물두 명의 블러드로드가 일제히 일어나며 준상에게 뭔가 말을 해보려 했다. 그러나 준상은 그들이 일어나거나 말거나 천천히 랩터를 몰고 성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 그야말로 닭 쫓던 개 꼴이 되어 버린 광전사들은 잠시 어안이 벙벙해지고 말았다. 한참이나 찬 바람 부는 성문 밖에서 랩터가 지나가며 날린 흙먼지만 멍하니 보고 있다가, 블러드로드 가운데 한 명이 선임을 향해 물었다. "어쩌죠?" "..." 하지만 그렇게 물어본 들 선임 역시 대답할 말이 있을 턱이 없었다. 그래서 난감해 하고 있는데, 문득 누군가의 뱃속에서 꼬르륵 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한다. 하늘을 바라보니 어느새 태양이 중천에 도달해 있었다. 그냥 있어도 배가 고플 판에, 광폭까지 써가며 힘을 있는대로 발휘했으니 격하게 허기가 지는 건 차라리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선임은 자신을 바라보는 후임 블러드로드들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불 꺼라. 가서 밥 먹게." "..." 모처럼 흥분을 감추지 못하던 광전사들은 이제 허무함까지 느끼며 모닥불을 끄고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일이 끝날 즈음이 되자 성 안에서 경비병 하나가 헐레벌떡 달려와 그들에게 말을 전했다. "준상님으로부터의 전갈입니다." "뭐라시든가." 부리부리한 눈매를 지닌 선임 블러드로드가 그렇게 묻자 경비병은 찔끔한 표정으로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정리가 끝나는 대로... 와서 밥이나 같이 먹자고..." 경비병은 괜히 이런 말을 전했다가 이 광전사들이 단체로 화를 내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은 표정이었지만, 블러드로드는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귀를 쫑긋거리며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다른 광전사들을 향해 외쳤다. "들었나!" "네!" "가자! 밥 먹으러!" "오오!" 광전사들은 그제서야 조금 풀이 죽었던 표정을 풀었다. 그리고 활기찬 모습으로 얼른 모닥불을 끄고 주변을 깔끔하게 정리한 다음 준상의 저택을 향해 우르르 달려가기 시작했다. "..." 그들에게 준상의 말을 전하기 위해 달려왔던 경비병은 깨끗하게 치워진 성문 밖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어쩌면 그들이 생각보다 그리 심하게 미친 것은 아닌 모양이라는 생각을 떠올렸다. 하지만 성문을 지키고 있던 동료 경비병들의 생각은 그와는 전혀 달랐다. 몸에 피를 잔뜩 뒤집어 쓴 블러드로드들을 선두로 무려 천 명에 달하는 광전사들이 우르르 달려오는 모습을 본 순간, 이미 통과시키라는 전갈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만 자신도 모르게 성문을 닫아 걸고 농성전을 벌이고 싶어질 정도였다. 광전사들은 자신들을 바라보는 경비병들을 무시한 채 성문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곧바로 준상의 저택으로 향할 생각이었지만, 성문 안에서는 의외의 존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리체스의 지시에 따라 그들을 마중 나와 있던 요정들이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요!" "빨리 와요!" "빨리 빨리!" 광전사들은 수다스럽게 떠들며 그들의 머리 위에 내려 앉아 독촉하는 요정들의 모습에 당황했지만, 줄까지 서가며 그들을 태우고 달렸던 이들인지라 얼른 정신을 수습하고 준상의 저택을 향해 움직였다.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는 주민들의 시선을 무시한 채 곧바로 거리를 통과한 그들은 오래지 않아 준상의 저택 부근에 도달했다. "어?" "이, 이건..." 헬레벌떡 달려오던 그들은 이내 코끝을 간지럽히는 뭔가 매콤하고 구수한 향기에 자신도 모르게 코를 킁킁거리기 시작했다. "뭐해요? 빨리 가요. 여왕님이 맛있는거 많이 준비해 놨다고 그랬단 말이에요." "여, 여왕님이요?" 머리 위에 올라 앉은 요정으로부터 여왕님이라는 말을 듣자, 어째서인지 광전사는 리체스가 아닌 헤네스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쨌거나, 안 그래도 배가 고픈 마당에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향긋한 음식 냄새가 후각을 자극하자 광전사들은 입 안에 가득하게 침이 고이는 것을 주체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그대로 급히 저택의 입구에 도달하자, 기다리고 있던 시종들이 정문을 크게 열어젖혀 그들을 맞이했다. "오오..." 광전사들은 이내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문으로부터 저택의 입구로 도달하는 정원 구석 구석에 흰 천을 덮은 테이블이 놓여져 있었고, 그 위에는 미리 준비해 둔것이 확실해 보이는 갖가지 요리가 차려져 있었던 것이다. 이 음식들은 준상이 요정계에 머물면서 틈틈이 지구로부터 구한 식재료를 저택의 시녀들과 브레아 가문에서 파견나온 시녀들이 아침 일찍부터 요리한 것이었다. 광전사들은 눈앞에 차려진 진수성찬에 흐르는 침을 삼키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었지만, 그들을 이끌고 온 블러드로드들은 이 모든 광경에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준상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에게 천 명의 광전사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미처 몰랐다면 자만감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 인정의 의식을 통해 파악된 그의 실력을 감안한다면, 이것은 자신감이라고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는 행동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시종 하나가 앞으로 나와 그렇게 말하자, 선임 블러드로드는 그에게 조용히 물었다. "붉은 공포께서는 어디 계신가." "네?" 급한 마음에 광전사들의 호칭을 사용했던 선임은 얼른 말을 고쳤다. "이 저택의 주인 말일세." 시종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준상이 헤네스와 함께 거처에 들었을 때는 방해를 하지 않는 것이 이 저택의 불문율이었기 때문이다. "아... 주인님께서는 지금 거처에서 드셨습니다." 하지만 선임은 간곡한 표정으로 시종에게 다시 말했다. "만나뵐 수 있겠는가?" 검게 말라붙어 있긴 했지만, 피를 잔뜩 뒤집어 쓴 그 모습을 보면서 절대로 안된다고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시종은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건 여쭈어 봐야 할 듯 합니다. 잠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사실 안된다고 거절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인건 분명한 사실이었기 때문에, 선임 블러드로드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지."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시종이 저택 안으로 급히 사라지자, 선임은 광전사들을 돌아보며 외쳤다. "붉은 공포께서 성찬을 내려 주셨다! 소란 피우지 말고 얌전히 먹어라!" "알겠습니다!" 그들은 곧바로 각자 테이블로 흩어졌다. 그리고 저택에 들어오기가 무섭게 음식을 향해 돌진한 요정들과 함께 주린 배를 채우기 시작했다. 블러드로드들은 광전사들이 왁자하게 떠들며 식사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간단한 음료로 목을 축이다가, 저택 안에서 나온 시종에게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시종은 선임 블러드로드에게 다가와 준상의 말을 전했다. "전부는 곤란하고, 블러드로드들만이라면 만나시겠답니다." 선임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네. 안내해주겠는가." "알겠습니다. 따라 오십시오." 블러드로드들은 시종을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아직 공사가 완전히 끝나지 않아서 조금 어수선한 복도를 따라 위층으로 올라간 그들은, 이내 응접실로 안내를 받았다. 몸에 피가 묻은 상황이라 감히 의자를 더럽히지 못하고 멀뚱히 서있자니, 잠시 뒤 어느새 옷을 갈아입고 몸을 깨끗이 씻은 준상이 헤네스의 손을 잡고 리체스를 어깨 위에 앉힌 모습으로 응접실 안으로 들어왔다. "..." 준상은 여전히 굳은 피를 덕지덕지 묻히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는 얼굴을 찌푸리더니, 이내 물의 정령인 새벽이슬을 불러 그들의 몸을 씻어 냈다. "헛?" "이, 이건... 설마 정령?" "허어, 이럴수가..." 준상은 이미 의식이 치러지던 곳에서 새벽이슬을 불러 간단하게 몸을 씻었지만, 고개를 숙인 채 엎드려 있던 그들은 미처 그 광경을 보지 못했었고, 설령 보았다 할지라도 그것이 정령이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의 몸 주위를 휘돌며 몸에 묻은 마른 피들을 씻어내는 힘은 분명히 정령의 그것이었다. "서, 설마... 정령사의 힘도 가지고 계셨던 겁니까?" 선임 블러드로드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물었고, 준상은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다면?" 그 대답을 듣기가 무섭게, 선임 블러드로드는 무너지듯 바닥에 엎드리며 크게 외쳤다. "붉은 공포시여! 청이 있습니다!" 그러자 다른 스물한 명의 블러드로드들 역시 그 뒤를 따라 머리를 바닥에 찧으며 외쳤다. "청이 있습니다!" 준상은 얼굴을 찌푸린 채 그들을 바라보다가 헤네스를 돌아보았고, 그 시선을 받은 갈색 머리 소녀는 그들 앞으로 나서며 친근함 가득한 목소리로 조용히 물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들려주시겠어요?" 그러자 선임은 천천히 고개를 들며 쪼그려 앉은 채 자신을 바라보는 갈색 머리 소녀와 눈이 마주쳤다. 평소대로라면 어디 여자 따위가 나서느냐며 호통을 쳤겠지만, 그녀 뒤에 서있는 준상을 생각하면 감히 그런 말을 입에 담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선임 블러드로드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헤네스에게 자신들이 왜 이렇게 대륙 각지에 흩어져 있는지, 그리고 그들이 수백년의 세월 동안 붉은 공포의 출현을 기다려 왔던 이유가 무엇인지 말하기 시작했다. 선임 블로드로드는 자신이 아는 바를 자세하게 설명했다. 비록 붉은 공포로서의 자격을 확인하기는 했지만, 준상은 엄연한 이방인이었다. 때문에 본래 광전사라면 당연히 알아야만 하는 이와 같은 사실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선임 블러드로드는 어째서 이런 이방인이 붉은 공포의 자격을 얻을 수 있었는지 궁금했지만, 지금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준상이 힘을 얻은 경로가 아니라 수백년을 전해 내려온 예언이 마침내 실현되었다는 사실이었다. 헤네스는 차근차근 선임 블러드로드와 대화를 나누며 그가 부탁하고자 하는 내용을 자세하게 파악했고, 마침내 그 대화가 끝나자 준상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준상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볼 겨를이 없었다. 대화가 끝나는 순간 시야 가득 새로운 퀘스트 메시지가 우르르 쏟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에픽 퀘스트 - 귀향 1. 블러드로드와 대화를 나누십시오. (달성) -> 광전사의 고향 얀트훈센에 대한 정보를 얻으십시오 (달성) -> 완료! 보상: 경험치 아주 약간 -> 보상을 지금 수령하시겠습니까? (Y/n) _ (주의) 수령하지 않은 보상은 7일후 자동 소거됩니다 에픽 퀘스트 - 귀향 2. 블러드로드에게 귀향에 대한 정보를 얻으십시오.(달성) -> 블러드로드는 당신이 그만한 자격을 갖추었는지 알기를 원합니다. 20명의 광전사와 대결하여 당신의 가치를 증명하십시오 (1032/20) (달성) -> 완료! 보상: 경험치 많음 -> 보상을 지금 수령하시겠습니까? (Y/n) _ (주의) 수령하지 않은 보상은 7일후 자동 소거됩니다. 에픽 퀘스트 – 귀향 3. 블러드로드는 당신이 자신들의 숙원에 대해 알만한 자격이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블러드로드와 대화를 나누십시오 (달성) -> 수백년전, 광전사의 고향 얀트훈센은 미쳐버린 대정령에 의해 점거되었습니다. 광전사들은 필사적으로 이 강대한 자연의 힘에 항거했지만, 결국 고향을 등진 채 물러설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그들의 주술사는 먼 훗날 붉은 공포가 강림하여 그들을 고향으로 인도하리라 예언했습니다. 당신은 스스로 그 예언의 주인공임을 입증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정의 의식을 치러 붉은 공포로 인정받으십시오. (달성) -> 완료! 보상: 경험치 많음 -> 보상을 지금 수령하시겠습니까? (Y/n) _ (주의) 수령하지 않은 보상은 7일후 자동 소거됩니다. 에픽 퀘스트 – 귀향 4. 당신은 자신이 예언의 주인공임을 훌륭하게 입증했습니다. 이제 블러드로드들은 당신이 그들을 이끌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주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얀트훈센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얻은 후, 미쳐버린 대정령이 머물고 있는 광전사의 고향으로 향하십시오. -> 미완료. 00206 트롤러 ========================================================================= 에픽 퀘스트. 세계적인 규모의 영향력을 지닌 대규모 퀘스트를 일컫는 말이다. 준상이 폭발적인 성장을 이룩하게 된 원인이 무엇이던가. 바로 보상이 나누어졌어야 하는 에픽 퀘스트를 독식한 덕분이다. 준상은 최근 이런 생각을 조금씩 하고 있었다. 최근 그에게 할당되는 퀘스트의 빈도가 줄고, 설령 나오더라도 보상이 별로 대단치 않은 퀘스트가 주로 내려오는 것이 이런 식으로 에픽 퀘스트를 독점한 때문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물론 이것은 너무 과한 생각일 수도 있었지만, 만약 이 퀘스트가 누군가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면 지금 준상이 지닌 힘이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관리 대상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도 에픽 퀘스트를 개방할 수 있다니. 해결한 것으로 인정되어 후다닥 넘어가버린 퀘스트 과정으로 추론해 보면, 광전사와 관련된 에픽퀘스트는 얀트훈센과 인접한 곳에서 광전사들과 접촉하면서 시작되는 것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던 것이 준상이 붉은 공포로 인정받고 급기야는 블러드로드들로부터 얀트훈센 수복에 관한 청을 받게 되자, 본래 치러야 하는 중간과정이 무시되고 곧바로 그에 해당되는 에픽 퀘스트가 발동된 것은 아닐까. “흠...” 당장 그가 떠올릴 수 있는 추론은 이 정도지만, 어쨌든 일반적인 절차를 따르지 않고도 에픽 퀘스트를 발동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은 그에게 있어 매우 큰 이득이 된다. 이것이 온당치 않은 방법이라면 퀘스트가 발동된 시점에서 무언가 제재가 떨어졌을 터. 그렇지 않다는 것은, 충분히 예외적인 상황으로 취급될 수 있는 부분이란 뜻이 된다. 하기야 이런 추론 역시 준상처럼 요정계를 통해 두 세계를 자유로이 왕복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준상이 굳은 얼굴로 이런 저런 생각을 떠올리고 있는 동안, 무릎을 꿇고 엎드린 블러드로드들은 점차 마음이 조급해지고 있었다. 사실 그들이 생각하기에도 준상이 미쳐버린 대정령이라는 존재와 맞서야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스스로 크림슨드레드임을 선언하고 그것을 인정받기는 하였으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격을 말하는 것이지 어떤 의무나 책임을 뜻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본래부터 광전사로 태어나 훈련받은 자라면 사실 이런 걸 고민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준상은 스스로 밝히기를 다른 세계의 사람, 그것도 왕족에 해당하는 고귀한 신분이었다. 천하를 오시할 만한 강대한 힘과, 어리고 귀여운 부인, 그리고 막대한 재력까지.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는 그가 대정령이라는 이름의 강대한 자연의 힘과 맞서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이렇게 따지면 오히려 자신들이 무턱대고 진행한 인정의 의식을 그가 받아들인 것도 솔직히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다. 물론,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는 일. 선임 블러드로드는 준상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수단이 무엇이 있는지 고민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지금 준상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그것은 바로 세력이었다. 돌아가는 사정을 봐서는 그가 요정계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여기에 추가로 이벨류아 인근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브레아 가문을 처가로 두고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이들이 지닌 무력은 일천해서 준상이 나서지 않았더라면 이번 기사 대전에서 큰 낭패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천 명의 광전사들이 이벨류아로 모여드는 동안, 블러드로드들은 마냥 손을 놓고 있지 않았다. 붉은 공포라는 지고한 신분에 도전하는 자가 누구인지, 그들로서는 확인할 의무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정보를 모으고 파악한 결과, 준상의 곁에는 지금까지 달리 부하라 불리울 만한 자들이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다. 왕족이라면 그에 걸맞은 세력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 그렇다면 다른 세계를 오가는 방법에 뭔가 제한이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것은 바꿔 말하자면, 그가 다른 세계에 세력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이곳으로 옮겨 오기가 매우 힘들다는 뜻이 된다. 그렇다면, 정말로 그와 같은 추론이 사실이라면. 차라리 이곳에서 새로운 세력을 일구는 것이 현명한 일이 아닐까. 어쩌면, 준상이 인정의 의식이라는 터무니 없는 과정을 받아들인 것에는 그런 이유가 있지 않을까. 선임 블러드로드는 그때 문득 아까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그렇다. 그는 분명 광전사들을 앞에 두고 이런 말을 했었다. 자신에게 와서 너희들을 증명해 보이라고. 준상은 정말로 강했다. 달리 자신의 강함을 증명해 보일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그는 강한 자였다. 그런 그가 인정의 의식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수행한 이유는 자신이 아닌 광전사들을 평가하고 파악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그들이 정말로 자신의 손발이 될 만한 자격을 갖추었는지, 그와 함께 마주 걸을 정도의 능력을 지니고 있는지 파악하기 위해서는 아니었을까. “...” 선임 블러드로드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어째서 준상이 그들의 부탁에 바로 대답하지 않는지 그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묻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그와 같은 부탁을 들어줬을 때, 그들이 지불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사실 이건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얘기였지만, 선임 블러드로드는 자신의 추론에 대해 한 점 의심도 떠올리지 않았다. 어차피 붉은 공포는 자신들을 이끌도록 예정되어 있는 자. 게다가 그 대상이 지고한 왕족의 신분이라면 그들로서도 주인으로 모시기에 부족함이 없다. 잠시 고민하던 선임 블러드로드는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부디, 저희들을 이끌어 주십시오!” 그의 입에서 그 말이 터져 나온 순간, 그 자리에 있던 모든 블러드로드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끌어 달라. 단순하게 생각하자면 그냥 미쳐버린 대정령을 상대할 동안 붉은 공포로서 그들을 이끌어 달라는 뜻일 수도 있다. 하지만 좀 더 의미를 넓혀 보면 광전사 들의 우두머리가 되어 달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었다. 과연 그는 어떤 의미로 자신들을 이끌어 달라 외친 것일까. 그 의문은 곧바로 이어진 말을 통해 풀렸다. “저희들의... 왕이 되어 주십시오!” “헉!” 정작 당사자인 준상은 가만히 있는데, 엎드려 있던 블러드로드들이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왕이라니? 이게 갑자기 무슨 말인가! 준상은 그 말을 듣고 다른 블러드로드들이 당황해 하는 모습을 보고는 이것이 사전에 논의된 사안이 아님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때문에 준상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것은 광전사 모두의 뜻인가.” “...” 당연한 일이지만, 선임 블러드로드는 그 말에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판단에 대한 불신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준상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물러섬 없이 꼿꼿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선임 블러드로드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물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이름을 듣지 못했군.” 선임 블러드로드는 얼른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오칸, 쿠스타 오칸입니다.” 준상은 가만히 그 이름을 되뇌이며 다시 말했다. “쿠스타 오칸. 너에게 명한다.” “말씀하십시오.” “나를 설득하고 싶다면 먼저 네 동료들을 한 뜻으로 만들어라. 얘기는 그 이후에 다시 듣도록 하겠다.” “블러드로드 쿠스타 오칸, 명을 받들겠습니다.” 오칸이 그렇게 대답하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던 다른 블러드로드들도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났고, 이내 그의 뒤를 따라서 황급히 응접실을 빠져 나갔다. 마침내 응접실에 자신들만 남게 되자, 헤네스가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지 못하고 준상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정말... 왕이 되실 생각이신가요?” 그녀는 이미 준상이 내세운 천년왕국 신라의 왕족이라는 신분이 그저 허울 좋은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다만 그녀가 지금껏 모르는 척 준상과 말을 맞추고 있었던 것은 그것이 딱히 거짓인 것도 아닌데다, 신분제 사회인 이곳에서 그만큼의 이점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광전사들의 추대를 받아 왕의 자리에 오르는 것은 그저 다른 세계의 왕족 운운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얘기였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당장 델로드란 왕실과도 충돌을 피할 수 없는 민감한 사안인 것이다. 그러나 준상의 어깨에 앉아 상황을 가만히 주시하고 있던 리체스는 그녀와는 의견이 또 달랐다. “내가 보기엔 별로 문제없어 보이는데.” “어째서요?” 헤네스의 물음에 리체스는 가슴을 앞으로 쭉 내밀며 대답했다. “내가 누구인지 잊은 건 아니겠지? “그거야...” “나는 요정계의 여왕이었어. 그런 나의 반려인 주인님이라면 당연히 왕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어?” “...” 리체스의 말에는 조금 농담기가 섞여 있긴 했지만, 확실히 틀린 얘기는 아니었다. 게다가 광전사들의 고향인 얀트훈센이 수복된 이후를 고려해 보더라도, 그들이 단순한 미친 전사들의 모임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독립된 집단임을 분명히 밝힐 필요가 있었다. 리체스는 차라리 잘되었다는 듯이 준상에게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참에 그냥 요정계의 왕이 되어 보시는 건 어때요?” “네?” 헤네스는 다시 한번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리체스는 당연하다는 듯이 다시 말을 이었다. “서클릿을 쓰지는 못하겠지만, 그거야 저나 리시스로 해결 가능한 일이고... 어차피 이미 반쯤은 왕이나 다름없잖아요.” “...” 헤네스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사실 말이 바른 말이지, 현재의 요정 여왕인 리시스는 아직 철모르는 꼬마인데다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상황이라 실질적인 업무는 보좌관들의 손에 대부분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요정계의 유지를 제외한 대부분의 일들은 현재에도 준상이나 리체스의 손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많았다. 직접적으로 직위는 주어지지 않은 상태지만, 요정들 역시 준상을 리체스와 동등한 지위로 인정하고 있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일이었다. 리체스는 다시 헤네스에게도 말했다. “이건 너한테도 좋은 일이야. 최소한 인간들에게 지위 문제로 업신여김을 당할 이유는 없어질 테니까.” “아...” 헤네스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색은 하지 않고 있었지만, 그녀는 지금도 준상에게 매파를 보내오는 자들이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준상의 옆에 자신이 있음을 뻔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매파를 보내오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자신의 친가인 브레아 가문의 작위가 일천하기 때문이다. 물론 준상이 요정왕이 된다고 해서 자신의 출신이 바뀌는 것은 아니지만, 단순한 부인과 왕비는 그 격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헤네스가 솔깃해 하는 모습을 보이자, 리체스는 다시 준상에게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때요? 한 번 해 볼만 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준상은 그런 리체스의 말에 이렇게 대답했다. “귀찮아.” “...” 리체스는 너무나 간단한 그의 대답에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준상은 그런 리체스를 향해 이렇게 말을 이었다. “그보다, 묻고 싶은 것이 있다.” “무슨...” “얀트훈센에 나타났다는 그 대정령에 대해 아는 바가 있나?” 리체스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정령계가 요정계의 하위 차원이라고는 해도 실질적으로는 통로 이상의 의미가 없는 것도 사실이고, 무엇보다도 정령들은 인간이나 요정처럼 이성을 가진 존재가 아니거든요. 정령들을 다루어 보셨으니 아시겠지만, 이건 대정령이라고 해도 그리 큰 차이가 없어요.” “흠...” “게다가 수백년전의 일이라면 제가 잠들어 있었을 때라... 그 근처에 살고 있던 요정들이라면 혹시 모르지만요.” “그렇군.” 리체스는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시 준상을 조르기 시작했다. “주인님, 그러지 말고 요정왕 한 번 해봐요. 네?” “됐다.” “아이이잉. 주인니임.” “...” 00207 트롤러 ========================================================================= 모처럼 리체스가 코맹맹이 소리까지 내가며 졸라댔지만 아쉽게도 준상은 요지부동이었다. 안되겠다 싶었던지 얼른 헤네스에게 손짓 발짓까지 해가며 눈치를 주었으나 불행히도 이 갈색머리 소녀는 그렇게 눈에 뻔히 보이는 목적성을 가진 애교 같은 건 부릴 줄을 몰랐다. “칫, 조금만 더 하면 넘어왔을 텐데.” 결국 조르기에 실패한 리체스가 투덜대자 헤네스는 난처한 표정으로 사과했다. “죄송해요.” “아니야. 죄송하긴 뭐. 네가 원래 그런 애인거 모르는 것도 아니고.” “...” 리체스는 투덜거리며 헤네스에게 팔찌 하나를 건네주었다. “자, 손목에 차봐.” “네.” 그녀들은 지금 요정계에 존재하는 리체스의 연구실에 와 있었다. 이전에 완성된 전신 방어복은 강력한 방어력을 지니고는 있지만, 입고 있던 옷을 모두 벗고 갈아입어야만 하는 문제가 있었다. 물론 준상에게는 충분한 대기 시간이 있기 때문에 생각해 보면 그리 큰 문제라고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요정계를 통해 서로 다른 두 세계를 자유로이 왕복할 수 있게된 상황인데다, 다크 시드 보유자들과 맞닥뜨렸을 때를 가정한다면, 좀 더 빠르고 신속하게 방어복을 착용할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해 두는 것이 좋았다. 무기의 경우에는 그냥 인벤토리에 넣어두었다가 바로바로 꺼내 쓰면 될 일이었지만, 방어복 같은 경우는 그렇지가 못했다. 준상이야 방어구 자체를 거의 쓰지 않아도 레어 시드 등을 통해 충분한 방어력이나 저항력을 획득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헤네스나 리체스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이것을 보완할 방법을 모색해야만 했다. 게다가 지금 준상이 방어구를 쓰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광전사 콤보가 방어구 착용시 발동되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기 때문인데, 경우에 따라서는 수호자처럼 방어에 특화된 콤보를 써야할 경우도 있으니 그런 경우를 상정해서 무기처럼 즉각 사용이 가능한 방어구를 마련해 둘 필요도 있었다. 그런 와중에 떠오른 것이 바로 리체스가 만든 분신 팔찌였다. 처음 만든 시험작은 의복을 제외한 신체만을 구현할 수 있었지만, 이것은 다시 말해 필요에 따라서는 옷만 따로 구현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얘기가 된다. 그렇다면, 아예 기존에 있는 옷이나 방어구를 마법으로 탈착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한 준상은 리체스에게 자신의 생각을 물었고, 그 결과 충분히 가능하다는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지금 헤네스가 착용한 팔찌는 그런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것이었다. “전에 분신 팔찌 봤었지? 그때랑 비슷해. 팔찌에 손가락을 가만히 대봐.” “네.” 리체스의 말대로 손가락을 대자 둥근 고리가 그녀의 몸을 훑고 지나가며 인증과정이 이루어졌다. 인증이 끝나자 리체스는 헤제가 되지 않도록 팔찌의 보안기능을 활성화시켰다. 그러자 헤네스의 손목에 채워진 팔찌는 희미하게 빛나는가 싶더니 이내 그들의 시야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이렇게 해두면 꼼꼼하게 마법으로 탐색하지 않는 이상, 이것을 착용하고 있다는 것도 알아보기 힘들어.” “정말 대단해요.” “에헴. 뭐 이 정도를 가지고.” 리체스는 작은 크기로 지낼 때처럼 허리에 손을 척 얹은 채 잘난 척을 했는데, 몸이 커져서인지 유난히 가슴이 도드라져 보인다. “자, 이제 사용해봐. 팔찌에 손가락을 대고 착용이라고 말하면 돼.” “해볼게요.” 헤네스는 리체스가 알려준 대로 팔찌에 손가락을 대고 착용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반짝이는 빛이 그녀의 몸을 감싸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온몸에 짝 달라붙는 레이싱 슈트 같은 형태의 방어복과 헬멧이 그녀의 몸을 감싼다. “우와...” 헤네스는 자신도 모르게 감탄했다. 리체스는 그녀가 자신의 손발을 살펴 보는 모습을 보며 간단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마법 부여를 하는 김에 간단하게 몇 가지 기능을 더 덧붙였어.” 헤네스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말요?” 그런 헤네스를 보며 리체스는 우쭐한 표정으로 설명을 덧붙였다. “물론이지. 첫 번째는 근력 증가. 두 번째는 피로 회복이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입고 있는 동안 쾌적한 온도가 유지되도록 보온 기능을 넣어 두었어. 어때, 쓸 만하겠지?” 쓸 만하다 뿐인가. 근력 증가야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고, 피로 회복은 그녀가 수련할 때 그 효과를 톡톡히 보았던 매우 유용한 마법이었다. 게다가 입고 있는 동안 쾌적한 온도가 유지된다면, 춥고 더운 것에 영향을 받지 않게 되니 전투가 아닌 일반적인 활동에서도 큰 도움이 된다. “정말 대단해요.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 하셨어요?” 헤네스가 바이저를 위로 올린 채 감탄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자, 리체스는 다시 한 번 허리에 손을 척 얹고 가슴을 쭉 내밀며 대답했다. “에헴. 뭐 이 정도를 가지고.” 헤네스는 리체스가 잘난 척 하는 모습을 보며 작게 웃음 짓다가 고개를 숙이며 그녀에게 감사를 표했다. “정말 감사드려요.”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이렇게 간편하게 입고 벗을 수 있는 방어복을 가지고 있는 이상, 앞으로는 전투중이라도 준상에게서 떨어져 있지 않고 그 옆을 지키는 것이 가능해진다. “새삼스럽게 무슨.” 리체스는 손을 내저으며 그렇게 대답하다가 문득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정말 고마워?” “네?” 갑자기 은근한 표정을 지으며 묻는 리체스의 모습에 헤네스는 살짝 불안감이 느껴졌지만, 일단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무, 물론이죠.” “그럼 말이지...” 리체스는 헤네스의 옆으로 다가가 그녀의 귀에 은밀하게 무언가를 속삭였다. 무슨 얘기를 하려고 그러나 싶어 가만히 귀를 기울이던 헤네스는 그녀의 말을 듣자 이내 눈을 크게 뜨며 당황했다. “그, 그런...” “왜? 부끄러워?” “...” 헤네스는 고개를 푹 수그린 채 대답하지 않았다. 리체스는 어느 새인가 귀까지 빨개진 그녀의 모습을 보며 다시 은밀하게 속삭였다. “어차피 지금이랑 달라질 것도 없잖아. 그냥 명목상의 일일 뿐이야.” “그건 알지만...” “딱 한 번만 해봐. 그래도 안 통하면 나도 포기할 테니까.” “...” 사실 헤네스도 리체스의 생각 자체에는 동의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생각하기에 준상은 단순히 이름만 취하고 넘어갈 사람이 아니었다. 본래 어떤 직위가 주어진 다는 것은 그것에 대한 책임과 의무 또한 부여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책임자란 곧 책임을 지는 자리를 말하는 것이고, 준상은 그런 원칙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정말로 그럴 생각이 있다면, 리체스가 코맹맹이 소리를 하며 뒤따라 다니지 않아도 자신이 먼저 손을 뻗을 사람이 아니던가. 헤네스는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아마... 제가 말해도 소용이 없을 거에요.” 하지만 리체스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설득했다. “그래도 해보지 않고는 모르는 일 아니겠어?” “그거야 그렇지만...” “그러니까 한 번만. 딱 한 번만 해봐. 그럼 나도 포기할게.” “...” 결국 헤네스는 리체스의 끈질긴 설득에 항복하고 말았다. “휴... 알았어요. 그럼 한 번만이에요.” 한 번은 어떻게 용기를 내본다 쳐도 두 번은 절대 무리였다. 리체스도 그것만큼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난 두 말 하는 요정이 아니거든.” “...” 둘은 준비를 하기 위해 곧바로 신기루 꽃으로 향했다. 그녀들이 작전을 모의하고 있을 때, 저택에서는 광전사들이 한창 토의를 벌이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급작스럽습니다.” “그렇습니다. 왕이라뇨. 솔직히 좀 뜬금없군요.” “맞습니다. 얀트훈센이 건재할 때도 그런 건 없었다고 들었습니다.” 선임 블러드로드 쿠스타 오칸의 생각은 처음부터 만만찮은 반대 여론에 직면하고 있었다. 준상의 실력은 분명히 대단하다. 천 명의 광전사들을 상대로 단 한 걸음도 물러나지 않고 그들 모두를 제압할 수 있는 능력이라니, 그것이 어디 인간으로서 가능한 일이던가. 게다가 듣기로는 정령사의 힘마저 갖추고 있다고 들었다. 얀트훈센을 미쳐 버린 대정령에게 빼앗긴 그들이기에, 정령사가 얼마나 강대한 힘을 지니고 있는지 광전사들은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인정의 의식 때는 그런 정령의 힘을 내보이지도 않았던 걸 감안하면, 실제로 광전사와 정령사의 두 가지 힘이 합쳐져 전투에서 모습을 드러냈을 때 얼마나 강력한 파괴력을 낼지는 그들로서도 쉽사리 짐작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강력한 힘이 곧 그 사람의 전부를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왕이란 곧 초월적인 권력이 부여됨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들은 아직 준상이라는 사람에 대해 그 강대한 힘을 제외하면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광전사의 고향인 얀트훈센을 탈환하는 것은 분명히 중요한 일이지만, 그것을 이루기 위해 광전사 전부를 담보로 잡을 필요가 있을까. 설령 여기 모인 광전사들을 모두 설득한다 하더라도 문제는 남아 있었다. 대륙에는 아직 이들 외에도 많은 수의 광전사들이 남아 있었고, 왕을 세우는 문제는 그들 역시 의견을 개진할 권리가 있었다. 그들 중에는 지금 여기 모인 이들처럼 광전사라는 이름과 습속을 유지한 채 대륙을 떠돌아 다니며 수련에 매진하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그 능력을 발휘해 공을 세우고 작위를 받아 정착한 자들도 적지 않았다. 만약 왕이 옹립된다면, 이미 정착해 버린 그들의 생활 또한 영향을 받을 것은 분명한 일. 여기서 단순히 몇 마디 말로 뚝딱 해치우고 말 일이 아닌 것이다. 처음 왕이라는 말을 입에 담은 쿠스타 오칸 역시 그런 상황을 모르지 않았다. 아니, 현재 남아있는 블러드로드 가운데 최선임인 그이기에 오히려 그런 모든 상황을 더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고, 때문에 물러서지 않고 계속 다른 광전사들에 대한 설득을 계속했다. “아무래도 시간이 좀 걸릴 모양이군.” 준상은 초감감과 정령을 통해 광전사들의 대화를 전해 들으며 그렇게 판단을 내렸다. 아무래도 얀트훈센의 수복만 가지고는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기에는 뭔가 부족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역시 다른 방법을 동원해야 하나.” 딱히 왕이라는 지위에 욕심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름이야 어찌되었든 광전사들을 움직일 만한 권한이 필요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아무리 에픽 퀘스트가 걸려 있다 한들, 모처럼 세력을 일굴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오칸이 파악했던 대로, 현재 준상에게 부족한 것을 굳이 꼽으라면 그 중 첫 번째가 바로 세력이었다. 하지만 세력이라는 것은 좀처럼 손에 넣기 어렵다. 더구나 준상처럼 친화력이 부족한 사람이라면 그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준상이 그렇게 이런 저런 생각을 떠올리며 가만히 소파에 앉아 있는데, 문득 방 한 켠에 석문이 생겨나더니 그 안에서 헤네스와 리체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고개를 돌려보니 헤네스는 몸에 방어복을 걸친 상태였다. “완성된건가?” 준상의 물음에 리체스는 바로 그의 어깨에 내려 앉으며 대답했다. “물론이죠. 제가 누군데요.” “하긴.” 우쭐거리며 대답하는 리체스의 모습에 준상은 피식 웃어 보이고는 헤네스를 향해 말했다. “탈착은 잘 되고?” “네...” 헤네스는 몸매가 드러나는 방어복을 입은 채 준상의 시선을 받아들이는 것이 부끄러운지 굴이라도 있으면 당장 파고들어갈 듯한 모습으로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그럼 한 번 벗어봐.” “...” 직접 성능을 확인하고 싶어하는 준상의 말에 헤네스는 잠시 머뭇거렸다. 하지만 이내 리체스의 강렬한 시선을 마주하자 주먹을 불끈 쥐더니 손가락으로 손목에 채워진 팔찌를 만지며 조용히 속삭였다. “해제.” 그러자 그녀의 모습은 작은 빛 알갱이에 감싸였고, 이내 방어복을 착용하기 전에 입고 있던 옷이 모습을 드러냈다. “...” 준상은 잠시 눈앞에 드러난 헤네스의 모습에 말문을 잃었다. 어깨 위에는 은은한 연보라색의 가운이 걸쳐져 있었다. 은은한 윤기를 발하는 실크는 그녀의 앳되고 부드러운 피부를 더욱 빛나게 하고 있었으며, 물결처럼 가볍게 흘러내리며 여성스러움을 돋보이도록 만들어 주고 있었다. 얇고 투명한 가운 아래에는 검은 색 레이스로 만들어진 네글리제를 입고 있었다. 레이스와 리본으로 포장된 듯한 아름다운 가슴은 물론이거니와 그 아래로 비쳐 보이는 투명한 피부는 준상으로 하여금 자신도 모르게 숨을 멈추게 할 정도의 아찔한 매력을 간직하고 있었다. 게다가, 놀랍게도 그녀는 팬티를 입지 않은 상태였다. 은은하게 비쳐 보이는 네글리제 아래로 그녀의 잘록한 허리와 앙증맞은 배꼽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으며, 그 아래의 부드러운 융기는 레이스에 의해 보일 듯 말 듯 모습을 숨기고 있었다. 헤네스는 허전한 느낌 탓인지 다리를 오므린 채 머뭇거리다가, 준상과 눈이 마주치자 돌진하듯 그의 품에 안겨들었다. 준상은 자신의 품에 안겨든 그녀의 작고 부드러운 몸을 감싸 안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리체스.” 음흉한 표정으로 둘을 바라보던 전대 요정 여왕은 준상의 나지막한 부름에 흠칫하며 얼른 딴청을 피웠다. “네?” 하지만 준상은 헤네스와 리체스의 태도 만으로도 이 일의 내막을 단숨에 꿰뚫어 보고 있었다. “이게 무슨 꿍꿍이지?” “꿍꿍이라뇨. 헤헤... 전 모르는 일인데요.” “...” 리체스는 고개를 돌리고 모르는 척 딴청을 피우다가 아무래도 안 되겠던지 석문을 열고 신기루 꽃으로 도망치고 말았다. 순식간에 사라진 그녀의 모습을 보며 준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품에 안긴 헤네스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헤네스.” “네.” “너도 내가 왕이 되었으면 싶니?” 헤네스는 가만히 준상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며 대답했다. “전 별로 상관없어요.” 조금 의외다. “어째서?” 그래서 다시 물어보자, 헤네스는 들릴 듯 말 듯한 작은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은 이미 저만의 왕자님이시니까요.” 헤네스는 스스로 말해 놓고도 너무 민망하다 싶었던 모양인지 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채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고, 준상은 가슴에 와닿은 그녀의 얼굴이 뜨거운 열기로 가득찬 것을 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소리 내어 웃었다. ============================ 작품 후기 ============================ 오그라 들어라. 얍! 00208 트롤러 ========================================================================= 도망치듯 자리를 피했던 리체스는 제법 시간이 흐른 뒤에야 몰래 저택으로 돌아왔다. “헤헤...” “...” 눈치를 보며 다가섰지만, 준상은 왔냐는 듯이 시선 한 번 주었을 뿐 별다른 말이 없었다. 뭔가 이상하다 싶은 생각에 어느새 원래의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헤네스에게 다가가 물었다. “어떻게 됐어?” 혹시나 하며 기대에 가득 찬 눈빛을 보내는 리체스의 모습에 헤네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죄송해요.” “끙...” 승부복장까지 차려 입은 헤네스가 실패할 줄이야. 이것은 단순히 매력이 부족해서라든가, 자신을 향한 애정이 부족해서 거절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는지라, 리체스는 아쉬우면서도 안도하는 복잡 미묘한 감정을 맛봐야만 했다. “할 수 없지.” “...” 실상은 설득을 시도하지도 않았지만 헤네스는 그냥 설득을 실패한 것으로 해두기로 했다. 괜히 사실대로 말하면 리체스의 성격상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으음... 어쩐다.” 리체스는 턱을 만지작거리며 고민하다가 조용히 자신을 바라보는 준상의 시선을 받자 어색하게 웃으며 얼른 방 밖으로 도망쳤다. 헤네스는 허겁지겁 모습을 감추는 그녀의 모습을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조용히 준상에게 물었다. “저대로 내보내도 괜찮을까요?” 그녀의 말에 준상은 유라스가 건네주었던 포목들의 목록을 살피며 짧게 대답했다. “놔둬.” “...” 조금 무심하게까지 느껴지는 말이었지만, 헤네스는 조용히 곁으로 다가가 그의 발치에 앉은 후 가만히 무릎에 머리를 기댔고, 준상은 그런 헤네스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물목의 확인을 계속했다. 한편 밖으로 나간 리체스는 준비된 만찬을 정리하는 시녀와 시종들의 모습을 발견했고, 이어서 나뭇가지 등에 올라앉은 채 볼록해진 배를 두드리고 있는 요정들을 발견했다. “우아아... 배 불러...” “못 움직이겠어어어...” 얼마나 먹어댔는지 숨을 쉬는 것조차 버거워 보일 지경이다. 리체스는 혀를 차며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그들에게 다가가 말을 건넸다. “많이들 먹었니?” 누군가 하고 돌아보던 요정들은 리체스 특유의 무지개빛 머리카락을 보고는 화들짝 놀랐다. “힉!” “여, 여왕님!” 몇몇 요정들은 너무 놀란 나머지 나뭇가지 위에서 굴러 떨어졌고, 또 몇몇 요정들은 급히 일어나려다 바위 위에서 데굴데굴 굴러 떨어졌다. 리체스는 그 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그러길래 적당히 좀 먹지.” “헤헤...” 자기들이 생각해도 좀 심했다 싶었던지 요정들을 뒤통수를 긁적이며 눈치를 살폈다. 리체스는 그런 요정들을 바라보다가 자신이 왔음에도 여전히 나뭇가지 위에 벌렁 드러누워 있는 몽몽이를 발견했다. 이 벌렁 누운 채 리체스를 흘깃 바라본 몽몽이는 이내 시선을 돌리더니 앞발로 자신의 옆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털빛이 알록달록한 자그마한 다람쥐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신경 쓰지마. 이 오빠가 있잖니.’ 리체스는 어쩐지 몽몽이에게서 그런 말이 흘러나온 듯한 착각이 들었다. “끙...” 이래봬도 명색이 전대 요정 여왕인데, 이젠 하다하다 다람쥐까지 무시를 하나 싶어 발끈하려던 리체스는 문득 그 모습을 보고 한 가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음? 잠깐...” 그녀는 자신의 눈치를 보고 있는, 과식한 나머지 배가 볼록 튀어나온 요정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뭔가 영 못 미더운 모습이긴 했지만, 그래도 보통의 인간들에 비하면 누가 봐도 귀여운 모습이다. “그렇게 서 있지 말고 가서 쉬어. 그러다 탈 날라.” 언제 여왕의 히스테리가 터질까 싶어 불안해하던 요정들은, 의외로 그녀가 선선히 휴식을 명하자 의외다 싶은 표정으로 얼른 도망치듯 물러나 휴식을 취하기 시작한다. 리체스는 그 모습을 보며 곰곰이 뭔가 생각하다가, 너무 많이 먹어서 멀리 가지도 못하고 자신과 가까운 바위 위에 앉은 요정을 향해 물었다. “대머리들은 어디 있지?” “그 사람들이라면, 식사가 끝나자 정원 분수대 쪽에 모여서 뭔가 얘기를 나누던데요.” “그래? 알려줘서 고맙다.” “헤헤, 별 말씀을요.” 리체스는 얼른 그곳을 벗어나 정원의 분수대로 향했다. 본래 이 저택의 주인이었던 집정관은 무언가를 내세워 자신을 포장하기를 즐기는 사람이었다. 물론 이것은 단순한 사치의 문제가 아니라, 귀족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한 가지 수단이기도 했다. 그 때문에 이 저택은 여러 가지로 이벨류아의 전통적인 양식과는 조금 다른 분위기의 화려한 치장이 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곳에서 나지 않는 하얀 대리석으로 저택을 치장한 것이라든가, 수도에서 이름 높은 조각가를 불러 화려한 분수대를 세운 것이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었다. 과거 델로드란이 위기에 처했을 때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왕실을 위기에서 구했다고 전해지는 수호자의 전설로 분수대를 치장한 것은, 집정관으로서는 단순한 치장을 넘어서 정치적인 의사 표현이나 야망의 구현 같은 의미마저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목적과 상관없이, 무려 삼단에 걸쳐 화려한 인물상이 면면에 조각된 이 아름다운 분수대는 지금 웃통을 훨훨 벗어젖힌 광전사들이 둘러 앉아 격렬한 토론을 벌이는 장소로 변모해 있었다. 리체스는 조금은 과열된 양상마저 띄고 있는 그들의 대화에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조금 분위기를 살펴보니 광전사들은 대략 세 부류로 나뉘어 있었다. 선임 블러드로드인 쿠스타 오칸의 생각에 따라 준상을 왕으로 옹립하자는 데 찬성하는 자들이 한 부류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며 반대 의사를 펼치는 자들이 또다시 한 부류를 차지 하고 있었다. 하지만 리체스가 살펴보니, 격렬하게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 자들은 이 두 부류를 합쳐도 전체의 반이 되지 않는 듯 했고, 나머지는 그저 멀뚱거리며 상황이 돌아가는 모습을 관망하는 분위기였다. “이건... 해볼만 할지도.” 리체스는 대충 분위기 파악이 끝나자 선임 블러드로드인 쿠스타 오칸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우리 얘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그는 눈을 감은 채 반대파의 의견을 듣고 있었는데, 갑자기 귓가에 아름다운 여자 목소리가 흘러들자 깜짝 놀라며 눈을 떴다. “쉿. 놀라지 말아요.” “...” 리체스는 손가락을 들어 입술에 가져다 대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제 모습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아요. 그러니 모르는 척 제 얘기를 듣기만 하세요.” “...” 쿠스타 오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아름다운 무지개빛 머리카락을 가진 요정이 준상의 한쪽 어깨를 차지하고 있던 존재임을 알아차린 탓이다. 리체스는 이 우직한 블러드로드의 반응에 살짝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우선 자신의 소개를 했다. “일단 제 소개부터 할게요. 저는 이전에 요정들의 여왕이었으며, 지금은 준상님의 반려중 하나인 리체스라고 합니다.” “...” 오칸은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았다. 보통 요정은 아니리라 생각했지만, 무려 전대 요정 여왕이라니. 하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면 준상 역시 천년 왕국 신라의 왕족이니, 이 정도는 되어야 격이 맞지 않겠는가 하고 말이다. 살짝 놀란 듯 하다가 이내 뭔가 납득했다는 표정으로 평온을 찾아가는 오칸의 모습을 재미있다는 듯이 바라보던 리체스는 다시 말을 이었다. “저는 준상님이 왕이 되어야 한다는 당신의 의견에 동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사실 그런 직위에 별로 관심이 없으십니다. 실제로 저만해도 요정왕이 되어주십사 말씀을 드렸지만 거절당했죠.” “아...” 오칸은 자기도 모르게 속으로 ’그런 아까운 짓을...’ 이라고 중얼거리고 말았다. 오칸은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여자들을 조금 천대하는 입장이었지만, 그런 그에게조차 귀여운 요정들의 모습은 뭔가 항거할 수 없는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토록 귀엽고 깜찍한 요정들의 왕을 거절하다니. 역시 보통의 인간이라면 하기 힘든 결단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이것은 제멋대로이며 천방지축인데다 통제나 질서와는 백만광년 정도 거리가 있는 요정들의 습속을 이해하지 못한 데다, 그런 요정들의 뒤치다꺼리를 무려 만년 동안 이어가다 히스테리를 일으킨 전례가 있는 리체스의 일에 대해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생각이지만, 어쨌거나 오칸은 안 그래도 광전사들의 반대가 많은 판국에 준상까지 설득할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해지고 말았다. 어쩌면 준상은 일이 이렇게 될 것을 알고 동료들을 설득하라 보냈던 것은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리체스는 오칸의 표정이 어두워지는 것을 보자 다시 조용히 말을 이었다. “너무 그렇게 걱정하실 것 없어요.” “하지만...” “준상씨는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 분이지만, 일단 말한 것은 확실하게 지킵니다. 생각해 보세요. 그분이 당신에게 뭐라고 했는지를.” “...” 준상은 오칸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신을 설득하고 싶다면, 먼저 네 동료들을 설득하라고. 얘기는 그 이후에 듣겠노라고. 오칸은 그제서야 깨달았다. 준상은 반허락 같은 것을 한 것이 아니다. 그는 이 일을 통해 오칸이 과연 자신의 수족이 될만한 자인지 시험하고자 하고 있었다. 비록 붉은 공포로 인정을 받았다 한들, 준상이 다른 세계의 이방인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존경은 받을 수 있을지 몰라도, 광전사들을 직접적으로 통제하기에는 여러모로 반발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불리한 점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광전사들과 준상을 이어주는 연결고리가 필요하다. 준상은 오칸에게 내린 시험은 그와 같은 직무를 수행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한 과정이라 할 수 있었다. “으음...” 오칸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뭔가 특단의 대책이 없는 이상, 이대로는 반대파의 의견을 누를 방법이 없었다. 적어도 그들의 논쟁을 방관하고 있는 대다수의 광전사들의 귀를 솔깃하게 할 만한 뭔가가 없다면, 이 상황을 타개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오칸은 자신을 은근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전대 요정 여왕과 시선을 마주했다. 지금까지 그들을 지켜 봤다면, 그녀 역시 상황을 파악하고 있을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자신에게 은밀하게 대화를 걸어온 것에는 그에 합당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무지한 저에게 지혜를 나누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오칸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자, 리체스는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지혜라고 할 정도로 대단한 것은 아니에요.” 겸양의 말이 나왔지만, 오칸은 머리를 조아리며 다시 청했다. “부탁드립니다.” 거듭 오칸이 고개를 숙이자, 리체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제 생각은 간단해요. 서로에게 부족한 것을 채워주자는 것이죠.” “어떤...” “저희 요정들은 조금 제멋대로인 성격이라 하나의 통일된 조직을 만드는 것이 곤란해요. 게다가 요정계 안에서라면 몰라도 바깥 세상에서는 신체적으로 커다란 제한을 받기 때문에 아무래도 큰 힘을 발휘하기가 힘들죠.” 오칸은 고개를 끄덕였다. 리체스는 그를 바라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반면에 광전사들은 통일된 하나의 체계 아래 움직이는 것에 익숙하고 이 세계에서 보통의 인간보다 훨씬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어요. 하지만 그들은 고된 수련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친해지기 어렵고 때문에 반려를 맞이하는 것도 매우 힘들다고 알고 있어요.” “으음...” 오칸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소리를 흘렸다. 말이 나와서 얘기지만, 사십이 넘은 그는 물론이고 블러드로드 대부분이 가정을 이루지 못한 상태였다. 오죽하면 광전사들 사이에 이런 얘기까지 전해지고 있었다. 블러드로드는 가정을 이룬 자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경지라고 말이다. 오칸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서로에게 부족한 면이 있다는 것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서로 보완하는 것이 정말 가능하겠습니까?” 오칸은 그렇게 말을 건네다가 문득 머리 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깨달았다. “서, 설마?” 리체스는 그런 오칸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그 설마가 맞을 거에요.” 오칸은 당황한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그, 그런 일이 정말 가능하겠습니까?” “물론이죠. 저와 준상님이 이미 맺어진 것을 보면 모르시겠어요.” “허어...” 하긴, 사이즈 문제는 요정계로 들어가면 해결되니 절대로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그리고 만약 이것이 성사된다면, 현재까지 관망을 유지하고 있는 대다수의 광전사들을 자신의 쪽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미 실질적으로 요정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준상이니, 요정들과 광전사들이 맺어진다면, 그것만으로도 그를 왕으로 추대하기에는 더 없이 큰 동기 부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리체스는 조금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오칸을 향해 다시 말했다. “준상님이 살고 있는 세계에는 이런 제도가 있다고 해요.” “어떤...” “미혼의 남녀가 모여 대화를 나누는 자리를 마련해서 서로의 짝을 찾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제도가 바로 그것이죠.” “오오! 그런 훌륭한 제도가! 그것이 무엇입니까?” 리체스는 오칸의 말에 조용히 대답했다. “그 제도의 이름은, 바로 미팅입니다.” 00209 트롤러 ========================================================================= 곧바로 의기투합한 전대 요정 여왕과 선임 블러드로드는 세부적인 사항을 협의하기 시작했다. “우선 한 가지 분명하게 해둘 일이 있습니다.” 진지한 표정을 짓는 리체스의 말에 오칸은 긴장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리체스는 주위를 둘러보고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오늘의 이와 같은 협의 사항이 절대로 준상님의 귀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음...” 오칸은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는 천년왕국 신라의 왕족. 모름지기 왕족이란 그 자존심이 매우 높은 경우가 많은데, 자신이 이런 이면 계약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었음을 알게 되면 결코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 점은 확실하게 주지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오칸이 굳은 표정으로 대답하자, 리체스는 두 번째 조건을 달았다. “또한 미팅 과정에서 일어난 일은 절대 다른 자에게 발설해서는 안 됩니다. 설령 마음이 맞아 반려가 되었더라도, 대외적으로는 어디까지나 자연스러운 교제의 결과일 뿐이어야 합니다.” 이것 역시 앞서의 조건과 다를 바가 없기에 오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며 리체스는 다시 세 번째 조건을 말했다. “마지막으로, 미팅으로 인해 어떠한 결과가 도출되더라도 그것은 온전히 참가자 본인의 책임입니다.” “그건 무슨...” “간단한 얘깁니다. 예를 들어 미팅에 나간다고 반드시 반려를 맞이할 수는 없다는 걸 인지해야 한다는 얘기지요. 설령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더라도 그것 또한 운명임을 받아들일 각오가 있어야만 합니다.” “그거야 당연한 얘기지요.” “이상의 세 가지 사항에 동의하십니까?” 오칸은 순간 뭔가 찜찜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리 깊게 고민하지 않았다. “동의합니다.” 오칸이 동의의 뜻을 표하자, 리체스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그에게 다시 말했다. “좋습니다. 그럼 일단 저는 돌아가서 제반 사항을 검토하겠습니다. 당신은 이 협의를 통해 동료들을 설득하는 한편, 참가자를 모집해야 합니다.” “첫 번째 참가자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일단... 아직 주최측인 저희들도 그 제도에 대해 자세히 아는 바가 없으니, 처음에는 다섯 명 정도로 인원을 제한하고자 하는데, 어떠십니까.”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건 그 제도가 실행된다는 사실 바로 그 자체니까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협의가 끝나자 리체스는 오칸의 시야에서 조용히 사라졌다. 오칸은 격론을 펼치고 있는 반대파의 수장을 조용히 불렀다. “무슨 일이십니까?” “잠깐 와서 내 얘기를 좀 들어보게.” “...” 무슨 일인가 싶어 미심쩍은 표정을 짓고 있던 반대파의 수장은 오칸이 조용히 몇 마디 말을 귀에 속삭이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그것이 사실입니까?” “물론.” “으으음...” 그대로 심각하게 고민에 빠진 반대파의 수장을 보고 오칸은 이 계책이 제대로 먹혔음을 인지했다. “다만 이 일이 성사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주의 사항이 있네.” “그것이 무엇입니까.” “우선...” 오칸은 리체스와 협의한 세 가지 사항을 전해 주었다. “하긴, 그쪽으로서는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겠지요.” “그렇지. 나는 거기에 한 가지 조건을 더 추가하고 싶네.” “그것이 무엇입니까.” “간단해. 참가 인원을 누군가가 심사해서 선발하고자 한다면 그 심사를 맡은 인원에게 권력이 집중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 아니겠는가.” “아...” 반대파의 수장은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차마 공공연히 떠들고 다닐 수 없는 비밀스런 협약이긴 했지만, 만약 심사를 통해 참가인원이 선발된다면 이것은 당연히 일어날 수 있는 결과이다. “그래서 나는 참가인원의 선발을 공개적으로 치르고자 하네.” 반대파의 수장은 깜짝 놀랐다. “공개적으로요?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하지만 오칸은 선선히 웃으며 대답했다. “목적을 밝히지만 않으면 될 일이지. 자네는 요 며칠간 요정들을 보면서 그들이 우리들에게 가장 많이 요구했던 일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했나.” “아... 설마?” 사실 이건 길게 생각하고 말고 할 일도 아니었다. 요며칠 동안 광전사들은 요정들을 어깨에 태우고 성벽을 미친 듯이 질주하는 것이 거의 일과였기 때문이다. 오칸은 진지한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역사적인 첫 미팅의 참가자들이라면 그만한 자격이 필요한 것은 당연한 일. 나는 오래 달리기 대회를 열어 그 대회의 상위 입상자 다섯 명을 참가자로 결정할 생각이네.” 이것은 얼핏 생각하기에 매우 평등한 조건으로 보였지만, 반대파의 수장은 그 이면에 숨겨진 뜻을 어렵지 않게 읽었다. “후후후... 오칸님도 속이 검은 분이셨군요.” “이해했나?” “이해했습니다. 저야 당연히 찬성입니다.” “좋아. 그럼 각자 조용히 남은 인원들을 설득하도록 하지.” “맡겨주십시오.” 두 사람은 각자 따로 측근을 몇 사람씩 불러 이번 일을 설명했고, 다시 그 사람들이 피라미드 식으로 다른 사람에게 내용을 전파했다. 그 결과, 지금까지 갑론을박했던 사실조차 의아하게 여겨질 정도로 광전사들은 순식간에 뜻을 하나로 모았다. “오래 달리기 대회는 언제 여실 생각이십니까.” “달리 생각이 있나?” “길게 끌 필요가 없지요. 마침 든든하게 배도 채웠겠다. 소화도 시킬 겸 바로 시작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반대파 수장의 은밀한 말에 오칸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야 거부할 이유가 없지. 자네도 제법 속이 검은 친구였군. 후후후...” “이를 말씀이겠습니까. 후후후...” 두 사람은 은밀한 표정으로 그렇게 웃어 보이고는 곧바로 광전사들을 데리고 성벽으로 가서 오래 달리기 대회를 시작했다. 험상궂은 광전사들이 우르르 성벽 밖으로 나가자 배부르게 먹고 따뜻한 오후의 햇살을 쬐고 있던 요정들은 그들이 또 달리려는 건가 싶었다. 평소 같았으면 좋다며 따라 나섰겠지만, 오늘만큼은 배가 너무 불러서 만사가 다 귀찮았다. “아, 몰라. 배불러. 그냥 잘래.” “나도.” “나도.” 요정들이 그렇게 잠에 취한 동안 광전사들은 성벽 밑에 모여 대열을 갖추고 달릴 준비를 했다. 하지만 열의에 가득 차 있던 그들은 한 가지 이상한 점을 오래지 않아 깨달았다. 고작해야 심판이나 하겠거니 싶었던 블러드로드들이 자신들과 뒤섞여 달릴 준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제야 눈치챈 것이다. “서, 설마... 대전사님들도 달리실 겁니까?” “물론. 뭔가 문제라도?” “...” 없다. 이 오래 달리기는 모든 광전사에게 평등한 기회를 부여하고자 행해지는 것. 블러드로드들이 조금 나이를 먹고, 조금 더 강하기는 하지만 그들 역시 홀아비인건 마찬가지고, 광전사의 일원이라는 사실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일이었다. “크윽...” “이 빌어먹을 노친네들이...” 젊은 광전사들은 그제야 자신들이 블러드로드의 술수에 넘어갔음을 깨달았지만, 그것은 이미 한참이나 늦어버린 일이었다. “지지 않겠습니다.” “젊음의 힘이 무언지 보여드리지요.” 모처럼 뜻이 하나로 뭉치나 싶었던 광전사들은 곧바로 청년층과 중장년층으로 나뉘어 으르렁대기 시작했다. “훗, 관록이란 걸 너무 얕보는 모양이군.” “젊음으로는 뛰어 넘을 수 없는 경험이라는 것이 있는 법이거늘.” 광전사들은 그렇게 서로 신경전을 펼치며 몸을 풀기 시작했고, 첫 미팅의 참가자 다섯 명을 뽑기 위한 오래달리기는 과열 양상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출발 신호를 내리기 위해 갑자기 불려온 경비병은 자신이 왜 이 시커먼 남자들의 살기를 온 몸에 받아야 하는지조차 이해하지 못한 채 부들부들 떨며 입을 열었다. “주, 준비... 출발!” 병사의 떨리는 목소리와 함께 천 명의 시커먼 광전사 패거리들은 지축을 뒤흔들며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번들거리는 대머리와 붉게 그을린 근육이 꿈틀거리는 그 장대한 물결에 성문과 성벽을 지키고 있던 경비병들은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터뜨렸다. 그들이 성벽 주위를 도는 것이 어제 오늘 일은 아니었지만, 이런 식으로 천 명이나 되는 광전사가 모조리 몰려나와 달리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고, 그만큼 그 위압감도 훨씬 대단한 바가 있었다. “애송이. 너 따위가 나에게 대항할 수 있을 것 같은가?” “훗, 나이 드신 분은 가서 잠이나 주무시죠. 마침 햇살도 따뜻하지 않습니까?” 그들은 달리는 와중에도 그렇게 신경전을 펼치고 있었고, 오래 지나지 않아 감정이 격화된 몇몇은 실제로 투닥거리는 지경에까지 도달했다. 하지만, 그런 광전사들 가운데서도 가장 선두에 선 것은 다름 아닌 블러드로드들이었다. “이건 사기입니다!” “맞습니다! 수치를 아신다면 지금이라도 포기하고 물러나십시오!” 젊은 광전사들이 이를 악물고 블러드로드들의 뒤를 쫓으며 그렇게 외쳤지만, 그들은 오랜 세월 단련된 강인한 체력 만큼 얼굴에 철판을 까는 능력도 발군이었다. “훗, 애송이들.” “그래서 너희들은 아직까지 광전사에 불과한 것이다!” 한 바퀴. 다시 두 바퀴. 달리기가 계속될수록 광전사들은 더욱 격렬하게 충돌하기 시작했고 중간에서 시작된 다툼은 이내 선두권에까지 이어지기 시작했다. “이대로 질 수는 없다!” 아무래도 체력으로는 블러드로드를 이길 수 없다 싶었던지, 광전사 가운데 하나가 앞서가는 블러드로드의 다리를 향해 태클을 시도했다. “으윽! 이 놈이!” 전력질주의 와중에 불의의 일격을 당한 블러드로드는 당황하며 젊은 광전사를 떼어내려 했지만, 광폭까지 쓰면서 이를 악물고 달려드는 광전사의 힘을 단숨에 뿌리치는 것은 제 아무리 대전사인 블러드로드라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적어도 똑같이 광폭을 쓰지 않는 이상은 말이다. “너의 희생을 잊지 않으마!” “달려라! 달려서 이 불의한 노친네들에게 젊음의 힘을 보여줘라!” 한번 과열되기 시작한 분위기는 좀처럼 다시 꺼지지 않았고, 결국 광전사들은 그날 밤이 새도록 전력을 다해 서로에게 부딪혀 가며 장렬히 산화했다. 그리고 마침내 다음날 아침이 되었을 때. 이벨류아의 성벽 주위의 땅은 널브러진 천 명의 광전사들의 몸으로 뒤덮인 채 밝아오는 태양을 맞이했다. “후후... 역시 대단하군.” “오칸 님이야 말로.” 처음에 예상했던 대로,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최후의 두 사람은 바로 선임 블러드로드인 오칸과 반대파의 수장, 이렇게 두 사람이었다. 그들은 격렬하게 서로를 견제하며 달리다가, 아침이 밝아오자 자신들 주위에 더 이상 따르는 광전사가 없음을 깨닫고는 그제서야 지친 몸을 차가운 대지 위에 눕히며 휴식을 취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그, 글쎄. 이것도 무슨 의식 같은 것이 아닐까?” “아...” 경비병들은 영문도 모르게 광전사들의 미친 질주를 꼬박 지켜봐야만 했고, 이 일은 이후에 광전사들의 철야 질주라는 이름으로 이벨류아의 경비병들에게 전설처럼 전해지게 된다. 어쨌거나. 마침내 참가인원으로 선발된 다섯 명의 광전사들은 주위의 시기와 질시를 한몸에 받으며 리체스가 자신들을 부르기를 기다렸다. 이제나 저제나 하며 소식이 오기를 간절히 기원하던 그들은 정오가 되어서야 리체스가 보낸 요정으로부터 전갈을 받을 수 있었다. “선발되신 분들은 저를 따라 오세요.” 안 그래도 이런 저런 일로 바쁜 와중에 느닷없이 불려와 미팅의 준비를 해야만 했던 셀라는 불퉁스런 표정으로 그들을 데리고 리체스에게 데리고 갔다. 리체스는 선발된 다섯 명의 광전사들의 면면을 보고는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오칸님. 당신이 포함되어 있을 줄은 미처 몰랐군요.” 질책의 의미가 담긴 그 말투에 오칸은 얼른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이것은 모든 광전사가 동의한 공평한 기회를 부여한 결과입니다. 절대로 부정한 방법을 쓴 것이 아니니 오해는 하지 말아주십시오.” “흠...” 리체스는 그리 달갑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죠. 처음부터 인원의 선발은 당신에게 맡겨둔 일이었으니, 이제 와서 그것을 문제 삼을 필요는 없는 일이겠죠.”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요정계로 가기 위해서는 이곳에 도착할 때 사용했던 정령의 문을 통해야 합니다. 그것은 알고 계시겠죠?” “물론입니다.” “요정 한 명을 붙여 드릴테니, 지금 곧 금단의 숲으로 가세요.” “알겠습니다.” 다섯 명의 광전사들은 희희낙락한 표정으로 자신의 짐을 챙겨 급히 금단의 숲을 향해 달려갔다. 짐을 잔뜩 짊어진 채로 정신없이 달려간 그들은 결국 그날 밤이 되기 전에 금단의 숲에 도착할 수 있었고, 정령의 문을 통해 요정계로 들어가게 되었다. “후후후...” “후후후후후...” 어제 인정의 의식을 치르고, 다시 밤새 미친 듯이 달리다가, 오늘 또 이렇게 한 나절을 정신없이 달렸으니 제 아무리 블러드로드들이라 해도 체력이 온전하게 남아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 지쳤음에도 불구하고, 블러드로드들은 헉헉거리며 먹이를 기다리는 사냥개들처럼 자신들에게 마련된 자리에 앉아 미팅에 참가할 요정들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셀라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헐떡거리는 그들의 모습에 눈살을 찌푸렸지만, 이내 표정을 정돈하고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앞서도 리체스님이 말씀하셨겠지만, 세 가지 조건에 대해서는 알고 계시겠지요?” “물론입니다.” 첫째, 오늘의 일이 절대로 준상의 귀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 둘째, 미팅 중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절대로 발설해서는 안 된다. 셋째, 결과에 대해서는 그것이 자신의 운명임을 인정하고 승복해야만 한다. 다섯 명의 광전사, 아니 블러드로드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 세 가지 조건을 되새겼다.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곧 요정측 참가자들이 들어올 것입니다.” 셀라가 물러가고 조금 시간이 지나자 주위에 둘러쳐진 장막을 열어 젖히고 요정 하나가 미팅 장소로 들어왔다. “...” 순간, 광전사들은 침묵에 잠겼다. 요정은 맞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들이 알고 있던 요정과는 뭔가가 달랐다. 절구통? 아니, 저 체형은 차라리 항아리라 부르는 편이 맞을 것이다. 좋게 말하면 육덕진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터무니 없는 비만.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싶어 멍하니 바라보는 그들을 향해, 요정측의 첫 번째 참가자는 생긋 웃으며 그들에게 말했다.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유니아란, 이렇게 훤칠한 미남 분들을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 유니아란. 그녀는 정령사 관련 에픽 퀘스트를 수행할 당시, 준상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던 적이 있는 바로 그 아줌마 요정이었다. 광전사들은 미처 몰랐다. 평소에 보이는 귀엽고 깜찍한 요정들만이 요정계의 주민들은 아니라는 사실을. 그리고, 애초에 결혼이라는 행위를 이해하고 있는 대부분의 요정들은 지금 모습을 드러낸 유니아란처럼 수천년 넘게 살아온 아줌마 요정들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00210 트롤러 ========================================================================= 광전사들이 유니아란의 모습을 보고 패닉 상태에 빠져 있을 즈음, 리체스는 아무 것도 모르는 척 준상과 헤네스가 머무는 거처로 돌아왔다. “저 왔어요!” 창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마침 수련을 마치고 돌아온 것인지 준상이 땀에 젖은 옷을 갈아입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꿈틀거리는 숭모근의 움직임을 잠시 넋 놓고 바라보던 리체스는 준상이 고개를 돌리다 입가에 흐르던 침을 급히 닦고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렸다. “흠흠! 헤네스는요?” “씻으러 갔다.” “아하...” 그럼 조만간 주인님도 씻으러 가시겠네요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리체스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괜히 창 밖을 바라보며 딴청을 부린다. 준상은 그런 요정 여왕의 모습을 보며 피식 웃더니, 몸에 묻은 땀을 물의 정령인 새벽이슬을 불러 대충 씻은 후 간편한 옷으로 갈아입으며 말했다. “수고했다.” “...” 뜬금없는 말이었지만, 리체스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지 않았다. “음? 뭐가요?” 하지만 그녀는 모르는 척 고개를 돌리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준상은 그 모습을 보고 다시 웃었다. 확실히, 지금 여기서 그녀에게 자초지종을 들을 필요는 없다. 여기서는 그냥 준상이 모르는 척 하고 넘어가는 것이 현명한 일이기 때문이다. 사실 준상은 그녀가 밖으로 나갈 때부터 광전사들의 토론을 초감각과 정령의 힘으로 가만히 전해 듣고 있었다. 오칸에게 동료들을 설득하라 지시를 내렸던 것에는, 현재 광전사들의 체계가 어떤 식으로 정립되어 있는지, 또한 그들 내부에 별도로 분립된 세력이 있는지 확인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예상대로 광전사들은 준상을 왕으로 추대하자는 의견이 나오자 세 개의 커다란 파벌로 갈렸다. 물론 이것은 추대에 대해 찬성과 반대, 그리고 중립이라는 형태로 크게 나누어진 것에 불과하고 실제로는 각 블러드로드들을 비롯해 여러 갈래의 파벌로 나뉘어 있는 형국이었다. 준상으로서는 사실 이런 파벌들이 그리 달갑지 않았다. 간혹 긍정적인 경쟁등을 이유로 파벌의 효용성을 언급하는 사람도 있기는 하지만, 이런 파벌들은 기본적으로 통제가 매우 힘든 것이 사실이고, 그 다툼이 격화될 경우 조직 자체가 붕괴될 소지가 매우 크다. 기왕 자신의 세력을 얻고자 한다면, 이런 식의 폐단은 초기에 미리 잡아 놓고 가는 것이 편할 수 밖에 없는 일. 하지만 강제적으로 이를 해결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은 결국 숙청 밖에 없는데, 이것은 효과는 크지만 그 반대급부가 너무 크기 때문에 쉽게 선택할 수 없는 수단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고 생각하는 와중에 리체스가 먼저 움직였다. 그녀는 미팅이라는 수단을 통해 분열되어 난립하던 광전사들의 의견을 단숨에 하나로 통일시켰다. 물론 이것은 그들이 지니고 있던 내부적인 문제를 해결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눈앞에 먹음직한 미끼를 흔들어 그 문제를 잠시 덮어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가 누구이던가. 서당개 삼년에 풍월을 읊고, 식당개 삼년이면 라면을 끓인다는 말도 있는 판에, 그녀는 저 천방지축인 요정들을 데리고 무려 만년이나 요정계를 다스려온 장본인이었다. 결국 광전사들은 그녀가 내민 미끼에 눈이 멀어 자신들끼리 경쟁을 벌여 미팅 참가 인원을 선발했다. 이것마저 예상한 일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들은 요정들이 그것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오래 달리기라는 방식을 통해 참가인원을 선발했고, 그 결과 현재 이곳에 모인 광전사들 가운데 가장 강한 다섯 명이 선발되었다. 여기서 리체스의 영악함이 발휘되었다. 그녀는 이벨류아로 요정들을 부르지 않고 광전사들을 요정계로 보냈다. 광전사들은 이곳으로 오는 도중에 요정계를 들른 경험이 있었고, 그곳에서 수려한 미모를 가진 보좌관들에게 안내를 받은 기억이 있었기에 그녀의 의도를 털끝만큼도 의심하지 않은 채 요정계로 향했다. 그녀가 과연 어떤 요정들을 미팅 상대로 삼았는지 준상은 알지 못했지만, 보좌관인 셀라를 불러 그들이 다시 요정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조치한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요정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정령의 문을 통과해야만 하는데, 이것은 아예 자신의 몸에 그것을 지니고 있는 준상과 같은 특수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반드시 요정의 협력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즉, 한 번 요정계로 들어간 자는 요정이 허락하지 않는 이상 다시 원래의 세계로 돌아올 방법이 없다는 얘기다. 블러드로드들은 분명 강하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기준을 인간으로 잡았을 때나 해당되는 일이다. 요정들은 비록 인간이 머무는 이 세계에서는 그다지 강한 힘을 발휘하지 못하지만, 요정계에서는 얘기가 전혀 달라진다. 신체에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는 요정계에서라면, 리체스 정도는 아니더라도 상당히 강력한 마법 능력과 더불어 정령마저 부리는 요정들이 부지기수다. 물론 이런 강제적인 수단을 통한 연금은 최후의 수단이 되겠지만, 미팅이 실패하더라도 그들이 돌아올 방법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이것은 다시 말해, 현재 광전사들을 주도적으로 이끄는 거대한 파벌의 수장들이 단숨에 잘려나간 것이나 다름없는 결과인 셈이다. 광전사들로서는 의문을 품을 수도 있는 일이겠지만, 그들이 지니고 있는 요정이나 요정계에 대한 인식을 이용한다면 이 다섯 명이 요정들과의 사랑 놀음에 빠져 이곳으로 돌아오려 하지 않는다는 식의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것은 아주 간단한 일이다. 그리고 이것은 광전사들에게 하나의 커다란 모티브가 될 수 있다. 그 다섯 명이 어떻게 선발되었던가. 오래 달리기라는 수단이 사용되기는 했어도, 그 과정에서 벌어진 처절한 격투를 감안하면 결국 현재 모인 광전사들 가운데 가장 강한 다섯 명을 선발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다시 말해, 이후에 미팅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다섯 명 안에 들 정도의 힘을 보유하고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뜻이 된다. 이것은 단순히 광전사들에게 모티브를 부여하는 것 이상의 또 다른 의미가 있다. 그것은 바로, 이후에 생겨날 수도 있는 준상의 경쟁자를 사전에 차단할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이 된다는 사실이었다. 준상이 붉은 공포로 인정을 받고, 다시 왕으로의 추대까지 거론된 가장 큰 원인은 그가 천 명의 광전사들을 제압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자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바꿔 말하면, 만약 광전사들 가운데 그런 일이 가능한 자가 나오게 되면 준상의 위치가 흔들릴 수도 있다는 뜻이 된다. 어디서 나고 자랐는지조차 알 수 없는 이방인과, 함께 훈련하며 함께 싸워온 전우, 이렇게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면, 당연히 후자에게로 더 관심이 가는 것이 세상 이치 아니겠는가. 하지만 주기적으로 미팅이라는 수단을 사용해 그럴 만한 가능성이 있는 자들을 걸러내어 요정계에 격리할 수 있다면, 준상이 지닌 권위를 위협할 수 있는 자를 사전에 처리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 된다. 물론 그 정도의 힘을 가진 자들을 격리하는 것은 조금 아쉬운 일이긴 하지만, 그들과 미팅을 가진 요정들을 이용한다면, 잘 구슬려서 또 다른 정예 병력으로 만들어내는 것도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그것만이 아니다. 파벌들의 수장이 사라진 이상, 이후로 준상이 무슨 일을 추진하더라도 사전에 계파 간의 이익 조정을 고려할 필요성이 확실하게 줄어든다. 이것은 빠른 의사결정을 가능하게 만들고, 그만큼 조직의 움직임이 민첩해지는 결과를 가져온다. 만약 광전사들이 요정계에 억류된 사실이 알려지더라도 준상으로서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미팅에 관한 밀약은 전대 요정 여왕인 리체스와 선임 블러드로드 오칸 사이에 맺어진 것이니, 준상으로서는 이런 일을 멋대로 벌인 그들을 벌할 책임은 있어도 이 일련의 사건 자체를 책임질 이유는 없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노린 것인지는 준상으로서도 확신하기 어렵지만, 결국 리체스는 별 것 아닌 미팅이라는 미끼를 통해 일석이조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의 이익을 그에게 챙겨준 것이나 다름없다. “리체스.” “네.” “오랜 만에 같이 목욕이나 할까?” “정말요? 우흐흐흐...” “...” 결론적으로, 준상은 결국 왕의 자리에는 오르지 않았다. 굳이 그런 것을 자칭해서 안 그래도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델로드란 왕실을 자극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대신 준상은 붉은 공포로 인정 받았음을 내세워 각 계파의 우두머리가 사라진 광전사들을 단숨에 장악한 뒤, 그들을 훈련시키고 또한 무장시키는 일에 매진하며 얀트훈센에 관한 정보를 수집했다. 에픽 퀘스트가 발동되기는 했지만, 딱히 시간 제한이 있는 것도 아닌 이상 무리하게 일을 추진할 이유가 없었다. 일전의 기사 대전 때와는 달리, 에픽 퀘스트가 발동한 이상은 다른 퀘스트에 불려갈 까봐 불안해 할 필요도 없다. 튜토리얼을 진행한 뒤로 준상의 신경을 가장 갉아 먹는 요소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언제 발동될지 모르는 퀘스트라 할 수 있다. 모처럼 그 지긋지긋한 퀘스트 발동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되었는데, 일부러 급히 움직일 이유 또한 없는 것이다. “얼어붙은 동토라고요?” “그렇습니다. 과거 얀트훈센이라 불리던 곳은, 현재 살아있는 생명체는 접근할 수 없는 극악한 환경의 지역으로 변한지 오래입니다.” “흠...” 준상이 턱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기자 얀트훈센에 대한 정보를 모아온 젤란은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설마, 그곳에 가실 생각은 아니시겠죠?” “글쎄요. 솔직히 별로 가보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만, 그게 제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라서 말이죠.” “허...” 젤란은 준상 옆에 다소곳하게 앉은 헤네스를 바라보며 속으로 작게 한숨을 쉬었다. 모르긴해도, 준상이 그곳으로 간다면 헤네스 역시 그 곁을 따를 것은 분명한 일. 그녀가 이미 상당한 힘을 손에 넣었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는 일이었지만, 그런 극한의 지역을 탐사하는 일에까지 뛰어들 것을 생각하면 걱정이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튼, 이렇게 직접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별 말씀을.” “아, 참. 어머님께는 조만간 요청하신 물목이 도착할 것이라고 말씀드려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젤란이 돌아가고 난 뒤, 준상은 헤네스와 함께 신기루 꽃으로 이동해 최상층에 가져다 놓은 컨테이너 하우스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준상은 보관 중인 시드들을 꺼냈다. 일전에 용암의 강에서처럼, 이번에는 특히 냉기 저항을 맞춰야 할 필요가 있었다. “역시 전부를 무장시키는 건 불가능한 일인가.” 헤네스의 방어복에 부여된 보온 기능을 활용할 수 없을까 하는 생각에 리체스에게 문의해 보았지만, 얼음의 대정령이 휘두르는 눈보라까지 막아낼 정도는 아니라는 대답을 들은지 오래다. 결국 냉기 저항의 속성을 가진 시드 정도가 현재로서는 대책의 전부인 셈이다. 임서윤을 통해 시드의 매입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덕분에 시드 자체는 부족함이 없었지만, 이렇게 되면 역시 광전사들을 데리고 얀트훈센으로 곧장 진주하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결국 이번에도 대정령과 직접 싸우는 것은 준상 혼자만의 일이 될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 추가로 카드 슬롯을 열 개나 가지고 있는 리체스에게 이것저것 슬롯이 많은 카드를 꽉꽉 채워 넣고, 헤네스 역시 다섯 개의 카드 슬롯에 레어급 이상 카드를 장착한 뒤 시드를 눌러 담으면 어떻게든 냉기저항을 100퍼센트 이상으로 맞추는 것이 가능하겠지만, 그 외의 다른 소환수나 펫들은 정령을 제외하고는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봐야한다. 시드의 정리가 끝나자 준상은 리체스를 신기루 꽃으로 불러들였다. “부르셨어요?” “그래.” 준상은 최상층의 입구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입구 말인데, 허가 받은 자만 출입할 수 있도록 만들 수 없을까?” 리체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바로 대답했다. “불가능한 일은 아니에요. 현재 적용되어 있는 공간 왜곡 마법을 손봐야 해서 여러 가지로 귀찮기는 하지만요.” “그럼 부탁해도 될까?” “상관은 없지만, 굳이 그래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어차피 여기 드나들 수 있는 건...” 리체스는 그렇게 말하다가 준상의 의도를 뒤늦게 깨달았다. “설마... 이곳에 광전사들을 데려다 놓을 생각이신가요?” 혹시나 하며 던진 질문이었지만, 준상은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 말이 맞아. 외벽의 계단을 보면 비어 있는 방도 많으니 충분히 수용할 수 있을 거다.” “과연...” 이렇게 신기루 꽃에 광전사들을 데려다 놓으면 만약의 사태가 벌어지더라도 언제든 준상의 원하는 때에 이 강력한 병력들을 동원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리체스는 납득했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알았어요. 그럼 바로 작업을 시작할게요.” “고맙다.” “별 말씀을요.” 리체스는 그렇게 말하고는 얼른 자신의 연구실에서 필요한 것들을 챙겨오기 위해 움직이다가, 그제서야 생각 났다는 듯이 준상을 향해 말했다. “아참. 새로 고친 분신 팔찌, 막 완성한 참인데 오셔서 시험해 보시는 것이 어떨까요?” “그러는 것이 좋겠군. 같이 가자.” “네!” 00211 트롤러 ========================================================================= 준상은 리체스의 연구실로 가서 막 새로 만들어 둔 분신 팔찌를 건네 받아 착용했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인증 과정을 마치자 여기에 추가로 보안 장치가 활성화되었다. “뭔가 좀 다른 것 같은데?” 팔찌를 착용했던 부위의 무게감이나 촉감이 사라진 것을 느낀 준상이 그렇게 말하자 리체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추가 설명을 했다. “알아 보시겠어요? 단순히 다른 사람의 이목에서 숨기는 것을 넘어서 은닉 기능도 추가했거든요. 보시면 이렇게...” 리체스는 손을 뻗어 분신 팔찌를 착용한 준상의 손목을 어루만졌다. 원래대로라면 눈에는 보이지 않더라도 촉감이 느껴져야만 했지만, 지금은 마치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준상의 손목에 그녀의 손이 닿는다. “이건... 정말 대단하군.” “그렇죠? 그렇죠?” 이것 저것 아이템을 많이 착용하다 보니, 준상으로서도 조금 부담스러울 때가 많다. 반지도 그렇고, 목걸이도 그렇고... 워낙 많은 양의 악세사리를 착용하고 있다보니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무슨 졸부가 자신의 부를 과시하기 위해 치장한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이 기능, 구현하기 어려운가?” “쉽진 않지만, 엄청나게 어려운 것도 아니에요. 결국은 발상의 전환이랄까요.” 물론 이런 얘기 자체가 리체스이기에 가능한 일이고, 약간의 겸양이 섞인 대답이기도 하다. 그러나 준상은 그 얘기를 액면 그대로 여과 없이 받아들이고 말았다. “잘 됐군. 그럼 이것들도 한 번 손을 봐주지 않겠나.” “...” 그렇게 말하고는 착용하고 있던 반지와 목걸이를 우르르 쏟아 놓자, 우쭐한 표정을 짓고 있던 리체스는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뒤늦게야 아차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늦은 일. 준상은 울상이 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대신 원하는 것이 있으면 말해봐. 너무 힘든 일이 아니라면 들어줄테니.” 순간 리체스의 눈이 초코바를 발견한 몽몽이처럼 번뜩이며 빛을 발했다. “정말요?” 준상은 괜한 말을 한 것이 아닌가 싶어 자신도 모르게 흠칫했지만, 이내 태연을 가장하며 대답했다. “물론.” 그러자 리체스는 언제 풀이 죽었냐는 듯이 발그레한 표정으로 몸을 베베 꼬더니 조용히 대답했다. “그럼요... 음, 이건 어떨까요?” “말해봐.” “악세사리 하나에 한 번씩 키스해주기. 물론 제가 원하는 곳에.” 무슨 대단한 조건을 내세울까 속으로 살짝 긴장하고 있던 준상은 조금은 맥이 풀리는 듯한 기분까지 느끼며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려울 것 없지.” “아자!” 리체스는 쾌재를 올리며 얼른 작업을 시작하기 위해 연구실의 설비들을 불러내기 시작했다. 어린애처럼 들뜬 그녀의 표정에 준상은 어쩐지 조금 죄책감을 느꼈다. 평소에 스킨십에 얼마나 목이 말랐으면, 모처럼의 기회를 이런 식으로 써버릴까 싶었던 것이다. 준상은 그녀가 일하는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말했다. “난 일단 꽃으로 가서 팔찌를 시험해 보고 있을테니, 무슨 일이 있으면 불러.” “네! 금방 끝내고 저도 따라 갈게요. 어차피 최상층의 보안 장치도 만들어야 하니까요.” “그래.” 준상은 다시 신기루 꽃으로 돌아간 다음, 일단 고쳐진 분신 팔찌의 아이템 정보를 확인했다. 아이템정보 명칭 : 분신의 팔찌 레벨제한 : 없음 종류 : 팔찌 등급 : Rare+ 효과 : 1. 착용시 자동으로 사용자 인식.(현재: 박준상) 2. 인증 완료시 자동으로 보안, 은폐 기능 활성화. 3. 사용자의 분신 활성화 가능. Seed : 슬롯없음 설명 : 요정 여왕 리체스 르아테미시스가 만든 악세사리. 악령의 구슬이 지닌 힘을 이용해 실체화된 분신을 불러내는 것이 가능하다. 시험작에서 파악된 문제점을 해결한 발전형. 다만 분신의 조종을 위한 의식의 분리는 여전히 상당한 수준의 난이도를 자랑한다. 적응에 제법 시간이 걸리니 설령 입수하더라도 바로 쓰기는 어려울 것이다. 리체스가 말했던 대로 효과 설명에 보안 기능이 추가되었으며, 아이템 설명 역시 이전에 비해 내용이 늘어났다. “확실히, 쓰기 쉬운 편은 아니지.” 준상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악령의 구슬이 잠들어 있는 불룩한 부위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며 조용히 팔찌를 기동시켰다. “분신.” 그의 입에서 그 말이 흘러나오자, 팔찌가 반응하며 준상의 몸에서 옅은 빛이 흘러나왔다. 빛은 이내 준상의 눈앞에 하나의 형체로 뭉쳐지며 거울에 비쳐진 듯한 형상으로 변화했고, 천천히 색이 짙어지며 실체화되었다. 다행히 팔찌를 개량하면서 문제를 해결한 모양인지 이전처럼 알몸이거나 하지는 않았다. 준상은 가만히 눈을 감은 채 서 있는 자신의 분신을 잠시 살펴 보다가 별다른 문제점이 없음을 확인하고는 다시 팔찌에 손가락을 대기 짤막하게 명령어를 말했다. “기동.” 그러자 분신의 눈이 천천히 떠지며 지금껏 막혀 있던 감각의 통로가 개방되었다. “으음...” 이미 몇 번 시험을 해봤음에도 불구하고 이 갑작스런 정보의 홍수는 역시 간단히 적응이 되지 않는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전처럼 멀미를 일으키며 주저앉지는 않게 되었다는 것 정도지만, 이대로라면 아직 실전에서 사용하기는 아직 어려운 일이다. “후우...” 준상은 가볍게 심호흡을 하며 분신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다. 가볍게 움직이며 감각을 조율하고 있는데, 마침 위쪽의 컨테이너 하우스에서 간단하게 몸을 씻은 헤네스가 물기어린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말리며 전송 장치를 통해 아래쪽으로 내려왔다. 그녀는 똑같은 모습을 한 두 명의 준상이 서 있는 모습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지만, 이내 그것이 이전에 보았던 분신 팔찌의 효과라는 것을 깨달았다. “분신을 시험하는 중이신가요?” “맞아.” 일부러 분신을 통해 말했지만, 그녀는 곧바로 본체 옆으로 다가와 가만히 몸을 부축해 주었다. “알아보겠어?” 이번에 만들어진 분신은 신체는 물론이거니와 착용하고 있는 복장까지 완벽하게 재현되어 있기 때문에 준상 스스로도 혼동이 올 지경이었다. 하지만 헤네스는 준상의 물음에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네. 바로 알겠던데요.” 준상은 궁금증이 일어 다시 물었다. “어떻게?” 하지만 헤네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웃으며 대답했다. “그냥... 느낌이에요.” 어쩐지 좀 허무한 대답이긴 했지만, 준상은 어쩐지 논리적인 설명보다 그쪽이 더 납득하기 쉽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과연. 여자의 직감이란 건가.” “그럴지도 모르죠.” 그렇게 헤네스와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면서도 준상은 분신의 몸을 푸는 행위를 멈추지 않았고, 어느 정도 그것이 익숙해지자 이전과 마찬가지로 꽃의 내부를 달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의식의 분리가 쉽지 않은 탓에 발이 뒤엉키기도 했지만, 준상은 이내 한 가지 요령을 깨달았다. 사실 사람은 몸을 움직일 때 근육과 뼈의 작동을 일일이 떠올리지는 않는다. 한 걸음 앞으로 내딛을 때, 일일이 몸의 중심을 앞으로 기울이고, 축이 되는 발로 지탱한 상태에서 한 쪽 다리의 근육을 수축시켜 발을 들어올렸다가 다시 근육을 이완시켜 그것을 내려 놓고, 이렇게 내려놓은 발로 무게 중심을 옮기면서 몸을 앞으로 이동시키는 과정을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저, 앞으로 한 걸음 내딛을 뿐이다. 이것은 단순한 요령이지만, 익숙하지 않는 분신의 몸을 움직이는데 있어서 무엇보다도 큰 도움이 되는 깨달음이었다. 하지만 역시 가장 큰 문제는 감각의 혼재였다. 멀티뷰 같이 두 개의 화면으로 분리되어 보이는 것도 아니고, 두 개의 시각이 뒤섞인 상태로 발현되는 것을 알아보는 것만으로도 준상은 심력이 바닥날 지경이었다. “음... 역시 아무래도 이건 쉽지가 않은데.” 인상을 쓰며 그렇게 중얼거리자, 옆에서 그를 부축하고 있던 헤네스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묻는다. “괜찮으세요?” “그럭저럭. 그래도 이전보다는 좀 나아진 듯한 느낌이야.” 그렇게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꽃의 석문 하나가 열리며 리체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마법으로 주머니 하나를 들고 있었다. “주인님! 끝났어요.” “수고했다.” 준상은 리체스에게서 악세사리들을 받아들고는 그것을 착용하며 말했다. “리체스.” “네?” “혹시 이런 것 가능할까?” 준상은 그렇게 운을 뗀 다음, 멀티뷰 가능에 대해 설명했다. “흠...” 리체스는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말했다. “팔찌를 한 번 줘보시겠어요?” “뭐하게?” “아무래도 제가 직접 경험을 해보는 쪽이 나을 것 같아서요.” “알았다.” 준상은 분신을 해제한 다음 팔찌를 벗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그녀는 그것을 받아들고는 주위를 돌아보더니, 다시 말했다. “일단 위층으로 가죠. 이 몸 크기로는 착용하기가 어려우니.” “그러지.” 위층으로 올라가 요정 결계의 영향권 안에 들어가자 리체스는 성인 여성의 그것으로 몸의 크기가 변화했다. 그녀는 그제서야 마법으로 들고 있던 팔찌를 손에 착용하고는 팔찌를 기동시켰다. 인증과정이 끝나고 마침내 분신을 발현시키자, 눈을 감은 아름다운 요정 여왕의 분신이 모습을 드러낸다. “기동.” 그리고 마침내 짧은 한 마디 명령이 리체스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분신이 서서히 눈을 뜨기 시작했다. “읏!” 하지만 만년을 살아온 요정 여왕도 이것 만큼은 버티기 어려웠는지 곧바로 비틀거리기 시작한다. 준상과 헤네스는 얼른 그녀의 팔을 잡으며 부축했다. “괜찮아?” “으으...” 리체스는 얼른 손을 들어 팔찌에 가져가더니 분신을 해제시켰고, 그러고 난 뒤에야 겨우 숨을 몰아쉬며 비틀거리던 것을 멈추고 바로 설 수 있었다. “주인님이 대수롭지 않게 쓰시길래 별로 어렵지 않은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군요.” 리체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확실히 이대로는 사용에 문제가 있다. 기동과 운용 방식에 획기적인 진전이 있지 않고는 실전에서 쓰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나 다름없다고 봐도 틀림없을 것이다. “음... 이건 아무래도 좀 더 고민을 해봐야겠네요. 죄송해요. 이런 터무니 없는 물건을 시험도 안해보고 건네드려서.” “괜찮으니 신경 쓸 필요없다.” 사실 준상으로서는 이 분신이 제대로 기능하기만 하면 이번 퀘스트의 목표인 얀트훈센처럼 극한의 환경에 진출해야 할 경우 굳이 본신을 움직일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본격적인 활용은 좀 더 뒤로 미룰 수밖에 없을 듯 하다. 리체스는 곧바로 신기루 꽃 최상층에 보안 설비를 장치했다. “기본적인 것은 제 연구실 주위에 설치된 환상 정원과 동일해요. 차이가 있다면 더 좁은 공간이라는 정도겠지만, 이곳의 공간 왜곡 기술을 응용하면 그건 별 문제가 되지 않을 거에요.” 헤네스는 그 말을 듣고는 감탄한 표정으로 말했다. “정말 대단해요.” “헤헤, 뭘 이 정도 가지고.”‘ 어쨌거나 조금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보안 설비가 완성되자 준상은 일단 저택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두 반려와 함께 시녀들이 정성껏 준비한 식사를 하며 그날 하루 광전사들이 어떤 훈련을 했는지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수고했다.” 준상은 보고를 마친 블러드로드를 치하하고는 다시 질문했다. “모두 휴식중인가.” “네. 모두 붉은 공포의 위엄 아래 그 은혜를 만끽하는 중입니다.” “...” 새로운 선임 블러드로드가 된 이 도룬이라는 남자는 우직한 면이 마음에 들기는 하지만 때때로 이런 낯 간지러운 말을 서슴없이 하는 것이 문제였다. 하지만 준상은 그런 기분을 내색하지 않은 채, 다시 그에게 지시를 내렸다. “식사가 끝나는 대로, 정원으로 집결시켜라.” “허면...” 기대감에 부푼 블러드로드 도룬의 표정을 보며 준상은 짧게 말했다. “출진이다.” 00212 트롤러 ========================================================================= 도룬은 준상의 말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오오! 드디어!” 하지만 준상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호들갑 떨지 말고, 가서 집결시키도록.” “알겠습니다! 맡겨 주십시오!” “...” 흥분해서 뛰어가는 모습이 어쩐지 호들갑 떨지 말라는 주의사항을 전혀 신경쓰지 않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준상은 그냥 내버려 두었다. 어차피 준상의 저택은 이미 여러 곳에서 보내온 정보원들에 의해 은연중에 감시 당하는 중이었기 때문에 도룬이 호들갑을 떨든 그렇지 않든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준상이 느긋하게 식사를 마저 즐기고 있을 무렵, 도룬은 열심히 달려가 이벨류아 각지에 흩어져 숙박중인 광전사들에게 급히 사람을 보내 준상의 저택으로 집결할 것을 지시했다. “드디어 출진이다! 모두 짐 챙겨서 후딱 모여라!” 이런 식으로 고함을 고래고래 지르면서 말이다. 철저한 무투파이며 맹장형인 그는 계략 따윈 팽개치고 단숨에 광전사들을 몰고 들어가 때려부수는 전술이 전부인 사람이었다. 무력을 제외하고는 여러모로 선임 블러드로드가 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은 사람이었지만, 흥분하지만 않으면 그럭저럭 시키는 일은 잘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었다. 광전사들은 도룬의 입에서 흘러나온 지시에 따라 자신이 가지고 온 짐을 챙겨서 곧바로 준상의 저택으로 모여들기 시작했고, 그와 같은 움직임은 대번에 정보원들의 시야에 잡혔다. 특히나 정보원들을 긴장하게 만든 것은, 출진이라는 단어였다. 단순한 이동도 아니고, 어딘가 싸우러 간다는 말이 담긴 그 말을 고래고래 외치는 도룬을 보며, 정보원들은 기어코 그들이 우려하던 사태가 온 것이라 여길 수밖에 없었다. 힘이 쌓이면, 그것을 시험해 보고 싶은 것은 당연한 일. 기사 대전에서 터무니없는 힘을 과시하며 그 존재감을 델로드란 전역에 퍼뜨린 준상에 혼자서도 기사 두셋은 가볍게 때려 잡는다는 광전사들이 무려 천 명이나 모였으니 지켜보는 사람들로서는 금방이라도 불안하기 그지 없는 일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들려온 말이 출진이니 어찌 긴장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정보원들은 급히 비선을 움직여 이 사태를 상부에 보고하는 한편, 그들의 최종적인 목적이 무엇인지 파악하기 위해 주의 깊게 광전사들의 움직임을 살폈다. 항상 전쟁을 염두에 두고 움직이는 자들이라서 그런지 광전사들의 집결은 매우 빨랐다. 이벨류아 각지에 흩어져 숙박하던 이들이 자신의 짐을 모두 챙겨들고 준상의 저택으로 모인 것이 고작 삼십 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을 정도이니, 현대 사회와 같은 급박한 생활보다는 목가적이고 조금은 느긋한 생활이 신조인 이 세계의 사람들로서는 정말 흔치 않은 경우라 할 수 있었다. 도룬은 마침내 이벨류아에 체재 중이던 모든 광전사의 집결이 완료되자 발소리를 쿵쾅거리며 저택 안으로 달려들어와 그제서야 식사를 마치고 디저트를 즐기고 있던 준상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보고했다. “블러드로드 도룬 외 1027명, 지금 막 집결 완료했습니다.” 우렁거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외치는 도룬의 모습을 보며 준상은 조용히 대답했다. “수고했다. 금방 나갈테니 대기하도록.” “알겠습니다!” 도룬이 급히 몸을 일으키며 밖으로 달려 나가자 준상은 마시던 차를 마저 비우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고, 헤네스가 급히 일어나 그의 의복을 정돈해 주었다. 준상은 준비가 끝나자, 헤네스의 손을 잡고 한쪽 어깨에는 리체스를 앉혀 둔 상태로 복도를 따라 내려가 저택 입구로 나아갔다. 그가 모습을 드러내자 기다리고 있던 광전사들이 일제히 가슴을 두드리며 함성을 지른다. “우오오오!” “오오오!” 광전사들이 출진에 즈음하여 지르는 특유의 함성이 저택 안팎에 울려 퍼지자, 정보원들은 앞서 도룬의 말이 거짓이 아니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고, 그 사실은 곧바로 다시 상부로 전파되었다. 준상은 저택 입구에 선 채 가만히 그 함성을 듣고 있다가, 이내 손을 들어 그들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마침내, 광전사들이 조용해지자 기대에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도룬을 마주 보았다. 도룬은 수백년을 기다려온 역사적인 대장정을 눈앞에 두고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이곳 이벨류아에서 북방의 얀트훈센까지 대륙을 종단하는 기나긴 여정 동안 무슨 일이 벌어질지를 생각하면 안 그래도 끓어올라 주체하기 힘든 피가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준상은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조용히 다시 지시를 내렸다. “조용히 한 줄로 내 뒤를 따라 오도록.” 조용히? 설마 처음은 잠입으로 막을 열 셈인가. 그렇구나. 붉은 공포는 우선 이 이벨류아부터 완전히 장악하기로 마음 먹은 것이로구나! 도룬은 그렇게 멋대로 판단을 내리고는 집결한 광전사들로 하여금 어느새 저택 안으로 들어가 버린 준상의 뒤를 급히 따르도록 했다. 도룬의 지시를 받은 광전사들은 각자 자신의 짐을 잔뜩 짊어진 채로 준상이 사라진 저택 입구로 뛰어들었다. 준상은 저택 안쪽의 홀로 들어서자, 그 자리에 돌로 된 커다란 문을 불러내더니 그것을 열고는 광전사들에게 말했다. 갑자기 커다란 석문이 나타난 것도 믿기 어려운 현상인데, 그 문에 준상이 손을 대자 테두리만 남기고 문 자체가 신기루처럼 사라지며 반투명한 장막이 드리워진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몰라 눈이 휘둥그레진 광전사들을 향해, 준상은 그 장막 안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들어가라.” “아, 알겠습니다.” 광전사들은 준상이 다른 세계의 왕족이라 여러 가지 신비한 능력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 불안한 와중에도 그가 가리키는 대로 문 안쪽으로 거침없이 뛰어 들었다. 그러자, 그들의 눈앞에 지금껏 경험해 본적 없는 신비한 곳이 모습을 드러냈다. 광전사들은 이내 자신들이 마치 투명한 유리로 지어진 듯한 아름다운 원뿔형의 구조물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바닥 밑으로는 아마도 이벨류아가 아닐까 싶은 커다란 성곽 도시의 전경이 자리 잡고 있었으며, 벽으로는 석양에 물들어가는 아름다운 하늘과 고요하게 흘러가는 구름들의 물결이 마치 코앞에서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드러나 있었다. 그들이 서 있는 바닥면의 정 중앙에는 위층으로 올라가기 위한 용도로 보이는 이중 나선의 계단이 자리 잡고 있었으며, 바깥쪽의 벽면에도 다시 나선형의 계단이 위쪽을 향해 설치되어 있었다. 잠시 멍한 표정으로 이 모든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광전사들은 이내 등 뒤에서 둔탁한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부딪히는 소리를 듣고는 화들짝 놀라 자신들이 통과해 온 입구에서 물러났다. “들어왔으면 입구에서 물러서세요! 아직 들어올 사람이 많아요!” “아, 알겠습니다!” 광전사들은 뒤따라 들어온 헤네스의 외침에 따라 허겁지겁 문에서 물러나 정렬했다. 그들 가운데는 처음 헤네스가 그랬던 것처럼 고소 공포증의 증세를 보이며 바닥에 주저앉는 자들도 제법 되었지만, 준상으로부터 약간의 권한을 받은 헤네스가 얼른 꽃 내부의 설정을 조정해 바닥에 비치는 풍경을 바꾸자 그제서야 놀란 가슴을 부여잡으며 몸을 일으켰다. 천 명의 광전사들은 꾸역 꾸역 밀려들어와 신기루 꽃의 아래쪽 광장을 이내 가득 채웠고, 블러드로드들을 들여보낸 준상이 마지막으로 들어옴과 동시에 입구가 닫혔다. 준상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광전사들을 향해 말했다. “앞으로 이곳이 너희들의 주둔지가 될 것이다. 벽면을 따라 올라가면 문이 있으니, 그 안에 짐을 풀면 된다. 지금 즉시 가서 각자의 짐을 정리하도록.” “알겠습니다!” 준상의 지시에 따라 블러드로드들은 광전사들을 이끌고 벽면의 계단을 따라 올라가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어젖히자, 예상외로 상당히 넓은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에 그들은 다시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 넓이를 가늠해서 광전사들의 분산 배치가 이루어지는 동안 준상은 도룬을 비롯한 선임들을 불러 현재 광전사들이 지니고 있는 물자를 파악하도록 지시했다. “식량과 무기, 의복, 침구 등의 수량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보고하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준상은 물자를 파악하기 위해 급히 달려가는 블러드로드들을 바라보다가 리체스를 향해 입을 열었다. “리체스.” “네.” “전령 역할을 맡길 만한 요정 기사들이 필요한데, 이곳에 불러들일 수 있을까.” 준상이 밖에 나가 있는 동안, 그의 지시를 이곳의 광전사들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통신 수단이 필요한데, 역시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은 요정들을 이곳에 몇 명 정도 상주시킨 후 그들을 전령으로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리체스는 준상의 의도를 바로 이해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없어요. 바로 데리고 올게요.” “고맙다.” “별 말씀을.” 리체스가 자신의 연구실로 이어지는 석문을 통해 사라지자, 준상은 자신의 옆에서 대기중이던 도룬에게 말했다. “나는 다시 이벨류아에 잠시 다녀오겠다.” “알겠습니다.” 도룬은 뭔가 예상과 다르다는 느낌에 조금 당황한 상태였지만 얼른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고, 준상은 그를 일별한 뒤 헤네스를 데리고 다시 이벨류아로 돌아갔다. “바로 출발하는 것 아니었나요?” 헤네스의 말에 준상은 고개를 저었다. “당분간 바빠질테니, 인사라도 하고 가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 “아...” 별 것 아닌 배려였지만, 헤네스는 그가 자신의 일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고마워요.” “뭘 이런 걸 가지고.” 준상은 석문을 빠져 나오자 저택에 있는 시종과 시녀들에게 자신들이 잠시 자리를 비울 것임을 알린 다음, 랩터를 꺼내 브레아 가문의 저택을 향해 이동했다. 차량이 당도하자 입구로부터 소식을 전해 받은 브레아 가문의 사람들은 급히 달려나와 그들을 맞이했다. 근방의 귀족들과 가문의 방계들을 방문하고 돌아온 제스터는 찰싹 붙어 있는 준상과 헤네스의 모습을 보고 살짝 불만스런 표정을 지었지만, 부인인 유라스가 옆구리를 꼬집자 마지못한 듯이 막내딸 내외의 인사를 받아들였다. 간단하게 인사를 마친 뒤, 응접실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기가 무섭게 준상은 곧바로 용건을 말했다. “잠시 이곳을 떠나 있게 될 것 같습니다.” 브레아 가문의 사람들 역시 광전사들이 출진 운운하며 그의 저택으로 몰려간 일들을 이미 전해들은 상태였기 때문에 조금 긴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디로 가는지 귀띔해줄 수 있겠습니까.” 젤란의 말에 준상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답했다. “북쪽으로 갑니다.” “북쪽?” 준상의 말에 젤란은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그동안 그가 정보를 모아왔던 지명 한 곳을 떠올릴 수 있었다. “설마... 얀트훈센을 찾아가는 겁니까?” “맞습니다.” “하지만, 그곳은...” 얼어붙은 동토가 아닙니까, 라는 말이 나오려는 것을 젤란은 꾹 눌러 삼켰다. 그만한 대비도 없이 움직이겠나 싶어서였다. “역시, 그 정령의 문이라는 것을 이용하는 것인지요.” 유라스의 조용한 물음에 준상은 바로 대답했다. “맞습니다. 그러니 생각보다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군요.” “말씀하셨던 물목은 떠나기 전에 꺼내 놓고 가도록 하겠습니다.” “신경 써주셔서 고마워요.” “별 말씀을.” 준상은 헤네스로 하여금 가족들과 인사를 나누도록 한 뒤, 자리에서 일어나 적당한 방에 포목을 가득 담은 컨테이너를 꺼내놓았다. 젤란은 커다란 철 상자에 담긴 각양각색의 아름다운 천들을 보고 감탄을 터뜨렸다. “전에도 봤지만, 정말 보면 볼수록 대단합니다.” “대단치 않습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대금은 말씀대로 현물로 준비해 두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젤란은 준상을 안채로 데리고 간 다음, 준비해 두었던 상자를 그에게 건네주었다. 준상이 열어 보니, 그 안에는 금화가 가득 들어 있었다. 내용물을 확인한 준상은 캐비닛을 꺼내 그 안에 상자를 보관했다. “좋은 거래, 감사합니다.” “별 말씀을. 저희야 말로 덕분에 한시름 놓았습니다.” 이번에 준상이 가져온 포목들은 수도의 귀족들에게 비싸게 팔려나갈 예정이었는데, 이것은 기사대전 당시 풀어놓은 물품들이 충분히 그들의 구미를 자극하고 있다는 증거라 할 수 있었다. 거래를 마친 준상은 잠시 젤란과 앞으로의 일에 대해 얘기를 나누다가 응접실로 돌아왔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조심하세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작별 인사를 나눈 준상은 곧바로 랩터를 타고 저택으로 돌아와 그곳에서 석문을 열고 신기루 꽃으로 귀환했다. 이제나 저제나 하며 동향을 주시하던 정보원들은 결국 밤을 꼴딱 새고 나서야 뭔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그, 글쎄요.” 그들은 조금 더 시간이 지난 뒤에야 출진한다는 말을 떠벌이며 집결한 광전사들은 물론이고 저택의 주인인 준상마저도 어느새인가 종적을 감추어 버렸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다른 세계로 가버린 것 뿐이라고 생각하면 그뿐일 수도 있었지만, 그들은 이내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설마... 이동 가능한 인원에 제한이 있었던 것이 아니란 말인가!” “그런!”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벨류아나 대륙 각지에 나타났던 이방인 들이 이번에 사라진 광전사들처럼 대규모로 준상의 뒤를 따라 모습을 드러낼 수도 있다는 뜻이 된다. 단 한 명 만으로도 버거운 판에, 그와 같은 자들이 수백 수천이나 넘어온다면 과연 그것을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정보원들은 그와 같은 사실을 깨닫자 이내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시고 말았고, 그러한 내용을 전달받은 델로드란 왕실과 수도의 귀족들 역시 반응은 그리 다르지 않았다. “이 일을 어쩌면 좋겠습니까.” “그, 글쎄요.” 우왕좌왕하던 그들은 다시 오래 지나지 않아 하나의 소식을 접하자 또다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뭐? 에슈탈렌의 사절단? 그들이 왜 갑자기 우리 델로드란을 방문한단 말인가!” “아닙니다. 그들의 목적은 델로드란이 아닙니다.” “그게 무슨 소린가? 그럼 달리 목적이 있다는 얘긴가?” “그렇습니다. 전해 듣기로는... 이벨류아의 그 이방인이 목적인 모양입니다.” “뭣이! 그게 사실인가?” “그 뿐만이 아닙니다. 확실치는 않지만... 이번 사절단에 에슈탈렌의 왕녀가 포함되어 있다고...” “그럴수가!” 00213 트롤러 ========================================================================= 하지만 이 모든 혼란의 이유를 초래한 장본인인 준상은 에슈탈렌에서 사절단 같은 것이 찾아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천상의 다리 퀘스트 때 에슈탈렌이라는 국가에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이번 사절단의 주축인 왕녀에 대한 기억은 준상의 머릿속에 남아 있지도 않았다. 말 한 마디 제대로 나눠보지도 못한 인물에 대한 걸 일일이 기억할 정도로 준상은 한가한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준상은 브레아 가문으로부터 자신의 저택으로 돌아오기가 무섭게 신기루 꽃으로 귀환했다. 광전사들은 여전히 구획을 나누어 숙소를 정돈하고 물자를 분류하는 작업에 정신이 없었고, 대신 얼마 지나지 않아 리체스가 전령 역할을 할 요정 기사들과 함께 돌아왔다. “세 명 정도 데리고 왔어요. 얘들아, 인사드려.” 리체스의 말에 요정 기사 세 명이 준상을 흘깃거리며 조심스럽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리엔이라고 합니다.” “엔더입니다.” “라일린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리엔은 살짝 은빛이 감도는 붉은 머리카락을 지닌 귀여운 인상이었고, 엔더는 조금 무뚝뚝해 보이는 푸른 머릿결의 중성적인 외모였으며, 마지막으로 라일린은 웃는 얼굴이 귀여운 옅은 금발의 요정이었다. 준상은 이 개성 넘치는 세 요정 기사들의 화려한 머리색을 보는 순간 신호등이라는 단어를 연상하고 말았다. “잘 왔다.” 그렇게 짧게 대답한 준상은 리체스에게 말했다. “적당한 곳에 거처를 만들어 주도록 해.” “걱정 마세요.” 리체스의 대답을 들은 준상은 자신의 얼굴을 흘깃거리며 살짝 볼을 붉히고 있는 세 요정 기사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얘기는 들었겠지만, 너희들은 앞으로 내 지시를 저기 보이는 광전사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대우는 요정계의 보좌관들과 동급이 될 것이고, 그 외에 이곳의 시설들은 자유롭게 이용해도 좋다. 질문 있나.” 그러자 곧바로 리엔이 손을 번쩍 들고 말했다. “하나만 물어봐도 되나요?” “얼마든지.” 리엔은 리체스를 흘깃 보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여왕님이랑 하루에 뽀뽀 몇 번이나 하세요?” “...” 뜬금없는 그 질문에 준상은 물론이거니와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헤네스와 리체스마저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의외의 일격으로 인해 잠시 정신이 멍해졌던 준상은 가볍게 헛기침을 하며 대답했다. “크흠. 그 질문은 듣지 못한 것으로 알겠다. 달리 이곳에서 생활하면서 궁금한 점이 있다면 리체스에게 묻도록.” “칫!” 리엔은 물론이고 미소를 짓고 있던 라일린과 냉정한 표정을 짓고 있던 엔더마저도 아쉽다는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준상은 선임 블러드로드 도룬을 불러 요정 기사들을 소개시켜 주었다. “앞으로 내가 밖에 나가 있는 동안, 지시할 사항이 있으면 이 아이들을 통할 테니 그리 알도록.” “알겠습니다.” 도룬은 귀여운 세 요정 기사들을 흘깃거리다가 준상의 시선을 느끼고는 얼른 부동자세를 취했다. “물자의 파악은 끝났나?” “그게... 아직 파악하는 중입니다.” 준상은 얼굴을 찌푸렸다. “현재 무엇이 얼마나 있는지, 또 무엇이 얼마나 부족한지 알아야 내가 그것을 채워 줄 수 있다.” “죄송합니다. 빨리 파악하도록 하겠습니다!” 부동자세를 취하며 외치는 도룬을 보며 준상은 다시 말했다. “나는 이대로 정령의 문을 이용해 얀트훈센 근처로 직행할 생각이다. 너희들은 이곳에서 머물며 내가 부르면 언제라도 신속하게 출동할 수 있도록 준비를 갖춰 둬야만 한다. 무슨 말인지 알겠나.” “준비태세에 만전을 기하도록 하겠습니다. 맡겨 주십시오!” “좋아. 그럼 이만 가봐도 좋다.” 도룬이 가슴을 두드리는 것으로 예를 표한 뒤 물러나자, 준상은 헤네스와 리체스를 향해 말했다. “그럼, 갈까.” “네!” 준상은 헤네스의 손을 잡고 리체스를 어깨 위에 앉혀둔 채로 연구실로 통하는 석문을 통과해 요정계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이전에 파악한 대로 얀트훈센에서 가장 가까운 정령의 문을 이용해 곧바로 북방의 대지 위에 발을 디뎠다. “음...” 제법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을 통과하기가 무섭게 거친 바람이 피부에 와닿는다. “방어복을 착용하는 것이 좋겠어.” “네.” 헤네스는 준상의 말에 따라 손목에 채워진 팔찌를 이용해 그 자리에서 방어복을 착용했다. 시드를 이용해 냉기 저항의 수치를 맞춰놓긴 했지만, 차고 거친 바람에 장시간 노출 되는 건 역시 그리 몸에 좋은 행동이 아니었다. 준상은 헤네스가 방어복을 착용하자, 캐비닛에서 오리털 파카를 꺼내 그녀의 몸에 둘러 주었다. “준상씨는요?” 헤네스의 말에 준상은 바로 대답했다. “나도 입을테니 걱정마.” “네.” 준상은 그녀에게 파카를 입혀준 다음, 자신 역시 손목에 채워진 팔찌를 운용해 방어복을 착용한 다음 마찬가지로 두터운 파카를 챙겨 입었다. 그러자 지켜보고 있던 리체스가 얼른 준상의 옷깃 속으로 파고 든다. “으와, 무슨 바람이 이렇게 세요. 자칫하면 그대로 날아가 버리겠네.” “엄살은.” “헤헤...” 아무리 바람이 세다 한들, 천하의 요정 여왕이 날려가서야 말이 되겠는가. 다만 그녀는 준상의 품으로 파고들 명분이 필요했을 뿐이다. 바람 한 점 새어 들어올 틈이 없을 정도로 꼼꼼하게 몸을 감싼 준상은 곧바로 유령말을 소환해 올라탄 채 북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산들바람과 마파람을 주위에 둘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불어오는 바람의 강도는 점점 더 매서워졌다. 아직도 상당한 거리가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라니. “역시 보통의 정령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인가 보군.” 준상이 그렇게 중얼거리자, 옷깃 속에 파고들어가 있던 리체스가 고개를 빠꼼히 내밀며 대답했다. “보통의 정령과 구분하기 위해 대정령이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그 정도 되면 사실상 하나의 자연 현상 바로 그 자체나 다름없어요.” “그렇군.” 아무래도 너무 쉽게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서 달리 방도가 있는 것도 아니다. 조금 더 달리자 차가운 바람에 섞여 눈발이 날아들기 시작했고, 시간이 지나자 우박과 같은 형태로 변해 그들의 몸을 때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쌀알 같은 것이 부딪히는 느낌이었지만, 나중에는 손톱 만한 얼음덩어리가 마치 탄환처럼 그들의 몸에 맹렬하게 날아들었다. 주위에는 이미 나무는커녕 우박을 피할 바위 덩어리 같은 것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 만약 광전사들을 이끌고 이곳을 진주했다면, 그들은 채 삼십분도 버티지 못하고 얼음 덩어리에 맞아 피투성이가 되었을 것이 분명했다. 물론 그 이전에 이 매서운 찬바람으로부터 체온을 유지하는 것조차 쉽지 않겠지만 말이다. 잠시 더 앞으로 나아가던 준상은 바람과 우박의 저항으로 말미암아 유령말이 비틀거리자 이대로는 무리라는 판단이 섰다. “아무래도 안되겠군. 일단 귀환한다.” “네.” 준상은 곧바로 석문을 열고 신기루 꽃으로 귀환했다. 꽃 안으로 들어온 준상과 헤네스는 방어복 이곳저곳에 달라붙은 얼음 조각을 떼어냈다. 수없이 많은 얼음조각에 찢겨진 파카는 이미 넝마가 되어 버린지 오래였다. 그들이 꽃 안으로 들어오자 최하층 주위를 돌며 수련을 하고 있던 광전사들이 화들짝 놀라며 다가왔다.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검은 색의 라이더 슈츠 같은 옷을 차려 입고 헬멧까지 쓰고 있는 그들의 모습은 이전에 광전사들이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이었고, 얼굴마저 바이저로 가려진 상황이라 그들이 준상과 헤네스를 알아보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후아... 무슨 바람이...” 하지만 옷깃 안에서 아름다운 무지개빛 머리카락을 지닌 리체스가 고개를 불쑥 내밀고, 다시 준상과 헤네스가 헬멧을 벗자 광전사들은 화들짝 놀라며 얼른 머리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불청객인줄 알고 그만.” “됐으니 그만 물러나라.” “넷!” 준상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전해지자 곧바로 블러드로드 도룬이 달려와 파악된 물자의 양으로 서류로 작성해 보고했다. 물론 준상은 그들의 문자를 알아볼 수 없었기 때문에, 대신 헤네스에게 서류를 넘긴 뒤 도룬을 향해 말했다. “수고했다. 특별히 필요한 건 없나?” 그러자 도룬은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대답했다. “물이 부족합니다.” 천 명이나 되는 인원이 함께 머물게 되는 셈이니 하루에 소비되는 물자의 양도 만만치 않았다. 그 중에서도 물의 부족은 특히 심각한 문제라 할 수 있었지만, 그에 대한 해결책은 이 신기루 꽃 안에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준상은 신기루 꽃의 기능을 몇 가지 조절하고는 다시 말했다. “그것이라면 문제 없다. 먹을 물과 씻을 물, 그리고 용변을 처리할 방법에 대해서는 요정 기사들에게 일러둘 테니 그녀들에게 설명을 듣도록.” “알겠습니다.” 준상은 다시 요정 기사들을 부른 후, 움직이는 계단을 통해 최상층으로 향하면서 그들에게 신기루 꽃의 각 구획에 설정된 기능들을 활성화시키는 방법을 설명해 주었다. 신기루 꽃의 각 구획에는 사용자가 임의로 필요에 따라 기능을 추가하여 실내를 꾸미는 기능이 설정되어 있었는데, 부엌이나 화장실 같은 공간도 그런 기능으로 구현이 가능했다. 간략하게 요정 기사들에게 설명을 마친 준상은 두 반려와 함께 최상층에 도착한 뒤 우선 뜨거운 물로 몸을 씻었다. 방어복과 파카를 갖춰 입고, 거기에 다시 시드를 통해 냉기 저항을 맞추었음에도 불구하고 피부로 느껴지는 차가운 감각까지 온전히 차단할 수는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동상을 입는다거나 하지만 않았지만, 반사적으로 몸이 움츠러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뜨거운 물로 몸에 남은 차가운 감각들을 깨끗하게 씻어낸 준상은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며 이 터무니없는 눈보라를 어떻게 헤치고 나가야 할지 고민했다. 냉기에 대해 빈틈없는 준비를 갖춘 준상이 이 정도로 곤란한 지경에 빠질 정도라면, 일반적으로는 사실상 이 눈보라를 빠져 나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뜻이 된다. 하지만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라면 퀘스트 자체가 성립하지 않을 터. 무언가 달리 이 눈보라를 헤치고 나아갈 해결책이 따로 있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준상은 다시 퀘스트 정보를 곰곰이 살펴 보았다. 에픽 퀘스트 – 귀향 4. 당신은 자신이 예언의 주인공임을 훌륭하게 입증했습니다. 이제 블러드로드들은 당신이 그들을 이끌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주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얀트훈센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얻은 후, 미쳐버린 대정령이 머물고 있는 광전사의 고향으로 향하십시오. -> 미완료. 얀트훈센에 대한 자세한 정보. 이것이 아마도 열쇠가 아닐까 싶다. 본래대로라면 준상은 이런 식으로 막무가내로 퀘스트를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퀘스트 정보를 받음과 동시에 새로운 장소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단계를 밟아 나가야 했다. 만약 이 눈보라를 헤치고 나갈 실마리가 있다면, 그것은 준상이 퀘스트를 받고 전송된 지점 근처에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예를 들어, 정령의 문 관련 에픽 퀘스트를 수행할 때 특별히 정령사로 유명한 아겔라한의 숲으로 이동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쯧...” 하지만 이렇게 중간 과정을 전부 건너뛰고 멋대로 퀘스트를 진행해 버리는 상황에서는 열쇠가 되는 단서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추측할 수가 없다. 물론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준상은 지금까지 퀘스트가 예비해 놓은 정석적인 진행을 그대로 따른 적이 거의 없었다. 때문에 매번 다소 곤란한 지경에 처하기는 했지만, 그는 언제나 그런 고정관념을 때려 부수며 더 큰 성과를 이룩해 왔다. 이번이라고 다를 이유가 있겠는가. “헤네스, 리체스.” “네.” “피곤할 테니 쉬고 있어라.” “준상씨는요?” 설마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두 반려를 향해 준상은 조용히 대답했다. “잠시 산책을 좀 다녀와야겠다.” 00214 트롤러 ========================================================================= 산책. 그 말이 의미하는 바를 이 상황에서 알아 듣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까. 준상이 몸을 일으키고 나갈 준비를 하자, 그 모습을 바라보던 헤네스가 말했다. “여왕님과 함께 가세요.” “뭐?” “혼자서는 무슨 일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잖아요. 그러니까 함께 가세요.” “...” 물론 필요한 상황이 되면 당연히 부르겠지만, 그런 것조차 불가능한 상황이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는 일. 자신은 이런 상황에서 큰 도움이 되지 못하니, 리체스라도 같이 보내려는 것이다. 준상은 괜찮다고 하려다가, 굳은 그녀의 표정을 보고는 별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그렇게 하지.” 그제서야 헤네스는 표정을 풀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럼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그래.” 그렇게 준상과의 대화를 마친 헤네스는 리체스의 손을 잡으며 다시 말했다. “부탁드려요.” “걱정마. 나 누군지 몰라? 전대긴 하지만 요정 여왕이라구.” 과장된 몸짓으로 그렇게 말하는 리체스를 보며 헤네스는 미소를 지었다. “알죠. 그러니까 이렇게 부탁하는 거잖아요.” “헤헤...” 준상은 최상층에 헤네스를 남겨둔 채 리체스와 함께 전송장치를 타고 아래로 내려왔다. 그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자, 우르르 몰려 다니며 세 요정 기사들에게 꽃의 기능에 대해 배우고 있던 광전사들이 화들짝 놀라며 달려온다. 준상은 그 모습에서 어쩐지 가장 몸집이 큰 강아지의 한 종류인 마스티프를 떠올리고 말았다. “나가십니까.” 자기들도 데려가 주지 않으려나 싶어 눈빛을 빛내는 모습이 정말 영락없다. 준상은 말없이 그들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곧바로 석문을 열어 다시 차가운 북풍이 몰아치는 대지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리체스는 바깥으로 나오자 일찌감치 그의 옷깃속으로 파고든 상태. “조금 격하게 움직일테니, 꽉 잡아라.” “네!” 역시 혼자 올 걸 그랬나 싶었지만, 리체스는 그의 시선이 닿지 않는 목덜미의 옷깃 속에 모습을 숨긴 채 무엇을 보여줄지 기대되는지 눈빛을 빛내고 있었다. “후우...” 준상이 가볍게 심호흡을 하자, 그의 입에서 뿜어져 나온 입김이 그대로 얼어붙으며 눈가루처럼 날려간다. 두 다리로 굳건하게 버티고 선 상태지만, 준상의 몸은 지금 이 순간에도 바람에 밀려 조금씩 미끄러지고 있었다. 그나마 준상이니 이 정도지, 다른 사람이라면 바람에 밀려 넘어지고 구르기 바빴을 것이다. 실제로 헤네스만 하더라도 방금 전 꽃으로 귀환할 때는 바람에 날려갈까봐 준상의 등에 찰싹 붙어 있어야만 했고, 그런 이유 때문에 그녀는 산책을 간다는 준상의 뒤를 차마 따르지 못했다. 준상은 곧바로 데안달라스의 파발꾼으로 콤보 카드를 바꾸었다. 질주, 도약, 순간가속, 순간가속. 이렇게 네 장의 카드로 구성되는 파발꾼 콤보는 전투보다 이동을 위해 차별화된 특별한 콤보 카드다. 카드 슬롯에 새로운 카드가 장착되자, 준상은 두 다리를 움직이며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곧바로 강한 바람이 그의 몸을 짓누르며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도록 방해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그럭저럭 버틸만 했지만, 달리는 속도가 빨라질수록 압력은 점점 더 강해졌고 나중에는 달리기는커녕 두 발로 딛고 서있는 것조차 쉽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쯧...” 너무 쉽게 생각했다. 준상은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혀를 찼다. 이전에 불의 정령과의 싸움을 생각하고 무작정 뚫고 나가려고 했지만, 단순한 정령과 대정령은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입증하듯이 바람은 앙탈을 부리며 자꾸만 그의 몸을 밀어내고 있었다. “우으으... 에잇!” 준상의 옷깃 속에 숨어있던 리체스 또한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던지, 방어막을 펼쳐 그들의 몸을 바람으로부터 보호했다. 하지만 그녀가 모처럼 만들어낸 방어막은 잠시 버티는가 싶더니, 극악한 수준으로 몰아치는 바람과 그 바람에 의해 날려 보내진 탄환과도 같은 얼음 덩어리들에 의해 이내 박살나 버리고 말았다. “마, 말도 안 돼.” 자신의 방어막이 채 몇 분도 버티지 못하고 박살나 버리는 모습에, 리체스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얘는 도대체 뭘 먹었길래 이렇게 세진거야. 에이씨...” 투덜거리며 뭔가 다른 방법을 떠올리기 위해 생각에 잠긴 리체스의 혼잣말을 듣던 준상은 카드를 무투가로 바꾼 다음 숄더 차지를 실행했다. 쫘아악! 그러자 마치 비단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준상의 몸이 탄환처럼 바람의 결을 비집고 앞으로 나아갔다. 질주 등의 방법으로 추진력을 얻지 못한 숄더 차지로는 채 몇 걸음 정도 전진하는 것이 고작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얻은 것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것이었나.” 준상은 혹시나 하고 사용해 보았던 숄더 차지가 발동되는 와중에 눈앞에서 찢겨지고 갈라지는 바람을 보고는 그제서야 이 터무니없는 상황이 어째서 벌어지는 것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리체스.” “네.” “고맙다.” “네?” 갑자기 무슨 소린가 싶어 리체스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준상이 뜬금없이 그녀에게 감사의 뜻을 표한 것은 다름이 아니었다. 그녀가 해준 말 속에 이 상황을 헤치고 나아갈 단서가 숨어 있었기 때문이다. 리체스는 이렇게 말 했었다. 대정령쯤 되는 존재라면, 그 자체로 하나의 자연 현상이나 다름 없다고. 준상은 지금까지 눈앞에서 불어 닥치는 이 터무니없는 눈보라를 얀트훈센이라는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한 단순한 장애물 정도로 인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이 눈보라라는 자연 현상 바로 그 자체가 지금 준상이 목표로 삼고 있는 얼음의 대정령이 지닌 실체 가운데 일부였던 것이다. 적이 뻔히 눈앞을 가로 막고 있는데,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고 단순히 밀치고 나아가려고만 했으니 그것이 통할 리가 있겠는가. “후우우우...” 준상은 숨을 길게 내뿜으며 어느 새인가 숄더 차지로 나아간 만큼 다시 그의 몸을 밀어내고 있는 강력한 바람을 바라보며 인벤토리에서 무기 하나를 꺼냈다. 두껍고 검붉은 검신을 가진, 불길한 형상의 그 무기가 지닌 이름은 어나이얼레이터. 모든 것을 베어버리고, 종국에는 자신마저 베어버림으로써 종국에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멸절시킨다는 마물이 지금 준상의 손에 쥐어졌다. “...” 어나이얼레이터의 손잡이를 움켜쥐자, 그것을 쥔 손으로부터 피가 들끓어 기화하는 듯한 어떤 감각이 그의 신경을 타고 올라온다. “주인님.” 리체스는 그의 손에 저 불길한 마물이 쥐어지고, 그의 숨결이 점차 격하게 거칠어지는 것을 느끼고는 불안한 표정을 지었지만, 방해하지 않고 그저 조용히 그의 옷깃 속에 몸을 웅크렸다. “크으...” 준상은 절멸의 이름을 지닌 마검이 주는 핏빛 쾌락에 잠시 몸을 부르르 떨다가 천천히 그것을 양손으로 움켜잡은 채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이 검붉은 마물의 존재감에 불안을 느낀 것일까. 바람은 거칠게 몰아치며 몸을 곧게 편 준상을 날려버리게 위해 용트림을 시작했다. 콰아아아! 이전보다도 몇 배는 강력해 보이는 바람이 밀려오는 순간, 준상의 눈에서 붉은 빛이 번쩍 뿜어져 나오며 그의 손에 쥐어져 있던 마검이 허공을 내리 그었다. 휘날려 나부끼는 기다란 천조각처럼 바람은 내리쳐지는 어나이얼레이터의 검신을 휘감으며 그 움직임을 방해하려 했다. 하지만 그렇게 소용돌이 치며 타래지어 휘감긴 바람의 힘에 검붉게 빛나는 절멸의 마물은 잠시 주춤하는 기색을 보였지만, 이내 가차없이 그 모든 방해물을 갈라버렸다. 콰아아악! 순간 준상의 몸이 비틀거렸다. 하지만 그것은 어떤 타격을 입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그의 몸을 밀쳐 내기 위해 불어 닥치던 거대한 바람이 일순간 마검의 힘에 의해 잘려 흩어지자 잠시 중심을 잃은 것 뿐이다. 마검에 의해 맥이 끊긴 바람은 잠시 주춤하는가 싶더니, 이내 상처 입은 맹수처럼 잔뜩 성을 내며 다시금 준상의 몸을 향해 뿜어져 나왔다. 그러나, 이번에도 바람은 준상의 두 손에 들려진 마검에 의해 갈가리 찢겨지고 말았다. “후우우...” 강렬한 대정령의 숨결을 단숨에 마검으로 찢어발긴 준상은, 바람이 약해진 틈을 타 천천히 걸음을 앞으로 내딛었다. 그의 옷깃 속에 몸을 웅크리고 있던 리체스는 준상이 벌이고 있는 이 터무니없는 행동에 숨이 막혀오기 시작했다. 비록 마검의 힘을 빌리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것은 인간에게 허락된 행동이 아니다. 바람을 찢어발기다니. 이것이 도대체 인간이 지닐 수 있는 힘이란 말인가. 요정계에서라면 자신도 이 정도의 일이 불가능한 건 아니다. 허나 그것은 그녀가 만 년을 살아오며 얻은 지식과 힘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리체스는 자신도 모르게 준상의 기세와 힘과 박력에 압도되었다. 자신이 살아온 세월의 백 분의 일도 안 되는 나이를 지닌 한 남자의 모습에, 그녀는 지금 이 순간 압도되고 있는 것이다. “후우우우우...” 준상은 길게 숨을 내뿜으며 전진을 계속했다. 그의 몸에서는 어느 새인가 짙은 아지랑이가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끝없이 몰아치는 바람을 가르며 앞으로 계속해서 나아가는 일은, 그가 지금까지 치러왔던 그 어떤 전투와 비교해도 우열을 따지기 힘들 만큼 고된 여정이었기 때문이다. 리체스는 준상의 몸이 과부하 현상을 일으키기 시작하자, 급히 마법을 사용해 그의 몸의 체력을 재충전시키고 피로를 회복시켰다. 준상은 몸속을 파고드는 청량한 마법의 기운을 느끼자 조용히 중얼거리듯 입을 열었다. “고맙다.” “별 말씀을요.” 리체스의 마법이 더해지자 이제 대정령의 숨결은 준상의 앞을 더 이상 가로막지 못했다. 자신을 향해 몰아치는 바람을 거침 없이 베어버리며 전진하기를 얼마나 했을까. 준상은 문득 마검으로 인해 붉게 물든 시야 한 편에 메시지 하나가 깜빡이며 나타나는 것을 깨달았다. 축하합니다! 아이템 어나이얼레이터가 3단계로 진화했습니다. -공격력이 증가합니다. -스킬 열아(颲牙)가 활성화 됩니다. 무언가에 홀린 듯 정신없이 바람을 베어내다 보니 자신의 손에 쥐어진 어나이얼레이터가 진화한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다시 바라보니, 절멸의 마물은 어느 새인가 이 미터 가까운 크기의 대검으로 그 모습이 변화한 상태였다. 벌써 3단계인가. 준상은 과연 이 어나이얼레이터가 몇 단계까지 진화할 수 있을지 궁금해졌지만, 그보다 우선 새로 생긴 스킬에 대한 것이 궁금해졌다. 자신을 향해 발악하듯 몰아치는 바람을 거의 반사적인 몸짓으로 베어버린 준상은 일단 변화한 어나이얼레이터의 아이템 정보부터 다시 확인했다. 아이템정보 명칭 : 어나이얼레이터 레벨제한 : 없음 종류 : 무기 등급 : Unique 공격력 : 25-40 효과 : 베어버린 적의 수가 많아질수록 위력이 강해집니다. (현재 3단계) -스킬 열아(1레벨) 사용 가능. Seed : 5슬롯 (치명타 확률 7%, 치명타 확률 7%, 치명타 피해 7%, 치명타 피해 7%, 치명타 피해 7%) 설명 : 이 무기는 주인과 함께 성장합니다. 베어버린 적의 수가 많을수록, 빨아들인 영혼의 수가 많을수록 위력이 증가합니다. 단순히 검을 들고 휘두르는 연습만 해도 신체능력이 빠르게 향상되는 효과가 있으나, 자칫하면 검의 마력에 홀려 살육의 쾌락에 빠지는 경우가 있으니 충분히 주의하셔야 합니다. 2단계에서의 공격력이 17-24 였던 것을 감안하면, 평균값만 따져도 거의 1.5배 이상의 공격력이 증가된 셈이다. 그래서일까. 바람을 베어낼 때 손으로 전해지는 저항감도 이전보다 훨씬 줄어든 느낌이다. 준상은 다시 검을 휘둘러 바람을 베어내며 이번에는 열아라는 이름의 스킬에 대해 확인해 보았다. 열아(颲牙) : 이 기술을 익히면 당신은 검의 기운을 바람에 주입해 쏘아내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1레벨에서의 유효거리는 10미터이며, 스킬 레벨이 높아질수록 이 거리는 더욱 길어집니다. -1레벨에서의 공격력은 사용하는 무기가 지닌 기본 공격력의 70%이며, 스킬 레벨이 높아질수록 위력이 증가합니다. 사나운 바람 열, 어금니 아. 본래 엠후라가 살던 시대와 문화에서 어떤 이름으로 불리웠는지 지금에 와서는 알 도리가 없지만, 지금 준상에게 인식된 이름은 사나운 바람으로 만들어진 강인한 이빨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아직 스킬 레벨이 높지 않아 여러 가지 제약이 많기는 하지만, 현재 상태의 어나이얼레이터의 공격력을 기반으로 그 위력을 계산해 봐도 2단계에서의 평균 공격력을 상회하는 수준이다. “이거였군.” 준상은 이 기술이 어떤 것인지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본래 어나이얼레이터를 소유하고 있었던 검왕 엠후라가 사용하던 기술 가운데, 검기처럼 멀리 떨어진 적을 향해 쏘아내는 기술이 있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기술을 얻었다면, 써보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 준상은 검에 정신을 집중하고는 자신을 향해 덮쳐오는 거대한 바람의 풍랑을 향해 휘두르며 열아를 발동했다. 검붉은 절멸의 마물은 그 불길한 색과는 어울리지 않는 푸른 기운을 발하는가 싶더니 그것을 전방으로 쏘아 보냈고, 그 순간 준상은 손을 통해 무언가 자신의 기운 일부가 쑥 빠져 나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어나이얼레이터로부터 쏘아져 나간 푸른빛은 그 이름처럼 날카롭고 사나운 이빨로 변화해 거대한 바람의 물결을 물어뜯었다. 억눌러져 있던 우리에서 뛰쳐나가는 광폭한 야수. 준상은 열아라는 이름을 가진 기술로 만들어진 이 푸른빛을 보는 순간 느낀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후후후...” 이런 비기까지 얻은 마당에 더 이상 두려울 것이 무엇이겠는가. 준상은 헤네스에게 했던 말처럼, 이제는 정말로 산책하듯 유유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거칠게 몰아치는 바람도, 쏟아지는 날카로운 얼음 덩어리도 더 이상 그에게는 장애물이 될 수 없었다. 준상은 손에 들린 검붉은 절멸의 마물을 휘둘러 대정령의 속살을 후벼 파고 찢어내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런 그의 등 뒤에는 오직 찢겨진 바람의 잔해만이 마치 산들바람처럼 흩날리고 있을 뿐이었다. ============================ 작품 후기 ============================ 이제 흑염룡만 나오면 완전체? 00215 트롤러 ========================================================================= 불어오는 눈보라에 대한 파훼법은 밝혀냈지만, 얼음의 대정령에 의해 장악된 지역이 너무나도 넓었기 때문에 하루의 산책만으로는 그 지역을 돌파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생각 같아서는 단숨에 돌파해 버리고 푹 쉬고 싶었지만, 마검에 의한 정신력의 소모도 만만치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준상은 리체스의 의견을 받아들여 얼마 뒤에 꽃으로 돌아와 휴식을 취해야만 했다. 잠시 신기루 꽃으로 돌아와 휴식을 취하다가, 다시 북방의 대지를 걸으며 바람을 베어내는 일을 반복하던 준상은 마침내 사흘째 되던 날,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얼음의 대정령의 일부로 여겨지는 눈보라에 섞여 바람과 얼음의 정령이 동시에 공격을 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살을 에는 눈보라 속에 숨어들어 기습적으로 공격을 가하고 사라지는 정령들의 모습은 마치 어둠 속에 숨은 암살자를 연상시키기에 충분했다. “에이씨! 뭐가 이렇게 많아!” 리체스는 투덜거리면서도 새로 챙겨 입은 파카의 옷깃 속에 숨은 채 연신 마법을 사용해 빈틈을 노리고 달려드는 정령을 쫓아 버렸다. 준상 역시 가지고 있는 정령을 모조리 소환해 이런 정령들의 기습을 막아내려 했지만, 지금 있는 곳 자체가 얼음의 대정령에 의해 장악된 지역이다 보니 그가 지닌 정령들은 그 위력에 압도되어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와라!” 준상은 끓는 용암을 소환해 마검 어나이얼레이터를 강화했다. 끓는 용암은 불과 땅의 레어급 정령으로서 준상이 지닌 정령들 가운데 가장 높은 등급에 속하며, 그 속성 또한 얼음의 대정령의 상극에 위치하고 있었다. 용암의 정령으로부터 속성력이 부여되자, 검붉은 절멸의 마물은 이내 촛농과도 같은 불길을 뚝뚝 떨구기 시작한다. 푸화아악! 정령으로 강화된 마검을 휘둘러 마침 후방으로 달려드는 얼음의 정령 하나를 베어 넘기자, 준상의 시야는 두 속성력이 충돌하면서 터져 나온 새하얀 수증기로 가려지고 말았다. “칫!” 준상은 급히 초감각을 발동해 주위에서 달려드는 정령들의 위치를 감지한 다음, 몸을 크게 회전시키며 사방으로 열아를 쏘아 보냈다. 용암의 정령으로 강화된 덕분인지, 본래 투명한 푸른 빛을 띄고 있던 열아는 어느새인가 붉은 빛으로 물든 채 사방으로 쏘아져 나갔다. “크으...” 열아는 따로 쿨타임이나 시전 시간의 제한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사용할 때마다 준상의 체력을 소모한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런 열아를 한 번에 여러 갈래로 쏘아보내자, 준상은 급격한 체력 소모로 인해 잠시 아찔한 현기증을 느껴야만 했다. 준상이 살짝 비틀거림과 동시에 온 몸에서 재생의 연기를 뿜어내자, 정령들을 요격하고 있던 리체스가 얼른 그에게 회복의 마법을 걸어 주었다. “괜찮으세요?” “물론.” 모처럼의 현기증으로 인해 잠시 비틀거리기는 했지만, 사실 이 정도의 증상은 블러드서커로 강타를 발동했을 때와 비교하면 그리 대수롭지 않은 수준이다. 다만 열아를 사용해 정령들을 베어낼 때는 생명력 흡수가 발동하지 않는 관계로 즉각적인 체력 수급에 다소 문제가 있었는데, 방금 전의 현기증은 그런 이유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었다. “그나저나, 정말 끝도 없이 몰려드는 군.” 준상이 그렇게 중얼거리며 붉게 타오르는 마검으로 날아드는 바람의 정령 하나를 베어내자, 리체스는 얼굴을 찌푸린 채 방어막을 펼치며 대답했다. “그러게요. 이 정도면 거의 정령계나 다름없는 수준인데.” “그 정도냐?” “네.” 처음에는 눈보라를 베어내는 틈을 노려 시간차 공격을 가해오던 정령들이었지만, 시간이 지나자 그런 식의 전술적인 행동 따위는 집어 던진 채 떼로 몰려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다. 이쯤 되고 보니 어떤 것이 본래 몰아치던 눈보라고, 또 어떤 것이 폭주한 정령들인지 구분조차 되지 않을 정도다. “주인님!” “왜?” “저 요정 결계 써도 되요?” 리체스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가득 담겨 있었다. 아무래도 별 것 아닌 것들이 벌 떼처럼 몰려들어 귀찮게 하자 히스테리가 다시 발작하려는 모양이다. “안 돼.” “하지만!” “참아!” “네...” 발작하려는 리체스를 말리기는 했지만, 준상도 짜증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경고! : ‘산들바람’이 심각한 피해를 입어 강제로 역소환되었습니다. 강제 역소환으로 인해 ‘산들바람’은 1일간 재소환이 불가능합니다. -소환물이 강제 역소환될 경우 낮은 확률로 카드가 파괴될 수 있으니 주의하십시오. 경고! : ‘모래무지’가 심각한 피해를 입어 강제로 역소환되었습니다. 강제 역소환으로 인해 ‘모래무지’는 1일간 재소환이 불가능합니다. -소환물이 강제 역소환될 경우 낮은 확률로 카드가 파괴될 수 있으니 주의하십시오. 잠시 신경이 분산된 탓인지 연달아 두 개의 정령이 큰 피해를 입고 강제로 역소환되고 말았다. 물량에서 압도적으로 밀리는 상황이라 큰 도움도 되지 못하는 데다 자칫 카드가 파괴되기라도 하면 그 피해를 복구할 방법도 없음을 깨달은 준상은 곧바로 마검의 강화에 쓰고 있는 끓는 용암을 제외한 다른 모든 정령들의 소환을 해제했다. 이지가 있는 존재라면 공포의 시선이나 광견의 위엄 같은 것으로 시간을 벌기라도 할 텐데, 정령들은 그런 것조차 통하지 않는다. 이래저래 난적이 아닐 수 없다. 준상의 정령들이 일시에 사라지자,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모든 정령들이 일시에 준상을 향해 해일처럼 몰려들기 시작한다. 리체스는 그 압도적인 모습에 아무래도 안되겠다 싶었던지 준상의 말을 어기고 요정 결계를 발동하려 했다. 그러나 그녀가 결계의 발동을 위해 옷깃에서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준상이 인벤토리에서 커다란 미늘창을 하나 꺼내어 비어있는 왼손에 쥐더니, 그대로 빠르게 몸을 회전시키기 시작했다. “꺅!” 리체스는 요정 결계를 펼치고자 했던 것도 잊은 채 다급히 준상의 옷깃에 매달려야만 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녀는 빠르게 돌아가는 주위의 풍경 속에서 준상의 손에 쥐어진 붉게 빛나는 무기들에 의해 폭죽처럼 터져나가는 수많은 정령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 리체스는 불어오는 폭풍을 피하고자 풀잎 뒤에 몸을 숨긴 나비처럼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그렇게 펼쳐지는 주위의 풍경에 넋을 잃었다. 검과 미늘창으로부터 번지듯 흘러나오는 빛이 눈보라 몰아치는 주위의 공간에 붉은 선을 그으면, 그 선에 와닿은 정령들이 거대한 모닥불에 날아드는 불나방마냥 퍽퍽 소리를 내며 터져 나간다. 빠르게 지나쳐 가는 풍경의 속도감과 더불어 펼쳐지는 그 현란한 빛의 향연은 리체스로 하여금 지금 이것이 격렬한 전투 중에 벌어지는 상황이라는 것조차 잊게 만들 정도였다. 스킬의 시전이 끝나자 준상은 어지러움을 견디지 못하고 잠시 비틀거렸다. 체력의 소모는 거의 없었지만, 양손 무기로나 어울릴 법한 커다란 두 개의 무기를 각기 한 손에 쥔 채 듀얼 스톰을 펼치다 보니 팔에서도 다소 뻐근한 느낌이 전해지고 있었다. 리체스는 그제서야 화들짝 정신을 차리고 얼른 준상의 옷깃 속으로 다시 들어간 다음, 원래의 위치에 다시 자리를 잡기가 무섭게 그의 몸에 마법을 사용했다. “괘, 괜찮으세요?” “그래.” 다소의 빈틈이 생겨나긴 했지만, 준상이 펼친 듀얼스톰의 위력은 확실히 대단한 바가 있어서 해일처럼 밀려오던 정령들의 기세를 단숨에 꺾어 버릴 수 있었다. 준상은 듀얼 스톰을 사용하기 위해 꺼내 들었던 호위장의 미늘창을 다시 인벤토리에 집어 넣은 다음, 어나이얼레이터를 양손에 잡은 채 빠르게 질주하기 시작했다. 콰아아아아아! 준상이 펼친 듀얼스톰의 기세에 눌려 잠시 주춤하고 있던 정령들은 그가 앞으로 쏘아져 나가자 그것을 막기 위해 움직였지만, 정령들이 미처 따라잡기도 전에 준상은 눈앞을 가로 막고 있던 눈보라의 장벽을 크게 베어버리고 그 안으로 뛰어 들었다. 두꺼운 하얀색 커튼과도 같았던 눈보라를 뚫고 나오는 순간, 준상과 리체스는 갑자기 시야가 확 밝아짐과 동시에 귀가 먹먹해지는 것을 느꼈다. 시끄럽게 몰아치던 바람소리가 사라지고, 그 대신 찾아온 적막. “이건...” 지금까지 그들을 괴롭히던 거센 눈보라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그들이 도달한 그곳은 너무나도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준상은 고개를 돌려 후방을 살폈다. 그러자, 마치 포근한 솜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보이는 두터운 구름 같은 무언가가 그의 뒤쪽에 벽처럼 둘러쳐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눈보라인지 아니면 구름인지 알 수 없는 그 장벽은, 준상의 바로 몇 걸음 뒤에서 사납게 소용돌이치며 빠르게 굽이쳐 흐르고 있었다. 고개를 들자 그렇게 솟아오른 눈보라의 장벽이 깎아지른 벼랑과도 같이 주위 공간을 에워싸고 있었으며, 그 위쪽에는 구멍이 뚫린 것처럼 푸른 하늘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우와아...” 리체스는 난생처음 보는 이 신비한 풍경에 연신 탄성을 터뜨리고 있었다. “이건 도대체...” 지옥이 있다면 이런 곳이 아닐까 싶을 정도의 눈보라를 뚫고 들어오자 이런 별천지가 나올 줄이야. 만년을 살아왔다고는 해도 요정계 이외의 장소를 본 적이 없는 그녀로서는 이 신비한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 준상은 가만히 손을 들어 자신의 입가에 가져간 다음, 살짝 숨을 내뱉었다. 그러자 그의 숨결 속에 담겨있던 수증기가 순식간에 차가운 얼음조각으로 변해 그의 손 위에 곱게 쌓인다. 손가락으로 그 얼음조각의 질감을 확인한 준상은, 이곳의 기온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차갑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확실하게 인지할 수 있었다. 만약 준상과 리체스가 카드에 냉기 저항의 시드를 카드에 카득 채워두지 않았더라면, 아무리 두꺼운 털옷을 챙겨 입었다 할지라도 그대로 얼음 동상이 되지 않았을까. 아마도 이것 역시 퀘스트에서는 따로 해결책이 있었겠지만, 이미 눈보라의 장벽을 뚫고 그 안으로 진입한 이상, 그런 것은 준상에게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준상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조금 떨어진 구릉 위에 서리 낀 유리창처럼 희뿌연 색을 발하고 있는 하나의 구조물을 발견했다. 이벨류아 같은 거대한 성곽도시에 비해서는 터무니없이 작은 규모였지만, 구릉 위에 벽을 쌓아올린 그 형태는 틀림없이 성채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달리 이정표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준상은 미니맵에 나타난 퀘스트 표식을 통해 그곳이 바로 지금까지 눈보라 속에서 악전고투하며 찾아 헤매던 바로 그곳임을 알 수 있었다. “드디어 도착했군.” 조금은 감개무량한 기분으로 그렇게 중얼거리자, 리체스는 준상이 그랬던 것처럼 입김을 불어 그것이 얼음 가루로 변해 손에 내려앉는 것을 시험해 보고 있다가 화들짝 놀라며 얼른 말했다. “바로 가실 건가요?” “굳이 시간을 끌 필요는 없겠지.” 리체스의 말에 그렇게 대답하며, 준상은 천천히 눈앞에 드러난 광전사의 고향 얀트훈센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자박. 자박. 얼어붙은 잡초들이 한 걸음 내딛어질 때마다 그 발자국 아래에서 작은 비명을 지르며 부서지는 소리를 들으며 준상은 천천히 성 아래의 마을로 들어섰다. 급하게 도망치느라 경황이 없었던 것일까. 겨울을 대비해 두툼하게 지어진 토벽으로 통하는 문들은 볼품없이 열려져 있었고, 그 안쪽에는 미처 챙기지 못한 가재도구 같은 것이 어질러져 있었다. 조금 더 마을 안쪽으로 들어서자, 서로 얼싸 안은 채 하얀 서리로 뒤덮인 조그만 아이와 커다란 개의 시체가 눈에 들어온다. “불쌍하게도...” 리체스가 그렇게 중얼거리는 순간, 준상은 눈앞에 새로운 퀘스트 정보가 나타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에픽 퀘스트 – 귀향 4. 당신은 자신이 예언의 주인공임을 훌륭하게 입증했습니다. 이제 블러드로드들은 당신이 그들을 이끌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주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얀트훈센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얻은 후, 미쳐버린 대정령이 머물고 있는 광전사의 고향으로 향하십시오. ->완료! 보상: 경험치 많음 -> 보상을 지금 수령하시겠습니까? (Y/n) _ (주의) 수령하지 않은 보상은 7일후 자동 소거됩니다. 에픽 퀘스트 – 귀향 5. 당신은 드디어 극한의 장벽을 돌파해 광전사의 고향인 얀트훈센에 도착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단 하나, 이 지역을 온통 얼음으로 뒤덮어 버린 원인을 제거하는 일 뿐입니다. ->미완료. (Hidden) 미쳐버린 얼음의 대정령을 제압하십시오. (단독) ->미완료. (Hidden) 얀트훈센의 비고를 탐사하십시오. (단독) ->미완료. 00216 트롤러 ========================================================================= 퀘스트 정보의 갱신과 함께 미니맵에 나타나는 표식을 확인한 준상은 성채 방향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히든 퀘스트가 나열된 순서로 보아서는 비고를 먼저 탐사하는 것이 올바른 공략 순서인 듯 싶은데, 사막의 신전에서 신기루 꽃을 얻을 때를 떠올려 보면 이 비고 안에 대정령을 상대할 만한 무언가가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이만한 대재앙을 유발할 정도의 힘을 지닌 존재를 보통의 인간이 상대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곳에서는 몽몽이를 꺼내놓기가 난감하다는 점. 카드 슬롯에 여유가 있다면 헤네스나 리체스에게 그렇게 한 것처럼 시드를 잔뜩 박아주기라도 하겠지만, 아쉽게도 몽몽이에게 부여된 카드 슬롯은 겨우 두 개 뿐이라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준상에게도 안목의 능력이 있기는 하지만 몽몽이에 비하면 스킬 레벨이 현저하게 낮은 상황이라 여러 모로 불안한 점이 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전의 다른 퀘스트처럼 전송을 통해 불려 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퀘스트가 종료되면 조금은 느긋하게 주위를 돌아볼 여유가 있다는 점일 것이다. 준상은 퀘스트 정보의 확인이 끝나자, 옷깃 사이로 고개를 빠꼼히 내밀고 있는 리체스와 함께 성채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성문 아래로 다가갈수록 땅바닥에 쓰러져 있는 가축과 인간의 시체가 늘어나고 있었다. 발밑에 부스러지는 얼음 조각 소리를 들으며 조심스럽게 접근한 준상은 일단 퀘스트 표식의 움직임을 확인했다. 비고에 발이 달려 있지 않은 이상, 움직이고 있는 쪽이 얼음의 대정령일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잠시 탐색을 해본 것이지만, 불행히도 두 개의 퀘스트 표식 모두 전혀 움직임이 없었다. 이렇게 되면 결국 남은 방법은 직접 다가가서 확인해 보는 것 뿐이다. 성문은 반쯤 열리다 만 상태였는데, 도망치려다가 그대로 얼어죽은 것으로 보이는 몇 명의 시체가 문틈에 마구 뒤엉켜 있었다. 괜히 소리를 내서 좋을 것이 없는 일이기에, 준상은 문을 열어젖히는 것을 포기하고 위상전이를 통해 안쪽으로 진입했다. 성문 안쪽에는 제법 넓은 중정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성문 위쪽에 자리 잡은 성루와 그 양옆의 감시탑이 성벽으로 연결되어 안쪽의 내성과 연결되어 있었다. 중정의 위쪽에는 몇 그루의 침엽수가 심어져서 내성으로 향하는 경사진 통로를 은폐하고 있었는데, 시간이 오래 지난 탓인지 나뭇잎은 거의 다 떨어져 앙상한 가지만 남아 있는 상태였다. 비탈길을 따라 걷자 길옆에 세워진 벽에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작은 구멍들이 보였으며, 길 위쪽에는 다시 두 개의 작은 감시탑이 있어서 성 안으로 들어온 적을 저격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마침내 비탈길을 완전히 올라가자, 내성의 성벽이 앞을 가로막는다. 내성은 2단으로 세워져 있었는데, 그 안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아랫단의 성벽 내부를 통과하는 길고 어두우며 좁은 통로를 지나가야만 했다. 이 통로 역시 앞서의 비탈길과 마찬가지로 길 옆에 공격이 가능한 구멍이 나있어서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옆에서 날아오는 불의의 일격에 고슴도치가 되어 버릴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가만히 통로를 걸어 올라가자, 마침내 내성 안쪽의 좁은 중정이 모습을 드러낸다. 중정 왼편에는 마굿간이 있었는데, 그 안에는 미처 도망치지 못한 말들이 바닥에 주저앉은 채 시체로 남아 있었다. 오른편에는 창고로 보이는 야트막한 석조 건물이 있었으며, 중정 가운데에는 우물이 자리 잡고 있었다. 미니맵 상으로는 그 우물이 있는 곳에 퀘스트 표식이 나타나 있었으며, 또 다른 퀘스트 표식은 내성 깊숙한 곳의 본관에 자리 잡고 있었다. “애매하군.” 비고나 대정령 둘 중 하나가 이 아래쪽에 있을 것이 확실한 상황이지만, 준상이 직접 내려가 보기엔 난감한 점이 많았다. 만약 이 좁은 우물 안에 대정령이 도사리고 있기라도 하는 날에는 제대로 운신하기도 힘든 장소에서 최후의 결전을 치러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런 준상의 생각을 눈치 챘는지 옷깃 속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던 리체스가 입을 열었다. “이 아래쪽에 내려가 봐야 하는 건가요?” “그래.” “그런 거라면 제가 가볼게요.” “위험할지도 모르는데.” 그러자 리체스는 별 걱정을 다 한다는 듯이 웃으며 대답했다. “괜찮아요. 조심스럽게 모습을 숨기고 다녀오면 되니까요.” 하긴, 요정들은 자신의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상대에게서 몸을 숨길 수 있는 능력을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다. 게다가 리체스는 보통의 요정조차 아니다. “그럼 부탁한다.” “맡겨두세요.” 리체스는 옷깃 속에서 빠져 나오더니, 날개를 펴고 날아올라 준상의 주위를 한 바퀴 돌고는 그대로 우물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우물 밖에서 잠시 기다리자, 얼마 지나지 않아 리체스로부터 요정만의 소통 수단을 이용해 말이 전해져 왔다. “여기 통로가 있어요. 들어가 볼게요.” “조심해라.” “네!” 다시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또 다른 연락이 전해져 왔다. “마법으로 봉인된 문을 발견했어요.” “대정령의 기운은?” “여기엔 없는 것 같은데요.” “기다려라. 나도 내려가마.” “네!” 준상은 밧줄을 꺼내 우물 주위의 기둥에 묶으려다가, 주위를 둘러싼 극한의 환경 때문에 다소 불안한 기분이 들어 이전에 획득했던 마수 보드 리델의 근섬유를 대신 꺼냈다. “이것도 슬슬 가공을 해 봐야 할 텐데.” 준상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보드 리델의 굵직한 근섬유를 밧줄 대신 사용해 우물 아래로 내려갔다. 우물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깊어서 제법 아래 쪽으로 내려간 뒤에야 리체스가 들어간 통로를 발견할 수 있었다. 준상은 위상전이를 이용해 단숨에 밧줄에서 통로로 옮겨갔다. 통로는 사람 하나가 겨우 통과할 정도에 불과했지만, 초감각을 통해 살펴보니 다행히 장애물이나 함정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어두운 통로를 조금 걸어 들어가자, 오래지 않아 앞쪽에 은은하게 빛나는 무지개빛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리체스의 머리카락에서 흘러나오는 빛이었다. “여기에요.” 준상이 다가가 리체스는 그에게 어서 오라 손짓하며 통로 옆의 벽을 가리켰다. 그냥 봐서는 지금껏 지나온 통로의 벽과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열어 볼까요?” “그래.” 준상이 허락을 내리자 리체스는 벽으로 다가가 작은 손을 내뻗었다. 그러자 그녀의 몸 주위로 복잡한 여러 개의 문양이 빠르게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더니, 이내 유리가 깨지는 듯한 작은 소음이 울려 퍼진다. “됐어요. 이곳을 손으로 밀어 보세요.” 준상은 리체스가 짚었던 벽으로 다가가 그것을 힘껏 밀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벽 한 쪽이 쑥 하고 밀려들어가며 새로운 통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제가 먼저 갈까요?” 리체스가 다시 말했지만, 준상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리고는 날개를 파닥이며 허공에 떠있는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리와.” “네.” 리체스는 준상이 뻗은 손 위에 내려앉은 다음, 그가 인도하는 대로 다시 옷깃 속으로 파고들었다. 준상은 옷깃 속에서 리체스가 꼼지락거리는 것을 느끼며 우선 초감각을 통해 통로 안쪽을 살폈다. 입구가 마법으로 봉인되어 있는 상황이라 혹시 함정 같은 것이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다행히 그런 흔적은 발견할 수 없었다. 면밀하게 확인을 마친 준상은 조심스럽게 새로 열린 비밀 통로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세 번 정도 모퉁이를 돌자, 마침내 그들은 하나의 좁은 방에 도착할 수 있었고, 빛의 정령을 불러 그 안의 모습을 비추자 비고를 탐사하라는 히든 퀘스트가 완료되었다. 방 안에는 상자와 자루 같은 것이 먼지를 잔뜩 뒤집어 쓴 채로 보관되어 있었다. “함정 같은 것은 없나?” 준상이 묻자 리체스는 주위를 한번 돌아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마법의 흔적은 보이질 않아요.” “다행이군.” 준상은 일단 자루를 열어 보았다. 그러자 휘황한 빛깔의 금화가 모습을 드러낸다. “흠...” 만약의 일이 생겼을 때를 대비한 비상 자금 같은 것이었을까. 상자와 자루 속에는 금화와 금괴, 그리고 보석 같은 것이 차곡차곡 쌓여져 있었다. 정확한 양은 나중에 다시 확인해 봐야겠지만, 이 정도 양이면 예전에 몽몽이가 털어왔던 벨카라스의 보물 창고보다도 양이 많은 느낌이다. 준상은 일단 캐비닛을 꺼내 상자와 자루에 담긴 보물들을 빠짐없이 챙겨 넣었다. “이상하군.” 보물을 획득한 것은 나쁘지 않은 일이었지만, 이곳에 대정령을 상대할 만한 특별한 무언가가 숨겨져 있을 거라 예상했었기 때문에 어쩐지 조금 맥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안목의 능력으로 다시 한 번 주위를 돌아보았지만, 그로서는 더 이상 특별한 무언가를 발견할 수 없었다. “역시 몽몽이뿐인가.” 비고를 탐사하라는 히든 퀘스트는 이미 달성된 상황이었지만, 아무래도 이대로 나가기엔 뭔가 찜찜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에 준상은 조금 무리를 해보기로 했다. 우선 슬롯 다섯 칸 짜리 레어 카드 두 장에 냉기 저항 시드를 잔뜩 박은 다음 현재 슬롯에 자리잡고 있는 영웅급의 피칠갑 카드 두 장 대신 장착했다. “으음...” 레어 시드를 잔뜩 박은 영웅급의 피칠갑 카드가 빠지자 준상은 다소의 허탈감을 느꼈지만, 바쁘게 손을 움직여 그 안에 끼워진 시드들을 모조리 빼내고 거기에 다시 냉기 저항의 시드를 잔뜩 끼워 넣었다. 영웅급의 피칠갑 카드는 시드 슬롯의 숫자가 모두 열 개. 이것이 두 장이니 6퍼센트의 시드만 모조리 끼운다 쳐도 냉기 저항 120퍼센트 정도는 우습게 맞출 수 있다. 준비가 끝나자, 준상은 몽몽이의 카드 슬롯에 이 두 장의 영웅급 피칠갑 카드를 장착시킨 다음, 소환을 실행했다. 그러자 이내 한 줄기 빛과 함께 다람쥐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낸다. 영웅급 카드를 장착해서인지는 몰라도 두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안광이 예사롭지 않다. 하긴 똑같은 카드를 두 장 장착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만 효과가 발휘된다고는 해도, 영웅급 피칠갑 카드를 장착한 이상 45퍼센트의 공포 유발에 재생률 20퍼센트, 공격력 15퍼센트, 생명력 흡수 10퍼센트에 공포의 시선까지 사용이 가능해진다. 모르긴 해도 지금의 몽몽이라면 어지간한 괴물 정도는 순식간에 해치울 수 있지 않을까. “이 안에 무언가 숨겨져 있다. 찾아라.” 준상의 명령이 떨어지자, 몽몽이는 붉은 안광을 번뜩이며 주위를 한 번 쓱 둘러 보더니 이내 구석의 바닥으로 달려가 바위를 맹렬하게 갉아내기 시작한다. “주인님.” “응?” “쟤 뭐 안 좋은 거라도 먹인건가요?” “...” 리체스의 말에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잠시 입을 닫고 있는 동안에도 몽몽이는 맹렬하게 바위를 갉아내며 안쪽으로 들어가더니, 잠시 지나자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 쓴 모습으로 준상에게 돌아왔다. “꺼내봐.” 몽몽이는 앞발로 세수하듯 머리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다가, 준상의 지시가 떨어지자 주머니 안에 넣어둔 손바닥 만한 상자 하나를 꺼내 놓았다. 준상은 곧바로 그것을 집어 올린 다음 열어보았다. 상자 안에는 붉은 천에 감싸인 뭉툭한 작은 병 하나가 들어 있었다. “그게 뭐에요?”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리체스가 물었지만, 준상이라고 단번에 알아볼 수는 없었다. “잠시만.” 준상은 그렇게 대답한 다음 곧바로 아이템 확인을 실행했다. 아이템정보 명칭 : 불사의 용혈 레벨제한 : 없음 종류 : 입욕제 등급 : Unique 효과 : 모든 종류의 피해 50퍼센트 영구 감소. 지속시간 : 즉시 재사용 대기시간 : 없음 남은 사용횟수 : 5회 설명 : 이것은 불사의 악룡이라 불리우던 그라드 바스토크의 피입니다. 과거 얀트훈센에서 태어난 용사 포르스발트는 그라드 바스토크와의 혈투 중에 그 피를 뒤집어 썼으며, 이후 그 어떤 무기로도 상처 입힐 수 없는 불멸자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습니다. 본래 광전사들이 전투 전에 선혈로 몸을 적시는 행위는 이 포르스발트의 전설로부터 유래된 것입니다. 얼마 남지 않은 이 불사의 용혈은 그러한 전설의 증거입니다. (주의) 1인에게 1회만 적용. 중복불가. “...” 불사의 용혈이라는 거창한 이름은 그렇다 치고, 그 아래쪽에 씌여 있는 문구에 준상은 잠시 말문을 잃었다. 입욕제라니. 하기야 아래쪽의 설명을 읽어보면 그 이유를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난감한 기분이 드는 건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지크프리트의 전설과 비슷하군.” 지크프리트는 니벨룽겐의 노래에 나오는 영웅이며, 지구상에 현존하는 서사시 가운데 가장 많은 수의 용을 잡은 전대미문의 드래곤 슬레이어다. 명검 발뭉으로 파프니르라는 드래곤을 죽였을 때, 그 피를 뒤집어 쓴 덕분에 불사의 육체를 지니게 되었다는 전설이 남아 있는데, 이곳에도 그것과 비슷한 전설이 있는 모양이다. 지금 준상의 손에 들어온 불사의 용혈은 그 효과가 지크프리트나 포르스발트의 전설에 비해 좀 떨어지는 경향이 있지만, 그것은 얼마 안 되는 양을 물에 타서 사용해야 하는 상황 때문으로 이해할 수 있다. 준상은 우선 몽몽이를 돌려보내고 원래대로 카드 설정을 되돌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라면 신기루 꽃으로 언제든 이동이 가능하니 이것을 입욕제로 사용하는 것에 아무런 문제도 없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어떨까. 준상처럼 냉기 저항을 맞추지 않은 이상은 이런 극한 환경에서 물을 뒤집어쓰는 행위는 그냥 자살을 시도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하긴 뒤집어쓰는 시점에서 모든 피해 50퍼센트 영구 감소의 혜택을 받으니 곧바로 얼어 죽지는 않겠지만, 그것도 말이 쉽지 어지간한 담력으로는 감히 시도할 엄두도 내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런 점을 고려해 보면 이것도 나름대로 인정의 의식과 같은 일종의 시험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를테면 얼음 꽝꽝 언 강 한 복판에서 대놓고 냉수마찰하는 것처럼. 물론, 진실이 어느 쪽이든 간에 준상과는 그리 상관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리체스.” “네.” “목욕하자.” “네?” 리체스는 이게 갑자기 무슨 뜬금없는 말인가 싶은 표정을 지었지만, 준상은 곧바로 비고 안에 신기루 꽃으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 작품 후기 ============================ Lets go 오늘 아침에도 내가 뭘 했는지를 몰라 아니 내게 아침이란 게 있나 아 벌써 12시네 연참해야지 달력을 보니 오늘은 파란 약이네 창밖의 남자 여자들도 박카스 난 약통에게 내 잘못을 고백해 하루 몇시간을 넘게 쓰니 노트북보면 질려 매일 똑같은 하루 이런 날 보면 질려 걷는 게 귀찮아서 배로 누운 그대로 여기저기 닦다 보니 안 해도 돼 걸레로 청소말이야 레드불 하나 책상에 올라도 이게 웬 떡이야 그림의 떡이야 날마다 워드를 켜보면 어제 연재 하고 남은 쪼가리 연참인건가 연참인건가 연참인건가 오늘도 내 일과는 연참인건가 연참인건가 연참인건가 오늘 아침에도 내가 뭘 했는지를 몰라 아니 내게 아침이란 게 있나 아 벌써 12시네 연참해야지 커튼 사이로 해가 빛나면 나도 신나서 양치도 안하고 놀다가 밤이 되서야 후회를 하지 사실 내 맘은 이렇지 않은데 쓰고 싶은 건 더 많고 그 곳에 몸을 담고 의미 있는 일분을 살고 싶어도 시간은 가는데 하루 종일 인터넷이 켜져 있어 그 속엔 웃음이 가득하지만 모니터에 비추는 내 모습은 점점 약빨이 돼 가 나의 미래가 being like 편수 불어나버린 연참인건가 연참인건가 연참인건가 연참인건가 연참인건가 연참인건가 오늘도 내 일과는 연참인건가 연참인건가 연참인건가 00217 트롤러 ========================================================================= 신기루 꽃으로 향하는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이제나 저제나 하면서 기다리고 있던 광전사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준상을 향해 고개를 조아린다. “오셨습니까!” “그래.” 일부러 아래쪽 광경이 보이지 않도록 신기루 꽃에서 보이는 풍경을 임의의 것으로 바꾸어 놓은 상태지만, 바보가 아닌 이상 요며칠 사이 얼음을 잔뜩 뒤집어 쓰고 돌아오는 준상의 모습에서 매일 그가 어디를 다녀오는지 추측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뭔가 진전이 있었는지, 자신들이 도움이 될만한 일은 없는지 눈빛을 빛내며 바라보는 광전사들의 모습은 뭔가 부담스러우면서도 우스꽝스러운 모습이라 어느 틈엔가 준상의 옷깃에 몸을 숨기고 있던 리체스는 자신도 모르게 킥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준상은 광전사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그들을 헤치고 나아가 중앙의 전송 장치에 몸을 실었고, 옷깃에서 리체스가 빠져 나오자 곧바로 최상층으로 이동했다. “어서오세요.” 전송장치에 준상과 함께 인간 크기로 변화한 리체스가 모습을 드러내자, 잠시 멍한 표정으로 벤치에 앉아 있던 헤네스가 화들짝 놀라며 그들을 맞이했다. “별 일 없었지?” “네. 뭔가 진전이 있었나요?” “있었지?” “아... 다행이네요.” 헤네스는 반색하다가도 이번 퀘스트에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깨달았는지 씁쓸하게 웃었다. 준상은 그런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내 그녀의 몸을 번쩍 안아 올렸다. “주, 준상씨?” 헤네스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준상은 그런 그녀를 안고 그대로 최상층 중앙에 위치한 수반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갑자기... 이게 무슨...” 말도 없이 물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그의 모습에 놀란 헤네스가 다시 입을 열자, 준상은 그제서야 조용히 물었다. “싫어?” “시, 싫은 건 아니지만.” 헤네스는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몰라 리체스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요정 여왕은 자신도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나도 몰라. 성 안을 돌아보다가 갑자기 목욕하러 가자시더라고.” “...” 헤네스가 해명을 요구하는 시선을 보내자, 준상은 그제서야 염동력으로 그녀를 수반 밖으로 내보낸 다음 말했다. “좋은 걸 얻었거든.” 그렇게 운을 뗀 그는 천천히 불사의 용혈이란 것에 대해 설명했다. 간략한 설명이 끝나자 헤네스와 리체스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그런 것도 가능한가요?” 이것은 헤네스의 반응이었고, “용의 피에 특별한 힘이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대단하네요.” 이것은 리체스의 반응이었다. 어쨌건 설명을 꺼낸 준상은 품 안에서 뭉툭한 모양의 작은 병을 꺼낸 다음 헤네스에게 건네 주며 다시 말했다. “가능한지 아닌지는 이제 시험해 보면 알 일이지. 잠시 들고 있어.” “네.” 헤네스에게 병을 건넨 준상은 그녀들이 보는 앞에서 입고 있던 방어복을 해제한 다음, 본래 그가 착용하고 있던 옷을 하나씩 벗어 수반 밖으로 던져 놓았다. “...” “...” 세 사람은 몇 번이고 함께 목욕을 한 적이 있었지만 그것은 대부분 요정계에 위치한 온천에서의 일이었다. 온천의 물은 불투명한 우윳빛인데다, 뜨거운 김이 항상 뿜어져 나오고 있었기 때문에 신경 써서 보지 않으면 상대의 벗은 몸을 알아보기는 조금 어려운 면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곳은 시야가 가리는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데다, 수반에 담긴 물 역시 불순물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다. 헤네스는 스스럼없이 자신들 앞에서 벗은 몸을 드러내는 준상의 모습에 얼굴을 잔뜩 붉힌 채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허둥대고 있었지만, 리체스는 마른 침을 꼴딱 꼴딱 삼키며 잔근육이 꿈틀거리는 준상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준상은 그녀들이 보는 앞에서 남은 속옷 하나까지 전부 벗어서 수반 밖으로 던진 다음, 감히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는 헤네스를 향해 말했다. “내가 물속에 몸을 담그면, 그걸 한 방울 떨어뜨리면 돼. 알겠지?” “네!” “...” 정말 제대로 알아들은 것이 맞나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준상은 천천히 다리를 구부려 수반 안에 몸을 담갔다. 그리고 물이 목까지 잠기자 다시 한번 다짐하듯 말했다. “머리까지 완전히 잠기면 떨어뜨려야 해.” “그렇게 할게요.” 첫날밤을 막 보낸 새색시도 아니고, 함께 지낸지가 벌써 얼마나 지났는데 아직도 저렇게 부끄러워 하는지. 하긴 그런 점이 귀엽긴 하지만 말이다. 준상은 가볍게 숨을 들이 쉬고는 그대로 잠수를 시도했다. 그러자 헤네스는 얼른 마개를 비틀어 열고는 조심스럽게 병을 기울여 그 안의 내용물은 물 위에 한 방울 떨구었다. 긴장한 탓인지 조금 병이 흔들리고 있었지만, 이윽고 병의 입구에서 케첩을 연상시키는 점성 있는 붉은 액체가 한 방울 흘러 내렸다. “...” 헤네스와 리체스는 자신도 모르게 병으로부터 떨어지는 그 붉은 액체를 눈으로 쫓았다. 방울진 채 떨어져 내린 불사의 용혈은 허공에서 다시금 둥글게 뭉치는가 싶더니, 그대로 물 위로 떨어졌다. 그 순간, 헤네스와 리체스는 수면 위로 밝은 빛이 확 하고 퍼져 나오는 것을 느꼈다. “이, 이건...” 요정 결계 안이라 특히 더 마력의 변화에 민감한 리체스는 불사의 용혈이 물과 만나는 순간 확 하고 터져 나오는 마력의 분출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헤네스는 미처 그런 것까지는 알아 볼 수 없었지만, 갑자기 눈부신 빛이 터져 나오는 현상에 놀라 자신도 모르게 병을 놓칠 뻔 하고 말았다. “휴우...” 얼른 병을 수습해 뚜껑을 닫은 헤네스는 빛의 파문이 수면 위로 퍼져 나가는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그 현상이 사라지자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화들짝 놀라며 물속에 머리까지 완전히 담그고 있는 준상의 모습을 확인했다. 그 순간, 준상은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축하합니다! 불사의 용혈에 의해 사용자의 신체에 추가 속성이 적용되었습니다. -앞으로 사용자(박준상)의 신체는 모든 종류의 피해를 50퍼센트 감소된 상태로 받게 됩니다. -이 효과는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영구히 지속됩니다. 메시지의 확인을 마친 준상은 몸을 일으켜 물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후우...” 손으로 대충 얼굴의 물기를 씻어낸 준상은 자신의 벗은 몸을 보고 얼른 시선을 피하는 헤네스를 향해 다가서며 말했다. “잘 했어. 이제 네 차례다.” “네?” 헤네스는 준상에게 불사의 용혈이 담긴 병을 돌려 주려다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서, 설마... 저도요?” “물론.” “하지만 저는...” 달리 전투에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점을 언급하려 했지만, 준상은 헤네스의 손에서 병을 받아들이면서 그녀의 손을 휙하고 끌어당겼다. “꺅!” 불의의 기습에 의해 끌려 들어간 헤네스는 짧은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물에 빠지고 말았다. “우으... 놀랐잖아요.” 헤네스는 얼른 손으로 얼굴의 물기를 닦아내고는 준상에게 불만을 표하려다가 그의 벗은 몸이 코앞에 자리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화들짝 놀라 다시 고개를 돌렸다. 준상은 그녀의 그런 반응을 즐기며 다시 말했다. “사죄의 의미로 내가 벗겨 줄까?” 은근한 그 말에 헤네스는 화들짝 놀라며 소리쳤다. “제, 제가 할 수 있어요!” “그래? 그럼 다행이고.” 준상은 웃으며 그대로 물 밖으로 걸어 나갔고, 물 위로 드러난 그의 둔부를 보고 놀란 헤네스는 얼른 몸을 돌렸다. 조금 멍한 표정으로 준상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리체스는 그가 옆으로 다가오자 화들짝 놀라며 옆에 놓여져 있던 수건을 그에게 내밀었다. “다, 닦으세요.” “고마워.” 준상은 수건으로 대충 몸의 물기를 닦은 다음 물의 정령인 새벽이슬을 불러 물기를 말끔히 털어낸 다음에야 다시 벗어둔 옷의 물기 역시 털어낸 다음 주섬주섬 챙겨 입기 시작했다. 리체스는 그가 복장을 다시 갖추자 조금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장난스런 시선으로 헤네스를 바라보았다. 헤네스는 리체스와 준상의 시선을 느끼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뭐해?” “그, 그게...” 아무리 그래도 모두가 보는 앞에서 옷을 벗으라니... 헤네스로서는 생각만 해도 머리에 피가 몰려 어질거릴 정도다. “못할 것 같으면 내가...” 하지만 준상이 다시 그렇게 입을 열자, 헤네스는 얼른 고개를 저으며 소리쳤다. “하, 할 수 있어요!” 그녀는 둘에게서 몸을 돌린 채 입고 있던 블라우스의 단추를 하나씩 풀기 시작했다. 벗은 몸을 보인 것이 처음도 아닌데, 어째서 이렇게 가슴이 떨리는 것인지. 헤네스는 눈을 질끈 감은 채 입고 있던 옷을 하나씩 벗었고, 그녀가 벗은 옷은 준상이 염동력으로 집어 밖으로 꺼내 놓았다. 물에 젖은 하얀 블라우스와 검은 면바지가 차례로 물밖으로 나오고, 마침내 부드러운 면 소재의 속옷 한 쌍이 밖으로 꺼내지자, 헤네스는 얼른 몸을 수그려 물속에 몸을 담갔다. 준상은 투명한 물 아래 비친 그녀의 몸을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 “방법은 알지?” “네...” 헤네스는 깊게 숨을 들이쉰 다음, 물속에 몸을 담갔고 그것을 본 준상은 곧바로 물 위에 불사의 용혈을 떨구었다. 그 모든 과정이 끝나자 헤네스는 새로 꺼낸 수건으로 몸을 가린 채 허겁지겁 물 밖으로 나와 도망치듯 컨테이너 하우스로 들어가 버렸다. “리체스.” “네.” 헤네스와는 달리 리체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입고 있던 하늘거리는 요정 특유의 옷을 마치 허물 벗듯 훌훌 벗어 던지고는 물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역시 조금은 부끄러운지 얼굴을 살짝 붉힌 채 몸을 살짝 틀어 자신의 시선을 외면하고 있는 모습이 오래된 명화 속에 등장하는 여신의 그것과 같다는 생각을 준상은 문득 떠올렸다. “준비해.” “네.” 리체스는 천천히 바닥에 주저 앉으며 물 속에 들어갔고,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붉은 액체가 물 위로 떨어짐과 동시에 그녀의 몸 역시 불사의 용혈이 주는 효과가 적용되었다. 준상은 리체스까지 불사의 용혈의 효과를 부여하는 작업을 마치자, 마개를 조심스럽게 닫은 다음, 본래 담겨져 있던 상자를 꺼내어 용혈이 담긴 병을 그 안에 넣었다. 아직 두 번의 사용횟수가 더 남았기 때문에 몽몽이나 엘리에게도 적용시키는 것이 좋을까 하는 생각을 떠올렸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저으며 상자를 인벤토리 안에 집어넣었다. 리체스가 조심스럽게 걸어나와 다시 옷을 챙겨 입는 모습을 가만히 감상하던 준상은, 헤네스가 붉어진 얼굴을 감싸며 컨테이너 하우스에서 걸어 나오자 그제서야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럼... 이제 마무리를 하러 가야겠군.” “...” 냉기 속성에 대한 저항을 빈틈없이 갖춘 것도 모자라 다시 불사의 용혈로 모든 피해 감소 50퍼센트의 효과까지 부여된 마당이니 더는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준상은 방금 전의 일때문이지 여전히 얼굴에 열기가 가시지 않은 두 반려를 바라보며 말했다. “갈까.” “네.” 리체스는 바로 대답했지만, 헤네스는 그렇지 못했다. 하지만 준상은 그런 헤네스의 몸을 염동력으로 끌어와 품에 안은 다음 걸음을 옮겼다. “저, 저는...” 헤네스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짓다가 무언가 말하려 했다. 아마도 자신은 전투에 쓸모가 없으니 남아있겠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었겠지만, 준상은 그런 헤네스의 입을 손가락으로 막으며 말없이 그녀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리체스는 그런 둘의 모습이 부러운지 입을 삐죽거리더니 이내 질 수 없다는 듯이 준상의 다른 한쪽 팔을 껴안으며 매달리며 말했다. “자, 얼른 가요!” “그래.” 준상은 두 반려와 함께 전송 장치에 몸을 실었고, 이내 셋은 석문이 위치한 꽃의 최하층에 모습을 드러냈다. 다시금 준상이 모습을 드러내자 이제나 저제나 하며 기다리고 있던 광전사들이 마스티프 떼처럼 우르르 몰려나와 그들을 에워싼다. “저, 저희도 데려가 주십시오.” “저희도 싸우고 싶습니다.” 하지만 준상은 그들을 바라보며 이렇게 대답했다. “기다려.” “...” 위엄 섞인 그 말 한 마디에 광전사들은 그대로 아무 말도 못한 채 멈추어 섰고, 그 틈에 준상과 헤네스는 방어복을 다시 갖춰 입은 다음 석문을 통해 얀트훈센의 지하 비고로 이동했다. 00218 트롤러 ========================================================================= 어두컴컴한 지하비고에 도달하자, 준상은 일단 빛의 정령인 반딧불이를 소환해 길을 밝혔다. “일단 이 통로를 빠져 나간다.” “네.” 리체스는 이미 지정석이 되어 버린 준상의 옷깃 속으로 숨어들었고, 헤네스는 조금 긴장한 모습으로 조심스럽게 뒤를 따랐다. 우물이 있는 곳으로 나오자, 준상은 헤네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리 와.” “혼자 올라 갈 수 있어요.” 헤네스는 그렇게 말하며 앞으로 나서려 했지만, 준상은 그런 헤네스의 허리를 안아 끌어당긴 뒤 그녀를 등에 업었다. “괜찮은데...” 헤네스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준상의 넓은 등이 주는 안락함이 싫지 않은지 가만히 그의 등에 매달렸다. 준상은 헤네스가 자신의 등에 단단히 업혔는지 확인한 다음 곧바로 보드 리델의 근섬유를 두 손으로 움켜쥔 뒤 위쪽으로 타고 올라갔다. 혹시나 하고 조심스럽게 우물 위쪽을 살폈지만, 특별히 아까와 달라진 점은 느껴지지 않는다. 준상은 우물 위로 올라가자 헤네스를 내려놓고는 기둥에 묶어둔 보드 리델의 근섬유를 풀어 다시 보관한 다음 미니맵에 나타난 퀘스트 표식을 향해 이동했다. 내성 깊숙한 곳에 자리한 표식은 우물 아래로 내려갈 때와 마찬가지로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혹시 움직이지 못할 어떤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면 수백년 동안 꼼짝도 하지 않고 이 성채 안에 웅크리고 있는 것부터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 이성을 가진 인간과 대정령의 행동 양식이 같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섣불리 판단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얀트훈센 성채의 본관은 3단의 구조로 만들어져 있었다. 비스듬한 형태로 쌓은 축대와 그 위에 지어진 3층 규모의 저택, 그리고 다시 성채 뒤편의 벼랑에 기대어 있는 것처럼 솟아오른 높은 석탑이 그것이었다. “아무래도 저 탑에 있는 모양이군.” 중세 시대의 탑은 여러 가지 용도를 지닌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바로 망루. 높은 곳에서 적을 확인하는 기능이 그것이다. 하지만 그 외에도 중요한 하나의 기능이 있었으니, 바로 감옥이다. 일례로 런던 탑 같은 경우는 수많은 왕족들이 그 안에 수감된 역사가 있으며, 실제로 영어에서 탑에 보내지다라는 말은 교도소에 수감된다는 의미를 지닌 말로 통용되기도 한다. 물론 이곳의 탑 역시 그런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본관이 아닌 탑에 대정령이 위치해 있는 것에는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싶은 것이 준상의 생각이었다. 준상과 헤네스는 조심스럽게 본관 최하층의 축대 외벽에 설치된 계단을 따라 위쪽으로 올라갔다. 다소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자 3층으로 지어진, 상당히 낡은 느낌의 저택과 그 저택을 내려다 보는 듯한 느낌의 탑이 모습을 드러낸다. 준상이 탑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자, 헤네스는 여전히 긴장을 감추지 못한 채 그 뒤를 따랐다. 탑의 입구에 도달한 준상은 초감각을 통해 내부의 구조를 확인해 보다가 예상과는 다른 복잡한 구조에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 탑은 성채 뒤편의 절벽에 그냥 기대어진 형태로 지어진 것이 아니라, 절벽 내부에 자리 잡은 숨겨진 요새의 통로 역할을 하는 구조물이었던 것이다. 대정령은 그 숨겨진 요새 최상층의 넓은 홀 한 가운데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대략의 구조를 마친 준상은 앞서서 탑의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헤네스는 모래알이 밟히는 자박거리는 소리가 어쩐지 굉장히 신경에 거슬렸다. 얀트훈센의 성채 안은 소리 자체가 사라지기라도 한 것처럼 너무나도 적막해서 얼핏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순백의 천위에 티끌과도 같은 작은 얼룩이 생겨나면 그것이 너무나 신경 쓰이는 것처럼, 자박거리는 발자국 소리는 긴장한 헤네스의 신경을 조금씩 갉아먹고 있었다. 어느새 말라버린 입술을 살짝 깨무는데, 문득 앞서가던 준상이 손을 내민다. 긴장으로 굳어져 있는 자신의 상태를 알아차린 것인가 싶어 헤네스는 조금 창피한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손을 뻗어 그의 손을 맞잡았다. 두 사람은 그렇게 나선형의 계단을 타고 올라가, 마침내 최상층의 망루에 도달했다. 그곳에는 지금까지 지나쳐 왔던 계단 안의 모습과 마찬가지로 절벽으로 통하는 좁은 통로가 마련되어 있었다. 준상은 그곳에 도달하자 헤네스에게 손을 들어보이며 작게 말했다. “조금 떨어져서 따라와라. 신호하면 바로 모습을 숨기고.” “네.” 헤네스는 자신도 모르게 귀걸이로 손을 가져갔지만, 손가락 끝에 닿은 것은 헬멧의 단단한 촉감 뿐이었다. 준상은 조심스럽게 통로 안으로 들어갔다. 절벽 속으로 이어진 길고 좁은 길을 통과하자, 그들은 이내 어둡고 넓은 광장에 도달할 수 있었다. 어둠 때문에 헤네스는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살펴볼 수가 없었지만, 준상은 초감각을 통해 광장 한복판에 자리 잡은 무언가를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 어지간한 일로는 그리 큰 변화를 보이지 않는 준상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혹시나 해서 초감각에 더욱 정신을 집중해 살펴봤지만, 그것은 틀림없는 인간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용암의 강에서 타락한 불의 정령이 인간과 비슷한 형체를 하고 있기는 했지만, 그것은 악령에 의해 오염되어 그 형상으로 의태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준상의 감각에 잡힌 인물은 무엇 하나 인간과 다를 바 없는 형태를 지니고 있었다. 아니, 다른 점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절대로 있을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냉기를 그 몸에서 뿜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 상황에 대해 리체스와 의논을 해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 일단 물러나기로 마음 먹었다. 그러나 준상이 미처 걸음을 떼기도 전에, 나무 기둥에 두 팔이 박힌 채 매달려 있던 인물의 눈이 번쩍 뜨여지며 서릿발 같은 푸른 안광을 뿜어낸다. “물러서!” 준상이 외치자 헤네스는 얼른 뒤로 물러서며 귀걸이를 이용해 모습을 감추었다. 그 기척을 느낀 준상은 급히 앞으로 달려나가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러자 준상의 옷깃 속에서 주위를 살피던 리체스가 그제서야 상황을 파악하고는 소리를 지른다. “세상에! 이게 도대체!” 단순한 통로 역할 밖에 하지 못한다고는 하지만 요정계는 엄연히 정령계의 상위 차원. 그런 곳을 다스리던 여왕이었던 리체스가 보통의 인간보다 정령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아는 건 달리 의문의 여지조차 품을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그런 그녀조차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자, 준상은 지금 자신이 겪고 있는 이 상황이 전혀 일반적이지 않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었다. “어떻게 된 건지 알아보겠나?” 대정령의 입이 벌려지고 그 안에서 날카로운 냉기의 파동이 뿜어져 나오는 것을 피하며 준상이 외치자, 리체스는 자신 없는 말투로 이렇게 대답했다. “제 생각엔... 아무래도 강신의 형태로 대정령을 몸에 담은 것 같은데... 아! 어쩐지 대정령이라고 해도 너무 힘이 강하다 싶었더니, 정령 증폭이 이루어진 것 같아요.” “정령 증폭?” 준상은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정령 증폭은 그가 지니고 있는 펫 가운데 하나인 엘리의 스킬이다. 이 스킬을 사용하면 정령을 몸 안에 받아들여 그 힘을 몇 배로 증폭하는 것이 가능한데, 실제로 엘리만 하더라도 이 방법을 통해 어지간한 마법은 명함도 못 내밀 정도의 엄청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을 정도다. 보통의 정령을 대상으로 증폭을 실행해도 그 정도인데, 하물며 지닌 바 힘이 하나의 자연 현상을 대표하는 대정령이라면 그 위력이 어느 정도이겠는가. 문제는 그 뿐만이 아니었다. 준상은 최근 정령사 관련 에픽 퀘스트를 통해 리체스의 잠을 깨우고 동결되었던 요정계를 회복시켜 정령계와 이 세계를 잇는 통로를 복구시켰다. 이것은 약화되었던 정령의 힘을 본래의 그것으로 활성화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는데, 그 덕분에 본래는 요정계의 동결로 인해 이보다 훨씬 약한 힘만을 발휘할 수 있었던 대정령의 힘을 원래의 그것으로 되돌려 놓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끙...” 준상은 이 모든 상황을 파악하자 자신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정령의 문을 열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강해진 대정령을 상대할 이유도 없었다는 점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가 깨달은 것은 그 뿐만이 아니었다. “그래서 여태 광전사 에픽이 실행되지 않고 있었던 것인가.” 그 엄청난 눈보라의 폭풍은 원래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다. 원래대로라면 그런 터무니없는 눈보라가 아니라, 두껍게 차려 입으면 어느 정도 견뎌낼 수 있을 정도의 눈보라가 그의 앞길을 막고 있었을 테지만, 정령의 문과 정령 증폭이라는 두 가지 요소가 맞물리면서 원래보다 더 강력한 재앙이 초래된 것이다. 지금까지 파악한 바로는, 이 퀘스트라는 것은 실행 불가능한 것을 억지로 맡기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설령 그렇다 할지라도 준상과 같은 구원 가능한 인원을 보내 도움을 주도록 안배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 광전사 관련 에픽은 준상이 정령의 문을 먼저 열어버림으로서 본래 예정되어 있던 퀘스트 자체가 실행 불가능한 것이 되어 버렸고, 때문에 영웅급 콤보를 완성했음에도 불구하고 퀘스트가 발동하지 않았던 것이다. “미치겠군.” 그가 머리 속으로 이 일련의 인과 관계를 정리하고 있는 동안 대정령을 그 몸에 품은 여인은 두 손이 묶여 매달린 상태로 그 하얀 알몸을 여지없이 드러내며 고통에 가득찬 비명을 그 입으로 토해 내고 있었다. 물론 비명이라 해도 소리가 들리는 것은 아니다. 대신 주위의 사물을 급격하게 동결시키는 대정령의 힘이 뿜어져 나올 뿐이다. 이 힘이 곤란한 점은 시각에 의존해서는 피하기가 매우 곤란하다는 점이었다. 물론 냉기 저항도 맞추고, 덤으로 피해 감소 50퍼센트의 효과도 부여된 상태긴 하지만, 준상은 굳이 대정령이 뿜어내는 이 힘을 자신의 몸으로 시험해 보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리체스.” “네!” “엄호를 부탁한다.” “맡겨 두세요!” 리체스는 곧바로 준상의 품에서 빠져 나오더니 대정령을 그 몸에 강림시킨 여인의 몸을 향해 마법을 발현시켰다. “지금 여기 내가 부르노니, 꽃이 되어 피어나라. 타오르는 불꽃이여!” 리체스의 낭랑한 목소리와 함께 그녀 주위에 현란한 마법진이 만개한 꽃처럼 화려하게 피어났다. 마법이 발현되었음에도 잠시 아무런 변화가 느껴지지 않았지만, 이내 여인의 발밑에서 불의 벽 하나가 확 하고 피어올랐다. 불꽃은 순식간에 사람의 키 서너 배는 되는 높이로 솟아올라 여인의 몸을 뒤덮었다. 그리고 곧바로 두 번째와 세 번째 불의 벽이 그녀의 발밑에 육각의 별표 모양으로 자리 잡으며 기둥에 묶인 여인의 몸을 달구기 시작했다. 하지만 리체스의 마법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타올라라, 푸른 불꽃이여! 그 신성한 힘으로 정화하라!” 그녀의 입에서 낭랑한 외침이 연거푸 쏟아져 나오자, 붉게 타오르던 세 개의 화염은 그 빛이 푸르게 변하며 더욱더 맹렬하게 타올랐다. 여인은 산채로 불에 그을리는 고통에 몸을 뒤흔들다가 이내 눈에서 투명한 눈물을 흘리는가 싶더니 지금까지와는 달리 소름끼치는 비명을 토해냈다. -꺄아아아아악! 그 처절한 외침이 터져 나오자, 사방으로 냉기의 파동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고 리체스가 발현한 마법은 마치 밸브가 잠긴 가스 렌지처럼 허무하게 꺼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녀의 마법이 전혀 소용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마법으로 인해 기둥에 묶인 여인이 고통으로 몸부림치며 주의가 산만해진 틈을 타 준상이 그녀의 코앞으로 접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인은 다시 한 번 비명을 질러 준상에게 냉기의 파동을 쏘아내려 했지만, 순간 그녀의 귀에 헤네스의 외침이 들려왔다. “멈춰! 이 바보야!” 리체스가 불러낸 푸른 불꽃으로 인해 이성이 조금이나마 돌아와 있던 여인은 순간 터져 나온 헤네스의 정신 공격에 멈칫하고 말았고, 그 잠깐의 틈이 승부를 결정지었다. 준상이 그런 여인의 가슴에 절멸의 마검 어나이얼레이터를 쑤셔 박은 것이다. 하얗게 변해버린 눈동자에 하얗게 서리가 뒤덮인 준상의 모습이 비친 순간, 여인은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던 것도 잊고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끄륵...” 순간 여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반투명한 냉기들이 뚝 끊겼다. 여인은 부르르 몸을 떨며 무심한 표정으로 자신의 가슴에 검을 박아 넣은 준상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내 입으로 울컥 피를 쏟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유리처럼 투명하던 피부에 차츰 혈색이 돌아왔고, 하얗게 변해버렸던 눈동자 역시 색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준상은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인터페이스를 통해 가죽 목걸이를 하나 불러낸 후 빈사 상태에 빠진 여인의 목에 그것을 채웠고, 입에서 피를 울컥거리며 뿜어내던 여인은 곧바로 준상의 시야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히든 퀘스트에서 지정된 내용은 대정령의 사멸이나 제거가 아닌 제압. 물론 대정령을 진정시킬 다른 수단이 있다면 이런 극단적인 방법을 쓰지는 않았겠지만, 지금의 준상으로서는 이렇게 단숨에 생명력을 소진시킨 다음 펫으로 만드는 것이 가장 간단한 해결책이었다. 00219 트롤러 ========================================================================= 여인의 모습이 준상의 시야에서 사라짐과 동시에 그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냉기는 모습을 감추었다. 하지만 그렇게 얼음의 대정령이 모습을 감추자 그 강대한 힘에 의해 얀트훈센에 쏟아져 내리던 하강기류는 모습을 감추었으며, 그 여파로 인해 주위에 생성되어 있던 눈보라의 벽이 붕괴되며 마치 탑처럼 솟아올랐던 구름들이 얀트훈센으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우르릉. 너무나 차갑게 가라 앉아 오히려 모든 사물이 정지된 것처럼 보였던 얀트훈센은 순식간에 격렬한 대기에 집어 삼켜졌다. 준상은 에픽 퀘스트 완료와 동시에 쏟아져 나오는 메시지들을 시야 한쪽으로 치우려다가 바깥에서 들려오는 그 소리를 들었다. 조마조마한 모습으로 전투를 바라보며 입구 근처에 대기하고 있던 헤네스는 준상이 얼음의 대정령을 단숨에 제압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다가, 구름의 벽이 무너지는 그 소음을 듣고는 고개를 돌렸다. “세, 세상에...” 그녀는 아직까지 눈사태나 해일 같은 자연현상을 본 적이 없었지만, 그런 배경지식이 없어도 지금 눈앞에서 붕괴되며 얀트훈센으로 쏟아져 내리는 구름의 모습에 압도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준상과 리체스는 얼른 헤네스의 곁으로 다가와 그 모습을 보았지만, 그들이라고 반응이 그리 다르지는 않았다. “우와아...” “...” 준상은 얀트훈센이 거친 눈보라에 집어 삼켜지는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일단 물러나기로 마음먹었다. 얼음의 대정령도 물리친 마당이니 별 문제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단순히 차가운 것을 넘어 폭풍까지 동반하고 있는 눈보라는 굳이 마주하기 보다는 일단 피하는 편이 상책이었다. 어차피 보통의 퀘스트처럼 돌아가면 다시 찾아오기 힘든 것도 아니니, 눈보라가 가라앉기를 기다려 다시 내려오면 그 뿐이다. 준상이 석문을 열고 그것을 개방하자, 헤네스와 리체스는 그의 뒤를 따라 신기루 꽃으로 귀환했다. 다시금 준상이 귀환하자, 이제나 저제나 하며 기다리고 있던 광전사들은 먹이를 기다리는 마스티프처럼 눈을 빛내며 뭔가 경과라도 알려주지 않을까 싶은 표정으로 바라보았지만, 준상은 그들을 무시한 채 헤네스와 리체스를 데리고 다시 최상층으로 이동했다. “뭔가 한 마디 해주는 것이 좋지 않겠어요?” 자신에게 꽂히는 근육질 남자들의 시선이 못내 부담스러웠는지 헤네스가 그렇게 말했지만, 준상은 고개를 저으며 전송장치를 가동시켰다. “아직은 아니다. 게다가 미심쩍은 부분도 있고.” “...” 헤네스와 리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얼음의 대정령, 아니 정확히는 대정령이 강림한 그 여인의 상태는 정상적이라고 생각하기 힘든 상태였다. 두 손이 묶인 채 알몸으로 그런 어두운 공간에 혼자 방치되어 있는 모습부터가 절대로 일반적이지 않은 것이다. 어차피 얼음의 대정령에 의해 격리되었던 눈보라의 벽이 붕괴된 이상, 그것이 진정되려면 최소한 며칠의 시간은 더 필요한 상황이다. 준상이나 헤네스, 그리고 리체스처럼 냉기 저항을 맞추지 않은 이상은 아무리 광전사들이라 해도 그 눈보라를 버텨낼 수는 없는 일이고, 설령 얼음의 대정령을 제압한 일을 말하더라도 얀트훈센의 상황에 변화가 없는 이상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준상은 최상층에 도달하자 팔찌를 가동해 방어복을 해제한 다음, 자신이 데리고 있는 소환물과 펫들을 그곳에 풀어 놓았다. “둘 다 수고했다.” 준상이 그렇게 말하며 팔을 벌려 보이자, 마찬가지로 방어복을 해제한 헤네스와 인간 크기로 변화한 리체스가 가만히 그 품에 안겼다. “아래쪽의 상황에 변화가 있을 때까지는 잠시 쉬도록 하자.” “네.” 사실 헤네스와 리체스는 마지막 순간 준상이 여인의 목에 가죽 목걸이를 채우고 그와 동시에 모습을 감추는 모습을 보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고 있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어째서 그와 같은 행동을 한 것인지 묻고 싶었지만, 어쩐지 그것을 소리내어 말하는 것이 주저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압도되는 어마어마한 자연현상을 만들어낸 대정령을 별다른 피해 없이 단숨에 제압한 것은 다행이지만, 하필 그 존재가 강림한 대상이 여성이라는 점이 마음에 걸린 것이다. 하지만 준상은 그녀들의 그런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들을 품에서 풀어주고는 다시 말했다. “보일러를 틀어줄 테니 먼저 씻어라. 온천 쪽이 편하면 요정계에 잠시 다녀오든가.” “주인님은요?” 혹시나 싶었던지 리체스가 얼른 질문을 던졌다. “난 잠시 확인할 것이 있어서.” 담담한 대답에 헤네스와 리체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함께 컨테이너 하우스의 탈의실로 향했다. 준상은 염동력으로 그녀들이 샤워실을 쓸 수 있도록 보일러를 작동시킨 다음, 수반 옆에 마련된 벤치에 앉아 이번 퀘스트의 결과를 확인했다. 에픽 퀘스트 – 귀향 5. 당신은 드디어 극한의 장벽을 돌파해 광전사의 고향인 얀트훈센에 도착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단 하나, 이 지역을 온통 얼음으로 뒤덮어 버린 원인을 제거하는 일 뿐입니다. ->완료! (Hidden) 미쳐버린 얼음의 대정령을 제압하십시오. (단독) ->완료! (Hidden) 얀트훈센의 비고를 탐사하십시오. (단독) ->완료! - 당신이 이번 퀘스트에서 보여준 행동과 성과를 정산합니다. 이 과정은 약간의 시간이 소요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축하합니다! : 당신의 랭크는 Ex:Hero입니다. 당신은 영웅적인 행동으로 세계의 변혁을 이루어냈습니다. -북부 대륙을 뒤덮고 있던 눈보라의 원인이었던 얼음의 대정령이 제압됨에 따라 그동안 통행이 불가능했던 동서 대륙의 육상 통로가 개방됩니다. 기본 보상 외에 추가 보상이 지급됩니다. 보상: 경험치 매우 많이, 추가 보상 상자(단독)x2, 추가 보상 상자(Ex:Hero), 칭호[북방의 정복자] -> 보상을 지금 수령하시겠습니까? (Y/n) _ (주의) 수령하지 않은 보상은 7일후 자동 소거됩니다. 이전에 수행했던 다른 에픽 퀘스트에 비하면 히든 퀘스트가 적은 탓에 획득한 추가 보상 상자의 수도 고작 두 개에 불과했다. 대신 진행 과정을 위한 연결점에 지나지 않은 중간 과정의 대부분이 전투로 이루어져 있는 탓에 다른 에픽 퀘스트보다 훨씬 많은 경험치 보상을 획득할 수 있었다. 준상의 현재 레벨은 29레벨.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경험치 보상을 수령하지 않고 보존해 둔 상태였지만, 20레벨이 되었을 때 칭호가 부여되었던 것을 고려해 보면 이번에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당시 얻었던 특수 보상이 바로 주머니 다람쥐인 몽몽이. 처음엔 그냥 그런가 보다 싶었지만, 이후 몽몽이가 자신에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는지를 떠올려 보면 이번에 얻게 될 보상도 제법 기대가 될 수밖에 없는 일이다. 더구나 비고에서 습득한 불사의 용혈이나 이전에 획득한 불굴, 그리고 신기루 꽃의 위기 회피 기능을 생각해 보면 굳이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경험치를 보존할 필요가 있을까 싶은 생각도 드는 것이 사실이다. 잠시 고민하던 준상은 이번 만큼은 바로 경험치를 획득하기로 마음 먹었다. 곧바로 보존해두었던 경험치를 하나씩 수령했지만, 30레벨의 필요 경험치가 생각보다 만만치 않은지 레벨 업 메시지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고, 결국 마지막 경험치 보상마저 전부 수령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의 몸 주위에 흰 빛이 나타났다. 축하합니다! :당신은 처음으로 ‘30레벨’에 도달했습니다. -당신의 위업을 찬양하며 ‘계란 한판’ 칭호를 부여합니다. [칭호 상세 정보 확인은 이곳을 누르십시오.] “...” 계란 한판이라니. 예상치 못했던 칭호 이름에 잠시 정신이 멍해졌던 준상은 일단 칭호 정보부터 확인했다. [계란 한판] :처음으로 30레벨에 도달한 자에게 부여되는 칭호. -효과: 특수 보상 ‘주사기 고슴도치’를 습득할 수 있습니다. -특수 보상 ‘주사기 고슴도치’를 지금 바로 습득하시겠습니까? (Y/n) _ “이건 또...” 몽몽이와 마찬가지로 이번 보상 역시 특수형 펫이었다. 이렇게 되면 동시 소환 가능한 펫보다 보유중인 펫의 숫자가 더 많아지는 셈이지만 일단 준상은 Y를 눌러 습득을 실행한 다음 펫 정보를 확인해 보았다. 펫 정보 이름 : [없음] 종류 : 주사기 고슴도치 레벨 : 1Lv 경험치 : 0 등급 : Rare 분류 : 복합 성장 : 조숙(중) 속성 : 땅 스킬 : 약물주사 1Lv, 약물보관 1Lv [정보] 호감도 : 50 충성도 : 50 카드슬롯 : 2개 [정보] 설명 : 전신에 빽빽하게 바늘이 돋아난 이 귀여운 고슴도치는 사용자가 소지한 각종 포션 카드를 보관하는 것이 가능하며, 이렇게 보관중인 포션 카드를 사용자나 사용자의 펫, 소환물, 특별히 지정한 파티원에게 자동으로 공급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바늘이 돋아나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 주사를 하는 것은 아니니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약물보관은 레벨당 하나의 포션 카드를 보관하는 것이 가능하며, 약물주사는 레벨이 높아질수록 동시에 투여 가능한 포션의 수와 대상의 수가 증가합니다. “자동 습득 다음은 자동 물약인가.” 확실히 이것저것 포션 카드를 많이 가지고 있기는 해도 전투중에 그것을 일일이 챙겨서 사용하는 것도 번거로운 일이라 요새는 다소 거추장스러웠던 것도 사실이고, 카드라는 특성 때문에 아무리 많은 포션을 가지고 있어도 다른 대상에게 사용하는 것이 불가능했던 점까지 감안하면 이 펫 역시 상당히 유용한 기능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준상은 시험 삼아 주사기 고슴도치를 소환해 보았다. 그러자 몽몽이와 비슷한 크기의 고슴도치 한 마리가 흰 빛을 뿜으며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털빛은 흰색이고 콧잔등과 눈동자, 그리고 바늘 아랫부분이 검은 색을 띄고 있었다. 준상이 손을 뻗자, 고슴도치는 흠칫 놀라며 밤송이처럼 몸을 둥글게 말았다. 그대로 집어서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바라보자 네 발을 한데 모은 채 검은 눈으로 가만히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가만히 고슴도치의 검은 눈을 바라보고 있자니, 빠르게 샤워를 마친 헤네스가 다가와 묻는다. “그 아인 누구에요?” “새로운 펫.” “아...” 펫이라는 말에 헤네스는 흠칫하는 표정이었지만, 이내 모르는 척 미소를 지으며 다시 말했다. “저도 만져봐도 되나요?” “물론.” 준상은 그녀에게 여전히 몸을 둥글게 말고 있는 고슴도치를 넘겨준 다음, 다른 보상들을 확인했다.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북방의 정복자라는 칭호였다. [북방의 정복자] :얀트훈센 해방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자에게 부여되는 칭호. -효과: 1. 광전사와 관련된 아이템, 칭호 등의 효과 증폭 2. 광전사에 대한 호감도 상승폭 증가. -칭호는 획득시 자동으로 효과가 적용됩니다. 칭호 효과는 이전에 정령사 에픽과 큰 차이가 없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대상이 요정에서 광전사로 바뀌었다는 정도 뿐이다. 광전사에 대한 호감도 상승폭이라는 부분에서 어쩐지 정신이 멍해지는 기분이 들기는 했지만, 준상은 그와 같은 생각 자체를 곧바로 치워버렸다. 다시 추가 보상 상자를 열어 보려는데, 문득 헤네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하나만 여쭤 봐도 될까요?” “물론.” “그러니까... 그 여자 말인데요.” “...” 펫 목걸이로 제압을 하기는 했지만, 달리 별 생각이 없었던 준상은 헤네스의 시선에 담긴 걱정스런 표정을 보며 그녀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이해했다. “글쎄. 가능하다면 정령계로 되돌려 보내면 어떨까 싶긴 한데.” 어떻게 보면 리체스와 비슷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히스테리를 부리긴 했어도 어느 정도 이성적인 대화가 가능했던 그녀와는 달리, 이번에 펫으로 만든 이 여인은 대화 자체가 가능할지도 의문이었다. 준상은 생각 난 김에 그녀의 정보 역시 확인해 보았다. 펫 정보 이름 : 이벨라 하란두르 종류 : 히딕스인 레벨 : 26Lv 경험치 : 34276 등급 : 불명 분류 : 복합 성장 : 조숙(중) 속성 : 어둠 스킬 : 정령증폭+ 26Lv(-26), 강신 26Lv(-26) [정보] 호감도 : 0 충성도 : 0 카드슬롯 : 5개 [정보] 설명 : 얀트훈센의 저명한 블러드로드 가운데 하나였던 주단 하란두르의 딸. 모종의 이유로 탑에 연금되어 있다가 분노에 휩싸여 그 몸에 얼음의 대정령을 강림시켰습니다. 너무 오랜 기간동안 대정령이 그 몸에 머문 탓에 현재는 본래의 인격이 거의 마모되어 사실상 인간의 형체를 한 대정령이나 다름없는 상태입니다. (주의) 이벨라 하란두르는 현재 신체와 영혼에 극심한 피해를 입은 상태이므로 완전한 회복이 이루어질 때까지 소환이 불가능합니다. 역시 영혼을 먹어치우는 마검인 어나이얼레이터에 찔린 후유증이 상당한 탓인지 소환 불가 상태로 나타나 있었다. 하지만 소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동안 혹시나 하면서도 감히 시험해 볼 엄두를 내지 못했던 사실 하나를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소환물과 마찬가지로 펫 역시 극심한 피해를 입을 경우 역소환을 통해 자체 회복이 가능하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었다. 정령계로 되돌려 보낸다는 말에 헤네스는 조금이나마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마침 무지개빛의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닦아내며 다가오던 리체스가 그 말을 받았다. “정령계로 보내는 건 좀 힘들지도 몰라요.” “어째서?” 리체스는 천천히 걸어와 벤치 위에 앉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정령계는 아예 물질이라는 개념 자체가 보통의 세계와는 전혀 다르거든요. 때문에 저희 요정들도 그곳에는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죠.” “그런 문제가 있었군.” “되돌려 보내는 것이 가능하려면 대정령을 그 여자의 몸에서 분리해야 하는데, 수백년이나 그 몸에 머물러 버렸다면 사실상 인간의 정신이나 감각에 오염되어 보통의 정령으로 돌아가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봐도 무방해요. 이미 타락한 정령이나 마찬가지가 되어 버린 셈이고, 그런 상태에서 정령계로 돌아가 봐야 다른 대정령들의 공격 대상이 될 뿐이에요. 물론 대정령의 힘으로 세월을 버텨온 여자의 몸도 무사하지 못할 테구요.” “흠...” 준상은 골치가 아파왔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어차피 마검에 찔린 후유증은 물론이고 동시 소환 가능한 펫의 숫자에도 제한이 있는 상황이라 당분간은 불러낼 일이 없으니 일단 그 문제는 뒤로 미루어 두기로 했다. 00220 트롤러 ========================================================================= 어쩐지 추궁하는 모양새가 되어서인지, 헤네스는 준상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씻고 오세요.” 리체스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도 아니라는 생각에, 준상은 모르는 척 자리에서 일어나 컨테이너 하우스의 샤워실로 걸음을 옮겼다. 탈의실에서 옷을 벗고 안으로 들어가 샤워기를 틀었다. 그리고 뜨거운 물을 머리에 맞으며 한편으로는 아직 열어보지 못한 보상 상자를 확인했다. 카드정보 명칭 : 근성 레벨 : 1Lv 경험치 : 0 등급 : Rare 분류 : 스킬 성장 : 일반(대) 속성 : 땅 효과 : 치명타 피해 60퍼센트 감소. Cost : 15 Seed : 3슬롯 첫 번째 단독 보상 상자에서 나온 것은 레어급 근성 카드였다. 이 스킬은 델로드란의 수호자를 구성하는 카드이다. 그러고 보니 수호자도 거의 레어급 콤보로 진화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기는 하지만, 카드 습득후 추가 메시지가 나오지 않는 걸로 보니 아직 때가 아닌 모양이다. 준상은 이어서 두 번째 상자를 열었다. 카드정보 명칭 : 침식 레벨 : 1Lv 경험치 : 0 등급 : Rare 분류 : 스킬 성장 : 대기만성(중) 속성 : 어둠 효과 : 적의 감각을 파고들어 무작위로 세 가지 저항 수치를 20% 감소시킵니다. Cost : 20 Seed : 3슬롯 장악과 비슷한 디버프 스킬인가 하는 생각을 떠올리고 있는 순간 갑자기 메시지가 추가로 나타난다. 이런 현상, 제법 오랜만인 것 같다. 최근 퀘스트 보상이 시원치 않아서 조금 성장이 둔화된 느낌이었는데, 모처럼 새로운 콤보가 나오면 좀 더 다채로운 전술의 구사가 가능해지리라.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준상은 급히 다음 메시지를 확인했다. 축하합니다! :콤보카드를 조합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현재 조합 가능한 콤보 카드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마지트의 검은 백합 [상세 확인] -콤보 카드 조합을 원하시면 해당 번호를 누르시고, 만약 조합을 원치 않으신다면 n을 누르세요(1/n) _ “이건...” 아무래도 백합이란 말 자체가 남자보다는 여자에게 어울리는 단어인지라 준상은 조금 난처한 표정으로 상세 정보를 열어 보았다. 마지트의 검은 백합 -무법지대로 이름 높은 마지트의 뒷골목에는 예로부터 조심스럽게 전해지는 소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죽음의 검은 백합. 그녀가 어둠 속에서 나타나 화려한 춤사위를 펼치는 순간, 사람들은 무언가에 흘린 듯한 표정으로 난도질되어 죽음에 이릅니다. [조합상세] -듀얼스톰, 장악, 침식, 매혹 -효과: 1. 방어 무시 효과 20% 증가 2. 각종 디버프 및 상태 이상 발생 확률 및 효과 20% 증가 3. 치명타 확률 15% 증가 장악과 침식으로 적에게 디버프 효과를 부여한 상태에서 듀얼스톰으로 적을 학살하는 콤보인 셈이다. 직접적인 공격력 증가의 효과가 없는 것이 단점이긴 하지만, 방어 무시 효과와 치명타 확률 증가가 간접적인 피해 증가를 유도한다는 장점이 있다. 콤보에 포함된 상태 이상 스킬은 효과가 모호한 매혹 하나 뿐이지만, 준상이 지닌 피칠갑 같은 카드를 추가로 장착하게 되면 공포의 시선이나 사안 같은 상태 이상 효과를 추가로 부여할 수 있으니 이 효과 역시 무시할 수 없다. 그야말로 듀얼 스톰의 효과를 극대화시켜 대량 학살을 유도하는 콤보. 다만 아쉬운 점이라면, 이미 누군가가 최초 조합을 달성한 것인지 칭호가 부여되지 않는다는 것 정도다. 하긴 시간이 제법 지난 상황이니 레어급이 아닌 이상은 칭호까지 바라는 건 무리인지도 모른다. 준상은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영웅급 보상 상자를 열었다. 카드정보 명칭 : 듀얼스톰 레벨 : 1Lv 경험치 : 0 등급 : Hero 분류 : 스킬 성장 : 일반(극대) 속성 : 바람 효과 : 1. 양손에 무기를 들고 회오리바람처럼 돌면서 180퍼센트의 위력으로 공격합니다. 2. 발동 후 평상시 이동 속도의 60퍼센트 속도로 이동이 가능합니다. 3. 발동시 사용하는 무기 길이의 300퍼센트에 해당하는 거리 내에 있는 적을 자신에게로 끌어 들입니다. Cost : 30 Seed : 5슬롯 “역시!” 은근히 영웅급 카드가 나오기를 기대하고 있던 준상은 예상이 들어맞자,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고 말았다. 공격 스킬 가운데는 강타에 이어 두 번째 영웅급 스킬인 셈이지만, 파괴력이 압도적인 대신 쓰고 난 뒤의 후유증이 심각한 강타와는 달리, 이 스킬은 맹렬하게 회전하는 바람에 어지러움이 동반되고 공격 동작이 매우 커서 의외로 반격 받기 쉽다는 점을 제외하면 단점이라 할 만한 것도 거의 없는 셈이다. 더구나 등급이 올라가면서 새로 멀리 있는 적을 살상 범위내로 끌어들이는 효과까지 추가되었다. 검이나 단검 같은 것을 들고 사용한다면 별 의미없는 일인지도 모르지만, 준상이 듀얼 스톰을 발동할 때 주로 쓰는 무기는 무려 1미터 직경을 가진 거대한 두 개의 철구이다. 단순히 그 크기만으로도 무시못할 지경인데, 이 철구는 기본적으로 기다란 쇠사슬로 연결하여 쓰도록 되어 있다. 여기에 이번에 새로 추가된 콤보 효과까지 더해지면, 이건 대량 학살을 넘어 대량 파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의 무시무시한 위력으로 진화하게 된다. “...” 자신이 랑다잘의 분노를 들고 새로운 콤보인 마지트의 검은 백합을 장착한 상태로 영웅급 듀얼 스톰을 발동하는 모습을 상상한 준상은, 자신도 모르게 그 전율스러운 파괴력에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이건... 정말 터무니없군.” 준상은 잠시 멍하니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을 맞고 있다가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일단 물을 잠근 후 샴푸를 꺼내어 머리에 문지르면서 마지막 남은 레벨 업 보상을 확인했다. 랜덤 카드를 실행하자, 다시 새로운 카드 하나가 모습을 드러낸다. 카드정보 명칭 : 눈보라 레벨 : 1Lv 경험치 : 0 등급 : Super Rare 분류 : 소환 성장 : 조숙(대) 속성 : 얼음, 얼음, 바람 효과 : 차가운 눈보라의 정령 1개체를 소환합니다. Cost : 25 Seed : 5슬롯 랜덤 카드에서 나온 것은 슈퍼 레어급의 정령인 눈보라 카드였다. 지니고 있는 속성은 모두 세 가지. 차가운 겨울 바람의 정령인 마파람의 상위 정령이 아닐까 싶은 느낌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이번에도 카드가 나온 순간 새로운 메시지가 연이어 쏟아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얼른 눈보라 카드를 치워 놓고 다음 메시지를 확인했다. 축하합니다! :콤보카드를 조합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현재 조합 가능한 콤보 카드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아겔라한의 대정령사 [상세 확인] -콤보 카드 조합을 원하시면 해당 번호를 누르시고, 만약 조합을 원치 않으신다면 n을 누르세요(1/n) _ “대정령사!” 정령사 에픽을 실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콤보 카드의 업그레이드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잠시 잊고 있었는데, 얄궂게도 광전사 에픽을 클리어 하고 나서야 그것이 실현되었다. 그러고 보면 광전사 에픽인데 불사의 용혈을 제외하고는 직접적으로 광전사와 관련된 보상이 거의 없는 것이 기묘하게 느껴진다. 하기야 이미 영웅급 콤보까지 다 완성한 상태에서 피칠갑 카드가 또 나와봐야 그것도 곤란한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준상은 머리를 감으며 새로운 콤보의 상세 정보를 확인했다. 아겔라한의 대정령사 -아겔라한의 숲에는 예로부터 정령사들의 전설이 전해집니다. 대정령사는 자연과 소통하여 그 본질적인 힘을 사용하는 정령사들 가운데서도 특히 강력한 존재입니다. [조합상세] 정령류의 소환물 카드 3종 이상. (레어 등급 이상인 카드가 세 가지 이상) -효과: 1. 정령 1개체를 소환할 때마다 해당 속성에 대한 저항력 15% 증가 2. 소환한 정령의 속성력을 무기와 방어구에 부여하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3. 서로 다른 속성의 정령을 복수 소환할 경우 상호작용을 일으키는 것이 가능합니다. 우선 정령을 소환함으로서 얻어지는 저항력 증가 수치가 조금 증가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준상이 보유한 정령만 해도 이미 열 넷. 그 가운데 두 가지가 레어급이고 이번에 추가로 슈퍼 레어급을 획득했다. 두 가지 이상의 속성을 지니는 레어급의 저항력 계산이 어떻게 적용되는지는 확인할 도리가 없었지만, 어쨌든 기존보다 훨씬 높은 저항력 보너스를 받게 되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여기에 추가로 기존에는 무기에만 적용이 가능하던 속성력 부여를 방어구에도 적용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새로 추가된 상호작용이라는 표현이 좀 애매한데, 준상은 이것이 서로 다른 속성을 가진 정령들을 이용해 레어급 정령과 같은 효과를 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떠올렸다. 일단 자세한 효과는 나중에 확인해 보기로 하고 준상은 곧바로 다음 메시지를 확인했다. 축하합니다! :당신은 처음으로 ‘아겔라한의 대정령사’ 조합에 성공했습니다! -당신의 위업을 찬양하며 ‘정령의 첫 번째 동반자’ 칭호를 부여합니다. [칭호 상세 정보 확인은 이곳을 누르십시오.] “친구 다음은 동반자인가.” 역시나 첫 번째로 콤보를 달성했음을 알리는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정령의 첫 번째 동반자] :‘아겔라한의 대정령사’ 조합을 최초로 성공한 자에게 부여되는 칭호. -효과: ‘정령의 가호’ 효과를 활성화할 수 있습니다. -칭호는 획득시 자동으로 효과가 적용됩니다. “이건 또 뭐지?” 얼른 효과 내용을 확인해 보았다. 정령의 가호 : 정령의 공격력을 봉인하는 대신 사용자, 또는 소환물이나 펫, 그리고 특별히 지정된 파티원의 속성 저항력을 부여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단, 이 전체 저항력 증가 효과는 현재 장착한 정령사 관련 콤보 카드의 속성 저항력 강화 능력의 70퍼센트 효율을 가집니다. 확인해 보니 공격력을 일시 봉인되는 패널티가 있기는 하지만, 용암의 강이나 이번에 겪은 눈보라 같은 극한의 환경에서 거의 무용지물이나 다름없던 소환물들을 활용할 발판이 이로서 겨우 마련된 셈이다. 물론 정령 만으로 필요한 속성력을 모두 갖추려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정령을 보유해야겠지만 말이다. 새로운 영웅급 스킬 카드를 얻은데다, 그것의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새로운 콤보, 여기에 기존에 지니고 있던 정령사 콤보까지 업그레이드되었으니, 준상으로서는 매우 만족스러운 성과가 아닐 수 없다. 여기에 이번 에픽 퀘스트의 성과는 이런 개인적인 능력 향상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 행성 곳곳에 열려진 정령의 문 때문에 조금 의미가 퇴색되기는 했지만, 동서 대륙을 연결하는 육상 통로가 얀트훈센을 수복함에 따라 다시 개통되었다. 자신의 몸을 단련하는 일에 몰두하는 광전사들의 고향. 그곳에 숨겨진 비고에 엄청난 양의 보물이 숨겨져 있었던 것은 이런 지역적 특성 때문이었음을 준상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해상 운송 수단이 충분히 발달하지 못한 상태에서, 항해는 그야말로 복불복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의 도박이나 다름 없는 일. 그에 반해 육상 교통로는 해상 교통보다 시간이 더 오래 걸린다는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안전성이라는 장점이 있었다. 얀트훈센의 비고 안에 잠들어 있던 보물은 그 교통로를 보호하고 무역을 장악함으로서 얻어낸 결과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중요한 요충지라면 그것을 탐내는 자들이 존재할 것은 당연한 일. 얼음의 대정령이라는 초월적인 대재앙 때문에 지금까지는 감히 손을 뻗지 못했지만, 이제 그것이 수복되었다는 것을 알면 인접한 각 세력들이 이곳을 탐낼 것이 분명하다. 광전사들이 귀향을 그토록 목말라 했던 것은, 단순히 그들의 뿌리를 찾고자 하는 의도만은 아니었음을 준상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00221 트롤러 ========================================================================= 샤워를 마친 준상이 밖으로 나오자 헤네스와 리체스는 손가락으로 몸을 둥글게 만 고슴도치를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리며 뭔가 조용히 얘기를 나누고 있다가, 준상의 기척을 느끼고는 화들짝 놀라며 아무 일도 아닌 척 딴청을 피우기 시작한다.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는지에 대해 궁금함이 전혀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준상은 모르는 척 그들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일단 오늘은 푹 쉬고... 내일은 서울에 잠시 다녀와야겠다.” “갑자기 서울은 왜...” “저 밑에 있는 녀석들 보급품이 필요해서.” 천 명의 인원이 하루에 먹어대는 양은 생각보다 대단히 많다. 더군다나 저 밑에 있는 인원들은 죄다 근육이 울퉁불퉁하게 튀어나온 거한들. 당연히 보통 사람들보다 먹는 양이 월등히 많다. 얀트훈센을 감싸고 있던 눈보라가 사라지고, 그곳에 다시 사람들이 몰려들어 도시나 마을로서의 기능이 정상화되기까지는 아무래도 시간이 제법 걸릴 수밖에 없는 일. 물론 교통로가 정상화되면 주위에서 식량을 매입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이곳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주변 세력들이 물자 부족을 알게 되면 그것을 이용하려 들 것이 분명하니 이곳을 그냥 포기할 것이 아니라면 초반에는 준상이 최소한의 물자 공급을 맡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한동안 이벨류아의 일에 신경을 쓰느라 그쪽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못했으니, 이번에 임서윤과 만나서 새로 등장한 귀환자들의 동향 같은 것도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가는 김에 이곳을 꾸밀만한 물품도 사오면 좋겠지.” “아...” 이벨류아에 저택이 있기는 하지만 그곳은 아무래도 별장 같은 느낌이 강하다. 무엇보다도 그곳에는 리체스가 인간 크기의 모습을 갖출 수 있는 요정 결계가 설치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셋의 보금자리는 신기루 꽃 최상층이라 할 수 있었다. 준상으로서는 그냥 이대로도 별로 상관없었지만, 그녀들의 마음은 또 그렇지 않을테니 넌지시 제안을 해본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헤네스와 리체스는 기쁜 표정을 지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기들끼리 쑥떡거리며 이곳을 꾸밀 계획을 세우기 시작한다. 결국 예정대로 그 날은 편하게 휴식을 취하고, 다음 날이 되자 셋은 정령의 문을 통해 서울의 북한산으로 이동했다. 준상은 숲을 지나 도로로 나오자 곧바로 랩터를 꺼낸 다음 헤네스와 리체스를 태운 채 대형 쇼핑몰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어디부터 갈까.” 주차장에 차를 세우며 그렇게 말하자, 헤네스와 리체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모아 말했다. “가구점이요!” “가구점?” “네!” 준상은 곧바로 그녀들을 가구가 비치되어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 침대라도 새로 사려나 싶었지만 의외로 그녀들이 가장 먼저 살펴보는 것은 책상과 탁자, 그리고 옷장 같은 물품이었다. “이런 건 왜?” 준상이 넌지시 묻자 헤네스가 얼른 대답했다. “어지간한 물품은 컨테이너 하우스에 다 있지만, 준상씨가 혼자 책을 읽는다거나 시간을 보낼 만한 장소가 없잖아요. 그래서 2층 공간에 간단하게 서재를 꾸며 보는 것이 어떨까 싶어서요.” 자신을 생각해 주는 마음이 기특해서 준상은 헤네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물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 했어?” 그러자 헤네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뭔가 깊이 생각할 일이 있으시면 아버지는 종종 서재에 틀어박히시곤 하거든요. 어릴 때 오빠한테 왜 그런 건지 물어보니까 남자들은 그런 식으로 자신만의 공간이 하나씩은 필요한 법이라고 그러더라구요.” “그랬군.” 그들은 고풍스런 책상과 책장 등을 샀으며 추가로 커튼이나 야외용의 파라솔과 의자 같은 것을 구입한 다음 임서윤이 빌려준 창고로 그것을 배달시켰다. 덩치 큰 물품들의 구매가 끝나자, 준상은 식품 매장에 들러 리체스나 요정들에게 줄 먹을 거리를 다시 잔뜩 구입한 다음에야 쇼핑몰에서 빠져 나왔다. 픽업 트럭의 화물칸에 먹을 거리를 잔뜩 옮겨 실은 준상은 헤네스와 리체스를 태우고 주차장을 빠져 나오며 임서윤에게 연락을 넣었다. “아, 오셨습니까.” 메신저를 통해 임서윤의 목소리가 전해지자 준상은 곧바로 본론을 말했다. “식량이 필요하다. 휴대와 섭취가 간편한 것으로.” 이런 식으로 곧바로 용건을 말하면 준상을 처음 겪는 사람은 당황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미 수차례 준상의 요구를 처리해 왔던 서윤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군용의 휴대식품을 민수용으로 판매하는 곳이 제법 있습니다. 양은 얼마나 필요하십니까.” “우선 천 명이 한 달간 먹을 만큼.” “네?” 임서윤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보통의 식량도 아니고 휴대와 섭취가 간편한 것으로 천 명 분이나 되는 대량을 한 번에 구입하다니. 이전에 몇 차례 구입해 간 포목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것은 명백하게 전투 물자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어려운가?” “아, 아니... 그건 아닙니다. 다만 생각보다 양이 많은지라...” “언제까지 가능하겠나.” “적어도 내일까지는 시간을 주셔야...” “알았다.” 임서윤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민수용으로 생산되기는 해도 그 정도 물량을 맞추려면 모르긴 해도 그의 휘하에서 일하는 직원들이 오늘 밤을 꼬박 세워야만 할 것이다. “숙박할 곳은 이미 알아보셨습니까?” “아니.” “그렇다면 저희와 함께 지내시는 것은 어떠십니까. 계속 호텔에서만 지내기도 뭐해서 교외에 별장을 하나 마련했습니다. 아마 지내시기에 불편함은 없을 겁니다.” “흠...” 호텔이 편하기는 하지만 계속 수영장이나 기타 부대시설을 전세 내는 건 곤란했던 모양이다. 준상이 바로 대답하지 않자, 서윤은 급하게 다시 말을 이었다. “내키지 않으시면 제가 찾아뵙겠습니다. 마침 드릴 말씀도 있으니.” 그 말을 듣고 준상은 바로 대답했다. “아니다. 내가 찾아가도록 하지. 주소가 어디라고?” “그러니까...” 준상은 서윤이 불러준 주소를 네비에 입력한 다음 연락을 끊었다. 네비가 지시하는 대로 조금 길을 달리자 양평 조금 못 미친 곳에 위치한 펜션이 하나 모습을 드러냈다. “별장이라더니 펜션을 통째로 산 모양이군.” 숲이 우거진 야트막한 언덕 아래 통나무집과 현대식 건물이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커다란 랩터가 펜션 입구에 들어서자 운동복 차림의 여자가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준상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바라보니 바로 뇌격계의 마법과 바람의 정령을 사용하는 정다빈이었다. 근처 산으로 조깅을 하다 왔는지 땀에 흠뻑 젖은 그녀는 갑자기 준상이 이곳을 찾아온 것이 의외였는지 우물쭈물하며 어쩔 줄을 몰라했다. “서윤은 안에 있나?” “네? 아... 아마 계실 거에요. 하지만 그게... 저도 지금 막 돌아온 거라...” “알았다.” 중언부언하는 정다빈의 모습을 일별한 준상은 주차장에 랩터를 세웠다. 그러자 차소리를 들었는지, 통나무집 안에서 임서윤과 진세아가 달려 나왔다. “어서 오십시오. 생각보다 일찍 오셨군요.” 임서윤이 먼저 인사를 건네자 진세아는 미소를 지으며 헤네스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보이고는 준상을 향해 말했다. “안녕하세요. 이곳은 처음이시죠? 이쪽으로 올라오세요.” 준상과 헤네스, 그리고 리체스는 그들에게 안내되어 통나무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집 안은 겉모습과는 다르게 현대식의 인테리어가 구비되어 있었다. 준상과 헤네스는 진세아가 이끄는 대로 거실의 고동색 가죽 소파 위에 자리를 잡았고, 리체스는 자신의 지정석인 준상의 어깨 위에 앉은 채 방 안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들이 자리에 앉자, 임서윤이 주방에서 마실 것을 챙겨 가지고 거실로 나왔다. “변변한 건 없지만, 일단 드시죠.” 그러자 헤네스가 준상 대신 살짝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별 말씀을.” 준상은 헤네스가 건네준 음료수 잔을 받아들고는 자신의 맞은 편에 앉는 임서윤을 보며 말했다. “용건이 있다고?” “예, 그것이...” 임서윤은 난처한 표정으로 잠시 이마를 긁적이다가 준상을 향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전에 일어났던 실종 사건 기억하십니까?” “물론.” 기억하고 말고 할 것도 없는 것이, 당시 준상은 무려 다섯 명이나 되는 다크 시드 사용자와 마주쳐야만 했었다. 기지를 발휘해 상황을 잘 해결하긴 했지만, 자칫하면 큰 위험에 빠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지금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뭔가 문제라도 생긴 건가?” 준상의 말에 서윤은 조금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단순한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엔 좀 공교로워서 말입니다.” “무슨 소리지?” “그 근처에 살고 있는 귀환자들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서윤의 말에 준상은 얼굴을 찌푸렸다. “몇이나?” “현재 파악된 것은 네 명입니다.” “흠...” “사실 저희들의 처지를 고려해 보면 퀘스트에 불려갔다가 제대로 그곳에서 변을 당했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겠습니다만,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엔 너무 공교로운 일이라서 말입니다.” “일리가 있군.” 준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실 생각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다섯 명의 다크 시드 사용자가 떼죽음을 당한 곳에서 귀환자들이 하나둘씩 자취를 감추고 있다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역시 보복이라는 단어였다. 하지만 그들은 금기에 얽매여 있는 것이 아니었던가. 금기를 어겼다는 사실 때문에 준상을 다른 누군가로 착각하며 벌벌 떨던 다크 시드 사용자들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한데, 이렇게 적극적으로 귀환자들을 사냥하고 있다는 사실이 뭔가 석연치 않다. 하지만 만약 금기 그 자체를 감독하고 있는 누군가가 이 일에 개입되었다면 어떨까. 다크 시드 사용자들이 ‘그’라고 호칭하는 누군가나, 칠성좌라는 우스꽝스러운 이름으로 불리는 누군가가 직접 나선 것이라면? 그렇다면 금기를 두려워하지 않고도 충분히 이런 일을 꾸밀 수 있을 것이다. “음...” 이것은 상당히 곤란한 일이다. 무엇보다도 상대가 어느 정도의 힘을 지녔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무턱대고 뛰어드는 건 너무나도 위험천만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을 모른 척 할 수 없는 것은, 그들이 이 퀘스트에 대해 무언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점 때문이었다. 헤네스의 오빠인 젤란이나, 요정계의 여왕 보좌관 셀라, 그리고 만년을 살아온 리체스를 통해 현재 자신이 겪고 있는 일련의 과정을 거쳐 온 사람이 있었는지에 대해 조사를 해보고는 있었지만 그리 신통한 대답을 전해 들을 수가 없었다. 물론 그런 실마리 따위 그냥 무시하고 지금 자신이 처한 현실에만 열중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무시하고 지나쳐 버리기엔, 이전에 다크 시드 사용자가 말했던 수확의 날이라는 것이 어쩐지 너무나 신경이 쓰인다. 지금 모처럼 마각을 드러낸 저들의 꼬리를 잡지 않으면, 또 언제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 그와 같은 생각이 떠오르자, 준상은 잠시 더 고민하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이 일, 국가가 개입된 건가?” 임서윤은 흠칫하더니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 “눈치가 빠르시군요.” “그렇지 않고서야 네가 귀환자 몇 명 정도 실종된 것에 이렇게 적극적으로 개입할 이유가 없으니까.” 임서윤의 옆에 다소곳이 앉아 있던 진세아가 그 말을 듣고는 웃음을 지었다. “거봐요. 그 시커먼 속을 바로 알아볼 거라고 그랬잖아요.” 그녀의 말에 임서윤은 발끈했다. “시커먼 속이라뇨. 어떻게 말을 해도.”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헤네스가 웃자 임서윤은 할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푸욱 내쉬며 말했다. “커험. 솔직히 골치 아픈 게 사실입니다. 저희들이 괴물 꽃을 처치했다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뭔가 연관이 있다 싶은 일은 일단 저에게 문의를 하거든요.” “흠...” “그것만이라면 상관이 없는데, 정부 쪽에서는 아예 전담 부서를 만들테니 그곳을 맡아 달라고까지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다시 한 번 한숨을 푸욱 내쉰 서윤은 쓴웃음을 지으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말이 나와서 얘기입니다만 금방이라도 그 괴물 꽃 같은 게 쳐들어오지 않을까 싶어서 잠도 설칠 지경이라니까요.” 너스레가 조금 섞여 있긴 했지만 그것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들도 처음보다는 제법 강해진 상태긴 하지만 괴물 꽃 같은 존재와 겨루기에는 여전히 객관적으로 열세인 상황이다. 어찌 보면 그동안 장기 투숙하고 있던 호텔에서 빠져 나와 이런 인적이 드문 펜션에 머물고 있는 것 역시 이번 일과 무관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만약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호텔에 괴물 꽃 같은 것이 덮쳐오면 한두 사람 죽는 걸로는 끝나지 않을테니 말이다. 대략의 상황이 파악되자, 준상은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옆 자리에 앉아 있던 헤네스도 얼른 뒤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로 가시려고요?” 임서윤이 소파에서 일어나며 말하자 준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시간 끌 이유가 있겠나.”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진세아가 그에게 서류 하나를 건네주었다. “이번에 실종된 귀환자들의 주소와 평소 자주 드나들던 곳을 요약해 두었어요.” 준상이 그것을 받아들자, 진세아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을 이었다. “실은 방금 전까지도 그것 때문에 서윤씨랑 싸우던 참이에요.” “어째서?” “준상씨에게 바로 연락을 해야 할지, 아니면 좀 더 면밀히 조사해서 확증을 잡아야 할지에 대해서요.” “그랬군.” 진세아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저희끼리 해결하고 싶어도 그 괴물 꽃 같은 녀석이 상대라고 생각하면 역시 몸이 굳어버리더군요.” 그러자 임서윤이 얼른 끼어들며 다시 말했다. “능력도 안 되면서 굳이 벌집을 건드릴 이유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오실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부탁드립니다.” 어찌 보면 너무 준상에게 의존한다고 생각될 수도 있는 일이지만 지금의 그들로서는 그것이 최선이었다. 준상은 곧바로 그들의 배웅을 받으며 펜션을 빠져 나와 일전의 사건이 일어났던 유원지로 향했다. 정말로 이번 일이 다크 시드 사용자들의 소행일 경우를 대비해, 준상은 몽몽이를 소환해 대시 보드 위에 앉혀 둔 채로 강변을 천천히 돌며 서류에 표시된 곳을 하나씩 신중하게 확인했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바짝 긴장한 채로 유원지가 위치한 강변을 한 바퀴 돌았지만, 행인지 불행인지 다크 시드 사용자들의 모습은 발견할 수가 없었다. 날이 어둑어둑 해지자 준상은 일단 탐색을 포기하고 일단 서윤의 펜션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차를 돌려 강변에서 벗어난 준상은 펜션이 밀집된 장소를 지나다가 한 무리의 남녀들이 펜션 앞 공터에 모여 캠프 파이어를 준비하는 모습을 발견했다. 조금 이르긴 하지만 MT라도 온 것인가 하며 지나치려는데, 문득 대시 보드에 리체스와 등을 기대고 앉아 있던 몽몽이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아얏!” 덕분에 뒤로 넘어가 바닥에 머리를 부딪힌 리체스가 비명을 지르자, 준상은 물론이거니와 살짝 피곤한 표정을 짓고 있던 헤네스마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몽몽이는 대시 보드 위에 앞발을 들고 일어선 채, 캠프 파이어를 준비하고 있는 남녀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행동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 몽몽이가 지닌 안목의 능력에 반응하는 무언가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설마 저들 중에 다크 시드 사용자가 섞여 있는 것일까. 준상은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조심스럽게 캠프 파이어가 벌어지고 있는 공터 근처로 차를 접근시켰다. 그리고, 어느 정도 거리에 이르러 차를 멈추고 안목의 능력을 개방했다. 순간. "헉!" 준상은 자신의 두 눈에 비춰진 풍경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헛숨을 들이키고 말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캠프 파이어를 준비하는 남녀들 속에 다크 시드 사용자가 섞여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무려 십여 명에 달하는 그들 모두가,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다크 시드 사용자였던 것이다. 그들의 머리 위에 하나도 빠짐없이 피어오르고 있는 검은 색의 아지랑이를 보고 잠시 아연해 하고 있는데, 그런 준상의 눈앞에 하나의 메시지가 나타났다. [당신은 특수 임무 발동 조건을 만족하고 있지 않습니다.] 언제나와 같은 메시지인 줄 알고 그대로 치워 버리려다 준상은 다시금 멈칫할 수 밖에 없었다. 다르다.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조건을 만족한다는 메시지가 아니었다. 그것을 깨달은 준상의 눈앞에, 다시 새로운 메시지가 나타났다. [위험합니다. 가급적 빨리 현재 위치에서 벗어나십시오.] 00222 트롤러 ========================================================================= 이전에는 본 적이 없었던 경고 메시지가 눈앞에 나타나자 준상은 머리가 복잡해졌다. 일단 지금 눈앞에 보이는 적의 수는 약 십여 명. 문제는 이 숫자가 전부인지 아닌지조차 퀘스트가 발동되지 않은 지금으로서는 확인이 불가능하다는 점. 급히 발동시킨 통찰의 능력으로 파악된 다크 시드 사용자들의 색은 녹색. 보통의 괴물들이라면 이것은 준상이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의 적이라는 의미가 되지만, 다크 시드 사용자들은 그런 식의 판단을 내리기엔 그들이 지닌 능력이 너무 독특하다. 적에 대한 정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무작정 덤비는 건 무모한 짓. 더구나 퀘스트조차 발동되지 않은 상태이므로 준상은 우선 이 상황에서 벗어나기로 마음먹었다. 몽몽이가 반응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준상이 입을 굳게 다문 채 차를 몰아 그 자리를 벗어나려 하자, 눈치 빠른 헤네스와 리체스는 상황이 여의치 않음을 깨달았는지 마름 침을 꿀꺽 삼켰다. 천천히 차를 몰아 캠프 파이어가 준비 중인 공터에서 멀어지는가 싶었지만, 길 반대편에서 다시 십여명의 남녀가 뭔가 짐을 잔뜩 들고 다가오고 있는 모습이 눈에 보인다. 일부러 맞춰 입은 것인지 같은 종류의 트레이닝복을 착용한 그들의 모습에 준상은 얼굴을 찌푸렸다. 아니나 다를까. 대시 보드 위에서 공터 쪽을 바라보던 몽몽이가 새로 나타난 사람들을 향해 반응을 보였고, 안목을 활성화한 준상의 눈에도 그들의 머리에서 뭉게뭉게 솟아나는 검은 아지랑이가 보이기 시작한다. 새로 나타난 인원은 모두 다섯 명. 게다가 놀랍게도 이 다섯 명은 모두 노란색 깃발로 그 능력이 표시되고 있었다. 녹색으로 표시되어도 가볍게 보지 못할 판에, 노란색 깃발로만 다섯 명이라니. 정말 다크 시드 사용자들끼리 모여서 무슨 단합 대회라도 벌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그들이 점차 차로 다가오는 모습을 보고 준상은 다시 차를 돌려 빠져 나가는 편이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여기서 갑자기 방향을 트는 건 너무 부자연스러운 일이라 그냥 모르는 척 지나치기로 마음먹었다. “킥! 그러니까 말야. 반응이 참...” “이런 변태 같은 놈.” “하긴 내가 좀 그렇긴 하지.” 무슨 얘기를 하는지 자기들끼리 깔깔대며 지나가던 그들은 웅장한 느낌의 랩터가 옆으로 지나치자 흘깃 그 안에 타고 있는 준상을 바라보았다. 순간 그들과 눈이 마주쳤지만, 준상은 태연함을 가장하며 그대로 차를 몰아 지나쳐갔다. 금방이라도 등 뒤에서 그들이 기습을 가하지는 않을까 싶어 날카롭게 날이 선 초감각으로 주위를 살피던 준상은 캠프 파이어가 벌어지는 공터에서 어느 정도 멀어지고 나서야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 그러자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헤네스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괜찮으세요.” “그래.” 일단은 저들이 전부라고 봐도 좋을까. 처음에는 지금까지 접해보지 못했던 상황에 당황한 탓에 깨닫지 못하고 있었으나,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 저런 식으로 다크 시드 사용자들이 모여 있는 것은 아무래도 부자연스러웠다. 게다가 트레이닝복까지 맞춰 입은 채 캠프 파이어라니.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영락없이 MT나 워크샵을 나온 사람들이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어째서 이곳에 모여 있는 것일까. 가능성은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단순하게 생각해 보면 귀환자들의 실종 때문에 조사를 나온 준상과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 이곳에서 사라진 다섯 명의 다크 시드 사용자들 때문에 집결한 것이리라. 문제는 마지막에 보았던 다섯 명이다. 예전에도 준상은 통찰에 노란 색으로 표시된 적들과 몇 번이나 싸운 경험이 있다. 이 통찰이라는 능력 자체가 명확한 수치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대강의 수준을 보여주는 정도인지라 그저 참고 정도의 의미 밖에 없기는 하다. 하지만 분명한 건, 에픽 퀘스트를 몇 번이나 클리어한 준상과 비슷한 수준이라는 것 자체가 이미 엄청난 일 아니겠는가. 단순히 레벨 비교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이것은 쉽게 생각하고 넘어갈 일이 아니다. 게다가... 어쩐지 준상은 그가 방금 전에 본 인원조차 전부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들의 포진이 적을 유인하고 섬멸하기 위한 것이라면, 한 곳에 몰려 있기 보다는 여러 곳에 분산되어 있는 편이 유사시 포위망을 갖추기 편리한 것은 달리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아무래도 좀 더 주위를 둘러봐야겠다. 피곤하겠지만 참아라.” “네.” 헤네스는 준상의 말에 바로 고개를 끄덕였고, 리체스는 얼른 그들에게 피로 회복의 마법을 걸어주었다. “어때요?” “한결 낫군. 고맙다.” 조심스럽게 차를 몰아 방을 알아보는 척 하며 주위의 펜션을 돌아본 준상은 놀랍게도 처음 그가 발견했던 인원과 같은 다크 시드 사용자들의 그룹이 두 개 더 이곳에 머물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파악된 인원만 해도, 녹색으로 분류되는 자가 약 사십 명에 노란색으로 분류되는 자는 열 명이나 되었다. “음...” 일반적인 퀘스트로 따지면, 메인 보스가 열 명에 중간 보스급이 사십여명이나 되는 셈이다. “이래서 위험하다고 나온 것인가.” 여기에 만에 하나라도 ‘그’나 칠성좌 같은 존재까지 가세한다면, 제아무리 준상이라도 감당하기 어려운 것은 당연한 일. 느닷없이 현재 장소에서 빠르게 이탈하라는 메시지가 나온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이성적으로 생각한다면 여기서는 일단 물러나는 것이 상책이다. 아니, 물러나지는 않더라도 정면으로 대결을 벌이는 것은 너무나도 미련한 짓. 하지만 그렇다고 모처럼 적을 대량으로 발견했는데 이대로 물러나는 것도 뭔가 찜찜한 일이다. 하다못해 표식이라도 새겨둘 수 있다면 이후에 그들이 다시 흩어졌을 때 하나씩 처리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아쉽게도 그런 능력은 준상에게 부여되어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다섯 명의 다크 시드 사용자들을 상대할 때처럼 적을 기만하거나, 적이 예상하지 못한 상황과 장소를 연출해 하나씩 각개격파하는 방법이 있다. “리체스.” “네.” “일전에 사막에서 상대한 마수 기억하나.” “마수요?” 리체스는 기억을 잠시 더듬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나요.” “요정계에서라면 그 정도 마수를 너 혼자 상대하는 것이 가능할까?” 준상은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지만, 리체스는 웃으며 대답했다. “세상에, 무슨 말도 안 되는 얘길 하시는 거에요.” “역시 무리인가?” 준상의 도발에 리체스는 발끈하며 대답했다. “무리라뇨. 요정계라면 그런 마수 따위 열 마리 정도가 한꺼번에 덤벼도 가뿐해요. 절 어떻게 보시고. 칫.” “정말?” “물론이죠. 서클릿까지 쓴 상태라면, 더 완벽하긴 하지만요.” “서클릿? 그게 그 정도로 강력한 물건인가?” 준상의 물음에 리체스는 손가락을 까딱여 보이며 대답했다. “그건 말이죠. 요정계의 의지라 할 수 있어요. 그걸 쓰고 있는 이상은 요정계 안에서 여왕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구요.” “그건 또 새로운 사실이군.” “이제서야 말이지만, 그때 제가 리시스한테 서클릿을 넘기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주인님의 펫이 될 일도 없었을 거에요. 뭐... 지금 상황이 싫다는 건 아니지만요.” “그렇군.” 단정적으로 말하고는 있었지만, 사실 리체스도 그 부분에 있어서는 조금 자신이 없었다. 애초에 만 년을 살아온 그녀가 다른 곳도 아니고 요정계에서 그런 식으로 제압된 것 자체가 사실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기 때문이다. 준상의 말에 대답하고 있던 리체스는 이 문답이 의미하는 바를 어렵지 않게 이해했다. “적들을 요정계로 끌어들이실 생각이신가요?” 그 말에 준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너무 많아서 정면 승부를 내기엔 곤란하거든.” “아하...” 리체스는 손가락으로 턱을 짚은 채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며 뭔가를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정말로 그러실 생각이라면 조금 준비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은데요.” “어떤?” 준상이 궁금한 표정을 짓자, 리체스는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일단 덫이라고 해두죠. 자세한 건 나중의 즐거움으로 삼으시는 것이 어떨까요?” 조금은 장난스러운 그 대답에 준상은 일단 확인부터 했다. “자신은 있는 거겠지?” “물론이죠.” 리체스의 말에 준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원하는대로 해봐.” “헤헤,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먼저 가서 준비할테니 정령의 문을 열어주세요.” “그래.” 준상은 자신의 몸에 마련된 정령의 문을 열었다. “얼마 안 걸릴 거에요. 준비가 끝나는 대로 다시 말씀드릴게요.” “그래.” 리체스가 정령의 문 속으로 모습을 감추자, 준상은 옆자리에 조용히 앉아서 그들의 얘기를 경청하고 있던 헤네스에게 말했다. “지루했지?” 헤네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지루하긴요.” 준상은 일단 멀리서 피어오르기 시작한 캠프파이어를 바라보았다. 그냥 이렇게만 봐서는 그런 흉악한 힘을 지닌 자들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모습에 준상은 자신도 모르게 혀를 차고 말았다. “일단... 어디 가서 잠시 휴식이라도 취하는 편이 좋겠다.” “편하신대로 하세요.” 준상은 상황을 살피며 휴식을 취할 만한 장소가 없는지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침 언덕 위에 모텔 하나가 자리 잡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저곳이라면 조금 거리가 있기는 하지만 다크 시드 사용자들이 머물고 있는 펜션이 한눈에 들어온다. “저곳이 좋겠군.” “...” 준상은 차를 몰고 근처의 으슥한 숲속으로 들어간 다음, 헤네스에게 말했다. “잠시 모습을 숨기고 날 따라와.” “네.” 헤네스는 차에서 내린 뒤 곧바로 붉은 보석이 박힌 귀걸이에 손을 가져가더니 이내 준상의 시야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준상은 차를 인벤토리에 집어넣은 다음, 모텔로 들어가 방을 잡았고, 안에 들어서자 헤네스는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준상은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젖히며 여전히 타오르고 있는 캠프파이어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조용히 헤네스가 다가와 뒤에서 그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헤네스?” 전에 없던 행동에 준상이 고개를 돌리자 헤네스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적이 많이 강한가요?” 평소대로라면 바로 달려가서 박살을 냈을텐데, 요정계로 리체스를 보내 이런 저런 준비를 시키는 모습을 보니 아무래도 불안해진 모양이다. “불안하니?” “...” 헤네스는 고개를 저었지만, 표정은 여전히 어두운 상태였다. 준상은 자신의 허리에 둘러진 헤네스의 작고 부드러운 손을 만지작거리다가 이렇게 말했다. “모처럼인데, 단둘이 목욕이나 할까?” “네?” 헤네스는 뜬금없는 준상의 말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리체스까지 셋이서는 간혹 함께 목욕을 한 적이 있지만, 그건 사실 대담한 리체스의 행동에 대한 경쟁심의 발로일 뿐이다. “그, 그게...” 헤네스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런 저런 상상 때문에 곧바로 얼굴이 시뻘개져서 말을 잇지 못했지만, 준상은 대답이 나오기도 전에 몸을 빙글 돌리며 그녀의 몸을 번쩍 안아들었다. “주, 준상씨?” 당황한 헤네스가 부르자, 준상은 담담한 표정으로 그녀를 마주보며 물었다. “싫어?” “...” 헤네스는 그 담담하면서도 묵직한 시선과 마주치자 그의 얼굴에서 환한 빛이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런 걸 콩깍지가 씌었다고 하는 거겠지. 헤네스는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감히 계속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그의 탄탄한 가슴으로 시선을 내리며 살짝 고개를 저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 주위가 완전히 어둠에 잠겼을 즈음이 되어서야 리체스는 모든 준비를 마치고 요정계에서 돌아왔다. “응?” 준상의 배꼽에 열린 정령의 문을 통해 복귀한 리체스는 돌아오자마자 눈에 들어오는 풍경에 얼굴을 찌푸렸다. 알몸으로 서로에게 몸을 기댄 채 땀에 젖어 침대 위에 누워 있는 그 모습을 보고 방금 전까지 이곳에서 벌어졌던 일을 눈치 채지 못한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치! 제가 자리를 비운 동안 둘만 오붓한 시간을 보내다니. 이거 너무 한 거 아니에요?”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며 리체스가 항의하자, 헤네스가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히며 변명했다. “그, 그게... 준상씨는 제 긴장을 풀어주려고 그런 거에요.” “으이구, 말이나 못하면.” 리체스는 가만히 태연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준상의 드러난 가슴팍 위에 내려 앉으며 이렇게 말했다. “전에 말한 키스도 아직 안 해주고선.” 투덜거리는 리체스를 향해 그제서야 준상이 입을 열었다. “이번 일이 끝나면 해주도록 하마.” “정말요?” “물론.” “헤헤...” 리체스는 무엇을 상상했는지, 얼굴을 발그레하니 붉히며 고개를 붕붕 내저었다. 그들은 잠시 더 모텔에서 휴식을 취하다가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 되자, 그제서야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자.” “네!” 00223 트롤러 ========================================================================= 준상은 어둠 속에 모습을 숨긴 채 조용히 모텔 방을 빠져 나왔다. “수가 많은데 괜찮겠어요?” 오솔길을 지나며 헤네스의 걱정스러운 말에 리체스가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괜찮아. 그래서 준비를 하고 온 거니까.” “아하...” 그때 몽몽이를 어깨에 태운 채 앞서가던 준상이 조용히 자세를 낮췄고, 그 모습을 본 헤네스와 리체스는 얼른 입을 닫으며 마찬가지로 몸을 숙였다. “리체스.” “네.” “준비해라.” “맡겨주세요.” 리체스는 얼른 열려있는 정령의 문 속으로 모습을 숨겼고, 준상은 그녀가 사라지자 곧바로 팔찌를 작동시켜 방어복을 착용한 다음 헤네스에게 말했다. “리체스와 함께 있어.” “네.” 난전이라면 어떨지 몰라도 하나씩 신중하게 처리해야 하는 상황이란 걸 알기에 헤네스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준상이 몸을 일으키자, 곧바로 그의 품에 안기듯 뛰어들었다. 이런 식으로 준상의 몸에 설치된 정령의 문을 이용한 것은 처음이라 헤네스는 어둡던 시야가 갑자기 확 밝아지자 조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깜짝이야. 난 또 적인 줄 알고 놀랐잖아.” 바라보니 인간 크기로 변한 리체스가 헤네스를 향해 뻗은 손을 다시 내리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녀는 헤네스를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 “이리와. 내가 요정 여왕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보여줄 테니까.” “부탁드려요.” “걱정마.” 헤네스는 리체스의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며 조금 가슴이 아파왔다. 준상이 자신에게 바라는 것이 싸움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자신의 재능 역시 그런 쪽이 아니라는 것도 아니지만, 이렇게 중요한 순간에 그에게 큰 도움이 되는 리체스의 모습이 부러운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헤네스가 옆에 서자, 리체스는 주위에 대기하고 있던 요정 기사들을 움직여 정령의 문 주위를 에워싸도록 지시했다. 요정계에서 그렇게 마지막 태세를 갖추고 있을 때, 준상은 투명화로 모습을 감춘 상태로 위상전이를 펼쳐 우선 캠프 파이어가 벌어지고 있는 공터 주위로 접근했다. 그러자 다시 한 번 경고 메시지가 준상의 시야에 나타났다. [당신은 특수 임무 발동 조건을 만족하고 있지 않습니다.] [위험합니다. 가급적 빨리 현재 위치에서 벗어나십시오.] 하지만 준상은 그대로 그 자리에 머물며 적의 상태를 지켜보았다. 이번에 치를 전투의 요점은 들키지 않은 상태에서 조용히 가능한 한 많은 수의 적을 처리하는 것에 있었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그냥 어둠 속에서 숨어서 기습적인 공격을 가하는 것만으로도 쉽게 처리할 수 있다. 아니, 애초에 인간이라면 이런 식으로 조심스럽게 접근할 것도 없이 최근 새로 얻은 검은 백합 콤보를 장착하고 난입해 듀얼 스톰을 실행하기만 해도 손쉽게 학살이 가능하다. 하지만 저들은 보통의 인간과는 차원이 다른 힘을 가진 존재들이기에 그런 방법 자체가 통할 가능성이 없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요정계와 그 안에서 본래의 힘을 모두 발휘할 수 있는 리체스의 존재지만, 이것도 마냥 간단한 일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저들을 요정계로 들여보내는 일 자체가 결코 쉽지 않은 탓이다. 준상의 몸에 정령의 문이 있다고는 해도, 그들을 품 안으로 끌어들이지 못하면 아무 의미가 없다. “...” 준상은 가만히 사그라드는 캠프 파이어를 노려보았다. 저녁부터 피우기 시작한 탓에 이미 불은 거의 꺼진 상황이었지만, 다크 시드 사용자들은 그 주위에 둘러 앉아 무언가 신중하게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생각 같아서는 좀 더 접근해 그 내용을 듣고 싶었다. 그러나 저들 역시 초감각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은 데다, 정령을 접근시키면 거의 확실하게 발각된다고 봐도 무방하기에 거리를 유지한 채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조금 지루할 정도의 시간이 지난 뒤에야 다크 시드 사용자들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불을 끄고 쓰레기를 모은 그들은 두 남녀에게 쓰레기 봉투를 맡기고는 하품을 하며 숙소로 향했다. 준상은 그 모습을 빠짐없이 지켜보다가, 일행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두 남녀의 뒤를 가만히 따라갔다. “후아암...” “피곤해?” “조금.” 두 남녀는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며 커다란 쓰레기 수거용 컨테이너로 향했다. 그들은 손에 들린 쓰레기 봉투를 그 안에 집어넣고는 손을 털며 주위를 둘러 보았다. “이대로 들어갈거야?” “그럼?” “모처럼인데 조금 있다가 들어가는 건 어때?” “흐음...” 남자가 은근한 말투로 유혹하자 여자는 잠시 주저하다가 마지못한 척 그것에 응했다. “잠깐이라면 좋아.” 두 남녀는 조용히 어둑한 수풀 속으로 향했다. 마침내 다른 사람의 시야가 닿지 않는 어둠 속에 도착하자, 갑자기 남자가 여자를 덮쳤고, 여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스스로 상의를 벗으며 남자의 입술을 더듬었다. “너무 급한 거 아니야?” “네가 날 그렇게 만들잖아.” “후후후...” 그들은 이내 수풀 속으로 뒤엉켜 넘어지며 서로의 몸을 탐닉하기 시작했다. 준상은 어둠 속에 숨어서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그들이 쾌락에 빠져 헐떡거릴 즈음이 되어서야 비로소 몸을 움직였다. “헉! 헉! 젠장... 너 진짜 장난 아니다.” “흐응... 그거 칭찬이야? 하읏!” “물론!” “너도 보기보단 멋져.” “보기보단?” “그냥 봐서는 샌님 같아 보이거든.” “겉보기랑은 다르다 이건가?” “몰라, 이 멍청아.” 여자는 얄밉다는 듯이 남자의 가슴을 손으로 툭 밀고는 상대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큭!” 그러자 갑자기 남자가 짓눌린 듯한 신음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키는가 싶더니 그대로 허공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어?” 여자는 묵직한 남자의 몸무게로부터 갑자기 해방되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얼른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 보았지만, 방금 전까지 자신의 몸 위에서 헐떡거리던 남자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무의식중에 너무 세게 쳐서 날아가 버리기라도 한 것일까. 그런 생각마저 떠올리며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데, 문득 그녀의 목 주위에 흰 실 같은 것이 드리워졌다. 거미줄인가 하고 무의식중에 그것을 털어내려 했지만, 미처 손을 들기도 전에 그 하얀 실은 그대로 위로 당겨지며 그녀의 목을 죄어 왔다. 그냥 목을 조르는 정도가 아니다. 흰 실은 엄청난 힘으로 그녀의 몸 전체를 들어올리고 있었다. “큭!” 그제서야 뭔가가 잘못되었음을 느끼며 몸부림을 쳤다. 격렬한 정사로 잠시 흐트러졌던 감각이 되살아나며, 곧바로 자신의 등 뒤에 누군가 다가와 있는 것을 눈치 챘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것을 알아채 봐야 너무 늦은 일이었다. 미처 뭔가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그녀는 몸이 휙 하고 당겨지며 어디론가 끌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았고, 아차 싶었을 때는 이미 주위의 풍경이 완전히 뒤바뀌고 난 뒤였다. “어?” 마치 어린 아이들이 크레파스로 낙서해 놓은 듯한 기묘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지만, 여자는 그보다 먼저 급히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녀가 채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갑자기 등 뒤에서 낭랑한 외침이 들려왔다. “피어나라, 유혹의 덩굴이여!” “뭐?” 이게 무슨 뜬금없는 소리인가 싶어 고개를 돌리는 순간, 발밑에서 엄청난 속도로 나무 덩굴이 싹을 틔우더니 그대로 여자의 몸을 뒤덮어 버렸다. “큭!” 여자는 당황해서 얼른 몸을 변이시켰다. 순식간에 그녀의 몸에 비늘이 돋아나고 다리가 하나로 합쳐지며 하체가 뱀의 형상으로 바뀌었다. “이런 어린애 장난 같은 짓을!” 이상 없이 자신의 몸이 변이를 마치자 여자는 날카로운 손톱이 자라난 팔을 휘둘러 덩굴을 잘라버리려 했지만, 이 터무니 없이 질긴 덩굴은 그런 행동에도 아랑곳없이 성장을 계속해 순식간에 그녀의 몸을 얼굴만 남긴 채 전부 뒤덮어 버리고 말았다. “이, 이게... 도대체?” 여자는 당황하며 몸부림을 쳤지만, 어느새 성장을 마치고 바위처럼 굳어버린 덩굴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우와... 정말 대단해요!” 헤네스는 순식간에 여자를 제압한 마법을 보며 탄성을 터뜨렸고, 리체스는 우쭐한 모습으로 허리에 손을 척 얹은 채 잘난 척을 했다. “그럼! 누가 쓴 마법인데. 당연한 일 아니겠어?” 그들의 모습을 본 여자는 크게 소리를 질렀다. “너희들은 누구냐! 그리고, 여기는...” 하지만 그녀는 리체스가 다시 손을 한 번 휘저어 보이자 덩굴이 다시 입마저 막아버렸다. 리체스는 여자의 입을 봉쇄하자, 손짓을 해서 대기하고 있던 자들에게 명령했다. “다음 손님 올 테니까 얼른 옮기세요.” “아, 알겠습니다.” 그녀의 명령이 떨어지자 삽을 든 건장한 다섯 명의 대머리 남자가 허겁지겁 여자의 몸을 뒤덮은 덩굴의 뿌리를 파헤치고는 그대로 덩굴째로 옮기기 시작한다. 마법을 조절해 그들이 덩굴을 쉽게 파헤칠 수 있도록 조절하는 리체스를 보며 헤네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분들, 광전사 아니에요?” 리체스는 바로 대답했다. “맞아.” 그리고는 조용히 헤네스의 귀에 속삭였다. “실은 말이지...” 헤네스는 리체스로부터 저 광전사, 아니 블러드로드들이 요정계에 머물게 된 전말을 듣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그거... 사기 아니에요?” 헤네스의 말에 리체스는 빙긋 웃어 보였다. “생각하기 나름 아니겠어? 짝을 찾아준 건 엄연히 사실이니까.” “...” 리체스의 말에 헤네스는 블러드로드들을 매의 눈으로 바라보며 응원하고 있는 펑퍼짐한 몸집의 요정들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요정계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 준상은 무리로부터 떨어져 나온 적을 탐색했다. “크으... 너무 마셨나.” 마침 한 남자가 펜션 근처의 어둑한 수풀 속에 대고 소변을 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혼자 떨어져 나와 있기는 하지만, 숙소에서 그리 멀다고 할 수는 없는 거리. 만약 지금 저 자를 덮친다면 다크 시드 사용자들 가운데 조금만 예민한 감각의 소유자가 있어도 이상을 눈치챌 것이다. 잠시 어찌하면 좋을지 고민하고 있는데, 남자가 일을 마치고 몸을 터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준상은 문득 지금까지 써본 적이 없는 스킬 하나를 떠올렸다. 그것의 이름은 바로 디코이. 침묵의 습지에서 에슈탈렌의 선봉대와 중국군을 박살냈던 마수 크롤로바간을 퇴치하고 얻은 시드에 들어있던 스킬이다. 준상은 남자가 몸을 돌려 사라지려는 모습을 보고는 곧바로 디코이를 실행했다. “응?” 목을 어루만지며 숙소로 들어가려던 남자는 문득 수풀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리다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술에 취한 것으로 보이는 육감적인 몸매의 여자 하나가 비틀거리며 나무에 기대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흐트러진 옷매무새 아래로 드러나는 탐스러운 가슴과 굴곡진 둔부의 형상, 젖혀진 치마 틈으로 비치는 가터벨트, 그리고 살짝 볼을 붉힌 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고혹적인 얼굴을 보는 순간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헛숨을 들이키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꿈에서나 그려왔던 자신의 이상형이 그곳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꿀꺽. 남자는 이성이 마비되어 어째서 이런 야밤에 저런 여자가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떠올릴 엄두도 내지 못한 채 홀린 듯이 다가섰다. 여자는 남자가 다가서자 얼굴을 찌푸리는가 싶더니 젖혀진 치마를 내려 다리를 가리려고 했지만, 술에 취한 탓인지 자꾸 손이 엇나갔다. 남자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여자를 향해 와락 달려 들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시야가 갑자기 확 밝아지는 것을 느끼며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그리고 미처 상황을 인식하기도 전에 리체스의 낭랑한 목소리가 다시 한 번 울려 퍼졌다. “피어나라, 유혹의 덩굴이여!” 남자가 덩굴에 휘감길 즈음, 준상은 얼굴을 찌푸린 채 몸을 털며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디코이 만으로는 아무래도 불안해서 매혹의 스킬마저 사용한 덕분인지 적은 아주 간단하게 준상이 만들어낸 허상에 사로잡혀 버렸다. 물론 침을 질질 흘리며 다가서는 남자의 모습이 그리 유쾌하지는 않았지만, 이 정도면 상당히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수가 많은 탓에 방심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들의 능력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예상보다 너무 쉽게 그들은 준상이 쳐놓은 미끼에 걸려 들었다. 한 명, 또 한 명. 다크 시드 사용자들은 거미줄로 날아드는 나방처럼 준상의 손에 걸려들어 요정계로 보내졌고, 도착하자마자 어김없이 리체스의 손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렇게 포획한 적의 숫자가 열두 명. 하지만 적들도 마냥 바보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동료들이 어느 순간부터 하나 둘씩 모습을 감추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서야 알아차린 것이다. 곧바로 다크 시드 사용자들이 머물고 있던 펜션에 불이 켜지고, 주위가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하자 준상은 일단 한 발 물러나 멀리 떨어진 곳에서 그들의 모습을 주시했다. 그들은 이내 가장 강한 열 명을 주축으로 한 예닐곱 명의 그룹으로 나뉘어 주위를 수색하기 시작했다. 숫자가 조금 많기는 하지만, 이것 역시 준상이 바라던 결과이다. “이 멍청이들은 도대체 어디서 뭘 하는 거야?” “설마... 사냥이라도 나간 건 아니겠죠?” “미친! 그런 짓을 했다간 ‘그’가 가만있지 않을 거라고!” 그룹 내에서 가장 강한 힘을 가진 것으로 보이는 남자가 그렇게 투덜대자 그를 따르던 자들 가운데 한 여자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다른 곳에도 일단 알려두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하지만 남자는 다시 벌컥 화를 냈다. “장난해! 그랬다가 무슨 비웃음을 들으려고!” “하지만...” “시끄러우니까, 닥치고 어서 흔적이나 찾아!” “아, 알겠습니다.” 일전에 칠성좌를 가장해 처리한 다섯 명에게서도 느꼈던 것이지만, 이들에겐 아무래도 단합이란 개념 같은 것이 부족해 보이는 느낌이었다. 어쩌면 그런 부족한 결속력을 다지기 위해 이런 식으로 모아놓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다. 준상은 가만히 그들을 지켜보다가, 다른 그룹들과 어느 정도 거리가 벌어진 것을 확인하고는 드디어 몸을 움직였다. 마침내 학살의 시간이 도래한 것이다. 00224 트롤러 ========================================================================= 준상이 어둠 속으로 모습을 숨기고 있을 때, 그의 목표로 결정된 일곱 명의 다크 시드 사용자들은 사라진 동료들의 냄새를 추적해 수풀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곳은 준상에게 맨 처음 포획된 두 남녀가 정사를 벌이던 장소였다. “이거... 그놈들 여기서 일 치렀나 본데요.” 개코라는 별명을 지닌 남자가 그렇게 말하자, 이들을 이끌고 나온 남자가 얼굴을 찌푸리며 그곳으로 다가섰다. 아닌게 아니라, 잡초와 땅에 진득하게 남아 있는 냄새는 이곳에서 남녀가 격하게 정사를 벌였음을 암시하고 있었다. 남자와 여자가 발정 났을 때 뿜어내는 기이한 향기가 코를 찌르자 그는 격분했다. “이 빌어먹을 자식들이 쓰레기나 버리고 후딱 올 것이지, 어디서 연애질이야!” 허접한 놈들과 함께 이곳까지 불려와 광대 짓거리를 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짜증나는 판에, 어디서 연애질 하느라 밤새는 줄도 모르는 녀석들을 찾아 돌아다닐 생각을 하자 그는 속에서 열불이 나기 시작한 것이다. “크으으...” 광철이라는 이름을 지닌 이 남자는 울화가 치밀다 못해, 정말로 입에서 불을 뿜어대기 시작했다. 그를 따르던 여섯 남녀는 광철의 입에서 불이 넘실거리며 뿜어지기 시작하자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지금 그들과 함께 있는 열 명의 우두머리급들 중에서도 이 광철이라는 남자는 특히 성격이 불 같아서 한 번 열이 뻗치면 주변 일대를 모조리 불 태워 재로 만들어 버려야 직성이 풀리는 그런 자였다. 어디서든 줄을 잘 서야 몸이 편한 법이지만, 지금 이 순간 그들은 하필 광철과 함께 하게 된 자신들의 불운함을 탄식하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다른 우두머리들이 그보다 크게 성격이 좋냐고 말하면 그건 또 아니지만, 그래도 광철이 최악인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들이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광철은 코와 입에서 마치 침을 흘리는 것처럼 불길을 뚝뚝 떨구며 발악하듯 소리 쳤다. “찾아! 내 이 연놈들을 그슬려서 개 먹이로 줘버리고 말테다! 뭘 멀뚱히 보고 있어! 어서 찾으라고!” 추적을 맡은 개코는 얼른 굽실거리며 주위를 둘러보다가 문득 어둑한 수풀 저편에서 인기척을 느꼈다. “음?” 그가 고개를 돌리자, 광철이 바로 반응했다. “뭐냐?” “저쪽에서 인기척이 납니다.” 그러자 광철은 애꿎은 바위를 발로 쾅쾅 소리내어 부수며 외쳤다. “그럼 얼른 쫓아가 봐야 할 것 아니야!” “가, 가려던 참입니다.” 어쩌자고 저 미친 소대가리의 줄에 섰던 것일까. 개코는 속으로 그렇게 투덜거리며 동료들과 함께 얼른 수풀 속으로 들어갔다. 아니나 다를까. 개코의 감각은 정확했다. 눈에 익은 남녀가 허겁지겁 옷을 갖춰 입다가 그들을 보고는 얼른 손가락으로 입을 가리며 조용히 하라는 시늉을 해보이는 모습이 바로 눈에 들어온 것이다. 하지만 개코와 동료들은 그들의 의사를 존중해줄 이유가 없었다. 괜히 여기서 모른 척하고 넘어갔다가 광철 놈에게 걸리기라도 하면 어찌 하겠는가. 원래부터 친분이 깊은 것도 아니고, 설령 그렇다 할 지라도 함께 있는 다른 자들까지 그렇다는 보장은 없었다. 게다가 광철처럼 직접적으로 표현하지는 않고 있었지만, 이 밤중에 불려 나온 것에 대해 그들 역시 화가 나있던 참이었다. 때문에 그들은 간절한 남녀의 눈빛과 몸짓을 무시하고 곧바로 광철이 있는 곳을 향해 외쳤다. “찾았습니다!” 그러자 애꿎은 바위를 잘근잘근 밟아 가루로 만들고 있던 광철은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와 기겁한 표정의 남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 개자식들! 내가 너희 같은 연놈들 때문에 이 밤중에 찾아 다녀야겠냐!” 광철은 불길이 뿜어지는 주먹으로 새파랗게 질려 대답조차 하지 못하는 남녀를 후려쳤다. 개코를 비롯한 다른 자들은 흠칫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금기를 생각하면 아무리 광철이라도 함부로 죽이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 광철의 급폭한 성격을 생각하면 차라리 죽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연애질도 좀 눈치껏 할 것이지. 눈 맞았다고 그 새를 못 참고 밤마실을 다니니 이 꼴을 당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며 동료의 피와 살점이 터져 나오기를 기다리는데, 의외로 그들의 귀에 들려온 것은 살이 찢겨지고 뼈가 부서지는 소음이 아니라, 바위 같은 것이 폭발하며 부서지는 소리였다. “어?” 그리고 이어지는 광철의 얼빠진 목소리. 어떻게 된 일인가 하고 고개를 돌리는 바로 그 순간. 그들의 머리 위로 검은 그림자 하나가 소리 없이 떨어져 내렸다. 가장 감각이 예민한 개코가 그것을 알아차리고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그의 입에서 터져나온 것은 동료들에게 발하는 경고성이 아니었다. “크아아악!” 족히 일 미터는 됨직한, 섬뜩한 형상의 뿔이 솟아난 커다란 철구가 대기를 갈기갈기 찢으며 휘몰아쳤다. 다크 시드 사용자들은 몸이 변이하기 전이라도 어지간한 물리적 타격은 씹어 먹을 수 있을 정도의 강인한 방어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이 무기라고 불리기조차 난감한 거대한 철구는 그런 것 따위는 가볍게 무시한 채 그들의 몸을 두들겼다. 순식간에 팔 다리가 꺾이고 뼈가 부서진 그들은 필사적으로 갑작스런 이 재앙으로부터 벗어나려 했다. 그러나 그들의 간절한 몸부림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기묘한 흡인력에 의해 무시되어 버렸고, 연거푸 철구에 직격당한 그들은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한 채 믹서기에 엉성하게 세팅되어 반쯤 갈리다 만 과일과 같은 모습으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 노옴!” 눈앞에서 갑자기 사라진 연놈들의 모습이 저 정체불명의 습격자가 만들어 놓은 미끼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광철은, 극도로 화가 치밀어 올라 지금껏 억누르고 있던 그의 본모습이 표출시키며 준상을 향해 불길이 이는 거대한 주먹을 치켜 들고 달려들었다. 하지만 여섯 명의 다크 시드 사용자를 단숨에 박살낸 준상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자 곧바로 어둠 속으로 스며들어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투우사가 흔드는 붉은 깃발에 유혹 당한 황소처럼 입에서 불길을 뿜어내며 씨근덕대던 광철은 갑자기 눈앞에서 준상의 모습이 사라지자 목표를 잃고 애꿎은 나무 한 그루를 박살내 버렸다. 어느 새인가 온몸에 비늘이 돋아난 황소 머리의 괴물로 변화한 그는 급히 고개를 돌렸지만, 이번에는 그 머리 위로 거대한 도끼가 떨어져 내렸다. “어림없다!” 광철은 급히 몸을 돌리며 자신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도끼를 향해 수박만한 크기로 변화한 주먹을 휘둘렀지만, 불행히도 이 도끼는 단순한 쇳조각이 아니었다. 꽝! 광철의 주먹과, 피를 갈구하는 마물인 블러드서커가 격돌하는 순간 숲속에는 지축을 울리는 격렬한 폭발이 일어났다. “어, 어어...” 광철은 사라져 버린 자신의 오른팔을 보며 얼빠진 표정을 지었지만, 바로 그 순간 다시 그의 등 뒤에서 준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역시 온 몸에서 연기를 잔뜩 뿜어내고 있었지만, 충분한 생명력 흡수와 재생력, 그리고 불사의 용혈이 지닌 피해 감소의 효과는 처음 블러드서커를 휘둘렀을 때와는 달리 준상에게 충분한 행동의 자유를 부여하고 있었다. 광철은 순간 자신의 목에 거미줄 같은 흰 실이 휘감기자 얼른 손을 들어 그것을 벗겨내려 했다. 그러자 불행히도 광철의 오른손은 블러드서커와 격돌하면서 박살난 상태였기에 그것은 헛된 손짓에 지나지 않았고, 아차 하는 순간 뒤에서 잡아당기는 힘에 의해 광철은 중심을 잃고 말았다. “크워어!” 광철은 급히 몸을 뒤틀며 일어나려 했지만, 다음 순간 갑자기 시야가 확 밝아지며 지금까지의 어두운 수풀 속이 아닌 뭔가 기묘하고 엉뚱한 공간에 와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어김없이 울려퍼지는 낭랑한 목소리. “피어나라, 유혹의 덩굴이여!” 광철은 순식간에 발밑에서 솟아나며 온 몸을 뒤덮는 덩굴에 당황하며 손발을 내저었지만, 제 아무리 강력한 힘을 지닌 그로서도 리체스가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이 강력한 포획 마법 앞에서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후와... 이건 또 신기한 몰골이네. 이크!” 머리는 영락없이 황소이고, 몸에는 검은 비늘이 돋아난 것이 갑주를 차려 입은 듯 하며, 그 코와 입에서는 쉴 새 없이 붉은 화염을 뿜어내고 있었다. 뿐인가. 제법 떨어져 있음에도 마치 불의 정령을 그 몸에 심어둔 것처럼 화끈거리는 열기는, 순식간에 주위의 땅이 머금고 있던 물기를 말려버리고 있었다. “이건 좀 더 조치를 취해야겠네.” 리체스는 다시 몇 가지 마법을 더 발휘해 광철이 지닌 열기를 차단하고 나서야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블러드로드들을 불러 이 기괴한 괴물을 옮기도록 지시했다. “더 이상 뜨겁지 않게 해뒀으니 어서 옮기세요.” “아, 알겠습니다.” 광철은 분통이 터져 아예 몸이 시뻘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지만, 별 것 아닌 푸성귀로 보이는 이 덩굴은 그런 열기에도 꿈쩍하지 않았다. 열 명의 우두머리 가운데 하나를 빠르게 제압한 준상은 최초의 기습으로 박살난 여섯 명으로부터 다크 시드를 회수하고 시체를 정령의 문에 집어 넣은 다음 급히 그 자리를 이탈했다. [당신은 특수 임무 발동 조건을 만족하고 있지 않습니다.] [위험합니다. 가급적 빨리 현재 위치에서 벗어나십시오.] [당신은 특수 임무 발동 조건을 만족하고 있습니다.] 다크 시드를 회수하십시오. :이 사악한 어둠의 씨앗은 본래 이 세계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물건입니다. 사용자를 제재하고 다크 시드를 회수하십시오. [이 퀘스트는 단독 퀘스트입니다.] [당신은 특수 임무 발동 조건을 만족하고 있지 않습니다.] [위험합니다. 가급적 빨리 현재 위치에서 벗어나십시오.] 다크 시드를 회수하십시오. :이 사악한 어둠의 씨앗은 본래 이 세계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물건입니다. 사용자를 제재하고 다크 시드를 회수하십시오. [이 퀘스트는 단독 퀘스트입니다.] -> 완료! 보상 : 경험치 조금, 특수 임무 보상 상자. -> 보상을 지금 수령하시겠습니까? (Y/n) _ (주의) 수령하지 않은 보상은 7일후 자동 소거됩니다. [당신은 특수 임무 발동 조건을 만족하고 있지 않습니다.] [위험합니다. 가급적 빨리 현재 위치에서 벗어나십시오.] [당신은 특수 임무 발동 조건을 만족하고 있습니다.] 다크 시드를 회수하십시오. :이 사악한 어둠의 씨앗은... 전투가 벌어졌던 장소에서 급히 이탈한 준상은 혼란에 빠진 듯 깜빡이고 있는 미니맵과 정신없이 뒤엉켜 쏟아져 나오는 퀘스트 정보를 보며 필설로는 형용할 수 없는 야릇한 쾌감을 느꼈다. 지금까지 자신을 손 안에 든 장난감처럼 움직이고 있던 퀘스트 바로 그 자체가 혼란에 빠진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큭큭큭...” 아직 블러드서커를 사용하고 난 후유증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상태였지만, 준상은 어둠 속에서 다시 몸을 일으켰다. 직접 부딪혀 보니, 적은 생각보다 그리 강하지 않았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준상이 시스템의 예상보다 훨씬 더 강했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준상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깜빡거리고 있는 미니맵을 바라보며, 급히 모여드는 다른 이들과는 달리 방금 전의 소란에도 움직이지 않고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룹을 향해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금 이 순간, 준상을 제외한 그 누구도 이 소란이 겨우 서막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 이 밤의 여흥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다. ============================ 작품 후기 ============================ 큭큭큭... 00225 트롤러 ========================================================================= 갑작스럽게 울려 퍼진 폭음과 섬광으로 주위가 소란스러워지자 다크 시드 사용자들 뿐만 아니라 주위의 펜션에 투숙하고 있는 사람들 역시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사라진 인원들을 수색하기 위해 밖으로 나왔던 자들은 몇몇은 폭음이 터져 나온 곳으로 향하고, 또 몇몇은 일반인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다수가 그렇게 급히 움직이고 있는 상황에서도 유독 느긋하게 제 자리에서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 그룹도 있었다. “저... 원요님. 저희도 움직여야 하지 않을까요?” 나이 지긋한 외모의 중년 남자가 그렇게 말했지만, 원요라는 이름으로 불린 여자는 태평한 얼굴로 되물었다. “왜?” 말투만 태평한 것이 아니다. 등산로 중간에 위치한 팔각정에 배를 깔고 누워서 곰방대를 뻐끔거리는 그 모습은 누가 봐도 사라진 인원을 수색하러 나온 자의 그것이라고는 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심드렁한 말투로 반문하는 원요의 모습에 중년 남자는 다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일단은 수색하러 나온 것이고, 저 정도의 폭음과 섬광이라면 누군가와 충돌이 일어난 것일 수도 있으니...” 하지만 원요는 다시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래서?” “네?” 원요는 곰방대를 한 번 길게 빨아들인 후 귀찮다는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그래서, 네 놈이 저길 가면 뭔가 달라지나?” “그, 그건...” 중년 남자는 우물쭈물할 수밖에 없었다. 하긴 지금 움직인다고 해봐야 뒷북이나 울리지 않으면 다행이긴 하다. 설령 간 큰 누군가가 그들에게 이빨을 드러낸 것이라 해도, 지금 여기 모여 있는 다크 시드 사용자들의 수를 감안하면 그건 미친 짓 밖에 되지 않는다. 게다가 정말 위험한 상황이 일어났다면 금기에서 해방된 자들이 순식간에 본신을 드러내며 이 근방을 쑥대밭으로 만들 것이 분명한 일. 움직이는 건 그 때라도 늦지 않는다. 사실 조금 음습해 보이는 인상의 이 중년 남자가 원요에게 말을 꺼낸 건 나중에 혹시라도 다른 이들에게 왜 움직이지 않았냐는 추궁을 받았을 때를 대비하기 위한 구실일 뿐인 것도 사실이다. 그의 그런 내심을 꿰뚫어 본 것인지, 아니면 정말 단순하게 그냥 귀찮은 것 뿐인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원요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후아암... 됐으니까 와서 등이나 좀 주물러봐.” “아, 알겠습니다.” 그는 얼른 팔각정 위로 올라가 원요의 등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일단 원요와 중년 남자의 대화가 끝나자 조금 긴장한 눈빛으로 폭음이 울렸던 곳을 지켜보며 서있던 자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근처의 바위 등에 자리를 잡았다. “너, 노래 좀 해봐.” “네?” 잘해야 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젊은 여자는 갑작스럽게 원요로부터 지적 받자 화들짝 놀라며 막 전입해 들어온 이등병처럼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 지금 뭐라고 하신...” “노래해 보라고. 너 가수인가 뭔가 하는 거 하는 애 아니었어?” 젊은 여자는 얼른 손을 내저으며 대답했다. “아, 아뇨. 그런 거 아닌데요.” “그럼?” “노래방 도우미를 좀...” 정확히 말하자면 노래방 도우미로 위장한 채 남자들을 잡아다 포식하는 것이었지만, 원요에게는 별 차이가 없었나보다. “아무튼 노래로 먹고 사는 건 마찬가지 아니야?” “그거야 그렇지만...” 먹고 산다는 의미가 일반적인 가수와는 전혀 의미가 다르다는 걸 항변하고 싶었던 모양이지만, 여자는 결국 그냥 입을 다물었다. 괜히 입 잘못 놀려서 원요의 화를 돋우기라도 하면 자신만 손해이기 때문이다. 겉보기엔 자신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지만, 지금 곰방대를 입에 문 채 안마를 받고 있는 저 여자는 그녀와는 격이 다른 존재였다. “그래서, 노래하기 싫다는 거야?” “아, 아니에요. 할게요.” 여자는 얼른 손을 저으며 떠오르는 대로 아무 노래나 하기 시작했다. 위장이라고는 해도 굳이 노래방 도우미 역할을 마다 않는 이유가 있었는지, 그녀의 춤과 노래 솜씨는 제법 훌륭한 편이었다. 물론 어두운 숲속을 헤매고 다니는 것보다야 이렇게 노래를 부르는 편이 훨씬 낫다. 그러나 이렇게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혼자 재롱을 떠는 건 역시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망할 년. 자기가 잘나면 얼마나 잘났길래. 그렇게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여자는 방긋방긋 웃으며 열심히 노래와 춤을 선보였다. 하지만 원요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이렇게 평했다. “그 실력으로 잘도 가수 짓을 했었구나.” 그러니까, 가수 아니라니까! 여자는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소리를 버럭 지를 뻔 했다. “다른 노래는 없어? 그게 끝이야?” “더 할까요?” “해봐.” “...” 여자는 속으로 치밀어 오르는 화를 꾹꾹 눌러 참으며 이번에는 무슨 노래를 할까 하고 머리 속으로 잠시 궁리를 하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녀가 소리를 내기 위해 배에 힘을 주는 순간, 조금은 긴장이 풀어진 채로 다음 노래를 기다리고 있던 자들의 머리 위로 검은 무언가가 떨어져 내렸다. 눈에서 섬뜩한 붉은 안광을 뿜어내며 떨어진 그 검은 그림자는, 갑자기 손에서 크고 시커먼 무언가를 꺼내는가 싶더니 폭풍처럼 맹렬하게 몸을 회전시켰다. “어?” 노래를 부르기 위해 목소리를 가다듬고 있던 여자는 본능적으로 신체를 변형시키며 뒤로 물러나려 했다. 그러나 미처 그녀의 발이 지면에서 떨어지기도 전에 검은 그림자로부터 강한 인력이 뻗어 나와 주위의 사물들을 끌어당겼고, 아차하는 순간에는 이미 직경이 일 미터는 되는 차가운 구형의 무언가가 그녀의 몸과 격돌하고 있었다. 비명을 지를 틈도 없었다. 그녀는 변화를 시작한 자신의 몸이 어이없을 정도로 단숨에 짓이겨지는 것을 느꼈고, 그것이 살아있는 동안 경험한 마지막 감각이 되고 말았다. 콰드드득! 어두운 하늘 위에서 떨어져 내린 파괴의 재앙은 팔각정에 태평스런 모습으로 앉아 있던 원요에게도 어김없이 사나운 기세로 몰아쳐 왔다. “이크!” 원요는 이것이 가볍게 맞부딪힐 성질의 것이 아님을 깨닫고는 얼른 뒤로 껑충 뛰어 물러났다. 물론 영웅급 듀얼 스톰 카드의 강한 인력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그 효과를 발휘했지만, 속수무책으로 끌려간 다른 이들과는 달리 원요는 어렵지 않게 그 인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이런, 이런.” 단번에 듀얼 스톰의 영향권에서 벗어난 원요는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참상을 보며 혀를 찼다. 팔각정은 마치 믹서기에 집어넣기라도 한 것처럼 순식간에 갈려나가며 문자 그대로 가루가 되어 버린지 오래였다. 뿐인가. 그녀가 이끌고 온 여섯 명의 다크 시드 사용자들 역시 그 터무니없는 파괴에 휩쓸려 순식간에 목숨이 끊어져 버렸다. 원요는 속으로 혀를 찼다. 달리 설명해 주지 않아도, 직경이 일미터는 되어 보이는 커다란 철구를 양손에 든 이 붉은 눈의 괴한이 이 밤의 소동을 일으킨 장본인이란 것 정도는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역시 조금 귀찮더라도 다른 그룹들처럼 이동을 하는 편이 나았으려나. 하지만 원요는 다음 생각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그들을 습격한 장본인이 거대한 철구 대신 요사스런 검붉은 기운을 뿜어내는 커다란 검을 휘둘러 왔기 때문이다. “이크!” 원요는 얼른 뒤로 물러나 검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났다. 아니, 벗어났다고 생각한 순간 검으로부터 시퍼런 무언가가 뿜어져 나오며 그녀의 어깨에 작렬했다. “크악!” 원요는 자신의 팔이 잘려나가자 비명을 지르며 물러섰고, 검을 든 습격자는 뒤따라 움직이며 이번에는 그녀의 목을 향해 검을 휘두르려 했다. 그러나 미처 검이 휘둘러지기도 전에 원요의 입가에 씩 웃음이 지어졌고, 다음 순간 습격자는 다리가 부러지는 듯한 충격을 느끼며 중심을 잃었다. “큭!” 바로 그 습격자, 준상은 고통을 삼키며 자신의 종아리를 강타한 무언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것은 바로 방금 전 그가 잘라내었던 원요의 팔이었다. 원요의 팔은 잘린 부위에서 부글거리는 무언가를 뿜어내기 시작했고, 그것은 순식간에 사람의 형체로 변화했다. 플라나리아나 불가사리의 경우 몸을 잘라내면 그 잘린 부위가 새로운 개체가 된다. 하지만 사람과 같은 고등 생명체에게 있어 그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준상의 눈앞에서 원요는 그 말도 안 되는 일을 직접 스스로의 몸으로 시연해 보이고 있었다. 원요는 새로 자라난 팔과 잘린 팔로부터 새로 만들어진 자신의 육체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 칼... 도대체 뭐지?” “...” 준상이 입을 다물고 바라보기만 하자, 여자는 잘렸던 부위에서 은은하게 전해지는 통증에 얼굴을 찌푸리며 다시 말했다. “말하기 싫으면 상관없어.” “...” “어차피 널 죽이고 나면 그것 또한 내 소유가 될 테니까.” 그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잘린 팔에서 생겨난 그녀의 또 다른 몸이 준상을 향해 와락 달려들었다. 겉보기에는 보통의 여자와 다를 바 없는 가늘고 여려 보이는 팔이었지만, 그것이 휘둘러지자 순식간에 아름드리 나무가 박살나고 바위가 가루로 변했다. 물론 준상은 그와 같은 공격을 피하며 다시금 목을 쳐버렸다. 하지만 데굴데굴 구르던 원요의 목은 다시 잘린 단면이 부글거리는가 싶더니 채 어느 틈엔가 새로운 육체로 분화해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목이 잘린 육체 역시 새로운 머리가 자라난 것은 마찬가지. “킥킥... 아직 모르겠어? 아무리 자르고 부숴도 나한테는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세 명으로 늘어난 원요는 벨 테면 베어보라는 듯이 가슴을 앞으로 내밀고 준상을 향해 걸어왔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새로 분화된 육체는 옷을 입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원래의 본체를 쉽게 알아볼 수 있다는 정도다. “쯧...” 준상은 얼굴을 찌푸렸다. “왜? 아까처럼 날 잘라봐. 어서.” “...” 원요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준상을 향해 다가섰다. 준상은 어나이얼레이터를 집어넣고 다시 랑다잘의 분노를 꺼낸 뒤 원요의 본체를 후려쳤다. 그녀의 몸은 그 강력한 일격에 맞아 단숨에 박살이 나서 갈기갈기 찢겨 졌지만, 그 작은 조각 하나하나에서 순식간에 거품이 뿜어지며 다시금 새로운 육체로 분화되어 버렸다. “...” 준상은 순식간에 알몸의 원요가 십여 개체로 늘어나 자신을 에워싸자 당혹할 수밖에 없었다. “소용없다니까 그러네.” 원요는 요사스런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바닥에서 무언가를 집어 올렸다. “쳇... 마음에 들었던 물건인데.” 그것은 바로 그녀가 애용하던 곰방대의 조각이었다. 씁쓸한 표정으로 그것을 바라보던 원요는 두 눈에 살기를 담은 채 준상을 바라보았다. “이런 짓을 할 때는 그만한 각오가 되어 있으렷다?” “...” 준상은 대답 대신 듀얼 스톰을 펼쳤다. 불가사리도, 플라나리아도 어느 한도 이상 잘게 잘리면 더 이상 재생하지 못하고 죽을 수밖에 없다. 잘릴 때마다 분화가 이루어진다면, 더 이상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을 때까지 부수고 잘라 버리면 그 뿐 아니겠는가. 팔각정이 있던 장소에는 다시 한 번 검은 태풍이 몰아쳤고, 랑다잘의 분노에 직격당한 원요의 육체는 마치 폭죽처럼 터져 나가며 갈기갈기 찢겨지고 말았다. 준상은 더 이상 남아 있는 원요의 육체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듀얼 스톰을 멈추었지만, 곧이어 터무니없는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점점이 찢겨지고 흩어진 원요의 육체는 듀얼 스톰이 끝나기가 무섭게 서로 작은 조각으로 뭉치더니, 주먹 크기가 되자 곧바로 하나의 육체로 분화를 일으켰다. 준상은 순식간에 자신을 둘러싼 수십 개체의 원요를 보고는 어이가 없어지고 말았다. “소용 없다니까 그러네. 후후후...” “...” 웃으며 다시 자신을 향해 다가서는 원요의 모습에 얼굴을 찌푸리던 준상은 문득 한 가지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녀의 머리에서 피어오르고 있던 검은 아지랑이가 사라져 있음을 이제야 알아챈 것이다. 그러고 보면, 처음에 그가 기습적으로 나타나 듀얼 스톰을 펼쳤을 때 원요는 화급히 뒤로 물러나며 공격을 피했다. 이런 능력을 지니고 있다면, 처음부터 그냥 공격을 받아들였어도 되지 않았을까. 준상은 자신의 어리석음에 혀를 차며 곧바로 몽몽이를 소환했다. “응?” 원요는 주위로 모여드는 이들의 기운을 느끼며 준상이 어떤 식으로 최후의 발악을 보여줄까 기대를 하다가, 뜬금없이 소환된 다람쥐의 모습을 보고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건 또 웬 다람쥐?” 하지만 그녀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어디론가 급히 사라지는 다람쥐의 모습을 보고 사색이 되고 말았다. “자, 잠깐!” 그녀의 분화된 육체들은 다급하게 몽몽이를 잡으려 했지만, 주인과 같이 눈에서 붉은 안광을 뿜어내는 이 작은 다람쥐는 그녀의 발밑을 요리조리 빠져나가더니 곧바로 나무 둥치에 숨겨진 무언가를 쫓기 시작했다. 눈으로는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초감각을 발휘하자 몽몽이가 쫓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그것은 원요였다. 원요는 원요인데, 손가락 하나 크기가 겨우 될까 싶은 작은 크기.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작은 원요의 몸에서 검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작은 원요는 몽몽이의 추격을 뿌리치고 다시 숨으려 했지만, 이 다람쥐는 눈에서 붉은 안광을 뿜어내며 도망치는 작은 원요에게 달라붙어 그 몸을 갉아대기 시작했다. “아아악!” 바각거리는 소리가 울려퍼짐과 동시에, 원요의 분화된 육체는 하나도 빠짐없이 머리를 움켜잡은 채 고통으로 몸부림치더니 그대로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다가 하나 둘씩 마치 바람 빠진 풍선껌처럼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준상은 눈앞에서 펼쳐지는 그로테스크한 그 풍경을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그리고 마침내, 바각거리는 소리가 멈추자 남겨진 원요의 육체는 푸쉬식거리는 소리와 함께 연기를 내뿜었고, 이내 불길에 휩싸여 사라지고 말았다. 준상은 몽몽이가 모아온 다크 시드들을 받아든 다음, 급히 어둠 속에 몸을 숨겼다. 00226 트롤러 ========================================================================= 광철과 원요의 그룹이 박살나자, 이제 남은 것은 모두 세 개의 그룹 뿐이었고, 그나마도 펜션 밖에 나와 있는 것은 두 개의 그룹 밖에 남지 않았다. 그 하나의 그룹을 이끄는 인물인 거치는 원요가 머물고 있던 팔각정에 도달하자 분노를 참지 못하고 눈앞에 놓여져 있는 바위를 단숨에 부숴버렸다. “젠장!” 급히 달려온다고 오긴 왔지만, 형체는커녕 흔적조차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박살나 버린 팔각정과 그 주위에 흩뿌려진 시체들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거치는 분노를 터뜨리며 주위의 애꿎은 바위와 나무들을 부수고 있었지만, 그를 따라온 자들은 눈앞에 펼쳐진 모습에 모골이 송연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이거... 위험한 거 아니야?” “...”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온 순간, 그들은 자신들이 위험에 처했다는 사실을 뒤늦게서야 깨달았다. 이곳에 머물고 있던 것은 불사신이라고까지 칭해지던 원요의 그룹. 거들먹거리는 꼴이 기분 나쁘기는 해도 그 자존심만큼 능력도 출중했던 그녀가 아니던가. 실제로 그들은 언덕에 오르기 직전만 해도 수많은 개체로 분화한 그녀의 모습을 어둠 속에서 똑똑히 보았었다. 그런데, 막상 도착하고 나니 그 많던 원요의 몸은 이미 근처에서 완전히 사라진 상태. 과연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 “거, 거치님.” 상황이 심각하다는 걸 깨달은 자 하나가 분노에 사로잡혀 쓸데없이 기물을 파손하고 있는 거치를 향해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는 다음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갑자기 어두운 하늘 위에서 무언가가 툭 떨어져 내려오더니 거대한 붉은 칼날을 휘둘러 그의 머리를 사선으로 비스듬히 갈라버린 것이다. “어?” 용기 있게 거치를 부르는 모습을 보며 등 뒤에서 그의 행동에 격려를 보내던 중년 여자는 동료의 머리가 비스듬히 잘려 떨어지면서 피가 확 피어올라 자신의 얼굴을 적시자 잠시 그대로 사고가 정지해 버렸다. 그녀는 일순 멍청하게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진 이 기묘한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곧바로 붉은 안광이 시신경을 파고들자 비명이나 경고성을 지를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그대로 석상처럼 몸이 굳어 버렸다. 푸학! 가차 없이 휘둘러진 어나이얼레이터의 붉은 검신은 변이조차 되지 않은 여인의 몸을 세로로 갈라버렸고, 그녀의 몸에서 검붉은 체액이 사방으로 뿜어져 나오자 그제서야 부하 가운데 하나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 “저, 적이다!” 거치는 애꿎은 바위를 주먹으로 쾅쾅 내리쳐 가루로 만들고 있다가, 그 소리를 듣고 바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때 이미 준상은 고함을 지른 세 번째 적의 목을 날리고 있는 중이었다. “이 노옴!” 거치는 노호성을 터뜨리며 준상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러나 준상은 풍선처럼 몸이 부풀어 오르며 자신을 향해 성난 황소처럼 달려드는 거치를 무시한 채 스르르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뭐?”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 준상의 모습에 당황하던 거치는 문득 머리 뒤에서 무언가가 떨어져 내리는 느낌에 얼른 몸을 돌렸지만, 그가 마주한 것은 직경이 일미터나 되는 거대한 철구였다. “큭!” 거치는 얼른 팔을 교차하며 그 공격을 막아냈지만, 남아 있던 그의 부하들은 그 검은 폭풍을 견뎌내지 못했다. 콰가가각! 순식간에 압도적인 위력 앞에 박살나 흩어지는 부하들의 모습을 보며 거치는 이를 부득 갈았다. 변이를 마친 그의 몸은 보통 사람의 두 배 정도 될 정도로 크게 부풀어 올랐는데, 툭 튀어 나온 눈은 사람의 그것이라기 보다는 금붕어의 그것을 닮았고, 입에는 상어처럼 날카로운 겹니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광철과 마찬가지로 온몸에 비늘 같은 것을 두르고 있었는데, 통나무를 연상시키는 두 개의 팔꿈치는 마치 사마귀의 앞발을 연상시키는 날카로운 낫 같은 것이 접혀 있었고, 두 발은 털이 숭숭 자라난 황소의 뒷발 같은 형상으로 변해 있었다. “크으으...” 거치는 입으로부터 검은 연기 같은 것을 뿜어내며 준상을 노려보다가 두 팔을 크게 벌린 채 준상을 향해 돌진했다. 준상은 곧바로 랑다잘의 분노를 집어 던졌지만, 거치는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거대한 철구를 한 손으로 후려쳐 떨궈 버리고는 남아 있는 한 손을 앞으로 쭉 뻗었다. 그러자 거치의 팔에 접혀 있던 사마귀 앞발 같은 날카로운 낫이 쭉 펴지며 준상의 목을 향해 날아든다. 기묘한 각도로 들어오는 거치의 공격에 준상은 한발 옆으로 물러나는가 싶더니, 이내 어둠의 정령을 이용해 위상전이를 펼쳐 공격 범위에서 벗어났다. 거치는 다시 한 번 준상이 자신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리자, 분노의 포효를 터뜨렸다. “크아아아!” 단순히 소리만 지른 것이 아니다. 그 목소리가 터져 나옴과 동시에, 마치 환영과도 같은 그의 잔영이 사방으로 뻗어나갔고, 그것과 접촉하는 사물은 모두 예외 없이 폭발을 일으키며 분쇄되었다. 위상전이를 통해 그 자리에서 빠져나오려던 준상은 거치가 뿜어낸 기운에 직격당하며 뒤로 훨훨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큭!” 불사의 용혈 덕분에 피해가 반감되어 실질적으로는 그리 큰 타격을 입지 않았지만, 땅에 발을 붙이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피격을 당하는 바람에 뒤로 날려져 버린 것이다. 거치는 회심의 일격으로 준상을 날려버리는데 성공하자 곧바로 몸을 돌려 성난 황소처럼 준상을 향해 돌진했다. 공중에서 몸을 뒤집으며 땅으로 떨어져 내리던 준상은 자신을 향해 돌진해 오는 거대한 적의 모습과 더불어, 또 다른 적들이 빠른 속도로 접근해 오는 것을 느끼고는 얼굴을 찌푸렸다. 모처럼 힘과 힘을 맞부딪힐 만한 적을 만났지만, 아쉽게도 더 이상 시간을 끌 여유가 없었다. 거치는 준상이 아까처럼 모습을 감추지 않고 두 발로 땅을 디딘 채 자신에게 맞서려 들자 다시 한 번 노호성을 터뜨리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잡았다! 요놈!” 그렇게 말하며 사마귀의 앞발 같은 양손을 뻗었지만, 다음 순간 그는 어둡던 시야가 갑자기 확 밝아지는 것을 느끼며 중심을 잃고 땅바닥 위를 나뒹굴고 말았다. 얼른 몸을 굴려 일어나려 했지만, 황소의 뒷발 같은 그의 발굽이 땅을 제대로 딛기도 전에 낭랑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피어나라, 유혹의 덩굴이여!” “응?” 이게 뭔소린가 하고 금붕어 같은 눈을 희번득거리는데 발밑에서 나무덩굴이 엄청난 속도로 솟아올라 거대한 그의 몸을 삽시간에 뒤덮어 버린다. “이, 이게 도대체?” 그는 당황한 와중에도 준상을 날려버렸던 기술을 다시 한 번 발동했지만, 이 기묘한 덩굴은 그가 뿜어낸 힘을 마치 스펀지처럼 그대로 흡수해 버렸다. “어? 어?” 어이없을 정도로 너무나 간단하게 자신의 기술이 봉쇄되자 거치는 당황해서 어쩔줄 몰라했고, 그가 당황하고 있는 동안에도 덩굴은 계속 자라나 마침내 얼굴까지 완전히 뒤덮어 버리고 말았다. “아까부터 계속 이상한 괴물들만 들어오네.” “그러게요.” 리체스와 헤네스가 그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동안, 준상은 새롭게 다가선 적들과 마주하고 있었다. 거치와 준상이 싸우는 모습을 보고 달려온 그들은 이미 변이를 모두 마친 상태였지만, 갑자기 눈앞에서 거치의 거대한 몸이 지우개로 지워진 것처럼 그대로 사라져 버리자 당황을 금치 못했다. “네, 네놈은 누구냐!” 물론 준상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랑다잘의 분노를 휘둘렀을 뿐이다. 곤충과 같은 외골격의 모습을 갖추고 있던 적은 갑자기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커다란 철구를 보며 당황했다. 그의 몸을 뒤덮은 단단한 갑주는 인간들이 지닌 어지간한 개인화기 정도는 거뜬히 막아낼 정도의 방어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눈앞에 날아드는 거대한 철구의 기묘한 위압감에 짓눌린데다, 갑자기 사라져 버린 거치의 모습까지 떠오르자 그는 직접 받아내기 보다는 피하는 쪽을 선택했다. 그가 내린 결정은 매우 현명한 일이었지만, 불행히도 그는 자신의 선택대로 움직일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가 없었다. 준상의 눈에서 뿜어져 나온 붉은 안광이 그의 시신경을 자극하자, 찰나의 순간 그는 신체의 자유를 잃었고, 그렇게 굳어버린 그의 몸 위에 어김없이 랑다잘의 분노가 작렬했다. 콰직! 일격이었다. 고작 단 한 번의 일격에 그의 몸은 슬리퍼에 짓뭉개진 바퀴벌레처럼 내장이 삐져나온 상태로 부서져 쓰러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의 불행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생명력이 완전히 사라지기도 전에 주인과 마찬가지로 두 눈에서 붉은 안광을 뿜어내는 다람쥐가 달려들었다. 결국, 그는 머리 속에 들어있던 다크 시드를 산 채로 빼앗기는 경험을 해야만 했다. “이, 이런...” 준상을 에워싼 적들은 그 처참한 광경에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생겨난 빈틈을 비집고 한 줄기 기묘한 기운이 그들의 마음을 파고 들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광견의 위엄. 찰나의 순간 미친개로 콤보를 바꾼 준상에 의해 이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기묘한 공포의 기운이 뻗어 나오자, 적들은 금방이라도 뒤돌아 도망치고 싶은 충동을 느껴야만 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준상이 그런 빈틈을 가만히 두고 볼 이유가 없다. 그는 곧바로 위상전이를 펼쳐 적의 한복판으로 이동한 다음, 공중에서 다시 이번에 새로 얻은 검은 백합 콤보를 발동하며 듀얼 스톰을 펼쳤다. 적들은 당황하며 자신들을 향해 날아드는 거대한 철구로부터 몸을 피하려 했지만, 광견의 위엄에 짓눌리고, 공포의 시선에 의지를 상실한데다, 듀얼 스톰이 지닌 인력이 끌어당겨진 그들에게 이 폭풍과도 같은 공격을 피할 기회나 방법 따위는 처음부터 주어지지 않은 것이나 다름 없었다. 콰가가가각! 적들은 부서지고 갈려나가며 이내 사방으로 피와 살점을 흩뿌리며 쓰러졌다. 준상은 단숨에 새로운 적들을 쓸어버리고는 뒤늦게서야 천천히 산을 올라오다가 그 모습을 발견한 마지막 단 한 명의 적에게 시선을 던졌다. “이런...” 거치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그룹을 이끌고 사라진 자들을 수색하기 위해 펜션을 나섰던 황연은 눈앞에서 자신이 데리고 나온 부하들이 단숨에 피떡이 되어 버리는 광경을 보고 식은 땀을 흘렸다. 이미 멀리서 원요가 싸우는 기척을 느꼈고, 거치가 앞서서 달려갔을 뿐만 아니라, 부하들까지 한데 뭉쳐 올라간 상황이라 사냥개를 부리는 엽사의 기분으로 느긋하게 올라온 것인데, 원요와 거치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흔적을 찾을 수가 없고 부하들마저 단숨에 박살이 나버렸으니 그녀로서는 당황스러움을 넘어 공포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황연은 모골이 송연해진다는 말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비로소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에게 그런 감정이나 느낌이 있다는 것에 놀랄 틈도 없이 그녀는 곧바로 신체를 변이시키며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 그녀는 이전에 준상이 이 근처에서 쓰러뜨렸던 여자들처럼 양팔이 날개의 형상을 지니고 있었으며 다리는 독수리의 그것과 비슷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온몸이 은은한 황금색 불길에 쌓여 있다는 것 정도이다. 황연은 하늘로 날아오르기가 무섭게 그대로 등을 돌리고 자신의 동료들이 남아있는 펜션을 향해 날아갔다. 이미 원요와 거치를 홀로 박살낼 정도의 힘을 가진 자라면, 자신이 혼자 덤벼서 될 일이 아니다. 광철과 원요, 거치, 그리고 자신이 이끌던 부하들이 모조리 학살당했다면, 이제 남은 것은 오직 펜션에서 대기 중인 열다섯 명의 동료들 뿐이다. 본래 그들은 모두 56명이었다. 그 가운데 열두 명이 밤 사이 갑자기 종적을 감추었다. 이들을 찾기 위해 광철이 여섯 명, 원요가 여섯 명, 거치가 일곱 명, 황연이 여섯 명을 데리고 펜션 밖으로 나왔지만, 이제 남은 것은 하늘을 날아 도망치고 있는 황연, 단 한 명 뿐이었다. 어찌 두렵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녀는 이 위급한 상황을 어서 동료들에게 알려야만 한다는 생각을 떠올리며 힘차게 날개짓을 했지만, 문득 바람을 가르고 날아오는 무언가를 느끼고 흘깃 뒤를 돌아보았다. 바위 같은 것이라도 던졌나 싶어서 본능적으로 돌아본 것에 불과했지만, 순간 그녀는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검은 인영을 보며 기겁할 수 밖에 없었다. “어, 어떻게?” 등에 날개가 돋은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뭔가 비행을 위한 도구를 장착한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령과도 같이 붉은 안광을 번뜩이는 이 남자는 마치 탄환처럼 그녀를 향해 똑바로 날아들고 있었다. 황연은 얼른 방향을 틀어 남자로부터 벗어나려 했지만, 그녀가 미처 몸을 틀기도 전에 남자의 손에서 커다란 철구가 원을 그리며 휘둘러져 그녀의 등판을 내리찍었다. “커헉!” 단숨에 등골이 부서지는 듯한 타격에 그녀는 입으로 피를 뿜으며 추락하기 시작했다. 감미로운 꽃 향기. 어이없는 일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 황연은 자신을 후려친 거대한 철구에서 달콤한 꽃 향기 같은 것이 묻어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지면이 눈앞으로 쇄도하는 모습이 어쩐지 너무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그런 멍한 기분도 잠시. 황연은 너무나 강렬한 타격에 잠시 흐릿해졌던 정신을 추스르며 다시금 날개를 퍼덕여 하늘로 날아오르려 했지만, 그런 그녀의 몸 위로 다시 한 번 거대한 철구가 날아들었다. 파리채에 얻어맞은 날파리처럼 랑다잘의 분노에 짓눌린 황연은 그대로 지면과 격돌하고 말았다. 본래부터 그리 약한 자가 아니었기에, 연속된 치명적인 타격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여전히 꿈틀거리며 몸을 일으키려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자비 없는 검은 철구는 심판의 날에 쏟아져 내리는 불타는 유성처럼 다시 한 번 떨어져 내리며 그녀의 생에 마지막 종지부를 찍었다. 00227 트롤러 ========================================================================= 준상은 쑥대밭이 된 숲 위로 내려 앉은 다음, 피와 살점이 덕지덕지 붙은 두 개의 철구를 물의 정령으로 대충 씻은 다음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몽몽이를 재소환해 다크 시드를 챙긴 다음, 황연의 시체를 정령의 문으로 밀어 넣고는 다시 어둠 속으로 모습을 숨긴 채 적들이 머물고 있는 펜션을 향해 움직였다. 수색을 위해 나왔던 자들은 방금 전에 떨군 여자를 마지막으로 모조리 전멸한 상황. 정확한 수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퀘스트 정보들을 정리해봐야 알 수 있겠지만, 요정계로 끌어들인 적들까지 합치면 대충 어림잡아도 사십 명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다. 지금까지 준상이 획득한 카드의 수가 대충 구십 개 정도인 것을 감안하면, 이번에 획득할 보상 상자 가운데 절반만 카드가 나온다 치더라도 엄청난 전력 증강이 가능해진다. 준상은 깜박거리고 있는 미니 맵을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 시스템이 혼란으로 인해 불안정해진 탓인지 미니맵으로 정확한 수를 파악하는 건 조금 무리였지만, 아까 미리 살펴봤던 대로라면 대충 계산해도 열 명 좀 넘는 수가 남아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문제는 남은 이들 가운데 여섯 명이 노란색 깃발로 표시되는 강자들이라는 점. 아까 그 썰어도 썰어도 다시 재생되던 여자 같이 골치 아픈 적만 아니라면 일대 일로는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다. 하지만 그 수가 여섯이나 되면 제 아무리 준상이라도 이대로 무턱대고 밀고 들어가는 건 아무래도 주저될 수 밖에 없는 일이었다. 잠시 어떻게 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문득 미니맵에 새로운 표식들이 우르르 나타나기 시작했다. “쯧...” 두 방향에서 우르르 몰려오고 있는 표식들은 아마도 다른 펜션에 투숙하고 있던 다크 시드 사용자일 것이다. 그 수는 어림잡아 약 삼십 명. 게다가 아까 살펴본 바대로라면 노란색 깃발로 표시되는 능력자들도 새로이 대여섯명 이상 추가될 것이다. “많기는 더럽게 많군.” 저 인원이 한국 내에 있는 모든 다크 시드 사용자들일까. 아니면, 저것조차 일부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어느 쪽이 되었든 간에, 이렇게 되면 펜션 안으로 난입하는 것은 물 건너 간 일이나 다름 없었고, 결국 준상은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미니맵에 나타나는 적의 동태를 가만히 주시하는 것 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게 되고 말았다. 그렇게 우르르 몰려든 다크 시드 사용자들은 곧바로 펜션 안으로 들어가 원래 준상이 노리고 있던 적들과 합류하더니 그대로 움직임을 멈추었다. 준상으로서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적이 다시 밖으로 나와주길 바라고 있었지만, 잠시 시간이 흐르자 주민들의 신고를 받은 것인지 경찰차 몇 대가 요란스런 사이렌 소리와 함께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 난리가 났는데, 아무도 와보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긴 하다. 하지만, 저들이 그럴 마음이 있다면 지금 다가오는 경찰들 정도는 단숨에 쓸어버릴 수 있을 터. 원래 그들은 금기에 얽매여 있기 때문에 노골적인 충돌은 자제하는 편이었지만, 준상에 의해 공격을 받은 이런 상황에서도 그 금기가 효력을 발휘할지는 미지수이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가만히 몸의 기운을 끌어올리며 미니맵을 주시하고 있던 준상은 다시 조금 시간이 지나서야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인원수조차 제대로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빽빽하게 모여있던 저들의 표식이 어느 순간부터 확연하게 줄어들기 시작한 것이다. 좀 더 기다리자 그러한 정황은 더욱더 명확해졌다. 미니맵에 나타난 표식들이 순차적으로 어느 지점으로 이동하는가 싶더니 그대로 하나씩 사라져 버리고 있었다. 저들이 미니맵으로부터 자신의 위치를 숨길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이런 상황에서 떠올릴 수 있는 가능성은 단 하나. 정령의 문이나 신기루 문으로 통하는 석문처럼 다른 공간으로 통하는 문을 연 다음 그리로 이동하는 중이라고 밖에 생각이 되지 않는다. 수색을 나간 인원의 생존 여부를 파악하는 수단이 따로 있기라도 한 것일까. 아니면, 아직 돌아온 인원의 생존 여부 따위는 처음부터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던 것일까. 어느 쪽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들이 이곳으로부터 이탈하고 있는 것만큼은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준상은 다시 고민에 빠졌다. 추적을 해봐야 하나. 이 상황에서 추적을 하자면 자신이든 아니면 자신이 부리는 다른 무언가든 간에 저들이 열어 놓은 통로 안으로 진입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하지만 준상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무턱대고 저들이 열어 놓은 문을 향해 뛰어드는 건 너무 위험한 일이다. 준상이 저들을 단숨에 압도할 정도의 힘을 갖추고 있다면 모르지만, 어딘지도 모르는 장소에 무턱대고 뛰어드는 건 어떻게 생각해도 좋지 않은 선택이라고 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애초에 그 정도의 전력 차가 있었다면 이렇게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자칫하면 고립되는 것은 물론이고 우글대는 적 한복판에 떨어질 수도 있다. 물론 신기루 탑이라는 최후의 보루가 있기는 하지만 자칫 그보다 강한 적, 이를테면 저들이 칠성좌라 부르는 적 같은 이가 존재한다면 큰 낭패에 직면하게 된다. 단순히 낭패를 당하는 것을 넘어서 지금까지 그가 이뤄놓은 모든 것이 박살날 수도 있고, 결국에는 자신마저 죽음을 당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런 생각을 떠올리던 준상은 문득 하나의 가능성을 깨달았다. 어쩌면 저 문을 열고 있는 이가 칠성좌나 ‘그’라고 불리던 존재는 아닐까. 정령의 문과 리체스의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그가 상대했던 자들은 긴급 회피 지시가 뜰 정도로 난적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수준이었다. “음...” 괜한 짓을 한 것일까. 그냥 시스템이 지시하는 대로 모르는 척 그 자리를 이탈하는 것이 현명한 일이었을까. 준상이 그렇게 고민하는 와중에도 저들은 하나둘씩 사라지더니, 이내 미니맵 안에는 아무런 표식도 남지 않게 되었으며, 더불어 정신없이 깜박이던 현상도 멈추어 버렸다. 적들은 그의 탐지 범위 내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이다. 내심 찜찜한 느낌을 감출 수 없었지만, 준상은 일단 만에 하나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조금 더 적들이 모습을 감춘 펜션 주위를 감시하다가 동녘이 서서히 밝아올 즈음이 되어서야 조용히 그곳에서 빠져 나왔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들은 쑥대밭이 되어버린 숲의 모습에 놀라 증원을 요청한지 오래였고, 준상이 물러날 즈음에는 몰려온 군경들로 북새통을 이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한참 떨어진 장소로 물러난 뒤에야 신기루 꽃으로 통하는 문을 열고 이탈할 수 있었다. “후...” 준상은 곧바로 리체스의 연구실로 통하는 석문을 통해 요정계에 들어섰다. 적의 근거지에서 이탈하기 전에 미리 연락을 해놓은 덕분에 그가 연구실을 통해 여왕의 침실로 들어서자 미리 기다리고 있던 헤네스와 리체스가 그를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수고하셨어요.” 준상은 자신에게 안겨드는 두 반려를 향해 손을 뻗어 그녀들을 가볍게 안아준 다음 조용히 말했다. “보낸 놈들은 어떻게 되었지?” 그러자 리체스가 얼른 대답했다. “살아있는 녀석들은 잘 모셔두었고요. 시체들은... 동결시켜 둔 상태에요.” “수고했다.” “별 말씀을요.” 준상은 리체스의 안내를 받아 포획한 적들이 있는 장소로 안내되었다. 만에 하나 덩굴에서 벗어날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인지, 그들은 몇 겹의 결계로 보호된 장소에 감금되어 있었다. 준상은 혹시나 정보를 알아낼 수 없을까 하며 대화를 시도해 보았지만, 결과는 예전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말을 하려는 자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단어로 구체화되어 음성으로 변화되기도 전에 금제가 발동해 죽음을 면치 못한 것이다. 수확의 날 같은 단어를 언급한 자가 또다시 나왔지만, 준상은 결국 더 이상의 심문이 의미가 없음을 인정하고 그들을 모두 어나이얼레이터의 제물로 삼았다. 어나이얼레이터에 의해 영혼이 흡수되어 죽음을 당한 그들의 사체는 다크 시드가 뽑혀 나오자 이내 흐물흐물 녹아서 사라져 버렸다. 그것은 리체스가 동결시켜 둔 사체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신경을 써두는 건데.” 리체스는 그렇게 말하며 투덜거렸지만, 준상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니 마음 쓸 필요 없다.” “네...” 준상은 이번에 획득한 퀘스트 보상의 수량을 확인했다. 그가 쓰러뜨린 적은 모두 41명. 단일 퀘스트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시간 대비 보상 획득의 효율만을 놓고 보자면 에픽 퀘스트을 능가하는 수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무려 41개나 되는 특수 임무 보상 상자를 어느 세월에 다 열어보나 하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지만, 하나를 열면 그만큼 강해지는 것이 이 시스템의 특징이니 귀찮다고 팽개쳐 둘 수도 없는 일이다. “음...” 특수 임무 보상 상자는 일반적인 보상 상자와는 달리 시스템 보조 기능들이 많이 나오는 경향이 있었다. 우선 41개의 상자 가운데 일곱 개는 인벤토리 확장이 담겨 있었다. 축하합니다! 추가 보상 상자(협력)에서 특수카드 ‘인벤토리’를 획득했습니다. :특수카드를 획득하면 봉인된 특수기능을 해제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이미 특수기능 ‘인벤토리’가 개방되어 있으므로 인벤토리 용량을 3칸 확장합니다. -현재 당신의 인벤토리에는 서로 종류가 다른 52가지 물품을 등록하여 사용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확장되는 개수는 경우에 따라 두 개에서 다섯 개까지 천차만별이었지만, 어쨌든 보상 상자 확인이 끝났을 때, 준상의 인벤토리는 23칸에서 52칸으로 두 배 이상 증가되어 있었다. 솔직히 이 이상 인벤토리가 늘어봐야 무슨 소용일까 싶은 생각도 없지는 않았지만, 많아서 손해 볼 일이 없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인벤토리 확장이 단순한 양의 증가라면, 기존에 가지고 있던 특수 기능들의 확장은 조금 신경 써서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축하합니다! 특수카드 ‘추적’을 획득했습니다. :특수카드를 획득하면 봉인된 특수기능을 해제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특수기능 ‘추적’이 개방됩니다. -추적은 마킹된 표적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추적하는 기능입니다. 새로 개방된 추적은 미니맵의 확장 기능 중 하나인데, 특정 표적에 마킹을 하고 그것의 정보를 실시간으로 자신이나 자신에게 포함된 펫, 소환물, 그리고 특별히 지정된 파티원들에게 전달할 수 있었다. 물론 미니맵이 개방되지 않은 파티원이라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위치 정보를 발송하게 된다. 축하합니다! 특수카드 ‘줌’을 획득했습니다. :특수카드를 획득하면 봉인된 특수기능을 해제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특수기능 ‘줌’이 개방됩니다. -줌이 적용되면 미니맵에 확대, 축소 기능을 추가됩니다. 이 기능은 말 그대로 기존에 고정된 영역만을 확인할 수 있었던 미니맵에 확대와 축소 기능을 부여하여 더 자세히, 또는 더 멀리 볼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기능이다. 축하합니다! 특수카드 ‘길찾기’을 획득했습니다. :특수카드를 획득하면 봉인된 특수기능을 해제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특수기능 ‘길찾기’가 개방됩니다. -길찾기는 목표까지 이르는 최단 거리의 경로를 빠르게 산출하는 기능입니다. 길찾기는 미로와 같은 복잡한 지형에서 유용한 기능이지만, 준상의 경우에는 길이 없으면 만들어서 달린다에 가까운지라 다른 기능에 비해 조금은 효용성이 떨어진다 할 수 있었다. 축하합니다! 특수카드 ‘시드각성’을 획득했습니다. :특수카드를 획득하면 봉인된 특수기능을 해제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특수기능 ‘시드각성’이 개방됩니다. -시드각성은 같은 속성을 지닌 두 개의 시드를 합성해 시드를 성능을 업그레이드 하는 기능입니다. 기존에 준상이 가지고 있던 랜덤시드 기능은 두 개의 시드를 합성해 전혀 새로운 속성의 시드를 얻는 기능이었다. 이 기능은 성능이 떨어지는 시드를 이용해 보다 높은 성능의 시드를 확률적으로 얻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종류나 수치를 전혀 예상할 길이 없기 때문에 준상은 그다지 사용해 본 적이 없었다. 차라리 여기에 사용할 바에는 강화에 쓰는 편이 낫다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새로 활성화된 이 시드각성은 같은 속성을 지닌 두 개의 시드를 이용해 더 높은 수치를 가진 시드를 만들어 내는 것이 가능하다. 아직은 국내에서만 통용되고 있지만, 준상이 시드를 사들일 때 적용하는 계산법을 따르면 퍼센티지가 1 오를 때마다 그 가격은 두 배로 뛰어오른다. 이렇게만 따지면 5퍼센트짜리 시드 두 개를 이용해 6퍼센트짜리 시드 1개를 만들어 내는 것은 별 의미 없는 행동으로 이해될 수 있지만, 이 시드 각성의 놀라운 점은 레어 시드가 아닌 일반 시드가 지니고 있는 한계 수치인 7퍼센트 이상의 시드를 확률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이었다. 예를 들어 레어 이하의 시드는 커먼이나 언커먼 등급을 지니고 있는데, 시드 각성을 실행할 경우 확률적으로 이 등급이 커먼+나 언커먼+로 변화되며 이렇게 될 경우 최대 수치 제한이 7퍼센트를 넘어서는 것이 가능해진다. 카드 슬롯은 준상이든 이제 막 튜토리얼을 마친 귀환자든 간에 모두 10으로 고정되어 있는 상태이고, 이것은 결국 누구든 간에 한 번에 장착할 수 있는 카드는 10개 밖에 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카드 슬롯이 제한된 이상, 거기에 장착할 수 있는 시드의 숫자도 제한되는 것은 당연한 일. 그렇다면 결국 실제 사용하게 되는 시드 역시 상향 평준화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또한 7퍼센트를 넘어서는 시드는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획득할 수가 없으니 +등급의 시드가 지닌 가치는 기존의 계산법을 초월할 수밖에 없다. 축하합니다! 특수카드 ‘카드각성’을 획득했습니다. :특수카드를 획득하면 봉인된 특수기능을 해제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특수기능 ‘카드각성’이 개방됩니다. -카드각성은 같은 이름을 가진 같은 등급의 카드 두 개를 합성해 카드의 성능을 업그레이드 하는 기능입니다. 단, 이 경우 합성되는 두 개의 카드가 높은 레벨을 지니고 있으면 보너스 속성이 부여될 수 있습니다. 카드각성은 시드각성과 비슷하지만, 카드가 그때까지 습득한 레벨과 경험치에 따라 추가 속성이 부여될 수 있다는 점이 다르다. 기존에 준상은 카드조합과 카드강화라는 두 가지 기능을 이미 칭호를 통해 습득하고 있었지만, 이것은 확률적으로 실패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는 낮은 등급의 카드라면 모를까 높은 등급의 카드에는 쓰기 곤란한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 카드각성은 사용된 두 개의 카드가 하나의 카드로 합쳐지는 것 외에는 실패시 적용되는 패널티 같은 것이 없었다. 물론 시드각성과 마찬가지로 언커먼에서 레어로 올라가는 식의 등급 상향을 불가능하지만, 적절하게 레벨을 올려서 각성을 시도할 경우 추가 속성을 획득해 이미 속성이 고정된 상위 등급 카드보다 더 강력한 카드를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축하합니다! 특수카드 ‘카드육성’을 획득했습니다. :특수카드를 획득하면 봉인된 특수기능을 해제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특수기능 ‘카드육성’이 개방됩니다. -카드육성은 육성하고자 하는 카드에 다른 카드를 합성해 단숨에 레벨을 향상시키는 기능입니다. 단, 이 경우 등급에 따라 레벨 상한이 존재하므로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카드각성 기능을 제대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각성시키고자 하는 카드를 원활하게 레벨 업시킬 수 있어야만 한다. 물론 이것은 전투를 통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긴 하지만, 보다 빠르게 카드의 레벨을 높이고 싶다면 쓰지 않는 카드를 사용해 임의로 레벨을 높여주는 것이 가능하다. 레벨과 등급이 높은 카드를 사용할수록 더 많은 경험치를 얻는 것이 가능하지만, 보통은 카드 자체가 부족하기 때문에 마음대로 사용하기는 여러모로 곤란한 점이 많다. ============================ 작품 후기 ============================ 남은 상자 수 28개. 00228 트롤러 ========================================================================= 축하합니다! 특수카드 ‘회복가속’을 획득했습니다. :특수카드를 획득하면 봉인된 특수기능을 해제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특수기능 ‘회복가속’이 개방됩니다. -회복가속은 전투중 피해를 입은 소환물이나 펫을 각종 포션등을 사용해 빠르게 치유시키는 기능입니다. 회복속도는 포션의 투여량에 따라 조절이 가능하지만, 개체의 특성에 따라 최대 회복 속도의 제한이 있으니 주의하십시오. 이전에는 손상을 입어 역소환된 소환물의 경우 무조건 하루의 시간이 지나야만 회복이 끝나 재소환이 가능했고, 만약 피해의 정도가 심각하다면 오랜 기간동안 소환 불가 상태로 회복에 전념해야만 한다. 그러나 새로 추가된 이 기능을 사용하면 각종 포션을 사용해 회복에 걸리는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 “한 번 써볼까.” 마침 준상에게는 속한 소환물 가운데 큰 피해를 입어 장기간의 회복에 들어간 존재가 있다. 바로 얀트훈센에서 펫으로 만든 이벨라 하란두르가 이 경우에 해당된다. 준상은 펫 정보를 잠시 살펴보다가 시험 삼아 포션 카드 하나를 세팅해 회복 가속을 걸었다. 마침 준상에게는 힐링 포션 카드가 여섯 장이나 쌓여 있는 상태. 그 가운데 이전부터 계속 쓰다보니 사용횟수가 거의 바닥난 카드를 세팅한 것이다. 하지만 힐링 포션 만으로는 육체의 회복 속도만 가속될 뿐이라, 준상은 여기에 추가로 축복의 성수 역시 세팅해야만 했다. 축복의 성수 역시 힐링 포션 다음으로 많이 남아 있는 카드이기에 사용에 별 문제는 없다. 축하합니다! 특수카드 ‘인벤토리 할당’을 획득했습니다. :특수카드를 획득하면 봉인된 특수기능을 해제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특수기능 ‘인벤토리 할당’이 개방됩니다. -인벤토리 할당은 사용자가 소유한 인벤토리를 소환물이나 펫에게 분배하는 기능입니다. 이 기능을 사용하면 여분의 인벤토리를 소환물이나 펫에게 나누어 줄 수 있다. 지금까지는 준상을 제외하고는 오직 몽몽이 만이 별도로 저장 공간을 가지고 있었다. 별다른 장비 없이 싸우는 늑대나 정령의 경우에는 크게 문제될 일이 없다. 그러나 필요에 따라 여러 가지 장비를 사용해야 하는 헤네스나 리체스의 경우엔 장비를 착용하거나 교체해야 할 경우 무조건 준상의 손을 거쳐야만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하지만 이 기능을 사용하면 각자 자신에게 할당된 인벤토리 공간을 활용해 언제든 필요에 따라 장비나 기타 물품들을 꺼내 활용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또한 필요에 따라서는 늑대나 정령들에게 인벤토리를 할당해 물품의 습득이나 운반을 지시할 수도 있게 된다. 현재 습득한 인벤토리의 수는 모두 52칸. 준상은 이 가운데 일단 시험적으로 2칸씩을 헤네스와 리체스에게 할당했다. “일단 써보고, 더 필요하다 싶으면 언제든 말하면 된다.” “고마워요!” “잘 쓰겠습니다.” 둘은 지금껏 준상에게 맡겨 두고 있었던 물품들을 받아 자신의 캐비닛에 보관했다. 부카의 혀 같은 장비품이야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속옷이나 기타 여성 용품 같은 것까지 맡겨 놓아야 했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민망한 경우도 많았다. 축하합니다! 특수카드 ‘영상통화’를 획득했습니다. :특수카드를 획득하면 봉인된 특수기능을 해제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특수기능 ‘영상통화’가 개방됩니다. -영상통화는 메신저에 등록된 상대와 영상을 통해 대화를 나누는 기능입니다. 이 기능은 통화 당사자와 자신, 둘 중 한 사람에게만 기능이 활성화되어 있어도 사용이 가능합니다. 단순히 얼굴 보며 얘기하는 기능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기능의 진면목은 단순한 통화를 넘어 상대에게 현재 자신이 위치한 곳의 영상을 실시간으로 전달하는 것에 있었다. 말이란 건 아무리 표현력이 뛰어난 사람이라도 듣는 사람에 따라서 전혀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는 모호함이 있다. 하지만 영상은 일체의 가감 없이 그대로 상대에게 직관적인 전달이 가능하다. 표현의 모호함으로 인해 혼동이 생길 여지도 없으니 사용하기에 따라서는 상황을 파악하는데 매우 유용하게 사용이 가능하다. 축하합니다! 특수카드 ‘물질전송’을 획득했습니다. :특수카드를 획득하면 봉인된 특수기능을 해제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특수기능 ‘물질전송’이 개방됩니다. -물질전송은 멀리 떨어진 상대에게 메신저를 통해 작은 물품을 주고받을 수 있는 기능입니다. 전송 가능한 물품의 부피는 가로, 세로, 높이가 약 10센티미터로 제한됩니다. 이 기능을 사용하면 시드 1개가 소모됩니다. 부피가 상당히 제한적이긴 하지만, 메신저의 확장된 기능중 하나인 물질전송은 일일이 직접 움직일 필요 없이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바로 물품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한 번 전송이 이루어질 때마다 시드 하나가 소모되기는 하지만, 1퍼센트짜리 시드 하나를 소모해 얀트훈센 같은 곳에서 임서윤이 매입한 시드를 받아볼 수 있다면 이런 저런 일로 바쁜 준상으로서는 여러모로 이득이 아닐 수 없다. 축하합니다! 특수카드 ‘속성보호’를 획득했습니다. :특수카드를 획득하면 봉인된 특수기능을 해제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특수기능 ‘속성보호’가 개방됩니다. -속성보호는 아이템 강화시 추가로 시드를 소모해 현재 가지고 있는 속성을 보호하는 기능입니다. 이 기능은 속성 하나당 시드 하나를 추가 소모합니다. 기껏 아이템 강화를 얻었음에도 준상이 그 기능을 제대로 활용하지 않고 있었던 이유는 강화가 실패로 돌아갈 경우 기존의 속성중 하나가 사라질 수 있다는 문제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기능을 사용하면 추가로 시드를 소모해 아이템이 현재 가지고 있는 속성을 보호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성공과 실패는 여전히 확률에 의해 지배될 수밖에 없는 일이지만, 적어도 강화가 실패하더라도 성능이 떨어지지는 않게 된 것이다. 다만 기존에선 시드 세 개로 강화의 실행이 가능했다면, 이 기능을 사용할 경우 한 번의 강화에 소모되는 시드의 수가 기하급수로 늘어난다는 문제가 있다. 보호가 가능한 속성에는 내구도, 공격력 또는 방어력, 그리고 아이템의 효과 이렇게 세가지로 분류되며, 이 때 효과는 항목 하나당 시드 하나가 추가로 소모된다. 어나이얼레이터를 예로 들어보자면, 이 아이템에 속성 보호를 건 상태로 강화를 하기 위해서는 내구도와 공격력, 여기에 두 개의 효과까지 총 4개의 시드가 추가로 소모되므로 한 번의 강화에 총 7개의 시드가 소모되는 셈이다. 단번에 성공하면 상관이 없지만, 실패할 경우 누적되는 시드 소모는 그야말로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된다. 물론 그런 단점이 있더라도 충분히 쓸만한 가치가 있는 기능인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축하합니다! 특수카드 ‘조련’을 획득했습니다. :특수카드를 획득하면 봉인된 특수기능을 해제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특수기능 ‘조련’이 개방됩니다. -이 기능은 패시브로서 펫 목걸이를 사용할 때의 성공률에 영향을 끼칩니다. 레벨이 높아질수록 초기 충성도와 호감도에 보너스를 받으며, 이후의 증감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쉽게 말해 펫 목걸이의 효과를 더 높여주는 기능인 셈이다. 강제로 생명력을 소모시킨 뒤 펫 목걸이를 사용할 경우 이벨라 하란두르처럼 초기 호감도와 충성도가 바닥을 치게 되는데, 이 기능을 가지고 있으면 그런 상황에서도 초기 호감도와 충성도에 보너스를 받게 된다. 축하합니다! 특수카드 ‘보수’를 획득했습니다. :특수카드를 획득하면 봉인된 특수기능을 해제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특수기능 ‘보수’가 개방됩니다. -보수를 사용하면 손상된 아이템을 수리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아이템 수리에는 시드가 소모되며 아이템의 등급과 파손 정도에 따라 소모되는 시드의 양이 결정됩니다. 아이템의 내구도는 명확한 수치로 표시되지 않기 때문에 한눈에 알아보기 어려운 점이 있지만, 준상이 자주 애용하는 그룬발의 망토나 에쉬달의 부츠 같은 경우는 아무래도 헤진 부분이 조금씩 나타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경우 보수 기능을 사용하면 아이템의 내구도를 원래대로 되돌리는 것이 가능해진다. 축하합니다! 특수카드 ‘직관’을 획득했습니다. :특수카드를 획득하면 봉인된 특수기능을 해제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특수기능 ‘직관’이 개방됩니다. -직관은 통찰 능력을 강화하는 기능입니다. 직관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 상대의 공격력, 방어력, 특수능력의 세 가지 항목에 대한 비교 우위를 판별할 수 있게 됩니다. 이전까지 상대의 힘을 어림잡아 파악할 수 있도록 도와주던 통찰의 능력은 다소 부정확한 면이 있었다. 준상은 이런 통찰의 부정확함이 단순한 레벨 비교 정도의 효과 밖에 지니고 있지 않은 탓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었는데, 직관의 기능이 개방됨에 따라 좀 더 세부적으로 전력의 비교가 가능해진 셈이다. 축하합니다! 특수카드 ‘관찰’을 획득했습니다. :특수카드를 획득하면 봉인된 특수기능을 해제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특수기능 ‘관찰’이 개방됩니다. -관찰은 안목 능력을 강화하는 기능입니다. 관찰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 명확하게 사용자가 지정한 색깔로 아이템의 등급을 단번에 확인하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기존의 안목 능력은 레어 등급 이상의 경우에만 은은한 서기가 뿜어져 나오는 정도의 차이를 보였지만, 관찰 능력을 사용하면 아이템 확인을 거치지 않고도 해당 아이템의 등급을 알아보는 것이 가능해진다. 축하합니다! 특수카드 ‘리더십’을 획득했습니다. :특수카드를 획득하면 봉인된 특수기능을 해제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특수기능 ‘리더십’이 개방됩니다. -리더십은 사용자에게 속한 펫, 소환물, 그리고 파티원 등의 특별히 지정된 인원에게 보너스를 부여합니다. 이 보너스는 공방 같은 능력을 포함해 전투효율 전반과 경험치 획득량 등의 영역을 모두 포함합니다. 지금까지는 펫이나 소환물 등을 운용하더라도 관련 보너스가 부여된 시드를 장착하지 않은 이상은 별다른 보너스를 부여받지 못했다. 하지만 리더십의 기능을 얻음으로서 현재 준상에게 속한 펫이나 소환물은 물론이거니와 함께 싸우는 파티원들 또한 여러 가지 분야에서 추가적인 보너스를 받게 된다. 최근 준상이 수하로 거둔 일천 명의 광전사들을 감안하면 이것 또한 가볍게 생각하고 넘어갈 수 없는 보상이라 할 수 있다. 일단 새로 개방된 추가 기능은 이 정도가 전부였다. 남은 보상 상자에서는 각종 포션이 열두 개 정도 나왔는데, 그 구성을 보자면 힐링 포션이 두 개, 축복의 성수가 세 개, 안티도트와 시커 포션이 각각 두 개였으며, 여기에 추가로 신체에 화염 속성을 부여하는 플레임 포션과 냉기 속성을 부여하는 프로즌 포션, 일시적으로 방어력을 상승시키는 디펜스 포션이 하나씩 새로 나왔다. 다른 포션들이야 이전에도 많이 나온 것들이라 별 감흥이 없었지만, 속성 부여나 방어력 상승의 효과가 있는 특수 포션들은 얼마 전에 새로 얻은 펫인 고슴도치의 활용범위를 좀 더 다채롭게 만들어 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 하다. 이 모든 것을 제외한 나머지 여섯 개가 소환물과 스킬 카드였다. 카드정보 명칭 : 갑가오리 레벨 : 1Lv 경험치 : 0 등급 : Super Rare 분류 : 소환 성장 : 대기만성(대) 속성 : 물 효과 : 거대한 갑가오리 1개체를 소환합니다. Cost : 30 Seed : 5슬롯 여러 가지 소환물 가운데서도 특히 눈에 띄는 것은 바로 이 갑가오리라는 생소한 이름의 소환물이었다. 등급부터가 보통의 다른 소환물과는 차원이 다른 수퍼 레어 등급인지라 기대를 품지 않을 수가 없었다. 준상은 효과 설명에 나온 거대하다는 표현을 참고해 일부러 요정계의 넓은 공터 한 군데를 빌려 소환을 실행해 보았다. 그러자, 그들의 눈앞에 거대한 가오리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다만 보통의 가오리와 차이가 있다면, 이 녀석은 마법의 양탄자처럼 허공에 둥둥 떠 있는데다 등판의 면적만 해도 성인 서너명이 둘러 앉아 술판을 벌여도 될 정도로 널찍했다. 마치 제트기의 흡기구를 연상시키는 거대한 입으로는 충격파를 발사할 수도 있어서 근접 항공 지원 능력마저 갖추고 있었으며, 그 표피는 외골격과 같은 두터운 비늘이 뒤덮여 어지간한 충격은 그냥 씹어 먹을 수 있을 정도의 방어력 또한 갖추고 있었다. 특히 이 외골격은 등 부분이 뿔처럼 솟아나 있었는데, 이것을 잘 이용하면 의자처럼 등을 기대고 탑승하는 것 또한 가능해 보였다. “우와아아...” 이번에는 또 무슨 신기한 일을 벌일까 하며 몰래 준상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요정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이 거대한 가오리의 모습에 감탄하더니, 이내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강한 호기심을 표출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들은 이 가오리를 맨처음 시험운항하는 영예를 얻을 수 없었다. 누구보다도 호기심이 왕성한 리체스가 바로 이 순간 준상의 옆에 버티고 서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요정들은 아쉬운 표정으로 손가락을 빨면서 준상이 두 반려들과 함께 이 거대한 가오리를 타고 하늘을 나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부럽다.” “쳇... 여왕님은 욕심쟁이.” ============================ 작품 후기 ============================ 아직도 다섯 개 -_-a 00229 트롤러 ========================================================================= 간단한 시험 비행이 끝나고 지상으로 내려 왔을 때, 준상은 쏟아지는 요정들의 탐욕어린 시선을 보고는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리체스.” 준상의 부름에 새로운 탈것에 대한 흥분에 눈을 반짝이고 있던 리체스가 얼른 대답했다. “왜요?” “네가 적당히 애들 데리고 타다 와.” 순간 리체스의 눈에서 번쩍 빛이 발한다. “정말요?” “그래.” “감사합니다!” 준상은 들뜬 표정으로 신이 나서 어쩔 줄 모르는 리체스를 놔두고는 공터를 빠져 나왔다. “들었지, 얘들아! 줄 서!” “네!” 여담이지만, 이날 갑가오리는 역소환된 후 과로로 인해 제법 오랜 시간동안 휴식 시간을 가져야만 했다. 소환물은 갑가오리 이외에 두 개의 정령이 더 나왔는데, 어둠의 정령인 어둑발이와 불의 정령인 도깨비불이었다. 두 정령 모두 언커먼 등급에 불과했으나, 그 중에서도 특히 어둑발이는 이로써 두 개체를 갖추게 되어 위상전이의 출발지점과 도착지점을 모두 대체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카드정보 명칭 : 매혹 레벨 : 1Lv 경험치 : 0 등급 : Rare 분류 : 스킬 성장 : 조숙(대) 속성 : 빛 효과 : 상대를 강하게 매혹해 자신에 대한 호감도를 높입니다. Cost : 25 Seed : 4슬롯 첫 번째 스킬 카드는 매혹이었다. 기존에 사용하던 언커먼 등급과 달라진 점은 단순히 매혹한다는 효과 설명이 강하게 매혹한다고 바뀐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에 정확한 그 위력을 추측하기는 좀 곤란한 면이 있었다. 카드정보 명칭 : 장악 레벨 : 1Lv 경험치 : 0 등급 : Rare 분류 : 스킬 성장 : 일반(대) 속성 : 어둠 효과 : 강력한 존재감을 퍼뜨려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적들의 공격력을 대폭 감소시킵니다. Cost : 25 Seed : 4슬롯 마찬가지로 효과 설명에 대폭이라는 문구가 추가된 것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언커먼 등급과의 차이라 할 수 있다. 효과 설명이 모호하기는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이 카드를 획득함으로서 마지트의 검은 백합 콤보가 레어로 상향되었다는 점이다. 축하합니다! :콤보카드를 조합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현재 조합 가능한 콤보 카드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마지트의 검은 천사 [상세 확인] -콤보 카드 조합을 원하시면 해당 번호를 누르시고, 만약 조합을 원치 않으신다면 n을 누르세요(1/n) _ 마지트의 검은 천사 -무법지대로 이름 높은 마지트의 뒷골목에는 예로부터 조심스럽게 전해지는 소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검은 백합. 그녀의 고결하기까지한 죽음의 미학은 이후 순결의 상징인 백합을 넘어서 천사로까지 칭해지기에 이릅니다. [조합상세] -듀얼스톰, 장악, 침식, 매혹 (모든 등급이 레어 이상) -효과: 1. 방어 무시 효과 30% 증가 2. 각종 디버프 및 상태 이상 발생 확률 및 효과 40% 증가 3. 치명타 확률 40% 증가 4. 치명타 피해 20% 증가 기존의 효과가 대폭 증가했으며, 여기에 치명타 피해 옵션이 추가되어 적에게 가하는 피해량이 매우 크게 상승했다. 하긴 이 콤보 하나로 일반 퀘스트의 중간 보스급을 두 자리 수 이상 단숨에 때려잡았으니 이런 식의 빠른 업그레이드는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추가로, 새로운 레어급 카드들을 획득함에 따라 기존의 검은 백합 카드를 헤네스나 리체스에게 장착시켜 주는 것 또한 가능해졌다. 축하합니다! :당신은 처음으로 ‘마지트의 검은 천사’ 조합에 성공했습니다! -당신의 위업을 찬양하며 ‘피어나는 죽음의 춤’ 칭호를 부여합니다. [칭호 상세 정보 확인은 이곳을 누르십시오.] [피어나는 죽음의 춤] : ‘마지트의 검은 천사‘ 조합을 최초로 성공한 자에게 부여되는 칭호. -효과: 치명타 발생시 즉사 확률 5퍼센트 증가 -칭호는 획득시 자동으로 효과가 적용됩니다. 검은 백합 콤보의 경우에는 아쉽게도 칭호 획득을 놓쳤지만, 이번에는 확실하게 습득할 수 있었다. 새로운 칭호의 효과는 놀랍게도 치명타 발생시 즉사 확률 증가. 비록 확률은 낮은 편이지만, 이것은 운이 좋을 경우 일격에 상대를 죽음으로 몰고 갈 수도 있다는 의미가 된다. 일대일 승부라면 이 즉사 확률이 발동하는 건 좀 어려운 일일지도 모르지만, 대규모의 적을 상대로 듀얼 스톰 같은 광역기를 사용하면 이 확률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 된다. 하긴 랑다잘의 분노를 사용해 펼치는 영웅급 듀얼 스톰에 맞고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가정 하의 일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카드정보 명칭 : 카운터 레벨 : 1Lv 경험치 : 0 등급 : Rare 분류 : 스킬 성장 : 일반(대) 속성 : 땅 효과 : 적이 공격하는 타이밍에 맞춰 강력한 반격을 가한다. (쿨타임: 2초) Cost : 20 Seed : 4슬롯 이 보상은 조금 의외였다. 언제 사용했는지조차 까마득한 카운터 카드의 레어 버전이 난데없이 튀어나온 까닭이다. 확실히 강타의 효용성을 생각하면 이 카드가 포함된 무투가 콤보가 업그레이드를 해줄 필요성이 있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강타나 광폭의 경우는 수차례 반복된 사용으로 인해 영웅 등급까지 카드를 획득했지만, 무투가 콤보를 구성하는 또다른 카드인 숄더 차지와 카운터는 지금까지 레어급도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때문에 무투가 콤보를 레어급 이상으로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앞으로 카운터나 숄더 차지 같은 기술을 자주 써서 상위 등급의 카드를 획득해야만 한다. 다크 시드 회수 퀘스트 41개 분의 경험치를 획득하자 다시 한 번의 레벨업이 이루어졌고, 그 보상인 랜덤 카드 역시 획득할 수 있었다. 카드정보 명칭 : 잔인무도 레벨 : 1Lv 경험치 : 0 등급 : Uncommon 분류 : 스킬 성장 : 일반(중) 속성 : 어둠 효과 : 적을 한 명 살해할 때마다 공포 유발 수치가 증폭됩니다. Cost : 10 Seed : 2슬롯 “...” 새로운 스킬 카드가 추가된 건 좋은 일이지만, 어째 영 이름이나 효과가 꺼림직하다. 