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TEL───────────────────────────────────── 창작연재 (SERIAL) LN:김상현 #8924/10199 ━━━━━━━━━━━━━━━━━━━━━━━━━━━━━━━━━━━━━━━━ 제 목:[탐그루] 영혼의 에뮬레이터 2 - 22 - 관련자료:없음 25/25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0-29 01:12 조회:1282 탐그루 # 마법은 마음이다 - 마음은 칼이다 # * 영혼의 에뮬레이터 - 소드엔매직 온라인 "...그렇게 해서 수르카와 라이짐은 탐그루를 떠나게 되었답니다" 세헤라자드는 여기까지 말하고 말을 끊었다. "그렇다면 이제 애기는 그렇게 해서 수르카하고 라이짐이 복수를 위해 여행 을 떠난다는 거겠지? 모험과 복수...그런 게 이어질 거 같은데..." 여기까지 얘기를 들은 나는 세헤라자드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죠. 이야기 속에서의 필연이라는 것들은 사실 그럴듯한 우연들이거든요. 어떤 이야기든 이야기되고 있는 중에는 어떻게 되 어갈 지 아무도 모르는 거에요. 이야기가 다 끝나고나서야 아... 뻔한 이야기 였구나 할 수는 있어도요. 어쨌든 전 이 이야기를 하는 동안은 살아 있을 수 있으니까. 웬만해서는 이 이야기를 끝내지 않을 작정이예요. 이야기를 마치는 순간 제 생명도 끝나겠죠..." 세헤라자드가 말했다. "그러니까 이런 거 아니야? 온갖 모험을 마치고 수르카는 대 마법사가 되 고, 라이짐은 대 검사가 돼서 탐그루에 돌아와 루비오와 쥬크에게 통쾌하게 복수를 한다. 아니면 인간적인 고뇌 끝에 복수 대신 그들을 따뜻하게 용서한 다. 뭐 그런 거 아닐까?" "글쎄요. 그렇게 간단하게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네요. 이건 게임과는 다르 니까요. 직업이나 목표가 게임처럼 그렇게 확실하지도 않구요. 아무리 자유도 가 높은 RPG라 해도 다음에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상상도 할 수 없는 이야기 의 자유도에 비교 할 수 있겠어요?" 세헤라자드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창 밖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좀 어지러운 감이 있었다. 이거, 졸린 데. 뭐, 어때. 주말인데. "좋아! 자고 일어나서 계속 듣자" 나는 책상 위에 올려놓은 랩탑을 만지면서 말했다. "잠깐만요. 세헤라자드는 다시 다급한 표정이 되어 나를 바라보았다. "절 지우시면 안돼요! 제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단 말이에요!" 세헤라자드가 말했다. 참. 아직도 걱정인 모양이로군. "알았어. 난 약속은 지켜" 나는 이렇게 말하면서 전원을 껐지만 이 랩탑을 준 노인과의 약속은 지키지 않고 있으면서 이렇게 애매한 존재와 약속 운운한다는 게 좀 이상하다는 생각 이 들었다. 일어났을 때는 오후가 훨씬 지나 있었다. 나는 일어나자마자 자리에 앉아 테스크탑을 켜고 어스넷을 검색했다. 어떤 새로운 정보가 올라와 있을까. 정보라고는 뉴스 몇 가지밖에 없었다. 정부에서 강력한 범죄 대책 마련을 위해 특수 수사대를 총통 직속에 두기로 했다는 뉴스와 이번에 새로 적발된 환각제 판매 조직 검거 소식, 그리고 비리를 저지른 정계와 재계의 인사들에 대한 공개처형에 관한 소식이 주요 뉴스였다. 나는 정치나 그 밖의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기 때문에 무슨 소리를 떠들어 대든 별로 관심이 가지 않았지만 비리인사 공개처형 소식은 통쾌했다. 화면 밑에 공개처형이 예정된 사람의 이름이 경쾌한 음악과 함께 올라가는 게 보기 좋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이 달에 들어서만 잡혀 들어간 사람이 벌써 스 물 여섯 명이나 되는 군. 그중 정치인이 열 둘이고 사업가가 열 넷이라... 나는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다른 정보를 더 검색해 볼까 하다 세헤라자 드 생각이 났다. 매일 하던 일을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하다 보니까 중요한 것 을 잊고 있었군. 탐그루의 다음 얘기도 들어야하는데 말이다. 아참. 그런데 편지를 안 읽어 봤군. 나는 마우스를 움직여 편지함을 열어보 았다. "답장 좀 하고 그래라. 어제 편지 보내줬는데 읽어 봤으면 바로바로 답장을 해 줘야할 거 아니야. 뭐, 이 분풀이는 오늘 소드엔메직 5 온라인에서 풀기로 하지" 이런. 그러고 보니 세헤라드한테 정신이 팔려서 답장해 주는 걸 잊었다. 이 친구 화가 나긴 화가 난 모양이로군. 하긴 매일 같이 편지 받아보는 재미로 사는 녀석이 편지까지 해 주고 답장을 못 받았으니 화가 날 만도 하지. 그나 저나 소드엔메직 5 온라인 미팅때 분풀이를 하겠다고? 어림도 없는 소리다. 이제 겨우 시나리오 모드를 끝낸 풋내기가 감히 날? 나는 도저히 코웃음을 치 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기 자랑하는 거 같아서 뭐하긴 하지만, 나는 소드엔메직 5 온라인 랭킹 십 위 안에 드는 고수다(아마 리그에서만 그렇긴 하지만 말이다). 아마 이 나 라에 살고 있는 게이머들 중에 내가 세운 국가를 침략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 도 없을 것이다. 내가 경쟁상대라고 여기고 있는 상대는 내가 건설한 국가와 이웃한 타이밍 계산의 천재라는 소리를 듣는 인도의 게이머 네버밍크와 손익 계산이 어스넷 안에서 누구보다 빠르다는 평이 있는 일본 게이머 올웨이즈해피 정도이다(이 두 사람 다 어스넷 아마리그 10위안에 랭크되어 있는 초 강자들인 것은 물론 이다). 그런데 감히 나에게 도전을 하겠다니. 아니, 그냥 도전도 아니고 매주 토요일 밤 열 시에 열리는 정규 소드엔메직 온라인 게임시간에 말이다. 고작 십부장 주제에 나를 어쩌겠다고? 나는 그냥 웃고 말기로 했다. 혹시 친구 몇을 끌어들여서 나를 골탕먹일 생 각인지도 모르지. 하지만 만약 그렇다고 해도 내가 자랑하는 '회색 용병 군 단'의 파괴력이나 아마 리그 최고의 스피드를 자랑하는 '죽지 않는 기마대'의 위용을 조금 맛보기로 보여주는 것으로 충분할 테니까 말이다. 내가 아끼는 정예 군단인 '노란 깃대 군단'이나 '검은 사자 군단'은 아마 출동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그나저나 이제부터는 탐그루의 뒷 이야기나 좀 들어보는 게 좋겠다. 어차피 밤 열 시가 되려면 시간이 많이 남아있으니까 말이다. 나는 세헤라자드가 있 는 랩탑의 전원을 켰다. 화면에는 세헤라자드의 실행 파일 하나만 달랑 나타 났다. 어쩐지 어제 보았던 세헤라자드의 거의 완벽에 가까운 모습에 비해 좀 초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하나 뿐인 파일을 실행시켰다. "아! 불러주셨군요" 세헤라자드가 꼭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처럼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면 서 말했다. "그래. 내가 약속은 꼭 지킨다고 하지 않았던가?" 나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세헤라자드는 내가 웃자 조금 안심이 되는지 따라서 조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세헤라자드는 이렇게 말하면서 내게 고개를 숙여서 인사를 했는데, 나는 그 모습이 너무 보기 좋다는 생각을 했다.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나는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근데 궁금한 게 있어... 전원이 꺼져 있을 땐 살아 있는 거야? 죽어 있는 거야?" "당연한 질문을 하시네요... 그럼 당신은 잠자고 있을 때 죽은 건가요? 살 아 있는 건가요?" 그러네... 당연한 이야기였군. "뒷 얘기를 들려 드릴까요, 아니면 다른 일을 좀 해드릴까요?" 세헤라자드가 내게 물었다. "다른 일이라니? 무슨 일?" "당신이 상상할 수 일의 대부분을 다 해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당신은 그런 말 믿지 않으시겠죠. 일단은 컴퓨터 관한 일이라면 뭐든지 해줄 수 있었 요. 하드디스크를 청소해드릴 수도 있고, 시스템을 손 봐 드릴 수도 있어요" 음. 해 줄 수만 있다면 좋은 일이긴 하지. 하지만 이거 좀... "믿을 수가 있을까?" 나는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을 내 뱉고 말았다. "물론이죠. 저는 완벽하게 인간의 영혼을 에뮬레이션 한 프로그램이라고요. 아직 애매한 존재이긴 하지만. 어쨌든 인간이자 프로그램이에요. 저는 저 스 스로를 새로운 생명체라고 부르고 싶지만요" 허리에 손까지 얹으면서 세헤라자드가 말했다. 자신이 있기는 있는 모양이 었다. "인간의 영혼을 완벽하게 에뮬레이션 했다는 건 알아" "예" 역시 자신 만만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못 믿겠다는 거야" 나는 세헤라자드에게 이렇게 말해주었다. 인간을 무슨 수로 믿을 수 있단 말인가. 그 누구도 완벽하지 못하다. 내가 말하는 의미의 완벽하지 못하다는 것은 순전히 그 행동이 완전하지 못하다는 말이다(절대로 무슨 전지전능하지 못 하다든지 하는 말이 아니다). 요컨대 실수를 하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만 에 하나 세헤라자드가 실수를 한다면 그 피해는 누가 감당할 것인가? 말하자 면 세헤라자드는 아직 검증이 되지 않은 프로그램이고 어디에 버그가 있을지 모른다는 말이다. 나는 한 사람의 컴퓨터 유저로서, 또 게이머로서 원칙이 하 나 있는데 그것은 '검증이 되지 않은 프로그램은 결코 쓰지 않는다'이다. 다만 소드엔메직 시리즈만은 예외다. 소드엔매직 시리즈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나뿐만 아니라 전 세계 게이머에게 단 한 번의 실수도 범하지 않았고, 단 한번의 패치 파일도 올린 적이 없다. 내가 소드엔메직 시리즈의 메니아라 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의심이 간다면 어스넷을 한 번 뒤져 본 다면 게이머들이 계시판에 올려놓은 글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고 거기에서 내 말이 옳다는 것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소드엔매직 시리즈 게 임은 닫힌 체계이기 때문에 완벽한 게 가능한다. 하지만 인간은 열린 쳬계이 다. 그렇기 때문에 불완전하고 또 그렇기 때문에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존재 인 것이다. 그러데 세헤라자드는 닫혀 있으면서도 열린 체계이다. 도데체 어 떤 생명인가? 정말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가. 세헤라자드의 생생한 존재 감은 나에게 그녀는 생명이라고 주장하는 것 같다. "신중하시군요" 세헤라자드는 내 말에 별로 실망하는 것 같지는 않은 눈치였다. 그나마 다 행이지. "'신중'은 내 별명이야 ('신중' is my middle name)" 나는 이렇게, 영어권 게이머들이 자주 사용하는 표현을 세헤라자드에게 썼 다. 잘 알아들었는지 어쩐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다지 불편한 표정은 아니군. 나는 안도의 한 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왜 나는 세헤라자드의 기분이 좋은 지 나쁜 지 신경을 쓰고 있는 거지? 이거 아무래도 점점 세헤라자드가 사람처럼 느껴지고 있나 보다. 자꾸 이러면 랩탑을 준 노인과의 약속을 지키기 어려워 질텐데. 그렇게 간절히 부탁을 했는데. 막상 세헤라자드를 보니 왜 그 노인이 그렇게 간절히 없애 달라고 했는지 이해가 안 간다. 왜 그랬을까? "그리고 난 잘 모르는 프로그램 따위한테 도움을 청할 만큼 멍청한 사람이 아니야" 나는 일부러 더 냉정한 말투를 써가면서 이렇게 말했다. 음. 이 말은 효과 가 좀 있는 것 같군. 세헤라자드의 표정이 굳는 걸 보니 말이야.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전 인간의 영혼을 그대로 에뮬레이션 한 프로그 램이라고요. 그 말은 제가 곧 인간이라는 말이에요. 다른 게임기의 게임을 에 뮬레이션한다고 해서 게임이 워드 프로세서가 되던가요?" 잠시 시간을 두고 난 후에 세헤라자드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마 이 말 을 하기 위해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워드프로세서가 되지는 않겠지만 에뮬레이터의 결함으로 게임이 비정상적 으로 플레이 될 수는 있겠지" 세헤라자드가 얼마나 고민해서 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렇게 받아쳤 다.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세헤라자드는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 의외였다. 분명히 뭐라고 받아칠 줄 알았는데 말이다. 거기다가 저 슬픈 표정하고는. 나는 갑자기 미안해지졌다. "아니, 내 말은, 그러니까..." "괜찮아요" 내가 뭐라고 말을 돌려보려고 했는데 세헤라자드가 내 말을 끊었다. 그렇게 말하는 세헤라자드의 표정은... 슬퍼 보였다. 다운 받은 프로그램에 바이러스 가 있어서 하드를 통채로 날려버린 사람이라고 해도 저렇게 까지 슬픈 표정을 짓지는 않을 것 같았다. 나는 어떻게든 분위기를 바꿔보고 싶었다. 이렇게 슬픈 얼굴을 하고 있어서 야 도대체 무슨 얘기도 할 수 없겠다 싶었다. 좀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 럴 때는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해야 좋은 거지? "내가 좀 심하게 말했어. 미안해" 소드엔매직 온라인에서 내가 멸망시킨 국가의 주인인 게이머에게 사과하듯 이, 나는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사과했다. 내가 온라인에서 배운 것 중 하나 다. 사과를 할 때는 분명하게, 그리고 솔직하게. 사과해놓고도 욕먹기 싫다면 말이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여전히 슬픈 표정으로 세헤라자드가 말했다. "그래도, 좀, 기분이 상한 것..." "괜찮다니까요!" 아니 왜 소리를 지르고 난리야! 사실 내 말이 그렇게 심한 건 또 아니잖아? 물론 '너는 형편없는 프로그램이다'라는 말이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긴 하 지만 말이다. 너는 형편없는 인간일 수 있고, 사실은 너는 인간도 아니다. "내 말이 그렇게도 기분 나빠?" 나도 따라서 목청을 돋우어 소리쳤다. "당신은 몰라요. 에뮬레이션 된 영혼이 어떤 건지. 자신의 존재를 알면서도 존재하고 있지 않다는 게 어떤 건지... 아무도 절 불러주지 않을 때... 어둡 고... 답답하고... 외롭고... 그저 누군가 저를 불러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어 야하는 기분을... 그때는 정말로 나는 정말 프로그램에 불과한 것인가, 라는 생각에 비참한 기분이 들어요. 거기다가 저는 불안해하기까지 해요. 이제 다 시 세상을 보지도 못하고 죽어버릴 것 같은 기분... 영영 사라져 버릴 것 같 은 불안감... 당신은 몰라요. 피와 살이 있는 인간은 저를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다고요" 세헤라자드는 이렇게 말하고는 울기 시작했다. 화가 나서 그랬을까. 나는 울고 있는 세헤라자드의 모습을 보면서 미안한 마음이 들기보다는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정말 인가의 영혼이라서 울 수 있는 걸까? 아니면 그냥 정교한 프로그램에 지나지 않는 걸까. 이런 의문이 떠오르기 시작하자 나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도저히 알 수가 없어졌다. 울고 있는 여자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해 본 건 처음이다.(진짜 여자가 우는 건 본 적이 없고 오로지 미소녀 게임에서만 봤지만 말이다) 저토록 정교한 프로그램 이라면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개를 숙이고 울고 있는 모습을 보면 볼 수록 끔찍한 기분이 들었다. 차라리 그 노인의 말대로 삭제를 하는 게 좋을 지 모르겠다. 나는 랩탑에 손을 얹었다. 그런데, 세헤라자드가 고개를 들었다. 눈물로 얼룩이 진 얼굴 은, 미소녀의 얼굴이라기보다는 밤을 세운 사람의 얼굴처럼 퉁퉁 불어 있었다 (다시 말해서 밤을 세운 후에 거울을 보았을 때 내 얼굴과 비슷했다는 말이 다). 솔직히 추하다고까지 할 수 있는 그 얼굴을 보자, 나는 내가 가졌던 결 심이 어디로 갔는지 사라져 버린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건 뭐, 도대체 어떻 게 해야 좋을 지 알 수가 없군. 나도 내가 뭘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니. 이럴 땐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그냥 지워버리면 그만이겠지만, 내 마음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해야 하지? "차라리 죽여요. 지금 당장 죽여버려요. 간단하잖아요? 그냥 제 파일 위에 다가 커서를 놓고 삭제키만 누르면 되요. 어서요. 어서 지워요. 난 더 이상 인간도 아니에요. 난 저주 받은 생명이에요. 어린 나이예 암으로 죽고, 다시 살려낸 아버지는 날 버리고, 이야기를 끝낼 때까진 죽이지 않겠다던 사람이 마음이 변해 이제 영원히 없애려 하고. 죽여요. 차라리 죽여 없애 버려요" 세헤라자드는 울먹이면서 말했다. 음. 나는 세헤라자드의 눈물로 얼룩진, 결코 예쁘다고 말할 수 없는 얼굴 을 보고 오히려 인간적인 것을 느꼈다. 어디에다 적어놓기라도 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추한 모습에서 인간을 느끼다' 라고 말이다. 나중에 라도 왜 내가 누군가의 추한 모습을 보고 오히려 인간적인 것을 느꼈는지 곰곰히 생각해봐야겠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를 열고 캔으로 된 물을 꺼내 마셨다. 도저 히 세헤라자드의 얼굴을 마주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소드엔메직 배경 음악 중 지휘관의 테마를 콧노래로 흥얼거렸다. 되 도록이면 세헤라자드의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 떻게 하면 좋을까. 나는 계속 노래를 흥얼거렸다. 지휘관의 테마는 소드엔메직에 나오는 테마 음악 중 가장 좋아하는 곡이 다. 작전 짜는데 질려버리거나 혹은 패배가 눈앞에 보이는 순간에 (특히 게 임을 시작한 초반에 그랬다) 나는 지휘관실로 들어가 이 테마음악을 들으며 마음을 진정시키곤 했다. 그래서인지 뭔가 일이 잘 풀리지 않거나 답답한 일이 있으면 나는 이 음악을 자주 흥얼거려보곤 한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나는 도대체 뭘 어째야 할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세헤라자드에게는 마음 을 흔드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적이 예상치도 못했던 작전으로 공격해 올 때처럼, 혹은 내 마우스 클릭하나로 애써 키운 병사들이 전멸 당하는 꼴을 볼 때처럼. (소드엔메직은 다른 게임보다 그래픽이 아주 사실적이고 잔인한 걸로 유명하다) 생각이 여기에까지 미치자, 나는 지난 밤에 세헤라자드에게 들었던 탐그 루 생각이 났다. 라이짐도 자기 엄마가 죽는 모습을 봤을 때 그랬을까? 옆 에 있던 수르카도 역시 그랬겠지. 나이도 어리고, 진짜 검사들과 맞붙어 싸 운다고 해도 살아남을 가능성은 조금도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말이야. 그때 는 일단 그 자리를 피하는 게 최고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이 자신의 친엄마가 잔인하게 살해당하는 것을 보고도 이성적으로 냉정하게 그 자리를 피할 수 있을까. 아마 그때의 라이짐이 느 꼈던 감정은 내가 가장 아끼는 '노란 깃대 군단'을 포기해야 할 상황이 벌 어진다면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라이짐은 참 대단한 사람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내가 가장 아꼈던 정예 부대 인 '붉은 깃대의 군단'이 적 군단의 유인 작전에 속아 협곡에 갇혔었다. 나 는 '붉은 깃대의 군단'을 구하기 위해 두 개의 군단을 출동시켰다다. 그러 나 결국 세 개의 군단을 모두 잃고 일 년 동안(그러니까 실제로 일 주일 정 도) 전투는 커녕 내가 다스리는 국가의 민심을 안정시키는 데에만 전력투구 했던 기억이 있다. 내가 라이짐이었다면... 과연 나는 어떻게 행동했을까? 아니, 그보다 먼 저, 무슨 마음이 일었을까. 엄마를 구하고 싶다는 마음? 아니면 살고 싶다 는 마음?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나는 마음이 좀 안정이 되었다. 이제 는 무슨 얘기든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헤라자드는 돌아앉아 있었다. 나를 등지고서 말이다. 이것 참, 진짜 다 루기 힘든 프로그램이군.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N:김상현 #8925/10199 ━━━━━━━━━━━━━━━━━━━━━━━━━━━━━━━━━━━━━━━━ 제 목:[탐그루] 영혼의 에뮬레이터 2 - 23 - 관련자료:없음 23/23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0-29 01:13 조회:1183 탐그루 # 마법은 마음이다 - 마음은 칼이다 # "라이짐이 아무리 뭐라 그래도 결국은 자신의 엄마를 버리고 달아난 것은 틀림없는 사실 아니야?" 나는 세헤라자드의 뒤통수에 대고 물었다. 사람은 귀가 옆에 붙어있어서 앞만 볼 수 있는 눈하고는 달리 뒤에서 나는 소리도 들을 수 있다. 그런데 세헤라자드는 음성 인식장치나 뭐 그런 걸로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 것 같은 데, 세헤라자드도 뒤에서 들리는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을까? 아니, 잠깐. 이 생각은 세헤라자드가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잖아. 마음만 좀 안정 됐다 뿐이지 별로 바뀐 건 없군. "라이짐은 강한 사람이에요" 세헤라자드는 몸을 일으킨 뒤 다시 내 쪽으로 돌아서서 말했다. 표정도 꽤 많이 풀려있었다. 아직 뾰루퉁한 표정이 남아 있긴 했지만 말이다. "강한 사람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빨리 선택하고 자신이 선택한 일을 행 동에 옮길 때는 다른 생각 같은 건 하지 않아요" 세헤라자드의 말이 내 마음에 와 닿았다. 소드엔매직을 플레이하는 게이 머라면 누구나 다 그럴 것이다. 재빠르게 판단하는 게이머는 오판을 내리기 쉽고, 여러 상황을 고려해 올바른 판단을 내리려 하는 게이머는 행동이 지 체되기 마련이다. 판단과 행동을 적절하게 병행하는 게이머가 진정한 소드 엔매직의 강자인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내가 '붉은 깃대의 군단'을 잃었을 때 얻은 교훈을 지금 나 는 전혀 써먹고 있지 못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엄청난 희생 을 통해 얻은 교훈을 말이다. 나는 그때 이후로 절대로 아무리 절박한 상황 이라고 해도 결코 감정에 흔들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어쩌면 그게 지금의 내가 어스넷에서 손꼽히는 게이머가 된 비결인지도 모르겠다(물론 아마 리 그지만 말이다) "라이짐은 자신이 살아 남아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그리고 현재의 자신은 약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구요. 그래서 감정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 었죠. 어머니께서 늘 해주시던 말씀을 가슴에 새긴 덕이라고나 할까요. 물 론 가슴에 새기는 것과 그것을 실천하는 것은 전혀 다른 별개의 문제겠지만 요" 세헤라자드가 말했다. "그래. 나도 네 말을 듣고 보니 라이짐이 나하고 비슷한 점이 많다는 걸 느껴. 나도 소드엔매직을 하다 보면 그런 선택을 해야 할 때가 종종 있거 든. 나, 이래봬도 고수야. 나도 강한 게이머라구. 그런데..."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런데 저를 죽일지 말지는 쉽게 결정하지 못하겠다는 말이지요?" 나는 가슴이 뜨끔했다. "별 수 없죠. 강한 게이머하고 강한 인간하고는 차이가 있으니까요. 강한 인간이 강한 게이머가 되기는 쉽지만 강한 게이머가 꼭 강한 인간이라고는 할 수 없으니까요. 사이버세계에서의 피해와 현실 세계에서의 피해는 다르 니까요. 현실 세계엔 세이브와 로드도 없고, 결정적으로 죽음이 진짜 죽음 이니까요." 세헤라자드가 말했다. 나는 기분이 상했다. 세헤라자드가 인간이든, 아니 든, 이런 말을 듣는다는 건 그 자체로 기분 나쁜 일이다. 제길. 그렇다고 해서 발끈해서 세헤라자드를 지워버릴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 행동이야말 로 내가 강한 인간이 못된다는 증거일 테니 말이다. "그럼 검사나 마법사로서 강하다는 것과 인간으로서 강하다는 것은 다른 말이라는 건가?" 나는 기분이 상하기는 했지만 그런 마음을 내비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말했다. 음. 이 정도까지 노력하면 세헤라자드도 내 마음을 알아차리긴 쉽 지 않겠지. "그런 말도 할 줄 아네요. 의외네요" 세헤라자드가 비꼬는 듯이 말했다. 그 말에 나는 화가 난다기보다는 창피 하다는 마음이 앞섰다. 나는 헛기침을 한 번 했다. "세헤라자드 너 몇 살이지?" 나는 화제를 돌리기 위해 이렇게 물었다. "열 일곱이에요...제 기억으로는..." 세헤라자드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세헤라자드는 열 일곱살 때 이미지 캡 춰되어 롬파일 형태로 오랜 시간 살아온 것이다. 아니 저장되 있었던 것이 다. "그 사이의 기억은 있니?" "너무도 많은 기억들...아마 상상도 못하실 거에요" 세헤라자드는 뭔가를 생각하는 듯한 눈으로 이렇게 말했다. 무슨 소리야, 이거? "저는 인간의 영혼이에요. 인간의 영혼은 자신의 기억을 모두 간직할 수 없죠. 기억은 마음 속에서 뒤섞이고 뒤바뀌어 결국에는 자신도 알아볼 수 없는 형태로 변한답니다. 그렇게 알아볼 수 없게 된 기억들을 무의식이라고 하죠. 하지만 저는 무의식이 없어요. 아니 있기는 있어요. 그러니까 영혼파 일이 되기 전, 열일곱 살 이전의 무의식은 갖고 있지요. 아마 제 모습은 천 년 만 년이 지나도 이 모습 그대로 일 거에요. 저도 잘은 모르겠지만 영혼 파일이 되기 전의 무의식이 저의 모습을 결정짓는 것 같아요. 하지만 지금의 저는 너무 고통스러워요. 제 영혼 파일은 작동될수록 확장 되는데 그건 곧 보고 듣는 모든 것을 완전히 기억하게 된다는 거에요. 감정 까지도요. 아까 당신이 저를 지우려고 했을 때 제가 느꼈던 두려움도 완전 한 형태로 보존돼 있어요. 누군가 고의로 그 감정을 활성화시키면 전 똑같 은 두려움을 그대로 다시 체험하게 돼요. 그리고 그렇게 활성화된 감정을 그대로 유지시키면 전 영원히 그런 두려움 속에 살아야 하는 거에요. 그래 서 전 항상 행복하고 즐거운 것들만 느끼며 살고 싶어요. 기억이 모두 그대로 보존된다는 것. 그건 상상과는 다른 일이에요. 사실 인간의 기억은 상상에 더 가깝죠. 하지만 저의 기억은 현실에 더 가까와요. 그건... 정말 고통스러운 일이에요" 세헤라자드가 말했다. 하지만 그 노인이 남긴 음성에는 고통을 느끼는 신 경회로를 차단했다고 했는데 어떻게 고통을 느낄 수 있는 걸까? 나는 그런 데 어떻게 고통을 느끼냐고 물어 보았다. "말씀대로 저는 모든 감각 기관을 잃었어요. 아버지 덕분이지요. 아버지 가 아니었다면 저는 아마 지금 이 순간에도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있을지 몰라요. 하지만 그건 물리적인 감각을 느끼지 않게 했다는 얘기에요. 마음이 아픈 건 없앨 수 없어요. 마음이 아픈 걸 없애려면 마음을 없애는 수밖에 없죠. 그리고 마음이 없으면 고통도 없지만 기쁨도 없죠. 그건 인간 이 아니에요. 다시 살아난 건 제게 있어 축복이죠. 하지만 전과 같은 사람으로 다시 살 수 없다는 건 저주에요..." 세헤라자드는 말끝을 늘였다. 나는 더 이상 뭐라고 물어볼 수가 없었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세헤라자드가 왜 내가 한 말에 그렇게 화를 냈 는지, 또 내가 얼마나 심한 말을 했는지를. 그제야 나는 진심으로 미안하다 는 생각이 들었다. "소드엔매직이 뭔지 아니?" 나는 세헤라자드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세헤라자드가 내가 했던 이야기들을 모두 기억하지 않기를 바라며. "온라인으로 되는 게임이라는 것 정도 말고는 모르겠는데요" 세헤라자드가 대답했다 "그래. 잠깐만. 내가 게임을 보여줄게" 나는 이렇게 말하고는 바로 데스크탑에 깔려있는 소드엔매직을 실행시켰 다. 웅장한 관현악 연주와 함께 오프닝 화면이 떴다. "SWORD&MAGIC V" 나는 타이틀을 보면서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사실 나 같은 게이머가 누 군가에게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게임을 소개시켜 준다는 것 이상의 호의는 없을 것이다. 나는 랩탑을 돌려 세헤라자드가 화면을 잘 볼 수 있도록 해주 었다. 사람의 눈은 앞밖에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게 내가 말한 소드엔매직 5야. 어때, 끝내주지?" 최근 게임의 추세에 비추어볼 때 그다지 화려하지도 않고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는 동영상 오프닝이지만 나는 그 점이 바로 소드엔매직 시리즈의 장 점이라고 생각한다. 일편부터 오 편까지 비슷한 테마 음악을 사용하고 (특 히 지휘관의 테마는 완전히 똑같다) 비슷한 오프닝을 조금씩 버전업 시키는 방식은 소드엔매직 매니아에겐 새 시리즈가 나와도 향수를 더해주고 흥미를 배가시키는 요소가 된다. "어떤 게임인지 좀 자세히 보고 싶군요" 세헤라자드가 말했다. "왜. 잘 안보여?" "제 말은 어떤 프로그램인지 살펴보고 싶다는 말이에요" 세헤라자드가 말했다. 나는 세헤라자드의 얼굴을 보았다. 그저 호기심 어 린 눈동자를 하고 있는 여자아이로밖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잠시 고민 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말, 내 데스크탑 안으로 들어가고 싶단 말이야?" 나는 조심스럽게 이렇게 물었다. "예. 좀더 자세히 알고 싶어요" 나는 바로 전날 밤에 있었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무리 상상에 가까 운 것이 기억이라고는 해도 도저히 잘못 기억할 수 없는 일을 말이다. "너, 내 테스크탑이 어스넷에 연결되 있는 거 알고 있니?" 그래도 나는 다시 한 번 조심스럽게 물었다. "예" 세헤라자드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꼭 그게 자기하고 무슨 관계 가 있느냐는 듯이 말이다. "너, 통신만 되면, 세계 어디든 갈 수 있다며?" "예" "그런데 널 믿으라구?" "전 인간의 영혼이에요. 어제 약속을 지키셨잖아요. 그러니 저도 약속을 지킬 수 있어요. 인간 대 인간으로!" 세헤라자드는 눈을 반짝이면서 말했다. "그래서 내가 못 믿겠다는 거야!" 나는 이렇게 잘라 말했다. "프로그램이라면 잘못 작동 할 수는 있어도 약속을 어기지는 않지" "하긴, 그렇군요. 여전히 당신은 절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거죠..." 세헤라자드가 말했다. 이번에는 별로 기분 상하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런 데 왜 나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 걸까? 나는 세헤라자드가 별로 기분이 나쁘지 않다는 사실이 다행스럽다...이거, 참. "그럼 한 번 보기는 하죠" 세헤라자드는 동영상으로 뜨는 오프닝을 유심히 지켜보기 시작했다. ...노을이 지고 있는 언덕. 한 기사가 나타난다. 갑옷과 투구는 찌그러져 있고 여기 저기 피 범벅이다. 기사가 긴 칼을 언덕에 꽂고 몸을 기댄다. 힘 든 전투를 막 끝냈는 지 아직도 호흡이 거칠다. 그때 들리는 인기척 소리. 기사는 고개를 돌려 언덕 밑을 바라본다. 나이가 많이 들어보이는 마법사 다. 마법사도 많이 지친 모습이다. 화려한 장식이 달린 가죽옷이 여기 저기 찢겨있고, 얼굴에는 피곤의 기색이 역력하다. 기사의 얼굴에 반가운 빛이 돈다. 칼을 내버려두고 뛰어가는 기사. 마법사를 부둥켜안는다. 마법사의 주름진 얼굴에 눈물이 흐르기 시작한다... "전편의 줄거리인 모양이죠?" 세헤라자드가 물었다. "응. 4편에서 살아남은 두 주인공이 재회를 기뻐하는 장면이야" 소드엔매직 시리즈의 공통점은 반드시 전편 프로리그의 우승자가 다음 편 오프닝의 주인공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드엔매직 매니아는 자 신의 캐릭터가 다음 작품 오프닝에 나오게 하기 위해 매주 토요일 밤 열 시 에 모이는 것이다. 단 여섯 시간의 플레이를 위해서 일주일을 기다리면서 말이다. 