하긴 물어뜯기나 피칠갑, 철면피 같은 카드도 있는 판에 잔인무도 정도면 양호하지 않나 싶긴 하지만, 그래도 어감이 영 찜찜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어쨌거나 무려 41개 분의 보상 상자를 일일이 열어보는 것도 상당히 고역에 가까운 일이었기 때문에 이 작업을 모두 마쳤을 때는 천하의 준상조차도 기진맥진해지고 말았다. 보상을 많이 얻은 것은 좋은 일이지만, 이 수많은 카드와 보상들을 일일이 기억하고 정리해서 전투 등에 활용하는 것도 정말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결국 준상은 하루 정도 휴식을 취한 다음, 임서윤에게 연락을 보냈다. “안 그래도 연락을 드려야 할까 고민하던 참이었습니다. 이건... 새로운 기능입니까?” “그렇다.” 새로 개방된 메신저의 기능인 영상통화를 사용하자 서윤의 표정 변화가 일목요연하게 준상의 시각에 전달되고 있었다. “어떻게... 그 일은 잘 처리 되었습니까?” “물론.” 반 정도를 놓친 것이 좀 찜찜하긴 하지만, 어쨌든 마흔 한 명이나 되는 다크 시드 사용자를 척살한 것은 큰 성과라 할 수 있다. 준상은 서윤에게 이와 같은 상황을 알리고 주의를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음...” 서윤은 괴물 꽃 같은 존재가 이 작은 땅 덩어리에 그렇게 많이 있을 줄은 미처 몰랐던 까닭에 안색이 어두워졌다. “이건 큰 문제군요.” “아쉽긴 하지만, 내 실체가 드러나지는 않았으니 저들도 당분간 함부로 움직이기는 어려울 것이다. 물론 막무가내로 덤벼올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겠지만.” “후...” 만약 저들이 앞뒤 가리지 않고 덤벼들게 되면 가장 먼저 목표가 될 것은 일전에 괴물 꽃을 처치했다는 오해를 받고 있는 서윤의 길드원들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당하지 않으려면 더 강해져야 할 필요가 있겠군요.” 임서윤은 입맛을 다시다가 화제를 바꾸었다. “일전에 말씀하신 물품의 준비가 끝났습니다. 언제 찾아가시겠습니까?” “굳이 시간 끌 필요는 없겠지. 어디로 가면 되겠나?” 준상의 말에 임서윤은 바로 대답했다. “일전에 임대한 창고에 옮겨두었습니다. 지금 바로 찾아가실 생각이시면, 제가 그쪽으로 가도록 하죠.” “알겠다. 잠시 뒤에 만나도록 하지.” 준상은 연락을 마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몸을 동그랗게 말고 있는 고슴도치를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리며 장난을 치고 있던 헤네스가 얼른 따라 일어섰다. “나가시게요?” “그래. 같이 갈래?” “물론이죠.” 준상이 헤네스와 함께 여왕의 침실을 나서자, 바깥에서 요정들과 함께 갑가오리를 타고 노느라 정신없던 리체스가 얼른 하늘에서 내려왔다. “어디 가시게요? 같이 가요.” “그래.” 리체스가 내리자 준상은 어쩐지 눈 아래가 검게 물든 듯한 갑가오리를 역소환했다. 요정들은 거의 이틀 동안 쉬지 않고 갑가오리를 타고 놀았음에도 아쉬운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준상은 갑가오리가 휴식에 들어갔다는 메시지를 확인하며 모르는 척 그들을 지나쳐갔다. “더 타고 싶었는데.” “저거 어디서 못 구하나?” “몰라.” “나도 몰라.” “나한테 그런거 묻지마.” 요정들이 그렇게 투덜대는 소리를 들으며 신기루 꽃의 석문을 거쳐 휴양지 인근의 숲으로 되돌아 나온 준상은 곧바로 랩터를 타고 임대해둔 창고를 향해 차를 달렸다. 한참을 달려 도착하자,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던 임서윤이 그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이쪽입니다.” “...” 준상은 서윤이 이끄는 대로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 안에는 천명이 한 달간 먹을 만큼의 휴대식품이 컨테이너들에 담겨 있었다. “여유분을 포함해서 십만 개의 휴대식량을 준비했고, 여기에 추가로 건빵 같은 부식도 다시 추가로 십만 개를 준비했습니다.” “수고했다.” “별 말씀을요.” 준상은 서윤에게 금괴로 값을 치른 다음, 전투식량이 담긴 컨테이너들을 인벤토리에 집어 넣었다. 물품의 수령이 끝나자 준상은 서윤과 작별한 뒤, 차를 몰고 다시 북한산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대시보드위에 몽몽이와 엘리, 그리고 고슴도치 이렇게 세 마리와 나란히 앉아 있던 리체스가 왔던 길과는 다른 길로 향하자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어디로 가시게요?” 준상은 시선을 전방에서 돌리지 않은 채로 그 말에 대답했다. “바다.” “바다요?” “아직 정령의 문을 개통하지 않은 곳이 남아있거든.” 준상이 말한 것은 바로 남쪽에 위치한 마지막 국립공원인 한라산이었다. 국내에 존재하는 모든 국립공원에는 이전에 전국을 순회하며 정령의 문을 개통했지만, 한라산의 경우에는 바다라는 장애물에 가로막혀 그 일을 수행할 수가 없었다. 사실 하려고 마음 먹었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조금 귀찮기는 해도 개인용 요트 같은 선박을 구입하고 그것을 운용하기 위한 자격증을 취득하면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구입이야 서윤을 거치면 될 일이고, 보관 역시 인벤토리가 많이 남아 있으니 문제될 일은 없었지만, 곧바로 기사 대전에 불려가고 추가로 에픽 퀘스트까지 발동하는 등 여러 가지로 신경 써야 할 일이 많다보니 우선 순위가 뒤로 밀렸었다. 그러던 차에 이번에 비행 가능한 소환물인 갑가오리가 나오자, 연속된 굵직한 퀘스트로 인해 피로해진 심신도 달랠 겸 제주도를 방문하기로 결정을 내린 것이다. 준상은 일단 북한산에 설치된 정령의 문을 통해 요정계로 귀환한 다음 그곳에서 현재 정령의 문이 설치된 곳 가운데 가장 남쪽에 위치한 월출산 국립공원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다시 차를 타고 좀 더 남쪽으로 내려간 그들은 해안선에 도착하자 날이 어두워지기를 기다려 갑가오리를 타고 바다를 향해 날아갔다. ============================ 작품 후기 ============================ 으으으. 망할 보상 상자. 00230 트롤러 ========================================================================= 바닷바람이 제법 세차게 불어왔지만, 갑가오리의 주위에는 바람의 정령들이 빈틈없이 둘러서서 그 위에 올라탄 이들을 보호했다. 파도 위를 스치듯 비행하면서 준상은 초감각을 통해 주위를 경계했고, 덕분에 다른 누군가에게 들키거나 하는 일 없이 제주도 해안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해안선에 길게 늘어선 불빛 위를 지나친 갑가오리는 곧바로 숲이 있는 곳을 향해 움직였다. 정령의 문을 열만한 숲과 나무를 찾는 일은 준상의 어깨 위에 자리를 잡고 앉은 리체스가 맡았다. 그녀는 천천히 유영하듯 제주도 상공을 누비는 갑가오리 위에서 주위를 살피다가 제법 시간이 지난 뒤에야 우거진 숲 속에 자리 잡은 커다란 나무 하나를 가리켰다. “저 정도면 좋을 것 같아요.” “...” 준상은 말없이 리체스가 가리킨 나무로 갑가오리를 이동시켰다. 갑가오리가 지느러미를 출렁이듯 움직이며 허공에 멈추어 서자, 준상과 헤네스는 그 위에서 내렸다. 리체스는 잠시 나무 주위를 돌며 다시 한 번 확인을 해보고는 준상에게로 돌아와 말했다. “괜찮을 것 같아요.” “알았다.” 준상은 곧바로 셀라에게 연락을 보내 정령의 문을 개통하는데 필요한 요정들을 보내도록 지시한 다음 자신의 몸에 설치된 정령의 문을 열었다. 곧바로 한 무리의 요정들이 줄지어 나타나 정령의 문을 개통하는 의식을 시작했다. 준상과 헤네스는 그들이 의식을 진행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그 일이 모두 끝나자 보수로 초코바와 연양갱 등의 군것질 거리를 주려 했다. 하지만 요정들은 리체스의 눈치를 살짝 보더니 조심스럽게 헤네스를 향해 말했다. “저기... 다른 걸로 받으면 안 될까요?” “어떤 걸로요?” 헤네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요정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일제히 허공에 가만히 떠있는 갑가오리를 바라보았다. 순간, 헤네스는 갑가오리가 흠칫 놀라 움찔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쩐지 조금 불쌍한 기분이 들어서 준상을 돌아보았지만, 그는 상관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걸 원한다면 거절할 이유는 없겠지.” 준상의 입에서 허락의 말이 나오자 요정들은 환호하며 갑가오리를 향해 우르르 몰려갔다. 요정계에서는 인간의 크기인지라 서넛 정도를 태우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이곳에서라면 그런 제한에 구애받지 않고 한 번에 많은 수의 요정들을 태우는 것이 가능하다. “...” 헤네스는 갑가오리의 등에 요정들이 덕지덕지 들러붙은 그 모습에서 예전에 준상에게 요정들이 들러붙어 있던 모습이 연상되어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날 갑가오리는 밤새도록 요정들을 태우고 제주도 상공을 날아다니다가 날이 밝아올 즈음이 되어 요정들이 돌아가자 그제서야 역소환될 수 있었다. 준상은 헤네스와 리체스를 데리고 잠시 해안을 거닐다가, 바다를 박차고 올라오는 태양을 감상한 뒤에야 숙소를 잡았다. 원래 이런 관광지에서 예약 없이 방을 잡는 건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지만, 서윤에게 연락을 넣고 잠시 기다리자 곧바로 호텔 측 직원이 허겁지겁 달려 나와 준상을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방금 연락을 받았습니다. 마침 예약이 취소된 곳이 있으니 그곳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준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직원의 뒤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직원이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가자 모습을 숨기고 있던 헤네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굳이 이런 곳에 묵을 필요는 없지 않나요?” 이전이라면 몰라도 지금은 신기루 꽃이라는 훌륭한 거처가 있으니 굳이 이런 식으로 호텔에서 묵을 이유가 없다 싶었던 모양이다. 리체스 역시 말은 안 해도 궁금한 표정이었기 때문에, 준상은 조용히 그녀들을 향해 대답했다. “여기가 어딘지 알아?” “아뇨.” 준상의 질문에 헤네스는 고개를 저었고, “어딘데요?” 리체스는 오히려 반문했다. 준상은 그런 두 반려를 향해 차분하게 대답했다. “여긴 제주도라는 섬이다. 여러 가지로 유명한 곳이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신혼 여행지로 손꼽히는 곳이지.” “...” “...” 그 말에 헤네스와 리체스는 준상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깨달았는지 상기된 표정으로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헤네스의 경우에는 이벨류아에서 한동안 밀월의 기간을 즐겼지만, 리체스는 그런 기간조차 갖지 못한 터라 준상의 말에 더욱더 가슴이 뛰었다. 억지로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든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에 리체스는 헤네스에게 마음으로 빚을 지고 있었고, 똑같이 반려로 불리기는 해도 한 수 접어줄 수 밖에 없었다. 분신 팔찌라든가 작업을 핑계로 준상과 헤네스가 밀월을 즐길수 있도록 배려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지만, 한편으로는 자신 역시 그런 시간을 갖고 싶었던 것이 사실이다. 셋은 그로부터 며칠간 다소 느긋한 기분으로 제주도 각지를 돌며 신혼의 기분을 즐겼다. 한동안 제주도에서 휴식을 취한 셋은 며칠 뒤에야 다시 요정계로 복귀했다. 준상은 정령의 문을 통해 요정계에 들어서자 곧바로 헤네스에게 말했다. “헤네스.” “네.” “일을 하나 맡아 줬으면 하는데.” 그 말을 들은 헤네스는 얼른 대답했다. “맡겨주세요. 열심히 할게요.” 준상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직 무슨 일인지 말 안 했는데.” 그러자 헤네스는 바로 그 말을 받았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니까 맡기시려는 것 아닌가요?” “물론.”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맡기고자 하는 일을 설명했다. “이번에 광전사들의 식량을 확보한 것은 알고 있지?” “네.” “그것의 관리를 맡아줬으면 한다.” “아...” 헤네스는 아버지나 오빠가 이런 종류의 일을 하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본 적이 있기 때문에 준상이 그녀에게 무엇을 원하는 것인지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아직 정식으로 어떤 세력을 결성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광전사 일천 명은 이미 군대라 부르기에부족함이 없는 전력이었다. 그런 군대를 유지하고 관리하는데 필요 불가결한 것이 바로 보급이다. 준상은 그런 중요한 일을 헤네스에게 맡기려 하고 있는 것이다. 사안의 중요성을 깨달은 헤네스의 표정이 진지해지자 준상은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어때. 할 수 있겠어?” 헤네스는 주먹을 불끈 쥐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해볼게요.” 그녀의 단호한 대답에 준상은 다시 말했다. “혼자서 하라는 얘기는 아니다. 보좌관들을 몇 붙여 줄테니, 너는 전체적인 관리만 하면 돼.” 내심 그런 큰일을 할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보좌관들이 도와준다면 한결 일이 편해지는 것은 두 말 할 필요가 없다. “그 정도면 문제없어요.” “그래.” 준상은 그 자리에서 바로 전투 식량이 담긴 인벤토리를 헤네스에게 건네 주었다. “신기루 꽃의 구획을 하나 비워줄 테니 그곳을 창고로 사용하면 된다.” “네!” 헤네스가 밝은 표정으로 대답하는 모습에 준상은 그녀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어 주었다. 준상은 최근 헤네스가 고민에 빠져 있음을 알고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준상에게 큰 도움이 되고 있는 리체스의 모습을 보며, 그녀는 조금씩 무력감에 빠져 들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준상은 여전히 그녀를 리체스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고, 헤네스 역시 그것을 잘 알고 있었으나 그것만으로 조금씩 마음을 좀 먹는 무력감을 떨치는 건 역부족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그녀 자신이 준상에게 충분히 큰 도움이 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 뿐이다. 하지만 이건 준상이 설명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그녀 자신이 그렇게 느껴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준상은 광전사들의 보급 전반에 관한 일을 그녀에게 맡기기로 결정한 것이다. 물론 단순히 그녀의 기분을 풀어주고자 이런 중요한 문제를 즉흥적으로 정한 건 아니다. 준상의 세계든, 헤네스의 세계든 간에 군대에서 부패가 일어나기 가장 쉬운 곳은 역시 보급이다. 이 일을 광전사들 중 누군가에게 맡긴다면, 그것을 감사하는 체계를 다시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아도 인력이 부족한 준상에게 있어서 이것은 이중의 부담일 수밖에 없는 일. 실무 능력을 갖춘 요정들이 있지만, 광전사들을 상대하기엔 아무래도 권위가 부족하다. 그런 면에 있어서 헤네스는 탁월한 친화력과 교섭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다, 준상의 반려라는 권위 또한 가지고 있으며, 또한 부패를 걱정할 이유도 없으니 가히 최고의 인선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일석 삼조, 아니 헤네스의 고민마저 해결할 수 있으니 그야말로 일석 사조다. 헤네스에게 광전사들에 대한 보급 문제를 일임한 준상은 신기루 꽃 최상층에 틀어박혀 이제까지 시도하지 않고 있었던 아이템 강화에 몰두했다. 가장 먼저 손을 댄 것은 바로 랑다잘의 분노였다. 압도적인 파괴력과 보기만 해도 움찔거릴 정도의 위압감을 지닌 이 거대한 두 개의 철구는 영웅급 듀얼 스톰과 검은 백합, 아니 이제는 검은 천사로 업그레이드된 콤보 카드의 위력 덕분에 더욱더 강력해진 상태이다. 하지만 문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아이템 그 자체로만 보자면 옵션이 극대화 피해 40퍼센트 증가, 단 하나 뿐이었다. 레어급임에도 옵션이 고작 하나 뿐이란 것은 아무래도 장점으로 보기 힘든 일이고, 만약 여기에 추가적인 옵션을 부여할 수 있다면 지금보다 훨씬 강력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 준상은 아이템 강화 전에 속성 보호를 위한 시드를 장착하기 시작했다. 속성 보호에 필요한 시드는 모두 세 개. 내구도, 공격력, 그리고 극대화 피해 증가, 이렇게 세 가지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속성 보호를 위한 시드를 장착한 준상은 다시 아이템 강화에 필요한 시드 세 개를 준비했다. 강화를 시작합니다. -강화에는 시드 세 개가 소모됩니다. -높은 등급의 시드일수록 강화 성공 확률이 높습니다. :강화에 성공하면 다음의 세 가지 효과중 하나가 부여될 수 있습니다. 1. 새로운 옵션 1개 추가 2. 공격력, 또는 방어력 증가 3. 아이템 내구도 상승 (주의) 강화에 실패하게 되면 당신의 아이템에는 여러모로 안 좋은 일이 생겨납니다. ->속성보호(내구도, 공격력, 극대화 피해 증가)가 적용 중입니다. 일전에 서윤의 길드원들에게 강화를 해줄 때와는 달리 하단에 속성보호가 적용 중이라는 메시지가 추가되어 있었다. 속성보호가 적용되어 있음을 확인한 준상은 곧바로 두 개의 철퇴 가운데 하나에 아이템 강화를 실행했다. 그러자 한순간 거대한 철구에서 빛이 흘러나오더니, 강화를 위해 준비했던 시드 세 개가 모습을 감추었다. 준상은 바로 아이템 확인을 실행해 변화를 확인했다. 아이템정보 명칭 : 랑다잘의 족쇄(R) +1 레벨제한 : 10 종류 : 무기 등급 : Rare 공격력 : 39-41 효과 : 극대화 피해 40% 증가 Seed : 4슬롯 설명 : 랑다잘의 오른쪽 팔을 구속하던 족쇄. 어지간한 힘으로는 이것을 무기로 사용하기는커녕 움직이기도 쉽지 않을 듯 합니다. “이건...” 새로운 옵션 대신 공격력이 증가되었다. 최소 공격력이 4, 최대 공격력이 1.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계속해서 아이템 강화를 실행했다. 처음에는 순조롭게 성공이 이어지다가 +9에서 +10으로 올라갈 때 한번 실패가 일어났지만 속성보호가 발동한 덕택에 아무런 변동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시 +11이상으로 강화를 하려 했지만, 뭔가 또 다른 요소가 필요한지 계속 실패하기만 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군.” 준상은 강화가 끝난 철구의 아이템 정보를 다시 확인했다. 아이템정보 명칭 : 랑다잘의 족쇄(R) +10 레벨제한 : 10 종류 : 무기 등급 : Rare 공격력 : 51-59 효과 : 1. 극대화 피해 48% 증가 2. 치명타 확률 8% 증가 3. 치명타 피해 12% 증가 Seed : 4슬롯 설명 : 랑다잘의 오른쪽 팔을 구속하던 족쇄. 어지간한 힘으로는 이것을 무기로 사용하기는커녕 움직이기도 쉽지 않을 듯 합니다. 중간에 내구도 증가가 한 번 뜨기는 했지만, 다른 부분은 제법 만족스럽게 강화가 이루어졌다. 단순 계산으로도 무기 공격력이 50%이상 증가한데다, 다른 옵션들도 유용한 것 뿐이었다. 다만 옵션은 3가지가 한계인지 처음에 치명타 확률과 치명타 피해가 나오자 새로운 옵션이 나오지 않고 수치만 변동이 이루어졌다. 단 하나의 아이템을 강화하는데 시드를 너무 많이 소모한 것이 아닌가 싶기는 했지만, 이 정도라면 충분히 투자할 가치가 있었다. 준상은 이후로도 계속해서 현재 사용중인 여러 아이템을 +10수준으로 강화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던 준상은 얀트훈센에서의 퀘스트가 끝난지 일주일째가 되는 날, 다시 얀트훈센을 방문했다. 눈보라는 이미 사라졌지만, 오랫동안 몰아쳤던 한파의 영향으로 인해 아직 군데 군데 얼음 같은 것이 남아 있었다. 허나 따스한 햇빛이 계속 내리쬐고 있으니 얼어붙은 대지는 머지않아 본래의 색을 찾게 될 것이다. 냉기에 대한 별다른 대책이 없어도 활동에 지장이 없음을 확인한 준상은 얀트훈센의 탑 뒤쪽의, 자신의 펫이 된 이벨라 하란두르가 감금되어 있던 곳에 마지막 하나 남은 신기루 꽃의 석문을 장치하고는 그곳을 통해 대기하고 있던 광전사들을 내려보냈다. “아...” 광전사들은 어두운 통로를 지나 탑 위에서 수백년 동안 얼음의 대정령에 의해 봉쇄되어 있던 얀트훈센의 정경을 바라보고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드디어, 드디어!” 그들 가운데 단 한 명도 이곳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자는 없었지만, 광전사의 숙원이 마침내 이루어진 것에 대한 감상은 이전에 이곳에서 도망쳐 대륙으로 흩어져야만 했던 선조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광전사들은 누가 명령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얼른 탑을 내려가 성 안팎을 쓸고 닦으며 청소를 시작했다. 너무나 급격하게 얼어붙은 데다, 마지막 순간을 제외하고는 눈보라조차 범접하지 못한 터라 의외로 성곽이나 마을의 상태는 매우 양호했고, 조금만 더 손을 보면 지금 당장이라도 충분히 사용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준상은 광전사들이 신이 나서 성과 마을을 정돈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블러드로드 몇을 불러 지시했다. “바로 주둔이 가능할까?” 그 말에 블러드로드들은 입을 모아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벌판에 천막을 치고도 지내는 판에 이 정도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다행이군.”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말했다. “신기루 꽃 안에는 일단 백 명 정도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이곳으로 옮겨서 복구 작업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라.” “알겠습니다.” 블러드로드들이 당연한 일이라는 듯이 한 목소리로 대답하자, 준상은 몸을 돌려 신기루 꽃으로 돌아가려다가 다시 한 마디를 덧붙였다. “이곳이 수복되었음을 알게 되면 필시 욕심을 부리려는 자들이 있을테니, 대비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 그러자 블러드로드들은 눈에서 안광을 번뜩이며 대답했다. “그런 자가 있다면, 어째서 저희들이 광전사라 불리는지 뼈저리게 깨닫게 될 것입니다.” 00231 트롤러 ========================================================================= 결의에 가득 찬 광전사들의 말에 준상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현재 남은 블러드로드 가운데 최고 선임인 도룬이 마침 잘되었다는 듯이 다시 얘기를 꺼냈다. “건의하고자 하는 일이 있습니다. 들어 주시겠습니까?” 준상은 신기루 꽃으로 들어가려던 것은 멈추고 되돌아서며 말했다. “말하라.” 도룬은 얼른 준상 앞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대륙에는 아직 많은 수의 광전사들이 남아 있습니다. 그들과 그들의 가족들을 이곳으로 불러 모으고 싶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자 다른 블러드로드들도 일제히 준상 앞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외쳤다. “허락해 주십시오!” 그들의 모습을 보며 준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일천의 광전사들은 분명히 강한 전력이지만, 본래 군대란 것은 나무와 같아서 그것을 지탱할 뿌리와 같은 존재를 필요로 한다. 인간인 이상 나이를 먹어 노쇠해지는 전사들을 대신해 새로운 젊은 전사들을 보충해야 하고, 그들이 입고 먹고 마시는 그 모든 것을 생산해 공급하는 자들도 필요하다. 당장은 준상이 보급을 책임지고 있는 상황이지만, 이것 또한 기본적으로 자급이 가능한 체계를 만들 필요가 있다. 이 모든 것을 만족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인력. 하지만 어중이 떠중이들을 무작정 불러 모으는 것은 여러 가지로 위험성이 따르는 일이다. 물론 광전사의 후예라고 해서 마음 놓을 수는 없는 일이지만, 최소한의 선별 기준은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자발적으로 대륙에 흩어져 있는 광전사의 후예들을 불러 모으고자 하는 그들의 의견은 일견 타당한 바가 있다. 하지만 사람이 늘어나면 문제도 그만큼 늘어나게 마련. 당장 그들을 관리할 행정 체계가 부족한 것은 물론이고, 모처럼 준상의 손에 의해 장악된 광전사들 내부에 다시금 파벌이 대두할 가능성도 있다. 더구나 생산 체계가 전혀 갖춰지지 않은 상황에서 무작정 사람들을 받아들이게 되면 그만큼 보급의 부담도 커지기 마련. 게다가 광전사의 후예들이 대규모로 이동하게 되면 주변 세력의 이목이 집중될 것 또한 당연한 일이다. 준상은 가만히 이런 저런 생각을 떠올리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불러 모은다면 그 수는 얼마나 되겠는가.” 블러드로드들은 서로를 바라보았지만,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자는 그들 가운데 아무도 없었다. “정확한 숫자 까지는...” 도룬이 식은땀을 흘리며 대답하자, 준상은 다시 말했다. “내 깃발 아래 복종을 표할 자라면 받아들이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곳에 오기를 희망하는 자가 얼마나 될지 대략의 숫자 정도는 파악하고 있어야 그에 걸맞는 준비를 갖출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옳으신 말씀입니다.” 도룬의 대답을 들은 준상은 지시를 내렸다. “지금 즉시 대륙 각지에 전령으로 보낼 인원을 차출하고, 그들로 하여금 이곳으로 돌아올 인원을 파악하도록 계획을 수립하라. 그 모든 현황이 정리되어 온전히 한 눈에 파악되면 헤네스를 통해 보고를 받겠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도룬을 비롯한 블러드로드들은 머리를 조아리고는 광전사들을 불러 모으기 위해 급히 성채 밖으로 달려 나갔다. 준상은 그들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가만히 옆에 서있던 헤네스를 향해 말했다. “헤네스.” “네.” “들었지?” “...” 헤네스는 잠시 주저하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보급이라면 몰라도, 그 정도의 큰일을 제가 맡아도 될지.” 모르긴 해도 대륙 각지에 흩어진 광전사의 일족은 그 수가 최소한 만 단위는 될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이 정도 인원의 이동 계획은 물론이거니와 이동 후 정착에 필요한 여러 가지 제반 사항을 검토하고 결정하는 일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실로 만만치 않은 일이다. 보급이야 정해진 수량에 따라 그때 그때 실수 없이 원칙대로 분배하면 되는 일이다. 그러나 토지나 건물, 그리고 이권 같은 것이 걸리면 나이 어린 그녀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복잡한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 준상은 걱정스런 표정을 짓고 있는 헤네스를 향해 대답했다. “너 혼자 전부 떠맡으라는 것이 아니다. 필요하다면 나의 권위를 빌리고, 부족하다면 리체스의 경험으로부터 도움을 받으면 될 일이니까.” 헤네스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녀는 이 말이 듣고 싶었던 것 뿐인지도 모른다. 준상은 가만히 손을 뻗어 그녀의 작고 여린 손을 쓰다듬다가 다시 말했다. “물자에 대해서는 처가의 도움을 받는 것도 괜찮을 듯 싶은데.” “네?” 처가라는 말에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헤네스는 그것이 이벨류아의 브레아 가문을 말하는 것임을 깨닫고는 얼굴을 살짝 붉혔다. 이벨류아는 변경에 위치한 곳이지만 주위의 물류가 집결하는 곳이고 너른 들판도 끼고 있기 때문에 식량의 생산도 풍족하게 이루어지는 곳이다. 도움이라고는 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이러한 잉여 생산물을 얀트훈센이 자급 체제를 이루기 전까지 공급하는 거래가 될 터. 기사 대전의 준비를 위해 적잖이 자금력이 소모된 상황이니 이런 큰 거래는 브레아 가문에 큰 도움이 된다. 사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준상이 서윤을 통해 물자를 대량으로 반입하는 것이겠지만, 당장 광전사들로부터 대금을 지급 받는 것이 아닌 이상 여기에 소요되는 자금은 일방적으로 준상의 호주머니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하지만 중간에 이벨류아를 거치게 되면 얘기는 조금 달라진다. 얀트훈센에 필요한 물자를 이벨류아에서 수급하고, 그 대금은 지구의 물품으로 대체하는 방식이 가능해진다. 이렇게 되면 지구의 물품을 이벨류아에 판매하는 수익으로 얀트훈센의 개척에 필요한 물자를 충당하는 것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야말로 누이 좋고 매부 좋다는 말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얘기가 아닐까. “고마워요.” 그녀는 바보가 아니다. 준상이 자신에게 보급을 맡기고 다시 이 모든 일의 총괄을 맡기려 하는 것이, 최근 그녀의 마음 속에서 피어나던 무력감과 그로 인한 고민을 해소시키는데 도움을 주고자 하는 배려임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 말 할 필요 없다.” 준상은 그녀의 상기된 볼을 살짝 어루만지고는 다시 말했다. “일단 블러드로드들의 보고를 기다렸다가, 이벨류아에 다시 한 번 들르도록 하자.” “네.” 함께 손을 잡고 신기루 꽃으로 돌아가자, 마침 연구실에서 돌아오던 리체스와 곧바로 마주쳤다. “지금 막 돌아오는 길인가요?” 헤네스가 묻자, 리체스는 한숨을 푸욱 내쉬며 대답했다. “에휴, 그렇지 뭐.” 아무래도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는 모양이다. 하지만 지금 그녀가 연구중인 분신의 팔찌는 제대로 성공하기만 한다면 준상에게 큰 힘이 될 수 있었다. 만약 세 명의 또 다른 준상이 각기 랑다잘의 분노와, 블러드서커, 그리고 어나이얼레이터를 들고 본체와 함께 전장에 뛰어든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적어도 이번처럼 전력의 열세 때문에 몸을 웅크린 채 기회만을 엿보다가 적을 놓쳐버리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준상은 손을 뻗어 리체스를 어느새 지정석이 되어버린 자신의 어깨 위에 데려다 앉히고는 이렇게 말했다. “수고했다.” 별 것 아닌 치하였지만, 그 말을 들은 리체스는 방금 전까지 날개가 축 처져 있었던 것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볼을 발그레하니 붉히며 미소를 지었다. “헤헤, 별 말씀을요.” 그렇게 대화를 나누며 최상층에 설치된 요정 결계의 영역에 들어서자 리체스는 스르르 미끄러지듯 준상의 어깨에서 내려와 바닥에 서더니 상기된 표정으로 준상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키스해주세요.” “...” 리체스는 이전에 아이템을 손보는 일을 준상으로부터 부탁받으면서 그 댓가로 작업한 아이템의 개수만큼 자신이 원할 때 원하는 곳에 키스를 받을 수 있는 권리를 얻은 상태였다. 준상이 말없이 길고 아름다운 그녀의 손가락을 맞잡으며 입을 맞추자, 리체스는 마음 속에 차오르는 행복감으로 인해 지금껏 어깨를 짓누르던 피로가 단숨에 쓸려나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이미 만년을 넘게 살아온 리체스였지만, 지나온 세월보다 최근의 얼마 안 되는 짧은 기간이 그녀에게는 더욱더 자극적이고 재미 있으며 행복하기 그지 없었다. 이 좋은 걸 왜 진작 몰랐을까. 리체스는 그런 생각을 떠올리다가 요정들의 키스 자국이 가득 새겨진 준상의 얼굴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튼. 블러드로드들은 다음 날이 되어서야 예상되는 이주 인원을 보고해왔다. 단번에 모든 인원들을 불러 모으는 것은 그들의 생각에도 무리하다고 생각했는지, 각 지역 별로 천명 단위의 인원을 순차적으로 이주시키는 쪽으로 계획을 수립한 모양이다. 확실히, 이 정도면 준상으로서도 큰 부담 없이 일을 처리하는 것이 가능하다. “헤네스.” “네.” “네 생각은 어때.” 헤네스는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다만 먼저 도착한 쪽이 아무래도 주택이라든가 토지 소유에 있어 기득권을 가지게 될 수 있어요. 이 점을 고려해서 나중에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각 지역별로 이주 시기를 조율할 필요가 있다고 봐요. 먼저 온 사람들이 더 많이 고생하게 될 것은 분명한 일이니 이 점에 대해 충분히 납득시키는 것도 좋겠죠.” 준상은 블러드로드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렇다는군.” 그러자 곧바로 도룬이 대답했다.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충분한 사전 협의를 거치도록 하겠습니다.” 준상은 다시 물었다. “그럼 언제부터 시작할 생각인가.” “붉은 공포께서 허락해주신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시작할 생각입니다.” “흠...” 기다렸다는 듯한 도룬의 대답에 준상은 턱을 쓰다듬으며 이렇게 말했다. “원활한 물자 수급을 위해서는 일단 이벨류아에 다녀올 필요가 있다. 시작은 그 이후가 좋겠군.” 도룬을 비롯한 블러드로드들은 다소 아쉬운 표정이었지만, 무턱대고 사람들만 불러온다고 될 일이 아니란 건 그들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준상은 블러드로드들을 돌려보낸 다음, 그들이 가져온 보고서를 헤네스에게 건넸다. “그럼 슬슬 가볼까?” “네.” 준상은 곧바로 헤네스와 리체스를 데리고 이벨류아의 저택으로 향했다. 신기루 꽃의 석문을 통해 곧바로 저택에 도착한 준상은 방에 마련된 끈을 당겨 시녀를 불렀다. 오직 준상과 헤네스만이 사용할 수 있는 침실과 연결된 종이 울려 퍼지자, 조용히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수행하고 있던 시종과 시녀들은 저택의 주인이 귀환했음을 알 수 있었다. 헐레벌떡 달려와 고개를 조아리는 시녀를 향해 준상은 조용히 말했다. “브레아 가문에 내가 돌아왔음을 알려라.” 그러자 시녀들을 이끌고 온 시녀장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외람되지만 주인님께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시녀장의 태도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음을 깨달은 헤네스가 얼른 그 말을 받았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그것이...” 시녀장은 난처한 표정을 짓더니 다른 시녀들을 밖으로 내보낸 다음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실은, 두 분이 자리를 비우신 동안 큰 일이 있었습니다.” “...” 준상은 얼굴을 찌푸렸다. 자신들이 자리를 비운 동안이라도 문제가 생기면 헤네스의 어머니인 유라스에게 붙여둔 요정 기사 미아라를 통해 보고가 전해지도록 조치를 취해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자세히 설명해 주세요.” 다시 이어진 헤네스의 재촉에 시녀장은 마지못한 표정으로 이렇게 대답했다. “두 분이 떠나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왕실에서 사자가 찾아왔습니다. 그 사자는 에슈탈렌의 사절단이 이벨류아를 방문할 예정이니 준비에 만전을 기하라는 말을 전했습니다.” “에슈탈렌?” 준상은 난데없이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은 표정을 짓자, 헤네스가 그에게 설명을 해주었다. “예전에 천상의 다리에서 벌어졌던 일, 기억나지 않으세요?” “아...” 준상은 그제서야 에슈탈렌이라는 이름과 함께, 침묵의 늪지에서 나온 마물 크롤로바간을 해치웠던 일을 떠올릴 수 있었다. 헤네스는 준상이 기억을 떠올리자 다시 시녀장을 향해 말했다. “설마, 준상씨를 찾아오는 건가요?” “말씀대로입니다.” 당시 준상이 보여주었던 초월적인 능력을 감안하면 감사의 뜻을 표하기 위해 사절을 보내는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단지 그것뿐이라면 시녀들을 내보내고 이런 식으로 말을 꺼낼 이유가 없다. 헤네스는 순간 직감적으로 한 인물을 떠올렸고, 설마 아니겠지 싶은 표정으로 시녀장에게 물었다. “설마... 그 사절단에 특별한 인물이라도 섞여 있는 건가요?” 에둘러 묻는 헤네스의 말에 시녀장은 바로 대답했다. “말씀대로입니다. 이 사절단에는 에슈탈렌의 왕녀 에롤로미네님이 포함되어 있다고 합니다.” 준상과 헤네스는 그제서야 어째서 유라스가 미아라를 통해 이 일을 알리지 않은 것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00232 트롤러 ========================================================================= 이전에 준상이 잠시 이벨류아에 머물 때도 귀족 같은 자들이 괜히 혼담 같은 걸 찔러보는 경우가 많았다. 헤네스나 브레아 가문으로서는 그것 만으로도 골치가 아픈 일이었으나 준상은 얼굴도 본 적 없는 여자와의 혼담 자체에 아예 신경도 쓰지 않았기에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 찾아오는 여자는 무려 왕녀. 그것도 시조신의 가호를 받아 대대로 특수한 능력을 부여받는다는 에슈탈렌 왕실의 직계다. 한 나라의 왕실이라는 든든한 배경은 물론이고, 그 자신의 능력이나 명성도 보통의 귀족 나부랭이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파급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 왕녀를 대놓고 사절로 파견할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수밖에 없고, 그런 이유들 가운데 가장 사람들이 연상하기 쉬운 것은 바로 혼사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지금까지 목 안에 걸린 가시처럼 준상을 껄끄러워 하며 사람을 보내 호시탐탐 정탐을 일삼던 델로드란 왕실이나 수도의 귀족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처럼 난리가 나고 말았다. 자신들과 다소 척을 지긴 했어도, 어쨌든 이벨류아의 명문가와 혼인을 맺었으니 실질적으로야 어림없는 얘기더라도 심정적으로는 델로드란의 영향력 하에 있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에슈탈렌 왕실이 혼인 적령기의 왕녀를 사절로 보내는 초강수를 던짐으로 인해 왕실과 수도 귀족들은 준상이라는 인물이 지닌 가치를 처음부터 다시 재고할 것을 강제당한 셈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당연히 그 모든 압박은 이벨류아의 집정관 대리를 맡고 있는 브레아 가문에 집중되었다. 웃긴 건 바로 그 브레아 가문이 준상과 혼인으로 맺어진 곳이라는 점. 하지만 집정관을 대리하고 있는 이상, 에슈탈렌의 왕녀가 이벨류아에 오면 그 대접을 브레아 가문이 맡아야 하니 상황은 더 이상해질 수밖에 없었다. 야반도주니 뭐니 시끄러웠던 것도 사실이고, 그 때문에 제스터가 뒷목 잡고 쓰러진 일도 있었지만, 어쨌든 준상과 헤네스는 공식적으로 혼인을 인정받은 상태.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나라의 왕녀가 노골적으로 그 남자를 노리고 찾아오는 걸 극진히 대접해야 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으니, 브레아 가문으로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난감한 처지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 소식이 전해진 시점에 준상과 헤네스가 이벨류아에서 떠나 있었다는 사실. 물론 헤네스의 어머니 유라스는 요정 기사 미아라를 통해 준상에게 곧바로 연락이 가능했다. 그러나 만에 하나의 상황을 고려하면, 역시 최선은 준상이 이 일 자체를 모르고 넘어가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왕녀라는 입장상 세인의 시선을 의식해서라도 무작정 눌러 앉을 수는 없을 테니, 적당히 시간을 끌면 알아서 돌아갈 수밖에 없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사실 브레아 가문이나 델로드란 왕실을 비롯해 지금 이곳을 찾아오고 있는 에슈탈렌의 왕녀 에롤로미네조차 한 가지 커다란 착각을 하고 있었다. 이번 사태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의사 결정권을 지닌 자가 누구이던가. 바로 준상이다. 혼인이든 뭐든 준상의 마음이 동해야 가능한 일이란 것은 달리 물어볼 필요도 없는 일. 하지만 정작 이 남자의 기억 속에는 지금 찾아온다는 왕녀의 이름은 물론이고 그 외모를 비롯한 일체의 어떤 감상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다. 오히려 왕녀의 존재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것은 당시 기사들을 치료하며 함께 얼굴을 마주했던 헤네스 쪽이었다. 이런 상황이고 보니, 막무가내로 이곳을 찾아온다는 왕녀의 소식을 들은 준상의 반응은 오히려 명확할 수밖에 없었다. “민폐로군.”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얼굴조차 기억이 안 나는 엉뚱한 여자가 자신의 의사는 생각지도 않고 무작정 찾아온다고 해봐야 준상에게 귀찮음 이상의 감정을 유발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조금은 조마조마한 기분으로 준상의 반응을 살피던 헤네스는 그러면 그렇지 하며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준상은 저 엄청난 힘을 지닌 요정 여왕조차도 처음에는 고작 날파리 취급했던 남자다. 얼음덩이 같은 그 마음을 녹이기 위해 헤네스가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단순히 외모에 혹할 남자 같았으면, 당장 요정계에만 가더라도 그에게 호감을 보이는 아름답고 귀여운 요정들이 천지사방에 널려 있는 판국이다. 헤네스는 조용히 시녀장을 향해 말했다. “알려줘서 고마워요.”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시녀장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하자 준상이 입을 열었다. “이제 와서 입단속을 하는 건 늦었을테지.” “네. 아무래도...” “그래도 일단 주의 정도는 주는 편이 좋겠지?” “그렇게 조치하겠습니다.” 주의를 준다고 해도 완전한 비밀이란 건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이곳의 종이 울려서 시녀들이 달려온 것만 살피더라고 준상이 돌아온 것 정도는 파악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도 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엄연히 존재한다. “잠시 물러가 있도록.” “네. 주인님.” 시녀장이 물러가자 준상은 헤네스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대놓고 움직이기는 어려울 것 같은데.” 귀찮기는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귀찮음을 피하기 위해서도 대놓고 움직이는 건 그리 현명한 생각이 아니었다. 에슈탈렌 왕국의 사절, 그것도 왕실의 금지옥엽이 방문한다는 사실을 전해듣고도 그냥 무시한 채 자기 볼 일 보고 돌아가 버린다면 이건 그 나라에 대한 큰 모욕이 된다. 차라리 그냥 이 모든 사실을 몰랐던 것으로 해버리는 쪽이 준상으로서는 귀찮음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인 셈이다. “그래도 괜찮으시겠어요?” 그 의도를 파악한 헤네스는 무려 왕실의 사절을 모른 척하는 것이 과연 잘하는 일일까 싶어 그렇게 물었지만, 준상은 덤덤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물론.” “...” 확정적인 그의 대답에 헤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준상의 그녀의 손을 잡으며 다시 이렇게 말했다. “갈까.” “네.” 준상은 시녀들을 통해 브레아 가문에 자신의 방문을 통보하는 대신, 요정 기사 미아라에게 연락을 넣었다. “미아라.” 요정들의 소통 방법을 이용해 연락을 넣자 때마침 유라스와 우아하게 티타임을 즐기고 있던 미아라는 기겁을 하며 놀라고 말았다. “콜록! 콜록! 준상님?” 미아라의 당황한 목소리를 전해들은 준상은 조용히 용건을 말했다. “장모님께 전해라. 지금 조용히 찾아뵙겠다고.” “네! 그렇게 할게요.” 곧바로 준상이 연락을 끊자, 미아라는 가슴을 쓸어내리고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유라스를 향해 말했다. “준상님이 지금 조용히 찾아뵙겠다고 전해달래요.” “그랬군요.” 유라스는 미아라의 입에서 준상이라는 말이 나오고, 다시 이어서 조용히 찾아온다는 말이 전해지자 그가 현재 돌아가는 상황을 어느 정도 파악했음을 바로 이해했다. 대략의 정황을 파악한 유라스는 조용히 사람을 보내 남편 제스터와 장남 젤란을 불러들였다. 그렇게 세 사람이 거실에 모여 조금 기다리자, 창문이 열리며 한 차례 공기가 흔들리는가 싶더니 준상과 헤네스가 그들 앞에 스르르 모습을 드러냈다. 유령처럼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자 제스터와 유라스, 그리고 젤란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반색하며 그들을 맞이했다. “어서 와요.” “반갑습니다.” 유라스와 준상이 인사를 나누는 사이, 제스터는 자신의 품으로 안겨드는 막내 딸을 가만히 안아주며 안부를 물었다. “별 일 없었니?” “네. 아버지도 별 일 없으셨죠?” “그야 물론이지.” 잠시 해후의 시간을 가졌던 그들은 이내 자리를 잡고 둘러 앉아 앞으로의 일을 논의했다. 준상은 가장 먼저 얀트훈센이 완전히 수복되었음을 알렸다. “허... 그게 정말입니까?” 이벨류아의 일만으로도 정신이 없는 제스터와 유라스는 머나먼 북녘의 일에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얀트훈센이 과거 동서대륙의 요충지였던 것은 익히 알고 있다. 그러나 그곳이 수복되었다 한들 당장 어떤 영향을 받기에 이벨류아는 너무나 거리가 먼 곳이었다. 하지만 한동안 수도에서 지내며 국제 관계에 대해 이런 저런 경험을 하고 돌아온지 얼마 안되는 젤란은 준상의 무덤덤한 말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얼음의 대정령에 의해 광전사들이 그들의 고향으로부터 쫓겨난 것은 이미 수백년이 넘은 오래된 과거의 일이다. 그러나 최근 얀트훈센 주위를 뒤덮고 있던 눈보라의 힘이 월등히 강해지면서 접근은커녕 멀리서 지켜보는 것조차 힘들어졌음을 알고 있는 젤란에게 있어 준상의 말은 경이 그 자체라고 밖에 할 수 없었다. 게다가 얀트훈센이 어딘가. 이곳 이벨류아에서는 아무리 빠른 교통수단으로 사용하더라도 그곳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이 말도 안 되는 자신의 매제는 고작 얼마 되지 않는 짧은 시간동안 이미 그곳을 다녀온 것은 물론이거니와, 인간의 힘으로는 감히 범접조차 할 수 없다고 전해지던 얼음의 대정령을 굴복시키고 그곳을 수복했다고 말하고 있었다.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준상은 젤란이 그렇게 놀라거나 말거나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허... 허허...” 만약 준상이 아닌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대번에 미친놈이 헛소리 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를 만큼 이 일은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더구나 얀트훈센이 지닌 지정학적 요건을 감안한다면, 모르긴 해도 이 남자는 앞으로 대륙의 정세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될 것임에 틀림없다. 에슈탈렌의 왕녀는 이런 준상의 가치를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걸까. 아무리 그의 힘이 상식을 벗어났다고는 해도, 남자라도 쉽지 않은 머나먼 여정을 고귀한 왕실의 금지옥엽이 주위의 시선조차 아랑곳 않고 찾아올 정도인지는 솔직히 조금 의문일 수밖에 없는 일이다. 때문에 세간에는 준상과 에슈탈렌의 왕녀 사이에 뭔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지 않겠냐며 의혹어린 시선마저 보내고 있었고, 젤란 역시 속으로 그런 의심을 조금은 품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일천의 광전사와 함께였다고는 해도 준상이 재앙이라는 말로 밖에 표현이 안 되는 얼음의 대정령을 굴복시킨 것이 사실이라면, 에슈탈렌의 왕녀는커녕 왕이 직접 달려와 맞이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거 참... 정말 매번 사람을 놀라게 하시는 군요. 정말 대단합니다.” “별 말씀을.” 감탄어린 젤란의 말에 준상은 그렇게 대답하고는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실은 그래서 말입니다만...” 준상은 앞으로 얀트훈센을 다시 정비하고 광전사들이나 그들의 가족을 불러들이기 위해 필요한 물자를 수급하기 위한 자신의 방법을 그들에게 설명했다. 처음에는 그저 먼 곳의 일이라고만 생각했던 제스터와 유라스도 준상의 설명을 듣자 흥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광전사들과 함께 떠나기 전에 그와 거래한 포목들은 이벨류아를 통해 델로드란 각지의 귀족들에게 퍼져 나가며 새로운 하나의 커다란 유행을 선도하는 중이었고, 이것을 통해 브레아 가문은 기사 대전으로 인해 소모된 자금의 상당 부분을 다시 회복하는 것이 가능했다. 본디 교역이란 일방적으로 수입만 이루어지게 되면 결국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일. 하지만 포목이나 기타 이계의 물품을 수입하는 동시에 이벨류아에서 생산되는 물품을 얀트훈센에 공급하는 형태의 삼각 무역이 이루어질 수 있다면 그런 불균형을 조금은 해소할 수 있게 된다. 준상이 제안한 삼각 무역의 이점은 이것만이 아니다. 당장은 얀트훈센이 무한정 물자를 소비하기만 하는 구멍이 될 수밖에 없지만 시간이 지나 복구가 이루어지고 동서 대륙의 교통로로서의 구실할 수 있게 되면, 이벨류아는 이곳을 통해 다른 대륙의 물품을 누구보다도 빨리 접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되면 이벨류아라는 남대륙 최고의 교역 도시로 발전하는 것은 그야말로 시간문제일 뿐이다. 젤란은 준상의 설명이 끝나자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이건 반드시 해야 합니다!” 하지만 제스터와 유라스는 다소 신중한 반응을 보였다. 생각해보면 얼마 전에 있었던 기사 대전은 브레아 가문이 이벨류아 인근에서 너무 큰 영향력을 가진 탓에 벌어졌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이야 준상이라는 존재 때문에 감히 욕심을 내지 못하고 있지만, 만약 지금보다 더 이벨류아가 커지고 이곳을 통해 막대한 이익이 오가게 되면 이런 상황은 또다시 뒤집어질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기사 대전 정도가 아니라 아예 전쟁이 일어날 지도 모른다. 물론 지금 준상이 제의한 삼각 무역 자체가 그의 힘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지만, 욕심에 눈이 멀면 합리적인 판단보다는 자의적인 판단이 우선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바보 같은 생각이지만 브레아 가문 전체 또는 일부를 인질로 삼아 이권이나 이러한 교역을 가능하게 만드는 힘 그 자체를 빼앗으려 드는 자가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음...” 제스터로서는 가문의 힘과 명성을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불씨를 만들어 다가올 미래에 대해 불안요소를 만들 수도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아무래도 생각이 길어질 수밖에 없다. 제스터는 흘깃 준상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담담한 표정으로 자신의 시선을 태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통이 커도 어느 정도여야지. 이건 나라는커녕 대륙 전체를 뒤흔들 수도 있는 파급력을 지니고 있지 않은가. 그런 주제에 저런 담담한 표정이라니. 제스터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푸욱 내쉬고 말았고, 그런 복잡한 심경을 이해했는지 유라스가 손을 뻗어 그의 손을 말없이 감쌌다. 아버지가 한숨을 내쉬는 모습을 본 헤네스는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처음부터 크게 일을 벌일 생각은 없어요. 인원의 복귀도 천명 단위로 순차적으로 이루어질 테니 소모되는 물자도 그런 식으로 차츰차츰 규모를 키워가게 될 거에요. 이벨류아에서 이 모든 것을 감당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면, 교역 대상을 늘려보는 방법을 취할 수도 있겠죠. 광전사들도 그냥 정처 없이 떠돌기만 한 것은 아니니 알아보면 그 정도는 가능할 것 같아요.” “...” 들어보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한곳으로 너무 재화가 집중되는 것이 문제의 소지를 만든다면, 적절히 분배하면 될 일이다. 제스터는 유라스와 젤란을 돌아보며 눈빛으로 동의를 구했고, 그들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했다. “후... 좋습니다. 그럼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의 물자가 필요한지 말씀해 주십시오.” 제스터가 최종적으로 결정을 내리자 준상은 헤네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것에 대해서라면 헤네스에게 말씀하십시오.” “네?” “얀트훈센에서 소모되는 모든 물품의 보충과 관리는 그녀의 책임 하에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아...” 어떻게 보면 이건 대단히 무모한 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커다란 신뢰의 표현이기도 했다. 안 그래도 에슈탈렌의 왕녀 때문에 복잡한 기분일 수밖에 없던 제스터와 유라스, 그리고 젤란 이렇게 세 사람은 준상의 그 말을 듣고 감격스러운 기분마저 들었다. 헤네스는 그런 세 사람을 보며 선언하듯 말했다. “가족이라고 봐주지 않을테니까 모두 긴장하셔야 할 거에요.” 막내딸의 당돌한 그 말을 듣는 순간, 제스터의 입에서는 참으로 오랜만에 기분 좋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 작품 후기 ============================ 표지는 조만간 교체될 예정입니다. 이북 계약을 하면서 업체에서 표지를 맡았습니다. 이미 시안이 나와 있으니 조금만 기다리시면 새로운 표지를 만나볼 수 있게 될 겁니다. 빨리 퇴고를 해서 원고를 넘겨야 이북이 나올텐데... 아무래도 연재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는지라;; 다른 연재 장소를 문의하신 분이 계셨습니다. 하지만 편당 결제와 정액제를 병행하는 건 여러가지로 번거로운 문제가 많아서 현재로서는 다른 연재 장소를 물색할 생각이 별로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00233 트롤러 ========================================================================= 준상은 하루 정도 은밀히 브레아 가문에 머물러 헤네스가 모처럼 가족들과 함께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는 다음날이 되어서야 신기루 꽃으로 귀환했다. 그리고 곧장 최상층에 틀어박혀 새로운 작업에 몰두했다. 리체스는 아직도 분신 팔찌의 연구에 몰두해 있는 상황이었고, 헤네스는 얀트훈센의 복구와 물자 수급을 총괄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어떻게 보면 그녀들이 있기에 이렇게 다른 것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만의 수련과 능력 향상에 몰두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준상이 새로 시작한 것은 다름 아닌 시드각성. 카드의 경우에는 각성을 위해 레벨과 경험치를 올려야 할 필요성이 있어서 아직 보류한 상태지만, 시드는 필요한 수량만 갖춰지면 실행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물론 이 수량이라는 것 자체가 준상처럼 시드를 긁어모으지 않으면 꿈도 꾸기 어려운 것이지만 말이다. 산술적으로 계산해 봐도 두 개의 시드를 이용해 각성을 실행하면 하나의 시드만 남는다. 운이 좋아서 곧바로 10% 이상의 시드가 나온다면 더할나위 없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8%만 양산될 가능성이 높고, 이렇게 되면 10%를 맞추기 위해서 다시 몇 번의 각성을 재시도해야만 한다. 준상이 사용하는 카드에 장착될 시드 슬롯의 개수는 콤보에 따라 변동이 제법 심한 편이다. 가장 높은 범용성을 지닌 광전사 콤보의 경우, 영웅 등급 콤보인 크림슨 드레드는 총 37개의 시드 슬롯을 가진다. 이 가운데 16개를 레어시드를 장착하기 위해 따로 제하면, 남은 슬롯의 수는 모두 21개. 만약 준상이 현재 사용하는 모든 일반 시드를 10%이상으로 필요한 수만큼 갖춘다면, 물리 저항을 제외하고도 최소 두 가지 이상의 속성을 100% 이상으로 맞출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준상의 전투 스타일은 맞기 전에 먼저 두들겨 부수는 것. 이런 극단적인 스타일은 일장일단이 있게 마련이지만, 상대의 공격을 그대로 씹어 먹을 수 있을 정도의 방어 능력을 갖추게 된다면 그만큼 공격의 효율이 높아질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일이다. 최근에 준상이 상대한 적들은 단순한 물리 공격 능력을 넘어서 거기에 속성 공격을 부여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었다. 그런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속성 저항력을 갖추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또한 퍼센티지가 높은 시드를 다량 소유하고 있으면, 상대적으로 적은 카드 슬롯을 갖춘 여타의 펫이나 아예 카드 장착 자체가 불가능한 소환물 들에게도 완전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의 속성 저항 능력을 갖춰주는 것이 가능해진다. 시드각성을 시작합니다. -시드 각성에는 같은 효과를 지닌 두 개의 시드가 필요합니다. :각성에 성공하면 다음과 같은 효과가 부여됩니다. -각성에 소모된 두 개의 시드가 지닌 효과 수치의 평균값보다 높은 수치의 시드가 생성됩니다. -만약 각성에 소모되는 두 개의 시드가 모두 7% 이상의 수치를 가지고 있다면, 등급에 +효과가 부여됩니다. -등급에 +효과가 부여된 시드는 최대 10%의 효과 수치를 가질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두 개의 시드가 모두 10%이상의 수치를 가지고 있다면 등급은 ++로 상승됩니다. -등급에 ++효과가 부여된 시드는 최대 12%의 효과 수치를 가질 수 있습니다. -각성으로 생성된 시드가 가질 수 있는 최대 수치는 해당 등급의 최대 수치와 같습니다. ex) 일반 등급이라면 7%, +등급이라면 10%, ++등급이라면 12% 시드각성을 실행하자 간단한 안내문이 나온다. 단순히 플러스 등급만 가능한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투플러스 등급 역시 생성이 가능한 모양이다. 시드 하나의 능력을 12%까지 올릴 수 있다면, 여유 슬롯으로 올릴 수 있는 저항 수치는 최대 252퍼센트. 이 수치라면 정령 효과까지 감안할 경우 최대 3가지 속성을 100퍼센트로 맞추는 것이 가능해진다. 물론 100퍼센트로 저항 수치를 맞춘다고 해서 안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최근 얻은 검은 백합 콤보처럼 상대의 방어나 저항을 낮추는 능력을 지닌 적이 등장하지 말란 법도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대단한 일인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거... 만만치 않겠는걸.” 운이 없을 경우, 12퍼센트까지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 7%시드의 수는 무려 32개. 21개의 여유 슬롯을 모두 12퍼센트짜리로 채운다 가정하면 필요한 7% 시드의 수는 모두 672개다. 여기에 추가로 상황에 따라 속성의 변화를 준다고 가정하고, 추가로 펫이 사용할 시드까지 감안하면, 이 수는 더욱더 늘어나게 된다. 아무리 준상이 그동안 시드를 긁어모아 산더미처럼 쌓아두었다 해도 7%짜리 시드가 그렇게 넘쳐나지는 않는다. 결국 하위 등급의 시드를 각성시켜 7%짜리로 만들어야 하는 셈인데, 이렇게 되면 소모되는 시드의 수는 더욱더 늘어나게 된다. “죽겠군.” 준상은 잠시 고민하다가 1%짜리 시드 두 개를 가지고 각성을 실행해 보았다. 안내 메시지를 넘긴 다음 시드 두 개를 세팅하고 각성을 실행하자, 한 줄기 빛과 함께 시드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면서 사라지더니, 이내 하나의 새로운 시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축하합니다! :시드각성이 성공했습니다! (화염저항 1%)와 (화염저항 1%)의 시드를 사용한 결과, (화염저항 6%)의 시드가 생성되었습니다. “오!” 한 3% 정도만 나와도 다행이다 싶었는데, 예상 외로 6%나 되는 시드가 생성되었다. 준상은 혹시나 하고 다시 한 번 1%짜리 시드를 투입해 보았다. 축하합니다! :행운의 여신의 가호를 받아 시드각성이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냉기저항 1%)와 (냉기저항 1%)의 시드를 사용한 결과, (냉기저항 7%)의 시드가 생성되었습니다. “헛!” 이번엔 아예 7%짜리가 생성되었다. 게다가 메시지까지 바뀌었다. “행운의 여신이라니...” 그러고 보면 준상은 지금 얼굴에 일만이 넘어가는 요정들의 키스 자국이 뒤덮인 상태. 지금까지는 요정의 키스가 지닌 행운 증가의 효과에 대해 별다른 실효성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시드가 뻥튀기 되는 모습을 보면 메시지대로 자신이 행운의 여신에 의해 보호 받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준상은 신이 나서 계속해서 하위 등급 시드를 각성시켰다. 계속해서 실행해 본 결과 여신의 가호가 발동될 확률은 대략 30퍼센트 정도. 하지만 사용되는 시드가 대부분 1~2퍼센트짜리 저급 시드인 것을 감안하면 이건 절대로 낮은 수치가 아니다. 준상이 시드 매입에 사용하는 계산법으로만 따져 보더라도, 20만원을 들여 640만원짜리를 만드는 셈이니 이쯤 되면 거의 연금술이라 불려도 할 말이 없을 정도다. 요정 1만명의 키스를 받은 효과가 이 정도라면, 사실 한 명 분의 키스는 생각보다 그리 효과가 크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1만명이 2만, 3만으로 늘어나면 어떨까. 모르긴 해도 그 수치는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 될 것이다. “으음...” 준상은 고민에 빠졌다. 당장 요정계로 달려가 갖은 수단을 동원해 아직 키스를 받지 않은 다른 요정들에게 손을 내밀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바로 그것이었다. “으으음...” 단순히 행운 증가라는 측면만을 고려한다면, 이것은 사실 고민하고 말고 할 것이 없는 일이지만, 단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일이라면 요정의 키스가 가져오는 부작용이었다. 이를테면 뽀샤시라든가, 물광 효과 같은 것이 바로 그것이다. 요정 일만 명으로부터 키스를 받고 생겨난 부작용이 물광인데, 만약 여기서 더 많은 키스를 받으면 도대체 어떤 부작용이 일어날지 준상으로서는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으으으음...” 그렇게 시드를 쌓아놓고 각성을 실행하다 말고 고민에 빠져 있는데, 최상층으로 통하는 전송장치가 작동하며 은빛의 하늘거리는 옷을 걸쳐 입은 아름다운 여성 하나가 모습을 드러낸다. 무지개빛 머리카락을 찰랑이는 그녀의 이름은 다름 아닌 리체스였다. “후아아암...” 리체스는 연구실에 처박혀 있다가 돌아온 탓인지 두 팔을 쭉 펴고 하품과 함께 기지개를 쭉 펴더니 수반 옆에 가져다 놓은 평상 위에서 팔짱을 끼고 고민에 빠져 있는 준상을 발견하고는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얼른 준상의 뒤로 다가가 등 뒤에서 그의 목을 끌어안으며 달콤한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그냥.” 하지만 돌아온 것은 무미건조한 대답. 빈 말이라도 자기 생각을 했다고 해주면 어디가 덧나나 싶은 기분에 리체스는 입술을 삐죽거리다가 눈앞에 보이는 준상의 귀를 살짝 깨물어 주었다. “...” 갑작스런 리체스의 기습에 준상은 살짝 얼굴을 찌푸리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리체스는 얼른 그에게 입술을 내밀며 말했다. “키스해주세요.” “...” 얼핏 보면 성스러운 분위기마저 느껴지는 요정 여왕이 입술을 쭉 내밀고 눈을 감은 모습에는 무덤덤하기 이를 데 없는 준상도 피식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준상은 몸을 돌리고는 그녀의 목을 한손으로 감싼 채 그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처음에는 그냥 가볍게 살짝 입을 맞추는 정도에 불과했지만, 아무도 없는 빈 공간이다 보니 둘의 호흡은 점차로 가빠지기 시작했고, 그럴수록 키스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 “...” 리체스는 키스가 끝나자 달뜬 호흡을 준상의 목덜미에 뿜으며 그의 등에 가만히 몸을 기댔다. 원래대로라면 이 정도에서 일단 그만 두었겠지만, 지금은 헤네스도 자리를 비운 상황. 조금 더 욕심이 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리체스는 준상과 단 둘이 오붓한 시간을 보낸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요정계나 요정 결계 안이 아닌 이상 다른 곳에서는 작은 몸으로 지내야 하니 그런 제약이 없는 헤네스에 비해 기회 자체가 적은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점을 떠올린 탓일까. 리체스는 모처럼의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모처럼이 아니라 좀처럼 찾아오지 않는 특별한 기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그녀는 결심했다. 평소보다 좀 더 대담하게 행동하기로. 그런 생각을 떠올리자, 그녀의 가슴은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세차가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뭔가 아주 못된 장난을 준비하는 꼬마가 된 것 같은 생각에 리체스는 어쩐지 아찔한 기분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주인님.” “응.” “안아 드려도 될까요.” “...” 아무리 둔감하고 멍청한 남자라도 지금 같은 상황에 이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조차 모를 수는 없는 일. 하지만 그가 뭔가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리체스는 먼저 준상의 목에 조용히 입을 맞추는가 싶더니 부드럽고 흰 두 손으로 그의 옷을 여미고 있는 단추를 풀기 시작한다. 준상은 그녀의 대담한 행동에 내심 살짝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은 채 그녀가 하고자 하는 대로 그냥 내버려 두었다. 리체스는 준상이 가만히 그녀의 행동을 받아들이자, 혹시나 거부하면 어쩌나 하고 불안해 하던 기분을 떨쳐 버리고 더욱더 적극적으로 상황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막상 해본 적이 없는 일을 하려니 이것도 쉽지가 않다.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셔츠의 단추를 푸는 손가락이 덜덜 떨릴 정도였다. 하나의 단추를 풀어낼 때마다 리체스의 가슴은 점점 더 심하게 고동치기 시작했고, 이윽고 준상의 몸에서 셔츠를 벗기는 상황이 되자 그녀는 자신의 심장소리가 돌격을 앞둔 병사들의 귀에 울려 퍼지는 전장의 북소리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마침내 단추를 모두 풀고 준상의 셔츠가 벗겨지자, 그 아래 숨어있던 탄탄한 근육질의 목덜미와 그곳으로부터 이어진 어깨의 곡선이 그녀의 눈앞에 나타났다. 꼴깍. 순간 리체스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키고는 그런 자신의 행동에 기겁할 정도로 놀라고 말았다. 그녀는 가만히 손가락을 들어 그의 몸을 만져 보았다. 자신의 몸과는 전혀 다른 단단한 촉감이 손가락을 통해 전해진다. 조금 더 용기를 내어 울퉁불퉁한 등근육에 손바닥을 가져다 대보았다. 그러자, 맥동하는 근육의 움직임이 그녀의 여린 손바닥을 통해 그대로 전달되었다. 이번에는 가만히 얼굴을 가져다 대어 본다. 달아오를대로 달아오른 붉은 뺨이 조금은 차가운 그의 등에 기대어지자, 자신의 고동소리와는 다른 크고 웅장하며 느릿한 심장의 울림이 전해져 왔다. 리체스는 가만히 눈을 감고 그의 등에 얼굴을 기댄 채 자신과 준상의 심장 소리가 이뤄내는 기묘한 불협화음을 즐겼다. ============================ 작품 후기 ============================ 이 장면은 여기서 끝. 이북이 출간된다고 해도 노블 연재에는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프리미엄으로 넘어가지도 않습니다. 그대로, 이대로, 계속, 쭉 노블 연재는 진행되니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00234 트롤러 ========================================================================= 준상은 리체스가 가만히 등에 얼굴을 기대오자 움직이지 않은 채 그대로 놔두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아무래도 이상해서 초감각을 통해 살펴보니 리체스는 준상의 등에 얼굴을 기댄 채 그대로 잠들어 있었다. “...” 만년을 살아온 요정 여왕도 피곤함에는 버틸 수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준상의 등에서 전해지는 안락함에 자신도 모르게 취해 버린 것일까. 어느 쪽인지는 당사자가 아닌 이상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너무나 달고 곤하게 잠이 들어버린 터라 깨우기는커녕 그녀를 들어 옮기기도 주저될 정도였다. 하긴 지금의 준상에게 누구 하나 정도 등에 기대 잠들어 있다 해도 그리 문제될 이유는 없다. 자세가 조금 불편하긴 했지만 그 정도는 견디고 말고 할 것조차 없는 일. 준상은 그 자세 그대로 시드 각성 작업을 계속했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쩐지 아까보다 여신의 가호가 뜨는 확률이 더 높아진 듯한 기분도 조금은 들었다. 리체스는 꼬박 두 시간 넘게 그대로 잠이 들어 있다가 배가 고파오는 것을 느끼며 깨어났다. “응...” 그녀는 눈을 뜨고도 잠시 멍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자신이 흘린 침이 준상의 등을 적시고 있는 것을 깨닫고는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헙!” 얼른 소매로 등판을 적시고 있는 침을 닦아내긴 했지만, 그런다고 이미 저지른 일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시드 각성 작업을 계속하고 있던 준상은 그녀가 깨어난 기척이 느껴지자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피곤하면 더 자도 된다.” “...” 리체스는 자기도 모르게 울상이 되어 버렸다. 단 둘이 시간을 내기가 얼마나 어려운데 이 천금 같은 기회를 침 흘리며 자느라 다 날려버렸으니 어찌 아깝지 않겠는가. 하지만 준상은 그런 리체스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던 작업을 멈추고는 무정하게도 자리에서 일어나 버렸다. 리체스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를 붙잡으려다 자신의 배에서 들려오는 꼬르륵거리는 소리에 멈칫하고 말았다. 아아... 정말이지 이젠 쥐구멍이라도 들어가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리체스는 자신이 부끄럽고 한심해서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고 말았다. 더 이상 맨 얼굴로 준상을 바라보기가 어려웠던 탓이다. 준상은 그런 리체스의 모습을 보며 피식 웃고는 그녀가 벗겨 놓은 셔츠를 다시 입으며 말했다. “기다려. 마침 나도 출출하던 참이니.” “네...” 준상은 컨테이너 하우스의 주방으로 향하다가 초감각을 통해 리체스가 자신의 머리를 스스로 콩콩 쥐어 박는 모습을 보고 다시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냉장고를 열고 몇 가지 재료를 꺼냈다. 요즘은 세상이 참 좋아져서 어지간한 음식은 특별한 기술이 없어도 바로 조리해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즉석 식품이 다양하게 나와 있다. 준상은 요리를 그리 잘 하지는 못하지만 설명서에 나와 있는 것을 그대로 따라하는 것 정도는 충분히 가능했다. 냉동고에서 동결 건조된 새우 볶음밥 재료를 꺼낸 준상은 프라이팬을 꺼내 달구며 버터를 넣었다. 그리고 버터가 녹자 그곳에 방금 꺼낸 새우 볶음밥 재료를 그대로 부었다. 원래 볶음밥은 강한 화력으로 순간적으로 볶아내야 하지만 전문 요리사도 아닌 준상이 그런 흉내를 낼 수 있을리는 만무한 일. 정령을 이용해 흉내를 내볼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지만, 먹는 걸 가지고 장난치는 기분이 들어 그만 두었다. 조리법에 나와 있는 대로 불을 중간으로 맞춘 상태에서 밥을 볶던 준상은 구수한 냄새가 풍기기 시작하자 밥을 볶던 프라이팬을 옆으로 밀어 놓고 계란을 풀어 지단을 부쳤다. 지단이 완성되자 조금 넓은 접시에 볶음밥을 담고 그 위에 지단을 펼쳐 덮었다. 준상은 완성된 오므라이스 위에 캐첩을 뿌리고는 새콤한 피클을 따로 작은 접시에 담아 곁들이는 것으로 요리를 마쳤다. 평상 위에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던 리체스는 준상이 두 개의 접시를 양손에 든 채 염동력으로 피클을 담은 접시를 내오자 얼른 일어나 그의 손에서 접시를 받아들었다. “이게 뭐에요?” “오므라이스.” “...” 언제나와 같은 단답형의 대답에 리체스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이렇게 입술을 삐죽거리는 것은 원래 헤네스의 버릇이었는데, 함께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어느새 옆에서 보고 배운 것이다. 사실 리체스가 듣고 싶었던 것은 요리 이름이 아니라 어떤 재료가 들어갔고 어떻게 만들었는지 자세한 설명이 듣고 싶었다. 그러나 이 남자에게 그런 것까지 바라는 건 아무래도 무리였던 모양이다. 속으로 투덜거리던 리체스는 준상이 내민 수저를 들고는 노란 지단 끝부분을 조금 덜어내고는 그대로 입으로 가져갔다. “음...” 캐첩의 새콤함과 계란의 부드러움, 그리고 구수하게 볶아진 밥의 향취가 입 안에서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그 느낌에 리체스는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이전에도 몇 번 준상이 해준 음식을 먹어본 적이 있긴 했지만, 오늘은 단 둘이서 먹는 거라 그런지 더 맛있게 느껴진다. 리체스는 준상이 해준 오므라이스를 먹고 나자 식곤증이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후아암...” 자신도 모르게 하품을 해버린 리체스는 찔끔한 표정으로 준상을 바라보았다. 준상은 그 모습을 보고는 그녀에게 짤막하게 말했다. “이리와.” “...” 리체스가 조심스럽게 다가서자 준상은 그녀의 몸을 번쩍 안아들더니 그대로 컨테이너 하우스의 침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침대 위에 리체스를 조심스럽게 눕히고 시트를 덮어준다음 일어서려는데, 리체스가 손을 뻗어 그의 팔을 잡았다. “...” 준상이 말없이 바라보자, 리체스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같이... 있어줘요.” “...” 각성시킬 시드가 아직 남아 있기는 했지만, 그리 급한 일은 아니었다. 어차피 요정들을 불러 모아 행운 수치를 더 높이고 나서 해도 될 일이기 때문이다. 준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가만히 그녀의 옆 자리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리체스는 준상이 옆자리에 눕자 아기처럼 그의 가슴속으로 파고들었다. “잘 자요.” “그래.” 리체스는 준상의 가슴 속에서 전해져 오는 고동소리를 자장가 삼아 이내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뒤늦게 얀트훈센에서의 일을 마치고 돌아온 헤네스는 리체스가 준상의 품에 안겨 잠들어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는 멈칫했다. 준상은 그녀에게 손가락을 들어 입을 가리는 것으로 조용히 하라는 뜻을 전한 다음, 가만히 한 손을 뻗어 그녀 역시 침대로 불러들였다. 요즘 리체스가 계속된 연구로 인해 피로가 상당히 쌓여 있는 상태라는 건 헤네스도 익히 알고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준상의 뜻을 거스르지 않고 조용히 옷을 벗은 다음 침대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헤네스는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오늘 있었던 일을 조곤조곤 준상에게 말하다가 점차 목소리가 작아지더니 리체스와 마찬가지로 준상의 가슴에 얼굴을 기댄 채 잠이 들었다. 다음날. 준상은 아침 식사를 함께 하는 자리에서 모처럼 푹 잔 탓인지 얼굴에 윤기마저 도는 리체스에게 말을 꺼냈다. “해줬으면 하는 일이 있는데.” 리체스는 눈빛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말씀하세요.” “대단한 건 아니고, 요정들을 좀 모아줬으면 해.” 예상 외였는지 리체스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요정들이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리체스를 바라보며 준상이 간략하게 설명을 했다. “음... 요정의 키스를 더 받고 싶으신 거군요.” “요약하자면 그런 셈이지.” 리체스는 별로 어렵지 않다는 듯이 바로 대답했다. “불러 모으는 거라면 어렵지 않아요. 키스를 받는 건 별개의 일이지만요.”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할 필요 없다.” 준상의 대답에 리체스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가 싶더니 다시 말했다. “정령의 문이 다시 열리기는 했지만, 개중에는 작은 숲이나 인간들의 마을 같은 곳에 사는 아이들도 있어요. 그런 애들까지 전부 불러 모으려면 조금 시간이 걸릴 것 같은데, 괜찮을까요?” “물론.” “그럼 셀라에게 말해둘테니 조금만 기다리세요.” “알았다.” 리체스는 조금 기다려야 할 거라고 말했지만, 셀라에게 준상의 말이 전해진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곧바로 요정계는 바깥 세상에 흩어져 있던 요정들로 북새통을 이루기 시작했다. “여기 오면 맛있는 걸 준다던데, 먹어 봤어?” “아니.” “나도 아직.” “내 친구가 먹어 봤다던데.” “그래? 어떤 맛이래?” “꿀보다 더 달콤하다고 그러던데.” “흠... 난 달콤한 거 별론데.” “나도.” “나도 나도.” 확실히 이번에 모인 요정들은 예전에 초콜릿의 달콤함에 현혹되어 찾아온 요정들과는 취향이 사뭇 다른 모양이었다. 전과 같이 초코바나 연양갱으로 어떻게 해보려던 준상은 셀라로부터 그런 정황을 전해 듣고는 얼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문제로군.” 먹을 것이 통하지 않는다면 남은 방법은 단 하나. 어깨를 빌려주는 것 뿐이다. 꾸역꾸역 밀려드는 요정들을 모조리 태우고 다니는 건 아무리 준상이라도 난감하기 이를 데 없는 일. 하지만 그렇다고 헤네스를 통해 그들의 사소한 부탁을 일일이 확인해 해결하는 건 이전에 아겔라한의 숲에서의 일을 떠올려 보면 역시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린다. 더군다나 대륙 전역에서 모인 요정들의 부탁을 해결해 주기 위해 그들이 사는 곳을 일일이 방문하는 건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일이다. “끙...” 난감함에 앓는 소리를 내던 준상은 문득 머리 위에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것을 느끼고는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는 거대한 가오리 한 마리가 마치 날개를 펼친 듯한 모습으로 유유히 떠있었다. “...”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준상은 한 가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리고 모처럼 조용히 하늘을 떠다니며 휴식을 만끽하고 있던 갑가오리는 갑작스레 덮쳐오는 한기에 몸을 부르르 떨어야만 했다. 준상은 곧바로 셀라에게 연락을 넣었다. “셀라.” “네.” “갑가오리를 요정들에게 빌려주겠다. 그 댓가는 키스 한 번.” “...” 셀라는 잠시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먹힐까?” 하지만 준상이 그렇게 묻자, 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먹힙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갑가오리의 비행쇼는 대성황을 이루었다. 무려 보름 넘게 열린 이 이벤트에 지금까지 준상의 소문을 듣고도 시큰둥하던 요정들마저 환호하며 요정계를 몰려들었다. “근데 너희들 그 얘기 들었니?” “무슨 얘기?” “저 가오리 주인에 대한 얘기.” “아니.” “내 친구가 그러는데, 가오리보다 저 사람 어깨에 타는 게 훨씬 재미있다더라.” “에이... 설마.” “진짜야. 바람이 아주 쉭쉭 밀려가는 게 끝내준대.” “정말?” “정말.” “진작 좀 말하지. 그럴 줄 알았으면 가오리 대신 어깨에 태워달라고 했을텐데.” “나도 그게 아쉬워.” 그렇게 요정들 사이에서는 환상의 어깨에 대한 소문이 퍼져 가기 시작했지만, 준상은 모르는 척 그들에게 키스를 갈취하며 행운 수치를 더욱더 높여 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눈가에 다크 서클이 짙게 깔린 채 피로에 지쳐 강제 역소환된 갑가오리의 노고 덕분에 준상은 새로운 칭호를 얻게 되었다. 축하합니다! :당신은 십만 명의 요정에게서 키스를 받았습니다! -당신의 위업을 찬양하며 ‘요정계의 슈퍼스타’ 칭호를 부여합니다. [칭호 상세 정보 확인은 이곳을 누르십시오.] “아이돌 다음은 슈퍼스타인가.” 준상은 마음을 비운 탓인지 이젠 그냥 그러려니 하며 상세 정보를 확인했다. [요정계의 슈퍼스타] :십만 명의 요정에게서 키스를 받은 자에게 부여되는 칭호. -효과: 1. 사용자에게 ‘후광’ 효과가 부여됩니다. 2. 이제 요정들은 사용자에게 남몰래 은애와 동경의 감정을 품게 됩니다. -칭호는 획득시 자동으로 효과가 적용됩니다 후광이라니. 얼굴이 반짝이다 못해 그 빛이 유형화되는 경지에라도 이르렀단 말인가. 준상은 한숨을 푸욱 내쉬며 두 번째 칭호를 확인했다. 축하합니다! :당신은 최초로 ‘요정계의 슈퍼스타’ 칭호를 받았습니다! -당신의 위업을 찬양하며 ‘요정 키스의 전설’ 칭호를 부여합니다. [칭호 상세 정보 확인은 이곳을 누르십시오.] “전설...” 하긴 요정 십만 명 분의 키스를 받은 것도 대단한데, 그걸 최초로 실현했으니 확실히 전설이라는 칭호가 부족하지 않은 일이긴 하다. 다만 문제라면 어디다 드러내놓고 말하기 어려운 전설이라는 것 정도가 아닐까 싶다. [요정 키스의 전설] :‘요정계의 슈퍼스타’ 칭호를 가장 먼저 받은 자에게 부여되는 칭호. -효과: ‘요정의 키스’를 사용하면 그 모습을 본 자들 역시 50% 확률로 매료시킬 수 있습니다.(중첩가능. 단, 키스는 1인당 1회만 적용됩니다.) -칭호는 획득시 자동으로 효과가 적용됩니다. 무려 광역 효과가 부여되어 버렸다. 요정의 키스를 실행하면 키스를 받은 당사자 뿐만 아니라 그것을 지켜보던 다른 자들까지 매료되어 버리는 것이다. “후...” 역시 예상대로 부작용이 만만치 않았지만,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은 키스를 받았으니 충분히 감수할 만한 일이다. “그나저나... 이제 남은 요정들은 어느 정도나 될까.” 준상의 말에 리체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바로 대답했다. “글쎄요. 산골짜기에 틀어박혀서 나올 생각도 않는 몇몇을 제외하고는 아마 거의 다 왔을 걸요.” “그런가.” 십만 명이라. 생각보다 요정이라는 종족은 그리 수가 많지 않은 모양이었다. 수명도 길고 달리 천적이라 할만한 종족도 없는 걸 생각하면 좀 의외였다. 아무튼 목적했던 바를 이룬 준상은 다시 시드 각성 작업을 시작했다. 축하합니다! :행운의 여신의 가호를 받아 시드각성이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치명타 확률 1%)와 (치명타 확률 1%)의 시드를 사용한 결과, (치명타 확률 7%)의 시드가 생성되었습니다. “역시!” 일만 명에게 키스를 받았을 때도 30퍼센트 가량의 확률로 여신의 가호가 떴는데, 십만 명에게 키스를 받은 지금 그보다 확률이 높아지는 것은 당연한 일. 혹시나 해서 다시 한 번 더 실행해 봤지만, 이번에도 역시나 여신의 가호가 발동하며 단번에 7%짜리 시드가 만들어졌다. 준상은 내친 김에 새로 만들어진 7% 시드 두 개로 다시 각성을 시도했다. 축하합니다! :행운의 여신의 가호를 받아 시드각성이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치명타 확률 7%)와 (치명타 확률 7%)의 시드를 사용한 결과, (치명타 확률 10%)의 시드가 생성되었습니다. -시드의 등급이 Uncommon+로 상승했습니다! “하하!” 이번에도 역시나 여신의 가호가 발동하며 단숨에 10%짜리 시드가 만들어졌다. 준상은 곧바로 다시 1퍼센트짜리 시드 네 개를 사용해 10%짜리 시드를 만든 다음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각성을 실행했다. 축하합니다! :행운의 여신의 가호를 받아 시드각성이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치명타 확률 10%)와 (치명타 확률 10%)의 시드를 사용한 결과, (치명타 확률 12%)의 시드가 생성되었습니다. -시드의 등급이 Uncommon++로 상승했습니다! “그렇지!” 12퍼센트 짜리 시드를 만드는데 소모된 시드는 1퍼센트짜리 시드 8개. 시드를 매입할 때 사용하는 준상의 계산법을 적용하면 80만원의 비용으로 무려 2억이 넘는 가치의 시드를 만들어 낸 셈이다. 이런 성과는 온전히 요정의 키스를 통해 극도로 높아진 행운의 효과 때문이기 때문에 설령 다른 자들이 시드 각성의 특수 기능을 손에 넣더라도 감히 흉내낼 수 없는 일이었다. 적어도 준상처럼 십만 명의 요정에게서 키스를 받아내지 않는 이상은 말이다. 이로써 필요한 퍼즐 조각은 모두 모였다. 준상은 컨테이너 하우스의 다용도실에 산처럼 쌓여있는 시드들을 보며 슬슬 예전에 생각해 두었던 일을 실행할 때가 왔음을 깨달았다. ============================ 작품 후기 ============================ 현재 변경된 표지는 완성된 것이 아니라 시안입니다. 저기에 채색을 하고 글자를 입히면 완성이죠. 완성본이 나오면 다시 업데이트하도록 하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요정들의 눈에 저 모습이 어떻게 보일지가 더 궁금하긴 합니다만... 00235 트롤러 ========================================================================= 아직 준상을 제외한 귀환자들은 이전부터 그들을 괴롭히고 있던 경제적 어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언제 발동될지 모르는 퀘스트로 인해 직장은커녕 일반적인 사회생활조차 불가능해진 탓이다. 그나마 한국의 경우엔 준상이 서윤을 통해 적극적으로 시드 매입을 추진한 덕분에 그런 곤란함이 많이 해소되었고, 더불어 성장에 대한 동기 부여도 이루어진 상태지만 다른 나라의 경우엔 쥐꼬리만한 정부 보조금에 의지해 그들의 사냥개 수준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개중에는 SNS등을 통해 한국에서 시드 매입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얘기가 전해지자 항공 우편 등을 통해 거래를 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움직임은 귀환자들을 정부의 영향력 하에 붙잡아 두려는 각국 정부에 의해 시드의 반입과 반출이 금지되면서 결국 차단되어 버리고 말았다. 개중에는 국가에서 시드를 매입해서 그것을 서윤에게 팔아넘기는 식으로 이윤을 추구하는 경우도 있는 모양이었지만, 그런 경우라도 대부분의 이익은 정부로 귀속되고 실질적으로 귀환자들에게 돌아가는 액수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거나 아예 없는 경우도 태반이었다. 준상으로서는 그런 정부들의 행태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일일이 각국 정부를 찾아다니며 협박하기도 곤란한 일. 갑가오리 획득 이전에는 준상 역시 해외로의 이동이 그리 자유롭지 못했던 것도 한 가지 이유였으며, 강제로 힘을 써서 억누른 것은 언젠가 더 큰 반발력으로 튕겨지게 마련이라는 점 역시 간과할 수 없는 이유였다. 게다가 한 두 나라라면 몰라도 전 세계를 돌며 그 짓을 할 수도 없는 일 아니겠는가. 결국 가장 좋은 해결 방법은, 각국 정부가 스스로 시드의 반입과 반출에 대한 규제를 풀고 귀환자들 간의 자유로운 거래를 활성화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이것 역시 여러 가지 수단이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간단한 것은 각국 정부를 움직일 수 있는 유력자들의 힘을 이용하는 것이다. “리체스.” “네.” “전에 말한 그것은 어떻게 되었지?” 뜬금없는 말에 리체스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준상이 손가락을 들어보이자 무엇을 말하는지 바로 이해했다. “아! 그거라면 물론 준비해 두었죠. 어디보자... 잠시만요.” 리체스는 급히 밖으로 나가더니 이내 작은 반지 하나를 가지고 돌아왔다. “여기요. 확인해 보세요.” “수고했다.” “헤헤...” 치하와 함께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리체스는 기쁜 표정으로 웃음을 지었다. 준상은 리체스가 건네준 반지에 곧바로 아이템 확인을 실행해 보았다. 아이템정보 명칭 : 공백의 반지 레벨제한 : 없음 종류 : 반지 등급 : Common 효과 : 없음 Seed : 1슬롯 설명 : 요정 마법사 유니아란이 만든 반지. 아무런 기능 없는 단순한 반지지만, 가운데 있는 홈에 시드를 장착하여 그 힘을 활용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유니아란이라는 이름이 어쩐지 많이 낯익은 느낌이긴 했지만, 준상은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갔다. 중요한 것은 레벨 제한이 없다는 점과, 시드를 장착해 그 효과를 적용받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준상은 여기에 새로 만든 12퍼센트짜리 생명력 강화 시드를 장착한 다음, 그 효과를 확인해 보았다. “훌륭하군.” 정상적으로 반지에 장착된 시드가 효력을 발휘하는 것을 확인한 준상은 리체스에게 다시 물었다. “하루에 어느 정도까지 만들 수 있을까.” 그 말에 리체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바로 대답했다. “대충 대여섯개 정도요?” 준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이 반지는 소량으로 제작해서 비싼 가격에 팔 물건이니 생산성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 반지들을 만든 요정 마법사들은 이번에 블러드로드들과 맺어진 바로 그 아줌마 요정들이었다. 당장 집만 하더라도 블러드로드들을 다른 요정들처럼 은방울 꽃 같은 곳에서 지내게 할 수는 없는 노릇. 몸뚱이 하나만 덜렁 가지고 요정계로 들어온 블러드로드들을 부양하기 위해서는 그녀들 나름대로 그에 걸맞는 일을 할 필요가 있었고, 마침 마법사들의 인력을 필요로 하던 준상의 요구와 맞물려 그녀들에게 이 공백의 반지를 만드는 작업이 부여된 것이다. 원래 이런 식의 아티팩트는 간단하게 마구 만들어낼 수 있는 물품이 아니지만, 아무런 효과 없이 단순히 시드를 장착하는 것만이라면 의외로 간단하게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물론 이것을 만들어 내기 위해 준상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반지 가운데 일부를 연구용 샘플로 그들에게 넘겨주어야 했지만, 그 정도 투자는 이후에 벌어들일 수익에 비하면 극히 사소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준상은 생명력 강화 12퍼센트의 시드를 박은 공백의 반지를 가지고 서윤을 방문했다. “어서 오십시오.” 근처의 야산으로 산악구보를 막 다녀온 참인지 서윤은 땀을 잔뜩 흘리고 있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좀 씻고 와야 할 것 같아서.” “편한대로.” 준상이 허락하자 그는 헐레벌떡 샤워실로 달려가 몸을 씻고는 잠시 뒤 말쑥한 모습으로 변해 다시 응접실로 돌아왔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그가 준상의 맞은 편에 자리를 잡자 마침 펜션에 대기 중이던 정다빈이 그들에게 차를 가지고 나왔다. 그녀는 탁자에 차를 내려 놓으면서도 연신 준상을 흘끔거리느라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일전에 봤을 때만해도 자신의 착각인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정말로 얼굴에서 빛이 나는 느낌이었다. 뭔가 새로운 스킬이라도 얻은 걸까. 처음 봤을 때만 하더라도 무서우면 무서웠지, 잘 생겼다거나 빛이 난다거나 하는 느낌은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남자답게 생겼다고나 할까. 그랬던 사람이, 지금 보니 자꾸만 눈길이 가고 보면 볼수록 가슴이 콩닥콩닥 뛰기까지 하는 것이 자신이 생각해도 미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여자인 정다빈은 그나마 낫다. 준상과 마주 앉은 서윤은 같은 남자임에도 자꾸만 정신이 몽롱해지자 자신의 정체성마저 혼란스러워질 지경이었다. “크흠... 오, 오늘은 어쩐 일로...” 말까지 더듬어 가며 그렇게 서윤이 입을 열자, 준상은 품에서 반지 하나를 꺼내 그에게 보여 주었다. “이것을 팔아라.” “...” 서윤은 일견 평범해 보이는, 하지만 가운데 시드 하나가 박혀 있는 은반지를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확인해 봐라.” 준상은 그렇게 말하며 반지를 건네 주었고, 그것을 받아든 서윤은 얼른 휴대폰을 꺼내 아이템 확인을 실행해 보았다. “어?” 처음에는 아무런 효과가 없는 반지라는 사실에 고개를 갸웃했고, 그 다음에는 장착된 시드가 무려 12퍼센트 짜리 생명력 강화라는 점에 놀랐다. 12퍼센트라니. 지금까지 제법 많은 시드를 매입했지만 최고 수준은 7퍼센트가 고작이었고, 그나마도 대부분 자신들이 사용하느라 바빠서 정작 매입이 이루어지는 경우는 급전이 필요한 몇몇 귀환자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런데 이 시드는 그런 7%짜리 시드를 아득히 넘어서는 무려 12퍼센트짜리. 준상의 계산법대로 라면 이 시드 하나 만으로도 무려 2억이 넘는 가치를 지닌다. “12퍼센트짜리 시드라니, 정말 대단하군요.” 하지만 준상은 고개를 저으며 다시 말했다. “그게 아니다.” “네?” 무슨 말인가 하고 의문스러운 표정을 짓는 서윤을 향해 준상은 다시 말했다. “시드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그 반지다.” “반지요?” 서윤은 아이템 정보를 다시 확인했다. 하지만 시드를 장착할 수 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보통의 것과 다를 바 없는, 그렇다고 뭔가 특별한 세공이 가해진 흔적도 찾을 수 없는 평범한 반지였다. 이것이 12퍼센트짜리 생명력 강화보다 더 중요하다니. 뭔가 비밀이라도 숨겨져 있는 건가 싶어 다시 아이템 정보를 살펴보던 서윤은 뒤늦게서야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설마, 레벨 제한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아...” 레벨 제한. 그것은 귀환자들과 일반인을 구분하는 하나의 기준점이다.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얘기는, 다시 말해 이 반지는 귀환자 뿐만 아니라 일반인도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순간 서윤은 정수리에 짜릿한 무언가가 내리 꽂히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이걸... 팔라고 하셨습니까?” “그 말대로다.” 무려 12퍼센트의 생명력 강화. 이것은 귀환자들로서도 가볍게 생각할 수 없는 수치다. 하물며 일반인이라면 골골하던 노인이 단숨에 활력을 되찾는다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아니, 만약 생명력 강화가 아닌 좀 더 특별한 시드를 찾아다 장착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리고 이런 반지를 열 손가락에 전부 끼운다면? 모르긴 해도 귀환자에 버금가는 엄청난 능력을 지니게 될 지도 모른다. 아니, 아니다. 열 손가락에 전부 끼울 필요도 없다. 12퍼센트짜리 재생력 강화 시드라도 하나 사다 끼운다면, 지금의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엄청난 속도로 육체능력의 강화가 가능해질테니 그것만으로도 이미 초인이나 다름없다. 귀환자들처럼 언제 퀘스트에 불려갈지 전전긍긍할 필요도 없으니, 오히려 전력으로 삼고자 한다면 그들이 더 유용하게 사용될 것이다. 서윤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고 말았다. 그제서야 이 물건이 지닌 파급효과를 제대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그가 이해한 것은 극히 일부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자칫하면, 지금까지 지구라는 이름의 이 세계가 지니고 있던 모든 가치 기준이 단숨에 흔들릴 수도 있다. 지금 그의 손에 쥐어진, 이 단순한 모양의 은반지는 그 정도의 위력을 지닌 물건이었다. “가, 가격은 얼마나...” 준상은 손가락 하나를 펴 보였다. 이 반지에 박힌 시드 하나만 하더라도 이미 2억 이상의 가치가 있는 물건. 그렇다면 저 손가락 하나의 의미는... “십억 말씀이십니까?” 준상은 고개를 저었다. 서윤은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그, 그럼...” 하지만 그는 제대로 말을 맺지 못했고, 준상은 그런 그를 향해 선언하듯 조용히 입을 열었다. “백억. 그것도 무조건 현물 일시불로.” “...” 각 국의 화폐 따위는 이후 세계 정세의 변동에 의해 얼마든지 그 가치가 변화할 수 있으니 의미가 없다. 때문에 거래의 수단은 무조건 현물. 준상은 거기에 한 마디를 더 덧붙였다. “단, 이 현물에는 시드도 포함된다.” “아!” 서윤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터뜨리고 말았다. 백억이나 되는 가치의 현물을 모으는 건 어지간한 대부호라도 결코 쉽지 않은 일. 하지만 상대적으로 그 가치가 저평가되고 있는 시드라면 얘기가 다르다. 이 반지를 구입하고자 하는 유력자들은 직접적으로 시드를 구할 방법이 없으니 결국은 시드의 획득이 가능한 귀환자들에게 손을 벌릴 수밖에 없을 것이고, 이것은 음이든 양이든 간에 세계 각처에서 시드의 거래를 촉발하게 된다. 처음에는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대는 인터넷으로 인해 정보의 공유가 매우 빠른 속도로 이루어지는 시대. 같은 값이면 조금이라도 더 비싸게 팔고자 하려는 자가 나타나는 건 필연이고, 그렇게 되면 한국에서 시드를 매입하는데 사용되는 준상의 계산법이 알려지는 건 순식간일 것이다. 이것이 돈이 된다는 것을 파악하면 설령 국가가 반입과 반출을 제한하려 하더라도 그 이득을 노리려 하는 자는 나타나게 마련. 결국 밀수든 암거래든 서윤에게 시드를 팔고자 하는 자가 늘어나는 것 역시 필연일 수밖에 없다. 그렇게 세계의 흐름이 더 막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면, 결국 정부는 무조건적으로 시드의 거래를 막기보다는 그 대세에 편승해서 이득을 챙기고자 할 것이고, 이것은 현재의 규제를 부수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손안에 놓여진 이 평범한 작은 반지 하나로부터 시작된다. 서윤은 양팔로 자신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그러지 않고서는 격하게 밀려오는 이 전율을 멈출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00236 트롤러 ========================================================================= 서윤은 잠시 말이 없다가 이렇게 물었다. “수량은 어느 정도까지 가능합니까.” 준상은 바로 대답했다. “처음부터 많은 물량을 풀 생각은 없다. 우선은 내 쪽에서도 수요가 있는지라.” “음...” 예전 같았으면 이런 식으로 물량을 나누는 일은 없었겠지만, 지금 준상에게는 천 명이나 되는 광전사들이 딸려 있었다. 얀트훈센 주변의 세력들이 질적으로 우세한 광전사들에게 물량으로 승부를 걸어올 우려도 있는 이상 우선은 그들의 전력부터 집중적으로 강화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굳이 처음부터 이 반지를 대량으로 풀어서 양산이 가능하다는 걸 밝힐 필요도 없었다. 자칫 잘못하면 황금알을 사기 보다는 거위를 잡아서 배를 가르려 하는 자가 나타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표면에 드러나지 않은 준상을 노리지 않는다 하더라도, 서윤의 길드나 그의 본가인 XX그룹, 그것도 아니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바로 그 자체를 노릴 수도 있는 일이다. 경제적이나 군사적인 도발이 아니더라도 정치권이나 기타 권력자들을 통해 압력을 가해올 수도 있다. 이런 일들은 준상이 아무리 조심한다 해도 인간에게 욕심이 존재하는 한 언젠가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다. 물론 준상이 지닌 능력이라면 어떠한 형태의 도발이든 힘으로 눌러 부수는 것이 가능하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전처럼 위력 과시를 통해 처음부터 덤빌 생각을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 낫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 국회의원 한 명 제압하는 것과 세계를 상대하는 일은 차원이 다른 일일 뿐만 아니라, 설령 불가피하게 위력 과시를 하게 되더라도 가급적이면 적과 아군이 명확하게 구분된 이후가 유리하다. 섣부른 변혁은 경계심을 부르고, 경계심은 아군이 될 수 있는 자도 잠재적인 적으로 만든다. 그것은 아직 세력이 완성되지 않은 준상으로서는 무척이나 위험한 일이다. “처음에는 기왕이면 떠들썩하게 일을 치르는 것도 좋겠지.” 그 말에 서윤은 잠시 생각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하긴... 일단은 판매자를 물색할 필요도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역시 경매를 붙여보는 편이 좋겠군요.” “어떤 방식을 쓰든 그건 알아서 해도 된다. 이런 물품이 존재한다는 걸 보통 사람들도 알 수 있게만 된다면. 그리고 기본 가격은 앞서 말한 바와 같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문화는 위에서 아래로 흐르게 마련. 비단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이런 것이 존재한다는 것이 일반에 알려지는 것만으로도 귀환자들에 대한 인식은 급변할 수밖에 없다. 준상은 다시 서윤에게 말했다. “그리고, 혼자서 감당 못할 일이 있다면 바로 연락하도록.” 서윤도 배경이 만만치 않은 이상 어지간한 일은 혼자 감당할 수 있다. 그런 그가 감당 못할 정도라면 국가 규모의 압력이 가해졌을 때 정도. 하지만 귀환자들은 언제 퀘스트가 발생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비행기나 여객선 같은 장거리 교통 수단을 이용하는데 상당한 제한이 따른다. 서윤은 그런 점을 떠올리며 난색을 표했다. “그거야 어렵지 않은 일이지만, 만약 그 배후가 바다 건너라면 아무리 준상님이라도...” 하지만 준상은 그런 서윤을 향해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며칠 전에 어디서 연락을 했지?” “네? 그야 제주도에서... 아!” 순간 서윤은 아차 싶었다. 그렇지 않아도 준상이 제주도에서 호텔 때문에 연락을 했을 때 얼마나 놀랐던가. 준상은 탄성을 터뜨리는 서윤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나에게 바다는 더 이상 벽이 아니다.” “허...” 서윤은 이제 더 이상 놀랄 기력조차 없었다. 바다라는 장벽이 무너진 이상, 이 엄청난 괴물을 도대체 무슨 수로 막는단 말인가. 서윤은 미래에 생겨날지도 모르는 불쌍한 불나방들에게 미리 애도의 뜻을 표했다. 준상은 서윤과의 대화를 마친 다음, 곧바로 신기루 꽃으로 돌아와 헤네스와 리체스에게 여행을 떠날 것임을 알렸다. “어디를 가시려고요?” 헤네스의 물음에 준상은 따로 보관해둔 요정의 돌을 꺼내면서 대답했다. “슬슬 다른 나라에도 정령의 문을 열어둘 필요가 생겨서.” “아...” 나중에 그럴 일이 생겼을 때 일일이 다른 나라들을 찾아다니기보다는 미리 미리 퀘스트가 없는 이 틈에 열어두는 편이 여러모로 이득이 된다. 공백의 반지를 세상에 내놓은 이상,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니 지금이라도 대비해 둘 필요가 있었다. 준상은 우선 일본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육상으로 연결된 북한이 지리적으로는 더 가깝기는 하다. 그러나 갑가오리라는 운송 수단을 새로 얻기는 했어도, 레이더에 잡히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으니 날아가는 것도 위험하고, 북한 안에서 미제 차량인 랩터를 타고 돌아다닐 수도 없는 일이니 설령 들키지 않고 침투하는데 성공하더라도 정령의 문을 열만한 곳을 이동하는데 여러모로 애로사항이 꽃피게 된다. 물론 일본으로 건너간다 해도 몰래 들어갈 수밖에 없는 이상 밀입국이기는 마찬가지지만, 일본은 한국인 관광객도 많이 찾는 곳이니 정령의 문을 열기 위한 장소를 찾기 위해 이동하는 일도 훨씬 수월할 수밖에 없다. 준상은 곧바로 갑가오리를 타고 수면을 스치듯이 날면서 밤바다를 가로 질러 일본으로 향했다. 혹시나 레이더나 열영상 감지기 같은 탐지 장비에 노출되면 어쩌나 싶어서 긴장을 늦추지 않았으나 다행히도 별다른 문제없이 일본 영토 내로 진입하는 것이 가능했다. 갑가오리의 형상이 스텔스기를 닮은 것도 한 가지 이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긴 했지만, 어쨌든 준상은 곧바로 일본 각지를 돌며 정령의 문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도착한 일본의 규슈 지방에는 모두 네 개의 국립 공원이 있었는데, 이 가운데 아소산과 사쿠라지마 같은 곳은 화산지대라 정령의 문을 열만한 장소가 없었다. 남은 곳은 운젠 아마쿠사와 야쿠시마의 두 곳인데 이곳들은 모두 해안 지역에 치우쳐 있다는 점이 문제였지만 달리 그 외에 열만한 곳도 없는지라 결국 이 두 군데에 열 수밖에 없었다. 준상은 이런 식으로 일본 각지를 순회하며 정령의 문을 여는 작업을 계속했고, 결국 보름이 지나서야 오키나와의 두 군데를 제외한 남쪽의 규슈로부터 북쪽의 홋카이도에 이르는 총 29개의 국립공원 가운데 총 열다섯 곳에 정령의 문을 여는데 성공했다. “이거 만만치 않군.” 일단 일본에 정령의 문을 여는 일이 끝나자, 남쪽의 오키나와로 가야할지 사할린을 거쳐 러시아 땅으로 넘어가야 할지 고민하며 신기루 꽃에 도착한 준상은 때마침 메신저를 통해 서윤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무슨 일이지?” 준상의 물음에 서윤은 얼른 인사하며 용건을 말했다. “반갑습니다. 실은 경매 일자가 잡혀서 알려 드리려고 연락 드렸습니다.” 하지만 준상은 그런 서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굳이 나에게 일일이 보고할 필요 없다. 연락은 문제가 생겼을 때만 하면 돼.” “그래도 직접 경매 현장을 한번 보시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것 아니라도 할 일 많다. 믿고 맡길테니 알아서 하도록.” “알겠습니다.” 정령의 문을 열고 다니는 동안 생산된 반지들은 차곡차곡 컨테이너 하우스의 다용도실에 보관중이었다. 이 반지들은 12퍼센트의 재생률 증가 시드가 장착되어 우선적으로 광전사들 가운데 실력이 출중하고 준상에 대한 충성심이 높은 자들을 선별해 대여의 형식으로 나누어 줄 생각이었다. 블러드로드와 일반 광전사의 가장 큰 차이는 바로 재생력의 유무. 그런 상황에서 12퍼센트의 재생률 증가 반지를 끼게 되면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블러드로드 비스무리한 능력을 지니게 될 뿐만 아니라, 차후의 수련에도 큰 도움이 된다. 또한 이것은 실력이 정체되어 있던 블러드로드에게는 큰 자극이 될뿐더러, 한편으로는 그들을 견제하는 수단도 된다. 대화를 끝내고 씻기 위해 컨테이너 하우스 안으로 들어가자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는지 헤네스가 탁자에 기대 졸고 있다가 후다닥 몸을 일으킨다. “오셨어요.” 당황해서 우물쭈물하는 모습을 보고 준상은 웃으며 말했다. “피곤하면 쉬지 그래.” “아, 그게...” 헤네스는 얼른 뒤돌아서 흐트러진 매무새를 바로 잡더니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준상에게 말했다. “실은 일 때문에 기다렸어요.” “무슨 일?” “이전에 가져다 놓은 식량이 슬슬 떨어지고 있거든요.” “아...” 그러고 보니 벌써 한 달이나 시간이 지나버렸다. 그 사실을 깨닫자 준상은 다시 한 가지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이것 저것 바빠서 미처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지만, 벌써 한 달간 퀘스트가 내려오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이제야 새삼스럽게 깨달은 것이다. “음...” 이게 어찌된 영문일까. 멋대로 얀트훈센의 광전사 관련 에픽 퀘스트를 클리어해버린 탓인지도 모르고, 기껏 경고 메시지를 보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41명에 달하는 다크 시드 사용자들을 도륙하고 보상을 챙긴 것이 이유일 수도 있다. 퀘스트가 없으면 그만큼 성장의 기회도 줄어드는 것은 당연한 이치. 어쩌면 이것은 시스템이 그에게 내린 제재사항일 수도 있고, 그것이 아니라면 일정 기간 동안 수행할 수 있는 퀘스트 개수에 제한이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물론 어느 것 하나 확실치 않은 추측에 불과하긴 하지만 말이다. “준상씨? 뭔가 문제라도 있나요?” 무언가 잘못 되었나 싶어 걱정스런 표정을 짓는 헤네스를 향해 준상은 웃으며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다. 음... 그럼 일단 처가에 뭐가 필요한지 연락부터 해봐야겠군. 씻고 나올테니 잠시만 기다려.” “네!” 준상은 샤워를 마친 다음 헤네스가 끓여주는 차를 마시며 미아라에게 연락을 넣었다. “앗! 준상님!” 도대체 연락할 때마다 뭘 하고 있는지 미아라는 이번에도 준상의 연락을 받자 화들짝 놀라며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장모님께서는?” 단도직입적으로 그렇게 묻자 미아라는 우물쭈물하더니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게요. 유라스님은 지금 좀 바쁘세요.” “바쁘다니?” “음, 그러니까요. 뭐라더라. 무슨 왕녀인가 뭔가 하는 여자가 왔거든요. 그래서 요며칠 동안 저랑 놀아주지도 못할 정도로 바빠요.” “...” 미아라랑 놀지 못할 정도로 바쁘다는 것이 정확히 어느 정도를 뜻하는 것인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바쁘다는 건 이해할 수 있었다. “음... 곤란한데.” 준상이 중얼거리자 미아라가 급히 말했다. “급하신가요? 그러시면 제가 가서 일단 말을 해보구요.” “아니. 그럴 필요는 없다. 내가 나중에 다시 연락할테니 나중에 그렇게만 전하도록.” “알겠습니다.” 준상은 연락을 끊고 생각에 잠겼다. 원래대로라면 지구와 이벨류아, 그리고 얀트훈센을 잇는 삼각 무역을 시작해야 할 시점인데 에슈탈렌의 왕녀인지 뭔지가 하필 지금 찾아오는 바람에 일이 어그러져 버렸다. 물론 식량이야 이전에 했던대로 서윤에게 다시 준비하라고 하면 될 일이지만, 자신이 모처럼 세운 계획이 이런 식으로 어그러지는 것이 준상으로서는 그리 탐탁지 않았다. “쯧...” 하지만 그렇다고 무턱대고 달려가 박살내버릴 수도 없는 일. 준상은 일단 이번에는 이벨류아를 통하지 않고 다시 식량을 마련하는 쪽을 선택하기로 했다. 서윤에게 연락을 넣어 이전과 마찬가지로 일천 명 분이 먹을 한 달 분량의 전투 식량을 준비하게 한 준상은 하루 뒤 물건을 넘겨받아 신기루 꽃으로 가져왔다. 그렇게 창고로 사용하고 있는 장소에 전투식량이 담긴 컨테이너를 들여놓고 나오던 준상은 귓가를 울리는 조심스러운 목소리를 알아차렸다. “저기... 준상님. 계세요?” 그것은 다름 아닌 요정 기사 미아라의 목소리였다. “무슨 일이지?” 준상이 묻자 미아라는 잠시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조금 화가 난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 “준상님. 와서 저 공주인지 뭔지 좀 혼내 주세요.” “뭐?” 갑자기 이게 무슨 말인가. “어떻게 된 일인지 자세히 말해봐.” 그러자 미아라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러니까요.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여기 지금 공주들이 와 있거든요? 근데 걔들 중에 아주 짜증나는 애가 하나 있어요. 유라스님한테도 막 반말까지 한다니까요. 세상에. 고작해야 내 나이 반에 반도 안 되는 계집애 따위가 감히 유라스님한테 반말이라니, 이게 말이 되냐구요. 그것뿐이면 제가 말도 안 해요. 아까는요. 정원이 마음에 안 든다면서 멀쩡한 나무를 막 뽑아버리구요. 아까 아까는요...” 자세히 말하라고 하지 않았으면 어쨌을까 싶을 정도다.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미아라의 말에 준상은 잠시 정신이 멍해지는 기분을 느꼈지만, 그런 와중에도 중요한 몇 가지 부분을 짚어내는데 성공했다. “잠깐, 잠깐만.” “네?” “지금 방금 공주들이라고 했나?” “네. 음... 갑옷 입은 공주 하나랑요. 이상한 천쪼가리를 막 주렁주렁 매단 공주 이렇게 둘이 왔어요. 다른 여자들도 많이 왔는데요. 아무튼 공주는 그렇게 둘이에요.” “...” 이건 또 무슨 말인가. 헤네스에게 전해 듣기로는 에슈탈렌에서 온 왕녀는 기사라고 했으니 갑옷 입은 공주는 그녀를 말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남은 한 명의 또 다른 공주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갑옷 입은 공주 말고, 다른 공주는 또 누구지?” 준상은 좀 더 자세한 정보를 얻고자 그렇게 물었지만, “몰라요. 암튼 공주랬어요.” “...” 미아라에게 그런 자세한 설명을 바라는 건 처음부터 무리였다. 이렇게 되면 남은 방법은 단 하나. 유라스든 젤란이든 직접 찾아가서 자초지종을 듣는 방법 뿐이다. “알았다. 혹시 장모님과 얘기를 나눌 수 있다면 조금 있다 찾아뵙겠다고 알려드려라.” “네! 걱정마세요! 꼭 전해드릴게요!” 준상은 전투 식량의 수량을 요정 보좌관들과 함께 확인하고 있는 헤네스를 힐끗 보았다. 얀트훈센의 일을 맡으면서 모처럼 무기력함에서 벗어나 활력을 되찾은 그녀가 이번 일을 알게 되는 건 그리 좋지 않다. 물론 언제건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되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다. 준상은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다음, 헤네스를 향해 말했다. “잠시 다녀올테니 수고해라.” “네! 다녀오세요.” 준상은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어 보이는 헤네스를 일별하고는 곧바로 석문을 통과해 이벨류아로 향했다. 00237 트롤러 ========================================================================= 문을 통과해 자신의 저택에 도착한 준상은 시녀들을 부르지 않고 그대로 모습을 숨긴 채 브레아 가문의 저택으로 향했다. 정오의 햇살이 내리쬐는 창창한 날씨였지만, 어둠의 정령 둘을 마치 징검다리처럼 배치한 상태로 빠르게 위상전이를 실행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흠...” 저택 입구에 도달한 준상은 담장 주위로 배치된 삼엄한 경비병들을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브레아 가문의 저택 입구에는 이전에 보았던 그들 가문 특유의 문장이 아닌, 처음 보는 형태의 문장이 깃대에 매달려 나부끼고 있었다. 에슈탈렌의 국기인가 싶어 기억을 더듬어 봤으나 이전에 천상의 다리 퀘스트때 만났던 자들의 문양과는 좀 다른 느낌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저 문장은 누구의 것이란 말인가. 준상은 얼굴을 찌푸리며 경비병들의 눈을 피해 저택 안으로 스며들었다. 사전에 미아라에게 연락을 취해뒀으니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그의 예상은 틀어지고 말았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시골구석에 처박혀 있어야 하는 거야? 아우, 짜증나.” “그건 저희로서도...” “차라리 그 사람 저택으로 가는 게 낫겠어. 거긴 차라리 넓기라도 하잖아.” “하오나, 주인이 없는 곳에 함부로 머무는 것은 예의가 아닌지라...” “그러니까 당장 오라고 해! 벌써 며칠 째인데 소식조차 없는 거냐고!” “전하, 부디 고정하십시오.” 짙은 화장으로 얼굴을 가리고는 있었지만, 아무리 많이 쳐줘도 절대 헤네스보다 나이가 많다고 보기는 어려운 소녀가 브레아 가문의 응접실을 차지한 채 나이 많은 시녀를 닦달하고 있는 모습이 준상의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화려한 색깔의 천을 겹겹이 두른, 보기만 해도 상당히 더운 느낌의 치렁치렁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어딘지 낯익은 느낌이 들어 자세히 살펴보니, 그것은 이전에 준상이 브레아 가문에 선물 삼아 가져다주었던 포목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준상은 미아라가 말했던 이상한 천쪼가리를 주렁주렁 매단 왕녀가 바로 눈앞의 이 소녀라는 걸 알아챌 수 있었다. 또다른 왕녀. 예정에 없던 인물이 마치 주인처럼 이 저택의 응접실에 눌러 앉아 있는 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역시 브레아 가문의 원래 주인들을 찾아볼 수밖에 없을 듯 하다. 준상은 몸을 움직여 제스터의 서재를 비롯해 저택 곳곳을 확인해 보았다. 그러나 주눅이 든 모습으로 이리저리 오가는 시녀와 시종들만 눈에 보일 뿐, 브레아 가문의 인물들은 찾아낼 수 없었다. 다시 미아라에게 연락을 해봐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문득 시녀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언제까지 이래야 하는 거니?” “쉿! 들리겠어.” “들을테면 들으라고 해. 진짜 더는 못 참겠어. 여기 와서 시녀 노릇을 하고는 있지만 나도 따지고 보면 브레아 가문의 방계라고.” “후...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그 꼬맹이한테는 브레아 가문 자체가 자기가 부리는 시종이랑 동급이잖아.” “그게 무슨 소리야?” “집정관 대리를 하고는 있지만 아직 작위 회복이 안 되서 기사 작위 밖에 없는 건 알고 있지?” “그건 그렇지만...” “우리랑 마찬가지로 왕녀쯤 되면 고급 시녀들은 귀족 집안의 영애들이 맡는 경우가 많아. 왕족을 곁에서 모시는 측근시녀쯤 되면 기사급의 작위는 기본이라고.” “아... 그럼...” “브레아 가문도 자기 시녀랑 동급 밖에 안 되는데, 그 가문의 방계인 우리들이 눈에 들어오기나 하겠니?” 준상은 시녀들의 얘기를 통해 현재 브레아 가문이 처한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차라리 철이 든 어른이라면 설령 작위가 기사급 밖에 안 된다 해도 현재의 위치와 준상과의 관계를 고려해 조심스럽게 대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지금 응접실을 차지한 저 소녀는 아직 그런 식의 주위 상황을 살필 정도의 안목이나 식견이 부족한 모양이다. 가만히 그런 생각을 떠올리고 있는데 다시 시녀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아무리 그래도 주인을 별채로 내쫓는 건 너무 한 거 아니야? 게다가 어떻게 사람을 그렇게... 아무리 왕녀라도 이건 너무한 일이라고.” “그거야 그렇지만... 쉿! 누가 온다.” 시녀들은 발소리가 들리자 속닥거리던 것을 멈추고 모르는 척 고개를 숙이고 종종 걸음으로 사라져 갔다. 어쩐지 본관 안에 브레아 가문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했더니, 그런 이유가 있었던 것인가. 준상은 혀를 차며 이전에 이벨류아로 돌아왔을 때 헤네스와 머물던 별채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역시나, 시녀들의 말대로 별채 입구에 다가가자 어렵지 않게 익숙한 얼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디를 다녀오는 길인지 급한 걸음으로 별채에 들어가는 그의 뒤를 따라가자, 준상은 별채의 거실 안에 모여있는 브레아 가문의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젤란이 거실 안으로 들어오자 제스터와 유라스가 급히 일어나며 그를 맞이했다. “어떻게 됐지?” 제스터의 물음에 젤란은 얼른 대답했다. “다행히 목숨은 건진 모양입니다. 불구가 되지도 않을 듯 하고... 완치가 되려면 몇 달은 고생하겠지만요.” 그 말을 들은 제스터와 유라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 정말 다행이군.” “그러게요. 정말 어쩌나 싶었는데.” 그러자 젤란이 어두운 얼굴로 다시 말했다. “이번은 어떻게 운이 좋았지만, 이러다가는 정말로 사람이 죽어 나갈지도 모릅니다. 뭔가 방법을 찾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제스터가 침중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놈에게 연락이라도 하자는 말인가?” 그러자 옆에서 유라스가 주의를 주었다. “여보. 그놈이라뇨.” “크흠. 뭐, 어때. 듣지도 못할 텐데.” “여보.” “알았어. 안 그러면 되잖아.” 제스터는 유라스의 엄한 시선을 감당하지 못하고 얼른 말을 돌리며 다시 젤란에게 말했다. “아무튼, 그분에게 연락이라도 하자는 말이냐?” 젤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을 끌면 제풀에 지쳐 떨어져 나가겠거니 싶었는데, 이래서는 그 전에 저희 가문 사람들이 나가 떨어지게 생겼습니다.” “후...” 그 말을 듣고 제스터가 어두운 표정으로 다시 한숨을 내쉬자, 유라스가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어쩌면 그걸 노리는 걸지도 모르죠.” “네? 그게 무슨...” “저희가 견디지 못하고 사위님을 부르기를 기다리는 걸지도 모른다고요. 그렇지 않고서는 저렇게 왕녀가 안하무인으로 구는 걸 방치할 까닭이 없잖아요.” “역시... 그런 걸까.” 제스터가 부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젤란이 격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왕녀는 얼어 죽을. 에슈탈렌의 왕녀가 온다니까 이름만 남은 방계 왕족인 후작 가문의 딸을 양녀로 삼은 것 뿐이잖습니까.” 그 말에 유라스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절차야 어찌되었든 지금은 왕녀 신분이잖니. 행여라도 그런 말은 입밖에 내지 않도록 해라.” 그러게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문득 창가를 톡톡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세 사람은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지만, 그것도 잠시 유라스가 일어나 창문을 열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창문을 통해 날아든 것은 다름 아닌 미아라였다. “휴... 전부 여기 계셨네요. 찾느라 혼났어요.”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을 닦으며 미아라가 그렇게 말하자, 유라스는 잔잔하게 미소를 지은 채 그녀에게 물었다.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요정님.” 그러자 미아라는 생각 났다는 듯이 주먹으로 손바닥을 탁 치며 대답했다. “아참, 그렇지! 유라스님. 알려드릴 것이 있어요.” “말씀하세요.” “준상님이 조만간 찾아오신다고 전해달래요.” “사위님이요?” 안 그래도 한창 그 얘기를 나누던 참이라 세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돌아보며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설마... 사위님께 이곳의 일을 말한 건가요?” 유라스의 물음에 미아라는 우물쭈물하다가 대답했다. “그게, 아까 그 계집애가 유라스님한테 막 반말하는 걸 보고 저도 모르게 화가 울컥 치밀어서... 미안해요.” 유라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긴요. 절 생각하셔서 그러신 건데. 언제쯤 오신다는 얘기는 없었나요?” “그건... 에헤헤...” 준상은 슬슬 모습을 드러낼 때가 왔음을 깨달았다. 그가 가만히 손을 들어 벽을 톡톡 두드리자, 그 소리를 듣고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세 명의 사람과 한 명의 요정은 어느 틈엔가 기척도 없이 나타나 방 한 켠에 서있는 한 남자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하지만 그들은 이내 자신들이 익히 알고 있던 남자의 모습에서 풍기는 기묘한 느낌에 다시 한 번 놀라고 말았다. 예전에 봤을 때도 얼굴에서 빛이 난다 싶은 느낌이긴 했다. 그러나 지금은 모습이 드러난 순간 방 안이 환하게 밝아지는 듯한 느낌마저 들 지경이었다. 아직까지도 준상을 딸 도둑놈 정도로 인식하고 있는 제스터마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붉힐 정도라면 말 다한 것이 아니겠는가. “준상님?” “어, 언제부터?” 준상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는 세 사람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천천히 그들의 곁으로 다가갔다.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속이기 위해 몰래 찾아온다는 것이 그만 본의 아니게 대화를 엿듣고 말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아... 그게...” 이미 자신들의 대화를 다 들었다는 것을 준상이 간접적으로 피력하자 세 사람은 서로 얼굴을 돌아보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앉아도 되겠습니까?” “예, 물론입니다.” 준상이 자리에 앉자 세 사람은 얼른 다시 자리에 앉았고, 미아라는 유라스의 어깨 위에 자리를 잡았다. 그 모습을 잠시 돌아보던 준상은 바로 질문을 던졌다. “듣자하니, 에슈탈렌의 왕녀 말고 또 다른 왕녀가 온 모양이던데, 어디의 누구입니까.” 준상의 물음에 젤란이 바로 대답했다. “델로드란의 왕녀입니다. 정확히는 방계 왕족 가운데 하나인 토넬 후작가의 영애인데, 이번에 에슈탈렌의 왕녀가 준상님을 찾아온다는 얘기를 듣고는 부랴부랴 왕실의 양녀로 맞이했습니다.” “어째서 그런 일을?” 준상이 다시 묻자, 젤란은 부모님의 안색을 한번 살피더니 헛기침과 함께 입을 열었다. “크흠... 그게, 저쪽에서 왕녀를 보내서 준상님을 회유하려 드는 것이라면 이쪽도 왕녀를 보내면 되지 않겠느냐. 게다가 헤네스의 나이가 어린 것으로 보아 취향이 그쪽인 듯 싶으니 좀 더 어리고 귀여운 여자를 보내면 통할지도 모른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대충 그런 느낌입니다.” “...” 준상은 그 어이없는 발상에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이거야 원. 아닌게 아니라 지금 말을 하는 젤란 역시 자신을 흘긋거리며 조금 불안해 하는 표정을 짓고 있다. 확실히 헤네스가 귀엽고 예쁜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식으로 취향을 오해 받는 건 그리 즐거운 일이 아니다. 준상은 그들의 불안을 해소시켜줄 필요를 느꼈다. “어째서 그런 오해가 생겼는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취향을 따지자면 전 장모님처럼 푸근한 인상의 성숙한 여인을 좋아했습니다.” “어머...” 유라스가 얼굴을 붉히며 탄성을 발하자, 제스터는 마음에 들지 않는지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헤네스를 만나고부터 그런 취향이 바뀐 건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럼...” 준상은 천천히 말했다. “그녀가 앳되고 귀여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그녀가 지닌 장점의 아주 작은 일부분일 뿐이죠. 여러분은 모두 그것을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 그 말에 유라스와 젤란은 물론이고 제스터마저도 고개를 끄덕였다. 준상은 그런 세 사람을 바라보며 선언하듯 말했다. “지금의 제 취향은 헤네스, 바로 그녀입니다.” ============================ 작품 후기 ============================ 큭큭큭... 00238 트롤러 ========================================================================= 그 말이 준상의 입에서 흘러나온 순간, 세 사람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분명 그들은 헤네스와 부모와 형제로서 감동을 받아야만 하는 위치에 있었지만, 면전에서 이런 식으로 직접적인 표현을 듣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할 정도의 면역력까지는 갖추고 있지 못했다. “크험험험...” 잠시 굳어있던 제스터는 얼굴이 붉어진 채 그렇게 헛기침을 크게 내뱉으며 준상의 타오르는 듯한 시선을 외면했다. 유라스는 자신이 고백을 받기라도 한 것처럼 얼굴이 붉어져서 두 손으로 연신 부채질을 하느라 정신없었다. 젤란의 경우에는 더욱 상황이 심각해서 괜시리 주먹을 폈다 쥐었다 하면서 연거푸 심호흡을 하며 가슴 속에서 무언가 불끈불끈 치밀어오르는 간지러운 느낌을 억누르느라 심력을 소모해야만 했다. 오직 어깨 위에 앉아 있던 요정 기사 미아라만이 꾸벅 거리며 졸다가 손부채질을 하는 유라스의 모습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을 뿐이다. 준상은 그들이 법석을 떠는 모습을 잠시 가만히 지켜보다가 어느 정도 상황이 진정되자 다시 질문을 던졌다. “델로드란의 대응은 그것 뿐이었습니까?” 그러자 젤란이 얼른 헛기침을 하며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실은... 그녀 외에도 약 십여명 정도의 여인들이 함께 왔습니다.” “십여명이나요?” 얼굴을 찌푸린 준상의 말에 젤란은 난처한 듯 웃음을 지었다. “네, 일단은 왕녀의 측근시녀라는 명목이지만, 대부분이 쟁쟁한 명문가의 규수들입니다. 혹여라도 준상님을 왕실에서 독점하는 사태를 막아보겠다고 귀족 측에서 억지로 끼워보낸 것이죠.” “그럼 그녀들도...” “왕녀와 비슷합니다. 대부분 급조된 양녀들이죠.” “...” 철모르는 계집애들이 하나도 아니고 십여명이나 우글대고 있다니. 준상은 한숨을 푸욱 내쉬고는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나저나, 이 모든 상황을 초래한 에슈탈렌의 왕녀는 어떻게 지내고 있습니까.” 그 말이 나오자 젤란은 다시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거처에서 나오지 않은 채 함께 온 호위 기사들과 수련에만 몰두하고 있습니다.” “수련이요?” 준상은 다소 의외란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왕녀이면서도 동시에 기사라는 사실은 이미 전해들은 뒤였지만, 이런 상황에서조차 수련에 몰두하고 있다는 건 조금 의외였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더구나 그녀는 이곳에 온 이후로 단 한 번도 드레스를 입지 않았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델로드란의 수도에서 왕실이 주최한 무도회 때를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드레스를 입지 않았습니다.” “그건 또 재미있는 얘기로군요.” “그 때문에 일각에서는 그녀의 목적이 준상님과의... 크흠, 그러니까 남녀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제 관계를 맺기 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도 있는 상황입니다.” “사제라...” 준상이 강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건 누구에게 가르치고 말고 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물론 엄밀히 따지자면 헤네스에게 다소의 수련을 시킨 경험이 있긴 하지만, 그것 역시 펫이라는 특수한 관계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정말 여러모로 민폐로군요.” “하하...” 젤란은 난처해 하면서도 어쩐지 안도하는 듯한 기색으로 그렇게 웃었지만, 준상으로서는 정말 민폐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냥 얌전하게 자기 나라에나 있을 것이지, 왜 이런 곳까지 힘들게 찾아와서 평지풍파를 일으키냔 말이다. 준상은 혀를 차며 잠시 곰곰이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세 사람에게 말했다. “저를 만나지 못하면 이대로 언제까지고 계속 눌러 앉아 있겠죠?” 제스터와 유라스마저도 그 말에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그들의 생각을 대변하듯 다시 젤란이 대답했다. “후, 아마도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설령 에슈탈렌의 왕녀가 돌아간다 해도 말이죠.” “그 말은, 그녀들을 이곳에 보낸 목적이 단지 저를 유혹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라는 뜻으로 들리는 군요.” 그러자 가만히 듣고 있던 유라스가 조심스런 태도로 대답했다. “저희가 견디지 못하고 사위님을 불러도 좋고, 계속 견디다 못해서 저희 가문이 왕녀나 다른 영애들에게 실례라도 저지르면 그것은 그것대로 명분을 쌓는 일이니 손해될 일이 아니란 거겠죠. 물론 그러다 사위님의 분노를 살 수도 있겠지만, 그리 된다면 왕실은 거리낌 없이 저 아이들을 제물로 삼을 겁니다.” “문제를 일으킨 당사자에게 책임을 지운다... 반박의 여지가 없군요.” “말씀대로입니다.” 생각해보면 이건 무척이나 냉혹한 일이었다. 그녀들은 양녀로 선택된 시점에서 이미 가문을 위한 희생양으로 정해진 것이다. 한창때의 여아들을 징벌하는 건 어지간한 독심으로는 불가능한 일. 설령 징벌이 이루어진다 해도 그것 자체로 하나의 부담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또한 이것은 준상과 브레아 가문의 평판을 떨어뜨리는 일도 된다. 유라스는 어두운 표정으로 계속 말했다. “더욱 난처한 건, 그녀들 대부분이 그런 자신의 처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음...” 과연 왕국을 손에 쥐고 흔드는 자들이라 그런지 계략 하나하나가 냉혹하기 이를 데 없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적어도 자신들의 친 자식을 계략의 희생물로 삼지는 않았다는 정도. 굳은 표정으로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긴 준상을 향해 젤란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어떤 방식으로 대응을 하던 간에, 결국은 저들이 바라는 대로의 결과를 낼 뿐이니 이래저래 곤란한 일입니다.” “과연...” 제법이다. 에슈탈렌의 왕녀가 갑작스럽게 준상을 찾아왔을 때는 저들도 무척이나 당황했을 터. 그런 당황스러움 속에서도 그것을 이용해 이런 계략을 짜내다니. 뻔히 보이는 계략이라는 문제가 있긴 하지만, 그렇게 뻔히 보이는 데도 피할 수가 없으니 이것 역시 어떤 면으로는 상대를 심리적으로 압박하는 수단으로 매우 효과적이다. “음...” 준상이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에 잠기자 세 사람은 말없이 그의 생각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자신들로서도 여러 가지 대응책을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그리 효과적인 수단은 아니라는 느낌이었고, 또한 이 문제에 있어서는 당사자인 준상의 입장이 가장 중요한 것도 분명한 사실이었다. “이렇게 되면 방법은 하나 뿐이군요.” “어떤...” “저를 만나러 왔다면, 만나 보면 될 일 아니겠습니까.” 그 말에 젤란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녀들이 급조된 양녀들이라는 건 알고 계시겠지요.” “물론입니다.” “개중에는 양녀로 선택되기 이전의 행적이 불분명한 자도 있습니다. 자칫 불순한 목적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는 얘기지요.” “이를테면?” “암살 같은 경우도 생각을 해두셔야 합니다.” 확실히 불가능한 얘기는 아니다. 지구의 역사를 살펴보더라도 미인계를 이용한 암살은 그리 보기 드문 일이 아니다. 사실 준상만 아니었다면 이미 집정관을 통한 계략이 성공하여 이벨류아는 이미 왕실이나 수도 귀족들의 영향력 하에 들어와 있어야만 한다. 이런 식으로 이미 껄끄러운 관계를 맺은 상대라면 이후에도 걸림돌이 될 공산이 크니, 회유하기 보다는 차라리 미리 싹을 잘라버리자고 생각하는 급진적인 부류가 있어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재미있군요.” 준상의 말에 젤란은 한숨을 푸욱 내쉬고는 다시 말했다. “결심하신 거군요.” “그렇습니다.” 단호한 그 대답에 젤란은 제스터와 유라스를 바라보았고, 가만히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두 사람은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저희가 힘이 부족해서...” 유라스의 말에 준상은 고개를 저었다.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는 젤란을 향해 다시 말했다. “굳이 시간 끌 이유는 없겠죠. 오늘 저녁에 그녀들을 만나겠습니다.” 그 말에 젤란은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빨리 말씀이십니까?” “뭔가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니... 무도회까지는 아니어도 하다못해 만찬 정도라도 준비하려면 아무래도 시간이...” 준상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저었다. “상관없습니다. 게다가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목적이 분명한 이상 그녀들은 제 초대를 거절하지 않을 겁니다.” “그건 그렇습니다만.” 젤란은 한숨을 푹 쉬었다. 준상은 이렇게 간단하게 말하고 나면 그만이지만, 그 얘기를 왕녀나 영애들에게 전달해야 하는 것은 엄연히 자신이고, 그녀들로부터 불평을 듣는 것 역시 자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당사자가 그렇게 하겠다는데. “후... 알겠습니다.” 젤란의 대답을 들은 준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원래는 일전에 말씀드린 삼각무역에 대한 일을 논의하고자 왔습니다만, 지금은 그런 일을 논의할 상황이 아닌 듯 하니 일단 뒤로 미루어 두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준상은 제스터와 유라스에게 인사를 한 다음 다시 모습을 감춘 채 브레아 가문의 저택에서 빠져 나왔다. 그는 곧바로 자신의 저택으로 돌아온 다음, 침실에 매달린 줄을 당겨 자신이 돌아왔음을 시녀들에게 알렸다. “오셨습니까.” 허겁지겁 달려와 고개를 조아리는 시녀장에게 준상은 곧바로 지시를 내렸다. “브레아 가문에 머물고 있는 왕녀와 영애들에 대해서는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내가 돌아왔음을 알리고, 그녀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도록.” 그 말에 시녀장은 고개를 거듭 조아리며 물었다. “준비라시면, 어느 정도를 말씀하시는 것이온지.” 무도회인지, 만찬인지, 그도 아니라면 다과회인지. 시녀장은 구체적인 규모를 묻고 있었지만, 준상은 그런 그녀를 향해 이렇게 대답했다. “오래 있다 가지는 않을 것이니, 간단한 접견 정도로만 준비하도록.” 그 말을 들은 시녀장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네? 정말이십니까?” 원래는 이런 식으로 되묻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중대한 실수였기에 시녀장은 스스로 말해 놓고도 놀라 얼른 고개를 조아리며 용서를 구했다. “죄송합니다.” “신경 쓸 것 없다. 아무튼 말한 대로 준비하도록.” “알겠습니다. 그리 알고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시녀장은 급히 물러난 뒤 준상의 지시대로 브레아 가문에 그가 돌아왔음을 알리고, 시녀들을 지휘해 접견 준비를 시작했다. 한편, 준상의 저택에서 그가 돌아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젤란은 그것을 왕녀들과 그 외의 영애들에게 일일이 전하는 역할을 맡았다. 왕녀와 영애들은 갑작스런 그 통보에 불만을 터뜨렸지만 그러면서도 재빨리 몸치장을 서두르기 시작했다. 오직 하나, 에슈탈렌의 왕녀 에롤로미네만 빼고. “그 분이 돌아오셨다고요?” “그렇습니다.” 젤란은 영애들의 불평을 감당하느라 녹초가 된 몸으로 별채에 딸린 마당에서 수련 중인 에롤로미네를 만나 준상의 말을 전했다. “오늘 저녁이요?” “네.” 다른 영애들과는 다르게 검을 다루는 기사이기에 자칫 검이라도 날리면 어쩌나 싶어서 젤란은 슬그머니 눈치를 살폈지만, 의외로 에롤로미네는 담담한 표정으로 젤란에게 사의를 표했다. “소식 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늦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아, 알겠습니다.” 젤란은 정중한 에롤로미네의 말에 얼른 고개를 숙이고는 그녀의 처소를 빠져 나왔다. “음... 역시 사제 관계가 목적인건가.” 그는 잠시 복잡한 표정으로 그녀의 처소를 바라보다가 이내 지친 몸을 이끌고 자신의 가족들이 머물고 있는 별채로 걸음을 옮겼다. 마침내 저녁 시간이 되자, 브레아 가문에서는 화려한 마차들이 줄을 지어 나타나더니 준상의 저택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녀들에 대한 소문은 이미 이벨류아 전역에 널리 퍼진 상태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화려한 마차의 행렬이 의미하는 바를 어렵지 않게 알아차렸다. “그분이 돌아오신 건가.” “그렇겠지.” “전에도 봤지만, 정말 많기도 하다.” 사람들의 수근거림과 시선 속에서 마차들은 이벨류아의 대로를 통과해 준상의 저택에 하나씩 줄을 지어 도착했다. “어서 오십시오. 뫼시겠습니다.” “흠.” 가장 앞서 도착한 델로드란의 왕녀, 이브릴은 자신이 왔는데도 감히 얼굴조차 내보이지 않는 준상의 행태에 분노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심호흡을 하며 꾹 눌러 참았다. 브레아 가문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상대는 신비에 쌓인 천년왕국 신라의 왕족. 다소의 거만함은 이미 예상한 일이었다. 그녀는 주먹을 불끈 쥐고 자신의 전장이 될 저택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그런 이브릴의 뒤를 이어 영애들이 마차를 타고 속속 준상의 저택으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브릴을 비롯한 영애들은 각자 시녀들을 한두 명씩 대동한 채 저택 안에 자리 잡은 커다란 접견실로 안내되었다. 하다못해 다과회라도 준비되어 있으리라 생각했던 그녀들은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방 안으로 안내되자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이브릴은 몸을 부들부들 떨며 분노를 삼켰다. 아무리 팔려온 신세나 다름없다고는 하지만, 그렇다 해도 엄연히 한 나라의 왕녀이다. 뿐인가. 본래도 방계이기는 하지만 엄연히 왕실의 피를 이은 후작 가문의 영애였던 그녀다. 그런 그녀에게 이런 식의 응대라니. 이것은 어린 그녀가 감당하기엔 너무나 치욕적인 일이었다. 도저히 참지 못하고 그대로 박차고 나가려는데, 시녀들의 안내를 받으며 갑옷 차림의 에롤로미네가 들어왔다. “...” 이브릴은 물론이고, 당장이라도 화를 내며 방을 나가려던 영애들은 차분하기 이를 데 없는 그녀의 모습을 보자 약속이라도 한 듯이 스스로 화를 억눌렀다. 그녀들은 지금 이 상황 자체가 하나의 시험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에롤로미네의 차분한 모습을 보고 뒤늦게나마 깨달은 것이다. 물론 준상에게는 처음부터 시험이고 뭐고 할 생각조차 없었지만 말이다. 잠시 시간이 흐르자, 마침내 브레아 가문에 머물고 있던 모든 영애들이 방 안에 빼곡하게 자리 잡았고, 그제서야 시녀장이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주인님께서 드십니다.” 그 말이 끝나자 곧바로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순간. 접견실 안에 모여 있던 영애들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멈추었다. 흔히 잘 생긴 사람을 두고 얼굴에서 빛이 난다고 표현하는 경우가 있다. 여기 모인 영애들도 사교계 등에서 이른바 당대의 미남이라 불리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고, 그래서 그러한 표현이 어떠한 상황에서 사용되는 것인지 정도는 익히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남자는 그녀들이 지금껏 만나봤던 그 어떤 남자와도 달랐다. 그가 접견실 안에 들어선 순간 영애들은 정말로 얼굴에서 빛이 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여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아니, 그것만이 아니다. 그렇게 얼굴에서 빛이 나면서도 그는 감히 눈을 마주치기 어려울 정도의 어떤 분위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영애들은 빛으로 감싸인 듯한 그 모습 때문에 자신을 짓누르는 이 감정이 무엇인지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당황했다. 그 감정의 이름은, 바로 두려움. 그녀들은 매혹과 두려움이라는 상반된 두 가지 감정이 휘몰아치는 자신의 상태에 당혹해 하며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두렵다. 하지만 멋지다. 멋진데 계속 보자니 두렵다. 도대체 이 감정을 뭐라고 표현해야 옳단 말인가. 준상은 그런 혼란의 도가니 속에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접견실 한 켠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자신을 감히 똑바로 보지 못하고 흘깃거리는 영애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날 찾아왔다고?” 하지만 영애들은 물론이고 이블린이나 에롤로미네마저도 그 말에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준상은 그녀들을 다시 한 번 쓰윽 훑어보고는 다시 말했다. “누가 델로드란의 왕녀인가.” 그 말을 듣자 이블린은 얼른 손을 번쩍 들며 앞으로 나섰다. “저에요.” 이블린은 대답해 놓고도 곧바로 그런 자신의 가벼운 행동을 자책했지만, 준상은 개의치 않는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손짓해 불렀다. “이리로.” 이블린은 머뭇거렸지만, 그녀를 데리고 온 나이 든 시녀가 기회라는 듯이 얼른 등을 밀었기 때문에 주춤거리며 준상에게 다가설 수밖에 없었다. 준상은 자신을 향해 머뭇거리며 다가서는 소녀를 향해 손을 뻗더니 그녀의 손등에 다짜고짜 입을 맞추었다. 이블린은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당혹했지만, 준상의 입술이 손등에 닿는 순간 전신을 강타하는 어떤 짜릿한 느낌에 그대로 다리에 힘이 풀리며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허윽...” 그녀 뿐만이 아니었다. 질투 섞인 눈으로 이블린을 바라보고 있던 다른 영애들과 그녀들을 따라온 시녀들 역시 준상의 입술이 이블린의 손등에 닿는 순간 마치 전염이라도 된 것처럼 탄성을 지르며 그대로 풀썩 풀썩 주저앉기 시작한 것이다. 준상은 단순히 인사의 의미로 손등에 입을 맞춘 것이 아니었다. 그가 실행한 것은 다름 아닌 요정의 키스. 그것도 무려 광역으로 매료 효과를 발산하는 마성의 키스인 것이다. “흠...” 본래 광역 매료의 효과는 50퍼센트의 성공률을 가지고 있었지만, 상대가 정신 공격에 대한 면역력이 전혀 없는 소녀들인데다 준상이 지닌 무지막지한 행운의 영향으로 이런 식의 터무니 없는 결과가 초래된 것이다. 준상은 단 한 번의 키스로 초토화된 접견실 안을 바라보다가 무릎을 꿇은 채 몸에서 희미한 빛을 뿜어내고 있는 한 인물을 발견하고는 눈에서 이채를 발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준상은 손뼉을 쳐 시녀들을 부른 다음, 달뜬 표정으로 신음을 흘리며 바닥에 쓰러져 있는 영애들의 모습에 놀란 표정을 짓는 그녀들을 향해 명령했다. “치워라.” 00239 트롤러 ========================================================================= 시녀들은 차가운 준상의 명령에 당황하다가 시녀장이 나서자 우물쭈물하며 영애와 그녀들이 데리고 온 시녀들을 한 명씩 부축해서 밖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준상은 품에서 사자의 가면을 꺼내 얼굴에 쓴 채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다른 이들과는 달리 스스로 몸을 일으키는 한 명의 여인을 잠시 바라보더니 아무 말 없이 자신의 처소로 돌아가 버렸다. “휴...” 에롤로미네는 준상의 모습이 접견실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간신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긴장을 풀었다.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지금으로서도 도대체 감이 잡히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준상이 무언가 특이한 능력을 사용했으며, 자신은 조상신의 가호 덕분에 그 효과를 견뎌낼 수 있었다는 것만큼은 분명히 인지할 수 있었다. 저주 같은 것이 아닌가 하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기도 했으나, 생각보다 그녀의 몸과 마음을 지켜부는 가호의 반응이 격렬하지 않은 것을 보면 그런 것은 아닌 듯 했다. 이것이 시험인지, 아니면 다른 어떤 목적을 가진 행동인지는 지금의 그녀는 알 수 없는 일.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의 목적이 무엇이든 간에 자신은 그것을 피해갔으며 그 덕분에 그에게 조금이나마 눈도장을 찍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일단은... 한 고비 넘긴 건가.” 그렇지 않아도 느닷없이 찾아와 버린데다, 이런 식으로 일이 커져서 난처하던 참이었다. 설마 델로드란 왕실이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그녀도 미처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다소 아쉽고 섭섭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흘깃 바라봤던 그의 시선은 자신 따위 기억에 전혀 남아 있지 않은 듯 담담하다 못해 무심하기까지 할 지경이었다. “...” 에롤로미네는 어쩐지 가슴이 먹먹한 느낌이 들었으나, 이내 심호흡을 깊게 내쉬고는 이곳에 왔을 때처럼 자신의 말을 타고 호위기사들과 함께 브레아 가문에서 마련해준 거처로 돌아갔다. 한편, 영애들이 준상의 저택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다시 마차를 타고 돌아가는 모습은 이벨류아의 시민들은 물론이거니와 그녀들의 행동을 예의주시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커다란 의문을 던져 주었다. “뭐지? 뭐가 이렇게 빨라?” “영문을 모르겠군. 안에서는 아무 기별이 없었나?” “그, 그게... 아직...” “정말로 얼굴만 보고 돌려보낸 건가? 도대체 뭐냐고?” 하지만 자세한 사실을 말해야 할 영애들과 그녀들을 보좌하기 위해 함께 움직였던 시녀들 역시 마치 열병에 걸린 것처럼 가쁜 숨을 몰아쉬며 제대로 안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지 못했다. 결국 다른 사람들이 저택에서 있었던 일을 알게 된 건 다시 그로부터 만 하루가 지나서의 일이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갑자기 가슴이 세차게 뛰더니 다리에 힘이 풀려서...” “아무 생각도 안 나요. 그 사람의 얼굴 밖에는...” “아... 준상님.” 대부분 미열과 홍조를 보이고 있었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왕녀 이브릴의 경우에는 증세가 심각해서 정신이 들자 계속해서 눈물만 주룩주룩 흘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 일관된 반응을 보고 그녀들의 증상이 무엇인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들의 병명은, 다름 아닌 사랑의 열병. 흔히 말하는 상사병이다. “이건 도대체...” “그 짧은 시간에 뭘 어떻게 해야 이런 일이...” 그녀들을 보좌하며 이곳에 왔던 사람들은 물론이고, 도대체 무슨 기책을 쓰려는 건가 싶어 내심 조마조마하며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브레아 가문의 사람들 또한 당황스럽기는 매한가지. 하지만 준상은 그들에게 이렇다 할 말 한 마디 없다가, 다시 하루가 지나서야 당당하게 랩터를 타고 브레아 가문을 찾아왔다. 말로만 전해 들었던 말 없는 마차. 하지만 그 어떤 마차보다도 육중하고 견고해 보이는 랩터가 기세 좋게 대로를 질주해 브레아 가문에 도착하자 안 그래도 정신이 없던 사람들은 금새 법석을 떨기 시작했다. 하지만 준상은 얼굴을 사자의 가면으로 가린 채 그들이 법석을 떨거나 말거나 바로 저택 안으로 들어서서 회의실로 쓰는 큰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얼마 안 있어 영애들을 앞세운 왕국의 귀족들이 우르르 그의 뒤를 따라 회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회의실의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채 일어나지도 않는 준상을 발견하고는 그 오만함에 울컥 화가 치밀어 올랐으나, 일단은 내색하지 않고 스스로의 소개와 함께 예를 갖춘 다음 각자 회의실 안에 자리를 잡았다. 그렇게 모든 이들이 회의실에 자리를 잡자 왕녀 이브릴을 보좌해 이곳을 찾은 귀족 한 명이 자리에서 일어나 낭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준상님의 명성은 이전부터 전해듣던 바입니다. 오늘 이렇게 여러분들이...” 하지만 그가 자신이 생각한 문장을 제대로 늘어 놓기도 전에 준상의 한 손이 올라가더니 사자 가면 안에서 묵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본론만.” “...” 이런 식으로 말이 가로막히는 것은 전례에 없던 일이라 귀족은 당황했다. 하지만 그 역시 정치판에서 굴러먹은 자답게 잠시 헛기침을 하며 마음을 다잡은 다음, 준상이 원하는대로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커흠! 그럼 원하시는 대로 본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 준상은 대답 없이 가만히 귀족을 바라보기만 했다. 지금의 그는 아무런 특수 효과를 발하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사람들은 어쩐지 묘한 존재감에 짓눌리는 듯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귀족은 말없이 바라보는 준상의 시선에 어쩐지 위축되는 느낌을 받았지만 일단 무시하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며칠 전, 준상님께서 왕녀님을 부르신 일을 기억하십니까?” 준상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기억한다.” 그러자 귀족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에게 따지듯 물었다. “그 때, 준상님을 접견하기 위해 저택을 방문했던 왕녀님과 그분을 보좌하기 위해 따라 나섰던 영애들이 갑자기 열병에 걸린 것과 같은 증상을 보이며 급히 돌아오셨던 것 역시 기억하십니까?” 준상은 이번에도 담담하게 인정했다. “기억한다.” 귀족은 예상보다 너무나 담담하게 모든 것을 인정하는 준상의 모습에 불안감을 느꼈다. 하지만 이왕 칼은 빼어든 상황. 여기서 머뭇거리며 물러서봐야 다른 귀족들이 그 기회를 가로챌 뿐이다. 귀족은 목소리를 드높이며 준상에게 이렇게 외쳤다. “저는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도대체 그날 무슨 일이 있었던 것입니까? 이것은 실로 일반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 사람들은 준상님이 무언가 사특한 술법으로 왕녀님과 영애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습니다. 준상님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이에 대한 해명이 있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다른 영애들을 보좌해 이곳을 찾은 다른 귀족들 역시 한 목소리로 준상을 성토하기 시작했다. “맞습니다! 진실을 밝혀 주십시오!” “사악한 흑마법이라는 소문마저 돌고 있습니다.” “이것은 영애들의 명예와도 관련된 일이니 반드시 진실이 밝혀져야만 합니다!” 하지만 준상은 시끄럽게 울려 퍼지는 귀족들의 말에도 불구하고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이나 귀족들이 떠들고 싶은대로 떠들도록 놔두던 준상은 그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제풀에 지쳐 다소 조용해졌을 때를 기다려 한 손을 들어 보였다. 준상은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집중되자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해명을 하라고?” 그러자 처음 입을 열었던 귀족이 얼른 그 말을 받아 외쳤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해명을 원합니다!”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턱을 괴고 있던 자세를 바로 하고는 천천히 얼굴에 쓰고 있던 사자 가면을 벗었다. “...” 순간, 회의실에는 침묵이 흘렀다. 단순히 가면을 벗었을 뿐이다. 그것 뿐인데, 사람들은 이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멍하니 드러난 준상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별다른 말이나 행동을 하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마음을 지그시 억누르는 기묘한 존재감. 그 뿐만이 아니다. 마치 환한 빛에 감싸인 듯한 그 얼굴이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사람들은 방금 전까지 그렇게 자신들이 성토하던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래서였나. 남자인 자신들마저도 이렇게 가슴이 두근거리는데, 한창 때의 꿈꾸는 소녀들이야 오죽하겠는가. 사람들은 어느 순간 이 모든 상황을 납득해 버리는 자신을 느끼고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하지만 인정해서는 안 된다. 인정해서는 오히려 자신들만 꼴이 우스워진다. 단순히 꼴이 우스워지는 것만이라면 아무 문제 없지만, 여기서 물러나게 되면 수도로 귀환했을 때 웃음거리가 되는 건 보지 않아도 뻔한 일. 그것은 지금까지 정계에서 쌓아온 모든 명성과 권위가 순식간에 추락하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은 또한 가문의 몰락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어차피 외모라는 것은 객관적인 판단의 기준이 되지 못한다. 또한 객관적이지 못한 것은 증명의 요건으로 성립되지 않는다. 귀족들은 그래서 떼를 쓰듯 다시 한 목소리로 외쳤다. “어서 해명하십시오!” “해명하십시오!” “저주가 아니라면 일시에 그 많은 인원들이 실신한 까닭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어서 해명하십시오!” 원래대로라면 이렇게 급하게 몰아쳐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직접적으로 몰아붙이기 보다는 조금씩 상대를 구석으로 밀어 붙이며 자신들에게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 가야만 하는 것인데, 느닷없이 준상이 가면을 벗어 그 모습을 드러내자 심리적으로 위축된 귀족들은 그런 점조차 잊고 일방적으로 매도를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준상은 일견 모욕이라고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몰아치는 그들의 태도에도 아랑곳없이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다가 다시 조용히 물었다. “이것은 그대들의 국가과 가문의 의견인가?” “그, 그것은...” 귀족들은 일순 주춤했다. 준상은 다시 물었다. “아니면 단순히 개인의 궁금증을 풀기 위함인가?” “...” 귀족들은 선택의 기로에 섰다. 여기서 단순한 개인의 궁금증이라고 대답해 버리면 모처럼의 공세가 전부 무용지물이 되어 버림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모처럼 잡은 기회 그 자체가 의미 없는 일이 되어 버릴 수도 있는 일. 그것은 다시 말해 지금까지 그들이 쏟아부었던 말들의 경솔함을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나 마찬가지다. 때문에 귀족들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 그렇습니다!” “저희 가문은 공식적으로 귀공께 해명을 요구하는 바입니다!” 그렇게 한 명이 물꼬를 트자 다음부터는 쉬웠다. 귀족들은 결국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이 그렇게 외쳤고, 그 말을 들은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가까운 자리에 앉은 채 자신을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델로드란의 왕녀 이브릴을 향해 물었다. “너도 내가 해명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은근한 그 목소리를 들은 이브릴은 화들짝 정신을 차리는가 싶더니 마구 고개를 저으며 이렇게 외쳤다. “아뇨! 준상님은 나쁘지 않아요!” 준상은 천천히 배석한 다른 영애들을 바라보았고, 그녀들은 자신에게로 시선이 돌아오자 미리 입이라도 맞춘 것처럼 한 목소리로 외쳤다. “맞아요! 준상님은 아무런 잘못이 없어요!” “왜 준상님을 욕하는 거죠?” “해명이라뇨! 죄라면 준상님께 반한 저희들에게 있어요!” 귀족들은 연이어 터져 나오는 영애들의 그같은 외침에 어안이 벙벙해지고 말았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아무리 외모에 홀렸다고는 해도 그녀들은 각자 가문의 부흥을 위해 이곳에 온 상태.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다는 건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다시 외쳤다. “이, 이것은... 지금 영애들의 정신이 온전치 못한 상태라...” “그렇습니다. 정말 무섭군요. 도대체 얼마나 강한 저주를 펼쳐야 이런 일이...” 그것은 분명히 진실에 근접한 말들이었지만, 준상은 오히려 피식 웃으며 이브릴의 맞은 편에 자리하고 있던 에슈탈렌의 왕녀 에롤로미네를 향해 물었다. “저들은 이 모든 일을 저주라고 말하는 듯 한데, 네 생각은 어떤가.” 그러자 에롤로미네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더니 단호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에슈탈렌의 왕녀인 저 에롤로미네의 이름을 걸고, 그날 있었던 모든 일은 저주와 무관함을 선언합니다.” 귀족들은 다시 한번 말문이 막혔다. 애초에 저주니 뭐니 하고 몰아붙인 것은 그것이 일반적인 방식으로는 증명하기 매우 곤란한 부분이라는 점도 한 가지 이유였다. 하지만 그들은 에롤로미네의 말을 듣고서야 자신들이 커다란 실수를 저질렀음을 깨달았다. 에슈탈렌의 본가에만 이어지는 강력한 가호의 능력. 그것은 저주와 같은 사악한 힘으로부터 자신과 다른 이들을 보호하는 힘이었다. 다른 이도 아니고, 당대에 그 힘을 가장 강력하게 발휘하고 있다 전해지는 에롤로미네의 선언이 이런 상황에서 얼마나 큰 공신력을 가지는 지는 달리 생각할 필요도 없는 일. 준상은 그대로 꿀먹은 벙어리가 된 귀족들을 향해 담담한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그렇다는군.” “...”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본 준상은 다시 입을 열었다. “내 비록 천년왕국 신라의 왕족이지만, 이곳은 델로드란이니 그대들의 관습을 따르는 것이 도리.” “...” “아직 이곳의 관습에 익숙하지는 않지만, 이미 한 가지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이 있다.” 준상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을 이었다. “그것은 바로, 귀족들의 분쟁을 해결하는 가장 간단하며 확실한 방법.” 귀족들은 그가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얼굴이 하얗게 탈색되어 버렸다. 준상은 그런 귀족들을 향해 선언했다. “나, 천년왕국 신라의 왕족 박준상은, 델로드란 왕실과 그대들의 가문에 대해 기사대전을 선포한다.” 혹시나 그것만은 아니기를 간절히 기원하던 귀족들의 가슴은 그 묵직한 말을 듣는 순간 그대로 덜컥 내려앉고 말았다. 00240 트롤러 ========================================================================= 끝장이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의기양양하게 준상을 몰아붙이고 있던 귀족들은 그 한 마디 말이 머리 속에서 종소리처럼 마구 울려대고 있었다. 애초에 그들이 저주니 뭐니 하는 말을 꺼낸 것은 그런 식으로라도 준상에게 자신들이 데리고 온 소녀들을 떠넘기려는 속셈이 사실상 거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 날 한 시에 소녀들은 물론이고 그녀들을 보좌하던 시녀들마저 같은 증세를 보이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일반적인 일이라고는 볼 수 없는 일이다. 여기 모인 귀족들이 원하던 결론은 단 하나. 책임 질 일을 했으면, 책임을 져야 한다. 이 한 마디 말을 끌어내는 것이었다. 남녀 관계라는 것이 어떤 식으로든 자주 엮이다 보면 결국은 뭔가 진전이 있게 마련이고, 이렇게 많은 수의 여자들과 지내다 보면 당연히 원래의 반려와는 사이가 벌어질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녀들이 준상의 마음을 훔칠 수 있다면 더욱 좋은 일이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최소한 브레아 가문의 여식과의 사이에 균열은 일으킬 수 있을 터. 비록 준상의 힘을 자신들에게 끌어오지는 못하더라도, 눈에 가시 같은 브레아 가문으로부터 이탈시킬 수 있다면 충분히 절반의 성공이라 할 만하다. 하지만 그런 얄팍한 계략은 자신들이 펼치는 주장의 근거가 되어 주어야 할 영애들의 예상치 못한 배반과 곧바로 이어진 에롤로미네 왕녀의 증언으로 인해 완전히 무산되어 버렸고, 이제 그들은 준상을 모독한 댓가를 치러야만 할 처지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것은 그들이 상정한 것 중에도 최악의 결과. 만약 이 상황이 그들을 이곳으로 보낸 자들의 귀에 들어간다면, 정계는커녕 목숨마저도 위태로운 지경에 처하게 된다. 준상의 기사 대전 선포를 듣고 패닉에 빠져 있던 귀족들은 어떻게든 그와 같은 상황만은 면하고자 수습을 시도했다. “기사 대전은... 왕실의 허락이 있어야만 합니다.” 누군가가 기사 대전의 규칙을 떠올리고 그와 같은 말을 했으나, 준상은 이렇게 대답했다. “신라의 왕실은 내 의견을 무시하지 않을 것이다.” “어, 어, 어...” 말을 꺼낸 귀족은 이게 아닌데 싶은 표정으로 입을 다물지 못했다. 델로드란에서 왕실이라면 당연히 델로드란의 왕가를 말하는 것이지만, 이 박준상이라는 자는 속해 있는 왕실조차 다른 인물이다. 물론 델로드란의 왕실이 기사 대전을 거부할 수도 있다. 허나, 그건 오히려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 막는 사태를 불러올 수도 있다. 기사 대전보다 더 중대한 사태가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바로 전쟁 뿐이다. 이전 같았으면 설마 준상 혼자 전쟁을 일으키겠나 싶은 마음이라도 들었겠지만, 지금 여기 모인 귀족들은 그가 천 명이 넘는 광전사들을 자신의 수하에 끌어들이고 또한 순식간에 감쪽같이 사라지게 만들었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그것은 다시 말해, 준상이 원할 경우 그 천 명의 광전사는 물론이고 신라의 정예 병력이 전쟁이라는 명목으로 이 땅에 쏟아져 나올 수도 있다는 뜻이다. 준상, 그리고 그가 이끄는 천 명의 광전사들만으로도 감당이 될지 의문인 판에 신라의 병력마저 넘어오게 된다면, 델로드란으로서는 도저히 막아낼 도리가 없다. 그렇게 되면 남은 것은 단 하나. 델로드란이라는 이름의 국가 자체가 신라에게 병탄 당하는 일 뿐이다. 귀족들은 등골이 오싹해지고 말았다. 설마. 이 남자는 처음부터 모든 것을 다 알아차리고 자신들이 스스로 명분을 만들어 바칠 때만을 기다린 것은 아닐까. 아니, 그런 단순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신라라는 테두리 안에서는 아무리 용을 써도 왕족 이상의 신분이 될 수 없으니, 처음부터 이 델로드란이라는 땅 위에 자신의 나라를 세우고자 작정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만약 그런 것이라면, 지금의 이 사태는 호시탐탐 때를 기다리던 그에게 있어 천금 같은 기회인 셈이다. 이전의 기사 대전에서 그는 왕국 내에 위명을 떨치던 기사들로부터 간단하게 승리한 바가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터무니없는 힘을 목격한 기사들이 차마 싸울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명예를 잃을 것을 감수하며 싸움 자체를 포기해 버렸다. 뿐인가. 전해 듣기로는 혼자서 기사 두세 명은 간단히 찜쪄먹는다는 광전사를 한두 명도 아니고 무려 천 명이나 불러다 놓고 싸움을 벌여 당당하게 승리를 거머쥐었다는 정보마저 있었다. 이것은 실로 인간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의 용력. 당장 자신들이 기사의 입장이 되더라도, 그와 싸우라는 부탁을 받으면 고개부터 저을 것은 당연한 일. “아차.” 귀족들은 그 순간 다시 깨달았다. 준상이 이블린 왕녀를 포함한 영애들과 에롤로미네 왕녀에게 의견을 물은 진의를 다시 깨달은 것이다. 그것은 바로, 다른 자들을 위한 명분이었다. 명분은 나쁘게 말하자면 핑계. 다시 말해 준상은 그녀들과의 짤막한 문답을 통해 이 나라에 존재하는 기사들로 하여금 이 기사 대전을 회피할 수 있는 명분을 만들어 준 것이다. 아마도 지금 이곳에서 벌어진 소식을 전해 듣는다면, 기사들은 백이면 백 연심을 저주라고 매도당한 소녀들의 수호 기사를 자청하며 준상의 편에 설 것이 분명하다. 물론 순수한 동정이나 인정에 따라 그와 같은 선택을 하는 자들도 없지는 않을 터. 하지만 대부분의 기사들은, 이길 것이 분명한 준상의 편에 서는 것으로 기사 대전 이후에 벌어질 권력의 재편성에서 흘러나오는 향기로운 과실을 손에 넣고자 할 것이다. 그렇게 보자면, 지금 이 상황은 이전에 집정관이 브레아 가문에 대해 모략을 벌였을 때와 비슷한 점이 많았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지금은 델로드란 왕실과 수도의 귀족들이 압도적인 열세에 있다는 점 뿐이다. “...” 귀족들은 이제 항변조차 하지 못한 채 새파랗게 질린 안색으로 부들부들 떨고만 있었다. 이미 상황은 그들의 알량한 세 치 혀만으로 수습하기에는 너무나도 터무니없는 규모로 확대되고 말았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오직 하나. 바로 파멸 뿐이다. 준상은 그런 그들을 차가운 눈으로 지켜보다가, 다시 사자 가면을 얼굴에 쓰더니 자신을 몽롱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이블린 왕녀와 다른 영애들을 향해 말했다. “이리 와라.” 영애들은 그 말을 듣자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준상에게로 달려갔다. 멍하니 얼이 빠져 있던 귀족들은 미처 막을 틈도 없이 모든 영애들이 준상의 뒤에 도열하자 다시금 아차 싶은 생각이 들었다. 준상은 그런 귀족들을 향해 다시 말했다. “그녀들은 지금의 이 일을 밝힐 중요한 증인들이니, 내가 보호하도록 하겠다.” “자, 잠깐...” 하지만 귀족들이 다시 뭐라고 말할 틈도 없이, 준상은 이블린 왕녀와 영애들을 이끌고 방을 빠져 나갔다. 회의실에서 그가 나오자, 후련하다는 표정으로 싱글벙글 웃고 있던 젤란이 얼른 그에게 다가와 말했다. “말씀하신 대로 시녀들 역시 모두 확보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준상은 자신의 저택에서 출발하기 전에, 미아라를 통해 젤란에게 회의실에서 대화가 이루어질 동안 영애들과 함께 자신의 저택을 찾았던 시녀들의 신병을 모조리 확보할 것을 부탁해 놓은 상태였다. 처음부터, 귀족들에게는 빠져 나갈 구멍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준상은 마차를 준비해 이블린 왕녀를 포함한 영애들과 그녀들을 보살피기 위한 시녀들을 모조리 태우고 곧바로 자신의 저택으로 향했고, 에롤로미네 왕녀가 자신의 호위기사들을 거느리고 그런 그의 뒤를 따랐다. 귀족들은 회의실에서 빠져 나온 순간, 텅 비어 버린 저택을 보고는 자신들이 완벽하게 당했음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어쩌죠?” “...” 귀족 하나가 멍한 표정으로 그렇게 입을 열었지만, 그 말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준상은 신기루 탑에서 대기중이던 백 명의 광전사 들을 저택으로 불러들여 이블린 왕녀를 포함한 영애들의 경호를 맡겼다. 만약의 경우 증인인 그녀들의 신병을 노리고 암살자가 스며들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준상이 저택의 경비를 강화하는 동안, 브레아 가문은 그동안 시달림 받았던 것에 대한 반발인지 곧바로 기민하게 움직이며 델로드란 전국에 준상의 기사 대전 선포를 알렸다. 그 움직임이 얼마나 빨랐는지, 브레아 가문에 파견되어 있던 귀족들이 올린 보고가 도착하기도 전에 기사 대전에 대한 소문이 먼저 수도를 강타했다. “기사 대전이라니!” “어찌 이런 일이...” 델로드란 왕실과 수도 귀족들이라고 뾰족하게 다른 수가 있을리 없었다. 기사 대전을 거부하자니, 전쟁이 두렵다. 하지만 그렇다고 기사 대전을 하려 해도 나설 기사가 없다. 물론 그들에게는 엄연히 정규 기사단이 존재했으나, 소문이 퍼지자 그 대부분의 기사들은 와병과 수련을 핑계로 잠적해 버리고 말았다. 그것은 분명히 기사로서 불명예스러운 일이었지만, 기사 대전에 참여한다고 해도 그만큼의 명예가 따라오는 것 역시 아니다. 이것은 누가 봐도 개죽음 이상의 의미가 없는 일. 요행을 바랄 수도 없다. 그렇다고 명분이 있느냐면 그것도 아니다. 참가해 봐야 오히려 어리석다는 말이나 듣지 않으면 다행이다. 델로드란 왕실과 수도 귀족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사람들은 양녀라는 얄팍한 수단으로 준상을 회유하려 했던 그들의 행동을 비판했고, 또한 저주라는 가당치도 않은 명목으로 그를 얽어매려 한 어리석음을 비웃었다. 준상은 대략의 상황이 정리되고 브레아 가문을 점거하고 있던 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자, 자신의 저택에 데려다 놓았던 이블린 왕녀와 영애들을 다시 브레아 가문의 별채로 옮기는 한편, 그녀들을 경비하던 광전사들로 하여금 헤네스의 가족과 영애들을 지키게 했다. 그녀들은 이번 사태의 중요한 증인이며 또한 이어질 상황의 중요한 포석이기도 하기에 준상은 젤란에게 신중히 보살필 것을 부탁했다. “슬슬 움직여 볼까 합니다.” “네?” 기사 대전을 선포한 것만으로도 이미 델로드란 왕실과 수도 귀족들은 반신불수나 다름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움직인다는 준상의 말에 젤란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설마... 정말로 기사 대전을 벌이실 생각이십니까?” “물론입니다.” “허...” 원래대로라면 기사 대전은 각 가문 사이의 무분별한 분쟁을 막기 위한 수단이며, 또한 델로드란 왕실은 이것에 대한 중재 권한을 통해 지방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해 왔다. 하지만 준상은 신라의 왕족이라는 신분과 실질적인 무력 투사의 위협을 통해 델로드란의 권위 자체를 무력화시킨 상태. 이것은 다시 말해 그가 어떠한 조건을 내세우더라도 상대로서는 거부할 방법이 없다는 뜻이 된다. “그렇다면 상대에게 어떤 보상을 요구하실 생각이십니까.” 젤란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준상은 조용히 대답했다. “그건 저들이 하기에 달린 일이겠죠.” “그 말씀은...” “직접 가서 물어볼 생각입니다. 과연 저들이 저에게 어느 정도의 보상을 생각하고 있는지.” “아...” 굳이 보상을 강요해 봐야 인상만 나빠질 뿐이니, 가서 직접 물으면 된다. 마음이 담긴 충분한 보상을 내놓으면 다행이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 날 밤 그들의 성 안에는 작은 다람쥐 한 마리가 나타나게 될 것이다. 모르긴 해도 몽몽이가 한 번 훑고 지나가면, 이후 그 가문은 당분간 중앙 정계는커녕 자신의 세력을 추스르는 것조차 버거울 것이고, 최악의 경우에는 파산을 면치 못할 것이다. 명예도 잃고, 거기에 자금력마저 잃은 귀족에게 남은 것은 그야말로 파멸 뿐. 그나마 이전까지 큰 악행을 저지르지 않았다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복수의 칼날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젤란은 의외로 준상이 그리 가혹한 조건을 달지 않은 것에 안도한 표정을 지었지만, 준상은 처음부터 후환을 남겨두거나 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잠깐만... 설마 각 가문들을 일일이 다 돌아다니실 생각이십니까?” 젤란은 뒤늦게서야 준상과의 대화에 담긴 속뜻을 깨닫고는 그렇게 물었다. “물론입니다.” 그리고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준상의 모습에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물론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이런 식으로 모든 가문을 순회하는 것은 무척이나 번거로운 일이기에 젤란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 날 한 시에 왕실과 다른 모든 가문을 모아놓고 기사 대전을 벌이리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뭔가 문제라도 있습니까?” 준상의 물음에 젤란은 얼른 손을 내저으며 대답했다. “아니, 아닙니다.” 기사 대전의 가장 중요한 규칙 가운데 하나는, 제안자가 장소와 시간을 정하며 받아들이는 쪽이 방식을 정하는 것이다. 이번 같은 경우는 준상이 제안자이기 때문에 그는 장소와 시간을 결정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즉, 준상이 직접 각 가문을 찾아가 기사 대전의 실행을 요구한다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전례에 따라 한 번의 기사 대전만을 준비하고 있는 왕실과 수도 귀족들에게는 그야말로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이다. 안 그래도 기사들을 모으기 힘든 판에, 함께 힘을 합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그들에게는 재앙이나 다름 없는 일. 더구나 이런 식으로 일이 진행되면, 델로드란 왕실로서는 자신의 수족이며 또한 경쟁자들이기도 한 귀족 가문들이 하나씩 떨어져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상상할 수도 없는 압박감을 느끼게 된다. 단순히 심리적인 압박감 뿐만 아니라, 왕실의 경제와 정치 등의 모든 분야에 압력이 가해지게 될 것이고, 이것은 단순한 권위의 약화를 넘어 왕실이 지닌 실질적인 역량의 약화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이것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그야말로 말려 죽이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런 압박감을 견디지 못하고 또다시 서투른 짓을 저지르기라도 한다면, 그것은 준상에게 새로운 명분과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준상이 일부러 이벨류아를 벗어나는 것은 그런 의미 또한 지니고 있었다. 젤란은 이와 같은 사실을 깨닫자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주륵 흐르는 것을 깨달았다. “너무... 일을 크게 벌이지 않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젤란은 간신히 그렇게 자신의 심경을 표현했지만, 준상은 고개를 저었다. “저는 이미 그들에게 한 번 기회를 주었습니다.” “...” 젤란은 그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집정관의 모략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의 배후에 왕실이 있었다는 것은, 이 델로드란이라는 나라 안에서 어느 정도 정치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일이었다. 더욱이 젤란은 그 모든 일을 직접 겪었던 당사자.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미아라를 통해 연락해 주십시오.” 준상의 말에 젤란은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얼른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반드시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답을 들은 준상은 그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마치 환영처럼 스르르 모습을 감추었다. 젤란은 그가 홀로 어둠 속으로 스며들어 모습을 감추는 것을 멀거니 지켜보다가, 이내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급히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00241 트롤러 ========================================================================= 준상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 곳은 이벨류아로부터 전속력으로 말을 달렸을 때 사흘 정도 거리에 위치한 작은 영지였다. 이곳의 영주는 그레프스 자작 우벨 가르크 바스트민. 그레프스라는 명칭은 과거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이곳의 지명으로부터 유래된 것이고, 본래는 대귀족인 바스트민 백작가의 방계이다. 본래 이 지역은 바스트민 백작가가 보유한 여러 영지 중 하나로서, 대대로 차남이 성주 대리를 맡아 다스리던 곳이었는데, 3대 전에 게번 가르크 바스트민이 본가로부터 공식적으로 작위를 나누어 받아 그레프스 자작 가문을 세우며 실질적인 분가가 이루어졌다. 그레프스 자작가는 이후로 수도 정계에서 수완을 떨치며 세력을 차츰 넓혀 가기 시작했지만, 역사가 짧고 기반이 되는 영지가 좁다는 약점을 지니고 있었다. 때문에 이들은 근방에 무주공산이나 다름없는 상태로 방치되어 있는 이벨류아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는데, 실질적으로 집정관의 모략으로 인한 기사 대전이나 이번에 양녀들을 대거 브레아 가문으로 보낸 일들은 모두 이 그레프스 자작 가문에서 일을 주도했다고 봐도 거의 틀림이 없었다. “아직 수도에서는 연락이 없나?” “그것이...” 그레프스 자작가의 3대 영주, 우벨은 지금 몹시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한창 왕국의 다음 해 예산을 책정하는 일을 맡아 수도에서 정신없는 향응의 나날을 보내고 있어야 할 시기. 그러나 지금은 준상의 기사 대전 선포로 인해 예산 책정에 참가하기는커녕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이렇게 자신의 영지에 내려와 성에 목책을 두르고 해자를 더욱 깊게 파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중이다. 그레프스 자작가의 역사는 짧았지만, 그가 머물고 있는 이 성은 바스트민 백작가의 영향력 아래 있을 때부터 수백년간 개축을 거듭한 요새 중의 요새이다. 전체적인 형태는 이벨류아와 같은 성곽도시보다는 얀트훈센의 성채와 비슷했다. 다만 얀트훈센의 경우에는 높은 절벽을 배후에 둔 천연의 요새라면, 그레프스는 야트막한 구릉 위에 바위와 흙을 쌓아올려 토대를 만들고 그곳에 일곱 개의 성탑을 쌓은 뒤 이 성탑들을 두터운 성벽으로 연결한 인공적인 요새라는 점이다. 성벽은 크게 간단한 목책으로 이루어진 버팀벽과 성탑을 연결한 외벽, 그리고 외벽 내부에 존재하는 아성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지금 우벨이 있는 곳은 그 아성 한 가운데 존재하는 이 성에서 가장 높은 두 개의 쌍둥이 성탑 가운데 하나 였다. 가문 자체가 본래부터 무용을 기반으로 이름을 드높이기 보다는 본가의 인맥과 수도 정계에서의 활약을 기반으로 한 문신 계통이다. 그레프스 가문은 직접 칼을 휘두르기 보다는 그렇게 칼을 휘두르는 자들에게 실을 매달아 뒤에서 꼭두각시 놀음을 즐기는 쪽을 선호하는 경향이 강했고, 그것은 당대의 영주인 우벨 역시 마찬가지였다. 은연중에 기사와 같이 몸뚱이 하나만을 가지고 영욕을 쫓아다니는 필부들을 멸시하던 그였지만, 그래도 만약의 상황에서 행사할 수 있는 실질적인 무력의 필요성까지 무시하지는 않았다. 때문에 우벨은 우수한 기사들을 발굴, 육성하고 그들을 후원하는 일에 적극적이었는데, 그런 식으로 가문의 지원을 받은 기사의 수만 꼽아도 손발이 모자랄 지경이었다. 하지만 막상 그의 가문이 위기에 처하자 기사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등을 돌렸다. 지금 현재 이 성에 모여 있는 것은 그레프스 가문이 자체적으로 육성하고 있는 기병대 정도. 우벨은 그들의 실력이 허영심으로 가득찬 기사들에 못지 않다고 자부하고는 있었지만, 이런 중요한 시기에 막대한 자금을 들여 투자한 기사들을 써먹지 못하는 건 역시 속이 쓰릴 수 밖에 없는 일이었다. “아직 그놈에 대해서는 다른 정보가 들어오지 않았나?” “그렇습니다.” 기사 대전을 선포했으면 시간은 나중에 천천히 정하더라도 일단 장소 정도는 먼저 알려오는 것이 관례이다. 우벨은 역시 되먹지 못한 이방인 놈이라고 속으로 준상을 욕하면서 수도에서 가져온 질 좋은 술을 유리잔에 부었다. 그러고 보니 이 유리잔도 그 놈이 가져온 것이다. 이곳에서 이런 유리잔을 만들기 위해서는 질 좋은 수정을 일일이 깎아 정성들여 세공을 해야만 한다. 아니, 그런 식으로 공을 들이더라도 지금 보이는 것처럼 잡티 하나 없이 깨끗한 형태로 투명하게 그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아름다운 유리잔을 만드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수도의 귀족들 사이를 돌고 돌아 마침내 우벨의 손 안에 이 유리잔이 들어왔을 때, 그는 이벨류아 역시 언젠가 이렇게 자신의 손 안에 들어오게 되리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벨류아를 손에 넣기는커녕, 오히려 그레프스 가문이 위태로운 상황. “젠장.” 우벨은 찰랑거리는 술이 담긴 유리잔을 머리 위로 번쩍 치켜 올렸지만, 차마 그것을 바닥에 내던지지는 못했다. “후...” 치켜든 잔을 다시 내린 다음, 그 안에 든 술을 입에 머금은 우벨은 이번 일을 어떻게 수습할 지에 대해 생각했다. 기사들의 섭외가 실패한 지금, 그 일을 대신할 자는 가문에서 육성한 삼십 명의 기병대 뿐이다. 그들에게 임시로 기사 작위를 내리고 기사 대전을 맡기는 것 자체도 사실 구설수에 오를 만한 편법이지만, 우벨로서는 공들여 육성한 기병대를 그런 식으로 소모해 버리는 것 역시 아깝기 그지 없었다. “역시 그 방법 뿐인가.” 손가락질을 받기는 하겠지만, 어차피 임시로 작위를 내릴 것이라면 더러운 성하 마을에서 그의 은총으로 살아가는 무지렁이 농부들을 대충 뽑아서 갑옷을 입혀 내보내는 것이 차라리 낫다. “할 수 없군.” 어떻게든 구색을 맞춰서 이 위기를 넘기기만 하면 된다. 어차피 그 놈도 인간인 이상 시간의 힘을 무시하지는 못할 터. 지금이야 젊고 강해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우쭐거리겠지만, 놈이 늙고 쇠약해지면 그런 힘 따위는 일순간에 사라지고 만다. 남자의 복수는 십년이 걸려도 늦지 않는 법. 우벨은 속이 쓰린 것을 참으며 그렇게 속으로 후일을 기약했다. “크으...” 다시 술을 한 모금 넘기며 씁쓸한 속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그 감각을 즐기고 있는데, 갑자기 자신이 머물고 있는 집무실 입구가 어수선해지는가 싶더니, 전령 하나가 허겁지겁 문을 박차고 들어와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린다. “무슨 일인데 그리 호들갑이냐.” 노크조차 하지 않고 이렇게 뛰쳐 들어왔을 때는 그만한 사정이 있을 터. 손에 쥔 유리잔을 내려 놓으며 그렇게 묻자, 전령은 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놈이 나타났습니다.” “뭐?” 잠시 어리둥절해 하던 우벨은 놈이라는 말에서 순간 한 남자의 이름이 떠올랐다. “놈이라면... 설마 그 박준상인가 하는 그 놈 말이냐?” “그렇습니다.” “빌어먹을.” 우벨은 자신도 모르게 상소리를 입에 담았다. 기별도 없이 갑자기 이 성에 등장했다는 점으로부터 몇 가지 의도를 곧바로 유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놈은... 역시 각 가문에 개별적으로 기사 대전을 요청할 셈이군.” 우벨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전령에게 다시 물었다. “그래. 놈이 데려온 자들은 몇이나 되던가.” 그러자 전령은 얼른 그 질문에 대답했다. “혼자입니다.” “뭐?” 우벨은 순간 자신이 뭔가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지금 뭐라고 했지?” 그러자 전령은 큰 목소리로 거듭된 그 질문에 대답했다. “혼자입니다. 놈의 뒤를 따르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뭐라?” 우벨은 잠시 기분이 멍해지는 느낌이었다. 혼자라니.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우벨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놈은 지금 어디에 있나!” “관문 밖에 있습니다.” 전령의 대답을 들은 우벨은 곧바로 밖으로 나갔다. 우벨이 밖으로 나오자 전령의 움직임을 보고 미리 대기중이던 기병대들이 그 뒤를 따랐고, 급히 움직인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외벽의 성루에 도착했다. 성루에 도착한 우벨은 어렵지 않게 도개교 너머 버팀벽에 마련된 관문 밖에 홀로 버티고 선 한 남자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우벨은 잠시 얼떨떨한 표정을 짓다가 중얼거렸다. “정말... 혼자로군.” 얼굴에는 사자의 가면을 쓰고 있었으며, 눈에서 푸른 안광이 쏟아져 나오는 거대한 유령말을 타고 있었다. 등에는 검은 망토를 걸치고, 몸에는 이전에 본적이 없는 특이한 옷을 걸치고 있었는데, 그 모든 것이 이전에 전해들었던 박준상이라는 이방인의 특징과 일치하고 있었다. “놈은 정말 혼자서 이곳에 온 것인가?” 우벨의 물음에 부관 중 하나가 얼른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혹시나 싶어 성하 마을과 근방에 사람을 보냈으니 곧 연락이 도착할 것입니다.” “...” 잠시 기다리자 부관의 말대로 사람들이 연이어 도착하며 근방을 탐색한 결과를 보고해 왔다. “혼자가 맞습니다.” “놈 이외의 이방인은 근방에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부관은 보고를 듣고는 다시 우벨에게 말했다. “영지 경계에도 정찰병을 보내 볼까요?” 우벨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기병대장을 향해 지시를 내렸다. “기병대들은 지금 즉시 외성 성문 안에 집결하도록.” “알겠습니다.” 미친 놈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놈이 천 명이나 되는 광전사들과 혈투를 벌여 승리했다는 얘기를 듣기는 했지만, 우벨은 그 싸움 뒤에 단 한 명도 죽거나 다치지 않았다는 얘기를 듣고 그것이 단순한 어릿광대 짓거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놈은 처음부터 광전사들과 연계가 되어 있었고, 그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그런 웃기지도 않는 연극을 벌인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많은 인원이 싸움을 벌였는데 단 한 명의 부상자도 나오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물론 이것은 헤네스와 리체스의 열성적인 구호 활동으로 인해 일어난 결과였지만, 우벨에게는 그런 자세한 내막까지는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큭큭큭...” 명성 높은 기사들에 비하면 다소 손색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에게는 무려 삼십 명에 이르는 정예 기병대가 있었고, 또한 그 뒤를 받쳐줄 수백 명의 병사들이 있었다. 놈의 실력이 대단한 건 분명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용력일 뿐. 설령 자신이 지닌 병력의 절반 이상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놈을 죽일 수만 있다면 이 싸움은 자신의 승리다. “하늘은 아직 이 그레프스 자작가를 버리지 않은 모양이군.” 그렇게 우벨이 중얼거리고 있는데, 뒷문을 통해 들어온 전령들이 속속 우벨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보고를 올리기 시작했고, 그것을 종합한 부관이 들뜬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영지 경계는 물론이고 인근의 숲으로 통하는 관문 등에도 다른 이방인의 흔적은 찾을 수 없습니다.” “놈은 혼자입니다!” 우벨은 부관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로 명령했다. “놈에게 전해라. 기사 대전의 방식은 배틀 로열이다.” 그 말을 들은 전령이 달려 나가자, 우벨은 모여 있는 자들을 향해 다시 명령했다. “성 안의 모든 병력들을 준비시켜라.” 그리고는 준상을 향해 비릿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오늘 우리는 이방인의 피로 축제를 벌일 것이다.” 우벨의 말이 떨어지자, 모여있던 부관들은 얼른 예를 취한 뒤 각자의 부대를 향해 달려갔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것은 무척이나 비열할 술책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각기 짝이 되는 대전자끼리 승부를 벌여 그 승패를 합산하는 선승제, 그리고 일대일 방식의 예를 따르되 이긴 사람이 계속 싸워 나가는 승자전과 더불어, 모든 대전자들이 한꺼번에 출전해서 단 한 명의 승자가 남을 때까지 싸우는 배틀 로열은 엄연히 전통적인 기사 대전의 방식 가운데 하나 였다. 이번 경우에는 참여하는 대전자의 수가 압도적으로 불균형을 이루고 있지만, 방식 그 자체로는 문제될 것이 없었다. 하지만 우벨은 미처 예상치 못하고 있었다. 그의 이런 반응마저도 이미 준상은 예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지금 범의 아가리 속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것은, 준상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또한 전 병력이 출진 준비를 시작한 바로 그 즈음, 준상의 어깨 위에서 뛰어내린 작은 다람쥐 한 마리가 붉은 안광을 번뜩이며 성벽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는 사실 또한 그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00242 트롤러 ========================================================================= 준상은 몽몽이가 성벽 안으로 무사히 잠입하자, 초감각을 열어 성벽 너머의 상황을 주시했다. 예상대로 이곳의 영주는 준상이 혼자라는 사실을 확인하기가 무섭게 병력을 정비해 그와 맞상대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원래 사람은 자신이 보지 못한 것에 대해 의심하는 경향이 있다. 준상이 당대의 명성 높은 기사들을 압도적인 실력으로 물리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벌어진 일들은 누가 듣더라도 다소의 과장이 있다 싶을 정도로 파격적이었고, 여기에 더해 천명의 광전사들과 치른 의식 같은 건 어떻게 봐도 실제 일어난 일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점이 많았다. 당시 그 상황을 목격했던 자들의 상당수는 준상이 뿜어낸 기세 등에 짓눌려 이후에도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하고 의식에 대한 일을 말할 때면 횡설수설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데다, 그러한 격렬한 격투에도 불구하고 사상자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광전사들의 의식이 하나의 퍼포먼스에 지나지 않았다는 의심을 만들어 내기에 충분한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상대편에서 이렇게 적극적으로 전투에 나서지 않더라도 사실 문제될 것은 없었다. 앞잡이라고 해야 하나, 이벨류아에서 벌어진 일의 대부분이 이곳의 영주인 그레프스 자작의 손을 거쳤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때부터 준상은 이곳을 델로드란 왕실과 다른 수도 귀족들에 대한 본보기로 삼을 결심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 기다리자, 곧바로 깃발을 든 전령 하나가 성문을 열고 나와 준상에게 외쳤다. “기사 대전의 방식은 배틀 로열입니다!” 그리고는 대답도 듣지 않은 채 그대로 돌아가 버린다. 애초에 저렇게 외친 것 자체가 혹시라도 뒷말이 나올 것을 대비한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배틀 로열 방식의 기사 대전은 본래 여러 귀족들이 하나의 문제에 대해 얽혀 있을 경우 한꺼번에 자웅을 결하기 위한 방식이다. 배틀 로열 방식은 선승제나 승자전 방식을 적용할 경우 부전승이라든가 여러 가지로 말이 나올 소지가 있으니 아예 한 자리에 몰아넣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결판을 내도록 하는 것으로서, 이렇게 대립하는 귀족의 수가 단 둘일 때는 적용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 하지만 관례가 없다 뿐이지 하지 말란 법이 없는 것도 분명한 사실. 전령이 돌아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외벽과 버팀벽 사이의 해자를 연결하는 도개교가 열려지고 한 무리의 기마병이 뛰쳐나와 그대로 둘로 갈라지며 준상의 배후를 점하더니 다시 수백명은 됨직한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나온다. 굳이 이러지 않아도 준상은 도망칠 생각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지만, 포위망이 완료되자 그제서야 화려한 갑주로 몸을 감싸고 백마에 몸을 실은 귀족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대가 박준상이라는 이방인인가?” 제법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분위기를 잡는 중년의 귀족을 향해 준상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 했다. 입 열어 대답하는 것조차 귀찮다는 듯한 준상의 반응에 그레프스 자작은 얼굴을 찡그리더니 갑자기 번쩍 들어 올리며 외쳤다. “시작하라!” 그의 명령이 떨어지자, 준상의 주위를 넓게 원을 그리며 천천히 돌고 있던 기병대의 일부가 병사들의 포위진 밖에 집결하는가 싶더니, 그대로 진형을 갖추어 돌진을 시작한다. 거친 숨소리를 내뿜으며 달려드는 육중한 체구의 말과, 튼튼한 갑옷을 걸치고 기병창을 손에 든 채 그 위에 올라타 목표를 향해 돌진하는 그 모습은 지켜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절로 탄성을 자아내게 할 만큼 위협적이었다. 기사 대전에서도 상대를 말 위에서 떨어뜨리기 위한 기병 돌격이 이루어지기는 하지만, 한 명의 기사가 돌격을 하는 것과 기병대가 진형을 갖추고 돌격을 하는 것은 애초에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위압감의 차이가 있었다. 그레프스 자작은 자신이 육성한 기병대의 모습에 스스로 감탄하며 준상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이 이방인은 처음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의 모습 그대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돌격이 시작되어 그 말발굽 소리가 지축을 울리고 있는 이 상황에서도 기병대를 향해 말머리를 돌리는 그 당연한 반응조차 보이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너무나 놀라 움직일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럴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순간, 의기양양해 있던 그레프스 자작의 머리 속에서 경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이것은 뭔가가 잘못되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저렇게 태연할 수가 없다. 하지만 그의 생각이 두뇌로부터 신체로 전해져 어떤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가만히 말 위에 올라탄 채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던 준상의 손에 어디서 튀어 나왔는지 조차 알 수 없는 불길한 검붉은 색을 지닌 거대한 검 한 자루가 쥐어졌다. 그레프스 자작은 준상의 손에 쥐어진 그 검을 보는 순간 흠칫 굳어 버렸다. 금방이라도 굳어서 엉기기 시작한 피가 검면을 타고 흐를 듯한 그 불길한 빛의 대검을 손에 든 준상은, 자신을 향해 찔러오는 기병창을 가볍게 밀치듯 튕겨내더니 그대로 손목을 떨치며 검을 휘둘렀다. 선두에 서서 준상을 향해 자세를 낮추고 신중하게 기병창을 찔러가던 기병은 갑자기 준상의 대검에 의해 창이 튕겨지는 순간 하마터면 기병창을 놓칠 뻔했고, 다급하게 창을 수습하려는 순간 무언가 검붉은 파도 같은 것이 어깨를 향해 날아드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이 끝이었다. 선두에서 준상을 향해 창을 찔러가던 기병은 상완을 부수며 밀려드는 그 둔중한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허공을 날아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병사들의 머리 위로 떨어지더니 그대로 목이 꺾여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런.” 준상은 혀를 찼지만 줄지어서 자신을 향해 밀려드는 다른 창기병들을 상대하기 위해 다시 검을 휘둘렀다. 퍽! 콰직! 모처럼 몸에 걸친 두꺼운 갑옷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창을 들어 막으려 하면 창이 부서지고 방패를 들면 방패 째로 날아가 버린다. 검을 휘둘러 베는 것도 아니고, 한 손으로 쥔 채 옆면으로 날파리 잡듯이 휘두르고 있을 뿐인데, 그 일격을 감당해 내는 이가 단 한 명도 없었다. 기병들은 이를 악물고 돌격을 계속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온전히 말에 탄 상태로 준상의 옆을 스쳐 지나갈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 마침내 기병들의 돌격이 끝나자 주위는 침묵에 휩싸였다. 아니, 정확히는 주인을 잃은 말들이 투레질을 하는 소리와 원래 그 위에 타고 있어야 할 기병들이 흘리는 신음 소리만이 적막한 성문 앞을 음산하게 적시고 있을 뿐이었다. 꿀꺽. 그레프스 자작은 자신이 착각을 해도 너무나 큰 착각을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허풍으로 매도했던 정보와 소문들은 오히려 축소된 것이었다. 준상은 진형을 갖추고 돌격하는 삼십 명의 기병대들을 말을 달리지도 않은 채 한 손으로 검을 휘둘러 모조리 떨구어 버렸다. 게다가 그런 터무니없는 일을 해치운 주제에 숨을 고르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는다. 이 자는 격이 다르다. 애초에 인간이라는 규격으로 재단하는 것 자체가 미친 짓이었다. 준상은 기병대들을 모두 떨구자, 그제서야 억누르고 있던 기세를 천천히 개방했다. “어어...” “으으으...” 병사들은 준상의 터무니없는 무용에 얼어 있다가, 갑자기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어느새 콤보를 바꾼 준상으로부터 흘러나오기 시작한 그 기운의 이름은, 바로 광견의 위엄.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도망치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끼도록 만드는 불길한 기운의 영향력 하에 놓인 병사들은 자신도 모르게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물론 그것은 하얀 털빛의 아름다운 백마 위에 앉아 방금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에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그레프스 자작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말초신경을 침식해 들어와 두뇌 속으로 파고드는 이 미치도록 꺼림직한 기운을 견디지 못하고 이렇게 외쳤다. “후퇴! 물러나라! 어서 물러나!” 이 자와 싸워서는 안 된다. 애초에 이런 괴물 같은 자와 싸우려 했던 것 자체가 잘못이었다. 그레프스 자작 우벨은 광견의 위엄에 압도되어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해지자 본능이 이끄는대로 그렇게 외치며 가장 먼저 뒤로 돌아 성 안으로 도망쳤다. 자신들을 이끌고 나온 자작이 그렇게 뒤돌아 도망치자 병사들은 더 망설일 이유조차 없었다. 준상은 유령 말 위에 올라탄 상태로 그레프스 자작과 그의 병사들이 허겁지겁 성 안으로 도망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우벨은 관문을 지나 도개교를 건너 외벽의 두꺼운 성문 안으로 들어서고 나서야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뒤따라 들어오는 병사들을 향해 외쳤다. “도개교를 들어 올리고 성문을 닫아라! 어서!” 다행히 준상은 여전히 관문 밖에서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병사들은 동료들이 모두 도망쳐 들어오는 것을 기다려 성문을 닫고 도개교를 들어올릴 수 있었다. 그들은 든든한 성벽에 기대며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허나, 그들은 한 가지 사실을 잊고 있었다. 처음 그레프스 자작 우벨이 내세운 방식은 다름 아닌 배틀 로열. 이것은 기사 대전에 참가한 모든 인원이 쓰러지고 단 한 명의 승자가 남아야만 끝나는 시합 방식이다. 정말로 안전해지고 싶었다면 그들은 도망치기 보다는 항복이란 단어를 먼저 입에 담았어야 했지만, 광견의 위엄으로 인해 이성이 짓눌리는 바람에 미처 그러한 단순한 사실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준상은 모든 병사들이 성 안으로 도망치자, 어나이얼레이터 대신 두 개의 거대한 철구를 꺼내 들었다. 랑다잘의 분노라 이름 붙은 이 무지막지한 무기의 본래 용도는, 성벽을 파괴하기 위한 공성 병기. 준상은 처음부터 그레프스 자작에게 재기의 기반이 될 만한 그 무엇도 남겨줄 생각이 없었다. 쿠쿵! 육중한 두 개의 철구가 지축을 울리며 떨어져 내린다. 준상은 그 상태로 손목을 튕겨 철구 하나를 손에 쥐더니 그대로 크게 휘돌리기 시작했다. 훙! 훙! 훙! 훙! 성벽에 기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던 병사들은 갑자기 밖에서 들려오기 시작한 이 괴이한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무리 엄청난 무력을 지닌 자라도, 이런 크고 단단한 성벽을 혼자 힘으로 어쩌지는 못하리라. 병사들은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불안을 잠재우려 했지만, 성벽 위에서 준상의 모습을 지켜보던 초병들마저 그러지는 못했다. “말도 안 돼.” “서, 설마... 아니겠지?” 성벽 위를 지키고 있던 초병들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리자, 병사들은 무언가에 홀린 듯이 얼른 성벽 위로 올라가 밖을 내다 보았다. 바로 그 때. 하늘과 땅이 뒤집어지는 듯한 거대한 굉음이 그레프스 성을 뒤흔들었다. 꽝! 병사들은 물론이고, 말에서 내려 우물물로 목을 축이고 있던 우벨마저 화들짝 놀라 머리를 숙였다. 어디서 천둥이라도 내리친 것일까. 우벨은 혀를 차며 자신도 모르게 하늘을 올려다 보았지만, 그의 시야에 들어온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기만 했다. 어떻게 된 일인가 하고 다시 주위를 둘러보는데, 성벽 위로 올라간 병사들이 공포에 질려 부들부들 떠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도대체 무슨...” 우벨은 얼굴을 찌푸리며 그렇게 입을 열었지만, 다시 한 번 그의 귓가에 거대한 굉음이 전해져 왔다. 꽝! 이번에도 역시나 흠칫하며 고개를 숙이던 우벨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얼른 성벽으로 통하는 계단을 뛰어올라 멍한 표정으로 몸을 떨고 있는 병사들을 헤치고 바깥을 내다 보았다. 처음에는 흙먼지가 잔뜩 피어올라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바로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한 줄기 바람이 그 흙먼지를 밀어 버리는 순간, 우벨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흡뜨며 숨을 멈추고 말았다. 외성 만큼 견고하지는 아니지만, 도개교 너머에는 해자를 둘러싼 버팀벽이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그 버팀벽과 성으로 통하는 도개교를 연결하는 자리에는 방어용으로 만들어진 관문이 자리 잡고 있었다. 말이 관문이지, 이것은 두 개의 작은 성탑을 세우고 그 사이에 벽을 쌓은 방어거점으로서 사실상 작은 성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의 견고함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우벨의 눈에 들어온 것은 자신이 그레프스 성의 얼굴이라 일컫던 관문이 아니라 다 부서져서 박살이 난 돌더미 뿐이었다. 훙! 훙! 훙! 훙! 그리고 그 너머에 한 사람의 손에 쥐어진 거대한 철구가 원을 그리며 공중을 휘돌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준상은 부서진 관문의 잔해들 사이를 유유히 지나치더니 도개교가 내려오는 자리에 멈추어 섰다. 설마 아니겠지. 아무리 인간의 힘을 넘어선 자라도, 그것만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레프스 자작 우벨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마음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불안을 억눌렀지만, 다른 병사들의 생각은 그와 전혀 달랐다. “도망쳐!” “악마다! 저자는 악마다!” 병사들은 머리를 감싸쥔 채 무기를 버리고 허겁지겁 성벽을 내려갔다. 우벨은 그런 병사들을 돌아보며 소리를 치려 했지만, 미처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다시금 천둥과도 같은 소리가 울려 퍼지며 딛고 있던 성벽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헉!” 기겁해서 얼른 몸을 숙이던 우벨은 곧바로 이어지는 믿을 수 없는 광경에 그대로 굳어 버렸다. 우르릉. 그의 눈 앞에서, 마치 산사태와 같은 굉음을 일으키며 성문 위에 자리 잡은 성루가 힘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 사람이 너무 놀라면 아무런 반응조차 보이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지금의 우벨이 바로 그런 상황이었다. 그는 성루가 무너지면서 뿜어져 나온 흙먼지가 눈코입으로 거침없이 밀려드는 상황에서도 입을 쩍 벌린 채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재앙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준상의 손을 벗어난 랑다잘의 분노는 성문 양쪽을 거인처럼 버티고 선 성탑을 향해 거침없이 날아들었다. 꽝! 그레프스 성을 지탱하고 있는 일곱 개의 성탑. 하지만 그 견고하고 단단한 성탑도 준상의 손을 벗어나 날아드는 거대한 철구가 지닌 위력을 감당하지는 못했다. 한번 움찍하며 휘청거리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그 토대로부터 균열을 일으키며 힘없이 주저앉아 버린다. 우벨은 성루에 이어 성탑마저 그렇게 무너져 내리자, 후들거리는 다리를 억지로 놀리며 구르듯이 성벽으로부터 도망쳤다. 그리고 그가 허겁지겁 가족들이 있는 내성을 향해 달려가는 순간, 성루 옆을 버티고 서있던 또 하나의 성탑이 또다시 굉음과 함께 무너져 내렸다. 그날 델로드란 왕실과 수도 귀족들은 믿을 수 없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것은 바로 그레프스 함락. 아니, 이 사건을 단순히 함락이라고 말하는 것은 올바르지 못한 표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레프스 성은 주춧돌 하나도 온전히 남기지 못한 채 완전히 박살이 나버렸기 때문이다. 그것도 준상이라는 이름의 이방인, 단 한 명의 손에 의해서. 00243 트롤러 ========================================================================= 성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다. 단순히 들어가는 비용만을 따지더라도 비슷한 규모의 저택이나 집을 짓는 것보다 재료도 더 많이 필요하고, 인력도 많이 소모하며, 건축에 필요한 기술도 까다로운 것이 많은 데다, 유지에 들어가는 비용도 압도적으로 많다. 이것은 그러한 것을 짓고 유지하는 권력자의 능력을 표현하는 좋은 본보기가 되기 때문에, 귀족이나 왕족들과 같은 권력자들은 성을 단순한 방어 거점의 의미보다는 자신과 가문의 명예와 자존심을 구현한 상징물로 생각하는 경향조차 있을 정도였다. 그런 자들에게 있어, 단신으로 성을 때려 부수는 존재의 출현은 그야말로 재앙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천 명의 광전사를 상대로 홀로 싸워 이겼다는 건 그레프스의 함락, 아니 박살에 비하면 차라리 우스개 소리에 가까울 정도였다. 때문에 귀족들은 이 일 또한 뭔가 다른 술책을 사용한 것이라 의심했고, 정황을 파악하고자 사람을 파견해 성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런 그들이 발견한 것은, 이전에 성이었던 돌무더기 속을 미친 듯이 헤집으며 재산의 일부라도 되찾기 위해 애쓰고 있는 그레프스 자작 일가의 모습이었다. 물론 그런 노력은 헛수고였다. 병사들이 준상을 에워싸며 기병대들이 돌격을 준비하고 있을 즈음, 성벽을 타고 올라간 다람쥐 한 마리가 그레프스 자작의 비밀 금고를 비롯한 은닉 재산을 전부 털어 가버렸기 때문이다. 거느리고 있던 병사들이 대부분 도망가 버리고, 기병대는 몸이 성한 자가 없었으며, 그들이 타고 있던 말 역시 어디로 도망쳤는지 알 방법이 없는데다, 성은 박살이 나고 만약을 대비해 숨겨 놓았던 귀금속마저 몽땅 털려 버렸다. 영지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고, 수도로 올라가면 저택을 비롯한 재산의 일부가 남아 있긴 했지만, 문제는 병사들이 대부분 도망쳐 버린 터라 수도까지 이동하는 동안의 안전을 보장받을 길이 없다는 점이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레프스 자작은 그리 평판이 좋은 영주가 아니었다. 그런 그가 제대로 보호받지도 못한 채 수도로 향한다는 말이 전해지면 어떻게 될까. 본래부터 앙심을 품은 자를 비롯해, 그가 지니고 있을 재산을 노리는 자들 역시 벌떼처럼 일어나 자작과 그의 일가를 덮칠 것은 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었다. 아니, 그들만 덮치면 차라리 다행일수도 있다. 최악의 경우 본래 그레프스 자작이 이끌고 있던 병사들이 도중에 칼을 거꾸로 잡고 자작 일가를 노릴 가능성마저 있었다. 이쯤 되면 살아도 산 목숨이 아니다. 때문에 그레프스 자작은 다른 귀족들의 조사단이 찾아오자 그들에게 도움을 청했고, 자세한 내막을 알고자 하던 조사단들은 그와 그의 가족을 데리고 수도로 급히 귀환했다. 그레프스 자작은 반쯤 정신이 나가 있는 상황이었지만, 자신이 보고 들은 바를 말하는 것마저 불가능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와, 그가 데리고 있던 병사와, 시종과, 가족들에게서 전말을 전해들은 왕실과 수도의 귀족들은 도대체 이걸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직접 확인해 보면 어떤 술책을 사용한 것인지 알 수 있으리라 생각했건만, 이들의 진술은 지금 퍼져나가는 소문보다 오히려 더 과장된 느낌이었기 때문이었다. 삼십 명에 달하는 기병대를 단지 검면을 휘두르는 것만으로 무력화시킨 얘기는 그렇다 치더라도, 그의 눈이 붉게 빛나면서 악마가 강림했고, 그렇게 하늘에서 내려온 악마가 성을 부숴버렸다는 식의 얘기는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이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이쯤 되자 왕실과 수도 귀족은 혼란에 빠졌다. 무슨 수를 쓴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조사단은 분명 그레프스 성이 본래의 형체를 알 수 없을 정도의 돌무더기로 변한 것을 확인했다. 게다가 조금 떨어진 성하 마을의 주민들이 목격한 의견을 종합해 봐도, 준상이 다른 이들을 대동하지 않은 채 홀로 그레프스 성을 찾아간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이쯤 되자, 이벨류아로 영애들을 보낸 귀족들은 언제 자신의 영지에 준상이 나타날지 몰라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우왕좌왕하는 귀족들에게 마침내 준상의 행적이 전해졌다. “테드란 성으로 향하고 있다고?” 놀랍게도 준상은 마치 유람이라도 떠난 사람처럼 느긋한 움직임으로 테드란 자작의 영지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사자의 가면을 쓴 채 망토를 길게 드리우고 눈에서 시퍼런 불길이 뿜어져 나오는 유령말을 탄 모습의 이방인이 가도를 따라 움직이는 정황이 파악되자, 대부분의 귀족은 일단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단, 한 사람. 준상의 다음 목표로 정해진 테드란 자작을 제외하고 말이다. 당황한 테드란 자작, 그리올리 콘스티드 브루젠은 급히 왕실과 다른 귀족들에게 힘을 합칠 것을 제의했지만, 그들에게서 돌아온 것은 정중한 거절 뿐이었다. “멍청한! 자기들이 다음 차례라는 것을 왜 몰라!” 그리올리는 고민하다가 수도에 남아있던 모든 사람들을 이끌고 테드란 성으로 급거 귀환했다. 그가 성에 도착했을 때, 마침 준상은 느긋한 모습으로 테드란 영지의 접경에 도달하던 참이었다. 테드란 자작은 준상이 성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자, 침통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모든 병사들을 이끌고 성 밖으로 나가 그를 기다렸다. 준상은 야트막한 산기슭에 자리 잡은 테드란 성의 입구를 향해 다가가다가, 모조리 몰려 나와 입구를 버티고 선 병사들을 보고는 일단 멈추어 섰다. 수백명에 달하는 병사들이 벌려 선 것을 보고도 위축되기는커녕 오히려 그 모든 인원들을 압도하는 준상의 모습을 접하자, 테드란 자작은 소문이 거짓이 아님을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테드란 자작 그리올리는 지금 자신이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 준상의 모습을 직접 대하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랬군. 하하...” 그는 잠시 허탈한 표정으로 그렇게 웃더니, 이내 말에서 내려 천천히 준상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준상이 바라보는 가운데, 그의 말발굽 아래 엎드리며 말했다. “항복합니다.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 아무리 기사 대전에 패하더라도 영주가 직접 이 정도의 행동을 취하는 경우는 없었다. 상대에게 무릎을 꿇는 것만으로도 복종의 뜻으로 인식되는 판에, 아예 엎드려 자비를 구하다니. 긴장한 표정으로 성을 빠져 나와 준상을 기다리고 있던 병사들은 자신들을 이끌고 나온 영주의 그와 같은 행동에 당황하고 말았다. 하지만 막상 그와 같은 일을 직접 실행한 테드란 자작의 표정은 오히려 담담하기까지 할 정도였다. 굴욕은커녕, 수치심조차 그의 얼굴에는 남아 있지 않았다. 다소의 후회가 서려있기는 했지만, 그것은 지금 자신의 행동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왜 진작 이 남자를 직접 만나볼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테드란 자작 그리올리의 머리 속에 떠오른 후회는 바로 그것이었다. 그리올리는 준상 앞에 엎드린 채 회한에 잠겼다. 처음 중앙 정계에 진출할 때만 해도 그는 자신의 이득에만 골몰하는 왕실과 수도 귀족들과는 다른 자가 되겠다는 포부를 품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처음의 포부를 잊은 채 그들과 동화되어 가기 시작했다. 수도의 정계를 장악하고 그의 포부를 펼치기에 일개 자작의 힘은 너무나 보잘 것 없었고, 그런 현실에 적응하다가 결국은 타성에 젖어버린 것이다. 준상은 그리올리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항복하겠다고?” “그렇습니다.” 우선 그의 말을 다시 한 번 확인한 준상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그대는 나의 번거로움에 대한 보상으로 무엇을 내놓겠는가.” 그리올리는 더욱 깊이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작위를 내려놓겠습니다.” “...” 작위의 포기. 이것은 상당히 파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기사 대전에서 패배한다고 해봐야 보통은 상대에게 사과의 말과 함께 적절한 수준의 보상금을 내놓는 것이 고작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금전적인 손해보다 훼손된 명예와 그로 인한 입지의 약화가 귀족들에게 있어서는 더 큰 문제였지만, 그것은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일이었고 또한 마음 먹기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회복 가능한 수준의 타격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 이 중년의 귀족은 서슴없이 준상 앞에서 스스로의 작위를 포기하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물론 이것은 그의 가문이 작위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올리라는 개인에 한정된 문제이니 다음 대의 작위는 정해진 계승권에 따라 이어져 내려가겠지만, 기사 대전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사죄의 예로서는 최상급의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했다. “이벨류아에 보낸 영애의 이름이 어떻게 되지?” “네?” 그리올리는 뜬금없는 준상의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가, 그런 자신의 행동에 놀라 다시 급히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도니아입니다.” “도니아...” 준상은 그 이름을 나직하게 되뇌이더니 다시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 그녀를 잘 보좌할 수 있겠는가?” “...” 그리올리는 잠시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는 머리 속에서 천둥이 내리치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이럴수가. 설마 그녀들을 보호하고 있던 진정한 이유가 그것이었단 말인가. 그리올리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자신을 비롯한 귀족들이 저지른 가장 치명적인 실수가 무엇인지. 에슈탈렌의 왕녀에게 준상이라는 강력한 존재를 넘기기는 아깝다. 하지만 피가 이어진 친족을 이방인에게 내주는 것 역시 뭔가 수치스럽다. 그래서 생각해낸 궁여지책이 바로 방계의 혈족 가운데 미색이 곱고 어린 아이를 뽑아 양녀로 삼은 다음 준상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미처 깨닫지 못했다. 방계의 혈족이든 뭐든 간에, 양녀로 들여진 시점에서 이미 계승의 자격이 부여된다는 사실을. 물론 여성이 단독으로 작위를 계승하는 일은 지금까지 전례에 없는 일이고, 가능하다면 다른 양자를 들여서라도 피하는 일이었지만, 법으로 절대 안 된다고 정해져 있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다. 다시 말해, 그들이 양녀를 보낸 시점에서 준상은 합법적으로 그들의 작위를 갈취할 수 있는 방법을 건네받은 셈이다. 그리올리는 또한 깨달았다. 지금껏 잠자코 있던 준상이 어째서 성의 파괴와 같은 파격적인 행동을 서슴없이 해치우기 시작한 것인지를. 그레프스 자작은 운이 좋았다. 그는 단지 준상이 이런 것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첫 번째 본보기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조금만 더 독한 마음을 먹었다면, 성의 파괴에 휩쓸려 그레프스 자작 일가는 한 명도 남김없이 도륙을 당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유일하게 남은 계승권자는 이름조차 떠오르지 않는 그레프스 자작가의 양녀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올리는 순식간에 등이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오는 것을 느꼈다. 만약 자신이 먼저 항복의 의사를 표하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을까. 최상급의 사죄 표시로서 작위를 내려놓지 않았다면, 지금 이곳에서 어떤 참상이 벌어지고 있었을까. 그런 생각들이 머리 속에서 정신없이 휘몰아치자 그리올리는 자신도 모르게 극심한 현기증을 느끼며 비틀거릴 수밖에 없었다. 준상은 혼란에 빠져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그리올리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다시 조용히 물었다. “어려운가?” 그리올리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비로소 정말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양녀를 보낸 것은 귀족 가문들만이 아니다. 델로드란 왕실 역시 양녀를 들여 왕녀라는 이름으로 재포장하지 않았던가. 그 사실이 머리 속에 떠오르자마자, 그리올리는 머리를 깊이 조아리며 외쳤다. “맡겨 주십시오! 제 이름을 걸고 성심을 다해 보좌하겠습니다!” 00244 트롤러 ========================================================================= 테드란 성은 자작의 결단 덕분에 온전히 그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때문에 다른 귀족들은 또다시 혼란에 빠졌다. 도대체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들리는 소문에는 기사 대전 자체가 없었다는 듯 했지만, 정확한 실상을 알아보려면 역시 테드란 자작 본인에게 전해 듣는 것이 가장 간단한 방법이기에, 귀족들은 그를 수도로 불러들이려 했지만 묘하게도 자작은 기사 대전 이후 행방이 묘연해지고 말았다. 혹시 준상에게 살해된 것은 아닐까. 하지만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대번에 자작 가문에서 보고가 올라와야만 한다. 아무리 기사 대전이라고 해도 작위를 가진 영주가 살해 당하는 것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이고, 만약 그렇게 되었다면 진상 조사와 아울러 다음 대의 계승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왕실의 중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테드란 자작가는 마치 기사 대전 자체가 없었건 것처럼 평온하기만 했다. 그레프스 자작가에서 있었던 일과는 너무나 상이한 모습에 귀족들은 다시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알 수가 있나.” 르실의 백작이며 모르아의 자작, 스터빌의 자작, 발루엔의 남작, 그리고 몬센 섬의 주인이라는 직함을 가진 네이드 몬센 슬라이언은 오늘도 별 소득 없이 원로원의 회합이 끝나자 투덜거리며 저택으로 돌아가기 위한 마차에 올랐다. 공작이나 후작의 가문들이 왕실에 속한 명목 상의 작위로 전락한지 오래인 델로드란에서, 실질적으로 왕국을 이끌어 가는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자들은 흔히 6대 백작가라 불리는 자들이었고, 르실 백작 네이드는 그런 당대 최고의 대귀족 가운데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참고로 이전에 브레아 가문이 가지고 있던 작위는 바로 이벨류아 백작가였는데, 이로 인해 당시에는 6대 백작가가 아닌 7대 백작가라고 불리웠었다. 사실 그때만 하더라도 지금처럼 공작이나 후작의 작위가 실질적인 영지나 권력이 없는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백작들이 지금 같은 큰 영향력은 가지고 있지 못했지만, 이벨류아라는 도시 전체를 성곽으로 감싼 것만 보더라도 당시 브레아 가문이 지닌 힘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고, 실제로 이 정도의 능력을 가진 가문은 왕실을 제외하고는 지금도 한 두 가문 정도에 불과하다. 따지고 보면 그런 힘을 가졌던 가문이기에 작위를 빼앗기고 몰락한 지금에 이르러서도 왕실의 견제를 받고 있는 것이다. 르실 백작 네이드는 마차 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박준상이라는 이름의 이방인은 다시 종적을 감추어 버렸다. 이렇게 되자 귀족들은 언제 그가 자신의 영지에 들이닥칠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도리 밖에 없었고, 실제로 그런 압박감을 견디지 못한 몇몇 귀족들은 이미 수도를 벗어나 자신의 영지로 향한지 오래였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네이드 역시 그렇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왕국을 이끌어 가는 6대 백작가라는 이름이 그를 놓아 주지 않는다. 유달리 책임감이 강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치열한 수도의 정계에서 자리를 비운다는 것은, 그 기간 동안 정적들의 공격에 무방비 상태가 된다는 것을 의미했고, 이로 인한 피해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다시 몇 배의 노력을 필요로 한다. “젠장.” 네이드는 바스트민 백작 라르드의 빙글빙글 웃는 얼굴이 떠올라 자신도 모르게 상소리를 내뱉고 말았다. 바스트민 백작은 다른 이들이 준상에게 양녀를 보낼 때, 격이 맞지 않는다며 자기 가문의 방계인 그레프스 자작에게 그 역할을 대신하도록 했다. 당시에는 쓸데없이 자존심만 높은 멍청이라고 속으로 욕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바스트민 백작의 판단이 옳았다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그레프스 자작가가 초토화 되기는 했지만, 바스트민 백작가는 아무런 피해도 입은 것이 없었고, 이 기회를 살려 아예 분가했던 그레프스 자작가를 다시 흡수할 수도 있다. 게다가 만약 다른 귀족들 역시 그레프스 자작가와 비슷한 피해를 입는다면, 향후 정계를 주도하게 될 가문은 바스트민 백작가 단 하나 밖에 남지 않는다. 그러니 다른 귀족들이 불안에 떠는 상황에서도 오직 바스트민 백작 라르드만이 싱글벙글하며 즐거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하필이면 다른 모든 백작들 가운데서도 가장 덜 떨어진 저 주걱턱 놈에게 이런 행운이 떨어지다니. 네이드로서는 깊은 탄식이 절로 나올 수 밖에 없는 일이었다. 마차는 천천히 가도를 달리더니 흰 색의 아름다운 아치로 장식된 커다란 문 안으로 들어섰다. 르실 백작가의 저택은 수도 안에 자리 잡은 다른 여러 귀족들의 저택 가운데서도 특히 아름다운 풍취를 지니고 있었는데, 특히 계절마다 대륙 각지에서 모아들인 아름다운 꽃이 화려하게 피어나는 이곳의 정원을 구경하지 못한 자는, 진정한 수도 귀족이 아니라는 말조차 있을 정도였다. 네이드는 무심히 창 밖으로 흘러가는 아름다운 정원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마침내 마차가 멈추어 서자 상념에서 깨어났다. “후...” 깊은 탄식과 함께 마차에서 내리는데, 문득 저택의 일을 총괄하는 노집사가 긴장한 표정으로 그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무슨 일이지?” 네이드가 묻자, 집사는 눈짓으로 주위를 물리더니 작은 목소리로 그에게 속삭였다. “손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손님?” “테드란 자작입니다.” “...” 네이드는 순간 흠칫할 수 밖에 없었다. 준상이 테드란 성으로 향한다는 말이 전해진 후 급거 귀환했다가 그대로 종적이 묘연해진 테드란 자작이 온다간다 말도 없이 은밀하게 자신의 저택을 방문했다면 필시 단순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와 같은 생각을 떠올린 네이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노집사를 따라 테드란 자작이 기다리고 있는 별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안으로 들어서자, 익숙한 얼굴의 중년 남성이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인다. 바로 테드란 자작 그리올리였다. “기별도 없이 이렇게 찾아뵙게 되어 죄송합니다.” “무슨 그런 말을.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일단 앉으시오.” “감사합니다.” 그리올리가 자리에 앉자 네이드는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소식이 없어서 걱정하던 참이었소. 결례가 되지 않는다면 어찌된 일인지 물어도 되겠소? 테드란 자작.” 그러자 그리올리는 조용히 대답했다. “여러 가지 일이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참으로 유익한 시간이었지요.” “...” 네이드는 잠시 아무 말 없이 그리올리를 바라보았다. 여러 가지 일이 있었다는 건 그런가보다 하겠는데, 그 뒤에 이어진 말을 이해할 수 없었던 까닭이다. 유익한 시간이었다니. 이게 도대체 무슨 뜬금없는 말인가. “나는 돌려 말하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소. 어차피 듣는 사람도 없으니 허심탄회하게 말씀해 주시지 않겠소?” 그 말을 들은 그리올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틀린 말씀입니다.” “무슨 소리요?” 네이드가 얼굴을 찌푸리며 묻자 그리올리는 다시금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아무도 없는 창가를 가리키며 말했다. “소개하겠습니다. 제가 이번에 새로 모시게 된 주인이십니다.” “...” 주인이라니? 이것은 테드란 자작과 같이 작위를 지닌 귀족이 함부로 입에 담을 말이 아니었다. 전통적으로 델로드란 왕실과 그 휘하의 귀족들이 주종 관계를 맺어온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경우에도 귀족들이 국왕을 지칭하는 단어는 국왕이나 군주 정도가 고작이다. 그런 상황에서 느닷없이 주인이라니. 도대체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한단 말인가. 하지만 네이드가 그런 의구심을 표현하기도 전에, 분명히 아무도 없었던 창가에서 한 사람이 환영처럼 스르르 모습을 드러냈다. 어깨에는 망토를 걸치고, 이곳의 것이라고는 보기 어려운 특이한 옷으로 몸을 감싼데다, 얼굴에는 사자의 가면을 눌러쓴 인물. 창문으로부터 비치는 역광으로 인해 알아볼 수 있는 것은 고작 그 정도에 불과했으나, 그 정도의 인상착의만으로도 네이드는 지금 자신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이 인물의 정체를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박준상. 테드란 자작의 성에서부터 소식이 묘연하던 그가 바로 지금 여기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게 도대체!” 네이드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사람을 부르려 했지만, 바로 그 순간 준상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안광을 직시하고 말았다. “컥!” 네이드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그대로 허물어지듯 자리에 주저앉았다. 손발이 부들부들 떨리고 몸에서는 식은땀이 흐른다. 르실 백작 네이드. 비록 지금은 수도의 정계에 몸을 담고 있지만, 젊은 시절에는 국경 지역에서 용맹을 떨쳤던 인물이고, 실제로 지금까지도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 그가, 단지 눈빛을 마주한 것만으로 이렇게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잠시 옆으로 물러나 있던 테드란 자작 그리올리는 잠시 그와 같은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네이드가 금방이라도 실신할 것처럼 안색이 창백해지자 슬그머니 앞으로 나서서 준상의 시선을 몸으로 막아 그를 구해냈다. “괜찮으십니까.” 실로 병 주고 약 주는 행동이었지만, 네이드는 지금 이 순간 준상의 시야에서 벗어났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크게 안도할 수밖에 없었다.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이오. 테드란 자작.” 그 말에 그리올리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이미 자작의 자리를 내려 놓았습니다.” “그게 무슨?” 이건 또 무슨 뜬금없는 소리인가. 흥건하게 젖은 식은땀을 닦을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눈을 부릅뜬 네이드를 바라보며 그리올리는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르실 백작님. 이미 대세는 기울었습니다.” “...” “저희와 함께 새로운 질서를 이끌어 가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새로운 질서. 그 말을 듣는 순간 네이드는 테드란 자작, 아니 이제는 작위를 내려놓아 그저 그리올리라는 이름으로만 불리게 된 그가 준상을 주인이라고 부른 이유 또한 그 단어에 함축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네이드는 그리올리의 어깨 너머로 어느새 등을 돌린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준상의 뒷 모습을 흘깃 바라보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자세한 얘기를 들을 수 있겠소?” 그 말에 그리올리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이후로 준상은 그리올리를 앞세운 채 수도에 남아 있는 귀족들을 하나씩 방문했다. 그리고 그 결과, 날이 지날수록 수도 귀족의 집회장이라 할 수 있는 원로원은 한산해지기 시작했고, 정신을 차려보니 이번에 준상에게 양녀를 보냈던 귀족들은 모두 자취를 감춘 뒤였다. 이제 남은 대귀족은 바스트민 백작 라르드가 유일했고, 그 이하의 귀족들은 서열과 권위에서 밀려 양녀를 보내지도 못한 자들 뿐이었다. 바스트민 백작 라르드는 자신을 제외한 6대 백작가가 모두 수도에서 모습을 감추자 이 기회를 빌어 자신의 영향력을 증대하고자 연일 화려한 연회를 베풀며 수도에 남은 귀족들을 자신의 휘하로 끌어 들이느라 여념이 없었다. “뭔가 있어. 그렇지 않나?” 델로드란 왕실의 제24대 국왕인 데른 브리드먼 노히드 델로드란은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측근으로 함께한 시종장인 길베르 남작에게 그렇게 물었다.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문제는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가 하는 점인데...” 준상에게 양녀를 보낸 귀족들의 종적이 묘연해지는 것은 가볍게 생각하고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차라리 그들이 박준상이라는 자에게 성이 박살나 거리에 나앉았다든가 하면 모르겠는데, 그냥 소리 소문 없이 소식이 끊기니 마찬가지로 양녀를 보낸 데른 국왕으로서는 불안함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이다. 바스트민 백작은 지금이 정국의 주도권을 잡을 기회라 여기는 모양이지만, 데른 국왕은 오히려 무언가 커다란 일이 벌어지기 전이라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답답해 미치겠군. 정보원들에게서는 다른 연락이 없나?” 길베르 남작이 바로 대답했다. “각 영지의 병력 이동을 특히 예의 주시하라고 명을 내려 놓았습니다만, 지금까지 별다른 보고가 올라온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습니다.” “이거 참...” 혹시 이것들이 모두 모여 반역이라도 꾸미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러려면 병력이 집결하는 정황이라도 포착이 되어야 한다. 뭔가 있긴 한데, 도무지 그것을 알 수 없으니 데른 국왕으로서는 머리가 지끈거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잠시 끙끙대던 데른 국왕은 길베르 남작에게 다시 물었다. “이전에 말해둔 그것은 준비가 끝났나?” “물론입니다. 명만 내리시면 언제든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음...” 준비란 다른 것이 아니었다. 만약의 경우 이벨류아 인근에 심어놓은 정보원들과 기타 특수 훈련을 받은 요원들을 움직여 브레아 가문의 식솔들과 그들이 보호하고 있는 영애들을 탈취하려는 계획이 바로 그것이었다. 보고 받기로는 브레아 가문을 지키고 있는 광전사들의 수는 모두 백 명. 에슈탈렌의 왕녀가 좀 문제기는 하지만, 이벨류아 안에 이미 백여 명의 요원들이 잠입해 있는 상황이고, 작전이 발동되는 즉시 금단의 숲에 은밀히 대기 하고 있던 이천여 명의 정예 병력이 곧바로 이벨류아 영내로 진입할 예정이었다. 준상이 강하다고는 하지만, 수도와 이벨류아는 아무리 빨리 달려도 족히 보름은 걸리는 거리. 등에 날개라도 돋지 않은 이상, 이것을 막아내지는 못할 것이다. “왕실을 상대로 기사 대전이라니, 이런 전례를 만들어서는 곤란하지.” 전례라는 것은 깨지기 위해 존재한다는 말이 있지만, 데른 국왕으로서는 그런 식의 파격이 자신의 대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한 번 정도는 상관없지 않나 할 수도 있겠지만, 한 번은 두 번이 될 수 있고, 두 번은 다시 일상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오랜 세월을 거쳐 간신히 공후작 등의 거대 귀족들을 억누르고 비로소 중앙 집권으로 나아가기 위해 한창 발돋움하는 델로드란 왕실에게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일. 때문에, 준상이 수도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데른 국왕은 즉시 계획을 발동해 이 모든 일의 원흉인 브레아 가문을 인질로 삼는 것으로 그의 움직임을 봉쇄할 생각이었다. 지금까지 그의 행동으로 보아 브레아 가문의 가솔들은 인질로서 충분한 가치가 있다. 게다가 영애들을 돌려받으면 그가 내세운 명분을 증명할 방법도 없으니 기사 대전 그 자체를 막을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지금 한창 기세를 돋우고 있는 멍청한 바스트민 백작을 누르고 왕실이 전면에 나설 수 있으며, 이것은 또한 지난 세월 동안 그의 조상들이 꿈꿔왔던 완벽한 중앙 집권 체제를 실현하게 만드는 토대가 된다. 최악의 경우 분노한 준상이 신라의 병력을 끌어들여 전쟁을 일으킬 수도 있겠지만, 지금까지 그 외에 신라에서 건너왔다는 다른 자가 없는 것을 고려해 보면 실제로 국가간의 전쟁을 일으킬 수 있을 정도의 역량이 있는지도 의심스럽기 짝이 없다. 천 명의 광전사가 있다 하나, 델로드란이 마음먹고 동원령을 선포하면 족히 수만의 병력을 일으킬 수 있고, 광전사들을 상대할 기사들 또한 수백명 이상 불러 모을 수 있을 것이다. 일당 백이라는 말이 있긴 하지만, 실제로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자는 거의 없다. 박준상이라는 자의 무용이 대단하다고는 하지만, 그런 능력을 지닌 자가 둘은 아닐 터. 왕은 가장 강한 자가 아니다. 강한 자를 지배하는 자일 뿐이다. 또한 역사는 강한 자가 아니라, 현명한 자가 이끌어 가는 것이다. 데른 국왕은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가슴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이름 모를 불안감을 억지로 떨쳐 내었다. 아니나 다를까. 다시 며칠이 지나자 마침내 보고가 올라왔다. “그 이방인이 수도를 향해 올라오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데른 국왕은 쾌재를 올리며 곧바로 명령을 내렸다. “지금 즉시 준비했던 일들을 시행하라.” “네!” ============================ 작품 후기 ============================ 다람쥐... 착한 사람 눈에는 보입니다. 00245 트롤러 ========================================================================= 수도의 왕궁에서 다리에 전서를 묶은 매가 날아올랐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러한 정황은 며칠 전부터 왕궁을 감시하던 자들의 눈에 발각되었고, 이 소식은 곧바로 왕국 각지로 퍼져 나갔다. “왕궁에서 움직였습니다.” 사자 가면을 쓴 채 느긋하게 가도를 움직이고 있던 자에게 행인을 가장한 누군가가 스치고 지나가며 그렇게 말했다. 데른 국왕은 보고를 듣고 영락없이 이 남자가 준상일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남자는 익히 알려진 인상착의를 흉내냈을 뿐, 준상 본인이 아닌 가짜였다. “드디어 시작이군.” 과거에 테드란 자작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웠던 남자, 그리올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위를 은밀하게 둘러싼 호위들과 함께 마치 유람 나온 사람처럼 느긋하게 수도를 향해 움직였다. 그의 역할은 다른 이들의 시선을 자신에게 묶어 두고 왕궁이 움직이도록 유도하는 것. 이로써 준비는 끝났다. 다른 귀족들을 규합하는 일 역시 모두 끝난 상태지만, 왕실을 상대로 기사 대전을 벌이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일 뿐만 아니라, 이런 식으로 양위의 전례를 만드는 것은 이후를 위해서도 좋지 않은 일이었다. 그리올리를 비롯한 귀족들은 그와 같은 사실을 준상에게 건의했으나, 이 현명한 이방인은 이미 그에 대한 준비도 모두 마쳐둔 상태였다. “확실히, 역사는 현명한 자가 이끌어 가는 법이지.” 그리올리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천천히 수도로 말을 몰았다. 수도로 올라오는 자가 가짜라면, 진짜는 도대체 어디 있는 것일까. 놀랍게도 준상은 그 시간에 이미 이벨류아로 돌아와 있었다. “저들의 위치는 모두 파악이 되었습니까?” 준상의 말에 젤란이 바로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나름대로 조심스럽게 움직인다고 노력하긴 한 모양입니다만, 이벨류아에서 그만한 수의 이방인이 저희 가문의 눈에 띄지 않은 채로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죠. 이천명이나 되는 수를 움직이고도 들키지 않을거라 생각하다니, 국왕은 브레아 가문을 너무 우습게 봤습니다.” 비록 작위를 빼앗겼다고는 하지만 과거에 7대 백작가의 일원이었던 가문의 저력이 어디로 가는 것은 아니다. 젤란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이벨류아 인근의 지도를 펼치며 저들의 부대가 숨어있는 장소를 준상에게 일목요연하게 설명했다. 준상은 젤란에게서 적 병력의 위치를 듣고는 다시 말했다. “성 안에 들어와 있는 자들의 동향은 어떻습니까.” 이번에도 젤란은 기다렸다는 듯이 즉시 대답했다. “이전에 광전사들과 치르신 의식 이후로 조용히 추적을 계속하고 새로 성 안에 들어온 자들을 파악한 결과 어느 정도는 파악이 끝난 상태입니다. 생각보다 수가 좀 많아서 놀라긴 했습니다만, 움직임에 변화가 생기면 바로 연락이 들어올 겁니다.” 준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하셨습니다.” “별 말씀을.” 젤란은 한꺼번에 말을 많이 한 탓에 목이 탄 모양인지 차를 한 모금 들이키고는 담담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 있는 준상을 향해 말했다. “하나만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십시오.” “정말로 왕위에 오르실 생각이 없으십니까?” 모처럼의 기회를 날려버리는 것이 아쉽다는 표정이었지만, 준상은 고개를 저었다. “왕실의 혈족이 양위를 받는 것과 느닷없이 나타난 이방인이 왕위를 찬탈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다른 이들에게 전해지는 충격에서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자 젤란이 바로 말했다. “어차피 이블린 왕녀가 양위를 받게 될테니, 그녀와... 크흠.” 이블린 왕녀와 결혼하게 되면 문제될 것이 없지 않겠느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고 올라왔지만, 젤란은 차마 그 말을 입에 담지 못했다. 비록 이번 일의 결과로 브레아 가문이 과거와 마찬가지로 7대 백작가의 자리를 되찾는다 해도, 준상이 여왕이 될 이블린 왕녀와 결혼하게 되면 헤네스의 위치는 자연스럽게 뒤로 밀릴 수밖에 없는 노릇이니 그녀의 오빠인 젤란으로서는 차마 그러한 일을 입에 담기 어려웠던 탓이다. 준상은 그런 젤란에게 대답했다. “그럴만한 여유가 없습니다.” 그가 퀘스트라는 영문 모를 무언가에 얽매여 있다는 점을 젤란은 다시 떠올리고는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후... 할 수 없군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젤란은 다시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한 가지 더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어째서 저들을 그대로 안고 가는 것입니까.” 저들은 다름 아닌 수도 귀족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들을 포섭함으로서 정변에 따르는 피해를 최소화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젤란으로서는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는 그들의 행태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금은 비록 준상의 힘에 굴복했지만, 이것은 마찬가지로 다음에 또 비슷한 일이 생겼을 때 배반할 가능성이 높다는 뜻도 되기 때문이다. 기왕에 정변을 일으킬 것이라면, 다소의 번거로움이 있더라도 단숨에 싹 뒤집어 엎고 새로 출발하는 것이 낫지 않겠냐는 것이 젤란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준상의 생각은 달랐다.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저에게는 여유가 별로 없습니다.” “음...” 한 번에 뒤집어 엎는 쪽이 일이 간단하다고 생각될지는 몰라도, 델로드란 전역에 퍼져 있는 그들의 세력 기반을 탐색하고 후환이 될 만한 모든 것을 깔끔하게 정리하는 일은 아무리 빠르게 해치운다 해도 족히 이삼 년은 걸리는 일이고, 자칫 일이 꼬이기라도 하면 십년 이상은 이 일에만 매달려야 할 수도 있다. 이것은 역으로 브레아 가문이 작위를 빼앗기고도 여전히 이벨류아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모습을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게다가, 사실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준상은 천천히 찻잔을 들어 그것으로 입 안을 적시고는 말을 이었다. “우선, 여자도 작위나 왕위를 이을 수 있다는 전례가 만들어집니다.” “음...” 어떻게 보면 별것 아닌 것 같아 보이는 일이지만, 이것은 지금까지 델로드란이라는 국가 내부에 존재하던 암묵적인 틀 하나를 부숴버리는 일이라 할 수 있었다.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여성들의 사회 참여와 생산 활동을 활성화시키는 훌륭한 계기가 된다. 준상은 계속 말을 이었다. “또한 작위가 없는 자도 국정에 참여할 수 있게 됩니다.” “...” 젤란은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준상은 기존의 수도 귀족들로 하여금 이전처럼 국정에 관여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대신, 그들의 작위를 일괄적으로 양녀들에게 넘길 것을 제안했다. 비록 양녀들에게 작위가 넘어간다고 해도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 아이들이 무엇을 하겠는가. 어차피 가문의 모든 일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손에 의해 이루어질 것이고, 거기에 더해 국정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 역시 보장되었으니 그들로서는 손해날 일이 없었다. 하지만 이 일은 자세히 살펴보면 실질적으로는 작위가 없는 자가 국정을 전담하는 관료로서 등용되는 첫 번째 사례가 될 것이고, 또한 이후에 작위가 없는 또 다른 인물이 관료로 등용되는 발판으로 작용하게 된다. 즉, 귀족 정치에서 관료 정치로 자연스럽게 전환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처음에는 작위가 없는 방계 귀족들이 주로 등용되겠지만, 이건 교육의 기회가 공평하게 주어지지 않는 델로드란의 현실을 감안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작위보다는 능력이 관료 등용에 우선된다는 사실을 알게되면 그러한 능력을 갖추고자 교육이 활성화되는 것은 필연이고, 이것은 또한 기존의 협소했던 인재 풀을 확대하는 결과를 초래하며, 여기에 더해 신분 상승의 한 가지 방법으로 교육이 자리 잡는 원동력이 된다. 수도 귀족들은 왕실을 밀어내고 자신들이 정권을 농단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눈이 가리워져 이런 큰 흐름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준상으로서도 이 나라에 민주 정치 같은 제도를 도입하는 것을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식의 정치 제도는 민중의 의식 수준이 높아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오히려 더 큰 혼란을 불러올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대한민국의 경우만 보더라도 민주 정치가 자리 잡는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던가. 제반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섣불리 민주정을 도입했다가 수십년째 내란으로 고통 받는 나라는 또 얼마나 많은가. 준상으로서는 그런 식의 번거로운 일을 굳이 앞서 행할 정도로 정치적 신념이 강한 이도 아니었고, 그런 정국을 이끌어갈 만한 열의도 역량도 부족했다. “게다가 돈의 흐름 또한 바뀌게 됩니다.” 준상으로 하여금 이번의 사태에 직접 관여하게 만든 원인 중 하나인 지구와 이벨류아, 그리고 얀트훈센을 잇는 삼각 무역의 대두는 기존에 델로드란이라는 국가를 지탱하던 산업 구조를 뒤바꾸게 된다. 단지 물품을 쌓아두기만 해서는 돈이 되지 않는다. 그것이 길을 따라 순환하는 순간 그 가치가 올라가는 것이다. 기존에 각 영주가 할거하던 상황에서는 이와 같은 단순한 이치가 제대로 현실화되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의 정변으로 국정이 일원화되게 되면, 영지라는 이름으로 나뉘어져 있던 국가 역시 하나의 틀로 재통합이 될 수 밖에 없고, 교역이 가져다 주는 달콤한 꿀을 한 번 맛보게 되면 단순히 땅을 파고 농작물을 심어 그것을 수확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게 되고 만다. 이렇게 돈의 흐름이 생겨나면, 그것에 편승해 이득을 보는 자가 생기고, 이것은 기존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사회 계층이 만들어지는 것을 뜻한다. 생활이 부유해지면 신분 상승을 노리는 것은 당연한 이치. 그들은 곧바로 자식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할 것이고, 이렇게 교육을 받은 이들은 다시 관료의 형태로 중앙 정부에 참가해 자신들과 같은 자들의 권익을 위해 움직이게 된다. 어차피 똑같이 시간이 걸리는 일이라면, 느긋하고 편안한 쪽이 낫다. 젤란은 이런 구체적이고 점진적인 사회의 변화까지 유추할 수는 없었지만, 이것이 하나의 포석으로 작용하리라는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준상님께서는 국정에 전혀 관여할 생각이 없으십니까?” 젤란의 물음에 준상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닙니다.” “그렇다면...” “감찰과 심판. 이 정도면 충분하겠죠.” “아...” 지금까지는 주종의 관계를 맺기는 했어도 왕실이 함부로 귀족을 처벌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물론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누구라도 납득할 만한 명분이 있고, 다시 그 명분을 원로원이 인정한다면 작위의 박탈을 비롯한 강력한 처벌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귀족들이 결집한 원로원에서 극단적인 형태로 같은 귀족을 처벌하는 일은 별로 없었고, 이것은 사실상 귀족들에게 자기 영지내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만드는 기반이 되어 왔다. 사실 지금의 상황으로는 준상이 이블린 왕녀와 결혼해서 왕위를 챙긴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하지만 준상은 그것을 포기하는 대신 감찰권을 손에 넣음으로서 간접적으로 국정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것이다. 수도 귀족들로서는 준상이 왕위에 올라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러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다 보니 그가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 양보를 한 것이라 생각했고, 때문에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것을 준상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면, 여러 가지 책임과 의무가 뒤따르는 왕위를 버린 대신 델로드란의 국정에 언제든 간섭할 수 있는 권한만을 손에 넣은 것이니, 이런 저런 일로 바쁜 그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선택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왕위가 정말로 필요하다면 언제든 손에 넣는 것은 너무도 간단한 일이므로 이것은 포기라기 보다는 유예라고 표현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런 식으로 처가에서 은밀하게 휴식을 취하던 준상은 채 하루가 지나지도 않은 시점에 마침내 왕궁이 움직였다는 전갈을 받았다. “모두 모였습니다.” 헐레벌떡 달려와 왕궁이 움직였음을 알린 젤란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다시 그렇게 말했다. 모든 준비가 완벽하게 이루어져 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지만, 만의 하나를 생각하면 역시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준상은 그런 젤란의 모습을 바라보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시작합시다.” 00246 트롤러 ========================================================================= 젤란과 함께 밖으로 나가자, 미리 연락을 받기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조용히 그를 맞이했다. 준상은 그들 앞에 신기루 꽃으로 통하는 석문을 열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문 저편에서 헤네스가 튕겨지듯 밖으로 나온다. “준상씨!” “...” 조금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던 브레아 가문의 사람들은 갑자기 무언가 튀어나오는 모습에 움찔하다가 그것이 자신들에게 익숙한 헤네스임을 깨닫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헤네스는 준상과 한 차례 포옹을 나눈다음, 기다리고 있는 브레아 가문의 사람들을 석문 안으로 인도했다. “자, 얘들아. 들어가면 요정들이 안내를 해줄테니까 그 애들을 따라 가면 돼.” “네!” 아이들은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지만, 옛날 이야기에나 나올 법한 신기한 마법의 문이 나타나자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헤네스는 새언니와 조카들을 먼저 안으로 들여보낸 다음, 뒤이어 부모와 인사를 나누었다. “오랜 만이에요. 아버지.” “그래.” 제스터는 얼마 못 본 사이에 훌쩍 어른이 된 듯한 헤네스의 성숙한 모습을 보고는 남모르게 감회에 젖었고, 유라스는 헤네스를 가만히 안아준 다음 그녀가 이끄는 대로 석문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브레아 가문의 식솔들이 모두 석문 안으로 들어가자 그 다음은 왕녀와 영애들의 차례였다. 헤네스는 전날 자신이 얀트훈센의 일에 몰두해 있는 사이에 델로드란에서 벌어진 일을 전해 듣고는 그야말로 깜짝 놀라고 말았다. 에슈탈렌의 왕녀가 찾아온다는 얘기를 전해듣기는 했지만, 그 일이 이런 식으로 발전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탓이다. 헤네스는 먼저 이블린 왕녀를 비롯한 영애들을 바라보았지만, 어쩐지 날카롭게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조차 바보스럽게 느껴지는 바람에 그만두었다. 뭐라고 해야 하나. 지금 그녀들의 모습은 준상이라는 어미 새를 놓치지 않으려고 삐약거리며 모여드는 병아리들 같은 느낌이다. 실질적으로 나이 차는 그렇게 크지 않았지만, 어쩐지 어린 애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고 해야 하나. 만약 이런 감상을 리체스에게 말한다면 도토리 키재기냐며 마구 폭소를 터뜨리겠지만, 어쨌든 그런 느낌이었다. “자, 모두 안으로 들어가세요.” 헤네스는 올망졸망한 영애들과 그녀들을 따르는 시녀들까지 석문 안으로 인도하다가, 문득 갑옷을 걸친 여성 하나가 준상에게 다가가는 모습을 발견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지금 이곳에 있는 여기사가 누군지는 따로 확인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따지고 보면 그녀야 말로 이 모든 사태의 시발점. 준상과 그녀가 무슨 말을 나눌지 궁금하기 그지 없었지만, 헤네스는 모르는 척 나머지 인원들을 석문 안으로 들여보내는 일을 계속했다. “싸우고 싶다고?” “그렇습니다.” 준상은 얼굴을 찌푸렸다. 지금 이 기사 왕녀의 존재는 계륵,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래서 이 모든 사태를 촉발한 장본인임에도 불구하고 준상은 지금까지 그녀와 개인적으로 대화의 자리조차 나눌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솔직하게 준상이 이 왕녀에게 지닌 느낌을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민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마수 크롤로바간을 해치운 것에 대한 답례를 하고 싶었다면 그냥 남들 하듯이 대충 재물 같은 걸로 인사치레 정도만 해주면 될 일. 이번만 하더라도 그녀가 이곳을 찾아오지 않았다면, 이 정도까지 일이 크게 번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덕분에 델로드란을 장악하는 일이 좀 더 쉬워지긴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준상의 임기응변이 빛을 발한 것일뿐이지, 실질적으로 그녀는 앞서 귀족들과의 회합에서 증언을 한 것 이외에는 달리 한 일도 없었다. 사실 싸우고 싶다면 그냥 싸우게 내버려 두는 것 정도는 큰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그녀가 에슈탈렌이라는 국가의 왕녀라는 신분을 가진 이상, 오늘 밤의 전투에서 부상을 입거나 하면 자칫 외교 문제로 비화될 가능성조차 있었다. 델로드란은 당분간 정치적 격변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 가급적이면 다른 나라와의 마찰은 피하는 것이 현명한 상황. 때문에 준상은 이렇게 답했다. “필요 없다.” 그리고 귀찮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지만, 에롤로미네는 얼른 그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주저 앉았다. “...” 왕족은 무릎을 꿇지 않는다. 그들이 무릎을 꿇을 때는, 전쟁에서 패해 나라가 망했을 때 뿐이다. 때문에 흘깃 거리며 두 사람을 훔쳐보던 사람들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준상은 대륙의 외교적 관례까지는 알지 못했지만, 한 나라의 왕녀가 자신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라는 정도는 따로 설명을 듣지 않더라도 이해하고 있었다. “이게 무슨 짓이지?” 준상이 묻자 에롤로미네는 조용히 대답했다. “진작 만나 뵙고 제가 온 이유를 말씀드렸어야 하건만, 그럴 기회가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준상은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다시 말했다. “이게 무슨 짓이냐고 물었다.” 에롤로미네는 차가운 그의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을 바늘로 쿡쿡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애써 무시하며 다시 말했다. “저는 당신의 깃발을 드는 기수가 되고 싶어 이곳에 찾아왔습니다.” 기수라니. 준상은 얼굴을 찌푸렸지만, 에롤로미네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저는 언제든 에슈탈렌의 왕녀라는 신분을 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준상은 그런 에롤로미네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어림없는 소리.” “...” “출신이나 신분이라는 것은 그렇게 간단하게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에롤로미네는 고개를 들고 그 말에 항변하려 했지만, 준상은 손을 들어 그녀의 말을 막으며 계속 말했다. “네가 왕녀라는 신분을 버렸다 치더라도, 사람들은 네 모습을 볼 때마다 에슈탈렌의 왕녀라는 말을 떠올릴 것이다. 그건 네가 부정한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 “그건...” “네가 나에게서 무엇을 보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런 허상에 취할 시간이 있다면 네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일에 전념하는 편이 나을 듯 하다만.” “...” “게다가 지금은 델로드란에 있어 무척이나 중요한 상황. 한 나라의 왕녀였던 자가 낄 자리조차 구분하지 못하는 건가.” 준상은 그렇게 말하고는 그녀의 등 뒤에 서 있던 호위 기사들을 향해 눈짓했다. 호위 기사들 역시 자신들의 우상인 그녀가 이런 식으로 다른 자에게 애걸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터라 준상의 눈짓을 받자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를 부축하며 일으켰다. 에롤로미네는 기사들의 부축을 받으며 몸을 일으키더니 입술을 깨문 채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준상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제가 마음이 급해서 미처 주위를 돌아보지 못했습니다. 일단 물러가 있겠습니다.” 그리고는 호위 기사들과 함께 헤네스의 안내를 받아 석문 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젤란은 숨죽이며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준상에게 다가와 말했다. “크흠, 그럼 저도 이만 들어가 있도록 하겠습니다.” “네.” 마지막으로 젤란이 석문 안으로 들어가자, 헤네스는 준상에게 달려와 다시 한 번 포옹을 하고는 그대로 뒤돌아서 석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헤네스를 마지막으로 대기하고 있던 모든 인원이 모습을 감추자, 준상은 석문을 없앤 다음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대기하고 있던 백 명의 광전사들이 일제히 그에게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한다. “준비는?” 짧은 준상의 물음에 선임 블러드로드 도른이 얼른 대답했다. “어떠한 적이 쳐들어와도 문제없습니다.” “들었겠지만, 적의 수는 약 이천이다. 제법 훈련이 잘된 정예인 듯 하니 주의하도록.” “알겠습니다.” 준상이 고개를 끄덕이자, 도른은 뒤돌아서며 기다리고 있던 광전사들을 향해 손을 들어보였고, 그 신호를 받기가 무섭게 광전사들은 미리 젤란이 준비해둔 말에게로 다가가 커다란 곡도로 그 목을 단숨에 날려버렸다. 도른은 구리 대야에 김이 무럭무럭 솟아오르는 선혈을 가득 받아 준상 앞에 내밀었다. “...” 설마 앞으로 광전사들을 데리고 전투에 나갈 때마다 이 짓을 해야 하는 걸까. 준상은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얼굴을 찌푸렸지만 이내 도른이 내민 대야를 받아 그것을 머리 위에 쏟아내었다. 그러자 지금껏 준상의 몸 안에 감추어져 있던 피의 공포가 일깨워지며 하나의 파도가 되어 주위를 장악하기 시작한다. 준상은 광전사들이 자신의 뒤를 따라 피를 몸에 바르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에롤로미네 왕녀가 언급했던 깃발을 떠올리고는, 인벤토리에 잠들어 있던 호위장의 미늘창에 피와 혼돈의 깃발을 손수 매달아 그것을 한 손으로 치켜든 채 정령과 소환물, 그리고 펫들을 한꺼번에 불러내었다. 송아지만한 덩치의 늑대들과 입에서 불을 뿜어내는 헬하운드, 그리고 날카로운 송곳니를 자랑하는 검치호 등이 먼저 모습을 드러냈고, 몽몽이와 고슴도치, 그리고 엘리 같은 펫이 뒤를 이었으며, 마지막으로 형형색색의 정령들이 연이어 모습을 드러낸다. 준상은 준비가 모두 끝나자 초감각을 최대로 발동했다. 그러자 이벨류아의 성문을 빠르게 돌파한 한 무리의 병사들이 저택으로 몰려오는 기척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었다. 사람들을 대피시키느라 다소 시간이 걸린데다, 성문을 지키던 경비병들에게 미리 무리하게 막을 필요없다고 말해두긴 했어도 생각보다 무척이나 기민한 행동이 아닐 수 없었다. 역시나 한 나라의 왕이 신임할 정도의 정예병력인가. 그대로 모두 처치해 버리기엔 조금 아깝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저들은 현재의 왕실에 절대적인 충성을 맹세한 자들로만 가려 뽑은 병력이니 괜히 남겨둬봐야 나중의 불안 요소가 될 뿐이다. 준상은 깃발이 달린 미늘 창을 든 채 훌쩍 몸을 날려 저택 지붕 위로 올라간 다음, 지붕 위에 미늘 창을 콱 박아 넣으며 말했다. “시작하라.” 그러자 광전사들은 곧바로 그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저택 입구 앞에 넓게 진형을 펼쳤고, 기다렸다는 듯이 한 무리의 기병들이 저택의 문을 부수고 안으로 들이닥쳤다. 광전사들은 무기를 들고 적을 바라보았지만, 가장 먼저 그들에게 날아든 것은 기병이 아니라 새카맣게 칠해진 화살들이었다. 잘 훈련된 정예 병력답게, 적들은 기병 돌격 직전에 광전사들의 진형을 부수기 위해 집중적으로 화살을 쏘아낸 것이다. 광전사들은 날아드는 화살의 파공성을 듣고 얼른 몸을 낮추며 방패로 몸을 가렸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들의 주위에는 이미 강력한 바람의 정령들이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준상이 지닌 정령 가운데 바람의 속성을 보유한 것은 모두 세 가지. 산들바람과 마파람, 눈보라가 바로 그것이다. 이 세 가지 종류의 정령들은 준상의 몸에 열려진 정령의 문을 통해 그 힘이 강화되어 있는 상태. 적들의 검은 화살은 매우 치명적이었지만, 이러한 정령들을 돌파할 정도로 강력하진 못했다. 후두둑! 갑자기 휘몰아친 강력한 바람에 화살들은 무력하게 방향을 잃고 흩뿌려졌다. 하지만 위기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곧바로 그 뒤를 이어 일단의 기병들이 몰아치는 듯한 기세로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기병들은 몸을 낮춘 채 기병창을 치켜들고 곧바로 광전사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들은 채 목표지점에 도착하기도 전에 예상치 못한 습격을 받아야만 했다. 그것은 바로 거대한 늑대들과 검치호, 그리고 입에서 불을 뿜는 헬하운드가 바로 그 습격의 장본인들이었다. 쿠아아앙! 송아지 만한 크기의 거대한 야수들이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앞세운 채 풀쩍 뛰어올라 곧장 머리 위에서 떨어져 내리자, 말들은 예상치 못한 천적의 등장에 놀라 발이 꼬여 넘어지거나 갑자기 멈추어 서며 타고 있던 기병들을 떨궈 버렸다. 선두의 기병들이 혼란에 빠지자 돌격은 너무나도 어이없이 저지되어 버렸고, 선봉이 돈좌되자 가만히 기세를 돋우고 있던 광전사들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돌격을 시작했다. 광전사들의 특기는 다름 아닌 난전. 온몸에 김이 무럭무럭 나는 피를 잔뜩 뒤집어 쓴 채 함성을 지르며 돌격하는 그들의 모습은 아무리 잘 훈련된 정예 병사라도 일순 흠칫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위협적이었고, 아차하는 사이에 도끼며 커다란 곡도 같은 것을 손에 든 광전사들은 멈추어선 기병들을 도륙하며 그 피로 몸을 적시기 시작했다. 돌격이 저지된 기병들은 난전이 시작되자 침착하게 말에서 내려 광전사들을 맞이했으나, 기세를 돋우며 달려드는 광전사들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일 수밖에 없었다. “죽어라!” 몇몇 기병들이 광전사의 몸을 베거나 찌르는데 성공하는 모습이 간혹 눈에 띄었지만, 그들은 광전사들의 베이고 찔린 광전사들의 몸이 흰 연기를 뿜어내며 아물어 가는 모습을 보고는 크게 놀라고 말았다. “서, 설마... 블러드로드!” 광전사들 가운데서도 특히 강한 대전사, 블러드로드. 살육에 의해 피의 본질에 눈뜬 그들은 설령 전장에서 적의 무기에 상처 입더라도 순식간에 상처가 아물어 버리는 놀라운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유명했다. 지금 브레아 가문을 침탈한 병력들은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는 적이 어떤 자들인지 이미 교육을 받은 상태였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주의해야 할 것이 바로 블러드로드였다. 광전사도 버거운 마당에 블러드로드라니. 기병은 자신의 불운에 혀를 찼지만, 이내 그의 뒤를 이어 다른 자들 역시 같은 말을 외치기 시작하자 안색이 새파랗게 질리고 말았다. “블러드로드?” “여기도?” “이럴수가! 이건 도대체!” 고작해야 한두명 있으면 많으리라 여겼건만, 지금 광전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작은 상처 따위는 무시한 채 기병들을 들이치고 있었다. 이렇게 되자 기병들과 그들의 뒤를 받치기 위해 달려오던 보병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큭큭큭! 이거 싸울 맛이 나는데!” “영감탱이들이 왜 그렇게 힘이 좋은가 했더니 이래서였군!” 광전사들은 재생력의 강력한 효과를 만끽하며 성난 야수처럼 적의 병력들을 몰아치기 시작했다. 원래도 기사 한둘 정도는 찜쪄먹을 정도의 실력을 지닌 데다 반지를 통해 재생력을 부여받고, 여기에 깃발의 능력 향상 효과마저 더해지자 광전사들은 흥에 취해 몸을 사리지 않고 난폭하게 공격을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적들은 숫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수세에 몰리고 말았다. 준상은 지붕 위에서 광전사들의 전투를 지켜보며 반지의 효과에 만족감을 느꼈다. 사실 모든 광전사들이 전부 재생률 증가 반지를 끼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도 열심히 아줌마 요정들이 반지를 만들고는 있었지만, 백 명의 광전사들에게 전부 반지를 지급하기에는 아무래도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전사들이 모두 반지를 끼고 있는 것처럼 날뛸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들 사이를 공처럼 튕기며 움직이는 작은 고슴도치 한 마리 덕분이었다. 고슴도치는 몸을 둥글게 만 채 공처럼 튕기며 부상을 입은 광전사의 몸에 부딪히는 것으로 그들의 신체에 힐링포션의 효과를 부여하고 있었다. 준상은 빠르게 올라가는 고슴도치의 레벨을 살피다가 아직 이름을 짓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잠시 생각하다가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밤톨. 앞으로 네 이름은 밤톨이다.” 00247 트롤러 ========================================================================= 좋은 이름을 붙여줘서 힘이 나는 건지, 아니면 어이없는 이름을 붙여줘서 화가 나는 건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밤톨이라는 이름을 새롭게 얻은 주사기 고슴도치는 더욱더 빠르게 움직이며 폭주하는 광전사들의 보조를 담당했다. 밤톨이가 가지고 있는 스킬은 특성상 레벨이 올라갈수록 더 많은 종류의 포션 카드를 장착할 수 있기 때문에 준상은 전투를 지켜보며 지니고 있는 포션 카드를 계속해서 장착시켜 주었다. 준상이 현재 지니고 있는 포션은 모두 일곱 가지. 단순히 상처를 치료하는 힐링 포션은 물론이고, 상태 이상을 회복하는 축복의 성수와 해독 능력을 갖춘 안티도트 포션, 초감각을 일깨우는 시커 포션, 여기에 방어력을 강화하는 디펜스 포션과 속성 부여 능력을 가진 플레임 포션, 프로즌 포션 등이 그것이다. 이런 여러 가지 포션 카드를 장착하게 되면 밤톨이는 단순히 상처에 약을 발라주는 기초적인 힐러 역할 뿐만 아니라, 필요에 따라서는 상태 이상을 치료하고 해독을 시켜줄 수도 있으며, 여기에 방어 강화나 속성 부여 또한 가능해진다. 단점이라면 자체적인 회복 능력을 갖춘 것이 아니기 때문에 포션 카드가 떨어지면 능력 자체가 의미 없어진다는 정도다. 준상은 밤톨의 첫 전투를 지켜보다가 병력을 나누어 별채 쪽으로 숨어드는 또 다른 병력을 초감각으로 발견했다. 정문 쪽이 광전사들의 완강한 저항으로 수세에 몰리자 소수의 병력을 돌려 저택 안의 사람들을 노리는 모양이지만, 불행히도 그들의 예상과는 달리 저택 안은 완전히 텅텅 비어 있는 상태였다. 그냥 놔둬도 상관은 없지만, 저대로 분탕질을 두도록 놔둘 수는 없는 일. 준상은 자신의 어깨 위에 앉아 있던 엘리에게 얼음과 바람의 상급 정령인 눈보라를 장착시킨 다음 별채쪽으로 잠입한 병력들에게 보냈다. 그가 지닌 정령 가운데 가장 강력한 정령인 눈보라와 결합한 엘리는 이내 작은 눈송이 같은 것을 회오리처럼 휘감기는 모습으로 변화하더니 준상이 지시한 대로 별채 쪽으로 곧장 날아들었다. “아무도 없습니다.” “설마 벌써 빼돌린건가... 혹시 모르니 샅샅이 뒤져라!” “네!” 별채 안을 뒤지던 요원들은 어쩐지 집안이 쌀쌀해지는 듯한 느낌에 몸을 움츠렸다. 긴장한 탓인가 싶어 옷깃을 여미며 계속 탐색을 계속하려 했지만, 입에서 하얀 입김이 뿜어져 나오자 단순한 착각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뒤늦게서야 깨달았다. “뭐지?” 요원들을 이끌던 자가 갑작스런 기온의 변화에 의문을 표하는 순간, 저택 안에 매서운 눈보라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준상이 얀트훈센으로 향하면서 겪었던, 차마 눈보라라고 부르기조차 힘든 극한의 얼음 폭풍과 비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엘리의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차가운 눈바람은 정령의 문과 정령 증폭이라는 두 가지 힘으로 강화되어 사방이 얼음으로 뒤덮인 극한의 오지에서나 경험할 수 있는 수준의 냉기를 지니고 있었고, 이것은 침투를 위해 가벼운 무장과 얇은 겉옷만을 걸친 요원들에게는 치명적인 위협으로 다가왔다. “으그극!” “함정이다! 피하라!” 순식간에 피부의 감각이 얼얼해지고 손발이 곱을 정도로 차가운 냉기가 막힌 실내 안을 가득 채우기 시작하자, 요원들은 이대로 순식간에 얼어 죽을 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느끼며 급히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요원들은 미처 건물을 빠져 나가기도 전에 하얀 눈바람을 몸에 감싼 채 날아다니는 귀여운 요정용과 맞부딪히고 말았다. 간접적인 영향 만으로도 정상적인 활동이 불가능할 정도였는데, 직접 그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차디찬 눈보라에 직격 당하면 어떻게 될까. 요원들은 환상처럼 느껴지는 엘리의 아름다운 모습에 취해 잠시 멈추어 있다가, 이내 엘 리가 뿜어낸 극한의 냉기에 직격 당했고, 뭘 어떻게 반응해볼 틈도 없이 그대로 차가운 얼음으로 뒤덮여 움직임을 멈추고 말았다. 엘리는 모든 요원들을 순식간에 얼음 기둥으로 만들어 버린 다음, 유유히 하늘을 날아 준상에게로 돌아왔다. “수고했다.” 준상은 엘리에게서 눈보라를 분리시킨 다음 천천히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점차 패색이 짙어지고 있는 적의 군세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광전사들은 재생의 반지와 밤톨의 지원에 힘입어 우세를 점하자, 순차적으로 광폭의 힘을 발동해 더욱더 거세게 적을 몰아부쳤다. 안 그래도 피에 절은 대머리들의 위세에 짓눌려 있던 적군은 그들이 광폭을 사용해 더 강력한 힘으로 밀어 붙이자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저택의 정문까지 죽죽 밀려나고 있었다. 선임 블러드로드 도른은 광폭의 유효시간이 끝난 이들을 후열로 내려 보내고, 다시 새롭게 광폭을 발동한 광전사들로 하여금 그 자리를 채우게 하는 일종의 차륜전을 시도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재생률 증가의 반지가 지닌 효능과 맞물려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좋은 방법이군.” 준상은 슬슬 전투가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음을 파악하자 적의 진형에 뛰어들어 난동을 부리고 있던 늑대와 헬하운드, 검치호 등의 야수들을 적의 후방으로 이동시켜 퇴로를 차단하게 하는 한편, 그의 주위를 멤돌고 있던 정령들을 보내 야수들을 돕도록 했다. 광전사와 야수들의 사이에 낀 적의 병력들은 자신들이 포위되었다는 사실을 깨닫자 급속하게 사기를 잃어가기 시작했다. 적을 포위하는데 성공하자, 준상은 저택의 지붕에 박아 두었던 미늘창을 뽑아 들고는 위상전이를 펼쳐 아래쪽으로 내려간 다음,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지만 전투의 광기에 취해있던 자들은 어느 틈엔가 자신의 감각 속을 서서히 비집고 들어오는 거대한 존재감을 깨달았다. 온몸에 피를 뒤집어 쓴 채, 사자의 가면을 쓰고 다시 피와 혼돈이 소용돌이 치는 문양의 깃발이 달린 미늘 창을 손에 든 준상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오자, 그 모습으로부터 전해지는 위압감에 적도 아군도 일순 숨을 멈추었다. 적들은 그렇지 않아도 지쳐가던 어깨 위에 무거운 돌덩어리 같은 것이 차곡 차곡 쌓이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어떤 외침 같은 것이 들려오는 것을 느꼈다. 도망쳐라. 어서 저 자에게서 멀리 도망쳐라. 살아남고 싶다면,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도망쳐라! 처음에는 착각이라는 것을 스스로 자각하고 있었지만, 준상의 모습이 가까워질수록 그러한 자각은 점차로 확신을 일어가기 시작했고, 여기에 사자 가면 안쪽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안광이 더해지자 적들은 감히 더 이상 항거할 생각조차 못한 채 사지의 자유를 잃고 썩은 지푸라기처럼 풀썩 풀썩 쓰러지기 시작했다. “과연... 이것이 바로 붉은 공포.” 선임 블러드로드 도른은 준상이 뿜어내는 공포의 기운에 이 전장이 완전히 장악되었음을 깨닫자 천천히 몸을 숙여 광전사들의 정점에 선 그의 위용에 경의를 표했다. 도른이 그와 같은 행동을 취하자, 다른 광전사들 역시 끓어오르는 광폭한 기운을 억누르며 준상을 향해 몸을 숙였다. 격렬했던 전투는 그렇게 끝을 맺었다. 준상은 모든 적들이 무력화되자 자신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는 도른에게 조용히 말했다. “남은 적들을 포획하고 전장을 정리하라.” 도른은 바로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붉은 공포의 뜻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준상은 다시 천천히 몸을 돌려 저택 안으로 들어갔고, 그가 모습을 감추자 그제서야 광전사들은 숨을 돌리며 넋이 나간 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적들을 모아 묶기 시작했다. 그렇게 브레아 가문에서 전투가 벌어진 다음 날. “아직도 보고가 없나?” “그것이...” 이방인은 어느새 수도 기안의 목전에 도달해 있었는데, 그를 저지하기 위한 수단을 얻기 위해 보냈던 병력으로부터는 아무런 소식이 전해지지 않고 있었다. 성공이든 실패든 보고가 와야 그에 대한 대비를 할 수 있을 텐데, 가타부타 아무런 소식이 없으니 이 모든 일을 획책한 국왕 데른으로서는 속이 타들어갈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죄 없는 옥좌의 손잡이를 신경질적으로 톡톡 두들기고 있는데, 문득 전령 하나가 급하게 달려와 시종장 길베르 남작에게 무언가 소식을 전한다. “그래, 무슨 일인가?” 이제야 소식이 왔나 싶어 반색하는 국왕을 향해 길베르 남작은 입술을 깨물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그것이...” 순간 국왕은 자기가 바라던 소식이 아님을 깨달았지만, 마음 속의 불안감을 억누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서 말하라.” 길베르 남작은 눈을 살짝 감으며 심호흡을 하고는 이렇게 말했다. “그 이방인이... 마침내 수도의 성문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벌써?” 아침만 해도 이삼일은 더 있어야 도착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국왕은 잠시 얼빠진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고, 길베르 남작은 착잡한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며 덧붙였다. “아무래도... 저희가 추적하고 있던 이방인은... 가짜였던...” 순간 국왕의 손이 벼락처럼 움직이더니 아름다운 문양이 새겨진 청동 술잔이 길베르 남작의 머리로 날아들었다. “큭!” 길베르 남작은 그대로 비명을 지르며 주저 앉았고, 국왕 데른은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가!” “죄송합니다. 죽여주십시오.” 하지만 국왕이 길베르 남작의 실책을 다시 따지기도 전에, 또다른 전령 하나가 급하게 달려왔다. 전령은 이마에서 피를 흘리며 바닥에 엎드려 있는 길베르 남작의 모습에 흠칫 놀라더니 얼른 국왕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며 외쳤다. “아룁니다. 지금 이방인의 뒤를 따라 6대 백작가를 비롯한 수많은 귀족들이 왕성을 향해 들어오고 있는 중입니다!” “뭐?” 국왕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게 무슨 소리인가. 왜 그들이 그 이방인의 뒤를 따라 왕성으로 들어온단 말인가.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것인가! 하지만 그런 혼란도 잠시. 국왕 데른은 이내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리고는 안색이 파랗게 질리고 말았다. “서, 설마... 설마...” 반정. 국왕의 머리 속에 떠오른 단어는 바로 그것이었다. 그것이 아니고는, 서로 적대해야 마땅한 이방인과 귀족들이 함께 보조를 맞추어 왕성으로 들어올 까닭이 없었다. “처음부터... 처음부터 한 통속이었던 건가.” 데른은 그제서야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깨달았다. 처음부터 귀족들과 이방인이 손을 잡고 자신을 농락한 것이 아니고서는 이 상황을 설명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완벽한 농락. 물론 그것은 국왕의 완벽한 오해였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면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것도 차라리 당연한 일이었다. 뿌드득. 국왕은 이를 갈았다. 감히 자신을 이런 식으로 농락하다니. “병력의 움직임은 없었던 것이 확실한가?” 차갑게 가라앉은 국왕의 말에 길베르 남작은 얼른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소수의 병력이 움직였을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감히 왕궁을 침탈할 정도의 병력이 움직이지 않은 것은 분명합니다.” “...” 도대체 무슨 속셈일까. 병력 따위 움직이지 않고도 자신을, 그리고 이 나라를 굴복시킬 수 있다고 여겼던 것일까. 아니면 이미 대세가 결정되었다는 생각에 방심이라도 한 것일까. 당장 병력을 움직여 저들을 모조리 사로잡으라 명령해야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꽝! 갑자기 천둥 같은 소리가 터져 나오며 그들이 있던 왕궁 건물이 흔들렸다. 그리고 곧바로 얼굴이 하얗게 질린 병사 하나가 구르듯이 달려와 국왕을 향해 외쳤다. “왕성의 성문이... 파괴되었습니다!” “뭐?” 00248 트롤러 ========================================================================= 국왕은 잠시 이게 무슨 소린가 싶은 표정이다가 얼른 옥좌에서 일어나 순백의 홀이라 이름 붙은 대전을 가로 질러 밖으로 나갔다. 시종과 경비병들을 잔뜩 이끌고 대전 밖으로 나온 데른 국왕은 잠시 정면으로 날아드는 눈부신 햇살에 자신도 모르게 손을 들어 눈을 가리며 얼굴을 찌푸리다가, 본래 왕성의 정문이 있어야 할 자리에 뿌옇게 피어오른 거대한 먼지 구름을 발견했다. “...” 먼지 구름 주위에는 당황한 경비병들을 비롯해서 근처에서 일하고 있던 사람들이 혼비백산한 표정으로 멍하니 그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이냐.” 국왕이 묻자 방금 전에 문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가져왔던 병사가 얼른 대답했다. “그것이... 갑자기 굉음과 함께 문이 주저앉아 버렸다는 것 밖에는...” 하긴 지금 국왕이 있는 곳으로부터 왕성의 정문까지는 한 달음에 달려도 족히 몇 분은 걸리는 위치이다. 시종장 길베르 남작은 얼른 사람을 보내 자초지종을 알아보려 했지만, 그때 갑자기 성문이 있던 자리에 피어오른 먼지 구름이 누군가가 손으로 밀어내는 것처럼 한쪽으로 치워지기 시작한다. “으음...” 먼지 구름이 치워지자, 데른 국왕은 완전히 박살나서 돌더미로 변해버린 성문의 모습에 얼굴을 찌푸리는 동시에, 얼마전에 전해 들었던 그레프스 성의 참사를 머리 속에 떠올렸다. “이것이... 그 이방인의 힘이란 말인가.” 데른 국왕이 입술을 깨물며 그런 말을 중얼거릴 즈음, 준상은 정령을 이용해 먼지 구름을 밀어낸 다음 수북하게 쌓아올려진 성문의 잔해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등 뒤에는 수도의 외성으로부터 그와 함께 이곳까지 걸어온 귀족들이 도열해 있었는데, 하나 같이 귀신에 홀린 것 같이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허허...” 준상에게서 가장 가까운 위치에 서 있던 테드란 자작 그리올리는 방금 전 눈앞에서 벌어진 모습을 머리 속에 떠올리며 허탈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왕성의 성문에 도달하자 테드란 자작은 앞서 나가며 성문을 지키고 있던 왕실 경비대들에게 자신들이 왔음을 알리고 문을 열라는 말을 하려 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수도의 외성으로부터 여기까지 오면서 단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던 준상으로부터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물러나라.” 그는 곧장 앞으로 나서는가 싶더니, 허공으로부터 거대한 두 개의 철구를 꺼내 들었다. 보기만 해도 위압감 넘치는 거대한 철구가 느닷없이 나타나자, 그때까지도 조금은 의구심 어린 눈으로 준상을 바라보던 귀족들은 놀란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준상은 이내 불길한 기운을 몸으로부터 뿜어내 자신의 앞을 가로막으려 드는 왕실 경비대들을 도망치게 만들더니, 곧바로 거대한 철구를 던져 왕성의 정문을 단숨에 박살내 버린 것이다. 왕성의 정문은 아름다운 흰색 아치 형태를 띄고 있는데, 마차가 드나들 수 있는 거대한 문과 사람들이 드나들도록 만들어진 네 개의 문을 가지고 있었다. 이 문은 전국에서 모은 대리석 가운데서도 가장 흠이 없고 깨끗한 것만을 모아 외부를 치장하였기에 사람들은 그것을 흔히 순백의 문이라 부르곤 했다. 하지만, 실로 델로드란 왕실을 상징하는 랜드마크라 불리워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의 이 아름다운 건축물은 준상이 던진 거대한 철구를 단 일격도 견디지 못한 채 마치 모래성처럼 힘없이 주저앉아 버렸다. 준상의 뒤를 따르던 귀족들은 그 터무니없는 모습을 보고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방어력보다는 예술적인 측면이 강조된 건축물이라고는 하지만, 저런 식으로 한 사람의 힘에 무너진다는 건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 검은 머리의 이방인은 당연하다는 듯이 그들 앞에서 단숨에 그런 터무니없는 짓을 저질러 버리고 말았다. 그 한 번의 무력 시위로 인해, 귀족들은 그가 지닌 무력에 대한 의구심을 머리 속에서 완전히 지워 버릴 수밖에 없었다. 준상은 정령으로 돌더미들을 대충 치워내자, 이번에는 거대한 야수들을 소환하기 시작했다. 어른이 올라타도 될 것 같은 거대한 크기의 늑대부터 시작해서, 입에서 불을 뿜는 기괴한 사냥개, 여기에 날카로운 송곳니를 가진 검치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류의 야수들이 한 줄기 빛과 함께 모습을 드러내더니 마치 준상을 호위하는 것처럼 그 주위를 에워쌌다. 정문의 붕괴로 혼비백산했던 경비병 가운데 하나가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준상을 향해 창을 들이밀며 용감하게 외쳤다. “멈춰라! 이곳은 델로드란의 왕성이다!” 하지만 그 경비병은 곧바로 자신을 향해 뛰어든 거대한 늑대에 의해 무기를 빼앗기고 아차 하는 사이에 날카로운 발톱이 번뜩이는 발에 짓눌린 채 쓰러지고 말았다. “어, 어어...” 병사는 자신의 가슴을 한쪽 발로 지그시 누른 채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는 늑대의 모습을 견뎌내지 못하고 그대로 기절해 버리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보고 다른 병사들 역시 허겁지겁 자신의 무기를 들었지만, 무기를 뽑아 준상에게 겨누는 순간 정령과 야수들이 움직여 순식간에 그들을 무장해제시켜 버렸다. 병사들은 그 모습을 보고 깨달았다. 무기를 들고 겨누지만 않으면 이 야수들은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렇게 되자 병사들은 무기를 잡을 엄두도 내지 못한 채 그저 멀찍이서 준상을 에워싸는 수밖에 없었고, 지체 높은 귀족들이 그 뒤를 따르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모습으로 우왕좌왕해야만 했다. 준상은 왕성 내의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정문으로부터 순백의 홀로 이어지는 하얀 길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크음...” 멀리서나마 그 모습을 지켜보던 데른 국왕은 불편한 심정을 그렇게 끓어오르는 침음으로 표현했다. “길베르 남작.” “하명하십시오.” “짐이 어찌해야 좋겠는가.” “...” 박준상이라는 이름의 이방인이 지닌 힘은 실로 놀라웠지만, 정문을 부순 것을 제외하고는 다른 이를 공격할 의사가 없는 듯 했고, 뒤를 따르는 귀족들 역시 병력이라고는 단 한 명도 이끌고 오지 않은 모습이었다. 길베르 남작은 일단 몸을 피하는 것이 좋으리라 생각하고 있었지만, 지금 여기서 물러나 순백의 홀을 저들에게 내준다면, 이것은 싸워보지도 않고 저들의 위세에 굴복했음을 시인하는 꼴이나 다름없다. 데른 국왕은 이마에서 피를 흘리며 굳은 표정으로 대답을 하지 못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괜한 걸 물었군. 그냥 잊어버리게.” 그리고는 곧바로 몸을 돌리며 이렇게 말했다. “가자. 귀한 손님이니 순백의 홀에서 맞이하겠다.” “...” 데른 국왕은 뒤따라오는 준상과 귀족들을 무시한 채 다시 순백의 홀을 가로질러 자신의 옥좌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자신의 뒤를 따라 순백의 홀 안에 들어선 자들을 바라보다가, 그들이 마침내 멈추어 서자 사자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검은 머리의 이방인을 향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대가 박준상이라는 이름의 이방인인가.”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다.” 일국의 국왕에게 하는 말이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는 담담한 말투. 일말의 존칭도 포함되지 않은 그 말을 듣는 순간 국왕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은 울컥한 표정을 지었지만, 데른 국왕은 오히려 담담하기까지 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오늘 이 자리에 나타난 까닭은 무엇인가.” 그 말에 준상은 고개를 돌려 자신의 뒤를 따라오던 그리올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 일에 대해서는 내 대리인이 말할 것이다.” “...” 대리인이라니. 직접 말을 섞기도 귀찮다 이건가. 데른 국왕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면서 옥좌 손잡이를 있는 힘껏 꽉 움켜 잡았다. 그런 그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며 그리올리가 앞으로 나섰다. 그는 이전에 자신이 섬겼던 군주를 향해 손을 모은 채 한 차례 길게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고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양위하십시오.” “...” 서론 본론 다 제외하고 다짜고짜 터져 나온 그 한 마디에 순백의 홀은 그대로 침묵에 잠겼다. 데른 국왕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주먹으로 옥좌 손잡이를 내리치며 외쳤다. “그리올리! 네놈이 정녕 미친 게로구나! 내 손으로 저 이방인을 왕으로 삼으란 말이냐!” 하지만 그리올리는 평온하기까지 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는 신라의 왕족일뿐, 델로드란과는 무관한 이. 설령 양위가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그 대상은 온전히 델로드란의 왕족이어야만 합니다.” “...” 데른 국왕은 얼굴을 찌푸리며 순백의 홀에 자리 잡은 귀족들의 면면을 살펴 보았다. 6대 귀족 가운데 지금 이 자리에 없는 것은 바스트민 백작, 단 한 명 뿐이었다. 나머지 귀족들 역시 비록 작위는 낮아도 이번에 준상에게 양녀를 보낼 정도의 실세들이다. 이들이 전부 돌아섰다면, 설령 이 요구를 거절해 내전이 벌어진다 해도 승리를 장담할 수는 없는 일. 설령 이긴다 해도 델로드란의 국력은 반토막이 나버릴 것이 분명하다. “그럼 누구에게 양위를 하란 말이냐.” 그리올리는 데른 국왕의 말에 가만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이블린 왕녀에게 양위하십시오.” “뭐?” 데른 국왕은 물론이고 그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은 이 뜻밖의 대답에 당황을 금치 못했다. 하고 많은 왕족 중에 하필 그녀라니. 이건 대놓고 꼭두각시를 삼겠다는 뜻이 아닌가. 하지만 놀랄 일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저희들 역시 사죄의 뜻으로 이미 작위를 내려놓았으니, 부디 통촉하시길 바랍니다.” “...” 다시 한 번 순백의 홀은 침묵에 잠겼다. 그리올리의 말은, 그들 역시 양녀에게 작위를 넘겼다는 뜻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왕실은 물론이고, 델로드란의 정권 실세들이 일시에 양녀들에게 작위를 넘기다니. 도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한단 말인가. 데른 국왕은 고개를 숙인 그리올리를 바라보다가 껄껄 웃기 시작했다. “재미있군. 실로 재미있는 말장난이야. 그렇지 않은가? 하하하하하!” “...” 그리올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때까지 가만히 서있던 준상이 입을 열었다. “시끄럽다.” “...” 데른 국왕은 그 나직한 말에 잠시 어이가 없어서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하다가 이내 얼굴이 붉어지며 호통을 치려 했다. 하지만 그가 채 입을 열기도 전에 사자 가면 안에 감추어진 준상의 눈동자가 붉게 빛나며 그의 시신경을 장악해 버렸다. “...” 핀포인트로 데른 국왕 하나만을 노린 채 공포의 시선이 발동된 것이다. 데른 국왕은 준상의 붉은 눈동자가 크게 확대되며 자신을 덮치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준상은 그런 데른 국왕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지금 제안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 그리고는 천천히 손을 들어 데른 국왕을 가리키는가 싶더니, 염동력을 발동해 그를 자신에게로 끌어들였다. “어엇!” “잠깐!” 주위를 지키고 있던 시종과 병사들은 준상을 향해 힘없이 딸려가는 국왕의 모습에 기겁하며 그 몸을 붙잡으려 했으나, 그때까지 잠자코 있던 야수들이 이빨을 드러내며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준상은 데른 국왕의 멱살을 잡은 채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 “귀찮은 왕위 따위 관심 없다.” “...” “하지만 네놈이 왕위에 앉아 있으면, 계속 나를 귀찮게 하겠지.” “...” “그렇지 않은가?” 데른 국왕은 이제 완전히 공포에 짓눌려 자신이 뭘 하는지도 모른 채 무조건 고개를 마구 끄덕이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으면 당장에라도 이 붉은 눈의 악마가 자신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준상은 잠시 데른 국왕을 노려보다가 그의 몸을 휙 하고 집어 던졌다. “헉!” “폐하!” 시종과 병사들은 기겁을 하며 얼른 그 몸을 받아내려 했으나, 염동력에 의해 떠밀린 국왕의 몸은 원래 그랬던 것처럼 사뿐하게 다시 옥좌로 내려 앉았다. 길베르 남작은 얼른 국왕의 상태를 살폈다. 파랗게 안색이 질린 그의 모습은 의식을 잃지만 않았을 뿐, 반쯤 기절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길베르 남작은 입술을 깨물고는 준상을 바라보며 물었다. “당신은 무엇이 되고자 하는 것입니까.” 사람들은 그 물음에 일제히 준상을 바라보았다. 국왕을 보좌하던 사람들은 물론이고, 오늘의 거사를 위해 그의 뒤를 따라온 귀족들 또한 그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준상은 그런 그들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델로드란에는 과거로부터 수호자의 전설이 전해진다고 들었다. 만약 너희들이 나를 선의로서 대한다면, 그 역할을 맡아줄 수도 있겠지.” 델로드란의 수호자. 이 나라에 어려운 일이 일어났을 때면 어김 없이 나타난다는 수호자의 전설에 대해서는 그들 모두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준상의 행태는 누가 봐도 수호자보다는 파괴자에 가깝다. 적어도 오랜 기간 동안 델로드란의 왕성을 상징하던 순백의 문을 경고조차 없이 단숨에 때려 부수고 들어와 양위를 요구하는 사내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기에, 사람들은 오히려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길베르 남작은 잠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다가 이내 깊게 심호흡을 하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좋습니다. 하지만 수호자의 칭호는 함부로 내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자신이 그 자격에 걸맞은 인물임을 증명해 보여야만 합니다.” “어떻게?” 무미건조한 어조로 준상이 묻자 길베르 남작은 싸늘한 표정으로 이렇게 대답했다. “이 순백의 홀에는 수호자에게 전해지는 신물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당신이 진정 수호자의 자격을 갖춘 이라면, 신물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겁니다.” 길베르 남작은 어림도 없다는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지만, 지금 이순간 준상은 그런 표정 같은 건 신경 쓰지도 않고 있었다.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메시지를 읽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에픽 퀘스트 - 수호 1. 델로드란의 수도 기안을 방문하십시오. (달성) -> 수도 기안에서 순백의 문을 찾으십시오. (달성) -> 수문장으로부터 순백의 문에 얽힌 이야기를 전해 들으십시오 (달성) -> 완료! 보상: 경험치 아주 약간 -> 보상을 지금 수령하시겠습니까? (Y/n) _ (주의) 수령하지 않은 보상은 7일후 자동 소거됩니다 에픽 퀘스트 – 수호 2. 순백의 문에는 수호자의 전설에 대한 조각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수도 기안의 도서관에서 보다 자세한 얘기를 확인 하십시오. (달성) -> 사서를 통해 수호자의 전설을 전해 들었습니다. 사서는 보다 자세한 얘기를 전해 듣고 싶다면 국왕의 시종장으로 재직중인 길베르 남작을 방문할 것을 권했습니다. 하지만 길베르 남작은 쉽게 만날 수 없는 인물입니다. 먼저 수도에서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도와 평판을 쌓으십시오. (서브퀘스트 완료 0/10회) -> 완료! 보상: 경험치 약간 -> 보상을 지금 수령하시겠습니까? (Y/n) _ (주의) 수령하지 않은 보상은 7일후 자동 소거됩니다. 에픽 퀘스트 – 수호 3. 수도에서 선행으로 이름을 얻은 당신은 소문을 들은 길베르 남작과 만날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남작과 만나 수호자에 관련된 숨겨진 이야기를 전해 들으십시오. (달성) -> 완료! 보상: 경험치 약간 -> 보상을 지금 수령하시겠습니까? (Y/n) _ (주의) 수령하지 않은 보상은 7일후 자동 소거됩니다. 에픽 퀘스트 – 수호 4. 길베르 남작은 당신이 과연 수호자의 자격을 갖추고 있는지 궁금해 하고 있습니다. 델로드란의 수호자는 나아가면 거칠 것이 없고, 멈추어 서면 누구도 뚫을 수 없는 자. 당신은 자신이 그 자격을 온전히 갖추고 있음을 왕실 경비대를 통해 증명해 보여야 합니다. (달성) -> 완료! 보상: 경험치 조금 -> 보상을 지금 수령하시겠습니까? (Y/n) _ (주의) 수령하지 않은 보상은 7일후 자동 소거됩니다. 에픽 퀘스트 – 수호 5. 길베르 남작은 수호자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우선 대대로 델로드란 왕실에 전해지는 수호자의 신물을 찾을 필요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 신물이 있는 곳은 다름 아닌 왕성 내에 위치한 순백의 홀. 당신은 그것을 찾아 신물과 호응하고 있음을 증명해야만 합니다. (미달성) -> 미완료! 역시나. 준상은 우선 눈앞에 우르르 쏟아지는 메시지를 천천히 읽으며 에픽 퀘스트의 흐름을 살폈다. 마지막에 나타난 퀘스트 목표는 방금 길베르 남작이 말한 대로 수호자의 신물을 이 순백의 홀에서 찾는 일. 이것은 누가 보기에도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준상은 마침 이런 일에 특화된 존재를 데리고 있었다. “몽몽.” 그의 부름에 따라 한 줄기 빛과 함께 다람쥐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준상은 자신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다람쥐를 향해 조용히 말했다. “찾아라.” 그 말이 떨어지자, 다람쥐의 두 눈에서 번쩍하고 붉은 빛이 터져 나왔다. 00249 트롤러 ========================================================================= 몽몽이는 천천히 주위를 한 번 둘러보더니, 이내 쏜살같이 어디론가 달려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눈에서 붉은 안광을 번뜩이는 다람쥐의 그와 같은 움직임에 흠칫 놀랐고, 시종과 병사들 중 일부는 자신들을 향해 달려오는 모습을 보고 기겁해서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길베르 남작은 이게 뭐하는 짓인가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다람쥐가 갑자기 순백의 홀을 덮고 있는 판석 가운데 일부를 파고 들어가기 시작하자 얼굴을 찌푸렸다. 분명히 이곳에 숨겨져 있다고 말을 하기는 했지만, 자신이 시종장으로 재직하며 자식같이 돌봐 왔던 순백의 홀이 저런 식으로 파헤쳐지는 것을 보는 것은 그리 좋은 기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바각 바각 바각. 사람들이 숨죽이며 지켜보는 가운데, 순백의 홀 안에서는 그렇게 몽몽이가 무언가를 갉아대는 소리가 한동안 울려퍼졌다. 퀘스트를 정상적으로 진행했더라면 신물이 어떻게 생겼는지 대략의 정보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고, 그랬다면 몽몽이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물건을 찾으라는 지시를 내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준상은 그러한 중간과정을 전부 건너 뛴 상태. 때문에 그는 몽몽이로 하여금 이 넓은 순백의 홀 안에 숨겨져 있는 가치 있는 물건을 모조리 찾아오게 할 수 밖에 없었다. “으음...” 아무래도 시간이 조금 많이 걸린 탓에, 공포의 시선에 심령이 제압되 반쯤 넋이 나가 있던 데른 국왕이 조금이나마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그가 정신을 차리자 길베르 남작은 시종들로 하여금 물을 가져오게 한 다음, 땀으로 흥건하게 젖은 그의 얼굴을 물수건으로 닦도록 시녀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후우...” 데른 국왕은 따뜻한 물 한잔을 마시고 나서야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정신을 온전히 되찾았지만, 여전히 순백의 홀 한 켠에 팔짱을 낀 채 버티고 서 있는 준상의 모습을 보는 순간 흠칫하며 몸을 움츠렸다. “기, 길베르.” “걱정마십시오. 폐하.” 길베르 남작이 그렇게 국왕을 다독이고 있을 때, 마침내 온몸에 흙먼지와 돌가루를 잔뜩 뒤집어 쓴 몽몽이가 준상에게로 돌아왔다. 몽몽이가 몸에 묻은 돌가루와 흙먼지를 후드득 털어내는 모습을 보고, 준상은 일단 물의 정령을 불러 몸을 간단하게 씻겨 준 다음 말했다. “꺼내봐.” 그러자 몽몽이는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자신이 순백의 홀 안에서 찾아낸 물건을 준상 앞에 우르르 쏟아 놓았다. “오!” 사람들은 이 작은 다람쥐에게서 마술처럼 한 무더기의 물건이 쏟아져 나오는 모습에 탄성을 질렀다. 그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리던 길베르 남작은 몽몽이가 쏟아낸 물건 가운데 하나를 보고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준상은 그 반응을 보고는 이 가운데 수호자의 신물이 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어디 보자...” 퀘스트에는 신물이 자신과 호응하고 있음을 증명하라고 되어 있었다. 준상은 그 사실을 되새기고는 현재 장착하고 있는 카드들을 델로드란의 수호자로 교체했다. 웨펀차지(R), 철벽(R), 관통(UC), 근성(R). 이렇게 네 가지 카드가 슬롯에 장착되자 콤보 카드 ‘델로드란의 수호자’가 완성되었다. 아직 레어급 콤보조차 완성되지 않은 터라, 다른 콤보에 비해 다소 능력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치명타 무시 확률과 갑옷 효과, 그리고 모든 저항 증가 효과가 철벽 카드와 호응하면 준상이 지닌 모든 콤보 가운데 가장 강력한 방어 능력을 발휘하게 된다. 사실 전투시 방어보다는 공격 일변도의 경향이 있는 준상으로서는 이런 방어형 콤보는 조금 사용 빈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었고, 콤보의 완성이 늦은 것도 아직까지 레어급 콤보로 승격시키지 못한 것도 따지고 보면 그런 이유에서였다. 델로드란의 수호자는 습득시 최초 조합의 칭호를 얻지 못한 콤보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이것은 다시 말해 지금 누군가가 최초 칭호를 얻고 이 에픽 퀘스트를 향해 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뜻도 된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 누군가는 이제 수호자의 에픽 퀘스트를 수행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여기 이 사자 가면의 이방인에 의해 퀘스트를 강탈당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 준상은 델로드란의 수호자를 장착한 상태로 몽몽이가 찾아온 물품들을 하나씩 살폈다. 가죽으로 된 검집에 들어있는 단검, 지금껏 보아왔던 금화와는 다른 형태의 동전들, 녹이 잔뜩 슨 겁집 안에 들어있는 보석 박힌 금손잡이의 장검, 그리고 여러 가지 형태의 작은 반지들. 어째서 이런 것이 이곳 순백의 홀 바닥에 파묻혀 있는지는 알 도리가 없었지만, 준상은 콤보가 발동된 상태로 그것들을 하나하나 손으로 만져보았다. 만약 이 가운데 신물이 있다면 반응을 보일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마른 침을 삼키며 준상의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았고, 마침내 몽몽이가 꺼내놓은 물건 가운데 가장 커다란 물건에 그의 손이 닿는 순간 작은 진동음이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이건가.” 반응을 보인 것은 진흙이 잔뜩 묻어 원래의 형체를 알 수 없는 커다란 무언가였다. 준상은 우선 물과 땅의 정령을 동원해 그 물건에 묻은 진흙들을 씻어내었다. “오오!” “바로 저것이!” 그의 행동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정령에 의해 진흙들이 씻겨 나가 본래의 모습을 되찾기 시작한 신물의 모습을 보고는 탄성을 터뜨렸다. 수호자의 신물. 그것은 바로 커다란 순백의 방패였다. 대략적인 모습은 역삼각형의 카이트 실드를 연상시키고 있었지만, 방패 전면에 코뿔소를 닮은 일각수의 모습이 조각상처럼 튀어 나와 있었다. 보통 방패에 사나운 맹수 같은 것을 양각하거나 가문의 문장을 새겨 넣는 경우는 많지만, 이 방패의 경우에는 옆에서 보아도 일각수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확연하게 그 형태가 튀어나와 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더욱이 그 일각수의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커다란 뿔은 마치 거대한 창촉처럼 우뚝 솟아 있어서 이것이 단순한 장식의 용도가 아님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었다. “이럴수가...” 설마 정말로 찾아낼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길베르 남작은 마침내 드러난 수호의 신물을 보고는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준상은 천천히 염동력으로 방패를 들어올려 그것을 왼손에 착용했다. 지금껏 미약한 진동음만 흘리고 있던 방패는 그의 손에 쥐어지자 마치 포효와도 같은 강렬한 파공음을 뿜어냈다. 우웅! 소리 만이 아니었다. 준상의 손에 쥐어지는 순간, 그렇지 않아도 순백으로 빛나던 이 아름다운 방패는 스스로 빛을 뿜어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름다운 서기를 발하기 시작했다. 변화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방패 중앙에 돌출된 일각수의 조각 역시 마치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두 눈으로부터 붉은 빛을 뿜어져 나왔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며 감탄하다가 문득 이상한 점을 깨닫고는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잠깐만... 전에 듣기로는 신물의 두 눈에서 푸른빛이 흘러나왔다고 했던 것 같은데.” “듣고 보니 그러네.”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문을 표했지만, 이런 종류의 전설에서는 간혹 그 내용이 와전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이내 준상의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아이템정보 명칭 : 수호의 신물 레벨제한 : 없음 종류 : 방패 등급 : Unique 방어력 : 매우 높음 효과 : 1. 착용제한 : [수호자] 2. 수호자 관련 칭호 효과 100퍼센트 증가. 3. 수호자 관련 콤보 효과 50퍼센트 증가. 4. 범위 내의 모든 아군에게 ‘수호’ 효과 부여. 5. 범위 내의 모든 아군에게 ‘불굴’ 효과 부여. Seed : 10슬롯 설명 : 델로드란의 수호자만이 사용할 수 있는 방패. 델로드란에는 수호의 신물을 손에 든 수호자가 선봉에 서면 그 어떤 경우에도 절대로 패배하지 않는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설명은 짧았지만, 효과 설명을 보는 순간 준상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효과는 다 그렇다 치더라도 마지막 다섯 번째 효과인 범위 안의 모든 아군에게 불굴 효과 부여의 항목은 절대로 웃어넘길 수 없는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불굴은 준상이 영웅급 콤보 카드를 최초 획득하면서 얻은 진정한 영웅 칭호가 지닌 효과이다. 이 효과는 사망에 이르는 피해를 입더라도 최소한의 생명력을 유지한 채 한 번의 부활을 실행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비록 한 달에 한 번이라는 제한이 붙어 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다시 말해 수호의 신물을 지닌 자가 속한 군대가 여벌의 목숨을 지닌 채 전장에 임한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재발동 제한이 붙어있으니 두 번째에는 어김없이 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겠지만, 그것만으로도 적에게는 죽여도 죽지 않는 불사의 군대로 인식되기에 충분하다. 준상은 네 번째 효과인 수호에 대해서도 확인해 보았다. 수호 : 하나보다는 둘이, 둘보다는 셋이 강한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이 특성이 부여되면 아군에게 방어 증폭의 효과가 부여되며, 이 증폭률은 특성이 부여된 아군이 많아질수록 더욱더 증가합니다. “허...” 모이면 모일수록 강해진다 이건가. 어느 정도까지 방어력이 증폭되는지는 명확하게 나와 있지 않은데다 범위 안의 아군이라는 제한도 붙어있기는 하지만, 여기에 불굴 특성까지 부여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사기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다. 이쯤 되면 아이템 설명에 나온 절대로 지지 않는다는 표현도 과장이 아닌 셈이다. 준상이 아이템 확인을 마치자, 지켜보고 있던 귀족들은 서로를 바라보더니 천천히 준상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경의의 뜻을 표했다. 과정이 좀 이상한데다 신물의 반응도 뭔가 이상한 느낌이긴 했지만, 어쨌든 그것을 찾아내고 능력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이상, 이제 준상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수호자의 자격을 손에 넣었기 때문이다. “허... 허허...”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이 모든 상황을 알아차린 데른 국왕의 허탈한 웃음 소리를 무시한 채, 준상은 수호의 신물을 길베르 남작에게 들어 보이며 말했다. “아직도 할 말이 남았나.” “...” 그러자 준상의 눈앞에서 퀘스트 정보가 갱신되기 시작한다. 에픽 퀘스트 – 수호 5. 길베르 남작은 수호자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우선 대대로 델로드란 왕실에 전해지는 수호자의 신물을 찾을 필요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 신물이 있는 곳은 다름 아닌 왕성 내에 위치한 순백의 홀. 당신은 그것을 찾아 신물과 호응하고 있음을 증명해야만 합니다. (달성) -> 완료! 보상: 경험치 조금 많이. -> 보상을 지금 수령하시겠습니까? (Y/n) _ (주의) 수령하지 않은 보상은 7일후 자동 소거됩니다. 준상은 퀘스트 메시지를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설마 신물을 찾아내 호응하는 것으로 끝이 아니란 말인가. 그런 그의 의문에 대답하듯, 곧바로 새로운 메시지가 준상의 눈앞에 나타났다. 에픽 퀘스트 – 수호 6. 당신은 수호의 신물을 찾아내어 그 능력을 이끌어 내는데 성공했습니다. 이제 당신은 수호자로서 인정을 받기 위한 마지막 관문을 돌파해야만 합니다. 이제 수호자의 영령이 당신의 능력을 검증할 것입니다. 그와 싸워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십시오. -> 미완료. 그 메시지를 모두 읽자 갑자기 준상의 눈앞에서 눈부신 빛이 터져 나왔다. “...” 준상은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그 빛으로부터 눈을 가렸지만, 어느 틈엔가 자신이 순백의 공간 안에 덩그러니 서 있음을 깨닫고 천천히 손을 내렸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메아리 같은 소리가 순백의 공간에 울려 퍼지며 흰 옷을 차려 입은 여인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흰 색의 치렁치렁한 천으로 몸을 감싼 그녀는 옷 아래 드러난 몸의 굴곡을 통해 여인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을 뿐, 두건 아래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이목구비를 제대로 확인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일각수의 형상을 한 수호의 신물을 가만히 바라보는가 싶더니, 천천히 준상을 향해 말했다. -델로드란은 아직도 망하지 않은 건가. 00250 트롤러 ========================================================================= 귀로 전해진다기 보다는 머리 속에 직접 전달되는 듯한 느낌. 준상은 영령의 말에 담긴 짜증스러움을 느끼고는 얼굴을 찌푸렸다. “델로드란이 망했으면 싶은 모양이군.” 그 말에 수호의 영령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꾸했다. -물론. 그렇게만 된다면야 더 말할 나위가 없지. “...” 영령은 그렇게 대답하고는 그제서야 알아챘다는 듯이 준상을 향해 고개를 갸웃하더니 다시 말했다. -너... 생긴 게 좀 이상하네? “어떤 점이?” -아무리 봐도 델로드란 사람으로는 안 보이는 걸. 하긴 국적이야 옮기면 그만이긴 하지만. “...” 준상은 대화가 진행될수록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원래는 그냥 후딱 싸우고 나갈 생각이었는데, 말하는 투가 아무리 봐도 ‘델로드란의’ 수호자라고는 생각하기 힘들다. 아직도 안 망했냐느니, 국적이야 옮기면 그만이라느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 영령은 딱히 애국심 같은 형태의 감정이 무척이나 결여되어 있다는 느낌이다. 그렇게 한 가지에 의문을 품고 나니, 방금 전까지 그냥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여러 가지 일들이 꼬리를 물고 머리 속에 떠올랐다. 우선, 지금 준상의 손에 쥐어진 수호의 신물 같은 엄청난 물건이 어째서 지금까지 순백의 홀 밑에 파묻힌 채 방치되었던 것일까. 단순히 이걸 사용할 만한 능력을 가진 자가 나타나지 않아서라고 하기엔 뭔가 부자연스러운 점이 있음을 준상은 뒤늦게 알아차렸다. 능력을 가진 자가 없다면, 사람을 끌어 모아서라도 그런 능력을 가진 자를 발굴할 노력을 하는 것이 이치에 맞는 일이다. 아이템 정보에 나타난 내용대로라면, 레벨 제한도 없으니 자신과 같은 자가 아닌 일반인이라도 무리 없이 사용할 수 있을 터. 아니, 다소의 제한이 있더라도 이 수호의 신물이 지닌 능력 가운데 일부만 끄집어 낼 수 있어도 델로드란은 단순한 왕국이 아닌 제국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하다 못해 준상이 순백의 문을 때려 부숴도 그걸 말릴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것이 이 델로드란이라는 나라의 현실이다. 이 방패의 능력을 활용할 수만 있었더라면 준상이 그런 식으로 왕성을 침범하는 것을 마냥 구경하지만은 않았을 터. 이것은 다시 말해, 수호의 신물을 그렇게 묻어 둔 채 방치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는 의미가 된다. 이런 생각을 떠올리고 나자, 길베르 남작의 태도도 뭔가 이상했음을 뒤늦게 깨달을 수 있었다. 그는 처음에 준상이 수호의 신물을 어렵지 않게 찾아내는 것을 보고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그의 손에 그것이 쥐어지자 말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에픽 퀘스트에서 인도자 역할을 할 정도라면, 누구보다도 이 수호의 신물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을 터. 즉, 처음부터 그는 수호의 신물을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그것을 찾아내 반응을 이끌어내는 것 외에 다른 것이 필요함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여기에 또 한 가지. 그가 신물의 반응을 이끌어 내자 귀족들이 중얼거렸던 말이 있었다. 본래 방패에 형상화되어 있는 일각수의 눈은 푸른 색으로 빛나는 것이 맞다고 했었던가. 하지만 지금 준상의 손에 들린 신물의 눈은 붉은 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이것 자체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다면, 길베르 남작이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던 이유도 설명이 된다. 준상은 이 모든 상황을 하나 하나 떠올리다가 결국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 수호의 신물이 그렇게 땅속에 묻힌 채 방치되어 있던 것은, 결국 지금 그의 눈앞에 서있는 이 영령이 원인이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알 수는 없지만, 수호의 영령은 이 신물이 델로드란의 의도대로 사용되는 것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단순히 싸워 이겨서 될 문제가 아닌 모양이군.” 준상이 그렇게 중얼거리자, 수호의 영령은 조금 놀랐다는 듯한 말투로 대답했다. -눈치가 제법인데? 그 말이 맞아. 난 절대로 이 마지막 관문을 통과시킬 생각이 없어. “그렇게 되면 델로드란에 도움이 되니까?” -정답이야. 수호의 영령은 말을 이었다. -네가 현실에서 얼마나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이곳은 그저 망념으로 이루어진 공간일 뿐이라 그런 건 아무 의미가 없어. 즉, 내가 통과시킬 생각이 없는 이상 설령 네가 신이더라도 관문을 통과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뜻이지. “음...” -물론 이곳에서는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현실에서는 찰나에 불과하니까, 그건 걱정할 필요 없어. 그래서였군. 준상은 지금까지 이 수호의 신물이 순백의 홀이라는 장소에 묻힌 채 방치된 이유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어떠한 수단을 써도 영령의 마지막 관문을 돌파할 수가 없다. 하지만 신물이 엄연히 있는데 아무도 사용할 수 없다면, 그것과 관련된 전설 그 자체가 의심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 처음에는 델로드란 왕실도 어떻게든 이 수호의 신물을 사용해 보려고 노력했겠지만, 오래지 않아 그것이 부질없는 노력임을 깨닫게 되었으리라. 결국 그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수호의 신물을 아무도 찾지 못하는 곳에 숨겨 더 이상 전설이 훼손되지 않도록 막는 정도가 고작이었을 것이다. 전설만이라면 나라에 대한 충성심을 고취시키는 정도의 역할은 기대할 수 있었고, 그것은 델로드란 왕실이 꿈꾸어 왔던 중앙집권이라는 목표와도 부합되는 점이 있었다. 준상은 말없이 신기루 꽃으로 통하는 석문을 불러 보았다. 만일 이곳이 영령의 말과는 달리 실제로 존재하는 공간이라면, 신기루 꽃으로 통하는 석문이 바로 열릴 터. 하지만 그의 부름에도 불구하고 신기루 꽃은 반응하지 않았다. 준상은 계속해서 인터페이스와 정령의 문을 활성화시키려 해보았지만, 외부와 연결될 가능성이 있는 그 무엇도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퀘스트 시스템은 요정 여왕이 지배하는 또다른 세계인 요정계에서도 아무 이상 없이 적용되었었다. 그것은 다시 말해 퀘스트가 요정계를 넘어서는 초월적인 무언가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는 의미. 전대 요정 여왕인 리체스가 펫 목걸이에 간단하게 구속되어 버렸던 점을 고려한다면 이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 퀘스트 시스템이 발동하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이 공간이 실재하지 않는 곳이든가, 정말로 수호의 영령이 퀘스트를 농락할 수 있을 정도의 강대한 존재이든가, 둘 중 하나라는 결론이 나온다. 수호의 영령이 퀘스트를 농락할 수 있을 정도의 강대한 존재일거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지만, 퀘스트 시스템이 먹통이 된 상황에서도 영령과의 대화에 지장이 없다는 점을 감안해 보면 이것 역시 마냥 가능성이 없는 일은 아니었다. 결국 둘 중 어떤 것이 진실인지 준상으로서는 알 도리가 없는 상황. 하지만 어느 쪽이든 간에 수호의 영령을 이겨서 관문을 통과하는 것이 불가능한 건 결국 매한가지다. 방법이 있다면, 단 하나. 수호의 영령을 설득하는 것 뿐이다. 준상은 일이 귀찮게 되었다는 생각에 얼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왜 델로드란을 그렇게 미워하는 거지?” 그 말에 수호의 영령은 잠시 말이 없다가 머리에 쓰고 있던 두건을 천천히 뒤로 벗어 넘겼다. 준상은 두건 아래 숨겨져 있던 영령의 얼굴이 드러나자 살짝 눈을 찌푸렸다. “흠...” 영령은 준상을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 -징그럽지? 나도 원래 이런 모습은 아니었어. 하지만 아무리 아름다운 여자도 화형을 당해 불에 태워지면 이런 모습으로 변할 수밖에 없지. “...” -별에 별 추잡한 죄목을 다 뒤집어씌운 다음 불태워 죽일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힘을 빌려 달라니... 세상에 염치가 없어도 정도껏이어야지. 안 그래? 생각해 보면 이런 식의 일은 지구 상에도 적지 않다. 싸워 이길 때는 영웅으로 떠받들다가, 나중에 그 지닌바 명성과 힘이 부담스러워지면 악마로 매도하는 일 따위 과거는 물론이고 현재에도 얼마든지 벌어지는 일이 아니던가. 굳이 비교를 하자면, 이 수호의 영령은 델로드란의 잔다르크쯤 되지 않을까 싶다. -하기야, 내가 이런 식으로 수호의 영령이 되어 신물의 힘을 제어할 수 있게 되리라고는 나 자신조차 생각지 못했으니까. 재미있는 건 이런 상황이 되어서도 그때의 착해 빠졌던 본성이 남아서 악령조차 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겠지. 수호의 영령은 한숨을 푸욱 내쉬고는 다시 두건을 뒤집어썼다. -사실 그럴 마음이 있으면 원래의 내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어렵지 않은 일이긴 해. 하지만 이런 모습이라도 유지하고 있지 않으면 착해 빠진 내가 다시금 고개를 들어 버리거든. 준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일이 있었군.” 어쩌면 델로드란의 수호자와 관련된 에픽 퀘스트가 지금까지 제대로 발동되지 않고 묻혀 있었던 이유는 마지막 관문인 영령의 심사가 이런 식으로 꼬여 있어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준상은 떠올렸다. “그렇다면, 역시 델로드란은 멸망시키는 수밖에 없나.” 준상이 그렇게 중얼거리자, 수호의 영령은 잠시 아무 말이 없다가 잠시 뒤에야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 그게 무슨 뜻이지? “말 그대로다.” -그게 무슨... “원래는 차후에 일어날 혼란을 감당하는 것이 번거로워서 일단 명맥은 유지시키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델로드란이라는 나라가 존재하는 것이 장애가 된다면 치워버리는 수밖에 없겠지.” 수호의 영령은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라 하나를 무슨 길가에 널려 있는 돌맹이 취급하는 그의 말을 좀처럼 믿기 어려웠던 탓이다. -하하, 농담도... 하지만 준상은 진지한 표정을 지은 채 가만히 수호의 영령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 시선을 잠시 마주 바라보던 수호의 영령은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지금...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알고 싶은가?” -그렇다. “그럼 말해주지.” 준상은 자신이 이방인이라는 것부터 시작해서, 에슈탈렌의 왕녀가 자신을 찾아옴으로 인해 벌어진 여러 가지 일들은 천천히 수호의 영령에게 들려주었다. 그렇게 얘기가 이어지다가, 마지막으로 이제 급조된 왕녀에게 양위를 앞두고 있는 델로드란 국왕의 상황이 준상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수호의 영령은 손뼉을 마주치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정말 대단해! 한 나라의 국왕을 그런 식으로 농락하다니! 수호의 영령은 그렇게 한참을 웃다가 이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렇게 기분 좋게 웃어본 게 얼마만인지 도대체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야. “기쁘다니 다행이군.” 준상이 담담하게 대답하자, 수호의 영령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가 싶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좋아. 너라면 상관없겠지. “힘을 빌려주겠다는 말인가?” -그래. 확인해 보고 싶은 것도 있으니 힘을 빌려줄게. 아, 잠깐만. 수호의 영령은 잠시 머리에 뒤집어 쓴 두건을 잡고 뭔가 뜸을 들이더니 천천히 그것을 뒤로 넘겼다. 그러자 아까의 불에 녹아내린 끔찍한 몰골이 아닌, 그림으로 그린 듯한 금발 청안의 아름다운 미녀가 모습을 드러낸다. -어때? “예쁘군.” 수호의 영령은 다시 두건을 뒤집어쓰며 말했다. -방금 전 그 모습이 ‘착해 빠진 나’야. 아무래도 아까의 그 모습만으로 기억되는 건 좀 그렇다 싶어서. “그랬군.” 준상의 대답을 들은 수호의 영령은 그에게 손을 뻗으며 말했다. -좋아. 그럼 잘 부탁해. 어차피 다시 이런 식으로 얼굴을 마주할 일은 없겠지만. “무슨 말이지?” 수호의 영령은 조금 씁쓸한 말투로 대답했다. -이게 생각보다 굉장히 힘든 일이거든. 우리 힘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고, 본래 수호의 신물이 지닌 힘을 이용해서 처음에 착용여부를 판별하는 단계에서만 이런 식으로 모습을 드러낼 수 있을 정도니까.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천천히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마주 잡았다. 수호의 영령은 두건 아래 살짝 드러난 입술에 미소를 머금은 채 다시 이렇게 말했다. -잘 부탁해. 내 이름은 기안이야. 기안. 그것은 바로 델로드란의 수도 이름이기도 하다. 수도의 이름이 먼저인지, 그녀의 이름이 먼저인지 지금의 준상으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오랜 세월 델로드란을 상징하는 수호의 신물에 깃들어 있던 영령의 이름으로는 그보다 어울리는 것이 없을 듯 하다. 비록 그 세월 동안 자신의 나라를 원망하고 있었더라도 말이다. 준상은 눈앞을 하얀 빛으로 가득 채우고 있던 공간이 순식간에 본래 자신이 위치해 있었던 순백의 홀로 바뀌는 것을 느꼈다. 영령의 말대로, 제법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었음에도 불구하고 주위의 모습은 그다지 바뀐 것이 없었다. 준상은 천천히 자신의 왼손에 들린 수호의 신물을 바라보았다. 기다란 뿔이 솟아나온 일각수의 두 눈에서는 어느 새인가 불길한 붉은 색의 빛이 사라지고 청아한 푸른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아... 일각수가 눈을 뜨다니. 하지만 그는...” 길베르 남작은 그 변화를 알아보았는지 그렇게 중얼거렸다. 다른 귀족들은 그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지만 말이다. 에픽 퀘스트 – 수호 6. 당신은 수호의 신물을 찾아내어 그 능력을 이끌어 내는데 성공했습니다. 이제 당신은 수호자로서 인정을 받기 위한 마지막 관문을 돌파해야만 합니다. 이제 수호자의 영령이 당신의 능력을 검증할 것입니다. 그와 싸워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십시오. -> 완료! - 당신이 이번 퀘스트에서 보여준 행동과 성과를 정산합니다. 이 과정은 약간의 시간이 소요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축하합니다! : 당신의 랭크는 Ex:Hero입니다. 당신은 영웅적인 행동으로 세계의 변혁을 이루어냈습니다. -수호의 신물이 활성화됨에 따라, 지금껏 잠들어 있던 신수인 일각수가 눈을 뜨고 활동을 시작합니다. -싸우는 성녀 기안의 힘이 개방됩니다. 기본 보상 외에 추가 보상이 지급됩니다. 보상: 경험치 매우 많이, 추가 보상 상자(Ex:Hero), 칭호[기안의 후예] -> 보상을 지금 수령하시겠습니까? (Y/n) _ (주의) 수령하지 않은 보상은 7일후 자동 소거됩니다. 준상은 메시지를 읽다가 랭크 설명 밑의 붙은 내용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신수라니. 게다가 싸우는 성녀 기안의 힘은 또 무엇인지. 이 신물은 단순히 수호자의 능력을 일깨우는 용도만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란 말인가.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데, 문득 그의 귓가에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야... 진짜였네. 저기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 녀석이 국왕인가봐. 하하하! -너무 시끄럽게 그러지 마세요. 놀라시잖아요. 순간 준상은 자신이 뭔가 헛것을 들었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계속해서 준상의 머리 속에 울려퍼졌다. -미처 말 안 해서 미안. 그렇지만 무턱대고 네 말을 다 믿을 수는 없는 일이잖아? “설마... 수호의 영령이냐?” 준상이 그렇게 중얼거리자, 곧바로 두 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맞아. 굳이 구분하자면, 나는 화난 기안이고, -저는 착한 기안이라고 불러주세요. “...” 수호의 신물을 얻고 에픽 퀘스트를 달성한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시끄러운 무언가가 덤으로 딸려오다니. 준상은 얼굴을 찌푸리며 손에 들고 있던 수호의 신물을 인벤토리에 집어넣으려 했다. -자, 잠깐! 그러지마! -죄송해요. 조용히 있을테니까 그러지 말아 주세요. 제발 부탁드려요. “...” 준상이 반응을 보이지 않자 화난 기안은 열심히 자신들이 함께 있을 때의 이점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래봬도 내가 한 싸움 하거든. 정신적으로 피로하다거나 하면 나한테 잠시 몸을 맡겨. 그러면 내가 대신 싸워줄 수도 있어. 참고로 내가 네 몸을 움직인다면 수호의 신물이 지닌 능력이 한층 더 강해진다고. -그래요. 화난 기안은 정말로 강해요. -착한 기안도 대단해. 얘한테 몸을 맡기면 그 뭐냐, 영기라고 해야 하나. 그런 게 몸에서 화악 피어 나와서 아군의 부상을 회복시키고 떨어진 체력을 북돋아주지. 그야말로 착해 빠진 성녀라고나 할까. “...” 싸우는 성녀 기안의 힘이란 건 이 둘의 능력을 두고 하는 말이었던 모양이다. 준상은 잠시 생각하다가 문득 이전에 수호의 효과에 이런 말이 있었던 것을 떠올렸다. 하나보다 둘이 강한 건 당연한 이치라고 했던가. 물론 준상이 이 수호의 신물을 이용하면 그만큼 강해지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만, 다른 누군가가 기안의 힘을 받아 그를 돕는다면 더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뭐라해도 아직까지 레어급 콤보도 완성하지 못할 정도로 준상은 전투 스타일 자체가 수호자와는 거리가 있는 것도 문제였다. 마침 준상에게는 수호의 신물을 맡겨도 될 정도로 마음을 나누고 있는 반려가 있다. 그녀의 이름은 바로 헤네스. 따지고 보면 델로드란과 아무런 연고도 없는 준상보다는 그녀 쪽이 수호자나 싸우는 성녀에 더 어울린다. 리체스도 가능하긴 하지만, 수호의 신물을 착용하고 육박전을 벌이기엔 아무래도 신체적인 제약이 너무 크다. “기안.” -응? -말씀하세요. 두 기안에게 준상은 조용히 말했다. “조금 있다가 소개해줄 사람이 있으니, 잠시 조용히 있어라.” -아, 알았어. -그럴게요. 준상은 그렇게 두 기안의 입을 다물게 한 다음, 데른 국왕을 바라보았다. 본래 지니고 있는 힘만으로도 감당하기 어려운 판에, 델로드란이라는 나라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수호자의 능력까지 얻은 준상을 적대하는 건 이제 불가능한 일이나 다름없었다. 데른 국왕은 허탈한 표정으로 옥좌에서 천천히 일어서며 내키지 않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었다. “양위... 하겠소.” ============================ 작품 후기 ============================ 헤네스한테 남자를 빙의시킬 수는 없는 노릇. 00251 트롤러 ========================================================================= 데른 국왕의 양위 선언을 들은 준상은 그 뒤의 일을 그리올리를 비롯한 귀족들에게 맡긴 뒤 왕성을 빠져 나왔다. 준상은 기안이 원하던 대로 나라를 확 갈아엎을까도 했지만, 막상 그럴 상황이 되자 기안은 그를 막았다. -그냥 해본 소리야. 나라 일이라는 것이 그냥 뒤집어 엎는다고 끝나는 일이 아니잖아. -이번 일만으로도 충분해요. 그러니 그만 두세요. 확 망해 버렸으면 좋겠다고 말은 해도, 역시 본심은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결국 델로드란은 멸망하지 않았다. 이벨류아에서 보호중이던 이블린 왕녀와 다른 양녀들 역시 각자의 가문으로 귀환했다. 에슈탈렌의 왕녀 에롤로미네는 호위 기사들과 함께 일단 브레아 가문을 떠났다. “좀 더 자신을 갈고 닦은 다음 다시 찾아 뵙겠습니다.” 준상으로서는 괜히 더 이상의 분란을 일으키지 말고 얌전히 자기 나라에서 지내줬으면 좋겠다는 느낌이었지만, 어쨌든 그녀는 그렇게 고국을 향해 돌아갔다. 그리고, 브레아 가문은 마침내 잃었던 작위를 되찾았다. 그렇다고 곧바로 중앙 정계로 진출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브레아 가문이 백작의 작위를 되돌려 받음에 따라 6대 백작가는 다시 7대 백작가로 변경이 되었다. 바스트민 백작가가 이번 정변에서 소외되고, 다른 다섯 가문의 작위가 방계의 양녀들에게 돌아가 당분간 그들 내부에 혼란이 예고되는 것과는 달리, 이제 브레아 가문은 준상이라는 배경을 통해 새롭게 떠오르는 별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그들의 본거지 이벨류아는 변방의 외딴 성곽 도시에서 지구와 델로드란, 그리고 얀트훈센을 잇는 삼각 무역의 중심지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어쨌거나. 준상은 델로드란에서의 일을 마치고 신기루 꽃으로 돌아오자 헤네스에게 방패를 건넸다. 수호의 신물이 지닌 효과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을 마치자, 헤네스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성녀 기안이요?” “알아?” “일단은요. 수호자의 전설이 유명하긴 하지만 여러 가지 이견이 많은 편이거든요. 성녀 기안에 대한 얘기도 그 중 하나죠.” 헤네스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잠시 긴장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준상이 내민 수호의 신물을 받아들더니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손을 떼었다. “왜?” 준상의 물음에 헤네스는 얼른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게... 갑자기 말을 걸어와서 좀 놀랬어요.” “하긴, 좀 수다스러운 면이 있긴 하지.” 준상은 헤네스가 수호자 콤보를 사용할 수 있도록 세팅한 다음, 다시 수호의 신물을 넘겨 주었다. 이미 한번 겪었던 탓인지 이번에는 놀라지 않고 조심스럽게 수호의 신물을 받아드는 그녀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헤네스는 수호의 신물을 받아들고 잠시 눈을 깜박이는가 싶더니, 이내 왼손으로 그것을 쥐었다. 그러자 신물에 새겨진 일각수의 눈이 붉은 색으로 잠시 빛나다가 이내 푸른 빛으로 바뀐다. 아마도 준상이 그랬던 것처럼 망념의 세계에서 잠시 대화를 나눈 것이리라. 무슨 얘기를 나누었는지, 헤네스는 잠시 얼굴을 붉히다가 준상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고마워요. 여러 가지로 신경 써 주셔서.” “...” 준상이 가만히 고개를 저어 보이자, 헤네스는 방긋 웃으며 그의 뺨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다른 영혼이 몸 안에 들어오는 것이 불쾌하지 않을까도 싶었지만, 의외로 헤네스는 기안과 죽이 잘 맞았고, 전투 중이 아니더라도 등에 수호의 신물을 짊어지고 다니며 두 기안과의 대화를 즐기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준상은 헤네스에게 신물을 넘기고 난 다음, 이번 퀘스트의 보상을 습득했다. 이전에 다크 시드 사용자들을 학살한 것과 더불어 이벨류아 관련 칭호 효과로 인해 보상이 증폭된 덕분인지 습득이 완료됨과 동시에 준상은 다시 한 번 레벨이 올랐다. 이로써 준상은 31레벨이 되었다. 레벨 업을 뜻하는 흰 빛이 그의 몸을 스치고 지나가자, 준상은 일단 영웅 등급의 보상 상자부터 확인했다. 카드정보 명칭 : 철벽 레벨 : 1Lv 경험치 : 0 등급 : Hero 분류 : 스킬 성장 : 일반(극대) 속성 : 땅 효과 : 1. 장착시 방어력 60퍼센트 증가. 2. 방어시에도 걷기가 가능해집니다. 3. 모든 저항 20퍼센트 증가. 4. 상태 이상 유발 무시 확률 15퍼센트 증가. 5. 치명타 무시 확률 10퍼센트 증가. Cost : 30 Seed : 5슬롯 영웅급 보상 상자에서 나온 것은 다름 아닌 철벽. 레어급 이상의 관통이 나왔으면 단숨에 콤보를 업그레이드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 뽑은 영웅급 카드 역시 수호자 콤보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준상은 입맛을 다시며 레벨 업 보상인 랜덤 카드를 뽑았다. 그러자 레어급의 농락 카드가 나왔다. “음...” 이미 가지고 있는 카드지만 레어급 카드인지라 잠시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딱히 콤보를 완성한 것도 아니고, 효과 또한 대화시 적의 내분을 유도하는 뭔가 좀 미묘한 형태라 준상은 결국 랜덤 카드를 다시 시도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두 번째 랜덤 카드에서는 장악이 나왔다. 농락과는 달리 완성된 콤보의 카드이긴 했지만, 이것 역시 이미 가지고 있는 카드이긴 마찬가지. 준상은 결국 세 번째로 랜덤 카드를 실행해야만 했다. 카드정보 명칭 : 관통 레벨 : 1Lv 경험치 : 0 등급 : Rare 분류 : 스킬 성장 : 일반(대) 속성 : 없음 효과 : 1. 치명타 발생시 방어가 25퍼센트 무시됩니다. 2. 일반 타격의 데미지가 15퍼센트 증폭됩니다. Cost : 20 Seed : 3슬롯 “애 먹이는 군.” 준상은 세 번의 시도 끝에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 관통 카드를 보며 쓴웃음을 지어야만 했다. 레어 급의 관통 카드가 나타나자, 예상 대로 새로운 콤보가 모습을 드러냈다. 축하합니다! :콤보카드를 조합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현재 조합 가능한 콤보 카드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델로드란의 성녀 [상세 확인] -콤보 카드 조합을 원하시면 해당 번호를 누르시고, 만약 조합을 원치 않으신다면 n을 누르세요(1/n) _ 델로드란의 성녀 -델로드란 왕국에는 나라에 어려운 일이 일어났을 때 앞장 서서 적을 쳐부수는 위대한 수호자의 전설이 전해집니다. 그러나 사실 이 수호자의 전설은 왜곡되어 그 실체가 가리워져 있었습니다. 싸우는 성녀 기안, 그녀야 말로 진정한 수호자의 모습입니다. [조합상세] -웨펀차지, 관통, 철벽, 근성 (모든 등급이 레어 이상) -효과: 1. 웨펀차지시 관통 효과 150퍼센트 증가. 2. 치명타 무시 확률, 갑옷 효과 60% 증가. 3. 모든 저항 15% 증가. 4. 범위 내 아군의 재생률 5% 증가 새로운 콤보는 기존의 수호자 콤보의 효과가 향상되었을 뿐만 아니라, 범위 내 아군에게 재생률 증가 효과를 부여하는 옵션이 새로 추가 되었다. 비록 수치는 5퍼센트에 불과하지만, 재생률의 유무가 실제 전장에서의 승패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는 이미 광전사들의 전투를 통해 입증된 상황이다. 준상은 콤보 효과의 확인이 끝나자 곧바로 새로 얻은 칭호들을 확인했다. [기안의 후예] : 싸우는 성녀 기안의 힘을 개방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자에게 부여되는 칭호. -효과: 1. 수호자와 관련된 아이템, 칭호 등의 효과 증폭 2. 델로드란 출신자들에 대한 호감도 상승 폭 증가. -칭호는 획득시 자동으로 효과가 적용됩니다. 수호자 에픽 퀘스트의 보상인 기안의 후예는 광전사 에픽의 보상과 비슷한 효과를 지니고 있었다. [두 개의 얼굴] : ‘델로드란의 성녀‘ 조합을 최초로 성공한 자에게 부여되는 칭호. -효과: 범위내 아군의 생명력 5퍼센트 증가 -칭호는 획득시 자동으로 효과가 적용됩니다. 레어급 수호자 콤보의 최초 달성 칭호는 범위 내의 아군 생명력을 증폭시키는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준상은 보상의 정리가 끝나자 헤네스에게 새롭게 사용할 무기를 선택하도록 했다. “기안씨는 폴암 종류를 잘 쓰신대요.” “흠...” 폴암은 자루가 긴 병기를 총칭하는 말인데, 마침 준상에게는 딱 알맞은 무기가 있었다. 호위장의 미늘창이 바로 그것이다. 다만 문제라면, 이 아이템은 등급이 언커먼 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준상이 사용하는 다른 아이템들에 비해 성능이 상대적으로 많이 떨어진다. 그렇다고 마검을 쥐어주기도 그렇고 해서, 준상은 이 아이템을 강화해 보기로 했다. 아이템정보 명칭 : 호위장의 미늘창 +10 레벨제한 : 10 종류 : 무기 등급 : Uncommon 공격력 : 31-37 효과 : 1. 치명타 피해 20% 증가 2. 방어 무시 확률 11% 증가 3. 번개 무기 공격력 7~11 증가 Seed : 2슬롯 설명 : 호위장 큐롤의 미늘창. 강력한 위력을 가졌지만 어지간한 힘으로는 다루기조차 어렵다. 준상은 추가로 피와 혼돈의 깃발 역시 강화해서 미늘창에 부착시켰다. 아이템정보 명칭 : 피와 혼돈의 깃발 +10 레벨제한 : 20 종류 : 깃발 등급 : Rare 효과 : 1. 깃발이 보이는 위치에 있는 아군의 쿨타임 22퍼센트 감소. 2. 깃발이 보이는 위치에 있는 아군의 공격력, 방어력, 치명타 확률 18퍼센트 증가. 3. 깃발이 달린 아이템의 내구도 극대화 4. 깃발이 달린 아이템의 공격력 13퍼센트 증가. Seed : 슬롯 없음 설명 : 피와 혼돈이 소용돌이 치는 문양이 그려진 깃발 +10 강화를 했음에도 생각보다 공격력이 그리 많이 높아지지 않은 것이 조금 불만이긴 했지만, 그래도 깃발의 효과까지 감안하면 그럭저럭 쓸만한 수준이었다. 사실 그럭저럭 쓸만하다는 말도 유니크 아이템을 몇 개나 가지고 있는 준상이니까 할 수 있는 얘기지, 다른 사람 같으면 어림도 없는 말이다. 준상은 마지막으로 수호의 신물을 +10 강화한 다음 헤네스에게 건네주었다. 아이템정보 명칭 : 수호의 신물 +10 레벨제한 : 없음 종류 : 방패 등급 : Unique 방어력 : 극히 높음 효과 : 1. 착용제한 : [수호자] 2. 수호자 관련 칭호 효과 123퍼센트 증가. 3. 수호자 관련 콤보 효과 73퍼센트 증가. 4. 범위 내의 모든 아군에게 ‘수호’ 효과 부여. 5. 범위 내의 모든 아군에게 ‘불굴’ 효과 부여. 6. 방어 무시 효과 상쇄 확률 17퍼센트 증가. Seed : 10슬롯 설명 : 델로드란의 수호자만이 사용할 수 있는 방패. 델로드란에는 수호의 신물을 손에 든 수호자가 선봉에 서면 그 어떤 경우에도 절대로 패배하지 않는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수호의 신물은 강화의 효과로 인해 방어력이 매우 높음에서 극히 높음으로 증가하고, 여기에 기존 효과 수치도 증가되었으며, 방어 무시 상쇄 확률 옵션이 추가로 생성되었다. 보상의 정리와 더불어 헤네스가 사용할 장비의 점검이 끝나자, 준상은 미루어 두었던 삼각 무역의 시작을 위해 다시 지구를 찾았다. 준상은 헤네스와 함께 임서윤과 그의 길드원들이 머무르고 있는 펜션을 방문했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미리 연락을 하고 방문한 덕분인지 임서윤은 말쑥하게 차려입고는 그들을 맞이했다. 그는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우선 이전에 실시된 경매에 관한 얘기를 꺼냈다. “이런 식으로 이계의 물품이 거래되는 것 자체가 처음이라 다소 반응이 조심스러운 분위기였습니다. 게다가 예상 외로 시드 역시 그리 많이 모이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된 일이지?” “잘은 모르겠지만, 전해지는 얘기로는 시드에 대한 연구를 위해 미국 쪽에서 매입을 진행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흠...” 어느 쪽이 되었든 시드의 수요가 증가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었지만, 시드 각성이라든가 아이템 강화등으로 제법 많은 양의 시드를 소모한 상황이라 다소 아쉬운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번 경매의 입찰가는 한화로 500억원. 그나마도 경매가 과열될 것을 우려하여 최대 입찰가를 미리 지정해 놓은 덕분이다. 서윤은 다소 아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같은 물품이 계속 생산된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더 좋은 가격을 받을 수 있었다 싶어서 좀 아쉽습니다.” “신경 쓸 필요 없다. 어차피 돈이 궁해서 하는 일도 아니니까.” 준상은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주머니 하나를 그에게 건넸다. “이번엔 다섯 개다. 알아서 잘 받아내도록.” “헉!” 하나 만으로도 그 난리가 났었는데, 이번엔 다섯 개라니. “앞서도 말했지만 돈이 궁해서 하는 일이 아니니, 최대한 떠들썩하게 팔도록.” 서윤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하겠습니다. 맡겨주십시오.” 00252 트롤러 ========================================================================= 이후로는 헤네스가 나서서 이벨류아와 얀트훈센에 필요한 물자에 대해 임서윤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번 경매의 대금으로 들어온 물품의 상당수는 식량과 의약품, 옷감 등으로 준비되었다. 상대측에서는 운송이나 보관 등의 문제 때문에 가급적이면 부피가 작은 귀금속 등으로 지급하려 했지만, 현물로 받으려는 이유 중 하나가 얀트훈센에서 소모되는 물자를 충당하기 위한 것이라 일부러 이러한 물품들로 지정한 것이다. 생각보다 양이 많은 탓에, 인벤토리를 52개나 보유한 준상으로서도 한 번에 다 옮기지 못할 정도였다. 그래봐야 신기루 꽃을 몇 번 왕복하면 될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현물로 받은 물품 외에 이벨류아와의 교역 등에 필요한 물자에 대해 헤네스와 임서윤의 협의가 끝나고 나서야 준상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묻고 싶은 것이 있다.” “말씀하십시오.” 협의된 물자의 내역을 진세아에게 넘겨준 임서윤은 또 무슨 일인가 싶어 긴장하며 준상에게 주목했다. “그리 대단한 건 아니고, 요 한 달 간 퀘스트를 얼마나 수행했지?” “퀘스트 말씀이십니까?” 임서윤은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바로 대답했다. “음... 다섯 번이군요. 간격의 차이는 있습니다만, 대충 그 정도인 듯 합니다.” “역시 그런가.” 준상은 얼굴을 찌푸렸다. 예상대로 자신에게만 퀘스트 발생 빈도가 현격하게 줄어들었음을 확인한 탓이다. “무슨 문제라도...” “음...” 자잘한 퀘스트에 시도 때도 없이 불려가는 것 역시 골치 아픈 일이지만, 이런 식으로 퀘스트 발생 자체가 거의 되지 않는 것도 문제인 건 마찬가지다. 퀘스트가 발생하지 않으면, 보상을 얻을 수 없고, 보상을 얻지 못하면 강해지기 어렵다. 물론 수련은 계속하고 있지만, 단순히 육체의 단련을 계속하는 것보다 강력한 카드나 그 카드를 통해 구성되는 콤보의 조합이 훨씬 효율이 높은 건 굳이 생각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처음부터 단계를 밟지 않더라도 일정 조건을 만족시키면 에픽 퀘스트를 강제로 발동시키는 것이 가능하다는 걸 확인한 것 정도다. 현재 준상이 해결한 콤보 카드 관련 에픽 퀘스트는 모두 세 가지. 그 중 첫 번째 것이 정령사이고, 두 번째는 광전사, 그리고 최근 수호자의 에픽 퀘스트를 클리어했다. 하지만 이 가운데 정상적인 순서를 밟은 것은 오직 단 하나, 정령사 에픽 뿐이다. 나머지 둘은 원래 처음부터 발동되지 않았던 퀘스트를 임의의 조건을 달성함으로서 강제 발동시킨 경우다. 한 번이라면 우연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두 번이나 계속 되었다는 것은 다른 콤보 카드의 경우에도 비슷한 방식으로 강제 발동시키는 것이 가능하다는 의미가 된다. 준상이 보유한 콤보 카드 중에는 아직 에픽 퀘스트를 수행하지 않은 퀘스트가 여럿 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미친개 콤보이고, 욕쟁이 할매나, 파발꾼, 검은 백합, 무투가 등도 아직 에픽 퀘스트를 수행하지 않은 상태이다. 도깨비 시장이라는 모호한 지명으로 표현된 욕쟁이 할매를 제외하고는 모두 구체적인 지명을 지니고 있는 상태. 다소 시간은 걸리겠지만, 해당하는 지역을 조사한다면 또다른 에픽 퀘스트를 수행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런 식으로 퀘스트를 강제 수행할수록 정상적인 퀘스트 발동이 이루어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준상은 에픽 퀘스트를 계속 수행하는 것과는 별도로, 이러한 문제를 타개할 만한 대책을 마련 할 필요성을 느꼈다. “길드원들의 레벨이 어느 정도지?” 서윤은 바로 대답했다. “제가 현재 21레벨이고, 유미씨가 23레벨, 나머지도 모두 최소 10대 후반의 레벨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레벨이 그리 높지 않다. 하긴 준상의 경우에는 10레벨 후반부터 어둠의 군세 침공 관련 에픽 퀘스트를 연속으로 수행하면서 폭발적인 레벨 상승을 기록했다. 그러나 이들은 그런 대규모 퀘스트가 아닌 일반 퀘스트를 통해 차곡 차곡 레벨을 쌓고 있는 중이니 준상보다 레벨 상승 속도가 느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준상과 비교해서 느리게 보이는 것이지 실제로 임서윤과 그의 길드원들은 현존하는 귀환자들 중에서도 최상위권에 달하는 레벨과 실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한 가지 예상외라면 서유미의 레벨이 임서윤보다 높다는 것 정도다. “수련은 계속 하고 있나?” 이어진 준상의 물음에 서윤은 당연하다는 듯이 즉각 답했다. “물론입니다.” 준상은 다시 물었다. “길드원 수는 변동이 없나?” 서윤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무래도... 그 괴물꽃의 일도 있고 해서 일단은 길드원 모집을 미뤄둔 상태입니다.” “그럼 현재 몇 명이지?” “저까지 일곱입니다.” 마침 딱 적당한 숫자다. “그 중 셋을 골라라.” “네?” “시험해 보고 싶은 것이 있으니, 당분간 파티를 맺어 뒀으면 한다.” “아...” 서윤은 일전에 준상과 함께 수행했던 사막에서의 퀘스트를 떠올렸다. 당시 그와 그들의 길드원들은 그야말로 꿔다놓은 보리 자루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지만, 경험치를 적게 받았던 것을 제외하고는 그들끼리 퀘스트를 수행했을 때보다 훨씬 많은 보상 상자를 획득했고, 그 덕분에 순식간에 전력을 진일보시키는 것이 가능했다. 위험도 거의 없는 상태에서 높은 성과를 얻을 수 있으니, 다른 귀환자들이 이런 사실을 알게 된다면 너도 나도 준상과 파티를 맺기 위해 달려들지도 모른다. 사실 서윤으로서도 이후 준상과 대면할 때마다 몇 번이나 그런 부탁을 하고 싶은 충동을 참아야만 했다. 그런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준상이 먼저 나서서 파티를 맺어주겠다고 한다. 혹시 괴물 꽃의 위협이라든가, 다른 나라의 이목이 집중되는 상황이니 위험 요소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라도 더 실력을 높여주겠다는 뜻일까. 아니면 달리 무언가 꿍꿍이가 있는 것일까. 현재로서는 준상의 속내를 알 도리가 없었지만, 어느 쪽이 되었든 서윤으로서는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 주신다면 저희로서야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정말이십니까?” 솔직히 사막에서도 귀찮은 걸 억지로 한다는 느낌이었기 때문에 서윤은 다시 한 번 확인을 했지만 준상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서윤은 급히 밖으로 나가 길드원들을 소집한 다음 준상의 뜻을 전했다. 그들이 다른 귀환자들보다 상위의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퀘스트에 돌입하면 긴장을 늦출 수가 없는 것은 매한가지. 준상이 미처 알려주지는 않았지만, 그와 함께 하면 헤네스가 장착한 방패 덕분에 수호와 불굴이라는 효과가 부여되며, 여기에 신기루 꽃의 긴급 회피 기능까지 적용된다. 다시 말해, 준상이 지닌 행운 효과를 능가할 정도의 엄청난 불운을 지닌 자가 아닌 이상 퀘스트 수행 도중 전사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들은 미처 이런 내용까지 알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편하고 쉽게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기회를 마다할 이유가 없는 것은 마찬가지다. “저요! 