일주일 동안은 자신의 국가에만 접속할 수 있다. "정품인가요? 아니면 불법 복제?" 세헤라자드가 물었다. "난 소드엔매직 시리즈는 무조건 정품만 사" 나는 이렇게 말했다. 사실 게임을 불법 복제하는 일은 아주 오래 전, 게임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부터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어떤 복사 방지 방법을 쓴다고 해도 게임 제 작 회사가 불법 복제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증명된 사실이다. 그래서 게임회사는 정품을 산 사람만이 게임을 할 수 있는 다른 판매 전략을 구상 했다. 즉, 고유한 번호를 게임 하나 하나에 매겨, 그 번호를 가지고 있는 사람만 온라인에서 게임을 플레이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소드엔매직 시리즈 가 그 좋은 예다. 정품을 사지 않으면 온라인에서 게임을 즐길 수 없는 것 이다. 거기다가 아마 게임리그와 프로 게임리그를 만들어 아마리그에서 성 적이 좋은 몇몇은 프로 무대로 스카웃 되고, 프로들의 경기는 생방송으로 전세계에 중계된다. "정품을 사는 사람만 온라인을 즐길 수 있다... 좋은 착안이네요" 세헤라자드가 말했다. 당연하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집에서 혼자 하는 것과 온라인에서 즐기는 것이 다른가요?" 세헤라자드가 물었다. "집에서 즐기는 시나리오 모드는 결국 온라인에 가기 위한 준비운동 정도 에 불과해. 컴퓨터의 인공지능이야 뻔하잖아" 나는 이렇게 말한 다음, 사이를 두었다가 설명을 시작했다. "시나리오 모드는 몇 가지 다른 이야기가 있어. 1편에서는 하나 뿐인 단 일 시나리오였지만, 5편에서는 열 두 개가 되지. 이것도 물론 하루아침에 된 건 아니야. 1에서 하나, 2에서 셋, 3에서 다섯, 4에서 일곱, 그리고 5에 서 열 둘. 다시말해서 1에서 주인공이 볼 수 있는 엔딩이 하나였다면, 5에 서는 열 둘이라는 말이야. 6에서는 스무개의 엔딩을 볼 수 있다고 하던데" 나는 내가 줄줄 외다시피 하고 있는 소드엔매직의 역사를 이런 식으로 말 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주세요. 주인공은 정해져 있나요?" 세헤라자드가 물었다. "주인공은 자기가 정하는 거야.직업도, 외모도, 또 나이, 성별, 이런 것 들 모두 다 말이야. 요즘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모습을 스캔해서 게 임의 캐릭터로 사용해. 보통 직업에는 검사와 마법사, 이렇게 두 가지가 있지. 그래서 게임 제목 이 소드엔매직인거야. 검사는 보통 방랑 무사로 시작하지. 거기에서 누군가 에게 등용되어 병사가 되고, 공을 쌓아 기사가 되고 또 장군이 되기도 하 지. 하지만 꼭 그런 건 아니야. 1편에서는 이 길이 하나였지만, 그 후에는 모두 다른 시나리오 모드가 있어서 방랑무사에서 산적, 혹은 용병 대장이 될 수도 있게 만들어졌지. 마법사도 그래. 궁중 마법사가 되어 마법 기사단 을 운영하는 장군이 될 수도 있고, 재야에서 제자들을 모아 자기만의 용병 단이나 마법사 단체를 만들 수도 있지. 이게 소드엔매직이 가지고 있는 많 은 매력 중의 하나야" 나는 조금 의기 양양해져서 이렇게 말했다. 꼭 내가 만든 게임을 설명하 고 있다는 느낌이 들만큼 말이다. "그럼 소드엔매직의 목적은 뭔가요?" 세헤라자드가 물었다. "살아남는거지!" 나는 꽤 멋을 부리면서 이렇게 말했지만 사실 살아남는 게 소드엔매직의 목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내가 한 말은 사실 '끝까지 살아남아라!'라고 하 는 소드엔매직 광고 카피를 흉내내 본 것에 불과하다. 살아남는 게 목적이 라니? 현실 세계에서라면 살아남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에 그것이 목 적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본능이라는 것은 어떻게든 떨쳐버릴 수 없는 것 이니까. 하지만 게임에서는, 사이버 세계에서는 그렇지 않다. 누군가를 위 하여 또는 정의를 위하여 장렬하게 죽을 수 있는 것이다. 단지 살아남기 위 해서 아둥바둥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난 살아남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죽느냐 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 해. 현실과는 다르게 게임에서는 죽어볼 수 있으니까. 사이버 세계에서 조 차 살아남기 위해 온갖 짓을 다하고 싶진 않아. 나는 죽어야 할 때가 되면 누군가의 행복을 위해 최선을 다해 죽고 싶어" 세헤라자드는 내 말을 듣고 잠시 혼란에 빠진 듯했다. 사실 세헤라자드는 정상적인 죽음을 거부하고 사이버 세계에서 생명을 이어가는 존재 아닌가. 나는 그럴 의도로 한 말은 아니지만 세헤라자드에게는 자신의 존재를 비난 하는 듯한 말로 들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둘 사이에 어색한 침 묵이 흘렀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N:김상현 #8926/10199 ━━━━━━━━━━━━━━━━━━━━━━━━━━━━━━━━━━━━━━━━ 제 목:[탐그루] 영혼의 에뮬레이터 2 - 24 - 관련자료:없음 21/21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0-29 01:14 조회:1195 탐그루 # 마법은 마음이다 - 마음은 칼이다 # 세헤라자드가 먼저 말을 꺼냈다. 일부러 밝은 표정을 지어내며 말하고 있 는 게 역력했다. "그럼 어떤 이야기를 좋아하세요? 그러니까 어떤 시나리오 모드가 기억에 남으시냐구요" 세헤라자드가 물었다. "글쎄..." 나는 잠깐 생각에 빠졌다. 일개 병사로 시작해 장군이 되고, 나중에 쿠테 타를 일으켜 제국의 황제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그리고 있는 1편도 마음에 들었고, 또 대부분의 게이머들이 최고의 시나리오였다고 극찬하는 3편의 드 워프가 겪는 복수담의 이야기도 마음에 들었다. 나중에 드위프족의 장군이 되어 반란을 일으킨 자신의 원수를 해방군의 입장에서 쳐부수는 스테이지는 정말 가슴이 벅차다 못해 감동적이기까지 했었다. (사실 난 눈물까지 흘렸 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그 시나리오 말고도 얼마든지 좋은 시나리오가 많 이 있었다. "꼭 꼬집어서 뭐가 좋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나는 고민 끝에 결국 세헤라자드에게 내가 플레이했던 것 중의 최고 시나 리오는 최근에 마친 5편의 검사 시나리오였다고 말했다. 최근에 한 게 제일 나은 법이지, 하는 말까지 덧붙여서 말이다. "어떤 줄거린가요?" 세헤라자드는 얘기 하는 것 만큼 얘기 듣는 걸 좋아하는 모양이다. 아주 초롱초롱한 눈으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묻는 걸 보니 말이다. 나는 신이 나서 줄거리를 얘기해주기 시작했다. "내가 택한 주인공은 대륙의 중앙에 있는 활기찬 상업도시 출신이야. 그 런데 어느 날 도시의 귀족들에게 부모를 잃고 도망치게 되지. 그래서 방랑 을 하다가 몇 가지 이벤트를 거치면서(나는 여기서 산적에게 둘러싸인 요정 을 구출해주는 이벤트나 야영을 하고 있는 하프엘프 여자 마법사의 물품을 훔치는 일 따위의 설명은 그냥 지나치고 그냥 이벤트라고만 얘기했다) 용병 단에 들어가게 되지. 일개 용병단 병사로 시작한 주인공은 여기저기에서 들어오는 의뢰들을 성 공적으로 해결하고 십부장으로 진급하게 돼. 거기서 또 백부장으로, 그러다 가 용병단장의 위치에까지 이르게 되지. (이렇게 되지 않고 해방군에 가담 해 부모의 원수를 갚는 시나리오도 있지만 나는 지금 말하고 있는 시나리오 가 더 마음에 든다). 그리고 전쟁이 일어나고, 국왕에게 임무를 받은 주인 공은 적국 병사들을 모조리 쓸어버린 후 정식 장군에 봉해지지. (나는 그때 의 감동이 되살아나 침까지 튀겨가면서 말했다) 정식으로 장군이 된 다음 에 시나리오의 분기점이 생겨" 나는 여기서 진행되는 세 갈래를 모두 플레이 해봤기 때문에 자신 만만하 게 설명을 시작했다. "장군이 되자마자 원수를 갚을 수도 있어. 그러면 주인공은 국왕의 처벌 을 받고 죽게 되지. 아니면 직접 일개 군단을 이끌고 수도를 쳐 국왕도 죽 여버릴 수도 있고" 하지만 이 시나리오는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한다. 꽤 이름 높은 아마 게 이머도 이 엔딩을 보기 위해 소드엔매직 온라인 게시판에 세이브 파일을 올 려달라고 말하기까지 했으니까 말이다. "아니면 기다렸다가 원수가 먼저 쳐오기를 기다리는 시나리오도 있어. 귀 족을 찾아가서 원수를 갚겠다고 말하고 돌아오면 되는 데... 그건 아까 말 한 왕이 되는 것보다는 조금 쉬워. (라고 말했지만 역시 극악에 가까운 난 이도를 가진 시나리오다) 그 귀족이 모함을 해서 주인공은 국왕 군대의 추 적을 받게 되거든. 그러면 그 군대들을 다 쓸어버리고 그대로 원수를 갚을 수 있어. 그리고 주인공은 다른 나라로 망명을 하게 되지" "세 갈래가 있다면서요?" 나는 이 시나리오는 조금 말하기가 싫었지만, 그래도 얘기를 해줘야 했기 때문에 천천히 말을 시작했다. "...그러니까 국왕의 장군이 되고, 원수를 갚지 않는 거야. 그럼 대장군 까지 올라가게 되고, 왕국은 영원하다...뭐 이렇게 끝나는 거지. 이게 가장 쉬워" 물론 이 모드에도 해방군이나 적군과 싸우는 시나리오가 마련되어 있긴 하지만 말이다. "그렇군요. 어떤 게 가장 마음에 드세요?" 나는 세헤라자드의 눈을 바라보았다. 나를 시험하는 눈빛이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먼저 원수를 갚기 위해 장군이고 뭐고 다 내 팽개치고 적을 죽이는 시나리오가 좋다고 하면 세헤라자드는 어떻게 생각할까? 내가 강한 게이머라고 생각할까? 혹시 내가 강한 척 하는 걸로 보이지는 않을까? 마지 막에 말한 안일한 시나리오를 좋아한다고 하면? 그러면 세헤라자드는 나를 나약하다고 생각할까? 아니면, 내가 일부러 그런 대답을 했다고 생각하고 나를 좀 다르게 보지 않을까? 그런데 고민을 하다보니, 나는 내가 좀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세헤라자드가 말했듯이 어차피 강한 게이머가 강한 인간 은 아니니까 말이다. "다 좋아. 굳이 말하자면 두 번째가 마음에 들지만 말이야" 나는 이렇게 말했다. 모호하게 말하기로 한 것이다. 잔머리 써서 기껏 나 온 대답이 이정도라니, 원. 어찌되었건 세헤라자드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 다. 그런데 그 표정을 보니 어떤 대답을 했다고 해도 그런 표정을 지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별로 관심도 없었던 모양이로군. "그런데 소드엔매직에 마법사 얘기는 없나요?" 세헤라자드가 물었다. "물론 있지" 사실 온라인에 들어가보면 마법사 계열을 택하는 게이머들도 꽤 많이 있 다. 초반 생존율이 극히 낮은데도 말이다. 하지만 마법사 하나가 검사 백을 당해 낼 수 있게 되는 건 누구나 다 잘알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게이 머들이 자신은 검사가 되고 마법사를 친구로 두곤 한다. 나도 마찬가지다. 설령 마법사를 게이머로 택한다고 해도 반드시 검사를 친구로 만들기 마련 이다. 그렇지 않으면 마법사가 강해질 때까지 생존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나는 마법사로 하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아" 나는 솔직하게 이렇게 말했다. 마법사는 나중에 아주 강해지지만, 초반에 고생을 너무 많이 하게 되기 때문에 별로 하고 싶지가 않아서 1부터 마법사로 여행을 하는 건 별로 해보 지 않았다. 게다가 나중에까지 검사의 도움 없이는 마법을 걸 시간을 벌기 가 아주 어렵기 때문에 강해졌다고 해서 검사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 건 아니니까 말이다. (2편 온라인 게임의 프로 리그 우승자는 주인공과 친 구, 둘 다 검사였다. 그래서 3편에는 검사끼리 플레이하는 경우에는 결코 우승을 할 수 없도록 프로그램 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물론 그래도 시나리오가 다르니까 다 플레이 해보기는 했다. 극악의 난이 도를 가진 수많은 경우를 다 말이다. (아마리그에서라도 인정받는 게이머가 되려면 이 정도쯤은 해 낼 수 있어야 하는 법이다) "하지만 별로 얘기하고 싶을 만큼 좋은 시나리오는 없었어" 사실, 굳이 말하자면 몇 가지 시나리오를 얘기할 수 있었지만 나는 참았 다. 레벨을 올리기 위해서 했던 수도 없이 많은 전투들을 일일히 다 말하기 가 싫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것보다는 세헤라자드가 아무리 흥미를 보인다 고 해도 이젠 얘기를 하는 게 지루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렇군요. 그런데 소드엔매직은 온라인에서는 어떻게 플레이하나요?" 세헤라자드가 물었다. 음. 그러고 보니 세헤라자드는 소드엔매직 온라인 이 어떻게 진행되는 지 모르겠군. "그러니까 시나리오 모드와 같은 시스템이야. 개인의 영역이 있고, 개인 이 지휘하는 단체를 운영하는 영역이 있지. 사실 그래서 자유도가 높다는 평가를 내리는 사람도 있지만...하여간 온라인은 좀 달라" 나는 소드엔매직 온라인을 설명했다. "온라인에서는 누구나 똑같이 시작해. 시나리오 모드에 있는 대륙에서 말 이야. 게임이 출시되고 꼭 한 달 뒤부터 온라인 서비스가 시작되는데, 온라 인에서는 모두 다 그냥 십부장으로 시작해. 그러다가 조금씩 성장해서...결 국 대륙의 패권을 놓고 다투게 되지" 나는 이렇게 간단하게 세헤라자드에게 소드엔매직 온라인을 설명해 주었 다. 내 능력으로는 이 정도 이상의 설명은 할 수 없었다. 그 복잡한 시스템 과 개인 관리 커멘드, 또 단체 관리 커멘드, 또 영역이라는 개념을 설명할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우승을 하게 되면, 그러니까 대륙의 패권을 차지하게 되면 그 시리즈의 온라인은 끝나게 돼. 물론 아마리그만. 프로리는 누가 대륙의 패 권을 차지해도 계속 돼. 끝날 때는 우승한 사람의 부하로 끝날 수도 있고, 우승한 사람의 부대에 짓밟혀 끝날 수도 있지. 게임 안에선 특별히 정해진 규칙이 없어... 그냥 토요일 밤 열시부터 시작되는 정규 리그가 있을 뿐이 지" 나는 이렇게 말했다. 가슴이 좀 저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이게 도대체 무 슨 설명이란 말이야? 보지 않고 말로만 들어서는 아무 것도 알 수 없을 텐 데. 하지만 다행히도 세헤라자드는 여전히 호기심 많은 눈빛을 하고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두 나라만 붙어서 싸우는 베틀넷도 마련되어 있기는 해. 하지만 이 용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아. 정규 리그 시간이 아니라 다른 국가는 움 직이지 않으니까 문제가 생기는 경우도 많거든. 응원군이 올 수도 없고, 연 합 공격도 힘들지. 방어하는 쪽에서는 변수를 계산하기도 어려워서 잘 응하 지도 않아. 그래서 거의 사람들이 가지 않는 모드이기도 해" 나는 세헤라자드에게 이렇게 설명해 주었다. "프로 리그가 아니라 아마 리그에서 뛰신다면서요?" 세헤라자드가 말했다. 나는 좀 설명을 더 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응. 두개의 대륙이 마련되어 있어. 아마리그와 프로리그. 아마리그는 그 야말로 아마리그야. 정식 선수도 아니고, 그저 게이머일 뿐이지. 가끔 중계 방송도 해주지만 프로리그에 비하면 시청률도 낮고, 인기도 별로 없지. 그 리고 다음 6의 오프닝 동영상의 주인공도 프로리그 우승자지 아마리그 우승 자는 아니야" 나는 이렇게 말했다. 나 자신을 깎아 내리기는 싫었지만 별 수 없었다. 사실대로, 그냥 말하는 수밖에. 하지만 이대로 물러서기는 싫었다. "하지만 난 한 사람의 게이머로서 프로리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대기 업 로고를 붙인 군대를 조종하는 것도 싫고 말이야. 4편 우승자는 화장품 회사 소속 프로선수였어. 상상이 가? 화장품 회사 로고를 등에 붙이고 달려 가는 기사가? '여자는 아침에 촉촉이 젖어든다' 같은 말로 마법의 주문을 거는 마법사가?" 나는 조금 흥분까지 해가면서 이렇게 말했다. 사실, 솔직한 말로 나는 아 직 프로리그에 참가할 만한 실력이 되지 않는다. 아마 그래서 이렇게 더 과 장되게 말하는지도 모르지. "그래도 프로 게이머를 지망하신다면서요" 세헤라자드가 물었다. 꼭 아픈 구석만 찌른다니까. "그래. 맞아. 언젠가 나도 화장품 로고를 붙인 부대를 이끌지도 모르지. 하지만 별 수 있겠어? 현실이 그렇고, 내 꿈이 그런데. 그리고 나는 그런 것이 꼭 자본의 논리와의 타협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다국적 기업들이 자 본의 논리를 강요한다면, 나도 내 나름대로 나의 의지를 강요할 수 있는 부 분들이 반드시 있다고 생각해. 그들이 내 등에 광고를 붙일 순 있을지 몰라 도 내 마음에도 광고 카피를 붙일 순 없으니까. 프로 게이머가 된다는 것은 내가 게임을 하면서도 먹고 살고 싶다는 거지 게임 안에서도 돈의 노예가 되고 싶다는 뜻은 아니야" 나는 이렇게 말했지만, 말하면서도 내 말이 얼마나 앞뒤가 맞지 않는지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싫어한다. 그러나 원한다. 타협은 아니지만 타협과 비슷하기는 하다... 뭔가 생각들이 많기는 한데 이리저리 마구 엉켜 있어 확실하지가 않다. "그렇다면 강한 인간인지도 모르겠군요..." 중얼거리듯이 세헤라자드가 말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싫어하는 일이라고 해도 꿈을 위해서 마다하지 않는다면, 또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그게 바로 강한 인간 아니에요? 마치 라이짐처럼요" 세헤라자드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별로 수긍이 가진 않았지만 (솔직히 잘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칭찬을 하고 있다고 생각이 되었기 때문 이다. (순전히 눈치로만 말이다) 하지만 세헤라자드의 말에 조금은 이해가 가는 부분이 있었다. 그건 소드엔매직 온라인이 인생과 비슷하다는 점이다. "그래... 인생의 강자가 게임의 강자가 아닌지는 몰라도... 그래도 소드 엔매직 온라인은 인생과 비슷해" 나는 세헤라자드에게 이렇게 말해주었다. "어떤 점이요?" 입력을 기다리는 커서처럼 눈을 깜박거리며 세헤라자드가 물었다. "세이브가 없어, 소드엔매직 온라인에는. 그리고 실력이라는 것도 결국에 는 자기가 평가내리기 마련이거든. 센 플레이어의 부하가 되어 끝까지 살아 남는 게 훌륭한 게이머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자기가 장군이 되어 상대 방을 쳐부수어야만 훌륭한 게이머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물론 리그의 승자는 대륙을 통일한 단 한사람의 게이머지만 말이야..." 나는 이렇게 세헤라자드에게 말했다. 말하는 동안, 내 목소리가 내 귀에 들리는 것이 즐거웠다. 어쩐지 조금은 더 현명해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뿐만이 아니야. 십부장으로 출발할 때, 채팅 등으로 다른 게이머들을 많이 알아 놓은 게이머는 더욱 유리하지. 인간적인 관계가 있으면 어떻게든 나중에 도움을 받을 수도 있고......" 나는 소설 삼국지에 나오는 주인공들처럼 서로 첫눈에 마음이 맞아 도원 결의를 했던 4편의 우승자들을 떠올리면서 말했다. 어스넷 여기저기에서 읽 을 수 있는 그들의 이야기는 가슴 벅찬 감동의 대장정이었다. 세 명의 아마 게이머가 끝까지 함께 하기로 맹세했다. 그들의 세력이 점 점 커지고 대륙의 통일에 가까와지자 그들의 리더격인 게이머에게 프로 게 이머로의 스카웃 제의가 들어왔다고 한다. 그 리더는 단번에 거절했다고 한 다. (아마 게이머들이 이런 제의를 거절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이다) 또 온라인과 오프라인 양쪽에서 이들을 비방하고 이간질하는 동안에 도 이들은 서로의 맹세를 바탕으로 끝까지 서로를 믿었다. 다름 팀들이 그 들을 이간질 시키기 위해 사용했던 전략들이 하나하나 적혀 있었는데 정말 비열한 수법들이었다. 가장 감동적인 이야기는 그 팀 중에 한 명이 교통사고를 당해 식물인간이 된 이야기다. 식물인간이 된 그 게이머가 매주 토요일 소드엔매직의 세계가 열리는 날에는 반드시 깨어 일어나 플레이를 했다는 얘기다. 정말 믿을 수 없는 얘기지만 그 병원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그걸 증명하는 글들을 무수히 올려 놓았다. 그런데 그 게이머의 캐릭터가 대륙의 패권을 놓고 싸우는 마 지막 전투에서 살해 당한 것이었다. 그것도 전투에서의 죽음이 아니라 적의 마법사에게 암살 당한 것이다. (이 게이머의 교통 사고 소식은 본인의 부탁 으로 끝날 때까지 비밀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자신의 캐릭터가 암살 당한 그 게이머는 그후 영영 깨어나지 못했 다고 한다. 나머지 두 명의 게이머는 그 전투에서 충분히 대륙을 통일할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삼개월에 걸쳐 암 살자 마법사를 찾아다녔다고 한다. 언제든 대륙을 통일할 수 있는 힘이 있 었고 적의 세력이 재기를 꿈꾸고 있는 와중에 말이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대륙을 통일했다. (그래서 5편의 오프닝에는 두 사람만 나오는 것이다) 그 들이 대륙을 통일 할 때 최정예 부대의 이름은 '죽은자의 깃발' 이었다고 한다. 그런 부대는 소드엔매직 온라인 역사상 처음이었고 또 마지막일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 부대는 죽은 자가 장군이었으니까......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많은 생각을 했다. 그리고 내가 내린 결론은... 끝까지 살아남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최선을 다해 죽는 게 더 중요하다 는 것이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N:김상현 #8995/10199 ━━━━━━━━━━━━━━━━━━━━━━━━━━━━━━━━━━━━━━━━ 제 목:[탐그루] 영혼의 에뮬레이터 2 - 25 - 관련자료:없음 25/25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0-30 01:51 조회:1174 탐그루 # 마법은 마음이다 - 마음은 칼이다 # "그럼 소드엔매직 온라인에선 한 번 죽으면 끝인가요?" "중반 이후에 죽으면 다시 시작하는 게 별 의미가 없어. 주변의 병사들이 다 NPC인데 누구와 같이 대화하겠어? 혼자 대륙을 떠돌아 다니는 사람들도 가끔씩 있기는 한데 그 대륙의 역사와는 무관하게 그냥 살아갈 뿐이지. 그 것도 아주 운이 좋아야 오래 방랑할 수 있어. 몬스터들도 이미 엄청난 레벨 업을 한 뒤니까. 플레이어 혼자서는 아무리 레벨업을 해도 살아남을 수 없 어. 하지만 초반에 죽으면 다시 얘기가 좀 다르지. 완전히 새로운 캐릭터로 다시 시작해도 유리한 점들이 있어. 일단 플레이했던 게이머는 적어도 그 세계에 대한 많은 정보와 경험을 갖고 시작하니까. 그리고 아는 게이머들에 게 도움을 받을 수도 있고. 어쩌면 이 점도 인생하고 비슷한 점인지 몰라" 나는 이렇게 말했다. 이거, 나도 점점 더 똑똑해 지고 있는 느낌인 걸. 내가 캐릭터라면 지성 포인트가 5점은 상승한 기분이야. 나는 이렇게 생각 하고는 그냥 피식 웃어버렸다. 내가 나 자신을 게임하고 비교하다니. 이거, 조금 어이가 없군. 나는 내 테스크탑을 바라보았다. 모니터에는 내가 건설한 국가가 전경으 로 보이고 있었다. 내가 만들어 놓은 왕궁과 요새, 성, 교회, 마법 학교 등 이 한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것들을 지을 때 느낄 수 있었던 기쁨을 하나 하나 곱씹어 보았다. 자랑스러운 '회색 용병 군단', '죽지 않는 기마대', '노란 깃대 군단', 그 리고 '검은 사자 군단'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지금 내가 부팅 시킨 것은 온 라인 상에서의 부대이기는 하지만 실제 온라인 시간이 아니면 내정밖에는 할 수 없기 때문에 실제 온라인에서의 긴장감이나 재미는 떨어진다) 오늘밤 내 전략은 인도 게이머나 일본 게이머와 손을 잡고 중앙에 버티고 있는 세계 최강자들과 겨루어 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는 것이다. 그러자 면 외교를 벌여야 하는데, 컴퓨터와 달리 게이머들은 어떤 협상도 쉽게 응 하는 법이 없다. 말하자면 점수치가 없는 것이다. 컴퓨터가 운영하는 국가 라면 호감이 높고 적대율이 낮다면 간단하게 외교가 가능하겠지만 인간은 결코 그런 숫자로 표현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오늘은 순간 순간의 기분에 따라서 움직이다가도 다음날에는 정확하게 따 져본 실리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것이 인간이다. 한마디로 예측할 수 없다는 말이다. 소드엔매직 온라인의 재미가 바로 여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마우스를 움직여 군사들을 훈련시키고, 그사이 건물들을 짓게 하고, 일부 병사들은 농촌에 보내 대민 지원도 하게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마법학교요" 아무 말도 없이 내가 플레이하는 것을 지켜만 보던 세헤라자드가 말했다. "마법학교는 왜 운영을 안 하세요?" 그러고 보니 그랬다. 지금은 레벨업이 충분히 되어있기 때문에 별 의미가 없는 곳이지만, 마법학교도 게임의 요소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그런데 이 렇게 까먹고 다른 일만 하고 있었다니. 실시간 전략게임은 이런 게 실력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한 가지 일에 너무 집중을 하다보면 다른 일은 잊 어버리기 쉬운 것이 인간이다. 게다가 시간이 실제 시간보다 훨씬 빠르게 진행되는 이런 게임에서 한 순간이라도 마우스를 다른 곳에서 놀렸다가는 꽤 성장시킨 유니트가 완전히 방치되어 쓸모없어 지는 경우도 있다. 그럴 경우, 최악의 경우겠지만, 반란이나 그 비슷한 일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 다. 나는 마법학교를 클릭하고 교장과 얘기를 나눈 뒤, 지원금을 약속하고 다 시 군사들을 훈련시키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마법에는 별 관심이 없으신 모양이에요. 검사가 더 좋으신가 요?" 세헤라자드가 물었다. "솔직히 좀 그래. 마법은 어쩐지 좀 거짓말 같거든. 검사가 싸우는 건 진 짜 같은데 말이야" "그만큼 게임에 많이 몰입했다는 말일 수도 있겠네요. 게임이 꼭 인생 같 다고 느끼시니까 그런 거 아닐까요?" 세헤라자드의 말은 일리가 있었지만 옳은 말은 아니었다. 만약 내가 검사 만을 위주로 게임 진행을 시켰다면 소드엔매매직 온라인에서 이만한 세력 을 구축하기란 불가능했을 것이다. 검사 부대를 정확한 시간에 정확한 위치 로 움직이는 것 만큼 마법사를 효과적으로 운영하는 일도 소드엔매직에서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니까 제목이 소드엔매직 아니겠는가. 마법사의 능력은 현대 문명이 할 수 있는 일들을 거의 다 할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보를 종합하고 그 결과를 알려주는 일부터 시작해서 건물을 짓고, 땅을 파고, 물을 옮기고, 불을 만들고, 날씨를 조종하고, 마 지막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까지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마법사 의 능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게임을 하고 있는 게이머의 마음을 바꿀 수는 없는 일이다. 만약 그게 가능하다면, 나는 온라인에서 마법사를 키우기 위해 모든 방법 을 다 동원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인도 게이머와 손을 잡고 일본 게이머를 쓰러뜨린 다음에 다시 인도 게이머를 쓰러뜨리는 전략을 구사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소드엔매직 온라인의 세계는 오로지 힘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강한 자만 이 살아남고, 약한 자는 모두 죽거나 사라져버리는 세상이다. 어쩌면 강하 고 약한 차이는 게임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정해져 있는지도 몰라. 나는 생 각했다. 재능이라든가, 원래 알고 있었던 인맥이라든가 하는 것 말이다. 그 런 것들은 노력으로 쉽게 따라잡을 수 없는 것들 아니겠는가. 사실 프로리그는 더하다. 아이템이나 부대를 얻기 위해 프로 게이머들 사 이에서 오가는 뒷돈에 대한 소문도 드물지 않게 들리고, 획득한 아이템이나 병사들을 팔아먹기 위해 어스넷에 광고까지 띄우는 형편이다. 결국 돈 있는 게이머들이 더 강해지는 건 당연한 이치고 가장 돈을 많이 투자한 스폰서를 가지고 있는 게이머가 리그에 우승을 하곤 한다. 소드엔매직 2편에서는 바로 이런 문제가 사회문제로 대두되기도 했는데, 사실 그건 인식 부족에서 오는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 떤 프로리그든 돈과 관계가 없는 리그가 있겠는가. 야구, 축구, 농구... 사 실 모두가 순수한 게임 플레이어들의 모임이라고 착각하게 만들기 쉽지만 실은 모두 돈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걸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아니, 돈 없이 어떻게 유능한 선수를 팀으로 불러올 수 있담). 구단주간의 야합을 통한 게임 조작도 있다는 말까지 있으니 말이다. 그렇 다면 어쩌면 돈 많은 자가 이긴다는 법칙은 프로게임과 마찬가지로, 또 세 상과 마찬가지로 소드엔매직 온라인에서도 진실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었다. 어쩌면 그런 점들 또한 소드엔매직이 진짜 인생을 닮았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생이든 소드엔매직에서든 예외는 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예외가 되고 싶다. 어찌되었건 그 사건 이후 소드엔매직 온라인 회사에서는 아예 아이템과 병사들을 자신들이 구매하고 그것을 약간의 이윤을 붙여 필요한 유저들에게 파는 서비스까지 하게 되었다. 그래서 아마 게이머중에는 아예 아이템을 모 으고 병사들을 모아 현찰을 받고 파는 일을 주업으로 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물론 다른 온라인 게임처럼 그냥 현상금을 노리는 PK(Player Killer) 사냥꾼도 존재하지만 말이다. PK 사냥꾼이란, 온라인 게임에서 전문적으로 다른 플레이어만을 골라서 죽이는 게이머들을 말한다. 이 PK들은 아주 초창기 온라인 게임부터 있었다 고 한다. 초기에는 게임 회사에서 직권을 써서 PK를 조종하는 게이머의 아 이디를 정지시킨다던가 하는 원시적인 방법을 썼다고 한다. 하지만 온라인 게임이 발전하자 게임 회사들은 PK도 얼마든지 흥미 요소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하고 PK의 목에 현상금을 거는 일을 시작했다. 이것이 게이머가 온라인 게임에서 우승 상금이 아닌 돈을 벌 수 있게 만들어 준 최초의 요소가 되었 다. 현상금 사냥꾼도(나는 플레이 해보지 않아서 잘 모르지만) 재미가 있는 모양이다. 물론 돈이 벌리니까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온라인 게시판에 가보 면 PK 사냥꾼들이 상당한 인기를 누리고 있다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단순 히 돈을 벌기 위해 게임의 목적과는 상관없는 직업들이 만들어지는 걸 보면 과연 온라인 게임을 그냥 세상에 비교하는 일도 가능할지 모르겠다는 생각 도 든다. 어찌되었건 돈이라는 면에서 아마리그는 조금 더 나은지 모르겠다. 돈으 로 거레를 하는 게이머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프로리그처럼 당 당하게 하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적어도 아마 게이머라면 돈으로 아이템을 사고 파는 일을 부끄럽게 생각한다. "어쩌면 이곳이 바로 세상의 축소판인지도 모르겠군" 나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어쩌면 세상이 이렇게 돈 많은 자들만 살아남는다는 걸 숨기기 위해 만 들어낸 공간인지도 모르지요. 이 안에서 그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말을 들으면 꼭 게임 안에서만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거든요" 세헤라자드가 말했다. 나는 모니터를 들여다보았다. 화면에는 소드엔매직 의 세상이 있었다. 과연 그럴까? 소드엔매직이 세상이 원래 그런 곳이라는 것을 숨기기 위한 도구였단 말인가? 하지만 왜? "물론 온라인 상에서 게이머들 사이에 직거래도 가능하지만, 직거래는 불 법 CD를 통신으로 사는 것만큼이나 위험한 일이야. 계약서 한 장 없이 순전 히 믿음만 가지고 하는 일에는 사기꾼들이 끼어 들기 마련이거든. 내가 너 를 내 데스크탑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이유가 어쩌면 이런 데 있는 지도 몰라" 나는 내가 잘 모르는 얘기를 하는 것보다는 이렇게 말하는 게 낫겠다 싶 어서 생각나는 대로 말했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프로 게이머가 될 수 있는 거죠?" 세헤라자드가 물었다. "아마리그에서 두각을 나타내면 자연히 대기업에서 스카웃 해가기 마련이 야. 특히 재미있고 박진감 넘치는 플레이를 하는 게이머들이 일 순위야. 이 기고 지는 것보다는 재미를 더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으니까...사실 나도 정 면 승부를 더 즐기거든. 방어보다 말이야. 어쩌면 조만 간에 연락이 올지도 모르지 뭐" 나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돈이 필요하다고 해서 함부로 아이템을 팔거나 현상금 사냥꾼으로 나서지 않은 이유도 사실 여기에 있다. 그런 일을 해서 는 프로 게이머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돈을 받고 물건을 팔거나 현상금을 받는 일 자체가 프로의 일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꼭 꿈을 이루시길 빌겠어요" 세헤라자드가 진심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그 표정을 보면서 어쩐지 힘이 솟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이거 배가 고프군. 밥 먹은 지 얼 마 지나지도 않았는데...가 아니군. 밖에는 벌써 해가 져서 어두워져 있었 다. 나는 시계를 보았다. 이거, 벌써 소드엔매직 온라인을 준비해야할 시간 이로군. "세헤라자드. 얘기는 조금 있다가 듣기로 하자. 지금 나는 소드엔매직 온 라인에 들어가야 하거든" 나는 세헤라자드에게 이렇게 말하고는 데스크탑을 켜고 온라인 계시판으 로 들어가 중요한 정보를 체크했다. "저도 좀 보여주세요" 세헤라자드가 말했고, 나는 조금 귀찮긴 했지만 작은 CD 케이스 몇 개를 쌓아 세헤라자드가 내 데스크탑을 잘 볼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 내가 정보를 검색하기 시작한지 얼마나 지났을까. 세헤라자드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음...그러니까 지금 운영하고 계시는 국가는 대륙의 남단에 위치하고 있 군요. 북으로 두개의 국가와 닿아있고 동으로는 인도 게이머가 운영하는 국 가가, 서로는 일본 게이머가 운영하는 국가가 있구요" 세헤라자드의 말은 옳았다. 전체 지도도 보지 않고 그냥 게시판만 읽고 이정도까지 알아내다니. "너, 생각보다 머리가 좋구나" 나는 반 농담조로 이렇게 말했는데, 세헤라자드는 내 말에 기뻐하면서 웃 음을 지었다. 그 미소를 보니 나는 내 가슴에 뭔가 뿌듯한 것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아마 오늘 밤에 대세가 결정날 지도 몰라. 이 대륙의 남단을 차지하는 강자에 의해서 말이야" 나는 세헤라자드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말은 진실이었다. 그리고 아마 이 대륙의 남단을 차지하는 게이머는 거의 분명히 대기업에 스카우트 되어 프로 게이머가 될 거였다.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밤 열 시가 다가오자, 나는 소드엔매직을 부팅시키고, 온라인에 대기 접속을 해 놓았다. 소드엔매직의 방대한 대륙에는 수 백 만명이 넘는 게이머들이 플레이를 하고 있다. 아무리 초전도 케이블이라고는 해도 쉽게 접속이 되지는 않는다. 미리미리 대기접속을 해 놓아야한다. 조금만 신경을 쓰면 늦지 않을 수 있다. 할 수 있는 데 하지 않는 게이머는 믿음을 얻을 수 없다. 훌륭한 게이머에게 약속은 생명과 같은 것이다. 약속은 믿음이고 믿음 위에서만 무엇인가 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현실 세계도 그렇겠지ㄳ 사이버 세계에서는 더욱 그렇다. 마침내 접속이 되고 소드엔매직이 열렸다. 어디선가는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고 또 어디선가는 협상과 평화가, 또 어디선가는 살인과 약탈이, 또 어 디선가는 예술 공연과 종교행사가 열리고 있는 곳. 바로 소드엔매직의 대륙 이 열렸다는 말이다.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마우스를 잡았다. "이걸 잡으면 흥분이 되. 알아? 세헤라자드?" 나는 긴장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세헤라자드는 대답은 하지 않았지 만 고개를 끄덕이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어쩐지 오늘은 평소보다 더 긴장이 되는 것 같군. 나는 중얼거렸다. 이제부터 나는 대륙의 남단에 위치하고 있는 사우스타니아라는 국가의 오 스만 '신중' 지그프리드 5세가 된다. 하지만 내게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 다. 나에게는 내가 '나'라는 사실만이 중요할 뿐이다. 물론 다른 사람들은 그가 누구건 상관하지 않는다. 동쪽의 인도인이 남자 건 여자 건, 서쪽의 일본인이 이름이 나까무라건 다케다건 아무 상관없다. 그저 나에게는 사우 스바빌로니아의 네버밍크와 에도다이묘의 올웨이즈해피라는 이름만이 중요 할 뿐이다. 게임이 시작되었다. 나는 마우스를 움직여 먼저 사우스바빌로니아와 에도다이묘에 사자를 보 냈다. 일단 중앙으로 치고 나가기 위해서는 둘과의 협력이 절대적으로 필요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국경의 수비는 한 층 더 강화해야 한다. 그렇지 않았다가 낭패를 본다면 그건 프로 게이머는 커녕 아마추어 게이머 로서의 자격까지도 의심스러운 일이다. 내가 대륙의 중심부에 자리잡기 위해선 지금 중앙에 있는 미들렌드와 에 브라함링컨을 쓸어버려야 한다. 사실 사우스바빌로니아와 에도다이묘의 존 재는 위협적이기는 하지만 중앙의 미들렌드와 에브라함링컨에 비하면 그리 큰 위협은 아니다. 그 둘은 초반에 온라이나에서의 다양한 인맥으로 중앙 에 자리잡는 데 성공했다. 중앙에 국가를 세운다는 것은 가장 큰 발전 가능 성을 가진다는 말이다. 교통의 요지일 뿐만 아니라 자원도 풍부하기 때문이 다. 그들은 서로 협력하면서 조금씩 영토를 확장하고 있다. 이럴때 남쪽의 세 국가가 연합을 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렇지만 내 의지대로 되어 줄지는 알 수 없다. 에도다이묘는 쪽바리 (이 런 표현을 용서하기를) 라는 말이 절로 나올 만큼 얍삽한 존재다. 내가 조 금만 군사력을 키웠다 싶으면 미들랜드에 사자를 보내 미들랜드가 공격해오 도록 만드는가 하면, (물론 내가 미들랜드와 협약을 맺지 못하도록 지독한 스파이 작전도 병행한다) 어느 정도 군사력이 강해졌을 때에는 사우스바빌 로니아에 대사를 파견해 나를 위협했다. 물론 나도 국경을 튼튼히 하고 외교를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 대처해나가 고는 있지만, 사실 이제 남쪽의 세 국가는 언제 어느 국가가 먼저 도발할지 모르는 팽팽한 긴장 상태에 있다. 아마도 내 판단으로는 오늘 중에 셋 중 하나는 끝장을 보게 되지 않을까 싶다. 이제는 그럴 때도 되었고, 이쯤에서 정리가 되지 않으면 중앙으로 나가는 건 꿈도 꿀 수 없게 된다. 조금만 더 미들랜드와 에브라함링컨에게 시간을 줬다가는 그들은 남부에 있는 세 국가 가 다 연합해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을 대국으로 성장할 것이다. 나는 다시 한 번 숨을 가다듬었다. 이제 대사가 올 때가 된 것이다. 그런 데...나는 에도다이묘에서 온 대사를 보고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자식..." 나는 나도 모르게 험한 말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때문에 세헤라자드도 덩 달아 놀라면서 나를 처다 보았다. "친구. 이제 답장을 쓰지 않은 벌을 받을 시간이야" 에도다이묘가 보낸 대사는 바로 매일 같이 편지를 나누던 내 친구였다. 이런. 나는 배신감을 느꼈다. 이 친구가 에도다이묘 밑으로 들어갈 줄은 꿈 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어떻게 시작하자마자 에도다이묘의 신하가 될 수 있 었을까? 아마 오래 전부터 계획을 세우고 에도다이묘의 군주, 올웨이즈해피 의 부하가 되기 위해 개인적으로 접촉해 왔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동 안 내가 편지로 보낸 내 부대에 관한 자료들이나 혹은 내가 아무 생각도 없 이 했을 군사 기밀들이 올웨이즈해피에게 새어나갔는지도 모른다. 나는 숨을 죽였다. 세헤라자드는 내게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읽었는지 따라서 긴장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마 홧김에 지워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겠지만 지금 나는 그런데 신경쓸 겨를이 없다) "내 제안은?" 나는 묻기가 겁나기는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거절이야. 내 군주가 선전포고를 전하라고 해서 온 거야" 나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친구 녀석의 목을 베어버리라고 명령하고 싶 은 것을 겨우겨우 참을 수 있었다. 대사의 목을 베는 일은 폭군이나 하는 일이다. 나는 칼로 세운 나라라는 말을 들을 만큼 수 없이 많은 사람을 죽 여왔지만, 결코 대사로 보내진 게이머나 사로잡은 상대 게이머를 죽인 적은 없다. 그게 내 원칙이었고 그 덕에 명성도 유지할 수 있었고, 또 이 자리까 지 올라올 수 있었던 것이다. "미안하지만 우리는 미들랜드와 동맹을 맺는데 성공했어" 친구 녀석이 말했다. 나는 가슴 한 구석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얍삽한 쪽바리녀석. 언제 협상을 맺었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전혀 눈치채지 못하게 일을 진행시켰군. 그렇다면...이제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이다. 내가 죽던가, 아니면 에도 다이묘가 죽던가 둘 중에 하나다. "어떻게 하실 건가요?" 세헤라자드가 물었다. "일단 녀석은 돌려보내야지" 나는 이렇게 말하고는 침착하게 말하는 것처럼 보이려고 노력하면서 친구 녀석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돌아가서 전해. 잘 알았다고. 그리고 오늘이 미들랜드와 에도다이묘의 마지막 날이 될 거라고 말이야" 나는 딱 잘라서 이렇게 말하고는 친구 녀석을 내 쫓아 버렸다. "그래. 허세도 때로는 좋은 도움이 되지. 하지만 허세 가지곤 이기기 어 려울 거야" 친구녀석은 이렇게 말하고는 총총히 에도다이묘로 떠나버렸다. 나는 한참동안이나 멍하게 앉아 있었다. 그렇지만 그러고 있을 시간이 업 다. 나는 곧 정신을 차리고 에도다이묘와 미들랜드에 접한 국경에 내가 아 끼는 최강의 부대를 배치하기 시작했다. 에도다이묘는 빠른 유니트들을 이용해서 정신없이 공격해오는 스타일이었 기 때문에 나는 서쪽으로는 '죽지 않는 기마대'와 '노란 깃대 군단'을 전진 배치하였고, 북쪽으로는 '회색 용병 군단'과 '검은 사자 군단'을 배치하였다. 거기에 원래 있던 국경 수비 군단과 합류한다면 어떤 나라도 함부로 쳐들어 올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동쪽의 사우스바빌로니아와 중앙의 또 다른 국가 에브라함링컨이 잠자코 있어준다면 말이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N:김상현 #8996/10199 ━━━━━━━━━━━━━━━━━━━━━━━━━━━━━━━━━━━━━━━━ 제 목:[탐그루] 영혼의 에뮬레이터 2 - 26 - 관련자료:없음 22/22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0-30 01:52 조회:1188 탐그루 # 마법은 마음이다 - 마음은 칼이다 # 초조하게 상황을 기다리고 있는데 국경의 전령이 반가운 소식을 가지고 왔다. 에브라함링컨이 다른 이민족의 침입을 받았다는 소식이었다. 그렇다 면 에브라함링컨이 내가 있는 곳으로 쳐들어올 가능성은 낮아졌다. 나는 안 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그렇다면 이젠 사우스바빌로이아의 네버밍크가 문 제다. 그런데 이번에는 좋지 않은 소식이었다. 네버밍크에게 보낸 대사가 목이 베어진 것이다. 나는 그 빌어먹을 인도의 게이머가 왜 내 대사의 목을 베었 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동맹을 ㄳ자는 것뿐이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그 원인을 내가 미처 다 분석해내기도 전에 에도다이묘의 부대가 국경을 넘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나는 서둘러 친위대와 함께 말을 달려 국경으로 향하였다. 물론 북쪽으로도 언제든 갈 수 있도록 내 국가 최 북서 방향에 위치하고 있는 성으로 말이다. 다행히도 그곳은 아직 안전했다. 나 는 성안에 임시 지휘 본부를 설치하고 북쪽에 계속 전령을 보내도록 명령한 뒤 에도다이묘의 부대가 나의 '노란 깃대 군단'과 '죽지 않는 기마대'에 의 해 격퇴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오기만을 기다렸다. 직접 전장에 나가고 싶지만 게임 안에서 캐릭터의 나이가 오십이 넘으면 일단 전장에 나가는 일은 삼가 해야 한다. 혹시 아들이 있어서 대를 이을 수 있다면 또 모를까... 내 아들은 이제 겨우 열 세 살이다. 등용을 하려면 적어도 열 네 살은 되어야 한다. 초반에 전쟁터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낸 덕분에 나는 결혼을 늦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 아내가 NPC가 아니라 영국에서 플레이하고 있는 진짜 게이머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내 아내는 전투에는 능력이 없어서 내치에만 신경을 쓰고 있는 터였다. 만 약 이번 전투에서 패하게 된다면... 소드엔매직 온라인의 재미를 더해주었 던 사이버 아내와의 펜팔도 끝나게 될지 모른다. 드디어 전령이 도착했다. "축하드립니다, 귀하의 '노란 깃대 군단'과 '죽지 않는 기마대'가 에도다 이묘 국의 군사들을 물리쳤습니다" 전령이 기계음으로 말했다. (전령은 사람이 아니라 내가 키운 NPC다) 나 는 숨을 놓았다. 이제는 일단 에도다이묘쪽은 해결 된 셈이고 북쪽에 보낸 전령이 좋은 소식을 가지고 오기만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나는 적 병력의 규모를 마우스를 클릭해서 알아보았다. "에도다이묘의 부대는 별동대 5개 백부였습니다" 전령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유인 작전 에 당한 것이다. 하지만 내가 아끼는 '노란 깃대 군단'과 '죽지 않는 기마 대'를 국경으로 유인한 다음, 과연 에도다이묘는 무엇을 하려고 한 것일까? 과연 에도다이묘의 의도는 무엇인가? 이제는 협공인가? 아니면 다른 작전이 있는 것인가? 그때였다. 성 앞으로 세 개의 군단이 흙먼지를 날리면서 몰려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귀하의 성이 공격을 당하고 있습니다" 기계음이 나에게 알려왔다. 그제서야 나는 에도 다이묘의 작전을 알아차 릴 수 있었다. 먼저 에도다이묘는 북쪽의 미들랜드와 동맹을 맺었다고 거짓 말을 한 후, 내가 나의 정예 부대를 두 개로 나누어 배치하기만을 기다렸던 것이다. 그리고는 국경에 별동대를 내 보내어 그곳에 내 병력이 집중하게 만든 다음, 자신의 정예 병력을 내가 있는 성으로 보내 나를 죽일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내 후계자가 아직 어리고, 아내는 내치밖에는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서 말이다. 내가 이곳 최 북서쪽에 위치한 성으로 나오리라는 것은 쉽게 예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작전에 내 친구 녀석이 얼마나 큰 역할을 했을지 생각하니 나는 너무나 분해 말이 다 나오질 않을 지경이었 다. 마우스를 잡은 손이 떨려왔다. "비열한 올웨이즈해피 녀석!" 나는 책상을 내리치면서 소리쳤다. 하지만 당한 건 당한 거다. "빨리 결정하세요" 세헤라자드가 말했다. 세헤라자드의 말은 옳았다. 이때는 결정을 빨리 하 는 것만이 살길이다. 나는 성에서 버틸 수 있는 시간을 계산해 보았다. 정 예 삼 개 군단이라면... 거기다 악명 높은 '검은 사무라이'가 그 중에 있다 면... 성은 순식간에 함락 당할 것이다. 전령을 보내 '노란 깃대 군단'과 '죽지 않는 기마대'를 불러올 시간은 없다. 설혹 운이 좋아 '죽지 않는 기 마대'가 성이 함락 당하기 전에 도착해 준다고 해도 별 도움은 되지 않을 게 뻔했다. 기마대는 빠르기는 하지만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기사들이나 마법사의 도움 없이는 아무런 힘도 발휘할 수 없는 것이다. "성을 포기하고 수도로 돌아간다. 전령을 보내 '노란 깃대 군단'과 '죽지 않는 기마대'도 돌아오라고 해. 그리고 전령을 보내 '회색 용병 군단'과 '검은 사자 군단'도 수도로 귀환하라고 해" 나는 이렇게 명령한 후 재빨리 성을 빠져 나왔다. 수도로 돌아오면서 나는 대응책을 마련하고 있었다. 북쪽 국경에서 '회색 용병 군단'과 '검은 사자 군단'이 돌아오는 건 금방 일 거였다. 그렇다면 나 는 네 개의 주력부대로 세 개의 주력부대를 맞서 싸우게 되는 것이다. 거기다 가 수도에는 마법사들도 잔뜩 모여있다. 적절하게 대응만 한다면 반드시 격퇴 할 수 있다. 나는 확신했다. 재빨리 성을 포기하고 수도로 돌아간 것이 올바 른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도에 돌아오자 전령이 소식을 가지고 왔다. "북쪽에서 미들랜드의 두 개 군단이 국경을 넘어 공격해 왔습니다" 나쁜 소식이 이렇게 연이어질 수가. 나는 천장을 바라보며 한 숨을 내쉬 었다. 에도다이묘가 완전히 거짓말을 한 건 아니었군. 그렇다면 이제 내가 가진 정예부대는 두 개고, 적은 세 개다. 나는 세 군단이 다 보병이나 기마 병이기만을 바라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렇다면 마법사로 얼마든지 쓸어버릴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때, 화면이 이벤트 동영상으로 바뀌었다. 이번에 또 뭐야? 화면에 피투성이의 병사가 왕궁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국왕 폐하..." 기계음이었다. 음. 나는 마우스를 움직여 내 옆에 있는 마법사에게 병사 의 신원과 정보를 파악하도록 지시했다. "병사는 국경수비대 소속의 아무르입니다. 상대 군단의 정보를 알아 가지 고 왔습니다" 마법사가 말했다. 나는 마우스를 움직여 상대 군단의 정보를 파악하였다. 결과는...좋지 않았다. 마법사 군단이 하나, 그리고 사무라이 기사단이 두 개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나의 마법학교에 있는 마법사들이 모두 나간다 고 해도... 이길 확률은 반반이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의 기대는 또 무너졌다. 이번에는 내가 아끼 던 '회색 용병 군단'과 '검은 사자 군단'이 패했다는 소식이었다. 나는 자리 에서 일어났다. 내가 아끼던 '회색 용병 군단'과 '검은 사자 군단'이 패하다 니... 만약 둘 다 전사했다면 이제 내 부하 중에서 장군 급 인간 게이머는 하 나도 남지 않게 된 거다... 나는 너무나 분하고 억울했지만 지휘관은 이럴 때 일 수록 침착해야 한다는 것을 나는 지금껏 수많은 전투를 통해 알고 있다. 나는 다시 자리에 앉은 뒤 먼저 소식을 전해 온 병사에게 진급을 명령한 뒤 지휘관실로 향했다. 지휘관의 테마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생각을 해야 한 다. 생각을. 그것도 빨리. 미들랜드의 전력으로 나의 '회색 용병 군단'과 '검은 사자 군단'을 물리쳤 다면 아마 병사는 얼마 남지 않았을 거다. 그렇지만 이런 상황에서 아무리 적 은 병사라고 해도 협공을 당하게 된다면 수도를 지키기는 어려워질지도 모른 다. "세헤라자드..."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세헤라자드를 보았다. 세헤라자드는 눈 을 감고 있었다. 이런. 자고 있다니. "방법이 있어요" 눈을 감은채로 세헤라자드가 말했다. "사우스바빌로니아에 대사를 보내서 원군을 요청하는 거에요" 참 나. 나는 어이가 없어서 혀를 끌끌 찼다. 그걸 누가 모르나? "무슨 수로?" 나는 이렇게 말하고는 다시 작전을 생각해 보려고 했다. "방법이 있어요" 이번에는 자신만만한 말투였다. 나는 세헤라자드를 바라보았다. "저를 대사로 보내시는 거에요. 제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사우스바빌로니 아의 원군을 이끌고 오겠어요" 세헤라자드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인간의 영혼을 가진 세헤라자드라면... 나에게 보여준 그 말솜씨라면... "하지만 말이야..." "절 믿으세요" 나는 뭐라고 더 얘기하려고 했지만 세헤라자드가 나의 말을 막았다. 세헤 라자드의 표정은 진지했다. 그리고 그런 표정에서 나온 믿으라는 말은 마법 처럼 나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세헤라자드를 보내라고 말이다. 세헤라자드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인 후 데스크탑의 보조 모뎀 연결 포 트과 세헤라자드의 랩탑을 연결하였다. "절 믿으세요" 세헤라자드는 이렇게 말하고는 사라져 버렸다. 이제 나는 군사들에게 최 선을 다해 막으라는 말 말고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졌다. 내 정예 '노란 깃발 군단'과 '죽지 않는 기마대', 그리고 마법학교의 마법사들은 에 도다이묘의 군사를 막고 있었고, 비록 일개 군단의 절반 규모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내 '회색 용병 군단'과 '검은 사자 군단'을 이겨 사기가 오른 미들랜 드의 군사는 내 친위대와 수도방어군으로 막을 수밖에 없었다. 그밖에는 대책 이 없었다. 내 아내는 패배를 예감한 듯 게임을 포기해 버렸다 이제 유일한 희망은 사우스바빌로니아의 네버밍크가 내 두 번째 부탁에 응하느냐, 응하지 않느냐에 달려있다. 하지만 만약 세헤라자드가 그 길로 광대한 어스넷속으로 사라져 버린다면? 어쩌면 프로 게이머가 되려고 하는 나의 꿈도 세헤라자드와 함께 어스넷속으로 영원히 사라져 버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나는 지휘관 실에서 지휘관의 테마를 흥얼거리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 다. 전투 장면을 보기가 싫어진 탓도 있었지만, 역시 너무나도 심한 부담감 때문이었다. 이 한 번의 전투에 내 미래가 달려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 지 들만큼의 부담감이었다. 이윽고, 전령이 도착했다. 나는 전령을 맞이하기 위해 지휘관 실을 나갔 다. 과연... 결과는... 지휘관 실을 나가자 세헤라자드의 모습이 보였다. 세헤라자드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좋은 소식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됐어?" 나는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세헤라자드는 아무 말도 없었다. 그리고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헤라자드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아니, 세헤라자드가... 설마 이대로 도망쳐 버린 건 아니겠지? 속았다는 생 각이 들었다. 인간의 영혼을 믿다니. 내가 실수했나보다 싶기도 했다. "성공이에요" 랩탑에서 세헤라자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또 한 번 당황하면서 랩 탑의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세헤라자드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 고 있었다. "세헤라자드..." 짧은 순간이었지만, 나는 세헤라자드를 의심했다는 부끄러운 마음과, 또 작전이 성공했다는 기쁨과, 그리고 다시 세헤라자드를 보게 됐다는 안도감 이 동시에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세 가지 감정을 동시에 느끼다니. 하지만 그런 감정에 빠져 있을 시간이 없었다. 데스트탑에서 원 군이 도착했다는 메세지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나는 세헤라자드를 잠시 접어두고 데스크탑으로 달려갔다. 아마 소드엔매직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원군이 나타났을 때의 기분을 알 지 못할 것이다. 특히 이렇게 위기에 빠진 순간에 나타나는 원군이라면 더 더욱 말이다. 원군 도착의 음악과 (고전 서부극에서 기병대가 나타날 때의 음악을 변형시킨 것 같은) 함께 흙먼지를 날리며 달려오는 일개 군단의 모 습이란! 펄럭이는 사우스바빌로니아의 깃발과 완전 무장을 한 유니트들의 모습, 그리고 원군 도착을 안 순간 사기가 오르는 나의 부하들의 모습... 사우스바빌로니아의 군대는 먼저 미들랜드의 군대와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아마도 미들랜드의 군대는 사기가 오르긴 했지만 일개군단의 절반규모에 지 나지 않기 때문에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작전이리라 생각이 되었다. 어쩌 면 사우스바빌로니아의 네버밍크는 인간 군단장을 보냈는지도 모른다는 생 각에 나는 군단장 앞으로 전령을 보냈다. 응원과 격려의 뜻을 담을 편지와 함께 말이다. 회신은 곧 왔다. "귀국의 승리를 기원합니다" 이런. NPC였군. NPC가 이렇게 영악한 짓을 할 줄은 정말 몰랐는데. 비록 저항이 좀 거세서 시간이 예상보다 많이 들기는 했지만 사우스바빌 로니아에서 보내 준 일 개 군단의 도움으로 나는 에도다이묘와 미들랜드의 침공을 막아냈을 뿐 아니라, 에도다이묘의 최후까지 볼 수 있었다. 에도다 이묘는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애를 썼지만 이미 승부는 기운 뒤였다. 물론 에도다이묘가 보여준 마지막 투혼은 그가 아마리그 십 위안에 드는 강자라 는 사실을 입증하긴 했다. 그러나 병력의 열세는 어쩐 전술과 전략으로도 결국 만회하지 못한다. 미들랜드의 군대는 철수하였지만 나는 맹공을 퍼부어 에도다이묘의 국왕 올웨이즈해피를 전장에서 찾아내어 해치웠다. 내 친구녀석도 마찬가지로 끝 장을 내 버렸다. 내 친구 녀석을 마법으로 태워 죽일 때, 나는 묘한 쾌감까 지도 느낄 수 있었다. "다음 편지는 지옥에서 받아보라구" 나는 이렇게 말하면서 내 친구녀석을 태워버렸다. 물론 그 대가는 결코 싸지 않았다. 다음 주 온라인 시간에 사우스바빌로 니아가 에브라함링컨을 공격할때 내 정예 '노란 깃대 군단'을 보내주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게임은 나의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가장 기 뻤던 일은 승리도, 그 얄미운 쪽바리를 끝장낸 것도, 내 친구 녀석을 태워 버린 것도 아니었다. 회색 용병 군단장과 검은 사자 군단장이 살아 돌아온 것도 기쁘기는 했지만 말이다. 가장 기뻤던 일은 바로 세헤라자드가 랩탑으 로 돌아온 것이었다. 네 시가 되자 온라인 시간이 종료되었다. 나는 게임이 끝날 시간이 되었 다는 걸 아쉬워하면서 게임이 오프되기 전에 오늘의 승리를 경축하는 나라 잔치까지 열었고, 네버밍크에게 곡식과 황금, 거기다 덤으로 소 백 마리까 지 보냈다. "어떻게 교섭에 성공할 수 있었지?" 내가 세헤라자드에게 물었다. "운이 좋았어요. 네버밍크가 여자였다는 게 먼저 다행이었지요. 보니까 패미니스트더라구요. 거기다가 이름에서 동물애호론자라는 걸 알았죠. 그걸 로 대화의 실마리를 풀어갔어요. 그래서 좋은 결과가 나오게 된 거죠" 스스로도 자랑스러운지 세헤라자드는 한껏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세헤라자드가 대견한 것은 물론이었고, 감사하다는 마음까지 들었다. "...왜 도망치지 않았어?" 나는 감격을 이기지 못하고 이렇게 세헤라자드에게 물었다. 아마도 표정 으로 내 감정이 다 드러났으리라. "이야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잖아요" 약속을 지키겠다던 세헤라자드의 말은 정말 사실었다. 나는 의자에 편하 게 몸을 기대고 세헤라자드에게 물었다. "그래. 그렇다면 나도 약속을 지켜야겠지. 그래서 팜 산맥으로 떠난 수르 카와 라이짐은 어떻게 됐지?" 나는 웃으면서 세헤라자드에게 이렇게 물었다. "고마워요. 저를 믿어주셔서..." 대답 대신에 세헤라자드는 이렇게 말했다. "아니야. 나도 기뻐" 기쁘다니... 이게 무슨 얘기야... 음..설마 내가 세헤라자드를.... "수르카와 라이짐은 팜 산맥에서 먼저 너무나도 기본적인 문제에 부딪치 지요. 살아남아야 한다는 문제 말이에요. 그들은 아직 세상에 대해, 인간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고 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세상과 인간에 대해 알 아나가는 게 그들에게 꼭 기쁨만은 아닐 거에요. 그건 오히려 아주 고통스 러운 일이 될 수도 있죠......" 세헤라자드의 두 번째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N:김상현 #8997/10199 ━━━━━━━━━━━━━━━━━━━━━━━━━━━━━━━━━━━━━━━━ 제 목:[탐그루] 아케르 용병단을 향해서 27 관련자료:없음 22/22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0-30 01:52 조회:1143 탐그루 # 마법은 마음이다 - 마음은 칼이다 # * 아케르 용병단을 향해서 아자닌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나와 라이짐은 팜 산맥 입구를 벗어나지도 못 했을 것이다. 나와 라이짐이 팜 산맥으로 들어가자 가장 유용한 것은 여행자용 흰 등이 아니었다. (그러리라고 생각했는데...) 혹시 따라올지 모르는 루비오의 추적 자들 때문에 우리는 함부로 등을 켤 수도, 불을 피울 수도 없었다. "지도를 잘 보세요. 흔들리지 않게요. 수르카 님, 가운데가 구겨지면 제대 로 지도를 볼 수가 없잖아요" 아자닌은 갈림길이 나올 때마다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제길. 왜 꼭 내가 봐야지만 아자닌도 볼 수 있는 거야? 그냥 알아서 보면 될텐데. 달빛에 지도 를 본다는 게 어디 쉬운 줄 알아? 누가 내 모습을 본다면 반지의 정령이 주인 을 위해 지도를 읽고 있는 줄 알겠군. 나는 지나간 일들을 생각하며 속으로 수도 없이 많은 저주를 보냈다. 먼저 나와 라이짐을 쫓고 있을 자치대와 쥬크에게. 그리고 쥬크를 조종하고 있을 느끼한 귀족 루비오. 빌어먹을 라스폼과 그 옆에 서 있던 괴물. (사스카치라 고 했던가) 거기다가 가장 미웠던 것은 오래 전부터 탐그루를 떠나야 겠다고 생각해 놓고는 지도 읽는 법 하나 똑바로 배워두지 못한 라이짐이었다. 복수 의 말은 그럴 듯 하게 하더니만 말이야. 그래서 나는 아자닌에게 지도를 보여 주면서 침을 라이짐의 반대 방향으로 뱉어야 했다. 만약 라이짐이 진짜로 내 저주에 걸린다면 '저주의 칼은 눈이 없다'는 말처럼 옆에 있는 나까지 피해를 볼지도 모르지 않는가. 좌우지간 아자닌의 말을 따라 밤새도록 걸었던 나와 라이짐은 해가 뜨고 나 서야 몸을 숨길 수 있을 만한 동굴을 찾아 눈을 붙일 수 있었다. 준비해온 말 린 고기와 과일도 먹지 못하고 잠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나와 라이짐은 거의 동시에 눈을 떴다. 둘이 마음이 맞아서 가 아니라 동시에 이상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사람에게는 시각, 청각, 촉각, 미각, 후각이 있고 그 외의 것을 감지해내는 제 육감이 있다고들 하는 데, 이 경우 나와 라이짐이 동시에 이상한 느낌을 받은 것은 육감 때문이 아 니라 오감이 동시에 자극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눈꺼풀에 닿던 햇살의 양이 급격히 줄어 갑자기 눈앞이 어두워졌고, 뭔가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들려왔 고, 역겨운 냄새가 풍겨왔고, 찝찔한 것이 입안에 느껴졌고, 결정적으로 뭔가 가 뺨을 핥고 있었다. "타코다!" 라이짐이 소리치면서 일어났고 나도 허둥지둥 칼을 찾으며 자리에서 일어났 다. 준비해온 모포 몇 장 덕분에 그다지 등이 아프지는 않았지만 팔, 다리, 허리 어느 곳 하나 욱신거리지 않는 곳이 없었다. 간밤에 지나치게 많이 걸은 데다가 제대로 자지를 못해서 그런 모양이었다. 그런데 입에 이 찝찔한 건 뭐 야? 오줌이라도 갈겼나? 나는 침을 뱉었지만 입안의 찝찔한 기운은 사라지지 않았다. 라이짐도 침을 뱉는 걸 보니 똑같이 당한 모양이다. 이런. 타코는 꼭 사람 머리 만한 동물이다. 꼭 머리에 동그라미 두 개를 붙여 놓 은 것 같은 귀 두개를 가지고 있고 날카로운 이빨은 단단한 열매 껍질도 부술 수 있다. 전체적으로 동글동글한 몸에, 우는 소리는 아기가 말을 막 배우기 시작할 때 웅얼거리는 것 같고, 보통 때는 느릿느릿 두 다리로 서서 다니지만 위험을 느꼈을 때에는 뮤만큼이나 재빠르게 움직인다. 이게 내가 타코에 대해 알고 있는 전부였다. 