제가 갈래요!” 최초 길드를 결성했던 사인방 가운데 현재 가장 레벨이 떨어지는 진세아가 손을 번쩍 들었다. 뿐인가. 이들 가운데 가장 레벨이 높은 서유미조차 머뭇거리며 눈치를 살피더니 얼른 손을 들었다. 그러자 다른 이들도 이에 질세라 얼른 손을 들었다. “으음...” 솔직히 말하자면 서윤도 준상의 파티에 끼고 싶은 것은 매한가지.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 길드장의 권력을 앞세우는 건 불화의 씨앗을 만드는 행위 밖에 안 된다. 결국 서윤은 자신이 임의로 선택하기 보다는 준상에게 판단을 맡기기로 결정을 내렸다. “나보고 고르라고?” “네.”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종이 하나를 가져오게 한 다음 그곳에 줄을 몇 개 그었다. “헤네스.” “네.” “원하는 곳에 가로줄을 그어봐.” “...” 그것은 다름 아닌 사다리 타기. 준상이 임의로 세 명을 고르는 것이 가장 간단하기는 하지만, 결국 이래저래 말이 나올 가능성이 많은 건 마찬가지니 아예 무작위 추첨 방식을 선택하기로 정한 것이다. 헤네스는 준상이 그어 놓은 일곱 개의 줄 이곳 저곳에 가로 줄을 연결해 사다리 타기를 완성시켰고, 그 작업이 끝나자 준상은 다른 길드원들을 불러오게 했다. 길드원들은 사자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준상의 모습을 힐긋 거리며 방안에 들어왔고, 그들이 들어서자 사다리의 중간 위치를 가린 준상은 아래쪽 세 군데에 동그라미를 그리고는 선택의 기회를 주었다. “으음...” “전 여기요.” “그럼, 난 여기...” 길드원들이 선택을 마치자, 준상은 종이를 서윤에게 건네주었다. 서윤은 그것을 받아 당첨 여부를 확인했다. 그 결과, 준상과 파티를 맺을 세 명의 길드원이 정해졌다. “쳇... 아깝네.” “아자!” “우웅...” 그 결과 윤성렬, 정다빈, 이한서의 세 명이 선택되었다. 준상은 그들과 파티를 맺은 다음, 메신저에 이 자리에 모인 길드원들을 모조리 등록한 다음 말했다. “퀘스트가 나오면 바로 연락하겠다.” “네?” 준상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한 사람은 없었지만 그들은 일단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다른 이들보다 훨씬 긴 퀘스트 대기 시간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이 시간이 다른 이들보다 빠르게 퀘스트를 받는 것인지, 아니면 발동은 마찬가지인데 대기 시간만 더 긴 것인지 아직 제대로 확인한 적이 없었다. 물론 준상은 전자일 것이라고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정확한 내용은 직접 확인하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일. 물론 이번에 파티를 맺는 이유는 단순히 그것 뿐만이 아니다. 현재 준상은 거의 버그 플레이에 가까운 행위로 다크 시드 사용자들을 섬멸하고 에픽 퀘스트를 강제 발동 시킨 탓인지, 일반적인 퀘스트 발동이 거의 정지되어 있는 상태다. 처음 몇 주는 우연일 수도 있다 싶었지만, 그 기간이 한 달이 넘어서자 준상은 이것이 퀘스트 수행 횟수의 제한이라든가, 자신의 행위에 대한 제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바로 다른 이들과의 파티 플레이. 자신에게 퀘스트가 발동되지 않는다면, 다른 이에게 발동된 퀘스트를 수행하면 될 일 아니겠는가. 어떻게 보자면 이것 역시 에픽 퀘스트 강탈과 그리 차이가 없는 일이긴 하지만, 생각해 보면 퀘스트 시스템을 관리하는 자들은 준상의 이런 행동을 바라며 퀘스트 제한을 걸어 버린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물론 서윤과 그의 길드원들은 이런 내막은 모른 채, 그저 준상이 자신들의 능력을 키워주기 위해 퀘스트를 함께 수행해주는 것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파티 결성을 마친 준상은 곧바로 임서윤의 안내를 받아 물품이 담긴 컨테이너가 보관된 창고로 이동한 다음, 그것을 인벤토리에 담아 신기루 꽃으로 옮기는 작업을 시작했다. 분량이 상당히 많기는 했지만, 몇 번 왕복을 계속하자 물품의 운반은 어렵지 않게 모두 끝났다. 준상과 헤네스는 곧바로 임서윤과 헤어진 다음, 다시 이벨류아로 넘어가 물품의 일부를 브레아 가문에 전달했다. 창고 안에 컨테이너를 내려 놓는 작업이 끝나자, 준상은 젤란에게 조용히 말했다.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몇 군데의 지명을 말씀드릴 테니, 그곳의 위치와 현재 상황에 대한 조사를 해주셨으면 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에픽 퀘스트의 추적을 위한 조사였다. 젤란은 준상의 그런 의도는 알지 못했지만,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승낙했다.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그런 일이라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감사합니다.” 이벨류아에서의 일을 마친 준상과 헤네스는 다시 신기루 꽃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사흘이 지난 어느 날. 마침내 기다리던 메시지가 준상의 눈앞에 나타났다. 새로운 퀘스트가 도착했습니다 -30분뒤 퀘스트 수행을 위한 장소로 전송됩니다. 안전한 장소로 이동해 주십시오. (남은시간: 29분 56초) ============================ 작품 후기 ============================ 이북 원고를 6권까지 넘겼습니다. 물론 출시 되려면 조금 더 시간이 걸리겠지만요. 다만 연재와 원고 정리를 병행하느라 그동안 좀 피곤했는데 이제야 여유가 생기겠네요. 예고는 없었지만, 기념 연참이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00253 트롤러 ========================================================================= 준상은 일단 파티원들에게 퀘스트 메시지가 도착했는지 알아보기 위해 메신저를 열었다. “서윤.” “네. 말씀하십시오.” “내 쪽에 퀘스트가 도착했다. 길드원들을 확인해 보도록.” “네? 아... 바로 알아보겠습니다.” 메신저 기능이 개방되어 있다면 이런 식으로 서로 대화가 가능하지만, 그렇지 않은 이상에는 일방적으로 메시지를 보내는 수밖에 없기 때문에 서윤에게 연락을 넣은 것이다. 준상은 서윤에게 연락이 오기를 기다리며 퀘스트 정보를 확인했다. 봉인을 지키십시오. :대륙 중앙을 관통하는 이스르 강에는 오래 전 봉인된 마수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그 이야기가 오래된 전설일 뿐이라고 알고 있지만, 불행히도 이스르 강 상류의 외딴 섬에 실제로 마수를 봉인한 다섯 개의 봉인석이 존재합니다. 봉인석을 파괴하기 위해 몰려드는 괴물들을 처치해 마수의 해방을 저지하십시오. [남은 시간:48시간 00분] [이 퀘스트는 여러 명의 인원이 동시에 참여합니다.] (Hidden) 봉인에서 깨어난 마수 바스반 탄을 처치하십시오 (협력) -> 미완료. (Hidden) 키메라 마법사를 처단하십시오. (협력) -> 미완료. (Hidden) 백인대장을 처단하십시오. (0/3) (협력) -> 미완료. (Hidden) 제한 시간 이내에 모든 괴물들을 섬멸하십시오. (0/432) (협력) -> 미완료. “흠...” 퀘스트의 주목적인 마수의 봉인을 파괴하려는 괴물들을 섬멸해 봉인을 지키는 것이다. 하지만 히든 퀘스트에는 이 기회에 문제가 되는 마수를 아예 토벌하는 내용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이것이 봉인의 파괴를 염두에 둔 것인지, 아니면 할 수 있으면 해 보라는 식의 의미인지는 알 수 없는 일. 일단 퀘스트 정보를 시야 한 켠으로 밀어놓고 있자니 서윤으로부터 다시 연락이 들어왔다. “확인해 봤습니다만, 저희 쪽에는 퀘스트 알림이 뜨지 않았습니다.” 역시 그랬던 것인가. 대기 시간이 생기면 그만큼 퀘스트가 더 빨리 도착한다는 것이 이로써 증명된 셈이다. 준상은 시야 한쪽에 자리잡은 퀘스트 시작 시간을 확인한다음 서윤에게 말했다. “나와 파티를 맺은 인원들에게 알려라. 약 27분 후에 퀘스트가 발동할 테니 미리 준비하라고.” “알겠습니다.” 서윤이 긴장한 표정으로 연락을 끊는 것을 본 준상은 얀트훈센에 나가 있는 헤네스와 요정계에서 여전히 분신 팔찌의 연구를 계속하고 있는 리체스에게 연락을 넣어 신기루 꽃으로 귀환할 것을 지시했다. 그러자 요정 보좌관을 통해 연락을 받은 헤네스와 연구실에 있던 리체스가 거의 동시에 신기루 꽃으로 돌아왔다. 준상은 두 반려를 바라보며 말했다. “오랜만의 퀘스트다, 준비하도록.” “네!” 둘은 곧바로 그렇게 대답한 다음 각자 장비를 확인했다. 그녀들이 인벤토리에 담긴 물품을 비롯한 다른 장비들을 확인하는 모습을 보며 준상 역시 전투를 위해 필요한 장비들을 착용했다. 사자 가면을 쓰고 부츠와 망토를 착용하자, 두 반려 역시 준비를 마치고 그에게로 다가왔다. 남은 시간을 살펴보니 대충 이십 분 정도. “준비됐어?” “네.” “그럼 잠시 들어가 있어라.” “그럴게요.” 준상은 그녀들을 역소환한 다음, 퀘스트 즉시 시작 기능을 활성화했다. 한 줄기 빛이 그의 몸을 감싸는가 싶더니, 어느새 준상은 드넓은 강 한복판에 자리잡은 작은 섬에 도착해 있었다. “이게 봉인인가.” 섬에는 넓고 평평한 돌 다섯 개가 오각형 형태로 자리잡고 있었다. 준상은 퀘스트 정보에 나타난 표식을 통해 그것이 봉인석임을 확인하자, 곧바로 두 반려들을 비롯한 정령과 야수, 그리고 펫들을 일시에 소환했다. 헤네스는 도착하기가 무섭게 팔찌를 작동시켜 방어복으로 몸을 감싸고는 수호의 신물을 꺼내 왼손에 장착하고 피와 혼돈의 깃발이 부착된 미늘창을 손에 들었다. “여긴...” 주위를 돌아보는 헤네스를 향해 준상은 이곳의 지명을 말해 주었다. “이스르 강이라더군.” “아...” 헤네스가 어딘지 대충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자, 리체스는 얼른 날아와 준상의 어깨 위에 자리 잡으며 말했다. “뭘 하면 되는 거죠?” “여길 지켜야 한다.” 준상은 그렇게 운을 뗀 다음, 이 퀘스트의 목적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했다. “헤에... 마수라니. 일전에 봤던 그 괴물 비슷한 건가요?” “정확히 어떻게 생긴 건지는 나도 모른다. 하지만 평범한 생물에게 마수라는 명칭이 생기지는 않았겠지.” “하긴, 그렇겠네요.” 너무 일찍 온 탓일까. 준상은 일단 갑가오리를 보내 공중에서 적을 찾도록 했지만, 하늘 위에서는 별다른 징후가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물 속으로 오는 모양이군.” 준상은 여러 가지 정령을 많이 부리고 있었지만, 아쉽게도 물의 정령은 새벽이슬 단 하나 뿐이었다. 물 위라면 몰라도 정령 하나를 가지고 이 드넓은 강바닥을 샅샅이 수색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 “할 수 없군.” 결국 준상은 적극적인 수색을 포기하고 미니맵을 확대해 적의 접근을 파악하는 쪽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야수들과 정령들을 다섯 개의 봉인석 주위에 포진시켜 놓고 잠시 기다리자, 뒤늦게 세 명의 파티원들이 섬 한 가운데로 전송되어 왔다. 그들은 헤네스의 것과 비슷한 슈츠를 입고 있었는데,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위를 살피다가 준상을 발견하고는 얼른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안녕... 하세요.” 머뭇거리며 준상에게 꾸벅 고개를 숙인 것은 전격 마법과 바람의 정령을 다루는 정다빈이었고, “안녕하십니까.” 정중한 태도로 꾸벅 허리를 굽히며 인사를 하는 떡 벌어진 어깨의 거한은 윤성렬이었으며, “반갑습니다.” 윤성렬과 비교하면 어쩐지 조금 왜소한 느낌을 저버릴 수 없는 가는 체구의 소년은 이한서였다. 준상은 그들이 입고 있는 옷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건?” 그 말을 듣고 질문의 의도를 파악한 윤성렬이 얼른 대답했다. “귀환자용의 전투 방어복 양산형입니다. 일단 성능 시험을 겸해서 이번에 저희 셋이 우선적으로 착용하고 퀘스트에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벌써 양산형이 나온건가. 하긴 준상과 헤네스가 가진 원형이 만들어진지도 제법 시간이 지났다. “성능은?” 이어진 물음에 답한 것은 정다빈이었다. “잘은 모르겠는데... 원형의 70퍼센트 정도 방호력을 지니고 있다고 들었어요.” “70퍼센트라...” 아무래도 원형이 아닌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뭔가 묘한 수치가 아닐 수 없다. 그렇게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늑대들과 함께 강 너머를 바라보고 있던 헤네스가 세 사람의 도착을 알아차리고 다가와 바이저를 위로 올리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오랜 만이에요.” 오랜만이라고 해봐야 고작 사흘 밖에 되지 않았지만, 세 사람은 사근사근한 헤네스의 말을 듣자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주고 받았다. 특히 이한서의 경우에는 헤네스가 척 보기에도 무거워 보이는 폴암과 커다란 일각수 형상의 방패를 들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머, 머, 멋있네요.” 금새 얼굴이 새빨개져서 말까지 더듬는 이한서의 모습에 헤네스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고마워요. 그런데... 죄송해요. 이름이?” 하지만 불행히도 헤네스는 이 수줍음 많은 소년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한서입니다.” 이한서는 잔뜩 풀이 죽은 채 자신의 이름을 대답했고, 헤네스는 어쩐지 미안한 느낌이 들었는지 그에게 다음에는 이름을 기억하겠노라 말했다. 그렇게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동안, 미니맵을 주시하고 있던 준상은 화면 밖에서 붉은 점들이 몰려오는 모습을 확인하자 바로 짧게 말했다. “온다.”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조금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대화를 나누고 있던 다른 세 사람은 급히 주위를 돌아보며 경계하기 시작했다. 헤네스는 전투 태세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문득 깜짝 놀란 표정을 짓더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지금요?” 그녀는 잠시 우물쭈물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았어요. 그럼 부탁드릴게요.” 헤네스는 그 말과 동시에 잠시 눈을 감더니, 이내 천천히 눈을 떴다. 준상은 어렵지 않게 그녀의 변화를 알아볼 수 있었다. 단순한 환각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부드럽고 커다란 귀여운 눈망울을 지니고 있던 헤네스의 인상이 어쩐지 조금 날카롭게 변해 있었다. 인상만 살짝 변한 것이 아니다. 실질적인 외형의 변화 또한 있었다. 부드러운 갈색 머리카락에는 살짝 금빛 광채가 돌기 시작했고, 눈동자 역시 사파이어 같은 파란 색으로 빛나기 시작한 것이다. 준상은 그 모습을 보고는 망념의 공간에서 헤어지기 전에 보았던 착한 기안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었다. “이야... 이런 식으로 강바람을 맞는 것도 정말 오랜 만이네.” 헤네스의 몸에 빙의한 기안은 크게 기지개를 켜며 그렇게 말하더니 이내 준상을 돌아보며 말했다. “안녕. 이런 식으로 다시 보는 건 오랜 만이지?” “그렇군.” “그때는 그냥 그런가보다 했는데, 이렇게 보니 너 제법 멋있다. 하하.” 기안은 그렇게 말하고는 털털한 느낌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갑작스런 변화에 놀란 것은 그녀를 은근히 훔쳐보고 있던 이한서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귀엽고 사랑스럽던 그녀가 갑자기 선머슴처럼 껄껄 웃으며 준상의 어깨를 툭툭 치고 있으니 당황하지 않으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이다. 물론 준상은 그러거나 말거나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지만, 그의 어깨 위에 앉아 있던 리체스는 달랐다. 이미 수호의 신물에 잠들어 있던 싸우는 성녀 기안에 대해서는 준상과 헤네스로부터 전해들은 바가 있었지만, 보자마자 준상에게 다짜고짜 반말을 하는 그 모습을 보자 리체스는 참지 못하고 기안을 향해 외쳤다. “야! 너!” “응? 나?” “그래. 너 어디 감히 우리 주인님한테 반말이야?” “뭐?” 기안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다시 웃으며 말했다. "주인님?" 바로 그때. 물 위로 도마뱀 머리를 한 인간형의 괴물들이 솟구쳐 올랐다. 어림잡아도 족히 수십마리는 되어 보이는 숫자와 성인 남자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보이는 커다란 체구에 윤성렬과 정다빈, 그리고 이한서는 놀라며 곧바로 전투 태세에 돌입했다. 하지만 준상은 우선 적들의 모습을 느긋한 표정으로 한번 훑어 보았다. 통찰의 능력에 추가된 직관의 기능을 통해 적들의 공격력과 방어력, 그리고 특수능력이 준상의 눈에 깃발의 형태로 나타났다. 공격력, 파란색. 방어력, 파란색. 그리고 마지막으로 특수능력 녹색. 이래서야 준상에게는 준비 운동감도 되지 못한다. 준상은 곧바로 봉인석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야수와 정령들에게 공격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순식간에 얼음 폭풍과 벼락, 불덩이등이 섬 주위에 휘몰아치며 도마뱀 괴물들을 쓸어버리기 시작했고, 그 무시무시한 융단폭격을 피해 섬 위로 상륙한 놈들에게는 야수들이 벌떼처럼 달라붙어 순식간에 숨을 끊어 놓았다. “...” 윤성렬과 정다빈, 그리고 이한서는 손가락 하나 까딱 않고 소환물 만으로 수십마리의 도마뱀 괴물들을 쓸어버리는 준상의 모습에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동안 제법 많은 퀘스트를 거치며 나름 강해졌다 생각하고 있었건만, 이건 격이 틀리다는 말 밖에 나오지 않는 상황 아닌가. “내가 이래봬도 죽은지 이백 년은 넘었거든. 그 정도 나이차이면 반말 좀 해도 상관없잖아.” 물론 그런 와중에도 기안과 리체스의 대화는 전혀 끊기지 않고 있었다. “이백 살? 내 나이 십분의 일도 안되는 게 어디 감히 나이 타령이야?” “뭐?” 기안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리체스를 바라보았지만, 전대 요정 여왕은 당당하게 말했다. “난 일만 살 넘은 뒤로는 아예 햇수를 세는 걸 잊어 버렸어. 이 애송이 유령아.” 리체스의 말에 기안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일만 살? 노, 농담이지?” 하지만 리체스는 옆구리에 손을 척 얹은 채로 뻐기듯 대답했다. “내가 너하고 농담할 나이로 보이니?” “...” 아니. 아무래도 일만 살 먹은 괴물 요정으로는 보이지 않는 걸. 기안은 아무래도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얼른 주위를 돌아보고는 말했다. “아! 싸움 시작했네. 잠깐만. 좀 있다 마저 얘기하자.” “야, 너!” 리체스는 냅다 도망치는 기안의 모습을 보며 볼을 부풀렸지만, 이내 준상을 바라보며 혀를 쏙 내밀며 말했다. “이제 앞으로는 나이 타령 못할 거에요.” “...” 나름대로 자신을 위해서 나서 준 것은 고맙지만 말이지. 준상은 이걸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난감해 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거나, 정령과 야수들의 요격에도 불구하고 몇몇 도마뱀 괴물들은 살아 남아 봉인석 근처로 접근했다. 윤성렬과 정다빈, 그리고 이한서는 봉인석을 향해 망치를 내리치려 드는 도마뱀 괴물을 공격하다가, 뒤에서 외치는 소리를 듣고는 움찔 놀라 길을 열어 주었다. “비켜! 비켜! 비켜!”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헤네스의 몸에 빙의한 기안. 그녀는 방패를 앞세운 채 그대로 달려가더니 자신보다 월등한 체구를 지닌 도마뱀 괴물들을 향해 돌진했다. 누가 봐도 상대를 날려버리기는 커녕, 오히려 튕겨나가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싶은 느낌이었고, 당사자인 도마뱀 괴물들 역시 가소롭다는 듯이 그녀의 돌진을 받아들였지만 결과는 그들의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케엑! 한 줄기 외마디 비명과 함께 도마뱀 괴물들이 뭉텅이로 볼링핀처럼 날아가 버린 것이다. “우랴아아아!” 그뿐인가. 자기 키보다도 훨씬 큰 미늘창을 마구 휘두르며 마치 배팅 연습을 하듯 호쾌하게 도마뱀 괴물들을 날려 버리기 까지 한다. “...” 이한서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사막에서 처음 헤네스를 만난 이후, 그는 마음 속에 그녀의 모습을 계속 해서 되새기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모습은, 그가 마음 속에 그려왔던 갈색 머리의 아름다운 미소녀와는 백만광년 정도는 되는 먼 거리에 떨어져 있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기안은 도마뱀 괴물들의 머리를 미늘창의 도끼날로 날리고 그것을 축구공처럼 뻥 걷어차면서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다 덤벼! 덤비라고!” 그 목소리를 들으며, 이한서는 어째서인지 그녀에게 채찍으로 얻어맞던 때의 일이 떠올라 몸을 부르르 떨었다. 00254 트롤러 ========================================================================= “위험해!” 헤네스의 모습을 보며 환상과 실제의 차이를 여실히 느끼고 있던 이한서는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듣고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큭!” 이한서는 자신의 머리를 향해 내리치는 커다란 망치를 얼른 피하며 손에 쥔 환도를 휘둘렀다. 엉겁결에 휘두른 환도의 날 끝에 적의 손가락이 걸리는 느낌이 전해졌지만, 이한서는 그것을 확인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얼른 몸을 옆으로 피했다. 얼른 무너진 자세를 가다듬는데, 한줄기 섬광이 그를 스치고 지나가며 적의 몸을 두들긴다. 순간 달궈진 공기를 통해 오존 냄새가 확 터져 나온다. 그 섬광의 정체는 바로 정다빈이 쏘아낸 전격이었다. -크엑! 그렇지 않아도 물에서 막 빠져 나온 상황이었던 도마뱀 괴물은 정다빈이 쏘아낸 전격에 명중되자 몸을 부들부들 떨었고, 이한서는 그 틈에 얼른 자세를 바로잡은 다음 환도를 사선으로 그어올려 괴물의 목을 베었다. “헉... 헉...” 일순간이지만 정신줄을 놓고 있다가 자칫 골로 갈 뻔 했던 이한서는 목을 부여잡고 비틀거리는 도마뱀 괴물의 모습을 보면서 숨을 몰아쉬었다. 물론 그 와중에도 기안은 물가에서 튀어나오는 도마뱀 괴물들을 두더지 잡듯이 때려잡고 있었다. “하하핫! 가죽이 아주 탄탄한 게 손맛이 기가 막히구나!” 그렇게 외치며 괴물들을 미늘창의 창대로 신나게 두들기고 있는데, 보통의 도마뱀 괴물보다 더 우람한 체구를 지닌 괴물 하나가 괴성과 함께 물에서 뛰쳐나오더니 손에 들고 있던 커다란 곡도로 기안을 후려쳤다. 놈의 정체는 바로 백인대장. 물속에서 다른 도마뱀 괴물들을 지휘하고 있다가, 기안이 설치는 모습을 보고는 분노해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크크!” 기안은 얼른 방패로 놈의 곡도를 튕겨내는가 싶더니, 그대로 상대의 품에 달려들었다. 수호의 신물은 방패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튀어나온 일각수의 뿔은 그 자체가 날카로운 창날처럼 위협적이다. 백인대장은 자신의 몸통을 향해 쇄도하는 날카로운 일각수의 뿔을 보고는 그것을 얼른 손으로 나꿔채 방향을 바꾸려 했다. 그러나 성난 무소처럼 돌진하는 기안의 기세를 그런 식으로 죽이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고, 아차 싶은 순간 수호의 신물 위로 돋아난 일각수의 뿔은 백인대장의 어깨를 짓뭉개며 뚫고 들어가 버렸다. -크악! 백인대장은 비명을 지르며 손에 든 곡도를 휘두르려 했지만, 다음 순간 날아든 깃발 달린 미늘창이 놈의 손목을 후려쳤다. “시끄러! 입 냄새 나니까 닥쳐!” 도끼날이 달린 미늘창 자체의 무게도 만만치 않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거기에 깃발마저 달린 상황이라 도저히 한손으로 휘두를 수 없을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기안은 헤네스의 여린 팔목으로 그 육중한 중병기를 휘둘러 백인대장의 머리를 내리쳤다. 백인대장은 연속된 공격에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정수리를 향해 떨어져 내리는 미늘창을 어떻게든 피하려 했다. 허나 고개를 살짝 비트는 순간 미늘창은 여지없이 놈의 어깨죽지로 떨어져 내리며 살을 가르고 뼈를 부숴버렸다. -크에엑! 백인대장은 죽는다고 비명을 질렀고, 기안은 그 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피하면 더 아프다니까. 그냥 깔끔하게 가라.”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금 미늘창을 휘둘러 백인대장의 머리통을 둘로 갈라버리고 말았다. 백인대장을 해치운 기안은 몸에 과부하가 걸린 것을 깨닫고는 일단 뒤로 물러났다. 헤네스는 준상에게 짐이 되지 않도록 틈틈이 계속 수련을 계속해 왔었다. 때문에 지금 그녀의 체력이나 근력은 어지간한 광전사들에게도 뒤지지 않을 정도였지만, 기안 같은 전설 속에나 나올 법한 존재를 만족시키기에는 아직 부족한 점이 많았다. “아직 좀 부족하긴 하지만, 그래도 제법 쓸 만 하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보통의 소녀가 지닐 만한 근력이 아닌 것만은 분명한 일이었다. 애초에 평범한 소녀였다면, 수호의 신물이나 호위장의 미늘창 같은 무기를 들고 한 번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이미 근육 파열이 일어나 전투도 뭐고 물 건너 가버렸을 것이다. 어쨌든 기안이 백인대장을 해치우자 도마뱀 괴물들의 기세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이내 정령의 융단 폭격이 다시 한 번 이어지자 수십에 달하는 시체를 남겨둔 채 일단 물러가기 시작했다. 준상은 미니맵을 통해 적이 완전한 것을 확인하자 정령과 야수들을 불러들인 다음, 기안에게 말했다. “치유를.” 그 말을 들은 기안은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쩍 다시더니, 이내 자세를 바로하고 눈을 감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날카롭던 인상이 조금 선하게 바뀌며 착한 기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 그녀는 묘하게 색기 넘치는 표정으로 탄성을 지르며 오랜 만에 느끼는 강바람을 만끽하는가 싶더니 이내 화들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죄송해요. 너무 오랜 만이라 저도 모르게...” “...” 기안은 준상을 향해 배시시 웃음을 지어 보이더니, 이내 미늘창을 땅에 박아 넣은 다음 한손을 가슴에 댄 채 눈을 감고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녀의 몸을 중심으로 은은한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봉인석 주위에 늘어서 있던 야수들은 물론이고 정다빈과 이한서, 그리고 윤성렬의 몸에서 그녀가 뿜어내는 것과 같은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이건...” “오오오... 힘이, 힘이 솟는다!” 윤성렬은 몸에서 힘이 불끈 불끈 솟는 느낌에 탄성을 지르며 펄쩍 펄쩍 뛰기 시작했고, 정다빈과 이한서도 표현만 하지 않았을 뿐 몸 안 깊숙한 곳에서 샘 솟듯이 흘러나오는 힘의 파동에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기안은 기도가 끝나자 다시 배시시 웃음을 지으며 준상에게 말했다. “여러분의 내면 깊숙한 곳에 숨겨진 생명의 파동을 활성화시켰어요.” “수고했다.” “별 말씀을요.” 기안은 준상을 향해 묘하게 색기 어린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심각한 부상을 입은 이가 없는지 확인했지만 야수들도 길드원들도 그 정도의 부상을 입은 이는 없었다. 야수들 몇몇이 도마뱀 괴물과의 전투에서 작은 부상을 입었었지만, 리체스가 나설 것도 없이 밤톨이가 공처럼 튕겨 다니며 포션으로 이미 치유를 끝낸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아쉽지만 다친 이가 없는 건 좋은 일이죠.” 착한 기안은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헤네스에게 몸의 통제권을 넘겼다. 그녀는 다시 동글동글한 귀여운 눈매의 본 모습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헤네스는 준상과 눈이 마주치자 울상이 되더니 얼굴을 감싸고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헤네스?” 준상이 이름을 불렀지만, 헤네스는 주저앉은 채로 손을 들어 보이며 그의 말을 막았다. “잠시만... 이대로 있게 해주세요.” “...” 비록 기안에게 몸을 빌려 주었다고는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헤네스는 그들의 행동 하나 하나를 전부 보고 들을 수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착한 기안이야 그렇다 쳐도, 화난 기안의 그 거침없는 행동은 지금껏 조신한 아가씨로서의 모습만을 준상에게 보여주었던 그녀로서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준상과 리체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주저앉은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지만, 불행히도 도마뱀 괴물들은 헤네스가 마음을 추스를 시간마저 주지 않았다. “또 온다.” 미니맵을 통해 다시금 적들이 몰려오는 것을 확인한 준상이 그렇게 경고를 발하자, 헤네스는 쪼그리고 앉은 채 한숨을 푸욱 내쉬더니 조용히 중얼거렸다. “부탁... 드릴게요.” 그리고 잠시 눈을 감았다. 그러자 다시금 그녀의 머리 카락에 찬란한 금빛이 어리고, 눈동자에 푸른 기운이 서리며 화난 기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쪼그린 몸을 일으키며 팔을 한 차례 크게 휘둘러 보이더니, 바닥에 꽂아 넣은 미늘창을 뽑아 내며 말했다. “흐흐, 그럼 또 한 바탕 놀아볼까.” 그렇게 중얼거린 그녀는 준상을 향해 한쪽 눈을 찡긋하더니 방패를 치켜 들고 외쳤다. “오라! 수호의 힘이여!” 그녀의 외침과 함께 방패에 형상화된 일각수의 눈이 번쩍 빛을 발하는가 싶더니 작은 파동 같은 것이 뿜어져 나와 섬 안에서 전투를 기다리고 있던 아군의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건...” 방금 전 착한 기안이 부여했던 힘과는 다른 기묘한 느낌. 하지만 그 순간 정다빈과 이한서, 그리고 윤성렬의 삼 인은 기안이 또다시 자신들의 몸에 무언가 좋은 영향을 끼쳤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렇게 해두면 맞아도 조금은 덜 아프게 되겠지. 이번에도 신나게 싸워보자고. 하하하!” 기안은 그렇게 말하며 껄껄 웃더니 미늘창을 들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괴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놈들은 무작정 돌격을 시도하다가 참담한 패배를 겪은 탓인지, 이번에는 조금 멀찍이 떨어진 물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다음 손에 들고 있던 단창을 일제히 집어 던졌다. 그들의 생각은 일견 타당했고, 보통의 귀환자들이라면 달리 몸을 숨길 만한 것도 없는 섬 안에서 고스란히 그 공격을 받아야만 했겠지만, 불행히도 지금 이 봉인석을 수호하고 있는 것은 그런 일반적인 능력의 소유자들이 아니었다. 준상은 적들이 단창을 꺼낸 순간 바로 바람의 정령들의 기운을 끌어올렸고, 뒤이어 그의 어깨 위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리체스도 아군을 보호하기 위한 마법을 발동시켰다. “튕겨내버려! 장난꾸러기 바람들아!” 그녀의 입에서 한 줄기 외침이 터져 나오자, 바람의 정령과 호응하는 하나의 보이지 않는 장벽이 섬을 에워쌌다. 기세 좋게 날아든 단창들은 정령과 마법이라는 이중의 보호막에 가로 막혀 힘없이 튕겨 나가고 말았다. 도마뱀 괴물들은 자신들의 원거리 공격이 힘없이 튕겨나가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바로 그 순간 준상에 의해 날아든 정령들이 그 머리 위에 다시금 화려한 융단 폭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아니, 이번에는 정령들만이 아니었다. 커다란 몸을 지닌 갑가오리가 마치 급강하 폭격기처럼 내리 꽂히며 입에서 파괴의 파동을 뿜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도마뱀 괴물들은 자신들이 지닌 원거리 공격 수단으로는 적을 분쇄하기는커녕 오히려 도륙 당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도마뱀 괴물들은 일단 물속으로 들어가 정령들과 갑가오리의 융단폭격을 피하려 했지만, 번개의 정령인 날벼락과 전격을 주특기로 하는 정다빈의 존재는 그것마저도 여의치 못하게 만들었다. 결국 그들은 함성을 터뜨리며 단 하나 남은 수단인 난전을 시도하기 위해 섬으로 돌격을 감행했지만, 그들 앞에는 검은색의 방어복으로 몸을 감싼 채 순백의 방패와 깃발 달린 커다란 미늘창을 손에 쥔 기안이 버티고 서 있었다. “하하하! 그래야지! 어서 와라! 성대한 죽음이 너희들을 기다리고 있으니!” 기안은 그렇게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도마뱀 괴물들을 방패로 후려치고 미늘창으로 박살내기 시작했다. 그녀의 몸에서는 순식간에 기이한 열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헤네스의 신체가 극한의 상황에 도달하며 한 단계 더 높은 곳으로 진화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표식이었다. 준상은 기안이 웃음을 터뜨리며 외치는 그 소리를 들으며 지금 헤네스의 심정이 어떨까 하는 생각에 쓴웃음을 지어야 했다. 리체스는 발광하듯 도마뱀 괴물들을 박살내는 기안의 모습을 보며 혀를 차더니 준상을 향해 말했다. “저도 슬슬 움직일게요.” “그래.” 준상의 허락이 떨어지자 리체스는 그들이 버티고 선 섬 뒤쪽으로 은밀하게 접근하는 도마뱀 괴물들의 머리 위로 날아가더니 곧장 마법을 발동했다. “쏟아져라. 천상의 심판이여! 작렬하는 뇌성으로 나의 적을 물리쳐라!” 그녀의 외침이 터져 나오자 정다빈이 쏘아내는 전격과는 격이 다른 한 줄기 뇌격이 하늘로부터 커다란 우레 소리와 함께 강 위로 떨어져 내렸다. 굳이 비교를 하자면, 정다빈이 쏘아내는 전격은 나뭇가지이고, 리체스가 방금 떨군 뇌격은 커다란 거목이라 할 수 있을 정도다. 리체스가 발동한 마법은 강물 위에 직격하는 순간 상당한 양의 물을 그대로 기화시킨 것도 모자라 물속에서 은밀히 움직이고 있던 도마뱀 괴물들과 애꿎은 물고기들의 몸을 그대로 지져버리고 말았다. 일격에 십여 개체에 달하는 도마뱀들을 전기 구이로 만들어 버린 리체스는 계속해서 물 속에 숨은 도마뱀 괴물들을 향해 강대한 뇌격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물 속에서 아까와 마찬가지로 커다란 도마뱀 괴물 하나가 리체스를 향해 뛰쳐 나왔다. 바로 두 번째 백인대장이었다. -크와악! 놈은 괴성을 지르며 작은 리체스를 향해 무기를 휘둘러지만, 그녀는 조롱하듯 하늘을 자유로이 날아다니며 다시 마법을 쏟아냈다. “작다고 얕보면 곤란하지. 받아라! 낙숫물 연타!” 그녀의 외침이 터져 나옴과 동시에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강물이 솟아오르더니 백인대장의 머리를 향해 작은 물방울을 기관포처럼 쏟아내기 시작한다. -크워어! 백인대장은 처음에는 그런 물방울의 연속 공격 따위 무시하려 했지만, 이내 적중당한 부위에 참을 수 없는 고통이 가해지기 시작하자 비명을 지르며 손을 내저어 그것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초당 수십 발의 속도에 가공할만한 압력마저 지닌 물방울들의 연타는 그런 도마뱀 괴물의 살가죽을 찢고 들어가기 시작했고, 이내 강물은 백인대장이 흘린 피로 붉게 물들었다. “음... 발상은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역시 위력이 좀 모자른가.” 리체스는 아쉬운지 입맛을 다시더니 다시 한 번 강력한 뇌격을 불러내 백인대장의 머리 위에 떨구어 그 생명을 거둬들였다. 00255 트롤러 ========================================================================= 두 번째 백인대장이 리체스에 의해 전기구이가 되어 쓰러지자, 도마뱀 괴물들은 다시금 사기를 잃고 후퇴하기 시작했다. 갑가오리가 몽몽이를 태우고 돌아다니면서 물 위에 둥둥 떠내려가는 괴물들로부터 시드를 모으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데, 문득 기안이 다가와 준상에게 말을 걸었다. “그냥 이대로 기다리는 것보다는 적의 본거지를 치는 쪽이 낫지 않을까?” 이 정도로 전력 차이가 난다면 더 이상의 정면 공격 보다는 소수의 병력을 찔끔찔끔 투입하면서 피로를 유발하는 작전을 써올 가능성이 높다고 기안은 생각하고 있었고, 그것은 준상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미 손을 써뒀다.” 준상의 대답에 기안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손을 써두다니. 이 섬을 공격하는 적의 본거지를 찾기 위해서라면 뭔가 후퇴하는 저들의 뒤를 쫓기라도 해야 하는데, 그녀의 감각에는 그런 식으로 추격하는 무언가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말?” “물론.” 기안은 여전히 미심쩍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녀가 알아차리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준상이 사용한 것은 미니맵에 추가된 새로운 기능인 ‘추적’.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은 채로 느긋하게 전투를 구경만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있었지만, 지금 그의 시야에는 줌 아웃 기능으로 넓게 펼쳐진 미니맵 안에서 후퇴한 적들이 한 곳에 집결하는 모습이 일목요연하게 포착되고 있었다. 준상과 기안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동안, 주위를 둘러본 리체스가 돌아왔다. 그녀는 곧바로 준상의 어깨 위에 자리를 잡더니 조용히 속삭였다. “푸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아요. 어떻게 하시겠어요?” 준상은 그 말에 바로 대답했다. “일단 놈들을 쓸어버린 뒤가 좋겠지.” “알았어요.” 전투가 끝나자 기안은 다시 몸의 통제권을 본래의 주인인 헤네스에게 돌려 주었다. 이번에도 헤네스는 준상을 마주 볼 엄두조차 내지 못한 채 그대로 주저앉아 얼굴을 두 팔로 가렸다. “몸은 어때.” 기안의 움직임은 아무래도 헤네스의 신체 능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리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준상은 조용히 혹시 몸에 무리가 가지는 않는지 물었지만, 헤네스는 고개를 숙인 채로 고개를 저어 보이기만 했다. 준상과 리체스가 쓴웃음을 짓고 있는데, 문득 갑가오리가 그들의 머리 위로 스쳐 지나가더니 물에 젖은 갈색 털뭉치 하나를 헤네스의 머리 위에 떨구었다. “...” 헤네스의 머리 위에 튕기듯 떨어져 내린 갈색 털뭉치의 정체는 다름 아닌 주머니 다람쥐 몽몽이였다. 갑가오리가 운송수단이 되어 주긴 했어도 시드나 아이템 같은 걸 수집하려면 물에 젖는 건 피할 수 없는 일이었고, 덕분에 몽몽이는 흠뻑 젖은 모습이 될 수 밖에 없었다. “...” 자신을 우울한 표정으로 물끄러미 바라보는 헤네스와 눈이 마주친 몽몽이는 짧은 앞발로 머리를 몇 번 쓰다듬더니 몸을 후드득 털어대기 시작했다. “꺅!” 갑작스런 몸털기로 인해 물벼락을 맞은 헤네스는 자신도 모르게 뒤로 넘어가며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그녀는 얼굴에 묻은 물을 닦다가 몽몽이의 모습을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풋!” 그도 그럴 것이 젖었던 털이 몸털기로 인해 이리저리 삐쭉삐쭉 뻗친 모습이 너무나 귀여웠기 때문이다. 몽몽이는 두 개의 앞발로 마치 세수를 하듯이 머리를 닦다가 한 번 더 몸을 부르르 몸을 털었고, 헤네스는 덕분에 또 한 번 물방울 세례를 받아야 했다. “아이, 참...” 헤네스는 웃으며 인벤토리에서 자신이 사용하는 물품을 담아둔 캐비닛을 꺼내더니 안에서 수건을 집어 몽몽이의 몸에 묻은 물기를 닦아주기 시작했다. 준상은 리체스와 함께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헤네스.” “네.” “저들과 함께 이곳을 지키고 있어라. 잠시 다녀올 곳이 있다.” “본거지를 공격하실 생각이신가요?” “그 말대로다.” 예전 같았으면 자신이 짐이 되기 때문에 떼어 놓고 가는 것이라 생각했겠지만, 기안의 놀라운 능력을 직접 체감한 헤네스는 이것이 그 능력에 대한 신뢰의 의미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맡겨주세요.” “그래.” 준상은 헤네스에게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춘 다음, 갑가오리를 불러 리체스와 함께 그 위에 올라탔다. “금방 다녀오마.” “네.” 준상은 몽몽이를 불러 갑가오리의 등에 앉힌 다음, 미니맵에 나타난 적의 본거지를 향해 움직였다. 갑가오리의 등에 올라타 하늘 높이 올라가자 구불구불하게 흐르는 이스르 강과 그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정글과도 같은 숲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준상은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십여 마리의 도마뱀 괴물들을 발견했지만, 일부러 못 본 척 그대로 지나쳤다. 지금 저들을 중간에서 요격하면 모처럼 집결한 적들이 기습을 알아차리고 흩어질 수도 있다. 봉인 쪽에 방어를 위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헤네스와 세 명의 길드원, 그리고 야수와 정령들이 빈틈없이 지키고 있으니 문제될 일은 없을 터. 준상은 그대로 그들을 지나쳐 적의 집결지로 계속 나아갔다. “이 근처에도 정령의 문이 있나?” 준상의 물음에 리체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요. 저도 그냥 이렇게만 봐서는 잘 모르겠는데요.” “그렇군.” 준상은 어렵지 않게 적들이 모여 있는 곳을 찾을 수 있었다. 한 무리의 도마뱀 괴물들이 작은 모래톱 위의 갈대숲에 집결해 있는 것을 확인한 준상은 미니맵에 나타나는 붉은 표식을 다시 한 번 살폈다. 남은 도마뱀 괴물의 수는 대략 백여 마리 남짓. 그리고 그 안에는 좀 더 크게 반짝이는 두 개의 표식이 있었다. 퀘스트 정보대로라면, 저들은 남은 하나의 백인대장과 이들을 이끄는 키메라 마법사일 것이다. “저들 가운데 마법사가 있다. 맡을 수 있겠나.” 그 말에 리체스는 당연하다는 듯이 바로 대답했다. “문제 없어요.” 준상은 그녀의 호언장담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말했다. “꽉 잡아라.” “네!” 준상은 갑가오리를 몰아 그들을 향해 곧바로 쏘아져 내려가기 시작했다. 섬을 공격하기 위한 다음 작전을 짜고 있던 도마뱀 괴물들은 문득 바람을 가르는 파공성에 고개를 들었다가 자신들을 향해 떨어져 내리는 거대한 그림자를 발견했다. 하지만 그들이 미처 무기를 집어 들기도 전에, 갑가오리의 입에서 쏘아져 나온 파괴의 파동이 하늘을 뒤덮은 거대한 해일처럼 그들을 덮쳐왔다. 파동의 중심에 직격한 도마뱀 괴물 몇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찢겨 나갔고, 그 주위의 도마뱀 괴물들도 크고 작은 부상을 입으며 흩어졌다. -크륵! 기습을 성공적으로 마친 갑가오리가 방향을 틀어 하늘로 다시 고개를 쳐드는 순간, 분노한 백인대장이 자신의 무기인 거대한 작살을 치켜 들었다. 하지만 놈은 그것을 집어 던질 수 없었다. 갑가오리가 하늘로 솟아오르는 순간, 그 위에서 뛰어내린 한 명의 인간 때문이었다. “흠...” 준상은 몸을 일으키며 진흙과 도마뱀 괴물들의 피로 질척하게 젖은 갈대숲의 모습을 가만히 둘러보다가, 인벤토리로부터 두 개의 거대한 철구를 꺼내 들었다. 백인대장은 갑작스럽게 등장한 적의 모습에 흠칫 놀랐지만, 이내 상대가 단 하나 뿐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작살을 높이 치켜 올리며 소리쳤다. -크롸아악! 그 소리를 듣자 도마뱀 괴물들은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준상을 향해 달려들었다. 준상은 도마뱀 괴물들의 그와 같은 맹목적인 돌진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어느 정도 거리가 가까워지는 순간 두 개의 철구를 들고 듀얼스톰을 발동했다. 그의 몸이 팽이처럼 빠른 속도로 돌기 시작했고, 두 개의 거대한 철구가 손에서 벗어나며 주위의 공기를 찢고 폭풍처럼 주위를 휩쓴다. 도마뱀 괴물들은 철구에 의해 발기발기 찢겨지는 대기의 비명소리에 움찔했지만, 그들은 미처 돌진하던 발걸음을 멈출 사이도 없이 이 철의 소용돌이 내부에서 뻗어나온 흡입력에 의해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콰가가가각! 질기고 단단한 도마뱀 괴물들의 가죽이 찢겨지고 그 안에 숨겨져 있던 근육과 뼈가 순식간에 거대한 철구에 의해 갈려져 한줌의 핏물로 변해 버린다. 준상은 오래지 않아 회전을 그치고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그러자 갈리고 부서진 도마뱀 괴물들의 피와 살점이 마치 비처럼 마른 갈대숲 위에 쏟아져 내린다. 일순, 갈대숲 위에는 구름이 스쳐지나가며 어둠이 드리워졌고, 그와 함께 바람이 불어와 짙은 피비린내를 주위의 공간에 흩뿌린다. 스스스스... 갈대가 바람에 의해 흔들리는 소리와 함께 도마뱀 괴물들은 눈앞에서 붉은 안광을 뿜어내고 있는 인물의 몸에 젖은 번들거리는 피가 망막 속에 선명하게 각인되는 것을 느꼈다. 그들은 몸서리쳤다. 그것이 때마침 불어온 스산한 바람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눈앞의 인물이 주는 공포라는 생소한 감정에 의한 것인지 그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런 식으로 누군가에 의해 공포를 느낀다는 것 자체가 그들로서는 처음 경험해 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공포는 그렇게 바람을 타고 흘러 붉게 물든 갈대 숲 위를 천천히 잠식해 들어갔다. 이것이야 말로 붉은 공포. 인간이 아닌 도마뱀 괴물이라 해도, 자신들의 머리 속을 휘저어 놓는 이 감각의 소용돌이만큼은 감당할 도리가 없었다. -크륵! 도마뱀 괴물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지만, 그들을 이끄는 백인대장과 봉인을 부수기 위해 이들을 불러낸 키메라 마법사만큼은 손끝을 저릿하게 만드는 공포에도 굴하지 않고 준상을 공격하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백인대장이었다. 키메라 마법사는 백인대장이 거대한 작살을 들고 준상을 향해 달려나가자 뒤늦게서야 그를 돕기 위해 마법을 발동할 준비를 했지만, 그 순간 한줄기 외침과 함께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마법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쏟아져라. 천상의 심판이여! 작렬하는 뇌성으로 나의 적을 물리쳐라!” 그것은 다름 아닌 전대 요정 여왕 리체스였다. 그녀는 미리 준상으로부터 적들 가운데 마법사가 있다는 것을 전해 듣고는 마력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가, 마침내 키메라 마법사가 마법을 발동하려는 기색을 보이자 곧바로 공격을 가한 것이다. “큭!” 키메라 마법사는 다급하게 지팡이를 하늘로 치켜 올리며 방어 마법을 발동했지만, 대기를 격렬하게 태우며 내리꽂히는 거대한 섬광을 온전히 막아내기에는 아무래도 역부족이었다. 꽈릉! 한 줄기 섬광과 함께 달궈진 공기가 울부짖는다. 시각과 청각을 마비시킬 정도의 강렬한 빛과 소리가 사라지자, 그곳에는 검게 그을린 채 온몸에서 연기를 뿜어내고 있는 키메라 마법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크윽...” 키메라 마법사는 온몸을 저릿하게 만드는 뇌격의 여파를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풀썩 주저 앉았다. 원래대로라면 방어가 실패한 시점에서 즉사했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위력. 하지만 방어 마법으로 인해 어느 정도 위력이 분산되고 다시 강화된 키메라의 신체가 뇌격의 피해를 줄여준 덕분에 즉사를 면할 수 있었다. 키메라 마법사는 흐릿해지는 정신을 부여잡으며 허공을 향해 화염 마법을 마구 쏘아내기 시작했다. 뇌격으로 인해 감각이 흐릿해진 상태에서는 리체스의 작은 몸을 제대로 조준하기가 어려웠지만, 멍하니 주저앉아 추가 공격을 허용할 수는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키메라 마법사가 폭주하듯이 주위에 화염을 쏘아대고 있을 때, 준상은 자신을 향해 돌진하는 백인대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크롹! 백인대장은 단숨에 준상을 꿰뚫어 버릴 것처럼 작살을 치켜들었지만, 미처 그것을 뻗어내기도 전에 면전으로 날아드는 거대한 철구와 마주쳐야만 했다. 도마뱀 괴물의 작은 두뇌로 생각하기에도, 자신의 작살로 이 거대한 철구를 꿰뚫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백인대장은 얼른 몸을 굴려 그것을 피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옆으로 몸을 날린 그가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하늘 위에서 무언가 거대한 것이 떨어져 내렸다. 백인대장은 마치 검은 태양처럼 순식간에 그의 시야를 덮어오는 거대한 무언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크륵? 그것이 백인대장의 마지막 말이 되고 말았다. 하늘 위에서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져 내린 거대한 철구는 그의 머리를 그대로 짓이기며 바닥과 충돌하고 나서야 움직임을 멈추었다. 콰직! 그리고 뼈와 살가죽이 으스러지는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다시 한 번 한줄기 섬광이 조금 떨어진 장소에 내리 꽂혔고, 이어서 처절한 비명 소리가 갈대숲에 울려 퍼졌다. “크아아악!” 도마뱀 괴물들은 그 비명 소리가 자신들을 이끌던 또 하나의 지휘자인 키메라 마법사의 것임을 어렵지 않게 이해했다. 화르르르... 키메라 마법사가 발악하며 쏟아놓은 화염은 어느새인가 갈대숲에 옮겨 붙으며 자욱한 연기를 뿜어내기 시작했고, 모든 지휘관을 잃은 도마뱀 괴물들은 그 검은 연기 속에서 천천히 자신들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 붉은 눈의 인간을 보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도마뱀 괴물들은 도망치고 싶어 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불행히도 준상은 이들을 놓아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결국, 이제 남은 것은 오직 하나. 학살 뿐이다. 도마뱀 괴물들은 준상의 눈빛을 보며 깨달았다. 이 괴물 같은 인간은 자신들을 놓아줄 생각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그들은 그와 같은 사실을 깨닫자 물러서던 걸음을 멈추고 서로를 돌아보더니 마음 속에 남은 최후의 용기를 쥐어짜며 준상을 향해 돌격을 개시했다. 준상은 그들이 자신을 향해 돌진해 오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다시 한 번 듀얼스톰을 발동했다. 크고 검은 두 개의 철구는 다시 한 번 휘몰아치며 불길에 휩싸인 갈대숲 위에 피의 비를 내렸다. 준상은 미니맵 상에 나타나 있던 퀘스트 표식이 모두 사라진 뒤에야 리체스에게 갈대숲의 불을 끄도록 했다. 리체스가 마법으로 갈대숲 위에 물을 쏟아 부어 불을 끄는 모습을 지켜보며, 준상은 갑가오리를 불러 그 위에 타고 있던 몽몽이로 하여금 갈대숲 위에 흩어진 도마뱀 괴물들의 사체로부터 아이템을 모아들이도록 지시했다. 이전에 던전에서 처음으로 키메라 마법사와 싸웠을 때, 그들은 보통의 시드가 아닌 다크 시드를 몸에 지니고 있었다. 그 때문에 이번에도 혹시 다크 시드가 나오지 않을까 했지만, 이 마법사는 다크 시드가 아닌 보통의 시드를 지니고 있었다. “흠...” 키메라 마법사에도 따로 종류가 있는 것일까. 준상은 불을 모두 끄고 돌아온 리체스와, 아이템 수집을 마친 몽몽이와 함께 다시 갑가오리 위에 올라탄 뒤 봉인이 있는 섬을 향해 날아올랐다. 도마뱀 괴물들을 모두 물리쳤지만, 아직 퀘스트는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 보통은 이런 경우 남은 시간 때문이라고 생각하겠지만, 히든 퀘스트를 모두 확인할 수 있는 준상의 생각은 달랐다. 봉인 속에 잠든 마수 바스반 탄. 이전에 그가 상대했던 마수들의 경우를 떠올려 본다면, 이 놈 역시 강력한 레어 시드를 그 몸 안에 품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레어 시드는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귀중한 물건. 특히나 지금까지 획득한 마수의 레어 시드는 초감각이나 초재생 같은 일반적이지 않은 강력한 능력을 소유하고 있으니 절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준상이 봉인석이 있는 섬으로 돌아오자, 헤네스가 그를 맞이했다. “수고하셨어요.” “별 일 없었지?” “기습이 있긴 했지만 어렵지 않게 물리칠 수 있었어요.” “잘했다.” 준상은 몽몽이로 하여금 아이템을 수거하게 한 다음, 연이은 격렬한 전투로 조금 지친 기색을 보이고 있는 길드원들을 향해 말했다. “이곳을 공격하려던 적들은 모두 소탕했으니 잠시 휴식을 취한 다음 마지막 전투를 치르도록 하겠다.” 정다빈과 윤성렬, 그리고 이한서는 적을 모두 소탕했다는 말에 반색하다가, 휴식을 취한 다음 마지막 전투를 치른다는 준상의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적은... 모두 소탕하셨다고 하시지 않았나요.” 정다빈의 물음에 준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그런데 또 누구와 싸운다는 말씀이신지...” 윤성렬의 이어진 질문에 준상은 천천히 봉인석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마지막 전투 상대는 저 안에 잠들어 있는 마수 바스반 탄이다.” “...” 세 길드원들은 준상의 선언에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마수와 싸우다니. 이게 갑자기 무슨 말인가. “하하... 농담이시죠?” 윤성렬은 웃으며 그렇게 말해 봤지만, 가면 뒤로 비치는 준상의 무감동한 눈빛을 보고는 이내 꼬리를 말았다. “크흠, 죄송합니다.” 00256 트롤러 ========================================================================= 이전까지 마수와 싸웠던 경험을 참고하면 봉인에서 풀려난 마수의 크기는 상당한 규모일 것이 분명한 상황. 그렇게 되면 아무래도 이 작은 섬 안에서 발을 붙이고 싸우는 것은 여러모로 불리한 점이 많다. “역시 그 수밖에 없나.” 준상은 다른 세 명이 휴식을 취하는 동안 봉인석을 돌아보고는 결국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헤네스.” “네.” “받아라.” “...” 준상은 이전에 요정들에게 받아서 보관해 두었던 요정의 술 두 개를 그녀에게 건넸다. “이건...” “요정의 술이다. 마시면 10분간 하늘을 날 수 있지.” “아...” 마수가 섬보다 작거나 수중형의 생물이 아니라면 상관이 없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결국 섬을 벗어나서 싸워야 한다.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모르지만, 그렇지도 않은 이상은 비행 능력을 준비해두는 것이 최선이다. “하나는 만약의 상황을 대비한 예비용이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어요.” 준상은 세 길드원들을 일단 조금 떨어진 강기슭으로 옮겼다. “저희들도 싸울 수 있습니다!” 정다빈이나 윤성렬은 별 말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정체 불명의 마수와 싸우는 위험에 직면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모양이었지만, 이한서의 경우에는 이런 식으로 싸움에서 배제되는 것이 불만이었던 모양이다. 물론 준상은 그의 의견 같은 건 깨끗이 무시했다. 통찰의 능력에 나타난 이한서의 능력은 공격력만 녹색이고 방어력과 특수능력은 모두 파란색.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이번 전투에서 도움이 되기는 어렵다. “하하... 얘가 아무래도 아직 좀 젊다보니... 죄송합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윤성렬은 얼른 이한서의 뒷덜미를 잡아 자신의 뒤로 끌어당기면서 사과했고, 준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섬으로 돌아갔다. 윤성렬은 준상이 갑가오리를 탄 채 자신들에게서 멀어지자, 이한서에게 말했다. “쩝...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다만, 너도 알잖아. 지금 실력으로는 무리란 걸.” “...” “이렇게 물러나게 해주는 것도 알고 보면 배려라고. 아무 상관없었으면 그냥 봉인부터 풀었을테니까. 무슨 말인지 알지?” “네...” “객기와 용기는 다른 거야. 다음에 또 그러면 형한테 혼난다. 알았냐?” “네.” 우울한 표정으로 말없이 고개를 숙이는 이한서의 모습에 윤성렬은 쓴웃음을 지은 채 그의 머리를 마구 흐트러뜨렸다. 세 사람이 강기슭에 앉아 멍하니 섬쪽을 바라보는 동안, 리체스는 준상이 정령과 야수들을 봉인석 주위에 배치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말했다. “시작할까요?” “그래.” 준상의 대답이 떨어지자, 리체스는 봉인석에 걸린 마법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곧바로 봉인석 위에 복잡한 문양들이 소용돌이처럼 흘러나와 허공에서 흩어지더니, 이내 유리 깨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하나의 봉인이 해체되었다. 우우우웅. 그리고 이어지는 기묘한 울림. 아마도 섬 안에 잠들어 있던 마수가 봉인이 풀린 것을 느낀 모양이다. “일단 하나.” 리체스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다음 봉인으로 향했다. 헤네스는 방패를 움켜 잡은 채 리체스가 봉인을 푸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눈을 감고 조용히 말했다. “부탁드릴게요.” 그러자 이내 그녀의 눈동자에는 푸른 기운이, 머리카락에는 금빛 찬란한 기운이 어리며 화난 기안이 헤네스 대신 그 몸을 움직이게 되었다. “마수 바스반 탄이라... 전설에나 나오는 괴물과 마주하게 되다니, 이거 흥분되는데? 후후후.” 기안이 그렇게 말하며 낮게 웃음을 흘리자, 그 말을 듣고 있던 준상이 물었다. “바스반 탄이 어떤 놈인지 알고 있나?” 준상의 물음에 기안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내가 살아 있을 때만 해도 제법 유명했으니까.” “...” 맹점이었다. 전설이란 과거의 일. 따라서 과거의 인물이라면 지금보다는 더 많은 일들을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준상은 간과했던 것이다. 물론 더 오랜 과거를 지나온 리체스가 있기는 했지만, 그녀는 기본적으로 요정계에 틀어박혀 그곳을 관리하는 일에만 전념해왔기 때문에 이쪽 세계에 대해서는 일반 요정들보다도 무지한 경향이 있었다. 준상은 그와 같은 사실을 깨닫자 기안에게 바로 물었다. “놈은 어떤 마수지? 아는 것이 있다면 설명해봐.” “음, 그러니까...” 하지만 기안이 다시 뭔가 말하기도 전에 리체스가 마지막 봉인을 해체하는데 성공했다. “휴, 끝났네요. 역시 처음이 어렵다니까.” 리체스는 보람차다는 듯이 그렇게 말하며 준상에게로 돌아왔고, 그녀의 말이 끝나는 순간 섬 위로 거대한 조개껍데기 같은 것이 굉음과 함께 불쑥 솟아올랐다. 기안은 그 거대한 조개의 형상을 보고 말했다. “맞아. 딱 저런 느낌이라고 들었어. 커다란 조개. 물론 내용물은 상당히 다르지만.” “...” 준상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건 그냥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약점은?” 준상은 일단 정령들로 하여금 공격을 시작하게 한 다음 다시 물었고, 기안은 멋쩍게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글쎄. 잘 모르겠는데. 워낙 오래전 일이라. 하하하...” “...” 준상이 얼굴을 찌푸리자, 그녀는 이내 무기를 고쳐 잡으며 이렇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뭐... 상관없잖아? 적이 나타나면 쳐부수면 되는 일이니까.” 그리고는 한차례 기합을 넣으며 수호의 기운을 주위에 퍼뜨리고는 마수 바스반 탄을 향해 곧바로 돌진했다. “비켜! 비켜! 비켜!” 방패를 앞세운 기안은 곧바로 땅 위에 드러난 거대한 조개 껍데기를 향해 돌진했고, 이내 격렬한 충돌음과 함께 다시 튕겨 나왔다. “어라. 제법 단단한데?” 하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연이어 조개 껍데기의 한 부분을 향해 맹렬하게 돌진을 계속했다. 쩌적! 그러자 더 이상은 견디기 어려웠던 모양인지 조개 껍데기가 휘릭 옆으로 몸을 돌리더니 반으로 갈라지며 안에서 개구리 혀와 같은 거대한 촉수가 기안을 향해 뻗어 나왔다. “이크크!” 기안이 얼른 피하자, 촉수는 힘을 잃은 봉인석을 대신 휘감아 껍데기 안으로 끌어들였고, 조금 시간이 지나자 하늘 위로 부서진 봉인석의 파편을 분수처럼 쏘아올린다. 껍데기가 열린 시점에서 안을 살펴본 준상은, 그 안에 빽빽하게 들어찬 상어 이빨과도 같은 날카로운 이빨을 보고는 얼굴을 찌푸렸다. “대충 어떤 놈인지 알만하군.” 바스반 탄은, 이를테면 강 한 복판에 자리 잡은 개미 지옥과도 같은 놈이었다. 개미 지옥은 땅을 파서 그 안에 빠진 곤충을 사냥하지만, 이 놈은 강 바닥에 웅크리고 있다가 그 위를 무언가가 지나가는 낌새를 느끼면 튀어나와 저 기다란 촉수로 사냥을 한다. 문제는 저 단단한 조개 껍질. 최초 기안이 수차례 발동한 웨펀 차지에도 불구하고 파괴되기는커녕 금조차 가지 않은 걸로 미루어 보아, 상당한 방어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쯤 되면 철옹성이라 불려도 할 말 없을 정도다. “리체스!” “네!” 리체스는 준상에게 호명되자 하늘 위로 날아오르더니 곧바로 바스반 탄을 향해 마법을 발동했다. “지금 여기 내가 부르노니, 꽃이 되어 피어나라. 타오르는 불꽃이여!” 그녀의 낭랑한 외침이 끝남과 동시에 바스반 탄을 중심으로 현란한 마법진이 만개한 꽃처럼 화려하게 피어났다. 처음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지만, 거대한 조개 껍데기 형태의 바스반 탄 주위로 불의 벽 하나가 확 피어나더니, 순식간에 솟구쳐 올라 주위를 뜨겁게 달구기 시작했고, 연이어 두 번째와 세 번째 불의 벽이 생겨나 육각의 별표 모양으로 자리를 잡는다. 마법이 그렇게 자리를 잡자, 리체스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이어진다. “타올라라, 푸른 불꽃이여! 그 신성한 힘으로 정화하라!” 그러자 붉게 타오르던 세 개의 화염은 그 빛깔이 푸르게 변하더니 바스반 탄을 뜨겁게 달구기 시작한다. 준상은 화염에 둘러싸여 요동치는 바스반 탄의 모습을 보고는 어쩐지 조개 구이라는 단어가 떠올랐지만, 리체스가 방금 발동한 이 마법이 저런 식으로 고정된 형태의 적에게 무척이나 효과적이라는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마법을 발동한 당사자인 리체스와 그것을 지켜보던 준상은 의외로 간단하게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떠올렸지만, 그 순간 기안이 크게 외쳤다. “조심해! 놈이 솟구쳐 오를지도 몰라!” “뭐?” “저 조개 껍데기는 놈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아니나 다를까. 기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바스반 탄은 마치 로켓이 발사되는 듯한 모습으로 허공을 향해 솟구쳐 올랐고, 그 충격을 견디지 못한 섬은 그대로 폭발하듯 박살이 나버리고 말았다. “이크!” 기안은 얼른 방패로 몸을 가린 채 물러나며 솟구치는 바위의 범위로부터 벗어나다가 물 속으로 빠졌고, 그제서야 생각났다는 듯이 준상이 미리 건넸던 요정의 술을 쭉 들이켰다. “크아... 이거 맛이 끝내주는데?” 그 상황에서도 일일이 감상을 늘어놓던 기안은 자신을 향해 덮쳐오는 커다란 그림자를 느끼고는 얼른 허공으로 솟구쳐 올라 그것을 피해냈다. 준상은 바스반 탄이 허공으로 솟구치는 순간 얼른 요정의 술을 들이키고는 섬 주위에 늘어서 있던 야수들을 우선 역소환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지면을 박차고 뛰어 올라 허공으로 솟구치며 전신을 드러낸 바스반 탄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기안의 말대로 방금 전까지 본체라고 생각했던 거대한 조개 껍데기는 바스반 탄이 지닌 몸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했다. 놈의 본체는 마치 뱀이나 지렁이 같은 느낌의 긴 형태를 지니고 있었는데, 그 길이가 지면 위에 드러난 조개 껍데기의 몇 배는 되고도 남았다. 바스반 탄은 잠시 허공에서 몸을 몇 번 튕기는가 싶더니, 그대로 수면을 향해 강렬하게 격돌했다. 그러자 그 충격에 의해 커다란 물보라가 일어나고 뒤이어 거대한 해일과도 같은 물결이 강변을 향해 밀려갔고, 그렇게 튀어오른 물 속으로 바스반 탄은 다시 뿌리를 내리듯이 본체를 감추고 조개 껍데기만 내놓은 상태로 돌아갔다. 미리 요정의 술을 준비해 두었길래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제 아무리 준상이나 기안 같은 존재라도 거대한 바스반 탄의 육체가 떨어져 내리는 낙하 에너지와 그 뒤에 이어지는 물보라의 충격파에 의해 큰 피해를 입었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다. 이쯤 되면, 단순한 회피기라기 보다는 그 자체로 강력한 공격 기술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 모르긴 해도 이 정도의 파괴력이라면 이곳의 선박은커녕 지구의 군함도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준상은 어느 새인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물 위로 조개 껍데기를 드러내 놓고 있는 바스반 탄을 보며 혀를 찼다. “리체스! 한 번 더 부탁한다!” 하지만 그녀는 난처해하며 그 말에 바로 대답했다. “저런 식으로 물속에 있는 상태로는 화염 마법을 쓸 수가 없어요!” “음...” 지금도 정령들이 수면 위에 드러난 조개 껍데기를 향해 융단 폭격을 퍼부어 대고 있었지만, 바스반 탄은 어디서 개가 짖느냐는 듯이 아무런 반응조차 보이지 않고 있었다. 화염은 그렇다 치고 날벼락이 떨구는 번개조차 가볍게 씹어버리는 모습에, 준상은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역시 그 수밖에 없나.” 준상은 일단 조금 떨어진 곳에서 급히 자신과 두 반려의 시드 구성을 교체했다. 허공에서 하는 일이라 조금 번거롭기는 했지만, 염동력을 사용해 순식간에 시드 구성을 교체한 준상은 강기슭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세 사람에게 메신저를 통해 이런 메시지를 보냈다. -갑가오리를 보내줄 테니 지금 즉시 이곳에서 최대한 물러나라. 정다빈과 윤성렬, 그리고 이한서는 이 메시지를 보는 순간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그러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자신들을 향해 갑가오리가 날아오자 더 생각하지 않고 얼른 그 등에 올라탔다. 갑가오리는 그들을 태우기가 무섭게 빠르게 강변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맨 뒷자리에 앉아 있던 이한서는 문득 피부로 전해지는 섬뜩한 느낌에 뒤를 돌아보았다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헉!” 헛숨을 들이키는 그 목소리를 듣고 뒤를 돌아본 정다빈과 윤성렬 역시 등뒤에서 벌어지고 있는 그 광경에 입이 쩍 벌어지고 말았다. “이럴수가...” 얼어 붙고 있었다. 물 위에 드러난 거대한 조개 껍데기를 중심으로 극한의 냉기가 강림하여 주변의 모든 것을 얼려버리고 있었다. 그 속도가 얼마나 어마어마한지, 육안으로도 순식간에 영역을 확대해 가는 얼음들의 모습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광전사들의 고향, 얀트훈센을 극한의 얼음 폭풍으로 뒤덮었던 존재. 갑가오리에 올라탄 세 사람은 미처 알 수 없었지만, 지금 이순간 이스르 강 한복판에 강림한 것은 미쳐버린 얼음의 대정령이었다. 00257 트롤러 ========================================================================= 얼음의 대정령은 준상에 의해 소환되기가 무섭게 예의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주위를 삽시간에 얼려 버렸다. “우와... 뭐야, 저건?” 기안은 냉동 폭탄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의 그 위력에 눈이 휘둥그레졌고, 그렇게 주위가 얼어붙는 상황에도 조금 춥다 싶은 정도의 느낌 외에는 전해지지 않는 상황에 다시 한 번 놀랐다. “어떻게 된 거지?” 헤네스가 지금 입고 있는 것은 속옷과 검은 색으로 채색된 방어복 뿐. 혹시 이 방어복이 뭔가 특별한 건가 싶어 만져보고 있는 기안을 향해 리체스가 말했다. “그게 아니야.” “그럼?” 기안이 묻자 리체스는 옆구리에 손을 척 얹으며 한숨을 푸욱 쉬었다. “너 진짜 그 말투 좀 어떻게 안 되니?” “칫. 냅둬. 원래 내 사전엔 존댓말이란 없어. 아무리 네가 만년 묵은 괴물 요정이라도.” “...” 리체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 보이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에휴... 할 수 없지.” “아무튼, 왜 우리는 멀쩡한거야?” “그건 말이지...” “그래, 어서 말해봐.” 리체스는 우쭐거리는 모습으로 준상을 바라보며 말했다. “주인님이 한거야.” “오오! 역시!” 기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평범하지 않다 싶기는 했지만 이런 능력마저 가지고 있을 줄이야. 기안이 그렇게 감탄하며 바라보고 있는 동안, 준상은 아래쪽의 상황을 지켜보다가 마수 바스반 탄의 움직임이 완전히 멈추자 소환했던 대정령,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대정령에 의해 빙의된 여인 이벨라 하란두르를 본래대로 역소환시켰다. 그러자 주위를 빠르게 침식해 가던 냉기의 폭풍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대로 멈추어 버린다. 당연한 얘기지만, 바스반 탄은 대정령이 뿜어내는 냉기에 그대로 얼어버린지 오래였다. 그냥 겉모양만 얼어버린 것이 아니다. 급속하게 내부의 생체조직이 얼어버리면서 철옹성 마냥 꽉 다물어져 있던 조개 껍데기의 틈 또한 벌어져 잇었다. “기안, 리체스!” 준상의 외침이 이어지자, 기안은 손에 든 미늘창을 크게 두 번 휘저어 보이며 대답했다. “하하하! 그렇지 않아도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외친 기안은 곧바로 방패를 앞세운 채 창을 내밀고 틈이 벌어진 조개 껍데기를 향해 돌격해 들어갔다. “어휴. 쟤는 머리 속에 돌격 밖에 없나.” 리체스는 혀를 차며 새로운 마법을 발동했다. “돌아라! 소용돌이쳐라! 그리고 칼날이 되어 나의 적을 둘로 나누어라!” 리체스의 마법은 거대한 소용돌이를 만드는 것이었는데, 보통의 소용돌이가 수평 방향으로 회전하며 솟구치는 형태라면 지금 그녀가 만들어내는 소용돌이는 수직 방향으로 회전하며 주위의 잡동사니들을 끌어 들이고 있었다. 거대한 회전 톱날. 준상이 리체스의 새로운 마법을 보고 떠올린 단어다. 얼음과 바위 조각 등의 잡동사니를 잔뜩 끌어모은 소용돌이는 그대로 벌려진 조개 껍데기 틈으로 밀려 들어가며 얼어붙은 속살을 쪼개기 시작했다. “우와와! 뭐야, 이건!” 벌려진 조개 껍데기 틈에 미늘창을 쑤셔 넣고 그것을 벌리기 위해 애쓰던 기안은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이 터무니 없는 마법에 기겁하고 말았다. “흥, 다치기 싫으면 물러나렴.” 리체스가 옆구리에 손을 척 얹으며 잘난 척을 하자 기안은 그녀의 말대로 얼른 조개 껍데기로부터 떨어지며 말했다. “우오오! 역시 만년 묵은 괴물 요정.” “뭐야?” 둘이 그렇게 티격태격 하고 있는 동안, 준상은 상공에서 리체스의 마법이 조개 껍데기의 틈을 더욱더 벌리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마침내 굉음과 함께 수박이 쪼개지듯 두 쪽으로 갈라지는 모습을 보고 말했다. “리체스, 기안. 물러나라.” “네!” 리체스는 그 말을 듣고 얼른 마법을 해제하며 물러났지만, 기안은 기대 가득한 눈으로 준상을 바라보며 말했다. “오, 드디어 뭔가 보여주려는 건가?” 그 모습을 보고 리체스는 얼른 기안을 향해 말했다. “뭘 하고 있어! 얼른 물러나라고!” “알았어, 알았다고.” 기안이 얼른 몸을 피하자, 준상은 그제서야 인벤토리에서 블러드서커를 꺼내 들었다. 모양은 예전과 같았지만, 이 블러드서커 또한 +10으로 강화된지 오래. 아이템정보 명칭 : 블러드서커 +10 레벨제한 : 없음 종류 : 무기 등급 : Unique 공격력 : ?-? 효과 : 1. 장착시 폭혈 발동. 2. 적중시 감속 확률 6% 증가. 3. 적중시 7% 확률로 5초에 걸쳐 흡혈. 4. 치명타 피해 30% 증가. 5. 치명타 발생 확률 15% 증가. Seed : 5슬롯 (재생률 12%, 재생률 12%, 재생률 12%, 재생률 12%, 재생률 12%) 설명 : 이것은 언제나 피를 갈구하는 마물입니다. 위력에 취해 남용한다면 당신은 영원히 암흑 속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게 됩니다. 무기의 특성상 얼마나 데미지 증가가 이루어졌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새로운 옵션이 무려 네 가지나 붙었다. 적중시 감속 옵션은 블러드서커가 가지고 있는 일격 필살의 이미지 때문에 좀 미묘한 느낌이 들지만, 상당히 높은 수준의 치명타 관련 옵션이 추가되고 여기에 흡혈이라는 이름의 또다른 생명력 흡수 옵션이 추가되었다. 원래부터 파괴력 하나는 흠잡을 데 없는 무기인지라, 시드는 패널티를 최소화하기 위해 모조리 재생률로 때려 박은 상태. 하지만 레벨이 오르면서 생명력 소모가 또 얼마나 늘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라, 준상은 추가로 기안에게 지시를 내렸다. “기안!” “응?” “생명의 파동을.” “으음...” 기안은 모처럼 재미있어지려는 상황에서 착한 기안에게 자리를 내줘야 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얼굴을 찌푸렸다. “끙... 알았어, 알았다고.” 시간을 끌자 헤네스나 착한 기안이 뭐라고 했던 모양인지 화난 기안은 투덜거리며 눈을 감았고, 이내 묘하게 색기어린 시선을 지닌 착한 기안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했다. “우후후... 잠시만 기다리세요.” 착한 기안은 살짝 웃어보이고는 가슴에 손을 얹고 무언가를 읊조렸고, 그와 동시에 그녀의 몸으로부터 밝은 빛이 퍼져 나오며 리체스와 준상의 몸을 감쌌다. 준상은 생명의 파동이 자신에게 적용된 것을 확인하자, 아래로 움직이며 곧바로 강타를 발동했다. 구궁. 구구궁! 대기를 떨어 울리는 공명음을 들은 리체스는 얼른 기안의 어깨 위로 날아들었다. “잘 막아. 심상치 않으니까.” “걱정마세요.” 착한 기안은 수호의 신물로 몸을 가린 채 준상의 모습을 흥미진진한 눈으로 지켜 보았다. 바스반 탄은 얼었던 몸이 녹기 시작하자 움찔거리며 다시 움직이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지만, 그런 놈 앞에 이글거리는 기운으로 온몸을 감싼 준상이 떨어져 내렸다. “후우우...” 준상은 몸 안에서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것은 같은 파괴의 힘을 신중하게 갈무리 하며 조금은 느릿하게 강타를 발동시켰다. 번쩍! 순간 한 줄기 섬광이 준상의 몸으로부터 뻗어 나오며 얼어붙은 강물 위를 채찍처럼 내리쳤다. 조밀하게 압축된 강타의 파괴력은 그대로 대지를 파고 들어 깊숙한 상흔을 만들어 내었다. 그리고 마침내 강타의 파괴력이 온전히 사라지고 난 뒤에야, 대지가 몸서리를 치기 시작한다. 우르르릉! 한 번의 거친 지진이 일어나자 얼어붙은 강물은 갈라져 부서지고, 강변의 나무들이 도미노처럼 쓰러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갑가오리에 탄 채 긴급하게 그곳으로부터 이탈하던 세 명은 자신들의 휴대폰이 일시에 울리며 퀘스트 완료 메시지를 토해내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후아... 도대체 뭘 어떻게 한 거죠?” “글쎄...” 정다빈과 윤성렬이 그렇게 대화를 나누는 동안 이한서는 착잡한 표정으로 얼어붙은 강물을 바라보다가 10초의 시간이 지나자 곧바로 전송되었다. “후우우우...” 준상은 몸에서 짙은 연기를 뿜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번에도 역시나 엄청난 양의 생명력이 소모되었지만, 기안의 힘과 잔뜩 도배된 재생률 시드 덕분에 어느 정도 몸을 움직이는 것이 가능했다. “와아아아...” 멀찍이 떨어진 채 방패로 몸을 가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착한 기안은 기나긴 탄성을 터뜨렸다. 리체스도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녀는 준상이 뿜어낸 파괴력에 놀랐다기 보다는 한층 정교해진 그의 힘에 감탄하고 있었다. 이전에는 강타를 발동하더라도 스스로 그 힘을 주체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엄청난 힘을 뿜어내면서도 그 파괴력이 집중되지 못하고 천지사방으로 흩어지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방금 전의 준상은, 어느 정도 힘을 제어하여 원하는 곳에 집중시키고 있었다. 그 결과, 단순히 거대한 폭발과 같은 현상을 불러 일으켰던 예전과는 달리, 지금은 대지에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의 상흔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똑같은 힘이라도 한 점에 집중시켰을 때의 위력 차이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는 일. 어찌보면 블러드서커와 강타 조합의 무지막지한 파괴력을 제어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준상은 이미 한 단계 더 높은 곳으로 올라선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차차, 이럴 때가 아니지.” 리체스는 얼른 준상에게 다가가 그에게 회복 마법을 퍼부으며 기안에게 말했다. “멍하니 있지 말고 너도 도와!” “네에!” 착한 기안은 사뿐사뿐한 걸음으로 허공을 날아 준상에게 다가가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호위장의 미늘창을 인벤토리에 집어 넣고 채찍 두 개를 꺼내 한 손에 그러쥐었다. “후후후... 이거 정말 써보고 싶었거든요.” 그녀는 준상을 향해 그렇게 말하고는 세련된 솜씨로 채찍을 휘두르는 동시에 회복의 영기를 더욱 강렬하게 피워 올렸다. 회복의 영기가 지닌 효과가 좋았던 것인지, 아니면 착한 기안이 숨겨두고 있던 세련되고 정교한 채찍 솜씨가 빛을 발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준상은 몸을 완전히 회복할 수 있었다. “아쉬워라...” 착한 기안이 배시시 웃으며 그렇게 말하는 모습을 무시한 채 준상은 퀘스트가 완료되었음을 확인했다. 봉인을 지키십시오. :대륙 중앙을 관통하는 이스르 강에는 오래 전 봉인된 마수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그 이야기가 오래된 전설일 뿐이라고 알고 있지만, 불행히도 이스르 강 상류의 외딴 섬에 실제로 마수를 봉인한 다섯 개의 봉인석이 존재합니다. 봉인석을 파괴하기 위해 몰려드는 괴물들을 처치해 마수의 해방을 저지하십시오. [남은 시간:43시간 23분] [이 퀘스트는 여러 명의 인원이 동시에 참여합니다.] -> 완료! (Hidden) 봉인에서 깨어난 마수 바스반 탄을 처치하십시오 (협력) -> 완료! (Hidden) 키메라 마법사를 처단하십시오. (협력) -> 완료! (Hidden) 백인대장을 처단하십시오. (3/3) (협력) -> 완료! (Hidden) 제한 시간 이내에 모든 괴물들을 섬멸하십시오. (432/432) (협력) -> 완료! - 당신이 이번 퀘스트에서 보여준 행동과 성과를 정산합니다. 이 과정은 약간의 시간이 소요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준상은 모든 목표가 달성되었음을 확인한 다음 일단 메시지를 치워놓고, 이내 난처한 표정으로 깊게 갈라진 땅 속을 바라보았다. “할 수 없군.” 준상은 몽몽이를 불러낸 다음, 요정의 술을 건넸다. 몽몽이는 자신 앞에 내밀어진 작은 병에서 이전에 느껴보았던 향긋한 냄새가 전해지자 두 개의 앞발로 신중하게 병을 잡은 채 천천히 그 안에 담긴 술을 마셨다. 순간 몽몽이의 두 눈에서 붉은 빛이 번쩍이더니, 이내 바람 빠진 풍선처럼 하늘을 마구 정신없이 날아다니기 시작한다. 준상은 기운이 뻗쳐서 정신 사납게 날아다니는 몽몽이의 모습에 살짝 눈을 찌푸리더니 바로 지시를 내렸다. “찾아라.” 몽몽이는 그제서야 정신이 들었는지 갈라진 땅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준상은 얼마 지나지 않아 땅속에서 바각거리는 소리가 들려오자, 멀찌감치 날아가 버린 두 개의 조개 껍데기를 인벤토리에 수납했다. 그리고 이내 시드를 찾아낸 몽몽이가 자신의 어깨 위로 돌아와 비틀비틀 거리다가 픽 고꾸라지는 것을 받아들고는 리체스와 기안을 향해 말했다. “돌아가자.” ============================ 작품 후기 ============================ 요즘 뉴스들 보면 정말 세상이 미쳐 돌아가고 있다는 걸 느낄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쩝... 나도 귀농이나 할까. 00258 트롤러 ========================================================================= 즉시 전송 기능을 이용해 귀환을 마친 준상은 곧바로 헤네스와 리체스부터 소환을 한 다음, 다른 펫과 소환물들도 불러내어 신기루 꽃 최상층에 풀어 놓았다. 헤네스는 다시 소환되자 곧바로 얼굴을 감싼 채 냅다 샤워실로 도망쳐 들어갔고, 리체스는 그런 모습을 보고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 뒤를 따랐다. 준상은 그런 두 반려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물의 정령인 새벽이슬을 시켜 도마뱀 괴물들의 피로 젖은 몸을 대충 씻은 다음 여전히 취해서 비틀거리는 몽몽이를 눕혀 놓고 나서야 보상 확인에 들어갔다. 이번에 획득한 보상은 추가 보상 상자가 네 개, 그리고 트리플 에스 등급의 보상 상자가 하나였다. 비록 낮은 레벨의 귀환자들에게 내려진 퀘스트라고는 해도, 마지막에 상대한 마수 바스반 탄의 경우에는 조개 껍데기를 닫고 있으면 기안 조차도 그 방어를 뚫을 수 없을 정도의 난적이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바스반 탄의 히든 퀘스트 자체가 준상을 위해 마련된 것이 아닐까 싶은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긴 하다. 이 퀘스트 직전에 수행했던 수호자의 에픽 같은 경우는 명색이 에픽 등급의 퀘스트임에도 불구하고 별도의 히든 퀘스트가 없어서 고작 카드 하나를 얻는데 그쳤었다. 물론 수호의 신물이라는 엄청난 아이템과 더불어 거기에 깃든 화난 기안과 착한 기안이라는 영령까지 손에 넣었으니 보상이 작다고만은 할 수 없는 노릇이긴 하다. 하지만 역시 보상이라면 이렇게 여러 개의 상자를 열어보는 맛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준상은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상자를 하나씩 열기 시작했다. 카드정보 명칭 : 신뢰 레벨 : 1Lv 경험치 : 0 등급 : Rare 분류 : 스킬 성장 : 대기만성(대) 속성 : 빛 효과 : 강력한 존재감을 퍼뜨려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소환물, 펫, 파티원의 공격력과 방어력을 증폭시킵니다. Cost : 20 Seed : 4슬롯 처음 나온 카드는 신뢰의 레어 버전. 이전에 가지고 있던 언커먼 버전에 비해 공방의 증폭 효과가 상승한 것을 알 수 있었다. 당장 콤보를 구성하지 못 한다는 단점이 있기는 해도 장착하고 있는 것만으로 아군 전체에 효과를 부여하는 카드이니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보상이다. 카드정보 명칭 : 기습 레벨 : 1Lv 경험치 : 0 등급 : Uncommon 분류 : 스킬 성장 : 조숙(중) 속성 : 어둠 효과 : 적의 빈틈을 노려 치명적인 일격을 가합니다. Cost : 15 Seed : 2슬롯 카드 자체는 그다지 특이한 것이 없었지만, 이 카드가 나오는 순간 메시지가 우르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스킬 카드가 나옴과 동시에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은 두말할 것 없이 새로운 콤보의 출현이다. 축하합니다! :콤보카드를 조합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현재 조합 가능한 콤보 카드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에레디스의 꽃그림자 [상세 확인] -콤보 카드 조합을 원하시면 해당 번호를 누르시고, 만약 조합을 원치 않으신다면 n을 누르세요(1/n) _ 꽃그림자. 기습 카드가 나온 순간 콤보가 활성화된 것도 그렇고, 이름이 풍기는 어감도 어쩐지 이전에 나왔던 마지트의 검은 백합과 비슷한 느낌이다. 에레디스의 꽃그림자 -에레디스는 히딕스인들이 말하는 저승입니다. 에레디스로 가는 길에 뿌려지는 꽃그림자란 다시 말해 죽음을 의미하며, 이것은 오랜 세월 동안 암살자를 뜻하는 말로 지칭되어 왔습니다. [조합상세] -기습, 은신, 은신, 관통 -효과: 1. 은신시 발각 확률 대폭 감소. 2. 은신후 기습시 치명타 발생 확률 100% 증가. 3. 은신후 기습시 방어 무시 확률 20% 증가. “암살자인가.” 이 콤보는 은신 효과를 극대화할 뿐만 아니라, 몸을 숨긴 상태에서 기습을 가할 경우 사실상 무조건 치명타가 발생하는 효과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상대의 방어를 무시하는 확률도 늘려준다. 준상은 곧바로 콤보를 활성화했지만, 아쉽게도 최초 달성 칭호는 얻을 수가 없었다. “그나저나 에레디스라... 애매하군.” 새로운 콤보가 나온 이상 해당 콤보의 에픽 퀘스트 역시 노릴 수 있는 기회가 생긴 셈이다. 그러나 설명을 보면 에레디스라는 말은 특정 지명이 아니라 저승을 뜻하는 일반 명사일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이렇게 될 경우 현재 사용되는 지명으로는 파악하기 힘들기 때문에 에픽 퀘스트를 찾아나서는 일이 쉽지 않다. 준상은 입맛을 다시며 다음 상자를 열었다. 카드정보 명칭 : 푸른너울 레벨 : 1Lv 경험치 : 0 등급 : Rare 분류 : 소환 성장 : 일반(대) 속성 : 물, 물 효과 : 큰 파도의 정령 1개체를 소환합니다. Cost : 20 Seed : 4슬롯 세 번째 상자에서 나온 것은 정령 카드였다. 속성은 물과 물. 이런 식으로 한 종류의 속성만 두 개 중첩된 형태의 정령은 처음이었지만, 따지고 보면 이전에 나왔던 눈보라 역시 세 가지 속성 가운데 얼음 속성이 두 개 중첩되어 있는 형태였다. 그렇지 않아도 물의 정령이 새벽이슬 하나 뿐이라 조금 아쉬운 느낌이었기 때문에 준상은 만족감을 느꼈다. 준상은 바로 마지막 추가 보상 상자를 열었다. 그러자 다시 힐링 포션이 나왔다. 그렇지 않아도 이전에 광전사들의 전투를 지원하면서 밤톨이가 제법 많은 양의 힐링 포션을 소모한 뒤였기 때문에 준상은 곧바로 밤톨이의 포션 슬롯에 힐링 포션을 채워 넣은 다음, 마지막 남은 트리플 에스급 보상 상자를 확인했다. 카드정보 명칭 : 회복 레벨 : 1Lv 경험치 : 0 등급 : Rare 분류 : 스킬 성장 : 일반(중) 속성 : 빛 효과 : 깊은 상처를 치유하는 제법 강한 회복 마법을 사용합니다. Cost : 20 Seed : 5슬롯 마지막 상자에서 나온 것은 다름 아닌 회복 마법. 그것도 중간 단계를 건너뛰고 곧바로 레어 등급이 튀어 나왔다. 지금껏 준상은 수십 개의 카드를 모았지만, 마법 카드가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사실 마법이 없어도 정령이 워낙 많아서 별 상관은 없었지만, 이런 회복 계통의 마법은 정령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물론 리체스라든가 착한 기안 등이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회복의 수단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법. 준상은 잠시 생각하다가 비어있던 밤톨이의 카드 슬롯에 회복 카드와 함께 이전에 리체스가 장착하고 있던 언커먼 등급의 신뢰 카드를 장착시켰다. 이렇게 되면 포션과 함께 회복 마법을 병용할 수 있으니 힐러로서 보다 효율적인 활용이 가능해진다. 준상은 상자의 확인이 모두 끝나자 아이템의 확인을 시작했다. “꺼내봐.” 몽몽이는 여전히 술이 덜 깼는지 앞발로 자꾸만 머리를 문지르고 있었지만, 준상이 지시를 내리자 평상 위에 바로 아이템을 주르르 쏟아 놓았다. 도마뱀 괴물들이 사용하던 아이템들은 특별한 것이 없었고, 백인대장이나 키메라 마법사의 시드도 모두 언커먼 등급 밖에 되지 않았다. 다소 아쉽긴 했지만, 그래도 수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바로 마수 바스반 탄의 시드가 그것이었다. 명칭 : 단단한 껍데기 레벨제한 : 20 종류 : 시드 등급 : Rare 효과 : 1. 물리 피해 무시 5% 2. 속성 피해 무시 7% 3. 초도약 1레벨 상승 설명 : 마수 바스반 탄이 지니고 있던 특별한 시드입니다. Seed 슬롯이 있는 아이템이나 카드에 장착하여 능력을 강화할 수 있습니다. 한번 장착한 시드를 분리하기 위해서는 특수기능 ‘분리’가 필요합니다. [이 시드를 아이템이나 카드에 장착하시려면 이곳을 누르십시오.] 물리 피해 무시와 속성 피해 무시는 지금까지 준상이 획득한 어떤 시드에도 없는 새로운 옵션이었다. 뿐만 아니다. 다른 마수와 마찬가지로 초도약이라는 특수 스킬마저 추가되어 있었다. 준상은 얼른 자세한 정보를 확인해 보았다. 초도약 : 순간적으로 자신의 도약력을 두 배 상승시킵니다. -도약 스킬을 사용할 경우에도 적용됩니다. -단, 사용 후 10초간 재사용이 불가능합니다. 10초의 재사용 대기 시간을 가지고는 있지만, 도약 스킬이 적용된 상태에서도 가능하기 때문에 만약 준상 같은 사람이 이 스킬을 사용한다면, 어지간한 성벽 정도는 단숨에 뛰어 넘을 수 있게 된다. 에픽 퀘스트도 아니고, 다른 사람의 퀘스트에 동행한 것만으로 이 정도의 수확을 얻은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매우 훌륭한 성과가 아닐 수 없다. 준상은 만족감을 표하며 카드 슬롯에 시드를 장착하다가 컨테이너 하우스에서 머리를 수건으로 닦으며 나오는 리체스의 모습을 보았다.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컨테이너 하우스 쪽을 바라보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잠깐 가서 얘기를 나눠보시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아무래도 기안에게 몸을 빌려준 일 때문에 창피해서 나오질 못하는 모양이다. 준상은 자리에서 일어나 리체스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춰준 다음 천천히 컨테이너 하우스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안으로 들어오자, 헤네스는 이불을 어깨 위에 두른 채 멍하니 뭔가 생각에 잠겨 있다가 화들짝 놀라며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 썼다. 흰 이불을 뒤집어 쓴 채 몸을 웅크리고 있는 모습을 보니 어쩐지 굴속에 머리만 집어 넣고 있는 토끼의 모습이 연상된다. 준상은 가만히 그녀의 옆에 다가가 앉으며 물었다. “싫으면 굳이 네가 쓰지 않아도 괜찮다.” 그 말을 들은 헤네스는 이불 속에서 살짝 머리를 내밀더니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그냥... 아직 적응이 되지 않았을 뿐이에요.” “적응이 되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준상이 다시 말하자, 헤네스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가 싶더니 이렇게 말했다. “기안님이 저보고 재능이 있대요.” 갑작스런 말에 준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재능? 무슨?” 준상이 되묻자 헤네스는 바로 대답했다. “성녀의 재능이요.” “성녀?” 이건 또 무슨 소린가. 갑자기 성녀라니? 헤네스는 그런 준상의 어리둥절한 느낌을 알아차린 것인지 작은 목소리로 설명을 시작했다. “원래는 아무리 수호의 신물을 들고 기안님이 빙의를 해도 그 정도까지 능력을 발휘하기는 쉽지 않대요. 특히나 회복의 영기 같은 건 빙의를 한 상태에서도 제 효과를 발휘하기가 쉽지 않다고...” “그랬군.” 그렇다는 얘기는, 다시 말해 기안이 이전에도 이런 식으로 몸을 빌려 힘을 발휘한 적이 있다는 뜻이 된다. 물론 그냥 헤네스의 몸이 쓰기 편해서 그렇게 구슬린 것일 수도 있지만, 준상은 그 말을 듣는 순간 한 가지 마음에 짚이는 것이 있음을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이전에 헤네스를 처음 만났을 때의 일이었다. 그녀를 만난 것은 다름 아닌 에픽 퀘스트. 하지만 단순히 이벨류아의 권력층과의 연줄을 얻기 위한 장치였다면, 굳이 그녀가 아니더라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굳이 멀리 떨어진 곳에서부터 그녀를 호위해 이벨류아로 향하게 한 것에는 무슨 이유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런 형식으로라도 그녀를 보호해야만 하는 어떤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가끔 들기는 해도 딱히 뭔가 단서가 될만한 일도 없었기 때문에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 하지만 지금 헤네스의 말을 듣고 보니, 지금껏 풀리지 않았던 비밀 하나가 마침내 실마리를 찾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저 같은 애가 성녀의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별로 믿기지는 않지만 말이에요.” 헤네스는 그렇게 말하며 쓴웃음을 짓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지만, 성녀의 능력도 쓰면 쓸수록 개발되는 것이래요.” “그럼...”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기안님을 통해 능력을 개발하다보면... 언젠가는 두 분의 도움이 없어도 능력을 쓸 수 있게 된다는 말이겠죠.” 그렇게만 된다면, 헤네스에게도 준상에게도 큰 도움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그와 같은 적성을 지닌 인물을 찾아내면 성녀의 능력을 지닌 이를 계속적으로 양성하는 것도 꿈이 아니다. 헤네스는 거기까지 말하고는 준상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다시 이불을 뒤집어썼다. “하지만, 그래도 역시 생각할수록 창피해서. 아우으으으...” “...” 준상은 그렇게 다시 이불 속에서 부르르 몸을 떠는 헤네스를 보며 쓴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헤네스는 준상이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을 느끼자 더욱더 이불 속으로 몸을 웅크리더니 아까의 일이 다시 떠오르는지 몸을 뒤집은 채 허공을 발로 마구 걷어차기 시작한다. “아우으으으...” “...” 준상은 그 모습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지만, 모르는 척 샤워실로 걸음을 옮겼다. 샤워실에서 간단하게 몸을 씻은 준상이 밖으로 나오자 머리를 다 말린 리체스가 다가와 그의 머리를 수건으로 문질러주기 시작했다. 준상은 가만히 그녀에게 머리를 맡긴 채 메신저를 켜서 서윤에게 연락을 넣었다. “안녕하십니까. 그렇지 않아도 연락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반색하는 서윤의 말에 준상은 조용히 대답했다. “그들은 잘 도착했나.” “물론입니다. 뭐... 경험치는 별로 못 얻었지만, 보상 상자를 다섯 개나 얻어서 매우 만족해 하고 있습니다.” “다행이군.” 보상 상자가 다섯 개라는 건 의외로 등급이 제법 높게 나왔다는 뜻이리라. 등급이 너무 낮으면 등급 보상 상자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이번에 함께 했던 세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중에서 다시 셋을 고르도록.” 서윤은 깜짝 놀라며 외쳤다. “다시 말입니까?” “뭔가 문제라도 있나?” 하지만 준상이 바로 그렇게 묻자, 서윤은 얼른 고개를 저으며 황급하게 말했다. “아니, 아닙니다. 좀 의외라서. 하하하...” “...” “크흠. 아무튼 알겠습니다. 곧바로 셋을 고른 다음 다시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알았다.” 준상이 연락을 끊자 뒤에서 그의 머리를 매만지고 있던 리체스가 물었다. “이번에도 같이 다니시게요?” 그녀 역시 조금 의외라는 표정이었지만, 준상은 담담한 말투로 대답했다. “아무래도 더 빨리 강해져야할 것 같아서.” “무슨...” 준상은 잠시 아무런 말없이 아직도 술이 덜 깨서 비틀거리는 몽몽이와 이전에 괴롭힘을 당했던 화풀이를 하듯 녀석을 콧잔등으로 툭툭 건드리고 있는 밤톨이를 바라보다가 한참 뒤에야 조용히 입을 열었다. “뭐랄까... 예감이 들어. 그것도 좋지 않은 예감이.” “...” ============================ 작품 후기 ============================ 제가 말을 잘못했네요. 귀농이 아니라 귀촌이라고 했어야 하는데 ^^; 평생 농사라고는 해본 적도 없는 제가 느닷없이 귀농이라니 말도 안되는 일이죠. 그런 의미에서... 가가갓 가가갓 간진가이가! 가가갓 가가가갓 간진가이가!! 외쳐라! 약빨의 연참빠와! 빨간 약의 순수한 빠와! 연참을 인도하는 간진스톤 악플의 근원을 쳐부수기 위해 지금이야말로 날아올라라 인간과 타자 치는 기계 사이를 배회하는 아픔을 가슴 속에 숨기고 가가갓 가가갓 간진가이가! 가가갓 파이팅 간진가이가!! 파이널 연참 승인이다! 지금이다! 약빨 합체다! 강완 폭쇄! 브로큰 팬텀! 원기! 승리! 정열! 파이팅! 탄생! 불사신의 엄청난 약빨 싸우는 연참왕! 갓갓갓갓 간진가이가!! 타올라라 슈퍼 약빨노이드 붉은 약빨 칠흑같은 전신 눈부신 맹세 간과 진 연참의 염원을 비추기 위해 지금이야말로 부활이다 약빨로 하는 연참의 귀중함을 모르는 슬픔을 풀어헤치고 가가갓 가가갓 간진가이가! 가가갓 제네식 간진가이가!! 파이널 연참 승인이다! 지금이다! 약빨 합체다! 천벌 광림! 골디언·크러셔! 용기! 투지! 숙명! 제네식! 탄생! 연참 별들의 보물 새로운 연참왕! 갓갓갓갓 간진가이가! 가가갓 가가갓 간진가이가! 가가갓 가가가갓 간진가이가!! 가가갓 가가갓 간진가이가! 가가갓 가가가갓 간진가이가!! 치열! 격렬! 맹렬! 빅뱅! 탄생! 신생!! 영원한 신화 우리들의 연참왕! 갓갓갓갓 간진가이가! PS) 역시 연참송이 없으면 연참할 맛이 안남. 00259 트롤러 ========================================================================= 준상 자신도 이것이 정확히 어떤 식의 예감인지는 설명할 도리가 없었다. 다만 한 가지. 두 번째 귀환자들이 돌아온지도 제법 시간이 흐른데다, 일전에 있었던 다크 시드 사용자들에 대한 학살에 대한 여파도 슬슬 모습을 나타낼 시점이 되었다는 느낌이랄까. 물론 이런 식의 예감에 근거를 들이대는 것도 웃긴 일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준상은 자꾸만 조급해지는 기분이 드는 걸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런 준상의 기분을 느낀 것일까. 문득 리체스가 가만히 준상의 목에 팔을 감으며 조용히 그의 머리를 품에 안았다. “주인님.” “응.” “혼자서 모든 걸 다 책임지려고 하실 필요는 없어요.” “...” 준상은 아무 대답이 없었지만, 리체스는 가만히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절 보세요. 혼자서 전부 다 하려다가 일만 년 동안 노처녀 신세를 면치 못했잖아요.” “...” “에? 안 웃겨요? 웃으라고 한 말인데.” 준상은 그녀의 말에 결국 피식 웃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날 너무 대단한 사람으로 보는 것 아닌가?” 가만히 웃던 준상이 그렇게 말하자, 리체스는 무슨 말이냐는 듯이 정색하며 대답했다. “충분히 대단해요.” “...” “하지만 주인님은 앞으로도 더 대단해질 거에요.” “어째서?” “그야 제 주인님이니까요. 아무나 요정 여왕의 주인님이 되지는 못 한다구요.” “후후...” 준상은 목을 휘감은 그녀의 부드러운 손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리체스.” “네.” “이젠 주인님이라고 부르지 않아도 된다.” “...” 모처럼의 말이었지만, 리체스는 고개를 저었다. “전 그냥 이대로가 좋아요.” “어째서?” “그냥... 익숙해졌다고나 할까요. 이제 와서 다른 호칭으로 부르기가 좀... 아무튼 그래요.” “네가 편하다면 상관은 없지만.” 리체스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길고 가는 손가락을 준상의 눈앞에 내밀어 보이며 말했다. “키스해주세요.” “...” 준상은 당돌한 그녀의 말을 듣고는 천천히 손을 들어 그녀의 손목을 감싼 다음 부드럽고 매끈한 손가락 위에 입술을 맞추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킨 다음 리체스의 몸을 번쩍 안아들었다. “주인님?” 리체스는 갑작스런 준상의 행동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왜?” “아뇨... 아무것도.” 리체스는 얼굴이 붉어진 채 그냥 조용히 고개를 그의 품에 묻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다음 날. 준상은 하룻밤 동안 끙끙대다가 겨우 안정을 찾은 헤네스를 데리고 다시 서윤과 그의 길드원들이 머물고 있는 펜션을 찾았다. 펜션 앞에 차를 세우자, 곧바로 임서윤이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달려나왔다. “어서 오세요. 그렇지 않아도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의 등 뒤에는 진세아와 손가은이 나란히 서서 준상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고 있었다. “이렇게 셋인가?” “그렇습니다.” 준상의 말에 대답한 서윤은 쓴웃음을 지으며 펜션 옆에 자리 잡은 작은 개울가에 쪼그리고 있는 하얀 원피스의 여성을 가리켰다. “제비뽑기에서 지더니 저렇게 풀이 죽어 있네요.” “...” 서유미는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눈치 챈 것인지 준상쪽을 흘깃 바라보더니 다시 고개를 푹 수그린 채 바닥에 무언가를 끄적거리고 있었다. 두 번이나 파티 참가의 기회를 놓친 것은 확실히 불운하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아무래도 좀 낙심의 강도가 생각보다 강해 보인다. 그래서일까. 서윤은 준상에게 살짝 부연설명을 했다. “아직까지 붉은 늑대 카드를 뽑지 못했습니다.” “그랬군.” 아무리 생각해도 붉은 늑대에 대한 집착이 좀 과한 느낌이다 싶었는지 헤네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그렇게 붉은 늑대를 좋아하시는 거죠?” 그 말에 대답한 것은 가만히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진세아였다. “저도 궁금해서 물어봤는데... 어릴 적에 비슷한 모양의 개를 키웠던 모양이에요. 형제나 다름없었는데, 나중에 자기를 지키다가 죽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흠...” “뭐... 흔하다면 흔한 얘기일 수도 있겠죠.” 그런 일이 있었던 건가 하고 준상이 고개를 끄덕이자, 헤네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금방 가실 건가요?” “일단은.” “급한 일이 없다면 잠시 이곳에 머물다 가는 건 어떨까요?” “...” 준상은 그녀의 의도를 깨닫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원한다면.” 그리고는 곧바로 그곳에 자신이 데리고 있는 야수들과 펫을 풀어놓았다. 검치호부터 시작해서 입에서 불을 뿜는 헬하운드, 그리고 한 무리의 늑대들에 이르기까지, 커다란 덩치를 지닌 야수들이 한꺼번에 모습을 드러내자 펜션의 앞마당은 금방 북적거리기 시작한다. “고마워요.” 헤네스는 감사의 표시로 그의 뺨에 입을 맞추고는 늑대들을 데리고 개울가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서유미에게 다가갔다. 준상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서윤에게 물었다. “이 녀석들을 풀어놔도 괜찮을까?” 서윤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근방에서 벗어나지만 않는다면 문제 없습니다.” “다행이군.”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서윤의 안내를 받아 펜션 안으로 들어갔다. 자리를 나누어 앉자, 서윤은 얼른 그에게 말했다. “일단... 앞서도 말했다시피 저희 셋이 이번에 파티를 함께 맺게 되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임서윤과 진세아, 그리고 손가은에게 차례로 파티를 걸었다. “이전에 봐서 알겠지만, 나는 퀘스트가 발동되기 전에 그것을 미리 알 수 있다.” “아, 역시...” 임서윤과 진세아, 그리고 손가은이 감탄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보며 준상은 다시 말했다. “솔직히 20레벨이 넘도록 아직 대기 시간을 별도로 획득하지 못했다는 것이 나로서는 좀 의문이지만, 이건 나만 가진 특수 능력이 아니다.” “그렇군요.” “앞으로 퀘스트를 함께 하다 보면 보상 상자를 추가로 얻을 기회가 많아질테니, 너희들에게도 이런 능력이 생기게 될 것이다.” “알겠습니다.” 준상은 곧바로 그들이 머물 펜션으로 안내 받았다.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신혼부부나 커플이나 쓰면 어울릴 법한 치렁치렁한 내부 장식의 모습을 보고 준상은 얼굴을 찌푸렸지만, 리체스는 마음에 들었는지 탄성을 터뜨리며 부드러운 차양이 치렁치렁하게 쳐진 침대 안을 바쁘게 날아다녔다. 그러고 보면 요정계에 있는 여왕의 침실도 이런 식의 장식이 쳐져 있었지. 준상은 어쩐지 리체스의 취향을 조금은 알 것도 같은 느낌이 들었다. 밖에서 서유미와 함께 늑대들을 데리고 노는 헤네스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데, 문득 누군가가 준상이 있는 펜션으로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것은 다름 아닌 정다빈이었다. “저... 실례합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염동력으로 문을 열어주자, 정다빈은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서더니 얼른 준상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죄송합니다. 쉬시는데 이렇게 찾아와서...” “무슨 일이지?” 준상이 묻자, 정다빈은 신이 나서 침대 안팎을 날아다니고 있는 리체스를 흘끔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저기... 이런 부탁 드려도 될지는 모르겠는데... 그러니까...” 그녀는 무척이나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지만, 준상은 이런 식으로 말이 길어지는 걸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본론만.” “...” 단칼에 내려치는 듯한 그 말을 듣고 정다빈은 울상이 되었지만, 이내 주먹을 불끈 쥐더니 말했다. “요정님에게 마법을 배우고 싶어요.” “마법을?” 하긴 정다빈이나 진세아 같은 마법 사용자들에게 있어 리체스의 존재는 그야말로 우상이나 다름없다. 적어도 리체스가 마법을 쓰는 모습을 보았다면, 한번쯤은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품는다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문제는 과연 리체스가 쓰는 마법을 정다빈이나 진세아 같은 귀환자들이 배울 수 있느냐 하는 점. 단순히 생각해도 카드라는 시스템을 사용하는 귀환자들과 요정인 리체스의 마법 체계가 비슷하리라고는 생각하기가 어렵다. “리체스.” “네?” 리체스는 준상이 부르자 얼른 그에게로 날아와 그녀의 지정석인 어깨 위에 자리를 잡았다. “마법을 배우고 싶다는데.” “마법이요?” 리체스는 정다빈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렇게 말했다. “음... 인간한테 마법을 가르쳐 본 적이 없어서 가능할지 모르겠네요.” “한 번도?” “한 번도.” 리체스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누구한테 가르친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는 것이 사실이고, 사실 요정의 마법이란 건 나이테 같은 거라서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깨우치는 거라 누군가에게 가르치거나 배운다는 식의 생각을 해본 적도 없어요.” 다시 말해 요정들은 마법에 대해서는 일종의 천재라 할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당연히 습득하는 것이기 때문에 굳이 누군가에게 배워야 할 이유도, 가르칠 이유도 없는 것이다. 요정 마법사들이 전부 아줌마들인 것도 사실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정다빈은 얘기가 부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가자 다시 말했다. “해본 적이 없으시긴 해도, 앞으로 그런 경우가 생기지 말란 법은 없지 않겠어요?” “흠...” 리체스는 그녀의 말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요정이 누군가에게 마법을 가르치는 경우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아주 드문 경우긴 하지만 인간과 요정 사이에 혼혈이 태어나는 경우, 아이가 스스로 몸을 지킬 수 있도록 마법을 가르치기도 한다. 인간 가운데 마법사라고 하면 이런 식으로 요정의 피를 타고 태어난 상태에서 부모에게 마법을 전해 받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지금 헤네스가 사는 세계에 마법을 지닌 인물이 거의 씨가 마르다시피 한 것도 사실 이런 이유 때문이다. 과거에는 요정계에 제한적이기는 해도 인간이 드나들 수 있었고, 그런 만남 속에서 자연스럽게 짝을 이루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리체스가 기나긴 잠에 빠지자 그런 식의 소통은 그대로 끝이 나버렸고, 당연히 인간과 요정의 혼혈도 사라지게 된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리체스는 이런 귀찮은 일 따위 신경도 쓰지 않았겠지만, 앞으로 준상과의 사이에서 태어날지도 모르는 2세를 생각하면 이런 일 역시 미리 경험해 두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저버릴 수 없었다. “좋아. 하지만 나도 처음 가르쳐 보는 것이고, 너는 요정계의 혈통도... 어라?” 그렇게 말을 이어가던 리체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문제라도?” 정다빈의 말에 리체스는 다시 말을 이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튼 쉽지는 않을 테니까, 노력해야 할거야.” 리체스의 말에 정다빈은 기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 모습을 보며 리체스는 다시 말했다. “그럼 수업료로 뭘 줄래?” “네?” 순간 정다빈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리체스는 그런 모습을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난 좀 비싸. 요정계 최고의 마법사에게 마법을 배우는데 공짜일 리가 없잖아.” 정다빈은 조심스럽게 물어 보았다. “그럼... 얼마나...” 리체스는 손가락을 하나 펴보였다. “이 만큼만 받을게.” “...” 백만원? 아니면 천만원? 그것도 아니면 일억? 요 근래 시드를 팔아서 조금 돈을 벌기는 하지만, 이전에 준상에게서 산 지팡이 값도 아직 다 치르지 못한 처지라 정다빈은 울상이 되었다. 그런 그녀에게 리체스는 단호하게 선언했다. “하루에 초코바 한 상자. 물론 최고급품으로. 한 개도 안 깎아줄 거니까 각오해.” “...” 00260 트롤러 ========================================================================= 정다빈은 이게 농담인지 진담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초코바... 한 상자요?” 그래서 그렇게 되물었지만, 리체스는 옆구리에 손을 척 얹고는 거만한 표정까지 지어가며 다시 말했다. “그래. 그냥 초코바가 아니라 최고급!” “최고급...” 정다빈은 잠시 머리를 긁적이다가 준상의 담담한 표정을 보고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한번 구해볼게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그리고는 부리나케 바깥으로 달려나갔다. “맛있는 걸로 사와야 돼!” 리체스는 달려가는 정다빈의 뒷모습에 대고 그렇게 소리치고는 기대어린 모습으로 우흐흐 하고 웃음을 지었다. 준상은 염동력으로 다시 문을 닫은 다음 리체스에게 물었다. “가능한 일인가?” 그러자 리체스는 얼굴에서 웃음을 지우고는 시치미를 뚝 떼며 대답했다. “일단은 해봐야 알 것 같아요. 뭐가 좀 아리송한 부분도 있고 해서요.” 준상은 리체스가 정다빈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던 일을 떠올렸다. 튜토리얼에서 마법 카드를 뽑을 정도라면 소질이 없는 것은 아닐 터. “어떤 면이?” 준상의 물음에 리체스는 잠시 손가락으로 턱을 쓰다듬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그게... 묘하게 요정의 기운 비슷한 것이 느껴진달까요. 너무 희미해서 제대로 확신하기는 힘들지만요.” “흠...” 설마 이 지구에도 요정의 혈통이 남아 있었다는 얘기인가. 준상이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얼굴을 찌푸리자 리체스는 얼른 다시 말했다. “정확한 건 아니에요. 제 대역을 하고 있는 리시스의 경우만 봐도 역시나 희미하긴 했지만 보는 순간 딱 감이 왔거든요. 근데 저 애는 아무리 봐도 뭔가 묘하게 뒤틀려 있는 듯한 느낌이라...” “그렇군.” 생각해 보면 리체스는 이미 천년간 잠이 들어 있었던 상태. 그런 점을 감안해 보면 설령 요정과 비슷한 형질의 무언가가 정다빈이나 진세아의 혈통에 섞여 있더라도 그것은 리체스가 다스리던 요정계가 아닌 다른 어떤 것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다시 밖에서 시끌벅적한 소리와 함께 한 사람이 달려오더니 문 앞에 멈춰서 조심스럽게 노크를 한다. 염동력으로 문을 열어주자, 아니나 다를까, 또 다른 마법 사용자인 진세아였다. “마법을 가르쳐 주신다는 것이 정말인가요?” 단숨에 그렇게 본론부터 쏟아내자 리체스는 진세아를 아래 위로 훑어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배우게?” “네! 가르쳐만 주신다면!” 그 말을 들은 리체스는 흐응 하며 콧소리를 내더니 역시나 단호하게 대답했다. “조건은 들었겠지? 하루에 최고급 초코바 한 상자!” 그러자 진세아는 반색하며 대답했다. “물론이죠!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초코바를 구해다 드릴게요!” “정말?” “정말!” “정말, 정말?” “정말, 정말, 정말!” 리체스는 기대 가득한 표정으로 눈을 반짝거리다가 이내 헛기침을 하며 다시 말했다. “엣헴! 일단 성의를 보고 결정하도록 할게.” 그 말을 들은 진세아는 얼른 리체스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며 말했다. “네! 지금 당장 구해올게요!” 초코바 한 상자. 얼마나 고급품으로 사올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카드의 힘을 빌리지 않고 지구에서 최초로 마법을 배울 수 있다는 것만 따져 보더라도 감히 돈으로는 환산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니게 된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누군가를 가르쳐 본 경험이 없는 리체스가 과연 얼마나 그녀들을 잘 가르칠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이겠지만 말이다. 그녀는 인간의 기준으로 말하자면 엄청난 수준의 천재다. 비록 만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고는 해도, 한 가지 학문의 끝에 도달해 반신의 경지에 도달한다는 것은 어지간한 재능 가지고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천재라 불릴 정도의 재능이 있다 해도 그것은 자신이 습득하는 능력이 뛰어난 것이지 남을 가르치는 재주가 탁월하다는 뜻은 아니다. “흠...” 준상은 리체스에게 조용히 물었다. “그거 나는 배우지 못하는 건가?” 30레벨이 넘어서야 겨우 한 장 나오기는 했어도 준상 역시 회복이라는 마법을 습득한 상태. 마법에 대한 재능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닐거란 생각에 그렇게 물었지만, 리체스는 이번에도 역시나 단호하게 대답했다. “네.” “...” 진세아나 정다빈과는 다르게 고민하는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 그 단호함에 준상은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었다. “전혀 가망이 안 보이는 건가?” 그 말에 리체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다시 이렇게 대답했다. “전혀라고 말하기는 어려울지도 몰라요. 요정들도 어릴 때는 마법의 소질을 전혀 보이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으니까요.” 리체스는 나름대로 돌려 말한다고 한 셈이지만, 준상은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바로 알아들었다. “적어도 현재로서는 전혀 소질이 보이지 않는다는 얘기군.” “네, 일단은.” “...” 어쨌거나. 그 날은 그렇게 흘러가고 다음 날이 되자 진세아와 정다빈은 아침 식사를 마치기가 무섭게 리체스에게 달려와 화려한 금박으로 치장된 상자를 내밀었다. “응? 이건?” 평소에 먹던 초코바와는 뭔가 모양이랄까 형태 자체가 전혀 다르다. 크기 또한 고작 해야 절반이나 될까 싶은 초소형 사이즈. 다만 포장은 헤네스가 이따금 조금씩 쓰는 화장품과 닮은 것이 제법 아기자기한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이게 뭐야?” 역시나 요정 특유의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그렇게 묻자, 진세아가 마치 홈쇼핑의 쇼핑 호스트처럼 과장된 표정으로 설명을 시작했다. “이 초코바로 말할 것 같으면 36년 전통의 벨기에 왕실의 고급 초콜릿, 갤러 쇼콜라띠에입니다.” “갤러?” “네. 이 상품은 그 중에서도 샐러브레이션 박스로 모두 8가지 맛의 초코바가 모두 18개나 들어 있습니다.” 청산유수와도 같은 진세아의 말 가운데서도 리체스가 반응한 것은 여덟 가지 맛이라는 부분이었다. “여덟 가지 맛?” 진세아는 리체스가 반응을 보이자 상자 안에 고급스럽게 포장된 초코바를 하나씩 가리키며 설명을 이어갔다. “여기 이 주홍색의 포장이 보이시나요?” “응.” “이건 바로 느와르 프랄리네입니다.” “느와... 뭐라고?” “느와르 프랄리네. 헤이즐넛 프랄린이 채워진 다크 초콜릿이죠.” 리체스는 진세아가 하는 말의 반절도 알아먹을 수가 없었지만, 어쨌든 맛있는 거란 생각에 홍수처럼 군침을 흘리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진세아의 설명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여기 보이는 이 어두운 풀색의 포장은 느와르 프랄리네 느와입니다.” “그, 그건 무슨 맛인데?” “부드러운 카라멜 층에 그르노블 호두와 구운 헤이즐넛이 채워진 다크 초콜릿이죠.” “우으으으...” 그런 식으로 진세아는 상자 안에 담겨진 여덟 가지 초콜릿의 설명을 하나 하나 이어갔고, 마침내 그 모든 설명이 끝날 즈음이 되자 리체스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침만 꼴깍 꼴깍 삼키고 있었다. 진세아는 그 표정을 보고는 그녀가 완전히 넘어왔음을 확신했다. “자, 어떠세요. 마음에 드시나요?” 하지만 리체스는 역시 요정계를 다스리던 여왕. 그렇게 만만치 않았다. “흐흥! 뭘 그 정도 가지고. 별로 대단치도 않구만.” 그리고는 상자 안의 초코바를 흘깃거리며 손을 내밀었다. “어디 한 번 줘봐. 대체 무슨 맛인지 한 번 시험이나 해보게.” “네.” 진세아는 얼른 상자 안에 담긴 초코바의 포장을 정성스럽게 벗긴 다음 조심스럽게 내밀었고, 리체스는 그것을 마법으로 들어 올려 입으로 가져갔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진세아가 내민 것은 그녀가 아직 먹어본 적이 없는 화이트 초콜릿. 이게 정말 초콜릿이 맞나 싶어서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리체스는 에라 모르겠다 싶은 표정으로 초코바를 한입 깨물었다. “...” 순간 그녀의 눈앞에 신세계가 펼쳐졌다. 하늘 높이 날아올라 밤하늘에 떠있는 새하얀 은하수를 거니는 듯한 그 감각은 그야말로 밀키웨이! “이, 이게 뭐라고?” 떨리는 음성으로 묻는 리체스를 향해 진세아는 미소 띤 표정으로 대답했다. “피스타쉬 후레쉬입니다. 쌀크로칸트와 신선한 피스타치오, 그리고 프랄린이 채워진 화이트 초콜릿이죠.” “음, 음! 그래, 피스타쉬. 기억해 두지.” 결국 리체스는 냠냠거리며 초코바 하나를 게눈 감추듯 먹어치우고 난 뒤에야 자신의 실태를 깨달았다. “크흠! 아무튼 초코바를 받았으니 마법을 배워보도록 하자. 자, 나를 따라와!” “네!” 리체스가 정다빈과 진세아를 데리고 근처의 숲으로 사라지자 지금까지 그 모든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헤네스가 준상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돌아갈 때 여왕님 드릴 군것질 거리 좀 많이 사가야겠어요.” “그래야겠군.” 진세아가 사온 것은 고급 초코바이긴 해도 최고급이라는 말을 붙이기에는 다소 미흡한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원래 초코바라는 물건 자체가 따지고 보면 정크푸드의 최종보스라 해도 할 말 없을 정도의 물건이다 보니 고급을 따지는 것 자체도 좀 난감한 일. 게다가 고작 하룻밤 만에 최고급 초콜릿으로 초코바를 만드는 일 따위, 남자친구에게 줄 발렌타인 초콜릿조차 만들어 본 적이 없는 진세아나 정다빈에게는 절대로 무리였다. 그래서 생각해 낸 방법이 그나마 고급 초코바로 통하는 물건을 사다가 말빨로 리체스를 구워삼는 것이었지만, 애초에 이 전대 요정 여왕이 최고급 운운한 것 자체가 그냥 해본 말이었음을 그녀들은 미처 알지 못했다. 어쨌거나. 내막이 어찌 되었든 간에 그날부터 리체스는 진세아와 정다빈에게 마법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물론 그들의 교육과정은 절대로 쉽지 않았다. “저, 정말로 그런 주문을 외워야 하나요?” 리체스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물론! 마법은 상상력이야. 상상력을 구현화 하는데는 단순히 머리 속으로 떠올리는 것을 넘어서 언어라는 형태로 구현을 해야할 필요가 있지. 나 정도 되는 마법사라면 적절한 몇 마디 언어만으로도 그런 형상을 구체화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너희 같은 초짜들은 가급적 세세하고 면밀하게 주문을 완성시켜야할 필요가 있어.” “으음...” 충분히 일리가 있는 말이긴 했지만, 정다빈은 울상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얼른 안 해?” 하지만 리체스의 재촉이 이어지자 그녀는 이내 체념한 듯 눈을 감은 채 천천히 주문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연옥의 심처에서 뛰쳐나온 검붉은 화염이여, 지금 나 정다빈이 명하노니 세상 끝까지 피어올라 나의 적에게 지옥의 징벌이 무엇인지 알려주어라. 수라의 불꽃이여, 적염의 사자여, 나의 마음 속 가득한 이 열화를 씨앗으로 삼아 나의 열정과 분노와 증오와 파괴의 단상을 모두 모아 나의 적을 몰아치리라. 나의 이름은 화염의 주재자. 그 이름을 걸고 명하노니, 날뛰어라! 화염이여!” 나름대로 열심히 주문을 읊조리긴 했지만, 그녀의 뻗어진 손에서는 아무런 현상도 일어나지 않았다. 마법이 실패하자 곧바로 리체스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아니, 아니야! 그게 아니라니까! 좀 더 배에 힘을 꽉 주고 마음 속에 피어오른 열화를 끌어내서 토해내듯이 외치라고 몇 번을 말해!” 하지만 정다빈은 지금 이 순간 리체스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느 틈엔가 숲 너머에서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길드원의 모습을 발견하자 머리 속이 하얗게 비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는 이내 발끝으로부터 치고 올라오는 표현할 길 없는 엄청난 수치심에 의해 그대로 사고 능력이 함락되고 말았다. “으아아앙!” 결국 정다빈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얼굴을 가린 채 어두운 솦속으로 울며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어디가! 나 참... 하여튼 요즘 젊은 애들은 근성이 없다니까.” 리체스는 정다빈이 도망치는 모습을 보며 혀를 차고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진세아를 향해 말했다. “넌 원래 화염을 다룬다고 했지? 어디 한 번 해봐.” 진세아는 숲 너머에서 시선을 피하는 길드원들의 모습을 흘깃 보고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기... 제가 지금 화장실이 급해서 그런데...” 하지만 리체스는 단호하게 외쳤다. “시꺼! 방금 전에도 다녀 왔잖아! 얼른 못해?” “...” 진세아는 왜 마법을 배운다고 했을까 하며 깊게 탄식했지만, 그건 이미 너무 늦은 후회였다. 00261 트롤러 ========================================================================= 너무나 훌륭한 초코바를 선물 받아서인지 의욕이 마구 마구 샘솟기 시작한 리체스는 다음 날이 되자 어제의 치욕을 견디지 못하고 침대 안에서 이불을 뒤집어 쓴 채 웅크리고 있는 그녀들을 몸소 찾아내 끌고 나와 마법 연습을 시키려 했다. “무언가에 대한 재능이 없다는 것이 이렇게 다행스럽게 느껴진 경우는 처음인 듯 합니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훈련 전에 간단하게 몸을 풀고 있던 윤성렬은 울상이 되어 리체스에게 끌려 나오는 그녀들의 모습을 보고 그렇게 평했고,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나 자청해서 그녀들과 같은 훈련을 할 뻔했던 준상의 경우에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마저 내쉬고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진세아와 정다빈은 어제와 같은 수치 플레이를 반복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녀들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는 준상의 시야에 퀘스트 정보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리체스.” “네?” 자신의 부름에 얼른 고개를 돌린 그녀를 향해 준상은 짧게 한 마디를 건넸다. “퀘스트다.” “아...” 그 말을 들은 리체스는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고, 진세아와 정다빈은 튜토리얼을 겪고 난 뒤 처음으로 퀘스트라는 존재에 대해 감사의 뜻을 표했다. “29분 남았다. 그 전에 준비를 끝내도록.” “네!” 준상과 파티를 맺은 임서윤, 진세아는 3인은 급히 방어복으로 갈아입기 위해 자신의 방으로 달려 들어갔고, 아직 자신의 인벤토리를 가지지 못한 손가은은 진세아의 뒤를 따랐다. 세 사람이 준비를 시작하는 동안 준상은 느긋하게 벤치에 앉은 채로 퀘스트 정보를 확인했다. 괴물 쥐들의 진격을 저지하십시오. : 북대륙 남동부에 위치한 세두스 강 하류는 예로부터 비옥하기로 이름 높은 곡창 지대입니다. 바로 이곳을 향해 이상 번식한 대규모의 괴물 쥐들이 몰려 들고 있습니다. 만약 이들이 세두스 강 하류의 곡창 지대로 침입하게 된다면, 북대륙은 한동안 기아에서 벗어나기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이들의 진격을 두알라 계곡의 지형을 이용해 저지하십시오. [남은 쥐의 숫자: 1,251 마리] [이 퀘스트는 여러 명의 인원이 동시에 참여합니다.] (Hidden) 오염의 근원을 처단하십시오. (협력) -> 미완료. (Hidden) 대왕 쥐를 처단하십시오. (협력) -> 미완료. (Hidden) 오염된 쥐들을 처리하십시오. (0/213) (협력) -> 미완료. “쥐 사냥인가.” 계곡의 지형을 이용해 쥐 떼를 막는 정도의 일이라면 진세아나 임서윤 정도만 나서도 충분하지 않을까 싶은 느낌. 히든 퀘스트 자체도 세 개 뿐이라 앞서의 퀘스트에 비하면 볼륨이 약간 부족한 듯한 느낌이긴 하다. 다만 괴물 쥐라는 것이 튜토리얼에서 상대해 봤던 그 거대한 쥐들이라면 천 마리가 넘는 숫자는 확실히 가볍게 웃어 넘기기 어려운 규모라 할 수 있다. 메뚜기 같은 작은 벌레도 떼로 몰려들면 쉽게 퇴치하기 어려운데 크기가 무려 강아지만한 괴물 쥐들이라면 사람에 따라서는 보는 것만으로도 악몽이나 다름없는 일. 준상은 어쩐지 튜토리얼 당시 싸웠던 괴물 쥐의 일이 다시 떠올라 얼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일전의 봉인석 방어 퀘스트가 끝난지 며칠 지나지 않았음에도 곧바로 새로운 퀘스트라니. 한 달간 퀘스트가 없어서 정령의 문을 연다든가 델로드란 왕실을 농락하며 지냈던 준상으로서는 어쩐지 이전에 에픽 퀘스트가 몰아치던 시절이 떠올라서 감회가 새로웠다. 가만히 헤네스의 부드러운 손등을 쓰다듬으며 기다리자, 임서윤과 진세아, 그리고 손가은, 이렇게 세 명이 양산형 방어복을 갖춰 입고 후다닥 달려 나와 준상 앞에 모였다. 준상은 그들이 준비를 마치자 느긋하게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먼저 가서 기다리겠다.” “네?” 먼저 가다니? 퀘스트 출발 시간마저 조절할 수 있단 말인가. 임서윤은 물론이고 진세아와 손가은 마저도 그 말이 의미하는 바를 깨닫고는 부러운 표정을 지었다. 준상은 그들의 표정을 보고는 조금 귀찮은 표정으로 설명을 덧붙였다. “대기 시간 삼십 분을 채우면 출발이나 귀환 시간을 임의로 조절할 수 있게 된다.” “아...” 그들은 몰랐던 사실을 또 하나 알게 되자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준상과 자신들의 수준 차이를 여실히 깨달았다. 자신들은 아직 10초의 대기 시간을 넘어서지도 못하고 있는데, 준상은 이미 대기 시간 삼십 분을 넘긴 상황이라니. 도대체 얼마나 많은 보상 상자를 얻어야 그런 일이 가능한 건지, 그들로서는 감도 잡히지 않았다. 준상은 헤네스와 리체스, 그리고 소환해 두었던 야수들을 차례로 역소환한 다음 즉시 전송 기능을 실행했다. 그러자 그의 몸은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한 줄기 빛과 함께 모습을 감추었고, 이내 녹음이 우거진 아름다운 계곡으로 전송되었다. “흠...” 도로가 있는 관문 같은 것을 연상했던 준상은 물이 졸졸 흐르는 계곡의 모습에 얼굴을 찌푸렸다. 뒤를 돌아보니 넓은 평야가 시야에 들어온다. 좁은 한국 땅에서는 지평선이라는 것을 체감할 일이 거의 없다보니, 이런 식으로 넓게 펼쳐진 평야의 모습은 준상에게 있어 조금 낯선 것일 수밖에 없었다. “이쪽이 평야라면, 쥐들이 몰려오는 방향은 저쪽이라는 얘긴데.” 방향을 가늠한 준상은 우선 헤네스와 리체스부터 소환했고, 이어서 야수와 정령들, 그리고 갑가오리를 차례로 소환했다. 헤네스는 소환되기가 무섭게 바로 팔찌를 작동시켜 방어복을 착용하고 수호의 신물과 깃발 달린 호위장의 미늘창을 인벤토리에서 꺼내 손에 쥐었다. 그녀가 전투 준비를 하는 동안, 리체스는 당연하다는 듯이 준상의 어깨 위에 자리를 잡았다. 준상은 우선 미니맵을 확대해 주변의 지형을 확인하는 한편, 괴물 쥐들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갑가오리를 날려보냈다. “일단 위로 올라가야겠는걸.” 지금 위치한 곳에서는 괴물 쥐들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형국이 되는데다, 적당한 지형 지물도 없는 상황이라 방어가 쉽지 않았다. 때문에 준상은 헤네스와 함께 계곡 위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잠시 위로 올라가자 예상 외로 얼마 지나지 않아 야트막한 작은 고개 정상에 도달할 수 있었다. 고개 너머에는 울창한 잡목림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안개가 껴서 어두컴컴한 것이 음침한 느낌을 한껏 풍기고 있었다. “이쯤이 좋겠군.” 준상은 걸음을 멈추고는 그곳에 야수들과 정령들을 배치했다. 그리고 잠시 기다리자, 뒤늦게 임서윤과 진세아, 그리고 손가은이 전송되어왔다. 준상은 그들이 미니맵 상에 모습을 드러내자 메신저를 통해 말을 전했다. “위쪽에 있으니 올라오도록.” “네.” 세 명은 준상의 지시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허겁지겁 고개 위로 달려 올라왔다. 그동안 꾸준하게 산악구보를 해온 탓인지 이 정도의 야트막한 고개를 올라오는 정도로는 숨도 차지 않는 모습이다. “퀘스트 내용은 확인했나.” 임서윤은 바로 대답했다. “네. 여기서 쥐 떼를 막으면 되는 겁니까.”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말했다. “더 좋은 지형이 있다면 모르겠지만, 마땅한 곳이 보이지 않는군.” “음...” 서윤은 잠시 주위를 돌아보더니 아쉽다는 듯한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확실히 말씀대로군요. 인간과의 전투라면 고지 쪽이 나을 수도 있겠지만, 이건 그렇지도 않은 상황이니.” 그렇게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상공을 정찰하고 있던 갑가오리의 시야에 검은 파도 같은 것이 잡힘과 동시에 준상의 미니맵에 빨간 퀘스트 표식이 쏟아져 내린다. “벌써 오는군. 준비하도록.” “네!” 진세아는 곧바로 화염의 벽을 불러낼 준비를 했고, 손가은은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앞으로 나섰으며, 임서윤은 이전에 준상으로부터 구입했던 어쌔신 나이프와 함께 헌팅 나이프를 양 손에 쥐었다. 두두두두... 보통의 쥐 떼라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퍼졌겠지만, 이놈들은 덩치가 워낙 좋다 보니 무슨 말이나 소떼가 달려오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 헤네스는 그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얼굴을 찌푸리더니, 이내 눈을 감고 기안을 불러내었다. “부탁드려요.” 그러자 그녀의 머리카락에 금빛 기운이 어리기 시작했고, 곧이어 눈매가 날카롭게 변하며 푸른 기운이 어린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낸다. “이거야 원. 너무 하잖아. 좀 심하게 날뛴 건 나도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곳에 며칠이나 처박아 두다니.” 기안은 그렇게 투덜거리며 미늘창을 든 손을 붕붕 휘저었다. “알았어. 알았다고. 이번에는 가급적 입 다물고 있을게.” 그녀는 그렇게 혼잣말을 하고는 곧바로 수호의 신물이 지닌 힘을 불러냈다. “오라! 수호의 힘이여!” 임서윤과 진세아, 그리고 손가은은 이미 들은 바가 있었는지, 뜬금없는 그녀의 행동에도 별로 놀란 기색이 없었다. 하지만 곧바로 수호의 신물로부터 보이지 않는 힘의 파도 같은 것이 퍼져 나오며 그들의 몸에 숨겨진 무언가를 일깨우는 것마저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지는 못했다. “이건...” 정확히 어떤 변화가 이루어진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곧이어 착한 기안이 모습을 드러내며 다시 회복의 영기마저 부여하자 그들은 헤네스가 새롭게 얻은 힘이 결코 작지 않음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세아씨.” “네!” 임서윤이 부르자 진세아는 곧바로 정신을 집중하며 불의 벽을 불러내었다. 그 모습을 본 리체스는 이렇게 자신의 감상을 이렇게 말했다. “오, 제법인데?” 진세아가 불러낸 불의 벽은 준상과 처음 만났던 마을 방어 퀘스트에서 선보였던 것보다 더 넓은 공간에 더 높이 피어오르고 있었으며, 그 불꽃 또한 푸른 색을 띄고 있었다. 아마도 그동안의 퀘스트를 통해 더 높은 등급의 카드를 습득한 것이리라. 하지만 그녀가 일으킨 불의 벽으로도 넓은 고개 입구를 완전히 다 막아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애초에 양옆에 서있는 산기슭 자체가 완만해서 그럴 마음이 있다면 얼마든지 우회하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진세아는 처음부터 어중간하게 불의 벽을 배치하지 않고, 그나마 보다 완만한 산기슭 쪽으로 붙여서 괴물 쥐들의 진행 경로를 좁은 통로로 강제하는 쪽을 선택했다. 이것은 그들만 있었다면 쉽게 실행하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지금 그들 곁에는 박준상이라는 이름을 지닌 그야말로 무지막지한 괴물이 버티고 서있었고, 그런 그의 능력이라면 그렇게 좁아진 통로로 몰려드는 쥐 떼 정도는 가볍게 물리칠 수 있으리라는 판단이 섰기 때문에 이런 선택이 가능했다. 이것은 매우 현명한 생각이었지만, 완벽하지는 않았다. 이 정도의 적을 상대로는 굳이 준상이 직접 나설 필요도 없다는 것이 보다 정확한 답이었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정령들이 몰려드는 쥐 떼들을 향해 지닌바 힘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불과 얼음, 그리고 바람과 번개가 마치 폭풍처럼 쥐 떼들을 향해 쏟아지자 그 화려한 장관에 임서윤과 진세아, 손가은 등은 그만 얼이 빠지고 말았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정령들의 융단폭격에도 불구하고 몸이 잔뜩 그을리고 얼어붙은 모습으로 좁은 통로를 빠져나온 쥐들은 곧바로 자신들의 천적이라 할 수 있는 거대한 야수들의 습격을 받았다. 두 번도 필요 없이 곧장 달려들어 목을 으스러뜨리는 야수들의 이빨은 쥐 떼들에게 있어서는 악몽과도 같은 일이었으며,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파괴의 파동은 마치 폭탄이 터진 것과 같은 충격을 일으키며 쥐 떼들을 혼란으로 몰아넣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곧바로 눈보라와 합체한 엘리가 쥐 떼들의 향해 얼음 폭풍을 쏟아내기 시작했고, 몽몽이가 붉은 눈을 번뜩이며 자기보다 훨씬 큰 덩치의 쥐들 속으로 뛰어들었으며, 밤톨이는 몸을 둥글게 말고 데굴데굴 구르며 부상을 입은 야수들의 상처를 치유했다. 이렇게 되자 쥐 떼들은 진세아가 펼친 불의 벽 너머로 들어오기는커녕 오히려 고개 아래쪽으로 밀려가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 준상은 물론이고 그의 어깨 위에 앉아 있는 리체스나 그 앞에 버티고 선 헤네스마저도 움직일 기색을 보이지 않는 모습을 흘깃 바라본 진세아는, 이미 고개 아래로 한참 밀려 내려간 쥐 떼들의 모습을 다시 보더니 슬그머니 불의 벽을 거둬들였다. 00262 트롤러 ========================================================================= 준상은 정령들과 야수들이 너무 멀리까지 가지 않도록 지시를 내린 채 전투 상황을 가만히 지켜 보았다. 일반적인 쥐와는 차원이 다른 크기와 힘을 지니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래봐야 튜토리얼에나 등장하고 말 정도의 녀석들이라 그런지 상대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물론 그 와중에도 기안은 몸이 근질거리는지 쓸 데 없이 미늘창을 허공에 붕붕 휘두르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냥 나도 가서 싸우면 안 될까?” 결국 아무래도 안 되겠던지 그렇게 말을 걸어왔지만, 준상은 무심한 표정으로 즉시 답했다. “기다려.” “...” 기안은 매몰차기까지 한 그 말에 꿍얼거리며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기다려는 무슨. 내가 무슨 강아지도 아니고.” 그렇게 투덜거리며 애꿎은 바위를 발로 툭툭 걷어 차고 있는데, 준상의 퀘스트 창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마지막 히든 퀘스트인 오염된 쥐를 처치하라는 내용의 숫자가 하나씩 카운트 되기 시작한 것이다. “흠...” 가만히 살펴보니 정령들은 별 문제가 없었지만, 야수들 가운데 일부가 상태 이상에 걸렸다가 바로 회복되는 현상이 반복되고 있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스스로 회복되는 것은 아니고, 밤톨이가 축복의 성수를 사용해 상태 이상이 걸리는 즉시 회복을 시켜 주고 있는 것이다. 준상은 그것을 지켜보다가 기안에게 조용히 말했다. “상태 이상 같은 것에 대한 저항력을 높여주는 영기는 없는 건가?” 지루한지 애꿎은 바위를 툭툭 걷어 차다 못해 조금씩 갉아먹듯이 부수고 있던 기안은 얼른 반색하며 대답했다. “있지! 물론.” “사용해 봐.” “알았어.” 기안은 눈을 감았고, 이내 묘하게 색기 어린 눈매의 착한 기안이 표면으로 올라왔다. “바로 시작할게요.” 착한 기안은 준상을 향해 그렇게 말하며 살짝 눈웃음을 치더니 한 손을 가슴에 대고 기도를 올렸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이전에 활성화했던 생명의 파동과는 다른 영기가 그녀에게서 흘러나와 준상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의 몸에 스며든다. “이건?” “정신의 파동이에요. 마음을 굳세게 만들어서 나쁜 기운을 몰아내 주죠.” 사실 지금의 준상에게는 별 의미 없는 효과였지만 정신의 파동이 활성화되자 야수들이 오염된 쥐에 의해 상태 이상에 걸리는 경우가 눈에 띄게 줄어 들었다. 자신의 할 일을 마친 착한 기안이 물러가고 화난 기안이 다시 돌아와 땅에 박아 넣은 호위장의 미늘창을 뽑아 드는 순간, 준상은 미니맵에 다른 자잘한 붉은 표식의 몇 배는 되는 크기의 커다란 퀘스트 표식이 출현한 것을 알아보았다. “...” 가만히 미니맵이 가리키는 장소를 주시하자, 어두운 잡목숲이 흔들거리며 무언가 묵직한 것이 움직이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잠시 더 지켜보자, 과연 저것을 쥐라고 부르는 것이 맞을까 싶은 수준의 거대한 무언가가 느릿하게 잡목들을 밟아 으스러뜨리며 모습을 드러낸다. 야수들 가운데 가장 큰 덩치를 지닌 크림슨 울프 리더나 검치호보다도 몸집이 클 정도이니 말 다한 것 아니겠는가. “기안.” 준상이 부르자 기안은 기다렸다는 듯이 외쳤다. “저 놈을 해치우라는 거겠지?” “그래.” “하하하!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기안은 크게 웃음을 터뜨리더니 방패로 전면을 가린 채 마치 불도저와 같은 기세로 곧장 대왕쥐를 향해 돌진하기 시작한다. “쟤는 정말 돌진 밖에 모르나봐요.” 리체스는 그 모습을 보고 못 말리겠다는 듯이 그렇게 중얼거렸고, 준상은 타고 가라고 하기 위해 일부러 불러들이던 갑가오리를 말없이 돌려보냈다. “비켜! 비켜! 비켜! 비켜!” 자신들의 우두머리인 대왕쥐를 지키기 위해 괴물 쥐들이 기안의 앞을 가로 막았다. 그러나 애초에 기안의 돌진은 설사 버티고 선 것이 거대한 성벽이라 할지라도 쉽사리 막아낼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고, 결국 괴물 쥐들은 그녀의 발에 밟혀 터지고 미늘창에 맞아 으스러지며 길을 열어줄 수밖에 없었다. -키에엑! 대왕 쥐는 비명인지 포효인지 모를 소리를 질러대며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인간을 향해 위협을 가했다. 그러나 기안은 눈썹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 방패를 앞세우고 곧장 달려들어 놈의 콧잔등을 미늘창으로 가차 없이 찍어 버렸다. -끼엑!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기안을 향해 뛰어들 준비를 하던 대왕 쥐는, 펄럭이는 깃발을 단 미늘창이 곧장 내리 꽂히며 부드러운 콧잔등을 찢어 발기자 펄쩍 뛰며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뭐야, 이거. 덩치만 컸지, 완전히 맹탕이었잖아.” 기안은 어이없다는 듯이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의 섣부른 판단이었다. 대왕 쥐라는 이름에 걸맞은 크기를 지닌 이 괴물은 오염의 결과로 인해 어지간한 인간의 갑옷을 능가하는 방어력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인간이 휘두르는 무기 쯤이야 가볍게 튕겨 내고 목덜미를 물어뜯으려 했던 것인데, 불운하게도 싸우는 성녀가 빙의된 이 인간 소녀의 힘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고, 여기에 콤보 효과와 무기의 파괴력까지 합쳐지자 자신하던 단단한 피부가 여지없이 갈라지는 사태를 맞이한 것이다. 말이 나와서 얘기지만, 기안이 휘두르는 +10 강화된 미늘창의 파괴력은 판급 갑옷이라 해도 여지없이 찢어발길 정도의 위력이니 오염에 의해 조금 강화된 정도로는 막아내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기안은 짧은 앞발로 콧잔등을 감싸쥔 채 끽끽거리며 비명을 지르는 대왕 쥐의 옆구리를 향해 수호의 신물을 들이밀며 뛰어들었다. 대왕 쥐는 다시금 기안이 자신을 향해 달려들자 펄쩍 뛰며 그 돌격의 범위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미처 발이 땅에서 떨어지기도 전에 일각수의 뿔이 길게 튀어나온 수호의 신물이 놈의 옆구리를 맹렬하게 들이받았다. 일각수의 뿔은 곧바로 대왕 쥐의 부드러운 옆구리를 뚫고 들어갔다. 그것만으로도 치명적인 결과였지만, 날카로운 뿔은 갈비뼈 사이를 곧장 비집고 들어갔고, 그 압력을 견디다 못한 갈비뼈는 으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부서지고 말았다. 최후의 빗장이 열리자, 뿔은 그대로 대왕 쥐의 여린 속살을 비집고 들어가 간과 허파를 찢어 발기고 말았다. -케륵! 제 아무리 덩치가 산만한 대왕 쥐라 해도 이래서야 도저히 견뎌낼 방법이 없다. 그대로 잡목숲의 가지들을 부러뜨리며 튕겨 나간 채 버둥거리며 피거품을 뿜어내는 대왕 쥐의 뒤를 따라간 기안은 약간의 망설임도 없이 곧바로 미늘창을 휘둘러 대왕 쥐의 목을 부숴버렸다. 대왕 쥐가 쓰러진 것을 확인한 준상은 곧바로 기안을 다시 불러들이고는 정령을 보내 괴물 쥐들을 포위했다. 혹시라도 쥐들이 뿔뿔이 흩어질 것을 염려한 조치였지만, 괴물 쥐들은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맹목적으로 앞을 향해 달려들기만 할 뿐이었다. “역시 오염의 근원이 문제인가.” 준상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미니맵을 크게 펼친 상태로 갑가오리를 불러 들여 그 등에 올라탔다. 이미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영역 근처는 갑가오리를 통해 면밀하게 수색을 마친 상태.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하나의 퀘스트 목표인 오염의 근원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단순하게 생각하자면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나 대왕 쥐가 처참하게 죽음을 당한 상황에서도 무언가에 홀린 듯이 전진만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은 바꿔 말하자면 아직까지도 무언가에 의해 조종을 받고 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바꾸어 말하자면, 오염의 근원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갑가오리 같은 존재들에게 들키지 않은 채 모습을 숨기고 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이전에 싸웠던 다른 놈들과 다르게 직접 나서서 싸우기 보다는 숨어서 쥐들을 조종하는 것이 주된 행동 패턴이라면 어떨까. 준상처럼 퀘스트의 목록을 사전에 확인할 수 없다면 그런 존재가 숨어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할 것이고, 단순히 쥐들을 모두 해치운 것만으로 만족하고 물러가면 놈은 다시 숲속으로 숨어들어 다른 것을 오염시켜 똑같은 일을 반복할 것이다. 어떻게 보면 얍삽한 행동일 수도 있다. 그러나 바꿔 생각해보면 자신의 몸을 드러낸 채 싸움을 거는 다른 놈들보다 오히려 더 상대하기 까다로운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준상은 리체스와 함께 갑가오리에 올라탄 상태로 하늘을 날며 초감각의 범위를 최대한으로 넓혔다. 그러자 어두운 잡목숲에 가리워져 세세하게 보이지 않던 괴물 쥐들의 움직임이 손에 잡힐 것처럼 명확하게 전해진다. 가만히 그렇게 괴물 쥐들과 자신이 부리는 소환물들이 싸우는 모습을 초감각을 통해 지켜보던 준상은 뜬금없이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 초감각은 엄연히 자신의 신체에서 느껴지는 일상적인 감각과는 구별되는 제2의 감각. 그럼에도 불구하고 준상은 그것을 받아들이고 느끼고 분석하는데 전혀 위화감이 없었다. 혹시, 이것을 리체스가 만드는 분신에 적용할 수는 없을까. 분신의 사용에 있어 가장 곤란한 점을 꼽으라면 본신의 감각과 분신의 감각이 혼재되어 구별하기 어렵다는 점. 리체스는 연구를 계속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분신이 느끼는 감각이 보통의 감각이 아닌 초감각이라면 어떨까.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모처럼 만들어 놓고도 사용하지 못하는 분신의 활용에 획기적인 전기가 마련될 것이다. 준상은 방금 떠오른 그 생각을 리체스에게 말하려다가, 초감각의 그물에 괴물 쥐와는 다른 이질적인 무언가가 잡히는 것을 깨닫자 입을 다물었다. 역시 예상대로였다. 놈은 어두운 숲 그늘에 구부정한 모습으로 몸을 숨긴 채 괴물 쥐들을 조종하고 있었던 것이다. 몸에서 풍겨 나오는 기운의 느낌은 이전에도 몇 번 퀘스트에서 접한 적이 있었던 오염의 근원이 틀림없었다. 다만 한 가지 특이한 점이라면, 이전에 오염의 근원을 몸에 품고 있던 다른 놈들과는 달리 이 놈은 고작해야 어린 아이 키 정도가 될까 싶을 정도로 작은 몸집을 지니고 있다는 정도다. “리체스.” “네.” “저기 숲그늘에 벼락 한 방.” “맡겨 주세요.” 곧바로 그녀의 입에서 낭랑한 주문 소리가 흘러나옴과 동시에 하늘에서 거대한 섬광이 숲그늘을 향해 내리꽂혔다. 준상은 눈을 감은 채 초감각을 통해 숲그늘에 몸을 숨긴 놈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놈은 키득거리는 듯한 소리로 중얼거리며 괴물 쥐를 조종하는 일에 열중하다가 갑자기 번뜩이는 섬광과 함께 벼락이 자신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자 기겁하며 몸을 숨기고 있던 숲그늘로부터 뛰쳐나왔다. 상당히 날렵한 움직임이었지만, 준상은 놈이 뛰쳐나오는 순간 염동력을 펼쳐 갑가오리 위에서 마치 낚시질을 하듯 놈을 휙 건져 올렸다. -히긱! 놈은 보이지 않는 힘이 자신을 옭아매며 허공으로 들어올리자 기겁하며 몸을 틀어 그 힘의 영향력 하에서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그런 노력도 헛되이, 놈의 가벼운 몸은 순식간에 허공으로 들어 올려졌고, 아차하는 순간에는 이미 준상의 손에 의해 덜미를 잡힌 신세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흠...” 준상은 포박 상태로 덜미를 잡힌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놈의 모습을 가만히 살펴 보았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쥐 인간. 얼굴의 생김새는 영락없이 쥐새끼인데, 검게 번들거리는 몸은 인간의 그것과 닮았다. 준상은 부들부들 떠는 놈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지만, 키득거리는 듯한 기묘한 울음소리 밖에 들을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밖에 없었다. 곧바로 어둠의 근원을 부술까 하던 그는 괴물 쥐들이 모두 처치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지금 부숴버리면 괴물 쥐들이 흩어져 달아날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사냥이 몇 배는 더 골치 아파지기 때문이다. 결국 어둠의 근원은 모든 괴물 쥐들이 소탕되고 난 다음에야 준상의 손에 의해 괴물의 가슴에서 뽑혀 나왔다. 괴물은 몸에 박혀 있던 어둠의 근원이 뽑혀 나오자 바람 빠지는 듯한 비명소리와 함께 숨을 거두었고, 그 몸은 이내 흐느적거리며 엿가락처럼 녹아 내렸다. 괴물 쥐들이 모두 소탕되자 마지막이 되어서야 괴물 쥐 소탕에 뛰어들었던 임서윤과 진세아, 그리고 손가은의 3인은 즉각 전송이 이루어졌다. “흠...” 준상은 어둠의 근원이 이전에 자신이 획득했던 악령의 구슬과 많이 닮아 있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바로 부수지 않고 괴물의 몸에서 뽑아낸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지만, 모처럼 수고스럽게 뽑아냈음에도 불구하고 어둠의 근원은 괴물의 몸이 녹아내리자 마치 자신의 역할을 다했다는 듯이 쩡 하는 소리와 함께 가루가 되어 부서져 내렸다. “쯧...” 준상은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다가 몽몽이가 아이템 수집을 마치고 돌아오자 모든 소환물들을 역소환한 다음 즉시 전송을 실행해 귀환했다. 준상이 다시 펜션에 모습을 드러내자 임서윤과 진세아, 그리고 손가은의 3인은 그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고는 몸에 뭍은 쥐의 피와 살점등을 씻기 위해 각자가 머물고 있는 펜션으로 돌아갔다. 준상 역시 곧바로 자신이 머물고 있는 펜션으로 돌아와 우선 헤네스와 리체스부터 다시 불러냈다. “먼저 씻어라.” “네.” 00263 트롤러 ========================================================================= 저번처럼 곧장 이불을 뒤집어 쓰고 숨으면 어쩌나 싶었다. 그러나 헤네스는 예상 외로 별다른 이상 반응을 보이지 않은 모습으로 순순히 욕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기안이 저번보다 얌전하게 군 탓인지, 아니면 어느새 적응이 된 탓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준상은 헤네스가 욕실로 들어가자 물의 정령을 불러 대충 옷 등에 묻은 이물질을 닦아낸 다음 이번 퀘스트에서 얻은 결과물들을 확인했다. 괴물 쥐들의 진격을 저지하십시오. : 북대륙 남동부에 위치한 세두스 강 하류는 예로부터 비옥하기로 이름 높은 곡창 지대입니다. 바로 이곳을 향해 이상 번식한 대규모의 괴물 쥐들이 몰려 들고 있습니다. 만약 이들이 세두스 강 하류의 곡창 지대로 침입하게 된다면, 북대륙은 한동안 기아에서 벗어나기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이들의 진격을 두알라 계곡의 지형을 이용해 저지하십시오. [남은 쥐의 숫자: 0 마리] [이 퀘스트는 여러 명의 인원이 동시에 참여합니다.] ->완료! (Hidden) 오염의 근원을 처단하십시오. (협력) -> 완료! (Hidden) 대왕 쥐를 처단하십시오. (협력) -> 완료! (Hidden) 오염된 쥐들을 처리하십시오. (213/213) (협력) -> 완료! - 당신이 이번 퀘스트에서 보여준 행동과 성과를 정산합니다. 이 과정은 약간의 시간이 소요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축하합니다! : 당신의 랭크는 SSS입니다. -당신은 이번 퀘스트의 목표를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완벽하게 수행했습니다. 기본 보상 외에 추가 보상이 지급됩니다. 보상 : 경험치 약간, 추가 보상 상자(협력)x3, 추가 보상 상자(SSS랭크) -> 보상을 지금 수령하시겠습니까? (Y/n) _ (주의) 수령하지 않은 보상은 7일후 자동 소거됩니다. 역시나 퀘스트 난이도가 시원찮은 탓인지, 경험치는 조금도 아니고 약간 수준에 불과했다. 숨겨진 보스가 포박도 벗어나지 못할 정도면 말 다한 일 아니겠는가. 하긴 처음부터 경험치 보다는 보상 상자를 노리고 저들과 파티를 맺은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준상은 곧바로 보상을 수령한 다음 상자를 하나씩 열기 시작했다. 카드정보 명칭 : 덩치 큰 괴물 쥐 레벨 : 1Lv 경험치 : 0 등급 : Uncommon 분류 : 소환 성장 : 일반(중) 속성 : 없음 효과 : 제법 덩치가 큰 괴물 쥐 1개체를 소환합니다. Cost : 10 Seed : 1슬롯 “...” 하지만 첫 번째로 나온 카드를 보고 준상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확실히 쥐 떼를 미친 듯이 때려잡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이런 식으로 괴물 쥐가 보상으로 나올 줄은 미처 예상 못한 탓이다. 등급은 칭호 효과 덕분에 최하를 면했으나, 그래봐야 시드 슬롯도 고작 하나에 불과하다. 준상은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두 번째 상자를 열었다. 카드정보 명칭 : 숄더차지 레벨 : 1Lv 경험치 : 0 등급 : Rare 분류 : 스킬 성장 : 일반(대) 속성 : 없음 효과 : 적을 어깨로 강하게 들이받아 현재 공격력의 200% 데미지를 가한다. (쿨타임: 4초) Cost : 20 Seed : 4슬롯 두 번째 상자가 열리기가 무섭게 쏟아지는 메시지의 향연. 준상은 카드의 이름을 확인하고는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축하합니다! :콤보카드를 조합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현재 조합 가능한 콤보 카드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전장의 암흑 무투가 [상세 확인] -콤보 카드 조합을 원하시면 해당 번호를 누르시고, 만약 조합을 원치 않으신다면 n을 누르세요(1/n) _ 준상이 주로 사용하는 유력한 콤보 가운데 하나 였음에도 불구하고 카드 운이 따라 주지 않아 지금까지 레어급 이상으로 승격 되지 못했던 무투가 콤보가 마침내 업그레이드된 것이다. 전장의 암흑 무투가 -피와 살이 튀는 지하의 격투장에서 불패의 신화를 쌓고, 나아가 전장에서 그 명예를 드높인 위대한 암흑 무투가의 힘이 담긴 카드 조합입니다. 이 콤보는 무투 계열의 스킬 사용에 특화 되어 있습니다. [조합상세] 광폭, 카운터, 숄더 차지, 강타, (야수의 영혼 효과 1종 이상) (모든 등급이 레어 이상) -효과: 1. 카운터, 숄더 차지, 강타의 위력 상승 (영혼 효과의 수 X 120%) 2. 카운터, 숄더 차지, 강타의 스킬 쿨타임 60퍼센트 감소 3. 카운터, 숄더 차지, 강타 사용시 치명타 발생 확율 대폭 증가 4. 카운터, 숄더 차지, 강타 사용시 패널티 20퍼센트 감소 기존에 있던 옵션 들의 효과가 상승했음은 물론이고, 여기에 더해 기술 사용시의 패널티 감소 효과가 새롭게 부여되었다. 카운터나 숄더 차지 같은 경우는 그렇다 치더라도 강타의 패널티가 감소한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축하합니다! :당신은 처음으로 ‘전장의 암흑 무투가’ 조합에 성공했습니다! -당신의 위업을 찬양하며 ‘첫 번째 전투 무투가’ 칭호를 부여합니다. [칭호 상세 정보 확인은 이곳을 누르십시오.] 레어 등급으로의 승격이 너무 늦어서 칭호를 획득하는 것이 실패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을 느꼈던 것과는 달리, 이번에도 어김없이 칭호를 받아낼 수 있었다. [첫 번째 전투 무투가] :‘전장의 암흑 무투가’ 조합을 첫 번째로 성공한 자에게 부여되는 칭호. -효과: 야수의 영혼 효과를 하나 달성할 때마다 공격속도 3퍼센트 증가. -칭호는 획득시 자동으로 효과가 적용됩니다. 그 효과는 이전에 습득했던 무투가 칭호의 그것과는 조금 달랐다. 이전의 것은 야수의 영혼 효과 하나를 달성할 때마다 전체속도 2퍼센트 증가의 옵션이 붙어있었던 반면, 이번에 얻은 칭호는 전체속도가 아닌 공격속도인 대신 효과는 조금 더 높았다. 준상은 다시 세 번째 상자를 열었다. 카드정보 명칭 : 대왕 쥐 레벨 : 1Lv 경험치 : 0 등급 : Rare 분류 : 소환 성장 : 일반(대) 속성 : 없음 효과 : 엄청나게 큰 괴물 쥐 1개체를 소환합니다. Cost : 15 Seed : 2슬롯 “...” 모처럼 원하던 카드를 얻어서 기분이 좋아졌던 준상은 마지막 추가 보상 상자에서 나온 카드를 보는 순간 얼굴이 찌푸려졌다. 괴물 쥐라니. 등급은 높지만 코스트나 시드 슬롯의 개수를 보면 대충 이 소환물의 가치를 알만했다. “쩝.” 소환물의 수가 늘어난 걸로 만족을 해야 하나. 준상은 다시 한 번 입맛을 다시며 마지막 남은 트리플 에스 등급의 상자를 열었다. 카드정보 명칭 : 약삭빠른 쥐의 영혼 레벨 : 1Lv 경험치 : 0 등급 : Rare 분류 : 아이템 성장 : 일반(대) 속성 : 없음 효과 : 장착시 약삭빠른 쥐의 영혼이 사용자에게 빙의하여 민첩성이 상승합니다. Cost : 15 Seed : 2슬롯 “이건...” 준상은 예상치 못한 쥐의 영혼 카드에 얼굴을 찌푸렸다. 카드 자체가 지닌 능력은 민첩성 상승. 괴물 쥐 소환 카드처럼 코스트도 낮고 시드 슬롯도 레어 등급인 주제에 고작 2개 밖에 안 된다. 하지만 영혼 카드를 장착하게 되면 방금 레어 등급으로 승격된 무투가 콤보의 파괴력이 직접적으로 상승하는 효과를 가져오게 된다. 그 양이 얼마 안 되면 모르겠지만, 영혼 카드를 하나 장착함으로서 위력 상승 효과는 무려 120퍼센트. 문제는 이 카드를 장착하게 되면 군랑맹진 콤보의 효과를 포기해야만 한다. 군랑맹진 콤보는 늑대류의 소환물 들이 지닌 코스트를 절반으로 줄여줄 뿐만 아니라, 늑대류의 소환물이 지닌 공격력을 상승시켜 주고, 여기에 추가로 사용자에게 늑대의 영혼이라는 버프를 부여해 준다. 늑대의 영혼은 늑대 한 마리를 소환할 때마다 공격력과 이동속도를 증가시켜 준다. 이전에 비해 늑대들의 활용도가 다소 떨어지고 있기는 하지만, 이런 이점을 포기하고 쥐의 영혼을 장착하기는 아무래도 저어될 수밖에 없는 일이다. “곤란한걸.” 혹시나 해서 펫에게 소환물 카드를 장착한 상태에서도 영혼 효과가 부여되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늑대 카드를 한 장 빼고 그 자리에 쥐의 영혼 카드를 장착한 다음 숄더 차지 스킬을 발동해 위력을 시험해 봤다. 하지만 결과는 펫에게 장착된 늑대 카드로는 군랑맹진 효과가 발동이 되지 않는 것을 확인하는데 그치고 말았다. 준상은 쥐의 영혼을 카드 슬롯이 많이 남아도는 리체스에게 장착시키는 것으로 카드 정리를 끝냈다. 남은 것은 시드 확인. 대왕 쥐가 지닌 시드는 레어가 아니라 방어력 상승 7퍼센트짜리에 불과했으나, 어둠의 근원을 지니고 있던 괴물로부터 나온 시드는 다소 특이한 효과를 지니고 있었다. 명칭 : 숨바꼭질 레벨제한 : 20 종류 : 시드 등급 : Uncommon 효과 : 은신 스킬 증폭 1단계 설명 : 어둠의 근원이 지니고 있던 특별한 시드입니다. Seed 슬롯이 있는 아이템이나 카드에 장착하여 능력을 강화할 수 있습니다. 한번 장착한 시드를 분리하기 위해서는 특수기능 ‘분리’가 필요합니다. [이 시드를 아이템이나 카드에 장착하시려면 이곳을 누르십시오.] “언커먼인데 레벨 제한이 20?” 단순히 레벨만 높은 것이 아니라 은신 스킬을 증폭시켜 주는 특수한 효과를 지니고 있었다. 아마도 놈이 갑가오리나 야수들의 예민한 감각에 잡히지 않았던 것은 이런 식으로 은신 스킬에 대해 증폭 효과가 부여된 덕분이 아니었을까. 이런 식으로 스킬을 증폭해주는 시드는 처음 습득한 것이기에, 준상은 일단 나중을 대비해 따로 보관해 두었다. 그렇게 보상의 확인이 모두 끝나자, 그제서야 몸을 다 씻은 헤네스가 젖은 머리를 한 채 가운을 두르고 욕실 밖으로 나왔다. “다 씻었어요.” 막 씻고 나온 모습을 보이는 것이 부끄러운지 볼을 발그레하니 붉히고 있는 헤네스가 너무나도 귀여웠기 때문에 준상은 말없이 손을 뻗어 그녀를 끌어당기고는 그 볼에 입을 맞추었다. 순간 향긋한 비누 냄새와 함께 보송보송한 그녀의 살결의 감각이 입술을 통해 전해져 왔다. “수고했다. 쉬고 있어.” “네.” 준상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욕실로 향하다가 리체스가 어깨 위에 그대로 앉아 있는 것을 깨달았다. 리체스는 준상이 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손을 내밀자, 그 위에 올라타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도 같이 들어가면 안 되나요?” 몸을 베베 꼬며 묻는 그 모습에 준상은 물론이고 헤네스마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안 될 것 없지.” 준상은 선선히 그렇게 대답하고는 리체스를 어깨 위에 앉혀둔 채로 욕실로 걸어 들어갔다. 욕실 안에 들어온 준상은 리체스를 거울이 있는 세면대 위로 옮겨둔 다음 옷을 벗으며 말했다. “리체스.” “네?” 리체스는 뒤로 돌아서서 입고 있던 원피스를 벗다가 화들짝 놀라며 돌아보았다. “그렇게 놀랠 건 없고, 내가 아까 떠오른 생각이 있는데.” 준상은 그렇게 운을 뗀 다음, 아까 초감각을 발동했을 때 떠올렸던 생각을 그녀에게 말했다. “초감각이라... 어떤 식으로 적용되는 건지 알 수 있다면 도움이 될 것 같기는 한데요.” 리체스의 대답을 들은 준상은 우선 욕조에 물을 받으면서 머리부터 감으며 대답했다. “참고가 될 만한 것이라면 있는데.” “그래요? 한 번 보여주세요.” 준상은 인벤토리에서 사자의 가면을 꺼낸 다음 염동력을 사용해 리체스가 있는 세면대 위로 옮겨 놓았다. “그 가면 안에 초감각 능력이 담겨져 있다.” “아...” 리체스는 옷도 벗다 말고 준상이 넘겨준 가면을 이리저리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녀는 준상이 머리를 다 감고 간단하게 샤워를 마칠 때까지도 가면을 살피는 일에 몰두하다가 그가 욕조 안으로 들어서는 기척을 느끼자 그제서야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아차차. 내 정신 좀 봐.” 그녀는 얼른 옷을 벗고는 그대로 하늘을 날아 준상이 들어와 있는 욕조 안으로 몸을 날렸다. 원래부터 커플 용으로 만들어진 욕조라 인간 크기로 들어왔더라도 무난하게 함께 목욕을 즐길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요정 사이즈. 그런 리체스에게 있어 이 욕조는 그야말로 거대한 수영장이나 다름 없을 정도다. “어때? 살펴 보니.” 리체스는 물 위에서 얼굴을 내밀고 고개를 저어 물기를 털어낸 다음에야 대답했다. “우푸푸... 확실하지는 않지만 대충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는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자세한 건 연구실에 가서 더 확인을 해봐야겠지만요.” “다행이군.” 준상은 눈앞에서 헤엄치고 있는 작은 리체스를 보다가 문득 욕조 한쪽의 스위치가 눈에 들어왔다. 그 중 하나를 누르자 욕조 주위에 배치된 전구에 불이 들어오더니 욕조 안이 분홍빛으로 물든다. “우와! 이거 뭐에요?” “이 욕조에 달린 기능이야.” “오오!” 리체스는 얼른 준상이 가리킨 스위치가 있는 곳으로 가더니 호기심 어린 눈으로 버튼을 이것 저것 눌러보기 시작했다. 그러자, 갑자기 평온하던 욕조 안에 급류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다. “우와아아!” 리체스는 그것을 보자 환호성을 지르며 그대로 욕조 안으로 풍덩 뛰어 들더니 신나게 물놀이를 즐기기 시작했다. 준상은 자신과 목욕을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물살에 이리저리 휩쓸리며 환호성을 지르고 있는 리체스의 모습에 다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월풀 욕조의 놀라운 성능에 심취해 정신 없이 놀던 리체스는 한참이 지나서야 녹초가 된 모습으로 준상의 어깨로 기어 올라왔다. “후와...” 가볍게 숨을 몰아쉬는 그녀에게 준상이 말했다. “신기루 꽃에도 이런 거 하나 들여놓을까?” “정말요?” “물론.” 신기루 꽃에 들여놓은 컨테이너 하우스에는 간단한 샤워만 가능한 수준의 욕실 밖에는 구비되어 있지 않았다. 최상층 정 가운데 물이 담긴 수반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욕조라기보다는 작은 연못이나 물놀이 장소에 가까운 개념이다. 생각 같아서는 신기루 꽃의 방 하나를 월풀 기능이 달린 수영장으로 꾸미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러자면 공사를 위한 인부들이 신기루 꽃을 출입해야만 한다는 문제가 있었다. 헤네스의 가족들이나 델로드란의 사람들이라면 몰라도, 지구의 사람들에게 신기루 꽃이 알려지는 것은 아직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 “흠...” 혹시 컨테이너 하우스의 형태로 대욕탕 같은 걸 만들 수는 없을까. 준상은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욕실을 나왔다. “끝나셨어요.” 밖으로 나가자 어느새 머리를 다 말린 헤네스가 다가왔다. 준상이 소파에 자리를 잡자, 헤네스는 조심스럽게 수건으로 그의 머리카락을 닦아주기 시작했다. “이거 제가 가져가서 살펴봐도 되죠?” 리체스는 마법으로 물기를 대충 떨구어 내고는 준상에게 사자의 가면을 들어 보였다. 준상은 그러라고 하려다가 지금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면 곤란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서윤의 길드원들이야 이미 자신의 인상착의를 다 알고 있는 상황이긴 하지만, 문제는 요정들에게 키스를 받아 생긴 부작용이다. 일전에 서윤과 만났을 때 그의 반응이 어땠는가. 게다가 그의 길드원들은 반수 이상이 여성. 괜히 쓸데없는 문제가 일어나는 것을 그는 바라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당분간 그가 요정계로 가서 지내면 그뿐 아니겠는가. 연속해서 두 번이나 퀘스트를 진행했으니 리체스의 연구도 도울 겸 잠시 쉬는 것도 나쁘지 않다. “모처럼인데 함께 요정계로 가자.” “네!” ============================ 작품 후기 ============================ 쓰다 보니 분량이 많아져서 두 편으로 나누어 올립니다. 내일 한 편 더 올릴지 어떨지는 두고 봐야겠네요. 00264 트롤러 ========================================================================= 준상은 잠시 휴식을 취하고 헤네스와 리체스를 대동한 채 펜션 밖으로 나와 임서윤이 머물고 있는 펜션으로 들어섰다. “아... 어서 오십시오.” 임서윤은 서류를 보고 있다가 얼른 준상과 헤네스를 맞이했고, 준상은 그가 권하는 대로 자리에 앉으며 얘기를 꺼냈다. “부탁할 것이 있다.” “말씀하십시오.” “만들었으면 하는 것이 있는데...” 준상은 컨테이너 하우스를 이용해 적당한 크기의 실내 욕탕을 만들 수 있는지 물었다. “음...” 서윤은 잠시 생각을 하다가 대답했다. “너무 큰 규모만 아니라면 충분히 만들 수 있습니다. 실제로 펜션에 딸린 작은 실내 수영장 정도는 의외로 제법 있으니까요. 크기는 어느 정도로 생각하십니까?” “일전에 받았던 컨테이너 하우스 정도면 알맞을 것 같은데.” “그 정도라면... 주문 제작을 넣어야 하니 시간이 좀 걸리긴 해도 가능할 겁니다. 물론 수영장이 아니라 욕탕이면 급탕 같은 기능도 넣어야 할테니 조금 더 시간이 걸리긴 하겠군요.”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리체스가 기다렸다는 듯이 얼른 끼어들었다. “월풀 기능도 넣어주세요.” “월풀이요?” “음... 그리고 조명도! 되도록 화려하게!” “...” 서윤은 슬쩍 준상을 바라보며 허락을 구했다. 물론 준상이 안 된다고 할 이유가 없다. “그녀가 원하는 대로.” “알겠습니다.” “아... 혹시 모르니 물이 분사되는 위치에는 안전 설비를 충분히 해두는 편이 좋겠군.” “안전 설비... 그것도 추가하도록 하겠습니다.” 서윤은 메모지에 간단하게 준상의 요구 사항을 적었다. 준상은 그것을 지켜보다가 다시 말했다. “그 양산형 방어복 말인데.” “아...” 서윤은 깜박 잊고 있었다는 듯이 얼른 대답했다. “그렇지 않아도 말씀드리려던 참이었습니다. 아직 본격적인 양산은 조금 시기상조이긴 합니다만.” “아직은 시험단계인 모양이군.” “그런 셈입니다. 원래는 퀘스트를 수행하면서 시험도 병행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랬군.”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말했다. “양산이 시작되면 나도 별도로 구입했으면 한다.” “네?” 서윤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준상은 이미 양산형보다 성능이 좋은 원형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쓸 것은 아니다.” 설마 준상도 따로 길드나 세력을 만들어 두고 있었던 것일까. 그의 성격을 생각하면 좀처럼 믿기 어려운 일이긴 했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완전히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아... 그렇군요. 그럼 몇 벌 정도를 생각하고 계십니까.” 그 말에 준상은 바로 대답했다. “일단, 일천 벌 정도.” “일천 벌...” 서윤은 별 생각 없이 준상의 말을 받아 적으려다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네? 일천 벌이나요?” “그래.” “...” 준상과 헤네스의 담담한 표정을 보고 서윤은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자신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이 무뚝뚝한 남자야 원래 표정 변화가 없으니 거짓말인지 참말인지 구분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고는 해도, 그 옆에 앉은 이 감수성 풍부한 소녀마저 당연하다는 듯이 그 말에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고 있으니 은근히 속으로 놀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일천 명이라고 하면 군대 편제로만 따져도 대대급을 능가하는 수준이다. 게다가 준상이 아무런 능력 없는 보통 사람들을 끌어 모았을 리는 없는 일. 아니, 설령 보통 사람들을 끌어 모았다 치더라도 그에게 공백의 반지 제조 기술이 있으니 카드의 능력을 활용하지는 못하더라도 육체만이라면 충분히 귀환자들 못지 않은 능력을 지니게 하는 것이 가능하다. 서윤은 자신도 모르게 이마에 땀이 맺히는 것을 느꼈다. 도대체, 이 남자는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그렇게 머리에 쥐가 나도록 생각에 잠겨 있는데 준상이 다시 물었다. “어려운가?” “아닙니다. 오히려 저희야 반가운 일이죠.” 방어복을 만든다고는 해도 그것이 바로 정식 채용되는 데는 여러 가지 곤란한 점이 많다. 우선 가장 큰 문제는 귀환자들이 지닌 구매력. 기껏 귀환자들용으로 만들어 두었는데, 막상 그들이 살 능력이 안 되면 말짱 도루묵 아니겠는가. 물론 준상 덕분에 그나마 어느 정도 경제력이 생겼다고는 해도, 현재 생산되는 방어복을 단번에 현금으로 구입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자들을 얼마 되지 않는다. 때문에 서윤은 일단 군이나 경찰 등에 납품하는 방향으로 판로를 잡고 귀환자들에게는 할부와 같은 방법을 적용할 생각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일천 벌이나 되는 방어복의 공급 계약을 맺게 된다면 당장 개발비로 인해 받고 있는 자금 압박도 어느 정도 회복이 가능해진다. “시험은 언제쯤 끝나겠나.” 준상의 물음에 서윤은 얼른 대답했다. “일단은 저희가 좀 더 사용해 봐야 겠습니다만...” 잠시 고민하던 서윤은 다시 말했다 “이렇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어떻게?” “일단 일천 벌을 먼저 공급하겠습니다. 그것을 받으시고 저희들에게 개선 사항에 대한 피드백을 주시는 댓가로 가격을 할인해 드리는 방식을 취하면 어떨까 싶습니다만.” “흠...” 확실히 나쁘지 않은 방법이다. 게다가 어차피 이 방어복은 준상이 넘긴 아문간의 사체를 연구해서 만들어진 물건. 그렇기 때문에 준상 역시 어느 정도의 지분을 가지고 있는 상황이니 그만큼 더 싸게 구입하는 것이 가능하다. 게다가 결함이 있다 하더라도 적당히 마법으로 보강해서 사용하면 되는 일. 또한 아직 시험해 보지는 않았지만, 마법으로 보강해서 아이템으로 분류하는 일이 가능해진다면, 강화 시스템을 적용해서 더 강력한 물품으로 재탄생시킬 수도 있다. “나쁘지 않군.” “그럼 허락하시는 겁니까.” “그래.” “감사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양산화 이전에 시험을 어떻게 치러야 하나 골머리를 썩고 있던 서윤은 밝은 표정으로 감사의 뜻을 표했다. 준상은 용건이 끝나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필요한 일이 있다면 메신저로 연락을 하도록.” “네?” 서윤은 준상의 말에서 지금 곧 떠난다는 의미를 알아듣고는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뭔가 문제라도?” “아니, 그게...” 잠시 주저하던 서윤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서유미씨와 아직 파티 사냥을 하지 않으신 듯 해서...” “...” 다들 한 번씩 파티 사냥을 했고, 그 덕분에 세 개에서 네 개의 추가 보상 상자를 획득했지만, 서유미는 뽑기 운이 나빠서 단 한 번도 파티 사냥에 참가하지 못했다. 물론 준상이 모든 길드원들과 파티 사냥을 하겠노라 선언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녀 혼자만 누락되는 건 서윤으로서는 조금 난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흠...” 준상으로서는 어차피 이들 가운데 레벨도 가장 높으니 상관없지 않나 싶었지만, 옆에서 헤네스가 가만히 팔을 잡으며 눈짓을 보내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 없지. 불러와.” “아! 감사합니다.” 서윤은 얼른 휴대폰으로 연락을 넣어 서유미를 불러왔다. 준상은 쭈뼛거리는 그녀에게 파티 신청을 넣은 다음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윤은 빈 두 자리에 추가로 길드원들을 더 끼워 넣고 싶었지만 괜히 준상을 귀찮게 했다가 호의를 권리로 안다는 식의 오해를 받으면 그것도 곤란한 일이라는 생각에 그만두었다. “고마워요.” “별 말씀을요.” 헤네스는 서유미와 간단하게 인사를 나눈 다음, 준상과 함께 차를 타고 펜션을 떠났다. 그들은 곧바로 북한산에 설치된 정령의 문을 통해 요정계로 들어섰다. 오랜만에 와서인지 그들이 도착해서 여왕의 거처로 들어서자 셀라와 함께 리시스가 그들을 반겼다. “안녕하세요?” 놀랍게도 리시스는 짤막하게 그들에게 인사를 건네기까지 했다. “말 배운 거니?” “응.” 아직 그리 능숙하지는 않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말이라고는 한 마디도 하지 못했던 것을 감안하면 충분히 놀랄 만한 일이었다. 준상은 헤네스가 리시스와 놀 수 있도록 늑대들을 불러주었다. 리시스가 오랜 만에 만난 늑대들의 모습에 기뻐하며 헤네스와 밖으로 나가자, 준상은 쓰고 있던 가면을 벗어 리체스에게 건네주었다. “받아라.” “네.” 리체스는 준상에게서 가면을 받은 다음 곧바로 자신의 연구실로 향했다. 두 반려가 그렇게 자신을 남겨두고 각자 볼 일을 보러 나가 버리자, 준상은 덩그러니 여왕의 침실에 남겨져 버리고 말았다. 수련이라도 할까 하던 준상은 아까 서윤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리고는 팔찌를 가동시켜 자신이 지닌 방어복을 착용해 보았다. 아이템 강화가 가능해지고 나서도 방어복에 대해서는 미처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퀘스트를 통해 획득한 물건이 아닌지라 강화가 가능할 거라 미처 생각을 못한 탓이다. 하지만 리체스의 마법을 통해 착용이 자동화된 이상 이것도 엄연한 마법 물품이라 할 수 있다. 아이템정보 명칭 : 아문간의 가죽옷 레벨제한 : 없음 종류 : 전신 갑옷 등급 : Uncommon 방어력 : 높음 효과 : 자동 착용 Seed : 없음 설명 : 아문간의 가죽으로 만든 방어구. 요정 여왕 리체스에 의해 자동 착용의 마법이 부여되었습니다. 등급은 언커먼에 불과했지만 방어력은 높음이라고 나와 있었다. 효과는 자동 착용 뿐. 그러나 아이템 확인에 반응한다는 것은 강화 역시 가능하다는 뜻이다. 준상은 곧바로 시드를 꺼내서 강화를 시작했다. 속성 보호에 필요한 시드와 강화에 필요한 시드를 꺼낸 준상은 곧바로 아이템 강화를 실행했다. 그 결과 두 번 가량 실패가 뜨긴 했지만 어렵지 않게 +10으로 강화하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아이템정보 명칭 : 아문간의 가죽옷 +10 레벨제한 : 없음 종류 : 전신 갑옷 등급 : Uncommon 방어력 : 매우 높음 효과 : 1. 자동 착용 2. 치명타 무시 19% 증가 3. 펫/소환물 방어력 16% 증가 Seed : 없음 설명 : 아문간의 가죽으로 만든 방어구. 요정 여왕 리체스에 의해 자동 착용의 마법이 부여되었습니다. +10으로 강화하자 방어력은 높음에서 매우 높음으로 상승했고, 여기에 치명타 무시 확률과 펫/소환물 방어력 옵션이 추가되었다. 준상은 헤네스의 방어복도 가져다가 강화를 시도했다. 헤네스의 방어복에는 준상의 것과는 달리 속성 피해 감소 27퍼센트 증가와 재생률 18퍼센트 증가 옵션이 붙었다. 레어 시드 같은 것을 장착하지 못해 재생률이 떨어지는 헤네스의 상황을 감안해 보면 매우 만족스러운 효과가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아이템도 강화하고 모처럼 요정계에서 온천도 즐기면서 시간을 보내던 준상은 요정계로 들어온지 사흘째 되는 날 리체스로부터 새롭게 만들어진 분신 팔찌를 받을 수 있었다. “일단 하는 데 까지는 해봤는데 어떨지 모르겠어요.” “수고했다.” 준상은 리체스의 노고를 치하한 후, 팔찌를 손목에 착용했다. 그리고 곧바로 분신을 발동해 보려고 했지만 공교롭게도 바로 그 순간 준상의 시야에 퀘스트 예고 메시지가 도착했다. “이런...” 모처럼 새로운 분신 팔찌를 시험해 보려는데 이게 무슨 일인지. 준상은 기대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리체스를 향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리체스.” “네? 뭔가 문제라도...” “퀘스트다.” “아...” 리체스는 물론이고 옆에서 조심스럽게 지켜보고 있던 헤네스마저도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할 수 없죠. 시험은 다녀와서 하는 수밖에요.” “그래.” 준상은 곧바로 메신저를 통해 서윤에게 연락을 넣었다. “서윤.” “네. 말씀하십시오.” “퀘스트다. 27분 후 출발이니 서유미에게 알려라.” “알겠습니다.” 00265 트롤러 ========================================================================= 서윤에게 퀘스트 도착을 통보한 준상은 바로 퀘스트 정보를 확인했다. 괴수 헤이드릭스를 토벌하십시오. : 대륙 중서부의 대밀림에는 과거부터 괴수 헤이드릭스가 살고 있습니다. 갈색의 깃털이 나있고 두 개의 뒷다리로 뛰어다니며 무리지어 사냥하는 이 괴수는 밀림의 최상위 포식자 가운데 하나입니다. 최근 이상 증식으로 수가 늘어나고 있는 이 괴수를 사냥하십시오. (남은 목표 : 20마리) [이 퀘스트는 여러 명의 인원이 동시에 참여합니다.] (Hidden) 오염된 헤이드릭스의 둥지를 파괴하십시오. (협력) ->미완료. (Hidden) 오염된 괴수 그라드닉스를 토벌하십시오. (협력) ->미완료 (Hidden) 오염된 괴수 베스포라를 토벌하십시오. (협력) ->미완료 괴수 헤이드릭스. 마수라면 몇 번 상대해 본 경험이 있으나, 괴수라는 명칭은 지금 처음 보는 것이기에 준상은 얼굴을 찌푸렸다. “헤네스.” “네?” 입고 있던 하늘거리는 평상복을 벗고 외출복으로 갈아입으려고 휘장이 쳐진 침대 뒤쪽으로 가던 헤네스는 준상이 부르자 깜짝 놀라면 얼른 돌아보았다. 준상은 동그래진 눈으로 바라보는 그녀를 향해 웃으며 다시 말했다. “갈아입으면서 대답해도 돼.” “그럼...” 헤네스는 살짝 얼굴을 붉히고는 침대 휘장 뒤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반투명한 휘장 사이로 힐긋 드러나는 그녀의 하얀 속살을 감상하며 준상은 천천히 알고자 하는 바를 물었다. “헤이드릭스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어?” 헤네스는 바로 대답했다. “네. 대밀림에 사는 괴수라고 들었어요.” “이번에 상대해야 할 것 같으니 아는 것이 있다면 말해줘.” “음...” 헤네스는 옷을 갈아입으며 예전에 책에서 읽었던 내용을 조심스럽게 떠올렸다. “예전에 그림을 본 적이 있는데, 날개가 자라다만 커다란 오리 같은 느낌이었어요.” “오리?” “네. 하지만 입이 새처럼 부리 형태이긴 해도 날카로운 이빨이 많이 나있는데다 날개처럼 생긴 앞발에도 날카로운 갈고리 같은 발톱이 달려 있대요. 꼬리가 굉장히 긴데, 머리부터 꼬리까지 길이가 사람보다 더 크고요. 아, 키는 의외로 작아서 사람 허리 정도 밖에 오지 않을 거에요. 그리고... 꼬리 끝에는 전갈처럼 독을 뿜는 가시가 달려 있다고 했던 것이 기억나요. 보통 대여섯 마리가 한꺼번에 움직이는데, 굉장히 사나워서 훨씬 큰 괴수나 동물들도 놈들이 덤비면 얼른 도망가 버릴 정도라고 들었어요.” 대충 기억나는 것을 말하는 것 치고는 설명이 굉장히 자세하다. 준상은 그녀의 설명을 듣고는 날개가 퇴화한 새인 타조 같은 생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떠올렸으나, 날개 모양을 한 앞발이라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헤네스가 옷을 다 갈아입고 휘장 밖으로 나오자 준상은 다시 물었다. “그라드닉스나 베스포라 같은 것도 알고 있어?” 하지만 헤네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헤이드릭스의 경우에는 학교 선생님 중에 비슷한 이름을 지닌 분이 계셨거든요. 그래서 애들이 몰래 별명으로 그렇게 부르다보니 알게 된 거고... 그 외의 것은 잘 몰라요.” “그렇군.” 준상은 자리에서 일어난 다음 두 반려를 한 번씩 안아주고는 역소환을 실행했고, 그녀들이 한 줄기 빛과 함께 모습을 감추자 곧바로 즉시 전송 기능을 사용했다. 준상이 모습을 드러낸 곳은 마치 커튼처럼 덩굴이 길게 늘어져 있는 절벽 아래였다. 땅 위에는 고사리 비슷한 형태의 식물이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수북하게 자라나 있었고, 굵은 나무들이 제멋대로 휘어진 채 뒤엉켜 자라나 있는 모습 사이로 희미한 안개가 자욱하게 드리워져 있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절벽 위쪽에 빛이 드리워진 것이 보이긴 했지만, 나무들과 안개 때문인지 숲 안쪽은 한 낮인데도 불구하고 초저녁처럼 어둑어둑하기만 하다. “곤란한데.” 퀘스트 내용을 보자면 이 숲속을 헤집고 돌아다니며 괴수들을 사냥해야 하는 모양인데, 길잡이나 지도조차 없이 밀림을 돌아다니며 그곳을 본거지 삼아 활동하는 사나운 맹수들을 사냥하는 건 그런 일만 수십년간 되풀이해온 숙련된 사냥꾼이라 해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준상은 우선 두 반려부터 다시 소환한 다음 정령들을 불러내 주위를 탐색하게 했다. “우와...” 리체스는 소환이 되기가 무섭게 너무나 울창해서 빛조차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숲의 모습을 보고 탄성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는 이내 얼굴을 찌푸렸다. “왜?” 준상이 묻자 리체스는 얼른 마법으로 주위에 방어막 같은 것을 둘러치며 말했다. “안개가 기분 나빠요. 뭔가 끈적거리면서 엉겨 붙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게다가 벌레도 많을 것 같고.” 보통의 사람들로서도 날벌레나 모기, 파리 같은 것들이 달라붙는 건 별로 좋은 기분이 아니지만 인간 세상에서 몸집이 작아질 수밖에 없는 요정들로서는 단순히 기분 나쁜 것을 넘어서 괴기스럽다는 말이 나올 정도이니 이런 반응은 차라리 당연한 것이었다. 단순히 입장을 바꿔 생각해 봐도 자기 몸집만한 모기나 파리가 덤벼든다면 그건 괴기는커녕 공포라 불려도 이상할 것이 없다. 헤네스 역시 끈적거리며 달라붙는 안개가 기분 나쁜지 얼른 방어복을 착용한 다음 바이저를 눌러 썼다. 아니나 다를까. 정령들을 통해 주위를 탐색하고 있는데, 문득 숲 쪽에서 윙 거리는 소리와 함께 벌레들이 모여드는 모습이 보였다. “히익!” 리체스는 방어막까지 둘러치고서도 그 모습을 보자 기겁을 하며 준상의 어깨 뒤로 얼른 몸을 감추었다. 마법 한 방이면 다 태워 죽이고도 남을 텐데. 하지만 방어복으로 온 몸을 빈틈없이 감싼 헤네스 역시도 자기 손가락 길이만한 벌레들이 날아드는 모습은 당해낼 수 없었던지 얼른 준상 뒤로 몸을 숨겼다. “흠...” 벌레라니. 본격적인 사냥에 들어서기도 전에 마주친 최초의 난관에 준상은 얼굴을 찌푸렸지만, 대응할 방법 정도는 얼마든지 있다. 준상은 가장 먼저 눈보라를 불러내 자신들의 주위를 휘감았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뚝뚝 떨어질 정도의 고온 다습한 밀림에 갑자기 북쪽의 차가운 눈보라가 몰아치자 양치류로 보이는 식물들은 다급하게 잎을 접기 시작했고, 벌레들은 순식간에 생명력을 잃고 그대로 비처럼 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한다. 준상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다시 도깨비불들을 불러 안개 속을 이리저리 헤집고 돌아다니도록 만들었다. 그러자 주위를 감싸고 있던 안개는 이내 증발해서 사라져 버리고 그 안에 도사리고 있던 벌레들도 불꽃에 부딪히는 순간 타닥거리는 소리와 함께 불타 사라져 갔다. “후아...” 리체스는 벌레들이 자취를 감추자 그제서야 한숨을 내쉬며 준상의 어깨 뒤에서 몸을 드러냈고, 헤네스 역시 바이저를 올리며 멋쩍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예전 같았으면 이 상태로 곧장 밀림을 향해 이동을 시작했겠지만, 이번에는 파티를 맺은 서유미가 도착하기를 기다려야만 했다. 준상은 갑가오리를 불러내 그 위에 헤네스와 함께 올라탄 다음 절벽 위쪽으로 날아올랐다. 위쪽으로 올라가자 푸른 잎으로 뒤덮인 지평선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이쯤 되면 밀림보다는 오히려 수해(樹海)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그 상태로 정령을 통한 탐색을 계속하자, 마침내 한 무리의 붉은 퀘스트 표식이 확대된 미니맵에 모습을 드러냈다. 퀘스트 표식들이 상당히 빠른 속도로 이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준상은 추적 기능을 실행해야만 했다. 그 상태로 잠시 더 기다리자, 마침내 서유미가 모습을 드러냈다. 서유미는 다른 길드원들과 마찬가지로 검은 색으로 칠해진 양산형 방어복을 입고 있었다. 양산형 방어복은 준상이나 헤네스가 가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검은 색의 바이크 슈츠 비슷한 모습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원형에 비해 조금 두꺼워 보이고 다른 장비나 파우치 같은 것을 달기 쉽도록 개선이 이루어져 있다는 정도이다. 위쪽에서 그녀의 도착을 확인할 찰나, 뒤이어 다시 두 명의 귀환자가 빛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두 명 모두 건장한 남자들이었지만, 준상은 그들은 거들떠도 보지 않은 채 곧바로 염동력을 발휘해 서유미를 끌어올렸다. 전송과 동시에 일단 퀘스트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휴대폰을 꺼내던 서유미는 갑자기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자신의 몸이 공중으로 들어올려지자 비명을 질렀다. “꺅!” 마찬가지로 우선 휴대폰부터 꺼내들던 두 남자는 갑작스런 비명과 함께 서유미가 허공으로 끌어올려지자 당황하며 얼른 몸을 날려 그녀를 붙잡으려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바로 그 순간. 하늘 위에서 귀여운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미씨! 저희에요.” “에?” 서유미는 물론이고 아래쪽에 있던 남자들 역시 얼른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고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거대한 가오리 형상의 괴물 위에 귀여운 모습의 소녀가 손을 흔들어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 옆에는 사자 가면을 쓴 남자가 한 손을 뻗고 있었는데,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 지금 여자를 끌어올리는 것은 바로 그의 능력일 가능성이 높았다. 서유미는 자신을 끌어올리는 것이 준상의 힘이라는 것을 깨닫자 저항을 멈추고 순순히 염동력을 받아들였고,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갑가오리 위에 내려설 수 있었다. “놀라셨어요.” “조금요. 하지만 괜찮아요.” 묘하게 친밀감 넘치는 대화를 나누고 있는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돌린 준상은 퀘스트 표식이 움직이는 방향을 돌아보며 조용히 말했다. “간다.” “네.” 헤네스는 대답과 동시에 얼른 서유미의 손을 잡아 끌어 갑가오리 위에 앉혔고, 그녀들이 자리를 잡자 준상은 곧바로 퀘스트 표식을 향해 갑가오리를 이동시켰다. 그들을 태운 갑가오리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아래쪽에 남겨진 두 남자들은 얼빠진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 보았다. “어쩌죠?” “글쎄요.” 두 남자는 자욱한 안개가 깔리기 시작한 밀림을 바라보고는 이내 서로를 마주 보았다. 다른 두 귀환자들을 당황에 빠뜨린 준상은 곧바로 퀘스트 표식의 위쪽으로 이동했다. 워낙 밀림이 우거져 있어서 아래쪽의 모습을 자세하게 살필 수는 없었지만, 초감각을 발동하자 우거진 숲 속을 빠르게 움직이는 여섯 마리의 괴수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흠...” 모양은 앞서 헤네스가 설명했던 것과 비슷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직전의 퀘스트에서 상대했던 오염의 근원과 비슷한 기운을 몸에서 뿜어내고 있다는 것 정도. 움직임도 예상보다 재빠른데다, 중간에 나무들이 가로 막고 있어서 공중에서 직접 공격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내려가는 수밖에 없겠군.” 준상은 갑가오리를 움직여 놈들의 진행방향을 앞질러 간다음 밀림을 뚫고 내려가 바닥에 내려섰다. 절벽과 다르게 질척한 진흙의 느낌이 신발을 통해 전해진다. 준상은 바닥에 내려서기가 무섭게 자신이 가진 소환물들을 일시에 풀어놓은 뒤, 목표인 헤이드릭스를 향해 외쳤다. “공격!” 거대한 늑대들과 검치호, 헬하운드들은 마주 달려오는 헤이드릭스에게 달려들었고, 밀림은 곧바로 야수들이 사납게 울부짖는 소리로 가득 찼다. -캬아악! 여자의 비명소리를 닮은 괴성을 지르며 헤이드릭스들은 감히 자신들의 앞을 가로막은 야수들과 싸움을 시작했다. 준상은 늑대들이 쉽게 이길 거라 생각했지만, 놀랍게도 결과는 정 반대였다. 늑대들은 발밑의 무른 진창으로 인해 자꾸 미끄러지며 중심을 잃었지만, 헤이드릭스들은 날카로운 발톱을 스파이크처럼 사용하며 날렵하게 진창 속을 움직이며 늑대들을 농락하고 있었다. 똥개도 자기 집에서는 반은 먹고 들어간다던가. 알 수 없는 힘에 오염되면서 더 강하고 난폭해진 것도 한 가지 이유일 것이다. “쯧.” 준상은 혀를 차며 정령들을 불러 늑대들을 도우려 했지만, 문득 헤이드릭스 한 마리가 늑대들을 따돌리고 달려 나왔다. 서유미는 곧바로 허리 춤에서 투척용 단검을 뽑아 헤이드릭스를 향해 던지려 했으나, 그보다 먼저 나선 이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헤네스였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헤네스의 몸에 빙의한 기안이었다. 순식간에 인벤토리에서 수호의 신물과 호위장의 미늘창을 꺼내 손에 쥔 헤네스는 기안을 불러냈고, 통제권을 넘겨 받은 기안은 자신을 향해 덤벼드는 괴수를 미늘창으로 인정사정 없이 후려쳤다. 퍽! 마치 젖은 빨래를 야구 방망이로 후려치는 듯한 소음과 함께 헤이드릭스는 그대로 질척한 진흙 위로 내동댕이 쳐지고 말았다. 놈은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얼른 발버둥을 치며 몸을 일으켰으나, 뒤이어 날아온 날카로운 단검이 녀석의 두꺼운 머리뼈를 꿰뚫으며 두뇌를 헤집어 놓았다. 그 단검은 이전에 헤네스가 서유미에게 빌려주었던 무한의 연쇄라는 이름을 지닌 투척용 단검이었다. 헤이드릭스는 술에 취한 것처럼 비틀거리다가 그대로 진흙 속에 쓰러지고 말았다. “이런.” 기안은 놈을 향해 내리치려던 미늘창을 치켜들고 있다가 혀를 차며 손을 내리더니 서유미를 흘깃 바라보았다. “제법인데?” “...” 서유미는 갑작스럽게 변한 헤네스의 태도에 당황하다가 그것이 다른 길드원들에게 전해들은 현상이라는 것을 뒤늦게서야 깨달았다. 기안은 서유미를 잠시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무언가 납득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호오... 과연. 이건 또 의외로군.” 기안은 혼자 계속 고개를 주억거리며 뭔가 납득했다는 표정으로 그렇게 서유미를 전후 좌우에서 샅샅이 살피더니 이내 결정했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 “너, 내 제자해라.” “네?” 갑작스런 그 말에 당사자인 서유미는 물론이고, 쟤가 또 왜 저러나 하는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던 리체스마저 놀라버렸다. “갑자기 그게 무슨...” 서유미가 당황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자, 기안은 그녀 답지 않은 차분한 말투로 계속 말했다. “소질이 있어. 그것도 상당히. 헤네스 얘가 착한 기안 쪽의 소질이 더 강하다면, 넌 딱 내 스타일이야.” “...” “아, 이렇게 말하면 딱 감이 안 올지도 모르겠네. 알기 쉽게 설명하자면 대충 이런 거야.” 기안은 서유미의 어깨를 한 손으로 짚으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에겐 싸우는 성녀의 재능이 있다.” 00266 트롤러 ========================================================================= 기안의 진지한 말을 듣고도 서유미는 혼란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애초에 싸우는 성녀가 뭔지도 모를뿐더러, 이런 식으로 무언가에 재능이 있다는 얘기를 들어본 것 자체가 살아오면서 처음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씀하셔도...” 서유미가 다시 우물쭈물하며 그렇게 말하자, 기안은 모처럼 짓고 있던 진지한 표정을 와락 구기더니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에이씨! 그냥 내가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 그리고는 느닷없이 서유미의 멱살을 왈칵 움켜쥐더니 늑대와 헤이드릭스가 뒤엉켜 싸우고 있는 곳을 향해 휙 집어 던졌다. “꺅!” 서유미는 자신의 몸이 맥없이 허공으로 내던져지자 비명을 질렀지만, 이내 고양이처럼 몸을 뒤집으며 땅 위에 내려섰다. 그런 그녀를 향해 늑대와 신경전을 벌이고 있던 헤이드릭스 한 마리가 곧바로 뛰어들었다. 헤이드릭스는 비록 키는 작지만 몸길이만 4미터에 육박하는 괴물. 하지만 놈이 달려드는 순간 서유미는 언제 당황했냐는 듯이 눈빛이 침착하게 가라앉더니 품에 넣고 있던 식칼을 빼들었다. -캬악! 헤이드릭스는 날개가 되다 만 것 같은 앞발의 날카로운 발톱으로 서유미를 움켜잡으려 했다. 그러나 순간 놈의 눈앞에 식칼을 감싸고 있던 흰 붕대가 풀려나오며 시야를 가렸고, 뒤이어 한줄기 섬광이 그어지자 놈의 콧잔등에서 붉은 피가 솟구쳤다. -캬아악! 헤이드릭스는 갑자기 느껴진 고통에 놀라 뒤로 펄쩍 뛰어올랐다. 하지만 곧바로 입가에 한줄기 미소를 지은 채 서유미가 그 뒤를 따라붙었다. “하하하하!” 서유미는 식칼을 휘둘러 헤이드릭스의 살을 다시금 갈랐고, 그 상처로부터 솟구치는 피의 향연에 도취되었다. 준상은 오랜 만에 보는 서유미의 칼부림에 얼굴을 찌푸렸지만, 기안은 그것보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봤지?” “뭘 말이냐.” 준상의 담담한 말에 기안은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설명을 시작했다. “칼이란 건 말이야. 무작정 휘두른다고 되는 것이 아니야. 검이 적의 몸에 닿는 순간 최적의 각도가 들어 맞지 않으면 베기는커녕 오히려 칼날이 망가질 수밖에 없지.” 기안의 말에 준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준상도 제대로 검술을 배운 것은 아니지만, 어나이얼레이터를 통해 검술의 기초를 몸으로 체득한 상태이기 때문에 그녀의 말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기안은 계속 말을 이었다. “잘 봐. 그냥 막 휘두르는 것 같아 보이겠지만, 잘 보면 항상 최선의 각도로 적의 몸에 칼날을 꽂아 넣고 있지?” “확실히.” 그녀의 말대로 서유미는 일견 마구잡이로 식칼을 휘두르는 것 같이 보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최선의 각도로 상대의 몸을 베고 있었다. “저건 배워서 되는 일이 아니야. 아니, 검술을 연구한 인간이라도 저런 짧고 뭉툭한 칼로 상대의 급소를 정확하게 베는 일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나 다름없지.” 준상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고, 기안은 말을 이어갔다. “게다가, 저 얇은 팔로 저 정도 운동량을 보이는 것 자체가 이미 일반적인 상식을 넘어선 일이야. 특별한 무언가가 없는 이상은 말이지.” “그게 싸우는 성녀의 재능이라는 건가?” 기안은 준상의 말에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대로야. 모르긴 해도 저 녀석 회복 마법 같은 것도 이미 쓸 수 있을 걸? 아직 제대로 개발되지 않은 상태지만, 잘만 가르치면 나 정도 수준은 오를 수 있을거야.” “...” “헤네스라면 뭔가 느끼고 있었을지도 몰라. 성녀들끼리는 그 안에 내재된 힘 때문에라도 서로 끌릴 수밖에 없으니까. 모르긴 해도 자신조차 모르는 사이에 친자매 같은 정을 느끼고 있지 않았을까? 그렇지? 역시 내 말대로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있는 헤네스와 대화를 나누는 것인지 그렇게 혼잣말 비슷하게 얘기를 하고 있는 기안을 보며 준상과 리체스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면 헤네스는 임서윤이 데리고 있는 길드원 중에서도 특히 서유미와 친하게 지냈다. 성격을 봐도 도저히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데 알게 모르게 친밀한 미소를 주고 받는 모습도 여러번 보였었고, 준상이 임서윤에게 아이템을 바가지 씌울 때도 남모르게 무한의 연쇄 같은 레어 아이템을 빌려주기까지 했었다. 최근 임서윤의 길드원들이 머무르고 있는 펜션에서도, 준상과 지낼 때를 제외하면 유독 서유미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뭔가 기묘하다고는 생각했지만, 그런 이유가 있었을 줄이야. “아, 그렇다고 헤네스가 저렇게 피를 보면 발광하거나 하지는 않을테니까 안심해. 저건 아무래도 성장과정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거든.” “그렇군.” 그들이 그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동안 서유미는 자신이 상대하던 헤이드릭스가 쓰러지자 다른 놈에게 달려들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괴수를 쓰러 뜨렸다. 서유미는 헤이드릭스가 모두 쓰러지자 그제서야 정신이 돌아왔는지 난처한 표정을 짓다가 자신의 옆을 지나치는 붉은 늑대의 모습을 보자 그대로 달려들어 그 목을 얼싸 안았다. 기안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 “문제가 좀 있어 보이긴 하지만, 원래 사람이란 게 다 그런 거 아니겠어. 게다가 나에게 배우면 어느 정도는 자신을 통제하는 것도 가능해질 테니 그것 역시 모두에게 좋은 일이지.” “...” 기안이 보여주는 모습으로 봐서는 별로 신뢰가 가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처럼 화난 기안과 착한 기안으로 나뉜 것 자체가 고통과 배신감으로부터 자신의 인격을 보호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음을 감안하면 이렇게라도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일지도 모른다. 준상은 밤톨이를 불러 상처입은 야수들을 치료하게 했다. 그러자 뒤늦게서야 서유미가 쭈뼛거리며 그들에게로 돌아왔다. “...” 기안은 말없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는 그녀를 향해 다가가더니 어깨에 손을 척 얹으며 말했다. “나 한테 배우면 너 자신을 조절하는 것도 가능해 질거야. 싸우는 성녀, 얼마나 멋지냐?” 그러자 서유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싸우는 성녀가 뭐죠?” “...” 순간 기안은 얼굴이 일그러졌다. 어울리지 않게도 그렇게 열심히 설득을 했는데 정작 상대는 싸우는 성녀가 뭔지도 모르고 있는 것이다. “끙...” 기안은 골치가 아픈지 관자놀이를 주무르더니 이내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아무래도 난 두들겨 패며 가르치는 거라면 몰라도 차분하게 뭔가를 설명하는 건 도무지 체질이 아니라서, 헤네스를 바꿔줄 테니 그 애한테 들어봐.” “헤네스요?” 무슨 소린가 싶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서유미를 두고 기안은 가만히 눈을 감더니 이내 머리에 감돌던 금빛 기운과 눈동자에 깃든 푸른 기운이 사라지며 헤네스의 인격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유미 언니. 제가 설명해 드릴게요.” 헤네스는 그녀가 자신과 같은 재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기쁜지 밝게 웃으며 서유미의 손을 이끌었다. 준상은 그들이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 모습을 지켜보며 몽몽이를 불러 아이템을 수집하게 하고 뒤이어 헤이드릭스의 시체를 살폈다. 여섯 마리 가운데 세 마리는 서유미에게 난자되어 고기 덩이 이상의 가치가 없어 보였지만, 나머지 녀석들은 그런대로 형태가 온전하게 유지되어 있었다. 달리 가죽이 튼튼해 보이지도 않았고, 깃털도 칙칙한 갈색 빛이 도는 것이 별로 가치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 “아, 맞다.” 서유미와 대화를 나누던 헤네스가 갑자기 생각 났다는 듯이 준상을 향해 외쳤다. “헤이드릭스는 다른 건 별로 쓸모가 없지만 발톱은 제법 비싸게 팔린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알았다.” 그 말을 듣고 다시 살펴보니 이 놈의 발톱은 마치 작은 상아를 연상시키는 형태를 지니고 있었다. 준상은 천천히 헤이드릭스의 큰 발톱들을 잘라 모은 다음에야 비로소 다시 정령들을 풀어 다음 목표를 찾기 시작했다. 이 놈들도 자신 만의 영역이 있는 것인지 제법 먼 거리를 탐색하고 나서야 비로소 다음 목표물을 찾아낼 수 있었다. 준상은 목표를 확인하자 갑가오리를 불러들인 후 마침 얘기를 마치고 일어서는 헤네스와 서유미를 향해 말했다. “얘기는 끝났나?” “네.” 잘은 모르겠지만, 헤네스는 무척이나 밝은 표정이었고 서유미 역시 기쁜 듯한 표정으로 얼굴을 살짝 붉히고 있었다. “다행이군.”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들을 갑가오리에 태운다음 다시 야수들을 역소환시키고 다시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가만히 다음 목표를 향해 이동하던 중에, 문득 준상은 혹시나 싶어 서유미에게 물었다. “어떤 콤보를 쓰고 있지?” 기안이 말한 대로 싸우는 성녀의 재능을 가지고 있다면 혹시 델로드란의 수호자 콤보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레어 등급의 수호자 콤보 조합의 칭호는 얻은 상태지만, 일반 등급의 콤보는 첫 번째 조합의 달성 칭호는 얻지 못했는데, 그 칭호를 가져간 것이 혹시 서유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서유미는 준상의 물음에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우물거리기만 했다. “대답해라.” 하지만 다시금 차가운 말투로 그렇게 다시 한 번 말하자, 서유미는 얼굴을 푹 수그린 채 대답했다. “도살자요.” “...” 순간 준상은 물론이고 헤네스와 리체스마저도 입을 다물었다. 도살자. 확실히 식칼을 들고 설치는 그녀와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콤보가 아닐 수 없다. 어떤 면에서는 준상이 지닌 광전사나 미친개와도 비슷한 느낌. 만약 맨주먹이 아니라 칼을 들고 설쳤다면 현재 사용하는 콤보가 그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다. “그랬군.” “네.” 일단 현재 자신이 가진 콤보의 에픽 퀘스트를 찾는 것이 먼저긴 하지만, 나중에는 서윤이나 그의 길드원들이 지닌 콤보에 대한 정보도 수집해 두는 편이 좋을지도 모른다. 새로운 콤보를 얻으면 그것도 좋고, 그것이 아니더라도 다른 이의 스킬을 알고 있으면 만약의 경우 같은 귀환자와 싸우게 되었을 때 큰 도움이 된다. 지금은 준상을 당할 자가 없지만, 나중의 일은 또 모르는 것. 영리한 토끼는 굴을 세 개 만든다는 고사성어를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만약을 위한 대비가 많을수록 좋은 건 당연한 일이다. 어쨌든. 새로 발견한 다섯 마리의 헤이드릭스는 밀림 속에 자리 잡은 작은 웅덩이에 모여 휴식을 취하고 있는 참이었다. 갑가오리 위에서 그 모습을 확인하자, 곧바로 헤네스 대신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오른 기안은 준상을 향해 말했다. “마침 적당한 숫자네. 이번엔 우리 둘이 해결해 보고 싶은데, 허락해 주겠어?” 기안은 말할 것도 없고, 서유미 역시 방금 전에 헤이드릭스를 처리할 때의 모습을 보면 큰 문제는 없어 보인다. 더욱이 그녀들은 모두 스스로 몸을 회복시킬 수 있는 능력마저 지니고 있는 상태. “원한다면.” 준상이 허락하자, 기안은 서유미를 향해 눈을 찡긋하더니 미늘창과 수호의 신물을 든 채 곧바로 갑가오리 위에서 뛰어 내렸다. “앗!” 서유미는 갑자기 뛰어내리는 그녀의 모습에 당황하며 손을 뻗었지만, 기안은 바닥을 한번 구르는가 싶더니 그대로 헤이드릭스를 향해 달려들며 외쳤다. “늦게 오면 나 혼자 다 잡는다!” “...” 서유미는 이러지도 못하는 모습으로 우물쭈물 대다가, 준상이 갑가오리의 고도를 낮추자 그제서야 얼른 뛰어내리며 기안의 뒤를 쫓았다. 물가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헤이드릭스들은 작은 체구의 인간 하나가 자신들을 향해 달려들자 성이 잔뜩 난 모습으로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놈들은 분명 이 밀림의 최상위 포식자 중 하나였고, 보통의 인간이라면 놈들의 몰이사냥에 걸려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 앞에 선 기안과 서유미는 그런 일반적인 인간의 범주에 들지 않는 자들이었다. “비켜! 비켜! 비켜!” 기안은 수호의 신물을 앞세운 채 곧바로 달려들어 성난 표정을 달려드는 헤이드릭스의 가슴팍을 일각수의 뿔로 단숨에 꿰뚫어 버렸다. -꾸엑! 문자 그대로 돼지 멱 따는 소리를 지르며 헤이드릭스 한 마리가 튕겨 나가자 기안은 자신의 팔을 노리고 덤벼드는 또 다른 괴수를 미늘창의 창날로 찍어버렸다. 단숨에 헤이드릭스 한 마리를 땅바닥에 곤충 표본처럼 못 박아 버린 기안은 그렇게 박혀진 미늘창을 잡은 채 공중으로 뛰어올라 자신의 목을 노리고 달려드는 헤이드릭스의 머리를 걷어차 버렸다. -키약! 기안의 작은 발에 채여 볼썽 사납게 날아가버린 헤이드릭스는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공중에서 몸을 뒤채며 중심을 잡으려 했지만, 그런 놈을 향해 이번에는 서유미의 식칼이 휘둘러졌다. 스컹! 딱 썰기 좋게 세로로 눕혀진 채 날아드는 목표를 서유미가 놓칠 이유가 없다. 스쳐 지나가며 식칼을 위에서 아래로 크게 휘두르자, 헤이드릭스의 길고 두꺼운 목이 단숨에 반절이나 잘려나가고 말았다. 한번에 완전히 잘려 나가지 않은 것은 그녀가 지닌 식칼의 길이가 짧아서일 뿐, 만약 식칼이 좀 더 길었다면 헤이드릭스의 몸통은 단숨에 반토막이 나 버렸을 것이다. 물론 반만 잘리든, 완전히 두동강이 나든 죽는 것은 매한가지겠지만 말이다. “이렇게 멀리서 보니까 싸우는 모습이 닮은 것 같기도 하네요.” “그런가.” 리체스와 그렇게 대화를 나누며 기안과 서유미의 전투 장면을 지켜보던 준상은 문득 미니맵 한쪽에서 빠른 속도로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붉은 표식을 발견하고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순간 준상은 멀리서 빠른 속력으로 날아드는 커다란 생물체를 발견하고 눈을 부릅 떴다. 박쥐와 같은 날개를 크게 펼친 채 갑가오리를 향해 날아드는 그 생물체를 보는 순간 준상은 자신도 모르게 하나의 단어를 연상했다. “드래곤?” “네?” 무슨 말인가 하고 준상의 시선이 향한 곳을 돌아보던 리체스 역시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드는 괴물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준상은 급히 갑가오리를 몰아 날아드는 놈의 경로에서 벗어났다. 그러자 거대한 검은 색의 몸체가 그들의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저게 뭐죠?” “글쎄.” 처음에는 드래곤을 연상했지만, 표식이 붙은 걸 보면 퀘스트 정보에 나타난 괴수 가운데 하나일 것이 분명했다. 하기야 검치호도 있는 세상인데 익룡이 없으라는 법은 없지 않겠는가. 괴수 그라드닉스, 또는 괴수 베스포라. 물론 어느 쪽이 되었든 준상이 쓰러뜨려야할 존재인 것은 분명한 사실. 준상은 자신을 향해 몸을 트는 거대한 익룡을 바라보며 인벤토리에서 무기를 꺼내 들었다. 그가 꺼내든 것은 다름 아닌 랑다잘의 분노. “리체스.” “네!” “놈의 움직임을 묶을 수 있겠나.” “물론이죠!” 그녀는 준상의 어깨 위에서 익룡을 향해 손을 뻗으며 외쳤다. “몰아치는 돌개 바람이여, 불어오는 회오리 바람이여. 나의 적을 감아올려라!” 그러자 순간 평온하던 밀림 위에 두 개의 거대한 소용돌이가 생겨나 방향 전환을 마치고 다시 준상이 탄 갑가오리를 향해 내리 꽂히려 드는 익룡을 그대로 휘감아 버렸다. ============================ 작품 후기 ============================ 자꾸 이렇게 연참 하면 버릇 되는데... 00267 트롤러 ========================================================================= “으윽... 빨리요!” 과도하게 힘을 쓴 탓에 리체스는 작은 신음을 흘렸고, 그것을 들은 준상은 갑가오리를 몰아 서로 역방향으로 흐르는 두 개의 회오리 사이에 갇힌 익룡을 향해 돌진했다. 훙! 훙! 가볍게 휘돌려 원심력을 얻은 거대한 철구는 준상의 팔이 앞으로 뻗어 나가자 그 방향을 따라 공기를 가르며 날아갔다. 익룡은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철구를 보고 몸을 비틀며 회오리로부터 피하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리체스가 이를 악물고 발동한 마법의 힘을 벗어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그런 노력이 마냥 헛된 것은 아니었다. 몸을 마구 비트는 바람에 철구가 처음에 노린대로 등판을 제대로 가격하지 못하고 날개죽지에 빗맞은 것이다. 직격을 피한 덕분에 즉사를 면하기는 했으나 익룡의 오른쪽 날개는 그 일격을 견디지 못하고 뼈가 박살나고 피막이 찢겨지는 바람에 더 이상 날개로서 구실을 하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익룡의 뼈는 다른 괴수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볍고 단단했지만, 랑다잘의 분노는 처음부터 단단한 무언가를 파괴하기 위해 만들어진 무기인데다, +10으로 강화되면서 그 파괴력이 대폭 상승했기 때문에 생명체가 특별히 방어에 특화된 무언가가 아닌 이상은 생명체가 맨몸으로 견뎌내는 건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날개가 꺾인 익룡이라니. 그것은 밀림에서 절대자로 군림하던 이 거대한 괴수에게는 차라리 즉사 당한 것보다 못한 일이다. 준상은 던졌던 철구를 회수한 다음 고통스러워 하며 괴성을 지르는 익룡을 향해 다시 철구를 던졌고, 그것으로 익룡의 생명은 끝나고 말았다. “에고고...” 익룡의 숨이 끊기자 리체스는 그제서야 유지하고 있던 마법을 거둬들이며 앓는 소리를 했다. 자신도 모르게 마법을 발동하기는 했는데, 두 개나 되는 거대한 소용돌이를 유지하기에는 현재의 신체가 갖는 제약이 너무 컸다. “괜찮나.” 준상이 묻자 리체스는 어깨를 두드리며 대답했다. “괜찮다고 하고 싶은데... 역시 좀 무리를 한 것 같아요.” 준상은 그 말을 듣고는 가만히 손을 뻗어 그녀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고생했다.” “헤헤...” 리체스는 힘든 나머지 식은 땀을 흘리면서도 준상의 손길이 스치고 지나가자 웃음을 지었다. 사실 리체스가 조금 무리를 하지 않았더라면 창공의 폭군으로 군림하는 저 거대한 익룡을 이렇게 간단하게 해치우지는 못했을 것이다. 요정의 술로 비행이 가능하고, 갑가오리라는 탈 것도 있었지만, 체급이나 속도 자체가 워낙 차이가 나는지라 공중전으로 제압하기는 상당히 곤란할 수 밖에 없었다. 준상은 퀘스트가 갱신되는 것을 보고 방금 처리한 익룡이 괴수 그라드닉스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준상과 리체스가 갑작스럽게 나타난 그라드닉스와 싸우고 다시 그 사체를 수습하고 돌아오자 기안과 서유미는 어느 틈엔가 다섯 마리의 헤이드릭스를 모두 때려잡고 발톱의 수집까지 마친 상태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기안과 서유미를 다시 태운 준상은 하늘로 날아올라 다시금 퀘스트 목표를 탐색하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곳에 모여 우글거리는 표식과 혼자 덩그러니 떨어져 있는 표식을 발견했다. 퀘스트 정보를 다시 확인한 준상은 홀로 떨어져 있는 표식이 괴수 베스포라임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헤이드릭스의 토벌을 완료하면 퀘스트가 끝나 버리므로 선행해야 할 목표는 당연히 베스포라 쪽이다. 준상은 곧장 갑가오리를 몰아 표식이 나타내는 위치로 이동했다. 그러나 목표 지점에 도착한 준상의 눈에 나타난 것은 거대한 구덩이였다. 깔데기 모양으로 움푹 팬 그 구덩이를 보는 순간 준상은 개미지옥이라는 단어를 연상했다. 경사진 구멍에 미끄러져 떨어지는 순간, 저 안에 숨은 괴수 베스포라가 먹이를 나꿔챌 것은 보지 않더라도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는 일. 어떻게 보면 굉장히 원시적인 함정인 셈이지만 폭탄 같은 것을 쓰지 않는 이상 일반적인 귀환자들이 상대하기는 무척이나 까다로울 수밖에 없었다. 물론 준상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베스포라의 위치를 확인한 준상은 구덩이로 접근하는 대신 정령들을 소환해 한꺼번에 구덩이 안으로 밀어 넣었다. 정령들이 깔데기 안쪽으로 진입하자 베스포라는 무언가가 안으로 진입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인지 곧바로 개구리 혀 같은 것을 뻗어 정령들을 공격해 왔다. 하지만 정령들은 마치 바람에 흩날리는 눈송이처럼 유유히 그 공격을 피하며 구덩이 안에 도사리고 있는 베스포라를 공격했다. 불꽃이 떨어지고, 번개가 내리치며, 다시 얼음 폭풍이 몰아치자, 괴수 베스포라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땅속을 파고 들어가 숨으려 했지만, 땅의 정령과 용암의 정령이 힘을 합치자 뜨겁게 달궈진 구덩이 위쪽으로 끌려나오고 말았다. 모습을 드러낸 베스포라의 모습을 본 리체스는 그 모습을 이렇게 표현했다. “두꺼비?” 앞발이 기이할 정도로 크기는 했지만. 우둘투둘한 등과 툭 튀어나온 커다란 눈이 영락없는 두꺼비의 형상이었다. 베스포라의 몸이 구덩이 위로 끌려 나오자, 준상은 곧바로 엘리를 불러 날벼락과 합체시킨 다음 놈의 몸에 벼락을 연이어 쏟아 부었다. 이 거대한 땅두꺼비는 땅속으로 도망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볼을 불룩하게 부풀리고는 독 안개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베스포라의 그 같은 노력은 도깨비불이 날아들어 독 안개를 태워버림으로서 좌절되었고 결국 정령증폭으로 위력이 강해진 벼락을 연속으로 맞자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베스포라가 쓰러지고 퀘스트 정보가 갱신되자 준상은 그 사체를 수거한 다음 헤이드릭스가 몰려 있는 곳으로 날아갔다. 미니맵에 나타난 목표 지점에 도착하고 보니, 양지바른 마른 풀 위에 수박만한 크기의 알록달록한 알들이 담겨져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그곳은 마지막 히든 퀘스트의 목표인 헤이드릭스의 둥지이기도 했던 것이다. 둥지 주위에는 십여 마리 가량의 헤이드릭스가 있었는데, 놈들은 갑가오리가 나타나자 하늘을 올려다 보며 특유의 여자 비명소리 같은 목소리로 울부짖으며 위협을 시작했다. 물론 놈들이 그런 식으로 울부짖어 봐야 지금 갑가오리 위에 타고 있는 사람들에겐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는다. 기안은 십여마리나 되는 헤이드릭스의 모습을 보자 곧바로 말했다. “안 그래도 지루하던 참인데 잘됐네. 우리한테 맡겨.” 물론 준상으로선 거부할 이유가 없다. “좋을대로.” 그의 허락이 떨어지자 기안은 다시금 미늘창과 수호의 신물을 든 상태로 갑가오리 위에서 뛰어 내렸고, 서유미가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이 뛰어내리자 헤이드릭스 가운데 일부가 그들을 공격하기 위해 둥지를 뛰쳐나갔으나, 몇몇은 여전히 둥지 위에 버티고 선 채로 갑가오리를 경계하며 알을 지키고 있었다. 준상은 정령들을 소환함과 동시에 갑가오리로 하여금 파괴의 파동을 쏘게 했다. 제법 거리가 있는 터라 파동은 한군데 집중되지 못하고 넓게 퍼져 나갔지만, 그 정도의 위력만으로도 둥지 안의 알을 파괴하기엔 충분했다. 퍽! 퍼퍽! 알들은 마치 전자렌지에 들어간 계란 마냥 부들부들 떨다가 이내 폭탄처럼 터지기 시작했다. -캬아악! 그 모습을 본 헤이드릭스들은 발광하며 뛰어 올랐지만 그들의 뛰어난 도약력으로도 공중에서 유유히 날고 있는 갑가오리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기안과 서유미는 그런 헤이드릭스들을 차근차근 처치해 나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둥지 안에 도사리고 있던 열두 마리의 헤이드릭스는 모두 차가운 시체가 되어 쓰러지고 말았다. 퀘스트가 완료되기가 무섭게 서유미는 완료 메시지와 함께 전송이 되었으며, 영문도 모르고 그저 멀뚱히 처음 있던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던 두 명의 귀환자들은 F등급의 메시지와 함께 그대로 되돌려 보내지고 말았다. 준상은 느긋하게 전리품을 수거한 다음, 땅 위에 내려 앉아 헤네스와 리체스, 그리고 다른 소환물들을 모두 역소환한 뒤에야 즉시 전송 기능을 통해 요정계로 귀환했다. 괴수 헤이드릭스를 토벌하십시오. : 대륙 중서부의 대밀림에는 과거부터 괴수 헤이드릭스가 살고 있습니다. 갈색의 깃털이 나있고 두 개의 뒷다리로 뛰어다니며 무리지어 사냥하는 이 괴수는 밀림의 최상위 포식자 가운데 하나입니다. 최근 이상 증식으로 수가 늘어나고 있는 이 괴수를 사냥하십시오. (남은 목표 : 0마리) [이 퀘스트는 여러 명의 인원이 동시에 참여합니다.] ->완료! (Hidden) 오염된 헤이드릭스의 둥지를 파괴하십시오. (협력) ->완료! (Hidden) 오염된 괴수 그라드닉스를 토벌하십시오. (협력) ->완료! (Hidden) 오염된 괴수 베스포라를 토벌하십시오. (협력) ->완료! - 당신이 이번 퀘스트에서 보여준 행동과 성과를 정산합니다. 이 과정은 약간의 시간이 소요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축하합니다! : 당신의 랭크는 SSS입니다. -당신은 이번 퀘스트의 목표를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완벽하게 수행했습니다. 기본 보상 외에 추가 보상이 지급됩니다. 보상 : 경험치 조금, 추가 보상 상자(협력)x3, 추가 보상 상자(SSS랭크) -> 보상을 지금 수령하시겠습니까? (Y/n) _ (주의) 수령하지 않은 보상은 7일후 자동 소거됩니다. 서유미의 레벨이 다른 이들보다 높은 탓인지 보상 경험치가 이전의 다른 퀘스트에 비해 높았다. 물론 그래봐야 약간이 조금으로 바뀐 것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서유미가 기안과 함께 제법 잘 싸웠기 때문에 등급이 낮아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나, 다행히도 등급에는 차이가 없었다. 준상은 퀘스트 완료 메시지를 일단 치워놓고 헤네스와 리체스부터 다시 불러낸 다음, 그녀들과 함께 온천에 들어가 씻으며 보상을 확인했다. 카드정보 명칭 : 아지랑이 레벨 : 1Lv 경험치 : 0 등급 : Rare 분류 : 소환 성장 : 일반(대) 속성 : 물, 바람 효과 : 아지랑이의 정령 1개체를 소환합니다. Cost : 20 Seed : 4슬롯 괴물 쥐의 예도 있고 해서 이번에 상대한 괴수의 카드가 나오지 않을까 싶었는데, 예상 외로 첫 번째 나온 카드는 새로운 정령 카드 였다. 속성은 물과 바람. 뭔가 파괴력을 기대하기는 애매한 속성이긴 하지만 어쨌든 정령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이기 때문에 준상은 만족스러움을 표하며 다음 상자로 시선을 옮겼다. 카드정보 명칭 : 용오름 레벨 : 1Lv 경험치 : 0 등급 : Rare 분류 : 소환 성장 : 일반(대) 속성 : 바람, 바람 효과 : 회오리 바람의 정령 1개체를 소환합니다. Cost : 20 Seed : 4슬롯 놀랍게도 두 번째 상자 역시 정령 카드였다. 속성은 바람과 바람. 짐작 가는 것이라고는 리체스가 사용한 마법 정도가 고작이지만, 그 마법이 지닌 위력대로라면 이것 역시 큰 전력의 증강으로 이어진다. 이전의 보상에서 워낙 죽을 쒀서 이번에는 별로 기대하지 않고 있었는데, 예상외로 레어 카드가 연속으로 두 번이나 나오자 세 번째 상자에 대한 기대도 덩달아 커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기대가 깊으면 실망도 큰 법. 세 번째 상자에서 나온 것은 무려 수퍼레어 급의 피칠갑이었다. “...” 등급이 아쉽기는 해도 이미 영웅 등급의 피칠갑 카드가 두 장이나 있는데다, 별도로 헤네스가 장착할 블러드로드 콤보 역시 완성된 상황이고, 수퍼 레어 등급의 피칠갑도 이미 하나 보유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 고민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음...” 잠시 고민하던 준상은 결국 재시도를 선택했다. 카드정보 명칭 : 그라드닉스 레벨 : 1Lv 경험치 : 0 등급 : Rare 분류 : 소환 성장 : 일반(대) 속성 : 바람 효과 : 커다란 익룡 1개체를 소환합니다. Cost : 20 Seed : 5슬롯 그 결과 나온 것이 바로 이번에 싸웠던 괴수들 가운데 가장 위협적이었던 익룡 그라드닉스였다. 리체스의 마법에 사로잡혀 간단하게 제압하기는 했어도, 갑가오리의 비행능력을 간단하게 상회하는 빠른 속도와 거대한 몸집에서 나오는 위압감은 확실히 보는 것만으로 대단한 바가 있었다. 다만 한 가지 문제라면, 몸집이 큰 만큼 현대의 대공 무기 체계에 노출되었을 때 제압당하기 쉽다는 사실. 시드 슬롯이 5슬롯이니 12퍼센트로 가득 채울 경우 물리저항을 60퍼센트까지는 맞출 수 있을테고, 기타 여러 가지 버프들에 카드 레벨을 올림으로서 상승되는 능력치까지 감안한다면 상당한 수준으로 방어력을 높일 수는 있겠지만, 그래도 역시 불안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물론 그런 위협이 없는 저쪽 세계에서라면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상대에게 큰 위협을 가할 수 있을테지만 말이다. 준상은 마지막으로 트리플 에스 등급의 상자를 확인했다. 카드정보 명칭 : 은신 레벨 : 1Lv 경험치 : 0 등급 : Rare 분류 : 스킬 성장 : 조숙(대) 속성 : 그림자 효과 : 적의 시선을 피해 몸을 숨깁니다. (실행시 걷기 가능) Cost : 20 Seed : 3슬롯 마지막 상자에서 나온 것은 은신 카드였다. 준상은 최근 조합에 성공한 꽃그림자 콤보의 구성을 새로 얻은 레어급 은신 카드로 교체하는 것으로 보상 상자의 확인을 모두 마쳤다. 00268 트롤러 ========================================================================= 보상 상자의 확인을 끝내고 천천히 바위에 등을 기댄 준상은 온천 밖에서 리체스의 머리를 감겨 주고 있는 헤네스의 모습을 발견했다. “어때요?” “음... 좋아.” 조심스럽게 조물조물 거리며 머리를 감겨 주던 헤네스는 조금 불만스럽다는 말투로 다시 말했다. “리시스도 이렇게 얌전하면 좋을 텐데.” “왜?” “머리를 감겨 주려고 하면 싫다고 울면서 도망가거든요.” “이상하네. 이렇게 기분 좋은데.” “그쵸?” “응.” 리체스는 머리를 감고 린스까지 마치자 개운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고, 이내 무지개빛의 긴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둘둘 말아 올렸다. “이리 와봐. 나도 감겨줄게.” “네? 전 괜찮은데.” “이리 와보라니까.” “그치만...” “얼른!” “네...” 결국 리체스의 기세를 못 이긴 헤네스는 그녀에게 머리카락을 맡겨야만 했다. 리체스는 헤네스가 자신에게 해주었던 것을 떠올리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감기려 했지만, 익숙하지 않은 일이라 그런지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손놀림이 영 어색하다. “아야야...” “아, 미안.” “조금만 천천히 해주세요.” “응.” 결국 악전고투 끝에 헤네스의 머리를 감기는 일에 성공했지만, 리체스는 불만스러움을 느꼈다. 그런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다름 아닌 준상. 바위에 느긋하게 등을 기댄 채 온천에 몸을 담그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자 리체스는 얼른 그의 곁으로 다가가 말했다. “주인님.” 하지만 준상은 곧장 이렇게 대답했다. “싫다.” “...” 본론도 말하기 전에 거절부터 당한 리체스는 개구리처럼 볼을 부풀리더니 다짜고짜 손으로 물을 퍼서 그의 얼굴에 뿌렸다. “...” 이게 무슨 짓이냐는 뜻을 담아 가만히 바라보자, 리체스는 애교어린 표정으로 다가서며 다시 말했다. “자꾸 싫다 그러면 또 물 뿌릴 거에요.” “...” 그러자 머리에 수건을 감고 온천으로 들어온 헤네스가 웃으며 준상에게 말했다. “그러지 말고 허락해 주세요. 준상씨.” “후...” 헤네스까지 그렇게 말하자 준상은 할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쉬며 온천에서 몸을 일으켰지만 리체스는 다시 불만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치. 내가 말할 때는 들은 척도 안하더니.” 그 말을 듣고 준상이 다시 말했다. “싫으면 관두고.” “누가 싫다 그랬어요? 그렇다는 얘기지.” 리체스는 투덜거리며 준상의 뒤를 따라 온천 밖으로 나왔고, 헤네스는 어린애처럼 투정을 부리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웃음을 지었다. 처음에 그녀와 함께 하게 되었을 때는 솔직히 속도 많이 상하고 그랬지만, 만년을 산 요정 답지 않게 리체스는 헤네스 자신이 보기에도 가끔은 꽉 껴안아 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운 여자였다. 물론 질투심이 완전히 없어졌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다. 다만 이렇게 함께 지내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워졌다고 해야 하나. 어쨌거나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헤네스는 준상의 머리카락을 감겨주는 리체스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때요.” “그럭저럭.” “시원해요” “그런대로.” “이렇게 하면요?” “괜찮군.” 리체스는 나름대로 열과 성을 다해서 준상의 머리를 감겨 주었으나, 이런 서비스를 받는다고 무뚝뚝한 그의 성격이 어디 갈리는 없는 일. 게다가 준상의 짧은 머리카락을 감기는 일은 여자의 머리카락을 감기는 것에 비해 너무 쉽게 끝나버렸다. 리체스는 순식간에 머리를 감겨 주는 일이 끝나 버리자 다시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준상이 곧바로 다시 온천 안에 들어가자 리체스는 손가락을 하나 들어 보이며 다시 말했다. “한 번만 더요.” “싫다.” 준상은 다시 거절했지만, 리체스는 포기하지 않고 떼를 쓰기 시작한다. “한 번 더! 한 번 더!” “...” 물론 그런 식으로 떼를 쓴다고 꿈쩍할 준상이 아니다. 리체스는 자신의 투정이 통하지 않자 볼을 부풀리다가, 문득 머리의 물기를 털어내기 위해 들어올려진 준상의 손목을 보고는 잊고 있던 일을 떠올렸다. “아! 맞다. 분신!” “...” 준상은 그제서야 퀘스트 때문에 분신의 시험이 뒤로 미루어졌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는 나가는 즉시 다시 시험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떠올렸지만, 리체스의 생각은 달랐다. “주인님.” “왜?” “그 분신 팔찌, 지금 시험해 봐요.” “...” 이 엄청난 아이템을 고작 머리 감기기 시험용으로 쓰자는 거냐. 게다가 다른 누구도 아닌 제작자 본인이. 조금 어이 없는 상황이긴 했으나 리체스는 진지하게 계속 시험을 요구했다. “얼른요.” “나가서.” “그러지 말구요. 전 그것의 시험을 요구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 자격까지 언급하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는 리체스의 모습에 헤네스는 다시 웃음을 터뜨렸고 준상을 고개를 설레설레 저을 수밖에 없었다. 만년 동안 요정 여왕을 했던 관록이 어디 가지는 않는지 표정은 진지하기 이를데 없었으나, 머리에 수건만 덜렁 감은 벗은 몸으로 그런 진지한 모습을 보이니 오히려 웃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알았다.” 결국 준상의 입에서 항복 선언이 흘러나오자 리체스는 손을 번쩍 치며 올리며 환호했다. “아자!” 그 모습에 준상은 결국 웃음을 지으며 바위에 등을 기댄 채로 천천히 분신 팔찌를 가동했다. 그러자 이전과 마찬가지로 희뿌연 안개 같은 것이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더니 이내 형상이 또렷해지며 실체로 변화한다. “음...” 준상은 새로운 감각의 물결이 자신의 신경을 거슬러 올라와 두뇌로 파고드는 것을 느꼈다. 여전히 조금은 혼란스러운 느낌이었지만, 이전처럼 극심한 감각의 홍수로 인해 멀미가 느껴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괜찮군.” “그렇죠? 저도 시험해 봤는데 훨씬 낫더라구요.”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며 일단 분신을 천천히 움직여 보았다. 감각의 혼재는 초감각을 운용하는 것으로 어느 정도 해결이 되었다고 해도, 두 개의 몸을 동시에 움직이는 것은 역시 별개의 문제였다. “아무래도 훈련이 필요하겠군.” 준상이 그렇게 말하자 리체스가 물었다. “어때요? 이 정도면 괜찮을까요?” “그럭저럭. 그 동안 정말 수고했다.” “헤헤...” 리체스는 준상이 칭찬을 하자 쑥스러운지 얼굴이 상기되었지만 이내 방금 전의 일을 떠올리고는 얼른 분신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어서 이리 와요. 하던 거 마저 해야죠.” “...” 별 것 아닌 것처럼 대수롭게 말하기는 했지만, 본신과 동등한 수준의 능력을 가진 분신을 만드는 일은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요정계에 지구처럼 매스컴이 발달했었다면 당장 금일의 탑뉴스를 넘어 해외 토픽으로 선정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그런 위대한 업적을 고작 머리 감기는 연습용으로 쓰려고 하다니. 대범한 건지, 아니면 그런 일 정도는 정말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건지. 준상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그녀가 원하는 대로 분신을 움직여 온천 밖으로 내보냈다. 리체스는 분신의 건장한 몸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지만, 얼른 손을 잡아 끌어다 앉히며 자신의 행위에 대한 당위성을 토로했다. “이건 중요한 시험이기도 해요.” “무슨 말이냐.” “얼마나 제대로 만들어졌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는 이런 머리카락 한 올의 감각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일이거든요.” “...” 갖다 붙이기는. 준상은 물론이고 헤네스마저도 그녀의 진지한 표정에 다시금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후후후...” 리체스는 뭔가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분신을 가지고 놀기 시작했고, 준상은 그녀에게 머리카락을 맡긴 채로 손가락 같은 신체의 세세한 움직임을 시험했다. 물론 중간에 리체스의 음흉한 손가락이 분신의 몸 이곳 저곳을 주물럭거리는 모습에 헤네스가 견디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새로운 분신 팔찌의 시험은 상당히 성공적이었다. 남은 것은 본신과 함께 분신을 한꺼번에 움직이는 일에 익숙해지기 위한 훈련 뿐이다. “그럼 전 남은 악령의 돌도 분신 팔찌로 만들어 볼게요.” “그래.” 분신을 마음껏 가지고 논 탓인지 리체스는 개운한 표정으로 콧노래까지 부르며 연구실로 향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준상은 새롭게 완성된 분신 팔찌의 정보를 확인했다. 아이템정보 명칭 : 분신의 팔찌 레벨제한 : 없음 종류 : 팔찌 등급 : Unique 효과 : 1. 착용시 자동으로 사용자 인식.(현재: 박준상) 2. 인증 완료시 자동으로 보안, 은폐 기능 활성화. 3. 사용자의 분신 활성화 가능. 4. 분신을 통한 초감각 발동 가능. Seed : 5개 설명 : 요정 여왕 리체스 르아테미시스가 만든 악세사리. 악령의 구슬이 지닌 힘을 이용해 실체화된 분신을 불러내는 것이 가능합니다. 시험작에서 파악된 문제점을 해결한 완성형. 초감각을 통해 감각의 혼재에 대한 문제는 해결했지만 분신의 조종을 위해서는 여전히 상당한 훈련을 필요로 합니다. 완성된 분신 팔찌의 등급은 무려 유니크. 게다가 이번에는 시드 슬롯도 다섯 개나 추가되어 있었다. “역시 대단하군.” 준상은 리체스의 능력에 다시 한 번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나 하는 기대가 없지는 않았지만, 정말로 유니크급의 아이템을 만들어 내다니. 악령의 구슬과 같은 막대한 힘을 지닌 무언가가 필요하기는 하지만 이건 현존하는 그 누구도 이를 수 없는 대단한 일이다. 만족감을 표하며 자신의 손목에 채워진 분신 팔찌를 가만히 쓰다듬던 준상은 헤네스가 조심스럽게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저...” “왜?” “기안님이 유미 언니를 만나고 싶다고...” 슬쩍 바라보니 침대 위에 수호의 신물이 놓여져 있는 것이 보인다. 그녀 역시 준상과 마찬가지로 전투 후에 자신의 장비를 점검하던 중이었던 모양이다. “정말로 제자를 삼을 생각인 건가?” “네.” 서유미의 능력이 강해지면 준상으로서도 나쁜 일은 아니다. 뭐라해도 서윤 일행의 능력이 생각보다 자신과 너무 차이가 나서 조금 실망스럽던 상황인데, 그녀라도 한 사람 몫을 제대로 해준다면 준상으로서는 훨씬 부담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물론 준상의 기준으로 한 사람 몫이라는 것 자체가 이미 보통의 귀환자들을 훨씬 초월한 수준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일단은 리체스가 새로운 분신 팔찌를 만들고 있으니 그것이 끝나면 가보는 것이 좋겠다.” “네!” 기안의 말대로 성녀끼리는 정말로 강한 친애의 감정을 느끼기라도 하는 것일까. 자신의 말에 기쁜 표정으로 미소 짓는 헤네스의 모습을 보며 준상은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연구 기간은 오래 걸렸지만, 이미 만들어진 물품을 똑같이 재생산하는 건 리체스에게 있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고, 일주일이 지나자 다시금 새로운 분신 팔찌 두 개가 더 만들어졌다. 준상은 그것을 모조리 착용한 상태로 세 개의 분신을 동시에 사용하는 일을 시험해 보았지만, 아직 하나의 분신조차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준상은 헤네스와 리체스에게 하나씩 분신 팔찌를 건네주고는 그녀들에게도 분신의 운용을 훈련하도록 했다. 나중에는 한꺼번에 운용할 수도 있겠지만 당장은 하나를 운용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상황이니 놀려두기 보다는 미리 미리 그녀들 역시 훈련을 해두기로 한 것이다. 혹시 수호의 신물에 깃든 기안의 영령을 이용해 분신을 응용할 수는 없을까 하고 시험해 보았지만, 아쉽게도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와 같은 일이 가능하려면 수호의 신물로부터 그녀들의 영령을 분리하거나 동시에 복수의 인격이 수면 위로 떠오를 수 있어야 하는데, 어느 쪽도 매우 위험한 일이기는 마찬가지. 두 기안은 수호의 신물과 한 몸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에 그것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은 자칫 그녀들의 영령이 파괴되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었으며, 복수의 인격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 행위 역시 서로의 영혼이 뒤섞여 파괴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었다. 어쨌거나 분신 팔찌 세 개가 모두 만들어지자 준상은 헤네스와 리체스를 데리고 다시 서윤의 길드원들이 머물고 있는 펜션을 방문했다. 서유미는 헤네스의 모습을 보고 반가워 했으나, 또 다른 두 명의 여자는 리체스의 모습을 보자 흠칫 놀라며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물론 리체스가 그걸 가만 두고 볼 리가 없다. “어때? 그동안 연습 많이 했어?” 그 말에 진세아와 정다빈은 식은땀을 뻘뻘 흘릴 뿐 말을 잇지 못했고, 리체스는 이내 화를 내며 그녀들을 야단치기 시작했다. 그녀들이 리체스에게 야단 맞는 모습을 지켜보던 헤네스는 문득 한 가지 사실을 떠올리고는 서유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언니. 이번에는 늑대 나왔나요?” 그 말에 서유미는 우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거 말고 다른 게 나왔어요.” “다른 거요?” 서유미는 잠시 우물쭈물하더니 이내 무언가를 헤네스의 눈앞에 소환해 보였다. 한 줄기 빛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그것은 오리와 같은 주둥이를 가지고 있었으며 몸에는 갈색의 깃털이 뒤덮여 있었다. 생기다 만 날개처럼 생긴 앞발에는 길고 날카로운 발톱이 숨겨져 있었으며, 길이만도 족히 일이 미터는 될 법한 긴 꼬리 끝에는 전갈처럼 독이 달린 가시가 숨겨져 있었다. 허리쯤 오는 키를 가진 그 기묘한 생물은 바로 이전의 퀘스트에서 그들이 사냥했던 괴수 헤이드릭스였다. “...” 헤네스는 우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는 서유미의 어깨를 말없이 토닥여 주었다. ============================ 작품 후기 ============================ 크윽... 손가락 끝에서 흑염룡이 미쳐 날뛰며 멋대로 키보드를 두들기고 있... 00269 트롤러 ========================================================================= 헤네스와 리체스가 각자의 제자들에게로 가자 준상은 서윤과 대화를 나누었다. “마침 일전에 주문하신 욕탕의 개념 설계가 나온 참입니다. 보시겠습니까.” “그러지.” 준상이 서윤을 따라 펜션 안으로 들어가자 리체스는 울상이 되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진세아와 정다빈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수업료.” “...” 물론 둘은 오늘치 수업료를 준비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일전에 당한 수치 플레이만으로도 며칠 동안을 끙끙 않았는데, 그 같은 일을 스스로 앞장서서 뇌물까지 바쳐가며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 때문이다. “뭐야. 준비 안 했어?” 리체스가 얼굴을 찌푸리자 진세아가 얼른 말했다. “그게... 저희는 역시 소질도 모자른 것 같아서요. 그때도 보셔서 아시겠지만, 그렇게 열심히 가르쳐 주셨는데도 단 한 번의 마법도 성공시키지 못했잖아요.” 그러자 리체스는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럴 수도 있지. 하루 아침에 바로 마법을 쓰면 세상에 온통 마법사들이 넘쳐나게?” “그거야 그렇지만.” “걱정 마. 너희들은 재능이 있어. 내가 보장할게.” “...” 그런 거 보장하셔도 곤란하거든요. 진세아와 정다빈은 마음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물론 입 밖에 낼 생각은 하지 못했다. 정다빈만 하더라도 못하겠다고 울며 도망갔다가 저녁 때 다시 돌아온 순간 번개에 맞아 머리카락이 홀라당 다 타버릴 뻔 했기 때문이다. 리체스는 평소에는 안 그러면서 무언가를 가르칠 때는 굉장히 엄격한 편이었다. “할 수 없지. 일단 오늘은 외상으로 해두자고.” 외상이라니. 요정이 그런 건 또 어디서 배운 건지. 진세아와 정다빈은 눈 앞에서 무지개빛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날고 있는 이 작은 요정이 혹시 특수한 무언가를 통해 모습만 바꾼 인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떠올렸다. 물론 리체스는 둘이 그런 생각을 떠올리거나 말거나 자기 하고 싶은 말을 이어갔다. “그... 뭐였지? 갤리? 갤라?” “갤러... 말씀이신가요.” “그래. 갤러. 그거 크기는 작아도 은근히 맛있더라고. 그리고 다빈이 네가 가지고 온 그게 뭐였지?” “로이스 초콜릿이요.” “그래, 맞아. 그것도 굉장히 맛있더라도. 오늘치 수업료도 그걸로 부탁해.” “...” 그렇게 맛있으면 돈도 많이 버는 준상에게 사달라고 하면 될 것 아닌가. 진세아와 정다빈은 그렇게 다시 마음 속으로 꿍얼거리다가 이어진 리체스의 말에 혼비백산 하고 말았다. “전에 보니까 너희들은 역시 패기가 부족해. 오늘은 구보를 하면서 전에 가르쳐 줬던 주문을 큰 소리로 외치도록 하자.” “네?” 숲 속에서 몰래 연습을 하는 것만으로도 까무러치는 줄 알았는데, 그걸 달리면서 동네 방네 다 들리게 외치고 다니라고? 만약 누가 보기라도 하면 곧바로 전세계 방방곡곡에 SNS를 통해 동영상이 퍼져나갈 일이다. 물론 동영상을 본 사람들이 한국어를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깔리긴 하겠지만 말이다. “왜? 하기 싫어?” 진세아와 정다빈은 머리카락이 홀라당 다 타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못하겠다고 버텨야 겠다는 생각을 떠올렸으나, 리체스가 씩 미소를 짓는 순간 화창하던 하늘에 먹구름이 짙게 깔리는 것을 보고는 얼른 그런 생각을 머리 속에서 지웠다. 무서운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그 엄청난 모습을 보는 순간 자신이 왜 마법을 배우겠다고 그녀를 졸랐는지 다시금 깨달았기 때문이다. “후... 할게요.” 결국 진세아는 버티기를 포기했고, 정다빈 역시 울며 겨자 먹기로 그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얼굴을 드러내고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 진세아는 어차피 할 수밖에 없는 일이라면 얼굴이 드러나는 일만은 피하기 위해 꾀를 썼다. “기왕 해야 한다면 전투 복장을 입고 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그녀의 의도를 깨달은 정다빈이 얼른 맞장구를 쳤다. “맞아요. 사실 저희들은 대기 시간도 없어서 언제 불려갈지도 모르는 상황이니 그러는 편이 나을 것 같은데요.” “흠...” 확실히 논리적으로 문제가 없는 건의인지라 리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편하면 그러든가.” 리체스가 선선히 승낙하자 진세아와 정다빈은 반색하며 얼른 그녀에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바로 갈아입고 올게요!” 하지만 그녀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얼굴을 가리면 뭐하나. 주문에 그녀들의 실명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데. 아무튼 진세아와 정다빈이 방어복을 챙겨 입으로 후다닥 각자가 머무는 펜션으로 들어갈 즈음, 서유미는 헤네스의 손에 이끌려 펜션 주위의 오솔길을 걸으며 화기애애한 모습으로 성녀의 힘을 발현하기 위한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해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럼 역시 그 영기라는 것을 발현하기 위한 수련이 주가 되는 건가요?” 서유미의 물음에 헤네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저도 이제 막 배우기 시작한 상황이라 잘은 모르겠지만, 유미 언니의 경우엔 기안님과는 싸우는 방식 자체가 틀리기 때문에 굳이 그것에 손을 대기보다는 자신의 것을 더욱 발전시키는 편이 나을 것 같다고 그러셨어요.” “그렇군요.” 헤네스는 다시 설명을 이어갔다. “물론 영기의 경우에도 보통의 학문이나 기술처럼 이론 같은 걸로 설명이 가능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우선 어떤 느낌의 힘이고 어떤 식으로 발현하는지 몸으로 체득하는 수밖에 없는 모양이에요.” “그럼...” “가급적 자주 영기를 직접 몸으로 느껴보는 수밖에 없는 거죠.” 서유미는 미안해 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번거롭지 않겠어요?” “저요?” “네.” 헤네스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그 정도는. 오히려 동료가 생긴 것 같아서 기쁜 걸요.” “...” 서유미는 헤네스의 밝은 미소를 보며 수줍게 미소를 지었다. 물론 긴 머리카락에 가려진 상태라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홍조를 띈 채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모습만으로도 헤네스는 서유미가 짓고 있는 모습을 알아볼 수 있었다. “아, 맞다.” 헤네스는 잊고 있었다는 듯이 서유미를 향해 말했다. “주로 쓰시던 그 칼 있잖아요.” 서유미는 그 말을 듣고는 품속에서 흰 천으로 감싸여진 식칼을 꺼냈다. “이거 말인가요?” “네. 뭔가 사연이 있는 물건인가요?” “그게...” 서유미는 난처한 표정을 지은 채 우물쭈물하다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실은... 어머니가 남겨주신 거에요.” “아, 그랬군요. 헤네스가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바라보던 서유미는 잠시 심호흡을 하고는 용기를 내어 말했다. “네. 이런 말 하기 부끄럽기는 하지만... 제 어머니가 무당이셨거든요.” 하지만 나름 용기를 낸 그 말을 헤네스는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무당? 그게 뭐에요?” “...” 서유미는 그렇게 반문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모습을 보자, 어쩐지 마음이 가벼워지는 기분을 느꼈다. 어머니에 대한 것을 알게되면 사람들은 그녀를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이 담긴 눈으로 보곤 했다. 그 감정들은 때로는 멸시이기도 하고, 때로는 동정일 때도 있었지만, 여기에 아버지를 밝힐 수 없다는 사실까지 더해지면 그 시선들이 품은 감정은 더욱더 깊고 음침하게 변해 서유미의 정신을 갉아 먹곤 했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이 소녀에게서는 그런 감정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단순히 무당이 뭔지 몰라서 보이는 반응일지도 모르지만, 서유미는 그런 헤네스를 한 번만 믿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용기를 내어 무당에 대해 더듬거리며 설명을 해 주었다. 그러자 헤네스는 놀랐다는 표정을 지으며 짝 하고 박수를 쳤다. “그럼 유미 언니의 어머니께서도 성녀셨던 거네요? 정말 대단해요!” “...” 그게 그렇게 되나. 하긴 신을 모신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일지도 모르겠지만, 서유미 자신조차 그런 생각은 떠올려 본 적이 없다. “과연. 그랬군요. 전 가문 안에 그런 힘을 지닌 사람이 없어서 누구한테 말하기도 곤란한데.” “그런가요.” “네. 솔직히 제가 성녀라고 말하면 제 오빠나 언니들은 웃음부터 터뜨릴 거에요.” “...” 헤네스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 칼 말인데요.” “네.” “여왕님. 아니, 리체스님에게 말하면 마법을 부여해 주실지도 몰라요. 잘은 모르지만 그렇게 되면 준상씨에게 부탁해서 더 강력하게 만드는 것도 가능할 거에요. 제가 한 번 부탁해 볼까요?” 서유미는 헤네스의 호의에 가슴이 푸근해지는 것을 느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전에 빌려준 단검만으로도 충분해요.” “하지만...” “정말로 괜찮아요. 그리고, 고마워요.” “...” 서로 상반된 분위기이긴 했지만 헤네스와 리체스는 그날 각자의 용무를 마치고 다시 준상과 함께 요정계로 돌아왔다. 당장은 분신의 팔찌에 익숙해지는 것이 가장 시급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준상은 일단 본격적인 훈련에 들어가기에 앞서서 각자의 분신 팔찌에 대한 강화부터 실행했다. 아이템정보 명칭 : 분신의 팔찌 +10 레벨제한 : 없음 종류 : 팔찌 등급 : Unique 효과 : 1. 착용시 자동으로 사용자 인식.(현재: 박준상) 2. 인증 완료시 자동으로 보안, 은폐 기능 활성화. 3. 사용자의 분신 활성화 가능. 4. 분신을 통한 초감각 발동 가능. 5. 생명력 강화 18% 증가 6. 화염 속성 저항 17% 증가 7. 방어력 23% 증가 Seed : 5개 설명 : 요정 여왕 리체스 르아테미시스가 만든 악세사리. 악령의 구슬이 지닌 힘을 이용해 실체화된 분신을 불러내는 것이 가능합니다. 시험작에서 파악된 문제점을 해결한 완성형. 초감각을 통해 감각의 혼재에 대한 문제는 해결했지만 분신의 조종을 위해서는 여전히 상당한 훈련을 필요로 합니다. 가장 먼저 실행한 준상의 팔찌에는 생명력 강화와 화염 속성 저항, 그리고 방어력의 옵션이 새로 추가되었다. 준상은 곧바로 헤네스와 리체스의 팔찌 역시 강화했다. 그 결과. 헤네스의 것에는 재생률 12퍼센트, 크리티컬 확률 18퍼센트, 냉기 저항 25퍼센트가 붙었고, 리체스의 것에는 방어력 23퍼센트, 마법 무시 15퍼센트, 독 저항 19퍼센트가 붙었다. 준상은 일단 기본적으로 각 팔찌에 붙은 저항 속성에 맞춰서 시드를 장착하는 것으로 강화를 마쳤다. 셋은 곧바로 다시 팔찌를 차고는 분신의 운용에 익숙해지는 훈련을 시작했다. 그러나 헤네스의 경우에는 기안으로부터 성녀의 능력을 개발하기 위한 훈련 역시 병행해야 하는데다, 이따금 얀트훈센에 들러 물자의 보급 상황이라든가 이벨류아와의 교역 같은 문제도 협의해야만 했기 때문에, 분신의 운용 훈련은 자연스럽게 준상과 리체스 둘이 함께 하는 일이 많아지게 되었다. 리체스의 호감도와 충성도는 이미 오래전에 100을 넘긴 상태. 다소 억지스럽게 헤네스와 준상의 사이에 끼어들긴 했지만, 그날의 일로부터 상당한 시간이 흐른 지금에 와서는 그녀 역시 이미 준상의 반려로서 확실하게 자리 잡은 상태였다. 그래서일까. 비록 훈련이 주목적이긴 해도 이런 식으로 둘만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면 가끔 딴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주인님.” “왜?” “잠시만 그대로 있어 봐요.” “...” 물론 여기서 가만히 있으라는 것은 분신에 대한 얘기다. 천천히 체조나 달리기 같은 것을 통해 분신의 움직임을 더 자연스럽게 이끌어내기 위한 훈련을 하고 있던 준상은 가만히 자신의 등 뒤에 몸을 기대오는 리체스의 말대로 분신의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러자, 리체스는 천천히 자신의 분신을 움직여 준상의 분신을 뒤에서 끌어안았다. 본신은 아니지만, 초감각을 통해 상대의 분신과 접촉하는 감각이 그대로 전해진다. 리체스는 분신을 통해 전해지는 상대의 촉감을 만끽하며 준상에게 속삭였다. “체조나 달리기 같은 것도 좋지만, 그런 식의 작위적인 움직임보다는 좀 더 자연스러운 것이 좋지 않을까요?” 준상은 자신의 목을 휘감아 오는 리체스의 팔을 가만히 쓰다듬으며 물었다. “이를테면?” “이를테면... 키스라든가.” “...” 리체스는 그렇게 말하고는 분신을 움직여 상대의 목덜미에 살짝 입술을 맞추었다. 준상은 분신을 통해 전해지는 감미로운 입술의 감촉을 느끼고는 자신 역시 천천히 분신의 몸을 돌아서게 했다. 마침내 두 분신이 마주서자, 리체스는 다시 조용히 입을 열었다. “키스해 주실래요?” “...”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신의 목을 감싸고 있는 그녀의 손을 들어 거기에 입을 맞추는 동시에, 분신으로 하여금 자신을 바라보는 리체스의 분신을 끌어당겨 그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동시에 두 개의 몸을 통해 전해지는 키스의 감촉에 리체스는 가슴이 세차게 두근거리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준상과 리체스가 움직이는 두 개의 분신은 조심스럽게 서로의 몸을 쓰다듬으며 입맞춤을 계속했다. 상대를 상처 입히지 않기 위해서는 최대한 세심하게 힘조절을 할 필요가 있다. 때문에 준상과 리체스는 서로의 분신에 대해 정신을 집중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분신으로부터 전해지는 부드럽고 따뜻한 감각과 눈앞에서 보여지는 그 모든 모습으로 인해 점차 몸이 뜨거워지고 있었다. “아...” 리체스는 자신도 모르게 뜨거운 숨을 준상의 귓가에 뿜어냈다가 그런 자신의 반응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 작품 후기 ============================ 드디어 선작 삼만의 벽을 돌파했습니다. 성원에 보답하며... 다시 한 번 연참송을! 아니, 미친거 아니야? 일요일 밤이 되니까 12시가 되도 나 잠 못 자겠어 다 연참을 부르니까 아니, 미친거 아니야? 밤이야? 밤이 아니야? 엄지부터 새끼 손가락까지 세상에 모두 흑염룡이야 끌리는 약빨의 향기에 약빨의 몸짓에 그런 눈빛에 난 (미쳐 버려 귓가에) 귓가에 속삭여줘 약빨의 목소리에 숨 소리는 거칠어져가 하 미친거 아니야? 오늘밤 미치려고 작정한 흑염룡이야 오늘만 미치도록 달리잔 말이야이야이야 미친거 아니야이야이야? 미친 흑염룡 (Crazy) Go Crazy (Go Crazy) Go Crazy (Go Crazy) Go Crazy (Go Crazy) 아니, 미친거 아니야? 아직도 끝이 아니야 이 자식 2연참 가자고 달려보자 난리도 아니야 아니, 미친거 아니야? 아직도 모자란단 말이냐 다들 모두 모여(서) 하나되어(서) 미쳐가니까 Everybody just drop it like it’s hot 함께하니 즐거워지잖아 아주 어지러운 몽롱함에서 벗어나긴 너무 이르잖아 연참은 약빨의 꿀 폭참은 약빨의 독 내일은 없어 Noday But Today 저 흑염룡들의 손짓 그 약빨 속의 외침 내 가슴 점점 더 뜨거워 Going Crazy Baby Clap ya hands everybody E’rbody getting all crazy (Everybody knows it u can’t stop it baby) 아니, 미친거 아니야? 오늘밤 미치려고 작정한 흑염룡이야 오늘만 미치도록 달리잔 말이야이야이야 미친거 아니야이야이야? 미친 흑염룡 (Crazy) Go Crazy (Go Crazy) Go Crazy (Go Crazy) Go Crazy (Go Crazy) 00270 트롤러 ========================================================================= 부끄러워서 어디로 숨고만 싶은 기분이 되었지만, 그런 리체스의 귀로 준상의 조용한 말이 들려왔다. “리체스, 집중해라.” “...” 잠시 리체스가 딴 생각을 하는 사이, 제어가 풀린 그녀의 분신은 목석처럼 딱딱하게 굳어 버린 모습으로 돌변해 있었다. “치...” 리체스는 입을 삐쭉거리며 다시 분신에 신경을 집중했으나 바로 그 순간 준상의 분신이 그녀의 분신이 입고 있던 옷을 벗기기 시작하는 모습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쓰다듬는 건 그렇다 쳐도, 옷을 벗기다니.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사이에, 리체스의 분신은 순식간에 무장해제 되어 아름다운 알몸을 내보이고 있었다. 분신이 입고 있던 옷은 바닥으로 흘러내리는가 싶더니 그대로 빛으로 화해 사라지고 말았다. “집중하라니까.” “...” 다시금 이어진 준상의 말에 리체스는 어쩐지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반격을 해보기로 했다. 이번에는 리체스의 분신이 준상의 분신이 입고 있는 옷을 천천히 벗기기 시작했다. 사실 이런 식으로 준상의 옷을 벗기는 행위는 본신으로도 해본 적이 거의 없다. 리체스는 손 끝에 전해지는 감각에 최대한 집중하며 조심스럽게 그 행위를 이어가다가 바지를 벗기는 순간 모습을 드러낸 위험한 무언가를 보고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 이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묘한 기시감을 느끼며 당혹해 하던 리체스는 가만히 분신을 움직여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흉기를 손으로 감싸 쥐었다. “음...” 긴장한 탓에 너무 힘을 주었던 것일까. 문득 준상의 입에서 작은 신음소리가 흘러나오자 리체스는 기겁하며 손에서 힘을 뺐다. “아파요?” “아니, 괜찮아.” 사실 아무리 리체스의 분신이 힘을 꽉 주었다 하더라도 준상의 몸은 그 정도의 손아귀 힘으로 통증을 느낄 정도로 약하지 않았고, 그건 분신 역시 마찬가지였다. 민감한 부위라는 생각에 지레 겁을 먹은 것이라고 하는 편이 맞을 듯 싶다. 리체스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만지는 것만으로도 당황스러웠지만 조금 지나자 요정의 호기심이 발동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것에 살짝 입을 맞추어 보았다. “음...” 그러자 곧바로 준상이 다시금 신음 소리를 흘린다. 과연. 그런 것인가. 리체스는 방금 전에 자신도 모르게 준상의 귀에 뜨거운 숨을 토해냈던 일을 떠올리고는 그의 신음소리가 의미하는 바를 이해했다. 일단 한 번 약점을 파악하자 그녀의 행동은 더욱 대담해졌다. 양손으로 준상의 몸을 움켜잡은 채 혀로 그것을 핥은 것이다. “으음...” 그러자 준상은 몸까지 움찔거리며 크게 반응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리체스는 마치 사탕을 핥듯이 혀를 움직이기 시작했고, 준상은 그때마다 움찔거리며 신음을 흘리다가 결국에는 참지 못하고 그녀의 머리를 움켜잡았다. “읍!” 리체스는 자신의 입 안으로 밀려들어오는 뜨거운 무언가의 감각에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실제로 입에 무언가가 들어온 것은 아니었다. 분신으로부터 느껴진 감각이 본신에 투영되어 그렇게 느껴진 것 뿐이었다. “아, 미안.” 준상은 자신도 모르게 과격한 움직임을 보인 것을 사과하며 몸을 떼어내려 했지만, 리체스는 고개를 저으며 분신의 팔을 움직여 엉덩이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는 가만히 입안에 들어온 준상의 몸을 혀로 굴리기 시작한다. “크음...” 준상은 이 감미로운 자극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한 번 크게 몸을 움찔거렸다. 이쯤 되자 리체스는 재미마저 느끼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무슨 말을 해도 항상 단답형으로 대답하는 이 남자가 이 정도로 자신의 행동에 반응하는 일은 정말 보기 드문 일이었기 때문이다. “어때요?” “...” “기분 좋아요?” “...” 준상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의 숨이 뜨거워져 있다는 것을 리체스는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었다. 대답하지 않은 것에 대한 벌로 더욱 정성껏 그의 몸을 자극하자, 결국 준상은 견디지 못하고 반응을 보였다. 그녀의 분신으로부터 몸을 떼더니 엉거주춤하게 앉아 있던 분신을 밀어 넘어뜨린 것이다. “꺅!” 분신이 나동그라지는 느낌에 리체스는 짤막한 비명을 지르며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느낌에 가슴이 세차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금방이라도 리체스의 분신을 덮칠 것만 같던 준상의 분신은 마치 석화라도 된 것처럼 그래도 우뚝 멈추어 서고 말았다. 심장이 콩닥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다음 행동을 기다리고 있던 리체스의 귀에 가라앉은 준상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무슨 일이지?” “네?” 갑자기 무슨 말인가 싶어 리체스가 되묻자, 준상은 손가락을 들어 조용히 하라는 시늉을 해보이고는 다시 말했다. “티비? 지금 말인가?” 공교롭게도 그는 지금 메신저를 통해 임서윤과 통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실례인 줄은 압니다만 아직 모르실지도 모른다 싶어서 연락드렸습니다.” “흠...” 일부러 이렇게 메신저를 통해 연락을 보내올 정도면 보통 일은 아닐 것이다. “무슨 일이지?” 그러자 서윤은 굳은 표정으로 이렇게 대답했다. “미국에 마수들이 등장했습니다.” 준상은 결국 얼굴을 찌푸렸다. “마수?” “네. 정다빈씨나 윤성렬씨, 그리고 이한서군의 말로는 이전의 퀘스트에서 준상님이 쓰러뜨린 마수가 틀림없다고...” 설마, 마수 바스반 탄을 말하는 것인가. “잠깐, 방금 마수들이라고 했나.” “네.” 서윤은 굳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지만, 뉴스에 나온 영상으로 미루어 보면 최소 열 개체 이상인 것으로 보입니다.” 한 마리도 아니고 열 마리 이상이라니. “게다가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것 이외에 다른 무언가에 대한 목격담도 있는 모양입니다.” “...” “방어력이 상당해서 미군들이 공습과 포격을 가했지만 별다른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고 합니다.” 하긴, 바스반 탄의 조개 껍데기는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깨뜨리기가 쉽지 않다. 오죽하면 얼음의 대정령을 불러내어 얼린 다음 벌려진 껍데기의 내용물을 처리했을까. 하지만 사실 중요한 건 미국에 나타난 마수가 바스반 탄이라는 점이 아니다. 저쪽 세계에, 그것도 봉인의 형태로 잠들어 있던 마수가 열 마리나 지구 상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점이 문제였다. 아직 정보가 부족해서 정확한 내막을 알기는 어렵겠지만, 가장 큰 가능성을 꼽으라면 역시 두 가지 정도다. 하나는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의 벽이 무너져 이와 같은 일이 발생했을 가능성. 또 다른 하나는 그 정도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무언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불려왔을 가능성이 바로 그것이다. 어느 쪽이든 향해 세계에 큰 여파를 몰고 올 것은 당연한 일. 만약 그렇다면 여기서 리체스와 노닥거리고 있을 상황이 아니다. 결국 준상은 분신을 해제하며 몸을 일으킬 수 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 “그래.” 준상은 손을 뻗어 리체스의 입술에 입을 맞추어 보이고는 다시 말했다. “이 다음의 일은 나중에 다시 이어서 하자.” “...” 담담한 그 말을 듣는 순간, 리체스는 이 능구렁이 같은 남자가 단지 자신의 행동에 박자를 맞추기만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물론 지금에 와서는 확인할 도리가 없게 되고 말았지만 말이다. “치.” 입술을 삐죽거리며 분신을 해제하는 리체스의 모습을 보고 피식 웃어버린 준상은 잠시 물자 보급 문제로 얀트훈센에 나가 있던 헤네스를 불러들인 다음, 그녀가 돌아오자 곧바로 정령의 문을 통해 북한산으로 나와 임서윤의 길드원들이 머물고 있는 펜션으로 향했다. 임서윤은 그가 도착하자 반색하며 그를 맞이했다. “번거롭게 해서 죄송합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시죠.” “...” 서윤은 준상과 헤네스, 그리고 리체스를 안으로 맞이한 후, 그들이 자리를 나누어 앉기가 무섭게 티비를 켜고 거기서 흘러나오는 속보를 보여주었다. “흠...” 준상은 속보에서 흘러나오는 영상을 보고 작은 신음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그가 쓰러뜨린 바스반 탄은 조금 넓은 형태의 조개 껍데기를 가지고 있었던 데 반해, 영상에 나타난 것들으 마치 홍합처럼 뾰족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허나 형태가 조금 다른 것을 제외하면 땅속에 뿌리를 내린 채 거대한 조개 껍데기를 내밀고 있는 그 모습은 영락없는 바스반 탄이었다. “맞군.” 준상이 그렇게 말하자, 서윤은 역시나 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니길 바랬습니다만.” “아니라면 그건 더 곤란한 일이 되겠지.” “하긴... 그것도 그렇군요.” 괴물 꽃의 일로 잠시 귀환자의 존재가 두각되기는 했으나 이후로 비슷한 사례가 발생하지 않은 탓에 일반인들은 그런 식의 위협이 실존한다는 사실을 어느새 조금씩 잊어 가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세계 최강이라 불리는 미군의 공격에도 꿈쩍 않는 마수가 이렇게 매스컴을 통해 당당히 등장한 것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이쯤 되면 앞으로의 혼란은 피할 수 없다고 봐도 틀림없다. “미국 쪽에서 정보 규제를 하지 않은 건가.” 준상의 물음에 서윤은 고개를 저었다. “물론 했습니다.” “그런데?” “저 마수들이 최초로 모습을 드러낸 곳은 캘리포니아 만 일대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다가 지상으로 상륙을 시도했고, 이동을 계속해 지금은 샌 디에이고를 눈 앞에 둔 상황입니다. 중간에 미군이 여러 가지로 놈들의 이동을 저지하려고 노력했던 것으로 보입니다만, 결국 그 모든 수단이 실패로 돌아가 대도시에 접근하자 도저히 더 이상 정보 규제를 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음...” 그 정도의 시간이 있었다면 여러 가지 수단을 동원했을 것은 당연한 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이라면 사실상 재래식 무기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뜻이나 다름없다. 마지막 남은 것은 핵 무기 정도. 하지만 그것은 사용 후의 여파를 생각해 봐도 함부로 꺼내들 수 있는 무기가 아니고, 설령 사용을 결의하더라도 주민의 소개나 지역의 폐쇄등 사전에 해야 할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일단은 샌 디에이고 주변의 인구를 소개하는 중으로 보입니다만, 문제는 이후가 되겠죠.” “확실히.” 이것이 세계의 벽이 무너져 생긴 일이거나 그에 버금가는 단순한 사고의 산물이 아닐 경우, 과연 누가 이런 일을 실행했느냐에 따라 가능성은 둘로 나뉜다. 하나는 퀘스트를 주재하는 자의 소행일 경우이고, 나머지 하나는 다크 시드 사용자들, 그 중에서도 칠성좌라 불리는 누군가의 소행일 가능성이다. 사실 준상으로서도 칠성좌가 도대체 얼마만큼의 힘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지만, 확실하게 어느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이상 이것이 일전에 벌어진 다크 시드 사용자의 학살에 대한 보복조치 같은 것일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 물론 이러한 가정에는 한 가지 큰 맹점이 있다. 이것이 준상의 행위에 대한 보복이라면 어째서 사건이 벌어진 한국이 아닌 미국인가 하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때문에 준상은 이번의 마수 출현이 퀘스트를 주재하는 누군가의 소행이 아닐까 하는 가능성에 더 무게를 둘 수밖에 없었다. 물론 어느 쪽이라고 확실하게 결론을 내리기에는 아무래도 단서가 부족한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음...”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준상은 결정을 내렸다. “미국에 가는 수밖에 없겠군.” “네? 하지만...” 미국까지 가려면 배나 비행기를 이용하는 수밖에 없는데, 속도가 느린 선박은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처음부터 열외이니, 남은 것은 비행기 뿐이다. 하지만 준상과 같은 귀환자들에게 있어 비행기 같은 운송 수단을 이용하는 것은 목숨을 거는 일이나 다름없다. 물론 서윤은 그가 최근 제주도 등에 다녀왔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미국은 사실상 지구 반대편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먼 거리가 아닌가.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서윤의 조심스러운 말에 준상은 조용히 대답했다. “글쎄. 그건 지켜 보면 알 일이겠지.” 준상은 그렇게 대답하고는 다시 말했다. “사건 현장으로 향하는 가장 빠른 비행기편을 구할 수 있겠나.” “그건 어렵지 않습니다만.” 역시 서윤은 준상이 직접 움직인다는 것이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무려 열 마리 이상의 마수라면 그 정도 수고로움은 충분히 감수할 만 했다. 딱히 물리칠 방법이 없다면 모르지만, 그는 이미 한 번 바스반 탄을 처리한 전적이 있지 않은가. 열 개 이상의 레어 시드라면 이전에 에픽 퀘스트를 연속으로 수행하면서 모은 레어 시드의 수와 맞먹는다. 퀘스트가 주어질지는 확신할 수 없으나 이 정도의 보상을 놓칠 수는 없는 것도 분명한 사실. 물론 미끼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허나 기왕 미끼를 뿌릴 생각이었다면 일부러 먼 미국에 그런 마수들을 불러내는 건 이치에 맞지 않은 일이다. 결국 서윤은 이미 결정을 내린 채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는 준상의 시선을 감당하지 못하고 이렇게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바로 비행기편을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서윤은 곧바로 준상이 타고 갈 비행기편을 마련했다. “그럼 다녀오도록 하지.” “부디, 조심하십시오.” 서윤은 준상이 랩터를 몰고 펜션을 빠져 나가는 모습을 길드원들과 함께 굳은 표정으로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었다. 00271 트롤러 ========================================================================= 다음날, 로스앤젤레스 국제 공항. 경사로를 따라 바글거리며 원형의 조명이 설치되어 있는 입국장을 따라 올라오는 사람들의 표정은 지루하고 긴 입국 심사를 마쳤다는 안도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 사람들 사이에 유독 눈에 띄는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검은 야구 모자에 커다란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얼굴 주위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은 묘한 착각을 불러 일으키고 있었다. 오죽하면 옆을 지나던 사람들 대부분이 그가 지나치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출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그런 사람들의 시선을 무시한 채 커다란 원형의 조명이 설치된 입국장으로 향하는 경사로를 짐도 없이 뚜벅뚜벅 걸어 올라가더니, 그곳에서 기다리는 방문객들을 한번 주욱 훑어 보았다. 방문객들은 왠 선글라스를 낀 동양 남자가 자신들을 훑어보자 처음에는 그런가보다 싶었다가 갑자기 주위가 확 밝아지는 듯한 착각을 느끼며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모자와 선글라스로 가렸는데도 이 정도이니, 그렇지 않았다면 모르긴 해도 큰 소란이 일어났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바로 그 남자, 준상은 그런 방문객들 사이에서 피켓을 들고 있는 한 남자를 발견하고는 그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박준상님, 미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는 피켓을 들고 있던 남자는 다른 방문객들과 마찬가지로 멍하니 준상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그가 자신의 앞에 멈추어 서자 그제서야 화들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박준상님... 되십니까?” “그렇다.” 담담한 준상의 목소리를 들은 남자는 얼른 피켓을 옆구리에 끼우고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김진수라고 합니다. 임서윤님의 연락을 받고 기다리던 참이었습니다. 가시죠.” “...” 준상은 김진수가 이끄는 대로 주차장을 향해 이동했다. 검은 색 세단의 뒷자석에 올라탄 준상은 김진수가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자 조용히 물었다. “상황은?” “네?” 김진수는 시동을 걸다가 갑작스럽게 날아든 질문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봐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이라 준상은 얼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바로 인벤토리에서 사자 가면을 꺼내 얼굴을 가린 뒤, 다시 말했다. “나에 대해 들은 바가 없나?” 갑자기 영화 같은 데서나 나올 법한 사자 가면을 눌러쓰는 모습을 보고 김진수는 더욱더 당황스런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게... 그저 도착하시면 최대한 편의를 봐드리라는 말 밖에는 듣지 못했습니다.” “...” 하기야 괜히 이런 저런 말을 해서 준상에 대한 정보가 여기 저기 흘러들어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을 보내는 쪽이 낫긴 하다. 준상은 대충 어떻게 된 일인지 파악하자 다시 질문했다. “샌디에이고의 상황은?” 지금 한창 미국 내에서도 이슈가 되고 있는 도시의 이름이 나오자 김진수는 그제서야 화들짝 정신을 차리며 대답했다. “일단 주민 소개가 반 정도 완료된 상황입니다. 도시 남쪽에는 주 방위군과 육군이 방어선을 친 상태지만 현재로서는 방어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분석입니다.” 첫 인상은 조금 멍청해 보였지만 임서윤이 일부러 골라 보낼 정도의 인물이라 그런지 준상이 원하는 정보가 술술 흘러나온다. “얼마나 걸리나.” “로스앤젤레스에서 샌디에이고 까지는 해안도로를 따라가면 두 시간 반 정도 걸립니다. 다만, 이곳 공항에서 해안도로까지 진입하는데 시간이 좀 많이 걸릴 수 있습니다.”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말했다. “한글로 된 약도가 있나.” “네. 좌석 앞쪽에 보면 관광용 지도가 있을 겁니다.” 준상은 좌석 주머니에 비치된 지도를 꺼내 살펴 본 다음, 다시 말했다. “임서윤을 통해 연락할테니, 일단 돌아가도록.” “네?” 김진수는 당황해 하며 다시 돌아보았지만, 준상은 어느 새인가 차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얼른 차에서 내린 김진수는 준상을 향해 말했다. “이곳은 대중교통도 마땅치 않은 곳입니다. 어디를 가시든 간에 일단 이 차를 타시고 시내까지 가시는 편이 나을 듯 싶습니다만.” 그 말에 준상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게 나을 지도 모르겠군.” 모처럼 그룹 차원에서 손님 접대를 맡았는데 영문도 모르고 놓쳐버릴 뻔 했던 김진수는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준상은 그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움직였다. 뒷좌석이 아닌, 운전석에 올라탄 것이다. “차는 잘 쓰겠다. 임서윤에게는 내가 잘 도착했다고 전해라.” “네? 아니, 저기, 잠깐...” 김진수는 당황하며 준상을 붙잡으려 했지만, 이미 시동이 걸려 있던 차는 무정하게도 주인을 내팽개친 채 그대로 주차장을 빠져 나가고 말았다. 잠시 멍하니 선 채 멀어지는 자동차를 바라보던 김진수는 차 안에 지갑마저 놓고 내린 상태라는 것을 깨닫자 이렇게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거... 어쩌면 좋지?” 애꿎은 샐러리맨 하나를 당혹 속에 몰아넣은 준상은 차를 몰고 공항을 빠져 나오기가 무섭게 곧바로 헤네스와 리체스를 불러냈다. “음? 이건 우리 차가 아니네요?” 자신이 불려진 곳이 준상이 몰고다니던 랩터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리체스의 말에 준상은 바로 대답했다. “번호판이라든가, 여러 가지 귀찮은 문제가 있어서 일단 잠시 빌려 쓰기로 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빌린 것이라기 보다는 강탈에 가깝지만 헤네스나 리체스가 그런 상황까지 알아 들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리체스는 곧바로 대시 보드 위에 앉아 차창 밖의 풍경을 구경하기 시작했고, 헤네스 역시 말없이 그 시선을 따라 바깥의 풍경을 바라보다가 이렇게 말했다. “역시 다른 나라라 그런지 느낌이 확연히 다르네요.” “먼 나라니까.” 준상은 그렇게 대답하고는 그대로 차를 몰아 해안도로로 향했다. 표지판을 알아보기가 어렵긴 했지만, 다행히 차 안에 네비게이션이 설치되어 있어서 어렵지 않게 경로를 찾을 수 있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샌디에이고로 향하는 도로는 미국에서도 드라이브 초보자들에게 추천하는 제일의 코스로 알려져 있는 곳이다. 해안선을 따라가는 해변 도로라사 도중에 헤맬 필요 없이 일직선으로 달리기만 하면 된다는 것도 이 지역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는 준상으로서는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공항 남쪽에 위치한 롱비치에 도착하자 준상은 곧바로 해안도로를 타고 샌디에이고를 향해 달렸다. 유명한 관광 코스답게 아름다운 해변의 풍경이 계속 이어지자, 처음에는 조만간 있을 전투를 생각하며 긴장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던 헤네스도 어느새 소녀스러운 감성을 폭발시키며 감탄을 연발하기 시작했고, 원래부터 호기심이 풍부한 리체스는 말할 것도 없었다. 이곳에서 고작 두 시간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군대가 미지의 생명체와 대치하고 있는 탓인지 유명한 관광 코스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우와! 저 사람들 좀 봐요! 이런 대낮에 저렇게 훌렁 벗고 돌아다니다니!” “...” 정확히 말하자면 훌렁 벗은 것은 아니고 수영복 같은 것을 입은 상태였지만, 리체스나 헤네스가 보기에는 전부 벗고 속옷 차림으로 돌아다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런 모습도 해안 도로를 따라 좀 더 내려가자 점차 사라지고 바쁘게 움직이는 장갑차 같은 것의 모습이 점차 하나 둘씩 눈에 띄기 시작했다. 준상은 오렌지 카운티와 샌디에이고의 경계지점에서 주 방위군이 도로를 막고 이동을 통제하고 있는 모습을 멀리서 확인하자 길가에 차를 멈추었다. 반대편 차로를 통해서는 피난민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차가 줄을 잇고 있었다. “차를 타고 갈 수 있는 건 여기까지인가 보군.” 준상은 인적이 드문 장소에 차를 세웠다. “일단 여기서 내려야 겠다.” “네.” 헤네스와 리체스가 차에서 내리자, 준상은 타고 왔던 차를 인벤토리에 집어넣고는 망토를 꺼내 어깨에 걸쳤다. 주위를 살펴보니 헬기 같은 것이 바쁘게 날아다니고 있는 상황이라 갑가오리나 익룡을 꺼내놓기는 여러 가지로 난처했다. 일단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려 볼까 싶기도 했지만, 안쪽의 자세한 상황을 알아보는 것이 먼저라는 생각에 우선 움직이기로 결정을 내렸다. 준상은 일단 헤네스와 리체스를 신기루 꽃으로 보내 놓고는 혼자서 모습을 감춘 채 도심 속을 위상전이로 빠르게 이동했다. 그때, 남쪽에서 포격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조금 더 이동하자, 자주포 부대들이 연신 포탄을 쏘아 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준상이 접근할 즈음이 되자 무슨 연락을 받았는지 바쁘게 움직이더니 얼른 시동을 걸고 현재 위치에서 이탈하기 시작한다. 무슨 일인가 싶어 가만히 지켜보던 준상은, 문득 하늘 위에서 무언가 거대한 것이 떨어져 내리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마수 바스반 탄이었다. 꽝! 거대한 몸집의 홍합을 닮은 뾰족한 조개 껍데기가 방금 전까지 자주포 부대가 있던 장소에 떨어지며 자욱한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이것만으로도 보는 이의 간담을 서늘케 할 만한 압도적인 광경이었으나, 연이어 기이한 파공음이 연이어 들려오는가 싶더니 십여 개체의 바스반 탄이 마치 융단 폭격을 쏟아 붓는 것처럼 하늘 위에서 떨어져 내린다. 그러자 아름다웠던 해안의 풍경은 순식간에 쑥대밭이 되고 말았다. 샌디에이고는 아직 도착하지도 못한 상태. 하긴 현대 화기가 먹히지 않는 괴물들이니 막아낸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흠...” 준상은 오뚜기처럼 바로 서는 바스반 탄의 모습을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여기까지 왔으면 저걸 처치하라는 식의 퀘스트가 뜨지 않을까 싶었는데, 이렇게 뻔히 눈앞에서 바스반 탄의 모습을 지켜보는 와중에도 그런 식의 메시지는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하다 못해, 일전에 다크 시드 사용자들의 패거리와 접촉했을 때처럼 빨리 대피하라는 식의 메시지라도 있어야 하건만, 그런 것 역시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곤란하군.” 곧바로 움직여야 하는 걸까. 아니면 잠시 더 상황을 지켜보면서 퀘스트가 나오기를 기다려야 하는 걸까. 그렇게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데, 파공성과 함께 바스반 탄 무리에게 다시금 포탄의 비가 쏟아졌다. 아니, 포탄인줄 알았지만 하늘을 살펴보니 한 무리의 전폭기들이 지나치며 폭탄을 떨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한 차례 폭격이 이어졌지만, 바스반 탄의 굳게 여며진 조개 껍데기에는 생채기조차 나있지 않은 상태였다. 전폭기의 폭격이 지나가고 나자, 이번에는 바다로부터 미사일 폭격이 이어졌고, 그 뒤를 이어 다시 한 무리의 전투 헬기가 나타나 미사일을 퍼부어댔지만 역시나 효과는 전무했다. 좀 더 지켜보자 이번에는 드론 들이 나타나 바스반 탄에 접근했다. 그러자 곧바로 조개 껍데기 하나가 벌어지며 그 안에서 촉수가 뻗어 나와 드론을 휘감았다. 아차 하는 순간 개구리가 버레를 잡아 채듯이 드론이 끌려들어 가더니, 곧바로 조개 껍데기 안쪽에서 큰 폭발이 터져 나왔다. “자폭인가?” 이미 제법 전투를 치른 탓에 놈의 습성을 알아차린 누군가의 계획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제법 훌륭한 계획으로 보였지만, 불행히도 놈의 실체는 아래쪽의 지면에 숨어 있는 상태였고, 조개 껍데기와 그 안쪽의 촉수는 그저 사냥감을 끌어들여 부수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바스반 탄들은 처음의 폭발로부터 이것이 함정임을 깨달았는지 드론들을 껍데기 안쪽으로 끌어들이지 않고 촉수로 후려쳐 격추시키기만 했다. 그리고 잠시 시간이 지나자, 바스반 탄들을 마치 로켓의 일제 발사처럼 하늘로 치솟아 올랐고, 제법 멀리 떨어진 장소로 다시 한꺼번에 떨어져 내렸다. “이런.” 준상은 혀를 차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바스반 탄이 떨어져 내린 곳은 바로 주 방위군들이 차단선을 치고 있던 바로 그 장소였기 때문이다. 그 너머에는 아직 이곳을 완전히 빠져 나가지 못한 피난민들의 행렬이 줄을 잇고 있었다. 다급한 총성이 연이어 들려오기 시작했지만, 일제 폭격으로도 상처를 입히지 못한 바스반 탄을 고작 개인 화기로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칫.” 준상은 위상전이를 통해 빠르게 바스반 탄이 떨어져 내린 곳으로 이동했지만, 바스반 탄의 촉수에 사람이 잡히는 모습을 보자 그대로 모습을 드러낸 채 최대 속도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부와악! 공기가 갈라지며 사자 가면을 얼굴에 쓴 준상의 모습이 순식간에 바스반 탄을 향해 쇄도했다. 그는 인벤토리에서 하나의 거대한 검을 꺼내 사람을 잡아 조개 껍데기 안으로 끌어들이고 있는 바스반 탄의 촉수를 향해 휘둘렀다. 스컹! 빛살 같은 한 줄기 검광과 함께 바스반 탄의 촉수는 단숨에 잘려 나갔다. 불의의 기습으로 촉수가 잘린 바스반 탄은 얼른 촉수를 회수하더니 이내 서너 개에 달하는 촉수를 일시에 준상을 향해 쏟아냈다. “이건...” 모양만 다른 줄 알았더니, 한 번에 뻗을 수 있는 촉수도 다른 건가. 준상은 이놈들이 이전에 상대했던 마수와는 다른 놈들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떠올리며 자신을 향해 뻗어오는 촉수들을 향해 마검 어나이얼레이터를 휘둘렀다. 순식간에 서너 개의 촉수들을 잘라낸 준상은 위상전이를 펼쳐 일단 현재의 위치에서 벗어났다. “정말 곤란한데...” 이런 상황에서는 얼음의 대정령을 불러낼 수가 없다. 자칫 잘못하면 피난민들까지 모조리 얼어 죽는 대참사가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대로 방관할 수만은 없는 노릇. 준상은 그 대안으로 엘리와 함께 눈보라의 정령을 불러냈다. 수퍼 레어 급의 정령과 합체한 엘리는 이내 온 몸에 하얀 서리 같은 것이 맺힌 상태로 바스반 탄을 향해 거센 눈보라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00272 트롤러 ========================================================================= 마치 소화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처럼 살포된 눈보라와 접촉하자 바스반 탄은 조개 껍데기를 굳게 다물었다. 얼음의 대정령을 소환했을 때처럼 급격하게 얼어붙으며 그 팽창을 견디지 못해 조개 껍데기 부분이 벌어지는 일어나지 않았으나, 대신 바스반 탄의 움직임을 일시적으로 봉하는 것 정도는 가능했던 것이다. 준상은 놈들의 움직임을 봉쇄하자 어나이얼레이터 대신 블러드서커를 꺼내 들었다. 단숨에 밑동을 잘라 땅 속에 파고든 본체와 골치 아픈 조개 껍데기를 분리할 생각이었지만, 그 순간 엘리의 눈보라 브레스로부터 먼 거리에 떨어져 있던 바스반 탄 한 마리가 느닷없이 로켓처럼 뛰어올랐다. “이런.” 통제가 불가능한 얼음의 대정령에 비해 엘리의 눈보라는 목표한 지점에 효율적인 공격이 가능한 반면 위력과 효과 범위가 부족하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얼음의 대정령 때를 생각하고 미처 멀리 떨어진 개체에 대비하지 못한 것이 패착이었다. 준상은 급히 몸을 움직였지만, 이번에 뛰어오른 바스반 탄은 먼 거리가 아닌 짧은 거리의 도약을 통해 기관총 사격을 하고 있던 장갑차 위로 떨어졌다. 콰직! 뭘 어떻게 해볼 틈도 없이 장갑차 하나가 종이 상자처럼 힘없이 짓이겨졌고, 곧이어 다른 바스반 탄도 날아 오르는 것처럼 움찔거리기 시작하자, 준상은 아무래도 혼자서 이 모든 마수들을 전부 상대하는 건 무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준상은 가장 가까운 바스반 탄을 향해 달려가며 신기루 꽃으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그러자 곧바로 그 안에서 완전무장한 헤네스와 무지개 빛 머리카락을 흩날리는 요정 여왕 리체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헤네스, 사람들을 보호해라! 리체스! 놈들이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게 막아!” “네!” “맡겨 주세요!” 헤네스는 곧바로 기안을 불러냈다. 부드러운 갈색 머릿결에서 금빛이 찰랑찰랑 흔들리기 시작하고, 눈에 푸른 빛이 어리자 귀여운 소녀는 강인한 여전사로 거듭났다. 몸의 통제권을 넘겨받은 기안은 상황이 급박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곧바로 수호의 능력부터 일으켰다. “하앗!” 뒤이어 조금 매섭게 빛나던 눈매가 고혹적으로 변하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그녀의 몸에서 생명의 파동이 뿜어져 나와 주위의 모든 사람들의 생명력을 일깨웠다. 부상을 입고 도망치던 병사들은 갑자기 자신의 몸 안에서 부드러운 힘이 일깨워지며 상처로부터 전해지던 고통이 줄어드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런 기적에 놀라워 할 틈도 없이, 또다시 한 마리의 바스반 탄이 공중으로 솟구쳐 오른다. 착한 기안은 그 모습을 보며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나쁜 아이군요.” 고혹적으로 눈웃음을 흘리던 눈매가 다시 사나운 전사의 그것으로 변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다시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낸 화난 기안은 얼른 뒤로 물러나 놈의 낙하지점으로 이동했다. “꺄악!” “지저스 크라이스트!” 사람들은 자신의 머리 위로 거대한 바스반 탄이 떨어져 내리자, 방금 전에 보았던 장갑차와 그 안에 타고 있던 군인들의 최후를 떠올리며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검은 인영 하나가 그들 머리 위를 뛰어 올라 작은 냉장차 위에 자리를 잡았다. 검은 색의 바이크 슈츠를 연상시키는 방어복을 걸치고, 한 손에는 피와 혼돈의 깃발이 내걸린 미늘창을 들었으며, 나머지 한 손에는 커다란 뿔이 돋아난 기이한 동물의 모습이 양각된 순백의 방패를 든 그 모습이 순간 사람들의 시야에 화인처럼 박혔고, 곧이어 마치 느린 화면을 보는 것과 같은 느낌으로 검고 거대한 무언가가 그 위에 떨어지는 모습이 이어졌다. “으랴아아아아!” 기안은 그렇게 기합성을 내지르며 수호의 신물로 바스반 탄의 거대한 몸을 받아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받아냈다기 보다는 충돌의 순간 뛰어오르며 방패의 면을 따라 바스반 탄의 낙하지점을 틀어버렸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꽝! 결국 바스반 탄은 처음 노렸던 대로 사람들의 머리 위로 곧장 떨어져 내리지 못하고 도로 옆의 우거진 숲속에 떨어졌다. 기안이 날아오른 바스반 탄을 튕겨 내고 있을 때, 리체스는 낭랑한 목소리로 주문을 외우며 마법을 발동하고 있었다. “차가운 서릿발이여! 불어오는 눈보라여! 지금 이곳에 얼음의 꽃을 피워라!” 주문이 완성되자, 하늘 위에 투명하고 거대한 눈꽃 모양의 마법진이 아로 새겨졌다. “세상에!” “이건 또 무슨!” 사람들은 아름다운 그 눈꽃 문양이 천천히 지면으로 내려 앉는 모습을 보며 자신들이 처한 위기도 잊고 찬탄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들의 감탄은 너무 일렀다. 진정한 마법의 위력은 아직 나타나지도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거대한 눈꽃 모양의 마법진이 지면에 내려 앉아 스며드는 순간, 서릿발이 땅에서 솟아나듯이 아름다운 눈꽃들이 대지를 박차고 뛰쳐나와 엘리가 쉴 새 없이 쏟아내는 눈보라의 힘에 행동이 억제되어 있던 바스반 탄의 몸에 덩굴처럼 뒤엉키기 시작한 것이다. 그 놀랍고도 아름다우며, 또한 신비롭기 이를데 없는 모습에 사람들은 찬탄을 표하는 것조차 잊은 채 멍한 표정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 순간, 다시 그들의 시야 한 켠에서 흰 빛이 번쩍 솟아 올랐다. 준상이 블러드서커를 손에 든 채 마치 나무 밑동을 베어 넘기는 모습으로 바스반 탄의 아랫 부분을 강타로 후려친 것이다. 지면을 파고든 섬광은 땅 밑에 숨겨진 본체를 단숨에 끊어 버렸고, 본체가 죽음에 이르자 바스반 탄의 거대한 조개 껍데기는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썩은 고목 나무처럼 천천히 바닥에 쓰러졌다. 준상은 몽몽이를 불러 땅 속에 묻혀 있을 바스반 탄의 시드를 찾게 하는 한 편, 생명을 잃고 쓰러진 그 조개 껍데기를 인벤토리 안에 수납했다. 사람들은 이제 할 말마저 잃고 말았다. 전폭기의 폭격으로도, 군함의 함포 사격으로도, 자주포의 TOT 사격으로도 상처 하나 낼 수 없었던 저 악마 같은 거대한 조개 껍데기가 그의 도끼질 한 방에 가루가 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이게 도대체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상황이 이렇게 되자 발악적으로 방아쇠를 당기고 있던 군인들 역시 멍하니 준상과 그 반려들의 행동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런 그들을 향해, 기안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뭘 멍하니 보고 있어! 방해 되니까 꺼지라고!” 검은 슈츠로 몸을 감싸기는 했지만, 덩치 큰 서양인들의 눈에는 작은 체구의 소녀로 밖에 보이지 않는 기안의 입에서 일갈이 터져 나오자 사람들은 그제서야 화들짝 정신을 차리고 얼른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그 자리에서 물러났다. 몇몇 사람들은 그 와중에도 휴대폰이나 캠코더를 들고 준상과 기안의 모습을 촬영했지만, 기안은 그것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숲으로 떨어진 바스반 탄이 움찔거리더니 바로 몸을 세우기가 무섭게 도망치는 사람들을 향해 촉수를 내뻗었기 때문이다. “어디서 감히 혓바닥을 내밀어!” 단숨에 미늘창을 휘둘러 촉수들을 쳐낸 기안은 곧바로 반격을 가했다. “꺼져라!” 그녀는 방패를 앞세우고 미늘창을 내민 상태로 몸을 낮추며 바스반 탄의 밑동을 노리고 웨폰 차지를 발동했다. 물론 손에 들린 미늘창은 준상이 사용하고 있는 블러드서커처럼 위력적이지도 않았고, 강타와 같은 파괴적인 기술도 없었지만, 대신 그녀는 확률적으로 상대의 방어를 무시하고 본체에 타격을 입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한 번으로는 효과가 없었지만, 두 번 세 번 연타로 웨폰 차지가 발동되자 마침내 단단한 조개 껍데기로 보호된 바스반 탄의 밑동에 타격이 가해지기 시작했다. 원래대로라면 언커먼 아이템에 불과한 미늘창은 내구력이 부족한 탓에 그 조개 껍데기를 뚫기도 전에 부러지거나 휘어졌겠지만, 부착된 무기의 내구도를 극대화 시켜주는 피와 혼돈의 깃발이 그와 같은 약점을 상쇄시켜 주었다. 결국 바스반 탄은 연속된 기안의 타격 앞에 마치 쟁기에 걸려 뿌리가 뽑힌 그루터기처럼 뽑혀 나오고 말았다. 놈은 당황해 하며 길고 커다란 혓바닥처럼 생긴 본체를 얼른 조개 껍데기 안으로 숨기려 들었지만, 기안은 가차 없이 미늘창에 달린 도끼날로 보기만 해도 징그러운 그 살덩이를 두 동강 내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곧바로 어디서 나타났는지 붉은 눈동자를 번뜩이며 몽몽이가 나타나 죽어서 흐물거리기 시작하는 살덩이를 헤집고 들어가 시드를 캐낸다. “저 다람쥐 녀석... 저런 놈이었나.” 거대한 마수를 단숨에 작살내고 그 쾌감에 젖어있던 기안은 몽몽이의 그 섬뜩한 모습에 쓴웃음을 짓다가, 준상으로부터 할당 받은 인벤토리에 조개 껍데기를 수납하고는 이내 다음 목표를 향해 움직였다. 아니, 곧바로 다시 움직이려는 순간 장교로 보이는 미군 하나가 그녀를 향해 외쳤다. “당신들은 도대체 누구요!” 감히 막을 엄두는 나지 않았던 모양인지 멀찍이서 그렇게 외치는 장교를 향해 기안은 이렇게 대답했다. “보면 몰라?” “...” 모르니까 묻는 거 아닌가. 하지만 기안은 거들떠도 보지 않은 채 리체스의 마법과 엘리의 눈보라 브레스에 의해 움직임이 봉쇄된 바스반 탄을 향해 달려갔다. 그녀가 도착했을 때, 준상은 이미 바스반 탄을 세 마리째 찍어 넘기고 있는 중이었다. 옆에서 리체스가 열심히 회복 마법으로 과부하가 걸린 그의 몸을 치유하고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강타를 연속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아무리 준상이라도 예전 같으면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이런 일이 가능해진 것은 무투가 콤보가 레어 등급으로 상향되면서 강타 사용시의 패널티를 일정부분 상쇄하는 능력이 추가되었기 때문이다. “후우우...” 입에서 한 줄기 흰 연기를 내뿜으며 다음 목표를 향해 움직이는 준상의 모습을 보며 기안은 감탄했다. “이야! 벌써 세 마리나?” 그러자 리체스가 그녀를 보고 소리를 빽 질렀다. “뭘 멀뚱히 보고 있어? 너도 어서 도와!” “알았어, 알았다고. 하여튼 누가 만년 묵은 괴물 요정 아니랄까봐.” “뭐야?” 기안은 리체스와 투닥거리면서도 인벤토리에서 두 개의 채찍을 꺼내 준상의 회복을 보조했다. 그녀 역시 웨펀 차지 연타를 이용해 바스반 탄을 쓰러뜨리는 것이 가능하기는 했지만, 효율을 보자면 역시 준상이 블러드서커를 이용한 강타로 한 번에 찍어내는 쪽이 훨씬 수월했기 때문이다. 기안마저 준상의 회복에 동참하고, 여기에 밤톨이까지 불려나와 가세하자, 이제 준상의 앞을 가로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도끼질 한 번에 마수 한 마리. 지금까지 악전고투를 거듭하며 어떻게든 이 정체불명의 생명체를 쓰러뜨리고자 안간힘을 쓰던 미군들이 멍하니 지켜보는 가운데 그들은 순식간에 마수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사실 미군들을 포함해 그 광경을 지켜보는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만드는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사자 가면을 쓰고 망토를 두른 채 도끼질을 해대는 건장한 남자와, 그 뒤를 따라 다니며 분홍빛이 감도는 기묘한 채찍으로 그의 등을 후려치고 있는 검은 바이크 슈츠 차림의 소녀. 이 기괴한 조합은 허무하게 쓰러져 가는 바스반 탄의 모습보다도 어떤 의미에선 더 강렬한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준상은 마침내 바스반 탄을 모조리 해치우고 나자, 신기루 문을 열어 리체스와 헤네스를 들여보낸 다음 망토를 사용해 투명화를 펼쳐 모습을 감추었다. 누군가는 경탄하고, 누군가는 경악했으며, 또 누군가를 금단의 영역에 눈뜨게 만든 그 전투는 그렇게 종결되었다. 준상은 위상전이를 통해 오렌지 카운티에 자리 잡은 주택들 사이를 이동하다가 전투가 벌어졌던 곳에서 조금 떨어진 라구나 우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움직임을 멈추었다. “후우...” 적절하게 회복이 되었다고는 해도 무려 열 한 마리에 이르는 바스반 탄을 블러드서커와 강타 연계로 쓰러뜨렸는데 몸에 부담이 오지 않으면 그게 이상한 일이다. 준상은 잠시 나무 그늘에 주저 앉아 휴식을 취하다가, 이곳까지 타고온 검은 세단을 인벤토리에서 꺼낸 다음 헤네스와 리체스를 불러들였다. “괜찮으세요?” 어느새 기안을 돌려보낸 헤네스가 준상의 안색을 알아보고는 얼른 다가와 부축하며 그렇게 물었다. “그럭저럭. 일단 근처에서 잠시 쉬다 가도록 하자.” “네.” ============================ 작품 후기 ============================ 흑염룡아, 나에게도 잠시 쉴 시간을 주렴. 00273 트롤러 ========================================================================= 준상은 차를 몰고 다시 로스앤젤레스로 향하려 했지만, 올 때와 달리 가는 길은 샌디에이고로부터의 피난민들로 인해 북새통을 이루고 있어서 차로는 언제 도착할지도 감이 잡히지 않을 정도였다. 결국 준상은 차로 이동하는 것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적당한 골목에서 차를 인벤토리에 넣은 준상은 그대로 바닷가로 나갔다. 물론 그러기 전에 서윤에게 연락을 넣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도착하셨다는 연락을 좀 전에 받았던 참입니다. 현장으로 이동 중이십니까?” 아직 뉴스가 나가지 않은 것일까. 보도 규제를 하고 있더라도 피난민부터 시작해서 마수를 처치하는 모습을 지켜본 사람이 워낙 많아서 금방 SNS가 북새통이 되었으리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준상으로서는 조금 의외였다. “마수라면 이미 모두 처리했다.” “네?” 잠시 서윤은 말문을 잃고 어버버 거리기만 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빠르지 않은가.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다 때려 잡았단 말인가. “아마 지금쯤이면 슬슬 속보가 나가지 않을까 싶긴 하다만.” “아,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서윤은 허겁지겁 티비를 켜고 채널을 돌리다가 그제서야 흘러나오기 시작한 속보를 볼 수 있었다. “허어...” 휴대폰으로 급하게 촬영한 탓인지 화면이 상당히 흔들리는데다 초점도 잘 잡히지 않는 화면들이 티비를 통해 연속으로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서윤은 그렇게 흐릿한 화면 속에서도 커다란 도끼를 휘두르는 사자가면의 남자라든가, 그런 남자를 분홍빛이 감도는 채찍과 흰 방패를 들고 쫓아다니는 소녀의 정체를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었다. 그 두 남녀는 두 말 할 것도 없이 준상과 헤네스였고, 그들 사이를 날아다니는 신비한 무지개 빛의 무언가는 리체스가 틀림없었다. “허어...” 더 놀라운 것은 준상이 마수들을 처리하는 방식이었다. 힘을 모아 도끼를 휘두르면 번쩍하는 빛과 함께 커다란 조개 모양의 마수들이 마치 썩은 고목 마냥 툭툭 쓰러졌고, 곧바로 감쪽 같이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잘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무슨 퍼포먼스 같은 거라고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모습. 화면 이곳 저곳에서 멍하니 서있는 미군들이 멍하니 서있는 모습을 보면 현장에서 그 모습을 지켜본 사람들이 얼마나 당황스러웠을지 능히 짐작이 갈 정도다. “서윤.” 임서윤은 휴대폰의 메신저에서 준상이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몇 번이나 부르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흥분한 목소리로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 리포터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영상을 멍하니 지켜 보고 있었다. “서윤.” 한 번 더 불렀지만 서윤은 여전히 멍하니 티비 화면만 보고 있는 상태였기에, 준상은 조금 큰 소리로 다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서윤!” 그제서야 임서윤은 화들짝 정신을 차리고는 얼른 티비의 볼륨을 줄이고 휴대폰을 들여다 보았다.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그만...” “됐고. 숙소를 잡았으면 하는데.” “아, 그거라면 이미 준비가 되었을 겁니다. 제가 다시 알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말했다. “본의 아니게 그렇게 되긴 했지만, 광고 효과를 보려면 서두르는 게 좋을거야.” “네?” 서윤은 무슨 말인가 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준상은 그 말만 하고는 메신저 연결을 끊어 버렸다. 그가 겪은 준상은 말수가 과하게 적은 편이긴 해도 의미 없는 말을 하는 사람은 아닌지라, 서윤은 광고 효과라는 말을 되새기며 다시 티비에서 흘러나오는 화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아!” 광고 효과란 다름이 아니라 바로 헤네스가 입고 있던 방어복이었다. 비록 그녀가 입고 있는 원판은 양산형과는 성능도 디자인도 다소 차이가 있긴 했지만, 이 정도로 흐릿한 화면이라면 사실상 구별하기가 쉽지 않을 터. 저것이 단순한 바이크 슈츠가 아니라, 전신 방어복이란 것을 알게 되면 과연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게다가 그것을 입고 방송에 나온 사람은, 세계 최강이라고 자부하는 미군조차 감당하지 못해 하나의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든 마수들을 장작 패듯이 때려잡은 인물이다. 모르긴 해도 발 빠른 자들이라면 그들의 신원을 알기 위해서라도 그들의 인상착의부터 확인을 시작할 터. 양산형 방어복에 대한 디자인 등은 이미 의장 등록이 되어 있는 상태이니, 촉각이 남다른 자라면 그것이 한국에서 만들어진 것을 파악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끙...” 이건 단순히 광고 효과라는 단어로 표현하고 넘어갈 문제가 아니다. 서윤은 앞으로 닥쳐올 일들에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곧바로 연구소와 그룹 상황실에 연락을 넣었다. 하지만. 임서윤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을 혼란의 소용돌이로 몰고 간 당사자는 캘리포니아 해안을 자신의 반려들과 유유자적하게 노니며 한가로운 휴식을 만끽하고 있었다. 팔찌를 작동시켜 방어복을 해제한 헤네스는 다소 선선하게 느껴지는 바닷 바람에 아름다운 갈색 머리를 나부끼며 그의 팔짱을 끼고 있었고, 리체스는 지정석인 준상의 어깨 위에 앉은 채로 쉴 새 없이 조잘대고 있었다. 리체스를 제외한 준상과 헤네스는 외모를 감추기 위해 커다란 선글라스와 모자를 쓰고 있는 상태였다. 물론 그래봐야 근처에 사람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지만 말이다. 그들이 거닐고 있는 해안은 원래대로라면 많은 사람들이 북적이고 있을 유명한 관광지 가운데 하나지만 마수 출현의 여파로 인해 지금은 사람 하나 없는 호젓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는 상태. 모르긴 해도 이곳 캘리포니아 해안에서 이런 식으로 프라이빗 비치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는 경우는 지금 같은 상황이 아니면 거의 불가능한 일이나 다름 없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야말로 준상이기에 느껴볼 수 있는 호젓함인 셈이다. “저거 뭐에요? 저기 저거요!” “...” 준상은 염동력을 발휘해 리체스가 가리킨 소라 껍데기를 집어 올렸다. 리체스는 하얀 소라 껍데기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그 안에서 벌레가 튀어나오자 기겁을 하며 놀랐다. “꺅!” 그 모습을 보고 헤네스는 물론이고 준상마저 웃음을 지었다. 거대한 마수들조차 단숨에 꼼짝 못하게 만들 정도의 마법사면서 작은 벌레에 호들갑을 떠는 모습이 너무나 귀여웠기 때문이다. “치... 웃지 말아요.” 리체스는 놀림감이 된 느낌이었는지 입을 삐죽거리며 토라진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채 일분도 지나지 않아 그녀는 또다시 호기심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조잘거리며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안을 걷고 있는데 다시 서윤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무슨 일이지?” 준상이 메신저를 켜자, 서윤은 인사를 한 다음 바로 용건을 말했다. “다른 게 아니라, 숙소 때문입니다. 아무래도 그쪽 지리를 잘 모르실테니 현재 위치를 말씀해 주신다면 바로 사람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음...” 준상은 잠시 생각하다가 아까 차에서 내렸던 곳의 지명을 떠올렸다. “잘은 모르겠지만 라구나 우즈에서 가까운 곳이다.” “라구나 우즈. 알겠습니다. 너무 멀리 가지 마시고 해안 도로 근처에 계시면 사람이 찾아갈 겁니다.” “알았다.” 메신저 연락을 끊은 준상은 조금 더 해안을 거닐다가 다시 해안 도로가 있는 곳으로 올라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가는 방향에서 다시 검은 색 세단 하나가 급하게 달려오더니 그의 옆에서 멈추어 섰다. “여기 계셨군요. 한참 찾았습니다.” “...” 바라보니 공항에서 준상을 마중 나왔던 바로 그 남자다. 미안한 일이지만, 준상은 이미 그의 이름조차 잊어버린 상태다. 바로 그 남자, 김진수는 그가 차도 없이 처음 보는 여자애와 팔짱을 끼고 안 그래도 난리 법석인 이 해안을 호젓하게 걷고 있는 모습을 보자 속으로 울화가 치밀었다. 자신도 내팽개친 채 혼자 내뺀 것부터 화가 나는 일인데, 차는 어디다 내팽개치고 어린 여자애를 꼬셔서 탱자 탱자 해변을 노닐고 있으니 아무리 성격이 무난해도 이건 참아내기가 쉽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감정을 드러내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다. 이까짓 일로 분통을 터뜨리고 본인 앞에서 화를 내기에는 그의 오랜 샐러리맨 경력이 아깝지 않겠는가. “숙소를 잡아 뒀습니다. 가시죠.” 김진수는 정중하게 말했지만 준상은 반대편 노선의 모습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상황이 저런데 괜찮겠나?” “그게...” 마수가 처치되었음을 알리는 속보가 나오기는 했지만, 군의 소개령은 아직 풀리지 않은 상황이었고, 주방위군의 차단 역시 풀리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로스앤젤레스로 향하는 길은 여전히 북적거리며 속도를 제대로 내지 못하고 있었다. “굳이 로스앤젤레스로 가느니 이 근처 호텔을 잡는 편이 나을 것 같은데.” “...” 한국에서 특급 손님이 온다고 연락을 받아서 최고급 호텔을 예약하느라 얼마나 힘이 들었는데 이게 또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유명한 관광지이기 때문에 이 주변에 호텔은 제법 많은 편이었다. 하지만 방금 전까지만 해도 괴물이 몰려온다는 소식에 호텔이고 뭐고 너나 할 것 없이 죄다 피난을 가느라 정신이 없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당장 이 근처에서 정상 영업 중인 호텔을 찾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상대가 그걸 원하는데. “알겠습니다. 바로 알아볼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김진수는 바쁘게 이리저리 전화를 걸어서 근처에 숙소를 찾아보려 했지만 그의 예상대로 이 근처에는 현재 정상 영업 중인 호텔이 없었다. “죄송합니다. 괴물 때문에 모두 피난 중이라 이 근처에는 현재 정상 영업 중인 호텔이 없습니다.” “그렇군.”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로스앤젤레스로 향햐는 반대편 길을 바라보았다. 마수가 처치된 덕분인지, 아까보다는 피난민의 행렬이 많이 줄어든 상태다. 김진수는 준상이 반대편 길의 모습을 살피는 모습을 보며 다시 물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예약해둔 곳으로.” “알겠습니다.” 김진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준상과 헤네스를 얼른 차에 태운 채 바로 유턴해서 로스앤젤레스로 향했다. 결국 그들은 약 세 시간 정도 걸려서야 비로소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할 수 있었다. 김진수는 지친 표정으로 호텔 주차장에 차를 댔다. 준상은 차가 멈추자 무릎을 베고 잠이 든 헤네스를 그제서야 흔들어 깨웠다. “도착했다.” “으음...” 헤네스는 천천히 몽롱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키다가 자신이 자면서 침을 흘렸다는 사실을 깨닫자 화들짝 잠이 깨고 말았다. “가자.” “네...” 준상은 차에서 내리자 비어 있는 옆공간을 확인하고는 김진수에게 말했다. “아까 빌린 차는 여기에 두겠다.” “네?” 김진수는 그를 객실로 안내하기 위해 휴대폰으로 방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있다가 그 말을 듣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준상은 곧바로 비어있는 주차장 공간에 아까 김진수에게서 강탈했던 차를 꺼내 놓았다. “...” 김진수는 잠시 아무런 말도 못하고 허공에서 갑자기 검은색 세단이 모습을 드러내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기만 했다. “열쇠는 차에 꽂혀 있다.” 이어진 준상의 말에 그는 화들짝 정신을 차리며 얼른 소매로 눈을 비볐다. 뭔가 속임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무리 뛰어난 마술사도 아무런 장치 없이 이런 일을 벌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고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도대체... 이건...” 설마, 특급 손님인 이유가 이래서인가. 김진수는 그런 생각을 떠올리다가 화들짝 놀라 생각을 멈추었다. 세상에는 몰라도 되는 일이 많이 있고, 자신 같은 샐러리맨은 가급적 그런 일들을 모르는 쪽이 만수무강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그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얼른 엘리베이터 쪽을 향해 손을 뻗어 보이며 말했다. “객실로 올라가는 길은 이쪽입니다.” “...” 준상은 헤네스를 데리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김진수는 그를 조금 앞에서 인도하다가 문득 한 가지 생각을 떠올리고는 그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런데... 그쪽 분은.” 혹시나 법에 저촉되는 일이 있지 않을까 싶어 그렇게 물어 봤지만 준상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신경 쓸 필요 없다.” “...” 방금 전에 차를 꺼내 놓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면, 어떻게 신경을 안 쓰냐고 분통을 터뜨리고 있었겠지만, 지금의 김진수는 불안한 와중에도 무슨 수를 쓰려는 건지 궁금함마저 일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자 방금 전까지만 해도 준상의 옆에 착 달라붙어 있던 갈색 머리 소녀의 모습이 김진수의 시야에서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물론 준상의 초감각에는 헤네스의 모습이 그대로 느껴지고 있었지만, 김진수는 지금 이 순간 준상의 어깨 위에 앉아 있는 무지개 빛 머리카락의 작은 요정도 그의 옆에 다소곳이 서있는 헤네스의 모습도 전혀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들은 곧바로 카운터를 거쳐서 미리 예약된 방으로 인도되었다. 김진수는 준상에 대한 안내를 마친 뒤 방을 빠져 나와 문을 닫은 뒤에야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안 그래도 요즘 숱이 적어져서 걱정인 머리카락을 잠시 벅벅 긁어대던 그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준상이 객실에 들었다는 연락을 취하며 그곳을 빠져 나왔다. 김진수의 기척이 방으로부터 멀어지자 조용히 모습을 감추고 있던 헤네스와 리체스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들은 전면의 대형 유리창을 통해 보이는 아름다운 캘리포니아 해변의 모습에 탄성을 질렀다. “와아...” “너무 아름다워요.” 헤네스는 그 모습을 보며 이곳이 원래 준상이 살았던 곳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곳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되새겼다. 서윤의 펜션만 하더라도 완연한 겨울 날씨였는데, 이곳은 조금 선선하기는 해도 봄이나 가을 같은 느낌이었다. 00274 트롤러 ========================================================================= 준상은 입고 있던 상의의 단추를 풀며 말했다. “일단 씻고, 조금 쉬다가 저녁을 먹으러 가자.” “네.” 헤네스는 얼른 준상에게 다가가 그가 옷을 벗는 것을 도우려 했다. 하지만 준상은 헤네스가 다가오자 자신의 옷을 벗다 말고 그녀가 입고 있는 블라우스의 단추로 손을 뻗었다. “준상씨?” 헤네스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준상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블라우스 단추를 풀며 말했다. “왜?” “...” 너무나 당연한 듯이 돌아오는 그 말에 헤네스는 얼굴을 붉히며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면 요정계에서는 함께 목욕을 즐기는 것이 거의 일상이나 다름없는데, 묘하게 사람들 사는 곳으로 오기만 하면 따로 목욕을 한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사랑하는 연인이 자신의 옷을 벗기고 있는데 두근거리지 않는 여자가 어디 있겠는가. 헤네스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으려 애쓰며 준상의 셔츠로 손을 가져갔다. 그러자 어느 틈엔가 준상의 어깨로부터 날아오른 리체스가 헤네스의 어깨 위에 앉으며 말했다. “얼른 안 하면 여기다 요정 결계 걸어 버린다.” 그 말을 듣자 헤네스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하긴, 요정계가 아닌 이상 리체스는 이런 경우 분위기를 잡기도 어렵다. “죄송해요. 얼른 할게요.” “그래, 그래.” 조금 서먹했던 분위기는 리체스의 한 마디 덕분에 풀렸고, 헤네스는 조금 민망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한 기분으로 준상과 함께 욕실에 들어갔다. 헤네스와 리체스가 먼저 샤워를 하는 동안 준상은 두 사람이 들어가 길게 드러누워도 될 정도로 넓은 욕조 안에 물을 채우다가 문득 생각이 떠올라 몽몽이와 밤톨이, 그리고 엘리를 소환했다. “꺼내봐.” 준상의 명령이 떨어지자 몽몽이는 그의 눈앞에 열 두 개의 시드를 꺼내 놓고는 물이 채워지고 있는 욕조 안으로 풍덩 몸을 던졌다. 그에 반해 밤톨이는 눈앞에서 물이 가득 채워지는 모습을 보더니 몸을 둥글게 말고 통통 튕기며 목욕탕으로부터 도망치고 말았으며, 엘리 역시 그런 밤톨이의 뒤를 따랐다. 준상은 마수의 체액이 묻어있는 시드를 물로 대충 씻고는 확인을 시작했다. 명칭 : 야무진 껍데기 레벨제한 : 20 종류 : 시드 등급 : Rare 효과 : 1. 물리 피해 흡수 7% 2. 속성 피해 흡수 6% 3. 도약력 증가 8% 설명 : 마수 바스반 잔이 지니고 있던 특별한 시드입니다. Seed 슬롯이 있는 아이템이나 카드에 장착하여 능력을 강화할 수 있습니다. 한번 장착한 시드를 분리하기 위해서는 특수기능 ‘분리’가 필요합니다. [이 시드를 아이템이나 카드에 장착하시려면 이곳을 누르십시오.] 준상은 아이템 정보에 표시된 마수의 이름을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전에 그가 쓰러뜨렸던 마수의 이름과는 미묘하게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봉인 되어 있던 마수의 이름은 바스반 탄. 그리고 이번에 처치한 마수의 이름은 바스반 잔. 시드의 옵션만 하더라도 미묘하게 바스반 탄의 경우에는 피해 무시의 옵션이 붙어 있었는데, 이번에 획득한 시드는 무시가 아니라 흡수다. 게다가 세 번째 옵션 역시 초도약이 아닌 도약력 증가. 나머지 열한 개의 시드도 확인해 보았지만, 미묘하게 수치만 다를 뿐 옵션의 종류는 마찬가지였다. “흠...” 수치를 합산해 보니 이번에 획득한 열두 개의 시드를 모두 장착할 경우 물리 피해 흡수 91퍼센트, 속성 피해 흡수 89퍼센트, 도약력 증가 90%가 나온다. 도약력은 그렇다 치더라도 피해 흡수의 옵션이 어떤 기능을 하는지는 차후에 확인을 해볼 필요가 있을 듯 싶다. 물을 받으며 시드 확인을 마치자 샤워를 마친 헤네스와 리체스가 다가왔다. “이것도 그 월풀이라는 건가요?” “그럴걸.” 준상은 욕조 옆에 달린 스위치를 찾아 몇 개를 눌러 보았다. 그러자 하얀 욕조 위에 은은한 푸른색 조명이 켜짐과 동시에 물 위로 꽃잎 같은 형태의 빛이 아로새겨진다. “오오!” 리체스는 그 아름다운 모습에 감탄하다가 준상이 월풀 기능을 켜자 환호성을 지르며 물 안으로 풍덩 뛰어 들었다. “아하하하! 역시 이게 최고야! 월풀 만세!” 리체스가 환호하며 욕조 안에서 노는 모습을 보며 헤네스와 준상은 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화기애애하게 목욕으로 피로를 풀고 나오자 어느새 바다 위로 붉은 노을이 지고 있었다. 붉은 노을과 더불어 해안선을 따라 자라난 야자수 주위로 불이 켜지자, 리체스는 물론이고 헤네스마저 창밖의 풍경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다음날이 되자 준상은 헤네스와 리체스를 데리고 수족관등을 돌아보며 관광을 즐겼고, 하루 더 휴식을 취한 다음 정령의 문을 설치하기 위해 엔젤레스 국유림을 방문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가까운 데다, 최근에는 숲의 절반 가량이 통째로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 곳이라 정령의 문을 열기에는 최적의 장소라 할 수 있었다. 숲을 돌아다니며 적합한 나무를 찾고 다시 요정들을 불러내 의식을 치르는 일만으로도 하루가 꼬박 소모되었기 때문에 준상이 다시 숙소로 돌아왔을 때는 날이 완전히 저물어 버린 뒤였다. 씻고 저녁을 먹은 다음 슬슬 잘 준비를 하는데, 메신저로부터 다시 연락이 들어왔다.” 준상이 메신저를 연결하자, 서윤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실은 아무래도 연락을 드려야 할 것 같아서.” “무슨 일이지?” “그게... 아무래도 미국에서 냄새를 맡은 것 같습니다.” 어차피 그건 방어복이 노출되었을 때부터 예측했던 일이기에 준상은 담담한 말투로 다시 물었다. “구체적으로?” 그 말에 서윤은 바로 대답했다. “방어복에 대한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준상씨에 대해 뭔가 눈치를 챈 듯한 느낌입니다. 공항을 이용하실 때 뭔가 문제가 생길 수도 있으니 주의하셨으면 합니다.” “그렇군.” 하지만 기껏 위험을 알려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준상의 태도는 담담하기 그지 없었다. 마치, 그 모든 것을 다 예상하고 있었다는 것처럼. 서윤은 그 모습을 보고는 순간 등골이 오싹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설마. 그는 이런 결과를 예상하고 있었던 것일까. 광고 효과라는 말을 했을 때, 준상은 본의 아니라는 말을 했다. 그것은 적어도 방어복에 대한 정보가 흘러나간 것까지는 의도한 바가 아니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골똘하게 고민에 잠긴 서윤을 보고 준상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뭘 타고 왔는지 잊었나.” “네?” 서윤은 멍청하게 반문하고 나서야 그의 말뜻을 알아 들었다. “아...” 그가 미국까지 이용한 운송수단은 다름 아닌 비행기. 귀환자들에게 있어 높은 하늘을 나는 비행기에 탑승하는 짓은 자살행위나 다름 없다. 하지만 준상은 태연하게 그런 운송수단을 사용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간단하다. 목숨을 걸 정도로 중요한 일이 있든가. 아니면, 비행기를 타더라도 신변의 위협을 느끼지 않는다는 반증이다. 다른 사람은 미처 눈치 채지 못하더라도, 같은 처지의 귀환자들이라면 준상이 하필 이 시기에 비행기를 타고 로스앤젤레스를 방문한 것에 대해 의문을 품을 터. 설마. 그는 미국에 올 때부터 이런 식으로 상대가 접근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인가. 준상은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하는 서윤을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 “아무튼, 알려줘서 고맙다. 달리 새로운 소식이 들어오면 다시 연락하도록.” “알겠습니다.” 연락을 끊자 헤네스가 그의 옆에 다가와 앉으며 물었다. “뭔가 또 일이 생긴 건가요.” “글쎄.” 준상은 그녀의 부드러운 갈색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건 내일 공항에 가보면 알게 될 일이지.” “...” 그리고는 가만히 그녀의 턱을 손가락으로 잡으며 그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몸을 둥그렇게 만 밤톨이를 괜히 툭툭 건드리며 티비를 보고 있던 리체스가 득달같이 날아오며 말했다. “저도요. 저도 키스해 주세요.” “어디에?” “음... 여기요.” 상기된 표정으로 작은 손을 내미는 리체스의 모습에 헤네스는 미소를 지었고, 준상은 그녀가 원하는 대로 입을 맞춰 주었다. 그리고, 다시 하룻밤이 지나고 다음날. 준상은 헤네스와 리체스를 신기루 꽃으로 보낸 뒤 혼자서 김진수의 안내를 받으며 로스앤젤레스 공항으로 향했다. “즐거운 여행이 되셨습니까?” 여전히 짐 하나 없는 맨몸으로 차에서 내리는 준상을 향해 김진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럭저럭.” 조금은 성의 없는 대답을 건넨 그는 공항 안으로 들어가려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는 이렇게 말했다. “여기서 헤어지도록 하지.” “네? 하지만...” “괜히 귀찮은 일에 말려들고 싶지 않다면 내 말대로 해.” “...” 어째서인지 모르지만 김진수는 그 말을 듣자 더 이상 준상의 뒤를 따를 수가 없었다. 준상은 그런 그를 향해 다시 말했다. “이름이 뭐라고 했지?” “김진수입니다.” “김진수... 기억해 두지.” “...” 준상은 그렇게 말하고는 그대로 공항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김진수는 준상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가뜩이나 숱이 적어지고 있는 머리를 다시 북북 긁으며 차로 돌아갔다. 김진수가 차를 몰고 사라지는 것을 초감각을 통해 확인한 준상은 천천히 주위의 기척을 살피며 수많은 사람으로 붐비는 대합실로 걸음을 옮겼다. 2층에서 발권을 마치고 출국장이 있는 3층으로 향하는데, 문득 양복 차림의 건장한 사내들이 그의 주위를 에워싸기 시작한다. 그들은 서너 발자국 정도 떨어진 상태로 준상의 주위를 에워싸고는 정중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실례지만, 잠시 동행해 주시겠습니까?” “...” 준상은 초감각을 통해 그들의 옷 속을 살폈다. 권총 하나 정도는 숨기고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묘하게도 그들은 권총 외에도 곤봉이나 짧은 헌팅 나이프를 비롯한 냉병기마저 고루 갖추고 있는 상태였다. 이번에는 통찰의 능력으로 살펴 보았다. “호오...” 그러자 일반인과는 다른 색깔 달린 깃발이 그들의 머리 위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래봐야 노란색 하나 없는데다 반절 이상이 파란색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준상은 긴장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사내들을 향해 말했다. “싫다면?” 그러자 사내들은 자세를 낮추며 품 안으로 손을 집어 넣었다. 이것은 여차하면 무력 충돌도 불사하겠다는 의사 표시. 바로 그 때. 한 남자가 손을 들어 그들을 제지하며 앞으로 나섰다. “물러서라.” 사내들은 불만스러운 표정이었으나, 남자의 말에 따라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는 준상을 향해 조심스러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박준상씨, 맞습니까?” 준상이 말없이 고개를 한번 끄덕이자 남자는 자신의 소개를 했다. “저는 윌킨슨 중령입니다.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 “벨카라스에서는 큰 신세를 졌습니다. 뒤늦게나마 당시 살아남은 모든 이들을 대신해 감사의 뜻을 표합니다.” 벨카라스. 이벨류아에서 에픽 퀘스트를 끝내고 난 다음 방문했던 도시의 이름이다. 그곳은 당시 미국인들이 어둠의 군세를 물리치는 임무를 수행하던 중이었는데, 보급대장 후카에 의해 끝없이 되살아나는 좀비들과 성 안으로 침투한 유격대장 애쉬달의 암살, 그리고 로켓탄마저 씹어버리는 돌격대장 아문간의 힘에 의해 미국인들은 위기에 처해 있었다. 당시 획득했던 애쉬달의 부츠와 후카의 혀는 지금도 준상과 헤네스가 요긴하게 쓰고 있는 아이템이다. 뿐인가. 아문간의 사체를 이용해 방어복이 만들어졌고, 그것을 연구한 결과 다시 양산형 방어복이 만들어져 한창 시험 중에 있다. 여기에 레어 시드들까지 감안하면 당시 준상이 얻은 보상은 결코 적지 않은 양이었다. 문제는 그 모든 것이 본래는 지금 준상의 눈앞에 서 있는 윌킨슨 중령을 비롯한 미국인에게 돌아갔어야 하는 것이라는 점. 생각해 보면 참으로 복잡한 인연이 아닐 수 없었다. 준상은 윌킨슨 중령을 바라보며 조용히 대답했다. “그래서?” ============================ 작품 후기 ============================ 윌킨슨 중령 : 사인 좀. 준상 : ... 00275 트롤러 ========================================================================= 준상의 대답에 윌킨슨 중령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래서. 긍정인지 부정인지 애매한 대답. 굳이 분류를 하자면 긍정에 가깝지만 좀 더 확인을 해 볼 필요가 있다.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긴히 나누고 싶은 대화가 있습니다.” 준상은 주머니에 손을 집어 넣었다. 그 모습을 보고 주위에 둘러서 있던 사내들이 긴장하며 각자의 무기를 쥐었지만, 준상이 꺼내든 것은 방금 전에 발권을 마친 비행기표였다. “비행기 시간이 얼마 안 남아서 그건 좀 무리일 것 같군.” 그 말에 윌킨슨 중령은 다시 말했다. “필요하다면 특별기 편으로 모셔다 드릴 수도 있습니다.” “호오.” 말이 특별 기지 그쯤 되면 사실상 국빈 대우나 마찬가지다. 물론 준상이 마수를 토벌하지 않았을 경우를 감안해 보면 그 정도 대우는 사실 별 것 아닐 수도 있지만 말이다. “특별기라...” 준상이 반응을 보이자 윌킨슨 중령은 다시 말했다. “만약 그 괴물들을 처치하신 본인이 맞으시다면, 미국 정부는 그 영웅적 행위에 대한 적절한 보상을 할 준비 또한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굳이 이렇게 번잡한 대합실을 이용하거나 발권을 하지 않더라도 미군이 보유한 항공기로 세계 어디든 즉시 이동할 수 있는 특전 같은 것도 가능합니다.” 윌킨슨의 말에 준상은 피식 웃어 버렸다. “그건 특전이라기 보다는 족쇄 같은데.” “물론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 하지만 윌킨슨은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선글라스 안쪽에서 번쩍이는 붉은 빛이 시신경을 파고 드는 순간 손끝이 저릿하면서 몸이 굳어버렸기 때문이다. 준상은 공포의 시선에 짓눌려 식은땀을 뻘뻘 흘리기 시작하는 윌킨슨을 바라보며 말했다. “말장난으로 시간을 벌 셈인가.” 갑자기 윌킨슨의 상태가 이상해지자 사내들은 품 안에 넣어두었던 무기를 꺼내 들고자 했다. 그러나 그들은 다음 순간 준상의 몸에서 확 하고 퍼져 나오는 어떤 기운에 압도되고 말았다. “크윽!” “이건...” 콤보 카드를 변경한 준상이 뿜어낸 그 기운은 다름 아닌 광견의 위엄. 그나마 다행이라면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준상을 에워싼 사내들의 모습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고 사건에 휘말리지 않도록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는 정도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광견의 위엄이 발하는 꺼림직한 기운으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주춤주춤 물러나기 시작했고, 결국 발권이 이루어지는 공항 2층은 한창 바쁜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지나는 사람 하나 없는 썰렁한 상태로 변하고 말았다. 준상은 공포의 시선을 발동한 상태로 윌킨슨을 바라보며 말했다. “용건은?” 윌킨슨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상황에서도 필사적으로 버티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괴물의 사체를... 원합니다.” “...” 마수 바스반 잔의 조개 껍데기는 미군이 지닌 대부분의 무기를 무력화시켰다. 물론 핵무기나 화학무기, 생물학무기 등의 대량 살상 무기는 사용하지 않았지만, 그건 일반적인 전장에서도 실제로 사용되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 지구 최강의 수퍼 파워로 군림하던 미국의 자존심을 짓뭉개 버린 놈의 껍데기. 당장 미국이 아닌 다른 어느 나라라도 욕심을 낼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것 뿐인가.” 윌킨슨은 잠시 이를 악물더니,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뱉으며 대답했다. “당신의 능력... 그렇게 강해질 수 있었던 비결... 그것 역시 원합니다.” 준상은 피식 웃어버렸다. “달란다고 줄 것 같은가?” “...” 준상의 말에 윌킨슨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물론 그 역시 욕심이 과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명령을 수행하는 것 또한 군인으로서 그가 지닌 본분이다. “저는... 이곳에 비행기를 타고 왔습니다.” “호오.”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당신은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충분한 대책이 마련되어 있는 준상마저도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비행기 안에서는 긴장을 풀지 못하는 판에, 다른 귀환자들이야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다시 말해, 윌킨슨은 준상을 만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이곳에 온 것이다. “재미있군.” 준상은 그렇게 말하며 공포의 시선과 광견의 위엄을 풀었다. 윌킨슨은 그제서야 숨 넘어 가는 소리로 거칠게 호흡을 내뱉기 시작했고, 당장이라도 뒤돌아 도망치고 싶은 욕구를 간신히 억누르고 있던 다른 사내들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준상은 그들이 잠시 숨을 돌릴 수 있도록 시간을 주다가 윌킨슨 중령이 몸을 바로하자 지니고 있던 비행기 표를 그에게 던지며 말했다. “안내해라.” “감사합니다.” 윌킨슨 중령은 준상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사내들을 물러서게 한 다음 앞장 서서 그를 안내했다. “저를 따라 오십시오.” “...” 윌킨슨은 원래 준상이 정말로 벨카라스와 이곳에서 괴물들을 물리친 장본인이 맞는지 간단한 시험을 해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자신을 비롯해서 특수 선발된 요원들이 무기를 제대로 꺼내지도 못한 채 기세에 눌려 버린 시점에서 그런 시험은 이미 의미가 없어지고 말았다. 물론 그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한 가지 만큼은 분명히 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었다. “죄송합니다만, 이번에 쓰러뜨린 괴물의 사체를 잠시만 보여주실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 “물론 그건 아닙니다. 허락하시면 적당한 장소에 일단 들르겠습니다.” “편한대로.” 준상이 허락하자 윌킨슨은 그를 비어있는 비행기 격납고로 안내했다. 그곳에서 준상은 마치 홍합을 닮은 거대한 조개 껍데기를 꺼내 보였다. “잠시만 시험해 보겠습니다.” “그러든지.” 윌킨슨은 품에서 권총을 뽑고는 준상이 꺼낸 조개 껍데기에 대고 사격을 가했다. 하지만 TOT 포격에도 생채기 하나 나지 않던 껍데기가 고작 권총 사격 정도에 흠집이 날 수는 없는 일. 윌킨슨은 총탄이 맞았던 지점을 자세히 살피고는 다시 말했다. “확인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준상이 다시 바스반 잔의 껍데기를 인벤토리에 집어넣자, 윌킨슨은 차량 한 대를 불러 자신이 타고 왔던 전세기로 그를 안내했다. “미국은 이번 사태에 대해 큰 우려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 번 일어났던 일은 두 번도 일어날 수 있는 법. 일전의 대규모 실종 사건이 좋은 예가 되겠죠.” 윌킨슨은 전세기로 향하면서 조심스럽게 그렇게 미국의 입장을 조금씩이나마 설명하려고 했지만, 준상은 귀찮은 표정으로 이렇게 대답했다. “그 얘기, 내가 반드시 알아야만 하는 내용인가?” “...” 물론 그건 아니다. 그를 회유하기 위한 토대를 쌓기 위해 억지로 말을 이어가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윌킨슨은 벨카라스에서의 작전 실패 이후, 군에서의 위치가 크게 위축되어 있는 상태였다. 상급자들은 자신들의 이해부족을 인정하는 대신, 그의 지휘능력 부족을 문제 삼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준상과 같은 강력한 능력자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확인한다면, 군이나 정부의 고위 책임자들도 귀환자들에 대한 인식을 달리할 것이 분명하다. 사실 윌킨슨이 목숨을 걸고 비행기를 탄 채 이곳으로 날아온 이유에는 상부의 명령 뿐만 아니라 그런 점도 있었다. “목적지는?” 이어진 준상의 질문에 윌킨슨은 얼른 대답했다. “랭글리 공군 기지를 거쳐 펜타곤으로 향하게 됩니다.” “흠.” 펜타곤. 미국 국방부를 일컫는 말이다. 이것은 곧, 미국 정부가 이번 일을 무척이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게 말하고 다른 곳으로 빠져 준상을 억류하려는 시도를 할 수도 있겠지만, 신기루 꽃과 정령의 문이라는 수단이 있는 이상 그는 언제든 미국을 빠져나갈 수 있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다시 돌아와 보복을 하는 것 또한 가능하다. 물론 준상이 그런 것까지 가능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준상이 굳이 비행기라는 운송수단을 사용해 미국을 방문한 것에는 미국에 자신의 존재를 알림은 물론이거니와, 스스로 지구 반대쪽의 한국으로 돌아갈 다른 특별한 수단이 없다는 암시를 주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윌킨슨이 타고 온 전세기는 기체 후미에 두 개의 엔진이 달린 걸프스트림 550 기종으로 미군에서는 C-37이라는 제식 명칭을 부여하여 운용 중이며 최대 12명의 승객이 탑승할 수 있었다. “이 비행기입니다. 타시죠.” “...” 경계심을 주지 않으려는 의도인지, 승객은 윌킨슨 중령과 준상 이렇게 단 둘 뿐이었다. “함께 타고 갈 셈인가?” 질문의 의도를 깨달은 윌킨슨은 쓴웃음을 지었다. “내키지 않으신다면 내쫓으셔도 상관없습니다. 다만, 그렇게 되더라도 다른 비행기를 타고 갈 뿐이겠지만요.” “다른 자들은?” “그들이라면 차량 편으로 귀환하게 될 겁니다.” “...” 준상은 가만히 윌킨슨을 바라보다가 그에게 파티를 걸었다. “잠시만...” 갑자기 휴대폰이 울리지 긴장한 표정으로 내용을 확인하던 윌킨슨은 떠오른 파티 요청 메시지를 보고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이건...” 준상은 그런 윌킨슨을 보며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쓸 데 없는 일에 목숨 거는 꼴이 눈에 거슬렸을 뿐이다.” “...” 윌킨슨은 쓴웃음을 짓고는 이내 준상을 향해 살짝 목례를 하며 말했다. “번거롭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 하지만 준상은 대답 없이 창문 밖으로 비치는 로스앤젤레스 공항의 모습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들을 태운 전세기는 제법 오랜 시간이 걸린 끝에 버지니아주 랭글리 공군기지에 도착했다. 다행히도 비행기를 타고 오는 동안 퀘스트가 발동하지 않은 탓에 큰 번거로움 없이 그들은 지상에 내려설 수 있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 윌킨슨은 스스로 파티를 해제하며 준상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뜻을 표했다.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 준상이 말없이 그의 인사를 받아들이자 윌킨슨은 그를 대기하고 있던 리무진으로 안내했다. 다시 차를 타고 한동안 길을 달리자, 준상은 마침내 버지니아주 알링턴에 위치한 미국 국방부 청사, 일명 펜타곤에 입성하게 되었다. 차에서 내려서기가 무섭게 그는 엄중한 경호 속에서 커다란 회의실로 안내되었다. 준상이 기다란 탁자 한 켠에 자리를 잡고 앉자,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무리의 사람들이 회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자신들이 들어왔음에도 의자에 앉은 채 일어설 생각을 하지 않는 준상의 모습에 언짢은 기색을 보였지만 이내 말없이 자리에 나누어 앉았다. 모자를 눌러 쓰고, 다시 선글라스를 낀 채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가만히 앉아 있는 준상을 향해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서류를 뒤적거리더니 이렇게 물었다. “저는 국방정보국 소속의 리처드 클리퍼드입니다. 박준상씨, 본인이 맞습니까?” 준상은 무감동한 어조로 맞은 편에 앉은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너희들은 누구지?” 그 말에 사람들은 다시 한 번 얼굴을 찌푸렸고, 클리퍼드가 굳은 표정으로 준상을 향해 말했다. “질문에 대답하십시오. 박준상씨, 본인이 맞습니까?” 상황이 이렇게 되자 윌킨슨은 당황한 표정으로 얼른 앞으로 나섰지만 준상이 한 손을 들어 그의 행동을 막았다. 준상은 앞으로 몸을 숙이며 잠시 소리 죽여 웃다가 고개를 들고 클리퍼드를 향해 물었다. “이건 심문인가?” 윌킨슨은 클리퍼드를 향해 손짓을 해보였지만, 그는 그런 그의 행동을 무시한 채 싸늘한 표정으로 준상을 향해 말했다. “당신이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심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준상은 천천히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호오. 그거 재미있군.” 클리퍼드는 얼굴을 찌푸리며 다시 입을 열어 무언가 말하려 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탁자 위에 내려놓았던 펜이 둥실 떠오르며 천천히 그의 눈앞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주위에 둘러서 있던 경호원과 군인들 모두가 급히 자신의 무기를 꺼내고자 했으나, 갑자기 준상의 몸에서 터져 나온 강렬하고 꺼림직한 공포의 기운에 짓눌려 그대로 몸이 굳어 버리고 말았다. 준상은 염동력으로 펜을 천천히 클리퍼드의 목으로 가져가며 다시 말했다. “다시 한 번 묻겠다.” “...” “뭐라고?” ============================ 작품 후기 ============================ 클리퍼드 : 사인 좀. 준상 : ... 00276 트롤러 ========================================================================= 클리퍼드는 자신의 목으로 다가오는 볼펜을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 게다가 준상의 몸에서 뿜어지는 기묘한 느낌은 또 어떠한가.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며 일어나 도망치고 싶은 이 소름끼치도록 꺼림직한 기분은 아마도 귀환자들이 지닌 능력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클리퍼드는 도망칠 수 없었다. 만약 이 자리에서 일어나 도망친다면, 벽 뒤에서 이곳의 상황을 지켜보는 모든 이들에게 실망과 조롱을 한 몸에 받게 될 것은 보지 않아도 뻔한 일. 당장의 인사고과는 물론이거니와 앞으로 무슨 일을 맡기려 해도 오늘의 일이 회자될 것이니 사실상 중요한 교섭 업무에서는 무조건 열외된다고 봐도 틀림없다. 그건 다시 말해, 낙오자가 된다는 의미. 장래에 미국의 정보 임무를 한 손에 쥐겠다는 야망을 가진 채 지금까지 부단하게 노력해 왔던 클리퍼드에게 있어 그것은 사망 선고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큭...” 클리퍼드는 잘근 깨문 입술에서 비릿한 쇠냄새가 나는 것을 느끼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당신은 물론이거니와 당신 가족들에게도 이롭지 않습니다.” “호오.” 준상은 볼펜 끝이 목에 거의 닿아 있는 상황에서도 그런 말을 입에 담는 클리퍼드의 모습에 흥미를 느꼈다. “가족이라... 그건 협박인가?” 클리퍼드는 바로 대답했다. “그건 당신의 태도 여하에.... 달린 일입니다.” 준상은 피식 웃어 버렸다. “가족이라... 어디 한 번 들어 볼까. 내 가족이 누구인지.” “...” 조소가 섞인 그 말에 클리퍼드는 떨리는 손을 들어 자신이 가져온 서류를 읽기 시작했다. “당신의 아버지와 형제지간인 박원석씨, 박원혜씨 일가... 우선은 이들 정도를 꼽을 수 있겠군요. 물론 더 자세한 정보도 저희들은 갖추고 있습니다.” 준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법 조사를 했나 보군.”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준상은 다시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시간이 많이 모자랐나봐.” “무슨...” 의혹어린 시선을 보내는 클리퍼드를 향해 준상은 다시 말했다. “아쉽게도 난 그들을 더 이상 가족이라고 생각지 않거든.” “...” 허세다. 클리퍼드의 머리 속에 순간 떠오른 생각은 바로 그것이었다. 분명 박준상이 대학 입학과 동시에 박원석의 집을 나와 독립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가족간의 단절을 의미하는 바는 아니다. 무엇보다도 가족 간의 유대를 중요하게 여기는 건 한국인의 매우 큰 특징 중 하나. 더구나 사람은 의외로 알게 모르게 사회와 규범에 얽매여 사는 존재다. 하지만 준상은 지루하다는 표정으로 계속 말을 이었다. “실망이군. 도대체 얼마나 큰 약점을 잡았길래 이렇게 고자세로 나오나 싶어서 조금 기대하고 있었는데.” “그건...” 클리퍼드는 다시 말을 이으려다 자신의 목에 와닿아 있던 볼펜이 갑자기 무릎 위로 툭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이건 무슨 의미일까. 자신의 의도가 먹힌 것일까. 하지만 클리퍼드는 다음 순간 준상이 꺼내 놓은 물건을 보고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쿵! 갑자기 회의실의 빈 공간에 직경이 일 미터나 되는 거대한 철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쿵! 그것도, 두 개가 연달아. 준상은 자신이 앉아 있는 의자 양 옆에 랑다잘의 분노라는 이름이 붙은 두 개의 철구를 꺼내놓고는 말을 이었다. “하긴, 어차피 네 놈 따위에게 화를 내봐야 의미 없는 일이겠지.” “그게 무슨...” 준상은 왼손으로 철구 하나를 들어올렸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그리고는 자신의 왼쪽에 자리한 원목으로 마감된 벽을 향해 그것을 집어 던졌다. 꽝! 회의실 안에 있던 사람들은 준상이 무슨 농구공을 던지듯이 그 커다란 철구를 던지는 모습에 놀라고, 다시 그 철구가 특별히 강화된 회의실 벽을 장난감 블록마냥 박살내 버리는 모습에 혼이 달아나 버리는 충격을 느꼈다. 준상은 손목을 튕겨 철구를 자신의 회수하고는 부서진 벽 너머로 혼비백산한 표정이 되어 널브러져 있는 사람들을 돌아보며 다시 말했다. “에피타이저는 이쯤이면 충분하다는 뜻이다.” “...” 준상은 랑다잘의 분노를 다시 인벤토리에 집어넣은 다음, 자리에서 일어나 경호원으로 둘러싸여 있는 사람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경호원들이 반응하기도 전에 마치 거짓말처럼 거구의 사내 하나가 준상의 손으로 휙 딸려 들어가 멱살을 잡히고 말았다. 준상은 자신의 손에 포획된 남자를 향해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렇지 않나. 국방부 장관.” “...” “당신에 대해서는 예전에 들은 바가 있지. 이렇게 만나게 되어 유감이군.” “으음...” 처음부터 국방부의 고위층 들은 준상과 같이 성향은 물론이고 행동의 의도조차 분명치 않은데다 강대한 무력을 지닌 인물과 직접 대면하기를 원치 않았다.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이 직접 나서는 대신 사람들을 보내 일단 대화를 나누게 했던 것이지만, 불행히도 그들은 준상이 처음 자리에 앉는 순간부터 초감각을 통해 회의실 주위 상황을 면밀하게 관찰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크윽.” 국방부 장관은 크게 당황하고 있었다. 특별히 보강된 회의실 벽을 단숨에 부숴버리는 건 물론이고, 족히 80킬로그램은 나가는 자신의 몸을 한 손 만으로 가볍게 들어 올리는 괴력이라니. 미국 역시 벨라카스의 실패 이후로 귀환자들의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여러모로 노력을 계속하고 있었으나, 이런 식의 터무니없는 힘을 지닌 자는 보고된 바가 없었다. 원래부터 스포츠 스타로 시작해서 군인으로 경력을 쌓은 후 정계에 입문한 그이기에 인간이 지니는 완력의 한계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샌디에이고에서 벌어졌던 마수의 난동도 뭔가 트릭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살짝 의심마저 품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의 머리 속에 떠오르는 것은 무언가 잘못 되어도 크게 잘못 되었다는 생각이었다. 격이 틀리다. 이 자는 자신이 알고 있던 일반적인 인간과는 격이 틀리다! “멈춰라!” 국방부 장관이 준상의 손에 들어가자 경호원들이 일제히 권총을 뽑아 준상을 겨누었고, 군인들 역시 품 안에 숨겨 두었던 자신들의 무기를 꺼내어 들었다. 이렇게 보니 참 다양하기도 하다. 단순한 곤봉부터 시작해서, 안테나처럼 접을 수 있는 기다란 진압봉과 곤봉에 가지가 달린 톤파, 그리고 두 개의 막대 사이에 강화 플라스틱 사슬이 달린 쌍절곤까지. 칼 종류가 없는 게 묘하긴 해도 휴대가 간편하고 금속 탐지기에 잡히지 않으며, 상대를 쉽게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점까지 고려해 보면 충분히 효율적인 무기들이다. 아마도 자신과 격투가 벌어지는 상황 또한 고려를 한 것이리라. 준상은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사람들의 모습을 한번 쓱 훑어보고는 피식 웃었다. “그렇지 않아도 시험해 보고 싶은 일이 있었는데 잘되었군.” “무슨...” 준상은 한손을 뻗어 자신을 둘러싼 군인 가운데 하나를 가리켰다. 그러자 군인의 겨드랑이에서 권총 하나가 빠져나와 그의 손으로 날아들었다. “이런!” 사람들은 준상의 손에 권총이 들어가자 경악하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준상은 옆에서 떠들거나 말거나 손에 들어온 묵직한 권총의 촉감을 잠시 만끽하다가 안전장치를 풀고는 그것을 다시 염동력으로 들어 올렸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건가. 준상은 사람들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을 무시한 채 자신의 손바닥을 향해 권총의 총구를 가져다 대더니 염동력을 이용해 방아쇠를 당겼다. 콰앙! 밀폐된 실내에서 터져 나온 한 줄기 총성은 사람들의 고막이 멍멍할 정도로 크게 울려 퍼졌다. 미친 건가. 누가 봐도 지금 준상은 전력을 다해 상대해도 이 자리를 벗어날 수 있을지 모르는 상황. 그런 판국에 스스로 자해를 하다니. 이건 미치지 않고서는 저지를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사람들의 사고 방식. 준상은 미치지도 않았고, 자해를 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생각대로군.” 그렇게 말하며 쥐고 있던 손바닥을 풀자, 그 안에서 금속 광택을 발하는 탄환 하나가 모습을 드러낸다. “...” 순간 회의실 안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이건 또 무슨 트릭인가. 사람이 자신의 손바닥에 대고 총을 쐈다면, 손바닥이 뚫려서 피와 살점이 터져 나와야 하는 것이 정상 아닌가. 총알에 맞았다면 방탄복을 입어도 멍이 들거나 뼈가 부러져야 정상이다. 하지만 준상의 손바닥에서는 그런 일체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총에 맞아도 상처 하나 입지 않는 인간이라니. 그런게 현실에서 가당키나 한 일이란 말인가. 준상은 염동력을 발휘해 권총을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고는 자신의 손바닥에 놓여져 있던 탄환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고 있던 윌킨슨을 향해 던져 주었다. “윌킨슨, 선물이다.” “엇! 뜨...” 윌킨슨 중령은 준상이 던져준 탄환을 엉겁결에 받아들다가 달궈진 탄환의 열기에 깜짝 놀라며 그것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준상은 국방부 장관을 다시 그의 보디가드들에게 던져 주고는 이렇게 말했다. “30분 주겠다.” 국방부 장관은 준상에게 잡혔던 목덜미를 어루만지며 굳은 표정으로 되물었다. “30분이라니?” “...” 하지만 준상은 대답대신 약화시켜 두었던 광견의 위엄을 다시금 발동했다. “으... 으으...” 사람들은 아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두렵고 꺼림직한 느낌이 준상의 몸에서 퍼져 나오자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준상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는 사람들을 향해 사안을 발동했다. 공포의 시선과 달리 사안은 사람들에게 혼란이나 착란 같은 상태 이상 가운데 하나를 확률적으로 발동시키는 특수 능력이다. 사람들은 선글라스 너머로 뿜어져 나오는 이 사악한 시선과 마주치자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머리를 감싸쥔 채 비명을 지르며 뿔뿔이 흩어져 도망치기 시작했다. 준상은 그들을 보며 생각했다. 직접 본 것 밖에 믿지 못하는 자를 상대로 입 아프게 떠들어 봐야 의미 없는 일. 백 마디 말보다 한 번 보여주는 것이 낫다면 그렇게 하면 되는 것이다. 준상은 초감각을 통해 각층의 상황을 확인한 다음 어둠의 정령인 어둑발이를 배치시키고는 위상전이를 펼쳐 위층으로 빠르게 이동을 시작했다. 곧바로 펜타곤 옥상으로 올라온 준상은 자신이 데리고 있는 정령 가운데 아지랑이를 소환했다. 레어급 정령임에도 공격 능력이 다소 부족한 느낌이긴 하지만, 아지랑이가 만들어내는 안개는 넓은 영역을 단숨에 뒤덮어 시야를 가릴 수 있는 좋은 수단이다. 하지만 펜타곤이라는 건물 자체가 워낙 넓어서 정령 자체의 힘 만으로는 이것을 모조리 안개로 뒤덮는 일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준상은 여기에 하나를 더 추가했다. “엘리.” 그의 부름에 따라 요정용이라는 별칭을 가진 작은 드래곤 하나가 빛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준상은 엘리에게 아지랑이를 합체시키며 명령했다. “한치 앞도 알아보기 어렵도록 이곳을 모조리 안개로 뒤덮어라.” 엘리는 명령이 떨어지자 곧바로 입으로 희뿌연 안개를 뿜어내기 시작했고, 마치 불이라도 난 것처럼 펜타곤 전체가 짙은 운무에 가리워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준상은 엘리가 명령을 수행하는 동안 펜타곤 안에 설치된 화재 경보기를 일시에 울리고 감지기를 자극해 스프링 쿨러를 작동시켰다. 광견의 위엄에 눌리고 사안에 놀라 도망치던 사람들은 갑작스런 화재 경보에 다시금 소스라치게 놀랐다. 사안의 지속시간이 끝난 덕분에 간신히 제 정신이 돌아온 국방부 장관은 곧바로 이어지는 화재 경보를 듣고는 화들짝 놀랐다. “이건 또 무슨 일인가!” “연기입니다! 지금 밖에 연기가!” “뭣이?” 정확히는 연기가 아니라 안개였지만, 화재 경보기가 요란하게 울리는 상황이 그들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고 있었다. 불이라는 말에 다시 도망치려는 국방부 장관이 윌킨슨 중령의 중얼거림을 들은 건 바로 그때였다. “30분.” “무슨 말인가.” “그는 아까 30분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 잠시 사람들은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돌아보았고, 국방부 장관은 이렇게 중얼거렸다. “도대체... 놈은 무슨 생각인 거지?” ============================ 작품 후기 ============================ 준상 : 사인 좀. 펜타곤 : ... 00277 트롤러 ========================================================================= 국방부 장관의 중얼거림에 모두의 머리 속에서는 한 가지 일이 떠올랐다. 그래서일까. 문득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막아야 합니다.” 그러자 그 말을 다른 사람이 받았다. “하지만, 어떻게?” 그렇다. 문제는 바로 그것이었다. 막아야 하긴 하는데, 무슨 수로 막는단 말인가. 그는 스스로의 몸으로 자신에게 총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속임수일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그것이 속임수일 가능성이 거의 제로에 수렴한다는 것을 모두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철근과 콘크리트, 그리고 케블라 같은 방탄 섬유로 겹겹이 보호된 벽을 단숨에 부수기까지 했다. 원래 펜타곤은 건물이 지어질 당시의 상황 때문에 철근이 생각보다 그리 많이 쓰이지 않은 건물이다. 하지만 911테러 이후 이루어진 보수 공사를 통해 건물의 내외벽에 상당한 규모의 강화가 이루어졌고, 본래부터 저층의 안정된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지간한 충격에는 끄떡도 하지 않을 정도다. 하지만 그 무지막지한 사내가 휘두르던 그 무기라고 부르기조차 두려운 거대한 철구의 위력을 상대로 미국이 지닌 무력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이 오각형 건물이 버티어낼 수 있을 거라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니, 단순히 건물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 안에는 수많은 문서가 있고, 그것들은 하나 하나가 중요한 비밀 문건이기도 했다. 단순히 병사 하나가 먹고 입는 것부터 시작해서, 다음 세대를 위해 개발 중인 비밀 무기의 문건에 이르기까지. 이곳에 보관 중인 문건이 일부라도 유출되는 날에는 미국의 전력은 물론이거니와 앞으로의 계획까지 낱낱이 까발려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 막아야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하지만 이미 인간인지조차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한 그런 존재를 무슨 수로 막는단 말인가. “실수로군.” “...” 국방부 장관의 중얼거림에 사람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대로 멍하니 있을 수만도 없는 일. 국방부 장관은 급한 어조로 지시를 내렸다. “우선 각 구획에 연락해 현재 피해 상황을 확인하도록. 또한 보안 태세를 최고 수준으로 격상하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다.” “네!” “알겠습니다.” 지시를 받은 사람들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하자 국방부 장관은 입술을 깨문 채 한쪽에 서 있던 윌킨슨을 향해 말했다. “중령.” “네. 장관님.” “특수팀의 전력으로 그자를 막는 건 무리겠지?” “...” 윌킨슨은 대답하지 못했다. 여기서 그렇다고 대답하는 건 자신의 무능을 넘어서 미국의 무능함을 인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가 대답 없이 입을 다문 것 만으로도 장관은 충분히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일단, 그 자의 위치를 먼저 파악하도록.” “알겠습니다.” 윌킨슨은 경례와 함께 걸음을 옮기다가 문득 아직까지 자신의 손에 쥐어져 있는 둥근 권총 탄환의 존재를 깨달았다. 그는 이것을 선물이라는 이름으로 윌킨슨에게 건넸다. 보기에는 그저 평범한, 권총 탄환. 하지만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지금까지의 상식을 뛰어 넘은 인간의 존재가 출현했음을 알리는 증거이기도 하다. 달 표면에 새겨진 하나의 발자국 사진이 세계의 의식에 변혁을 일으켰던 것처럼, 이 탄환 역시 지금까지의 세계와 그 이전의 세계를 구분하는 이정표인지도 몰랐다. 윌킨슨은 자신의 손에 쥐어진 탄환을 잠시 바라보다가 그것을 상의 주머니 속에 넣고는 바쁘게 걸음을 움직였다. 바로 그 즈음. 준상은 펜타곤 전체를 안개로 뒤덮히는 것을 바라보며 천천히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흠...” 화재 경보가 울리자 각 구획에서는 사람들이 빠르게 대피를 시작하고 있었다. 잠시 시간이 지나자 헬기 십여대가 급히 날아오는 모습이 보이고, 그 뒤를 이어 장갑차와 소방차, 구급차 등이 줄을 지어 다가온다. 준상은 자욱한 안개로 뒤덮인 옥상 위에 선 채 대피하는 사람들과는 별개로 움직이며 각 구획을 확인하는 사람들의 존재를 확인했다. 그들의 목적은 볼 것도 없이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는 것. 뒤이어 달려온 소방대워들이 화재 경보가 울린 지점을 확인하고, 곧바로 병력들이 펜타곤 내부로 진입하는 정황이 포착되었다. 하지만 준상은 자신을 찾는 사람들의 움직임을 옥상 위에서 마치 영화를 구경하듯이 느긋하게 살피며 시간을 보냈다. 펜타곤은 워낙에 넓어서 아직까지 한번도 사용하지 않은 방이 있을 정도의 건물이다. 이 모든 구획을 샅샅이 뒤지려면 아무리 많은 인원이라도 쉽지 않은 일인 것만은 분명한 일. 게다가 지금은 펜타곤 전체가 짙은 안개로 휩싸여 있고, 준상 스스로도 투명화로 모습을 감추고 있으니 단숨에 그의 위치를 찾아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준상은 조금은 지루한 표정으로 그들의 굼뜬 움직임을 구경했다. 그러기를 얼마나 했을까. 마침내 자신이 선언한 30분의 시간이 지나자, 준상은 펜타곤 중앙에 위치한 그라운드 제로로 자리를 옮겼다. 그라운드 제로는 펜타곤 중앙부에 위치한 중정을 일컫는 말인데, 그 안에는 핫도그와 음료를 판매하는 작은 카페가 위치해 있다. 준상은 위상전이를 통해 그 건물의 지붕으로 옮겨간 다음 자신이 보유한 정령을 하나씩 소환하기 시작했다. 물, 불, 바람, 땅, 빛, 어둠. 여섯 가지 속성을 하나씩 또는 두 개 이상 가진 정령들이 하나 둘씩 짙은 안개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준상은 모든 정령의 소환이 끝나자 그들을 펜타곤의 구획중 하나로 이동시켰다. 그리고 마침내 파괴활동을 시작했다. 펜타곤에는 모두 열 개의 구획이 존재하는데, 오각형의 면에 해당하는 다섯 개의 구획과 그 다섯 개를 연결하는 꼭지점에 해당하는 또 다른 다섯 개의 구획이 그것이다. 가장 먼저 불의 정령들이 건물에 불을 붙였다. 곧바로 화재 경보가 터져 나오며 스프링 쿨러가 작동했지만, 물의 정령들이 그 물의 움직임을 변경시켰다. 바람의 정령은 불이 붙은 곳에 신선한 산소를 끊임없이 공급함으로서 화재를 더욱 키웠고, 땅의 정령은 건물의 벽에 균열을 일으켜 불이 더 빠르게 옮겨갈 수 있도록 도왔다. “화재입니다! 이번에는 진짜입니다!” “이런.” 정확히 30분이 지난 시점에서 시작된 화재는 순식간에 오각형의 최상단 꼭지점에 위치한 구획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연결 구획에 해당하는 곳이라 배치된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그것은 다시 말해 즉각적인 대처가 어렵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즉각 소방대를 그곳으로 보내!” “알겠습니다.” 펜타곤 주위에 도착해 있던 소방대들이 급히 불이 난 지점으로 움직이기 시작했고, 건물 내부에서는 준상을 검거하기 위한 군인과 요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준상은 소방 헬기들이 화재 지점으로 이동하는 것을 확인하자 바람의 정령으로 그들의 움직임을 교란했다. 헬기들은 갑작스럽게 영문모를 눈보라가 헬기 주위에 몰아치기 시작하자 마치 술에 취하기라도 한 것처럼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들로서는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지만, 이래서는 화재 진압은커녕 헬기끼리 부딪히지 않도록 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이럴 수가...” 펜타곤을 빠져 나와 현장을 살피고 있던 국방부 장관은 마치 폭풍에 휩쓸린 모기떼처럼 왱왱거리며 비틀거리는 헬기들의 모습에 넋이 나가고 말았다. 이게 도대체 무슨 조화란 말인가. 누가 봐도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저 눈보라는 자연적인 현상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부자연스러웠다. “윌킨슨.” “네, 장관님.” “저게... 가능한 일인가?” 윌킨슨은 이제 차라리 담담하기까지 한 표정으로 그에게 대답했다. “아마도 마법이나 정령이 아닐까 싶습니다.” “마법, 그리고 정령...” 국방부 장관은 얼빠진 표정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다시 말했다. “우리 쪽엔 저런 힘을 가진 이가 없는 건가?” 윌킨슨은 속으로 혀를 찼다. 벌써 몇 번이나 귀환자들의 능력에 대한 브리핑을 했는데 그것조차 모른단 말인가.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여기서 그런 생각을 표현할 수는 없는 일. 윌킨슨 중령은 조심스럽게 장관에게 설명을 했다. “저희측 요원 가운데도 저런 힘을 가진 이가 몇몇 있긴 합니다만... 이렇게 광범위한 영역에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가진 이는 아직...” 그 말을 듣고 국방부 장관은 다시 말했다. “그를 돕는 다른 귀환자가 있는 건가?” 윌킨슨은 고개를 저었다. “알 수 없습니다. 그는 분명 혼자 입국을 한 상태지만, 갈색 머리의 소녀와 행동을 함께 했다는 보고도 있고, 실제로 괴물과의 전투 중에 그는 방패를 든 인물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럼...” “하지만 비행기를 타고 오는 중에 다른 인물이 접근한 정황은 포착할 수 없었습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이곳까지 쉬지 않고 온 것을 감안하면, 목적지를 알고 미리 와서 대기하지 않은 이상 지금 이곳에 그를 도울 만한 사람은 없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음...”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헬기들은 계속해서 어떻게든 화재가 난 구획에 접근을 시도하려 했지만 눈보라의 힘이 더욱 거세지고 추락마저 우려되는 상황이 되자 결국 화재 진압을 포기하고 물러설 수 밖에 없었다. 안쪽으로부터 시작된 불은 정확히 연결 구획만을 태웠고, 마침내 그 화염이 정점에 이르는 순간 가장 안쪽에 위치한 건물이 굉음과 함께 무너져 내렸으며, 불은 다시 그 바깥쪽 건물을 태우기 시작했다. 도미노. 사람들은 순간 그와 같은 단어를 떠올렸다. 하나씩 하나씩. 펜타곤을 구성하는 다섯 겹의 건물을 그런 식으로 모두 불태우고 무너뜨리려는 것인가. 하지만 정작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이 모든 상황을 초래한 당사자의 현재 위치조차 포착하지 못하고 있었다. 국방부 장관은 검게 피어오르는 화염과 붕괴된 건물로부터 터져 나온 흙먼지, 그리고 이 와중에도 마치 구름 속에 잠겨 버린 것처럼 거대한 펜타곤을 감싸고 있는 짙은 안개를 보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막을 방법이... 없단 말인가.” “...” 내부에서는 소방대원들이 화재가 발생한 구획으로 접근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앞을 가로막는 초현실적인 자연현상에 압도되어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있었다. 눈앞에서 번쩍이는 빛을 발하며 나타나는 빛의 정령부터 시작해서, 갑자기 나타나 건물 내부를 한치 앞도 살필 수 없도록 만드는 어둠의 정령은 물론이거니와,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가려는 사람들을 가로막으며 부드러운 쿠션처럼 밀어내 버리는 바람의 정령들까지. 차라리 괴물이 상대라면 총이라도 쏴볼 텐데, 이건 어떻게 손을 쓸 도리조차 없었다. 건물 바깥에 도착한 소방차들도 속수무책인 것은 마찬가지. 아직 화염에 휩싸이지 않은 건물 외벽에 가로 막혀 그저 멍하니 안쪽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결국 다시 한 번 굉음이 들려오며 건물이 붕괴되는 것을 그들은 속수무책으로 바라만 봐야 했다. 그때, 준상은 다시 한 번 접근을 시도하는 소방 헬기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귀찮게 구는 군.” 그렇게 중얼거린 준상은 인터페이스로 소환물 카드 하나를 꺼낸 다음 시드를 장착한 다음 소환을 실행했다. 그러자 펜타곤 상공에 거대한 날개를 지닌 익룡 그라드닉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헉!” 사람들은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거대한 익룡의 모습에 경악했다. 크기만 따져도 족히 삼층 건물 높이는 되는 거대한 생명체가 검은 날개를 펄럭이며 하늘을 날아오르는 모습은 너무나도 비현실적이었다. 익룡 그라드닉스는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하늘로 솟구쳤고, 뒤늦게서야 근처를 날고 있던 전투 헬기들이 반응하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전투 헬기들은 기본적으로 자신보다 아래쪽에 있는 표적을 공격하기 위해 만들어진 무기이다. 물론 거리가 어느 정도 떨어져 있다면 이런 고도 차이는 어느 정도 극복이 가능하겠지만, 지금처럼 창공으로 솟구치고 있는 익룡을 단숨에 공격할 방법은 갖추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전투 헬기들은 사격을 위해 급히 상승하거나 거리를 벌리는 식의 운동을 시작했지만, 그들이 미처 태세를 갖추기도 전에 솟구치던 그라드닉스가 몸을 휙 뒤틀며 급강하했다. 그리고 마치 먹이를 낚아채는 독수리처럼 전투 헬기 한 대를 낚아채 지면에 짓눌러 버렸다. 엄청난 가속도와 무게에 짓눌린 전투 헬기는 뭘 어떻게 해볼 틈도 없이 그대로 장난감처럼 지면에 구겨져 처박혀 버렸다. 급히 주위의 헬기들이 그라드닉스를 향해 사격을 가했지만, 총알이 채 닿기도 전에 그라드닉스는 허깨비마냥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이게 도대체...” 사람들은 갑자기 사라져 버린 익룡의 모습에 얼이 빠져 있다가, 다시금 익룡이 펜타곤 위에서 거대한 날개를 펄럭이며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보고 말문이 막혀 버렸다. “순간이동?” 국방부 장관의 그같은 얼빠진 말을 들으며 윌킨슨 중령은 속으로 피식 웃어 버렸다. 지금 그것은 아마도 총탄이 닿기 전에 역소환을 실행해 돌려 보냈다가, 곧바로 다시 소환을 실행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것은 다시 말해 저 익룡의 바로 아래쪽에 준상이 위치하고 있다는 뜻. 하지만 윌킨슨은 그와 같은 자신의 추론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는 부서진 헬기의 잔해에서 조종사들이 엉금엉금 기어 나오는 모습을 확인하자, 이제 조금은 느긋하기까지 한 모습으로 이 사태가 어디까지 발전할지 지켜보기 시작했다. 준상은 일부러 30분의 시간을 주고 여기에 더해 화재 경보까지 울림으로서 사람들이 피할 시간을 주었다. 게다가 방금 전의 터무니 없는 상황에서도 조종사들은 목숨을 잃지 않았다. 그것은 다시 말해, 그에게 인명을 해칠 의도가 없다는 뜻. 원래대로라면 윌킨슨은 이를 악물고서라도 준상을 막아야 하는 입장이다. 하지만 그는 지금 이 순간 자신의 윗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탄환으로부터 전해지는 감촉을 느끼며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후아암; 피곤하네요 ㅠㅠ 00278 트롤러 ========================================================================= 익룡 그라드닉스는 다시금 전투 헬기 하나를 해치우고는 다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격추되거나 사살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헬기들은 더 이상 감히 펜타곤 상공 위에 접근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 와중에 화재로 불타고 있던 구획 안에 존재하는 다섯 겹의 건물이 완전히 붕괴되어 버리고, 또 다른 연결 구획에 화재가 시작되자 국방부 장관은 입술을 깨문 채 결단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퇴거 조치를 실행하라.” “알겠습니다.” 단 한 명의 능력자를 막지 못해 펜타곤이 퇴거 조치를 실행하다니. 이것은 역사에 남을 치욕이 아닐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한 번에 모든 구획에 화재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서 최중요의 비밀 문건을 빼낼 시간적 여유가 아직 남아 있다는 점이었다. 퇴거 조치를 위해 펜타곤 내에서 급박한 움직임이 시작되자 그라운드 제로 정 가운데에 위치한 카페 지붕 위에서 지루한 표정으로 자신이 저지른 파괴활동을 관람하고 있던 준상의 눈에 마침내 활기가 돌아왔다. “이제야 시작되었군.” 준상은 팔찌를 작동시켜 방어복을 장착한 다음, 위상전이를 이용해 소리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빨리! 최중요 문건이 우선이다! 나머지는 파기하도록!” 사람들은 각 부서에서 보관중인 최중요 문건의 서류와 하드디스크, DVD롬등을 빼내 방화 상자에 담은 다음 군인들의 경호를 받으며 보안 구역을 빠져 나왔다. 하지만 출구에 도달하기 직전, 그들은 통로를 가로 막는 한 사람과 마주쳤다. 군인들은 갑자기 나타난 검은 바이크 슈츠 차림의 괴한을 보자 곧바로 자세를 낮추며 총을 겨누었다. “누구냐!” “꼼짝마!” 하지만 준상은 그런 외침에도 아랑곳 없이 그들을 향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고, 자신들의 지시에 따를 생각이 없음이 명백한 그 행동을 보자 지휘관은 곧바로 사격 명령을 내렸다. “사격!” 곧바로 막힌 실내 안에 터져 버릴 듯한 급박한 총성이 연달아 이어졌다. 하지만 준상은 그와 같은 집중 사격에도 움찔거리는 기색조차 없이 그 모든 총탄 세례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아문간의 피부로 만들어진, 그나마도 이미 +10으로 강화되어 버린 방어복은 그런 개인 화기 정도는 가볍게 튕겨내 버리고 있었고, 방어복 안쪽으로 전달되는 운동 에너지 역시 준상의 신체가 지닌 방어력과 물리 저항, 물리 피해 흡수, 물리 피해 무시 등의 옵션이 복합적으로 적용되며 대부분의 타격 자체를 원천적으로 무효화시켰다. “이럴수가!” 십여명이나 되는 인원들이 퍼붓는 각종 화기의 일제 사격에도 끄떡없이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준상의 모습을 보자 군인들은 물론이거니와 문건을 챙겨 나오던 요원들조차 얼이 빠지고 말았다. “어디 이것도 버티나 보자!” 군인 한 명이 그렇게 외치며 수류탄을 뽑아 들었지만, 바로 그 순간 준상의 몸에서 광견의 위엄이 터져 나옴과 동시에, 헬멧의 바이저 안쪽에서 뿜어져 나온 붉은 안광이 자욱한 총연 사이를 마치 레이저 사이트처럼 뚫고 들어와 사람들의 시신경을 파고 들었다. “어...” “으으으...” 사람들은 부들부들 떨며 어떻게든 버티려고 애쓰다가 결국은 참지 못하고 뒤돌아서 그대로 도망치고 말았다. 하지만 준상은 그들을 구태여 쫓지 않았다. 대신 몽몽이를 불러 그들이 흘리고 간 문건이며 총기 같은 것을 모조리 거둬들이게 했을 뿐이다. “역시 생각대로군.” 몽몽이는 뛰어난 안목을 지니기는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아이템이나 금은보석처럼 특별한 가치를 지닌 물품에만 적용된다. 이전에 김종경의 저택을 털었을 때처럼, 가장 중요한 문건들이 금고 같은 것에 한데 모아져 보관되어 있다면 그것만 가져 오면 되는 일이다. 하지만 펜타곤 같은 거대한 건물 안 곳곳에 숨겨져 있는 최중요 문건들은 몽몽이의 안목 능력으로도 판단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일일이 모아오는 것 역시 시간이 너무 걸린다. 그래서 결정한 것이 불 지르기. 일부러 연결 구획부터 하나 하나씩 무너뜨리는 식으로 불을 지른 것은, 이들이 알아서 최중요 문건이나 기타 중요한 물건을 빼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이렇게 하면 굳이 일일이 찾아 돌아다닐 필요없이 그들이 챙겨오는 문건이나 물품들만 빼돌리면 그 뿐이다. 준상은 몽몽이가 바닥에 떨어진 모든 물품들을 챙겨 돌아오자, 녀석을 역소환한다음 다음 위치로 위상전이를 실행했다. 국방부 장관은 화염이 치솟으며 연결 구획의 건물들이 하나 하나 무너지는 광경을 침통한 표정으로 보고 있다가 다시 보고를 받았다. “빼았겼... 습니다.” “무슨 소리냐?” “각 구획에서 수송중이던 최중요 문건들을 중간에 모조리 강탈 당하고 말았습니다.” “...” 국방부 장관은 순간 눈앞이 노래지는 기분을 느끼며 무너지듯 주저 앉아 버렸다. “장관님!” “괜찮으십니까?” 사람들은 그렇게 물으면서도 생각했다. 괜찮을 리가 없지 않은가 하고. 일반적으로 기지가 함락될 경우 중요 문건들은 즉각 파기하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지금 꺼내오려던 최중요 문건들은 다른 곳에 사본 조차 없는 그야말로 가장 중요한 문건들. 이것 가운데 하나만 밖으로 빠져 나가도 그들의 목이 달랑달랑 거릴 지경인데, 하나도 아니고 전부 강탈당해 버린 것이다. 이건 아무리 국방부 장관이라도, 이것은 단순히 해임이나 파면을 넘어서 재판에 회부되어 중징계를 당해도 불평 한 마디 할 방법이 없는 중대한 실책이 아닐 수 없다. 국방부 장관은 검게 타오르는 펜타곤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거였나... 처음부터 이걸 노렸던 건가.” 아니나 다를까. 느릿하게 하나 하나 불태우며 무너지던 건물들은 모든 최중요 문건이 탈취당하기가 무섭게 빠른 속도로 붕괴하기 시작했고, 아차 싶은 순간에는 다섯 개의 연결 구획 모두가 삽시간에 거대한 화염에 휩싸여 불타며 무너지고 있었다. 준상은 모든 연결 구획을 무너뜨리자, 요정들의 통신 방법을 이용해 리체스에게 연락을 넣었다. “리체스.” “네! 주인님.” “지금 어디 있지?” 헤네스와 리체스는 로스엔젤레스 공항으로 향하기 전에 신기루 꽃으로 넘어간 후 얀트훈센과 요정계에서 각자 자신에게 맡겨진 일들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야 당연히 연구실이죠. 왜 이렇게 늦게 연락하셨어요.” “미안.” 준상은 짤막하게 사과하고는 다시 말했다. “지금 정령의 문을 열겠다. 바로 이쪽으로 올 수 있겠나.” 그 말에 리체스는 즉각 대답했다. “물론이죠!” 그리고 연락을 주고 받은지 채 오분도 되기 전에 리체스는 준상의 배꼽 근처에 열려진 정령의 문을 통해 그라운드 제로에 모습을 드러냈다. 준상은 무지개 빛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모습을 드러낸 작은 모습의 요정 여왕에게 자신이 원하는 바를 말했다. “리체스.” “네.” “여기 이 건물들을 단숨에 무너뜨릴 수 있을까?” “음...” 리체스는 잠시 하늘로 날아올라 주위를 둘러보다가 다시 그의 어깨 위로 돌아와 말했다. “지금 모습으로는 아무래도 어렵고, 요정 결계를 써서 본신의 힘을 끌어 오면 가능할 것 같아요.” 준상은 그녀의 대답에 만족감을 표하며 바로 지시를 내렸다. “좋아. 그럼 무너뜨려라.” 리체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조금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지금요? 그것도 전부?” 하지만 준상은 바로 대답했다. “지금. 그리고 전부.” 리체스는 그 즉각적인 대답을 듣자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그녀는 곧바로 준상의 어깨로부터 날아올라 한 달에 한 번만 사용할 수 있는 요정 결계를 이곳 그라운드 제로에 발동시켰다. 그러자 그녀의 몸에서 한 줄기 빛이 흘러나오며 작고 귀엽던 요정의 모습에서 아름답고 성숙한 여왕의 모습으로 변화가 일어났다. 그녀는 자신의 본래 모습을 되찾기가 무섭게 허공에 떠올랐다. 그리고 여전히 무너지지 않고 버티고 있는 펜타곤의 남은 건물들을 향해 손을 뻗으며 말했다. “쓰러져라.” 그녀가 이전에 사용하던 주문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짧은 한 마디 말. 그러나 요정 결계가 활성화되어 본래 자신이 지닌 능력의 80퍼센트까지 끌어낼 수 있는 지금 상황에서, 그 짧은 말이 지닌 위력은 이전까지 그녀가 사용했던 그 어떤 마법 주문 보다도 더 강력한 위력을 발휘했다. 쿠궁! 가장 안쪽에 위치한 E링의 건물이 한줄기 굉음과 함께 힘없이 뒤로 넘어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뒤이어 그 육중한 무게는 다음 건물을 짓누르기 시작했고, 펜타곤을 이루는 다섯 겹의 건물들은 도미노 마냥 힘없이 풀썩 풀썩 쓰러져 순식간에 폐허로 변해 버리고 말았다. 리체스는 단숨에 한쪽 방향의 건물들을 그런 식으로 쓰러뜨리고는 남은 네 방향의 건물 역시 같은 방식으로 단숨에 부숴버리고 말았다. “끝났어요.” 펜타곤의 모든 건물을 삽시간에 파괴해 버린 리체스는 허공으로부터 내려와 준상 앞에 서며 그렇게 말했다. 준상은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대답했다. “수고했다.” 얼굴을 가져가며 그 볼과 입술에 입을 맞추어 주자, 리체스는 간지럽다는 듯이 웃으며 만족감을 표했다. “먼저 돌아가 있어라. 금방 뒤따라 갈테니.” “네!” 리체스는 요정 결계를 거두어 들인 다음, 정령의 문을 통해 요정계로 귀환했다. 준상은 그녀의 모습이 사라지자, 미리 챙겨둔 스프레이를 꺼내 그라운드 제로 중심에 위치한 카페의 유리창에 글귀 하나를 남기고는 위상전이를 통해 그 자리를 벗어났다. “...” 그렇지 않아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불타는 펜타곤을 바라보고 있던 사람들은, 그 거대한 건물이 삭은 벽돌더미처럼 삽시간에 무너져 내리는 광경을 보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럴수가.” “펜타곤이...” 차츰 사라지기 시작한 안개 사이로 드러난 광경은 처참하기 그지 없었다. 이전까지 세계 최강의 국가가 지닌 모든 군사력을 통솔하던 오각형의 건물은 이미 한줌의 부서진 돌더미로 변한지 오래. 아무리 뛰어난 기술자가 온다고 해도, 지금 상황에서 펜타곤을 예전의 모습으로 되살리는 방법은 잔해를 밀어버리고 새로 짓는 방법 뿐이었다. 국방부 장관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이마를 짚으며 쓰러져 버렸고, 사람들이 그런 그를 급히 구급차로 옮기는 모습을 윌킨슨은 격정을 감춘 채 바라보았다. 박준상. 펜타곤은 굳이 비유를 하자면 미국의 심장이나 다름 없는 곳. 두뇌에 해당하는 백악관과 비교해도 그 상징성으로는 결코 뒤지지 않는 곳이다. 그런 곳을 군대도 아니고 단 한 명의 남자가 무너뜨렸다. 미국은 그 남자의 행동을 제대로 막을 엄두조차 내지 못한 채 무기력하게 자신의 심장을 내주고 만 것이다. 윌킨슨은 손을 뻗어 자신의 가슴 어림의 주머니 안에 담겨진 탄환을 조용히 어루만지며 여전히 흙먼지와 검은 연기를 뿜어 내고 있는 펜타곤의 잔해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가 향하는 곳은 다름 아닌 그라운드 제로. 펜타곤 중앙에 위치한 그 정원 안에 들어서자, 윌킨슨은 생경한 느낌을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바깥쪽에 위치한 펜타곤은 이미 기둥 하나 제대로 남기지 못하고 모조리 부서지거나 불타 버렸건만, 이 그라운드 제로는 나무 하나 풀 한 포기 상한 것 없이 온전하게 보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윌킨슨은 마치 홀린 것처럼 천천히 걸음을 옮기다가, 그라운드 제로 중앙에 위치한 카페 유리창에 페인트 락카로 새겨진 글귀를 발견했다. -모레, 백악관으로 가겠다. 유리창에는 그렇게 씌여져 있었다. ============================ 작품 후기 ============================ 윌킨슨은 한동안 그 글귀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지나가던 군인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가서 한국어 통역 좀 불러와." 00279 트롤러 ========================================================================= 그라운드 제로를 빠져 나온 준상은 그 길로 버지니아주에 위치한 국립공원과 국유림을 돌며 정령의 문을 설치했다. 가장 먼저 포토맥강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와 프린스 윌리엄 포레스트 공원에 정령의 문을 설치한 준상은 그 길로 다시 서쪽으로 이동해 셰넌도어 국립공원에 두 번째 문을 설치한 뒤에야 요정계로 귀환했다. 펜타곤에서 포토맥 강을 건너서 조금만 더 가면 나오는 백악관을 굳이 이틀 뒤에 방문하겠다고 예고한 이유 중 하나는 그 기간 동안 버지니아주 인근의 숲에 정령의 문을 설치하기 위함이었다. “후...” 요정계로 귀환해서 간단하게 씻고 침대에 몸을 눕히자 기별을 받았는지 리체스가 침실 안으로 들어왔다. “돌아오셨으면 말씀하시지 그랬어요.” “바쁜 것 같아서.” “그래도요.” 분신의 팔찌는 완성되었지만, 그녀는 다시 시드에 흥미를 느끼고는 그것을 분석하기 위한 연구에 돌입한 상태였다. 시드에 관한 연구는 미국에서도 이미 진행하고 있는 것이었지만, 과학적 방법론을 동원한 그들과 마법으로 일가를 이룬 리체스의 연구는 기초적인 접근 방법부터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준상도 은근히 기대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리체스가 옆으로 다가와 앉는 모습을 보며 준상은 질문을 던졌다. “연구는?” 아름다운 무지개 빛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정돈해 하나로 묶어내리던 리체스는 준상의 질문에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게... 쉽지가 않네요. 뭐가 뭔지 감도 잡히질 않는다고 해야 하나.” “그런가.” 리체스조차 감이 잡히지 않는다면 마법과는 다른 무언가로 만들어진 것은 아닐까. 준상은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올랐지만 마법에 대해 문외한인 그로서는 더 이상의 생각을 진행시킬 단서가 너무나도 부족했다. “그래도 연구 재료는 많으니까 하다 보면 언젠가는 감이 잡히겠죠.” 리체스는 그렇게 말하고는 조심스럽게 몸을 눕히며 준상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그나저나... 그 건물은 왜 부순 거에요?” 느닷없이 불려 나와서 부수라길래 부수기는 했다. 그러나 솔직히 좀 당황스러웠던 것도 사실이기에 리체스는 한 손으로 가만히 준상의 가슴을 쓰다듬으며 그렇게 물었다. 하지만 준상은 무덤덤한 말투로 이렇게 대답할 뿐이었다. “필요해서.” “...” 리체스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삐죽거렸다. 하기야 준상이 자상하게 이것저것 설명해 줘도 뭔가 이상할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헤네스에 비교하면 역시 온도차가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리체스는 손가락으로 준상의 가슴을 만지작거리다가, 가만히 고개를 들어 얼굴을 바라보았다. 헤네스는 오늘도 준상이 돌아오지 못하는 줄 알고 친정에 가 있는 상황. 하지만 이 무뚝뚝한 남자는 이렇게 명백하게 자신이 신호를 보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새인가 눈을 감고 고른 숨을 쉬고 있었다. 세상에.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하지 않은가. 순간 리체스는 뭔가 울컥하는 것을 느끼며 몸을 일으켜 준상의 몸 위에 올라탔다. “...” 준상은 자신의 몸 위에 부드러운 무언가가 올라오는 것을 느끼고는 조용히 눈을 떴다. 그리고 울상이 된 리체스를 향해 손을 뻗었다. 리체스는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는 준상의 손길을 느끼며 샐쭉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미워요.” “...” 하지만 그와 동시에 몸을 기울여 준상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리체스는 잠시 준상의 입술이 주는 조금 거친 감촉을 음미하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그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기 시작했다. 두근. 두근. 지난 번에 분신을 운용하고 있을 때 모처럼 그런 좋은 분위기를 만들고도 제대로 일을 치르지 못한 것이 내심 불만스러웠던 리체스로서는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상기된 표정으로 단추를 모두 풀자, 탄탄하고 넓은 준상의 가슴이 모습을 드러났다. 리체스는 고개를 숙여 근육이 선명하게 드러난 그 가슴에 정성스럽게 입을 맞추고는 계속해서 준상의 바지로 손을 가져갔다. 리체스는 곧바로 바지와 함께 속옷을 벗겨냈다. 그러자, 곧바로 우람한 준상의 신체가 모습을 드러낸다. 상대의 치부를 이런 식으로 주시하고 있으니 뭔가 민망하고 부끄러운 기분이 든다. 리체스는 드러난 준상의 알몸을 바라보다가 가만히 손을 뻗어 그것을 손으로 그러쥐었다. 뜨겁게 불끈 달아오른 신체의 촉감이 어쩐지 너무 현실감이 넘쳐서 잠시 우물쭈물거리던 그녀는 이전에 분신을 운용하던 때의 일을 떠올리고는 천천히 그것에 입을 맞추었다. “음...” 부드러운 리체스의 입술이 닿자, 준상은 그 감미로운 감촉에 자신도 모르게 작은 신음을 흘렸다. 리체스는 준상의 신체에 입을 맞추다가 그것을 입안에 머금었다. 그렇지 않아도 불끈 솟아올라 힘자랑을 하고 있던 준상의 신체는 촉촉하고 감미로운 그와 같은 자극이 이어지자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기세 좋게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기분 좋아요?” 입을 떼고 리체스가 그렇게 묻자 준상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고 리체스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고분고분하니까 어쩐지 이상해요.” “그런가.” “네.” 리체스는 대답이 끝나자 입고 있던 부드러운 촉감의 원피스를 천천히 벗었다. 투명하고 매끄러운 피부가 부끄러운 듯 모습을 드러내자, 준상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뭔가... 새삼스럽게 그녀의 아름다움을 다시 깨달았다고나 할까. “그렇게 빤히 보면 부끄러워요.” “미안. 너무 예뻐서 나도 모르게.” “...” 준상의 담담한 말에 리체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피했다. 이런 식의 말을 들어본 적이 없는 그녀로서는 지금의 이 당황스러움의 정체가 무엇인지조차 가늠하기 어려웠던 탓이다. 하지만 준상은 그런 리체스를 바라보며 다시 이렇게 말했다. “이리와.” “...” 리체스는 그 말에 따라 다시금 천천히 준상의 몸 위로 올라 앉았다. 준상은 가만히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과 목과 가슴과 배로 이어지는 유려한 곡선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리체스는 그 손길을 받는 것만으로도 몸에 전기가 통하는 것만 같은 짜릿한 쾌감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사실 자체를 인식하자 리체스는 갑자기 지금의 상태가 너무나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녀는 천천히 준상 위로 몸을 포갰다. 단단한 가슴의 감촉이 그녀의 부드럽고 풍만한 가슴을 통해 전해지자, 리체스는 조금이나마 안도할 수 있었다. 준상은 부드러운 몸이 자신의 몸 위에 겹쳐지자 천천히 자신의 몸을 휘감듯 덮고 있는 그녀의 다리를 당겨 올리며 결합을 준비했다. “아...” 리체스는 준상의 의도를 깨닫고는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다리 사이를 스치는 그의 뜨거운 육체를 느끼자 조금이나마 안정되었던 가슴이 다시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준상은 위치를 가늠하고는 천천히 그녀의 몸 안으로 자신의 육체를 밀어 넣었다. “읏...” 리체스는 자신의 몸 안으로 밀려 들어오는 뜨거운 감촉을 느끼자 자신도 모르게 작은 신음 소리를 흘렸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조심스럽게 허리를 틀어 준상이 좀 더 쉽게 진입할 수 있도록 유도했다. 그 결과, 마침내 둘은 한 몸으로 결합할 수 있었다. 리체스는 자신의 몸 안에서 맥동하는 그의 신체를 느끼자 어쩐지 눈물이 났다. 왜 일까.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기쁜 건지 슬픈 건지조차 감이 잡히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준상의 손이 자신의 얼굴을 감싸오자 잠시 그 손길에 의지해 마음을 진정시키고는 가만히 몸을 일으켰다. 몸을 일으키고 침대 위에 눕혀진 준상의 모습을 보며, 그녀는 손을 들어 젖은 눈가를 훔치고는 스스로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으음...” 느릿하면서도 감미로운 율동. 준상은 자신이 행위를 주도할 때와는 뭔가 다른, 포근하면서도 부드러운 그 박자에 현혹되는 것을 느꼈다. 가만히 손을 뻗어 흔들리는 아름다운 가슴을 만졌다. 그러자 리체스는 상기된 표정으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가슴으로 뻗어온 준상의 손을 가만히 감싸 쥐었다. 그녀는 자신의 가슴 속에서 세차게 고동치고 있는 심장의 떨림이 그의 손을 통해 전해지기를 기원하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당신이 좋아요.” “...” “당신은 어때요?” 리체스의 말에 준상은 조용히 대답했다. “나도.” 그와 같은 말이 흘러나오자 리체스는 밝게 웃으며 가만히 몸을 굽히더니 양손으로 준상의 얼굴을 감싸고는 다시금 길고 진한 키스를 시작했다. 준상은 리체스와의 감미로운 키스를 즐기다가 이내 몸을 뒤집으며 그녀의 몸 위로 올라갔다. “주인님.” 리체스는 손을 뻗어 준상의 등을 감싸 안으며 그렇게 속삭였다. 준상은 마찬가지로 그녀의 몸을 강하게 끌어 안으며 차츰 속도를 내기 시작했고, 이내 둘은 거친 숨을 내쉬며 절정으로 향하는 길목에 들어섰다. “으읏!” 문득 리체스가 작은 신음소리를 흘리며 몸을 떨더니 이내 준상의 몸을 쥐어짜듯 강하게 압박하기 시작했다. 준상은 잠시 더 버티다가 그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마침내 리체스의 몸 안에 욕구를 분출시키고야 말았다. “아...” 준상은 순간 아차 싶은 느낌이 들어 얼른 몸을 떼려 했지만, 리체스는 팔과 다리로 그런 그를 옭아맨 채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이대로... 잠시만 이대로 있어 줘요.” “...” 결국 준상은 그 말에 항거하지 못하고 그대로 리체스를 안아 주었다. 리체스는 자신의 몸 위로 느껴지는 묵직한 준상의 체중을 느끼며 한참이나 여운에 잠겨 있다가, 어느 순간 다시 불끈거리며 자신의 몸 안에서 기운을 되찾아 가는 준상의 몸을 느끼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마?” 준상은 그런 리체스를 보며 물었다. “싫어?” 물론 리체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결국 그들은 그 뒤로도 몇 번이나 더 일을 치르고 나서야 잠이 들었다. 다음날. 리체스를 품에 안은 채 곤히 잠들어 있던 준상을 깨운 것은 메신저의 호출음이었다. “음...” 준상은 인상을 쓰며 눈을 뜨고는 메신저를 켰다. 어차피 이런 식으로 호출할 사람은 단 하나, 임서윤 뿐이다. “무슨 일이지?” “미국에 다시 괴물이 나타났습니다.” “어디에?” 조금 귀찮다는 듯한 준상의 물음에 서윤은 긴장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놀라지 마십시오. 무려 펜타곤입니다.” “...” 물론 준상은 이미 예상했던 일이라 놀라지 않았다. 하지만 서윤은 그런 준상의 기색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채 계속 신이 나서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유미씨에게 듣기로는 준상님이 처치한 익룡과 비슷한 무언가가 아닐까 싶긴 합니다만, 놀랍게도 이 괴물은 펜타곤을 완전히 박살내 버리고 말았답니다.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게다가 더 놀라운 점은 그렇게 쑥대밭은 만들어 놓고는 감쪽 같이 사라져 버렸다는 점입니다.” 준상은 가만히 그 말을 듣고 있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그래서?” 무심한 것을 넘어서 귀찮다는 기색이 역력한 그 대답에 서윤은 어안이 벙벙해지고 말았다. “네? 아니... 그러니까...” 예상치 못한 반응에 버벅거리는 서윤을 향해 준상은 다시 이렇게 말했다. “그거 내가 한 거다.” “...” 서윤은 준상의 말을 듣는 순간 잠시 사고가 멎었다. “지금... 뭐라고...” 혹시 잘못 들은 건가 싶어 그렇게 되묻는 서윤을 향해 준상은 약간의 짜증을 섞어서 다시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한 일이라고.” “...” 잘못 들은 것이 아니다. 준상은 지금 미국의 국방부 건물인 펜타곤을 자신이 때려 부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서윤은 순간 머리 속이 뒤죽박죽이 되어 버렸다. 준상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그 일로 인한 여파를 생각하니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머리가 복잡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째서... 그런 일을...” 서윤은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물었다. “그건 지나보면 알 일이고, 그 외에는 달리 특별한 일이 없는 건가?” “네, 뭐... 일단은.” “알았다. 나중에 연락할 테니, 다른 일이 생기면 다시 연락하도록.” “네.” 준상이 서윤과의 연락을 끊자,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댄 채 누워있던 리체스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준상은 그녀의 아름다운 무지개빛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별 일 아니야.” “...” 리체스는 그 말을 듣고는 가만히 준상의 가슴에 얼굴을 문질렀다. 준상은 그 부드러운 감촉을 느끼며 다시 말했다. “어제 일 말인데.” “무슨...” 리체스가 조금 불안한 표정으로 올려다 보자, 준상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원래는... 조금이나마 더 상황이 안정된 이후에 아이를 가질 생각이었거든.” “아...” 리체스는 새침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대답했다. “그거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되요.” “어째서?” “실은...” 리체스는 머뭇거리다가 조용히 대답했다. “역시 그렇지 않을까 싶어서 새로운 마법을 만들었거든요.” “...” 무슨 마법인지는 따로 물을 필요도 없는 일이다. “미처 말 안 해서 죄송해요.” 리체스의 말에 준상은 고개를 저었다. “미안해 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는 쓴웃음을 지으며 다시 말했다. “다만... 어쩐지 아이가 생기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 싶던 참이라 좀 아쉽긴 하군.” “...” 리체스는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럼... 다시 하실래요?” “...” 준상은 자신의 눈치를 보며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에? 왜 웃어요?” “그냥. 하하하...” “치.” 어쨌거나. 준상은 간단하게 몸을 씻은 다음 다시 하룻동안 애팔래치아 산맥을 따라 이동하며 정령의 문을 개통하는 작업을 이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예고했던 날이 다가왔다. 펜타곤의 파괴와 더불어 이틀 뒤 백악관을 방문하겠다는 준상의 메시지를 발견한 미국 정부는 그야말로 정신이 하나도 없는 상황이었다. “전쟁입니다! 미국 역사상 이런 치욕을 그냥 참고 넘어갔던 일이 있었습니까?” “전쟁이요? 좋죠. 근데 누구와 합니까?” “그야 한국이 아닙니까?” “펜타곤에 테러가 가해졌으니 한국이 책임을 져라? 물론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지요. 하지만 그 다음은요?” “무슨 말입니까?” “전쟁을 해서 이겼다 쳐요. 그러면 그 박준상이라는 자가 움직임을 멈출까요?” “그야... 하지만 그래도 이대로는...” “만약 그 자가 더욱더 난동을 부린다면? 다음에는 인명 피해 따위 고려하지 않고 모조리 때려 부순다면, 지금 우리에게 과연 그것을 막을 방법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잠자코 있을 수는 없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책임을 물어야만 합니다!” “그러니까 누구한테 책임을 묻느냐 이겁니다.” 윌킨슨은 이틀째 내용의 변화조차 없이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처럼 같은 내용의 토론을 반복하고 있는 국가 안전 보장 회의 임원들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이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역사는 반복되기 마련이라지만 이건 좀 너무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 모습을 보았던 것일까. 역시나 지친 표정으로 의자에 앉아 턱을 쓰다듬고 있던 대통령이 그에게 물었다. “윌킨슨 중령.” “네. 대통령님.” “자네 생각은 어떤가.” “...” 윌킨슨은 자신을 향해 모아지는 사람들의 시선에 긴장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협상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자 전쟁을 외치던 국토안전부 장관이 그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지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린가!” 하지만 그는 대통령이 손짓을 하자 씨근덕거리며 다시 자리에 앉아야만 했다. 대통령은 짤막하게 한숨을 내쉬고는 윌킨슨을 향해 다시 말했다. “자네는 우리가 그를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건가.” 윌킨슨은 그 말에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00280 트롤러 ========================================================================= 다시 발끈하려 드는 국토안전부 장관을 눈짓으로 앉힌 대통령은 윌킨슨을 향해 다시 물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가.” 윌킨슨은 호흡을 가다듬고는 이렇게 말했다. “보고를 받으셨겠지만, 그에게는 일반적인 현대 화기가 통하지 않습니다.” “그건 들었네. 하지만 미국이 가지고 있는 무기 중에는 총 말고도 더 강력한 것이 얼마든지 있지.” 대통령의 말에 윌킨슨은 고개를 저었다. “외람된 말이지만, 대통령님. 여러분께서는 샌디에이고에 나타난 괴물들을 처치한 것이 누군지 잊고 계신 것이 아닙니까?” “음...” “보고를 받으셨겠지만, 당시 군은 핵과 같은 대량 살상 무기를 제외한 거의 모든 수단을 동원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적에게는 아무런 피해를 입히지 못했습니다. 박준상은 그런 상대를 단숨에 제압한 장본인입니다.” 그 말을 듣고 있던 합동 참모 의장이 말했다. “자네의 말도 일리가 있네. 하지만 그 괴물은 그렇다 치더라도 박준상은 어디까지나 인간에 불과하지 않은가. 동일 선상에 놓고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무리라고 생각하네만.” 하지만 윌킨슨은 고개를 저었다. “평범한 인간이 혼자서 펜타곤을 부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건...”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국가 정보 국장이 손을 들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것에 대해서라면 저희들의 정보 분석으로는 최소 2인 이상의 협력자가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대통령은 그 말에 실소를 머금었다. “이틀이나 회의를 해놓고 그 말을 듣는 것이 처음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군.” 그 말에 국가 정보 국장은 머쓱한지 헛기침을 하고는 다시 말했다. “방금 막 분석이 끝난 터라...” 대통령은 알았다는 듯이 손을 들어 보이고는 다시 물었다. “그건 그렇다치고, 그럼 그 2인의 협력자는 누구인가.” 국가 정보 국장은 화면을 켰다. 거기에는 방패를 들고 채찍을 휘두르는 인물의 모습이 흐릿하게 찍혀 있었다. “일단 첫 번째는 바로 이 인물입니다. 당시 전투에 참가했던 장교의 말로는 여성으로 추정되며 방패와 미늘창, 그리고 채찍을 무기로 사용합니다. 보기엔 가냘퍼보이지만 하늘로 뛰어오른 괴물의 충돌을 저 방패 하나만을 들고 단독으로 막아낸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음...” 준상만으로도 정신이 없는데 그런 능력자가 또 있다니. 회의에 참가한 임원들은 얼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국가 정보 국장은 다시 흐릿한 폐쇄 회로 티비 화면을 비췄다. 그곳에는 상자를 카트에 담아 챙겨 나가던 군인과 요원들이 누군가에게 총을 쏴대다가 그대로 도망치는 장면이 담겨 있었다. 국가 정보 국장은 화면을 계속 재생시키다가 검은 바이크 슈츠 같은 것으로 몸을 감싼 인물이 나타나자 화면을 정지시키고 다시 말을 이었다. “두 번째 인물입니다. 화면이 흐려서 잘 보이지는 않으시겠지만, 영상 판독 결과 앞서의 여성과 마찬가지 복장을 착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총탄을 막아낸 것이 단순히 저 슈츠의 능력인지, 아니면 본래부터 해당 인물이 지닌 능력인지는 알 수 없지만, 펜타곤의 연결 구획이 무너지는 동안 이 인물이 각 동을 순회하며 문건의 탈취를 실행했습니다.” 그때 가만히 듣고 있던 안보 수석 보좌관이 국가 정보 국장에게 질문을 던졌다. “저 인물이 박준상 본인과 동일 인물일 가능성은 없습니까?” 그 말에 국가 정보 국장은 고개를 저었다. “물론 그런 가능성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정보 분석 결과 그런 가능성은 매우 희박한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어째서입니까?” “문건 탈취가 진행되던 당시 연결 구획에 대한 파괴 활동이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는 점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펜타곤의 건물의 내구도는 보수 공사를 통해 획기적으로 강화된 상태이기 때문에 단순히 불 좀 붙인다고 그런 식으로 허무하게 무너지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계속적으로 무언가 외부적인 충격이 계속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죠.” “박준상은 파괴활동을 지속하기에도 벅찼을거다 이 말씀이신가요?” “그렇습니다.” 대통령은 국가 정보 국장과 안보 수석 보좌관의 대화를 듣고는 다시 윌킨슨에게 질문을 던졌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윌킨슨은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어째서?” “국가 정보 국장님의 말씀도 일리가 있습니다만, 멀리 떨어져 있는 상태라도 충분히 그와 같은 파괴활동이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회의에 참석한 임원들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어떻게?” 다시 이어진 대통령의 질문에 윌킨슨은 이렇게 대답했다. “임의로 화재를 일으키고 그것으로 펜타곤 정도의 건물을 붕괴시킬 수 있는 수단은 단순히 생각해도 그리 많지 않습니다. 단순히 건물 한두 개 동 정도라면 몰라도 전체를 파괴할 수 있는 수단이라면 더욱 제한될 수밖에 없습니다.” “확실히...” 소이탄 같은 것을 쓴다해도 어지간한 숫자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원래부터 보수 공사 당시 그런 상황까지 염두에 둔 것은 물론이거니와 방재 시설도 충실하게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가능한지 불가능한지 여부를 일단 논외로 둔다면 일단 임의의 장소에 화재를 일으킬 수 있는 수단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그것이 무엇이지?” 대통령의 물음에 윌킨슨은 바로 대답했다. “마법과 정령입니다.” “으음...” 안보 회의에 참석한 임원들은 불만스러운 기색을 흘리기 시작했다. 확실히 귀환자들이 일반인은 생각하기 어려운 대단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지만, 이런 장소에서 소설이나 만화에나 나올 법한 단어가 언급되었다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는 썩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윌킨슨은 그들의 반응을 무시한 채 다시 말을 이었다. “가능성이 높은 것은 일단 마법입니다. 보고를 받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박준상은 샌디에이고의 괴물을 처치할 때도 대규모 마법을 사용한 전례가 있습니다. 당시 사용한 마법은 일정 지역에 강한 냉기를 불러 일으켜 상대를 얼려 버리는 마법이었습니다만, 동일한 수준의 화염 마법을 한 곳에 집중해서 사용한다면 펜타곤의 방재 설비로도 감당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지금 세상에 마법사라니... 그거 참.” 윌킨슨의 말에 국토안전부 장관이 그렇게 혀를 차며 중얼거렸지만, 이어진 대통령의 눈짓을 받자 그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윌킨슨은 그와 같은 반응을 모른 척하며 다시 말을 이었다. “정령은 마법과는 달리 다소 위력이 약한 것이 흠입니다. 같은 레벨의 귀환자라면 마법을 다루는 이가 정령을 다루는 이보다 강력한 것이 통상적인 일입니다. 하지만 정령의 경우에는 마법과는 달리 일단 지시를 내려 두면 정령들이 그 지시에 따라 지정된 행동을 하도록 조종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물론 박준상이 마법을 사용하고 다른 동료가 서류를 탈취했을 가능성도 있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강력한 정령의 힘으로 파괴활동을 일으켜 이목을 돌린 다음 박준상 본인이 서류를 탈취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쪽이 되었든 위협적인 것은 마찬가지겠지요.” “으음...” 그 말에 안보 회의 임원들은 잠시 말이 없었다. 윌킨슨은 그들을 바라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그가 지닌 가장 위협적인 능력은 신체 능력이나 마법, 그리고 정령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 말에 대통령은 얼굴을 찌푸렸다. 지금까지의 얘기 만으로도 충분히 괴물이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는데, 이보다 더 위협적인 능력이 있단 말인가. “그것이 무엇인가.” 대통령의 질문에 윌킨슨은 이렇게 답했다. “바로 은신과 순간이동 능력입니다.” “순간이동?” “그렇습니다. 현재 입원 중이신 국방부 장관께서도 보셨지만, 펜타곤 파괴 당시 박준상은 거대한 익룡을 임의의 장소로 순간이동 시키는 능력을 선보인 바 있습니다.” 물론 윌킨슨은 그것이 순간이동이 아니라 단순한 역소환과 소환을 반복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으나, 자신의 추론을 설명하기 위해 일부러 그 얘기를 끄집어 낸 것이다. “만약 그에게 순간이동 능력이 있는 것이 사실이고, 그 대상으로 자신의 몸 이외의 것까지 가능하다면, 앞서 국가 정보 국장님께서 말씀하셨던 동료들에 대한 것도 충분히 설명이 가능합니다.” “필요할 때만 불러들인다는 건가.” 합동 참모 의장이 흥미롭다는 듯이 묻자, 윌킨슨은 바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문제는 그런 식으로 불러들일 수 있는 인원이 과연 몇이나 되는가 하는 점입니다.” “으음...” “만약의 경우 그런 순간이동에 제한이 없다면...” 대통령은 침중한 안색으로 말을 이었다. “필요할 때 언제든 원하는 장소에 대량의 군사력 투사가 가능하다는 뜻이 되겠군.” “그렇습니다.” 윌킨슨은 그렇게 대답하고는 다시 한 마디 더 덧붙였다. “문제는... 단순히 인원만 옮길 수 있냐는 것입니다.” “그 말은?” “원하는 곳에 원하는 것을 옮겨 놓을 수 있다면, 그것이 단순히 사람에만 국한되겠느냐는 것이죠.” “...” 순간 안보 회의 임원들 사이에는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그것은 다시 말해 필요에 따라서는 대량 살상 무기 같은 것도 원하는 장소에 마음대로 떨굴 수 있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핵탄두 같은 것을 훔쳐서 이 백악관 같은 곳에 툭 떨군다면 어찌 되겠는가. 아무리 깊숙한 곳에 벙커를 지어도 의미 없는 일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윌킨슨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임원들을 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가정에 불과합니다. 그런 능력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죠.” 다시금 침묵이 이어졌다. “자네의 가정은 그것 뿐인가?” 침중한 대통령의 말에 윌킨슨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럼 어디 계속 해보게.” 윌킨슨은 목이 마른지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계속 말을 이었다. “순간이동 능력이 얼마나 위험한지, 이제 아셨을 겁니다. 그럼 이제 남은 것은 은신 능력이겠군요.” “은신이라면, 몸을 숨기는 능력이겠군.” 지금까지 입을 다문 채 가만히 듣고만 있던 국무 장관의 말에 윌킨슨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문제는 이것이 단순히 숨바꼭질 이상의 효과를 지니고 있다는 점입니다.” “자세히 설명해 보게.” 국무 장관의 재촉에 윌킨슨은 설명을 계속했다. “펜타곤에서의 파괴 활동 당시, 박준상은 회의실에서의 홀연히 모습을 감추었습니다. 여기까지는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갈 수 있지만, 문제는 그 이후 박준상의 종적을 펜타곤 내에 장치된 그 어떤 감지 장치도 찾아내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 안보 회의 임원들은 다시 말문을 잃었다. 펜타곤은 백악관만큼 보안이 철저한 곳. 그곳에 어느 정도의 보안 설비가 갖추어져 있는지는 그들 자신이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잠시 회의실에 감돌던 침묵을 깨뜨린 것은 안보 수석 보좌관이었다. “자네 말은... 그가 투명 인간이라도 된다는 뜻인가?” 그것은 예상 외로 상당히 진실에 근접한 발언이었지만, 윌킨슨은 준상이 투명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까지는 알지 못했다. “저로서도 그것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단순히 순간이동 능력으로 그 모든 것을 무력화시킨 것인지, 아니면 보좌관님 말씀대로 정말로 투명인간인지... 그에 관한 진실을 아는 것은 오직 박준상 본인 뿐이겠죠.” 그렇게 말한 뒤 윌킨슨은 목이 타는지 다시금 물을 한 잔 마시고는 어느새 자신을 주목하고 있는 안보 회의 임원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만약 지금 이 회의실에 박준상 본인이 와서 이제까지의 모든 대화를 듣고 있다 하더라도, 저는 더 이상 놀라지 않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 말에 대통령을 포함한 안보 회의 임원들은 등줄기에 서늘한 감각이 스치고 지나가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하하... 아무리 그래도... 설마 그런 일이...” 안보 부보좌관이 그렇게 말하자, 비서실장이 그 말을 받았다. “그렇습니다.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그가 엄청난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는 해도...” 하지만 바로 그때. 회의실 안에 박수 소리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짝짝짝짝.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임원들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이곳은 완전히 외부와 차단된 공간. 지금 대화를 나누고 있는 임원들 이외의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되는 곳이다. 그런데, 이 박수 소리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임원들은 천천히 그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구석에서 사자 가면을 쓴 남자 하나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 그들의 눈에 비쳤다. “...” 그 남자는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핼쓱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둘러보다가 입을 떡 벌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윌킨슨을 향해 말했다. “놀라지 않는다더니.” “...” 윌킨슨이 그 말에 겨우 정신을 차리고 벌린 입을 다물자, 그는 염동력으로 의자를 들어서 대통령 맞은 편의 자리에 가져다 놓고는 그곳에 앉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박준상이다.” ============================ 작품 후기 ============================ 사인 드립 하고 싶어서 손이 근질근질하군요. 00281 트롤러 ========================================================================= 준상이 자신의 이름을 말했으나, 회의실 안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이미 이곳에 들어와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한 당사자인 윌킨슨 역시 당황하기는 매한가지. 그가 그런 식의 언급을 한 것은 정말로 그런 상황이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서가 아니라, 그 정도로 준상의 능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안보 회의에 참석 중인 다른 사람들에게 인식시키기 위한 일종의 비유였을 뿐이다. 그런데 그 말의 여운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정말로 박준상이 자신의 눈앞에 모습을 나타난 것이다. 윌킨슨은 예기치 못한 상황에 식은땀을 뻘뻘 흘리다가 안보 수석보좌관 등이 자신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는 것을 깨닫고는 더욱더 당황했다. 자칫하면 자신이 일부러 박준상을 이곳에 끌어들인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상황. 그런 윌킨슨의 난감한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준상은 가만히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손을 앞으로 모으며 느긋한 자세를 취했다. “나를 만나면 하고 싶은 말들이 잔뜩 있는 것처럼 보이던데, 아닌가?” “...” 회의실에 모여 있던 이들은 그 말을 듣고서야 겨우 당황스러움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들이 서로의 눈치를 살피는 모습을 보고는 피식 웃더니 정령을 불러 회의실 문에 배치했다. 울긋 불긋한 빛덩어리들이 준상의 주위에 허깨비처럼 모습을 드러내고 그것들이 일제히 문으로 다가서자 사람들은 그 신비로움에 놀랐다. 준상은 그들의 모습을 보며 다시 말했다. “놀랄 것 없다. 우리들의 대화가 방해 받는 것이 싫어서 조치를 취한 것 뿐이니까.” “...” 그러자 합동 참모 본부 의장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협박이라도 할 셈인가?” 그 말에 준상은 잠시 말이 없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생각하기에 달린 일이겠지. 하지만 적어도 당신들의 가족까지 손대지는 않을테니 그건 안심해도 좋아.” “...” 준상의 말에 임원들은 머쓱한 기분이 들었다. 방금의 말은 첫 대면에서 가족의 신상을 언급했던 자신들의 태도를 꼬집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를 어떻게 할 셈이오.” 이번엔 나이 지긋한 국무 장관이 준상을 가만히 바라보며 그렇게 물었다. 하지만 준상은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이 이렇게 대답했다. “말했을텐데. 대화를 나누러 왔다고.” “...” 그 때 밖에서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오려다가 갑자기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고, 곧바로 소란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회의실 안의 사람들은 그 소리를 듣고 다시 흠칫 놀랐지만 준상은 별 일 아니라는 듯이 손을 내저으며 다시 말했다. “신경 쓸 것 없다.” “...” 어떻게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처음에는 그저 고함 소리만 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총성이 시끄럽게 울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거의 사오분간 들려오던 총소리는 이내 잠잠해지기 시작했고, 이내 인터폰을 통해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준상은 그리 영어 실력이 좋지는 않았지만, 그 목소리가 대통령의 안위를 묻고 있다는 정도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시끄럽게 굴지 말라고 해.” “...” 그 말을 들은 비서실장은 대통령을 바라보았다. 대통령은 고개를 끄덕여 승낙의 뜻을 내비쳤고, 그 모습을 본 비서실장은 인터폰에 대고 조용히 말을 전했다. “모두 무사하니, 일단 대기하도록.” 긴장된 목소리를 통해 상황을 알아들은 것인지, 아니면 달리 안쪽의 상황을 확인할 수단이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비서실장의 말이 전해지자 바로 대답이 전해지며 인터폰이 끊겼다. 준상은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향해 다시 말했다. “우선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나에게 해야 할 일이 있지 않나.” 회의 중 내내 입을 다물고 있던 부통령이 준상에게 되물었다. “무슨 말이오.” 준상은 대답했다. “정말 몰라서 묻나.” “...” 부통령은 입을 다물었다. 선후 관계를 따진다면 거래를 하자고 불러 놓고는 은근하게 심문 비슷한 분위기를 유도하며 간접적인 협박을 가한 자신들이 먼저이기 때문이다. 아까부터 계속 전쟁을 부르짖던 국토 안전부 장관은 의외로 준상의 그런 태도를 보고서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전쟁을 반대하며 그와 대립각을 세우던 재무장관이 준상에게 따지고 들었다. “지금 우리보고 사과를 하라는 말이오?” “물론.” 준상이 고개를 끄덕이자, 재무장관은 다시 말했다. “말 몇 마디 잘못했다고 한 나라의 국방부 건물을 산산조각 내버린 사람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닌 듯 하오만.” 그는 준상을 논리적 대결로 끌어들일 속셈이었지만, 불행히도 준상은 그런 의도에 넘어가지 않았다. 준상은 재무장관을 가만히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서.” “...” “싫다고?” 순간 준상의 몸에서 꺼림직한 기운이 마치 파도처럼 터져 나와 회의실 안의 사람들을 그대로 덮쳐 버렸다. “크윽!” “으으으...” 사람들은 준상의 몸에서 기이한 느낌이 풍겨지는 것을 느낌과 동시에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은 생각이 자꾸만 마음 속에서 고개를 드는 것을 억지로 눌러 참아야만했다. 하지만 그들은 몰랐다. 이것조차도 준상이 많이 양보한 것이라는 사실을. 그가 본격적으로 공포의 시선 같은 능력을 사용했다면, 대부분 고령인 회의 참석자들의 반수 이상은 대번에 심장 마비 등의 증상을 일으키며 쓰러져 버렸을 것이다. 준상은 식은땀을 흘리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 “좋게 얘기를 하니 우스워 보이나?” “...” “아니면, 누구 하나 죽여 놓고 시작해야 제대로 말을 알아먹을 건가?” 그 말을 듣고 윌킨슨이 얼른 말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애초에 그걸 바라고 오신 것도 아니잖습니까?” “...” 준상은 그제서야 다시 기운을 되돌렸고, 사람들은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간신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국가 정보 국장이 윌킨슨을 향해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지?” 윌킨슨은 사람들을 돌아 보며 말했다. “그는 대화를 하러 이곳에 온 것입니다. 단순히 화풀이를 하러 왔다면 이미 백악관은 박살이 나고 있었을 겁니다.” “...” 부정할 수 없는 진실. 그것은 조금만 생각해 보면 깨달을 수 있는 사실이었으나, 이들은 준상이 내뿜는 존재감에 압도되어 미처 거기까지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기야, 눈에서 푸른 인광을 줄기 줄기 뿜어내는 호랑이 같은 존재가 눈앞에 있으면, 보통은 왜 이런 존재가 여기 있는지 보다 어떻게 해야 이 상황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지를 먼저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일이다. “후우...” 대통령은 쓰고 있던 안경을 벗은 다음, 미간을 손가락으로 잠시 주무르다가 자세를 바로하며 준상을 향해 말했다. “사과를 하면 되겠소?” 그 말을 들은 비서실장이 화들짝 놀라며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대통령님! 그게 무슨!” 하지만 대통령은 한 손을 들어 그에게 다시 자리에 앉으라 손짓하고는 다시 말했다. “하긴 말 몇 마디로 넘어가기엔 너무 멀리 왔는지도 모르지. 무엇을 바라시오.” “...” 준상은 다시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는 피로해 보이는 안색의 대통령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우선 사과부터.” “...” 대통령은 준상을 가만히 마주보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가만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당신이 느꼈을 불쾌감에 대해 유감의 뜻을 표하오.” 대통령이 다시 자리에 앉자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를 향해 말했다. “사과를 받아들이겠다.” 그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에 대한 보상은 나중에 얘기하기로 하고... 일단 내 용건부터 말하는 편이 좋겠군.” 용건이라는 말이 나오자 대통령의 유감 표명에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던 사람들의 눈이 일제히 준상을 향했다. “윌킨슨이 나를 찾아왔을 때, 이런 얘기를 하더군.” “무슨...” “한 번 일어날 수 있는 일은 두 번도 일어날 수 있는 법이라고.” “...” 준상의 일만 아니라면 지금 이 회의실에 모인 사람들은 그에 관한 대책을 논의하느라 정신이 없었을 것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는 일. 아니, 준상이 멀리 바다를 건너와서 괴물을 퇴치해 주지 않았더라면 미국은 지금쯤 국가 비상 사태를 선포하고 괴물에 대한 전쟁을 선포하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당신들은 모르겠지만, 나는 퀘스트라는 과정을 통해 그 괴물들을 다른 세계에서 이미 한 번 상대해 본 적이 있다.” 사람들은 처음 듣는 정보에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그들 역시 막연하게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다른 세계의 괴물이라는 확정적인 단서는 전혀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윌킨슨은 그제서야 이해가 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과연... 그래서 그렇게 간단하게 처리할 수 있었던 것이군요.” “아...” “그랬던 거군.” 미군이 며칠 동안이나 상처 하나 입히지 못한 괴물을 너무나도 간단하게 해치웠기 때문에 일각에서는 그 조개 껍데기 모양의 괴물을 준상이 일부러 풀어놓은 것일 수도 있다는 추측까지 나돌고 있는 상황이었다. 물론 지금의 발언으로 그런 의심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미 그 전에 상대한 경험이 있다면 약점도 알고 있을테니 허무할 정도로 간단하게 그 괴물들을 쓰러뜨릴 수 있었던 까닭도 설명이 된다. 준상은 그런 그들을 향해 다시 말했다. “사실 마수들은 그 쪽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괴물들이 아니야.” 준상은 앞으로 몸을 기울이고는 다시 말했다. “게다가, 그 놈들만이 전부인 것도 아니지.” “...” 전부가 아니라니.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준상은 자신에게로 모인 시선들을 하나씩 돌아보며 다시 말했다. “좀 더 자세한 얘기가 듣고 싶은가?” “...” 이후로 준상은 무척이나 긴 시간 동안 안보 회의 임원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무려 여섯 시간 동안 이어진 이때의 대화 내용은 외부로 알려지지 않았으나, 마침내 회의실의 문이 열리고 밖으로 나왔을 때 회의 참석자들은 무척이나 어둡고 지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후...” 백악관에서의 일을 마무리 지은 준상은 요정계로 복귀하기 전에 우선 윌킨슨으로부터 한 사람을 소개 받았다. “이쪽은 딜런 소위입니다. 앞으로 준상님과의 연락을 맡게 될 겁니다.” “...” 딜런 소위는 자신의 눈앞에 선 사자 가면의 사나이를 보고는 얼굴을 찌푸렸다. 비상 대기 때문에 며칠간 꼬박 밤을 세우다가 갑자기 불려 온 것도 귀찮은데, 무슨 히어로물에나 나올 법한 괴상한 옷차림의 사내에게 소개를 받으니 당황스러운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도 일단 존경하는 상관인 윌킨슨 중령의 말을 무시할 수도 없는 일이라, 일단 손을 들어 거수 경계를 하며 자신의 소개를 했다. “딜런 소위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 준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메신저 등록 요청을 실행했다. “헛!” 딜런 소위는 말도 없이 고개만 까딱이는 준상의 태도에 얼굴을 찌푸리다가 갑자기 벨 소리가 울리기 시작하자 기겁하며 얼른 휴대폰을 꺼내 들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박준상 님이 메신저 등록을 요청했습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Y/n) _ 화면에 나타난 메시지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데 옆에서 보고 있던 윌킨슨 중령이 다시 말했다. “수락하도록.” “네! 알겠습니다!” 딜런은 그제서야 화들짝 놀라며 얼른 수락을 했다. “...” 준상은 그 모습을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아무리 봐도 영 어리버리하고 미덥지 못한 것이 임관한지 얼마 안 되는 풋내기 소위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윌킨슨 중령은 그런 준상의 태도를 알아챈 것인지 쓴웃음을 지으며 다시 말했다. “앞서도 말씀드렸다시피, 이후의 연락은 딜런 소위를 통해 전해질 겁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대로 투명화로 모습을 숨긴 채 그곳을 떠났다. 딜런은 준상이 갑자기 허깨비처럼 모습을 감추자 깜짝 놀라며 윌킨슨에게 물었다. “그는 누구입니까?” 윌킨슨은 그제서야 생각이 났는지 주머니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꺼내며 대답했다. “글쎄...” 그는 천천히 담배에 불을 붙인 후 길게 한 모금을 빨아들였다가 천천히 내뿜으며 말했다. “일단은 태풍의 눈이라고 해두지.” “...” 딜런은 뜬금없는 그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얼른 휴대폰을 열어 박준상이라는 이름 옆에 ‘태풍의 눈?’이라는 메모를 적어 두었다. 준상은 윌킨슨과 헤어진 다음 조금 잠시 포토맥 강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신기루 꽃으로 귀환했다. 간단하게 씻고 아무도 없는 신기루 꽃 최상층에서 혼자 긴의자에 앉아 느긋하게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헤네스가 그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 여기 계셨네요.” “...” 헤네스는 준상에게 다가와 그의 뺨에 살짝 입을 맞추더니 살짝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얀트훈센의 성에 대한 개수 작업이 끝났어요. 한번 가보시지 않으시겠어요?” “그럴까.” 준상은 헤네스의 손에 이끌려 얀트훈센으로 향하는 신기루 꽃의 석문을 통과했다. 어두운 석실을 빠져 나와 탑 위로 올라서자, 어느새 푸른 기운이 가득한 얀트훈센의 전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얼음으로 뒤덮여 있었을 때는 무척이나 적막하고 고요해 보이던 곳이었지만, 풀과 나무가 잎을 틔우고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한 지금에 와서는 무척이나 활기 찬 모습으로 변모해 있었다. 준상은 수리를 마친 성의 내부를 돌아보고, 그곳에서 헤네스와 하룻밤을 보낸 뒤 다시 신기루 꽃으로 돌아왔다. 이런 저런 일로 인해 잠시 잊고 있었지만, 얀트훈센에서 하룻밤을 보내면서 아직 해결하지 못한 일이 하나 남아 있음을 떠올린 것이다. 그것은 바로 얼음의 대정령에 빙의된 채 그의 펫이 되어버린 또 한 명의 여인, 이벨라 하란두르의 일이었다. 얼음의 대정령에 의해 완전히 의식이 장악되어 지금은 그저 미쳐 버린 정령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여인. 하지만 그녀가 지닌 힘은 단순히 소환을 실행하는 것만으로도 넓은 범위의 지역을 삽시간에 빙하기로 되돌려 버릴 정도이다. 물론 그대로도 활용하기에 따라서는 충분히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겠지만, 그래서야 단순히 냉동 폭탄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준상은 우선 리체스에게 협조를 구했다. “냉기를 차단할 수 있는 결계 말씀이신가요?” “그래.” “음...” 리체스는 잠시 고민하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대정령 정도의 힘이라면 어지간한 정도로는 어림도 없어요. 아무래도 준비하는데 제법 시간이 걸릴 것 같은데, 괜찮으시겠어요?” “물론.” “알았어요. 그럼 장소는 어디에...” “신기루 꽃의 방 가운데 하나가 어떨까 싶은데.” 리체스의 힘을 전부 발휘할 수 있는 요정계가 낫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자칫 사고라도 나면 그 여파를 감당하기가 어렵다. 그에 반해 신기루 꽃은 외부와 완전히 독립된 공간이라 만약의 사태가 발생해도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이 가능하다. 준상의 대답에 리체스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음... 그곳이라면 임의로 구조를 바꿀 수도 있으니까 괜찮겠네요. 바로 준비할 게요.” “고맙다.” “별 말씀을요.” 00282 트롤러 ========================================================================= 냉기를 차단하기 위한 결계는 일단 요정계의 연구실에서 필요한 설비를 만든 다음 신기루 꽃으로 옮겨 설치하는 방식으로 제작이 진행되었다. 아무래도 신체적 조건에 제한이 있을 수 밖에 없는 신기루 꽃에서 바로 작업하는 것은 리체스로서도 까다로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결계가 완성되는 것을 기다리는 동안 준상은 잠시 서윤에게 들러 미국과의 협상에 관한 내용중 일부를 전달했다. “방어복 구매 계약을 말입니까?” “그래. 조만간 미국 쪽에서 사람이 올테니 준비하도록.” 서윤은 갑작스런 준상의 말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럼, 물량은 얼마나...” “글쎄. 자세히는 모르지만 아마도 제법 되지 않을까.” “...” 준상은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그렇게 말했지만 서윤은 수량을 가늠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복잡해질 지경이었다. 아직 실전 테스트조차 거치지 않은 방어복을 대량 구매하다니. 도대체 무슨 얘기가 오고간 것일까. “그리고.” “...” 또 무슨 얘기를 꺼내려나 싶어 긴장한 서윤을 향해 준상은 이렇게 말했다. “그 조개 껍데기 말인데.” “아!” 그렇지 않아도 연구소에서 제발 그 마수의 껍데기를 확보해 달라고 독촉이 와있는 것을 깜빡 잊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부탁드리려던 참이었습니다. 저희가 연구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그럴 셈이야. 다만, 이번 연구는 미국과 함께 진행하게 될테니 그리 알도록.” “네? 함께 말입니까?” “포획된 수도 많으니 문제될 일은 없을거야. 기왕이면 여러 곳에서 동시에 협력해 가면서 진행하는 편이 더 빠른 성과를 기대할 수도 있을테고.” “음...” 이전에 건네받은 아문간의 사체처럼 독점이 불가능하다는 점이 다소 아쉽긴 했지만, 준상이 그렇게 결정했다면 거부할 수도 없는 일이다. 오히려 미국이 적극적으로 나서는 상황에서 한발 걸친 것만으로도 다행이랄까. 어쩌면 방어복의 대량 구매는 이것에 대한 보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리 알도록 하겠습니다.” 계약 조건은 이전과 마찬가지. 독점이 아니라는 사실에 연구소 쪽에서는 다소 불만이 나오기도 한 모양이었지만, 미국 역시 동일한 조건이라는 소식이 전해지자 입이 쑥 들어가고 말았다. 임서윤은 펜션을 떠나려는 준상을 배웅하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거래 대상을 다변화하시는 이유가 따로 있는 겁니까?” 준상은 잠시 서윤을 바라보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솔직히 지금까지는 너무 평온했어. 그렇지 않나?” “...” 그 말대로였다. 귀환자들의 등장 이후, 지금까지 세상은 너무나 평화로웠다. 처음에는 능력자들이 나타났다는 사실에 떠들썩했던 사회의 분위기도 이후 그들이 처한 현실이 알려지자 부러움보다는 동정 쪽의 시선이 늘어난 것도 분명한 사실. 하지만 그런 상황이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이번에 일어난 마수의 출현. 이것이 균열의 시작이라면, 조만간 지구는 큰 변혁의 시기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서윤은 준상이 그 시기를 미리 대비하고자 하는 것임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준상이 다시 신기루 꽃으로 귀환하고 다시 며칠의 시간이 흐르자, 리체스가 결계의 완성을 알려왔다. “지금 바로 시험할 수 있을까.” “물론이죠.” 준상은 자신과 리체스의 시드 구성을 점검한 다음, 결계를 설치한 곳으로 이동했다. 신기루 꽃의 벽면에 위치한 방은 필요에 따라 방의 형태를 임의로 바꿀 수 있는데, 리체스는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삼중으로 벽을 세우고 그 각각의 벽에 결계를 설치했다. “대정령에 강화된 정령 증폭의 힘까지 더해진 걸 감안해서 튼튼하게 만들었어요. 덕분에 여왕의 돌이 제법 많이 소모되긴 했지만요.” 여왕의 돌이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인지를 떠올린 준상은 자랑스러워 하는 리체스의 모습에 잠시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가동할게요.” “그래.” 리체스는 방의 중심부에서 마침내 결계를 발동했다. 몇 겹의 마법진이 수놓아지며 방 구석 구석으로 퍼져가더니 이내 작은 공명음과 함께 공기의 흐름이 천천히 멎는다. “잠시만요.” 리체스는 결계 이곳 저곳을 날아다니며 확인 과정을 거치더니 다시 준상에게로 돌아와 말했다. “됐어요. 정상 작동 중이니 언제든 소환하셔도 괜찮아요.” “수고했다.” “별 말씀을요.” 준상은 일단 리체스가 어깨 위에 내려앉자 잠시 심호흡을 한 다음 이벨라를 소환했다. 그러자 곧바로 하얀 눈처럼 투명한 피부를 가진 나체의 여인이 준상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바닥에 털썩 주저 앉더니 이내 주위의 공간에 극도의 냉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음...” 준상과 리체스는 사전에 냉기에 대해 철저한 대비를 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별다른 지장을 받지 않았지만, 만약 그렇지 못한 자가 이곳에 있었더라면 단숨에 얼음 동상으로 변해 버렸을 것이다. “어떻게 하시려고요?” “글쎄.” 그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자니 그제서야 준상과 리체스의 존재를 알아차린 것인지 이벨라의 투명한 눈이 그들을 향했다. 준상과 리체스는 어쩐지 그 시선을 마주하는 순간 섬찟한 느낌이 들었다. 살아있는 생명체라고 하기엔 뭔가 어색한, 마치 동상을 마주하는 느낌이 전해져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감정은 그들만의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으... 아으으...” 본래 실체가 없는 정령이 인간의 육체에 덧씌워진 탓일까. 이벨라는 격하게 몸을 덜며 자신의 몸을 감싸안았다. “추운가봐요.” “묘하군.” 얼음의 대정령이 빙의된 이상 냉기에 대해서는 사실상 면역이나 다름 없는 몸이 되었을 터. 단순히 육체가 가지고 있는 기억이 춥다는 감각을 되살린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추위를 느끼는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대로 두고 볼 수만도 없는 일이었다. 준상이 가만히 다가서자, 이벨라는 두려움에 젖은 눈으로 기듯이 물러나며 그를 향해 다시금 냉기를 세차게 뿜어내었다. 이번에 새로 얻은 시드들 덕분인지 그런 행동은 준상에게 별 의미가 없었지만, 리체스는 문득 몸을 부르르 떨었다. “우으으... 어쩐지 조금 추워지는 것 같은데요.” “흠...” 충분한 수치의 속성 저항을 맞췄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만으로는 모자랐던 것일까. 밀폐된 공간이라 냉기들이 주위로 퍼지지 못한 것이 원인일 수도 있고, 냉기 저항 수치를 무너뜨릴 정도의 능력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일단 요정계로 가 있는 편이 좋겠다.” 그러자 리체스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혼자서 괜찮으시겠어요?” 하지만 준상은 그런 리체스를 보며 웃었다. “보다시피.” 입고 있던 옷마저 모조리 뻣뻣하게 얼어버린 상황이고 뿜어져 나온 김이 수염처럼 입가에 서려 있기는 했지만, 그것을 제외하면 준상은 전혀 추워 보이는 모습이 아니었다. “그래도 조심하세요. 결계를 해제하는 방법은 아시죠?” “그래.” 리체스는 준상의 뺨에 입을 맞추고는 그가 열어준 정령의 문을 통해 요정계로 돌아갔다. 준상은 그녀가 돌아가자 천천히 이벨라에게로 다가갔다. “우으으... 우으...” 이벨라는 자신이 뿜어내는 냉기에도 아무런 반응조차 보이지 않는 준상의 모습을 보고 겁에 질린 것인지 그렇게 의미 모를 신음 소리를 흘리며 다시 기듯이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뒤로 물러서던 이벨라는 벽이 등에 닿자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곧바로 돌아서서 가냘픈 손으로 벽을 두드렸지만, 리체스의 결계는 충격이랄 것도 없는 그 정도의 손짓에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준상은 천천히 다가가 이벨라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녀는 다시 한 번 준상을 향해 냉기를 뿜어냈다. 두려움이라는 생소한 감정 때문에 정령 증폭의 힘이 더 강해진 것일까. 이번에 뿜어낸 냉기는 간신히 버티고 있던 준상의 옷들을 얼려 버렸고, 신축성이 사라진 옷감들은 준상의 작은 움직임조차 견디지 못하고 부서져 버렸다. “이런.” 준상은 옷이 얼어서 부서지는 그 기막힌 현상을 보고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하긴 리체스가 추위를 느끼고 물러갈 정도면 지금의 온도가 어느 정도일지 대충 감이 온다. 모르긴 해도 이번에 얻은 속성 피해 흡수의 시드들이 아니었다면, 준상 역시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소환을 해제한 채 밖으로 뛰쳐 나갔을 것이다. 확실히 대단한 능력이다. 이런 능력이라면 충분히 히든 카드가 될 수 있다. 준상에게 가장 큰 불안이 있다면, 그것은 지금 현재 그가 지니고 있는 능력의 대부분이 이 퀘스트를 통한 카드 시스템이나 시드들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런 능력들은 굉장히 유용한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만에 하나 시스템을 조작할 수 있는 누군가가 나서게 되면 준상은 재생력을 통해 강화된 육체 이외에는 별다른 무기가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리고 만다. 이것은 다시 말해 블러드서커나 어나이얼레이터 같은 강력한 무기들을 사용할 수 없다는 뜻이 되고, 부상이든 근육 파열이든 간에 육체에 손상이 가해져도 부카의 혀 같은 아이템 외에는 즉각적으로 복구가 가능한 방법 역시 없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시스템에 구애 받지 않는 리체스의 마법 능력이나 이벨라의 정령 증폭은 준상에게 있어 강력한 히든카드가 될 수 있다. 설령 펫 시스템이 해제된다 해도 그녀들의 존재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니 정령의 문을 통해 얼마든지 불러들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 이성이란 것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모습을 보니 막막한 것도 분명한 사실. 게다가 호감도와 충성도 역시 모두 0인 상태임을 감안하면 그 막막함은 배가 되어 버린다. “역시 그 방법 밖에 없나.” 준상은 한숨을 푸욱 내쉬고는 가만히 손을 뻗었다. “우으으...” 이벨라는 몸을 뒤틀며 준상의 손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준상의 억센 손은 차가운 그녀의 여린 어깨를 양손으로 움켜 잡았다. “미안하다.” 준상은 그렇게 말을 하고는 고개를 마구 내젓고 있는 이벨라의 머리를 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한 뒤, 그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순간 차가운 결계 안에 은은한 물결 같은 기운이 화악 하고 퍼져 나갔다. 그것은 바로 준상의 입술이 이벨라의 이마에 닿는 순간 발동된 매료의 힘. 발버둥을 치며 준상의 손에서 벗어나려 하던 이벨라의 움직임은 그 한 번의 키스로 인해 그대로 멈추어 버렸다. “...” 그녀는 멍한 표정으로 자신의 이마에서 입술을 떼는 준상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후...” 이런 쪽의 힘에 전혀 면역이 없는 탓일까. 이벨라는 너무나도 쉽게 매료의 힘에 장악 당하고 말았다. 준상은 이벨라의 정보를 확인해 보았다. 펫 정보에 나타난 수치는 호감도가 75. 충성도가 20. 이 호감도 수치는 리체스가 처음 펫이 되었을 당시보다 조금 더 높은 수준이다. 이 정도면 충분히 성공적이다. 일단 호감도를 추가로 쌓을 수 있는 토대를 쌓았으니, 이후는 시간을 들이는 길 뿐이다. “후...” 준상은 멍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이벨라를 향해 쓴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가만히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가슴에 안았다. 요정의 키스로 이벨라를 매료시키는데 성공한 준상은 다시 그녀를 역소환한 다음 최상층으로 돌아와 냉기로 인해 부서져 버린 옷을 갈아입었다. 일단 호감도를 올려놓기는 했어도, 이성이 돌아오지 않은 이상 위험하기는 매한가지. 가장 확실한 것은 이벨라의 이성이 돌아와서 스스로 얼음의 대정령이 지닌 힘을 조절하는 것인데 너무나 오랜 기간 동안 장악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은 생각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어떻게 해야 그녀의 이성을 본래대로 되돌릴 수 있을까에 대해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데, 문득 메신저로부터 연락이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딜런 소위입니다!” 통신을 열자 곧바로 군기가 바짝 든, 하지만 역시 어딘지 모르게 어리버리한 느낌을 지울 수 없는 목소리가 전해져 온다. 책임자 급인 윌킨슨이 아니라 딜런이 굳이 연락책이 된 것은 그가 장교들 가운데 유일한 메신저 기능 보유자이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지?” 준상이 조금 피곤한 느낌으로 묻자, 딜런은 국어책을 읽는 듯한 느낌으로 말을 시작했다. “미국 정부를 대표해 대통령이 의뢰를 하고자 합니다. 마수로 보이는 생명체의 출현이 파악되었습니다. 퇴치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말투는 국어책 읽기라도 내용은 정중하기 그지 없었다. 마수를 잡으면 레어 시드를 얻을 수는 있지만 퀘스트도 없이 무료 봉사를 하는 것은 아무래도 체질이 아닌지라 방법을 생각해낸 것이 바로 이것이다. 통신 상으로 전해진 얘기라 그런지 서브 퀘스트가 바로 발동되지는 않는다. 역시 얼굴을 마주 보고 얘기를 전해 들어야 하는 걸까. “알았다. 어디로 가면 되지?” 준상의 대답에 딜런은 잠시 버벅대더니 조금 뒤에야 이렇게 대답했다. “그러니까... 랭글리 공군 기지에 수송기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알았다. 바로 가도록 하지.” 역시 시작된건가. 준상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헤네스와 리체스에게 연락을 취한 뒤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러자 곧바로 석문을 통해 얀트훈센과 요정계로부터 헤네스와 리체스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그렇게 곧바로 뛰어올 것 까지는 없는데.” 준상은 그렇게 말하고는 두 반려에게 말했다. “어차피 비행기를 타고 이동해야 하니까, 그 동안은 이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도록 해.” “혼자서 괜찮으시겠어요?” 걱정이 담긴 헤네스의 말에 준상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사냥이 시작되면 바로 부를테니까 걱정마.” “네...” 준상은 곧바로 프린스 윌리엄 포레스트 공원에 만들어진 정령의 문을 통해 미국으로 이동한 다음 뉴포트뉴스와 노퍽 사이에 위치한 랭글리 공군기지로 향했다. 기지에 도착하자, 윌킨슨 중령과 딜런 소위가 이제나 저제나 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많이 기다렸나.” “아! 어서 오십시오.” 준상이 도착하자 윌킨슨은 그를 반갑게 맞이하고는 바로 의뢰 내용을 말하려 했지만 준상은 손을 들어 그의 행동을 막았다. “잠깐.” “네?” 준상은 곧바로 그들의 눈앞에 헤네스를 소환했다. 미리 연락을 받은 뒤 방어복과 수호의 신물을 장비한 채 대기하고 있던 헤네스가 한줄기 빛과 함께 모습을 드러내자 딜런은 물론이고 윌킨슨마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헤네스.” “네, 맡겨 주세요.” 헤네스는 윌킨슨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원하는 바가 있다면 부탁하세요. 그럼 이루어질 거에요.” 00283 트롤러 ========================================================================= 윌킨슨은 지금 나타난 소녀가 이전에 마수 바스반 잔을 해치울 때 준상을 도왔던 인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전차와 장갑차를 단숨에 우그러진 종이 상자로 만들어 버리던 마수의 낙하 공격을 새하얀 방패 하나에 의지해 막아내던 모습과, 도끼질로 마수를 한 번에 한 마리씩 처치하는 준상의 뒤에서 채찍질을 가하던 모습이 너무나도 인상 깊어서, 당시의 영상을 본 이들 중에는 그녀를 새하얀 방패의 여왕(Queen of White Shield)이라고 부르며 추종하는 이들마저 있을 정도였다. 바로 그의 옆에 서 있는 딜런이 바로 그런 인물 중 하나였다. “여왕님!” “네?” 헤네스는 잠시 주위를 돌아보았다. 아직 리체스는 소환되지 않았을 텐데, 라고 생각하며. “크흠.” 윌킨슨은 헛기침을 하고는 딜런을 팔꿈치로 툭 치며 말했다. “딜런, 의뢰 내용을.” “알겠습니다!” 딜런은 가지고 있던 서류철을 꺼내고는 의뢰 내용을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미국 정부를 대표해서...” 통신 상에서 짤막하게 말했던 것과는 달리, 이번에는 의뢰를 수행하게 될 장소 등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조금은 지루한 의뢰 요청서 낭독이 끝나자, 헤네스는 다시 물었다. “보상에 대한 내용이 빠진 것 같은데요.” “아, 그것이라면...” 딜런은 버벅대며 서류를 뒤지고는 다시 말했다. “협상에 준하여 실태 조사와 전투에 필요한 경비 일체를 미국 정부에서 제공합니다. 부산물 일체의 소유권은 박준상 님에게 귀속되며, 미국 정부는 이 부산물의 구매에 대한 우선 협상권을 가집니다. 작전 내용에 대해서는 박준상 님의 허락 없이 정보를 외부에 유출할 수 없습니다. 이외에 미국 정부는 의뢰의 달성에 대해 사전에 협의된 소정의 감사금을 현물이나 기타 박준상 님이 원하는 형태로 지불합니다. 이상입니다.” 헤네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의뢰의 진행이나 달성 여부는 어떻게 판별하죠?” “에, 그러니까...” 딜런은 다시 서류를 뒤적이며 대답했다. “필요한 경우 수행원이나 드론을 대동할 수 있고, 그렇지 못할 경우는 대상물의 사체 등의 증거물 제시로 대신할 수 있습니다.” 이쪽에서는 처음 받는 퀘스트인데다 그 대상이 무려 세계 최강국으로 손꼽히는 미국이다 보니 헤네스는 의뢰 내용을 하나 하나 세심하게 살필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의 내용은 사전에 협의된 내용을 재확인하는 것이 불과했지만, 아직 자신에게 맡겨진 업무가 정확히 무엇인지 감을 잡지 못하고 있던 딜런은 식은 땀을 뻘뻘 흘리며 바이저로 얼굴을 가린 작은 체구의 소녀의 질문에 일일이 대답해야만 했다. 윌킨슨은 키 크고 깡마른 딜런이 작고 아담한 헤네스에게 쩔쩔 매는 모습에 쓴웃음을 짓고는 준상에게 이렇게 말했다. “동료 분께서 아주 야무지시군요.” “그런 면이 있지.” 별 것 아니라는 듯 담담한 말투이긴 했으나 윌킨슨은 어쩐지 그의 목소리에서 묘하게 온기가 느껴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가끔은 인간이 맞나 싶을 정도로 날을 잔뜩 세운 칼날 같은 말만 하던 준상 밖에 본 적이 없는 윌킨슨으로서는 조금은 의외일 수밖에 없었다. 헤네스가 마침내 자세한 의뢰 내용을 모두 확인하고 그것을 수락하자, 준상의 눈에 퀘스트 정보가 나타났다. (Sub) 산타마리아 섬을 조사하십시오. 대서양의 아소르스 제도 남동부 끝에 위치한 산타마리아 섬은 규모는 작지만 세계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비행 정보 구역 중 하나인 산타마리아 대양 FIR을 관장하는 대서양 항공 관제 센터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두 시간 전, 괴물의 출현에 대한 보고를 끝으로 현재 이 지역과의 연락이 두절된 상태이며, 정확한 상황 파악을 위해 파견되었던 아소르스 자치 정부의 선박 역시 긴급 구난 신호와 함께 연락이 두절되었습니다. 미국 정부는 이 지역에 대한 조사와 더불어, 만약 마수의 출현이 확실할 경우 퇴치를 원하고 있습니다. 준상은 메시지 창을 치우고는 윌킨슨에게 다시 말했다. “수송기는?” “산타마리아 섬에도 공항이 있긴 하지만, 착륙이 가능한 상황인지 알 수 없는 관계로 일단 가까운 상미겔 섬의 조앙 파울루 2세 공항으로 먼저 이동합니다. 그곳에 가시면 산타마리아까지 모실 운송수단이 준비되어 있을 겁니다. 따라 오십시오.” 준상과 헤네스는 윌킨슨과 딜런의 안내를 받아 특별히 준비된 수송기에 몸을 실었다. “...” 헤네스는 회색으로 칠해진 C-17 글로브마스터 3의 엄청난 위용에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입만 쩍 벌리고 있었다. 길이만 해도 53미터. 준상이 소유한 가장 큰 소환물인 익룡만 해도 저런 엄청난 것이 과연 하늘을 날 수 있을까 하는 심정이었던 그녀로서는 이런 엄청난 물건이 과연 하늘을 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나마 헬멧을 쓰고 바이저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던 탓에 그런 추태를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가자.” 준상이 어깨를 잡고 이끌자 헤네스는 얼른 벌리고 있던 입을 닫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게... 하늘을 날아요?” “그래.” “...” 달랑 두 명만 태우고 가기엔 너무 엄청난 것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드는 건 준상도 마찬가지. 하지만 딱히 자신이 기름 값을 내고 타는 것도 아니니 미국이 무슨 생각으로 이 커다란 수송기를 동원한 것인지는 준상이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준상과 헤네스가 비행기 탑승구에 도달하자 윌킨슨과 딜런은 그들에게 경례를 해보이며 말했다. “그럼, 무운을 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준상은 그저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지만, 그 대신 헤네스가 공손하게 고개를 숙여 그들에게 답례를 했다. 탑승구 안으로 들어가자 널찍한 실내 공간이 눈에 들어온다. 필요할 경우 189명이나 되는 인력을 수송할 수 있는 기체이다 보니, 달랑 둘이서 들어서자 어쩐지 썰렁한 느낌마저 들었다. 게다가 창문 하나 없이 사방이 막힌 공간이다 보니 어쩐지 삭막하기까지 한 느낌이다. 여객기에 비해 나아보이는 것이라는 탁 트인 높은 천장 정도. 가만히 내부를 살피고 있는데, 문득 두 명의 군인이 다가와 그들에게 경례를 해보이며 말했다. “기장인 맥너헌 소령입니다. 산타마리아까지 모시겠습니다.” “잘 부탁드려요.” 맥너헌과 그 옆의 부기장 역시 헤네스의 모습을 보고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검은색 바이크 슈츠를 입고 흰색 방패를 든 모습을 보고 그녀가 누구인지 어렵지 않게 알아챘기 때문이다. “샌디에이고의 영웅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하지만 맥너헌은 그 말 한 마디를 남긴 뒤 다시 경례를 해 보이고는 곧바로 승강구등을 점검하더니 조종실로 향했다. “일단 앉자.” “네.” 군용이라 그런지 로스앤젤레스까지 가는데 이용했던 여객기의 일등석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지만, 헤네스는 난생처음 비행기를 타는 것이 너무나 흥분 되는지 벌써부터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아, 맞다.” 헤네스는 자리에 앉다가 그제서야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여왕님도 부르시는 것이 좋지 않겠어요?” 갑가오리부터 시작해서 탈 것이라면 눈빛부터 달라지는 리체스의 모습이 떠올라 한 말이었지만 준상은 주위를 둘러보며 이렇게 대답했다. “지루해 하지 않을까.” “음...” 하긴 다시 생각해 보니 이렇게 꽉 막힌 공간에서 몇 시간씩이나 버틸 수 있을지 의문이긴 하다. “그래도 안부르면 서운해 하실거에요.” “하긴.” 준상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리체스를 연락을 취한 뒤 역소환과 소환을 거듭하는 방식으로 이곳에 불러들였다. 흰 빛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리체스는 주위를 돌아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긴... 뭐죠?” “비행기래요.” “비행기?” 리체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내 넓은 수송 공간 이곳저곳을 돌아다녔지만, 온통 철제 구조물이 가득한 비행기 내부는 딱히 그녀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우음... 얼마나 걸려요?” 이내 흥미를 잃은 듯 시큰둥한 표정을 지으며 묻는 리체스의 말에 준상은 조용히 대답했다. “많이.” “...” 리체스는 얼굴을 찌푸리더니 다시 말했다. “음... 역시 전 요정계로 가서 연구나 하고 있을래요.” 어차피 자신외에는 돌아가서 다른 일을 해도 상관없는 터라 준상은 바로 허락했다. “편한대로 해.” “감사합니다.” 리체스는 준상의 볼에 입을 맞추고는 곧바로 정령의 문을 통해 요정계로 돌아갔다. 준상은 헤네스에게도 물었다. “헤네스도 돌아가 있어.”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싫어요.” “...” “전 오히려 요새 이것 저것 일이 바빠서 단 둘이 있을 시간이 없었는데 마침 잘 되었다 싶은 걸요.” “그럼 그러든가.” 그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스피커에서 기장인 맥너헌의 음성이 들려왔다. “곧 이륙할 예정이니 안전벨트를 착용해 주십시오. 다시 말씀 드립니다. 곧...” 비행기는 곧이어 천천히 가속하며 마침내 랭글리 공군기지로부터 이륙해 동쪽으로 향했다. 준상과 헤네스가 마침내 아소르스 제도의 상미겔 섬에 도착한 것은 약 6시간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두 사람은 맥너헌 기장의 전송을 받으며 대서양함대로부터 급파된 MV-22B 오스프리로 갈아탔다. 그들은 비행기를 갈아타면서 산타마리아 섬 상공에서 촬영한 사진과 함께 현재의 상황을 보고 받았다. “현재 섬은 완전히 불타버린 상황입니다. 이 사진을 보십시오.” 준상은 항공기로부터 촬영된 마수의 사진을 보자 곧바로 하나의 단어가 떠올랐다. “투구게?” 생명체라기 보다는 원반형의 UFO를 연상시키는 둥글고 넓적한 외형은 사진 등에서 보았던 투구게와 매우 유사했다. 차이가 있다면 꼬리가 투구게처럼 길고 곧은 형태가 아니라, 전갈처럼 앞으로 휘어져 있는 형태라는 정도. “저 휘어진 꼬리에서 화염을 뿜어내는데, 이것이 거의 화염 방사기에 버금가는 위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정확한 원리는 알 수 없지만, 현대 무기라도 직격당하면 상당히 위험할 수 있다고 정보 분석팀은 판단하고 있습니다.” 준상은 다시 물었다. “방어력은?” “500파운드의 마크 82로 폭격을 시도해 보았습니다만, 전혀 효과가 없었습니다.” 항공 폭탄은 지근탄의 폭압 만으로도 전차 정도는 간단히 파괴할 수 있을 정도의 위력을 지니고 있다. 그런 폭탄을 얻어맞아도 끄떡없다는 것은 이전에 샌디에이고에 나타났던 마수 바스반 잔과 방어력에서 거의 동등한 수준이라는 의미가 된다. “확인된 개체는?” “총 세 마리입니다. 모두 섬 북동부의 산타바바라 인근에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흠...” 그렇게 현장 상황을 보고 받으며 이동하던 준상은 마침내 산타마리아섬의 유일한 공항인 빌라 도 포토 공항에 도착했다. 활주로를 제외하면 성한 건물이 하나도 없는 상황이었지만, 오스프리는 두 사람을 안전하게 내려준 다음 급히 호위기의 인도를 받으며 상공에서 물러났다. 준상은 미군과의 통신을 위해 건네받은 통신기와 지도를 다시 한 번 확인한 다음, 곧바로 리체스에게 연락을 넣었다. “목적지에 도착했다.” “아! 잠시만요. 바로 갈게요.” 리체스는 잠시 시간이 지나자 정령의 문을 통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으음... 이건.” 그녀는 곧바로 눈에 들어오는 불탄 잔해를 보고는 얼굴을 찌푸리다가 얼른 준상의 어깨 위에 자리를 잡았다. 준상은 다시 지도와 미니맵을 비교해서 앞서 전달받은 마수의 위치를 확인한 다음 갑가오리를 소환했다. 섬을 가로질러 비행하던 준상은 얼마 지나지 않아 세 마리의 거대한 투구게를 발견할 수 있었다. 바스반 잔이 마치 요새와 같은 느낌이라면, 이 놈들은 그야말로 살아 움직이는 전차. 둥글고 넓적한 껍데기 위로 전갈의 그것처럼 솟아오른 꼬리에서는 연신 불길이 넘실거리며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준상은 우선 통찰의 능력으로 마수의 능력을 확인했다. 방어력은 놀랍게도 붉은 빛을 띄는 노란색. 이것은 마수 바스반 잔과 동급임을 뜻하며, 다시 말해 일반적인 수단으로는 저 껍데기를 잘라내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의미도 된다. 그에 반해 공격력은 녹색, 특수 능력은 노란색에 가까운 밝은 녹색이었다. 어디서 이런 놈들만 기어 나오는 것인지. 준상은 잠시 지켜보다가 갑가오리에서 내려서며 헤네스와 리체스를 향해 말했다. “시작하자.” “네!” 헤네스는 바로 대답했지만, 리체스는 준상의 옆 얼굴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화들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왜?” 준상이 묻자 리체스는 뭔가 석연치 않다는 듯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저기... 지금 이런 말씀 드려도 괜찮을지 모르겠는데...” “뭐지?” 리체스는 아무래도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다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머뭇거리며 말을 이었다. “제가 요새 시드를 연구하잖아요.” “그랬지.” 리체스는 준상의 어깨에서 날아올라 준상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있는 것 같아요.” “뭐가?” “시드요.” “...”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준상을 향해 리체스는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준상씨 머리에도, 시드가 있는 것 같아요.” “...” 당사자인 준상은 물론이고, 옆에서 무슨 일인가 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던 헤네스마저도 잠시 말문을 잃었다. “그게... 무슨 말이죠?” 리체스는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 헤네스를 잠시 조심스럽게 바라보더니 다시 대답했다. “안심해. 너한테서는 느껴지지 않아.” 하지만 헤네스는 고개를 저으며 다시 물었다. “그게 아니라요. 준상씨 머리 속에 그 시드란 것이 들어있다는 얘기 말이에요.” 리체스는 착잡한 표정으로 다시 준상을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 “시드를 연구해 보니 그 안에서 묘한 파동 같은 것이 흘러나오는 것을 알 수 있었어요. 이것이 혹시 각각의 시드가 지닌 힘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해서 시드의 파동을 탐지하는 마법을 개발했거든요. 한참 연구하는 중에 부르셔서 깜빡 잊고 마법을 해제 하지 않은 상태로 도착했는데...” “확실한가?” 굳은 표정으로 묻는 준상을 향해 리체스는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해요. 제 이름을 걸어도 좋아요.” “...” 준상은 그 말을 듣고 머리 속이 복잡해졌다. 느닷없이 이게 무슨 말인지. 리체스가 이런 상황에서 허튼 소리를 할 이유가 없다. 전투 직전임에도 불구하고 바로 얘기를 꺼냈다는 것은 그녀 역시 당황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미처 준상이 복잡해진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멀리서 마치 뱃고동이 울려 퍼지는 듯한 낮은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부우우우우웅! 그것은 다름 아닌 투구게의 울음소리였다.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존재를 알아차린 것이다. “아차.” 준상은 자신들을 향해 마치 전차처럼 돌진해 오는 세 마리의 투구 게를 보며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자세한 얘기는 전투가 끝난 후에 다시 하자.” “네!” 준상의 말에 헤네스는 곧바로 눈을 감고 자신의 의식 속에 숨어 있는 기안을 불러 일으켰고, 리체스는 준상의 어깨 위에 다시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전투가 시작되었다. ============================ 작품 후기 ============================ 예약 시간을 잘못 설정해서 이제야;; 쿨럭; 00284 트롤러 ========================================================================= “기안!” 준상이 부르자 기안은 방패를 내밀며 앞으로 나섰다. “왜 안 부르나 싶어서 근질근질하던 참이었다고!” 그녀가 앞으로 나서자 세 마리의 투구게는 기다렸다는 듯이 꼬리로부터 불을 뿜어냈다. 아니, 그것은 정확히 말하자면 불이 아닌 불붙은 액체였다. 화염 방사기 비슷하다고 표현한 것은 이런 의미였나. “으익!” 그 액체는 공기와 맞닿는 순간 격렬하게 화염을 일으키는 효과를 가지고 있었는데, 마치 네이팜처럼 끈적하기까지 해서 일단 신체에 묻기라도 하면 치명적인 부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물론 준상과 헤네스, 그리고 리체스는 화염 저항 시드를 미리 충분히 장착한 상태이긴 했지만, 그래도 호흡기 같은 곳에 들어가 몸 안에서 불타오르면 어찌 될지 시험하고 싶은 인원은 여기에 아무도 없었다. “에잇!” 펄쩍 뛰며 피하는 기안 대신 리체스가 방어 마법을 발동해 투구게의 화염액을 막아냈다. 철퍽거리며 방어벽 밖으로 흘러내리는 화염액을 보며 준상은 어둠의 정령을 연속으로 소환해 징검다리처럼 배치하고는 연속해서 위상전이를 펼쳤다. 곧장 투구게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린 준상은 인벤토리에서 랑다잘의 분노를 꺼내 손에 쥐고는 그것을 곧장 아래로 집어 던졌다. 하지만, 퉁! +10까지 강화된 랑다잘의 분노는 어이없을 정도로 간단하게 튕겨 나가고 말았다. 투구게의 껍질은 커다란 철구에 직격당하는 순간 마치 고무공처럼 우그러졌다가 바로 원상태로 회복되어 버렸다. 재생력이라기 보다는 형태 복원이라는 말이 어울릴 듯한 느낌. 준상은 투구게의 꼬리가 자신을 향하는 것을 보고는 다시 위상전이를 펼쳐 몸을 피했다. “으랴아아아아!” 리체스 덕분에 화염액을 피해낸 기안은 방패를 앞세운 채 미늘창을 치켜 들고 투구게를 향해 웨펀차지를 발동했다. 아무리 좋게 봐줘도 떨어지는 바위 덩어리를 향해 엉덩이를 치켜드는 쇠똥구리 이상의 무모함 밖에는 느껴지지 않는 모습. “저 돌격 바보가!” 리체스는 혀를 차며 뭔가 마법이라도 걸어주려 했지만, 그녀가 뭔가 손을 쓸 틈도 없이 기안은 곧바로 투구게와 맹렬한 속도로 충돌했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맹렬하게 부딪혀 간 것은 기안 뿐이고 투구게는 몸을 숙여 지면에 껍질을 밀착시키며 완만한 경사면으로 그녀를 받아 넘겼다. 텅! “에?” 몸이 뒤집히며 허공으로 떠오른 기안을 향해 투구게의 꼬리가 채찍처럼 날아들었다. 공중에 뜬 상태라 피할 방법이 없던 기안은 방패로 그 일격을 막아내는 수밖에 없었다. “큭!” 기안은 결국 배트에 맞은 야구공처럼 날아가 버릴 수밖에 없었다. “헤네스!” 리체스는 헤네스의 이름을 부르고는 뒤늦게나마 마법을 발동했다. “백은의 창이여! 날아들어 나의 적을 찔러라!” 그녀의 마법 주문이 울려퍼지자 마치 거대한 창과도 같은 얼음 기둥이 허공에 맺히더니 기안을 쫓아가려고 제자리에서 방향을 트는 투구게를 향해 날아들었다. 콰드득! 격렬한 소음과 함께 투구게의 등판에 격돌한 얼음의 창은 곧바로 사방에 파편을 뿌리며 부서지고 말았다. 이번에도 투구게의 등판은 잠시 음푹 들어갔다가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으나, 그 짧은 시간동안 기안은 다시 자세를 잡을 수 있었다. “잘도... 나를 집어 던졌겠다!” 기안은 이를 부득 갈고는 다시 창과 방패를 고쳐 잡았다. 바로 그때. 또 다른 투구게 한 마리가 리체스를 포착하고는 빠르게 다가왔다. “앗!” 기안의 상태를 살피다가 미처 그것을 포착하지 못한 리체스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방어막을 펼치려 했다. 그러나 그녀가 방어막의 주문을 입으로 말하려는 순간 눈앞에 넓은 등을 망토로 감싼 남자의 뒷모습이 나타났다. 그것은 바로 준상이었다. 준상은 어느틈엔가 랑다잘의 분노 대신 블러드서커를 손에 쥔 상태였는데, 리체스를 향해 달려오는 투구게를 향해 자세를 낮추더니 마치 골프를 치는 듯한 동작으로 그것을 휘둘렀다. 퍽! 달리 기술을 쓴 것도 아니다. 그저 자신이 지닌 근력과 폭혈의 힘을 합쳐 그대로 휘둘렀을 뿐. 허나 온몸에 갑주를 두른 채 전차처럼 달려들던 투구게는 그대로 몸이 뒤집히며 허공으로 떠오르고 말았다. 기안의 경우와는 다르게 압도적인 크기를 자랑하는 놈이라 그런지 일순 리체스는 자신의 주위가 어두워지는 것을 느꼈다. “아...” 리체스는 똑똑히 보았다. 투구게의 껍질 안에 숨어 있는 갑각류의 그것을 닮은 열 개의 다리가 버둥거리는 모습을. 마치 정지 화면처럼 그녀의 시각에 그 모습이 비치는 순간 준상은 치켜든 도끼를 고쳐 잡았고, 그 순간 투구게는 그들의 머리 위를 넘어 땅 바닥에 처박히고 말았다. “리체스, 견제를 부탁한다.” “네!” 리체스는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진 그 압도적인 광경에 잠시 멍해 있다가 준상의 말을 듣고는 자신들을 향해 달려드는 투구게를 향해 마법을 펼쳤다. 그녀가 발동한 마법은 다름 아닌 회오리 바람. 거대한 회오리 바람은 넓적한 그릇을 뒤집어 놓은 듯한 투구게의 아래쪽에 힘을 가해서 그 몸을 들어올렸다. 리체스가 마법을 펼치는 동안 준상은 몸이 뒤집혀진 투구게를 향해 다가서며 블러드서커를 든 채 강타를 발동시켰다. 1초, 그리고 2초. 하지만 그가 미처 힘을 다 모으기도 전에 투구게는 꼬리를 맹렬하게 떨치더니 뒤집어져 있던 몸을 원래대로 되돌렸다. “칫!” 준상은 완전히 모이지 않은 힘을 투구게를 향해 뿜어냈으나 투구게는 자신의 등껍질로 가볍게 그 공격을 튕겨내 버리고 말았다. “짜증나는군.” 몸이 뒤집히면 스스로는 절대 원래대로 돌아오지 못하는 투구게의 약점을 떠올리고 그와 같은 공격을 펼쳤으나 이놈은 꼬리가 휘어진 탓에 자력으로 몸을 다시 뒤집는 것이 가능한 모양이었다. 혀를 차는 준상의 눈에 리체스가 회오리를 이용해 투구게를 감아올리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겉껍질의 형태 때문인지, 투구게는 그 강력한 회오리의 힘을 견뎌내지 못한 채 공중에서 마구 뒤집히며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방법이 있었군.” 준상은 곧바로 엘리를 소환한 다음 회오리바람의 정령인 용오름을 합체시켰다. 용오름 혼자서는 리체스의 마법과 같은 힘을 발휘하기 어렵겠지만, 엘리의 정령 증폭 능력이라면 충분히 비슷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 터. “엘리!” 자신을 향해 화염액을 뿌려대는 투구게의 공격을 피하며 준상이 외치자 엘리는 강력한 회오리바람을 일으켰다. 투구게는 다리와 꼬리를 버둥거리며 저항했지만, 곧바로 몸이 뒤집히며 하늘로 떠올랐고, 그런 놈의 눈앞에 준상이 위상전이를 펼쳐 날아들었다. “후우...” 준상은 곧바로 강타를 발동하고는 5초 동안 힘을 모은 뒤 배를 드러낸채 다리를 버둥거리는 투구게를 향해 그 힘을 뿜어냈다. 번쩍! 다리가 붙어 있는 껍질 부분에 흰 섬광이 번쩍이더니 이내 푸른 체액이 퍽 하고 튀어올랐다. 준상은 피할 겨를도 없이 투구게의 체액을 뒤집어 써야만 했다. 마치 형광액을 바른 듯 푸르게 빛나는 체액을 뒤집어 쓴 준상은 혀를 차며 엘리에게 회오리 바람을 멈추게 한 다음, 바닥으로 굴러 떨어져 버둥 거리는 투구게의 속살에 다시 한번 도끼를 내리쳐 그 생명을 완전히 끊어 버렸다. “후우...” 블러드서커를 사용해서 강타를 발동한 후유증으로 준상의 몸은 흰 연기를 줄기줄기 뿜어내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헤네스나 리체스로부터 체력 회복을 도움 받아야 했겠지만, 지금은 둘 다 각자 자신 몫의 투구게를 상대하는 도중이라 그럴 여유가 없었다. “밤톨.” 그래서 준상은 밤톨이를 소환해서 자신의 회복을 돕도록 했다. 밤톨은 회복 마법과 더불어 힐링 포션을 함께 사용해 준상의 생명력을 회복시켰다. “잘했다.” 준상은 체력이 회복되자 엘리를 기안이 상대하고 있는 투구게에게로 날려 보낸다음, 리체스가 잡아두고 있는 놈을 향해 위상전이를 펼쳤다. 공략 방법을 알아낸 알아낸 이상 투구게는 더 이상 준상의 적이 되지 못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조리 푸른 체액을 뿜어내며 쓰러져 버렸다. “후우...” “수고하셨어요.” 별로 활약을 못했다면서 투덜거리던 기안과 다시 교체한 헤네스가 언제 챙겨 두었는지 캐비닛에서 음료수를 꺼내어 준상에게 건네주었다. “어? 그거 뭐야?” “드실래요? 많이 있어요.” 마셔 보니 처음 마셔보는 종류의 음료였다. “이건?” “아... 어머니께서 챙겨주신 거에요. 피로 회복에 좋다면서.” “그랬군.” 준상은 몽몽이가 마수들의 사체를 헤집으며 시드를 캐는 장면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곧바로 전투가 이어지는 바람에 생각을 이어가지는 못했지만, 리체스의 말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준상은 가만히 손을 들어 관자놀이를 어루만졌다.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은 두 가지. 자신의 머리 속에만 시드가 있을 가능성이 그 첫 번째이고, 다른 모든 귀환자들의 머리 속에 그런 식으로 시드가 숨겨져 있을 가능성이 두 번째이다. 아직 제대로 확인한 것은 아니지만, 준상은 자신만 특별하게 시드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근거는, 다름 아닌 자신은 물론이고 몽몽이의 안목 능력으로도 그런 식으로 시드가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점이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자신의 머리 속에 들어있는 시드를 스스로 알아보려면 거울로 비춰봤을 때도 안목의 능력이 발동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그것은 불가능한 일. 하지만 몽몽이라면 어떨까. 몽몽이가 지닌 안목 레벨은 무려 29. 이 수치는 자신의 레벨에 거의 근접한 높은 수치다. 그런 몽몽이조차 이 시드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사실은, 다시 말해 시스템이 의도적으로 은폐해 두었다는 얘기 밖에 되지 않는다. 그리고 시스템적으로 은폐가 된 것이라면 준상이든 몽몽이든 다른 귀환자들의 시드를 알아채지 못한 것도 당연한 일. “음...”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무엇 때문에 귀환자들의 머리 속에 숨겨진 시드를 은폐한 것일까. 그 때 준상의 머리 속에 다시 한 단어가 떠올랐다. 그것은 바로 수확의 날. 다크 시드 사용자들에게서 알아낸 그 말의 대상을 준상은 지금까지 보통의 인간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인간을 먹이로 삼는 그들의 행태로 인해 수확의 대상 역시 당연히 인간일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상황과 연관지어 생각해 보니 그것은 틀린 생각이었다. 애초에, 단순히 보통의 인간을 수확할 생각이라면 굳이 이런 식으로 때를 기다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귀환자들이 더 큰 힘을 지니기 전에, 그들이 수확에 나선다면 현대 문명의 힘으로는 그것을 막아낼 수 없을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놈들이 수확의 날을 기다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간단하다. 아직 수확할 대상이 완전히 여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귀환자의 머리 속에 시드를 심어 그것이 충분히 여물기를 기다리는 것이라면, 그들이 수확의 날을 기다리고 있는 이유도 충분히 설명이 된다. 수확의 대상은 처음부터 보통의 인간이 아니라, 시드를 머리 속에 담은 귀환자로만 한정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친다면 일반인과 귀환자는 머리 속에 시드를 보유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로 구분되고, 이것은 다시 말해 카드 시스템으로 대표되는 여러 능력의 근원이 바로 머리 속의 시드라는 뜻도 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준상이 고대 유물이라는 이름 아래 획득한 장치의 이름은 휴대용 인터페이스. 휴대폰과 이 장치의 역할은 그 이름대로 그저 인터페이스에 불과하고, 본체는 바로 머리 속의 시드인 것이 아닐까. “아니... 잠깐.” 준상은 거기까지 생각을 이어가다가 자신이 뭔가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무엇일까.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그 무언가를 떠올리기 위해 눈을 지그시 감으려 하는 그의 앞에 푸른 피를 잔뜩 뒤집어 쓴 몽몽이가 다가왔다. 어느새 시드 수거를 모두 마친 모양이다. 준상은 습관적으로 물의 정령을 불러 녀석의 몸에 묻은 체액을 닦아주다가 그 너머에 비치는 마수의 시체를 보고서야 자신이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렸다. “시체...” 그렇다. 바로 시체가 문제였다. 숲의 정화 퀘스트에서 준상은 같은 귀환자의 시체를 처음 보았다. 잠을 자다 소환되어 봉변을 당한 그녀는 좀비들에 의해 내장이 뜯겨져 죽임을 당하자 이내 한줄기 빛과 함께 사라졌었다. 지금까지 귀환자의 머리 속에 시드가 숨겨져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지 않은 이유. 그것은 바로 귀환자들의 시체를 찾을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처음부터 그런 용도였나.” 튜토리얼 수행 전에 정신을 잃고 있었던 이유 역시 시드 이식을 위한 단계이고, 죽음과 동시에 시체가 어딘가로 전송되는 이유 또한 시드의 수거를 위해서라고 보면 모든 것이 아귀가 딱 들어맞는다. 준상은 몽몽이가 내놓은 세 개의 시드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게... 도대체 무엇이기에.” 게다가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수확의 날이라는 단어를 입 밖에 낸 것은 다름 아닌 다크 시드 사용자. 하지만 편의상 시스템이라 자신이 칭하고 있는 이 퀘스트의 주재자는 그런 다크 시드 사용자들을 제재하라는 퀘스트를 공공연히 내고 있었다. 연막전술이라고 하기에는 아귀가 맞지 않는 일. 다크 시드 사용자는 시드의 수확을 놓고 시스템과 경합을 벌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주인님.” 그때 리체스가 다가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면 리체스의 존재도 마음에 걸린다. 만약 그녀가 없었더라면, 준상은 수확의 날이 되어서야 자신의 머리 속에 시드가 있고 그것이 수확의 대상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모르긴 해도 시스템이라면 그녀가 그 정도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을터. 이것은 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일일까. 우연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공교롭다. 그녀의 존재 자체가 무언가를 위한 안배라면? 준상은 이런 저런 생각으로 머리가 다시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후...” 준상은 가볍게 한숨을 몰아쉬며 자리에서 일어나 투구게들의 사체를 챙긴 후 인벤토리에 넣어두었던 통신기를 꺼내 대기하고 있는 미군들에게 연락을 취하고는 곧이어 딜런에게 임무가 완료되었음을 알렸다. 연락을 마친 준상은 자신을 걱정스런 눈으로 지켜보고 있는 두 반려를 향해 말했다. “일단... 돌아가자.” “네.” 00285 트롤러 ========================================================================= 신기루 꽃으로 돌아온 준상은 일단 몸에 묻은 투구게의 체액을 씻기 위해 목욕을 한 다음 최상층에 마련된 평상에 누웠다. 이런 저런 생각을 계속 떠올려 보았지만, 결국 그 모든 생각들은 하나의 결론으로 귀결되었다. 지구라는 행성 자체가 누군가의 농장으로 전락해 버렸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문제의 핵심은 바로 시드. 어찌 보면 이 모든 일은 자신이 귀환자들로부터 시드를 사모아 그것을 통해 능력을 강화했던 것과 같은 종류의 일일 수도 있다. 차이가 있다면, 저들은 처음부터 씨앗을 적당한 자의 머리 속에 심어 놓고 그것이 익기를 기다려 수확한다는 정도. 그렇게 생각해 보면 다크 시드 사용자들의 행동을 제한하고 있던 금기가 무엇인지도 어렵지 않게 추측이 가능하다. 시간이 지나면 충분히 익어 먹음직스럽게 변할 작물들을 심어 놓은 밭.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제대로 성장하기도 전에 밭을 짓밟는 것은 씨앗을 심은 뒤 수확을 기다리고 있는 자들에게 있어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금기가 아니겠는가. 물론 이런 결실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다크 시드 사용자들 가운데서도 최상층에 속하는, 이를테면 칠성좌라는 우스꽝스러운 이름을 가진 자들 뿐이라고 봐야 한다. 지금까지 준상이 처리했던 다크 시드 사용자들은, 수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조차 모르는 일개 하수인일 뿐이라고 생각하면 어렵지 않게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 “후...” 준상은 답답한 마음에 눈을 감았다. 하지만 그렇게 눈을 감아도 생각은 끊임없이 떠올라 그를 괴롭힌다. 처음부터 수확이 예정된 상태로 시드가 이식된 것이라면, 아무리 레벨을 높이고 능력을 강화한다 해도 그 모든 것이 이미 예상 범위 내의 행동인 셈이다. 준상의 독주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제재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그가 지닌 시드의 상품 가치를 훼손할 이유가 없어서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최근 들어 퀘스트가 제한되다가 다른 이들과 파티를 맺은 상태에서는 정상적으로 퀘스트가 진행되었던 것도 이렇게 생각하면 어렵지 않게 그 전모를 파악할 수 있다. 게임이라는 형태의 시스템을 갖추고 있는 이상, 너무 잘 자란다고 솎아내기 보다는 그 개체를 이용해서 다른 개체들의 성장을 돕는 편이 훨씬 더 이득인 것은 달리 생각해 볼 필요도 없을 정도로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멍청하긴.” 하다 못해 좀비들 마저도 머리 속에 시드가 심어져 있는 판인데, 하루 아침에 강력한 힘을 손에 넣고도 자신만은 예외일 것이라 생각했다는 것 자체가 멍청한 일이다. 어쩌면 처음에 시드를 심어 넣을 때부터 은연 중에 자신은 예외일 거라고 생각하도록 조치가 취해졌을 가능성도 부정할 수 없다. 아니. 그것만이 아니다. 끊임없이 강해지고자 노력했던 일 자체가 머리 속에 박혀 있는 이 시드의 영향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것은 강해질수록 더 좋은 시드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라고 보면 틀림이 없을 것이다. 당장 그가 상대했던 괴물들이나 마수를 보더라도 강할수록 더 높은 등급과 더 뛰어난 효과를 지닌 시드들을 품고 있지 않았던가. “젠장.” 생각 같아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머리 속에 들어 있는 이 시드라는 놈을 파내 버리고 싶다. 그러나 시스템이 바보가 아닌 이상 간단하게 외과 수술등의 방법으로 꺼내는 것이 가능하도록 방치해 두었으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두뇌는 인체의 여러 장기 중에서도 가장 민감한 곳. 하다 못해 머리 속의 시드가 작은 충격만 가해도 준상은 의식을 잃거나 그대로 식물인간이 되어 버릴 수도 있었다. 그야말로 머리 속에 든 시한 폭탄이나 다름 없는 상황. 아무리 준상이라도 암담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후우...” 결국 나오느니 한숨 뿐. 바로 그때, 목욕을 마친 헤네스와 리체스가 그의 곁으로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 준상은 눈을 뜨고는 말없이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리체스가 가만히 그의 곁에 다가와 앉으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안색이 안 좋아요.” “그런가.” 지금껏 고생했던 일 자체가 누군가의 손바닥에 놀아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건 아무래도 즐거운 일이 아니다. “역시... 그 시드 때문인가요.” “...” 헤네스의 말에 준상은 말없이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이야 그냥 원래 팔자가 그런가보다 생각하면 그 뿐일 수도 있지만, 헤네스나 리체스는 무슨 죄란 말인가. 게다가 지금껏 저질러 놓은 일을 생각해 보면, 만약 그녀들의 본래의 생활로 돌아가게 되더라도 그 여파가 작지는 않을 터. 준상은 이런 저런 일로 다시 머리 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리체스가 다시 말했다. “주인님.” “응.” “제가 연구를 계속 해볼테니 너무 걱정마세요.” “...” 리체스가 그렇게 말하며 준상의 손을 맞잡자, 헤네스 역시 그 위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저도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최선을 다할게요.” 준상은 두 반려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 가능성이 그리 높아 보이지는 않지만, 시드의 존재를 파악해낸 리체스라면 뭔가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녀는 지금도 펫이라는 형태로 시스템에 의해 구속된 상태. 그럴 생각이 있다면 풀 수도 있을 것 같다고 말하고는 있지만, 어찌되었든 그것은 리체스보다 시스템 쪽의 능력이 더 윗줄에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설령 머리 속의 시드를 뽑아내거나, 시드에 들어 있을지도 모르는 부정적인 요소들을 파훼할 수 있다 치더라도, 그와 같은 행동을 시스템이 과연 용납할지는 역시 미지수. 준상이 지닌 능력의 대부분이 시스템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만 보더라도 제재가 이루어질 경우 그것을 막아낼 능력은 매우 희박할 수밖에 없다. 물론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의 주변에는 시스템의 범위에서 벗어난 능력을 수련하는 사람이 제법 많다. 얀트훈센에 바글거리는 광전사들만 해도 시스템과는 무관하게 광폭과 재생이라는 두 가지 능력을 보유하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리체스는 스스로 마법을 익혀 반신급에 이르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진세아와 정다빈에게 그것을 가르치고 있다. 뿐인가. 서유미는 기안으로부터 성녀의 힘을 전해 받고 있고, 앞서의 사람들에 비해 능력이 약하기는 하지만 어느새 이름조차 까먹은 그 기사 왕녀 또한 특수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문제는 그 능력의 습득에 걸리는 노력과 시간이 퀘스트를 통한 능력의 강화보다 몇 배는 힘들고 느리다는 점. 게다가 일반적인 인간을 넘어서는 초월적인 능력을 얻을 수 있다는 보장도 전무하다. 반신급의 경지에 이른 리체스가 있기는 하지만, 그녀가 그와 같은 실력을 쌓는데 걸린 시간은 무려 일만년. 그나마도 그녀가 일만년 이후의 햇수를 세는 것을 그만둬서 그렇게 부르는 것이지 실제로는 그보다 더 긴 시간인지도 모른다. 설령 일만년의 시간을 들여 리체스와 같은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 하더라도, 수확의 날이 다가오고 있는 상황에서는 그처럼 느긋하게 수련을 이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후... 일단 퀘스트부터 마무리 짓고 오자.” “네.” 준상은 헤네스와 리체스를 데리고 윌킨슨과 딜런을 만나 퀘스트를 마무리 짓고 보상을 수령했다. “일단 투구게의 사체 가운데 하나는 미국 쪽에 넘기는 것으로 하지.” 전부가 아니라 하나 뿐이라는 말에 딜런은 조금 아쉬운 표정이었지만, 윌킨슨은 그나마도 감지덕지라는 듯이 감사의 뜻을 표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나야말로.” 준상은 그들과 인사를 나누다가 어깨 위에 자리를 잡은 리체스에게 조용히 물었다. “어때.” 리체스는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찬가지에요.” “역시 그런가.” 혹시나 싶어서 리체스에게 확인을 부탁했지만, 예상대로 윌킨슨과 딜런 역시 머리 속에 시드를 품고 있었다. 강해지기 위해 쉴 새 없이 앞으로만 달려오던 준상으로서는 허망함마저 느껴질 정도의 상황. 시드의 연구야 리체스에게 일임한다 치더라도, 만약의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서는 시스템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그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이 선결과제였다. 골똘히 생각에 잠긴 채 신기루 꽃으로 돌아와 방법을 모색하고 있기를 사흘. 갑자기 딜런과 서윤으로부터 동시에 연락이 들어왔다. 준상은 우선 서윤의 연락부터 받았다. “무슨 일이지?” 그러자 서윤의 다급한 목소리가 전해져 왔다. “또다시 사람들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 딜런으로부터의 연락도 마찬가지로 대규모 실종이 일어났다는 내용이었다. 이로써 벌써 세 번째. 하지만 최근에는 어둠의 군세와의 전투처럼 귀환자들 가운데 대규모 사상자가 발생한 일이 없다. 이것은 실종자의 발생이 단순히 귀환자의 수를 적정수준으로 유지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때가 되었으니 씨를 뿌린다 이건가.” 준상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하긴, 그렇게 생각해 보면 지구 만큼 시드의 수확에 적합한 곳도 없다. 인구만도 70억이 넘어섰으니, 한 번에 수만명씩 시드를 파종하고 수확한다 치더라도 바다에서 물 한 바가지 퍼낸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세 번째로 씨가 뿌려졌으니, 처음 시드가 뿌려진 자들 가운데 몇몇은 이미 수확의 대상으로 정해졌을 수도 있다. 만약 그렇다면, 일 순위는 두 말할 것도 없이 준상일 수밖에 없다. “역시 그 수밖에 없나.” 준상은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곧바로 요정계로 향한 그는 한창 시드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리체스에게 물었다. “정령계로 내려갈 수 있는 방법이 있나?” “네?” 리체스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그게 무슨...” 그 말에 준상은 굳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힘이 필요하다.” “...” 광전사의 힘도, 마법도, 성녀의 힘이나 그 외의 다른 힘도, 시스템에 대항할 정도의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너무 긴 시간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단 하나, 그런 식으로 수련의 시간과 무관하게 강해질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정령의 힘. 얼음의 대정령이 그 몸에 깃들어 버린 이벨라 하란두르가 바로 그런 예에 해당한다. 비록 정령에 의해 의식이 침식당해 이성을 잃은 상태이긴 하지만, 달리 수련을 쌓지 않은 상태로도 만년 동안 마법을 수련한 리체스에 버금가는 능력을 지니고 있지 않은가. 만약 준상이 그처럼 정령을 몸 안에 품고 그 능력을 증폭할 수 있게 된다면, 시스템의 힘을 빌지 않고서도 충분한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리체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별로 추천 드릴 수가 없네요.” “어째서?” 리체스는 차분한 표정으로 준상을 향해 말했다. “과거에도 몇 번 그런 식으로 정령의 힘을 얻기 위해 정령계로 내려간 사람들이 있어요. 하지만 그들은 대부분 실패했죠. 단순히 실패만 하면 다행이지만, 그 결과는 결코 가볍지 않아요. 정령계의 힘에 침식되어 존재 자체가 그대로 휩쓸려 사라지거나, 정령에게 몸을 빼앗긴 채 의식을 잃고 정령계의 일원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에요.” “...” 리체스는 가만히 준상의 손을 어루만지며 말을 이었다. “마음이 급하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조금만 저를 믿고 기다려 주세요. 제가 어떻게든 그것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방법을 찾을테니까요.” 정령에 의해 의식이 침식되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이벨라의 예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준상은 고개를 저었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현재 나는 시스템의 힘을 통해 막대한 힘을 얻은 상태다. 언젠가는 이것으로부터 벗어나야 할테지만, 지금이라면 이것을 활용하는 일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은데.” “...” 확실히 그것은 준상의 말대로였다. 꺼림직하기는 하지만, 굳이 현재 지니고 있는 모든 힘을 부정할 이유는 없는 일. 활용할 수 있는 것이라면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 옳다. 설령 그것이 자신의 목을 죄는 족쇄라 할 지라도. 보통 사람이라면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강력한 정령 증폭 능력으로 강화된 얼음의 대정령이 뿜어내는 힘조차 감당할 수 있는 준상이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일이다. 결국 리체스는 무겁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미 마음을 정하셨군요.” “...” 준상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리체스는 조금은 슬퍼 보이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말했다. “알았어요. 하지만... 너무 무리는 하지 마세요.” “그래.” 준상은 리체스의 허락을 받자 정령계로 내려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 와중에도 세상은 급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처음처럼 강력한 마수의 등장은 멎었지만, 세계 각지에서 좀비들을 비롯한 어둠의 군세가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준상은 자신이 자리를 비웠을 때를 대비해 여러 가지 안배를 시작했고, 그 모든 것이 끝나자 마침내 정령계로 향하는 문 앞으로 나섰다. “뒤를 부탁한다.” 그 말과 함께 헤네스와 리체스를 한번씩 품에 안은 준상은 가만히 심호흡을 하고는 문 안으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꼭... 돌아오세요.” 문 너머로 사라져가는 준상의 뒷모습을 향해 그렇게 중얼거리며 입술을 깨무는 헤네스를 리체스는 가만히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준상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서도 한참이나 정령계로 통하는 문을 바라보고 있던 리체스는 가만히 헤네스의 갈색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당분간 이곳에 있을 생각이야.” 그러자 헤네스는 가만히 리체스의 품에서 떨어지며 말했다. “전 얀트훈센 쪽에 주로 있을 거에요. 가끔은 이벨류아나 지구에도 들릴 거구요.” “...” 리체스는 준상의 머리 속에 박혀 있는 시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당분간 외부 출입을 마다한 채 연구에만 전념할 생각이었다. 그에 반해 헤네스는 준상이 벌여놓은 여러 가지 일을 관리하는 일을 맡았다. 얀트훈센의 일을 비롯해서 지구 쪽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연구 성과등을 감독하는 것도 모두 그녀가 맡은 일이었다. “너무 무리하지 말고.” “여왕님도요.” 00286 트롤러 ========================================================================= 일 년 뒤. “후아...” 헤네스는 세차게 거품이 솟아나오는 커다란 욕조 안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아무리 봐도 욕조라기 보다는 실내 풀장에 가까운 느낌이긴 하지만, 어쨌든 욕조라고 만들어서 가져다 놨으니 일단은 욕조라고 부르고 있는 상태. 이 거대한 욕조는 리체스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만, 그녀는 요정계에서 두문불출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지금은 사실상 헤네스 혼자 이 사치스런 욕조를 독차지 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녀는 수건으로 대충 몸에 묻은 물기를 닦아내기 시작했다. 일 년이라는 시간은, 이전에 앳되어 보이던 그녀의 모습을 성숙하고 아름다운 미녀로 바꾸기에 충분했다. 얼굴에 남아 있던 젖살이 대부분 빠진 것부터 시작해서, 몸매도 훨씬 여성스러워졌으며 신장도 커져서 이제는 완연한 숙녀로서의 자태를 갖추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헤네스를 제일 만족스럽게 한 것은 다름 아닌 가슴. 부드럽게 솟아난 그 아름다운 융기는 이제 한 손으로는 완전히 가리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부풀어 올라 있었다. 하지만 전혀 바뀌지 않은 점도 있었다. 이를테면 동글동글하고 귀여운 눈동자라든가, 부드럽게 찰랑거리는 갈색 머리는 여전히 그녀의 외모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매력적인 요소 가운데 하나이다. “후우...” 헤네스는 그렇게 아름답게 성장한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춰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전의 자기 모습을 떠올리면서 어느새 벌써 시간이 이렇게 지났다는 것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헤네스는 천천히 공들여서 로션을 바르고는 가운을 걸치고 욕실에서 나왔다. 준상이 정령계로 들어간 뒤로 신기루 꽃은 이렇게 헤네스가 이따금 목욕을 하러 올 때를 빼고는 거의 비워진 채로 방치되어 있었다. 이전에 리체스와 함께 꾸미다 만 최상층의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헤네스는 다시 한 번 뜻모를 한숨을 가볍게 내쉬고는 가운을 벗고 옷을 갖춰 입기 시작했다. 속옷을 입고 그 위에 흰 블라우스와 청바지를 챙겨 입은 그녀는 검은색의 재킷을 위에 걸치고 다시 굽이 약간 높은 부츠를 신었다. 아버지인 제스터는 이런 그녀의 행색을 그다지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지만, 최근 얀트훈센과 이벨류아에서는 은연중에 그녀와 같은 차림새를 흉내 내는 여자들의 수가 점차 늘어나고 있었다. 헤네스는 거울에 자신의 각선미를 비춰보고는 또다시 작은 한숨을 내쉬다가 화들짝 정신이 들었다. 한숨을 쉬다가 어머니인 유라스에게 혼이 난 것이 며칠 전인데 어느 새인가 다시 버릇처럼 같은 일을 되풀이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이러면 안 돼.” 헤네스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 보이고는 다시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거울을 향해 방긋 방긋 미소 짓는 연습을 하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다시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후우.” 아무리 예뻐지면 뭐하나. 일 년이나 독수공방 신세인 것을. 키가 크고 몸매가 아름다워질 때는 기뻤던 것이 사실이지만, 지금에 와서는 준상이 돌아왔을 때 알아보지 못할까봐 은근히 불안한 것도 사실이었다. 혹시 너무 커버려서 이제는 매력이 없다고 여기는 것이 아닐까 하는 발칙한 상상마저 떠올릴 정도니 말 다한 것 아니겠는가. 하지만 헤네스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준상은 놀러 가 있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지금도 정령계의 혹독한 환경 속에서 악전고투를 벌이고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 헤네스는 거울을 보며 다시 자신을 다잡고는 한켠에 놓여있던 다이어리를 집어 들었다. “오늘은...” 간단하게 오늘의 일정을 확인한 헤네스는 곧바로 석문을 통과해 요정계로 발걸음을 옮겼다. 연구실로 통하는 석문 안으로 들어서자, 책상에 앉아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던 리체스가 그녀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넸다. “헤네스?” “안녕하세요. 리체스 언니.” 일 년이 지나면서 달라진 점이라면 일단 호칭의 변화를 들 수 있었다. 그래봐야 헤네스가 리체스를 부르는 호칭이 여왕님에서 언니로 바뀐 정도지만 말이다. “오랜 만이네. 요새 바쁘다더니.” “그래도 우리 공주님을 보러 오는 날을 빼먹을 수는 없는 일이죠.” 준상이 돌아오면 뒤집어질 만한 사건 하나. 그것은 바로 리체스가 딸을 낳은 일이다. 이전에 리체스는 준상과 관계를 맺으면서 피임을 위한 마법을 개발했다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사실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물론 리체스도 일부러 아이를 가지고 싶어서 그런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었고, 괜히 염려하게 만드는 것이 싫어서 둘러댄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준상이 정령계로 떠나고 몇 달이 지난 뒤, 그녀는 자신이 임신했음을 깨달았다.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그녀는 기쁘게 그와 같은 사실을 받아들였고 다시 몇 달이 지난 뒤 예쁜 딸을 낳았다. 물론 준상에게는 아직 이와 같은 사실을 알리지 않은 상태. 그럴 생각이 있다면, 요정들의 방법을 이용해 준상에게 충분히 소식을 알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리체스는 잠자코 혼자 아이를 낳았다. 요정들은 리체스가 딸을 낳자 모두들 기뻐했고, 준상의 초코바 공세에도 산골짜기에서 버티고 있던 요정들까지 달려 나와 일제히 그녀에게 키스를 건넸다. 자세한 숫자까지는 알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모르긴 해도 준상이 받은 키스 숫자보다 많으면 많았지 적지는 않으리라는 것이 수석 보좌관인 셀라의 추측이었다. 그렇게 수많은 요정 들의 축복을 받은 탓인지 아직 이름조차 지어지지 않은 리체스의 딸은 별 탈 없이 무럭무럭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었다. “어떨 때 보면 나보다 더 엄마 같다니까.” 리체스의 말에 헤네스는 웃으며 대답했다. “잊으셨어요? 우리 공주님이 엄마라고 맨 처음 부른 게 저란 걸.” “으윽... 아픈 과거를.” 헤네스는 리체스와 잠시 얘기를 나눈 뒤 여왕의 침실로 향했다. “아, 헤네스 언니!” 침실에 들어서자 짧은 단발을 한 여자 아이 하나가 달려 나와 헤네스의 품에 안겼다. “잘 있었니. 리시스.” 여왕의 서클릿을 머리에 끼고 있는 이 여자 아이의 이름은 리시스. 이렇게 보면 마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건강한 여자 아이로밖에 보이지 않지만, 그녀의 머리에 씌워진 서클릿은 그녀가 현재 요정계 전체를 통솔하는 여왕의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었다. 물론 본인은 물론이거니와 다른 이들 모두 그것이 그저 명목 상의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말이다. “언니도 잘 지냈어요?” 말 한 마디 못하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이제는 제법 또박 또박 하게 요정들의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 리시스가 염려해 준 덕분에.” 헤네스가 몸을 숙인 채 리시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있는데, 등에 아이를 업고 눈가가 시커멓게 죽어 버린 셀라가 나타났다. “오셨어요...” “마마마마!” 셀라가 헤네스에게 인사를 하기가 무섭게 그녀의 등에 업힌 아기가 헤네스를 향해 큰 소리로 옹알이를 했다. 바로 이 아이가 준상과 리체스의 딸이다. 통통하게 오른 볼살과 동글동글한 두 눈. 하지만 그런 아이의 귀여운 모습과는 정반대로, 눈 아래 마치 먹이라도 칠해 놓은 것처럼 짙은 다크 서클이 끼어 있는 셀라의 모습에 헤네스는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요? 많이 피곤해 보이는데.” 그 말에 셀라는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울먹이며 대답했다. “괜찮다고 하고 싶은데... 그렇질 못해요. 흑...” 아이를 낳은 뒤에도 리체스는 시드의 연구에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덕분에 육아의 고통은 모조리 수석 보좌관 셀라의 몫으로 떠넘겨졌다. 멀쩡한 처녀임에도 불구하고 하루 아침에 육아라는 막중한 임무를 떠맡은 셀라는 리체스에 대한 투철한 충성심으로 무장한 채 이 고귀한 핏줄을 성심성의껏 보살폈다. 하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태어난 지 세 달째에 접어드는 이 귀여운 아이는 누굴 닮았는지 그 원기왕성함이 하늘을 찌를 듯 했고, 한 번 울기라도 하면 그야말로 요정계가 떠나갈 정도였다. 오죽하면 처음에는 예쁘다고 와서 쪽쪽 빨고 난리를 치던 요정들이 요새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을 정도이겠는가. 그나마 또래가 없어서 심심해 하던 리시스라도 이렇게 와서 놀아주니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셀라는 육아의 피로로 인해 벌써 쓰러지고도 남았을 것이다. 헤네스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셀라의 모습에 안되겠다 싶었던지 얼른 말했다. “이리 넘겨주고 일단 좀 쉬어요. 그러다 쓰러지겠어요.” “가, 감사합니다.” 한 달 전만 해도 그럴 수는 없다며 한사코 거절했던 그녀였지만, 지금은 눈물마저 글썽이며 얼른 아이를 헤네스에게 건네준다. 헤네스는 자신에게 아이를 넘겨주고 곧바로 그 자리에 쓰러져 잠을 청하는 셀라의 모습에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 공주님, 나 보고 싶었니?” “아우! 아우!” “엄마 해봐. 엄마.” “아마! 아마!” 처음 리체스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헤네스는 남모르게 가슴이 쓰려오는 것을 억지로 눌러 참아야만 했다. 하지만 리체스의 배가 불러오고 다시 임신으로 인해 고생하는 모습을 보며 한편으로는 벌컥 겁이 나기도 했다. 아름다웠던 몸매가 망가지고 고통 속에서 아이를 낳고는 심하게 부어오른 리체스의 얼굴을 보았을 때는 그 두려움이 극에 달했던 것도 분명한 사실. 하지만 지금 되돌아 생각해 보면 아이를 낳은 것이 자신이 아니라 리체스였던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만약 자신이 리체스처럼 준상도 없는 상황에서 아이를 낳아야 하는 상황이었다면 어땠을까. 적어도 리체스만큼 당당하고 꿋꿋하게 아이를 낳을 수는 없었을 것이고, 정령계로 가있는 준상을 억지로 불러들였을 수도 있고, 그러지는 않더라도 심리적인 불안정을 견디지 못해 아이나 자신의 건강을 해쳤을지도 모른다. 헤네스는 한 나절 동안 아이를 돌보다가 죽은 듯이 쓰러져 자던 셀라가 깨어나 요기를 하고 나서야 다시 그녀에게 아이를 맡기고 얀트훈센으로 향했다. 석문을 통과한 그녀는 탑에 올라 이제는 완전히 옛 모습을 되찾은 얀트훈센의 전경을 바라보았다. 지난 일 년간 얀트훈센은 눈부신 속도로 발전을 거듭했다. 처음에는 고작 천명의 광전사가 인구의 전부였지만, 지금은 각지에서 모여든 광전사들의 가족과 그 친지들을 비롯한 이주민들로 인해 인구만도 벌써 일만명에 육박하고 있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그렇게 몸집이 커진 만큼 얀트훈센을 둘러싼 탐욕의 불길도 점차 거세어 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녀가 탑을 내려오자 성채 안을 오가던 사람들이 일제히 그녀를 알아보고 고개를 숙이고는 바쁘게 움직이며 그녀의 도착을 성채 곳곳에 알리기 시작했다. 헤네스는 우선 성채 안에 마련된 자신의 집무실에 들어가 고작 한나절 만에 다시 수북히 쌓인 서류들을 하나씩 들춰보더니 옅은 한숨과 함께 그것들을 빠르게 처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서류들을 결제와 반려, 보류의 세 단계로 구분해 정리하고 있는데 문득 쿵쾅거리는 발소리와 함께 번들거리는 대머리를 반짝이는 여섯 명의 사내가 그녀의 집무실로 달려 들어왔다. “무슨 일이죠?” 책상에 앉은 채로 헤네스가 묻자, 방 안에 들어온 여섯 명의 사내 들은 일시에 그녀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더니, 이내 그들 가운데 최선임인 도른이 밀납으로 봉해진 서찰 하나를 그녀에게 건넸다. “이건?” “최후통첩입니다.” “...” 최후통첩. 그것은 국가 간의 우호적인 일체의 외교 교섭을 중지하고 최종적인 요구 조건을 내세우고 그것에 불응할 경우 어떤 행동을 취하겠다는 뜻을 밝히는 행위를 말한다. 헤네스는 얼굴을 찌푸리고는 밀납을 떼어내고 서찰을 열어 보았다. 잠시 아무 말 없이 서찰을 읽어보던 헤네스는 피식 웃음을 짓고 말았다. “아무래도... 더는 피할 수 없게 되어 버린 것 같군요.” “그럼...” 헤네스는 읽고 있던 서류들을 한 쪽으로 치워놓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자신을 바라보는 여섯 명의 블러드로드들을 향해 말했다. “이번 만큼은 여러분의 생각이 옳았던 모양입니다.”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 블러드로드들은 주먹을 불끈 쥐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한동안은 대륙을 떨쳐 울리는 준상의 명성과 그를 따르는 광전사들의 이름 덕분에 얀트훈센은 다른 세력들의 시선에 구애받지 않고 재건에 주력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준상의 부재를 어떻게 눈치 챈 것인지 요즘 들어 부쩍 이런 저런 도발이 조금씩 늘기 시작하다가 얼마 전에 있었던 사건을 빌미로 이런 식의 최후통첩을 보내온 것이다. 가급적이면 대화로 일을 해결하고 싶었지만, 이런 터무니없는 서한을 받고도 참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얀트훈센을 넘기고 자신의 여자가 되라니. 사실 지난 몇 달간 헤네스는 무던히도 인내를 하고 있었다. 그 인내의 결과가 고작 이것이란 말인가. 얼마나 우습게 보였으면 이따위 서한을 보내온단 말인가. 헤네스는 손에 든 서한을 책상에 내려 놓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우리의 힘을 보여줄 때가 온 듯 합니다.” “그럼...” “준비하십시오.” 그녀의 말에 블러드로드들은 가슴에 주먹을 가져다 대며 일제히 대답했다. “명을 따릅니다.” 그리고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블러드로드들은 헤네스의 방에서 뛰쳐 나가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전쟁이다! 출진을 준비하라!” 00287 트롤러 ========================================================================= 헤네스로서는 준상이 자리를 비운 상황에서 가급적이면 큰일을 만들고 싶지 않은 마음이 간절했다. 두려워서가 아니다. 자칫 자신이 일을 잘못 일을 벌려서 준상이 그려 놓은 밑그림에 문제라도 생기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위의 세력들은 그런 헤네스의 소극적인 대응을 보고 준상의 신변에 문제가 생긴 것임을 알아차렸다. “역시 나만으로는 힘든 건가.” 따지고 보면 헤네스가 아직 어린 여자란 것도 문제의 빌미가 되었다. 물론 이제는 누가 봐도 소녀라고는 부르기 힘들 정도로 장성한 그녀였지만, 주변 세력을 다스리는 자들이 보기에는 아직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계집애에 불과한 것이 사실이었고, 그녀의 미모와 함께 이곳에서는 보기 드문 파격적인 옷차림 등이 주위에 알려지면서 얀트훈센보다 헤네스라는 여성 자체를 탐 내는 자들도 늘어나고 있었다. 욕심은 이성적인 판단을 가로 막는 가장 큰 적. 그녀를 얻으면 얀트훈센이라는 먹음직한 땅과 함께 광전사라는 강력한 무력까지 손을 넣을 수 있다는 생각에 되어 먹지 않은 놈팽이들이 집적 거리는 일도 많아졌다. 헤네스는 그런 식으로 문제를 일으킨 본인을 두들겨 패서 추방하고 사과를 요구하는 식으로 일을 마무리 지었다. 물론 보통의 경우 이런 대처는 매우 합리적인 해결 방식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전에 준상이 보인 행보가 그런 식의 합리적인 해결 방법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점이다. 준상이라면, 그런 식으로 자기 여자를 집적 거리는 놈들은 그 본인에게 죄를 묻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가문마저도 박살을 내서 다시는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했을 테니 말이다. 욕심은 나도 감히 손을 내뻗지 못하고 있던 주변 세력들은 그것을 보고 의심을 품었다. 혹시, 준상의 신변에 뭔가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닐까 하고 말이다. 헤네스는 그제서야 자신의 미적지근한 대응이 문제를 일으켰음을 깨달았지만 이미 때는 늦은 뒤였고, 결국 이런 터무니없는 최후통첩마저 받게 되고 만 것이다. 어쨌거나. 그녀가 전쟁을 결심하자 지금까지의 미온적인 대응에 불만을 품고 있던 광전사들은 일시에 환호하며 오랜만에 치러지는 전투의 준비에 열광했다. 이주가 시작된 뒤로 각지에 흩어져 있던 자들이 모여들어 현재 얀트훈센이 보유한 광전사의 수는 무려 천 이백 명에 육박하고 있었다. 병사도 아니고 기사 급의 무력을 가진 이가 이 정도로 모여 들었다는 것 자체도 유래 없는 일. 단순히 숫자만 갖춰진 것도 아니다. 그들 모두가 재생의 반지를 지급 받아 장착하고 있으며, 여기에 더해 지구에서 제작된 양산형 방어복까지 갖추고 있었다. 이 방어복은 이곳의 사람들이 보기에는 다소 기묘한 외형을 가지고 있었지만, 일단 착용하게 되면 냉병기로는 뚫는 것이 불가능한 막강한 방어력을 발휘한다. 물론 물리력 자체를 완전히 해소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날붙이가 아닌 철퇴 같은 타격 무기에는 다소 약점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그런 약점을 보완해 주는 것이 바로 재생의 반지. 재생의 반지와 방어복이라는 두 개의 절대적인 장비를 보유한 데다, 여기에 헤네스가 지닌 피와 혼돈의 깃발과 수호의 신물이라는 절대적인 두 개의 아티팩트마저 추가되면 감히 범접할 방법이 없는 최강의 군대나 다름 없었다. 물론 제한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본래 광전사 콤보는 방어구를 착용하지 않은 상태로 전장의 공기를 직접 피부로 느끼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이것은 해당 콤보의 모티브가 된 광전사들 역시 마찬가지여서, 일단 방어구를 착용하게 되면 그들 특유의 능력인 광폭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지닌 바 능력을 넘어서는 초월적인 존재와의 전투가 아닌, 단순히 숫자가 많은 적을 상대로 할 때는 공격을 희생해 방어를 극대화시킨 이런 상태가 오히려 더 큰 도움이 된다. 헤네스가 최후통첩에 대해 강경하게 대응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광전사들의 강력한 무력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얀트훈센이 최후통첩에 불응하고 전쟁을 결의했다는 소식은 그 날이 지나기 전에 주변 세력들에게 전해졌다. “쓸데없는 고집을 피우는군.” 최후통첩을 보낸 장본인인 바르델의 국왕 다스톤은 헤네스가 보내온 정중한 답신을 읽으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바르델은 얀트훈센이 얼음의 대정령의 손에 의해 금역으로 변한 뒤에 들어선 신흥국이다. 그전에 이곳을 지배하던 국가인 렐스타쉬는 얀트훈센을 통해 전해지는 동서교역의 이득으로 나라가 유지되고 있었는데, 하루 아침에 얼음의 대정령에 의해 교역로가 봉쇄되자 급격하게 산업 구조가 붕괴되면서 패망으로 치달았고, 이후 혼란의 시기를 지나 다시 재통일을 통해 성립된 나라가 바로 현존하는 바르델이었다. 바르델은 전대의 렐스타쉬가 동서 대륙의 교역으로 융성했던 기억을 아직 가지고 있는 나라였고, 그만큼 광전사들이 지닌 힘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도발을 할 수 있었던 것에는 신흥국이 지니는 자신만만함 외에도 벨카라스에서 전래된 신무기의 영향이 컸다. 일년전 어둠의 군세가 대륙을 침범했을 때, 이벨류아를 제외한 다른 지역들은 모두 총기를 기본으로 무장한 귀환자들이 주력으로 투입되었다. 총기에 지나치게 의존했던 귀환자들이 당시 위험에 빠진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지만, 이들이 지니고 있던 총기의 위력이 당시 해당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던 것도 사실이다. 각 지역을 방어하기 위한 에픽 퀘스트들은 준상의 개입 덕분에 간신히 성공할 수 있었지만, 이후에 전사한 귀환자들이 소지하고 있던 총기의 일부분은 완전히 회수되지 못한 채 그대로 버려졌다. 이런 과정을 통해 부서지거나 혹은 멀쩡한 총기를 손에 넣은 지배자들은 이 무기들을 복제하기 위해 큰 노력을 기울였다. 물론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단순히 외형을 본뜨는 것부터가 이곳의 기술로는 일단 무리였고, 설령 모양을 복제하는데 성공하더라도 탄환을 날려 보내는 장약을 재현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총기와 함께 습득된 탄환을 사용해 복제 총기를 시험해 보다가 총신이 폭발해서 장인이 사망하는 일까지 벌어지기를 수차례. 자신들의 기술로는 이 총기를 제대로 복제할 수 없음을 깨달은 한 장인의 손에 의해 기본적인 원리만을 흉내 낸 새로운 총기가 만들어졌다. 총신은 철판을 두들겨 감아 만들었고, 튼튼한 약실을 만들 정도의 능력이 없는 터라 필연적으로 전장식이 되었다. 장약은 이전부터 사용되었던 흑색 화약이 사용되었고, 뇌관 대신 화승을 화약에 직접 가져다 대는 방식이 도입되었다. 바로 화승총이 만들어진 것이다. 물론 기반 기술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흉내만으로 만들어진 무기가 제대로 효과를 발휘할 수는 없는 일. 유효 사거리는 고작해야 50보 정도였고, 그나마도 총신과 탄환의 정교함이 너무 떨어져서 명중률이 형편없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어 보이는 무기였지만, 한데 모아서 일제 사격을 가할 경우 튼튼한 갑주로 무장한 중장기병도 어렵지 않게 제압할 수 있었다. 실제로 임진왜란 당시 사용된 조총의 위력도 딱 이 정도 수준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이런 무기라도 외국으로 반출되는 일은 없었겠지만, 몽몽이에 의해 창고가 털린 뒤 벨카라스의 지배자는 그것을 다시 채우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었고, 그런 그에게 있어서 이 성능을 평가하기 애매한 신무기는 아주 좋은 상품으로 보였다. 바르델의 국왕 다스톤은 바로 이 새로운 신무기의 위력에 주목한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물론 얀트훈센을 장악한 광전사의 배후라고 알려진 박준상 역시 다른 세계의 사람이라는 풍문이 있었으나, 그와 관련된 그 어떤 얘기에도 이제까지 총기를 사용했다는 말은 전해지지 않고 있었다. 다스톤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델로드란에 많은 수의 첩자를 보내 좀 더 면밀하게 정보를 수집했지만 결과는 역시나 마찬가지, 준상과 관련된 그 어떤 정보에도 그가 총기를 사용했다는 얘기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만약 준상이 건재한 상황이라면 강력한 이계의 총기를 가져올 가능성도 있었지만, 그의 부재가 확실시되는 지금이라면 그런 가능성도 사라져 버린다. 광전사들이 강하다고 해봐야 결국은 피와 살로 이루어진 인간. 그 정도라면 바르델이 보유한 오백 정의 총기만으로도 충분히 제압할 수 있다고 다스톤은 결론을 내렸고, 그 결과 헤네스에게 무례하기 이를 데 없는 최후통첩이 전해진 것이다. “멍청한 놈들.” 다스톤은 헤네스의 답신을 탁자에 내려놓고는 이미 전투 준비를 마쳐 놓고 있던 그의 충성스러운 군대에게 얀트훈센으로의 진군을 명했다. 왕의 명령이 떨어지자 바르델의 자랑스러운 일만 군세는 보무도 당당하게 얀트훈센과의 접경으로 들어섰다. 물론 일만 대군이라고 스스로 칭하고는 있었지만, 실질적인 바르델 군의 숫자는 약 팔천 명 정도였고, 그 중 약 오천 명은 이번 원정을 위해 급히 징집된 자들에 지나지 않았다. 실질적인 정예 병력은 왕실에서 특별히 양성한 총병 오백과 그들을 호위하는 근위병 이천, 그리고 지방 영주들의 군세를 합친 기사단 오백이 전부였다. 허나 그 내용물이야 어찌 되었든 간에, 얀트훈센의 전체 인구와 맞먹는 수준의 병력이 파견된 것만은 분명한 사실. 이런 중대한 위협이 얀트훈센으로 전해지자, 헤네스는 소집된 광전사들을 이끌고 몸소 전장으로 나섰다. “전진!” 성장한 체형에 맞추어 다시 고쳐진 방어복을 입은 헤네스가 오른손에 든 깃발 달린 미늘창을 들고 명령을 내리자, 마찬가지로 검은 방어복으로 몸을 감싼 광전사들이 위압감 넘치는 모습의 광전사들이 천천히 성을 나섰다. 광전사들은 처음 방어복이 주어졌을 때 자신들의 전통적인 방식에 대한 도전이라고 여기며 강력하게 반발했었다. 이런 상황의 내면에는 준상도 아닌 조막만한 계집애가 나선다는 아니꼬움도 한 가지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내정이라면 충분히 그녀의 능력을 인정하고 있었지만, 전투는 그들의 업이었고 명예였으며 긍지였다. 준상이 직접 나섰다면 또 모른다. 하지만 그것도 아닌 마당에야, 조막만한 계집애가 그런 민감한 부분을 참견하고 나서는 것을 기분 좋게 받아들이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처음에는 말로 어떻게든 설득을 해보려 했지만, 결국 헤네스는 포기하고 기안을 불러내 준상이 치렀던 의식을 다시 한 번 치를 수밖에 없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수호의 신물을 손에 든 기안은 적어도 방어에 있어서는 누구도 따를 자가 없었다. 미늘창 대신 철봉을 손에든 기안은 일천 광전사들을 곡소리 나도록 두들겨 팼고, 그 결과 헤네스는 단순히 준상의 대리인이었던 과거의 지위에서, 문과 무를 모두 통괄하는 실질적인 얀트훈센의 총독으로 올라설 수 있게 되었다. 어쨌거나. 똑같이 검은 색의 방어복으로 복장을 통일한 광전사들의 행렬은 그렇지 않아도 무시무시한 그들의 인상을 더욱더 강렬하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헤네스는 준상으로 건네받은 유령말에 올라탄 채, 광전사들을 이끌고 성채로부터 조금 떨어진 실란 평원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잠시 기다리자, 마침내 먼지 구름을 일으키며 바르델의 일만 대군이 도착했다. 바르델 군의 지휘는 우스켈이라는 이름의 고위 귀족이 맡고 있었는데, 그는 국왕 다스톤의 숙부로서 조카가 왕위에 오른 뒤 벨드란 공작이라는 작위를 받아 사용하고 있었다. 벨드란 공작 우스켈은 실란 평원에 들어서자 이미 나와서 기다리고 있는 광전사들을 발견하고는 얼굴을 찌푸렸다. “야전을 치를 셈인가.” 확실히 공격능력이 뛰어난 광전사들을 데리고 농성을 하는 건 그리 현명하지 못한 행위다. 실제로 그들의 돌파 능력은 무시무시해서, 이쪽이 압도적인 수적 우위를 지니고 있다 해도 결코 방심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것도 모두 과거의 일. 지금의 바르델군은 총기라는 최신식 무기로 무장한 최첨단의 군대. 단순히 무장만 갖춘 것이 아니라, 다른 세계의 군대가 싸우던 모습을 최대한 참고해서 전술마저 최첨단으로 준비된 군대였다. “멍청한 놈들. 딱 맞춰서 상복을 입고 나왔군.” 벨드란 공작 우스켈은 검은 복장을 맞춰 입은 채 열을 지어 서있는 광전사들을 향해 비웃음을 던지고는 이끌고 있는 군세에게 진형을 갖추도록 지시했다. 그의 명령이 떨어지자, 곧바로 이천의 근위병이 진세를 갖추었고, 그 안쪽에 오백의 총병이 자리를 잡았다. 오백의 기사단이 좌측으로 이동해 대기하고, 나머지 징집병들이 그들의 뒤를 받치자 벨드란 공작 우스켈은 다시 질서 정연하게 전진을 시작했다. 선임 블러드로드 도른은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어디서 본 건 있어 가지고. 큭큭큭...” 그러자 블러드로드들은 물론이고 휘하의 광전사들마저 킥킥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헤네스는 가만히 그 모든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바르델 군과의 거리가 오백 보까지 가까워지자 바이저를 내리고는 조용히 기안을 불러내었다. “부탁드릴게요.” 그 한 마디 말과 함께 눈을 감자, 이내 그녀의 부드러운 갈색 머리에 황금 빛이 물들고, 눈동자가 푸른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이야... 이런 식으로 전쟁을 치르는 건 또 아주 오랜 만이구만.” 기안은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오르자 감개무량한 표정을 지어 보이고는 미늘창을 번쩍 치켜 들었다. “이 미친 놈들아, 준비해라!” 광전사들은 기안의 존재까지는 몰랐지만, 전투 상황에 들어서면 마치 딴 사람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헤네스의 성격이 바뀐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저 미친 놈 소리도 오랜 만에 들으니 기분이 심숭생숭한데.” “너 그런 취향이었냐?” “원래는 아니었는데, 의식 때 철봉으로 죽도록 얻어맞은 뒤부터 이상하게 총독님만 보면 가슴이 뛰더라고.” “에라이, 미친 놈.” 광전사들은 그렇게 키득거리며 천천히 기세를 피워 올리기 시작했다. 비록 광전사 본연의 능력인 광폭을 사용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그들의 전투 능력 그 자체가 봉인된다는 뜻은 아니다. 실제로 방어복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몇몇 블러드로드들은 제한된 수준의 광폭 능력을 발동할 수 있었다. 이것은 카드 시스템 하에서라면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이들에겐 노력으로 충분히 넘어설 수 있는 벽이었던 것이다. 기안은 광전사들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살기를 만끽하며 수호의 능력과 회복의 영기를 연달아 발동했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기안은 깃발이 달린 미늘창을 번쩍 치켜 올리며 외쳤다. “돌격!” “우오오오오!” 명령과 함께 기안이 유령말을 몰아 앞으로 달려나가자 방어복으로 몸을 감싼 광전사들이 함성을 터뜨리며 그 뒤를 따랐다. “미친 놈들.” 그 모습을 본 벨드란 공작 우스켈은 비웃음을 흘리며 명령을 내렸다. “장전.” “장전!” 명령이 떨어지자 총병들은 가지고 있던 총기에 탄약을 장전하기 시작했고, 근위병들은 긴 창을 앞으로 내밀며 그들을 보호하는 진형을 취했다. 비록 직접 지구인들로부터 이런 형태의 전술이 있었다는 사실을 전해 들은 것은 아니지만, 제한된 무기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활용하려는 궁리는 결국 과거 지구인들이 사용했던 것과 비슷한 형태의 전술을 만들어 내었다. 우스켈은 얼굴조차 보이지 않는 기묘한 옷차림의 광전사들을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처음에는 그저 결사적인 의지를 표출하기 위한 옷차림으로만 생각했는데, 거리가 가까워질 수록 그런 단순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런 생각을 떠올려 봐야 늦은 일. 우스켈은 동요하는 기색 없이 다시 명령을 내렸다. “조준.” “조준!” 총병들은 곧바로 총구를 앞으로 향하며 자신들을 향해 달려드는 광전사들을 조준했다. 총기 자체의 명중률은 상당히 떨어지는 것이 사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진형을 갖추고 순차 사격으로 탄막을 치게 되면 하나 하나의 명중률은 의미 없는 일이 되어 버린다. 우스켈은 광전사들인 백 보 안으로 들어오자, 삼열로 나뉘어 선 총병들에게 사격을 명했다. “사격.” “사격!” 명령이 떨어지자 총병들의 손가락이 움직이며 방아쇠를 당겼고, 지렛대와 비슷한 원리로 만들어진 초기형태의 방아쇠가 노끈을 화약이 담긴 접시로 가져갔다. 순간, 자욱한 연기와 함께 흑색 화약이 폭발하며 총기 안에 장전된 탄환을 광전사들을 향해 쏘아 보냈다. 둥근 모양의 쇠구슬은 폭음을 뒤로 한 채 곧바로 광전사들을 향해 날아갔다. 총병들과 그들의 앞을 막아선 근위병들은 총성이 울려퍼지는 순간 자신들을 향해 함성을 지르며 달려드는 저 광전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질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의 예상은 빗나갔다. 광전사들을 향해 날아간 총알들은 그들이 입고 있는 방어복에 작은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모조리 튕겨 나가 버린 것이다. “어?” 근위병들은 물론이고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벨드란 공작 우스켈마저도 이 뜻밖의 상황에 멍한 표정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사격!” 총병들은 기계적으로 자리를 바꾸며 다시 한 번 사격을 가했지만 이번에도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막아!” 근위대를 이끄는 기사가 악을 쓰는 소리를 듣고서야 우스켈은 겨우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총알을... 튕겨낸다고?” 하지만 그렇게 중얼거리는 찰나, 유령말을 탄 채 창병들의 머리 위를 훌쩍 뛰어넘은 기안이 미늘창을 휘둘러 단숨에 총병을 흩어 버리고는 단숨에 벨드란 공작 우스켈을 향해 달려왔다. “비켜! 비켜! 비켜!” 눈에서 시퍼런 불길을 뿜어내는 유령말을 탄 채, 커다란 흰 색 방패와 깃발이 달린 묵직한 미늘창을 휘두르며 달려드는 기안의 모습은 우스켈로 하여금 자신도 모르게 찔끔거리게 만들 정도로 위압적이었다. “마, 막아!” 우스켈의 명령이 떨어지자 주위를 에워싸고 있던 호위기사들이 일제히 말을 달렸지만, 그들은 기안이 휘두르는 미늘창을 단 한 번도 막아내지 못한 채 모조리 나가 떨어지고 말았다. “미친!” 우스켈은 호위 기사들이 단숨에 박살이 나자 스스로 기안의 미늘창을 막아내기 위해 검을 뽑아들었다. 기안은 그런 우스켈을 향해 가타부타 말도 없이 위에서 아래로 미늘창을 내리쳤다. 우스켈은 대기를 갈기갈기 찢으며 내리 꽂히는 미늘창을 향해 반사적으로 검을 들었으나, 애초부터 이건 될 일이 아니었다. 퍼걱! 미늘창의 도끼날은 단숨에 우스켈의 검을 아래로 밀쳐내며 그의 어깨를 찍어 버린 것이다. “커헉!” 도끼날은 갑옷이 우그러뜨리며 내려가 단숨에 빗장뼈를 부러뜨리고는 허파까지 상하게 만들었다. 우스켈은 눈을 부릅뜨며 자신에게 치명상을 입힌 인물을 바라보았지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얼굴 생김새조차 알아볼 수 없는 둥근 헬멧 뿐이었다. “이럴... 수가...” 우스켈이 그 한 마디를 남기고 말 위에서 떨어지자 기안은 겁에 질린 채 자신을 바라보는 다른 병사들을 보며 외쳤다. “꿇어!” 00288 트롤러 ========================================================================= 박력 넘치는 기안의 외침에 몇몇 병사들은 자신도 모르게 얼른 머리를 감싸 쥐며 주저앉았다. 기안이 단숨에 벨드란 공작 우스켈을 격살하고 지휘부를 휘저어 놓자 좌측면에서 총병들의 사격 후 측면을 들이칠 준비를 하고 있던 기사단이 본대의 위급함을 구원하기 출격했다. 기사단은 일단 돌격을 위한 거리를 벌기 위해 우회를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기사단의 뒤쪽으로 기안이 유령말을 타고 따라붙었다. “느려! 느려! 느려!” 후위에 따라붙어 악귀처럼 미늘창을 마구 휘두르는 기안의 터무니 없는 모습에 기사단은 그야말로 혼비백산할 정도로 놀라고 말았다. 전면에서 들이쳐도 완전무장한 채 말 위에 타고 있는 기사를 일격에 떨구는 건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하물며 앞서 달리고 있는 기사들을 따라 잡아 한 번에 하나씩 후려쳐 떨구다니. 그런 것이 가능한 기사가 있다는 말조차 바르델의 기사들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젠장! 무시하고 저 검둥이들을 때려잡는다!” 기사단의 지휘를 맡은 리츠 백작은 기안을 떨쳐 버리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닫자 광전사들의 측면을 들이쳐 본대의 위기만이라도 구하려 했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미 여섯 블러드로드 가운데 하나인 게르드가 광전사들을 이끌고 전선에서 빠져 나와 기사단을 향해 정면으로 돌진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어리석은!” 리츠 백작은 말도 타지 않은 채 정면으로 달려드는 광전사들의 모습을 보고 그렇게 소리치며 손에 들고 있던 기병창을 그대로 눈앞의 적을 향해 찔렀다. 수차례나 마상창시합에서 우승한 경력을 가진 자 답게 리츠 백작의 창은 어김없이 적의 가슴을 향해 찔러 들어갔다. 설령 방어복이 뚫리지 않더라도 전속력으로 달리는 기마의 돌격력이 합쳐진 터라 적중 당하면 그 충격량만으로도 큰 부상을 면치 못할 정도의 치명적인 공격. 그러나 리츠 백작이 창을 내지른 상대는 바로 여섯 블러드로드 가운데 하나인 게르드였다. “으랏차!” 게르드는 달려가던 속도 그대로 몸을 뒤채며 가슴을 향해 찔러 들어오는 기병창을 겨드랑이 밑으로 흘리는가 싶더니 몸을 젖히며 리츠 백작이 타고 있는 새하얀 백마의 앞다리를 커다란 쇠몽둥이로 후려쳤다. 그 터무니 없는 일격은 그대로 백마의 앞다리를 부수어 버렸고, 리츠 백작은 자신이 노리던 적이 갑자기 시야에서 사라졌다고 느끼는 순간 그대로 하늘이 뒤집히며 허공으로 내던져지는 경험을 해야만 했다. “어?” 그리고는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알아차릴 겨를도 없이 그대로 지면에 처박히고 말았다. 우드득! 전속력으로 돌진하던 속력에 두꺼운 갑옷으로 무장한 자신의 몸무게까지 모두 견뎌내기엔 그의 목뼈는 너무나도 연약했고, 이내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목이 부러지며 리츠 백작은 그대로 즉사하고 말았다. 게르드의 뒤를 따르는 다른 광전사들 역시 대동소이한 모습을 보이며 기사단들이 타고 있는 말들을 때려 잡았다. 몇몇 광전사들은 기병창에 찔리거나 말에게 채여 부상을 입었으나 이내 몸에서 연기를 뿜어내며 벌떡 일어나 다시 전투에 참가했다. 그 터무니 없는 모습에 기사단들은 질려 버리고 말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들의 뒤를 따르며 후위의 기사들을 내동댕이치고 있는 기안부터 시작해서, 전면을 가로 막은 채 기사단의 진로를 막고 있는 광전사에 이르기까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 전투는 무엇 하나 그들의 예상대로 진행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자신이 불리하다고 생각하고 전쟁을 일으키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것은 바르델 역시 마찬가지여서, 절대적인 숫적 우위와 더불어 총병이라는 새로운 무기체계까지 도입해 필승을 다짐했으나, 결과는 너무나도 참혹했다. 아차하는 사이에 바르델의 왕권을 수호하는 이천의 정예 근위병과 오백의 총병이 박살나 버렸고, 전과 확대를 위해 대기 중이던 기사단 역시 기안과 게르드의 협공에 힘조차 제대로 쓰지 못하고 지리멸렬해 버렸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전체 병력의 반수 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징집병들은 어렸을 적부터 들어왔던 광전사의 전설을 떠올리며 두려움에 떨기 시작했다. 이들은 인간이 아니다. 얼굴조차 보이지 않는 번들거리는 기묘한 형태의 투구를 쓰고 사람을 단숨에 둘로 쪼개버리는 이런 자들이 어찌 자신과 같은 인간일 수 있겠는가. 그런 생각이 머리 속에 파고들자, 이내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고, 한 명 두 명 뒤로 물러서는 사람이 늘어갈수록 공포는 그들의 마음 속으로 파고들어 이성을 마비시켰다. 원래대로라면 우스켈을 비롯한 지휘부가 그런 징집병들의 마음을 움켜잡고 전장으로 밀어넣었어야 했지만, 그들은 전투가 시작되기가 무섭게 기안에게 박살난지 오래였다. 남은 것은 징집병들을 직접적으로 지휘하는 하급 기사들 정도였지만, 경험이 풍부한 그들은 이미 이 전투가 글러버렸음을 어렵지 않게 깨달았다. “젠장!” 하급 기사들이 먼저 몸을 돌려 도망치자, 징집병들에게 남은 길은 단 하나. 그들의 뒤를 쫓아 이 지옥의 불구덩이 같은 참혹한 전장에서 벗어나는 길 뿐이었다. 알에서 막 태어난 거미 새끼들처럼 확 흩어져 달아나는 징집병들의 모습에, 도른은 신나게 기사들을 때려잡고 있던 기안에게 다가가 물었다. “추격할까요?” 기안은 자신에게 악을 쓰며 반항하던 기사 하나를 창대를 휘둘러 두들겨 패다가 도른의 말을 듣고는 그제서야 주위를 돌아보았다. “벌써 끝이야? 근성 없는 놈들.” 그렇게 투덜거리던 기안은 미늘창을 높이 쳐든 채 외쳤다. “요델!”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자 여섯 블러드로드 가운데 하나인 요델이 얼른 달려와 그녀 앞에 고개를 숙였다. “말씀하십시오. 총독.” 기안은 피에 흠뻑 젖은 요델과 그의 부하들을 흘깃 보고는 명령을 내렸다. “너와 네놈 부하들은 지금 즉시 이 중에서 쓸만한 놈들로 포로를 추린 다음 성으로 돌아가 방어에 전념한다.” 요델은 신나는 추격전을 기대하고 있다가 방어 명령이 떨어지자 떫은 감을 입에 가득 처넣은 듯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런 임무라면 저 말고 게르드 쪽이...” 참고로 게르드는 여섯 블러드로드 가운데 가장 후임이다. 하지만 기안은 그런 요델을 향해 소리를 버럭 질렀다. “시꺼! 까라면 깔 것이지 뭐가 말이 그리 많아!” “쳇... 알겠습니다.” 요델은 투덜거리며 쓰러져 뒹구는 적병 가운데 옷차림이 화려한 자들을 골라내기 시작했다. 기안은 요델이 전장 정리를 시작하자 나머지 광전사들을 향해 외쳤다. “그만 두들겨 패고 모여! 이제부터 몰이 시간이다!” “오오오!” 터져 나온 외침을 들은 광전사들은 함성으로 화답하고는 곧바로 전열을 갖추며 모여들었다. 기안은 그들의 선두로 나서다가 요델에게 다시 말했다. “아, 그 놈들이 쓰던 그 묘한 무기는 잘 모아두도록 해.” “여부가 있겠습니까.” 요델은 투덜거리면서도 기사들이 흘린 무기라든가 돈주머니 같은 것을 모으며 희희낙락하고 있었다. 기안은 그 모습에 혀를 차고는 나머지 광전사들을 몰아 도망친 바르델의 병사들을 뒤쫓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의 추격은 무척이나 느긋하기 이를 데 없었다. 도망칠테면 쳐보라는 듯이 느긋하게 병사들의 뒤를 쫓다가 상대가 접경을 넘어서 얀트훈센에서 가장 가까운 라구아트 남작성으로 몰려 들어가자 성문 앞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좋은 말 할 때 항복해라. 그럼 목숨 정도는 살려줄 수도 있다.” “...” 건들건들한 태도하며 예의라고는 눈곱만치도 느껴지지 않는 그녀의 말에, 긴장된 표정으로 광전사들을 지켜보고 있던 라구아트 남작은 입술을 깨물었다. 성까지 도망쳐 들어온 패잔병의 수는 약 일천. 남작 자신이 데리고 있는 오백의 병사와 합치면 지금 눈에 보이는 광전사들보다 우위이고, 딱히 공성 장비도 없는 듯 하니 성벽에 기대 버티면 충분히 방어가 가능할 거라는 계산이 섰다. “웃기지 마라! 어디 계집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나대는가! 썩 물러가지 못할까!” 충분히 모욕적인 언사였지만 기안은 별로 기분 나쁜 기색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옆에 선 도른을 향해 말했다. “다행이다. 그렇지?” “말씀대로입니다.” “정말이지, 간단하게 항복해 버리면 어쩌나 싶어서 가슴이 막 두근거렸다니까.” 기안은 유령말에서 내린 다음 고삐를 도른에게 맡긴 채 어깨를 크게 휘저어 보이며 성문 앞으로 다가왔다. 라구아트 남작은 그 모습을 보고는 성루에 대기 중이던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쏴라!” 곧바로 수십의 병사들이 기안을 노리고 일제히 활을 쏘았다. 그러나 기안이 입고 있는 것은 보통의 광전사들이 입고 있는 양산형이 아닌 최신형 방어복. 아문간의 가죽 뿐만 아니라, 이후에 때려잡은 마수들의 껍질 같은 것도 사용해서 방어력을 극대화시킨 물건이었다. 한꺼번에 쏟아져 내린 화살들은 결국 기안의 방어복을 뚫지 못하고 사방으로 튕겨 나가고 말았다. “하긴, 사람이란 꼭 경험해 봐야 납득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혼자 그렇게 중얼거리며 납득한 표정을 짓던 기안은 화살비가 멈추자 체조를 하듯이 오른팔을 크게 휘두르고는 인벤토리에서 무기 하나를 꺼냈다. 쿵! 그것은 바로 랑다잘의 분노. 직경이 일미터나 되는 거대한 철구가 모습을 드러내자 지켜보고 있던 광전사들은 일제히 탄성을 터뜨렸다. 기안은 자신의 눈앞에 나타는 이 터무니없는 무기를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정말 다행이지 뭐야. 이걸 시험해 보고 싶어서 안 그래도 손이 근질근질하던 참이었거든.” “...” 라구아트 남작은 설마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기안이 그 거대한 철구를 번쩍 들어올리자 안색이 새파랗게 질리고 말았다. “젠장, 더럽게 무겁네. 이런 걸 그 괴물은 한손으로 휘둘러대는 건가.” 기안은 혀를 차며 철구를 휘둘러 보더니 그대로 성문을 향해 집어 던졌다. 접하고 있는 국경이라고 해봐야 수백년 동안 얼음의 대정령에 의해 얼어붙어 있던 얀트훈센 정도인지라, 라구아트 성의 성문은 두꺼운 나무 판자를 겹겹이 대고 그것을 강철로 보강한 수준이었다. 보통의 경우라면 그 정도 성문으로도 충분했겠지만, 랑다잘의 분노라 이름 붙은 이 터무니 없는 무기를 막아내기에는 아무래도 부족한 것이 사실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기안이 한손으로는 방패를 들어야 하기 때문에 두 개의 철구를 동시에 들 수는 없었고, 그 덕분에 시설 파괴시 200퍼센트 공격력 증가와 파쇄라는 터무니 없는 세트 보너스까지는 적용되지 않았다는 정도다. 하지만 그런 세트 보너스가 없는 상태에서도 +10으로 강화된 이 거대한 철구는 이런 나무 성문 따위는 단숨에 박살낼 정도의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콰직! 단숨에 성문이 박살나 버리자 라구아트 남작은 얼이 빠지고 말았다. “뭐야. 뭐가 이렇게 간단하게 부서져?” 기안은 투덜대며 랑다잘의 분노를 회수해 인벤토리에 집어 넣고는 부서지고 남은 성문을 발로 걷어차며 광전사들을 향해 말했다. “멀뚱히 서서 뭐해? 들어와!”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자기 집에 초대하는 거라 생각할 듯한 말투로 기안이 부르자 광전사들은 껄껄 웃으며 느긋하게 성문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기껏 이곳까지 도망쳐 들어왔던 패잔병들은 물론이고, 호기롭게 항전을 외쳤던 라구아트 남작마저 얼이 빠지고 말았다. 이래서는 싸울 엄두조차 나지 않는 것이 당연한 일. 라구아트 남작은 얼른 무기를 버리며 기안을 향해 말했다. “항복입니다.” 하지만 기안은 고개를 저었다. “거절한다.” “네?” “항복따윈 없다고.” 라구아트 남작은 물론이고 그를 둘러싸고 있던 병사들 모두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항복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말은, 그들의 상식으로는 모조리 죽여 버리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이야 그렇다쳐도 가족들은 어쩐단 말인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라구아트 남작은 얼른 납작 엎드리며 기안에게 애원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모욕에 대한 댓가라면 제가 치르겠으니 제발 다른 사람들만은...” 하지만 기안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누가 죽인댔니?” “네?” “항복 필요 없으니까 어서 도망가.” “...”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상황 파악이 안 되는지라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데, 기안은 미늘창의 도끼날로 남작을 겨누며 다시 말했다. “싫으면 다 죽던가.” “...” 도망쳐라. 그게 아니면 다 죽인다. 뭔가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이었지만, 남작은 얼른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바로 도망치겠습니다.” 남작은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뒷걸음질을 치다가 정말로 잡을 생각이 없는 듯 보이는 기안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허겁지겁 성을 버리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어쩔 생각이십니까?” 도른이 그렇게 묻자 기안은 씩 웃으며 대답했다. “말했잖아. 몰이 시간이라고.” 굳이 포로로 잡아봐야 그걸 지키려면 또 병력을 나누어야 한다. 그럴 바에야 놓아주고 느긋하게 뒤를 쫓는 편이 훨씬 편한 일 아니겠는가. “과연. 이 도른, 정말 탄복했습니다.” “아부해봐야 미팅 안 시켜준다.” “쳇.” 00289 트롤러 ========================================================================= 기안은 광전사들을 이끌고 바르델 국내로 진격을 계속했다. 느긋하게, 아주 아주 느긋하게. 일반적으로 전술에 있어서 진격은 적이 대비할 틈을 얻지 못하도록 쾌속하게 진행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점을 감안한다면, 기안의 이 같은 행보는 그야말로 상식 외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이것은 바꿔 말하자면 상대가 어떠한 대비를 하더라도 그것을 격파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해석될 수도 있는 일이었고, 이것은 이어진 그녀의 행보를 통해 확실하게 증명되었다. 광전사들의 진격에 놀라 결집한 삼천의 귀족 연합군을 한번의 전투로 다시 한번 박살내 버린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은 다름 아닌 바르델의 국왕 다스톤이었다. “이럴수가.” 그는 뒤늦게서야 패잔병들을 통해 실란 평원에서의 전투를 전해 듣고는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운용이 까다롭기는 하지만, 그가 준비한 신무기인 화승총은 오십보 내에서라면 기사들의 두꺼운 갑옷도 관통할 정도의 치명적인 무기이다. 게다가 발사할 때의 소리는 어떠한가. 백여개의 화승총이 일시에 불을 뿜을 때의 소리는 마치 천둥을 치는 것과 같아서 처음 듣는 사람이라면 그 소리만으로도 혼란에 빠질 정도이다. 그런데, 그런 무기를 오백이나 갖춰 보낸 일만의 정예군이 고작 천여명의 광전사들에게 한 번의 전투조차 견디지 못하고 박살이 나다니. 아니, 단순히 광전사에게 지기만 했다면 이 정도로 충격을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놀라운 점은, 그 전투를 통해 광전사가 입은 피해가 전무하다는 사실이었다. 동네 아이들끼리 패싸움이 나도 다리가 부러지고 머리가 깨지는 일이 다반사인데, 부상자조차 없다는 게 도대체 말이나 되는 일인가. “숙부께서는?” “전사하셨습니다.” “허...” 비록 왕의 숙부로서 공작의 자리에 오른 우스켈이지만 젊은 시절에는 바르델은 물론이고 각국의 토너먼트에서 우승을 휩쓸다시피 한 장본인이다. 그와 같은 명성이 있었기 때문에 수많은 방계 귀족들 사이에서도 공작의 자리에 오르고 다시 이번 원정군의 총대장 같은 중책을 맡을 수 있었던 것이다. “경과를 상세히 보고하라.” “그것이...” 거지꼴이나 다름 없는 모습으로 다스톤 왕에게 불려온 병사는 쉽게 말을 잇지 못하다가 시종장이 눈을 찡그리며 노려보자 기겁하며 얼른 말했다. “그것이...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제대로 보지는 못했습니다만...” “상관없다. 본대로 고하도록.” “...” 병사는 잠시 우물쭈물거리다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전투가 막 시작되었을 때였습니다. 광전사들 가운데 유일하게 말을 탄 이가 있었는데, 한손에는 뿔 달린 동물 모양의 흰색 방패를 들었고, 또 다른 손에는 깃발 달린 커다란 미늘창을 들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얘기는 날아드는 총탄을 무시하고 달려든 기안이 근위병들의 머리 위를 뛰어 넘어 총병들을 박살내고는 곧바로 지휘부로 뛰어들어 벨드란 공작 우스켈을 격살하는 장면으로 이어졌다. “...” 국왕 다스톤은 물론이고, 정청 안에서 그 얘기를 들은 사람들 모두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멍한 표정을 지어야만 했다. 말을 달려 장창으로 무장한 근위병들을 뛰어 넘다니. 게다가 쟁쟁한 실력을 갖춘 호위 기사들을 단숨에 때려 눕히고 저 이름 높은 벨드란 공작이 일격조차 감당하지 못할 실력이라니. 그것이 도대체 인간으로서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옛날 얘기에 나오는 영웅들이라면 몰라도, 그런 식의 무용을 지닌 사람이 이런 식으로 현실에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믿기 어려웠다. “그가 바로 저 박준상이라는 이방인인가?” 문득 한 사람이 병사에게 그렇게 묻자 국왕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델로드란 왕실을 단신으로 거꾸러뜨린 그라면 그와 같은 일도 가능하리라 여겼던 것이다. “그것이...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았습니다.” 정청 안은 다시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병사는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게... 목소리라든가 체형 같은 것이, 아무리 봐도 남자가 아니었습니다.” “...” 정청 안은 그대로 침묵에 잠겼다. “남자가 아니면?” “얼굴을 보진 못했지만, 여자라고 밖에는...” 얼굴에 쓴 헬멧 때문에 기안에게 격살당한 벨드란 공작 우스켈은 물론이거니와 그를 따르던 병사들 또한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본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기억나는 것이라고는 오직 하나 번들거리는 검은 색의 기묘한 투구와 몸매가 훤히 드러나는 기묘한 방어복 뿐. 그나마 기안은 여성 특유의 부드러운 곡선이 드러나는 몸매와 검은 방어복에 대비되는 새하얀 방패 때문에 다른 이들과 구별이라도 가능한 것이지, 광전사들은 그냥 바이저를 내리고 서 있으면 누가 누군지 알아보는 것조차 불가능할 정도였다. “여자라니... 허허...” 이내 침묵이 짙게 깔린 정청 안에는 허탈한 듯 웃음을 흘리는 국왕 다스톤의 목소리만 이어지고 있었다. 박준상이라는 이방인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비천한 여자 따위에게 이런 치욕스러운 패배를 당할 줄이야 어찌 예상이나 했겠는가. 다스톤은 잠시 말이 없다가 겁에 질린 병사를 내보내게 한 뒤, 정청 안에 늘어선 다른 귀족들에게 물었다. “이 싸움은 이미 명백하게 패배했소. 이미 다섯 개의 영지가 저들의 손에 떨어졌고, 이대로라면 열흘 안에 저들이 수도를 침탈할 것이 분명한 일. 이 상황을 어찌해야 좋겠소.” “...” 다른 나라나 세력이라면 이 정도에서 싸움을 멈추자고 사람이라도 보내겠는데, 상대는 자신을 모욕했다는 이유 만으로 나라를 뒤집어 놓고 왕위마저 교체시킨 전력이 있다. 게다가 저들의 주력은 야만스럽기로 이름 높은 광전사들. 설령 교섭을 위해 사자를 보내더라도 가도 살아 돌아올 수 있을지도 의문스러운 상황이니 귀족들은 서로 눈치만 볼 뿐 감히 의견을 내려 하는 자들이 없었다. “허허...” 완전히 겁을 먹어버린 귀족들의 모습에 바르델 국왕 다스톤은 허탈한 표정으로 웃을 수 밖에 없었다. 결국 국왕 다스톤은 기운이 하나도 없는 목소리로 손을 저어 귀족들을 물렸다. “이만 물러가시오.” “...” 귀족들이 정청에서 물러가자 다스톤은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휘청거리며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전하!” 시종장과 호위병들이 얼른 달려와 부축했지만, 다스톤은 고개를 저으며 그들의 손을 물리쳤다. “모두 자업자득인 것을. 이 죄인이 어찌 다른 이의 도움을 구할 수 있겠는가.” 다스톤은 그대로 자신의 거처로 들어갔고 곧바로 광전사들에게 사자를 보내 싸움을 멈출 것을 제안했다. “그만 싸우자고요?” “네.” 유령말 위에 앉은 채 다스톤의 사자를 맞이한 헤네스는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먼저 싸우자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불리해지니 싸움을 멈추자는 건가요? 다스톤 국왕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사람이었군요.” “...”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있을리 없으니 사자는 그냥 잠자코 그녀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헤네스는 그 모습을 보고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다시 말했다., “정말로 싸움을 그만두고 싶다면, 이렇게 다른 사람을 보낼 것이 아니라 당사자가 직접 오는 것이 예의 아닐까요?” “그 말씀은...” “그 무례한 최후통첩을 보낸 당사자가 직접 와서 사과하는 성의는 보여야 한다는 말이에요.” 사자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그럼... 저희 국왕 전하께서 직접 얀트훈센으로 와서 사죄하라는 말씀이십니까?” 헤네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가 있나요. 당사자가 여기 있는데.” “네?” 헤네스는 헬멧을 벗어 풍성한 갈색 머리와 아름다운 외모를 드러냈다. “...” 사자는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았다. 패잔병을 통해 하얀 방패와 깃발 달린 미늘창을 들고 벨드란 공작 우스켈을 단숨에 격살한 장본인이 여자라는 말을 전해 듣기는 했지만, 이 정도로 청초하고 아름다운 미녀일 줄을 미쳐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놀랄 일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다스톤 국왕에게 전하세요. 최후통첩을 통해 그가 모욕했던 헤네스 브레아가 바로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니 진정 평화를 원한다면 직접 와서 사죄하라고요.” “...” 그럴수가. 다른 이도 아닌, 헤네스 브레아 본인이었단 말인가. 사자는 대답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그대로 굳어 버렸다. “내 말이 안 들리나요?” “아, 아닙니다. 국왕 전하께 그대로 고하겠습니다.” 헤네스에게 얼른 인사를 하고 그 자리를 빠져 나온 사자는 허겁지겁 다시 수도로 귀환하여 다스톤 국왕에게 그 사실을 보고했다. “그녀였다고?” “그렇습니다. 이전에 본적은 없지만, 풍문으로 전해들은 외모와 정확히 일치하고 있었습니다.” “...” 다스톤 국왕은 허망한 표정으로 멍하니 옥좌에 앉은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이건... 장미의 가시 정도가 아니잖은가.” 물론 이것은 위장일 수도 있다. 하지만 되돌려 생각해 보면 저 거친 광전사들이 비록 준상이라는 이방인의 대리인이라 해도 그녀의 말에 고분고분 따를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오직 힘을 최우선의 가치로 생각하는 그들이 명목 상이라도 자신들보다 약한 자를 머리 위에 둘리가 없지 않은가. 하물며 전장에서 그들보다 앞서서 달릴 때는 그만한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다스톤은 한참이나 고민하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왕비와 왕자를 불러라.” “네?” “그리고 두 후작도. 어서.” “아, 알겠습니다.” 다스톤은 이제 겨우 여덟 살이 된 왕자와 그 어머니인 왕비를 부르고는 다시 벨드란 공작 사후 최고위급의 귀족이 된 두 명의 후작을 불러 뒷일을 당부한 다음, 아무 장식 없는 흰 옷을 입은 채 백여명의 호위병만을 데리고 광전사들이 주둔하고 있는 마일린 평원으로 달려갔다. 헤네스는 흰 옷을 입고 왕관조차 쓰지 않은 채 달려와 자신 앞에 선 다스톤을 보고는 그가 정말 바르델의 국왕이 맞는지 몇 가지 확인 절차를 거친 다음에야 헬멧을 벗으며 말했다. “정말로 왔군요.” “...” 다스톤은 헤네스의 얼굴을 감히 똑바로 보지 못하고 그대로 주저 앉으며 말했다. “부디, 저 한 사람의 목숨으로 노여움을 가라앉히길 청합니다.” “...” 헤네스는 유령말의 안장에 꼽혀 있던 미늘창을 뽑아 들더니 그대로 다스톤을 겨누었다. “그것이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사과인가요?” 다스톤은 커다란 미늘창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모습을 보고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혹시나 싶었는데, 정말로 그녀가 숙부인 벨드란 공작을 쓰러뜨린 장본인이었던 것이다. “왜 대답이 없죠?” 헤네스의 말에 다스톤은 얼른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말씀대로입니다.” “흠...” 이러니 저러니 해도 상대는 한 나라의 국왕. 이 정도까지 굽히고 나오는데도 계속해서 진군을 강행할 수는 없는 일이다. 헤네스는 이 정도면 되었다 싶었지만, 마음 속에서 두 기안이 너무 무르다고 난리법석을 치기 시작했다. “...” 잠시 얼굴을 찌푸리던 헤네스는 두 기안에게 말했다. “사과만 받고 끝낼 리가 없잖아요. 잠깐만 있어봐요.” “네?” 다스톤은 이게 무슨 말인가 싶었지만, 헤네스는 손을 들어 보이고는 두 기안과 토론을 시작했다. “그러니까... 잠깐만 있어봐요. 그래도 만족 못하시겠으면 바꿔 드릴테니까요. 네. 네. 그래요. 약속. 네.” “...” 다스톤은 저게 뭐하는 짓인가 하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다가 그 옆에 선 도른이 눈을 부라리는 모습을 보고는 얼른 눈을 내리 깔았다. 헤네스는 한참이나 지나서야 두 기안과의 대화를 마치고는 헛기침을 하며 다스톤에게 말했다. “나라와 나라 사이의 일인데 말 몇 마디로 끝낼 수는 없는 일이죠. 안 그래요?” “그렇습니다.” “제가 미리 협정서를 만들어 둔 것이 있으니 봐주세요.” 헤네스는 인벤토리에서 캐비닛을 꺼낸 후 그 안에서 미리 준비해둔 협정서를 집어 다스톤에게 건넸다. 다스톤은 갑자기 허공에서 커다란 철상자가 나타나는 모습에 눈이 휘둥그레졌다가, 이내 협정서의 초안이 건네지자 얼른 그것을 받아 읽었다. “이건...” 일반적인 국가 간의 외교문서와는 다르게 간략하게 내용이 요약된 그 문서에서 요구하고 있는 조건은 크게 다섯 가지였다. 첫째, 얀트훈센에 인접하는 다섯 개 영지를 할양한다. 둘째, 국왕을 제외한 열 살 이상의 모든 왕족은 얀트훈센에 인질로 제공한다. 셋째, 배상금으로 금화 십만 개를 지불한다. 넷째, 현재의 국왕은 퇴위하고, 왕자가 열 살이 될 때까지 왕위는 공석으로 남겨두며, 그 이년간 왕국의 국정은 귀족들 가운데 선발된 위원회에 맡겨둔다. 다섯째, 포로가 된 귀족들의 반환을 위한 협상은 각각의 가문과 개별적으로 진행한다. 영토 할양과 배상금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열 살 이상의 모든 왕족을 인질로 내놓으라는 말에 국왕은 입술을 깨물 수 밖에 없었다. 이대로라면 왕자가 열 살이 넘어 왕위에 오르더라도, 왕실은 사실상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 없게 되어 버린다. 헤네스는 그런 다스톤을 보며 말을 이었다. “저는 가급적이면 좋은 의도를 가지고 바르델과 협력관계를 만들고 싶었어요. 설마 그걸 몰랐다고 할 셈은 아니겠죠?” “...” “선의에는 선의로, 악의에는 악의로. 저를 이렇게 몰아붙인 것은 다름 아닌 당신이에요.” “후...” 다스톤은 깊게 한숨을 내쉬고는 그녀의 조건을 받아들이겠노라 서약했다. 바르델의 전격적인 항복으로 전쟁을 마무리 지은 헤네스는 다스톤을 포로로 잡은 채 즉각 얀트훈센으로 광전사들을 후퇴시켰다. 그녀는 전후의 여러 가지 처리를 블러드로드들에게 각기 분담해 처리하도록 한 뒤, 곧바로 요정계로 들어가, 이전에 미팅을 통해 블러드로드들과 결혼한 아줌마 요정들을 만났다.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물론이죠. 호호호.” “저희들이야 언제나 마찬가지죠. 애 키우고 남편이랑 노닥거리고. 호호호호!” 유니아란을 비롯한 다섯 명의 아줌마 요정들은 저마다 아이를 하나씩 안고 있었다. 그녀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차례로 아이를 낳았는데, 덕분에 연구에 매진하는 리체스를 대신해 공주님의 유모 역할도 맡고 있는 중이었다. 헤네스는 미소를 지은 채 그녀들에게 얘기를 시작했다. “실은 오늘 여러분을 모신 것은 다름이 아니라...” 차분한 그녀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아줌마 요정들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저희 남편을 영주로 삼으신다구요?” 유니아란의 말에 헤네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이번에 다섯 개의 영지를 새로 얻었거든요. 그동안 요정계에서 이런 저런 일로 고생도 하셨고, 아이들을 키우려면 여러 가지로 필요한 것도 많으실테니 이참에 영지 하나씩 맡으시면 서로에게 도움이 큰 도움이 될 것 같은데, 어때요?” “확실히...” 오래 산 만큼 인간에 대한 이해도 높은 아줌마 요정들은 헤네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들이야 그렇다 쳐도 인간의 피가 섞인 아이들이 요정들처럼 언제까지나 느긋한 생활을 영위할 수는 없는 일. 그런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적절한 배경이나 지원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고, 안전한 환경에서 인간들의 생활에 익숙해질 필요도 있었다. 아줌마 요정들은 눈을 빛내며 헤네스의 제안에 찬성의 뜻을 표했다. “맡겨만 주세요. 저희 남편이 좀 머리가 굳기는 했지만, 그래도 제법 성실한 편이랍니다.” “머리 쓰는 일은 저희가 맡으면 되니 상관없죠. 호호호! 안 그래도 이래저래 필요한 것이 많았는데, 마침 딱 잘되었네요.” 헤네스는 미소를 지으며 다시 말했다. “그럼 승낙하신 걸로 알고 일을 진행할게요. 남편 분들께는 잘 말씀해 주세요.” “물론이죠. 그건 염려하지 마세요.” 헤네스는 그렇게 새로 할양받은 다섯 영지의 일을 마무리 짓고 난 다음 바로 얀트훈센으로 돌아가려다가 전쟁으로 인해 한동안 공주님을 보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여왕의 침실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언제봐도 조금은 우스꽝스러운, 마치 어린 아이들이 낙서해 놓은 듯한 풍경의 숲을 지나던 그녀는 정령계로 통하는 문 근처를 지나다가 문득 낯익은 뒷모습의 사람 하나를 발견했다. “아...” 헤네스의 도톰한 입술 사이에서 새어나온 탄성을 들은 것인지 그 사람은 고개를 돌렸고, 이내 놀란 표정을 지었다. “헤네스?” 조금은 초췌해진 그의 모습 같은 것은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그 입을 통해 자신의 이름이 흘러나온 순간, 헤네스는 곧바로 그의 품으로 뛰어들며 눈물을 터뜨렸다. “헤네스.” 자신의 등을 감싸오는 그의 손길을 느끼며 헤네스는 그의 가슴을 주먹으로 마구 두드렸다. 나쁜 사람. 하지만 너무나도 보고 싶었던 사람. 준상이 드디어 돌아온 것이다. ============================ 작품 후기 ============================ 헤네스 : (퍽퍽퍽퍽!) 준상 : (컥컥컥컥!) 00290 트롤러 ========================================================================= 준상의 가슴을 마구 두드리던 헤네스는 이내 팔을 뻗어 그의 품을 꽉 끌어안았다. “너무 예뻐져서 못 알아 볼 뻔 했다.” 가만히 등을 쓰다듬으며 속삭이는 준상의 말에 헤네스는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면서도 웃어 버리고 말았다. “준상씨 좋으라고 예뻐진 거 아니거든요?” “뭐? 하하...” 눈물이 그렁그렁한 모습으로 토라진 척 그렇게 대답하는 헤네스의 모습에 준상은 크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잠시 그렇게 부둥켜 안은 채 그리던 정인의 체온을 만끽하던 헤네스는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을 소매로 닦고는 준상의 손을 잡아 끌었다. “가요. 소개시켜 줄 사람이 있어요?” “무슨...” “보면 알아요. 어서요.” “...” 준상은 헤네스가 이끄는 대로 그녀의 뒤를 따라 여왕의 침실로 향했다. 갑자기 누굴 소개시켜 준다는 건가 싶어 어리둥절해 하던 그는 침실 안에 들어서자 그대로 멈칫하고 말았다. “쉿, 조용히 해주세요. 이제 막 겨우 잠드셨...” 셀라는 인기척을 느끼자 얼른 그렇게 말을 하다가 준상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돌아오신건가요?” 셀라가 떨리는 음성으로 묻자, 헤네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에게 부탁했다. “방금 돌아오셨어요. 언니에게도 좀 알려주시겠어요?” “물론이죠. 잠시만... 아니, 이럴게 아니지. 제가 바로 갔다 올게요.” “부탁드려요.” 셀라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눈밑에 다크 서클이 짙게 깔려 있는 상황에서도 호들갑을 떨며 리체스의 연구실을 향해 달려갔다. 헤네스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웃음을 짓다가 침대 위를 바라보며 굳어 있는 준상에게 말했다. “알아보시겠어요?” 장난기 어린 헤네스의 말에, 준상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설마... 내 아이?” 헤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리체스 언니가 낳았어요. 언니 오면 잘 해주세요. 얼마나 고생이 심했는지 몰라요.” “그럴수가.” 준상은 천천히 침대 옆으로 다가가 곤히 잠든 아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잘 먹고 잘 놀아서 포동포동하게 살이 찐 아기는 꿈이라도 꾸는지 입술을 오물거리며 단잠에 빠져 있었다. “...” 준상은 자신도 모르게 아기에게로 손을 뻗다가 흠칫 하며 손을 거둬 들였다. 가슴 속으로 차오르는 벅찬 감동에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다가, 근 일 년 동안 목욕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자신의 상황을 깨닫고 손을 되돌린 것이다. 준상 답지 않게 아기 옆에서 머뭇거리는 그 모습을 보며 헤네스가 조용히 미소를 짓고 있는데, 문득 침실의 문이 거칠게 열리더니 무지개 빛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아름다운 여인이 달려 들어왔다. “아!” 리체스는 침실 안으로 허겁지겁 들어오다가, 침대 옆에 주저앉아 아기에게 손을 뻗다말고 우왕좌왕하고 있는 준상의 모습을 발견하자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멈추어 섰다. 준상은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는 고개를 돌리다가 입을 가린 채 눈물을 글썽이고 있는 리체스의 모습에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리체스.” “...” 준상이 두 손을 뻗어 보이자, 리체스는 그대로 훨훨 날 듯이 그 품 안으로 뛰어들었다. “고생했다. 많이 힘들었지.” “...” 리체스는 고개를 저을 뿐 말을 잇지 못했다. 목이 매여서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상황인데다, 막상 이렇게 얼굴을 마주한 채 그의 자상한 목소리를 듣자 돌아오면 퍼부어 주고 싶었던 말들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가만히 리체스의 등을 쓰다듬어 주던 준상은 리체스가 겨우 진정하자 조용히 물었다. “말을 하지 그랬어. 그랬으면 바로 달려 왔을 텐데.” “그럴까봐 말 못했어요.” “...” 준상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자, 리체스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그보다, 이렇게 돌아오셨으니 우리 공주님의 이름부터 지어주세요.” “공주님?” 리체스는 되묻는 준상의 모습을 보자 헤네스를 향해 물었다. “아직 말 안 한 거야?” 그 말에 헤네스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 건 엄마가 말해줘야죠.” “언제는 자기가 엄마라고 우기더니.” “인정해주는 건가요?” “설마.” 리체스는 헤네스에게 혀를 내밀어 보이고는 준상에게 말했다. “들으신 대로에요. 아빠한테 지어 달라고 할 셈으로 아직까지 이름조차 없이 그냥 공주님이라고만 부르고 있으니, 얼른 이름부터 지어주세요.” “...” 준상은 난처해지고 말았다. 자신에게 딸이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경황이 없는 판에 갑자기 이름을 지어내라니. 더욱이 박씨는 여자 이름 짓기가 난해한 성씨 가운데 하나라 난이도마저 상당히 높았다. “지금 당장?” “물론 그건 아니구요. 잘 생각해서 좋은 이름을 지어 주세요.” “알았어. 그렇게 할게.” 그렇게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어른들의 말소리에 잠을 설친 것인지 공주님께서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우와아아앙!” 목소리가 어찌나 우렁찬지 준상은 순간 움찔하며 놀라고 말았고, 그 소리가 울려 퍼진 순간 이제까지 흐뭇한 표정으로 준상과 리체스를 바라보고 있던 셀라가 화들짝 놀라며 얼른 침대로 구르듯이 달려왔다. 리체스는 아기를 어르는 셀라의 모습을 보고는 준상의 손을 잡아 끌었다. “아기를 안아 보고 싶으시면 일단 가서 씻어요. 도와드릴테니.” “그래.” 리체스는 준상의 손을 잡아 끌며 헤네스를 향해 눈짓을 했다. 그 의미를 깨달은 헤네스는 당황한 표정으로 손을 저었지만, 이내 리체스가 가볍게 인상을 쓰자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얼굴을 붉히며 그들의 뒤를 따라 나섰다. 옷을 벗고 자주 셋이서 함께 목욕을 즐기던 요정계의 온천 안으로 들어서자, 헤네스와 리체스는 가만히 비누 거품을 내서 준상의 몸을 씻기며 말을 걸었다. “가셨던 일은 잘 되신 건가요?” 리체스가 먼저 운을 떼자 준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럭저럭.” 성의 없는 대답이긴 했지만, 그래도 최소한 실패했다는 말은 아닌지라 두 반려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누워 봐요.” “...” 헤네스의 말에 준상은 타월이 깔린 바닥에 몸을 눕혔고, 두 반려는 정성스럽게 그의 몸을 천천히 닦아 주었다. “자세하게 말 해주세요. 정령계는 어떤 곳이었나요?” “음...” 비누거품을 잔뜩 묻힌 타월로 팔을 부드럽게 닦아주며 묻는 헤네스의 말에 준상은 잠시 눈을 감은 채 기억을 되새기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정령계는... 한 마디로 설명하기는 쉽지 않지만, 굉장히 혼란스러운 곳이었어.” 사실 단순히 혼란스럽다는 정도의 표현으로 말하고 넘어갈 정도가 아니었다. 처음 정령계에 들어갔을 때의 느낌은, 그야말로 혼돈의 도가니. 빛과, 어둠과, 불과, 물과, 바람과, 땅과, 번개와, 그 외에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속성의 정령들이 마치 세탁기에 가득 채워진 빨래감처럼 서로 뒤엉켜 흐르는 곳. 그곳이 바로 정령계였다. 그런 곳이다 보니 처음에는 그런 거대한 흐름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처음에는 그럭저럭 버텼지만, 시간이 지나자 정신적인 피로가 엄습해오기 시작했고, 아주 잠깐 정신을 놓은 순간 정령들이 마구 뒤엉켜 흐르는 거대한 흐름에 휩쓸려 버렸다. 그때는 정말 이렇게 죽는 건가 싶을 정도였다. 모처럼 속성 저항을 최대한 갖춰놓은 상태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령들의 거대한 흐름에 휩쓸리자 곧바로 정령들의 힘이 준상의 몸 안으로 미친 듯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준상은 이를 악물고 그 상황을 견뎌내려 했지만, 결국 정신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정신을 잃었다가 다시 의식이 돌아왔을 때, 준상은 인터페이스의 시계를 통해 자신이 무려 삼개월이나 정신을 잃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만약 그 기간 동안 퀘스트라도 발동되었다면 꼼짝 없이 죽음을 당했을 거란 생각에 준상은 등골이 서늘해졌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한 가지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놀랍게도, 정령의 흐름 속에서는 시드가 제대로 인식되지 않더군.” 리체스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시드가 힘을 잃는다는 말인가요?” 하지만 준상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시드가 눈앞에 있어도 안목이나 리체스가 만든 탐지 마법이 전혀 반응하지 않더라고.” “그렇다면...” “정령의 흐름이 시드가 내뿜는 파동을 흡수해 버렸던 것 같아.” “아...” 리체스는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사실 그녀가 지난 일년 동안 중점적으로 연구했던 부분이 바로 시드의 파동에 대한 것이었다. 시드를 제어하는 것은 둘째 치고라도 퀘스트의 전달과 같은 형태의 정보 전달을 차단할 수만 있다면 최소한 외부에서 준상의 머리 속에 있는 시드를 임의로 조작하는 것이 불가능하리라는 생각에서였다. “잘은 모르겠지만, 그동안 퀘스트가 나에게 전달되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가 아닐까 싶어.” “그렇군요.” 준상의 팔을 닦다 말고 리체스가 골똘히 생각에 잠기자, 다리로 손을 옮겨가던 헤네스가 다시 물었다. “그럼, 수확의 날이 와도 정령의 흐름 속에 들어가 있으면 안전하겠네요?” 그 말에 준상은 웃으며 대답했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어.” “네? 어째서...” “그것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리긴 했지만, 어느 정도 그 흐름을 스스로 끌어내고 조절할 수 있게 되었거든.” 생각에 잠겨 있던 리체스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정령의 흐름을 불러 일으킬 수 있게 된 건가요?” 준상은 몸을 일으키며 대답했다. “맞아. 나도 이 힘을 정확히 뭐라고 불러야 할지는 모르겠는데, 아무래도 내 몸 안에 이식한 요정의 돌이나 그것을 매개로 열어둔 정령의 문이 뭔가 반응을 일으킨 것 같아.” “그럴수가...” 리체스는 너무나 놀란 나머지 입을 쩍 벌린 채 말을 잇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보고 헤네스가 조용히 물었다. “혹시 뭔가 잘못 된 건가요?” 리체스는 잠시 말없이 고개를 저어 보이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 생각이 맞다면... 하지만, 그런 일이 가능할 리가.” 이번에는 준상이 물었다. “안 좋은 건가?” “그게...” 리체스는 입술을 깨물고 잠시 머리를 긁적이며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엄청나다고 밖에는.” “자꾸 말 돌리지 말고 속 시원히 얘기 좀 해봐요.” 헤네스의 말에 리체스는 머뭇거리다가 준상에게 다시 말했다. “혹시 그 정령의 흐름이란 걸 보여주실 수 있나요?” “물론.” 준상은 그렇게 대답하고는 오른손을 손바닥을 위로 한 채 가만히 들어 올렸다. 그러자 그의 손 안에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기묘한 소용돌이 같은 것이 생기더니 이내 확 하고 터져 나와 마치 분수처럼 천장을 향해 뿜어져 나왔다. 폭죽처럼 터져 나온 빛 덩어리들은 천장을 타고 흐르며 온천 구석구석을 누비다가 이내 조용히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이럴수가...” 어찌 보면 단순한 눈속임이라 해도 할 말이 없는 짤막한 시연이었지만, 리체스는 준상의 손을 통해 빛 덩어리들이 터져 나오는 순간, 그것의 정체를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놀랍게도 그 작은 빛 덩어리들은 하나하나가 저마다의 속성을 가진 정령들이었던 것이다. 잠시 멍하니 있던 리체스는 한참 뒤에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는 준상과 헤네스를 향해 말했다. “자세한 건 확인을 해봐야겠고,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인지 도무지 짐작도 가지 않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어요.” “그게 뭐지?” 리체스는 경외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주인님은 이제 스스로 하나의 작은 정령계가 된 거에요.” “정령계?” 정령사도 아니고 정령계라니. 얼떨떨한 표정을 짓는 준상을 향해 리체스는 다시 말했다. “아직 탄생한지 얼마 안 되어서 그 안에 속한 정령들의 힘은 미약하지만, 만약 이 정령들이 제대로 힘을 갖추게 된다면 과연 어느 정도의 능력을 얻게 될지, 저로서도 감히 짐작이 되지 않네요.” 00291 트롤러 ========================================================================= 준상으로서는 힘 자체보다도 일단 수확의 날을 막을 방법을 찾았다는데 의의를 두고 귀환을 한 것이었기에 그 놀라움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리체스의 말대로라면 자신의 몸 안에 존재하는 정령들의 힘을 키우기에 따라서는 단순히 한 두 개체의 정령을 몸에 빙의시킨 것을 넘어서는 엄청난 능력을 얻을 수도 있다는 뜻이기도 하지 않은가. 사실 생명이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라는 개념은 제법 오래된 생각 중 하나이다. 불교에서 물질 세계라는 것은 생명이라는 이름을 가진 무한히 많은 세계의 연속이며, 타로 카드의 더 월드는 세계를 지칭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완벽한 사람을 상징하기도 한다. “이거 좀 얼떨떨한데.” 준상이 그렇게 말하자, 예상을 초월하는 상황에 멍해 있던 헤네스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렸고, 리체스 역시 굳었던 표정을 풀고는 다시 말했다. “그런데, 정령의 흐름이 시드의 파동을 억제하는 능력이 있다면 이제부터는 퀘스트에 불려가지 않아도 되는 건가요?” “글쎄. 아직 시험해 보지 않아서 모르겠는걸.” 그러자 헤네스가 일어나 준상의 등 뒤로 다가서며 말했다. “머리 감겨 드릴게요. 누우세요.” “그럼 한번 맡겨 볼까.” 준상은 헤네스가 이끄는 대로 그녀의 무릎 위에 머리를 대고 누웠다. 그 상태로 위를 올려다 보자,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풍성해진 아름다운 가슴이 바로 눈에 들어온다. “눈 감으세요.” 헤네스가 얼굴을 붉히며 눈을 흘기자, 준상은 웃으며 못이긴 척 눈을 감았다. 조물거리는 손가락으로 머리를 감겨 주고 있자니 리체스가 불만어린 말투로 말했다. “안 계신 동안 열심히 연구했는데, 이렇게 터무니없는 결과를 가지고 돌아오실 줄이야. 어쩐지 일년간 바보짓을 한 것 같은 기분마저 드네요.” 준상은 눈을 감은 채 그 말에 대답했다. “뭘 연구했는데?” 리체스는 조용히 대답했다. “앞서도 말했듯이, 파동의 억제에 대해 주로 연구했어요. 마법적인 방법으로 차폐를 시도해 봤는데, 생각처럼 쉽지가 않더라구요.” “그랬군.” “그래도 성과가 전혀 없는 건 아니었어요. 조금 힘들긴 했지만, 시드가 인체에 자리잡는 방식을 조금은 알아낼 수 있었거든요.” 조금 힘들었다고 표현했지만, 이것을 위해 그녀는 시드를 머리 속에 담고 있는 괴물들의 몸을 직접 해부하고 분석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마법을 연구하기는 했어도 이런 식으로 살아 있거나, 또는 살아 있었던 무언가의 몸을 열어보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특히나 이 연구를 진행할 당시, 그녀가 임신중이었음을 생각하면 어지간한 독기로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나 다름없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준상은 자신 때문에 그런 일들을 해야만 했던 리체스에게 절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미안.” 가만히 손을 움직여 자신의 몸을 닦고 있는 리체스의 손을 감싸 쥐며 그렇게 말하자,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신경 쓰지 마세요.” 그리고는 다시 이렇게 말했다. “아직은 좀 더 연구를 해봐야겠지만, 잘만 되면 인체에 해가 가지 않는 방법으로 시드를 빼낼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요. 장담은 못하겠지만 기대해 주세요.” “그래.” 헤네스가 머리를 다 감기자 준상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자, 돌아서봐.” “...” “왜? 싫어?” “아뇨. 그런건 아니지만.” 헤네스와 리체스는 부끄러우면서도 기쁜 마음으로 준상에게 등을 맡겼다. 준상은 가슴을 한손으로 가리고 돌아선 그녀들의 등을 거품이 묻은 타월로 가볍게 문질렀다. 단순히 서로의 몸을 씻겨주고 있을 뿐인데도, 뭔가 많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듯한 느낌. 하나의 의식을 치르는 듯한 마음으로 그렇게 목욕을 마친 셋은 조금은 들뜬 마음으로 다시 침실로 돌아왔다. “마마마마!” 그러자 잠에서 완전히 깨버린 아기가 큰 목소리로 그들을 맞이한다. “안아 보세요.” “...” 리체스의 말에 준상은 조금 긴장된 표정으로 셀라에게서 아이를 안아들었다. 아이는 준상의 품에 안기자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 보았다. 마치, 눈동자 속에 그 모습을 각인시키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모르는 사람에게 안기면 발버둥을 치며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며 울음을 터뜨리는 평상시의 반응과는 너무도 다른 그 모습에 지친 표정을 짓고 있던 셀라마저도 눈이 동그래지고 말았다. “저도 그렇게 안아보는데 무려 일주일이나 걸렸는데. 뭔가 차별 받는 기분이네요.” 헤네스가 그렇게 투덜거리며 말하자, 리체스는 웃으며 그녀의 말을 받았다. “우리 공주님 다음으로 요정의 키스를 많이 받은게 주인님이잖니.” “흠... 그래서인가.” 고개를 끄덕이던 헤네스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리체스에게 다시 말했다. “근데 그 주인님 소리는 언제까지 계속할 생각이에요? 이제 아이도 생겼으니 슬슬 호칭도 바꾸는 편이 낫지 않겠어요?” “음... 그래야 하나.” 리체스로서는 굳이 호칭을 바꿀 필요를 느끼지 못했지만, 아이 앞에서 주인님 운운하는 건 역시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뭐라고 부르지?” 그 말에 헤네스는 얼굴을 붉히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여보... 라든가, 당신이라든가...” 그 모습을 보고 리체스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얘 좀 봐. 이제 보니 자기가 호칭을 바꾸고 싶어서 괜히 날 걸고 넘어진 거였잖아.” “그, 그런 거 아니거든요?” 그렇게 둘이 티격태격하고 있는 동안 준상은 아이와 눈을 마주한 채 감동에 젖어 있다가 문득 생각이 난 듯이 입을 열었다. “누리.” “네?” 갑자기 나온 그 말에 리체스가 반문하자, 준상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누리가 좋겠어.” “뭐가요?” “아이 이름 말이야.” “아...” 준상은 흥분된 표정으로 이름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누리라는 이름은 굉장히 역사가 깊은 이름이야. 시조인 박혁거세의 경우만 해도 그 의미를 따지면 밝은 누리이고, 고구려의 유리명왕이라든가, 신라의 유리 이사금의 이름인 유리도 결국은 누리를 한자로 고쳐 쓴 것이니까.” “무슨 뜻인데요?” 헤네스의 말에 준상은 얼른 대답했다. “세상이나 세계란 뜻이야.” “아...” 리체스는 웃으며 대답했다. “스스로 정령계가 된 분의 딸 이름으로는 제격인 것 같네요.” “그런가.” 준상은 마주 웃다가, 문득 생각이 났는지 가만히 아기의 눈앞에 손을 가져가며 말했다. “그래. 이 아빠가 선물을 주마.” 그렇게 말한 준상은 아기에게 정령의 흐름을 약하게 뿜어냈다. “마아?” 누리라는 이름을 새로 얻은 아기는 자신의 눈앞에서 반짝 반짝 빛나는 빛의 향연이 베풀어지자 손을 뻗으며 옹알거리기 시작했다. 준상은 아이에게 다시 말했다. “이 정령들은 앞으로 너와 함께 하며 자라나 네 힘이 될 거다.” 아름다운 빛의 무리에 감싸인 아기를 바라보던 헤네스가 문득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위험하지는 않겠죠?” 그 말에 준상은 웃으며 대답했다. “보통의 정령이라면 위험할 수도 있겠지만, 이 아이들은 괜찮아. 완전히 나에게 종속되어 있으니까.” “아...” “이 아이에게 나와 같은 소질이 있다면, 자연스럽게 그 능력을 개화시킬 수도 있겠지만 역시 그건 아직 너무 먼 일일지도 모르지.” “그렇군요.” 그렇게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누리가 다시 옹알이를 했다. “마우우! 마아!” 맞장구를 치는 듯한 그 외침에 웃음을 짓던 헤네스가 이렇게 말했다. “누리야. 이 사람이 네 아빠란다. 아빠, 해봐.” “아바?” “...” 하란다고 정말 단숨에 따라할 줄은 미처 몰랐기 때문에 헤네스는 물론이고 아이를 안고 있던 준상마저도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금... 들었어요?” “드, 들었어.” 그렇게 서로를 돌아보며 말을 나누는데 누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부! 아바!” “...” 다시 한 번 이어진 누리의 말에 준상과 헤네스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조금은 바보 같다고까지 느껴지는 두 사람의 모습에 리체스는 웃음을 지었다. “하여튼 호들갑은. 둘이 똑같다니까.” 준상은 이후로도 계속 아이를 안고 있다가, 지쳐 투정을 부리자 그제서야 품에서 떼어놓았다. 마음 같아서는 하루 종일 안아 주고 싶었지만, 아무리 원기왕성한 아이라도 준상의 체력을 따라가는 건 역시 무리였던 모양이다. “서운해 하지 말아요. 나중에 깨면 그때 또 놀아주면 되잖아요.” “그런가.” 대답은 그렇게 해도 역시나 아쉬운 표정이다. 평소에 감정 변화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 모습이라서 더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아이에게 사족을 못 쓰는 모습이 두 반려에게는 어쩐지 신선하게까지 느껴졌다. 아이가 편안하게 잠들 수 있도록 일단 침실을 빠져 나온 셋은 정원에 앉아서 다시 얘기를 나누었다. “바깥 상황은 좀 어때?” 준상의 말에 헤네스가 대답했다. 그녀는 우선 가장 최근에 벌어진 바르델과의 전쟁 얘기를 꺼냈다. 전쟁이 일어나게 된 원인부터 시작해서, 경과를 차근차근 전해들은 준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속국으로 만들 생각이야?” “현재로서는 하나의 국가를 운영하기엔 얀트훈센의 역량이 너무나 부족하니까요.” “하긴.” 단순히 영토를 점령하기만 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 힘으로 억누르자면 그렇게 못할 것도 없겠지만, 소수의 지배층과 다수의 피지배층이 가지는 구조적인 모순은 아무리 시간이 많이 지나도 쉽게 극복하기 어려운 점이 많다. 때문에 헤네스는 일단 교두보와 완충지대로서 다섯 개의 영지를 운영하고, 인질이라는 명목으로 왕족을 얀트훈센의 문화에 익숙해지도록 만들 생각이었다. 만약 이런 계획이 실패해서 새로운 왕이 반감을 가지더라도, 이년이란 시간 동안 권력을 장악했던 귀족 회의와의 알력으로 인해 정치력이 소모될 테니 그 틈을 파고 든다면 얀트훈센의 영향력은 더욱더 커지게 될 것이다. “고생했다.” “저보다는 기안님이 더 고생이셨죠.” 헤네스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다시 지구의 사정을 설명했다. “준상씨가 정령계로 들어가고 난 이후, 세 번의 실종이 더 이어졌어요.” “음...” 정령계로 들어가기 이전에 일어난 실종 횟수 역시 모두 세 번이므로, 지금까지 일어난 실종의 횟수는 모두 여섯 번이 되는 셈이다. 헤네스는 생각에 잠긴 준상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놀라지 마세요. 유미 언니 아시죠?” “물론.” “유미 언니 레벨이 지금 얼마나 되는 줄 아세요?” “얼만데?” 헤네스는 조금은 과장된 표정으로 대답했다. “무려 42레벨이에요. 제가 알기로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레벨이 높을 걸요.” 하지만 준상의 반응은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그랬군.” 너무나 담담한 그 반응에 헤네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별로 안 놀라네요?” 그 말에 대답한 건 리체스였다. “예전 같으면 몰라도, 지금의 여보에겐 별로 의미 없는 일이니까.” “...” 리체스는 준상과 헤네스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자 얼굴을 붉히며 다시 말했다. “이상해? 역시 그냥 주인님이 나을라나?” 그 모습에 준상과 헤네스는 다시 웃음을 터뜨리고 말했다. “안 이상해요. 언니한테는 오히려 그 정도가 딱 어울리는 것 같아요.” 헤네스의 말에 리체스는 얼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그거 별로 칭찬 같지가 않은데.” “칭찬 맞아요.” “정말?” “정말이요. 그렇죠?” 그 말에 준상은 마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작품 후기 ============================ 덴장... 00292 트롤러 ========================================================================= 헤네스는 계속해서 지구에서의 변화를 준상에게 알려 주었다. 우선 가장 큰 변화는 귀환자들에 대한 일반인의 인식 변화를 꼽을 수 있다. 어둠의 군세와 마수들이 지구상에 모습을 드러냄에 따라 그들을 사냥하는 것이 가능한 귀환자들은 일반인들에게 영웅과도 같은 존재로 떠올랐다. 처음에는 준상과 같은 상위 능력자들의 절대 부족으로 큰 곤욕을 치렀지만, 방어복의 양산이 본격화되고 지금까지 모습을 감추고 있던 상위 능력자들이 하나 둘씩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위기를 타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는 법. 귀환자들이 지닌 바 능력을 범죄에 사용하는 행위도 따라서 늘어나는 바람에 도심 한 복판에서 능력자들끼리 전투가 벌어지는 경우도 빈번해지는 상황이었고, 이것은 귀환자들로 구성된 특수 부대를 운영하고 싶어 하는 권력자들의 좋은 빌미가 되어 최근 각국에서는 이런 식으로 새로운 특수 부대를 창설하는 것이 일종의 유행처럼 번져가고 있었다. 다만 이전에 준상에게 크게 데인 적이 있는 미국이 앞장서서 귀환자들에 대한 처우를 최대한 보장하고 있는 상황이라, 이전처럼 헐값에 불려 다니는 경우는 줄어들고 있었다. 그에 반해 다크 시드 사용자들의 활동은 예상 외로 좀처럼 들려오지 않고 있었다. 레벨 30 이상의 상위 능력자들이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니 준상과 마찬가지로 다크 시드 사용자들과의 충돌이 빈번히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데, 기묘하게도 다크 시드 사용자와 충돌이 일어났다는 얘기는 전혀 나오지 않고 있었다. 마수나 어둠의 군세 같은 자들과 혼동되어 그 실체를 미처 알아채지 못했을 수도 있고, 준상에게 크게 당한 뒤로 철저하게 지하로 숨어들어 외부 활동을 자제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지만, 어느 쪽이 되었든 준상으로서는 불안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정령의 흐름이 시드의 파동을 차단하는 효과가 있다면, 예전의 힘은 더 이상 사용하지 못하는 건가요?” 리체스의 물음에 준상은 고개를 저었다. “이미 가지고 있는 능력의 사용은 큰 문제가 없는 것 같아. 새로운 퀘스트를 받는다든가, 메신저 같은 통신 기능에 제한을 받는 것 뿐이지.” “그렇군요.” 퀘스트를 받지 못한다는 말은 다시 말해 더 이상의 카드 수급이 어렵다는 말과도 같다. 하지만 성장이 여기서 멈추었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었다. 현재 그의 몸 안에는 그 수를 일일이 세기 어려울 정도의 수많은 정령들이 자리잡고 있다. 이 정령들은 이제 막 태어난 아기와도 같은 존재라 기존에 그가 부리던 정령들에 비하자면 능력이 형편없었지만, 그 하나하나가 힘을 쌓기 시작하면 그야말로 기하급수적으로 능력이 폭발하게 된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더라도 딱히 문제될 일은 없었다. 애초에 준상이 능력을 성장시키고자 한 이유는 퀘스트나 수확의 날, 그리고 다크 시드 사용자들 같은 위협으로부터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수확의 날 같은 경우는 아직 완전히 안심하기는 이른 면이 있지만, 퀘스트가 더 이상 날아오지 않게 된 이상 요정계 안에서만 지낸다면 다크 시드 사용자 같은 자들과 만날 일도 없으니 조금은 느긋하게 지낸다 해도 문제될 것이 없다. 헤네스도 리체스도 그런 상황을 어느 정도 인지했는지, 조금은 편안한 기분으로 준상과 그동안 있었던 일들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다. “응?” 그러던 중에, 문득 리체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더니 준상에게 이렇게 말했다. “누리가 깼나봐요.” “그래? 그럼 가봐야지.” 깼다는 말에 반색하며 얼른 일어서는 준상의 모습에 헤네스와 리체스는 마주 보며 소리를 죽인 채 웃음을 지었다. 침실 근처로 가자 우렁찬 아기 울음소리가 쩌렁거리며 밖에 까지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 녀석 참. 목소리만 들으면 남자인 줄 알겠네.” 준상의 말에 헤네스가 살짝 물어 보았다. “남자 아이가 더 좋아요?” “설마.” 하지만 준상은 고개를 저으며 안색이 새카맣게 죽은 채 아이를 어르고 있는 셀라에게 달려갔다. 셀라는 쩔쩔 매며 어르고 있다가 준상이 다가오자 못 이긴 척 아이를 넘겨 주었다. 하지만 누리는 준상이 자신을 안아 올리자 흘깃 바라보고는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우와아아아앙!” 목소리가 어찌나 우렁찬지 준상은 순간 귀가 먹먹해지는 듯한 느낌까지 받았다. 아까와는 너무도 다른 반응이라 준상은 당황하고 말았다. “얘가 왜 이러지?” 당황해서 쩔쩔매는 준상의 모습에 헤네스와 리체스는 다시 웃음을 지었다. “배가 고파서 그래요. 이리 줘보세요.” 리체스는 준상으로부터 아이를 넘겨받더니 앞섶을 풀고는 가슴을 아이 입에 가져다 대었다. 그러자 누리는 기다렸다는 듯이 울음을 그치고는 식사를 시작했다. “허, 그 녀석 참.”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시치미 뚝 떼고 식사를 하고 있는 아이의 모습을 보며 준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 보이자, 리체스는 젖을 물린 채 이렇게 말했다. “어쩔 수 없어요. 당장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우는 것 밖에 없으니까요.” “하긴.” 누리는 양껏 배를 채우고 신나게 트림을 한 다음 다시 잠이 들었다. 모처럼 허겁지겁 달려온 준상으로서는 허무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잘 자고 있는 녀석을 다시 깨울 수도 없는 일이다. “아, 그렇지.” 준상은 그제서야 생각났다는 듯이 캐비닛 안에 일년 넘게 처박아 두었던 휴대폰을 꺼내 누리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기 시작했다. 이런 저런 각도로 한참이 사진을 찍던 준상은 마음에 드는 사진 한 장을 손에 넣고서야 겨우 손을 멈추었다. “어때. 잘 찍혔지?” 자랑스럽게 누리 사진을 보여주는 준상에게 헤네스가 조금 토라진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게 좋아요?” “그럼.” “저보다도요?” “어? 그게...” 잠시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몰라 당황해 하는 준상의 모습에 헤네스와 리체스는 다시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특히나 리체스의 경우에는 말도 않고 자기 마음대로 아이를 낳은 뒤라 혹시 준상이 싫어하면 어쩌나 싶어 남 몰래 가슴을 졸이던 상황이라 이렇게 허둥대는 모습이 기쁘기까지 했다. 그렇게 하루 종일 아이 옆에 달라붙어 있다가, 마침내 밤이 되었다. 준상은 누리와 함께 자고 싶어 했지만, 헤네스와 리체스는 그를 억지로 데리고 신기루 꽃으로 향했다. “먼저 들어가 있어요.” “알았어.” 준상을 먼저 컨테이너 하우스 안으로 들여보낸 헤네스와 리체스는 뭐가 그리 좋은지 웃으며 어딘가로 향했다. “...” 준상은 컨테니어 하우스 안에 마련된 접이식 침대를 펴고 시트를 만져 보았다. 그가 없는 동안에도 주기적으로 시트를 갈아준 탓인지 부드럽고 따뜻한 느낌이 전해져 온다. 솔직히 말하자면, 준상으로서는 일년이라는 시간에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물론 정령계에 있는 동안 헤네스나 리체스에 대한 일이 떠오르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새로운 힘을 얻어 수확의 날에 대비하는 일이 더 시급한 일이었기 때문에 그런 감정은 최소한으로 억눌렀다. 하지만 막상 돌아오고 보니, 그의 생각과는 달리 일년이라는 시간의 무게는 생각보다 상당히 컸다. 생각지도 못했던 딸의 모습을 보는 순간 과장 하나 없이 정말로 심장이 철렁 내려 앉는 느낌을 받았다. 뿐인가. 헤네스 역시 처음 봤을 때는 바로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성장해 있었고, 리체스는 귀엽고 장난기 많은 요정 여왕에서 푸근한 분위기를 지닌 한 아이의 엄마로 변해 있었다. 비록 리체스처럼 많은 세월을 살아온 것은 아니지만, 준상은 살아오면서 일년이라는 시간의 무게를 오늘처럼 크게 느낀 적이 없었다. 그렇게 가만히 상념에 잠긴 채 의미없이 시트를 가만히 어루만지고 있는데, 컨테이너 하우스의 문이 열리며 두 반려가 모습을 드러냈다. “...” 헤네스와 리체스는 준상이 말없이 자신들을 바라보자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일 년이나 독수공방을 한 여파인지, 아니면 모처럼 만난 정인을 위해 용기를 낸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녀들이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파격적인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먼저 헤네스는 지금까지 사다 놓고 단 한번도 입어 본적이 없었던 하얀색 네글리제를 입고 있었다. 풍만하게 성장한 가슴 골이 훤히 보일 정도로 깊게 파인 목선부터 시작해서, 레이스로 가려진 가슴과 그대로 비쳐 보이는 배꼽, 그리고 평소의 헤네스라면 절대로 입지 않을 듯한 손바닥 만한 속옷에 이르기까지, 무엇 하나 놀랍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에 반해 리체스는 고아한 느낌을 주는 하얀색의 네글리제를 입고 있었는데, 헤네스의 것처럼 속살이 훤히 비치지는 않았지만, 치렁치렁하게 흘러내린 옷자락은 마치 그녀의 반투명한 날개와도 비슷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역시... 이상한가요?” 스스로 입어 놓고도 역시 감당하기가 쉽지 않은지 자꾸만 손으로 가슴을 가리며 헤네스가 그렇게 말하자 준상은 그제서야 취한 듯한 기분에서 깨어나며 고개를 저었다. “설마. 이상하다니, 그럴 리가 없잖아.” 리체스는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그런 준상에게 다가서며 물었다. “예뻐요?” “응.” “그럼 키스해줘요.” 리체스가 먼저 그렇게 유혹을 시작하자, 헤네스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저도 키스해주세요.” “...” 준상은 난처해지고 말았다. 이렇게 동시에 두 반려가 아름다운 육체를 밀착시키며 키스를 요구하자 누구에게 먼저 키스를 해야 할지 난감해진 것이다. 이전의 그였다면 당연하다는 듯이 헤네스에게 먼저 입을 맞추었겠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없는 일 년 동안 마음 졸이며 고생한 리체스를 모른 척 할수도 없는 일. “큰일인데.” “뭐가요?” “둘 다 너무 예뻐서 누구한테 먼저 키스를 해야할지 모르겠어서.” “...” 헤네스와 리체스는 정말로 난처해 하는 준상의 모습에 이내 웃음을 터뜨리고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의 볼에 입을 맞추어 주었다. 볼에 입을 맞추고 나자, 리체스가 준상의 가슴에 손을 얹고는 살짝 밀며 말했다. “누워봐요.” “...” 준상은 못 이긴 척 그녀가 미는 대로 몸을 침대 위에 눕혔다. 그러자 리체스는 헤네스와 눈짓을 주고 받더니, 함께 준상의 옷을 하나 하나 벗기기 시작했다. 그녀들의 행동을 준상은 말없이 받아들였지만, 리체스는 셔츠를 벗기자 그것으로 준상의 팔을 묶더니 침대 기둥에 고정시켰다. “리체스?” 이건 또 뭐하는 건가 싶어 준상이 묻자, 리체스는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말했다. “무려 일년 동안이나 이렇게 예쁜 부인들을 독수공방시키고도 그대로 넘어갈 줄 알았어요?” “...” “오늘은 각오해야 할 거에요.” 준상이 쓴웃음을 짓자 아름다운 두 반려는 그의 옷을 완전히 벗기고는 온몸에 감미로운 입맞춤을 선사하기 시작했다. 이 정도의 결박은 풀고자 한다면 단숨에 풀어버릴 수 있었지만, 준상은 가만히 눈을 감은 채 그녀들이 하고자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리체스는 준상의 몸에 키스를 하면서 손을 뻗어 그의 하복부를 어루만졌다. 그녀의 대담한 행동에 조금 놀란 표정을 짓던 헤네스였지만, 이내 질 수 없다는 듯이 그녀 역시 손을 뻗었다. 두 개의 부드러운 손이 마치 경쟁하듯 주물럭대자, 준상의 육체는 금방 원기왕성한 기운을 뽐내기 시작한다. 리체스는 헤네스를 향해 눈을 찡긋하더니 이내 천천히 준상의 부풀어오른 육체에 입을 가져갔다. “...” 그 모습에 헤네스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지금까지 준상과 잠자리를 수차례 가진 그녀였지만, 이런 대담한 행위는 미처 상상도 못했었기 때문이다. 리체스는 단순히 입을 맞추는 것을 넘어서 아예 그것을 입안에 집어넣었다. “그, 그런.” 이쯤 되자 헤네스는 눈앞에서 펼쳐지는 리체스의 행위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일까. 그냥 옆에서 지켜보는 것 뿐인데도 묘하게 하반신이 저릿저릿해지는 이 느낌은. “으음...” 리체스는 준상의 육체를 입안에서 굴리다가 그것이 한계까지 팽창했음을 느끼자 상기된 표정으로 헤네스에게 말했다. “자, 이리와.” 멍하니 리체스의 모습을 지켜 보고 있던 헤네스는 갑작스런 그 같은 부름에 화들짝 놀랐다. “네?” “어서.” 헤네스는 머뭇거리며 그녀의 옆으로 다가섰고, 리체스는 그녀의 손을 잡아 이끌더니 입고 있는 검은 색 속옷의 끈을 풀어 버렸다. “언니?” 그녀의 행동에 당황해 하는 헤네스의 말에 리체스는 살짝 눈을 흘기며 말했다. “싫으면 내가 먼저 한다?” “...” 헤네스는 결국 못 이긴 척 그녀가 이끄는 대로 몸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천천히...” 리체스의 손이 인도하는 대로 허리를 내리던 헤네스는 뜨거운 불덩이 같은 무언가가 다리 사이를 스치는 감각이 느껴지자 흠칫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머뭇거림에도 불구하고 리체스의 길고 부드러운 손가락은 준상의 육체를 헤네스의 몸 안으로 거침없이 인도했다. “흣!” 뜨겁게 달궈진 육체가 자신의 몸 안을 가득 채우며 밀려들자 헤네스의 입에서는 억누르고 있던 뜨거운 숨결이 그대로 터져 나왔다. “잘했어.” 삽입만으로도 숨을 헐떡이는 헤네스의 모습에 리체스는 미소를 짓고는 이내 몸을 일으켜 준상의 가슴 위에 올라탔다. 리체스는 그 상태로 가만히 하늘거리는 네글리제를 두 손으로 걷어 올리고는 하얗게 드러난 허벅지 사이의 계곡을 준상의 입가에 가져가며 말했다. “키스해줘요.” “...” “어서요.” 준상은 리체스의 요구에 응했다. 그의 입술이 민감한 속살에 와 닿고, 뒤이어 촉수처럼 꿈틀거리는 혀가 그 안을 비집고 들어오자 리체스는 탄성을 터뜨렸다. “아아... 좀 더 부드럽게요. 그래요. 좋아요.” “...” 리체스는 혼자 아이를 낳으며 했던 고생과 그로 인해 쌓인 울분을 모조리 풀겠다는 듯이 준상에게 끊임없이 무언가를 요구했고, 결국 준상은 그날 침대에 손이 묶인 채 두 반려들에게 벌을 받다가 새벽이 되어서야 겨우 잠이 들었다. 준상은 그뒤로 계속 낮에는 아이를 돌보고 밤에는 반려들과 뜨거운 시간을 보내다가, 마침내 일주일이 지나자 본격적으로 정령계의 정령들을 단련시키기 위한 수련을 시작했다. 정령의 힘이 가장 충만한 장소라면 역시 정령계겠지만, 사실 그곳은 너무나도 다양한 속성의 힘이 뒤섞여 있기 때문에 제대로 정령의 힘을 키우기에는 오히려 어려운 점이 많았다. 여러 가지 힘이 혼재된 정령계 같은 곳보다는, 한 가지 힘이 특별히 많이 분포된 곳이 오히려 수련에는 이로운 면이 많은 것이다. 단순히 여러 가지 정령이 동시에 몸을 깃든 것 뿐이라면, 이런 식으로 한가지 속성을 먼저 특화시키는 것은 정령의 균형을 무너뜨릴 수 있으므로 매우 위험한 일이었지만, 준상의 경우에는 그 육체 자체가 하나의 정령계이므로 그런 식의 제약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가장 먼저 선택된 것은 바로 불의 속성. 이것을 위해 준상은 일부러 화산지대를 찾아 용암이 펄펄 끓는 불구덩이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만 했다. “후아...” 사실 수련이라고 해봐야 화염 저항 시드를 잔뜩 갖추고서 용암천 안으로 들어간 다음 화염 속성의 정령들을 불러내어 그 힘을 북돋워주는 것이 고작이다. 조급한 마음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서두른다고 해서 되는 일도 아닌지라 차라리 느긋하게 온천을 즐기는 기분으로 수련에 임하는 것이 현재로서는 최선이었다. 용암천에서의 수련을 마치고 돌아오자, 헤네스가 그를 맞이했다. “수련은 잘 끝나셨어요?” “덕분에. 그런데 무슨 일이라도?” 준상의 물음에 헤네스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마침 필요한 것도 있고 해서 지구에 다녀오려던 참이거든요. 같이 가지 않으실래요?” 곰곰이 생각해 보니 누리가 쓸 물건이라든가, 누리의 모습을 촬영할 비디오 카메라라든가, 누리가 가지고 놀 장난감이라든가, 준상도 여러 가지로 필요한 물건이 많았다. “그러지. 금방 씻고 나올테니 잠깐만 기다려.” “네!” ============================ 작품 후기 ============================ 설문 진행중입니다. 나중 되면 고치기 힘드니 오늘 하루만 열어두도록 하겠습니다. 많은 참여 바랍니다. 00293 트롤러 ========================================================================= 준상은 얼른 몸을 씻고는 헤네스와 함께 요정계로 가서 북한산으로 연결된 정령의 문을 통과했다. “흠...” 현재 정령의 문은 한국과 일본, 그리고 미국의 동부와 서부에 다수 설치되어 있다. 요즘처럼 시간이 날 때 이것도 차근차근 수를 늘려 가야할텐데 라는 생각을 떠올리며 준상은 숲을 가로질러 도로가 있는 곳으로 나온 다음 오랜 만에 자가용인 랩터를 꺼냈다. “운전도 오랜만에 하시는 거 아니에요?” 헤네스의 말에 준상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어쩔 수 없지. 그렇다고 걸어갈 수도 없는 일이니.” “하긴, 그렇네요.” 조심스럽게 산길을 따라 차를 몰고 내려오자 헤네스가 말했다. “전에 갔던 호텔 기억하세요? 쇼핑몰이랑 합쳐진.” “물론.” “유미 언니랑 만나기로 했거든요. 그곳으로 가요.” “미리 약속했었던 거야?” 준상의 말에 헤네스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네. 유미 언니가 아는 분 중에 아기들한테 필요한 걸 잘 아시는 분이 있으시다고 해서 조언을 좀 구할 생각이었거든요.” “아하.” 이러니 저러니 해도 결국 생각은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하기야 준상도 마음만 앞섰지 정작 아기한테 정말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는 전혀 모르는 상황이니 마침 잘된 일이기도 하다. 세상이 바뀌었어도 여전히 북적거리는 도심을 지나 이전에 한동안 머물렀던 호텔 근처에서 차를 인벤토리에 넣은 준상은 헤네스와 함께 호텔 로비의 커피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요정 키스의 부작용 때문에 선글라스와 모자를 착용한 상태이긴 했지만, 잘 달련된 근육질의 준상과 쭉 빠진 팔다리의 아름다운 몸매를 지닌 헤네스가 함께 들어서자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그들에게로 시선을 향하고 말았다. “아, 여기에요.” 바라보니 서유미가 어떤 나이 지긋한 할머니 한 분과 함께 자리에 앉아 있는 모습이 보인다. 준상과 헤네스는 곧장 그들이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서유미는 준상의 모습을 보고는 조금 긴장한 표정으로 일단 인사부터 했다. “안녕하세요. 하던 일이 잘 마무리 되셨나 봐요. 그동안 안 보여서 많이들 걱정했는데.” 준상은 서유미의 모습을 보고는 조금 놀랐다. 항상 정돈 되지 않은 긴 머리를 귀신처럼 늘어뜨린 채 흘깃 보면 영락없이 소복이 연상되는 흰 원피스만 줄창 입어대던 그녀가 지금은 어쩐 일로 제대로 머리도 정돈하고 성숙한 분위기의 정장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갑군.” 물론 그래봐야 대답은 언제나처럼 단답형이었지만 말이다. 조금 썰렁해진 분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헤네스가 얼른 나섰다. “이분이 말씀하셨던 그 분이신가요?” 서유미는 옆자리에 앉아 있던 할머니를 가리키며 말했다. “맞아요. 철모르던 시절부터 절 길러준 분이세요.” 고아한 느낌의 할머니는 준상과 헤네스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이금옥이라고 합니다. 아가씨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반갑습니다. 헤네스라고 해요.” “박준상이라고 합니다.” 인사를 나눈 그들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쇼핑몰로 향했다. “아이가 몇 개월이라고요?” “이제 삼 개월 되가요.” “한창 예쁠 때네요.” 헤네스는 특유의 친화력을 발휘하여 할머니와 얘기를 나누었고, 준상은 조금 뒤에서 서유미와 함께 그들의 뒤를 따랐다. 앞선 두 사람의 화목한 분위기와는 달리 서유미와 준상은 달리 할 얘기가 없는 상황이라 서먹하게 걸음만 옮길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분유병부터 시작해서 아기 전용의 물비누나 샴푸, 린스에 이르기까지 정말 수를 세는 것이 난감할 정도로 다양한 아기용품의 물량 공세에 준상은 그만 압도되고 말았다. “수유 쿠션은 있나요?” “그, 그게 뭐죠? “젖을 줄 때 자세를 잡아주는 쿠션이에요. 있으면 편하답니다.” 아줌마 요정들의 도움을 받아 이것저것 준비를 하기는 했어도, 이곳에 준비되어 있는 물품과 비교하면 아무래도 부족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헤네스는 이것저것 사서 부지런히 준상에게 떠안겼다. 준상은 그제서야 자신이 짐꾼으로 헤네스에게 불려왔음을 깨달았지만, 사실 그의 능력이라면 어지간한 무게 정도는 문제도 아니었다. 정 안되면 인벤토리에 넣어도 되는 일이고 말이다. 거의 한나절이나 쇼핑몰을 쏘다니며 이것저것 필요한 물품을 사고 나서, 준상과 헤네스는 서유미와 할머니에게 점심 식사를 대접한 뒤에야 쇼핑을 마칠 수 있었다. “오늘 고마웠어요.” “저도 즐거웠답니다.”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고 있는데, 문득 서유미가 생각났다는 듯이 준상에게 말했다. “맞다. 서윤씨가 전부터 만나고 싶어했는데, 혹시 얘기 들으셨어요?” “아니.” “메신저로는 연락이 안된다던데...” “그럴 일이 좀 있어서. 조만간 찾아가겠다고 전하도록.” “네.” 대화를 마치고 서유미와 할머니가 시야에서 멀어지자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헤네스가 준상에게 말했다. “아, 근데 준상씨도 뭔가 살 것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랬지.” “아까 말하시지.” “괜찮아. 지금부터 사러 가면 되니까.” 준상은 우선 전자 제품 매장부터 들렀다. 그곳에서 최고 화질의 캠코더와 디지털 카메라를 구입한 준상은 이어서 유아용 장난감 매장에 들렀다. “이 미끄럼틀 어때.” “그, 글쎄요. 아직 누리가 이런 걸 타는 건 좀 무리가 아닐까요?” “역시 그런가.” 둘이서 장난감을 살펴보고 있자니 점원이 다가와서 물었다. “아기가 몇 개월이죠?” “아... 이제 막 삼 개월 되어 가요.” “그러면 이런 건 어떨까요.” 점원이 추천한 것은 인형들이 끈에 매달린 모빌이었다. “삼 개월 정도면 한창 감각이 발달하기 시작할 시기죠. 이 시기의 장난감은 시각이나 청각 발달에 도움이 되는 것이 적격이죠.” “아... 그렇군요.” “시각 발달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앞서 보여드린 모빌 같은 것이 있고, 청각 발달에 도움이 되는 거라면 이런 간단한 딸랑이나 삑삑이부터 시작해서 조금 복잡한 건반 같은 것도 있어요.” 결국 준상과 헤네스는 점원이 추천하는 대로 또다시 이것저것 산더미처럼 사 모으고 말았다. “어쩐지... 뭔가 속은 기분이 드는 걸요.” “기분 탓이야. 신경 쓰지마.” 결국 그들이 쇼핑을 마치고 다시 요정계로 돌아가기 위해 북한산에 위치한 정령의 문에 도착한 것은 해질 무렵이 다 되어서의 일이었다. 정령의 문을 통과해 요정계에 들어선 그들은 곧바로 여왕의 침실로 향했다. “셀라. 이것 좀 봐요.” “세상에! 이게 다 뭐에요?” 산더미처럼 쌓여진 유아용품에 셀라는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았다. “너무... 많은 거 아닌가요?” “크흠, 어쩌다 보니까...” 준상과 헤네스가 돌아왔다는 소식에 침실로 돌아왔던 리체스 역시 놀래기는 마찬가지였다. “뭘 이러게 많이 샀어요?” “크흠... 어쩌다 보니.” 준상은 그렇게 헛기침을 하면서도 얼른 캠코더부터 꺼내 누리의 모습을 동영상으로 촬영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하여튼, 못 말려.” 리체스는 그 모습에 결국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자아, 아빠다. 아빠 해봐.” “아바?” “옳지. 우리 누리 착하다. 하하.” 어느새 둘 만의 세계로 빠져드는 그 모습을 보고 헤네스가 웃으며 말했다. “저렇게 좋을까요.” “그러게. 이거 은근히 질투 나는데.” “언니도 참.” 결국 그날은 그렇게 지나가고, 다음 날이 되자 준상은 혼자서 다시 서울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제 말한대로 서윤을 만나보기 위해서였다. 정령의 흐름 때문에 메신저가 먹통이 되어버린 지금 상황에서는 조금 귀찮더라도 이렇게 직접 만나러 가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가 랩터를 몰고 펜션으로 들어서는데 입구에서 처음 보는 남자가 그의 차를 가로 막았다. “이곳은 사유지입니다. 용건을 말씀해 주십시오.” 복장을 보아 하니 경비원으로 보였다. “서윤을 만나러 왔다.” 경비원은 얼굴을 찌푸리더니 다시 물었다. “누구라고 전해 드릴까요.” “박준상.” “...” 단답형의 대답에 경비원은 뭔가 울컥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심호흡을 하고는 무전기로 보이는 무언가에 대고 뭔가 얘기를 하더니 이내 크게 놀란 표정을 지으며 얼른 거수 경례를 했다. “어서 오십시오! 길드장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 과장된 그 반응에 준상은 쓴웃음을 짓고는 펜션 안으로 차를 몰았다. 그러자 이전과는 달리 상당히 많은 수의 사람들이 안에서 오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처음 보는 육중한 차체의 픽업 트럭이 펜션 안으로 들어오자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 안에 탄 사람을 살폈다. “누구지?” “글쎄.” 하지만 준상이 차에서 내리는 순간 펜션 문이 벌컥 열리며 임서윤과 윤성렬이 후다닥 달려나와 그를 맞이하자, 그들은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았다. 며칠전 정부 고위 인사가 방문했을 때도 저 정도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었기 때문이다. 누군가 싶어 수군거리는데, 문득 날렵한 체구를 지닌 청년 하나가 혀를 차며 말했다. “거들먹거리기는.” 그는 다름 아닌 길드 초기 멤버 가운데 하나인 이한서였다. 준상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조금 왜소한 체구의 검도 소년이었지만, 이 일 년간 헤네스와 마찬가지로 급격하게 성장을 거듭해 지금은 완연한 청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너무 신장이 빠르게 커서 지금도 성장통으로 고생을 하고는 있는 것이 문제일 정도다. “뒤에서 험담하는 것은 좋지 않은 버릇이야.” 그렇게 충고한 것은 이한서와 같은 시기 길드에 들어온 손가은이었다. “험담이랄 것 까지야 있나요. 사실을 말한 것 뿐인데.” 투덜거리며 그렇게 말하는 이한서를 향해 손가은은 다시 말했다. “질투 속에는 사랑보다 이기심이 더 많다고들 하지.” “쳇... 그건 또 누구 말이죠?” “라 로시코프.” 그렇게 밖에서 손가은과 이한서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동안, 준상은 임서윤과 윤성렬의 안내를 받으며 소파에 앉았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신 겁니까. 통 연락도 없으시고.” “그러게 말입니다. 정말 어떻게 되신 줄 알았습니다.” 앞 다투어 그렇게 말하는 임서윤과 윤성렬을 보며 준상은 조용히 말했다. “그럴만한 일이 있었다.” “...” 대화의 맥을 단숨에 끊어버리는 준상의 말에 임서윤과 윤성렬은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변하기는 개뿔. 서유미로부터 어쩐지 사람이 조금 유하게 변한 것 같다는 말을 들었을 때만 해도 과연 지난 일년간 무슨 일이 있었나 싶었는데, 지금 보니 별로 변한 것 같지도 않다. “길드원이 늘어난 모양이군.” 준상의 말에 임서윤이 얼른 대답했다. “네. 아무래도 슬슬 힘을 결집할 필요가 있다 싶어서 말입니다.” “정부 때문인가?” “정부도 있고, 방어복 문제도 있고 해서 말입니다.” “방어복?” “그게... 너무 잘 팔리다보니 여기저기서 탐내는 놈들이 많아졌습니다. 미국 쪽에서도 자체 개발을 시작한 모양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역시 원조는 저희 쪽이니까요.” “그렇군.” 서윤은 얼른 준비해두었던 서류를 꺼내어 준상에게 내밀었다. “그간의 재무제표입니다. 수익은 일단 임의로 통장을 개설해서 넣어두었습니다. 현물은 아무래도 보관이 까다로워서 말이죠. 하지만 원하시면 언제든 현물로 교환해 드리겠습니다.” 준상은 서윤이 건넨 통장을 대충 확인하고는 탁자에 내려놓았다. “다들 레벨이 어느 정도지?” “저희들 말씀이십니까?” “이전부터 있던 사람들도 전부.” 임서윤은 윤성렬과 마주 보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일단... 서유미씨가 최근 42레벨로 올라섰습니다. 아직 귀환자들의 레벨 통계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지는 않지만, 최초 40레벨 달성 칭호를 얻은 것으로 봐서는 현재 가장 레벨이 높지 않을까 합니다.” “그 얘기는 들었다.” 자신의 얘기를 듣고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준상의 모습에 서윤은 마음 속에 떠오르는 의문을 감출 수가 없었다. 서유미가 최고 레벨이라는 것은 다시 말해서 준상의 레벨이 그에 못 미치다는 뜻이 된다. 물론 준상의 능력을 단순히 레벨로 따질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그렇다면 과연 지난 일년간 무얼 했다는 말인가. 그의 성격상 퀘스트를 대충 수행할 리도 없는 일. 적어도 퀘스트만 제대로 수행했어도 이런 식으로 레벨을 따라 잡히는 일은 없었을 테니, 이것은 다시 말해 그가 퀘스트를 수행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거나, 아예 수행 자체를 하지 않았다는 말 밖에 되지 않는다. “지난 일 년간 뭘 했는지 궁금한 모양이군.” “네, 뭐...” 준상은 소파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나는 지난 일 년간 퀘스트를 전혀 수행하지 않았다.” 혹시나 하고 있던 임서윤과 윤성렬은 크게 놀라고 말았다. “그런 일이... 가능합니까?” 준상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내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있나?” “...” 임서윤과 윤성렬은 당장이라도 비결을 캐묻고 싶은 표정이었다. 퀘스트는 강해지기 위한 과정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귀환자들을 옭아매는 족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나마 레벨이 올라가면서 대기 시간 같은 것도 획득하고 해서 좀 나아졌지만, 대기 시간이 10초 밖에 되지 않던 저렙 시절에는 제대로 편하게 용변도 못 볼 지경이었다. 그런 굴레를 벗어버리다니, 어찌 궁금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00294 트롤러 ========================================================================= 귀환자들이 막강한 능력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실질적으로 현실에 생각보다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에게 강한 능력을 부여하는 퀘스트의 존재가 바로 그것이다. 만약 이 문제가 해결되고, 덤으로 다른 세계와의 자유로운 출입이 가능해진다면, 현대 문명은 귀환자라는 이름의 신인류를 발판으로 삼아 한 단계 더 진보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 대다수 학자들의 의견이었다. 퀘스트의 문제는 지금 처음 들은 얘기였지만, 다른 세상을 자유로이 오갈 수 있으리라는 점은 임서윤이나 윤성렬처럼 그와 이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들은 모두 어느 정도 추측하고 있는 일. 다시 말해 준상은 지금 시대의 지구인들이 가장 원하는 두 가지 요소를 이미 모두 손에 쥐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개인의 강함을 넘어서는, 역사 그 자체를 뒤바꿀 수 있는 중대한 요소이기에 임서윤과 윤성렬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일년이나 아무 소식이 없다 싶어서 도대체 뭘 하나 궁금했는데, 이런 터무니 없는 성과를 들고 올 줄이야. 비록 지난 일년 동안 퀘스트를 수행하지 못해 능력이 정체되어 있었다 할지라도, 준상의 능력을 옆에서 직접 보았던 그들은 아직도 자신의 능력이 당시의 준상과 비교할 수 있을지 장담하지 못하고 있었다. 가장 간단한 예로, 지난 일년간 현실에 나타난 마수들만 봐도 그렇다. 제법 오랜 시간이 지났고, 많은 귀환자들이 능력을 개화시켜 이제는 굳이 준상이 아니더라도 어지간한 마수들은 사냥이 가능할 정도로 성장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마수를 단신으로 사냥했다는 얘기는 어디서도 흘러나오지 않고 있었다. 준상을 제외하고, 마수를 가장 적은 인원으로 상대했던 것은 약 일 개월 전에 에게 해에 나타난 투구게 형태의 마수 타스 빌렘을 그리스 출신 귀환자 여섯 명이 사냥한 것이다. 이것조차도 준상이 대서양의 산타마리아 섬에서 같은 형태의 마수를 사냥했던 당시의 전투 기록을 기초로 대략의 사냥법이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고, 보통 마수 사냥에 소요되는 인력은 4인 파티 5개 정도가 기본이다. 최근 서윤이 길드를 확대 개편한 것도 이런 대세에 편승하기 위한 것으로서, 귀환자들 사이에서는 이렇게 다수의 파티로 묶여진 부대를 과거 MMORPG에서 사용되던 용어를 따서 공격대라고 부르고 있었다. 상위 능력자의 평균 레벨이 30정도로 상승한 지금에도 마수는 이러한 공격대 규모의 레이드를 필요로 하는 강대한 존재. 그런 존재를 이미 일년 전에 단신으로 처치했던 장본인이 바로 준상임을 감안하고, 실질적으로 레벨이 상승해도 랜덤 카드 외에 실질적인 능력치 상승이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단순히 레벨의 고저로 그의 능력을 판단하는 것 자체가 심각한 오류인 셈이다. 그야말로 격이 다른 자. 그렇게 밖에는 달리 부를 방법이 없다. 임서윤과 윤성렬이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기자, 거실 안에는 잠시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그때, 누군가 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들어와요.” 임서윤이 대답하자 조금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 하나가 찻잔이 담긴 쟁반을 든 채 머뭇거리며 안으로 들어섰다. “얘기 나누시는데 죄송합니다. 음료수라도 드릴까 해서...” “...” 임서윤과 윤성렬은 서로를 돌아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쟁반을 들고 나타난 이 남자는 이런 식으로 다른 사람에게 호의를 베푸는 일을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냉막한 성격을 가지고 있기로 길드 안에서 이름이 자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다소 사교 능력이 떨어짐에도 불구하고 두 자루의 헌팅 나이프를 다루는 솜씨가 실로 대단해서, 길드의 초창기 멤버 일곱 명을 제외한 다른 길드원들 중 최강의 공격력을 가진 한 사람으로 손꼽힌다. 그의 이름은 바로 이승형. 준상은 이미 그의 존재 따위 잊어버린지 오래였지만, 이승형은 튜토리얼 직후 받았던 퀘스트에서 그와 마주친 후 그 강렬한 존재감에 매료되어 지금까지 부단한 노력으로 능력을 개발해왔다. 방금 전 산악구보를 마치고 돌아오다가, 그가 커다란 픽업 트럭에서 내리는 모습을 보고 어찌나 놀랐던지. 제법 시간이 지난데다 선글라스와 모자로 얼굴을 가리고는 있었지만, 이승형은 준상의 모습을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러던 차에 음료를 준비하고 있는 정다빈을 본 이승형은 얼른 그 역할을 자신이 하면 안 되겠느냐고 부탁했다. 첫 만남부터 틀어져서 알게 모르게 준상을 다소 부담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던 데다, 아이를 낳는다고 최근 방문이 뜸해졌던 리체스가 언제 다시 마법 수련을 시키려고 들지 모르는 상황이라 안절부절하던 정다빈은 그의 부탁을 듣자 구세주를 만난 것처럼 기뻐했고 덕분에 이승형은 이렇게 준상 앞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내막을 모르는 임서윤과 윤성렬은 이승형이 어디서 준상을 만난 것일까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를 손짓해 불렀다. “자네, 이 분 아나?” 이승형은 서툰 몸짓으로 쟁반을 내려 놓으며 대답했다. “그게... 예전에 퀘스트에서 뵌 적이 있습니다.” “그랬군.” 그 대답을 듣고 임서윤과 윤성렬은 쓴웃음을 지었다. 준상과 퀘스트에서 만났다면 대충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 상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럼 자네도 권총을 차봤나?” 윤성렬의 말에 이승형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권총이라면...” “F 말일세.” “아...” 이승형은 고개를 저었다. “잘 기억은 안나지만 그때 등급이 D 정도 되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오오! 그거 정말 대단한데.” 튜토리얼을 막 끝내고 퀘스트에서 준상을 만났는데 F 등급을 면하다니. 역시 최강의 루키는 뭔가 싹이 달랐던 것인가 하며 탄성을 지르던 윤성렬은 임서윤이 옆구리를 툭 치자 그제서야 지루한 표정을 하고 있는 준상을 보고는 헛기침을 하며 입을 다물었다. 이승형은 혹시 지금의 대화로 자신을 기억해 주지 않을까 하며 준상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고맙군. 이만 가보게.” “예.” 조금 아쉬운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항상 목표로 삼아왔던 인물이 이 길드의 핵심 간부들과 친분이 있다는 것을 알아낸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었기 때문에 이승형은 얼른 준상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고는 거실 밖으로 나갔다. 물론 이승형의 감회야 어찌 되었든 간에 준상으로서는 대화의 맥이 끊긴 것이 귀찮을 뿐이었지만 말이다. “크흠.” 임서윤은 가볍게 헛기침을 하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저희들도 그 방법을 알 수 있겠습니까?” 단순히 자신이 이룬 성과를 과시하기 위해 이런 얘기를 꺼내지는 않았을 터. 지금까지 준상이 보여주었던 모습만 보더라도, 그는 의미 없이 아무 말이나 꺼내는 사람이 아니었음을 고려한다면, 이번 역시 뭔가 목적이 있어서 자신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꺼낸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하지만 준상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이승형이 가져다 놓은 음료수를 마시며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오히려 두 사람에게 이렇게 물었다. “이 퀘스트의 목적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나?” “...” 임서윤과 윤성렬은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러나 선글라스 안쪽에서 준상의 무거운 눈빛을 느낀 순간, 그들은 이것이 매우 중요한 질문임을 깨달았다. 설마. 이 남자는 퀘스트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을 넘어서, 이 모든 일이 지닌 의미 그 자체를 파헤쳤단 말인가. 대화의 방향이 상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곳으로 흘러가기 시작하자 임서윤과 윤성렬은 튜토리얼 당시 처음 전투를 치렀을 때와 같은 긴장감으로 온몸이 축축하게 젖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생각해 본 적이 없나?” 다시금 준상의 질문이 이어지자, 윤성렬은 조심스럽게 현재 가장 흔하게 떠도는 소문 가운데 하나를 입에 담았다. “일종의 면역 체계 같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둠의 군세라든가, 마수 같은 외부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지구 스스로가 귀환자라는 항체를 만든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만.” 하지만 준상은 고개를 저었다. “가장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생각은 역시 그것이겠지. 하지만 아니야.” “그럼...” 준상은 무거운 시선으로 윤성렬과 임서윤을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 “지금부터 하는 얘기는 절대 밖으로 흘러나가서는 안 된다. 감당할 자신이 없다면, 이 방에서 바로 나가도록.” “...” 임서윤과 윤성렬은 잠시 아무 말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았다. 설령 그것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충격적인 내용이더라도, 그들 역시 귀환자였기 때문에 스스로의 운명을 뒤바꾸어 버린 퀘스트의 실체에 대해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준상은 두 사람이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자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했다. “보통 어떤 현상이 일어나면 바로 그 자체가 목적이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그것이 다른 무언가를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윤성렬이 말한 얘기도 그런 식의 사고가 낳은 결과물이라 할 수 있지.” 임서윤은 가뜩이나 작은 눈을 더욱 찌푸리며 그 말을 받았다. “그 말씀은, 퀘스트 자체가 바로 그 목적이란 말씀이십니까?” “그게 아니다.” “그럼...” 준상은 다시 물었다. “퀘스트를 수행한 귀환자들은 어떻게 되지?” 그러자 윤성렬이 대답했다. “돌아옵니다.” “...” 순간 준상은 물론이고 임서윤마저 윤성렬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 무언의 압박에 윤성렬은 얼른 뒤통수를 긁적이며 사과했다. “크흠... 죄송합니다.” 그러자 임서윤이 준상에게 말했다. “귀환자들을 강하게 만드는 것이 퀘스트의 목적이란 말씀이십니까?” 준상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 말대로다. 최근 지구 상에서 출현하는 어둠의 군세나 마수 또한 같은 목적이라고 보면 거의 틀림없다.” 그 말을 들은 임서윤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더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아무 이유도 없이 귀환자들에게 무턱대고 이런 능력을 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한두 명이라면 몰라도 이미 실종과 귀환을 통해 능력을 받은 자가 전 세계에 십만을 넘어섰습니다.” “난 이유 없이 능력을 주었다고는 하지 않았다.” “네?” “이유가 있다. 분명한 이유가.” 준상은 굳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임서윤과 윤성렬을 바라보며 자신의 머리를 톡톡 건드렸다. “이유는 바로 시드다.” “네?” 윤성렬은 머리가 아파지기 시작했는지 관자놀이를 주무르기 시작했고, 임서윤은 아무래도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다시 말했다. “시드라니요. 괴물들 머리 속에 들어있는 그것이 목적이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그건 더 말이 되지 않습니다. 시드가 목적이라면 그렇게 무턱대고 뿌려대서는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준상은 오히려 반문했다. “시드는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이지?” “네? 그건...” 임서윤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단순히 괴물 들의 머리 속을 뒤지면 나오는 것이라는 것만 알 뿐, 지난 일년간 각국의 연구에도 불구하고 시드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 정체불명의 물질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임서윤은 다시 준상에게 물었다. “그럼, 이 시드의 생산이 귀환자들과 관련이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준상은 그제서야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그리고는 천천히 자신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리며 말을 이었다. “자라고 있는 것이다. 그 빌어먹을 놈이 바로 이 머리 속에.” “...” 임서윤은 물론이거니와 관자놀이를 쓰다듬고 있던 윤성렬마저 그대로 굳어 버렸다. 지금까지 수많은 괴물들의 머리를 부숴서 그 안의 시드를 채취했던 그들이기에, 그 말을 듣는 순간 헤집어진 괴물들의 머리 속과 그 안에 숨겨져 있는 시드의 모습이 눈앞에 떠올랐고, 이내 그 괴물의 얼굴이 자신의 모습과 오버랩되자 참을 수 없는 욕지기를 느껴야만 했다. “큭...” “그럴수가.” 준상은 그런 두 사람을 보며 다시 말했다. “지구는... 시드를 재배하기 위한 목장으로 선택된 것이다.” “...” 잠시 아무런 말도 못한 채 입만 벙긋거리던 윤성렬이 급히 준상에게 물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아까 말했다시피 시드를 무턱대고 뿌리는 이유를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준상은 바로 대답했다. “시드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지?” “네?” “대답해라.” 윤성렬은 더듬거리며 답했다. “그야... 카드나 아이템에... 아!”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그 말대로다. 본래 시드는 그 자체로는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것 외에 다른 방법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현재 알려진 방법은 그 두 가지 뿐이지.” “...” 물론 다크 시드처럼 몸에 직접 이식하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지금 여기서 논할 사항이 아니다. 준상은 계속해서 말했다. “카드는 귀환자가 아니면 사용은 물론이고 그 존재를 확인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수단. 또한 아이템이란 것은 기본적으로 레벨 제한이 붙어 있어서 귀환자가 아니면 그 능력을 활용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유니크 아이템이나 요정계에서 만들어진 아이템의 경우에는 레벨 제한이 없지만 이것 역시 논외의 사항이다. “다시 말해 시드라는 것은 귀환자가 아니라면 그 능력을 사용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뜻이고, 이것은 결국 어찌 되었든 간에 시드는 결국 귀환자의 손에 머물 수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물론 예외는 있겠지만, 그 정도는 튜토리얼에 뽑혀 가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회수도 어려운 일이 아니지.” 거기까지 말한 준상은 윤성렬을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 “그럼 여기서 다시 묻지.” “...” “귀환자들은 죽으면 어떻게 되지?” “아...” 윤성렬은 물론이고 잠자코 대화를 듣고 있던 임서윤마저도 탄성을 터뜨렸다. 준상은 그들을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 “귀환자는 시체를 남기지 않는다. 죽는 순간 전송이 되어 버리지. 그들이 과연 그 시체를 어디에 쓰는 것일까.” “으음...” 간단하다. 그들이 괴물들에게 했던 대로, 머리 속에 담긴 시드를 채취하기 위해 시체를 회수한다고 보면 틀림이 없는 것이다. 윤성렬이 침음을 삼키며 입을 다물자 임서윤이 다시 물었다. “이건... 절대로 흘러나가서는 안되는 얘기군요.” 만약 이 이야기가 흘러나간다면, 그렇지 않아도 귀환자의 능력을 질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던 자들은 기회라는 듯이 달려들어 귀환자들의 머리 속에 담긴 시드를 확인하려 들 것이다. 명분이란 건 그럴 마음만 있다면 만드는 건 일도 아니다. 외계 질병이든 뭐든 이유는 가져다 붙이기 나름이고, 그 여파는 중세에 일어난 마녀 사냥보다도 처참할 것이다. 임서윤과 윤성렬은 어느새인가 옷을 땀으로 흥건하게 적신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학질이라도 걸린 것처럼 그렇게 몸을 떨고만 있었다. 00295 트롤러 ========================================================================= 차라리 이런 얘기라면 듣지 않는 편이 좋았을지도 모른다. 그랬더라면 차라리 자신이 위대한 존재에게 선택 받았다며 사도 행세를 하고 다니는 놈들처럼 자기 만족이라도 했을테니 말이다. “수확의 날.” 준상은 귀환자들의 종착역이나 다름없는 그 단어를 입에 담았다. “이전에 나는 다크 시드 사용자들로부터 이 말을 전해 들었다. 물론 당시에는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 머리 속에 시드가 들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모든 의문이 풀리더군.” 거실을 무겁게 짓누르며 울려 퍼지던 담담한 준상의 목소리가 멈추자, 임서윤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퀘스트에서 벗어나면, 수확의 날로부터도 안전해지는 겁니까?” 간절하기까지 한 그 말에 준상은 잠시 말이 없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그랬으면 하고 스스로도 바라고는 있지만, 확인되지 않는 정보를 입에 담는 건 무의미한 일이겠지.” “하긴...” 생각 같아서는 확인이 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일단 퀘스트에서 벗어나는 방법부터라도 알아내고 싶었지만, 임서윤도 윤성렬도 감히 준상에게 그런 요구를 강요할 만한 담력은 지니고 있지 못했다. 그런 두 사람을 보며 준상은 말을 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마침내 본론이 나오는 것인가. 임서윤은 긴장하며 준상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말씀하십시오.” 준상은 그런 임서윤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수확의 날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런 사실을 다른 누군가가 알아차렸을 경우를 대비해야만 한다.” “어떻게...”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귀환자 역시 여느 인간과 마찬가지. 자신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사회적인 힘을 얻을 필요가 있다. 귀환자들에 대한 선망과 호의가 충만한 지금이라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터.” 모처럼 말을 많이 한 탓인지, 목이 타다. 남은 음료수를 단숨에 비워버리고 나서야 준상은 말을 이었다. “처음 시작은 직능 단체 정도가 좋지 않을까.” 임서윤은 수긍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익단체니 압력단체니 해서 좋지 않게 보는 시선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자신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집단을 만드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서는 본능이나 마찬가지 행동이다. “귀환자들을 조금 특별한 능력을 가진 기술자 정도로 우선 인식시키자는 것이군요.” 준상은 바로 대답했다. “목적은 아무래도 좋다. 중요한 건 필요할 때 힘을 결집시킬 수 있느냐 없느냐니까.” “알겠습니다. 맡겨 주십시오.” 이런 일은 아무에게나 맡길 수 없다. 능력이 있더라도 충분한 배경이 없으면 공염불이 되어버릴 가능성도 높기 때문이다. “그 사람을 이용하는 것도 좋겠지.” “그 사람이라면...” “그 왜... 국회의원 말이다. 협회인지 뭔지 만들었던.” “아... 김종경 의원 말이군요.” 김종경은 준상과의 일이 있은 후 자금력은 물론이고 보관중이던 비밀 장부와 문건을 모조리 빼앗기는 바람에 순식간에 권좌에서 밀려나 버렸다. 아직 의원직은 유지하고 있었지만, 이대로라면 다음 총선에서는 공천조차 받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곰곰이 지금 그가 처한 상황을 떠올리던 임서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확실히 그라면 쓸모가 있겠군요. 이빨 빠진 호랑이라도 현직 의원인 건 분명한 사실이고, 누구보다도 준상님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을테니.” 그제서야 안색이 조금 나아진 윤성렬이 임서윤의 말을 받았다. “재활용이란 건가요.” 준상이 다시 말했다. “자세한 내용까진 말해줄 필요가 없다. 우리 뜻대로 움직여줄 허수아비가 필요한 것 뿐이니.” 그 말에 임서윤은 어렵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끈 떨어진 연 신세니 우리가 손을 뻗는다면 바로 받아들일 겁니다. 그 수련원 부지도 이번 기회에 매입해서 이참에 귀환자들의 요람으로 만드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군요. 그렇게 되면 속사정이야 어찌 되었던 그의 실정을 수습하는 모양새가 되니 그로서는 더더욱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겁니다.” “세세한 건 맡기겠다.” “알겠습니다.” 준상은 임서윤과 좀 더 대화를 나누고는 그들이 머물고 있는 펜션을 빠져 나왔다. 곧바로 정령의 문을 통과해 요정계로 돌아온 준상은 다시금 누리가 있는 여왕의 침실로 향했다. “아빠 왔다.” “아바?” “그래. 우리 누리 주려고 선물 사왔다. 볼래?” “부아아!” 만약 임서윤이나 윤성렬이 보았다면 방금 전까지 자신들과 진지하고 무거운 대화를 나누다 온 사람이 맞는가 싶어서 스스로 허벅지를 꼬집을 듯한 모습. 그런 준상을 옆에서 지켜보던 리체스가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보고 싶은데 어떻게 참았어요?” “그러게 말이야.” 준상은 누리의 눈앞에 새로 사온 장난감을 흔들어 보이다가 리체스에게 말했다. “미안해.” “뭐가요?” “그냥. 이것 저것.” 그런 준상을 향해 리체스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미 일만년을 넘게 살아왔지만, 요즘 들어서야 저는 비로소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끼고 있어요.” “...” “어째서 이런 느낌을 미처 몰랐을까. 지금까지의 나는 정말 살아있었던 것일까 하는 기분이 들 정도라면 믿으시겠어요?” 준상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글쎄. 나로서는 짐작도 가지 않는군.” 리체스는 그런 준상을 보며 다시 웃더니 가만히 그의 등을 안으며 말했다. “마음 쓰실 것 없어요. 미안해 하실 필요도 없고요. 전 지금 행복하니까요.” “...” 가만히 손을 뻗어 리체스의 손을 감싸고 있자니, 누리가 그런 두 사람을 보며 옹알이를 했다. “아바! 아마!” “...” 준상과 리체스는 서로를 돌아보았다. “지금 아빠 엄마라고 한 건가?” “그, 글쎄요.” 그러자 누리가 다시 잘 들으라는 듯이 외친다. “아바! 아마!” “...” 우연의 일치 치고는 뭔가 묘하다. “혹시... 우리 말을 알아듣는 건가?” “아...” 준상의 말에 리체스는 뭔가 짚이는 구석이 있는지 잠시 생각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생각 나세요? 리시스가 처음 왔을 때.” “리시스? 걔가 왜?” “걔도 처음에는 말을 못했죠. 말이란 것 자체를 모르고 살아왔으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과 헤네스 말은 알아 들었었죠. 혹시 누리도 그런 거 아닐까요?” “아!” 준상은 자신을 바라보는 누리를 향해 조심스럽게 물어 보았다. “누리야. 내가 누구지?” 그러자 누리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아바!” “헉!” 놀라서 헛숨을 들이키는 준상을 무시하고 이번에는 리체스가 말했다. “누리야. 나는 누구야?” “아마!” “...” 준상과 리체스는 잠시 서로를 바라보며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준상은 얼른 방을 뒤져서 캠코더를 꺼내 들고는 누리에게 계속 말을 시켰고, 리체스는 셀라에게 헤네스를 불러오도록 지시했다. “누리야. 아빠 해봐. 아빠.” “아부아?” “아니, 아빠.” “아바!” “옳지, 우리 누리 누굴 닮아서 이렇게 똑똑할까. 하하하!” 입이 헤벌쭉하게 벌어져서 웃음을 터뜨리는 준상의 모습을 보고 리체스가 핀잔을 주었다. “당연히 절 닮아서 그런 거죠.” “어째서?” “그야 당신은 몸으로 싸우는 육체파고, 저는 머리로 싸우는 지성파니까요.” “그거 상당히 차별적인 발언인거 같은데.” 자칫하면 최초의 부부싸움이 벌어질 수도 있는 상황에서, 그와 같은 일촉즉발의 사태를 수습한 것은 다름 아닌 원인 제공자인 누리였다. “아우우아우!” 옹알이 소리와 함께 한줄기 약한 바람이 휙 하고 준상과 리체스 사이로 불어 닥친 것이다. 바깥이라면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겠지만, 이곳은 바람 한 점 들어올 틈이 없이 완벽하게 밀폐된 공간. 때문에 준상과 리체스는 깜짝 놀라며 자신들을 향해 뭐라 뭐라 옹알이를 하고 있는 누리를 돌아보았다. “지금 그거...” “설마 누리가?” 분명히 준상은 누리에게 자신의 정령계에 속한 정령의 일부를 선물로 주었다. 그러나 그런 선물을 주면서도 준상은 그 정령들을 누리가 활용하는 것은 상당히 시간이 지난 뒤의 일일거라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방금 전의 그 바람은 아무리 봐도 인위적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는 현상. 결국 가능성이 있는 것은 누리가 자신의 의지로 정령의 힘을 끌어내는 것 뿐이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자신들의 말을 알아듣는 것과 더불어 엄청난 사건임에 틀림없었다. “누리야. 다시 한 번 해봐.” “아까처럼 바람 한 번 불어보렴. 응?” 준상과 리체스는 방금 전까지 자신을 닮았다며 목소리를 드높이던 것도 잊고 누리에게 달라 붙어 다시 한 번 바람을 일으켜 보라고 부추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둘이 달라붙어서 그렇게 들볶아 대자 누리는 귀찮아졌는지 이내 침실이 떠나갈 정도로 크게 울어대기 시작했다. “우아아아앙!” “이크!” 결국 준상은 바람의 원인을 제대로 규명할 수 없었다. 확인을 해보고 싶어도 울다 지쳐 잠든 아이를 다시 깨울 수도 없는 노릇. 결국 준상은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다시 수련을 위해 용암천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생각했던 것만큼 용암천의 수련은 큰 효과가 없었다. 준상은 실망스러운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전 같았으면 좀 더 묵묵히 수련에 임했겠지만, 누리를 생각하면 자꾸만 마음이 조급해지는 것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지금도 저렇게 귀여운데, 자라나면 얼마나 더 귀여울까. 그 아이가 하루 하루 무럭무럭 자라나는 모습을 보고 싶다. 몸을 뒤집고, 일어나 서고, 다시 걸음마를 하는 그 모든 모습을 자신의 두 눈으로 지켜보고 싶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튜토리얼에서 빠져 나왔을 때 가슴에 품었던 생존의 욕구와도 비견될 정도로 강렬한 욕망이었다. 허나 그와 같은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신을 억누르고 있는 시스템이라는 굴레로부터 벗어날 필요가 있었다. 퀘스트로부터는 벗어났지만, 그것이 수확의 날이나 시스템으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만약 파종한 시드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문제를 확인하거나 임의로 회수하려고 들 것은 달리 생각하고 말고 할 것도 없는 일. 하지만 지금의 능력으로는 시스템에 대항할 수 있을지 요원하기만 하다. 임서윤을 통해 귀환자들이 힘을 모을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도록 조치했다고는 하지만, 우선 준상 스스로가 만약의 상황을 극복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을 지니지 않으면 그런 대비도 무용지물이나 다름없다. 뭔가 좋은 방법이 없을까.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준상은, 문득 지난 일년간 소환조차 하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었던 존재 하나를 떠올렸다. 바로 얼음의 대정령에 의해 몸을 장악당한 이벨라 하란두르가 바로 그 존재였다. 준상의 몸은 그 자체로 하나의 정령계. 그렇다면 그녀의 몸에 깃든 얼음의 대정령 또한 자신의 몸 안으로 끌어들일 수는 없을까. “해볼 만한 가치가 있겠군.” 그녀가 지닌 극한의 냉기는 어떤 면에서는 들끓는 용암천보다도 더 순수한 정령의 기운이니, 설령 대정령을 자신의 의지 하에 두지 못한다 하더라도 얼음의 정령력을 보충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다. 시도해서 최소한 손해볼 일은 없다는 결론이 나오자, 준상은 이벨라 하란두르를 위해 특별히 만들어진 결계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도 오랜 만이군.” 이벨라 하란두르를 전력화 하기 위해 리체스로 하여금 결계를 만들게 했지만, 실제로 사용해 본 것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미처 목적을 이루기 전에 머리 속에 들어있는 시드의 정보를 얻고, 다시 새로운 힘을 얻기 위해 정령계로 들어가 버렸기 때문이다. 펫 정보를 확인해 보니, 호감도와 충성도는 이전에 요정의 키스를 한 직후에서 변동이 없었다. 준상은 일단 장착된 시드를 확인하고는 마침내 소환을 실행했다. 화악! 순간 결계 안에 짙은 냉기가 퍼져 나오며 흰 빛과 함께 투명하게 빛나는 알몸의 여인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벨라 하란두르는 소환이 끝나자 천천히 눈을 뜨더니 이내 몸을 움츠리며 준상을 바라보았다. 인간의 형상을 하고는 있지만, 그녀의 정신을 장악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얼음의 대정령. 요정의 키스가 지닌 매료의 힘에 의해 호감도가 올라간 데다, 준상의 몸 안에 내재된 정령계의 힘이 작용한 탓인지, 이전과는 달리 극도의 경계심을 보이거나 하지는 않았다. 준상은 그런 그녀에게 다가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러자 이벨라 하란두르, 아니 그녀의 몸에 깃든 얼음의 대정령은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그 손을 마주 잡았다. 마치 춤을 청하는 듯한 단순한 동작. 하지만 서로의 손이 맞닿는 순간, 준상은 맹목적으로 뿜어져 나오던 냉기가 갑자기 자신들 주위로 소용돌이치며 휘몰아치는 것을 느꼈다. “으음...”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어찌된 영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갑자기 막대한 양의 힘이 그녀와 맞잡은 손을 통해 준상의 몸으로 밀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힘은 체내를 마구 휘저으며 돌아다니다가 어딘가로 마구 빨려들어가기 시작했지만, 그런 식으로 지나치는 힘을 견디는 것만으로도 준상은 마치 피가 얼어붙어 버리는 듯한 고통을 느껴야만 했다. ============================ 작품 후기 ============================ 설문 결과 입니다. 총 290분이 참여해 주셨습니다. 누리가 좋을까요, 유리가 좋을까요 1. 상관없다. 그냥 누리로 하자. -181 (63%) 2. 성을 붙여부르면 뭔가 어색하다. 순화해서 유리로 하자. -109 (38%) 짧은 기간이긴 하지만 설문을 진행한 결과 그냥 누리로 해도 괜찮다는 의견이 반수를 넘었습니다. 하지만 성을 붙여 부르는 것이 어색하다는 의견도 많은 고로, 가급적 성은 제외한 상태로 부르되 공주님 같은 호칭이나 중간 이름 등의 방법을 사용해 최대한 어색한 느낌을 순화해 보겠습니다. 설문에 참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즐거운 명절 되세요. 00296 트롤러 ========================================================================= “큭!” 갑작스럽게 쏟아져 들어오는 힘의 격류에 준상은 얼굴을 찌푸리며 일단 맞잡은 손을 떼려 했다. 그러나 이벨라의 손은 마치 아교를 붙여 놓은 것처럼 단단하게 달라 붙은 채 준상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아아아아아! 이벨라 역시 몸을 한껏 젖히고 소용돌이 속에서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입을 벌려 들리지 않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당황스러움 속에서도 준상은 이것이 자신이 지닌 정령계와 연관이 있음을 깨닫고, 일단 의지를 발동해 외부 세계와 정령계를 잇는 통로를 차단했다. 그렇게 하고 나서야 비로소 준상과 이벨라의 손이 떨어지며 힘의 폭류가 멈추었다. “크으으...” 준상은 이벨라에게 뻗었던 손을 움츠리며 신음을 흘렸다. 극한의 냉기가 흘러들어오는 통로로 사용되는 바람에 그의 손은 충분한 양의 냉기 저항 시드를 갖췄음에도 불구하고 희뿌연 서리에 뒤덮인 채 흰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불사의 용혈로 모든 피해로부터 반감되는 상황에서도 이 정도라니. 대정령이 지닌 힘이 어느 정도인지 여실하게 증명되는 순간이다. 이벨라는 방금 전의 일 때문인지 몸을 움츠린 채 구석에 처박혀 준상을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얼음의 대정령으로서는 자신의 힘을 빨아들이는 준상의 능력이 마치 흡혈귀처럼 느껴졌을 테니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준상은 이미 한 번 그녀의 가슴에 어나이얼레이터를 박아 넣은 전례조차 있지 않은가. 요정의 키스를 통한 매료로 희석되었던 공포가 다시 한 번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 되살아 난 것이리라. 하지만 준상은 그런 대정령의 모습에 측은함을 느끼면서도 자신의 밀려들어왔던 엄청난 양의 힘을 떠올리고는 다시 정령계를 활성화시켜 정령들을 불러내 보았다. 그러자, 이전에는 흩날리는 꽃가루와 가까운 모습이었던 정령들의 빛 가운데 몇몇이 유난히 강하게 반짝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혹시나 해서 다시 한 번 살펴봤지만 결과는 마찬가지. 용암천에 들어가 불과의 교감을 이루어 그 힘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했을 때와 비교하면, 그야말로 괄목할 만한 성과라 할 수 있다. 그 짧은 시간에 이 정도 성과를 낼 수 있다니.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이벨라를 향해 다가섰다. “으우으으...” 이벨라는 준상이 다시 다가서자 두려움에 떨며 뭔가를 말하려 했다. 그러나 효과가 있다는 것을 확인한 이상, 준상으로서는 물러설 이유가 없었다. 다시 한 번 손을 뻗자, 이벨라는 도리질을 치며 그 손으로부터 벋어나려 했지만 그런 몸부림으로 막혀있는 공간을 탈출하는 건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큭!” 준상의 손이 이벨라의 이마를 짚자, 다시 한 번 강력한 극한의 기운이 팔을 타고 올라와 준상의 몸 어딘가로 사라져 갔다. 머리를 잡힌 이벨라는 마치 전기에 감전된 듯한 모습으로 사지를 떨며 입을 벌려 소리 없는 비명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아아아아아! 고통스럽기는 준상 역시 마찬가지. 하지만 소용돌이치는 극한의 냉기 속에서도 준상은 이를 악물고 팔이 떨어져 나갈 것만 같은 끔찍한 고통을 감내했다. 이 정도의 고통을 제물로 더 강한 힘을 얻을 수 있다면, 남는 장사다. 정말로 팔이 떨어져 나가는 것이 아닌 이상, 준상으로서는 물러설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격하게 몸을 떨며 비명을 지르던 이벨라의 움직임이 둔해진다고 느껴질 즈음 준상은 소용돌이치는 극한의 냉기 속에서 작은 목소리를 들었다. “사, 살려...” “...” 어느새인가 밀려 들어오던 힘도 수그러든 상태. 준상이 조심스럽게 이벨라의 머리에서 손을 떼자, 그녀의 몸을 하얗게 빛나게 만들고 있던 어떤 기운이 마치 유령처럼 스르르 빠져 나왔다. “이건...” 눈앞에서 비틀거리며 날아다니는 푸른 기운을 가만히 바라보던 준상은 조용히 손을 뻗어 그 기운을 손바닥 위에 올려 놓았다. 그는 단숨에 알 수 있었다. 이것이야 말로 이벨라의 몸 안에 깃들어 있던 대정령의 본체라는 것을 말이다. 준상에게 모든 힘을 빼앗긴 탓인지, 얼음의 대정령은 금방이라도 꺼질 듯이 비틀거리다가 마치 손 안에 올려놓은 눈송이가 체온에 녹아드는 것처럼 준상의 몸 안으로 소리 없이 스며 들었다. “으음...” 그러자 금방이라도 얼어서 부서질 것처럼 고통스럽던 손의 감각이 강력한 회복 마법이라도 가해진 것처럼 정상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간질간질하면서도 묘한 쾌감마저 느껴지는 그 감각에 준상은 전율하듯 몸을 부르르 떨다가 한참이나 지나서야 겨우 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시스템처럼 명확한 메시지가 전달된 것은 아니었지만, 준상은 자신의 몸 안에 대정령이 완전히 흡수되었음을 인식할 수 있었다. 이렇게 흡수된 대정령의 존재와 의의는 다시 정령계 안에서 모이고 흩어지는 과정을 거쳐 다시 새로운 정령으로 태어나게 될 것임을 준상은 또한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은 초신성으로 변해 폭발해 버린 별의 잔해가 다시금 인력에 이끌려 새로운 별로 재탄생되는 과정과 같았다. 이 신비로운 과정은 준상의 의지가 개입될 여지조차 없는 극히 자연스러운 흐름.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제 준상이 지닌 정령계가 새롭게 대정령 하나 만큼의 힘과 의의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런 거였나.” 준상은 이 모든 현상을 느낌으로서 용암천에서의 수련이 지지부진 했었던 이유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별의 잔해가 다시 모여 새로운 별로 탄생하기 위해서는, 핵이 될 만한 무언가가 필요하기 마련. 하지만 준상의 정령계는 이제 막 탄생한 터라 그 핵이 될만한 무언가가 절대로 부족한 상황이었다. 그 무언가는 다름 아닌 의의. 실체가 없는 존재인 정령에게 있어서 의의란 곧 존재 바로 그 자체나 다름없다. 불, 물, 바람, 얼음, 땅, 빛, 어둠... 이것은 단순히 정령을 분류하기 위한 개념이 아니다. 정령이 정령으로서 존재하기 위한 핵이 되는 의의. 준상의 정령계가 본연의 힘을 발휘하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그 안에 담겨진 힘의 크기 뿐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후...” 준상은 눈앞에 정신을 잃고 쓰러진 이벨라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너무나 오랜 기간 동안 대정령에 의해 몸이 지배되었던 탓일까. 그녀는 대정령이 완전히 몸에서 빠져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미약한 호흡만을 내뱉고 있었다. 준상은 일단 그녀를 역소환했다. 정령이 빠져나간 그녀의 몸은 보통의 인간과 다름없는 상태. 얼음의 대정령이 머물렀던 덕분에 소용돌이치던 극한의 냉기 속에서도 멀쩡했던 그녀였지만, 이제는 정령이 빠져 나왔으니 그 힘의 여운이 사라지면 생명이 위태로워질 수밖에 없다. 아니 그것만이 아니더라도, 오랜 기간을 정령의 힘만으로 유지해온 그녀의 신체가 정상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가능할지도 의문이었다. 일단 역소환을 실행한 준상은 결계를 빠져 나오며 생각에 잠겼다. 정령계에서는 이런 식으로 특정한 정령의 힘을 무차별적으로 빨아들이는 현상이 일어나지 않았었다. 그것은 다시 말해 어떤 조건이 이루어져야만 방금 전 같은 상황이 연출된다는 의미. 정확한 조건을 면밀하게 확인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저 같은 상황을 반복하는 것만이라면 그리 어렵지 않다. 이벨라에게 새로운 정령을 빙의시키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혹시나 해서 마찬가지로 정령 증폭의 능력을 가진 엘리를 데리고 정령계에 들어가 봤지만, 아무런 현상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벨라는 다시 소환이 되기가 무섭게 정령의 흐름 안에서 거대한 불의 기운이 뻗어 나와 그녀의 육신으로 스며 들었다. 준상은 일단 불의 대정령이로 보이는 존재가 그 안에 깃들이자 바로 역소환을 실행한 다음 정령계로부터 빠져 나왔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이벨라 본인이 의식을 되찾지 않는 이상 정확한 원인을 파악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겠지만, 감히 추측하자면 그녀가 얼음의 대정령을 그 몸안에 불러들이던 당시의 의지가 강신이라는 능력을 통해 여전히 발휘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그 원인이야 어찌 되었든 준상으로서는 이제 본격적으로 자신의 몸 안에 깃든 정령계의 힘과 의의를 확장시킬 계기를 얻게 된 셈이다. “리체스.” 불의 대정령을 통상 공간에서 불러내기 위해서는 신기루 꽃의 설정을 바꾸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준상은 다시 여왕의 침실로 돌아왔다. “엄마 해봐. 엄마.” “어마?” 그러자 언제 왔는지 헤네스가 리체스와 함께 누리 옆에 앉아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헤네스는 어디서 났는지 알록달록한 무언가를 누리의 눈앞에 흔들어 보이고 있었다. “그게 뭐야?” 준상이 다가와 묻자 헤네스와 리체스는 화들짝 놀라더니 그를 타박했다. “아우, 깜짝이야.” “놀랐잖아요. 기척이라도 좀 내고 다니시지.” “...” 얼마나 열중했으면 들어와서 이름을 불렀는데도 모르고 이럴까 싶어 준상은 웃어 버리고 말았다. “미안.” 준상이 웃으며 사과하자 리체스는 헤네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직접 만들었대요. 얀트훈센에 가서 밀린 일 하느라 바빴을 텐데.” 그러자 헤네스는 쑥스럽다는 듯이 볼을 긁적이며 대답했다. “아니 뭐... 그냥 시간이 좀 남는 김에...” 이전에 사왔던 화려한 형태의 모빌에 비하면 투박한 감이 없지는 않았지만, 알록달록한 색종이로 접은 학이라든가, 천조각을 이어 붙인 작은 인형 같은 것이 매달려 있는 것이 제법 공을 들이 티가 났다. “아우! 아우!” 그렇게 얘기를 나누는데 다시 누리가 크게 옹알이를 했다. “흔들어 달라고? 이렇게?” “아우우!” 자신이 왔는데도 거들떠도 안 보고 헤네스가 만든 모빌에만 정신이 팔려있는 누리의 모습을 보자 준상은 어쩐지 좀 심통이 났다. “아, 그렇지.” 준상은 그제서야 생각났다는 듯이 누리 근처에 무언가를 소환했다. 그것은 바로 몽몽이와 밤톨이, 그리고 엘리였다. “어때. 누리야. 새로운 친구들이다.” 누리는 갑자기 눈앞에서 흰 빛과 함께 작은 동물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일순 그곳에 시선을 돌렸지만, 별로 관심이 없다는 듯이 다시 헤네스가 흔들어 보이는 모빌로 눈을 돌렸다. “이런...” 준상이 실망스러운 기색을 보이자, 리체스가 웃으며 말했다. “얘들이랑 놀기에는 아직 너무 어리지 않을까요?” “그런가.” 풀 죽은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준상은 그제서야 자신의 용무를 깨닫고는 리체스에게 말했다. “아... 리체스.” “네.” “전에 만들었던 결계 말인데, 조금 손을 봤으면 싶어서.” “결계요?” “냉기를 차단하는 결계 말이야.” “아, 그거요.” 벌써 일년도 전의 일인데다 딱히 이후로 언급된 일도 없었고 준상이 정령계로 가고 난 뒤에는 임신에 출산에 연구에 여러 가지로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리체스는 결계를 만들었던 일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다. “어떻게 손을 보고 싶으신데요.” “이번에는 화염으로.”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에요. 결계를 구성하는 마법을 조금만 손보면 되니까요.” 그렇게 대답한 리체스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다시 말했다. “이참에 필요한 속성을 그때 그때 선택해서 차단하도록 설정을 바꾸어 보는 것도 좋겠네요. 매번 일일이 손을 보는 것도 귀찮은 일이니.” “그래 주면 나야 좋지.” “정령계의 수련 때문이겠죠?” “맞아.” “알았어요. 잠시만요. 금방 준비하고 올게요.” 리체스는 몸을 일으키며 헤네스에게 말했다. “금방 다녀올테니 누리 좀 봐줘.” “네. 다녀오세요.” 00297 트롤러 ========================================================================= 리체스가 일어나자 준상은 누리의 이마를 쓰다듬어 줄까 말까 고민하다 포기하고는 그녀의 뒤를 따랐다. 예쁘다고 너무 만져 버릇하면 아기에게 과다한 스트레스를 주게 된다는 얘기를 들은 것이 불현듯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까 같으면 이런 것까지 신경을 쓰지는 않았겠지만, 이미 정령을 움직일 수 있는지 확인해 본다고 울려 버린 전례가 있는지라 아무래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먼저 걸음을 옮기던 리체스가 그렇게 머뭇거리는 준상의 모습을 보며 웃었다. 뭐랄까. 덩치는 커다란 사람이 아기에게 쩔쩔 매는 모습이 커다란 아빠 곰 같은 느낌이랄까. “그냥 한번 정도는 괜찮아요.” 보다 못한 리체스가 웃으며 말하자 준상은 머쓱한지 머리를 긁적이며 마주 웃었다. “하하...” 결국 준상은 머쓱한 기분으로 누리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고 나서야 리체스의 뒤를 따랐다. 잠시만 기다리라 말하고 나오긴 했지만, 결계를 수정하기 위한 준비를 하기 위해 갈 곳도, 신기루 꽃으로 가기 위한 석문이 있는 곳도 그녀의 연구실이었기 때문에 준상은 그녀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화염 속성으로 결계를 변경하는 거면, 이전에 빙의하고 있던 얼음의 대정령은 어떻게 된거죠?” 리체스의 물음에 준상은 바로 대답했다. “흡수했어.” 짤막한 그 대답에 리체스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단순한 얼음의 대정령도 아니고, 정령 증폭의 힘으로 능력이 강화된 개체를 그런 식으로 흡수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금시초문이기 때문이다. 하기야 인간이 자신의 몸에 정령계를 생성한 것 자체가 전대미문이긴 하지만 말이다. 정령의 문을 몸에 만든 것부터 시작해서 정말 최초라는 말을 너무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물었다. “그런 것도 가능해요?” 하지만 준상이라고 해도 그 정확한 원인을 모르는 것은 마찬가지.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어 버렸어.” 당연히 이 정도의 대답 밖에는 해줄 수가 없었다. 리체스는 그런 준상의 대답에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잘은 모르지만 처음 무언가를 하는 건 한편으로는 굉장히 위험한 일이에요. 이젠 누리도 있으니까 너무 무리는 하지 마세요.” “알았어.” 준상은 리체스의 손을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잔소리 좀 그만하라는 신호로 받아들일 수도 있는 일. 하지만 리체스는 조금은 거친 느낌의 손이 자신의 손을 살며시 쥐어 오자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정말 주책이다. 리체스는 스스로 그런 생각을 떠올리면서도 가만히 준상의 손을 맞잡았다. 이미 아이까지 있는 사이에 이런 식으로 마음이 설레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어찌 보면 참으로 대단한 일. 하지만 그런 것이야 어찌 되었든 간에 둘은 마치 이제 막 데이트를 시작한 아이들처럼 얼굴을 붉힌 채 걸음을 옮겼다. “아참.” 그렇게 잠시 걷던 리체스가 문득 준상을 향해 말했다. “혹시 인터페이스라는 물건, 잠시 빌릴 수 있을까요?” 준상은 자신의 팔목에 채워진 채 모습을 감추고 있는 휴대용 인터페이스를 가리키며 되물었다. “이거?” “맞아요. 바로 그거요.” 리체스는 그렇게 대답한 다음 곧바로 말을 이었다. “확인해 봐야겠지만, 마법으로 만들어진 것이면 작동 원리 같은 걸 파악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만약 그렇게 된다면 머리 속의 시드가 어떤 식으로 신체에 영향을 주는지도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아...” 인터페이스는 그 자체로는 아무런 효과가 없는 단순한 표시 장비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이유 때문에 준상은 지금까지 그냥 조금 편리한 아이템 정도로 인식했을 뿐이지만, 메시지나 정보를 표시할 수 있다는 것은 시드가 파동의 형태로 발하는 여러 가지 신호를 해석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더구나 이 아이템은 어떻게 해서 메시지가 전해져 들어오는지 감조차 잡히지 않는 휴대폰과는 달리, 마법이라는 수단을 사용해 제작된 물건이다. 그것은 다시 말해 마법의 극한에 도달한 리체스라면 충분히 그 작동원리를 해석할 수 있다는 의미다. 이런 저런 일들로 인해 머리가 복잡해서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하고 있던 준상으로서는 리체스의 말을 듣는 순간 왜 미처 이런 점을 떠올리지 못했을까 싶을 정도다. “잠깐만.” “네.” 준상은 처박아 두었던 휴대폰을 꺼내 주머니에 챙겨 넣은 다음, 손목에 차고 있던 인터페이스를 풀어 리체스에게 건넸다. “받아.” “네.” 리체스는 팔찌 형태의 휴대용 인터페이스를 받아들고는 눈을 반짝였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본 준상은 기원조차 알기 힘든 고대의 마법 기기를 손에 넣은 탓에 연구자로서의 정열이 다시 불타오르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휴대폰을 사용하게 되면 위치 추적을 당할 위험성이 있지만, 이곳은 기지국이나 위성 같은 건 아예 존재하지 않는 요정계에서는 그런 것도 별 의미가 없다. 물론 퀘스트라는 굴레에서 벗어난 상황이니 굳이 휴대폰을 가지고 다닐 이유가 있나 싶은 것도 사실이지만, 그래도 만약의 사태라는 건 언제 어디서 일어날지 모르는 일이니 메시지를 받기 위한 최소한의 장비는 휴대하고 있는 것이 현명한 일이다. 준상으로부터 인터페이스를 건네받은 리체스는 보안용의 결계를 지나 연구실 안으로 들어서자 이곳저곳을 뒤적이며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준상은 가만히 그런 리체스의 뒷모습을 보았다. 아이를 낳았다고는 하지만, 길게 쭉 뻗은 다리로부터 시작해서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는 둔부의 아름다움은 이전과 전혀 달라진 것이 없었다. 아니. 그렇지 않다. 달라진 것이 분명히 있다. 뭔가 말로 콕 집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분위기라고 해야할지 그런 부분에서 예전보다 훨씬 여성스러운 느낌이 물씬 풍겨 나오고 있었다. 그냥 느낌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선연한 분위기. 준상은 조금은 멍한 기분으로 그녀의 아름다운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무언가에 이끌리듯 다가가 그녀의 허리를 등 뒤에서 감싸 안았다. “깜짝이야. 놀랐잖아요.” 한참 무언가를 열심히 찾고 있던 리체스는 갑자기 허리를 감아오는 준상의 단단한 팔을 느끼고는 움찔 놀라는 기색을 보이더니 고개를 돌려 준상을 향해 살짝 눈을 흘긴다. 그 모습이 또 얼마나 고혹적인지. 준상은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세차게 고동치는 것을 느꼈다. 이런 것을 가리켜 매료 당했다고 표현하는 것일까. 그런 생각마저 들 정도이니 말해 무엇하겠는가. “...” 눈을 흘기고는 다시 무언가를 찾으려 손을 뻗던 리체스는 자신의 귓가에 닿아오는 준상의 뜨거운 숨결을 느끼고는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여보?” 의문을 담은 그 부름을 듣고 준상은 리체스의 귓가에 살짝 입을 맞추며 물었다. “싫어?” 명백한 준상의 의사표시에 리체스는 얼굴을 붉힌 채 우물우물거렸다. “그건 아니지만... 결계의 일도 있고...” 그 말에 준상은 다시 리체스의 귓가에 뜨거운 숨을 불어넣으며 대답했다. “괜찮아. 그런 건 조금 천천히 해도.” “당신도 참...” 떼쓰는 아이 같은 준상의 태도에 리체스는 난처한 기색을 보였지만, 이내 준상의 입술이 하늘하늘한 옷자락 위에 드러난 목덜미에 와닿자 다시 한 번 움찔하며 반응했다. 등을 타고 전기가 흐르는 듯한 그 짜릿한 느낌이라니. 속으로 한숨을 내쉬던 그녀는 준상의 행동에 자연스럽게 반응하는 그 감각에 깜짝 놀랐고, 이내 더 이상 항거하지 못한 채 그대로 준상의 손에 몸을 맡겼다. 준상은 리체스가 무언의 행동으로 허락의 표시를 보내자, 그녀의 어깨를 가만히 쓰다듬으며 어깨끈을 아래로 내렸다. 곧바로 쇄골에서 어깨로 이어지는 부드러운 곡선이 모습을 드러내자 준상은 정성스럽게 그곳에 입술을 맞추었다. 평소와는 다른 장소, 다른 분위기여서일까. 리체스는 그 짤막한 접촉만으로도 몸 안이 서서히 달궈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준상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허리를 감싸 안고 있던 손 가운데 하나를 내려 그녀의 드러난 허벅지를 가만히 쓸어 올렸다. 허벅지 바깥쪽으로부터 천천히 올라온 준상의 손은 리체스가 입고 있는 하늘거리는 옷 속으로 파고들며 그대로 골반으로 향했다. 천천히 무언가를 탐색하듯 올라가던 준상의 손은 마침내 목표로 했던 무언가를 찾아냈다. 작은 매듭으로 묶여진 그 가냘픈 천조각은 거친 준상의 손가락이 몇 번 오가자 이내 중력의 힘을 견디지 못하고 아래로 흘러내렸다. 고지를 가로 막고 있던 관문 가운데 하나를 함락시킨 준상의 손은 이번에는 앞을 향해 전진했다. 부드러운 수풀을 헤치고 들어간 손가락은 이내 따뜻한 온기를 머금은 촉촉한 샘물에 도달했다. “음...” 리체스는 민감한 속살에 준상의 손가락이 와닿자 입술을 깨물며 몸을 떨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준상의 손가락은 그녀의 샘을 자극했고,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했던 색다른 자극에 불이 붙은 리체스의 몸은 금방이라도 불타오를 것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 “주인님... 와주세요.” 정신이 없는 와중에 예전의 말버릇이 다시 나왔지만 준상도 리체스도 그런 호칭 따위는 이미 아무 상관이 없었다. 리체스의 흐느끼는 듯한 말에 준상은 입고 있던 옷의 벨트를 풀고는 리체스의 치마를 허리 위로 걷어 올리고는 그대로 진입해 들어갔다. “아!” 용암과도 같은 뜨거운 기운이 촉촉하게 젖은 속살을 유린하며 밀려들자 리체스는 그 격한 감동에 떨며 몸을 앞으로 숙였다. 준상은 한 손으로는 리체스의 풍만한 가슴을 그러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골반 어림을 잡은 채 따뜻한 온천 같은 느낌을 주는 안락한 그녀의 몸 안으로 자신의 몸을 완전히 밀어 넣었다. 완전한 결합. 하지만 리체스가 결합의 여운을 느낄 틈도 없이, 준상의 몸은 썰물 빠지듯 밖으로 다시 이동했다. “하윽!” 리체스는 다리에 힘이 풀리는 듯한 감각과 함께 비틀거렸지만, 그녀의 몸을 단단하게 붙잡은 준상의 손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불타는 용암 덩어리 같은 그 뜨거운 무언가가 많이 빠져 나갔다는 정도. 하지만 잠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던 그녀는 이내 성난 파도처럼 다시금 밀려들어오는 그 뜨거운 기운에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헉!” 리체스는 손을 뻗어 후들거리는 무릎을 짚으며 문득 이전의 일을 떠올렸다. 처음 준상과 관계를 가졌을 때도 이런 자세 아니었나. 하지만 그런 생각은 다시금 진퇴를 시작한 준상의 행동에 의해 머리 속에서 비워져 버렸다. 연구실은 더 이상 터져 나오는 목소리를 주체할 수 없게 되어버린 리체스의 교성과 준상의 거친 숨소리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뜨거운 열기로 연구실을 가득 채워가던 둘은 한참이나 지나서야 크게 몸을 떨며 움직임을 멈추었다. 리체스는 더 이상 버틸 힘이 없는지 책상 위에 엎드린 채 숨을 헐떡이고 있었고, 준상은 그녀의 등 위에 얼굴을 기댄 채 여운을 즐겼다.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숨을 되돌린 리체스는 입을 삐죽거리며 중얼거렸다. “정말이지. 놀랬잖아요.” “...” 하지만 준상은 땀에 젖어 머리카락이 달라붙은 그녀의 목덜미를 가만히 쓸어 넘기고는 그곳에 살짝 입을 맞추며 이렇게 말했다. “미안.” “치.” “너무 예뻐서 나도 모르게 그만.” “...” 조용히 귓가에 속삭이는 준상의 말에 리체스는 가슴이 철렁하는 느낌과 함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이런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혹시 정령계에서 뭘 잘못 먹은 것이 아닐까 하는 기분마저 들 정도다. “내가 아는 여보가 아닌 것 같아요. 누구세요?” 리체스가 정색을 하며 그렇게 말하자, 준상은 웃으며 대답했다. “누리 아빠.” 담담한 준상의 대답에 리체스는 다시 입을 삐죽거렸다. “쳇. 말이나 못하면.” “하하...” 한동안 그렇게 책상에 기대어 여운을 즐기던 둘은 땀이 식어 쌀쌀한 기운이 느낄 즈음이 되어서야 비로소 몸을 일으켰다. 리체스는 흐트러진 옷 매무새를 마법으로 단정하게 가다듬은 다음, 준상의 옷차림 역시 바로 잡아 주었다. “가요.” “그래.” 둘은 곧바로 석문을 통과해 신기루 꽃으로 향했고, 리체스는 도착하기가 무섭게 급히 결계부터 손을 보기 시작했다. “천천히 해. 급한 것도 아닌데.” “하지만.” 헤네스를 놔두고 둘이서만 좋은 시간을 보낸 것이 조금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준상은 바쁘게 날아다니며 결계를 살피는 그녀의 모습을 흐뭇한 모습으로 지켜보다가, 마침내 결계의 조정이 끝나 돌아온 리체스를 향해 말했다. “먼저 돌아가 있어.” “혼자서 괜찮겠어요?” 걱정이 담긴 리체스의 말에 준상은 웃으며 대답했다. “처음도 아닌데, 뭘. 원래 처음이 제일 어려운 거잖아.” “하긴.” 내심 함께 있었으면 하는 표정이었지만, 이전에도 밀폐된 공간에서 밀어닥친 정령의 힘에 곤욕을 치렀던 적이 있는지라 리체스는 준상의 뺨에 살짝 입을 맞추고는 그대로 결계 밖으로 나갔다. 리체스가 밖으로 나간 것을 확인한 준상은 가볍게 심호흡을 한 다음 이벨라를 불러내었다. “...” 순간 뜨거운 기운이 확 하고 결계 안으로 몰아친다. 이벨라는 넘실거리는 하얀 불꽃을 몸에 두른 채 빛과 함께 모습을 드러내더니, 천천히 눈을 뜨고 준상을 바라보았다. “이건...” 얼음의 대정령 때와는 뭔가 다른 반응에 준상이 얼굴을 찌푸릴 찰나, 이벨라는 그를 향해 손을 뻗으며 하얗게 타오르는 백염을 그에게 쏟아내었다. 위험하다. 준상은 본능적으로 그런 느낌을 받으며 얼른 몸을 옆으로 움직였다. 하지만 화염의 대정령이 쏟아낸 하얀 불꽃은 그런 식으로 간단하게 피할 수 있는 성질의 공격이 아니었다. 공격을 피하게 몸을 옆으로 움직이는 순간, 뿜어져 나온 하얀 불꽃은 마치 채찍처럼 휘어지며 준상의 몸을 후려쳤다. 화악! “큭!” 휘어져 들어오는 채찍에 몸을 맞는 순간 그가 입고 있던 옷 전부가 뭘 어떻게 해볼 틈도 없이 그대로 한 줌 재로 변해 버렸다. 이미 그가 입고 있던 옷은 처음에 이벨라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쏟아져 나온 열기로 인해 수분이 모두 날아가 버석버석해진 상태였고, 그런 와중에 대정령이 뿜어낸 불이 와닿자 마치 지우개로 지워진 듯이 불타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지금은 별다른 아이템을 장착하지 않은 상태라는 정도. 준상은 너무 마음을 놓았다는 것을 깨닫고 혀를 차며 자신의 몸을 살폈다. 불의 채찍에 얻어 맞은 곳은 끔찍한 고통과 함께 붉게 달아오른 상태로 재생의 연기를 뿜어내고 있는 상황. 정말 터무니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현재 준상의 화염 저항 수치는 무려 187퍼센트. 용암 속에 들어가서 목욕을 해도 좀 따뜻하다 싶을 정도의 느낌 밖에 받지 않는 그의 몸이 통증을 수반하는 피해를 입다니. 이런 경험 자체가 준상으로서는 정말 오랜 만이다. 하지만 이것은 다시 말해 지금 눈앞에서 이벨라의 몸에 빙의된 채 그에게 적대감을 표하고 있는 화염의 대정령이 그만큼 강한 존재라는 의미. 준상은 상처가 회복되면서 느껴지는 통증과 감각에 묘한 카타르시스마저 느꼈다. “이거 꼴이 말이 아닌 걸.” 옷이 모조리 타버려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못한 모습으로 변해버린 준상은 쓴웃음을 지으며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이내 천천히 자세를 낮춘 채 흐트러졌던 정신을 다잡기 시작했다. 그가 흐트러졌던 정신을 다잡고 몸 안의 기운을 가다듬기 시작하자, 화염의 대정령이 뿜어내는 열기에 한껏 달아올랐던 공기가 웅웅거리며 소리를 냈다. 화염의 대정령은 무표정한 얼굴로 전투태세로 들어선 준상을 바라보다가 이번에는 두 손을 들어 준상을 향해 불꽃을 뿜어냈다. 이번에는 두 개인가. 그렇게 생각하며 준상은 이벨라에게 접근할 기회를 노렸지만, 막상 그녀의 두 손에서 뻗어 나온 것은 아까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의 두께를 지닌 거대한 불꽃의 소용돌이였다. 00298 트롤러 ========================================================================= 아차. 준상은 눈앞을 덮쳐오는 거대한 불의 파도에 인상을 찌푸려야만 했다. 급히 옆으로 뛰어 불꽃을 피했지만, 이번에도 역시나 두 개의 거대한 화염은 궤도를 틀어 준상의 몸을 직격했다. “큭!” 눈과 코, 그리고 입을 가리며 몸을 움츠리는 순간 하얀 불꽃은 그대로 준상을 집어 삼켰다. “...” 하지만 이벨라는 서늘한 눈으로 화염이 휩쓸고 지나간 곳을 바라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화염의 폭풍이 수그러들자 온 몸이 붉게 물든 준상의 모습이 드러났다. 단순히 몸이 좀 달궈지고 만 것이 아니다. 몸에 나 있던 털들이 방금 전 몰아친 화염 폭풍의 위력을 견디지 못하고 모조리 불타 버린 상태였다. 준상은 손을 들어 머리를 만져보고는 얼굴을 찌푸렸다. 재 마저도 남지 않은 채 완전히 민둥산으로 변해버린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젠장...” 다른 부위라면 어지간한 부상이나 상처 정도는 바로 재생이 되겠지만, 머리카락 같은 부위는 시간을 들여서 다시 기르는 수밖에 없다. 그나마도 불길이 덮치는 순간 몸 안에서 차가운 기운이 일어나 화염에 대항하지 않았더라면 모공까지 다쳐서 그대로 대머리로 지내야 했을 것이다. 준상은 자신이 너무 성급했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시간을 들여서 이전에 흡수한 얼음의 대정령을 완전히 자신의 힘으로 소환했더라면, 최소한 이렇게 일방적으로 몰리지는 않았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은 법. 이미 머리카락은 다 타버린 뒤가 아닌가. 근 일 년 간 전투에서 멀어진 탓에 아무래도 감각이 떨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떠올리고 있는데, 이벨라가 다시 두 손을 준상에게 향했다. 하지만 준상은 그녀의 몸에서 다시금 하얀 불꽃이 맹렬하게 피어오르는 것을 본 순간 그대로 역소환을 실행해 버렸다. 이벨라는 화염을 뿜어내기 위해 힘을 끌어내다가 흰 빛을 발하며 그대로 모습을 감추었다. 준상은 그녀가 사라진 곳을 보며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이 정도로 강력한 존재도 펫 목걸이라는 단순한 아이템의 효과에서는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에 앞으로 가야할 길이 멀었음을 다시 느낀 탓이다. “한동안은 모자를 쓰고 다녀야 하나.” 준상은 혀를 차며 다시 머리를 만지다가 아차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이템은 따로 착용하지 않고 있었지만, 들어오기 직전에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휴대폰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미치겠군.” 여러모로 삽질이 풍년이구나. 준상은 그렇게 혀를 차며 다시 이벨라를 소환했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이벨라가 눈을 감은 채 모습을 드러내자 준상은 곧바로 그녀의 어깨를 양손으로 거머쥐었다. 가냘픈 그녀의 어깨가 손에 닿는 순간, 얼음의 대정령 때와 마찬가지로 그녀의 몸 안에서 작열하는 하얀 불꽃이 터져 나와 그들 둘 사이에서 소용돌이치기 시작한다. “큭...” 혹시 같은 대정령이라 해도 급이 있는 걸까. 준상은 두 팔을 거슬러 올라오는 뜨거운 기운에 이를 악물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연어가 물길을 거슬러오는 듯한 움직임으로 준상의 몸 안에서 한 줄기 차가운 기운이 흘러나와 불꽃이 올라오는 팔 안의 길목을 보호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통이 줄어든 것은 아니다. 팔 안쪽에서 불꽃과 얼음이 격렬하게 충돌하며 오히려 고통을 더 배가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친...” 차라리 지금 이 고통에 비하자면, 이전에 다크 시드 사용자를 상대하다가 팔이 잘렸을 때의 고통은 양반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고통은 준상의 것만이 아니었다. 그에게 어깨를 잡힌 채 격하게 몸을 떨고 있던 이벨라의 입에서 들릴 듯 말 듯한 소리가 준상의 귀에 전해진 것은 바로 그 때였다. “그만... 제발 그만...” “...” 몰아치는 화염의 폭풍 속에서 아주 잠깐 그 두 사람은 눈을 마주쳤다. 하지만 뜨거운 불의 소용돌이는 곧바로 마지막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듯 크게 타오르다가 확 하고 사라져 버렸다. “...” 준상은 자신의 손 안에서 실신한 채 축 늘어진 이벨라의 모습을 보고는 잠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는 동안 화염의 대정령은 그녀의 몸으로부터 벗어나 허공으로 떠올랐다. 우선 손을 뻗어 힘을 잃은 화염의 대정령이 지닌 의의를 자신의 정령계로 흡수한 준상은 창백한 표정을 지은 채 정신을 잃고 있는 이벨라를 우선 역소환시켰다. 회복 마법도 있긴 하지만, 가장 안정적으로 그녀의 상태를 회복시킬 수 있는 수단은 역시 역소환이었기 때문이다. “곤란한데...” 대정령에게 의식이 먹혀서 사실상 식물인간이나 다름 없는 줄 알았건만.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의식이 먹히든 먹히지 않았든 간에 그녀를 이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긴 하지만 말이다. “후...” 준상은 일단 결계를 벗어나 최상층에 위치한 컨테이너 하우스로 가서 화염으로 인해 벌거숭이가 된 몸에 옷부터 걸쳤다. 거울을 바라 보았지만, 머리카락이 없는 자신의 모습이 영 어색하기 그지 없다. “정말 곤란한데...” 준상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일단 리체스의 연구실로 통하는 석문으로 향했다. 리체스는 준상이 건네준 인터페이스를 요리조리 살펴보다가 석문으로 들어서는 준상의 모습을 발견했다. “벌써 끝났...” 하지만 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다. 갑자기 머리카락은 물론이고 눈썹마저 깨끗하게 사라진 준상의 모습을 알아보지 못한 탓이다. “여보?” “역시 이상하지?” “...” 리체스는 목소리를 통해 준상이 맞다는 것을 확인하자 얼굴을 찌푸린 채 그의 앞으로 다가오더니 반짝거리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반들반들한 느낌이 꼭 잘 무두질된 가죽을 만지는 듯한 느낌이다. “어떻게 된거에요?” “좀 그슬려 버렸어.” “...” 어떻게 좀 그슬려야 이렇게 완벽한 대머리가 될 수 있는 건지. 리체스는 멋쩍어 하며 뒷덜미를 긁적이는 준상의 모습에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끙...” 준상이 앓는 소리를 하자 리체스는 얼른 손등으로 입을 가리며 말했다. “미안해요. 후훗. 아니, 이건 그러니까...” 단순히 머리 때문에 웃는 것이 아니라 머쓱해 하는 준상의 모습이 어쩐지 귀여워서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준상은 한숨을 푸욱 내쉬며 그녀의 말을 막았다. “알아. 신경 쓰지 마.” “...” 게다가 풀이 죽어 시무룩한 표정까지. 리체스는 그 사진인지 캠코더인지로 이 모습을 찍어두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울 정도였다. “일단 가요.” “어딜?” “누리한테요. 괜히 그 모습으로 불쑥 침실에 들어갔다가 울기라도 하면 어떻게 해요. 잘 설명을 해줘야죠.” “...” 듣고 보니 그렇다. 괜히 놀라서 울기라도 하면 당분간은 누리와 얼굴을 마주하기 어려울지도 모르니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하지만. 침실 안에 있던 헤네스는 물론이고, 젖을 주러 들렀던 유니아란과 깔개를 갈아주러 들어왔던 셀라에 이르기까지 준상의 그런 모습을 보고는 웃음을 터뜨려 버렸다. “푸훕!” 유니아란이나 셀라가 웃음을 참으려고 애쓰며 몸을 돌리고 있는 거야 그렇다 치더라도, 헤네스가 누리를 안아올려 준상의 얼굴을 볼수 있게 해주자 손뼉을 치듯 팔을 흔들며 웃음을 터뜨리는 바람에 준상은 자신도 모르게 울상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말이 나와서 얘기지만, 누리는 지금까지 준상을 보고 이런 식으로 웃음을 터뜨린 적이 없었다. 그 기념할 만한 첫 번째 웃음이 하필 이런 몰골 때문이라니. 준상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지만, 어느새인가 캠코더를 찾아온 헤네스가 풀 죽은 준상의 모습과 활기차게 웃는 누리의 모습을 영상으로 기록하기 시작했다. “사용법은 또 언제 배웠어?” “틈날 때마다요.” “...” 헤네스와 리체스는 준상의 머리에 흔히 빵모자라고 불리는 털모자를 씌우고 동그란 선글라스를 씌웠다. 수염만 기르면 모 영화에 소녀와 함께 등장하는 킬러 캐릭터와 판박이인 그 모습이라니. “너무 멋져요. 뭐랄까, 남성미가 물씬 풍긴달까.” “그러게요. 머리 기르고 난 다음에도 그러고 다니는 건 어때요?” 말은 그렇게 해도 눈이 웃고 있다. “하여튼... 이 장난꾸러기들.” “꺅!” 준상은 한동안 다시 그런 식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가 리체스에게 말했다. “휴대폰이 타버리는 바람에 새로 장만을 해야할 것 같아. 잠시 밖에 다녀올 동안 팔찌 좀 쓸게.” “네, 그러세요.” 그러자 한동안 웃느라 정신없었던 헤네스가 말했다. “같이 갈까요? 바람이라도 쐴 겸.” 그 말에 리체스가 눈을 흘겼다. “바람은 무슨. 그냥 데이트 하자고 그래.” “뭐... 그럼 더 좋구요.”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리체스에게서 팔찌를 건네받은 뒤 지구로 향했다. 북한산에 위치한 정령의 문을 통과한 두 사람은 랩터를 꺼내 탄 다음 시내로 들어섰다. 신형 휴대폰을 구입한 다음 퀘스트 관련 기능을 확인해 보았다. 다행히도 퀘스트 관련 기능은 아무 이상 없이 잘 작동하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이런 저런 휴대폰을 관심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헤네스의 모습에 그녀에게도 지구에서 사용할 적당한 신분을 만들어주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을 떠올리며 밖으로 나오는데, 문득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한다. 갑작스레 도시를 가득 채우는 사이렌 소리에 헤네스는 놀란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이건...” 날짜를 확인해 봤지만 민방위 훈련 같은 것은 아니다. 어떻게 된 일인가 싶어 급히 매장 안으로 들어가는 점원에게 물었다. “이게 무슨 소리죠?” 그러자 점원은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아... 해외에서 있다 오셔서 잘 모르시나 보군요. 지금 저 소리는 근처에 괴물이 출현했으니 빨리 대피하라는 뜻입니다.” “괴물이요?” 그렇게 대화를 나누는 동안 요란하게 경광등을 켠 경찰차와 장갑차가 도로를 급히 지나쳐 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 근처는 아닌가 보군요. 바로 대피하라는 말이 없는 걸 보니. 앱을 잘 살펴 보시면 위험 지역에 대한 실시간 경보를 알려주는 것이 있으니 한 번 확인해 보세요.” 점원은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준상은 점원의 말대로 휴대폰을 열어 앱을 살펴 보았다. 그가 말한대로 실시간 경보 상황이라는 앱이 기본적으로 설치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긴 일년이나 지났으니까.” 준상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앱을 실행시켜 보았다. 그러자 그들이 있는 곳에서 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D급 경보가 발령되어 있는 것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다. “확인해 보시게요?” 헤네스의 말에 준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한번쯤은 봐두는 편이 나을 것 같아.” “그럼 이럴게 아니라 빨리 가요.” “그래.” 준상은 랩터를 몰고 경보가 발령된 지역으로 향했지만, 어느 정도 접근하자 경찰들이 장갑차로 길을 막고 차량을 통제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무래도 차를 타고 계속 가는 건 무리겠군.” 준상은 적당한 골목으로 들어가 차를 인벤토리에 집어 넣고는 헤네스와 함께 조심스럽게 경보가 발령된 지역으로 향했다. 헤네스를 팔에 안아든 채 옥상을 건너 뛰며 이동하고 있는데, 문득 그녀가 손가락으로 한 방향을 가리켰다. “저기요.” “...” 바라보니 검은 색의 방어복을 몸에 걸친 여자 하나가 같은 차림의 귀환자 몇 명과 함께 깃털이 달린 장닭 같은 기묘한 생명체를 사냥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방어복을 걸치고 머리에 헬멧까지 쓰고 있는 상황이라 얼굴을 알아보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준상과 헤네스는 그녀가 사용하는 무기만 보고도 누군지 대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유미 언니네요.” “그렇군.” 적어도 저런 방어복 차림으로 식칼을 들고 휘둘러대는 여자가 둘은 아닐테니 말이다. 옥상 위에서 둘이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동안 서유미는 한 손에는 식칼을, 그리고 또다른 한 손에는 투척용 단검을 손에 들고 자신들을 향해 막무가내로 달려드는 장닭들을 단숨에 반으로 가르고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녀의 몸에서는 은은한 영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기안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회복의 영기. 그러고보니 자질이 있다며 그녀가 기안으로부터 싸우는 성녀의 능력에 대해 배우기 시작한 것도 벌써 일년 전의 일이다. “굳이 도와줄 필요는 없을 것 같군.” 가만히 살펴 보니 서유미 혼자 만으로도 저 정도는 충분히 처치할 수 있을 듯한 분위기다. 그녀는 귀환자들의 선두에 선 채 장닭 들을 베어 넘기다가 동료들이 위험할 것 같으면 투척용 단검을 던지는 식으로 전투를 이끌어 가고 있었다. 저 투척용 단검 이름이 무한의 연쇄였던가. 그런 생각을 떠올리고 있는데, 문득 어디선가 쿵쿵 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동시에 준상의 휴대폰으로부터 짤막한 신호음과 함께 메시지가 하나 나타났다. 준상은 반사적으로 휴대폰을 확인했지만, 퀘스트 메시지가 아니라 실시간 경보 앱에 새로운 경보가 도착해 있었다. 경보! :현재시간 XX시 XX분을 기해 XX동 일원에 내려져 있던 D급 경보를 두 단계 격상합니다. 위험하오니 즉시 현재 지역에서 대피해 주시기 바랍니다. 앱을 만든 사람이 귀환자와 관련된 사람인가. 메시지 창의 모습이 퀘스트 관련 메시지의 그것과 많이 닮아 있었다. 즉시 대피하라는 메시지를 보니 준상은 어쩐지 예전에 다크 시드 사용자들을 사냥할 때의 일이 떠올랐다. 준상이 휴대폰의 메시지를 살피는 동안 헤네스는 다시 한 번 사이렌이 길게 울려 퍼지자 이곳 저곳을 살피다가 쿵쿵거리는 소리와 함께 가옥을 부수며 나타난 괴물 하나를 발견하고는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기에요!” 준상은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 괴물은 아르마딜로처럼 몸에 비늘 같은 것을 달고 있었으며, 머리는 앵무새의 그것과 닮아 있었는데 크기만 해도 4층 건물에 육박하고 있었다. 괴물은 눈앞에서 걸리적 거리는 건물 하나를 앞발로 후려쳐 부숴버리고는 부리를 위로 든 채 마치 뱃고동 같은 소리를 냈고, 그와 동시에 놈의 몸으로부터 검은 안개 같은 것이 퍼져 나오기 시작한다. ============================ 작품 후기 ============================ 몸살이 났습니다. 명절날 이게 무슨 일인지. 00299 트롤러 ========================================================================= 새로운 괴물이 모습을 드러내자 장닭들을 때려잡던 귀환자들은 우왕좌왕하며 어쩔 줄을 몰라하기 시작했다. 하긴 일단 크기부터가 방금 잡고 있던 놈들과는 비교가 안 되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B급이라...” 준상은 통찰의 능력을 통해 괴물의 능력치를 확인해 보았다. 공격력 밝은 녹색. 방어력 밝은 녹색. 특수능력 녹색. 생각보다 덩치에 비해서는 그리 능력치가 높지 않은 수준. 이 정도 녀석이 B급이면 그 이상의 등급을 가진 녀석은 어느 정도인지 궁금해졌지만, 그런 한가로운 생각을 할 수 있는 것도 지금 이 현장에서는 준상 정도가 고작이었다. 귀환자들은 아무래도 안되겠다 싶었던지 어디론가 연락을 시작했고, 이어서 서유미를 포함한 서너명을 제외한 다른 귀환자들이 급히 전장을 빠져 나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떻게 하실래요?”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헤네스의 말에 준상은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이대로 전투를 지켜보며 상위 능력자들의 힘을 확인해 보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더 큰 피해가 나오기 전에 바로 나서서 괴물을 쓰러뜨리는 것이 좋을까. 하지만 준상이 어떤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서유미와 그녀를 따르는 네 명의 귀환자들이 괴물을 향해 공격을 시작했다. 전위로 나선 것은 서유미와 커다란 사각 방패를 든 남자. 둘이 앞으로 뛰쳐나가 주의를 끌기 시작하자, 괴물은 다시 한 번 뱃고동과 같은 소리를 지르며 공격을 시작했다. 세 개의 커다란 발톱이 달린 앞발이 가장 먼저 서유미를 향해 휘둘러졌다. 풍압 만으로도 사람 정도는 단숨에 날려 버릴 수 있을 정도의 위력을 가진 일격. 하지만 서유미는 침착하게 그 일격을 끝까지 지켜 보다가 몸을 뒤집으며 허공으로 떠오르더니 손에 쥔 식칼이 크게 원을 그리며 괴물의 앞발을 그어올렸고, 지면으로 내려오면서 스쳐지나가는 발등을 다시 한 번 그어내렸다. “우와...” 일부러 하라고 해도 힘들 것 같은 곡예와 같은 그 모습에 긴장된 표정으로 지켜보던 헤네스가 주먹을 불끈 쥐며 탄성을 터뜨리는 순간, 서유미의 공격이 적중한 괴물의 앞발에서 검은 피가 확하고 피어오르더니 곧바로 고통에 찬 괴물의 소리가 울려 퍼진다. 예상 외의 반격을 받은 괴물이 움찔하며 뒤로 물러서는 순간 후위의 세 명이 일시에 원거리 공격을 시작했다. 정령사로 보이는 한 명의 귀환자와, 활과 총을 손에 든 두 명의 귀환자들이 눈을 노리고 사격을 시작하자, 괴물은 다시 커다란 울부짖음과 함께 다시 그들을 향해 앞발을 휘둘렀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사각 방패를 든 남자가 후위의 귀환자들 앞으로 나서며 그 공격을 막았다. “크악!” 하지만 능력보다 의욕이 앞섰던 것일까. 모처럼 방패로 앞발의 일격을 막아선 보람도 없이 남자는 허무하게 옆으로 튕겨 나가버렸고, 그의 뒤에 서있던 세 귀환자들도 풍압을 견디지 못한 채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서유미는 급히 회복의 영기를 끌어올려 그들의 회복을 돕는 한편, 발목을 공격해 주의를 끌어보려 했지만, 아까와 같은 검은 안개 같은 것이 괴물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자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괴물은 우선 서유미를 제외한 다른 귀환자들부터 처리하기로 마음 먹었는지, 그녀를 무시한 채 여전히 널브러진 채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귀환자들에게로 다가섰다. “준상씨.” 더 이상은 이대로 지켜볼 수 없다 싶었던지 헤네스가 준상을 돌아보았다. “이 정도인가.” 준상이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헤네스는 곧바로 팔찌를 작동시켜 방어복을 입은 다음 방패와 깃발 달린 미늘창을 꺼내 들고 옥상으로부터 뛰어 내렸다. “크으...” 방패를 들고 앞으로 나섰다가 괴물의 일격에 날아가 버린 차석태는 회복의 영기 덕분에 정신을 차리기가 무섭게 일단 방패부터 찾았다. 하지만 정신만 겨우 차린 상태일 뿐, 그의 몸은 아직 제대로 움직일 수 있을 정도의 상태가 아니었기에, 그는 손을 조금 치켜드는 정도의 행동 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어느새인가 괴물이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지만, 그는 일어나 도망칠 수조차 없었다. 차석태는 괴물의 앞발이 높이 치켜 올려진 것을 알아 볼 수 있었다. 이제 저 앞발이 내리쳐지면, 자신은 부엌을 알짱거리다가 걸린 바퀴벌레마냥 납작하게 짓이겨질 것이다. 이렇게 죽는 건가. 그런 생각을 떠올리니 차석태는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 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일단 물러가라는 말을 들을 걸 괜히 객기를 부렸나 싶었다. 하지만 바로 그때. 차석태의 눈앞에 한 사람이 떨어져 내렸다. “...” 날씬하고 여성스러운 각선미를 보는 순간 서유미가 돌아왔나 싶었지만, 그녀의 손에 들린 커다란 방패와 깃발 달린 미늘창의 모습에 차석태는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귀환자들 가운데 미신처럼 떠도는 한 사람의 별명을 입에 내고 말았다. “여왕... 님?” 그리고 그 말에 차석태의 입에서 흘러나온 순간 괴물의 앞발이 그들의 머리위로 떨어져 내린다. “으라차!” 하지만 방패를 머리 위로 치켜든 여성의 힘 있는 목소리가 울려퍼지는 순간 강력한 풍압과 함께 떨어져 내린 괴물의 앞발은 그들을 압살하고자 했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옆으로 튕겨 나가 버리고 말았다. “...” 차석태는 도무지 현실감 없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확실하다. 지금 그를 구해낸 바로 이 사람은 미국에 나타나서 하얀 방패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얻은 바 있는 그 정체불명의 귀환자였다. 자신이 방패를 들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이 사람을 닮고 싶었기 때문이 아니던가. 괴물은 자신의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분노에 찬 울부짖음을 터뜨렸지만, 다시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느 틈엔가 지상으로 내려선 준상이 괴물을 다가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압도적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존재감을 내뿜는 준상이 전장에 난입하자, 괴물은 본능적으로 이 상대가 만만치 않음을 깨닫고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기안은 잠시 방패를 앞으로 내민 채 상황을 지켜보다가, 괴물이 뒤로 물러서자 미늘창을 집어넣고 두 개의 채찍을 꺼내 들고는 몸을 돌려 차석태를 향해 말했다. “금방 끝나니까 참아요.” “...” 분홍색으로 번들거리는 기묘한 채찍. 아아, 저것도 생각이 난다. 자신을 구한 사람은 틀림없이 바로 그 하얀 방패의 여왕이었던 것이다. 차석태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기안이 휘두르는 채찍을 맞았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생겨났다. 손가락 하나조차 꼼짝하기 힘들 정도로 만신창이가 된 차석태의 신체가 빠른 속도로 회복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럴수가.” 차석태가 놀라워 하며 몸을 일으키자, 기안은 그에게 다시 말했다. “일어났으면 가서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물러나요. 저놈은 우리들이 처리할테니.” “아, 알겠습니다.” 차석태는 얼른 방패를 챙겨들고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동료들을 향해 달려갔다. 기안은 차석태가 일어나 달려가자, 채찍을 다시 집어 넣은 다음 미늘창을 꺼내 손에 쥐고는 괴물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고양이 앞의 쥐처럼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는 괴물과 온몸에서 꺼림직한 기운을 있는대로 발산하고 있는 준상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누가 괴물인지 원.” 기안은 혀를 차며 그렇게 말하고는 지면을 박차며 앞으로 달려나갔다. 준상은 발을 옮기며 인벤토리에서 자신의 장비를 하나씩 꺼내 착용하고 있었다. 부츠를 신고 망토를 걸치고는 사자의 가면을 얼굴에 쓴 그는 뒤에서 기안이 달려오는 것이 느껴지자 돌아보지도 않은 상태로 말을 건넸다. “기안. 분신 팔찌를.” 기안은 달려오다가 그 말을 듣고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걸 지금 쓰려고?” “그래.” 담담한 준상의 대답에 기안은 손목에 채워져 있던 분신 팔찌 하나를 준상에게 던져 주었다. 준상은 그녀로부터 건네 받은 분신 팔찌를 손에 끼고는 원래 차고 있던 분신 팔찌와 함께 동시에 발동시켰다. 그러자, 준상의 몸에서 두 개의 잔상이 분리되어 분신으로서의 형태를 갖춘다. “이건...” 서유미는 준상과 헤네스의 모습을 발견하고 다가오다가, 갑자기 준상의 모습이 둘이나 더 늘어나는 모습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녀가 자초지종을 묻기도 전에 기안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유미! 너 이 녀석!” 그 호통 소리에 서유미는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스승님?” “너 내가 한 동안 신경을 좀 안 썼더니 그게 무슨 꼴이야! 이런 녀석 정도는 혼자서 찜쪄 먹을 수 있어야 하지 않겠어?” “그, 그게...” 서유미가 기안에게 혼이 나고 있는 사이, 준상은 한꺼번에 두 개나 불러낸 분신으로부터 밀려들어오는 감각을 확인하고는 곧바로 인벤토리에서 무기를 꺼냈다. 블러드서커와 어나이얼레이터는 분신에게. 그리고 랑다잘의 분노는 자신이 직접. 그렇게 무기를 분배한 준상은 다시 괴물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방해하지 말고 이리 와.” “네...” 서유미는 기안이 이끄는 대로 일단 뒤로 물러섰다. “군것질 거리 좀 있냐?” “잠시만요.” 얼른 인벤토리에서 캐비닛을 꺼낸 서유미는 그 안에서 질 좋은 최고급 육포와 오징어포를 꺼냈다. “술이 없는 게 아쉽지만, 전투 중이니 어쩔 수 없지. 따라와.” “네.” 둘은 곧바로 근처의 옥상으로 자리를 옮겼다. 기안은 옥상 한켠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는 세 명의 준상이 괴물을 압박해 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서유미는 그녀의 옆에 공손한 자세로 두 손을 모으고 선 채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도와야 하지... 않을까요?” “누가? 네가? 저 인간을?” “네.” “그 식칼에 집착하는 이상은 어림도 없을 걸.” “...” 서유미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전부터 기안은 서유미에게 무기를 바꿀 것을 종용하고 있었다. 무기의 길이가 전투에 있어서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특별한 아이템도 아닌 보통의 짧은 식칼이 그녀의 전투력을 갉아 먹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 만약 그녀가 준상처럼 뛰어난 무기를 장비한 채였다면, 아까의 공격에서도 저런 괴물의 앞발 따위는 단숨에 잘라내 버렸을 것이다. “그러다가 그 칼 부러지고 나서 후회할 셈이냐.” “죄송합니다.” “말이나 못하면.” 그렇게 기안이 다시 타박을 하고 있는 동안 마침내 준상이 공격을 시작했다. 아니, 정확히는 압박을 견디다 못한 괴물이 커다랗게 울부짖으며 무작정 달려든 것이 먼저였다. 건물들을 부수며 성난 물소처럼 달려들자, 가장 먼저 블러드서커를 든 준상의 분신이 괴물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번쩍! 곧바로 한줄기 빛이 번쩍이며 괴물의 품 안에서 나타나자, 괴물은 달려가던 속도 그대로 바닥을 나뒹굴고 말았다. -그아아아아! 그리고 울려 퍼지는 고통 가득한 비명. 블러드서커가 단숨에 괴물의 앞발을 절반이나 베어버린 탓이다. “제법 뼈가 단단한 놈이었군.” 앞발 정도는 단숨에 잘라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준상으로서는 조금 의외의 결과가 아닐 수 없었다. 괴물은 부상을 입자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라 자신을 압박하는 준상의 존재감조차 무시한 채 광폭하게 마구 잡이로 공격을 시작했다. 이성을 잃은 그 몸부림에 애꿎은 집들이 박살나며 그 파편들이 준상을 향해 날아들었다. 하지만 준상은 침착하게 두 개의 철구로 그런 파편들을 쳐내며 분신들을 움직여 다시 공격을 개시했다. 가장 먼저 놈의 몸을 베어낸 것은 것은 다름 아닌 어나이얼레이터. 준상의 본체가 시선을 끄는 동안 뒤로 돌아간 분신은 괴물의 몸을 지탱하고 있는 뒷다리의 무릎 부근을 길게 베어내는데 성공했고, 거리가 떨어지자 열아를 발동해 끊임없이 괴물의 신경을 자극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어느 틈엔가 용케 무너지지 않은 근처의 옥상 위로 올라간 또다른 분신은 공중으로 뛰어오르며 놈의 등판을 내리찍었다. 괴물은 뒷다리의 인대가 끊어지자 비틀거리다가 섬뜩한 일격이 등판에 가해지자 고통 가득한 비명을 지르며 힘 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일단 방어에만 전념하고 있던 준상은 괴물의 자세가 무너지자 앞으로 나서며 놈의 머리를 향해 거대한 철구를 마구 휘둘러댔다. 쾅! 콰쾅! 괴물은 검은 안개를 내뿜고 반쯤 잘려 덜렁거리는 앞발을 들어 이 무지막지한 연타를 막아보려 했지만, 살을 짓이기고 뼈를 부수는 연타는 끝이 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 서유미는 싸움이라고 부르기조차 뭐한 일방적인 전투를 바라보며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최초 40레벨 달성 칭호를 얻고 나서 조금은 자만했던 마음이 다시 움츠러드는 그런 기분이랄까. 그때 기안이 다시 말했다. “그러니까 무기를 바꾸라고.” 역시 그럴 수밖에 없는 걸까. 서유미는 자신의 손에 들린 식칼을 보며 남모르게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전투는 분신으로부터 블러드서커를 건네받은 준상이 강타를 발동해 괴물의 목을 일격에 끊어버리는 것으로 종결되었다. 몽몽이를 불러내 시드를 찾아보게 하고 있자니, 그제서야 서유미와 헤네스가 준상에게 다가왔다. “수고하셨어요.” 어느 틈엔가 기안과 다시 자리를 바꾼 헤네스가 수건을 건네자 준상은 그것으로 옷에 튄 괴물의 피와 체액을 대충 닦고는 서유미에게 말했다. “전투 뒤처리는 보통 어떻게 이루어지지?” 서유미는 얼른 그 말에 대답했다. “보통은 전투에 참여한 귀환자들에게 사체 처리의 우선권이 있어요. 하지만 정확히는 귀환자들과 계약한 연구소들이 우선 협상권을 가지게 되죠. 제 경우엔 서윤씨가 소개시켜준 연구소와 계약한 상태에요.” 이전에 아문간의 사체를 연구소에 제공한 것과 비슷한 형태로 계약이 이루어지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준상은 다시 물었다. “그 외엔?” 서유미는 바로 대답했다. “등급에 따라 정부가 내건 포상금이 있어요. 다만 이 경우엔 사체에 대한 지분 일부를 정부 관계 연구소에 제공할 의무가 있죠.” “그렇군.” 정부 관계 연구소라. 방어복 같은 실질적인 성과물을 보니 욕심이 생겼던 것일까. 준상은 몽몽이가 시드를 찾아오자, 괴물의 몸과 나머지 사체를 인벤토리에 넣으며 말했다. “연구소에는 내가 직접 찾아가겠다고 전하도록.” “서윤씨 쪽이요?” “그래.” “알겠습니다.” 멀리서 전투 현장을 지켜보던 헬기가 머리 위로 다가오는 것을 확인한 준상은 헤네스를 향해 말했다. “돌아가자.” “네.” 처음에 앞발을 조금 베어낸 것 밖에는 그다지 전투에 기여한 바가 없었기 때문에 서유미는 자신의 지분을 요구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지분보다 더 중요한 보상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헤네스는 준상에게 대답하고는 다시 서유미에게 말했다. “아까 기안님이 말씀하셨던 일 말인데요.” “네?” “무기 말이에요.” “아, 그거요.” 이 식칼이 자신의 능력을 좀먹고 있다는 정도는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한 식칼이 아닌 어머니의 유품. 처음 튜토리얼에 떨어졌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녀와 함께 해온 동반자나 다름없는 존재이기도 하다. 기안의 말대로 단순한 집착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식칼이 있었기에 서유미는 지금의 자신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씁쓸하게 웃는 서유미를 향해 헤네스가 다시 말했다. “그걸 계속 쓰고 싶으시다면, 방법이 있을 것 같기도 해요. 제가 일단 확인한 다음 다시 연락을 드릴게요.” “고마워요.” “별말씀을요.” 헤네스는 서유미의 손을 잡고 미소를 지어 보이다가 준상이 재차 부르자 얼른 그를 향해 달려갔다. 서유미는 시야에서 사라지는 둘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현장 수습을 위해 달려오는 경찰차와 소방차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 작품 후기 ============================ 누워서 끙끙거리며 앓다 보니 연휴 3일이 끝나 버렸네요. 쩝. 00300 트롤러 ========================================================================= 인간은 적응의 생물이라고 했던가. 몰려온 소방차와 경찰차들이 무너진 건물 잔해 등을 정리하는 모습을 보며 준상은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마수들이 지구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 어느새 일 년. 자신이 정령계에 가 있는 동안 이 사회는 새로운 침략자에 대해 빠르게 적응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다친 사람들이 많지 않아야 할텐데...” 자신의 팔을 끌어안은 채 그렇게 중얼거리는 헤네스의 모습에 준상은 비어있는 손으로 그녀의 손을 감싸 쥐었다. “어떻게 할래?” 준상의 말에 헤네스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뭐가요?” “모처럼의 데이트인데, 이대로 돌아가기는 좀 그렇지 않아?” “...” “좀 더 있다가 갈까?” 기껏 데이트라고 하고 나와서는 휴대폰 사고 뜬금 없이 괴물과 싸운 것이 고작. 그렇지 않아도 아쉬웠던 모양인지 헤네스는 상기된 표정으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엉망이 된 옷부터 일단 정돈을 한 다음 전투 현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서 랩터를 타고 드라이브를 시작했다. 오랜 만에 단 둘이 즐기는 드라이브라서 그런지 헤네스는 상기된 표정으로 어린 아이처럼 조잘대더니, 이내 준상이 정령계에 가 있는 동안 얀트훈센과 이벨류아에서 있었던 일들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그 남자가 갑자기 제 손목을 잡으면서 그러더라고요.” “뭐라고?” “당신 안에 나를 담고 싶소.” “풉!” 목소리를 착 깔고 남자 목소리를 진지하게 흉내 내는 헤네스의 모습에 준상은 운전하다 말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우아아... 그 말을 듣는 순간 막 몸이 근질근질하면서 닭살이 막...” “그래서 어떻게 했어?” “어쩌긴요. 바로 바닥에 패대기친 다음 광전사 아저씨들한테 치워달라고 부탁했죠.” “하하하.” 지금에서야 이런 식으로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분노한 광전사들을 달래느라 헤네스는 무던히도 심력을 소모해야 했다. 물론 그렇게 달래 놓은 보람도 없이 최후통첩을 받는 바람에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소소한 대화를 나누며 강변 도로를 달리다 헤네스는 문득 차창 밖의 풍경 가운데 기묘한 것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저게 뭐에요?” 얼핏 보았을 때는 범선 모양이었지만, 자세히 보니 범선 모양으로 치장한 야외 레스토랑이다. “식당인 것 같은데.” 한바탕 난리를 치고 난 뒤라 그랬을까. 그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뱃속에서 꼬르륵 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어쩐지 머쓱해져서 헛기침을 하고 있자니 헤네스가 웃으며 말했다. “안 그래도 배가 고프던 참인데 잘 됐네요. 가서 뭐 좀 먹고 가요.” “그럴까?” 범선 모양의 식당은 1층의 라운지와 2층의 레스토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살펴보니 라운지에서는 간단하게 치킨과 맥주를, 레스토랑에서는 스테이크를 주로 판매하고 있었다. 빵모자에 동그란 선글라스를 쓴 듬직한 체구의 준상과 그의 팔짱을 낀 채 선글라스를 쓰고 웨이브진 갈색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날씬한 몸매의 헤네스가 안으로 들어서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들을 향해 쏟아진다. 연예인인가 하며 훔쳐 보던 사람들은 휴대폰을 들어 슬그머니 그들의 모습을 찍으려다가 준상이 선글라스 너머로 주위를 한 번 훑어보자 기겁하며 고개를 돌렸다. “왜요?” “아니. 아무것도.” 둘은 곧바로 2층으로 올라가 자리를 잡았다. 자리에 앉자 아르바이트생인지 조금 앳되어 보이는 남자 종업원 하나가 다가와 주문을 받았다. “뭐가 맛있지?” 아르바이트생은 헤네스의 모습을 홀린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준상의 낮게 깔린 목소리를 듣고는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가, 가장 많이 찾으시는 메뉴는 등심 스테이크입니다. 20년 이상의 경력을 자랑하시는 주방장님의 특제 소스가 곁들여진 두툼한 육질의 풍미가 아주 일품이죠. 조금 더 고급스러운 메뉴를 원하신다면 VIP메뉴도 있습니다. 달콤하고 감칠맛 나는 호박 스프를 시작으로 상큼한 맛의 키위 드레싱에 곁들인 콤비네이션 그린 샐러드에 버터를 발라 마늘과 구운 바케트와 디너롤빵, 그리고 안심과 대하구이를 함께 맛볼 수 있는 안심스테이크에 레드 와인 1잔이 곁들여집니다.” 처음에는 좀 말을 더듬는가 싶었지만, 수없이 연습을 한 멘트인지 일단 말을 시작하자 줄줄 얘기를 쏟아낸다. 헤네스는 열띤 목소리로 그렇게 얘기하는 모습이 재미있는지 미소를 지었고,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며 종업원에게 대답했다. “그럼 그걸로 2인분.” “네! 감사합니다.” 종업원은 구십도 각도로 둘에게 인사를 해보이고는 마치 개선장군처럼 우쭐거리며 돌아갔다. “재미있는 사람이네요.” “그러게.” 둘은 느긋하게 창 밖의 풍경을 즐기며 식사를 즐겼다. 사실 이런 곳의 음식은 맛보다는 분위기에 더 취하기 마련이지만, 특별히 신경을 썼는지 음식 맛이 상당히 좋아서 헤네스는 만족감을 표하며 음식을 깨끗이 비웠다. 당연한 얘기지만 헤네스도 준상도 테이블 매너 같은 것은 제대로 알지 못한다. 하지만 워낙 당당하게 행동하는데다 이미 그녀의 매력에 홀랑 넘어간 종업원은 최대한 친절함을 과시하며 그녀에게 포크나 나이프의 사용법을 알려주고 있었다. “고마워요. 정말 맛있었어요.” 계산을 치르고 나갈 때 헤네스가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하자, 주문을 받았던 종업원은 물론이고 주방장까지 달려나와 직각으로 인사를 했다. “후훗, 재미있는 사람들이네요.” “누군가로 착각하는 모양인데.” “상관 없잖아요. 맛있는 식사를 했으니.” “그렇긴 하지만.”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주차장으로 향하는데, 문득 헤네스가 강변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건 뭐에요?” 준상이 바라보니 그것은 다름 아닌 오리보트였다. “물놀이용으로 만들어진 배. 저 안에 발판이 있어서 그걸 구르면 배가 움직이도록 되어 있지.” 그 말을 듣자 헤네스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기 시작했다. “한 번 타봐요.” “지금?” “네!” 준상은 웃으며 말없이 헤네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헤네스는 이내 볼을 부풀리며 말했다. “앗! 지금 어린애 취급 한 거죠?” “싫어?” “아니, 뭐... 싫다기 보다는.” “하하.” 그렇게 투닥거리며 오리보트가 있는 곳으로 가자 안내인이 그들을 보며 말했다. “식사하신 영수증이 있으면 할인 됩니다.” “그래요?” 준상이 영수증을 내밀자 안내인은 다시 물었다. “전동식과 페달식이 있습니다. 어떤 걸 타시겠습니까?” 헤네스는 이게 뭔 말인가 싶어 준상을 바라보았다. “페달은 아까 말한대로 발판을 밟아서 움직이는 거고, 전동식은 자동으로 움직이는거야.” 준상의 설명에 헤네스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손을 번쩍 들고는 이렇게 외쳤다. “페달식이요!” 그러자 나이 지긋한 안내인은 웃으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둘은 곧바로 안내를 받아 구명조끼를 입고 오리보트에 나란히 탑승했다. “제가 운전할게요.” “그래.” 천천히 페달을 굴리자 오리보트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헤네스는 신이 나서 요리조리 보트를 움직이다가 속도 욕심이 생겼는지 힘차게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준상에 비하면 아직 멀었지만, 그녀 역시 그에게 기초 수련을 받고 다시 지난 일년간 서유미와 함께 기안에게 착실하게 수련을 받은 상황이라 어지간한 일반인을 초월하는 근력과 지구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야아아압!” 원래 오리보트는 스피드를 즐기려고 타는 것이 아닐텐데. 준상은 무슨 모터보트처럼 강 위를 질주하는 오리보트의 모습에 쓴웃음을 지었지만, 모처럼 신이 나서 열중하고 있는 헤네스의 모습이 귀여워서 그냥 그대로 놔두었다. “이거 은근히 수련에도 도움이 될 것 같아요. 