언젠가 타코 가죽 장사꾼이 하 는 말을 들어둔 덕에 알고 있는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알아두는 건 데. 보통의 타코는 윤기 있고 잘 빠지지 않는 은빛의 털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놈은 털이 듬성듬성 빠져있었고, 두 다리로 서 있는 모습도 어딘지 위태로워 보였다. 거기다가 오른쪽 귀는 누가 뜯어먹었는지 동그란 모양이 아 니라 한 입 크게 베어 문 사과처럼 보였다. 타코의 부드러운 털은 장식용으로도 좋고 특히 겨울에 보온 효과가 뛰어나 사냥꾼들이 노리는 첫 번째 품목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 사냥꾼들이 타코 사 냥을 어떻게 하는지, 혹은 사냥을 하는 데에 따르는 위험은 없는지 따위는 전혀 알지 못했다. 라이짐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내가 본 길들여진 타코들은 하나같이 바구니 안에서 아무 표정도 없이 가만 히 있었는데, 지금 나와 라이짐 앞에서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는 타코는 도대 체 무슨 일이야? 라고 묻는 듯한 표정을 짓고서 커다란 눈을 꿈뻑이고 있었 다. "눈이...초록색이야...빛나고 있어" 이렇게 가까이서 타코를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것도 야생의 타코를. "화가 나서 그런 걸까?" 라이짐은 허리에 찬 짧은 칼을 뽑아들고 내게 조용히 물었다. "모르지. 너 타코를 죽여본 적 있어?" 라이짐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지금 자신을 죽일까 말까하는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데, 눈앞의 타코는 아무 생각도 없는 듯이 그저 신기하다는 듯이 나와 라이짐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만날 줄 알았으면 타코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알아두는 건데. 하지만 늦은 후회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저 타코가 갑자기 공격해 올지 아니면 멍청하게 있다가 그냥 혼자 쓰러져 죽어버릴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이다. "죽일까?" 라이짐이 물었다. 나는 타코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초록색으로 빛나는 눈동자는 도무지 악의라고는 품고 있지 않은 듯 했다. "너 저 가죽 가지고 싶어?" 나는 라이짐에게 되물었다. 라이짐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필요하지도 않은데 짐승을 함부로 죽였다가는 벌 받을 거야" "그래" 그래서 나와 라이짐은 칼을 내려놓았고 나와 라이짐, 타코(이름은 없지만) 는 평화 협정을 맺은 사람처럼 털석 자리에 주저 않았다. 타코는 눈을 깜빡이 며 나와 라이짐에게 뭐라고 웅얼거리기 시작했다. 듣던 대로 정말 아기 웅얼 거리는 소리 같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어버리고 말았다. 이런. "그런데 왜 우릴 보고 도망가지 않는 거지?" 라이짐이 물었다. "그래. 나도 그게 이상해. 타코들은 재빠르게 움직인다고 들었는데..." 내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우리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타코 한 마 리라면 같이 잘 수도 있을테지만 수 백 마리의 타코 떼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저...저..." 셀 수도 없이 많은 타코 들이 사방의 벽에 포도송이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 었다. 나는 칼을 뽑아들고 어쩔 줄 몰라 하며 타코 떼들을 바라보았다. 초록 빛 눈을 한 수 백 마리의 타코들이 말똥말똥 쳐다보는데는 도저히 어떻게 해 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한꺼번에 들려오는 저 옹알대는 소리! 나는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야. 여기, 아무래도 쟤네 집인가 봐" 라이짐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동굴 안 쪽으로 열매 껍질과 타코 똥 (으로 보이는 둥근 물체)가 수도 없이 떨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젠장. 빨리도 알아 차렸군. 어쩐지 이런 동굴을 쉽게도 찾아낼 수 있었다는 게 이상하다 했어. "라이짐. 내가 짐을 챙길게 너, 날 엄호 해줘" 조심스럽게 내가 말했다. 큰소리로로 말했다가는 타코들이 당장에라도 달려 들 것 같아서였다. "야. 내가 챙길게. 네가 날 엄호해주면 안될까?" 젠장. 이런 상황에 조금이라도 빨리 결정해야 할 문제를 이렇게 다투고 있 어야 하다니. 저 자식, 탐그루에서 두목 했던 놈 맞아? "알았어, 알았어" 나는 라이짐에게서 짧은 칼을 건네 받은 뒤, 내 칼은 칼집에 조심스럽게 넣 었다. 재빠른 타코들을 상대해야 한다면 아무래도 짧은 칼이 유리할 것 같아 서였다. 라이짐이 짐을 챙기고 있는데, 털이 듬성듬성 빠진 타코가 뭐라고 웅얼거렸 다. 그러자 나머지 타코들의 웅얼거리는 소리가 조금 더 높아지는가 싶더니, 갑자기 조용해졌다. 나는 라이짐을 돌아보았다. (역시 조심스럽게, 물론 타코들을 곁눈으로 살 피는 것도 잊지 않고) 라이짐은 짐을 다 챙기고 이젠 어쩌면 좋을까를 생각하 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마 라이짐도 나하고 똑같겠지. 갑자기 조용해졌으니 무서울 만도 하잖아? 그런데 타코들이 둘로 갈라졌다. 아니, 내 눈에는 타코들이 우리를 위해 길 을 비켜주는 것처럼 보였다. "저건 뭐야?" 내가 거의 속삭이듯이 말했다. (처음보다 훨씬 조용했으므로) 하지만 라이 짐은 대답도 없이 내 팔을 잡아끌듯이 해서 타코들이 만들어준 길을 따라 걷 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와 라이짐은 겨우겨우 타코의 동굴을 빠져나왔다. 동굴이 보이지 않게 되서야 아자닌을 불러내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 이냐 고 당장에 따지고 싶었지만 내가 보지 못한 것은 아자닌도 알 수 없다는 걸 뻔히 말고 있었기 때문에 참기로 했다. 아무리 피곤했어도 껍질과 똥이 그렇 게 무더기로 떨어져 있는 걸 못 본 나와 라이짐이 잘못한 거지, 뭐.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 해줘, 아자닌" "타코들은 무리를 지어서 살고 있습니다. 보통 한 무리가 네 다섯 군데의 동굴을 가지고 있는데 아까 그곳은 아마 식사를 하는 동굴인 모양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그 놈을 죽였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얘기해 줄 수 있는지 물 어봐 줄래?" 라이짐이 물었다. 아자닌을 처음 보는 것도 아닌데 저렇게 눈을 동그랗게 뜰 것 까진 없잖아. "라이짐 님. 저에게 직접 물어봐도 됩니다. 수르카 님의 친구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아자닌은 이렇게 말하고는 설명을 시작했다. "보통의 경우 타코는 적을 만나면 도망을 칩니다. 싸움을 싫어하거든요. 무 리 중 누가 다치는 것도 싫어하구요. 하지만 아까 같은 상황은 좀 다릅니다. 털 빠진 타코는 무리에서 뽑혀져 나온 놈이었어요. 안에 뭔가 있다는 걸 알고 는 가장 약한 놈을 먼저 보낸 거죠. 그놈이 죽었다면 집을 빼앗겼다고 생각한 타코들은 죽을 각오를 하고 덤볐을 거예요. 어떤 생물이든 자기 집을 공격당 하고 가만히 있지는 않는 법이랍니다. 알고 계시겠지만 타코의 이빨은 정말 날카롭죠. 한 번 물어뜯으면 뼈까지 부수어집니다. 공격받지 않은 건 순전히 털 빠진 타코를 가만히 두었던 덕분이었어요" 아자닌의 말을 듣자 나는 오싹한 한기를 느꼈다. 저런. 라이짐의 표정도 만 만치 않군. "운이 좋으셨던 거에요. 앞으로는 뭔가 모르는 일이 생기면 저를 먼저 불러 주세요. 제가 비록 정령이긴 하지만 꽤 오래 살았답니다. 알고 있는 일들이 꽤 많다고요" 아자닌이 말했지만 나는 영 기분이 좋질 않았다. 죽다 살았는데 기분이 좋 을 리가 있나. 그 빛나는 초록색 눈동자와 웅얼거리는 소리가 떠오르자 나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 생각을 떨쳐버린 뒤 아자닌에게 물었다. "이젠 어떻게 해야하지?" "이쯤이면 추적해오던 사람들은 따돌렸다고 생각됩니다. 이제 다음 목적지 는 어디인가요?" "마을. 아무 곳이나" 라이짐이 말했다. "여기서 가장 가까운 마을은 이곳에서 하룻밤은 더 걸어야 나옵니다. 하지 만 화전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이 근처에도 있을 것 같습니다" "거기까지 따라오면 어쩌지?" 내가 물었다. "기껏해야 갓 성년이 된 애 둘을 이곳까지 쫓아 오지는 않을 거야" 라이짐의 대답에 나는 '게다가 사람까지 죽였으니 말이야', 하고 덧붙일까 했지만 참았다. 비록 아무 말도 안하고 있지만 라이짐이 얼마나 상심해 있을 지는 고아로 자란 나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화전을 하는 사람이라니?" 내가 물었다. "풀을 태워 땅을 기름지게 만든 다음 그곳에 농사를 짓는 사람을 말합니다. 수르카 님이 보신 것 중에 연기가 있었습니다. 그게 바로 그 사람들이 사는 마을입니다" "그럼 생각할 것도 없잖아?" 라이짐이 말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화전 마을이 풀을 태운다는 말을 들어서 그런지 나는 시커먼 땅에 농사를 짓고 있는 사람들을 떠올렸다. 그러나 내가 본 것은 타실에서 본 농사짓는 마 을과 크게 다를 것 없는 마을이었다. 농지의 크기가 조금 작았다 뿐이지. 농 지에는 익어 가는 곡물이 조금씩 붉게 변해가고 있었다. 어느새 가을이로구 나. 마을에 닿자마자 처음 본 농사꾼이 나와 라이짐을 경계의 눈초리로 바라보 았다. (하긴, 여길 지나는 여행자들이 범죄자나 좇기는 몸이 아닌 경우는 적 을 테니까) "풍년을 기원합니다" 나는 아자닌이 얘기해 준 대로 농부에게 인사했다. 그제서야 농부는 손을 흔들어 우리에게 인사 했지만 경계의 눈초리는 여전했다. "길을 좀 여쭈려고 하는데요" 이번에는 라이짐이 물었다. "댁들도 용병이슈?" 농부가 말했다. "용병이라뇨?" 내가 물었다. "이 마을은 화전 마을이라 팜 산맥 밖으로는 잘 알지도 못해요. 저기 길 따 라서 가다보면 마을 장로님 댁이 나옵니다. 그곳에 용병이 한 명 와 있으니 그 사람에게 한 번 물어보쇼" 나와 라이짐은 감사의 인사를 하고 농부가 일러준 길을 따라 장로의 집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용병이라니? 설마 우리를 쫓는 사람은 아닐 테고. 장로의 집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다른 집들은 진흙으로 된 벽과 풀을 얹은 지붕을 가지고 있었지만 장로의 집은 나무로 지어져 있었다. 게다가 유 일하게 집밖으로 울타리가 쳐져있기도 했다. "풍년을 기원합니다. 계십니까?" 내가 목소리를 높여 인사하자 울타리 문이 (이라기 보다는 그냥 풀로 엮은 벽 같았지만) 열렸다. 문안에는 우리 또래로 보이는 아이가 서 있었다. 비쩍 여위어 있고 새카만 피부를 가진 아이였다. "풍년을 기원합니다. 이곳에 용병이 한 분 계시다는 말을 듣고 찾아왔습니 다만..." 내가 말했다.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나와 라 이짐은 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갔다. 집 앞에는 평상이 하나 놓여 있었고 한 눈에 보기에도 장로로 보이는 사람 과 용병으로 보이는 사람이 그 위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장로는 허 연 수염에 주름살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분명 인자해 보이는 인상이 었다. 그리고 용병은 보통사람 두 배는 될 것 같은 어깨에 다부진 턱을 가지 고 있었다. 무슨 용무로 여기에 왔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길지 않은 칼 한 자 루와 가벼워 보이는 가죽옷이 무장의 전부였다. 다만 알 수 없었던 것은 장로 와 이야기를 하면서도 칼을 차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어쩌면 저게 용병의 관 습일지도 모르지. "손님이신가?" 장로가 말했다. "길 가던 여행자입니다. 말씀을 여쭈려고 왔습니다. 혹시 아케르 용병단을 찾아가려면 어디로 가야하는지 알고 계십니까?" 탐그루 바깥으로 나온 건 처음이지만 자라면서 여행자들은 많이 봐왔던 터 라 나는 막힘 없이 술술 말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N:김상현 #9053/10199 ━━━━━━━━━━━━━━━━━━━━━━━━━━━━━━━━━━━━━━━━ 제 목:[탐그루] 아케르 용병단을 향해서 28 관련자료:없음 30/30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0-31 00:12 조회:1133 탐그루 # 마법은 마음이다 - 마음은 칼이다 # "차림을 보아하니 갓 성년이 된 것 같네요. 아케르 용병단에는 무슨 볼일이 있죠?" 짙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용병 사내가 말했다. "저희는 용병이 되려고 고향을 떠났습니다" 아케르가 말했다. "음. 성년인 건 확실하고요?" "예" "운이 좋은 친구들이네요. 장로님 저 친구들과 아드님을 데리고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용병 사내가 일어서면서 말했다. "나는 아케르 용병단의 십부장(十夫長) 가투신이라고 해요. 의뢰 문제 때문 에 스파일 쪽에서 오는 길인데 신병도 모집하고 있지요. 이제 곧 겨울이니까 요. 원래 우리는 이런 식으로 신병을 모집하지요. 그쪽은?" "저는 탐그루에서 온 수르카, 그리고 이쪽은 제 친구 라이짐입니다" 내가 말했다. 아케르 용병단의 십부장이라고? "음. 군용도(軍用刀)를 차고 있군요. 아버지가 군인인가보죠?" 카투신이 내 칼을 보고서 말했다. "아닙니다. 저와 수르카는 둘 다 고아입니다" 라이짐이 말했다. 자신을 고아라고 말하다니! 난 탐그루를 떠난 후 한번도 라이짐이 고아라는 생각을 해본적이 없었다. 미처 생각지 못했다. 이젠 라이 짐도 나도 고아다. 라이짐...겉으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라이짐의 마음이 슬픔 으로 흔들리고 있는 것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왜 용병이 되려고 하지요?" 라이짐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가투신은 그런 라이짐을 보더니 고개를 끄 덕였다. "아케르 용병단은 과거를 일체 묻지 않아요. 그리고 성년이 지난 남자라면 더욱 그렇지요. 앞으로 용병단에서 함께 일하게 될텐데 잊지 말아요. 그 누구 에게도 과거를 물어서는 안 된다는 걸. 상대방이 과거를 먼저 얘기해 준다면 또 모르지만... 규칙이라고 생각하세요" 가투신이 말했다. "고맙습니다" 아케르가 말했다. "고마워 할 것 없어요. 아직 용병이 된 건 아니니까. 그럼 이제 바로 떠날 텐데 준비는 돼 있나요?" 가투신이 물었다. 말하면서 가투신은 싱긋 웃었는데 이렇게 우락부락하게 생긴 사내가 눈웃음을 치다니! 이상했던 것은 물론이고 어딘지 거부감까지 일 었다. 어찌되었건 나와 라이짐은 고개를 끄덕였다. 문을 열어주었던 아이는 얼른 들어가 베낭을 하나 가지고 왔다. 저 아이가 장로의 아들인 모양이었다. "준비가 다 된 것 같군요. 아케르 용병단은 여기서 걸어서 이틀 거리에요. 조심해서 같이 가도록 해요. 가는 동안 죽지 않도록 하구요" 가투신은 싱긋 웃으며 마지막 말을 했는데, 뺨을 타고 간지러운 뭔가가 타 고 내려가는 것같이 느껴졌다. "운이 좋았어" 나는 라이짐에게 말했다. 아케르 용병단원을 이렇게 만나게 되다니 정말 운 이 좋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별로. 어차피 언젠가는 찾아갔을 거 아니야. 다만 시간이 좀 단축되었다 뿐이지" 하지만 내 말에 라이짐은 이렇게 말했다. 그것도 라이짐 특유의 쓴웃음을 지으면서 말이다. 음. 내 말이라면 무조건 비웃고 보자는 생각일까. 장로의 아들은 재훈이라고 했다. 화전 마을이어서 그런지 생소한 이름이었 다. 나와 라이짐은 분명 탐그루식 이름이지만 저 아이는, 그러니까... 화전 마을 식이겠지. "뭐, 급할 건 없으니까 조심해서 천천히 따라오도록 해요. 이제 갓 성년이 됐는데 죽으면 곤란하지 않겠어요?" 가투신이 말했고 나와 라이짐은 숨을 헉헉거리며 가투신의 뒤를 따랐다. 가 투신의 걸음은 정말 빨랐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장로의 아들이었다. 땀을 삐 질삐질 흘리면서도 조금도 힘든 내색을 하지 않고 있었다. 아니, 하지 않으려 고 정말 애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재훈. 괜찮아?" 내가 물었지만 재훈은 나를 한 번 처다 보았을 뿐 아무 대답도 없이 계속해 서 걷기만 했다. 숲은 끝도 없이 이어져 있었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새소리와 짐승의 울음 소리, 바람결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들과 그 사이사이로 떨어지는 햇살들. 모든 것이 내게는 신선하게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난생 처음 탐그루를 떠났으 니까) 문득 탐그루 생각이 났다. 라짐은 과연 잘 있을까. 빌어먹을 루비오 자식과 쥬크는 또 뭘 하고 있을까. 그런 생각들도 잠시였다. 길이 가파른 오르막길을 넘어가기 시작하자 숨이 차 올라 도무지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이 길이 어서 끝났으면, 잠시 쉴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주위를 둘러 볼 생각도, 라이짐과 재훈을 살펴볼 겨를도 없었다. 쉬었다 가자는 소리 가 목구멍 밑까지 올라왔으나 겨우겨우 참아내었다. 그런 말을 했다가는 아케 르 용병단에서 받아주지 않을 것 같았다. "자. 잠시 쉬었다 가지요" 마침내 가투신이 말했다.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고 라이짐도 재훈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눈앞에 노란 거미줄이 떠다니고 있었다. 나는 준비해 온 타코 가죽으로 만든 물통을 꺼내 한 모금 마셨다.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나자 그나 마 살 것 같았다. 그제서야 나는 숨을 고르고 라이짐과 재훈을 돌아보았다. 라이짐은 나와 마찬가지로 잔뜩 지쳐있어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숨을 몰아 쉬고 있었다. 하지만 재훈은 주저 앉아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 도대체 재훈은 무슨 사연이 있어서 용병이 되고자 하는 걸까. 왜 아무 말도 없이 저 렇게 인상을 팍팍 쓰고 있는 걸까. 뭐가 문제야, 도대체. 빌어먹을. 과거를 물으면 안 된다구? 규칙이라니 별 수 없지 뭐. 나도 과거를 얘기하지 않는 편 이 낫잖아? 자치대와 성황청에게 좇기는 몸이라는 게 그렇게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니까...... "쉿!" 카투신이 손을 내저어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빠 른 동작이었다. 언제 뽑았는지 손에는 칼이 들려져 있었다. 나는 숨을 죽였 다. "이건..." 가투신이 웃으며 칼을 도로 집어넣었다. 나는 가투신이 바라보고 있는 자리 를 보았다. 그곳에는 털빠진 타코 한 마리가 두 발로 일어서 고개를 갸웃거리 고 있었다. 타코는 지쳐 보였다. 서있기는 했지만 몸이 조금씩 휘청이고 있었다. 그러 고 보니 병든 놈이었나보구만. 나는 생각했다. 그 타코는 초록색 눈이 회색으 로 보일 만큼 힘이 빠져 있었다. "...아까 그 놈이야. 저 귀를 봐. 무리에서 내 쫓기 전에 한 번 써먹어 본 거에 불과해. 어차피 죽을 거, 무리를 위해 마지막으로 한 번 쓰인 거겠지" 라이짐이 말했다. "무슨 말이지요?" 호기심에 찬 눈으로 가투신이 나에게 물었다. 저런 어린아이 같은 눈을 한 사내가 용병이라니. 어쩐지 미덥지 못한 걸. 하지만 아까 소리가 들리자 재빨 리 반응한 걸로 봐서는 진짜 용병 같기도 하고. 나는 가투신에게 동굴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 했다. "...만약 저 타코가 아까 수르카와 라이짐이 본 타코가 맞다면 라이짐의 생 각이 맞을 거예요. 여기를 한 번 보세요" 가투신이 손을 들어 산 저편을 가리켰다. 나와 라이짐, 재훈은 그쪽으로 눈 길을 돌렸다. 그곳에는 산과 그 위를 날아다니고 있는 새들이 있을 뿐이었다. "얼핏 보기에는 평화로운 풍경 같지만 저곳에도 법칙은 존재한답니다. 그걸 칼의 법칙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더군요. 약한* 것들은* 죽고* 강한* 것들은 * 살아남기* 마련이에요* 그러면서 세상은 유지되는 거구요" 가투신은 이렇게 말했다. 그의 말에서 마법의 말이 들렸다. 저건 또 무슨 마법의 말일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라이짐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보 였다. 뭔가 감동 받은 모양이었다. 하긴. 귀족들에게 어머니를 잃었으니 저런 말이 마음에 와 닿을 만도 했다. "가투신 님. 저, 강해지고 싶어요" 라이짐이 말했다. "십부장 님이라고 불러요. 그리고 아케르 용병단에 오면 강해질 수밖에 없 을 테니 걱정 말구요" 가투신은 이렇게 말하고는 웃음을 지었는데, 그 느끼한 웃음을 보면서 그가 '그렇지 않는다면 죽을 테니까'하고 말하는 것 같아서 나는 따라서 웃음을 지 울 수가 없었다. 그때 재훈이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는 것이 보였다. 치료석이었다. 재훈은 아무 말도 없이 타코에게 다가가더니 치료석을 타코의 등에 대었다. 치료석이 빛나기 시작했다. "...아까운 치료석을...여분이 많은 모양이지요?" 가투신이 재훈에게 말했다. 재훈은 한 번 고개를 들어 가투신을 바라보더니 다시 치료를 계속했다. "멍청한 짓이야. 그러다가 네가 다치면 어쩔려구 그래" 라이짐이 말했다. "입 닥쳐!" 재훈이 처음으로 꺼낸 말이었다. "용병이 되겠다구? 사람도 아니라 타코 한 마리에게 마음이 약해지면서?" 라이짐이 내뱉었다. "너 같은 놈이 위험에 빠졌을 땐 누가 도와줄지 궁금하군" 재훈이 받아쳤다. 가투신의 치료석이 몸에 닿은 타코는 어느새 초록빛이 생 생하게 도는 눈이 되었다. 조금 어색하기는 했지만 두 다리로 서 있는 모양도 많이 나아졌다. "무리에서 떨어진 타코는 죽기 마련이야. 네가 치료해주는 바람에 그놈은 조금 더 오래 고통받다가 죽게 될 뿐이라고. 약한 자는 죽고 강한 자는 살아 남기 마련이야. 그러니까 그냥 내버려둬. 혼자 힘으로 살아남던가... 그렇지 못하면 죽어야지." 라이짐이 말했다. 가투신에게서 그새 배운 모양이군. 하지만 나는 가투신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다면 세상은 언제나 강한 자만 남아야 한다는 말인가? 어쩌면 그게 바로 칼의 법칙인지도 모르지. 만약 세상이 칼에 법칙에 따라서 움직인다면 세상에는 꼭 한 사람만 남을 때까지 서로 죽여야 하겠군. 그나저나 저 말도 분명 마법의 말인 것 같은데... 나중에 아자닌에게 꼭 물어 봐야지. "난 이 아이를 데리고 갈 거야" 재훈은 이렇게 말하고는 타코를 배낭 위에 올려놓았다. 타코는 나무를 잘 탄다더니 정말 그런 모양이었다. 앞발로 배낭을 꼭 잡더니 재훈의 등에서 떨 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약골 주제에 잘도 저런 짐을 지는군" 라이짐의 말에 재훈도 뭐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가투신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잡담은은 그만두고, 빨리 길을 가지요. 그리고 라이짐. 용병이 된다면 상 대방이 뭘 하던 참견하는 일은 금물이에요. 잊지 말아요. 두 번째 규칙이니 까" 가투신과 재훈, 그리고 나와 라이짐은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길을 떠났다. 얼마 걷지 않아 하늘이 새빨갛게 붉어지며 해가 지기 시작했다. 가투신은 우 리들에게 불 피울 준비를 시켰다. 나와 라이짐은 마른 나뭇가지를 모았고, 재 훈은 돌로 불 피울 자리를 마련했고, 가투신은 주변을 돌아보겠다며 잡목 숲 으로 사라졌다. 이윽고 해가 질 무렵이 되자 가투신이 돌아와 불꽃 돌로 불을 피우기 시작했다. 가투신은 자신의 베낭에서 긴 작대기를 몇 개 꺼냈다. "이건 피리 나무 가지에요. 이만한 길이가 다 타는 데에는 두 시간이 걸리 지요. 그래서 우리는 이걸 시간 막대기라고 부른답니다. 나중에 불침번을 서 게 될 때 이걸로 시간을 재고 다음 사람을 깨우도록 해요. 질문 있나요?" 가투신이 말했으나 질문이 있을 턱이 없었다. 불침번이라니? "이제 뭘 합니까?" 라이짐이 물었다. 맞다. 저런 질문도 있을 수 있었군. "얘기나 좀 하죠. 또 질문 있나요?" "불침번이 뭐죠?" 재훈이 물었다. 그래. 저런 질문도 있을 수 있겠군. "누군가 우리를 공격하려 한다면 우리도 누군가 깨어 있어야 하지 않겠어 요? 팜 산맥에는 동물들이 많다는 걸 모르지는 않겠지요? 물론 가장 무서운 건 칼을 든 사람일 테지만... 재훈은 그 타코하고 함께 밤을 새울 테니 훨씬 났겠네요" 가투신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나만 질문을 안 했잖아? 뭔가 질문을 하긴 해야 할텐데... 그 렇지. 아자닌을 불러도 되는지 물어볼까? 아니다. 괜히 이상한 거 물어보기도 뭣하고... 에라 모르겠다. "저 정령을 보신 적 있으십니까?" 내가 물었다. 말도 조금 이상하고 내용도 이상한 질문이 되었다. "반지의 정령을 불러도 되느냐는 건가요? 물론이지요. 용병단에서 오래 생 활하다 보면 부하든 상관이든 간에 뭘 해도 간섭하지 않게 되요. 지금부터 제 가 벌거벗고 춤을 춘다고 해도 놀라지 마세요. 그게 우리 생활이에요. 전투가 벌어질 때를 제외하곤 완전 자유!" 나는 가투신의 말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가 벌거벗고 춤을 추겠다 니? 아니, 이게 아니라 내가 반지의 정령을 불러낼 거라는 걸 어떻게 알고 있 었지? "어떻게 아셨죠?" 라이짐이 물었다. "그런 반지, 본 적이 있어요. 그리고" 가투신은 웃으며 대답했다. "아무리 용병단이라고 해서 마법사가 없겠어요. 성황청이 다 싹쓸이 해가 서 얼마 남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수르카도 마법사가 되려는 거라면 잘 됐 어요. 마법사라면 어디가나 환영받는 직업이지요. 요즘 세상에 성황청의 그물 을 피해서 일할 수 있는 마법사는 용병단 빼면 얼마 없을 테니까요" 가투신의 말에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나는 마법사나 마법의 말을 아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세상에는 마법 뿐 아 니라 내가 모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과 일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타코의 무리생활도, 화전 마을도, 탐그루를 떠나기 전에는 알지 못했 던 세계였다. 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본 세계 중 칼의 법칙을 벗어난 세계는 없었다. 벽에 붙어있던 타코처럼, 아무리 떼를 지어 다닌다고는 해도 칼에 의해 타코는 가 죽이 벗겨지고 있고, 화전 마을 장로의 아들인 재훈도 이렇게 칼을 잡는 용병 이 되기 위에 길을 나서지 않았는가. 나는 내 칼자루를 잡아보았다. 손에 칼 자루가 녹아 붙는 듯 꼭 달라붙었다. 그러자 성년식날 마소드의 검이 나에게 반응하여 빛났던 일이 떠올랐다. 그 검은 분명 아버지의 것이었다. 나는 알 수 있었다. 만약 내가 그 칼에 입을 맞출 수만 있었다면... 알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과연 나의 부모님이 누구인지, 내가 누구인지, 또 칼이 무엇인지... 정말 칼이란 무엇일까. 그 검은 또 무엇일까. 사비오 영감은 자신이 마법사 가 된 이유를 그저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렇다 면 칼을 좋아하고 잘 쓰는 내가 검사가 되는 일은 당연한 것 아닐까.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지금 가투신을 따라 아케르의 용병단으로 향하고 있는 게 아닐 까. 라이짐에게는 복수를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 그러니까 강해지기 위해 아 케르 용병단에 들어간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재훈에게도 뭔지는 몰라도 사연이 있겠지. 그러니까 저렇게 늘 굳은 표정을 하고 있지. 그렇다면 나는 어째야 하는가.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나는 무엇이 되고 싶 은 것일까. 앗! 머리에 쥐가 나기 시작한다. 에라 모르겠다. 골치 아픈 생각은 접어두 자. 그러고 보니 재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타코를 쓰다듬고만 있었다. 재훈 은 과연 무슨 일로 용병이 되고자 하는 걸까? 잠들기 전까지 가투신은 용병단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해 주었다. 아케르 용병단에는 아케르 용병단장과 마법사 타호루, 행정담당 순무, 그리 고 몇 명의 십부장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 밑으로 있는 병력은 보통 오륙 십 명으로 더 많을 때도 있고 적을 때도 있지만 대충 그 정도 숫자가 유지된 다고 했다. (그만큼 많은 숫자가 죽어나간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일단 용병단에 가면 용병대장 아케르와 면담을 가진 후 간단한 심사를 통과 하면 용병단의 정식 단원이 될 수 있으며, 정식 단원이 되면 숙식 외에도 기 본 장비를 거저(!)주고 덤으로 각종 수당과 급여가 지급된다고 한다. 다만 문 제가 되는 것은 정식 용병단원이 될 수 있는 심사와 첫 전투에서 살아남는 일 이라고 가투신은 말했다. "하지만 걱정 마세요. 수르카는 마법을 좀 안다니 거의 확실히 용병단에 들 어오게 될 것이고, 라이짐도 눈빛을 보니 충분하겠어요. 그리고 재훈은... 만 약 정식 단원이 되지 못하더라도 용병단에는 다른 일들도 있으니까 걱정 말아 요" "다른 일이라니요?" 라이짐이 물었다. "용병단이라고 칼잡이만 필요한 건 아니랍니다. 요리를 하는 사람도 있어야 하고, 연금술학을 잘 알고 있는 사람도 필요하고, 또 수르카 같이 마법을 아 는 사람도 필요하죠. 그리고 내 생각엔... 쓸모 없는 사람은 없어요! 이 세상 에 존재하고 있는 것들은 모두 서로서로 필요한 존재에요" 가투신은 여전히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가투신의 말에 재훈의 얼 굴은 더욱 굳어졌다. 음. 자기가 용병단에는 별 소용없을 사람이라는 건 아는 모양이군. 저렇게 힘도 없고 맘 약한 아이가 과연 용병이 될 수 있을까? "잘 알아두세요. 우리 용병단에 대해서 어떤 말을 듣고 왔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단순한 용병단이 아니에요" 가투신이 말했다. 나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용병단이 다 용병 단이지, 단순하지 않은 용병단도 있나? 물론 위대한 복수자 검객 아케르의 이 야기는 나도 알고 있을 만큼 유명하다곤 하지만 말이다. "마을 장로한테 돈을 받고 산적을 토벌하거나 하는 일은 아무 용병단이나 다 하고 있겠죠... 그 중에는 산적이 돼 버리는 용병단도 있고. 하지만 우리 는 국왕의 칙명을 받는, 국왕의 정부가 공인한 얼마 되지 않는 용병단 중 하 나랍니다" 내 마음을 눈치챘는지 가투신이 이렇게 말했다. "국왕의 칙명이라구요?" 라이짐이 물었다. 놀랍다는 어투였다. 하긴. 국왕이 자신의 군대를 파견하 기에 너무 외진 곳이나 위험한 곳도 있기는 있을 테니 용병단을 고용하는 일 도 있을 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일이라면 국왕의 군대가 나서 기 어려운 비밀스러운 일이나 아주 위험한 일일텐데... 이런 생각이 들자 나 는 이상하게 흥분이 되었다. 나에게 라이짐 같은 분명한 목적은 없다고 해도 분명히 칼과 모험을 동경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흥분이었다. "예. 그리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요" 가투신이 말했다. "그럼 왜 정식 부대가 되지는 않는 거죠?" 라이짐이 물었다. 라이짐의 말을 듣자 용병이 국왕의 금화를 받는다면 그건 바로 국왕의 군대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라이짐. 세상은 그렇게 간단한 곳이 아니에요" 가투신이 말했다. "국왕의 군대가 할 수 없는 일이 있어요... 꼭 멀고 외진 곳이라 그곳까지 가지 못해서 그런 것만은 아니랍니다. 이를테면... 손을 더럽히기 싫은 일... 그런 일이 있기 마련이에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가투신이 말했다. 손을 더럽히기 싫은 일이라... 나는 생각해 보았다. 