그렇지 않아요?” “그런가?” “준상씨도 한 번 굴러봐요.” “내가?” “네.” “어디 보자.” 준상은 가볍게 몸을 푸는 시늉을 하더니 천천히 페달을 구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처음만 그랬던 거고, 조금 지나자 헤네스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듯한 속도로 페달을 밟아댔다. “꺄하하하하!” 헤네스는 엄청난 속도로 물 위를 가로지르는 오리보트의 속도감에 취해 연신 웃음을 터뜨렸다. 때마침 모터보트를 타며 물놀이를 즐기던 사람들이 엄청난 속도로 자신들을 지나쳐 가는 오리보트의 모습에 얼이 빠진 것은 덤이다. “방금 그게 뭐였지?” “그, 글쎄?” 근처의 레스토랑이나 강변을 거닐던 사람들도 그 믿기지 않는 모습에 얼이 빠졌다. “저게 가능한 일이에요?” “크흠, 뭐 저 정도야. 운동 좀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정말요?” “그, 그럼.” “그럼 한 번 해봐요.” “...” 괜히 객기를 부리다가 다음날 일어나지도 못할 정도로 근육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나온 것도 자잘한 후유증 가운데 하나였다. “후아... 재미 있었어요.” 귀신에 홀린 듯한 표정으로 자신들을 바라보는 안내인을 지나치며 헤네스가 그렇게 말하자 준상은 웃으며 대답했다. “이렇게 물놀이를 좋아할 줄 알았으면 진작에 올 걸 그랬군.” “...” 헤네스는 그 말에 웃어보이고는 다시 준상의 팔짱을 끼고는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에요.” “응?” 미처 알아듣지 못한 준상이 다시 물었지만, 헤네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아무것도.” 당신이랑 함께여서 더 즐거웠던 거에요. 그녀가 웅얼거리듯 속삭였던 말은 바로 이것이었다. 하지만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너무 닭살이다 싶었던지 헤네스는 머리를 붕붕 저으며 상기된 표정을 감추느라 애써야만 했다. “잠깐 여기서 쉬었다 가요.” “그럴까.” 두 사람은 강변의 벤치로 자리를 옮겨 끙끙거리며 오리보트의 페달을 밟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감상했다. 바람이 불어 쌀쌀하기는 했지만, 어차피 얼음의 대정령과도 맞짱을 뜨는 두 사람에게 이 정도의 강바람은 별 의미가 없다. 가만히 서로에게 기대어 있기를 얼마나 했을까. 준상은 문득 조잘거리며 이런 저런 얘기를 속삭이던 헤네스가 어느 틈엔가 곤한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는 것을 깨달았다. 말은 안했어도 전쟁 후의 뒤처리부터 시작해서 매일 뜨거운 밤을 계속해서 보내다 보니 이래저래 피로가 겹쳤던 모양이다. 준상은 그녀가 깨지 않도록 움직이지 않은 채 석상처럼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렇게 곤하게 잠들어 있던 헤네스는 저녁 노을이 질 무렵이 되어서야 눈을 떴다. “음...” 멍한 표정으로 눈을 비비며 일어나는 그녀를 보며 준상이 말했다. “잘 잤어?” “...” 헤네스는 잠이 덜 깼는지 잠시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가, 조금 지난 뒤에야 상황을 깨달았다. “아... 죄,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그만.” “신경 쓰지마.” 준상은 어쩔 줄 몰라하는 헤네스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다시 말했다. “많이 피곤했나봐.” “그게...” “얀트훈센의 일이 그렇게 많은 거야?” “요즘 좀 그렇긴 해요.” “그랬군.”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말했다. “어디 또 가보고 싶은 곳이 있어?” 그 말에 헤네스는 잠시 말이 없다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누리가 보고 싶어졌어요.” “...” 이럴 때 정도는 좀 더 떼를 써도 좋으련만. 준상은 쓴웃음을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가자. 일단 뭔가 따뜻한 음식이라도 먹는 편이 좋겠어.” “네.” 주차장에 세워두었던 랩터를 타고 다시 도심으로 돌아오자, 헤네스는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커다란 식당 하나를 가리켰다. “저게 뭐에요?” 준상이 바라보니 그것은 다름 아닌 감자탕 집이었다. “감자탕.” “맛있는 음식인가 봐요. 저렇게 사람들이 많은 걸 보면.” “...”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눈은 이미 호기심에 가득차 반짝거리고 있었다. 요정계에서 오래 지내다보니 그들의 성격이 옮은 것일까 하고 준상은 생각하다가 문득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요정을 닮았다고 말했던 일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훗.” 준상이 갑자기 웃음을 짓자, 헤네스는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왜 갑자기 웃어요?” “아냐. 아무것도.” “빨랑 말해요. 얼른!” 옆구리를 간질이며 추궁하자 준상은 얼굴에서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대답했다. “그냥. 옛날 생각이 나서.” “옛날 생각이요?” “내가 요정을 닮았다고 했던 거 기억나?” “...” 헤네스는 그 말을 듣고는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때의 상황이 다시금 머리 속에 생생하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얼굴을 수그리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준상은 다시 한 번 웃으며 감자탕 집의 주차장에 차를 멈추었다. 과연 입맛에 맞아할까 싶었는데, 의외로 헤네스는 감자탕을 매우 맛있게 먹었다. 쭉쭉 빠진 이국의 미녀가 선글라스를 쓴 채 감자탕을 맛있게 먹는 모습이 신기한지 사람들이 흘깃거리는 모습이 여기저기서 눈에 들어왔지만, 이제는 준상도 이 정도 주위 반응은 그냥 그러려니 할 뿐이었다. 배부르게 식사를 마친 둘은 다시 차를 타고 밖으로 나왔다.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갈까?” “...” 안전벨트를 채워주고 그렇게 말하자, 헤네스는 얼굴을 붉힌 채 대답을 하지 못했다. 준상은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천천히 차를 몰아 외곽을 달리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크흐흐흐... 덴장; 00301 트롤러 ========================================================================= 준상은 강을 따라 길을 달리다가 남쪽 강변에 보이는 모텔을 발견하고는 핸들을 꺾었다. 곧바로 키를 받아 방으로 올라간 준상은 문이 닫히기가 무섭게 모습을 감추고 자신을 따라오는 헤네스를 끌어 안았다. 그러자 투명화가 풀리며 놀란 표정의 헤네스가 모습을 드러낸다. “준상씨?” 동그랗게 치켜뜬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자 헤네스는 이내 볼을 붉히며 다가오는 준상의 입술을 받아들였다. 천천히, 그리고 부드럽게 몇 번이고 톡톡 모이를 쪼는 듯한 느낌으로 서로의 입술을 마주치던 두 사람은 이내 이마를 마주하며 미소를 지었다. “놀랬잖아요.” 가슴을 툭 두드리며 그렇게 말하는 헤네스의 모습에 준상은 웃으며 대답했다. “더 놀라게 해줘?” “네?” 준상은 무슨 소린가 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헤네스의 몸을 그대로 공주님 안 듯 번쩍 안아들었다. 갑작스런 준상의 행동에 헤네스는 다시 눈을 크게 뜨다가 이내 살짝 눈을 흘기며 말했다. “이 정도로는 안 놀라거든요?” “정말?” “물론이죠.” 여전히 볼이 발그레하니 상기된 상태이면서도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그렇게 말하는 헤네스의 귀여운 모습에 준상은 웃으며 그녀를 침대 위로 옮겼다. 헤네스는 준상이 자신을 침대 위에 내려 놓고 상의의 단추를 풀기 시작하자, 그제서야 당황해 하며 말했다. “자, 잠깐만요.” “왜?” “일단 씻고 난 다음에...” “난 이대로가 좋은데.” “하지만.” “싫어?” 준상의 말에 헤네스는 울상이 되더니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었던지 그를 밀치고 일어나더니, “그, 그래도 안돼요.” 라는 말과 함께 그대로 욕실로 도망쳐 버렸다. “쩝.” 준상은 후다닥 도망쳐 버리는 헤네스의 뒷모습을 보며 아쉬운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혹시나 화가 난 건 아닐까 싶어 슬쩍 초감각으로 안의 모습을 살피니 헤네스가 투덜거리며 옷을 벗는 모습이 느껴진다. “준상씨도 참... 땀 흘리고 먼지까지 잔뜩 뒤집어썼는데... 키스 하다가 구정물이라도 나오면 어쩌려구...” 입을 삐죽 내밀며 꿍얼꿍얼 대는 그녀의 모습에 준상은 피식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준상으로서는 그런 것 따위 신경도 쓰지 않았겠지만, 그녀로서는 그런 식의 일이 일어나 모처럼 좋은 분위기가 깨지는 걸 용납하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준상은 일단 옷을 벗고 가운을 걸친 다음, 이제나 저제나 하며 헤네스가 목욕을 끝내기를 기다리다가 문득 이번에 획득한 시드를 떠올렸다. “이것도 근 일 년 만의 시드인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준상은 몽몽이를 불러내 시드를 받아내고는 아이템 확인을 실행해 보았다. 명칭 : 구린 털가죽 레벨제한 : 20 종류 : 시드 등급 : Rare 효과 : 1. 방어 증가 12% 2. 근력 증가 8% 3. 악취의 안개 1레벨 상승 설명 : 마수 그누트 팔이 지니고 있던 특별한 시드입니다. Seed 슬롯이 있는 아이템이나 카드에 장착하여 능력을 강화할 수 있습니다. 한번 장착한 시드를 분리하기 위해서는 특수기능 ‘분리’가 필요합니다. [이 시드를 아이템이나 카드에 장착하시려면 이곳을 누르십시오.] 그 검은 안개의 정체가 악취였나. 준상은 악취의 안개에 대한 정보를 확인해 보았다. 악취의 안개 : 역겨운 냄새가 가득한 안개를 만들어 냅니다. -악취의 안개에 노출된 적은 지독한 냄새로 인해 주의력이 떨어집니다. -효과는 미약하지만 지속적으로 중첩되며, 명중률이나 치명타 발생률 등에 악영향이 생길 뿐만 아니라, 올바른 처치를 하지 않고 방치할 경우 행동 불능이나 중독, 질병 상태를 유발할 수 있습니다. -악취의 안개는 적아를 구분하지 않습니다. 뭔가 좋은 것 같긴 한데, 별로 쓰고 싶지 않은 스킬이다. 게다가 적아마저 구분하지 않으니 여러모로 난감한 스킬이 아닐 수 없다. 시드의 확인이 끝나자 준상은 티비를 켰다. 볼 만 한 것이 있나 하며 채널 몇 개를 돌리다 보니, 아까 전에 있었던 전투 모습을 찍은 영상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전투 중에 머리 위에 떠 있던 헬기가 영 거슬리더니, 이런 식으로 영상을 촬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영상은 호쾌하게 괴물의 머리를 철구로 연타하는 준상의 모습을 클로즈업 하며 흘러나오고 있었다. -서울 도심에 B급 경보가 발령된 것이 3개월만이죠? -그렇습니다. 하지만 지난 XX월에 XX동에서 출현한 마수에 비하면 크기부터가 비교의 대상이 아닙니다. 사체를 분석해 봐야겠지만, 영상으로 추정해 보면 아마 국내에 출현한 마수 중에서는 가장 큰 규모가 아닐까 싶군요. -지난 XX월의 마수 출현 때에 비하면 피해 규모가 상당히 적은 편입니다. 원인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조기에 빠르게 대피가 이루어진 것이 우선 주효했습니다. 거기에 더해 마수가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기 전에 사전에 차단해서 격멸한 귀환자 여러분의 노고 또한 무시할 수 없겠죠. -이전에는 귀환자들의 피해도 상당했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말씀대로입니다. 당시만 해도 국내에 상위 능력자의 수가 그리 많지 않은 상황이었고, 군경과의 연계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시점이라 전투 중에 아군에 의한 오폭에 의해 사망한 사례도 있었습니다. 참으로 뼈아픈 일이었지요. -그런데 이번에 마수를 처치한 인물이 과거 미국 서부에서 발생했던 마수의 대규모 출현을 저지했던 귀환자와 동일 인물이라는 얘기가 있습니다. 이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됩니다. 우선 자료 화면을 보시죠. 티비 화면에서는 샌디에이고에서 마수들을 처치하던 당시의 준상과 헤네스의 모습과 함께 이번에 서울에서 촬영된 영상이 나란히 흘러나오며 이런 저런 설명을 하고 있었다. 뻔히 자신의 일임에도 불구하고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화면을 지켜보고 있는데, 목욕을 끝낸 헤네스가 머리에 수건을 감고 가운을 걸친 채 욕실에서 나오더니 화면에서 흘러나오는 영상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오늘 일에 대한 건가요?” “응.” 준상이 일어나며 손을 뻗자 헤네스는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안돼요. 가서 씻고 오세요.” “쳇.” “어서요.” “알았어.” 헤네스에게 등이 떠밀려 욕실로 들어간 준상은 씻는 둥 마는 둥 하며 대충 샤워를 하고는 바로 돌아왔다. 그러자 은은한 조명 아래서 옷을 갈아 입고 있던 헤네스가 화들짝 놀라며 얼른 몸을 움츠렸다. “버, 벌써 끝났어요?” “그야 뭐...” 바라보니 헤네스는 캐비닛에서 네글리제를 꺼내 입고 있었는데, 어디서 구했는지 테이블 위에는 와인잔과 함께 술병과 과일마저 놓여 있었다. 나름대로 준상이 샤워를 하는 동안 준비를 마치려고 했던 모양인데, 너무 빨리 샤워를 끝내는 바람에 예상이 어그러진 것이다. “어휴... 뭐가 그리 급해요?” 살짝 눈을 흘기며 바라보는 헤네스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준상이 되물었다. “이유를 알고 싶어?” 그 말에 헤네스는 준상의 반짝이는 머리를 어루만지며 대답했다. “이유라면 알아요.” “뭔데?” 헤네스는 장난기 어린 눈으로 대답했다. “머리카락이 없어서 빨리 끝날 수밖에 없는 걸 깜빡했네요.” “뭐?” “아닌가요?” “끙...” 준상이 앓는 소리를 내자 헤네스는 웃으며 품에서 빠져 나오더니 와인 잔을 건넸다. “받아요.” “이건?” “어머니가 주신 거에요.” “장모님께서?” “네. 몸에 아주 좋은 거래요.” “...” 과연 몸에만 좋은 걸까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준상은 웃으며 그녀가 따라주는 술을 입에 머금었다. 느낌은 뭐랄까, 약초로 담은 술 같은 느낌. 쌉싸름한 맛 뒤에 묘하게 단 맛이 느껴지는 기묘한 맛이다. “어때요?” “글쎄. 난 술은 잘 안 마셔 버릇해서.” 너무나 담백한 그 대답에 헤네스는 다시 눈을 흘겼다. “하여튼 너무 솔직해서 탈이라니까.” “그런가.” “그런 점이 더 좋긴 하지만요.” 헤네스는 웃으며 다시 잔을 부딪히고는 남은 술을 단숨에 마셔 버렸다. “후아.” “...” 괜찮은 걸까. 조금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준상에게 헤네스는 잔을 내밀며 말했다. “자, 이번엔 준상씨가 따라 주세요.” “너무 많이 마시는 거 아니야?” 준상의 말에 헤네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손을 내저으며 대답했다. “괜찮아요. 처음에는 한 잔만 마셔도 바로 취했지만, 리체스 언니랑 몇 번 주거니 받거니 하다보니 요새는 혼자서도 한 병은 거뜬히 마시는 걸요.” “...” 일 년 동안 독수공방하면서 몸만 커진 것이 아니라 주량도 늘어난 건가. 준상은 마음 속으로 작은 죄책감을 느끼면서 그녀가 내민 잔에 술을 따라 주었지만, 헤네스는 그가 잔을 채우는 동안 고개를 돌린 채 쿡쿡거리며 작게 웃음을 흘렸다. “왜 웃어?” 뭔가 실수라도 했나 싶어 그렇게 묻자 헤네스는 억지로 웃음을 참으며 대답했다. “그게... 머리카락이랑 눈썹이 하나도 없는 상태로 진지한 표정을 지은 채 술을 따르는 모습을 보니까 저도 모르게... 쿡쿡쿡.” “끙...” 준상이 앓는 소리를 내며 술병을 탁자에 내려 놓자, 헤네스는 웃음이 지워지지 않은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가까이 와봐요.” “...” 준상이 그 말에 따라 다가 앉았지만 헤네스는 고개를 저으며 다시 말했다. “좀 더요.” 무릎이 맞닿을 만큼 가까워지고 나서야 헤네스는 손에 들린 잔을 기울여 입안에 술을 머금더니 준상에게 입을 맞춰왔다. “...” 헤네스는 그대로 조심스럽게 준상의 입으로 술을 흘려보내고는 술기운 탓인지 조금 몽롱해진 눈으로 이렇게 말했다. “이 술은 원래 이렇게 마시는 거래요.” “이것도 장모님이 알려주신 방법이야?” “네.” 헤네스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준상의 입술에 이전과는 다른 길고 뜨거운 키스를 선사했다. 술 기운 탓일까. 준상은 달콤 쌉싸름한 그녀의 입술을 음미하며 점점 몸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가만히 손을 들었다. 그러자 일 년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풍성해진 그녀의 가슴이 부드러운 실크의 감촉 너머로 손에 쥐어진다. 손이 닿자 헤네스는 살짝 움찔하는 기색이었지만, 상관없다는 듯이 더욱더 정열적으로 준상의 입술을 탐했다. 헤네스는 아예 몸을 일으켜 준상의 허벅지 위에 걸터앉은 채로 두 손을 뻗어 얼굴을 감싸쥔 채 키스에 열중하더니 이내 입술을 떼고는 준상의 몸에 걸쳐진 가운 속으로 손을 넣어 어깨 아래로 밀어내렸다. 준상은 헤네스의 부드러운 손이 가슴을 지나 쇄골을 거쳐 어깨를 쓰다듬는 감촉을 즐기며 그녀에게 물었다. “이것도 장모님이 가르쳐 주신 방법이야?” 준상의 말에 헤네스는 눈을 살짝 흘겼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리고는 부드럽게 웨이브진 갈색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드러난 가슴에 다시 입을 맞추며 준상을 올려다 보았다. 오늘따라 묘하게 헤네스의 동그란 눈이 고양이의 그것처럼 느껴진다. 손을 뻗어 가만히 그 부드러운 갈색 머리를 쓰다듬자 헤네스는 눈을 감으며 그 손길에 머리카락을 맡기다가 말했다. “이상해요.” “뭐가?” “어린애 취급 당하는 것 같아서 싫은데, 막상 머리카락에 손이 닿으면 거부할 수가 없어요.” “...” 준상은 그렇게 말하는 헤네스의 모습에 웃음을 짓고는 그녀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번쩍 들어올렸다. “준상씨?” 갑작스런 그 행동에 헤네스가 깜짝 놀라며 이름을 불렀지만, 준상은 그대로 그녀를 들어 침대 위에 데려다 눕혔다. “...” 침대 위에 비스듬히 누운 채 자신을 올려다 보는 헤네스의 모습을 바라보던 준상은 천천히 그녀의 발목을 잡아 들고는 그곳에 입을 맞추며 음흉한 표정을 지은 채 말했다. “각오는 됐겠지?” 그러자 헤네스는 웃음 섞인 비명을 지르며 몸을 돌렸다. “꺄악! 살려줘요!” “어흥!” 준상은 돌아 누운 그녀의 몸을 뒤에서 감싸 안으며 하얀 어깨를 살짝 물었고, 이내 두 손으로 거침없이 그녀의 몸 구석 구석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아...” 조금은 거칠다 싶을 정도의 애무였지만 헤네스는 고개를 돌려 한 손으로 준상의 뒷목을 감싸 안으며 입을 맞추었다. 준상은 헤네스가 입고 있던 네글리제를 가만히 벗겨 내고는 그녀의 다리 사이로 손을 뻗었다. 어느새 한껏 달아올라 있었던 모양인지, 이내 손가락 끝에 촉촉한 물기가 느껴졌다. “으음...” 민감한 속살에 와닿은 손가락의 감촉에 헤네스가 가볍게 신음을 흘리자 준상은 그녀의 다리를 들어 자신의 허벅지 위로 걸치며 그대로 몸을 밀어 붙였다. 헤네스는 예상치 못한 자세에서 그의 몸이 밀려들자 눈을 크게 뜨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자, 잠깐만요.” “왜?” “이런 자세는... 아흑!” 하지만 그녀는 몸 안을 가득 채우는 뜨거운 불덩이의 감촉에 말을 이을 수가 없었고, 곧바로 부드러운 진퇴가 시작되자 더 이상 자세에 대해 말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준상은 헤네스의 귀와 쇄골과 어깨에 계속해서 입을 맞추며 한 손으로는 가슴을, 또다른 한 손으로는 배꼽 아래의 은밀한 부위를 자극하며 계속 몸을 움직였다. “아아...”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했던 새로운 체위 때문일까. 아니면 행위 중에 계속해서 몸 이곳저곳을 자극하는 준상의 나쁜 손 때문일까. 그도 아니면 직전에 마신 술 때문일까.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었지만, 헤네스는 결국 자신의 입을 통해 터져 나오는 교성을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었다. 곧바로 방 안은 헤네스의 숨넘어갈 듯한 교성과 준상의 거친 숨소리로 가득 찼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 늦게가 되어서야 살짝 잠이 들었던 준상은 전화 벨 소리에 잠이 깨버렸다. “네.” 전화를 받자 수화기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시간 됐습니다.” “네.” 준상이 수화기를 내려놓자 전화벨 소리에 깼는지 부스스한 모습으로 헤네스가 눈을 뜬다. “으음... 무슨 일이에요?” “시간 됐다는데.” “우웅... 그래요...” 아직 덜 깬 탓인지 그렇게 대답하고 헤네스는 다시 준상의 가슴에 얼굴을 기대며 다시 잠시 들어버리고 말았다. 준상은 그런 헤네스의 모습이 피식 웃고는 신기루 꽃으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일단 시트로 잠든 그녀의 몸을 대충 감싼 다음 그대로 안아서 신기루 꽃으로 들어간 준상은 최상층의 컨테이너 하우스의 침대 위에 옮겨 놓았다. “음? 여긴...” 그제서야 조금 정신이 들었는지 몸을 일으키려 하는 헤네스의 이마를 손가락을 꾹 눌러 다시 눕힌 준상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는 이렇게 속삭였다. “쉬고 있어. 금방 돌아올테니.” “네.” 헤네스는 잠에 취한 상태에서도 배시시 웃어 보이고는 다시 침대 속으로 애벌레처럼 몸을 웅크린 채 파고 들었다. 준상은 시트를 챙겨 모텔로 돌아왔다. 그리고 대충 옷을 걸친 다음, 방 안에 어질러진 그녀의 옷이나 술병, 그리고 와인잔 등을 꼼꼼하게 챙기고 나서야 방을 빠져 나왔다. 차를 몰고 여관을 빠져 나온 준상은 인적이 드문 숲길로 가서 인벤토리에 차를 집어넣고 신기루 꽃으로 돌아와 다시 옷을 벗고 헤네스의 옆자리로 파고 들었다. 헤네스는 인기척을 느끼자 덜 깬 표정으로 눈을 뜨더니 이내 미소를 지으며 그의 가슴에 얼굴을 기댄 채 다시 잠이 들었고, 준상 역시 그녀의 부드러운 갈색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잠을 청했다. ============================ 작품 후기 ============================ 축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기념으로 특대 염장 특집을 보내드립니다. 젠장; 00302 트롤러 ========================================================================= 결국 한 나절이나 더 자고 나서야 겨우 깨어난 두 사람은 오랜만에 준상이 만든 볶음밥으로 늦은 점심을 먹고 나서야 다시 서울에 모습을 드러냈다. 사체도 처분할 겸 연구소에 들르려는 것이다. 준상은 차를 몰고 가며 우선 임서윤에게 휴대폰으로 연락을 취했다. “엇, 휴대폰으로 연락을 주셔서 좀 놀랬습니다. 어쩐 일이십니까?” 준상은 염동력으로 휴대폰을 든 채 차를 몰며 대답했다. “어제 일은 들었겠지?” “물론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유미씨가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전해달라고 하더군요.” “그랬군.” 별 감흥 없는 목소리로 그렇게 대답한 준상은 바로 말을 이었다. “사체를 처리하려고 연구소로 향하는 참인데, 위치는 변동이 없겠지?” 그 말에 임서윤은 반색하며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제가 미리 연구소 쪽에 연락을 해두겠습니다.” “알았다. 그럼 수고하도록.” “네, 감사합니다.” 헤네스는 가만히 차창 밖을 바라보다가 준상이 통화를 끝내자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유미 언니는 잘 돌아갔대요?” 그런 말은 없었지만 준상은 서윤이 감사의 말을 대신 전했던 것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그래.” 준상의 대답에 헤네스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말해봐.” “준상씨도 아시겠지만, 유미 언니 무기 말인데요. 좀 더 좋게 만들어 주실 수 없을까요?” “흠...”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준상과 헤네스가 쓰고 있는 방어복만 하더라도 본래 아이템으로 인식되지 않던 것을 리체스가 순간적으로 착용이 가능한 팔찌 형태로 만든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뭔가 마법적 기능을 부여해서 아이템화 시키면 준상이 지닌 능력으로 +10까지 강화하는 건 일도 아니다. “불가능한 건 아니다.” “그럼...” “하지만 공짜는 안돼.” 인색하다고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 이런 식으로 특정 물품을 아이템화시키고 다시 강화를 통해 강력하게 변모시키는 능력은 리체스와 준상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나 다름없다. 자칫 알려지기라도 하는 날에는 이전에 헤네스가 무한의 연쇄를 빌려주었던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귀찮은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헤네스도 그와 같은 상황은 잘 알고 있는지라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걱정하실 필요 없을 거에요. 유미 언니도 이젠 제법 부자거든요.” “...” 하긴 귀환자들 가운데 레벨로 랭킹 1위라면 시드든 마수의 사체든 간에 수입이 상당할 것이다. 준상은 웃으며 손을 뻗어 헤네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계속해서 차를 몰았다. 커다란 차체의 픽업 트럭이 연구소 부지 안으로 들어가자, 미리 연락을 받고 기다리던 사람들이 우르르 달려 나와 그들을 맞이했다. 이전과는 달리 연구소 주위에 철책과 함께 높은 벽이 둘러져 있고 건장한 경비원들이 입구를 지키고 있다는 것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이 정도면 안에 군대가 주둔하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듯한 그런 분위기. 하지만 경비원들은 미리 연락을 받았는지 준상과 헤네스가 탄 차가 접근하자 얼른 차단기를 올리고 바리케이드를 치우더니 긴장한 표정으로 경례까지 해보였다. 저럴 거면 뭐하러 차단기를 만들어 둔 건지. 어쨌거나 준상과 헤네스가 차에서 내리자, 작달막한 체구의 낯익은 남자 하나가 준상을 향해 다가서며 인사를 했다. “어서 오십시오. 기억하시겠습니까? 소장인 맹진우입니다.” 빵모자를 뒤집어쓰고 둥근 테의 선글라스를 낀 모습이 조금 낯설었는지 맹진우의 표정에 살짝 의혹이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준상은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었지만 모르는 척 그가 내미는 손을 맞잡았다. “반갑습니다.” 그 목소리를 듣고서야 본인이 맞다는 것을 확인했는지 맹진우는 웃으면서 준상과 헤네스를 연구소로 안내했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안으로 들어가시죠.” “네.” 준상과 헤네스는 그의 사무실로 들어가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맹진우는 손수 차를 타서 가지고 오며 말했다. “일전에 건네주신 샘플들 덕분에 요즘 저희 연구소의 이름이 너무 유명해졌습니다. 그래서 좀 이래저래 귀찮은 일이 많아졌죠.” “그렇군요.” 준상이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하자 맹진우는 손을 비비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마수의 사체를 가져 오셨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렇습니다.” “아, 역시. 그럼 조건은...” “...” 준상이 대답 없이 지그시 바라보자 맹진우는 찔끔하는 표정으로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예전의 조건대로 어떠십니까.” 이전에 준상이 아문간의 사체를 넘겼을 때의 조건이 로열티 16퍼센트에 사체 매입 대금은 별도였다. 현재 일반적으로 마수의 사체를 매입할 때의 조건이 별도의 매입 대금 없이 10퍼센트 안팎의 로열티가 제시되거나 10년치의 로열티를 임의로 산정해서 일시불로 지불하는 형식임을 감안하면, 이전에 준상과 계약했던 16퍼센트의 조건은 연구소로서는 아무래도 출혈을 각오할 수밖에 없는 수준이다. 하지만 일년이나 소식이 없다가 나타나서 B급의 마수를 혼자 힘으로 때려잡는 능력을 선보인 이상 그를 보통의 다른 귀환자들과 동급으로 취급하는 건 역시 무리한 일이었고, 덧붙여 미국 정부에 대한 그의 영향력까지 감안하면 이 정도 출혈은 충분히 감내할 만 했다. 그룹에서 내려온 지침도 어지간히 까다로운 조건이 아니면 모두 들어주라는 식이었지만 워낙에 생각을 종잡을 수 없는데다 이전에 경험했던 그 꺼림직한 기운 때문에라도 맹진우는 준상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 역시나 준상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20퍼센트 채워주십시오.” “...” 맹진우는 울상이 되었다. 아무리 조건을 맞춰주라는 말을 들었다 치더라도 이래서는 정말 남는 것이 없었다. 방어복의 경우라면야 공전의 히트를 치면서 16퍼센트의 로열티를 지불하고도 엄청난 이익을 그룹에 안겨 주었지만, 이번에 잡은 거대 괴수는 아무리 봐도 그 정도의 가치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결정을 하는 것은 자신이 아니었다. 맹진우는 얼른 준상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전화기를 들고 옆방으로 가서 통화를 시작했다. 한참이나 통화를 하고 나온 맹진우는 십년은 늙어 보이는 듯한 표정으로 통화를 마치고 돌아와 준상에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 조건대로 하죠.” “감사합니다.” 하지만 준상의 말은 끝난게 아니었다. “대신.” “...” 그러면 그렇지. 그냥 그렇게 끝날 리가 없지 않은가. 맹진우는 이제 될대로 되라 싶은 표정을 채 준상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준상은 그런 맹진우를 바라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부탁 하나만 좀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부탁이라시면...” “신분을 몇 개 만들어 주셨으면 합니다.” “...” 맹진우는 도대체 이 남자가 또 무슨 일을 저지르려고 그러는 건가 싶은 생각에 가슴이 철렁 주저앉았다. 임서윤은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맹진우를 비롯한 그룹의 고위층들은 눈앞의 이 남자가 미국의 펜타곤을 무너뜨린 장본인이 아닐까 하고 의심하는 중이었다. 그런 남자가 위장 신분을 구하다니. 당연히 걱정이 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어렵습니까?” 반쯤 벗겨진 머리에 식은땀이 송글송글 맺히는 모습을 바라보며 준상이 그렇게 묻자 맹진우는 얼른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어렵다니요. 그 정도는 얼마든지 해 드릴 수 있습니다.” “저희 둘 다입니다.” “네. 두 분이 쓰실 용도로. 알겠습니다. 일단 사진 정도는 필요하겠지만, 나머지는 저희들이 다 알아서 할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것은 사실 준상 자신보다는 헤네스가 지구에서 사용할 신분을 만들고자 하는 목적에서 내건 조건이었다. 물론 미국 정부와 교섭을 하면 이런 정도의 신분을 만드는 건 일도 아니겠지만, 아무래도 그쪽은 악연으로 시작된 사이라 무조건 믿고 맡기기엔 아무래도 불안한 점이 많았다. 간단하게 계약 내용에 대한 확인이 끝나자, 준상은 헤네스와 함께 연구소가 사체 보관용으로 특별히 만든 창고로 자리를 옮겼다. “여기에 가져다 놓으시면 됩니다.” 고무 장갑과 고무 장화, 거기에 세균이나 독소를 막기 위한 방독면과 방호복까지 완벽하게 착용한 채로 창고로 안내된 준상은 맹진우가 가리키는 장소에 우선 이번에 사냥한 마수 그누트 팔을 꺼내 놓았다. “오오! 이 엄청난 크기라니! 정말 대단합니다!” 네 발로 딛고 섰을 때의 어깨 높이만도 무려 4층 건물에 육박할 정도의 괴물이다 보니, 단숨에 창고 한 구석이 꽉 들어차 버린다. “하하, 정말 감사합니다. 당분간 이놈을 연구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흥분이 되는군요.” 이러니 저러니 해도 역시 천생 연구자인지 맹진우는 방금 전의 계약도 잊고 손을 비비며 만족스러움을 표시했다. 하지만 그런 맹진우에게 다시 준상의 말이 이어졌다. “더 있습니다.” “아, 그렇... 네?” 준상은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는 맹진우의 눈앞에 이제껏 인벤토리만 차지하고 있던 각종 보스급 괴물들의 사체를 하나씩 꺼내 놓기 시작했다. “어어...” 마수 보드 리델의 거대한 껍데기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지구상에는 단 한 번도 출현한 적이 없는 갖가지 보스들의 사체가 모습을 드러내자 맹진우는 입만 떡 벌린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이, 이, 이, 이, 이건 도대체!” 달리 용도가 있을까 싶어서 계속 가지고 다니긴 했지만, 달리 이것을 활용할 방도가 없는데다 이미 지구에 사체의 처리가 활성화된 이상 굳이 더 묵혀둘 이유도 없었다. 맹진우는 잠시 넋이 나간 표정으로 산더미처럼 쌓인 괴물 들의 시체를 바라보다가 급히 돌아다니며 일일이 확인하고는 그제서야 뒤늦게 깨달았다. 이래서 20퍼센트를 맞춰달라고 했던 것인가. 어차피 사체의 구입대금은 별도로 치러줘야겠지만, 이렇게 다양하고 특이한 사체들이라면 활용분야는 그야말로 무궁무진하다.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준상은 눈물마저 글썽이며 그의 손을 움켜쥐는 맹진우를 향해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신분을 만드실 때는 특별히 보안에 신경 써 주십시오.” “물론입니다. 당연히 그래야죠. 여부가 있겠습니까. 맡겨만 주십시오.” 당장 자신의 배를 갈라서 쓸개라도 꺼내 줄 듯한 맹진우의 모습에 헤네스는 미소를 지었다. 준상과 헤네스는 곧바로 신분을 만들 때 사용할 사진 몇 장을 찍은 다음 연구소를 빠져 나왔다. 사진을 찍으면서 준상의 모습 때문에 조금 실랑이가 생기긴 했지만 그거야 당장은 어쩔 수 없는 일. “이제 볼일은 다 끝나신 건가요.” “일단은.” “그럼 누리 보러 가요.” “그래.” 둘은 적당한 곳에서 신기루 꽃을 통해 요정계로 돌아왔다. 두 사람이 침실로 들어섰을 때 마침 누리는 젖을 배부르게 먹고 한참 달게 잠이 들어 있는 상태였다. 리체스는 가만히 누리가 잠든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방 안으로 들어서는 준상과 헤네스를 보고는 미소를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오셨어요.” “응. 별 일 없었지.” “물론이죠.” 먼저 준상과 간단하게 인사를 나눈 리체스는 헤네스의 옆구리를 살짝 꼬집으며 물었다. “얼굴에 윤기 도는 것 좀 봐. 나만 빼놓고 데이트해서 좋았니?” “언니도 참.” 둘은 그렇게 장난을 치다가 헤네스가 리체스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언니. 부탁 하나만 해도 되요?” “뭔데?” “언니도 유미 언니 칼 알죠?” 헤네스의 말에 리체스는 무슨 일인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다른 칼은 못 쓰겠다니?” “유품이잖아요. 지금까지 계속 써오기도 했고.” “하긴.” 리체스는 납득이 간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악령의 구슬 같은 것이 더 있으면 제법 훌륭한 걸 만들 수 있겠지만, 당장 쓸 수 있는 재료는 요정의 돌 정도 밖에는 없는데, 그 정도로 괜찮겠어?” “그거야 어쩔 수 없죠 뭐.” 그렇게 둘이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고 있는 동안 준상은 침대에 달라붙어 누리의 자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딱히 재롱을 부리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보고만 있어도 시간 가는줄 모르겠으니 참 이상한 일이다. 리체스는 그 모습을 보고는 헤네스의 귀에 이렇게 속삭였다. “저렇게 좋을까?” “그러게요.” 헤네스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어 보이고는 다시 말했다. “아무래도 오늘은 그른 것 같네요. 기왕이면 생각 난 김에 유미 언니 칼도 해결을 좀 했으면 싶었는데.” 리체스는 그런 헤네스를 향해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에헴, 부럽지?” “아프다고 난리칠 때는 언제고.” “내가 그랬나?” “그랬거든요.” 어쨌거나 헤네스의 말대로 그날은 누리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다음 날이 되어서야 준상은 리체스와 함께 다시 임서윤이 있는 펜션을 찾았다. 차가 건물 앞에 멈추어 서자, 임서윤과 서유미가 얼른 달려나와 준상을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자, 안으로 들어가시죠.” 거실에 자리를 잡고 앉자, 리체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얘들은 어디 갔나요?” 리체스가 언급한 것은 바로 진세아와 정다빈이다. “마침 퀘스트 때문에 잠시 자리를 비웠습니다.” “흐음...” 정말일까. 그녀가 오늘 준상과 함께 온 것은 서유미의 식칼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일신상의 이유로 인해 한동안 돌보지 못한 제자들의 일을 살피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다. 리체스가 의구심 가득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임서윤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어제는 정말 감사했습니다. 소장님께서 거듭 감사의 말을 전해달라고 부탁하시더군요.” “그랬군.” “...” 무미건조한 준상의 대답에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임서윤을 향해 리체스가 다시 말했다. “저기요.” “네. 말씀하십시오.” “혹시 마법 배워보지 않을래요? 소질이 있어 보이는데.” “...” 임서윤은 잠시 굳어 버린 채로 식은땀을 뻘뻘 흘리다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얼른 가서 데려 오도록 하겠습니다.” 리체스는 그런 임서윤의 모습에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어머, 일부러 안 그러셔도 되는데.” “아닙니다. 당연히 제가 할 일인걸요.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임서윤은 그렇게 말하고는 부리나케 거실 밖으로 달려 나갔다. 00303 트롤러 ========================================================================= 임서윤이 부리나케 달려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씩 미소를 짓던 리체스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머뭇거리고 있는 서유미를 향해 말했다. “칼 좀 잠깐 봐요.” “네? 아, 알겠습니다.” 서유미는 흰 천으로 감싼 채 품 안에 넣어두고 있던 식칼을 꺼내어 리체스에게 보여 주었다. 이전에 기안으로부터 처음 싸우는 성녀에 대해 전해들은 직후에도 헤네스가 이 식칼을 좀 더 강화시켜 보다는 얘기를 꺼낸 적이 있었으나, 서유미는 그녀의 호의에 기뻐하면서도 일단 거절했었던 일이 있다. 당시만 해도 지금처럼 무기가 그녀의 역량을 따라 잡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고, 이미 헤네스에게 무한의 연쇄라는 이름을 지닌 투척용 단검까지 빌려 쓰고 여기에 성녀의 수업까지 받게 된 마당에 그런 식으로 계속 도움을 받는 일이 너무 염치 없다 여겨졌기 때문에 마음만 받고 조심스럽게 거절을 했었던 것이다. 서유미가 천을 끌러 안의 내용물을 꺼내 놓자, 리체스는 날개를 움직여 탁자 위로 내려 앉더니 묘하게 예기가 감도는 식칼을 요모조모 살피기 시작했다. “이거 예상 밖인데요.” 잠시 식칼을 살펴 보던 리체스가 턱을 만지작거리며 그렇게 말하자 서유미는 혹시 뭔가 잘못 되었나 싶어 얼른 물어보았다. “뭔가... 문제라도 생긴 건가요?” “일단은요.” “아...” 서유미는 리체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안색이 창백해졌다. 리체스는 그런 서유미의 모습을 바라보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제가 이런 금속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일단 칼 자체의 수명은 거의 다 되었다고 봐도 틀림없을 거에요. 모르긴 해도 조만간 전투 중에 부러지거나 했을 걸요.” “그런.” 퉁명스런 기안의 충고는 괜한 참견이 아니었던 셈이다. 리체스는 울상이 된 서유미의 모습을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 “하지만 일반적인 칼이라면 아무리 잘 만들어진 물품이라도 마수는커녕 괴물들과의 싸움만으로도 부러지거나 칼날이 망가졌을 거에요. 그건 다루는 사람의 실력이 아무리 좋아도 마찬가지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칼이 지금까지 버텨온 건 다른 이유가 있어서에요.” “그게... 뭐죠?” 궁금함을 감추지 못하는 서유미를 향해 리체스는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설명을 시작했다. “일종의 수호령이라고 해야 할지, 정령이라고 해야 할지... 아무튼 그런 것이 붙어 있어요. 어떤 종류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상당히 오래된 영체인 것 같은데... 자세한 것까지는 저도 모르겠지만 그런 것이 이 칼에 머물고 있는 것 같아요.” “아...” 서유미는 손으로 입을 감싼 채 탄성을 터뜨렸다. 리체스는 고개를 돌려 준상에게 말했다. “혹시 지금 요정의 돌 가지고 계세요?” “물론.” “한 세 개만 줘보세요.” “잠시만.” 준상은 캐비닛을 인벤토리에서 꺼내고는 그 안에 넣어두었던 요정의 돌을 몇 개 꺼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리체스는 그것을 받아들고는 다시 서유미에게 말했다. “원래는 상당히 강한 영혼이었던 것 같지만,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서인지 상당히 약해져 있는 상황이에요. 무턱대고 마법을 부여하기 보다는 우선 그 힘을 북돋워줘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그런 것도 가능한가요?”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렇게 묻는 서유미를 향해 리체스는 허리에 양손을 짚고 콧대를 치켜 세우며 대답했다. “에헴! 저에게 불가능이란 없습니다.” “아...” 리체스는 씩 웃으며 서유미에게 물었다. “어때요. 진행해도 괜찮겠어요?” “부, 부탁드립니다.” “후후, 잘 생각하셨어요.” 리체스는 준상으로부터 건네받은 요정의 돌을 식칼 주위에 내려놓고는 무언가 주문 같은 것을 조용히 읊조리기 시작했다. 얼핏 들으면 콧노래같은 기묘한 울림의 목소리가 방안에 메아리처럼 울려퍼지자 이내 식칼이 허공에 둥실 떠올랐고, 곧바로 요정의 돌이 그 뒤를 따랐다. “어디 보자.” 리체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손을 뻗어 허공에 몇 번 휘저었다. 그녀의 손짓이 지나친 궤적은 이내 희미한 빛의 가루와도 같은 형상으로 변해 허공에 아로새겨지는가 싶더니 이내 마법진의 형태를 갖추었다. 허공에 떠올라 천천히 회전하고 있던 식칼과 요정의 돌이 그렇게 만들어진 마법진의 특정 위치로 스스로 찾아 들어가자, 리체스는 그제서야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준상과 서유미에게 말했다. “조금 강한 빛이 나올 수도 있으니 놀라지 마세요.” “...” “네.” 어차피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상황이라 준상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고, 서유미는 두 손을 가슴에 댄 채 긴장된 표정으로 얼른 대답했다. 리체스는 둘의 반응을 보고는 침착한 목소리로 말하며 마법진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럼 시작합니다.” 그녀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마법진이 천천히 회전했고 곧이어 그 안에 자리 잡고 있던 요정의 돌들이 희미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 빛은 점차로 강해지다가 갑자기 카메라 플래시처럼 확 하고 피어올랐다. 서유미는 폭발하듯 터져 나오는 빛에 움찔 놀라며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가 얼른 다시 눈을 떴다. 그러자 어느새 마법진과 요정의 돌은 자취를 감추고 은은한 흰 빛에 감싸인 식칼만 허공에 둥둥 떠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아...” 식칼은 빛을 발하며 허공에 떠있다가 천천히 빛이 사그라 들며 탁자 위로 내려 앉았다. “휴...” 리체스는 과장스런 표정으로 이마의 땀을 닦는 듯한 행동을 취하고는 서유미에게 말했다. “한번 확인해 보세요.” 그 말을 듣고서야 서유미는 화들짝 정신을 차리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리체스와 준상에게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드려요.” 리체스는 조금은 과한 서유미의 반응에 웃으며 다시 말했다. “일단 확인부터 해봐야죠.” “네!” 서유미는 휴대폰을 꺼내 서둘러 아이템 확인을 시도했다. 그러자 이전에는 반응을 보이지 않던 특수 기능이 적용되며 휴대폰에 식칼의 정보가 나타났다. 아이템정보 명칭 : 아랑도 레벨제한 : 없음 종류 : 무기 등급 : Rare 공격력 : 16-20 효과 : 1. 방어 무시 효과 16% 증가 2. 치명타 확률 8% 증가 3. 공격속도 9% 증가 Seed : 없음 설명 : 굵주린 늑대의 영혼이 담겨진 오래된 칼. “...” 서유미는 나타난 정보를 확인한 순간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저 어머니의 유품이라고만 생각했던 식칼이 이런 진귀한 아이템이었을 줄은 미처 예상치 못한 탓이다. “어때요?” 리체스의 말에 서유미는 감격한 표정으로 벌떡 일어나 그녀에게 다시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정말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그러자 리체스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일단 초코바 한 상자부터 받고 시작하죠.” “...” 서유미는 그녀의 대답에 당황한 표정을 짓다가 진세아와 정다빈의 일을 떠올리고는 이내 웃으며 대답했다. “네! 반드시 세계 최고의 초콜릿을 구해 드릴게요!” “아니, 뭐... 그 정도까지야. 헤헤...” 리체스는 그렇게 말하고는 준상에게 다시 말했다. “자, 이제 여보 차례에요.” “...” 서유미는 뭔가 자연스러운 그 분위기에 이끌려 준상에게 시선을 돌리다가 뒤늦게서야 그 말의 의미를 깨닫고는 이내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지금... 방금... 뭐라고...” 자신이 뭔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싶어 되묻는 서유미를 향해 리체스는 준상의 어깨 위로 날아가 자리를 잡아 앉으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아직 얘기 안 했었나요? 저희 둘 결혼했답니다.” “그럴수가...” 서유미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결혼이라니? 이게 갑자기 무슨 소리란 말인가. 게다가, 준상에게는 그 귀엽고 예쁜 헤네스가 있지 않은가. 요정계에서 보여지는 성숙한 리체스의 모습을 알지 못하는 그녀로서는 손바닥만한 작은 요정과 준상이 결혼했다는 말부터가 일단 믿기 어려웠다. “그게... 정말인가요?” “...” 준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다는 듯한 그 모습에 서유미는 크게 충격을 받은 표정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럼 헤네스는...” 그 말에 대답한 것은 리체스였다. “물론 헤네스도 마찬가지죠.” “그런...” 당혹스러워하며 말조차 제대로 잇지 못하는 서유미의 모습에 리체스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래요?” 서유미는 천진한 리체스의 모습을 보자 얼른 표정을 고치고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뇨. 그냥... 좀 놀래서요.” 그렇게 말한 서유미는 심호흡을 하며 일단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물리적으로도 저렇게 작은 요정과 맺어질 수는 없는 일. 결혼이니 뭐니 해봐야 실제로 뭔가 이성간의 이런 저런 일이 이루어지는 건 불가능한 일 아니겠는가. 그렇다. 애초에 결혼이니 뭐니 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되는 일인 것이다. 그렇다면 결론은 단 하나. 서유미는 준상도 헤네스도 그저 귀여운 요정의 투정을 모르는 척 받아주고 있을 뿐이라고 스스로 납득해 버렸다. 하지만 이미 리체스가 아이까지 낳은 상황이란 것을 알았다면 어땠을까. 그녀는 아마 절대 이대로 어물쩡 넘어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그녀는 본디 모 재벌 회장의 서녀. 그런 과거를 가지고 있는데다, 그 때문에 목숨마저 위협 받은 적이 있다 보니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특히 격렬하게 반응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거나 서유미가 마음을 가라앉히고 평상시의 모습으로 돌아오자 리체스는 준상에게 말했다. “여보. 어서요.” “알았어.” 준상은 그렇게 대답하고는 서유미에게 말했다. “그 상태로 만족한다면 상관없지만, 나는 아이템 강화를 통해 그 칼을 더 강하게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 서유미는 그 말을 듣고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템 강화라면 저도 들은 적이 있어요.” “그런가.” “전에 보여주신 적도 있고... 길드원들 가운데도 그 기능을 얻은 사람이 있거든요. 하지만 단계가 높아질수록 성공 확률이 낮아지는 데다, 자칫 잘못하면 중요한 옵션이 사라지거나 아이템이 망가질 수도 있다고 들었는데요.” 아무래도 이제는 레벨이 되다 보니 강화에 대해서도 제법 상세하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준상은 그렇게 말하며 불안한 표정을 짓는 서유미를 향해 조용하게 말했다. “지금부터 하는 말은 비밀이다.” “네?” “만약 이 사실을 다른 누군가에게서 듣게 된다면, 네가 발설했다고 판단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물을 것이다.” 말투는 담담했지만, 서유미는 그 내용을 듣자 절로 긴장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런 식의 부담감에 약한 그녀는 얼른 듣지 않겠다고 말하려 했지만, 준상은 서유미가 대답할 틈조차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 “나는 10단계까지 실패 없이 무조건 강화를 성공시킬 수 있다.” “...” 순간 서유미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10단계라니. +5의 레어 아이템만 되어도 귀환자들 사이에서는 지존급 아이템으로 불리는 것이 현실인데, 이 남자는 지금 +10까지 무조건 성공시킬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그럴수가...” 말조차 제대로 잇지 못하고 놀란 표정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는 서유미를 향해, 준상은 자신이 즐겨 사용하는 사자 가면을 꺼내 보여 주었다. 서유미는 혹시나 하는 표정으로 휴대폰을 꺼내 사자 가면의 정보를 확인해 보았다. 아이템정보 명칭 : 피 끓는 사자의 가면 +10 레벨제한 : 10 종류 : 가면 등급 : Rare 효과 : 1.공격 속도 26% 증가 2.체력 증가 35% 3.초감각 3레벨 상승 Seed : 3슬롯 (생명력 흡수 12%, 생명력 흡수 12%, 생명력 흡수 12%) 설명 : 젊은 사자의 영혼이 담긴 강력한 마법의 가면. “...” 아이템 이름 뒤에 붙어 있는 +10의 표시와 함께 효과에 기재되어 있는 무지막지한 옵선의 내용을 보고 서유미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래도 믿지 못하겠다면, 다른 아이템을 더 보여줄 수도 있다.” 서유미는 얼른 손을 내저으며 대답했다. “아뇨! 믿을게요. 믿고 말고요.” 그녀는 그제서야 자신보다 레벨이 낮은 준상이 어째서 그렇게 터무니 없이 강한지 이해할 수 있었다. 레벨이 아무리 높으면 뭐하나. 자신은 거의 다 망가져서 효과도 제대로 발휘되지 않는 칼 하나로 여태껏 싸우고 있었는데, 준상은 이런 말도 안되는 아이템을 온 몸에 두른 채 전투에 임하고 있으니 전투력에 차이가 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그것 외에도 영웅 카드를 몇 장씩이나 가지고 있는데다 레어시드도 열 개 넘는 수량을 장착하고 있다는 차이까지 있었지만, 그녀는 미처 거기까지는 알지 못했다. 준상은 사자 가면을 조심스럽게 돌려주고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느라 애쓰는 서유미를 향해 다시 말했다. “이제 네 차례다.” “네?” “나와 리체스가 지닌 능력의 댓가로 너는 무엇을 내놓을 수 있는가.” “...” 서유미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리체스는 그냥 웃으며 초코바 정도의 보상만 얘기하고 말았지만, 실질적인 결정권을 지닌 것은 다름아닌 준상이었다. 지금까지 아이템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이 사실. 하지만 준상이 지닌 힘의 일면을 본 이상 그녀 역시 욕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잠시 생각하던 그녀는 이내 인벤토리에서 캐비닛을 꺼내더니 그 안에서 서류를 하나 가득 꺼내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집은 물론이고 통장과 지금까지 잡은 모든 마수들의 사체에 대한 계약서도 모두 포함되어 있어요. 제가 지금 지닌 재산의 전부에요.” “...” 그녀의 말에는 한 치의 거짓말도 없었다. 하지만 준상은 일고의 여지조차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이런 건 필요 없다.” 서유미는 그 말을 듣고 막막해질 수밖에 없었다. +10으로 강화된 레어 아이템의 가치는 현재로서는 계산조차 힘든 것이 사실. 그래서 지닌 바 재산을 모두 내놓은 것이지만, 준상은 자세한 내용은 확인도 하지 않은 상태로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처음부터 달리 원하는 것이 있다는 뜻. 서유미는 조심스럽게 준상을 향해 물었다. “혹시... 따로 원하는 것이 있으신가요.” 그 말에 준상은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서유미는 긴장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심호흡을 크게 하고는 다시 물었다. “저에게 무엇을 원하시는 거죠?” 준상은 그 질문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서유미를 가리키며 말했다. “네 미래다.” “...” “내가 네게서 원하는 것은 그것 하나 뿐이다.” 00304 트롤러 ========================================================================= 서유미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자신의 미래를 달라니? 하지만 미처 그녀가 뭔가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준상의 어깨 위에 앉아 있던 리체스가 그의 귀를 잡아 당기며 외쳤다. “여보!” “응?” “지금 그 발언의 의미, 자세히 설명해 주실 수 있겠어요?” “...” 파르르 떨리는 반투명한 날개 뒤로 불길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듯한 그 모습에 준상은 흠칫 놀랐지만 태연을 가장하며 대답했다. “미래를 원한다고 한 것?” “그래요.” “그 말대로다.” 담담하기까지한 준상의 모습에 리체스는 가늘게 눈을 뜨고 다시 물었다. “그러니까, 그렇게 추상적인 표현 말고, 직접적이고 자세하며 구체적인 표현을 사용해 설명해 달란 말이에요.” “그거야 어렵지 않지.” 준상은 다시 서유미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나는 조만간 어떤 일을 하려고 생각중이다.” “무슨...” “그것에 대해서는 나중에 설명할 일이 있을 것이다. 다만 현재 네가 진행하고 있는 퀘스트나 마수 사냥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위험한 일이다.” “네?” 서유미는 준상의 진지한 표정에 정신없이 달아오르던 얼굴의 열기가 싸늘하게 식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아직까지도 준상의 귀를 잡아 당기고 있던 리체스 역시 마찬가지. “솔직한 심정으로, 성공 여부를 장담할 수 없는 이런 모험 따위 하고 싶은 생각이 없지만, 한동안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이대로 가만히 미래를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여보.” 리체스는 준상에게 뭔가를 말하려 했지만 그는 손을 들어 그녀의 말을 막으며 다시 말했다. “어차피 해야 한다면, 성공할 확률을 높이기 위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만 한다. 하지만, 솔직한 심정으로 지금까지 다른 귀환자들은 발목을 잡는 짐이라면 모를까 도움이 될만한 존재라고 보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었다.” “음...” 서유미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준상의 압도적인 강함을 고려하면, 어지간한 귀환자들로서는 괜히 나서봐야 발목이나 잡지 않으면 다행이다. 비공식 세계 최고 레벨인 자신조차도 그와 비교하면 아직 한참 멀었다는 기분 밖에 들지 않는데, 다른 사람들이야 오죽하겠는가. 적어도 스승인 기안이나 지금 준상의 어깨 위에서 조금 슬픈 표정으로 그의 옆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리체스 정도 수준은 되어야 최소한 발목 잡는다는 얘기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제 미래를 원하신다는 건가요?” 서유미의 말에 준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아직은 계획 단계이긴 하지만, 만약 그 날이 왔을 때 네가 그에 합당한 능력을 가진 채 운명을 함께 할 수 있는 동료로 참가해 주길 나는 바라고 있다.” “...” 준상이 계획하고 있는 것은, 바로 시스템의 본체를 직접 타격하는 것. 물론 시스템이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 지금으로서는 알 도리가 없지만 충분한 능력만 갖추어진다면 찾아가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이 불러 올리는 것이지만 말이다. 방법 자체는 간단하다. 머리 속에 존재하는 시드가 준상의 죽음을 인지하도록 속이는 것, 그것 뿐이다. 이 상태에서 정령의 흐름을 통제해서 시드의 파동을 풀어 놓으면, 시스템은 시드로부터 전해지는 정보를 통해 준상이 사망했음을 인지할 테고, 그와 동시에 머리 속의 시드를 회수하기 위해 그를 시스템이 존재하는 곳으로 불러들일 것이다. 하지만 이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우선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 먼저, 시드가 준상의 죽음을 인지하도록 속이는 것이 가장 첫 번째 조건이다. 아직 리체스에게 이 계획에 대해 말하지는 않았지만, 인터페이스의 해석이 완료되면 이것 역시 어렵지 않게 해결이 될 문제이다. 진짜 문제는 바로 두 번째부터이다. 과연 사망시 이루어지는 전송이 퀘스트의 그것과 동일한가 하는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무턱대고 시드를 속여 전송이 이루어졌는데, 여타 다른 과정없이 바로 육체가 분해되고 시드만 달랑 추출되는 식이라면 자살행위 밖에 되지 않는다. 물론 이것 역시 당장은 해결하기 힘든 문제 중 하나이지만, 헤네스의 고향에서 지구로 메신저를 통한 연락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점을 감안하면, 시드의 파동에 대한 연구가 진전을 이룰 경우 이 또한 해결이 가능하다. 귀환자의 사체에 시드의 파동을 응용한 일종의 스파이웨어를 심어 사체의 처리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확인하는 방법이 바로 그것이다. 물론 이것은 시스템 측에 의해 감지될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에 가급적 작전 실행 전에 확인을 해야만 한다. 하지만 이 앞서의 조건이 모두 달성되더라도 여전히 문제가 남는다. 시스템이 있는 곳으로 전송되었는데, 그곳에 있는 존재들이 월등히 강하다면 이것 역시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앞서의 조건들처럼 미리 확인할 수 있는 방법조차 없다. 결국 직접 돌입하여 맞닥뜨리는 수밖에 없는데, 정령의 문이나 신기루 꽃과 같은 회피 수단이 있다고는 해도 단번에 성공하지 못하면 바보가 아닌 이상 시스템 측에서 바로 추격을 시작할 것은 따로 생각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즉, 두 번의 기회는 없다 생각하고 실행할 수 밖에 없다는 뜻이고, 이러한 상황에서 성공률을 높이기 위해서는 준상 외에도 그를 도울 강력한 동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서유미는 준상의 계획에서 가장 먼저 포섭해야할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녀는 비공식이기는 하지만 세계 최고 레벨을 달성하고 있는 장본인일 뿐만 아니라, 기안을 통해 싸우는 성녀의 능력을 개화시켜 머리 속의 시드가 무력화된 상태에서도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귀환자 가운데 하나이다. 아직 준상에 비해 능력이 떨어지기는 하지만, 전투 감각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지니고 있는 아이템이나 카드, 시드 등의 질이 떨어지는 것이니 조금만 신경을 써주면 월등한 수준의 전력 향상 또한 기대할 수 있다. 임서윤과 윤성렬에게 머리 속의 시드에 대해 얘기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위기감을 갖도록 만들어 귀환자들을 결집시키는 원동력으로 삼고자 한 것일뿐, 실질적으로 이러한 구체적인 계획에 대해서는 아직 리체스나 헤네스에게도 말한 적이 없었다. 서유미는 빵모자를 쓰고 동그란 선그라스를 낀 준상의 얼굴을 서늘한 표정으로 말없이 바라보다가 이렇게 물었다. “그것은... 모두를 위한 일인가요.” 그 말에 준상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 “우리들을 위한 일이다.” 그녀는 모두를 위한다는 식의 말을 믿지 않는다. 모두를 위한다는 말은, 자신을 위해 희생하라는 말을 거창하게 부풀려 말하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웃기는 얘기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어머니를 안을 때도 그런 말을 했었다. 이것은 모두를 위하는 일이라고. 서유미는 자신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생각해보면 자신도 어머니와 그리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기 때문이다. 모두든 우리든 결과적으로 준상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그녀의 미래를 사들이려 하고 있다. 차이라면 모두보다는 우리 쪽이 더 피부에 와닿는 정도. 그런데도 고작 단어 하나 바뀐 그 말에 이끌리고 가슴이 설레이는 것은 자신이 어머니의 나쁜 피를 이은 탓이리라. 서유미는 자조 섞인 표정으로 손에 들린 식칼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자세한 얘기를 해주세요.” 준상은 길게 기른 머리카락 안에서 서늘하게 빛나는 그녀의 눈동자를 가만히 직시하고는, 천천히 설명을 시작했다. 귀환자들의 머리 속에 담겨져 있는 시드와, 그것을 통해 파악한 시스템의 목적 등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들은 서유미는 손톱을 깨물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보통 일은 아닐거라 생각했지만, 이런 터무니없는 상황이라니. 그녀는 자신의 머리 속에도 다른 괴물들과 마찬가지로 시드가 박혀 있다는 얘기에 다시금 자조할 수밖에 없었다. 하긴 이제 와서 괴물 취급을 당한다고 해도 그다지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말이다. 잠시 동안 기나긴 상념에 잡혀 있던 그녀는 이내 긴 탄식과 함께 생각을 멈추고는 준상과 리체스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이런 저라도 도움이 된다면, 힘을 보태고 싶어요.” 그 말에 리체스는 기쁜 표정을 지으며 그녀에게로 날아오더니, 이마에 입을 맞추어 주었다. “...” 서유미는 갑작스럽게 날아와 이마에 입을 맞추는 리체스의 행동에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휴대폰에서 알림음이 들려오자 화들짝 놀라 메시지를 확인했다. ‘요정여왕의 키스’가 각인되었습니다. :요정여왕의 호의가 담긴 키스가 당신에게 행운을 부여합니다. 이것은 일종의 각인이므로 절대 지워지지 않습니다. 요정여왕이 만년간 아껴둔 키스의 힘은 다른 요정들보다 월등히 강력한 효과를 지니고 있습니다. “만년? 게다가 요정 여왕?” 리체스는 허리에 손을 척 얹은 채로 우쭐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일단은 현직에서 물러나 있는 상황이긴 하지만요.” 하기야 그녀 정도의 실력을 가진 요정들이 수두룩하다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일 것 같다. “여왕님이셨어요?” “헤네스가 이전엔 그렇게 불렀을 텐데요.” “그거야... 그냥 별명 같은 건가 싶었죠.” “하긴, 틀린 말은 아니네요.” 리체스는 어깨를 으쓱해 보인 다음 미소를 지으며 다시 말했다. “아무튼 이건 아무한테나 해주는 키스가 아니에요. 여보랑 헤네스 외에는 당신이 처음이니까 충분히 자랑스러워 해도 좋아요.” 서유미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리체스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준상이 서유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거, 이리 줘봐.” “네?” “식칼.” “아, 여기요.” 준상은 식칼을 받아들더니 이내 캐비닛을 꺼내 시드가 가득 든 자루를 꺼내 놓고 강화를 시작했다. 속성 보호 기능과 아이템 강화 기능을 함께 실행한 준상은 순식간에 서유미의 식칼을 +10으로 강화시켰다. “끝났다.” “벌써요?” 뭔가 순식간에 시드들이 사라진다 싶더니 벌써 끝나 버렸다는 말에 서유미는 다시 얼이 빠졌다. 번갯불에 콩을 볶아 먹어도 이것보다는 시간이 더 걸릴 것 같은 느낌. 애초에 실패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으리라는 절대적인 확신이 없으면 불가능한 손놀림이다. “확인해 보도록.” “감사합니다.” 서유미는 얼른 감사의 뜻을 표한 다음 아이템 확인을 실행해 보았다. 아이템정보 명칭 : 아랑도 +10 레벨제한 : 없음 종류 : 무기 등급 : Rare 공격력 : 29-42 효과 : 1. 방어 무시 효과 32% 증가 2. 치명타 확률 19% 증가 3. 공격속도 21% 증가 Seed : 없음 설명 : 굵주린 늑대의 영혼이 담겨진 오래된 칼. 시드 슬롯이 없는 것이 단점이기는 하지만, 레벨 제한이 없다는 점을 생각하면 감히 가격을 환산하는 것조차 어려울 정도의 엄청난 무기로 진화한 셈이다. 단순한 무기 공격력 만으로도 랑다잘의 족쇄가 강화하기 이전과 최대 공격력이 비등한 수준이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더군다나 특유의 방어 무시 효과가 무려 두 배나 증가한 이상, 강력한 방어력을 자랑하는 마수들의 상대로 엄청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거듭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리체스가 다시 말했다. “시간 내서 요정계에 한번 들려요. 여기서는 힘들지만 그곳에서라면 방어복도 손을 봐줄 수 있을 거에요.” “방어복이요?” 무슨 소린가 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서유미를 보고 리체스는 살짝 웃더니 준상을 돌아보며 말했다. “여보. 한번 보여 주세요.” “그러지.” 준상은 곧바로 손목에 차고 있던 팔찌를 작동시켰고, 그와 동시에 그의 몸이 검은 방어복으로 뒤덮였다. “이건...” 준상이 다시 원래대로 모습을 되돌리자 리체스가 다시 한 번 잘난 척을 하며 말했다. “어때요? 제 솜씨가.” “정말... 정말 대단해요! 어쩜 이럴 수가.” 이 정도라면 그야말로 변신 히어로나 마법 소녀가 부럽지 않을 정도다. “에헴! 제가 원래 좀 대단해요. 헤헤...” 그렇게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문득 거실의 문을 누군가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네.” 서유미가 얼른 대답하자, 조심스럽게 문이 열리며 진세아와 정다빈이 슬금슬금 안으로 들어왔다. “오셨... 어요?” “오랜 만이에요. 스승님.” 서유미에게 한껏 잘난 척을 하고 있던 리체스는 그 두 제자의 모습을 보자 이내 으르렁거리며 소리쳤다. “너희들. 연습은 제대로 했겠지?” “그게...” 진세아와 정다빈은 울상이 되었다. 솔직히 리체스만큼 마법이 강해진다면 조금 창피한 정도야 뭐가 대수겠는가. 하지만 불행히도 그녀들의 마법 수련은 처음 배웠을 때 이후로 손톱의 때 만큼의 진전도 보이지 못하고 있었다. 정말 땅 파고 들어가서 그대로 드러눕고 싶을 정도로 창피한데, 진전마저 전혀 없으니 그녀들이 슬금슬금 리체스를 피하는 것도 무리는 아닌 것이다. “노력이 부족해. 노력이! 그래서야 언제 제대로 마법을 쓸 수 있겠어?” “죄송합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수련법에 역시 문제가 있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지만, 전에 괜히 그런 말을 했다가 삼일 내내 강제로 주문의 영창을 있는 힘껏 실행해야만 했던 아픈 기억이 떠올라 그녀들은 그저 꾹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00305 트롤러 ========================================================================= 리체스가 이렇게 화가 난 건 방금 전까지 대화를 나누었던 서유미와 이들의 성취가 너무 비교가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마주쳤다 하면 투닥거리기 일쑤인 기안이 가르친 서유미는 저렇게 훌륭하게 힘을 키워 준상의 스카웃을 받을 정도가 되었는데, 자신의 제자들은 아직 변변하게 마법 하나 제대로 완성하지 못하고 있으니, 그녀로서도 속이 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결국 리체스는 다시 기본부터 시작하자며 정다빈과 진세아를 끌고 나갔고, 그녀들이 거실에서 사라지자 그제서야 임서윤이 눈치를 살피며 안으로 들어왔다. “하하... 몸집은 작으신데, 그야말로 폭풍 같군요.” “...” 그가 준상에게 뭔가 전할 말이 있음을 알아차린 서유미는 준상에게 다시 한 번 감사의 뜻을 표한 다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유미가 나가며 문을 닫자 임서윤은 그제서야 생각 났다는 듯이 거실 옆에 딸린 작은 주방에서 직접 차를 끓이며 입을 열었다. “실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 준상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서윤은 찻잔과 커피포트를 가져와 탁자에 늘어 놓으며 말을 이었다. “요전에 유미 양을 도왔던 일이 미국에 알려진 모양입니다.” 그거야 별로 이상한 일도 아니다. 티비에 그렇게까지 생생하게 보도가 되었는데, 못 알아차리면 그게 더 이상한 일 아니겠는가. 때문에 준상은 공연히 말을 늘이는 임서윤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본론만.” 임서윤은 쓴웃음과 함께 찻잔에 물을 부으며 말을 이었다. “딜런 중위를 아십니까? 준상님과의 연락을 담당했었다고 하던데.” 준상이 알던 딜런이라는 인물은 중위가 아닌 소위였지만, 그가 정령계로 가 있었던 일년이라는 시간을 감안하면 그 기간 동안 진급이 이루어졌어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가 왜?” 준상이 그렇게 묻자 임서윤은 바로 대답했다. “메신저를 통한 연락이 불가능해지자 저에게 접근을 하더군요.” “그랬군.” “뭔가 급한 용무가 있는 모양이더군요. 일단, 여기 딜런 중위의 연락처입니다.” 찻잔에서 맑은 향기가 흘러나오자 준상은 천천히 그것을 손으로 집어 뜨거운 차를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삼키며 말했다. “짐작 가는 바가 있나?” 준상의 말에 임서윤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탁자 밑에 놓여있던 노트북을 꺼내어 켜고는 곧이어 리모컨을 눌러 벽에 걸린 티비 화면을 통해 노트북의 화면을 보여주었다. “2개월 전 오대호 가운데 하나인 수피리어 호 북부에 위치한 캐나다의 루비 레이크 주립공원에 마수가 하나 출현했습니다. 미국과 캐나다는 이 마수를 공원 최북단의 이반 호수에 몰아넣는데 성공했지만, 그것을 처리했다는 보고는 아직 들려오지 않고 있습니다. 이 마수가 자칫 오대호 영역으로 진입하기라도 하는 날에는 인근 240여개의 도시에 대한 용수 공급이 제한될 뿐만 아니라, 오대호 인근의 산업 시설에도 큰 피해를 입게 됩니다. 제 생각에는 아무래도 이 마수의 처리를 맡기려는 것이 아닌가 싶군요.” 화면에 나타난 지도를 가만히 바라보던 준상은 다시 물었다. “마수에 대한 상세한 정보는 없나?” 임서윤은 바로 대답했다. “네. 아무래도 두 나라 정부가 철저하게 정보를 통제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군.” 준상은 임서윤과 잠시 차를 마시며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펜션에서 나오자 진세아와 정다빈이 만사 체념한 표정으로 손을 든 채 무릎을 꿇고 벌을 서는 모습과 함께 리체스가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그들의 머리 주위를 빙빙 돌며 무언가 골똘하게 생각에 잡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리체스.” 하지만 준상이 조용히 이름을 부르자 리체스는 화들짝 놀라며 얼른 그의 어깨 위로 날아들었다. “얘기는 다 끝나셨어요?” “그래.” 준상은 일단 리체스의 물음에 답하고는 우울한 표정으로 손을 들고 있는 진세아와 정다빈을 바라보며 물었다. “잘 안 되나봐?” “네, 뭐...” 리체스는 한숨을 푸욱 내쉬고는 두 제자에게 눈짓을 해 팔을 내리도록 했다. “강아지를 데려다 가르쳐도 이 정도면 뭔가 반응이 와야 하는데, 그렇지를 못하니 뭔가 이상하다 싶어서 고민하던 중이었어요.” “그랬군.” 준상은 지친 표정으로 자신들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물러가는 그녀들의 모습에 살짝 고개를 끄덕여 답을 하고는 픽업 트럭의 문을 열다가 마중을 나온 서유미를 바라보며 말했다. “조만간 미국에 갈 일이 있을 듯 한데, 함께 가지 않겠나?” 그 말에 당사자인 서유미보다도 임서윤이 더 크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미국 말입니까?” 임서윤의 말에 준상은 그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되물었다. “왜? 가고 싶나?” “아니, 뭐... 그야...” 가고 싶지 않다면 그게 이상한 일이긴 하다. 원래 좀 사는 집 자식이다 보니 나름 해외 여행도 제법 다녔었는데, 귀환자가 된 이후로는 거의 반 강제로 국내에 발이 묶여 버린 탓이다. 국내가 뭔가. 대기 시간이 없을 때는 화장실 가는 것조차도 긴장의 연속이었고, 대기 시간이 생긴 후로도 비행기나 선박 같은 대형 운송 수단을 사용하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다. 하지만 준상은 임서윤이 머뭇거리며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자 더 들을 생각이 없다는 듯이 그대로 서유미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차에 올라타고 말았다. “...” 그거 참. 사람이 말을 걸었으면 대답이라도 끝까지 듣던가. 임서윤은 즉시 승낙하지 않은 자신을 탓하며 아쉬움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물론 준상이 미국에 놀러가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아쉬운 건 아쉬운 일이다. 시내에 들렀다가 적당한 곳에서 신기루 꽃을 통해 요정계로 귀환한 준상은 가장 먼저 누리부터 찾았다. “누리야. 아빠 왔다!” “바아!” 다행히 이번에는 누리가 잠들지 않고 깨어 있는 상태였다. “우리 예쁜 누리. 잘 놀고 있었어!” “아우아우으!” “오오, 그랬구나. 하하. 자, 봐라. 아빠가 뭘 사왔는지.” 준상은 방금 전까지 임서윤과 서유미 앞에서 무게 잡던 바로 그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의 딸바보로 변신하여 새로 사온 갖가지 모양과 색깔의 딸랑이를 번갈아 누리 앞에서 흔들어 보이느라 정신이 없었다. “못 말려. 정말.” 리체스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자, 때마침 어딘가를 다녀오던 헤네스가 방으로 들어섰다. “어? 벌써 오셨어요? 모처럼인데 좀 쉬다 오시지.” 헤네스의 말에 리체스는 한숨을 푸욱 내쉬며 대답했다. “그러자고 하고 싶어도 얘기가 끝나자마자 일단 장난감부터 사러 가는 모습을 보니 말이 안 나오더라.” “그랬나요.” 그때 준상은 허리띠에 이상한 방울을 주렁주렁 달고는 그것을 흔들어 보이기 시작했다. “볼래? 이게 바로 허리띠 딸랑이라는 거다. 어때? 재밌지?” 그 모습에 누리는 재미있다는 듯이 크게 웃었다. “꺄하!” 그러자 준상은 자신을 바라보며 난감해 하는 헤네스와 리체스를 향해 외쳤다. “방금 들었어? 누리가 웃었다고!” “네. 들었어요.” 헤네스는 웃으며 대답해 주었지만, 리체스는 아이처럼 들뜬 준상의 모습에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하여튼 못 말린다니까.” 그렇게 누리가 깨어 있을 때는 함께 놀아주고, 잠들면 정령계의 수련을 이어가던 준상은 어느 정도 새로 얻은 두 대정령의 힘을 소화했다고 여겨질 즈음이 되어서야 요정계를 빠져 나와 휴대폰으로 임서윤에게 연락을 취했다. “네, 말씀하십시오.” “딜런에게 조만간 미국에 간다고 전하도록. 만나는 장소는 대충 알아서 정하도록 하고.” 준상의 말에 임서윤은 바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이전에 말씀하신대로 유미씨와 함께 가실 겁니까?” “그래. 퀘스트 중은 아니겠지?” “물론입니다. 유미씨에게도 바로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연락을 마친 준상은 랩터를 몰고 다시 임서윤의 길드가 있는 펜션으로 향했다. 그러자 미리 나와서 대기하고 있던 임서윤과 서유미가 그를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준상은 차에서 내리지 않은 채 차창 너머로 임서윤에게 물었다. “연락은 취했나?” “네. 링컨 기념관의 석상 앞에서 기다리겠답니다.” 링컨 기념관은 백악관과 펜타곤의 중간 쯤에 위치한 곳으로서, 유명한 링컨의 좌상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수고했다.” “별말씀을.” 준상은 임서윤 옆에서 조금 긴장된 표정으로 두 손을 모은 채 서 있는 서유미를 바라보며 말했다. “타라.” “네.” 서유미가 쭈뼛거리며 옆좌석의 문을 열고 자리를 잡자, 준상은 임서윤에게 손을 들어보이고는 바로 펜션을 빠져 나왔다. 픽업 트럭 특유의 육중한 차체가 길을 따라 달려가기 시작하자, 서유미는 긴장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평소라면 그의 주위를 항상 그림자처럼 따르던 헤네스나 리체스의 모습도 오늘따라 보이지 않는 상황. 아무래도 함께 있으면 위압감을 느끼는 건 비공식 최고 레벨이 된 지금도 마찬가지라 그녀는 자신의 긴장한 표정을 감추기 위해서라도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려야만 했다. 허나, 나름대로는 어색한 분위기를 피하기 위한 고개를 돌리자 차창에 준상의 모습이 그대로 비쳐 보였다. 빵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동그란 선그라스를 쓴 채 한팔을 차창에 기댄 모습으로 차를 모는 준상의 모습은 의외로 제법 그림이 되는 터라 서유미는 자신도 모르게 잠시 홀린 듯이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차를 달렸을까. 문득 차가 서서히 속도를 줄이는가 싶더니 그대로 멈추어 섰다. 조금 멍한 표정으로 차창에 비친 그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서유미는 차가 멈추고 나서야 주위를 둘러보았다. “...” 인적이 드문 으슥한 숲길. 범죄 다큐멘터리에서 긴박한 배경음악과 함께 나타나면 딱 어울릴 듯한 주위 풍경을 보자 서유미는 자신도 모르게 흠칫 놀라고 말았다. 하지만 준상은 긴장한 서유미의 표정을 본 척 만 척 하며 그대로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더니 그녀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내려라.” “...” 순간 서유미는 갈등했다. 도대체 이 남자가 무슨 의도로 이런 으슥한 숲길로 자신을 데려온 것일까. 긴장한 표정으로 가슴 어림에 품고 있는 식칼의 손잡이를 쥐며 바라보았지만, 준상은 다시 한번 그녀에게 재촉했다. “안 갈건가?” “...” 가다니? 어딜? 뭘 하려는 건지 설명을 해줘야 할 것 아닌가. “미국으로... 가는 것이 아니었나요?” “...” 준상은 그녀의 표정과 목소리에 어린 긴장과 두려움을 그제서야 깨닫고는 혀를 차며 대답했다. “뭔가 단단히 착각을 한 모양이군.” “...” 서유미는 그런 준상의 모습에 울컥했지만, 긴장을 풀지 않은 채 식칼의 손잡이를 잡고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경계심 가득한 그 모습에 준상은 피식 웃더니, 이내 한 손을 펼쳐 허공을 가리켰다.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 고풍스런 느낌으로 만들어진 석문 하나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네 말대로. 우리는 미국으로 갈 것이다.” “...” 서유미는 갑자기 모습을 나타낸 석문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뒤늦게서야 정신을 차리고는 허겁지겁 차에서 내렸다. 물론 그 와중에도 가슴에 품은 식칼의 손잡이로부터 손을 떼지 않고 있었다. 준상은 그녀의 모습에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일단 랩터를 인벤토리에 집어 넣은 다음, 앞장 서서 석문 안으로 들어섰다. “...” 서유미는 준상이 석문 안으로 모습을 감추자 조심스럽게 그 뒤를 따라 발을 옮겼다. 기묘하게 물결 치는 석문의 건너편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그녀는 이내 익숙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어서 오세요. 유미 언니.” “...” 흰 블라우스와 날씬해 보이는 검은 바지를 갖춰 입은 헤네스가 그녀를 향해 웃으며 말을 걸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얼른 다가와 유미의 손을 잡아 끌며 말했다. “잘 모르시겠지만, 지구 분들 가운데 여기 신기루 꽃을 방문하신 건 유미 언니가 처음이에요. 잘 오셨어요.” “신기루 꽃?” “이 공간의 이름이에요. 외양이 꽃을 닮아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는데, 남들 눈에는 거의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없으니 좀 의아하실 수도 있겠네요.” 헤네스는 높게 솟아오른 기묘한 공간의 모습에 어리둥절해 있는 유미의 손을 잡아 끌고는 준상이 기다리고 있는 석문으로 데리고 갔다. “나중에 이곳에 대해서도 안내해 드릴 기회가 있을거에요.” “네...” “자, 가요.” 이번에도 준상이 먼저 석문을 통과하자, 헤네스는 서유미의 손을 잡아 끌며 그 뒤를 따랐다. 서유미는 석문을 통과하자 새롭게 모습을 드러낸 기묘한 공간의 모습에 다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자신을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보이는 아름답고 성숙한 여인의 모습에 혼이 빠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어서와요. 유미씨.” “아, 안녕하세요.” 서유미는 멍한 표정을 지은 채 거의 반사적으로 인사를 했다. 그 모습에 헤네스는 웃으며 말했다. “역시 못 알아보는 것 같네요. 언니. 제가 이겼어요.” “쳇. 이건 정말 말도 안돼.” 아름다운 여인은 입을 삐죽거리며 투덜거렸고, 헤네스는 여전히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서유미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정말 모르시겠어요?” “무슨...” 여전히 감을 잡지 못하는 서유미를 향해, 헤네스는 웃으며 다시 말했다. “리체스 언니에요.” “리체스님?” 서유미는 다시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 그게 정말이에요?” “물론이죠.” “하지만 리체스님은... 조그마한 요정일텐데...” “이곳 요정계 외의 장소에서는 제한을 받기 때문에 그런 작은 모습이 되는 거에요. 이게 리체스 언니의 본 모습이죠.” “아...” 서유미는 놀란 표정으로 다시 리체스를 바라보았다. 언제나 진세아와 정다빈을 골탕 먹이던 그 장난꾸러기 요정의 진짜 모습이 이렇게 아름답고 성숙한 여인이었을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입만 떡 벌린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서유미를 향해 리체스는 푸근하게 웃으며 다시 한 번 자신의 소개를 했다. “맞아요. 제가 리체스에요. 요정계에 오신 걸 환영해요. 서유미씨.” 00306 트롤러 ========================================================================= 어쩐지 기억 속의 어머니가 떠오르는 그 푸근한 모습에 서유미는 우왕좌왕하다가 얼른 직각으로 허리를 굽히며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그러니까... 잘 부탁드립니다.” 리체스와 헤네스는 그 모습을 보고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서유미는 그녀들의 웃음소리를 듣고는 다시 어쩔 줄을 몰라했지만, 처음의 혼란스러움이 가시자 일전에 리체스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당시 리체스는 분명 준상과 자신이 결혼했다는 말을 했었고, 준상도 그 말에 동의했다. 그때는 준상과 헤네스가 그저 작은 요정의 말에 장단을 맞추어 주는 것이라고만 생각했지만, 상황이 이렇다면 그 얘기 또한 그저 장단을 맞추어 주는 수준이 아니게 되어 버린다. “...” 이걸 물어봐야 하나. 아니면 그냥 모르는 척 넘어가야 하나. 한국인인 그녀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들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상식을 무작정 밀어붙일 수만도 없는 일 뭐라해도 헤네스는 아예 다른 세계의 사람이고, 리체스는 아예 종족마저 다르기 때문이다. 지구조차 아직 일부다처의 풍습이 남아 있는 민족과 국가가 있는데, 자신과 다르다고 무작정 매도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하지만 서유미는 아무래도 그냥 그렇게 이해하고 넘어갈 수가 없었다. 뭐라해도 그녀의 출신 자체가 현대 한국에서 금기시 되는 서녀이기 때문이다. “가요. 소개해 줄 사람이 있어요.” 이런 저런 생각 때문에 머리 속이 뒤죽박죽되어 버린 서유미였지만, 헤네스는 그런 그녀의 팔을 이끌고 어디론가 데려가기 시작했다. 결국 어어 하는 사이에 서유미는 화려하게 치장된 침실로 안내되었고, 그곳에서 딸랑이를 흔들며 아이를 어르고 있는 준상을 발견했다. “어딨지?” “무우?” “여깄다!” “바아!” “앗, 어디 갔지?” “부우?” “여기 있네!” “꺄하!” 어느 틈엔가 선글라스를 벗은 준상이 빵모자만을 뒤집어 쓴 채 큼지막한 손바닥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가 다시 보여주는 식으로 아기와 놀아주고 있었다. 서유미는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지금까지 인간은커녕 피와 살이 차가운 금속으로 되어 있지 않나 싶을 정도의 차가운 일면만을 보여주었던 준상의 이미지와 눈앞의 현실이 10중 추돌사고를 일으키는 듯한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갑작스럽게 덮쳐온 이 심리적 충격에 그대로 얼어붙어 말도 제대로 못하고 어버버거리고 있는 서유미에게 헤네스는 자랑스러워 하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누리에요. 준상씨와 리체스 언니의 아이죠. 이제 3개월이 되어 가고 있어요.” “...”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설마 싶기는 했지만, 헤네스도 아니고 리체스의 아이라고? 그러고 보니 준상의 행방이 묘연했던 지난 일년간, 헤네스는 서윤과의 거래나 자신의 수련을 위해 간간히 모습을 드러냈었지만, 리체스는 어느 순간부터인가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워낙 장난스러운 요정의 이미지가 있는지라 그냥 흥미가 떨어져서 그런 건가 싶었는데, 이런 이유가 있었을 줄이야! 게다가, 자신이 아닌 다른 여자와의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났는데 이렇게 행복하게 웃을 수 있다니. 서유미는 이제 혼란을 넘어 패닉 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여보. 약속 있으시다고 했잖아요.” “하지만.” 리체스의 말에 준상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투덜거리더니 이내 한숨을 내쉬고는 누리의 뺨에 살짝 입을 맞추어 주었다. “누리야. 아빠 다녀 올게?” “아바바아!” “으으으...” 준상은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지 울상을 짓고 있다가 리체스에게 등이 떠밀리고 나서야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침실을 빠져 나갔다. “...” 서유미는 그 모습에 잠시 현실도피를 하다가 얼른 고개를 저으며 헤네스에게 물었다. “저 사람이... 정말 그 박준상씨 맞나요?” 진지하기까지 한 서유미의 말에 헤네스와 리체스는 서로를 바라보며 웃음을 지었다. “저희도 좀 놀랐어요. 아무리 그래도 저렇게까지 아이를 좋아할 줄은 미처 몰랐거든요.” 헤네스의 말에 뒤이어 리체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예상할 수 없는 일면이 하나씩 있다던데, 준상씨에게는 아기가 그런 부분을 자극하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서유미는 아무래도 납득이 되지 않는지 길게 탄식을 터뜨렸다. “하아...” 이젠 도무지 뭐가 뭔지. 그녀의 이해 능력으로는 감당이 되질 않는다. “이리 와요. 누리한테 인사해야죠.” 헤네스의 손에 이끌려 침대 옆으로 다가간 서유미는 동글동글한 눈이 초롱거리며 반짝이는 귀여운 아기의 모습에 다시금 말문을 잃었다. 그녀 역시 아이를 그리 싫어하지는 않지만, 이 아이는 뭔가 처음 보는 순간 사람의 마음을 확 잡아 끄는 듯한 착각마저 느껴질 정도의 기묘한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 공주님, 귀엽죠?” “네. 정말... 그러네요.” 리체스가 여왕이라고 했으니, 헤네스의 말대로 공주님이 맞다. 아... 그런 건가. 서유미는 그제서야 이들의 관계가 왕족이라는 특수성으로 인해 성립이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고 납득해 버렸다. 그것 외에는 지금 상황을 이해할 다른 단서가 거의 없는 것도 사실이었고, 그렇게라도 하지 않고서는 그녀 자신이 지금껏 태어나서 살아오며 겪어 왔던 모든 고뇌와 고통이 뒤엉켜 모순에 빠져 버릴 것만 같았던 것도 한 가지 이유였다. 그렇게 조금은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서유미를 빤히 쳐다보던 누리의 몸 주위에서 반짝반짝하는 빛들이 마치 반딧불처럼 떠오르기 시작했다. “어?” 이건 또 어떻게 된 일인가 싶어 어리둥절해 하는 서유미에게 리체스가 웃으며 말했다. “유미씨는 운이 좋네요.” “네? 뭐가요?” “누리가 정령들을 데리고 노는 건 아직 그 사람도 보지 못한 일이거든요.” “정령이요?” 둘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반짝 반짝 빛나는 작은 빛덩어리들은 누리의 주위를 조심스럽게 떠돌며 신비로운 빛을 발했다. 뜨거운 느낌의 빛, 차가운 느낌의 빛, 밝고 어두운 느낌의 빛에 이르기까지 형형색색의 빛무리들이 침대 위에 누워 있는 누리의 몸 주위를 떠도는 모습은 너무나도 신비로워서 서유미는 물론이거니와 이전에 몇 번 이런 광경을 본 적이 있는 헤네스와 리체스마저도 잠시 넋을 잃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아름다웠던 정령들의 윤무는 어느 순간 마치 모든 것이 꿈결이었던 것처럼 스르르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순수한 아이라서 그런 걸까요?” “그러게. 어떤 면에서는 아빠보다도 더 정령들을 잘 다루는 것 같아.” 헤네스와 리체스가 그렇게 얘기를 나누자 서유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누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정령을 다룰 수 있었나요?” 그 말에 헤네스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에요. 준상씨가 정령을 나누어 주었답니다.” “준상씨가요?” “네. 이 정령들은... 좀 설명하기는 복잡하지만, 퀘스트라든가 그런 것과 상관없이 준상씨에게 완전히 속해 있는 새로운 정령들이에요.” 헤네스의 설명에 뒤이어 리체스가 다시 덧붙였다. “제가 보기에는 아빠로부터 넘겨받는 순간 정령들에게도 뭔가 변화가 생긴 것 같은 느낌이긴 하지만, 아직은 누리가 말을 못하니 어떻게 물어볼 수도 없고 그러네요.” “아, 예...” 서유미는 뭐가 뭔지 정신이 없었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면, 아버지는 저 인간인지조차 의심스러운 준상이고, 어머니는 무려 만년을 넘게 살아온 요정 여왕이니 그 아이가 평범하지 않은 건 차라리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그렇게 헤네스와 리체스가 딸 자랑에 빠져 있는 동안, 그 대열에 동참하지 못한 준상은 터덜터덜 미국 동부의 애팔래치아 산맥으로 통하는 정령의 문을 통과하고 있었다. “후...” 누가 보면 한 백만장쯤 산 복권이 한 장도 안 맞고 전부 꽝이라도 되었나 싶을 정도의 표정을 지으며 길게 한숨을 내쉰 준상은 이내 주머니에서 동그란 선글라스를 꺼내 얼굴에 쓰고는 다시 표정 변화 없는 목석같은 모습으로 돌아왔다. 서유미가 봤으면 다시 사기다 라는 소리를 외치며 혼란에 빠졌을 법한 변화를 보이며 준상은 주위를 돌아보다가, 이내 빠르게 산맥을 내려간 다음 랩터를 꺼내 타고는 링컨 기념관으로 향했다. 알링턴 메모리얼 브릿지를 지나자 이내 파르테논 신전을 연상시키는 하얀색의 건물이 푸른 나무에 둘러 싸여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준상은 기념관 근처의 주차 공간에 차를 멈추고는 천천히 리플렉팅 풀이라고 불리는 커다란 연못이 보이는 기념관의 정문으로 다가갔다. 몇 번 보지도 못한 풋내기 소위의 모습 따위 잊어버린지 오래였지만, 그에게는 통찰이라는 능력이 있었다. 통찰은 본래 다른 이와 자신이 지닌 힘을 비교 분석하는 능력이지만, 일반인과 귀환자들을 구별하는 용도로도 사용이 가능했다. 준상은 주위를 오가는 관광객들과는 달리 머리에 색깔이 달린 깃발 표식을 달고 있는 두 사람의 미국인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사복차림이라 한눈에 알아보기는 어려웠지만, 그 중 어두운 녹색 표시의 깃발 표식이 달린 조금 마른 체격의 남자는 분명 이전에 보았던 딜런이 분명했다. 또 다른 한 명은 딜런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보이는 키에 떡 벌어진 어깨를 가진 건장한 흑인 남성이었는데, 번들거리는 검은 피부가 마치 흑표범을 연상시키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의 머리 위에 펄럭이는 깃발 표식은 확연하게 밝은 녹색. 추가로 상세 능력을 확인해 보니, 서유미보다 공격력은 떨어지지만 방어력 면에서는 그녀를 오히려 능가하고 있었다. 이런 인재가 있었다니. 솔직히 지난 번에 미국이 보여준 추태로 인해 도움이 될만한 인재를 만날 수 있으리라고는 거의 기대하지 않았던 준상이었기에 놀라움이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준상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천천히 딜런을 향해 다가갔다. 그가 다가가자 옆에 서 있던 흑인이 대뜸 긴장하는 표정을 지으며 앞으로 나선다. “호오...” 식은땀을 흘리는 와중에도 몸에서 맹렬한 투기를 발산하는 그 모습에 준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공격력이 다소 부족하기는 하지만, 피부를 따끔따끔하게 찔러오는 그 투기를 통해 이 흑인이 자신과 비슷한 부류의 투사임을 어렵지 않게 알아본 것이다. 곧바로 기세 싸움이 벌어질 찰나, 뒤에 서 있던 딜런이 허겁지겁 앞으로 나오며 흑인을 말렸다. “블레이크 중사. 일단 물러서세요.” “중위님. 하지만...” “중사. 이 사람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 흑인은 그제서야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준상을 바라보다가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휴...” 딜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준상을 향해 손을 내밀며 인사를 했다. “오랜만입니다. 저 기억하시죠? 딜런입니다. 그동안 연락이 안 되어 걱정하던 참이었습니다.” “...” 하지만 준상은 그가 내민 손을 무시하고는 뒤에 서서 여전히 자신을 경계하고 있는 흑인을 바라보며 물었다. “누구지?” 기껏 내민 손이 무시를 당하자 딜런은 공연히 손을 쥐었다 폈다 해보이는 식으로 무안함을 감추며 준상의 질문에 답했다. “마커스 블레이크 중사입니다. 미군에 속한 귀환자들 가운데 현존 최고의 전투력을 갖춘 사람이죠. 이번 의뢰의 안내역을 맡게 될 겁니다.” “그렇군.” 준상은 미처 몰랐지만, 블레이크 중사는 미국의 귀환자들 가운데서도 매우 특이한 이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다른 귀환자들 모두가 총기의 위력에 심취하여 그것을 활용하는 쪽으로 능력을 개발시킬 때, 블레이크 중사는 화기 무용론을 주장하며 육체의 강화에 매달렸었다. 처음에는 쓸데 없는 짓이라며 무시를 당하기 일쑤였지만, 벨카라스에서 당시 미국의 에이스였던 레이먼드 중위가 암습으로 사망한 뒤 그의 주장이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최근에는 절대적인 방어 능력을 인정받으며 새로운 에이스로서 부각이 되고 있었다. 무미건조한 준상의 반응에 딜런은 잠시 난처해 하다가 주위의 관광객들의 시선이 자신들에게 몰리고 있음을 깨닫고는 다시 말했다. “일단, 자리를 옮기죠.” 딜런은 그렇다 쳐도 준상이나 블레이크의 경우에는 보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이 넘치는 인물들이라 이렇게 기념관 정문 앞에 떡 버티고 서 있으면 구경거리 밖에 안된다. 실제로도 몇몇 관광객들은 무슨 영화나 드라마 같은 거라도 찍는건가 싶었는지 휴대폰으로 그들의 모습을 몰래 촬영하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그러지.” 그들은 일단 기념관을 내려와 근처에 자리 잡은 리플렉팅 풀 근처의 산책로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평평한 돌로 포장된 기다란 직사각형 모양의 인공 호수 주위를 걸으며 딜런은 외투 안에 넣어두고 있던 서류를 꺼내며 이전처럼 서브 퀘스트 발동을 위해 설명을 하려 했다. 하지만 준상은 그의 설명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가만히 걸음을 옮겼다. “이상입니다. 그 이상의 자세한 내용은 블레이크 중사에게 물으시면 됩니다.” 딜런은 그렇게 말하며 의뢰 내용에 대한 설명을 마쳤지만, 역시나 퀘스트는 발동되지 않았다. 어쩐지 좀 시원섭섭한 느낌. 하지만 준상은 내색하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았다.” 00307 트롤러 ========================================================================= 현재 위치에서 목적지인 루비 레이크 주립공원까지는 차로 달릴 경우 이십 시간이 넘게 걸리는 곳이기 때문에 미국은 준상을 태우고 갈 항공기를 마련해 둔 상태였다. “가시죠. 일단 공항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차를 가지고 왔다.” “차를...” 순간 이동 능력이 있다고 들었던 탓인지 딜런은 다소 놀란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평온함을 가장하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럼 이 앞에서 각자의 차를 타고 만나는 것으로 하죠.” “그러지.” 준상이 차를 몰고 다시 링컨 기념관 근처로 나오자 군용 험비를 탄 딜런과 블레이크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그들은 곧바로 서쪽에 위치한 덜레스 공항을 향해 이동했다. “이곳에서 비행기를 타고 캐나다의 선더베이까지 간 다음 차로 한 시간 반 정도를 더 가야합니다.” 공항에 도착하자 딜런은 준상에게 그렇게 설명하고는 블레이크 중사를 바라보다가 아무래도 안되겠다 싶었던지, 양해를 구하고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기 시작한다. 딜런이 통화를 하는 동안 블레이크는 여전히 투쟁심 가득한 눈으로 준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준상은 그런 블레이크를 담담하게 바라보며 물었다. “할 말이 있나?” “...” 블레이크는 그 말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생각 같아서는 바로 달려들어 자웅을 결해보고 싶었지만, 상대는 펜타곤을 단신으로 무너뜨린 괴물인데다, 당장 그들은 국가를 위한 중대한 임무를 수행해야만 하는 위치에 있었다. 그는 투사이기 이전에 한 나라의 군인. 자신의 욕구를 해결하기 위해 임무를 저버리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죄송합니다.” 블레이크가 투기를 가라앉히고 순순히 고개를 숙이자 준상의 눈에는 이채가 떠올랐다. 이 정도 투기를 가지고서도 지금 같은 상황에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자제심마저 갖추는 건 생각처럼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그렇게 신경전을 벌이는 동안 딜런은 허겁지겁 통화를 마치고 돌아와 다시 준상에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허가를 받느라...” “허가?” “네. 원래는 블레이크 중사가 안내역을 맡을 계획이었지만, 일단 저도 함께 가는 걸로...” “...” 준상은 자신의 눈치를 살피며 그렇게 말하는 딜런의 모습을 보고 속으로 실소를 흘렸다. 투견과 광견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나 몰라라 그냥 가버리자니 역시 불안했던 모양이다. “괜찮겠습니까?” 딜런의 조심스러운 말에 준상은 그를 지그시 바라보며 물었다. “나야 상관없지만, 그쪽이야 말로 괜찮겠나?” 준상은 말할 것도 없고 블레이크 역시 상당히 방어력에 자신이 있는 모양이니 비행기를 타더라도 만약의 사태에 대비할 수 있다. 애초에 딜런이 아닌 블레이크가 안내역으로 배정된 것 역시 그런 점을 감안해서일터. 딜런은 준상이 되묻자 난처한 듯 쓴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낙하산도 매고 탈 생각이고... 어차피 이젠 익숙하니까요.” 지금이야 좀 덜하지만 처음에는 귀환자임에도 불구하고 높으신 분들의 부름에 따라 이곳저곳으로 불려 다니기 일쑤였다. 처음에는 그럴 때마다 언제 불려갈지 모른다는 생각이 식은땀이 줄줄 흐르곤 했지만, 이제는 만성이 되어 버린지 오래다. 좋게 말하면 관록이 생긴 거고, 나쁘게 말하면 감정이 무뎌진 것이리라. 아무튼, 셋은 공군에서 준비한 C-37기에 탑승했다. 이 기종은 윌킨슨이 준상을 워싱턴으로 데리고 올 때 준비했던 바로 그 기종이다. 딜런은 블레이크와 함께 낙하산을 꼼꼼하게 챙긴 상태로 탑승한 다음, 비행기가 이륙해서 적정 고도에 오를 때까지 계속 긴장을 풀지 않았다. 차라리 고도라도 높으면 낙하산의 도움이라도 받겠지만, 어중간한 고도에서 떨어지면 오히려 더 위험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도 어차피 퀘스트가 끝나고 돌아올 때의 문제겠지만 말이다. 스스로는 만성이 되었다고 생각하면서도 비행기가 뜨고 내릴 때 몸이 굳는 건 역시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다행히도 캐나다의 선더베이 공항에 도착할 때까지 큰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다. 비행기가 지면에 내려앉자 딜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돌아갈 때는 역시 차를 타고 가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을 떠올리다가 비행기가 멈추자 안전벨트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시죠. 차가 준비되어 있을 겁니다.” “...” 준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일으켜 딜런과 블레이크의 뒤를 따랐다. 비행기에서 내리자 조금은 황량한 공항의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똑같이 공항이라는 이름을 달고는 있지만, 이곳은 이전에 준상이 보아왔던 다른 공항들과는 달리 황량하다는 느낌마저 전해질 정도다. 비행기의 탑승구에 서서 주위를 한번 둘러보고 있는데, 그제서야 대여섯대의 차량이 그들을 향해 달려오는 모습이 보인다. 바라보니 그 가운데 두 대는 여덟 개의 바퀴가 달린 차륜형 장갑차이고, 두 대는 앞서의 장갑차들과는 달리 네 개의 바퀴만이 달렸지만 역시나 지프보다는 장갑차라는 말이 어울릴 법한 육중한 차체를 지니고 있었다. 육중한 장갑 차량이 주위를 에워싸고 나자 다시 차량 두 대가 비행기 앞에 멈추어 선다. 하나는 이미 눈에 익숙한 군용 험비였지만, 또 다른 하나는 중후한 멋이 풍기는 고급 리무진이었다. 딜런은 그 차량들을 보며 준상에게 말했다. “캐나다군과 함께 온 모양입니다. 저기 보이는 4륜 차량이 캐나다 군이 사용하는 맘바이고, 뒤따라는 바퀴 여덟 개 짜리가 저희 해병대의 LAV-25입니다.” 살짝 흥분한 표정마저 보이며 그렇게 떠들어 대는 딜런의 모습을 보니 어쩐지 임서윤과 함께 데려다 놓으면 죽이 잘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말없이 딜런의 설명을 들으며 탑승구를 내려가자 험비에서 서너 명의 사람들이 내려서 그들에게 다가왔다. 그 가운데 흰 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른 남자 하나와 조금 마른 인상의 중년 남자 하나가 다가와 먼저 인사를 했다. “미 육군의 셰퍼드 중령입니다. 반갑습니다.” “캐나다 육군의 글렌 소령입니다. 환영합니다.” 셰퍼드 중령의 경우에는 준상에 대해 이미 들은 바가 있었는지 깍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지만, 글렌 소령의 경우에는 다소 미심쩍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고 있었다. 딜런 소위와 블레이크 중사는 자신의 상급자 들에게 바로 경례를 해보였지만, 준상은 살짝 목례를 해보이는 정도의 답례만 했다. 셰퍼드 중령은 간단하게 인사가 끝나자 그들을 리무진으로 데리고 갔다. “타시죠.” “...” 준상이 리무진 안에 탑승하자 블레이크가 앞자리에 타고, 뒤이어 딜런과 셰퍼드 중령, 글렌 소령이 차례로 자리를 잡았다. “저도 이런 차를 타보는 건 처음입니다. 이거 덕분에 호강하는 군요. 하하.” 셰퍼드 중령은 웃으며 그렇게 말하고는 차내에 설치된 냉장고에서 음료수와 잔을 꺼냈다. “한 잔 하시겠습니까? 술은 아니고 간단한 음료수입니다.” 일부러 친화력이 좋은 장교를 배정한 것인지, 아니면 지시에 철저하게 따르는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셰퍼드 중령은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로 준상에게 친밀함을 표하고 있었다. 하지만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 아무리 성격이 좋아도 말 한 마디 제대로 대꾸조차 안 하는 준상을 상대로 자기 혼자 주절주절 떠드는 건 역시 힘 빠지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결국 머쓱한 표정으로 셰퍼드 중령이 입을 닫자,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었던지 딜런 중위가 입을 열었다. “이반 호수 주변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그러자 지금까지 잠자코 준상을 바라보고만 있던 글렌 소령이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호수 주변을 액체 질소 등으로 얼려서 마수의 이동을 억제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유가 있습니까?” 딜런은 이미 브리핑을 통해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자연스럽게 준상에게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그런 식의 질문을 던졌고, 그의 의도를 이해한 글렌 소령은 그 질문에 바로 답했다. “현재 이반 호수에 묶어 두고 있는 마수는 바다뱀에 다리가 달린 듯한 형상인데, 물 속에서는 거의 물리적 데미지를 입지 않는데다, 물 그 자체를 조종하는 능력까지 있어서 대응하기가 매우 까다롭습니다. 호수에 몰아넣은 뒤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해 보았지만 별다른 효과가 없었고, 유일하게 물 그 자체를 얼려 운동성을 감소시키는 방법만이 효과를 보이는 터라 그런 식으로 대응을 하고 있습니다.” 준상은 글렌 소령의 말을 듣고 피식 웃어 버렸다. 그 정도까지 마수의 약점을 확인한 상태라면 호수의 물을 단숨에 증발시켜 버릴 정도의 위력을 갖춘 폭탄이라도 하나 떨어뜨리면 간단한 일. 하지만 미국이나 캐나다가 굳이 그런 방법을 쓰지 않고 비싼 돈 들여가며 액체 질소를 퍼부어 호수의 물을 얼리고 있는 것은 이반 호수의 마수를 가급적 상처 없이 포획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다고 봐야 한다. 물 속에서 방어력이 증대되는데다, 물 그 자체를 조종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마수의 살아있는 몸. 세계 최강의 해군을 운용 중인 미국으로서는 목구멍에서 손이 뻗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샘플인 셈이다. 이런 점을 감안한다면 리무진까지 대절해서 중령 씩이나 되는 인물이 저자세로 굽신거리는 이유도 어렵잖게 이해할 수 있다. 준상은 과거 샌디에이고의 전투에서 마수를 상대할 당시 대규모 마법을 사용해 마수들의 움직임을 묶은 적이 있다. 물론 정확하게는 준상이 아니라 리체스가 대규모 마법을 발동한 것이지만, 그녀의 존재를 모르는 다른 이들의 눈에는 준상이 정령이든 마법이든 사용해서 단숨에 마수들을 얼린 것이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을 터. 다시 말해, 준상은 골치 아픈 마수를 피해 없이 제거하기 위해 불려온 것이 아니라, 가급적 상처 없이 포획하기 위해 불려온 셈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글렌 소령의 조금 불만스러워 보이는 표정도 이해할 수 있다. 미국과 캐나다가 동맹국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 해도 자국 내에 출현한 마수를 이런 식으로 다른 나라에 털도 안 벗기고 홀라당 털어 넣는 일이 기분 좋을 리가 없지 않은가. 준상은 생각을 마치고 나서야 셰퍼드를 향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미국 입장에서는 가급적 상처 없이 포획해 주었으면 싶겠군?” 문득 사람 좋아 보이던 셰퍼드 중령의 눈에 살짝 이채가 나타난다. “그야 뭐... 그래 주시면 저희들로서야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만.” 준상은 셰퍼드 중령을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 “재미없군.” “네?” “차 세워라.” “그게 무슨.” 셰퍼드 중령은 물론이고 딜런과 글렌마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준상은 가타부타 말도 없이 그대로 몸을 일으키는가 싶더니, 위상전이를 펼쳐 리무진 밖으로 빠져 나갔다. 그가 차 안에서 모습을 감추자 리무진은 급히 멈추어 섰고, 주위를 에워싸며 달리던 험비나 장갑차들 역시 움직임을 멈추었다. “준상님!” 당황한 딜런이 먼저 리무진의 문을 열고 밖으로 달려 나왔고, 셰퍼드 중령과 글렌 소령이 그 뒤를 따랐다. 준상은 길가에 서서 그들을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 “몇 개월이나 묵혀 두고 있다길래 얼마나 엄청난 놈인가 싶었더니.” “잠시 제 얘기를...” 셰퍼드 중령이 급히 앞으로 나서며 무언가 말하고자 했지만, 준상은 그를 향해 공포의 시선을 발동했다. “커억!” 자비 없는 강력한 정신 공격이 터져 나오자 셰퍼드는 안색이 창백해지며 그대로 주저 앉아 버렸고, 그것은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준상은 염동력으로 셰퍼드의 몸을 끌어당겨 그 멱살을 움켜 쥐고는 이렇게 말했다. “워싱턴 놈들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건가.” “그, 그게...” 그때 딜런 소위가 이를 악물고 앞으로 나서며 소리쳤다. “진정하십시오! 아무래도 뭔가 오해가 있으신 듯 합니다.” “오해라고?” 준상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정말로 그럴 생각이 있었다면 약점이 밝혀진 마수 따위 잡지 못할 이유가 없지.” “그건...” “내 말이 틀린가!” “...” 딜런은 물론이고 글렌 소령마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바로 그때. 검은 피부를 지닌 거한이 준상을 향해 한 줄기 기합과 함께 어깨를 내밀며 달려 들었다. 그 자세는 준상도 과거 즐겨 사용하던 기술인 숄더 차지. 발동되는 순간 주위의 바람이 확 갈라지며 밀고 들어오는 기세가 범상치 않다. 위력도 위력이지만, 블레이크 중사의 강력한 방어력까지 감안하면 가히 검은 포탄이라 불리워도 이상하지 않을 듯한 모습. 하지만 준상은 그 모습을 흘깃 보고는 자세를 낮추며 상대의 숄더 차지를 그대로 받아내었다. 쿵! 블레이크 중사는 준상과 어깨가 맞부딪히는 순간 응축된 힘이 어이 없이 와해되는 기묘한 감각과 함께 그대로 뒤로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젠장!” 블레이크는 급히 몸을 일으키며 재차 공격을 가하려 했지만, 그런 그를 향해 셰퍼드 중령의 몸이 날아들었다. “헛!” 놀라서 얼른 상관의 몸을 받아 드는데, 그의 등 뒤로 무언가가 떨어져 내리더니 곧바로 무릎 뒤쪽을 강하게 타격했다. “이런!” 아무리 방어력이 강해도 그런 식의 기습에 관절이 굽혀지는 것까지는 막을 도리가 없다. 덕분에 블레이크 중사는 셰퍼드 중령의 몸을 안은 채 또 한 번 땅바닥에 나뒹굴 수밖에 없었다. 셰퍼드 중령은 이미 눈이 팽팽 돌아가는 상황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지만, 블레이크 중사는 그가 무사한 것을 확인하고는 바로 옆으로 밀쳐내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바로 그때. 묵직한 발이 그의 목을 그대로 짓눌러 버린다. “큭!” 준상은 천천히 발에 힘을 주며 손을 들었다. 그 손에는 어느 새인가 불과 얼음의 정령력이 마치 손을 맞잡고 춤을 추는 것처럼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 블레이크 중사는 거목의 뿌리처럼 자신의 목을 짓누르고 있는 준상의 발을 밀쳐 버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가 그 모습을 보고서야 저항을 멈추었다. 준상은 자신의 발 아래 깔린 블레이크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천천히 발을 떼고는 손 안에 만들어 내었던 정령력을 지워버림과 동시에 몸을 돌리며 걸음을 옮겼다. 공격할테면 해보라는 듯한 그 모습에 몇몇 군인들이 슬그머니 총을 들어 올렸지만, 지금까지 가만히 사태를 주시하던 글렌 소령이 손을 들어 그들을 말리고는 문득 준상을 향해 외쳤다. “당신의 말대로 입니다!” “...” 준상은 그 말을 듣고는 고개를 돌려 글렌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가.” 글렌은 준상의 물음에 바로 대답했다. “자력으로 포획하자는 의견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녀석을 몰아넣을 때와 마찬가지로 병사들의 희생이 필요합니다. 때문에 저희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 “부탁 드립니다. 힘을 빌려 주십시오.” 준상은 글렌의 말에 혀를 차며 대답했다. “죽어도 포획을 해야겠다 이건가.” 글렌은 고개를 저었다. “생각 같아서는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습니다.” “그런데?” “저는 수행하는 자일 뿐, 결정하는 자가 아닙니다.” “...” 그때서야 비로소 정신을 차린 셰퍼드가 허겁지겁 준상을 향해 외쳤다. “저는 병력을 들이 부어서라도 단숨에 해결하자고 했습니다. 하지만 저 자가 그걸 말려서 이런 상황이 온 것입니다. 미국 정부는 당신을 하찮게 여기려 했던 것이 아닙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 준상은 속으로 혀를 찼다. 셰퍼드의 말대로 라면 준상의 개입을 원한 것은 미국 정부가 아니라 캐나다 정부였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병사를 들이 붓다니. 그 말을 들은 병사들은 금새 분위기가 험악해지고 말았다. 셰퍼드는 목을 쓰다듬으며 일어서다가 자신을 노려보는 병사들의 모습을 보고서야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다. 자칫 자신에게 책임이 돌아올 수도 있는 상황인데다 준상에게 목을 잡히고 다시 떠밀려지는 급박한 사태가 이어지다보니, 경황이 없는 가운데 해서는 안 될 말을 입에 담아 버렸음을 뒤늦게서야 깨달은 것이다. 그야말로 자폭이나 다름없는 상황. “아니...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셰퍼드는 뒤늦게서야 수습을 해보려 했지만, 이미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딜런이나 블레이크 마저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상황이니 말해 무엇할까. 결국 셰퍼드는 어깨를 늘어뜨린 채 고개를 수그릴 수밖에 없었다. 이 정도면 적당히 흔들어 본 것 치고는 제법 훌륭한 성과다. 준상은 그들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글렌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아직 의뢰는 유효한가.” 글렌은 반색하며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00308 트롤러 ========================================================================= 준상은 다시 리무진에 올라탔으나 셰퍼드 중령은 더 이상 같은 차에 탈 수 없었다. 글렌은 준상이 다시 차에 타자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딜런과 블레이크는 표정이 그리 밝지 못했다. 셰퍼드의 발언으로 인해 소모품 취급당하는 자신들의 현실을 다시금 깨달았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식의 생각을 가진 장교 한 둘 정도는 어느 나라 군대든 있기 마련이지만, 평소에도 군이나 정부의 고위층 인사들에게 비행기로 불려 들어오는 일이 많은 그들이다보니 아무래도 그냥 웃고 넘어갈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준상은 푹신한 리무진 좌석에 몸을 기댄 채 차창 밖을 바라보며 블레이크의 능력에 대해 다시 한 번 검토를 했다. 중요한 순간 블레이크가 사용했던 기술은 다름 아닌 숄더 차지. 그 기세 뿐만이 아니라 위력도 범상치 않아 준상 역시 자세를 낮추고 어깨로 받아내야만 할 정도였다. 그 정도로도 은근히 뒤로 밀릴 정도이니 만약 보통의 다른 귀환자들이었다면 결과는 전혀 다르게 나왔을 것이다. 준상이 가진 콤보 가운데 숄더 차지를 기습 공격에 주로 사용하는 것은 다름 아닌 무투가. 무투가는 광전사 계열과 마찬가지로 광폭을 사용함과 동시에 야수의 영혼으로 기술의 파괴력을 증폭시키는 콤보 카드이다. 단순히 독립적인 기술로 숄더 차지를 사용하는 것은 아무래도 효율이 떨어지는 일. 그것은 다시 말해 숄더 차지의 위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콤보를 사용 중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생각을 정리한 준상은 딜런이 내민 음료수로 목을 축이다가 석상처럼 말없이 앉아 있는 블레이크를 향해 물었다. “무투가인가.” “...” 대답은 없었지만 순간 블레이크의 눈가가 움찔하는 것을 보고 준상은 자신의 추측이 맞았음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딜런은 다시금 차 안에 긴장감이 흐르기 시작하자 전전긍긍하며 준상을 향해 말했다. “죄송합니다. 블레이크 중사가 사용하는 콤보 카드에 대해서는 일단 비밀이라...” 하지만 그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준상이 입을 열었다. “내가 사용하는 콤보에 대해서 말해 줘도?” “...” 딜런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블레이크 중사의 주력 콤보도 중요한 비밀이지만, 지금 눈앞에 앉아 있는 인물의 정보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일. 하지만 이 중대한 정보 교환에 대한 결정을 임의로 내리기엔 그의 계급이나 부여된 권한이 너무나 낮았다. 때문에 딜런은 뭐라 입을 열기도 난감한 상황이 되어 혼자 끙끙거릴 수 밖에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자신이 윌킨슨 대신 멕시코의 귀환자 마약 조직 토벌 작전에 나갈 것을. 오죽하면 그런 생각을 다 떠올리고 있겠는가. 어쨌거나 그렇게 잠시 더 차를 타고 달리자 마침내 목적지인 루비 레이크 주립공원에 도착했다. 공원은 입구부터 미군과 캐나다군에 의해 통제되고 있었는데, 이미 마수가 출현한 시점으로부터 시간이 많이 흐른 탓인지 보도진의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차는 잠시 더 안쪽으로 달리다가 급히 만들어 놓은 듯 보이는 도로를 지나 공원 북쪽의 이반 호수로 접근했다. 호수 주위에는 액체 질소를 담은 탱커 들이 줄을 지어 서 있었고, 분사기로부터 뿜어진 액체 질소들이 뿌연 안개처럼 호수 주위로 피어오르고 있었다. 액체 질소를 취급하기 위해 보호의와 방한복을 착용하고 있던 사람들은 고급 리무진이 도착하자 그들을 흘깃거리다가 글렌 소령을 비롯한 지휘관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경례를 하고는 자신들의 업무를 이어갔다. 준상은 우선 시드 구성을 냉기 저항 위주로 재편하고는 액체 질소를 분사하고 있는 곳을 바라보다가 블레이크를 향해 말했다. “함께 가겠나.” 그 말에 블레이크는 딜런을 바라보았고, 이 건장한 흑인의 굳은 시선과 눈이 마주치자 딜런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나한테 물어도 소용없어. 그런 걸 결정할 권한이 없으니.” “...” 그것은 현장 지휘관인 셰퍼드나 글렌도 마찬가지. 결국 블레이크는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준상에게로 천천히 다가섰다. 준상은 블레이크가 다가오자,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말했다. “방어복 가지고 있나.” “네.” “그럼 입도록.” “알겠습니다.” 블레이크는 인벤토리에서 커다란 사물함을 하나 꺼내 그 안에 담겨진 방어복을 즉석에서 착용했다. 제법 많은 사람들이 주위를 오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창피해 하는 기색도 없이 우람한 체구를 유감없이 드러내며 방어복을 입는 모습에 글렌은 어쩐지 머쓱한 기분이 들었는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린다. 블레이크가 입고 있는 방어복은 준상이나 헤네스가 사용하는 것과는 다소 모양이 달랐고, 임서윤이나 그의 길드원들이 사용하는 것과도 차이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미국에서 자체 개발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마침내 블레이크가 방어복을 모두 착용하자 준상은 바로 갑가오리를 소환했다. “헛!” 갑자기 허공에서 한줄기 빛과 함께 하늘에 떠있는 커다란 가오리 한 마리가 나타나자 병사들은 물론이거니와 글렌이나 딜런마저도 흠칫 놀라고 말았다. “놀랄 것 없다. 내 소환물이다.” 하지만 준상은 그렇게 말한 뒤 훌쩍 갑가오리의 등 위로 뛰어 오르고는 블레이크를 향해 손짓을 해 보였다. 블레이크는 준상이 먼저 올라타자 주저하는 기색도 없이 갑가오리 위로 뛰어 올랐다. “그럼 다녀오겠다.” 준상은 딜런을 향해 그렇게 말하고는 갑가오리를 몰아 호수 쪽으로 이동했다. “저런 탈것마저 가지고 있었다니. 놀랍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글렌과 딜런이 그렇게 대화를 나누는 동안 준상은 갑가오리를 타고 호수 위를 천천히 살폈다. 블레이크는 처음에는 다소 당황한 표정을 짓는가 싶더니 이내 무표정한 얼굴로 준상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준상은 어느 정도 호수 안쪽으로 들어서자 뜬금없이 이렇게 말을 꺼냈다. “나도 무투가 콤보를 사용중이다.” “네?” “레어급 콤보까지 갖추고 있지.” “...” 레어급 콤보. 블레이크가 얼마 전에야 달성한 능력이다. “참고로 최초 달성 칭호의 보너스는 야수의 영혼 효과를 하나 달성할 때마다 공격속도 3퍼센트 증가이다.” 준상의 이어진 말에 블레이크는 입술을 깨물었다. 모처럼 레어 콤보를 달성해 놓고도 아무런 칭호를 얻지 못해 얼마나 아쉬워 했던가. 그런데 눈앞의 이 인물이 그 최초 달성 칭호를 가져간 자라니. “참고로 나는 야수의 영혼을 네 개 가지고 있다.” “헉!” 블레이크는 자신도 모르게 헛숨을 들이켰다. 무투가 콤보는 야수의 영혼이 하나 늘어날 때마다 그 파괴력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레어 콤보라면 영혼 하나당 위력 상승 효과가 무려 120퍼센트. 블레이크가 가진 영혼의 수가 고작 둘 뿐인 점을 감안하면 똑같은 기술을 사용하더라도 그 위력이 두 배나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물론 준상의 경우에는 네 개의 영혼을 모조리 다 활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최대 3개까지 밖에 활용하지 못하지만 굳이 여기서 그런 걸 다 얘기해줄 필요는 없는 일. 하지만 그 내막이 어찌 되었든 간에 블레이크는 방금 전의 접촉에서 자신이 맥없이 튕겨 나간 이유를 그제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준상의 말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래봐야 내가 가진 열 가지 콤보 가운데 하나일 뿐이지만.” “...” 블레이크는 입이 떡 벌어지고 말았다. 열 가지라니. 그가 보유한 콤보는 이제 고작 세 종류 뿐. 그나마도 두 가지는 레어 등급도 아닌 일반 등급일 뿐이다. 무투가의 경우에는 일반과 레어 두 가지로 조합이 가능하지만, 상위 등급의 콤보를 놔두고 굳이 하위 등급의 콤보를 쓸 이유가 없으니 그것은 당연히 제외된다. “설마... 전부 다른 콤보입니까.” 혹시나 싶어 물었지만, 준상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당연한 일 아닌가.” “...” 블레이크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준상의 뒷모습을 바라보았지만, 그것은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사실이었다. 광전사, 미친개, 무투가, 군랑맹진, 정령사, 파발꾼, 욕쟁이 할매, 수호자, 검은 백합, 꽃 그림자. 이상이 현재 준상이 보유한 열 가지 콤보이다. 개중에는 파발꾼처럼 전투보다는 특수 기능에 특화된 것도 있고, 군랑맹진처럼 일반 스킬이 아닌 소환물로만 이루어진 콤보도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열 가지인 것은 분명한 사실. 블레이크는 제법 시간이 지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준상을 향해 물었다. “자랑이라도 하시려는 겁니까?” 그 말에 준상은 뒤를 돌아보며 대답했다. “뭐하러?” “...” 자랑을 해봐야 그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아주 사소한 우월감 뿐. 이제 와서 굳이 그런 하찮은 감정을 내보일 이유가 없었다. 준상은 말없이 굳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블레이크를 향해 다시 말했다. “게다가, 그런 건 내가 상대하려는 적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이다.” “...” 이건 또 무슨 말인가. 블레이크는 눈을 부릅뜨고 이어질 준상의 말을 기다렸지만, 그는 고개를 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등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궁금한가. 하지만 블레이크가 그 말에 답하기도 전에 호수로부터 굉음과 함께 물기둥이 솟구쳐 오른다. “드디어 놈이 나타난 모양이군.” 준상은 일단 요정의 의사소통 방법으로 리체스에게 연락을 취한다음 갑가오리의 고도를 높였다. 그러자, 호수의 물이 마치 송곳처럼 솟아올라 갑가오리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물을 자유자재로 다룬다더니, 이런 것인가. 이래서는 확실히 헬기 같은 걸로 액체 질소를 쏟아 붓는 것도 쉽지 않을 듯 하다. 갑가오리가 충분히 높은 고도로 올라가자 솟구치는 물줄기는 잠잠해졌다. 준상은 잠시 말없이 수면 아래로 비치는 검은 마수의 그림자를 바라보다가 리체스로부터 다시 연락이 오자 허공에 석문을 열었다. “헛!” 블레이크는 갑자기 빈 공간에 고풍스러운 느낌의 석문이 모습을 드러내자 크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정말로 놀랄 일은 그 다음에 벌어졌다. 문이 열리며 그 안에서 방호복을 갖춰 입은 두 명의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앗!” “조심해라.” “네.” 블레이크는 가장 먼저 한 여성에게 눈길이 갔다. 눈처럼 흰 하얀 방패와 검고 붉은 기이한 문양이 새겨진 깃발이 달린 미늘창을 손에 쥔 여성. 바로 헤네스이다. 샌디에이고에서의 일로 헤네스는 알게 모르게 미국 귀환자들에게 준상 다음으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준상에게 동료가 있다는 얘기는 은연중에 잘 알려진 얘기였지만, 이런 식으로 불러낼 수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블레이크는 조금 멍한 표정으로 헤네스를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정신이 퍼뜩 들었다. 방금 전까지 그의 입에서 나왔던 얘기나, 방금 동료들을 불러들이는 이 방식. 모두 하나 같이 중대한 비밀에 속하는 것들이다. 어째서 자신에게 이런 비밀을 알려주는 것일까. 하지만 그가 미처 생각을 이어가기도 전에 서유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분은... 누구시죠?” 준상이 대답했다. “마커스 블레이크. 미국 군인이다. 이번 의뢰의 안내역이지.” 간단하게 마커스에 대한 설명을 한 준상은 블레이크의 시야로부터 모습을 숨긴 채 자신의 어깨 위에 내려앉은 리체스에게 눈짓을 하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설명할테니 잘 듣도록.” ============================ 작품 후기 ============================ 준상 : 작가가 한 편 더 쓰는 중이라는군. 일행 : 오오! 00309 트롤러 ========================================================================= 준상은 간단하게 호수 아래 숨어 있는 마수에 대한 정보와 특징 등을 설명했다. “그럼 단숨에 얼려 버리면 되는 건가요?” 리체스가 묻자 가만히 그들의 대화를 경청하던 블레이크는 뒤늦게서야 그가 인식하지 못하는 또다른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준상은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리체스에게 대답했다. “저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듯 하지만, 생각처럼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을 것 같다.” “그럼요?” “글쎄. 정확한 건 부딪혀 봐야 알겠지.” 준상은 그렇게 대답하고는 다시 말했다. “일단 마법과 정령의 힘으로 호수를 남쪽과 북쪽에서부터 중앙 방향으로 얼린다. 정말로 냉기에 취약하다면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오겠지.” “알았어요.” 준상은 대화가 끝나자 바로 엘리를 소환했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블레이크는 다시 한줄기 빛과 함께 잠자리 날개가 달린 요정용이 모습을 드러내고 곧바로 정령과 합체해 강력한 냉기를 발산하기 시작하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호수 주위에 사람들이 있으니 주의하도록.” “염려 마세요.” 먼저 엘리가 날아올라 긴 엽궐련처럼 생긴 호수 북쪽으로부터 강력한 눈보라를 쏟아내기 시작했고, 이어서 리체스의 입에서 마법 주문이 흘러나왔다. “차가운 서릿발이여! 불어오는 눈보라여! 지금 이곳에 얼음의 꽃송이들을 피워라!” 이번에 발동된 마법은 이전에 샌디에이고에서 발동했던 마법과 주문부터 효과까지 매우 비슷한 형태를 지니고 있었다. 다른 점이라면, 이전에 사용했던 마법은 눈의 결정과도 같은 커다란 마법진이 하나 내려 앉으며 주위를 얼려버리는 대신, 이번에 사용한 마법은 수많은 작은 마법진이 중첩되어 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오오...” 그 화려한 마법의 향연에 블레이크는 물론이고 호수 주위에서 액체 질소를 퍼붓고 있던 사람들 역시 모두 놀란 표정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정말 멋진 마법이네요.” “에헴. 내가 원래 이 정도거든.” 서유미의 말에 리체스가 우쭐해 하는 동안 정령과 마법의 힘에 의해 호수는 차근차근 동결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게 호수가 얼기 시작하자, 그 안에서 숨어 있던 마수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물줄기가 닿지 못하는 갑가오리는 물론이고 열심히 눈보라를 쏟아내던 엘리에게까지 물줄기를 쏘아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성난 기세로 물 위에 몸을 드러내며 호수 주위에 늘어선 탱커들에게도 공격을 시작했다. 호수의 모양 자체가 길쭉한 엽궐련 형태이다보니 중앙 부근에서 액체 질소를 퍼붓던 탱커들은 이 기습에 무기력하게 노출되고 말았다. 나름대로 방어시설을 갖추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쏟아지는 강력한 물줄기에 탱커는 양철캔처럼 순식간에 구멍이 뚫려 버렸다. “역시 가만히 있지를 않는군.” 준상은 혀를 차며 모두에게 다시 말했다. “내려간다.” “네!” 갑가오리는 곧바로 고도를 낮추며 호숫가에 일행들을 내려 놓았다. 서유미는 바닥에 내려섬과 동시에 자신의 애병인 아랑도를 꺼내 들다가 물 위로 모습을 드러낸 마수의 모습을 보고는 얼굴을 찌푸렸다. “용?” 거대한 바다뱀의 동체에 짤막한 다리가 붙어 있는 모습은 얼핏 보면 동양식의 용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했으나, 자세히 보면 머리의 형태가 전혀 달랐다. 이 괴물은 특이하게도 눈이 없었는데, 다섯 개로 갈라진 입을 펼치면 마치 불가사리를 붙여 놓은 듯한 형상으로 변한다. 입의 중앙에는 마치 꽃의 수술 같은 기묘한 촉수들이 자라나 있었는데, 준상과 그 동료들이 땅에 내려서자 그 촉수들이 화살처럼 날아들며 공격을 시작했다. “기안님, 부탁드릴게요.” 헤네스는 그렇게 말하며 눈을 감더니 이내 의식의 수면 안에 감추어져 있던 기안의 인격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꾸려면 빨리나 바꾸어 줄 것이지. 이크크!” 기안은 모습을 드러내기가 무섭게 방패를 앞으로 내밀며 일행들을 향해 날아드는 하얀 촉수들을 튕겨내 버렸다. 하지만 마수의 공격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기안이 촉수를 막아내자 이번에는 물줄기와 함께 마치 융단폭격처럼 공격을 쏟아내기 시작한 것이다. “핫!” 이번에는 서유미가 앞으로 나서며 촉수를 단숨에 베어 넘겼다. 한줄기 빛과 함께 허공에 그녀의 손에 들린 식칼이 그어지자 촉수는 단숨에 반토막이 나며 투명한 체액을 사방에 흘려대기 시작한다. “으엑. 기분 나빠. 이거나 먹어라!” 리체스는 요동치는 촉수들의 모습에 치를 떨며 마법을 시전했다. “날카로운 얼음의 창이여! 나의 적을 꿰뚫어라!” 주문이 완성되자 허공에 얼음의 창이 하나씩 생성되더니 마치 기관포처럼 마수를 두들겨 대었다. -키야아아아! 마수는 얼음의 창들이 자신의 전신을 두들기자 물 위로 드러났던 몸을 뒤틀더니 기묘한 안개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안개에 불과했지만, 리체스의 얼음 창들은 그 안개의 벽을 뚫지 못했다. “기이하군.” 그때까지 가만히 서서 동료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준상은 그제서야 천천히 손을 뻗어 그 안에 하얀 불꽃의 덩어리와 냉기의 결정체를 동시에 불러내었다. “그게 뭐에요?” 자신의 마법이 막히자 얼굴을 찌푸리며 어떤 마법을 사용할까 생각에 잠겨 있던 리체스는 준상의 손 위에서 춤을 추듯 빙글빙글 돌고 있는 두 개의 정령력 덩어리를 보자 호기심을 감추지 못하고 바로 질문을 던졌다. “글쎄. 나도 아직 이름을 붙이지는 못했어.” “오오! 새로운 기술이란 말씀이시군요!” “그런 셈이지.” 준상은 그렇게 말하고는 손을 천천히 쳐들었다. 그러자 각기 상극의 힘을 지닌 두 개의 정령력 덩어리는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고, 잠시 뒤에는 하나의 둥근 고리처럼 모습이 변화했다. 고오오오... 리체스는 준상의 손 위에서 기묘한 소리와 함께 요동치는 이 터무니없는 힘의 고리를 보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마른 침을 꼴깍 삼키고 말았다. “이건... 도대체...” 하지만 준상은 무표정한 얼굴로 가만히 손을 뻗어 그것을 마수의 몸 주위에 넓게 퍼진 안개를 향해 쏘아 보냈다. 고리의 진행 속도는 생각처럼 그리 빠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더 위력적이었다. 고리는 갈수록 그 회전 속도를 높여가며 마수의 몸을 감싼 안개를 압박해 들어갔다. 마수는 괴성을 지르며 더욱더 안개를 뿜어내 이 미증유의 힘에 저항하고자 했으나, 두 개의 대정령이 지닌 힘이 응축된 이 고리의 힘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허...” 블레이크는 허탈하기까지 한 표정으로 준상이 쏘아낸 하얀 고리가 안개를 지워 버리는 모습을 지켜 보았다. 준상에게는 미처 말하지 않았지만, 이 안개는 항공 폭격과 포병대의 대규모 포격마저 막아낸 강력한 방어막이었다. 단순히 소재의 특성을 활용한 것이 아닌, 현상으로서 이 정도의 물리력을 막아내는 방어막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에 미군은 특히 주목했다. 그런데, 그 강력한 방어막이 준상이 펼친 기술 하나에 너무나도 허무하게 사라져 가고 있었다. “이건... 무슨 스킬입니까.” 블레이크가 떨리는 음성으로 묻자, 준상은 돌아보지도 않은 채 조용히 대답했다. “스킬이 아니다.” “네?” “퀘스트와는 무관한 힘이다.” “...” 그럴수가. 블레이크는 잠시 아무 말도 못한 채 입만 뻐끔거리고 있었다. 퀘스트로 얻은 힘이라고 해도 놀라 자빠질 판에, 아예 무관한 능력이라니.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한단 말인가. “역시 개선할 필요가 있군.” 준상이 쏘아낸 고리는 마수가 뿜어낸 안개를 모두 지우는데 성공했지만, 아쉽게도 마수의 본체를 타격하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정령에 의지하지 않고 그 힘만을 응축해 쏘아낸 탓에 자유롭게 조종하는 것이 좀처럼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준상이 일단 고리의 힘을 흩어 버리자, 대기하고 있던 기안과 서유미가 동시에 얼어붙은 호수위를 내달려 마수에게로 돌진해 들어갔다. “또 시작이네. 하여튼 돌격 밖에 모른다니까.” 리체스는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그녀들을 엄호하기 위해 다시금 얼음 창의 마법을 준비했다. 준상은 천천히 마수를 향해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구경만 할텐가?” “...” 블레이크는 그 말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물론... 아닙니다.” 그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기안과 서유미의 뒤를 따라 마수에게로 달려 들었다. 준상은 그가 앞으로 달려나가자 그제서야 지금껏 소환하지 않고 있던 카드 형태의 정령들을 단숨에 꺼내 놓았다. 한꺼번에 모습을 드러낸 형형색색의 정령들은 얼어붙은 호수 위에서 방어막을 잃은 채 괴성을 지르고 있는 마수를 향해 일제히 공격을 시작했다. 무기로 삼을 물을 모두 잃고, 방어막 또한 잃은 데다, 운신할 공간조차 제한된 상태이다 보니 마수는 피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기안과 서유미, 그리고 블레이크가 두들기는 대로 다 맞을 수밖에 없었다. “죽이면 안 됩니다!” 블레이크의 외침에 기안과 서유미는 마수의 몸을 난도질하던 손을 멈추고 뒤로 물러나 자신들에게로 다가서는 준상을 바라보았다. 블레이크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뒤로 물러서다가 준상이 마수에게 다가서는 모습에 흠칫 놀랐다. “잠깐...” 뭘 하려는 건가 싶어 얼른 소리를 쳤지만,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준상은 마수에게로 다가가 몸부림치는 놈의 몸을 손으로 움켜 잡았다. “...” 곧바로 이어진 광경에 블레이크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마수가 무슨 길가에 난 잡초도 아니고. 그대로 얼어버린 호수에서 마수의 몸을 그대로 쑥 뽑아 올리는 그 모습이라니.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삽날에 찍힌 지렁이처럼 꿈틀대는 마수의 몸을 준상은 부서진 탱커들이 즐비한 호숫가에 그대로 패대기치기 시작했다. 이걸 뭐라고 불러야 하나. 마수 채찍? 두께만도 아름드리 나무에 버금가는 거대한 마수의 몸통이 호숫가의 땅을 마구 두들기는 그 현실감 없는 모습에 블레이크는 말도 못한 채 입만 벙긋 거릴 뿐이었다. 물론 그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멀찍이 떨어져 전투를 지켜보던 이들 모두가 이 당황스러운 광경에 경악해 하고 있었던 것이다. “괴물...” 딜런은 자기도 모르게 그 단어를 입에 담았다. 펜타곤을 혼자서 박살냈다고 하더니. 도대체 저 말도 안 되는 완력은 뭐란 말인가. 과연 자신과 같은 귀환자가 맞기는 한 걸까. 그런 생각을 품은 것은 딜런이나 블레이크 뿐만이 아니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근처에서 대기 중이던 캐나다의 귀환자들 역시 마찬가지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렇게 주위를 경악 속에 밀어넣은 장본인인 준상은 마침내 마수가 그 무지막지한 타격을 견디다 못해 기절해 버리자, 그제서야 손을 멈추었다. “운송 수단은 준비 되었나.” “무, 물론입니다.” 블레이크는 얼른 멀리서 지켜보던 딜런에게 손을 들어 신호를 해보였고,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딜런은 여전히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글렌으로 하여금 특수 제작된 운반 차량을 가지고 오게끔 했다. 준상은 사람들이 다시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하자, 신기루 꽃으로 통하는 문을 열어 헤네스와 리체스, 그리고 서유미를 돌려보냈다. 그녀들이 다시 모습을 감추자, 준상은 잠시 어딘가로 연락을 취하더니 이내 블레이크를 보며 말했다. “이제 너만 남았다.” 블레이크는 그녀들이 고풍스런 문 안으로 모습을 감추고 다시 그 문마저 사라지는 광경을 멍하니 지켜보다가 준상의 말에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무슨... 뜻입니까.”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는 블레이크를 향해 준상은 손을 뻗으며 대답했다. “이런 뜻이다.” 순간 블레이크는 강대한 어떤 힘이 자신을 끌어당기는 것을 느꼈다. 그는 필사적으로 그 힘에 저항했지만, 다음 순간 준상의 모습이 자신을 향해 쏘아져 오는 것을 느끼고는 반사적으로 숄더 차지를 발동했다. 블레이크는 아까처럼 튕겨나갈 것을 예상하고 다음 행동을 준비했으나, 그런 예상과는 달리 아무런 저항감도 없이 앞으로 휙 딸려 들어갔다. “어?” 블레이크는 얼른 자세를 낮추었지만, 어느 틈엔가 주위의 풍경이 완전히 뒤바뀐 것을 알아차리고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마치 아이들이 낙서해 놓은 것 같은 기묘한 풍경. 꿈에서라면 모를까, 이전까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이 기묘한 공간의 모습에 블레이크는 당황해 하며 어쩔 줄을 몰랐다. “여긴... 도대체.” 급히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곳에는 자신이 들어왔을 입구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것일까. 혼란에 빠져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데, 문득 여기저기 수풀 속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와, 살빛이 새카매.” “일부러 저렇게 칠하고 다니는 건가?” “몰라.” “나도 몰라.” “도대체 넌 아는게 뭐니?” “나도 그게 궁금해.” 요정들이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쑥덕거리는 모습에 블레이크는 긴장하며 몸의 기세를 돋우며 엄폐물을 찾았다. 하지만 미처 마땅한 엄폐물을 찾기도 전에, 이번에는 걸쭉한 남자들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참 짐 싸고 있는데, 이게 무슨.” “난 애 기저귀 갈다 나왔다고.” “말도 마십쇼. 전 빨래하다 왔습니다.” 얼른 돌아보니 머리를 빡빡 밀어버린 건장한 사내 다섯이 투덜거리며 블레이크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은 긴장한 표정으로 자신들을 바라보는 블레이크를 보고는 다시 자기들끼리 쑥덕거렸다. “생김새 보니 이놈이 맞나 보군요.” “그러게. 진짜 새카만데.” “어떻게 살을 태워야 저렇게 되는 거지.” 블레이크는 긴장을 풀지 않은 채 그들을 향해 물었다. “당신들은 누구요?” 그 말에 한 사람이 앞으로 나서며 대답했다. “누구긴. 네놈 선배님이시지.” 이들 가운데 최선임이자, 헤네스에 의해 새로운 영지의 영주로 선택된 블러드로드 오칸은 눈앞에서 긴장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블레이크를 향해 웃으며 다시 말했다. “잘 왔다. 신입.” “...” “천국과 지옥이 교차하는 또다른 세계에 온 것을 진심으로 환영한다.” 00310 트롤러 ========================================================================= 신입이라니.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으나, 지금 눈앞의 거한들에게서 나온 말은 그가 군대에 막 들어갔을 때 조교들에게서 들었던 말과 거의 차이가 없었다. 블레이크는 온몸의 근육을 팽팽하게 긴장시키며 거한들을 바라보았다. 명백하게 전투태세를 취하는 그의 모습에 오칸은 피식 웃으며 동료들에게 말했다. “이거 한 판 해보자는 것 같은데?” 다른 블러드로드들 또한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거야 원.” “요새 저희들이 애 보느라 성격이 많이 유해지긴 했나 봅니다.” “그게 애 보느라 유해진건가. 부인님들 때문에 기를 못 펴고 사는 거지.” “꼭 자기는 아니라는 듯이 말씀하시는 군요.” “크윽. 말이 그렇다는 거야. 말이.” 긴장감 없는 그들의 모습에 블레이크는 얼굴을 찌푸렸다. 아무리 봐도 힘 좋은 동네 아저씨들 이상은 아닌 것 같은데, 묘하게도 빈틈을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빈틈은커녕 오히려 기이한 압박감 같은 것마저 느껴지고 있었다. 이런 느낌, 최근에 느껴본 적이 있다. 링컨 기념관 앞에서 준상을 처음 보았을 때도 이런 식의 압박감을 느꼈다. 정확히 말하자면 보는 것만으로 절로 근육이 긴장되던 준상보다는 다소 약한 느낌이긴 했지만 말이다. 숫자도 상대가 많은데다 예감조차 좋지 않은 상황이고, 덤으로 어딘지 감도 잡히지 않는 기묘한 주위 모습과 그 안에 숨은 채 자신을 포위하고 있는 또 다른 이들까지 감안하면 무작정 싸움을 거는 건 그리 현명하지 못한 행동이다. 그런 생각을 떠올리고 있는데 문득 오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안 되지. 모처럼 취향이 맞는 신입이 들어왔는데 신고식 정도는 치러야 하지 않겠어?” 오칸의 말에 다른 블러드로드들이 맞장구를 쳤다. “후후... 모처럼 몸 좀 풀겠군요.” “너 맞고 산다더니 정말인가 보구나.” “맞아주는 겁니다. 때릴 데가 어디 있다고 손을 댑니까.” “내가 보기엔 제수씨 몸집이 아주 넉넉해 보이더라만.” “그 말 형수님께 그대로 전해 드리죠.” “미안. 내가 잘못했다. 제발 잊어주라.” 주고받는 말은 거의 만담 수준이었지만, 그들의 몸에서 퍼져 나오는 위압감은 이제 블레이크가 아닌 다른 이들의 눈에도 아지랑이처럼 보일 정도로 확연하게 형상화되어 있었다. 꿀꺽. 저토록 확연하게 형상화되는 위압감이라니. 블레이크는 방어복 안이 흥건하게 땀으로 젖어드는 것을 느끼자 주춤 주춤 뒤로 물러섰다. 물론, 그걸 가만히 두고 볼 블러드로드들이 아니다. “이제 와서 그러면 곤란하지.” “맞고 사는 남편의 울분을 느껴봐라!” “맞아 주는 거라며?” “이럴 때 그걸 꼭 따져야겠습니까?” 블러드로드들은 그렇게 대화를 주고받으며 느긋한 걸음으로 블레이크를 에워싸기 시작했다. 블레이크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대화에 여념이 없는 블러드로드 가운데 하나를 노리고 기습적으로 숄더 차지를 감행했다. 선수필승! 하지만 기습을 받은 블러드로드 발드란은 자신을 향해 어깨를 내밀고 돌진해 오는 그 모습을 보고 씩 웃더니 옆으로 슬쩍 피하며 블레이크에게 반격을 가했다. 발드란이 팔꿈치로 내리찍는 동시에 무릎으로 쳐올리자, 블레이크는 화들짝 놀라며 기술을 취소하고 옆으로 몸을 날렸다. 블레이크는 곧바로 다시 몸을 움직여 일단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자 했지만, 다시 몸을 틀어 가속하기도 전에 등판에 강력한 일격이 가해졌다. “컥!” 그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의 그는 미국 내에서도 최강이라고 칭해질 정도의 신체 방어력에 국방부 산하 연구소에서 제작된 최신형 방어복까지 갖춰 입은 상태가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순 숨이 턱 하고 막힐 정도의 타격을 받을 줄이야. 블레이크가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자 발드란은 방금 전에 일격을 가한 블러드로드 루아낙에게 혀를 차며 말했다. “형님, 살살 좀 하십쇼. 그러다 애 잡겠습니다.” 루아낙은 피식 웃으며 그 말에 대꾸했다. “그러는 네놈은.” “제가 뭘요.” “단숨에 목을 부러뜨리려고 작정을 했더만.” “에이, 그 정도는 당연히 피할거라 예상을 한 거죠.” “잘도 그랬겠다.” 그렇게 둘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나머지 블러드로드들이 다시 걸음을 옮겨 블레이크를 다시 에워쌌다. 이래서야 방법이 없다. 이 사내들이 경험도 실력도 자신보다 높으면 높았지, 절대로 낮은 이들이 아님을 깨달은 블레이크는 입술을 깨물고는 지금까지 수많은 퀘스트에서 일발역전의 기회를 만들어준 자신의 필살기를 발동했다. 그것의 이름은, 다름 아닌 광폭. 스킬이 발동되자 그의 눈동자가 붉게 빛나며 핏속에 잠들어 있던 파괴의 본능이 거친 야수의 숨결로 형상화되었다. “어?” 그 모습을 본 블러드로드들이 순간 놀란 표정을 지으며 틈을 보였다. 블레이크가 그 기회를 살려 다시 한 번 발드란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크!” 발드란은 놀란 표정을 지우지 않은 채로 손을 뻗어 블레이크의 두 손을 맞잡았다. 블레이크는 광폭으로 증폭된 파괴력을 모아 단숨에 그를 무릎 꿇리려 했지만, 다음 순간 믿지 못할 일이 일어났다. “이거 놀랬는데. 정말 후배 놈이었구나.” 발드란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는가 싶더니 갑자기 그의 몸에서 무시무시한 기세가 퍼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큭큭. 붉은 공포께서 우리들을 보낸 것이 다 이유가 있었구만요.” 발드란은 서서히 블레이크를 힘으로 찍어 누르며 오칸에게 물었다. “제대로 붙어 봐도 되겠죠?” 오칸은 고개를 끄덕였다. “광전사끼리의 대결이라면 사정 봐줄 필요 없지. 더구나 선배도 못 알아보고 이빨을 들이대는 장래가 촉망되는 미친 후배라면 더더욱.” “크크... 감사합니다.” 발드란은 오칸의 허락이 떨어지자 발을 들어 블레이크의 정강이를 인정사정없이 걷어 찼다. “컥!” 뼈가 부러졌어도 이상하지 않을 강력한 타격에 블레이크는 비명을 질렀고, 그렇게 집중력이 흐트러지자 곧바로 발드란에 의해 바닥에 패대기쳐지고 말았다. “젠장.” 블레이크는 상소리를 내뱉으며 얼른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다음 순간 믿지 못할 광경을 목격하고 말았다. “그렇지 않아도 이걸 써보고 싶어서 근질근질하던 참이었는데, 마침 잘되었군.” 그런 말을 중얼거리며 발드란이 손목 어림을 만지작거리자, 갑자기 그의 몸이 검은 색의 전신 방어복으로 감싸여진 것이다. “후배 상대로 그런 것 까지 쓰는 건 너무 한 거 아니냐?” 블러드로드 가운데 한 명이 혀를 차며 그렇게 말하자 발드란은 손가락을 쥐었다 펴며 대답했다. “후배니까 최선을 다해 상대해줄 필요가 있는 겁니다.” 발드란은 뒤이어 블레이크를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 “자, 덤벼라. 네 놈의 실력, 내가 확인해 주마.” “크아악!”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렇지 않아도 광폭으로 감정이 고양되어 있던 블레이크는 머리 속에서 뭔가 줄이 툭 끊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발드란을 향해 악을 쓰며 달려들었다. “어이쿠.” 발드란은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블레이크의 커다란 주먹을 피하며 그의 가슴을 어깨로 툭 밀어 버렸다. 살짝 어깨를 가져다 대는 정도의 움직임이었지만, 그 일격을 맞는 순간 블레이크는 가슴이 함몰되는 듯한 느낌과 함께 다시금 숨이 턱 막혀 왔다. 가슴을 감싸 쥐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자, 이번에는 발드란이 주먹을 뻗어 왔다. “벌써 끝이냐!” 블레이크는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커다란 주먹을 보는 순간 반사적으로 카운터를 발동했다. 퍽! 거의 동시에 블레이크와 발드란은 서로의 헬멧에 강렬한 일격을 가했다. 그야말로 완벽한 크로스 카운터. “큭...” 발드란은 예상치 못한 반격에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지만, 모처럼 회심의 일격을 성공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블레이크 역시 그리 성한 상태는 아니었다. 블레이크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이럴... 수가...” 최강의 방어력을 지녔다고 자부하던 자신이 주먹질 한 방에 머리가 흔들릴 정도라니. 블레이크는 도무지 지금 자신이 처한 현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건 그의 능력이 부족한 탓이 아니었다. 지금 발드란이 착용한 방어복은 리체스에 의해 마법이 부여되고, 다시 준상이 강화처리까지 한 특제품. 최고급 아이템으로 무장한 데다, 블러드로드는 기본적으로 광전사 콤보의 레어급에 해당하는 능력의 소유자. 게다가, 예전이라면 몰라도 지금의 블러드로드들은 부인들이 만든 아이템 덕분에 시드의 효과를 제대로 부여받고 있는 상태였다. 물론 장착한 시드의 수는 블레이크 쪽이 더 많지만, 블러드로드들이 아이템을 통해 장착한 시드들은 준상이 한계까지 각성시킨 것들이라는 차이가 있다. 자잘하게 많은 수의 시드를 이것저것 장착하느니, 확실하게 자신에게 필요한 것으로만 집중적으로 장착한 블러드로드들의 능력이 더 높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 그런 발드란에게 반격을 가해 뒤로 물러나게 한 것만으로도 실로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윽... 이거 장난이 아닌데.” 발드란이 머리를 흔들며 말하자, 다른 블러드로드들이 그를 비웃었다. “잘 하는 짓이다. 신입한테 한 방 먹기나 하고.” “그러게 말입니다. 너무 놀아서 녹이 슬었나.” 발드란은 어깨를 한번 휘돌리며 다시 다가섰고, 블레이크는 광폭의 효과가 사라져 가는 것을 느끼며 허탈감에 빠져야만 했다. 블레이크가 요정계에서 블러드로드들에게 그렇게 호된 신고식을 치르고 있는 동안, 준상은 마수의 신체를 미군들이 준비한 특수 차량에 담는 일을 도왔다. 녹초가 되어 정신을 잃기는 했지만, 혹시라도 깨어나 난동을 부릴 경우 일반인으로서는 감당이 되지 않으니 글렌이 다시금 도움을 청한 것이다. “수고하셨습니다.” 딜런은 모든 작업이 끝나자 안도하며 준상에게 인사하다가 뭔가 허전한 느낌을 받았다. 뭔가 있어야 할 것이 없는 느낌이랄까. 그게 뭘까 잠시 고민하던 딜런은 그제서야 블레이크의 모습이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잠깐. 블레이크 중사 못 보셨습니까?” “...” 준상은 대답하지 않은 채 무심하게 고개를 돌려 한쪽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호숫가 근처에 석상처럼 우뚝 선 블레이크의 모습이 딜런의 눈에 들어왔다. 분명히 블레이크는 지금 요정계에서 블러드로드들에게 둘러싸여 신고식을 치르는 상황일텐데, 이게 어찌된 일일까. 해답은 간단했다. 지금 딜런의 눈에 보이는 블레이크는 준상이 디코이 능력을 이용해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했던 것이다. 준상은 블레이크가 달려드는 순간 그를 정령의 문으로 요정계에 끌어들임과 동시에 디코이를 실행해 그의 모습을 한 허상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때 셰퍼드 중령이 움직였다. 말실수로 인해 부하들로부터 순식간에 왕따 당하는 처지가 되긴 했지만, 과정이야 어찌 되었든 일단 임무는 성공인지라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던 그는 이번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자국의 군인이 홀로 호숫가에 서 있는 모습을 발견하자 이것을 앞서의 실언을 만회할 좋은 기회로 여겼다. 셰퍼드 중령은 블레이크에게 다가가며 푸근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블레이크 중사. 수고가 많았네. 이제 전투도 끝났으니 이만 방어복도 벗고 가서 휴식을...” 그렇게 말하며 중령은 블레이크의 어깨를 툭하고 쳤다. 그러자. 오연한 표정으로 호숫가를 바라보고 있던 블레이크의 모습이 갑자기 스르르 사라져 버린다. “어?” 셰퍼드 중령은 갑자기 눈앞에서 블레이크의 모습이 흩어지며 사라져 버리자 너무나 놀라 그대로 굳어 버렸다. 멀찍이서 셰퍼드 중령이 블레이크에게 다가서는 모습을 눈살을 찌푸린 채 바라보고 있던 딜런은 득달같이 달려가 그에게 외쳤다. “중령님!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셰퍼드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는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몰라. 나도 어떻게 된 건지. 툭 건드리니까 갑자기 스르르 사라져 버렸네.” “...” 딜런은 차가운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정말 모르십니까?” “물론일세. 자네들도 모두 보지 않았나.” “...” 딜런은 입술을 깨물고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바로 어딘가로 연락을 시작했다. 블레이크는 현존하는 미국의 귀환자들 가운데 최강의 실력을 지닌 에이스. 그런 이가 갑자기 사라져 버린 사건은 결코 가볍게 넘어갈 수가 없는 일이었다. 준상은 표정이 굳은 채 어디론가 바쁘게 연락을 취하는 딜런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글렌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아무래도 얘기가 길어질 듯 하니, 난 이만 가보겠소.” 어차피 보상은 사전에 얘기된 대로 치러질 것이니, 더 이상 이곳에 남아있을 필요가 없다. 글렌 소령은 그 말을 듣고는 준상에게 경례를 해보였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 준상은 글렌에게 가볍게 목례를 해보이고는 이내 위상전이를 이용해 그의 눈앞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곧바로 도로를 따라 내려가다가 오면서 보았던 슬리핑 장 주립 공원에 정령의 문을 하나 연 준상은 그곳을 통해 요정계로 귀환했다. “먼저 온 사람이 있을텐데.” 정령의 문을 열기 위해 요정들을 데리고 왔던 보좌관은 준상에게 공손한 태도로 대답했다. “그 새카만 분이라면 아직 아저씨들과 투닥거리고 있을 거에요.” “...”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신의 몸에 설치된 정령의 문과 연결된 출구로 향했다. 하지만 그가 도착했을 때는 블레이크는 정신을 잃은 채 블러드러드들에 옮겨지고 있는 중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블러드로드들은 준상의 모습을 보자 얼른 각 잡힌 부동자세를 취하며 예를 취했다. 준상은 살짝 고개를 움직여 그들의 예에 답하고는 바로 물었다. “어떤가.” 밑도 끝도 없는 말이었지만, 선임인 오칸이 바로 그 질문에 답했다. “상당합니다. 아무런 장비 없이 일대일로는 저라고 해도 가볍게 보기 어려운 수준입니다.” “그런가.” 하긴 그 정도가 아니라면 힘들게 납치까지 해서 데리고 온 보람이 없다. 준상은 만족을 표시하며 블레이크를 옮기도록 지시했다. 00311 트롤러 ========================================================================= 여왕의 거처에 돌아오자, 먼저 돌아와 있던 여자들이 누리와 놀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누리야. 아빠 오셨네. 어서 오세요. 해봐.” “바우아!” 방금 전까지 무표정에 가깝던 준상의 얼굴이 누리의 외침을 듣는 순간 이내 헤벌죽 벌어진다. “우리 누리. 아빠 보고 싶었니?” “아우!” “아빠도 보고 싶었단다.” 그렇게 한참이나 본인에게는 감동을 다른 이에게는 웃음을 주며 해후의 시간을 가진 준상은 누리가 다시 식사를 마치고 잠이 들자, 그제서야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몸을 일으켰다. “다들 다친 데는 없고?” 준상의 말에 헤네스는 입을 삐죽 내밀며 대답했다. “참 빨리도 물어보시네요.” “정말이지. 누리 때문에 요새 우린 완전히 뒷전이라니까.” 리체스마저 삐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자, 준상은 뒤통수를 긁으며 사과했다. “미안.” 그 모습을 보고 두 반려는 다시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농담이에요. 피곤하실텐데 가서 씻고 쉬세요.” “알았어.” 준상이 온천이 있는 곳으로 향하자 조금 떨어져서 그 모습을 보던 서유미가 그제서야 입을 열었다. “정말... 제가 알던 그 분이 아닌 것 같네요.” 혹시 기분 나쁠까 싶어 조심스러운 기색으로 입을 열었지만, 헤네스와 리체스는 다시금 그 말에 웃음을 지었다. “하긴 저희들도 가끔은 놀라니까요.” “누가 아니래요.” 그렇게 웃으며 담소를 나누던 중에 문득 리체스가 생각 났다는 듯이 서유미에게 물었다. “방어복은 어때요. 이상하지는 않던가요?” 서유미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주 좋았어요. 정말 대단하던데요. 갈아입으려면 여러모로 번거로운 점이 많았는데, 여왕님 덕분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정말 감사합니다.” 그러자 리체스는 살짝 눈을 흘기며 서유미에게 말했다. “그런 호칭은 싫어요. 실제로 지금은 여왕 자리도 물려준 상태고.” “그럼...” “헤네스처럼 언니라고 불러주세요.” “아...” “한 번 시험 삼아 불러봐요.” 서유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 언니.” “네? 안 들려요. 뭐라구요?” 다시 한 번 재촉이 이어지자 서유미는 그제서야 조금 더 큰 목소리로 말했다. “리체스 언니.” “후훗. 그래요. 앞으로는 그렇게 부르도록 해요.” “네.”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던 헤네스가 이내 손바닥을 마주하며 말했다. “아, 참. 방어복도 준상씨한테 강화해 달라고 하세요.” “네? 하지만...” “왜요?” “이 칼도 별다른 대가를 받지 않고 강화해 주셨는데, 이런 것까지 부탁드리기는 좀...” 그러자 어느 틈엔가 몸을 씻고 나온 준상이 그 말에 대답했다. “대가라면 받았다.” 서유미가 화들짝 놀라며 바라보자 준상은 수건으로 파릇파릇하게 머리가 나기 시작한 머리를 닦으며 말을 이었다. “네 미래. 나한테 맡긴다고 하지 않았나?” “...” 서유미는 가운을 입은 채 나타난 준상의 모습을 보고 놀란 채 대답을 하지 못했다. 모자와 선글라스를 벗은 그 모습이 너무나 파격적이어서 순간 다른 사람인가 싶었던 것이다. “여보. 갑자기 그런 모습을 보이니까 유미가 놀라잖아요.” “응?” 준상은 그제서야 자신의 상황을 깨닫고 얼른 모자와 선글라스를 눌러썼지만,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헤네스는 쿡쿡거리며 서유미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일전에 화염의 대정령과 한바탕 하다가 머리를 홀랑 태워 먹었지 뭐에요.” “아...” “조만간 다시 나긴 하겠지만, 당분간은 저 모습이니 이해해 주세요.” “그, 그렇군요.” 조금 어수선한 분위기가 가라앉자 준상은 다시 서유미에게 말했다. “당분간 요정계에서 지내는 건 어떤가.” “네?” 갑작스런 제안에 당사자인 서유미는 물론이거니와 헤네스와 리체스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준상은 그들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일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현재 퀘스트로부터 벗어난 상태다. 단순히 퀘스트만 안 들어오면 다행인데, 메신저 같은 연락 수단도 불통이 돼서 여러모로 불편한 점이 많다. 그래서라고 하기는 뭐하지만, 당분간 이곳에서 지내며 연락을 담당해 줬으면 하는데.” 일리가 있는 얘기였다. 전에는 메신저라는 훌륭한 통신 수단이 있어서 요정계나 헤네스의 고향인 이벨류아, 또는 광전사의 본거지인 얀트훈센 같은 장소에서도 어렵지 않게 임서윤이나 지구의 다른 귀환자들과 연락이 가능했지만, 정령의 파동 때문에 그것이 불가능해진 지금은 지구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즉각적인 연락이나 상황대처를 하기 어려운 점이 많았다. 요정의 돌을 이식해서 요정들의 의사 소통 방식을 적용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긴 하지만, 임서윤 등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딜런이나 그 외 다른 귀환자들까지 모두 그런 방식을 적용하는 건 여러 가지로 문제가 있었다. 서유미는 가만히 준상은 바라보다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유는 그것 뿐인가요?” “일단은.” “...” 어쩐지 그냥 좋다고 하자니 뭔가 미심쩍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한 복잡한 느낌. 헤네스나 리체스야 그렇다 치더라도 준상은 엄연한 현대 한국인이니 그런 그가 두 사람의 반려를 맞이한 것이 역시 마음에 걸리는 탓이다. 준상은 별로 내키지 않아 하는 서유미의 모습에 다시 말을 이었다. “이곳으로 거처를 옮기면 좋은 점이 한 가지 더 있다.” “그게... 뭐죠?” “적어도 이곳에서는 마수 같은 것들이 출현할 위험이 없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지. 물론 만약의 사태라는 건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더라도 리체스가 모든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이곳이 지구보다 훨씬 안전한 건 따로 설명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준상의 말에 서유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만이라면 문제가 없지만, 그녀에게는 어릴 때부터 자신을 키워준 부모나 다름 없는 노부부가 있다. 서유미 본인이야 이제 힘을 어느 정도 갖추었으니 문제가 없지만, 그녀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집 근처에 마수가 출현하기라도 하면 큰일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이곳에서라면 그런 위험으로부터 충분히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다. 그 점이 서유미의 마음을 움직였다. “이곳으로 모시고 싶은 분들이 있는데... 괜찮을까요?” 당연히 처음부터 그 점을 노리고 말을 꺼낸 것이니 거부할 이유가 없다. “상관은 없지만, 한 번 들어오면 아무래도 바깥의 세상과는 쉽게 내왕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어차피 자식도 없이 자신 하나만을 보고 지금까지 은거하다시피 지내오신 분들이다. 은연중에 자신에 관한 나쁜 소문이 돌아서 주위의 이웃들과도 사이가 좋지 못한 것도 분명한 사실. 지구에서의 생활과는 다소 차이가 있겠지만, 유쾌한 요정들이라면 오히려 그분들의 좋은 친구가 되어줄 수도 있을 것이다. “괜찮아요.” 서유미가 고개를 끄덕이자 헤네스가 준상에게 물었다. “그 분들이 사시려면 집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준상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바로 대답했다. “그거라면 문제없다. 어차피 조만간 블러드로드들이 영지로 떠날테니 그들이 머물던 집을 이용해도 될 일이고, 그것으로 부족하다면 컨테이너 하우스 같은 걸 가져다 놓는 방법도 있지.” “아... 그러면 되겠네요.” 일단 그렇게 결정이 되자 그 뒤는 일사천리였다. 당분간 서유미가 길드에서 떠나 있을 것임을 알리자 임서윤은 조금 아쉬워하는 기색이었지만, 길드를 떠나는 것도 아니고 파티가 유지되는 한 퀘스트 진행은 길드원들과 함께 하게 될테니 큰 문제는 없었다. 서유미 본인의 경우에도 진세아나 정다빈, 그리고 손가은처럼 길드 초기부터 함께 지낸 이들을 제외하고는 그리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없는데다, 요즘 들어 정부나 친부 쪽에서 비공식 세계 랭킹 1위인 그녀를 홍보 등에 활용하기 위해 자꾸만 접촉을 해오던 상황이라 오히려 속으로는 다행스러워 하고 있었다. 한편. 블러드로드들에게 두들겨 맞아 정신을 잃었던 블레이크는 이내 그 부인들이 찾아와 회복 마법을 걸어주자 바로 정신을 차렸다. “정신이 좀 드나요?” 후덕한 인상의 아줌마 요정인 유니아란이 웃으며 묻자, 블레이크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가 눈을 뜬 곳은 조금 신경써서 지은 느낌의 오두막이었지만, 바깥의 풍경은 정신을 잃기 전에 보았던 기묘한 모습 그대로였다. “여기는... 도대체 어딥니까?” 블레이크의 말에 유니아란은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로 대답했다. “이곳은 요정계랍니다.” “요정계?” “네. 저희들 요정들이 태어나고 자라는 세상이지요.” “...” 이게 도대체 무슨 영문 모를 소리인지. 블레이크는 얼굴을 찌푸리며 유니아란을 바라보았지만, 다음 순간 그녀의 등 뒤에 돋아나 있는 반투명한 날개를 보고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유니아란은 그 모습을 보고는 웃으며 대답했다. “하긴 처음 보신 분들은 제가 요정이라고 하면 잘 안 믿더라구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날개를 파닥여 그 후덕한 몸을 공중으로 띄워 올린 채 춤을 추듯 제 자리에서 한 바퀴 돌아 보였다. “아유, 애를 낳고 나니까 몸이 불어서. 호호호.” “...” 남편인 오칸이 들었다면 썩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을 법한 말을 거침없이 입에 담은 유니아란은 땅에 내려서더니 잠시 고개를 돌리고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다가 블레이크를 향해 말했다. “준상님이 곧 오신대요. 먹을 걸 조금 가져왔으니 먹으면서 쉬고 계세요.” “...” 블레이크는 그 말을 듣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박준상. 역시 그가 이 모든 상황을 일으킨 원흉이었단 말인가. 유니아란은 굳은 표정으로 주먹을 불끈 쥐는 블레이크의 모습에 쓴웃음을 짓고는 이내 오두막을 빠져 나갔다. 잠시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 있던 블레이크는 이내 오두막 밖에서 자신을 훔쳐 보는 시선들을 느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달팽이 눈처럼 머리를 감추는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블레이크는 방금 전 그 아줌마 요정이 했던 말을 다시금 되새겼다. “요정계라고 했던가.” 그렇게 중얼거리던 블레이크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오두막 밖으로 걸어나갔다. 그러자 근처에 숨어서 지켜보던 요정들이 일제히 다시 모습을 감춘다. 하지만 블레이크는 알 수 있었다. 자신을 지켜보던 요정들이 어디론가 가버린 것이 아니라 단지 모습을 감추기만 한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개중에는 다시 수풀 속에서 머리를 빠꼼이 내밀고 블레이크를 훔쳐보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가 말을 걸면 하나 같이 꺅꺅거리며 도망가기 바쁘다. 흑인으로 태어나 이런 저런 차별을 받으며 자라왔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동물원 원숭이 취급을 받기는 또 처음이라 블레이크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미치겠군.” 블레이크는 이내 요정들에게 무언가를 물어보기를 포기하고 터덜터덜 하염없이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이어지는 것은 처음 보았던 그대로 아이들이 낙서해 놓은 듯한 기묘한 풍경 뿐이다. 블레이크는 한참이나 그렇게 걸음을 옮기다가 결국 허탈한 기분이 되어 근처의 바위에 주저 앉을 수밖에 없었다. “도망칠 수 있으면 쳐보라 이건가.” 딱히 누구에게 한 말이 아니다. 그저 허탈한 기분에 자신도 모르게 나온 혼잣말. 하지만 곧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그 말대로다.” 블레이크는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누구냐!” 그러자 그의 눈앞에 한 사람이 스르르 모습을 드러냈다. 빵모자를 눌러쓰고 검은 선글라스를 쓴 그 모습은 다름 아닌 준상이었다. 블레이크는 준상을 보고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날 어쩔 셈이지?” 준상은 블레이크를 바라보며 조용히 대답했다. “의문을 품어 본 적이 없나.” “뭘 말인가?” “어째서 이 모든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 그건 귀환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품어 보았던 의문이다. 준상은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블레이크를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들어보겠나?” “...” 블레이크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준상은 곧바로 퀘스트와 시드, 그리고 수확의 날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했다. “그런...” 블레이크는 자신의 머리 속에 시드가 들어 있다는 얘기를 듣고는 충격에 빠졌다. 이유 없이 능력이 주어지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했지만, 이런 식일 줄은 미처 생각지도 못한 탓이다. 그것도 모르고, 점점 강해지는 스스로의 모습에 우쭐해 하던 일이 떠오르자 블레이크의 입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탄식이 터져 나왔다. 준상은 혼란스러워 하는 블레이크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를 도와라.” “무슨.” “네 도움이 필요하다.” “...” “시간을 줄 테니 잘 생각해 보도록.” 밑도 끝도 없는 그 말에 블레이크는 멍한 표정을 지었지만, 준상은 말이 끝나자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그 자리를 떠났다. 블레이크는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허...” 거절 따위는 생각지도 않는다는 듯한 준상의 태도에 기가 막힌 탓이다. 말도 없이 이 영문 모를 곳으로 자신을 납치하더니, 이제는 다짜고짜 엄청난 비밀을 늘어놓고는 자신을 도우라 명령을 하고 있다. 하지만 너무 당당하니 오히려 화도 나지 않는다. 당황스러운 건 어쩔 수 없지만 말이다. “미치겠군.” 블레이크는 그대로 땅바닥에 벌러덩 누워 버렸다. 그러자 준상과 대화를 나누고 있을 동안 모습을 숨기고 있던 요정들이 그의 모습을 보며 속닥이기 시작했다. “죽은 건가?” “설마.” “가슴이 움직이잖아. 아직 살아 있어.” “도와줘야 하지 않을까?” “네가 먼저 가봐.” “하지만.” 그렇게 속닥이던 요정 가운데 하나가 나뭇가지 하나를 집더니 땅바닥에 벌렁 누워 있는 블레이크에게 다가와 다리를 툭툭 건드렸다. “...” 하지만 블레이크가 말없이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화들짝 놀라며 후다닥 도망가 버렸다. 뭐랄까. 긴장감 없는 그들의 모습에 블레이크는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때 블레이크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전투로 인해 몸을 격하게 움직인데다, 한참이나 요정계를 헤집고 다니다 보니 허기가 몰려 오기 시작한 것이다. 아까 아줌마 요정이 먹을 것을 챙겨왔다고 했던 것을 떠올리고 몸을 일으키려는데, 문득 요정 가운데 하나가 머뭇거리며 블레이크에게 다가와 뭔가를 내밀었다. “...” 블레이크가 받아들자 요정은 꺅꺅 거리며 다시 도망가 버린다. “이거 참.” 쓴웃음을 지으며 도망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블레이크는 요정이 건넨 것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영문 표기의 포장지가 씌워진 초코바였다. “...” 이젠 도대체 뭐가 뭔지. 자신의 손에 쥐어진 초코바를 잠시 멍하니 바라보던 블레이크는 이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포장지를 벗겨 내용물을 한 입 깨물었다. 배가 고파서 그런지는 몰라도, 초코바는 제법 맛이 좋았다. 00312 트롤러 ========================================================================= 다음날. 요정계 이곳 저곳을 헤매던 블레이크는 결국 출구를 찾지 못한 채 자신에게 배정된 작은 오두막으로 돌아와 잠이 들었었다.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여러모로 피곤했던 하루였던 탓에 곤하게 잠을 자고 있던 그는, 문득 누군가 집 안으로 들어오는 인기척을 느끼자 바로 잠에서 깨어났다. “오, 깼나? 감이 좋은 걸?” “...” 바라보니 전날 자신을 흠씬 두들겨 팼던 사내 중 한 명이었다. 이름이 뭐랬더라. 발 어쩌고 였던 것 같은데. 어쨌거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그 인물은 블레이크를 보며 씩 웃더니 이렇게 말했다. “일어났으면 따라와. 어제는 경황중이라 넘어갔지만, 이곳에 왔으면 밥값은 해야 하지 않겠나? 가뿐하게 일하고 먹는 아침 식사만큼 맛있는 것도 없지.” “...” 그렇게 말하고 휙 나가버리는 모습에 블레이크는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방금 전 얘기는 결국 식사를 하고 싶으면 일을 하라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하다못해 죄수도 밥은 굶기지 않는 세상에서 살다온 블레이크로서는 이 상황 자체가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안 올건가?” 오두막 밖에서 다시 한 번 들려오는 그 말에 블레이크는 결국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밖으로 나가자 이전에 자신을 데리러 왔던 다섯 명의 사내들이 커다란 광주리를 짊어진 채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자, 이건 신입 네 몫이다.” “...” 그렇게 말하며 건네주는 광주리를 엉겁결에 받아들던 블레이크는 순간 풀로 엮은 듯 보이는 뚜껑 안쪽에서 확 풍겨 나오는 구린 냄새에 기겁을 하고 말았다. “헉!” 깜짝 놀라 광주리를 떨구자, 사방으로 펼쳐지는 황금색의 물결. 그것은 바로 똥기저귀였다. “야! 그걸 떨구면 어떻게 해!” “아, 진짜. 어우... 냄새. 빨리 못 담아!” “발드란! 신입 몫은 이불이었잖아! 왜 저걸 건네 준거야?” “끙... 그냥 장난 좀 친 건데. 에이씨.” 발드란은 투덜거리며 쏟아져 나온 똥기저귀들을 다시 광주리 안에 담는다. 그 모습에 얼이 빠져 있는 블레이크에게 오칸이 다시 사람이 들어가 누워도 될 것 같은 큼지막한 광주리를 건넨다. “신입 몫은 이거다. 들어.” “...” 또 방금 전 같은 똥기저귀가 아닌가 하고 흠칫 놀라자, 오칸은 광주리 안을 열어 보이며 다시 말했다. “자식이 놀래기는. 그냥 이불이다.” “...” “어서 들어. 빨리 안 끝내면 아침 밥 없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하지만 일대일로도 못 이기는 상대가 무려 다섯이나 둘러서 있는 판에 못하겠다고 들이받을 수도 없는 일. 결국 블레이크는 다시 한숨을 내쉬며 오칸이 건네주는 광주리를 받아들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곧바로 근처 계곡으로 내려가 빨래를 시작했다. 아이들이 낙서해 놓은 듯한 기묘한 풍경을 따라 흐르는, 너무나 맑아서 차마 거기다 놓고 빨래를 하기가 미안해질 정도의 계곡물 주위에 빨래를 내려놓은 다섯 명의 건장한 사내들은 이내 풍경과는 영 안 어울리는 커다란 고무 대야를 꺼내더니 블레이크가 지고 온 광주리의 이불을 그 안에 담았다. “야, 신입.” “...” “와서 밟아.” “...” 자세히 보니 제법 양이 많다. 블레이크는 이런 식으로 빨래를 해본 적이 없었지만 일단은 발드란이 시키는 대로 대야 안으로 들어가 이불을 밟기 시작했다. 발드란은 곧바로 동이에 물을 담아 대야 안에 붓더니 역시나 풍경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플라스틱 용기의 세제를 꺼내고는 개량컵으로 양을 재 대야 안에 넣었다. “그만 하랄 때까지 계속 밟아. 알았냐?” “...” “알았냐고!” “네.” 그러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다른 사내들이 발드란에게 한 마디 했다. “넌 왜 애를 갈구고 그러냐?” “그러게. 어제 한 방 먹은 게 그렇게 억울했냐?” “아, 진짜. 뭔 말을 못해.” 발드란은 투덜거리며 냄새 나는 똥기저귀들을 물로 대충 헹군 후 열심히 빨래를 시작한다. 블레이크가 이불들을 밟으면서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발드란처럼 기저귀를 빠는 남자들도 있고, 아기 옷처럼 보이는 작은 옷들을 빠는 사내도 있었다. “그나저나 이 짓도 처음에는 그렇게 하기 싫더니, 막상 그만 둔다고 생각하니까 뭔가 좀 서운하네.” “그럼 남아서 계속 하시던가요.” “끙. 말이 그렇다는 거지. 하여튼 뭔 말을 못해.” 자기보다도 강한 남자들이 뭐가 아쉬워서 이렇게 개울물에 모여 빨래나 하고 있는건지, 블레이크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묘한 건 그렇게 투덜대면서도 정말로 싫은 기색을 보이는 사람은 없다는 점이다. 한참을 그렇게 열심히 빨래를 하던 사내들은, 가지고 온 광주리가 비자 세탁물과 이불들을 꾹 짜서 물기를 대충 털고나서야 비로소 다른 광주리에서 아침 식사를 꺼냈다. “자, 먹자.” 그들이 가져온 아침 식사는 이름을 알 수 없는 묘한 형태의 과일 서너가지와 빵인지 떡인지 헷갈리는 기묘한 음식과 꿀이 전부였다. 가짓수는 적었지만, 사내들의 덩치를 고려한 탓인지 양이 제법 많아서 블레이크도 제법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다. 그렇게 아침식사를 마치자, 오칸이 품속에서 작은 병을 여섯 개 꺼냈다. “그럼, 마무리를 해야지.” “흐흐, 역시 이게 빠지면 안 되죠.” “이 맛에 빨래를 한다니까.” 오칸은 동료들에게 작은 병을 하나씩 나누어 주고는 마지막으로 뭔가 싶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블레이크에게도 병을 건네 주었다. “한 번에 마시지 말고, 천천히 음미해 가면서 마셔라.” “이게... 뭡니까?” “술.” “술이요?” “그래. 기가 막힌 술이지.” “...” 무슨 술을 향수 샘플이나 담으면 딱 알맞을 것 같은 코딱지 만한 병에 담아 마시는 건지. 뭔가 좀 미심쩍기는 했지만, 사내들이 먼저 병을 열자 황홀하다 싶을 정도로 매혹적인 꽃 향기가 화악 퍼져 나온다. “크으, 죽인다.” 블러드로드들은 병에 입을 대고 향기를 깊게 음미하며 내용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흘러나온 냄새만 맡아도 그 달콤한 향기에 침이 입 안에 고일 정도라, 블레이크는 결국 참지 못하고 병을 열어 그 안의 내용물을 마셔 보았다. “아...” 이럴수가. 도대체 이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수많은 술을 접해본 그였지만, 이렇게 혀에 닿는 것만으로도 황홀한 기분이 드는 술은 정말이지 생전 처음이었다. “젠장. 벌써 다 마셨네.” “에휴. 영주 같은 거 안 시켜줘도 좋으니까 이거나 실컷 마시게 해주면 좋을텐데.” 발드란은 그렇게 투덜거리다가 아직 병을 비우지 않은 블레이크를 보고는 다시 말했다. “뭐해? 안 마실거면 이리 내놔.” “마, 마십니다.” 블레이크는 빼앗길까 두려운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남은 술을 모조리 입안에 털어 넣었다. “아아...” 그리고는 몸이 붕 뜨는 듯한 그 황홀한 기분에 취해 몸을 떨었다. “자, 다 마셨으면 시작하자.” “네.” 황홀경에 빠져 잠시 넋이 나가 있던 블레이크였지만, 곧바로 이어지는 광경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날고 있었다. 근육이 울퉁불퉁하게 솟아난 건장한 다섯 사내들이, 마치 요정이라도 된 것처럼 그의 눈앞에서 하늘로 솟아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자유롭게 하늘을 날아 오르더니 곧바로 높게 솟은 나무들 사이를 오가며 곳곳에 줄을 치기 시작했고, 그 작업이 완료되자 방금 세탁한 기저귀며 옷가지들을 그곳에 널기 시작한다. “신입! 멍하니 서있지 말고 이불 가지고 와!” “네?” “얘기 안 해줬나? 그 술 먹으면 날 수 있게 돼.” “...” 그럴 수가. 블레이크는 자신의 손에 쥐어진 작은 병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천천히 허공으로 몸을 띄워 보았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그의 크고 검은 육중한 체구가 하늘로 떠오른다. “말도... 안 돼.” 자신의 손을 바라보며 멍해 있는데, 발드란이 내려오며 말했다. “쯧, 빨리 가져 오라니까.” “죄, 죄송합니다.” “말로만 하지 말고 거기 들어.” “네.” 블레이크는 발드란에게 이끌려 광주리를 짊어진 채 하늘을 날며 계곡에 빨래를 널었다. 기계의 힘을 빌지 않은 최초의 비행이 고작 빨래를 너는 작업이었다는 것이 좀 그렇긴 했지만, 자유롭게 하늘을 누비는 그 체험은 지금까지 수많은 일을 겪어 왔던 블레이크로서도 뭐라 쉽게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대단한 감동을 주었다. 마침내 모든 빨래를 너는 작업이 끝나자, 계곡은 온통 하얀 색의 깃발로 가득 찬 듯한 모습이 되었다. “어때, 신입. 멋지지?” “네.” 조금은 남다른 감회에 젖은 채 그 빨래들을 바라보고 있던 블레이크는 어깨를 툭 치며 건네진 오칸의 말에 화들짝 놀라며 대답하다가, 문득 주머니 속에 넣어둔 휴대폰이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얼른 휴대폰을 꺼내서 확인해 보았다. 새로운 퀘스트가 도착했습니다 -5분뒤 퀘스트 수행을 위한 장소로 전송됩니다. 안전한 장소로 이동해 주십시오. (남은시간: 4분 41초) “이런.” 퀘스트가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보고 블레이크는 모처럼 좋았던 기분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오칸은 그 모습을 보고는 블레이크에게 다시 말했다. “뭔가 일이 생긴건가?” “네.” “그럼 어서 가봐. 여기 일은 다 끝났으니.” “감사합니다.” 블레이크는 곧바로 개울가로 올라가 사물함을 꺼낸 다음 옷을 벗고 방어복으로 갈아입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블러드로드들은 그의 우람한 몸을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침음을 삼키고 말았다. “엄청... 나군.” “저럴수가.”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가 이내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하지만 블레이크는 그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얼른 방어복을 모두 챙겨 입자 사물함을 다시 집어넣고 숲속으로 들어가 적당한 공터에 자리를 잡았다. 그렇게 잠시 기다리자 마침내 한줄기 빛이 그의 몸을 감싸며 전송이 이루어진다. 전송이 끝나자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곧바로 그의 뒤를 이어서 같은 형태의 방어복을 입은 사람 셋이 한줄기 빛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다. 그들 중 하나가 블레이크를 알아보고는 급히 소리쳤다. “교관님. 무사하셨군요!” 하지만 곧이어 빈정거리는 목소리가 이어진다. “교관은 얼어 죽을. 탈영병 따위한테 무슨 존칭이야?” 헬멧에 가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저 목소리는 분명히 존슨 소위일 것이다. 이들은 현재 미군에 속한 귀환자들 가운데서도 특히 촉망 받는 인재들이다. 교육 수준부터 시작해서 자라온 배경에 이르기까지, 고등학교만 간신히 졸업하고 입대한 블레이크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엘리트들이다. 이들이 자신과 같은 파티에 배속된 것은, 그들의 능력을 높여 차후 귀환자들을 이끌 지휘관으로 삼기 위해서였다. 그런 그들에게 있어 대학 문턱도 밟아 보지 못한 흑인 중사 나부랭이가 자신들의 교관으로 있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 방금 전에 교관님이라고 불러준 해밀튼 소위는 그나마 그런 경향이 덜했지만, 존슨 소위나 유일한 홍일점인 맥밀란 소위의 경우에는 작전 중을 제외하고는 얼굴조차 마주치려 하지 않고 있었다. “패트릭. 말이 심하잖아!” 패트릭은 존슨 소위의 이름이다. “말이 심하긴. 평시도 아니고 준전시 상황에서 군무 이탈을 벌인 건 엄연한 사실 아닌가?” “그건...” 블레이크는 그들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쉬고 말았다. “후...” 딱히 큰 걸 기대 했던 것은 아니지만, 머리에 솜털도 벗겨지지 않은 애송이들한테 이런 말을 들으려고 입대를 했던 것은 아닐텐데. “아직 탈영이라고 확정된 것도 아니잖아! 당장 교관님에게 사과해!” 해밀튼은 다시 그렇게 말했지만, 존슨은 코웃음을 쳤다. “웃기는 소리.” 그리고는 팔짱을 낀 채 관망하고 있는 맥밀란 소위를 향해 말했다. “리즈. 네 생각에도 내가 사과를 해야 하나?” 그 말에 맥밀란은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정확한 사유는 확인해 봐야겠지만, 방어복까지 챙겨 입고 나타난 것을 보니 누군가에 의해 강제로 납치 당한 상황으로는 보이지 않는군.” “...” 그 말에 블레이크는 쓴웃음을 지었다. 맥밀란은 자신을 달가워하지 않는 쪽이기는 해도 나름 공사 구분이 투철한 면이 있다. 그런 그녀가 저렇게 판단하고 있다면, 상부에서도 같은 판단을 내릴 것은 분명한 일. 어떻게 해야 하나. 일단 지금 상황에 대해 설명을 하고 양해를 구해야 하나. 하지만 블레이크는 다시 쓴웃음을 지었다. 요정계라는 영문 모를 세상에 갇혀 있는 상황인데, 요정이 초코바를 주더라, 남자들이랑 개울에서 빨래하다 술 먹고 하늘을 날아 봤다 라고 말하면,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지 눈에 선했기 때문이다. 물론 열심히 설명을 하면 믿어줄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우선 약물검사부터 신청할 것이다.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들었다. 과연 자신이 저들 속으로 반드시 돌아가야만 할 이유가 있을까 하고 말이다. 게다가 존슨 소위가 저런 식으로 나올 수 있는 것은, 또한 군내의 분위기가 이미 그런 행동이 충분히 용납될 정도로 악화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문득 존슨이 맥밀란을 향해 말했다. “난 저런 탈영병과 함께 싸우고 싶은 생각이 없다. 혹시 알아? 등 뒤에서 기습이라도 할지.” “그런!” 해밀튼은 그렇게 소리쳤지만, 맥밀란 역시 존슨의 말에 동의했다. “기습까지는 몰라도, 신뢰할 수 없다는 말에는 동의한다.” “...” 존슨은 그것 보라는 듯이 피식 웃고는 다시 해밀튼에게 말했다. “너도 괜히 믿다가 뒤통수 맞지 말고, 우리와 함께 가는 편이 좋을거야.” “...” “리즈. 가자.” 존슨은 그렇게 말하고는 맥밀란과 함께 숲을 향해 앞서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고, 해밀튼은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멀거니 보다가 블레이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블레이크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해밀튼 소위, 저들을 따라 가십시오.” “하지만...” “어서요.” “...” 해밀튼은 잠시 입술을 깨물다가 이내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는 존슨의 뒤를 따랐다. 블레이크는 그 모습을 씁쓸하게 바라보다가 그대로 땅바닥에 벌러덩 누워 버렸다. “후...” 아까 술을 마신 탓일까. 어쩐지 목이 타는 느낌이다. 00313 트롤러 ========================================================================= 블레이크를 놔두고 해밀튼이 다가오자 존슨은 퀘스트를 확인하며 말했다. “릭. 퀘스트 확인 했어?” “어? 잠시만.” 해밀튼은 존슨에게 방금 전의 일을 따지려다가 화들짝 놀라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타락한 일각수를 처치하십시오. : 얼마 전 모종의 일로 봉인되었던 일각수가 해방되었습니다. 일각수는 본래 강력한 힘을 지닌 성수이지만, 오랜 기간의 봉인으로 인해 일부 개체가 타락한 상태입니다. 타락한 일각수를 찾아 처치하십시오. “일각수면, 유니콘을 말하는 건가?” 퀘스트 정보를 확인한 해밀튼의 말에 맥밀란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아마도. 하지만 지구의 전설에 나오는 유니콘과 동일한지는 알 수 없는 일이겠지.” “하긴.”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던 해밀튼은 무기를 점검하는 존슨을 보고 다시 말했다. “패트릭.” “왜?” “방금 전 일말인데... 딜런 중위가 그랬잖아. 퀘스트에서 만나게 되면 어떻게 된 일인지 일단 자초지종부터 확인하라고.” “그랬지.” 존슨은 총기의 안전장치를 확인한 다음 다시 홀스터에 집어넣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봤잖아. 변명조차 안 하는 모습을.” “그건...” “게다가, 이제 굳이 그 검둥이 녀석이 없어도 문제없잖아.” 해밀튼은 명백한 인종 차별의 의미가 담긴 존슨의 말에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필요 없다는 소리야?” 존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미국의 모든 귀환자들 가운데서도 최고로 빨리 20레벨을 돌파했어. 앞으로 두 세 번 정도만 퀘스트를 더 수행하면 30레벨도 넘을 수 있겠지. 그런 우리들이 언제까지 그런 검둥이 녀석의 뒤를 쫓아다닐 필요가 있을까.” 그 말에 해밀튼은 물론이고 맥밀란마저 얼굴을 구겼다. 그들이 최단 시간 안에 20레벨을 돌파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블레이크라는 강력한 귀환자가 그들의 성장을 전력으로 도운 덕분이다. “패트릭. 네가 자부심을 가지든 자만심을 가지든 상관은 없지만, 그의 노고를 무시하는 건 그리 현명한 처사가 아닌 것 같다.” 맥밀란의 말에 존슨은 자신이 생각해도 조금 심했다 싶었던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크흠. 어쨌든 적극적으로 해명을 하지 않은 것만 봐도 뭔가 뒤가 구린 일을 숨기고 있는 것이 분명해. 정말로 피치 못할 사정이라면 해명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고.” “그건...” 그 말에는 해밀튼도 맥밀란도 대답하지 못했다. “어쨌거나, 지금은 일단 퀘스트의 해결이 먼저니까 거기에 집중하자고.” “알았다.” 세 사람은 각자의 무기를 든 채 조심스럽게 숲을 탐색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맥밀란은 빛의 정령과 함께 펜싱을 주특기로 하며, 존슨은 그를 위해 특수하게 개조된 강력한 총기류를 주로 다루는데, 근접전용으로 한 자루 정글도 또한 사용한다. 마지막으로 해밀튼은 톤파를 주로 다루는데, 그 역시 보조 무기로 특수 개조된 총기류를 장비하고 있다. 벨카라스 전투 이후 미군은 총기류에 의존하는 기존의 전술에서 벗어나 블레이크의 주장대로 근접전에 대응한 훈련 역시 병행하고 있었다. 그 결과, 기존에는 사용할 수 없었던 무겁고 강력한 총기류를 사용하는 것이 가능해졌는데, 존슨이 소지하고 있는 파이퍼 첼리스카가 사용하는 .600 니트로 익스프레스라는 탄환의 파괴력은 무려 11,426 줄이나 된다. 이것은 흔히 강력한 권총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는 데저트 이글보다 무려 4배 이상이나 되는 수치인데다, 형태마저 리볼버라 실제 체감되는 반동 또한 그 이상이니 존슨처럼 특별히 신체 능력을 강화한 자가 아니면 연사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조심스럽게 숲을 탐색하던 세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숲 속의 작은 연못가에서 목표인 일각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유니콘과는 역시 뭔가 다르군.” “그러게.” 그들이 발견한 일각수는 말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몸집을 가지고 있었는데, 갑옷처럼 보이는 은빛 비늘로 몸을 감싸고 있었으며, 머리에는 날카로운 창날을 연상시키는 긴 뿔을 달고 있었다. 그냥 멀리서 봐서는 철제 마갑을 씌워 놓은 것처럼 보일 정도다. 파이퍼 첼리스카와 동일한 탄환을 사용하는 577 티 렉스 소총에 장착된 스코프를 통해 일각수의 모습을 확인한 존슨은 두 동료에게 말했다. “일단 저격부터 시도해 보자. 리즈는 관측수를, 릭은 엄호를 부탁한다.” 해밀튼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역시 불안한지 다시 이렇게 말했다. “역시 교관님의 도움을 받는게...” “어째서?” “저격이 실패할 경우를 감안하면, 근접전을 염두에 둬야 하는데... 지금의 우리 전력으로는 탱커 역할을 할 사람이 없잖아.” “...” 확실히 저 일각수의 모습을 보면, 아무리 강력한 탄환이라도 일격에 치명상을 입힐 가능성은 무척 적어 보이는 것이 사실. 물론 그들이 착용하고 있는 방어복은 어지간한 무기로는 뚫는 것조차 불가능할 정도의 방어력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전혀 피해를 입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존슨은 불안해 하는 해밀튼을 바라보며 짜증을 냈다. “시끄러. 언제까지 그 검둥이 녀석 뒤만 쫓아 다닐건데? 30레벨이 넘으면 우리도 엄연히 상위 능력자 아닌가?” “그거야 그렇지만.” 해밀튼은 한숨을 푸욱 내쉬고는 결국 존슨의 말대로 매복을 시작했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엄폐가 가능한 장소로 저격 위치를 잡은 존슨과 맥밀란은 해밀튼이 자리를 잡은 것을 확인하자 신호를 주고받은 뒤 저격을 준비했다. 풍향등을 고려해 조준점을 확인한 존슨은 방아쇠를 당겼다. 코끼리의 두개골도 단숨에 꿰뚫는 강력한 파괴력의 탄환이 쇄도해 그 운동 에너지를 일각수의 머리에 전달했다. 퍽! 순간 머리가 휙 꺾이며 일각수가 비틀거리자 존슨은 속으로 쾌재를 올렸다. 하지만 그렇게 비틀거리던 것도 잠시. 일각수는 천천히 존슨을 향해 고개를 돌리더니 입에서 검은 기운을 뿜어내며 그를 향해 돌진해 왔다. “젠장.” 존슨은 급하게 탄환을 재장전했지만, 돌격해오는 일각수의 뿔이 아름드리 나무를 단숨에 박살내는 광경에 크게 놀랐다. “재사격!” 맥밀란이 크게 외치자 존슨은 기계적으로 재장전한 탄환을 자신이 엄폐한 바위를 향해 달려오는 일각수를 향해 다시 발사했다. 하지만 일각수는 탄환이 맞는 순간 조금 움찔거리는 정도의 반응 밖에 보이지 않았다. “해밀튼!” 존슨은 맥밀란과 함께 급히 진지를 이탈하며 대기하고 있던 동료의 이름을 불렀고, 그 순간 보조 진지에서 대기 중이던 해밀튼의 총구에서 불이 뿜어졌다. 일각수는 해밀튼이 발사한 총탄이 목덜미에 맞자 잠시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다. 덕분에 일각수의 속력이 줄어들자, 존슨은 홀스터에서 파이퍼 첼리스카를 꺼내 들고는 일각수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한발 쏠 때마다 몸이 휘청거릴 정도의 강력한 탄환이 연이어 발사되자, 일각수는 강력한 펀치에 연이어 맞은 것처럼 비틀거렸다. 존슨은 쾌재를 올리며 연사를 했지만, 탄환을 모두 소모했음에도 일각수는 쓰러지지 않았다. 푸르르르... 해볼테면 더 해보라는 듯이 일각수가 머리를 흔드는 모습에 존슨은 슬그머니 총을 집어넣고 근접 무기인 정글도를 꺼내 들었지만, 파이퍼 첼리스카도 뚫지 못하는 저 비늘을 어떻게 할 자신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는데, 옆으로 몸을 피했던 맥밀란이 특수 제작된 에스토크로 일각수의 허리 부근을 찔렀다. 얼핏 보기에는 어림도 없어 보이는 행동이었지만, 그녀의 이 공격에는 관통 효과가 부여되어 있었던 탓에 일각수는 자신의 비늘이 뚫리는 느낌에 놀라 펄쩍 뛰었다. “칫!” 하지만 비늘을 뚫었다고는 해도 그 깊이는 손가락 마디 하나 될까 싶을 정도. 맥밀란은 혀를 차며 재공격을 시도하려 했지만, 그 순간 일각수의 강력한 뒷발이 그녀의 가슴을 때렸다. “커헉!” 방어복을 입었다고는 해도 물리적 충격까지 전부 해소해주지는 못하는 탓에 맥밀란은 숨이 콱 막히는 느낌과 함께 그대로 공중으로 떠올랐고, 이내 나무 둥치에 연이어 튕기며 바닥에 처박혀 버렸다. “이 자식!” 맥밀란을 공격하는 틈을 노려 해밀튼이 달려들어 톤파로 목을 후려치려 했지만, 일각수는 마치 검술을 펼치듯 부드럽게 그 공격을 받아 넘기더니 중심이 흐트러진 해밀튼의 어깨를 뿔로 찔러 버렸다. “크악!” 여러 가지 마수들의 표피를 복합적으로 조합한 방어복은 그 강력한 일격에도 뚫리지 않았지만, 해밀튼의 어깨는 방어복만큼 강력한 방어력을 지니고 있지 못했던 탓에 그대로 부서져 버리고 말았다. 비명을 지르며 나뒹구는 해밀튼을 뒤로 한 채, 일각수는 정글도를 든 채 굳어 버린 존슨을 비웃음 담긴 시선으로 바라보며 천천히 다가섰다. 푸르르르... 투레질을 하며 다가서는 일각수의 모습에 존슨은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다가 발악하듯 정글도를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하지만 일각수는 앞서 해밀튼을 상대할 때와 마찬가지로 머리에 솟은 뿔을 사용해 존슨의 정글도를 가볍게 튕겨내 버렸다. 일각수의 뿔이 보여주는 움직임은 유려한 검무와도 같아서 존슨은 눈앞에서 희롱하듯 번뜩이며 지나가는 그 날카로운 움직임을 눈으로 쫓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그렇게 잠시 존슨을 데리고 놀던 일각수는 조금 시간이 지나자 이내 재미없다는 듯이 다시 한번 투레질을 하고는, 뿔을 휘둘러 손목을 후려쳐 정글도를 떨군 후 연이어 그의 명치 어림을 뿔로 쿡 찔러 버렸다. “컥!” 방어복은 뚫리지 않았으나 존슨은 곧바로 호흡 불능 상태에 빠져 가슴을 움켜쥔 채 주저 앉았다. 일각수는 곧바로 앞발을 번쩍 치켜 들며 몸을 일으키더니 그의 머리를 향해 커다란 철퇴와도 같은 말발굽을 내리 찍었다. “...” 존슨은 호흡불능 상태에 빠져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그 커다란 말발굽이 자신의 머리를 향해 떨어져 내리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 보았다. 이렇게 죽는 건가. 멍하니 자신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말발굽을 바라보는 존슨의 시야에 무언가 검은 그림자 같은 것이 스쳐 지나간 것은 바로 그때였다. 쾅! 그리고 곧바로 벽을 망치로 때려 부수는 듯한 굉음과 함께 앞발을 쳐들었던 일각수가 옆으로 나가떨어져 버린다. 존슨은 멍한 표정으로 자신을 위기에서 구한 인물을 바라보았다. 헬멧을 써서 얼굴을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떡 벌어진 건장한 체구를 보는 순간 누군지는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다름 아닌 블레이크였다. 블레이크는 멍하니 주저앉아 있는 존슨을 흘깃 바라보더니 발버둥치며 몸을 일으키는 일각수를 향해 다시 달려들었다. 푸르릉! 뜻하지 않은 기습을 받자 성이 잔뜩난 일각수는 코를 통해 검은 기운을 뿜어내며 블레이크를 향해 뿔을 휘둘렀다. 숙련된 검사의 검술을 연상시키는 화려한 움직임이 이어졌지만, 블레이크는 그 모습에 현혹되지 않고 자세를 낮추며 달려들어 일각수의 가슴을 다시 한 번 숄더 차지로 들이 받았다. 퍽! 아까와는 달리 부딪힐 때의 소리는 작았지만, 일각수는 고개를 흔들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고, 뒤이어 블레이크의 솥뚜껑 같은 주먹이 일각수의 머리를 후려쳤다. 퍽! 퍼퍽! 연달아 터지는 연타에 일각수는 아까 파이퍼 첼리스카에 얻어맞을 때처럼 휘청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모습을 지켜보던 존슨은 알 수 있었다. 총탄에 얻어맞을 때는 끄떡도 하지 않던 일각수의 눈이 지금 블레이크의 주먹에 맞을 때는 심하게 요동치고 있는 것을 말이다. 일각수는 연이어 날아드는 블레이크의 주먹에 성을 내며 다시금 뿔을 휘둘렀다. 하지만, 블레이크는 일각수가 공격을 시작하자 곧바로 카운터를 발동시켰다. 번쩍! 한줄기 빛이 터지며 정수리에 블레이크의 주먹이 꽂히자, 일각수는 그 충격을 감당하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후우...” 블레이크 역시 일각수의 뿔에 어깨를 찔렸지만, 그의 몸은 해밀튼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방어력을 지니고 있었기에 고통은 일어날 지언정 치명적인 부상으로 연결되지는 않았다. 일각수는 주춤주춤 물러서더니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었던지 뒤로 돌아 도망을 치려 했다. 도망을 치기 위해 일각수가 몸을 돌리자 블레이크는 기다렸다는 듯이 다시 한번 숄더 차지를 발동했다. 퍼억! 허를 찔린 일각수는 화려하게 허공을 날아 나무 둥치에 부딪혔고, 그 육중한 몸무게와 충격을 견디지 못한 나무가 부러지자 먼지를 날리며 바닥에 뒹굴고 말았다. 블레이크는 곧바로 몸을 달려 쓰러진 일각수의 옆으로 다가간 뒤 그 몸 위에 올라타 놈의 머리를 주먹으로 마구 후려치기 시작했다. 마운트 포지션에서 쏟아진 강력한 펀치의 향연은 일각수의 혼을 빼놓기에 충분한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일각수가 숨을 헐떡이며 발버둥을 멈추자 블레이크는 놈을 깔고 앉은 자세 그대로 강타를 발동했다. 1초. 2초. 그리고 3초. 영겁과도 같은 그 시간이 끝나는 순간 블레이크의 주먹은 숨을 헐떡이는 일각수의 머리에 내리 꽂히며 그 머리 뼈를 단숨에 부숴 버렸다. “후...” 블레이크는 퀘스트가 완료된 것을 확인하고는 일각수의 사체를 인벤토리에 챙겨 넣은 다음, 부상 당해 흩어진 파티원들을 살폈다. 해밀튼은 어깨 뼈가 부서지긴 했지만, 바로 힐링 포션을 사용한 덕분에 생명에는 이상이 없었다. 하지만 눈동자가 심하게 떨리는 모습을 보니 아무래도 육체적인 손상보다는 정신적인 타격이 더 큰 것 같았다. 존슨은 아무래도 갈비뼈가 부서진 것 같았다. 역시나 힐링 포션을 사용한 덕분에 다행히 호흡은 정상으로 돌아왔지만, 당분간 절대 안정을 취해야만 하고, 해밀튼과 마찬가지로 정신적인 타격 역시 의심되는 상황이었다. 맥밀란은 정신조차 차리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가슴을 일각수의 발굽에 채인 그녀는 날아가면서 머리와 목, 그리고 등을 나무 둥치에 심하게 부딪혔는데, 아무래도 정밀 검사를 해봐야만 정확한 부상 정도를 확인할 수 있을 듯 했다. 블레이크는 그나마 정신이 멀쩡해 보이는 존슨에게 말했다. “존슨 소위. 맥밀란 소위의 상태가 위험합니다. 스스로 힐링 포션을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이니 도착 즉시 구급팀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 하지만 존슨은 멍하니 맥밀란의 모습을 바라보기만 할 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존슨 소위!” 블레이크가 다시 한 번 크게 부르고 나서야 존슨은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네, 넷!” “정신 차리십시오.” “으, 으아아아아!” “이런.” 혀를 차는 블레이크에게 대답한 것은 해밀튼이었다. “구, 구급팀... 말이죠?”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할게요.”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지만, 해밀튼은 블레이크를 바라보며 그렇게 대답했다. 블레이크는 남은 시간을 확인했다. 운이 없는 탓인지, 레벨이 가장 높으면서도 그의 대기 시간이 가장 짧았기 때문에 바로 전송을 준비해야만 했다. 해밀튼은 전송에 대비하는 블레이크를 보며 다시 말했다. “돌아오지... 않으실 겁니까?” “...” 하지만 미처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흰 빛이 그를 감쌌다. 블레이크는 다시금 어린애가 낙서한 듯한 기묘한 풍경의 숲으로 돌아오자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계곡에는 아직도 하얗게 세탁된 빨래들이 마치 깃발처럼 휘날리고 있었다. 가만히 주저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데, 문득 발드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봐! 신입! 마침 잘 왔다!” “...” 고개를 돌리자 무언가 다시 광주리를 하나 가득 들고 있는 사내들의 모습이 보였다. 덜그럭거리는 소리를 들어보니, 이번에는 설거지가 아닐까 싶다. “후...” 블레이크는 몸을 일으켰다. 어쩐지 이런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 싶은 느낌. 천천히 사내들에게 다가가 광주리를 하나 들자, 오칸이 그제서야 생각났다는 듯이 그에게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미처 말을 안 해줬군.” “무슨...” “내일부터는 자네 혼자 다 해야 되니까 열심히 배우게.” “네?” 이건 또 무슨 소린가. 내일부터는 혼자서 해야 한다니. 당황한 블레이크를 향해 오칸은 자랑스럽게 말했다. “실은 내일부터 각자 영지를 받아서 영주로 나가게 되었거든. 하하! 혼자서 이 일을 다 하려면 좀 고생스럽기는 하겠지만, 자네도 열심히 하다 보면 우리들처럼 될 수 있을테니 잘 해보게!” “그런...” 그 말을 뒷받침하듯 발드란이 다시 말했다. “오늘은 인수인계할 것이 많으니까 잘 배워두라고!” 블레이크는 순간 그냥 다 팽개치고 도망쳐 버리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을 다시 떠올렸다. 00314 트롤러 ========================================================================= 다음날. 다섯 명의 광전사들은 흰 벽으로 둘러싸인 여왕의 거처 앞에서 헤네스와 그들의 부인이 특별히 준비한 붉은 색 망토를 방어복 위에 두른 채 서 있었다. 처음에는 모처럼 영주로 취임하기 위해 출발하는 날이고 하니, 얀트훈센의 풍습에 맞게 정장이라도 한 벌 맞춰주는 것이 어떨까 하고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얼음의 대정령으로 인해 고향을 떠난 뒤 수백년간 대륙 각지의 전장을 전전하던 광전사들이다 보니 과거의 복식 같은 풍습 같은 것이 많이 희미해진 것도 사실이고, 남아 있는 것 역시 갑옷을 좀 변형시킨 스타일이거나 산적처럼 동물의 가죽을 몸에 두르는 정도에 불과했다. 결국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헤네스와 아줌마 요정들은, 실란 평원에서 벌어진 바르델 군과의 전투에서 광전사들의 상징처럼 세상에 알려지게 된 방어복 위에, 피처럼 붉은 망토를 두르는 정도로 타협을 볼 수밖에 없었다. 오늘 광전사들이 부임하게 될 영지는 모두 다섯 군데. 바르델로부터 넘겨 받은 시점에서는 모두 제각각 다른 규모를 지니고 있었지만, 헤네스는 이 영토를 토지의 면적과 산업 능력을 따져 조정하였다. 처음에는 이렇게 나뉘어진 영지에 부임할 블러드로드들의 작위를 어떻게 정해야 할지에 대해서도 여러모로 논란이 많았으나, 준상은 기존에 광전사들의 계급 체계를 그대로 따와 기존에 다른 국가들이 사용하는 작위 대신 블러드로드라는 칭호를 그대로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다만 일반적인 블러드로드와의 차이를 둘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다스리는 영지의 이름을 수식어로 붙이는 것을 허용했다. 예를 들어, 이번에 라구아트의 영주로 부임하는 오칸의 공식적인 호칭은 라구아트의 블러드로드 오칸이 되는 셈이다. 준상이 이런 식으로 호칭을 정한 것에는 노림수가 있었다. 영주 권한을 지닌 이의 호칭이 블러드로드란 것은, 다시 말해 블러드로드의 자격이 없는 자는 영주가 될 수 없다는 의미가 된다. 이것은 다시 말해 기존의 다른 국가나 지역들처럼 영주의 자격이 세습이 아닌 능력으로 결정되는 것을 의미하며, 또한 그런 자격을 갖춘 이들을 준상이 직접 임명하는 형식을 취하게 되므로 각 지역에 할거하는 블러드로드에 대한 통제권 역시 강화되는 이점이 있다 여기에 영주로 부임한 자와 얀트훈센에 있는 블러드로드 간에 호칭의 차이를 두지 않음으로써 은연중에 그 격이 너무 크게 벌어지는 상황 역시 어느 정도 조율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지금 여왕의 거처 앞에서 여러 요정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서 있는 블러드로드들은 이런 식의 뒷사정보다는 언제 의식이 시작될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것이 고민의 전부였다. 그들 앞에는 펑퍼짐한 체구를 지닌 아줌마 요정들이 각기 자신들의 아기를 안아든 채 흐뭇한 표정으로 남편들의 모습을 감상하고 있었다. “아유, 누구 남편인지는 몰라도 신수가 훤하네.” “그럼. 누구 남편인데.” 그렇게 아줌마 요정들이 수다를 떨고 있기를 얼마나 했을까. 마침내 여왕의 거처가 열리며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색 선글라스를 쓰고 빵모자를 눌러쓴 준상과, 전대 요정 여왕 리체스, 그리고 얀트훈센의 총독으로 재직중인 헤네스와 함께 현직 요정 여왕인 리시스 또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준상이 모습을 드러내자 다섯 블러드로드들은 경직된 표정으로 부동자세를 취하고는 일제히 가슴에 손을 올리며 예를 취했다. “붉은 공포를 뵙습니다!” “붉은 공포를 뵙습니다!” 그들이 예를 취하자 근처에서 멀뚱거리며 구경하던 요정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붉은 공포가 뭐야?” “몰라. 묻지마. 왜 맨날 나한테만 물어봐?” “네가 내 옆에 있으니까.” “그랬군. 그게 문제였어.” 그렇게 요정들이 쑥덕대고 있는 동안 준상은 간단하게 목례로 그들의 예에 답하고는 헤네스가 건네주는 작은 브로치를 받아 가장 먼저 오칸의 망토에 끼워 주었다. 브로치에는 각 블러드로드들이 스스로 고른 문장이 새겨져 있었는데, 이것은 단순한 장식품이 아니라 독에 대한 내성을 높여주는 기능과 생명력 강화등이 부여된 마법 아이템이기도 했다. 영주로 부임하기는 하지만, 그들이 데려가는 병력은 광전사 다섯이 고작이었다. 물론 그들 모두가 혼자서 기사 세 명을 감당할 만한 강력한 전사들이란 점을 감안하면, 영지 하나 정도 장악하는 데는 오히려 넘친다고 생각될 수도 있다. 하지만 전쟁으로 빼앗은 영지, 그것도 영주 일가 외에는 기존의 주민들이 그대로 살고 있는 장소로 가는 상황에서 어떤 위험이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 그에 대한 충분한 대비를 해둘 필요가 있었고, 브로치에 부여된 능력은 그런 대비 가운데 하나였다. 준상이 오칸을 시작으로 나머지 블러드로드들에게도 각자의 문장이 새겨진 브로치를 달아주었다. 그렇게 브로치의 수여식이 끝나자, 블러드로드들은 곧바로 아줌마 요정들의 손에 이끌려 또 다른 의식의 장소로 이동했다. “자, 배 좀 내밀어 봐요.” “이, 이렇게?” 블러드로드들이 영문조차 모른 채 부인님의 말대로 배를 드러내자, 그녀들은 주머니에서 작은 보석 같은 것을 꺼내 그들의 배에 이식하고는 간단한 마법을 발동시켰다. “방금 뭐한거요?” “요정의 돌을 이식한 거에요. 멀리 떨어진 곳에서 급한 연락 같은 걸 할 일이 생겼을 경우를 대비하는 거죠.” “아...” 하지만 요정의 돌을 이식하는 것은 고작 시작에 불과했다. 아줌마 요정들이 곧바로 그들을 이끌고 나와 한 명씩 공터에 세워 놓자, 곧바로 요정들이 주위를 에워싼다. “이건...” “만약을 대비해서 당신의 몸에 정령의 문을 열 거에요. 기분이 좀 이상하겠지만, 참아봐요.” “그런 것도 가능해?” “물론이죠. 당신이 붉은 공포라고 부르는 저 분도 정령의 문을 가지고 있는 걸요.” “허...” 블러드로드들의 몸에 정령의 문을 여는 것은 그들의 가족들이 요정계를 편하게 드나들도록 만드는 목적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각 지역에 필요한 물자나 병력등을 빠르게 투입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다. 브로치에 생명력 강화 기능을 추가하고, 그들에게 지급된 방어복을 개조해 시드를 추가한 것은 모두 이것을 위한 일이었다. 한 명씩 돌아가며 정령의 문을 여는 의식이 끝나자, 블러드로드들은 마침내 신기루 꽃의 석문을 통해 얀트훈센으로 이동했다. 이제 준상과 헤네스, 그리고 리체스는 그들을 이끌고 각 영지를 돌아야만 한다. 이것은 상당히 귀찮은 일이었지만, 일전에 벌어졌던 바르덴과의 전쟁 같은 일이 다시금 벌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이런 식으로라도 준상의 건재함을 대외적으로 어필할 필요가 있었다. “얼굴 좀 펴세요. 사람들이 무서워 하잖아요.” “...” 물론 그런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다 해도 귀찮은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보다 못한 헤네스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지만, 준상의 표정을 펴질 줄을 몰랐다. 어쨌든. 그들은 광전사들의 환송을 받으며 얀트훈센과 가장 가까운 라구아트로 이동했다. 기안이 성문을 부숴버린 탓에 문조차 달려 있지 않은 작은 성 안으로 들어선 그들은 곧바로 간단하게 취임식을 치른 다음, 성 안에 요정 결계를 설치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리체스가 이번 행사에 함께한 한 것은 바로 이 작업을 위해서 였다. 아줌마 요정들은 리체스만큼 강한 마법 능력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반신의 경지에 도달한 리체스와 비교를 했기 때문이지, 실제로는 이 대륙의 인간과 귀환자들을 모두 통틀어 봐도 그녀들과 마법 능력을 견줄 만한 존재는 그리 많지 않은 것이 사실이었다. 요정 결계는 그런 아줌마 요정들의 마법 능력을 극대화함과 더불어, 요정계 바깥에서도 그들 부부가 원만한 부부관계를 지속할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한 하나의 배려이기도 했다. 아기들의 경우에는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위험을 감안해서라도 아직 요정계에 남겨둘 예정이었지만, 아줌마 요정들은 블러드로드들이 지니지 못한 행정 능력을 보완하기 위해서라도 그들과 함께 지내야만 할 필요가 있었다. 물론 요정 모습으로 지내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블러드로드들 정도 되는 사람들이 부인 없이 홀몸으로 지내게 되면 어떤 유혹이 있을지는 알 수 없는 일. 그런 일들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서라도 그녀들은 가급적 인간에 가까운 모습으로 블러드로드들 옆에 머물 필요가 있었다. 이것을 위해, 그녀들은 리체스로부터 불특정 다수에게 특수한 환상을 보여주는 반지를 받은 상태였다. “오늘 일은 끝난 거지?” “네.” “그럼 일단 돌아가자.” “후후, 알았어요.” 준상은 취임식과 요정 결계의 설치가 완료되자 곧바로 요정계로 귀환했지만, 새로 부임한 블러드로드 오칸은 부인인 유니아란과 함께 인근의 유지와 호족들을 불러 모아 간단한 연회를 베푸는 것으로 하루의 일과를 마무리했다. 유지나 호족들은 은근히 준상이나 지난 전쟁에서 바르덴을 무릎 꿇린 전력을 가진 아름다운 그의 반려를 보고 싶어하는 기색이었지만, 감히 불러 달라 청을 할 엄두를 내지는 못했다. 그런 식으로 하루마다 각각의 영지에 들려 취임식을 치르고 요정 결계를 만드는 일이 완료되자 준상은 그제서야 블레이크를 불렀다. “...” 블레이크는 곧바로 보좌관의 뒤를 따라 여왕의 정원으로 안내되었다. 준상은 그가 정원 안으로 들어와 자신의 앞에 서자 보좌관을 돌려보낸 후 말했다. “일을 아주 열심히 한다더군.” 넌지시 건네진 준상의 말에 블레이크는 퉁명스런 목소리로 대답했다. “안 하면 굶긴다는데 어쩌겠습니까.” “그랬군.”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 준상은 다시 물었다. “생각해 봤나?” “...” 블레이크는 잠시 아무런 말없이 준상을 바라보다가 이렇게 물었다. “왜 접니까.” 준상은 대수롭지 않은 듯한 모습으로 대답했다. “내 눈에 띄었으니까.” “...” 그 대답에 얼굴을 찌푸린 블레이크는 다른 질문을 던졌다. “일전에 봤던 그 다섯 명만 하더라도 저보다 더 강합니다. 저보다는 그들이 더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준상은 그 말에도 짧게 대답했다. “물론, 그들의 도움도 받을 생각이다.” “...” “상황의 심각함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모양인데, 지금 우리들은 전력을 아끼고 말고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음...” 블레이크는 그 말을 듣자 스스로의 이마를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고, 준상은 그 모습을 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어중이 떠중이들을 아무나 마구 데려올 수도 없는 노릇이지. 그런 시점에 네가 눈에 띄었을 뿐이다.” 블레이크는 그 말에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한 마디로, 운이 없었던 거군요.” 준상은 담담하게 그 말에 동의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후...” 블레이크는 크게 숨을 내쉬고는 다시 말했다. “이번 일 때문에 제 처지가 여러 모로 곤란해졌습니다. 사전에 조율을 할 수도 있었을 텐데요.” “하지만 그만큼 귀찮고 번거로워졌겠지.” “...” 하기야, 아무리 은연중에 백안시 당하고 있는 상황이라고는 해도 미군 내 귀환자 가운데 최고 에이스를 간단하게 내줄 이유가 없다. 설령 준상의 목적에 동의하더라도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 그에 걸맞은 조건을 내걸 것은 분명한 일. 더구나 그런 조건의 대부분이 당사자의 의지나 이익과는 아무 상관도 없을 것은 굳이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좋게 말하면 조국이나 다른 이들을 위해 희생을 하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자신 외의 다른 자들의 이익을 위해 팔려나가는 신세가 되는 것이다. “용의주도한 사람이군요. 당신은.” 조금은 허탈한 듯한 말투로 블레이크가 그렇게 말했지만, 준상은 대답하지 않은 채 선글라스 너머로 그를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블레이크는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말했다. “제가 당신의 동료가 된다면, 그들처럼 강해질 수 있습니까?” 준상은 짧게 대답했다. “물론.” 블레이크는 다시 물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말입니까.” 준상은 역시나 곧바로 대답했다. “우선 최상급으로 강화된 아이템과 시드가 주어질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네가 패배했던 블러드로드들 정도는 넘어설 수 있겠지.” 블레이크는 조금 미심쩍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이템이나 시드의 강화는 그도 이미 가지고 있는 기능이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리 유용하다고는 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잘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그런 블레이크를 향해 준상은 다시 말했다. “공백의 반지를 아나?” 블레이크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압니다. 당신이 그 반지를 공급하는 배후라는 정보도 얼핏 들은 적이 있습니다.” 준상은 그 말을 듣자 품에서 반지 하나를 꺼내 블레이크에게 던져 주었다. 블레이크는 그것을 받아 들고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이건...” “경우에 따라서는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실제로 보는 것이 이해가 빠를 때가 있지. 확인해 보도록.” “...” 블레이크는 미심쩍어 하면서도 준상의 말대로 자신에게 던져진 반지를 확인해 보았다. 아이템정보 명칭 : 공백의 반지 +10 레벨제한 : 없음 종류 : 반지 등급 : Common 효과 : 1.치명타 확률 15% 증가. 2.번개 저항 17% 증가. 3.재생률 13% 증가. Seed : 1슬롯 (재생률 12%) 설명 : 요정 마법사 일리에라가 만든 반지. 아무런 기능 없는 단순한 반지지만, 가운데 있는 홈에 시드를 장착하여 그 힘을 활용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 블레이크는 휴대폰 화면에 나타난 아이템 정보를 보고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이름은 분명히 공백의 반지가 맞았지만, 무려 +10으로 강화되어 있는데다, 시드 슬롯에 장착된 것은 무려 12퍼센트의 재생률 시드이다. 옵션만으로도 어지간한 레어 아이템보다 더 뛰어난 건 물론이고, 레벨 제한마저 없다니. 준상은 놀라서 굳어버린 블레이크를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 “나는 모든 아이템을 +10까지, 그리고 모든 시드를 12%까지 손상 없이 강화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럴수가...” 블레이크는 그 한 마디를 가까스로 내뱉고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입만 벙긋거릴 뿐이었다. ============================ 작품 후기 ============================ 그러고 보니... 전작부터 계산하면 작년 6월 21일부터 지금까지 하루도 쉬지 않고 연참을 했군요. 00315 트롤러 ========================================================================= 준상은 놀라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블레이크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는지 모르겠지만, 퀘스트를 통해 획득할 수 있는 아이템 가운데 레벨 제한이 없는 것은 유니크 등급이 유일하다.” “유니크...” 멍하니 준상의 말을 따라하던 블레이크는 뒤늦게서야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유니크 등급의 아이템을 획득한 적도 있으십니까?” 준상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리고는 잠시 머리 속으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말을 이었다. “다섯 개 정도 얻은 것 같군.” “헉!” 하나도 아니고 다섯 개 씩이나? 아이템 운이 지지리도 없어서 유니크는커녕 레어 아이템조차 획득해 본 적이 없는 블레이크로서는 입이 쩍 벌어질만한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깜빡 잊고 있었군.” “네?” “아니. 자네한테 한 말이 아니야.” “...” 준상은 블레이크에게 다시 말했다. “아무튼 결정은 빨리 내리는 편이 좋아. 나도 느긋하게 기다려 줄 수 있는 형편은 아니니까.” “...” “미안하지만 급한 용무가 떠올랐다. 나중에 보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준상은 앞서 그를 안내했던 보좌관을 다시 불러 블레이크를 거처로 데려다 주도록 지시하고는 급히 여왕의 거처로 들어갔다. “리체스!” “네?” 누리에게 젖을 주고 있던 리체스는 헐레벌떡 거처로 들어온 준상의 모습을 보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무슨 급한 일이라도?”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맛있게 식사중인 누리의 모습을 살핀다음 다시 말했다. “신기루 꽃에 잠깐 다녀와야겠어.” “거긴 왜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리체스를 향해 준상은 인벤토리에서 상자 하나를 꺼내고는 그 안에 담겨있는 내용물을 보여주었다. 붉은 천에 감싸인 뭉툭한 작은 병. 얼핏 보기엔 별로 대단해 보이지 않는 물건이었지만, 리체스는 그 모습을 보는 순간 그 병 안에 담긴 내용물을 떠올렸다. “불사의 용혈!” “맞아. 바로 그거야.” 준상은 다시 상자를 닫고는 누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방금 전까지도 이걸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깜빡 잊고 있었지 뭐야.” “그랬군요.” 리체스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다시 말했다. “여보.” “응?” “그거... 누리한테 쓰기보다는 나중에 동료들에게 쓰는 편이 좋지 않겠어요?” “...” 불사의 용혈이 지닌 능력은 모든 종류의 피해를 절반으로 감소시켜준다. 이것은 적의 수준을 알 수 없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무엇보다도 강력한 카드가 될 터. 하지만 잠시 생각하던 준상은 고개를 저었다. “상관없어.” “하지만...” 리체스는 다시 무언가 말하려 했으나 준상의 손가락이 그녀의 입술을 막았다. “그냥 이번만큼은 내 말을 따라줬으면 해.” 자기 자식 잘 되는 일인데 리체스라고 해서 어찌 싫을 리가 있겠는가. 결국 리체스는 준상의 말대로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때 누리가 꿈찔 거리면서 젖을 피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준상이 바라보자, 리체스는 능숙하게 누리를 안아서 어깨에 머리가 오도록 한다음 가만히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렇게 잠시 지나자, 누리가 꺼억 하는 소리와 함께 거하게 트림을 했다. “그 녀석 참. 소리 한 번 우렁차네.” 준상이 웃으며 말하자 리체스는 다시 젖을 물리며 대답했다. “그러게요. 젖을 빠는 힘이 얼마나 좋은지 유모들도 놀란다니까요.” “하하.” 잠시 그렇게 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은 누리가 배불리 젖을 먹고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자 리체스가 다시 말했다. “근데 굳이 신기루 꽃에 가서 해야할 필요가 있나요?” “그건...” 생각해 보니 꼭 그럴 필요는 없다. 어디든 몸을 푹 담글 정도의 물만 있으면 되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니 그렇군.”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급히 온천으로 가서 아기 욕조에 따뜻한 온천물을 가득 담아 왔다. 이전에도 몇 번 이런 식으로 목욕을 한 적이 있어서인지 누리는 욕조 안에 들어가서도 별로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배불러서 졸린 판에 물에 넣으니 귀찮다는 기색을 좀 보일 뿐이다. 리체스는 누리의 입이나 코, 귀 등에 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마법을 사용한 다음 준상에게 말했다. “준비 됐어요.”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누리의 몸이 물 속에 완전히 잠기자 욕조 안에 불사의 용혈을 한 방울 떨구었다. 점성 있는 붉은 액체 한 방울이 욕조 안에 떨어지자 그 안의 물에서 밝은 빛이 순간 확하고 퍼져 나온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빛이 사라지자 리체스는 잠이 확 달아났는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누리를 물 속에서 건져냈다. “됐군.” 준상은 다시 병을 갈무리하고는 리체스를 도와 누리의 몸을 닦아 주었다. 불사의 용혈을 사용한 덕분인지, 아니면 따뜻한 온천물에 몸을 담근 탓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누리는 양볼이 발그레진 채 고개를 갸웃거리기만 했다. “자, 이제 다 됐다. 하하.” “...” 리체스는 누리를 얼싸안고 웃음을 터뜨리는 준상을 바라보며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다시 다음 날. 서유미와 그녀를 키워준 노부부를 데리고 오기 위해 준상은 헤네스와 함께 다시 서울로 향했다. 그녀와 노부부가 사는 곳의 주소는 일전에 서유미가 요정계에 왔을 때 이미 받아두었기 때문에, 준상은 곧바로 주소에 적힌 대로 차를 몰았다. 네비가 알려주는 대로 길을 달리던 준상은 전원 주택이 자리 잡은 어느 한적한 마을에 도착했다. 서유미의 집이 있는 곳으로 천천히 차를 몰아 가는데, 문득 헤네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한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기, 유미 언니 아니에요?” “...” 그녀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니, 역시나 긴 머리를 늘어뜨린 서유미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알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준상과 헤네스를 마중하기 위해 밖에 나와 있는 것이 아니었다. 대충 세어 봐도 십여명은 족히 됨직한 건장한 사내들. 서유미는 그런 자들과 마주 선 채 대치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데요.” “그렇군.”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들을 향해 차를 몰아갔다. 서유미를 에워싼 채 그녀를 압박하고 있던 사내들은 갑자기 커다란 픽업 트럭 한 대가 자신들을 향해 속도조차 줄이지 않고 거침없이 밀고 들어오자 깜짝 놀라며 물러섰다. 준상은 서유미의 코앞에서야 비로소 브레이크를 밟으며 차를 멈췄다. “유미 언니!” 얼른 차문이 열리며 헤네스가 내리자 서유미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헤네스? 여긴 어떻게?” 그 말에 헤네스는 볼을 부풀리며 대답했다. “어떻게라뇨. 이사 하기로 한 거 벌써 잊었어요?” “아... 그랬지, 참.” 그때, 준상이 천천히 차에서 내렸다. 헤네스야 그렇다 치더라도, 준상의 몸에서 심상치 않은 기세가 뿜어져 나오자 서유미를 압박하고 있던 사내들은 자신도 모르게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준상은 그들의 모습을 보고 한쪽 눈썹을 찡그리더니 바로 통찰의 기능을 실행했다. 아니나 다를까. 놀랍게도 그들은 모조리 귀환자들이었다. 더 놀라운 것은 그들 모두가 녹색의 깃발로 능력치가 표시되는 자들이라는 점. 서유미조차 준상의 눈에는 노랑색에 가까운 밝은 녹색 정도로 보이는 점을 감안하면, 사실상 이들 전부가 30레벨 이상의 상위 능력자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이들은 누구지?” “그게...” 준상이 묻자, 서유미는 잠시 머뭇거리며 대답을 하지 못했고, 대신 사내들 틈에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반백의 머리를 뒤로 넘긴 건장한 체구의 노중년이 모습을 드러내자 서유미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 남자는 준상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나는 유미 애비 되는 유경훈이라는 사람일세.” “...” “자네는 누군가.” 준상은 말없이 서유미를 돌아보았다. 아버지라고 말은 하고 있지만 성이 다르다. 서유미의 집안 내력에 대해서는 지나가는 말로 얼핏 들은 것이 전부. 하지만 최근 친부가 그녀의 가치에 대해 눈독을 들이고 있다는 말 정도는 준상도 전해 들은 상태였다. 그리고는 주먹을 꽉 움켜쥔 채 몸을 떨고 있는 그녀를 헤네스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감싸는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저 여자의 미래를 책임질 사람.” “...” 그 대답에 유경훈은 얼굴을 찌푸렸다. “정말인가?” 준상은 아무 말 없이 유경훈을 가만히 바라만 보았다. 그 모습에 유경훈은 혀를 차고는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건 처음 듣는 얘기로군, 김비서!” 유경훈의 부름에 젊은 남자 하나가 그에게로 다가왔다. “보고서에는 이런 얘기가 없었던 것 같은데.” 김비서라고 불린 젊은 사내는 준상을 바라보더니 다시 말했다. “최근 아가씨께서 가깝게 지낸 남성은 같은 길드의 몇몇 뿐입니다.” “그럼 이 사람은?” “길드원 가운데 저런 남자는 없습니다.” “흠...” 원래대로라면 인상착의만 보고도 준상의 이름 정도는 바로 알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최초의 귀환자라는 점도 제법 유명한 편이었고, 김종경의 연합을 때려 부순 장본인이기도 하거니와, 요즘 방어복으로 한창 연일 상종가를 치고 있는 임서윤 일가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상태이다 보니 귀환자들에 대한 정보를 다루는 사람들에게 준상은 알게 모르게 제법 유명한 존재였다. 하지만 최근 화염의 대정령과 있었던 일 때문에 머리카락과 눈썹이 홀라당 타버리자 준상은 어지간히 가까운 사람이 아니면 한눈에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인상이 확 달라져 있었다. 실제로 안면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사진으로 밖에 본 적이 없는 사람을, 그것도 불의의 사고로 인상마저 확 바뀐 사람을 초대면에 바로 알아보는 건 어지간한 안목으로는 거의 불가능한 일에 가깝다. 비서의 대답에 다시 얼굴을 찌푸리던 유경훈은 준상을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 “하긴, 어차피 그건 지금 중요한 일이 아니지.” “...” “보아하니 자네도 귀환자인 모양인데, 어줍잖은 힘에 취해 섣불리 끼어들지 말고 물러서도록 하게.” 그 말을 들은 준상은 피식 웃어 버리고 말았다. 확실히 일반적인 경우라면 서유미 정도의 능력자라도 이 정도 숫자의 상위 능력자들을 상대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준상은 그런 일반적인 경우에서 한참 벗어난 존재. “서유미.” “네.” “저 사람이 정말 네 아버지가 맞나?” “...” 서유미는 잠시 입술을 깨물고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으며 천천히 그 말에 대답했다. “저는 아버지가 없습니다.” “...” 단호한 그 대답에 유경훈은 눈을 가늘게 뜨고는 다시 무언가 말하려 했으나, 그가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준상의 몸에서 강력한 기세가 확 하고 퍼져 나왔다. “헉!” 유경훈은 물론이거니와 그를 에워싸고 있던 귀환자들 모두가 갑작스럽게 준상의 몸에서 터져 나온 그 기운에 놀라 헛숨을 들이키며 뒷걸음질을 쳤다. 능력자가 아닌 사람이라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유형화된, 마치 한낱의 아스팔트 위로 이글거리며 뿜어져 나오는 열기와도 같은 그 가공할 기세라니. 사람들은 숨 쉬는 것조차도 잊은 채로 신경의 마디마디를 적셔오는 공포에 몸을 떨어야만 했다. 준상은 그런 그들을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하긴, 그건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지.” 그렇게 말하고는 천천히 앞으로 걸음을 옮기며 말을 이었다. “누군가.” “...” “어줍잖은 힘에 취한 나의 어리석음을 몸소 깨우쳐 줄 자가.” ============================ 작품 후기 ============================ 어둠의 다크가 밀려온다... 00316 트롤러 ========================================================================= 그냥 허세라고 치부해 버리기에는 너무나도 엄청난 위압감. 귀환자들은 본능적으로 유경훈과 그 비서를 보호하며 주춤주춤 물러나기 시작했고, 그 가운데 통찰의 능력을 가진 자가 얼른 준상의 능력을 확인해 보았다. “허억!” 통찰의 능력을 사용한 귀환자는 기겁하며 헛숨을 들이키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준상의 머리 위에 펄럭이는 깃발은 금방이라도 핏물이 뚝뚝 떨어질 것처럼 선명한 붉은 색으로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퀘스트 중에 만난 보스급의 마수에게서도 본 적이 없는 색깔. 능력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수준의 존재에게서나 나올 수 있는 표식에 귀환자는 부들부들 몸을 떨며 한층 더 격하게 식은땀을 흘릴 수 밖에 없었다. 갑자기 학질이라도 걸린 것처럼 몸을 떨어대는 귀환자의 모습에 그 옆에 서 있던 동료가 당황해 소리쳤다. “뭐야? 왜 그래?”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쏠리자, 통찰의 능력을 가진 귀환자는 준상을 한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붉은 색이야.” “뭐?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선명한 붉은 색.” “...” 귀환자들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마수도 아니고 인간이 그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를 그들은 상상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이제 막 튜토리얼을 마친 애송이들이라면 또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들은 그런 애송이들이 아닌 상위 능력자. 귀환자들 가운데서도 레벨 30 이상을 특별히 상위 능력자라고 부르는 것은, 단순히 시간만 지나면 알아서 레벨이 올라갈 정도로 퀘스트가 무르지 않기 때문이다. 차라리 애송이들이라면 빨간 색이든 노란 색이든 그냥 강하구나 하고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이들은 이미 어느 정도 힘을 갖추고 있는 상태인데다, 최소한 자신이 지닌 힘에 대해서는 충분한 이해를 갖춘 자들. 그런 능력자들이기에 방금 흘러나온 선명한 붉은 색이라는 것이 얼마나 터무니 없는 것인지 확연하게 피부로 절감하고 있는 것이다. 귀환자들이 자신들을 에워싸듯 보호한 덕분에 간신히 준상이 뿜어내는 공포스러운 기세를 견뎌낼 수 있게 된 유경훈은, 자신이 데려온 귀환자들인 식은 땀을 줄줄 흘리며 긴장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다. “무슨 일이지?” 그 말에 귀환자들 가운데 하나가 잔뜩 잠겨서 까끌거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일단... 피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뭣이?” 유경훈은 어느새 흥건하게 이마를 적신 땀을 손수건으로 닦아내며 말했다. “저 자가, 그렇게 강한 자인가?” “그렇습니다.” “모두 함께 덤벼도?” “정확한 건 싸워봐야 알겠지만, 현재로서는 저희들이 모두 죽음을 각오한다 해도 막아낼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 싸움이란 것도 어느 정도 역량이 비슷해야 성립이 되는 것. 이겨내는 것도 아니고 막아내는 것만으로도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상대라니. 이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실제로 충돌이 벌어질 경우 일방적인 학살이 되어 버릴 수도 있다는 뜻이 된다. 어디서 이런 자가 갑자기 튀어나왔단 말인가. 공식적으로 확인된 정보는 아니지만 자신의 딸이 전세계의 모든 귀환자들 가운데 가장 높은 레벨을 달성했다고 알고 있던 유경훈으로서는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실수다. 이런 자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사전에 알고 있었더라면, 이렇게 무턱대고 강경한 수단을 동원하지는 않았을 터. 이런 상황에서 무작정 들이대는 건 스스로 목을 내어 놓는 일이나 다름 없다. 그렇게 판단을 내린 유경훈은 준상의 기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귀환자들의 등 뒤에 몸을 숨긴 채로 크게 소리쳤다. “뭔가 착오가 있었던 모양이오. 나중에 다시 얘기합시다.” 그는 일방적으로 그렇게 선언하고 귀환자들을 재촉해 그 자리에서 물러나려 했지만, 준상은 그들이 도망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헉!” 뒤돌아 도망치려던 김비서의 눈앞에 갑자기 붉은 털을 지닌 거대한 붉은 늑대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커다란 황소에게 늑대 가죽을 뒤집어 씌웠다고 해도 믿을 정도의 커다란 늑대가 노란 눈알을 번뜩이며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대자 너무나 놀란 김비서는 다리의 힘이 풀리는 것을 느끼며 그대로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곧바로 서로 다른 털빛을 지닌 늑대들이 퇴로를 막아서는가 싶더니, 도저히 이 세상의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는 기괴한 형태의 개 한 마리가 입에서 화염 방사기처럼 불을 뿜어대며 그들을 위협했다. 뿐인가. 늑대들의 주위로 흰 빛이 명멸하는가 싶더니 십여 개체에 이르는 화려한 빛의 정령들이 연이어 모습을 드러낸다. “...” 이렇게 되자 그나마 숫자에서 보이고 있던 우위마저도 의미가 퇴색해 버리고 말았다. 늑대 같은 소환물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이 엄청난 수의 정령들이라니. 최초 귀환자들이 생겨났을 당시에는 정령사들은 그야말로 천덕꾸러기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약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어느 시점이 되자 갑자기 정령들이 강한 힘을 발휘하기 시작하면서 지금은 레벨이 낮아도 정령사라면 일단 대우를 받을 정도로 축복받은 존재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런 정령사들도 기타 슬롯의 개수 제한으로 인해 최대 다섯 개체의 정령을 부리는 것이 고작이다. 헌데, 지금 그들의 눈앞에 나타난 정령들의 수는 무려 열 손가락을 모두 채우고도 남는 수준이다.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 말고 함께 온 여자까지 모두 함께 정령을 소환했다고 해도 이 정도의 소환물과 정령을 한꺼번에 불러내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귀환자들은 주위를 둘러보며 긴장하기 시작했다. 은신 등의 방법으로 모습을 감춘 제3의 인물이 있지 않고서는 지금의 상황을 설명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준상과 헤네스, 그리고 서유미 만으로도 난감한 상황에서 모습을 숨긴 제3의 인물까지 가세한다면 그들로서는 도저히 손을 써볼 도리가 없다. 그야말로 막다른 골목에 몰린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 준상은 광견의 위엄을 발동한 채로 귀환자들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누가 가도 좋다고 했지?” “크윽.” 이미 기세가 완전히 제압된 상황이라, 그들은 더 이상 준상이 뿜어내는 기괴하고 꺼림직한 기운을 견뎌내지 못했다. 차라리 처음부터 막무가내로 악을 쓰며 덤벼들었다면, 이런 무시무시한 능력을 지닌 존재라도 백주대낮에 마을 한복판에서 사람을 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니, 한두명 정도는 빠져 나갈 수도 있었을 터. 하지만 이제 자신이 거느린 귀환자들은 완전히 마음이 짓눌려 버린 탓에 대항하고자 하는 의지조차 사라져 버린지 오래였다. 유경훈은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지만, 이미 상황을 되돌리기에는 너무나 늦어 버린 뒤였다. 바로 그때. 귀환자 가운데 한 명이 기억 속에서 준상의 모습을 떠올렸다. “아! 당신은!” 인상이 완전히 바뀐 것은 물론이고 뿜어내는 기세 또한 생소하기 짝이 없었으나, 만인을 압도하는 엄청난 기세에 짓눌리자 그제서야 이전에도 이런 능력을 지닌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서야 떠올린 것이다. 다른 귀환자들과 유경훈이 그들 바라보자, 그 귀환자는 손가락을 들어 준상을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귀환자. 그리고, 연합의 파괴자!” 그 말을 듣고서야 귀환자들은 준상이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박준상...” 단신으로 김종경이 만든 연합으로 쳐들어가 그들을 굴복시키고 연합 건물을 박살내 버린 일화는 국내의 귀환자들 사이에서는 거의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었다. 특히나 지금 준상을 알아본 귀환자는 당시 기초 생활 수급자 수준의 돈을 지급 받으며 연합 안에서 숙식을 하던 인물 가운데 하나로 그 광경을 멀리서나마 직접 목격한 장본인이기도 했다. “이런...” 하지만 유경훈은 귀환자들과는 다른 의미로 준상의 이름을 받아들였다. 그와 같이 기득권을 지닌 자들에게 있어서 준상을 건드렸다가 하루 아침에 몰락해 버린 김종경의 일은 귀환자들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유명했다. 당시만 해도 유경훈 역시 김종경의 몰락을 보며 냉소를 지었던 것이 사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것이 남의 일이 아니게 되어 버렸으니 그로서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서유미가 속한 길드와 준상이 친밀한 관계에 있다는 것은 그 역시 알고 있었지만, 미래 운운하며 이렇게 집까지 사적으로 방문하는 사이일 줄이야 어찌 예상이나 했겠는가. 유경훈은 늑대들의 모습을 보고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떨고 있는 자신의 비서를 보며 이를 갈았다. 잘만 했으면, 서유미는 물론이거니와 인간인지조차 의심스러운 이 괴물 같은 사내와도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었는데, 이 빌어먹을 멍청이가 정보 수집을 제대로 못한 탓에 처음부터 완전히 관계가 틀어져 버렸다. 어떻게 해야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을까. 유경훈은 이마로부터 줄줄 흘러내리는 땀을 닦을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생각을 시작했지만, 그의 두뇌가 어떤 결론을 내기도 전에 준상이 다시 그들을 향해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딛었다. 저벅. 신발 밑창에 잔모래가 밟히는 그 작은 소리가 지금 이들에게는 마치 염라대왕이 재판정에서 내리치는 망치 소리처럼 크게 들리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유경훈은 다급히 손을 내저으며 준상을 향해 외쳤다. “진정하시오! 내가 아무래도 말을 함부로 했던 것 같...” 하지만 그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준상의 오른손이 들려지는가 싶더니 건장한 유경훈의 몸이 그대로 휙 하고 딸려가고 말았다. “헉!” “회장님!” 귀환자들과 비서가 기겁하며 그의 몸을 붙잡으려 했지만, 그들이 손이 채 완전히 들려지기도 전에 유경훈은 준상의 손아귀에 잡혀 대롱대롱 매달리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컥!” 유경훈은 억센 손이 자신의 목덜미를 움켜 잡자 그대로 전신의 힘이 쭉 빠지는 듯한 탈력감을 느껴야만 했다. 그것은 지금까지 자신을 짓누르고 있던 공포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공포였다. 단지 목덜미를 움켜쥐었을 뿐인데, 지금까지 멀쩡하게 움직이고 반응하던 자신의 신체가 줄 끊어진 마리오네트처럼 축 늘어지는 그 감각이라니. 유경훈은 이대로 불구가 되어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극심한 두려움에 정신이 함몰되기 시작했다. “이, 이러지 말게. 우리 좋은 말로 풀어 보세나.” “...” 급히 그렇게 말했지만 준상은 대답 없이 무심한 시선으로 그의 눈을 바라 보기만 했다. 정면 대결로 붙어도 승산이 없는 마당에, 유경훈마저 사로 잡혀 버리자 다른 귀환자들은 감히 움직일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 유경훈은 준상이 반응을 보이지 않자 필사적으로 다시 말을 걸었다. “내가 잘못했네. 전부 다 잘못했으니, 우리 일단 이건 놓고 얘기하세.” “...” 물론 이번에도 준상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니, 반응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무심하기까지 하던 그의 시선이 차갑게 가라앉는 것을 유경훈만큼은 바로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는 따로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아니, 생각 이전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 살기. 그것은 고도로 정제된 진득하고 차가운 살기였다. 유경훈은 그 눈을 바라보는 순간, 이 남자가 이미 누군가의 생명을 끊은 적이 있음을 알아 차렸다. 준상이 언제, 누구를, 어떻게 죽였는지는 지금 상황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다만, 그 차갑게 가라앉은 살기가 유경훈 본인을 향해 흘러나오고 있다는 점만이 중요할 뿐이었다. 결국 유경훈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이렇게 애원할 수 밖에 없었다. “사, 살려주시오.” “...” 하지만 이번에도 준상은 대답하지 않았다. 유경훈은 마음이 급해졌다. 아까까지만 해도 그는 최악의 상황까지는 가지 않으리라 판단하고 있었다. 아무리 엄청난 힘을 지닌 귀환자라 해도 엄연히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테두리에 있는 이상 함부로 사람을 죽일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오산이었다. 이 남자라면 저지르고도 남는다. 직접 그 손아귀에 잡혀 보고 그 시선을 코앞에서 마주하고 나서야 유경훈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법의 심판이 뒤따르면 뭐할 것인가. 이미 자신의 목숨은 끊어진 후일텐데. 마음이 급해지자 유경훈은 다시 애원을 해보려 했지만, 그가 입을 열려는 기색을 먼저 알아차린 준상이 선수를 쳤다. 유경훈의 눈을 똑바로 직시하며 공포의 시선을 발동한 것이다. “커억!” 몸이라도 움직일 수 있다면, 고개라도 돌려서 피할 텐데. 지금 그의 몸은 준상의 단단한 손아귀에 붙들린 채 손가락 하나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이 불가능한 상태. 결국 유경훈은 붉게 타오르는 그 눈동자에서 쏟아지는 공포라는 이름의 치명적인 독에 의해 정신이 함몰되는 과정에서도 눈조차 돌리지 못한 채 부들부들 몸을 떨며 준상과 시선을 맞대고 있어야만 했다. 그도 보통 사람은 아닌지라 처음에는 그나마 좀 버티는가 싶었지만, 굶주린 피라냐처럼 달려들어 정신을 물어뜯는 공포의 위력 앞에 결국 함락되고 말았다. “...” 준상은 넋이 나간 채 몸을 떨고 있는 유경훈을 잠시 바라보다가, 그의 몸을 귀환자들에게 휙 하고 집어 던지며 말했다. “조만간 내가 찾을 것이니, 가서 기다려라.” 준상의 말에 귀환자들은 대꾸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반쯤 정신이 나간 유경훈을 부축해 그 자리에서 얼른 벗어나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귀환자들이 허겁지겁 도망치자, 서유미는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준상에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 준상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헤네스는 얼른 서유미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 “가요. 얼른 가서 할머니 할아버지께 인사부터 드려요.” 분위기를 바꾸고자 미소를 지으며 재촉하는 그녀의 모습에 서유미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00317 트롤러 ========================================================================= 준상과 헤네스는 서유미의 안내를 받아 그녀의 집을 방문했다. 서유미의 집은 전통 한옥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작은 규모의 전원주택이었는데, 지붕은 푸른색 기와로 얹고 벽은 붉은 황토 벽돌을 사용하였으며, 현관은 전통 주택의 대문과도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런 식의 개량 한옥은 준상에게도 그리 낯익은 것이 아니었지만, 아예 다른 세상 사람인 헤네스로서는 집의 외양 자체가 너무나 신기할 따름이다. “집이 너무 예뻐요.” “그런가요.” 순수하게 감탄하는 헤네스의 모습에 서유미는 씁쓸하게 웃었다. 원래 이 집은 유경훈이 본가의 사람들 몰래 외도를 즐기기 위한 용도로 구입했다가, 어머니의 사망 이후 혼자가 된 서유미에게 넘겨진 곳이다. 한적하고 넉넉한 분위기를 가진 집이긴 하지만, 그녀에게 있어서는 사실상 감옥이나 다른 없는 곳이었고, 노부부마저 없었다면 그녀는 이곳에 갇힌 채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고 그대로 시들어 버렸을 것이다. 마당 안으로 들어서자 한켠에 작은 돌이 비석처럼 서 있는 것이 보인다. 준상이 흘깃 바라보니 어린 아이의 글씨로 쫑이라고 써있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아가씨.” 인기척을 느꼈는지 곧바로 현관이 열리며 이전에 아기용품을 사러 갔을 때 도움을 받았던 할머니가 서유미에게 다가와 그녀를 안아주었다. 할머니는 잠시 아무런 말없이 서유미를 보듬으며 그렇게 서 있다가, 뒤늦게서야 준상과 헤네스에게 인사했다. “어서 오세요. 날씨가 찬데 일단 들어가요.” “네.” 안으로 들어가자 방 한쪽에 싸다만 짐꾸러미가 눈에 들어왔다. “오신다고 얘기는 들었는데, 막상 짐을 챙기려니까 자꾸만 이것저것 눈에 밟혀서...” 할머니는 그렇게 말하고는 그들을 거실로 안내했고, 뒤이어 조금 허리가 굽은 할아버지 한 분이 안방에서 조심스럽게 모습을 드러냈다. “죄송합니다. 제가 몸이 조금 불편해서... 미리 마중을 나갔어야 하는데.” 그 모습을 본 헤네스가 얼른 일어나 할아버지를 부축했다. 준상과 헤네스는 곧바로 이삿짐 챙기는 일을 도왔다. 짐 자체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것저것 손 때 묻은 것이 많다 보니 뭘 버리고 뭘 챙겨가야 할지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한 탓에 시간이 제법 걸렸다. 짐을 챙기자 이사 자체는 간단했다. 인벤토리에 짐을 몰아 넣고 신기루 꽃을 통해 요정계로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나름대로 준비를 하기는 했는데, 어떨지 모르겠네요.” 그들이 살 집은 여왕의 정원과 가까운 곳에 마련되어 있었는데, 미리 서유미와 함께 알아본 한옥 형태의 컨테이너 하우스였다. 한옥 형태라고 해봐야 외양은 기와 비슷하게 올려진 지붕 외에는 거의 비슷한 점이 없었지만, 집 내부는 ㄷ자 형태로 세 개의 컨테이너 하우스를 연결해서 제법 한옥의 흥취를 자아내고 있었다. “이쪽은 수석 보좌관인 셀라입니다. 요새는 아이들을 보살피는 일을 도맡아 하고 있는데, 경험이 없다 보니 모르는 것이 많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많이 가르쳐 주셨으면 합니다.” “저희가 아는 게 있나요. 그저 폐나 끼치지 않으면 다행이죠.” 할머니가 그렇게 말하자 셀라는 화들짝 놀라더니 울먹이며 매달렸다. “그러지 마시고 도와주세요. 정말 힘들어 죽겠어요.” “...” 아닌게 아니라 그녀의 눈가에 생겨난 다크 서클은 이전보다 그 색과 깊이를 한껏 더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아줌마 요정들이 남편을 따라 영지로 나가게 됨에 따라 셀라를 비롯한 보좌관들의 보육 업무는 그 난이도를 더해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물론 아줌마 요정들이 언제까지고 자기 아이들을 그렇게 내버려 두지는 않을 테지만, 적어도 그 남편인 블러드로드들이 어느 정도 영지 업무에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출퇴근 식으로 아이들을 보살필 수밖에 없었다. 누리 만으로도 벅찬 마당에, 그에 버금가는 건강한 아이들이 다섯이나 추가 되었으니 셀라의 부담이 오죽했겠는가. 그런 와중에 육아의 베테랑이라 할 수 있는 노부부가 왔으니, 그녀로서는 천군만마가 온 것처럼 느껴져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 심각했기 때문에 노부부는 다음날부터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돕기 시작했다. 물론 그 전에 리체스로부터 치료를 받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허리가 아프시다고요.” “네, 네.” 아이를 낳은 뒤로 성스러운 기품마저 더해진 리체스의 분위기에 압도된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핀잔에도 불구하고 얼굴을 붉히며 치료를 받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완치되어 할머니와 함께 아이들 돌보는 일에 뛰어들었다. 덕분에 셀라를 비롯한 보좌관들은 육아로 인한 피로로 시들어 가던 모습에서 벗어나 빠른 속도로 본래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게 되었다. 노부부가 요정계에 정착하면서 좋아진 점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지금까지는 준상이 볶음밥을 하는 것 정도가 요리의 전부였지만, 노부부가 자리를 잡으면서 전통 한식을 언제든 맛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아무리 서구화된 입맛을 가지고 있다 해도 준상 역시 한국 사람인 이상은 가끔 칼칼한 겉절이나 물김치 같은 것이 생각날 때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그런 것을 먹으려면 재료를 사서 직접 만들던가 아니면 만들어진 것을 사오는 수밖에 없었던 것도 사실. 바쁜 와중에 반찬 하나 갖춰 먹자고 지구를 왕복하는 일은 무척이나 번거로운 일이었기 때문에 준상은 막 만든 싱싱한 밑반찬 같은 건 이미 포기한지 오래였다. 하지만 노부부는 아기들을 돌보느라 바쁜 와중에도 집 앞에 텃밭을 일구고 이런 저런 밑반찬을 만들어 나누어 주자 그런 상황은 단숨에 뒤바뀌어 버렸다. “무척이나 열심히 사시는 분들이네요.” 도무지 노인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의 활발한 행동력에는 한창 때인 헤네스마저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이곳에 오신 뒤로 한층 활기를 찾으신 것 같아 저도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렇군요.” 노부부의 등장은 준상에 의해 납치되어 강제로 머슴살이 중인 블레이크에게도 자극이 되었다. 아무래도 나이가 나이인 이상 의욕은 있어도 한창 때처럼 힘을 쓰기 어려운 할아버지에게 있어, 이 건장하고 선량한 군인은 마침 부려 먹기 딱 좋은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 “예끼. 그렇게 무작정 힘만 쓴다고 되는 일이 아니야. 잘 보라고.” “...” 도끼질부터 시작해서 항아리를 마당에 묻는 일까지, 처음에는 그런가보다 하던 블레이크도 여러 가지 노하우를 전수 받으면서 나날이 여러 가지 잡일에 익숙해지기 시작하자 언제부터인가 할아버지를 교관이라고 부르며 따르게 되었다. 처음에는 노부부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 같아서 걱정하던 헤네스였지만, 고작 며칠 만에 현재의 요정계에 없어서는 안 될 인물이 되어 버린 것을 보고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렇게 서유미와 노부부가 성공적으로 요정계에 정착하자, 준상은 미루어 두었던 일을 처리하기 위해 다시 지구로 향했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바로 서유미의 친부인 유경훈에 대한 일이었다. 집이나 사무실 같은 정보는 전혀 알고 있지 못했지만, 이전에 그를 붙잡았을 때 활성화시켜둔 추적 기능을 통해 준상은 어렵지 않게 유경훈의 소재를 파악할 수 있었다. “제법 머리를 썼군.” 준상에 의해 연합의 건물이 박살나 버린 일 때문일까. 유경훈은 서울 시내를 벗어난 인적이 드문 교외의 별장에 칩거해 있는 상태였는데, 생각보다 경비하는 인원의 수가 매우 적었고, 그나마도 유경훈이 머무는 본채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있는 상태였다. 마치 올테면 와보라는 듯한 모습. 준상은 일단 투명화로 모습을 숨긴 채 위상전이를 펼쳐 별장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가 안으로 들어섰을 때, 유경훈은 2층의 거실에서 안락의자에 앉은 채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홀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후우...” 준상에 의해 공포로 침식되어 버린 마음의 상처는 며칠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 정도 회복이 된 상태였지만, 지금 그의 마음이 무거운 것은 전혀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준상의 생각과는 달리, 유경훈은 스스로 이곳으로 온 것이 아니었다. 서유미와 노부부가 요정계로 이사를 하고 그곳에 적응하던 그 며칠 동안, 유경훈은 참으로 여러 가지 일을 경험해야만 했다. 그가 인사불성 상태로 반쯤 정신을 놓은 채 돌아오자, 그의 아내와 아들들은 처음에는 극진히 보살피는 시늉을 했다. 하지만 사흘이 지나도 제 정신이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자, 그들은 곧바로 태도를 바꾸어 유경훈을 회장직에서 밀어내고 인적이 드문 이곳 별장으로 옮겨 버렸다. 이것은 사실상의 쿠데타나 다름 없는 상황. 얼마 지나지 않아 유경훈은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릴 수 있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지금껏 애정으로 보살펴 왔던 아내와 자식들에게 이런 처지로 내몰렸다는 사실에 다시금 충격을 받고 말았다. 이런 식으로 자신을 처박아둔 또다른 이유. 그것은 조만간 예고된 준상의 방문이었다. 준상의 정체가 파악되자 그들은 이전까지 그가 벌여왔던 행적을 추적했고, 그 결과 어지간한 방법으로는 그의 분노를 잠재우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서툴게 그를 건드렸다가 모처럼 심혈을 들여 일으킨 연합이 붕괴되고 정치인으로서의 생명이 사실상 끊어져 버린 김종경.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준상과 접촉한 직후 펜타곤 붕괴라는 전대미문의 상황을 맞이한 미국. 다른 건 제쳐두고 이 두 가지만 놓고 보더라도 유경훈의 앞날은 이미 예정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 재앙이라고 밖에 부를 수 없는 이 터무니없는 인간이 눈밖에 났음을 확인한 유경훈의 부인과 아들들은 이것을 오히려 좋은 기회로 보았다. 이른바 차도살인의 계책을 떠올린 것이다. 물론 준상이 유경훈을 죽음으로 몰 가능성은 매우 낮다. 하지만 그가 왔다 간 것만 확인되면 경비원들이 얼마든지 손을 쓸 수 있는 상황. 적당히 사고사 정도로 처리되기는 하겠지만, 방식이야 어떻든 간에 최소한 살인의 주체에 대한 의혹 정도는 준상에게 분담시킬 수 있으니 그들로서는 더할 나위 없다. 이런 와중에도 자신과의 의리를 지켜준 김비서를 통해 이 모든 정황을 전해들은 유경훈은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은 기분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아등바등하며 살아온 결과가 고작 이런 것이란 말인가. 수차례 외도를 하기는 했어도 부인과 아들들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정성을 기울여 왔다고 생각했던 그이기에 충격이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하긴 전조는 이미 예전부터 나타나 있었다. 서유미의 어머니가 죽은 일이라든가, 막 걸음마를 뗀 아이를 해치려고 했던 일이라든가. 모르는 척 하고 있었을 뿐, 그들의 포악한 성정은 이미 그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는 일이었다. “누구를 탓하겠는가. 모두 자업자득인 것을.” 유경훈은 다시 길게 탄식하며 잔을 기울이다가 그것이 비었음을 깨달았다. 고개를 돌려 탁자 위를 바라보았지만, 어느새 병 또한 비어버린 상황. 유경훈은 새로운 술병을 꺼내오기 위해 몸을 일으키다가, 어두운 벽 한 켠에 등을 기댄 채 소리 없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한 남자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툭. 데구르르르. 유경훈의 손에서 빈 술잔이 융단이 깔린 거실 바닥에 떨어져 굴렀다. “하... 하하...” 잠시 허탈해하며 웃는 것지 마는 건지 모를 기묘한 소리를 흘리던 유경훈은 이내 거실 바닥에 털썩 주저앉더니 긴 탄식과 함께 눈을 감으며 말했다. “결국은 이렇게 끝나고 마는 건가.” 세상만사 전부 달관한 듯한 그 모습에 준상은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어떻게 된 건가.” “...” 준상의 물음에도 불구하고 유경훈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더 이상 구차해지지 말자고 결심한 탓이다. 잠시 말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던 준상은 휴대폰을 들어 임서윤에게 연락을 취했다. “안녕하십니까. 어쩐 일로...” 휴대폰 너머에서 서윤의 목소리가 전해지자, 준상은 조용히 용건을 말했다. “유경훈에 대해 알고 있나?” 그 말에 임서윤은 잠시 아무런 말이 없다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유미씨 아버지 말씀이십니까.” “그래.”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임서윤은 잠시 어딘가로 연락을 취하는가 싶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유경훈이 현재 처한 상황에 대해 소상하게 알려 주었다. 유경훈의 부인과 아들들은 나름 신경 써서 일을 처리한다고 하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유경훈 본인에 비하면 노련함이 많이 떨어지는 탓에 이미 많은 곳에 정보가 흘러들어간 상황이었던 것이다. “재미있군.” 임서윤의 설명을 들은 준상은 피식 웃어 버렸다. 보기 드문 콩가루 집안의 막장 행보야 어차피 남의 일이니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누군가를 해치기 위한 도구로 이용되는 것은 그리 기분 좋은 일이 아니다. 준상은 임서윤과의 통화를 끊고 유경훈에게 이렇게 말했다. “일어나라.” 내색하지는 않고 있었지만, 유경훈은 속으로 크게 놀란 상태였다. 그저 힘만 믿고 설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식으로 자신의 집안에서 벌어지는 일까지 단숨에 알아낼 수 있을 정도의 정보통마저 갖추고 있다니. 정보통의 실체야 누군지 대충 감이 왔지만, 이 정도의 고급 정보를 달란다고 재깍 말해주는 것은 단순한 친분 관계로는 사실상 불가능한 일. 유경훈은 떨리는 목소리로 준상에게 물었다. “어쩔 셈이오.” 준상은 반문했다. “어쩔 것 같은가.” 유경훈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준상의 의도를 깨닫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00318 트롤러 ========================================================================= “날 꼭두각시라도 만들 셈이오?” 유경훈의 말에 준상은 대답 대신 어딘가로 연락을 취하는가 싶더니 잠시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를 향해 한 손을 내밀었다. 자신의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지만, 지금 상황에서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이 손을 잡는 것 뿐임을 유경훈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잠시의 굴욕을 참고 살아남아 자신을 팽시킨 부인과 자식들에게 복수를 할 것인가. 아니면 이대로 지난 인생을 되돌아 후회하며 담담하게 최후를 맞이할 것인가. 잠시 갈림길에 놓였지만, 처음부터 그의 선택은 정해져 있었다. 준상은 유경훈이 자신의 손을 잡자,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를 자신에게로 확 끌어 당겼다. “엇!” 그 우악스런 힘에 유경훈은 비틀거리면서 그대로 준상의 품으로 끌려 들어갔다. 탄탄한 준상의 가슴이 눈앞으로 다가오자 유경훈은 본능적으로 충격에 대비하며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예상했던 충돌은 없었다. 뭐가 어떻게 된건가 싶어 주위를 돌아보는데, 문득 눈에 익은 한 사람이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윤선?” 유경훈은 순간 자신의 눈이 잘못 되었나 싶었다. 벌써 죽은지 이십년이 넘은 한 인물이 그의 시야에 들어와 있었기 때문이다.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니, 자신을 둘러싼 풍경도 예사롭지 않았다. 마치 아이들이 낙서를 해놓은 듯한 그런 모습. 아무리 봐도 자신이 살던 인간 세상의 그것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광경이다. “난... 죽은 건가?” 조금은 허탈한 기분으로 그렇게 중얼거리자, 눈앞의 여인이 입을 열었다. “정신이 나갔다더니 정말인가 보군요.” “...” 분명히 목소리가 닮기는 했는데, 뭔가 다르다. 기억 속의 여인과 무척 닮기는 했지만, 아담한 체구를 지니고 있던 윤선과는 달리 이 여인은 제법 날렵한 몸매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유경훈은 그제서야 한 가지 가능성을 깨달았다. “설마?” 여인은 그런 유경훈의 모습을 보며 서늘한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확실히 전 당신의 딸이 아닌가 봐요.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데 알아보지도 못하는 걸 보면.” 그 여인은 놀랍게도 서유미였다. 언제나 앞머리를 내린 채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었던 그녀였지만, 요정계에 온 뒤로는 더 이상 그렇게 하고 다니지 않았다. 그녀가 얼굴을 가리고 다녔던 것은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격리시키기 위한 하나의 수단. 하지만 요정계로 삶의 터전을 옮기게 되자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언제나 자신을 백안시하던 이웃들의 눈치를 살필 필요도 없다. 출생의 비밀로 인해 떳떳하게 세상에 나서지 못하던 것도 이 요정계에서는 의미 없는 일이다. “그런...” 유경훈은 눈앞의 여인이 자신의 딸인 서유미라는 것을 깨닫자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런 유경훈을 보며 서유미는 품에서 흰 천에 싸여 있는 식칼을 꺼내 들고는 으스스한 한기가 풍기는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이 칼, 기억하시나요?” “...” 어딘지 모르게 투박하면서도 예리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는 식칼 한 자루. 하지만 유경훈은 그것을 보는 순간 이름 하나를 바로 떠올릴 수 있었다. “아랑도.” 서유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랑도를 유경훈에게 겨누었다. “용케 이름은 기억하는 군요.” “...” 기억 못할 이유가 없다. 유경훈이 윤선에게 눈독을 들이게 된 것도 결국 따지고 보면 그 식칼을 들고 귀신을 물리치는 모습을 본 직후의 일이었으니 말이다. 착잡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유경훈을 향해, 서유미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난 아직도 매일 밤 꿈을 꿔요.” “...” “나를 감싸고 죽은 어머니, 그리고 나대신 차에 치인 쫑이.” “음...” 유경훈은 눈을 감은 채 침음을 삼켰다. 이것만큼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서유미는 마음 속에서 불길이 확 하고 치미는 느낌을 받았다. “눈 떠요.” “...” “왜 눈을 감는 건가요. 자신이 뿌린 죄악의 씨앗이 이렇게 크게 자라나 칼을 겨누고 있는 현실이 꼴도 보기 싫다 이건가요?” “아니, 나는...” 유경훈은 얼른 눈을 뜨며 변명을 하려 했지만, 다음 순간 서유미가 그의 어깨를 우악스럽게 잡아채며 그의 몸을 뒤로 넘어 뜨렸다. “큭!” 서유미는 그렇게 널브러진 유경훈의 몸 위로 올라타며 아랑도를 그의 목에 겨누었다. 귀기 어린 시선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그 모습과 마주하자 유경훈은 저항할 엄두조차 내지 못한 채 그대로 압도되어 버리고 말았다. “꼴좋네요.” “...”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부인과 아들들에게 버림받은 기분이 어떤가요.” 유경훈은 가슴 속 한 구석을 예리한 송곳으로 후벼 파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입술을 깨물어야만 했다. 서유미는 그런 유경훈을 내려다보며 냉소를 흘렸다. “지금까지 나는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을 믿지 않았어요.” “...” “그렇잖아요. 그렇게 고통스런 삶을 사시던 어머니는 그렇게 고통스럽게 돌아가셨고, 저는 얼굴조차 드러내지 못한 채 시들어가고 있는데, 그 모든 일의 원흉들은 떵떵거리며 잘 살고 있었으니까요.” 유경훈은 더 이상 서유미와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서유미는 손을 뻗어 그의 턱을 잡아채 자신에게로 시선이 향하도록 고정시키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고개 돌리지 마.” “유미야...” “그 이름도 부르지 마.” “...” 유경훈이 입을 다물자, 서유미는 식칼을 천천히 그의 목젖에 가져다 대며 말을 이었다. “당신도 봤겠지만, 이곳은 당신이 살던 지구가 아니야. 그곳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지.” “...” “이곳에서라면, 내가 당신을 죽여 땅에 파묻어 버려도 아무도 나에게 죄를 물을 수 없어.” 귀기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며 자신의 죽음을 논하는 딸의 모습을 유경훈은 더 이상 직시할 수 없었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이게 최선인지도 모른다. 엄한 놈들에게 죽느니, 이렇게 예쁜 얼굴을 떳떳하게 세상에 드러내지도 못한 채 숨어 살아야만 했던 딸의 원한을 조금이나마 풀어주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준상이 내민 손을 바라보며 잠시나마 살아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던 일조차 어쩐지 허망하게 느껴질 정도다. “원하는 대로 해라.” “...” 그렇게 말하며 가만히 눈을 감는 유경훈의 모습에 서유미는 다시금 울컥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유경훈의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움켜 잡은 채 다른 한 손으로 식칼을 높이 쳐들며 외쳤다. “웃기지마! 애원해! 애원하라고! 살려달라고 울며불며 꼴 사납게 매달리란 말이야! 그딴 식으로 폼 잡으면 내가 살려줄 것 같아? 웃기지마! 이 개새끼야!” 서유미는 그렇게 소리를 지르며 식칼을 있는 힘껏 내리 찍었다. 콱! 하지만 그녀의 식칼은 유경훈의 머리를 찌르지 못했다. 광대뼈 언저리를 칼날이 스치고 지나가며 상처가 생겼지만, 그것이 전부였던 것이다. 유경훈은 화끈거리는 얼굴을 상처 위로 뜨거운 무언가가 떨어져 내리는 것을 느꼈다. 가만히 눈을 떠보니, 잔뜩 찡그린 얼굴로 자신의 딸이 눈물을 펑펑 쏟아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개새끼... 빌어먹을 개새끼...” “...” 서유미는 그렇게 유경훈을 내려다보며 눈물을 쏟아내더니 손을 들어 얼굴을 닦으며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일어나.” “...” “다시는 나와 얼굴 마주칠 생각 하지 마. 그땐... 정말 죽여 버릴지도 모르니까.” 유경훈은 착잡한 표정으로 짧은 탄식을 내뱉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가 주춤주춤 일어나자, 서유미는 길게 숨을 내쉬며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는가 싶더니 갑자기 몸을 휙 돌리며 그의 가슴을 발로 콱 걷어차 버렸다. “컥!” 갑작스런 그 기습에 놀랄 틈도 없이 유경훈은 몸이 뒤로 휙 날아가 버리는 것을 느끼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는 주위의 풍경이 다시금 확 바뀌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어둑한 하늘. 그리고 방금 전까지 호흡했던 깨끗한 공기와는 다른, 어딘지 모르게 매캐한 느낌의 대기. 유경훈은 아스팔트 위에 널브러지며 자신이 원래의 세계로 돌아왔음을 깨달았다. “이건...” 얼른 몸을 일으킨 그는 이내 자신의 눈앞에 빵모자를 눌러쓰고 동그란 선글라스를 쓴 준상이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방금 그건... 도대체...” 잠시 공포에 빠져 환상이라도 본 것이었을까. 아니면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잠시 정신을 잃고 꿈이라도 꾼 것일까. 뭐가 뭔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던 유경훈은 문득 얼굴에서 느껴지는 화끈거리는 감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손을 들어 가만히 얼굴을 쓰다듬어 보았다. 그러자, 칼로 베인 예리한 상처가 만져진다. “...” 그렇다면, 방금의 그 일은 꿈이 아니었단 말인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손에 묻어나는 끈적한 피를 바라보고 있는데, 준상이 그제서야 입을 열었다. “이곳이 맞나?” “...” 무슨 소린가 하고 주위를 돌아본 유경훈은 자신이 북한산 아래 위치한 자택 근처에 와 있는 것을 그제서야 알아챘다. “여긴...”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인적이 드문 교외의 별장에 있었는데, 이것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놀란 표정으로 주위를 돌아보는 그의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준상은 다시 입을 열었다. “맞나?” 그제서야 유경훈은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맞긴 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하지만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준상은 그의 목덜미를 콱 움켜쥐더니 그대로 눈앞에 높게 솟아 있는 담장을 훌쩍 뛰어 넘었다. “헉!” 유경훈은 기겁하며 몸을 움츠렸지만, 아차 하는 사이에 이미 자신이 담장을 너머에 도달해 있는 것을 깨닫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준상은 그가 황망해 하고 있는 동안 초감각을 통해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이층집 내부를 잠시 확인하더니, 다시 옥상 위로 몸을 날렸다. “...” 나이는 들었어도 아직 건장한 체구를 유지하고 있는 자신의 몸을 장난감처럼 한 손으로 번쩍 들어 올리는 것만 해도 놀라운데, 그 상태로 커다란 담장을 가볍게 넘고 다시 이층집 옥상으로 단숨에 뛰어오르면서도 깊은 숨 한 번 들이쉬지 않는 준상의 모습에 유경훈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옥상에 올라선 준상은 유경훈을 내려 놓고는 문을 열고 아래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다가 멀뚱히 서있는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따라와라.” “...” 유경훈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 뒤를 따라 계단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아래쪽에서 웃음이 섞인 대화가 들려온다. “십년은 더 기다려야 할 거라 생각했는데, 일이 쉽게 풀렸어.” “그러게 말입니다. 하여튼 노인네가 욕심만 많아서.” “내 말이. 자, 제 잔 받으시죠. 어머니.” “그래.” 유경훈은 그 대화를 듣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지만 준상은 그러거나 말거나 발소리를 죽이는 기색도 없이 뚜벅뚜벅 계단을 내려갔다. “누구냐!” 느닷없이 모습을 드러낸 괴한의 모습에 거실에 모여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던 세 사람 중 하나가 급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준상은 대답하지 않고 손을 뻗어 곧바로 염동력을 발동했다. “헉!” 몸을 일으키던 남자는 갑작스럽게 자신의 몸이 휙 하고 끌려가자 기겁을 하며 놀랐지만 뭔가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준상의 몸에 설치된 정령의 문 속으로 모습을 감춰 버렸다. “저럴수가.” 뒤따라 계단을 내려오던 유경훈은 둘째 아들의 건장한 체구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는 모습을 보고서야 방금 전 자신이 겪었던 일의 진상을 깨달을 수 있었다. “누, 누구냐!” 이번에는 큰 아들이 급히 일어나며 소리쳤지만, 준상은 이번에도 대답 없이 염동력을 발휘해 그 역시 정령의 문 안으로 끌어 들였다. 마지막으로 뒤늦게서야 놀란 표정으로 몸을 일으키던 중년 부인은 준상의 뒤를 따라 계단을 내려오는 유경훈의 모습을 보고는 크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당신이... 어떻게?” 하지만 유경훈이 그 말에 대답하기도 전에, 준상은 곧바로 염동력을 발휘해 그녀 역시 정령의 문 안으로 끌어들이고 말았다. “꺄악!”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갑작스럽게 몸이 딸려가던 그녀는 땅바닥에 나동그라지고 나서야 비로소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팔꿈치와 무릎의 통증에 얼굴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키다가, 자신의 두 아들이 굳은 표정으로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그녀는 자신의 아들들이 바라보고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그렇게 입을 열다가 흠칫하며 그대로 굳어 버렸다. 바람 한 점 불어오지 않는 마치 어린 아이가 낙서를 해 놓은 듯한 기괴한 숲 속. 그곳에 한 명의 여인이 하얀 원피스를 입은 채 서 있었다. 올올이 곤두선 길고 검은 머리카락. 귀기 어린 시퍼런 불길을 내뿜으며 번뜩이는 눈동자. 그리고, 손에 들린 한 자루의 식칼. 두 아들은 그 모습 만으로도 두려움에 휩싸였지만, 그 어머니는 눈앞에 서 있는 여인의 얼굴을 보는 순간 크게 몸을 떨었다. 미지에 대한 두려움을 밀치고 머리 속을 차지한 그 감정의 정체는, 다름 아닌 경악.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여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윤선? 넌... 넌 분명히 죽었을텐데...” 유경훈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녀 역시 서유미의 모습에서 자신이 사주해 죽음에 이르게 했던 윤선이라는 이름의 무당을 어렵지 않게 떠올렸다. 하지만, 그것은 명백한 실수였다. 그녀의 그 말 한 마디가, 서유미의 가슴 속에 잠들어 있던 분노와 광기를 단숨에 일깨워 버린 것이다. 서유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귀기 어린 눈동자에서는 어느새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그녀의 얼굴에 새겨진 감정은 다름 아닌 기쁨. 혈관을 타고 전신을 통해 전해지는 강렬한 카타르시스에 젖은 채 그녀는 격렬하게 몸을 떨고 있었다. 서유미는 터져 나오는 감정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광기에 찬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공포에 젖어 가련하게 몸을 떨고 있는 원수들을 향해 어머니의 유품인 아랑도를 겨누었다. ============================ 작품 후기 ============================ 우린 무한연참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발을 딛었다 많은 독자들의 마음 속 어두운 장막을 거두어낼 오늘 이날을 잊지 마시오 어서 옵쇼~ 사는게 힘들때 어서 옵쇼~ 잘 찾아왔어요 어서 옵쇼~ 막~ 눈물이 흐를 때 어서 옵쇼~ 탁월한 선택이야 으라차 으라차 으라차 야 당신을 미치게 할 이 에너지 울랄라 울랄라 울랄라 숑 이 후기를 크게 읽~고 두팔을 벌리고 벌리고 흔들어 약빨 터지게 쌓여온 모든 걸 털어내 버리게 키보드 마우스 더 때려 손꾸락 부러지게 이 순간 모든 걸 다 태워fire 어서 옵쇼~ 외로워 힘들때 어서 옵쇼~ 잘 찾아왔어요 어서 옵쇼~ 막~ 콧물이 흐를 때 어서 옵쇼~ 탁월한 선택이야 으라차 으라차 으라차 야~~ 당신을 미치게 할 이 에너지 울랄라 울랄라 울랄라 숑~~ 이 후기를 크게 읽~고 두 팔을 벌리고 벌리고 흔들어 약빨 터지게 쌓여온 모든 걸 털어내 버리게 키보드 마우스 더 때려 손꾸락 부러지게 이 순간 모든 걸 다 태워 fire 독자가 원한다 우리를 원한다 어디든 약통 들고 달려간다 독자만족 감동 서비스 우리는 연참왕 한~~ 번~~ 더~~~!! 열나게 열나게 흔들어 약빨 터지게 다 아무 말 하지 마 이거나 따라해 동해물과 백두산 마르고 닳도록 이 순간 모든 걸 다 태워 fire 두팔을 벌리고 흔들어 약빨 터지게 쌓여온 모든 걸 털어내 버리게 키보드 마우스 더 때려 손꾸락 부러지게 이 순간 모든 걸 다 태워 fire Fire fire 다 태워 fire all right 00319 트롤러 ========================================================================= 유경훈은 뭘 어떻게 반응할 틈도 없이 두 아들과 부인이 눈앞에서 사라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다가 준상이 소파에 앉자 정신이 퍼뜩 들었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그는 지금 모습을 감춘 세 사람이 어디서 누구와 마주하고 있을지를 깨닫자 등골에 서늘한 기운이 스쳐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경우에는 그나마 친아버지라 차마 손을 쓰지 못했지만, 윤선의 죽음에 직접적으로 관여한 세 사람의 경우에도 서유미가 과연 그런 식으로 관용을 베풀 수 있을까. 유경훈은 고개를 저었다. 백이면 백,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로서는 도무지 짐작도 가지 않는 일이었지만, 준상이 세 사람을 끌어들인 장소는 서유미가 말했던 대로 지구와는 전혀 다른 곳. 아예 다른 세상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이곳에서는 알 도리가 없다. 적어도, 당사자가 입을 열기 전에는. “앉지.” “...” 유경훈은 준상의 맞은편에 앉으며 생각했다. 이 모든 것은 경고다. 자신 정도는 언제든 처리할 수 있다는 뜻의 준엄한 경고. 아무리 재산이 많고 권력이 있으면 뭘 하나. 눈앞의 이 남자에게는 그 어떤 것도 의미가 없는데. “한 잔... 마셔도 되겠습니까.” 그 말에 준상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고, 허락을 받은 유경훈은 탁자 위에 놓인 잔에 샴페인을 따라 마셨다. 톡 쏘는 탄산의 느낌이 바짝 마른 목구멍 속을 타고 내려가는 그 느낌을 잠시 음미하던 유경훈은 잔을 내려놓고 다시 말했다. “저에게 무엇을 원하시는 겁니까.” 준상은 소파에 등을 기댄 채 가만히 유경훈을 응시하며 대답했다. “조만간 김종경이 다시 전면에 나설 것이다.” “네?” 김종경이라면 바로 눈앞의 이 남자에 의해 정치적 생명이 끝장난 인물. 물론 아직 의원직을 유지하고는 있지만 그저 이름만 명부에 얹어 두었을 뿐, 사실상 종이 호랑이로 전락해 버린 그 인물이 다시 전면에 나서다니. 도대체 무슨 일을 벌이려는 것일까. “그를 지원하라.” 밑도 끝도 없는 준상의 말에 유경훈은 자신도 모르게 반문했다. “지원이라면...” 하지만 준상은 귀찮다는 기색을 잔뜩 내비치며 대답했다. “알아서.” “...” 알아서라니. 이쯤 되면 당황스러움을 넘어 난감할 지경이다. 하지만 준상은 난처한 기색을 비치는 유경훈을 향해 다시 이렇게 말했다. “못하겠나?” “...” 유경훈은 차가운 그 말을 듣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닙니다. 할 수 있습니다.” “좋아.”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뒤따라 일어서는 유경훈을 향해 말했다. “지켜보겠다.” “...” 잘 하라는 말보다 더 무서운 한 마디. 자신도 모르게 깊은 심호흡을 하던 유경훈은 어느 순간 눈앞에 서있던 준상의 모습이 홀연히 사라진 것을 깨닫고는 다시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았다. “후우...” 어쩐지 너무나 피곤한 느낌. 하지만 지금은 느긋하게 휴식을 취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다. 처자들이 이런 식으로 대담한 짓을 저질렀을 때는 그에 동조한 자들이 있었을 터. 우선은 그 모든 상황을 빠른 시일에 정리해야만 한다. 유경훈은 잠시 머리 속으로 지금부터 해야할 일들을 떠올린 후, 어느 정도 생각이 끝나자 휴대폰을 들어 전화를 걸었다. 유경훈이 사태를 정리하기 위해 전화를 걸고 있는 것을 옥상 위에서 초감각으로 확인한 준상은 그제서야 신기루 꽃으로 통하는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섰다. 곧바로 요정계로 들어가 여왕의 정원에서 잠시 기다리자, 하얀 원피스를 입은 서유미가 다가왔다. 흘깃 돌아보니, 그녀의 하얀 원피스 자락 한 켠에 붉은 핏 자국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는 모습이 보인다. 서유미는 준상이 자신을 돌아보자, 두 손을 공손하게 모은 채 그에게 깊게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 준상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 여기서 굳이 그녀에게 방금 전 있었던 일을 물을 필요는 없는 일. 그녀가 어떤 식으로 일을 처리했든 간에, 이미 그것은 준상의 손에서 떠난 일이니 더 이상 관심을 가지지 않는 편이 서로를 위해서 좋다. 준상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돌렸지만, 서유미는 머뭇거리며 다시 말을 이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하지만 준상은 돌아보지도 않은 채 이렇게 대답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 서유미는 그 말에 살짝 미소를 지었다.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던 지금까지의 모습과는 달리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미소였지만, 고개를 돌리고 있는 준상으로서는 그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 잠시 미소를 지어 보이던 서유미는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는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리고 다시 시간이 흘렀다. 블러드로드들을 영지로 내보내고, 서유미와 노부부를 데려오는 일로 조금 분주하게 돌아가던 요정계가 어느 정도 안정을 찾을 무렵, 헤네스가 소식 하나를 가지고 왔다. “하리아스의 위치를 찾았다고?” 한동안 화염과 얼음의 대정령의 힘을 다루는 일에 몰두하고 있던 준상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가 바로 반응을 보이자 헤네스는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지명이라 확인하는데 조금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확실한 것 같아요.” 하리아스. 바로 미친개 콤보에서 언급되는 지명이다. 콤보 카드의 이름들이 그냥 무작위로 지어진 것이 아니라, 히딕스라는 행성의 각처에 전해지는 전설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몇 번의 에픽 퀘스트를 통해 확인했던 준상은 헤네스의 오빠인 젤란에게 그것들을 확인해줄 것을 부탁한 바가 있었다. 정령계에 들어가기 전의 일이라 그 일을 부탁했던 준상 본인도 잠시 잊고 있었는데, 오늘 비로소 그에 관한 정보가 들어온 것이다. “여기 지도를 가져왔어요.” 헤네스는 투박하게 그려진 지도 하나를 펼쳐 들고는 잠시 그 안을 살피더니 한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여기에요.” 준상으로서는 인쇄된 것도 아니고 손으로 대충 죽죽 그린 조잡한 지도의 내용은 물론이거니와 그 안에 씌여진 글자도 무엇 하나 알아볼 수 없었다. 그나마 알아볼 수 있는 것이라면, 대충 동대륙의 북동부 근처라는 정도. 헤네스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다시 이렇게 부연 설명을 했다. “알고 보니까 저희들이 전에 한 번 가봤던 곳 근처더라구요.” “어딘데?” “하를라간이요. 기억나세요?” “아...” 하를라간이라면 벨카라스에 이어 어둠의 군세에 대한 구원을 위해 갔었던 곳이다. 당시 인도인지 동남아 사람인지 모를 자들이 제각기 따로 따로 흩어져 싸우던 것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하리아스라...” 이미 퀘스트의 영향력 하에서 벗어난 상황이기는 하지만, 에픽 퀘스트라면 영웅 카드가 아니더라도 유니크 아이템 같은 것이 나올 가능성이 있다. 얀트훈센에서만 하더라도 불사의 용혈을 얻지 않았던가. “역시 한 번 들러 보는 것이 좋겠군.” “준비할까요?”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눈동자를 반짝이며 묻는 헤네스의 모습에 준상은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 준상이 고개를 끄덕이며 허락하자, 헤네스는 바로 지도를 챙겨 든 채 리체스가 있는 연구실로 달려갔다. 헤네스가 호들갑을 떨기는 했지만 사실 준비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준상은 물론이거니와 헤네스도 리체스도 인벤토리에 각자에게 필요한 물품 정도는 항상 보관중이기 때문이다. 출발 전에 미리 해두어야 할 일이라면 하리아스에서 가장 가까운 정령의 문을 미리 확인해 두는 정도가 고작이다. 오랜 만에 전투용 장비를 대충 갖춰 입고 잠든 누리의 모습을 살핀 뒤 여왕의 거처에서 나오자 마침 헤네스가 한 무리의 사람들을 데리고 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바라보니 리체스 뿐만 아니라, 서유미와 블레이크 역시 헤네스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준상이 가만히 바라보자 헤네스는 씩 웃으면서 대답했다. “기왕이면 모두 함께 가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요.” 하긴, 나중을 위해서도 사전에 손을 맞춰 볼 필요가 있다. 준상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서유미가 먼저 인사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러자 유독 눈에 띄는 외모를 지닌 블레이크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정말... 제가 끼어도 괜찮겠습니까?” 그도 그럴 것이, 준상과 자신을 제외하면 모두 아름다운 미녀들 뿐이고, 그 세 명의 미녀 가운데 두 명은 그의 부인이기까지 하니 어쩐지 좀 눈치가 보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의 말에 헤네스와 리체스는 부끄러운지 살짝 얼굴을 붉혔고, 서유미는 그런 둘의 모습이 재미있다는 듯이 미소를 짓는다. “싫으면 가서 일이나 하든가.” “끙.” 블레이크는 앓는 소리를 내며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스카웃인지 납치인지 자신조차 헷갈리기는 했지만, 그런 과정을 거쳐서 왔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요정계에서 그가 한 일을 살펴보면 그야말로 머슴살이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대로라면 정체성마저 흔들릴 것 같은 상황에서 모처럼 자신의 진가를 보여줄 수 있는 일이 생겼는데 그냥 모른 척 넘어갈 수는 없는 법. 서유미는 커다란 덩치의 흑인이 준상의 한 마디에 꼼짝도 못하는 모습이 재미있는지 다시 미소를 지었다. 일전에 유경훈과의 일이 있은 뒤로 은근히 웃음이 많아진 그녀였지만, 스스로는 아직 그와 같은 자신의 변화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듯 하다. “정령의 문은 확인해 두었나?” 준상의 말에 헤네스는 아차 싶었던지 얼른 지도를 꺼내 리체스에게 보여 주었다. “이 근처라면... 음, 조금 시간이 걸릴 것 같은데요.” “그래?” “네.” “대충 예상을 해보자면?” “음...” 준상의 물음에 리체스는 잠시 생각에 잠겼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이 지도만 봐서는 잘 모르겠는데요.” “그런가.” 좀 귀찮기는 했지만, 직접 가서 확인하는 수밖에 없을 듯 하다. 그들은 곧바로 리체스의 안내를 받아 정령의 문을 통과했다. 정령의 문을 넘어서자 상쾌한 느낌의 요정계의 공기와는 다른 후덥지근하고 건조한 공기가 확하고 코와 입으로 밀어닥친다. “상당히 더운 곳이네요.” “그러게.” 그들이 넘어온 정령의 문은 바오밥 나무를 연상시키는 커다란 나무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준상을 비롯해 리체스와 헤네스, 서유미, 그리고 블레이크가 차례로 공간을 넘어서자 나무 위에서 쑥덕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앗! 여왕님이다!” “어디? 어디?” “저기, 저 남자 어깨 위에.” “오오! 근데 키스 자국 때문에 얼굴이 안 보여! 저분이 여왕님의 신랑님인가?” “그런가봐.” 다른 사람들은 그런가보다 했지만, 블레이크는 갑자기 리체스의 모습이 작아지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몸이... 크기가...” 그 말을 들은 서유미가 살짝 말해 주었다. “요정들은 인간 세상에 오면 크기가 작아져요.” “아...” 그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동안 준상은 일단 주위를 둘러 보았다. 밀림 정도는 아니었지만 상당히 숲이 울창해서 랩터를 타고 가는 건 아무래도 무리일 듯 싶었다. 그래서 준상은 바로 갑가오리를 소환했다. 이미 모두들 한 번씩 이 소환물을 타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달리 말을 하지 않았음에도 바로 자리를 잡았다. “저게 뭐지?” “재미있을 것 같은데.” “태워 달라고 해볼까?”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갑가오리의 모습에 나무 위에서 지켜보던 요정들이 그렇게 속닥거렸지만, 그들이 말을 걸기도 전에 준상은 갑가오리를 몰아 숲 위로 올라가 버렸다. ============================ 작품 후기 ============================ 키보드의 은혜는 하늘같은데 키보드는 어째서 두들깁니까 키보드님 죄송합니다 빨간 약인 줄 알았어요 손발이 닳도록 고생하시는 마우스는 어째서 던져댑니까 마우스님 죄송합니다. 패드 꼭 깔아 드릴게요 돌아와라 빨간 약 랄라랄라랄라 라 랄라랄라랄라 오오 어디로갔냐 빨간 약 랄라랄라랄라 라 랄라랄라랄라 넌 넌 넌 대체 어디로 간거야 돌아와라 빨간 약 지구는 언제나 푸른 별인데 모니터 화면은 어째서 파랗습니까 지구야 미안하구나 이젠 약봉지 안버릴게 언제나 열심히 연참을 하는데 워드는 어째서 또 오류납니까 워드야 미안하구나 내가 오늘은 업데이트해주마 돌아와라 빨간 약 랄라랄라랄라 라 랄라랄라랄라 오오 어디로갔냐 빨간 약 랄라랄라랄라 라 랄라랄라랄라 넌 넌 넌 대체 어디로 간거야 돌아와라 빨간 약 돌아와라 빨간 약 랄라랄라랄라 라 랄라랄라랄라 오오 어디로갔냐 빨간 약 랄라랄라랄라 라 랄라랄라랄라 진짜 진짜 어디로갔냐 빨간 약 랄라랄라랄라 라 랄라랄라랄라 오오 어디로갔냐 빨간 약 랄라랄라랄라 라 랄라랄라랄라 진짜 진짜 넌 대체 어디로 간 거야 돌아와라 빨간 약 00320 트롤러 ========================================================================= 헤네스가 지닌 지도가 지구에서 사용하는 것처럼 정밀하다면 갑가오리에 탄 채로 곧장 목적지까지 날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는 아직 정밀한 지도를 만들기 위한 기술이 여러모로 부족한 탓에 지도의 기능은 대략의 위치를 파악하는 정도의 의미 밖에 없었다. 지도로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다면, 지리를 알고 있는 자를 안내인으로 구할 수밖에 없는 일. 때문에 준상은 일단 근처에 있는 마을이나 도시 가운데 가장 큰 곳인 요새도시 하를라간을 먼저 들를 수밖에 없었다. “일단 이 근처에서 내려서 가는 편이 좋겠군.” “네.” 블레이크는 요새도시 하를라간이 내려다보이는 바위산 근처에 내려서자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렇지 않아도 미국에서는 한참 퀘스트를 받은 귀환자 외에 이 땅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보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인벤토리에 탐사용 로봇을 싣고 가서 내려 놓는다든가 하는 식으로 여러 가지 아이디어가 많이 나왔지만 실효성이 있는 것은 아직 아무것도 없는 상황. 하지만 준상은 이미 이런 식으로 자유롭게 다른 세계를 이동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헤네스가 이쪽 세계의 사람이라는 걸 알았을 때 얼마나 놀랐던지. 그 뿐인가. 미국은 생각지도 못하고 있는 요정계라는 세상을 다스리는 여왕과의 사이에 아이까지 두고 있으니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블레이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바위 산을 타고 내려가 길 위에 발을 디뎠다. “읏차!” “조심해요.” “네!” 헤네스와 서유미가 서로 도와가며 아래로 내려오고, 뒤이어 준상이 어깨 위에 리체스를 앉혀 둔 채 내려왔다. 준상은 곧바로 인벤토리에서 랩터를 꺼내 놓았다. 커다란 픽업 트럭이 모습을 드러내자 사람들은 각자 문을 열고 들어가 각자 자리를 잡았다. 앞좌석에는 준상과 헤네스가 타고, 대시보드 위에는 리체스가 자리를 잡았으며, 서유미와 블레이크는 뒷좌석에 앉았다. 모두가 자리를 잡자 준상은 바로 시동을 걸고 차를 움직였다. “근데... 이런 식으로 차를 타고 가도 괜찮을까요?” 서유미가 조금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말했지만, 준상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이곳은 이전에 이벨류아처럼 에픽 퀘스트가 발동해 어둠의 군세가 쳐들어 왔던 곳 중 하나이니 그리 큰 문제는 없을 거다.” “그런가요?” “정확한 국적은 알 수 없지만, 인도인지 동남아인지 모를 곳의 사람들이 왔었지.” 그 말을 듣자 블레이크는 한 가지 정보를 떠올렸다. “아마 인도가 맞을 겁니다. 벨카라스에서와 같은 대규모 퀘스트라면 미국과 중국, 한국, 인도 이렇게 네 군데 귀환자들이 경험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군.” 대수롭지 않다는 식으로 준상이 고개를 끄덕이자, 블레이크는 조심스럽게 다시 물었다. “역시... 당신이 ‘그’였습니까?” 준상에게 물어본 것이었지만, 반응한 것은 헤네스 쪽이었다. “그라뇨?” 블레이크는 바로 대답했다. “퀘스트의 실패가 기정사실이 되었을 즈음 갑자기 나타나 적을 무찌르고 임무를 달성해 버린 인물에 대한 얘기가 당시 에픽 퀘스트를 경험했던 귀환자들 사이에 떠돌고 있습니다. 중국의 경우에도 첫 퀘스트가 실패한 뒤, 두 번째 퀘스트에서 사실상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받았을 때 누군가가 나타나 임무를 마무리 지었다는 얘기가 있었죠.” 그 말을 듣자 헤네스는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준상씨 맞아요.” “네?” “전부 준상씨가 한 일이에요. 저도 그때 옆에 있었는 걸요.” “...” 그러자 대시 보드에 앉아서 가만히 대화를 듣고 있던 리체스가 투덜거리며 말했다. “나는 모르는 얘기인데.” 그 말에 헤네스는 웃으며 말했다. “리체스 언니를 만나기 전의 일이니까요.” “칫.” 둘은 곧바로 도란 도란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지만, 블레이크는 헤네스가 별거 아니라는 듯이 대답한 말을 듣고는 입을 쩍 벌린 채 말문을 잃었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준상은 네 가지 에픽 퀘스트를 혼자서 전부 완수해 버렸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에픽 퀘스트의 보상이 정확히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는 자신과 비교하자면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 근 일년간 제대로 퀘스트를 수행하지도 않은데다, 지금은 아예 퀘스트라는 시스템에서 벗어나 있으면서도 터무니없이 강한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었는데, 이런 식으로 에픽 퀘스트를 몇 개나 수행한 것이 사실이라면 준상의 그 무지막지한 능력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어쨌거나.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는 동안 그들이 탄 차는 하를라간의 성문에 도착했다. 이전에 어둠의 군세에 의해 파괴된 성벽은 아직도 완전히 고쳐지지 않은 채 복구가 한창이었다. 육중한 차체의 랩터가 성문 앞에 도착하자, 곧이어 한 무리의 무장한 병사들이 나타나 그들에게 무기를 겨누었다. 그런데 그 무기가 예상 외였다. “머스킷?” 준상이나 헤네스의 경우엔 바르델과의 전투를 통해 이 세계에 화승총이 모습을 드러낸 것을 알고 있었지만, 블레이크나 서유미의 경우에는 난데없이 병사들이 총 비슷한 무기를 들이대는 모습에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블레이크는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여전히 담담한 표정으로 병사들을 바라보고 있는 준상과 헤네스의 모습을 보고는 바로 물었다. “알고 계셨습니까?” “일단은.” 준상이 짤막하게 대답하자, 곧바로 헤네스가 설명을 덧붙였다. “듣기로는 벨카라스에서 미군들이 잊고 간 무기들을 분석해서 만들었다는 것 같더라구요.” “아...” “이곳도 귀환자들이 에픽 퀘스트를 치렀던 곳이니 저런 무기를 가지고 있어도 이상한 일은 아니죠.” “그렇군요.” 그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성문 쪽에서 화려한 갑옷으로 몸을 감싼 사람 하나가 호위병들에게 둘러싸인 채 그들에게 다가왔다. 아무래도 분위기 자체가 그리 호의적으로 보이질 않는다. “일단 방어복을 갖춰 입는 편이 좋겠어요.” “그래야겠군.” 그들은 곧바로 손목에 차고 있는 팔찌를 작동시켜 방어복을 착용한 다음 천천히 차에서 내렸다. “헉!” 검은 방어복을 착용한 이들이 차에서 내리자, 병사들은 크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거리가 먼 탓에 아직 이곳에는 얀트훈센과 바르델 사이에 벌어진 전쟁에 대한 내용이 전해지지 않았지만, 전신을 감싸는 검은 색의 기묘한 옷차림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묘한 위압감을 느끼도록 만든다. 모두가 내리자 준상은 인벤토리에 차를 집어 넣었다. 육중한 차체가 눈깜짝할 사이에 모습을 감추자 병사들은 다시 한 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방인이여! 이곳에는 무슨 용무인가!” 화려한 갑옷을 입은 자의 외침을 들은 준상은 조용히 대답했다. “안내인을 원한다.” “안내인?” “그렇다. 우리는 하리아스에 가야만 한다.” “...” 그 말에 병사들이 일제히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화려한 갑옷을 입은 자도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곳은 금역이다.” “금역?” “그곳은 언급조차 해서는 안 되는 곳이다.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지만, 그곳을 갈 생각은 그만 두는 것이 좋다. 이방인이여.” “흠...” 어째 말하는 투가 일고의 여지도 없다는 식이라 준상은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힘이라도 써야 하는 건가 싶어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데, 문득 옆에 서 있던 헤네스가 나섰다. “불쾌하게 만들었다면 죄송해요. 하지만 저희들은 그곳에 반드시 가야만 해요. 무언가 방법이 없을까요?” “...” 화려한 갑옷을 입은 남자는 헤네스의 목소리를 듣고는 난감해 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전에 이방인들의 전투를 직접 눈으로 보았던 사람 가운데 한 명인 그는, 가급적이면 그들과 충돌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이방인들의 무기를 조악하게나마 본떠서 새로운 신무기를 얻기는 했지만, 그것이 저들의 무기와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는 그 자신이 더 잘 알고 있는 탓이다. 게다가 이들이 입고 있는 이 기묘한 검은 옷도 뭔가 심상치 않다. 뻔히 총을 들이대고 있는데도 별다른 두려움 없이 나선 것을 보면, 그에 대한 대책도 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으음...” 잠시 고민하던 그는 차선책을 내놓기로 마음 먹었다. “여기서는 그곳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없을 것이다.” “...” 역시 완력을 쓸 수 밖에 없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며 힘을 끌어올리려던 준상의 눈에 그 남자가 한 쪽 방향을 가리키는 모습이 보였다. “저쪽의 길을 따라 가다보면 관문 하나가 있고, 근처에 마을 하나가 있다. 그곳에 가보도록.” “...” 구체적인 언급은 없었지만, 그것이 그가 줄 수 있는 최선의 정보라는 것 정도는 모두가 어렵지 않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친절한 말씀 감사합니다.” 헤네스가 사의를 표하자,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이렇게 밖에 말해줄 수 없는 나를 용서하시오.” “별말씀을요.” 준상은 다시 인벤토리에서 차를 꺼낸 다음 남자가 가리킨 방향으로 차를 달렸다. 한 나절을 달려도 관문 비슷한 것조차 눈에 띄지 않아 어쩐지 속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슬슬 날이 어두워질 무렵이 되자 이윽고 남자가 말했던 관문과 작은 마을이 모습을 드러냈다. “제법 먼 곳이네요.” “그러게.” 지루한 표정으로 대시보드 위에 앉아 졸고 있던 리체스가 준상을 향해 말했다. “어떻게 하실 거에요?” 일단은 준상의 의향을 묻는 것이었지만, 그 말에는 우선 쉬었다가 내일 다시 찾아 나서자는 뜻이 담겨 있었다. “할 수 없군.”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차를 멈춘 뒤, 신기루 꽃으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일단 오늘은 쉬고 내일 계속 찾아가도록 하자.” “네!” 요정계로 돌아와 휴식을 취한 그들은 다음 날 일찍 관문 마을에 들어섰다. 이곳에서도 그들의 옷차림이나 타고 있는 차가 관심과 경계의 대상이기는 마찬가지. 관문의 수비대장으로 보이는 인물이 나서자, 준상은 그에게 안내인을 구하고 있음을 말했다. “곤란한데...” 준상의 말을 들은 관문의 수비대장은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 하지만 그 모습은 정말로 곤란해서라기 보다는 뭔가 다른 것을 원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헤네스는 그런 기색을 알아차리고는 바로 품에서 주머니 하나를 꺼냈지만, 준상은 그녀를 말리고는 갑자기 수비대장을 향해 손을 뻗었다. “헛!” 그러자 보이지 않는 힘의 그물이 수비대장을 단숨에 옭아매고는 그대로 준상을 향해 끌어당겼다. 아차 하는 사이에 준상에게 사로잡힌 수비대장은 갑자기 전신의 힘이 쑥 빠져 나가며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두려움에 떨었다. “아직도 곤란한가.” 준상의 말에 수비대장은 얼른 대답했다. “아닙니다. 곤란하지 않습니다. 안내인을 원하신다면 바로 대령하겠습니다.” “...”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히게 빠르다. 수비대장은 준상이 아무 말 없이 바라보자, 얼른 소리를 질러 부하들에게 하리아스로 가는 안내인을 데리고 오도록 명령했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허리가 구부정한 노인 하나가 병사들에게 이끌려 왔다. “이 자라면 하리아스의 저주받은 투기장으로 가는 길을 소상하게 알고 있을 겁니다.” “...” 묻지도 않은 일은 소상하게 말하며 비굴하게 웃어 보이는 수비대장의 모습에 준상은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약삭빠른 놈이군.” “헤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 손을 풀어 주자 수비대장은 얼른 땅바닥에 엎드려 거듭 고개를 조아렸다. 준상은 곧바로 안내인으로 불려온 노인을 차에 태우고는 그 자리를 떠났다. 노인은 뒷좌석 가운데에 앉아 두려움 가득한 눈으로 말없이 앉아 있다가 관문에서 멀어지자 조심스럽게 물었다. “죄송하지만... 어째서 그곳에 가시려는 건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준상은 백미러로 노인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는 것이 있다면 말해 보도록.” 그 말에 노인은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곳은... 저주 받은 땅입니다.” 준상은 대수롭지 않은 기색으로 대답했다. “그 얘기라면 이미 들었다.” 하지만 노인은 고개를 저으며 다시 말했다. “그게 아닙니다. 저주는... 아직도 실재합니다.” “무슨 말인가.” 노인은 두려움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곳에 가득한 악의 기운은 사람을 미치게 만듭니다. 자칫 그 기운에 휩쓸리면... 평범한 사람도 괴물이 되어 버립니다.” “괴물?” 노인은 잠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 투기장은 멀쩡한 사람을 미친개처럼 만들어 싸움을 시키고 그것을 관람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어느 날 투기장 안의 마법 장치가 폭주를 일으켰습니다. 그 결과 선수들 뿐만 아니라,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광기에 물든 미친개가 되어 버리고 말았죠.” “흠...” “아직도 그 마법 장치는 여전히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그곳이 금역이 된 것은 바로 그 저주 때문입니다.” 저주란 건 그런 의미였나. 확실히 그런 것이 있다면 보통 사람들은 접근조차 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노인의 말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곳에는 괴물이 있습니다.” “괴물? 저주에 걸린 사람들 말인가?”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물론 그들도 괴물이 되어버리는 건 마찬가지지만...” “그럼?” “마법 장치를 지키고 있는 불사의 괴물... 그 투기장이 여전히 금역인 이유는 바로 그 괴물 때문입니다.” 불사의 괴물이라. 뭔가 참 거창하다 싶은 말이었지만, 준상은 의외로 담담하게 그 말을 받아들였다. 이미 에픽 퀘스트나 그에 준하는 무언가가 있을 것을 기대하고 온 상황이라, 그게 걸맞는 보스가 있으리라 예상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문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가 지금까지 수행했던 콤보 카드 관련 에픽 퀘스트는 모두 엄청난 수준의 최종 보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정령사의 경우에는 만년 묵은 요정 여왕 리체스가 마지막 관문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뿐인가. 광전사의 경우에는 정령 증폭으로 강화된 얼음의 대정령이 있었고, 수호자 역시 기안이라는 강력한 존재가 있었던 것은 마찬가지. 기안을 제외한 다른 둘은 펫 목걸이라는 수단이 없었다면 제압 자체가 불가능한 존재들이나 다름없었다. 만약 하리아스에 도사리고 있는 불사의 괴물이라는 존재가 이들과 동급이라면 준상으로서도 쉽게 제압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 작품 후기 ============================ 오마니 글많이 띠디리 디리리 오마니 글많이 띠디리 디리리 오마니 글많이 띠디리 디리리 오마니 글많이 띠디리 디리리 야~~ 스피커줄 끊어졌다 아~~~ 어차피 소리 안난다 연참의 가속화 가속화 가속화 아이구 더워 땀나고 죽겄네 푸주간으로 푸주간으로 고기를 씹어봅시다잉 마구간으로 마구간으로 근육은 말근육이야~~ 백악관으로 백악관으로 부킹을 즐겨봅시다잉 덧글란으로 덧글란으로 글좀써라 이인간아~~ 길가다가 못참겠다 싶으면 참지말고 공중변소 길가다가 연참폭참을 만나면 참지말고 완전감사 오마니 글많이 띠디리 리리리 오마니 글많이 띠디리 리리리 오마니 글많이 띠디리 디리리 오마니 글많이 띠디리 디리리 야~~ 대낮에 노상연참 아~~~ 사돈에 당숙 아저씨 연참의 가속화 가속화 가속화 연참의 가속화 가속화 가속화 아이구 더워 땀나고 죽겄네 푸주간으로 푸주간으로 고기를 씹어봅시다잉 마구간으로 마구간으로 근육은 말근육이야~~ 백악관으로 백악관으로 부킹을 즐겨봅시다잉 덧글란으로 덧글란으로 글좀써라 이인간아~~ 좀더 즐기고 싶다면 우리모두 참지말고 오마니 글많이 안드로메다 안드로메다 오마니 글많이 오마니 글많이 안드로메다 안드로메다 오마니 글많이 푸주간으로 푸주간으로 고기를 씹어봅시다잉 마구간으로 마구간으로 근육은 말근육이야~~ 백악관으로 백악관으로 부킹을 즐겨봅시다잉 덧글란으로 덧글란으로 글좀써라 이인간아~~ 길가다가 못참겠다 싶으면 참지말고 공중변소 안드로메다~~~ 00321 트롤러 ========================================================================= 예전 같았으면 이런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곳으로는 함부로 진입하거나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의 리스크는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대비가 충분히 되어 있는 상태이니 충분히 해볼만 하다. 신기루 꽃의 긴급 회피 기능이라든가, 수호의 신물에 부여된 아군 전체 불굴 효과 부여 기능 같은 것이 있는 이상, 정말 어지간한 상황이 아니라면 심각한 피해를 입을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기 때문이다. “이 길이 맞는가.” 심각하게 경고를 했음에도 전혀 돌아갈 기미를 보이지 않는 준상의 말에 노인은 몸을 떨며 애원하기 시작한다. “제발 살려 주십시오. 얼마 안 있어 아이가 태어납니다. 늦게 얻은 자식의 얼굴도 못 본 채 죽고 싶지 않습니다.” “...” 그 말에 모두들 고개를 돌려 노인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봐도 이번에 요정계로 온 노부부보다 어려 보이지 않는 모습. 그 나이에 자식이라니. 생각보다 상당히 정정한 건가, 아니면 나이보다 훨씬 겉늙은 것일까. “제 얼굴에... 뭐라도?”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헤네스가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하자 준상이 말을 이었다. “안으로 같이 들어가자고는 하지 않을테니 걱정 말도록.” 노인은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감사합니다.” 다소의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일행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구릉에 도착할 수 있었다. 풀 한포기 없는 모래사막 한 가운데 무저갱을 연상시키는 시커먼 구멍 하나가 뻥 뚫려 있는 모습은 그 안에 전해지는 전설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보더라도 한눈에 음산한 기운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이곳입니다. 입구 근처까지는 안전합니다만, 안으로 들어가면 저주의 기운이 달려드니 조심하셔야 합니다.” 노인은 보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치는지 가능한한 다른 쪽을 바라보며 그렇게 설명을 해주었다. “알겠다. 그런데... 역시 그 거리를 혼자서 돌아가는 건 무리겠지?” 그 말을 들은 노인은 얼른 손을 내저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갈 수 있습니다. 이래봬도 제가 제법 튼튼합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혹시라도 일단 함께 들어가자고 할까봐 그러는 걸까. 기겁을 하는 노인의 모습에 모두는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정말 괜찮겠나?” “물론입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알았다. 그럼 이만 돌아가 보도록.” “감사합니다!” 준상의 허락이 떨어지자 노인은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를 하고는 꽁지에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쏜살같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튼튼하다는 말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래 속을 소금쟁이처럼 후다닥 달려가는 모습이 경이로울 정도다. “아무래도 얼굴 모습만 노인이었던 모양입니다.” 웃음띤 블레이크의 말에 서유미가 마주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게요. 저보다도 더 빠른 것 같은데요.” 노인 덕분에 긴장감을 어느 정도 해소한 그들은 구멍 안으로 진입하기에 앞서 장비 등을 점검했다. 안으로 들어서는 자를 미친개로 만든다는 말로 미루어 안쪽은 저주 계열의 마법으로 장악된 상태. 일단 시드를 저주나 모든 속성 저항으로 맞추고 만약을 대비해 리체스가 다시 저주 저항의 마법까지 추가로 걸어주었다. 준비를 마친 헤네스가 기안을 불러내자 준상은 곧바로 갑가오리와 익룡 그라드닉스를 제외한 모든 소환물과 정령들을 일시에 소환했다. “오오!” 블레이크는 쏟아져 나오는 소환물들과 정령의 모습에 감탄한 표정을 짓다가 준상에게 넌지시 물었다. “슬롯을 늘려주는 기능 같은 것도 있습니까?” 아무리 봐도 불러낸 소환물과 정령이 너무 많은 탓이다. “아니.” “음...” 블레이크는 궁금한 표정이었지만 준상이 몸을 돌리자 더 이상 캐묻지 못하고 그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차에 탔을 때와 마찬가지 대열을 이룬 채 이동을 시작했다. 전열은 준상과 기안이, 후열은 블레이크와 서유미가 자리했으며, 리체스는 언제나처럼 준상의 어깨 위에 앉아 있었다. 일단 늑대들을 구멍에 진입시킨 준상은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자 조심스럽게 구멍 안으로 진입했다. 구멍 안은 시커먼 연기와 같은 것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빛과 불의 정령이 들어서자 스스로 물러서는 모습을 보였다. “이 검은 연기가 아무래도 저주의 실체가 아닐까 싶네요. 대비는 해뒀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주의하세요.” “그러지.” 리체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준상은 몸 안에서 화염의 대정령으로부터 뽑아낸 정령력을 끄집어 내어 주위를 밝히기 시작했다. 빛의 정령도 있고 불의 정령도 둘이나 있었지만, 준상이 뽑아낸 대정령의 힘은 그 모든 기운을 합친 것보다도 더 밝고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준상의 뒤를 따르던 서유미와 블레이크는 갑자기 그의 몸이 뜨겁고 환한 빛에 둘러싸이는 걸 보고 다시 한 번 놀랐다. 도대체 저건 또 뭔지. 서유미는 차라리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 버렸지만, 블레이크는 새롭게 선보인 준상의 능력이 너무나 궁금한 탓에 귀에서 김이 뿜어져 나올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궁금증을 채 풀기도 전에, 적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크아앙! 선두에 서서 구멍 안으로 진입하던 늑대들이 무언가를 발견하고 전투를 시작한 것이다. 준상은 자신들 주위에 떠 있던 반딧불이를 날려 보내 적의 실체를 확인하게 했다. “으음...” 환한 빛에 의해 늑대들과 싸우는 적의 모습이 드러나자 서유미는 얼굴을 찌푸렸다. 좀비나 다름 없어 보이는 인간들이 떼를 지어 개처럼 엎드린 자세로 늑대들에게 덤벼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친개로 만드는 저주라더니...” 준상은 혀를 차며 정령들을 통해 공격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 기형 좀비들은 그들이 지금까지 상대했던 보통의 좀비들과는 차원이 다른 힘을 지니고 있었다. 깨갱! 달려든 기형 좀비의 이빨에 목덜미를 물린 팀버 울프가 비명을 지르며 펄쩍 뛰어 오르는 것을 시작으로 늑대들은 금새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다. 곧바로 정령들의 융단 폭격이 시작되었지만, 기형 좀비들은 기민한 몸놀림을 보이며 그 융단폭격을 빠져 나와 준상과 기안이 있는 쪽으로 돌진해 들어왔다. “어딜!” 곧바로 기안이 앞으로 나서며 기형 좀비의 몸을 깃발 달린 미늘창으로 후려쳤다. -케엑! 강력한 일격에 어깨를 두들겨 맞은 기형 좀비는 그 충격으로 날아가 버렸지만, 기안이 미처 자세를 되돌리기도 전에 새로운 기형 좀비가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기안은 전혀 놀란 표정 없이 그대로 방패를 내밀며 몸을 숙였고, 그런 그녀의 등을 타고 서유미가 날아들었다. “하압!” 곧바로 울려퍼지는 한줄기 청량한 기합소리와 함께 시퍼런 칼날이 번쩍이자 기안을 향해 달려들던 기형 좀비의 몸은 단숨에 사선으로 반토막이 나 바닥을 뒹굴고 말았다. 서유미가 기형 좀비 하나를 갈라 버리자 그 뒤를 이어 기안과 블레이크가 차지 스킬을 발동하며 앞으로 튀어 나갔다. 기안의 웨펀 차지와 블레이크의 숄더 차지가 동시에 발동하자 늑대들을 뚫고 달려들던 기형 좀비들은 순식간에 꿰뚫리고 박살이 난 채 구석으로 처박히고 말았다. “옆으로 물러나요!” 그들의 차지 스킬이 한바탕 전장을 휩쓸기가 무섭게 리체스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그 말을 들은 기안과 블레이크는 급히 통로 옆으로 몸을 피했고, 서유미는 준상의 뒤로 자리를 옮겼다. 마지막으로 준상이 수세에 몰린 늑대들을 역소환하자 리체스의 입으로부터 낭랑한 주문 소리가 울려퍼졌다. “물결치는 불의 파도여, 이제 타오르는 해일이 되어 저 부정한 자들을 쓸어 버려라!” 그녀의 외침과 함께 커다란 불의 벽이 일어나더니 그대로 통로를 향해 밀고 나간다. 준상은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리체스가 만든 마법을 흉내내어 화염의 대정령이 지닌 백염의 불꽃을 파도처럼 쏘아 보냈다. 연이어 터진 그 강력한 화염 공격에 휩싸인 기형 좀비들은 비명을 지르며 한줌 재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방금 뭐 한거에요?” 리체스는 준상이 만들어낸 불꽃의 파도를 보고는 크게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상한가?” “방금 그거 대정령의 정령력을 이용해 마법을 흉내낸 것 맞나요?” “일단은.” 담담한 준상의 대답에 리체스는 크게 놀란 표정으로 반문했다. “그런 것도 가능해요?” “해보니까 되던데.” “...” 리체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요정계에서라면 모를까, 인간 세상에서는 그 정도의 마법을 발현시키려면 리체스도 주문을 외어야만 한다. 그런데 이 터무니없는 남자는 그걸 정령력을 이용해 한번 보고 흉내내버렸다. 일만년이 넘게 살아온 자신이지만, 지금까지 정령의 힘을 그런 식으로 사용하는 사람은 들어본 적도 없다. 하기야, 그는 정령사도 아니고 스스로 정령계를 이룬 존재이니 기존의 상식으로 재단하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 일이지만 말이다. 둘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동안, 서유미와 블레이크, 그리고 기안은 남은 기형 좀비들을 모조리 쓸어버리는데 성공했다. “생각보다 너무 센 것 같은데요.” 서유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런 저런 버프 효과와 레벨 효과로 보통의 늑대들보다 준상이 불러낸 늑대들은 훨씬 강한 힘을 지니고 있다. 그런 늑대들조차 함부로 상대하기 어려울 정도라니. 가장 처음 만난 적이 이 정도라면 안쪽의 적들은 어느 정도일지 감히 짐작하기 어렵다. “아무래도 긴장해야 할 것 같습니다.” 블레이크 역시 서유미의 말에 그렇게 맞장구를 쳤다. “흥, 이 정도 가지고 우는 소리를 하면 곤란하지.” 하지만 기안은 신중한 태도를 보이는 두 사람에게 핀잔을 주며 앞으로 나섰다. 이렇게 되자 자연스럽게 대열이 다시 변경되었다. 가장 선두에 기안이 서고, 그 뒤로 준상, 서유미, 블레이크의 순서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그렇게 다시 조금 더 가자 조금 넓은 석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건... 갈림길인가.” 들어온 입구를 제외하고도 다시 다섯 개나 되는 통로가 드러나자 준상은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퀘스트라도 받았으면 단숨에 표식을 향해 이동할 수 있을텐데. 서유미나 블레이크에게도 달리 메시지가 전해지지 않는 것을 보니, 미친개 콤보를 완성하지 않으면 에픽 퀘스트도 발동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음...” 어떻게 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던 준상은 임의로 정령의 파동을 조정해 퀘스트를 받을 수 없는지 확인해 보기로 결정했다. “잠시 대기.” 그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자, 기안과 서유미, 그리고 블레이크는 준상의 주위에 선 채로 사방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준상은 자신의 몸 안에 내재된 정령계의 힘이 외부로 분출되지 않도록 갈무리하기 시작했다. 그가 심각한 모습으로 눈을 감은 채 무언가에 집중하기 시작하자, 다른 이들은 모두 궁금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의 행동을 방해하지 않으려 애쓰며 경계에 힘썼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거의 무아지경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정령계의 힘을 갈무리하는 일에 집중을 거듭하던 준상의 시야에 마침내 메시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에픽 퀘스트 – 광기 1.하를라간에서 이야기꾼을 찾으십시오(달성) ->이야기꾼은 금지된 이야기를 한 죄로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를 감옥으로부터 꺼내주십시오. (달성) ->완료 보상: 경험치 조금 -> 보상을 지금 수령하시겠습니까? (Y/n) _ (주의) 수령하지 않은 보상은 7일후 자동 소거됩니다 에픽 퀘스트 – 광기 2.이야기꾼으로부터 하리아스의 잊혀진 투기장에 대한 정보를 얻으십시오 (달성) ->관문 마을에서 투기장의 위치를 확인하십시오. (달성) ->안내인을 통해 투기장의 입구를 찾으십시오. (달성) ->완료! 보상: 경험치 조금 -> 보상을 지금 수령하시겠습니까? (Y/n) _ (주의) 수령하지 않은 보상은 7일후 자동 소거됩니다 에픽 퀘스트 – 광기 3.하리아스의 잊혀진 투기장 안에는 저주의 안개를 뿜어내는 광기의 정령이 봉인되어 있습니다. 이 정령을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과거 하리아스의 투기장을 주름잡다가 이제는 불사의 괴물이라는 이명으로 불리게 된 존재를 물리쳐야만 합니다. 불사의 괴물을 쓰러뜨릴 수만 있다면, 당신은 진정한 미친개의 자격을 인정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와 싸워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십시오. (미달성) ============================ 작품 후기 ============================ 차가운 땅위에 홀로 강렬히 빛나고 있어 머나먼 세상 끝에서 시간도 초월해 있어 지쳐도 또 붉은빛 약빨 멈추지 않을꺼야 레드불~~ 변하지 않는건 변할수 없는건 약빨을 모아 비추는 연참 지우지 않는건 뜨거운 키보드 아래 존재함이니라 오라 찬란히 솟은 연참 뜨거운 약빨은 손가락을 광분하게 해 보라 약들이 뒤섞인 햇빛 모든걸 녹여 달콤한 연참으로 변해가네 내이름 여기 새기리 내뼈를 여기 묻겠어 널 원해 잃은 영혼도 이곳에 남겨두리라 지쳐도 또 붉은빛 약빨 멈추지 않을꺼야 레드불~~ 변하지 않는건 변할수 없는건 녹슬지 않는 강인한 약빨 지우지 않는건 뜨거운 모니터위에 존재함이니라 오라 찬란히 솟은 연참 뜨거운 약빨은 손가락을 춤추게 해 보라 약들이 뒤섞인 달빛 모든걸 녹여 달콤한 연참으로 변해가네 찬란하게 춤추는 그 심장 속의 약 잠겨져 있는 고통을 난 삼키고 삼켜낸다 절대 안돼 언젠가 다쳐 지금일까 바뀔수 있지 절대 안돼 놓칠순 없어 이젠 알아 나의 운명을 오라 찬란히 솟은 연참 뜨거운 약빨은 흑염룡을 미치게 해 보라 약들이 뒤섞인 별빛 모든걸 녹여 달콤한 연참으로 변해가네 오라 찬란히 솟은 광참 뜨거운 약빨은 손가락을 미치게 해 보라 약들이 뒤섞인 저빛 모든걸 녹여 달콤한 연참으로 변해가네 00322 트롤러 ========================================================================= 성공이다. 상당히 까다롭기는 했지만 필요한 만큼만 파동을 조절하여 퀘스트 정보를 취득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퀘스트 정보가 수신되자 준상은 곧바로 미니맵을 확인해 퀘스트 목표를 확인했다. 그러자 곧바로 서로 찰싹 붙어 있는 두 개의 퀘스트 목표가 미니맵에 표시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준상은 잠시 심호흡을 하고는 천천히 눈을 뜨며 한 방향을 가리켰다. “저쪽이다.” 다른 사람들로서는 준상이 방금 무엇을 한 것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그저 잠시 눈을 감고 명상을 하는 듯 보이더니 갑자기 길을 가리키니 그런가보다 할 수밖에 없는 일이지만, 어깨 위에서 그의 변화를 세심하게 살피고 있던 리체스는 어느 틈엔가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정령의 파동이 고요하게 갈무리된 것을 깨닫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여보, 지금 그거... 어떻게 된 거에요?” 준상은 이번에도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그녀에게 대답했다. “해보니까 되던데?” “...” 해보니까 되더라니. 세상에 이렇게 무책임한 말이 어디 있는가. 리체스는 다시금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 보이다가 문득 제자들 생각이 났다. 진세아나 정다빈도 자신을 볼 때마다 이런 식의 감정을 느끼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엉뚱하기는 하지만, 리체스는 이 순간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에 대해 하나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어쨌거나. 준상이 가리킨 방향을 따라 그들은 다시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선두에 선 기안의 뒤를 따라가던 준상은 다섯 개의 통로 가운데 하나에 들어서자 일단 벽부터 살폈다. 여차하면 이전에 미로를 뚫고 갔을 때처럼 단숨에 직진이라도 해 볼 생각이었지만, 이곳의 벽은 오랜 세월 동안 너무나도 노후된 탓에 여차하면 바로 무너질 것처럼 위태롭기 짝이 없었다. 이래서는 통로 개척하겠다고 괜히 벽에 구멍을 뚫다가 오히려 엄청난 양의 토사에 그대로 매몰되어 버릴 가능성이 더 크다. 할 수 없다. 여기서는 일단 길을 따라 천천히 진행하는 수밖에.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 잊혀진 투기장은 처음부터 미로로 지어진 곳이 아니라 길 자체는 그다지 복잡하지 않았다. 대신 그 길 중간 중간에 강력한 기형의 좀비들이 도사리고 있다는 점이 문제일 뿐이다. 절그럭, 절그럭. 길모퉁이 하나를 돌아서자 기다렸다는 듯이 기형의 좀비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블레이크와 버금가는 커다란 덩치를 지닌 그 좀비는 썩어 문드러진 몸에 거무튀튀한 쇠사슬을 잔뜩 두른 채 느릿느릿 움직이다가, 그들의 기척을 확인하는 순간 맹렬하게 공격을 개시했다. “쇠사슬을 몸에 두른 미이라 같은 모습이군.” “미이라가 뭐에요?” “그건...” 준상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는 곧바로 리체스가 호기심을 발동시켰지만, 한가롭게 얘기를 나누고 있을 만큼 상황은 그리 한가롭지 않았다. 무언가 신호라도 보낸 것인지 쇠사슬 미이라의 공격을 기안이 막아서는 순간 뒤쪽의 통로에서 다시금 기형 좀비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으라차!” 육중한 쇠사슬 미이라의 공격을 기안이 기합소리와 함께 받아 넘기자 서유미가 그녀를 스쳐 지나가며 상대의 빈틈을 노렸다. 카가각! 하지만 모처럼 틈을 노린 기습을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아랑도는 미이라의 몸에 두른 녹슨 쇠사슬을 몇 가닥 끊는 정도에 그치고 말았다. “이런.” 서유미는 혀를 차며 얼른 물러나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끊어진 쇠사슬들이 채찍처럼 그녀를 공격해 왔다. “물러나!” 그 모습을 본 기안이 다시 앞으로 나서며 쇠사슬을 막아내자, 이번에는 몸을 웅크리고 있던 블레이크가 전신의 근력을 폭발시키며 앞으로 튀어 나왔다. 거대한 검은 탄환을 연상시키는 육중한 그의 몸이 공기를 가르며 튀어나오자 미이라는 손을 뻗어 그를 막으려 했지만, 블레이크의 어깨는 그 손을 밀치고 들어가 미이라의 몸통에 어깨를 명중시켰다. 콰앙! 쇠사슬 미이라의 육중한 몸이 튕겨 나가며 뒤에서 달려나오던 기형 좀비들의 몸을 덮치고, 그로 인해 달려 들던 기형 좀비들이 우르르 넘어지자, 그 위로 리체스의 마법이 쏟아져 내렸다. “내리치는 천상의 신벌이여. 질주하는 푸른 섬광이여. 심판의 사슬이 되어 나의 적에게 고통을 안겨 주어라!” 낭랑한 주문 소리와 함께 푸른 뇌전이 한줄기 굉음을 터뜨리며 앞선 동료들의 몸을 이리저리 피해 날아가 좀비들을 덮치자 통로가 일시에 대낮처럼 밝아진다. -케에엑! 비척거리며 몸을 일으키던 쇠사슬 미이라가 뇌전에 휩싸이며 비명을 지르자 그 놈에게 깔려 있던 좀비들도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틀어댔다. 바로 그때, 가만히 전투를 관망하고 있던 준상이 앞으로 튀어 나갔다. 알싸한 오존 냄새가 가득 찬 통로를 단숨에 돌파한 준상은 뇌전의 충격으로 인해 비틀거리고 있는 쇠사슬 미이라의 목을 향해 손을 주욱 뻗었다. 미이라는 비틀거리는 와중에도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지만, 불행히도 자신을 향해 뻗어오는 갈고리 같은 강인한 손을 뿌리치는 일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콰악! 준상의 손이 목덜미를 움켜쥐고, 이어서 그 거대한 몸집이 번쩍 치켜 올려지자 미이라는 그대로 실 끊어진 꼭두각시 인형처럼 사지를 축 늘어뜨리고 말았다.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동료들은 준상이 단숨에 미이라를 제압하자 쾌재를 올렸다. 하지만 미이라의 뒤를 따라 몸을 일으키던 기형 좀비들은 준상의 그런 행동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미이라마저 물어뜯어 버릴 기세로 삭아버린 누런 이빨을 들이대며 준상을 향해 몸을 날렸다. “위험...” 리체스는 반사적으로 방어 마법을 펼치려 했지만, 그 순간 미이라의 목을 움켜쥔 준상의 손으로부터 하얀 불꽃이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키에에에에! 미이라는 순식간에 자신의 몸을 휘감는 하얀 불꽃에 놀라 비명을 질렀고, 그 뒤에서 준상을 향해 달려들던 기형 좀비들은 갑자기 자신들을 향해 쏟아져 나오는 백염의 파도에 놀라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미이라는 자신의 몸을 순식간에 불태워 버리는 하얀 불꽃의 힘에 비명을 지르다가 그대로 쇠사슬과 함께 녹아내리며 사라져 버렸고, 선두에서 달려들던 기형 좀비들은 폭발하듯 터져 나온 백염의 파도에 휩쓸려 한 줌 재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건...” 리체스가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자, 준상은 혀를 차며 대답했다. “힘 조절이 생각처럼 쉽지가 않군.” “...” 준상이 원한 것은 미이라 하나만 말끔하게 태워버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세차게 분출된 하얀 불꽃은 그 뒤에서 달려들던 기형 좀비들마저 단숨에 한 준의 재로 만들어 버렸다. “방금 그거... 정령 증폭인가요?” 리체스의 말에 준상은 고개를 저었다. “나도 잘 모르겠어. 수련할 때는 그럭저럭 되는 것 같더니, 역시 실전은 어렵군.” “...” 도대체 이 남자는. 리체스가 다시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동안, 뒤에 서있던 기안이 다시 앞으로 튀어나오며 외쳤다. “혼자 다 해먹으면 어떡해! 이런 상도덕도 없는 놈.” 사근사근하게 말을 걸어주던 헤네스의 모습과는 백만광년 정도 떨어진 느낌의 그 말에 블레이크는 어색하게 웃으며 뒤를 따랐고, 서유미는 말없이 아랑도를 든 채 앞서 나가는 그들의 그림자처럼 움직였다. “으랴아아!” 한 줄기 기합성과 함께 기형 좀비의 뱃가죽에 미늘창을 찔러넣은 기안은, 곧바로 지렛대를 움직이듯 놈의 몸을 번쩍 들어 올려 허공으로 띄워 올렸다. 그러자 맨 뒤에 서있던 서유미가 블레이크의 등을 밟고 뛰어 올라 놈의 몸을 반으로 갈라 버리고는 사뿐하게 몸을 웅크리며 지면으로 착지했다. 착지로 인해 잠시 틈이 생긴 서유미를 향해 기형 좀비 하나가 이빨을 들이밀며 몸을 날렸지만, “이놈!” 곧바로 뒤따르던 블레이크가 카운터를 발동해 놈의 머리를 박살내 버린다. “고마워요.” “별말씀을.” 블레이크는 이들과 함께 기형 좀비들을 박살내면서 어쩐지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그는 총기를 사용하는 귀환자들 사이에서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거나,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들의 뒤치다꺼리를 하기 위해 전투를 치른 것이 고작이었다. 전부다 외팔이인데 혼자만 팔이 두 개면 장애인 취급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처럼, 모두가 총기의 위력에 의지해 전투를 치르는데 혼자만 주먹질을 하고 있으니 그가 얼마나 무시를 당했을지는 따로 설명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벨카라스 전투 이후 육체 단련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그나마 그에 대한 평가도 올라갔지만, 레벨이 올라가고 전투력이 강해지자 그는 예의 소위 3인방의 육성을 돕는 보모 역할로 전락하고 말았다. 말이 쉬워서 보모지, 사실상 그들이 다치지 않고 효율적으로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도록 매사에 철저하게 신경을 써야만 했다. 이런 식이다 보니 전투는 그에게 있어서 골치 아프고 신경 쓰이는 귀찮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 블레이크에게 있어서 자신과 대등 또는 그 이상의 이들과 함께 보조를 맞추어 전투를 치르는 행위는 사실상 이번이 처음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캐나다에서 준상을 도와 마수를 처치한 전례가 있기는 하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이들의 실력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던 데다 등을 맡길 수 있는 동료라는 식의 인식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그는 만약의 경우 자신이 상황을 주도해야만 한다는 강박 관념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 중에 자신보다 약한 자는 아무도 없다. 하다 못해 이런 격한 전투의 와중에도 준상의 어깨 위에 앉아 조잘대고 있는 저 작은 요정 여왕마저도 그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강대한 힘을 지닌 존재가 아니던가. 그것이 단초가 되었다. 모든 걸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깨닫자 블레이크는 지금까지 그 자신을 억누르고 있던 중압감에서 해방되면서 지금까지 제대로 발휘되지 못하고 있던 전투 본능을 약간의 남김도 없이 모조리 풀어 놓을 수 있게 되었다. “호오... 제법인데.” 기안은 물 만난 고기처럼 활개 치며 기형 좀비들을 박살내는 블레이크의 모습에 살짝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유미야.” “네.” “신입한테 지면 곤란하겠지?” “물론이죠.” 짤막하게 웃으며 대화를 나눈 기안과 서유미는 한층 더 기세를 올리며 전투에 몰입했고, 그런 세 사람의 압도적인 무위에 의해 기형 좀비들은 다시금 박살이 나버리고 말았다. 준상은 가만히 그들을 뒤에서 지켜보며 정령으로 보조를 하면서 주위 상황에 대한 탐색을 계속하는 한편, 몽몽이와 밤톨이를 불러내어 아이템을 수집하고 그들을 보조하도록 했다. “흠...” 마침내 전투가 끝나자 준상은 몽몽이가 수집해 온 아이템들을 확인했다. 딱히 레어 시드 같은 것은 눈에 띄지 않았지만, 오래된 느낌의 귀금속이나 금은으로 된 동전 같은 것이 제법 많이 나왔다. “이 좀비들은 아무래도 관람객 들이었나 보군.” 준상의 말에 서유미가 물었다. “그 쇠사슬 괴물도요?” 블레이크가 그 말에 대답했다. “그놈은 죄수라든가 그런 녀석이었겠죠. 지구에서도 죄수들을 이런 식으로 투기장에 내모는 일은 비교적 흔했으니까요.” “그렇군요.” 그렇게 잠시 대화를 나누던 그들은 다시 통로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조금 더 걸어가자, 조금 널찍한 방 같은 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크르르르... 그 안에는 목에 쇠고랑을 차고 있는 기형 좀비들 십여 개체가 우글거리고 있었다. 모습은 앞서의 다른 좀비들과 별로 다를 것이 없었지만, 붉은 안광을 흩뿌리며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놈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는 좀 전까지 싸웠던 다른 기형 좀비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광폭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블레이크는 전투태세를 가다듬으며 이렇게 말했다. “아무래도... 여긴 선수 대기실인 모양입니다.” ============================ 작품 후기 ============================ 풀잎새 따다가 엮었어요 예쁜 꽃송이도 넣었고요 그대 노을빛에 머리 곱게 물들면 예쁜 약 봉지 씌워주고파 냇가에 고무신 벗어놓고 흐르는 냇물에 발 담그고 언제쯤 그 애가 징검다리를 건널까 하며 가슴은 두근거렸죠 흐르는 냇물위에 노을이 분홍빛 물들이고 어느새 구름 사이로 저녁달이 빛나고 있네 노을 빛 냇물 위엔 예쁜 약 봉지 떠가는데 어느 작은 산골소년의 슬픈 연참 얘기 풀잎새 따다가 엮었어요 예쁜 꽃송이도 넣었고요 그대 노을빛에 머리 곱게 물들면 예쁜 약 봉지 씌어주고파 냇가에 고무신 벗어놓고 흐르는 냇물에 발 담그고 언제쯤 그 애가 징검다리를 건널까 하며 가슴은 두근거렸죠 흐르는 냇물위에 노을이 분홍빛 물들이고 어느새 구름 사이로 저녁달이 빛나고 있네 노을빛 냇물 위엔 예쁜 약 봉지 떠가는데 어느 작은 산골소년의 슬픈 연참 얘기 노을빛 냇물 위엔 예쁜 약 봉지 떠가는데~ 어느 작은 산골소년의 슬픈 연참 얘기 00323 트롤러 ========================================================================= 그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비쩍 마른 기형 좀비 하나가 바닥을 기는 듯한 모습으로 그들에게 달려 들며 손에 든 두 개의 낫을 휘두른다. “이크!” 기안이 얼른 몸을 숙이며 방패로 놈이 휘두르는 낫을 막아냈지만, 놈은 그대로 기안의 몸을 덮치며 목을 노리고 이빨을 들이밀었다. “어딜!” 그 모습을 본 블레이크가 얼른 뛰어 오르며 사커 킥으로 놈의 머리를 걷어 찼지만, 미처 땅에 내려서기도 전에 기형 좀비 가운데 하나가 그를 향해 투창을 집어 던진다. “이런!” 기안이 얼른 일어나며 그것을 막아내려 했지만, 빠르게 날아든 투창은 블레이크의 어깨에 직격하고 말았다. “큭!” 방어복 덕분에 치명적인 부상을 입지는 않았지만, 그 충격으로 인해 블레이크는 균형을 잃으며 바닥을 뒹굴어야만 했다. “괜찮으세요?” 리체스가 얼른 날아올라 어깨에 회복 마법을 걸어주자 블레이크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 정도 쯤이야.” 하지만 그가 전열에서 밀려나자 다시금 두 명의 기형 좀비가 각자 크게 휜 언월도를 휘두르며 기안을 양 옆에서 협공했다. 그 모습을 본 서유미는 곧바로 기안의 옆으로 이동해 기형 좀비 가운데 하나를 상대로 아랑도를 휘둘렀다. 촤차창! 곧바로 기형 좀비가 휘두르는 언월도와 서유미의 아랑도가 불꽃을 튀기며 부딪히기 시작했다. 서유미 덕분에 한 놈에게만 전력을 다할 수 있게 된 기안은 일단 방패로 적의 언월도를 밀어내고는 무시무시한 힘으로 미늘창을 휘둘러대기 시작했다. “내가 만만해 보이더냐!” 하지만 그 두 명이 각각 하나의 좀비를 맞아 싸움을 벌이는 동안 새로운 기형 좀비들이 다시 그들에게 다가왔다 선두는 짧은 단검으로 무장한 기형 좀비와 방금 전에 블레이크의 사커킥에 맞아 날아가 버렸던 낫을 든 기형 좀비였다. 놈들은 일단 기안을 내버려 둔 채 무장이 빈약해 보이는 서유미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들이 무기를 채 휘두르기도 전에, 서유미의 뒤쪽에서 육중한 체구의 남자 두 명이 동시에 숄더 차지를 발동하며 그들에게 쇄도했다. 바로 준상과 블레이크였다. 놈들은 무기를 휘둘러 두 남자의 돌진을 막으려 했지만, 이 터무니없는 사내들은 자신들을 향해 휘둘러지는 무기를 무시한 채 두 기형 좀비들을 단숨에 날려 버렸다. 콰쾅! 단숨에 두 명의 기형 좀비들이 뒤로 날려가자 준상과 블레이크는 놈들을 뒤따르며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두 놈을 깔아 뭉개고는 단숨에 그 머리를 짓뭉개 버렸다. “뭐 저런 무식한...” 기안은 혀를 차고는 상대하고 있던 기형 좀비의 미늘창의 창대로 마구 두들겨 곤죽을 만들어 버렸다. 남말 할 상황이 아니잖아요. 서유미는 스승의 모습에 그렇게 작게 중얼거리고는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언월도를 피하며 기형 좀비의 몸 안으로 파고든 뒤 그 목을 아랑도로 단숨에 갈라버렸다. 블레이크는 자신 몫의 기형 좀비를 쓰러뜨리기가 무섭게 새로운 적을 맞이했다. 이번 상대는 상반신이 기형적으로 발달한 놈이었는데, 그 주먹에 날카로운 송곳이 달린 강철 건틀릿을 장착하고 있었다. 놈은 기형 좀비 하나를 깔아뭉갠 채 머리를 박살내고 있는 블레이크를 향해 달려들며 주먹을 휘둘렀다. 막 기형 좀비의 머리를 박살내고 몸을 일으키려던 블레이크는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주먹을 보고는 얼른 몸을 피했지만, 이번에도 역시나 어깨를 두들겨 맞는 수모를 겪어야만 했다. “큭!” 하지만 블레이크는 고통을 참아내며 마주 주먹을 내질렀고, 이 두 거한은 곧바로 서로의 몸을 치고 받으며 난타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피할 생각조차 없는지 때리는 대로 다 맞으며 상대를 두들기는 데만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 그 모습이라니. 하지만 이 무식한 대결은 의외로 간단하게 결말이 나고 말았다. 그냥 다짜고짜 주먹을 휘두르는 기형 좀비를 향해 콤보의 힘으로 증폭된 카운터를 연거푸 날리고 있으니 그 결과야 뻔한 노릇 아니겠는가. 퍼걱! 결국 기형 좀비는 블레이크의 주먹이 지닌 파괴력을 견디지 못하고 머리가 부서지며 그대로 허물어지듯 뒤로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헉... 헉...” 블레이크의 몸에서는 곧바로 가느다란 아지랑이가 뿜어져 나오며 몸을 회복하기 시작했지만, 재생이 완료되기도 전에 서유미가 그를 스쳐 지나가며 회복 마법을 걸어 주었다. “고맙소.” “별말씀을요.” 블레이크가 악전 고투를 치르고 있었던 것과는 달리, 준상은 처음의 돌격 이후로는 주먹에 하얗게 빛나는 불꽃과 극한의 냉기를 담아 휘두르며 좀비들을 일격에 무력화 시키고 있었다.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하얀 불꽃과 또한 모든 것을 얼려 버리는 극한의 냉기는 상호작용을 일으키며 좀비들의 몸을 산산이 부숴버리고 있었다. 개중에는 제법 강인한 방어력을 지닌 놈들도 있었지만, 대정령의 힘으로 승화된 불꽃과 냉기의 연타는 그런 방어력조차 무시한 채 놈들을 부수고 태워 버렸다. 그냥 주먹만 휘둘러도 무시무시한 준상의 힘에 이런 강대한 속성력까지 더해졌으니 기형 좀비들로서는 도저히 당해낼 방법이 없었다. “아주 그냥 혼자 다 해먹어라.” 준상이 본격적으로 전면에 나서자 기안은 자기 몫의 좀비가 줄어든 것이 불만인지 그렇게 투덜거리며 애꿎은 좀비에게 미늘창을 마구 휘둘러댔다. 서유미는 스승의 그런 모습에 쓴웃음을 흘리다가 커다란 기형 좀비 하나가 그녀를 향해 팔을 펼치고 달려들자, 훌쩍 뛰어올라 몸을 뒤집으며 놈의 어깨를 짚으며 아랑도를 휘둘렀다. 짧은 순간 세 번이나 휘둘러진 그녀의 아랑도는 거대한 기형 좀비의 뒷목과 척수를 어김없이 갈라버렸고, 순식간에 목이 잘린 좀비는 그대로 우당탕거리는 소리와 함께 바닥을 나뒹굴고 말았다. 다수에게 에워싸였으면 위험한 상황이 되었을지도 모르지만, 시기 적절하게 전면으로 튀어 나와 하나씩 착실하게 적을 지워버리는 준상의 존재 덕분에 이들은 비교적 간단하게 선수 대기실의 좀비들을 쓸어버릴 수 있었다. “별 거 아니네.” 기안이 그렇게 말하자, 블레이크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신나게 두들겨 맞은 저는 뭐가 됩니까.” 그 말에 기안은 피식 웃으며 바로 대답했다. “내 눈엔 맞는 걸 즐기는 것처럼 보이던데.” “하하... 설마요.” 블레이크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지만, 기안은 인벤토리에서 분홍빛이 감도는 채찍 두 개를 꺼내들고는 다시 말했다. “이거 맞아 볼래?” “그건...” “이래 봬도 이 채찍이 회복 용품이거든. 모양은 좀 이상하지만 삭신이 쑤시는 데는 그야말로 즉효지.” “사양하겠습니다.” 블레이크가 얼른 손을 내저으며 말하자, 기안은 아쉽다는 듯이 말했다. “나중에라도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 기다릴테니.” “하하...” 그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동안 아이템과 시드에 대한 수거를 마친 준상이 블레이크에게 건틀릿 하나를 건네 주었다. 블레이크는 무심결에 준상이 던져주는 아이템을 받아들었다가 그것이 방금 자신이 쓰러뜨렸던 기형 좀비가 사용하던 무기임을 알아차렸다. “이건...” 블레이크가 건틀릿을 두 손으로 받아들고 바라보자 준상은 짧게 말했다. “껴 봐.” “...” 사실 블레이크도 전용의 무기를 써볼 생각이 없었던 건 아니다. 처음에는 징박힌 가죽 장갑이나 너클 같은 것도 써보고 했지만, 어느 정도 힘이 갖춰지자 그런 물품들이 블레이크의 힘을 견뎌내지 못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지금은 그냥 방어복의 주먹 부분에 특수 제작한 너클 파츠를 장착해 사용하는 정도로 만족하는 중이었지만 자신에게 맞는 아이템이 없는 건 역시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자신이 쓰러뜨린 적의 물품인지라 블레이크는 사양 않고 준상이 말한 대로 건틀릿을 껴 보았다. 실제로 착용해 보니 조금 헐거운 느낌이긴 했지만, 철제 밴드를 몇 개 조이자 이내 맞춘 것처럼 손에 착 감겨 온다.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 하며 착용감을 확인해 보고 연이어 몇 번 허공에 주먹을 휘둘러 본 블레이크는 이내 만족감을 표시했다. “좋군요.”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내 손을 내밀었다. “다시 줘봐.” “...” 뭘 하려는 건가 싶었지만, 일단 블레이크는 건틀릿을 풀어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러자 준상은 곧바로 시드가 담긴 자루를 꺼내어 건틀릿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오오!” 눈앞에서 강화 작업이 시작되자 블레이크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그 광경을 지켜 보았다. 순식간에 강화를 마친 준상은 다시 건틀릿을 그에게 건네 주었고, 블레이크는 그것을 받아들기가 무섭게 아이템 확인부터 실행해 보았다. 아이템정보 명칭 : 권투사의 건틀릿 +10 레벨제한 : 20 종류 : 무기 등급 : Uncommon 공격력 : 21-34 효과 : 1. 적중시 감속 확률 27% 증가 2. 독 속성 공격력 8~10 증가 3. 민첩성 21% 증가 Seed : 없음 설명 : 하리아스의 잊혀진 투기장에서 권투사들이 사용하던 건틀릿입니다. “어, 엄청나군요.” 아직 다른 사람의 무기를 많이 본 적이 없는 탓에 공격력 같은 것이 높은 건지는 알 도리가 없었지만, 적중시 감속 확률과 민첩성 증가 옵션은 이런 것에 대한 안목이 없는 블레이크가 보기에도 너무나 매력적인 옵션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손에 쥐어진 아이템의 정보에 마른 침만 꼴딱 꼴딱 삼키는 블레이크와는 달리 준상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시드가 담긴 자루를 다시 보관하며 대답했다. “별 것 아니다.” “...” 유니크나 레어 아니면 거들떠도 안보는 그가 언커먼 등급 따위를 보고 눈이 찰 이유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아이템 운이 지지리도 없어서 최상위 능력자임에도 이렇다 할 아이템 하나 마련하지 못하고 있던 블레이크에게는 눈이 뒤집어질 정도의 횡재가 아닐 수 없었다. “감사합니다!” 감격한 블레이크가 다시 한번 그렇게 외쳤지만, 준상은 그를 돌아보며 이렇게 대답했다. “시끄럽다.” 하긴 이곳은 기형 좀비들이 우글거리는 적진 한 복판. 게다가 블레이크는 미처 모르고 있었지만, 이 선수 대기실을 빠져 나가면 바로 최종 보스인 불사의 괴물이 도사리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됐고.” 준상은 손을 내저으며 그렇게 대답한 다음, 다른 일행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 앞에 불사의 괴물이 있다. 아마도 상당히 강할 듯 하니 긴장하도록.” “네.” 모두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준상은 앞서서 어두운 통로를 걸어가기 시작했다. 좁고 긴 야트막한 경사로를 걸어 올라가던 준상은 초감각을 통해 주위를 살피다가 얼굴을 찌푸렸다. “이건...” 미니맵에 표시된 불사의 괴물에 대한 것은 이미 예상한 일이었지만, 그 주위에 엄청난 수의 기형 좀비들이 도사리고 있는 것을 이제야 알아차린 탓이다. 아마도 경기를 관람하던 관중들이 기형 좀비로 변화한 것이겠지만, 그들이 이전처럼 얌전히 자리에 앉아 자신과 불사의 괴물이 펼치는 싸움을 관전할 가능성은 사실상 전무하다고 봐야 한다. 불사의 괴물 만으로도 어느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는지 가늠하기 어려운 판에, 보통의 좀비들보다 훨씬 강력한 힘을 지닌 기형의 좀비들이 이렇게 우글거린다면, 준상으로서도 매우 곤란한 상황에 빠질 수 밖에 없다. “곤란하군.” 앞서서 경사로를 올라가던 준상이 그렇게 말하자, 리체스가 물었다. “무슨 일이죠.” “그게...”