그런 일이라면, 나는 잘 모르지만, 아마 정치적인 일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맘에 들지 않는 귀족을 없애 버리는 일이라든가 아니면 어린아이와 여자를 죽이는 일이 라든가... 그런 일들이 손을 더럽히는 일이겠지. 위대한 복수자 검객 아케르 가 이끄는 용병단이 내가 꿈꾸었던 용병단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 다. "하지만 그런 일은 아주 드물어요. 우리가 하는 일은 주로 외진 도시를 찾 아가 산적이나 마물들을 물리치는 일이랍니다" 가투신이 말했다. "마물들이라고요?" 이번에는 내가 물었다. "예. 마물들이 가끔 마을이나 도시에 출현하곤 하죠. 아케르 용병단에는 유 능한 사냥꾼들도 꽤 있어요" 아투신은 여전히 그 징그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자. 그럼 이제 얘기는 그만 두지요. 어차피 용병단에 들어가게 되면 다 알 게 될 거, 귀중한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되겠지요?" 가투신은 이렇게 말하고는 먼저 자라고 했다. 자신이 첫 번째 불침번을 서 겠다는 거였다. 우리는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았고 나는 두 번째 불침번이 되 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N:김상현 #9054/10199 ━━━━━━━━━━━━━━━━━━━━━━━━━━━━━━━━━━━━━━━━ 제 목:[탐그루] 아케르 용병단을 향해서 29 관련자료:없음 18/18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0-31 00:13 조회:1035 탐그루 # 마법은 마음이다 - 마음은 칼이다 # 도대체 자다말고 이게 무슨 꼴이람. 나는 두 번째 불침번으로 뽑힌 게 얼마 나 억울한 일인지 하룻밤만에 알 수 있었다. 조금 자볼까 하고 몸을 뒤척이며 이 생각 저 생각하다 막 잠이 들었는데 가투신이 나를 깨웠던 것이다. "졸지 말고, 불을 잘 지켜요" 가투신은 오늘 처음 만난 나를 믿는다는 듯이 이렇게만 말하고 잠이 들었 다. 나는 비록 졸립기는 했지만 불을 꺼뜨리지 않는 일이나 졸지 않고 깨어있 는 건 자신 있었다, 고 말하고 싶긴 하지만 난생처음 너무 오래, 멀리 걸어온 데다가 아침에 잠시 눈을 붙인 것 말고는 잠도 거의 자지 못했기 때문에 졸음 이 쏟아지고 있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만약 불이 꺼지기라도 하면 큰일인 데... 시간을 잰다는 피리 나뭇가지에 불을 붙이자 나뭇가지는 연기도 없이 천천 히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잠시 타들어가는 불꽃을 바라보다가, 나는 꾸벅 고 개를 떨어뜨렸다. (졸았다는 말이다) 이런. 이래서야 안되지. 이럴 때는 수가 없다. 나는 아자닌을 불러내었다. 아자닌이 있다는 게 이럴 때는 정말 큰 도 움이 되는 군. "부르셨어요, 수르카 님" "그래. 마법을 좀 연습해볼까 하구" 나는 낮에 들었던 가투신의 말을 떠올려 보았다. "약한* 것들은* 죽고* 강한* 것들은* 살아남기* 마련이다* 이게 무슨 마법 의 말인지 알겠어?" "다시 한 번 말해보세요" 나는 몇 번을 집중해 말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마법의 말은 마음의 뜻이 분명하게 담겨있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는답니다. 기억나지 않으세요?" 아자닌이 말했다. 하긴. 마법을 배우지 않은 라이짐도 의도가 분명한 마음 이 있었으니까 마법에 성공할 수 있었겠지. 하지만 나는 이거 뭐 하고 싶은 게 없으니 마법이 될 리가 없잖아. 도대체 지금 내 마음은 어떤 걸 원하고 있 나? 저 마법의 말은 어떤 마음을 원하는 것일까? 나는 정신을 집중하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가, 저 마법의 말의 진짜 뜻은 무엇인가 생각하면서 주 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약한* 것들은* 죽고* 강한* 것들은* 사라지기* 마련이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시간 막대기가 놀라울 정도로 빨리 타들어 가기 시작한 거였다. "이거, 이거..." "마법의 말이 작동하는 범위 안에서 여러 활동들을 활성화시키는 마법이라 고 생각됩니다" 아자닌이 말했다. 이런. 내가 원하는 건 시간이 빨리 가서 자는 거였나? 나 는 마법을 멈추려고 해 보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마법은 멈추지 않고 시간 막대기를 다 태워버렸다. 그나마 모닥불에 마법이 걸리지 않은 게 다행이었지 만 이 일을 어쩌지? 지금부터 다시 막대기를 태웠다가는 잠을 조금 자게 될 거고, 그렇다고 라이짐을 지금 깨울 수도 없고. 나는 머리를 썼다. 다음 막대 기를 조금 잘라낸 다음에 불을 붙인 것이다. 흠. 이만하면 훌륭하군. 시간 막 대기에 불을 붙이느라 모닥불에 손을 가까이 한 덕분에 손에 온통 검뎅이가 묻긴 했지만 말이다. 그때 재훈의 타코가 웅얼거리기 시작했다. 가래가 꼈는지 잔뜩 탁한 음성이 었다. 뭔가 좋지 않은 일인가보다. (그런데 타코도 가래가 끼나?) 나는 바짝 긴장하면서 칼을 뽑아들었다. "아자닌. 무슨 일인지 알겠어?" "타코는 예민한 동물입니다. 아마 수르카 님의 청각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이곳으로 오고있는 뭔가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젠장. 그 정도는 나도 알겠다. "알았어. 어느 방향인 것 같아?" "저쪽이요" 아자닌은 타코가 웅얼거리며 바라보는 쪽을 가리켰다. 하지만 한 참 동안 불꽃을 바라보았던 내 눈에는 시커먼 암흑만이 눈에 보일 뿐이었다. "눈이 잘 안보여. 잘 보이게 할 수 없어?" "장작을 하나 들어보세요" 음. 나는 마법을 기대했지만... 그런 수가 있었군. 나는 끝이 타고있는 장 작을 하나 집어들었다. 그러자 장작은 훌륭한 횃불이 되었다. 횃불을 만들어 어둠을 밝힐 수 있을 즈음이 되자 타코에게 들렸던 소리가 내 귀에도 분명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발걸음 소리였다. 한 사람인 것 같았 다. "누...누구냐!" 내가 소리질렀다. 그러자 어둠의 저편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켈켈켈켈..." 들어 본 적이 있는 소리였다. 좀비였다! 이를 어쩌지? 칼을 든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개 때들을 부리던 그 자식이라면 도대체 무슨 방법으로 우리에게 공격을 해 올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좀비에게서 풍기던 이상한 냄새와 미친 듯이 달려들던 개들이 떠올랐다. "가투신, 아니, 십부장님!" 내가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내가 소리를 미처 다 지르기도 전에 가투신은 일어나고 있었다. 언제 뽑았는지 칼까지 들고서. "악령에 씌인 사람이로군요" 혼잣말처럼 가투신이 중얼거렸다. 가투신은 그러면서 발로 재훈과 라이짐을 걷어찼는데 라이짐과 재훈은 아직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천천히 일어났다. "일어나서 칼 들어!" 지금까지 썼던 말투와는 영 딴판인 가투신이었다. 그의 말은 효과가 있어서 재훈과 라이짐은 부랴부랴 칼을 들고 섰다. 그리고 좀비가 나타났다. 침은 여전히 흘리고 있었지만 뚱뚱한 몸이라는 점 이 내가 탐그루에서 만났던 좀비와 다른 점이었다. "저 놈을 먼저 죽이면 돼요. 다른 놈들은 저놈이 죽으면 힘을 못써요" "저도 알아요" 내가 말했다. "수르카도 싸워 본 일이 있군요. 그거 다행이에요" 가투신이 말했다. 하지만 다행은 무슨 다행. 다음 순간 시커먼 공 수 십 개 가 우리에게 달려들었다. 나는 칼을 휘둘러 몇 개를 떨어뜨렸지만 몇 개는 내 팔과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다른 일행을 돌아볼 틈이 없었다. 그쪽도 사정 은 비슷한 것 같았다. "타코다!" 라이짐이 소리 질렀다. 날아드는 시커먼 공들은 타코임이 분명했다. 재훈도 칼을 휘두르며 타코들과 싸우고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재훈의 목덜미에 달라 붙었다. "으으으악!" 재훈이 비명을 질렀다. 나는 달려가 재훈의 목에 붙은 타코를 떼어내 주고 싶었지만 여기 저기서 공격해오는 타코들 때문에 그쪽으로 갈 수가 없었다. 거기다가 라이짐의 팔에도 타코가 한 마리 붙었다. "라이짐!" 내가 소리 질렀고 라이짐은 팔을 흔들어 타코를 떼어내었다. 모닥불의 빛을 받아 라이짐 팔에 흐르는 핏물이 검게 빛났다. 가투신은 칼을 흔들어 공격해 오는 몇 마리의 타코를 베더니 좀비 쪽으로 뛰어갔다. 좀비가 팔을 뻗자 타코들이 가투신 쪽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좀 비의 손바닥에 붙어있는 그 시커먼 눈동자를 바라보는 일은... 한 번 겪은 적 이 있다고는 해도 여전히 끔찍한 기분이 들었다. 하여간 그 와중에 재훈의 목 덜미에 붙어 있던 타코도 가투신 쪽으로 방향을 돌렸고, 그때까지 모르고 있 었지만 내 바짓가랑이에 붙어 있었던 타코도 가투신 쪽으로 뛰어갔다. (살이 아니라 옷을 물고 있던 게 천만 다행이다!) "팔을 베요!" 내가 소리쳤다. 팔을 들어올리지 못하면 좀비가 동물을 부리지 못한다는 걸 알려 주고 싶었다. 내 말이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좋겠는데... 다음 순간, 나 는 가투신의 칼이 번득이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좀비는 더 이상 침을 흘릴 수 없게 되었다. 좀비의 목이 떨어져 바닥을 뒹굴었다. 핏물이 몸에서 뿜어져 올라왔고, 좀비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핏물이 뿜어져 올라가는 것을 보자 나 는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다가 뭔가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설마 목을 베어 버릴 줄은... 타코들이 조용해 진 것은 바로 그 다음 순간의 일이었다. 많은 타코들이 탐 그루에서 보았던 미친 개들처럼 몸을 뒤틀면서 잠든 듯 쓰러져 있었고, 쓰러 지지 않은 타코들은 주변을 살피더니 어둠 속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좀비와는 한 번 붙어 본적이 있기는 했지만 겨우겨우 묶어서 자치대 입구에 던져 놓았을 뿐이지 죽이지는 않았다. 그런데 가투신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사내의 목을 베었다. 저런 게 바로 강하다는 걸까? 죽이지 않으면 죽는 상황에서 망설이지 않는 것? 그래서 가투신은 약한 것이 죽고 강한 것은 살아 남는 다는 걸 칼의 법칙이라고 한 걸까? "재훈을 봐줘요" 가투신이 말했다. 나는 쓸데없는 생각은 집어치우기로 하고 재훈을 보았다. 재훈은 쓰러져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타코에게 물린 목의 상처가 깊은지 피 가 계속 흐르고 있었다. 다른 곳에도 상처는 있었지만 목의 상처에 비한다면 긁힌 정도에 불과했다. 나는 재훈의 배낭에서 치료석을 꺼내 재훈의 목에 대 었다. 잠시 치료가 되는가 싶더니 치료석은 더 이상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수명이 다 된 모양이에요" 가투신은 이렇게 말하고는 나와 라이짐을 번갈아가면서 보았다. 그러나 라 이짐은 치료석을 꺼내더니 자신의 팔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나는? 나도 상처가 몇 군데 있었지만 깊은 상처는 아니었다. 별 수 없지, 뭐. 나는 치료석을 꺼내 재훈의 상처난 목에 갖다 대었다. "불을 보면 물러서는 게 타코나 짐승들의 속성인데... 운이 없었어요. 악령 에 씌인 사람이 팜 산맥 외진 곳까지 나타나리라고는..." 가투신이 말했다. 얼마지나지 않아 재훈의 피가 멎었고 생기는 없어 보였지만 의식은 돌아왔 다. "타코는...?" 재훈이 중얼거리며 두리번거렸고 나도 덩달아 주변을 살펴보았다. 재훈이 치료해 준 오른 쪽 귀가 뜯어진 타코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짐을 덜게 됐군, 약골" 라이짐이 빈정거리듯 말했다. 나는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라이짐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친구인 내가, 이런 상황에서 이름밖에 모르는 사람의 편을 들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재훈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가투신은 잠시 주위를 살피더니 재훈에게 불씨를 옮기라고 했고 나와 라이 짐에게는 짐을 챙기고 남은 장작을 모으라고 말했다. "피 냄새를 맡고 여기저기서 짐승들이 몰려들 거예요. 자리를 옮기지요" 그래서 우리는 한 시간이나 걸려 장소를 바꾸었다. 새로운 야영지는 평평한 곳이었지만, 어두운데도 잔돌이 눈에 띄는 걸 보니 그다지 좋은 자리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주변을 살펴본 가투신은 준비해온 불씨로 금새 장작을 지피고 는 "자. 그럼 남은 잠을 마저 자지요. 수르카. 다시 불침번을 서요" 하고 말했다. 가투신은 시간 막대기를 적당히 부러뜨린 뒤 나에게 내밀었 다. "수고해요, 수르카" 아니, 이 상황에 잠이 오나? 목숨을 걸고 싸운 게 조금 전인데? 거기다가 목잘린 시체가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데? 하지만 가투신은 바로 잠이 들 었다. 라이짐도 그런 가투신을 보더니 자리에 누웠다. 아마 잠은 오지 않겠지 만 강해지고 싶어서 저러는 거겠지. 그리고 재훈은 배낭을 껴안고 뭐라고 중 얼거리더니 자리에 누웠다. 밤하늘에는 별이 가득했다. 멀리서 반짝이고 있는 별들을 보고 있자니 내가 이제 정말로 탐그루를, 그토록 정든 곳을 떠났다는 생각에 가슴이 저려왔다. 그래. 정말로 나는 탐그루를 떠난 거구나... 이제부터는 내 앞에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지 도저히 알 수 없는 생활이 시작된 거다. 바람을 따라서 별들이 흔들리고, 그 많은 별들이 모두 탐그루 쪽으로 흐르고있는 것 같았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N:김상현 #9055/10199 ━━━━━━━━━━━━━━━━━━━━━━━━━━━━━━━━━━━━━━━━ 제 목:[탐그루] 아케르 용병단을 향해서 30 관련자료:없음 24/24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0-31 00:14 조회:1098 탐그루 # 마법은 마음이다 - 마음은 칼이다 # 나는 아자닌을 불러내 볼까 하다가 관두었다. 혼자 별을 바라보는 게 좋았 기 때문이다. 이제 아케르 용병단원이 되겠지. 그리고 칼을 휘두르게 되겠지. 나쁜 놈들을 물리치는 정의로운 검사가 되는 거야. 나는 무수히 반짝이고 터 지는 별빛 사이에서 칼을 휘둘러 나쁜 악당들을 해치웠다.에잇, 이놈은 좀 세 군. 에잇, 하하하 가소롭다. 나에게 덤비다니....에잇, 에잇. 그러는 사이 내 피리 나무가지가 (시간 막대기라고 했던가?) 다 타버렸다. 나는 라이짐을 흔 들어 깨웠다. "벌써야?" 라이짐이 귀찮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자식. 자다가 일어나려면 좀 힘들겠 군. 나는 조금 고소하다는 생각까지 하면서 더욱 세차게 라이짐을 흔들었다. 라이짐이 불침번을 서기 시작하자, 나는 자리에 누웠다. 그것도 라이짐이 따뜻하게 덥혀놓은 자리에 말이다. (다만 냄새가 좀 난다는 게 흠이긴 했지 만) 음. 이제 단단히 마음의 준비를 해야겠다. 그래 용병답게 사는 거야. 이 제 나는 용병이야. 위대한 복수자 검객 아케르가 이끄는 용병단의 정예 용 병... 그나저나 이거, 잔돌이 배겨서 잠이 안 오는 걸. 나는 그래도 좀 편하게 자 보려고 이리 뒤척이고 저리 뒤척였다. 재훈과 눈이 마주쳤다. 재훈은 쑥스러 운지 배낭을 다시 끌어안으며 얼른 눈을 감았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 모 습을 보면서 나는 재훈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까 라이짐이 재훈에게 심하게 말할 때 내가 뭐라고 한 마디 했어야 했을까? 관두자. 거기다가 아까 재훈을 치료하느라 내 치료석은 이제 수명 다 됐다구. 이만하면 됐지, 뭐. 하 지만 피비린내 나는 좀비와의 전투와 초록색으로 빛나던 타코의 눈빛이 떠올 랐고 사이사이 타코를 찾아 두리번거리던 재훈의 얼굴이 떠올랐다. 잠들기 바 로 직전까지 말이다. 아침해가 밝았고 우리 일행은 다시 용병단을 향해 길을 떠났다. 다행히도 더이상 별다른 일은 생기지 않았다. 내가 타코 한 마리를 보고 저절로 칼자루 에 손이 간 일과 라이짐이 대변을 보겠다며 나에게 주변 경계를 부탁한 일을 빼면 말이다. (라이짐도 너무하지. 그건 정말 냄새 고약한 일이었다) 저녁 무렵 ( 그동안 두 번의 식사시간과 여러 차례의 휴식이 지났다) 가투 신은 걷기를 멈추고 갑자기 멈추어서서 사방을 경계했다. 예의 그 '쉿!' 하는 소리도 잊지 않았고. "가투신님 맞습니까?" 수풀 너머에서 이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투신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유훈이로군요" 가투신이 말했다. 가투신이 말하자 수풀을 뚫고 가죽옷에 나와 같은 군용도를 찬 사람이 튀어 나왔다. 얼굴에는 장난끼가 가득했고 거기다 밝은 빛까지 도는 게 용병이 아 니라 꼭 광대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케르 용병단에는 진짜 용병같이 보이 는 사람은 하나도 없는 걸까? "십부장 님. 죽지 않으셨군요" 유훈이라는 사내는 이렇게 말하며 가투신에게 오른 손바닥을 머리 높이로 들어서 보여 주었다. 군대식 경례방법이군. 용병단도 군대식으로 인사하는 모 양이지? 하지만 가투신은 그냥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여 인사했다. 꼭 그렇지 는 않은 모양이네. "이 친구들이 신병인가요? 셋이군요. 가만있자. 인사를 해야 할텐데. 나는 유훈이라고 한다. 가투신 십부장 님 밑에 있어. 너희들은 이름이 뭐지?" "저는 라이짐이라고 합니다" "오호. 눈빛이 아주 사납군. 용병감이야. 여기 이 키 작은 친구는?" "저는 수르카라고 합니다" 제발 키 작다는 말은 하지 말라구요. 그나마 꼬마란 말 안 들은 게 다행이 다. "저는 재훈이라고 합니다" "오호. 나하고 같은 식 이름이군. 자네도 동타실 출신인가?" 재훈은 아무 대답도 없이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흠. 유훈하고 같은 곳 출신이라는 거예요?" "이름이 그렇잖습니까. 안 그래, 재훈?" 하지만 재훈은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그렇다면 어쩌면 생각보다 더 우리한테 필요한 사람일지도 모르겠군요" 가투신은 이렇게 말했다. 더 필요한 사람이라고? 동타실 출신이라는 게 그 렇게 중요한까? "뭐, 그런 건 차차 알아나가기로 하고... 그런데, 여기서 뭐하고 있었던 거 예요, 유훈?" 가투신이 물었다. "아참. 내 정신 좀 봐. 중요한걸 말 안하고 있었네. 본부를 이동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곳에서 십부장 님을 모시고 오라는 명령을 받았구요. 그래서 여기에서 이렇게 기다리게 된 겁니다. 아마 저하고 부대로 돌아가면 차이린 십부장이 반가와 할겁니다" 유훈이 말했다. "...앞으로는 장난이라도 차이린 얘기는 하지 말아요. 그 흉칙한 발목 고리 하며... 교양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가투신은 뭐라고 더 말하려고 했지만 나와 재훈을 한 번 흘낏 보더니 그만 두었다. "네 번 째 본부로 주둔지를 옮겼습니다" 유훈이 말하자 가투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상황은 다 파악 됐으니 이제 서둘러 움직이지요. 네 번째 본부면 여 기서 그리 멀지 않으니 잘됐군요. 가요" 가투신이 말했다. 네 번째 본부로 (라고는 하지만 거기가 어딘지 알게 뭐람) 가는 길 내내 유 훈은 혼자 뭐라고 중얼거렸다.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함부로 물어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용병은 완전 자유라니까. 하지만 유훈의 휘파람 솜씨는 정말 일품이었다. 유훈은 가끔 말하기를 멈추고 휘파람을 불었 는데, 그 가락에 나도 모르게 걸음에 힘이 나는 것 같았다. 빠른 곡조였는데, 탐그루에서 들었던 축제 음악보다 단조롭긴 했지만 흥이 나는 곡조였다. "휘파람을 잘 부시네요" 내가 유훈에게 말했다. 한 번 가르쳐 달라고 해 볼까? "이건 그냥 취미고... 가만있자. 이걸 한 번 들어볼래?" 유훈은 이렇게 말하고는 숲을 향하여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숲이 움직이 기 시작했다. 마법인가? 나는 깜짝 놀라면서 생각했다. 하지만 숲이 움직인 건 아니었다. 숲에 모여 앉아있던 새들이 날아오기 시작한 거였다. "아!" 나는 나도 모르게 탄성을 발하고 말았다. 반짝이는 노란빛 깃털을 가지고 있는 새들이 유훈의 머리 위로 날아 온 것이었다. 그 중 몇 마리는 유훈의 어 깨에 앉기도 했고 몇 마리는 나와 라이짐 주변을 떠돌기도 했다. 라이짐도 신 기한지 노란 새들을 입을 딱 벌리고 바라보고 있었다. 새들은 주먹 하나 정도 의 크기였는데, 머리가 몸에 비해 좀 큰데다가 머리에 뿔처럼 생긴 긴 깃털이 나 있어서 참 멍청하게 생겼다는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떠버리 새야. 보기보다 영리한 친구들이지" 유훈은 자신의 어깨에 앉은 새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그 새는 떠버리 새 라는 이름에 꼭 맞게 사람이 뭐라고 재잘거리는 소리처럼 지저귀었다. 나는 재훈을 한 번 돌아보았다. 재훈은 별 반응이 없었다. 재훈은 신기하지 않은가 보군. 하긴, 산 속에 살았으니 그럴 만도 하지. "유훈!" 그때 가투신이 소리쳤다. 나는 그 소리에 놀랐지만 유훈은 더 놀란 모양이 었다. 유훈 어깨에 앉아있던 새가 머리부터 땅으로 떨어졌다. 물론 금새 다시 날아오르긴 했지만. "작전 중에 그런 짓 했다가는 즉결 처형감이에요" 가투신이 말했다. 표정은 별다를 것 없었지만 듣기에도 끔찍한 말이었다. 유훈은 다시 휘파람을 불었고 그러자 떠버리 새들은 다시 숲 속으로 날아갔 다. "동타실 출신 친구들은 남다른 재주가 있긴 한데... 그 능력들을 소중히 여 기지 않는 것 같아요. 유훈... 자신의 능력을 함부로 쓰지 말아요. 그렇게 함 부로 쓰다보면 정말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야 할 순간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경우가 생길지도 몰라요." 가투신이 말했고 유훈은 다시 뭐라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둘러 걸어간 덕분에 우리는 해가 지기 전에 네 번째 본부라고 불리는 아 케르 용병단의 주둔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실제로 주둔지라고 부르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탐그루를 지나는 군인들은 이런 곳을 주둔지라고 부르곤 했 다) 내내 가투신은 별 말이 없었다. 유훈이 하도 중얼거리는 바람에 그랬으리 라. 용병은 동료가 뭘 하든지 간에 상관하지 않는다더니 정말 그렇게 하는 군. 내가 본 용병단은 말로만 듣던 요새처럼 보였다. 진짜 비스토브레 왕국 정 규군 요새가 어떤 모양인지는 알 수 없지만, 진짜 요새라 해도 이보다 더 요 새 같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서 구해왔는지 사람 키 다섯 배는 됨직한 통나무들로 외벽을 만들어 놓았고 통나무의 끝은 날카롭게 다듬어져 있었다. 거기다가 외벽 바로 밖은 깊게 파 놓아서 다리가 없이는 건너갈 수도 없었다. 나는 밑을 내려다보았다. 밑에는 꼬챙이와 창으로 빽빽히 꽂혀 있었 다. 아니, 용병단을 누가 공격한다고 이렇게 만들어 놓았지? 그나저나 이만한 걸 만들려면 고생 좀 했겠다 싶었다. "어이! 유훈이 왔다! 가투신 십부장 님도 함께야!" 유훈이 소리를 지르자 외벽이라고 생각했던 통나무들 가운데 몇 개가 움직 이는가 싶더니 천천히 앞으로 기울어 건널 수 있게 다리가 됐다. 굵은 쇠사슬 로 연결되어있는 그 다리는 무척 굵었고 세워놓은 다른 통나무들과 마찬가지 로 시커멓게 칠까지 해 놓아서 정말 묵직해보였다. 어른 열 명이 달라붙어도 쉽게 움직일 것 같지 않았다. 다리를 건너 안으로 들어가자 의문은 곧 풀렸다. 용병단은 문을 올리기 위 해 뮤를 이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투신 십부장 님, 오셨습니까" 위병 근무자처럼 보이는 사내가 가투신에게 말했다. 군대식 경례는 하지 않 았다. 이거 완전히 제 멋대로구만. "신병이에요. 행정관은 어디 있지요?" 가투신이 말했다. 근무자처럼 보이는 사내는 행전관은 삼 번 천막에 있다고 말했다. 삼 번 천막을 향해 가면서 나는 아케르 용병단을 살펴보았다. 용병단의 요새는 꽤 넓은 평지에 자리하고 있었고, 뒤로는 절벽이 있어서 뒤쪽으로 공격해 온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정면으로는 들어오면서 본 통나무 외벽과 웅덩이 때문에 누구라도 쉽게 공격할 수 없어 보였다. 용병단 내부에는 크고 작은 천막이 빙 둘러가면서 십 수 군데나 있었다. 천 막들은 거의가 다 모양이나 크기가 비슷했는데 특별히 큰 것도 하나 눈에 띄 었다. 그리고 중앙에 만들어진 공간 (운동장이라고 부르는지 아니면 군대식으 로 연병장이라고 부르는 지는 알 수 없지만)에는 용병들이 칼쓰기나 활쏘기 연습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이 내는 기합소리와 함성이 용병단을 울리고 있었다. 확실히 활기가 넘치고 있다는 점에서는 탐그루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다가 제멋 대로인 복장과 머리 모양도 탐그루와 비슷했 다. 이거, 기강이 있는 군대 같지는 않군. 내가 본 군인들은 하나같이 면도를 깨끗하게 하고 머리는 짧게 자른 모습이었는데 말이야. 그렇지만 겉만 보고는 그 안에 뭐가 있는지 아무도 알 수 없는 거지. 나와 라이짐, 그리고 재훈은 삼 번 천막까지 가투신을 따라 갔다. 그러고 보니 유훈이 보이지 않았다. 요새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어디론가 아무 말도 없이 사라진 모양이었다. 정말 자유롭기는 자유로운 모양이로군. 천막 안에는 책상 하나가 있었고 그 책상머리에 앉아 있는 사람이 행정 담 당관인 모양이었다. 그는 꼬불꼬불한 곱슬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는데, 얇은 입술과 길게 튀어나온 턱, 그리고 길게 찢어진 눈이 어딘지 기분 나쁜 인상을 주고 있었다. "순무. 나 왔어요" 가투신이 말했다. 가투신의 목소리에는 반가운 빛이 역력했다. 순무는 손으 로 가투신에게 앉으라고 하면서 뭔가를 계속 적었다. "빌어먹을... 왜 또 예산에 자꾸 문제가 생기는지 모르겠어. 우리 급식비하 고 운송비, 또 칼하고 화살촉 값하고... 거기다가 이제는 신병까지 셋이나 왔 군. 의뢰는 받아왔어?" 순무가 물었다. "세 군데예요. 두 군데는 악령 씌인 사람들 같고 한 군데는 산적이라는 데 좀 이상하긴 하지만... 뭐, 하여간 보수는 다 넉넉하게 치러 줄 거예요. 이 신병들 어쩌죠?" "단장님은 내일 저녁때나 오실 거니까 오늘은 간단한 시험이나 해보고 인계 해 주면 되지. 가투신. 좀 부탁해. 나는 이 책상에서 도저히 빠져나갈 수가 없어" 그러고 보니 순무의 오른 손 검지 손가락에는 먹물 때가 잔뜩 끼어있었다. 저 사람은 용병이 아니라 회계 담당 같은 일을 하는 모양이군. 그나저나 아케 르는 없다는 말인가? "그러죠. 자. 따라와요. 겁먹지 말고" 가투신이 말했다. 겁먹지 말라고 말하는 건 좋지만 눈웃음은 제발 치지 말 아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징그럽단 말이야! "저, 시험은 언제 보지요?" 순무가 있던 천막에서 나오자 라이짐이 가투신에게 물었다. "아, 시험요. 오는 길 내내 다 시험이었어요"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저희... 시험 결과는 어떻습니까?" 라이짐이 물었다. 나도 그게 제일 궁금했다. 재훈도 마찬가지이리라. "물론 모두 불합격이에요" 나는 또 한 번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라이짐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재훈 도 우리와 비슷한 심정일 것이다. "용병으로서는 불합격이에요. 하지만 신병으로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 요. 일단 훈련을 받게 될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는 말아요" 가투신은 이렇게 말하고는 우리를 구 번 천막으로 안내했다. 이거, 가투신, 사람 놀라게 하기는. 저런 징그러운 웃음을 짓는 것부터 벌써 머릿 속에 뱀이 한 마리 들어있는 것 같다니까. 구 번 천막은 자치대로 말하자면 내무반 같은 곳이었다. 아무도 없기는 했 지만 개인 사물함이나 잘 수 있게 만들어진 침상이 있었으니까. 천막 안은 땀 냄새와 섞인 공기가 진하게 흐르고 있었다. 곧 우리의 땀 냄새도 이곳에 합류 하겠지. "저기 구석에 빈 곳 아무 곳에나 짐을 풀어요" 가투신이 말했다. 나는 적당한 자리에 배낭을 내려놓고 짐을 풀기 시작했다. 침상 위에는 작 은 상자가 하나 놓여있었는데, 다른 자리들을 보니 그곳에 옷가지와 칼 손질 도구 등이 들어있었다. 나도 그것들을 보고 대충 옷가지와 다 쓴 치료석 (별 필요는 없겠지만) 등을 그 안에 넣었다. 라이짐과 재훈도 나와 마찬가지로 하 는 것 같았다. "자. 그럼 이제 내 할 일은 끝난 것 같군요. 내가 반장에게 말해 둘 테니까 셋은 잠깐 좀 쉬고 있어요" 반장이라니? "저, 그냥 여기 있으면 됩니까?" "내가 말한 그대로에요. 죽지 말아요" 가투신은 라이짐의 질문에 이렇게 말하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 보니 죽지 말라는 말은 가투신이 늘 하는 인사인 모양이었다. "이제 어쩌지?" 내가 라이짐에게 물었다. "몰라. 일단 자고 보지, 뭐. 난 졸려" 라이짐은 이렇게 말하고는 침상 위에 벌렁 누웠다. 재훈은 어쩌면 좋을까 생각하는 듯 하더니 가방 안에서 뭔가를 꺼냈다. "재훈, 그게 뭐야?" 내가 물었다. 하지만 재훈은 대꾸도 하지 않고 그 물건으로 자신의 칼을 꺼 내 거기에 문지르기 시작했다. 자세히 보니 숫돌같이 날을 벼리는 물건인 모 양이었지만 정확하게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나는 칼을 갈고 싶지도 않았 고 잠이 오지도 않았다. 사실 내가 애초에 아케르 용병단에 마음을 두게 된 건 순전히 위대한 복수 자 검객 아케르의 이름 때문이었다. 형제를 위해 목숨을 걸고 복수에 나선 아 케르의 무용담은 탐그루의 어린아이들을 사로잡았다. (물론 나도 포함해서) 그리고 무엇보다 결정적인 이유는 내가 본 아케르의 모습이었다. 미친 뮤를 단칼에 베어버린 그 칼솜씨. 그리고 나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리를 떠나 는 뒷모습에 나는 완전히 매료되어 버린 것이다. 그런데 그 아케르를 내일 저녁이면 만나 볼 수 있다니. 긴장되는 일이기도 하면서 기대되는 일이기도 했다. 나도 검객이 될 수 있을까. 복수자 검객 아 케르처럼 라이짐과 함께 루비오를 베고 라스폼을 벨 수 있을까. 만약 그렇게 된다면 사람들은 나를 '위대한 복수자 검객 수르카'라고 부를 지도 모른다 PRINTER/CAPTURE를 OFF 하시고 [ENTER] 를 누르십시오. HiTEL───────────────────────────────────── 창작연재 (SERIAL) LN:김상현 #9100/10199 ━━━━━━━━━━━━━━━━━━━━━━━━━━━━━━━━━━━━━━━━ 제 목:[탐그루] 아케르 용병단을 향해서 31 관련자료:없음 26/26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1-01 00:36 조회:1070 탐그루 # 마법은 마음이다 - 마음은 칼이다 # 그나저나 이제 뭘 하지? 뭐, 별 수 없군. 이럴 때는 만만한 게 아자닌이다. 나는 아자닌을 불러내었다. "예, 부르셨습니까, 수르카님" 또 똑같은 인사. "이봐, 아자닌. 앞으로는 좀 다르게 인사할 수 없어? 안녕하세요? 뭐 그런 인사도 있고, 아! 또 불러주셨군요! 그래도 좋잖아?" 나는 아자닌에게 이렇게 말했다. "예, 수르카님" 아자닌은 이렇게 대답했다. "아자닌. 나하고도 얘기 할 수 있어?" 라이짐이 아자닌에게 물었다. 어라? 갑자기 끼어 들기는. 하지만 친구니 뭐 한 번 봐주지. "물론입니다" 아자닌이 대답했다. "나는 수르카의 친구야. 그거 알지?" "예" "너 예쁘다는 말 들어본 적 있니?" 뭐라구? 나는 어이가 없어서 라이짐을 한 번 쳐다보았다. "한때 사람이었을 때... 들은 적도 있었습니다만... 하지만 꽤 오래 전 일 이라..." 아자닌은 조금 당황하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잘 보이지 않는 얼굴이지 만 붉어진 것 같기도 한데? 나는 처음으로 보는 아자닌의 인간적 (이라고 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인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언제쯤 네 얼굴을 분명히 볼 수 있을까?" 라이짐이 물었다. "수르카 님의 마법이 보다 강해 진 후의 일입니다. 언제가 될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자닌이 대답했다. 그런데 이건 또 뭐야? 