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준상은 한 가지 계획을 생각해 냈다. "블레이크." "네?" "네가 나서줘야겠다." ============================ 작품 후기 ============================ 에너지 보충중. 00324 트롤러 ========================================================================= 무슨 말인가 하고 블레이크가 어리둥절해 있는 사이, 준상은 다시 리체스에게 말했다. “투명화 아이템 가지고 있지?” “네.” “서유미에게 빌려줬으면 하는데.” “알았어요.” 리체스는 곧바로 자신이 가지고 있던 귀걸이를 서유미에게 건네 주었다. “확인한 다음 착용하세요.” “네.” 서유미가 건네받은 귀걸이를 확인하는 동안 준상은 다시 리체스에게 말했다. “요정 결계, 지금 사용할 수 있어?” “물론이죠.” “그럼 조금 있다가 이곳에서 나가면 사용하도록 해.” “그럴게요.” 대략의 지시가 끝나고 서유미가 귀걸이를 착용한 다음 다시 헬멧을 쓰자 준상은 멀뚱거리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블레이크를 손짓해 불렀다. “와봐.” “네.” 드디어 자신한테도 뭔가 구체적인 지시를 하려는 건가 싶어 조심스럽게 다가섰지만, 준상은 블레이크가 다가오자 느닷없이 그의 멱살을 움켜 쥐더니 이렇게 말했다. “달려라.” “네?” 갑자기 멱살이 잡히는 바람에 당황하던 블레이크는 준상이 그대로 자신을 통로 밖으로 집어 던지자 비명을 질렀다. “우아아악!” 하지만 그렇게 비명을 지르며 날아가던 블레이크는 자신이 커다란 콜로세움의 한 귀퉁이에서 튀어나왔다는 사실과 함께 붉은 안광을 번뜩이는 수많인 기형 좀비들에게 포착되었음을 깨달았다. “망할!” 민첩성이 증가한 덕분인지 블레이크는 몸을 비틀어 회전시키며 고양이처럼 객석 한켠이 착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발이 땅에 닿는 순간, 이빨을 드러내며 달려드는 수많은 기형 좀비들의 모습에 기함하고 말았다. 많다. 너무 많다. 뭘 어떻게 대항하고 말고 할 엄두가 안 날 정도로 많다. 설마. 달리라는 건 그런 의미였던가. “젠자아앙!” 블레이크는 곧바로 객석 외곽을 있는 힘껏 질주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래봐야 사방에서 덤벼드는 기형 좀비들의 품으로 달려드는 꼴이나 마찬가지였지만 그에게는 그것을 돌파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으랴아압!” 누런 이빨을 드러낸 채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기형 좀비를 향해 블레이크는 숄더 차지를 발동했다. 순간 그의 눈앞에서 대기가 갈라지며 기형 좀비의 몸체와의 거리가 급속하게 좁혀지더니, 강렬한 어깨의 힘이 좀비의 가슴 어림과 격돌했다. 콰악! 좀비가 된지 오래된 탓일까. 제대로 된 방어구조차 갖추지 못한 기형 좀비의 몸은 블레이크가 발동한 숄더 차지의 힘을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오체분시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박살나 흩어지고 말았다. 단숨에 적을 분쇄할 때의 그 쾌감은 실로 대단한 바가 있었지만, 블레이크는 그것을 제대로 즐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를 향해 달려드는, 그야말로 개떼라는 말이 어울릴 듯한 기형 좀비들의 물결 속에서 고작 하나를 박살냈을 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객석의 기형 좀비들을 이끌고 움직이기 시작하자, 다른 동료들이 움직이기가 한결 편해졌다. 곧바로 모습을 숨긴 채 통로를 빠져 나온 준상은 거대한 콜로세움의 한 켠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리체스에게 말했다. “요정 결계를!” “맡겨 주세요!” 리체스는 곧바로 커다란 반구형으로 만들어진 콜로세움 안에 요정 결계를 발동시켰다. 그녀의 염원과 의지가 광기의 검은 안개가 가득 차있던 공간 속으로 퍼져 나가며 이곳이 요정 여왕의 영역임을 선언했다. 그러자 자그맣던 리체스의 몸이 크게 변화하며 아름다움과 성스러움을 두루 갖춘 요정 여왕 본연의 모습을 되찾았다. “후우...” 커진 몸과 더불어 완벽하지는 않지만 본신의 능력 일부를 되찾은 리체스가 가볍게 심호흡을 하는 동안, 준상은 다시 기안과 서유미에게 말했다. “둘은 투명화 능력을 최대한 활용해서 블레이크를 뒤따르는 좀비들을 처리하도록.” “네.” “알았어!” 두 사람이 움직이자 준상은 다시 리체스에게 말했다. “리체스는 공중에서 저 세 사람들을 지원해 줬으면 해.” 그 말에 리체스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혼자서 괜찮겠어요?” 준상은 콜로세움 중앙에 동상처럼 우두커니 서있는 거한을 바라보며 말했다. “글쎄. 그건 해봐야 알겠지.” 리체스는 준상의 시선을 따라 불사의 괴물을 바라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가능한 한 빨리 처리하고 도울 수 있도록 할게요.” “부탁해.” “조심하세요.” “...” 리체스는 준상의 이마에 키스하고는 공중으로 날아올라 블레이크를 뒤따르는 좀비들을 향해 마법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준상은 동료들이 좀비들을 처리하는 것을 흘깃 바라보고는 천천히 콜로세움 중앙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검붉은 피부 아래로 울퉁불퉁 솟아 있는 힘줄들과 손발에 채워져 있는 쇠고리들. 누더기인지 옷인지 알 수 없는 검붉은 천조각을 몸에 두른 그 존재는 주위에서 일어나는 소란 따위는 신경 쓰지도 않은 채로 콜로세움 중앙에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특이한 것은, 그의 가슴 중앙에 박혀있는 붉은 보석. 어두운 방 한 구석에 켜진 붉은색 할로겐 램프를 연상시키는 그 보석을 보는 순간, 준상은 이것이 바로 광기의 정령이 봉인된 매개체임을 알아 볼 수 있었다. “그런 거였군.” 불사의 괴물을 처치하는 것과 광기의 정령을 해방시키는 것. 퀘스트에서 요구하는 목표는 두 가지였지만, 결국 본질적으로는 하나로 귀결되고 있었던 것이다. 준상이 천천히 다가서자, 불사의 괴물은 그제서야 기지개를 켜듯 몸을 일으켰다. -크르르르... 전투 전에 인간다운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지만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준상은 개의 으르렁거리는 소리보다는 어쩐지 가래 끓는 소리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불사의 괴물은 한 줄기 커다란 외침과 함께 준상을 향해 달려 들었다. -크와앙! 풀쩍 뛰어올라 준상의 목을 노린다. 여기까지는 보통의 기형 좀비와 그리 다를 바가 없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보통의 기형 좀비들의 움직임을 3배속으로 빨리 감기 한 것처럼 보인다는 정도다. 기세는 물론이거니와 속도마저 예상보다 훨씬 빠른 탓에 준상은 방어하기 보다는 일단 회피하기로 결심했다. 준상은 일단 어둑발이를 통해 위상전이로 괴물의 공격권으로부터 벗어났다. 하지만, 괴물은 손이 땅에 닿기가 무섭게 엄청난 속도로 방향을 틀어 다시 준상을 덮쳐 왔다. “이런.” 준상은 방향을 트는 순간 우두둑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혀를 찼다. 아마도 급격한 방향 전환을 근육과 뼈가 견디지 못한 것일테지만, 괴물은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몸을 감싼 검은 안개가 손상된 팔과 다리를 휘감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원래대로 재생마저 시켜 버리는 것이 아닌가. “정말 괴물이군.” 위상전이는 매우 효과적인 이동 방법이지만 약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림자를 통해서만 이동할 수 있다는 것이 그 첫 번째이고, 반경 십미터 내의 위치로만 이동이 가능하다는 점이 두 번째이다. 첫 번째 약점은 어둠의 정령인 어둑발이를 2개체 보유한 것으로 사실상 의미가 없어져 버렸지만, 반경 10미터 내의 장소로만 이동가능하다는 사실은 여전히 약점으로 남아 있었다. 물론 이전까지는 이것이 그리 큰 약점으로 생각되지 않았다. 하지만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는 이 불사의 괴물을 상대함에 있어 반경 10미터의 거리는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도달할 수 있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칫!” 순식간에 다시 거리를 좁혀 오는 괴물의 붉은 눈을 보며 준상은 혀를 찰 수 밖에 없었다. 준상은 빛의 정령인 반딧불이를 놈의 눈 어림으로 이동시키며 강한 빛을 방출했다. 하지만 코앞에서 카메라 플래시가 터진 것 같은 그 상황에서도 불사의 괴물은 눈꺼풀 하나 깜빡이지 않고 곧장 준상의 목을 노리며 이빨을 들이밀었다. 정령을 이용한 반격이 무용지물로 돌아가자, 준상은 일단 다시 한 번 위상전이로 몸을 피한 다음, 인벤토리에서 랑다잘의 분노를 꺼내 들었다. 불사의 괴물은 준상의 목이 있던 자리를 향해 입을 크게 벌리고 이빨을 딱 소리가 나도록 마주치더니, 다시금 우두둑거리는 소리를 내며 준상을 향해 방향을 틀어 돌진해 왔다. 어설프게 피했다가 손에 잡히기라도 하는 날에는 영락없이 저 물어뜯기 공격에 당할 것이 뻔한 상황. 이미 스스로 수차례에 걸쳐 물어뜯기로 위기를 헤쳐 나온 적이 있던 준상인지라 방어복과 저 괴물의 이빨 가운데 어느 쪽이 더 튼튼할지 감히 시험해 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흡!” 준상은 짧게 호흡을 멈추며 자신을 향해 몸을 날리는 괴물을 향해 거대한 철구를 집어 던졌다. 지금까지 수많은 적들을 단숨에 어육으로 만들었던 전례가 있는 강력한 무기이기에, 준상은 이 공격이 성공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불사의 괴물은 그런 준상의 생각과는 달리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철구를 한 손으로 튕겨내 버렸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자신의 팔 하나를 희생해 철구의 방향을 틀어버린 것에 지나지 않았다. 괴물의 팔은 철구의 무지막지한 위력을 견디지 못하고 뼈가 드러날 정도의 깊은 상처를 입었지만, 가슴에 박힌 붉은 보석으로부터 뿜어져 나온 광기의 안개는 그 상처를 휘감아 단숨에 본래대로 재생시켜 버리고 말았다. 이쯤 되면 재생이란 말을 쓰기도 난감할 지경이다. 준상이 초재생의 능력을 써도 저런 일이 가능할까 싶을 정도. 하지만 설령 그것이 가능하다 해도 살이 부서지고 찢겨져 뼈가 드러날 정도의 상처를 입는다면 재생이 되더라도 그 고통과 충격을 견뎌내는 것부터가 큰일이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바로 쇼크사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 하지만 불사의 괴물은 하루살이가 팔에 앉은 정도의 반응조차 보이지 않은 채 무기를 사용하면서 빈틈이 드러난 준상을 향해 달려들었다. “미친!” 준상은 투척한 철구의 회수를 과감히 포기하고 위상전이를 펼쳐 다시 몸을 피했지만, 이번에도 어김없이 불사의 괴물은 관절에서 우두둑거리는 소리는 내며 방향을 전환해 준상에게 달려들었다. 아무래도 이런 식으로는 끝이 없다는 생각에 준상은 다음 수단을 사용했다. 곧바로 흰 빛과 함께 준상의 몸이 셋으로 갈라졌다. 갑자기 준상이 셋으로 늘어나자 괴물은 일단 가장 가까운 준상에게 달려들어 그 목을 물어 뜯었다. 하지만 그것은 준상이 만들어낸 디코이였다. 목을 물어뜯는 순간 스르르 사라져 버리는 허상에 괴물이 잠시 어리둥절해 있을 때, 놈의 머리 위로 거대한 도끼를 든 또 하나의 준상이 떨어져 내렸다. 괴물은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막았지만, 도끼는 순식간에 괴물의 팔을 잘라버리고 가슴에 큰 상처를 입혔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즉사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처. 하지만 괴물은 비명조차 지르지 않은 채 멀쩡한 다른 손으로 준상의 팔을 붙잡더니 곧바로 몸을 날려 그 목을 물어 뜯었다. “여보!” 공중에서 블레이크를 쫓아 다니는 기형 좀비들에게 마법을 난사하고 있던 리체스는 준상이 불사의 괴물에게 목을 물어 뜯기는 모습을 보고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바로 그 때. 게걸스럽게 준상의 목을 물어 뜯고 있던 괴물의 등 뒤에 또 한 명의 준상이 모습을 나타냈다. 그는 손에 들린 커다란 장검으로 괴물의 등 뒤를 노렸다. 괴물은 등 뒤로부터 전해지는 그 예리한 살기를 느꼈는지 곧바로 몸을 돌리려 했지만, 그 순간 목을 물어뜯기고 있던 준상이 팔을 뻗어 그런 괴물의 몸을 껴안았고, 괴물은 자신이 물어뜯고 있던 자의 팔에 몸이 결박된 채 절멸의 마검 어나이얼레이터에 의해 등을 관통당해야만 했다. 하지만 이 괴물의 생명력은 정말로 놀라웠다. 블러드서커에 베이고, 다시 어나이얼레이터에 의해 가슴이 관통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가슴이 잘려 나가는 것을 무시한 채 몸을 돌려 등 뒤에서 검을 찌르고 있는 준상의 목까지 물어뜯어 버린 것이다. 괴물의 이빨은 단숨에 준상의 목을 파고들어 대동맥을 끊어 버렸다. 하지만. 뿜어져 나오는 뜨거운 선혈의 감각을 느끼며 게걸스럽게 목을 물어 뜯는 괴물의 머리 위로 하나의 점으로 응축된 강력한 정령력의 결정이 떨어져 내린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작은 하나의 눈송이처럼 떨어져 내린 정령력의 결정은 괴물의 머리 속을 파고드는가 싶더니 단숨에 그 조직을 증발시켜 버리더니, 이내 그 몸 속을 파고 들어 가슴에 박힌 붉은 보석으로 도달했다. 그리고 마침내 두 강대한 정령력이 충돌을 일으키자, 쩡! 마치 거대한 빙하가 쪼개져 바다로 떨어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괴물의 가슴에 박혀 있던 보석에 균열이 생겨났다. 그러자 지금까지 몸이 갈가리 찢겨지는 상황에서도 비명 한 번 지른 적이 없었던 불사의 괴물에게서 처참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크아아아아악! 괴물은 몸부림을 치며 도망치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목에서 선혈을 뿜어내고 있는 두 명의 준상은 그런 괴물의 몸을 감싸쥔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쩌정! 그런 와중에 다시 한 번 파열음이 콜로세움 안에 울려 퍼지더니 붉은 보석으로부터 막대한 양의 정령력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다. 투명화 능력으로 모습을 감춘 채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준상은 엄청난 양의 정령력이 쏟아져 나오자 급히 정신을 집중하며 자신 안에 내재된 정령계를 개방해 그 힘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꺼억. 00325 트롤러 ========================================================================= “여보?” 불사의 괴물에게 목덜미를 물어 뜯겨 선혈을 쏟아내는 모습에 놀라 마법을 사용하던 것도 잊고 날아오던 리체스는, 엉뚱한 곳에서 멀쩡한 모습의 준상이 나타나고, 다시 연이어 엄청난 정령력이 그의 몸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보자, 잠시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허둥댈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서서히 빛으로 화해 사라지는 분신들의 모습을 보고서야 어떻게 된 일인지 뒤늦게서야 깨닫고는 화난 얼굴로 준상을 바라보았다. 이런 거였으면 미리 말이라도 해주었어야 하지 않는가 말이다. 하지만 광기의 정령이 해방되면서 뿜어져 나오는 정령력을 흡수하느라 정신이 없는 준상에게 당장 화풀이를 할 수는 없는 일. 그래서 속으로 꿍얼거리고 있는데, 블레이크가 몰고 다니던 기형 좀비 가운데 일부가 준상을 향해 달려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콜로세움 안의 소란을 감지한 탓인지 기형 좀비의 수는 처음보다 더 늘어 있었는데, 잊혀진 투기장 안에 있던 모든 기형 좀비들이 모여드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감히 어딜!” 리체스의 손이 한 번 휘저어지자, 강력한 뇌전의 마법이 기형 좀비들을 향해 파도처럼 뻗어나가 단숨에 숯덩이로 만들어 버린다. 그녀가 콜로세움 안쪽으로 난입해 들어오는 기형 좀비를 처리하는 동안, 준상은 끊임없이 밀려들어오는 정령력을 갈무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대정령이라는 말이 없었던 것 같은데, 밀려들어오는 정령력의 양은 이전에 흡수했던 대정령들의 힘과 비교해도 거의 밀리지 않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이 힘은 감정을 조작하는 능력을 지닌 탓인지 정령계로 들어오면서도 끝없이 준상의 마음을 간섭하려 들고 있었다. 붉은 보석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던 안개의 힘을 수십 수백배 농축한 것만 같은, 가히 악마의 속삭임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것만 같은 감각. 리체스가 옆에서 지켜 주었길래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몰려드는 기형 좀비로 인해 정신이 흐트러지는 바람에 광기의 정령에게 잠식당해도 이상한 일이 아닐 것만 같다. 하지만 그치지 않는 폭우와도 같던 불길한 정령력은 어느 시점이 되자 그 기세가 약해지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처마 위에서 똑똑 떨어지는 낙숫물처럼 변해 버렸다. “후...” 준상은 쏟아져 나오던 정령력이 약해지자 얼른 눈을 뜨고 불사의 괴물을 바라보았다. 그 몸을 장악하고 있던 붉은 보석의 힘이 사라진 탓인지, 괴물의 힘은 산들바람에 흩어지는 오래된 먼지 덩어리처럼 서서히 사라져 가고 있었다. 준상은 그렇게 사라져 가는 불사의 괴물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이미 존재 자체가 사라져 가는 괴물 따위는 관심 없었다. 그가 주시하고 있는 것은, 어느새 그 빛이 거의 사라져 버린 붉은 보석이었다. 가만히 다가가 그 보석을 손에 쥐자, 손바닥을 통해 맥동치는 작은 고동소리 같은 것이 전해져 왔다. 준상은 보석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보석은 잠시 그 힘에 저항하려 했지만, 이내 그의 악력을 견디지 못하고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고, 희미한 빛을 뿜어내는 작은 반딧불 같은 것이 그곳에서 휘청거리며 빠져 나왔다. 준상은 부서진 보석의 파편을 버리고, 다시 그 작은 빛덩어리를 손에 쥐었다. 이것이야 말로 광기의 정령의 실체이며, 또한 그 모든 힘의 응집점인 의의였다. 준상은 사로잡은 광기의 정령을 자신의 정령계로 인도해 그 의의를 흡수했다. “후...” 그 모든 과정이 끝나자, 그제서야 준상의 휴대폰에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했다. 에픽 퀘스트 – 광기 3.하리아스의 잊혀진 투기장 안에는 저주의 안개를 뿜어내는 광기의 정령이 봉인되어 있습니다. 이 정령을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과거 하리아스의 투기장을 주름잡다가 이제는 불사의 괴물이라는 이명으로 불리게 된 존재를 물리쳐야만 합니다. 불사의 괴물을 쓰러뜨릴 수만 있다면, 당신은 진정한 미친개의 자격을 인정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와 싸워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십시오. (달성) ->완료! - 당신이 이번 퀘스트에서 보여준 행동과 성과를 정산합니다. 이 과정은 약간의 시간이 소요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축하합니다! : 당신의 랭크는 Ex:Hero입니다. 당신은 영웅적인 행동으로 세계의 변혁을 이루어냈습니다. -광기의 정령이 해방됨에 따라 광폭 스킬의 공격력 강화 효과와 패널티가 각각 증가합니다. -늑대와 개 형태의 소환물이 광폭 스킬을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기본 보상 외에 추가 보상이 지급됩니다. 보상: 경험치 굉장히 많이, 추가 보상 상자(Ex:Hero), 칭호[제대로 미친개] -> 보상을 지금 수령하시겠습니까? (Y/n) _ (주의) 수령하지 않은 보상은 7일후 자동 소거됩니다. 준상은 휴대폰으로 들어온 메시지를 확인하고는 다시 정령의 파동을 조절해 다시 퀘스트를 차단하고 나서야 주위를 돌아보았다. 붉은 보석의 힘이 완전히 소멸한 탓인지, 콜로세움 안을 채우고 있던 불길한 검은 안개는 점차 그 힘이 약해지기 시작했고, 사납게 날뛰던 기형 좀비들의 움직임 또한 그에 따라 눈에 띌 정도로 둔해졌다. “리체스, 고마워.” 준상이 웃으며 말을 건네자, 리체스는 입을 삐죽거리며 투덜거렸다. “그런 작전이었으면 처음부터 말을 해주면 좋았잖아요.” “미안.” 더 이상 기형 좀비라 부를 수가 없을 정도로 좀비들의 움직임이 둔해지자, 리체스는 그제서야 준상의 옆으로 다가오며 그의 목을 쓰다듬었다. “괜찮아요? 아무리 분신이라도 감각은 그대로 전해 졌을텐데.” “괜찮으니 걱정마.” 준상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바로 대답했지만, 불사의 괴물에 의해 목덜미를 물어 뜯기는 그 감각은 솔직히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끔찍했다. 생살이 물어 뜯기고 맥동 치는 피가 찢겨진 혈관으로 뿜어져 나오는 그 감각이라니. 되돌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을 정도다. 어쨌거나, 좀비들의 움직임이 느려지자 블레이크는 정신없이 쫓기던 분풀이라도 하듯이 모습을 드러낸 기안과 서유미의 도움을 받아 놈들을 모조리 분쇄해 버렸다. 워낙 수가 많은 탓에 제법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귀환자들 중에서도 최상위에 속하는 그들이고 보니 보통의 좀비 따위는 어기적거리는 표적 이상의 의미가 없었다. “고생했다.” “후...” 준상의 말에 블레이크는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 가운데 가장 몸이 튼튼한 것이 자신이니 미끼 역으로 그보다 더 잘 어울리는 사람이 없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불평 한 마디 않고 한숨만 푹푹 내쉬는 그의 모습을 보고, 기안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너 생긴 거랑 달리 의외로 손해 보고 사는 성격이구나.” 블레이크는 투덜거리며 그 말에 대답했다. “차라리 이럴 때는 생긴 대로 논다는 말이 듣고 싶군요.” “그럼 그렇게 말해줄까?” “관두시죠. 우울해지니까.” “하하.” 준상은 몽몽이가 콜로세움 안에 떨어진 아이템과 시드들을 모조리 챙겨오자, 모두를 돌아보며 말했다. “모두 수고했다. 이만 돌아가도록 하자.” “네.” 그들은 신기루 꽃을 거쳐 요정계로 귀환했다. 준상은 요정계로 귀환하기가 무섭게 먼저 누리부터 찾았다. 하지만 누리는 한참 곤하게 낮잠을 자고 있는 중이었다. “하여튼, 못 말린다니까.” “그러게요. 후후.” 리체스와 헤네스는 침대 옆에 딱 달라붙어 있는 준상의 모습에 웃음을 짓고는 서유미를 데리고 온천으로 향했다. 블레이크는 감히 멀뚱히 그녀들이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침대 옆에 앉아 누리를 지켜보고 있는 준상을 향해 말했다. “저... 이만 가봐도 됩니까?” 그제서야 준상은 잊고 있었다는 듯이 말했다. “무투가 말고 무슨 콤보를 가지고 있었지?” “베네레스의 파괴자, 쿨칸의 수도자. 이렇게 두 가지입니다.” 둘 다 처음 들어보는 콤보 이름이다. 준상은 휴대폰을 꺼내 두 가지 콤보의 이름을 메모하고는 다시 말했다. “오늘은 고생이 많았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말해 보도록.” “...” 납치하다시피 해서 데려와 놓고 머슴살이를 시키는 것도 모자라서 이번 같은 경우는 미끼로까지 써버렸으니 고생한 만큼의 보상을 줄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블레이크는 어색하게 웃으며 착용하고 있는 건틀릿을 들어 보였다. “이거면 됐습니다.” 준상은 그냥 필요 없다는 듯이 툭 던져 주었지만, 격투 계열의 귀환자들에게 있어 이 정도의 아이템은 돈이 있다고 해서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하지만 준상은 고개를 저으며 다시 말했다. “그것과 이것은 별개다. 원하는 것을 말해 보도록.” “...” 군대에서라면 진급을 위해서라도 포상 같은 것을 적극적으로 원했을 것이다. 하지만 치열했던 군대에서의 생활에 알게 모르게 염증을 느끼고 있던 그로서는 이곳의 목가적인 생활을 마음에 들어 하고 있었고, 원래부터 금전이나 명예욕 같은 것도 그리 많지 않았다. 오죽하면 그가 획득한 세 가지 콤보 가운데 하나가 수도자일까. 그런 상황이고 보니 원하는 것을 말하라고 해도 설거지 할 때 쓸 고무장갑이나 빨래 널 때나 조금씩 마시는 요정의 술 같은 것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준상에게 그런 걸 보상으로 달라고 하기도 뭔가 어색해서 어떻게 해야 하나 하고 잠시 고민하던 블레이크는, 문득 이전의 퀘스트에서 중상을 입은 한 사람의 일이 떠올랐다. “이런 부탁을 드려도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만...” “말하라.” 잠시 머뭇거리던 블레이크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와 함께 파티를 구성했던 인원 가운데 한 명이 일전의 퀘스트에서 중상을 입었습니다. 아시겠지만, 그런 중상을 입은 상태로 다음 퀘스트에 불려가게 되면 죽음을 면치 못하게 됩니다. 그러니...” “그 자의 부상을 보살펴 달라는 건가?” “네.” “...” 준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사지가 소실되었다든가 하는 식의 부상이라면 나로서도 손을 쓸 수가 없다.” “그 정도는 아닙니다.” 자칫 척수에 손상이 갔다면 마비가 왔을 수도 있겠지만, 정확한 상황을 알지 못하는 블레이크로서는 일단 말을 아낄 수밖에 없었다. “알겠다. 알아보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블레이크가 밖으로 나가자 준상은 다시 누리의 옆자리에 앉은 채로 이번 퀘스트의 보상을 확인했다. 보상을 수령하자 놀랍게도 바로 레벨업 효과가 몸에 나타났다. “이건...” 어떻게 된건가 하고 보상 항목을 살피니, 경험치 항목이 굉장히 많이 라고 표시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강력한 존재인 불사의 괴물을 쓰러뜨린 덕분일까. 그러고 보면 지금까지 콤보 관련 에픽 퀘스트를 수행하면서 최종 보스에 해당하는 존재를 제대로 쓰러뜨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닐까 싶다. 준상은 우선 칭호부터 확인했다. [제대로 미친개] :광기의 정령을 해방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자에게 부여되는 칭호. -효과: 1.미친개와 관련된 아이템, 칭호 등의 효과 증폭. 2.시헬반트 출신자들에 대한 위압, 공포 효과 증폭. -칭호는 획득시 자동으로 효과가 적용됩니다. 칭호의 효과는 이전에 획득했던 다른 콤보 관련 칭호의 그것과 크게 다른 점이 없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수호자나 광전사 콤보의 그것과는 달리, 하리아스가 위치한 국가인 시헬반트 출신자들에 대해 호감도가 아닌 위압과 공포 효과가 증폭된다는 점 정도다. 어차피 다시 그 나라에 갈 일이 있을 것 같지도 않은 터라 준상은 그런가 보다 하고 넘기며 보상 상자를 확인했다. 퀘스트 정보 수령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탓인지, 아니면 정상적인 루트로 퀘스트를 받은 것이 아닌 탓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번에도 히든 퀘스트가 나타나지 않은 상황이라 보상 상자는 영웅급 하나가 전부였다. 상자를 열자 바로 메시지 하나가 휴대폰에 표시되었다. 축하합니다! 스킬카드 ‘피칠갑(H)’를 획득했습니다 :스킬카드는 카드 슬롯에 장착하여 그 능력을 사용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이 스킬카드는 이미 소유한 카드이므로 재시도가 가능합니다. -상자 열기를 재시도하시겠습니까? (Y/n) _ “...” 근 일년 만에 열어본 보상 상자에서 나온 카드조차 피칠갑이라니. 준상은 기가 막혀서 잠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로서 영웅급 피칠갑 카드만 세 개째. 확실히 피칠갑 카드는 시드 슬롯도 많고 여러 가지로 유용한 카드이긴 하지만, 그냥 이대로 습득하자니 뭔가 납득이 되질 않는다. 어차피 카드 시스템에 대한 신뢰도는 이미 한참 낮아진 상태지만, 결전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자신이 쓰지 않더라도 리체스나 헤네스에게 장착시켜 주기만 해도 큰 효과를 볼 수 있는 것이 분명한 사실. 잠시 고민하던 준상은 결국 재시도를 포기하고 영웅급 피칠갑을 습득하기로 결정했다. 곧바로 몽몽이를 불러 아이템 확인이나 하려던 준상은 갑자기 휴대폰으로부터 메시지 알림음이 들려오자 깜짝 놀라고 말았다. 혹시라도 누리가 깰까 싶어 얼른 소리를 죽인 준상은 휴대폰 화면에 나온 메시지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축하합니다! :콤보카드를 조합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현재 조합 가능한 콤보 카드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진 크림슨드레드 [상세 확인] -콤보 카드 조합을 원하시면 해당 번호를 누르시고, 만약 조합을 원치 않으신다면 n을 누르세요(1/n) _ “이건...” 무슨 오래된 게임이나 만화의 최종 보스에게나 어울릴 법한 명칭에 준상은 잠시 멍한 기분이 들었지만, 일단 그 상세를 확인해 보았다. 진 크림슨드레드 -북방의 광전사들에게 있어 경의와 두려움을 동시에 상징하는 붉은 공포. 하지만 붉은 공포의 칭호를 부여받았다고 모두 같은 능력을 지녔다고 생각해서는 곤란합니다. 천 명의 광전사를 홀로 상대할 수 있는 붉은 공포. 그리고 그러한 붉은 공포를 동시에 세 명까지 상대할 수 있는 자. 그것이 바로 진 크림슨드레드입니다. [조합상세] 광폭, 피칠갑, 피칠갑, 피칠갑 (모든 카드가 영웅 등급) -효과: 1. 추가 공격력 250퍼센트 증가. 추가 공포 유발 확률 50% 증가 2. 장착중인 모든 갑옷 해제. 3. 모든 물리 공격 스킬의 쿨타임 80퍼센트 감소. 4. 피나 체액을 뒤집어 쓸 경우, 재생률 40퍼센트 증가. 5. 피나 체액을 뒤집어 쓸 경우, 그 모습을 본 적에게 30퍼센트 확률로 공황, 궤주, 전의상실, 공포 가운데 한 가지 상태 이상 유발. (10초마다 재시도, 기본 지속 시간 3초, 중첩 가능) 6. 범위 내의 모든 아군에게 ‘철혈’ 효과 부여. 기존의 크림슨드레드에 비해 모든 효과 수치가 증가했을 뿐만 아니라, 철혈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효과가 생겼다. 철혈 : 강철과도 같은 굳은 의지가 혈관을 통해 흘러넘칩니다. -강인한 의지로 무장되어 모든 종류의 정신 공격에 대한 저항력이 증폭됩니다. -행동 불능이나 각종 상태 이상에 대한 저항력이 높은 수준으로 증폭됩니다. 자신에게만 부여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위의 모든 아군에게 부여된다는 점에서 매우 놀라운 효과가 아닐 수 없다. ============================ 작품 후기 ============================ 버그 자수합니다. 321화에서 에픽 퀘스트가 준상의 눈에 바로 보였다고 표현했었는데, 현재 인터페이스는 리체스가 연구중이라 준상은 휴대폰을 사용중이므로 이에 맞게 수정되었습니다. 따스한 날 오후 두 시 연두색 담요에 누워 조용히 눈감아 보다 생각나는 약의 향기 약국으로 달려가 내 지갑 꺼내고 싶어 봉지 속 숨겨져 있는 뜨거워진 약의 효과 알 수 없는 약의 향기를 아무도 몰래 음미해 노란 별이 보이네 두근두근 꽃빛 약냄새 풍기는 날 알 수 없는 약의 효과를 아무도 몰래 음미해 빨간 별이 보이네 두근두근 꽃빛 약빨을 부는 날 알고 싶은 화끈한 약빨 효과 있기를 기도해 막 별들이 보이네 두근두근 연참으로 향하는 날 00326 트롤러 ========================================================================= 크림슨드레드가 무서운 이유는 그 개인의 강력한 능력 뿐만 아니라 피와 체액을 뒤집어 쓸 경우 적에게 지속적으로 상태 이상을 불러 일으킨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 철혈의 능력은 아군으로 하여금 그런 상태 이상에 대한 저항력을 부여함으로서 대규모 전투에 있어서 훨씬 유리한 고지를 점하게 만들어 준다. 정확한 증폭률은 알 수 없지만, 크림슨드레드를 동시에 세 명까지 감당할 수 있다고 되어 있는 것을 통해 그 효과를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준상은 만족감을 표하며 다른 메시지를 확인했다. 축하합니다! :당신은 처음으로 ‘진 크림슨드레드’ 조합에 성공했습니다! -당신의 위업을 찬양하며 ‘석양을 잠재우는 자’ 칭호를 부여합니다. [칭호 상세 정보 확인은 이곳을 누르십시오.] [석양을 잠재우는 자] :진 크림슨드레드 조합을 최초로 성공한 자에게 부여되는 칭호. -효과: 추가 재생률 10퍼센트 증가 -칭호는 획득시 자동으로 효과가 적용됩니다. 크림슨드레드 최초 달성 칭호가 ‘대지를 석양으로 물들이는 자’ 였던 것과 연관이 있는 칭호인 듯 하다. 추가 보상 상자가 하나 뿐이라 아쉬웠는데, 뜻밖에도 새로운 콤보를 갖추게 되었으니 나쁘지 않은 결과다. 시스템에 대항하기 위한 수단으로서는 큰 의미가 없다 해도, 그것은 아직 나중의 일. 게다가 정령계라는 비장의 수단이 생긴 이상, 이것을 잘 연구하면 퀘스트를 차단했듯이 시스템의 간섭 자체를 차단한 상태로 카드 같은 것을 활용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정령계의 힘을 더 강대하게 키우고, 인터페이스에 대한 리체스의 연구도 더 진전이 이루어져야겠지만 말이다. 또한 이번 에픽 퀘스트를 통해 선택적으로 원하는 퀘스트를 골라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찾은 이상, 본격적으로 대륙 곳곳에 숨겨진 에픽 퀘스트를 탐사해 획득하는 작업을 추진할 수도 있다. 이번에는 아쉽게도 획득하지 못했지만, 레벨 제한이 없는 유니크 아이템이라면 머리 속의 시드가 무력화된 상황에서도 충분히 위력을 발휘할 수 있을 터. 우선은 자신이 보유한 에픽 퀘스트가 우선이겠지만, 이후로는 다른 이들이 지닌 콤보와 관련된 에픽 퀘스트 역시 확인할 필요가 있다. 어쨌거나. 보상 상자의 확인이 끝난 준상은 레벨업 보상인 랜덤 카드를 확인했다. 축하합니다! 스킬카드 ‘은신(SR)’를 획득했습니다. :스킬카드는 카드 슬롯에 장착하여 그 능력을 사용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스킬카드를 카드 슬롯에 장착하시겠습니까? (Y/n) _ [카드 상세 정보 확인은 이곳을 누르십시오.] 물어뜯기 같은 것이 나오면 어쩌나 싶었지만, 다행히도 준상이 보유하지 않은 새로운 카드가 나왔다. 몸을 숨긴 채 분신으로 불사의 괴물을 상대한 탓일까. 새로 얻은 카드의 상세를 확인하려는데, 다시 새로운 메시지가 몇 개 나타났다. “이건...” 준상은 뭔가 싶어서 일단 새로운 메시지부터 확인했다. 축하합니다! :콤보카드를 조합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현재 조합 가능한 콤보 카드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에레디스의 꽃향기 [상세 확인] -콤보 카드 조합을 원하시면 해당 번호를 누르시고, 만약 조합을 원치 않으신다면 n을 누르세요(1/n) _ 놀랍게도 새로운 메시지는 새로운 콤보 카드의 조합이 가능하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준상은 바로 상세 정보를 확인해 보았다. 에레디스의 꽃향기 -에레디스는 히딕스인들이 말하는 저승입니다. 에레디스로 가는 길에 뿌려지는 꽃그림자란 다시 말해 죽음을 의미하며, 이것은 오랜 세월 동안 암살자를 뜻하는 말로 지칭되어 왔습니다. 에레디스의 꽃향기란, 이러한 꽃그림자 중에서도 특히 은신에 뛰어난 치명적인 암살자들을 그들이 흩뿌리고 사라지는 죽음의 내음에 빗대어 지칭하는 명칭입니다. [조합상세] -기습, 은신, 은신, 관통 (레어 등급 이상인 카드가 세 가지 이상) -효과: 1. 탐지를 위한 특별한 능력이 없는 한 은신 상태 탐지 불가능. 2. 은신후 기습시 치명타 발생 확률 100%, 치명타 피해 50% 증가. 3. 은신후 기습시 방어 무시 확률 30% 증가. 4. 치명타 발생시 즉사 확률 3% 증가. 이것은 암살자의 레어급 콤보다. 준상은 콤보 효과를 살펴보고는 조금 놀랐다. 치명타 발생시 즉사 확률과 탐지를 위한 특별한 능력이 없는 한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은신 상태를 탐지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는 점 때문이었다. 문제는 최초 달성 칭호가 나오지 않았다는 점. 이것으로 미루어 봤을 때, 귀환자 가운데 이미 이 칭호를 달성한 자 또한 있을 것이 분명했다. 일반 등급의 칭호 또한 획득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 두 가지 칭호를 모두 한 사람이 획득했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지금으로서는 확인할 수 없지만, 만약 이 칭호들의 효과가 즉사 확률과 관련이 있다면 준상으로서도 그 위력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 된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준상이 이미 높은 수준의 초감각 능력을 보유하고 있어서 다른 평범한 이들과는 달리 사전에 은신 상태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것도 어디까지나 상대가 자신과 같은 레어급의 콤보만을 달성하고 있다는 전제하에서의 얘기이고, 만약 영웅급 콤보까지 달성하고 있다면 얘기는 또 틀려지게 된다. “이건... 주의할 필요가 있겠군.” 준상은 몽몽이를 불러내 아이템과 시드의 확인을 했다. 선수 대기실에 있었던 기형 좀비들이 사용하던 무기들은 다양한 종류가 있었지만, 아무래도 오랜 시간이 지난 탓인지 상태가 그리 좋지 못했다. 앞서 블레이크에게 준 건틀릿처럼 보수를 할까 하다가, 당장 쓸지 안 쓸지도 모르는 아이템에 시드를 투자하는 건 어쩐지 좀 낭비로 생각되어 일단 보관만 해두기로 했다. 남은 것은 불사의 괴물이 지니고 있던 레어 시드 뿐. 명칭 : 광기의 눈동자 레벨제한 : 30 종류 : 시드 등급 : Rare 효과 : 1. 공격 속도 증가 12% 2. 민첩 증가 13% 3. 초재생 3레벨 상승 설명 : 불사의 괴물이 지니고 있던 특별한 시드입니다. Seed 슬롯이 있는 아이템이나 카드에 장착하여 능력을 강화할 수 있습니다. 한번 장착한 시드를 분리하기 위해서는 특수기능 ‘분리’가 필요합니다. [이 시드를 아이템이나 카드에 장착하시려면 이곳을 누르십시오.] 불사의 괴물이라는 이름답게 이 시드에는 초재생이 무려 3레벨이나 부여되어 있었다. 새로 획득한 레어 시드를 바로 장착하고 다른 시드들을 정리하고 있는데, 온천에서 목욕을 마친 세 여자들이 여왕의 침실로 들어왔다. 따끈따끈한 물에 푹 담그고 온 덕분인지 상기된 모습으로 헤네스가 말했다. “씻고 오세요.” “그래.” 준상이 몸을 일으키자 리체스가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도와드릴까요?” 그러자 안 그래도 목욕을 막 끝내고 나온 모습을 보이는 것이 부끄러운지 시선을 피하고 있던 서유미의 얼굴이 확 붉어진다. 준상은 그 모습에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됐으니까 다녀올 동안 누리나 잘 보고 있어.” “피...” 리체스가 아쉽다는 듯한 표정을 짓자 헤네스가 그 모습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날 하루는 그렇게 휴식을 취하고, 다음날이 되자 준상은 헤네스와 리체스, 그리고 서유미를 불렀다. “잠시 같이 가야 할 곳이 있다.” “무슨...” 의아한 표정을 짓는 그들을 향해 준상은 어제 블레이크가 말했던 일에 대해 설명했다. 두 사람은 그런가 보다 했지만, 서유미는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귀환자들에게 있어 몸을 움직일 수 없을 정도의 중상이란 것은 다음 퀘스트에서 사망할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나 다름없는 일. 물론 퀘스트 시작 지점이 적의 출현과 무관한 장소라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고 적이 우글거리는 장소 한복판에 떨어지면 달리 옆에서 지켜주는 파티원이 없을 경우 저항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사망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유미씨는 왜 부르신 거에요?” 리체스나 헤네스의 경우에는 회복을 위해서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서유미의 경우에는 성녀의 능력이 있다고는 해도 기안에 비해 훨씬 미미한 수준이기 때문에 가벼운 부상이라면 몰라도 중상의 경우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준상은 리체스의 말에 바로 대답했다. “이번 기회에 메신저를 등록할 필요가 있어서.” “아...” 정령의 파동을 임의로 조절하는 것이 가능해지긴 했지만, 에픽 퀘스트처럼 반드시 퀘스트가 발동될 것이 확실시 되는 상황이 아니라면 평상시에 이것을 개방해 두는 것은 귀찮은 상황을 유발할 가능성이 높았다. 에픽 퀘스트가 아닌 보통의 자잘한 퀘스트로 얻을 수 있는 보상보다는 정령계의 수련 등에 정진하는 쪽이 더 큰 효과를 볼 수 있음은 말할 필요도 없는 일. 적어도 자신의 귀여운 딸과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퀘스트 때문에 방해를 받는 일 따위, 준상으로서는 절대로 사절이었다. 게다가 메신저를 쓰려고 정령의 파동을 억눌렀는데 퀘스트가 덜렁 떠버리면 그것도 난감한 일. 어차피 서유미를 이곳으로 데려온 이유 가운데 하나가 이런 식으로 다른 귀환자들과의 연락을 전담시키기 위함이니 이번 기회에 함께 데려가고자 하는 것이다. “일단 서윤에게 연락해서 딜런과 약속을 잡았으면 좋겠군.” “알겠습니다.” 준상이 영어에 능통하다면 직접 전화를 걸어 약속을 잡겠지만, 불행히도 그의 외국어 능력은 그리 좋지가 못했다. 귀환자의 언어 소통 능력은 얼굴을 맞댄 상태가 아니면 의미가 없는 것도 한 가지 이유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링컨 기념관 앞에서 딜런과 만나기로 약속을 잡은 준상은 다시 블레이크를 불러 함께 갈지를 물어 보았다. 블레이크는 잠시 고민하다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저는 이번엔 남아 있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이 그리 좋지는 못했지만, 따지고 보면 존슨과 해밀튼, 그리고 맥밀란은 블레이크에게 있어서는 제자와도 같은 존재. 직접 가서 용태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그가 모습을 드러내면 쓸 데 없이 소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차라리 자신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편이 그들을 치료하기 쉬워질 것은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 물론 준상이 느닷없이 일면식도 없는 세 명의 소위들을 살피는 것에 대해 의문을 가질 것 역시 분명한 일이긴 하지만, 그에게 직접적으로 그 일을 따지고 들 정도로 간 큰 인물은 적어도 지금의 미국에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준상은 블레이크를 남겨둔 채 헤네스와 리체스, 그리고 서유미를 대동한 채 애팔래치아 산맥에 열린 정령의 문을 통해 미국으로 향했다. 숲에서 벗어나 차를 타고 조금 이동한 그들은 오래지 않아 링컨 기념관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차를 주차시키고 파르테논 신전을 본뜬 링컨 기념관을 향해 계단을 조금 올라가자 입구 근처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딜런 중위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딜런은 준상의 모습을 보고 반색하며 다가서다가 그의 옆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헤네스와 서유미의 모습을 보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방긋 미소를 짓는 헤네스와 앞머리를 올려 얼굴을 드러낸 서유미가 번갈아 인사를 건네자, 이 숫기 없는 청년은 경례를 해야 할지 악수를 청해야 할지 갈팡질팡 하다가 준상이 가만히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고서야 거수 경례도 아니고 목례도 아닌 엉거주춤한 자세로 답례를 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 작품 후기 ============================ 딜런 : 사인 좀. 00327 트롤러 ========================================================================= 누리와 마주할 때 좀 풀어지는 걸 빼면 매사에 철두철미하기 그지없는 준상과 너무나도 대비되는 그 모습에 헤네스가 다시 웃음을 터뜨리자, 딜런은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준상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서유미에게 말했다. “메신저를.” “네.” 서유미는 곧바로 한 발 앞으로 나서며 휴대폰을 꺼내 딜런 중위에게 메신저 등록을 요청했다. 헤네스의 미소에 기분이 붕 뜬 채로 어쩔 줄 몰라 하던 딜런은 갑작스레 알림음이 들려오자 기겁하며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가 메신저 등록 요청인 것을 확인하고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 이름은... 설마 비공식 세계 랭킹 1위인 바로 그...” 랭킹이라는 말이 뭔가 묘하긴 했지만 서유미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에 대답했다. “네. 제가 바로 서유미입니다.” 딜런은 놀란 표정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그녀의 자료에 대해서는 이미 확인을 한 상태였지만, 사진으로 보던 것과는 뭔가 외모나 분위기가 전혀 다른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사진에서는 앞머리를 길게 길러 얼굴을 가린 채였는데, 그 모습이 꼭 예전에 유행했던 공포 영화의 주인공과도 같은 모습인데다 사용하는 무기마저 오래된 식칼이다 보니, 정보 관계자들은 그녀를 은근히 사다코라는 닉네임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게 어찌된 일인가. 실물로 만난 그녀는 그런 공포 영화에나 등장할 법한 이미지와는 달리 매우 침착하고 조신한 느낌의 동양 미녀였다. “아! 미처 알아보지 못해 정말 죄송합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그보다는 승낙을.” “무, 물론입니다. 잠시만요.” 하지만 딜런이 알아보지 못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애초에 이런 식으로 앞머리를 넘겨 얼굴을 드러내고 다니게 된 것 자체가 최근의 일인데다, 요정계가 아닌 다른 곳에서도 그와 같은 모습을 하게 된 것은 마음 속에 쌓여 있던 원한과 트라우마를 얼마 전의 사건으로 인해 씻어 버린 덕분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봐야 전투 시에 드러나는 광기는 여전하지만, 그런 것 까지 완전히 뒤바뀌기에는 아직 시간이 좀 더 필요한 상황이다. 어쨌거나 메신저 등록이 끝나자 준상이 다시 딜런에게 말했다. “앞으로 나에 대한 연락은 그녀가 중간에서 맡게 될 것이니 그렇게 알고 있도록.” “아... 그렇군요. 기억해 두겠습니다.” 대답은 바로 나왔지만 딜런은 속으로 놀라고 있었다. 같은 나라 사람인데다 임서윤의 길드원이기도 한 그녀이니 어느 정도 친분이 있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아예 연락 전반을 책임진다는 것은 단순한 친분관계로는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준상 하나만으로도 감당하기 어려운 판에, 또 한 명의 강자가 가세했다는 사실을 상부에 어떻게 보고 하는 편이 좋을지 생각하던 딜런은 방금 전 자신의 이목을 완전히 빼앗았던 갈색 머리 미녀에 대해서도 궁금증이 일어났다. “그런데, 이 분은...” 딜런의 조심스러운 말에 헤네스는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며 스스로 소개를 했다. “헤네스 브레아에요. 잘 부탁드려요.” “예! 저야 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친밀감 넘치는 그녀의 말에 딜런은 금새 표정이 풀리며 헤벌레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어지는 준상의 말을 듣는 순간 정수리에 벼락이 내리 꽂힌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하얀 방패의 여왕이 바로 그녀다.” “네?” 감히 입에 담기도 난감한 그 이명을 듣는 순간 헤네스는 얼굴이 홍시처럼 붉어지며 준상을 향해 눈을 흘겼다. “그 얘기는 안 하기로 했잖아요.” “그랬나. 기억이 안 나는데.” 당연하다는 듯이 대화를 나누는 그 모습을 보고 딜런은 얼떨떨한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하얀 방패의 여왕. 이것은 샌디에이고에 나타난 조개 모양의 마수를 처치할 당시 강력한 마수의 일격을 하얀 색의 방패로 막아내는 영상이 퍼지면서 붙은 이명이다. “영상에서는 좀 더... 뭐랄까...” 키도 작고 몸매도 어린애 같았는데 라고 말하려다가 딜런은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그래도 초면에 함부로 입에 담기에는 난감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헤네스가 모를 리 없다. “그때는 아직 좀 어렸을 때니까요.” “아, 예... 그렇군요.” 어쨌거나 소개가 끝나고 당황스러움이 조금 가시자 딜런은 그제서야 준상에게 자신을 부른 이유를 물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무슨 일로 저를 부르셨습니까.” 준상은 바로 대답했다. “아는 사람에게서 부탁을 받았다.” “무슨...” “존슨, 해밀턴, 맥밀란.” “...” 블레이크와 함께 파티를 맺었던 세 사람의 이름이 준상의 입에서 거론되자 딜런은 바로 표정이 굳었다. 그의 탈영에 대해서는 아직도 군 내에서 의견이 분분한 상태. 그런데 그가 탈영할 당시 바로 옆에 있었던 사람에게서 느닷없이 세 사람의 이름이 나왔다는 사실에 딜런은 가만히 억눌러 두고 있던 의심이 폭발하는 것을 느꼈다. 물론, 그렇다고 대놓고 그것을 입에 담을 수는 없었다. 뭐라 해도 이 남자는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극히 위험한 존재. 요즘 들어 귀환자의 능력을 얻은 자들 가운데 갱이나 테러리스트 흉내를 내는 자들의 수가 늘어나고 있었지만,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이 남자와 비교하자면 그런 자들은 차라리 하루살이 이하의 존재나 다름없었다. 여기서 자신의 마음 속에 생겨난 의심을 말하는 건, 공연히 준상을 자극하는 일이 될 수도 있을 터. 최악의 경우에는 그것을 빌미로 삼기 위해 일부러 그 세 명을 언급한 것일 수도 있다. 딜런은 머리 속이 복잡해지자 일단 심호흡으로 들끓어 오르는 마음을 가라 앉히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세 사람에게 용무가 있으십니까?” 혹시라도 꼬투리가 잡힐까봐 신중하게 입을 연 딜런과는 달리 준상은 바로 대답했다. “큰 부상을 당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게...” 그들의 존재는 엘리트로 육성되는 만큼 군 내에서도 상당한 비밀 등급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제대로 알기 어렵다. 하물며 최근의 퀘스트에서 중상을 입은 것은 당사자와 몇몇 관계자 외에는 알지 못하는 비밀. 그들 자신들의 존재는 물론이거니와 부상을 입은 과정에 대한 당사자들의 진술이 엇갈리는 상황이라 더욱더 신중하게 입단속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이 남자는 어떻게 그와 같은 사실을 알아낼 수 있을까.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은 단 하나. 그들이 부상을 입을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던 또 다른 한 사람에게 직접 얘기를 전해 듣는 것이다. 이쯤 되면 적어도 블레이크의 탈영에 관여했는지 여부는 둘째 치더라도 현재 그와 연락이 닿고 있다는 것 하나는 의심할 여지가 없게 된다. 그리고 캐나다에서의 마수 퇴치 이전까지 블레이크와 박준상이라는 두 귀환자 사이에 소통이 전혀 없었던 점을 감안하면, 더욱더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상황. 이렇게 되고 보면 박준상에게 블레이크가 지금 어디 있는지 아느냐고 묻고 싶은 걸 참는 것만으로 딜런으로서는 고역이 아닐 수 없다. 딜런이 머리에서 김이 나도록 무언가를 고민하며 대답을 하지 못하고 우물우물 대자, 준상은 조금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건가” 딜런은 화들짝 정신을 차리며 일단 그 말에 대답했다. “아닙니다. 중상을 입은 건 맞습니다. 다만...” “다만?” 블레이크의 일을 묻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지만 딜런은 애써 말을 돌렸다. “다만... 존슨 소위와 해밀턴 소위의 외상은 힐링 포션을 바로 사용한 것도 있고, 추가로 회복 마법도 받아서 어느 정도 완치가 된 상태입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보이고 있기는 합니다만, 적어도 신체 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문제는 맥밀란 소위인데...” “심각한가?” 딜런은 난처한 표정으로 우물쭈물하다가 말을 이었다. “그게... 척수 손상으로 현재 하반신 마비가 일어난 상태입니다.” “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도 만만하게 볼 것은 아니지만, 하반신 마비라면 적절한 보호를 받지 않는 이상 다음 퀘스트에서 생명을 부지하기 어렵고, 설령 보호를 받는다 쳐도 그만큼의 전력 손실이 일어나니 파티원 전체가 위험해질 수도 있다. 맥밀란이라는 이도 귀환자인 이상은 그와 같은 상황을 자신이 먼저 알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일반인이라면 시간을 들이든 수술을 하든 간에 회복을 위해 노력이라도 해보겠지만, 언제 퀘스트가 발동될지 모르는 상황에서는 그 어떤 것도 시도하기가 어렵다. 수술 중에 퀘스트가 발동되기라도 하면 그 순간 사망 확정이니 당연한 일이다. “가지.” “네?” 준상의 말에 딜런은 화들짝 놀랐다. “하지만...” 그는 당황해 하며 뭔가 말하려 했지만, 준상이 그의 말을 자르며 다시 말했다. “정말로 그런 상황이라면, 한시가 급할 터. 여기서 떠들고 있을 틈이 없다.” “...” 딜런은 입술을 깨물었다. 함부로 그들에 대한 것을 말한 것 만으로도 대외비 유출로 징계 대상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일이지만, 촉망 받던 후배가 병원 침실에서 넋이 나간 채 시들어 가는 모습을 마냥 지켜보는 것도 그로서는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가망이... 있겠습니까?”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물어보았지만, 준상은 그런 그를 향해 이렇게 대답했다. “봐야 안다.” “...” 하긴, 아무리 능력이 좋은 의사라도 그냥 대충 어떻다는 식의 말만 듣고 완치를 장담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일까. 어설픈 확신보다는 오히려 이쪽이 더 신뢰가 간다. 딜런은 잠시 고민하다가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러지.” 그는 곧바로 어딘가로 바쁘게 전화를 걸기 시작했고, 한참이나 그렇게 통화를 하고 나서야 비로소 지친 표정으로 준상에게 말했다. “허가를 받았습니다. 바로 안내하도록 하겠습니다.” “수고했다.” 맥밀란이 있는 곳은 메릴랜드 베세스다에 위치한 월터리드 국립 군 의료센터였다. 원래 이곳은 국립 해군 의료 센터가 있는 곳이었지만, 2011년에 워싱턴 DC에 소재하고 있던 월터리드 육군 의료 센터가 이전 통합되면서 현재와 같은 명칭으로 바뀌게 되었다. 준상은 앞선 딜런의 차를 따라 링컨 기념관에서 차를 타고 북쪽으로 이십여 분 거리에 있는 월터리드 국립 군 의료센터로 향했다. 간단한 검문을 통과한 그들은 딜런의 안내를 받아 곧바로 맥밀란이 입원해 있는 병실로 향했다. “우... 이상한 냄새.” 지금까지 조용히 준상의 어깨 위에 앉아 있던 리체스는 소독약 냄새가 싫었는지 대번에 얼굴을 찌푸렸다. 비교적 약 냄새가 약한 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약품에 대한 내성이 없는 요정에게는 견디기 어려울 정도였던 모양이다. 냄새를 막기 위해 부산스럽게 이런 저런 마법을 자신에게 거는 리체스의 모습에 웃음을 짓던 준상은 이내 굳은 표정으로 병실의 문을 여는 딜런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화장기 없는 얼굴로 누워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엘리자베스 제인 맥밀란은 문이 열리는 기척을 느끼자 고개를 돌려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중위님?”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려 하는 맥밀란을 보고 딜런은 얼른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그대로 있도록.” “죄송합니다.” “죄송하긴.” 그렇게 대화를 주고 받던 맥밀란은 딜런의 뒤를 따라 들어오는 낯선 인물들을 보고는 미간을 찡그렸다. “이 분들은...” 딜런은 순간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난감해졌다. 준상은 물론이고 헤네스와 서유미도 지금 여기서 신분을 밝히기는 여러모로 난처했기 때문이다. “음... 내가 아는 분들이다.” “...” 맥밀란은 얼버무리는 딜런의 모습을 보고는 더 이상 의문을 표하지 않고 입을 닫았다. 알아도 되는 사항이라면 이렇게 말을 얼버무릴 이유가 없으니 차라리 관심을 표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다음 순간 준상이 스윽 다가오더니 양해도 구하지 않고 느닷없이 자신의 몸을 번쩍 안아 올리자 평소 냉정하고 침착하기로 이름 높던 그녀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짓을?” 하지만 다음 순간 선글라스 너머로 차갑게 자신을 내려다 보는 준상의 시선과 마주친 순간 그녀는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준상은 말없이 시선 만으로 맥밀란의 입을 다물게 하고는 어깨 위에 앉아 있던 리체스에게 말했다. “리체스, 부탁한다.” “맡겨주세요.” ============================ 작품 후기 ============================ 냠냠냠 노래 들어 봤는데... 왜 전 가사로부터 연상 되는 이미지가 공포 내지는 고어물인 걸까요. 약을 너무 먹어서? 00328 트롤러 ========================================================================= 리체스는 곧바로 준상의 어깨 위에서 날아올라 맥밀란의 몸 이곳 저곳을 마법으로 확인하기 시작했다. 맥밀란은 위압감 넘치는 준상의 기세에 압도된 채 잠시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자신의 몸 이곳 저곳에 갑자기 마법진 같은 것이 나타나자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다, 당신은 누구죠? 누군데 갑자기 이런...” 하지만 준상은 그녀를 바라보며 이렇게 대답했다. “조용히.” “네?” “다시 일어나 걷고 싶다면, 가만히 있어라.” “...” 이게 무슨 소린가. 다시 일어나 걷다니. 현재 그녀의 상태는 반신 불수.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반신 불수 가운데서도 감각은 있으나 근육에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는 상태라 할 수 있다. 완전히 척수의 신경이 끊긴 상태는 아니고, 노력 여하에 따라서는 충분히 회복이 가능하지만 언제 퀘스트에 불려갈지 모르는 그녀의 상황을 감안하면 그런 것은 전혀 위안이 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지금 그녀는 물론이고 부모나 군의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위험을 무릅쓰더라도 일단 수술 등의 방법을 강행해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중이었다. 애초에 신경외과의 가장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가 무서울 정도로 길고 긴 수술 시간이다. 다섯 시간은 기본이고, 심하면 최대 하루를 넘길 정도라 수술팀 전체가 수술을 교대로 수행하는 일도 허다하다. 맥밀란이 보통의 군인이라면 이런 점은 차라리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는 다름 아닌 귀환자. 수술 중에 퀘스트가 발동되면 그 즉시 사망 선고를 받는 것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할지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딜런 중위가 데려온 이 남자는 대뜸 허락도 받지 않고 자신의 몸을 안아 들고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이런 말을 하고 있다.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좋단 말인가. 맥밀란은 고개를 돌려 딜런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신중한 표정으로 손가락을 들어 조용히 하라는 시늉을 해보이고 있었다. 도대체 이들은 누구인가. 그리고 지금 이 상황은 어떻게 된 영문일까. 맥밀란은 당장이라도 입을 열어 그 의문에 대한 답을 묻고 싶었지만, 일단은 딜런 중위의 말대로 입을 다물고 있기로 했다. 그렇게 알 수 없는 문양이 몸 주위에 새겨지기를 얼마나 했을까. 어디선가 흡사 작은 새가 지저귀는 듯한 아름다운 목소리가 맥밀란의 귀에 들려왔다. “가능할 것 같아요. 단지...” 그러자 준상이 곧바로 그 목소리에 반응했다. “단지?” “두 가지 방법이 있어요. 시간은 적게 걸리지만 고통스러운 방법, 그리고 시간은 좀 걸리지만 아프지 않은 방법.” 모습을 감춘 채로 준상의 어깨 위로 돌아와 그렇게 속삭이는 리체스의 말에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가만히 자신을 올려다 보는 맥밀란을 향해 말했다. “들었나?” 맥밀란은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들었어요.”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말했다. “결정해라. 네 몸에 대한 문제이니.” “...” 맥밀란은 다시 딜런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딜런이라고 뭔가 뾰족하게 다른 정보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그 역시 리체스의 존재를 모르기는 마찬가지이고 마법을 사용하는 주체조차 준상일거라 생각하고 있는 상황이니 뭐라 맥밀란에게 조언을 해줄 방법도 없었다. 다시 준상에게로 시선을 돌린 맥밀란은 푸른 눈동자로 그를 올려다보며 다른 것을 물었다. “왜 제 몸을 고쳐 주려 하시는 거죠?” 그 말에 준상은 짧게 대답했다. “보상이다.” “보상... 이라면?” “원하는 것이 있냐고 물으니 네 얘기를 하더군.” “...” 주어는 빠져 있었지만, 맥밀란은 그 얘기를 듣는 순간 불현듯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검은 피부를 지닌, 건장한 체구의 사내. 바로 블레이크다. 어째서 그의 얼굴이 바로 떠올랐는지는 그녀 자신으로서도 알 도리가 없었지만, 다시 생각해 봐도 그 외에는 달리 그런 식의 부탁을 할 사람이 없었다. 누군지는 몰라도 마법 같은 힘을 사용할 만한 존재와 알고 지낼 만한 사람 가운데 그녀가 동료라고 부를 수 있는 자는 몇 되지 않는다. 직속상관이라 할 수 있는 윌킨슨 중령과 딜런 중위가 일단은 가장 유력하지만, 지금 옆에서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중위의 모습을 보면 그들이 이 남자에게 부탁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여진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그녀와 퀘스트를 함께 수행하는 자들 정도. 하지만 존슨은 일전의 퀘스트가 끝난 이후로 횡설수설하며 아직도 제 정신을 차리지 못한 상황. 해밀튼은 그보다는 좀 나아서 가끔 자신의 병실을 찾아오기도 하지만, 그가 이런 자와 알고 지낸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결국 남는 것은 단 한 명. 존슨이나 해밀튼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힘을 지니고 있으나, 지금은 행방불명된 채 탈영의 의혹을 받고 있는 그녀의 교관 블레이크 뿐이다. “교관님이 보내셨나요?” “...” 그 질문에 대해 준상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맥밀란은 그런 무반응 자체가 자신의 질문에 대한 긍정임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과연 이들을 믿어도 될까. 설령 블레이크가 보낸 것이 맞다 하더라도, 여전히 탈영에 대한 의혹이 풀리지 않은 그를 무조건 신뢰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인지도 모른다. 평소의 그녀였다면, 아마도 이 상황에서는 명백하게 확신이 없는 이상 일단 거절했을 터.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작은 가능성이라도 몸이 원래대로 돌아갈 가능성이 있다면, 그것을 무턱대고 거절할 수 없을 정도로 절박한 상황이다. 잠시 더 생각에 잠겨 있던 맥밀란은 곧바로 준상을 향해 결연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시간이 적게 걸리는 방법으로 부탁드립니다.” “...” 준상은 말없이 그녀를 내려다 보다가 다시 확인하듯 질문했다. “틀림없나.” 맥밀란은 결연한 태도로 그 말에 답했다. “네.” 그 대답을 들은 리체스는 곧바로 헤네스와 유미를 향해 말했다. “헤네스, 그리고 유미씨.” “네.” “둘이서 나를 좀 도와줘야 겠어요. 괜찮겠죠?” “물론이에요.” 준상은 천천히 맥밀란을 다시 침대 위에 내려 놓고는 그녀의 몸을 옆으로 굴려 엎드리는 자세를 취하게 하고는 환자복을 걷어 올려 등이 드러나도록 했다. “바지도 좀 내려 주세요.” “그러지.” 준상의 손이 바지에 닿자 맥밀란은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고, 딜런은 급히 몸을 돌리며 문가로 물러났다. 엉치뼈가 드러날 정도로 바지를 당겨 내리자 허리에 채워져 있던 기저귀가 모습을 드러낸다. 맥밀란으로서는 순간 죽고 싶을 정도로 수치스러운 기분이 들었지만, 이를 악문 채 그것을 견뎌냈다. 몸이 원래대로 나을 수만 있다면. 오직 그 한 가지 생각만을 머리 속에 담은 채,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리체스는 드러난 맥밀란의 새하얀 등을 가만히 살펴보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헤네스와 서유미에게 말했다. “회복의 영기를.” “네.” 헤네스와 서유미의 몸에서 동시에 은은하고 따뜻한 빛이 흘러나와 자신의 몸을 내리쬐자, 맥밀란은 질끈 감았던 눈을 자신도 모르게 살며시 떴다. 그리고 다음 순간, 침대 양 옆에 나뉘어 선 두 명의 여성으로부터 은은한 빛이 흘러나와 자신의 몸을 감싸고 있는 모습에 크게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그 빛이 지닌 힘이 정확히 무엇인지 그녀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그녀가 보고 들은 귀환자들의 힘 가운데 이런 식의 능력은 들어본 적이 없다. 도대체 이들은 누구란 말인가. 그런 의문이 맥밀란의 머리 속에 떠오를 때, 리체스가 다시 준상에게 말했다. “고통 때문에 발버둥을 칠 수도 있으니 몸을 확실하게 고정시켜 주세요.” “그러지.” 그리고 뒤이어 리체스는 맥밀란의 귀에 이렇게 속삭였다. “뭐라도 입에 물고 있도록 해요. 견디기 어려울 지도 모르니.” 정체를 알 수 없는 속삭임이었지만, 맥밀란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손을 뻗어 침대 옆 탁자에 놓여있던 물수건을 집어 입에 물었다. 마침내 모든 준비가 끝나자, 리체스는 침대 옆에 쳐 있던 커튼을 마법으로 펼쳐 그 안의 모습을 외부에서 볼 수 없도록 차단한 다음, 준상에게 다시 말했다. “문단속 좀 부탁드려요.” “그러지.” 준상은 몸을 돌린 채 서있는 딜런을 향해 말했다. “좀 시끄러울 수도 있으니 누가 들어오지 못하게 잘 살피도록.” “알겠습니다!” 딜런은 얼른 병실 밖으로 나가 문에 기대어 섰다. 지나던 사람들은 그가 긴장된 표정으로 문을 지키고 서 있는 모습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리체스는 시술 전에 주위에 소리를 차단하는 결계를 칠 생각이었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지만, 결과적으로 봤을 때는 딜런의 행동이 옳았다. “딜런 중위!” “...” 긴장된 표정으로 문에 기대어 서있던 딜런은 복도 저쪽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다가오는 모습을 보고는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딜런이 준상을 이곳으로 데리고 오기 위해 교섭을 벌였던 바로 그 대상들이었기 때문이다. 흰 가운을 걸친 이들과 장교의 정복을 몸에 감싼 한 무리의 사람들은 딜런이 문 앞에 서있는 모습을 보자 곧바로 다가와 그를 에워쌌고, 그들 가운데 희끗한 머리를 뒤로 넘긴 장년의 인물 하나가 앞으로 나서며 말을 걸었다. “딜런 중위.” “네.” “지금 문을 지키고 있는 건가?” “그게...” 딜런 중위는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우물쭈물할 수 밖에 없었다. 맥밀란을 맡은 의사들의 동의도 받지 않은 채 의료 행위에 대한 자격이 있는지조차 의문스러운 이에게 시술을 맡겼으니, 이것이 알려지게 되면 단순히 준상을 데리고 온 것 이상으로 큰 문제가 된다. 애초에 딜런이 교섭한 내용도 그저 준상에게 맥밀란을 잠시 보이겠다는 것을 허락받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중위가 장교인 것은 분명하지만, 군 전체로 보자면 고작 초급 장교에 지나지 않는다. 월터리드 국립 군 의료센터의 신경외과 과장인 브루스 애들러는 난처한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 하는 딜런의 모습을 보며 다시 말했다. “비키게.” 하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든 딜런은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 없습니다.” “...” 애들러는 얼굴을 찌푸리고는 다시 말했다. “그녀는 내 환자일세.”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비키지 않겠다는 건가.” “죄송합니다.” “...” 그러자 옆에 서있던 장교 하나가 딜런에게 말했다. “지금 자네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지 알고 있나?” “...” 딜런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 채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애들러는 혀를 찼다. “도대체 저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건가.”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딜런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자신이 왜 이렇게까지 나서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준상은 분명 강력한 힘을 가진 자이긴 하지만, 그것이 부상을 입은 부하를 완치시킬 수 있다는 보장이 되어 주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완강하게 이들의 출입을 막아서는 이유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군의관과 장교들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분명히 저 안에서 무언가가 벌어지고 있는데, 그것을 확인할 방법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힘으로 밀고 들어가기도 난감한 것이, 조금 어리버리해 보이기는 해도 딜런 중위 역시 엄연한 귀환자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어중이 떠중이가 아니라, 일년전 첫 번째 실종 사건이 발생했을 때 탄생한 첫 번째 귀환자 중 하나이며, 또한 레벨 30이 넘는 상위 능력자 가운데 한 명이니 완력으로는 일반인이 상대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정말 이래야겠나.” “죄송합니다.” 다시 한 번 애들러가 그렇게 말을 걸었지만, 딜런은 묵묵히 사죄할 뿐 문에서 비키려 하지 않았다. ============================ 작품 후기 ============================ 애매한 2연참 그거 레드불이란 거야? 잠깐! 약봉지로 예쁘게 포장한건데 불리하다는 거야? 흥! 더 힘내볼까? 아예 저질러 버릴까? 그럴때야말로 Catch and Release 야 아, 준비하고 (Hoo!)하나, 둘~ (Hoo!) 약빨로 연참 연참 프린스-! 왠지 나른해 아껴 놓았던 약 몇 개 먹자 어라 1개가 다르네 고민쟁이, 많은 분량, 맛있는 거만 먹으려는 녀석 적당히 좀 해! 뛰어 올랐던 그 녀석의 달아오른 몸이란 흔히 말하는 평범한 연참머신 놀란 건 나뿐!? 살 떨리는 한편더더더더더더~! 무 : 있잖아 나, 연참 시작했어 간 : 그래도 최근엔 꾸준하게 연참 하고 있네 진 : 정말! 너 정면으로 오는 척 하면서 오른쪽 훅을 날리는구나! 슉슉, 슉슉! 빈틈발견! 짱 : 저기.. 박카스, 레드불, 붕붕드링크는 어디있나요? 제 약통은.. 아얏☆ 봉봉~ 응원단 Let's get! Cherry Pie! 란란~ 환영회 You've got a Sensation! 네~엣! 존재감 데굴데굴 소혹성 부딪혀서 녹아버렸어요 어이가 없지만 큰소리로 노래해 Sing and Dance!! 가져가 마지막에 웃는 건 나일테니까 무간진이기때문이에요. 결론은! 목요일 인데 기분이 안좋아, 어떻게 해야해? 무간진이 좋아요. 귀여우니까! 3연참 접근 할 때까지만 참자. 힘내! (Yeah!) 힘을 내! (Yeah!!) 마이 연참, 연참, 프린스☆ 분위기가 고조되어 분위기 업 연참을 하거나 아직 비밀로 해두고서는 모른 척 응석쟁이 연참머신 통신부 상황을 말하고 깔끔하게 죽어! 그 녀석에게 밟힌 새끼손가락이 아프다고 호들갑 떨고 살짝 그 녀석에게 한마디 절대로야! 내 전문 분야야! 반짝반짝 맨발로 조르기다다다다-! 연연 연참전 Let's go 연참신전 야이야이 소란절 What's UP? Temptation 아-이 상실감 연참 연참! 합이 삼연참 찾았더니 발견했네 약빨이란 당연히 있는 그대로 빠는 것 걱정 따윈 없어 한번 해봐 새로운 걸 시도하게 되는 건 나의 연참력 무간진으로 변신해도 나는 나 주말에는 어때? 살짝 보여주는 것 정도야 별거 아니잖아 연참은 간단해 식은 죽 먹기나 마찬가지 연참 3연발 꽉 매달려서 견디자 가슴이 철렁 허리는 덜덜 I'm sugar sugar sweet BONBON! Mon Mon Day Let's get! UH! UH! AH! RUNRUN! Chop chop kick! Look up! Fu! Fu! Ho! HI!Education Love is ABC! 운다카다- 운다카다- 우냐우냐 날이 개이고 반해버려서 슬픈 연참 가져가 마지막에 웃는 건 나일테니까 무간진이기때문이에요. 결론은! 목요일 인데 기분이 안좋아, 어떻게 해야해? 무간진이 좋아요. 귀여우니까! 역시 예상대로, 마지막에 웃는 건 나일테니까 무간진이기때문이에요. 결론은! 애매한 2연참 그건 무간진이란 거야? 와우 약봉지로 예쁘게 포장한건데 불리할리가 없어 Po! 힘낼꺼야 저질러버릴꺼얏 그때는 박카스&레드불로 핫! 아, 하나-(Hoo!) 아, 둘- (Hoo!) 셋 틈만나면 연참 연참 아뮤즈! 00329 트롤러 =========================================================================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문 안쪽에서 헤네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끝났어요. 들어오셔도 되요.” “...” 딜런은 반색했지만, 이내 다시 난처한 표정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주위에 둘러서 있던 다른 군위관과 장교들 역시 헤네스의 말을 똑똑히 전해들은 탓이다. 딜런은 금방이라도 자신을 밀치고 문으로 들어서려는 그들의 모습에 식은 땀을 흘리며 문 안쪽에 대고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지금은...” 하지만 그렇게 딜런이 입을 연 순간 문이 왈칵 열리며 갈색 머리의 아름다운 미녀가 그들을 향해 방긋 미소를 짓더니 군의관과 장교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죄송해요. 다른 분들은 나중에 들어오세요.” “네?” 딜런은 이게 무슨 소린가 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뒤돌아 서려다가 헤네스가 그의 옷자락을 잡고 끌어당기자 그대로 속절 없이 병실 안으로 끌려들어가고 말았다. 다른 장교들은 딜런이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반사적으로 그 뒤를 따르려 했다. 하지만 그들은 곧바로 무언가 투명한 벽에 가로 막힌 채 발을 멈추어야만 했다. 딜런은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 막혀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들의 모습에 놀란 표정을 짓다가, 헤네스가 문을 닫자 그녀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방금 그건?” 헤네스는 웃으며 대답했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아요?” “그거야 그렇지만...” 딜런은 그렇게 말하며 맥밀란이 누워있던 침대를 바라보다가 맥밀란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온몸이 흠뻑 젖은 채로 멍한 표정을 지으며 침대 난간을 잡고 서 있었다. “성공... 한 겁니까?” 떨리는 목소리로 딜런이 묻자 헤네스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네. 잘 참아준 덕분에 빨리 끝낼 수 있었어요.” “아...” 딜런은 감격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한 가지 의문스러운 점을 떠올렸다. “그런데... 밖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그 말에 헤네스가 다시 대답했다. “아까 그 벽을 보셨죠?” “네.” “그런 비슷한 장막을 병실 주위에 두른 거에요. 소리 같은 걸 차단하기 위해서.” “아...” 딜런은 이제 더 이상 뭐에 놀라야 할지조차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가 그렇게 조금은 어리벙벙한 모습으로 바라보고 있는 동안 맥밀란은 천천히 침대 난간으로부터 손을 떼며 몸을 일으켰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반신불수로 있었던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다는 점. 만약 오랜 시간 동안 그 상태로 지냈다면 아무리 귀환자라도 근력을 되찾는데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을 것이다. “위화감은 없나?” 리체스를 대신해 준상이 묻자 맥밀란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요. 조금 어지러운 느낌이 있긴 한데, 그건 너무 오랜 만에 일어나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그렇군.” 준상이 고개를 끄덕이자 다시 맥밀란의 몸 주위로 마법진 몇 개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이건...” 이번에도 리체스를 대신해 준상이 설명했다. “회복을 돕기 위해 몇 가지 조치를 취했다.” “아...” “우선은 천천히 걷는 연습부터 하도록.” 맥밀란은 가만히 자세를 바로 하고는 준상과 헤네스, 그리고 서유미를 향해 차례로 목례를 해 보이고는 다시 말했다. “감사드립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보답해야 좋을지.” 하지만 준상은 덤덤한 표정으로 그 말에 이렇게 대답했다. “보답을 하고 싶다면, 날 이곳으로 보낸 이에게 하도록.” “...” 이들을 자신에게 보내준 사람. 준상의 입에서 이름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맥밀란과 딜런은 그가 누구인지 바로 떠올릴 수 있었다. “그 분은... 돌아올 생각이 없으신 건가요?” “...” 준상은 대답하지 않았다. 애초에 블레이크는 자신의 의지로 요정계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따지고 보면 그는 준상에게 납치당한 몸. 설령 스스로 복귀를 원한다고 해도 능력을 실전에서 확인한 지금 준상은 그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준상이 입을 다문 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 것을 본 맥밀란은 이번에는 다른 것을 물었다. “중요한 이유가 있는 것이겠죠?” “그렇다.” 시스템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어지간한 능력자로는 어림도 없는 일. 하지만 준상의 진지한 대답에 헤네스와 서유미, 그리고 모습을 감추고 있는 리체스는 동시에 난처한 듯 쓴웃음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블레이크가 요정계에서 하고 있는 일은 누리의 옷가지를 빠는 일이라든가, 누리의 젖병을 씻는 일이라든가, 누리의 기저귀를 삶는 일 같은 것들 뿐이었기 때문이다. 초콜릿을 연상시키는 피부색 때문에 요정 들에게 묘하게 인기가 있는 모양이지만, 누가 봐도 지금의 블레이크는 머슴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하지만 그런 자세한 사정을 전혀 알지 못하는 맥밀란은 준상의 대답을 듣자 결연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저도 그 분을 돕도록 하겠습니다.” “...” 준상은 오히려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옆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딜런이 기겁하며 소리쳤다. “맥밀란 소위! 지금 그게 무슨 말인가!” 딜런의 말에 맥밀란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전 이미 한 번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몸입니다.” “그건...” “그런 제 몸이 이렇게 멀쩡하게 회복되어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된 것은 오직 그분이 저를 신경 써준 덕분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딜런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거야 그렇지만... 자네는 지금 그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고나 하는 얘긴가?” 맥밀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그 모습에 딜런은 다시 소리쳤다. “물론이라니! 지금 이대로 블레이크를 따라 나서는 것은 군무이탈, 아니 탈영을 뜻하는 거다. 군인에게 있어 이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알고나 하는 얘긴가?” 하지만 맥밀란은 굳은 표정으로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딜런은 허탈한 표정으로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 “허...” 하지만 두 사람이 그렇게 심각한 대화를 나누는 사이 준상과 헤네스, 리체스, 그리고 서유미는 귀환을 준비하고 있었다. 노련한 상위 능력자도 아니고, 블레이크의 도움으로 편하게 레벨 올리다가 주제도 모르고 설쳐서 중상을 입은 민폐스러운 인물에게까지 손을 내밀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딜런과 대화를 나누던 맥밀란은 준상과 헤네스, 그리고 서유미가 벽 한쪽으로 자리를 옮기자 이상한 낌새를 알아채고는 바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바로 그때. 준상은 신기루 꽃으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갑자기 아무것도 없던 병실 벽면에 고풍스러운 느낌의 석문이 모습을 드러내자 맥밀란과 딜런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 “저건...” 그런 그들을 향해 헤네스가 말했다. “그럼 몸조리 잘 하세요.” 그 말 한 마디를 던지고는 열려진 석문 너머로 사라지는 그녀의 모습과, 자신들에게 살짝 목례를 해보이고는 그 뒤를 따르는 서유미, 그리고 마지막으로 석문 너머로 발걸음을 옮기는 준상의 모습을 보는 순간 맥밀란은 자신도 모르게 준상의 뒤를 따라 석문 안으로 몸을 날렸다. “소위!” 뒤늦게서야 딜런이 기겁하며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한동안 침대 위에서 꼼짝도 못한 채 누워만 있던 사람이 맞는가 싶을 정도로 날렵하게 맥밀란 소위는 석문 안으로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그녀의 모습이 사라지고 곧이어 석문마저 눈앞에서 사라지자, 딜런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아무것도 없는 병실 벽면을 바라만 보았다. 준상을 이곳에 데려온 것이 누군가. 맥밀란에 대한 시술을 은연중에 허락한 것이 누군가. 병실 안으로 들어오려던 장교와 군의관들을 한사코 저지한 것은 또 누구인가. 두 말 할 것도 없이, 전부 딜런이다. 맥밀란마저 감쪽같이 눈앞에서 사라진 이상, 그 모든 행동의 책임 또한 딜런이 져야만 한다. “이거... 어쩌면 좋지?” 하지만 당황스럽기는 그와 같은 사건을 벌인 맥밀란도 마찬가지였다. “여긴?” 그녀는 눈앞에 나타난 거대한 탑의 내부와도 같은 구조물을 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석문을 통과하면 어딘가로 이동하리라는 것까지는 예상했지만, 그것이 이런 엄청난 구조물의 내부일 거라고는 미처 예상치 못한 탓이다. “어쩌죠?” 서유미의 말에 준상은 바로 대답했다. “다시 돌려보낼 수밖에.” 맥밀란은 그 말을 듣고는 다급하게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준상은 염동력을 발휘해 그녀의 몸을 끌어당겨 단숨에 멱살을 움켜쥐고는 그 푸른 눈동자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네 의견은 물은 적이 없다.” “...” 그의 손에 멱살이 잡힌 순간 전신의 힘이 쭉 빠져 나가는 그 소름끼치는 감각에 맥밀란은 너무나 놀란 나머지 말조차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보통의 사람도 그런 상황에 처하면 놀랄 수 밖에 없는데, 그녀는 바로 직전까지 반신불수 상태를 체험한 장본인이다. 하체를 움직이지 못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한데, 이번에는 아예 목 아래를 전혀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 처하자 그녀는 신경이 전부 오그라들 것만 같은 극심한 공포를 느껴야만 했다. 준상은 새파랗게 질린 채 몸을 떠는 그 가련한 모습을 가만히 주시하다가 다시 석문을 열고자 했다. 하지만 그런 준상을 헤네스가 말렸다. “잠시만요.” 다른 사람이 그랬다면 그냥 무시하고 넘어갔겠지만, 헤네스와 리체스의 말은 그럴 수가 없다. “왜?” 준상이 돌아보며 묻자 헤네스는 침착하게 말을 시작했다. “제 생각엔 그녀를 데리고 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아요.” “어째서?” 말은 준상에게 했지만, 의문을 표한 것은 리체스였다. 헤네스는 그녀를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 “생각해 보세요. 블레이크씨의 지금 상황을.” 그녀는 그렇게 운을 띄우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예전에는 블러드로드 다섯 명이 하던 일을, 지금은 혼자서 도맡아 하고 있잖아요.” “그거야... 그렇지.” 리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유미가 모시고 온 노부부가 어느 정도 일을 도와주고는 있지만, 블러드로드나 블레이크 같은 건장한 사내들과는 심각할 정도로 근본적인 노동력의 격차가 있었다. 헤네스는 리체스와 서유미가 일리가 있다는 듯한 반응을 보이자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게다가, 저희들과는 달리 블레이크씨는 혼자에요. 요정들이 관심을 보이고는 있지만, 그건 말 그대로 호기심일 뿐, 친분과는 거리가 멀죠.” 이번에도 리체스와 서유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외모부터도 이질적이고 살아온 문화와 지역도 너무나 상이한 터라 블레이크는 좀처럼 그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헤네스는 다시 준상을 향해 말했다. “이 분이라면 블레이크씨의 일을 돕는 것도 가능할 것이고, 말벗도 되어 줄 수 있을 거에요. 게다가 본인 스스로 그 역할을 원한다니 더할 나위 없죠. 그렇지 않은가요?” “음...” 이번에는 준상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헤네스는 준상에게 멱살이 잡힌 채 대롱대롱 매달려 새파랗게 질려 있는 맥밀란을 향해 마지막으로 물었다. “맥밀란씨, 제 말이 맞나요?” 맥밀란은 그 말을 듣고는 깊게 생각하지도 않고 바로 대답했다. “네! 그 말씀대로입니다!” 결사적이기까지 한 그 말에 준상은 얼굴을 찌푸린 채 다시 물었다. “잘 생각하도록. 돌아가려면 지금이다. 일단 그 안으로 들어서고 나면 힘들다고 다시 돌려보내 달라는 식으로 투정을 부려 봐야 소용없다.” 그 말에 맥밀란은 새파랗게 질린 채 떨고 있으면서도 결연하게 대답했다. “저는 이미 결심했습니다.” ============================ 작품 후기 ============================ 충전중....... 00330 트롤러 ========================================================================= 자기가 하고 싶어 하는데다, 헤네스의 말에도 일리가 있는지라 준상은 맥밀란의 멱살을 쥐고 있던 손을 풀어주었다. “커헉...” 맥밀란은 준상의 손에서 풀려나자 그대로 주저앉아 가쁘게 호흡을 몰아쉬며 다시 손발의 감각이 돌아온 것에 대해 안도했다. 서유미는 무감동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준상과 잘됐다는 듯이 미소를 짓고 있는 헤네스의 모습을 번갈아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얼핏 보기에는 헤네스가 맥밀란을 위해 말을 해준 것 같지만, 그녀 역시 지금 블레이크가 처한 상황을 제대로 말하지 않은 것은 것을 결국 마찬가지. 따지고 보면 딱히 맥밀란을 위한 행동이라고 보기도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부부는 닮아가게 마련이라더니. 이런 걸 부창부수라던가. 남편이 노래하면 아내가 따라한다는 그 말대로, 블레이크를 강제로 납치하다시피 끌고 온 준상이나 좋은 말로 맥밀란을 구슬린 헤네스나 제3자인 서유미가 보기엔 거기서 거기라는 느낌이다. 어쨌거나. 맥밀란을 돌려보내지 않기로 결정한 준상은 그녀가 다시 몸을 일으키자 곧바로 다시 요정계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준상이 먼저 앞장서서 석문을 통과하자, 헤네스가 미소를 지으며 맥밀란에게 말했다. “들어가세요.” “네.” 맥밀란은 그 말에 따라 석문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다가 준상이 없는 지금이 기회다 싶었는지 헤네스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서유미는 그 모습을 보고 다시금 쓴웃음을 떠올릴 수 밖에 없었지만, 헤네스는 시치미를 뚝 떼고 그녀의 인사를 받아들였다. “신경 쓰지 마세요. 어쩐지 남 일 같지 않아서 한 마디 거든 것 뿐이니까요.” “네?” 의아한 표정을 짓는 맥밀란의 모습에 헤네스는 별 것 아니라는 듯이 대답했다. “그런 게 있어요. 그보다 일단 어서 문 안으로.” “아, 죄송합니다.” 맥밀란은 얼른 사과하고는 석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아까는 다급한 김에 후다닥 뛰어 들어갔지만, 지금 다시 안으로 들어가자니 뭔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제와서 물러 설 수는 없는 일. 맥밀란은 깊게 심호흡한 뒤 물결치는 기묘하게 반짝이는 빛의 장막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러자 앞서 안으로 들어섰던 준상과, 처음 보는 아름다운 여성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쩐지 이야기 책에 나오는 여신과도 같이 아름다우면서도 성스러운 기품이 느껴지는 외모는 물론이거니와 등 뒤에서 희미하게 반짝이는 날개의 형상을 보자 맥밀란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터뜨렸다. “아...” 자신을 보고 넋이 나간 듯한 표정을 짓자 리체스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까는 제대로 인사를 못했죠? 리체스라고 해요.” 리체스의 인사에 맥밀란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엘리자베스 제인 맥밀란입니다! 반갑습니다!” 그리고는 자신도 모르게 거수 경례까지 해버리고 말았다. 뒤따라 들어오던 헤네스와 서유미는 그 모습을 보고 다시 웃음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리체스 언니는 여기 와서 처음 보시는 거겠네요.” “네?” “아까도 있었어요. 모습은 지금처럼 기품 있는 모습이 아니었지만...” “그게 무슨.”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맥밀란을 향해 리체스가 다시 말했다. “제 목소리, 기억 안 나세요?” “...” 맥밀란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불현듯 깨닫는 바가 있었다. “아! 아까 저한테 속삭이던 그 목소리!” “맞아요.” 리체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헤네스가 다시 설명을 덧붙였다. “참고로 맥밀란씨를 고쳐준 마법사도 바로 리체스 언니에요.” “네? 정말입니까?” 놀라서 반문하는 맥밀란을 향해 리체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 말도 맞아요.” 그렇게 여자들끼리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던 준상은 말도 없이 어디론가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하여튼, 누리 보고 싶어서 어떻게 참았나 몰라.” “그러게 말이에요.” 리체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준상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기자, 헤네스는 맞장구를 치고는 서유미를 향해 말했다. “유미 언니, 부탁 좀 드려도 될까요?” 헤네스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들은 서유미는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러세요.” “그럼 부탁드려요.” 헤네스와 리체스마저 준상을 따라 가자 서유미는 멍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는 맥밀란을 향해 말했다. “어서 와요. 잘못해서 뒤처지면 미아가 될 수도 있거든요.” “알겠습니다!” 맥밀란은 씩씩하게 대답하고서는 서유미와 함께 헤네스의 뒤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연구실 밖에 설치된 결계를 통과하자 서유미는 헤네스의 뒤를 따르던 것을 멈추고 여왕의 거처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밖으로 나오자 가장 먼저 맥밀란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아이들이 낙서해 놓은 듯한 기묘한 풍경이었다. 아무리 봐도 지구의 그것으로는 생각되지 않는 기묘한 이 광경은 도대체. 환자복을 입고, 짧게 자른 숏컷의 맥밀란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모습에 서유미는 그녀의 외모가 어쩐지 한창때의 처녀라기 보다는 미소년 같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여기가 어딘지 알 수 있겠습니까?” 군대식의 딱딱한 억양에 묘하게 허스키한 느낌의 미성까지. 모르는 사람이라면 성별이 헷갈릴 수밖에 없을 듯한 그런 중성적인 느낌이 맥밀란에게는 있었다. “이곳은 요정계랍니다.” “요정계... 말입니까??” “네.” 맥밀란의 반문에 대답한 서유미는 이렇게 덧붙였다. “참고로 아까 인사를 나눴던 리체스님이 바로 이 요정계의 여왕이시죠.” “아...” 어쩐지 묘하게 보통의 인간과는 느낌이 다르더라니. 맥밀란이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며 서유미는 다시 말을 이었다. “정확히는 전대 여왕이시지만, 뭐... 딱히 그걸 구분 지어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아요.” “그렇군요.” 새로운 인간의 모습을 발견한 것인지 요정 몇몇이 수풀 속에서 고개를 빠꼼이 내민 채 맥밀란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서유미의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경계하듯 조심스럽게 맥밀란의 모습을 살피는 요정 가운데 한 명에게 물었다. “죄송하지만 블레이크씨가 어디 계신지 아시나요?” 그러자 요정들은 서로를 돌아보며 쑥덕거리기 시작한다. “블레이크가 누구지?” “몰라!” “나도 몰라!” “난 알아!” “오오오!” “이럴수가! 이건 기적이야!”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요정들의 대화 내용에 어리벙벙한 표정을 짓고 있는 맥밀란을 향해 서유미가 웃으며 말했다. “조금 기다리세요. 원래 좀 시간이 걸려요.” “아, 예...” 그 와중에도 요정들의 대화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블레이크씨는 말이지, 바로 그 초콜릿 남자야!” “오오! 어떻게 알았어?” “안 건 둘째 치고 어떻게 기억했어?” “그건... 바로 이 핫블레이크랑 이름이 똑같기 때문이지!” “오오오!” “그렇구나!” “핫블레이크! 어째서 나는 그것을 연상하지 못했단 말인가!” “후훗, 그것이 바로 너와 나의 차이지.” “이럴수가.” “인정한다.” “인정한다.” 요정 하나가 초코바를 들고 으스대는 모습을 보며 맥밀란은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헷갈리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구와는 전혀 다른 요정계라는 세계 만으로도 놀라움을 감추기 어려운데, 초코바를 들고 잘난 척 하는 요정이라니. 어쨌거나 자기들끼리 쑥덕거리는 일이 끝나자 요정 중 하나가 서유미를 향해 말했다. “핫블레이크씨는 지금 개울가에 있을 거에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핫블레이크가 아닌데. 어쨌거나 서유미는 요정들에게 공손하게 인사한 다음 맥밀란에게 말했다. “가요.” “네.” 맥밀란은 이런 비밀스런 세계에서 블레이크가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생각하며 서유미의 뒤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고 보니 어릴 적에 그녀가 봤던 만화 중에 그런 것이 있었다. 육체의 단련을 위해 물 속에 들어가 그 흐름을 가르는 훈련을 하는 장면이 바로 그것이다. 잘은 모르지만 블레이크 역시 현대 무기보다는 육체의 단련을 중시하는 인물이었고, 자신 역시 그런 그의 가르침을 받아 지금까지 수련을 쌓아왔다.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보통의 일반인에 비해 엄청난 근력과 민첩성을 획득한 자신의 능력에 조금은 자만했었던 것도 분명한 사실. 하지만 일전에 타락한 일각수와의 전투에서 너무나도 무력하게 쓰러져 버린 뒤로는 그런 자신의 자만심에 대해 깊이 반성하게 되었다. 블레이크는 그런 그녀보다도 엄청나게 강한 능력을 지닌 존재.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불가사의한 세계에서 연일 고된 수련에 매진하고 있다니. 그에 비하면 꼴 같지도 않은 자만심에 도취되어 있던 자신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맥밀란은 그렇게 마음 속 깊이 반성하며 서유미의 뒤를 따라 개울가로 향했다. 우거진 숲속을 지나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자, 깨끗하고 아름답다는 말로 표현하는 것조차 미안할 정도로 투명한 개울물이 흐르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개울물을 따라 조금 더 내려가자, 바구니 같은 것을 늘어 놓고 바위 위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블레이크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맥밀란은 그 모습을 보자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 말로 표현하기 힘든 벅찬 감정이 용솟음치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일까. 평소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것만 같은 행동을 저지르고 말았다. “교관님!” 그렇게 외치며 블레이크를 향해 한걸음에 달음박질치기 시작한 것이다. “응?” 블레이크는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그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다가 환자복을 입은 채 눈물마저 그렁거리며 달려오는 맥밀란의 모습을 발견하고 말았다. “맥밀란 소위?” 그녀가 어째서 이곳에? 당황해서 몸을 일으키는 그를 향해 맥밀란은 날듯이 뛰어 올라 그 품에 안겼다. “교관님! 보고 싶었어요!” 느닷없이 달려와 자신의 품에 얼굴을 비비는 그 모습에 블레이크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소위님.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블레이크는 그렇게 말하다가 저만치에서 조용히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몸을 돌려 멀어져 가는 서유미를 발견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블레이크는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설마... 소위님도 납치 당한 겁니까?” “네?” 맥밀란은 블레이크의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품에서 떨어지다가, 그제서야 그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았다. 그것은 바로 아기 옷이었다. “...”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싶어 다시 고개를 돌린 맥밀란의 눈에 들어온 것은 광주리에 가득 담긴 똥기저귀와 아기 옷들이었다. 게다가 그의 손에 들린 것은 빨간 고무장갑. 그리고 그가 쪼그리고 앉아 있던 자리에는 고색창연한 나무 빨래판과 빨래 방망이, 그리고 빨래비누 등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교관님... 이건... 도대체...” 뭔가 상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상황. 당혹스런 표정으로 자신과 빨래더미를 번갈아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에 블레이크는 어색하게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소위님.” “네.” “오실 때 뭔가 들은 얘기 없으십니까?” “그게...” 맥밀란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교관님이 혼자 고생하시니까 잘 도와주라고...” “끙.” 블레이크는 골치가 아픈지 관자놀이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런 말씀 드려도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무슨...” “아무래도... 실수하신 것 같습니다.” “...” 맥밀른은 그 말을 듣는 순간, 그 기묘한 탑 같은 구조물 안에서 준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잘 생각하도록. 돌아가려면 지금이다. 일단 그 안으로 들어서고 나면 힘들다고 다시 돌려보내 달라는 식으로 투정을 부려 봐야 소용없다. 그러고 보면 준상도 그 갈색 머리 여자도 블레이크가 수련 중이라는 말은 한 적이 없다. 하지만 그 모든 말들이 설마 이런 상황을 뜻하는 것이었을 줄이야 어찌 알았겠는가. 맥밀란은 허탈한 기분과 그대로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끼며 그대로 주저 앉고 말았다. “소위님!” “...” 최소한 블레이크와 만났으니 그건 다행인건가. 맥밀란은 당황한 표정으로 자신의 어깨를 흔드는 그의 모습을 보며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처음 보고 이런 말을 했었다. 소위님도 납치된 것이냐고. 그 말과 지금의 상황을 연관 짓자 대충 돌아가는 상황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었다. “교관님.” “네.” 맥밀란은 한숨을 푸욱 내쉬며 블레이크를 향해 말했다. “이런 상황이라고 미리 말해주셨으면 좋았잖아요.” “그건...” 우물쭈물하는 커다란 그의 모습에 맥밀란은 미소를 지었다. “역시 이젠 마음대로 돌아가기는 힘들겠죠?” “네, 아마도.” 하긴 이런 별세계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비밀이다. 게다가 그 엄청난 구조물은 어떤가. 존재 자체만으로도 엄청난데, 자기 마음대로 이동하는 것까지 가능하다니. 이런 비밀을 알게 된 자신을 쉽게 놓아줄 거라고는 아무래도 생각하기 힘들다. 맥밀란은 그런 생각을 떠올리고는 쓴웃음을 지으며 블레이크에게 말했다. “정말 전 아직 멀었나봐요. 항상 냉정을 유지하려고 그렇게 애썼는데, 막상 중요한 곳에서는 이렇게 실수를 저지르니.” “소위님.” 맥밀란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는 블레이크를 향해 깊게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우선... 제 몸을 낫게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블레이크는 당황한 표정으로 얼른 손을 저으며 말했다. “전 딱히 아무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만.” 그러나 맥밀란은 고개를 저으며 덧붙였다. “아뇨. 교관님이 부탁하셔서 그 분들이 저를 찾아와 준 거잖아요.” “그거야... 그렇지만.” 블레이크는 쑥스러운지 뒤통수를 긁다가 뒤늦게 생각이 났는지 다시 물었다. “그나저나, 몸은 괜찮으십니까?” 맥밀란은 그런 블레이크를 바라보며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물어보는 게 너무 늦잖아요.” “아,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얼른 사과하는 숫기 없는 그 모습에 맥밀란은 밝은 미소를 지었다. ============================ 작품 후기 ============================ 젠장... 00331 트롤러 ========================================================================= 맥밀란이 이곳에 온 것은 예상 외의 일이었지만, 어쨌든 그녀가 중상으로부터 벗어났다는 것을 확인한 블레이크는 안도하는 표정으로 다시 하던 일을 마저 이어서 하기 시작했다. 덩치도 커다란 사람이 쪼그리고 앉아서 작은 빨래판에 대고 조심스럽게 빨래를 하고 있는 모습에 맥밀란은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생소함에 조금 놀라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어울린다는 느낌마저 받았다. “즐거워 보여요.” “그렇습니까.” “네. 전에는... 뭐랄까. 생명이 없는 로봇 같이 느껴질 때가 있었거든요.” “하하...” 맥밀란의 말에 블레이크는 자신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 역시 이전의 그녀에 대해서 그런 식의 감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매사에 항상 공정하려 애쓰며, 자신의 감정을 최대한 억누르는 그 모습은 다소 어설프기는 해도 노력가인 그녀를 또한 가장 잘 상징하는 모습이기도 했었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개울가에 발을 담그고 앉아서 자신이 일하는 것을 지켜보는 그녀의 모습에서는 이전의 그런 딱딱하기 이를데 없던 장식 인형 같은 모습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전혀 다른 세계이기에 무방비해진 것일까. 아니면 군인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자 본연의 소녀다운 모습이 은연중에 드러나는 것일까. 어느 쪽인지는 확실치 않았지만, 블레이크 역시 예전보다는 역시 지금의 모습이 더 마음에 들었다. “그나저나... 걱정이네요.” “뭐가 말씀이십니까.” “딜런 중위요. 저 때문에 자칫하면 전부 혼자 뒤집어 쓸 수도 있으니까요.” 그녀의 말에 블레이크는 조심스럽게 빨래를 비비던 손을 멈추고 그녀에게 말했다. “자세한 얘기를 해주시겠습니까?” 맥밀란도 자세한 정황을 아는 것은 아니었지만, 일단 자신이 이곳에 오게 된 과정에 대해 아는 대로 말해 주었다. “흠... 확실히 곤란한 상황이겠군요.” 잠시 고민하던 블레이크는 다시 멈추었던 빨래를 다시 시작하며 말했다. “일단 이 일부터 끝내고 그 분을 만나 봐야겠습니다.” “그 분이라면?” “박준상씨 말입니다.” 블레이크의 말에 맥밀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사람의 능력이 아무리 대단해도 군 내부의 문제를 함부로 하기는 어렵지 않을까요?” 그 말에 블레이크는 고개를 저었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소위님의 말씀대로겠습니다만, 그 분은 예외입니다.” “어째서요?” 블레이크는 조심스럽게 방망이로 빨래를 두들기며 대답했다. “음... 하긴 소위님은 아직 모르시겠군요. 그의 정체에 대해서.” “정체요?” 맥밀란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블레이크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작년에 펜타곤이 박살난 일에 대해서는 알고 계시죠?” “네. 한동안 비상이 걸려서 난리가 났었죠. 전 그 때 아직 귀환자도 아니었고, 사관학교도 졸업하기 전이었지만요. 그 일과 박준상이라는 사람이 관계가 있는 건가요?” 블레이크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관계 정도가 아닙니다. 펜타곤을 박살낸 장본인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네?” 맥밀란은 잠시 정신이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펜타곤이 무엇이던가. 미국의 군사력을 상징하는 중추가 아니던가. 그것을 한 사람이 때려 부쉈다는 말도 믿을 수가 없는데, 그런 일을 저지른 자가 멀쩡하게 미국을 돌아다니고 있다니. 그녀로서는 이해도 납득도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농담이시죠?” 혹시나 하고 그렇게 물었지만, 블레이크는 고개를 저었다. “불행히도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럴수가...” “이것은 정부와 군에서도 핵심 인사들만 알고 있는 고급 정보입니다. 제 경우에는 캐나다에서의 작전에 동행하면서 넌지시 행동을 조심하라는 식으로 언질을 받으면서 알게 된 사실이긴 합니다만.” 블레이크는 두들기던 빨래를 다시 한쪽 광주리에 넣어두고 새 빨래를 집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이런 얘기 하면 믿기 어려우실지도 모르지만, 사실 펜타곤을 부순 것 자체는 그가 지닌 아주 일부의 힘에 불과합니다.” “그건 또 무슨 얘기죠?” 맥밀란이 심각한 표정으로 묻자 블레이크는 다시 빨래에 비누를 묻혀 문지르며 대답했다. “우선... 지금 우리가 있는 이 세계만 해도 그렇죠.” “그건 들었어요. 요정계라면서요?” “그럼 요정계를 다스리는 요정 여왕에 대해서도 아십니까?” 맥밀란은 이곳으로 들어서며 만났던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절 고쳐준 것도 바로 그 분이죠.” 블레이크는 바로 말을 이었다. “그 요정 여왕이 박준상씨의 반려입니다.” “네?” “참고로 지금 제가 빨고 있는 이 세탁물들은 둘 사이에서 난 공주님의 것이죠.” “그럴수가...” 연인 관계도 아니고 이미 슬하에 자녀까지 두고 있는 상황이라니. 이 요정계라는 곳이 얼마나 넓은지는 알 수 없지만, 세계라고 불릴 정도라면 결코 작은 규모는 아닐 것만은 분명한 사실. 그런 세계를 통치하는 여왕의 반려라는 것은 사실상의 왕이나 다름없는 위치이다. 하지만 블레이크의 말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퀘스트를 수행하기 위해 가는 세계에서도 그는 이미 왕과 같은 존재입니다. 실제로 그가 새로 임명한 영주들의 임명식이 최근 이곳에서 열리기도 했었죠.” 맥밀란은 다시 크게 놀랐다. “그곳에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건가요?” “실제로 몇 군데에 거점을 두고 교역도 진행 중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혹시 헤네스라는 아가씨도 보셨습니까?” “네.” 보다 뿐인가. 곧바로 그녀를 쫓아내려는 준상에게 자신이 이곳에 머물 수 있도록 말을 해준 장본인이 바로 그녀다. “그 분이 바로 그 세계에서 온 사람입니다. 박준상씨의 또 다른 반려이기도 하고, 아시는 지는 모르지만 하얀 방패의 여왕이라고 불리는 그 분이기도 하죠.” “아...” 하얀 방패의 여왕. 귀환자들, 그 중에서도 여성 귀환자들 사이에서는 그야말로 전설이나 다름없는 인물이라 맥밀란 역시 당시 찍힌 사진을 모티브로한 일러스트를 방 안에 걸어 두었을 정도다. 그런데 자신을 위해 준상을 설득했던 그 아름다운 갈색 머리의 미녀가 바로 그녀 였다니. “그럼 그 사자 가면을 쓴 도끼 남자가...” “네. 박준상씨입니다.” “...” 이쯤 되면 이제 뭐에 놀라고 뭐에 놀라지 말아야 할지조차 헷갈리기 시작한다. 머리 속이 복잡해진 맥밀란이 입을 다물자, 블레이크는 그 틈을 타서 재빨리 세탁을 마쳤다. “후... 겨우 끝났군요.” 블레이크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깊은 생각에 잠겨있던 맥밀란은 그제서야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죄송합니다. 조금이라도 도와 드렸어야 하는데...” 맥밀란이 사과하자 블레이크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아직 몸도 성치 않으시면서.” 하기사 아직 환자복 밑에 차고 있는 종이 기저귀조차 벗지 않은 상황이고, 거동에 무리가 없다고는 해도 한동안 움직임이 없었던 하체의 근육을 곧바로 노동으로 혹사시키는 것은 별로 현명하지 못한 행위이다. 블레이크는 항상 똑 부러지던 그녀가 머뭇거리며 우물쭈물하는 모습에 웃음을 짓고는 품에서 작은 병 하나를 꺼냈다. “받으십시오.” “이건...” 건장한 그와는 어쩐지 별로 어울리지 않는, 향수 샘플이나 담으면 딱 어울릴 법한 작은 병. “원래 한번에 하나만 쓰는 것이 원칙입니다만, 소위님이라면 상관없을 것 같군요.” “이게 뭔데요?” 의아한 모습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맥밀란을 향해 블레이크는 씩 웃으며 병을 열었다. 그러자 곧바로 사방에 향긋하고 감미로운 냄새가 은은하게 퍼져 나온다. 역시 향수였던 건가 하고 그 향기를 음미하는 맥밀란을 향해 블레이크는 다시 말했다.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는 직접 보여드리는 것이 나을 것 같군요.” 그는 곧바로 병 안에 든 것을 음미하듯 천천히 들이키고는 안타까운 듯이 옅은 탄식을 터뜨리더니, 이내 하늘로 날아올랐다. “어?” 맥밀란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검고 커다란 블레이크의 몸이 중력으로부터 벗어나 마치 깃털처럼 두둥실 하늘로 날아오르는 그 광경에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블레이크는 그런 맥밀란의 모습에 웃으며 다시 말했다. “요정의 술입니다. 마시면 하늘을 날 수 있죠.” “그럴수가...” 자신의 손에 쥐어진 작은 병으로 다시 시선을 돌리는 그녀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블레이크는 곧바로 나뭇가지에 줄을 치고 세탁물들을 널어 말리기 시작했다. 그와 같은 블레이크의 모습에 맥밀란은 이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기 시작했다. 뭐랄까. 어릴 적 어머니가 읽어주던 동화책 속의 피터팬이 상상 속에서 뛰쳐 나왔는데, 알고 보니 그 실체가 칠흑 같은 피부에 건장한 체격을 지닌 근육질의 남자라는 사실을 알게된 소녀의 심정이랄까. 크고 검고 단단한 피터팬이라니. 이쯤 되면 동심파괴라는 말로도 부족하다. 하지만 당황스럽던 것도 잠시. 어째서인지 그녀는 이런 피터팬도 그리 나쁘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지금 그녀의 손에는 자신을 웬디로 만들어줄 요정의 술이 들려 있지 않은가. 짧은 머리에 여자라기 보다는 어쩐지 선머슴 같은 모습이긴 해도, 저런 피터팬 상대라면 자신 같은 웬디가 한 명 쯤 있어도 이상하지는 않을 것이다. 맥밀란은 술병을 열어 그 안에 든 감미로운 술을 입 안에 머금었다. “아...” 곁에서 흘러나온 향기를 맡은 것만으로도 몽롱해지는 기분이건만, 직접 입 안에 머금으니 그야말로 날아오를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다. 아니, 느낌만 그런 것이 아니다. 실제로 그녀는 날아오르고 있었다. “맛있죠?” 하얗게 세탁된 빨래들을 널며 블레이크가 그렇게 묻자, 맥밀란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들은 분주하게 하늘을 오가며 빨래를 너는 작업을 시작했다. 한동안 침대에 누워 꼼짝 못하고 있었던 반동인지, 맥밀란은 너무나도 활기찬 모습으로 즐겁게 그 일을 거들었다. 침대에서 일어났을 때 움직이지 않는 하체를 보며 절망했던 일을 다시 떠올리면, 지금 이렇게 사지가 멀쩡히 움직이고 하늘마저 날 수 있게 된 상황은 차라리 꿈처럼 느껴질 정도다. 맥밀란이 가세한 덕분에 빨래를 너는 작업은 생각보다 훨씬 빨리 끝을 맺었다. 서서히 요정의 술이 지닌 효력이 사라지면서 땅에 내려 앉게 되자 맥밀란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블레이크는 그 모습에 웃으며 다시 말했다. “있다가 빨래를 걷을 때 한 번 더 기회가 있으니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그, 그런거 아니거든요?” 맥밀란은 당황해서 그렇게 소리를 치다가 이내 부끄러운지 얼굴이 빨갛게 익어 버렸고, 블레이크는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어쨌거나. 빨래가 끝나자 블레이크는 맥밀란과 함께 곧바로 준상을 찾아 나섰다. 하지만 준상은 그들이 빨래를 하고 그것을 너는 동안 누리와 놀아주다가 아이가 잠들자 다시 정령계의 수련을 위해 어디론가 가버리고 난 뒤였다. “음... 곤란하군요.” “그러게요.” 난처한 표정을 짓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본 헤네스가 물었다. “무슨 일이시죠?” “실은... 딜런 중위 때문입니다.” 블레이크가 그에 대한 일을 설명하자 헤네스는 미처 생각지 못했음을 인정했다. “무슨 말씀인지 잘 알았어요. 그 분이 곤경에 빠지지 않도록 노력해 볼게요.” “감사합니다.” ============================ 작품 후기 ============================ 준상 : 데이트 하라고 준 요정의 술이 아닐텐데? 블레이크, 맥밀란 : ... 이 두 사람을 위해 부릅니다. 약빨의 성. 믿을 수 있나요 너의 꿈속에선 나는 약빨에 빠진 왕자란걸 언제나 약을 향한 몸짓은 수많은 어려움뿐이지만~ 그러나 언제나 굳은 다짐뿐이죠 다시 약을 구하고 말거라고 두 손을 모아 기도했죠 끝없는 약빨과 연참을 달라고 약빨의 성을 지나 늪을 건너 어둠의 동굴 속 멀리 그대가 보여 이제 나의 약을 빨아 보아요 우리의 몸이 떠오르는 것을 느끼죠 자유롭게 저 하늘을 날아가도 놀라지 말아요 우리 앞에 펼쳐질 약빨이 너무나 소중해 함께라면 약빨의 성을 지나 늪을 건너 어둠의 동굴 속 멀리 그대가 보여 이제 나의 약을 빨아 보아요 우리의 몸이 떠오르는 것을 느끼죠 자유롭게 저 하늘을 날아가도 놀라지 말아요 우리 앞에 펼쳐질 약빨이 너무나 소중해 함께 있다면 00332 트롤러 ========================================================================= 준상이 그 얘기를 들은 것은 수련에서 돌아온 뒤였다. “그래서? 연락은 해 봤어?” 헤네스는 준상이 땀에 젖은 셔츠를 벗자 그것을 받아들며 대답했다. “네. 유미 언니를 통해서 연락을 해봤는데, 나름대로 어떻게 위기는 모면한 모양이에요.” “어떻게?” “맥밀란씨가 완치된 걸 다른 사람이 모르는 것을 이용했나 봐요.” “호오...” 짬밥이 늘어서 임기응변도 늘어난 것인가. 처음 봤을 때의 어리버리한 소위의 인상이 조금은 옅어지는 느낌이다. “완치를 위해서 잠시 준상씨가 보호를 하기로 했다는 식으로 말했다는 것 같아요. 물론 그렇다 치더라도 독단이 지나친 것은 분명히 징계 대상이겠지만요.” “그랬군.” 말은 이렇게 간단하게 하고 있겠지만, 두 사람으로서도 다른 상급 장교들의 추궁에 진땀을 흘리며 대답하는 딜런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하기야 준상이 강제로 그런 일을 저질렀다고 하면 아무리 상급 능력자인 딜런이라도 막을 방법이 없으리라는 것 정도는 뇌가 있는 이상 이해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말하기에 따라서는 펜타곤 붕괴와 같은 상황이 다시 일어나지 않은 것만으로도 그의 대응이 적절했다는 식의 판단을 이끌어 낼 수도 있겠지만, 딜런의 담력이나 말재간으로 그런 식의 결과를 도출하는 건 역시 어려운 일이 아닐까 싶다. 헤네스는 준상에게 가운을 입혀 주고는 다시 말했다. “여러모로 신세를 졌으니 적당히 보답을 하는 것이 어떨까 싶은데요.” “어떤?” “그 분도 귀환자이니 적당한 아이템이나 시드 같은 건 어떨까요? 금전적인 걸 원한다면 그것도 괜찮을테고.” 준상은 별로 탐탁지 않는 반응이었지만, 헤네스는 그를 타이르듯 다시 말했다. “그로서는 선의를 보였는데, 돌아온 것이 곤란함 뿐이라면 나중에 비슷한 상황이 되었을 때 도움을 주려 하지 않을 거에요. 이 경우에는 역시 작게라도 보상을 해주는 편이 좋을 것 같아요.” 그 말에 준상을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원하는 것이 있는지 한 번 알아보도록 해.” “네.” 준상은 온천으로 들어가 몸을 담근 채 생각에 잠겼다. 일단 광기의 정령을 흡수하기는 했지만, 그 힘을 갈무리 하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화염과 얼음의 대정령은 광기의 정령에 비하면 오히려 난이도가 쉬운 편에 속했다. 오랜 시간 봉인된 채 억눌려 있던 힘이 지닌 폭주의 경향은 물론이거니와 정신에 직접 관여하는 정령이다 보니 의식을 침식해오는 강도도 훨씬 강력했다. 그렇다고 그냥 힘으로 억눌러 제압할 수도 없는 것이, 광기의 정령이 지닌 힘 자체가 그런 식으로 정신에 관여해서 내재된 능력을 끌어내는 것이기 때문에 무작정 힘으로 억눌러서는 그 본연의 파괴력을 발휘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게다가 본래는 광기의 정령이 개방되면서 메시지에 나온 대로 광폭 스킬의 공격력 강화라든가, 늑대와 개 형태의 소환물에게 광폭 스킬이 부여되는 등의 변화가 일어났어야 하는데, 준상이 광기의 정령을 모조리 흡수해 버리는 바람에 그와 같은 변화도 일어나지 않게 되어 버렸다. 물론 광기의 정령이 지닌 힘을 제대로 다룰 수 있게 되면 자신이 원하는 자나 소환물들에게 그와 같은 변화를 임의로 일으킬 수도 있겠지만, 아직은 요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준상은 그 뒤로 다시 며칠 동안 광기의 정령으로부터 흡수한 정령력을 활용하기 위한 수련에 매진했다. 그렇게 다시 시간이 흐르던 어느 날. 누리의 백일이 다가오는 터라 요정계 전체가 잔치 준비로 들썩거리고 있는 와중에 서유미를 통해 임서윤과 딜런으로부터 급한 소식이 전해졌다. 요 근래 뒤집기를 시작한 누리의 모습을 보며 즐거움에 빠져 있던 준상은 서유미로부터 전해진 소식을 듣고 얼굴을 찌푸렸다. “검은 태풍?” “네. 타클라마칸 사막을 전부 뒤덮어 버릴 정도의 엄청난 규모라고 합니다.” 어떻게 된 것고 하니, 중국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위치한 타클라마칸 사막에 어느 순간 검은 안개와 같은 폭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는데, 점차로 그 기세가 커지는가 싶더니 이제는 그 넓은 타클라마칸 사막을 전부 뒤덮어 버릴 정도가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중국 정부는 처음에 이런 일이 일어난 사실에 대해 전면 부인했지만, 위성사진 등을 통해 폭풍의 실체가 확인되자 현재는 입을 다물고 침묵으로 일관하는 중이었다. “딜런은 뭐라던가.” “미국 정부도 확인을 위해 움직이고는 있지만, 중국 정부의 정보 통제가 워낙 심해서 좀처럼 쉽지 않다고 합니다. 아마도 중국 정부가 뭔가 실험을 벌이다가 사고가 난 것이 아닐까 하는 식으로 추측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실험이라.” 준상의 머리 속에서 떠오른 것은 일전에 마주쳤던 중국군의 모습이었다. 중국은 귀환자들을 군대로 만들어 그 능력을 이용하고자 했다가 마수 크롤로바간의 정신 공격에 무력하게 무너진 바가 있다. 그 뒤의 일은 제대로 알 수 없지만, 그때의 실패로 인해 귀환자들의 능력을 군사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을 포기했을 것 같지는 않다. 특히나 중국은 한국과 미국이 생산하고 있는 방어복의 혜택도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 자체적으로 방어복 비슷한 것을 개발한 정황이 파악되고 있기는 하지만, 역시 방어 효과가 많이 떨어질 것으로 파악되고 있었다. 혹시 그런 식으로 벌어진 기술 격차를 메우기 위해 뭔가 파격적인 실험을 시도했던 것은 아닐까. 미국 정부가 생각한 것은 아마도 이런 식의 추측이 아닐까 하고 준상은 생각했다. 만약 현재 타클라마칸 사막에 출현한 검은 태풍이 중국 정부가 벌인 실험의 산물이라면, 성공이든 실패든 간에 미국이나 다른 나라들로서는 그 실체가 궁금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타클라마칸 사막은 미국으로부터 너무나도 멀리 떨어진 곳. 의뢰는 아니지만 딜런을 통해 이런 정보를 알려온 것은 역시 준상이 움직이기를 은연중에 바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준상은 생각을 정리하다가 다시 서유미에게 물었다. “공식적으로 의뢰를 해온 것은 아니겠지?” “네.” 심상치 않은 현상이기는 하지만, 무작정 움직이는 것은 역시 좋지 않다. 결국 일단 관망하기로 결정한 준상이었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서 다시 급박한 소식이 전해졌다. “중국이 핵을 썼다고?” “네.” 딜런이 다시금 급히 전해온 소식에 따르면, 한동안 재래식 군사력을 동원해 검은 태풍 주위에서 군사작전을 펼치던 중국 정부는, 그와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검은 태풍의 규모가 타클라마칸 사막을 넘어 신장 위구르 자치구 남쪽을 거의 다 뒤덮어 버리는 상황에 이르자, 마침내 태풍의 중심부를 향해 핵을 발사했다. “그래서, 현재 상황은?” “핵 미사일을 발사한 정황은 있습니다만, 그것이 폭발한 정황은 파악되지 않고 있습니다.” “불발?” “그런 가능성도 있습니다만...” 서유미는 그렇게 대답하다가 알림음이 울려 퍼지자 얼른 휴대폰을 꺼내 들고는 메시지를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추가 핵공격이 실행되었다고 합니다.” “...” 잠시 기다리자 또 다른 메시지가 전해졌고 서유미는 다시 그 내용을 읽었다. “착탄이 확인되었으나, 이번에도 폭발 징후는 확인되지 않았음.” “음...” 이렇게 되면 가능성은 두 가지. 두 발의 핵공격 모두 불발일 가능성이 그 첫 번째이고, 나머지 하나는 공격은 성공했으나 그 폭발 자체가 검은 태풍에 의해 흡수되었을 가능성이 두 번째이다. 검은 태풍의 실체에 대한 정보가 부족한 지금으로서는 어느 쪽이 맞다고 판단을 내리기가 어렵지만, 준상은 어쩐지 후자 쪽이 맞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후자가 맞다면, 뭔가 특징적인 징후가 일어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런 준상의 예상대로 검은 태풍이 급격한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엄청난 속도로 확장을 하고 있다고?” “네. 핵공격 직후부터 이전보다 몇 배는 빠른 속도로 확장되어 지금은 티벳은 물론이고 키르기스스탄 등의 주변국까지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고 합니다.” 상황이 그렇다면 더 이상 중국 만의 일이 아니게 된다. 역시나 곧바로 각 국의 성명이 잇따르며 중국 정부에 정보 공개를 요구하기 시작했으며, 검은 태풍의 영향권에 들어간 각국으로부터 새로운 정보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준상은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하자 우선 미국으로 가서 윌킨슨과 딜런을 만났다. “반갑습니다.” 딜런은 이래저래 시달린 일이 많아서인지 다소 수척해진 모습으로 준상에게 인사했다. 준상은 그에게 목례로 답하고는 윌킨슨과 악수를 나누었다. “상황은?” 준상이 바로 본론을 꺼내자 윌킨슨은 주위를 잠시 둘러보더니 그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일단 조용한 곳으로 가시죠.” “...” 그들은 링컨 기념탑에서 북쪽으로 나있는 23번가를 따라 국무부 쪽으로 걸으며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시작했다. “키르기스스탄과 타지키스탄 등의 각국에서 들어온 정보를 종합해 보면, 저 검은 태풍 안에는 마수들이 도사리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마수.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엄청난 면적을 감안하면, 그 안에 얼마나 많은 수의 마수들이 우글거릴지 감히 예측조차 하기 힘들다. “밖으로 나오지는 않는 건가?” 준상의 이어진 물음에 윌킨슨은 고개를 저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검은 태풍의 영역 밖으로는 나오지 않는 모양입니다.” “그나마 다행이군.” “확실한 상황의 파악을 위해 무인기를 이용해 정찰을 시도해 보고는 있지만,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강력한 전파 방해가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이라 내부 상황을 파악하기가 여러모로 곤란합니다.” “안으로 진입을 시도해 보지는 않았나.” 그 말에 대답한 것은 딜런이었다. “각국에서 군대나 귀환자들을 진입시킨 모양입니다만, 현재로서는 일단 안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온 자는 아무도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흠...” 갑작스럽게 나타난 검은 태풍. 그리고 그 안에 가득한 마수들. 한 가지 가정을 떠올린 준상이 얼굴을 찌푸리자, 윌킨슨이 그 모습을 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정보기관 쪽에서는 중국 쪽에서 임의로 마수들을 소환하려 했던 것이 아닐까 하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 윌킨슨은 준상의 물음에 짧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그래서 추측입니다. 지금으로서는 마수가 출현할 당시의 상황을 중국이 어떻게든 재현한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만.” 임의로 마수를 소환할 수 있게 되면, 파급효과는 상당할 수밖에 없다. 어디서 뭐가 나올지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 임의의 정해진 장소에서 마수들을 소환하는 것이 가능해 지고, 그렇게 소환된 마수들을 제압하고 감당할 수만 있다면 이건 노다지를 만들어낸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 된다. 당연한 얘기지만, 욕심에 눈이 먼 자들이라면 누구든 그 비밀을 알고 싶어 혈안이 될 수 밖에 없는 일이다. 준상은 혀를 차며 다시 말했다. “중국은 여전히 묵묵부답이고?” “그렇습니다.” “곤란하군.” “...” 한적한 공원이 자리잡은 곳을 지나 야트막한 건물들이 자리 잡은 고갯길을 세 사람은 깊은 생각에 잠긴 채 말없이 걸었다. 그렇게 좀 더 걷자 마침내 그들은 미국 국무부 건물에 도착할 수 있었다. “들어가시죠.” 일전에 국방부 건물이 박살났던 것을 감안하면, 이런 식으로 준상을 다시 국무부 건물에 들여놓는 것 자체가 이들로서는 큰 모험이나 다름 없다. 그래서인지 윌킨슨은 쓴웃음을 지으며 준상에게 다시 말했다. “이번에는 가급적이면 부수지 말아 주십시오.” 준상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봐서.” “...” ============================ 작품 후기 ============================ 충전중....... 00333 트롤러 ========================================================================= 나름대로 농담이라고 하긴 했는데,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등골이 오싹한 얘기가 아닐 수 없다. 딜런은 차라리 낫다. 윌킨슨의 경우에는 펜타곤 붕괴 당시에도 이런 식으로 그를 안내한 경험이 있는 인물. 그래서인지 준상을 안내하는 그의 표정에는 비장감마저 서려 있었다. 아무튼, 준상은 그들의 안내를 받아 국무부 건물 깊숙한 곳에 마련된 회의실로 들어섰다. 그러자 안면이 있는 얼굴이 그를 맞이한다. 일전에 백악관 지하 벙커에서 만난 바 있는 미국 대통령이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박준상씨.” 자신에게 다가와 악수를 청하는 그의 모습에 준상은 조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전에 펜타곤에서의 일을 생각하면 또 다른 미국의 중추 가운데 하나인 국무부로 부른 것도 놀라운데 하물며 대통령이 몸소 나와서 기다리고 있으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준상이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악수를 받아들이자, 대통령은 털털한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펜타곤 다음으로 백악관이 부서지는 건 아무래도 곤란한 일이라, 이곳으로 모셨습니다.” 다른 이들은 긴장하는 기색이 역력한데, 대통령 혼자 넉살 좋게 농담까지 건네고 있는 모습에서 어쩐지 괴리감이 느껴진다. 준상은 결국 피식 웃으며 그가 이끄는 대로 자리에 앉았고, 대통령이 뒤따라 그 옆에 자리를 잡자 국가 안전 보장 회의의 다른 임원들도 하나둘 착석했고, 그들이 모두 자리에 앉자 곧바로 브리핑이 시작되었다. 여러 가지 얘기가 나왔지만, 대략의 내용은 앞서 윌킨슨이 간단히 설명했던 내용과 대동소이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중국 정부의 실험으로 인한 결과라는 의견과 함께 단순히 마수의 출현이라는 사건의 연장선에 있다는 의견 또한 함께 제시되었다는 것 정도다. 하지만 이것 역시 위험하기는 마찬가지. 단순히 중국 정부의 실험으로 결과라면 정보가 누출되어 누군가가 같은 실험을 반복하지 않는 이상은 똑같은 상황이 두 번 일어나지는 않을테지만, 만약 이것이 마수의 출현과 같은 사건의 연장선에 있는 일이라면 똑같은 일이 어딘가에서 다시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전자의 경우라면 사전에 위험을 차단 하거나 하다못해 실험 전에 대비라도 할 수 있겠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언제 어디서 두 번째 검은 태풍이 일어날지 알 수가 없으니 대비 자체가 거의 불가능하다. 가만히 국가 정보 국장의 브리핑을 듣던 대통령이 입을 열었다. “안쪽의 상황에 대해선 아직도 알려진 정보가 없나?” 국가 정보 국장은 그 말에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불행히도 저희가 투입한 무인기 전부가 진입 즉시 통신 불능 상태에 빠졌습니다. 인도 측에서 유인기를 투입한 정황이 파악되었으나, 역시나 귀환은 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음...” 그러자 안보 수석 보좌관이 물었다. “키르기스스탄이나 타지키스탄 쪽은 어떻소.” 국가 정보 국장은 다시 대답했다. “그 두 국가에서는 주둔 중인 러시아군의 협조를 얻어 안쪽으로 군대를 진입시킨 것으로 보입니다만, 이것 역시 복귀한 인원은 전무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곤란하군...” 그러자 이번에는 국토안전부 장관이 물었다. “귀환자라면 그... 메신저라는 통신 수단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거라면 통신이 가능할 것 같은데.” 가만히 회의를 지켜보던 준상은 그 의견에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나 먼 곳에 떨어져 있는지 조차 모를 다른 세계에서조차 통신이 가능한 메신저라면 설령 강력한 전파 방해로 인해 일반적인 통신 수단이 통하지 않는 그곳이라 해도 연락이 가능할 것이다. 적어도, 정령의 파동 같은 것이 그 안에 휘몰아치고 있지 않은 이상은 말이다. 하지만 국가 정보 국장은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것이... 현재로서는 확인이 불가능합니다.” “어째서?” “중국은 말할 것도 없고, 키르기스스탄이나 타지키스탄, 인도, 러시아 등 인접 국가들에 메신저 기능을 갖춘 귀환자가 몇 명이나 되는지 부터가 명확하지 않은데다, 설령 그런 인원을 투입했다 하더라도 저희 측에서 확인할 방법이 없습니다.” “직접 귀환자를 투입하지 않으면 확인이 불가능하다는 뜻이군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쉽지는 않은 것이, 미국과 문제의 타클라마칸 사막은 사실상 지구 반대편이나 다름없는 곳이다. 단순히 거리만 먼 것이 아니다. 중국이야 당연히 미국의 개입을 거부할 것이 뻔하고, 인접한 국가인 러시아나 인도 역시 미국이 자기 나라 안에서 설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쪽에 속한다. 남는 것은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정도인데, 파키스탄은 일단 친중 성향이 강해서 그쪽의 손을 들어줄 가능성이 높으며, 아프가니스탄은 인접한 지역도 얼마 안 되고 그나마도 오랜 전쟁으로 인해 반미 감정이 극심해서 함부로 손을 대기 어렵다. 키르기스스탄이나 타지키스탄은 이 두 나라에 비하면 그나마 나은 편이긴 하지만 타지키스탄은 아예 러시아군이 주둔중이고, 키르기스스탄 역시 친러 성향이 강하기 때문에 미국이 개입하기 어려운 쪽에 속한다. 이런 정황이 국무장관에 의해 보고되자 안보 수석 보좌관이 다시 물었다. “그럼 전혀 손을 쓸 수 없다는 말입니까?” 그 말에 국방 장관이 슬그머니 손을 들며 입을 열었다.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닙니다.” 그 말에 부통령이 반색하며 물었다. “그게 무엇입니까.” 어쩐지 이전에 펜타곤에서 봤을 때보다 살이 쪽 빠진 듯한 모습의 국방 장관은 준상의 눈치를 슬쩍 보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키르기스스탄이라면 가능성이 있습니다.” “어째서?” “아시겠지만, 이곳에는 최근까지 마나스 공군 기지가 있었습니다. 물론 러시아의 적극적인 회유로 현재는 기지가 폐쇄된 상황이지만, 최소한 다른 나라보다는 우호적인 관계에 있는 곳이죠.” “과거엔 그랬지만, 지금은 친러로 돌아선 상황이 아닙니까.” 안보 부 보좌관이 지적하자 국방 장관은 바로 대답했다. “물론 그렇습니다. 때문에 여기서는 약간의 변칙적인 방법이 필요합니다.” “어떤?” “한국을 이용하는 겁니다.” “한국을?” 그 말에 회의에 참석한 이들은 준상의 눈치를 살폈고, 국방 장관은 펜타곤에서의 일이 떠오르는지 땀을 뻘뻘 흘리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키르기스스탄은 최근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한 적도 있고, 한류 문화의 확산으로 인해 국민들도 한국에 대해 상당히 우호적인 성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비서실장이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근거가 좀 빈약해 보입니다만.” “그거야... 그렇긴 합니다만, 다른 나라들 같은 경우엔 개입의 여지 자체가 거의 없는 상황이라...” “흠...” 비서실장이 생각에 잠기자 이번에는 국무 장관이 입을 열었다. “설령 한국을 통하는 방법이 가능하다고는 해도, 파견하는 인원이 미국인이어서는 의미가 없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그곳까지 우리측의 귀환자를 보내는 건 너무 위험스러운 일입니다.” 그 말에 국방 장관은 땀을 뻘뻘 흘리며 준상을 향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말씀대로입니다. 그래서 말입니다만... 저기 계신 박준상씨께서 이번 일을 맡아 주셨으면 어떨까 하는 것이 제 의견입니다.” “...” 자신에 대한 두려움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자기 몫의 말을 끝까지 하고 나서야 안도하는 표정으로 입을 다무는 국방 장관의 모습을 보고 준상은 피식 웃고야 말았다. 제법 구색을 갖추기는 했지만, 처음부터 이 회의는 그에게 보여주기 위해 마련된 자리임을 일찌감치 알아차린 탓이다. 애초에 검은 태풍 안쪽은 마수들이 우글거리는 지옥이나 다름없는 장소. 게다가 중국 측에서 두 발의 핵을 썼음에도 폭발의 흔적조차 잡히지 않은데다 오히려 확장 속도가 빨라졌으니 같은 방법을 또다시 쓰는 건 불가능하다. 그런 곳에 일반 병사를 투입할 수는 없는데다, 메신저라는 통신 수단을 활용하기 위해서도 결국은 귀환자를 투입할 수밖에 없는데, 지구 반대편이나 다름 없는 곳에 자국의 상위 능력자를 투입하는 것은 여러모로 위험한 일이다. 비행기 같은 운송 수단을 이용해 귀환자를 이송하는 일부터가 위험천만한 일인데다, 설령 그것이 성공하더라도 미국의 행동을 달갑지 않게 여기는 국가들의 틈바구니 속에 자국의 귀환자를 적절한 보호 수단조차 없이 떨구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현명한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이 중대한 상황에서 그냥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는 일. 마침 그들은 영 상대하기 꺼림직하기는 하지만 미국의 다른 모든 귀환자들을 합쳐도 감당할 수 있을지 파악이 되지 않는 엄청난 능력의 귀환자와 관계를 맺고 있는 사이. 하지만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그에게 막무가내로 이 위험한 임무를 맡기는 것도 여간 곤란한 일이 아니니, 이런 식으로라도 한바탕 연극을 펼쳐 그 당위성을 준상에게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아직도 식은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저 국방 장관은 이전에 괜히 준상의 비위를 거드렸다가 펜타곤을 날려 먹은 죄로 이 자리에서 준상에게 직접적인 제의를 하는 역할을 맡은 것이리라. 준상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이 임무에 가장 걸맞는 사람이 본인인 것 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들은 아직 모르고 있지만, 신기루 꽃 같은 비상 회피 수단이 존재하는 것은 물론이고, 오십개가 넘는 인벤토리는 만약의 상황에 대비하기 위한 여러 수단을 준비하기에 안성 맞춤이다. 더구나 혼자서도 마수 한 마리 정도는 찜쪄 먹을 수 있는 그의 무력이라면 마수가 우글거리는 지옥 같은 상황에서도 충분히 버틸 수 있으니 더 할 나위 없다. 만약 그가 아닌 다른 귀환자들을 이 임무에 투입하고자 한다면, 최소로 잡아도 30레벨 이상의 상위 능력자로 편성된 공격대가 필요한데, 문제는 이 인원을 무작정 투입해도 확실하게 성공한다는 보장이 현재로는 확실치 않다는 점이다. 어쨌든. 미국 정부의 핵심 인사들이 이렇게 한 자리에 모여 뜻 깊은 환영 무대를 보여 주었는데 그냥 무시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다. 그래서 준상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래서, 보수는?” 준상의 말이 떨어지자 재무 장관이 얼른 앞으로 나서며 대답했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이 상황이 중국의 실험에 의한 것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미국으로서는 정확한 원인을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시급한 과제였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다소 무리를 해서라도 준상의 요구를 맞춰줄 의사가 있었다. 지금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현상의 원인을 알아내는 것은 그 정도의 가치를 지닌 일이었다. 우선, 저 검은 태풍은 두 차례에 걸친 중국의 핵공격을 견뎌냈다. 이것은 만약 이 현상을 제대로 연구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기존에 존재하던 핵과 같은 대량 살상 무기를 원천적으로 방어하는 것 또한 가능하다는 뜻이 된다. 뿐인가. 그 안에 우글거리는 마수들 역시 금액으로는 환산조차 어려울 정도의 가치를 지닌다.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손을 댈 명분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미국으로서는 준상의 도움이 그 누구보다도 절실할 수밖에 없었다. “흠...” 어지간한 정도라면 뭐든지 조건을 맞추어 주겠다는 듯한 재무 장관의 그 노골적인 태도에 준상은 의자에 기댄 채 턱을 쓰다듬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똑딱. 똑딱. 오늘따라 유난히 시계 초침 가는 소리가 시끄럽게 들린다는 생각이 회의 참석자들의 머리 속에 떠오를 무렵, 준상이 마침내 생각을 마치고 이렇게 대답했다. “실은...” 그가 입을 열자 대통령을 비롯한 회의 참석자들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며, 준상은 이렇게 말했다. “얼마 뒤에 아이가 백일을 맞이하는데...” 회의 참석자들은 잠시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엉뚱한 소리인가. 이들로서는 박준상이라는 이름의 남자에게 아기가 있다는 말조차 금시초문이다. 게다가 한국의 풍속을 세세하게 알지 못하는 이들로서는 아기 생일도 아니고 백일이 되었는데 뭘 어쩌라는 건가 싶을 정도다. 단 한 명, 회의에 참석하고도 멀뚱히 자리만 차지한 채 앉아 있던 UN 주재 미국 대사만이 이런 풍습을 이해하고 있었는데, 그는 준상의 말을 듣자 얼른 대통령에게 다가가 한국에서 치러지는 백일잔치라는 풍습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했다.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대통령은 준상의 말을 이해했다. 가족의 생일이나 각종 기념일에 대한 선물을 빙자해 이런 저런 대가성의 물품이 오가는 건 미국이라 해도 크게 다를 바가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역시 준상도 인간은 맞구나 하며 입을 열었다. “아이에게 줄 선물을 원하시는 겁니까?” 준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통령은 그 모습을 보고 다시 물었다. “생각해 두신 것이 있으시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하지만 준상은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대답했다. “섬.” “네?” “적당한 크기의 아름다운 해안과 푸른 숲을 갖춘 섬.” “...” “적당한 규모의 놀이 동산이나 마음껏 뛰어 놀 적당한 크기의 목장 같은 것도 갖추어져 있으면 좋겠지. 이름은 누리 섬이 좋겠군.” ============================ 작품 후기 ============================ 검고 크고 단단한 피터팬이 노니는 아름다운 누리 아일랜드? 00334 트롤러 ========================================================================= 회의실에 둘러앉은 사람들은 잠시 아무런 말도 못한 채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적당히. 말이 참 쉽다. 대통령은 잠시 말이 없다가 위원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 섬이 있습니까?” “...” 위원들은 서로를 돌아보다가 이내 국가 정보 국장에게로 시선을 모았다. 하지만 아무리 정보 단체의 수장이라 해도 이런 식의 뜬금없는 정보를 바로 알아내기는 어려운 일.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시선들의 압박에 땀을 뻘뻘 흘리며 잠시 여기저기에 무언가를 알아보던 국가 정보 국장은 난감해 하며 대답했다. “그것이... 그 정도의 시설을 갖춘 섬은 없는 것 같습니다.” “...” 없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안이라면 그냥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현재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발생한 검은 태풍의 면적은 무려 백만 제곱 킬로미터에 육박하고 있는 상태. 이 면적은 단순 계산으로도 남한 면적의 열 배에 해당하는 규모다. 문제는 이런 엄청난 현상이 이번으로 끝이 나느냐, 아니면 또다시 생길 수 있는 현상인가 하는 점. 이 현상이 차라리 중국의 실험으로 인해 일어난 단발적인 현상이라면 모를까, 같은 형태의 현상이 세계 각지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일어난다면, 현재의 국제 질서가 완전히 붕괴될 수도 있다. 미국처럼 영토라도 넓은 나라는 차라리 낫다. 하지만 국토 면적으로 순위를 매겨도 현재 발생한 검은 태풍의 규모를 넘어서는 면적을 가진 나라는 전 세계를 다 따져 봐도 고작 30개국에 불과한 것이 현실. 즉, 중국이나 미국처럼 광대한 영토를 가진 나라가 아닌 이상, 저 검은 태풍이 발생한 나라는 사실상 멸망의 수순을 밟을 수밖에 없다. 만약 자연적인 현상이 아닌 중국의 실험에 의한 것이라도 심각하기는 마찬가지. 저런 현상을 임의로 발생시킬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핵공격에 버금가는 파괴력을 지니게 되니 당연한 일이다. 이러한 사안의 중대성에 대해서는 준상에게 가급적 알려지지 않기를 바랬던 그들이지만, 방금 전의 터무니 없는 요구를 보면 이미 그런 부분까지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렇다면 해결 방법은 단 하나. 만들어서라도 조건을 맞춰주는 수밖에 없다. “만약, 그런 섬을 조성한다면?”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국토안전부 장관과 더불어 고문 자격으로 참석하고 있던 주택도시개발부 장관과 운수부, 내무부에 이르는 관계 부서의 장들이 곧바로 의견을 교환하기 시작했고, 이내 몇 군데의 후보지가 선정되었다. “일단... 본토 가까운 섬의 경우는 대부분 개발이 되어있는 터라 복잡하게 얽혀 있는 이해관계를 푸는 것만으로도 막대한 시간과 자금이 소요됩니다. 그런 상황을 감안한다면 해외 영토의 일부를 사용하는 편이 바람직하지 않나 생각됩니다.” “흠...” 국토안전부 장관의 발언에는 한 가지 중요한 이유가 빠져 있었다. 본토 주변에 준상 같은 감당하기 어려운 존재를 데려다 놓는 것에 대한 위험성이 바로 그것이다. 어차피 자기 맘대로 드나들 수 있다고는 하지만, 이따금 드나드는 것과 아예 앞마당에 데려다 놓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이기 때문에, 이들은 가급적 먼 거리에 떨어뜨려 놓기를 원하고 있었다. 자신들이 조심한다 해도, 괜히 가까운 곳에 데려다 놨다가 괜히 엉뚱한 놈들이 집적거려서 문제를 만들거나 하면 어찌 되겠는가. 예를 들어, 그의 자녀에게 위해가 가해진다든가 하는 식의 문제라도 발생하는 날에는 펜타곤 붕괴 정도는 차라리 애교에 가까운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다. 감당하지 못할 바에야 아예 멀찍이 떼어놓는 것이 상책. 그들의 결론은 바로 그것이었다. “그럼, 어디쯤이 좋겠소?” 대통령이 고개를 끄덕이며 묻자, 이번에는 내무부 장관이 대답했다. “태평양에 산재한 군소 제도는 현재 어류 및 야생동물관리국의 관할입니다. 조건 상으로는 가장 자연이 잘 보호되어 있는 팔미라 환초가 적합합니다만, 이 지역은 학계의 관심이 높은 지역인데다 의회로부터 예산을 받아 매입한 지역이라 임의로 매각이나 대여를 할 경우 큰 반발이 우려됩니다.” “확실히... 그건 곤란하지.” 팔미라 환초의 경우는 본래 사유지였던 것을 매입하는 과정에서 상당히 큰 이슈가 된 곳이고, 현재도 과학자 등이 상주하며 연구를 하고 있는 곳이라 임의로 처분하기가 여러모로 곤란했다. 내무부 장관은 대통령의 수긍하는 표정을 보고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따라서 팔미라 환초를 제외한 군소 제도 가운데 말씀하신 시설들을 모두 들여놓을 정도의 면적을 가진 섬은 일단 세 군데 정도입니다.” “어딥니까?” 내무부 장관은 급히 벽면에 설치된 모니터에 태평양에 산재해 있는 미국령 군소 제도의 지도를 띄우고는 하나 하나 설명하기 시작했다. “자르비스, 미드웨이, 웨이크. 이렇게 세 곳입니다. 하지만 자르비스 섬의 경우에는 숲 같은 것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마른 산호초 섬이고, 미드웨이의 경우는 군사 기지 등의 용도로 너무 개발이 진행된 상황이라 숲을 조성하기가 곤란하고 이차대전 때의 격전지라는 상징성도 고려해야 합니다.” “그럼...” “앞서 말씀하신 조건에 그나마 부합하는 섬을 고르라면 역시 웨이크 환초 정도가 어울리지 않을까 합니다.” 물론 웨이크 섬도 그리 썩 상대가 좋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어쨌든 이차대전 당시 미드웨이 섬과 함께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 가운데 하나인지라 전투로 인한 피해도 만만치 않았고, 그 이후에도 군사 기지 등의 용도로 제법 오랫동안 사용된 곳이기 때문이다. 현재로서는 전략적인 가치가 거의 사라져서 비행장을 관리하는 인력이라든가 주무부서인 어류 및 야생동물 관리국의 직원 정도만 상주하는 상태이다. 본토로부터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인지라 준상의 요구에 맞춰 개발을 하자면 이것 또한 만만치 않은 비용이 들 것은 틀림없는 일이지만, 비행장이 완비되어 있으니 그럴 마음이 있다면 미국의 국력으로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내무부 장관의 설명을 들은 대통령은 준상에게 물었다. “어떠십니까.” 준상은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래서는 백일에 맞추기가 어려울 것 같은데...” “...” 문제는 바로 그것이다. 아무리 미국이 날고 기어도 고작 며칠 안에 머나먼 태평양의 외딴 섬에 유원지와 목장과 기타 등등의 시설을 완비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보고 그나마 한국의 풍습을 알고 있는 UN 주재 미국 대사가 중재에 나섰다. “일단은... 백일잔치는 다른 선물을 준비하도록 하고, 섬은 돌잔치 선물로 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흠...” 아쉽긴 하지만 며칠 남지도 않은 백일잔치에 그 모든 조건을 맞추는 건 역시 무리한 일이라 준상은 일단 타협하기로 했다. “할 수 없지. 그 정도로 만족하는 수밖에.” “감사합니다.” 내무부 장관을 비롯한 회의 참석자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준상은 그런 그들을 보며 다시 말했다. “대신 백일잔치 선물을 좀 더 신경 써 줬으면 한다.” “하하... 알겠습니다.” 이것도 난감하기는 마찬가지지만 최소한 섬을 달라는 식은 아니니 일단은 다행이다. 준상은 백일잔치 선물을 뭘로 해야 좋을지 다시 고민하기 시작한 참석자들에게서 시선을 돌려 국가 정보 국장을 향해 말했다. “원인을 파악하는 것이 가장 급선무겠지?” 휴대폰으로 육아 용품을 검색하고 있던 국가 정보 국장은 화들짝 놀라 일어나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안쪽의 상황을 확인하는 것도 시급한 문제입니다만, 이 현상의 원인을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말했다. “일단 키르기스스탄으로 향하는 항공편이 필요하다.” “바로 출발하실 겁니까?” 비서실장의 질문에 준상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준비해야 할 것이 있으니 그건 좀 어렵겠군.” “그럼...” “항공편은 한국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부탁한다. 준비 되는 대로 딜런을 통해 연락하도록.” “알겠습니다.” 말을 마친 준상은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고는 대통령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럼 이만.” 대통령은 일어나 그에게 악수를 청하려 했으나, 미처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전에 준상은 위상전이를 통해 회의실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언제 봐도 신기하다 못해 두렵기까지 한 모습. 하지만 준상이 모습을 감추자 사람들은 팽팽하게 당겨졌던 긴장으로부터 겨우 해방될 수 있었다. “후...” 그가 사라진 것을 본 국방 장관이 흥건하게 젖은 땀을 닦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 대통령 역시 긴장을 풀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물었다. “돌잔치면 시간이 얼마나 남은 겁니까?” “백일잔치가 얼마 안 남았다는 말로 미루어 봐서는 약 9개월 정도가 남은 상황입니다.” UN 주재 미국 대사가 대답하자, 대통령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내무부 장관에게 물었다. “시일을 맞출 수 있겠소?” “아무래도 군의 협조를 얻어야 할 듯 합니다.” 내무부 장관의 대답을 들은 국방 장관은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얼른 일어나며 대답했다. “전력으로 지원하겠습니다.” “...” 군기가 바짝 든 국방 장관의 모습을 보며 대통령은 쓴웃음을 지었다. 어쩌다 이런 상황이 되어버린 건지. 첫 단추를 잘못 끼운 탓이라고 하기에는 여러 가지로 씁쓸한 기분이 들 수밖에 없었다. 대통령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가서 함께 식사라도 합시다.” “알겠습니다.” 국가 안전 보장 회의 임원들이 그렇게 회의실을 나설 즈음, 준상은 이미 신기루 꽃을 통해 요정계로 돌아온 뒤였다. 준상은 곧바로 블레이크와 서유미를 불러들이고, 얀트훈센에 나가 있던 헤네스와 연구실에 틀어박혀 있던 리체스에게도 연락을 취했다. 모두가 한 자리에 모이기를 기다리던 준상은 블레이크가 맥밀란과 함께 온 것을 보고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쪽은 부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준상의 말에 블레이크가 얼른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전투력은 조금 떨어질지 모릅니다만, 그녀는 5개 국어에 능통한 수재입니다. 중국에서의 일 때문이라면 큰 도움이 될 겁니다.” “흠...” 서유미로부터 현재 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해 들은 것인가 싶었지만, 확실히 블레이크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직접 얼굴을 맞대고 대화하는 것이라면 언어 소통의 능력이 있으니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통신 장비를 사용하거나 문건 등을 확인하는 일이라면 그런 능력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런 점을 감안하면 이번처럼 탐색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여러 가지 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 맥밀란의 존재는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5개 국어라면?” 준상의 물음에 맥밀란은 얼른 부동자세를 취하며 대답했다. “영어를 제외하고 러시아어, 중국어, 일본어, 독일어, 프랑스어가 가능합니다!” 다른 언어는 그렇다 쳐도 러시아어와 중국어는 이번 임무에서 큰 효용을 지닌다. “문서도 자유롭게 읽을 수 있는 수준인가?” “중국어와 일본어의 경우에는 정자가 아니라면 한자를 읽는데 다소 어려움이 있습니다.” 준상은 문득 예전에 본 중국 드라마에서 북경대를 졸업한 여주인공이 청나라 시대로 타임슬립하자 한자를 제대로 못 읽는 상황을 난감해 하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 경우에는 간자체를 평상시 사용하다가 번자체의 한문을 보니 당황한 것이지만, 정자가 아니라 흘려 쓴 한자의 경우에는 그 언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들도 읽고 쓰는데 어려움이 있을 정도이니 이 정도면 확실히 블레이크가 수재라고 칭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대단하군.” “감사합니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동안, 서유미와 리체스가 들어섰고, 뒤이어 헤네스가 숨을 헐떡이며 도착했다. ============================ 작품 후기 ============================ 빨갛게 피어난 N표시 하나가 달가운 연참에 얼굴을 내밀어 아무 말 못했던 이름도 몰랐던 지나간 날들에 눈물이 흘러 차가운 악플 속에 숨어 있다 한줄기 추천에 몸 녹이다 그렇게 연참은 또 한번 내게 온다 좋았던 기억만 그리운 마음만 니가 떠나간 그 길 위에 이렇게 남아 서 있다 잊혀질 만큼만 괜찮을 만큼만 약빨 머금고 기다린 연참 끝에 다시 나를 피우리라 연참은 피고 또 지는 타버리는 약빨 흘린 박카스에 젖을까 두 눈을 감는다 어리고 작았던 나의 맘에 눈부시게 빛나던 약빨 속에 그렇게 너를 또 한번 불러본다 좋았던 기억만 그리운 마음만 니가 떠나간 그 길 위에 이렇게 남아 서 있다 잊혀질 만큼만 괜찮을 만큼만 약빨 머금고 기다린 연참 끝에 그때 다시 나는 메말라가는 입술 위에 온몸이 타 들어가고 내 손끝에 남은 너의 약빨 흩어져 날아가 떨어져 가는 약통을 다시 채우지 못해 아프다 연참할 만큼만 광참했던 만큼만 먼 훗날 너를 데려다 줄 그 날이 오면 연참을 향해 나 달리리라 00335 트롤러 ========================================================================= 모두가 모이자 준상은 이번 임무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했다. 이야기를 전해들은 이들은 우선 검은 태풍의 어마어마한 규모에 크게 놀랐다. “그 정도 규모라면 내부를 탐색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시간이 걸리겠군요.” 블레이크의 말에 준상은 고개를 저었다. “굳이 전부 탐색할 필요는 없다. 뭐든 처음이 있게 마련이니, 최초 발생 지점을 우선적으로 탐색해야겠지.” “아...” 블레이크가 고개를 끄덕이자 준상은 서유미를 향해 다시 말했다. “항공편이 준비 되는대로 딜런으로부터 연락이 오면 바로 알리도록.” “알겠습니다.” 준상은 다시 말을 이었다. “검은 태풍으로 뒤덮인 지역을 전부 탐사할 필요는 없다 해도, 그 안에 우글거릴 것으로 예상되는 마수들을 처치하면서 전진하자면 역시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은 분명한 일. 그에 걸맞은 대비를 갖출 필요가 있으니 준비하도록.” “네.” 준상은 일단 맥밀란을 불렀다. “방어복과 무기를 꺼내 보도록.” “...” 맥밀란은 잠시 머뭇거렸지만, 블레이크가 고개를 끄덕이자 인벤토리에 보관된 방어복과 무기를 꺼내서 보여주었다. 준상은 그것을 리체스에게 보여주었다. “너무 좋게 할 필요는 없고, 그냥 강화가 가능할 정도로만 만들어 줘. 방어복은 이전에 했듯이 하면 되고.” “알았어요.” 에스토크는 검날이 없는 대신 찌르기에 특화된 기형검이다. 맥밀란은 펜싱, 그 중에서도 찌르기에 특화된 에페를 주종목으로 연마한 상태. 찌르기용 도검은 레이피어 같은 것이 유명하지만, 실전용으로는 갑주를 입은 상대로도 효용을 보이는 에스토크쪽이 좀 더 유용하다. 실제로 투우사들이 소를 상대로 사용하는 무기도 바로 이 에스토크이다. 리체스는 곧바로 준상에게서 요정의 돌 몇 개를 받아 특수강으로 만들어진 에스토크에 먼저 마력을 부여했다. 간단한 마력 부여가 끝나자 준상은 그것을 받아들고 확인을 한 뒤 곧바로 아이템 강화를 실행했다. 시드가 가득 든 자루를 꺼내 든 채 휴대폰으로 무언가를 실행하는 모습을 멀거니 바라보던 맥밀란은 이내 그 과정이 끝나고 자신에게 무기가 건네지자 얼떨떨한 표정으로 블레이크를 바라보았다. “확인해 보십시오.” “...” 맥밀란은 그 말대로 휴대폰을 꺼내 아이템 확인을 실행해 보았다. 아이템정보 명칭 : 에스토크 +10 레벨제한 : 없음 종류 : 무기 등급 : Common 공격력 : 21-24 효과 : 1. 치명타 확률 24% 증가 2. 관통시 기본 피해 43% 증가 3. 관통시 재생률 15% 저하 Seed : 없음 설명 : 좋은 재질로 만든 찌르기용 무기입니다. “...” 너무나 놀라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도 헷갈려 하는 그녀에게 리체스가 조용히 말했다. “방어복은 조금 시간이 걸리니까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네넷!” 블레이크는 그 모습에 쓴웃음을 짓고는 준상에게 물었다. “그녀도 전투에 투입할 생각이십니까?” 준상은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듯이 그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럴 생각으로 데려온 것 아닌가?” “그야... 뭐...” “쓸데없는 소리 말고 필요한 것이 있다면 목록을 작성해 두도록. 딜런에게 말해둘테니.” 블레이크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기본적인 개인 장비는 인벤토리에 넣어둔 상태고, 없는 건 탄약 정도인데 마수들 상대로는 그런 일반 화기가 먹히지도 않을 테니 의미 없는 일이겠죠.” “하긴.” 그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한쪽에서 진동음이 울려퍼졌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서유미가 얼른 핸드폰을 꺼내 들고는 메시지를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항공편이 준비 되었다는데요.” “빠르군.” 한국 정부와의 교섭도 필요한 사안이기 때문에 시간이 좀 걸릴 거라 여겼는데, 생각보다 훨씬 일처리가 빠르다. “어디로 가야하지?” “오산 공군 기지라고 합니다. 다만 미국 대사관에 교통편을 준비해 두었으니 그것을 이용하시면 된다고 전해 왔네요.” “제법 신경을 썼군.” 서유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준상은 모두를 돌아보며 다시 말했다. “그럼 일단 먼저 움직일테니 대기하도록.” “알겠습니다.” 준상은 곧바로 북한산에 설치된 정령의 문을 통해 서울로 이동한 후, 미국 대사관으로 향했다. 대사관 정문에 다가가자 미리 나와서 기다리고 있던 건장한 체구를 지닌 양복 차림의 남자 하나가 얼른 다가와 그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박준상씨 되십니까.” “...” 준상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얼른 손을 들어 정문 안쪽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들어가시죠. 차량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남자의 안내를 받아 대사관 안으로 들어서자, 파란색 외교관 표지판이 붙은 검은색 캐딜락 한 대가 대기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타십시오. 바로 오산 공군 기지로 모셔다 드릴 겁니다.” “...” 준상은 뒷좌석 문을 열어준 남자에게 간단하게 목례를 해보이고는 차에 올라탔다. 앞좌석에는 건장한 체구의 남자 둘이 타고 있었는데, 준상이 뒷좌석에 오르자 말없이 백밀러를 통해 고개를 숙여 보인 뒤 곧바로 차를 출발시켰다. 한국에서 키르기스스탄으로 가기 위한 항공편은 직항로는 주 1회 뿐이고, 보통은 카자흐스탄의 알마티나 우즈벡의 타슈켄트를 경유한다. 물론 그럴 마음이 있다면 타고 가지 못할 이유도 없지만, 이곳 저곳을 거쳐 가면 당연히 이목에 띄기도 쉬우니 번거로운 상황에 처할 가능성도 높다. 때문에 미국은 오산 공군 기지에 특별히 전세기를 준비해 둔 것이다. 한참 도로를 달려 도착을 하고 보니 공군 기지 한켠에 주위의 모습과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민항기 한 대가 준비되어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자동차는 몇 번의 검문을 거치더니 바로 비행기 앞까지 준상을 데리고 갔다. 앞좌석에 앉은 남자가 먼저 내려서 문을 열어주자, 준상은 천천히 차에서 내렸다. 그러자 군복을 입은 미군 대령 한 명이 다가와 그에게 경례를 했다. “박준상씨 되십니까?” “...” 준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긴장한 표정으로 비행기 승강구를 가리키며 말했다. “키르기스스탄까지 빠르게 모시기 위해 전세기를 준비했습니다. 오르십시오.” “...” 이번에도 준상은 말없이 간단하게 목례를 해 보이는 것으로 답례한 다음 계단을 올라가 승강구에 접어 들었다. 입구에 들어서자 승무원들이 그를 향해 단정하게 배꼽 인사를 해보인다. “어서 오십시오. 편안한 여행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준상이 목례로 답하고 안으로 들어서자 방금 전에 인사를 했던 대령이 다시 그에게 경례를 하며 말했다. “그럼 건승을 기원합니다.” 짧게 인사를 건넨 그는 승무원들에게 부탁한다는 말을 건네고는 급히 비행기를 빠져 나갔다. 대령이 비행기 밖으로 빠져 나가자 여승무원 하나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안내하겠습니다.” 겉으로는 특별한 것이 없어 보이는 국제선 항공기처럼 보였지만, 안으로 들어서자 이전에 준상이 탔었던 비행기들과는 확실히 뭔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가장 큰 차이는 객실이었는데, 좌석이 주욱 늘어서 있는 형태가 아니라 열차처럼 구획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각 구획은 칵테일바를 연상시키는 곳부터 시작해서, 안락한 분위기의 식당, 킹사이즈의 침대가 갖추어진 침실은 물론이고 목욕을 할 수 있도록 욕조가 갖추진 욕실마저 준비되어 있었다. 준상은 침대 위에 흩뿌려진 장미 꽃잎과 와인이 담겨진 쟁반을 보고 피식 웃어 버렸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준비한 것인지는 모를 일이지만, 이것만 보더라도 미국이 이번에 중국에서 일어난 일을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사우디의 왕자가 A380을 자가용 비행기로 구입한 일이 뉴스에 났던 것이 기억난다. 내부에 사우나와 콘서트홀까지 갖춘 그 비행기보다는 못하지만, 이 정도만 해도 일반인은 꿈도 꾸기 어려운 수준이다. “마음에... 안 드십니까?” 조심스럽게 묻는 여승무원을 돌아보니 눈동자가 살짝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뭐라고 사전에 얘기를 해두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여 승무원이 자신을 무척이나 두려워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준상은 고개를 살짝 저어 보이고는 아까 보았던 거실로 향한 뒤 리체스에게 연락을 취했다. “다들 어때.” 요정들의 의사소통 방법을 통해 리체스가 바로 대답해 왔다. “준비를 끝내고 기다리는 중이에요. 어디세요?” “비행기 안.” “비행기요? 아... 예전에 그 꽉 막힌 이상한 냄새 나던 그곳이요?” 이전에 산타마리아 섬으로 미군이 준비한 수송기를 타고 가던 일이 떠올랐는지 리체스는 싫은 기색으로 그렇게 말했다. 준상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이번엔 좀 달라.” “정말요?” “그래.” “알았어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준상은 긴장된 표정으로 옆에서 대기하고 있는 여승무원들을 손짓해서 물러나게 한 다음, 정령의 문을 개방해 리체스와 헤네스를 불러들였다. “여긴...” 이전에 탔던 수송기와는 차원이 다른 내부 모습에 리체스와 헤네스는 곧바로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았다. “정말 비행기 맞아요?” “물론.” 준상은 창옆으로 다가가 밖으로 보이는 커다란 날개를 가리켰다. “아직 이륙전이긴 하지만.” “오오!” 리체스는 얼른 창문으로 다가가 찰싹 달라붙은 채 바깥의 풍경을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때, 이륙을 알리기 위해 다가오던 여승무원 하나가 헤네스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누구...” 준상은 손을 내저으며 대답했다. “내 일행이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아, 알겠습니다.” 여승무원은 허겁지겁 뒤로 물러나려다가 뒤늦게서야 생각이 났는지 다시 돌아서며 급히 말했다. “곧 이륙할 예정이니 안전벨트 착용을 부탁 드립니다.” “알았다.” 대답은 했지만 물론 그런 것 따위 신경 쓸 준상이 아니다. 움직일 생각도 않는 준상의 모습에 잠시 머뭇거리던 승무원은 우물쭈물하다가 결국 포기하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뭐래요?” “신경쓰지마.” 준비를 마치자 비행기는 천천히 이동을 시작했고, 곧이어 하늘을 날아올랐다. 리체스는 비행기가 하늘을 날아오르자 다시금 창문에 찰싹 붙은 채 정신없이 창밖을 구경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창밖으로 보이는 땅 위의 모습이라든가 지나가는 구름의 모습 같은 것에 잔뜩 흥분했던 리체스였지만, 얼마 시간이 지나자 이내 금방 싫증을 내버리고 말았다. 갑가오리나 익룡 그라드닉스와는 달리 속도를 직접 체감할 수 없는 것이 역시 가장 큰 문제였다. 결국 리체스가 누리 젖 준다는 핑계로 강화를 마친 맥밀란의 방어복을 지닌 채 다시 요정계로 돌아가 버린 탓에, 결국 준상은 헤네스와 단둘이 비행기 여행을 즐겨야만 했다. 그렇게 한나절 정도가 지나자 준상은 키르기스스탄의 수도인 비쉬켁에 도착했다. 헤네스와 함께 비행기에서 내린 준상은 한국 대사관 측에서 보낸 차량을 타고 공항을 빠져 나갔다. 앞좌석에 탄 건장한 사내가 준상에게 조심스럽게 현재 상황을 알려주었다. “현재 키르기스스탄 남동부는 계엄령이 발효된 상태입니다. 저희들로서는 함부로 접근하기 힘드니 최대한 근처까지 안내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준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고는 창 밖으로 보이는 이국의 풍경을 가만히 살펴 보았다. ============================ 작품 후기 ============================ 충전중... 00336 트롤러 ========================================================================= 키르기스스탄은 국토의 절반 가까이가 해발 3000미터를 넘는 산간 지방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중앙 아시아의 스위스라 불린다. 북동부에는 세계 최대 규모의 산정 호수인 이스쿨 호수가 존재하는데, 과거 소련 연방 시절 관광지로 이름 높았으며 지금도 러시아 등에서 관광객들이 피서를 즐기기 위해 찾아오곤 한다. 이번 사태로 인해 검은 태풍의 영향권에 들어간 곳은 나린 주의 남쪽 지방인 아트바쉬 군이었다. 이곳은 나린 주의 5개군에서 면적이 가장 넓은 곳이지만, 인구는 고작 5만에 불과할 정도로 인구 밀도가 희박한 곳이었다. “현재 계엄령이 내려진 곳은 아트바쉬 지역 뿐이지만, 확장 속도를 감안하면 내일이나 모레 정도는 그 북쪽인 나린에도 추가로 계엄령이 내려질 것으로 보입니다.” “어디까지 접근이 가능하지?” “나린까지는 어떻게든 가능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대로 문제가 없다면 네다섯 시간 정도 걸릴 겁니다.” “오래 걸리는 군.” “산악 지대를 통과해야 하는지라...” 대답을 하는 사내의 눈이 꾸벅꾸벅 졸고 있는 헤네스에게 향했다가 얼른 원래대로 돌아간다. 미국 정부에서 어떻게 교섭을 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준상은 그렇다 치더라도 느닷없이 모습을 드러낸 헤네스의 존재에 대해서는 역시 의문이 생길 수 밖에 없는 모양이다. 네다섯 시간이면 사실상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데 걸리는 시간과 맞먹는 거리. 문제는 나린에 도착하고 나서도 한참 더 내려가야 현재 검은 태풍의 영역 안으로 들어선 아트바쉬로 접근이 가능하고, 그곳을 지나 해발 7천 미터의 고산지대인 천산 산맥을 넘어야 비로소 중국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갑가오리 같은 탈것을 이용하기는 하겠지만, 가는 도중에 마수를 만날 가능성을 고려하면, 이 현상이 일어난 타클라마칸 사막까지의 길은 역시 요원할 수밖에 없다. 결국 준상은 완전히 해가 져서 깜깜해지고 난 뒤에야 나린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린 강을 따라 만들어진 촌락을 지나며 앞 좌석에 앉은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은 늦었으니 일단 숙소를 정하고 내일 출발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준상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여유를 부릴 만한 상황이 아니다.” “그럼...” “바로 출발하겠다.” 준상은 그렇게 말하고는 자신의 어깨에 기대어 곤히 잠들어 있는 헤네스를 깨웠다. “헤네스.” “으응...” 잠이 덜 깼는지 헤네스는 투정을 부리며 준상의 품에 얼굴을 비볐고, 그 모습을 본 앞좌석의 남자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준상이 가만히 어깨를 토닥여 주자 헤네스는 차가 완전히 마을을 빠져 나간 뒤에야 비로소 눈을 떴다. 헤네스는 길 옆에 드문드문 늘어 서있는 집들과, 그 너머에 펼쳐진 새카만 산의 그림자를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도착한 건가요?” “그래.” 반대편 길에는 피난을 가는 사람들이 드문 드문 모습을 보이고 있었고, 길옆에 차를 세운 그들을 지나쳐 장갑차 같은 것이 급히 달려가는 모습이 이어진다. 앞좌석의 남자는 몇 가지 내용을 확인하더니 다시 준상에게 말했다. “저기 고개 근처에 검문소가 있고, 그 남쪽 지역은 현재 계엄이 선포되어 있습니다.” 준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헤네스를 데리고 차에서 내렸다. 그들이 길가로 물러서자, 차에 탄 남자들은 준상을 향해 가만히 목례를 해보이고는 이내 차를 되돌려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그럼 가볼까.” “네.” 준상은 일단 길에서 조금 벗어난 다음 갑가오리를 소환한 다음, 눈앞의 고개를 향해 남하했다. 인구밀도가 낮은 지역인데다 고산지대라는 점까지 겹쳐서인지 사방이 칠흑 같이 어두웠다. 달도 뜨지 않은 하늘에는 소나기처럼 별빛이 하나 가득 쏟아지고 있었지만, 눈앞의 시야를 밝히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할 수밖에 업었다. 그래서일까. 고개에 설치된 검문소의 불빛이 더욱더 환하게 느껴진다. 준상과 헤네스는 고개를 넘어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문득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 남쪽의 하늘 일부가 마치 블랙홀에 집어 삼켜지기라도 한 것처럼 칠흑같은 어둠에 물들어 있었던 것이다. 천산 산맥의 그림자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내 두 사람은 그 그림자가 문제의 검은 태풍이라는 것을 알아 차릴 수 있었다. “어마어마 하군.” “그러게요.” 조금 더 다가가자 포성이 들려오기 시작한다. 어디서 들려오는 것인가 하고 주위를 살피자, 이내 몇 안 되는 불빛이 반짝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을 지나치자 장갑차 들이 진을 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탐조등 같은 것을 켜고 내부를 살피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으나, 화재 현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듯한 검은 구름들 외에는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 없었다. 준상은 적당한 곳에 갑가오리를 멈추고는 헤네스에게 말했다. “준비해.” “네.” 헤네스가 방어복을 착용하고 곧이어 깃발달린 미늘창과 수호의 신물을 꺼내어 드는 동안, 준상은 요정들의 의사 소통 방법을 이용해 리체스에게 연락을 보냈다. 연락을 받은 리체스는 곧바로 서유미와 블레이크, 그리고 맥밀란을 데리고 정령의 문을 통해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엄청나군요.” 블레이크는 시야를 가득 메운 검은 구름의 모습에 작게 휘파람을 불었고, 맥밀란은 긴장된 표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서유미가 방어복을 갖춰 입는 모습을 보자 리체스에게 받은 팔찌를 작동시켜 방어복을 활성화시켰다. 리체스가 자신의 지정석인 준상의 어깨에 자리 잡고, 블레이크가 뒤늦게 방어복과 건틀릿을 착용하자, 준상은 그들과 함께 천천히 검은 구름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검은 구름 안쪽은 얼마 전에 하리아스에서 보았던 저주의 안개와 매우 흡사한 분위기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더 어둡고, 더 탁하며, 더 무겁게 느껴진다는 것 정도다. “모두 괜찮은가?” “네.” “이상 없습니다.” 혹시 저주의 안개처럼 정신 공격이 가해지는 것은 아닌가 하고 확인해 보았지만, 그들 모두 별다른 이상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준상이 앞장서고 그 뒤를 헤네스와 서유미가 따르며, 후방에 블레이크와 맥밀란에 자리 잡은 채로 전진을 시작한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전진하기를 얼마나 했을까. 그들은 시체 하나를 발견했다. “이건...” 뱃가죽이 찢어져 내장을 파 먹힌 시체의 모습에 모두들 얼굴을 찌푸리고 있을 때, 준상의 초감각에 무언가가 감지되었다. “기안!” 준상의 외침을 들은 기안은 얼른 자세를 낮추며 방패로 몸을 가렸다. 그러자 그녀의 방패에 무언가가 둔탁하게 부딪히며 튕겨 나가는 모습이 보인다. “투창?” 서유미가 그렇게 중얼거렸지만, 그것의 형상을 똑똑히 본 준상은 고개를 저었다. 드릴을 연상시키는 긴 뿔은 분명 투창과 비슷한 느낌이었지만, 그 끝부분에는 호미 같은 앞발을 단 기묘한 생물이 존재했다. 놈은 방패에 막혀 바닥에 떨어지자 곧바로 땅을 파고 들어가 숨어버렸다. 뒤늦게 그것을 알아챈 기안이 얼른 땅 속을 미늘창으로 찔렀지만 헛수고였다. “발밑을 조심해라!” 하지만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어두운 구름 너머에서 수십 마리에 달하는 이 기묘한 생물이 마치 기관포를 쏴대는 것처럼 날아들기 시작했다. 기안이 얼른 앞으로 나서며 방패로 막아서고, 서유미와 블레이크가 그 옆에 버티고 서서 놈들을 쳐냈지만, 바닥으로 떨어진 놈들이 땅속으로 파고드는 모습에 얼른 다시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으씨! 뭐 이런 놈들이 다 있어?” 발 밑에서 솟구치는 놈을 펄쩍 뛰며 피한 기안이 짜증을 내며 소리치는 순간, 준상은 부르지 않고 있던 정령들을 한꺼번에 소환했다. 십여 개체에 달하는 정령들이 한꺼번에 모습을 드러내자, 뒤쪽에서 보호를 받으며 어쩔 줄 몰라하고 있던 맥밀란은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도대체... 이건...” 잠시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그녀는 곧바로 기안에 의해 세차게 밀쳐지며 바닥을 뒹굴어야만 했다. “뭘 멍청하게 서있는거야! 죽고 싶어?” “죄, 죄송합니다.” 맥밀란이 얼른 몸을 일으키는 동안, 준상은 다시 엘리를 불러내 용암의 정령과 합체시키며 외쳤다. “녹여라!” 엘리는 정령 증폭의 힘으로 땅을 녹여 그들 주위에 금새 시뻘건 용암이 들끓는 대지를 만들어 내었다. 그러자 땅속을 누비며 공격 위치를 찾던 마수 중 하나가 용암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이것이야 말로 용암으로 만든 해자이다. 준상은 얼른 화염 저항을 갖춘 다음, 용암 속으로 걸어 들어가 끈적거리는 용암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놈을 끄집어냈다. 세모꼴의 머리와 함께 입가에 수염과도 같은 짧은 촉수를 가진 이 기묘한 마수는 준상의 손에 잡히자 호미처럼 생긴 앞발을 마구 허우적댔다. 그러나 준상은 어니이얼레이터를 꺼내 놈의 머리를 쿡 쑤시고는 용암의 해자 안쪽에 버티고 서서 화살처럼 날아드는 놈을 용암 쪽으로 쳐내고 있는 동료들의 발밑에 놈의 사체를 던져두었다. 리체스는 어느 틈엔가 동료들의 머리 위를 날아다니며, 그들이 쳐낸 마수가 용암 안쪽의 땅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바람의 마법으로 밀어내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맥밀란.” “넷!” “확인 사살 하도록.” “알겠습니다!” 감히 날아드는 마수들을 쳐낼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던 맥밀란은 에스토크를 들고 발밑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마수의 머리를 일일이 몇 번이고 찍어대기 시작했다. 로켓처럼 날아드는 마수의 공격은 맥밀란이 확인 사살한 놈들의 사체가 열 다섯 마리에 이를 즈음이 되어서야 겨우 끝이 났다. 준상은 혹시 근처에 남아있는 마수가 더 없는지 초감각으로 확인하다가 별다른 기척이 느껴지지 않자 그제서야 입을 열었다. “고개 돌려.” “...” 용암 때문에 멀쩡한 옷을 다 태워 먹었으니 새 옷으로 갈아입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어차피 용암에 빠진 놈들을 건져내는 것뿐이니 염동력만 써도 되는 일이었는데. 그렇게 후회하며 용암 밖으로 걸음을 옮기자, 블레이크와 맥밀란, 그리고 서유미는 얼른 그 말대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기안은 그 말에 따를 의사가 전혀 없었다. “에이, 본다고 닳는 것도 아닌데 뭘 그래?” 기안이 음흉한 표정으로 웃으며 말하자, 리체스가 얼른 팔을 활짝 벌린 채 그녀의 눈앞을 가리며 외쳤다. “닳거든? 얼른 눈 못 돌려?” “못 돌리겠는데?” “칵!” 준상은 둘이 투닥거리는 사이에 얼른 몸에 묻은 용암을 정령으로 털어내고 인벤토리에서 새 옷을 꺼내 입으려 했다. 그러나 용암 부스러기를 다 털어내기도 전에, 그의 초감각에 또 다른 무언가가 접근해 오는 것이 포착되었다. 이번엔 하늘에서였다. “젠장!” 준상은 일단 급한대로 방어복을 챙겨 입은 다음, 랑다잘의 분노를 꺼내 들고는 하늘로부터 날아드는 묵직한 무언가를 향해 집어 던졌다. 직경 1미터의 거대한 철구는 검은 구름 속으로 날아들어 무언가와 격돌했고, -캬아아악! 곧이어 한줄기 비명과 함께 검은 구름 속에서 날개가 부러진 거대한 익룡 한 마리가 땅바닥으로 추락해 구겨지듯 땅바닥에 처박혀 버린다. 놈은 발버둥을 치며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그런 놈을 향해 서유미와 기안이 동시에 달려들었다. “이놈!” 깃발 달린 미늘창을 들고 단숨에 뛰쳐나간 기안은 놈의 부드러운 뱃가죽에 웨펀 차지를 성공시켰다. 가죽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놈의 뱃속에서 내장이 흘러나오는 순간 귀기어린 눈동자를 번뜩이며 서유미가 놈의 품 안으로 뛰어들었고, 곧바로 새파란 검광이 휘몰아치자 피와 체액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맥밀란은 그녀들의 뒤를 이어 단말마를 터뜨리는 익룡을 향해 달려가고자 했으나, 블레이크의 두꺼운 팔뚝이 앞을 막았다. “교관님?” “기다리십시오.” “...” 무슨 일인가 싶어 블레이크가 바라보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던 그녀는 이내 두 개의 거대한 철구를 든 채 허공으로 뛰어오르는 한 남자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는 하늘을 향해 몸을 솟구치다가 이내 격렬하게 몸을 회전시키며 두 개의 철구로 거대한 소용돌이를 만들어 내었다. 그러자 뒤이어 두 개의 거대한 무언가가 그 소용돌이에 부딪혀 바닥으로 처박히는 모습이 맥밀란의 시야에 들어왔다. “...” 날개가 꺾여 바닥에 처박힌 거대한 익룡 두 마리의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는 맥밀란에게 블레이크가 다시 말했다. “따라 오십시오.” “네!” 어느 새인가 익룡 한 마리를 완전히 끝장 낸 기안과 서유미가 또다시 바닥에 떨어진 익룡 가운데 한 마리에게 달려드는 모습을 본 맥밀란은 블레이크의 뒤를 따라 나머지 익룡을 향해 달려들었다. 준상은 익룡을 격추시키고 땅에 내려섰지만, 곧바로 지면으로부터 전해져 오는 울림에 얼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발밑으로부터 전해져 오는 진동은 지금 다가오는 적들이 단순히 한두 마리 수준이 아님을 암시하고 있었다. “정말 우글우글 대는군.” 혀를 차며 그렇게 중얼거리자 어느 새인가 준상의 어깨 위로 돌아온 리체스가 말했다. “잠깐만요.” 달려 나가려는 준상을 말린 리체스는 주문을 외워 강력한 회오리 바람을 불러내었다. 그것을 통해 잠시나마 시야를 가로막고 있던 검은 구름을 밀어내자 비로소 새로운 적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 준상과 리체스는 잠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마치 개미떼 같은 무언가가 언덕을 새까맣게 뒤덮으며 그들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 개의 뒷다리로 달려드는 그것은 이전에 봤을 때와는 달리 검은 색의 깃털로 몸이 뒤덮이고 이마에 붉은 색의 세 번째 눈이 달린 변종 헤이드릭스였다. 게다가 그게 끝이 아니었다. 놈의 뒤에는 두 개의 거대한 집게 발이 달린 소라게 같은 형상의 거대한 마수가 느릿느릿 다가오고 있었다. 격추시킨 익룡들을 끝장 낸 다른 동료들이 다가오자, 리체스가 모두를 대표해 조용히 물었다. “어쩌죠?” 준상은 일단 랑다잘의 분노를 인벤토리에 집어넣고는 정신을 집중해 정령계의 힘을 개방하며 대답했다. “물러나 있어.” ============================ 작품 후기 ============================ 나는 지옥의 테러리스트 어제 키보드를 강X했지 내일은 마우스를 겁X할 테다 I am a terrorist straight out of hell 나는 마우스도 키보드도 없지 그건 내가 발살냈으니까 내겐 모니터도 스피커도 없지 그건 내가 개발살냈으니까 부숴라 부숴라 연참따윈 부숴라 부숴라 부숴라 모든 것을 부숴라 SAKJE SAKJE하라 SAKJE SAKJE하라 (DEL! DEL! DEL! DEL!) 현탐따윈 약으로 물들여줘라 SAKJE SAKJE하라 SAKJE SAKJE하라 (DEL! DEL! DEL! DEL!) 악플따윈 약으로 물들여줘라 부숴라 부숴라 연참따윈 부숴라 부숴라 부숴라 모든 것을 부숴라 나는 지옥을 지배했었다 오늘 아침엔 마우스패드를 찢어놓고 내가 USB을 재로 만들었다 I am a terrorist straight out of hell 내겐 마우스패드도 USB도 없지 그건 내가 발살냈으니까 내겐 모에도 덕심도 없지 그건 내가 개발살냈으니까 부숴라 부숴라 연참따윈 부숴라 부숴라 부숴라 모든 것을 부숴라 SAKJE SAKJE하라 SAKJE SAKJE하라 (DEL! DEL! DEL! DEL!) 현탐따윈 약으로 물들여줘라 SAKJE SAKJE하라 SAKJE SAKJE하라 (DEL! DEL! DEL! DEL!) 악플따윈 약으로 물들여줘라 부숴라 부숴라 연참따윈 부숴라 부숴라 부숴라 모든 것을 부숴라 SAKJE SAKJE하라 SAKJE SAKJE하라 (DEL! DEL! DEL! DEL!) 현탐따윈 약으로 물들여줘라 SAKJE SAKJE하라 SAKJE SAKJE하라 SAKJE! 크아아아아악! 00337 트롤러 ========================================================================= 어딘가에 존재하는 또다른 세계로의 문이 열리자, 준상의 몸 주위에 세 가지 강대한 기운이 휘몰아치며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그 첫 번째는 하얗게 타오르는 불꽃. 화염의 대정령으로부터 흡수한 이 강대한 불꽃은 정화의 힘을 지닌 성스러운 불꽃이다. 두 번째는 차갑게 흘러내리는 서리꽃. 얼음의 대정령이 남겨준 혹한의 냉기가 불어닥치면 만물은 움직임을 멈춘다. 세 번째는 끓어오르는 핏 속의 붉은 광기. 폭주하는 광기의 정령은 감정을 지닌 자로 하여금 자신이 지닌 모든 잠재력을 단숨에 폭발시키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이 세 가지 정령의 힘이 경쟁하듯 발산되자 리체스는 놀라며 그의 몸으로부터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셋 중 하나만으로도 보통의 인간은 감당하기 어려운 힘이건만, 이 터무니 없는 남자는 그 세 가지를 동시에 불러내고 있는 것이다. 리체스로서는 놀라는 한편으로 준상의 안위가 걱정될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러나 준상은 자신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요정 여왕의 시선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대로 폭발해 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힘들이 서로 부딪히며 휘몰아치는 것을 스스로의 의지로 조절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준상이 정령력을 풀어 놓고 그것을 조절하는 순간에도 검은 파도처럼 몰려드는 헤이드릭스의 물결은 그들을 향해 전속력으로 쇄도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었던지, 기안과 블레이크가 방어 태세를 취하며 앞으로 나서려 했지만 준상의 손이 뻗어지며 그들의 행동을 막았다. “후우우...” 길게 숨을 몰아쉬며 입으로부터 연기인지 냉기인지 알 수 없는 기운을 길게 내뿜은 준상은, 두 손을 천천히 내려 뜨리더니, 이내 무언가를 깊게 퍼올리는 듯한 동작으로 자신을 향해 쇄도하는 헤이드릭스를 향해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그의 손으로부터 하얀 물결과도 같은 것이 뻗어 나갔다. 처음에 뿜어진 것은 차가운 냉기를 품은 서리꽃의 향연이었다. 청량한 푸른 기운을 머금은 서리꽃의 물결은 광폭한 기운을 뿜어내며 덮쳐오던 헤이드릭스의 몸을 단숨에 얼려 버렸다. 그것은 무참한 결과를 낳았다. 갑작스럽게 얼어붙어 버린 헤이드릭스들의 몸이 달려오던 속도를 감당하지 못하고 그대로 부서지며 조각나 흩어져 버린 탓이다. 마치 달리던 트럭 위에서 쏟아져 내린 석고상처럼 선두에 선 헤이드릭스들을 그렇게 부서지며 생을 마감했다. 그 뒤를 따라 다시 한 번 또 다른 하얀 색의 물결이 뻗어 나갔다. 색깔은 비슷했지만, 이번에 뿜어져 나간 것은 앞서의 서리꽃과는 전혀 다른 속성을 지닌, 작열하는 하얀 불꽃이었다. 정화의 힘을 지닌 이 불꽃의 파도는 바닥을 나뒹구는 헤이드릭스의 얼어붙은 몸체를 녹이는가 싶더니 그대로 한 줌 재로 만들어 버렸다. 워낙에 많은 수의 헤이드릭스들이 몰려 오고 있었기 때문에 얼음과 불꽃의 파도를 한 번씩 뿜어낸 것만으로는 그들의 선두에 선 일부 밖에는 처치할 수 없었다. 하지만, 곧이어 준상의 양손이 계속해서 휘저어지며 같은 힘이 연속해서 분출되자, 광폭한 헤이드릭스의 물결은 이 또 다른 물결에 휩쓸린 채 타오르는 모닥불 속으로 뛰어 드는 불나방처럼 사라져 갔다. 물론 준상의 손으로부터 뻗어 나온 하얀 파도를 용케 피해 돌파한 놈들도 몇몇 있었지만, 그들은 곧바로 기안과 블레이크에게 움직임을 차단당하고, 뒤이어 서유미와 맥밀란에 의해 숨통이 끊겨 버렸다. “완전히 괴물이네.” 방패와 미늘창으로 헤이드릭스의 몸을 두들기던 기안이 그렇게 투덜거리자, 블레이크는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아직 준상에 대해 많은 것을 알지 못하는 블레이크였지만, 지금 보여주는 이 힘이 귀환자의 그것과 사뭇 다르다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마법사? 그들은 힘을 정제하여 최선의 방식으로 가공한다. 멀리서 찾을 것도 없이 자신 들의 등 뒤를 바쁘게 날아다니며 마법으로 지원을 해주고 있는 리체스가 가장 좋은 예다. 마법의 정점에 도달한 그녀라면 준상이 일으킨 저 현상을 흉내낼 수 있지 않을까 싶긴 하지만, 만약 그렇더라도 지금 보여지고 있는 저런 식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의 당혹스러움은 준상과 처음 전투를 치러보는 맥밀란 만큼은 아니었다. 자신이 이들 가운데 가장 힘이 부족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던 그녀였지만, 그런 이들조차 아득하게 뛰어 넘는 준상의 힘 앞에서는 놀라는 것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요정 여왕의 반려라더니, 귀환자를 넘어서는 다른 힘이라도 얻은 것일까. 그녀의 추측은 한 편으로 매우 예리한 부분이 있었지만, 지금으로서는 그것이 맞는지 틀리는지도 알아낼 도리가 없었다. 그저 몸의 일부가 불탄 채 미쳐 날뛰는 헤이드릭스의 숨통을 끊어 놓는 것이 당장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불꽃과 서리꽃의 힘을 연거푸 뿜어내어 광폭한 헤이드릭스의 물결을 어느 정도 잠재운 준상은 이내 그 뒤를 느릿하게 뒤따라는 거대한 소라게 형상의 마수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압도적인 하얀 물결을 연거푸 뿜어내던 그의 손이 멈추자 헤이드릭스들은 기회다 싶었는지 그를 향해 몸을 던졌다. 길고 육중한 몸을 지닌 헤이드릭스들이 마치 육탄 공격을 하듯 다가오자 준상은 날파리를 쫓는 듯한 손짓으로 놈들을 후려쳤다. 퍽! 불꽃의 힘이 담긴 오른손에 부딪힌 놈들은 그대로 폭발하듯 몸이 터져 나가 버렸다. 콰드득! 서리꽃의 힘이 담긴 왼손에 부딪힌 놈들은 자동차 바퀴에 밟힌 사탕처럼 으깨진 뒤 서서히 녹아 내렸다. 손짓 한 번에 한 마리씩. 그렇게 헤이드릭스들은 지워버리던 준상은 거대한 소라게 형상의 마수와 어느 정도 근접한 거리에 이르자 느긋하게 걷던 것을 멈추고 앞으로 뛰쳐 나갔다. 마수는 준상의 움직임을 포착하자 어울리지 않는 빠른 동작으로 집게발을 휘둘렀다. 랑다잘의 분노를 네다섯 개 합쳐도 모자랄 것만 같은 거대한 집게발이 파공성과 함께 날아들자, 준상은 감히 맞받아칠 엄두를 내지 못한 채 훌쩍 몸을 날려 그것을 피했다. 그러자 마수는 기다렸다는 듯이 하얀 실과 같은 무언가를 준상에게 쏘아 보냈다. 거미줄이나 개구리의 혀처럼 상대를 옭아매는 용도일까. 아니면 크롤로바간이 쏘아대던 실처럼 상대의 몸을 관통해 꿰뚫는 용도일까. 하지만 준상으로서는 그 용도를 자신의 몸으로 확인할 생각 따위 처음부터 털끝만큼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는 허공에서 위상전이를 펼쳤다. 갑자기 준상의 몸이 사라지자, 마수는 몸에 달려 있던 다섯 개의 눈을 희번덕거리며 준상의 위치를 찾으려 했고, 마침내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놈은 잠시 어리둥절할 수 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느 틈엔가 준상이 넷으로 늘어나 있었기 때문이다. 거대한 도끼를 든 준상이 한 명. 길고 날카로운 거검을 든 준상이 한 명. 두 개의 육중한 철구를 양손에 하나씩 쥔 준상이 한 명. 마지막으로 하얗게 빛나는 소용돌이로 몸을 감싼 준상이 또 한 명. 느닷없이 목표가 넷으로 늘어나자, 마수는 다섯 개의 눈을 마구 움직이며 각각의 준상을 쫓다가 하얗게 빛나는 소용돌이로 몸을 감싼 준상에게 다시 집게발을 휘둘렀다. 거대한 집게발은 어김없이 준상의 몸에 작렬했다. 쿠오오오오! 마수는 자신의 집게발에 맞아 으깨지는 몸을 보며 포효를 터뜨렸지만, 아쉽게도 그것은 준상이 만들어낸 디코이에 불과했다. 피와 살이 튀기는커녕 한 웅큼의 빛가루를 흩뿌리며 시야에서 사라지는 준상의 모습을 보고 마수는 뒤늦게서야 무언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다시 무언가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집게발이 달린 관절 부위에 세찬 공격이 퍼부어 졌다. 피에 취한 마물 블러드서커가 관절을 헤집고, 영혼을 빨아들이는 마검 어나이얼레이터가 신경을 태워 버리며, 파쇄의 효용을 지닌 랑다잘의 분노가 껍질을 부순다. 급작스럽게 이어진 파상 공격에 마수는 허둥대며 입으로부터 하얀 실을 내뿜어 세 명의 준상을 옭아매려 했다. 하지만 그렇게 주의가 흐트러져 있을 때, 마수가 지닌 다섯 개의 눈 앞에 불꽃과 서리꽃으로 온 몸을 감싼 준상이 광기를 폭사시키며 모습을 드러냈다. 갑자기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낸 준상의 모습에 당황해 하는 마수의 눈알 중 하나에 준상의 주먹이 내리꽂혔다. 푸악! 정화의 힘이 담긴 하얀 불꽃이 놈의 눈알 가운데 하나를 그대로 터뜨려 버렸다. 마수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입으로부터 녹색의 기묘한 액체를 준상에게 뿜어냈다. 그러나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준상은 그 액체를 뒤집어쓰기 전에 다시 마수의 눈앞에서 모습을 감추어 버리고 말았다. 빗나가 버린 녹색의 액체가 애꿎은 근처의 바위를 녹여 버리는 동안에도 다른 준상의 분신들은 마수의 관절을 노리며 공격을 이어가고 있었다. 당황한 마수가 상처입은 집게발을 휘둘러 댔지만, 분신들은 요리조리 피하며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며 관절의 상처를 늘려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었던 걸까. 마수는 아무렇게나 사방에 녹색 액체를 마구 흩뿌리기 시작한다. 일단 이 집요한 찰거머리들을 떼어놓으려는 심산이었겠지만, 녹색의 액체를 한바탕 뿜어내고 숨을 돌리는 순간 다시 마수의 눈동자 앞에 하얀 소용돌이로 몸을 감싼 준상이 모습을 드러내더니 남아 있던 네 개의 눈알 가운데 하나를 또다시 터뜨려 버렸다. 쿠아아아악! 마수는 비명을 지르며 발광을 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준상은 일단 분신들을 돌려보내고 무기들을 회수한 다음 멀찍이 물러났다. 그러자 나머지 헤이드릭스들을 모두 정리한 동료들이 그의 주위에 모여든다. “괜찮으세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리체스가 묻자 준상은 깊게 숨을 몰아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정확한 수치를 알 수는 없었지만, 광기의 정령이 지닌 정령력을 활용하면 레어급 이상의 광폭 카드에 버금가는 능력을 사용할 수 있었다. 제대로 조절할 수만 있다면, 카드 하나 정도가 아니라 미친개나 광전사 콤보가 지닌 수준의 파괴력에 근접할 수도 있겠지만 아직은 이 정도가 한계였고, 실제로 그가 지금 마수로부터 일단 거리를 벌린 것도 몸 안에서 들끓는 정령력을 갈무리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 였다. 지금 단계에서 괜히 더 욕심을 냈다가는 자칫 이벨라처럼 정령의 힘에 오히려 먹혀버리는 상황이 일어날 수도 있다. 그나마도 준상이 정령계를 완성했으니 이 정도지, 보통의 인간이 이런 식으로 광기의 정령 같은 위험한 정령을 다루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나 다름없다. 준상과 리체스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서유미와 블레이크, 그리고 맥밀란은 발광하는 마수를 보며 침음을 삼키고 있었다. 거대한 성채와 같은 육중한 몸을 마구 휘저으며 사방 팔방으로 녹색의 액체와 흰 거미줄 같은 걸 쏘아대고 있는 마수의 모습을 보니 감히 범접할 엄두도 나지 않은 탓이다. 방어복을 입었다고는 해도, 거대한 집게발에 짓눌리면 그 압력에 몸이 터져 나가고 말 것이다. 특히나 맥밀란의 경우에는 일각수의 뒷발에 채여 반신불수가 되어 버렸던 전례가 있는지라 다른 이들보다 더 창백한 표정으로 마수의 발광을 지켜보고 있었다. 놈은 한동안 미친 듯이 난리를 치다가, 차츰 진정하는 기색을 보이고 있었다. “후우우우...” 잠시 호흡을 고르며 들끓는 정령력을 갈무리한 준상은 마수의 움직임이 수그러드는 것을 보고는 다시 놈을 향해 움직였다. 세 개 밖에 남지 않은 눈알로 주위를 살피던 마수는 다시금 하얀 소용돌이로 몸을 감싼 인간이 자신에게로 달려드는 것을 보자 흠칫 놀라는가 싶더니, 그를 저지하기 위해 입으로부터 하얀 실을 마구 뿜어냈다. 하지만 준상은 그것을 보고도 피하거나 하지 않았다. 이미 앞서의 접전을 통해 그것이 관통력을 지닌 크롤로바간의 실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라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준상은 자신에게로 쏘아지는 하얀 실들을 향해 불꽃이 담긴 오른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앞서 헤이드릭스를 불태워 버렸을 때처럼 불꽃의 파도가 생겨나 하얀 실들을 증발시켜 버렸다. 손짓 한 번으로 자신의 선제공격을 무력화시키는 모습에 마수는 크게 놀라며 커다란 집게발을 휘둘렀다. 받아낼 수 있을까. 준상은 문득 날아드는 거대한 집게발을 보며 그런 생각을 떠올렸지만, 굳이 모험을 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 훌쩍 몸을 날려 그것을 피하고는 곧장 마수의 머리를 향해 뛰어들었다. 기겁한 마수는 남은 하나의 집게발로 얼른 머리를 감쌌다. “후으읍!” 하지만 준상은 멈추지 않은 채 깊게 숨을 몰아쉬며 오른 주먹에 광기의 정령이 지닌 힘을 담았다. 그러자 하얀 불꽃이 휘감고 있던 주먹에 붉은 기운이 엉기더니 머리를 감싼 마수의 집게발과 격돌했다. 콰드득! 준상의 주먹에 담긴 힘은 단숨에 마수의 집게발을 뒤덮은 껍질을 부수고 들어가며 타격을 주었다. 놀란 마수가 허겁지겁 두 개의 집게발을 휘저으며 물러나는데, 미처 놈의 집게발에 박힌 주먹을 빼내지 못하고 있던 준상이 그것에 얻어맞고 말았다. “여보!” 집게발에 얻어맞아 날아가는 준상의 모습에 크게 놀란 리체스가 그렇게 외치는 순간, 바위 더미 속에 처박힌 준상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용암 속에 하반신을 담그고 있는 상황에서도 용케 녹거나 부서지지 않고 그의 얼굴을 가려주고 있던 선글라스도 이 공격만큼은 견디지 못했다. 준상은 알 하나가 완전히 깨지고 다리가 휘어진 선글라스를 벗어서 던져 버리고는 입 안에 들어온 흙먼지를 뱉어 내며 천천히 마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그의 눈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것은 공포의 시선이나, 그 외에 그가 지니고 있는 다른 상태 이상 유발 능력 가운데 하나가 발동함으로서 일어나는 현상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그의 눈동자를 물들이고 있는 그 기운은 바로 순수한 광기. 물리저항과 방어력 덕분에 집게발에 맞은 충격 자체는 그리 크지 않았다. 하지만 날아가 처박히는 순간, 준상의 이성을 얽어매고 있던 끈 하나가 툭 끊어지면서 그 빈틈을 광기의 정령이 헤집고 들어가 버린 것이다. ============================ 작품 후기 ============================ 큭큭큭... 00338 트롤러 ========================================================================= “크크크...” 비릿한 웃음 소리를 흘리며 준상은 천천히 마수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방금 전의 격돌로 인해 하얀 실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이해한 것인지 녹색의 액체가 준상을 향해 뿜어졌다. 그러나 이번에도 준상은 귀찮다는 듯이 한 손을 휘저었다. 단, 아까와는 달리 이번에 휘둘러진 것은 서리꽃이 맺혀있는 왼손이었다. 마수가 뿜어낸 녹색 액체는 희뿌연 안개와도 같은 냉기의 파도와 마주친 순간 모조리 얼어붙으며 우박처럼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준상은 그렇게 쏟아지는 녹색의 얼음 덩어리를 그대로 맞으며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고, 자신의 공격이 무위로 돌아간 것을 확인한 마수는 집게발을 번쩍 쳐들고는 그대로 내리 찍었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당연히 피할 거라 모두가 생각했지만, 준상은 움직이지 않고 자신을 향해 떨어져 내리는 거대한 집게발을 그대로 바라보았다. 쾅! 무슨 생각이 있겠지 하며 지켜보던 동료들은 준상이 끝까지 움직이지 않은 채 집게발을 그대로 몸으로 받아내는 모습을 보고 경악했다. “안 돼!” 경악한 리체스가 비명을 지르며 얼른 날아가려 했지만, 침착하게 전방을 주시하고 있던 기안이 그녀를 막았다. “기다려. 그리고 잘 봐.” “무슨...”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며 발작하려던 리체스는 집게발 옆에 서 있는 사람의 그림자를 알아볼 수 있었다. 방금 전에 보았을 때는 영락없이 집게발에 맞아 그대로 땅속으로 파묻혀 버렸으리라 생각되었던 준상이 한 손으로 집게발을 짚은 채 서 있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몰라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입을 다물지 못하는 리체스에게 기안이 입을 열었다. “정말이지... 터무니없는 짓을 하는군.” 준상이 방금 전 한 행동은, 기안이 방패로 적의 공격을 흘리는 동작과 닮아 있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방패의 각도를 이용해 그와 같은 일을 행하는 기안과는 달리 어깨를 살짝 비트는 것으로 같은 일을 해냈다는 것 정도다. 말이 쉽지. 머리 위에서 집채만 한 집게발이 떨어져 내리는데 그걸 슬쩍 어깨로 받아 흘려내는 짓 따위를 할 수 있는 이가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아무래도... 준상씨의 상태가 좀 이상한 것 같아요.” 스스로도 그러한 광기에 취해 본 적이 있는 탓인지, 준상의 변화를 가장 먼저 알아차린 것은 다름 아닌 서유미였다. 침착한 표정으로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블레이크 역시 그 말에 동의했다. 순도에서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지금 준상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저 기운은 블레이크가 광폭을 사용했을 때 뿜어져 나오는 기세와 동류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준상이 집게발 공격을 허용하는 것을 보고 잠시 침착함을 잃었던 리체스는 두 사람의 말을 듣고서야 준상의 상태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광기의 정령.” 설마... 광기의 정령에게 먹힌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이것은 간단하게 생각하고 넘어갈 일이 아니다. 얼음의 대정령에게 이성이 먹혀버렸던 이벨라. 잊혀진 투기장에 도사리고 있던 불사의 괴물. 모두가 그런 식으로 정령에 먹힌 희생자들이다. 어떻게 해야 하나 싶어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데, 다시 기안이 무언가를 알아차렸다. “또 온다.” 그녀의 말에 따라 고개를 돌려 보니 오른편에서 십여 마리의 변종 헤이드릭스가 다시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길을 잃은 것인지, 아니면 무리에서 떨어져서 중간에 다른 곳을 들렸다 오는 것인지 알 수는 없는 일. 분명한 것은 사방에 널린 헤이드릭스의 시체를 본 것인지 성이 잔뜩 난 모습으로 그들을 향해 돌진해 오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가자!” 이대로 멍하니 서서 구경만 해봐야 아무 소용도 없는 일. 기안이 미늘창에 달린 깃발을 휘두르며 앞장서자, 다른 이들도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 뒤를 따랐고, 오직 리체스만이 준상의 모습을 보며 어쩔 줄 몰라하고 있을 뿐이었다. 콰드득! 준상의 손이 마수의 집게발 관절을 파고 들어간다. 거대한 집게발을 마수의 동체와 연결하고 있는 관절들은 앞서 분신들의 파상 공격에 여기저기 상처를 입은 상태였는데, 준상의 손이 그 상처를 파고들어간 것이다. 콰득거리는 소리와 함께 껍질이 벗겨지며 분홍빛의 속살이 드러나고, 체액이 뿜어져 나오자 준상은 비릿한 웃음을 지은 채 그 피와 살의 향연을 만끽했다. 한손으로는 굽고, 그렇게 타버린 살을 다른 손으로 또 얼리고. 마수는 집게발을 마구 흔들어 관절 부위에 달라붙은 준상을 떼어 내려 했지만, 거머리처럼 달라붙은 준상은 이제 구워진 속살 속에 머리를 들이밀고 그것을 뜯어 먹기까지 했다. 계속되는 고통을 견디지 못한 마수가 다시 지면을 향해 집게발을 휘둘렀지만, 지면과 격돌하는 순간 지금까지 힘겹게 버티고 있던 관절이 그대로 뚝 꺾여 버리고 말았다. 준상은 지면에 내동댕이쳐지는 순간에도 거대한 집게발을 양손으로 안은 채 그 비릿한 살을 뜯어 먹고 있었다. 마수는 분노하며 자신의 떨어져 나간 집게발을 부둥켜 안고 있는 준상을 향해 성한 집게발을 휘둘렀다. 하지만 준상은 안고 있던 집게발을 휘둘러 그것을 막아냈다. 쾅! 콰쾅! 거대한 두 개의 집게발이 격돌하며 굉음이 사방으로 울려 퍼진다. 그야말로 괴물과 괴물의 싸움. 이쯤 되면 아무리 마수라 해도 한 번쯤 도망을 생각해 볼만 했지만, 준상의 의식을 침식해 들어간 광기의 정령은 이전에 잊혀진 투기장에서 그랬던 것처럼 아지랑이를 뿜어내며 주위의 모든 것들에게 광기를 전염시키고 있었다. 준상은 칼싸움을 하듯이 집게발을 휘둘러 마수와 접전을 벌이다가, 어느 순간이 되자 손에 들려진 집게발을 내팽개치고 다시 성한 집게발에 달라붙더니 관절을 끊어내고 거기서 쏟아지는 살점과 체액을 만끽했다. 두 개의 집게발을 모두 잃은 마수는 그제서 제 정신이 되돌아 왔는지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지만, 준상은 몸을 날려 그런 놈의 머리에 달라붙더니 남아있는 세 개의 눈알을 순식간에 터뜨려 버리고 그 머리 속을 헤집기 시작했다. 아무리 강대한 마수라도 머리가 부서지고 그 뇌수가 뽑혀서는 살아날 방법이 없다. 결국 거대한 성채를 연상시키던 마수는 그대로 모로 쓰러지며 생명이 끊어지고 말았다. 뒤늦게 나타한 헤이드릭스들을 해치운 동료들이 다시 모여든 것은 바로 그 즈음이었다. “어쩌죠?” “음...” 기안은 잠시 난처한 표정으로 마수의 몸을 헤집으며 그 피와 살의 향취에 취해 있는 준상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리체스가 급히 그에게 날아가는 모습을 보고는 혀를 찼다. 다른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고 있었지만, 헤네스 역시 의식 속에서 그녀를 재촉하고 있는 상황. 기안은 서유미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거 기억하지?” 서유미는 긴장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네!” 가장 먼저 기안의 몸에서 은은한 영기가 뿜어져 나왔고, 뒤이어 서유미의 몸에서도 같은 빛의 힘이 뿜어져 나왔다. 먼저 날아간 리체스가 준상을 애타게 부르며 정화 마법을 뿌리는 것을 보며 기안과 서유미는 몸을 던졌다. “크으으...” 준상은 마수의 살점을 뜯어 먹고 있다가 자신을 향해 방어복을 착용한 두 명의 여인이 몸을 날리는 것을 보고 주먹을 휘둘렀다. “젠장!” 기안은 방패를 들어 그 공격을 빗겨냈지만, 워낙 엄청난 힘이 담긴 터라 완벽하게 빗겨냈음에도 불구하고 몸의 중심이 흐트러지고 말았다. 준상은 비틀거리는 기안의 머리를 향해 다시금 주먹을 휘두르려 했지만, 그 순간 서유미가 뛰어들어 그의 팔을 붙잡았다. 서유미는 죽기살기로 준상의 팔에 매달리며 그의 몸 안에 정화의 영기를 쏟아붙기 시작했다. 준상은 팔을 휘둘러 서유미를 떨쳐 내려 했지만, 곧이어 기안에게 나머지 팔 하나를 붙잡혀야만 했다. 기안은 자신을 떨쳐 내기 위해 엄청난 괴력으로 휘둘러대는 준상의 팔에 필사적으로 매달리며 리체스를 향해 외쳤다. “마법!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강력한 마법을!” “하, 하지만...” 리체스가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라하는 사이 블레이크가 거구를 날려 뒤에서 준상의 허리를 노리고 태클을 시도했다. 하지만 준상은 거구의 블레이크가 전력으로 몸을 날렸음에도 꼿꼿하게 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허리를 한 번 틀 때마다 매달려 있는 블레이크의 거구가 허공에 번쩍 번쩍 들려지는 상황. 그 모습을 보고서야 리체스는 입술을 잘근 깨물고는 준상의 어깨를 향해 마법을 구현했다. “울부짖는 뇌성이여! 천상의 심판이여! 지금 여기에 강림하라!” 그녀의 외침과 함께 하늘에서 한 줄기 벼락이 떨어져 내렸다. “으악!” “꺅!” 그리고 곧바로 울려퍼지는 비명 소리. 바로 준상의 몸에 매달려 있던 기안과 서유미, 그리고 블레이크가 리체스가 떨군 번개에 타격을 받은 것이다. “이 노망난 요정이 누굴 죽이려고!” “하, 하지만... 정신이 번쩍 들 만 한 마법을 쓰라고...” 워낙 여러 가지 속성 저항이 높아서 어지간한 마법은 통하지도 않는 준상인데다 일반적인 정화 마법 같은 것도 통하지 않는 상황이니 리체스가 선택할 수 있는 마법은 낙뢰 정도가 고작이었다. 애초에 만년 동안 마법을 연구하기는 했어도 이런 식의 전투에 참여한 것 자체가 최근의 일인데다, 정령에게 의식이 침식당한 준상의 모습에 당황한 상황임을 생각하면 이 정도 마법이라도 제대로 쓴 것이 오히려 용한 일이다. 기안은 머리털이 곤두선 채로 리체스에게 화를 내다가 아차 싶은 표정으로 준상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준상은 온 몸에서 매캐한 연기를 뿜어내며 그대로 석상처럼 굳어진 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정화의 영기와 낙뢰의 마법이 효과를 발휘한 것일까. 다시 아까와 같은 상황을 반복해야 할지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피고 있는데, 문득 준상의 고개가 천천히 들려졌다. “우웃!” 기안은 순간 어두운 검은 태풍 안에 태양이라도 떠오른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것도 가려진 것이 없는 상태로 준상의 맨 얼굴을 그대로 직시해 버린 탓이다. 마수의 몸을 물어뜯기 위해 방어복의 헬멧은 언제 던져 버렸는지조차 알 수 없는 상태로 멀찌감치에 뒹굴고 있었다. 리체스가 떨군 낙뢰 마법 탓에 머리를 덮고 있던 모자도 사라져 버린 상황이라 밤송이 같은 머리가 삐죽삐죽 솟아 있는 모습이었지만, 뽀샤시와 물광의 위력은 이런 상황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었다. “제, 젠장.” 기안은 기겁하며 얼른 손을 들어 눈을 가렸지만, 준상의 정면에 서 있던 서유미는 그대로 그의 얼굴과 대면하고 말았다. “...” 홀린 듯한 표정으로 준상을 바라보고 있는 서유미의 모습에 리체스는 아차 싶었던지 감히 접근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멀뚱히 서 있는 맥밀란과 낙뢰의 충격으로 엉금엉금 바닥을 기고 있던 블레이크를 향해 외쳤다. “눈 감아요! 얼른!” 맥밀란은 영문도 모른 채 일단 리체스의 말대로 눈을 감았고, 블레이크는 안 그래도 정신이 오락가락 하는 상황이다 보니 일단 그녀의 말을 따랐다. 기안이 혀를 차며 넋이 나간 서유미의 몸을 돌려 세우는데,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준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퉷!” 그는 일단 입 안에 가득 배인 마수의 살점과 체액을 뱉어 내고는 고개를 잠시 흔들었다. 방금 전까지의 모습과는 다른 반응이었기에, 리체스는 조심스럽게 준상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여보. 저 알아보겠어요?”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미안해.” 모두는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작품 후기 ============================ (원곡 : 달빛천사 - New Future) 오직 한가지 간직하고 있는 건 지금 것 그려 왔던 레드불 지금의 내 모습 어떻게 보일까 나 약 빨때 함께 한 너에-게 저 약봉지를 봐 서로 멀리 있어도 함께 할 수 있어 나 너에게 언제나 빛나는 레드불처럼 약빨을 기다리고 있을께 너무 늦지 않게 내게 와줘 렛츠 드링크. 약 빠는 동안에 느낄 수 있게 내게 약빨이란 희망을 준 널 위해서 Day by day 힘겨운 날들도 멍한 현탐도 다 약빨속에 묻어 둘수 있을거야 렛츠 드링크 멈추지 않은 나 나의 연참들에 너와 함께 했던 약빨들을 담아 볼께 More and more 조금만 더 너에게 용길 내 볼래 이젠 한 박스 더 약통 열고 many thanks for Red Bull 00339 트롤러 ========================================================================= “일단 잠시 돌아가서 휴식이라도 취하는 것이 좋겠어.” 한숨을 푸욱 내쉬며 기안이 그렇게 제안하자 리체스는 마법으로 준상의 헬멧을 집어 올리며 대답했다. “저도 동감이에요. 그렇게 해요.” 리체스에게 헬멧을 받아 들고 머리에 착용한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없이 신기루 꽃으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아...” 이전에 요정계로 처음 올 때 보았던 석문이 모습을 드러내고 다시 그 안에 들어서자 맥밀란은 그 안의 풍경을 보며 다시금 감탄한 표정을 지었고, 낙뢰의 충격으로 인해 정신이 오락가락한 상태로 맥밀란의 부축을 받아 안으로 들어선 블레이크 역시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블레이크는 이곳이 처음이었던가?” “네, 뭐... 일단은...” 준상은 아직도 광기의 정령에 침식당한 뒤의 후유증이라도 겪는지 머리를 몇 번이나 저어 대고 있었고, 리체스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그의 주위를 멤돌고 있었다. 준상과 리체스가 먼저 최상층으로 올라가는 승강기에 몸을 싣자 기안이 그 뒤를 따랐고, 뒤이어 블레이크와 맥밀란이 조심스럽게 승강기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 순간 부드러운 힘이 작용해 블레이크와 맥밀란의 몸을 승강기 밖으로 밀어낸다. “어?” 어떻게 된 일인가 싶어 어리둥절해 하는 맥밀란을 본 리체스는 뒤늦게서야 아차 싶었던지 승강기 안의 마법진을 조작해 그들에게 입장 권한을 부여했다. “보안 장치에요. 다시 들어오세요.” “네.” 쭈뼛거리며 맥밀란과 블레이크가 다시 승강기 안으로 들어서고 서유미가 뒤를 따르자, 리체스는 마법진을 작동시켜 최상층으로 곧장 이동했다. 마법이 발동하자, 이내 헤네스와 리체스가 정성껏 꾸며 놓은 신기루 꽃 최상층이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갖가지 화분에 담겨진 다른 세계의 기이한 초목들과 중앙에 설치된 맑은 수반, 그리고 그 둘레에 놓여진 고풍스러운 의자와 탁자 등과 더불어 반구형으로 만들어진 천정으로 새어들어 오는 아름다운 별빛의 모습은 제법 대단한 가문의 자손인 맥밀란으로서도 감탄이 절로 나올 만큼 훌륭했다. 어느 새인가 작은 요정에서 아름다운 요정 여왕으로 모습이 바뀐 리체스가 그들을 안으로 인도했다. “내 집이다 생각하고 편하게 쉬어요.”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맥밀란과 블레이크에게 그렇게 말한 리체스는 어느새 기안 대신 의식의 수면 밖으로 나온 헤네스와 함께 여전히 고개를 저으며 관자놀이를 문지르고 있는 준상을 부축해서 컨테이너 하우스 안으로 들어갔다. “...” 맥밀란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일단 근처의 벤치로 블레이크를 데리고 가서 앉혔다. 얼굴을 양손으로 감싼 채 숨을 고르다가 수반 옆으로 다가가 쪼그리고 앉는 서유미의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그녀는 벤치에 앉아 숨을 고르고 있는 블레이크에게 말을 걸었다. “뭐라도 드실래요?” “크흠... 죄송합니다.” “그런 말씀 마세요.” 맥밀란은 쓴웃음을 지으며 인벤토리에서 사물함을 꺼낸 다음 그 안에 담겨 있던 음료수와 에너지바를 꺼내 블레이크에게 건넸다. “드세요.” “감사합니다.” 블레이크는 에너지바의 받아 들고 한 입 베어 문 다음 천천히 음미하듯 그것을 씹었다. 마치 소가 여물을 삼키듯 한참이나 조용히 우물우물 씹어대는 그 모습을 지켜보던 맥밀란은 은근히 허기가 느껴지는 것을 깨닫고는 역시나 에너지바 하나를 꺼내 블레이크처럼 조용히 그것을 씹기 시작했다. 수반 옆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서유미를 제외하고는, 어느 부유한 가문의 온실에 들어와 있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듯한 모습.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지켜보는 맥밀란의 머리 속은 복잡하기 그지 없었다. 처음부터 쉽지 않은 임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현재의 상황은 그녀의 상상을 아득히 초월하고 있었다. 준상을 제외하더라도 현재 그녀와 함께 하고 있는 이들은 귀환자들 가운데 최상급의 실력을 지닌 이들이다. 그런 이들조차 진입한 뒤 채 한 시간 정도 밖에 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렇게 기진맥진할 정도라면, 이전에 검은 태풍 안으로 들어선 다른 귀환자들이나 군인들이 어떻게 되었을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물론 정확히는 준상의 폭주를 진정시키려다가 이 꼴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없었다면 끝도 없이 몰려드는 헤이드릭스나 어떻게 손을 써야 할지 엄두도 나지 않는 소라게 모양의 마수를 그들이 직접 상대해야 했을 테니 오히려 더 큰 피해가 났을 지도 모른다. 잠시 에너지바를 우물거리며 그런 생각에 잠겨 있던 맥밀란은 수반 옆에 얼굴을 감싼 채 쪼그리고 앉아 있는 서유미의 모습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요정 들의 키스로 인해 준상의 얼굴에 생긴 부작용에 대해 알지 못하는 그녀로서는 마지막에 눈을 감으라고 외치던 리체스의 모습이라든가 멍한 표정으로 준상의 얼굴을 바라보던 그녀의 반응 같은 것이 모두 기이하게 느껴졌다. 궁금증이 일어난 맥밀란은 에너지바와 음료수 하나를 꺼내 손에 쥔 채 수반 옆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서유미를 향해 다가섰다. “저...” “...” 서유미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는 양손으로 뺨을 감싼 채 올려다 보았다. 두근. 맥밀란은 발그레하게 상기된 모습으로 두 눈 가득 황망함을 담은 채 자신을 물끄러미 올려다 보는 그 모습을 직시하는 순간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지만 얼른 헛기침을 하며 그녀에게 손에 들린 에너지바와 음료수를 내밀었다. “이거... 드세요.” “...” 맥밀란이 내민 것은 미군 전투 식량에 포함되어 있는 에너지바인데, 병사의 연료라는 별명 답게 높은 칼로리를 지니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서유미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받아 들고는 살짝 고개를 숙여 고마움을 표했다. “괜찮으세요?” “네...” 준상의 맨얼굴을 마주했을 때의 충격 때문인지 서유미는 기껏 되찾은 활발한 분위기를 모조리 잃어버린 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고 있었다. 어떻게 더 대화를 이어나가기 난감할 정도로 소극적인 그녀의 모습에 머뭇거리고 있는데, 문득 컨테이너 하우스에서 헤네스가 나오더니 그녀들에게 다가섰다. 헤네스는 맥밀란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곧장 서유미에게 다가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 “언니, 괜찮아요?” “네.”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그거... 일종의 정신 공격 같은 거니까요.” “네...” 정신 공격이라. 맥밀란은 도대체 준상의 맨얼굴이 어떻길래 저런 말까지 나오는 건가 싶었지만, 그렇다고 당사자에게 직접 확인하는 건 너무 무서운 일이었다. 조금 시간이 지나긴 했지만, 처음 이곳에 왔을 때 그에게 멱살을 잡혔던 일은 아직도 그녀에게 트라우마로 남아 있는 상황이니 말해 무엇하겠는가. 헤네스는 잠시 서유미의 등을 가볍게 쓸어 주며 토닥이다가 이내 몸을 일으키며 그녀의 손을 잡아 끌었다. “가요. 가서 뜨거운 물에 푹 담그면 좀 기분이 나아질 거에요. 여기 욕조가 끝내주거든요. 바다처럼 파도도 막 치는데다, 넓어서 수영도 할 수 있어요.” 정말 욕조 맞는 건가. 혹시 파도 풀장을 잘못 알고 있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떠올렸지만, 이내 서유미와 맥밀란은 헤네스의 손에 이끌려 컨테이너 하우스에서 조금 떨어진 건물로 향했다. 에너지바를 씹으며 그 모습을 지켜보던 블레이크는 물을 한 모금 마시며 벤치에 등을 기대다가, 문득 다람쥐 한 마리가 발치에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 겁도 없는지 도망갈 생각도 않고 손에 쥐어진 에너지바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그 모습에 블레이크는 먹고 있던 에너지바를 조금 떼어내 다람쥐 앞에 내려 놓았다. 에너지바 조각이 앞에 놓여지자, 다람쥐는 사양하는 기색도 없이 앞발로 그것을 집어 들었다. 그 귀여운 모습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블레이크. 하지만 그는 이내 기겁을 하며 놀랄 수밖에 없었다. 바각 바각 바각! 다람쥐의 눈에서 번쩍 붉은 빛이 뿜어지는가 싶더니 맹렬한 기세로 에너지바를 순식간에 갉아 먹는 것이 아닌가! “...” 순식간에 한 조각을 다 먹어 치우고는 다시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신을 바라보는 작은 눈동자와 마주치자, 블레이크는 어째서인지 등골이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크흠... 더 먹을래?” 그러자 마치 사람 말을 알아듣는 것처럼 다람쥐는 고개를 끄덕인다. 일반적으로 시판되는 초코바나 에너지바와는 달리 블레이크가 지금 먹고 있던 에너지바는 하나씩이 아니라 며칠분이 하나의 포장에 담겨 있다. 파란색 포장은 3일치로 한 끼에 두 개씩 18개가 담겨 있으며, 하얀색 포장은 2일치로 12개가 담겨 있다. 맥밀란이 꺼낸 것은 하얀색 포장의 2일치 짜리. 블레이크가 에너지바를 하나 꺼내 앞에 내려놓았다. 그는 다람쥐가 앞발로 그것을 집어들고 바각거리며 갉아먹는 모습이 이어질 것이라 생각했지만, 블레이크의 그런 예상을 비웃기라도 하듯 바닥에 놓여진 에너지바는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블레이크는 얼른 손을 들어 눈을 비볐지만, 사라져 버린 에너지바는 종적을 찾을 길이 없었다. 다람쥐는 그런 블레이크를 바라보며 앞발로 바닥을 탁탁 두드렸다. 목소리를 직접 들은 것은 아니었지만, 블레이크는 어쩐지 다람쥐가 지금 장난하냐고 화를 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블레이크는 그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에너지바 하나를 다람쥐 앞에 내려놓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에너지바는 그의 손에서 떠나기가 무섭게 사라져 버렸다. “...” 블레이크는 이제 번개를 잘못 맞은 탓에 자신에게 뭔가 이상이 생긴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으으음...” 아닌게 아니라 정말로 골치가 살짝 아파오기 시작해서 엄지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주무르고 있자니, 다람쥐는 화가 났는지 더욱 세차게 앞발로 바닥을 팡팡 두드리기 시작한다. “...” 블레이크는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땅바닥에 내려 놓지 않고 벤치 위에 에너지바를 내려 놓은 다음 다람쥐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다람쥐가 벤치 위로 폴짝 뛰어오름과 동시에 놓여져 있던 에너지바가 감쪽 같이 사라져 버렸다. “...” 이쯤 되자, 블레이크도 자신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 이 다람쥐가 이상한 것이라는 점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너... 정체가 뭐냐?” 하지만 다람쥐는 블레이크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한쪽에 놓여져 있는 에너지바 뭉치를 향해 뛰어들더니, 감쪽 같이 그것을 사라지게 만들고는 그대로 도망쳐 버렸다. “...” 블레이크는 멍한 표정으로 다람쥐가 사라져 버린 방향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혹시 준상이 기르는 펫 같은 것일까. 그러고 보니 처음 에너지바를 먹을 때 눈에서 붉은 안광이 번뜩였던 것이 떠오른다. 하기야 이런 곳에 평범한 보통의 동물이 들어와 사는 것도 뭔가 어울리지 않는 일인듯 싶다.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남은 에너지바를 마저 입으로 가져 가던 블레이크는 발치에 또 다른 생물 하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앉아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온몸에 가시가 빽빽이 나 있는 그 동물은, 다름 아닌 고슴도치였다. “...” 블레이크는 자신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고슴도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손에 들린 에너지바를 보고는 다시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 작품 후기 ============================ 충전중..... 00340 트롤러 ========================================================================= 한편 리체스의 손에 이끌려 컨테이너 하우스로 들어간 준상은 그녀의 도움을 받아 간단하게 몸을 씻고는 침대에 누웠다. 역시 한 번에 세 가지 정령력을 다루는 것은 무리였던 걸까. 수련할 때는 그럭저럭 문제가 없는 것 같았는데 실전이 되니 역시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겨난다. 하기야 그런 식으로 두들겨 맞는 상황까지는 상정하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인지도. “이것 좀 드세요.” “고마워.” 몸을 일으키고는 리체스가 가져다 놓은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자 광기의 정령이 한바탕 휘저어 버리는 바람에 잔뜩 곤두선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는 느낌이다. “걱정하게 해서 미안.” 준상의 말에 리체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말 마세요.” 그녀는 가만히 준상의 옆자리로 다가와 그의 등을 가볍게 쓰다듬어 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혼자 모든 걸 하려드는 건 당신의 나쁜 버릇이에요. 아시죠?” “응.” 그렇게 잠시 서로의 체온을 만끽하고 있자니, 서유미와 맥밀란을 욕실로 안내했던 헤네스가 그제서야 안으로 들어왔다. “데려다 주고 왔어요.” “수고했어.” 헤네스는 아직 주전자의 물이 따뜻한 것을 확인하고는 찻잔 하나를 꺼내어 스스로 차를 타들고는 준상의 옆으로 다가왔다. “전 너무 뜨거운 건 싫더라고요. 이 정도로 살짝 따뜻한 정도가 딱 좋다고나 할까.” 그렇게 말하면서도 역시나 호호 불어가며 조심스럽게 차를 마시는 그 모습에 준상과 리체스는 미소를 지었다. 준상은 가만히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조용히 물었다. “부상을 당한 사람은 없지?” “그렇긴 한데...” 헤네스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유미 언니가 준상씨 얼굴을 그대로 봐버린 것이 역시 마음에 걸리네요.” 그 말에 리체스가 대답했다. “괜찮을 거야. 전에 다빈이도 그런 식으로 본 적이 있다던데, 지금은 그냥 그런가보다 하더라고.” “그러면 다행이지만요.” 준상은 둘이서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 것을 가만히 듣다가 차 한 잔을 다 마시고 나서야 도로 침대에 누웠다. 그가 침대에 눕자, 기다렸다는 듯이 헤네스와 리체스가 그의 옆 자리에 몸을 눕힌다. 육체의 피로는 문제될 것이 없었지만, 역시 광기의 정령에게 침식당했던 것이 문제였던 모양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생각보다 그리 깊게 침식을 당한 것은 아니라는 정도.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깊게 침식 당하지 않았음에도 리체스나 헤네스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광기의 정령이라는 존재가 위험하다는 뜻도 된다. “이리 와요. 제가 꼭 안아줄게요.” “무슨 소리. 오늘은 내 차례거든?” 그렇게 투닥거리며 자신에게 기대오는 부드럽고 따뜻한 두 여체의 감촉을 느끼며 준상은 잠이 들었다. 두 반려의 그런 헌신적인 보살핌 덕분이었을까. 하루 정도 지나자 준상은 원래대로 회복되어 동료들 앞에 나섰다. “퀘스트를 받은 사람은 없는 건가.” “네.” 서유미도, 블레이크도, 맥밀란도 검은 태풍에 진입한 이후로 퀘스트가 도착하지 않고 있었다. 일상적인 퀘스트는 그렇다 치더라도, 이것이 시스템 측에서 의도한 현상이거나 그들의 인지하에 들어가 있는 상황이라면 준상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이들 세 사람에게는 그에 걸맞는 퀘스트가 나타나야 정상이다. 맥밀란이야 레벨이나 능력이 모자라서 그렇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서유미나 블레이크의 경우는 그렇게 생각하기도 어렵다. 예전 같으면 퀘스트 목표로 적의 위치가 사전에 미니맵에 포착되었기 때문에 그에 걸맞게 미리미리 대비를 하는 것이 가능했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정령이나 소환물들을 활용해서 적절하게 사전에 포착하는 정도 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 장비 등을 점검한 그들은 다시 석문을 통해 키르기스스탄 동남부의 아트바쉬 지역으로 이동했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모습을 감춘 준상과 리체스가 먼저 석문을 넘고,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뒤에야 나머지 사람들이 차례로 넘어왔다. 준상은 곧바로 정령들을 모조리 소환해 사방에 넓게 퍼뜨려 주위를 살피도록 했다. “음...” 그렇게 많은 수를 잡아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쉬는 동안 다시 새로운 놈들이 이동해 왔는지 제법 많은 수의 마수들이 존재하는 것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다. 검은 태풍의 영향권 안에 들어온지 얼마 되지도 않은 상황인데 이 정도면, 천산 산맥 너머와 타클라마칸 사막에는 얼마나 많은 놈들이 있을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일일이 다 때려잡으며 이동하는 건 역시 너무 시간이 걸리는 일인지라, 최대한 마수들을 피해 가기로 결정을 본 그들은 곧바로 갑가오리를 타고 천산 산맥을 향해 남하했다. 원래부터 인구 밀도가 그리 높지 않은 지역이라, 피해자의 시체 같은 것은 거의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키르기스스탄과 중국의 접경 지역 근처에 도달하자 떼죽음을 당한 사람들의 시신과 파괴된 군사 장비 같은 것이 여기저기 널려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무언가 거대한 것에 짓밟혀 버린 장갑차의 잔해라든가, 두 토막이 나서 추락한 헬기의 잔해 같은 것이 널려 있는 곳을 지나서 좀 더 내려간 그들은 마수들의 것으로 보이는 시신의 잔해가 흩어져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일단 정령을 통해 주위에 다른 마수가 없음을 확인한 그들은 지면으로 내려가 상황을 살폈다. 시체들은 다른 마수들이 뜯어 먹은 것인지 제대로 형체를 갖추고 있는 것이 거의 없었으나, 대신 특수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도검 같과 총기류 같은 것이 부서져 흩어져 있는 것이 추가로 발견되었다. “이건... 역시 귀환자들의 것일까요?” “아마도.” 안목으로 봐서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아이템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었지만, 아무리 신체 능력이 좋은 사람이라도 일반인이 이런 정글도나 손도끼로 마수를 때려잡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에 가깝다. “아무래도 키르기스스탄의 귀환자들이 이곳에서 저지선을 폈었던 것 같습니다.” 혈흔을 조사한 블레이크가 무거운 표정으로 준상에게 보고했다. “적어도 십여명 이상의 귀환자들이 이곳에서 한 무리의 마수와 접전을 펼치다 후퇴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군.” 전사자에 대해서는 따로 말이 없었다. 어차피 귀환자들은 죽으면 그들이 알지 못하는 어디론가 전송되기 때문에 사체가 남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갑가오리에 탑승한 그들은 하늘을 나는 마수들을 피해 천산 산맥을 넘었다. 중국과 키르기스스탄 접경을 넘어서자 그들은 다시 중국군의 것으로 보이는 군사 장비들이 파괴된 채 방치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전과는 달리 사체들이 좀비화되어 그 주위를 어슬렁거리고 있다는 점. 대부분의 사체가 마수의 먹이가 되어서인지 그 수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런 식으로 사체가 좀비화된다는 것 자체가 무시할 수 없는 사안이었다. 사막 근처라 인구가 그리 많지 않다고는 해도 인근의 카슈가르 같은 도시의 인구는 근 이십만에 달하고 그 외의 하천이나 오아시스를 따라 존재하는 여러 촌락이나 도시들의 인구 역시 상당한 수준이기 때문이다. “좋지 않군요.” 어슬렁거리는 좀비들은 어렵지 않게 제거할 수 있었지만, 이런 상황 탓인지 블레이크의 표정을 그리 밝지 않았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당초 계획으로는 도로를 따라 남하해 카슈가르에 들른 다음 사막 남쪽으로 이어진 도로를 따라 타클라마칸 사막에 접근할 예정이었지만, 상황이 이렇다면 그 경로의 도시들 대부분이 좀비들에게 점거되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둬야만 한다. 하지만 통신이 마비되어 GPS 같은 것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는 상황에서 새로 경로를 개척하는 것은 오히려 더 큰 위험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 높이 올라가 GPS를 확인해 보는 방법도 고려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미국측의 정보에 따르면 이 검은 태풍은 성층권까지 도달해 있기 때문에 갑가오리로는 도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때문에 준상은 이렇게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예정대로 진행한다.” 갑가오리를 타고 도로를 따라 남하한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신장 위구르 자치구 서쪽의 도시인 카슈가르에 도착했다. 카슈가르는 파키스탄과 연결된 카라코람 고속도로의 출발지이며, 실크로드 최대의 대도시인 우루무치와 키르기스스탄, 타클라마칸 사막 남부의 호탄 등으로 향하는 길이 모두 모이는 교통의 요지이다. 하지만 그들이 도착했을 때 이슬람 풍의 건물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이 도시는 검은 태풍에게 완전히 잠식 당해 죽음의 땅으로 변해 버린지 오래였다. “음...” 대피가 늦었던 것일까. 도시 안에는 생각보다 더 많은 수의 좀비들이 들끓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마수들은 이미 다른 곳으로 이동했는지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점. 하지만 도시 남동쪽의 경로를 따라 이동을 계속하던 그들은 다시 마수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보통은 일정 거리 밖에 퍼뜨려 놓은 정령으로 미리 파악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이번에 공격을 가해온 놈은 사막의 모래 속에 깊게 은신한 상태에서 기습을 가하는 통에 사전에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뭐야, 이놈들은.” “뿔 달린 날치? 뱀장어?” 뱀인지 물고기인지 헷갈리는 긴 몸통을 가진 마수들은 모래 속에서 로켓처럼 솟아오른 후 지느러미 같은 긴 날개를 펼쳐 활강하며 갑가오리를 공격해 왔다. 사람의 키보다 서너배는 긴 놈들이 사슴뿔처럼 복잡한 형태의 뿔을 앞세우고 날아들자 그들은 곧바로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다. “지면이 단단한 곳을 찾아!” 랑다잘의 분노를 휘둘러 놈들을 격추시키며 준상이 외치자 마법으로 그를 보조하는 리체스를 제외한 다른 이들은 그 말에 따라 이 마수들이 숨기 어려운 곳을 찾았다. “저기요! 저기 바위 언덕이 있어요!” 때마침 맥밀란이 적당한 지형을 발견하자 준상은 갑가오리를 몰아 그곳으로 이동했다. 얼른 단단한 지면에 내려선 그들은 자신들을 향해 날아드는 마수들을 상대로 전투를 시작했다. “으랏차!” 선두에 선 기안이 방패를 들고 격돌해 오는 마수를 막아내자, 옆에서 블레이크가 숄더 차지를 사용해 밀쳐 낸다. 일단 그렇게 바위 언덕에 떨어지면 퍼덕거리는 놈들을 서유미와 맥밀란이 숨통을 끊어 놓는다. 허공을 날아 격돌해 오는 놈들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어야만 가능한 전법이긴 했지만, 기안이 이 역할을 아주 훌륭하게 수행해 낸 덕분에 어렵지 않게 마수들을 처치할 수 있었다. 물론 그런 것 없이 정면으로 부딪혀 놈들의 머리를 짓뭉개 버리는 준상 같은 이도 있긴 하지만 말이다. “놀래라.” “그러게요.” 마수들의 사체를 인벤토리에 챙겨 넣는 작업이 끝나자 그들은 잠시 휴식을 취하고는 다시 남동쪽으로 이어진 도로를 따라 내려갔다. 몇몇 거대한 마수들이 중간에 나타났지만 정령들을 통해 사전에 포착한 덕분에 별 어려움 없이 지나칠 수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이동한 그들은 야르칸드를 지나 호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곳으로부터 북상한다.” 인구 칠십만의 야르칸드도, 인구 삼십만의 호탄도 모두 살아있는 생명이라고는 단 하나도 남지 않은 죽음의 도시로 변해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우울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사막을 향해 이동을 시작했다. 타클라마칸이라는 이름은 ‘들어가면 나올 수 없다’는 뜻이다. 눈이 내리는 혹한의 겨울과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로 뜨거운 혹서의 여름이 공존하는, 면적만도 37만 제곱 킬로미터에 달하는 사막이다. “지도를.” “여기 있습니다.” 미국은 이번 일을 의뢰하면서 검은 태풍의 발생지로 추정되는 지역의 정보를 추려 준상에게 제공했다. 지도를 확인한 준상은 호탄강을 따라 곧장 북쪽으로 난 길을 이동할 것인지, 아니면 동쪽으로 더 이동해서 민풍과 룬타이를 연결하는 사막 공로를 이용할 것인지 잠시 고민하다가, 그대로 강을 따라 북쪽으로 이동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강이라고는 해도 여름 외에는 대부분 말라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적어도 표식으로서의 가치는 충분히 있다. 본래대로라면 이런 식으로 안내자도 없이 무작정 사막을 횡단하는 것은 무척이나 위험한 일이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갑가오리라는 이동수단과 함께 언제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신기루 꽃도 있으니 조금 헤매더라도 크게 문제될 것이 없었다. “이래서 사막의 재보라 불리웠던 건가.” “뭐가요?” “신기루 꽃 말이야.” 그렇게 리체스와 대화를 나눈 준상은 갑가오리를 타고 북쪽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여기까지 왔으면 이제 거의 다 도착한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그들은 조심스럽게 마수들과의 접촉에 유의하며 북상했고,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검은 태풍의 발생지로 보이는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지도에는 나타나 있지 않은, 사막 한 가운데 위치한 폐허. 그 중앙에 거대한 검은 색의 소용돌이가 하늘 높이 솟아오르는 모습이 모두의 시야에 들어왔다. 준상은 정령들을 먼저 보내 정찰을 시켜 보고는 얼굴을 찌푸렸다. 적어도 십여 개체에 이르는 대형 마수들이 마치 문을 지키는 수문장처럼 폐허 주위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 포착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곧이어 준상에게 전해지는 하나의 메시지. 경고! : ‘산들바람’이 심각한 피해를 입어 강제로 역소환되었습니다. 강제 역소환으로 인해 ‘산들바람’은 1일간 재소환이 불가능합니다. -소환물이 강제 역소환될 경우 낮은 확률로 카드가 파괴될 수 있으니 주의하십시오. 준상은 휴대폰으로 들어온 메시지를 확인하고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저 곳이 맞는 모양이군.” 정령을 포착한 것도 모자라 단숨에 처치하는 것은 보통의 존재로서는 불가능한 일. 게다가 눈으로는 알아보기 힘든 바람의 정령조차 안으로 침투하지 못할 정도라면 갑가오리를 타고 들어가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라 봐도 무방하다. 은밀한 침투가 불가능하다면 결국 방법은 하나 뿐. 모조리 박살 내고 들어가는 길 뿐이다. ============================ 작품 후기 ============================ 잠깐 눈 붙인다는게 깨보니 아침이군요. -_-a 00341 트롤러 ========================================================================= “돌파한다.” 그 말이 흘러나오자 무기를 점검한 동료들은 준상이 앞서서 갑가오리로부터 뛰어 내리자 그 뒤를 따랐다. 그러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모래 속에 숨어 있던 한 무리의 마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마수들은 앞 다리가 자라다만 날개와 같은 형상을 지니고 있는데다, 두 개의 두꺼운 뒷 다리로 버티어선 형상이 헤이드릭스와 무척 닮아 있었지만, 머리에 작살과도 같은 형상의 긴 뿔이 달려 있는 것이 큰 차이였다. 이 뿔은 마치 갈기 처럼 등골까지 이어져 있었는데, 그 위에 길게 자라난 털이 마치 깃발과도 같았다. 거무튀튀한 비늘을 전신에 두른 채 날카로운 뿔을 앞세우고 있는 그 모습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말과 자신의 몸을 찰갑으로 감싼 중장기병의 그것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했다. 삐이이이익! 화려한 푸른빛의 긴 털이 뿔 위에 돋아난 마수가 휘파람과도 같은 소리를 지르자, 마수들은 준상과 그 동료들을 향해 일제히 돌진을 시작했다. “처음부터 만만치 않은데.” 어느새 헤네스와 교체한 기안이 방패를 앞으로 내밀며 그렇게 말하자, 맥밀란은 긴장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블레이크 옆으로 다가섰다. 조잡한 창 하나를 들고 기사들의 돌격을 막아내야만 했던 농노들의 심정이 이렇지 않았을까 싶은 느낌에 그녀는 바짝 마른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녀는 앞에서 선 준상을 바라 보았다. 이전에 헤이드릭스의 무리들을 해치웠을 때처럼, 불과 얼음의 파도를 사용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 그녀의 예상이었지만, 준상은 어째서인지 정령계의 힘을 불러들이지 않고 있었다. “리체스.” “네.” “장애물을.” “맡겨 주세요.” 리체스는 준상의 어깨에서 날아오르더니 곧바로 주문을 읊었다. “일어나라, 대지여. 날카로운 창과 단단한 벽이 되어 나의 적을 막아라!” 그녀의 낭랑한 주문 소리가 끝남과 동시에 마수들의 발 밑에서 날카로운 가시와도 같은 암석의 파편들이 성벽처럼 일어나 그들의 몸을 찔렀다. 마수들은 갑자기 발 밑에서 날카로운 암석의 창이 솟구치자 얼른 뛰어올라 피했지만, 뒤따르던 마수들은 갑자기 눈앞에 커다란 장애물이 나타자 그곳에 격돌할 수 밖에 없었다. 단단한 비늘로 몸을 감싸고 있는 터라 실질적인 피해는 그리 크지 않았으나, 이로 인해 마수들을 대열이 크게 흐트러지고 돌격력이 상실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키야아아악!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선두에 선 푸른 털의 마수는 리체스의 마법을 피해낸 마수 몇 마리와 함께 여인의 비명과도 같은 날카로운 괴성을 터뜨리며 준상을 향해 돌진해 왔다. 준상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 보고 있다가, 마수가 코앞에 다가왔을 즈음에야 비로소 주먹을 치켜드는가 싶더니, 날카로운 뿔을 슬쩍 어깨 너머로 피하면서 마수의 미간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빠각! 순간 무언가 부러지는 듯한 기묘한 타격음과 함께 푸른 털의 마수는 그대로 몸이 뒤집어지며 화려하게 허공을 날아 바닥에 처박히고 말았다. “미친.” 기안은 그런 준상의 모습에 혀를 차며 자신을 향해 뿔을 내밀고 달려드는 마수의 공격을 방패로 흘려냄과 동시에 그 다리를 미늘창으로 후려 갈겼다. 바닥을 긁어내는 듯한 모습으로 올려친 미늘창에 발목을 정확히 얻어맞은 마수는 머리의 뿔을 지면에 쑤셔 박으며 허공으로 떠오르는가 싶더니 역시나 화려하게 몸을 뒤집으며 지면에 처박히고 말았다. 기안에게 다리를 얻어맞고 나동그라진 마수는 곧바로 다리를 버둥거리며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그런 놈의 몸 위로 날카롭게 벼려진 식칼을 든 서유미가 뛰어 들었다. 마수는 날카로운 앞발의 발톱으로 서유미를 할퀴었으나, 그녀는 식칼을 휘둘러 그런 마수의 발가락을 잘라 버렸다. 서유미는 곧장 뛰어 들어 비명이 터져 나오고 있는 목울대를 단숨에 베어 버렸다. 마수는 하나 남은 짧은 앞발로 헛되어 허공을 휘저으며 휘청거리다가, 다시금 뒤돌아서며 휘두른 아랑도의 일격에 목 자체가 단숨에 잘려 나갔다. 목이 잘려 나간 마수의 잠시 비틀거리다가 그대로 털썩 쓰러지자, 서유미는 헬멧에 묻은 마수의 피를 대충 닦아내고는 다음 목표를 향해 몸을 날렸다. 준상이 내지른 일격에 나가 떨어진 푸른털의 마수에게는 블레이크와 맥밀란이 동시에 달려 들었다. 이 마수는 지금 쇄도하고 있는 뿔 달린 마수들의 대장과도 같은 존재였지만, 준상이 내지른 일격에 머리와 목뼈에 심각한 타격을 입자 비틀거리며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고, 블레이크는 그런 놈의 옆구리를 숄더 차지를 발동해 전력으로 들이 받았다. 커다란 덤프 트럭에 치인 것과 같은 파괴력이 비늘을 뚫고 갈비뼈를 부수자 푸른 털의 마수는 처절한 비명 소리와 함께 그대로 나동그라졌고, 그렇게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놈의 눈을 향해 맥밀란은 에스토크를 있는 힘껏 찔러 넣었다. 푸욱! 소름 끼치는 촉감과 함께 눈알이 터져 나가고 그 뒤에 자리 잡은 뇌수까지 곧바로 관통 당하자 경련하듯 몸을 버둥거리다가 결국 숨이 멎고 말았다. 그래도 이놈은 대장이라 그런지 뼈가 제법 단단해서 준상의 일격을 견뎌 냈지만, 다른 놈들은 그가 내지른 주먹에 맞는 즉시 목이 부러지고 머리뼈가 으스러지는 치명상을 입어야만 했다. “울부짖는 뇌성이여! 천상의 심판이여! 여기 강림하라!” 준상의 머리 위에 떠 있는 리체스는 목이 터져라 주문을 외우며 쉴 새 없이 마법을 마수들에게 떨어뜨렸고, 그녀의 그런 노력 덕분에 마수들은 대열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채 순차적으로 일행에게 달려들어 각개 격파되어야만 했다. “꺅!” 너무 전투가 순조로웠던 탓일까. 준상에게 일격을 허용하고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마수의 숨통을 끊기 위해 공격을 가하던 맥밀란이 기안에게 일격을 허용한 마수에게 깔리는 상황이 발생하고 말았다. 맥밀란을 깔아 뭉갠 마수는 곧바로 서유미에게 목이 잘라며 죽음을 당하고 말았지만, 다급하게 블레이크가 끄집어낸 맥밀란은 팔을 움켜 잡은 채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블레이크가 얼른 부축하며 말하자 맥밀란은 새로 건네받은 재생력 시드의 효과로 인한 아지랑이를 온몸으로 뿜어내는 상태로 대답했다. “팔이... 아파요.” 느낌으로 봐서는 단순히 타박상 정도가 아니라 부러지거나 금이 간 것 같았다. 블레이크는 얼굴을 찌푸리다가 다시 그들을 향해 떨어져 내리는 마수를 보고는 곧바로 숄더 차지를 발동해 날려 버리며 리체스를 불렀다. “리체스님!” “네?” 마법을 연발하고 있던 리체스는 블레이크의 부름에 얼른 고개를 돌리더니 이내 맥밀란이 한쪽 팔을 늘어뜨린 채 서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는 곧장 날아왔다. “어디에요?” “팔이...” 리체스는 얼른 마법으로 팔을 살핀 후 금이 간 것을 확인하자 그것을 고정시키는 마법을 사용했다. 원래대로라면 강력한 회복마법을 연속으로 펼쳐 그렇게 금이 간 부분을 접합시켜야겠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기안과 서유미로부터 회복의 영기가 발현되고 있는 상황이고 재생력도 작용하고 있으니 시간이 가면 알아서 회복이 되겠지만, 그런 식으로 느긋하게 회복을 기다릴 여유도 지금은 없었다. “여보! 밤톨이 좀 부탁해요!” 뒤에서 리체스의 말이 들려오자 준상은 곧바로 작은 고슴도치 한 마리를 소환한 다음, 동글게 몸을 만 녀석을 한손으로 잡아 리체스에게 집어 던졌다. 리체스는 그렇게 날아온 밤톨이의 몸을 마법으로 붙잡은 다음 고통으로 인해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맥밀란에게 말했다. “방어복 좀 열어봐요.” “네?” “얼른요!” “아, 알겠습니다!” 맥밀란이 얼른 가슴 부위의 단추를 풀고 지퍼를 내리자 리체스는 그녀의 드러난 뽀얀 가슴 골에 밤톨이를 집어넣었다. “꺅!” 맥밀란이 기겁하며 비명을 지르자, 리체스가 다시 준상에게로 날아가며 말했다. “좀 따끔거려도 참아요. 얘가 이래봬도 회복 전문이니까. 힐링 포션 있으면 그것도 쓰고요.” 원래는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었지만, 현재 전투를 수행하고 있는 인원 가운데 가장 약한 것이 그녀인지라, 아예 밤톨이를 전담으로 붙여 버린 것이다. “아, 알겠습니다.” 맥밀란은 휴대폰을 꺼내 힐링 포션을 사용하려다가 몸 전체에 따뜻한 기운이 퍼지는 것을 깨달았다. 고개를 숙여 바라보니 가슴 골 속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는 고슴도치로부터 은은한 회복 마법이 연속해서 발현되는 것이 보인다. “...” 맥밀란은 어느 틈엔가 팔의 통증이 사라지는 것을 깨닫고는 슬그머니 휴대폰을 다시 집어 넣은 다음 고슴도치가 다치지 않도록 앞섶을 조심스럽게 여몄다. 창기병 부대와도 같은 뿔 달린 마수와의 접전은 쓰러져 숨이 멈춘 마수의 숫자가 스물에 달할 즈음이 되어서야 겨우 끝났다. 하지만, 그것이 전투의 종결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또 온다.” 앞장선 준상에게서 그런 말이 나옴과 동시에 사막의 모래가 분수처럼 솟구치며 새로운 마수가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갑주어와 같은 형상의 머리를 지닌 이 거대한 마수는 뿔 대신 푸른 불꽃이 넘실거리는 두 개의 긴 더듬이가 달려 있었으며, 입에는 날카로운 이빨이 상어의 그것처럼 겹겹이 나 있었다. 몸은 기다란 어류의 그것과 닮았는데, 머리 옆에는 지느러미 대신 날카로운 발톱이 달린 두 개의 앞발이 자리 잡고 있었다. 마수는 포효하며 모래 속에서 솟구쳐 나오더니, 이내 두 개의 앞발로 몸을 지탱하며 머리 위에 달린 두 개의 불타는 더듬이를 채찍처럼 휘둘러 공격을 가해왔다. “이크!” 기안은 얼른 방패로 몸을 가리며 몸을 숙여 그 공격을 받아냈지만, 준상은 꼿꼿하게 선 채로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푸른 불꽃이 실린 더듬이를 한 손으로 잡아챘다. 곧바로 더듬이로부터 푸른 불꽃이 넘실거리며 그의 팔을 휘감았지만, 곧바로 준상의 몸에서 하얀 불꽃이 뿜어져 나와 그 푸른 불꽃을 집어 삼켜 버렸다. “하압!” 한 줄기 기합성이 터져 나오자, 이내 더듬이를 놓고 마수와 준상의 줄다리기가 시작되었다. “뭐 이런...” 어이없어 하며 기안이 지켜보고 있는 동안, 그녀가 막아낸 더듬이가 하늘로 솟구치더니 준상을 향해 다시금 날아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준상은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더듬이를 팔로 나꿔채 버렸다. 두 개의 더듬이가 모두 잡히자, 마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준상과 줄다리기를 벌이는가 싶더니, 다시 한 번 준상의 입에서 커다란 기합 소리가 터져 나오자 모래 속에서 잡초 뿌리가 쑥 뽑혀 나오는 것처럼 허공으로 떠올랐다. “허...” 월척이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그 모습이라니. 동료들이 입만 쩍 벌린 채 이 무지막지한 크기의 마수가 휙 딸려 오는 모습을 지켜보는 가운데, 준상은 마수가 굉음과 함께 바닥에 떨어지자 다시금 더듬이를 낚아챈 팔에 힘을 주었다. 뚜둑! 그러자 미처 그 힘에 대항을 하지 못한 탓인지 마수의 더듬이 두 개가 놈의 머리로부터 그대로 뽑혀 나왔다. 쿠아아아악! 더듬이가 뿌리채 뽑힌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마수가 크게 발버둥을 치자, 어느 틈엔가 커다란 도끼를 손에 든 준상이 놈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준상은 콤보 카드를 무투가로 바꾸고 강타를 발동했으나, 채 시간을 채우기도 전에 마수는 엄청난 속도로 모래 속을 파고 들어가 숨어 버리고 말았다. “이런!” 급히 힘을 모으다 말고 도끼를 내려 쳤으나 애꿎은 모래만 파헤쳤을 뿐이다. 그렇게 모래 속으로 파고 들어간 마수는 곧바로 블레이크의 발 밑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00342 트롤러 ========================================================================= 엄청난 속도로 발밑의 모래가 빨려 들어가자 블레이크는 급히 몸을 날려 피하려 했지만, 발밑이 푹 꺼지는 바람에 소용돌이에 휩쓸리듯 속수무책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교관님!” 맥밀란이 얼른 손을 뻗어 그를 향해 달려가려 했으나, 서유미가 그녀의 허리를 잡아 멈추어 세웠고, 대신 기안이 인벤토리에서 채찍을 꺼내 블레이크를 향해 휘둘렀다. “잡아!” 블레이크가 머리 위로 날아드는 분홍빛 채찍을 한 손으로 낚아채자, 기안은 기합성을 터뜨리며 채찍을 잡아 당겼고, 그 무지막지한 힘에 블레이크가 딸려 오는 순간 모래 속에서 날카로운 이빨이 겹겹이 박힌 거대한 입이 튀어 나와 허공을 베어 물었다. 모래 속에서 머리를 드러낸 마수는 자신의 공격이 허탕으로 돌아갔음을 깨닫자 얼른 모래 속으로 다시 숨으려 했지만 미처 다시 숨기도 전에 놈의 턱 밑에 거검 하나가 푹 하고 박혀 들었다. 그것은 바로 절멸의 마검 어나이얼레이터였다. 영혼을 갉아먹는 마검에 턱 밑을 찔리자 마수는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움찔하며 일순 몸이 굳어 버렸고, 그런 놈의 머리 위에 리체스의 마법이 작렬했다. “울부짖는 뇌성이여! 천상의 심판이여! 여기 강림하라!” 낭랑한 외침과 함께 떨어진 낙뢰는 마수의 머리에 직격하며 그 몸을 마비시켰고, 놈의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리자 준상은 턱 밑에 찔러 넣은 대검을 한번 비틀고는 한 줄기 기합성과 함께 그대로 마수의 몸을 모래 속에서 끄집어냈다. 거대한 마수의 몸체가 모래 속에서 쑥 뽑혀 나오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 아닐 수 없었지만 그들이 감탄의 목소리를 입으로 내기도 전에 다시 지축을 울리며 한 무리의 마수들이 달려오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앞서 해치웠던 뿔 달린 마수들의 무리가 싸우는 소리를 듣고 달려온 모양이었다. “기안!” 끄집어낸 마수의 생명을 끝장 내기 위해 어나이얼레이터를 치켜 들고 준상이 외치자, 기안은 방패를 치켜 들며 대답했다. “맡겨둬!” 기안은 그렇게 대답하고는 리체스를 향해 외쳤다. “한 방 큰 걸로 부탁해!” “알았어!” 리체스는 양 손을 앞으로 내밀고는 다시금 주문을 외웠다. “몰아치는 돌개바람이여, 불어오는 회오리 바람이여. 나의 적을 감아 올려라!” 그녀의 주문이 끝나자 어둑어둑한 사막 위에 두 개의 거대한 소용돌이가 생겨나더니 그들을 향해 돌진해 오는 마수들을 단숨에 휘감아 버렸다. 과거에 그라드닉스를 격추시킬 때 사용했던 강력한 회오리 마법이 다시 한 번 이곳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두 개의 거대한 회오리바람은 서로 맞물리듯 몰아치며 마수들을 끌어올려 사방으로 내동댕이쳐 버렸다. 그 엄청난 위력에 기안은 탄성을 터뜨리며 말했다. “끝내준다! 멋져!” 하지만 리체스는 끙끙거리며 그 말에 답했다. “힘드니까 말시키지 마!” 그렇게 투닥거리는 사이 회오리 바람을 뚫고 나온 마수가 기안을 향해 날카로운 뿔을 들이밀며 쇄도했지만, 기안은 앞서의 격전으로 놈들의 공격에 익숙해 졌는지 방패로 받아낼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몸을 숙여 그 공격을 피해내고는 미늘창을 찔러 놈의 목을 꿰뚫어 버렸다. “두 번은 안 통한다!” 그렇게 외치며 두 번째 마수의 목을 뾰족하게 튀어나온 방패의 뿔로 꿰뚫어 버린 기안은 회오리바람으로 인해 속도를 잃은 마수들 속으로 뛰어 들어가 버렸다. 기안이 혼자 그렇게 돌진하자, 서유미는 혀를 차고는 그녀를 돕기 위해 뒤따라 몸을 날렸고, 블레이크와 맥밀란은 회오리바람으로 인해 내팽개쳐진 마수들의 숨통을 끊는 작업을 맡았다. 그렇게 접전이 벌어지는 동안 모래 속에서 끄집어낸 마수의 숨통을 끊어 버린 준상이 다시 전열에 복귀했다. “수고했다!” “별 말씀을요!” 준상이 두 개의 거대한 철구를 들고 스쳐 지나가며 말을 건네자, 땀을 뻘뻘 흘리며 마법을 유지하고 있던 리체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마법을 거두어 들였다. 두 개의 거대한 회오리바람에 휩쓸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던 마수들은 마침내 마법이 끝나자 성난 목소리로 크게 울부짖으며 다시금 돌격을 시도하려 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내 방금 전에 몰아쳤던 회오리바람보다 더 치명적인 또 하나의 회오리바람을 만나야만 했다. 그 회오리의 정체는 두 개의 철구를 양손에 든 채 발동시킨 준상의 듀얼 스톰이었다. 콰드드득! 단단한 비늘과 튼튼한 뼈를 가진 마수들도 이 말도 안 되는 공격 앞에서는 그야 말로 믹서기 안에 밀어 넣어진 과육에 불과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른 채 블레이크를 따르며 마수들의 숨통을 끊는 일을 하고 있던 맥밀란은 눈앞에서 벌어진 그 터무니없는 광경을 접하자 품위 없이 입만 쩍 벌린 채 그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저 사람... 정말 사람 맞나요?” 맥밀란의 말에 블레이크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아마도요.” 그렇게 실없는 소리를 주고받는데, 마수의 목을 잘라내던 서유미가 문득 고개를 들더니 크게 외쳤다. “하늘!” 그리고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검붉은 무언가가 그들을 향해 내리 꽂히며 화염을 쏟아 부었다. 블레이크는 얼른 맥밀란의 몸을 감싸며 자신들을 향해 쏟아지는 화염을 피해 냈다. “교관님!” 맥밀란은 블레이크의 등이 불꽃에 휘감기는 듯한 모습에 비명을 질렀지만, 다행히 불꽃이 스쳐 지나가면서 그렇게 보인 것에 불과했다. 준상은 듀얼 스톰을 펼치며 마수들을 학살하다가, 뒤늦게서야 하늘로부터 화염을 퍼부으며 내려오는 한 무리의 익룡들을 발견했다. 정확히는 익룡이라기 보다는 날개달린 악어와도 같은 모습. 모두 세 마리의 날개 달린 악어를 확인한 준상은 곧바로 익룡 그라드닉스를 소환해 놈들을 상대하게 했다. 쿠와아아악! 준상의 머리 위에 흰 빛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익룡 그라드닉스는 명령이 떨어지자 곧장 날개 달린 악어를 향해 날아들었다. 기습적으로 내리 꽂힌 그라드닉스의 공격에 날개 달린 악어 가운데 한 마리가 바닥을 나뒹굴었지만, 나머지 두 마리는 집요하게 블레이크와 맥밀란을 노리고 화염을 뿜어 댔다. “어딜!” 그때, 잠시 숨을 고르고 있던 리체스의 입에서 다시금 주문이 터져 나왔다. “몰아치는 돌개바람이여, 불어오는 회오리 바람이여. 나의 적을 감아 올려라!” 다시 한 번 같은 주문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거대한 두 개의 회오리바람이 날개 달린 악어 형상의 마수들을 허공으로 감아 올렸다. 마수들은 입에서 불을 뿜으며 발버둥을 쳤지만, 그 불은 곧바로 회오리바람에 집어삼켜져 자신들의 몸을 태우기 시작했다. 그에 반해, 그라드닉스는 날개 달린 악어 형상의 마물 한 마리를 떨구는데 성공했지만, 이어진 육박전에서는 오히려 마수에게 크게 밀리며 위기에 처했다. 마수는 그라드닉스의 머리를 앞발로 후려치고는 비틀거리는 상대를 향해 불을 뿜으려 했지만, 바로 그 순간 놈의 머리 위로 아랑도를 거꾸로 잡은 서유미가 떨어져 내렸다. 부우욱! 질긴 천이 찢겨 나가는 소음과 함께 머리 가죽이 찢겨 나가며 검은 피가 사방으로 솟구치자, 그 끔찍한 고통을 견디지 못한 마수는 비명을 지르며 발에 밟힌 지렁이마냥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 일격을 성공시키긴 했지만, 서유미는 그렇게 발버둥치는 마수의 머리 위에서 곧바로 튕겨 나가버렸고, 그 대신 온몸에 검댕을 잔뜩 뒤집어 쓴 블레이크가 마수의 머리를 향해 도약하더니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은 채로 강타를 발동시켰다. 1초. 2초. 그리고 3초. 그 시간이 모두 채워지자 블레이크는 전신의 힘을 한 점에 모아 있는 힘껏 주먹을 내질렀고, 이미 가죽이 찢겨지고 머리 뼈에 흠집이 나있던 마수는 벼락과도 같은 일격을 견디지 못한 채 뇌수가 곤죽이 되면서 혀를 빼물고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크윽...” 강타의 반동으로 인해 몸에서 연기를 잔뜩 뿜어내며 마수의 등으로부터 떨어져 내리는 블레이크를 받아든 것은 바로 맥밀란이었다. 그녀는 육중한 그의 몸을 받아내고는 무너지듯 쓰러지는 마수의 거대한 몸에 짓눌리지 않도록 얼른 그곳에서 몸을 피했다. “괜찮으세요?” 맥밀란은 그렇게 묻다가 얼굴을 찌푸린 채 힐링 포션을 사용하기 위해 휴대폰을 꺼내드는 블레이크의 모습을 보자, 얼른 방어복의 앞섶을 풀어 헤치더니 그녀의 뽀얀 가슴 골 속에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밤톨이를 꺼내 들었다. “이 녀석은...” 블레이크는 자신의 에너지바를 강탈해 간 범인 중 하나인 고슴도치를 보고는 얼떨떨한 표정을 짓다가 맥밀란이 강제로 그의 방어복을 벗기고 그 안에 녀석을 밀어 넣자 기겁을 하고 말았다. “자, 잠깐! 소위님, 이게 무슨!” 하지만 맥밀란이 뭐라 대답을 하기도 전에 밤톨이는 몸을 둥글게 만 채로 회복 마법을 그에게 펼치더니, 이내 폴짝 뛰어서 맥밀란의 가슴골로 다시 돌아가 버렸다. “...” “...” 맥밀란의 앙가슴 속에서 머리를 내민 채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밤톨이의 모습에 두 사람은 잠시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몰라 그대로 굳어 있었다. “야! 너희 둘! 안 싸우고 뭐해! 정신없는 거 안 보여?” 기안의 외침을 듣고 나서야 둘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다시 전투 현장으로 향했다. 서유미는 악어 형상의 마수로부터 굴러 떨어지자 잠시 정신이 아득해지는 느낌을 받았지만, 얼른 회복 마법을 스스로에게 사용하고는 리체스를 향해 달려갔다. 리체스는 땀을 뻘뻘 흘리며 마법을 유지하다가 준상이 달려오자 바로 외쳤다. “떨굴게요!” 그녀의 말과 함께 마법이 해제되자 자신의 입에서 뿜어져 나온 화염에 의해 새까맣게 그을린 두 마리의 마수들이 곧바로 사막의 모래 위에 처박혀 버렸다. 준상은 리체스를 향해 고개를 한 번 까딱이고는 곧바로 놈들에게로 달려 갔고, 서유미가 그런 준상의 뒤를 따랐다. 마수들은 회오리바람에 휩쓸린 탓에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와중에도 자신들을 향해 준상과 서유미가 달려들자 다시금 화염을 뿜어냈다. 서유미는 훌쩍 몸을 날려 그 화염을 피해냈지만, 준상은 정령계를 개방하더니 그 안에서 하얀 불꽃을 이끌어 내어 마수의 불꽃을 먹어 치웠다. 하얀 불꽃은 마치 타 들어가는 도화선처럼 불꽃을 먹어 치우며 마수의 입안으로 밀려 들어갔다. 마수는 기겁하며 입을 닫았지만,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하얀 불꽃은 놈의 몸속에 숨겨져 있던 불꽃의 정화를 먹어 치우고는 그대로 폭주해 버렸던 것이다. 마수는 몸 안에서 들끓는 화염의 힘을 견디지 못한 채 몸을 부들부들 떨다가 이내 커다란 폭음과 함께 그대로 산산이 조각나 부서지고 말았다. 반면, 서유미는 화염을 피하자 화살처럼 앞으로 내달리며 마수의 턱 밑으로 쇄도했다. 마수는 불을 뿜던 것을 멈추고 서유미를 향해 날카로운 이빨이 가득 자리 잡은 입을 벌렸지만, 그녀는 자신을 향해 벌려진 입을 피한 뒤 그 머리 옆을 스치고 지나가며 놈의 눈을 도려내 버렸다. 거의 사람 머리통 만한 커다란 눈알이 몸으로부터 뽑혀 나오자 마수는 그 끔찍한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발버둥 치기 시작했고, 서유미는 그렇게 몸부림치는 놈의 품 안으로 파고 들어 가슴 어림에서 붉게 빛나는 불꽃의 정화를 아랑도로 푹 찍어 버렸다. 곧바로 검푸른 체액이 서유미의 전신에 분수처럼 뿜어졌지만, 그녀는 그 역겨운 분출에도 아랑곳없이 아랑도에 더욱더 힘을 주어 불꽃의 정화를 완전히 찢어 놓고 말았다. “헉... 헉...” 불꽃의 정화가 사그라 들자, 마수는 크게 경련을 일으키더니 그대로 생명이 꺼지며 천천히 식어가기 시작했다. 00343 트롤러 ========================================================================= 서유미가 쓰러뜨린 마수를 끝으로 대형의 마수는 모조리 쓰러졌고, 나머지는 머리에 뿔을 단 마수 몇 마리 뿐이었다. “더럽게 많네.” 기안이 툴툴거리며 마수들을 확인 사살하는 동안 준상은 신기루 꽃으로의 문을 열고 블레이크와 서유미, 그리고 맥밀란으로 하여금 사체를 옮기도록 했다. “어디로 옮기면 될까요?” 서유미의 물음에 준상은 리체스를 돌아보며 말했다. “결계 안에 옮겨두면 어떨까 하는데.” “결계요?” 이벨라를 위해 만들어둔 결계는 냉기 같은 기운을 가둬두는데 특화된 곳이니, 일정 이상의 냉기를 풀어놓고 그 안에 사체를 넣어두면 부패를 막는데 매우 효과적이다. 준상의 의도를 이해한 리체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안내도 할겸 그들과 함께 사체를 옮기는 작업을 도왔다. 그렇게 잠시 시간을 들여 이전에 잡은 마수들의 사체까지 깔끔하게 정리를 끝낸 그들은 또다른 마수들의 접근을 경계하며 폐허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엉망으로 구겨진 철조망과 담장을 넘어서자 군사용으로 지어진 듯 보이는 단단한 건물의 폐허가 눈에 들어온다. “정보가 될 만 한 것이 있는지 확인하도록.” “네!” 준상과 리체스, 그리고 기안이 경계를 하는 동안 다시 서유미와 블레이크, 그리고 맥밀란의 3인은 부서진 건물의 폐허를 돌며 문서나 기타 저장 매체들을 철저히 수색하기 시작했다. 몽몽이 역시 소환해서 수색에 가담시켰지만, 이 식탐 많은 다람쥐에게 아이템이나 금은보석 같은 물품이 아닌 일반적인 서류 같은 걸 알아보는 안목까지 바라는 건 역시 무리한 일이었다. 결국 그들이 발견한 것은 얼마 안 되는 서류와 USB 메모리 몇 개, 그리고 부서진 컴퓨터의 하드 디스크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렇게 수색하며 전진하던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폐허 한 가운데 위치한 거대한 소용돌이 근처까지 도착했다. “이곳이 검은 태풍의 중심인가.” 정황상 계속 중심이 이동하고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검은 태풍의 중심인 커다란 소용돌이는 마치 못이라도 박아 놓은 것처럼 하늘로 솟아오르는 모습 그대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준상은 일단 늑대 한 마리를 소환해 안으로 진입시켜 보았다. 늑대는 두려운 기색을 보이고는 있었지만, 준상의 명령이 떨어지자 머뭇거리며 소용돌이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연속해서 정령 진입을 시켜보았지만, 역시 별 다른 위험은 감지되지 않았다. “들어간다.” 그렇게 말하고 준상이 앞장서자, 모두들 그 뒤를 따라 소용돌이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음...” 태풍의 중심부가 그러하듯이 소용돌이 안쪽은 암흑의 기운이 휘몰아치는 바깥과는 달리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소용돌이 내부의 공간은 고작해야 테니스장 정도의 넓이에 불과했지만, 그곳에 들어선 준상은 이내 무너진 지하 벙커의 잔해 같은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위치 상으로 미루어 보니, 소용돌이의 중심은 이 지하 벙커의 입구와 정확히 일치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여기가 실험장 입구인 모양이에요.” 부서진 입구의 표지판들을 확인한 맥밀란의 말에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갑가오리를 불러내 함께 타고는 천장이 무너져 내부가 드러난 지하 벙커 안으로 진입했다. 아래 쪽에서 무언가가 폭발하면서 각 층을 뚫고 올라갔는지, 대부분의 층이 흉하게 부서진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각 층에 잠시 들러 다시 서류나 저장 매체 등을 수거하며 내려가기를 얼마나 했을까. 지하 10층에 이르자 마침내 이 지하 벙커의 바닥이 드러났다. “최하층이 맞는 것 같네요.” 표지판을 읽은 맥밀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준상은 다시 수색을 명했다. 하지만 이 최하층은 마치 무언가가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사소한 집기의 잔해 하나 찾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무언가 파괴의 흔적이 보이는 것도 아니고. 혹시 이 아래로 뭔가가 더 있나 싶어서 정령으로 탐색을 하고 있는데, 문득 머리 위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분명히 모든 층을 샅샅이 뒤지며 내려 왔을 텐데. 그때, 준상의 어깨 위에 앉아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던 몽몽이의 고개가 휙 하고 위쪽으로 쳐들어 졌다. 그리고 동시에 느껴지는 섬찟한 감각. 그 느낌에 이끌려 준상이 고개를 쳐들자, 뒤이어 리체스와 기안 역시 그를 따라 고개를 쳐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천천히 허공에 난 계단을 걷는 듯한 동작으로 내려오는 한 사람의 모습이 그들의 시야에 잡혔다. “대단해. 한 일년은 더 기다려야 할 줄 알았는데.” 얼굴의 반쪽을 검은 색의 가면으로 가린, 청년이라고 하기엔 다소 나이가 들어 보이는 느낌의 남자가 그렇게 입을 열자, 최하층을 수색하고 있던 다른 세 사람도 화들짝 정신을 차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보기에는 평범한 보통의 남자인 듯 보였지만, 그가 등장한 순간부터 주위의 공기가 기묘하게 짓눌리는 듯한 느낌이 전해지고 있었다. 위압감? 아니다. 이 기운은 위압감이라기보다는 천천히 가라앉는 듯한 느낌에 가깝다. 모든 사물에 무게가 더해져 조용히 그리고 끝없이 바닥으로 침전하는 그런 느낌. 바닥이 보이지 않는 늪속으로 천천히 사지를 옭아매며 끌어당겨지는 듯한 기묘한 감각에 준상은 얼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남자는 긴장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을 하나 하나 마주하더니 이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한데?” 뭔가 잘못 되었다는 표정으로 다시 한 번 일행의 면면을 살피던 남자는 이럴 리가 없다는 듯이 당혹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어떻게 된 거지? 아직 50레벨도 못 된 애송이들 뿐이라니. 이럴 리가 없는데?” 그는 준상의 어깨 위에서 모습을 감추고 있던 리체스를 바라보더니 다시 이렇게 말했다. “얼씨구. 이젠 실패작까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영문이지?” 그 때 기안이 소리쳤다. “너는 누구냐!” 하지만 남자는 그런 기안을 보고 이렇게 대답했다. “이쪽은 아예 시드조차 없군. 그 목걸이는 애완동물의 증표인가? 이거 참... 어이가 없어서. 이걸 어쩌면 좋지?” 인터페이스가 있으면 별 다른 조작 없이 바로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을 텐데. 몽몽이의 반응을 보면 예상되는 바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만약 그렇다면 지금쯤 서유미나 블레이크, 그리고 맥밀란의 휴대폰에서 시끄럽게 알림음이 들려와야만 한다. 준상은 조심스럽게 휴대폰을 꺼내 안목을 실행시켰다. “...” 그러자 역시나 남자의 머리에서 짙고 검은 아지랑이가 퍼져 나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몽몽이가 반응할 때부터 이상하다 싶었더니, 역시나 다크 시드 사용자였다. 머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짙은 아지랑이의 모습으로 미루어 지금까지 준상이 상대해 왔던 여느 사용자와는 격이 다른 느낌. 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어째서 서유미나 블레이크, 그리고 맥밀란의 휴대폰이 잠잠한 것일까. 안목 능력에 이상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상정할 수 있는 가능성은 단 하나. 이 자는 일정 영역 안에서 시스템의 영향력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이어서 통찰의 기능을 실행하자, 남자의 머리 위에 깃발이 표시되었다. 그 색깔은 붉은 색. 그것도 피처럼 밝은 붉은 색이다. 다크 시드 사용자면서 이 정도의 능력을 갖춘 존재. 준상의 기억 속에 그런 존재를 가리키는 명칭은 하나 뿐이다. “칠성좌?” “...” 순간 남자의 얼굴이 팍 찌푸려진다. “그 이름, 어디서 들었나.” 남자는 잔뜩 찌푸린 얼굴로 준상을 바라보더니 이내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하. 일전에 아랫것들이 된통 혼쭐이 난 적이 있다더니, 그게 바로 네 놈 짓인가? 그 이름을 알고 있는 걸 보면.” “...” “아니... 그것도 뭔가 이상한 걸. 네 놈의 레벨은 이제 고작 32. 그 레벨 가지고는 어림도 없는 일일텐데. 이거 참... 도대체 뭐가 뭔지.” 남자는 고개를 다시 갸웃거리더니 다시 말했다. “하긴 그걸 안다고 해서 꼭 네놈이 당사자라는 법은 없겠지. 하지만 오면서 보니 바깥에는 아무도 없었는데. 곤란하군. 정말로 곤란해.” 준상은 그렇게 혼자 중얼거리는 남자를 향해 물었다. “무엇이 곤란하다는 거지?” “그게 말이지...” 남자는 턱을 쓰다듬으며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역시 좀 더 기다리는 편이 옳았으려나. 하지만 주문을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고... 그렇다고 여물지도 않은 씨앗을 유통할 수는 더더욱 없는 일이고.” 버릇인지 그렇게 혼자 중얼거리던 남자는 레벨이 가장 높은 서유미를 유심히 바라보더니 다시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역시 무리야. 이래서는 도저히 유통할 수가 없어.” 그리고는 한숨을 푹 쉬더니 위를 올려다 보며 다시 말했다. “역시 레벨 디자인에 실수가 있었나. 레벨 50은 되어야 돌파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할 수 없지. 다시 배치를 해보는 수밖에.”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다시 말했다. “아, 미안하군. 혼자 중얼거려서. 어떻게 여길 돌파해 들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함께 가줘야겠다. 아직 덜 여물어서 상품 가치는 없다지만, 그렇다고 내 존재가 이곳의 주민들에게 드러나서는 곤란하거든.” “...” 남자는 준상과 그 일행이 무언가 다른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손가락을 딱 하고 튕겼고, 그와 동시에 지하 벙커 최하층 전체를 거대한 마법진이 감싸버렸다. “이건?” 리체스가 놀란 음성을 터뜨리는 순간, 준상과 그 일행들은 마법에 의해 어디론가 전송되어 버렸다. 준상과 그 일행이 모습을 드러낸 곳은 빛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어두컴컴한 공간이었다.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낸 그들은 발밑이 쑥 꺼지는 듯한 느낌에 당황하기는 했지만, 어렵지 않게 바닥에 착지했다. “히익!” “누, 누구냐!” 그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어둠 속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라보니 군복을 입은 군인과 노란 방호복을 입은 사람, 가운을 입은 사람까지 있었다. 동양인의 외모로 미루어 봤을 때, 그들은 아마도 지하 벙커에서 실험을 주도했던 자들이 아닐까 싶었다. 준상이 말없이 그들을 바라보자 남자가 뿜어내던 기묘한 감각에 제대로 움직일 생각조차 못하던 동료들이 준상에게로 모여들었다. “여기가... 어디죠?” “글쎄.” 준상은 일단 신기루 꽃이 이상 없이 작동하는지 확인해 보았다. 예상대로 석문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번에는 휴대폰을 꺼내 확인해 보았다. 역시나 카드나 그 외의 시스템 들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역시 시스템을 무효화시키는 능력을 지니고 있는 건가.”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곳에 아무렇게나 자신들을 던져 둘 이유가 없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언어 소통의 능력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정도. 준상의 중얼거림을 들은 서유미와 블레이크, 그리고 맥밀란은 얼른 휴대폰을 열어보더니 당황해 하는 표정을 지었다. “어, 어쩌죠?” 갑자기 힘을 상실해 버린 탓일까. 맥밀란은 두려움 가득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반신불수의 상황에 처해 본적이 있는 그녀이다보니 가지고 있던 힘에 대한 상실감이 더 크게 느껴지는 모양이다. 하지만 준상은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는 맥밀란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리 와.” “네?” “어서.” 맥밀란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머뭇거리다가 준상이 내민 손을 잡았고, 그 순간 갑자기 몸이 휙 딸려가는 느낌에 깜짝 놀라며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주위의 시야가 확 밝아지는 것을 느끼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느 틈엔가 그녀의 주위는 어린 아이가 낙서해 놓은 듯한 특유의 풍경을 지닌 요정계로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이건...” 뭐가 어떻게 된 일인가 싶은 표정으로 어리둥절해 있는데, 곧바로 그녀의 뒤를 이어 블레이크와 서유미가 모습을 드러내더니 계속해서 그들보다 먼저 어두운 공간 안에 들어와 있던 사람들이 연이어 뒤를 따랐다. 당황스럽기는 그들도 마찬가지. 중국인답게 곧바로 왁자하게 떠들어 대기 시작했지만, 서유미가 앞으로 나서며 식칼을 뽑아들고 외쳤다. “조용히!” “...” 그러자, 그들은 서슬 퍼런 서유미의 모습에 찔끔하며 입을 다물었다. 서유미는 그렇게 중국인들의 입을 다물게 만든 다음, 블레이크와 맥밀란에게 말했다. “일단 이들을 다른 곳으로 옮겨야겠어요. 흩어지면 여러모로 귀찮아지니 두 분이 도와주세요.” “네.” 정령의 문을 통해 검은 공간 안에 있던 이들을 정령계로 내보낸 준상은 리체스를 향해 물었다. “리체스.” “네.” “방금 그 놈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혹시 감이 잡히나?” “그게...” 리체스는 어두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무래도 요정계에서가 아니면 대적하기 힘들 것 같아요. 게다가, 그렇게 되더라도 이길 수 있다는 생각도 별로 들지 않네요.” “흠...” 만년을 산 요정 여왕과 최소한 동급, 또는 그 이상이라는 건가. 실전 경험이 부족한 리체스의 사정을 감안하면 역시 열세라고 밖에는 여겨지지 않는다. “어쩌죠?” 리체스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자신들이야 그의 몸에 설치된 정령의 문을 통해 이곳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 가능하다지만, 당사자인 준상은 그런 식으로 도망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준상은 처음부터 도망칠 생각이 없었다. 예정보다 빠르기는 하지만, 칠성좌나 시스템과의 전투는 이미 상정되어 있는 상황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오히려 자신의 능력을 얕보고 있는 지금이야 말로 적의 뒤통수를 후려갈길 절호의 기회가 아니겠는가. ============================ 작품 후기 ============================ 후기 앞으로 안 쓰겠습니다. 00344 트롤러 ========================================================================= 바로 죽이려 하지 않고 이런 곳에 데려다 놓았다는 것은 무언가 쓸모가 있다는 뜻. 게다가 또 한 가지 준상에게 유리한 점이라면, 상대가 리체스의 능력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것 같다는 점이다. 놈은 준상의 레벨을 단숨에 알아 봤을 뿐만 아니라 동료들 가운데 가장 레벨이 높은 것이 서유미임을 알아 보았다. 하지만 그들 가운데 정말로 가장 레벨이 높은 존재는 서유미가 아닌 리체스이다. 리체스의 레벨은 무려 99. 요정계가 아니라서 막대한 패널티를 받기는 하지만, 그렇게 따져도 무려 49레벨이다. 반가면을 쓴 놈이 지하 벙커에서 적정 레벨로 언급했던 것은 50이므로, 리체스의 레벨 역시 알아봤다면 사실이야 어찌 되었든 간에 그들이 검은 태풍을 돌파해 그곳에 도달한 이유를 그녀로 지목했어야 옳다. 하지만 놈은 그러지 않았다. 그냥 뭔가 이상하다며, 레벨 디자인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는 식으로 말을 했을 뿐. 이것은 다시 말해 놈이 리체스의 레벨이나 능력을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다는 뜻이 된다.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그리 어렵지 않게 생각할 수 있었다. 스스로의 능력인지, 아니면 놈이 쓰고 있던 반가면의 기능인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놈이 준상이나 다른 귀환자들의 머리 속에 박혀 있는 시드의 정보를 보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감별사처럼 말이다. 그것 말고도 놈은 여러 가지 말을 했다. 놈에게는 별 것 아닌 일상적인 얘기들일지도 모르나, 준상은 그 말들로부터 여러 가지를 유추할 수 있었다. 우선 놈은 시드를 상품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상품 가치를 가지는 최저한의 레벨은 50. 유통이나 주문 같은 말로 미루어 볼 때, 귀환자들의 머리 속에 박혀 있는 시드들은 별도의 유통망을 통해 누군가에게 공급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점을 이해한다면 갑작스럽게 검은 태풍이 나타난 이유도 짐작이 가능하다. 칠성좌가 누군가에게 급한 주문을 받았다. 그러나 적절한 수준까지 성장한 귀환자가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황. 게다가 귀환자가 처음 발생했던 시기를 고려해 보면 레벨 50에 도달한 자가 있을지도 역시 미지수였다. 그래서 칠성좌는 임의로 중국 정부를 뒤에서 조종해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실험을 실행시켰다. 그 결과 생겨난 것이 바로 검은 태풍인데, 이것은 놈의 말로 미루어 봤을 때 두 가지 노림수가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검은 태풍으로 뒤덮인 지역 일대를 일종의 던전과 같은 상태로 만들어 귀환자들이 더 빠르게 레벨을 올릴 수 있도록 만들고자 함이다. 처음이야 거대 마수들의 힘을 견디지 못하고 대량 학살 당할 수 밖에 없겠지만, 마수들이 검은 태풍 밖으로 빠져 나가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 미련하게 안에서 죽자 사자 싸우기 보다는 치고 빠지는 식으로 상대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렇게 마수의 능력을 가늠하고 어느 정도 적의 패턴을 알게 된다면, 그 다음부터는 파티를 짜든 공격대를 결성하든 해서 마수 사냥을 할 수 있을터. 한 두 마리라면 몰라도 거대 마수들을 일상적으로 사냥할 수 있게 된다면, 능력 향상과 레벨 상승이 뒤따르는 것은 따로 생각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마수 사냥에 익숙해지면 그 다음 수순은 무엇일까. 준상과 그 일행이 그러했던 것처럼 검은 태풍이 최초 발생했던 지하 벙커로 가서 그러한 현상을 일으킬 수 있도록 만든 무언가나 기타 연구 자료 같은 것을 찾으려 할 것이다. 하지만 검은 태풍의 중심으로의 여정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고, 이것은 다른 귀환자들 가운데서도 정예의 인원을 걸러내는 좋은 수단이 된다. 그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마침내 지하 벙커에 도착하면, 아까와 마찬가지로 놈이 나타나 시드의 능력을 스위치 끄듯 잠재우고 그대로 이곳으로 끌고 오면 되는 끝. 이런 식으로 적정한 수준의 귀환자들을 걸러내기 위한 수단, 이것이 바로 검은 태풍이라는 이상 현상을 만들어낸 또 다른 이유이다. 하지만 이러한 추측에는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칠성좌가 이런 일을 저지르는데 어째서 시스템이 가만히 보고만 있는가 하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다크 시드 사용자에 대한 제거 명령이 퀘스트로 발동될 정도라면 시스템과 칠성좌들이 협력관계라고는 생각하기 힘들다. 그렇다면 이런 식으로 칠성좌가 지상의 일에 개입해서 무언가 사건을 일으킨 것에 대해 시스템은 적절한 대응을 보여 주어야만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고 있다. 검은 태풍의 원인을 파악하라든가, 그 안의 마수를 처치하라는 식의 퀘스트가 나와야 정상 아니겠는가. 여기서 생각해 봐야 할 것은 지상에 출현한 마수들에 대해서도 일부러 서브 퀘스트를 발동시키지 않는 이상 시스템으로부터 퀘스트가 나오지는 않는다는 점. 이 점을 고려해 보면 시스템은 이런 식으로 검은 태풍이 발생하는 것 역시 일반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보통의 상황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칠성좌가 굳이 중국인들의 손을 빌려 실험을 실행했던 것에는 이런 식의 개입을 막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준상은 정령계를 개방해 작은 정령들을 주위에 흩어 놓으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복잡하군.” 그러자 혹시 틈새 같은 것이 있는지 미늘창으로 여기저기를 쿡쿡 찔러보던 기안이 말했다. “없어. 완전히 밀폐된 공간이야.” 뒤이어 리체스가 다시 말했다. “이쪽에 생존을 보조하는 마법진이 있어요. 지속적으로 공기를 공급하는 것 뿐이지만요.”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둘에게 말했다. “너희들도 일단 요정계로 돌아가 있는 편이 좋겠다.” 기안이 그런 준상을 보며 말했다. “무슨 꿍꿍이라도 있는 건가?” “일단은.” “흠...” 기안이 입을 다물자 리체스가 말을 이었다. “위험하지 않겠어요?” 준상은 부정하지 않았다. “위험하겠지.” “그럼...” 리체스는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뭔가 말하려 했지만, 기안이 끼어들었다. “뭔가 생각이 있으니 그러는 것 아니겠어? 필요하면 바로 부를테니 일단 돌아가 있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지.” “...” 기안의 말을 들은 리체스는 무언가를 생각하는가 싶더니 착용하고 있던 귀걸이를 떼어 준상의 귀에 달아 주었다. “공기를 공급하는 마법진이 활성화되어 있는 걸 보면, 마법 그 자체가 차단된 것은 아닌 듯 싶어요. 그러니 일단 이거라도 가지고 계세요.” “고맙다.” 시드의 능력이 차단되어 인벤토리에 담아둔 아이템은 꺼내어 사용하는 것이 불가능했지만, 이런 식으로 이미 가지고 있는 아이템은 활용이 가능한 듯 했다. 그것도 레벨 등의 착용 제한이 있는 아이템을 제외한 보통의 아이템 뿐이지만 말이다. 그 모습을 보고 기안도 자신의 방패를 내밀었다. “그렇다면 이것도 쓸 수 있겠지. 받아.” “이건 지금 내가 쓰기가 곤란하다. 수호자의 능력을 이끌어 낼 수가 없으니.” 기안의 영혼이 담겨 있는 수호의 신물. 이것 역시 유니크이므로 레벨 제한이 부여되어 있지 않지만, 수호자가 아니면 그 힘을 이끌어 낼 수가 없다는 문제가 있었다. 지금의 준상은 시드의 능력이 차단된 상태이므로 수호자의 능력을 끌어낼 수가 없다. 방법이라면 기안의 영혼이 준상의 영혼 대신 전면에 나서는 방법 정도. 분신에 빙의가 가능하다면 큰 도움이 되겠지만, 아쉽게도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능력을 뽑아낼 수는 없어도, 방패 그 자체의 방어력은 활용할 수 있을 거에요.”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던 기안이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분명한 일이지. 어떤 위험이 있을지 모르니 무기는 정령의 힘으로 대신한다 쳐도 방패 정도는 챙겨두는 편이 낫지 않겠어?” “확실히 그건 일리가 있군.”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기안으로부터 방패를 넘겨받았다. 방패가 그의 손으로 넘어오자 그녀는 잠시 비틀거리는가 싶더니 헤네스의 영혼이 다시 전면에 나타났다. 그녀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준상을 지켜보다가 그를 살짝 안으며 말했다. “부디 조심하세요.” 그러자 리체스도 준상의 이마에 조심스레 입을 맞추며 말했다. “누리 백일이 얼마 남지 않은 것 알죠?” “물론.” 두 반려는 그렇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준상을 잠시 지켜보다가, 머뭇거리며 정령의 문을 통해 요정계로 돌아갔다. 모두가 요정계로 가버리고 혼자 남게 되자, 준상은 방어복을 활성화시킨 다음 정령계에서 정령들을 불러내 자신의 몸을 감싸게 했다. 그리고 리체스가 찾아낸 마법진으로 다가가 그것을 어루만졌다. 이것은 도박이다. 적어도 살려서 이곳에 가둬둔 이상 이 마법진에 문제가 생기면 그것을 확인하러 올 것이 분명한 일. 스스로 이 마법진을 부수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는 일. 이 공간에 이미 존재하는 공기도 있으니 어느 정도의 시간이라면 정령의 도움이 없어도 견뎌내는 것이 가능하지만, 미약하기는 해도 많은 수의 정령을 부리는 준상은 자기 한 명 정도라면 필요한 공기를 자급할 수 있다. 준상은 심호흡을 하며 정령들의 반응에 이상이 없는지를 일단 다시 한 번 확인한 다음 화염의 정령력을 끌어올려 마법진을 파괴했다. 파창! 유리창이 깨지는 듯한 소음과 함께 마법진은 화염의 정령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그대로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기분 탓인지 모르지만, 어쩐지 조금 갑갑해진 듯한 느낌. 하지만 준상은 긴장과 흥분으로 가빠지려는 호흡을 가만히 조절하며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무언가 반응이 오기를 기다렸다. 두근. 두근. 신경을 쓰지 않으려 해도 끝없는 적막 속에서 홀로 울려퍼지는 자신의 심장 고동 소리가 예민해진 준상의 감각을 자꾸만 자극한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준상은 주머니 속에 넣어둔 휴대폰을 꺼내 보고 싶은 충동이 자꾸 생겨나는 것을 억눌러야만 했다. 언제 무엇이 나타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런 것을 보면서 주의가 흐트러져서는 곤란한 일 아니겠는가. 준상은 마치 명상에 드는 듯한 기분으로 호흡을 짧게 들이쉬고 깊게 내쉬었다. 그렇게 어둠 속에서 자신을 억누르던 준상은 마침내 허공에서 한 줄기 빛이 생겨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에이... 한창 끝발 날리는데 짜증 나게시리.” 바라보니 자신을 이곳으로 데려온 반쪽 가면의 남자가 아니다. 어둠으로 인해 정확한 인상착의를 확인하기는 어려웠지만, 지금의 준상에게는 그것으로 족했다. 남자는 팔목에 채워진 완갑 같은 것에서 손을 떼더니 부서진 마법진이 있는 곳으로 다가섰다. 애초에 이 안에 갇혀 있는 자들에게는 관심조차 없다는 태도. 하긴 다크 시드 사용자라면 시드의 능력을 잃은 귀환자들이 무슨 짓을 해도 감당하기 어려울테니 이상한 일은 아니다. 어쩌면 그들이 지닌 힘이 그런 식으로 신체 변이 능력에 특화된 것은 이런 상황에 대응하는 일에 최적화된 탓인지도 모른다. 준상은 머리를 긁적이며 마법진을 바라보는 놈에게로 빠르게 다가가 그 뒷덜미를 붙잡았다. “어?” 남자는 갑자기 자신의 뒷덜미를 무언가가 낚아채자 무슨 일인가 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곱슬머리와 약간의 들창코를 지닌 조금은 미련해 보이는 인상의 사내. 그 순간 준상의 시야에 들어온 남자의 외모였다. “누가 감히...” 사내는 인상을 구기며 팔을 들어 자신의 뒷덜미를 잡은 준상의 손을 쳐내려 했다. 그러나 그가 미처 팔을 다 들기도 전에, 준상의 손이 하얀 빛으로 물들었다. 그것은 바로 모든 것을 얼려 버리는 극한의 냉기. 얼음의 대정령이 지니고 있던 정령력을 있는 대로 쏟아 붓자, 남자의 몸은 삽시간에 얼린 동태 꼴이 되어 버렸다. “후...” 준상은 가볍게 심호흡을 한 다음 얼음 동상이 되어 버린 남자의 팔을 잡고 주먹으로 힘껏 내리쳐서 그것을 부러뜨렸고, 그런 식으로 완갑을 손에 넣자 화염의 대정령이 지닌 정령력을 일거에 끌어올려 놈의 몸에 퍼부었다. 아무리 강인한 신체 변이 능력을 지닌 다크 시드 사용자도 이런 식의 속성 공격은 견디지 못했다. 매캐한 냄새와 함께 급격하게 끓어올라 한 줌 재로 변해가는 남자의 모습을 차갑게 가라앉은 시선으로 지켜보던 준상은 잘라낸 남자의 팔을 녹여 조심스럽게 완갑을 벗겨 냈다. 처음 남자가 모습을 드러낼 때, 그는 이 완갑에 손을 대고 있었다. 그것을 본 순간 준상은 이 물건이 지금 자신이 있는 공간을 왕래하기 위한 도구라는 걸 바로 짐작할 수 있었다. 완갑에는 두 개의 보석이 박혀 있었다. 빨강 색과 파랑 색. 만약 짐작이 틀렸다면 준상은 한 번 더 수고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 준상은 일단 파란 색 보석을 눌러 보았다. 하지만 아무런 반응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붉은 색 보석을 누르자 곧바로 흰 빛이 그의 몸을 감싸며 어디론가 전송시켰다. 시야에서 흰 빛이 사라지자, 눈앞에서 두 명의 남자가 탁자에 앉아 트럼프 같은 것을 들여다 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들은 서로의 카드를 바라보다가 준상이 모습을 드러내자 힐끗 고개를 돌리더니 깜짝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웬 놈이냐!” 준상은 대답 대신 하얀 불꽃을 그들에게 쏟아 부었다. 00345 트롤러 ========================================================================= 다짜고짜 화염을 뿜어내어 기습을 가하자 놈들은 급히 신체를 변이시켰다. 한 놈은 목도리 도마뱀처럼 목 언저리가 부풀어 올랐고, 또 한 놈은 상체가 급격하게 부풀어 오르며 얼굴이 길쭉하게 늘어나기 시작한다. 단순히 변이만 시작된 것이 아니다. 목도리 도마뱀 형상의 적의 입으로부터 날카로운 독침 같은 것이 기습적으로 쏘아져 나왔으나, 준상은 왼손에 들고 있던 수호의 신물로 그것을 어렵지 않게 막아냈다. 그것이 적들이 보인 반응의 전부였다. 모처럼의 변이가 채 끝을 맺기도 전에 준상이 뿜어낸 하얀 불꽃이 마치 뱀처럼 놈들의 몸을 휘감았기 때문이다. 보통의 화염 정도는 충분히 변이된 신체로 견딜 수 있으리라 생각한 모양이지만, 불행히도 그들의 몸에 직격한 화염은 보통이라는 말로 표현하기에는 역시 무리가 있었다. “크아아악!” “아, 안 돼!” 살점이 급격하게 끓어올라 기화 하고, 그로 인해 살점이 터져나가며, 재생이 이뤄지기도 전에 한줌 잿더미로 변해간다. 서늘하게 가라앉은 시선으로 쓰러져 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준상은 그들의 움직임이 완전히 멈추자 천천히 주위를 돌아보았다. 새로이 도착한 방의 크기는 대략 여느 가정의 거실 정도. 방의 형태는 원형이었는데 중앙에는 준상이 갇혀 있었던 공간으로의 입구가 아닌가 싶은 작은 단상이 존재했고, 다시 주위에 탁자라든가 물품을 보관하는 사물함 같은 것이 존재하고 있었다. “허술하군.” 흔히 생각하는 감옥과는 아무래도 차이가 있는 느낌이긴 하지만, 시드의 능력을 상실한 귀환자는 육체를 단련하더라도 보통의 다크 시드 사용자를 감당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니 굳이 보안 시설을 추가하는 것 자체가 번거롭고 귀찮은 일이었던 모양이다. “나로서는 잘 된 일이지만.” 준상은 일단 쓰러진 적이 앉아 있던 곳을 살폈으나 트럼프 카드 외에는 특별한 것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 역시 하나의 단서가 되기에는 충분한 일. 이런 곳에서 트럼프를 즐기고 있다는 것은, 이들이 지구 출신이거나 최소한 그곳의 문화를 접한 적이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놀이라는 것은 해당하는 세계의 문화 중에서도 가장 특징적인 것 가운데 하나가 아니던가. 준상은 다시 사물함을 열어 보았다. 그곳에는 방금 쓰러뜨린 자들이 입고 있던 것과 비슷한 종류의 옷가지들이 몇 벌 들어 있었다. “유니폼?” 유니폼이란 해당 인물이 어느 단체에 소속되었음을 알려주는 복식. 다시 말해 이곳의 다크 시드 사용자들이 단순히 아무렇게나 모여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어떤 식으로든 간에 집단과 조직을 형성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준상은 안에서 적당한 사이즈의 옷을 한 벌 꺼내고는 헤네스를 요정계로부터 불러냈다. 그녀는 정령의 문을 통과해서 준상이 있는 곳으로 나오기가 무섭게 주위를 돌아보고는 원래 그들이 갇혀 있던 곳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했다. “성공하신 건가요?” 헤네스의 말에 준상은 고개를 저었다. “일단 빠져 나오기는 했지만, 좀 더 살펴봐야 할 것 같아.” “그렇군요.” 준상은 헤네스에게 방패를 다시 맡겼다. “다시 가지고 돌아가 있어.” “하지만...” 그의 육체가 극도로 단련된 것은 사실이지만, 카드나 시드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지금 여느 때보다 방어가 취약한 것 또한 분명한 일. 하지만 준상은 입고 있는 방어복을 두드리며 다시 대답했다. “이게 있으니까. 그리고... 수호의 신물은 가지고 다니기에는 너무 눈에 띄어.” 헤네스는 준상의 손에 들린 옷가지를 보고는 그에게 다른 계획이 있음을 이해했다. “알았어요.” 그녀가 수호의 신물과 적이 불타고 남은 흔적을 챙겨 요정계로 돌아가자 준상은 일단 방어복을 해제하고는 사물함에서 꺼낸 유니폼으로 갈아입었다. 벽면에 붙은 거울을 바라보니, 어쩐지 청소 용역을 나온 아르바이트생 같은 느낌이다. 준상은 눈이 쉽게 드러나지 않도록 모자를 깊게 눌러 쓰고는 그 방에서 나왔다. 방 밖은 곡선의 통로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조명이 군데군데 박혀 있음에도 어둡고 음침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나선...” 가만히 통로를 살펴본 준상은 이 통로가 미묘하게 경사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곡선을 그리고 경사가 져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그가 지금 있는 곳은 신기루 꽃처럼 원기둥이거나 원뿔 형태의 구조물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렇다면 자신을 이곳으로 데리고 온 놈이 있는 곳은 위일까 아래일까. 달리 단서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 잠시 고민하고 있는데 때마침 아래쪽에서 발자국 소리와 함께 말소리가 전해져 온다. “아구구... 힘들다.” “소각장 당번이 제일 귀찮다니까.” “괜히 최하층이겠니.” 톤이 높은 것을 보니 여자 목소리다. 하지만 지금 당장 어디론가 몸을 피하는 건 이미 늦었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적당히 회피하거나 숨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지금 여기 있는 자들이 모두 다크 시드 사용자라고 가정한다면 이 정도 거리에서 급히 몸을 움직이는 기척 정도는 바로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준상은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갈까 하다가 아예 그녀들이 다가오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고개를 살짝 숙인 채 다가갔지만 그녀들은 자기들끼리 얘기를 나누느라 준상을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이대로 무사히 통과하는가 싶었지만 어깨를 스치며 지나갈 즈음, 그녀들 중 하나가 코를 킁킁거리며 이렇게 말했다. “응? 어디서 이상한 냄새 나지 않아?” “그러네.” 그녀들은 바로 몸을 돌리며 준상을 향해 말했다. “지금 소각장에 가는 거에요?” 준상은 말없이 고개를 돌려 그녀들과 눈을 마주쳤다. 라틴계로 보이는 외모를 지닌 두 명의 여인들은 준상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꿈결 속을 헤매듯 표정이 몽롱해졌다. 시선이 마주치자 요정들의 키스로 인한 부작용이 그녀들의 마음을 격하게 뒤흔들어 버린 탓이다. 키스는 카드나 시드와는 무관한 요정들의 고유 능력. 때문에 이곳에서도 준상의 얼굴에 남은 부작용은 어김없이 발휘되고 있었다. “뭔가 문제라도?” 단숨에 준상에게 매혹되어 버린 그녀들은 사춘기에 빠진 소녀마냥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아니, 그게...” 하지만 이 순간에도 준상의 머리는 민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처음 보는 인물과 마주쳤음에도 그것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은, 이 구조물 안에 기거하는 다크 시드 사용자들의 수가 생각보다 훨씬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손으로 꼽을 정도의 숫자뿐이라면 처음 보는 얼굴과 마주친 순간 대번에 의심을 해야 옳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눈앞의 이 여자들의 반응은 의심스러워하기 보다는 어째서 이런 사람이 있는 걸 지금까지 몰랐는가 하는 후회가 고작이다. 뿐인가. 이들은 준상이 다크 시드 사용자가 아닌 귀환자라는 것조차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다. 원래부터 그런 것을 알아보는 능력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이곳의 특수한 환경이 그런 식의 식별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이것은 준상으로서는 큰 호재가 아닐 수 없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바로 처리해 버려야 하나. 하지만 막힌 공간이라면 몰라도, 이렇게 트인 공간에서는 함부로 손을 쓰기가 어렵다. 정확한 정보도 없이 막무가내로 살육을 벌이다가 구석으로 내몰리면 도망도 치기도 어렵고, 그러다가 자신을 이곳으로 끌고 온 자가 나타나기라도 하면 그야말로 독 안에 든 쥐 꼴이 되어 버린다. 그것은 현재 준상이 처한 상태에서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 굳이 문제가 없다면 여기서는 일단 빠져나가는 것이 상책이다. 일단 이 아래쪽이 최하층이고 소각장 용도로 쓰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현재의 그로서는 큰 수확이다. “할 얘기가 없다면 이만.” 때문에 그렇게 말하며 몸을 돌렸지만, 이 여자들은 모처럼 찾은 매력적인 남자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잠깐만요. 그러지 말고 얘기 좀 해요.” “우리 지금 막 당번이 끝나서 한가하거든요.” “...” 얘기라. 그녀들의 말에 준상은 솔깃해졌다. 당장 아무것도 모른 채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것보다는 그녀들과 동행하는 편이 의심을 줄일 수 있을 것이고, 덤으로 자연스럽게 정보를 취득하는 것도 가능해진다. 생각을 정리한 준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라면 상관 없겠지.” 무덤덤한 대답이었지만, 여자들을 뛸 듯이 기뻐하며 얼른 그의 양 옆에 달라붙었다. “저는 제라라고 해요.” “제 이름은 도라에요.” “예쁜 이름이군.” 준상은 적당히 그녀들이 걸어오는 말에 맞장구를 쳐주며 위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감금실이 있던 곳에서 조금 위로 올라가자, 이내 커다란 광장 같은 것이 나타났는데 그 안에는 어림잡아도 백 명은 족히 되어 보이는 자들이 준상과 같은 유니폼을 입은 채 오가고 있었다. 전체적인 구조는 알 수 없었지만 한 곳에 이 정도 수가 바글거릴 정도라면, 이 구조물 전체에 도사리고 있는 다크 시드 사용자들의 수는 못해도 기본 세 자리 수를 가볍게 넘는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쪽이에요.” 두 여자는 조금은 으스대는 느낌으로 준상을 자신들의 숙소로 데리고 들어갔다. 숙소는 광장에서 다시 두 개 층 정도 더 올라간 곳에 있었는데, 기숙사라기 보다는 호텔 방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그녀들은 준상을 방 가운데 놓인 두 개의 침대 가운데 하나에 앉혀 놓고는 술을 내온다 안주를 만든다 하면서 수선을 떨었다. “...” 이곳까지 올라오면서 나눈 대화 중에는 별로 대단한 내용이 없었다. 그녀들이 이곳에 온 것이 약 삼 개월 전이고, 아직은 말단이라 소각장 당번 같은 허드렛일을 주로 한다는 것 정도가 전부였다. “자, 드세요.” “...” 그녀들이 내온 것은 기묘한 형태의 술병과 처음보는 종류의 과일이었다. 준상은 상기된 표정으로 자신에게 술을 권하는 그녀들을 바라보며 이렇게 물었다. “어디 출신이지?” 그 말에 먼저 대답한 것은 제라였다. “저희는 메오라에서 왔어요.” “메오라?” 준상이 되묻자 이번에는 도라가 수줍어하며 대답했다. “변방의 작은 별이라 잘 모르실 거에요. 기술 수준도 낮은 곳이고...” “그렇군.” 대수롭지 않은 듯이 대답했지만, 준상은 속으로 조금 놀라고 있었다. 라틴계의 외모로 미루어 남미 쪽에서 온 것이 아닐까 싶었는데, 실상은 아예 다른 별의 사람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 두 사람의 말에서 풍기는 뉘앙스로 미루어 보면 지금 이 구조물 안에 존재하는 다크 시드 사용자들은 메오라 외에도 다른 여러 별에서 온 사람들임을 알 수 있었다. 알 수 있는 것은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시드의 능력이 제한된 상황에서도 언어 소통 능력만은 활성화되어 있는 것이 이상하다 싶었는데, 우주 여기저기에서 모여든 다크 시드 사용자들이 함께 기거하는 상황이라면 이것 역시 충분히 납득이 가는 일이다. “블레이크씨는요?” 본인에게는 미안한 일이었지만, 당장 생각나는 남자 이름이 그 정도 밖에는 없었기 때문에 그녀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블레이크라고 소개한 상태였다. 제라의 물음에 준상은 오히려 반문했다. “글쎄. 어디일 것 같아?” 그러자 도라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라야 아닌가요? 아니면 페오르?” 새로 거론된 두 개의 별 이름을 다시 기억한 준상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제라가 안달을 내며 물었다. “그럼 어디에요? 타말? 헬몬?” 준상은 다시 고개를 저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글쎄. 일단은 비밀이라고 해두지.” 00346 트롤러 ========================================================================= 그 말에 두 여자는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뭐에요. 그게.” “얄미워. 그러지 말고 말해 줘요.” 준상은 그런 젤라와 도라를 바라보며 느긋하게 대답했다. “다른 사람의 비밀을 알고 싶다면, 자신의 비밀부터 말하는 것이 순서 아닐까?” 그 말을 듣자 젤라가 손을 번쩍 들며 말했다. “그럼 저부터요!” “말해봐.” 젤라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더니 이렇게 말했다. “저 사실은... 처녀에요!” “뭐?” 그녀의 말에 도라는 깜짝 놀라며 물었다. “너희 부족은 할례 같은 것도 없는 거야?” “응. 전대 족장님이 원시적인 풍습이라면서 그런 거 싹 없앴대. 다른 부족들 보기엔 역시 꺼림직한 모양이라 비밀로 하고는 있지만.” “그럼 혼인할 때는 어쩌고?” “그거야 뭐... 그 전에 슬쩍 대비를 해야지.” “아하.” 준상은 그녀들의 대화를 들으며 생각에 잠겼다. 지구에서도 오지의 부족들 중에는 할례 같은 풍습이 여전히 남아 있다. 멀리 볼 것도 없이 한국만 하더라도 90년대에는 포경 수술을 반드시 해야 한다는 인식이 있었는데, 이것도 따지고 보면 할례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젤라나 도라가 말하는 할례는 이런 식의 절제술이 아닌 처녀막을 제거하는 시술인 모양인데, 아마도 처녀혈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러고 보면 신기한 일이다. 사는 별이 다른데 이런 식으로 닮은 외모를 가지고 있는데다 생리적인 현상까지 동일하다니. 멀리 볼 것 없이 지구에서만 추려 봐도, 처녀막이라는 생체 조직을 가지고 있는 생물은 인간과 두더지, 그리고 고래 뿐이다. 어디인지 알지도 못하는 별의 주민과 지구인이 이렇게까지 유사한 신체를 가지고 있는 것을 과연 우연으로 치부할 수 있을까. 하긴 생각해 보면 리체스와 준상의 사이에서 누리라는 아이가 태어난 것부터도 곰곰이 생각해 보면 본래는 가능성이 매우 희박한 일이다. 아니, 불가능한 일이어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렇다고 리체스가 부정을 저질렀다는 식으로 의심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과 요정의 혼혈은 이미 누리 이전에도 존재해 왔으니 말이다. 멀리 볼 것도 없이 현재 요정 여왕의 자리를 맡고 있는 늑대 소녀 리시스가 좋은 예이다. 비록 양친을 잃은 일은 불행하기 그지 없지만, 요정과 인간과의 왕래가 끊긴 상황에서도 그런 혼혈이 남아 있다는 것은 달리 보자면 인간과 요정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 자손을 낳는데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뜻이 된다. 비슷한 뿌리를 가지고 있어도 이종 교배는 그 자손이 번식 불능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요정과 인간은 그런 식의 문제조차 생기지 않고 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좋을까. 준상을 이곳으로 데리고 온, 반쪽 가면을 쓴 자는 리체스를 가리켜 실패작이라고 말했다. 처음에는 이 실패작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이 넓은 우주에 인류와 비슷한, 아니 거의 동일한 종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이상, 이 모든 것이 누군가에 의해 인위적으로 일어난 현상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또한 이런 내용들을 종합하면 요정이 어떠한 목적을 위해 인류의 아종으로 만들어진 종족이라는 가설 또한 성립된다. “음...” 젤라와 도라는 자기들끼리 얘기를 주고 받다가 준상의 굳은 표정을 보자 아차 싶었던지 다른 얘기를 시작했다. “이번에는 제 차례에요.” “뭔데?” 젤라가 얼른 반문하자 도라는 가슴을 내밀고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사실은... 적성 검사에서 속성력에 재능이 있는 걸로 나왔어요!” 적성 검사가 뭔지도 모르는 준상은 그런가 보다 하고 말았지만, 젤라는 깜짝 놀라며 반문했다. “정말?” 도라는 우쭐대며 바로 대답했다. “정말. 그것도 무려 전기의 속성력!” “우와, 진짜 부럽다. 그럼 간부 확정이나 다름없잖아.” “헤헤. 세례를 받아봐야 하고 교육 과정도 있겠지만, 일단은 그런 셈이지.” “쳇. 계집애. 나중에 모른 척 하기 없기다.” 준상은 여기서도 몇 가지 중요한 정보를 얻었다. 그로서는 이곳에 있는 모든 자들이 영락없이 전부 다크 시드 사용자일거라 생각했지만, 이들의 대화로 미루어보면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었다. 적성 검사를 통해 적절한 재능이 있는 자들을 모아 온 다음, 세례라는 의식을 통해 그 재능을 개화시키는 과정이 필요한데, 지금 눈앞의 두 여성은 아직 그 세례라는 것을 받기 전이고, 그 때문에 소각장 작업 같은 허드렛일을 주로 하며 지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 세례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인데, 이것이 바로 다크 시드를 이식하는 과정일 가능성이 높다. 지금까지 준상이 겪은 다크 시드 사용자들은 육체 변이나 그것에서 분화된 특수 능력을 지닌 이들이 전부였지만, 방금 전에 도라의 입에서 나온 얘기 대로라면 그런 자들은 말단에 불과하고 간부급들은 속성력을 다룰 수 있어야만 하는 것으로 보인다. 현재 시드의 능력이 봉쇄된 준상이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정령계의 힘 뿐이다. 육체적으로 보통의 인간을 넘어서는 수준으로 단련이 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육체 변이 능력을 지닌 다크 시드 사용자들과 비교하면 어린애 수준이나 다름없는 일. 그런 상황에서 간부급 역시 준상과 마찬가지로 속성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것은 정말 큰 수확이 아닐 수 없다. 준상의 표정에 변화가 없자, 젤라와 도라는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었던지 공략 방법을 바꾸었다. 뺨이 발그레하니 상기된 모습으로 그녀들은 준상에게 살짝 눈을 흘기며 말했다. “치, 모처럼 비밀을 말해 드렸는데 제대로 대꾸도 안 하다니, 너무 한 거 아니에요?” “그러게.” 몇 잔 마시지도 않았는데 벌써 취한 것인지 살짝 혀가 꼬이고 있었다. 어쩌면 매혹 당한 효과가 술기운의 힘을 빌려 서서히 나타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그것을 핑계로 삼아 입고 있던 겉옷의 단추를 슬쩍 풀며 쇄골에서 가슴골에 이르는 매끄러운 피부를 과시하듯 준상에게 드러내는 것은 노골적인 유혹 행위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아, 더워.” “그러게. 왜 이렇게 덥지.” 스스로 말해 놓고도 민망한지 그렇게 서로에게 말을 건네며 준상의 눈치를 살핀다. 하지만 준상이 뭔가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바깥에서 짤막한 경고음이 몇 차례 이어졌다. “...” 혹시 감금되어 있던 인원이 탈출한 사실이 발각된 것인가 싶어 준상이 눈을 조금 찌푸리자, 젤라가 얼른 입을 열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이쪽 숙소에서는 가끔 이런 식으로 불시에 인원 점검을 하는 경우가 있거든요.” 도라 역시 모처럼 분위기가 무르익었는데 준상이 나가버리는 것이 두려웠는지 얼른 말을 이었다. “맞아요. 이쪽을 관리하는 감독관이 좀 별종이거든요. 심심하면 이것 저것 트집을 잡아서 아주 피곤해 죽겠어요.” “전에 딴 방 사람한테 들었는데, 노처녀라서 그렇데.” “정말?” 그렇게 대화를 주고받던 두 여자들은 준상에게 다시 말했다. “금방 나갔다 올게요. 얼마 안 걸릴 테니까 잠시만 기다리세요.” “...” 준상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젤라와 도라는 얼른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가만히 주의를 집중하자 바깥에서 번호 같은 것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다른 세계라도 인원 점검 하는 방법은 마찬가지인건가. 하기야 그냥 줄 세워 놓고 번호 부르면 되는데 그걸 굳이 이런 저런 방법으로 돈 들여서 바꾸는 것도 낭비가 아닐까 싶긴 하다. 그렇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의자에 앉아 가만히 잔을 기울이고 있는데,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며 날카로운 눈매의 여성 하나 보통의 유니폼과는 다른 파란색 유니폼을 입은 채 방으로 들어왔다. 아마도 이 여자가 방금 젤라와 도라가 말했던 노처녀 감독관인 모양이다. “와, 정말 있다.” “그러게.” “누구지? 멋있다...” 감독관이 안으로 들어와 준상을 쏘아보고 있는 동안, 열려진 문틈으로 이쪽 숙소에 기거하는 여자들이 고개를 내밀고 준상의 모습을 구경하며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젤라와 도라가 그랬던 것처럼 그녀들 역시 준상의 얼굴에서 발현되는 부작용에 그만 콩깍지가 씌여 버린 것이다. “조용히!” 하지만 감독관이 뒤를 돌아보며 그렇게 일갈하자 여자들은 얼른 고개를 움츠리며 입을 닫았다. 아무래도 이 노처녀 감독관에게는 뽀샤시도 물광도 별로 효력이 없는 모양이다. 그게 아니라면 강철 같은 정신력으로 버텨내고 있는 것인지도. 뒤쪽이 조용해지자 감독관은 준상을 노려보며 말했다. “이곳은 아직 세례를 받기 전의 여성들이 기거하는 곳이라 남성이 함부로 들어와서는 안 되는 곳입니다.” “그랬군.” 준상이 느긋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자, 감독관은 얼굴을 찌푸리며 다시 말했다. “설령 위반인 걸 몰랐다 해도 규칙은 규칙이니, 소속과 이름을 말씀해 주시죠.” 그러자 뒤에서 여자들이 쑥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런 규칙 있었나?” “그러게. 더구나 소속과 이름이라니?” “전에는 그런 거 안 물어 봤던 것 같은데.” 감독관은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꿋꿋하고 강경한 태도로 다시 준상에게 말했다. “자, 어서 말해 주시죠. 소속과 이름이?” 뜻하지 않은 위기 상황. 원래 그런 규칙이 있든 없든 지금의 준상에게는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소속이든 이름이든 신원 조회가 시작되면 준상으로서는 본색이 탄로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 어떻게 할까. 혼자 힘으로 모두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최소한 퇴로 정도는 준비가 되어야만 하는데, 지금 상황으로는 눈앞의 감독관을 해치우더라도 궁지에 몰릴 수 밖에 없다. 무작정 완력으로 해결할 수 없다면, 기략으로 승부를 거는 방법 뿐이다. 준상은 태연한 척 몸을 일으키고는 천천히 감독관에게 다가갔다. “...” 감독관은 준상이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며 다가서자, 당황하며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고 있었지만, 감독관 역시 준상과 눈이 마주친 순간 매혹되어 버렸던 것이다. 준상은 자신의 예상이 맞았음을 확인하자 입가에 살짝 미소마저 머금은 채 감독관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무, 무, 무슨...” 감독관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채로 말을 더듬기 시작했고, 뒤에서 지켜보던 여자들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방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흥미진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들 중에 오직 다른 반응을 보이고 있는 이가 있다면, 준상을 이 방 안으로 끌어들인 젤라와 도라 뿐이다. 그녀들은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으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기껏 공들여서 분위기를 띄워놨는데 남 좋은 일만 하게 생겼으니 그녀들로서는 안타까울 수 밖에 없는 일 아니겠는가. 준상은 자신에게 모든 이목이 집중되어 있는 것을 확인하자, 가만히 고개를 숙여 감독관의 손에 입을 맞추었다. 순간, “하윽!” 감독관은 자지러지는 듯한 비음을 흘리며 그대로 다리가 풀린 채 주저앉아 버렸다. 뿐인가. 문 밖에서 방 안을 훔쳐보고 있던 모든 이들이 마치 파도가 휩쓸고 지나가는 것처럼 우르르 넘어진다. 준상은 확실하게 처리하기 위해 다시 문가로 다가가 젤라와 도라의 손을 잡고 연거푸 키스를 했다. 본래 요정 키스의 전설 칭호로부터 발현 되는 광역 매혹 효과는 50퍼센트의 확률. 하지만 연이어 세 번이나 요정 키스가 행해지자, 방 안을 훔쳐보던 여성들은 연이어 발휘된 강력한 매혹 효과를 감당하지 못한 채 모두가 준상에게 매료 되어 버리고 말았다. 준상은 주저앉은 채 몽롱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들을 한번 쓰윽 돌아본 다음, 감독관을 향해 물었다. “이름이 뭐지?” 감독관은 마치 최면에 걸린 듯한 모습으로 준상에게 대답했다. “앙가라드. 제 이름은 앙가라드입니다.” 준상은 그녀의 뺨을 쓰다듬고는 그 얼굴을 자신에게로 끌어당기며 코 끝이 닿을 듯 말 듯 한 위치에서 말했다. “앙가라드. 좋은 이름이군.” “...” 앙가라드는 코앞에서 준상의 눈빛과 숨결과 목소리를 전해 듣자 그 자극을 감당하지 못한 채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아무래도 사랑에 굶주린 노처녀에게는 자극이 너무 심했던 모양이다. 준상은 감독관 앙가라드를 무력화시키자 방 입구 주위에 주저앉은 채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다른 여자들을 향해 말했다. “다시 부를 테니 지금은 일단 조용히 물러가 있도록.” “네.” 그녀들은 준상의 입에서 말이 나오자 일언반구의 대꾸도 없이 그 방의 주인인 젤라와 도라만을 남긴 채 조용히 자신들의 방으로 돌아갔다. 준상은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오는 젤라와 도라에게 다시 말했다. “그녀를 침대로.” “네?” 젤라와 도라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마도 준상의 입에서 침대라는 말이 나오자 뭔가 앙큼한 생각을 한 모양이다. “저대로 바닥에 내버려둘 수는 없지 않은가.” “아, 예...” 젤라와 도라는 그제서야 깊게 안도하며 얼른 앙가라드를 침대로 옮겨 눕혔다. 준상은 의자에 앉아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젤라와 도라가 조심스럽게 자신의 앞으로 다가와 앉자 다시 입을 열었다. “말해 둘 것이 있다.” “...” 긴장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두 여자를 향해 준상은 손바닥이 위로 향하도록 한 손을 펴 보이고는 그 안에 하얀 불꽃을 하나 만들어냈다. “아!” 그녀들은 준상의 손바닥 위에 생겨난, 보는 것만으로도 열기가 확 퍼지는 강렬한 불꽃을 보며 탄성을 터뜨렸다. 정령력에 대해 알지 못하는 그녀들은 준상이 만들어낸 불꽃을 보자 그것을 속성력이라고 생각했다. 속성력은 간부급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고귀한 능력. 그것도 이 정도로 강력한 열기를 별다른 과정 조차 없이 단숨에 뿜어낼 정도라면 상당히 고위급의 간부일 가능성이 높다. 준상은 불꽃을 없애고는 다시 말했다. “왜 나에 대한 얘기가 비밀인지, 알겠지?” 젤라와 도라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자신들에게만 이런 사실을 밝혔다는 것에 대해 크게 감격했다. 00347 트롤러 ========================================================================= “절대로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을게요.” “저도요.” 젤라와 도라는 눈을 반짝거리며 준상이 따로 말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얼른 입을 다물 것을 맹세했다. 광역 매혹의 효과는 물론이고 직접적으로 요정의 키스까지 받아 버린 탓에 약빨이 좀 과하게 먹힌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시선에 담긴 감정의 강도가 심상치 않아 보인다. 준상이 가만히 병을 들어 잔을 채워주고 있는데, 침대로 옮겨졌던 감독관 앙가라드가 깨어났다. 그녀는 후다닥 몸을 일으키더니 두 여성에게 잔을 채워주고 있는 준상의 모습을 발견하자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깨어났나.” 젤레와 도라에게 잔을 채워준 준상에게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앙가라드는 침대에서 얼른 일어나려 했지만, 너무 서둘렀던 나머지 발이 엉키며 넘어지고 말았다. “...” 젤라와 도라는 항상 날카로운 시선을 던지며 그들의 생활을 감독하던 이가 그런 식으로 망가지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준상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준상은 표정 없는 얼굴로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는 넘어진 상태로 얼굴을 감싼 채 감히 얼굴을 들지 못하고 있는 앙가라드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앙가라드는 준상의 발자국 소리가 등뒤에서 멈춤과 동시에 자신에게 손이 내밀어지자 우물쭈물하다가 마지못한 척 그 손을 잡았다. 준상은 감독관 앙가라드가 얼른 표정을 갈무리하며 몸을 일으키자, 슬쩍 손을 당겨 그녀에게 몸을 밀착시키며 귓가에 조그맣게 속삭였다.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잠깐 방을 구경할 수 있겠나?” “...” 가까이 다가선 준상의 체향과 나지막한 목소리에 완전히 이성을 장악당한 앙가라드는 이제 자기가 뭘 하는지조차 모른 채로 무작정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준상은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다시 돌아서서 젤라와 도라에게 말했다. “오늘은 재미있었다. 나중에 다시 보도록 하지.” “네!” 젤라와 도라는 작별을 뜻하는 그의 말에 일순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곧바로 다음 만남을 기약하는 말이 준상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다시 들뜬 모습이 되었다. 준상은 그녀들에게 정중하게 살짝 목례를 해보이고는 앙가라드에게 말했다. “앞장서도록.” “네.” 앙가라드는 요정의 키스에 당한 후유증인지 여전히 다리를 휘청거리고 있었지만, 준상이 다가가 손을 잡아주자 얼굴을 살짝 붉히며 은근슬쩍 그의 어깨에 몸을 기대왔다. 모두들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버린 덕분에 지나는 사람 하나 없이 조용해진 복도를 따라 조금 걷자 복도 끝에 위치한 앙가라드의 방에 도착했다. 방의 구조는 젤라와 도라의 그것과 비슷했지만, 침대가 두 개 놓여있던 그녀들의 방과는 달리 앙가라드의 방에는 침대가 하나만 놓여 있었고, 그 대신 업무용으로 보이는 책상 등이 놓여 있었다. 준상이 방 안으로 들어서자, 그때까지 수줍은 모습으로 가만히 그의 어깨에 몸을 기댄 채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던 앙가라드가 갑자기 돌변하며 사납게 준상에게 몸을 던져 왔다. “...” 마치 굶주린 야수처럼 목에 매달리는 앙가라드의 행동에 준상은 살짝 놀랐지만, 얼른 손을 들어 덮쳐오는 그녀의 입술을 가로 막으며 입을 열었다. “너무 급하군.” 그제서야 앙가라드는 자신의 추태를 깨달았는지 숨을 헐떡이며 얼른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그만...” “...” 얼마나 굶었길래 이러나 싶은 생각이 준상의 뇌리 속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모르는 척 의자로 다가가 앉으며 말했다. “앉아라.” 그 말에 앙가라드는 얼른 준상의 발치로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앉았다. “...” 거기가 아니라 맞은 편 의자에 앉으라는 얘기였는데. 젤라와 도라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기 때문에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하지만 이제 와서 다시 의자에 앉으라고 하기도 난감한지라 준상은 모르는 척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앙가라드.” “네.” “업무 현황을 위한 것이니 성실하게 답하도록.” “알겠습니다.” 명령하면 발이라도 핥을 듯한 기세인지라 준상은 속으로 실소를 머금은 채 질문을 던졌다. “방금 전에 인원파악을 한 이유가 무엇이지?” 감금되었던 인원의 도주로 인한 것이라면 대책을 세울 필요가 있기 때문에 이것이 가장 첫 번째 질문으로 선택되었다. 하지만 앙가라드는 생각할 필요조차 없다는 듯이 바로 대답했다. “세례 전의 순수한 인간 상태인 수습생들은 자칫 다른 인원들의 표적이 될 가능성이 있으므로 수시로 인원 파악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방금 전에 했던 인원 파악도 그런 이유입니다.” 다행히 중국인이나 자신들의 도주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표적이라면?” 준상의 질문이 이어지자 앙가라드는 모범 답안이라도 미리 외워둔 것인지 또박또박한 말투로 대답했다. “육체 변이 능력을 가지게 되면 피와 살육에 대한 욕구가 증대됩니다. 물론 같은 무리를 대상으로 그런 욕구를 해결하는 것은 금기에 해당되므로 강력한 제재를 받게 됩니다만, 이 욕구는 때로 조절하기 힘들 정도로 강력하게 발현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때문에 관리직의 경우에는 가급적 육체 변이 능력자 보다 살육에 대한 욕구가 떨어지는 속성 구현 능력자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속성 구현 능력자가 간부로 우대받는 이유가 또 한 가지 밝혀진 셈이다. 다른 모든 이를 자신의 먹이감으로 보는 자가 관리직이어서는 그 조직을 유지해 나가는 데 애로 사항이 만발할 수밖에 없는 일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준상은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럼 속성 구현 능력자는 받는 교육도 다르겠군.” 앙가라드는 바로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속성 구현 능력자란 다시 말해 사고만으로 에너지의 변환이나 흐름을 조절하는 것이 가능한 일종의 초상능력자이기 때문에 이 능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마법에 대한 교육이 추가됩니다.” 그런 것이었나. 속성 구현 능력이란 다시 말해 마법에 대한 재능을 의미하는 것이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이해하고 나자 준상은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정령술과의 차이는?” “정령술은 한 가지 의의로 정의된 에너지를 조작하는 능력입니다. 에너지 그 자체를 조작해 의의를 부여하는 마법과는 비슷하게 보이지만 선후 관계가 다릅니다.” 무슨 말인지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어쨌든 비슷하면서도 다르다는 말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너는 어떤 능력을 지니고 있지?” 이어진 질문에 앙가라드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대단치는 않지만 물의 속성력을 조금 지니고 있습니다.” “호오...” 상당히 자랑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기 때문에 준상은 간부들의 능력을 시험해 보기로 결정했다. “이걸 한 번 꺼 보도록.” 준상은 손바닥 위에 하얗게 타오르는 불꽃을 만들어냈다. 그러자 앙가라드는 크게 놀라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이, 이것은... 불꽃의 속성력 중에서도 최상급인 하얀 색...” 하기야 화염의 정령 가운데서도 가장 강력한 대정령의 힘으로 발현된 것이니 어지간한 다른 불꽃과는 차원이 다를 수밖에 없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앙가라드를 보며 준상은 다시 물었다. “무린가?” “그, 그것이... 제 능력으로는 도저히...” “흠...” 생각해 보면 간부급이라고는 해도 신입들 숙소 관리나 하는 수준이니 대정령의 힘과 비교를 하는 것 자체가 무리인지도 모르겠다. 앙가라드는 준상이 보여준 능력에 압도되었는지 이제 제대로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있었다. “앙가라드.” “네.” “다음 세례가 언제인지 궁금하군.” “그건...” 앙가라드의 표정에 어두운 기색이 스친다. 준상은 그 모습을 보고 다시 말했다. “왜? 내가 알면 곤란한가?” “아니, 그런 건 아닙니다. 다음 세례는 앞으로 1주기 후에 열릴 예정입니다. 다만 성좌의 주인께서 따로 예정이 있으시다면 이 시기는 조정될 수도 있습니다.” “1주기라...” 아무래도 1주일과 비슷한 의미가 아닐까 싶긴 한데, 구체적인 일수는 아무래도 차이가 있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그나저나 성좌의 주인이라니. 예전에는 단순히 상징적인 의미로만 여겼었는데, 이쯤 되고 보면 정말로 별을 다스리는 자라는 의미라고 봐도 좋을 듯 하다. 준상은 일단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는 다시 질문을 던졌다. “왜 대답을 망설인 거지?” “그, 그건...” 이어진 준상의 질문에 앙가라드는 눈에 띄게 당황했다. 준상은 그녀의 턱을 손가락으로 잡아 올려 시선을 강제로 맞춘 후 다시 물었다. “말해라.” “...” 앙가라드는 얼굴이 잔뜩 상기된 채 준상의 시선을 피하다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리고 싱싱한 아이들이 좋으신 건가 싶어서...” “...” 요컨대 자신보다는 역시 젤라나 도라 같은 젊고 싱싱한 여자들을 더 선호하는 건가 싶은 마음에 질투를 일으켰다는 의미다. 준상은 피식 웃고는 가만히 그녀의 얼굴에서 손을 떼고는 다시 말했다. “만약 그렇다면?” “...” 앙가라드는 입술을 깨물고는 준상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지금이라도 원하시는 아이가 있다면 대령하겠습니다.” “세례 전에 함부로 접촉해서는 곤란한 것 아니었나?” 준상의 말에 앙가라드는 고개를 저었다. “생명에 지장만 없다면 아무 문제없습니다.” “호오...” 준상은 엎드려 있는 앙가라드를 향해 말했다. “고개를 들어라.” 그 말에 따라 앙가라드가 고개를 들자 준상은 다시 말했다. “내가 여색이나 탐하고자 이곳을 찾았다고 생각하는가?” “그, 그게...” “게다가 세례 전의 중요한 인재들을 그런 식으로 간단하게 상납하려 들다니...” 앙가라드는 그제서야 아차 싶었는지 얼른 고개를 숙이며 죄를 청했다. “죄송합니다. 제 뜻은 그것이 아니라...” 준상은 의자에서 일어나 엎드려 있는 그녀의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나는 지금 죄를 묻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 준상은 앙가라드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정말 모르겠나?” “...” 물론 알 턱이 없다. 단지 그녀의 정신을 더욱 흐트러뜨리기 위해 던진 말이기 때문이다. 갈팡질팡하는 앙가라드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준상은 몸을 일으켜 그녀의 책상으로 다가갔다. 준상은 그 위에 놓여진 서류 몇 가지를 집어 들고 대충 살펴 보았다. 물론 그로서는 이들이 사용하는 문자를 전혀 알아볼 수 없었지만, 대신 몇 가지 도해 같은 것이 책상 위에 걸려 있는 것을 뒤늦게 알아보았다. “이 그림은 뭐지?” 멍한 표정으로 주저앉아 있던 앙가라드는 화들짝 놀라며 얼른 대답했다. “수습생들이 들어가서는 안 되는 제한 구역을 표시한 지도입니다.” 준상은 순간 이거다 싶은 느낌이 들었다. “설명해 보도록.” 앙가라드는 방금 전의 실수를 만회할 기회다 싶었는지 얼른 일어나 지휘봉 같은 막대기를 들고 브리핑을 시작했다. “제한 구역은 몇 가지로 구분됩니다. 우선 성좌의 주인이 계시는 최상층 지역과 통상의 기밀 업무가 이루어지는 상층의 몇 개 구역은 업무 제한 구역이므로 특정한 업무나 성좌의 주인께서 호출하시지 않는 이상은 접근해서는 안 되는 구역입니다.” 준상이 고개를 끄덕이자 앙가라드는 다시 아래쪽의 몇 개 지역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지역은 볼텍스의 존재 가치라 할 수 있는 통제 장치가 있는 곳입니다. 성숙된 씨앗의 소유자들은 매우 강력한 능력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상당히 위험하지만, 이 통제 장치가 있는 이상 그들은 조금 신체가 뛰어난 인간 수준의 능력 밖에는 발휘할 수 없게 됩니다. 사실상 수확을 위한 가장 중요한 설비이므로 수습생 뿐만 아니라 취급 인가를 부여 받지 못한 다른 모든 이들의 출입이 엄격하게 통제됩니다.” 드디어 찾았다. 겉으로는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 준상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짖고 있었다. 00348 트롤러 ========================================================================= 준상이 지도에서 통제 장치의 위치를 면밀히 기억하고 있는 동안에도 앙가라드의 브리핑은 계속 이어졌다. “그 외에 통상 업무에 관련된 지역이라 해도 경우에 따라 보안 등급이 적용되는 지역이 있습니다만 이 경우에는 특별한 출입용 장치를 요구하게 되므로 수습생들의 출입은 원천적으로 봉쇄됩니다.” “이를테면?” “이를테면... 현재 업무 구획 안에는 수확을 위해 생포된 씨앗의 소유자가 있습니다. 고객에 따라서는 씨앗을 추출하는 모습을 직접 보고 싶어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경우에는 고객의 안전을 위해 해당 구획 전체에 삼엄한 보안 태세가 발효됩니다.” “그렇군.” 이건 또 예상 못한 중대한 정보다. 수확을 위해 생포되었다면 모르긴 해도 최소 50레벨 이상의 능력을 지니고 있을터. 얼마나 강한 힘을 지니고 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최소한 준상이 하고자 하는 일이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준상은 브리핑이 끝나자 고개를 끄덕이고는 앙가라드의 뺨을 손가락으로 가만히 쓰다듬었다. 귀밑으로부터 시작하여 턱선을 따라 천천히 내려오다가 입술을 어루만지는 손가락의 감촉이 이어지자 앙가라드는 이내 달뜬 표정으로 지으며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숨을 헐떡이기 시작했지만, 앞서 방 안에 들어 오면서의 일 때문인지 억지로 참는 기색이 역력했다. 준상은 가만히 그녀의 입술을 주시하다가 조용히 말했다. “씻고 와라.” “아...” 앙가라드는 그 말이 의미하는 바를 깨닫자 얼른 준상을 향해 깊이 고개를 숙인 뒤 욕실로 허겁지겁 달려갔다. 하지만 준상은 그런 뒷모습을 싸늘한 시선으로 지켜보다가 그녀가 욕실 안으로 사라지자 얼른 휴대폰을 꺼내어 지도를 촬영했다. 면밀하게 기억해 두고자 노력하기는 했으나, 이렇게 사진으로 찍어 두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인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는 일. 사진 촬영을 끝낸 준상은 휴대폰을 챙긴 다음 팔목에 채워진 팔찌를 작동시켜 분신을 하나 만들어 냈다. 정상적으로 분신이 만들어지는 것을 확인한 준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평상시 인벤토리에 보관하는 다른 유니크 아이템들과는 다르게 항상 착용하고 있는 데다, 착용 제한이 없는 유니크 아이템의 특성 덕분에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도 문제 없이 작동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분신은 만들어지기가 무섭게 옷을 입고 있던 옷을 벗더니 그대로 욕실로 들어갔다. “앗!” 앙가라드는 정성껏 몸을 씻다가 욕실 안으로 들어온 분신의 모습을 보고는 크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가까이 다가와 몸을 쓰다듬는 분신의 손길에 마치 해파리처럼 흐느적거리며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가뜩이나 남자에 굶주려 있었던 데다, 준상에게 매료되어 버린 그녀로서는 숙련된 그 치명적인 손길을 감당해 낼 도리가 없었다. 이렇게 분신을 붙여 두면 속으로 다소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더라도 당분간은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할 터. 앙가라드의 숨 넘어 가는 듯한 신음 소리를 뒤로 한 채 준상은 그녀의 방을 조용히 빠져 나온 다음 통제 장치가 있는 구역으로 걸음을 옮겼다. 해당 구역은 지도 덕분에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지만, 역시나 가장 중요한 장소답게 경비가 매우 삼엄했다. 문제는 굳게 닫혀 있는 저 출입구이다. 경비병이야 정령력으로 어찌 어찌 처리를 한다 쳐도 저 안에 몇 단계의 출입구가 있는지 알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고, 만약 감시 카메라 같은 것이 있어서 곧바로 입구를 차단하기라도 하면 그야말로 독 안에 든 쥐가 되어 버리고 만다. 어찌 해야 좋을지 잠시 고민하고 있는데, 문득 입구가 열리며 몇 명의 사람이 밖으로 나왔다. “이번에 온 고객이 대단하긴 한가봐. 틈만 나면 보안 검열을 해대니.” “누가 아니래.” 그렇게 투덜거리며 입구를 통과하자 마지막에 뒤따라 나온 중년 남자가 입구를 나오기가 무섭게 그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언제 또 불시 점검이 있을지 모르니 가급적 숙소에서 대기하도록.” “알겠습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대답하고는 숙소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자 관리자급으로 보이는 중년 남자는 경비병들에게 목례를 해보이고는 어디론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준상은 조용히 그 남자의 뒤를 따르려 했지만, 하필 바로 그 순간 사방에서 시끄러운 경고음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아까 여자들 숙소에서 들었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의 경고음이 사방에서 울려 퍼지자 준상은 직감적으로 이것이 자신으로 인한 것임을 깨달았다. “젠장! 막 교대했는데!” “미치겠네. 이번엔 또 뭐야?” 방금 전에 통제 장치를 빠져 나왔던 일단의 사람들이 다시 발걸음을 돌려 입구로 향했고, 경비병들은 긴장된 표정으로 허리춤에 차고 있던 통신기 같은 것을 꺼내 들고는 무언가 연락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탈출자가 있음을 확인한다면, 우선적으로 통제 장치와 같은 장소의 경계가 강화될 것은 불보듯 뻔 한 일. 준상은 그들이 다시 통제 장치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는 더 이상 지체할 여유가 없음을 깨달았다. “할 수 없지.” 곧바로 분신을 하나 더 불러낸 준상은 그것을 조종해 경비병들을 습격했다. 갑작스레 어둠 속에서 분신이 튀어 나와 달려들자, 경비병들은 급히 몸을 변이시키며 반격을 시작했다. 물론, 카드와 시드를 쓸 수 없는 상황이다 보니 분신은 경비병들의 반격에 곧바로 나동그라질 수밖에 없었고,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은 표정으로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연기가 좀 어설프다 싶기는 했지만, 입구를 통과하던 사람들이 놀라 지켜보는 가운데 경비병들은 급히 분신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뭐지?” “글쎄. 아까 연락하는 걸 얼핏 들으니 누가 탈출했다는 것 같던데. 방금 그 자였던 모양이야.” “근데 여긴 어떻게 알았지?” “글쎄.” 그렇게 두런거리면서도 그들은 각자 속성력을 발동 시킨 채 경비병들 대신 주위를 경계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기술자 같은 존재들이라 그런지 그들이 지닌 속성력은 그리 대단한 수준이 아니었다. 물론 준상의 기준에서 봤을 때 얘기지만 말이다. 그들의 능력을 대략이나마 확인한 준상은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곧바로 정령계를 활성화시킨 다음 얼음의 대정령이 지닌 힘을 있는 대로 끌어올려 그들을 향해 쏘아 보냈다. 갑자기 쏟아진 극도로 차가운 냉기에 그들은 손 쓸 틈도 없이 그대로 얼어붙은 동상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얀트훈센을 수백년 동안 누구 하나 출입할 수 없을 정도의 얼어붙은 대지로 만들어 버렸던 대정령의 힘을 감당하기에는, 그들이 지닌 속성력은 너무나 미약하기 그지 없었다. 준상은 투명화 상태로 입구로 들어선 다음 팔찌 같은 것을 조작하고 있는 중년 남자에게로 다가갔다. 아니나 다를까. 이 남자가 차고 있던 팔찌도 감금실을 탈출할 때 사용했던 완갑과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었다. 준상은 얼른 동상이 되어 버린 중년 남자의 팔을 부수어 팔찌를 획득한 다음 거기 달린 파란 보석을 눌러 입구를 열고 안으로 들어간 다음 입구를 닫았다. 안으로 들어서자 기밀실로 보이는 입구가 또 하나 모습을 드러냈지만, 이것은 잠겨 있지 않았다. 얼른 문을 열고 들어서자 안에서 무언가를 조작하고 있던 자들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그를 돌아 보았다. “침입자다!” 그들은 낯선 이의 모습을 보자 크게 소리치며 얼른 자신들이 지니고 있던 속성력을 끌어올려 공격을 가했지만, 준상의 몸에서 확 피어오른 하얀 불꽃이 그 모든 공격을 단숨에 집어 삼켜 버렸다. 마치 거대한 해일이 해안의 잔물결을 삼켜 버리는 듯한 그 광경에 그들은 대번에 얼이 빠져 버리고 말았다. “이럴수가!” 속성 공격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몇몇이 다시 육체 변이를 일으키려 했지만, 그들의 몸이 제대로 변이되기도 전에 다시금 차가운 얼음의 파도가 그들을 덮쳐 버렸다. “후우...” 준상은 들끓는 정령의 힘을 일단 진정시킨 후, 숨을 고르며 리체스와 헤네스를 정령의 문을 통해 불러들였다. 그녀들은 거칠게 숨을 토하고 있는 준상의 모습에 크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괜찮으세요?” 얼른 다가서며 부축하는 헤네스의 손을 움켜쥔 준상은 리체스와 헤네스에게 급히 말했다. “헤네스, 입구를 부탁한다.” “알았어요.” 헤네스는 곧바로 기안을 불러낸 다음 주위의 잡동사니를 집어 들어 입구에 바리케이드를 쌓았고, 곧이어 블레이크와 맥밀란, 서유미 등이 다시 정령의 문을 통해 모습을 드러냈다. “너희들도 그녀를 도와 입구를 지키도록.” “알겠습니다.” 카드와 시드가 통하지 않는다는 점 때문인지 블레이크와 맥밀란은 각종 화기를 잔뜩 꺼내 짊어진 상태였다. 이것들은 모두 타클라마칸 사막으로 접근하는 중에 발견해 노획한 중국군의 무기들이었는데, 신뢰성이 다소 떨어지기는 하지만 전문적인 군사 교육을 받은 블레이크와 맥밀란이 사용하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리체스는 나와 함께 간다.” “네!” 통제 장치로 향하는 통로에는 다시 몇 개의 출입문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이곳이 습격당한 것이 확인되자 모조리 봉쇄 되어 버린 상태였다. 우려하던 최악의 상황이긴 했지만, 다행히도 지금 준상의 곁에는 만렙 요정 여왕인 리체스가 있다. “열 수 있겠어?” “문제 없어요.” 리체스는 입구를 봉쇄하고 있는 마법을 잠시 살피더니 단숨에 파훼해 버렸다. “만들기도 어렵고, 여는 것은 더 어렵지만, 부수는 거라면 간단하죠.” 으스대며 말하는 리체스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인 준상은 보안 장치가 파괴된 문을 화염의 정령력으로 파괴한 뒤 안으로 들어섰다. 때마침 뒤쪽에서 폭음과 함께 총성이 울려 퍼지기 시작한다. 현대 화기들이 저들 다크 시드 사용자에게 얼마나 큰 타격을 줄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지만, 수호의 신물을 지닌 기안이 입구를 가로 막고 있는 이상 입구가 단숨에 돌파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리체스가 연이어 보안 장치 들을 파훼하기를 몇 번이나 했을까. 준상은 마침내 기묘하고 복잡한 마법진과 장치들 가득 들어차 있는 밀폐된 방에 들어설 수 있었다. “알아볼 수 있겠어?” “으음...” 리체스는 방 안에 가득 차 있는 마법진과 장치들을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당장은 무리에요. 시간이 넉넉하게 주어진다면 몰라도.” “할 수 없군.” 그녀가 이렇게 말할 정도라면 다른 누가 와도 마찬가지다. 준상은 미련을 버리고 곧바로 화염의 정령력을 있는대로 끌어올려 그 방안에 존재하는 모든 마법진과 장치들을 단숨에 파괴해 버렸다. 그러자, 마치 지진이 일어난 듯한 격한 진동이 주위를 뒤흔들기 시작한다. 준상은 가장 먼저 신기루 꽃으로 통하는 석문을 소환해 보았고, 이상없이 정상적으로 석문이 소환되는 것을 확인하자 왔던 통로로 다시 달리며 기안에게 연락을 했다. “제약이 풀렸다! 마음껏 날뛰도록!” 요정의 연락 수단을 통해 준상의 그와 같은 말이 전해지자, 방패를 들고 힘겹게 경비병들의 공격을 막아내던 기안이 크게 웃으며 소리쳤다. “크하하하! 이 망할 자식들! 다 죽었어!” 그녀가 크게 웃으며 미늘창을 마구 휘둘러 대기 시작하자, 방어에 전념하고 있던 블레이크와 서유미 자신들의 콤보 카드를 발동시키며 앞으로 뛰쳐 나갔다. 각양 각색의 괴물 형상으로 모습을 바꾼 채 방어를 뚫기 위해 공격을 가하고 있던 경비병들은 갑자기 돌변한 그들의 모습에 크게 놀랐다. 하지만 그들에게 있어 진짜 재앙은 머리 위에서 갑자기 떨어져 내렸다. 구구구구궁! 금방이라도 그들이 있는 통로 전체가 단숨에 무너질 것처럼 격한 진동이 울려 퍼지는가 싶더니, 갑자기 커다란 발 하나가 천장을 뚫고 내려와 경비병들을 단숨에 밟아 으깨며 바닥을 뚫고 지나가 버린 것이다. “어?” 경비병들을 향해 웨펀 차지를 하기 위해 몸을 낮추던 기안은 갑자기 눈앞에 떨어져 내린 그 거대한 금속 재질의 물체를 보고 얼이 빠져 버렸다. 물론 뒤따르고 있던 블레이크나 서유미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뭐죠?” “그, 글쎄요.” 당황해서 굳어 있는 사이, 그 발은 천장에 커다란 구멍 만을 남긴 채 들어 올려졌고, 그렇게 생겨난 구멍을 통해 천둥이 치는 듯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크하하하하! 역시 하늘은 이 철골의 제왕을 버리지 않았구나! 이 망할 괴물 자식들, 다 죽여 주마!” 통제 장치를 부수고 급히 달려온 준상과 리체스 역시 그 목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철골의 제왕?” 리체스의 말에 준상이 대답했다. “시드 추출을 위해 생포되어 온 자가 있다더니, 아무래도 그 자인 모양이다.” 준상은 방금 전에 일어난 일은 미처 보지 못했지만, 눈앞에 참혹하게 으깨어진 채 흩어져 있는 육편들과 천장에 뚫린 구멍을 보고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는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철골인지 뭔지 하는 자의 능력이 엄청난가 보군.” 문제는 과연 그의 능력으로 성좌의 주인을 상대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겠지만, 어찌 되었든 이것은 준상에게는 큰 기회가 아닐 수 없다. 준상은 휴대폰을 꺼내어 아까 촬영해 두었던 지도를 모두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그 자가 설치는 동안, 우리는 이곳으로 간다.” 그의 손가락이 가르킨 곳은 성좌의 주인이 기거하는 최상층이었다. 00349 트롤러 ========================================================================= 준상이 내민 휴대폰 화면에 나온 지도를 보고 리체스가 문득 이렇게 말했다. “이거...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느낌인데요?” “무슨 소리야?” 무너진 곳 너머로 넘어가기 위해 도움닫기를 준비하던 기안의 물음에 리체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손뼉을 치며 외쳤다. “맞아요! 신기루 꽃!” “뭐?” “이 도면, 알맹이만 채워지면 신기루 꽃이랑 판박이에요.” “...” 듣고 보니 리체스의 말이 맞았다. 신기루 꽃의 경우에는 속이 빈 고깔 모양의 탑인데 반해, 이 도면에 나타난 구조물은 안이 채워져 있다는 것 정도가 다를 뿐이다. “흠... 그렇다는 얘기는...” 준상의 말에 리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이 중앙의 기둥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은 최상층으로 향하는 통로라는 얘기가 되는 거죠.” “...” 준상이 예정했던 경로는 외벽을 타고 만들어져 있는 나선형의 통로였지만, 리체스의 추측이 사실이라면 굳이 그럴 것이 아니라 중앙의 전용 통로로 곧장 올라가는 것이 가능해진다. 통제 장치가 있는 곳은 출구가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어차피 나선 통로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다시 중앙의 광장 지역을 돌파할 필요가 있다. 지도 상으로 보면 중앙 통로의 입구가 되는 부분이 광장 지역을 통과하므로 가는 도중에 충분히 확인이 가능하다. “가까운 길이 있다면 굳이 멀리 돌아갈 필요는 없는 일이겠지.” 문제는 그 경로에 경비 병력이 좍 깔려 있으리라는 점이겠지만, 방금 전에 철골인지 뭔지 하는 자가 바닥을 뚫어준 덕분에 생각보다 일이 더 쉬워졌다. 준상은 몽몽이를 불러내 주위에 흩어진 다크 시드나 기타 아이템들을 모아 들이게 하고는 기안을 향해 외쳤다. “기안! 내려간다!” “뭐?” 먼저 구멍을 넘어가 미늘창으로 신나게 경비병 들을 두들겨 대고 있던 기안은 준상이 그렇게 말하고 구멍으로 뛰어 들자, 혀를 차며 외쳤다. “젠장! 그럴 거면 미리 말해 주던가!” 그러자 블레이크와 맥밀란이 외쳤다. “먼저 내려가세요! 뒤를 맡겠습니다!” “괜찮겠어?” “맡겨 주세요!” 기안은 미덥지 않은 눈치였지만, 새로운 경비병들이 통로로 우르르 쏟아져 나오자 못 이긴 척 구멍으로 뛰어 내렸고, 서유미가 그 뒤를 따랐다. 블레이크는 벽에 설치한 장치에 스위치를 넣고는 맥밀란에게 말했다. “소위님!” “...” 맥밀란은 잠시 주저하는 기색이었지만, 경비병들이 구멍으로 접근하자 얼른 블레이크의 목을 감으며 안겼고, 그녀가 자신의 품으로 들어오자 검은 피부의 거한은 망설임 없이 구멍 아래로 몸을 던졌다. “쫒아라!” 경비병들은 블레이크와 맥밀란마저 구멍 아래로 몸을 날리는 것을 보고 곧바로 뒤따르려 했지만, 그 순간 강력한 폭발이 일어나 그들을 통로 너머로 밀어내고 말았다. 육체 변이를 마친 경비병들에게 이 정도 폭발은 사실 큰 문제가 아니었지만, 좁은 구역 안에서 폭발물들이 일시에 기폭되자 그 폭압으로 인해 밀려나는 것 까지 막아낼 수는 없는 일이었고, 그로 인해 안 그래도 철골의 제왕 때문에 파괴되어 있던 통로가 2차 붕괴를 일으키면서 다수의 경비병들이 무너지는 잔해 속에 파묻히고 말았다. 블레이크가 맥밀란을 안은 채 화려한 폭발을 뒤에 남기고 떨어져 내리자 먼저 내려와 있던 기안이 그의 등을 후려치며 말했다. “제법인데?” “하하, 감사합니다.” 준상은 모두가 내려오자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쪽 방향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침입자다!” 경비병은 아니었지만, 유니폼을 입은 자 하나가 그들을 발견하고 그렇게 외치자, 뒤이어 다른 방에 있던 자들 역시 달려 나오며 일제히 육체 변이를 일으켰다. “정말 우글우글 거리는구만.” 기안은 혀를 차며 곧바로 웨펀 차지를 발동해 눈앞에서 육체 변이를 일으키며 튀어나오는 한 남자의 몸을 미늘창으로 단숨에 꿰뚫었다. 하지만 복부를 관통 당했음에도 놈은 오히려 자신의 배에 꽂힌 미늘창을 오히려 두 손으로 움켜 쥐며 어깨 위에서 집게 같은 것을 만들어내 기안의 목을 노렸다. “조심하세요!” 하지만 집게가 완전히 만들어지기도 전에 뒤에서 달려든 서유미의 아랑도가 놈의 목을 단숨에 베어 버린다. “이거 정말로 괴물이잖아?” 기안은 혀를 차며 목이 잘리고 나서도 꾸물거리는 괴물의 시체로부터 미늘창을 빼낸 다음 서유미의 뒤를 따랐다. 질풍처럼 통로를 돌파하자 광장으로 통하는 직선형의 계단이 나타났다. “아래쪽으로!” 준상이 계단을 올라오던 다크 시드 사용자의 몸을 숄더 차지로 들이 받으며 그렇게 외치자, 리체스의 낭랑한 마법 영창이 이어졌다. “연옥의 끝없는 불 구덩이여, 여기서 그 꽃을 피워 나의 적들을 불살라 버려라!” 주문이 끝나자 위쪽으로 통하는 계단이 넘실거리는 불꽃으로 가득 차 버렸고, 갑작스럽게 타오르는 불꽃에 미처 대비하지 못한 다크 시드 사용자들의 비명이 계단을 가득 메웠다. 숄더 차지에 명중 당한 다크 시드 사용자의 가슴을 밟으며 떨어진 준상은 급격하게 변이를 시작한 그 자의 머리를 하얀 불꽃이 넘실거리는 주먹으로 후려쳐 박살 내고는 급히 몸을 일으켜 광장으로 내려 갔다. “꺄아악!” “침입자다! 경비병!” “...” 준상은 피와 살점으로 얼룩진 방어복 차림의 자신을 보자 비명을 지르며 개미떼처럼 흩어져 도망치는 그들의 모습에 잠시 말문을 잃었다. “어쩐지 중앙 정보국 청사의 사무원들 같은 느낌이군요.” 뒤따라 내려온 블레이크가 도망가는 저들의 모습을 그렇게 평했다. 하긴 전투 교육을 받고 사람을 해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고 해서 바로 피와 살점이 난무하는 전장에 익숙해지기는 어려운 일. 게다가 저들 가운데는 아직 다크 시드의 세례를 받지 않은 자들 또한 있을테니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저쪽이에요!” 리체스의 외침에 따라 고개를 돌려 보니 광장 중앙에 기둥 같은 것이 서 있는 것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가자!” 그들은 곧바로 기둥으로 향했고, 리체스가 기둥을 살피는 동안 그곳을 에워싼 채 주위를 경계했다. 그러자 뒤늦게 나선 계단 쪽에서 육체 변이를 마친 다크 시드 사용자들이 우르르 몰려 오는 모습이 보인다. “많기는 더럽게 많네.” 기안이 혀를 차며 방패를 고쳐 드는데, 리체스의 외침이 들려왔다. “됐어요!”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기둥 근처에 마법진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면서 출입구가 나타났다. “안으로!” 준상은 뒤를 맡을 생각으로 분신을 모조리 소환하며 그렇게 외쳤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한 줄기 굉음과 함께 금속 질의 거대한 육체를 지닌 거인이 갑자기 광장의 천장을 부수고 떨어져 내린 탓이다. “쿠억!” 대충 보기에도 보통 인간의 열 배는 되어 보이는 체격. 천장을 부수며 떨어져 내린 거대한 금속 인간은 준상과 그 동료들을 향해 달려 들던 다크 시드 사용자들을 다시 한 번 처절하게 뭉개 버리는가 싶더니 그 피와 살점이 덕지덕지 묻은 채로 후다닥 몸을 일으켰다. “대단하군.” 준상은 그 민첩한 움직임에 감탄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저런 커다란 몸이 최대한으로 신체 강화를 한 귀환자처럼 날렵하게 움직이는 것 자체가 그가 알고 있는 과학적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열 배 되는 신장이라면 단순히 무게 뿐만이 아니라 관성의 영향으로 인해 움직임도 더 느려질 수 밖에 없다. 이것은 단순히 몸이 커서 둔해진다는 뜻이 아니다. 