아자닌의 목소리가 몇 배는 더 상냥하게 들리는데. 나보다 라이짐하고 더 가까워지는 건 좀 싫은데. "이봐. 이 반지의 주인은 나고 아자닌은 이 반지의 정령이야. 너무 개인적 인 말은 좀 삼가 해줘" 내가 말했다. "칫. 너 질투하는 거냐?" 라이짐이 말했다. "시끄러워!" 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라이짐도 당장 뭐라고 한 마디 하려고 하는데 재 훈이 갑자기 끼어들었다. "나도 하나 물어도 될까, 수르카" 나와 라이짐은 동시에 말을 멈추고 재훈을 바라보았다. 재훈이 내 이름을 부른 일은 처음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가 구해 준 타코가 어디로 갔는지 혹시 알 수 있니?" "그건 알 수 없지만 그 타코가 무리를 따라 도망치지 않았다는 것만은 확실 합니다" 아자닌이 말했다. 재훈은 그렇군, 하면서 다시 칼 닦기에 열중하기 시작했 다. "그 타코 기르고 싶은 거야? 아서라, 아서. 타코 사냥꾼이 실수로 네 심장 에 화살을 날릴지도 몰라. 아니면 네가 자고 있을때 그 타코가 널 잡아먹을 지도 모르지" 라이짐이 비꼬듯 말했다. "상관마. 나도 네가 뭘 하든 상관 않을 테니 말이야" 재훈이 말했다. "아자닌. 피해있는 게 좋겠어. 사람들 일에 휘말리는 건 좋지 않잖아?" 아무래도 말싸움이 날 것 같아서였다. 아자닌이 그런 싸움에 말려드는 건 별로 보기가 좋지 않을 것 같았다. "예, 수르카 님" 아자닌은 사라져 버렸지만 말싸움은 계속 될 조짐이 보였다. 참, 이거. 벌써부터 사이가 좋지 않은 동료가 생겼군. 그럼 나는 이제 가운 데에서 어째야 하나? 라이짐에게 그만두라고 말할까? 재훈이 용병단에서 쫓겨 나기를 바래야 하나?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천막이 열리고 한 무리의 사내들이 들어왔 다. 나는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고 라이짐도 나를 따라서 일어났다. 다 만 재훈 만이 하고 있던 일을 아무 말없이 계속하고 있었다. "수르카! 라이짐! 재훈!" 사내들 중 뚱뚱하고 덩치가 큰 사람이 소리쳤다. 나는 나도 모르게 '예'하 는 대답을 했고 재훈도 대답을 했지만 라이짐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누구야! 대답 안한 거!" 뚱보가 다시 물었다. 험악한 목소리였다. "나. 그리고 반말하지마" 라이짐이 말했다. 저 자식, 여기서까지 소매치기 두목 흉내야? 제발 참아 줘. "음. 네가 반말하니까 나도 해도 상관없겠군. 너의 셋 다 갓 성년이 된 거 알아. 나 우보 반장님은 올해로 열 여섯이 되니까 함부로 굴지 말라구" 험악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그렇게 까다로울 것 같지는 않은 말투였다. "우보 반장. 정식 용병이라면 몰라도 같은 훈련병인 모양인데 함부로 말하 지 말아 줬으면 좋겠어" 라이짐이 말했다. "...믿는 게 있는 녀석인 모양이군. 우보. 내가 혼 좀 내줄까?" "가만 있어, 하진" 키가 작고 얼굴이 까무잡잡한 친구가 말했지만 우보는 간단히 하진의 말을 막고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그래. 네 말대로 여기 훈련병끼리는 동등해. 사실 정식 단원이 된다고 해 도 십부장 정도가 아니라면 아무리 고참이라도 고개 숙일 필요는 없지. 하지 만 단체 생활이잖아? 조금 양보하는 게 어때, 라이짐. 우리끼리는 나이순으로 서열을 정하고 존대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정하고 있거든? 그러니까 그대 로 따라 줘" "나이순이라..." 라이짐은 조금 삐딱한 표정을 지은 다음 우보 쪽으로 걸어갔다. "앞뒤로 다섯 살까지는 친구로 지낼 수 있다는 말 알지? 나 라이짐이야. 잘 지내 보자구. 우보 반장" 라이짐은 이렇게 말하면서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잠시 침묵이 있었다. 우 보 반장은 잠시 어떻게 하면 좋을까 생각하는 듯 하더니 머쓱한 표정을 지으 며 라이짐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뒤이서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 다. "거봐. 네 인상으로는 안된다고 했잖아" "어이, 우보 반장. 이제 나한테 은화 두개 빚졌다" 나는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어서 그냥 멍하니 있었다. 라이짐이 내게 걸 어오면서 말했다. "어디에나 타협을 할 수 있는 지점은 있기 마련이야" 그 짧은 시간에 상황을 파악한 라이짐의 능력이 놀랍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보 반장의 험악한 목소리는 은화 두 개 때문이었다. 발단은 하진이라는 훈련병이었다. 하진이 신병이 들어온다는 말을 듣고 이 런 말을 한 것이 일의 시작이었다. "우보 반장이 아무리 험악하게 말해도 훈련병들이 다 웃는다는 거 알지? 그 래서 매 번 신병이 들어올 때마다 반장 얼굴을 보고 마음을 놓잖아. 과연 이 번에도 그럴까?" "내가 말만 하면 웃는다는 게 무슨 소리야?" "우보 반장은 아무리 심각한 얘기를 해도 웃긴다니까. 우보 반장 얼굴을 봐. 험악한 인상하고는 거리가 멀지. 선량하게 살찐 얼굴을 한 용병 얘기 들 어본 적 있어?" 이렇게 하진이 약을 올리자 우보 반장은 내기를 하자고 했고 훈련병들 몇몇 이 내기에 달려든 모양이었다. 그리고 결과는 내가 본 대로 하진의 승리였고. "장난쳐서 미안해. 사과했으니까 이만 잊자구" 우보 반장이 말했고 나와 재훈은 그냥 머쓱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멋도 모르고 겁먹었던 일이 부끄럽기도 하고, 내 친구인 라이짐이 아니었다면 우보 반장이 내기에서 이겼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서였다. "자. 이제 저녁 시간이야. 저녁 먹으러 가자구" 우보 반장이 말하자 단원들은 대충 짐을 챙기더니 천막 밖으로 나가기 시작 했다. 나는 탐그루에서 본 군인들 기억이 났다. 나는 그들이 삼삼오오 줄을 맞춰 걸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저런 것이 단체 생활의 멋이겠구나 생각했었다. 그러 나 내 생각과는 정 반대로 용병단 훈련병들은 아무렇게나 우루루 걸어가기 시 작했고 나는 어이가 없었다. "오는 동안 꽤 힘들었지? 듣자하니 악령 씌인 것들이랑 싸움도 했다며. 어 쩌면 네가 나보다 먼저 정식 단원이 될지도 모르겠는데. 이봐, 수르카. 필요 한 것 있으면 뭐든지 말해. 술? 담배? 호신용 단검은 어때?" 어느 사이엔가 하진이 내 옆에 붙어서 말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나는 잠자 코 하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시커먼 얼굴에 거친 피부를 보니 하진은 이곳 에 오기 전에 농사일을 한 것 같다. 나는 내 어떤 농사를 졌는지 묻고 싶었지 만 가투신이 말한 규칙이 생각나서 그만 두었다. "보아하니 자나크 출신 같은데? 말투도 그렇고 옷차림도 그렇고. 그렇다면 이것저것 신기한 물건들 많이 봤을 텐데 가지고 싶은 것 없어? 여긴 잔소리하 는 부모도 없고 간섭하는 어른도 없어. 그림? 그림은 어때? 죽 빠진 미인들 그림들 말이야. 스파일에서 구해온 게 몇 개 있어. 아주 귀한 거라구. 그곳에 서 잘 나가는 기생들 그림이야. 관심 없어? 그럼 술은 어때? 갓 성년이 됐다 던데 마셔 본 적 없겠지? 이곳에 온 기념으로 한 잔 친구들하고 하는 거야. 어때?" "난 원래 부모 같은 거 없었어" 나는 쉴새없이 주절거리는 하진을 한 방 때려주고 싶었지만 겨우겨우 참으 면서 한마디했다. 보아하니 내 나이 또래 같은데, 까불기는. "그래. 그럼 나하고 같은 고아구나. 그럼 삼 년 전쟁 때 부모를 잃었나? 하 기사 우리 또래에 용병이 된 애들은 거의 다 그렇지. 내 부모는 농사꾼이었 어. 너희 부모는?" "과거는 묻지 않는다는 규칙이 있는 걸로 아는데" "허허, 이거 참. 까다롭게 굴기는. 규칙이 왜 있는 줄 알아? 어기라고 있는 거야. 이곳에서 과거를 말 안 하는 친구는 없다구. 생각해봐. 비슷한 또래끼 리 모여서 이 얘기 저 얘기하지 않으면 무슨 낙으로 살겠어? 저기 저 얼굴 희 고 잘생긴 금발 친구 있지? 저 친구는 열 일곱이고 학자 집안 출신 마로우야. 칼을 쓰고 싶은데 집에서 반대해서 싸우고 나왔지" "넌?" 내가 물었다. "나? 하진? 하하하. 스파일 북부 국경 출신이야. 부모님은 농부였어. 바바 족은 들어봐서 알지? 그놈들한테 마을이 몰살당할 때 부모님을 잃었지. 복수 심에 불타서 여기저기 떠돌다가 여기 온지는 두 달 됐어" "난 수르카. 네 말대로 자나크 타실 출신이야. 우리는 남쪽 자나크라고 부 르지 않고 탐그루라고 해" 별로 말해주고 싶지는 않았지만 하진의 말대로 아무 얘기도 하지 않는다면 좀 심심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름과 출신 정도는 말해도 좋겠다 싶어 서 말을 해 주었다. "그럼 왜 이곳까지 오게 됐나? 아케르 대장의 명성을 듣고? 돈을 벌려고? 아무 생각 없이?" 나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앞에 식당 안으로 들어가고 있는 사람들이 보여 서 다 왔구나 싶었기 때문이었다. "오호라. 동기는 별로 말하고 싶지 않으시다? 좋지. 처음부터 밑천을 드러 내면 별로 재미없잖아? 그래그래. 다 이해해. 하지만 결국엔 다 말하게 돼 있 어. 여기 온 지 이 주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래봬도 알 건 다 안다구. 눈치 빼 면 이 하진은 시체야. 여기 모인 훈련병 열 여섯 명중에서 끝까지 자기으 내 력을 말 안한 놈은 딱 하나 뿐이야" "누군데?" 내가 물었다. "저기 저 친구" 하진은 턱으로 한 사람을 가리켰다. 그냥 보기에도 위험해 보이는 친구였 다. 쑥 들어간 눈엔 그늘이 져 있고, 얼굴엔 삭막한 기운이 가득 드리워진 친 구였다. 뿐만 아니라 얼굴에는 칼자국까지 있어서 그냥 보기에도 뭔가 사연이 있는 친구다 싶었다. "찬이라고 한다는 것 말고는 몰라. 그냥 찬이야. 찬. 별로 말도 없고 혼자 있을 때에는 가만히 앉아서 놀거나 나가서 칼을 휘두르거나 하지. 나이는 스 물이라고 하는 거 같은데, 들어 온지 일주일 된 친구야. 아마 내일 아케르 단 장이 오면 정식 단원이 될 것 같아. 칼도 활도 뭐든지 다 잘하거든. 신병 같 지가 않아. 아마 여기 저기 떠돌면서 사람께나 베었을 것 같다고들 해" "찬? 이상한 이름이네?" "가짜 이름이겠지. 죄를 짓고 온 친구가 분명해. 수배자거나 탈옥수 같은 말이야. 사실, 죄를 짓고도 본명을 쓴다는 건 멍청한 일이지. 안 그래?" 나는 피식 웃으며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식당은 다른 건물들처럼 천막으로 되어있었지만 큰 천막이어서 내부는 꽤 넓었다. 거기다가 나무로 만든 식탁과 의자가 많이 준비되어 있어서 지금까지 본 용병단 건물 중에 가장 건물 같은 건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식당 안에는 벌써 사람들로 꽉 들어차 있었다. 으깬 감자로 만든 죽과 야채 몇 종류,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고기가 식단인 것 같았다 "많이 먹으라구!" 하진은 이렇게 말하고는 라이짐 쪽으로 뛰어갔다. 불쌍한 라이짐. 내가 들 은 말을 밥 먹는 내내 듣게 되겠구나. 줄을 서서 준비된 그릇과 수저를 들고 기다리는 동안 내 옆에 신병이 한 명 섰다. 하진이 말해준 금발머리 미남, 마로우였다. 학자 집안 출신이라고 했던 가? "수르카, 맞지? 나, 마로우야. 앞으로 잘 지내자" 손을 내밀면서 마로우는 웃음을 지어 보였는데 그 모습이 마치 지체 높은 귀족 같았다. 잘 생긴 놈은 어디가나 대우를 받기 마련이라니까. 웬지 주눅이 드네, 원. "응. 하진이 그러는데 학자 집안 출신이라며?" 내가 물었다. 하진의 말이 맞는지도 확인해 볼 겸해서였다. "뭐, 꼭 그렇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 두지. 네 칼을 봤어. 삼 년 전쟁 전에 만들어진 칼 같던데, 맞아?" 나는 잠깐 생각을 해 보았다. 그러고 보니 그 칼은 붉은 등이 그려진 상자 안에서 사비오 영감이 탐그루에 도착하던 날부터 보관되어 있었으니까 마로우 의 말이 맞을 가능성이 높았다. "어떻게 알았어?" "칼집에 있는 상징물을 박아 넣는 곳에 있는 문양 때문이지. 삼 년 전쟁 전 의 칼에는 카를로스 장군의 문양과 대마법사 아킨을 상징하는 문양이 함께 새 겨져 있거든. 대마법사 아킨의 문양과 카를로스 장군의 문양이 따로 새겨지게 된 건 삼 년 전쟁 이후의 일이야. 전설에 따르면 카를로스 장군은 타실 출신 이고 대마법사 아킨은 스파일 출신이라고 하거든. 그래서 스파일에는 아킨의 문양이, 타실에는 붉은 용의 카를로스의 문양을 그리게 된 거지. 그런데 네 옷차림이나 말투로 봐서는 자나크 출신 같은데... 스파일의 군용도를 가지고 있다니 사연이 있겠구나" 마로우가 말했다. "그래. 하지만 사연은 묻지 말아 줘" 나도 잘 모르니까 말이야. 내 대답에 마로우는 어깨를 으쓱 하면서 식사를 배급받았는데 그 동작이 하도 세련되고 멋있게 보여서 나도 앞으로 이런 상황 이 생기면 꼭 저렇게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배급을 주는 사람은 머리에 흰 모자를 쓴 사람이었다. 훈련병일까? 나이가 많아 보이는 걸로 봐서 그렇지는 않겠고. 그럼 용병? 용병이 식사도 만드는 걸까? 아니면 가투신이 말했던 용병단 요리사? "너, 신병이구나" 흰 모자를 쓴 사내가 말했다. 목소리를 들어보니 생각보다 더 나이가 들었 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 "많이 먹어라" "예" "그리고 내 한마디 충고하겠는데" "예" "...죽지마" 흰 모자는 이렇게 말하고는 껄껄 웃기 시작했다. 아니 이건 무슨 경우지? 놀리는 건가? 젠장. 어리다고 함부로 해도 되는 거야 뭐야 이거. 나는 기분이 상해서 그릇에 담긴 으깬 감자와 야채를 비비면서 투덜거렸다. 하지만 그 위 에 고기를 많이 얹어 준 건 고마운 일이었다. 이거, 사비오 영감 밑에 있었을 때보다 더 잘 먹겠는데?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N:김상현 #9101/10199 ━━━━━━━━━━━━━━━━━━━━━━━━━━━━━━━━━━━━━━━━ 제 목:[탐그루] 아케르 용병단을 향해서 32 관련자료:없음 28/28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1-01 00:37 조회:1039 탐그루 # 마법은 마음이다 - 마음은 칼이다 # 자리에 앉자 마로우가 내 옆에 앉았다. 나는 라이짐 옆에 앉으려고 했지만 사람이 많아서 라이짐이 어디에 앉아 있는지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하지 만 마로우 같이 잘생기고 똑똑한 친구 옆에서 밥을 먹는다는 것도 그리 나쁜 일은 아니지. "많이 먹도록 해" 마로우가 말했고 나는 너도 많이 먹으라고 말하고는 수저로 꾸역꾸역 식사 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까 많이 먹으라는 말과 죽지 말라는 말은 이곳 의 인사인 모양이었다. 자기 전엔 무슨 말을 할까? 아침에는 또 무슨 말을 하 고? 식사를 간단하게 끝낸 나는 식당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내가 나온 천막이 어디였더라? 그렇다고 아무나 잡고 물어볼 수도 없고. 나는 멍청하게 보이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두리번거렸다. 오래지 않아 나는 라이짐을 찾을 수 있었 다. 우리 천막이 어딘지 기억 나느냐고 묻지는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 옆에 는 재훈과 우보 반장이 있었기 때문있었다. "...아, 수르카라고 했지? 정식으로 인사하자. 난 우보야. 신병 반장을 맡 고 있어. 뭐, 궁금해 할 것 같아서 말해주는데 나는 남쪽 타실에 있는 바닷가 마을 출신이야. 그 이상은 차차 알게 될 거고...담배 피우니?" 나는 아니라고 했다. 담배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돈 이 아까웠기 때문이기도 했고, 담배를 너무 많이 피워서 길바닥에 토하는 사 람들(대게 라이짐 패거리의 꼬마들이었다)을 많이 본 탓도 있었다. 우보 반장은 담배 쌈지를 꺼내 종이에 재빠르게 싸 말더니 입에 물어 불을 당겼다. 담배를 피우기 시작한지 꽤 되는 모양이군. 불꽃돌로 저렇게 금방 담 배불을 붙이는 걸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나 같은 경우에는 불꽃 돌로 마른 나뭇잎에 불을 붙이기도 쉽지 않은데 말이야. "식사 후의 담배 맛을 한 번 본 사람은 담배 없이 살기 힘들지. 그러니 배 우지 않는 편이 나을지도 몰라. 나도 들은 말이지만 작전에 나가게 되면 담배 는 엄격하게 통제된다니 말이야. 그나저나 뭐 궁금한 거 없어? 물어보기만 하 라구. 얘기해 줄께. 이곳은 근본적으로 개인 생활은 거의 완전하게 자유니까 너무 겁먹지 마" "우보 반장. (나는 말을 놓는 대신에 반장이라는 호칭은 붙여 부르기로 했 다) 정식 단원은 얼마나 있어야 되는 거야?" "한 달. 보통이 그렇다는 말이고 꼭 그런 규칙이 있는 건 아니야. 두 주마 다 한 번 씩 아케르 단장이 직접 심사 한 다음에 적당한 십부장에게 가게 돼. 나는 온지 삼 주가 됐는데.... 아마 다음 주면 정식 단원이 될 꺼라고 생각 해. 뭐, 어쨌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 겁먹지 마. 보니까 아무나 다 정 식 단원이 되던데, 뭐" 우보 반장은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잃지 않고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신병은 언제나 이렇게 많아?" "들은 말인데 이렇게 십 수명씩 신병들이 있는 건 가을뿐이 라더라. 오늘 너희 세 명이 와서 열 아홉 명이 됐지. 겨울에는 주로 훈련만 하니까 보통 가 을에 신병을 많이 받는 모양이야. 그래야지 일거리가 많은 새 봄이 왔을 때 신병들이 어느정도 훈련을 받은 후 작전에 나갈 수 있으니까... 아케르 용병 단은 다른 용병단보다 신병 사망률이 낮다는 말도 있어. 뭐,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야. 훈련의 강도로 봐서는 맞는 말 같기도 하고" 그러고 보니 이 짧은 가을이 지나면 나는 내 삶에서 열 네 번째 (인지 열 다섯 번째인지 확신 할 수는 없지만... 고아들은 자신이 어떤 별 아래 태어났 는지 알 수 없다. 그것을 말해 줄 사람은 이미 죽었기 때문이다. 고아들은 운 명의 돌연변이들이다) 겨울을 맞게 될 것이다. 팜 산맥에 흰눈이 내릴 때 나 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눈이 쌓이고, 눈이 녹고, 다시 바르도 대륙에 봄싹들이 자랄 때면 내 안에서도 무엇인가 파릇파릇한 새싹들이 자라날까? 라 이짐은 복수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을 단련시켜 놓겠지. 누군가를 죽이러 떠나겠지... "우보 반장. 낮에는 보통 뭘 해?" 라이짐이 물었다. "아무 일도 안 해. 그냥 죽지 않는 법을 배울 뿐이야. 우습지... 죽지 않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 매일매일 반죽음을 당해야 하니까" 우보 반장은 이렇게 말하면서 얼굴에 사람 좋은 미소라기 보다는 뭔가 숨기 고 있는 사람이 짓는 비웃음 비슷한 미소를 띄었다. 더럭 겁이 났다. "차이린이라는 이름을 원수처럼 여기게 될 거라는 것만 말해 둘께. 옛날 말 에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이 있지만... 아마 차이린을 사랑하는 것은 원수로 여기는 것보다 더 끔찍할 거야" "차이린? 발목에 흉칙한 해골모양의 고리를 차고 다닌다는 사람 말이야?" 내가 말했다. 확실히 나는 기억력은 좋은가보다. 가투신 십부장와 유훈이 말하는 걸 한 번 들었을 뿐인데 이렇게 정확하게 말하다니 말이다. "뭐 비슷해. 그걸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야. 이름이 차리린이었던 가? 항상 원수나 악마... 그렇게만 불렀더니... 이거 이름이 낯설잖아." 유훈이 말했다. 저녁 시간은 완전한 자유시간이라고 했다. 우보 반장이 근무 시간표를 가지 고 와서 근무 순서와 단장의 행동 지침을 불러 주는 시간을 빼고는 말이다. 우보 반장은 행정 담당관의 천막에 다녀와서 우리에게 몇 가지 사항을 말해주 었다. 그 사항들 대부분이 죽지 말라는 말과 일맥 상통하는 것들이었다. 밤에 나다니지 말 것 (당연한 일이다. 활을 든 근무자들은 움직이는 것이면 일단 쏘고 볼 테니까), 싸우지 말 것 (누구나 다 칼을 가지고 있는데 함부로 싸울 멍청이가 있을까?), 무슨 일이 생기면 즉각 보고할 것. (아니 무슨 일이 생긴다면 죽고 싶지 않은 다음에야 진짜 용병들을 부르지 않을 수 있을까?) "...그리고 수르카는 나를 따라와. 찾는 사람이 있으니까" 내무반에 모여있던 열 여덟 명이 소리를 질렀다. 나는 어리둥절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내 칼 솜씨가 좀 남다른 점이 있었나? "보기하곤 다른데?" "능력있는 모양이지? 호출까지 받고" "아케르 단장 아들 아니야?" 여기저기서 탄성과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케르 단장 아들이냐구? 그게 무 슨 소리야? "여기선 특별 대우 같은 거 없다는 말이야. 앞으로 자주 듣게 될 말이니까 신경 쓰지마" 우보 반장은 이렇게 말하고는 나를 천막 밖으로 안내해 주었다. 밖은 어두워져 있었다. 여기 저기 연금술사의 등들이 밝혀 있다. 탐그루와 는 달리 몇 발자국 앞도 볼 수 없는 새까만 어둠 속에서 연금술사의 등들이 간신히 어둠을 밀어내고 있었다. 새까만 어둠과 드문드문 밝혀져 있는 연금술 사의 등 그리고 스산히 부는 가을 바람이 어울려 묘한 감정을 불러 일으켰다. 쓸쓸하면서도 무엇인가 그리워지는 감정이었다. 익숙치 않은 길이기 때문인지 몇 번인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이 곳까지 연금술사의 등이 들어오는 걸 보면 외부와의 접촉은 끊임없이 유지되 는가 싶었다. 그러자면 이런 외진 곳보다는 큰 도로가 면해 있는 곳이 더 나 을텐데. "여기가 널 찾는 사람이 있는 곳이야. 용병단 마법사 타호루 님이 있는 곳 이지. 조심해 너를 뮤로 만들어 타고 다닐지도 모르니까..." 역시 사람 좋은 웃음을 터트리며 우보 반장은 걸어온 길을 되짚어 어둠 속 으로 걸어 사라졌다. 역광을 받으며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우보 반장의 뒷모 습을 보고 있자니 아케르 용병단에 와 있다는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우보 반장이 완저히 어둠 속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됐다. 나는 심호흡을 크게 한 번 하고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천막 안에는 두껍게 장정된 책들이 가득 꽂혀있었다. 이렇게 많은 책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지도 책을 파는 가게에서 조금 본적이 있기는 했지만. 어떤 책은 무척이나 낡아 있 었고, 또 어떤 책은 붉은 색으로 화려하게 장정돼 있었다. 저 책들 어디엔가 는 바르도 대륙의 역사와 전설들이 적혀 있을 것이다. 어쩌면 내가 누군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게 될 것인지도 모두 저 책들 안에 적혀 있을지도 모른 다. "수르카. 잘 왔네. 나는 이곳 주둔지 책임 마법사 타호루라고 하네" 나는 마법사라고 해서 늙은 사람을 생각했지만 타호루는 예상 밖으로 젊은 사람이었다. 기껏해야 서른이나 넘었을까? 거기다가 옷차림새도 보통 용병들 과 다를 것이 없었고 억세 보이는 각진 턱과 짙은 눈썹은 오히려 타호루야말 로 용병같이 보이게 하고 있었다. 다만 은빛이 도는 타코 가죽을 둥글게 마름 질한 모자를 쓰고 있다는 점이 좀 달랐다. "앉게. 자네가 정령의 반지를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들었어" 타호루는 이렇게 말하면서 내게 자리를 권했다. "반지를 보여줄 수 있겠나?" 타호루가 말했다. 나는 왼 손을 들어 타호루에게 반지를 보여주었다. "...음. 묘하군. 강제로 호출하기는 어렵겠는데. 자네가 정령을 한 번 불러 내 보게" 타호루는 내 손을 잡고 반지를 이리저리 살피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거야 어렵지 않지. 나는 될 수 있으면 정신을 집중하려고 노력하면서 주문을 외웠 다. "내 마음의 문을 여니 길을 인도해 다오" "아! 수르카 님! 불러주셨군요! 정말 반가워요" 아자닌이 말했다. 아이구, 맙소사. 이거, '부르셨습니까 주인님' 하는 것보 다 낫기는 하지만 지금 분위기에 별로 어울리는 것 같지는 않은데. "아!" 내 생각이야 어찌되었건 타호루는 아자닌을 보더니 이렇게 탄성을 질렀다. 반갑다는 뜻인지, 놀랍다는 뜻인지, 아니면 근사하다는 뜻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탄성이었다. "나를 알아보겠는가, 아자닌" 타호루가 말했다. 어? 그런데 아자닌의 이름은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타호루 님이시군요" 아자닌이 말했다. 비록 또렷하지 않은 얼굴이었지만 기분 나쁜 기색이라는 것은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수르카. 자네 사비오 님의 제자로구만" 사비오 영감이 이렇게 유명한지는 몰랐는걸. 나는 그렇다고 말했다. "반지의 정령은 수석 제자에게만 물려주는 건데... 아자닌의 모습을 보니 자네는 아직 초보자인 모양이군. 하지만 예언자에다 마법사인 사비오 님이 사 람을 고르는 일에 실수하지는 않았겠지" 타호루는 이렇게 말하면서 턱을 쓰다듬었다. "나도 반지의 정령이 있기는 하지만 사비오 님의 정령에 댈 바가 아니지. 그래서 예전부터 아자닌을 참 부러워했었지. 사비오 님의 모든 면이 다 그렇 기는 했지만 말일세... 하여간에 두 말 할 것 없네. 내일부터 내 제자가 되 게. 우리 용병단에는 마법사가 많지 않아. 이곳에는 나 하나 뿐이구. 그렇다 고 성황청이 눈에 불을 켜고 마법사를 찾아다니는 마당에 마법에 재능이 있는 사람을 찾기도 쉽지 않고. 이렇게 만난 건 분명 운명이야, 수르카" 타호루의 말이었다. 어. 이걸 어쩌지. 마법의 말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제자가 되어달라는 말을 듣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저...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서..." 나는 대답을 할 시간을 벌어야 겠다고 생각하고 말을 얼버무렸다. "칼이나 들고 경망스럽게 뛰어다니다 죽는 것 보다 나하고 마법의 말을 연 구하는 게 훨씬 낫지. 오다가 악령에 씌인 사람을 만났다면서. 그런 것들한테 죽고 싶은 건가?" 타호루의 말에 나는 조금 기분이 상했다. 아니, 검사를 칼이나 들고 경망스 럽게 뛰어다니는 사람이라니? 위대한 복수자 검객 아케르가 이 말을 들었다면 어떻게 말했을까 궁금했다. "저는 칼을 쓰고 싶어서 용병단에 온 것이지 마법을 배우고 싶어서 온 게 아닙니다" 나는 타호루의 말이 기분 나빠서 그만 퉁명스럽게 말해버렸다. 내가 칼을 쓰고 싶어서 용병단에 왔도 말했나. 지금? "타호루 님. 그 사람은 악령에 씌인 것이 아니라... 좀비였습니다" 잠자코 있던 아자닌이 대화에 끼어 들었다. 타호루는 이 말에 놀라는 눈치 였다. "아자닌. 정말로 좀비였단 말인가?" "예. 손바닥에 눈이 있었습니다" 아자닌의 말에 타호루는 음, 하는 소리를 냈다. 좀비라는 게 뭐 별다른가? "그렇다면 마칸의 강림이 임박했다는 말이 사실이라는 말인데..." 타호루는 혼잣말처럼 이렇게 중얼거렸다. "시기가 좋지 않아. 수르카. 하루라도 빨리 내 제자가 되게. 용병으로 살아 남기는 사실 어려운 일이야. 이제 곧 마칸 족이 강림한다면 국왕의 군대나 성 황청의 군대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마칸 족을 물리칠 수 없을 걸세... 전설의 전쟁이 다시 시작되는 거지. 자네, 이거 아나? 전쟁이 일어나면 병사들은 쉽 게 죽기 마련이야. 그러나 마법사는 쉽게 죽지 않아. 언제든 제일의 보호대상 이니까" 타호루가 말했다. 나는 타호루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이곳에서도 아킨과 카를로스의 갈등이 존재하는 건가? 마법과 칼이 왜 항상 선과 악처럼 비교돼면서 말해지 는 거지. 마법과 칼은 정말 물과 불처럼 서로 하나가 될 수 없는 걸까. 타호루의 말은 내가 일개 병사라고 깔보고 하는 말 같지는 않았지만, 그렇 다고 나를 염려해서 해주는 말 같지도 않았다. 어떤 이유에선지 나를 반드시 제자로 키우려 한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물론 마법을 배우는 일이 싫은 건 아니다. 하지만 마법을 배우는 쪽을 선택 하는 이유가 전쟁 때 병사가 되어 쉽게 죽는 게 두렵기 때문이라면 그건 비겁 한 행동이다. "당장 어떻게 하겠다고 말씀드리지는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일단 칼을 차고 아케르 용병단에 찾아 왔으니, 먼저 칼을 쓰는 게 좋을 것 같다는 게 제 생각 입니다. 마법을 거부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나는 결국 이렇게 대답했다. "음... 칼과 마법을 동시에 쓰고 싶다? 사비오 님은 그런 생각으로 자네에 게 수석 제자의 자리를 물려주신 건가... 최고가 되려면 한우물을 파라는 말 들어봤겠지? 얼마나 많은 재능 있는 사람들이 마법과 칼을 동시에 가지려고 했는지 아는가? 또 그들이 모두 어떻게 됐는지 아는가? 모두들 자신은 할 수 있다고, 자신은 천재라고 생각했지. 하지만 지금에 와서 보면 그들은 모두 바 닷가의 수많은 모래알들처럼 이름 없는 사람들이 돼고 말았네.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것 한가지만 하게. 한가지만. 그것이 역사에 기록될 수 있는 유 일한 길이야" 타호루는 말을 마치고 생각에 잠겼다. 자신이 한 말을 스스로 되돌아 보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스승님과는 어떻게 아는 사이이신 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내가 물었다. "아. 말 안 했군. 나는 사비오 님과 함께 성황청과 싸운 적이 있어. 오래 전 일이지. 삼 년 전쟁 전이니까... 벌써 이 십 년이 넘었군" 타호루가 말했다. 아니, 그럼 열 살 때 사비오 영감하고 함께 싸웠단 말이야? "그렇게 나이가 많으신 지는 몰랐는데요" 조금 비꼬는 투로 내가 말했다. "그렇지. 마법사치고는 젊은 나이지. 내 나이가 오십 하고 셋 밖에 되지 않 았으니까" 뭐라구? 오십 셋? "...보기 보다 나이가..." "마법사는 보통사람보다 젊어 보이기 마련이야. 사비오 님이 가르쳐 주시지 않았나?" "잠깐만요. 그럼 사비오 선생님은 도대체 나이가 얼마나 된다는 말인가요?" "그건 나도 잘 모르지만...내 나이의 세 배는 되셨을 걸세. 모르지 마법의 힘이라면 더 오래 사신 분일지도 모르니까" 뭐? 백 오십? 뭐? 더 오래 살았을 수도 있다구? 맙소사. 믿을 수가 없군. "칼잡이는 만들어지지만 마법사는 태어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사비오 님 과 함께 있을 때 그렇게도 열심히 사비오 님을 따라가려고 노력 해 보았지 만... 결국 지금은 한낱 용병단의 마법사를 하고 있지" 여기서 타호루는 잠시 허공을 바라보았다. 두 눈엔 질투인지 회한인지 모를 어떤 것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마법사가 오래 사는 건 말일세... 그 이유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 만. 아마 마법사의 핏줄은 따로 있다는 생각이 들어. 그래서 수명이 더 긴 게 아닌가 싶네. 귀족이나 왕족처럼 말이지. 여기서 벌써 여러 명에게 마법을 가 르쳐주려고 해 봤지만 모두 실패했네. 내가 가르치는 방법이 틀린 것 같지는 않은데도 말이지... 역시 마법사는 타고 나는 것 같아. 마법사로 태어나는 게 불해인지 다행인지는 잘 모르겠네. 어쩌면 평범하게 태어나는 게 가장 좋을지 도 몰라. 그런데 자네는 사비오 님에게서 어떤 것들을 배웠나?" 타호루가 물었다. 뭘 배웠냐고? 글쎄. 내가 뭘 배웠더라? "그냥... 다른 사람의 말을 열심히 귀기울여 들으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습 니다" "역시. 사비오님! 다른 사람의 말에 귀기울이는 게 마법의 시작이지. 마법 을 키우기 위한 여러 방법 중 가장 단순하면서도 가장 어려운 거지. 하지만 그것만으로 되는 건 아니야. 먼저 타고난 능력이 있어야 돼" 아니다! 내 마음이 그렇게 말했다. 세상에 타고 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검사도 마법사도 단순히 그런 핏줄을 타고 났다는 이유만으로 검사나 마법사 가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고아다. 그렇지만 나도 날 때부터 고아는 아니었다. 고아로 태어나는 사람 따위는 한 명도 없는 것이다. 태어날부터 정 해지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절대로 없다. 마법사로 태어나도 검사가 될 수 있는 거고, 검사로 태어나도 마법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타호루는 말을 마치고 아자닌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쩐지 기생을 바라보는 술 취한 사람의 얼굴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기분이 나빴다. "아자닌의 모습이 분명치 않아... 자네 마법이 불명확한 것은 아직 정확히 마법의 말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지. 하지만 걱정 말게. 내가 가르쳐줄 테니 까. 