진자의 운동을 예로 들자면, 진자의 크기가 네 배로 커지면 그 주기는 두 배로 늘어나는데, 이런 점을 감안하면 크기가 열 배인 인간은 단순 계산으로도 10의 제곱근 값인 3.16배 만큼 보통 인간보다 느리게 넘어질 수밖에 없다. 또한 길이가 열 배 늘어나면 그 부피는 천 배로 늘어나게 되는데, 저런 식으로 재질조차 보통의 인체보다 훨씬 비중이 높은 금속 형태로 변화하게 되면 그 질량이 얼마나 무거워질지는 감히 계산하기도 어려워진다. 이렇게 늘어난 체중을 감당하려면 근력도 그에 걸맞은 수준으로 늘어나야만 하는데, 실제로 근육의 단면적은 열 배의 제곱인 백 배 밖에 늘어나지 않으니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는 수준. 다시 말해 저와 같은 움직임이 가능하려면, 보통의 인간이 지닌 근력의 천 배를 아득히 넘어서는 초월적인 근력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이쯤 되면 단순한 주먹질 한 방도 신의 지팡이 같은 상상 속의 질량 병기에 맞먹는 파괴력을 내게 되니, 사실상 존재 자체가 전략 병기나 다름없다. “젠장! 그래, 누가 먼저 죽나 어디 한 번 해보자!” 몸을 일으킨 거인은 그렇게 외치고는 위쪽을 향해 다시 뛰어 올랐다. 준상이 다른 세계의 귀환자가 지닌 초월적인 능력에 감탄하고 있자니, 등 뒤에서 리체스의 다급한 외침이 들여왔다. “뭐해요!” “아, 미안.” 준상은 얼른 사과하고는 분신들을 해제한 뒤 얼른 승강기에 탑승했다. 그가 안으로 들어오자 리체스는 얼른 입구를 닫고는 마법진을 작동시켰고, 한 줄기 빛이 그들의 몸을 스치고 지나가자 어느 새인가 아늑한 빛의 군락이 환상처럼 허공에 떠 있는 기묘한 공간에 도착해 있었다. “벨 라야님?” 승강기가 작동하는 소리를 들었는지, 한쪽 공간이 열리며 하늘거리는 옷차림을 한 미소년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벨 라야. 준상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젤라와 도라로부터 들었던 별 이름 가운데 라야가 있었음을 떠올렸다. 벨이 어떤 의미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이 단순한 고유 명사가 아니라고 가정한다면, 이곳을 지배하는 성좌의 주인은 라야라는 별을 지배하는 자이거나 혹은 관련이 있는 자일 가능성이 높다. 준상이 머리 속으로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동안 속살이 훤히 보이는 소년의 모습에 여성들은 일제히 얼굴을 붉히고 남성들은 혀를 차고 있었다. 시종이거나, 또는 애첩이거나. 어느 쪽이든 간에 벨 라야 라는 자의 취향만큼은 모두가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누구냐!” 하지만 승강기로부터 모습을 드러낸 자들이 자신의 주인이 아님을 깨닫자 여리 여리한 미소년의 모습은 사라지고 대신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지닌 야수의 그것으로 모습이 바뀌었다. 아마도 전설 속의 늑대 인간이 정말로 실존한다면 이런 느낌이 아닐까 싶은 모습. 하지만 준상은 무감동한 표정으로 손을 뻗어 야수로 변해 버린 소년의 목을 단숨에 움켜 잡은 다음 화염의 정령력을 퍼부어 그대로 불태워 버렸다. “크아아악!” 방금 전 보았던 미소년의 인상 때문인지 동료들은 준상의 잔혹한 손속에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지만, 그 비명 소리를 듣고 비슷한 모습을 한 야수들이 승강기를 향해 쏟아져 나오자 각자 무기를 고쳐 잡고는 전투에 돌입했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적의 외모를 보고 감상에 젖는 것이 얼마나 멍청한 짓인지를 말할 필요도 없는 일. 그들은 자비심이나 감상을 버린 채 눈앞에 달려드는 야수들을 향해 가차 없이 무기를 휘둘렀다. 준상은 자신에게 맹목적으로 달려드는 야수들에게 카운터를 가해 그 머리를 단숨에 부숴버리며 승강기로부터 내려서더니 몽몽이에게 명령을 내렸다. “찾아라.” 정확히 뭘 찾으라는 건지 구체적인 지시는 없었지만, 몽몽이는 명령이 떨어지자 얼른 바닥으로 내려가더니 뒷발로 선 채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가 후다닥 어디론가 달려 나갔다. 00350 트롤러 ========================================================================= 야수들을 쓰러뜨리며 열려진 공간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던 준상은 앞서 달려가던 몽몽이가 털을 곤두세운 채로 멈춰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중앙 승강기로 올라올 줄이야. 어떻게 보안 장치를 뚫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방 먹은 느낌이군.” 바라보니 고글 같은 것을 쓴 채 연미복의 꼬리 부분을 강조한 듯한 검은 제복을 입은 사내가 몽몽이의 앞을 가로 막고 있었다. 그의 뒤에는 어쩐지 패션쇼에나 나올 법한, 수십가지 보석과 귀금속으로 화려하게 치장되었음에도 천박해 보이지 않고 오히려 고급스러운 느낌이 가득한 하얀색 드레스를 입은 여성이 서 있었다. 옷차림 외에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머리카락이었는데, 마치 리체스의 그것처럼 시시각각 변하는 무지개 빛이라 단숨에 준상의 시선을 사로 잡았다. 얼굴 생김새 자체는 동글동글하고 귀여운 인상이지만, 외모와는 달리 어딘지 모르게 날카롭고 뾰족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그녀는 역시나 귀금속과 보석으로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는, 전신 갑옷을 모티브로 한 옷을 입고 있는 남성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이 남성은 어둠 속에서도 금색과 은색이 조합되어 화려하게 빛나는, 그 자체로 화려하게 세공된 귀금속을 연상시키는 곱슬머리를 하고 있었는데, 굳건한 남성의 전형과도 같은 강인한 인상의 외모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모르게 눈빛이 유한 느낌이었다. 그들 주위에는 겁먹은 표정의 사람들 십여명이 둘러 서 있었는데, 어떻게든 몸으로라도 화려한 외모를 지닌 안쪽의 두 사람만큼은 반드시 지키겠다는 결의를 온 몸으로 풍기고 있었다. 준상은 찬찬히 그와 같은 모습을 살펴보고는 저 화려한 외모의 두 사람이 바로 앙가라드가 말했던 ‘고객’임을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었다. 문제는 앞을 막아선 이 연미복 비슷한 옷차림의 남자가 누구인가 하는 점. 준상 자신을 이곳으로 데려온 남자와는 분위기도 외모도 전혀 다르다. 그의 경우에는 시선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보이지 않는 손이 발목을 잡고 지하로 끌고 들어가는 듯한 기묘한 느낌을 받았었지만, 지금 눈앞에서 고글을 쓴 채 준상을 바라보고 있는 이 남자는 잔뜩 벼려진 칼끝처럼 날카로운 느낌이 전해져 오기만 할 뿐 전신의 감각을 통째로 지배하는 듯한 압도적인 존재감은 지니고 있지 못했다. “레벨 32. 설마 다 자라지도 않은 수확물에게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맞는 날이 올 줄이야.” 고글남은 손에 끼고 있던 장갑을 벗으며 말을 이었다. “내 이름은 가이트 사드 루올라.” “...” “수확물이여, 그대의 이름은?” 준상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네 놈 따위에게 알려줄 이름은 없다.” “...” “시간 없으니, 어서 덤벼라.” 가이트의 매끈하던 얼굴은 그 말을 듣는 순간 확 일그러져 버렸고, 그의 뒤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금발 남자의 눈에도 이채가 나타났다 사라졌다. “수확물 주제에, 잘도 나불거리는구나.” 가이트의 몸에서 검은 아지랑이 같은 것이 확 피어오르자, 일순 현기증 같은 것이 느껴지는가 싶더니 준상 앞에서 털을 곤두세우고 있던 몽몽이의 모습이 확 사라져 버렸다. “이건...” 몽몽이가 사라진 모습을 보고 준상이 얼굴을 찌푸리자, 가이트는 씩 웃으며 말했다. “어떻게 통제 장치를 부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벨 라야께 직접 세례를 받은 이 가이트 사드 루올라 앞에서는 욕망의 씨앗에 의해 부여된 힘 따위 아무런 의미도 없다.” “호오...” 준상은 그 말을 듣고서야 반쪽 가면의 남자에게서 느껴졌던 이질감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 가라앉는 듯한 기묘한 느낌은, 은연중에 시드의 능력이 중화되면서 생기는 일종의 탈력감 비슷한 것이었던 모양이다. “이제 그만 죽어라!” 가이트는 그렇게 외치며 한쪽 팔을 뻗어 준상에게 푸른 화염을 뿜어냈다. 겉보기에는 단순한 푸른 불꽃처럼 보이지만, 가이트가 만들어낸 이 화염에는 그의 몸을 감싸고 있는 검은 아지랑이의 기운이 섞여 있어서 시드로부터 유래된 여러 가지 능력을 무력화시키는 효과가 부여되어 있었다. 때문에 어설프게 화염 저항 같은 것으로 방어하려 들었다가는 순식간에 아교처럼 달라붙는 이 끈적한 불꽃에 휩싸여 한 줌 재로 변해 버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준상은 그런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신을 향해 덮쳐 오는 불꽃을 피하려는 기색조차 없이 바라만 보고 있었다. 가이트는 혹시라도 준상이 피하면 곧바로 연속 공격을 가하기 위해 새로운 불꽃을 손바닥에 만들어 내다가 미동도 하지 않는 준상의 모습에서 위화감을 느끼고는 얼굴을 찌푸렸다. 설마, 자살이라고 하려는 건가. 아니면 시드가 무력화 되었음에도 알량한 화염 저항 같은 걸 믿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곧바로 이어진 상황에 가이트는 크게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준상의 코앞으로 날아들던 푸른 불꽃이 갑자기 사라져 버린 탓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푸른 불꽃이 날아들자 준상은 자신에게 내재되어 있는 정령계를 개방해 그 힘을 흡수해 버린 것이다. 그 안에 어떤 힘이 스며들어 있건 간에 결국 불꽃은 불꽃일 뿐이니, 이미 화염의 대정령이 지닌 힘과 의의를 온전히 흡수한 준상에게는 대등한 수준의 정령력이나 속성력이 아닌 이상 정령계를 개방하는 것만으로도 공격 자체를 무력화시킬 수가 있었다. “음...” 다만 그것을 흡수하는 과정에서 약간의 더부룩함이 동반되기는 하지만, 그 정도는 별로 대수롭지 않은 부작용이다. “어, 어떻게?” 가이트는 당황해 하며 발악하듯 준상을 향해 푸른 불꽃을 쏘아 보냈지만, 준상은 정령계를 개방하는 것만으로 그 모든 공격을 무력화시켰다. 준상은 미처 알지 못했지만, 이 가이트라는 자는 지구의 다크 시드 사용자들에게 있어 공포의 대상이었다. 누차에 걸쳐 금기를 감독하는 인물로 거론되었던 ‘그’. 이름조차 함부로 언급할 수 없던 그 인물이 바로 지금 당혹한 표정으로 준상에게 푸른 불꽃을 쏟아 붓는 가이트일줄이야 어찌 짐작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가이트의 불꽃은 귀환자들 뿐만 아니라 다크 시드로부터 부여된 능력마저 소멸시키는 강력한 권능이었다. 하지만 스스로 정령계라는 하나의 세계를 이룬 준상에게는, 그런 재앙과도 같은 권능 자체가 무의미한 일이었던 것이다. 차라리 육체 변이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시드의 능력을 잃은 상황에서 준상이 대항할 수 있는 수단은 오직 하나, 광기의 정령을 그 몸에 강림시키는 방법 뿐이었을 것이고, 일단 의식이 침식되면 적아를 구분하지 못하니 공격 목표로부터 벗어날 수만 있다면 오히려 가이트 본인이나 고객들이 도망칠 수 있는 기회가 생겨났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되어서는 도저히 가망이 없다. “말도 안 돼. 이건 거짓말이야!” 성좌의 주인 벨 라야의 최측근임을 증명하는 푸른 불꽃이 무기력하게 준상에게 삼켜지는 그 모습이라니. 가이트는 지금껏 자신을 지탱해왔던 모든 것이 허물어지는 듯한 좌절감을 느끼며 광분하듯 전력으로 공격을 이어갔지만, 그래봐야 헛된 몸부림에 지나지 않았다. 준상은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가이트에게 다가가더니 이제 공포로 인해 패닉 상태에 빠진 가이트가 쓰고 있던 고글을 벗겨내고는 그 머리를 움켜쥐며 말했다. “꺼져라.” 그 말이 가이트의 고막을 뒤흔드는 순간, 준상의 손으로부터 백색의 불꽃이 뿜어져 나와 가이트의 전신을 감싸 버렸다. “끄아아아아!” 가이트는 자신이 다른 이들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능력이 무력화되고 다시 전신이 불타는 그 처절한 공포와 고통 속에 몸부림치다가 한 줌 재가 되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준상이 가이트를 쓰러뜨리자, 그제서야 모든 야수를 해치운 동료들이 열려진 공간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성좌의 주인 벨 라야의 최측근인 ‘감시자’ 가이트조차 준상 한 명에게 별다른 힘도 쓰지 못한 채 처참한 최후를 맞이한 판국에, 그와 마찬가지로 방어복을 걸친 인물들이 온 몸에 피칠갑을 한 채 모습을 드러내자, 이제 화려한 옷차림의 두 ‘고객’은 물론이고 그들을 에워싸고 있던 시종들 모두 두려움을 감추지 못한 채 몸을 떨어야만 했다. 준상은 가이트가 쓰고 있던 고글을 잠시 만지작거리다가, 바이저를 위로 올린 채 그것을 머리에 쓰고는 두 고객을 살펴보았다. “호오...” 이 고글은 인터페이스와 유사한 기능을 지니고 있었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안목과 통찰의 능력이 좀 더 구체적인 정보를 표시한다는 정도였다. 준상이 자신도 모르게 감탄한 것은, 이 두 ‘고객’이 몸에 두르고 있는 옷과 장신구들 때문이었다. 입고 있는 속옷까지도 레어 이하의 물품이 없었고, 대부분 유니크이니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두 ‘고객’이외의 다른 시종들마저 각종 아이템들로 몸을 치장하고 있을 정도였다. 그야말로 살아있는 보물 창고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정도다. “그래서 몽몽이가 다른 데는 쳐다보지도 않고 이곳으로 먼저 달려온 거였군.” 준상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다시 통찰의 능력으로 이들의 능력을 확인해 보았지만, 시드나 다크 시드가 머리 속에 심어져 있지 않은 탓인지 레벨은 물론이고 능력치도 확인이 되지 않았다. 기안이나 리체스의 능력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이유를 알게 된 준상은 헬멧의 바이저를 아래로 내리고는 그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벗어라.” “네?” 그 말에 놀란 표정으로 대답한 것은 두 ‘고객’도 그들의 시종도 아니었다. 지친 표정으로 그의 어깨에 내려 앉아 쉬고 있던 리체스가 바로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었다. 준상은 쓴웃음을 지으며 리체스에게 설명했다. “저게 다 아이템이야. 속옷부터 머리핀 하나에 이르기까지 전부.” “네?” 다시 이어진 말에 리체스는 물론이고 다른 동료들의 눈도 휘둥그레지고 말았다. 그러자 잠시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시종 가운데 하나가 준상에게 소리쳤다. “이 무슨 무엄한! 이 두 분이 감히 뉘신 줄 알고!” 그 모습에 준상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럼 전부 죽이고 벗겨갈까?” “...” 그대로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그들을 바라보며 준상은 다시 말했다. “열을 세겠다. 하나, 둘...” 손 안에 하얀 불꽃을 만들고 그렇게 숫자를 세기 시작하자,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허겁지겁 옷을 벗기 시작했다. 말이란 것도 통할 상대가 있고 통하지 않을 상대가 있는 법. 적어도 이들은 눈앞의 상대가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라는 것 정도는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지능을 지니고 있었다. 사실 이 두 ‘고객’이 지닌 아이템 중에는 가이트가 그러했던 것처럼 시드의 능력을 무효화시키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고, 호신을 위한 방어나 공격 아이템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가이트가 손 한 번 제대로 쓰지 못하고 허무하게 한 줌 재가 되어 버리는 모습을 보고서도 그 아이템에 의지해 준상에게 대항할 생각을 떠올릴 정도로 이들은 무모하지 않았다. “어라?”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그들을 지켜보던 기안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몸에 걸친 것을 하나 둘씩 떼어내자 신비롭기까지 하던 그들의 외모가 조금씩 퇴화했기 때문이다. 물론 단순히 생긴 것 자체는 여전히 미남 미녀였지만, 리체스의 머리카락처럼 화려한 무지개빛으로 반짝이던 여자의 머리카락이라든가, 아름답게 세공된 귀금속처럼 반짝이던 남자의 금발 같은 것은 바로 빛을 잃어 버렸고, 풍겨 나오던 분위기 같은 것도 마치 불 꺼진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온데 간데 없이 자취를 감추어 버리고 말았다. 조명빨, 화장빨 다음은 아템빨인건가. 준상은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속으로 혀를 차고는 몽몽이를 다시 불러 그들이 벗어놓은 아이템과 함께 최상층의 귀중품을 모조리 쓸어 담게 한 다음, 신기루 꽃으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능력 자체는 별 볼 일이 없지만, 성좌의 주인이 ‘고객’으로 대우하며 애지중지할 정도라면 저들이 지닌 배경이 결코 만만치는 않을 터. 이번 기회에 저들의 역학 관계를 파악하기 위해서도 이들은 인질로 잡을 필요가 있다. “들어가라.” “...” 보다 못한 서유미가 건네준 커튼 자락으로 몸을 감싼 그들은 블레이크와 맥밀란의 감시를 받으며 신기루 꽃으로 옮겨졌다. 준상은 그들을 데리고 신기루 꽃으로 향하는 두 사람에게 덧붙였다. “측면의 나선 계단을 올라가다 보면 광전사들이 사용하던 숙소가 있으니 그곳에 감금하도록.” “알겠습니다.” ‘고객’들을 포로로 잡고 몽몽이를 시켜 최상층을 탈탈 털어 버린 준상은 그대로 귀환하려다 걸음을 멈추었다. “먼저 돌아가 있어라.” 멈춰선 준상의 입에서 그와 같은 말이 나오자 리체스가 물었다. “어쩌시려고요?” “아무래도, 아래쪽에서 벌어지고 있는 싸움의 결과를 확인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 “음...” 진동이 완전히 차단되었는지, 아래쪽에서 벌어지고 있는 싸움의 여파는 전혀 느껴지지 않고 있었으나, 성좌의 주인이 이곳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보면 아직 철골의 주인이 분투하는 중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물론 그가 싸우거나 말거나 모른 척하고 그냥 물러설 수도 있다. 그러나 최상층이 모조리 털리고 귀중한 고객마저 납치 되었음을 확인한 성좌의 주인이 어떻게 나올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 포로로 잡은 고객을 인질로 삼는다 쳐도, 만에 하나 그것을 무시하고 보복을 감행할 수도 있는 일이니, 일단 내려가서 전투 상황을 확인하고 가능하다면 이 기회에 철골의 제왕을 도와 성좌의 주인 역시 쓰러뜨리는 편이 후환을 없애는 지름길이다. 준상의 의도를 이해한 리체스는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그럼 저희는 요정계로 가 있을게요. 만에 하나 위험한 상황이 생기면 바로 불러주세요.” “알았어.” 기안과 서유미, 그리고 리체스가 정령의 문을 통해 요정계로 모습을 감추자, 준상은 망토를 사용해 모습을 숨긴 다음 위상전이를 이용해 아래쪽으로 빠르게 이동을 시작했다. 00351 트롤러 ========================================================================= 나선 계단을 따라 몇층 아래로 내려가기도 전에 준상은 갑자기 시야가 확 밝아지는 것을 느꼈다. 철골의 제왕과 성좌의 주인이 벌인 전투로 인해 내부 구조물들이 파괴되어 버린 탓이었다. 속살이 무참하게 찢겨진 구조물 안쪽에서는 거대화한 철골의 제왕이 검은 불꽃에 휩싸인 채 공중에 떠 있는 성좌의 주인과 전투를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아니, 전투라는 말은 뭔가 어폐가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준상의 시야에 비치고 있는 풍경은 철골의 제왕이 성좌의 주인에게 일방적으로 얻어 맞는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크하하하! 그래, 어디 한 번 죽여봐라! 죽여 보란 말이다!” 성좌의 주인이 만들어낸, 검은 색의 유형화된 기운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주먹에 정신 없이 연타 당하면서도 철골의 주인은 오히려 그렇게 웃고 있었다. “하등한 수확물 따위가!” 철골의 제왕의 말은 단순한 허세 같은 것이 아니었다. 금속질로 만들어진 거대화된 몸은 성좌의 주인이 뻗어내는 주먹에 맞을 때마다 산산이 부서지며 파편을 사방에 흩날리고 있었지만, 그렇게 타격을 받을 때마다 주위의 구조물들로부터 부서진 잔해들이 다시 모여 원래대로 복구가 되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일까. 준상은 이 두 존재의 싸움을 유심히 지켜보다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우선, 통제 장치와는 달리 성좌의 주인이 가진 시드에 대한 무력화 능력은 일정 거리 까지만 효력을 지니고 있었다. 성좌의 주인과 철골의 제왕이 워낙 격렬하게 싸움을 벌이고 있어서 그 범위를 가늠하기는 매우 어려웠지만, 눈대중으로 살피기에는 대략 5에서 10미터 반경 내에서만 그 효력이 발휘되는 듯 했다. 물론 가이트라는 자가 쏘아대던 푸른 화염처럼 성좌의 주인 역시 자신의 공격에 그런 무력화 능력을 싣는 것이 가능했지만, 이런 식으로 쏘아대는 공격은 적중되는 부위에만 적용될 뿐 몸 주위로 내뿜는 기운처럼 넓은 영역에 효과를 미치지는 못하고 있었다. 만약 상대가 어느 정도 일반적인 몸집의 소유자라면 이런 점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겠지만, 지금 기지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는 이 철골의 제왕은 신나게 두들겨 맞고 있는 현재 상황에서도 오히려 그 크기를 더욱더 키워가고 있었다. 승강기에 올라탈 때만 해도 인간의 열 배 정도 되는 느낌이었다면, 지금 그의 몸은 거의 열다섯 배 이상으로 불어나 있었다. 이대로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지금 준상이 자리잡고 있는 구조물 자체가 모조리 철골의 제왕의 일부분이 되어버릴 것이 분명했다. 철골의 제왕이 신나게 얻어맞으면서도 웃음을 터뜨리고 있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성좌의 주인은 도저히 이런 식으로는 무리다 싶었던지 허공에 멈추어 서서 대규모 마법을 발동했다. 거대한 마법진이 사방에 생겨나며 불과 벼락 등이 정신없이 철골의 제왕에게로 쏟아져 내리며 그의 강철 육체를 파괴했지만, 이미 가속화되어 버린 흡수 능력을 저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크크크... 이곳으로 나를 데려온 것 자체가 네놈의 실수다. 사막의 모래에서 뽑아낸 사철만으로도 대륙의 제왕 자리에 우뚝 섰던 나를 이렇게 많은 금속이 모여 있는 장소에 데려다 놓다니. 이 얼마나 멍청한 짓인가!” 철골의 제왕은 그렇게 말하더니 무력하게 얻어 맞고만 있던 지금까지의 태세에서 벗어나 이제는 대형 트레일러보다도 거대해진 주먹을 성좌의 주인에게 마구 휘둘러댔다. 물론 그의 주먹은 성좌의 주인이 발하는 무력화 능력의 범위 내에 접근하는 것만으로도 응집력을 잃고 산산이 부서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먹을 휘두를 때 생긴 운동 에너지나 주먹을 구성하고 있는 금속 들의 질량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고, 그 결과 부서진 파편들이 마치 거대한 화포에서 쏘아댄 산탄처럼 성좌의 주인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물론 성좌의 주인은 마법을 이용한 방어막을 만들어내어 그러한 공격 대부분을 막아냈지만, 그와 같은 공격이 지금 이들이 자리하고 있는 구조물의 파괴를 가속화시키고, 감히 싸움에 끼어 들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는 그의 부하들을 도륙하는 것은 저지할 방법이 없었다. “왜 그러나? 좀 더 힘을 내야 날 죽일 수 있지 않겠나!” 철골의 제왕이 그렇게 소리 치자 성좌의 주인은 이를 부득 갈고는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오냐! 네 놈이 그렇게 원한다면, 이제 나의 진실한 모습을 보여 주마!” 그렇게 외침과 동시에 가면을 쓴 남성의 모습을 하고 있던 성좌의 주인 벨 라야의 몸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더니 이내 거대한 괴수의 형상으로 변화했다. “그렇게 나와야지! 괴물 따위가 감히 존엄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으면 쓰나!” 철골의 제왕은 그렇게 말하며 거대화하기 시작한 성좌의 주인을 향해 다시 주먹을 휘둘렀다. 하지만 아까와는 달리 그의 주먹은 거대화한 성좌의 주인이 휘두른 주먹에 막혀 단숨에 부서지며 흩어져 버리고 말았다. “뭣이?” 거대화한 성좌의 주인 벨 라야는 상체는 암청색의 전신 갑옷을 입은 기사의 그것을 닮아 있었고, 하체는 황록색의 비늘을 가진 거대한 뱀의 형상이었다. 그는 암청색으로 변화한 자신의 손을 바라보더니 이렇게 중얼거렸다. “다시 이 치욕적인 모습을 하게 될 날이 올 줄이야.” 벨 라야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검은 불길과도 같은 기운을 뿜어내는 눈으로 철골의 제왕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름을 말하라.” “...” 철골의 제왕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하라바 은체우. 네 놈은 내 이름도 모르고 이런 곳으로 끌고 왔단 말이냐?” 성좌의 주인 벨 라야는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네 놈은 길거리에서 고기를 사먹을 때 그 가축의 이름을 일일이 물어보나?” “끙...” “그런 것이다. 나에게 있어 네 놈의 가치는 고작 그 정도였다는 얘기지.” 벨 라야는 두 팔을 사마귀의 그것과 같은 날카로운 낫의 형태로 변화시키며 말했다. “물론 이제는 아니다. 오랜 세월 공들여 만들어 놓은 초공간 요새 볼텍스를 이 정도까지 부숴버린 수확물은 네 놈이 처음이었으니, 내 친히 네 놈의 이름을 기억해 주도록 하마.” “쳇, 그거 참 영광이군.” 하라바는 혀를 차며 그렇게 대답했지만, 긴장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하기는 했지만 놈이 인간 크기였을 때조차 자칫 잘못하면 거대화한 몸체 속에 숨겨져 있는 본체에 타격을 입어 단숨에 즉사할 뻔한 것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저런 식으로 몸 자체가 거대화해 버리면 그만큼 시드 효과를 무효화시키는 능력의 적용 범위도 늘어날 수밖에 없다. 자칫 잘못해서 시드 무효화의 범위 내에 들어가기라도 하는 날에는 막무가내로 거대하게 키워 놓은 금속의 거체를 감당 못하고 그 안에 파묻혀 압사 당하는 참사가 벌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성좌의 주인 벨 라야는 부서진 요새 구석 구석에 몸을 웅크린 채 두려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수하들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기왕 이렇게 된 이상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는 수밖에.” 하라바는 그 말에 숨겨진 뜻을 어렵지 않게 깨달았다. “네놈... 수하들까지 전부 죽이려는 거냐?” 그 말에 벨 라야는 피식 웃어 버렸다. “수하? 누가? 저들이?” 그는 천천히 하라바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저들은 그저 벌레일 뿐이다. 내 발 아래 엎드려 저주받은 이 힘에 개미떼처럼 모여든 탐욕스러운 벌레들.” “네놈...” “새로 모으는 것이 골치 아프기는 하지만, 저들의 가치는 그 정도가 고작이란 거지.” 벨 라야는 사신의 낫과 같은 형상의 팔을 들어 하라바를 겨누며 말했다. “더 이상 시간을 끌어봐야 소용없다. 어차피 이제 기지를 구성하고 있는 금속의 양도 한계에 달한 듯 하니.” “...” “벽에 구멍이라도 내고 도망쳐볼 심산이겠지만, 불행히도 이곳은 차원의 틈에 존재하는 곳. 네 놈이 도망칠 곳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역시 그런 것이었나. 준상은 가만히 모습을 숨긴 채 저들의 대화를 듣고 있다가 벨 라야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지도를 살핀 리체스가 그런 식의 말을 언급하기는 했지만, 방금 전의 말로 미루어 보면 역시 이곳은 신기루 꽃와 비슷한 방식으로 만들어진 곳임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말로 놀랄 만한 얘기는 그 뒤에 이어졌다. “아무래도... 네 놈 말대로인가 보군.” 하라바는 요새의 외벽이 부서지며 드러난 차원의 틈을 보며 혀를 차더니 벨 라야에게 물었다. “이렇게 간단하게 날 끝장 낼 수 있으면서도 이제와서야 본색을 드러낸 걸 보면, 어지간히 그 모습이 싫었던 모양이군.” 벨 라야는 차갑게 대꾸했다. “그건 네놈이 알 바 아니다.” 하라바는 다시 말했다. “좋아. 하지만 이대로 차원의 틈에 빠지든 네 놈 손에 죽든 간에 하나는 알고 가야겠다.” 벨 라야는 낫의 형상을 한 팔을 내밀어 하라바의 목을 겨눈 채 말했다. “말하라.” 단지 가까이 겨누기만 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벨 라야의 신체와 근접하자 하라바의 거체는 말라붙은 모래성처럼 균열을 일으키며 허물어 지고 있었다. 하라바는 혀를 차며 질문을 던졌다. “도대체 나를 수확물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뭐냐?” “아아...” 벨 라야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네놈은 아직 자신이 그렇게 불리는 이유조차 모르고 있겠군.” 그렇게 중얼거린 벨 라야는 외벽이 부서지며 드러난 차원의 틈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네 놈의 머리 속에도 있는 거다. 그 빌어먹을 시드가.” “...” 하라바는 말없이 벨 라야를 바라보다가 이내 한숨을 쉬었다. “역시... 그랬나.” “호오, 짐작하고 있었던 건가?” “짐작까지는 아니고,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하라바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다시 물었다. “하지만 그래도 이해가 가지 않는군.” “무엇이 말인가.” “굳이 이런 식으로 번거롭게 시드를 만들어서 수확할 이유가 있나? 하긴 내 레벨쯤 되면 머리 속에 유니크 시드 같은 것이 있어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싶지만.” 벨 라야는 느긋한 태도로 대답했다. “유니크 시드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 “사실 네놈들이 시드라고 부르는 그것은 모두 실패작에 불과하다.” “실패작?” 벨 라야는 잠시 말이 없다가 이렇게 말을 이었다. “제대로 된 시드는 욕망의 씨앗, 또는 창조의 씨앗이라고 부르지.” “뭔가... 거창한 이름이군.” “이름만 거창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실제로 생물이 지닌 욕망이 구체화되어 만들어진 창조의 도구니까.” 하라바는 급히 반문했다. “창조의 도구? 설마 시드로 창조가 가능하다는 말이냐?” 벨 라야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 말대로다. 이를테면, 네놈이 부숴버린 이곳 역시 그러한 창조의 씨앗으로 만들어진 곳이니까.” “허...” “물론 시드를 그런 식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각인이나 개화의 과정이 필요하지만, 지금 네 놈에게 그런 것까지 알려줄 필요는 없는 일이겠지.” 하라바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가만히 숨어서 그 모든 대화를 듣고 있던 준상의 놀라움은 그보다 훨씬 더 컸다. 처음부터 답은 그의 손에 쥐어져 있었음을 이제야 깨달은 탓이다. 이미 그는 지금 둘이 얘기 나누고 있는 그 모든 과정을 두 눈으로 확인한 바가 있었다. 사막의 재보라고 불리던 하나의 씨앗. 그 씨앗을 땅에 심어 신기루 꽃을 개화시켰던 일이 바로 그것이다. 신기루 꽃의 씨앗. 그것이야 말로 지금 벨 라야가 말했던 각인의 과정이 끝난 시드의 진정한 모습이었던 것이다. 물론 리체스나 그녀 정도의 능력자들이 오랜 시간을 들이면 신기루 꽃 수준의 구조물을 만드는 것 자체는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만약 각인이나 개화의 과정이 이전에 준상이 그러했던 것처럼 마법이나 기타 공학적인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도 가능하다면, 이것은 그야말로 창조에 비견될 만한 엄청난 일이다. 벨 라야는 이곳 요새를 예로 들었지만, 이런 거대하고 복잡한 구조물을 만들어낼 수 있을 정도라면, 사용하기에 따라서는 그보다 더 작고 섬세한 것도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을 터. 만약 그 능력이 생명과 관계된 영역까지 감당할 수 있다면, 적어도 창조의 씨앗이란 이름만큼은 전혀 과장이 아닌 셈이다. 00352 트롤러 ========================================================================= 준상이 그렇게 이전의 일들을 떠올리며 사고를 확장시키고 있는 동안, 요새의 붕괴는 더욱더 가속화되고 있었다. “아무래도 더 이상은 무리인 모양이군.” 벨 라야는 무너지는 요새의 모습을 씁쓸한 모습으로 바라보더니 느닷없이 하라바의 목덜미를 푹 하고 찔러 버렸다. “컥!” “하라바 은체우. 네 놈의 머리 속에 든 욕망의 씨앗을 내 손으로 직접 꺼내 주지 못하는 것이 유감이구나.” 통제 장치가 부서지고 추출을 위한 설비마저 박살나 버린 이상, 아무리 성좌의 주인이라 해도 시스템의 간섭을 피해 수확물의 머리 속에서 시드를 뽑아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쉽지만 할 수 없는 일이지. 그만 죽어라.” “이 노옴!” 하라바는 발악하듯 벨 라야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지만, 그 최후의 일격이 상대에게 닿기도 전에 목을 찌르고 있던 거대한 낫이 휘둘러지며 그의 거대한 몸을 반으로 갈라 버렸다. “커헉!” 그 일격으로 인해 하라바의 거대한 몸은 붕괴하며 굉음과 함께 급격하게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이 하라바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건?” 벨 라야는 금속질의 거대한 육체가 붕괴하는 순간 하라바의 존재감이 사라진 것을 깨닫고 얼굴을 찌푸렸다. 단순하게 생각하자면 일격에 즉사한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을 정도로 존재감은 물론이고 통찰의 능력으로부터도 모습을 감추어 버렸지만, 수확물이 정상적으로 사망에 이를 때 나타나야 하는 전송 현상이 전혀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쥐새끼 같은 놈!” 벨 라야는 분노하며 안 그래도 붕괴가 시작된 요새 이곳 저곳을 마구잡이로 파괴하기 시작했다. “으아아악!” “어째서?” “성좌의 주인이시여! 진정하십시오!” 성좌의 주인 벨 라야가 철골의 제왕을 박살내는 광경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던 다크 시드 사용자들은 갑작스럽게 광분하며 스스로 요새를 파괴하는 모습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벨 라야는 이미 그들의 존재 자체를 잊은 듯이 어디론가 숨어버린 하라바 은체우를 찾아내기 위해 대규모 파괴 마법을 발동했다. “어디냐! 어디에 숨은 것이냐!” 육체 변이를 일으켜 거대화한 벨 라야의 머리 속에서는 이미 사실상 기능을 상실해 버린 차원 요새 볼텍스나 그 안에 존재하는 자신의 수하 따위 아무런 가치도 지니고 있지 않았다. 다크 시드를 통해 육체 변이를 일으키는 순간 이성보다는 본능의 영향이 더 강해지는 것은, 설령 그것이 성좌의 주인이라 할 지라도 피해갈 수 없는 섭리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준상은 광분하며 스스로 요새를 파괴하기 시작한 벨 라야의 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이쯤 되면 최상층에 피신시켜둔 ‘고객’의 존재마저도 망각했거나, 그들 옆에 붙여 두었던 가이트가 알아서 대응하리라는 생각에 마음 놓고 폭주하는 것이라 봐도 무방할 듯 하다. 그래봐야 이미 최상층에 존재하던 모든 귀중품과 중요한 ‘고객’들은 모두 준상의 손아귀에 들어가 버린 상황이지만 말이다. “곤란하군.” 기회가 되면 둘이 싸우는 틈을 노려 기습이라도 걸어볼 셈이었지만, 모처럼 상대를 궁지로 몰아넣는가 싶었던 철골의 제왕이 너무나 쉽게 쓰러져 버리는 바람에 일이 어렵게 되어 버렸다. 하지만 빠져 나갈 구멍도 없는 이곳에서 철골의 제왕 하라바가 무작정 일단 도망친다는 것도 뭔가 석연치 않은 일. 벨 라야와 마찬가지로 준상 역시 하라바가 뭔가를 노리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통찰의 능력이 발휘되기에는 너무 먼 거리에 있는지라 정확한 레벨은 파악하기 힘들었지만, 수확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은 최소한 50레벨 이상이라는 의미이고, 그 정도 레벨이라는 방금 전까지 보여주었던 거대화의 능력 말고도 무언가 숨겨진 능력이 있을 것은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추측할 수 있는 일이었다. 문제는 과연 그러한 힘이 저렇게 거대화한 벨 라야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하는 점. 통제 장치에 비해 범위가 한정되어 있다고는 해도 무효화 능력으로 시드의 힘을 봉인할 수 있는 상대를 대상으로 유효한 공격을 가하는 것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디냐!” 광분하는 벨 라야의 모습을 가만히 숨죽인 채 지켜 보고 있던 준상의 시야에 부서진 요새 한 구석의 모습이 비춰진 건 우연한 일이었다. “...” 이십여명에 달하는 젊은 여성들과, 그들의 앞에 서서 미약한 마법의 힘으로 떨어지는 요새의 파편을 막아서고 있는 파란 유니폼의 여인. 그들은 바로 준상이 이 요새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와 통제 장치를 찾는데 은연중에 큰 도움을 준 감독관 앙가라드와 수습생들이었다. 이미 세례를 받은 다크 시드 사용자라면 모를까. 앙가라드는 그렇다 쳐도 수습생들은 아직 다크 시드에 더럽혀지지 않은 깨끗한 인간의 육신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다. 이전의 준상이라면 그들이 죽거나 말거나 신경도 쓰지 않았겠지만, 헤네스와 리체스를 만나고 다시 누리가 태어나면서 알게 모르게 변모한 그로서는, 눈에 띄지 않았다면 모를까 그렇지도 않은 이상 이대로 죽도록 내버려 두는 것은 아무래도 입맛이 쓸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칫.” 그들이라면 아직 알아내지 못한 다른 별에 대한 정보도 알고 있을테니, 구출이 무의미하기만 한 것은 아닐 터. 준상은 그렇게 스스로를 설득하며 일단 블레이크에게 출구에서 대기하도록 연락을 넣은 다음 수습생들이 있는 곳을 향해 위상 전이를 실행했다. “흑흑...” “이렇게 죽기는 싫어.” “예쁜 옷 사서 돌아가기로 했었는데...” 가까이 다가서자 도망칠 길 없는 막다른 곳에 몰린 채 절망하며 흐느끼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준상의 귓가에 여과 없이 그대로 전해져 오고 있었다. “쯧.” 준상은 혀를 차며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누, 누구냐!” 검은 방어복을 입고 망토를 두른 채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준상의 모습에 떨어지는 파편을 막아내고 있던 감독관 앙가라드는 경계의 눈초리를 보냈다. “조용히.” 하지만 헬멧의 바이저를 들어올리며 가이트의 고글을 착용한 준상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오자 앙가라드는 크게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다, 당신은...” 갑자기 영문 모를 복장으로 나타난 것은 둘째 치고서라도, 그가 쓰고 있는 고글은 감시자 가이트의 그것이었다. 다른 수습생들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라 울다 말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초급이기는 해도 엄연한 간부인 앙가라드는 그 고글을 똑똑히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이다. “설마... 감시자셨던 겁니까?” 놀란 표정으로 그렇게 묻는 앙가라드의 모습을 본 준상은 그녀가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음을 깨달았지만, 굳이 그 오해를 고쳐줄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다. 준상은 대답하지 않은 채 곧바로 신기루 꽃으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헉!” 앙가라드는 허공에 생겨난 고풍스러운 문의 형상을 보고는 다시 깜짝 놀랐다. 그녀는 간부 교육을 위해 다른 별에 몇 차례 내려가 본 적이 있었는데, 지금 나타난 문은 형상이 다르기는 해도 틀림없이 그때 사용했던 게이트와 같은 종류의 것임을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었다. 준상은 석문이 열리자, 그제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 “들어가라.” 이미 이것 저것 가릴 수 있는 상황도 아닌데다, 이미 준상에게 홀딱 반해버린 그녀들이기에 두 말 않고 그 말에 따랐다. 석문 안으로 들어선 그녀들은 곧바로 준상과 비슷한 검은 방어복으로 몸을 감싼 육중한 체구의 블레이크와 마주쳤다. “조용히.” 블레이크는 자신의 눈치를 보고 있는 여성들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며 그녀들의 수를 헤아리다가, 마지막에 석문을 넘어 온 앙가라드의 모습을 보는 순간 휴대폰이 울리는 것을 확인하고는 얼굴을 찌푸렸다. 휴대폰에는 다음과 같은 메시지가 나타나 있었다. [당신은 특수 임무 발동 조건을 만족하고 있습니다.] 다크 시드를 회수하십시오. :이 사악한 어둠의 씨앗은 본래 이 세계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물건입니다. 사용자를 제재하고 다크 시드를 회수하십시오. [이 퀘스트는 단독 퀘스트입니다.] “...” 다크 시드.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블레이크는 아직 제대로 알고 있지 못했지만, 이 메시지가 요새 안에서 괴물이나 야수들과 마주쳤을 때 수차례 나타났던 것이라는 사실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다. 다시 말해, 이 파란 유니폼의 여성은 겉보기에는 앞서 들어온 다른 여성들과 다를 바가 없어 보이지만, 사실은 앞서의 전투에서 조우했던 괴물이나 야수들과 같은 존재라는 뜻이 된다. 설마 실수로 보통 인간과 함께 끼어들어 온 것일까 싶었지만, 다른 여성들의 반응으로 봐서는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일단 제압해 두는 편이 낫지 않을까. 블레이크는 잠시 갈등했지만, 석문이 닫힘과 동시에 준상이 요정들의 대화 방법으로 그에게 다시 연락을 취해왔다. “파란 옷의 여자는 위험할 수도 있으니 특별히 격리하도록.” “알겠습니다.” 연락 내용은 간단했지만, 적어도 실수로 끼어든 인물이 아니라 어떤 이유에서 준상이 일부러 함께 보낸 인물이라는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블레이크는 앙가라드에 대한 경계심을 버리지 않은 채, 앞서 구금한 ‘고객’들과 마찬가지로 그녀들을 광전사들이 묵고 있던 숙소로 데리고 갔다. 블레이크가 앙가라드와 수습생 들을 신기루 꽃 내부에 격리하고 있을 때, 요새는 다시금 격변의 소용돌이로 빠져 들고 있었다. 갑자기 요새의 최상층 부근에서 예상치 못한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무슨!” 광분하며 요새를 부수고 있던 벨 라야조차도 갑자기 최상층 부근에서 진동하는 칠흑의 구체가 모습을 드러내자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수습생들을 탈출시키고 이제 어떻게 해야할지 망설이고 있던 준상 역시 놀라기는 마찬가지. “그럴 수가.” 최상층에서 모습을 드러낸 그것은 준상의 예상이 맞다면 블랙홀과 유사한 중력 변이 현상이 틀림없었다. 다른 일반적인 물리력이나 속성력으로는 시드 무효화의 능력을 지닌 벨 라야에게 대항하기 어렵겠지만, 저런 식으로 공간 자체를 우그러뜨리는 초중력이라면 제 아무리 성좌의 주인이라도 견뎌내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아니나 다를까. 준상의 생각대로 벨 라야는 최상층에 나타나 주위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기 시작한 그 검은 태양과도 같은 현상에 접근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어떻게 저런 능력을...” 준상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었지만, 여기에는 그가 미처 알지 못하는 사실이 이유로 존재하고 있었다. 특별히 고객이 추출 과정의 시연을 원할 정도의 수확물인 철골의 제왕 하라바. 그의 레벨이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엄청난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었다. “크크크... 차원의 틈? 그 딴 거 알게 뭐냐! 어차피 죽을 거라면, 다 함께 죽는 거다! 이 뱀 꼬리 자식아!” 피투성이가 된 채 부조와 같은 형상으로 천장에 모습을 드러낸 하라바는 그렇게 외치며 검은 태양을 벨 라야를 향해 집어 던졌다. “이 하등한 수확물 따위가!” 벨 라야는 그렇게 외치면서도 자신을 향해 날아오며 점점 더 강한 압력으로 주위의 모든 사물을 우그러뜨리며 빨아들이는 검은 태양에 직접 부딪힐 엄두조차 내지 못한 채 방어 마법을 발동했다. 하지만 블랙홀을 연상시키는 검은 태양은 그의 방어 마법과 마주치는 순간 강력한 폭발을 일으키며 십여 미터에 이르는 공간을 암흑으로 뒤덮는가 싶더니, 그 안에 존재하던 모든 것을 문자 그대로 삭제해 버렸다. “크악!” 그 엄청난 위력 앞에서는 벨 라야도 무사하지 못했다. 폭발을 일으키는 순간 검은 태양은 무시무시한 압력으로 주위 수십여 미터 반경의 모든 물체를 끌어당겼고, 그 영향력 하에 있던 벨 라야는 팔 하나가 그대로 암흑의 공간에 의해 삭제되어 버리는 치명적인 부상을 입어 버리고 만 것이다. 벨 라야는 자신의 소멸된 오른팔을 급히 재생하며 외쳤다. “설마 했건만, 이건... 절멸의 검은 태양. 어떻게 네 놈이 벨 페오르만이 사용할 수 있는 이 절멸의 궁극기를 알고 있는 거지?” “벨 페오르? 그게 뭔지는 모르겠다만... 쿨럭!” 거기까지 말하고 검붉은 핏덩어리를 토해낸 하라바는 이렇게 대답했다. “네 놈한테 이 기술이 먹힌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한 모양이군.” “놈...” 벨 라야는 이를 부득 갈며 자신을 궁지로 내몬 수확물을 노려 보았지만, 그 순간 하라바의 몸 주위에 십여 개의 검은 태양이 모습을 드러내자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하라바는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는 벨 라야의 모습에 씩 웃으며 이렇게 외쳤다. “말했지? 어차피 죽을 거라면 다 같이 죽는 거다!” 발악하는 듯한 하라바의 외침과 함께 십여 개의 칠흑과도 같은 암흑의 태양이 마치 검은 비가 쏟아지는 것처럼 벨 라야의 거대한 몸으로 떨어져 내렸다. “이런 빌어먹을!” 벨 라야는 욕설을 내뱉으며 급히 이동 마법을 발동해 이곳으로부터 도망치고자 했다. 그 역시 멸살이라는 이름이 붙은 궁극기를 가지고는 있었지만, 이 좁은 공간에서 그것을 발동해 봐야 하라바의 말대로 함께 죽겠다는 의미 밖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절멸의 이름은 괜히 붙은 것이 아니었다. 검은 비처럼 쏟아져 내린 암흑의 태양은 공간과 그 안에 존재하는 에너지의 흐름을 교란시키며 마법의 발동 자체를 저지해 버린 것이다. 칠성좌는 함께 거론되는 이름이기는 하지만, 서로가 서로를 소 닭 보듯 경원하는 사이. 벨 라야로서는 벨 페오르는 물론이고 다른 칠성좌의 궁극기에 대해서도 이름만 들어 보았을 뿐, 이런 식으로 직접 그 힘을 마주하는 것은 그가 창조된 이래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물론, 그러한 무지의 결과는 언제나 그렇듯이 너무나도 참혹했다. “크아아악!” 준상이 수습생들을 구출하기 위해 아래쪽 구석으로 내려와 있었던 것은 그야말로 천행이라는 말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만약 그가 그런 식으로 위치를 변경하지 않았다면, 위상전이고 신기루 꽃이고 간에 뭘 어떻게 해볼 틈도 없이 절멸의 검은 태양이 만들어낸 공간 삭제의 힘에 휩쓸려 소멸해 버리고 말았을 테니 말이다. 00353 트롤러 ========================================================================= 쏟아져 내린 검은 태양은 동시 다발적으로 폭발하며 공간을 삭제했고, 폭격이라는 말이 어울릴 법한 그 가공할 공격의 중심에 놓여진 벨 라야의 몸은 만신창이로 변하고 말았다. 그러나 누군가가 아이스크림을 뜨는 구형의 스푼으로 몸 구석구석을 떠내버린 듯한, 보통의 생명체라면 도저히 살아남는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그런 부상을 입은 상황에서도 벨 라야의 신체는 부글거리며 재생의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어깨 위쪽의 모든 것이 사라지고, 뱀 모양의 동체도 반절이상 사라져 더 이상 생명체라고 부르기조차 난감한 고기 덩어리가 마치 누군가가 진흙으로 모양을 빚어가는 것처럼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가는 형상은 괴기스럽다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돋을 새김된 부조처럼 천장의 벽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던 철골의 제왕 하라바 은체우는 다시금 피를 왈칵 토해냈다. 남아있던, 아니 쏟아 부을 수 있는 모든 생명력을 있는대로 퍼부은 회심의 일격으로도 놈을 죽일 수 없었다는 사실에 그는 절망했다. 조금만 더. 한 번만 더 방금 전의 기술을 사용할 수 있다면, 저 혐오스러운 뱀꼬리 자식을 끝장낼 수 있었을 텐데. “망할...” 더 이상 떠들 힘조차 없는지, 하라바는 그 말 한 마디를 내뱉고는 벽으로부터 분리되며 서서히 아래쪽으로 추락해 갔다. 그러나 그가 채 바닥으로 떨어지기도 전에 무지막지한 속도로 재생이 되어가던 벨 라야의 동체에서 마침내 머리라고 불리울 만한 것이 만들어지더니 지옥의 심연에서 기어 올라온 악마처럼 울부짖기 시작한다. “끄으어어어!” 아직 언어라는 것을 표현하기에는 그 부상이 너무나 심각한 탓에, 벨 라야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그렇게 비명을 질러대다가 뒤늦게서야 천장으로부터 떨어져 내리는 하라바의 몸을 발견했다. 아직 완전히 재생되지 않아서 핏줄이 툭툭 튀어나온 두 개의 눈알을 희번득거리던 벨 라야는 역시나 아직 완전히 형체를 되찾지 못한 팔을 휘둘러 추락하는 하라바를 후려쳤다. 반쯤 의식을 잃은 채 수직으로 추락하던 하라바의 몸은 무방비 상태로 발악에 가까운 일격에 노출되었다. 살충제에 맞아 흐느적거리다가 파리채에 얻어맞은 하루살이처럼, 하라바는 벨 라야가 휘두른 주먹에 맞으며 다시 벽으로 처박혀 버리고 말았다. “쿠억!” 하지만 그 무지막지한 일격에도 불구하고 하라바는 철골의 제왕이라는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질긴 목숨을 붙들고 있었다. 물론 다시 한 번 검붉은 핏덩어리를 토해내며 그대로 정신을 잃어버리기는 했지만 말이다. “쿠어어어!” 벨 라야는 주먹을 통해 전해져 오는 그 확실한 타격감을 확인하자 크게 울부짖었다. 그것은 자신의 승리를 확신한 것을 표현하기 위한 괴성이었으나, 미처 그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예상치 못한 일격을 허용해야만 했다. 완전히 재생이 되지 못해 혈관과 살점이 그대로 드러난 그의 몸을 거대한 하얀 불꽃의 파도가 덮쳐온 것이다. 뿐만이 아니었다. 한쪽이 지글거리며 타오르고 있을 때, 다른 한쪽에서는 극한의 냉기가 재생을 위해 꿈지럭거리는 살점들을 얼려버리고 있었으며, 그렇게 연속해서 이어진 끔찍한 고통으로 인해 감각이 마비되어 버린 벨 라야의 등판으로 치명적인 무언가가 파고 들었다. 그것은 벨 라야라는 존재가 세상에 존재하기 시작한 이래로 처음 겪어보는, 끔찍한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 “끄아아악!” 벨 라야는 자신이 지를 수 있는 가장 커다란 목소리로 비명을 터뜨리더니 불에 데인 지렁이마냥 미친 듯이 몸을 뒤채며 바닥을 뒹굴기 시작했다. 무엇인가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자신의 등 뒤를 파고들어 그 살점을 뜯어 먹고 있었다. 그의 신체가 정상적이었다면 이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변이된 벨 라야의 몸은 겉을 에워싸고 있는 갑옷과도 같은 비늘은 물론이거니와 그 안을 채우고 있는 살점마저 엄청난 방어력을 지니고 있는 탓에 어지간한 무기로는 흠집을 내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하지만 앞서 폭우처럼 쏟아져 내린 절멸의 검은 태양은 그런 벨 라야의 신체를 재생 이외의 다른 것에 신경 쓸 수 없을 지경까지 몰아 붙였고, 그 결과 이런 터무니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단순히 그것만으로도 소름 끼치고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건만, 그렇게 자신의 파고 들어가는 그 무엇인가가 곧바로 생명의 근원이나 다름없는 다크 시드를 향해 움직이고 있음을 깨닫는 순간 벨 라야는 검은 태양의 폭우와 마주했을 때조차 느껴 본 적이 없었던 공포라는 감정에 젖어 들었다. 벨 라야는 생명에게 있어 가장 근원적인 공포와 직면했다는 사실 자체를 감당하지 못하고 부르르 몸을 떨다가 이내 미친 듯이 스스로의 몸을 헤집기 시작했다. 피가 튀고 살이 찢겨진다. 하지만 그런 발악에 가까운 행동으로도 자신의 몸 안에 파고든 정체 모를 무언가를 끄집어 내는 일은 불가능했다. 그리고, 마침내 어느 순간에 이르자 벨 라야는 마치 석상이라도 된 것처럼 그대로 몸이 굳어 버리고 말았다. 몸 안에 감추어진 다크 시드가 누군가의 손에 쥐어진 것이 느껴진 탓이다. “아, 안 돼.” 벨 라야는 드디어 재생이 거의 끝나 형태를 갖춘 입으로 그렇게 중얼거렸지만, 다음 순간 눈을 흡뜨고 입을 크게 벌린 채 몸을 떨기 시작했다. 성좌의 주인 벨 라야는, 고통과 공포가 극한에 이르면 입으로 소리를 내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는 것을 오랜 삶을 거쳐왔음에도 불구하고 오늘에서야 처음으로 깨달았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마지막 깨달음이었다.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부들부들 떨던 그의 몸은 어느 순간에 이르자 육체를 유지시켜 주고 있던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붕괴되며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의 몸 안에 존재하던 다크 시드가 떨어져 나가는 순간, 너무나도 허무하게 성좌의 주인 벨 라야는 생명이 끊어지고 말았다. 발악과도 같은 일격에 얻어맞아 벽에 처박혀 버렸던 하라바는 의식을 잃고 있다가 벨 라야의 육체가 순식간에 허물어지며 부패한 고기 덩어리 같은 형상으로 변함과 동시에 하얀 불꽃에 휩싸여 불타는 모습을 보며 정신을 차렸다. “이건...” 하라바는 의식이 단락되어 있는 동안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자신의 시야에 들어온 불타는 거대한 고기 덩어리가 벨 라야의 몸을 구성하고 있던 그것이라는 사실만큼은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자신이 정신을 잃고 있는 동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큭...” 하라바는 주위를 좀 더 자세히 살피기 위해 고개를 돌리려다가 몸 안의 뼈가 모조리 박살나 버린 것 같은 통증을 느끼며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그는 그 지옥과도 같은 고통 속에서 문득 한 사람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크르르르...” 발가벗은 채로 두 눈에서 붉은 안광을 터뜨리며 으르렁대고 있는 그 모습이라니. 하지만 하라바는 그가 벨 라야를 쓰러뜨린 장본인임을 어렵지 않게 알아 볼 수 있었다. 그 벌거숭이 남자의 손에 화려한 칠채서기를 내뿜고 있는 거대한 다크 시드. 씨앗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보통의 시드보다 몇 배는 큰, 주먹만한 검정색의 결정체가 눈에 들어온 순간 그것이 바로 벨 라야의 몸 안에 숨겨져 있던 다크 시드임을 하라바는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크크크크... 크하하하하!” 망할 뱀꼬리 자식. 하라바는 벨 라야의 최후를 인식하자 고통스러운 중에도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숨은 간신히 붙어 있다쳐도 그 역시 중상을 입은 것은 마찬가지. 웃음을 터뜨리는 순간 내장이 조각 조각 끊어지는 듯한 고통과 함께 다시금 정신을 잃어 버리고 말았다. 벌거숭이 상태로 자신의 손에 쥐어진 거대한 다크 시드를 홀린 듯이 바라보고 있던 준상이 정신을 차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음...” 광기의 정령에게 몸을 내맡긴 채 벨 라야의 몸속을 파고들어 다크 시드를 뽑아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것이 손에 들어온 순간 준상은 이 거대한 암흑의 씨앗이 지닌 마력에 현혹되었다. 그의 손에 쥐어진 이것은 지금까지 그가 접했던 어떤 힘과도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의 막대한 파괴력을 지니고 있었다. 다크 시드는 마치 스스로 살아 숨 쉬는 것처럼 손 안에서 고동치며 그의 내면에 속삭이고 있었다. 나를 받아들여라. 그리하면 너는 성좌의 주인이 되어 그 힘을 온전히 잇게 될 것이다. 네 안에 잠든 혼돈의 힘을 일깨워 새로운 성좌의 주인으로 거듭나라. 다크 시드는 그렇게 끊임없이 속삭이며 그를 유혹했다. 그것은 여느 생명체의 의식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치명적이었으나, 준상의 의식에는 광기의 정령이라는 또 다른 강대한 존재가 자리 잡아 있는 상태였다. 광기의 정령은 자신의 허락도 없이 준상의 내면으로 침투해 들어오는 이 유혹의 기운을 광폭하게 찢어발긴 후 그대로 집어 삼켰다. 본래대로라면 광기의 정령은 준상의 의식을 침탈해 그로부터 파괴의 본능을 충족시키려 들었겠지만, 다크 시드가 지닌 강대한 유혹의 힘을 집어 삼키자 포만감을 표하며 순순히 물러나 정령계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준상은 자신이 광기의 정령으로부터 다시 의식을 되찾은 것에 그런 과정이 숨겨져 있다는 것은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지금 자신의 손에 쥐어진 이 다크 시드가 얼마나 위험한 물건이지는 본능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준상은 인벤토리를 열어 보았다. 성좌의 주인이 품고 있던 다크 시드인지라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시드 무효화의 힘이 발휘되면 어쩌나 싶었지만, 다행히도 인벤토리는 정상적으로 열려졌다. 얼른 손 안에 쥐어진 다크 시드를 인벤토리에 집어 넣은 준상은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벨 라야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하기 직전 벗어 두었던 아이템들을 다시 착용했다. 그리고 그렇게 모든 아이템을 다 착용하고 나서야 붕괴가 가속되기 시작한 요새 한 귀퉁이에 쓰러져 있는 하라바의 모습을 발견했다. “...” 다가가서 살펴보니 철골의 제왕 하라바 은체우는 자신의 어깨 정도 밖에 안 되는 키와 땅딸막한 체구를 지닌, 동네 쌀집 아저씨라고 해도 믿을 만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런 투박한 외모가 아니었다. 고글에 나타난 그의 레벨은, 무려 85. 이것은 리체스가 요정 결계를 사용한 것보다도 더 높은 레벨이다. 레벨이 반드시 강함의 척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가 벨 라야를 궁지로 몰아넣지 않았더라면 제아무리 광기의 정령으로부터 힘을 빌린 준상이라 해도 성좌의 주인을 죽음으로 몰아넣지는 못했으리라는 점이다. 어차피 이대로 죽게 내버려 둔다고 해서 준상에게 이득이 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의 머리 속에 담겨진 시드를 얻을 수 있다면 모르겠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 레벨이 너무 높아서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그에게는 다른 세계에 대한 정보와 함께 앞서 벨 라야를 위기로 몰아넣었던 검은 태양이나, 그것을 보는 순간 언급되었던 벨 페오르 등에 대한 정보 역시 얻어낼 필요가 있었다. 준상은 의식을 잃은 하라바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염동력으로 그의 몸을 들어 올리고는 신기루 꽃으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의 모습이 석문을 통해 사라지고 잠시 뒤, 그때까지 힘겹게 버텨내고 있던 벨 라야의 차원 요새는 마침내 굉음과 함께 붕괴되며 차원의 틈 속에서 영원히 소멸해 버리고 말았다. 00354 트롤러 ========================================================================= 신기루 꽃으로 귀환한 준상은 연락을 받고 마중 나온 블레이크에게 하라바를 넘기기가 무섭게 이제나 저제나 하며 요정계에서 대기하고 있던 리체스와 헤네스, 그리고 서유미를 일시에 불러냈다. “어떻게 됐어요?” 리체스는 정령의 문을 통과하기가 무섭게 주위를 돌아보고는 신기루 꽃임을 확인하자 일단 경과부터 물었다. “처리했어.” 준상은 짤막하게 대답하고는 정령의 문을 빠져 나온 세 여자들에게 하라바를 가리키며 말했다. “죽지 않을 만큼만 일단 회복시켜 봐.” “누구에요?” “또 다른 별의 귀환자.” “...” 굳이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었고, 할 만한 내용도 없었다. 사실 준상으로서도 현재 하라바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철골의 제왕이라는 이명과 더불어 그가 지닌 힘의 일부에 관한 것 뿐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런가 보다 하며 바라보는 헤네스나 리체스와는 달리, 블레이크와 서유미는 피투성이가 된 채 정신을 잃고 있는 이 땅딸막한 사내의 모습을 유심히 바라 보았다. 헤네스도 리체스도 다른 세계의 존재인 것은 마찬가지. 하지만 그녀들은 이미 너무나도 친숙한 존재이기 때문에 처음과는 달리 다른 세상의 존재라는 인식이 많이 희미해진 상태였다. “헤네스와는 다른 세계의 존재인가요?” “그래.” 헤네스가 살고 있던 히딕스가 아닌 또 다른 세계의 주민. 블레이크는 이 정보를 알고 싶어하는 사람이 아주 많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서유미의 물음에 준상이 대답하는 동안, 리체스가 회복 마법을 하라바에게 베풀고는 준상에게 다시 말했다. “이미 몸이 스스로 회복을 시작했으니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거에요. 몇 군데 뼈에 금이 가긴 했지만, 그것도 이미 붙기 시작했고요.”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블레이크에게 말했다. “이 자도 적당한 곳에 데려다 놓도록.” “알겠습니다.” 블레이크가 하라바를 들쳐 메고 사라지자, 맥밀란이 서둘러 계단을 내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준상은 그녀를 손짓해 부른 다음 다시 물었다. “먼저 보낸 자들은?” “처음 데려온 사람들과 여자들은 각기 다른 곳을 배정했고요, 파란 옷의 여자 역시 말씀하신 대로 격리해 두었습니다.” “수고했다.” 맥밀란을 치하한 준상은 다시 리체스에게 말했다. “그들이 함부로 밖을 나다니지 못하도록 결계를 만들었으면 하는데.” “최상층처럼요?” “그래.” “어렵지 않아요. 요정의 돌 남은 것 있으면 좀 주세요.” 인벤토리에서 요정의 돌이 담긴 주머니를 건네주자 리체스는 맥밀란과 함께 계단을 올라갔다. 준상은 그녀가 바삐 움직이는 모습을 보며 다시 서유미에게 물었다. “중국인들은?” “일단 요정계에 데려다 놨어요. 그들도 이곳으로 데려 올까요?” “아니, 그럴 필요는 없다.” 어차피 그들은 조만간 미국 쪽에 넘길 생각이니 굳이 여러 가지를 보여줄 필요가 없었다. 상황이 급해서 요정계로 보내기는 했지만, 굳이 신기루 꽃이나 이번에 잡아온 다른 세계의 존재들과 접점을 만들어 줄 문제의 소지를 만들 이유가 없는 것이다. 리체스가 사람들을 가둬둔 숙소에 최상층에 만들어 둔 것처럼 출입을 선택적으로 제한하는 결계를 만드는 작업을 마치고 나서야 준상은 동료들에게 다시 말했다. “모두 수고했다. 돌아가서 휴식을 취하도록.” 준상 역시 반려들과 함께 돌아가 그 동안 못 본 누리 얼굴도 마음껏 보면서 휴식을 취하려 했지만, 요정계로 연결된 석문을 통과하는 순간 서유미의 휴대폰에서 알림음이 울러 퍼졌다. 서유미는 얼른 휴대폰을 꺼내어 메시지를 확인하더니 준상에게 바로 그 내용을 알렸다. “딜런 중위에게서 온 연락입니다. 검은 태풍 소멸. 경과보고를 원합니다.” “흠.” 성좌의 주인 벨 라야가 소멸한 것이 바로 직전임을 감안하면, 검은 태풍의 갑작스런 소멸도 별로 이상한 현상은 아니다. “연락해 보도록.” “네.” 서유미는 곧바로 메신저를 통해 딜런에게 연락을 취하고는 휴대폰을 준상에게 넘겼다. “딜런.” “안녕하십니까. 바로 연락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두 무사하십니까?” “물론.” “다행입니다. 역시 준상님이라면 이 정도 문제는 간단히 해결하실 수 있을 거라 믿고 있었습니다.” 말은 그렇게 하고 있었지만, 딜런의 표정은 감탄이라기 보다는 어딘지 모르게 질린 듯한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거기 간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일을 처리했다는 건지. 하긴, 중국이 검은 태풍을 없애기 위해 핵폭탄까지 두 발이나 사용했던 것을 감안하면 딜런이 질린 표정을 짓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준상은 딜런이 호들갑을 떠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질문 하나를 던졌다. “검은 태풍은 그렇다 치고, 안에 있던 마수들은 어떻게 되었지?” “네?” 딜런은 자신이 들은 말이 무슨 뜻인지 잠시 이해하지 못한 표정으로 버벅대다가, 뒤늦게서야 그 의미를 깨닫고는 안색이 창백해졌다. “바, 바로 확인하겠습니다.” “확인이 되는 대로 연락하도록.” “네.” 준상은 통화를 끝내자 서유미에게 다시 휴대폰을 넘겼다. “마수라면...” 어두운 표정으로 헤네스가 입을 열자, 준상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검은 태풍 자체는 그 현상을 일으킨 것으로 생각되는 성좌의 주인이 소멸하면서 사라졌다 치더라도, 그 안에 소환되어 있던 마수들까지 사라졌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오히려 검은 태풍의 소멸로 인해 활동 영역에 대한 제한이 사라지면서 사방으로 풀려났을 가능성이 크지.” “...” 준상과 동료들이 그곳을 돌파하면서 적지 않은 수의 마수를 해치우기는 했지만, 그들이 지나간 경로는 검은 태풍이 뒤덮고 있던 영역의 전체 넓이에 비하면 아주 적은 범위에 지나지 않는다. 그 나머지 영역에 우글대고 있던 마수들이 검은 태풍이라는 우리를 벗어났다면, 모르긴 해도 지금쯤 중국이나 그 인접국들은 뛰쳐나온 마수들의 폭주로 인해 아비규환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준상은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헤네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신경 쓸 것 없다. 우리는 검은 태풍의 확산을 막은 것만으로도 할 수 있는 일은 다 한 것이니까.” “네.” 일단 간단하게 몸을 씻고 누리와의 시간을 가진 준상은 요정계로 데리고 온 중국인들과의 면담을 거쳤다. “나는 아는 것이 없소.” 군복을 입은 자들 가운데 가장 계급이 높은 중국군 소령은 준상과 얼굴을 마주하기가 무섭게 그 말부터 입에 담았다. 입술을 깨문 채 주먹을 불끈 쥐고 있는 모습을 보니 고문이라도 각오하고 있는 모양이었지만, 준상은 굳이 그런 야만적인 행동을 할 생각이 없었다. “그런 것 같군.” “...” “아는 것이 있을 리가 없지. 어차피 반 가면을 쓴 인물의 손에 놀아난 것 뿐이니.” “그, 그걸 어떻게?” 소령은 자신도 모르게 그와 같이 반문하고는 아차 싶었던지 얼른 손을 들어 입을 막았다. 하지만 준상은 담담한 표정으로 자기 할 말만 계속 했다. “그 안에 잡혀 있느라 정확히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하기 어려울 테니, 지금 상황을 설명해 주도록 하지.” “...” “네 놈들이 만들어낸 검은 태풍은 타클라마칸 사막을 모두 뒤덮은 것도 모자라 신장을 넘어 키르기스스탄과 타지키스탄까지 넘어가 버렸다. 중국 정부는 그것을 없애기 위해 핵폭탄까지 두 발이나 썼지만, 오히려 검은 태풍을 더 빨리 팽창하게 만들고 말았지.” “그럴수가...” “당연한 얘기지만 태풍의 영향권에 들어갔던 지역은 모조리 마수들에게 짓밟히고 말았다. 다른 곳은 모르겠지만, 카슈가르와 야르칸트, 호탄은 내가 확인해 보니 개새끼 하나 살아남지 못한 채 죽음의 땅으로 변해 버렸더군.” “거짓말... 거짓말이다!” 소령은 발악하듯 그렇게 외치며 몸을 일으켰지만, 이내 준상의 몸에서 가공할 위압감이 쏟아져 나오자 다리에 힘이 풀리며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내가 왜 네 놈에게 거짓말을 해야 하지?” “으으으...” 이제 소령은 아무 말도 못한 채 주저앉아 식은땀만 흘리고 있었다. 준상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담담한 말투로 통보했다. “조만간 너희들은 미국 측에 인도될 것이다.” “그런...” “아마 그쪽에서는 가급적 너희들을 외부에 노출시키지 않은 채 검은 태풍이라는 현상이 일어난 전말을 상세하게 알아내려 들겠지. 미국이 인도주의를 표방하고는 있지만, 과연 신사적인 회유만 하려고 들지 모르겠군.” “...” 소령은 참담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준상은 그런 소령을 바라보며 계속 말했다. “물론 네 놈은 거기 가서도 아는 것이 없다고 말을 하겠지만, 과연 그들이 그걸 믿어줄까?” “...” “뭐, 그건 그렇다 치고.” “...” “회유든 뭐든 결국 빼낼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 확인되면 또 어떻게 될까.” “도대체... 원하는 게 뭐요?” 소령은 자포자기한 표정으로 그렇게 물었지만, 준상은 여전히 자기 할 말만 계속할 뿐이었다. “네 놈은 모르겠지만, 미국은 이번 일에 상당한 투자를 했다. 하지만 그 결과가 이런 빈 쭉정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들로서는 본전 생각이 날 수 밖에 없을테고, 어떻게든 네 놈들을 이용해 손실분을 메꾸려고 들겠지.” “그, 그만...” 이제 소령은 더 이상 감당하기 어려웠던지 두 손으로 귀를 막고 고개를 무릎에 처박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귀를 막아도 코앞에서 울려 퍼지는 준상의 목소리를 완전히 차단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미국이 그렇게 나온다 쳐도 중국이 순순히 그 손실분을 메꿔줄까 하는 점이겠지.” “으으으...” 이렇게 되면, 자신은 이미 살아도 산 목숨이 아니다. 만약 눈앞의 이 남자가 말한대로 상황이 흘러간다면, 중국 정부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 하나는 미국 정부의 요구를 받아들여 협상에 응하는 것이고, 또 한 가지는 그들의 존재를 지워 없었던 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중국이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여 협상에 응한다 하더라도, 상황이 이미 그처럼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확대되었다면 누군가는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만 한다. 소령은 준상에게서 뿜어져 나오던 위압감이 사라지고서도 고개를 들지 못하다가, 한참이나 지나서야 온몸이 땀으로 흥건하게 젖은 채 입을 열었다. “제가... 제가 어떻게 하기를 바라십니까?” 하지만 준상은 차가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바라는 것? 그런 건 처음부터 없었다.” “그럼 왜 절 불러내신 겁니까.” 소령의 물음에 준상은 차가운 말투로 대꾸했다. “얼마나 얼빠진 놈이기에 그런 되도 않는 술수에 넘어간 건지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다.” “...” 준상은 그렇게 말하고는 씁쓸한 표정으로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블레이크에게 말했다. “끌고 가도록.” “네.” 블레이크가 팔을 잡고 일으키자, 소령은 발악하듯 외쳤다. “살려주십시오! 이대로 가면 전 죽습니다!” 하지만 준상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블레이크에게 말했다. “조용히 시켜라.” “네.” 블레이크의 커다란 손날이 목덜미에 떨어지자, 소령은 끽 소리도 못하고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서유미가 소령을 들쳐 메고 나가는 블레이크의 뒷모습을 보며 준상에게 물었다. “저러다 자살이라도 하면 어쩌시려고.” 준상은 피식 웃어 버렸다. “그럴 생각이 있었다면 기회는 이미 몇 번이나 있었다.” “하긴...” 서유미가 고개를 끄덕이자, 준상은 다시 그녀에게 말했다. “딜런과 약속을 잡도록.” “알겠습니다.” 준상은 몸을 일으키고는 누리가 있는 여왕의 침실로 향했다. “오셨어요.” “어서 오세요.” 막 잠이 든 누리의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던 리체스와 헤네스는 준상이 안으로 들어오자 반색하며 몸을 일으켰다. 준상은 그녀들을 한번씩 안아주고는 누리가 깨지 않도록 조용히 속삭였다. “리체스.” “네.” “그 목걸이, 잘 하면 풀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랬었지?” 리체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자신의 목에 채워져 있는 펫 목걸이를 만지며 대답했다. “이거 말인가요?” “그래.” 준상의 대답에 리체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혹시 그 사람에게 쓰실 생각인가요?” 헤네스가 그 말을 받았다. “그 사람이라면... 이번에 구출한 남자요?” 준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같은 귀환자끼리도 통할지는 의문이지만... 일단 시도는 해봐야겠지.” 준상의 말에 리체스는 그제서야 깨달았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래서 완전히 회복을 시키지 않았던 거군요?” “맞아.” 선선히 인정하는 준상의 모습에 리체스는 눈을 흘겼다. “너무 사악한 거 아니에요?” “어쩔 수 없어. 가만히 놔두기에는 너무 강한 존재니까.” 뭐라해도 그는 혼자 힘으로 차원 요새를 거의 다 부수어버리고, 성좌의 주인 벨 라야를 빈사 상태까지 몰고 간 장본인. 게다가 또 다른 성좌의 주인인 벨 페오르와의 관련이 의심되는 상황이니, 어떻게든 하나라도 안전 장치를 마련해 둘 필요가 있었다. 준상의 의도를 파악한 리체스는 바로 대답했다. “알았어요. 바로 시작할게요.” “고맙다.” 생각보다 펫 목걸이를 벗기는 시술은 간단하게 끝나 버렸다. 연구실로 들어가서 몇 가지 장비를 꺼내어 실행시키는 것만으로도 펫 목걸이는 너무나도 허무하게 벗겨져 버린 것이다. “벗을 수 있었으면 진작 그러지 그랬어?” 리체스는 웃으며 대답했다. “이런 게 당신 취향인가 싶어서 내버려 두고 있었죠. 결혼 반지 대신이라고 생각하면 그뿐이기도 하구요.” 혀를 쏙 내밀며 말하는 리체스의 모습에 준상은 마주 미소를 짓고는 헤네스에게 다시 말했다. “헤네스도 벗을래?” 하지만 헤네스는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전... 리체스 언니만큼 강하지 못하니 그냥 하고 있을게요.” “...” 준상은 말없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고는 리체스의 목에서 벗긴 목걸이를 받아 들고 신기루 꽃으로 가는 문을 열었다. 00355 트롤러 ========================================================================= 신기루 꽃으로 들어가자 블레이크와 맥밀란이 요정 보좌관들과 함께 입구 한 켠에 내려놓은 식량들을 점검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하라바와 앙가라드를 제외하고는 전투력이 없는 인원들이기는 하지만, 수습생들이라면 몰라도 ‘고객’들의 경우에는 무엇을 숨기고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황이라 함부로 요정계에 들여놓기가 곤란했기 때문에 문제가 없음을 파악하기 전까지는 신기루 꽃에 감금해둘 생각이었다. 블레이크는 전투식량의 수량을 확인하다가 석문을 통해 준상이 나타나자 얼른 다가와 인사를 했다. “오셨습니까.” “별 문제는 없겠지?” “네. 처음에는 다소 경황이 없어 보이긴 했지만, 살펴보니 큰 문제는 없어 보입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식량이나 기타 물자를 분배할 때는 반드시 맥밀란과 함께 움직이도록.” “알겠습니다.” 다른 이들, 특히 고객들의 경우에는 시스템과 칠성좌에 대한 내용을 파악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면담을 해볼 필요가 있다. 벨 라야 정도 되는 자가 아무 능력도 없는 자를 ‘고객’이라고 부르며 예우할 때는 그만한 배경이나 이유가 있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고, 이 모든 상황을 주관하는 시스템과 칠성좌와의 관계도 앞으로를 위해서는 확실하게 파악해 두어야만 한다. 그러나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하라바 은체우. 바로 철골의 제왕이라 자칭했던 자의 신병을 조금이라도 빨리 구속해 두는 일이다. 어차피 ‘고객’들은 달리 숨겨둔 무언가가 없는 이상은 독 안에 든 쥐 신세이니 굳이 이쪽에서 안달을 낼 필요가 없었다. “남자를 가둬둔 곳이 어디지?” 준상의 물음에 블레이크는 한 손으로 나선 계단의 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쪽 계단을 올라가면 나오는 방 가운데 세 번째입니다.” 위치를 확인한 준상은 헤네스와 리체스를 데리고 나선 계단을 올라가 하라바가 갇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선택적으로 인원을 통과시키는 보안 결계의 힘이 몸을 스치고 지나가자, 광전사들의 숙소로 사용하기 위해 내무반과 비슷한 형태로 개조된 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라바는 그 중 왼쪽 침상을 차지한 채 누워 있었는데, 그의 모습이 보이자 우선 리체스가 다가가 다시 한 번 상태를 확인했다. 몇 가지 간단한 형태의 마법진이 허공에 떠올랐다 사라지고 나서야 리체스는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회복 속도가 굉장히 빨라요. 이대로라면 하루 정도면 완치되고도 남겠는데요.”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의 레벨은 무려 85. 그나마도 아이템 하나 착용하지 않은 빈 몸뚱이라 저 정도지, 장비를 완전히 착용하고 있는 상태라면 정신적인 피로는 어찌 할 수 없다쳐도 육체는 거의 대부분 회복되었을 지도 모른다. “서둘러야겠군.” 준상은 하라바의 옆으로 다가가 휴대폰과 펫 목걸이를 꺼내며 말했다. “오픈 펫 목걸이.” 그러자 휴대폰에 곧바로 메시지가 하나 나타난다. 죄송합니다. :하라바 은체우를 새로운 펫으로 삼는데 실패했습니다. -강제로 펫을 만들기 위해서는 해당 생물의 체력이 10퍼센트 이하가 되어야만 합니다. -사용자에게 높은 호감도를 지니고 있다면, 체력 여부에 상관없이 일정 확률로 펫을 만드는 것이 가능합니다. 단, 이 경우 행운 수치의 영향을 받을 수 있습니다. “...” 실패라니. 벌써 10퍼센트 이상으로 체력이 회복되어 버렸단 말인가. 준상은 얼굴을 찌푸리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느닷없이 정신을 잃고 있는 하라바를 향해 포박을 실행했다. 안 그래도 정신을 잃은 상태였던 하라바는 저항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준상에게 목덜미를 잡히며 사지의 자유를 잃어 버렸다. “헤네스. 이걸 써라.” “네?” 준상은 인벤토리에 넣어 두었던 기묘한 촉수 같은 것을 꺼냈다. 이것은 검은 태풍의 중심 근처에서 때려잡았던 마수의 더듬이였는데, 생명이 끊긴 뒤에도 푸른 불길에 싸여 있는 것을 보고는 아이템인가 싶어 일단 보관해 둔 것이었다. 당시 상황이 워낙 정신이 없어서 잠시 잊고 있었고, 더듬이 주위의 푸른 불길도 많이 약해진 상태였지만 지금과 같은 상태라면 매우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다. “설마... 이걸로 이 분을 때리라구요?” “못하겠으면 착한 기안이라도 불러.” “...” 헤네스는 준상에게서 더듬이를 건네받은 채 우왕좌왕하다가 다시 한 번 재촉이 이어지자 아무래도 안 되겠던지 수호의 신물을 꺼내 착용하고는 착한 기안을 불러내었다. “음? 이건 뭔가요? 손에 착착 감기는 데다 반짝거리는 게 꽤 멋있는데요?” 착한 기안은 불려지기가 무섭게 손에 들린 마수의 더듬이를 보며 눈을 반짝거렸다. “그걸로 이놈을 때려라. 죽지 않을 정도로만.” “후후후, 정말요? 무르기 없기에요.” “그래.” 착한 기안은 그동안 별로 활약할 기회가 없었던 것에 대한 분풀이라도 하듯이 희미한 푸른 불길에 휩싸인 더듬이를 하라바에게 마구 휘둘러대기 시작했다. 철썩 거리며 착착 휘감기는 채찍의 현란한 모습이 어찌나 대단하던지, 주위를 날며 그 모습을 지켜보던 리체스가 강한 호기심을 드러낼 정도였다. “그거 재미있어요?” “후후후. 왜요? 한 번 해볼래요?” “우음...” 리체스는 손가락을 입에 물고는 잠시 바라보다가 준상과 눈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웃으며 거절했다. “헤헤, 나중에요.” 싫다는 말이 아닌 걸로 미루어서는 언젠가 기회가 되면 꼭 휘둘러 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눈치인지라 준상은 속으로 괜한 걸 보여 주었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으윽! 허윽!” 강화도 되지 않은데다, 내재된 화염의 기운도 많이 약해져 있는 상태라 큰 피해를 주기는 어려웠지만, 현란한 채찍질이 계속해서 이어지자 생명의 위협을 느꼈는지 의식을 잃고 있던 하라바가 눈을 부릅뜨며 정신을 차렸다. “누구냐! 누가 감히!” 하라바는 자신의 신체가 무언가에 구속되어 있음을 깨닫고 그것에 저항하기 시작했으나, 그의 의지가 포박을 깨부수기 전에 준상의 입에서 한 마디가 흘러 나왔다. “오픈 펫 목걸이.” “뭐?” 하라바의 입에서 당황스런 외침이 터져 나왔지만, 그가 이상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준상의 손에 쥐어져 있던 펫 목걸이는 한 줄기 빛과 함께 사라져 버린 뒤였다. 준상은 휴대폰에 들어온 메시지를 확인했다. 축하합니다! :하라바 은체우를 새로운 펫으로 삼는데 성공했습니다. -현재 동시 소환 가능한 펫의 숫자는 다섯입니다. -현재 소환 가능한 펫은 모두 여섯입니다 1.몽몽 [상세 정보] 2.헤네스 브레아 [상세 정보] 3.엘리 [상세 정보] 4.이벨라 하란두르 [상세 정보] 5.밤톨 [상세 정보] 6.하라바 은체우 [상세 정보] -펫 소환을 원하시면 해당 번호를 누르시고, 만약 소환을 원치 않으신다면 n을 누르세요 (1/2/3/4/5/6/n) _ 많기도 하다. 강제적인 수단이 동원되기는 했지만 일단 성공했음을 확인한 준상은 곧바로 하라바를 역소환하려다가 갑자기 쏟아지는 메시지들에 당황했다. 축하합니다! :이고르를 새로운 펫으로 삼는데 성공했습니다. -현재 동시 소환... 축하합니다! :마난바를 새로운 펫으로 삼는데 성공했습니다. -현재 동시 소환... 축하합니다! :듀아 아란 사다트를 새로운 펫으로 삼는데 성공했습니다. -현재 동시 소환... 축하합니다! :파티아 아란 사다트를 새로운 펫으로 삼는데 성공했습니다. -현재 동시 소환... 축하합니다! :카말을 새로운 펫으로 삼는데 성공했습니다. -현재 동시 소환 가능한 펫의 숫자는 다섯입니다. -현재 소환 가능한 펫은 모두 열 하나입니다 1.몽몽 [상세 정보] 2.헤네스 브레아 [상세 정보] 3.엘리 [상세 정보] 4.이벨라 하란두르 [상세 정보] 5.밤톨 [상세 정보] 6.하라바 은체우 [상세 정보] 7.이고르 [상세 정보] 8.마난바 [상세 정보] 9.듀아 아란 사다트 [상세 정보] 10.파티아 아란 사다트 [상세 정보] 11.카말 [상세 정보] -펫 소환을 원하시면 해당 번호를 누르시고, 만약 소환을 원치 않으신다면 n을 누르세요 (1/2/3/4/5/6/7/8/9/10/11/n) _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순식간에 새로운 펫 다섯이 추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메시지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축하합니다! 아이템카드 ‘예속의 족쇄’를 습득하였습니다. :마음에 드는 동물을 길들여 펫으로 삼아보세요. -강제로 펫을 만들기 위해서는 해당 동물의 체력이 10퍼센트 이하가 되어야 합니다. -몬스터나 언데드는 펫으로 만들 수 없습니다. -사용자에게 높은 호감도를 지니고 있다면, 체력여부에 상관없이 일정 확률로 펫을 만드는 것이 가능합니다. 단, 이 경우 행운 수치의 영향을 받을 수 있습니다. 축하합니다! 아이템카드 ‘예속의 족쇄’를 습득하였습니다. :마음에 드는 동물을... 축하합니다! 특수카드 ‘인벤토리’를 획득했습니다. :특수카드를 획득하면 봉인된 특수기능을 해제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이미 특수기능 ‘인벤토리’가 개방되어 있으므로 인벤토리 용량을 62칸 확장합니다. -현재 당신의 인벤토리에는 서로 종류가 다른 114가지 물품을 등록하여 사용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여기에 펫 목걸이와 같은 기능을 지닌 예속의 족쇄라는 아이템 카드가 두 장이나 추가되었고, 인벤토리가 무려 62칸이나 추가로 확장되었다. “이 놈! 나에게 감히 무슨 짓을!” 하라바는 분노하며 그렇게 외치더니 그제서야 포박에서 벗어나 주먹을 휘둘렀으나, 그 주먹이 준상의 얼굴에 닿기도 전에 한 줄기 빛과 함께 역소환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런 것도 가능했단 말인가.” 갑자기 쏟아진 펫 추가 메시지는 아마도 하라바가 데리고 있던 펫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의 레벨만 해도 85인 점을 감안했을 때 펫 다섯에 예속의 족쇄 두 개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도 확실히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이런 식으로 다른 귀환자를 펫으로 삼았을 때 그에 예속되어 있던 펫까지 전부 자신의 소유로 넘어오는 것은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게다가 놀라운 것은 하라바가 지니고 있던 인벤토리까지 전부 자신에게 소유권이 넘어왔다는 사실. 이것은 경우에 따라서는 악용될 공산이 큰 사안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펫 목걸이나 예속의 족쇄 같은 것은 쉽게 얻을 수 없는 보상이라는 점. 펫이나 펫 목걸이는 일반적인 보상 상자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칭호 등을 달성해야만 얻을 수 있는 보상이기 때문에 귀환자들 대부분은 그런 보상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을 것이다. “예상 외의 소득을 얻었군.” 준상은 하라바의 정보를 확인해 보았다. 펫 정보 이름 : 하라바 은체우 종류 : 불명 레벨 : 85Lv 경험치 : 695243 등급 : 불명 분류 : 복합 성장 : 대기만성(극대) 속성 : 대지 스킬 : 근성 85Lv(-77), 열혈 85Lv(-77) [정보] 호감도 : 0 충성도 : 0 카드슬롯 : 10개 [정보] (소유카드수:불명) 설명 : 불명. (주의) 하라바 은체우는 현재 신체에 극심한 피해를 입은 상태이므로 완전한 회복이 이루어질 때까지 소환이 불가능합니다. 펫 정보에는 레벨과 스킬 등의 정보만 나와 있을 뿐, 구체적인 정보는 언급되어 있지 않았다. 아무래도 다른 별의 귀환자라서 그런 모양이다. 하지만 어차피 펫이 되어 버린 이상, 그런 것은 나중에 확인해도 될 일. “리체스.” “네?” “이거 할래?” 준상이 하라바에게서 얻어낸 예속의 족쇄를 휴대폰에서 꺼내어 보이며 말하자, 아쉬운 표정으로 더듬이를 만지작거리고 있던 착한 기안이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우후후, 취미도 고상하셔라.” “...” 그의 생각으로는 목걸이나 족쇄나 거기서 거기가 아닌가 싶었지만, 아무래도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그렇지가 않았던 모양이다. 리체스는 준상을 향해 눈을 흘기고는 못 말리겠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른 건 눈치가 빠른 분이...” “뭐가?” “됐거든요? 그거나 이리 줘요.” 준상은 입을 삐죽거리는 리체스를 보며 말했다. “가지고 싶으면 말을 하지.” “뭘요?” “결혼반지.” “...” 리체스는 못들은 척 하며 고개를 돌렸지만 싫은 눈치는 아니었다. 00356 트롤러 ========================================================================= 어쨌거나. 하라바를 펫으로 삼는 일을 마친 준상은 그로 인해 추가로 획득한 다른 펫부터 일단 확인을 시작했다. 펫 정보 이름 : 이고르 종류 : 검은 집사 고양이 레벨 : 43Lv 경험치 : 125433 등급 : Rare 분류 : 복합 성장 : 조숙(중) 속성 : 그림자 스킬 : 가사 43Lv, 염동력 43Lv [정보] 호감도 : 50 충성도 : 50 카드슬롯 : 2개 [정보] 설명 : 검은 집사 고양이는 귀찮고 피곤한 가사로부터 당신을 해방시켜줄 강력한 조력자입니다. 강력하지는 않으나 세심한 염동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에 단순한 잔심부름은 물론이고 요리나 세탁과 같은 어렵고 복잡한 일이라도 혼자 힘으로 척척 해냅니다. 만약 아이가 있다면 안심하고 육아를 맡기셔도 좋습니다. 이 작고 귀여운 펫은 짜증내는 일도 없이 당신의 편안하고 안락한 일상을 수호해 줄 것입니다. “오오!” 준상은 별 기대 않고 열어본 펫 정보의 내용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져서 탄성을 터뜨렸다. “왜 그러세요?” “그게... 잠깐만.” 휴대폰에 찍힌 한글 메시지를 보여주려다가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생각에 준상은 검은 집사 고양이 이고르를 바로 소환해 보았다. 그러자 그들의 눈앞에 빌로드처럼 윤기나는 검은 털을 지닌 검은 고양이 하나가 맵시 나는 붉은 리본을 목에 맨 채로 모습을 드러냈다. 이고르라는 이름이 붙은 이 펫은 보통의 다른 고양이들과는 달리 사람처럼 뒷다리로 서 있었는데,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자 멋들어지게 앞다리를 앞으로 내밀며 인사를 해 보였다. “어쩜!” 지금 당장 무도회에 내보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자연스럽게 격식이 몸에 배인 그 옛스러운 인사에 헤네스는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터뜨리고 말았다. 신기해 하기는 리체스도 마찬가지. “얘 뭐에요?” “새로운 펫. 가사 전문이라는데?” 준상의 대답에 질문을 던진 리체스는 물론이고 헤네스도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귀엽긴 하지만... 이렇게 작은 애가 가사 같은 걸 할 수 있을까요?” “그러게요.” 그녀들의 말에 준상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대답했다. “그거야 시험해 보면 될 일이지.” 준상은 꼿꼿하게 두 발로 버티고 선 검은 고양이 이고르에게 지시를 내렸다. “저기 깔아 놓은 담요 좀 정리해 봐.” 그러자 이고르는 다시 한 번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를 하더니 천천히 공중으로 떠올랐다. “하늘도 날 수 있는 거에요?” “아무래도 자신의 몸을 염동력으로 들어 올릴 수도 있나 본데.” “와...” 공중으로 떠오른 이고르는 짧은 두 개의 앞발을 앞으로 내밀더니 마치 오케스트라를 연주하는 지휘자처럼 신중하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와 동시에 방금 전까지 하라바가 깔고 덮었던 담요들이 두둥실 허공으로 떠올라 차곡차곡 정리되었다. 칼날처럼 각이 잡힌 채 발이라도 달린 것처럼 수납장 안으로 스르르 모습을 숨기는 담요의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던 준상과 두 반려들은, 그 모든 일이 끝나자 다시 바닥에 내려서서 연주를 마친 지휘자처럼 앞발을 내밀며 허리를 깊이 숙여 보이는 이고르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박수를 치고 말았다. “대, 대단해. 너 정말 고양이 맞니?” “이건 차라리 예술이라고 부르는 편이 좋겠어요.” 리체스와 헤네스의 극찬이 이어지자, 준상은 이고르의 다른 능력도 이 기회에 확인해 보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왕 이렇게 되었으니, 위로 올라가서 요리도 한 번 시켜 볼까?” “요리요? 얘가 요리도 할 수 있어요?” “그렇다는데.” 준상의 대답에 리체스와 헤네스의 눈이 반짝반짝 빛을 발했다. “당연히 확인해 봐야죠! 그런데 얘 이름이 뭐에요?” “이고르.” “이고르, 이리 온.” 헤네스가 손을 뻗자 이고르는 다시 한번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보이더니 냉큼 헤네스의 품으로 뛰어 올랐다. “나도 안아 보고 싶었는데.” 작은 요정의 모습인지라 지금으로서는 이고르를 안기는커녕 안겨 가야 할 판국이다 보니 리체스는 그런 헤네스의 모습을 보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후훗. 부럽죠?” 그들은 곧바로 나선 계단을 통해 위층으로 올라가 이고르에게 컨테이너 하우스의 주방을 보여 주었다. “이걸 이렇게 켜면 불이 나온다. 냄비나 기타 도구들은 이쪽 칸에 정리 되어 있고, 식재료는 여기 이 냉장고 안에 보관되어 있다. 이쪽에는 조미료가 들어 있는데 여기 이건 설탕이고, 이건 소금...” 간단하게 주방에 대한 것을 설명하자 이고르는 다시 한 번 자신의 몸을 띄워 주방의 물품들을 살펴 보고 조미료나 다른 식재료를 일일이 스스로 확인하고는 그 모든 것이 끝나자 주문을 하라는 듯이 오른쪽 앞발을 가슴에 댄 채 그들을 바라보았다. “일단 간단하게 요기를 할 만한 것을 만들어 봐.” 준상의 명령이 떨어지자 이고르는 깊게 허리를 숙여 보이고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허공으로 천천히 떠오르더니 앞발을 뻗으며 지휘를 시작했다. 진지한 표정의 검은 고양이가 앞발을 휘저을 때마다, 냄비와 국자가 춤을 추고 불이 피어오르며 밀가루 반죽이 허공에서 격렬하게 치대어 진다. 이것이야 말로 부엌에서만 볼 수 있는 오케스트라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명령을 내린 준상은 물론이거니와 그 모든 모습을 옆에서 홀린 듯이 지켜보고 있는 리체스와 헤네스 또한 그 화려한 퍼포먼스를 보는 것만으로도 포만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잠시의 시간이 흐르고, 그들 앞에 놓여진 것은 갓 구워진 따뜻한 빵과 부드러운 수프, 그리고 무슨 드레싱을 썼는지 입 안 가득 향기로움이 가득 전해지는 싱그러운 샐러드였다. 메뉴 자체는 대단한 것이 아니었지만, 그 맛과 식감과 향기는 일류를 넘어 가히 특급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풍미를 지니고 있었다. 비록 단순한 음식이기는 하지만 이곳의 식재료나 조미료, 주방 용품에 아직 익숙하지 않을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로 훌륭하게 맛을 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범상치 않은 요리 실력의 증명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너... 정말 고양이 맞니?” 빵을 한 입 깨물고는 한참이나 멍하니 넋을 잃은 채 허공을 바라보고 있던 헤네스가 그렇게 묻자, 이고르는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를 하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세탁은 물론 육아에도 일가견이 있다는데.” 싱그러운 샐러드를 한 입 먹고는 입을 헤 벌린 채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있던 리체스가 그 말을 듣고는 잘 되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행이네요. 셀라가 너무 힘들어 했었거든요.” “그녀가 고생이 심하긴 했지.” 서유미가 모셔온 할머니의 도움으로 부담이 다소 줄기는 했지만, 육아란 본래 전투나 다름 없는 일. 이런 저런 일 때문에 누리의 육아를 셀라에게 전부 맡기고 있는 것이 안 그래도 미안하던 참인데, 이런 강력한 도우미를 얻게 되었으니 무엇보다도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이고르는 대충 어떤 녀석인지 알아 봤으니, 이번엔 다른 녀석을 한번 살펴봐야겠군.” “또 있어요?” “응. 잠시만 기다려봐.” 준상은 휴대폰을 꺼내 다른 펫의 정보를 확인해 보았다. 이름 : 마난바 종류 : 솜씨 좋은 곰 아저씨 레벨 : 56Lv 경험치 : 238624 등급 : Rare 분류 : 복합 성장 : 대기만성(중) 속성 : 대지 스킬 : 제작 56Lv, 보관 54Lv [정보] 호감도 : 50 충성도 : 50 카드슬롯 : 3개 [정보] 설명 : 이 선량한 분위기의 덩치 큰 곰은 굉장히 훌륭한 손재주를 지니고 있습니다. 간단한 도구만으로도 당신에게 필요한 여러 가지 도구를 척척 만들어낼 수 있으므로 물자가 부족한 야전이라면 그 효용이 더욱더 크게 빛을 발할 것입니다. 곰 아저씨는 제작 레벨 1당 하나의 레시피를 습득하는 것이 가능하며, 한번 등록한 레시피는 이후 추가나 변경, 개선 등이 가능합니다. 처음에는 주로 작은 도구 위주의 물품을 제작할 수 있지만, 충분히 레벨이 높아지면 크고 장대한 건축물 같은 것도 만들 수 있게 됩니다. “허... 56레벨.” 하라바의 레벨이 워낙 높은 탓인지 펫들의 레벨도 범상치가 않다. 앞서 소환했던 검은 집사 고양이 이고르만 하더라도 서유미와 비슷한 레벨이었고, 이 녀석은 아예 그보다도 십레벨 이상이 더 높은 상태였다. “뭐가요? 펫이요?” “응.” “세상에.” 리체스야 원래부터 99레벨이니 그렇다 쳐도, 지구의 다른 귀환자들과 어느 정도 접촉을 해왔던 경험이 있는 헤네스로서는 무려 56레벨의 펫이 있다는 것 자체를 믿기 어렵다는 표정이었다. “그럼 소환한다.” “네.” 준상은 호기심에 가득차 반짝거리는 시선을 던지고 있는 두 반려 앞에 마난바를 소환했다. “...” “...” 이번에는 또 어떤 귀여운 펫이 나올까 하며 기대하던 두 반려는 갑자기 준상보다도 훨씬 큰 덩치를 지닌 육중한 체구의 야수가 모습을 드러내자 말문을 잃어 버렸다. 마난바는 조금 빛이 바랜 듯한 회색의 털이 전신에 뒤덮이고, 머리에는 안전모인지 철모인지 모를 둥근 모자를 쓴 커다란 곰의 모습이었다. 가슴 쪽에는 주머니가 잔뜩 달린 갈색 조끼를 지니고 있었는데, 소환이 끝나자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더니 그대로 바닥에 엉덩이를 대고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크네요.” “그러게요.” 그렇게 주저앉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깨 높이가 헤네스의 신장과 비슷할 정도이니, 단순히 크다는 말 정도로는 그 육중함을 표현하기에는 아무래도 부족하지 않을까 싶다. “얘는 특기가 뭐죠?” 겨우 정신을 차린 리체스의 물음에 준상은 휴대폰의 정보를 보며 대답해 주었다. “제작이라는데.” “제작이라면, 무언가를 만드는 능력이란 건가요?” “아마도. 한 번 시험해 볼까.” “네.” 준상은 느긋하게 주저앉아 어디서 났는지 호두를 까먹고 있는 마난바를 향해 명령을 내렸다. “마난바. 이곳에 어울리는 걸로 조각상을 한 번 만들어 보도록.” “...” 마난바는 준상에게서 명령이 떨어지자 먹고 있던 호두를 한 입에 털어 넣고 그 육중한 몸을 일으키더니, 갑자기 허공에서 커다란 대리석 조각 하나를 꺼내 놓았다. 조끼에서 정과 끌을 꺼내 뭉툭한 앞발로 나누어 쥔 마난바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준상과 헤네스, 그리고 리체스의 모습을 흘깃 바라보더니 조각을 시작했다. 콰드득! 커다란 대리석 파편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모습에 화들짝 놀라며 리체스가 말했다. “그냥 작은 걸로 시험해 보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요? 큰 조각은 시간도 많이 걸릴 텐데.” “생각해 보니 그렇군.” 하지만 이제 와서 말리기도 뭐해서 그들은 이고르에게 디저트를 부탁한 다음 평상에 앉아 향긋한 차와 달콤한 과자를 즐기며 마난바의 작업을 지켜보았다. 힘이 원체 좋은 탓인지, 대리석은 금새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마난바는 대략의 큰 형체를 잡는 것이 끝나자 뭉툭한 정을 집어넣고는 흡사 조각도를 연상시키는 다양한 모양과 크기를 지닌 정들을 하나 가득 꺼내어 세부적인 묘사로 들어갔다. 처음에는 저게 뭔가 싶은 느낌이었지만, 차 한 잔을 다 마실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그들은 지금 마난바가 만들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어렵지 않게 알아 볼 수 있었다. “저거... 저희들이죠?” “오른쪽은 리체스 언니인 것 같고, 가운데가 준상씨, 그 옆이 저인가 봐요.” 그들이 감탄의 시선을 보내는 사이 마난바는 후다닥 세부적인 묘사를 마무리 짓고 표면을 다듬어 광을 내서 완성을 해버리고 말았다. 사방에 널려져 있던 대리석 파편들은 조각상이 완성되기가 무섭게 이고르가 재빨리 청소해 버린다. “어디 보자.” 조각상이 완성되자 준상과 리체스, 그리고 헤네스는 가까이서 그것을 살펴보았다. “저희 집에도 이런 저런 조각품이 있기는 하지만, 이 정도의 작품은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제 머리카락 묘사한 것 보세요. 분명히 그냥 하얀 대리석일 뿐인데 무지개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지 않아요?” “그러고 보니 정말 그렇네요. 어떻게 한 거지?” 그들은 그렇게 한참이나 조각상을 관람하며 각자의 개성과 분위기가 잘 나타나 있는 사실적인 묘사에 찬사를 보냈다. “이번엔 다른 걸 시험해 보는 것이 좋겠군.” “어떤 걸로요?” “음...” 조각상의 제작으로 예술적인 감각과 기술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기는 했지만, 사실 지금 준상에게 필요한 것은 좀 더 실용적인 면의 조력자였다. “어떤 게 좋을까. 혹시 마법 지팡이 같은 것 만들 수 있나?” “...” 상당히 난이도가 있는 주문이었지만, 준상의 명령이 떨어지자 마난바는 앞발을 들어 머리를 긁적이더니, 다시 허공에서 여러 가지 물품을 꺼내 주위에 늘어놓기 시작했다. 커다란 모루부터 시작해서 화덕이나 작은 용광로 같은 것에 이르기까지 이런 저런 설비들을 주욱 늘어놓은 마난바는 아마도 마법으로 동작하는 것이 아닐까 싶은 화로에 불을 켜고는 이런 저런 금속들을 녹여가며 작업을 시작했다. 헤네스는 순식간에 커다란 대장간처럼 변해 버린 풍경 속에서 뜨거운 불과 싸우고 있는 마난바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이렇게 말했다. “저 어쩐지 지금 저 곰의 모습이 사람처럼 느껴졌어요.” 그 말에 리체스가 얼른 대답했다. “너도 그랬어? 나도 그랬는데.” “그쵸? 뭐랄까. 덩치는 엄청 크지만 말없고 순박한 그런 아저씨 같은 느낌?” “맞아. 바로 그거야.” 그래서 솜씨 좋은 곰 아저씨인건가. 준상 역시 어느 새인가 그녀들의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00357 트롤러 ========================================================================= 마난바는 한참이나 화덕에서 금속과 씨름하다가 제법 시간이 지나서야 마침내 기다란 지팡이 하나를 완성했다. 전체적인 길이는 성인의 신장과 비슷하지만 직접 손으로 들어보니 무슨 재질을 사용한 것인지 상당히 가볍고 단단했다. 이 정도라면 소재만 가져다 연구를 해도 좋지 않을까 싶을 정도. 하지만 그런 공학적인 부분보다도 더 보는 이를 감탄하게 만드는 것은, 그 지팡이의 외형을 장식하고 있는 아름다운 형상이었다. “이거... 리체스 언니 맞죠?” “그런 것 같은데.” 지팡이의 머리 부분에는 아름다운 여인의 형상이 두 팔을 가슴에 교차시킨 채 눈을 감고 있었는데, 그녀의 등 뒤에는 요정의 그것과 동일한 반투명한 날개가 묘사되어 있었다. “유리? 아니면 다른 보석인가요?” “글쎄. 이건 나도 모르겠는걸.” 준상과 헤네스가 그렇게 감탄하며 대화를 나누는 동안 리체스는 말문을 잃은 채 마난바가 만든 지팡이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자, 받아.” 준상이 지팡이를 건네자 리체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네?” “이런 걸 쓸 수 있는 건 리체스 뿐이잖아.” “아...” 리체스는 그제서야 머뭇거리며 지팡이를 받아들었다. “일단은 형상만 만들어졌을 뿐이니까, 마법 부여는 따로 해야 할 거야.” “그, 그렇겠네요.” “마음에 들어?” 준상의 말에 리체스는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정말 마음에 들어요. 전에도 마법 지팡이를 써보려고 하긴 했는데, 어쩐지 마음에 드는 것이 없어서 그냥 안 쓰고 있었거든요.” “그랬군.” 그녀 정도의 실력이라면 굳이 마법 지팡이를 쓰지 않고도 다른 요정들보다 월등히 뛰어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으니 지금까지는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앞으로 상대할 자들은 지금까지의 적들과는 격이 다른 존재들이니 이제부터는 그녀 역시 충분한 장비를 갖출 필요가 있다. “마법 부여가 끝나면 말해. 바로 강화시켜 줄테니까.” “네. 정말 고마워요.” 리체스는 얼른 준상의 품에 안겨 그의 볼에 키스를 하더니, 작업을 마친 채 멀뚱히 서있는 곰아저씨 마난바에게도 달려가 포옹을 했다. “고마워. 곰 아저씨.” “...” 마난바는 리체스가 포옹을 해오자 부끄러운지 한동안 머뭇거리며 뒤통수를 긁더니, 주위에 벌려 놓은 설비들을 다시 자신만의 공간에 집어넣었다. 흐뭇한 표정으로 지팡이를 쓰다듬고 있는 리체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문득 준상의 휴대폰에서 메시지 알림음이 들려왔다. “뭐지?” 갑자기 무슨 일인가 싶어 준상은 여러 개의 메시지가 휴대폰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는 모습에 깜짝 놀랐다. 축하합니다! 펫 ‘리체스 르아테미시스’의 충성도가 최대 수치인 120에 도달했습니다. :충성도가 높을수록 펫의 스킬 효율이 높아집니다. -충성도는 최대 120까지 상승 가능합니다. -충성도가 100이상인 상태로 특정 조건이 만족될 경우 스킬이 진화할 수 있습니다. “응?” 준상은 예상치 못한 메시지에 놀라면서도 이어지는 다른 메시지를 확인해 보았다. 축하합니다! :당신은 처음으로 펫 충성도 120에 도달했습니다. -당신의 위업을 찬양하며 ‘일편단심 민들레!’ 칭호를 부여합니다. [칭호 상세 정보 확인은 이곳을 누르십시오.] [일편단심 민들레!] :처음으로 펫 충성도 120에 도달한 자에게 부여되는 칭호. -효과: 동시 소환 가능한 펫의 숫자가 1 증가합니다. -칭호는 획득시 자동으로 효과가 적용됩니다. 그렇지 않아도 갑자기 펫의 숫자가 늘어나서 앞으로 운용을 어찌 해야할지 고민이 많았는데, 동시 소환이 가능한 펫의 숫자가 하나라도 늘어나면 그만큼 다양한 활용이 가능해진다. 하지만 메시지는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축하합니다! :당신은 펫 호감도, 충성도 관련 최초 칭호 네 가지를 모두 습득했습니다. -당신의 위업을 찬양하며 ‘육성의 달인’ 칭호를 부여합니다. [칭호 상세 정보 확인은 이곳을 누르십시오.] [육성의 달인] :펫 호감도, 충성도 관련 최초 칭호 네 가지를 모두 습득한 인물에게 부여되는 매우 희귀한 칭호. -효과: 1.동시 소환 가능한 펫의 숫자의 제한이 사라집니다. 2.펫이 치명적인 피해로 인해 강제 역소환 되어도 파괴 또는 사망하지 않습니다. 3.펫의 스킬 레벨 상승 속도가 가속화됩니다. -칭호는 획득시 자동으로 효과가 적용됩니다. 이것은 방금 전에 동시 소환이 가능한 펫의 숫자가 하나 늘어난 것을 기꺼워하던 것이 무색할 정도의 효과이다. 동시 소환 제한이 사라짐과 동시에 강제 역소환되어도 사망이나 파괴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은 전투에서 리체스와 헤네스의 비중이 커지고 있는 현재 상황에서 무엇보다도 크게 안심이 되는 일이었다. 역시 얻기 힘든 최초 칭호를 네 개 모두 달성한 것에 대한 보상이라 그런 걸까.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메시지를 살피며 고개를 끄덕이던 준상은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그것은 바로 하라바에 대한 것이었다. 이 정도 숫자의 펫을 모으고 육성을 했다면 펫 관련 최초 칭호를 못해도 몇 개는 획득했어야 하지 않을까. 현재 준상의 펫 관리 메뉴에 나타나는 새로운 펫들의 호감도와 충성도는 초기 상태인 50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러나 하라바가 이들을 부리던 상황에서도 그런 수치를 가지고 있었으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이것은 단지 펫 관련 칭호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말이 쉬워서 85레벨이지, 그 정도까지 능력을 키우려면 엄청난 시간이 소모되었을 것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고, 레벨 관련 칭호 역시 준상과 같은 시스템의 관리 하에 있다면 하라바가 먼저 취득하는 것이 당연하다. 다시 말해, 이것은 하라바가 준상과는 다른 시스템의 관리 하에 있었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는 셈이다. 게임으로 치자면 같은 타이틀을 지닌 게임이지만, 다른 서버에 존재하는 캐릭터라는 의미. 어쩌면 하라바를 펫으로 만들 수 있었던 이유 또한 이런 점 때문이 아니었을까. “나중에 확인해 볼 필요가 있겠군.” “뭔가... 문제라도 생겼나요?” 갑자기 휴대폰에서 알림음이 흘러나오고 준상이 그 메시지를 말없이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모습에 긴장했던 모양이다. 준상은 바로 고개를 저으며 헤네스에게 대답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정말요?” “그래.” “휴... 전 또 무슨 일이라도 생긴건가 싶어서 놀랐잖아요.” “미안.” 준상은 헤네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하라바로부터 얻은 세 번째 펫의 정보를 확인했다. 이름 : 듀아 아란 사다트 종류 : 라니족 무희 레벨 : 49Lv 경험치 : 169949 등급 : 불명 분류 : 복합 성장 : 조숙(대) 속성 : 그림자 스킬 : 의태 48Lv, 공연 49Lv [정보] 호감도 : 50 충성도 : 50 카드슬롯 : 5개 [정보] 설명 : 라니족은 파두스에 존재하는 여러 아인종 가운데 하나입니다. 다른 아인종들이 모두 그러하듯이 라니족 역시 절대적으로 적은 수만이 인간과의 오랜 생존 투쟁에서 살아남았습니다. 이 종족은 현재 사실상 노예화되어 버린 상태이며, 그들의 기묘한 특성으로 말미암아 불가촉천민으로 취급되고 있습니다. 라니족은 스스로 무언가를 창조할 수 없는 종족이지만, 특유의 의태 능력은 그들에게 강력한 사냥꾼의 재능을 부여합니다. 이들의 의태는 은신과는 구별되는 매우 특별한 능력이며, 충분한 레벨에 이르면 그들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는 사물과 구별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이고, 이쯤 되면 의태라기보다는 차라리 변신이라 부르는 쪽이 나을 수도 있습니다. “무희라...” 앞서의 두 가지 펫이 모두 생산 관련의 능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에 반해 세 번째 펫은 무희라는 종류와 함께 의태와 공연이라는 다소 모호한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은신과 비슷한 능력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암살자 계열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등급이 불명으로 나오는 것으로 봐서는 시스템에서 제공한 펫이 아니라 예속의 족쇄를 사용해 펫으로 만든 존재로 보이며, 다음 목록의 펫 역시 이름이 매우 유사했기 때문에 준상은 내친 김에 네 번째 역시 확인을 해보았다. 이름 : 파티아 아란 사다트 종류 : 라니족 무희 레벨 : 47Lv 경험치 : 154625 등급 : 불명 분류 : 복합 성장 : 조숙(대) 속성 : 그림자 스킬 : 의태 47Lv, 공연 45Lv [정보] 호감도 : 50 충성도 : 50 카드슬롯 : 5개 [정보] 설명 : 라니족은 파두스에 존재하는... 예상대로 네 번째 펫인 파티아 역시 동일한 종류와 스킬을 가지고 있었으며, 차이가 있다면 듀아에 비해 레벨이 조금 낮고 스킬 레벨에 다소 차이가 있다는 것 정도였다. “역시 무희인가.” 준상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듀아와 파티아를 동시에 소환했다. 앞서 등장했던 펫들의 이미지가 워낙 강렬했던 탓에 리체스와 헤네스는 다시 두 개의 흰 빛이 시야에 나타나자 기대에 가득 찬 시선을 던졌다. 하지만 그들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거무튀튀한 망토를 뒤집어 쓴 채 노란 눈빛만 그늘진 두건 아래 반짝이고 있는 기묘한 존재들이었다. 그 모습을 보자, 준상은 어릴 적에 보았던 만화에 등장하는 파란 제복의 차장이 떠올랐다. “무희... 라고 하시지 않았나요?” “그랬지.” 준상은 펫 정보를 다시 살피다가 불가촉천민이라는 문구를 보고서야 이들이 왜 이런 모습을 하고 있는지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무희이면서 불가촉천민이라는 말에서 어딘지 모르게 위화감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현대 이전에는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예능인이 천민 계급이었던 것이 사실이고, 인도에서는 신전에 봉사하던 무희들이 불가촉천민으로 취급되었던 전례가 있다. “망토를 벗어라.” 준상이 명령을 내리자, 그들은 머뭇거리더니 입고 있던 칙칙한 망토를 벗었다. 그러자, 조금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리체스와 헤네스가 동시에 탄성을 질렀다. “이건... 강아지귀?” “꼬리도 있어요.” 잘 해야 열 살이나 될까 싶은 모습은 일단 그렇다 쳐도 그들의 머리에 돋아 있는 강아지귀와 치마 밑으로 나와 있는 꼬리는 확실히 동물의 그것이었다. 피부는 아기 천사를 연상시킬 정도로 뽀얗게 빛을 발하고 있었으며, 머리카락은 흰색과 갈색이 섞인 부드러운 색이었다. 수인족. 이들은 짐승의 형상이 몸에 남겨진 아인종이었던 것이다. 낯이라도 가리는 것인지, 작은 쌍둥이 무희들은 서로에게 몸을 기댄 채 불안한 눈으로 준상과 두 반려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대로는 무슨 능력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특기가 있다면 말해 보도록.” 준상의 말에 왼쪽의 아이가 입을 열었다. “춤과 노래로 여러분의 기운을 돋우어 드릴 수 있습니다.” 뒤이어 오른쪽의 아이도 대답했다. “전투나 사냥 같은 것도 잘해요.” 라니족이 훌륭한 사냥꾼이라는 것은 펫 정보에도 나와 있는 말이었지만, 이런 작달막한 아이들이 과연 얼마나 제대로 싸울 수 있을지 솔직히 의문일 수밖에 없었다. “전투라... 간단하게 대련이라도 해보도록.” 무턱대고 이들의 말만 믿고 전투에 투입할 수는 없는 일이라, 준상이 그렇게 다시 지시를 내리자 쌍둥이 무희들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서로에게서 떨어져 거리를 벌렸다. “그럼, 시작할게.” “그럼, 시작할게.” 한 목소리로 그 말이 흘러나온 순간, 작달막한 아이들의 팔다리가 갑자기 죽죽 길어지기 시작했다. 변화한 그녀들의 몸은 방금 전의 올망졸망한 귀여운 모습에서 벗어나 어느 틈엔가 성숙하고 건강한 성인의 그것으로 변해 있었다. 의태란 건, 단순히 주위의 사물을 이용해 몸을 위장시키는 것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00358 트롤러 ========================================================================= “어머.” 올망졸망하던 아이들이 순식간에 뉴욕의 패션 위크를 장식하는 모델들처럼 팔다리가 쭉쭉 뻗은 모습으로 변하자, 흥미로운 눈으로 지켜보던 리체스와 헤네스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놀란 것은 준상 역시 마찬가지였으나, 단순히 귀엽던 아이 모습에서 성숙한 여인으로 변한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 그의 머리 속에 떠오른 것은 다크 시드 사용자들의 육체 변이가 혹시 이 의태 능력에서 발전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육체 변이가 된 다크 시드 사용자들의 모습은 보기만 해도 혐오스러움이 느껴지기 때문에 지금 눈앞에서 대련을 시작한 쌍둥이들의 모습과 연관시키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의태라는 것은 결국 두 가지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천적의 이목을 속이기 위해서가 첫 번째 목적이라면, 사냥감의 이목을 속여 사냥을 더 손쉽게 하기 위한 의태도 존재한다. 라니족의 경우도 현재에 이르러서는 인간이라는 천적으로부터 좀 더 안전해지기 위해 의태를 사용하는 경향이 있으나, 본래는 사냥이라는 행동을 보다 쉽게 하기 위해 의태를 사용했다는 사실이 펫 정보에도 기술되어 있다. 골격이나 신장이 이 정도로 순식간에 변화할 정도라면, 단순한 의태라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 만약 그렇다면 선후 관계는 알 수 없더라도 이들의 의태와 다크 시드 사용자들이 사용하는 육체 변이가 어떤 식으로든 연관이 있다고 보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준상이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동안, 쌍둥이들은 춤을 추는 듯한 동작으로 팔과 다리를 휘두르며 대련에 여념이 없었다. 리체스나 헤네스가 보기에는 대련이라기 보다는 나긋나긋한 춤 동작을 시연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지구에서도 탄압 받던 민족이 춤이라는 형태로 자신들의 무술을 비밀리에 전승시켜 왔던 것은 그리 드문 예가 아니다. 쌍둥이들이 펼쳐 보이는 춤과 같은 모습의 무술도 분명 그러한 식으로 전승된 것이 아닐까 싶기는 하지만, 그들의 무술에는 흔히 생각하는 검무 등과 확실히 차별화되는 부분이 있었다. 의태 능력을 사용해 주위의 풍경과 동화되었다가 상대에게 기습을 가하는 능력이 바로 그것이었는데, 주의 깊게 보고 있어도 일순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듯한 느낌을 받기 때문에 상당히 위협적이었다. 준상 역시 눈앞에서 쌍둥이 가운데 하나가 사라졌다가 나타나는 모습에 놀라기는 마찬가지. 하지만 그가 놀란 것은 단순히 모습이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었다. 단순히 시야에서 벗어나는 것 뿐이라면, 아이템을 사용한 투명화 능력이나 요정들의 특수 능력, 그리고 카드의 은신 능력 같은 것도 있으니 그리 대단하게 생각될만한 일은 아니다. 이런 식으로 모습을 감추는 능력은 존재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초감각 같은 탐지 능력이 있다면 어렵지 않게 그 위치를 파악하는 것이 가능하고, 실제로 준상은 이런 식으로 모습을 숨긴 적들을 상대하고 격퇴한 경험이 제법 많았다. 때문에 쌍둥이들이 의태를 통해 모습을 숨기기가 무섭게 준상은 반사적으로 초감각 능력을 발동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에 실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비록 그 시간이 아주 찰나에 불과했다고는 해도, 실전에서는 그런 찰나의 순간이 생사를 가르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감안하면 절대로 무시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게다가, 은연중에 최대한 억제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들이 펼쳐 보이는 무술은 인체의 각 급소를 효과적으로 제압하기 위한 동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래서 하라바가 둘이나 데리고 있었던 건가.” 준상은 자신도 모르게 그런 말을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성인의 체형으로 변한 그녀들의 모습은 상당히 매력적이다. 그러나 파두스라는 이름을 가진 세계에서 이들의 신분은 불가촉천민. 다른 이들 앞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조차 허락 받지 못하는 신분의 여성들을 둘이나 데리고 다니는 것에는 그에 합당한 이유가 있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그만.” 준상의 입에서 짤막한 말이 흘러나오자 쌍둥이들은 대련을 멈추고 다시 아이들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커다란 두 눈과 축 처진 귀, 그리고 복슬복슬한 털을 지닌 꼬리를 늘어뜨린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자신도 모르게 동정심이 느껴지도록 하고 있었다. “지금부터 묻는 말에 거짓 없이 고하도록.” “네.” “너희들, 암살자였었나?” 준상의 말에 듀아와 파티아는 당황한 기색을 보이더니 얼른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주인님께서 그것을 원하신다면 따르겠습니다.” “이전에는 주로 호위 임무를 했어요.” “호위라...” 준상은 잠시 턱을 만지작거리다가 다시 물었다. “하라바 은체우에 대해 아는 것을 모두 말해 보도록.” 쌍둥이는 고개를 들고 서로를 바라보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이전의 주인님께서는 사막왕국 라멜란의 건국왕이십니다.” “세 분의 왕비 마마가 계시옵고, 슬하에 다섯 분의 왕자와 일곱 분의 왕녀를 거느리고 계세요.” “휘하에는 세 분의 용맹한 장군이 계시며, 이 분들은 각각 일만의 정예화된 기병을 지휘하십니다.” “사막왕국 라멜란은 사막에서 가장 윤택한 열 개의 오아시스를 다스리고 있으며 동서 무역을 장악하고 있는 매우 부유한 나라예요.” 철골의 제왕이라는 이명이 단순한 별명 같은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가족 관계야 그렇다 치더라도 무려 삼만에 대한 정예 기병을 거느리고 있다는 점에서 그 나라가 지닌 막강한 국력의 일면을 이해할 수 있다. 역소환되어 회복이 진행 중이긴 하지만, 그렇게 딸린 가족과 부하들이 즐비하다면 속이 탈 수밖에 없는 일. 준상은 그녀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물었다. “주로 호위를 했다고?” “네.” 생각해 보면 그녀들의 의태 능력은 암살에도 적합하지만 호위에도 매우 효율적이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아직 만난지 얼마 되지 않은 터라 무조건적으로 신뢰하기는 어렵다는 점. “알겠다. 일단 돌아가 있도록.” 준상이 일단 그녀들을 역소환시키자 리체스가 물었다. “역시 하라바라는 분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요?” 에둘러 말하기는 했지만, 결국은 하라바의 애첩 같은 것일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질문이다. “글쎄. 그렇지는 않을 것 같은데.” “어째서요?” 기다렸다는 듯이 헤네스가 묻자 준상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대답했다. “그녀들은 불가촉천민으로 취급되는 종족이고, 하라바는 강성한 국력을 지닌 왕국의 건국왕이기 때문이지.” “신분의 차이 때문인가요?” “맞아. 물론 이런 문제는 감당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면 충분히 헤쳐 나갈 수 있는 일이긴 하지만, 그를 둘러싼 환경을 감안한다면 그건 별로 현명치 못한 행동이겠지.” 그 말에 리체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부인들 말씀이시군요.” “부인들이요? 아...” 처음에는 무슨 뜻인가 싶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던 헤네스지만, 뒤늦게서야 리체스가 던진 말의 의미를 이해했는지 탄성을 터뜨렸다. 준상은 그런 헤네스를 보며 부연 설명을 했다. “막강한 병력을 정확하게 셋으로 나누어 거느린 세 명의 용맹한 장군, 그리고 정실과 후실의 구분이 없이 동등한 지위를 가진 세 명의 왕비. 이건 아무리 봐도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는 어렵지. 그의 신분이 건국왕이라면 더더욱.” “세 명의 장군이 단순한 부하가 아니라 부인이라는 혈연으로 이루어진 인척 관계라는 말씀이시군요.” “자세한 것은 본인에게 확인해 봐야겠지만,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 준상은 그렇게 말하고는 이고르가 채워준 찻잔을 들어 목을 축인 후 다시 말을 이었다. “게다가 하라바 정도의 강력한 귀환자가 함부로 하지 못할 정도라면, 그 자들도 평범한 일반인들은 아니겠지.” “귀환자란 말씀이신가요?” “맞아. 하라바 정도의 귀환자가 넷이나 뭉쳤다면, 동서 무역을 장악한 강력한 국가가 하루 아침에 등장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겠지. 그런 식으로 미묘한 세력 균형이 이루어진 상황에서 천대받는 불가촉천민을 건드리는 건 자신의 권위를 스스로 밟아 뭉개는 짓. 바보가 아닌 이상 그런 모험을 할 이유가 없어.” “그렇군요.” 리체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다물자, 헤네스가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불쌍하네요.” “하라바가?” “네. 영문 모를 장소에 끌려와 하마터면 손도 못 쓰고 죽을 뻔했다가, 이제 이렇게 억류되어 버렸으니...” “...” 준상은 쓴웃음을 지으며 헤네스의 어깨를 가만히 어루만졌다. “상황이야 그렇다 쳐도 그 정도 힘을 가진 자를 아무런 안전 장치 없이 풀어두는 건 너무 위험한 일이니까. 적어도 신뢰관계가 형성되기 전에는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알고 있어요. 그냥... 제가 그 사람 입장이면 어땠을까 싶었을 뿐이에요.” 그렇게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던 준상은 마지막 하나 남은 펫의 정보를 마저 확인했다. 이름 : 카말 종류 : 별해파리 레벨 : 26Lv 경험치 : 34435 등급 : Rare 분류 : 복합 성장 : 일반(중) 속성 : 번개 스킬 : 성역 23Lv, 은신 26Lv [정보] 호감도 : 50 충성도 : 50 카드슬롯 : 3개 [정보] 설명 : 별해파리는 창공을 떠다니는 기이하고 거대한 생명체입니다. 어두운 밤하늘에서 기다란 촉수를 차양처럼 드리운 채 빛을 발하며 두둥실 떠가는 이 해파리의 모습은 너무나도 신비해서 각종 전설에서는 신이 거하는 궁전 등으로 묘사되기도 합니다. 별해파리는 내부에 커다란 빈 공간을 지니고 있어서 다수의 사람을 태울 수 있으며, 이들은 성역의 힘에 의해 모든 적대적인 환경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됩니다. 만약 성역의 레벨이 충분히 높다면, 어둡고 깊은 바다 속이나, 빛마저 사라진 창공 너머를 여행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얘기가 있지만, 이것이 진실인지는 아직 확인된 바가 없습니다. 별해파리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번개의 힘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은 탈 것인 모양이군.” 준상이 그렇게 중얼거리자 리체스는 두 눈을 반짝이며 강한 호기심을 표출했다. 애엄마가 되어서도 요정 특유의 호기심 만큼은 어쩔 수가 없는 모양이다. “소환해 볼까?” “네!” “알았어.” 준상은 곧바로 휴대폰을 통해 별해파리 카말을 소환했다. 죄송합니다. :지정한 펫 ‘카말’을 소환하는데 실패했습니다. -펫 ‘카말’을 소환하기에는 현재 위치한 공간이 너무 협소합니다. 좀 더 넓은 곳으로 이동하신 후 다시 소환을 실행해 주십시오. “좁다고? 여기가?” 준상은 놀란 표정으로 자신들이 위치한 신기루 꽃 최상층을 둘러보았다. 그럴 마음에 있다면 삼층 건물 정도는 거뜬히 들어설 정도의 공간인데도 너무 협소하다니, 도대체 카말이라는 펫은 얼마나 크단 말인가. “아무래도 요정계로 가서 실행해 봐야겠는데.” “여기가 좁아서 소환이 안 될 정도면 엄청 큰가 봐요.” 이제 리체스의 눈은 반짝거리다 못해 번쩍일 정도로 안광을 발하고 있었다. “하여튼, 언니도 참. 정말 못 말려.” “내가 뭘?” “귀엽다구요. 후훗.” 준상은 모두를 데리고 최상층에서 내려와 요정계로 향했다. 탁 트인 여왕의 정원으로 가자, 마침 요정들과 흙장난을 하고 있던 리시스가 그들을 맞이한다. “안녕하세요.” 온 몸이 흙투성이가 되었음에도 제법 의젓하게 인사를 하는 리시스의 모습에 헤네스와 리체스는 물론이고 준상도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시작한다.” “네.” 리시스와 함께 놀고 있던 요정들은 준상이 또 무슨 신기한 일을 벌이려나 싶어 동글동글한 두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그런 그들 앞에서 준상은 마침내 별해파리를 소환했다. “...” “...” 여왕의 정원을 모두 뒤덮고도 남을 정도의 거대한 해파리가 공중에 모습을 드러내자, 준상을 비롯한 모두는 잠시 말을 잊은 채 입을 헤 벌리고 그 아름다운 모습을 바라보느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반투명한 몸체는 마치 별 가루를 뿌려 놓은 것처럼 반짝이고 있었으며, 치렁치렁하게 늘어뜨린 촉수는 고풍스러운 침실의 차양을 떠올리게 하고 있었다.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위쪽은 푹신한 쿠션과 같았고, 그 아래에는 샹들리에를 연상시키는 작은 불빛 들이 성탄 전야의 크리스마스 트리나 여름 날 강변에서 터지는 불꽃 놀이처럼 형형색색으로 반짝인다. 그나마도 밝은 대낮이라 이 정도지, 어두운 밤이었다면 그 신비로움은 몇 배나 더해졌을 터. 화려한 조명에 어느 정도 익숙한 준상조차 말을 잊지 못하는 상황이니, 주위의 다른 이들이야 더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이게 뭐지?” “몰라.” “나도 몰라.” “여왕님은 알고 계실까?” “물어 보자!” 속닥거리던 요정들이 호기심 가득한 시선을 보내자 리체스는 당황해 하며 손을 내저었다. “나도 몰라!” 그러자 요정들은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여왕님도 요정이니까.” “과연 여왕님.” “역시 요정의 귀감이셔.” 헤네스와 리시스는 요정들의 그같은 대화를 듣고는 웃음을 참기 위해 배를 감싸 쥐어야만 했고, 리체스는 수치심으로 인해 얼굴이 홍시처럼 붉게 물들어 버렸다. ============================ 작품 후기 ============================ 늦어서 죄송합니다. 00359 트롤러 ========================================================================= 그대로 놔두었다가는 리체스의 손에서 불벼락이 떨어질 듯한 분위기라, 준상은 소환한 별해파리 카말에 탑승을 시도했다. 준상이 다가서자 별해파리는 길게 늘어져 있던 촉수 가운데 하나를 내밀었고, 그 위에 올라타자 조심스럽게 위로 끌어올렸다. 보기에 따라서는 하늘 위에 나타난 거대한 괴수가 사람을 먹어치우는 것처럼 인식되기에 충분한 모습이었기 때문에 지켜보던 이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촉수에 매달려 샹들리에의 아래쪽에 들어서자 반투명한 비누거품 같은 곳을 통과해 별해파리의 몸 내부로 들어설 수 있었다. 안에 들어오니 위쪽은 반짝이는 커다란 비누거품 속에 플라네타리움이 켜진 것만 같았고, 아래쪽은 끈적임 없는 부드러운 젤리 모양의 탄력 넘치는 쿠션과도 같았다. 살짝 발을 구르자 두둥실 몸이 떠오른다. 무중력 상태는 아니고, 중력이 있긴 한데 무척이나 미약해서 마치 물속을 유영하는 듯한 느낌이다. “나중에 누리 놀이터로 쓰면 딱 좋겠군.” 누가 딸 바보 아니랄까봐 그런 혼잣말을 중얼거린 준상은 아래쪽에서 호기심 넘치는 시선을 보내고 있는 다른 이들을 하나씩 끌어올렸다. 당연한 일이지만, 요정들의 반응은 그야말로 폭발적이었다. 원래부터 하늘을 날 수 있는 그들이긴 했지만, 하늘을 나는 것과 우주를 유영하듯 허공을 떠도는 감각은 전혀 달랐기 때문에 아래쪽의 쿠션과 부드러운 외벽을 핀볼처럼 튕겨 다니며 터뜨리는 웃음소리가 그칠 줄을 몰랐다. 그 중에서도 흥에 겨운 것은 다름 아닌 리체스. 오죽하면 헤네스가 고개를 저으며 이렇게 말했겠는가. “과연 요정의 귀감이네요.” 난데없이 여왕의 정원에 모습을 드러낸 이 거대한 별해파리는 곧바로 요정들에게 커다란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갑가오리 때와는 달리 느긋하게 허공을 떠다녀도 충분했기에 피로로 역소환 되는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다는 정도다. 별해파리 카말을 끝으로 새로 획득한 펫에 대한 확인을 마친 준상은 신기루 꽃에 갇혀 있는 이들의 처분을 시작했다. 가장 먼저 손을 댄 것은 차원 요새에서 구출한 수습생들이었다. 준상은 요정계에서 이제나 저제나 하며 다음 미팅 날을 기다리고 있던 아줌마 요정들을 불러내 그녀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들에게 접근해 정보를 뽑아내는 것이 너희들의 임무다.” “정보라면...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들의 고향에 대한 것부터 시작해서, 차원 요새에서 있었던 것까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나누었던 대화는 빠뜨리지 말고 보고하도록.” “농담 같은 것도 전부요?” “전부.” 아줌마 요정이라도 본질은 무사태평한 요정이기 때문에 그녀들에게 정보 분석까지 맡기는 건 역시 무리한 일이었다. 하지만 단순히 정보를 뽑아내는 것이라면 그녀들 특유의 수다를 발휘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일. 지금까지 블레이크와 맥밀란이 해왔던 허드렛일을 수습생들에게 맡기는 대신, 그들 두 명에게는 아줌마들이 물어오는 정보를 기록하고 분석하는 일이 주어졌다. 블레이크와 맥밀란은 빨래를 널기 위해 요정의 술을 맛보는 일을 더 이상 하지 못하게 된 것을 서운하게 여기는 듯 했으나, 마침내 비중 있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는 사실로 위안을 삼을 수밖에 없었다. “너희들이 중점적으로 분석해야 할 것은 다른 세계에 대한 일이다. 특별한 것이 없어 보이는 이들이긴 하지만, 그녀들은 서로 다른 여러 개의 행성에서 뽑혀온 인재들이니 그들이 내놓은 정보를 분석해 각 행성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확보하는 것이 너희들의 임무다. 물론 그 외에도 중요한 정보가 있다면 따로 보고해야겠지만.” “알겠습니다.” 수습생의 처리가 끝나자 다음은 그들을 이끌던 감독관 앙가라드의 처우가 남았다. 다른 수습생들은 아직 다크 시드의 세례를 받기 전이라 전투력이라고 할 만한 것이 거의 전무한 상황이나 다름없었지만, 앙가라드의 경우에는 다크 시드의 세례를 이미 받은 몸이라는 문제가 있었다. 때문에 준상은 별도로 감금해둔 그녀를 찾아가 따로 면담을 진행해야만 했다. “그러니까, 네 경우에는 육체 변이가 불가능하다는 건가?” “네. 육체 변이를 하게 되면 살육에 대한 본능을 스스로 억제해야만 합니다. 다른 임무의 경우에는 이것이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세례를 받기 전의 수습생들을 관리하는 입장에서는 어두운 욕망에 빠질 수 있습니다.” “자칫하면 늑대에게 양을 맡기는 꼴이 될 수도 있다는 얘기군.” “그렇습니다. 때문에 감독관은 임의로 육체 변이가 불가능하도록 특별한 시술을 받게 됩니다. 물론 저 역시 그 시술을 받았습니다.” 앙가라드는 그렇게 적극적으로 해명을 했지만, 그렇다 치더라도 누리가 있는 요정계에 다크 시드 사용자를 들여 놓는 것은 여러모로 꺼림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요정계에는 현재 서유미나 블레이크, 맥밀란 등이 머물고 있고, 하라바의 경우에도 회복 후 그곳에서 머물게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런 귀환자들이 앙가라드와 마주치게 되면 다크 시드 회수의 퀘스트가 발동하게 될 수밖에 없으니, 불필요한 충돌을 막기 위해서도 가급적이면 따로 떼어놓는 편이 현명하다. 결국 준상은 앙가라드를 얀트훈센으로 보냈다. 헤네스가 준상과 함께 활동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생긴 업무 공백도 채우면서 한편으로는 다른 귀환자들과의 접촉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물론 헤네스 대신 업무를 살피기 위해서는 따로 문자를 익혀야만 하는 문제가 있었지만, 다른 여러 행성에서 모인 이들을 관리하던 입장이다 보니 언어학에 있어서는 맥밀란보다도 재능이 뛰어났다. 앙가라드의 일을 처리한 준상은 곧이어 ‘고객’들에 대한 심문을 시작했다. “이름.” 떽떽거리는 시종들의 입을 늑대와 정령들을 소환해 막아 놓은 탓인지 두 ‘고객’의 눈에는 불안이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85레벨짜리 창조의 씨앗을 사기 위해 성좌의 주인이 운영하는 차원 요새를 방문했다가 영문 모를 사건에 휘말려 시드를 키우기 위해 사육되는 가축들에게 사로잡힌 신세가 되었으니 기가 막힐 법도 하다. 이들은 운이 나빴다. 하필이면 그들이 방문하던 시점에 최악의 미친 개가 차원 요새를 붕괴시켜 버렸으니 말이다. 준상은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다시 질문을 던졌다. “이름.” 옷조차 제대로 갖춰 입지 못한 채 서유미가 뜯어준 커튼 조각을 가운 비슷하게 두른 두 고객은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준상의 위압감 넘치는 모습에 압도되어 쉽게 입을 열지 못했으나, 다시 한 번 질문이 이어지자 더 이상은 무시하지 못하고 남자 쪽에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발레라 칼리스 에스텔리타 플로르 아펠리보 바리아넬라.” “...” 이름 한 번 더럽게 길다. 뭔가 있어 보이고 싶어 하는 놈들의 특징이 쓸데없이 기억도 못할 이름을 길게 짓는 것 아니던가. 준상은 얼굴을 찌푸리며 다시 물었다. “그걸 일일이 다 부르란 말인가?” 남자는 쓴웃음을 짓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냥 발레라라고 불러 주시오.” “...” 준상은 다시 여자를 향해 물었다. “그쪽은?” 두려운 표정을 지은 채 발레라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던 여자는 재차 질문이 이어지고 나서야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리투 아 모디니 파르나 샤 라타 라트나.” 이쪽도 길기는 마찬가지. 때문에 준상이 얼굴을 찌푸리자 여자는 제 발이 저렸는지 얼른 이렇게 덧붙였다. “라트나라고 불러주시면 돼요.” “...”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물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발레라라는 이름을 지닌 남자가 그 말에 바로 대답했다. “남매요.” “이름이 제법 다르던데?” “일족의 관습이오.” “그렇군.” 어차피 그건 중요한 일이 아니기에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시드에 아는 대로 말해라.” “...” 그 말에 발레라는 라트나를 바라보더니 이렇게 답했다. “우리는 그저 친족들이 약혼의 선물로 예약해둔 창조의 씨앗을 받기 위해 그곳을 찾았던 것 뿐이라 자세한 내용은 알지 못하오.” “약혼? 남매라며?” “일족의 관습이오.” “...” 하긴 지구에서도 과거에는 이런 식의 근친혼의 예가 제법 많은 편이다. 물론 일반적인 경우는 드물고 주로 왕실 등에서 많이 보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왕족인가?” 발레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칠대 황가 가운데 하나인 바리아넬라에 속해 있소.” “칠대 황가라면?” “바리아넬라, 모스포사, 살리아, 우르바, 타리크, 타랄라, 히라마니. 이렇게 일곱 가문을 칠대 황가라고 부르오.” 준상은 종이에 일곱 가문의 이름을 적고는 다시 물었다. “성좌의 주인과의 관계는?” “...” 지금까지 순순히 대답하던 발레라였지만 이번만큼은 머뭇거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잠시 그의 대답을 기다리던 준상은 고민하는 발레라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말하기 어려우면 내가 도와줄 수도 있다.” “그게 무슨...” 준상은 염동력으로 발레라의 목을 잡아 들어올렸다. “커흑!” 느닷없이 목덜미가 잡혀 들어 올려진 발레라는 목이 졸리기 시작하자 공포에 질린 채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 “이, 이러지 말아요!” 라트나는 기겁하며 얼른 발레라의 몸을 떠받쳤지만 그녀의 힘으로는 건장한 남자의 몸을 받치기에는 아무래도 역부족일 수밖에 없었다. “황자님!” 갑작스런 그 상황에 놀란 시종들이 다급하게 앞으로 나서려 했지만, 커다란 늑대들과 입에서 불을 뿜는 헬하운드의 서슬 퍼런 위협으로 인해 그들은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설 수가 없었다. 목이 졸려 버둥거리던 발레라의 움직임이 어느 순간 둔해지기 시작하자 라트나는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었던지 울음을 터뜨리며 자기가 아는 것을 기억나는 대로 전부 말하기 시작했다. “성좌의 주인은... 칠대 황가가 만든 존재들이에요!” “만들었다고?” 준상은 의외의 얘기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의 예상으로는 잘 해야 밀렵꾼 같은 존재가 아닐까 싶었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칠대 황가라는 든든한 배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 의외였기 때문이다. “창조의 씨앗은 칠대 황가가 함께 참여하여 설립한 관리자들에 의해 통제되지만, 그런 식으로 일일이 다른 세력의 동의를 얻어가며 일일이 수확물을 나눠 받는 것은 무척이나 귀찮고 번거로운 일이었기 때문에 성좌의 주인이라 불리는 자들에게 사략 허가와 비슷한 권한을 부여해서 그들을 통해 필요한 수량의 씨앗을 수급... 아무튼 다 말할테니까, 제발 그만 놔줘요! 이러다 정말 죽겠다고, 이 망할 자식아!” 발악하듯 외치는 라트나의 모습에 준상은 피식 웃으며 염동력을 해제했다. “큭!” 발레라는 목을 죄고 있던 염동력이 해제되자 아래에서 떠받치고 있던 라트나와 함께 바닥을 뒹굴더니 그대로 정신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오라버니, 오라버니!” 라트나는 걸치고 있던 천조각이 훌렁 뒤집어져 속살이 훤히 다 보이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의식을 잃은 발레라의 몸을 흔드느라 정신이 없었다. 준상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말했다. “그 정도로는 안 죽으니 호들갑 떨지 마라.” “...” “와서 앉아.” 차가운 그 목소리에 라트나는 흠칫 몸을 떨고는 몸을 일으켰다. 발레라가 떨어질 때 어딜 잘못 부딪히기라도 했던지, 그녀는 다리를 절룩거리며 다시 의자로 와서 앉았다. “제법 흥미로운 얘기를 하더군. 좀 더 자세한 얘기를 들을 수 있을까.” “...” 라트나는 고개를 돌려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발레라를 잠시 바라보다가 천천히 얘기를 시작했다. 00360 트롤러 ========================================================================= “창조의 씨앗은 칠대 황가들이 모여 만들어진 위원회와 그들의 감독을 받는 관리국에 의해 그 생산과 분배가 엄격하게 통제되고 있어요. 이것은 서로를 견제하기 위해 만들어낸 수단이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매우 갑갑한 일이 아닐 수 없었죠.” 그럴 법한 일이다. 서로를 견제하기 위해 만들어낸 수단이 스스로를 옭아매는 일은 의외로 많은 편이니까. 그렇다고 그 수단 자체를 없애 버릴 수는 없으니, 뒤에서 딴 수작을 부릴 도구를 만들어냈다는 말이 되는 셈이다. “문제는 그것 뿐만이 아니었어요. 위원회야 그렇다 치더라도 관리국이 창조의 씨앗이라는 수단을 독점하게 되면서 그 자체로 권력 기관화가 되어 버린 것이죠. 설립 당시 칠대 황가 가운데 어느 한 가문이 창조의 씨앗을 독점하는 상황을 막기 위해 각 가문의 영향력이 닿지 않은 중립적인 인물들로 관리국을 구성했는데, 그것이 오히려 독이 되어 버린 거에요.” “자가당착이라는 거로군.” 라트나는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말이 나오자 얼굴을 찌푸렸다. “자가... 뭐라구요?” “그런 것이 있다. 그래서 성좌의 주인들을 만들어 냈다?” “맞아요. 표면적으로는 일종의 해적과 같은 존재들이기 때문에 현상금도 붙어 있고 주기적으로 토벌도 진행되지만, 이들이 실질적으로 칠대 황가의 하수인이라는 것을 모르는 자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해요. 물론 공식적으로는 이와 같은 사실을 부인하고 있지만요. 이를테면 공공연한 비밀이라는 것이죠.” 준상은 다시 물었다. “하지만, 그러다가 성좌의 주인들이 관리국처럼 독립적인 태세를 유지하면 어쩌려고?” 라트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성좌의 주인들은... 자신이 속한 각 가문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어요.” “어째서?” “그들의 머리 속에 담긴... 어둠의 씨앗 속에 그렇게 각인되어 있으니까요.” “...” 그런 거였나. 어째서 성좌의 주인이나 그 부하들이 굳이 다크 시드를 머리 속에 심어 두고 있는지 의문이었는데, 라트나의 말을 듣고 보니 제법 그럴 듯 했다. 다크 시드는 그 자체로 귀환자들을 포획하기 위한 강력한 힘을 부여하는 도구이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그들을 통제하기 위한 족쇄이기도 했던 것이다. 준상은 자신이 보관하고 있는 벨 라야의 다크 시드를 떠올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벨 라야가 지니고 있던 힘에 욕심을 내서 유혹에 넘어가 버렸다면,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대화의 양상은 전혀 다른 형태로 바뀌어 버렸을 테니 말이다. 그 정도 힘을 지닌 자가 이렇게 아무 능력도 없는 자들을 상전 취급 하는 것이 뭔가 이상하다 싶더니, 이런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준상은 팔짱을 낀 채 납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보통의 시드들은 어떻게 된 거지?” “보통의 시드요?” “마수 같은 놈들이 가지고 있는 것 말이다.” “그건...” 라트나는 이번에도 잠시 머뭇거리는 기색을 보였지만, 고글을 쓴 준상과 시선이 마주치자 얼른 눈을 내리 깔며 대답했다. “처음 창조의 씨앗이라는 개념이 생겨났을 때부터 인간에게 이것을 적용하려던 것은 아니었어요. 인간은 성장이 너무 느리기도 했고... 윤리적으로도 문제가 많았기 때문이죠.” 윤리. 준상은 라트나가 대답을 망설였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자칫하면 눈앞에 앉아 있는 당사자의 화를 크게 돋울 수 있다는 염려 때문이리라. “재미있군. 인간을 가축 취급 하는 놈들의 입에서 윤리 운운하는 말을 듣게 되니.” “...” “그래서? 처음에는 인간이 아닌 다른 생물에게 시험을 해보았다는 건가?” “네.” 라트나는 일단 그렇게 답하고는 준상의 눈치를 보며 말을 이었다. “처음에는... 비교적 형태가 단순한 수중 생명체들이 그 대상으로 선택되었어요. 이 생물들은 단순한 형태를 지니고 있는데다 높은 재생력과 번식 능력을 지니고 있어서 빠르게 수확하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어요.” “어째서?” “그들의 삶이 너무 단순했기 때문이에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라트나는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창조의 씨앗이... 욕망의 씨앗이라는 이명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알고 계시죠?” “물론.” “창조라는 건, 다시 말해 원래 없었던 것을 만드는 것이죠. 문제는 이런 식으로 새로운 무언가를 만드는 것 자체가, 자신의 삶에 순응한 존재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점이에요. 만족을 모르고, 그런 불만스러움을 해소하기 위해 끊임없이 갈구해야만 비로소 원하는 무언가를 창조할 수 있게 되는 거죠.” “창조의 원동력이 욕망이라는 건가?” “다른 말로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저희들은 일단 그렇게 보고 있어요.” 보통은 상상이나 도전 등을 창조의 원동력으로 꼽는 것을 감안하면, 이들의 논리는 다소 파격적인 면이 있었다. 하지만 조금만 바꿔 생각해 보면 이것은 꽤 날카로운 의견이기도 했다. 상상이 무엇인가. 실제로 경험해 보지 않은 현상이나 사물을 마음 속으로 그려보는 행위다. 이런 것이 있으면 어떨까. 저런 것이 있으면 좋지 않을까. 다시 말해, 현재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현상이나 사물에 대한 불만을 생각이라는 수단을 통해 해소하는 행위인 것이다. 도전 역시 마찬가지. 자신이 이루어 본 적이 없는 것에 대해 정면으로 맞서고 그것을 성취하고자 하는 욕구가 아니던가. 결국 상상이든 도전이든 자신의 욕망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 되는 셈이다. “인간의 욕망이 가장 치열했다는 얘기가 되는 건가.” “네...” 혹시라도 자신의 신경을 거스르지나 않을까 싶어 조심스럽게 대답하는 라트나의 모습을 바라보며 준상은 다시 물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보통의 시드가 너무 많이 나오던데?” 라트나는 바로 대답했다. “실패작도 나름 쓸모가 있으니까요. 여러모로... 그러니까, 처음부터 창조의 씨앗으로 쓸 생각이 아니라면 빨리, 그리고 많이 만들 수 있는 것도 여러모로 도움이 되죠.” “하긴.” 아이템 강화라든가, 그 외의 기타 여러 가지 수단으로서도 시드가 지닌 힘은 매우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다. 생각해보면 강화 같은 것도 새로운 기능을 ‘창조’하는 기능이나 다름없으니, 시드가 지닌 본래 목적에서 크게 벗어난 것이라고 보기도 힘들다. 준상이 팔짱을 낀 채로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생각에 잠겨 있자, 라트나는 여전히 의식을 잃은 채 쓰러져 있는 발레라를 흘깃 바라보며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저희들을...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가요?” “글쎄.” 준상이 심드렁한 반응을 보이자 라트나는 이렇게 말했다. “본가에서 저희들을 실종을 알게 되면 가만히 있지 않을 거에요.” “가만히 있지 않으면?” 가소롭다는 듯이 되묻자 라트나는 어떻게든 설득하려고 마음 먹었는지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게... 조사가 시작되면 여러분의 행적도 밝혀질 것이고...” “어떻게?” 다시 이어진 반문에 라트나는 잠시 말문이 막힌 듯한 모습을 보였지만, 이내 한 사람의 이름을 거론했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벨 라야라면...” 준상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그 놈이라면 이미 죽었다.” “네?” “게다가 놈의 요새는 이미 차원의 틈 사이에서 완전히 소멸되었지.” “그럴수가...” 라트나는 벨 라야가 이미 사망하고 차원 요새가 소멸했다는 말에 우왕좌왕하며 공황 증세를 보이다가 간신히 이렇게 말했다. “그건... 불가능해요. 그는 혼자 힘으로 문명 하나를 통째로 박살낼 수 있을 정도의 가공할만한 능력을 지닌 존재에요. 당신이 아무리 강한 힘을 지니고 있다 해도 그의 상대로는...” 횡설수설하고 있는 라트나를 보며, 준상은 인벤토리에서 다크 시드 하나를 꺼내고는 염동력을 발휘해 그녀를 향해 들어 보였다. “이게 뭔지 알겠나?” 보통의 시드와는 확실히 구분되는 벨 라야의 다크 시드를 본 순간 라트나는 석상처럼 굳어 버리고 말았다. 준상은 벨 라야의 다크 시드를 다시 인벤토리에 넣으며 말했다. “벨 라야는 이미 죽었고, 흔적이나 증거는 차원 요새의 소멸과 함께 사라졌다. 이런 상황에서도 과연 너희들이 살아있다고 생각할까?” “그런... 그런 말도 안 되는...” 라트나는 물론이고 뒤에서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시종들마저 절망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준상은 그들의 모습을 즐기며 다시 물었다. “성좌의 주인이 칠대 황가의 하수인들이라면, 그들끼리 알력이 벌어지거나 하지는 않나?” “그, 그게...” 하지만 라트나는 공황 증세를 보이며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가만히 지켜보던 준상은 혀를 차고는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채를 움켜잡았다. “아악!” 그 고통에 놀라 정신을 차린 라트나는 자신의 머리채를 움켜쥐고 있는 준상의 손목에 매달리며 애원했다. “아파요. 제발... 이러지 말아요.” “정신이 들었나?” “네, 들었어요. 그러니까... 제발...” 하지만 준상은 서럽게 눈물을 흘리는 라트나의 모습을 가만히 내려 보면서도 그녀의 머리채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다시 묻겠다.” “네...” “성좌의 주인이 칠대 황가의 하수인들이라면, 그들끼리 알력이 벌어지거나 하지는 않나?” 라트나는 울먹이면서도 얼른 그 질문에 답했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요. 관리국에서 새로운 농장을 지정하고 파종을 시작했음을 위원회에 통보하면 칠대 황가들은 이후에 문제의 소지가 생기지 않도록 새로운 농장에 대한 권리를 사전에 규정하거든요. 보통은 순번을 지정하기 때문에 각 가문에 속한 성좌의 주인들이 충돌할 여지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해요. 만약 그럴 만한 일이 생기더라도 사전에 가문 간에 교섭이 이루어지니까, 충돌의 가능성은 그만큼 더 줄어들게 되죠.” “흠...” 허겁지겁 머리속에 떠오르는 대로 주워섬기느라 그런지 농장이니 파종이니 하는 식으로 신경을 건드릴 만한 단어가 마구 쏟아져 나왔으나, 준상은 개의치 않고 움켜쥐고 있던 그녀의 머리채를 놓아 주었다. “으흑...” 라트나는 엉망으로 흐트러진 머리를 감싸쥔 채 서럽게 울음을 터뜨렸다. “조용히.” “...” 준상이 다시 한 마디 던지자 라트나는 스스로 입을 막은 채 닭똥 같은 눈물만 주륵 주륵 흘렸다. “그렇다면 이상하군.” 하지만 준상은 라트나가 그러거나 말거나 턱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렇다면 하라바가 벨 페오르의 궁극기인 절멸의 검은 태양을 사용한 것은 도대체 어떻게 설명을 해야 좋단 말인가. “벨 페오르는 어느 가문에 속해 있지?” “네?” “벨 페오르.” “그, 그게... 그러니까...” 라트나는 얼굴이 눈물로 엉망이 된 채로 잠시 버벅거리다가 뒤늦게서야 급히 하나의 이름을 떠올렸다. “타랄라. 벨 페오르라면 타랄라 가문에 속한 성좌의 주인이에요.” “타랄라 가문?” “네. 저희 가문과 함께 칠대 황가의 수좌를 다투는 곳이죠.” 라트나의 말대로라면 칠대 황가는 서로 긴밀하게 협조하며 성좌의 주인을 내세워 사실상 독립적인 권력기관으로 발전한 관리국과 대치하고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이제 성좌의 주인 가운데 하나인 벨 라야가 소멸했으니, 본래 그가 맡고 있던 영역은 공백 상태가 되어 버렸을 터. 이것은 지금껏 미묘하게 균형을 유지하고 있던 저들의 세력 판도에 큰 혼란을 가져올만한 중대한 사안이 아닐 수 없다. “그렇군.” 준상은 여전히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라트나를 향해 씩 웃음을 지었고, 그녀는 갑자기 자신을 향해 던져진 소름끼치도록 차가운 미소를 보며 흠칫 몸을 떨었다. “내가 무섭나?” “그, 그게...” 라트나는 차마 그렇다고 대답하지 못한 채 몸을 움츠렸으나, 준상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무섭지 않아요. 아니, 그게 무섭지 않다는 건 그러니까...” 준상은 횡설수설하는 라트나를 바라보며 시종들의 앞을 가로막고 있던 소환물 가운데 빛의 정령인 반딧불이로 하여금 시종들의 눈앞에 강렬한 섬광을 터뜨리도록 했다. 팍! 마치 섬광탄과도 같은 강력한 빛이 예고도 없이 기습적으로 터져 나오자 시종들은 눈을 감싸며 비명을 질렀다. “으악!” “누, 눈이!” 갑작스런 비명소리에 라트나는 놀라 고개를 돌리려고 했지만, 준상의 손이 뻗어져 그녀의 아래턱을 감싸 쥐어버렸다. “왜, 왜 그러세요...” 라트나는 두려움에 떨며 그렇게 물었지만, 준상은 쓰고 있던 고글을 천천히 벗는 것으로 답했다. “아!” 라트나는 준상의 맨 얼굴을 마주한 순간 눈빛이 몽롱해지고 말았다. 요정의 키스가 지닌 부작용에 의해 매혹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일어나라.” 그 말이 흘러나오자 라트나는 방금 전까지 두려움에 젖어 눈물을 흘리던 것도 잊은 채 의자로부터 몸을 일으켰다. 준상은 곧바로 라트나를 데리고 결계 밖으로 나온 다음, 정신을 잃은 발레라와 일시적으로 시력이 봉쇄된 시종들의 시야에서 벗어나 앙가라드가 갇혀 있던 방으로 그녀를 인도했다. 마침내 아무에게도 방해 받지 않을 만한 장소에 도착하자, 준상은 몽롱한 표정을 짓고 있는 황녀에게 천천히 자신의 얼굴을 가져가며 그대로 입을 맞추었다. “...” 라트나는 준상과 입술을 포갠 순간 뇌신의 벼락이 전신을 관통하는 듯한 커다란 충격을 받았고, 결국 견디지 못한 채 그대로 기절해 버리고 말았다. 키스 한 방에 그대로 실신해 버린 황녀의 모습을 차갑게 바라보던 준상은 정신을 잃은 그녀를 버려둔 채 밖으로 나오며 중얼거렸다. “일이 재미있게 되었군.” 00361 트롤러 ========================================================================= ‘고객’들에 대한 심문을 끝낸 준상은 다음날 워싱턴의 링컨 기념관 앞에서 딜런을 만났다. “어서 오십시오.” “...” 깍듯하게 인사를 건네며 악수를 청하는 딜런의 손을 맞잡은 준상은 그를 살짝 끌어당기며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조용한 곳으로 갔으면 하는데.” 조용한 곳이라고 해도 어떤 목적을 위한 것인지에 따라 준비해야할 장소가 달라지기 때문에 딜런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어떤 곳을 원하십니까.” “넘길 사람들이 있다.” “...” 사람. 물건보다도 어떤 면에서는 더 신중한 보안이 요구되는 사안이라 딜런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지금 그들이 마주한 것은 중국에서 일어났던 검은 태풍에 대한 결과 보고를 위한 것이고, 소개도 아니고 신병을 넘기는 것이라면 해당 사건의 관계자일 가능성이 높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딜런은 급히 양해를 취하고는 어디론가 연락을 취하더니 땀을 뻘뻘 흘리며 여러 곳과 통화를 하고 난 다음에야 겨우 준상에게 말했다. “거리가 조금 멉니다. 차량을 수배하려는 모양인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상관없다.” 준상이 허락하자 딜런은 다시 몇 군데에 전화를 했고, 조금 시간이 지나자 캐딜락 리무진 한 대가 다가왔다. 딜런이 얼른 달려가 문을 열고자 했지만, 미처 그가 다가가기도 전에 차문이 열리며 말쑥한 인상의 남성 하나가 차에서 내리며 준상에게 악수를 청했다. “국토안전보장국 소속의 랄프 밀러입니다. 반갑습니다.” “...” 대답 없이 악수를 주고받은 준상은 밀러의 안내를 받아 차량에 탑승했고, 딜런은 쭈뼛거리며 그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밀러는 모두가 차량에 탑승하자 앞좌석에 신호를 보내 차량을 출발시킨 다음, 준상에게 물었다. “날씨가 많이 풀리긴 했지만 아직 쌀쌀한 편이죠.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따뜻한 차가 준비되어 있는데 한 잔 하시겠습니까?” “어떤 것이 있지?” “커피, 홍차, 녹차, 보리차 등이 있습니다.” 다른 건 그렇다 쳐도 보리차라니. 준상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밀러는 웃으며 설명했다. “한국인들이 많이 마시는 차라기에 부랴부랴 준비를 했습니다만...” “재미있군. 한 잔 부탁해도 될까.” “물론입니다.” 밀러는 포트에 담겨진 따뜻한 보리차를 텀블러에 담아 준상에게 건넸다. 미국에 와서, 그것도 대통령이나 국빈이나 겨우 타는 캐딜락 리무진 안에서 마시는 보리차는 조금 텁텁한 맛이기는 했지만, 준상은 커피나 홍차보다 역시 이쪽이 더 마음에 들었다. “좋군.” “감사합니다.”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자 밀러는 안도하는 표정을 지으며 준상의 텀블러를 다시 채우고는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어떤 사람들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준상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답했다. “실험 관계자와 책임자 일부이다.” 하지만 말투와는 달리 그 내용은 매우 중대했다. 검은 태풍 현상을 일으킨 실험의 관계자 뿐만 아니라 책임자까지. 실험의 실체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미국으로서는 그야말로 눈이 번쩍 뜨일 법한 내용이다. “몇 명이나...” “열 명 조금 넘더군. 실험 관계자 가운데 살아남은 인원은 아마도 그들이 전부일 것이다.” “허...” 준상은 텀블러에 담긴 보리차를 다시 한 모금 마시고는 밀러에게 물었다. “현재 그쪽 상황은 어떻지?” 밀러는 착잡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좋지 않습니다. 중국은 물론이고... 인도, 파키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등의 인접국 전부가 크게 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검은 태풍이 갑작스럽게 사라지는 바람에 그 안에 갇혀 있던 마수들이 한꺼번에 풀려 나오자 기습을 받은 각국의 군대들은 순식간에 패주해 버리고 말았다. 이 때문에 타클라마칸 사막과 천산 산맥에 인접한 나라들 대부분이 현재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는 혼란에 빠져 있는 중이었고, 키르기스스탄이나 타지키스탄의 경우에는 국가의 존망 자체가 위협을 받고 있었다. “이 두 나라의 경우에는 조만간 러시아에서 개입할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러시아라...” 준상은 텀블러를 기울이며 생각에 잠겼다. 성좌의 주인이나 그들의 종주인 칠대 황가, 그리고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 모든 일의 배후인 관리국 같은 자들에 대한 일로 머리가 복잡한 그로서는 사실 이런 일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는 것이 사실이다. 이번 일만 하더라도 사전에 미국과 거래한 내용만 아니었더라면 중국인들의 신병을 인도하기 위해 이렇게 일부러 시간을 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심각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심드렁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준상의 모습에 밀러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렇다고 따져 물을 엄두는 내지 못했다. 그들은 워싱턴 외곽에 자리잡은 국토안보부의 안전 가옥으로 들어섰다. 안전 가옥 지하에 설치된 벙커로 들어선 준상은 정령의 문을 통해 중국인들을 그곳으로 불러들였다. “어엇!” 어떠한 사전 징후도 없이 준상의 몸을 통해 중국인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오자 밀러와 딜런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은 중국인들 역시 마찬가지. 준상은 모든 인원들이 정령의 문을 넘어 도착하자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미국인들에게 말했다. “이 인원들이다. 이후의 일은 알아서 하도록.” “알겠습니다.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밀러는 얼른 그렇게 준상을 치하하고는 대기하고 있던 부하 직원으로부터 가방 하나를 건네 받아 준상에게 넘겨주었다. “대단치는 않지만, 미국 정부의 성의입니다. 받아주십시오.” “...” 준상은 말없이 그 가방을 받아들며 말했다. “더 이상 특별한 용무가 없다면 이만 가보도록 하지.” 그리고는 밀러가 미처 말릴 틈도 없이 신기루 꽃으로 통하는 석문을 연 다음 그대로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아...” 밀러는 겁 먹은 표정으로 멀뚱거리고 있는 중국인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옆에 서있는 딜런에게 말했다. “도대체... 그는 어떤 사람입니까?” 딜런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저도 모릅니다. 묻는다고 답해줄 사람도 아니니까요.” “그렇군요.” 밀러가 주위에 둘러선 사람들에게 눈짓을 하자, 그들은 곧바로 중국인들의 신병을 구속했다. 이들의 신병을 확보한 이상, 미국은 앞으로의 상황을 주도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얻은 셈이다. 진실이야 어찌 되었든 간에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한편, 중국인들의 신병을 인도하고 신기루 꽃을 통해 요정계로 귀환한 준상은 누리가 뒤집기 하는 모습을 보며 잠시 휴식을 취한 다음, 리체스와 함께 인적이 드문 공터로 발걸음을 옮겼다. 펫으로 만들어 버린 철골의 제왕 하라바를 불러내기 위해서였다. 펫 정보를 확인해 보니, 어느 틈엔가 부상은 모두 완치가 된 상태였다. 비록 펫이 되었다 해도, 상대는 성좌의 주인인 벨 라야를 빈사 상태로 몰고 간 장본인이니 결코 방심할 수 없다. “부탁해.” “맡겨 주세요.” 자신의 역량을 전부 발휘할 수 있는 요정계여서 그런 것일까. 리체스는 허공에 가볍게 손짓하는 것만으로도 주변의 공간을 차단하는 결계를 만들어 내었다. “됐어요.” “수고했어.” 만약에 있을지도 모르는 난동에 대비해 결계를 완성하자, 준상은 그제서야 철골의 제왕 하라바를 소환했다. 그러자, 한줄기 빛과 함께 작고 단단한 체구의 남자 하나가 모습을 드러낸다. “...” 하라바는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소환되었지만, 기묘한 요정계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오자 주춤한 모습을 보였다. 어린 아이가 제멋대로 낙서해 놓은 듯한 기묘한 세계. 그가 지금까지 보아왔던 어떠한 곳과도 다른 그 기묘한 풍경에 그는 묘한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다. 잠시 주위를 둘러보던 하라바는 곧이어 자신의 몸 상태를 확인했다. 뼈 마디 하나 하나가 완전히 박살난 것처럼 고통이 전해지던 일이 마치 거짓말처럼 그의 몸은 어느 새인가 완전하게 치유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상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전에는 없었던 기이한 무언가가 목을 죄고 있었기 때문이다. “날... 어떻게 한 거지?” 준상은 바로 대답했다. “만약을 대비해 조치를 취했다.” “조치라면?” “펫으로 삼았다.” 하라바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네놈... 능력자가 아니었던가?” “그 말대로다.” “능력자는 펫으로 삼을 수 없다. 그 정도는 상식일텐데?” 역시 그랬던건가. 따로 시험해 보지는 않았지만 역시 같은 세계의 귀환자들끼리는 펫으로 삼을 수 없는 모양이다. “상식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네가 내 펫이 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으음...” “믿지 못하겠다면, 확인시켜 줄 수도 있다.” “어떻게?” “몇번 소환과 역소환을 해보면 될 일이지.” “끙...” 하라바의 표정이 참혹하게 구겨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준상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그렇게 되면서 네가 소유하고 있던 펫과 인벤토리는 모두 나에게로 넘어왔다.” “젠장!” 하라바는 급히 자신의 팔뚝을 살펴보더니 이내 절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어떻게 모은 건데...” 준상은 그런 하라바를 바라보며 말했다. “묻겠다.” “뭘?” “벨 페오르와 무슨 관계지?” “벨 페오르?” 하라바는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얼굴을 찌푸리더니 뒤늦게서야 생각 났다는 듯이 말했다. “벨 페오르, 그 뱀꼬리 녀석이 언급했던 말이군. 맞나?” “그 말대로다.” “그 뱀꼬리 녀석은 어떻게 됐지? 확실하게 죽었나?” “확실하게 죽었다. 놈의 요새도 완전히 붕괴되었지.” “흠... 그건 다행이군.” 하라바는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이렇게 대답했다. “미안하지만 벨 페오르가 누군지는 나도 모른다.” “정말인가?” 준상이 의심스럽다는 표정을 짓자, 하라바는 혀를 차며 다시 말했다. “쯧, 아무래도 내가 그 벨 페오르인지 뭔지 하는 놈의 끄나풀이 아닌가 의심하는 모양이군.” 하라바의 말에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현재로선. 적어도 네가 그 절멸의 검은 태양을 사용한 이상 그건 당연한 일이다.” “...” 하라바는 얼굴을 찌푸린 채 준상을 노려보았다. “그렇게 따지면 나 역시 네가 의심스러운 것은 마찬가지다.” “어떤 점에서?” “네가 그 뱀꼬리의 하수인일 수도 있지 않은가. 죽은 척하고 검은 태양인지 뭔지 하는 것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이런 식으로 연극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준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가 있군.” “그렇지?” “하지만 그것이라면 나에겐 충분한 증거가 있다.” “증거라고?” “그래. 네 놈에게서 시드를 빼내려던 고객들을 포로로 잡고 있으니 원한다면 얼마든지 대면을 시켜줄 수도 있고, 벨 라야에게서 뽑아낸 다크 시드도 내가 가지고 있다. 그 정도라면 충분하겠지.” “음...” 하라바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렇게 말했다. “좋아. 한 가지 조건만 들어준다면, 내가 아는 것을 전부 말해주지. 원한다면 네 놈의 펫 역할도 충실하게 수행하고. 어쨌든 그 뱀꼬리를 끝장낸 것이 맞다면 생명의 은인인 것은 분명하니까.” “조건이라면?” 준상의 물음에 하라바는 살기 넘치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은혜는 열 배로, 원한은 백 배로. 그 연놈들을 이 손으로 직접 찢어 죽이고 싶다.” “...” 00362 트롤러 ========================================================================= 준상은 하라바의 말에 얼굴을 찌푸렸다. “별로 내키지 않는군.” “어째서?” “그들은 앞으로 따로 쓸 데가 있다. 제법 신분이 되는 자들이기 때문에 잠깐의 여흥을 위해 죽여 버리기에는 아깝다고 해야겠지.” “흠...” “시종들이라면 모르겠지만, 그런 잡다한 시종들 따위 죽여 봐야 별로 흥도 안 나겠지.” “두 말 하면 잔소리.” 두 남자의 대화를 듣고 있던 리체스가 한 마디 거들었다. “저로선 당신이 너무 순순히 펫 역할을 수행하겠다고 드는 것도 석연치 않군요.” 무지개빛으로 은은하게 빛나는 머리카락이라든가, 요정일 때와는 달리 자애로우면서도 알게 모르게 권위 넘치는 범상치 않은 리체스의 모습에 하라바는 이렇게 물었다. “이 여자 분은 또 누구신가?” 준상은 리체스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며 대답했다. “이곳 요정계의 여왕이며 나의 반려이며, 또한 내 아이의 어머니인 리체스다. 정확히는 전대 여왕이지만, 아무도 그런 건 신경 쓰지 않고 있지.” “호오.” 하라바는 리체스의 등 뒤에 나 있는 반투명한 날개를 보며 재미있다는 듯이 씩 웃었다. “이곳에는 아인종에 대한 편견이 없나 보군.” “편견이고 뭐고 간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요정의 존재 자체를 모르니까.” “하긴, 편견이란 것 자체가 상대를 인식하고 나서야 가능한 일이긴 하지. 아인종이라...”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하라바는 리체스를 향해 말했다. “부인께 하나만 묻겠소.” “말씀하세요.” “여왕의 자리에서는 스스로 물러나신 거요, 아니면 그럴 만한 강제적인 이유가 있었던 거요.” 그럴 만한 강제적인 이유. 돌려 말하기는 했지만, 결국 반정이나 찬탈 등을 일컫는 말이었다. 리체스는 준상과 처음 만났을 때의 일이 생각났는지 잠시 얼굴을 붉히며 머뭇거리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제 경우엔, 스스로 물러났다고 해야 옳겠죠.” 하라바는 그럴 것 같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물었다. “아직 한참은 젊으신 것 같은데,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혹시 이유를 물어도 되겠소?” “...” 한참은 젊다는 말에 준상이 피식 웃음을 흘리자, 리체스가 얼른 그를 째려보며 옆구리를 꼬집는다. 물론 그래봐야 딱히 통증이 느껴지는 것은 아니지만, 준상은 얼른 고개를 돌리며 얼굴에서 옷음을 지웠다. “왜 웃어요.” “내가 뭘.” “흐음...” “...” 일만년 이후로는 나이를 세어 보지 않은 것이 사실이니 한창 젊을 때라는 말이 좀 어색한 건 어쩔 수 없는 일. 하지만 아무리 나이를 먹었어도 젊어 보인다는 말이 기분 나쁠 여자는 없는 법이다. 특히나 헤네스의 명실상부한 젊음에 대해 은근히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리체스로서는 더더욱 그럴 수 밖에 없는 일이기도 하다. 리체스도 그런 점만큼은 스스로 인식을 하고 있는지 괜히 헛기침을 해보이고는 하라바의 말에 대답했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왕위를 내놓은 이유라면... 글쎄요. 지겨워졌다고 해야 하나요. 언제까지 이 짓을 하고 있어야 하나 싶기도 했고, 다른 삶의 목표를 찾았던 것도 이유가 되겠죠.” 그 말에 하라바는 박수를 쳤다. “그거요. 바로 그겁니다.” “그거라뇨?” 동질감을 느꼈기 때문인지, 어느 새인가 그녀를 대하는 하라바의 말투는 매우 정중하게 바뀌어 있었다. 리체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문을 표하자 하라바는 조금은 우울한 표정으로 답했다. “여왕의 자리에 얼마나 있으신 건지는 모르지만, 군주라는 것이 그리 만만한 자리는 아니죠. 처음에야 세상을 다 가진 것 같고, 뭐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막상 그 자리에 십년, 이십년 넘게 앉아 있다 보면 내가 지금 뭘 하나 싶은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하라바의 말에 리체스는 공감이 된다는 듯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준상은 그런 둘의 모습을 보며 쓴웃음을 지어야만 했다.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는다고 해야 하나. 말 안 듣고 통제 안 되기로는 둘째 가라면 서러울 요정들을 무려 일만년 넘게 다스리다가 결국 과부하 상태가 되어 천년 동안 잠들어 있었던 리체스에 비하면 하라바의 푸념은 차라리 귀여운 수준이었다. “부인들은 틈만 나면 시끄럽게 굴지, 자식들은 머리가 굵어졌다고 애비 말을 개똥처럼 듣기 일쑤지. 물론 제가 나라를 세우느라 가정에 별로 신경을 쓰지 못한 것은 인정합니다만, 그게 어디 저 혼자 잘 살자고 하는 일이었겠습니까? 자기들이 입고 먹는 그 모든 것들이 누구의 피와 땀인지 정도는 생각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누구 때문에 그 고생을 하는 건데, 정말이지 가끔은 다 뒤집어엎어 버리고 싶어질 정도죠.” “하지만 막상 그런 생각이 들더라도 차마 그럴 수 없는 것이 문제죠.” 하라바와 리체스는 죽이 척척 맞아서 그렇게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준상은 가만히 둘의 대화를 듣고 있다가, 이대로 놔뒀다가는 밤새도록 쓸데없는 푸념만 늘어놓을 듯한 분위기인지라 결국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래서, 결국 하고 싶은 얘기가 뭐지?” 준상의 말에 하라바는 아차 싶었던지 헛기침을 하고는 이렇게 말했다. “크흠... 결론은, 그러니까... 나에게도 다른 목표가 생겼다 이거겠지.” “다른 목표라면?” 하라바는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벨 라야인지 뭔지 하는 놈들과 고객인지 뭔지 하는 그 놈들을 찾아내 뿌리 뽑는 것.” 하지만 준상은 이렇게 물었다. “따지고 보면 네가 왕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결국은 그 시드 때문이 아닌가.” 그 말을 들은 하라바는 코웃음을 쳤다. “그래서, 네 녀석은 놈들에게 고마우니까 어서 가져 가십시오 하고 머리를 스스로 잘라 바칠건가?” 준상은 씩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 그건 아니지.” 그리고는 다시 말했다. “좋아. 그러나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인 듯 해도, 그것이 그 고객들을 넘겨줘야 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목표를 가지고 있다면, 그들을 잠깐의 화풀이 용도로 사용하기 보다는 좀 더 대국적인 측면에서 용도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라바는 준상의 말에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다가 이렇게 말했다. “그거야 뭐... 그렇기는 하지만. 혹시 내 인벤토리 안의 내용물들은 살펴보았나?” 준상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의외로 물욕이 없나 보군.” “그보다는 이후 동료가 될지도 모르는 자에 대한 예의라고 해두지.” “예의는 얼어 죽을.” 하라바는 그렇게 투덜거리다가 다시 말했다. “펫을 확인해 봤다면 알겠지만, 내가 살던 세계에는 다양한 종류의 아인종들이 존재한다. 대부분 인간과의 전쟁으로 그 수가 현격하게 줄어들어 있는 상태고, 이질적인 외모 같은 것 때문에 대부분 천민 취급을 당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중 몇몇은 상당히 위험하고 강력한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들이 있지.” “그 두 자매처럼?” “그래. 그들처럼.” 하라바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인벤토리를 보면 검은 색의 약병이 하나 있을테니 한번 확인해 보지 않겠나.” “뭔가 함정이라도 꾸미는 건 아니겠지?” “설마.” 준상은 하라바로부터 몰수한 인벤토리의 내용물을 살펴보다가 방금 전에 언급된 검은 색의 약병을 발견했다. 인벤토리에서 그것을 꺼낸 준상은 휴대폰을 꺼내 아이템 확인을 실행해 보았다. 아이템정보 명칭 : 저주의 흑혈 레벨제한 : 없음 종류 : 저주의 매개체. 등급 : Unique 효과 : 시체에 사용할 경우 아인종 ‘그라우엔’로 변화. 이때, 타인의 혈액이 섞이면 그 인물을 주인으로 인식. 지속시간 : 즉시 재사용 대기시간 : 없음 남은 사용횟수 : 5회 설명 : 이것은 저주의 기운이 가득 담겨 있는 검은 피입니다. 파두스 존재하는 수많은 아인종 중에서도 가장 두려운 존재가 바로 그라우엔 일족인데, 이들은 다른 이의 혈액을 갈취함으로서 그 안에 깃든 생명력을 흡수할 수 있으며, 이러한 습성은 그들에게 강대한 마력과 불사의 공능을 부여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너무나 강력했던 이 일족은 인간을 포함한 대부분의 아인종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으며, 결국 공적으로 지목되어 세상으로부터 자취를 감추게 되었습니다. 이 저주 받은 검은 피는, 그들의 능력을 시기했던 한 마법사의 손에 의해 만들어 졌습니다. 비록 이것을 만든 당사자는 스스로 사용해 보기도 전에 그 행적이 발각되어 형장의 이슬이 되었으나, 그라우엔 일족 백명의 원한을 담아 만든 이 검은 피의 효과만큼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주의) 1인에게 1회만 적용. 중복불가. “이건...” 준상은 설명을 읽으면서 이전에 자신이 발견했었던 불사의 용혈을 떠올렸다. 하지만 불사의 용혈과 저주의 흑혈은 그 이름이나 용법은 비슷해도 효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인간의 시체에 사용함으로서 그 인간을 또다른 아인종으로 변화시키는 저주의 매개체. “혈액의 갈취, 불사의 공능... 흡혈귀인가.” “흡혈귀?” “내가 사는 곳에도 이런 전설이 전해져 온다. 어느 곳이든 생각하는 건 다 마찬가지인가 보군.” 준상의 말에 하라바는 고개를 저었다. “그쪽은 단순히 전설인지도 모르겠지만, 이쪽은 실존했던 아인종이다. 너무나 위험해서 세상을 절멸시킬 뻔했다고 전해지는.” “그런 것 치고는 너무 허무하게 사라진 것 아닌가?” “그건 약점 때문이다.” “어떤?” 하라바는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대답했다. “그라우엔은 온몸이 갈기갈기 찢겨져 한줌 핏물이 되어 버려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부활하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만약 그렇게 무방비 상태가 되었을 때 작은 불씨가 하나라도 그 시체 위에 떨어지면, 그걸로 끝장이지.” “불이 약점인 모양이군.” “단순한 약점이 아니야. 닿는 순간 그대로 펑! 하고 형체조차 남기지 않고 터져 버리지. 물론 살아있을 때는 강대한 마력 때문에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마력을 사용할 수 없는 무방비 상태에서는 아주 작은 불씨조차도 치명적이지.” “흠...” 준상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다시 물었다. “그래서, 이걸 그들에게 쓰겠다는 건가?” 하라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연놈들에게 쓰는 것은 좀 과분한 일이긴 하지만, 그거라면 네가 원하는 대로 녀석들을 꼭두각시로 만들 수도 있을테고, 나 역시 마음껏 원한을 풀 수 있으니 서로 좋은 일 아니겠나?” “흠...” 확실히 나쁘지 않은 제안이다. 라트나에게 요정의 키스를 사용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준상에 대한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복종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의 마음이란 언제든 변할 수 있게 마련. 하지만 저주의 흑혈을 사용하게 되면 적어도 그런 식의 변심에 대한 걱정을 덜어낼 수 있게 된다. 문제는, 과연 저들 칠대 황가가 그라우엔이라는 아인종에 대해 모르고 있을까 하는 점이다. 아직 심증 뿐이기는 하지만, 준상은 요정을 비롯한 다른 모든 아인종들이 시드의 재배를 위해 관리국이나 칠대 황가가 임의로 탄생시킨 종족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만약 준상의 생각대로라면 발레라와 라트나를 그라우엔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은 모처럼의 좋은 패를 스스로 망가뜨리는 짓이 될 수도 있다. 잠시 고민하던 준상은 하라바에게 이렇게 제안했다. “이렇게 하면 어떨까.” “어떻게?” “만약의 경우를 감안하면 둘 다 그라우엔으로 만드는 것은 별로 현명치 못한 일이 아닌가 싶군.” 하라바는 얼굴을 구기며 말했다. “모처럼 서로 납득할 수 있는 좋은 타협안이라고 생각했는데, 기어코 거부하겠다는 건가?”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으르렁대는 하라바의 모습에 리체스는 경계의 시선을 보내며 마력을 일깨웠다. 하지만 준상은 그런 리체스를 말리며 이렇게 말했다. “말귀를 못 알아 듣는군.” “무슨 소리지?” 얼굴을 찌푸린 채 의문을 표하는 하라바를 향해 준상은 이렇게 말했다. “굳이 둘 다 그라우엔으로 만들 필요는 없는 일이라는 얘기다.” “오호...” 하라바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말했다. “하지만 다른 한쪽도 안전 장치는 마련해 두어야 할 텐데.”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니 걱정할 필요 없다.” 준상의 대답에 하라바는 턱을 쓰다듬으며 잠시 생각하더니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할 수 없지. 칼자루를 쥔 쪽은 내가 아니니까. 조금 아쉽긴 하지만 그 정도라면 적어도 구색은 맞출 수 있겠군.” “그럼 결정인가?” “결정이다.” 하라바는 그렇게 답하고는 스스로 손가락을 깨물어 상처를 낸 후, 그 피를 자신의 이마에 바르고는 이렇게 외쳤다. “라멜란의 왕 하라바 은체우는 지금 이 순간... 이름이 뭐였지?” “박준상.” “박준상으로부터 생명의 구함을 받은 은혜를 갚기 위해 수하로서 충실히 명을 따를 것을 맹세한다.” “수하?” “펫이라고 하기엔 좀 그렇지 않나.” “그렇긴 하군.” 준상은 다시 물었다. “방금 그건?” “종교적인 의식 같은 거다. 이렇게 자신의 피로 맹세한 일을 어기면 영혼이 지옥 불 위에서 영원히 고통 받는다고 전해지지.” “설마, 그걸 믿는 건가?” 준상의 물음에 하라바는 고개를 저었다. “별로. 하지만 이렇게라도 성의를 보이는 것이 일단은 도리일 것 같아서.” 그렇게 말한 하라바는 스산한 살기를 입가에 머금은 채 말을 이었다. “자, 그럼... 이제 그 연놈들이 어디 있는지 안내를 부탁해도 될까. 검은 태양인지 뭔지에 대해서는 그 다음에 말해 주도록 하지.” 00363 트롤러 ========================================================================= 준상은 잠시 생각하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알았다. 그럼 잠시 들어가 있도록.” “응?” 하라바는 무슨 말인가 하는 표정으로 의문이 담긴 시선을 던졌지만, 다음 말이 입에서 흘러나오기도 전에 한 줄기 빛과 함께 허공으로 모습을 감추어 버리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보고 리체스가 물었다. “괜찮겠어요?” “뭐가?” “그런 식으로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잖아요.” “...” 준상은 리체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그들은 살아 있는 사람의 머리 안에 든 것을 꺼내는 모습을 직접 지켜보며 그렇게 꺼낸 것을 약혼 선물로 삼는 일을 여흥으로 생각하는 존재들이다. 만약 요새를 붕괴시키지 못하고 그대로 잡혀 있었더라면, 나 역시 하라바처럼 도마 위에 오른 생선 꼴이 되었겠지. 그들이 지금 약자의 위치에 있다 해서 동정하는 건 멍청한 짓 밖에 안 돼.” “...” 앙가라드에게 얼핏 들은 내용이긴 했지만, 발레라와 라트나는 굳이 그럴 필요도 없는 일을 일부러 요새까지 찾아와 추출 과정을 직접 지켜보기로 했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 애초에 그들은 자신들을 동등한 인격체로 털끝만큼도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런 자들에게 인의를 따져 가며 아량을 베푸는 일은 티끌만한 자기 위안을 위해 자신은 물론이고 가족과 동료들 모두를 위험으로 모는 일이나 다름없다. 리체스는 우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준상의 품에 머리를 기댔다. “그럼, 갈까.” “네.” 둘은 신기루 꽃으로 가서 발레라와 시종들이 갇혀 있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서자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침상 위에 주저 앉아 있던 발레라와 시종들은 그들의 모습을 보자 놀라서 자리에 일어났지만, 그들의 입에서 무언가 말이 나오기도 전에 리체스가 마법으로 단숨에 재워 버렸다. 준상은 염동력으로 발레라를 들어 올린 다음 본래 하라바가 갇혀 있던 방으로 데리고 갔다. “하라바.” 그 이름을 부르며 소환을 실행하자, 한 줄기 빛과 함께 하라바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침상 위에 누운 채 잠들어 있는 발레라를 보고는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놈 맞아?” 하긴 아이템으로 잔뜩 치장했을 때와 비교하면 영 다른 사람처럼 보이긴 한다. “그 놈 맞아. 일전에는 속옷까지 전부 레어 이상의 아이템으로 치장하고 있었지.” “미친.” 생각해 보면 발레라가 몸에 걸치고 있던 아이템들은 그가 지닌 권력과도 비슷한 면이 있었다. 그 모든 것을 벗겨 놓은 발레라의 축 늘어진 몸은 그저 조금 훤칠한 청년의 그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생각해 보면 발레라나 라트나가 순수한 인간의 신체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 또한 의문스러운 일이기는 하다. 그럴 생각이 있다면, 성좌의 주인보다 더 강력한 힘을 쥘 수 있을텐데, 이렇게 무력하기만 한 보통의 인간으로 남은 것에는 과연 무슨 이유가 있는 것일까. 일부러 다른 세상에 인간의 씨를 퍼뜨리고 시드의 수확을 위해 그들의 종족 자체를 변이시키는 만행을 저지르면서도 자신들만은 순수하고 완전한 인간임을 자부하고 싶었던 것일까. 준상으로서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이렇게 도마 위에 오른 생선 마냥 침상 위에 누워있는 발레라의 모습을 보니 그로서도 역시 만감이 교차할 수밖에 없었다. 하라바는 까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주먹을 불끈 쥐더니 원한은 백배로 갚는다던 그의 말대로 보복을 시작했다. 뼈가 부서지고 살이 찢겨지는 소음과 함께 발레라는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숨을 거두었다. 우주를 제 멋대로 주무르는 칠대 황가의 핏줄은 그토록 허망하게 찢겨진 시신이 되고 말았다. 하라바의 보복이 끝나자, 준상은 품에서 저주의 흑혈을 꺼내어 작은 접시에 한 방울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수은처럼 뭉글뭉글하게 뭉쳐 있는 검은 피 위에 자신의 피를 한 방울 떨어뜨리자, 검은 색의 광채와도 같은 것이 피 위로 흘러 나온다. “이 과정을 직접 지켜보는 건 나도 처음이군.” 분출시켰던 살기를 억누르며 그렇게 중얼거리는 하라바의 모습을 일별한 준상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해버린 발레라의 시체 위에 저주의 흑혈을 떨어뜨렸다. 처음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러자 잠시 시간이 지나자 찢겨져 흩어졌던 살점과 피들이 마치 스스로 인력을 지닌 것처럼 모여들어 하나의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 기괴하고 그로테스크한 광경에 리체스는 결국 견디지 못하고 눈을 돌려야만 했지만, 준상은 담담한 눈으로 그 모든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크으...” 잠시의 시간이 지나 완전히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발레라는 신음인지 탄식인지 모를 작은 소리를 내더니 벌거벗은 채로 준상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주인님을 뵙습니다.” 이전에는 조금 준수한 외모를 지니고 있는 청년일 뿐이었다면, 지금의 발레라는 어딘지 모르게 조용히 주변을 잠식해 들어가는 기이한 분위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외형상으로 달라진 것이라면, 그저 눈빛이 조금 날카롭게 변한 것 정도. 하지만 준상은 그 모습을 접하는 순간 이 젊은이가 스스로 포식자로서의 본질을 깨달은 것을 어렵지 않게 눈치 챌 수 있었다. “너는 누구냐.” 준상이 묻자, 발레라는 조용히 대답했다. “발레라 칼리스 에스텔리타 플로르 아펠리보 바리아넬라. 칠대 황가의 하나인 바리아넬라 본가의 2남이며, 텔리타와 플로르, 아펠리보의 세 별을 다스리는 자입니다. 누이인 리투 아 모디니 파르나 샤 라타 라트나와 약혼했으나, 바리아넬라의 방계인 우드란 가문의 에나와 3년째 통정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바리아넬라 가문의 현 당주인 발루르 칼타스 에스아넬라 벤투르 그란데른 부토 바리아넬라이며 어머니는 그 누이인 리투 아 젤라니 리베라 타 벨라 아스타샤입니다.” 이전에는 듣지 못한 새로운 정보가 줄줄 흘러나오는 것을 보니 약효 하나는 확실한 모양이다. 준상은 다시 물었다. “본가와 연락할 방법이 있나?” 발레라는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없습니다. 다만 이곳의 시설물을 이용한다면 본가나 다른 지역으로 돌아갈 방법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곳?” “네. 처음 이곳으로 들어올 때 사용했던 석문의 설정을 조금 바꾼 후 적절한 좌표를 입력하면 원하는 장소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상당히 구형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이곳의 시설은 성좌의 주인이 사용하던 차원 요새의 그것과 매우 유사하니, 적절한 기회만 얻을 수 있다면 시종들 가운데 그러한 일을 해낼 만 한 자가 있습니다.” “호오...” 그런 비밀을 숨기고 있었던 건가. 리체스를 돌아보자 그녀는 일리가 있다는 듯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전부터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은 했지만, 괜히 어설프게 손대서 현재의 기능이 상실될까봐 섣불리 손을 대지 못하고 있었어요.” “그랬군.” 준상은 다시 발레라를 돌아보며 말했다. “당분간 별도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이전과 마찬가지로 행동하도록.” “알겠습니다.” 준상은 발레라를 본래 그가 갇혀 있던 장소로 다시 데려다 놓은 다음, 하라바에게 물었다. “원하는 것을 들어주었으니, 이제 검은 태양에 대해 들을 차례인 것 같군.” “여부가 있겠나.” 하라바는 침상 끄트머리에 앉으며 얘기를 시작했다. “그게... 그러니까 내가 갓 50레벨을 넘었을 때의 일이니까 제법 오래 전이군. 자네도 알겠지만 그 즈음이 되면 내가 지닌 능력에 한창 경도되어 있을 무렵이지. 다크 시드 사용자들도 정말 어지간한 상대가 아니면 혼자서 다 때려잡을 수 있을 정도인데다, 마수도 어지간히 강한 놈들이 아니면 혼자 힘으로 한 두 마리 정도는 찜쪄 먹을 수 있으니까. 스스로를 무적이라고 생각하며 우쭐거리던 때이기도 하고, 그런 자신감을 바탕으로 나라를 세운다 뭐한다 해서 정신이 없었던 때이기도 했지.” 하라바는 잠시 그 당시의 일이 떠올랐는지 회상에 잠겨 있다가 다시 말했다. “그가 찾아온 것은 바로 그 즈음이었어. 당시 나는 한창 내 왕국의 수도를 건설하는 일에 정신이 없었거든. 자네도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능력이라면 성벽을 쌓고, 물길을 놓고, 도시를 쌓는 데 아주 그만이라 한참 그 재미에 빠져 있었던 참에 그 이방인과 마주쳤었지.” “이방인이라면?” “키는 아마 자네 정도 되었을 거야. 체구는 망토에 가려져서 제대로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상당히 호리호리했던 걸로 기억이 나는 군. 얼굴에는 가면을 쓰고 있었는데, 그 뱀꼬리 녀석이 썼던 반가면 같은 것이 아니라, 눈구멍조차 뚫려 있지 않은 기이한 흰색 가면이었지.” “그 자가 벨 페오르였나?” 준상의 물음에 하라바는 난색을 표했다. “글쎄. 이름은 듣지 못했어. 분명한 건 그 자와 마주 쳤을 때 이 팔뚝 전체를 뒤덮을 것처럼 붉은 성흔이 새겨지며 어서 피하라는 경고 메시지가 마구 튀어 나왔다는 정도겠지.” “성흔이라니?” “이쪽은 다른가? 우리 쪽에서는 메시지 같은 것은 여기 이 팔에 상처처럼 생겨나거든.” “그거 신기하군.” 하긴 휴대폰이나 준상이 이전에 사용하던 휴대용 인터페이스 같은 것이 없다면, 귀환자의 몸에 직접 메시지를 새기는 것이 가장 효율적일수도 있다. “어떤 메시지였지?” 준상의 질문에 하라바는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위험하니 당장 도망쳐라.” “...” “그 내용을 보는 순간 솔직히 당황해 버렸어. 이전까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메시지였으니까.” 하라바의 말에 준상은 예전에 다크 시드 사용자들의 집단과 마주쳤던 일이 떠올랐다. 그 무리 속에 벨 라야까지는 아니더라도 감시자 가이트가 섞여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벨 라야와 가이트가 소멸해 버린 지금에 와서는 확인할 길마저 없어져 버리고 말았다. 하라바는 당시 일이 떠올랐는지 잠시 허공을 보며 생각에 잠겨 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어리석은 일이었지만, 나는 도망치지 않았어.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지금이야 원수도 그런 원수가 없지만, 당시만 해도 아이들이 한창 귀엽게 재롱을 부리던 때였거든. 이성적으로는 일단 내가 살아야 뭐든 할 수 있다는 걸 이해하고 있었지만,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더군.” “그래서?” “그래서는 뭘 그래서야. 당연히 단숨에 박살이 나고 말았지. 시드 무력화에 걸려서 그야말로 손가락 하나도 꼼짝 못하고 완벽하게 당해버렸던 거야.” “흠...” 시드 무력화를 사용했다는 것은 다시 말해 그 가면을 쓴 존재가 성좌의 주인이거나 그로부터 세례를 받은 감시자 수준의 인물이었다는 의미가 된다. 생각해 보면 뒤늦게나마 요새에서 하라바가 벨 라야를 상대로 그렇게 싸울 수 있었던 것도 이전에 시드 무력화 능력을 상대해 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꼼짝 없이 죽는가 싶었는데, 그 자는 나에게 다가와 손목에 이런 걸 남겨 주고는 말 없이 그냥 돌아가 버리고 말았지.” 하라바는 그렇게 말하고는 자신의 손목 안쪽을 준상에게 내밀어 보였다. 처음에는 아무런 특별한 것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준상과 리체스는 뭔가 싶은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작고 검은 결정체 같은 것이 마치 수면 위로 떠오르듯 손목의 살을 비집고 고개를 내밀었다. “이건... 다크 시드?” 준상의 말에 하라바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글쎄. 이게 정확히 뭔지는 나도 알 수가 없어. 나도 다크 시드가 아닐까 싶긴 하지만, 검은 태양인지 뭔지를 쓸 수 있게 해주는 것을 제외하고는 다른 효과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것이 검은 태양을 쓸 수 있도록 해준다고?” 하라바는 자신의 손목 위로 드러난 검은 색의 결정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래. 다만 무한정 쓸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생명력을 담보로 한다는 것이 문제긴 하지만.” “소모되는 생명력은 어느 정도지?” “최소 남은 생명력의 9할은 필요해. 전체 생명력의 수치로 계산하는 것이 아닌 것이 그나마 다행이랄까. 때문에 처음부터 쓰기엔 뭔가 난감해도 생명이 경각에 달린 상황이라면 이판사판이라는 심정으로 써볼 만 하지.” 일부러 시드 무력화의 능력에 대한 경험을 제공하고, 거기에 최후의 필살기마저 떠안겨 주었다. 이것은 확실히 어떤 의도가 있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00364 트롤러 ========================================================================= 준상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중요한 것은 하라바가 만난 것이 정말로 벨 페오르가 맞는가 하는 점. 절멸의 검은 태양이 발동하면 바보가 아닌 이상 하라바의 배후에 벨 페오르가 있으리라는 정도는 누구나 떠올릴 만한 일이다. 즉, 누군가가 일부러 벨 페오르의 궁극기를 흉내 내어 하라바에게 건네주었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만 하는 것이다. 생각해 볼 수 있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관리국과 칠성좌, 그리고 칠대 황가로 연결된 기존의 견고한 권력 구도를 흔들기 위한 수단으로서 하라바가 선택되었을 가능성이다. 중간에 준상이 끼어들면서 사태가 악화되기는 했지만, 벨 라야가 소멸하고 발레라와 라트나가 행방불명된 이상 기존의 권력 구도에 일대 파란이 몰아닥칠 것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 그 시점에 하라바가 벨 페오르의 궁극기를 사용한 사실이 밝혀지면, 발레라가 속한 바리아넬라 가문이 과연 잠자코 그 상황을 넘어갈까. 진상 조사를 위해 벨 페오르가 속한 칠대 황가에 신병을 요구하는 정도의 조치는 물론이고, 최악의 경우 칠대 황가 가운데 두 가문이 전쟁 상태로 접어들 가능성마저 있다. 준상이 생각에 잠긴 모습을 바라보던 하라바는 턱을 긁적이고는 다시 이렇게 말했다. “일단 내가 아는 건 이 정도가 전부다. 과연 그 하얀 가면이 누구인지부터 정확히 알아내는 것이 급선무겠지만, 솔직히 이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좋을지 막막한 일이거든.” 하라바는 그렇게 말하고는 리체스의 눈치를 흘깃 살핀 뒤 다시 이렇게 말했다. “그 연놈은 어떻게 써먹을 생각이지?” 발레라는 방금 저주의 흑혈을 써서 하수인으로 만들어 버렸지만, 여자 쪽의 일은 어찌할지 궁금한 모양이었다. “이미 손을 써두었다.” “그렇다면야 상관없지만.” 아쉬운 듯 입맛을 쩍 하고 다신 하라바는 문득 떠올랐는지 다시 이렇게 말했다. “그... 인벤토리에 있는 천막집은 꺼내 봤나?” “아니.” “인벤토리 안에 들어 있는 거라고 해봐야 거대화할 때 쓰려고 넣어둔 철재들이 대부분이긴 하지만, 그 천막집은 성 밖으로 나갔을 때 내가 쓰던 집 같은 거라서...” 머뭇거리며 말하는 품이 제법 아끼던 물건인 듯한 느낌이라 준상은 바로 대답해 주었다. “일단 문제될 만한 것이 없는지 살펴보고 이상이 없다면 돌려주도록 하지.” 하라바는 얼른 손을 저으며 말했다. “이상한 것 따위는 없으니까 걱정 말게. 내가 원래 잠자리가 바뀌면 잠을 잘 못자는 성격이라... 아, 어차피 역소환 되면 상관없나.” “상관없을걸.” “내가 이래봬도 한 나라의 왕인데, 먹고 자는 것 정도는 좀 대우를 해주지 않겠나? 이고르 녀석은 잘 있지? 그 녀석이 조막만 해도 음식은 참 잘하는데. 이거 간만에 힘을 썼더니 배가 또 슬슬 고파 오는군.” 그렇게 주절거리며 준상의 눈치를 보는 하라바의 능청스러운 모습에 리체스는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짓고 말았다. “왕이 뭐 대단한 거라고.” 준상이 그렇게 말하자, 하라바는 일리가 있다는 듯이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래. 방금 그 녀석만 해도 별을 세 개나 다스리는 신분이었으니. 맞다. 그러고 보니 그쪽의 작고 아름다우신 부인께서 요정계의 여왕이라고 하셨던가. 이거 괜히 잘난 척 한 꼴이 되어 버렸군. 하하.” 의외로 말이 많은 놈이라는 생각을 떠올리며 준상은 그를 데리고 요정계로 돌아왔다. 하라바의 천막집은 생각보다 상당히 규모가 컸다. 천막집은 한 면의 길이가 족히 어른 기준으로 열 걸음은 되는 정사각형의 커다란 수레 위에 놓여져 있었으며, 금실로 짠 휘황찬란한 천막 안에는 화로는 물론이고 커다란 침상과 여러 가지 가재도구가 들어 있어서 제법 안락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전체적인 느낌은 몽골의 게르를 좀 더 화려하게 치장한 느낌인데, 사막에서 이런 커다란 물건이 과연 제대로 움직일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다른 세계 사람들이 보기에는 어떨지 몰라도, 우리 왕국에서는 제법 명물이거든. 사막의 철골왕이 거하는 황금 천막이라고 해서 말이야. 말 스무 마리로 끌 수도 있긴 한데, 수도에서 행진할 때가 아니면 그냥 인벤토리에 집어넣고 다니는 쪽이 훨씬 편리하지. 애초에 진창이나 사막 같은데서 그런 식으로 끌고 다니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니까.” 하라바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리체스가 물었다. “마난바의 작품인가요?” “오, 아시는 군요. 그 곰탱이가 보기엔 둔해 보여도 솜씨가 제법입니다. 이거 만들었을 때보다 레벨이 많이 올랐으니 지금은 더 멋진 걸 만들 수도 있을 겁니다.” 하라바는 그렇게 말하고는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쩍쩍 다셨다. 이고르도 그렇고 마난바도 그렇고 실용적인 면에서는 준상이 데리고 있는 여러 펫 중에서도 으뜸이니 하라바로서도 아까운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만약을 대비해 리체스가 천막 안쪽을 마법으로 확인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하라바를 향해 준상이 말했다. “그 쌍둥이들은 자네와 어떤 관계지?” “쌍둥이? 아... 그 라니족 말이군.” 다른 펫들이야 그럴 일이 없지만, 라니족 쌍둥이들의 경우에는 치정 관계가 얽혀 있으면 문제가 복잡해지니 미리 확인을 해둘 필요가 있었다. 하라바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관계고 뭐고가 있나. 그냥 집 지키는 개일 뿐이지. 원래 그런 아인종들은... 아, 이거 실례했군. 자네 부인을 모욕하려는 의도가 있는 건 아니었네.” “알았으니 계속 해봐.” “관계랄 것이 뭐 있겠나. 그냥 주종관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 딱히 손을 대거나 한 것은 아니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되네.” “그렇군.” 둘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리체스가 확인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괜찮은 것 같아요.” “수고했어.” “별 말씀을요.” 준상은 인벤토리 할당 기능을 이용해 천막집이 들어있던 인벤토리를 하라바에게 넘겨 주었다. “하하, 신경 써줘서 고맙네.” “달리 필요한 건 없나?” “별로. 그냥 때 되면 이고르 시켜서 식사나 챙겨주게.” “그러지.” 이로써 요정계에는 명물들이 생겨났다. 그 중 첫 번째는 여왕의 정원 위에 떠 있는 커다란 별해파리. 어두운 밤이 되면 황홀할 정도로 아름답게 반짝이는 데다, 그 안에 들어가면 트램폴린을 능가하는 압도적인 재미를 선사하는 재미있는 놀이 도구로 변모하기에 요정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었다. 두 번째는 여왕의 거처 근처에 생겨난 커다란 대장간의 곰 아저씨. 안전모를 머리에 쓰고 상체에는 주머니가 잔뜩 달린 가죽조끼를 걸친 이 수더분한 인상의 덩치 큰 곰은 말만 하면 뭐든 재깍 만들어내는 신기한 손재주의 소유자였다. 세 번째는 검은 집사 고양이의 식당. 말만 하면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듯한 현란한 동작으로 어떤 음식도 척척 만들어내는 그 신기하기 이를 데 없는 능력을 선보이자, 먹보 요정들은 다시 열광의 도가니에 빠져 들었다. 이 모든 것들을 하루 동안 이용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은 요정의 술 한 병. 한 병이라고 해봐야 요정 사이즈에 적용되는 것이라 보통 인간으로서는 한 모금이나 될까 말까 싶은 양. 그러나 이 작은 병에 담긴 술의 진정한 가치는 그 감미로운 맛이 아니라 마시는 순간 일정 시간 동안 하늘을 날게 해준다는 것에 있다. 어쨌거나 그렇게 요정들에게 다시 요정의 술을 갈취하다 보니 마침내 누리의 백일 잔치 날이 되었다. 준상은 여왕의 거처 앞에 잔치상을 크게 벌려 누리의 백일을 축하했다. “오오! 이 하얗고 쫀득쫀득한 것은 도대체 뭐지?” “몰라!” “난 알아!” “뭔데?” “백설기래.” “백설기가 뭔데?” “몰라!” 요정들이 그렇게 수다를 떠는 동안, 누리는 곰아저씨 마난바가 만들어준 멋들어진 안락의자에 앉아 꾸벅 꾸벅 졸고 있었으며, 잔치상 위에는 역시나 마난바가 만든 작은 투구를 쓴 몽몽이와 밤톨이가 마치 호위병처럼 버티고 앉아 있었다. 요정들 외에 가장 먼저 누리를 찾은 손님은 다름 아닌 헤네스의 부모인 제스터와 유라스, 그리고 오빠인 젤란이었다. “어쩜 공주님이 참 귀엽기도 하네요.”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떻게 보면 좀 껄끄러울 수도 있는 일. 실제로 헤네스의 부친인 제스터는 정령의 문을 통과할 때만 하더라도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우지 못하고 있었으나, 막상 젖을 배부르게 먹고 안락의자 위에서 졸고 있는 누리의 모습을 보자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이것은 누리가 워낙 귀여운 아이인 탓도 있었지만, 준상보다도 더 많은 요정의 키스를 받은 부작용도 한 가지 이유였다. 뽀샤시와 물광의 위력은 안 그래도 뽀얀 아기 피부를 더 부드럽게 촉촉한 느낌으로 바꾸어 주고 있었던 것이다. 너무나 귀여운 누리의 모습에 한동안 넋을 잃고 감탄을 터뜨리던 유라스는 문득 헤네스를 불러 이렇게 물었다. “넌 어떠니?” “뭐가요?” “아이 말이다.” “그, 그게...” 어머니 유라스의 말에 헤네스는 우물쭈물 말을 잇지 못했다. 유라스는 그 모습을 보고 짤막하게 한숨을 쉬고는 헤네스에게 얼른 무언가를 건네주었다. “이거... 넣어두렴.” “이게 뭐에요?” “남자한테 이게 그렇게 좋다더구나. 아버지 모르게 구하느라 좀 힘들었다.” “...” 누리의 백일을 축하하기 위해 온 것은 헤네스의 가족만이 아니었다. 얀트훈센의 광전사들과 인근의 다섯 영지에 나가 있던 블러드로드들이 일제히 방문해서 축하와 함께 선물을 안겨 주었고, 준상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델로드란 왕실과 귀족들도 어떻게 알았는지 선물을 가지고 사절들을 보내왔다. 이렇게 되고 보니 원래는 요정들이나 동료들과 함께 조촐하게 잔치를 벌이려던 것을 넘어서 요정계가 들썩일 정도로 큰 잔치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혼자서 요리사 백 명 분의 능력을 발휘하는 이고르 덕분에 요리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다는 점. 게다가 일전에 요정계로 들어온 수습생들이 수가 적은 보좌관들을 도와 손님들의 안내와 접대를 맡아준 덕분에 갑작스럽게 일이 커졌음에도 불구하고 큰 혼란 없이 잔치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세상에. 저 고양이 도대체 뭐죠?” “그러게요.” “혹시 새끼 낳으면 한 마리 나눠 달라고 해 봐야 겠어요.” 물론 그렇다 치더라도 일일이 손님들과 인사를 나누는 그 일만으로도 충분히 고된 일이지만 말이다. “우으으... 여보, 나 허리 좀...” “언니, 괜찮아요?” “안 괜찮아. 피곤해 죽겠어.” 리체스는 잔치가 끝나자마자 그대로 늘어져 버렸다. “역시 나이는 못 속이는 건가.” 하지만 헤네스가 그렇게 옆에서 한 마디 하자, 리체스는 벌떡 일어나며 언제 그랬냐는 듯이 쌩쌩한 표정을 지었다. “무, 무슨 소리니? 내 나이가 뭐 어쨌다고?” “후후후.” 물론 그렇게 시끌벅적한 와중에도 누리는 넉살 좋게 잘만 자고 있었지만 말이다. 누리의 백일 잔치가 끝나자 준상은 곧바로 발레라와 라트나로부터 신기루 꽃의 석문을 업그레이드시킬 기술을 뽑아내는 일을 시작했다. “이게 시드 무력화의 아이템인가 보군.” “어디 한 번 봐요.” 발레라와 라트나는 각기 하나씩 시드 무력화의 능력을 가진 반지를 가지고 있었다. 효과 범위는 반경 십 미터 정도로 감시자 가이트가 지니고 있던 시드 무력화 능력보다 월등한 수준이었다. 00365 트롤러 ========================================================================= 발레라와 라트나가 지니고 있었던 아이템들은 대부분이 외모를 치장하거나 기품을 높이기 위한 것이었지만, 개중에는 이런 시드 무력화의 반지처럼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한 것도 있었다. 게다가 사소한 치장용 아이템 조차도 죄다 유니크 등급이었는데, 이것은 신체상으로 보통의 인간과 다를 바가 없는 그들이 착용하기 위한 물품이기 때문으로 보였다. 시종들과 함께 지내고 있는 발레라와는 달리 라트나는 따로 격리된 채 준상이 그들에게서 빼앗은 아이템을 분류하는 일을 돕고 있었다. “이런 아이템은 누가 만드는 거지?” 대충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대로 들고 질문을 던졌으나, 하필 그렇게 들려진 물품이 라트나의 속옷이었다. “여보.” “...” 옆에서 함께 물품을 살펴보던 리체스가 눈을 흘기자, 준상은 모르는 척 속옷을 다시 내려 놓았으나, 라트나는 수치심인지 부끄러움인지 모를 감정으로 얼굴을 붉히면서도 질문에 순순히 답했다. “제가... 만들었는데요.” “네가?” 의외의 대답인지라 준상과 리체스는 라트나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마법사였니?” 리체스의 물음에 라트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런데 이런 걸 어떻게 만들어?” 라트나는 준상과 리체스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창조의 씨앗으로요.” “...” 그 대답을 듣는 순간 준상은 물론이고 리체스마저도 이게 무슨 미친 짓인가 하는 생각을 떠올렸다. 별 생각 없이 들으면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본질을 따지고 들어가면, 하나의 씨앗을 만들기 위해서는 하나의 목숨을 필요로 한다는 점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그것도 최소한 레벨 50이상의 능력을 지닌 인간의 목숨이. 그렇게 만들어낸 물품으로 이런 속옷 따위를 만들다니, 도대체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창조의 씨앗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전혀 모른다면 몰라도, 그것도 아닌 이상에야 그야말로 미쳤다는 소리 밖에는 나오지 않는 일인 것이다. 리체스는 기가 막혀서 잠시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고, 준상은 그런 그녀를 내버려 둔 채 방금 전에 집어 들었던 속옷을 꺼내어 들고 아이템 정보부터 확인해 보았다. 아이템정보 명칭 : 황녀의 아름다운 기능성 속옷 레벨제한 : 없음 종류 : 속옷 등급 : Unique 효과 : 1.체형 교정 2.체온 유지 3.습도 유지 4.청결 유지 5.방향 기능 6.피로 회복 속도 증가 100% Seed :없음 설명 : 이 아름다운 속옷은 여성의 품위를 살려주는데 최적화된 물품입니다. 입는 것만으로 균형미 넘치는 아름다운 몸매를 유지시켜 줄 뿐만 아니라,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신체를 가장 청결하고 건강하게 유지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줍니다. “...” 방향 기능은 또 뭔지. 어지간하면 험한 말을 입에 담지 않는 준상으로서도 이걸 보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욕설이 나오는 걸 참느라 곤욕을 치러야만 했다. 그나마 한 가지, 이런 사실로 확인한 것이 있다면 창조의 씨앗을 통해 이런 식으로 유니크 아이템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이다. 라트나는 창조의 씨앗을 이용해 이런 쓰잘데기 없는 물건을 만들어냈지만, 제대로 활용할 수만 있다면 더 훌륭하고 뛰어난 물품을 만드는 것도 가능하지 않겠는가. 준상은 잠시 말없이 아이템 정보를 바라보다가 리체스에게 그 속옷을 내밀었다. “이걸 왜 저한테 주세요? 저 입으라고요?” 준상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럼요?” “누리 기저귀로 쓰면 어떨까 싶어서.” “끙...” 이런 상황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는 준상의 딸 바보 능력에 리체스는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확실히 이 정도 효과라면 기저귀보다는 기저귀 커버 같은 용도로 굉장히 효과적이긴 하겠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이 쓰던 속옷을 그대로 쓴다는 것 자체가 뭔가 찜찜한 느낌을 지울 수 없는 일이다. “됐으니까 놔둬요. 정 필요하면 제가 만들어 줄 테니까.” “알았어.” 어쨌든 머리카락을 리체스의 그것처럼 무지개 빛깔로 반짝이게 만드는 아이템이라든가, 눈빛을 더욱 맑고 초롱초롱하게 만드는 아이템이라든가, 목소리를 더 듣기 좋고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아이템 같은 것을 제외하고 나자, 정말로 쓸모가 있어 보이는 것은 몇 되지 않았다. 물론 이런 식으로 외모를 치장하는 아이템도 쓰고자 하면 용도야 무궁무진하겠지만, 그 재료가 뭔지를 떠올리면 역시 미친 짓이라는 말 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어쨌든, 그렇게 걸러낸 아이템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기능을 지닌 것은 말 할 것도 없이 시드 무효화의 반지다. 아이템정보 명칭 : 시드 무효화의 반지 레벨제한 : 없음 종류 : 반지 등급 : Unique 효과 : 반경 십 미터 이내에 존재하는 시드의 효과를 일괄적으로 끄고 켤 수 있다. Seed :없음 설명 : 이 반지를 착용하게 되면 효과 범위 내에 존재하는 모든 종류의 시드가 지닌 능력을 일괄적으로 끄고 켤 수 있게 됩니다. 단, 이미 다른 물품으로 변환된 창조의 씨앗은 더 이상 시드로서의 능력을 지니고 있지 않으므로 대상에서 제외됩니다. 시드 무효화의 반지는 발레라와 라트나가 하나씩 지니고 있었는데, 발레라의 것은 일단 준상이 챙겼고, 라트나의 것은 리체스에게 건네 주었다. “어떤 원리로 동작하는지 확인해 줬으면 해.” “휴... 알았어요.” 요사이 리체스는 쏟아지는 일거리를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였지만 어느 것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는데다, 달리 그녀를 대신할 만한 능력을 지닌 자도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준상은 다시 하나의 물품을 꺼내 라트나에게 내보이며 물었다. “이게 그 물건인가?” “네.” 아이템정보 명칭 : 게이트 좌표 측정기 레벨제한 : 없음 종류 : 반지 등급 : Unique 효과 : 게이트 소환시 좌표를 자동으로 산출해 주는 측정기입니다. Seed :없음 설명 : 이것은 특정한 지역의 좌표를 산출하고 기억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장치입니다. 게이트 소환시 함께 사용하면 현재 게이트가 소환된 지역의 좌표가 자동으로 산출되며, 이렇게 산출된 좌표를 최대 열 개까지 기억하거나 별도로 출력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차원 요새의 고정형 게이트에 접속해서 기억된 열 개의 좌표를 자동으로 입력하거나 이전에 산출해 두었던 별도의 좌표를 따로 입력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좌표 입력기는 예전에 유행하던 휴대용 게임기인 다마고치와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었는데, 설명만 보면 뭔가 대단해 보이지만 사실 신기루 꽃의 석문도 이미 이것과 비슷한 기본적인 기능을 갖추고 있었다. 차이가 있다면 신기루 꽃의 석문은 지정된 좌표를 출력하는 기능이 없는데다, 오직 하나의 좌표만 기억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점이 부각되지 않을 뿐이다. 현재 석문에 기억된 좌표는 얀트훈센의 성 뒤쪽에 자리 잡은 동굴과 이벨류아에 있는 준상의 저택, 그리고 요정계에 있는 리체스의 연구실이며, 나머지 하나는 준상이 마지막에 석문을 소환한 지점의 좌표만을 기억한다. 이를테면, 이 좌표 측정기는 석문의 기능을 확장시키기 위한 보조 도구인 셈이다. “리체스. 어때?” “음...” 리체스는 준상에게서 측정기를 받아 들고 잠시 살펴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물품이 있다면 당장이라도 어렵지 않겠어요. 사실 좌표를 읽어내고 덮어쓰는 방식을 알아낼 수가 없어서 곤란하던 참이었거든요.” “그래? 잘 됐군.”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한 가지 의문스러운 점을 깨달았다. “그런데, 발레라에게 듣자니 이것 없이도 석문을 조작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 모양이던데.” 라트나는 그 말을 듣자 이내 고개를 저었다. “저는... 잘 모르겠어요.” “그래?” 하긴 발레라가 안다고 해서 라트나 역시 무조건 알고 있으란 법은 없다. “그럼, 하라바가 살던 별의 좌표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있나?” “하라바가 누구죠?” “너희들이 죽이려 했던 시드 보유자 말이다.” 라트나는 흠칫 놀라더니 얼른 고개를 저었다. “모, 모르는데요.” “그런가.” 준상은 입맛을 다시고는 아이템을 챙겨서 인벤토리에 집어 넣은 다음 리체스를 데리고 라트나가 머물고 있는 방에서 나온 다음 발레라를 데리고 나왔다. “부르셨습니까.” 시종들과 함께 있을 때는 예전처럼 주눅이 든 모습을 보이던 그였지만, 일단 결계 밖으로 나오자 사방을 잠식해 들어가는 기묘한 존재감을 퍼뜨리며 준상을 향해 얼른 무릎을 꿇는다. “몸은 어떤가.” 억지로 그라우엔이라는 아인종으로 변형을 시킨 상황이니 뭔가 부작용 같은 것이 없나 싶어 그렇게 묻자, 발레라는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날아갈 것처럼 개운합니다. 어째서 이런 것을 모르고 살았나 싶을 정도로.” “불편한 점은 없나?” “그것이...” “말해라.” 발레라는 잠시 주저하다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흡혈에 대한 욕구가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그라우엔은 흡혈의 욕구를 지닌 이른바 흡혈귀라 부를 만한 아인종. 어떻게 보면 발레라는 그라우엔이 된 이후로 밥 한끼 제대로 먹지 못한 채 쫄쫄 굶고 있는 셈이었다. “미처 신경을 쓰지 못했군. 조만간 피를 조달해 줄테니 섣부른 행동은 자제하도록.”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나의 주인이시여.” 준상은 발레라가 고개를 숙이며 사의를 표하자 다시 말했다. “오늘 너를 부른 것은, 몇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어서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우선...” 품에서 게이트 좌표 측정기를 꺼낸 준상은 그것을 발레라에게 내보이며 말을 이었다. “이 안에 들어있는 좌표가 무엇인지 궁금하군.” “그것이라면 다행히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발레라는 얼른 고개를 숙이며 설명을 시작했다. “첫 번째 좌표는 제가 다스리는 행성 가운데 하나인 텔리타에 지어져 있는 제 저택이며, 두 번째와 세 번째 역시 마찬가지로 행성 플로르와 아펠리보의 저택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네 번째는 제 약혼녀인 라트나의 별궁이고, 다섯 번째는 바리아넬라의 본가가 있는 행성 아넬라의 대궁정 입구의 대광장입니다. 여섯 번째는 벨 라야의 차원 요새입니다. 나머지 네 군데는 그때 그때 필요에 따라 설정해서 사용하는데, 지금은 아마 비워져 있을 겁니다.” 준상은 간단하게 그 내용을 메모한 다음 다시 물었다. “혹시 이번에 너희들이 시드를 채취하려 했던 자가 살던 행성의 좌표에 대해서는 알고 있나?” 그 말에 발레라는 이렇게 답했다. “제가 가지고 있던 물품 중에 그 좌표를 기록한 것이 있을 겁니다. 가죽으로 만들어진 작은 주머니 같은 형태의 물품입니다.” “잠시만.” 준상은 인벤토리에 담아둔 물품들을 꺼내고는 거기서 발레라가 말한 물품을 찾아냈다. 지갑처럼 생긴 가죽 주머니를 건네주자 발레라는 그 안에서 옷감처럼 보이는 네모난 조각하나를 꺼내어 준상에게 건네주었다. “행성 파두스의 좌표입니다. 구체적인 위치는 잘 모르겠지만, 그 행성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로 연결되어 있다고 들었습니다.” “흠...” 준상은 그것을 받아들었지만, 처음 보는 기묘한 문자가 적혀 있어서 제대로 내용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발레라.” “네, 주인님.” “입력해라.” “알겠습니다.” 결국 준상은 발레라를 시켜서 측정기의 일곱 번째 기억 장소에 행성 파두스의 좌표를 입력했다. “수고했다.” “별 말씀을.” 발레라를 다시 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가 나오며 준상이 측정기를 챙겨 넣자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리체스가 물었다. “파두스란 곳에 가보시게요?” “그러려고. 이게 제대로 작동하는지도 확인해 봐야 하고, 하라바도 집이 걱정되면 제대로 싸우지 못 할 테니 한 번쯤은 가서 살펴봐야겠지.” “위험하지 않겠어요? 레벨이 높은 사람도 많을텐데.” 준상이 정령계의 힘을 손에 넣기는 했지만, 하라바 같은 고레벨의 능력자가 많으면 그건 그것대로 위험한 일이니 리체스로는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준상은 피식 웃으며 손에 끼고 있는 시드 무효화의 반지를 꺼내 보였다. “이게 있잖아?” 하긴 이 반지를 지니고 있으면 시드를 통해 얻은 능력은 무효화가 되어 버린다. 물론 반경 10미터라는 제한이 있는데다 준상이 지닌 능력 역시 무력화되는 건 마찬가지지만, 그에게는 정령계라는 초월적인 힘이 남아 있으니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게다가 하라바도 함께 가잖아.” 그렇게 말한 준상은 리체스에게 물었다. “같이 안 가려고?” 리체스는 눈을 살짝 흘기며 되물었다. “연구하라면서요?” “아, 그랬지.” “전 열심히 연구하고 있을 테니까, 헤네스랑 둘이 오붓하게 다녀오세요.” 누리의 백일잔치를 치르고 난 뒤로 헤네스가 묘하게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에 리체스는 큰 맘 먹고 단 둘이 지낼 수 있도록 시간을 양보하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준상은 그런 자세한 내막까지는 몰랐지만, 리체스의 마음 씀씀이가 고맙게 느껴지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고마워.” 준상이 가만히 어깨를 끌어안으며 그렇게 속삭이자 리체스는 입을 삐죽거리며 투덜거렸다. “치, 이럴 때만 고맙대.” “하하...” 00366 트롤러 ========================================================================= 자신의 황금 천막 안에서 느긋한 한 때를 보내고 있던 하라바는 준상의 호출에 떫은 감을 씹은 표정을 지었다. “음... 그냥 난 여기 있으면 안 될까.” “안 돼.” 리체스가 연구를 위해 남아 있기는 하겠지만, 자신이 없는 동안 하라바만 요정계에 남겨 두는 건 아직은 그리 탐탁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에 준상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쳇. 모처럼 좀 느긋하게 지내볼까 했더니.” 하라바는 투덜거리면서도 황금 천막을 인벤토리에 챙겨 넣고는 준상을 따라 나섰다. 귀찮은 건 귀찮은 거고, 이러니저러니 해도 역시 가족이라든가 자신이 없는 동안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궁금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우선은 하라바와 헤네스 외의 다른 인원은 요정계에 남아 자신의 임무에 전념하기로 했다. 블레이크와 맥밀란은 정보의 분석을 해야만 했고, 서유미는 지구로부터 전해지는 각종 소식을 정리해 준상에게 보고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가장 번화한 도시라던데, 어딘지 짐작이 가나?” “글쎄...” 하라바는 잠시 턱을 만지작거리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일단은 제국 두 군데 정도가 떠오르긴 하는데, 나도 가본 적이 없어서.” “안방 나팔이었나 보군.” “안방... 뭐?” 그리 미덥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 분명한 사실. 준상은 하라바를 데리고 신기루 꽃으로 향했다. 연구실을 통해 신기루 꽃에 도착한 준상은 리체스의 도움을 받아 좌표 측정기로 석문을 운용하는 방법을 익혔다. “여기 이 보석을 누르면 좌표 목록에서 원하는 내용을 선택할 수 있고요. 여기 이걸 누르면 선택이 되요. 그 상태에서 선택을 한 번 더 누르면 석문에 좌표가 입력되고요. 혹시 몰라서 좌표에 쓰이는 저들의 문자를 표로 만들어 봤으니까 참고하세요.” “수고했다.” “별말씀을요.” 준상은 리체스에게 좌표의 문자를 알아볼 수 있도록 만든 색인표를 건네받은 다음, 일전에 발레라에게서 건네받은 행성 파두스의 좌표를 석문에 입력했다. “딱히 변화가 없는 것 같은데.” “그것도 따로 신경을 써야 겠네요.” 준상은 일단 석문을 연 다음 정령 하나를 소환해서 그 안으로 들여보내 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리체스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그럼 다녀올게.” “다녀올게요.” “조심하세요. 헤네스도.” 준상은 리체스를 품에 안고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춘 다음 멀뚱히 지켜보고 있는 하라바에게 말했다. “앞장 서라.” “내가?” “그래.” “음...” 하라바는 열려진 석문 안쪽에 나타난 물결이 치는 듯한 기이한 모습의 공간을 별로 내키지 않는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다시금 준상의 말이 떨어지고 나서야 눈을 질끈 감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상 없이 하라바가 통과한 것을 확인한 준상은 리체스에게 다시 한 번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헤네스와 함께 석문 안으로 들어섰다. 석문을 빠져 나간 준상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숲속의 작은 공터와 먼저 도착한 하라바의 모습이었다. 모처럼의 귀향 때문인지 하라바는 돌려받은 인벤토리의 상자에서 제법 그럴 듯한 느낌의 옷을 꺼내 입고 있었는데, 상의는 금빛이 나는 짐승의 모피를 가공한 외투 같은 것을 입었고, 하의는 보랏빛이 감도는 풍성한 비단으로 만든 바지였다. 헤네스는 그런가 보다 하는 표정이었지만, 준상은 그 모습을 보는 순간 곧바로 한 가지 단어가 떠올랐다. “산적이군.” 그나마 다행인 것은 광전사들과는 달리 빡빡 민 대머리가 아니라는 것 정도지만 여기에 큰 칼만 짊어지면 그냥 바로 현장으로 나가 영업해도 되지 않을까 싶은 느낌은 아무래도 저버릴 수가 없었다. “끙... 이게 얼마나 비싼 가죽인줄 알아? 게다가 이 보라색 염료로 물들인 비단은 같은 무게의 금이랑 같은 값이라고.” 하라바의 투덜거리는 모습이 재미있게 느껴졌는지 헤네스는 살풋이 미소를 지었으나, 준상은 이렇게 의문을 표시했다. “혹시 왕이나 황제만 입을 수 있는 그런 옷감은 아니겠지?” “그야 당연히... 이런.” 하라바는 그제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는지 얼굴을 찌푸렸다. 자기가 다스리는 나라라면 왕의 신분이니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지만, 다른 나라에서 그런 차림으로 돌아다니는 건 역시 곤란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구에서도 정신 나간 군주 가운데 몇몇은 자신만의 색을 정해놓고 그 색깔의 옷감으로 옷을 해 입으면 대역죄로 처벌한 경우가 있다. 대표적인 것인 바로 로마의 네로 황제인데, 이 당시에도 문제가 된 것은 역시 보라색 염료였다. 이들의 가장 큰 목적은 일단 측정기를 통한 좌표 입력이 제대로 동작하는지를 확인하는 것이었지만, 그것이 달성된 상황에서는 하라바의 나라를 방문하는 것이 선결 과제였고 그러기 위해서는 이런 식으로 옷감 같은 자질구레한 것 때문에 문제를 일으키는 건 현명치 못한 행동이었다. “쳇. 이게 제일 좋은 옷인데.” 하라바는 투덜거리며 남색으로 염색된 적당한 옷을 꺼내 갈아입었다. 공터를 빠져 나가자 언덕 아래 거대한 도시의 전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 도시는 커다란 강을 끼고 있었는데, 강 한 쪽에 반도와 같은 형상으로 튀어나온 땅 위에 각이 진 거대한 성곽이 들어서 있었고, 성곽과 접한 강변에는 대규모 항만 시설이 들어서 있어서 수많은 배들이 정박해 있었다. 단순히 성곽 안쪽만 해도 준상이나 헤네스에게 익숙한 이벨류아와 크기가 비슷할 정도인데, 그 바깥쪽에도 성곽 넓이의 몇 배는 될 듯한 규모의 거대한 시가지가 강변을 중심으로 발달해 있었다. 건축 기술의 한계 때문인지 고층 건물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지만, 성곽 안팎으로 상당한 높이의 탑 같은 것이 솟아 있는 모습은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정확한 건 확인해 봐야겠지만 이 정도 규모라면 프라바 제국의 수도인 쿤티가 아닐까 싶은데.”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리는 하라바의 모습을 보며 준상이 물었다. “너희 나라까지는 얼마나 걸리지?” “음... 그게...” 하라바는 난색을 표하며 중얼거렸다. “한 달 내지는 두 달 정도?” “그렇게 멀어요?”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헤네스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고, 하라바는 난처해하는 표정으로 얼른 다시 말했다. “그거야 뭐... 도보로 가면 그 정도라는 거고 카말 같은 녀석을 타고 가면 그보다는 좀 더 시간이 적게 걸리지 않을까 싶군요.” “아, 예...” 둘이 나누는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준상이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길은 알고?” “당연히 모르지.” “...” 어차피 도움도 안 되는 거 그냥 버려두고 둘이서만 다닐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던 준상이지만, 하라바는 그런 준상의 심경을 눈치 챘는지 얼른 아래쪽에 펼쳐진 대도시로 향하는 길을 앞장서기 시작했다. 느긋하니 뭐니 하긴 했어도 요정계의 생활은 격렬한 투쟁의 삶을 보내왔던 그에게는 역시 지루했었던 모양이다. 언덕을 내려가자 대상으로 보이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여행객들로 보이는 사람들과 함께 큰 길을 따라 도시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대상의 수레 주위에는 칼을 찬 사람들이 말을 탄 채 주위를 경계하고 있었는데, 목적지에 거의 도착한 탓인지 지친 기색임에도 불구하고 제법 분위기가 화기애애했다. 사람들의 외모는 지구로 치면 동북 아시아 삼국과 비슷한 느낌이라 준상으로서는 어쩐지 친숙한 느낌마저 들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복색 정도인데, 남녀 모두 몸매가 거의 드러나지 않는 통옷 같은 것을 입고 있었으며 머리에는 너나 할 것 없이 챙이 좁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 하라바는 언덕 위에서 사람들의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준상에게 문득 이렇게 말했다. “말 있나?” “왜?” “그냥 걸어 가자니 뭔가 허전해서.” “흠...” 헤네스가 살고 있던 히딕스 같은 곳이라면 어느 정도 귀환자에 대해 알려진 편이라 준상의 자가용인 랩터를 꺼내 놔도 문제가 없다. 그러나 이곳은 지구인이 방문한 것 자체가 준상이 처음이고, 그런 상황에서 전혀 다른 세상에서 만들어진 문명의 이기를 꺼내놓는 것이 어떤 파급 효과를 불러올지는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 때문에 준상은 오랜 만에 유령말을 꺼내 볼까 하는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는데, 그때 대로 한쪽이 소란스러워지더니 거대한 무언가가 먼지를 잔뜩 일으키며 달려오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저건...” 형태는 커다란 말을 닮았는데, 머리에는 창과 같은 날카로운 뿔이 달려 있고 몸은 갑주와도 같은 찬란한 비늘이 감싸고 있었다. 준상은 그 모습을 보고 이전에 전해들은 하나의 동물을 떠올릴 수 있었다. “일각수?” 그 말에 하라바가 바로 반응했다. “프라바 제국에 일각수로 이루어진 기사단이 존재한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렇게 빨리 보게 될 줄은 미처 몰랐군.” 대로에 등장한 일각수의 숫자는 모두 다섯 마리였고, 그 등에는 일각수의 비늘과 비슷한 형태의 비늘 갑옷을 걸친 인물들이 타고 있었다. 그들은 곧바로 대로를 지나쳐 성으로 향했는데, 그 기세가 어찌나 흉험한지 느긋하게 길을 가고 있던 사람들은 물론이고 수레를 몰고 가던 대상들조차 허겁지겁 길 옆으로 몸을 피했다. 하지만 마음이 급했던 탓일까. 일각수를 모는 다섯 사람의 기사들은 간신히 피하려던 수레 하나가 길 옆 도랑에 바퀴를 빠뜨리고 말았다. “저런.” 수레가 옆으로 기울어지며 그 위의 짐들이 떨어지는 모습에 헤네스는 안타까워 했다. 저 가운데에는 분명 물 위에 떨어지면 안 되는 물품도 있었을 테니, 목적지를 코앞에 두고 이런 식으로 손실을 입은 건 대상들로서는 정말 불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라바는 그 모습을 보고는 준상에게 이렇게 제안했다. “어차피 안내인을 구하려면 성 안으로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은데, 적당히 도와주고 함께 들어가는 건 어떨까.” 이곳의 보안이 어떤지는 모르지만 준상이나 헤네스는 물론이고 하라바 역시 신분을 증명하기가 여러모로 곤란한 상황이니 대상들의 도움을 받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이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군.” 준상이 고개를 끄덕이자 하라바는 언덕 위에서 펄쩍 뛰어 대로로 내려서더니 도랑에 빠진 수레 때문에 어쩔 줄 몰라하는 대상들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도와주겠소.” 다짜고짜 그렇게 선언한 하라바는 수레로 다가가 가볍게 그것을 들어 올리고는 길 위로 안전하게 옮겨 놓았다. 건장한 장정 열이 달라붙어도 꿈쩍도 안하는 커다란 수레를 단숨에 들어 올리는 그 터무니 없는 괴력에 사람들은 절로 탄성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장사님,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하하, 별 말씀을.” 하라바가 상인들에게 치하를 받고 있는 동안 준상은 유령말을 소환해서 헤네스와 함께 타고 느긋하게 언덕 아래로 내려갔다. 유령말도 눈에 띄기는 마찬가지지만, 일각수 같은 걸 타고 다니는 기사단도 있는 마당이니 이 정도는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눈에서 푸른 불을 뿜어내는 유령말을 타고 범상치 않은 옷차림과 분위기의 준상과 헤네스가 모습을 드러내자 사람들은 놀란 표정으로 다시 그들을 주시했다. 타고 있는 말은 물론이거니와 입고 있는 옷도 이곳에서는 보기 드문 기이한 형태였고, 그 위에 타고 있는 준상과 헤네스 역시 다른 사람들과는 확실히 구별되는 외모의 소유자들이었다. 비록 감시자 가이트에게서 빼앗은 고글로 얼굴을 가리고 있다고는 해도 은연중에 흘러나오는 뽀샤시와 물광의 위엄은 여전했고, 헤네스 역시 이곳 사람들의 외모와 차이가 있긴 했지만 한창 피어나는 미모는 그런 이질적인 면 마저도 아름다움으로 느껴지도록 만들고 있었다. “역시 눈에 띄나 봐요.” 준상의 앞자리에 올라탄 헤네스가 조심스럽게 뒤돌아보며 그렇게 속삭였지만, 준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하라바에게로 다가갔다. “수고했다.” “...” 상인들에게 치하를 듣고 있던 하라바는 준상이 탄 유령말을 보더니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좋은 말이군. 혹시 하나 더 없나?” “없다.” “끙...” 하라바는 입맛을 다시더니 이내 말 한 마리를 불러내었다. 그가 불러낸 것은 티끌 하나 없는 하얀 털빛이 인상적인 아름다운 백마였지만, 아무리 봐도 준상이 타고 있는 유령말과 비교하면 뭔가 처지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쩝.” 하라바가 입맛을 다시고는 날렵하게 말 위에 올라타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대상 가운데 나이 지긋한 사람 하나가 그들에게로 다가와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이렇게 물었다. “혹시, 능력자 분들이십니까?” 지구에서 준상과 같은 이들을 귀환자라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곳에서는 그런 이들을 가리켜 능력자라 부르고 있었다. “그렇소만.” 하라바가 고개를 끄덕이자 상인은 반색하더니 다시 한 번 고개를 조아리며 정중하게 청했다. “혹시 폐가 되지 않는다면 이 영웅분들과의 귀중한 인연을 소중하게 이어갈 기회를 나눠 받고 싶습니다. 부디 허락해 주십시오.” “아니 뭐, 영웅까지야.” 하라바는 그렇게 말하고는 준상을 돌아보았고,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선심 쓰는 척 그들의 제안을 허락했다. “그렇지 않아도 성도 쿤티는 처음이라 난처하던 참인데 잘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죠.” “감사합니다.” 00367 트롤러 ========================================================================= 교섭이랄 것도 없는 간단한 몇 마디 대화로 대상 행렬과의 동행이 정해졌다. 대부분의 상인이 그렇듯이 이 대상을 이끄는 책임자 역시 사교성이 넘치는 인물이었는데, 동행이 결정되자 은근히 이것 저것 탐색을 해오기 시작한다. 귀찮은 일이기는 했지만, 성도로 접어드는 길목에서 처음 만난 인물을 수레바퀴 좀 끄집어내 줬다고 무턱대고 신용하는 것도 이상한 일. 얼마나 먼 곳에서 왔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십여명에 달하는 무장 호위병이 함께 할 정도라면 이곳의 치안도 그리 썩 좋다고만은 할 수 없는 모양이다. “아, 그럼 원래 사막 왕국 출신이신가 보군요.” “그렇습니다. 어쩌다 보니 멀리 흘러오기는 했는데, 여기까지 와놓고서 세계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라는 쿤티도 안 보고 가는 건 아까운 짓이다 싶어서 결국 이렇게 걸음을 하게 되었습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괜히 또 하나의 작은 세계라는 이명이 붙었겠습니까.” 하라바는 제법 넉살 좋게 탐색을 걸어오는 반첸이라는 이름의 상인을 상대하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하라바도 건국왕이라는 그럴 듯한 직분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그건 다시 말해 원래부터 왕으로 태어난 자가 아니라는 의미도 된다. 그만큼 여러 가지를 보고 듣고 익혀 오늘에 이르렀을테니, 이런 식으로 자연스럽게 상인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도 그런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행동이 아닐까 싶다. 의외라면 과거야 어찌 되었든, 현재의 직분이나 능력을 생각하면 충분히 상대를 깔고 뭉갤 수도 있을텐데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점. 어찌 보면 자신을 얼마든지 숨기는 것이 가능할 정도로 능글맞다는 뜻일 수도 있고, 다르게 생각하면 이런 작은 부분 정도는 대수롭지 않게 여길 정도로 생각에 여유가 있다는 의미도 된다. 본래 약한 강아지가 더 시끄럽게 울부짖는 법이니 말이다. 하라바의 그런 사교성이 빛을 발한 덕분에 준상과 헤네스는 별다른 귀찮은 일 없이 성도 쿤티의 성문에 도달할 수 있었다. “즐거운 만남이었습니다. 저희들은 통관 절차가 있어서...” 열심히 떠들어 댔으니 그 대가로 성문에서 신원 보증이라도 서주지 않을까 싶었지만, 상인은 통관을 핑계로 얼른 그들에게 작별을 고했다. 하기야 몇 마디 나눴다고 신원 보증 같은 걸 함부로 서줬다가 나중에 문제라도 생기면 골치 아픈 일. “헛수고했군. 하여튼 상인 놈들은 이래서 싫어.” 방금 전까지 좋다고 대화를 나누던 사람이 맞나 싶은 말을 툭 던진 하라바는 입맛을 다시며 성문을 바라보더니 다시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검문이 그리 엄격한 것 같지는 않은데?” 헤네스가 바로 그 말을 받았다. “그러게요. 사람들 인상착의를 주의 깊게 살피고는 있지만 따로 통행은 자유인 것 같은데요.” 커다란 마차 한 대가 통째로 드나들 수 있을 정도의 큰 성문이 있었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그 옆의 작은 문을 통해 드나들고 있었다. 출입문에는 무장한 몇 명의 병사가 버티고 서 있었는데, 행인들의 행색을 자세하게 살피기는 해도 달리 그들을 불러 세워서 무언가를 확인하거나 하지는 않고 있었다. “곤란한데. 그냥 무턱대고 들어가기도 뭔가 애매하고.” 하라바가 망할 상인놈 어쩌고 하면서 중얼거리고 있자니 문득 성문 근처에서 병사 몇 사람이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실례합니다. 혹시 능력자분들이십니까?” 병사들 가운데 능력자가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범상치 않은 그들의 외모를 보고 넘겨짚은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들은 다가오자마자 살짝 목례를 해보이며 정중한 말투로 그렇게 물어왔다. “맞습니다. 실은 쿤티에 와보는 것이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할지 망설이던 참이었습니다.” 병사들이 따로 묻지 않았음에도 하라바는 제발이 저린 것처럼 그렇게 설명을 했다. “그러시군요. 칙령에 따라 수배자만 아니라면 일반인의 통행은 따로 검문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만, 능력자 분들은 간단하게 몇 가지 설문을 받고 있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응해 주시겠습니까?” 생각보다 굉장히 정중한 태도. 원래 이런 것인가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하라바나 준상의 능력을 알아보고 그에 맞게 알아서 굽혀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준상이야 어찌 되었든 간에, 하라바만 하더라도 이곳에서 능력을 발휘했다가는 성 조금 무너지고 마는 수준으로 끝나지는 않을테니, 생각해 보면 병사들의 이런 태도는 상당히 현명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역시 저희들의 능력을 알아본 사람이 있나 봐요.” “아무래도 그런 모양이군.” 준상과 헤네스, 그리고 하라바는 병사들에게 정중하게 성문 안쪽에 위치한 작은 건물로 안내되었다. 타고 있던 말들을 역소환하고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콧수염을 멋지게 기른 중년의 장교 하나가 책상에 앉아 무언가 서류를 작성하고 있다가 정중하게 그들을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만나서 반갑습니다. 성도 쿤티의 외성 서문을 맡고 있는 수문장 가르엔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번거로우시겠지만, 간단하게 몇 가지만 묻겠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수문장 가르엔은 간단하게 그들의 이름과 출신지, 그리고 방문 목적 등을 묻고 그것을 서류에 기록하더니, 마법사로 보이는 자를 불러 그들의 인상착의를 기록했다. 그 모든 과정이 끝나자 가르엔은 작은 서류에 그것을 옮겨 적은 다음 그들에게 건네주었다. “설문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서류는 여러분의 신분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니 잃어버리지 않도록 주의해 주십시오.” “뭔가 주의 사항은 없습니까?” 서류를 정리해서 철을 하던 가르엔은 하라바의 물음에 이렇게 답했다. “외성 안쪽이라면 사유지가 아닌 이상은 자유롭게 다니셔도 좋습니다. 그러나 내성 쪽은 별도로 엄격하게 출입이 관리되니 주의하십시오. 다른 곳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은 비슷합니다만, 그 중에서도 특히 폭력 행위와 절도 등은 엄격하게 처벌이 되고 있으니 이 점 또한 유념해 주십시오.” “아... 그렇군요.” “숙소 등을 정하실 때 그 서류를 제시하시면 편의를 제공 받으실 수 있으니 그것도 참고 하십시오.” 가르엔은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들에게 말했다. “귀찮으실 텐데도 불구하고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생각보다 설문이 너무나도 간단하게 끝나버리고 말았기 때문에 하라바는 건물을 빠져 나오면서도 어리둥절할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너무 알아서 기어주니 뭔가 귀신에 홀린 듯한 기분인데.” “사막 왕국에서는 다른가 보군.” “그게... 우리 쪽은 사실 대상들을 제외하고는 개인 단위로 드나드는 사람이 드문 편이거든. 사막은 물 한 모금 가지고도 살인이 나는 곳이기도 하고. 문 밖을 나서면 다른 세상이라더니 이거 내가 완전히 그 꼴이군.” 하라바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은근히 부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막상 들어와 놓고 보니 이것도 막막한 일이군.” 세계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라는 이명답게 성도 쿤티의 시내는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하라바는 그 번잡함을 감탄하며 바라보고 있었지만, 준상은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어쩐지 칠팔십년대 배경의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재래시장이 연상되고 있었다. “지도 같은 건 엄격하게 관리되고 있을테니 아무래도 구하기 어려울테고, 대상은 가는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니 역시 곤란. 그렇다면 남는 것은 안내인 뿐인데 과연 그 먼 곳까지 함께 갈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네요.” 이동수단이야 갑가오리나 별해파리 카말 같은 것이 있지만, 정작 사막 왕국까지 가는 길을 모르니 정말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헤네스가 난색을 표하며 그렇게 중얼거리자 하라바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그 말을 받았다. “일단은 숙소부터 잡은 다음 사람을 풀어서 수소문해 보는 수밖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있으니 사막 왕국까지 갈 안내인 정도야 없겠나.” 상당히 낙관적인 의견이긴 했지만, 지금으로서는 그 정도가 가장 무난한 의견이었다. “제 생각에도 그게 좋을 것 같아요.” 헤네스의 말에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유령말을 소환했다. 각자 말을 소환해서 타고 천천히 성 안쪽으로 들어가자, 화강암이 깔린 번잡한 대로 너머로 제법 그럴 듯한 건축물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건물의 높이는 대부분 이층 정도고 높은 것이 삼사층 정도였지만, 개중에는 벽돌 위에 대리석 같은 마감재를 사용해 제법 깔끔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건물도 많았다. 조금은 느긋한 기분으로 관람을 하고 있는데, 한 무리의 꼬마들이 그들에게 다가와 호객을 하기 시작했다. “혹시 숙소를 찾으세요?” “맛있는 식당을 알아요. 안내해 드릴게요.” “예쁜 누나들이 있는 집을 알아요.” 사람 사는 곳은 어디든 다 마찬가지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벌떼처럼 몰려드는 아이들 때문에 길을 가기 어려울 정도라 준상은 말없이 광견의 위엄을 발동했다. “히익!” “죄, 죄송합니다.” 아이들은 준상의 몸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소름끼치는 위압감에 놀라 개미떼처럼 흩어져 버리고 말았다. “대단하군. 그거 무슨 능력인가.” 하라바가 감탄한 표정으로 그렇게 물었지만, 준상은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그래도 광견의 위엄이라고 답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어쨌거나 아이들을 쫓아내고 조금 걷다보니 강변에서 화물을 내리고 있는 배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배의 형태는 둥근 계란을 반으로 잘라 놓은 듯한 뭉툭한 형태였고, 커다란 사각 돛 하나가 중앙의 마스트에 걸려 있었다. 이런 저런 화물들이 배에서 내려지는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데, 문득 누더기를 걸친 한 무더기의 사람들이 쇠사슬에 손이 묶인 채 배에서 내리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아인종들인 모양이군. 요새는 아인종들 중에도 능력자가 많이 나오는 바람에 노예사냥도 예전 같지 않다던데. 역시 성도 쿤티 쯤 되는 곳이라 그런지 제법 수가 많군.” 그러고 보니 이곳에 도착한 뒤로 아인종들을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닌가 싶다. 가만히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문득 하라바가 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어떤가.” “...” 그가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니 작은 언덕 위에 우뚝 솟은, 하얀 대리석으로 마감된 깔끔한 3층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여관 같아 보이지는 않는데?” 준상의 말에 하라바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방음도 제대로 안 되는 냄새 나는 여관보다야 저런 곳을 빌리는 편이 훨씬 좋지. 딱 보니 어디 귀족이나 상인의 별장 같은데, 관리인들한테 금화만 넉넉히 쥐어주면 주인이 없는 동안 잠시 쓰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듣고 보니 확실히 구미가 당기는 일이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요정계로 돌아가서 휴식을 취하는 것이겠지만, 안내인을 구할 동안 잠시 지낼 거점 정도는 필요하다. “사라.” “응? 사라고?” “그래. 괜히 주인 허락 없이 빌리다가 문제가 생기는 것보다야 그냥 깔끔하게 사버리는 편이 낫겠지.” “하긴. 그것도 맞는 말이군.” 어차피 하라바는 물론이고 준상도 돈에 구애를 받는 처지가 아니니 상관은 없는 일이다. 말을 타고 언덕 위의 하얀 집으로 다가가자, 작은 성처럼 벽으로 둘러싸인 저택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거... 주인이 제법 공을 들인 곳인 모양인데. 가격이 만만치 않겠어.” 하라바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입맛을 다시고는 저택의 문을 두드렸고, 잠시 뒤 문지기로 보이는 사내 하나가 나타나 그들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이곳은 제국기사 케이드님의 저택입니다. 무슨 용무신지요.” 기사라... 이 나라의 작위 체계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지만, 그리 높은 직위인 것 같지는 않았다. 마침 잘 되었다 싶었는지 하라바는 얼른 입을 열었다. “케이드님의 저택이었군. 주인께서는 안에 계시는가?” “그것이... 뉘시라고 전해드려야 할지.” 조심스러운 문지기의 말에 하라바는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을 꺼냈다. “이곳을 사고 싶다. 주인께 그리 전하도록.” “네?” 문지기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하라바를 바라보았다. 이게 무슨 뜬금없는 소린가 하는 표정이었지만, 뒤이어 하라바가 허공에서 황금이 담긴 커다란 상자를 꺼내어 바닥에 내려놓자 문지기는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았다. “황금이라면 얼마든지 있다. 그러니 가서 주인께 전하도록.” “아, 알겠습니다.” 문지기가 안으로 들어가자 준상이 말했다. “그 상자 안에 든 게 황금이었나?” 그 말에 하라바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인벤토리 째로 돌려줄 때 열어 보지도 않았나.” “귀찮아서.” “하하.” 그렇게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저택의 큰 문이 열리며 앞서의 문지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일단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케이드님께서 만나보시겠답니다.” “고맙군.” 문지기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가자 저택 입구에 시종으로 보이는 사람들과 함께 희끗희끗한 반백의 머리카락을 차분하게 뒤로 넘긴 남자 하나가 검을 든 채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준상과 헤네스, 그리고 하라바가 말에서 내려 다가가자 그 남자는 세 사람을 돌아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나에게 도전한 분이 누구요.” “도전?” 하라바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남자는 혀를 차며 다시 말했다. “저택을 사고 싶다고 하지 않았소?” “그랬소이다만.” 남자는 미간을 찌푸린 채 잠시 그들을 바라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얘기는 간단하오. 날 쓰러뜨리시오. 그러면 이 집은 당신들의 것이 될 것이오.” 이게 무슨 뜬금없는 얘긴가 싶었지만, 다음 순간 케이드의 몸에서 광폭한 살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하라바는 쓴웃음을 지으며 준상에게 말했다. “이거... 얘기가 이상해지는데.” 준상은 휴대폰을 열어 통찰의 능력으로 케이드의 능력을 확인해 보고는 다시 말했다. “해봐. 겁나는 것이 아니라면.” “끙.” 하라바는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입고 있던 웃옷을 벗으며 앞으로 나섰다. 00368 트롤러 ========================================================================= “원래 이 동네 풍습이 집 살 때 주인이랑 한 판 붙는 거요?” 싸울 준비를 하면서도 뭔가 이상하다 싶었는지 하라바가 그렇게 묻자 케이드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오.” “그나마 다행이군.” 하라바는 손목을 흔들어 풀며 그렇게 대답하고는 벼락 같이 케이드를 향해 뛰어 들었다. “맨손?” 웃통을 벗어젖힌 탄탄한 체구의 하라바가 아무 무기도 들지 않은 채 달려들자, 케이드는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상대를 가볍게 보지 않고 가차 없이 검을 내질렀다. 케이드의 검은 간결하면서도 쾌속하게 하라바의 어깨를 노리고 날아 들었다. 한 줄기 빛처럼 날아드는 검광. “여차!” 그러나 곧이어 하라바의 입에서 짧은 기합 소리가 터져 나오자 케이드의 검은 본래 노리고 있던 곳에서 벗어나 상대의 손아귀를 향해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건?” 무언가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 어깨나 손이나 사람의 피륙인 건 마찬가지였지만, 그 불가사의한 흡인력이 심상치 않다 느낀 케이드는 얼른 검에 기운을 주입했다. 부우욱! 무명 천이 찢어지는 듯한 기이한 소음이 귓가에 전해지자, “이크!” 놀란 하라바는 얼른 손을 움츠려 케이드의 검을 피했다. 하지만 워낙 빠른 공방의 도중이라 완전히 피하는 것은 역시 무리였는지 하라바의 팔 언저리를 검광이 스치고 지나갔다. “...” 첫 번째 격돌은 하라바가 손해를 입은 상황. 하지만 얼굴을 구기고 있는 것은 케이드 쪽이었다. “평범한 자는 아니다 싶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기이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검을 자신에게 겨누고 있는 그의 말에, 하라바는 사나운 고양이가 할퀴고 지나간 것처럼 붉은 자국이 남은 자신의 팔뚝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 몸에 자국을 남기다니, 당신도 평범한 기사는 아닌 모양이군.” 하라바는 말이 끝나자 인벤토리 하나를 개방했다. 그러자 하나의 상자가 허공에서 떨어져 내리며 그 안에 들어 있던 수십 개의 잡다한 무기들을 바닥에 흩어 놓는다. 손가락 길이 만한 마름쇠부터 시작해서, 거무튀튀한 화살촉과 날카로운 창날, 그리고 둔탁한 날을 지닌 커다란 대검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이 사용하는 것이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많은, 다양하다는 말보다는 잡다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법한 양의 무기들이다. 무슨 꿍꿍이인가 싶어 케이드가 미간을 모은 채 바라보자, 하라바는 오른 손을 들어 허공을 움켜쥐며 말했다. “이 정도 실력을 가진 이라면 내 실력을 조금쯤은 보여줘도 괜찮겠지.” 그리고,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바닥에 떨어진 무기들이 마치 염동력이라도 발휘한 것처럼 허공으로 떠올라 하라바의 팔에 달라붙기 시작한다. 덜컥. 철커덕. 원래 한 몸이었던 것처럼 무기들은 어떠한 형태를 이루었고, 바닥에 떨어진 무기들이 사라졌을 때 사람들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사람 몸통 크기라고 해도 좋을 법한 크기로 변화한 하라바의 팔이었다. “이 능력은...” 케이드는 그렇게 중얼거렸지만,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대신 들고 있던 검에 힘을 있는대로 쏟아 부었을 뿐이다. 부우우욱! 무명 천이 찢어지는 듯한 기이한 소음이 한 번 더 울려 퍼지더니 캐이드의 검이 변화를 일으켰다. 방금 전까지 그의 검을 감싸고 있던 것이 아지랑이라면, 지금 그의 검을 에워싸고 있는 폭발하는 화산에서 터져 나오는 용암과도 같았다. 붉게 타오르며 흘러넘치는 그 기운에 하라바는 그제서야 생각났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당신이 누군지 알겠군. 여명의 횃불이라는 이명을 지닌 제국 제일의 기사가 당신이었나.” 하라바의 말에 케이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나야 말로 미처 알아보지 못해서 미안하오. 사막의 패자여.” 철골의 제왕이라는 이명을 언급하지 않은 것은 하라바의 사정과 주위의 이목을 고려한 탓이다. 하라바의 이름은 멀리 떨어진 쿤티에서도 제법 이름이 높았지만, 그런 이가 느닷없이 제국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이곳에 나타났다는 것이 알려지면 그 파장은 간단히 수습될만한 것이 아니다. 제국 측에서는 이게 웬 떡이냐 싶어 달려들 것이 분명하고, 그렇다고 하라바가 순순히 잡혀줄 리도 없으니 큰 소란이 일어날 것은 보지 않아도 틀림없는 일. 원래대로라면 케이드는 하라바의 정체를 파악한 시점에서 그와의 대결을 멈추고 제국 측에 이 사실을 먼저 보고할 의무가 있었으나, 평생 얼굴을 마주하기조차 힘든 타국의 강자와 자신의 실력을 비교해 보고 싶다는 욕망 쪽이 이성을 억눌러 버렸다. 그것은 하라바 역시 마찬가지.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그리 좋지 않다. 생각보다 상대가 너무 거물인 것도 있고, 여기서 일을 더 크게 벌였다가는 집 자체가 남아나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하라바는 그제서야 성급하게 자신의 실력 일부를 내보인 것을 후회했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서기엔 역시 뭔가 아쉬운 일. 성문을 통과할 때 수문장 역시 폭력 행위에 대해서는 엄중한 처벌이 있을 것이라 경고했던 것도 뒤늦게서야 다시금 떠올랐다. 물론 수비병 따위가 겁나는 것은 아니지만, 일부러 저들에게 빌미를 만들어 줄 필요도 없다.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문득 그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헤네스가 둘 사이로 끼어들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하는 건 어떨까요.” 철골의 제왕이라는 이명을 지닌 사막 제일, 아니 어쩌면 세계 최강일지도 모르는 사내와 항창 기세를 겨루고 있는 와중에 갑자기 중간에 아리따운 여성 한 명이 끼어들자 명실상부한 제국 최강의 기사 케이드는 당황하고 말았다. 그들이 뿜어내는 기세는 실로 일반인이 당해내기 어려운 수준. 실제로 케이드 주위에 서 있던 시종들은 어느 틈엔가 핼쓱한 표정을 지은 채 한참이나 뒤로 물러서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움츠러든 기색조차 보이지 않은 채 포근한 분위기로 날카롭게 곤두선 분위기를 감싸며 그들 사이에 끼어 든 아름다운 갈색 머리카락을 지닌 이국의 미녀라니. 케이드는 그제서야 하라바와 함께 들어섰던 다른 두 명의 이방인이 있었음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하라바 만으로도 버거운 판국에 또 다른 두 명의 강자까지 더해진다면, 아무리 제국 최강의 기사라 해도 당해내기는 어려운 일이기에 케이드는 잔뜩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말입니까.” 그런 케이드를 대신해 하라바가 넌지시 묻자, 헤네스는 미소를 지은 채 대답했다. “이곳은 아무래도 이목이 많은 곳이니 두 분이 제대로 겨루기에는 여러모로 무리가 있을 거에요. 마침 두 분이 겨루기에 마땅한 곳을 저희가 알고 있는데, 그곳으로 가서 일전을 겨루어 보는 건 어떨까요.” “그렇게만 된다면야 나로서는 더 할 나위 없지만.” 모처럼 제국 최강의 기사와 실력을 겨루어 볼 수 있는 기회를 허망하게 날려버리고 싶지 않았던 하라바는 그 말에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케이드를 바라보았다. “문제는 이곳의 주인인 그가 과연 그 제안을 받아들일까 하는 점 아닐지?” “...” 케이드는 잠시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그 역시 하라바와의 일전을 이대로 포기하기는 아쉬웠지만, 문제는 이것이 저들의 함정일지도 모른다는 점. 무턱대고 따라 나섰다가 납치라도 당하면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제국의 전력에 큰 구멍이 생기고 만다. 그런 케이드의 생각을 읽은 것일까. 헤네스가 미소를 지은 채 다시 이렇게 말했다. “저희들이 문제가 된다면, 케이드님께서도 참관인을 두시면 될 일 아니겠습니까? 숫자는 원하시는 대로 정하셔도 상관 없습니다.” “...” 그녀의 말은 무척이나 담대한 제안이 아닐 수 없었다. 이곳은 엄연히 제국의 수도 한 가운데. 참관인을 부른다는 명목 하에 제국 측의 병력을 끌어들이면 그들로서는 큰 위험에 직면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제안을 한다는 것은 그만큼 실력에 자신이 있다는 뜻. 또한 한편으로는 케이드에 대한 신뢰의 표시기도 하다. 케이드는 갈등할 수밖에 없었다. 제국에 대한 충성과 강자에 대한 호승심. 이것이야 말로 지금의 그를 있게 한 원동력이나 다름없으니 둘 중 하나를 고르는 것은 그에게 무척이나 어려운 난제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기사이면서도 본질적으로는 투사에 가까운 인물. 그렇지 않았다면 제국 최강이라는 이름은 얻지 못했을 것이다. “좋소. 그 제안을 받아들이겠소. 참관인을 부를테니 잠시 안으로 들어와 기다려 주시겠소?” 헤네스는 답을 하기 전에 일단 하라바를 바라보았다. “상관없소.” 하라바가 그렇게 선선히 대답하자, 헤네스는 미소를 지으며 케이드에게 말했다. “그럼 잠시 실례하도록 할게요.” “감사합니다.” 케이드는 살벌한 기세를 뿜어내는 검을 갈무리하고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한 뒤, 시종들을 어디론가 보내고는 다시 그들에게 말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하라바는 팔에 두르고 있던 무기들을 다시 풀어 인벤토리에 집어넣은 다음, 말없이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준상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몇 레벨이나 되는 거지?” “79레벨.” “호오.” 하라바와의 레벨 차이는 고작 6레벨. 고레벨로 갈수록 레벨을 올리기가 어려운 점을 감안하면 이 격차는 상당한 수준이긴 하지만, 그렇다 치더라도 대단히 높은 레벨이란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일이다. “말씀하신대로 결투는 일단 성사시켰어요.” “수고했다.” “별말씀을요.” 오랜만에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 준상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이 기뻤는지 헤네스는 두 볼에 살짝 홍조를 띄고 있었다. 하라바는 케이드의 안내를 받아 저택 안으로 들어서며 주위를 살폈다. 가족들의 것이 아닐까 싶은 초상화들이 군데군데 걸려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밝은 색의 벽지를 바른 것이 고작이었지만 분위기만큼은 제법 아늑한 느낌이었다. “별장이 아닌가 봐요.” “그렇군.” 세 사람은 일단 응접실로 안내가 되었다. 케이드는 그들이 안으로 들어오자 다시 정중하게 말했다. “누추하지만 이곳에서 기다려 주시오.”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헤네스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자 케이드는 그들을 응접실에 놔둔 채 밖으로 나갔고, 그제서야 하라바가 준상에게 다시 질문을 던졌다. “어쩔 셈이지?” “뭐가?” “모르는 척 하지 말고. 뭔가 꿍꿍이가 있으니 이런 식으로 일을 크게 벌이는 것 아닌가.” “...” 때마침 시종들이 그들에게 간단한 다과를 가져왔기 때문에 대화가 잠시 멈췄지만, 그들이 나가자 다시 하라바의 추궁이 이어졌다. “설마... 나처럼 케이드도 끌어들이려는 건가?” 준상은 시종이 가져온 차의 향기를 음미하며 대답했다. “아니라고 하면 믿어줄 건가?” “그럴 리가.” 하라바는 씩 웃고는 찻잔을 집으며 말을 이었다. “나만 이런 꼴을 당하는 건 곤란하지. 어디보자, 곧바로 싸움을 벌였으면 케이드 하나만 얻고 말았겠지만, 그가 데리고 올만한 참관인이라면 적어도 어중이 떠중이는 아닐테니 그물을 한 번 던져서 여러 마리의 물고기를 낚는 일이나 다름없겠군. 하긴 이대로 놔두면 다른 칠성좌들이 언제 개입할지 모르는 상황이니, 알아서 굴러 들어온 호박 덩어리라면 먼저 말뚝을 박아 두는 것도 나쁘지는 않은 일이겠지. 역시 자넨 음흉해.” 준상은 음흉한 표정으로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하라바의 모습을 보며 이렇게 대답했다. “됐으니까 차나 마셔.” “흐흐, 알았네. 그만 입 다물겠네.” 그렇게 잠시 기다리자, 바깥이 조금 소란스러워지더니 한 무리의 사람들이 응접실로 들어왔다. 바라보니 케이드가 다섯 명의 사람을 데리고 들어왔는데, 그들은 모두 화려한 비늘 갑옷을 몸에 걸치고 있었다. “일각수 기사단?” 하라바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렇게 말하자, 그들 가운데 한 명이 앞으로 나서며 인사를 건넸다. “반갑습니다. 프라바 제국의 알프레임 기사단의 단장인 데마 일리나 베리트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일각수의 모습을 형상화한 뿔 달린 투구를 벗자, 이내 풍성한 검은 머리카락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린다. 그녀는 검은 구슬 같은 반짝이는 눈동자를 가진 아름다운 미녀의 모습에 하라바는 잠시 놀란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여자?” 하라바의 말에 데마는 고운 아미를 살짝 찌푸리며 되물었다. “그렇습니다만, 뭔가 문제라도?” “크흠. 아니, 뭐... 그런 건 아니지만.” 조금은 신경질적인 반응에 하라바는 가볍게 헛기침을 하고는 케이드에게 물었다. “이 분들이 참관인이오?” 케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제자들이오. 마침 성도에 올라와 있다기에 불렀소이다.” “호오.” 일각수는 혼자서도 어지간한 능력자는 가볍게 농락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전설의 동물. 원래 일각수는 임의로 자신의 소유로 만드는 것이 불가능한 존재지만, 능력자가 나타나면서 펫이라는 형태로 그들을 귀속시켜 부리는 것이 가능해졌고, 그런 자들을 모아 만든 것이 바로 프라바 제국의 알프레임 기사단이었다. 다시 말해, 여기 모인 다섯 기사들은 모두 일각수 정도는 혼자서 생포할 수 있을 만한 능력을 지닌 자들인 셈이다. 하라바는 자신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케이드는 나름대로 안전 장치랍시고 이들을 불러왔겠지만, 하라바가 보기에는 준상이라는 이름을 지닌 마수 아가리에 제자들을 밀어 넣는 짓이나 다름없었다. 00369 트롤러 ========================================================================= 하라바는 일단 고개를 돌려 준상의 눈치를 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이런 쟁쟁한 분들을 결투의 참관인으로 맞이하게 되어 영광이오. 다만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는데 물어도 되겠소?” “말씀하시오.” 케이드가 허락하자 하라바는 난처하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원래 내가 이 저택을 방문한 것은 성도에 머무는 동안 필요한 거처를 구하기 위함이었소. 적당한 숙박 장소가 없는지 물색하다가 번잡한 시가지를 내려다 보듯이 언덕 위에 아름답게 자리 잡은 이 저택의 모습을 항구에서 발견했지. 원래는 가능하다면 몰래 빌려 쓸까 싶었지만, 엄연히 주인이 있는 집이라면 그것도 예의가 아닌지라 그냥 사버리자 싶었던 거요. 그래서 문지기에게 그런 의사를 전했던 것인데, 어째서 지금과 같은 상황이 되어 버린 건지 누군가 설명해 주실 수 있겠소?” 케이드나 그의 제자들은 미처 알지 못했지만, 하라바는 최소한의 양심으로 그들에게 설명을 요구하면서 빠져 나갈 구멍을 만들어 준 셈이다. 이유가 분명치 않다면 새로 나타난 기사들이 중재를 해서 결투 자체를 없던 일로 할 수도 있을테고, 그렇게 되면 준상의 마수로부터도 벗어날 방법이 생길테니 말이다. 데마는 하라바의 말을 듣고는 아미를 찌푸리며 스승에게 물었다. “스승님. 설마 이유도 말씀하지 않으시고 무턱대고 결투를 신청하신 건가요?” “커험! 아니, 그게... 나야 다 알고 그러는 줄 알았지.” 말은 그렇게 하고 있었지만, 시선을 피하는 모습을 보니 영락없이 거짓말이다. 도대체 어째서 이 분은 나이를 먹을 수록 철이 없어지시는 건지. “어휴.” 데마는 그렇게 한숨을 푸욱 내쉬고는 하라바를 향해 살짝 목례를 해 보이며 말을 이었다. “결례가 많았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라면 제가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부탁드리겠소.” “이 저택은 상황께서 제국 제일의 기사라는 칭호를 내리시면서 하사하신 곳입니다. 원래 상황께서는 제국 제일의 기사라는 명예에 대한 부상으로 이곳을 내리신 것이지만, 어떻게 된 영문인지 반대로 이곳의 주인이 제국 제일의 기사라는 식의 인식이 생겨났습니다. 물론 스승님이나 상황께서 적극적으로 이것을 해명했다면 단순한 일화로 끝났겠지만, 두 분이 오히려 그와 같은 일을 공언하면서 스승님을 이기면 제국 제일의 기사로 인정받음과 동시에 이 저택의 주인이 된다는 암묵의 규칙이 생겨난 것입니다. 처음에는 도전자가 제법 되었지만, 이제는 도전할 만한 사람들은 대부분 이곳을 거쳐간 뒤라 가장 최근의 결투가 있은지도 벌써 일년이 지났습니다. 아마도 스승님께서 이와 같은 연유를 설명하지 않으신 것은 모처럼의 도전자가 사라질까 저어한 탓이 아닐까 싶군요.” 데마는 그렇게 말한 뒤 자신의 스승을 한 번 째려보았고, 케이드는 겸연쩍은지 헛기침을 연발하며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케이드의 그런 모습에 데마는 다시 한숨을 푸욱 내쉬고는 하라바에게 공손하게 부탁했다. “제 보잘 것 없는 능력으로 살펴보니 손님께서는 감히 제가 측량할 수 없을 정도의 능력을 지니신 듯 합니다. 혹시 폐가 되지 않으신다면 이 기회에 제 스승님께 하늘 위에 하늘이 있음을 알려주시기를 감히 부탁드립니다.”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다른 기사들이 일제히 웃음을 참는 모습을 보였고, 그녀의 스승인 케이드는 얼굴을 붉히며 데마에게 따지고 들었다. “하늘 위의 하늘이라니. 제자야, 아무리 그래도 스승이 결투를 하는데 이기라고 응원은 못할망정 그런 말을 하는 건 좀 아닌 것 같다만.” 하지만 그의 항변은 곧바로 이어진 데마의 반박에 가로 막혔다. “스승님은 한 번 크게 당해봐야 정신을 차리실 분이십니다. 나이를 생각하세요. 내년이면 쉰이 넘으시는 분이 아직까지도 결투 타령이라니, 자기가 아직도 청춘이라고 착각하시는 모양인데 그러다 정말 언제고 한 번 큰 코 다치실 겁니다. 차라리 그럴 바에야 하루라도 빨리 물러나시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폭풍처럼 쏟아지는 데마의 말에 케이드는 앓는 소리를 내며 중얼거렸다. “끙... 하여튼 이 녀석은 어째 날이 갈수록 그 양반을 닮아 가는지 모르겠군.” “뭐라구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하라바는 두 사람이 벌이는 촌극을 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의 대화를 통해 사제간의 정이 깊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지만, 이래서는 모처럼 결투를 무마할 수 있는 기회를 건네준 자신의 의도가 완전히 무의미해져 버렸기 때문이다. 다시 고개를 돌려 준상의 눈치를 살폈다. 고글을 쓰고 있는 탓에 눈빛을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자신의 의도를 눈치챘는지 심상치 않은 기세를 은근히 뿜어냈고, 그의 옆에 선 헤네스는 하라바를 향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어 보이고 있었다. 더 이상은 아무래도 무리다. 결국 하라바는 기껏 건네준 기회를 차버린 사제를 향해 속으로 애도의 뜻을 표하며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된 일이라면 어쩔 수 없군. 좋소이다. 그럼 결투 장소로 안내해도 되겠소?” “결투 장소라면...” “우리 같은 사람들이 제대로 겨루기엔 이 저택은 너무 비좁소. 자칫하면 부서질 수도 있고. 저택만 부서지면 차라리 다행이지만, 성도에 피해가 가기라도 하면 그것 역시 곤란한 일 아니겠소?” 데마는 그제서야 이전과는 다르게 참관인으로 자신들을 불러들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일 년 전 이 저택으로 향하던 도전자의 행렬이 끊기게 만든 그 대혈투만 하더라도 정원이 죄다 박살 나서 복구하는 데만 몇 달이 걸렸었다. 하물며 지금 그녀의 스승은 다시 일 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만큼 더 강해진 상황이고, 그런 스승이 전력을 다 해야만 할 정도의 상대라면 이전처럼 정원이 박살 나는 정도로는 일이 끝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적당히 힘 조절이 가능하다면야 이런 걱정을 할 필요도 없겠지만, 그녀의 스승인 케이드는 그런 식의 일 자체가 불가능한 인물이다. 제 아무리 커다란 전공을 세우면 뭘 하나. 한 번 폭주하면 그 피해를 메꾸기도 급급한데. 오죽하면 제국 최고의 기사라는 인물의 작위가 오십이 다 되도록 아직까지 기사에 머무르고 있겠는가. 데마는 다시 한 번 한숨을 터져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삼키며 이렇게 물었다. “그거야... 그렇습니다만. 그럼 성도 밖으로 나가자는 말씀이십니까?”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밤새 일각수를 타고 달려온 상황이라 다시 밖으로 나가는 건 역시 귀찮고 피곤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때문에 데마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되묻자, 지켜보고 있던 헤네스가 생긋 웃으며 그녀의 말에 대답했다. “결투 장소는 저희가 제공할테니 염려 놓으셔도 됩니다.” 데마는 이국적인 외모를 지닌 갈색 머리의 미녀를 향해 살짝 목례를 해보이고는 다시 물었다. “어딘지 알 수 있겠습니까?” 헤네스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답했다. “아시겠지만, 이 세계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여러 가지 불가사의한 일들이 있습니다. 여러분께 보여드릴 수단은 바로 그런 것 가운데 하나입니다.” “혹시 위험한 방법은 아니겠지요?” “그 문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헤네스는 곧바로 준상을 바라보며 말했다. “준상씨.” “...” 준상은 헤네스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허공에 신기루 꽃으로 통하는 문을 불러냈다. “이건...” “차원의 벽을 넘어 원하는 장소로 이동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문입니다. 이 문을 통하면 아무리 먼 곳이라도 한 발자국 너머에 불과하죠.” “아...” “마침 이곳에 오면서 지정해 둔 장소가 있으니 그리로 가서 결투를 벌이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어떠신지요.” 데마는 일단 옆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동료들을 돌아보았다. 그들 역시 그런 편하고 간단한 수단이 있다면 굳이 사양할 생각이 없었고, 또한 그 전략적인 가치를 확인하기 위해서도 한번쯤은 시험해 볼 필요가 있었다. 눈빛이 달라진 데마와 기사들의 모습에 하라바는 다시 속으로 쓴웃음을 삼켰다. 이것이야 말로 또 하나의 미끼. 저들은 자신들이 빠져 나올 수 없는 그물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좋습니다. 그럼 부탁 드리겠습니다.” 스승인 케이드의 반응은 살피지도 않고 데마가 얼른 그렇게 대답하자, 준상은 좌표 입력기를 꺼내어 이곳의 좌표를 입력한 다음 이곳에 도착할 때 사용했던 좌표를 불러내었다. 달칵 거리는 소음과 함께 마침내 좌표의 입력이 끝나자, 준상은 앞서서 석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먼저 기이한 물결과도 같은 막이 반짝이는 문 안으로 모습을 감추자, 헤네스는 다른 이들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그럼 저희가 먼저 앞장 설 테니 따라 오세요.” “네.” 헤네스가 앞장서자 그 뒤를 하라바가 뒤따랐고, 다소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데마와 케이드, 그리고 다른 기사들이 문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 정말로 단 몇 걸음 만에 성 밖의 숲으로 나온 것을 확인하자 데마는 물론이고 케이드 또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건 정말 놀랍군. 정말 대단해.” 이런 문이 있다면 군사를 이동 시키는 일은 물론이고 정찰이나 병참 등에도 엄청난 이점을 가지게 된다. 이미 은퇴한 케이드는 물론이고, 한창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데마나 다른 기사들 역시 지금까지 한 마디 말도 않고 있던 준상에 대해 호기심 가득한 시선을 던지기 시작했다. 특히나 데마의 경우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준상 만큼은 반드시 포섭을 해야겠다는 발칙한 마음마저 품을 정도였다. “장소는 이곳으로 문제가 없겠죠?” “물론입니다.” 헤네스와 데마가 그렇게 대화를 마치자, 하라바가 쓴웃음을 지은 채 웃통을 벗으며 앞으로 나섰고, 케이드 역시 검을 들고 그와 마주 섰다. “그럼, 한 수 부탁 드리겠소.” “이쪽이야말로.” 그렇게 말을 건넨 두 사람은 곧바로 아까 미처 마무리 짓지 못한 결투를 다시 이어가기 위해 기세를 돋우기 시작했다. “이건...” 데마는 얼른 두 사람에게서 물러나며 얼굴을 찌푸렸다. 자신도 이제 어느 정도 한 사람 몫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건만, 몇 걸음이나 떨어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피부가 저릿 저릿할 정도의 기세가 뿜어져 오자 속으로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놀랄 일은 이제부터였다. “부족하지만 전력을 다하도록 하겠소.” 하라바는 그렇게 말하고는 허공에 수십 개의 커다란 상자를 꺼내 놓았다. 사람 하나가 들어가 누워도 될 정도의 커다란 상자 수십 개가 나타나고 그것이 열리며 감히 수와 종류를 헤아리기도 어려울 정도의 엄청난 무기들이 허공으로 떠오르는 모습은 가히 장관이 아닐 수 없었다. 철컥! 덜커덕! 허공으로 떠오른 무기들은 이내 하라바의 작달막하지만 다부진 몸에 달라붙으며 하나의 거대한 형상을 만들어 가기 시작했다. “...” 데마는 그 모습을 보고서야 자신의 스승과 결투를 벌이는 사내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철골의 제왕, 하라바 은체우.” 변변한 배경도 없이 세 명의 막강한 동료들과 함께 몸을 일으켜 일대에 사막 전체를 아우르는 왕국을 건설한 불세출의 입지전적인 영웅. 강철을 제 몸처럼 다루기에 그가 전력을 다하면 어떠한 무기로도 감히 상처를 입힐 수 없다 전해지는, 사실상 세계 최강으로 일컬어지는 바로 그 인물이 지금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어째서 그가 여기에?” 철골의 제왕이 지배하는 사막 왕국은 이곳으로부터 몇 달은 걸려야 할 정도로 먼 곳에 있는 나라. 어째서 그가 자신의 나라를 놔두고 이런 먼 곳에 모습을 드러냈단 말인가. 하지만 데마와는 달리 그녀의 스승은 거대화 한 하라바의 모습을 보며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과연 철골의 제왕. 하하하!” 데마는 그 말을 듣고 얼굴을 찌푸렸다. 설마 케이드는 이미 저 남자가 하라바 은체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단 말인가. “정말 스승님도 참...” 저런 인물이 느닷없이 제국에 나타났으면 먼저 그 사실부터 알리는 것이 도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투에 눈이 멀어 그와 같은 사실을 숨긴 채 자신들을 참관인으로 불렀다는 사실을 깨닫자, 데마는 이 상황을 어떻게 처리 해야 할지 몰라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케이드는 자신이 제자에게 새로운 두통거리를 선사했다는 사실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껄껄 웃으며 자신의 검에 기운을 있는 대로 불어 넣었다. 평범했던 그의 장검은 이내 붉게 달아오르는가 싶더니 끓는 용암과도 형상이 되었고, 점점 그 크기가 커져서 어느 틈엔가 하늘 높이 솟은 거목과도 같은 크기로 변해 버렸다. “저럴수가.” 데마는 다시금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케이드의 실력이 대단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저 정도일 줄이야. 저 무식한 크기의 검이라면, 높고 단단하기로 이름 높은 제국의 수도 쿤티의 성벽도 일거에 갈라버릴 수 있을 터. 데마는 물론이고 그의 옆에 서있던 그녀의 동료들 또한 지금까지 세상을 지배하고 있던 상식을 단숨에 부숴버릴 듯한 하라바와 케이드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다. 00370 트롤러 ========================================================================= “으라차!” 거대화한 하라바의 주먹이 휘둘러진다. 멀리서라면 그저 파리나 모기를 쫓는 듯한 한가로운 손짓으로 보였을지도 모르는 가벼운 일격. 그러나 직접 그것을 코앞에서 맞닥뜨려야 하는 입장에서는 거대한 산사태가 눈앞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무시무시한 박력을 지니고 있었다. “합!” 하지만 케이드는 휘둘러진다는 말보다는 무너져 내린다든지 쏟아져 내린다는 표현이 알맞을 듯한 거대한 주먹을 피하기 보다는 직접 맞상대하는 쪽을 선택했다. 붉게 타오르는 활화산 같은 검이 거대한 부채꼴 모양의 궤적을 남기며 하라바의 주먹과 격돌하는 순간,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던 데마와 그의 동료들은 자신들을 향해 덮쳐오는 엄청난 풍압에 비명을 지를 수 밖에 없었다. “으악!” “이런... 말도 안 되는...” 그들은 다급하게 무기를 꺼내 땅에 박아 넣으며 필사적으로 버텼지만, 인간을 초월했다고 밖에 여겨지지 않는 두 괴물들의 전투에서 눈을 돌릴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었다. 위험하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으나 조금이라도 더 가까운 곳에서 이 위대한 일전을 보고 싶다는 욕망이 그들의 정상적인 사고를 가로 막았던 것이다. 쾅! 쿠광! 하지만 욕망이나 의욕이 어찌 되었든 연이어 터져 나오는 굉음과 풍압에 그들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폭풍에 휘날리는 애처로운 작은 깃발처럼 자신들이 땅속에 박아 넣은 무기에 매달리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망할 노친네. 뭘 먹었길래 저렇게 힘이 넘쳐?” 아까까지만 해도 비록 울컥할 지언정 예의만큼은 잃지 않고 있던 데마의 입에서 상소리가 흘러나온 건 바로 그때였고, 그 한 마디에 대답하듯이 사람 하나가 커다란 방패를 들고 그들의 앞을 가로막은 것 또한 바로 그때였다. 당장이라도 날아가 버릴 것처럼 각자의 무기에 매달려 있던 그들은 갑자기 풍압이 사그라들면서 지면에 다리가 닿자 자신들의 앞에서 바람을 막아내고 있는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시선이 옮겨졌다. 그 사람은 놀랍게도, 철골의 제왕의 동료였던 부드러운 미소가 인상적인 갈색 머리의 미녀였다. “너 말투가 꽤 마음에 드는데? 내 제자 안 할래?” 그러나 곧바로 씩 웃으며 돌아보는 그녀의 모습에 데마를 제외한 다른 기사들은 이 여자 역시 자신들의 단장과 마찬가지로 두 얼굴을 지니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당신은.” 데마는 얼굴을 찌푸린 채 자신에게 등을 보이고 있는 이 이국적인 미모의 여성을 바라보았다. 처음 케이드의 응접실에 들어섰을 때, 그녀는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의 면면을 훑어보았었다. 가장 눈에 띄었던 것은 역시 철골의 제왕 하라바. 비록 체구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그녀가 지닌 통찰의 능력을 통해 그 자가 자신의 스승과 비교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는, 아니 오히려 더 강할지도 모르는 초월자임을 단박에 알아볼 수 있었다. 하라바의 동료로 보이는 다른 두 명의 동료 역시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소 미묘한 느낌을 받았다. 자신보다 강한지 약한지 좀처럼 감이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지구인들이 정보 단말로 사용하는 휴대폰과는 달리 이 세계의 시스템은 명확하게 수로 표현되는 디지털이 아닌 아날로그에 가까운 방식을 택하고 있었던 것 역시 한 가지 이유였으나, 그렇다 치더라도 그 두 남녀의 능력에 대해서는 역시 모호한 느낌이 강했다. 게다가 대화 중간 중간 하라바가 은근히 남자 쪽의 눈치를 보는 듯한 분위기마저 풍겼기 때문에 데마는 이 남자가 하라바조차 무시못할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하고 있었다. 그에 비하자면 여자 쪽은 사근사근한 미소로 다른 사람의 경계심을 간단하게 허무는 기묘한 친화력을 제외하고는 특별히 대단한 능력을 지닌 것처럼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다소 경시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 자신들 앞에서 하라바와 케이드라는 두 초월자가 벌이는 전투의 후폭풍을 대수롭지 않게 막아내고 있는 것은 자신이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바로 그 갈색머리 여성이었다. “천천히 뒤로 물러서라. 싸우다가 다치는 것도 아니고 구경하다가 바람에 날려가 버렸다면 농담거리도 못 되는 개망신 아니냐.” “...” 아까 응접실에서 보여졌던 부드러운 말투나 태도를 떠올려보면 어쩐지 사람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는 모습. 데마 자신도 전투나 급박한 상황에서 입이 좀 험해지는 면이 있기는 하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뭐해? 얼른 안 가고.” “아, 알겠습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지만 자신도 모르게 존대를 해버리고 만 데마는 동료들과 함께 재빨리 그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어느 정도 뒤로 물러서자 방금 전까지 거대한 풍랑처럼 몰아치던 후폭풍 들이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단순히 막아내는 정도도 아니고, 바람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평온함마저 느껴지는 상황에 데마와 그녀의 동료들은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마법? 아니 마력의 흐름이 느껴지지 않은 걸 보면 정령인가?” 그러자 어느 틈엔가 방패를 집어넣은 헤네스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정령이 맞아요.” “그렇... 군요.” 또다시 돌변한 태도에 데마는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다시 존대를 하고 말았고,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지은 채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인 헤네스는 바위 위에 버티고 선 채 두 괴물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는 준상의 옆으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걸음을 옮겼다. 하라바와 케이드는 마치 신화 속에 나오는 거인과 용사의 대결과도 같은 모습을 연출하고 있었다. 붉게 물들어 가는 석양을 등진 채 거대한 거인에게 붉게 빛나는 검을 들어 맞서는 케이드의 모습은 자못 비장하게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하라바의 발이 한 번 옮겨질 때마다 아름드리 거목들이 잡초마냥 부러져 나가고, 케이드의 검이 한번 휘둘러질 때마다 커다란 바위들이 진흙 덩이처럼 가루가 되어 버린다. 데마와 동료들은 방금 전까지 자신들이 있던 장소에 하라바의 커다란 발자국이 새겨지자 이내 등골이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대단해...” “이것이 인간의 힘이라니.” 하지만 그렇게 감탄하고 있는 다섯 기사들과는 달리 준상은 그 너머의 더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성 쪽에서 알아차린 모양이군.”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거대한 거인과 그에 맞먹는 붉은 검이 숲에서 날뛰는 모습이 더 멀리까지 확실하게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준상의 말을 듣고 정찰병으로 보이는 한 무리의 기마대가 다가오는 것을 확인한 헤네스가 말했다. “군대에요.” 제국의 병력이 도착하면 아무래도 계속해서 싸움을 이어가는 것은 역시 무리일 수밖에 없다. 케이드야 어찌 되었든 간에 거대화한 하라바의 모습은 데마처럼 그의 인상착의를 잘 모르는 사람조차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더구나 숲을 이 정도로 망가뜨려 놓은 상태라면 제국에 달리 위해를 가할 의도가 없었다 하더라도 꼬투리 잡히기 딱 알맞은 일이다. 데마와 다른 기사들 역시 하라바와 케이드의 장렬한 전투에 넋이 나가 있다가 그제서야 상황이 심각해졌음을 깨달았다. “어쩌죠?” 헤네스의 말에 준상은 품에서 작은 병 하나를 꺼내 마시더니, 곧바로 공중으로 떠올라 한창 피 터지게 싸우고 있는 두 초인들 사이로 날아들었다. 물론 이미 눈이 반쯤 돌아가 버린 하라바와 케이드는 그러거나 말거나 싸움을 계속하려 들었지만 하라바의 거대한 발과 케이드의 붉은 검이 격돌하는 순간 준상은 그들 사이로 끼어들며 시드 무효화의 능력을 발동했다. “어?” “으악!” 케이드는 갑자기 힘이 쭉 빠지는 느낌에 당황하며 정신이 번쩍 들었고, 하라바는 다리가 허물어지자 중심을 잃고 그대로 나자빠지고 말았다. 끼어드는 건 둘째 치고 감히 다가설 엄두조차 내지 못하던 데마와 그녀의 동료들은 준상이 단숨에 두 초월자 사이에 끼어들어 싸움을 멈추어 버리자 얼이 빠지고 말았다. “말도... 안 돼.” “방금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몰라.” “나도 몰라.” 헤네스는 어쩐지 얼빠진 그들의 대화가 요정들의 그것을 닮았다는 느낌이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짓고 말았다. 하지만 당혹스럽기로 따지면 그들보다도 방금 전까지 피터지게 싸우고 있던 하라바와 케이드 쪽이 더 했다. “너... 너... 그 능력!” 하라바는 방금 전에 준상이 선보인 능력이 벨 라야가 사용했던 시드 무력화임을 단숨에 알아보고 아연해 할 수 밖에 없었다. “도대체... 방금 그건 무슨...” 하지만 아무런 사전 정보를 가지고 있지 못했던 케이드는 공중에 떠서 자신들을 무심하게 바라보고 있는 준상의 모습에 얼이 빠져서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고 있었다. 준상은 그들을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 “군대가 오고 있다. 귀찮은 일에 휘말리지 않으려면 아무래도 일단 이곳을 빠져 나가는 것이 좋을 듯 한데.” 하라바는 그제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제법 멀리 나오기는 했지만, 거대화한 하라바의 모습이라든가 케이드의 불타는 붉은 검 같은 것이 제국의 수도 근처에서 숲을 마구 뒤집어 엎고 있는데 아무도 와보지 않는다면 그것도 이상한 일. 케이드도 화들짝 놀라기는 마찬가지다. 아무리 제국 제일의 기사라도 말도 없이 하라바 같은 자와 수도 근처에서 이렇게 큰 일을 벌여 놨으니 이 사실이 밝혀지면 단순한 질책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어쩌지?” “일단 그 쇳덩이부터 수습하도록.” “아, 맞다.” 하라바는 얼른 자신의 상자에 무기와 각종 쇳덩이를 담아 인벤토리에 챙겨 넣기 시작했고, 뒤늦게 헤네스가 데마와 다른 기사들을 데리고 그곳에 도착했다. “묻겠다.” 준상의 말에 케이드는 긴장하며 대답했다. “뭘 말인가.” “원한다면 다시 한 번 장소를 옮겨서 결투를 이어갈 수 있도록 해줄 수 있다. 그쪽의 생각을 듣고 싶군.” “...” 케이드는 그 말을 듣자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반색했다. 앞서 이곳에 도착했던 방식의 능력이라면 지금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는 제국의 군대 정도는 간단하게 따돌릴 수 있을 터. 모처럼 신나게 싸우다 훼방을 받아 적잖이 속이 상해 있던 그로서는 생각하고 말고 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그 말이 정말인가?” “물론.” “나로서야 두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지. 그렇게 해주게.” 케이드의 말에 데마가 화들짝 놀라며 외쳤다. “스승님! 계속 싸우시려고요?” “물론이다. 이렇게 마음 놓고 내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상대를 만났는데, 이대로 헤어지는 건 일 보고 뒤 안 닦고 나온 꼴이나 다름없지 않겠냐.” “꽤 그럴 듯한 비유지만 혼기가 꽉 찬 제자 앞에서 할 만한 말은 아니지 않아요?” “알아 들었으면 됐지 뭘.” “어휴...” 데마는 한숨을 푸욱 내쉬었지만, 그녀의 시선은 어느 틈엔가 준상과 그 옆에 선 헤네스에게로 향해 있었다. 저 두 사람은 도대체 어떤 존재들이란 말인가. 사실상 세계 최강이라 일컬어지던 하라바 곁에 이런 존재들이 있다니. 이것은 제국의 안위를 책임지고 있는 기사들로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만 할 문제였다. 하지만 준상은 데마가 그렇게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무시한 채 하라바가 허겁지겁 무기와 쇳덩이들을 인벤토리에 챙겨넣자 다시 석문을 열었다. “따라와라.” 짤막한 한 마디를 남기고 먼저 준상과 헤네스가 문 안으로 들어가자 하라바가 그 뒤를 이었고, 말릴 틈도 없이 케이드가 따라 들어가 버렸다. “어쩌지?” 동료 가운데 하나가 묻자 데마는 손톱을 물어뜯으며 대답했다. “어쩌긴. 이대로 스승님 혼자 내버려 둘 수는 없잖아. 빌어먹을.” 그들은 서로 시선을 교환하고는 곧바로 석문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지금까지 보았던 풍경과는 전혀 다른, 마치 아이들이 아무렇게나 낙서를 해놓은 듯한 모습의 기묘한 세계였다. “여긴... 도대체?” 아무 생각 없이 따라 들어온 케이드조차 이 기묘한 풍경을 마주하는 순간 무언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데마와 다른 기사들이야 말할 것도 없는 일. 준상은 그런 그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요정계에 온 것을 환영한다.” 그리고 그 말이 끝나는 순간 케이드와 데마, 그리고 기사들을 향해 싸늘한 냉기가 밀어닥쳤다. 00371 트롤러 ========================================================================= “큭!” 케이드는 얼른 앞으로 나서며 준상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냉기를 막아내려 했으나 그것은 처음부터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뼈속까지 시리다는 말이 절로 떠오르는 싸늘한 냉기의 힘에 케이드는 물론이고 데마와 다른 기사들마저 점차로 몸이 굳어져 가는 것을 느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데마가 참지 못하고 그렇게 소리를 질렀지만 준상은 그녀를 무시한 채 무표정한 얼굴로 케이드를 향해 말했다. “자신이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 느껴지는가.” “무슨...” “제국 제일의 기사. 하지만 힘을 잃은 지금은 그저 평범한 중년일 뿐이지.” “...” 준상은 정령계의 힘을 끌어내어 바닥을 구르고 있는 돌멩이 하나를 들어 올리더니 이내 하얀 불꽃을 피워 그것을 달구기 시작한다. “너희들은 자신들이 지닌 그 힘이 어떻게 생겨난 것인지 아는가.” “...” 케이드도 데마도 그 외의 다른 기사들도 입을 열지 못했다. 한때는 그들도 어째서 자신들에게 이런 힘이 생겨났는지 고민했었던 때가 있었지만, 지금은 스스로의 강함에 취해 더 이상 그런 일에 대해 고민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 것에 신경을 슬 바에야 조금이라도 더 강해지는 것에 열중하는 편이 나았고, 주변의 다른 모든 이들도 그렇게 한 마음으로 강해지고자 노력하는 그들을 자랑스러워 했다. 그렇게 해서 얻은 명예가 제국 제일의 기사이며, 또한 알프레임 기사단 아니던가. 준상은 손 안에서 붉게 달궈지다가 천천히 녹아내리는 돌멩이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너희들이 지닌 힘은 이토록이나 허무한 것이다. 그럴 마음만 먹는다면, 누군가에 의해 단숨에 빼앗길 수 있을 정도로.” 돌멩이는 어지간해서는 저렇게 녹아서 흘러내리지 않는다. 금속을 가공하는 일에 대한 지식이 없는 이들도 그런 사실 정도는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준상이 만들어낸 그 현상에 하나 같이 경악할 수 밖에 없었다. 갑자기 모든 능력이 사라진 데다 차가운 냉기가 스며들어 몸조차 제대로 움직이기 힘든 상황에서 저런 일을 벌이다니. 도대체 이 남자의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데마는 비수처럼 날아와 박히는 준상의 말에 입술을 깨물다가 질문을 던졌다. “설마 당신이 이 모든 일의 배후입니까?” “아니.” “그럼...” “그것에 관해서는 너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일원이 설명하는 쪽이 낫겠군.” 준상은 하라바를 돌아보며 말했다. “설명하도록.” “끙...” 하라바는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준상의 말을 거부하지 못하고 앞으로 나섰다. 준상이 발동한 시드 무력화의 힘에 의해 힘을 빼앗긴 것은 그도 마찬가지인데다, 그 기묘한 무력감이 이전에 차원 요새에서 겪었던 일을 더욱 생생하게 떠오르도록 만들어 주고 있었던 탓에 그는 잔뜩 얼굴을 구긴 채 였다. “후... 믿을런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겪었던 일을 말해 주겠소.” 하라바는 자신이 사막 왕국에서 누군가에게 납치되고 다시 차원 요새라는 곳에서 고객들이 보는 앞에서 머리가 쪼개져 죽을 뻔한 일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그의 언변은 그리 뛰어나지 않았으나 솔직 담백한 그의 말투는 그런 자질구레한 부분을 잊게 만들만큼 사실적이었다. “우리들의 머리 속에 시드가 들어있다는 말인가요?” “그렇소. 지금 당신들이 갑자기 힘을 잃은 것은 머리 속에 들어있는 시드의 효과가 무력화된 탓이지.” “그럴 수가.” 케이드는 고개를 치켜 든 채 눈을 감고 있었고, 데마는 혼란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채 머리를 감싸 쥐고 있었으며, 다른 기사들 또한 방금 전에 자신들이 전해들은 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잠시 눈을 감고 있던 케이드는 앞서의 조금은 장난스럽던 기색이 사라진 진지한 표정으로 준상을 바라보며 이렇게 물었다. “당신은 우리들에게 무엇을 바라는 것이오.” 준상은 바로 대답했다. “협력하라.” “...” 케이드는 다시 입을 다물었지만 이번에는 데마가 물었다. “우리가 협력하면 당신은 그 힘을 가지고 무엇을 할 생각이죠?” 데마는 두려웠다. 제국 제일의 기사인 케이드나 세계 최강으로 회자되던 하라바 등의 힘을 손에 넣으면 그 파괴력이 어느 정도이겠는가. 마음만 먹으면 제국의 수도 정도는 하루 아침에 잿더미로 만들 수 있을 터. 하지만 준상은 코웃음을 치며 이렇게 대답했다. “아직도 이해를 못했나 보군.” “무슨 소리죠?” “만약 방금 전의 사실이 흘러나가면, 과연 제국 황실에서는 가장 먼저 무엇을 할까.” “그거야...” 데마는 대답을 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듣지 않고도 그녀가 하려던 대답의 내용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확인. 제국 황실은 정보의 진위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움직일 것이다. 그것을 위해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능력자의 머리. 이러니 저러니 할 것 없이 머리를 갈라 보면 간단하게 알 수 있는 일인 것이다. 물론 능력자는 사망과 동시에 빛과 함께 어딘가로 옮겨진다. 그러나 빠르게 머리를 갈라 확인해 본다면, 시드가 있는지 없는지 정도는 알아볼 수 있을 터. 만약 그렇게 해서 능력자의 머리 속에 시드가 있다는 것이 알려지게 된다면, 그들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그들의 머리 속에 있는 시드를 얻으려 들 것이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만들어 낼 수 있는 창조의 씨앗. 이 얼마나 매혹적인 울림이란 말인가. 능력자는 강력한 존재지만 무적은 아니다. 그들이 능력을 하나 둘 얻어갈 때마다 질투 어린 시선을 던지던 자들은 셀 수도 없이 많다. 또한 그들이 입고 먹고 마시는 모든 것은 능력자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손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주위의 사람들이 적으로 돌아서는 순간, 능력자는 고립되어 버릴 수 밖에 없다. 케이드와 데마, 그리고 나머지 네 명의 기사들은 자신들이 벗어날 수 없는 함정에 걸려버렸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저들의 힘은 강대하다.” 준상은 그렇게 말하고는 안색이 창백해진 케이드와 데마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매우 연약한 존재이기도 하다. 지금의 너희들처럼.” “...” “일단 이 행성을 맡고 있던 벨 라야는 이미 소멸했다. 하지만 그들의 배후에 있는 칠대 황가는 여전히 건재하고 실질적으로 시드의 생산과 분배를 책임지고 있는 관리국 역시 건재하다. 오히려 벨 라야의 존재가 사라진 이상 상황이 더 급박하게 흐를 가능성도 높다. 칠대 황가의 영향력이 약화된 틈을 탈 수도 있는 노릇이고, 분쟁을 최소화하기 위해 전격적으로 수확을 단행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데마는 갑작스럽게 쏟아져 나온 정보의 홍수로 인해 현기증이 느껴졌는지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지만, 케이드는 준상을 향해 이렇게 물었다. “만약 그런 식으로 일이 진행된다면, 당신에게 협력한들 방법이 없지 않겠소?” 하지만 준상은 고개를 저었다. “방법은 있다. 수확의 대상이 될 확률이 높은 자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성공 가능성은 더 높아질 수밖에 없지. 게다가 이것은 너희들의 목숨을 구할 유일한 구명줄 또한 될 것이다.” “음...” 케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협력할지 안할지 결정조차 하지 못한 상대에게 알려줄 수 있는 정보는 이 정도가 고작. 아직 이름조차 듣지 못한 이 이방인은 케이드와 그의 제자들을 단숨에 한 줌의 재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그의 곁에는 명실상부 그들 세계의 최강자라 할 수 있는 하라바 역시 자리하고 있다. 그럴 생각만 있다면, 이미 제국 정도는 이 둘만의 힘으로도 초토화시킬 수 있을 터. “하나만 조건을 달아도 되겠소?” “뭔가.” 준상이 짧게 되묻자 케이드는 비장하기까지 한 표정으로 그를 향해 말했다. “우리가 협력한다면 제국의 안위를 보장해 주시오.” 아직까지도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데마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케이드를 바라보았다. “스승님!” 케이드는 어느새 훌쩍 자라버린 제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솔직히 나는 우주니 뭐니 하는 허무맹랑하기까지 한 큰일은 잘 모르겠소. 애초에 검 하나 만을 바라보고 살아온 어리석은 무인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래서?” “내가 지금까지 지켜왔던 가치들이 허무하게 무너지는 것만은 막아보고 싶소. 당신이 그것을 보장해 준다면, 나는 기꺼이 협력하겠소.” “...” 준상은 잠시 말없이 케이드를 바라보았다. 그가 제국 제일의 기사라 불리게 된 이유를 조금은 알게 된 느낌이랄까. “재미있군.” 준상은 케이드를 향해 다시 말을 이었다. “천년만년 제국을 돌봐줄 수는 없는 일이다. 그건 알고 있겠지?” 케이드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물론이오. 그렇게까지 막무가내는 아니라오.” 어차피 영원불멸한 나라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소망은 그저 자신이 애쓰고 가꾸어 온 작은 뜨락이 망가지는 것을 보고 싶지 않은 것 뿐. 오직 그것 뿐이었다. “좋다. 그 정도야 어려울 것 없는 일이지.”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며 그에게 다가섰다. “이것을 받아들여라.” “이건...” 케이드는 준상이 내민 것을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예속의 족쇄. 눈앞에 나타난 물품은 무언가를 구속해 펫으로 삼기 위한 물품이었기 때문이다. “당신도 능력자였던 거요?” “그렇다.” “능력자끼리는 펫을 삼을 수 없을텐데?” “나는 가능하다.” “...” 하긴 시드 무력화의 힘을 사용할 수 있을 정도인데 이 정도야 당연한 일인가. 케이드는 하라바를 바라보며 물었다. “당신도 이걸 받아들인 거요?” 하라바는 쓴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목에 채워진 가죽 목걸이를 보여 주었다. “내 경우에는 죽도록 두들겨 맞은 뒤에 강제로 채워졌지.” “그거 정말 재난이었겠구려.” “말도 마시오. 정말 죽는 줄 알았다니까.” 케이드와 하라바가 그렇게 웃으며 대화를 나누자 데마는 당황하며 얼른 그를 말렸다. “스승님. 이건 어리석은 짓입니다. 그러지 마세요.” 하지만 그녀의 말에 케이드가 대답하기도 전에 준상이 이렇게 말했다. “안달낼 필요 없다. 그 다음은 바로 너니까.” “...” 데마는 그 차가운 말을 듣고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표정과 말투에서 거절은 용납하지 않는다는 분위기를 느낀 탓이다. 케이드는 움찔하며 얼른 자신의 등 뒤로 숨어드는 제자의 모습에 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이 말괄량이를 과연 누가 휘어잡을까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는데, 드디어 제 임자를 찾은 모양이구려. 하하하.” “스, 스승님!” 데마는 당황해서 얼른 크게 외쳤지만, 준상은 그런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케이드에게 대답했다. “쓸 데 없는 소리 말고 어서 받아들여라.” “알겠소. 하하.” 케이드가 고개를 끄덕이자, 준상의 손에 쥐어져 있던 족쇄가 모습을 감추었고, 곧이어 휴대폰에서 알림음이 흘러나왔다. “뭔가 느낌이 묘하군.” 케이드가 몸을 발목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족쇄를 살피는 동안 준상은 그에게서 물러나며 휴대폰으로 들어온 메시지를 확인했다. 축하합니다! :케이드 제드노스을 새로운 펫으로 삼는데 성공했습니다. -현재 동시 소환 가능한 펫의 숫자는 (무제한)입니다. -현재 소환 가능한 펫은 모두 열 둘입니다 1.몽몽 [상세 정보] 2.헤네스 브레아 [상세 정보] 3.엘리 [상세 정보] 4.이벨라 하란두르 [상세 정보] 5.밤톨 [상세 정보] 6.하라바 은체우 [상세 정보] 7.이고르 [상세 정보] 8.마난바 [상세 정보] 9.듀아 아란 사다트 [상세 정보] 10.파티아 아란 사다트 [상세 정보] 11.카말 [상세 정보] 12.케이드 제드노스 [상세정보] -펫 소환을 원하시면 해당 번호를 누르시고, 만약 소환을 원치 않으신다면 n을 누르세요 (1/2/3/4/5/6/7/8/9/10/11/12/n) _ 이번에도 역시나 다른 메시지들이 뒤를 잇고 있었다. 축하합니다! 아이템카드 ‘예속의 족쇄’를 습득하였습니다. :마음에 드는 동물을... 축하합니다! 아이템카드 ‘예속의 족쇄’를 습득하였습니다. :마음에 드는 동물을... 축하... “...” 펫은 하나도 없고 줄줄이 예속의 족쇄를 획득했다는 메시지만 무려 열한 개나 이어지는 모습에 준상은 잠시 할 말을 잊었다. 00372 트롤러 ========================================================================= 예속의 족쇄를 획득했다는 메시지를 넘기자 인벤토리 획득 메시지가 나타난다. 축하합니다! 특수카드 ‘인벤토리’를 획득했습니다. :특수카드를 획득하면 봉인된 특수기능을 해제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이미 특수기능 ‘인벤토리’가 개방되어 있으므로 인벤토리 용량을 48칸 확장합니다. -현재 당신의 인벤토리에는 서로 종류가 다른 162가지 물품을 등록하여 사용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새로운 인벤토리가 48칸 늘어났지만, 준상은 하라바 때와 마찬가지로 내용물을 살피지도 않은 채 할당 기능을 이용해 케이드에게 되돌려 주고는 그의 정보를 확인했다. 펫 정보 이름 : 케이드 제드노스 종류 : 불명 레벨 : 79Lv 경험치 : 577898 등급 : 불명 분류 : 복합 성장 : 일반(극대) 속성 : 불 스킬 : 집념 79Lv, 신뢰 75Lv [정보] 호감도 : 55 충성도 : 40 카드슬롯 : 10개 [정보] (소유카드수:불명) 설명 : 불명. 하라바와 마찬가지로 설명 부분은 불명으로 되어 있었지만 대략의 성향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특히나 얻어맞으면서 펫이 되었던 하라바와는 달리 초기 호감도가 조금 높다는 것도 한 가지 특기할 만한 상황이다. 케이드를 펫으로 만드는 일이 모두 끝나자 준상은 새로 얻은 예속의 족쇄를 꺼내 들고 데마에게로 향했다. “네 차례다.” 데마는 기겁하며 반사적으로 허리에 찬 검에 손을 가져 갔으나 고글 너머로 자신을 바라보는 준상의 서늘한 시선을 느끼자 차마 손잡이를 잡지 못했다. “안 돼요.” “어째서?” 데마는 당황해 하며 어쩔 줄 모르다가 이렇게 외쳤다. “난... 여자라고요!” “...” 무슨 뜬금없는 소리인가 하고 준상이 얼굴을 찌푸리자,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케이드가 갑자기 껄껄 웃기 시작했다. “내 평생에 이 녀석이 스스로 여자라고 우기는 꼴을 보게 될 줄은 미처 몰랐군. 하하하.” 데마는 그 말을 듣고 얼굴이 붉어지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스승님!” 하지만 케이드는 유들유들하게 웃으며 제자를 놀려댔다. “왜? 내 말이 틀렸나? 여자 취급 하지 말라고 생떼를 쓰며 제자가 되었던 것이 어제 일 같은데.” “그, 그건... 어렸을 때 얘기잖아요!” “내가 보기엔 지금도 어려.” “으으...” 하지만 준상은 스승과 제자가 그렇게 촌극을 벌이거나 말거나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온몸으로 차가운 기운을 뿜어내며 데마를 향해 다가섰다. “그래서, 못하겠다고?” “...” 데마는 준상의 그런 모습을 보자 자신의 우려와는 달리 이 남자에게 털끝만큼의 사심도 없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자존심 상하는 일이기도 했기 때문에 우물쭈물거리고 있는데 문득 준상이 천천히 자신을 향해 천천히 손을 뻗어오는 모습을 보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알았어요. 받아들이면 되잖아요.” “...” 준상은 대답대신 예속의 족쇄를 내밀었고, 데마는 한숨을 내쉬며 그것을 받아들였다. 한 줄기 빛과 함께 사라진 족쇄가 어느 틈엔가 자신의 발목에 채워지자, 데마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결투건 뭐건 무시하고 그냥 모르는 척 하는 건데. 그렇게 후회하며 원망의 눈길을 보냈지만 스승인 케이드는 뭐가 재미있는지 그저 껄껄 웃기만 하고 있었다. 준상은 휴대폰을 통해 메시지를 빠르게 확인했다. 축하합니다! :데마 일리나 베리트 아렌 프라바를 새로운 펫으로 삼는데 성공했습니다. -현재 동시 소환... 축하합니다! :하샤트를 새로운 펫으로 삼는데 성공했습니다. -현재 동시 소환... 축하합니다! :루안을 새로운 펫으로 삼는데 성공했습니다. -현재 동시 소환... 축하합니다! 아이템카드 ‘예속의 족쇄’를 습득하였습니다. :마음에 드는 동물을... “...” 데마가 펫으로 등록되자 추가로 펫 둘과 예속의 족쇄 하나가 추가 되었다. 준상은 추가된 새로운 펫들의 정보를 확인했다. 펫 정보 이름 : 데마 일리나 베리트 아렌 프라바 종류 : 불명 레벨 : 53Lv 경험치 : 208243 등급 : 불명 분류 : 복합 성장 : 조숙(극대) 속성 : 바람 스킬 : 집념 53Lv, 사교 23Lv [정보] 호감도 : 45 충성도 : 55 카드슬롯 : 10개 [정보] (소유카드수:불명) 설명 : 불명. 우선 데마의 정보를 확인한 준상은 얼굴을 찌푸렸다. 앞서 소개할 때 들었던 것보다 이름이 더 긴데다 마지막이 프라바라는 단어로 끝나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마지막 이름이 제국의 이름과 동일하다는 건 보통 한 가지 이유이다. “너... 황녀였었나?” 데마는 물론이고 다른 기사들마저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그걸 어떻게?” “...” 어쩐지 그녀와 케이드가 대화를 나눌 때 다른 기사들은 말 한 마디 제대로 안 하고 가만히 지키고 서 있는 모습이 뭔가 이상하다 싶더니, 이런 이유에서였던 모양이다. 그러고 보면 케이드의 저택도 상황이 내려 준 것이라고 했었던가. 준상이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케이드가 웃으며 설명해 주었다. “원래부터 황녀였던 것은 아니고, 현 황제의 조카뻘 되는 아이인데 직첩을 내려 황실의 직계로 받아들인 경우일세. 어린 나이에 기사단장을 맡고 있는 것도 사실 그런 이유지.” “일종의 아이돌 같은 건가 보군.” “아이돌? 그게 뭐지?” 케이드와 데마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준상은 그들의 시선을 무시한 채 다른 펫들의 정보를 확인했다. 펫 정보 이름 : 하샤트 종류 : 일각수 레벨 : 31Lv 경험치 : 53799 등급 : 불명 분류 : 복합 성장 : 일반(중) 속성 : 빛 스킬 : 검술 31Lv, 방어 30Lv [정보] 호감도 : 50 충성도 : 70 카드슬롯 : 3개 [정보] 설명 : 일각수는 본래 천계의 신수였습니다. 이 성스러운 동물은 길고 날카로운 뿔과 전신을 뒤덮은 찬란한 비늘을 지니고 있습니다. 뿔을 다루는 능력이 숙련된 검사를 능가할 정도이며, 그 비늘은 그 어떤 갑주보다도 강인하고 튼튼합니다. 이들은 자유로운 영혼을 지녀서 쉽게 굴복하지 않지만, 일단 주인으로 인정한 상대에게는 생명을 다해 섬기는 충직함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일각수를 펫으로 삼아 데리고 다녔던 건가. 준상은 다른 펫도 확인을 해 보았다. 펫 정보 이름 : 루안 종류 : 토끼 레벨 : 3Lv 경험치 : 72 등급 : Common 분류 : 관상용 성장 : 일반(소) 속성 : 대지 스킬 : 굴파기 1Lv [정보] 호감도 : 50 충성도 : 50 카드슬롯 : 1개 [정보] 설명 : 귀여운 보통의 토끼입니다. “...” 지금까지 뭔가 대단한 능력을 지닌 펫만 보다가 이런 식으로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어찌 보면 펫이라는 말에 가장 어울리는 동물을 보자 준상은 어쩐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왜 그렇게 봐요?” 준상이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자 데마는 이 남자가 또 왜 이러나 싶었던지 눈치를 살피며 그렇게 물었다. “데려가라.” “네?” 무슨 소리냐는 듯이 바라보는 데마에게 준상은 그녀가 본래 데리고 있던 펫 두 마리를 소환해 주었다. “어?” 데마는 갑자기 눈앞에 자신의 애마 소환되는 것을 보고 어리둥절하다가 그 옆에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하얗고 귀여운 토끼의 모습을 보고는 크게 당황했다. “루안?” 토끼는 주인이었던 데마가 이름을 부르자 폴짝 뛰어올라 그녀의 품에 안겼다. 준상은 갑자기 품에 뛰어는 토끼를 안아드느라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데마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취향이 꽤 소녀스럽군.” “이게... 도대체...” “펫으로 만들면 이미 소유하고 있던 펫과 인벤토리의 소유권이 내게로 넘어오기 때문이다.” “그런...” 그 말에 데마는 그대로 얼굴이 붉어지며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고, 그녀의 스승인 케이드는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으며, 아무 말 없이 버티고 서 있던 기사 가운데 하나가 움찔한 표정을 지었다. “하하하! 녀석, 그렇게 숨기고 싶어 하더니 결국 이렇게 들통 나 버리는 구나.” “스승님!” “괜찮아. 뭐 그럴 수도 있지. 귀여운 걸 좋아하는 소녀 취향의 기사단장이 있다고 문제될 것 없지 않겠나. 특별히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닌데.” “으으... 그만 두지 못하겠어요!” 준상은 그렇게 스승과 제자가 다시 투닥거리는 동안 다른 기사들 역시 펫으로 만들었다. 축하합니다! :애커드 브라바스를 새로운 펫으로 삼는데 성공했습니다. -현재 동시 소환... 축하합니다! :암샤드를 새로운 펫으로 삼는데 성공했습니다. -현재 동시 소환... 축하... 기사 넷과 그들에게 속한 일각수 넷, 그리고 그들이 가지고 있던 예속의 족쇄 3개와 다른 펫 하나가 다시 준상의 소유로 넘어왔다. 새로운 펫이 열 셋이나 늘어났는데 족쇄의 여분은 아직도 열 개나 남아 있는 상황. 다만 조금 불편한 점이라면 이전에는 각자가 자유롭게 소환할 수 있었던 일각수들을 이제는 영락없이 보통의 말처럼 데리고 다녀야만 한다는 것 정도다. 준상은 기사들과 그들의 일각수에 대한 정보를 확인하다가 마지막 기사에게서 얻은 펫의 정보를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펫 정보 이름 : 안델 종류 : 토끼 레벨 : 2Lv 경험치 : 32 등급 : Co... “...” 가만히 이 토끼의 원래 주인을 바라보자 그는 당황하며 준상을 향해 손짓을 해보이고 있었다. 누구나 하나쯤은 숨기고 싶은 비밀이 있는 법이라더니, 저 기사에게는 이 토끼가 그런 모양이다. 준상은 애원 섞인 그 시선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고, 스라드 펠퍼트라는 이름을 지닌 기사는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모두를 펫으로 만드는 작업이 끝나자 준상은 마지막 메시지에 나타난 펫 목록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 10.파티아 아란 사다트 [상세 정보] 11.카말 [상세 정보] 12.케이드 제드노스 [상세 정보] 13.데마 일리나 베리트 아렌 프라바 [상세 정보] 14.하샤트 [상세 정보] 15.루안 [상세 정보] 16.애커드 브라바스 [상세 정보] 17.암샤드 [상세 정보] 18.파시드 올랙 카미란 [상세 정보] 19.그란투르 [상세 정보] 20.아카투스 압데라 [상세 정보] 21.세타람프스 [상세 정보] 22.스라드 펠퍼트 [상세 정보] 23.마인가드 [상세 정보] 24.안델 [상세 정보] -펫 소환을 원하시면 해당 번호를 누르시고, 만약 소환을 원치 않으신다면 n을 누르세요 (1/2/3/4/5/6/7/8/9/10/11/12/13/14/15/16/17/18/19/20/21/22/23/24/n) _ 이 가운데 12번의 제노스부터 24번의 안델까지가 이번에 새로 추가된 펫들이다. 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부를 정도라고나 할까. 준상은 목록을 확인하고는 아직까지도 투닥거림을 멈추지 않고 있는 스승과 제자를 향해 말했다. “저택으로 돌아간다.” “네?” 제노스와 데마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비록 펫이 되기는 했어도 이렇게 쉽게 돌려보내 줄 거라고는 미처 예상치 못한 탓이다. 준상은 석문을 열고는 미심쩍어 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그들을 향해 말했다. “가기 싫은가?” 그들은 얼른 손을 내저었다. “아니오. 그럴 리가 있겠소.” 허겁지겁 제노스가 석문 안으로 들어가자 데마와 기사들이 뒤를 따랐고, 준상은 하라바와 헤네스를 먼저 들여보낸 다음 마지막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제노스의 저택 응접실로 무사히 돌아오자 준상은 제노스를 제외한 다른 이들에게 말했다. “나머지는 일단 돌아가도록. 필요한 일이 있다면 다시 부르겠다.” 데마와 기사들은 그 말을 듣자 일단 제노스를 바라보았고,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내 인사를 하고는 응접실에서 물러갔다. “저렇게 보내도 괜찮을까?” 하라바가 문득 걱정스런 말투로 그렇게 물었지만 준상은 대수롭지 않게 말을 받았다. “죽기 싫으면 알아서 하겠지.” “...” 오늘 그들이 나누었던 일들이 누설되면 가장 먼저 위협을 받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이다. 게다가 이미 펫으로 종속된 이상, 그들은 어디에 숨어 있더라도 준상의 손짓 한 번에 다시 불려올 수 밖에 없는 상황. 적어도 생각이 있다면 함부로 오늘 일을 발설하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일단 응접실의 의자에 다시 자리를 나누어 앉자 케이드는 시종을 불러 다시 다과를 내오게 하고는 은근한 목소리로 준상에게 말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제안을 하나 하고 싶소만.” “제안?” 부탁도 아니고, 질문도 아니고, 제안이다. 준상이 흥미를 보이며 시선을 자신에게로 돌리자 케이드는 이렇게 말했다. “높은 레벨의 능력자가 필요하다고 하시지 않았소?” “그랬지.” “사막 왕국으로 가는 길에 마침 적당한 자가 하나 있소.” “...” 그 말을 듣고 하라바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혼자만 당할 수는 없다 이거요?” 케이드는 하라바를 향해 마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것이 있으면 나누는 것이 인지상정 아니겠소.” 00373 트롤러 ========================================================================= 케이드의 말에 하라바와 헤네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앞서 요정계에서 나누었던 말로 미루어 보면, 케이드는 다소 어린애스러워 보이는 경향이 있기는 해도 제국에 대한 충성심만큼은 대단한 기사라 할 수 있었다. 물론 전투에 들어서면 그딴 거 없이 이성을 잃고 날뛰는 경향이 있기는 하지만, 그런 점은 사실 준상이나 하라바의 경우에도 간혹 보여지는 경향이니 딱히 그만의 단점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그런 케이드가 이런 식으로 말을 꺼냈다는 것은, 자신이 자리를 비웠을 경우 제국의 안위에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을 정도로 위협적인 인물이라는 뜻도 된다. 준상은 새로 내온 차를 한 잔 마시고는 하라바를 바라보았다. 케이드가 이렇게 생각할 정도의 인물이라면 하라바 역시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으리라 생각한 탓이다. 하라바는 준상의 시선을 받자 어렵지 않게 그와 같은 의도를 깨달았고 이내 생각에 잠기더니 이렇게 말을 꺼냈다. “어디 보자. 제국 제일의 기사께서 이렇게 말을 꺼낼 정도라면, 역시 산의 주인이 아닐까 싶은데.” “산의 주인이요?” 차와 함께 나온 과자를 깨물던 헤네스가 묻자 하라바는 케이드를 바라보았고, 그가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설명을 시작했다. “프라바 제국에서 사막 왕국으로 가려면 크게 세 갈래 길 가운데 하나를 통과해야 하지. 그 첫 번째가 사막의 길, 또는 초원의 길이고, 두 번째가 산의 길, 그리고 세 번째가 바다의 길이오. 산의 주인은 그 가운데 두 번째인 산의 길에 은거하고 있는 마법사지.” “그렇게 대단한 마법사가 있어요?” 헤네스는 물론이고 준상도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지금까지 이런 저런 사람들을 많이 보아온 그들이지만, 하라바나 케이드와 비견될 정도의 마법사는 리체스 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더욱이 리체스는 무려 일만년이라는 세월을 통해 그 경지에 이른 것이니 시드에 의해 능력을 부여받은 능력자나 귀환자로 한정지어 생각해 본다면 사실상 그 정도 수준의 마법사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셈이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마법사의 재능 자체가 희귀한 것도 한 가지 이유일 뿐만 아니라, 근접전에 취약할 수 밖에 없는 마법사의 특성상 적절한 상위 능력자의 지원 없이 초기에 살아남기 어려운 것도 한 가지 이유이다. 가뜩이나 수도 적은데 생존률마저 낮으니 보다 높은 경지로 올라가기 힘든 건 당연한 이치. 물론 이것은 지구가 아직 시스템의 개입이 시작된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어찌 되었든 지금 눈앞에 있는 하라바나 케이드와 동등한 수준의 마법사라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실전 경험이 부족하고 요정계 외의 장소에서는 가차 없이 막대한 패널티를 받을 수 밖에 없는 리체스의 상황을 생각해 보면, 칠성좌나 관리국과의 싸움에서는 오히려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도 있으니, 준상이나 헤네스가 큰 관심을 보이는 것도 무리가 아닌 셈이다. “그게... 실은 나로서도 그런 자가 있다는 소문만 얼핏 들은 정도라.” 하라바는 다소 부담스러울 정도로 준상과 헤네스가 관심을 보이자 얼른 케이드를 바라보며 그에게 바톤을 넘겼다. 물론 케이드는 준상이 관심을 보이자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받았다. “소문만은 아니오. 그 자가 산의 길을 점거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니까. 실제로 방금 전의 그 아이들도 몇 번이나 접촉을 시도했다가 산 밑에 잔뜩 깔려 있는 마법 함정들에 철저히 농락당하고는 겨우 도망쳐 나온 일도 있소.” “오오, 그거 정말 대단하군.” 하라바는 크게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레벨 50근처의 능력자로 이루어진, 그것도 전설의 동물이라 불리던 일각수를 탄 기사단이 얼굴도 못 보고 쫓겨나올 정도라면 확실히 보통의 능력자는 아니라고 봐야한다. 준상은 케이드의 말을 듣고 결정을 내렸다. 어차피 사막 왕국으로 가는 길에 존재한다면 한번쯤 들러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이라 판단한 것이다. 산으로 가는 길에 잔뜩 깔려 있다는 마법 함정이 다소 귀찮기는 해도, 준상에게는 리체스라는 강력한 조력자가 있으니 이것 또한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길은 아는가?” 사실상 반승낙에 가까운 대답이 준상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케이드는 반색하며 대답했다. “물론이오. 지금이야 방구석에 처박혀 있다지만, 예전에는 나도 제국을 질타하던 기사였으니까 그 정도는 어렵지 않지. 정 안 되면 방금 그 아이들 가운데 몇 명에게 휴가를 내라고 해도 될 일이고.” 그 말에 하라바가 웃으며 말했다. “이 사람, 이거 우리가 안 왔으면 심심해서 어쩔 뻔 했나 싶군.” “내가 생각하기에도 그렇소. 하하.” 하라바는 잠시 케이드와 웃으며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문득 이렇게 말했다. “잠깐.” “왜 그러시오.” “그런데, 일이 이렇게 되면 이 저택의 주인은 누가 되는 거요?” “그거야...” 케이드는 준상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아직까지 이름도 듣지를 못했군. 소개를 해주시지 않겠소?” “박준상.” “...” 너무나 간결한 대답. 들어본 적이 없는 형식의 다소 괴이하게 까지 느껴지는 이름은 그렇다 치더라도, 그가 듣고 싶었던 것은 그의 배경이나 정체에 관한 것이었기 때문에 케이드는 난처한 표정으로 하라바를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나도 자세한 건 모르오. 요정계를 다스리는 여왕과 저기 아리따운 아가씨를 둘 다 데리고 사는 복 받은 사내라는 것 정도 밖에는.” 그 말에 헤네스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말을 이었다. “박준상이라는 이름이 좀 생소하게 느껴지실 텐데, 정확히는 준상 쪽이 이름이고, 박이 성이에요.” “오, 그런 거였군.” “그리고, 제 이름은 헤네스 브레아입니다. 준상씨도 저도 이곳과는 다른 곳에서 왔어요.” “다른 곳?” “정확히는 다른 세계라고 하는 편이 옳겠죠.” “허...” 그러고 보면 확실히 준상이나 헤네스의 외모나 입고 있는 옷 같은 것도 여러모로 이곳과 다른 점이 많았다. 사실 이런 식의 얘기는 단숨에 믿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지만 이미 요정계라는 곳까지 다녀와 놓고 보니 다른 세계의 사람이라는 말도 큰 저항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다른 세계는 어떤 곳이오? 얘기를 좀 해주시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눈을 반짝이며 그렇게 말을 거는 케이드의 모습을 보자 헤네스는 데마나 그 외의 제자들이 다소나마 유연한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 그의 영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결국 그 날은 그렇게 늦은 시간까지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 시간이 지나 버렸다. “어쩐지 요정들과 잘 어울릴 것 같은 분이었어요.” “그런가.” 케이드가 정성껏 준비한 식사를 마친 그들은 간단하게 몸을 씻고 별채의 방에 자리를 잡았다. 이런 저런 큰 일이 있고 난 다음인데다, 모처럼 단 둘이 낯선 곳에서 밤을 보내게 되어서일까. 헤네스는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머뭇거리더니 준상에게 작은 술잔 하나를 내밀었다. 술잔을 건내 받은 준상은 그 안에 담겨진 갈색의 액체를 보며 물었다. “이게 뭐지?” 헤네스는 머뭇거리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그게... 전에 누리 백일잔치 하던 날 어머니가 주고 가신 건데... 남자한테 좋은 거라고...” “...” 사위 사랑은 장모라던가. 요며칠 동안 헤네스가 어쩐지 안절부절 못하던 것이 이것 때문인가 싶어 준상은 웃음을 짓고 말았다. 하기야 장모님 입장에서는 헤네스의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리체스가 귀여운 딸을 낳은 것을 보고 마음이 조급해질 수도 있었을 터. 어쩌면 리체스가 일부러 자리를 피해준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리와.” “...” 준상이 손짓 하자 헤네스는 못 이긴 척 그의 품에 몸을 기댔다. 그렇게 하룻밤이 지나고 다음 날. 준상은 다소 지친 기색의 헤네스를 데리고 어쩐지 개운한 표정을 지은 채 활기에 넘치는 하라바와 케이드를 응접실에서 마주했다. “바로 떠날 건가?” 하라바의 말에 준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길을 알고 있다면 머뭇거릴 이유가 없으니까. 그 전에 해둘 일이 있기는 하지만.” “해둘 일이라니?” 준상은 하라바와 케이드를 번갈아 바라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수확의 날에 대한 준비.” “...” 그 말이 준상의 입에서 흘러나온 순간 하라바와 케이드는 얼굴이 굳었다. 벨 라야가 소멸한 지금, 그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문제는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수확이라는 사태에 대한 준비였다.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을까.” 하라바의 말에 준상은 바로 대답했다. “수확이 시작되면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일까.” “그야... 시드 무력화 아니겠소.” 시드 무력화의 위력은 일전에 준상과 마주하면서 처절하게 실감했다. 본래의 신체 능력으로 돌아온 것 뿐임에도 불구하고 전신의 힘이 쭉 빠져 나간 것처럼 무겁게 느껴지던 그 탈력감은 솔직히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다. 하지만 준상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다.” “그럼?” “가장 큰 문제는 아무런 대책 없이 고립된다는 점이다.” “아...” 하라바와 케이드는 준상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퀘스트를 위해, 또는 사망했을 때처럼 강제로 전송되면 그들은 자신들의 그러한 상황을 알릴 방법조차 없이 시드 무력화에 의해 힘이 빼앗긴 채로 도축을 기다리는 가축 같은 신세가 된다. 더구나 그들이 끌려가게 되는 곳은 정확한 위치조차 파악하기 힘든 차원 사이의 빈 틈. 하나씩 끌어올려져 무력화된 상태로 그런 곳에 고립되어 버리면 제 아무리 강력한 힘을 지닌 능력자라도 손 쓸 도리가 없다. “대책이 있는거요?” “물론.” 준상은 그렇게 대답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 옆으로 나서며 하라바에게 말했다. “이리로.” 하라바는 일단 시키는 대로 준상과 마주서며 물었다. “뭘 할 셈이지?” 하지만 준상은 말 대신 행동으로 대답했다. 느닷없이 하라바의 몸을 자신쪽으로 휙 끌어당긴 것이다. “엇?” 당황해 하던 하라바는 얼른 몸을 일으키려다가 자신이 어느 틈엔가 요정계로 와 있음을 깨달았다. “여기는...”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데, 문득 등 뒤로부터 케이드의 몸이 부딪혀 온다. “어이쿠.” 당황하기는 케이드 역시 마찬가지. “여긴 요정계가 아닙니까?” 아이들이 낙서해 놓은 듯한 그 기묘한 풍경은 한번만 봐도 뇌리에 콕 박혀들 정도로 인상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케이드는 자신이 어느 틈엔가 요정계로 와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아챘다. “그러게 말이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하라바는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문득 반짝이는 무지개 빛깔의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아름다운 미녀가 허공을 조용히 날아오는 모습을 발견했다. 그녀는 바로 요정 여왕 리체스였다. “어서 오세요. 요정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그 아름다운 자태에 단숨에 넋이 나가 버린 케이드를 대신해 이미 안면이 있는 하라바가 물었다. “그가 어째서 우리들을 요정계로 보낸 겁니까?” 리체스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여러분의 신체에 정령의 문을 개통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정령의 문? 그게 뭡니까.” “본래 정령의 문은 생명력이 넘치는 커다란 숲에만 열 수 있는 것이지만, 여러분처럼 강인한 생명력이 넘치는 분들 역시 요정계로 통하는 문을 여는 것이 가능합니다. 방금 전에 여러분이 준상씨의 몸을 통해 이곳으로 들어온 것처럼요. 이것은 시드와는 무관한 능력이니, 여러분이 수확으로 인해 차원의 틈에 고립되더라도, 그 문을 통해 연락이나 구원을 보내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아...” 하라바는 그제서야 준상이 고레벨의 능력자들을 끌어 모으는 이유를 온전히 이해했다. 관리국이나 칠성좌들을 상대함에 있어서 가장 곤란한 것은, 그들의 본거지가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찾아낼 수 없는 곳에 숨겨져 있다는 점이다. 황자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좌표를 알아낼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그들의 본거지를 찾아내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그곳으로 끌려간 수확의 대상을 통하는 방법 뿐이다. “그 자식, 처음부터 우리를 미끼로 쓸 셈이었군.” 하라바는 혀를 차면서도 전혀 기분 나쁜 표정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복수의 길이 활짝 열렸다는 사실로 인해 그는 매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00374 트롤러 ========================================================================= 하라바와 케이드는 요정들이 모여 있는 장소로 안내를 받고는 곧바로 정령의 문을 개통하는 의식을 치렀다. 요정의 돌을 몸에 이식하고 한데 모인 요정들이 빙글빙글 춤을 추며 그들의 주위를 도는, 정말 효과가 있는 건지 의심스러운 의식이 치러지고 나자 그들의 몸에는 정령의 문이 개통되었다. “이거... 정말 놀랍군.” 케이드가 감탄한 기색으로 그렇게 말하자 하라바가 대답했다. “그러게 말이오. 이들이 신비한 종족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런 일이 가능할 줄이야.” “그게 아니라, 이렇게 귀엽고 천진난만한 종족이 존재하다니... 혹시 이곳은 천국이 아니오?” “...”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지 않냐고 말하려던 하라바는 격한 감동을 온 몸으로 드러내고 있는 케이드를 보고는 그냥 입을 다물어 버리고 말았다. “모든 의식이 끝났습니다. 돌아가는 길을 안내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라바와 케이드는 다시 리체스의 안내를 받아 준상의 몸에 마련된 정령의 문을 통해 저택으로 돌아왔다. 요정계의 신비로움에 취해 있던 케이드는 저택으로 돌아오자 잠시 아쉬운 기색을 보였지만 준상이 곧바로 길을 떠날 준비를 하자 그를 급히 불러 세우며 말했다. “그 애들에게도 정령의 문을 열어 주는 것이 좋지 않겠소?” “누구 말인가.” “내 제자들 말이오.” “...” 그들도 레벨 50이긴 하지만 수확의 대상이 되기에는 좀 이르지 않을까 하는 것이 준상의 생각이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지 않소? 일부러 수확의 구간을 레벨 50으로 잡았다는 건 그러한 레벨의 시드에도 뭔가 용도가 있다는 의미 역시 될 수 있으니 말이오.” “일리가 있군.” 이를테면 준상에게 사로잡힌 황녀처럼 속옷을 만들어 입는다든가 하는 식의 용도도 확인한 바가 있으니 케이드의 말도 제법 설득력이 있었다. 결국 준상은 데마와 다른 네 명의 기사들 역시 불러들여 정령의 문을 개통하는 의식을 치르게 했다. “요정계로의 왕래는 우선 나에게 연락을 해서 허락을 받아야 하는 것을 잊지 말도록.” “여부가 있겠소이까. 하하.” “...” 정말 납득을 한 것인지 뭔가 의심스러운 모습이었지만 허허 거리는 모습을 보니 뭔가 더 말을 하는 것도 귀찮아져서 준상은 입을 다물어 버리고 말았다. “산의 주인에게 가신다구요?” “그래.” “음...” 데마는 자신 역시 따라 나서고 싶다는 기색이 완연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으며 그들을 전송 했다. “몸조심 하시구요. 나이도 있으시니.” “알았다.” 데마의 전송을 받으며 성도 쿤티를 빠져 나온 일행들은 병사들의 시야에서 벗어나자 숲으로 들어갔고, 준상은 그곳에서 별해파리 카말을 불러내었다. “오오! 이건 정말 아름답군.” 케이드가 조금은 과장된 표정으로 그렇게 탄성을 터뜨리자 하라바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원래 내 펫이었소.” “그러셨소? 하하.” 별해파리는 대낮인데도 아름답게 반짝이며 빛을 발하고 있었지만, 그들이 모두 탑승하고 나자 은신 능력을 사용해 외부의 다른 이들로부터 모습을 감추었다. “어느 쪽이지?” 주위를 둘러보며 기묘한 별해파리 내부의 환경에 감탄을 금치 못하던 케이드는 준상의 물음에 얼른 정색하며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이쪽의 길을 따라 쭉 가면 됩니다. 갈림길이 몇 군데 있으니 그때 그때 바로 알려드리겠소.” “알았다.” 별해파리는 공기를 모았다가 뿜어내는 듯한 기이한 동작과 함께 천천히 속도를 내기 시작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 속도는 더욱더 빨라졌다. 반투명한 별해파리의 외벽을 통해 주위의 광경이 빠르게 지나쳐 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이런 식으로 하늘을 날아본 적이 없는 케이드로서는 너무나도 신기한 일이었다. “데마 양이 왜 그렇게 걱정인지 조금은 이해가 가는군.” 어쩐지 철 모르는 아이를 데리고 시골 나들이를 나온 듯한 느낌이라 하라바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렇게 중얼거렸고, 옆에서 듣고 있던 헤네스 역시 그 말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훨씬 빠른 별해파리의 속도 덕분에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산의 길이라 불리우는 거대한 협곡의 입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기부터는 내려서 가야 할 겁니다.” “어째서?” “하늘에도 마법 함정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 별해파리의 은신 능력을 믿고 그대로 강행할 것인가, 아니면 케이드의 조언에 따라 이곳에서 내려서 계곡을 거슬러 올라갈 것인가. 준상은 잠시 고민하다가 괜히 모험을 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 케이드의 말을 따르기로 결정을 내렸다. 지상으로 내려가자 준상은 별해파리를 돌려 보내고는 요정계에 있던 리체스를 불러내었다. “부르셨어요.” 준상의 부름을 받은 리체스는 정령의 문을 통해 바로 모습을 드러냈다. 케이드는 작고 귀여운 요정의 모습을 한 리체스를 보고 다시 눈이 휘둥그레졌지만, 준상은 그의 반응을 무시하고 이렇게 말했다. “이곳 위쪽으로 마법 함정이 있다고 하더군. 확인해 줬으면 좋겠다.” “그 정도야 어렵지 않죠.” 연구 때문에 한창 정신이 없는 와중에 불려왔음에도 불구하고 리체스는 귀찮은 기색 없이 마법을 사용해 길 주위의 마법 함정에 대한 탐지를 실시했다. “이건... 대단하네요.” “그래?” “네. 수준도 대단하고... 이 마법 함정들을 만든 자가 이 길 저편에 있는 건가요?” “아마도.” 준상의 대답에 리체스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다시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저도 잠시 동행을 해야겠어요. 이 정도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자라면 한 번쯤 만나보고 싶어지네요.” “나야 상관없지. 좋을 대로 해.” 리체스는 앞장서서 그들의 앞을 가로 막고 있는 각종 마법 함정들을 하나 하나 해체했다. 처음에는 그 수가 그리 많지 않았지만, 산의 길에 완전히 들어서자 천하의 리체스도 일일이 함정을 해체하느라 시간이 제법 걸릴 정도였다. “이건 정말 대단하네요.” “그 정도인가?” “네. 마법의 난이도는 둘째 치고 그 발상의 참신함이 정말 놀라워요. 번뜩이는 면이 있다고 해야 할까요.” 다른 건 몰라도 리체스는 마법에 대해서는 이런 식의 칭찬을 잘 하지 않는다. 비록 마법을 전수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진세아나 정다빈이 그녀에게 얼마나 야단을 맞았던가. “아마도 이 마법사는 마법 부여가 특기인 것 같네요.” “마법 부여?” “네. 마법 함정을 만드는 것은 결국 물품에 마법 능력을 부여하는 기술과 일맥 상통하거든요. 더구나 이 정도로 다양한 조건을 설정할 정도라면 상당한 수준의 마법사라고 봐야겠죠.” “그거 잘됐군.” 리체스도 뛰어난 마법사이긴 하지만 교류 없이 혼자서 오랫동안 마법을 연구해온 데다, 실전 경험마저 부족한 탓에 의외의 분야에서 미숙함을 드러내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물론 산의 주인은 스스로 마법의 경지를 개척한 리체스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무리일 수도 있었지만, 그것은 다시 말해 능력자들이 그런 식으로 마법을 사용할 수 있도록 계통을 정리한 칠대 황가나 칠성좌, 그리고 관리국의 마법 지식을 미리 엿볼 수 있는 근거가 될 수도 있었다. 앞으로 그들과 싸워나가야 하는 준상으로서는 이런 지식 하나 하나가 큰 재산일 수밖에 없다. 아무튼 그런 식으로 함정을 해체하며 전진하다 보니 예상보다 더 많은 시간이 걸렸고, 마침내 산의 주인의 근거지로 보이는 동굴 근처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날이 거의 저물어 있었다. “휴... 정말 엄청나네요. 이런 식으로 함정을 깔아 두려면 시간이 만만치 않게 걸렸을텐데.” 리체스는 조금 힘에 겨운지 지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목적지가 멀지 않았다 싶었는지 다시 앞장 서서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준상은 정령들을 불러내 주위를 밝히고는 리체스의 뒤를 따랐다. “어라?” “왜?” “이곳엔 함정이 없네요. 밖에는 질릴 정도로 많더니.” “그래?” “아무래도 동굴이 무너질까봐 그런 건가 싶긴 한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 조심하세요.” 준상은 뒤따르는 하라바와 케이드를 향해 말했다. “들었나?” “들었다.” “저도 들었소이다.” 하지만 그렇게 주의를 준 것이 무색하게 정말로 동굴 안에는 빛을 밝히기 위한 몇 가지 기초적인 마법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함정이 없었다. “다 왔어요.” 리체스는 나무로 된 작은 문 앞에 도착하자 그렇게 말하고는 곧바로 그곳에 걸려있는 잠금 마법을 해체해 버렸다. “들어갑니다.” 리체스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앞장서서 문 안쪽으로 날아들었다. 그때, 한 줄기 빛이 그녀를 향해 날아들었다. “이크!” 리체스는 얼른 방어 마법을 펼쳐 자신을 향해 날아든 빛을 막아냈다. “이건... 전격 마법?” 그렇게 말하며 마법이 날아든 방향을 바라보던 리체스는 이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고, 그녀의 뒤를 바짝 따르던 준상과 헤네스 역시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어린애?” 그곳에는 조막만한 키의 안경 쓴 꼬마 하나가 겁에 질린 표정을 지은 채 나무로 만든 조악한 지팡이를 들고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 어린애 아니거든요!” “몇 살인데.” “스물 하나요.” “...” 리체스와 준상은 자신도 모르게 헤네스를 바라보았다. “왜 절 보는데요.” 헤네스의 말에 리체스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아니... 저 외모에 헤네스보다도 연상이라는 말이 어쩐지 믿기지가 않아서.” “...” 뒤따라 들어오던 케이드가 작달막한 체구의 꼬마를 보고는 잠시 턱을 긁적이더니 이렇게 말했다. “아인종이군. 들어본 적이 있소. 보통의 인간보다 절반 정도의 신장에 손과 발, 그리고 눈이 큰 아인종. 모자를 쓰긴 했지만 머리를 잘 살펴보면 동물의 귀가 달려 있을 거요.” “정말이냐?” 준상의 말에 꼬마 마법사는 얼른 지팡이를 그들에게 겨누며 외쳤다. “당신들... 역시 노예 사냥꾼인가요?” 그 말을 들은 하라바는 쓴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건 아니지만, 어떤 면에서는 노예 사냥꾼보다 더 악독하긴 하지.” “그게 무슨...” 긍정도 아니고, 그렇다고 부정도 아닌 그 미묘한 대답에 꼬마 마법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이렇게 외쳤다. “어쨌든... 이곳은 내 집이니 어서 나가요! 그렇지 않으면 혼을 내줄 거에요!” 하지만 그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준상이 그 앞으로 나섰고, 마법사는 자신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지팡이에 부여되어 있는 화염 마법을 발동해 버렸다. “앗!” 꼬마 마법사는 자신이 발동해 놓고도 당황해서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화염 마법은 준상의 몸에 닿는 순간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렸다. “어?” 화염 그 자체를 빨아들이는 듯한 모습에 꼬마 마법사가 놀란 표정을 지을 찰나, 준상의 손이 그의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특기 가운데 하나인 포박이 발동한 것이다. 반응하고 말고 할 틈도 없는 신속한 기습이었지만, 마법사의 몸에 닿는 순간 준상은 강력한 전격의 기운이 손을 타고 몸에 전해지는 것을 느꼈다. “읏, 이건...” 시드 무력화를 발동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저항 능력이 발동해서 큰 피해를 입지는 않지만 일순 몸이 멈칫할 정도의 효과는 충분히 있었다. 리체스는 얼른 앞으로 나서며 이렇게 말했다. “보호 마법이에요. 신체 접촉시 자동으로 발동 되도록 아이템에 부여되어 있는 것 같은데요. 잠시만요.” 꼬마 마법사는 얼른 그 틈을 타 얼른 준상에게서 벗어나려 했지만, 곧이어 날아든 리체스의 마법에 옴짝달싹 못하는 신세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럴 수가. 어떻게?” 다른 수단도 아니고 마법에 의해 결박 되어 버렸다는 사실을 깨닫자 꼬마 마법사는 다시 한 번 크게 당황하고 말았다. “후후, 꼬마야. 제법 솜씨가 좋기는 하지만, 너랑은 마법을 연구한 햇수가 다르단다.” “그런...” 리체스는 그런 꼬마 마법사의 앞으로 다가가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친절하게 설명해 주고는 얼른 상대가 몸에 두르고 있는 아이템들의 효과를 일시적으로 차단해 버렸다. “어? 어?” 평범한 보통의 마법사였다면 요정계 밖에서 능력에 제한을 받는 리체스 쪽이 오히려 불리했겠지만, 이 꼬마 마법사의 경우에는 미리 만들어 놓은 다양한 아이템이나 함정을 통해 자신의 몸을 보호하는 쪽이라, 아무래도 마법을 사용하는 순발력 같은 부분에서 크게 뒤지는 면이 있었다. 꼬마 마법사는 갑자기 몸에 두르고 있던 모든 아이템들의 능력이 차단되자 공황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준상은 전격의 충격으로 아직까지 저릿한 감각이 남아있는 손을 잠시 쥐었다 폈다 해보이다가, 손을 뻗어 그런 꼬마 마법사의 목을 움켜 쥐고는 품에서 예속의 족쇄를 꺼내며 말했다. “받아들여라.” “...” 꼬마 마법사는 포박이 발동해 몸에서 힘이 쭉 빠져 나가자 이제 울상이 되고 말았다. 노예 사냥꾼을 피하기 위해 이런 외진 산속에 틀어박혀 살고 있었는데, 그런 노력이 하루 아침에 물거품이 되어 버린 탓이다.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인 채 금방이라도 울어 버릴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던 꼬마 마법사는 준상의 손에 쥐어진 것을 보고는 다시 깜짝 놀랐다. “근데... 이거 예속의 족쇄 아닌가요? 능력자한테는 소용 없을텐데...” “그래서?” “...” 영문을 알 수는 없었으나 결국 꼬마 마법사는 울먹이며 준상이 내민 예속의 족쇄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00375 트롤러 ========================================================================= 한 줄기 빛과 함께 준상의 손에 쥐어져 있던 예속의 족쇄가 사라지자, 꼬마 마법사는 어느 틈엔가 자신의 발목으로부터 전해지는 족쇄의 느낌에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 준상은 얼굴을 찌푸리고는 휴대폰에 들어온 메시지를 확인했다. 꼬마 마법사의 이름은 후샤니 빈니하. 케이드와 마찬가지로 펫은 소유하지 않은 상태였고, 대신 펫 목걸이만 7개를 지니고 있었다. 노예 사냥꾼을 두려워했던 것으로 미루어 보면 예속의 족쇄를 채워 강제로 자신에게 속하게 만드는 행위 자체를 싫어했던 것이 아닐까 싶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데없이 들이닥친 불청객에게 이런 식으로 강제 예속 당하는 신세가 되었으니 울분이 터져 나올만도 하다. 준상은 펫 정보를 확인해 보았다. 펫 정보 이름 : 후샤니 빈니하 종류 : 불명 레벨 : 75Lv 경험치 : 503799 등급 : 불명 분류 : 복합 성장 : 일반(극대) 속성 : 바람 스킬 : 마법 58Lv, 부여 74Lv [정보] 호감도 : 40 충성도 : 40 카드슬롯 : 10개 [정보] (소유카드수:불명) 설명 : 불명. 아인종임에도 불구하고 라니족 자매와는 달리 종족명이나 설명이 따로 표시되지 않고 있다. 이런 현상은 하라바나 케이드, 데마처럼 능력자였다가 펫이 되었을 경우에 나타나는데, 아마도 시스템의 오류나 착오 같은 현상이 아닐까 하고 준상은 생각했다. 레벨은 75로 케이드보다 조금 낮은 수준이고, 특이하게도 마법의 레벨이 낮은 대신 부여의 레벨이 높게 나타나 있었다. “그만 내려 주세요.” 리체스의 말에 준상은 후샤니의 목을 움켜쥐고 있던 손을 풀어 주었다. 후샤니는 바닥에 내려서자 그대로 털썩 주저앉아 엉엉 울기 시작했다. “뚝!” “...” 하지만 눈앞에서 엄한 표정을 짓고 있는 리체스의 모습에 후샤니는 울음을 멈추고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마법사는 그렇게 시도 때도 없이 울고 그러는거 아니야.” “마법사... 세요?” “그래.” 후샤니는 작은 몸집의 요정 여왕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그녀의 발목에 채워져 있는 족쇄를 보고는 이내 다시 울먹이기 시작했다. “마법사님도 저 사람한테 사로 잡혀서 예속되어 버린 건가요?” “음... 그게...” 리체스는 갑작스런 후샤니의 말에 대답할 말이 궁해져 버렸다. 간단하게만 대답하자면 후샤니의 말이 맞긴 했지만, 준상과의 사이에 있었던 일을 하라바나 케이드가 뻔히 지켜보는 와중에 일일이 늘어놓기는 뭔가 난감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크흠. 아무튼, 그만 울고 일어나. 어엿한 마법사가 그게 뭐니?” “네...” 후샤니가 눈치를 보며 몸을 일으키자, 리체스는 준상을 돌아보며 말했다. “얘는 일단 제가 요정계로 데리고 갈게요. 가서 좀 씻기고, 옷도 갈아입히고, 지금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대충 설명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아요.” 워낙 겁을 먹은 눈치라 일일이 달래가며 설명을 하는 것도 상당히 귀찮은 일이었기 때문에 준상은 선선히 승낙했다. “좋을대로 해.” “그럼 정령의 문 좀 열어주세요.” 준상이 자신의 몸에 심어진 정령의 문을 열자 리체스는 잔뜩 겁을 먹은 후샤니의 팔을 억지로 잡아 끌어 요정계로 인도했다. 그들이 요정계로 모습을 감추자, 준상은 후샤니가 머물고 있던 동굴 안을 살펴보았다. 중요한 물품들은 인벤토리에 보관중인 모양인지 나무로 대충 얽어 만든 조악한 침상과 책상 같은 것 정도가 고작이었다. 혹시나 해서 몽몽이를 불러 보았지만, 특별한 것은 발견할 수 없었다. 준상은 동굴 안의 확인이 끝나자 멀뚱히 지켜보고 있던 케이드를 향해 다시 말했다. “근처에 다른 고레벨 능력자는 없나?” “글쎄올시다.” 그가 난처한 기색을 보이자, 하라바가 씩 웃으며 말했다. “있다. 게다가 저런 맹탕도 아니고 실력이 철저하게 검증된 알짜배기가. 성격이 좀 뭐 같은 것이 탈이긴 하지만, 너라면 못 다룰 이유가 없겠지.” 그 정도만 들어도 그가 언급하고 있는 것이 누군지는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세 장군을 말하는 모양이군.” 준상의 말에 하라바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케이드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좋은 것이 있으면 나누는 것이 인지상정 아니냐고 누가 그러더군.” “크흠, 제 얘기시구려.” 케이드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받자 하라바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정령의 문이라는 거... 꽤 쓸만할 것 같기도 하고, 게다가 젊었을 때는 안 그랬는데 그놈들도 나이를 먹으니 영 뻣뻣해져서 한번쯤은 콧대를 꺾어 놓을 필요도 있겠다 싶더군.” “자기가 손을 쓰기는 곤란하니 저 분의 손을 빌리겠다는 거요?” “말하자면 그렇다는 얘기요. 하하.” 준상은 그들의 대화를 한 귀로 흘리며 동굴을 빠져 나간 다음 다시 별해파리 카말에 탄 채 사막 왕국으로 향했다. 별해파리를 타고 어딘가로 향하는 것은 준상이나 헤네스도 이번이 처음. 기껏해야 갑가오리 정도의 속도이겠거니 싶었지만, 예상보다도 훨씬 빨라서 둘은 속으로 조금 놀라고 있었다. 이 정도라면 지구에서 사용하는 항공기와 비교해도 그리 떨어지지 않을 정도인데다, 성역이나 은신 능력까지 감안하면 어지간한 항공기의 성능과는 비교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였다. 만년설이 새하얗게 뒤덮인 산맥을 돌파하자 한동안 푸른 숲이 이어지는가 싶더니 초원과 황무지를 지나 사막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부터는 내가 안내를 하지.” 사막 왕국의 건국왕이라는 말이 거짓은 아니었던 모양인지 딱히 이정표가 될 만한 것이 없어 보임에도 불구하고 하라바는 방향을 척척 짚어 주었다. “일단 동쪽에서 가장 큰 오아시스인 라스둔으로 먼저 가려고 하는데 괜찮겠지?” “이유는?” “그곳에 세 장군 가운데 하나인 틸리오스가 있기 때문이지.” 하라바의 말에 푹신한 바닥에 반쯤 드러누워 있던 케이드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그 신궁이라 불리는 틸리오스 말이시오?” “신궁은 얼어 죽을. 멀리서 활이나 찔끔 찔끔 쏘는 소심한 놈팽이일 뿐이오.” “하하.” 그렇게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별해파리 카말은 빠른 속도로 사막을 질주하고 있었고,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거대한 산을 등지고 있는 오아시스에 도착했다. “도착했군. 저기 산 밑에 보이는 흰색 건물이 틸리오스의 거처니 그리로 가지.” 준상은 하라바가 가리킨 저택의 상공으로 별해파리를 이동시키고는 다시 물었다. “그대로 내려가면 되나?” “일단 별해파리부터 드러내는 편이 좋겠군. 이 녀석은 내 상징과도 같은 탈것이니까 보는 순간 알아서 모시러 나올거다.” 준상은 하라바의 말대로 별해파리의 은신 상태를 먼저 해제했다. 그러자 잠시 아래쪽이 어수선해지는 듯 싶더니 한 무리의 무장한 사람들이 저택 앞으로 몰려 나왔다. “어쩐지 환영 인파로는 보이지 않는구려.” 케이드가 아래쪽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하자, 하라바는 신경 쓸 것 없다는 듯이 앞서서 아래쪽으로 내려가며 말했다. “내가 사라진지 꽤 되었으니 이쪽에서도 난리가 났겠지. 모두들 따라오시오.” 하라바가 앞장서서 별해파리의 촉수를 타고 아래로 내려가자 몰려나와 있던 병사들이 그를 알아보고 일제히 머리를 조아렸고, 이내 병사들을 헤치고 커다란 철궁을 손에 든 훤칠한 중년 남자 하나가 하라바를 향해 다가왔다. “여어, 틸리오스. 별 일 없었지?” 하라바가 다가서며 그렇게 말을 건네자 틸리오스는 얼굴을 찌푸리며 일단 고개를 한 번 조아리고는 다른 사람들이 듣지 못하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너 이 자식! 어딜 가면 간다고 말이라도 하고 돌아다녀야 할 것 아니야! 리스카가 얼마나 걱정했는 줄 알아?” 리스카는 틸리오스의 여동생이며 동시에 하라바의 세 부인 가운데 한 명이기도 하다. “크흠. 이쪽도 나름 사정이란 것이 있었거든. 일단 조용한 곳에 가서 자세한 얘기를 하도록 하지.” “...” 틸리오스는 하라바의 뒤를 따라 별해파리에서 내려오는 세 명의 이방인을 보고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내 말없이 그들은 자신의 거처로 안내했다. 흰색의 저택 안쪽으로 들어가 양털로 짠 카페트가 깔린 큰 방에 들어서자 하라바는 뒤따라 들어오는 준상과 헤네스, 그리고 케이드에게 자리를 권했다. “일단 모두 앉으시오. 나는 잠시 이 녀석과 얘기를 나눠야 할 것 같으니.” “...” 모두가 그렇게 자리를 나눠 앉자 시종들이 차를 내왔다. 하라바는 일단 차로 목을 축이고는 시종들이 물러가자 틸리오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번에는 나로서도 불가피한 일이었다. 게다가 하마터면 꼼짝 못하고 죽을 뻔했지.” “암살자였나?” 틸리오스는 굳은 표정으로 물었지만 하라바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제 와서 암살자 같은 것이 날 어쩔 수 있다고 생각하나?” “그거야 그렇지만, 또 모르는 일이지. 능력자를 암살자로 고용했을 수도 있고.” “아쉽게도 이번 일은 그리 간단하지가 않아.” 하라바는 천천히 자신이 겪었던 일을 틸리오스에게 털어 놓았다. 이런 저런 일이 많았던 탓에 이야기가 끝났을 때는 어느새 날이 완전히 어두워진 뒤였다. “음...” 틸리오스는 하라바의 말이 끝난 뒤에도 믿기 어렵다는 듯한 표정을 지은 채 한동안 말이 없다가 저녁 식사를 어찌할지 묻기 위해 찾아온 시종의 말을 듣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나중에 다시 부를테니 일단 물러가라.” “네.” 시종을 물린 틸리오스는 식어버린 찻잔을 마저 비우고는 이렇게 말했다. “어쩐지 실감이 가질 않는군. 뭔가 뜬 구름 잡는 얘기 같다고 해야 하나.” 하라바는 쓴웃음을 지으며 순순히 그 말에 동의했다. “직접 경험한 나조차도 황당한데 네 놈이야 오죽하겠나.” 틸리오스는 잠시 뭔가를 더 생각하더니 이내 지루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준상과 헤네스, 그리고 구석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케이드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찌 된 일인지는 대충 알겠네. 그런데 저들은 또 누군가.” “아, 내 얘기만 하다보니 깜짝 소개를 못했군. 저쪽에서 한창 지루하다는 기색을 풀풀 풍기고 있는 저 친구가 날 구한 박준상이라는 사람이고, 그 옆의 갈색 머리 미녀가 그의 반려인 헤네스양이야. 