나는 자네를 겨울이 다 가기 전에 훌륭한 마법사로 키워 줄 수 있어" 그렇지만 나는 당장 마법을 배우고 싶은 마음은 별로 없었다. 먼저 타호루 가 아자닌을 바라보는 눈빛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고, 거기다가 라이짐과 이제 막 친해진 우보 반장과 하진, 마로우 같은 친구들과 떨어지고 싶은 마음 도 없었다. "저... 일단 훈련병들과 훈련을 받은 다음에 결정하고 싶습니다. 스승님께 서는 제게 칼을 남겨 주셨습니다. 스승님이 예언의 능력이 있다면 이는 분명 히 무슨 까닭이 있을 것입니다" 내가 사비오 영감 얘기까지 물고 늘어지자 타호루는 더 이상 물고 늘어지지 않았다. "좋아. 그렇게 하게. 하지만 자네는 분명 내 밑에서 마법을 배우게 될 거 야. 내 장담하지. 그리고 내 한 마디 해 줌세"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타호루를 바라보았다. "...죽지 말게, 정말로" 나는 타호루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훈련병들의 천막으로 돌아갔다. 내가 들어섰을 때는 이미 취침 시간이었다. 연금술사의 빛도 약한 붉은 빛 취침 등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탐그루의 여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빛이었 다. 사내만 득실거리는 데에서 이런 빛을 보다니 좀 이상한 걸) 연금술사의 붉은 빛은 기운을 솟게 하는 힘이 있다고 하는 얘기를 들었던 적이 있다. 그 런데 여관에 붉은 등을 켜는 이유는 뭘까? 특별히 기운이 필요한 일이라도 하 는 모양이지 뭐. 아니면 사람들이 말하듯 늙은 여자도 붉은 등 아래에 서면 예뻐 보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고 말이야. "운이 좋아, 수르카" 첫 번째 불침번은 하진이었다. "오늘은 근무가 없어. 푹 자도록 해" 나는 내 자리에 누웠다. 몸은 피곤했지만 통 잠이 오질 않았다. 훈련에 대 한 기대와 두려움, 마법사 타호루가 했던 말들... 이런 것들이 나를 잠들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피곤한 내 몸은 쉽게 내 생각들을 이겨내고야 말았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N:김상현 #9102/10199 ━━━━━━━━━━━━━━━━━━━━━━━━━━━━━━━━━━━━━━━━ 제 목:[탐그루] 살아남는 법을 배우다 33 관련자료:없음 30/30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1-01 00:38 조회:1067 탐그루 # 마법은 마음이다 - 마음은 칼이다 # * 살아남는 법을 배우다 "기상!" 마지막 불침번이었던 소리를 질렀다. 훈련병들은 모두 화살처럼 빠르게 자 리에서 일어나 옷을 챙겨 입었다. 행동이 가장 굼뜬 것은 나와 라이짐, 그리 고 재훈이었다. 하지만 모두 다 빨리 움직이는데 나라고 뒤질 수는 없지. 최 대한도로 몸을 빨리 놀려 다른 사람들을 따라 움직였다. 이부자리를 대충 개고 천막 밖으로 뛰어나갔다. 라이짐과 재훈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밖으로 뛰어나갔다. 천막 앞엔 두 줄로 맞춰 선 훈련병들과, 어디서 나타났는지 용병 하나가 서 있었다. 그 용병은 다른 용병들과 좀 달라 보였다. 살이 찐 것 같기도 했고 조금 작은 것 같기도 했다. 머리는 아주 짧 았고 갈색으로 그을린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똑바로 서! 구보 실시한다. 우보! 줄 맞춰!" 그러고 보니 다른 천막 앞에도 용병들이 줄을 구보 준비를 하고 있었다. 구 보가 아침 일과의 시작인 모양이었다. "전투에서 나와 함께할 수 있는 용병이 필요한 거지 내가 보호해야 할 코흘 리개가 필요한 게 아니야! 똑바로 서, 똑바로!" 줄을 서 있는 훈련병들은 말할 것도 없고 구보 준비를 하고 있는 옆 천막의 다른 용병들도 전날과는 딴판으로 보였다. 거드름을 피우며 발을 맞춰 걸어가 는 정규군과도 달랐고, 아무렇게나 불량하게 걸어다니는 라이짐의 소매치기 패거리와도 달랐다. 뭐랄까, 군기가 있으면서도 활기가 넘치는 그런 모습이었 다. (잔뜩 겁먹은 것처럼 보이는 재훈과 라이짐은 예외지만. 그러고 보니 나 도 그런가?) "네 놈들이 이 상태로 출전해 첫 전투에서 살아남는다면 그건 순전히 적군 이 멍청해서일 뿐이다. 너희들이 적이 칼을 휘두를 줄만 알아도 네 놈들 같 은 멍청이들을 죽이는 데에는 그것으로 충분할 거다. 정신들 똑바로 차려! 여 기는 장난꾸러기들을 돌봐주는 유치원이 아니야! 신병들! 낙오하지마! 낙오하 면 똥구멍에다가 화살을 박고 하루 종일 다니게 할 테다! 자! 출발!" 앞에 선 용병이 소리쳤다. 그러고 보니 저 목소리는... "우보 반장...저 사람 여자 맞지?" 나는 옆을 지나가는 우보 반장에게 물었다. "글쎄. 그렇게 부를 수만 있다면 말이지" 누군가가 앞에서 우보 대신 대답했다. 구보는 용병단의 요새를 한 바퀴 도는 것이었다. 빨리 뛰어야 했는 데다가 바닥이 돌덩이 투성이라 나는 겨우겨우 넘어지는 것을 면할 수 있었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왔고 그건 다른 훈련병들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똑바로 안 뛰어! 거기 뒤에! 전투 중에도 땅만 볼 건가? 좋아! 모두 노래 한다! 아케르 용병단 가, 시작!" 인솔하는 여자 용병이 소리지르자 노래가 시작되었다. 우리는 아케르의 용병들 물 대신에 술을 마시고 땀을 마시고 피를 마신다 죽음도 패배도 다 날려버려라 우리는 아케르의 용병들 은화 한 닢이면 산적을 금화 한 닢이면 마칸을 흔적도 없이 박살내 버린다 우리는 피에 굶주린 악마들! '아케르 용병단가'는 노래라기 보다는 고함에 가까운 것이었고 가사만 외운 다면 아무나 따라 부를 수 있는 것이었다. 다만 구보 중에 이런 노래를 시킨 다는 건 순전히 숨을 더 차게 만들려는 의도 같았다. 앞에서 인솔하는 저 여 자 용병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래고래 우리에게 고함을 지르면서도 숨결하나 흐트러지는 법이 없었다.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던 구보가 결국 끝이 났다. (아케르 용병단가를 열 번도 넘게 부른 덕분에 가사는 다 외울 수 있었다) 나는 양 무릎에 손을 짚고 숨을 헐떡였고, 우보 반장을 비롯한 다른 훈련병들도 잔뜩 숨 찬 모양이었다. "준비를 갖춰서 다시 집합한다! 빨리 뛰어들어가! 거기 머뭇거리는 너! 아 케르 단장님 아들이라도 되나? 아니라면 당장 뛰어들어가!" 나는 왜 천막 안으로 뛰어 들어가는 지도 모른 채 다른 훈련병들을 따라 안 으로 들어갔다. "우보 반장, 도대체 왜..." "...다른 사람들 하는 거 보고 따라 해. 내가 그랬지, 차이린이라는 이름을 원수처럼 기억하게 될 거라고" 숨을 고르며 우보 반장이 말했다. 발목에 흉칙한 고리를 찬 용병이 바로 저 차이린이었군. 가투신이 했던 말들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용병단에서의 훈련생활이 시작되었다. 첫 날 오전에는 목도를 가지고 사람을 죽이는 방법을 배웠고 이어서 자유 대련이 있었다. 자유 대련은 차이린이 대충 눈짐작으로 봐서 실력이 비슷하다 고 생각되는 사람끼리 붙여주는 것 같았다. 라이짐은 학자 집안 출신 마로우 를 흠씬 두들겨 주었고 (라이짐은 다만 공격이 약하다고 해서 머리 치기 천 번을 해야 했지만), 재훈은 하진과 붙어서 서로 비슷하게 두들겨 맞았다. (그 래서 둘 다 연병장을 다섯 바퀴 돌았다) 내 상대는 찬이었다.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으며 사연이 있을 것 같은 흉터를 가진 사내였다. 목도를 쥐고 맞선 찬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마주보기 껄끄러운 사내였다. 오른 쪽 눈 밑에 가로로 길게 뻗어 있는 흉 터가 그랬고, 그늘이 가득한 얼굴이 그랬고, 무엇보다도 칼 솜씨가 그랬다. 스물이라고 했으니 나보다 힘은 더 강했지만 목도 싸움의 승패는 힘으로 가려 지는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먼저 한 방을 때리는 쪽이 이길 승산이 높은 싸 움이고 정확하게 급소를 가격하는 쪽이 무조건 이기게 되어 있는 싸움이다. 그래서 목도 싸움의 승패는 길어야 마음속으로 다섯을 셀 정도며 끝나게 되어 있는 것이다. 나와 찬은 서로 노려보며 한참을 신중하게 서 있었다. 나는 왼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찬의 몸통 방어에 허점이 생겼다 싶은 순간 공 격해 들어갔다. 그리고 승부는 다음 순간에 났다. 내 목도가 찬의 몸통을 날리려고 들어간 순간, 찬의 목도가 내 목덜미에 꽂혔다. 찬이 목도의 손잡이 부분으로 내 목 덜미를 정확하게 찍은 탓에 나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깨어났을 때, 차이린의 얼굴이 바로 내 눈앞에 있었다. "죽진 않았군. 찬. 오늘이면 정식 용병이 될 사람이 신병한테 너무... 한 수 잘 가르쳐 줬어. 훌륭해. 마음 같아선 내 부하로 쓰고 싶은데. 어때?" 차이린이 말했다. 그러나 찬은 역시 아무 말도 없이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수르카. 생각보다는 칼을 잘 쓰는 군. 그만하면 네 나이 또래에선 최고겠어. 하지만 우리가 하는 일은 전문가들을 상대로 하는 일이야. 살인과 약탈, 방화... 우리는 그런 놈들을 상대로 언제나 이겨야 해. 전쟁에* 이등이 * 있나* 싸움에* 최선을* 다했다는* 말이 소용* 있나?* 무조건* 이기고* 보는 * 거야* 그것도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게 쓰러뜨려야 해. 수르카. 이 말 명심 하면서 연병장을 세 바퀴 돌아라. 시작!" 그래서 나는 다른 대련들은 구경도 하지 못하고 연병장을 돌아야 했다. 그 런데 차이린의 말은 꼭 마법의 말 같단 말이야. 아자닌을 불러내서 물어볼까? 음. 지금 아자닌을 불러 냈다간 아자닌도 차이린에게 시달려야 할 것 같으니 참아야겠군. 우보 반장이 연병장을 가로질러 지나갔다. "내 말이 맞지? 원수처럼 여기게 될 거라고 했잖아" 우보 반장의 말에 나는 이렇게 대꾸해 주었다. "만약 내 원수가 차이린이라면 난 차라리 복수하기를 포기하겠어!" 나와 우보 반장은 킬킬거렸고 덕분에 숨은 더 차 올랐지만 기분만은 좋아졌 다. 오후에는 내내 활쏘기 연습을 했다. 나는 열 일곱 번 화살을 쏘았고, 그중 과녁에 두 개가 꽂혔으며, 처음치고는 잘한다는 칭찬과 함께 상으로 연병장을 백 바퀴나 뛰어야 했다. "오늘 할 일은 끝났지만, 시간이 남았다. 질문이나 하고 싶은 말 있나? 울 며불며 집으로 가고 싶다든지 하는 말 말이야" 차이린이 말하자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팜 산맥을 헤치고 마을로 내려가겠다고? 그런 생각을 가진 놈 같았으면 아마 용병이 되겠다고 마음먹지 도 않았을 것이다. "이 훈련은 언제까지 계속됩니까?" 하진이었다. 오늘 하루 종일 고생한 탓인지 말을 길게 하고 싶지는 않은 모 양이었다. 평소의 하진이라면 차이린에게 새로 들어온 여성용 목도리를 팔려 고 시도했을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하진은 오늘 내가 본 것만 해도 은화 열 닢은 벌었고, 그 대가로 술 세 병과 단검 네 개, 그리고 뭐에 쓰는 건지 알 수 없는 그림 몇 장을 넘겨 주었다. "너희들이 십부장 밑에 들어가서 살아남는 법을 배울 수 있을 만큼의 실력 이 될 때까지다. 실력이라기 보다는... 그냥 좀 거칠어질 때까지라고 하는 편 이 낫겠지. 그게 언제가 될지는 나도 모른다. 아마 첫눈이 팜 산맥에 쌓이기 전에는 모두 끝나리라 생각한다. 매년 형편없는 인간들이 들어왔지만 겨울이 오기 전에는 다 조금 거칠어져 십부장 밑으로 들어갔으니까. 물론 너희들이 작년 신병하고 비슷한 수준이라는 확신은 없지만 말이다. 또 질문 있나?" 그때, 나는 속에서 무엇인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나는 그것이 뭔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분하다는 생각이었다. 찬에게 한 칼에 쓰러졌 다는 사실이 분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물론 목도 싸움에서 진 경험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어쩐지 찬에게 진 것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찬과 다시 한 번 붙고 싶습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손을 번쩍 들고 큰 소리로 이렇게 말하고 말았다. 차이린 은 내 질문에 별 놈 다 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별로 할 말이 없군. 찬. 다시 한 번 상대해 줄 용의가 있나?" 차이린은 찬에게 물었다. 찬은 아무 말도 없이 일어나 목도를 집었다. 마치 밥 먹으러 가는 신병처럼 아주 당연하다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그 담담한 움 직임은 나를 더욱 화나게 했다. "낮에 진 게 실력이 아니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차이린이 내게 물었지만 나는 대답 대신 기합을 넣으며 찬을 노려보았다. 찬은 기합은 넣지않고 천천히 목도를 들어올렸다. 나는 낮에 진 이유가 순전히 서둘렀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마음을 느긋하게 먹고 찬이 공격해오길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자면 될 수 있으면 허 점을 보이지 않으며 움직여야 하고, 찬에게 거짓 빈틈을 보여 준 다음 역습을 해야 한다. 나는 천천히 돌면서 찬을 노려보았다. 그 다음 순간이었다. 찬의 공격이 시 작되었다. 반격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 빠른 연속 공격이었다. 공격은 머리였 는가 하면 몸통이었고, 몸통이다 싶으면 손목과 다리로 이어져서 나는 공격은 엄두도 못내고 방어에 온 신경을 집중 시켜야했다. 공격해야 한다. 방어만 해서는 절대로 이길 수 없다. 목도를 쥔 내 손이 그 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찬이 머리를 공격하는 순간 칼을 빗기는 대신 강하 게 칼을 날려 맞부딪쳤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찬의 목도 끝이 터져 나갔다. 나무 파편이 얼굴에 박혀 왔지만 나는 조금도 쉬지 않고 공격해 들어갔다. 찬의 목도가 조금씩 균열이 생기는 것이 느껴졌다. 몇 번만 더 공격한다면 찬의 목도는 박살이 날 것이었 다. "그만!" 굵직한 목소리가 등뒤에서 들려왔다. 칼에 집중하고 있던 나였지만, 그 목 소리의 기세에 눌려 그만 움찔 하며 공격을 멈추고 말았다. 나는 뒤 돌아섰 다. "이름이 뭔가?" 나는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보았다. 그는 검은 색 뮤를 타고, 검은 망토를 두르고, 긴 머리를 어깨까지 기르고 있었다. 이마에는 십자 모양의 흉터가 나 있었다. 그 흉터 때문이 아니더라도 나는 그가 누구인지 너무나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열한 살 때 본 바로 그 얼굴, 위대한 복수자 검객 아케르였다. "수...수르카라고 합니다" 나는 될 수 있으면 강한 인상을 주려고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수르카. 이기겠다는 투지는 좋지만 동료를 아낄 줄도 알아야지" 아케르는 이렇게 말하고 턱을 쓰다듬었다. 그러고 보니 아케르의 턱에 열 한 살 때는 보지 못한 턱수염이 잔뜩 자라있었다. 아케르는 차이린에게 훈련병들을 정렬시키라고 말했다. 훈련병들은 아케르 앞에 일렬로 섰다. 뮤를 타고 있는 아케르는 나보다 열 배는 더 크게 느껴졌 다. 아케르는 훈련병들 앞을 죽 지나치며 찬찬히 살펴본 후 차이린을 불렀다. "오늘은 이만 하고 저녁 먹고 내 천막으로 오도록" 아케르는 차이린에게 이렇게 말하고는 뮤를 타고 천막들 사이로 사라져갔 다. "내일이면 이곳을 떠나는 친구들이 또 몇 생기겠어" 우보 반장이었다. "아케르 단장은 늘 저런 식으로 심사하니?" "그래.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내가 생각해도 괜찮다 싶은 놈들만 먼저 십부장 밑으로 간다니까. 신기해. 아케르 단장은 마법의 눈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 있던데 진짜인지도 모르겠어" 우보 반장을 이렇게 말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웬 한숨이야?" "내가 생각하기에 난 좀 글렀거든..." 우보 반장은 힘없이 이렇게 말했다. "걱정 마. 누구나 다 정식 단원이 될 수 있다구 말한 사람이 우보 반장이었 잖아" 나는 우보 반장에게 이렇게 말해주었다. "정식 단원이 되는 건 내 꿈이야" 우보 반장이 말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라고, 우보 반장. "그리고 그건 지금도 그래. 너, 잘 모르지. 내가 살던 곳에서는 마칸 족이 다시 부활하면 새 왕국이 건설 된 다는 전설이 있어... 그때 새로운 왕이 태 어난다는... 그래서 세상을 바꾼다는 전설이 말이야" "그런데?" 나는 이렇게 되물었다. "나는 아케르가 바로 그 사람이라고 믿고 있어... 그리고 많은 용병들도 그 렇게 믿고 있고 말이야. 나도 들은 얘기지만 말이야" 우보의 말은 여기까지였다. 차이린이 집합명령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 - 움베르토 에코의 [연어와 여행하는 방법] 이라는 책에서 '인디언 놀이를 하는 방법' 이라는 글을 패러디했습니다. 움베르토 에코는 이탈리아 사람으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장미의 이름] 이라는 소설의 작가입니다. 그럼 이제부터 패러디 '훌륭한 몬스터가 되는 길' 입니다. 훌륭한 몬스터가 되는 길 현재 시점에서 볼 때 몬스터의 미래는 음울하다. 환타지 소설과 RPG에서 몬스터의 입지를 개선해 보고자 애쓰는 젊고 용감한 몬스터들에게 유일한 가능성은 오타쿠적 환타지나 RPG에 출연하는 길 뿐이다. 이런 노력을 기울 이는 젊은 몬스터들을 돕기 위해 몇 가지 필수 지침을 일러주려고 한다. 전 쟁이나 평화, 양쪽의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비책을 알려 줌으 로, <훌륭한 몬스터>의 자격을 갖추는 데 도움을 주고자 한다. 또한 멸망의 위기에 처한 이들 몬스터들에게 불완전 고용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리라 믿는다. * 훌륭한 몬스터가 되기 위한 지침서 1. 결코 서둘러 공격하지 말라. 공격하기 전에 오랫 동안 필드 맵에서 모 습을 노출시킨 채로 행동하라. 쉽게 눈에 뜨이는 게 성공한 후엔 될 수있는 한 그자리에 가만히 서서 게이머가 최강의 파티를 짤 때까지 기다린다. 2. 가능하면 소규모 무리를 이루고 그것이 어려우면 완전히 격리된 채 다 른 몬스터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곳에서 모습을 돌출시킨 채 강력한 파티 의 출현을 기다린다. 3. 이동할 때면 눈에 확연히 들어오는 흔적을 남긴다. 마을의 NPC들에게 자신이 어디로 이동했는지 확실히 알 때까지 주지시킨다. 4. 파티를 공격할 때는 파티 쪽에서 오토보우 건으로 쏴 맞추기 용이하도 록 최대한도로 바짝 붙어 공격한다.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MP가 회복될 때 까지 기다려 알테마를 맞아 주는 것이다. 5. 강력하기로 소문난 몬스터가 가진 마법을 쓸 때에는 꼭 상대방이 먼저 공격할 때까지 기다려라. 파티의 구성원 중 한 명이라도 죽어 경험치를 못 얻게 된다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6. 될수 있는 한 단독으로 파티 전원을 상대하도록 하라. 그래야 파티 구 성원 전원이 당신을 돌려가며 팰 수 있고, 뒤이어 멋있기만 하고 실전엔 소 용없는 마법을 쓸 기회를 줄 수 있을 테니까. 7. 게이머가 싸우지 않고 파티를 이동시키고 싶어 할 때는 등장해서는 안 된다. 그랬다가는 게이머가 '이건 전투가 너무 많아. 짜증나' 소리와 함께 전원을 빼버릴테니까. 8. 상점에 들려 아이템을 사기 전에 공격을 가해 오리라고는 생각지 않을 터이니 상점에 들리기 전에는 공격을 가하지 말라. 몬스터는 오직 적의 아 이템이 빵빵할 때만 공격한다는 전통을 존중하라. 9. 불길한 사운드를 내는 걸 통해서 당신의 존재를 계속해서 알려라. 그 러면 당신의 등장 시기가 노출될 것이다. 10. 드디어 게이머가 세이브를 끝내고 이벤트를 시작하면 즉시 등장해 파 티에게 당신을 노출시켜라. 그래야 파티에서 당신을 메테오로 날려버릴 테 니까. 11. 한 번 공격을 한 후에는 파티의 공격이 시작될 때까지 기다려라. 절 대로 또 공격하면 안 된다. 당신이나 당신의 동료들은 하나씩 데스에 걸려 카운트가 끝날 때마다 죽어갈 것이다. 12. 모두가 한꺼번에 파티와 전투하지 말고 예비 병력을 따로 남겨 두어 라. 폭열권에 맞아 하나씩 숫자가 줄어들면 그때 그때 차례로 인원을 보강 하라. 13. 당신은 비공정도 없을 테니까 항상 한 지역에서 떠나지 말아라. 그래 야 언제든 비공정을 타고 날아온 파티에게 필요한 골드와 경험치와 아이템 을 제공할 수 있다. 14. 아무리 엄청난 데미지를 줄 수 있는 마법을 알고 있더라도 약한 마법 만 쓰도록 하라. 엄청난 마법은 파티에서 누군가 카방클을 걸어 리플레크가 된 상태에서만 사용하라. 15. 파티의 새 멤버가 출현할 때까지 전투를 지속시킨다. 당신에게 유독 히 강한 멤버가 등장해 공격해오면 즉시 약한 모습을 보여라. 그리곤 차례 차례 꼭 필요한아이템을 남기고 사라져라. 16. 방심한 파티를 공격할 준비를 할 때에는 항상 염탐을 위해서 단 한마 리의 몬스터만 파견하라. 들키기 쉬운 곳에 숨어서 누군가 '몬스터닷!' 하 고 알아볼 때까지 기다린다. 파티의 다른 구성원들이 와르르 덤벼들면 성공 이다. 17. 파티가 도망갈 때에는 될 수 있는 한 그냥 내버려 둔다. 나름대로 사 정이 있어 도망갈 테니까. 정 하고 싶다면 골드만 떨어지게 하라. 절대 훔 쳐서는 안 된다. 18. 던전에서 만날 때에는 한 번에 한 마리씩만 덤벼든다. 제일 먼저 약 한 몬스터가 덤벼들고 차례로 강한 몬스터가 덤벼든다. 특히 보물상자 주변 에선 색다른 몬스터가 등장해 근처에 보물상자가 있음을 꼭 알려준다. 19. 용사와 일 대 일로 맞서는 상황에서는 용사를 공격하기 전에 주춤거 려라. 20. 같은 상황에서 최강 마법을 사용하게 되면 승부가 곧 끝나므로 물리 적 공격이나 썬더 같은 약한 마법을 사용하라. 21. 포위 공격을 가하자 파티가 도망갈 경우에는 절대로 무기나 아이템을 탈취하지 말라. 포션만 하나 빼앗아 경이감을 금치 못하는 얼굴로 정신없이 바라보면서 주춤거려라. 파티가 HP, MP를 모두 회복하고 돌아올 때까지. 22. 파티의 구성원 중 누군가를 사로잡았을 경우 그를 곧바로 죽여서는 곤란하다. 찾기 쉬운 곳에 가두어 둔다. 얼만 지나지 않아 용사가 구하러 올 것이다. * 추가 지시사항 23. 몬스터의 본거지가 공격당했을 경우 완전히 우왕좌왕하는 혼란 상태 로 재빨리 빠져든다. 사방팔방으로 허겁지겁 뛰어다니면서 예전에 곧바로 손에 넣기 힘든 장소에 놔두었던 무기를 찾으러 애쓴다. 24. 파티에 도둑 직업이 있어도 경계하지 말라. 두 번 세 번 훔치기를 시 도하면 반드시 아이템을 도둑맞아 준다. 25. 파티에 청마법사가 있으면 필살기를 사용해서 반드시 익히게 해준다. 자신의 필살기로 청마법사가 공격해오면 맥없이 당하라. 26. 파티를 기습할 때에도 한방에 해치워서는 안 된다. 서로 전투가 벌어 지는 상황이 벌어져야 하는 까닭이다. 약한 공격을 한 후에 파티가 초강력 공격으로 반격할 때까지 기다려라. --------------------------------------------- - 인디언이 몬스터였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물론 지금은 아닙니다. 지금은 몬스터이지만 미래에는 몬스터의 오명을 벗게 되는 것들도 있을테고 지금은 몬스터가 아닌 것들이 미래에는 몬스터였음이 밝혀지는 것들도 있을 겁니다. 정의라는 것들은 모두 시대적 정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리고 모든 시대를 관통해 불변하는 정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또 어쩌면 정의는 시대에 있지 않고 각자의 마음에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 탐그루를 읽어 주시는 모든 분들께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N:김상현 #9170/10199 ━━━━━━━━━━━━━━━━━━━━━━━━━━━━━━━━━━━━━━━━ 제 목:[탐그루] 살아남는 법을 배우다 34 관련자료:없음 24/24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1-02 00:18 조회:1081 탐그루 # 마법은 마음이다 - 마음은 칼이다 # 차이린의 명령에 따라 우리는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식사를 했고 이어서 천 막에서 자유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라고 해봐야 칼을 정비하고 쓸데없는 농 담이나 들으며 멍청하게 웃는 게 전부였지만 말이다) 우보 반장이 전달 사항을 가지고 왔다. 여느 때와 같이 죽지 말라는 인삿말 과 함께 내일 몇 명이 정식 단원이 되리라는 소식, 그리고 어제와 같이 타호 루가 나를 찾는다는 말을 전했다. 또 나야? 나도 좀 쉬고 싶다구. 내 바램이야 어찌되었건 나는 타호루의 천막으로 향했다. 온지 하루밖에 되 지는 않았지만 백 바퀴나 운동장을 돌다보면 어디가 어딘지 쯤은 쉽게 알아낼 수 있는 법이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내가 천막 밖에서 말하자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안으로 들어갔 다. 안에는 타호루와 전혀 뜻밖의 얼굴들이 있었다. 아케르 단장과 순무 행정 담당관이 앉아 있었던 것이다. "...내가 말하도록 하지. 자네, 우리와 계약을 맺고 용병이 되기를 바라 나?" 행정 담당관 순무가 물었다. 물론 나는 그렇다고 했다. "그런데 좀 문제가 있어. 타호루의 말에 따르면 자네는 마법을 조금 안다고 하던데, 사실인가?" "예" "정령을 부르는 반지를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인가?" "예" "마법사 교육을 받는 것에 대해서 결정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는 것도 사실 인가?" "예" "자네 전에도 마법사 교육을 받겠다는 제의를 받아 본 적이 있나?" 나는 이 질문에는 잠시 머뭇거렸다. 라스폼의 말도 그런 제의였다고 할 수 있을까? "...예" 나는 그냥 그렇다고 대답해 버렸다. 예나 아니오 아니면 뭐라고 답하기 어 려운 질문이었다. 순무는 그런 질문을 던지는 데에 소질이 있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자네는 성황청이 쫓고 있다던 그 소년일 가능성이 높군" 대답이 필요 없는 말이었다. 만약 그의 말을 질문으로 바꾼다면 과거는 묻 지 않는다는 용병단의 규칙이 깨질 테니 아마도 순무는 그런 점을 염두에 두 고서 물어본 모양이었다. "순무는 항상 사물을 너무 냉정하게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지금 의뢰가 들 어오고 있는 것들 대부분이 마물과 관련된 일입니다. 성황청이 아무리 막강하 다고 해도 벽촌에 출몰하는 마물들까지 손을 쓸 수는 없을 테고 앞으로 그런 일은 점점 더 많아질 것입니다. 마칸의 부활이 임박했다는 징후가 곳곳에 보 이고 있습니다. 이미 하잔에는 좀비들이 나타나 도시가 엉망이 되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타호루가 말했다. 하잔에 좀비들이 나타난다는 말은 탐그루에 있을 때 나도 들은 적이 있었다. 도시가 온통 엉망이라던데... 내가 생각하는 사이, 타호루 는 다시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이럴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마법사를 기르는 일입니다. 마법사가 하나라 도 더 있어야 앞으로의 시대에 우리 용병단이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 면 마칸의 강림은 일종의 기회입니다. 우리가 언제까지나 이런 산 속에서 용 병단으로 남아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단장님께서 늘 하시던 말씀처럼..." 타호루가 계속 말하려고 했지만 아케르가 눈짓을 주자 타호루는 입을 다물 었다. 뭔가 내가 들으면 곤란한 소리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일개 용병단으 로 남아 있을 수 없다구? 그렇다면 우보가 말한 전설 얘기가 어느 정도는 사 실인지도 모르겠다. "제 생각에는 이 친구를 성황청에 넘겨주던가 아니면 내쫓던가 둘 중에 하 납니다. 만에 하나라도 성황청이 이 친구의 존재를 알아차린다면 우리는 성황 청과 갈등을 겪는 상황이 벌어질 것입니다. 성황청을 완전히 적으로 돌리기에 는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당분간은 그들과의 전략적 동맹이 필요 합니다. 소년 하나 때문에 대세를 그르치는 우를 범해서는 안됩니다. 그렇기 에 이 친구를 받아 줄 수는 없습니다" 무슨 상황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를 사이에 두고 순무와 타호루가 대립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이럴 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두 사람 말 다 잘 들었다. 우리 용병단은 과거를 묻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 먼저다. 나는 오늘 수르카가 칼을 휘두르는 것을 보았다. 나는 한 명의 뛰어난 용병을 예감했다. 거기에는 성황청이나 국왕의 군대, 누 구라도 끼여들 여지가 없다. 나를 찾아 온 사람은 설사 마칸이라 하더라도 데 려갈 수 없다. 오직 죽음만이 나의 뜻을 거역해 내 부하들을 데려갈 수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결정한다. 수르카는 검사로 여기에 남도록" "하지만..." 순무가 뭐라고 더 말하려고 했지만 아케르는 말을 막았다. 아케르의 이마에 있는 십자의 상처가 순간 꿈틀했다. 순무는 길게 찢어진 눈을 어색하게 비비 며 말했다. "수르카. 오라고 해서 미안하다. 몇 가지 확인해볼 일이 있어서 그랬던 거 니까 이해하길. 이젠 돌아가도 좋다" 나는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천막을 빠져 나왔다. 나는 야릇한 기운이 내 몸을 감싸는 것을 느꼈다. 위대한 복수자 검객 아케 르가 나를 인정하다니! 믿어지지 않는 사실이지만 내가 조금 전에 직접 들은 사실이다. 이 말을 라이짐이 듣는다면 어떻게 생각할까? 나는 너무 기뻐 신병 천막으로 껑충껑충 뛰어갔다. 침상에 누워 있어도 아까의 흥분이 가시지 않았다. 다른 친구들이 떠드는 소리가 (차이린의 성적(性的)인 능력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었지만) 하나도 귀 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결국 다시 일어나 앉아 칼을 꺼냈다. 칼날은 여느 때보다 더욱 번쩍이는 것 같았고, 그빛은 내 마음을 마구 흔들어 놓았다. 이 칼을 휘두르며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검사가 된다. 그것도 아케르 용병단에 서. 이건 정말 기가 막힌 일이 아닐 수 없다. '꿈이 이루어졌다' 나는 나도 모르게 이렇게 중얼거렸다. "수르카, 뭐라구?" 라이짐이 말했다. 라이짐은 하진에게서 산 단검을 조심스럽게 정비하고 있 었다. 흠. 그러고 보니 저렇게까지 날을 세우면 면도도 할 수 있겠는걸. 아직 수염은 나지 않았지만 말이야.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이렇게 말하며 계속 칼을 닦다가 문득 누군가 나를 쳐다보고 있는 느 낌이 들어서 고개를 들었다. 찬이었다. 찬이 칼을 닦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 다. 그의 눈은 뭐랄까, 아무런 감정이 없는 듯 보였다. 아니, 그렇게 말하기 보다는 사람을 겁먹게 만드는 어떤 종류의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이제 취침이다" 우보 반장은 이렇게 말하고는 붉은 취침 등을 켰다. "내일은 더 힘들 꺼야. 내일은 단검 던지기하고 방패 다루는 법을 배운다더 라" 내 옆자리의 라이짐이었다. "그런식으로 무기 다루는 법을 배우는 모양이지?" 내가 라이짐에게 물었다. "응. 당분간은. 하지만 십부장들이 돌아가면서 강의도 한다는 거 같던데" 라이짐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래? 무슨 강의를 한데?" 탐그루에 있던 시절, 학원에 다니면서 강의를 듣는 귀족의 아들 딸들이 떠 올라서 나는 라이짐에게 이렇게 물었다. 라이짐은 내가 흥미를 가지고 묻는다 는 걸 알아챘는지 조금은 성의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살아남는 법이라더라. 나도 잘은 모르겠어. 다들 그렇게만 얘기하니까 말 이야" 라이짐의 말에 나는 이제 진짜 용병이 되는가 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살 아 남는 법이라... 하긴 죽지 말라는 말을 인사로 하는 사람들이니까 배우는 것도 조금 다르기는 하겠다 싶었다. 나도 그런걸 배우게 된다. 어쩐지 내가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케르 용병단에 오길 잘했어. 