그리고 저기서 정신없이 졸고 있는 이가 여명의 횃불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제국 제일의 기사 케이드일세.” “케이드? 바로 그 케이드 제드노스 말인가?” 깜짝 놀란 틸리오스의 말에 졸고 있던 케이드는 화들짝 놀라 깨며 얼른 입가에 흐른 침을 닦았다. “음, 부르셨소?” 하라바는 그 모습을 보며 웃음을 지었다. “저렇게만 보면 좀처럼 믿기 어렵겠지만 그 케이드경이 맞아.” “흠...” 틸리오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하라바에게 물었다. “대충 어떻게 된 일인지는 알겠다. 그런데 왕도로 돌아가기 전에 날 먼저 찾은 것은 무슨 이유지?” “아...” 하라바는 씩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네 놈에게 좋은 경험을 선사해 주려고.” “무슨 소리지?” “내가 불한당 놈들에게 납치되었던 얘기는 이제 이해했지?” “물론.” “은혜는 열 배로, 원한은 백 배로 갚는 것이 사막의 율법. 그래서 말인데, 내 복수를 위해 네가 좀 도움을 줘야겠다.” 틸리오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는지 경계하는 기색을 보이며 하라바에게 물었다. “구체적으로 무슨 도움을 말하는 거지?” 하라바는 준상을 가리키며 말했다. “일단 그와 싸워봐. 이기든 지든 나머지는 그 이후에 말해 주도록 하지.” 00376 트롤러 ========================================================================= 틸리오스는 준상을 살펴 보았다. 하라바의 얘기대로라면 납치당했을 때 그를 구해낸 이라는 것 같은데, 겉보기로도 그렇고 통찰 같은 능력을 사용해도 자신보다 강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특이한 것이 있다면 하라바나 케이드, 그리고 자신과 같은 강자들이 한데 모여 있는 와중에도 긴장하기는커녕 지루한 기색을 보이고 있다는 점. 하라바는 명실상부한 세계 최강의 사나이이며, 제국 최강의 기사인 케이드는 말할 것도 없고, 자신 역시 뇌전의 신궁이라 불리는 절대 강자 가운데 한 명인데 그런 사람들 속에서도 태연하게 있을 수 있다는 것은 무언가 절대적으로 믿는 바가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네놈, 무슨 꿍꿍이냐.” 얼굴을 찌푸린 채 하라바를 돌아보며 말하자, 그는 씩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꿍꿍이랄 것은 없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뭔데?” “우리가 죽거나 사라지면, 이 왕국...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 틸리오스는 난데없는 친우의 진지한 표정에 입을 다물었다. “오면서 보니까, 마을 외곽이 꽤 어질러져 있더군.” “봤나.” “봤지.” “...” 하라바는 씁쓸한 표정으로 차를 한 모금 들이키고는 다시 말했다. “고작 며칠 자리를 비웠는데 이 모양이다. 그런데 만약 나는 물론이거니와 너희들 모두가 일시에 자리를 비우는 사태가 일어난다면 어찌될까.” “그건...” “물론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지. 보통은 말이야.” “...” “하지만 수확의 날이란 것이 실제로 일어나게 되면, 그런 상황이 실제로 벌어지게 될 테고, 그렇게 되면 외곽이 조금 어질러지는 정도로는 끝나지 않겠지.” “음...” 사막은 혹독한 곳이다. 때문에 강한 자가 아니라면 소유할 권리를 갖지 못한다. 지금 세워진 사막의 왕국은 하라바와 그의 세 친구로 인해 존재할 수 있는 나라. 하라바는 요며칠 사이 요정계나 프라바 제국의 모습을 보며 자기가 세운 나라의 한계를 다시 한 번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틸리오스는 잠시 턱을 괸 채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다. 하지만 저 젊은이와 겨루는 것이 그것과 무슨 상관이 있지?” 하라바는 그 말을 듣고는 씩 웃으며 대답했다. “그 이후는 이기든 지든 나중에 얘기해 주겠다고 했잖은가.” “끙.” 틸리오스는 앓는 소리를 내며 하라바를 노려보더니 이내 무릎을 툭툭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할 수 없지.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겠지만 네놈 장단에 어울려 주도록 하마.” “후후, 잘 생각했네.” “웃지마. 짜증나니까. 하여튼 잠깐 못 본 사이에 더 능청맞아져서는.” 틸리오스는 그렇게 투덜거리고는 지루한 준상을 향해 말했다. “무슨 영문인지는 모르지만, 내 왕께서 자네와 싸워보라니 할 수 없지. 일어나게.” 준상은 대답대신 하라바를 바라보았다. 고글로 인해 얼굴이 가려진 탓에 어떤 표정인지 제대로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풍기는 분위기를 보니 눈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듯 했다. 하라바는 어색하게 웃으며 눈짓을 해보이다가 틸리오스가 자신을 돌아보자 얼른 모르는 척 표정을 지웠다. “...” 분명히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 같긴 한데, 그게 뭔지 알수가 없으니. 틸리오스는 뭔가 찝찝한 느낌이 들었으나 그렇다고 한번 입 밖에 내뱉은 말을 되돌리는 것은 그의 신조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어서 일어나래도.” 그래서 짜증이 담긴 말투로 다시 재촉했고, 그제서야 준상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자리에서 일어난 준상은 대뜸 이렇게 물었다. “여기서?” “음...” 이 방이 제법 넓기는 했지만 활을 주무기로 사용하는 틸리오스로서는 아무래도 적당한 장소라고는 보기 어려웠다. 게다가 하라바가 싸움을 권할 정도라면 상대도 그만한 실력이 있을 것은 분명한 일. 공연히 좁은 공간에서 싸웠다가 모처럼 공들여 지은 저택이 무너지기라도 하면 손해가 이만 저만이 아니다. “따라오게.” “...” 틸리오스가 안내한 곳은 저택 뒤편의 활 연습장이었다. 활을 쏘는 곳으로부터 표적까지의 거리는 백 보. 신궁 틸리오스의 개인 연습장 치고는 상당히 좁은 편이지만, 철모르는 애송이를 상대하기엔 마침 적당한 넓이가 아닐 수 없다. 준상과 틸리오스가 적당히 거리를 벌려 서자, 하라바가 갈색머리 미녀와 졸고 있던 케이드를 데리고 뒤따라 나왔다. “그럼, 시작해 볼까.” “...” 틸리오스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애병인 거대한 철궁을 준상에게 겨누었다. 그의 활은 마수의 뿔과 가죽, 그리고 힘줄 등을 가공해 만든 것인데, 소재를 보호하기 위해 겉면을 철로 감아 놓은 탓에 철공이라고 불릴 뿐이므로, 정확히 말할다면 마수궁이라고 부르는 편이 더 어울릴 만한 무기였다. 이런 재료로 만든 활이다 보니 일반인은 감히 시위를 당기기도 어려울 정도. 허나 그런 활임에도 불구하고 틸리오스는 느긋하다 싶을 정도로 천천히 시위를 당겨 준상을 겨누고 있었다. 준상은 그 모습을 보고는 가만히 손목에 채워진 방어복을 활성화했다. 마수의 가죽으로 만들어지고 여기에 리체스의 마법이 가미된 다음, +10으로 강화된 기이한 형상의 방어복이 순식간에 준상의 몸을 감싸자 틸리오스의 눈에 이채가 발했다. 마법 갑옷인가. 설마 저것을 믿고 자신에게 덤빈 것인가 싶은 생각이 들어 힐끗 하라바를 바라보았지만, 그 역시 조금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영문인지. “쯧.” 틸리오스가 찝찝한 마음에 혀를 차자 준상이 그를 향해 발걸음을 움직였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오는 준상의 모습을 보자 틸리오스는 반사적으로 시위에 걸어 놓았던 화살을 쏘았다. 하지만 그가 시위에서 손을 놓는 순간, 갑자기 기이한 탈력감이 전신에 휘몰아치는 바람에 겨냥이 빗나가 버리고 말았다. “으윽!” 활은 잘못 쏘게 되면 자신이 다칠 수도 있는 무기. 하물며 마수의 그것으로 만든 이 활의 강도와 탄성은 다른 보통의 활에 비할 바가 아닌지라 틸리오스는 튕겨지는 활시위를 주체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바로 그 틈을 노려 준상이 틸리오스의 코앞으로 쇄도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에, 틸리오스는 일단 거리를 벌리고자 단거리 도약의 스킬을 발동했다. 하지만, 그의 의지와는 달리 스킬은 발동되지 않았다. “이건?” 당황한 틸리오스의 입에서 그와 같은 말이 흘러나오는 순간 준상의 주먹이 그의 복부에 틀어 박힌다. “컥!” 틸리오스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몸에 틀어박힌 주먹을 바라보았다. 그가 지닌 방어력과 물리 저항력을 감안한다면, 이런 정도의 주먹질에 고통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설마. 이 자는 자신이 지금까지 쌓아온 레벨과 스킬 등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단 말인가.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틸리오스는 철궁으로 준상의 머리를 후려쳤지만, 그의 몸을 감싸고 있는 기이한 형태의 방어복은 그런 식의 타격 정도는 우습게 씹어먹을 정도의 방어력을 지니고 있었다. 준상은 말없이 주먹을 휘둘렀다. 퍽! 퍼퍽! 오랜만의 맨손 싸움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전해지는 타격감이 제법 손에 착착 감기는 느낌이다. “커윽! 그, 그만. 내가 졌다.” 능력을 봉인 당한 상황이다보니 활을 당기기는커녕 젊고 건장한 준상의 주먹질을 받아내는 것도 쉽지 않았다. 결국 틸리오스는 견디다 못해 손을 내저으며 그렇게 패배를 시인했지만, 준상의 주먹은 마치 그를 때려 죽이기라도 할 것처럼 가차 없이 쏟아져 내렸고, 마침내 틸리오스가 거의 인사불성이 되어서야 손을 멈추었다. “으으으...” 엉망이 된 얼굴로 널브러진 틸리오스의 눈앞에 무언가 눈에 익은 것이 들이 밀어지더니, 한 줄기 빛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준상은 그제서야 틸리오스에게서 물러서며 방어복을 해제하더니, 헤네스를 향해 말했다. “치료를.” “네.” 헤네스는 인벤토리에서 기이한 분홍빛을 띈 두 개의 채찍을 꺼내더니 틸리오스에게 먼저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 워낙 험하게 두들겨 맞아 반쯤 넋이 나간 채 거친 숨을 몰아쉬던 틸리오스는 이 처자가 왜 자신에게 사과를 하는 건가 싶다가 이내 분홍빛을 띄는 두 개의 채찍이 자신에게 날아들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처덕 처덕. 피부에 채찍이 닿는 그 촉감이 묘하게 기분 나쁘다. 하지만 그렇게 채찍에 두들겨 맞다보니 어느 틈엔가 전신을 조여오던 고통이 확연하게 사라져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건...” 그리고 마침내 치유가 모두 끝나자 헤네스는 채찍을 거두어 들이고는 틸리오스에게 다시 꾸벅 인사를 했다. “어때, 정신이 번쩍 들지?” “...” 하라바가 빙글빙글 웃으며 다가오는 모습을 본 틸리오스는 자신도 모르게 그 얼굴에 주먹을 날릴 뻔 했다. “너 이 자식. 이렇게 될 걸 알고 일부러?” 으르렁거리듯 외치는 틸리오스의 말에 하라바는 바로 대답했다. “어땠나. 능력을 봉인 당했을 때의 기분이.” “음...” 너무 오랫동안 능력을 사용했던 탓일까. 단순히 보통의 인간으로 돌아갔을 뿐임에도 불구하고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의 탈력감에 빠져 손도 발도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내가 사로잡혔을 때, 딱 그런 기분이었네.” “그랬군.” 하라바가 틸리오스의 손을 잡아 일으키고 있을 때, 준상은 휴대폰을 통해 메시지를 확인하고 있었다. 펫 정보 이름 : 틸리오스 아스트라 종류 : 불명 레벨 : 77Lv 경험치 : 534306 등급 : 불명 분류 : 복합 성장 : 일반(극대) 속성 : 바람 스킬 : 궁술 77Lv, 집중 74Lv [정보] 호감도 : 20 충성도 : 10 카드슬롯 : 10개 [정보] (소유카드수:불명) 설명 : 불명. 뇌전의 신궁이라고 불린다길래 속성력 같은 것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스킬란에서는 찾을 수가 없었다. 그를 펫으로 만들면서 새로 추가된 펫은 다음과 같았다. 펫 정보 이름 : 알가트 종류 : 성새 거북 레벨 : 38Lv 경험치 : 95770 등급 : 불명 분류 : 복합 성장 : 일반(중) 속성 : 불 스킬 : 분사 35Lv, 방어 37Lv [정보] 호감도 : 50 충성도 : 50 카드슬롯 : 3개 [정보] 설명 : 성새 거북은 거대한 성채를 연상시키는 거북입니다. 단단한 거북의 등껍질 위에 공성탑을 연상시키는 높은 구조물이 세워진 이 거북은 물이나 사막, 늪지대처럼 지면이 단단하지 않은 지역의 이동에 특화되어 있습니다. 입에서 끈끈한 역청과도 같은 물질을 뿜어내는데 이 물질은 공기와 만나면 자연적으로 불이 붙는 성질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매우 위험합니다. 이동 속도가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설명대로라면 살아 움직이는 성이라 불리워도 충분할 듯한 느낌이라 만족스러워하며 다른 메시지를 확인하려던 준상은 갑자기 흥미로운 표정으로 휴대폰을 훔쳐 보고 있던 케이드가 빛과 함께 사라지는 것을 보고 흠칫 놀랐다. “이건?”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퀘스트. 하지만 케이드 정도의 인물에게 대기 시간이 없다고는 상상하기 어려운지라 고개를 젓고 있는데, 틸리오스의 놀란 음성이 들려왔다. “하라바?” 돌아보니 하라바 역시 한줄기 빛을 남긴 채 자취를 감추어 버린 상태였고, 놀란 표정으로 당황해하던 틸리오스 역시 이내 빛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준상씨, 이건...” 긴장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헤네스를 향해,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말했다. “드디어 시작된 모양이군.” 생각보다 너무 빠르다. 벨 라야가 소멸하고 채 며칠이 지나지도 않았다. 칠대 황가나 나머지 칠성좌들이 상황을 파악하고 의견을 조율하려면 조금은 더 시간이 걸릴 거라 생각했건만 벌써 수확의 날이 발동해 버리다니. “아니, 오히려 그런 혼란스러움을 틈타 시스템이 선수를 친 것인지도 모르겠군.” “그럼 서둘러야겠네요.” 헤네스의 말에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바로 리체스에게 연락을 넣으며 신기루 꽃을 통해 요정계로 향했다. “여보!” 요정계로 넘어가자 곧바로 리체스가 달려왔다. “그 꼬마 마법사는?” “갑자기 빛과 함께 사라졌어요.” “역시 그랬군.” 여왕의 거처에서 나오자 연락을 받은 서유미와 블레이크, 그리고 맥밀란이 전투 준비를 마치고 달려왔다. 준상은 그들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정령의 문이 있는 곳으로 향하며 하라바와 케이드에게 연락을 넣어 보았다. “정신을 잃은 건가.” 그렇게 혀를 차고 있는데, 문득 의외의 인물에게서 연락이 들어왔다. “드, 들리세요?” 그것은 바로 데마의 목소리였다. “데마?” “아! 준상님?” “그쪽의 상황은?” “그게... 모르겠어요. 시야가 가려져 있어서... 우읍!” “데마?” 준상이 연거푸 이름을 불렀지만, 데마의 대답은 더 이상 전해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상황이 급박한 것 같군. 리체스.” “네.” “정령의 문을 강제로 열고 나갈 방법은?” “있긴 하지만... 위험할텐데요.” 대답을 들은 준상은 손목에 찬 팔찌를 작동시켜 세 명의 분신을 만들어내고는 각자에게 무기를 쥐어주었다. 리체스는 그 모습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바로 하라바와 케이드, 그리고 데마의 몸에 만들어진 정령의 문을 강제로 개방했다. 00377 트롤러 ========================================================================= “열렸어요!” 리체스의 외침과 함께 열려진 정령의 문을 통해 끈적한 액체 같은 것이 쏟아져 나왔고, 그것을 확인한 순간 준상은 대기 중이던 분신 셋을 동시에 진입시켰다. 무기를 앞세우고 문 안으로 뛰어들자, 곧바로 단단한 무언가가 앞을 가로막았지만 +10으로 강화된 블러드서커와 어나이얼레이터, 그리고 랑다잘의 분노가 지닌 파괴력 앞에 허무하게 부서져 내리고 말았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준상은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음과 함께 그것을 듣고 누군가가 소리치는 것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무슨 일이냐!” “탈출이다! 탈출자가 있다!” 온몸에 끈적하게 묻은 액체들을 신경 쓸 여유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다. 한바퀴 몸을 굴려 바닥에 내려서기가 무섭게, 분신들은 방호복으로 보이는 흰색 옷을 전신에 걸친 몇 명의 사람들이 총처럼 생긴 무기를 들이대는 것을 보고 곧바로 행동을 시작했다. “말도 안 돼! 분명히 시드는 차단되어 있을텐데!” 사람을 단숨에 두쪽으로 갈라버리는 블러드서커의 파괴력은 물론이거니와 영혼을 빨아들이는 마물 어나이얼레이터로부터 풍겨지는 소름끼치는 분위기, 그리고 보통의 사람이라면 절대로 한 손으로 들고 휘두를 수 없는 거대한 철구까지. 탈출자의 발생을 듣고 허겁지겁 달려온 자들은 상식적으로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상황에 경악하며 일제히 무기를 발사했다. “광학병기인가.” 세 개의 분신을 동시에 조종하던 준상은 분신들의 면도날처럼 헤집고 지나가는 날카로운 감촉에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무기를 휘둘러 몇 되지 않는 자들을 모조리 쓸어버렸다. “괜찮으세요?” 본신에 상처를 입은 것은 아니지만 광학병기로 인해 준상의 분신들이 상처를 입으면서 그 감각과 고통이 전해진 탓에 준상의 얼굴에는 어느새 식은땀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괜찮아. 일단 정리가 끝났으니 바로 진입한다.” 준상은 헤네스에게 그렇게 대답하고는 곧바로 방어복을 착용한 상태로 정령의 문 가운데 하나로 뛰어들었고, 그 모습을 지켜본 다른 인원들도 곧바로 뒤를 따랐다. 문을 통과하자 가장 먼저 시끄러운 경고음이 고막을 때렸고, 뒤이어 탑과 같은 형태를 지닌 구조물의 내부가 시야에 들어왔다. 구조물의 내벽과 외벽에는 캡슐이라고 부르면 딱 어울릴 법한, 유리로 만든 관 같은 것이 빼곡하게 들어 차 있었는데, 그 안에 채워진 액체 속에 사람의 그림자 같은 것이 둥둥 떠다니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알아 볼 수 있었다. “으... 이게 도대체...” 하라바는 뒤늦게서야 정신이 들었는지 끈적한 액체에 잔뜩 젖은 채 유리관 안에서 비틀거리며 빠져 나왔다. “정신이 드세요?” 헤네스가 얼른 다가서며 부축하자 하라바는 얼굴을 찌푸린 채 주위를 둘러보더니 으득 소리가 나도록 이빨을 갈았다. “이 망할 놈들이 또다시...” 하지만 그가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에 통로가 하나 열리며 방패 같은 것을 든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 탈출자였나. 사살해도 좋다! 사격!” “칫.” 준상은 그들의 말이 들려온 순간 랑다잘의 분노를 들고 있던 분신을 움직여 그들에게 철구를 던졌다. 이 분신들은 시드의 효력이 발휘되는 요정계에서 생성된 것이라 시드 무력화의 영향을 받고 있는 준상의 본신과는 달리 괴력을 발휘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좋은 걸 알아냈군.” 준상이 그렇게 중얼거리는 순간 직경이 일미터나 되는 거대한 철구는 진압용 방패 같은 것을 든 사람들을 단숨에 짓이겨 버렸다. “말도... 안 돼...” 운 좋게 직격을 피한 자에게 다가가 어나이얼레이터를 겨눈 준상은 다른 이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나와 리체스는 통제 장치를 찾겠다. 나머지는 이곳에 갇혀 있는 자들을 해방시키고 시드 무력화가 풀릴 때까지 기다리도록.” 이곳에 갇혀 있는 자들은 하라바의 세계에서 모두 한 가락씩 하는 능력자들이지만, 시드 무력화의 효과가 적용되고 있는 동안은 그저 보통의 인간보다 조금 체력이 뛰어난 정도에 불과하다. 준상은 관리자들이 사용했던 광학 무기를 집어 들고는 그것을 블레이크에게 던져 주었다. “저들의 무기다. 사용할 수 있으면 해보고, 안 되겠다 싶으면 모아서 보관만 하도록.” “알겠습니다.” 지시가 내려지자 헤네스는 수호의 신물을 꺼내어 착용하고는 기안을 불러냈고, 다른 이들은 저마다 요정의 술을 복용한 상태로 허공을 날아올라 유리관에 접근한 다음 무기를 휘둘러 그 안에 갇혀 있는 능력자들을 탈출시켰다. “리체스, 분신의 복구를.” “이미 시작했어요!” 리체스의 대답을 들은 준상은 하얀 불꽃을 일으켜 한 손에 휘감은 채 유일하게 살아남은 자에게 다가갔다. “시드 무력화 장치는 어디에 있지?” “그건...” 방호복의 바이저 부분이 깨져 나가 피투성이가 되었으나 그 안쪽에 보이는 얼굴은 틀림없는 인간의 그것이었다. 그는 자신을 향해 내밀어진 어나이얼레이터로부터 전해지는 소름 끼치는 기운에 의해 질식될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쉽게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말해라.” 준상은 짧은 말 한 마디와 함께 하얀색 화염이 넘실대는 손을 그의 팔 가까이에 들이 밀었다. 잡은 것도 아니고, 닿은 것도 아니다. 하지만 단지 그것뿐임에도 불구하고 남자가 입고 있던 방호복은 촛농처럼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으아아악!” 남자는 녹아내린 방호복에 의해 살이 익는 그 끔찍한 고통에 발버둥 치며 비명을 질렀고, 바로 그때 출입문이 열리며 진압용 방패 같은 것을 든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유리관들이 부서지며 능력자들이 빠져 나오는 모습에 잠시 놀란 표정을 짓다가 미처 무언가 말을 하기도 전에 다시금 날아든 랑다잘의 분노에 의해 박살이 나버리고 말았다. “으아아악! 마, 마, 말하겠습니다. 그러니 제바아알!” 준상은 빨갛다 못해 새카맣게 익어버린 채 매캐한 노린내를 뿜어내고 있는 그의 팔에서 손을 물리고는 다시 물었다. “말해라.” “시드 무력화 장치는...” 남자는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된 상태로 숨을 헐떡거리면서도 사력을 다해 준상에게 시드 무력화 장치의 위치를 설명해 주었다. 준상은 그 내용을 전부 듣자 어나이얼레이터를 들고 있던 분신을 움직여 남자의 가슴에 검을 박아 넣었다. “커헉! 어째서...” 남자는 원망스럽다는 표정으로 그렇게 눈을 부릅뜨다가 숨을 거두었다. “세 개라... 리체스, 들었지?” 리체스는 처참하게 죽음을 당한 남자의 모습에 입을 가린 채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지만 준상의 말에 즉각 대답했다. “네. 어쩐지 반응이 좀 이상하다 싶더니 세 개였군요.” “위치를 가늠할 수 있겠나?” “이럴 줄 알고 준비해 두었죠.” 리체스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마법을 몇 번 더 발동했다. “시드 무력화 반지의 마력 패턴을 참고해서 만들었어요. 일종의 탐지 마법인 셈인데 방금 전에는 반응이 영 이상해서 뭔가 오류가 생긴 건가 싶었는데, 장치가 세 개라면 제대로 작동하는 것이 맞아요. 하지만 이 자가 말해준 위치는 아무래도 거짓인 것 같아요.” “역시 그랬군.”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물었다. “가장 가까운 곳은?” “바로 저곳! 이 탑의 중심부에요!” 리체스가 가리킨 곳을 바라보니 거대한 탑 형태의 구조물 중간에 붉은 보석과도 같은 것이 빛나고 있는 것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다. “서유미!” “들었어요!” 서유미는 빠르게 허공을 날아 붉은 보석으로 접근하더니 아랑도를 휘둘러 그것을 단숨에 갈라 버렸다. 콰지지직! 붉은 보석은 아랑도에 의해 부서지자 뇌전과 같은 것을 뿜어내며 맥동하는가 싶더니 이내 서서히 빛이 사라져 버렸다. 숨을 헐떡이고 있던 하라바는 혹시나 하고 힘을 끌어올려 보았지만 아무런 반응이 나타나지 않자 준상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아무 변화도 없는데?” “역시 세 개를 다 부숴야 하는 건가.” 준상은 기안을 향해 외쳤다. “기안! 입구를 막아라!” “맡겨둬!” 기안이 입구를 막아서자 준상은 리체스를 어깨에 앉혀두고는 세 개의 분신들을 출입구 밖으로 내보냈다. “왔다! 일제 사격!”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한 무리의 병사들이 분신들을 향해 광학병기를 쏘아대기 시작한다. 하지만 기습에 대비해 랑다잘의 분노를 앞세우고 있었던 덕분에 분신들은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다. “이럴 수가!” 경악한 그들의 목소리를 무시한 채 준상은 랑다잘의 분노를 앞세운 분신을 돌격시켰고, 방호복을 입은 자들은 진압용 방패로 보이는 방패를 들어 그것을 막으려 했으나, 그들이 지닌 장비는 시드 무력화의 힘에 의해 능력을 잃은 탈출자들을 상대하기 위한 것이다 보니 공성병기인 랑다잘의 분노를 막아내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단숨에 병사들을 밀어내 버리자 다시 리체스가 외쳤다. “이 아래쪽이에요!” “좋아!” 랑다잘의 분노를 든 분신이 새로 몰려드는 병사들을 상대하는 동안 블러드서커를 든 분신이 리체스가 가리킨 바닥을 그대로 갈라버렸다. “으악!” “적이다!” 두터운 바닥이 단숨에 갈라지며 무너져 내리자 그 안에 있던 자들은 비명을 지르며 혼비백산해서 도망치기 시작했으나, 곧바로 난입한 두 분신에 의해 단숨에 도륙당하고 말았다. “좀 더 아래쪽이요!” 다시 들려온 리체스의 말에 따라 분신들은 다시 몇 번 더 바닥을 가르고 내려갔고 그렇게 네 개 층을 돌파하자 그제서야 리체스가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저쪽이에요!” 리체스가 격벽으로 가로막힌 공간을 가리키기가 무섭게 블러드서커가 휘둘러졌지만, 그 일격은 기이한 일격에 의해 가로막히고 말았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랑다잘의 분노를 휘두르던 분신이 갑작스레 커다란 타격을 입으며 소멸하고 말았다. “큭!” 분신이 소멸한 충격에 준상이 비틀거리자 리체스가 얼른 그에게 회복 마법을 걸어주었다. “괜찮으세요?” “그게...” 하지만 준상이 대답하기도 전에 위쪽에서 외침이 들여왔다. “젠장. 통제실이다! 놈들이 통제실로 내려갔다!” “가디언을 내려보내! 서둘러!” 가디언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랑다잘의 분노를 들고 있는 분신을 단숨에 소멸시킬 정도라면 단순한 적은 아닐 터. “저격이라도 당했던 건가.” 랑다잘의 분노를 크고 강력한 무기이기는 하지만, 한 번 휘두를 때마다 빈틈을 드러낼 수 밖에 없는 무기이다. 본신으로 사용하는 것이라면 정신을 집중해서 사전에 그런 위협을 차단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본신 외에도 분신을 셋이나 조종하고 있는 상황이다 보니 아무래도 신경이 분산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준상은 다급한 마음에 격벽을 막아서고 있는 방어막을 블러드서커와 어나이얼레이터로 연신 후려쳤지만, 강한 물리 저항력이 작용하는지 방어막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물리력이 안 된다면.” 준상은 방어벽으로 다가서며 화염의 대정령이 지닌 힘을 불러내 방어벽으로 쏘아 보냈다. 방어벽은 크게 물결치며 위태롭게 흔들리기 시작 했다. 그러나, 바로 그 때. 준상이 부수고 내려온 천장으로부터 육중한 체구를 지닌 금속성의 물체 하나가 떨어져 내리더니 곧바로 푸른색의 빛을 쏘아 보냈다. “이익!” 하지만 그 빛은 리체스가 이를 악물고 만들어낸 무지개 빛 방어막에 튕겨 나가버렸고, 뒤이어 준상의 분신들이 불청객을 향해 무기를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틈을 타서 준상이 뿜어낸 하얀 불꽃이 마침내 방어막을 부수고 들어가 격벽을 단숨에 녹이고 그 안에서 작동하고 있던 통제 장치까지 한꺼번에 파괴했다. “됐다!” 그리고 리체스가 그렇게 쾌재를 올린 순간, 위쪽에서 굉음과 함께 커다란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으하하하하! 이 개자식들! 이 하라바님이 모조리 죽여주마!” 00378 트롤러 ========================================================================= 구구구구구구궁. 지진이 일어난 듯 바닥과 벽이 극심하게 흔들리는가 싶더니, 끼이이익! 쇠가 비틀리고 긁히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진다. 격하게 흔들리는 바닥으로 인해 두 분신을 공격하고 있던 금속성의 무언가가 비틀거리며 중심을 잃었고, 그제서야 천장으로부터 떨어져 내린 불청객의 존재를 향해 준상이 시선을 돌렸다. 언뜻 보니 전체적인 형태는 팔과 다리가 달린 이족 보행형의 로봇. 하지만 상체 쪽이 비정상적으로 발달한 것이, 인간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고릴라를 닮았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 같았다. 게다가 얼핏 두 다리로 서 있다고 생각되었던 하체의 형태도 자세히 살펴보니 다소 작은 네 개의 다리가 묘하게 균형을 잡고 있는 모양새였다. 이것이 가디언인가. 준상은 그런 생각을 떠올리면서도 분신으로 하여금 블러드서커를 본신에게 던져주고 그대로 적의 하체에 태클을 가하는 조작을 시도하고 있었다. 가디언은 작달막한 하반신에 공격을 받아 중심이 흔들리는 와중에도 상체에 장치된 팔을 이용해 공격을 가하려 했다. 그러나 잠시 흔들리며 틈을 보이자 또 다른 분신이 어나이얼레이터를 휘둘러 그런 로봇의 팔을 단숨에 잘라 버린다. 희뿌연 검광을 흩뿌리는 그 기술의 이름은 다름 아닌 월아(月牙). 어나이얼레이터가 4단계로 진화하며 개방된 이 스킬은 반월형의 검기를 내뿜어 적을 단숨에 베어버린다. 단점이라면 쿨타임이 제법 길다는 정도지만, 지금 이 순간 그런 점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두 분신이 시간을 벌어준 틈을 노려 준상이 직접 블러드서커를 들고 강타를 발동했기 때문이다. 번쩍 하는 한 줄기 섬광이 뻗어나가며 블러드서커의 가공할 파괴력이 가디언의 차갑고 단단한 몸통을 단숨에 짓이겨 버린 것이다. 콰드득! 무기질의 몸체가 부서지는 소음과 함께 가디언은 단숨에 두 쪽이 나버렸고, 준상은 오랜만에 신체를 덮쳐온 과부하 증상에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후우우우우... 그리고 입을 통해 긴 숨을 내뱉더니 블러드서커를 분신에게 돌려주고는 랑다잘의 분노를 회수하기 위해 무너진 천장을 바라보았다. “물러나라!” “지원은 아직인가!” “으아아악!” “내려간 가디언이 파괴되었습니다!” 사방에서 부서지고 우그러드는 쇳소리가 난무하는 가운데 병사들의 외침과 비명소리가 마구 뒤섞여 준상의 고막을 때린다. 준상은 그 소리를 들으며 우선 기안에게 연락을 취했다. “기안. 그쪽 상황은?” 그러자 기안이 악을 쓰는 소리가 들려왔다. “젠장! 상황이고 뭐고 이 미친 놈 좀 어떻게 해봐! 다른 사람도 생각해야지 무작정 거대화를 실행해 버리면 어쩌냐고.” 하지만 준상은 그런 기안의 투정을 무시한 채 지시를 내렸다. “서유미와 블레이크, 그리고 맥밀란을 데리고 전진하도록. 바닥이 뚫린 지점에서 합류한다.” “저 미친 놈은?” “신경 쓰지 마라.” “미치겠네.” 준상은 기안과의 연락을 끊고 다시 하라바에게 연락을 넣었다. “하라바!” “크하하하! 좋다! 나는 이걸 원한 거다! 응? 이건 준상인가?” 하라바는 시끄럽게 웃음을 터뜨리자 요정의 의사 소통 방식으로 전해진 준상의 말을 듣고는 화들짝 놀라 반응했다. “시끄럽고, 케이드와 틸리오스에게 나머지 능력자들로 하여금 기지 안을 소탕하게 해라.” 준상의 말에 하라바는 바로 대답했다. “응? 그 정도야 간단하지. 그런데 나는?” “혹시 칠성좌 같은 놈이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르니 그런 놈이 나오면 맡아.” “알았다.” 준상은 지시를 마치고는 위쪽의 병력들이 우르르 밀려나는 것을 확인하자 곧바로 도약해 뚫린 천장 위로 올라갔다. 무너진 천장을 타고 올라가자 미늘창으로 병사들을 두들겨 패고 있던 기안이 갑자기 솟아 오른 그에게 무기를 휘두르려다 멈추며 소리쳤다. “이크! 놀랐잖아!” “...” 하지만 준상은 들은 척도 않은 채 통로를 가로막고 있는 랑다잘의 분노를 집어 들었다. “리체스, 나머지 장치는?” 리체스는 다시 탐지 마법을 발동하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위쪽이에요. 다만 아까와는 달리 상당히 멀리 있는데요.” 서유미가 부순 장치와, 자신이 녹여버린 장치의 위치를 감안하면 위쪽에 장치되어 있는 시드 무력화 장치는 상당히 높은 곳에 자리를 잡고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떠올리고 있는데, 케이드가 그제서야 한 무리의 능력자들을 이끌고 그들이 있는 통로로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여기 계셨구려.” 준상은 그가 이끌고 온 능력자들을 돌아보고는 이렇게 물었다. “틸리오스는?” “철골의 제왕이 날뛰면서 드러난 또 다른 통로로 향하셨소.” “그랬군.”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말했다. “하라바가 말해 주었겠지만, 이쪽부터 시작해서 기지 안을 소탕하면 된다.” “맡겨 주시오.” 준상은 케이드가 능력자들을 이끌고 달려가는 모습으로부터 시선을 돌리고는 기안의 등 뒤에서 숨을 헐떡이고 있는 서유미와 블레이크, 그리고 맥밀란을 향해 말했다. “요정의 술은 얼마나 남았지?” “아직 각자 서너 병 정도는 더 남아 있습니다.” “잘 됐군.” 준상은 일단 분신을 해제하고 무기를 회수한 다음 하라바가 난리를 치고 있는 곳으로 돌아가서 요정의 술을 꺼내 주욱 들이키고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어차피 뻥 뚫려 있는 공간이 있는데 굳이 각 층의 방어를 뚫고 올라가느라 시간을 허비할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크하하하하! 이 조무래기 놈들! 전부 으깨주마!” 신나게 설비들을 때려 부수며 그렇게 파괴된 잔해로 몸집을 불리고 있는 하라바는 준상이 스치고 지나가는 것조차 눈치 채지 못 하고 있었다. “하여튼 누가 미친 놈 아니랄까봐.” 기안이 혀를 차며 내뱉는 소리를 무시한 채, 준상은 계속해서 공중으로 솟아오르다가 마침내 천장에 도달했다. “여기부터인가. 모두 조심하도록.” “네!” 준상은 화염의 정령력을 끌어올린 다음 벽을 향해 그 힘을 그대로 분출시켰다. 뻗어나간 하얀 불꽃에 직격당한 벽은 잠시 붉게 달궈지는가 싶더니 이내 촛농처럼 흘러내리며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아악!” “침입자다!” 갑자기 벽이 녹아내리고 기재들이 불에 타자 혼비백산해서 도망치는 자들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온다. 하지만 준상은 그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이번에는 얼음의 정령력을 녹아내린 구멍에 퍼부었다. 극한의 냉기가 한 차례 휘몰아치자 불타올랐던 기재들은 물론이고 용암처럼 흘러내리던 쇳물도 그대로 흉측한 몰골을 남긴 채 굳어 버렸다. 그렇게 단숨에 통로의 개척이 끝나자 준상은 앞장서서 안으로 들어갔다. “여긴...” 곧바로 그곳을 통과해 시드 무효화의 장치가 있는 장소로 향하려던 그들이었지만, 안으로 들어서자 곧바로 펼쳐진 광경에는 잠시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 방 안에는 아래쪽에 있던, 능력자들을 가두고 있던 유리관보다는 다소 작은 형태의 유리관들이 빼곡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은은한 빛을 뿜어내는 유리관 안쪽에 들어있는 것은 인간보다는 훨씬 작고 귀여운 인상의 동물이었다. “고양이?” “세상에. 이게 전부 다 고양이라고?” 혀를 차며 주위를 둘러보고 있는데, 도망갈 엄두조차 못낸 채 구석에 숨어 벌벌 떨고 있는 여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준상은 그녀에게로 다가가 멱살을 잡아 일으키며 물었다. “이 고양이들은 뭐지?” 여자는 자글자글한 눈가의 주름에 눈물을 가득 머금은 채 울먹이며 준상의 물음에 대답했다. “그, 그게... 펫입니다.” “펫?” “네. 그러니까... 관리국은 퀘스트 시스템을 통해 그 가치가 검증된 펫 같은 것을 대량 생산해서 칠대 황가를 비롯한 유력 가문들에 판매하는 작업도 병행하고 있습니다. 이 기지에서는 그중에서도 특히 집사 고양이를 독점 생산하고 있습니다.” 그 말에 리체스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집사 고양이? 그럼 여기 있는 고양이들이 다 이고르 같은 애들이란 말인가요?” “아무래도 그런 모양이군.” 준상이 그렇게 대답하는 순간 한쪽에서 푸른 빛이 그들을 향해 쏟아졌다. “커윽!” 운 나쁘게도 준상에게 사로잡혔던 여자는 자기 편이 쏜 광학 무기에 몸을 난자 당하며 그대로 즉사하고 말았다. “모두 조심해요!” 리체스가 그렇게 외치며 무지개 빛의 방어막을 만들어 내기가 무섭게 기안이 앞으로 나서며 적을 향해 돌진했다. “비켜! 비켜! 비켜!” 적의 광학 무기는 강력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으나, 기안의 몸을 가린 수호의 신물을 뚫기에는 역부족일 수밖에 없었다. 블레이크와 맥밀란은 숙련된 군인답게 어느 틈엔가 적에게서 빼앗은 광학 무기를 손에 쥔 채 엄호 사격을 하고 있었고, 기안의 돌진이 적의 진형을 부수자 그곳에 서유미가 난입했다. “하아앗!” 용서 없이 휘둘러지는 아랑도의 검광에 몇 안 되는 적들은 허둥거리다가 모조리 피를 뿜으며 쓰러져 버린다. 전투는 순식간에 끝이 나버렸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오간 총격전으로 인해 여러 개의 유리관이 부서지며 그 안에서 죽은 듯이 눈을 감고 있던 고양이들이 밖으로 흘러나왔다. 고양이들은 천천히 눈을 뜨고는 앞발로 젖은 털을 고르며 준상과 다른 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이내 이고르가 그랬던 것처럼 앞발을 가슴에 대고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모두 살아있나 보군요.” “그러게요.” 블레이크나 맥밀란은 물론이고 서유미나 기안까지도 준상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여보.” 그리고 마침내 리체스가 조심스럽게 속삭이자 준상은 혀를 차며 블레이크에게 지시를 내렸다. “블레이크, 정령의 문은 쓸 줄 알겠지?” “물론입니다.” 준상은 나머지 인원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할 거면 어서 서둘러라. 시간이 없다.” “네!” 그들이 허겁지겁 유리관을 부수고 고양이들을 구출하는 모습에서 고개를 돌린 준상은 다시 분신을 불러내어 무기를 쥐어 주고는 화염의 정령력을 뿜어내 천장에 구멍을 뚫었다. “으악!” “이쪽이다!” 갑자기 바닥이 녹아내리며 주위의 사물들이 불길에 휩싸이자 기겁한 병사들의 외침이 이어졌지만, 그들은 곧바로 뛰어오른 분신들이 휘두른 무기로 인해 죽음을 면치 못했다. 분신들이 위층을 정리하자 준상은 몸을 띄워 위층으로 향한 다음 다시 화염의 정령력으로 천장을 뚫었다. 그런 식으로 계속해서 위로 서너층을 더 올라가자 준상은 기이한 탈력감이 몸을 적시는 것을 느꼈다. “여기부터인가 보군.” 시드 무력화의 영향권에 다시 들어왔음을 깨달은 준상은 가급적 모습을 감춘 채 위층으로 향하는 통로를 다시 뚫었다. 아래층으로 대부분 몰려가서인지, 아니면 위급한 상황을 전해 받고 대피를 한 탓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후로는 남아 있는 병사가 거의 없었다. “아무래도 마지막 하나는 최상층에 있는 것 같아요.” “음...” 리체스의 말에 준상은 얼굴을 찌푸렸다. “최상층이라면, 설마...” 감시관 가이트나 칠성좌 같이 자체적으로 시드 무력화의 능력을 발동할 수 있는 존재가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예감이 준상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 것이다. 리체스는 그 말을 듣고는 다시 한 번 탐지 마법을 발동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아무래도 그 설마가 맞는 것 같은데요. 움직이고 있어요.” “음...” “죄송해요. 미리 알아챘어야 했는데.” “어쩔 수 없지. 신경 쓰지 마.” 적의 실체를 모르는 상황에서 무턱대고 덤비기에는 준상이 짊어져야 할 핸디캡이 너무 크다. 능력자 상대라면 모를까, 시드 무력화가 발동한 상황에서도 모든 능력을 그대로 다 사용할 수 있는 적을 상대하는 건 아직 역부족일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할 수 없지. 일단 대기하며 동향을 살피는 수밖에.” “잘 생각하셨어요.” 하지만 그 대화가 채 끝나기도 전에, 한 줄기 붉은 빛이 천장을 도려내며 그들을 스치고 지나간다. “큭!” 다급히 몸을 피했지만, 분신 가운데 하나가 손 쓸 틈도 없이 소멸해 버렸다. 준상은 분신이 들고 있던 어나이얼레이터를 얼른 집어 들고는 무너져 내린 천장 위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흰색의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왜소한 체형의 존재 하나가 검은 망토를 펄럭이며 공중에 떠 있었다. 준상은 고글에 나타난 정보를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중얼거렸다. “벨 페오르... 어째서 여기에.” ============================ 작품 후기 ============================ 보시면 아시겠지만 빠른 전개를 위해 자잘한 내용은 가급적 스킵을 하고 있습니다. 혹시 중간에 누락된 내용 가운데 이런 것은 묘사가 될 필요가 있겠다 싶은 부분이 있으시면 뜰의 방명록에 글을 남겨 주세요. 본편에 바로 추가하기는 어렵겠지만 여유가 되는 대로 외전 형식으로 따로 글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PS. 아직 완결되려면 멀었습니다. 이건 그냥 서비스 같은 거니까, 외전은 연재 중간에 여유가 될 때 조금씩 써서 한번에 올리는 형식이 될 겁니다. 00379 트롤러 ========================================================================= 또 다른 성좌의 주인. 그리고, 하라바에게 절멸의 검은 태양이라는 궁극기를 건넨 장본인. 이곳은 분명 관리국의 기지였을 텐데, 어째서 그가 여기 이렇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일까. 준상은 벨 페오르의 존재를 목도하는 순간 머리 속에서 지금 연상할 수 있는 모든 가능한 상황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런 사고가 결말을 맺기도 전에 벨 페오르는 손을 뻗으며 방금 전에 천장을 붕괴시켰던 붉은 빛을 쏘아냈다. 눈으로 보고는 피할 수 없는, 찰나의 파괴 광선. 하지만 준상은 그의 손이 자신을 향하는 것을 보기가 무섭게 빠르게 몸을 공중으로 띄워 올리는 것으로 그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해낼 수 있었다. “큭!” 아니다. 준상은 자신이 벨 페오르의 공격을 피해냈다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생각한 순간에는 이미 붉은 빛이 그의 옆구리를 훑고 지나간 뒤였다. “여보!” 리체스가 화들짝 놀라며 얼른 회복 마법을 써 주었으나 고맙다는 말을 할 틈도 없었다. 벨 페오르의 손에서 뻗어 나온 붉은 빛이 마치 채찍처럼 그들을 향해 휘둘러진 탓이다. 피하기엔 늦었다. 그렇다면? 준상은 자신을 덮쳐오는 붉은 빛을 방어하기 위해 정령력을 끌어올렸지만, 그의 직감은 광학 병기에 버금가는 이 기묘한 공격을 막아려면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핫!” 준상은 어나이얼레이터를 휘둘러 4단계 스킬은 월아를 발동했다. “호오.” 차가운 느낌의 희뿌연 반월 형상의 검기가 벨 페오르가 내쏜 붉은 빛을 튕겨 내자, 마치 시끄럽게 앵앵거리는 모기에게 파리채를 휘둘러대듯이 무감동한 반응으로 일관하던 벨 페오르의 입에서 처음으로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구구궁! 준상이 벨 페오르의 공격을 막아내고 땅에 내려서자, 그제서야 붉은 빛에 의해 절단된 기지의 설비 일부가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붕괴했다. “헉... 헉...” 리체스의 회복 마법으로 옆구리의 부상은 빠르게 아물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마법으로도 예상치 못한 부상으로 인한 체력과 정신력의 소모까지 막아낼 수는 없었다. 가빠지는 숨을 삼키던 준상은 다른 분신들을 끌어올려 방어를 견고히 하다가 그제서야 벨 페오르 주위의 모습을 보고는 눈을 부릅떴다. 족히 수십은 되어 보이는 시체와 그들로부터 흘러내린 붉은 피의 향연. 방금 전에 벌어진 벨 페오르와 자신의 싸움에 휘말리기라도 한 것일까. 아니다. 그들이 쓰러져 있는 곳은 준상이 있던 곳과는 전혀 별개의 장소. 케이드나 틸리오스가 이끄는 능력자들 또한 기지 안을 소탕하느라 아직 이곳까지 올라와 있지 못한 상태임을 감안한다면, 이 상황이 의미하는 바는 결국 한 가지 뿐이다. 지금 눈앞에 벌어져 있는 살육의 장본인은, 흰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채 말없이 준상을 바라보고 있는 벨 페오르 본인인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 관리국과 칠성좌가 서로 대립하는 관계이긴 하지만, 이런 식으로 난입해서 관리국에 속한 자들을 학살할 정도의 관계는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그들은 칠대 황가라는 한 갈래의 뿌리에서 뻗어 나온 빛과 어둠. 서로 뒤섞이기는 어렵지만, 최소한 우두머리들끼리는 상호의 이해관계에 따라 충분히 협의가 가능한 관계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하나도 남김없이 모조리 죽여 버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런 상황에서 떠올릴 수 있는 가능성은 단 하나. 길게 생각할 필요도 없다. “입막음... 인가.” 벨 페오르는 하라바에게 절멸의 검은 태양이라는 능력을 인도함으로서 벨 라야의 소멸과 칠대 황가중 하나에 속한 황족의 실종을 유발한 장본인. 그의 의도가 그 모든 이들의 소멸이었는지, 아니면 단순히 충돌을 일으키기 위한 불씨를 지피는 것만을 원한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어찌 되었든 그와 같은 결과가 나온 이상 책임을 회피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그 자신 또한 칠대 황가 가운데 하나에 예속된 몸임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사실이 외부에 흘러나가는 것 또한 결코 달갑지 않은 일. 그런 와중에 관리국이 하라바가 속한 행성 파두스에 대해 수확의 날이 실행한다는 첩보를 접했다면, 하라바의 몸에 남은 자신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이렇게 급히 모습을 드러내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증거 인멸.” 또 다른 성좌의 주인인 벨 페오르가 지금 이곳에 모습을 드러낸 이유는 바로 그것이었다. “알고 있다면 얘기가 빠르지.” 벨 페오르는 그렇게 말하고는 한 손을 높이 쳐들었다. 방금 전의 붉은 빛과는 취하는 동작이 달랐다. 하지만, 그 결과는 더욱 치명적이었다. 검은 빛이 그의 손 위로 모여든다. 한 줄기 회오리처럼 주위의 어둠을 빨아들이던 그 빛은 이내 하나의 형태를 갖춰가기 시작했다. 준상은 그의 손에서 검은 빛을 띄는 구체가 모습을 드러내자 벨 페오르의 궁극기가 발동됨을 깨달았다. 벨 라야를 빈사 상태로 몰고 갔던 그 기술의 이름은, 바로 절멸의 검은 태양. 준상은 혀를 차며 그것을 저지하기 위해 분신과 함께 공격을 가하려다 움칫하며 몸이 굳어 버리고 말았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준상과 리체스는 모습을 드러낸 진정한 절멸의 힘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크다. 압도적이라는 말 밖에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크다. 하라바가 사용했던 것이 절멸의 검은 태양이라면, 지금 벨 페오르가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은 절멸의 검은 초신성이나 성단이라고 부르는 편이 좋을 정도 벨 페오르가 천천히 몸을 띄워 올리자 그가 만들어낸 검은 태양은 빠르게 최상층의 상부 구조물을 집어 삼키며 크기를 키워갔고, 준상이 자신도 모르게 참았던 숨을 내뱉는 순간에는 이미 드러난 기지의 전체 면적을 모두 뒤덮고도 남을 정도로 거대해져 있었다. “말도... 안 돼.” 리체스는 그 터무니없는 크기의 검은 태양을 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절멸. 벨 페오르가 저것을 사용하면 현재 기지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은 반항할 틈도 없이 검은 태양의 압도적인 힘에 짓눌려 소멸해 버리고 말 것이다. 준상은 자신과 하라바가 벨 라야를 쓰러뜨렸던 것이 얼마나 운 좋은 일이었는지 이제야 깨닫고 있었다. 벨 라야에게도 이러한 궁극기가 있었을 터. 이런 터무니없는 궁극기를 처음부터 사용했다면, 아무리 거대화한 하라바라도 견뎌낼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만약 싸움이 일어났던 장소가 벨 라야 본인의 요새가 아니었더라면. 최상층에 벨 라야를 조종하고 있던 황가의 귀빈이 자리하고 있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끝이다.” 벨 페오르는 작은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손목을 까딱여 자신이 만들어낸 절멸의 힘을 준상에게로 날려 보냈다. 막아내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준상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거대한 절멸의 힘을 바라보며 처음 모닥불 너머로 늑대떼와 검치호의 무리를 보았을 때와 같은 막막함을 떠올렸다. 하지만 바로 그때. 준상의 눈앞에 무지개빛의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녀의 이름은 요정 여왕 리체스. 본래 그녀는 요정계가 아닌 곳에서는 이런 식으로 본래의 모습을 드러낼 수가 없다.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 요정 여왕만이 발동할 수 있는 요정 결계 뿐이다. “지금 내가 원하노니. 기적이여, 지금 이곳에 현현하라!” 그녀의 외침과 함께 눈부신 빛이 터져 나왔고, 검은 태양은 그 빛에 의해 궤도가 틀어지며 기지 외벽을 할퀴듯이 훑고는 차원의 틈 너머로 사라져 갔다. “뭐야! 무슨 일이야!” 그저 스쳐지나갔을 뿐인데도 원통형의 탑처럼 생긴 기지 구조물의 삼분의 일이 방금의 일격으로 소멸되었고, 한창 기지 안에서 파괴 행위를 하고 있던 하라바는 그와 같은 갑작스런 사태에 놀라 크게 부르짖었다. 하지만 놀란 것은 벨 페오르 역시 마찬가지였다. “요정?”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아름다운 리체스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어째서 일이 커졌나 싶었더니, 그런 이유가 있었던 건가.” 구구구구궁. 벨 페오르의 공격으로 인해 치명적인 파손을 입은 기지는 내부에서 하라바가 저지른 파괴 활동으로 인해 내구력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스스로 붕괴하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머지않아 차원의 틈에 의해 압궤되어 버릴 것이 분명한 상황. 벨 페오르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가 싶더니, 준상과 리체스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조만간 칠대 황가가 행성 파두스에 대해 강제 집행을 실행할 가능성이 있다.” 강제 집행? 다소 은유적인 수확의 날이라는 말보다 어휘 자체가 훨씬 강경하게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착각이 아닐 것이다. “본래 계획과는 달라졌지만, 이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그렇게 말을 건넨 벨 페오르는 준상과 리체스에게서 등을 돌리고는 검은 구멍과도 같은 무언가를 만들어 내었다. “너희들의 운이 어디까지인지, 지켜보도록 하겠다.” 그리고 그 한 마디를 남긴 채 거짓말처럼 스르르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은신인가.” 준상이 그렇게 중얼거리자, 리체스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요. 존재 자체가 사라졌어요. 어딘가로 이동한 모양이에요.” “...” 그들이 그런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기지의 붕괴는 더욱더 가속화하고 있었다. “이봐!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어떻게 된 거죠?” 뒤늦게 요정의 의사소통 방법을 이용해 하라바와 기안, 케이드 등이 연락을 취해왔다. 이미 기지의 붕괴는 막을 수 없는 상황. 예상치 못한 벨 페오르의 난입으로 머리 속이 혼란스럽기는 했지만, 적어도 수확의 날을 막아내는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으니 더 늦기 전에 이곳을 빠져 나가는 것이 상책이다. “이곳을 빠져 나간다. 하라바, 케이드, 데마. 너희들은 정령의 문을 통해 능력자들을 탈출시키도록. 기안. 구출이 끝났으면 최상층으로 올라와라.” 탈출 지시를 내리자 하라바가 다급하게 외쳤다. “어이! 다른 이들은 그렇다 쳐도 우리들은 어쩌라고!” 정령의 문을 가진 이는 다른 이들을 요정계로 들여보낼 수는 있어도 당사자는 별도의 이동 수단을 동원해야만 한다. 하지만 준상은 몽몽이를 소환하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너희들은 역소환하면 된다.” “아, 그렇지. 그럼 끝나는 대로 연락하겠다.” 몽몽이를 풀어놓은 준상은 혹시 생존자나 쓸 만 한 정보가 없는지 살펴보려 했지만, 이미 벨 페오르가 깔끔하게 손을 쓴 탓에 살아있는 자는 하나도 찾을 수 없었다. “세상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준상이 뚫어 놓은 구멍으로 올라온 기안과 서유미, 그리고 블레이크와 맥밀란은 박살이 난 최상층을 보며 놀란 표정을 짓다가 압궤가 시작되며 기지가 흔들리기 시작하자 준상은 신기루 꽃으로 통하는 문을 열어 그들을 퇴각시켰다. “끝났다!” “이쪽도요!” “잠시만... 우리도 끝났소.” 거의 동시에 하라바와 케이드, 그리고 데마로부터 능력자의 후퇴를 마무리 지었다는 보고가 들어 오자, 준상은 가타부타 말도 없이 그들을 역소환하고는 상처 입은 괴수처럼 울부짖으며 붕괴되어 가는 기지의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리체스와 함께 신기루 꽃으로 물러섰다. 준상과 리체스가 모습을 감추고 잠시 시간이 흐른 뒤, 빠르게 붕괴가 가속화되기 시작한 기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차원의 틈 속에서 완전히 소멸해 버리고 말았다. 00380 트롤러 ========================================================================= “후우...” “고생하셨어요.” 신기루 꽃으로 돌아오니 밝아진 표정으로 헤네스 등이 준상과 리체스를 맞이했다. 검은 태양이 기지를 반파시켰지만 고양이들을 대피시키고 있던 일행들 중에는 다행히 사상자가 나오지 않았다. 다만 아래쪽에서 소탕 작전을 수행 중이던 능력자들 중에 얼마나 피해가 나왔는지는 알 수 없는 상황인데다, 통제되지 않은 능력자들이 요정계를 함부로 돌아다니는 것도 탐탁지 않은 일이라 준상은 일행들의 인사를 받기가 무섭게 요정계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일단 요정계로 돌아간다.” “네.” 요정계로 들어선 준상은 곧바로 정령의 문이 있는 장소로 가면서 역소환 했던 하라바와 케이드, 데마를 연달아 소환했다. 하라바는 다시 소환되기가 무섭게 자신이 요정계에 와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바로 이렇게 물었다. “놈들의 기지는 완전히 파괴된 건가?” “그래.” 준상이 대답하자 하라바는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만족감을 표했다. “하하하! 이제야 좀 살맛이 나는군. 이번에 우리를 불러 올린 놈들이 시스템인지 관리국인지 하는 놈들이었지? 그럼 이젠 두 발 좀 뻗고 잘 수 있는 건가!” 그 말에 케이드와 데마는 눈빛을 빛냈다. 하라바의 말대로라면 이제 능력자들은 퀘스트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것은 다시 말해 능력자들의 능력이 이대로 고착화 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준상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멀었다.” “컥! 쿨럭! 뭐? 그게 무슨 소리야? 기지는 부서졌다며?” 하라바가 웃다 말고 사례가 들렸는지 기침을 터뜨리며 급히 되묻자 준상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우리가 파괴한 기지는 관리국이 사용하던 기지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너희들이 살고 있는 곳을 관리하던 곳이니 당분간 퀘스트나 기타 여러 가지 부분에서 차질이 있긴 하겠지만, 파괴되기 전에 너희들의 정보를 다른 곳으로 옮겼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런 부분도 복구가 되겠지.” “그럴수가.” 하라바는 케이드, 데마는 물론이고 조용히 뒤를 따르던 서유미나 블레이크, 맥밀란 역시 그 말을 듣고는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실제로 집사 고양이들을 발견했을 때 그곳에서 붙잡았던 여성은 ‘이 기지에서는...’이라는 말을 남겼다. 물론 이 말 하나만으로 다른 기지의 존재를 단정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전 우주를 아우르며 시드의 배포와 육성을 담당하고 있는 관리국이라면 최소한 뒤에서 암약하는 칠성좌 이상의 규모를 가지고 있을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하지만 준상의 말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칠대 황가에서 직접 나설 가능성이 있다.” “그런.” 하라바는 물론이고 케이드와 데마 역시 절로 얼굴이 굳어졌다. 이렇게 되면 행성 파두스는 칠대 황가와 남은 여섯 명의 칠성좌, 그리고 관리국의 집중적인 시선을 받을 수 밖에 없다. 능력자들이 제 아무리 강대한 힘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이들을 모두 감당하기는 어려운 일. 두려울 것이 없어 보이는 하라바조차도 현재의 상황을 깨닫자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준상은 앞일에 대해 생각하느라 조용해진 그들의 이끌고 정령의 문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정령의 문을 통과해 요정계로 도피한 능력자들의 수는 약 오십여명. ‘수확’으로 인해 기지로 전송된 능력자들의 정확한 수는 파악이 불가능한 상황. 또한 그 와중에도 소탕 작전을 이끌던 하라바와 케이드, 틸리오스 등의 통솔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행동하다가 마지막 순간 탈출하지 못한 자들이나, 벨 페오르의 공격에 의해 기지가 파괴될 때 거기 휩쓸린 자들도 있으리란 점을 감안하면 실제로 기지로 불려 올려진 능력자의 수는 더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죽거나 사라진 자들까지 어쩔 수는 없는 일. 중요한 것은 50레벨의 능력자들이 무려 오십여명이나 이곳에 모여있다는 사실이다. 정령의 문을 통과한 능력자들은 몇 개의 그룹으로 모인 채 서로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관리국의 기지에서는 경황이 없는데다 가장 강력한 능력자들이 전투를 주도했기 때문에 그것에 따라 움직였으나, 그런 급박한 상황이 지나가고 나자 인종이나 국가, 지역별로 다시 무리가 나누어진 것이다. 한 행성 출신이라고는 해도 서로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이상 이건 당연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서로를 경계하던 와중에 준상이 하라바등을 이끌고 도착하자, 가장 먼저 사막 왕국 출신들이 하라바에게 다가왔다. “왕이시여!” “무사하셨군요!” 그러자 뒤질세라 프라바 제국의 인사들도 케이드와 데마를 향해 다가섰다. “제국 제일의 기사를 뵙습니다!” “단장님!” 준상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런 사막 왕국의 인물들을 바라보고 있는 다섯 명의 무리들을 바라 보았다. “너희들은 어디 출신이지?” “아키아 제국에서 왔소.” 아키아 제국 출신 중에는 본래 하라바나 케이드에 버금가는 능력자가 존재했지만, 사막 왕국과 프라바 제국의 인사들이 상황을 주도하는 것에 대해 반발해 독자 행동을 하다가 탈출하지 못하고 요새와 함께 소멸하고 말았다. 지금 남은 인물들은 오륙십 레벨 정도가 고작. 파두스의 패권을 차지하고 있는 세 국가 가운데 하나인 아키아 제국의 능력자들이 다른 두 나라에 비해 너무 수준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그 짧은 시간 동안 이런 알력이 발생했음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렸다. 준상이 말없이 하라바와 케이드를 바라보자 그들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크흠. 상황이 워낙 급박해서...” “어디로 가 있는지 찾을 도리도 없고 해서...” 진땀을 흘리며 쩔쩔 매는 그들을 잠시 지그시 노려보던 준상은 또 다른 한 무리의 능력자들을 바라보았다. 약 이십명에 달하는 그들은 모두 커다란 두건 같은 것을 깊게 눌러 쓰고 있었다. 준상은 그들 가운데 두려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후샤니를 발견하고는 이들이 아인종들의 그룹임을 어렵지 않게 알아보았다. 그들은 모든 능력자들 가운데 가장 많은 수를 지니고 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인간들을 향한 불신과 두려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대충 능력자들의 면면을 둘러 본 준상은 복귀한 능력자들 가운데 자신에게 속하지 않은 칠십 레벨 이상의 능력자 두명이 하라바와 함께 있음을 알아 보았다. 따로 소개를 받을 필요도 없었다. 그들이야 말로 틸리오스와 함께 하라바의 휘하에서 용맹을 떨치고 있는 삼 장군이었다. “하라바.” “응?” “거기 두 명, 이리 데려와.” “...” 그 말에 하라바가 씩 웃었고, 그 표정의 의미를 이해한 틸리오스는 쓴웃음을 지었지만 그렇다고 다른 두 동료에게 자신이 겪은 일에 대해 말해 주지는 않았다. 초록은 동색이란 말도 있듯이, 틸리오스도 하라바와 별다를 것이 없었던 모양이다. “네 놈은 누군데 감히 사막 왕국의 고귀한... 컥!” 구릿빛 피부가 번들거리는 건장한 체구의 사내가 성을 내며 다가섰지만, 그는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전신에서 힘이 쭉 빠지는 느낌과 함께 준상에게 턱을 얻어 맞고 그대로 널브러졌다. 준상은 무표정한 얼굴로 쓰러진 남자의 몸 위에 올라타 반쯤 정신을 잃을 정도로 두들겨 패고는 그대로 예속의 족쇄를 채워 버렸다. 삼 장군 가운데 하나를 말도 없이 떡이 되도록 두들겨 팬 준상이 몸을 일으키자 기이한 탈력감에 당황해 하던 나머지 한 명은 얼른 두 손을 들어 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항복이오.” “...” 앞서 박살난 인물과는 달리 상대적으로 날렵한 체구와 가는 눈으로 인해 약삭빠른 인상을 지니고 있던 사내의 재빠른 항복 선언에 얼굴을 찌푸리던 준상은 품에서 예속의 족쇄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 약삭빠른 인상의 사내는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하라바와 틸리오스의 발목을 살폈다.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하지만 눈앞에 내밀어진 족쇄와 같은 물건이 그들의 발목에 채워져 있는 것을 보자 사내는 빠르게 상황 파악을 끝내고는 준상이 내민 족쇄를 받아들였다. “...” 순식간에 용맹한 사막 왕국의 장군 두 명을 제압하고 그들을 예속시키는 모습에 다른 능력자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본보기로 두 장군을 때려 눕혀 은연중에 서열을 확립한 준상은 곧바로 지시를 내렸다. “데마.” “네.” “이들의 명부를 작성하라.” “알겠습니다.” “맥밀란, 서유미. 너희는 그녀를 도와라.” “네!” 준상은 계속해서 하라바를 돌아보며 말했다. “하라바. 요정계에서 지내는 동안 사막 왕국의 인원은 네가 통제하도록.” “알았다.” 곧이어 케이드와 후샤니에게도 같은 지시를 내린 준상은 아키아 제국 출신의 인물 다섯명과 세 강대국에 속하지 못한 다른 능력자들에게 말했다. “방금 말한 세 무리 가운데 하나를 골라라.” “...” 하라바나 케이드 같은 최상위 능력자도 없는데다 수마저 적은 상황이니 다른 세 집단과 동등한 대우를 기대하는 건 처음부터 무리한 일이었고, 그 점을 이해한 아키아 제국 출신의 능력자들은 잠시 의견을 나누더니 프라바 제국쪽을 선택했다. 아무래도 국경을 마주한 채 긴장감이 유지되고 있는 사막 왕국보다는 생소한 프라바 제국쪽이 나으리라 판단한 것이다. 그 외 강대국에 속하지 못한 다른 이들 역시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세 무리 가운데 하나를 선택했다. 능력자들을 세 개의 무리로 나눈 준상은 일단 그들의 거처를 신기루 꽃으로 옮긴 다음에야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고양이들은 어떻게 할까요?” “고양이?” “제법 수가 많은지라...” 블레이크의 말에 리체스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저한테 맡겨 주시지 않을래요?” “어쩌려고?” “말도 잘 듣고 일도 잘 하니, 쓸 데야 무궁무진하죠.” “하긴. 그럼 마음대로 해.” “고마워요!” 그렇게 대략의 정리가 끝난 뒤 간단하게 몸을 씻자 하라바와 케이드가 준상을 찾아왔다. 귀여운 고양이들이 우르르 몰려와 다과상을 차리고 사라지자 하라바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고르 녀석이 자식이라도 낳은 건가?” 준상은 고개를 저었다. “그 기지 안에 집사 고양이들을 양산하는 시설이 마련되어 있더군. 저 고양이들은 그곳에서 구출한 녀석들이다.” 하라바는 반색하며 말했다. “그래? 그럼 나 한 마리만 나눠 줄 수 없겠나?” “리체스가 관리하고 있으니 말해 보든가.” “하하, 고맙네. 이대로 집에 돌아가서 마누라들이 만든 맛없는 식사를 먹을 생각을 하면 지옥이 따로 없었거든.” 그러자 케이드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럼 저도...” “리체스한테 말하라니까.” “아, 그랬지요. 하하하...” 일단 그렇게 대화를 나누며 차로 목을 축이자 케이드가 본론을 꺼냈다. “앞으로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 준상이 입을 다물고 대답하지 않자 하라바가 투덜거리며 말했다. “말해 무엇하겠소. 지나고 생각해 보니까 완전히 당한 느낌이긴 하지만.”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하라바는 찻잔을 든 채 케이드에게 대답했다. “이로써 우리가 살던 땅의 고위 능력자들은 모두 이 녀석의 손아귀에 들어간 것이나 다름 없소.” “음...” “하지만 그건 어떻게 보면 큰 일도 아니지.” 하라바의 말에 케이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무슨...” “좋든 싫든 앞으로 우리가 살던 곳은 칠대 황가와 관리국, 그리고 칠성좌 놈들에게 주목을 받을 수 밖에 없소.” “그야... 그렇지요.” “한 곳에 시선이 집중되면, 그만큼 다른 지역에 대해서는 소홀해질 수밖에 없는 법. 그렇지 않소이까?” “아...” 케이드는 하라바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하고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준상은 다른 세계의 인간. 하지만 그것은 여기 있는 몇 명 밖에 모르는 사실이고, 칠대 황가 또한 준상이 이번 사태를 주도하고 있음을 알지 못한다. 그것은 다시 말해, 그가 속한 세계 역시 저들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진다는 의미. “결과만을 따져 보면 일단 그렇긴 한데, 만약 적극적으로 미끼를 늘린 이유가 그런 것이라면...” 하라바는 그렇게 말하고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준상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준상은 별다른 대꾸 없이 찻잔을 기울일 뿐이었다. 00381 트롤러 ========================================================================= 하라바는 준상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다시 말을 이었다. “이런 식으로 위험이 가중되면, 능력자들은 좋든 싫든 뭉칠 수밖에 없는 노릇. 문제는 능력자들이라고 한꺼번에 호칭하고는 있지만 그들도 출신이라든가 이력 같은 것이 있는 이상 무조건 한 마음 한 뜻으로 뭉치기는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이오.” 케이드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을 받았다. “말씀대로요. 멀리 볼 것도 없이 방금 전에 패거리가 나누어졌던 일이라든가, 통제를 거부하고 뛰쳐나간 젝스 놈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지.” 젝스는 아키아 제국에서 가장 강하다고 알려진 능력자의 이름이다. 요새가 차원의 틈에 끼어 소멸한 이상, 더 이상 기억해둘 필요가 없는 이름이 되어 버렸지만 말이다. 하라바는 케이드의 비어버린 찻잔을 채워주며 다시 말했다. “이런 상황이라면 경이나 내가 이 무리들을 통솔하게 되면 필시 반발이 나올 수밖에 없소. 설령 경과 내가 그럴 마음이 없더라도 말이오. 아인종들이야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고.” “다소 강압적임에도 불구하고 저들이 준상님의 통제를 군말 없이 받아들인 건 그런 이해관계 때문이란 말씀이시구려.” “그 말대로요.” 케이드의 말에 맞장구를 친 하라바는 다시 준상의 반응을 살폈지만, 그는 여전히 반응 없이 다른 무언가를 생각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하라바는 혀를 차며 다시 말했다. “문제는 지금의 상황을 설명하더라도 이런 식으로 한데 뭉쳐 있는 상황을 저들이 그리 달갑지 않게 받아들일 것이라는 점이오.” “하긴, 저마다 속한 곳이 있으니.” “굳이 내 경우를 예로 들지 않더라도... 그들 정도의 고위 능력자라면 각자가 속해 있는 국가나 조직에서 모두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을 터. 이런 식으로 한꺼번에 그들이 자리를 비우게 되면 그것은 또 다른 혼란을 유발하는 원인이 될 수밖에 없소. 그 아인종 마법사처럼 세상과 인연을 끊은 채 숨어 지내는 자들도 있겠지만, 솔직히 그런 자들의 수가 그리 많지는 않으니까.” 케이드는 씁쓸한 표정으로 긍정했다. “힘이 있으면 내보이고 싶게 마련.” 그 말을 듣고 하라바가 씩 웃으며 말했다. “제국의 명망 높은 기사께서도 그런 욕망을 주체하지 못하는데, 다른 풋내기들이야 말할 것도 없지 않겠소.” “자기는 안 그런 것처럼 말씀하시는구려.” “하하, 말이 그렇다는 거요.” 하라바는 웃으며 그렇게 얼버무린 뒤,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문제는 그렇게 한번 흩어지게 되면 다시 지금과 같은 형태로 모이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겠지만, 이것은 생각보다 간단하게 해결이 가능하지. 이미 선례도 있고.” 케이드는 그 말을 듣자 바로 두 가지를 언급했다. “예속의 족쇄, 그리고 정령의 문.” 하라바는 찻잔을 기울여 목을 축이고는 말을 이었다. “그 두 가지라면 설령 흩어져 있다가 위급한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여기 있는 어떤 분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되오. 복잡하게 설명할 것 없이 이번 일을 떠올리면 되겠지.” 케이드는 진지한 표정으로 그 말을 받았다. “확실히 대책으로서는 상당히 매력적인 일이지만, 그렇게 되면 앞서 말했다시피 사실상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고위 능력자가 눈앞에 계신 어떤 분에게 예속되는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겠구려.” “예속의 족쇄에 얼마나 여분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우리들의 예만 보더라도 족쇄의 양이 늘면 늘었지 줄지는 않을 거요. 특히나 아인종들의 경우에는 그런 식으로 누군가를 예속하는 일 자체가 금기시될 테니 특히 족쇄가 많이 남아 돌 것이고.” 하라바는 그렇게 말한 뒤 다시 찻잔을 채우며 진지한 표정으로 준상에게 물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이제 슬슬 속내를 좀 털어놔도 되지 않을까 싶은데.” 준상은 담담한 태도로 반문했다. “뭘 말인가.” “이 강대한 힘을 지니고 무엇을 하려는 건가.” 하라바와 케이드는 진지한 표정으로 묻고 있었지만, 준상은 피식 웃으며 반문했다. “강대한 힘이라...” “그럼 아니란 말인가? 우리는 이미 그 칠성좌 가운데 한 놈을 박살냈고, 관리국인지 뭔지 하는 놈들의 기지도 하나 부숴버렸네. 물론 그것이 그들이 지닌 힘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이라고는 해도 말이야.” 하지만 준상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다.” “운이라, 그렇게 말할 때는 이유가 있겠구려. 말씀해주시겠소?” 케이드의 말에 준상은 이렇게 대답했다. “기지 최상층에서 벨 페오르와 마주쳤다.” 그 말에 하라바와 케이드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벨 페오르라고?” “칠성좌 가운데 한 명이 거기 있었단 말이오?” “그렇다.” 준상은 일단 그렇게 짧게 대답하고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놈은 자신이 벨 라야의 소멸에 관계했다는 증거를 없애기 위해 그곳에 와 있었다. 기지의 갑작스런 파괴도 녀석이 사용한 절멸의 힘 때문이었지.” “으음...” 케이드는 굳은 표정으로 침음을 삼켰지만, 하라바는 흥분한 표정으로 다시 이렇게 물었다. “자네가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있다는 건 놈을 때려잡았다는 뜻이겠지?” 준상은 고개를 저었다. “때려잡기는커녕 내가 죽을 뻔 했다. 네가 사용했던 검은 태양은 본래의 그것과 비교하면 반딧불 정도에 불과하더군. 솔직히 그 거대한 절멸의 힘과 마주한 순간 나는 대응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허...” “리체스의 도움이 아니었더라면, 그리고 그자가 갑자기 돌아가 버리지 않았다면, 우리들은 관리국의 기지와 함께 절멸의 힘에 삼켜져 그대로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그럴수가.” 하라바는 믿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은 채 입만 벙긋거리고 있었고, 케이드는 굳은 표정으로 찻잔만 연신 기울이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내가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놈의 의도가 과연 무엇인가 하는 점이었다. 하지만 떠올릴 수 있는 것은 모두 가정에 불과할 뿐, 확실한 결론을 내기에는 역시 정보가 너무 부족했다.” “끙... 골치 아프군.” 하라바가 머리를 감싸 쥐자, 케이드는 쓴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생각해 보면 칠대 황가나 관리국, 그리고 칠성좌 같은 존재들에게 있어 우리들은 그저 손가락에 박힌 가시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구려.” 준상은 가만히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굳이 그렇게 스스로를 비하할 필요는 없겠지. 작은 상처라도 잘못 덧나면 죽는 것은 마찬가지니까.” “하긴.” 준상은 찻잔을 내려놓고는 다시 말했다. “돌아가서 정령의 문이나 예속에 관한 것은 알아서 잘 설명하도록. 지금으로서는 저들의 강제 전송에 대항할 유일한 수단이니까.” “알았다.” “그렇게 하겠소이다.” 하라바와 케이드가 돌아가자 준상은 거처로 돌아가 잠든 누리의 모습을 바라보며 휴식을 취했다. 조용히 잠든 천사 같은 아이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덩달아 잠이 들었던 준상은 조금 시간이 지나서야 선잠에서 깨어났다. “음...” 준상이 깨어나자 누리에게 젖을 물리고 있던 리체스가 말했다. “깨셨어요?”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그리 오래 되지는 않았어요.” 리체스는 누리에게 젖을 배불리 먹이고 트림을 시킨 후, 다시 침대에 눕히고서야 준상의 옆으로 다가왔다. “여보.” “응.” “아까... 후샤니와 함께 있던 사람들 말인데요.” “그 자들이 왜?” “요정계에 받아들이면 어떨까 싶어서요.” “그들을?” 준상은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리체스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곳은 본래 당신이 다스리던 세계. 당신이 원한다면 내가 그걸 막을 이유는 없겠지. 하지만 한 가지 묻고 싶군.” “뭘요?” “그들만 받아들이는 건지, 아니면 그들 종족 전체를 받아들이겠다는 것인지.” 그 말에 리체스는 웃으며 대답했다. “일단은 그들부터요.” 우선은 지금 모여 있는 능력자들부터 받아들인다. 하지만 인간들이 그러하듯이 레벨 50이상의 능력자들이라면 그들 종족 내부에서도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을 터. 요정들은 호기심은 많지만 무언가를 차별한다는 개념 자체가 없는 종족이고, 이곳에 살고 있는 몇몇 인간들 역시 그런 요정들에게 익숙해져 있기는 마찬가지. 물론 아인종들이 한곳에 모여 살게 되면 그로 인한 다른 문제가 생길수도 있으나 그것은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든 생겨날 수 밖에 없는 문제다. 이런 점을 깨닫게 된다면, 달리 준상이나 리체스가 앞장 서지 않더라도 스스로 가까운 지인들을 하나둘씩 끌어들일 것이고, 필요하다면 준상이 각국의 고위 능력자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하여 노예처럼 지내고 있는 아인종들을 끌어올 수도 있다. 리체스가 말한 ‘일단’의 의미는 바로 이런 것이리라. “좋을 대로 해.” 일단 수족이 될만한 자들이 많으니 준상이 일일이 신경 쓰지 않더라도 일은 착착 진행이 되었다. 가장 먼저 이번에 구출한 능력자들에 대한 정보가 담긴 명부가 만들어졌다. 그리고는 하라바와 케이드에 의해 능력자들에 대한 설득이 이루어져 정령의 문을 개통하고 안전장치로 예속의 족쇄가 채워지는 과정이 진행되었다. 이런 식으로 통과 의례를 마친 능력자들은 일단 제국이나 사막 왕국으로 보내진 다음 별해파리나 갑가오리 등의 운송수단을 통해 각자가 살던 곳으로 되돌려 보내졌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일련의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 준상은 계속 한 가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칠성좌에 대항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 지금 상태로는 벨 페오르와 같은 칠성좌급과 마주할 경우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이 사실상 전무하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하라바가 지닌 검은 태양의 힘이 벨 페오르 본인의 궁극기에 비하면 반딧불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미약하다는 사실이 판명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이미 준상의 손에 들어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벨 라야의 다크 시드. 비록 하라바와 준상의 손에 허무하게 소멸당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여러 가지로 운이 좋았던 것일 뿐 그들의 역량이 벨 라야를 뛰어넘었기 때문은 아니다. 벨 라야 역시 칠성좌의 일인임을 감안한다면, 다크 시드를 이식해 그 능력을 손에 넣는 것 만으로도 다른 칠성좌와 동등한 수준의 힘을 손에 넣을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문제는 일단 칠성좌의 하나가 되어 버리면 칠대 황가에 종속되어 버린다는 점.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벨 라야의 다크 시드가 지닌 힘만 뽑아내어 사용하는 방법이지만, 시드나 다크 시드의 작동 원리 등이 규명되지 않은 현재로서는 뜬구름 잡는 얘기일 뿐이다. 결국 시도할 수 있는 방법은 현재 준상이 지니고 있는 정령계의 힘을 더욱 크게 확장하는 것 뿐이다. 현재 준상이 받아들인 정령은 세 가지. 화염의 대정령과 얼음의 대정령, 그리고 광기의 정령이다. 당장 이 세 가지 정령의 힘을 다루는 것만으로도 힘에 겨운 터라 새로운 정령을 받아들이는 작업을 유보해 두고 있었지만, 칠대 황가의 강제 집행을 눈앞에 둔 지금 상황이라면 더 이상 느긋하게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다. 준상은 새로운 정령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자 곧바로 신기루 탑에 구금해 두었던 칠대 황가의 일원인 바리아낼라 가문의 직계인 발레라와 라트나를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나의 주인이시여.” “준상님을... 뵈어요.” 공손하게 자신에게 고개를 숙이는 두 황족을 바라보며 준상은 이렇게 선언했다. “이제 너희들이 돌아갈 때가 되었다.” 00382 트롤러 ========================================================================= 준상의 말에 발레라와 라트나는 서로 상반된 반응을 보였다. 발레라가 보이는 반응이 굳은 결의라면, 라트나의 반응은 당혹과 불안. 하지만 준상은 그런 두 사람의 반응 따위는 무시한 채 계속 말했다. “방식은 이전에 네가 말한 식으로 탈출이 되겠지만,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맡기겠다.” 발레라는 그 말을 듣자 바로 고개를 숙이며 정중하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주인이시여. 그렇다면 제가 청을 몇 가지 드려도 되겠습니까?” “말하라.” 준상의 허락이 떨어지자 발레라는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시종들은 데리고 갈 필요가 없습니다. 쓸데없이 떠들어 댈 입이 늘어나게 되면 저희들의 행동에 제약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저에게 그들을 내려 주십시오.” “...” 준상은 얼굴을 찌푸렸다. 겉보기엔 평범한 인간과 다를 바가 없는 이 황자가 저주의 흑혈로 인해 포식자로 변화했음을 새삼스레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혈액이라면 이미 충분히 내려 주었을텐데?” 발레라는 그라우엔이 된 이후로 흡혈의 욕구를 억제하느라 고생했지만, 임서윤을 통해 다수의 혈액팩을 전달 받은 뒤로는 큰 지장 없이 생활하고 있었다. “주인의 은총에는 항상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혈액들은 포만감을 줄 지언정, 만족감을 주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저는 반쪽 짜리 그라우엔에 불과하게 됩니다.” “흠...” 하긴 같은 호랑이라도 우리 안에서 인간이 주는 먹이만 먹고 자란 녀석과 직접 야생에서 먹이를 잡아먹으며 자란 녀석은 아무래도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준상이 잠시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자 발레라는 다시 이렇게 말했다. “게다가, 놈들의 몸에는 제가 모르는 별도의 조치가 취해져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를테면?” “위치를 발신 하기 위한 마법 장치 같은 것이 좋은 예가 될 겁니다.” “그런 것도 있나?” “직접 본 적은 없지만, 고위 황족을 시종 하는 자의 몸에 그러한 장치를 심어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일종의 GPS 같은 건가. 역시 사람 생각이란 건 대체로 크게 다를 바가 없는 모양이다. “하지만 이상하군. 그런 장치가 있다면 어째서 구출대 같은 것이 쳐들어 오지 않은 거지?” 준상의 물음에 발레라는 이렇게 대답했다. “지금까지 이들이 차원 요새 안에만 머무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차원 요새는 차원의 틈 속을 헤매도록 만들어진 것. 애초에 관리국이나 칠성좌들이 차원 요새를 본거지로 삼는 것 또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런가.” 그런 종류의 마법 장치가 있었다면 리체스가 벌써 발견하고도 남았을 거란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만약 그 발신 장치가 시드와 비슷한 원리로 동작하고 있다면 리체스라 해도 그 신호를 감지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준상은 결국 고개를 끄덕여 발레라의 청을 수락했다. “원하는 대로 즐기되, 그 쾌락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라.” 발레라는 기쁜 표정으로 넙죽 엎드리며 외쳤다. “감사합니다! 나의 주인이시여.” “청은 그것이 전부인가?” 준상이 다시 묻자 발레라는 몸을 일으키더니 창백한 표정으로 옆에 앉아 있는 자신의 누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한 가지 청이 더 있습니다.” “말하라.” “부디 제 누이에게 은총을 내려 주십시오.” “...” 그 말이 발레라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준상은 미간을 찌푸렸고, 라트나는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발레라를 바라보았다. “이유는?” 준상이 묻자 발레라는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제 누이가 비록 주인님께 매혹되어 연모의 감정을 품고 있음은 익히 알고 있으나, 본디 사람의 마음이란 여린 잡초와 같은 것이라 가벼운 바람에도 크게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마음을 굳건히 할 증표가 필요합니다.” “...” “허나 물질적인 증표는 이후 화근이 될 소지가 있으니, 그녀만이 보고 느낄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면 흔들리는 마음을 굳세게 다잡을 수 좋은 버팀목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흠...” 라트나는 당황과 수치로 인해 귀까지 빨개진 채 고개를 수그리고 있었다. 준상은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다시 말했다. “그녀는 네 약혼자이다. 이것이 나중에 문제가 될 수도 있을텐데?” 발레라는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정으로 이어진 사이도 아닐뿐더러, 저와 맺어지면 오히려 더 큰 화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어째서?” “제가 이미 그라우엔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준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혼혈이 태어날 가능성이 높다는 얘긴가?” “그렇습니다. 제 경우에는 이미 충분히 성장한 상태에서 그라우엔이 되었으니 설령 흡혈이나 살육의 욕구가 치밀어 오르더라도 그것을 스스로의 의지로 억누르는 것이 가능합니다. 허나, 아직 인격이나 지능이 성숙하지 않은 아이의 경우에도 그것이 가능할지는 미지수 아니겠습니까?” 확실히 일리가 있다. 순수한 두 명의 인간이 결합했음에도 그라우엔 같은 아인종이 태어난다면 어떤 식으로든 문제가 될 수밖에 없는 일. “운이 좋아 잉태라도 하게 된다면, 이러한 위험을 사전에 예방할 수 있을뿐더러, 제 누이 역시 아이라는 증표를 버팀목으로 삼아 주인에 대한 충성을 이어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음...” 확실히 모략이 횡행하는 궁정에서 크고 자라서인지 발레라의 제안은 음험한 면이 있었다. 저주의 흑혈을 라트나에게 사용하지 않은 것은 만약 발레라가 그라우엔임이 발각되더라도 최소한의 끈을 남겨 두기 위함이지만, 주종 관계라는 절대적인 맹약으로 묶인 발레라와는 달리 라트나는 매혹의 힘이 약해질 가능성이 있었다. 라트나는 면전에서 이런 논의가 이루어지는 것이 너무나 민망한 나머지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으나, 준상은 그들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청은 그것뿐인가?” 승낙인지 거절인지 알 수 없는 대답이었지만, 발레라는 다시 고개를 조아리며 새로운 제안을 끄집어냈다. “벨 라야의 뒤를 이으실 생각이 없으십니까?” “...” 벨 라야의 힘은 상당히 매력적이지만, 그의 다크 시드를 받아들이면 칠대 황가의 손아귀에서 빠져 나올 수 없는 몸이 되고 만다. 발레라라면 그런 문제를 잘 알고 있을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제안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세히 설명하라.” 준상의 명령이 떨어지자 발레라는 몸을 바로하며 설명을 시작했다. “벨 라야가 소멸한 지금의 상태를 제 가문에서 그대로 방치하고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준상은 얼굴을 찌푸렸다. “새로운 성좌의 주인을 만들어 낼 것이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칠성좌 급의 다크 시드를 만드는 방법은 저 역시 알지 못하나, 짐작컨대 충분히 높은 레벨을 지닌 창조의 씨앗이 있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겁니다.” “흠...” 이미 한 번 만들어낸 전례가 있다면, 다시 만들어내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을 터. “어차피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면, 새로운 성좌의 주인을 만드는 것보다는 그 힘을 주인께서 취하시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말씀입니다만... 혹시 창조의 씨앗을 습득하지 않으셨습니까?” 벨 라야의 요새에서도, 그리고 이번에 파괴한 관리국의 기지에서도 창조의 씨앗은 획득하지 못했다. “얻지 못했다.” “음... 아쉽군요.” 그 반응을 보며 준상은 이렇게 물었다. “창조의 씨앗으로 종속의 기능을 무력화 시키자는 얘긴가?” 발레라는 바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칠성좌 급의 다크 시드를 만들기 위해서는 상당히 높은 레벨의, 그러니까 최고 레벨 수준의 씨앗이 있어야겠지만, 단순히 거기 담겨 있는 종속의 기능만 무력화시키는 장치를 만드는 것 뿐이라면 그 이하라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확실히 그럴듯한 얘기지만 추측성의 정보라 그리 신뢰가 가지는 않는다. 하지만 시도해 볼만한 가치는 충분히 있다. 우선 창조의 씨앗을 손에 넣은 다음의 일이겠지만 말이다. “기억해 두도록 하겠다.” 준상이 그렇게 대답하자 발레라는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제가 드리고자 했던 청은 이것은 전부입니다.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의 주인이시여.” 준상은 고개를 돌려 라트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방금 전 자신에 관한 논의로 인한 당혹스러움이 아직 가시지 않았는지 준상의 시선이 향하자 움찔하며 얼른 눈을 피하고는 손가락을 꼼지락 거리고 있었다. 아마도 일부러 언급하지 않은 것이겠지만, 발레라가 내건 두 번째 제안이 효과를 지니기 위해서는 한 가지 조건이 선결 되어야 한다. 그것은 준상이 그녀나 그녀에게서 태어날 아이에게 절대로 마음을 주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만약 그렇지 못하게 되면, 이것은 오히려 적에게 자신의 인질을 스스로 내주는 결과가 되어 버린다. 발레라의 제안이 더욱더 음험하고 냉혹하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준상은 다시 발레라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너는 가서 시종들에 대한 처리를 마치도록.” “알겠습니다.” 발레라는 몸을 일으키고는 깊게 허리를 숙여 예를 취한 뒤 시종 들이 감금되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라트나는 발레라가 자리를 비우고 준상과 단둘만 남게 되자 긴장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준상은 그런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거처로 돌아가 있도록.” “...” 라트나는 꼼지락 거리던 손가락의 움직임을 멈춘 채 잠시 굳어 있다가, 이내 조용히 일어나 준상에게 허리를 굽혔다. “물러... 가겠습니다.” 어쩐지 조금은 울먹이는 듯한 목소리. 라트나는 입술을 깨문 채 도망치듯 그 자리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준상은 손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 라트나는 자신의 손목을 움켜쥐는 강인한 힘에 놀라 돌아보았다. 준상은 그녀의 눈에 맺힌 눈물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잡고 있는 손을 끌어당겨 그녀를 가만히 품에 안았다. “아!” 라트나는 놀란 표정으로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품에 안겨 있다가, 준상이 손목을 놓아 주고 나서야 다시 도망치듯 자신의 거처로 돌아가 버렸다. 하지만 그렇게 물러가는 라트나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준상의 눈은 차갑기만 했다. 발레라는 먼저 먹이를 줘서 길을 들이라고 했지만, 배가 부르면 오히려 긴장이 풀어지고 몸이 둔해질 수밖에 없는 법. 더구나 처음부터 가장 맛있는 먹이를 주면 입이 고급이 되어 다루기 곤란해질 수도 있다. 똑같이 손 안에 든 물고기라고는 해도, 기르는 방법은 천차만별 아니겠는가. 준상이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천천히 몸을 일으킬 즈음, 발레라는 결계를 통과해 이제나 저제나 하며 안절부절하고 있던 시종들에게로 다가갔다. “황자 전하!” “죄송합니다! 저희들의 힘이 부족하여...” “죽여주십시오! 황자 전하!” 시종들은 무사히 돌아온 황자의 모습을 보자 그 앞에 달려와 엎드리며 그렇게 구태의연한 말들을 내뱉었다. 발레라는 피식 웃으며 그들 가운데 한 명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황자 전하?” 전에 없는 행동에 시종은 당황해 하면서도 감격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발레라는 그런 시종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잡고 있던 손을 끌어당기며 그를 껴안았다. “고맙다.” “화, 황자 전하.” 시종은 이제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감격한 표정을 지으며 몸을 떨었지만, 그와 같은 감동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콰득! 발레라가 느닷없이 그의 목에 날카로운 이빨을 박아 넣은 탓이다. “커윽!” 단숨에 목줄기를 통과하는 대동맥이 끊어지고, 그곳으로부터 울컥 울컥 솟아 오르는 붉은 피가 발레라의 목구멍 안으로 흘러 들어갔다. 부러운 눈으로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시종들은 그 갑작스런 모습에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저, 전하... 어째서...” 시종은 그 말 한 마디를 남기고는 그대로 축 늘어져 버렸고, 발레라는 그의 목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를 게걸스럽게 들이키다가 시종의 목숨이 끊어지자 그제서야 그의 몸에서 손을 풀었다. “크하...” 준상이 건네주던 투명한 주머니에 담겨 있던 피를 마실 때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충만함이 전신에 짜릿한 쾌감을 선사하고 있었다. 발레라는 난생 처음 느껴보는 그 지독한 쾌락에 전율하다가 남아 있는 다른 먹이들을 향해 눈을 돌렸다. 00383 트롤러 ========================================================================= 발레라가 느긋하게 피의 만찬을 즐기고 있는 동안 준상은 정령계로 통하는 입구 앞에 도달해 있었다. “후...” 한 발 내딛어 정령계로 들어선 그가 소환을 실행하자 하얀 머리카락을 지닌 투명한 피부의 여인이 한줄기 빛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준상은 그녀의 몸에 정령이 깃드는 순간 역소환을 실행하려 했지만, 이번에는 이전과는 다른 현상이 일어났다. “싫어... 이젠 싫어...” 얼음의 대정령에 빙의되어 얀트훈센 인근 지역을 수백년간 얼음 폭풍의 소용돌이 속에 가두어 버렸던 이벨라. 그녀가 정령의 침습을 거부하기 시작한 것이다. “...” 준상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에 얼굴을 찌푸렸다. 정령의 침습과 이탈이 반복되면서 그러한 과정에 대해 본능적인 이해가 생겨난 것일까. 정확한 원리는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지금까지 무력하게 굴복하기만 했던 그녀에게 정령을 거부하려는 의지가 생겨났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으으으...” 하지만 그녀의 노력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강렬한 빛이 그녀의 몸을 관통하며 정령이 그 몸을 차지해 버린 것이다. 준상은 정령이 그녀의 몸을 차지하자 곧바로 역소환을 실행하고는 정령계를 빠져 나와 신기루 꽃으로 돌아왔다. 이벨라를 위해 특별히 만들어 놓은 결계 안으로 들어간 그는 일단 결계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것을 확인하고는 이벨라를 소환했다. 그리고 한 줄기 빛과 함께 그녀의 투명한 몸이 나타나자 정신을 차리기 전에 그녀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아... 아으...” 이벨라의 몸에 깃들어 있던 정령은 준상의 팔을 통해 그가 보유하고 있는 정령계에 그 힘을 빼앗겼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정령력이 소모되자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힘을 잃은 정령이 이벨라의 몸에서 빠져 나왔다. 준상은 작은 반딧불과도 같은 형상으로 남은 그 정령을 마저 포획하고는 그 의의를 흡수했다. “이건... 빛인가.” 정령력을 빨아들일 때만 해도 뭔가 애매한 느낌이었는데, 의의를 받아들이고 나니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약간 더부룩하고 메스꺼운 느낌이 있기는 했으나, 이전보다는 훨씬 상태가 좋았다. 정령력을 다루는 데 익숙해 진 만큼 정령계가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의 크기도 더 늘어난 것이 아닐까 싶었지만, 그런 세세한 부분 따위는 어찌 되든 상관 없다. 중요한 것은 보다 큰 힘을 얻을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었다는 점. 준상은 반쯤 정신을 잃은 채 가쁜 숨을 헐떡이고 있는 이벨라를 역소환 한 다음 다시 정령계로 향했다. 하지만 방금 전의 일 때문인지 바로 소환이 되지 않았다. 때문에 준상은 그녀의 카드 슬롯에 쓰지 않는 몇 개의 카드를 장착한 다음 재생률 관련 시드를 부여했다. 12퍼센트의 재생률 시드가 다섯 개면, 총합이 육십 퍼센트. 준상에 비해서는 한참 모자른 수치이긴 하지만, 재소환을 압당기는 데는 큰 도움이 된다. 마침내 재소환이 가능해지자, 준상은 수많은 힘들이 소용돌이 치고 있는 정령계 안에 들어가 다시 이벨라를 불러냈다. “허윽!” 탈진 상태로 반쯤 정신을 잃고 있던 이벨라는 기습적으로 정령력이 몸 안에 밀려들자 눈을 부릅떴지만 아까처럼 저항할 틈도 없이 그대로 정령에 의해 신체의 주도권을 빼앗기고 말았다. 정령이 무사히 그녀의 몸을 안착한 것을 확인한 준상은 그녀를 역소환한 다음 아까와 마찬가지로 신기루 꽃 안에 설치된 결계 안에 데리고 들어와 정령력을 흡수했다. “하읏!” 송글송글 땀이 맺힌 벌거벗은 모습으로 신음인지 비명인지 모를 숨소리를 토해내는 이벨라의 모습은 묘하게 색기가 넘쳐서 준상은 자신도 모르게 하반신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이전에도 이런 모습을 몇 번이나 보았건만, 어째서 이제 와서 이런 기분이 드는 것일까. “으음...” 준상은 팔을 타고 전해지는 정령력에 그 이유가 있음을 알아챘다. “설마... 이번 정령은...” 정령은 정령력이라는 힘이 의의라는 형태의 핵에 모여 만들어진 것. 대표적인 것이 불, 물, 바람, 대지와 같은 사대 속성이지만, 이런 자연을 움직이는 큰 힘 외에도 광기처럼 정신과 관련된 것도 엄연히 존재한다. 정신의 정령은 위험하다. 어떤 면에서는 사대 속성보다도 더 다루기 까다로운 존재. 실제로 준상은 이미 화염과 얼음의 대정령을 거두었고, 방금 전에는 빛의 대정령마저 흡수했다. 단순히 흡수하는 것만으로는 그 의의를 제대로 활용하는 것이 쉽지 않으나, 지금 상태라면 빛의 대정령이 지닌 힘을 발휘하는 것도 그리 어렵게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대정령보다 급수가 낮으면서도 아직까지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존재가 있다. 그것은 바로 광기의 정령. 이런 정신계 정령은 의지 자체에 직접 관여하기 때문에 다른 속성들처럼 힘과 의의를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제대로 다룰 수가 없다. “젠장...” 준상은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이벨라로부터 손을 떼고 역소환을 실행하려 했다. 허나 그가 미처 자신의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기도 전에 뜨거운 숨을 헐떡이던 이벨라가 손을 뻗어 준상의 목을 감싸더니 그대로 준상에게 입술을 겹쳤다. “...” 순간 이벨라와 맞닿은 모든 신체 부위로부터 뜨겁고 강렬한 어떤 기운이 준상의 몸으로 밀려들어왔다. 그 기운은 순식간에 준상의 이성을 성난 피라니아처럼 뜯어 먹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성이라 불리우던 그것이 하얀 백골만 남게 되자, 준상은 지금껏 억누르고 있던 모든 욕망을 단숨에 폭발시켰다. 애욕. 이성에 대한 성애의 욕망을 일컫는 말. 준상과 이벨라는 애욕의 정령에게 이성을 침습 당한 채 그대로 바닥을 뒹굴었다. 몸에 걸치고 있던 옷을 찢듯이 벗어 던진 준상은 일체의 전희조차 없이 이벨라의 몸에 용암과도 같은 뜨거운 기운이 감도는 신체를 밀어 넣었다. “아악!” 정신없이 준상의 입술을 탐닉하던 이벨라는 생살이 찢기는 그 끔찍한 고통에 눈을 흡뜨며 비명을 질렀지만, 그런 비명 소리는 오히려 상대의 정복욕을 더욱 부채질할 뿐이었다. 준상은 격렬하게 움직이며 이벨라의 몸을 유린했다. 처음에는 고통에 몸을 떨던 그녀였지만, 애욕의 정령은 그 고통마저도 쾌락으로 승화시켰다. 본래대로라면 준상의 압도적인 힘을 감당하지 못해 그녀의 몸이 부서져 버려도 이상할 것이 없는 일이었지만, 다행히도 이전에 맞추어둔 재생력이 그런 이벨라의 몸을 보호하고 있었다. 뜨거운 숨과 함께 온몸에서 아지랑이를 피워 올리며 짐승처럼 흐느끼는 이벨라. 그 위에서 헐떡이며 끊임없이 샘솟는 욕정을 그녀의 몸에 퍼부어대는 준상. 그 나락과도 같은 끝없는 애욕의 윤회는 준상이 지닌 욕망의 그릇이 모조리 비워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모든 행위가 끝났을 때, 애욕의 정령은 스스로 이벨라의 몸으로부터 벗어나 준상의 정령계 안으로 스스로 흡수되었다. “헉... 헉...” 이성을 잃은 채로 이벨라의 몸을 탐닉하던 준상은 애욕이라는 이름의 의의가 흡수되자 그대로 수면이라는 이름의 끝없는 늪과도 같은 지옥 속으로 빠져 들었고, 지니고 있던 체력이 모조리 소진되어 버린 이벨라 역시 애욕의 정령이 몸으로부터 빠져 나가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기절해 버렸다. 준상이 다시 정신을 차린 것은 그로부터 다시 한 나절이 지난 뒤였다. “...” 정신을 차린 준상은 자신의 품 안에서 새근거리며 잠들어 있는 이벨라의 모습을 보자 잠시 머리 속이 멍해지는 충격을 받았다. “이건... 도대체...“ 정령력을 흡수하다가 이벨라가 갑자기 자신에게 입을 맞췄던 것까지는 기억이 나지만, 그 이후의 일에 대해서는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기억이 나지는 않아도 상황을 파악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사방에 흘러넘치는 밤꽃 향기는 물론이거니와, 자신의 신체 일부 역시 여전히 이벨라와 결합되어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 저질러 버렸다. 준상은 새로 얻은 정령의 의의를 확인하고는 한숨을 푸욱 쉬었다. 애욕의 정령. 하고 많은 정령 가운데 하필 이런 것이 걸려들었을 줄이야. 난감해 하며 이벨라에게서 몸을 떼려던 찰나, 정신을 잃고 있던 그녀의 눈이 번쩍 하고 떠졌다. “...” “...”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준상은 몰랐지만, 이벨라는 방금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아니, 방금 전 뿐만이 아니다. 그녀는 그저 신체의 자유를 정령에게 빼앗기고 있었을 뿐, 감각만큼은 생생하게 전달받고 있었다. 준상은 일단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이벨라는 손을 뻗어 그의 등을 감싸 안는 것으로 그 행동을 저지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여 준상의 허리마저 옴짝달싹 못하도록 그대로 옭아 맨 그녀는 준상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누구신가요.” “...” 준상은 그녀의 도발적인 시선과 눈이 마주치자 자신도 모르게 다시 하반신에 피가 몰리는 것을 느꼈다. 이벨라는 자신의 몸 안에서 다시 힘을 되찾아가는 준상의 신체를 느끼고는 흠칫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도 다시금 대답을 재촉했다. “알려주세요. 당신의 이름을.” 억지로 풀어내고자 한다면 그녀의 팔다리 정도는 가볍게 풀어 버릴 수 있었지만, 준상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준상.” “준상?” “박준상이다. 성이 박이고 이름이 준상이지.” “이상한 이름이네요.” “...” 이벨라는 준상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내 이름인 이벨라에요. 이벨라 하란두르.” “안다.” “어떻게요?” “어쩌다 보니.” “흐응.” 이벨라는 가볍게 콧소리를 내고는 다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날 해방시켜준 걸 알아요.” “...” “그리고 정령력을 얻기 위해 날 이용한 것도 알아요.” 정령에 의해 침습 당한 상태에서도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는 것인가. 인격이 마모되어 대정령에게 먹혀 버렸다고 알고 있었던 준상으로서는 의외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준상의 물음에 이벨라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모르겠어요.” “...”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도 한 두 번이 아니지만, 일단 해방의 실마리가 생겼으니 이대로 포기하는 건 역시 좋지 않은 일이겠죠.” 담담한 목소리로 말하고는 있었지만, 수백년의 시간동안 얼음의 대정령에 의해 신체의 자유를 빼앗긴 채 홀로 지내는 것이 즐거운 일은 아니었을 터. “나 스스로도 놀라고 있어요. 이렇게 담담하게 나 자신의 일을 얘기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 “복잡한 표정 짓지 말아요. 방금 전의 일이 당신의 의도가 아니었다는 정도는 아니까요. 난 너그러운 여자거든요.” “무엇을 원하나.” 단도직입적인 준상의 말에 이벨라는 잠시 그의 눈을 바라보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도와주세요.” “어떻게?” “하던 걸 마저 해주세요.” “하던 거?” 이벨라는 아차 싶었던지 살짝 얼굴을 붉히며 다시 말했다. “정령 말이에요.” “아아...” “정령이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과정이 죽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아까 빛의 대정령이 침입했을 때 실마리가 보였어요.” “스스로 정령의 힘을 조절하고 싶은 건가?” 이벨라는 씁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네. 이대로라면 저는 또다시 얀트훈센에서와 같은 일을 벌이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 준상은 순순히 승낙했다. “알겠다.” 이벨라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너무 간단히 허락하시는 거 아닌가요?” “허락이고 뭐고, 나는 처음부터 그렇게 하려던 참이었으니까.” “아... 그렇군요.” 준상은 이벨라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이제 놓아주겠나?” “...” 이벨라는 준상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시 말했다. “제가 싫으신가요?” “어째서 그런 걸 묻는 거지?” “당신이 마음에 들었으니까요.” “뭘 보고?” “그냥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 준상은 혀를 찼다. 요정의 키스를 통한 매혹의 효과는 이미 정령력을 빼앗는 과정에서 대부분 사라져 버린 상태. 하지만 준상의 맨얼굴에 남아있는 뽀샤시나 물광의 효과는 여전히 남아 있다. 어쩌면 사라져 가던 매혹의 효과가 준상과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되살아난 것은 아닐까. 준상의 곤란해 하는 태도를 알아본 이벨라는 쓴웃음을 지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오랜 시간 동안 손 하나 깜짝 할 수 없는 상태로 의식이 어둠 속에 처박혀 있었던 탓인지도 모르죠. 사람의 온기가 더 절실하게 느껴지는 건.” “...” “게다가, 이런 저를 안아줄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더 존재할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거든요.” 정령이 강림한 그녀는 보통의 사람이라면 만지기는커녕 시야에 들어오기만 해도 확실히 죽을 정도의 힘을 발휘한다. 하지만 준상이라면 신체가 접촉하는 순간 정령력을 흡수하게 되니 그녀로서는 최상의 상대가 아닐 수 없다. “할 수 없군.” “그럼...” “하지만 각오하는 게 좋을 거다.” “...” “나는 욕심이 많은 남자니까.” 이벨라는 준상의 목을 끌어당겨 입을 맞추고는 배부른 고양이처럼 웃으며 대답했다. “바라던 바에요.” 00384 트롤러 ========================================================================= 예정 외의 사건이란 건 언제나 당황스러운 법이다. 그렇지 않아도 칠대 황가니 칠성좌니 관리국이니 하는 거창한 것들을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는 와중에, 피치 못할 사정이 있다 해도 가정의 문제가 겹치는 건 안 그래도 복잡한 머리 속을 더 복잡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일이다. 준상은 잠시 고민했지만, 역시 바른대로 실토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이렇게 되어 버렸다.” 헤네스와 리체스는 준상의 말을 듣고는 잠시 아무런 말이 없었다. 리체스의 경우는 아무래도 먼저 말을 꺼내기 어려울 수밖에 없는 상황. 하지만 헤네스라고 해서 말을 꺼내기 쉬운가 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불가피한 상황인 것은 어렵지 않게 이해했다. 그녀들은 정신계의 정령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이미 수차례 경험한 바가 있기 때문이다. 굳이 잘못을 따지자면 그런 식으로 정신계 정령이 덤벼올 수도 있는 상황을 미리 예상치 못한 것 정도겠지만, 얼마 전 준상과 함께 칠성좌의 하나인 벨 페오르와 조우했던 전력이 있는 리체스로서는 그가 힘에 목말라 성급하게 움직인 이유 또한 절실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벨 페오르의 궁극기는 실로 무시무시해서, 반신에 이른 리체스조차도 기적의 힘을 빌려 간신히 경로를 바꾸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물론 그녀가 자신의 전력을 모조리 내보일 수 없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 하지만 그것이 요정계 밖에서 내보일 수 있었던 모든 힘이었던 것 또한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런 적이 하나도 아니고 무려 여섯이나 남아 있는 상황임을 생각하면 다소 조급하게 움직인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이다. 문제는 그런 조급함이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를 가져 왔다는 점. 어차피 현재의 이벨라는 결계 밖으로는 함부로 나올 수 없는 몸이니, 그냥 모르는 척 관계를 이어갔어도 둘이서 입만 다물면 아무도 그런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자신의 실수를 이실직고하고, 책임을 지겠다고 나서니 이걸 성실하다고 해야할지 뻔뻔하다고 해야할지 모를 일이다. 리체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새삼스러운 일이지만 이렇게 반대의 입장이 되어보니 당시에 준상과 헤네스 사이에 끼어들었던 것이 얼마나 황당한 일이었는지 여실히 깨달은 것이다. “언니.” “응.” “그런 표정 지을 필요 없어요.” “미안.” 헤네스로서도 서운한 기분을 억누르기 힘든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옆에서 리체스가 죄책감에 짓눌린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보니 어쩐지 화를 내기도 어렵다. “그 분의 이름이 뭐였죠?” 헤네스의 말에 준상은 조용히 답했다. “이벨라. 이벨라 하란두르.” 헤네스는 다시 물었다. “당신이 강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분인거죠?” “그래.” 준상의 대답에 헤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그럼 어쩔 수 없죠. 불가항력이기도 했고.” “...” 리체스를 받아들일 때도 헤네스는 그렇게 말했었다. “하지만... 역시 서운하고 화가 나는 건 사실이에요.” “미안하다.” “괜찮아요.” 헤네스는 조금 힘 빠진 표정으로 미소를 지으며 리체스의 손을 어루만졌다. “그러니까 언니도 그렇게 죄 지은 듯한 표정을 그만 둬요.” “미안.” 이벨라와의 대면은 조금 뒤로 미루어졌다. 결계 밖으로 나가면 언제 어디서 어떤 정령에게 빙의될지 모르는 이벨라의 특성도 한 가지 이유였지만, 일부러 찾아가서 만나볼 정도로 그녀들에게 마음의 여유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쨌든 허락은 허락. 준상은 일단 허락이 떨어지자 이벨라를 대상으로 애욕의 정령을 다루는 수련에 들어갔다. 같은 정신의 정령이지만, 광기의 정령과는 다르게 애욕의 정령은 그나마 만족이라는 개념이 적용되는 존재이다. 즉, 이성을 상대로 욕구를 충분히 분출시킬 수만 있다면 정령이 폭주를 일으키더라도 진정을 시키는 것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것은 정신의 정령으로서는 보기 드문 일인데다 만족을 모르기에 일단 폭주하면 성녀의 힘을 빌려야 간신히 진정시킬 수 있는 광기의 정령에 비하면 매우 큰 장점이라 할 수 있었다. 물론 문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만족을 하면 진정이 된다 해도 일단 폭주라는 개념이 있는 것은 마찬가지. 게다가 준상 정도의 힘과 체력이 있는 존재라면 정사로 인해 여자 하나 죽어나가는 건 일도 아니다. 그런 위험한 일, 헤네스나 리체스에게 저지를 수는 없다. 때문에 준상은 그녀들에게 미안함을 느끼면서도 이벨라를 받아들인 것이다. 그녀의 신체는 얼핏 보기에는 인간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수백년 동안 정령에 의해 침식되면서 보통의 인간과는 다른 존재가 되어 버린 것도 분명한 사실이었다. 정령의 힘은 강대하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그런 강대한 힘을 몸 안에 담는 순간 그 파괴력을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폭발해 버려도 이상하지 않은 일. 하지만 이벨라의 신체는 그런 강대한 힘을 수백년 동안 견뎌냈다. 이것은 몸이 단단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정령이라는 특수한 힘을 받아내고 견디는데 적합하게 그 신체가 변모했다는 뜻이다. 때문에 그녀의 몸은 준상의 몸으로부터 폭주해서 터져 나오는 힘을 받아내는데 매우 적합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준상 뿐만이 아니라 그녀에게도 도움이 되는 수련이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강대한 정령의 힘을 통제하는 식의 수련을 해본 적이 없다. 수련 같은 걸 해보기도 전에 너무나 강대한 정령이 그 몸을 점령해 버린 탓이다. 하지만 준상과 함께 폭주하는 정령의 힘을 갈무리하는 수련을 거치면서 그녀는 점차 정령이라는 존재에 대한 통제력을 키울 수 있게 되었다. 아직 대정령이나 정신 정령을 통제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준상이 애욕이라는 이름의 정령력을 다룰 수 있게 될 즈음에는 그녀 역시 사대 속성의 일반 정령 정도는 어느 정도 통제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정도면, 결계를 나가도 되지 않을까?” 준상이 그렇게 말을 했지만, 이벨라는 고개를 저었다. “현재 들어와 있는 정령을 밀어내고 느닷없이 대정령 같은 것이 강림할 수도 있어요.” 어두운 표정으로 대답하는 모습을 보니 이미 그런 일을 겪은 적이 있는 모양이다. 어쨌거나 그런 식으로 다소 복잡 미묘한 과정을 거치며 준상이 힘을 키우는 동안, 발레라와 라트나의 귀환이 결정되었다. 그라우엔이 되면서 어딘지 모르게 포식자의 날카로운 기운을 항상 뿜어내고 있던 발레라는 마음껏 피와 살육의 욕망을 채운 덕분인지 이전과는 다르게 침착하게 갈무리된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에 비해 라트나는 다소 안절부절 못하는 기색을 보이고 있었으나, 준상과 눈이 마주치자 이전과는 다르게 묘하게 열기 넘치는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그들은 준상이 돌려준 옷가지 몇 개를 걸치고 있었는데, 자칫 달라진 외모나 차림새 때문에 귀환하고 나서 신분을 의심받는 상황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염려 때문이었다. 일반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들의 경우에는 화장빨이나 조명빨을 능가하는 아이템빨의 인상이 워낙 강렬한 탓에 그런 상황이 일어나도 그리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니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어느 정도 구색을 맞출 필요가 있었다. 대신 약간의 구정물과 핏물을 여기 저기 묻혀 두어 그들이 천신만고 끝에 간신히 탈출했다는 사실 또한 어필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준비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들 두 명의 몸에는 요정의 돌이 이식되어 있었는데, 이것은 요정들의 의사소통 수단을 이용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신체 능력이 충분하지 못해서 정령의 문을 개통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이런 식으로 연락이 가능해지면 그들을 통해 좌표를 전해 받아 신기루 꽃의 문으로 이동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이들에게 내려진 임무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는 칠대 황가의 움직임이나 계획 등을 사전에 탐지해 준상에게 보고 하는 것. 예를 들어 벨 페오르가 언급했던 강제 집행의 방법이나 계획 같은 것은 지금의 준상으로서는 일이 벌어지기 전에는 알 도리가 없다. 하지만 황실에서도 직계에 해당하는 이 두 사람이라면 충분히 그런 고급 정보와도 접촉할 수 있을 터. 아는 게 병이 된다는 말도 있지만, 지금과 같은 경우는 기만이 아닌 이상은 작은 정보라도 더 많이 알아내는 것이 도움이 된다. 두 번째는 다크 시드에 관한 정보가 그것이다. 칠성좌 급의 다크 시드에 대한 정보는 물론이고, 그것을 제어할 수 있는 방법 만이라도 알아낼 수 있다면 커다란 전력 증강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다크 시드는 시드 무력화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다크 시드라는 물건 자체가 관리국처럼 전송이라는 수단을 사용할 수 없는 상황에서 수확을 보다 용이하게 하기 위한 방법으로 만들어진 물건이니 이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물론 다크 시드를 사용해 육체 변이를 사용하게 되면 살육에 대한 욕구가 증대되는 문제점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런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다면 수습생 감독관이었던 앙가라드처럼 마법 능력만을 활성화시키는 것이 가능할 수도 있다. 다크 시드에 대한 비전은 칠성좌를 만들어낸 칠대 황가에 틀림없이 전해지고 있을 터. 그것을 얻을 수 있다면, 반대로 보통의 시드에 대한 비밀에도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세 번째는 벨 라야의 차원 요새가 붕괴한 사건의 배경에 벨 페오르가 있음을 알리는 것이다. 벨 페오르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하라바에게 검은 태양을 사용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여 벨 라야를 궁지로 몰고 간 것만은 분명한 사실. 단순히 검은 태양이 발현된 것을 보았다는 증언 정도로는 부족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발레라와 라트나가 탈출에 사용한 수단이 차원 요새의 고정형 게이트임이 밝혀지면 이 증언은 신빙성을 가지게 된다. 물론 진실은 차원 요새보다 훨씬 구형인 신기루 꽃의 게이트지만, 현재 그런 설비를 갖춘 것은 칠성좌의 차원 요새나 관리국의 기지 정도에 불과하니 두 황족이 그런 곳들 가운데 한 곳에 억류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증거가 된다. 벨 라야의 소멸과 관리국의 기지가 파괴된 배경에 벨 페오르가 있음이 밝혀지면 행성 파두스에 대한 강제 집행이 철회될 가능성도 있으니, 이것은 매우 중요한 임무라 할 수 있다. “준비 됐나?” 준상의 말에 발레라가 먼저 정중한 태도로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언제든 명만 내려 주십시오. 나의 주인이시여.” 그러자 뒤이어 라트나가 살짝 상기된 표정으로 대답했다. “설령 저 문 밖이 불구덩이 속이라도 당신을 위해서라면 언제든 뛰어들 수 있어요.” 애욕의 정령력을 그녀에게 살짝 흘려보낸 것뿐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가쁜 숨까지 몰아쉬며 그렇게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너무 약빨이 과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좌표 입력기를 열어 첫 번째에 저장된 행성 텔리타의 좌표를 석문에 입력했다. 행성 텔리타는 발레라가 다스리는 세 행성 가운데 첫 번째로 사실상 그의 본거지라고 할 수 있는 지역이다. 어디로 탈출시킬 것인가에 대해 여러 가지로 고민을 해봤지만, 본가의 대궁정 같은 곳보다는 역시 발레라의 본거지가 가장 적합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똥개도 자기 집에서는 반은 먹고 들어간다지 않는가. 비유가 다소 저속하기는 해도, 괜히 대궁정 같은 곳으로 보냈다가 검사 같은 걸 잘못 받아서 그라우엔이 되어 버린 걸 들키기라도 하는 날에는 만사 도루묵이 되어 버리니 가장 안전한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강제 집행에 대한 정보가 시급하기는 하지만, 발레라나 라트나 같은 장기말은 구하고 싶다고 해서 구해지는 것이 아니니 여기서는 일단 신중하게 움직이는 편이 낫다. 좌표의 입력이 끝나자, 준상은 그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럼 연다.” “네.” “준비 됐어요.” 준상은 그들이 당장이라도 뛰어들 것처럼 자세를 잡는 걸 확인한 뒤 천천히 석문을 열었다. 석문 안쪽에 물결치는 듯한 힘의 장막이 나타나자, 발레라와 라트나는 손을 잡고 그 안으로 급히 뛰어들었고, 그들의 모습이 문 너머로 사라지자 준상은 바로 문을 닫았다. 이로써 미끼는 던져졌다. 과연 이 미끼에 월척이 걸릴지, 아니면 작은 피라미가 걸릴지는 지나봐야 알게 될 일. 최악의 경우 피라미는커녕 오히려 저쪽에서 반간계를 걸어올 가능성도 있지만, 지금으로서는 이 방법이 최선이다. 하루가 지나자 발레라로부터 각자 짤막하게 연락이 들어왔다. “주인님. 들리십니까.” “들린다. 어떻게 됐지?” 준상의 물음에 발레라는 이렇게 대답했다. “큰 문제없이 잘 도착했습니다. 다소 어수선하기는 하지만, 그라우엔에 대한 것도 들키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당분간은 일단 안정을 취하도록 조치가 내려진 상황이긴 하지만, 조만간 본격적인 활동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알겠다. 수고하도록.” “기대에 보답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나의 주인이시여.” 발레라의 연락이 있고 조금 시간이 지나자 라트나로부터도 연락이 도착했다. “저기... 계세요?” “말해라.” “그게, 그러니까... 저는 잘 있구요. 그러니까...” “...” 이런 식으로 단둘이 대화를 하는 것 자체가 생소했던 걸까. 그래도 처음에는 중언부언하다가 나중에는 그럭저럭 자신에게 있었던 일을 준상에게 이러쿵 저러쿵 늘어놓았다. 그래봐야 중요한 정보라기보다는 신변잡기에 가까운 수준이었지만, 그녀에게는 처음부터 전문적인 보고 같은 건 기대하지도 않았다. 어쨌거나, 중요한 것은 그들이 별 탈 없이 무사히 도착했다는 점. 불안한 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첫 단추는 무사히 끼운 셈이라 준상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후로 준상은 이벨라와 함께 정령의 수련을 이어가며 발레라와 라트나가 전해오는 정보를 분석하는 일에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약 나흘 정도가 지났을 무렵. 발레라가 이런 보고를 해왔다. “잘 하면 창조의 씨앗을 하나 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수확이 정해진 건가?” “그건 아니고... 이전에 구해둔 씨앗이 하나 있었던 모양인데, 그것을 저와 라트나의 약혼 선물로 받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발레라와 라트나가 벨 라야의 차원 요새를 방문했던 이유는 레벨 85에 이른 하라바로부터 시드를 얻어 약혼 선물로 삼기 위한 것이었다. 좋게 생각하면 그들이 본래 받아야 할 것을 되돌려준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도 있는 일. 하지만 조금만 바꿔 생각하면 간신히 적의 소굴에서 탈출한 이들에게 벨 라야의 차원 요새가 붕괴할 때의 상황을 억지로 되새기도록 만들 수도 있는 일이다. 원래 저들의 풍습이 그런 것일까. 아니면, 누군가의 못된 장난일까. 어느 쪽인지는 확실치 않은 일이었지만, 분명한 것은 염원하던 창조의 씨앗이 마침내 손에 들어온다는 점이다. 다크 시드에 대한 정보가 없는 상황이라 벨 라야의 다크 시드를 통제하기 위한 장치로 만드는 것은 아직 요원한 일이지만, 어쨌든 가지고 있어서 손해 볼 일은 없는 귀중한 물건이다. 00385 트롤러 ========================================================================= “그래서, 그 씨앗은 언제 도착하는 건가.” 준상의 말에 발레라는 이렇게 대답했다. “약 삼일 정도 뒤에 저희들의 무사 귀환을 축하하는 연회가 이곳에서 열리게 됩니다. 창조의 씨앗은 그 때 전달될 것 같습니다.” “연회라... 누가 참석할 예정이지?” “제1 황자비이며 제 친누이인 마유나, 그리고 제 4황자 내외. 직계 가운데는 이 정도가 전부이고, 그 외 방계 귀족 다수가 참석합니다.” 생각보다 참석 인원이 그리 많지 않다. 이전에 발레라에게 들은 바로는 황가는 그 수가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고 직계에서 멀어지게 되면 분가의 형식으로 새로운 가문을 만들어 나가야만 한다. 현재 가주를 맡고 있는 발레라의 아버지가 타계한 후 가문을 계승하지 못하면 발레라 역시 칠대 황가 직계에서 이름이 지워지고 새로운 가문을 만들어 분가하게 된다. 또한 그렇게 분가하게 되면 그는 지금까지 지배하던 행성의 영주에서 영주 대리로 지위가 격하되며, 이것은 새로운 황족이 태어나 그 영주의 직위를 계승하기 전까지 이어진다. 영주가 되기에 적절한 직계 황족이 태어나지 않는다면, 발레라는 영주 대리의 직위를 유지하다가 그의 사망과 동시에 영주 대리의 직위는 회수되고 행성 또한 황실 직속으로 귀속된다. 만약 이렇게 영주 대리의 직위에 있으면서 큰 공을 세우게 되면, 공의 크기에 따라 상속 가능한 별도의 영지를 얻게 되는데, 이것이 분가한 그의 후손들의 경제적 기반이 된다. 또한 황족이나 귀족에게는 귀천상혼의 예가 엄격히 적용되어 자신이 황족이더라도 일반 평민과 혼인하게 되면 그 즉시 신분이 박탈되고 평민으로 격하된다. 물론 정식 혼인이 아니라 단순한 통정이라면 상관은 없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그렇게 경직된 사회에서 황실 직계의 황자, 그것도 서열 2위의 황자가 죽을 고생을 하고 돌아온 것 치고는 연회에 참석하는 인사들의 규모가 너무 빈약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부모는 물론이고, 제1 황자조차 참석하지 않다니. 게다가 제3 황자 내외 역시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다는 것은, 차원 요새 붕괴 이전에 발레라가 가문 내에 지니고 있던 영향력이 생각보다 상당히 미미했다는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다. “사흘 뒤라...” 준상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이렇게 물었다. “그쪽의 보안 수준은 이전에 말한 그대로인가?” “그렇습니다.” 발레라는 즉시 짤막하게 대답하고는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혹시, 참석할 의향이 있으십니까?” “글쎄.” 어차피 창조의 씨앗을 받아오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그곳으로 보낼 필요가 있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몽몽이를 보내 시드 무력화의 영향 범위 밖에서 씨앗을 전달받은 다음 역소환을 통해 불러들이는 방법이다. 하지만 모처럼 다른 황족들과 접촉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는데 그대로 흘려보내기도 아까운 일이다. “일단... 이동 가능한 좌표를 몇 개 정도 뽑아서 보내도록.” “명을 받들겠습니다. 나의 주인이시여.” 발레라와의 대화를 마친 준상은 손을 뻗어 그곳에 약간의 의의를 결집시켰다. 그가 불러낸 의의는 바람. 이번에 빛의 대정령과 애욕의 정령 다음으로 흡수한 세 번째 정령이다. 흡수한지 얼마 안 되는 지금으로서는 산들 바람 정도의 약한 힘을 발휘하는 것이 고작이지만, 다른 대정령들이 모두 그러하듯 숙련이 된다면 큰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준상은 손 안에서 노니는 바람의 움직임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몸을 일으키고는 요정계로 발걸음을 옮겼다. 얼마 전까지는 아이들이 낙서해 놓은 듯한 풍경 속에 숨은 채 호기심 가득한 시선을 보내는 요정들의 모습이 흘깃 보이는 정도가 고작이었지만, 최근 새로운 주민들이 대거 요정계로 찾아들면서 이곳의 모습도 크게 바뀌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느닷없이 출몰하는 고양이떼. 두두두두! 한 무리의 작은 고양이들이 작은 바구니를 하나씩 머리에 지고는 우르르 몰려간다. 그들의 머리에 담긴 것은 다름 아닌 빨래. 아직 완전히 자라지 않은 탓에 이고르의 절반 정도의 크기 밖에 되지 않는 고양이들이었지만, 그들이 지닌 염동력의 힘이 모이면 고되고 힘든 빨래 같은 일은 순식간에 해치울 수 있을 정도의 위력을 가지게 된다. 얼마 전까지는 블레이크와 맥밀란의 뒤를 이어 벨 라야에서 구출해온 수습생 들이 이런 잡일을 맡고 있었지만, 지금 그들은 각자 얼마씩의 고양이들을 분배받아 저마다의 일을 감독하는 자리로 올라서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지금 길 한 쪽에서 길러지고 있는 텃밭이다. 강력하지는 않지만 매우 섬세한 고양이들의 염동력은 이런 식으로 밭을 일구고 채소나 과일 같은 것을 기르는 일에도 큰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다. 잎사귀를 하나하나 닦아주는 일부터 시작해서, 작은 벌레들을 잡고 꽃가루를 묻혀 수분시키는 일까지, 인간이 하기에는 너무나 번거롭고 귀찮은 일들도 이들은 한 마디 불평조차 없이 성실하게 해치우고 있었다. 아직은 작은 텃밭이 여기저기 만들어지는 정도에 불과하지만, 리체스는 작은 고양이들의 몸집이 커지고 이고르처럼 염동력을 좀 더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게 되면 커다란 농장이나 과수원을 일굴 계획을 세워 놓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직 시작에 불과하지만 이렇게 신선한 과일과 농작물들이 생산되기 시작하자 신이 난 것은 먹보 요정들이었다. “우오오오! 배불러!” “우, 움직이지 못하겠어.” “누가 좀 굴려줘.” 너무 많이 먹어서 배가 남산만 해진 요정들이 이고르의 식당에서 제법 멀리 떨어진 곳까지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광경이 목격되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처음에 비하면 많이 나아진 셈이다. 이 녀석들은 절제란 걸 모르는 걸까. 준상은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요정들을 피해서 계속 걸음을 옮겼다. 작은 고양이들에 의해 새로운 밭이 만들어지고 있는 곳 옆에는 곰 아저씨 마난바의 공방이 자리잡고 있었다. 원래는 마난바 혼자서 꾸려가는 장소였지만, 지금은 이곳에도 고양이들이 밀고 들어와 작업을 돕고 있었다. 마난바는 처음에는 다소 귀찮고 난처해 하는 기색이었지만, 이내 물을 길어오는 잡무라든가 자잘한 마무리 작업 같은 것을 고양이들에게 맡기자 작업의 능률이 빠르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지금은 요정들의 요청에 따라 가구나 식기 같은 것을 새로 만들고 있는 모양인데, 지구에서 판매되는 공산품과는 달리 하나 하나가 예술품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의 작품이라 요정들 사이에서는 마난바가 만든 생활 용품을 사는 것이 하나의 유행처럼 번져 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먹는 것 외에 대부분의 일에 대해 귀찮아하는 요정들마저 그 실력을 인정할 정도인지라, 헤네스는 조만간 마난바의 공방에 투입한 고양이들의 실력이 숙련되어 양산이 가능해지면 이벨류아와 얀트훈센을 통해 유통시킬 계획도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안녕하세요.” 고양이들이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길을 걷고 있자니, 한쪽에서 누군가 다가오며 준상에게 인사를 해왔다. 바라보니, 다름 아닌 서유미다. “수련하시다 오신 건가요?” 만약 수련의 구체적인 내용을 알고 있다면 이런 식으로 말을 걸지는 못했으리라. 준상은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오르는 것을 머리 속에서 지우며 고글에 나타난 그녀의 레벨을 살폈다. 현재 서유미의 레벨은 45. 처음 이곳에 올 때보다 어느새 3레벨이나 더 올라 있었다. “벌써 45레벨이군.” 서유미는 쑥스러운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준상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이렇게 물었다. “레벨이 높아지면 수확의 대상이 된다는 것 정도는 이미 알 텐데?” 수확의 기준은 레벨 50. 이것은 다시 말해 레벨 50을 넘지 않는 이상 관리국이나 칠성좌들의 표적이 되지 않는다는 뜻도 된다. “아직 5레벨은 남았으니까요.” “그런가.” 시드 무력화의 영향력 아래서도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성녀의 능력을 손에 넣었다고는 하지만, 퀘스트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여러 가지 이득도 무시할 수는 없다. 아이템, 특히 레벨 제한이 필요 없는 유니크 아이템 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특히 불사의 용혈이나 신기루 꽃 같은 보상은 얻고 싶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흠...” 그러고 보면 퀘스트를 수행하지 않은지도 굉장히 오래되었다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만약 머리 속의 시드나 칠성좌 같은 것들을 알지 못했다면, 준상은 여전히 다른 이들과 뒤섞여 퀘스트를 수행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지구 쪽은 요즘 어떻지?” 외부의 일이 너무 급박하게 돌아가는 바람에, 한동안 지구의 일에 대해 신경을 쓰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물었다. 서유미의 임무 가운데 하나는 지구와의 연락망을 유지하는 것. “실은... 그 때문에 연락이 몇 번 왔었어요.” “어떤?” “아시겠지만, 중국에서 풀려난 마수들이 역시 문제인 모양이에요.” 준상은 얼굴을 찌푸렸다. “아직도 해결하지 못한 건가?” “해결은커녕 악화되어 가고 있는 모양이에요.” “어째서?” “마수들이 번식을 시작했다는 것 같아요.” “음...” 그렇지 않아도 보통의 방법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마수들이 환경에 적응하고 번식을 시작했다면 이것은 큰 일이 아닐 수 없다. “피해 정도는?” “중국의 서북 지역이 마수들에 의해 완전히 장악된 모양이에요.” “쯧...” 지구 쪽의 역량을 너무 과신했었나. 준상이 혀를 차자 서유미가 급히 말을 이었다. “러시아와 미국 등이 연합해서 키르기스스탄이나 타지키스탄 등의 인접국으로 넘어온 마수들은 어떻게 막아냈지만...” “중국이 문제였던 거군.” “네.” 이와 같은 내용은 준상이 하라바의 사막 왕국으로 향하던 시기에 전해졌지만, 계속 다른 세계에 나가 있었던데다 계속해서 행성 파두스에 수확이 실행되는 사태가 벌어짐에 따라 보고할 기회를 잃었던 모양이다. “사천이나 섬서 같은 인구 밀집 지역 근처까지 마수가 밀고 내려왔다는 얘기를 최근에 들었는데, 지금은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겠네요.” “곤란하군.” 워낙 넓은 지역으로 퍼져 나간데다, 중국 따위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생각도 있었기 때문에 중간에 손을 떼기는 했지만, 이대로 피해 범위가 확산되는 걸 그냥 내버려 두는 건 역시 문제가 있다. 게다가 지금은 자신 외에도 행성 파두스의 고레벨 능력자들을 다수 장악한 상태. 그럴 마음만 있다면, 인구 밀집 지역을 위협하는 마수의 주력 정도는 어렵지 않게 토벌하는 것이 가능하다. “음...” 발레라의 귀환을 축하하는 연회는 사흘 후에 열린다. 더 이상의 정령을 흡수하는 것도 지금으로서는 한계. 그렇다면 며칠 정도 몸을 빼서 마수들을 토벌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결정을 내린 준상은 서유미에게 말했다. “딜런과 임서윤에게 말을 전해라.” “그럼...” “마수들은 토벌한다. 하지만 뒤처리에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필요한 법. 중국과의 교섭을 그 둘에게 맡긴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서유미가 휴대폰을 꺼내 연락을 취하는 모습을 일별한 채 걸음을 옮기던 준상은 머리에 짐승의 귀를 단 한 무리의 사람들이 그를 피해 고개를 숙인 채 지나가는 모습을 보았다. 이들은 얼마 전부터 요정계로 이주하기 시작한 아인종들이다. 행성 파두스에 있을 때와는 달리 두건을 뒤집어 쓰고 있지는 않았지만, 아직 준상이나 서유미 같은 보통의 인간들과 똑바로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있었다. 00386 트롤러 ========================================================================= 아직 그들의 눈에는 준상도 서유미도 그들을 박해하던 인간들과 별 다를 것이 없어 보이는 모양이다. 이건 인식의 문제이므로 차츰 시간을 들여가며 해결할 수밖에 없다. 조금 더 걸음을 옮기자 작은 천막이 몇 개 쳐져 있고 그 안에서 아인종들이 모여 무언가를 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그들을 지휘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아줌마 요정들. 수습생들의 감독을 성실히 수행한 성과를 인정받아 새로 이주한 아인종들의 감독 또한 맡은 모양이다. “그게 아니지. 여기는 이렇게.” “좋아요. 이 정도면 훌륭하네요.” 그들이 하고 있는 작업은 간단한 아이템 제작이었다. 지구에서 쓰이고 있는 슬롯 반지부터 시작해서, 간단한 효과를 지닌 아이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아이템들이 그들의 손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었다. 이전에 아줌마 요정들이 소량 생산하던 것이 가내수공업이라고 한다면, 이쪽은 거의 공장제 수공업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다. 이런 식으로 아인종들이 아이템 제작에 전격적으로 투입된 것은 그들의 마법적 재능이 보통 인간의 그것을 훨씬 넘어서는 것도 한 가지 이유였다. 실제로 이번에 관리국의 기지에서 구출된 50레벨 이상의 마법사들 가운데 8할 이상이 아인종들이고, 다시 구출된 아인종 전체로 따지면 거의 9할이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능력자들이었다. 그 뿐만이 아니다. 각국의 능력자들에게서 협력을 얻어 요정계로 이주를 시작한 아인종들 역시 리체스와 아줌마 요정들의 간단한 몇 가지 조언과 도움을 받자 하나 둘씩 마법의 길에 들어섰다. 진세아와 정다빈이 그 고생을 하고도 마법을 사용하지 못했던 것에 비하면 그야말로 놀라운 성과가 아닐 수 없었다. 리체스는 그럼 그렇지 하며 자신의 수업 방식에 다시 자신감을 가지게 된 모양이다. 그러나 솔직히 준상이 보기에도 그런 식의 수업을 받고 마법을 쓸 수 있게 된 것 자체가 뭔가 부조리의 산물처럼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반쯤 포기 하고 있던 마법 전수에 다시 열의를 가지게 된 리체스의 모습을 보니 진세아나 정다빈에게 어쩐지 동정심이 생길 정도다. 준상이 지나가며 그들을 바라보자 아인종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즐겁게 얘기를 나누던 것을 멈추고 시선을 피하며 작업에 열중한다. 그 모습을 보니 어쩐지 공장에서 인형 눈을 꿰매는, 옛날 영화에나 나올 법한 여공들이 연상된다. 모르는 척 그들의 천막을 지나치자 이번에는 이고르의 식당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는 거의 요정계에서 가장 게으른 요정조차도 그 모습을 보면 바로 이름을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유명인, 아니 유명묘가 되어버린 이고르. 그는 오늘도 어김없이 작은 앞발을 허공에 휘두르며 불과 재료와 식기와 그 외 요리 기구를 다루어 장엄한 오케스트라를 연주하고 있었다. 달라진 점이라면 요리 재료를 다듬고 그가 만들어낸 요리를 운반하는 일을 작은 고양이들이 돕고 있다는 것 정도. 그리고 예전보다 식당의 규모가 더욱 커져서 이제는 거의 백 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넓어져 있다는 것 정도이다. “이게 뭐지?” “그러니까... 크레... 뭐라고 써있는 거야?” “몰라!” “글자도 못 읽으면서 주문한 거야?” “응!” 준상으로서는 메뉴판의 글자도 못 읽으면서 주문을 하는 것보다도, 그렇게 주문된 내용을 이고르에게 제대로 전달하고 만들어진 음식을 제대로 배달하는 작은 고양이들의 능력이 더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런 준상의 의문을 눈치 챘는지 서유미가 웃으며 말했다. “실은 메뉴판에 사진이 붙어 있거든요.” “아하.” 고개를 끄덕이던 준상은 문득 식당 한켠에 앉아 있는 갈색 머리의 여인을 발견했다. 두 말 할 것도 없이 헤네스다. 그녀는 턱을 괴고 앉아서 포크로 탁자 위에 놓인 수플레를 공연히 쿡쿡 찌르고 있었다. 준상이 잠시 멈추어 서서 그녀를 바라보자, 서유미는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바라보고는 조용히 그 자리에서 물러났다. 준상은 잠시 헤네스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천천히 이고르의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고 보면, 이곳에 들어와 본 것도 사실상 처음이 아닐까 싶다. 헤네스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바로 옆에 준상이 다가와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계속해서 고양이들이 바쁘게 오가고 맛에 취한 요정들의 감탄 소리가 왁자지껄하게 울려퍼지는 곳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로 깊게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은 준상으로서도 거의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괜찮으면 같이 앉아도 될까?” “네?” 준상이 말을 걸고 나서야 헤네스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무, 물론이죠. 앉으세요.” 당황했는지 말까지 더듬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던 준상은 조용히 그녀의 앞자리에 앉았다. 그가 자리에 앉자 이내 하얀 아기 고양이 하나가 쪼르르 달려오더니 그에게 메뉴판을 건네 주었다. 준상은 고양이가 건네준 메뉴판을 살폈다. 요정들의 문자로 씌여져 있어서 음식 이름을 읽을 수는 없었으나, 이름 옆에 사진이 함께 기재되어 있어서 어떤 음식인지 알아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달콤한 것을 좋아하는 요정들의 취향에 맞춘 것인지 대부분 과일이나 크림 등을 이용한 디저트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으나, 좀 더 페이지를 넘기자 간단한 한식이나 양식 같은 것도 실려 있었다. “이걸로 부탁한다.” 그렇지 않아도 끼니를 놓쳐서 출출하던 준상은 비빔국수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아기 고양이에게 그것을 손가락으로 짚어서 보여주었다. 아기 고양이는 그것을 보고는 이고르처럼 앞발을 가슴에 대고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다음 준상에게서 메뉴판을 건네받아 주방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관리국의 기지에서는 솔직히 이들을 구출하는 것이 불필요한 일이라고 여겼던 준상이지만, 그런 그로서도 이렇게 고양이들이 열심히 일을 하는 모습을 보니 이들은 단순한 펫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하나의 새로운 종족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수련... 하시다 온 건가요?” 헤네스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수련이라고 돌려서 묻기는 했지만, 그녀가 묻고 싶은 것이 다른 내용이라는 것 정도는 무심한 준상도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었다. “지금까지 흡수한 정령들을 활용하는 방법을 연습하고 오는 참이다.” “아...” 평소와는 달리 자세한 설명으로 답하는 준상의 모습에, 헤네스는 자신의 속내를 들켰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고개를 숙이며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조금 서먹하게 마주 앉아 있자니, 어느 틈엔가 조리가 끝난 비빔국수가 쟁반에 담긴 채 아기 고양이에 의해 배달되어 왔다. 염동력에 의해 그릇을 탁자 위에 옮겨 놓은 아기 고양이는 다시 한번 앞발을 가슴에 대고 고개를 숙여 보인 다음 빈 쟁반을 들고 부리나케 주방으로 돌아가 버렸다. 준상은 젓가락을 들어 비빔국수를 먹기 시작했고, 헤네스는 말없이 그가 식사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후루룩거리며 빨갛게 비벼진 국수를 흡입하는 준상의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헤네스는 자신도 모르게 작은 한숨을 내뱉고는 앞에 놓인 수플레를 포크로 조금씩 떼어 입에 넣었다. 하지만 오늘따라 어쩐지 별로 맛있다는 느낌이 전해지지 않는다. 입맛이 바뀌기라도 한 걸까. 결국 그녀는 몇 조각 입에 넣지도 못하고 다시 포크를 내려놓고는 준상의 식사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얄밉다. 일전에는 대범한 척 허락을 했지만, 그 일이 있고 난 뒤 헤네스는 속이 타들어간다는 말이 어떤 것인지 여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불가항력이었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싫은 건 싫은 거다. 모든 것을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만 있다면, 세상에는 싸움이라는 말 같은 건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이 남자는 태연하게 자신의 눈앞에서 이렇게 맛있게 식사를 하고 있다. 그래서 더더욱 얄밉다. 결국 헤네스는 참지 못하고 그를 불렀다. “준상씨.” “응?” 그리고 몸을 일으켜 자신의 부름에 얼굴을 쳐드는 그의 머리를 있는 힘껏 후려쳤다. 반쯤은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이런 식의 주먹질에 그가 아픔을 느낄 거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이런 저런 방법을 통해 단련된 그의 신체가 얼마나 탄탄하고 굳건한지는 그녀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타격을 주기는 커녕 그녀 자신의 주먹이 부서지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하지만 그녀의 예상은 빗나갔다. 가볍게 휘두른 그녀의 주먹에 준상은 맥없이 옆으로 나동그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 이렇게 되자 당황한 것은 헤네스 쪽이었다. 너무나 얄미워서, 때려주고 싶다는 마음을 주체 못하고 주먹을 휘두르긴 했지만 설마 그가 이런 식으로 어이없이 나동그라질 거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한 탓이다. 놀란 것은 그녀 뿐만이 아니었다.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식사를 즐기고 있던 요정들은 물론이고, 바쁘게 오가며 음식을 나르던 아기 고양이들, 그리고 한창 주방에서 바쁘게 요리에 전념하고 있던 검은 고양이 이고르마저도 갑작스런 그 사태에 놀라 눈이 휘둥그레진 채 그대로 굳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정작 나동그라진 당사자인 준상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다시 몸을 일으켜 자리에 앉았다. “괜찮아요?” 헤네스의 말에 준상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괜찮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주먹이 많이 매워졌군.” “...” 놀리는 건가도 싶었지만, 준상의 표정에 나타난 감정은 미안함이었다. 본래 헤네스는 싸움 같은 건 모르던 양가집 규수. 그런 아가씨가 건장한 남자를 주먹질 한 방에 나동그라지도록 만들려면 얼마나 고된 수련을 거쳐야 할까. 그런 점을 떠올리면 역시 미안함을 감출 수가 없다. “미안하다.” 준상이 고개를 숙이며 말하자, 헤네스는 자리에 다시 앉으며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푸욱 내쉬고는 이렇게 말했다. “불겠어요. 마저 드시고 얘기해요.” “그래.” 가슴 속에 쌓인 울분이 전부 날아가 버린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방금 전의 일격 덕분에 조금은 기분이 나아진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준상과 헤네스는 그 뒤로 제법 오랜 시간동안 얘기를 나누다가 함께 여왕의 거처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하루 정도 시간이 지나자, 서유미를 통해 딜런이 연락을 보내 왔다. 중국과의 교섭이 생각처럼 그리 쉽지가 않다는 내용이었다. 인구밀도는 낮은 편이지만, 서북 지역은 엄청난 면적을 자랑하는 지역이다. 면적만으로 따지자면 현재 마수들에게 점령된 지역은 드넓은 중국 영토의 5분의 1에 해당할 정도다. 그 정도 지역이 마수들에게 점령당한 상황에서도 아직 정신을 못 차렸는지 중국은 내정간섭 운운하며 다른 나라의 개입을 적극적으로 거부하고 있었다. “아직 혼이 덜 난 모양이군.” 발레라의 귀환 축하 연회가 벌어지면 다시 한동안은 지구 쪽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기에 가급적이면 빠르게 해결을 보고자 했었던 것인데, 이런 식으로 완강하게 거부한다면 준상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남은 시간도 얼마 없는 터라 그냥 원하는 대로 하라는 식으로 내버려 두려고 했지만, 그 날이 가기 전에 다시 연락이 들어왔다. 군사적 개입이 아닌 민간 차원의 구호 협력이라면 응하겠다는 식의 다소 미묘한 조건을 중국이 들고 나온 것이다. 어째서 갑자기 태도가 바뀐 것일까.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서안이 마수들에 의해 함락되었다고 합니다.” 서안. 섬서성의 주도이며 중국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유서 깊은 도시 가운데 하나이다. 동탁이 낙양을 불태우고 천도했던 장안이 바로 이곳이며, 수나라와 당나라의 수도이기도 했다. 현재는 중국 6대 중심 도시의 하나이며, 우주 항공 기술과 기계 제작, 방직 공업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그런 도시가 함락되고 나서야 중국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음을 깨닫고 조건부로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준상은 혀를 찼다. “그 꼴이 되고서도 아직 군대를 더 두려워하는 건가.” 연회까지 남은 시간은 하루. 아무리 준상이라도 넓은 지역의 마수들을 토벌하기에는 빠듯한 시간이다. 그냥 차라리 모른 척 할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어차피 장거리 여행이 불가능한 귀환자들을 대규모로 투입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이상, 민간 차원의 도움 운운해봐야 실질적인 반전의 기회를 잡는 건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준상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기왕 말을 꺼낸 이상, 이대로 모른 척 할 수도 없다. 새로 얻은 정령의 힘을 시험해볼 필요도 있다는 생각을 떠올리며 준상은 마침내 몸을 일으켰다. 00387 트롤러 ========================================================================= 삼문협. 서안과 낙양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이곳은 본래 황하의 강물이 삼분되어 흐르는 급류가 있는 계곡을 일컫는 말이며, 또한 이 계곡에서 이름을 딴 도시의 이름이기도 하다. 현재는 황하 치수를 위해 건설한 삼문협 댐으로 유명하다. 황하는 본래 다스릴 수 없는 강이라 불리던 곳. 게다가 보통의 하천과는 달리 토사의 양이 압도적으로 많아서 오죽하면 물 반 흙 반이라는 말이 농담이 아닐 정도다. 일 년에 황하를 통해 운반되는 진흙의 양만 13억 8천만 톤. 워낙에 많은 토사가 배출되다 보니 댐을 건설하면 그 댐이 곧바로 토사에 묻혀 버릴 정도이다. 이 터무니없는 강의 치수를 위해 건설한 것이 바로 삼문협 댐인데, 이 댐이 건설될 당초의 계획은 하류로 유출되는 토사의 유출을 막아 황하의 물을 맑게 하자는 의도가 있었다. 황하가 맑아지면 성인이 나온다. 남당의 이강이 지은 운명론에 나온 말이다. 황하의 치수는 본래 중국인들의 역사에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내용. 가장 유명한 것이 우임금의 고사지만, 이후의 다른 국가들도 이 골치 아픈 강을 다스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그것은 새롭게 대륙을 통일한 중국공산당 역시 마찬가지였다. 역사 이래로 황하를 인위적으로 맑아지게 만든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삼문협 댐을 만들어 황하를 맑게 함으로서 자신들이, 그리고 자신들의 영수인 모택동이 시대가 낳은 성인임을 증명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중국인들은 댐의 착공과 더불어 이것이 얼마나 가당치 않은 일인지 바로 알게 되었다. 동관 상류의 위하에는 갈곳을 잃은 토사가 쌓여 밭이 모조리 뒤덮여 버렸고, 강의 흐름은 뒤엉켜 상류의 서안까지 홍수의 위협을 받게 되었다. 댐 하나를 쌓는 것만으로는 하류의 수해가 관중 평원으로 옮겨 왔을 뿐이고, 하류 역시 강의 흐름이 끊기며 안 그래도 매마른 중원 땅을 더욱 말라붙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그 결과 삼문협 댐의 기능은 상류에서 쏟아지는 토사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것으로부터 토사를 모아뒀다가 적절한 시기에 방출하는 형태로 바뀌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수십년에 걸친 시행착오의 결과를 토대로 황하에 대한 개발 사업은 아직도 계속 진행 중이다. 하지만 삼문협 댐이 파괴되면, 그 모든 노력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어 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뿐인가. 그동안 하류에 건설되었던 거대한 농장과 공업단지 역시 막대한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 이것은 중국으로서는 심각한 위협일 수밖에 없는 일이고, 때문에 서안이 마수들에 의해 짓밟힘과 동시에 중국 정부는 부랴 부랴 삼문협에 방어선을 구축하기에 이른다. 중국군은 거듭되는 마수들과의 전투를 통해 그들의 습성과 약점을 조금씩 파악할 수 있었지만 영악해지는 것은 인간 뿐만이 아니었다. 포탄의 비가 퍼부어지면 땅을 파고 들어가거나, 아예 땅 속으로 이동해서 군을 기습하는 사례가 빈번하게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중국 정부도 귀환자들을 그냥 놀려두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이 동원할 수 있는 숫자에 비해 퍼져 나온 마수들의 활동 범위는 너무 넓었고, 거대 마수들을 감당할 수 있는 귀환자의 수는 더 적었다. 스텔스나 인공 위성 등이 제작되는 서안의 첨단 공업 단지를 방어하기 위해 중국 정부는 가지고 있는 역량을 모조리 동원하여 필사적인 저항을 벌였다. 그러나 그 결과는 참담한 패배로 이어졌고, 결국 자국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판단에 의해 굴욕적인 구원 요청을 세계에 타전할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삼문협만 방어하면 끝나느냐. 그것도 아니다. 남쪽으로 방향을 튼 마수들은 중국에서 세 번째로 인구가 많은 사천성을 노리고 있었다. 인구 천사백 만의 대도시인 청두를 비롯해 수많은 인구가 몰려 있는 사천 지방이 파괴된다면 중국 서부가 사실상 무정부 상태에 빠질 가능성마저 있었다. 사실상 국가 존립의 위기나 다름없는 상황. 하지만 방어선이 펼쳐진 삼문협이나 사천 지방은 다른 나라와의 국경에서 한참 떨어진 내륙 지방. 러시아의 귀환자들과 미국의 물자 공여라는 조합을 통해 마수들을 방어하는데 성공한 키르기스스탄이나 타지키스탄으로부터도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크윽... 사, 살살.” 가슴과 머리만을 간신히 가린 급조된 방어구를 착용한 귀환자가 부러진 팔을 맞추는 의무 장교을 향해 그렇게 말했지만, 피로에 지친 기색이 역력한 의무 장교는 그런 귀환자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커윽!” 의무 장교가 힘을 주어 뼈를 맞추자 곧바로 대기하고 있던 다른 귀환자가 부러진 뼈에 대고 회복 마법을 걸어준다. 모처럼의 회복 마법도 통증을 조금 약화시키는 정도가 고작이었지만, 지금은 그나마도 감지덕지다. “후우... 고맙소.” “별말씀을.” 그나마 지금 이 귀환자는 운이 좋다. 사지 중 하나를 마수에게 뜯어 먹힌 자가 부지기수인 판에 고작 팔 하나가 부러지는 걸로 끝났으니 말이다. 게다가 이런 상황에서도 퀘스트는 어김없이 날아 들었다. 잘린 팔을 지혈하고 급히 붕대를 감아주던 와중에 한줄기 빛과 함께 전송이 이루어졌을 때는 얼마나 놀랐던지. 신체를 잃은 충격과 마취로 인해 멍해져 있던 그 귀환자는 어떻게 되었을까. 의무 장교는 이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어 상념을 떨쳐 버리려 애썼지만 그런 그의 귀에 다른 병사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관이 돌파되었다는 것 같던데...” “벌써?” 동관은 삼문협시와 인접한 위남시의 동쪽 끝. 그곳이 돌파되었다는 것은, 다시 말해 마수들이 곧 삼문협 안으로 밀려들어온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의무 장교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거대한 마수들이 사람들을 촉수로 끌어들여 우걱 우걱 씹어 먹는 소름 끼치는 장면이 연상되었기 때문이다. 이대로 도망치고 싶다.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의무 장교가 걸음을 멈추자 역시나 피로가 가득한 표정으로 뒤따르던 귀환자가 멈칫하며 그를 불렀다. “상위 동지?” 그 말을 듣고 서야 의무 장교는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쪽은 끝난 것 같으니 다음 방으로 가죠.” “알겠습니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고 걸음을 옮기는데 갑자기 임시 병동으로 쓰고 있는 건물 주위가 소란스러워졌다. “무슨 일이지?” 지나가는 병사를 향해 묻자, 그는 흥분된 목소리로 의무 장교에게 대답했다. “불명비행물, 그러니까... 비접입니다. 상위 동지.” “비접?” 불명비행물이란 중국인들이 미확인 비행 물체, 즉 UFO를 가리키는 말이며, 비접이란 날아다니는 접시, 즉 비행접시를 뜻한다. 마수라면 몰라도 비행접시라니. 혹시 그런 형태의 마수가 나타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지만, 달리 전투의 징후로 보이는 소음은 이어지지 않고 있었다. 병사가 대답을 마치고 후다닥 달려가는 모습에 의무 장교의 뒤를 따르던 귀환자는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의 임무는 부상을 입어 이곳으로 실려온 자들에게 응급 처리를 하는 것이지 뜬금없이 나타난 비행접시를 구경하는 일이 아니었다. “갑시다.” “네.” 의무 장교는 아쉬운 표정을 짓고 있는 귀환자를 데리고 다른 방의 병사들에게 응급처치를 하는 계속했다. 하지만 조금 지나자 바깥이 아닌 임시 병동 안에서 소란스러움이 이러지기 시작한다. “오오!” “대, 대단해!” 놀람과 더불어 감탄이 섞인 환성. 의무 장교는 아군의 오발탄에 맞은 것으로 보이는 병사의 상처를 살피고 붕대를 갈아주다가 그 소리를 들었다. 혹시 비행접시를 타고 연예인이라도 온 것일까. 그런 실없는 생각을 떠올리던 의무 장교는 이내 고개를 저어 잡념을 떨쳐 버리고는 신중하게 붕대의 교환 작업을 계속했다. 상세가 좋지 않다. 탄환은 바로 빼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맞은 부위가 좋지 않은데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고, 이차 감염도 우려되는 상황이라 아마도 오늘 밤이 고비일 듯 싶었다. 후방의 좋은 시설이라면 모르겠지만, 이곳에서는 당장 혈액도 장비도 약품도 모두 부족한 상황이라 의무 장교로서는 상처를 소독하고 새 붕대를 갈아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는 작업이 끝나자 작게 한숨을 내쉬며 뒤에 서 있던 귀환자에게 말했다. “부탁드립니다.” 회복 마법이란 건 참으로 대단한 수단이 아닐 수 없다. 통상의 수 배에서 수십 배에 달하는 놀라운 재생 효과로 수술 자국을 순식간에 아물어 버리게 만드는 그 놀라움을 보았을 때, 의무 장교는 마법이란 것이 실재한다는 사실에 격한 감동마저 느꼈었다. 본래대로라면 절망적인 상황이지만, 회복 마법이라면 좋은 결과가 나올 지도 모른다. 물론, 이 부상병이 회복될 때까지 이곳에 마수가 들이닥치지 않는다는 것이 전제겠지만 말이다. “동지?” 기다려도 회복 마법이 발현되지 않는 것에 의아함을 느낀 의무 장교는 뒤를 돌아보다가, 검은 방어복을 걸치고 새하얀 방패를 손에 쥔 어떤 인물과 마주쳤다. “어?” 예상 외의 인물이 등 뒤에 서 있는 모습에 잠시 당황해 하던 의무 장교는 이내 방어복 위로 드러난 유려하고 아름다운 몸매를 보고 상대가 여성임을 깨달았으며, 동시에 그녀의 몸에서 포근하고 온화한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 역시 알아보았다. “처치는 끝난 건가요?” 어쩐지 묘하게 색기가 묻어나오는 목소리를 듣는 순간, 의무 장교는 상대의 정체를 확인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자신도 모르게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물러서세요.” “...” 왜 그래야 하는지도 모른 채 허겁지겁 물러난 의무 장교는 검은 헬멧으로 얼굴을 가린 그녀가 분홍빛이 감도는 채찍으로 환자를 후려치는 모습에 기겁을 하고 말았다. “무슨 짓입니까!” 조심스럽게 보살펴도 모자를 판에 채찍질이라니! 당황해서 얼른 그 행동을 말리고자 했지만 문득 뒤에서 누군가가 그의 어깨를 잡았다. 돌아보니, 자신을 돕고 있던 귀환자였다. 그는 의무 장교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상위 동지. 잠시만 그대로 지켜 보십시오.” “네?” 무슨 영문일까. 그제서야 의무 장교는 자신을 돕던 귀환자 외에도 많은 수의 의무관과 병사들이 그들 주위를 에워싸고 있음을 알아차렸고, 방패를 든 여성 외에 보통 사람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건장한 체구의 남성이 조금 다른 형태의 방어복을 입은 채 버티고 서 있는 것도 알아볼 수 있었다. “이건...” 뭐가 어떻게 된건지 몰라 당혹해 하던 그는 뒤에서 들려오던 처덕거리는 소리가 끝나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으으...” 의무 장교는 입만 떡 벌린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오늘 밤이 고비라고 생각하고 있던 병사가 신음 소리를 흘리며 눈을 뜨더니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혹시 회광반조일까? 하지만 의무 장교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회광반조는 고작해야 죽기 직전에 잠시 정신을 차리는 것이지, 의식도 없던 중환자가 저렇게 벌떡 몸을 일으키는 현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오오!” “역시 대단해!” 주위에 늘어서 있던 의무관과 병사들은 그렇게 탄성을 터뜨렸다. 그런가. 아까 들려왔던 소리들은 바로 이것 때문이었나. 채찍질을 멈춘 여성은 의무 장교를 돌아보며 말했다. “다른 중상자들은 어디 있죠?” 의무 장교는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마치 처음 입대한 신병처럼 바짝 군기가 든 채 부동자세를 취하며 대답했다. “이, 이쪽입니다!” 00388 트롤러 ========================================================================= 기안과 블레이크가 위급한 부상자들을 살피는 동안, 준상은 장교들로부터 현재 상황을 간단하게 브리핑 받고 있는 중이었다. “현재 마수들은 310번 국도가 황하와 만나는 대촌 인근까지 진출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지금 저희들이 있는 영락 중학까지는 직선 거리로 약 10킬로미터. 중간에 황하가 자리 잡고는 있지만, 이 부근에서는 물살이 약해지는 곳이 많아서 소형이라면 몰라도 대형의 마수들의 도하에는 지장이 없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흠...” 인간과의 전투라면 도로나 교량 같은 요충지의 방어가 중요하겠지만, 이 거대 마수들을 상대로는 거점 방어 같은 건 거의 의미가 없다. 현재 준상이 도착해 있는 곳은 이미 함락된 동관에서 북쪽으로 황하를 건너야만 도달할 수 있는 영락진이라는 곳의 중학교. 하늘에는 흡사 UFO를 현상시키는 거대한 별해파리 카말이 특유의 기다란 촉수를 길게 드리운 채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카말이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 영락 중학에 설치된 임시 야전 병원의 장병들은 하늘이 흡사 황하의 물줄기처럼 노래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들로서는 거대한 촉수를 드리운 별해파리의 모습이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새로운 마수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능력자의 대부분은 삼문협 댐의 방어를 위해 이동 중이었고, 일반 병력들은 마수들의 도하를 방어하기 위해 진지를 구축하느라 정신이 없는 와중이라, 전선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임에도 불구하고 이곳에는 방어를 위한 병력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렇게 죽는 건가. 하지만 반항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넋이 나가 있던 그들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별해파리의 촉수를 타고 내려온 한 무리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입고 있었던 것은 전신을 감싼 검은 색의 방어복. 장병들은 그 차림새를 보고 나서야 지금 자신들의 눈앞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 다른 나라의 귀환자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지상에 내려오자 아름답게 반짝이던 비행접시를 닮은 기이한 물체는 이내 시야에서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급히 보고를 하자 상부에서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내 눈을 떼지 말고 감시에 만전을 기하다가 무슨 일이 있으면 즉시 보고하라는 식의 지시가 내려왔으나, 이곳의 장병들은 준상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기이한 위압감에 압도되어 감히 그들을 강제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감시고 뭐고 간에 자신을 방어할 최소한의 수단마저 갖추고 있지 못한 상황이니 괜히 신경을 거스르기보다는 최대한 편의를 제공하는 쪽이 훨씬 나은 일이라는 판단도 있었다. 중국의 대응 방향에 대해 대략의 정보를 얻은 준상은 기안과 블레이크가 치료를 마치고 돌아오자 곧바로 대촌 방향으로 이동하려 했으나, 그들이 미처 발을 떼기도 전에 남쪽으로부터 커다란 폭음과 함께 전투의 소음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소리가 들리는 곳을 바라보니, 흡사 전갈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마수가 외골격으로 각종 화포의 공격을 튕겨내며 황하를 건너려 하는 모습이 바로 눈에 들어왔다. 임시 야전 병원으로부터의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곳까지의 거리는 대략 2~3 킬로미터 정도. “벌써 이곳까지.” 거대한 마수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오자 임시 야전 병원의 장병들은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개중에는 만사 포기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버리는 자들도 있었다. 공중 폭격과 더불어 후방 진지에서 포격이 수차례 날아들었지만, 두터운 외골격을 지닌 마수는 귀찮다는 듯이 거대한 네 개의 집게발을 휘두르더니 순식간에 굽이치는 누런 황하의 강물을 건너버리고 말았다. “후퇴를 해야...” “어디로? 어떻게?” “...” 지금 이곳에 모여 있는 인원 들은 근 천명에 육박한다. 중상자들은 어떻게 위급한 순간을 넘겼지만, 몸도 성치 않은 이들 모두를 대피시킬 운송 수단 같은 건 이미 이곳에 남아 있지 않았다. 다른 나라의 귀환자들이 도착하기는 했지만, 아무리 대단한 능력을 지니고 있어도 고작 다섯 명으로 저 거대한 마수를 쓰러뜨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자들은 이곳에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이전의 전투에서 수십 명의 귀환자들이 거대 마수 하나를 당해내지 못하고 먹이가 되어 버리는 모습을 똑똑히 지켜보았던 자들이기 때문이다. “소교 동지, 아까 그 비접이라면...” 부관의 말에 야전 병원을 총괄하고 있던 소교는 그제서야 다른 나라의 귀환자들이 타고 왔던 비행접시 같은 무언가를 떠올리고는 급히 준상에게 말했다. “도와주십시오!” 그 말에 준상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러려고 왔다.” “그, 그럼 어서 후퇴 준비를...” “...” 다급한 표정을 짓고 있는 소교의 모습을 일별한 준상은 그곳에 한 남자를 소환했다. “어이쿠... 여긴 또 뭐지?” 한 줄기 빛과 함께 새롭게 모습을 드러낸 인물은 다름 아닌 하라바였다. 조금 땅딸막한 느낌의, 하지만 다부진 체구를 지닌 생소한 외모와 옷차림의 사내가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자 중국군 장병들은 다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라바는 연회라도 벌이고 있었는지 제법 화려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고, 술도 마셨는지 얼굴도 제법 붉어져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강변으로부터 전해지는 전투의 소음을 듣고 고개를 돌린 그는 거대한 마수를 발견하고는 씩 웃음을 지었다. “안 그래도 술안주가 부족하던 참인데 잘 됐군. 저 놈을 해치우면 되는 건가?” “그래.” “후후... 발티야마라드를 사냥하는 건 또 오랜 만이군.” 하라바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자신의 인벤토리를 전부 개방해 그 안에 담겨 있던 것을 허공에 떨구었다. “헛!” 갑자기 허공에서 창과 칼 같은 무기가 산더미처럼 쏟아져 나오자 중국군들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정말로 놀랄 일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하하하하!” 크게 웃음을 터뜨리는 하라바의 몸에, 그 모든 무기들이 철썩 철썩 달라붙었다. 하라바가 꺼내놓은 무기들 뿐만이 아니었다. 근처에 주차해 두었던 몇 대 안되는 차량은 물론이고 시야에 들어오는 금속으로된 물건 모두가 하라바의 몸에 달라붙기 시작한다. “어... 어...” 그리고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거대한 강철의 거인. 이것이야 말로 철골의 제왕이라 불리는 하라바의 진면목이다. 하라바는 잠시 팔을 가볍게 휘둘러 보더니, 이내 쿵쿵 거리는 발소리와 함께 강변을 넘어온 거대 전갈을 향해 달려들었다. 전갈은 하라바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날카로운 촉수를 뻗어 선제 공격을 가했지만, 두터운 강철의 신체를 지닌 하라바에게는 아무런 피해도 주지 못했다. “우랴아압!” 하라바는 달려가던 힘을 그대로 실어 전갈의 머리를 걷어 차 버렸다. 꽝! 그러자 마치 벼락이 내리치는 듯한 굉음과 함께 거대한 전갈의 몸이 훌떡 뒤집혀 강 저쪽으로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 임시 야전 병원의 장병들은 그 터무니없는 광경에 입만 쩍 벌린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혹시 모르니 지금부터라도 천천히 후퇴하도록.” “네? 아, 알겠습니다.” 중국군 소교는 얼떨결에 그렇게 대답하다가 뒤이어 검은 방어복을 입은 다섯 명의 귀환자들이 마치 날개라도 달린 것처럼 하늘을 날아가는 모습에 다시 얼이 빠졌다. “반고...” 그때 누군가의 입에서 그런 말이 흘러나왔다. 전갈 형태의 마수를 발로 밟은 채 손으로 거대한 집게발을 잡아 뜯어 내는 하라바의 모습을 보고 중국의 창세 설화에 나오는 거인의 이름을 떠올린 것이다. 반고가 뭔지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중국군 장병들 중에도 몇 없었지만, 그 이름이 흘러나오자 그들은 마치 주문처럼 그 이름을 되뇌이기 시작했다. “크하하하!” 전갈의 집게발을 뽑아내고 그 등껍질을 발로 밟아 두들겨 부순 하라바는 가슴을 활짝 펴고 호쾌한 승리의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런 하라바의 귀에 준상의 목소리가 전해져 왔다. “오른쪽.” “응?” 준상의 말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하라바는 방금 쓰러뜨린 전갈과 비슷한 크기의 마수들이 자신을 향해 몰려오는 모습을 발견했다. “뭐가 저렇게 많아?” 하라바는 지금까지 수많은 마수들을 해치웠지만, 이렇게 거대 마수들이 쏟아져 나오는 광경은 난생 처음 보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 모습만으로도 질려서 몸이 굳어버릴 만한 광경. 그러나 철골의 제왕에게는 날뛸 좋은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 “좋구나!” 하라바는 그렇게 외치며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거대 마수들을 향해 풀쩍 뛰어 올랐다. 십여미터에 달하는 강철 거인이 거짓말처럼 뛰어올라 마수들의 머리 위에 떨어지자 그 충격에 지축이 흔들리고 강물이 물결친다. “저쪽이요!” 그때 서유미가 한쪽을 가리키며 그렇게 외쳤다. 바라보니 소형의 마수들이 마치 잘 훈련된 기마대처럼 산기슭을 빠른 속도로 질주하며 중국군 진지를 덮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것은 별동대에 지나지 않았다. 하라바와 거대 마수들이 뒤엉켜 싸우고 있는 발밑으로 지면을 새카맣게 뒤덮으며 소형 마수들이 밀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이건...” 블레이크가 질려버렸다는 듯이 그렇게 중얼거리자 다시 하늘로부터 비행형 마수들이 멀리서 날아오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온다. 준상은 그 모습을 보고는 바로 지면에 내려섰고, 그의 발이 땅에 닿는 순간 주위에 흰 빛이 연이어 터져 나오며 한 무리의 사람들을 쏟아냈다.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케이드는 자신을 향해 새카맣게 달려드는 마수들의 무리를 보고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헛!” 놀라기는 뒤이어 나타난 다른 자들도 마찬가지. 하지만 50레벨 이상의 최상위 능력자들답게 곧바로 전투 준비를 시작했다. “이건... 너무 많은 것 같소이다만.” “그래서?” “허허, 그냥 그렇다는 거외다.” 케이드는 그렇게 말하고는 자신의 상징인 붉은 횃불과도 같은 거대한 검을 만들어 내고는 다른 능력자들을 이끌고 마수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준상은 다시 신기루 꽃으로 통하는 문을 열고는 그 안에서 미리 대기중이던 자들을 불러들였다. 새카만 방어복으로 전신을 빈틈없이 감싼 천 명의 광전사들은 신기루 꽃의 문이 열리자 함성을 터뜨리며 마수들의 무리를 향해 돌진을 시작한다. “훅! 훅! 훅! 훅!” “달려라!” “쓸어버려라!” “제일 많이 잡는 놈은 미팅이다!” “우오오오오!” 행성 파두스의 최상위 능력자들과 더불어 천 명의 광전사들은 그대로 쏟아지는 마수들의 물결과 맞부딪혔다. 콰과과과각! 성난 두 개의 물결은 이내 격돌하며 피와 살점을 사방에 흩뿌렸다. 준상은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중국군 진지를 격파하고 방향을 틀어 달려드는 마수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거대한 광풍이 일어나 그대로 마수들을 하늘로 빨아 올렸다. 준상은 그곳에 다시 화염의 정령력을 부여했다.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하얀 불꽃이 거대한 소용돌이에 사로잡혀 아우성치는 마수들의 몸을 태워 한 줌 재로 만드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저런... 말도 안 되는...” 전갈형의 거대 마수가 강을 넘어오자 꼼짝 없이 죽었다 싶어서 참호 속에 납작 엎드려 있던 중국군들은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투를 보고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00389 트롤러 ========================================================================= 저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지금 강변을 지키고 있는 자들은 서안과 동관에서의 방어 전투 이후 살아남은 잔여 병력들이었다. 하지만 악전고투를 거쳐 살아 남은 그들도 지금 강 너머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는 자들이 누구인지 알아 볼 수가 없었다. 거대한 강철의 거인. 횃불처럼 붉게 빛나는 거대한 검을 휘두르는 남자. 자기 키의 몇 배나 되는 긴 창을 휘두르는 남자. 두꺼운 철갑을 입은 채 성벽과도 같은 두터운 방패를 휘둘러 마수 들을 날려버리고 있는 남자. 그리고 검은 방어복을 입은 채 커다란 도끼와 검으로 마수 들을 참살 하는 전사들. 서안이나 동관에서 그들과 함께 했던 귀환자들은 가슴과 머리만을 간신히 가린 조악한 방어구를 걸치고 있었고, 그 숫자도 고작 수백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천 명이 넘는 엄청난 숫자의 귀환자들이 마치 땅에서 솟아나기라도 한 것처럼 모습을 드러내 마수 들을 박살 내 버리고 있는 것이다. “우아아아!” “죽여! 박살 내 버려!” 누가 먼저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일단 한 사람의 목에서 함성이 터져 나오자, 그들은 자신들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던 공포를 떨쳐버리려는 듯이 함께 소리를 질렀다. 방금 전까지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던 것도 잊은 채 강 너머에서 싸우고 있는 이들을 너나 할 것 없이 응원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별로 현명하지 못한 행동이었다. 그들의 응원 소리는 격렬한 전투를 벌이고 있는 전사들이 아니라 하늘을 날아오고 있던 마수 들에게 가장 먼저 전해졌던 것이다. 쿠아아아아! 가장 먼저 커다란 익룡 하나가 함성을 지르고 있는 병사 들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익룡은 크게 날개를 퍼득여 하늘 위로 솟구치더니 강변을 향해 그대로 내리 꽂혔다. “으악!” “하늘이다! 피해!” 창공으로부터 내리 꽂히는 익룡의 그 압도적인 위압감에 질려 버렸다. 그들은 솔개의 그림자를 발견한 쥐새끼들처럼 참호 속으로 급히 몸을 던졌으나, 익룡은 숨을 크게 들이 쉬며 그들을 향해 불꽃을 퍼부을 준비를 했다. 하지만, 익룡은 그렇게 들이킨 숨을 참호에 숨은 병사들에게 퍼붓지 못했다. 강 너머에서 한 줄기 푸른 빛이 번쩍이는가 싶더니 익룡의 목을 그대로 꿰뚫어 버린 것이다. 크에엑! 익룡은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누런 강물 위로 구겨지듯 추락해 버렸다. 병사들은 놀란 눈으로 흙탕물 위에 처박혀 몸부림치는 익룡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그 목에 박혀 있는 거대한 작살과도 같은 화살을 발견했다. “화살?” 하지만 아직 위기는 끝난 것이 아니었다. 익룡을 추락시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익룡의 거대한 몸체는 단지 몸부림치는 것만으로도 강물을 헤집고 강변을 뒤집어 엎는데 부족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병사들은 도망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강변을 향해 몸부림치며 밀려오는 거대한 몸을 바라보다가, 문득 하늘에서 다시금 푸른 섬광 같은 것이 익룡에게로 떨어져 내리는 모습을 목격했다. 쓰컹! 비늘과 강철이 마찰을 일으키는 소름 끼치는 소음이 울려 퍼지는가 싶더니, 몸부림치던 움직임이 멈추며 거대한 익룡의 머리가 힘없이 길쭉한 목으로부터 분리되어 강물 위로 떨어져 내린다. 방금,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어안이 벙벙해 있던 병사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검은 방어복을 입은 날렵한 몸매의 여성이 익룡의 목 근처에서 하늘로 솟구치는 광경이었다. 눈이 좋은 몇몇 병사들은, 그녀의 손에 식칼과 비슷하게 생긴 무기가 들려 있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호오.” 작살이라고 부르는 편이 좋을 법한 거대한 화살을 날려 익룡을 단번에 격추시켰던 틸리오스는 몸부림 치는 익룡의 목을 단번에 자르고 돌아오는 여성의 모습을 보고 감탄했다. “틸리오스! 뭐하고 있어!” “아, 미안.” 사막의 삼 장군 가운데 하나이며 그의 오랜 동료인 철벽 누트라의 외침에 틸리오스는 방금 전 익룡을 떨어뜨렸던 것과 같은 거대한 화살을 시위에 먹이며 하늘을 겨누었다. 하지만 그가 시위를 놓기도 전에 하늘 위에서 느닷없이 익룡 하나가 떨어져 내리며 그가 노리고 있던 익룡을 덮쳤다. “잉?” 내분인가 싶었으나 이내 틸리오스는 방금 전 내리 꽂힌 익룡이 준상의 소환물 가운데 하나임을 정보를 통해 알아볼 수 있었다. “별 걸 다 가지고 있군.” 틸리오스는 혀를 차며 땅바닥에 나뒹구는 두 익룡에게서 시선을 떼고는 뒤이어 날아와 지상을 향해 화염을 쏟아내려 하는 다른 익룡의 목을 향해 시위를 당겼다. 쿠엑! 목울대를 정확히 파고든 거대한 화살은 후두부까지 단숨에 꿰뚫어 버렸고, 그 파괴력에 머리가 번쩍 들려진 익룡은 허공에 화염을 흩뿌리며 다시금 강바닥으로 처박히고 말았다. “으랴아아!” 온 몸에 거대한 철갑을 두른 채 성벽과도 같은 두터운 검은 방패를 들고 불도저처럼 마수들을 밀어내고 있던 철벽 누트라는 문득 자신과 같은 방식으로 싸우고 있는 자가 있음을 알아보았다. “여자?” 두꺼운 검은 방패를 둔기처럼 휘둘러 마수들을 으깨버리고 있는 자신과 다른 점이라면, 하얀 색의 방패와 더불어 붉은 피가 소용돌이 치는 듯한 깃발이 달린 미늘창을 휘둘러 마수들을 두들겨 날려 버리고 있다는 정도. 하지만 자신의 가슴에나 올까 싶은 가는 몸으로 그런 괴력을 발휘한다는 것 자체가 범상치 않은 일이다. 그녀가 입고 있는 것은 몸매가 여실하게 드러나는 검은 색의 방어복. “그 괴물 녀석의 부하인가.” 철벽의 이름을 가진 누트라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자신에게 달려드는 악어 형상의 마수를 방패 모서리로 찍어 버리고는 나중에 한 번 이름이나 물어봐야 겠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그들에게서 조금 떨어진 장소에서는 케이드와 그의 제자들이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아가씨, 그러지 말고 이름 좀 알려 달라니까.” “...” 일각수의 등에 올라탄 채 마수 들을 참살 하고 있던 데마는 골치가 아파왔다. 안 그래도 마수들 상대하느라 정신없는데, 처음 보는 남자가 자꾸만 옆에서 추근거리며 그녀의 신경을 분산 시키고 있는 탓이다. 자신의 키보다 훨씬 거대한 창을 휘두르며 마수 들을 콕콕 찔러 죽이고 있는 이 남자의 이름은 신창 테쉬. “일각수를 타고 있는 데다 여명의 횃불 케이드 님과 함께 있는 걸 보니 프라바 제국의 황녀 가운데 한 명인 데마 님일 것 같은데. 내 말이 맞지 않소?” “...” “이야. 나는 케이드님의 수제자인데다 일각수 기사단의 단장이라길래 영락없이 우락부락한 괴물 같은 여자일 줄 알았는데, 이거 완전히 계산 착오였군. 이럴 줄 알았으면 하라바한테 말해서 쓸데없이 모래만 풀풀 날리는 사막 같은 거 정복하지 말고 차라리 제국에 투신하는 건데. 그랬으면 지금쯤...” 생각 같아서는 마상창으로 흠씬 두들겨 패서 그 입을 다물게 하고 싶었지만, 불행히도 테쉬는 데마가 상대하기에는 너무나도 강한 자였다. 별 생각 없이 그냥 콕콕 찔러 대는 것 같은데도 그의 창에 찔린 마수 들은 하나도 예외 없이 머리가 터져 나가며 즉사를 면치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견디다 못한 데마는 멀찍이서 한 무리의 마수들이 갈라져 나와 근처 마을로 향하는 모습을 보고는 일각수의 고삐를 잡아 챘다. 일각수는 그녀의 신호를 받자 앞발을 번쩍 쳐드는가 싶더니 그대로 하늘을 날 듯이 크게 뛰어 올랐고, 네 명의 일각수들이 마찬가지로 허공을 박차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어라?” 테쉬는 그녀가 말도 없이 몸을 빼 어디론가 향하자 쏟아져 나온 마수들로 인해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씩 미소를 짓더니 창을 바닥에 푹 꽂아 넣고는 마치 장대 높이 뛰기를 하듯이 하늘로 뛰어올랐다. 일각수를 타고 부하들과 함께 랜스 차지를 발동해 마수들을 짓이기며 나아가던 데마는 하늘을 붕붕 날아 자신에게 다가오는 테쉬를 보며 기겁을 하고 말았다. “하하! 데마 님! 이 테쉬가 돕겠소!” “끙...” 데마는 앓는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갈라져 나온 마수 무리의 예봉이 일각수 기사단과 테쉬에 의해 저지되자, 곧바로 광전사 가운데 한 무리가 갈라져 나와 그렇게 돈좌된 마수들을 덮쳤다. “훅! 훅! 훅! 훅!” “밟아!” 선임 블러드로드 오칸이 이끄는 광전사들은 짙은 땀내를 퍼뜨리며 마치 거대한 병정개미 떼처럼 덤벼들어 마수들을 발기 발기 찢어 버렸다. “휴... 무섭구먼.” 케이드는 사나운 광전사 무리들의 모습을 보며 그렇게 혀를 내두르다가 자신을 향해 콧김을 내뿜으며 멧돼지처럼 달려드는 거대한 마수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얼굴의 대부분이 입이고, 그 입의 대부분이 거대한 이빨로 이루어진 기괴한 마수의 몸은 케이드가 휘두른 검에 의해 단숨에 두토막이 나며 질척한 푸른 피를 사방에 흩뿌렸다. “이거 세탁하려면 고역이겠는걸.” 방금 그가 쓰러뜨린 마수는 하라바가 놓친 거대 마수들 가운데 하나. 케이드는 느긋하게 하라바의 등 뒤에서 그가 흘린 마수들이 접전이 벌어지고 있는 곳으로 가지 못하도록 막아서고 있는 중이었다. 키에에에엑! 하라바의 등 뒤를 노리던 마수 하나가 하얀 불꽃에 휩싸여 비명을 지른다. 바라보니 검은 방어복을 걸친 준상이 하라바의 머리 위에 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어이쿠!” 잠시 한눈을 팔고 있었던 탓일까. 그를 노리고 땅속에서 거대한 작살 같은 것이 불쑥 튀어 나왔다. 케이드는 슬쩍 뒤로 물러나는가 싶더니 그대로 한쪽 발을 들어 마치 진각을 밟듯이 세차게 땅을 밟았다. 그러자 물렁한 황토 흙이 마치 결정처럼 굳어지며 예리한 창날 같은 수정의 검날이 땅속을 헤집고 돌아다니던 마수의 몸을 믹서기처럼 갈아 버린다. “이 기술도 오랜 만에 쓰는 구먼.” 케이드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땅바닥을 쿵쿵 밟으며 돌아다니기 시작했고, 그 덕분에 지하를 통해 기습을 준비하고 있던 마수들은 지상으로 고개도 내밀지 못한 채 하나씩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와아, 그거 어떻게 하는 거에요?” “응?” 케이드는 지하로 침투해 오는 마수들을 일망타진하다가 어깨 너머에서 들려오는 고운 목소리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돌아보니 리체스가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 여왕님이십니까.” 케이드는 요정계에서의 고귀하고 성숙한 모습과는 전혀 딴판인 귀여운 리체스의 모습에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기술에 대해 설명했다. “이건 유리 지옥이라는 기술입니다. 땅 속에 숨어있는 마수들을 처리하기엔 그만이죠. 원리는 잘 모르지만 제법 쓸 만 합니다.” “아하.” 리체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궁리를 하는가 싶더니,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지진 마법이랑 비슷한 원리지만 진동 범위를 국소 범위로 한정 시키는 대신 토양을 암석으로 형질변환 시키고 그것을 다시 강화해서...” “...” 케이드로서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렇게 한동안 무언가를 중얼거리던 리체스는 이내 새로운 마법을 발동했다. “무너지고 흩어져 부서지는 창날의 지옥이여, 지금 여기 펼쳐져 땅속을 기는 자들을 벌하라.” 낭랑한 주문 소리가 펼쳐짐과 동시에 리체스를 중심으로 마법진이 생겨나 땅속으로 스며드는가 싶더니, 케이드가 발동했던 유리 지옥과 같은 현상이 동심원을 일으키며 지면을 타고 사방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한다. 이 작은 요정 여왕이 뭘하는 건가 싶었던 케이드는 지면을 타고 파문처럼 퍼져 나가는 유리 지옥의 모습을 보고 탄성을 터뜨렸다. “오오! 정말 대단합니다!” 케이드는 발바닥으로부터 전해지는 진동을 통해 지하에서 마수들이 죽음을 당하며 내지르는 비명을 전해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에구구... 너무 욕심을 부렸나 봐요. 이거 꽤 힘든데요.” “하하...” 리체스는 비틀비틀 거리며 하늘을 날아 준상에게로 돌아갔고, 그 모습을 보며 웃음을 짓던 케이드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작다고 얕보다가는 큰 코 다치겠군.” 00390 트롤러 ========================================================================= 지하를 통해 은밀히 접근 중이던 마수들이 리체스에 의해 떼죽음을 당하자 남은 것은 지상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는 놈들 뿐이었다. “하하하하!” 강철의 거인으로 변화한 하라바는 신이 나서 열심히 마수들을 밟아 대고 있었다. 하라바의 몸체는 어느새 처음보다 더 커져 있었는데, 그것은 전투를 치르면서 주위의 부서진 차량이나 건물의 금속을 흡수한 덕분이었다. “수고했다.” “헤헤...” 준상은 어깨 위로 돌아온 리체스에게 그렇게 말하고는 하라바에게 밟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마수들이 다시 재생하지 못하도록 말끔하게 불로 태워버리는 작업을 계속했다. 가장 위협이 되는 거대 마수들을 준상과 하라바, 그리고 케이드가 처리하자 나머지 중소 규모의 마수들은 준상이 소환한 행성 파두스의 능력자들과 행성 히딕스에서 불러온 광전사들에게 맥을 못 추고 도륙 당하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결국 약 한 시간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삼문협 방면으로 몰려들던 마수들은 모조리 죽어 땅 위에 널브러지고 말았다. “우오오오오!” “이겼다!” “하하하하!” 광전사들은 승리의 함성을 터뜨렸고, “후아... 뭐가 이렇게 많아?” “지옥으로 통하는 문이라도 열린 건가?” “그런데 여긴 어디지?” 행성 파두스에서 불려온 능력자들은 전투 중에는 미처 알아보지 못했던 주위의 풍경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준상은 먼저 몽몽이를 풀어 시드 등을 수거하고 정령들을 주위에 흩어 마수들의 흔적을 탐지했다. 몇몇 길 잃은 마수들이 정령에 의해 탐지 되었으나, 더 이상 방금 전과 같은 대규모 마수들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서유미.” “네.” “딜런에게 연락해서 삼문협 방면의 마수들은 토벌이 끝났다고 전하도록.” “알겠습니다.” 서유미에게 연락을 맡긴 준상은 선임 블러드로드 오칸에게 다시 명령을 내렸다. “인원 파악이 끝나는 대로 신기루 꽃으로 일단 후퇴해 다음 전투를 위해 대기하도록.” “명 받들겠습니다. 붉은 공포시여.” 오칸이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광전사들을 불러 모으기 시작하자, 이번에는 하라바를 향해 말했다. “짐 챙겨라.” “끙.” 전투를 할 때는 좋았지만, 늘어난 금속들을 인벤토리로 쓸어 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지라 하라바는 절로 앓는 소리가 나왔다. “케이드, 틸리오스. 인원과 장비를 파악한 다음 보고하도록.” “데마, 들었지?” “네. 스승님.” 인원 파악 결과 광전사들 가운데 부상자가 몇 명 나온 것을 제외하면 별 다른 피해가 없었다. 광전사들을 신기루 꽃으로 후퇴시키고, 능력자들을 역소환한 준상은 산더미처럼 쌓인 마수들의 시체들 가운데 쓸 만 한 것 위주로 인벤토리에 꽉꽉 눌러 담았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이 끝나자 별해파리 카말을 불러 타고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또 다른 접전 지역인 사천 지방으로 이동하기 위해서였다. “음료수 좀 드실래요?” “고마워.” 준상은 기안과 교체한 헤네스로부터 음료수를 건네받아 한 모금 들이키다가 울창한 숲을 발견하자 잠시 별해파리를 멈춰 세우고는 좌표 측정기를 꺼내 현재 지점의 좌표를 확인했다. 별해파리가 잠시 멈추자 지친 표정으로 주저앉아 있던 맥밀란이 블레이크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까 그 방어복 입은 사람들이 광전사들인가요?” “네.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휴, 중국은 물론이고 우리 나라에서도 난리가 났겠네요.” “하하...” 광전사들은 귀환자가 아니다. 그러나 방금 전의 전투에서 보여준 그들의 힘은 귀환자에 버금가는 위력을 지니고 있었고,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난데없이 천 명의 귀환자들이 땅에서 솟아난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것은 방어복과 더불어 꾸준하게 보급된 마법 물품들의 덕분이지만, 그런 물품들을 천명이 넘는 인원에게 지급할 수 있다는 것 자체도 엄청난 능력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중국의 경우 제대로 된 방어복조차 지급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니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뿐 만이 아니다. 50레벨 이상의 능력자가 무려 오십여명. 지구의 최상위 능력자가 이제 겨우 40레벨 정도인 것을 감안하면, 이것은 사실상 지구 전체의 귀환자들이 전부 모인다 해도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수준의 전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준상의 움직임을 미리 통보 받은 미국은 물론이고, 삼문협에서의 일전을 지켜보기 위해 주의를 집중하고 있던 다른 여러 나라들로서도, 방금 전에 벌어진 전투의 내용이나 결과는 충격적일 수밖에 없다. 그들이 잠시 휴식을 취하는 동안 별해파리는 빠르게 남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레이더에 감지되지 않게 위해 초저공으로 비행하고는 있었지만, 한국으로부터 중국의 내륙 지방을 가로질러 비행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별 다른 제지를 받지 않은 걸 보면, 은신 상태의 별해파리는 레이더나 기타 탐지 장치에 발각이 되지 않는 것으로 봐도 거의 틀림이 없을 듯 싶었다. “정말 영락없이 UFO로군.” “UFO요? 그게 뭔데요?” 지하로 접근해 오는 마수들을 처치하기 위해 새로운 마법을 만들어 사용한 덕분에 리체스는 무척이나 지친 기색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요정의 본성이라 할 수 있는 호기심만큼은 주체를 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준상은 헤네스와 함께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리체스의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별해파리는 남서쪽으로 진로를 바꾸어 청두 방면으로 나아갔다. 감숙성을 통해 들어왔던 마수들이 서안을 파괴하고 삼문협으로 몰려왔다면, 사천성으로 몰려오는 마수들은 청해성의 고원지대를 돌파한 놈들이었다. 청해성은 물론이고 사천성 북부 역시 고도가 높고 지형이 험준해서 병력들을 전개하기가 상당히 어렵다. 때문에 이 방면으로 몰려오는 마수들은 삼문협 인근에서 싸웠던 마수들과는 달리 주로 공중 폭격 위주의 공격이 가해졌으나, 험준한 지형의 영향으로 큰 효과를 보지 못한 상황이었다. “현재 파악된 바에 따르면 마수들은 3갈래 정도로 나뉘어 사천의 중심도시인 청두를 향해 접근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방어선은 어디에 구축되어 있지?” “그게...” 준상은 서유미의 핸드폰으로 연결된 메신저를 통해 딜런으로부터 현재 상황을 전달 받고 있었다. “민강에 건설되어 있는 시평댐 인근으로 보입니다.” “또 댐인가.” “하하...” 지도를 살펴보니 댐으로 인해 만들어진 호수가 남북을 가르고 있어서 북쪽으로부터 내려오는 마수들을 저지하기에는 제법 훌륭한 지형적인 조건을 만들어 주고 있었다. 하지만 상대는 인간이 아닌 마수. 굳이 삼문협에서의 전투를 예로 들지 않더라도, 중소형이 아닌 거대 마수들에게는 이런 식의 지형 같은 건 별 의미가 없었다. “수고했다. 다시 연락하도록 하지.” “네. 건승을 기원하겠습니다.” 딜런과의 연락을 끊고 조금 더 남하하자 마침내 사천 분지의 북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곳에서 산맥과 분지의 경계를 따라 남서쪽으로 이동하자 면양시를 지나 도강언시를 발견했다. “이건...” 하지만 그들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시평댐은 파괴되고 호수로부터 쏟아진 탁류가 도강언시를 집어 삼킨 뒤였다. 거대 마수들은 붕괴던 댐을 지나 강을 타고 남하하고 있었으며, 그보다 작은 마수들은 근처의 산과 강변에 구축된 방어 진지들을 습격해 부수고 있었다. “늦었군.” 준상은 혀를 차며 마수들의 진행 경로를 살피고는 제방이 시작되는 지점으로 이동했다. 도강언이라는 이름을 지닌 이 제방은 기원전 256년에 만들어진 것이지만 놀랍게도 지금까지 계속 사용되고 있는 고대 건축물이다. 별해파리가 멈추어 서자, 준상을 시작으로 헤네스와 서유미, 그리고 블레이크와 맥밀란이 차례로 제방이 시작되는 지점에 위치한 낡은 현수교 위에 내려섰다. 준상은 땅 위에 발을 내딛기가 무섭게 가장 먼저 하라바를 불러냈다. “하라바!” “이크!” 재소환된 하라바는 상류로부터 다리가 여섯 개 달린 도마뱀 형상의 마수가 내려오는 모습을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쯧, 물 위에서 싸우는 건 좀 별론데.” 기껏 모은 금속들이 녹 슬어 버리는 것이 아까운 모양이었지만, 곧바로 다리 위에서 강으로 뛰어 내리며 인벤토리에 담아둔 금속들을 쏟아냈다. 금속들은 허공에서 하라바의 몸에 척척 달라붙었고, 허공에서 형상을 갖춘 강철의 거인은 거대한 물보라를 일으키며 강물 위에 우뚝 섰다. “간다!” 하라바는 첨벙거리며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 도마뱀 형상의 거대 마수와 맞붙었다. 그 모습을 확인한 준상은 곧바로 신기루 꽃으로 통하는 문을 열어 광전사들을 불러내는 한편으로 행성 파두스의 능력자들을 한꺼번에 소환했다. “골치 아픈 지형이군요.” 케이드는 소환되기가 무섭게 주변 지형을 살피고는 그렇게 중얼거렸고, 뒤이어 모습을 드러낸 데마나 그의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건... 아무래도 탈것이 없으면 곤란하겠군.” 틸리오스는 산을 타고 내려오는 마수들을 보며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준상을 향해 말했다. “괜찮다면 익룡을 잠시 빌려줄 수 없겠소?” “...” 틸리오스는 활을 다루는 인물. 다른 자들이라면 몰라도 원거리 공격을 주로 하는 그라면 익룡에 올라탔을 때 가장 효율적인 공격이 가능해진다. “좋을대로.” 준상이 익룡 그라드닉스를 불러내자, 틸리오스는 쾌재를 올리며 훌쩍 뛰어 올라 익룡의 등에 올라타고는 곧바로 하늘로 날아올랐다. “케이드는 오른쪽, 누트라는 왼쪽을 맡는다. 오칸! 광전사들을 둘로 나누어 그들의 뒤를 받치도록.” “알겠습니다!” 명령을 내린 준상은 곧바로 요정의 술을 들이키며 하늘로 날아올랐고, 기안은 케이드쪽으로 서유미는 누트라 쪽으로 달려 나갔다. 맥밀란이 서유미의 뒤를 따르려 하자 블레이크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소위님.” “네?” “이걸 쓰십시오.” 블레이크가 건네준 것은 관리국의 기지에서 빼낸 광학 병기였다. 소총 모양의 이 개인 화기는 귀환자들의 강화된 육체에도 치명적인 피해를 입히는 매우 강력한 무기였다. 본래 블레이크는 육체의 단련을 위해 이런 식의 첨단 무기를 가급적 사용하지 않는 편이었지만, 지금처럼 지형이 불리한 상황에서 능력이 부족한 맥밀란이 난전에 참가하는 것은 너무나 위험한 일이었다. “이건...” 자신의 능력이 다른 이들에 비해 현저하게 떨어지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 맥밀란은 잠시 어두운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블레이크를 따라 마수들을 저격하는 일에 동참했다. “리체스! 우선 하늘 위에 있는 놈들부터 떨군다.” “네!” 준상과 리체스는 동시에 거대한 소용돌이를 만들어 내어 하늘 위에서 습격해 오는 마수들을 휘감아 올렸다. 거대한 두 개의 소용돌이가 솟아오르자 날개달린 물벼룩을 연상시키는 곤충형 마수들은 저항할 틈도 없이 거대한 공기의 흐름에 휩쓸려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하앗!” 준상은 두 개의 거대한 소용돌이가 비행형 마수들을 단숨에 끌어 들이자 곧바로 화염의 정령력을 끌어올려 소용돌이 속에 퍼부었다. 하얀 불꽃은 소용돌이 안에서 몸부림치고 있는 마수들을 덮쳤다. 그 강렬한 불꽃에 휩싸인 곤충형 마수들은 흡사 폭죽이 터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연달아 폭발을 일으켰다. 하늘에서 화려한 불꽃놀이가 펼쳐지자 강 속에 들어가 마수와 힘겨루기를 하고 있던 하라바는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이렇게 화려하게 응원까지 해주는데 이런데서 어물쩡거릴 수는 없는 일이지! 으라차!” 한 줄기 기합성을 터뜨린 하라바는 마수의 뿔을 잡은 채 그대로 옆으로 휙 비틀어 버렸고, 그 무지막지한 힘을 견뎌내지 못한 도마뱀 형상의 마수는 여섯 개의 다리를 허우적거리며 그대로 훌떡 뒤집어져 배를 드러내고 말았다. “이야압!” 그리고 또다시 이어진 기합성과 함께 강철의 거인이 거대한 발을 들어 목을 내려 찍자, 우두둑! 소름 끼치는 굉음과 함께 마수는 목이 부러져 버리고 말았다. 하라바는 마치 빨래를 짜듯 마수의 목을 몇 번이나 쥐어짜듯 확인사살을 하고는, 그 뒤에서 상어처럼 겹겹이 이빨이 난 거대한 입을 쩍 벌리고 달려드는 마수의 머리를 있는 힘껏 걷어찼다. 콰득! 그리고 부서져 흩어지는 이빨들의 잔해를 뚫고 손을 뻗어 마수의 입을 윗턱과 아래턱으로 나누어 쥐고는 그대로 힘주어 찢어 버렸다. 00391 트롤러 ========================================================================= 시평댐이 파괴되면서 그 안쪽의 호수에 몰려 있던 마수들이 민강을 따라 내려오다가 거대화한 하라바에게 막혀 버리자 근처의 산으로 움직이려 했다. 하지만 그들이 물에서 빠져 나오기 전에 하늘로 날아오른 준상이 먼저 손을 썼다. “이벨라.” 나지막한 준상의 목소리에 호응하듯 유리처럼 투명한 살결의 여인 한 명이 얇은 천으로 아슬아슬하게 몸을 가린 채 허공에 모습을 드러냈다. “아...” 이벨라는 너무나 오랜 만에 보는 바깥 세상의 모습에 잠시 놀란 표정을 짓다가 주위를 떠돌던 한줄기 바람이 몸 안으로 들어오자 가볍게 몸을 떨었다. 그 찰나의 순간에도 그녀의 몸은 근처를 떠돌던 정령을 끌어들여 그것에 빙의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의식을 잃지 않았다. 대정령이라면 모를까, 이 정도의 정령이라면 몸을 빼앗기지 않고 스스로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수련을 거친 덕분이다. “이곳은...” 아스팔트가 깔린 도로와 제방으로 둘러 싸인 강, 그리고 처음보는 생소한 식물들. 이벨라는 눈앞에 드러난 풍경이 자신이 보았던 것들과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허리를 감싸오는 탄탄한 손을 깨닫고 고개를 돌렸다. “준상씨?” “호수를 얼린다.” “네.” 준상의 손이 그녀의 헐벗은 등에 맞닿는다. “읏!” 그리고 그 손을 통해 막대한 정령력이 쏟아지자 잠시 들어와 있던 바람의 정령은 내쫒기듯 그녀의 몸으로부터 튕겨져 나가버리고 말았다. 이벨라의 몸 안을 새롭게 채우기 시작한 것은, 다름 아닌 얼음의 정령력. 수백년 동안 그녀의 몸을 가득 채우고 있던 그 기운은 소용돌이치며 오랜 만에 돌아온 집을 구경하듯 활개 치며 전신을 돌아다녔다. “하윽!” 이벨라는 밀려드는 정령력에 잠시 의식이 흐릿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이전에 그녀를 장악하고 있던 얼음의 대정령과는 달리, 지금 그녀의 몸 안을 휘젖고 돌아다니는 정령력의 의의는 온전히 준상이라는 인물에 의해 통제되고 있었다. 할 수 있어. 이벨라는 스스로에게 다짐하며 입술을 잘근 깨물고는 파리해 보일 정도로 투명한 두 손을 가슴에 모은 뒤 자신의 몸 안에 터질 듯이 들어찬 정령력을 마수들이 우글거리는 호수를 향해 쏟아 부었다. 이것이야 말로 준상이 이벨라와 함께 만들어낸 비장의 기술. 준상이 지닌 막대한 양의 정령력을 이벨라라는 매개체를 통해 막대한 규모로 증폭하여 쏟아 붓는다. 이벨라가 지닌 정령 증폭의 스킬은, 엘리가 지닌 일반적인 정령 증폭보다 한 단계 더 강화된 것. 수백년간 얀트훈센을 극한의 얼음 폭풍 속에 가둬 두었던 바로 그 능력이다. 정령 증폭으로 강화된 얼음의 정령력은 고도로 압축된 형태의 눈보라처럼 그대로 시평호에 직격했다. 쩌저적! 굽이치던 호수의 물은 급속히 얼어붙었고, 그 안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던 마수들 역시 삽시간에 쏟아져 나온 극한의 냉기를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준상은 호수 안의 마수들이 순식간에 동상이 되어 버리자 급히 이벨라의 등을 통해 밀어 넣고 있던 정령력을 끊어 버렸다. “커흑!” 이벨라는 정령력을 호수로 뿜어내다가 준상에게서 공급되던 힘이 끊기자 신음을 토해내며 증폭을 멈추었다. “괜찮아?” “네... 일단은. 흐윽!” 말을 하는 와중에도 갑작스럽게 쏟아져 나온 극한의 냉기에 이끌려 온 얼음의 정령 하나가 냉큼 그녀의 몸 안으로 밀려들어와 버린다. 그녀가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이런 식으로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정령이 냉큼 들어와 버리는 현상 또한 스스로 조절할 수 있어야만 한다. “수고했다. 들어가 있도록.” “네.” 이벨라를 역소환하자, 가만히 준상의 어깨에 앉아 그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리체스가 말했다. “불쌍해요.” “...” 하지만 준상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이용한다. 그녀는 정령계를 다루는 준상에게 있어 무척이나 유용하다. 지금 준상에게 중요한 것은 그 사실 뿐. 자비든 동정이든 결국 살아 있고 나서야 베풀 수 있는, 강자의 특권이 아니던가. 준상이 호수를 단숨에 얼려 버리고, 그로 인해 거대 마수들의 움직임이 멈추어지자 하라바는 마치 처음 물놀이를 나온 어린 아이처럼 물 위를 첨벙거리며 달려가 동상이 된 마수들을 두들겨 부수기 시작한다. 꽝! 꽈광! 익룡 그라드닉스에 올라탄 채 하늘로 날아오른 틸리오스는 거대한 강철의 주먹이 얼어붙은 마수의 몸을 두들겨 부수는 소리를 들으며 혀를 찼다. “저걸 다 얼려 버리는 놈이나, 그걸 때려 부수는 놈이나... 전부 괴물들 뿐이군.”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자신을 노리고 달려드는 익룡 들이 보이는 족족 사람 키만큼이나 큰 강철 화살들로 쏘아 보냈다. 키우우우! 화살이라기보다는 작살, 작살이라기보다는 미사일이라고 부르는 편이 나을 법한 무지막지한 화살은, 마치 고통에 찬 여인의 비명소리와도 같은 굉음과 함께 대기를 찢어발기며 거대한 익룡들을 사정없이 꿰뚫어 버렸다. 키에에엑! 비명을 지르며 공중에서 떨어져 내린 익룡의 거대한 몸체는 방패를 들고 선두에서 산을 향해 돌진하던 누트라를 그대로 덮쳤다. “이런 젠장!” 누트라는 상소리를 내뱉고는 그대로 뛰어올라 몸부림치며 떨어지는 익룡의 몸을 방패로 후려 갈겼다. 성벽을 연상시키는 두터운 방패에 얻어맞은 익룡은 그대로 구겨지듯 산비탈에 처박혔고, 이내 강물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너 이 자식! 일부러 그런 거지!” 누트라는 익룡을 타고 날아다니며 활을 쏘고 있는 틸리오스를 향해 주먹을 휘두르며 그렇게 소리쳤지만, 정작 상대는 이미 다른 표적을 찾아 날아가 버린 뒤였다. “끙...” 투덜거리며 다시 자세를 가다듬던 누트라는 문득 무언가 검은 그림자 하나가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것을 깨닫고 흠칫 놀랐다. “어?” 반사적으로 방어 자세를 취했지만, 그 그림자는 자신을 그대로 지나치더니 달려드는 마수들을 향해 손에 들린 짧은 칼을 휘둘렀다. 써컹! 푸른 검날이 번뜩일 때마다 마수의 신체 부위 가운데 하나가 정확히 절단되어 떨어진다. 그리고 그렇게 살과 뼈가 잘릴 때 마다 희미하게 작은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후후후후... 후하하하...” “...” 검은 색의 방어복을 걸치고 있는 상황이라 누가 누군지 쉽게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옷 위로 드러난 몸매를 보니 이 검귀 또한 여자가 확실했다. 그녀의 손에 들린 것은 누트라의 손바닥 길이보다도 짧은 칼. 사막의 용병들 중에도 간혹 짧은 칼을 선호하는 자들이 있기는 하지만, 찌르는 용도도 아니고 베는 용도로 저렇게 손바닥만 한 칼을 사용하는 이는 수많은 전투를 경험했던 누트라로서도 본 적이 없다. 게다가 듣는 순간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듯한 저 섬뜩한 웃음 소리라니.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은근히 미신이나 징크스 같은 것에 사족을 못 쓰는 누트라로서는 이런 인물과 함께 싸우는 건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젠장... 미친놈은 하라바 하나로 충분하다고.” 누트라는 자신도 모르게 두툼한 손을 들어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뒤이어 달려오는 광전사들과 다른 능력자들의 발걸음 소리에 화들짝 정신을 차리고 마수들을 향해 돌진했다. 서유미와 누트라를 시작으로 왼쪽의 산등성이를 향해 돌진한 병력들이 마수들과 격돌했다. 서로의 실력이 비등하다면, 올라가는 쪽보다 내려오는 쪽이 유리한 법. 더구나 인간에 비해 마수들의 신체가 더 크고 무거운 것은 당연한 일이기에 첫 격돌에서는 능력자들이 다소 밀리는 경향을 보였다. 하지만 그들로 인해 마수들의 움직임이 다소 주춤하는 순간, 능력자들의 뒤를 따라 달리던 선임 블러드로드 오칸이 크게 외쳤다. “이 미친놈들아! 날아보자!” “우오!” 광전사들은 오칸의 목소리가 터지기가 무섭게 손가락에 끼고 있던 마법 반지를 작동시키며 하늘 위로 크게 뛰어 올랐다. 도약력 강화. 재생력 강화와 함께 광전사들의 표준 장비로 채택된 또 하나의 마법 물품. 이것이 발동되자 광전사들은 평소보다 몇 배나 강화된 도약력을 이용해 허공으로 뛰어 올라 능력자들과 맞부딪혀 주춤해 있던 마수들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콰드득! 콰직! 실력이 비등하다면 위에서 내려오는 쪽이 아래쪽에 있는 쪽보다 유리한 법! 광전사들이 손에 쥐고 있던 거대한 둔기와 둔기에 버금가는 육중한 도끼 같은 무기들이 일시에 마수들의 머리와 등뼈를 부수어 버렸다. 선두에서 마수들과 겨루고 있던 능력자들은 그 모습을 보고 얼이 빠졌다. 검고 크고 단단한 수백의 근육질 사내들이 일시에 머리 위에서 산사태처럼 쏟아져 내리는 그 모습이라니. 상대가 인간이었다면 위력은 둘째 치고 그 박력만으로도 혼이 날아가 버릴 것만 같은 광경이었다. “저 놈들, 능력자 아니었지?” “통찰에는 그렇게 나오는데.” “그럼 저 옷 때문인가?” “그럴지도.” “...” 능력자들은 전투가 끝나면 자기들도 저 옷을 장만하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을 떠올리며 광전사들에게 뒤쳐질 새라 마수들을 향해 돌격했다. 강 오른쪽에서도 상황은 비슷했다. “날아라!” “짓뭉개버려!” 산사태처럼 쏟아져 내리며 마수들을 짓뭉개 버리는 광전사들의 전법에 케이드는 감탄하며 웃음을 지었다. “놀랍군. 저 많은 인원들이 전부 마법 물품을 장비하고 있다니.” 그러자 옆에서 일각수를 탄 채 그를 호위하듯 서있던 데마가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저들의 옷도 보통 물건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허허...” 왼편의 광전사들을 이끄는 것이 선임 블러드로드 오칸이라면, 이쪽은 수호의 신물과 깃발 달린 미늘창을 든 기안이 그 역할을 맡고 있었다. “으랴아아아!” “이요오오옷!” 광전사들의 선두에 서서 허공을 박차고 날아올라 마수들의 머리를 짓뭉개는 기안의 뒤를 따르고 있는 것은 바로 신창 테쉬였다. 기안이나 광전사들과는 다르게 도약력 강화 아이템을 가지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테쉬는 자신의 창을 이용해 광전사들보다 더 높게 날아오르고 있었다. 싸우는 것보다 광전사들과 높이뛰기 경쟁을 벌이는데 더 열중하고 있는 테쉬의 모습에 기안은 결국 견디지 못하고 짜증을 폭발시켰다. “너 뭐하는 자식이야? 똑바로 못 싸워?” “하하, 죄송합니다. 이게 은근히 재미있어서.” “미친놈.” “제가 그런 소리를 많이 듣는 편이죠.” “흥.” 기안은 콧방귀를 뀌고는 다시 마수들을 향해 몸을 날렸고, 테쉬는 빙글빙글 웃으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케이드는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마수를 거대한 붉은 검으로 단칼에 베어 버리고는 자신의 옆에선 제자들에게 말했다. “여기는 나 혼자서 충분하다. 저들의 뒤를 따르거라.” “네? 하지만...” “일각수라면 저들의 도약력을 충분히 따라 잡을 수 있을터. 게다가 말이란 건 가만히 서 있어서는 의미가 없는 법이다.” “알겠습니다. 스승님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데마는 불만스러운 표정이었지만, 이내 스승에게 예를 취하고는 고삐를 당겼다. 준상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도강언 입구로 몰려들던 마수들은 진격을 저지당했고, 오히려 밀리는 상황에 처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 찬물을 끼얹는 사태가 발생했다. 얼어붙은 마수들을 깨부수고 있던 하라바의 등에 포격이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으앗! 뭐야?” 느닷없이 등판을 두들겨 맞은 하라바는 놀라 펄쩍 뛰었고, 리체스의 마법에 의해 보호된 채 하늘 위에서 전투를 지켜보고 있던 준상은 이것이 중국군의 포격임을 깨닫고는 얼굴을 찌푸렸다. 00392 트롤러 =========================================================================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오인 포격. 산과 협곡으로 가로 막힌 얼어붙은 호수 안에서 싸우고 있는 하라바의 모습을 마수로 판단해 포격을 가했을 수도 있고, 시야가 닿지 않는 곳에서 전해 받은 제원만으로 지원 포격을 가한 것이 하라바에게 명중했을 수도 있다. 준상은 일단 포격이 날아온 방향으로 정령을 날려 보내 중국군 포병의 위치를 확인하게 하고는 리체스에게 말했다. “추가 공격이 있을 수 있으니 방어를 부탁한다.” 강철의 골격으로 보호되고 있는 하라바라면 큰 문제가 없겠지만 기화 폭탄 같은 것이 주위에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한창 전투중인 다른 이들이 피해를 입을 수도 있으니 사전에 차단할 필요가 있었다. “전부요?” 한창 난전중인데다 넓은 범위를 막아내야 하는지라 리체스는 난색을 표했다. “하라바는 내버려 두고 양쪽에서 싸우는 이들에게 불똥이 튀지 않는 정도라면 좋겠지.” 준상의 대답을 들은 리체스는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라면 가능할 것 같아요.” 리체스는 곧바로 마법을 발동해 전투를 벌이고 있는 능력자들의 머리 위에 방어막을 펼쳐 놓았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다시금 하라바와 호수 주변 지역에 광범위한 포격이 쏟아졌다. 위협이 될 만 한 포격은 리체스의 마법에 대부분 막혔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보호 받지 못한 하라바는 다시 등과 다리 등에 포탄이 떨어지자 짜증을 내며 소리를 버럭 질렀다. “으익! 자꾸 누구야!” 포탄의 양이 많지 않은 것을 보면 작정하고 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대로 계속해서 두들겨 맞고 있을 수는 없는 일. 결국 준상은 양쪽에서 누트라와 케이드, 그리고 기안과 오칸 등 현재 전투를 지휘하고 있는 자들에게 잠시 자리를 비운다는 것을 알리고는, 정령에 의해 확인된 중국군 포진지로 향했다. 창공을 가로질러 이동하자 제법 멀리 떨어진 곳에 야포들이 늘어서서 포격을 가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포의 숫자는 모두 여섯 대. 재사격을 위해 분주히 움직이는 모습을 발견한 준상은 급히 모습을 드러내며 바람의 정령력을 뿜어내어 야포 주위에서 분주히 움직이고 있던 포병들을 날려 버렸다. “으악!” “어이쿠!” 중국군 포병들은 비명을 지르며 가랑잎처럼 바람에 나뒹굴었고, 그들이 포로부터 떨어지자 준상은 그제서야 거대한 회오리 바람을 온 몸에 두른 채로 모습을 드러냈다. 병사들은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검은 방어복을 걸쳐 입은 채 거대한 회오리 바람을 망토처럼 두르고 서 있는 준상의 모습을 보자 깜짝 놀라고 말았다. “누구지?” “귀환자 아닌가?” 갑작스런 상황에 놀라 어쩔 줄 몰라 하는 병사들을 제치고 지휘관이 앞으로 나서며 성난 목소리로 외쳤다. “누구냐! 누군데 우리들을 방해하는 건가!” “...” 준상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손을 뻗어 지휘관의 몸을 염동력으로 끌어올렸다. “헉!” 작지 않은 덩치의 지휘관이 공중으로 휙 끌려 올라가는 모습에 병사들은 크게 놀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병사들의 놀람은 준상의 손에 의해 멱살이 잡힌 당사자의 그것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멱살이 잡히는 순간 전신의 힘이 쭉 빠져 나가자 지휘관은 방금 전까지 기세등등했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몸을 덜덜 떨기 시작한다. “어디다 대고 포를 쏘는 건가.” 방금 전까지 하대를 하고 있던 지휘관은 급히 말투를 바꾸어 대답했다. “네? 그게 무슨...” 도무지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듯한 지휘관의 대답에 준상은 다시 말했다. “네놈들이 쏜 포탄이 전투중인 아군에게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나?” “그, 그런...” 지휘관은 그제서야 눈앞의 귀환자가 왜 잔뜩 화가 났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현대의 포병은 적을 직접 눈으로 보고 사격을 하는 경우가 드물다. 때문에 원래대로라면 시평 댐 인근에 배치된 관측반에게 자세한 사격 제원을 전해 받아 포격을 실행했어야 하지만, 포진지를 완전히 구축하기도 전에 시평 댐의 방어선이 붕괴되었다는 사실이 전해지자 사령부에서는 이 포대에게 남아 있는 포탄을 모조리 쏟아 붓고 후퇴하라는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더듬거리며 자신이 명령 받은 내용을 말하는 지휘관의 모습에 준상은 혀를 찼다. 시평 댐의 방어선이 붕괴되면서 중국군 사령부는 지휘계통이 혼란에 빠진 상태였고, 중국군의 오인 포격은 그로 인해 벌어진 사건이었던 셈이다. 상황을 보아하니 아직 사령부에는 준상이 개입해 마수들을 토벌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모양이다. 준상은 겁에 질려 덜덜 떨고 있는 지휘관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강언 부근에서 현재 마수들을 토벌하는 중이니, 사령부에 이 내용을 전하라.” “도강언. 알겠습니다. 도강언에서 토벌 중이시라고 꼭 전하겠습니다.” “...” 그래도 군기는 제대로 들었는지 또박 또박 복명복창을 하는 지휘관의 모습에 준상은 피식 웃고는 그를 염동력으로 다시 땅에 내려놓았다. 준상에게서 간신히 풀려난 지휘관은 사지가 정상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확인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귀환자들이 대단하다는 얘기를 듣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지휘관은 거대한 회오리바람을 등진 채 하늘을 날고 있는 준상의 모습을 보며 용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용권풍(龍捲風). 회오리 바람을 일컫는 말 가운데 하나이다. 예전부터 동양에서는 갑자기 나타나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거대한 회오리 바람을 용의 등천과 연결지어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거대한 회오리바람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검은 옷차림의 신비인. 지휘관이 그런 준상의 모습에서 용을 떠올린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은 아닌 셈이다. 준상은 겁에 질린 병사들을 한 번 쓱 훑어보고는 지상에 방열되어 있는 야포들을 하나씩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육중한 152mm 야포가 지우개로 지워지기라도 한 것처럼 사라지는 모습에 중국군 장병들은 모두 얼빠진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 말도 전해라.” “마, 말씀하십시오.” “돕지는 못할망정 뒤통수를 때린 책임은 이후에 단단히 묻도록 할 것이다.” “...” 여섯 개의 야포를 모두 인벤토리에 집어넣은 준상은 그 말이 끝나자 바람의 정령력을 다시 회수해 회오리바람을 멈추고는 홀연히 모습을 감추었다. 그야말로 귀신이 곡할 노릇. 삽시간에 포병으로서의 능력을 상실해 버린 중국군 병사들은 준상이 사라진 곳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회오리바람이 사라지며 남긴 한줄기 바람에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그들은 어느새 목덜미를 흥건하게 적시고 있는 식은땀을 손으로 닦아내며 중얼거렸다. “어쩌지?” “글쎄.” 차라리 병사들은 낫다. 하지만 지휘관은 자신의 목숨이나 다름없는 야포들을 한순간에 빼앗기자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텅빈 포진지만 바라보고 있었다. “보고, 보고를 해야...” 얼마나 책임을 면할 수 있을런지는 모르지만 방금 일어난 일을 최대한 빠르게 보고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지휘관은 급히 사령부에 연락을 취했다. 한편, 중국군 포병 진지를 휩쓸고 돌아온 준상은 열심히 얼어붙은 마수를 깨부수고 있던 하라바에게 다가가 그의 몸 위에 방금 노획한 중국군 야포들을 쏟아 냈다. “으엇! 이게 뭐야?” “선물.” “선물?” 하라바는 뜬금없는 준상의 말에 어리둥절한 기색이었지만 질 좋은 강철들이 한 무더기나 보태지자 그것으로 몸집을 더욱 불리고는 열심히 마수들을 때려잡는 일을 계속했다. 강 양편으로 나뉘어 돌격한 광전사들은 달려드는 마수들을 때려잡고 마침내 중국군이 마련한 방어진지까지 밀고 올라갔다. 마수들은 호수 근처까지 밀려나자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던지 뒤돌아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렇게는 안 되지.” 준상은 거대한 불의 벽을 만들어 마수들의 퇴로를 차단했다. 느닷없이 솟아난 거대한 하얀 불꽃에 의해 도망칠 길이 막혀버린 마수들은 발악하며 능력자들과 광전사들에게 덤벼들었지만, 거대 마수들을 모조리 깨부순 하라바가 쿵쾅거리며 달려들자 제대로 반항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짓밟혀 버리고 말았다. 마침내 눈에 띄는 모든 마수들의 토벌이 끝나자 광전사들과 능력자들은 함성을 울리며 자신들의 승리를 자축했다. “우오오오!” “이겼다! 하하하하하!” 준상은 다시 몽몽이를 풀어 시드 등을 수거하게 하고 다른 이들에게 전장 정리를 명한 다음 서유미를 불러 삼문협과 도강언 방면의 마수들을 모조리 토벌했음을 딜런에게 알리도록 했다. 마수들의 사체 가운데 쓸 만 한 것을 추려 담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데, 케이드가 하라바 휘하의 삼 장군과 자신의 제자들을 데리고 준상에게 다가왔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하라.” 준상의 허락이 떨어지자 케이드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들이 입고 있는 옷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방어복이다.” “...” 단순 명료한 준상의 대답에 케이드는 말문이 막혔다. 전신을 감싸고 있는 저 검은 옷이 갑옷과 비슷한 종류의 의복이라는 사실 정도는 그 역시 모르는 바가 아니다. 그가 알고 싶었던 것은 이름이 아니라 방어복을 만들거나 구하는 방법이었다. 철벽 누트라가 입고 있는 갑옷이나 일각수 기사단의 갑옷에 비하면 훨씬 빈약해 보이는데다 몸매마저 훤히 드러나는 형태라 어쩐지 남한테 보이기 민망한 구석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런 소소한 외관상의 문제점을 제외하면, 이미 두 번의 전투를 지켜본 결과 그들이 사용하는 방어구보다 훨씬 강력한 능력을 지니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이 모두 강력한 힘을 지닌 능력자란 점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피와 살로 이루어진 인간이며 또한 목숨이 여러 개인 것도 아닌 이상 든든한 방어구에 대해 욕심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크흠, 죄송합니다만... 혹시 저희들에게도 저것을 구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형식상의 문제이긴 해도 준상은 그들을 예속해서 부리는 입장이니 어느 정도 그들의 안위를 책임질 의무가 있었다. “이미 만들고 있다.” “아, 그렇습니까.” “조만간 치수를 재기 위해 다시 한 번 부를 기회가 있을테니 그렇게 알고 있도록.” “정말 감사합니다. 하하.” 한시름 놓았다는 듯이 웃음을 짓는 케이드를 바라보며 준상이 다시 말했다. “내가 예전에 말 안 했나?” “무슨...” “너희들은 내가 죽지 않는 이상, 전투 중에 치명적인 부상을 입더라도 역소환되기만 할 뿐 죽지는 않는다.” “네?” 그 말에 케이드는 물론이고 주위에 늘어선 다른 능력자들도 모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준상은 그들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런 식으로 역소환되면 회복이 되기 전에는 다시 소환하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지.” “아...” “물론 시드 무력화 상황에서 죽어 버리면 이런 것도 소용없는 일이겠지만.” “그렇군요.” 은근히 준상에게 예속되는 것에 대해 자존심 상해 있던 몇몇, 이를테면 누트라나 틸리오스 같은 이들이 그 말을 듣고 곰곰이 머리 속으로 손익을 따지고 있을 때, 하라바의 외침이 들려왔다. “할 일 없으면 이리 와서 이거나 도와줘!” “...” 하라바는 얼어버린 호수 위에서 거대화를 풀고는 자신의 몸을 이루고 있던 금속들을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원래부터도 많은 양의 금속을 지니고 있었던 데다 이번에 벌어진 두 번의 전투에서 파괴된 무기나 차량 등을 대량으로 습득한 상황이다 보니 전투 후에 그것을 정리해서 인벤토리에 담는 일이 만만치 않았다. “빨리 가서 쉬려면 어쩔 수 없겠구려. 가서 도웁시다.” 웃음 띤 케이드의 말에 준상을 제외한 모두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하라바가 혼자서 낑낑거리고 있는 호수 위로 내려갔다. 00393 트롤러 ========================================================================= 모처럼 대규모로 동원된 광전사들과 능력자들을 본래 그들이 있어야 할 장소로 돌려보내는 일은 상당히 만만치 않았다. 이고르를 비롯한 아기 고양이들을 동원해서 귀환을 기다리는 전투 참가자들에게 간단하게 연회를 베푸는 일을 맡은 헤네스는, 그 모든 일이 끝나자 녹초가 된 몸을 침대에 눕히며 이렇게 말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관리국의 기지를 그냥 부숴 버리기 보다는 탈취하는 것도 좋았을 것 같아요.” 리체스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헤네스의 어깨를 주무르며 물었다. “무슨 얘기야?” “음, 그러니까... 아으...” 헤네스는 나긋나긋한 리체스의 손길이 주는 쾌감에 야릇한 비음을 토하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관리국의 설비라면 전송기능을 이용해서 그들을 불렀다가 돌려보내는 일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어서요.” “아하, 퀘스트처럼?” “네.” 좋은 생각이긴 하지만 하라바의 능력을 사용하려면 다소의 파괴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기지 붕괴의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한 것도 준상이 아니라 벨 페오르였다. 게다가 기지를 빼앗아도 그 안의 설비를 곧바로 활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리체스 같은 마법의 전문가나 이미 기지 설비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기능을 확인하고 설정을 용도에 맞게 고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더구나 이전에 파괴했던 기지에 준상의 정보가 있었는지조차 지금으로서는 알 도리가 없다. “준상씨는요?” “누리를 잠시 보다가 내일 일을 준비한다고 나갔어.” “음...” 내일은 발레라와 라트나의 무사 귀환을 축하하는 연회가 발레라의 본거지에서 열린다. 가주 부부나 제1황자 등의 핵심 인사는 참석하지 않지만, 그들을 대신해 제1황자비와 제4황자 내외 등이 참석하며 무엇보다도 발레라와 라트나의 약혼 선물로 창조의 씨앗이 전달될 예정이다. 준상은 그곳에 숨어 들어 황가의 인물들을 탐색하는 한편 창조의 씨앗을 회수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혼자서 괜찮을까요?” 헤네스는 적진 한복판에 준상 혼자 들어서는 것이 못내 불안한 모양이다. “나라도 함께 갈까 싶었지만, 할 일이 많은 터라.” 새로 합류한 능력자들에게 지급할 아이템들의 생산 계획을 확인하고 기존에 네 개 밖에 없는 신기루 꽃의 석문을 새로 추가하는 연구 등이 리체스에게 주어진 당면 과제였다. 게다가 이 일들이 끝나도 발레라로부터 건네받을 예정인 창조의 씨앗이나 벨 라야의 다크 시드 같은 것도 연구를 할 계획이 잡혀 있었다. “읏차... 누워 봐요. 이번에는 내가 안마해 줄 테니.” “고마워.” 리체스가 침대에 엎드리자 헤네스는 등에 돋아 있는 날개를 피해 손을 뻗은 후 어깨를 주물렀다. “아... 시원하다.” “후훗.” “왜 웃어?” “언니 말하는 걸 들으니 예전에 아버지 어깨 주물러 드릴 때의 일이 생각나서요.” “그래?” 그렇게 안마를 하고 있자니, 인기척과 함께 준상이 침실로 들어왔다. “어서 오세요.” “준비는 끝났나요?” 헤네스와 리체스가 몸을 일으키며 동시에 말하자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무래도 바로 가봐야 할 것 같아.” 헤네스는 그 말을 듣고 조금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벌써요? 연회는 내일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내일은 아무래도 번잡할 테니 미리 가서 기다리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 “아...” 준상은 헤네스와 리체스에게 다가와 그녀들을 안아주며 이마에 번갈아 입술을 맞추었다.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하시구요.” 리체스의 말에 준상은 그녀의 아름다운 무지개빛 머리카락을 살짝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걱정 마.” 두 반려들에게 작별의 인사를 마친 준상은 열심히 뒤집기를 하다가 지쳐 잠이든 누리에게 들러 이마에 입을 맞추어 주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럼, 다녀올게.” “조심하세요.” 다시 한 번 두 반려와 포옹을 나눈 준상은 신기루 꽃의 석문을 불러내어 새로 발레라에게 전달받은 좌표를 입력하고는 문이 열리자 바로 그 안으로 뛰어들었다. 석문을 통과하자, 미리 연락을 받고 대기 중이던 발레라와 라트나가 얼른 무릎을 꿇으며 인사를 했다. “어서 오십시오. 나의 주인이시여.” “준상님을 뵈어요.” 그가 도착한 곳은 발레라의 저택에서 조금 떨어진 호수 위의 별궁이었다. 발레라의 저택과는 푸른 빛이 감도는 크리스탈로 만들어진 다리로 연결되어 있었으며, 별궁 자체도 반짝 반짝 빛나는 크리스탈로 지어진 탓에 햇빛이 내리쬐는 한 낮에는 그 자체로 찬란한 보석을 연상시킬 정도였다. 그래서 지어진 이름이 보석궁. 이곳은 나중에 발레라와 라트나가 결혼한 후 신혼을 보내기 위해 특별히 지어진 궁전이다. “그런 곳에 내가 기거해도 상관없는 건가?” “자유롭게 드나들어도 문제가 없도록 관리인으로 신분을 만들어 두었습니다.” “수고했다.” “주인께 헌신하는 것이야 말로 저의 기쁨입니다.” 준상은 한껏 상기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라트나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이전에 처음 보았을 때와는 달리 불타는 화염처럼 찬란하게 빛나는 붉은 머리카락을 하고 있었다. 준상은 이쪽의 패션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었지만 단순히 머리카락의 색을 물들이는 염색과는 확실하게 구별되는 느낌이다. 문제는 이런 치장용 아이템조차 창조의 씨앗으로 만들어져 있다는 점이겠지만 말이다. “잘 지냈나?”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며 묻자, 라트나는 꽈배기처럼 몸을 배배 꼬며 대답했다. “네... 염려해 주신 덕분에...” 단지 손가락의 촉감이 뺨에 와 닿고, 그 호흡과 목소리가 전해진 것 뿐인데도 불구하고 라트나는 가슴이 벅차오르는 감동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준상이 그런 라트나의 반응을 확인한 다음 손을 떼고 물러서자,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발레라가 정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갈아입으실 옷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시죠.” “알았다.” 준상은 발레라가 이끄는 대로 별궁 안으로 들어갔다. 너무 번쩍거려서 조금 부담스럽기까지 한 바깥의 모습과는 달리 안으로 들어서자 차분한 빛이 주위를 감싸며 마음을 푸근하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준상은 조명 대신 주위를 밝히고 있는 작은 빛 덩어리를 발견하고는 발레라에게 물었다. “이건... 정령인가?” 앞서 가며 그를 안내하고 있던 발레라는 준상의 물음에 바로 걸음을 멈추며 대답했다. “일종의 인공 정령입니다. 퀘스트에 쓰이는 정령처럼 공격 능력은 갖추고 있지 않은 조명용이죠.” “과연.” 저택 안에는 빛의 정령 만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습도를 자동으로 조절하는 물의 정령과 환기를 담당하는 공기의 정령, 그리고 난방을 위한 불의 정령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것이 인간의 손길이 필요하지 않도록 준비되어 있었다. 복도를 따라 안으로 들어서자, 깔끔한 정장을 갖춰 입은 하얀 고양이 한 마리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집사 고양이 헬라입니다. 주인님을 최상위 명령권자로 지정해 두었으니 필요한 것이 있으시다면 헬라에게 말씀 주시면 됩니다.” 고글을 통해 파악된 헬라의 레벨은 정확히 50. 집사 고양이의 유능함은 요정계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은 이고르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이름이 여자 같은데.” “말씀대로 암컷입니다.” 나중에 이고르와 짝을 지어 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떠오른다. 신혼 생활을 위해 만들어진 곳이라 그런 것일까. 환상적인 분위기를 주는 것과는 별개로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로 단 둘이서만 오붓한 분위기를 즐길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이 이 별궁의 가장 큰 특징이 아닐까 싶었다. “이곳의 주택은 모두 이런 식인가?” 준상의 물음에 발레라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보통은 이런 식으로 정령이나 펫 같은 것을 사용하기 보다는 인력을 많이 사용합니다. 이곳은 신혼을 위한 별궁이라 조금 특별한 셈이죠.” “그렇군.” 용도야 어찌 되었든 간에 사람의 출입이 통제된 곳이라면 준상이 지내기에는 안성맞춤이다. 발레라는 간단하게 별궁의 내부를 안내한 다음, 한쪽 방으로 들어가 진열되어 있는 의복들을 보여주었다. “이곳에서 지내시는 동안에는 이쪽의 복장을 이용하시면 됩니다.” 준상은 발레라가 보여주는 의복을 보며 물었다. “이전에 보았던 시종의 복장과는 다르군.” 그 말을 들은 라트나가 바로 대답했다. “이 복장은 브리아넬라 가문에 봉직하는 궁내부원의 것입니다.” 라트나의 뒤를 이어 발레라가 대답했다. “일단은 제가 황실의 궁내부에서 특별히 선발한 자라고 얘기가 되어 있으니 그렇게 알아두시면 됩니다.” 준상은 다시 물었다. “그럼 이름이나 출신 같은 것도 알아두어야 하나?” 발레라는 바로 대답했다. “이름은 안트람. 그 외의 것은 비밀로 일관하셔도 무방합니다. 본래 궁내부의 전통이 그런 것이라.” “전통이라면?” “황실 직계의 측근에서 일하는 것이다 보니 궁내부원은 예로부터 다른 방계 황족이나 귀족의 포섭대상이 되곤 했습니다. 이런 폐단을 막기 위해 궁내부원은 자신의 출신에 대해 함부로 언급할 수 없도록 법으로 정해져 있습니다.” “그렇군.” 그 외에 간단한 주의 사항 같은 것을 전달한 발레라는 용무가 끝나자 준상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럼 전 먼저 가보겠습니다. 내일의 일을 준비할 필요가 있는지라.” “수고했다.” 준상은 발레라에게 그렇게 대답하고는 햇볕이 잘 들어오는 거실의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딱히 자신의 취향은 아니었지만 신기한 것을 좋아하는 리체스라면 이 보석궁을 아주 마음에 들어할 것 같다는 생각을 떠올리고 있는데, 문득 그의 옆에 라트나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앉았다. 준상이 바라보자 라트나는 조심스럽게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발그레하니 상기된 그녀의 모습은 영락없이 사랑에 빠진 소녀의 그것이었지만, 준상은 그런 라트나를 바라보며 이렇게 물었다. “그만 돌아가도록.” “하지만...” 라트나는 무언가 반박하려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준상은 손가락을 들어 그녀의 입술을 막으며 조용히 말했다. “발레라와 함께라면 몰라도, 혼자서 이곳에 너무 오래 남아 있으면 다른 이들이 의심할 수도 있다.” “...” 라트나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죄송합니다. 제 생각이 얕았어요.” “알면 됐다.” “쉬세요.”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그렇게 말하고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거실을 나갔다. 준상은 라트나가 거실에서 나가자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늘 위로 거대한 달이 지나가는 모습이 시야를 가득 메운다. 실금 같은 것이 잔뜩 새겨진 달은 차츰 저물어가는 태양의 빛을 머금으며 붉게 물들어가더니 태양과 겹쳐지며 검은 빛으로 변했고, 방금 전까지 황금빛으로 반짝이던 호수는 이내 캄캄한 어둠 속에 잠겨 버렸다. 삽시간에 주변이 어둠으로 물들자, 저택 주위를 맴돌던 빛의 정령들이 은은한 빛을 내뿜으며 호수 위로 내려앉는다. 그리고 다시 약간의 시간이 흐르자 하늘을 검은 구멍처럼 뒤덮고 있던 달의 모습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화려한 은하수의 모습이 아로새겨진다. 본래 근처에 밝은 빛이 있으면 별이 잘 보이지 않는 법. 하지만 정령의 은은한 빛은 하늘의 쏟아지는 별빛과 조화되어 크리스탈로 만들어진 보석궁을 더욱 은은하게 밝히고 있었다. 낮의 모습이 화려한 다이아몬드를 연상시킨다면, 밤의 풍경은 은은하게 빛나는 진주의 그것과도 같았다. 감정이 메마른 준상조차도 눈앞에 펼쳐진 이 아름다운 풍경에는 절로 찬탄을 터뜨릴 수 밖에 없었다. 00394 트롤러 =========================================================================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준상에게 집사 고양이 헬라가 간단한 식사를 가져 왔다. 넓게 잘라 구운 생선살에 밝은 색의 소스를 끼얹고 여기에 볶은 야채와 신선한 붉은 과일을 곁들인 음식에 약한 도수의 술이 곁들여져 나왔는데, 부드럽게 구워진 생선살에 살짝 매콤한 느낌의 소스가 곁들여진 것이 일품이었다. 한 접시를 뚝딱 해치우고 술잔을 기울이는데, 별빛 가득한 밤하늘로부터 유성 같은 것이 하나둘 지상으로 내려앉는 장면이 준상의 시야에 들어왔다. 바로 귀족들이 타고 있는 차원순양함이다. 본래 초차원 이동이 가능한 게이트는 차원 요새에 준한 설비에서만 운용된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칠성좌의 차원 요새와 관리국의 기지. 이 설비들은 초차원 게이트를 사용할 수 있는 대신 실차원에서의 운항은 불가능하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관리국과 칠성좌를 만들 당시 칠대 황가가 그들의 장비에 제약을 가했기 때문이다. 차원 요새의 은밀성과 실차원에서의 운항이 가능한 것도 존재한다. 칠대 황가가 각기 하나씩 운용하고 있는 초차원 기동 요새가 바로 그것이다. 최고 레벨을 지닌 창조의 씨앗 100개를 가지고 만들어낸 이 터무니없는 구조물은 칠대 황가의 상징이며 그들이 우주를 지배할 수 있게끔 해주는 실질적인 무력이라 할 수 있었다. 과거 칠대 황가에 대항하는 몇몇 행성들이 창조의 씨앗이 아닌 일반적인 기술로 이 무지막지한 구조물을 만들어내려 한 적이 있었으나, 채 반도 완성되기 전에 행성 자체가 파산의 나락으로 떨어져 버린 전례가 있을 정도였고, 그 이후로는 그 누구도 창조의 씨앗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초차원 기동 요새를 만들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초차원 기동 요새는 기본적으로 칠대 황가의 가주에게 최고 권한이 주어져 있으며, 가주 부재의 위급 상황에 대비해 황가의 제1계승권자 부부에게 예비 권한이 부여된다. 이번에 방문하는 제1황자비 마유나가 여기에 해당되는 인물이다. 이런 최고 권한과는 별도로 칠대 황가의 직계의 영지로 사용되는 몇몇 행성에는 좌표가 고정된 게이트들이 존재하는데, 발레라와 라트나는 이러한 게이트의 사용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초차원 기동 요새의 권한 체계는, 준상이 가진 신기루 꽃의 소유권과는 별개로 헤네스와 리체스가 얀트훈센과 이벨류아, 요정계로 통하는 석문의 사용 권한을 가지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권한을 가지지 못한 방계 황족이나 여타의 귀족들은 어떤 수단을 사용해 우주 각지에 흩어져 있는 행성들을 오가는 것일까. 그 수단이 바로 지금 하늘 위에서 천천히 내려오는 차원순양함이다. 차원순양함은 행성 궤도에 설치된 워프 게이트를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는데, 일반적인 실차원의 운송은 대부분 이 방식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 특별한 우주선들은 중력 제어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궤도 진입이 자유로울 뿐만 아니라, 워프 게이트 통과시 가해지는 압력을 견뎌낼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하다. 차원순양함은 용도에 따라 다양한 형태를 지니고 있는데, 가장 표준적인 것은 지구의 잠수함을 연상시키는 길이 150미터 정도의 시가형이지만, 사용하는 가문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개수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일반적인 업무에 사용되는 수송선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모양이 제각각이다. 발레라와 라트나의 귀환을 축하하는 연회는 내일이지만, 시간을 딱 맞춰서 도착하는 것은 주빈이라 할 수 있는 직계 황족들 정도가 고작이고, 나머지는 이런 식으로 차원순양함을 이용해 미리 도착하는 것이 상례인 듯 하다. 준상은 별빛으로 반짝이는 하늘을 수놓으며 지상으로 내려앉는 차원순양함들의 모습에서 자신이 상대하려 드는 자들이 우주라는 광대한 영역을 제패한 자들임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후...”헬라가 가져온 술잔을 기울였다. 달콤 쌉싸름한 맛이 입가를 적시며 그의 정신을 이완시킨다. 준상은 문득 고사성어 하나를 떠올렸다. 당랑거철(螳螂拒轍). 사마귀가 수레바퀴를 막는다는 말로서, 자신의 역량은 생각하지 않고 함부로 덤비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하지만 저주의 흑혈을 사용해 발레라를 그라우엔으로 만들어 버린 이상 이제 와서 물러설 수도 없는 일.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분명한 것은 그의 머리 속에 시드가 박혀 있는 이상 그에게는 타협의 여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헬라. 한 잔 더.” 대기하고 있던 하얀 고양이 헬라가 조심스럽게 잔을 채워 주자, 준상은 단숨에 그것을 비우고는 내일을 위해 휴식을 취하고자 침실로 향했다. 다음날. 행성 텔리타의 중앙 대륙에 위치한 발레라의 저택은 아침부터 손님들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저택이라고 하면 커다란 건물 한 두 채 정도의 규모를 연상하겠지만, 칠대 황가에 속한 브리아넬라 가문의 경우라면 도시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의 규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발레라와 라트나의 신혼 생활을 위해 지어진 보석궁의 이름이 오히려 예외인 셈이다. 규모가 큰 만큼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의 수도 많은 것은 당연한 일. 보석궁의 예를 봐도 알 수 있는 일이지만, 그럴 의도만 있다면 충분히 인력에 대한 의존도를 획기적으로 줄이는 것이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업무를 인력에 의존하는 것은 그렇게 사람을 부리는 것 자체가 황족이나 귀족의 특권이기 때문이다. 준상은 아침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 준비된 옷으로 갈아입고 저택 주위를 탐색했다. 발레라와 라트나의 말처럼 궁내부원의 옷을 차려 입은 그에게 함부로 말을 거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준상은 수월하게 저택 곳곳을 돌아볼 수 있었으며, 옷 자체에 신분증에 준하는 무언가가 있는 모양인지 일반적으로는 들어갈 수 없도록 마법이나 기타 설비로 통제된 지역도 어렵지 않게 통과할 수 있었다. 준상은 연회가 열리는 장소를 간단히 살펴본 다음 발레라가 머물고 있는 장소로 이동했다. “안트람인가. 잘 왔네. 낯선 곳이었을 텐데 잘 쉬었나 모르겠군.” 연회를 위해 예복을 차려 입고 있던 발레라는 준상이 방 안으로 들어오자 그렇게 말을 건넸다. 발레라의 치장을 돕는 자들이 함께 있는 터라 하대를 한 것이기에 준상도 그에 대응해 경어를 건넸다. “염려해주신 덕분에.” 이곳의 예법에 대해서는 이미 라트나에게서 간단하게 설명을 들은 뒤였다. 계급 사회인 만큼 세세한 여러 가지 예법이 존재하고 있었지만, 준상에게 필요한 것은 각 신분의 사람들에게 필요한 인사 예절 정도가 고작이었고, 발레라나 라트나를 수행하는 도중에는 그보다 높은 신분인 제1황자비 외에는 그나마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한결 수월했다. “조금 시간이 걸릴테니 잠시 거기 앉아서 쉬고 있게.” “감사합니다.” 준상은 발레라의 시야가 닿지 않는 곳으로 걸음을 옮긴 다음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시녀 하나가 가져온 음료수를 마시며 아침에 살펴본 이 저택의 구조와 경비 체계를 다시 한 번 머리 속으로 되새겼다. 잠시 그렇게 기다리고 있자니 마침내 예복을 다 차려입은 발레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떤가.” “훌륭합니다.” 발레라의 말에 의례적인 대답을 건넨 준상은 고글을 통해 그가 차려입고 있는 아이템들을 확인하고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십여 가지 이상의 유니크 아이템을 덕지덕지 처바른 그 모습이라니. 벨 라야의 차원 요새에서 처음 보았을 때보다도 더 심하게 느껴지는 것이 착각은 아닐 듯 싶었다. “오늘은 아무래도 옷 갈아입다가 시간이 다 갈지도 모르겠어. 나야 그렇다 쳐도 누이들은 아마 그것만으로도 지쳐 쓰러질지도 모르지. 만약 그렇게 되면 자네가 내 대신 잘 보살펴 주게.” “알겠습니다.” 직계 황족들은 발레라처럼 여러 가지 강력한 아이템으로 몸을 보호한다. 하지만 연회나 의식이 길어지게 되면 땀이나 음식 냄새가 옷에 배게 되는데, 이럴 경우 잠시 탈의실로 가서 옷을 갈아입으면서 휴식을 취하는 것이 보통이다. 준상은 탈의실을 나서는 발레라를 세 걸음 정도 물러난 상태로 뒤를 따랐다. 복도를 따라 조금 걷자 치장을 마친 라트나가 시종들을 데리고 모습을 드러냈다. 발레라는 라트나와 인사를 나누고는 함께 접견실로 가서 방문한 귀족들의 인사를 받았다. “이렇게 무사하신 모습을 뵙게 되니 정말 다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염려해 주어서 고맙소.” 준상은 접견실 입구에 선 채로 귀족들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사실 귀족들이라고 해서 별 다를 것은 없어 보였다. 차이가 있다면 발레라나 라트나보다 몸에 걸친 아이템의 수가 적다는 것 정도. 접견실이라 일부러 수행원들을 떼어 놓고 와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함께 하는 자들 중에도 특히 위험스럽게 느껴지는 자 역시 보이지 않았다. 그럴 마음만 있다면 단숨에 몰살시켜 버릴 수 있을 것 같은 느낌마저 들 정도다. 약 두 시간에 걸친 접견이 끝나자 발레라와 라트나는 옷을 갈아입기 위해 각자의 탈의실로 향했다. “누님이 오실 때까지는 여유가 있으니 잠시 쉬었다 오게.” “알겠습니다.” 발레라의 말에 따라 탈의실에서 나온 준상은 제1황자비와 제4황자 내외를 맞이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광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황족 납치라는 초유의 사태가 얼마 전에 벌어진 탓인지 광장은 삼엄한 경비 태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관리국의 기지에서 보았던 가디언과 비슷한, 하지만 더욱 사람과 가까운 형태를 지닌 인간형의 병기가 줄지어 도열해 있는 것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이 인간형의 병기들은 사람 키의 세 배 정도 되는 크기를 지니고 있었는데, 하나 같인 중세 기사의 갑옷과 같은 고풍스런 디자인의 갑주를 걸치고 있었으며, 그 손에는 금빛으로 상감된 커다란 미늘창을 들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군악대로 보이는 자들이 연습을 하고 있었으며, 그 앞쪽에는 의장대로 보이는 자들이 줄지어 서 있다. 화려한 옷차림의 군악대와 의장대 외에도 약 천여명에 달하는 경비병들이 대기 중이었는데, 이들은 커다란 사각의 방패를 손에 쥐고 있었으며, 어깨에는 관리국의 병사들이 사용했던 것과 비슷한 느낌의 광학 병기를 메고 있었다. 잠시 그곳에서 기다리자 옷을 갈아 입은 발레라와 라트나가 황족들의 방문을 마중하기 위해 그곳에 도착했다. 준상이 발레라의 뒤로 가서 자리를 잡자, 광장 한 쪽에 신기루 꽃의 그것보다 훨씬 큰 아치형의 문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시작하라.” 시종장의 명령과 함께 먼저 대기하고 있던 군악대의 연주가 시작되었고, 뒤이어 의장대가 앞으로 나서며 문 주위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그 모든 준비가 마쳐지자 마침내 문이 열리며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장 먼저 같은 색상의 예복을 차려 입고 무기를 양손으로 받쳐 든 의장대가 나타나 늘어섰고, 그들이 모든 준비를 마치자 그제서야 작은 원반 같은 것에 탑승한 화려한 옷차림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조금 수척해 보이는 느낌의 여성이 가장 앞에 서 있었고, 남녀 한쌍이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바로 저들이 이번 연회의 주빈인 브리아넬라 가문의 직계 황족들이다. 발레라와 라트나는 계단을 내려가 그들을 맞이했다.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누님.” “어서 오세요. 언니.” 공식적으로는 제1황자비지만 사적으로는 그들의 친누이이기도 하기에 발레라와 라트나는 친근한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맞이했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제1황자비 마유나는 푸근한 표정으로 미소를 짓고는 발레라와 라트나와 번갈아 포옹을 나누었다. “고생했다고 들었는데, 얼굴을 보니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군요.” 마유나의 뒤를 따르던 남녀 가운데 남자가 발레라에게 웃으며 그렇게 말을 건넸다. 완전한 성인인 발레라에 비하면 아직 어린 티가 가시지 않은 느낌. 준상의 기준으로는 잘해야 고등학생이나 되었을까 싶은 애송이들이다. “잘 왔다.” “와줘서 고마워.” 발레라와 라트나는 제4황자 내외를 웃는 얼굴로 맞이했다. 준상은 발레라에게서 조금 떨어진 채로 뒤따르며 이번에 방문한 황족들의 면면을 머리 속에 확실히 기억해 두었다. 황족들이 도착하자 곧바로 연회가 시작되었다. 넓이만도 축구장에 버금 갈 정도의 거대한 대연회장이 귀족들과 그들의 수행원으로 가득 차 버렸다. 황족들은 연회장을 굽어보는 듯한 위치의 단상에 자리한 채로 아래쪽에서 펼쳐지는 연회를 바라보며 얘기를 나누었다. 한참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던 제1황자비는 문득 측근으로부터 상자 하나를 받아 들더니, 그것을 발레라에게 건네주었다. “늦었지만 약혼 선물이에요.” “감사합니다. 누님.” 발레라는 상자를 받아 라트나에게 건넸다. 라트나가 상자를 열어보자 그 안에서 은은한 무지개 빛 광채가 확 뿜어져 나왔다. “언제 봐도 이 빛깔은 정말 아름다운 것 같아요.” 라트나가 그렇게 말하자, 마유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저는 그 빛이 인간의 일곱 가지 그릇된 욕망을 상징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곤 합니다.” “누님...” “미안해요. 그냥... 요즘 좀 피곤하다보니 이런 저런 잡생각이 나곤 하네요.” 라트나는 상자를 닫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마유나의 손을 잡아 끌었다. “그럼 가서 잠시 쉬다 와요.” “그럴까요?” “보석궁 아직 못 보셨죠? 오신 김에 보고 가세요. 얼마나 아름다운데요.” “두 사람의 신혼집에 함부로 들어가는 건 좀 미안한데.” “괜찮아요. 뭐하면 오라버니 대신 언니랑 결혼하면 되죠 뭐.” “얘도 참.” 창조의 씨앗을 전하는 것으로 자신이 이곳에 온 가장 큰 이유는 일단 해결이 된 셈이라 마유나는 웃으며 라트나의 손에 이끌려 몸을 일으켰다. 이번 연회는 삼일 연속으로 진행되는 것이니 첫날부터 굳이 무리를 할 이유도 없었다. 라트나와 마유나가 몸을 일으키자 준상은 발레라의 눈짓을 받고는 다른 수행원들과 함께 조용히 그녀들의 뒤를 따랐다. 00395 트롤러 ========================================================================= 라트나는 마유나를 보석궁으로 데리고 갔다. “어머...” 피로한 기색이 역력하던 마유나였지만 크리스탈로 만들어져 아름답게 반짝이는 다리를 건너 푸른 호수 위에 보석처럼 황홀하게 빛나는 궁전으로 들어서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은은한 정령들이 춤추는 복도를 지나 물결이 찰랑이는 호수가 전면에 보이는 거실로 마유나를 인도한 라트나는 그녀를 푹신하고 안락한 소파에 앉혔다. “많이 피곤해 보여요.” “그런가요.” 마유나는 푹신하고 안락한 소파에 몸을 파묻고는 손을 저어 수행원들을 방 밖으로 내보내고서야 입을 열었다. “이런 저런 일로 바쁘다 보니... 마음 놓고 쉴 수도 없더군요.” 씁쓸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는 마유나의 모습에 라트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녀의 등 뒤로 돌아가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한다. “어때요?” “시집 갈 때가 되어서 그런지 손길이 아주 부드러워졌네요.” “후후...” 마유나는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라트나의 손길을 받아들이며 이렇게 말했다. “라트나.” “네, 언니.” “고생이 많았다고 들었어요.” “...” “벨 페오르가 연관되어 있다고 하던데, 사실인가요?” “네.” “후우... 설마 했는데...” 마유나는 짧게 탄식하여 표정이 어두워졌다. 황가의 인물이 극적으로 무사 귀환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만이 이번 연회에 참석한 이유는 다른 사람들이 모두 이번 사태의 해결을 위해 분주하고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었다. 파괴된 차원 요새나 소멸해 버린 벨 라야의 후임을 정하는 문제는 물론이거니와 벨 페오르가 배후에 있는 것이 확실하다면 그가 속한 타랄라 가문과의 관계가 험악해질 것은 당연한 수순이고,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 겉으로나마 평온을 유지하고 있던 칠대 황가 간의 균형도 무너질 수밖에 없다. 자칫 한 발을 잘못 내딛기라도 하는 날에는 우주 전체를 집어 삼킬 수도 있는 대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벨 라야의 후임에 대해서는 어떻게 얘기가 오가고 있나요?” 잠시 상념에 잠겨 있던 마유나는 귓가로 조용히 들려오는 라트나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는 바로 대답했다. “이런 저런 얘기가 있기는 하지만, 쉽게 결정이 날 것 같지 않아요.” “왜요?” “서로 자기 가문의 사람을 집어넣으려고 하기 때문이죠. 이러니 저러니 해도 창조의 씨앗을 직접 수급하는 위치니까요.” 마유나의 말에 라트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기 가문이라면... 귀족들이 그 일을 하려고 든다는 말인가요? 괴물이 되어 버리는 거잖아요.” “서출들이라면 문제 될 것이 없죠. 어차피 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자들인데다, 성좌의 주인은 평민이 하나의 별을 지배하는 자가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도 하니까요.” “아하...” 귀천상혼이 엄격하게 적용된다고는 하지만, 적법한 혼인 관계가 아닌 은밀한 관계로 태어난 아이들은 어디에나 있는 법이다. 게다가 성좌의 주인은 한번 임명되면 어지간해서는 교체되는 일 자체가 드문 자리. 본래대로라면 숨죽이며 자신의 존재를 숨기고 살아야 하는 이들로서는 놓칠 수 없는 기회인 셈이다. 마유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따뜻한 햇살과 시원한 바람, 그리고 어깨를 조물거리는 라트나의 부드러운 손길이 합쳐지자 쌓여있던 피로가 스르르 풀리며 잠이 솔솔 들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저런 아이템을 착용하고 있는 탓에 육체적인 피로는 바로바로 해결이 된다 쳐도, 정신적인 피로만큼은 휴식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는 것도 사실. 결국 마유나는 그대로 깜빡 잠이 들고 말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잠시 눈을 감았다 뜬 것 같은데 어느샌가 시야에 들어온 풍경이 바뀌어 있었다. “여긴...” 찰랑거리는 물결과 시원한 바람이 가득하던 거실의 풍경은 어디가고, 어느 틈엔가 고풍스런 형태의 천장이 시야에 가득 들어와 있다. 잠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던 마유나는 온몸으로부터 느껴지는 서늘한 감촉에 화들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어?” 마유나는 자신이 발가벗겨진 채로 침대에 사지가 묶여져 있음을 깨달았다. 당혹스러움도 잠시, 그녀는 결박되어 있는 팔과 다리를 뒤틀며 소리를 질렀다. “누구 없어요! 데를라! 시미르!” 측근 시녀들의 이름을 소리쳐 부르자 문이 열리며 두 명의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한 명은 그녀의 여동생인 라트나. 그리고 또 한 명은, 궁내부원의 복장을 한 채 얼굴에 무언가를 쓰고 있는 생소한 외모의 남자. 마유나는 익숙한 얼굴을 보고 잠시 안도하다가 이내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원래대로라면 라트나가 앞서고 궁내부원이 그 뒤를 따라야 하지만, 지금 그녀의 눈에 들어온 모습은 그 반대였던 것이다. 더구나 라트나의 태도는 마치 자신의 뒤를 따르던 측근 시녀의 그것과도 같은 느낌을 주고 있었다. 마유나는 무언가 일이 잘못 되었음을 깨달았다. “라트나.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하지만 라트나는 대답하지 않았고, 대신 궁내부원이 침대 위에 묶여 있는 마유나에게로 다가왔다. “네 놈은 누구냐! 라트나! 왜 대답을 하지 않는 거죠?” 라트나는 그제서야 입을 열었다. “그렇게 소리 지르셔도 소용없어요. 언니.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테니, 잠시만 입을 다물어 주세요.” “뭐?” 마유나는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가 싶었지만, 이내 남자가 자신의 머리채를 움켜 잡자 비명을 질렀다. “아악! 무, 무엄하다! 어서 이 손 놓지...” 하지만 그녀는 다음 순간 남자의 입술이 이마에 닿자 부르르 몸을 떨며 말을 멈추고 말았다. 쾌락. 그녀의 이마를 타고 흘러내리며 전신의 신경 마디를 불태우는 듯한 감각의 폭발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했던 미증유의 경험이었다. “허윽!” 마유나의 몸은 혼이 날아가 버릴 것만 같은 그 격렬한 감각의 격류를 감당하지 못하고 마치 심장 마사지를 받은 사람처럼 크게 들썩였다. “아아...” 옆에서 지켜 보고 있던 라트나 역시 마유나의 몸으로부터 폭발하듯 터져 나온 매혹의 힘에 휩쓸렸고, 이내 자지러지듯 몸을 떨며 그대로 풀썩 주저앉아 버렸다. 황가의 직계쯤 되면 온 몸에 여러 가지 위협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한 유니크 아이템을 주렁주렁 달고 다니기 마련. 마유나 또한 그것은 마찬가지였으나, 친동생의 안마에 마음이 풀려 잠이 든 틈을 노려 라트나가 그녀를 침대로 옮기고 다시 몸에 걸치고 있던 모든 것들을 벗겨 버린 탓에 이렇게 쉽게 준상이 지닌 매혹의 힘에 정신이 오염되고 만 것이다. “마유나, 너는 누구냐.” 요정의 키스를 마친 준상은 마유나에게 그렇게 물었다. 하지만 그녀는 단숨에 마음을 점령당한 라트나와는 달랐다. “나는... 브리아넬라의 제1황녀이며, 또한 제1황자비인... 마유나...” “...” 머리 속을 녹여버릴 것만 같은 쾌락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한사코 자신의 정체성을 저버리지 않으려 드는 마유나의 모습에 준상은 얼굴을 찌푸렸다. 초차원 기동 요새가 지닌 기능이 신기루 꽃의 그것과 비슷하다면, 예비 권한을 가진 마유나 역시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의 위협이 가해질 경우 긴급 회피가 이루어질 가능성이 있었다. 때문에 그라우엔으로 만들기 보다는 라트나처럼 자신에게 매혹시키려 했던 것이다. 이전 같으면 이렇게 매혹의 힘을 견뎌내는 것 자체만으로도 상당히 곤혹스러겠지만, 지금의 준상은 그런 철벽 같은 의지도 능히 부술만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준상은 손을 뻗어 마유나의 이마를 감싸 쥐었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 속에 애욕의 정령력을 주입했다. “흐으으으윽!” 마유나는 다시 한 번 퍼덕거리며 몸을 격하게 뒤틀었다. 그녀의 몸을 덮고 있던 얇은 시트는 이미 가슴 아래로 밀려 내려간지 오래. 잘 관리되어 뽀얗게 빛을 발하고 있던 부드러운 피부는 달궈진 쇠처럼 붉게 물든 채 송글송글 땀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네가 누구라고?” “나는... 나는...” 마유나는 숨을 헐떡거리면서도 저항을 멈추지 않았지만, 굳건하게 본능을 억누르고 있던 이성은 어느 틈엔가 금이 가며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으으으... 제발... 제발 그만...” 결국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애원하는 마유나의 모습을 차갑게 바라보며 준상은 잠시 그녀의 머리에서 손을 떼었다. “헉... 헉...” 마유나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온몸이 근질 근질거리는 이 느낌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미치도록 무언가를 갈구하는 이 본능은 누구의 것이란 말인가. 몸 속 깊은 곳에서 뜨겁게 용솟음치는 이 미칠듯한 욕망의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마유나는 두려워졌다. 당장 몸속에서 소용돌이치고 있는 이 욕구를 해결하지 못하면 그대로 미쳐버릴 것만 같은 이 상황이 너무나도 두려웠다. 준상은 마유나의 눈빛이 두려움으로 물드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그녀의 이마에 다시 손을 가져다 대었다. 마유나는 다시금 그의 손이 자신의 머리로 다가오는 것을 느끼자 기겁하며 소리를 질렀다. “그, 그러지 말아요! 제... 흐악!” 하지만 준상은 그녀의 말을 무시한 채 가차 없이 애욕의 정령력을 쏟아부었다. 준상조차도 이성을 잃고 이벨라의 몸을 덮쳤던 것을 감안하면 잠시 동안이라도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 마유나는 실로 고결하고 강인한 정신력의 소유자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홍수처럼 범람하는 욕망의 물결을 굳건한 제방처럼 견뎌내던 마유나의 정신력도 이내 한계에 달했다. 처음 시작은 아주 작은 균열이었다. 하지만 그 균열은 이내 주먹만한 구멍으로 번지며 물줄기를 토해내더니, 이내 폭발하듯 제방을 붕괴시켜 버렸다. 한번 그렇게 이성이 무너지자 그 뒤로는 욕망이라는 그물에 뒤덮인 채 퍼덕이는 여인만이 남게 되었다. 준상은 그제서야 마유나의 이마에서 손을 떼고는 그녀의 사지를 묶고 있던 끈을 불태워 없애 버렸다. 그러자 마유나는 허겁지겁 준상의 다리에 매달리며 애원하기 시작한다. “제발... 저 좀 어떻게... 아으...” 완전히 욕망의 노예가 되어 버린 마유나의 모습을 차갑게 바라보던 준상은 가볍게 다리를 털어 그녀를 떼어내고는 침대 맞은 편에 놓여있던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마유나가 얼른 다가와 그의 다리에 매달리며 발정 난 강아지처럼 몸을 비벼댔다. 준상은 그녀를 내버려 둔 채 침대 옆에 주저앉아서 몸을 배배 꼬고 있던 라트나를 불렀다. “라트나.” “네.” 라트나는 준상이 부르자 허겁지겁 그의 옆에 다가와 앉았다. “창조의 씨앗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는 알고 있나?” “물론이죠.” 라트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품에 넣어 두었던 상자를 꺼내 창조의 씨앗을 준상에게 보여주었다.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말했다. “벨 라야의 다크 시드를 운용할 수 있는 아이템이 필요하다. 성좌의 주인이 지닌 힘을 온전하게 사용할 수 있으면서도 황가에게 지배되지 않아야만 한다.” “문제없어요. 저에게 맡겨 주세요.” 라트나는 얼른 상자에서 창조의 씨앗을 꺼내고는 그것을 가공하기 시작했다. 신기루 꽃이 발아할 때처럼 강렬한 힘의 폭발이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삽시간에 라트나의 주위로 여러개의 마법진이 나타났다 사라지는가 싶더니, 무지개 빛으로 반짝이던 창조의 씨앗은 어느 틈엔가 세련된 형태의 반지로 모습을 바꾸고 있었다. “휴... 끝났어요. 이 반지의 홈 안에 벨 라야의 다크 시드를 넣으세요.” 준상은 라트나가 건네는 반지를 건네받자 인벤토리에 보관 중이던 벨 라야의 다크 시드를 꺼내어 홈에 끼웠다. 다크 시드가 끼워지자, 반지는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며 움직여 어둠게 빛나는 다크 시드를 감싸 어둡게 빛나던 광채를 지워버렸다. 준상은 반지를 자신의 손가락에 끼웠다. 그러자 전신에서 검은 빛이 일순 나타났다가 사라지더니 그의 머리 속에 벨 라야가 어떤 힘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것을 어떻게 사용했는지에 대한 정보가 일목 요연하게 나타났다 사라진다. “이게 칠성좌의 힘인가.” 준상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오른손을 펼쳤다. 그러자 티끌 같은 기운이 맺히는가 싶더니 검은 불꽃이 피어나기 시작한다. 이것이야 말로 가장 기초적인 형태의 다크 시드. 인간의 머리에 심으면 권속으로 삼는 것이 가능해지는 욕망의 씨앗이다. 효과는 대상자의 마음 속 깊숙한 곳에 숨겨진 욕망을 현실에 구현하는 것. 그 욕망이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더 강력한 능력이 만들어지는 것이 특징이다. 본래는 황족이나 귀족의 혈통을 지닌 자에게는 이것을 심을 수 없도록 제한이 걸려 있지만, 라트나가 만들어낸 반지는 그런 제한을 무시하도록 만드는 기능 역시 부여되어 있었다. 준상은 손 안에 만들어진 검은 불꽃을 자신의 다리에 매달려 숨을 헐떡이고 있는 마유나의 머리에 가져다 대었다. “아악!” 마유나는 머리를 지져버리는 듯한 통증에 놀라며 비명을 지르다가 이내 멍한 표정으로 준상을 바라보았다. “내가 누구지?” 준상이 묻자, 마유나는 눈동자에 아직까지 풀지 못한 욕망이 번들거리며 뜨거운 숨을 내뱉고는 고개를 조아리며 이렇게 대답했다. “성좌의 주인이시며, 또한 저의 주인이십니다.” 00396 트롤러 ========================================================================= 피로해 보이던 안색은 나른한 기색이 감도는 표정으로 바뀌었고, 투명하지만 창백하게 보이던 피부는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단지 안색과 눈빛, 그리고 표정이 바뀐 것 뿐이었지만 마유나는 방금 전의 그녀와 동일 인물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변모해 있었다. 이것은 좋지 않다. 너무나 급격한 변화를 일으킨 탓에 그녀를 마주한지 얼마 되지 않는 준상조차 위화감을 느낄 정도라면 측근이나 가까운 가족들이 그 변화를 느끼지 못할 이유가 없다. 게다가 그녀는 초차원 기동 요새로 향하는 문을 여는 열쇠. 하지만 그곳에 들어간 시점에서 다크 시드를 보유하고 있음이 발각되면 모처럼 꾸민 일들이 모조리 무용지물이 될 수도 있다. 성급했나. 벨 라야의 힘을 시험해 보기 위해 가장 가까운 곳의 인물에게 무턱대고 다크 시드를 사용한 것은 역시 너무 성급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준상이 그런 생각을 떠올리자 곧바로 머리속에 한 가지 능력이 떠올랐다. 그것은 다크 시드를 주입하는, 일명 욕망의 세례라 불리는 행동을 취소하는 능력이었다. 다크 시드는 그 자체로 막강한 힘. 때문에 그것을 부여함과 동시에 다시 회수하는 능력까지도 성좌의 주인이 지닌 권능의 하나로 취급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행동이 언제나 가능한 것은 아니다. 완전히 고착되어 육체 변이까지 일으키고 난 뒤에는 다크 시드를 해제하는 순간 육신 자체가 붕괴해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준상은 손을 뻗어 마유나의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리고 방금 전에 부여했던 욕망의 세례를 다시금 거둬들였다. “아으으으...” 머리에서 검은 아지랑이 같은 것이 피어올라 준상의 손을 감싸자, 마유나는 몸을 격하게 떨며 신음을 흘렸다. 그리고 머리에서 뿜어져 나오던 검은 연기의 흐름이 끊기자 방금 전까지 전신에 충만했던 기운이 사라지며 깊은 허탈감에 빠져 들었다. “주, 주인님... 어째서...” 마유나는 원망스러워 하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준상에게 대한 호칭을 바꾸지 않았다. 그것은 한번 가해졌던 세례의 영향이 아직까지 그녀의 의식에 깊게 남아 있음을 의미하는 행동이었다. 그녀의 안색은 세례가 가해지기 전보다, 아니 보석궁에 들어서기 전보다도 더욱더 초췌해졌다.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 “아...” 마유나는 작게 흐느끼며 준상의 발치에 몸을 기댔다. 그 모습이 어찌나 애달픈지, 옆에서 지켜보던 라트나조차도 살짝 동요한 기색을 보일 정도였다. 준상은 그녀에게 회복 마법을 사용하고는 명령을 내렸다. “일어나 옷을 입어라.” “네...” 마유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는 벗겨 두었던 옷과 장신구들을 다시 차근차근 몸에 걸쳤고, 라트나는 그녀의 행동을 도왔다. 다시금 모든 옷과 장신구를 챙겨 입자 준상은 다시 말했다. “가주 부부와 제1황자는 어디에 있지?” “모두 기동 요새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들어갈 방법은?” “출입을 위해서는 가주의 허가가 필요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임의로 잠입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흠...” 그 정도 보안 체계는 당연한 일. 준상도 마유나를 손에 넣는 것만으로 잠입이 가능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일반적인 방법이 통하지 않는 상황이라면 어떨까.” 마유나와 라트나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어리석은 저희들로서는...” 준상은 그녀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예를 들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연회장에 손 쓸 길 없는 대화재가 발생하다든가.” “...” 마유나와 라트나는 안색이 창백해졌다. 비록 황가의 주축들은 그다지 참석하지 않았다고는 해도, 칠대 황가를 지탱하는 귀족들은 선조를 따지고 올라가면 모두 한 가문 출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자들이다. 이것은 다시 말하자면, 귀족이라는 신분을 지닌 자들은 두세 다리를 건너면 모두 친척이나 다름없다는 의미가 된다. 방계 황족이나 귀족 쯤 되면 자신의 몸을 보호할 아이템 정도는 가지고 있다. 연회장의 방재 설비를 무력화할 정도의 대화재라면 그런 식의 보호 만으로는 부족할 수도 있고, 그나마도 기대할 수 없는 수행원들은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될 터. 하지만 그 정도의 비상 사태라면 사실상 누군가의 직접적인 공격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니 황실 역시 좌시할 수 없을 것이고, 멀든 가깝든 친인척 관계임을 고려하면 적어도 직계 황족과 그들을 보필하는 수행원들은 기동 요새로 도피할 수밖에 없다. “가능합니다.” 어차피 호랑이 등에 올라탄 상황. 망설일 이유가 없다. “연회장으로 돌아간다.” 준상은 소리를 차단하고 있던 정령의 힘을 거둬들이고는 침실 밖에서 대기중이던 수행원들 속으로 다시 숨어들었다. 마유나와 라트나는 보석궁을 빠져 나와 발레라의 저택으로 돌아간 다음, 옷을 갈아입고 다시 연회장으로 나왔다. 준상은 수행원들과 함께 움직이다가, 그녀들이 단상으로 올라가자 슬그머니 빠져 나와 연회장의 옥상으로 이동했다. 연회장은 각종 방재 설비가 촘촘하게 깔려 있어서 어지간한 능력으로는 커튼에 불을 붙이는 행위조차도 불가능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상적인 사고를 대비하기 위한 수준. 준상의 능력을 막아낼 정도는 아니다. 옥상에는 경비 병력이 빠짐없이 배치되어 있었으나, 준상은 반응할 틈도 주지 않고 빠르게 처치하고는 이벨라를 불러냈다. “여긴...” 이전에 얼음의 정령이 그 몸을 차지한 상태로 역소환되었던 탓인지, 이벨라의 몸에서는 서리 같은 하얀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이번엔 화염이다.” “...” 이벨라는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모습이었지만, 굳은 준상의 표정을 보고는 눈을 감고 양손을 가슴에 모으며 정령력을 받아들일 준비를 했다. 준상은 그녀의 뒤로 돌아가 등에 손을 대고는 화염의 정령력을 뿜어냈다. “흐윽!” 몰아치는 강대한 정령력에 그녀의 몸 안에 깃들어 있던 얼음의 정령은 버틸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그대로 내쫓겨 버렸고, 이벨라는 온 몸에서 후끈한 열기를 뿜어내는가 싶더니 이내 가슴으로부터 새하얗다 못해 투명하게 느껴지는 화염을 뿜어냈다. 화염의 대정령이 지닌 힘 만으로도 강철을 녹이고 바위를 들끓게 할 정도인데, 이벨라의 능력을 통해 그것이 몇 배로 증폭되었으니 아무리 마법이나 그 외의 기술로 방재 설비를 구축했더라도 당해낼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옥상은 금새 뜨거운 불구덩이로 바뀌었고, 천장을 이루고 있던 바위와 금속들은 삽시간에 녹아내렸다. 그렇게 녹아내린 불덩이들이 떨어질 곳은 단 하나. 그 아래 위치한 연회장 뿐이다. “어?” 가장 먼저 그것을 발견한 사람은 연회장 안에서 음악을 연주하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가 천장이 녹아내리며 마치 폭포처럼 불꽃이 떨어져 내리는 모습을 어떤 말로 표현하는 것보다 그 뜨거운 불덩어리들을 뒤집어 쓴 자들의 입에서 비명이 먼저 튀어 나왔다. “으아아아악!” “꺄아악!” 보호 아이템을 가지고 있던 자들로서도 갑자기 용암과도 같은 뜨거운 불덩어리를 뒤집어 쓴 상태로는 무사할 수가 없었다. 은은한 음악 소리가 흘러나오던 연회장은 갑자기 천장으로부터 떨어져 내린 불덩이로 인해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것이야 말로 아비규환. “아악!” “살려줘!” 방금 전까지 옆에 서서 대화를 나누던 지인과 친족들이 불덩이를 뒤집어 쓴 채 비명을 지르자 이런 일에 면역이 없는 귀족들은 그대로 패닉상태에 빠져 버렸다. 준상은 천장의 구조물들이 불덩이가 되어 떨어지고 그로 인해 연회장이 불지옥으로 변하자 수고했다는 말과 함께 이벨라를 역소환하고는 몸을 숨긴 채 급히 아래로 내려갔다. 갑작스런 화재가 일어나자 발레라를 포함한 직계 황족들은 급히 수행원들 속에 파묻혀 연회장을 빠져 나갔다. “이게 도대체...” 제4황자 내외는 흥겹던 연회자리가 갑자기 아비규환의 구렁텅이로 떨어져 버리자 안색이 창백해진 채 어쩔 줄을 몰랐다. 안전한 구중심처에서 고이 자랐던 그들로서는 사람들이 살아남기 위해 악다구니치며 터뜨리는 그 강렬한 감정의 소용돌이만으로도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였다. 그 모습을 보며 발레라가 말했다. “가만히 있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이야.” 그것은 다분히 추측성의 발언이었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제4황자 내외는 물론이고 황족들을 보호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던 수행원들조차 한 가지 가능성을 바로 머리 속에 떠올렸다. “타랄라의 짓이란 말입니까?” 제4황자가 분노한 표정으로 그렇게 소리치자 마유나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이곳은 대대로 황자들이 머물던 곳. 방재 설비 만큼은 본가에 비견될 정도로 충분히 갖추어져 있어요. 게다가 방금 전의 화재는 천장을 단숨에 녹여 버릴 정도의 위력을 가지고 있었죠.” “그런...” 타랄라의 행위라는 언급은 전혀 없었다. 그저 이것이 사고나 과실이 아닌 인위적인 방화임을 설명했을 뿐. 그러나 마유나의 말은 그것을 들은 모든 이들의 머리 속에서 이것이 살아남은 발레라와 라트나를 죽여 입을 막기 위한 타랄라의 공작이라는 증거로 가공되어 버렸다. 일단 그렇게 머리 속에서 기정사실이 되자, 방금 전까지 그들을 잠식했던 공포와 두려움은 이내 타랄라에 대한 분노로 전이되었다. “어쩌죠?” 불안 가득한 라트나의 말에 제4황자는 마유나를 향해 다급한 어조로 말했다. “기동 요새로 가야합니다.” “기동 요새요?” “이곳이 공격당할 정도라면 다른 곳도 안심할 수는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마유나는 그 말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하지만 먼저 허락을 받아야만 해요.” “그야 물론이죠.” 경비병들의 두터운 호위를 받으며 별궁으로 이동하기가 무섭게, 마유나는 수행원으로부터 건네받은 통신 기기로 기동 요새에 있는 제1황자 바스톨라에게 우선 연락을 취했다. “마유나, 그렇지 않아도 연락하려던 참이었소.” “그럼 이쪽 상황에 대해서도 들으셨겠군요.” “그렇소. 다른 이들은 무사하오?” “저희들은 무사해요. 하지만 연회장에 있던 다른 귀족들은 어떨지...” “어떤 놈이 감히...” 마유나의 반려이기도 한 바스톨라는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그래서 말인데요. 아무래도 이 애들을 이곳에 그대로 두는 건 위험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음...” 바스톨라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렇게 대답했다. “알았소. 아버님께는 내가 말씀드릴테니, 일단 요새로 오시오.” “고마워요.” “당연한 일이오.” 마유나는 바스톨라에게 허락을 받자 동생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수행원들을 모두 데리고 갈 수는 없어요.” 제4황자가 되물었다. “첩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러자 마유나 대신 발레라가 대답했다.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으니까.” “음...” 제4황자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꼭 필요한 인원만 데리고 가는 걸로 하죠.” “미안해요.” “그런 말씀 마십시오. 누님의 잘못이 아니지 않습니까.” “...” 마유나는 씁쓸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어느 틈엔가 돌아와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는 준상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준상은 라트나의 시종으로 선발되어 마유나가 연 게이트를 통해 기동 요새 안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00397 트롤러 ========================================================================= 초차원 기동 요새 나스툼. 칠대 황가의 일원인 브리아넬라 가문의 상징이자, 그들이 지닌 가장 강력한 힘이다. 차원의 틈에 주류한 채 실차원에서의 운행을 염두에 두지 않고 만들어진 칠성좌의 차원 요새나 관리국의 기지와는 다르게, 나스툼은 처음부터 실제 우주 공간에서의 운항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탓에 이들과는 상이한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이것은 우주나 대기권에서의 운항에 알맞은 형태를 지니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전면에서 바라보면 원형으로 활짝 펼쳐진 날개가 은백색으로 반짝인다. 하지만 옆에서 보면 이 날개의 형상은 어디까지나 장식에 불과하고 요새의 실제 구획이 되는 몸체는 곤충의 그것처럼 머리와 몸통, 그리고 꼬리의 세 가지 구획으로 나뉘어져 서 있는 상태가 된다. 요새의 몸통 부분만으로도 차원 요새나 관리국의 기지보다 몇 배는 더 큰 규모를 자랑하지만, 펼쳐진 날개의 부분까지 합치면 지상에서도 위성 궤도에 떠 있는 요새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을 정도가 된다. 혹자는 요새 자체의 크기보다도 월등하게 큰 거대한 날개의 형상을 보고 비효율의 극치라고 평하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솔라 세일이나 태양광 전지의 역할도 겸하고 있기 때문에 무조건 폄하할 일만은 아니다. 하지만 준상에게는 그런 나스툼의 장대한 외양 같은 건 처음부터 신경을 쓸 여지가 거의 없었다. 차원순양함이나 셔틀 같은 것을 통해 들어선 것이 아니라, 게이트를 통해 내부로 직접 이동하다보니 그저 방에서 방으로 넘어간 정도의 느낌 밖에는 들지 않는다. 게이트를 넘어서자 줄지어 늘어선 경비병들이 브리아넬라의 직계 황족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게이트 안으로 들어서자 준상은 탈력감이 느꼈다. 이것은 시드 무력화 장치의 영향권 안에 들어섰다는 증거. 곧이어 황족들을 제외한 수행원들은 곧바로 경비병들에게 몸수색을 받았다. 만약을 대비해 아이템들을 벗어놓기는 했어도 머리 속에 시드가 박혀 있는 준상으로서는 이 과정이 매우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준상은 정령의 파동으로 머리 속의 시드를 단단히 감싼 채 공항의 검색기와 비슷한 기계를 지나쳤다. 처음에는 아무 이상이 없는 듯 싶었지만, 경비병 하나가 준상에게로 다가오며 말했다. “잠시 얼굴에 쓰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겠습니까?” “...” 준상은 쓰고 있던 고글을 벗어 그에게 건네주었다. 경비병은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준상과 눈이 마주치자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고글을 벗어 맨 얼굴이 드러나자 요정의 키스로 인해 생긴 부작용이 발동한 것이다. “어...” 눈이 마주친 순간 자기도 모르게 호흡이 가빠지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기묘한 체험을 하게 되자 경비병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은 채 넋을 잃고 준상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옆에서 무기를 든 채 대기하고 있던 시종과 시녀들 역시 멍한 표정으로 준상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준상은 자신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이렇게 물었다. “확인은?” “예? 아... 그게...” 경비병은 당황해 하면서 확인하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얼른 돌려주었고, 준상은 고글을 건네받기가 무섭게 바로 착용해 다시 얼굴을 가렸다. 그리고는 아쉬워하는 기색이 역력한 경비병을 무시한 채 라트나에게로 다가갔다. 수행원들에 대한 검문검색이 끝나자 먼저 마유나와 발레라가 이번에 일어난 일에 대한 보고를 위해 상층부로 발걸음을 옮겼고, 나머지 인원들은 각자의 숙소로 이동했다. 준상은 라트나를 따라 그녀의 숙소 근처에 마련된 수행원 대기실에 들어섰으나 곧바로 라트나로부터 쉬어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졌다. 자신에게 배정된 숙소로 안내된 준상은 침대에 몸을 눕힌 채 정령의 문을 통해 리체스를 불러냈다. 리체스는 준상의 가슴으로부터 곧바로 모습을 드러냈다. “여긴...” “적의 심장부다.” “...” “그건 가지고 왔겠지?” “네.” 리체스는 준상에게 벨 라야의 다크 시드가 장착된 반지를 건네주며 말했다. “너무 위험하지 않겠어요?” “지금이 아니면 영영 들어와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는 리체스의 모습을 모른 척 외면한 채 준상은 다른 말을 꺼냈다. “다른 이들은?” “대기 중이에요.”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밖의 인기척을 느끼고는 리체스에게 말했다. “일단 돌아가 있도록 해.” “네.” 리체스가 정령의 문을 통해 사라지자 준상은 몸을 일으켜 문으로 다가섰다. 잠시 주의를 기울이던 준상은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자 왈칵 문을 열었다. “앗!” 문 밖에는 작은 상자를 두 손에 받쳐 든 여성 두 명이 서 있었다. 정갈한 흰 제복을 입은 그녀들은 갑작스럽게 문을 열리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노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준상의 물음에 그녀들은 얼른 정신을 차리고는 이렇게 대답했다. “저희들은 의무부 소속 시녀들입니다. 다치신 곳이 없으신지 확인하라는 명을 받고 이렇게 찾아 뵙게 되었습니다.” “그렇군. 들어오도록.” “감사합니다.” 두 명의 의무 시녀들은 방 안으로 들어와 탁자에 상자를 내려놓고는 몇 가지 장비를 꺼냈다. “잠시 확인을 하겠...” 시녀 가운데 하나가 스캐너 비슷한 것을 들고 그렇게 말하다가 고글을 벗는 준상의 모습을 보고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상자에서 몇 가지 물품을 꺼내 탁자 위에 늘어놓던 시녀 역시 무슨 일인가 하고 고개를 들었다가 준상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작은 탄성을 터뜨렸다. 준상은 천천히 그녀들에게 다가간 다음 손을 뻗어 앞선 시녀의 뺨을 가만히 어루만졌다. “아...” 녹아내린다는 것이 이런 의미였나. 시녀는 강렬한 준상의 시선에 그대로 사로잡혀 버리고 말았다. 거미줄에 붙잡힌 나비처럼 가늘게 몸을 떠는 그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던 준상은 시녀의 손을 잡아 올려 그곳에 가만히 입을 맞추었다. “허윽!” “하읏!” 그러자 두 명의 시녀는 자지러지는 듯한 신음 소리를 흘리며 그대로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하지만 준상의 공격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곧바로 애욕의 정령력이 몸 안으로 밀려 들자, 그녀들은 애태우듯 가슴 속이 간질거리는 느낌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져 숨을 헐떡거리기 시작했다. 준상은 반쯤 넋이 나간 시녀의 턱을 손으로 잡아 올리며 물었다. “확인하고자 하는 내용은?” “신체적 이상 유무입니다.” 매혹의 힘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 시녀는 마치 꿈결 속을 헤매는 듯한 표정으로 자신이 아는 바를 술술 털어 놓았다. “구체적으로?” “질병이나 감염, 그 외 유해 물질에 의한 오염 등입니다.” “다크 시드는?” “기지 내에 감지기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정확한 위치는 모르나?” “잘은 모르겠지만, 각 계층으로 통하는 문이나 출입 제한 구역으로 통하는 입구 등에 있는 걸로 압니다.” “이곳 내부의 대략적인 구조를 설명하도록.” “우선 이곳은 기동 요새의 하층부에 속합니다...” 준상은 두 시녀를 심문해 그녀들이 알고 있는 정보를 뽑아내고는 그녀들의 몸 안에 다크 시드를 주입했다. 애욕이라는 이름의 욕망을 갈구하며 널브러져 있던 시녀들은 다크 시드에 의해 준상의 권속으로 변모하고 말았다. 뜨거운 숨을 내뱉으며 자신을 유혹하듯 바라보는 두명의 시녀들에게 준상은 명령을 내렸다. “시종이나 시녀들의 숙소는 한 곳에 모여있나?” “물론입니다.” “잘됐군. 그곳으로 나를 안내하라.” “네.” 준상은 그녀들을 앞세운 채 시종들과 시녀의 숙소가 몰려 있는 구획으로 이동했다. “실례합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문을 열어보던 젊은 시종은 미소를 짓고 있는 두 시녀의 모습에 화들짝 놀랐다. 그녀들의 외모는 평범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살짝 눈웃음을 치는 그 시선은 요녀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색기라 철철 넘쳐 흐르고 있었다. 꿀꺽. 자신도 모르게 마른 침을 꿀꺽 삼킨 시종은 그녀들의 옆에 서 있는 준상에게는 눈도 주지 않은 채 멍한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일이신지?” “저희들은 의무부 소속 시녀들입니다. 간단한 신체검사를 하고자 하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들어오시죠.” 시종은 그녀들의 옆에 서있는 남자의 모습을 보고는 그럼 그렇지 하며 조금 실망스러워 하는 기색을 보였으나, 이내 모르는 척 그들을 자신의 방 안으로 맞이했다. 하지만 이게 어쩐 일인가. 상자를 내려놓은 시녀들은 시종을 침대에 앉히더니 나긋나긋하고 은밀한 손길로 그의 몸을 어루만지기 시작한다. “저, 저기요?” 당황한 시종이 그렇게 말을 건넸지만, 시녀들은 색기가 뚝뚝 흐르는 눈길로 그를 바라보며 속삭였다. “쉿. 가만히 계세요.” “아, 예...” 시종의 머리 속에서는 이내 온갖 발칙한 상상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 역시 한창 나이의 젊은이. 이런 미녀들의 손길이 싫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눈을 감아 보세요.” “...” 시종은 눈을 감았다. 그러자 촉촉한 입술이 자신의 입술에 덮여지는 것이 느껴졌다. “으음...” 그 달콤한 느낌이라니. 반쯤 넋이 나간 채로 그 입술의 감촉을 느끼고 있는데, 갑자기 우악스런 손길이 그의 머리를 움켜잡았다. 당황해서 눈을 뜨자 두 개의 손이 그의 귀와 턱이 연결된 지점을 꽉 움켜 잡으며 그의 머리를 고정시켰다. “읍!” 여자의 손아귀 힘이라고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그 강력한 힘에 당황한 시종은 당황해 하며 몸부림을 쳤지만, 그의 머리를 움켜쥔 시녀의 손은 족쇄처럼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것일까. 하지만 그의 생각은 이내 머리 속으로 밀려들어오는 어떤 힘에 의해 그대로 조각나며 단절되어 버리고 말았다. 머리를 움켜 잡은 준상에게서 정령의 힘이 밀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이 젊은 시종에게 주입되는 힘은 두 시녀들에게 주입된 것과는 다른 종류였다. 그 이름은 바로 광기의 정령. 살육의 욕망에 미친 정령의 힘이 시종의 이성과 의식을 순식간에 갉아 먹었다. 그리고 이성이 완전히 날아갈 즈음, 그의 머리 속에는 다크 시드라는 욕망의 씨앗이 스며들었다. 다크 시드는 충만한 살육의 욕망을 먹어치우며 급속도로 형체를 갖춰 나갔으며, 마침내 입술을 맞대고 있던 시녀가 만족한 표정으로 얼굴을 떼자 그곳에는 방금 전까지 순진한 기색마저 엿보이던 젊은 시종이 아닌 살육의 본능에 눈뜬 악귀가 도사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 자는 하를라간에서 만났던 불사의 괴물과는 다르다. 단순히 욕망을 주체하지 못해 미쳐 날뛰는 다른 괴물과는 달리, 지금 눈앞에서 눈빛을 번뜩이고 있는 이 자는 다크 시드라는 이물을 통해 그 욕망을 제어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주인님을 뵙습니다.” 가장 중요한 점은 벨 라야의 다크 시드를 다루는 준상에게 완전히 복종하는 존재란 점. 이들은 암세포다. 초차원 기동 요새 나스툼이라는 거대한 적의 내부에 자라나기 시작한 독극물과도 같은 존재들. 그리고 모든 암이 다 그러하듯이, 그 수가 늘어날수록 더 강력한 파괴력을 발휘할 것이다. “별도의 지시가 내려올 때까지 본색을 숨긴 채 대기하도록.” “그것이 주인의 뜻이라면.” 시종에게 간단한 지시를 내린 준상은 의무 시녀들을 앞세운 채 다음 방의 문을 두드렸다. “실례합니다.” 의무 시녀들의 눈웃음에 홀린 시종들은 자신들의 눈앞에서 미소 짓고 있는 여성들이 잔혹한 암사마귀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채 문을 열어 그녀들을 맞이했다. 00398 트롤러 ========================================================================= 자신들이 지닌 권력의 심장부에 시커먼 암세포들이 하나 둘씩 늘어가고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채, 칠대 황가의 하나인 브리아넬라의 황족들은 직계 황족이 머무는 저택의 연회장이 고의적인 방화에 의해 소실되고 연회에 참석했던 귀족과 수행원들이 죽고 다치는 초유의 사태에 분노를 금치 못하고 있었다. “이것은 절대로 방관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브리아넬라의 이름을 걸고서라도 반드시 원흉을 밝혀내 뿌리를 뽑아내야만 할 것입니다!” “옳습니다! 브리아넬라가 어떤 가문입니까!” 황가를 이루는 영역은 너무나 광대해서 그 모든 영역에 거주하는 황족들이 한 곳에 모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보니, 지금과 같은 비상시국에는 얼굴을 직접 마주하기 보다는 화상을 통한 회의가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제1황자이며 브리아넬라 가문의 차기 가주인 바스톨라는 눈앞에서 이어지는 광경들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현재 회의에 참석한 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이번 연회에서 죽고 다친 귀족들과 친인척 관계이다 보니 평상시의 다소 냉정하다 싶은 회의 분위기와는 다르게 과열되는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발레라와 라트나가 생사 불명이었다가 돌아와서 같은 칠대 황가에 속한 타랄라와 그 휘하인 벨 페오르에 대한 증언을 했을 당시에는 그 파급 효과를 고려한 탓인지 신중론이 우세했지만, 지금은 신중론 자체를 피력하는 것 자체가 금기시 되는 분위기마저 나타나고 있다. 바스톨라로서는 가급적 선대의 다른 가주들이 그러했듯이 브리아넬라라는 가문을 별다른 상처없이 온전하게 계승하는 것이 가장 좋았지만, 자신의 반려이자 누이인 마유나마저 위협에 처한 지금의 상황에서 미온적인 대응을 보이면 자칫 나약한 군주로 인식될 가능성마저 있었다. 곤란하다. 이대로라면 타랄라와의 전쟁도 불사할 듯한 분위기. 아직 이번 사건의 배후가 타랄라라고 확정된 것조차 아님에도 불구하고 여론은 급격하게 주전론 쪽으로 기울어 가고 있었다. 브리아넬라의 명예를 위해서도 그냥 참고 넘길 수는 없는 분위기이긴 하지만, 작은 반란 세력도 아니고 같은 칠대 황가가 상대라면 그 피해가 얼마나 될지는 감히 짐작도 되지 않을 정도다. 그러고 보면 평화가 길긴 길었다. 칠대 황가 성립 초기는 물론이고 칠성좌의 성립 이후로도 한동안은 그늘 속에서 암투가 제법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하지만 그런 것도 오래전의 이야기. 칠성좌에 의한 대리전이 사라진 것이 언제적의 일인지조차 바스톨라로서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렇게 오랫동안 평화를 누리다가 이제 와서 전쟁을 벌이고자 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게다가, 브리아넬라가 타랄라와 싸우려 한다면 나머지 황가들은 과연 그것을 가만히 두고 볼 것인가. 합종연횡이 이루어질 것은 보지 않아도 분명한 일이고, 실제로 브리아넬라와 타랄라 사이에 일어난 불온한 기운을 느낀 다른 황가에서 은밀하게 접촉을 걸어오는 일도 점차로 늘어나고 있었다. 바스톨라는 회의를 잠시 지켜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대로라면 밤을 새우고 말테니, 다른 용무를 먼저 해결하는 편이 낫다 싶었기 때문이다. 집무실로 돌아가 자리에 앉자 보좌관들이 들어와 정중한 태도로 하나의 목록을 전달했다. “이게 전부인가?” “그렇습니다.” 바스톨라는 보좌관들을 내보내고는 목록을 살폈다. 그 안에는 성좌의 주인으로 추천된 자들의 신상 명세가 담겨 있었다. 성좌의 주인은 창조의 씨앗을 통해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이다. 그들이 지닌 궁극기는 혼자의 힘만으로 능히 요새 하나를 박살낼 수 있으며, 또한 지치지 않는 수많은 병사들을 빠른 시간 내에 만들어낼 수도 있다. 전쟁이 임박한 지금의 상황이라면 성좌의 주인을 이대로 공석으로 비워두는 것은 결코 현명하지 못한 일이다. “쯧...” 하지만 바스톨라는 각 가문에서 추천한 자들의 면면을 확인하고는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 오랜 만에 교체되는 자리여서 일까. 방계 황족들을 비롯한 각 가문에서 저마다 자기 가문과 가까운 사람들을 밀어 올리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음을 목록의 순서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정말 곤란하군.” 정보에 따르면 벨 페오르는 자신의 차원 요새에서 정상적으로 업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었다. 게다가 타랄라 가문은 브리아넬라 가문이 보낸 벨 페오르에 대한 참고인 출석 요구를 당치도 않은 모략이라고 비판하며 반려한 상황. 그들은 벨 라야의 차원 요새가 붕괴할 당시 벨 페오르의 행적에 관한 자료를 브리아넬라 가문에 보내왔지만, 그럴 마음만 있다면 이 정도의 증거를 위조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무도 그 증거를 믿으려 하는 자가 없었다. 발레라와 라트나의 증언보다 타랄라 가문이 제시한 증거를 우선할 자들은 적어도 현재로서는 가문 내에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나마 현재 상황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부분이라면 이 정도가 고작이다. 바스톨라가 서류를 살피며 어떤 자를 성좌의 주인으로 선택하는 것이 옳은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때, 문이 열리며 보좌관이 다가와 이렇게 고했다. “황자비께서 뵙기를 청하고 계십니다.” “마유나가? 어서 들이도록.” 바스톨라는 서류를 일단 덮어두고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반려이며 누이인 마유나를 맞이했다. 평소에도 초췌한 기색이 역력한 그녀였지만, 큰 일을 겪은 탓인지 오늘은 더욱더 안색이 좋지 않다. “마유나.” “황자님.” 바스톨라는 팔을 뻗어 자신의 반려를 품에 안았다. “다친 곳은 없소?” “네. 다행히도.” “다른 아이들은?” “모두 안전하게 돌아와 각자 휴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만하길 천만 다행이오. 자, 이리로.” “감사합니다.” 바스톨라가 눈짓을 보내자 보좌관들은 조용히 물러나 밖으로 나갔고, 널찍한 집무실 안에 둘만이 남게 되자 바스톨라는 마유나의 목을 감싸 안으며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키스가 끝나자 바스톨라는 마유나의 손을 맞잡은 채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말해 보시오.” “네.” 마유나는 조심스럽게 연회장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갑자기 천장이 녹아내리며 불덩이가 귀족과 그 수행원들을 덮친 일을 창백한 안색으로 설명하는 마유나의 모습에 바스톨라는 입술을 깨물며 분노를 금치 못했다. 각종 마법과 방재 설비로 보호되는 천장이 그런 식으로 녹아내릴 정도의 위력이라면 역시 단순한 화재로는 생각하기 힘들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브리아넬라의 직계 황족을 노리다니. 이것은 절대로 간과하고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고생했소. 당분간은 아무 생각 말고 편히 쉬도록 하시오.” “네. 오라버니.”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황자라고 자신을 호칭하는 그녀지만 이렇게 단 둘이 있을 때는 어릴 적에 그랬던 것처럼 오라버니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다. 바스톨라는 마유나가 수척한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을 바라보다가 그녀가 밖으로 나가자 보좌관들을 불러들여 물었다. “아직 범인이 누군지는 확인되지 않은 건가?” “그렇습니다. 범행 직전에 옥상을 지키던 자들이 누군가에 의해 살해된 흔적이 발견된 것을 제외하면 당시 연회장 주위에 있던 시종이나 경비병들 가운데 누구도 범행의 전조를 눈치 챈 자들이 없습니다.” “사망 원인은?” “소사입니다.” 바스톨라는 얼굴을 찌푸렸다. “타 죽었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화재로 인해 사체가 훼손된 것이 아닌가 하고 정밀 분석을 실행해 보았습니다만, 확인 결과 소사가 확실한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흠...” 연회장의 천장을 녹인 불길과 타 죽은 경비병들.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하기엔 너무나 공교롭다. “그렇다면...” “가능성은 크게 두 가지. 속성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린 다크 시드 보유자이거나, 그 정도의 화력을 낼 수 있는 어떤 장비가 동원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이런 추측도 확신하기는 여러 가지로 곤란한 점이 있다. 우선 다크 시드를 사용해 속성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리더라도 연회장을 보호하고 있던 마법이나 방재 설비를 파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정도의 능력을 지니고 있는 자라면, 황가에 속한 정보국에서도 어느 정도의 움직임은 이미 파악하고 있을 터. 평시라면 몰라도 발레라와 라트나의 실종과 귀환으로 인해 경계 상태가 한껏 강화한 상태라면 그 감시망을 빠져 나가 이런 큼직한 범행을 저지르는 건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장비를 동원하는 것도 어렵기는 마찬가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건은 벌어졌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무언가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다는 생각 밖에는 들지 않는다. “사건 직후 행적이 불분명한 자는?” “현재로선 없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것 참.” 뭔가가 있다. 자신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무언가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늘 속에 숨은 범인의 윤곽은 좀처럼 드러나지 않았다. “다른 정보가 들어오는 대로 바로 보고하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보좌관과의 대화를 마친 바스톨라는 덮어 두었던 목록을 다시 펼쳤다. 바스톨라는 일단 후보를 세 명 정도로 압축한 다음 그들의 정보만을 따로 빼내어 새로 서류를 꾸리고는 그것을 들고 요새 최상층으로 향했다. 전용의 승강 장치를 이용해 최상층으로 향한 바스톨라는 가주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우주를 지배하는 가문의 수장이 머무는 곳이라고 보기에는 다소 소박하다고 느껴지는 작은 방에 도달한 바스톨라는 작은 탁자를 마주한 채 무언가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자신의 아버지와 마주했다. 그의 이름은 발루르. 정식 명칭은 훨씬 길고 복잡하지만, 그 긴 이름은 물론이거니와 통칭으로 쓰이는 첫 번째 이름인 발루르조차 현재로서는 호칭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지금 그를 일컫는 말은 오직 하나. 브리아넬라 가문의 가주, 그 하나 뿐이다. “무슨 일이냐.” 바스톨라는 얼른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성좌의 자리에 어떤 자가 어울릴지 여쭈고자 왔습니다.” 자신의 아버지이기는 하지만, 그 이전에 군신 관계이기도 하기에 바스톨라는 엄격하게 예의를 다했다. 가주가 되기 전의 아버지는 항상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는 다정한 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지금도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따뜻하기는 매한가지지만, 바스톨라는 가끔 부친의 시선이 자신을 송곳으로 찌르듯 후벼 파는 감각을 느낄 때가 있었다. 어릴 적에는 그런 부친의 변모에 크게 놀라 두려워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브리아넬라라는 가문을 이끄는 가주라면 그 정도는 당연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다. 바스톨라가 내민 서류는 그대로 허공을 둥실 떠올라 전달되었고, 그것을 펼쳐 대충 살펴 보던 가주는 안에 담긴 서류 가운데 한 장을 꺼내 바스톨라에게 다시 넘겨주었다. “그 자로 하라.” “알겠습니다.” “그 외의 다른 일은?” 바스톨라는 다시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이미 아시리라 사료됩니다만, 여론이 전쟁 쪽으로 기울고 있습니다.” “전쟁이라...” 가주는 잠시 손을 멈추고 허공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네 생각은 어떤가.” 바스톨라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먼저 상대의 의도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됩니다.” “의도라...” “그리고... 타랄라가 아닌 제3자의 모략일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발레라의 증언을 신용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그것이 아니라, 발레라가 보았던 광경 자체가 다른 자의 모략으로 꾸며진 위장일 가능성도 있지 않나 싶습니다.” “하긴.” 가주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말했다. “브리아넬라의 위엄이 손상된 것은 반드시 응징되어야 할 일이지만, 다른 누군가의 손에 놀아나 비웃음거리가 되는 일은 더욱 피해야 할 일. 신중하게 판단하여 일을 그르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라.” “명하신 바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바스톨라는 그대로 고개를 조아리고는 가주전에서 나왔다. 전용의 승강기를 타고 내려온 그는 보좌관에서 선택된 후보의 서류를 건네고는 잠시 휴식을 취할 겸 마유나와 자신이 머무르고 있는 거처로 향했다. 수행원들을 거느리고 거처로 향하던 바스톨라는 문득 경비병들의 숙소를 빠져 나오는 세 남녀의 모습을 보았다. 처음에는 무심결에 지나치려던 그였지만, 그들 가운데 남자가 끼고 있는 고글이 어쩐지 눈에 밟혔다. 분명히 어디선가 보았는데.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는 이내 그 고글이 벨 라야 휘하의 감시자가 사용하던 것임을 떠올렸다. “저 자를 데리고 오라.” “네.” 수행원들은 곧바로 시녀들과 함께 움직이고 있던 남자를 바스톨라에게 데리고 왔다. “이름은?” “안트람입니다.” 준상의 대답에 수행원은 명부를 뒤져 그 정보를 바스톨라에게 전했다. “제2황녀님의 수행원입니다.” “...” 바스톨라는 준상이 끼고 있던 고글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것을 이리 가져 오도록.” “...” 준상이 고글을 벗자 수행원들은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갖가지 아이템으로 무장한 바스톨라는 준상의 얼굴에 현혹되지 않은 채 더욱더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것은 감시자의 고글. 네 놈은 벨 라야의 수하였나? 그런 자가 어째서 라트나의 측근 행세를 하고 있는 거지?” “...” “네놈... 정체가 뭐냐?” 바스톨라의 말에 준상은 가볍게 혀를 찼다. “쯧... 아쉽지만 어쩔 수 없군.” “뭐?” 준상의 태도에서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낀 바스톨라는 경비병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이 자를 포박하라.” “네.” 그 말을 들은 경비병 몇몇이 대답과 동시에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몇 걸음 움직이기도 전에 짧은 신음소리와 함께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그들을 공격한 것은 다름 아닌 같은 경비병들. 그리고, 아차 하는 사이에 경비병의 반수와 보좌관 전부가 비명조차 터뜨리지 못한 채 피를 뿜으며 바닥에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 “이, 이게... 무슨...” 바스톨라는 갑자기 확 피어오르는 피냄새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00399 트롤러 ========================================================================= 준상은 당황한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하는 바스톨라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직 이르다. 적당한 곳에 가둬두도록.” “뭐라?” 바스톨라는 준상의 말을 듣고 소리를 지르려 했지만, 곧바로 등 뒤에서 우악스런 손길이 그의 입을 막고 손을 결박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시종과 시녀들이 빠르게 손을 놀려 그가 몸에 걸치고 있던 물품들을 벗겨 내고는 세탁물을 담는 수레를 가져와 그를 실었다. 바스톨라는 순간 머리 속에서 한 가지 단어를 떠올렸다. 그것은 바로 반란. 하지만 그로서는 고글을 쓰고 있던 사내가 누구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칠대 황가의 하나인 브리아넬라 가문의 중심부에 들어와 그 안에 기거하는 자들을 소리 소문 없이 포섭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강력한 배경을 가지고 있어야 할까. 바스톨라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지금의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반쯤은 어리둥절한 상태로 혼란에 빠져 있는 동안 준상의 명을 받은 경비병과 시종들을 그를 숙소로 데리고 가 벌거숭이 상태로 손발을 묶고 감금해 버렸다. 뒤늦게서야 소리를 치고 발악을 해보았지만, 그와 오랜 시간을 지낸 가까운 시종과 시녀들조차 그런 행동에 일말의 동정조차 보이지 않았다. 아니, 동정을 보이기는커녕 뭔가 기이한 욕망이 들끓는 시선으로 그를 내려다 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기를 얼마나 했을까. 문득 바스톨라의 숙소의 문이 열리며 한 명의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마유나. 바로 그의 반려이자 누이였다. 처음보다는 나아졌지만, 여전히 피로한 표정을 한 자신의 반려가 눈에 들어오자 바스톨라는 다시 당황했다. 벌거 벗고 있는 자신의 모습은 상관없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불측한 무리들이 자신의 반려마저 해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뿐이었다. 그는 입에 재갈이 물린 상황에서도 발악하며 어떻게든 그녀에게 지금의 상황을 알려 도망치도록 만들고자 했지만, 정작 그 모습을 지켜보는 시종들은 물론이거니와 안으로 들어온 마유나도 별다른 감흥 없이 그런 바스톨라의 모습을 바라만 볼 뿐이었다. 너무나 괴리감 가득한 그 모습과 조우하고 나서야 바스톨라는 한 가지 가능성을 깨달았다. 만약 마유나가 이 모든 상황의 발단이라면. 그녀가 반란의 주축이라면? 그와 같은 추측이 머리 속에 떠오르자 바스톨라는 등골이 차갑게 식어 가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어째서? 마유나는 성격이 온화하고 마음이 착하면서도 자신의 작은 허물 정도는 기꺼이 눈 감아 줄 수 있는 좋은 아내의 본보기와도 같은 여자였다. 인간을 사용해 창조의 씨앗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한동안 그런 식으로 만들어진 물품들로 몸을 치장하는 일을 완강히 거부했을 정도다. 그런 그녀가 어째서 반란 같은 터무니없는 짓을 저지른단 말인가.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 자신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스톨라가 어떤 생각을 떠올리며 현실을 부정하든 간에 마유나는 권태로운 표정마저 지은 채로 그를 무시한 채 침대에 털썩 앉아 작은 탄식을 흘렸다. “후우...” 저 탄식의 의미는 무엇일까. 바스톨라는 다시금 발버둥을 치며 소리를 질렀지만, 그의 입에 단단하게 물려 있는 재갈은 그 음성을 의미가 있는 말로 바꾸는 것을 완강하게 거부했다. 하지만 마유나는 이번에도 돌아보지 않았고, 그에게 반응한 것은 오직 뒤에 서 있던 시종의 우악스런 손길 뿐이었다. “조용히.” 시종은 그렇게 짧은 말을 던지며 바스톨라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흔들었다. “큭!” 머리 가죽이 벗겨지는 듯한 그 고통에 바스톨라는 몸부림치며 비명을 질렀지만, 그럴 때마다 생명에 지장이 없으면서도 극심한 고통이 가해지는 부위에 교묘하게 타격이 이어졌고, 결국 바스톨라는 저항을 포기한 채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자신에게 이상이 생겼음을 다른 이들에게 알려야만 한다. 하지만 누구에게 알린단 말인가. 평생을 함께 하기로 언약했던 반려마저 등을 돌린 상황에서 자신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존재가 또 누가 있을지 떠올려 보았으나, 돌아온 것은 텅 빈 공허 뿐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새삼스레 자신이 진정으로 신뢰할 만한 대상이 없음을 떠올리고 나자 이번에는 끝없는 의심이 그의 머리 속에 솟구쳐 올랐다. 바스톨라는 소거법을 적용해 반란의 중심이 될 만한 인물이 누가 있는지 떠올려 보았다. 결과를 도출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발레라. 자신의 동생이며 제2황자인 그의 이름이 바로 떠오른 것이다. 생각해보면 벨 라야의 차원 요새가 붕괴한 일과, 이번에 일어난 연회장의 방화 사건 모두 그와 관련이 되어 있었다. 발레라와 라트나는 이 일이 벨 페오르나 그 배후의 타랄라 가문에서 꾸민 일이라 증언하고 있었지만, 그 외의 증거는 달리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고 있었다. 처음부터 이 모든 일들이 발레라의 자작극이라면? 바스톨라는 다시금 등골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한번 의심이 시작되자 다른 일들에 대해서도 의구심이 생겨났다. 만약 차원 요새의 붕괴가 발레라의 자작극이라면, 벨 라야는 어떻게 된 것일까. 성좌의 주인은 황실 직계에 대해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도록 정해져 있다. 이것은 그들의 머리 속에 심어진 다크 시드에 처음부터 그렇게 각인이 되어 있는 일이다. 하지만 황실 직계간의 다툼이 일어난다면 어찌될까. 일반적으로는 중립을 지키는 것이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것은 다시 말해 황실 직계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에 빈틈이 생긴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다. 만약 벨 라야가 발레라와 결탁한 것이라면? 그 둘이 모의하여 스스로 차원 요새를 붕괴시킨 것이라면? 발레라와 라트나는 자신들이 요새 붕괴 직전에 가까스로 탈출할 수 있었다고 말했지만, 벨 라야가 소멸할 정도의 큰 싸움이 일어나 다른 이들이 모조리 몰살한 상황에서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은 채로 그 두 사람만 멀쩡히 살아남은 것은 역시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아아, 바스톨라여. 너는 너무도 어리석었구나. 어찌 이런 작은 의심을 해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더란 말이냐. 성좌의 주인마저 수중에 넣은 상태이고 기지 안의 경비병 대부분을 장악했다면 외부에 아무리 강력한 조력자가 있어도 사태를 수습하는 건 이미 불가능한 일이나 다름없다. 절망 속에 허우적거리던 바스톨라는 다시 문이 열리며 몇 명의 사람들이 방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방금 전에 보았던 고글을 쓴 남자가 앞장 서고 발레라와 라트나가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바스톨라는 발레라가 씩 웃는 모습을 보고 자신의 생각이 옳았음을 깨달았다. “으오오옴!” 바스톨라는 몸을 일으키며 발레라를 향해 달려들고자 했지만, 시종들의 우악스런 손이 그의 어깨를 찍어 눌렀다. 발레라는 그 모습을 보며 준상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흠...” 준상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차원 요새에서 벌어졌던 전투의 양상을 떠올려 보면, 긴급 회피 기능은 요새 안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는 반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추측에 지나지 않는 일. 섣불리 손을 댔다가 바스톨라가 손에 닿지 않는 어딘가로 사라지기라도 하면 그야말로 큰 낭패가 아닐 수 없다. 바스톨라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영락없이 발레라가 흑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고글을 쓴 남자에게 존대를 하고 그것을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이는 누이들의 모습을 보니 지금까지 자신이 예상했던 모든 일들이 다시 어그러지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마유나.” “네.” “긴급 회피 기능에 대해서 알고 있나.” “물론이죠.” 마유나는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준상에게 설명했다. 바스톨라는 그 모습을 보면서 눈을 부릅뜨며 다시 무언가 소리쳤지만, 다시금 시종들의 손에 어깨가 짓눌리며 바닥에 고개를 처박았다. “요새 안에서 위급 상황이 발생하면 최상층으로 소환된다고?” “네. 그렇게 알고 있어요.” “아쉽군.” 이렇게 되면 바스톨라를 그라우엔으로 만들어 보안 설비들을 해제하는 방법은 무용지물이 되어 버린다. 하긴 바스톨라를 사로잡고 마유나를 포섭한 이상, 조금 시간이 더 시간이 걸린다는 차이 정도밖에는 없지만 번거로운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약물 등으로 재워두는 수밖에 없겠군요.” “할 수 없지. 그렇게 하도록.” 바스톨라는 이제 뭐가 뭔지 도무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 의문을 풀기도 전에 불려온 의무 시녀가 주사기로 약물을 주입하자 그의 의식은 나락으로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바스톨라의 제압이 끝나자 준상은 다시 말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느긋하게 있을 수는 없겠지. 마유나.” “네.” “기지 내의 모든 인원들이 한 곳에 모일만한 장소가 있나?” “있습니다.” 마유나는 살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 “형식은 조례나 회식 등이면 족하겠지요. 하지만 회식은 아무래도 준비에 시간이 걸리니 조례가 낫겠네요.” 발레라 역시 말했다. “당직 인원을 조절할 필요가 있겠군요. 돕겠습니다.” 의견 수렴이 끝나자 그들은 곧바로 행동에 옮겼다. 제법 바쁘게 움직이긴 했지만 기지 전체 인원으로 따져 보면 준상이 장악한 것은 고작해야 오분의 일 정도. 마유나와 발레라는 먼저 장악된 인원들로 당직을 교체했다. 그리고 장악되지 않은 인원들을 불시 조례라는 명목으로 기지 안의 대광장에 불러 모았다. “무슨 일이지?” “글쎄. 이번에 일어난 방화사건 때문이 아닐까?” “뭔가 중대 발표라도 하려는 모양이지?” “설마 전쟁 선포?” “에이... 아무리 그래도 설마.” 대광장에 집결한 자들이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마유나와 발레라가 경비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단상에 올라섰다. 그리고 그들이 자리를 잡기가 무섭게 완전무장한 경비병들이 대광장을 순식간에 에워싸더니 일제히 사람들을 향해 무기를 겨누었다. “어?” “뭐지?” 당황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모습을 지켜보던 발레라는 천천히 단상으로 나서며 말했다. “제군. 우리는 방금 불측한 첩보를 입수했다.” “...” “영광스러운 브리아넬라의 심장부 안에 타랄라의 주구인 벨 페오르의 첩자가 숨어 들었다는 첩보가 그것이다.” 발레라는 자신의 말에 놀란 표정을 짓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작은 구멍으로 인해 큰 둑이 무너지는 것은 역사를 살펴보아도 알 수 있는 일. 하지만 제군들 대부분은 선량하고 충성심 넘치는 자들임을 나는 또한 알고 있다. 하지만 만약의 사태에 대한 대비는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 바, 간단하게나마 모든 이들에 대해 검사를 실시하기로 결정했으니 적극 협조하기 바란다.” 그의 말이 끝나자 곧바로 무장한 경비병들이 앞으로 나와 사람들을 줄 세우고는 몇 명씩 나누어 어딘가로 데려가기 시작했다. 개중에는 갑작스런 사태에 대해 의구심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다. 특히나 가주의 권한을 대행하는 제1황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에 의문을 품은 자들은 은밀히 바스톨라에게 연락을 취하려 했지만, 그들의 시도가 성공하기도 전에 곳곳에 섞여 들어와 있던 자들에 의해 제압되어 그대로 끌려가고 말았다. “우리는 제군들의 충성심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다. 공연히 반항하여 시간을 허비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라.” 발레라의 말대로 앞서 데려 갔던 인원들은 물론이고 바스톨라에게 연락을 취하려다 제압되어 끌려갔던 인원들도 시간이 지나자 하나도 빠짐없이 무사한 모습으로 돌아왔고 곧바로 업무로 복귀했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속으로는 비록 일말의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순순히 검사에 협력할 수밖에 없었다. 00400 트롤러 ========================================================================= 경비병들에게 안내된 사람들은 소지품을 검사받고 검색대를 통과했다. 여기까지는 기동 요새를 드나들 때의 통상적인 과정과 다를 바가 없었으나, 마지막으로 한 가지 과정이 더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들어가라.” 무기를 든 경비병의 재촉에 따라 한 사람이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경비병 두 명과 고글을 쓴 남자 하나, 그리고 가구라고는 하나도 없는 빈 방에 덩그러니 놓여진 의자 하나. “이리로.” 손짓에 따라 의자에 앉자 두 명의 경비병이 우악스런 손길로 그의 어깨를 짓누른다. 그리고 갑작스런 행동에 놀라 당황해 하는 틈을 타 고글을 쓴 남자가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손으로 이마를 감싸 쥐었다. “어으윽...” 이마를 인두로 지지는 듯한 느낌과 함께 머리 속에 이물질이 주입되었다. 일부러 욕망을 부추기는 행위 따위는 추가되지 않았다. 이곳의 나약한 인간들은 다크 시드에 의해 의식이 장악되는 과정조차 견뎌내지 못하고 그대로 노예로 전락했다. 물론, 이런 표현도 어디까지나 이전에 노예가 아니었다는 전제하에서나 가능한 일이겠지만. 준상은 무감동한 표정으로 사지를 떨고 있던 자의 몸짓이 희열로 바뀌어 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떨림이 끝나는 순간이 되어서야 비로소 손을 떼었다. “주인님을 뵙습니다.” 그들의 반응은 한결 같았다. 어째서 그래야 하는지 조차 의식하지 못한 채 당연히 그렇다는 느낌으로 준상에게 복종을 표했다. 모든 것이 생각대로 이어지고 있었지만, 준상은 생선 가시가 목에 걸린 것 같은 꺼림직한 느낌을 받았다. 뭔가가 이상하다. 하지만 정확히 이상한 점이 무어냐고 스스로에게 자문해 봐도 해답을 알 수 없었다. 이상하다고 해서 지금 하고 있는 행동을 멈출 수도 없다. 화가 잔뜩 난 호랑이의 등에 올라탄 것처럼, 이제는 내리고 싶어도 내릴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튜토리얼에서 늑대와 검치호를 쓰러뜨리고 숲에 불을 질렀을 때와 같았다. 불을 붙이기 위해 준비를 하고 불씨를 준비할 때까지는 모든 것이 그의 의도대로 였지만, 막상 불을 붙이고 난 뒤에는 그 불이 숲 안에 존재하던 모든 생명체를 죽음으로 몰고 갈 때까지 손 하나 깜짝하지 못했던 것처럼, 준상이 피워낸 불씨는 브리아넬라를 상징하는 기동 요새 안에서 빠르게 번져 가고 있었다. 기계적으로 사람들에게 다크 시드를 주입하면서 준상은 문득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과연 이것이 내가 원하는 결과였을까.’ 그것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가 행했던 모든 행동의 주체는 준상 바로 자신이었다. 은연중에 누군가가 알게 모르게 그의 행동을 조절했을지도 모른다. 퀘스트라는 형식은 임무 수행을 위한 목표 설정이라는 형식으로 그를 임의로 조종하기에 매우 유리한 방법이었으니까. 그러나 정령계를 거쳐 가면서 퀘스트를 벗어난 이후로는 어땠을까. 퀘스트에 불려가고 그것을 수행하며 성과를 얻어내는 일련의 과정에서 벗어난 뒤의 일은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매우 즉흥적이고 돌발적이었다. 그는 항상 현재 상황에서 최선의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했고, 다행히 그 과정은 큰 실패 없이 이어져 지금 이렇게 칠대 황가의 하나를 손안에 넣기 직전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과연 이런 식의 성공이 과연 우연의 연속만으로 가능한 일이었을까. 누군가의 의도에 의해 이런 결과가 도출된 것은 아닐까. 준상은 그런 불안을 느끼면서도 계속해서 기계적으로 사람들의 머리 속에 다크 시드를 주입했다. 놀랍게도 그들은 단 한 명도 저항하지 않았다. 벨 라야의 차원 요새에서 사로 잡았던 앙가라드는 세례의 의식이 무조건 성공하는 종류의 행위가 아니라고 했었다. 선천적으로, 또는 후천적인 요인에 의해 열 명 가운데 한 명 정도는 세례를 거부하는 경우가 있다고 했었다. 따라서 처음에 광기의 정령이나 애욕의 정령을 주입해 내재된 욕망을 있는 대로 끌어올린 자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지금 기계적으로 다크 시드를 주입하고 있는 자들 가운데서는 적지 않은 수의 저항자가 나와야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단 한 명도 다크 시드가 의식의 기본 틀을 장악하는 과정에 대해 저항하지 않았다. 본래부터 그런 식으로 지배되는 것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칠대 황가라는 시스템에 완전히 적응하여 누군가의 지배를 받는 것에 대해 아무런 저항감도 가지고 있지 않은 자들만을 선별하여 모아놓은 것이 이유인 것은 아닐까.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얘기다. 단지 지배의 대상이 바뀌고 지배의 매개체가 바뀔 뿐, 지배 받는다는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으니 말이다. 준상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요정들에게 다크 시드를 주입하면 어떨까. 아마도 지금과 같은 결과가 나오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들에게는 다크 시드가 자극할 만한 다양한 욕망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수면욕이나 식욕과 같은 생명으로서 지녀야할 극히 당연한 몇 가지 욕망 밖에 없는데다, 사회나 조직이나 신앙 같은 어떤 형태의 지배도 무의미한 그들에게서도 같은 결과가 나오리라고는 상상하기 어렵다. 벨 라야는 그런 요정들을 실패작이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이토록 자유 의지를 쉽게 저버리는 인간들이 요정에 비해 나은 것이 과연 무엇일까. 이들 뿐만이 아니다. 따지고 보면 지구에서 사는 인간들도 다를 바가 없다. 사회라는 형태로 계급이라는 형태로 자신을 종속시키고 그 안에서의 지위와 명예와 부를 자랑스러워 하는 행동이 지금 이들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준상님.” 문득 귓가에 들려온 부름을 듣고서야 준상은 기계적으로 다크 시드를 주입하던 과정을 멈추었다. 돌아보니 라트나가 공손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끝났습니다.” “...” 그런가. 벌써 다 끝난 건가. “남은 것은 최상층의 몇몇 뿐. 명하신다면 바로 제압을 시작하겠습니다.” “게이트를 통해 탈출할 가능성이 있을텐데.” 그러자 마유나가 다가와 말했다. “최상층으로 진입할 수만 있다면 게이트를 무력화시키는 건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그런가.” 이미 기지 내의 모든 인원에게 다크 시드를 주입한 이상, 머뭇거릴 이유 따위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준상은 바로 허락을 내렸다. “좋아. 시작하도록.” “네!” 허락이 떨어지자 발레라는 경비병들을 지휘해 주요 시스템의 제압을 빠르게 시작했다. 애초에 각 위치를 관리하는 당직들을 모두 장악한 상황이다 보니 명령을 내리는 것만으로도 빠르게 기지 내의 시스템 권한이 준상에게로 집중되기 시작했다. 준상은 양 옆에 마유나와 라트나를 거느리고 대광장으로부터 계단을 따라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마침내, 최상층으로 향하는 문앞에 섰을 때 그 아래층의 권한은 모두 준상에게로 귀속된 상황이었다. “열겠습니다.” 마유나의 말과 함께 최상층으로 향하는 문이 열렸고, 곧바로 완전무장한 경비병들이 안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누구냐!” 갑작스레 쏟아져 나오는 무장 병력의 모습에 안을 지키고 있던 몇몇 시종과 경비병들이 소리를 질렀지만, 그들은 다른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경비병들이 발사한 광학 무기에 벌집이 되어 쓰러지고 말았다. “반란이다!” 그렇게 소리치며 손에 들고 있던 무기를 발사하는 경비병들도 있었지만, 압도적으로 부족한 숫자를 감당하지는 못했다. 발레라는 잠시 후 준상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주요 시스템의 제압을 완료했습니다.” “게이트도?” “물론입니다. 게이트를 비롯한 시드 무력화 장치 등 대부분의 시스템을 무력화한 상태이니 주인님께서 힘을 쓰는데는 아무 지장이 없을 것입니다. 다만...” “말하라.” “가주가 지닌 최고 권한은 직접 회수하는 수밖에 없을 듯 합니다.” “...” 준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가주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가주전의 문을 열자 기다렸다는 듯이 안에서 광학병기들이 발사되었지만, 다크 시드의 세례를 입은 병사들은 죽음이라는 개념 자체를 잊은 것처럼 돌진하여 내부를 지키고 있던 자들을 도륙했다. 달구어진 공기와 피 냄새, 그리고 살과 의복이 타는 냄새가 매캐하게 뒤섞인 공기 속을 준상은 천천히 걸었다. 안에는 몇몇 시녀들이 공포에 질린 모습으로 중무장한 경비병들이 밀려들어오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가주 부부는 고색창연한 두 개의 의자에 평상복으로 보이는 단정한 옷을 차려 입은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끌고 가라.” “네.” 발레라의 명령에 따라 주위를 에워싸고 있던 시녀들이 경비병들의 우악스런 손길에 잡혀 끌려 나갔다. 의자에 앉아 있던 가주 부부 가운데 부인 쪽에서 먼저 입을 열었다. “발레라.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이죠?” 그 말에 발레라는 고개를 숙이며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그저 주인님의 명에 따랐을 뿐입니다. 어머님.” “무슨...” 부인은 얼굴을 찌푸리며 다시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발레라는 다시 경비병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모셔라.” “...” 뒤따르던 의무 시녀가 다가와 제1황자와 마찬가지로 약물을 주입하자 부인은 작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정신을 잃고 끌려 나갔다. 그 모습을 담담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가주는 준상을 바라보며 말했다. “머리 속에는 창조의 씨앗이, 그리고 손가락에는 저주받은 욕망의 씨앗이라... 그것 참.” 일부러 평온을 가장한 것일까. 가주의 표정에는 약간의 놀라움을 제외하면 당혹이나 황망함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자네는 이곳을 빼앗아 무엇을 할 셈인가.” “...” 준상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 준상을 바라보며 가주는 다시 말했다. “하긴 그런 건 상관없는 일이지. 나 역시도 그랬으니까.” 가주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등 뒤의 벽을 향해 손을 뻗었다. “난 이 자리에 오르고 나서 항상 의문스럽게 생각했던 것이 있네.” “...” 준상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 정도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어째서 칠대 황가의 인간들은 스스로 불멸의 자리에 오르려 하지 않았을까. 그러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 불멸이라는 가치를 손에 넣어 스스로 신이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그러지 않는 것일까. 하다못해 성좌의 주인이라 불리는 자들조차 반쯤은 불사의 몸을 지니고 있는데, 어째서 나이를 먹고 자신의 후대에게 자리를 물려주는 행동을 반복하는 것일까 하고 말일세.” “...” 준상은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가주는 그런 준상을 돌아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하긴 이제 와서 이런 얘기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다 부질없는 일인 것을.” “...” “그래. 이제 날 어쩔 셈인가.” 그 말에 대답한 것은 발레라였다. “그라우엔이라고 아십니까?” 발레라의 말에 가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지. 관리국이 만들어낸 여러 실패작 가운데 하나라지?” “그 실패작이 되어 주셔야겠습니다.” 발레라의 말에 가주는 그제서야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군. 어째서 그렇게 간단하게 지배당하는 건가 싶었더니 그런 이유에서였나.” “...” 가주는 의자에 앉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오랜 세월 동안 얽매여 있던 순수한 인간이라는 굴레를 이런 식으로 벗게 되리라고는 미처 예상치 못했건만.”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눈을 감았다. 그러자 발레라가 경비병으로부터 대검 하나를 받아들고 그에게 다가섰다. 준상은 칠대 황가의 하나를 지배하는 가주가 아들의 손에 의해 숨이 끊기는 모습을 담담히 지켜보았다. 가주의 생명이 끊기자 일시적으로 기동 요새 나스툼이 진동을 일으켰다. 최고 권한을 지닌 자가 사망함에 따라 몇가지 시스템이 초기화된 탓이다. 준상은 가주가 완전히 사망했음을 확인하고는 그 아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저주의 흑혈을 이용해 그 몸을 되살렸다. “주인님을 뵙습니다.” 준상은 자신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는 가주의 모습을 보고서야 비로소 자신의 싸움 하나가 끝을 맺었음을 깨달았다. * 이후, 칠대 황가 가운데 하나인 브리아넬라 가문은 타랄라 가문과의 협상을 벌였다. 누명이나 다름없는 죄를 뒤집어 쓴 타랄라 가문이었지만, 칠대 황가끼리 전쟁을 일으키는 식의 결말은 원하지 않았던 터라 협상은 순조롭게 타결되었다. 그 결과 브리아넬라 가문은 지금까지 칠대 황가에 귀속되어 있지 않던 몇 개 행성에 대한 권리를 추가로 획득했고, 이것은 칠대 황가 간의 협의체인 위원회를 통해 의결되었다. 이미 은하를 지배하고 있는 그들로서는 브리아넬라 가문이 행성 몇 개를 더 지배하는 것 정도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는 요식 행위 같은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협상도 의결도 별 저항없이 부드럽게 이어졌다. 브리아넬라 가문은 협상의 진행과는 별도로 새로운 성좌의 주인은 선임했다. 벨 라야라고 불리던 전대와는 달리 새로운 성좌의 주인은 벨 가이아라는 이름을 부여받게 되었는데, 그것은 새로 선임된 성좌의 주인이 영지로 부여받은 행성의 이름에서 유래한 이름이었다. 벨 가이아는 선임되고 난 다음 은밀한 경로를 통해 타랄라 가문에 속한 성좌의 주인인 벨 페오르와 마주했다. 그 만남에서 어떤 대화가 오고 갔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몇 개월 후 타랄라 가문은 브리아넬라 가문과 전격적으로 결혼 동맹을 맺게 된다. 다른 황가들은 이 강대한 두 가문의 결합을 크게 경계했지만, 의외로 브리아넬라와 타랄라 가문은 이후로 대외적인 활동을 자제하면서 평온하기 이를데 없는 모습을 보여 주었기 때문에 그러한 경계는 두 황가에 속한 젊은이들 사이의 로맨스라는 형태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전 우주를 뜨겁게 달군 결혼 동맹의 얘기가 조금씩 수그러들 즈음, 지구의 어느 외딴 섬에서는 성대한 행사가 벌어졌다. “반갑습니다.” “...” 준상은 미국의 대표로 참석한 국무부 장관과 악수를 나누고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수고하셨습니다.” 국무부 장관은 준상의 입에서 흘러나온 존대말에 잠시 어리둥절한 기색을 보였지만 한 국가의 외교를 담당하는 자답게 얼른 그 말을 받아넘겼다. “별 말씀을. 자, 이쪽으로 오십시오. 간단하게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 국무부 장관은 준상과 그의 옆에 선 다른 사람들을 한쪽으로 인도했다. 그곳에는 모형 하나가 설치되어 있었다. 오른쪽이 약간 뭉개진 느낌의 V자 형태의 섬, 그리고 그 위에 정밀하게 표현된 여러 가지 시설물의 모습을 보고 준상의 옆에 서 있던 세 여인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터뜨렸다. 임산부용의 풍성한 옷을 입고 있는 갈색머리의 미녀와 하얀 피부와 하얀 머리카락을 지닌 묘한 분위기의 여인, 그리고 마지막으로 건강한 아이를 안고 있는 무지개빛 머리카락의 여인이 바로 그들이었다. “보시는 바와 같은 섬은 크게 셋으로 나뉘어 집니다. 우측의 필 섬, 그리고 중앙의 웨이크 섬, 마지막으로 좌측의 윌크스 섬이 그것입니다. 필 섬에는 주로 주거를 비롯한 건축물들이 자리잡고 있으며, 중앙의 웨이크 섬에는 누리 랜드라고 이름 붙여진 유원지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웨이크 섬의 양 끝 부분과 윌크스 섬에는 아름다운 숲과 화원이 만들어져 있지요.” 국무부 장관이 모형의 각 부분을 가리키며 간단한 설명을 마치자 무지개빛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여인이 아이에게 말했다. “누리야. 마음에 드니?” “응!” 국무부 장관은 아이의 힘찬 대답과 표정을 보고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혹시라도 아이가 싫은 표정을 짓거나 하면 어쩌나 하고 가슴을 졸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오오오오오!” “꺄하하하하하!” 벌써부터 운행을 시작한 놀이기구에는 어느 틈엔가 등에 날개가 달린 기묘한 자들이 올라탄 채 환성을 지르고 있었다. 이 섬에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이방인은 그들 뿐만이 아니었다. 머리를 빡빡 민 기이한 거구의 사내들이라든가, 어느 나라의 것인지 알 수도 없는 기이한 옷차림의 사람들은 물론이고 장식인지 뭔지 머리에 동물 귀를 단 사람들의 모습들도 보였다. 뿐인가. 알록달록한 털빛을 가진 고양이들이 두 발로 우르르 뛰어가는 모습을 본 국무부 장관의 수행원들은 비명인지 탄성인지 모를 소리를 지르며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엄마! 나두! 나두!” “그럴래?” 품에서 내려주자 붉은 나비 넥타이를 맨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기다렸다는 듯이 아이의 등 뒤에 섰다. 아이는 어디선가 모습을 드러낸 커다란 늑대에게 다가가더니 그대로 허공을 떠올라 늑대의 등에 올라탔다. 그러자 곧바로 기다렸다는 듯이 작은 다람쥐와 고슴도치가 후다닥 달려 나와 늑대의 머리 위에 자리를 잡는다. “가자!” 마침내 아이의 입에서 명령이 떨어지자 늑대는 느긋한 걸음걸이로 예쁘게 꾸며진 화단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하하...” 국무부 장관은 어디서부터 반응을 해야 좋을지 몰라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무지개빛 머리카락의 여인은 아이가 늑대를 타고 가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다가 준상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럼 슬슬 시작해도 될까요.” “그래.” 준상의 허락이 떨어지자, 그녀는 허공에서 아름답게 세공된 지팡이 하나를 꺼내고는 곧바로 마법을 발동했다. “어?” “세상에...” 갑자기 그녀의 주위에 아름다운 형태의 마법진들이 나타나 허공을 수놓기 시작하자 국무부 장관을 비롯해서 이번 행사를 위해 미국에서 파견된 사람들은 그 아름다운 모습에 절로 탄성을 터뜨렸다. 하지만 놀라기는 아직 일렀다. 구구구구궁... 가장 먼저 짧은 진동음이 울려퍼졌다. 지진이라고 하기에는 미약한 그 울림은 약 일 분간 지속되다가 마침내 끝을 맺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어리둥절해 하던 사람들은 멀리 보이는 풍경에 변화가 일어났을을 뒤늦게서야 알아차렸다. “이, 이럴 수가!” 떠오르고 있었다. 웨이크 섬이라고 불리는 지형과 그 인근의 바다가 마치 둥근 국자로 푹 떠올린 것처럼 허공으로 떠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게... 도대체...” 주위를 돌아보니 동물귀를 머리에 단 사람이라든가 등에 날개를 단 사람들이 섬 곳곳에서 무지개빛 머리카락을 가진 여인처럼 마법진을 만들어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국무부 장관은 놀라움을 넘어 경악할 수 밖에 없었다. 비록 작은 섬이기는 하지만, 이것을 통째로 띄워 올리다니. 도대체 이들의 능력은 어디까지가 한계란 말인가. 섬은 그대로 창공을 떠올라 위성 궤도까지 올라갔다. 국무부 장관은 시시각각 변하는 섬 바깥의 풍경에 얼이 빠져 있다가 섬이 완전히 우주 밖으로 나오자 멍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디로 가는 겁니까?” 준상은 말없이 손을 들어 한 곳을 가리켰다. 국무부 장관과 수행원들은 그가 가리킨 곳을 바라보았지만, 그곳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습니다만?” 국무부 장관이 그렇게 말하자, 옆에서 듣고 있던 갈색 머리의 여인이 웃으며 말했다. “정말로 아무것도 없나요?” “네?” 국무부 장관은 자신이 미처 보지 못한 것이 있는지 다시 살폈지만, 역시나 그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무엇을 말하시는 겁니까.” 그 말에 준상이 대답했다. “우주.” “...” 국무부 장관은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럴... 수가...” 갈색 머리의 여인이 그런 국무부 장관을 향해 말했다. “함께 가시겠어요?” “그래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죠.” <트롤러 : 완결> ============================ 작품 후기 ============================ 지난 10월부터 시작한 이야기가 드디어 끝을 맺었습니다. 이야기는 끝을 맺었습니다만, 미진하다 느끼시는 부분은 외전 등으로 보충해 나갈 생각입니다. 보고 싶은 내용이 있으시다면 덧글이나 뜰의 방명록 등에 말씀을 남겨 주십시오. 당분간은 오랜 연재를 통해 쌓인 피로를 풀면서 느긋하게 차기작을 준비할 생각입니다. 아마도 차기작은 빨간 딱지가 아니라 파란 딱지가 붙은 청소년 노블이 될 것 같습니다. 그동안 트롤러를 아껴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이만 물러갑니다. 00401 [뒷 이야기] - 회담 ========================================================================= [뒷 이야기] - 회담 벨 라야의 영지였던 라야는 작은 섬과 같은 육지가 포도처럼 연결되어 바다 위에 자리 잡은 독특한 지형을 가지고 있었다. 라야라는 이름부터가 위성 궤도로부터 이 행성을 바라본 첫 번째 이주민들에게서 나온 ‘포도’라는 의미의 방언으로부터 생겨난 것일 정도다. 커다란 바다가 없는 대신 대부분의 육지와 해안과 인접해 있기 때문에 이곳은 개척이 시작된 이후 귀족들의 개인 휴양지로 많이 사용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행성내 지각 운동이 둔화되면서 자기장이 약해졌고, 그 결과 항성풍을 막아낼 수 있는 수단이 사라져 감에 따라 행성 표면의 수자원은 점차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귀족들은 말라붙어 가는 행성의 모습에 아쉬워하면서도 그것을 예전의 모습으로 되살리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다. 이 행성을 살려내기 위해 들일 노력으로 다른 행성을 개발하는 편이 그들에게는 훨씬 더 효율적이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행성 라야는 시간이 지날수록 말라붙은 사막의 형태를 지니게 되었고, 지금에 와서는 지하의 얼마 남지 않은 수자원이 이 행성에 남은 물의 전부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차라리 그냥 버려진 행성이라면 그렇게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도 잊혀졌겠지만, 이 행성에는 과거 귀족들의 저택을 관리하던 시종의 후손들이 여전히 지하에 도시를 이룬 채 살아가고 있었다. 벨 라야는 그런 지저인의 후손이었다. 벨 라야는 성좌의 주인이 된 이후 자신에게 부여된 권력을 이용해 다른 행성으로부터 물을 수입할 수 있는 길을 마련했다. 당사자가 이미 소멸한 이상 그가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게 되어 버렸지만, 사람들은 벨 라야가 아마도 이곳을 과거 물이 충만하던 시절로 만들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하고 있었다.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항성풍을 막을 수 있는 수단, 이를테면 행성 전체를 감쌀 수 있을 정도의 방어막 같은 것을 건설하고 혜성이나 다른 물이 풍부한 행성으로부터 수자원을 지속적으로 공급한다면 이곳의 모습을 본래대로 되돌리는 일 자체는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귀족들은 그러한 예산과 비용을 투자해야할 당위성이 없어서 그만두었지만, 벨 라야는 그렇지 않았던 것라고 막연하게 생각해 볼 따름이다. 이곳이 회담 장소로 정해진 것에는, 새롭게 벨 가이아라는 이름을 받은 준상이 자신의 전임자가 태어나고 자라 영지로 받은 행성의 상황을 확인하기 위한 것도 한 가지 이유였지만, 설령 벨 페오르와의 회담이 결렬되어 전투가 벌어지더라도 피해가 최소화된다는 점 역시 큰 이유였다. 적어도 라야의 지표 상에는 더 이상 문명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준상과 벨 페오르는 정해진 시간이 되자 약속했던 좌표로부터 조금 떨어진 장소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모래바람이 몰아치는 지표를 조금 걸어 서로를 마주 보았다. 가장 먼저 입을 뗀 것은 벨 페오르였다. “설마 싶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군.” “...” 준상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벨 페오르도 자신의 말에 대답할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던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준상의 모습을 유심히 살피다가 쓴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그런 방법이 있었군.” 벨 페오르의 시선은 준상의 손에 끼워진 반지로 향해 있었다. 허나 이미 육체 변이를 일으켜 버린 지금 상황에서는 그런 방법이 있는 걸 알게 되었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아니, 완전히 소용없는 건 아닌가. 그의 후대라면 지금 준상이 사용하고 있는 방법으로 자신이 원할 때 언제든 성좌의 주인이라는 이름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테니까. 물론 몸에 직접 이식하지 않고 창조의 씨앗으로 제어를 위한 장비를 만들어 사용하는 것이 무조건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몸의 일부가 아닌 이상 망실의 우려가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강력한 또 하나의 힘인 육체 변이 또한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장일단.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벨 페오르는 부러운 느낌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벨 페오르는 허공에서 의자와 테이블을 꺼내 마른 대지 위에 늘어 놓았다. “앉지. 얘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 준상이 자리에 앉자 벨 페오르는 질문을 던졌다. “그때 보았던 요정과는 무슨 관계지?” 지금 이 시점에서 그 얘기를 꺼내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하지만 그것을 알고 싶다면 먼저 대화를 이어갈 필요성이 있었다. 준상은 인벤토리에서 캐비닛 하나를 꺼내고는 집사 고양이 이고르를 불러 다과를 준비하게 했다. 붉은 나비 넥타이를 맨 검은 고양이가 작은 앞발을 지휘하듯 휘두르며 다과를 준비하는 것을 지켜보며 준상은 입을 열었다. “나의 반려이며, 또한 내 아이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 벨 페오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역시 그랬군.” 그의 음성에는 어쩐지 즐거운 기색마저 담겨져 있었다. 준상이 느끼기에 리체스와 자신의 관계는 그에게 있어 무척이나 중요한 사실인 듯 했다. “그걸 물은 이유는 뭐지?” “음...” 벨 페오르는 잠시 턱을 만지작거리더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준상에게서 등을 돌리더니 몸에 걸치고 있던 의복을 벗기 시작한다. 갑자기 뭐하는 짓인가 하고 바라보던 준상은 그의 어깨에 자리 잡은 반투명한 작은 날개를 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크기가 너무 작아 거의 흔적만 남아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만, 그것은 요정의 날개가 분명했다. 벨 페오르는 옷을 다시 어깨 위에 걸치고는 의자에 앉았다. 벌어진 앞섶 사이로 남자의 그것이라 생각하기에는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풍만한 가슴이 드러나 있다. “봐서 알겠지만, 내 몸에는 요정의 피가 흐르고 있다.” “그랬군.” “그래봐야 날지도 못하는 작은 날개의 흔적을 제외하면 보통의 인간과 그리 다를 것도 없지만.” 준상은 관리국의 기지에서 그가 느닷없이 공격을 멈추고 돌아갔던 이유를 그제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요정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아인종들은 본래 창조의 씨앗을 보다 효율적으로 생산하기 위해 인간을 개량한 결과다. 창조의 씨앗을 성숙시키는 요소가 욕망이라는 건 비교적 최근에 알려진 사실이고, 그 이전에는 갖가지 동물이나 식물들에 이것을 무차별적으로 이식해서 경과를 살피는 식이었지. 결과적으로는 아무것도 손을 대지 않은 순수한 인간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전부 쓸데없는 짓이 되어버리긴 했지만.” 준상이 물었다. “창조의 씨앗은 도대체 뭐지?” 벨 페오르는 이고르가 건네주는 찻잔을 받아들며 대답했다. “글쎄. 그것에 관해서는 아직 정확히 밝혀진 바가 없어. 감정이라는 형태의 확정적이지 않은 에너지를 받아들여 자라는 규소질의 생명체가 아닐까 하는 추측이 현재로서는 가장 우세하지만, 이것도 확실한 건 아니야. 성숙하지 않은 창조의 씨앗이 생명체를 변이시키거나 마법과 같은 효과를 발휘하는 것은 자신이 깃든 숙주를 보호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의견도 있긴 하지.” “생명체라...” “겉보기에는 그저 돌덩어리에 불과한 느낌이라 별로 믿기진 않지만, 에너지를 받아들여 성장하고 번식 또한 가능하다는 얘기가 있는 걸 보면 그 자체로 하나의 생명체라는 얘기도 틀린 얘기는 아니다 싶어.” 시드의 개체수를 임의로 늘리는 것이 가능하다는 얘기는 브리아넬라 가문에 속한 자들로부터 이미 전해들은 바가 있었다. 본래 50레벨의 시드들은 그 이하 레벨의 시드와는 달리 추출시 별도의 처치가 필요하다. 만약 그러한 과정이 누락된 채 일방적인 추출이 이루어지면 시드는 자기 분열을 일으켜 레벨 만큼의 새로운 시드를 탄생시키고 소멸하기 때문이다. 고레벨의 시드가 아닌 수확의 제한선을 간신히 넘긴 저레벨의 시드들의 가장 큰 용도가 이러한 시드 개체수의 확보이다. 생물이 무생물과 구분되는 가장 큰 특징은 자기 증식 능력, 물질 대사 능력, 그리고 항상성 유지 능력의 세 가지로 나뉜다. 시드는 그 외형이 일반적인 생명체와는 크게 다르긴 하지만 이러한 세 가지 요건을 충분히 만족하고 있는 셈이다. “몇몇 사람들은 이 시드가 창조신의 파편이라고 일컫는 자들도 있는 모양이야.” “어째서?” “과거에 우주가 존재하지 않을 무렵, 커다란 태초의 알이 펑 하고 터지면서 우주가 창조되었다는 거지. 허무맹랑한 얘기 같기는 하지만, 창조의 씨앗이 지닌 힘을 생각하면 불가능한 얘기도 아닌 것 같아.” 벨 페오르는 찻잔을 완전히 비우고는 그것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자, 서론은 이쯤 해두고 이제 본론을 시작해 볼까.” “말해라.” “타랄라 가문을 지우는데 협력해 줬으면 한다.” “...” “도와주면, 그 이후엔 굽든 삶든 마음대로 해도 좋아. 네 여자로 삼아주면 그것도 재미있는 일이겠지만, 그런 아름다운 반려가 있는데 이런 괴물 같은 여자에게 흥미가 있을 것 같지는 않으니 그건 포기하도록 하지.” 준상은 찻잔을 기울여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물었다. “난 이미 내가 원하는 바를 이루었다. 내가 굳이 위험을 무릅써야 할 이유가 있나?” “쳇. 고민하는 척이라도 하는 게 예의 아닌가?” 벨 페오르는 혀를 차며 투덜거리고는 다시 말했다. “만약 지금 브리아넬라의 상황을 다른 황가들이 알게 되면 어찌 될 것 같아?” “...” “모르긴 해도 모든 황가들이 연합해서 브리아넬라를 밟아 버리려고 들겠지. 과연 그걸 너 혼자 힘으로 막아낼 수 있을 것 같아?” “어렵겠지.” 지구를 영지로 받고 헤네스의 고향인 행성 히딕스, 그리고 하라바나 케이드가 살고 있는 행성 파두스를 브리아넬라 가문의 휘하에 편입함으로서 관리국이나 다른 가문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도록 만들기는 했지만, 다른 가문들이 직접적으로 개입하게 된다면 브리아넬라 가문이 아무리 칠대 황가 가운데 수위를 차지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해도 전부 막아내기는 힘들다. 벨 페오르는 준상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나는 이 머리 속의 검은 씨앗이 존재하는 한 죽었다 깨어나도 타랄라 가문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어. 그래서 다른 가문에서 그 해결책을 찾고자 했던 거지. 뭐... 네가 나타나서 전부 뒤집어 버리는 바람에 무용지물이 되어 버리고 말았지만.” “...” “내가 그간 들인 공을 한 번에 꿀꺽 말아먹은 것에 대해 조금이라도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면, 날 도와줬으면 해.” 준상은 벨 페오르에게 물었다. “네가 원하는 것은 타랄라의 멸망인가?” “아... 그건 아니야. 애초에 그런 식으로 일을 벌였다가는 아까도 말했듯이 다른 가문들이 가만있지 않을테니까.” 벨 페오르는 이고르가 새로 따라준 차를 마시며 말을 이었다. “내 목표는 타랄라의 현 가주. 그 자 뿐이야.” “복수인가?” “그런 셈이지. 생각해 보면 시시할 정도의.” “...” 벨 페오르는 완전히 육체와 시드가 융합해 버린 탓에 따로 준상과 같은 형태로 타랄라 가문의 속박에서 벗어나기는 어렵다. 따라서 현재의 타랄라 가주가 사망하더라도 그 혈족이 뒤를 이으면 말짱 도루묵. 하지만 새로운 가주를 준상이 지배하게 되면 간접적으로 벨 페오르를 지배할 수 있게 된다. 브리아넬라 가문에서 일어난 사건의 전말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벨 페오르 역시 그러한 사항을 충분히 알고 있을터. 처음에 굽든 삶든 마음대로 하라는 얘기는 단순한 농담이 아니었던 셈이다. “나는 오래도록 염원해 왔던 목표를 이룰 수 있고, 너는 나라는 존재를 통해 만약의 사태에 대비할 수 있게 되는 거지. 육체 변이가 불가능한 이상 다른 칠성좌들과 싸우려면 아무래도 힘든 것도 사실이잖아? 그럴 때 내가 도와줄 수도 있겠지. 게다가 나라는 전례가 있다면 다른 칠성좌 녀석들을 포섭하는 것도 가능할지 모르고. 손해는 아닐 거라 생각하는데?” 씩 웃으며 말하는 벨 페오르의 모습에 준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겠군.” 그로부터 수개월이 지난 뒤, 브리아넬라와 타랄라의 두 가문은 결혼 동맹을 맺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