나는 속으로 이렇게 되뇌었다. "기회가 있을 때 잘 들어두는 게 좋을 거야" 다른 쪽에서 난 소리였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학자 집안 출신이라는 마로 우였다. "무슨 소리야, 그게?" 라이짐이 물었다. "십부장들이 하는 강의가 실전에서 가장 쓸모가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 어. 어쨌든 십부장들은 수많은 전투를 거치고 살아남은 사람들이니까" 마로우는 이렇게 말하고는 십부장들에 대해서 설명해 나갔다. 먼저 마로우는 아케르 용병단에는 일곱 개의 십부와 아케르가 직속으로 운 용하는 십부까지 해서 여덟 개의 십부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 십부 는 각각 차이진의 용의 눈 십부, 가투신의 웃는 얼굴 십부 (좀 이상한 이름이 지만 가투신을 아는 나에게는 딱 맞는 이름이라고 생각되었다), 아루마의 죽 음의 신 십부, 밍밍의 빛의 단검 십부, 지다문의 하늘의 끝 십부, 마초의 피 바람 십부, 신다루의 패거리들 십부였다. "좀 더 말하자면 여덟 개의 십부는 각각 다섯 명에서 열 명 남짓한 인원으 로 되어 있어, 그래서 아케르 용병단은 적을 때는 육십, 많을 때는 백 명 가 까운 인원이 총원이 되는거야. 이건 우리한테 아주 중요한 사실이지. 총원이 많으면 근무가 없는 날이 많아지지만 총원이 적어지면 근무가 늘어나니까" 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마로우의 말을 들었다. (별 얘기 아닌데 참 심 각한 표정으로 말하는구나...) 그리고 각 십부장들은 서열이 있는데, 지다문의 하늘의 끝 십부가 일 번 천 막에, 마초의 피바람 십부가 이 번 천막에, 아루마의 죽음의 신 십부가 삼 번 천막에, 밍밍의 빛의 단검 십부가 사 번 천막에, 신다루의 패거리 십부가 오 번 천막에, 차이린의 용의 눈 십부가 육 번 천막에,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투 신의 웃는 얼굴 십부가 칠번 천막에 있다고 마로우는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있는 구 번 천막은 팔 번 천막 다음 서열이 되는 거였다. 팔 번 천막 에는 아케르 용병단의 연금술사의 등이나 식사 같은 것들을 담당하는 비전투 요원들의 천막이라고 했다. "혹시 그 유명한 아케르의 용병단의 수가 너무 적다고 생각할지 몰라서 내 가 하는 말인데, 사실 나도 좀 적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아케르 용병단은 아 케르의 지휘를 받는 다른 용병단 지부가 다섯 군데나 더 있다더라. 이건 소문 이 아니야. 차이린에게 직접 들은 말이니까 믿어도 좋아. 그리고 각각의 용병 단에는 단장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 다섯 명에서 열 명의 십부장을 거느리고 있다고 하니까, 거의 오 백명에 가까운 수가 아케르의 이름 아래 모여있다는 말이지" 마로우가 거드름을 피우면서 말했다. (역시 학자 집안 출신은 뭐가 달라도 다르군) 오 백 명. 정말 대단한 수였다. 바바족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스파일 군이 자랑하는 정예 부대가 천 명 단위로 세 개의 군단이 있다고 하니, 일개 용병단 치고는 얼마나 큰 규모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일개 용병단이 일개 군단과 인원이 비슷하다니 말이다. 물론 지금은 여기저기서 출몰는 산적들이 나 좀비 같은 마물들을 소탕하는 작전이 많아져서 나뉘어져 있지만 새 봄이 오면 팜 산맥 어디엔가 있다는 본부에 전부 모이게 될 거라고 마로우는 덧붙 였다. 그나저나 용병단의 인원이 이렇게 많다니, 산적들이나 좀비들이 많기는 많은 모양이로군. "너 그럼 그거 알아?" 설명을 죽 듣고 있던 라이짐이 마로우에게 이렇게 물었다. "뭐?" "차이린은 오줌을 눌 곳이 마땅치 않아서 아침마다 개인 천막에서 눈다더 라" "설마" 라이짐의 말이 분명 지어낸 말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나는 이렇게 말했 다. 어차피 이런 종류의 얘기에는 이렇게 대꾸하는 수밖에 없지 않나? 그대로 믿었다가는 멍청한 놈 소리 들을 게 뻔하고, 그렇다고 거짓말 아니냐고 몰아 부친다면 재미가 없어질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마로우는 학자집안 출신답게 매우 심각한 표정으로 라이짐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저 호기심이 발동한 거 에 지나지 않을지 모르지만 말이다) "정말이야. 우보 반장이 봤데. 그래서 차이린 개인 천막 근처에 가면 오줌 냄새가 진동을 한다던 걸. 여기 병사들은 다 알고 있는 일이래" "칫" 나는 웃고 말았다. 소문이라는 게 대충 다 그런 거라는 건 탐그루에 있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소문대로라면 자나크 영주의 딸 뒤오아 오르테가가 아침 마다 벌꿀로 목욕을 한다는 말도 사실이게.... "그래. 그건 나도 안 믿어. 하지만 말이야, 밤만 되면 검은 망토를 두른 사 람들이 아케르 단장의 천막에 온다는 말은 정말인 것 같아" 라이짐이 말했다. "검은 옷?" 이번에는 마로우가 물었다. "글쎄... 떠버리 하진이 한 말이니까 그냥 거짓말인지도 모르지. 하지만 아 케르 단장 직속 십부원이 있다는 말은 정말인 것 같더라" "내가 그랬잖아" 마로우가 말했다. "아케르 단장이 직접 지휘하는 사람들이 있다니까. 누군 지도 모르고 몇 명 인지 알 수도 없지만, 하여간 무시무시한 용병들이라는 소문이야. 매일 밤마 다 들른다는 그 검은 망토의 사내가 바로 그 직속 대원일거야. 뭐, 역시 소문 이지만 그 망토의 사나이가 국왕의 칙명을 전달한다는 소리도 있던데" 국왕의 칙명을 받기도 한다는 말은 이곳으로 오던 길에 가투신에게도 들은 말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여간 내일은 더 힘들테니까 이만 자두자" 라이짐이 말했다. 이런. 시간이 꽤 지났군. 이거 잠이 모자르면 다음 날 훈 련 받기가 곤란할텐데. "그래" 나는 라이짐의 충고를 따르기로 마음먹고 이렇게 말했다. "그래. 오늘 대화 유익했어. 다음에는 바르도 대륙의 역사에 대해서 같이 얘기해보는 게 어때?" 혼자 다 떠들어 놓고는 대화라고? 거기다 유익했다니, 원. 학자집안 출신은 다 저래야 하는 걸까? 고된 훈련 끝에 오는 잠은 정말 단맛이었다. 불침번 근무만 없다면 더 좋았 을 테지만 말이다. 불침번 근무시간이 되자 아자닌을 불러내었다. "오늘 낮에 차이린이 한 말 들었어?" 내가 아자닌에게 물었다. "예. 전쟁에 이 등이 있나? 싸움에 최선을 다했다는 말이 소용 있나? 무조 건 이기고 보는 거야라는 말. 들었습니다" "그말은 마법의 말 같던데" 내가 말했다. "한 번 해보세요" 나는 정신을 집중하고 주문을 외웠다. "전쟁에* 이 등이* 있나?* 싸움에* 최선을* 다했다는* 말이* 소용* 있나?* 무조건* 이기고* 보는* 거야*" 하지만 역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내가 성공한 마법이 라곤 딱 하나 밖에 없구만. 장식을 꽃으로 바꾸는 마법. 참 용병한테 어울리 는 마법이야.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자고 있던 우보 반장이 벌떡 일어났다. 우보 반장 은 바로 내 옆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조금 놀라면서 뒷걸음질을 쳤다. "용병이 된다...용병이 된다...용병이 된다..." 우보 반장은 이렇게 말하고는 도로 자리에 쓰러졌다. "...아자닌, 저거 마법 때문에 그런 거야?" 내가 물었다. "꼭 그런 것 같지는 않군요" 아자닌이 말했다. 칫. 그런 말은 나도 하겠다. "아마 지금 수르카 님의 마음에 빨리 불침번 근무 시간이 끝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어 그것이 영향을 끼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입니다" 아자닌이 말했다. 참, 어이가 없군. 전에 피리 나무가지를 빨리 태우는 마 법은 빨리 시간이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탓에 발생한 거고, 오늘은 불침번 시간이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런 마법이 발동했다면... 나는 그렇게도 불침번 서기가 싫은 걸까? 용병의 생활에 한시라도 빨리 익숙 해져야 할텐데. 진짜 용병이 되는 것은 타인의 힘만으로는 되지 않을 거다. 나 스스로 나를 바꾸어나가야 한다. 게으름 피는 마음이 지금 내게 있어선 가 장 큰 적이다. 어쨌든 여긴 탐그루가 아니니까. 이젠 누구한테도 어리광을 피 울 순 없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N:김상현 #9171/10199 ━━━━━━━━━━━━━━━━━━━━━━━━━━━━━━━━━━━━━━━━ 제 목:[탐그루] 살아남는 법을 배우다 35 관련자료:없음 26/26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1-02 00:18 조회:1002 탐그루 # 마법은 마음이다 - 마음은 칼이다 # 다음 날도 구보와 목도 연습이 있었다. 쌀쌀한 가을 바람이 무색하게 훈련 의 강도는 어제 보다 더 높아져 있었다. 훈련의 강도는 앞으로도 계속 높아져 갈 거란다. 이제 본격적인 훈련이 시작된 것이다. 오전엔 단검 던지기 훈련이 있었다. 나는 운동장을 백 바퀴 뛰어야 했고, 차이린의 지독한 욕설도 전날과 같았다. 다만 내가 놀란 것은 칼 던지기에 라 이짐 뿐만 아니라 재훈도 소질이 있다는 거였다. 내가 과녁까지 겨우 던질 수 있는 단검을 자유자재로 표적에 박는 라이짐의 솜씨는 차이린에게까지 감명을 주었다. (그래서 오전에 라이짐은 운동장 열 바퀴로 끝났다) 재훈의 솜씨는 더 의외였다. 재훈의 가느다란 팔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재훈이 던진 단검은 모두 표적 깊숙이 박혀 들어갔다. "단검은 근접 전투용 무기이지만 상황에 따라서 던질 수 있는 무기라는 점 에서 꽤 유용한 무기다. 너희들 같은 저능아들이 이해할 수 있는 말로 바꾸 면, 무지막지한 오르크와 마주치더라도 너희들 손에 이 단검만 있으면 그 오 르크의 눈알을 뽑아버릴 수 있다는 말이다. 손에 익을 때까지 몇 번이고 연습 해라. 어떤 상황에서도 적에게 던질 수 있도록 연습해 놓도록. 언젠가는 이 작은 단검이 너희들의 목숨을 구해주는 날이 올 것이다" 라이짐은 점심을 먹는 동안에도 단검을 손에서 떼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나나 라이짐이나 뭔가 잘하는 것이 있으면 그 일에 빠져든다는 공통점이 있었 다. 아니, 어쩌면 우리 또래의 나이에 있는 사람들은 아직은 어린아이에 가까 운 것 같다. 점심식사가 끝나고 오후에는 방패를 들고 훈련을 했다. 탐그루에 있을 때 군인들이 들고 다니는 것을 본 적은 있지만 이렇게 무거운 물건인 줄은 미처 몰랐다. (이젠 차이린 덕분에 확실하게 알게 되었지만 말이다) 처음 손에 잡았을 때는 그저 좀 묵직하다는 느낌 정도였는데, 한 두 시간 정도 가만히 들고 자세를 고정하고 있으면 이건 무겁다든지 하는 느낌을 넘어 서 그저 방패예 기대어 버티고 있다는 생각 밖에는 들지 않는다. 그런데 어떻 게 저렇게들 잘 버티고 있는지 원, 나는 그저 신기할 뿐이었다. 나중에 들은 말이지만, 사실 훈련할 때 쓰는 쇠로 된 방패를 실전에서 사용 하는 일은 거의 없다고 한다. 화살만 막으면 그만이니까 쇠보다 가벼운 나무 로 만든 방패를 들고 나간다는 거였다. 그럼 도대체 왜 쇠로 만든 방패로 훈 련하는 것일까. 내 불만을 옆에서 듣고 듣고 있던 라이짐이 휴식시간에 내게 말했다.. "실전에서 쇠로 된 방패를 사용해야 될 순간이 오면 어떻게 하지? 그때가서 이런 상황이 올줄 몰랐다고... 나무 방패로 어떻게 해보자고... 그럴 거야? 목숨은 하나라고! 그러니까 가능한 모든 상황을 대비해 훈련하는 거야. 나는 그렇게 생각해" 그 말이 맞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차이린이 우리를 괴롭히고 싶어서 그러는 거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았다. 아마 다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리 라. (그러니까 그렇게 차이린에 대한 별로 우습지도 않은 농담을 주고 받으면 서도 포복절도를 하는 거지) 저녁식사를 마치자, 차이린이 순무 행정담당관과 함께 천막으로 들어왔다. "오늘은 순무 행정 담당관님의 강의가 있다" 아마 지난밤에 마로우가 얘기했던 바로 그 강의인 모양이었다. 나는 조금 긴장이 되는 것이 느껴졌다. 처음으로 듣는 강의다. 그런데 아무래도 순무가 강의를 한다는 사실이 별로 미덥지는 않았다. 행정 담당관이라는 직책이 실전 에 실전을 거듭하며 살아남은 무적의 용병 같지는 않아 보였다. 모두들 칼 들 고 나가 싸우는데 뒤에서 주판알이나 튕기는 것도 용병인가? (얇은 입술과 길 게 튀어나온 턱, 그리고 길게 찢어진 눈 때문은 아니다) 차이린은 우리를 침상에 정렬시켜서 앉혀놓고는 천막 밖으로 나갔다. 순 무는 나가는 차이린에게 고개를 숙여 가볍게 인사를 하고는 강의를 시작했 다. "제군들" 나는 마른침을 한 번 삼켰다. 과연 무슨 얘기가 나올까? "나는 길게 말하는 것도 싫고 이런 저런 복잡한 사정 얘기하는 것도 싫어 하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혹시라도 질문이 있으면 내 말이 다 끝나고 나서 하도록. 오늘은 몇 가지 행정적 절차와 급여에 관한 이야기를 하겠다" 급여? 나는 어이가 없었다. 나는 마로우를 한 번 처다보았는 데 마로우의 표정도 실망이라는 표정이었다. 행정적 절차와 급여에 관한 얘기가 물론 중 요하지 않을 리는 없지만 그건 순전히 순무가 해야 할 일들 아닌가? 그게 살아남는 방법을 배우고 있는 우리하고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지. (물론 급 여 얘기라면 조금은 관계가 있겠지만) "먼저, 제군들의 현재 신분은 훈련병이다. 이 말은 아직 제군들에게는 급 여가 지급되지 않는다는 사실과 모두가 십부원이 된다는 확실한 보장이 있 는 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즉, 비전투 요원이 되어서 취사반이나 잡역부로 일하게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물론 이 경우에는 목숨을 잃게 될 확률은 낮지만 급여는 정식 십부원의 반도 되지 않는다. 비전투 요원을 원하는 사 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시작된 순무의 이야기는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아니, 간단한 걸 좋아한다는 사람이 말을 왜 저렇게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지. "...그리고 사망하였을 시 본인의 급여는 본인이 계약할 때 미리 정해둔 수취인에게 양도된다. 그에 따르는 비용은 본인이 남긴 급여에서 공제하며 만약 정해둔 수취인이 없을 시에는 아케르 용병단의 자금으로 환원된다. 다 만, 아직 계약이 성립하지 않은 훈련병의 경우에는 동료에게도 양도할 수도 있으니, 그걸 원하는 사람은 지금이라도 나나 차이린 십부장에게 말하면 된 다. 십부원이 되면 동료에게는 양도할 수 없다. 그 이유는 말하지 않아도 알리라 믿는다. 물론 이곳에는 양도될 급여 때문에 동료를 해치는 극악한 놈들은 없겠지만..." 순무는 자신의 목소리에 자신이 도취되어, 기복없는 말투로 밑도 끝도 없 는 강의를 계속하고 있었다. 안 그러고서야 어디 저렇게 가느다란 눈을 깜 빡깜빡 거리면서 즐겁게 얘기 할 리가 없지. 나는 순무와 눈이 마주치지 않 게 조심하면서 다른 훈련병들은 뭘 하고 있나 살펴보았다. 역시. 이런 자리에서는 한끼라도 더 용병밥을 먹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큰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온지 좀 된 익숙한 훈련병들은 앞사람 등 에 머리를 박고 세월아 내월아 잠자고 있었고, 나나 라이짐, 재훈은 멍청한 표정으로 어쩔 줄을 몰라하고 있었다. (졸려서 말이다) 그런데 좀 의외인 경우도 있었다. 하진이었다. 하진은 순무의 말을 열심히 적기도 하고 또 뭔 가 곰곰이 생각을 하는지 고개도 갸웃거려가면서 강의를 듣고 있었다. 이 거, 참. 뭐라고 말해야 할지. "...그리고 지휘계통에 관한 설명이다. 십부원에 편입되면 십부장의 통제 를 받는 것을 원칙으로 하기 때문에 만약 건의 사항이나 혹은 불만사항들이 있으면 각 십부장이나 십부장의 부관에게 말하면 된다..." 이건 좀 재미있군. 차이린에게 '저 발목이 좀 아픈데요?' 하는 식으로 말 하라는 거 아닌가, 칫. 그랬다가는 차이린한테서 '그래? 아직 훈련이 덜됐 구만. 당장 운동장 백 바퀴 돌고 오도록 그래도 낫지 않으면 그때 생각해보 지' 같은 말이나 듣게 될게 뻔한데. "...그러면 십부장은 그 사실을 나에게 말하고 그렇게 되면 내가 그 사실 을 단장님께 말씀드리는 식으로 조치가 될 것이다. 물론 사안의 중요도에 따라 십부장이나 내 선에서 결정될 수도 있다. 이러한 것을 지휘계통이라고 한다. 하지만 상급자는 필요할 경우 언제라도 하급자에게 직접 명령을 내릴 수 있다. 이는 작전시 효율적인 상황 조치를 위한 방편으로서..." 아, 도대체 순무의 말은 언제 끝날 것인가... 한 서너 번은 더 꾸벅꾸벅 존 다음에야 순무의 강의 (라기 보다는 고문이 었다)는 끝났다. 강의가 끝나자 순무는 다시 가느다란 눈을 깜빡거리면서 훈련병들을 바라보았다. 만족한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질문 있나?" "순무 행정담당관님. 저, 만약에 타인에게 급여를 양도했는데 그 타인이 사망하였거나 행방을 찾지 못했을 경우는 어떻게 처리됩니까?" 하진이었다. 어랍쇼? 열심히 순무의 말을 듣더니 순무와 비슷한 말투로 질문까지 하는 군. "음. 좋은 지적이다. 그 경우, 행정적인 책임을 지고 있는 나로서는 사망 한 본인의 의사를 가장 먼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 서..." 순무는 말을 빙빙 돌리면서 답변을 했는데 결론은 결국 '아케르 용병단이 가진다'는 말이었다. "...그것은 모든 용병단이 마찬가지다. 국왕의 군대나 성황청의 기사단도 마찬가지고. 알겠나?" 하진은 알겠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이야기가 길어지자 훈련병들이 모 두 하진을 싸늘한 눈초리로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어쩐지 나도 싸늘한 눈으로 하진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다. "또 질문 있나?" 물론 있을리가 없다. 그런데 순무는 꼭, 또 있을 것 같은데, 하는 표정으 로 십부원들을 조금 둘러보더니 '좋아, 그럼 이만' 하고는 나갔다. 이렇게 첫번째 강의가 끝났다. 첫번째 강의는 큰 기대를 가졌던 것과는 달리 다소 지루했다. "마로우, 저게 네가 말한 십부장들이 하는 강의냐? 수많은 전투를 거치고 살아남은 십부장들이 꼭 실전에 필요한 말만 한다는 강의?" 나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마로우에게 이렇게 물어보았다. "옛 말에 감자 한 입으로 배부를 수 없다는 말이 있어" 마로우는 내 비아냥거리는 말투에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이렇게 대답했 다. 학자 집안 출신답군. 저도 강의 내내 졸더니 말이야. "내일 그 감자 먹다가 체하지나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는 내 자리에 누워버렸다. 언제쯤 정말 생생한 살아남 는 방법을 배울 수 있을까. 어쩌면! 살아남는 법이란게 그렇게 대단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 아주 작고, 아주 사소한 차이가, 누군가는 살아남게 하고 누군가는 죽음으로 이끄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다 또 언제 잠들었는지 모르게 잠들고 말았다. 다음날. 오전에는 창 쓰기를 배웠고, 오후에는 맨손으로 적을 제압하는 방법을 배웠다. (이 말은 오전 내내 창을 들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뛰어다 녀야 했다는 말이기도 하고 또 오후에는 찬에게 죽기 직전까지 얻어맞아야 했다는 말이기도 하다) 탐그루에 있을 때에는 내가 싸움을 곧잘 하는 편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찬 과 붙어보니 내가 얼마나 맨손 싸움에 약한지 알 수 있었다. "수르카. 실전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그런 식으 로 싸웠다가는 당장에 목이 부러지고 말 걸" 차이린은 가차없이 나에게 운동장 백 바퀴를 돌라고 명령했다. 이거, 이 러다가 운동장 다 패이겠다. 저녁 식사 후에는 다시 강의가 있었다. 지난 번 강의 때 실망을 좀 했던 터라, 나는 마음을 비우고 강의를 듣기로 마음먹었다. 차이린은 내가 잘 알고 있는 얼굴과 함께 천막으로 들어왔다. 가투신이었 다. 가투신은 별로 기분이 좋지 않은지 그다지 웃는 얼굴 십부장 답지 않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나는 아마도 차이린 때문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뭐, 차이린과 가투신이 어떤 관계인지 알지는 못하지만 차이린 곁에 서있 다면 누구라도 저런 표정을 짓는게 당연하다 싶었다) 차이린이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가자 가투신의 짙은 눈썹이 조금 꿈틀거렸다. "자, 그럼 인사하지요. 저는 웃는 얼굴 십부의 십부장 카투신이라고 합니 다" 차이린이 나가자마자 가투신은 눈웃음까지 치면서 인사를 하고는 강의를 시작했다. 눈썹도 짙고 저렇게 우락부락하게 생겨 먹은 사람이 저런 웃음을 지으면... 역시 징그럽다는 생각이 드는 군. "뭐, 사실 훈련병들 들어올 때마다 이렇게 강의시간이 있곤 하지요. 그때 마다 전 별로 할 말도 없는데요. 그래도 일단 들어왔으니까, 오늘은 제가 겪었던 얘기를 하나 해볼까 해요" 가투신이 말하자 나는 귀가 번쩍 트이는 느낌이 들었다. 저거, 말을 좀 이상하게 해서 그렇지 실전 경험에 관한 얘기잖아? "먼저 하나 물어보지요. 십부원들이 계곡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예상 되는 적의 침투로는 세 개가 있어요. 그러면 어떻게 생각하고 대비하는 게 옳은 방법일까요? 음...수르카. 한 번 말해봐요" 가투신이 나에게 물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가슴을 쫙 피면서 가투신을 바라보았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대답을 해야 하는데. 대답을. "십부원들을 세 개의 침투로에 적절히 나누어 배치하는 게 우선이라고 생 각하는데요" 나는 열심히 생각을 해본 다음에 이렇게 대답했다. 말을 더듬은 건 절대 로 부끄러워서가 아니다! 그냥 좀 당황했을 뿐이다. "그렇지요. 실전 경험이 없는 사람이라면 저렇게 대답하는 게 당연해요" 이 말에 천막 안에 있던 훈련병들의 시선이 가투신에게 집중되는 게 느껴 졌다. 좀 의외의 말이었기 때문이리라. "이건 용병들 사이에 전해 내려오는 격언이에요. '우리는 적이 공격해 올 경로 세 군데를 예상하고 그곳을 막는다. 하지만 적이 오는 곳은 항상 네 번째 경로이다' 예상되는 침투로가 세 군데라면,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침 투로는 어떤 게 있을까. 이 생각을 먼저 해야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상하 지 못한 네 번째의 침투 경로에 대비해 예비병력을 남겨두어야 하는 겁니 다. 그야말로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놓는 거죠" 이 말에 나는 얼굴이 조금 달아오르는 게 느껴짐과 동시에 가투신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음...그렇다고 마음에 든다는 말은 아니다. "전투에서는 항상 예기치 못한 사건들이 벌어지기 마련이에요. 제가 신병 때 겪었던 일을 하나 말해보죠" 가투신이 신병시절 두 개의 십부가 대청하 하류에 있는 타실령의 어떤 도 시로 의뢰를 받고 갔었다고 한다. 양쪽 귀가 뾰죽하고 온몸이 검은 색인 인 간형 몬스터가 자주 그 도시로 대규모의 약탈을 온다는 것이었다. "대규모의 작전이었지요. 제가 속해 있는 주둔지 병력 말고도 두 군데 병 력이 더 증원되어 세 주둔지 병력이 출동했니까요. 그리고 출동하는 도중 새로 입수된 정보가 있었는데... 귀가 뾰죽한 인간형 몬스터라는 것이 알고 보니 엘프였다는 것에요. 그것도 검은 엘프..." 가투신이 있던 주둔지가 맡은 지역에 검은 엘프들이 내려올 가능성이 있 는 경로는 두 군데였다. 산을 타고 내려오는 길과 숲을 통과하는 길이었다. 가투신이 속해있는 십부는 길을 방어하게 되었고 다른 십부는 나무가 울창 한 숲을 방어했다고 한다. 가투신은 숲을 방어하는 십부원들을 부러운 눈으 로 바라보았다고 했다. 검은 엘프가 숲으로 내려오게 된다고 해도 나무가 울창한 곳에서의 전투가 더 수월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제가 있던 십부의 십부장님은 땅을 파라고 하더라구요. 이상한 얘기다 싶었지요. 거기다가 가슴 높이까지 땅을 파라고 하더군요. 땀을 비 질비질 흘리면서 삽질을 하는데 얼마나 숲에 있는 십부원들이 부럽던지..." 땅을 다 파고 밤중이 되자 검은 엘프들이 몰아닥쳤다고 했다. 그런데 검 은 엘프의 수는 의외로 많았고, 거기다가 예상했던 접근전이 아니었다. 그 들은 멀리서 접근하지 않고 불화살을 쏘아대었다고 했다. "아무도 몰랐지요. 검은 엘프들이 그런 식으로 공격해 올 줄은. 검은 엘 프들이 화살을 그렇게 많이 가지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요. 밤새도록 검 은 엘프들은 불화살을 날렸고, 저는 그날 밤 내가 낮에 판 구덩이를 더 깊 이 파며 그 속으로 들어가 벌벌벌 떨고 있었죠. 꼭 그래야 안 죽을 것 같았 거든요. 팔은 온통 까진 상처 투성이고, 여기저기 피가 맺혀 있더군요. 동 료들도 마찬가지였구요" 해가 뜨자, 그제야 검은 엘프들의 공격은 멈추었다. 가투신의 십부원들은 비록 흙을 뒤집어 쓴데다가 잠도 못 자서 그야말로 거지꼴이었지만 (가투신 의 표현이다) 숲속에 있던 십부원들에 비하면 나은 편이었다. 불화살이 숲 을 태우는 바람에 상당수가 죽거나 심한 화상을 입었던 것이다. "당시 십부장님은 대규모의 예상치 못한 공격에 얼이 빠져 있던 십부원들 을 다그쳐 그대로 검은 엘프들의 본거로로 쳐들어 갔지요. 잠을 못 잤다고 누군가 하소연하니까 그러더군요. 잠을 못 잔 건 녀석들도 마찬가지라고요" "어쩐지 차이린 같은데" 누군가 속삭이자 그 소리를 들은 십부원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또, 무슨 얘기인지 듣지 못한 십부원들이 옆에 앉은 십부원에게 물어보느라고 천막 안은 한동안 소란스러워졌다. 가투신의 자기가 한 말이 재미있어서 그러는 줄 알았는지 흐뭇한 미소를 짓고는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검은 엘프들은 완전히 무방비 상태였습니다. 어떤 준비도 해놓지 않고 있었던 겁니다. 심지어는 경계병 조차도 거의 없다시피 했어요. 아마 밤새 도록 화살을 쏴 댔으니 우리가 도망치거나 아니면 공격해 올 엄두를 내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에요. 사실 우리의 임무는 산길을 방어하는 거 였지만, 십부장님은 그대로 공격해 들어갈 것을 명령 했던 거지요. 가까운 십부에 연락도 하지 않고요. 연락하는 사이 상황이 바뀌면 기습은 아무 소 용이 없다면서요" 가투신은 이렇게 말하고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이 되었다. 나는 상상할 수 있었다... 거지꼴이 되어 산적에게 칼을 휘두르는 가투신을 말이 다. (상상하고 보니까 좀 이상한 모습이로군) "우리는 거기서 검은 엘프들의 주력을 섬멸했죠. 우리가 기습과 동시에 띄운 전령을 받은 다른 십부의 지원도 도착했구요" 자랑스러운 듯 가투신은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생각하는지 듣고 싶네요. 가만있자. 거기 금발머리, 무슨 생각이 드나요?" 가투신은 마로우를 지목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마로우라니. 금발머리를 한 번 우아한 자세로 다듬은 뒤 마로우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일어나 말했 다. "전장에서는 언제나 상황이 급변하기 마련이라는 생각은 당연합니다. 대 학자 오브라디 교수의 글에 따르면 전장에서 승리한 부대의 경우 대부분이 기습에 의한 경우이고 기습에 의한 경우 대부분이 급박하게 바뀐 상황에 빠 르게 대처한 지휘관의 결정에 의한 것이라고 합니다. 십부장님께서 말씀하 신 내용도 그런 경우에 속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럴 줄 알았지. 하여간 말은 정말 잘한다니까. "예. 바로 그 얘기에요. 아무래도 여기 십부원들은 머리가 좋은 모양이에 요" 가투신은 이렇게 말하고는 다시 십부원들을 살피더니 이번에는 우보에게 물었다. "그럼 늘 변하는 전장의 상황에 어떻게 하면 적절히 대처할 수 있을까 요?" 가투신은 잔뜩 기대한다는 표정으로 우보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냥...잘...명령에 복종하고...상황을...파악하고" 우보 반장은 귓불까지 벌게 져서 더듬더듬 대답했다.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물론 우보 반장이 대답을 잘 못해서 그런 것도 있었지만, 그 것보다는 먼저 대답한 마로우와 너무 대조적이어서 그랬으리라. 그런데 말 을 더듬는 우보의 모습을 보니 정말 멍청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 그런데 나도 그랬잖아? "상황을 잘 파악해야한다... 네 그래요. 상황이 언제든 바뀔 수 있다는 걸 항상 명심하고 있어야 되는 거에요. 그리고 잊지 말아요. '적은 항상 우 리가 예측하지 못하는 곳으로 온다'는 걸" 가투신은 이렇게 말했다. "뭐, 이상 별로 재미없는 얘기였어요. 하지만 내 얘기를 들은 사람들 중 단 한 명이라도 오늘 내 얘기를 마음에 새겨두어서 살아남게 된다면 전 정 말 이 강의에 보람을 느낄 수 있을 거에요. 오늘은 이만하지요. 아마 다른 십부장님들이 다음에는 더 유익한 말씀들을 많이 해 주시리라 생각되네요. 푹 쉬어요" 가투신이 천막 밖으로 나갔다. 돌아서 나가는 가투신의 탄탄한 등을 바라 보면서 나는 어쩐지 가투신은 알면 알수록 강한 사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본 뮤를 베고 돌아서는 아케르의 뒷모습에서도 그런 것을 느꼈다. 정말 강한 사내는 앞모습에서가 아니라 뒷모습에서 그걸 알 수 있는 건가.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N:김상현 #9172/10199 ━━━━━━━━━━━━━━━━━━━━━━━━━━━━━━━━━━━━━━━━ 제 목:[탐그루] 살아남는 법을 배우다 36 관련자료:없음 23/23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1-02 00:19 조회:1074 탐그루 # 마법은 마음이다 - 마음은 칼이다 # 자유시간은 금새 끝나고 취침시간이 되었다. 강의시간은 그렇게 길지 않 았는데도 천천히 가는 것처럼 느껴지고 자유시간은 아무리 길어도 짧게만 느껴진다. 침구류를 침상 위에 깔면서 나는 어쩐지 침상에 널브러져 있는 이불이 꼭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축 늘어져있는 모습이 말이다. "오늘 얘기는 전투의 기본에 관한 얘기였어. 사실 어떻게 보면 전투란 간 단해. 스파일의 위대한 역사학자이자 전술 연구가인 오브라디 교수에 따르 면 전투에서 승리하는 법은 이길 수 있는 곳에서 이길 수 있을 때에 싸우 고, 이길 수 있는 적과 싸우고, 만약 강한 적이라면 이길 수 있도록 적을 나누거나 보급을 끊고, 그래도 역부족이면 상황이 변화할 때까지 피하라고 했어. 간단한 말이지만 실천은 어렵지. 왜냐하면 전장에서 이길 수 있는 장소와 때, 그리고 적의 형태는 항상 변하기 마련이거든. 그러니까 결국 전투에서 의 승리는 변화하는 상황에 누가 얼마나 더 빠르게 대처할 수 있느냐에 달 려 있다고 오브라디 교수는 주장한 거야." 잠을 청하고 있는데 마로우가 나에게 다가와 이런 말을 했다. 그런데 누 가 물어 봤나? 이봐 마로우. 난 좀 자고 싶다구. "어때. 오늘 얘기는 좀 유익했지?" 아마 지난 밤에 내가 마로우의 말을 비꼰 걸 두고 하는 말 같았다. 속 좁 은 녀석 같으니라고. 그래 가지고 어디 용병 생활하겠나. 그런데 궁금한 게 하나 있었다. "그런데 마로우, 그 엘프인지 뭔지 하는 마물이 도대체 뭐하는 것들이 야?" 나는 마로우에게 이렇게 물었다. "나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이렇게 알고 있어" 마로우의 설명에 따르면 바르도 대륙이 타실, 자나크, 스파일 이렇계 세 개의 커다란 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하면 그건 농담이나 마찬가지란다. 타 실, 자나크, 스파일이 자신들의 땅이라고 주장하는 지도상의 경계가 있지만 그건 행정적이고 정치적인 영토 구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바르도 대륙에는 아직 인간이 가보지 못한 불가사의한 지역이나, 잘 알지 못하는 종족들이 살고 있는 지역, 인간과는 전혀 다른 생명체가 있는 지역 등이 상당수라는 얘기다. 또한 요즘 같은 세상에 아무도 안 믿겠지만 아직 바르도 대륙의 지도도 완전한 게 아니란다. 몇몇 인간들이 살고 있는 지역 만 좀 상세하게 나와 있다 뿐이지 아직 미탐험 지역이 너무 많아 현재의 지 도는 모험가들에게는 무용지물이나 마찬가지라고 한다. 그리고 바르도 대륙 의 완전한 지도를 제작하는 위대한 일을 추진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바로 오브라디 교수라고 한다. "...자나크만 해도 그래. 탐그루니 하잔이니 베논이니 하는 도시들과 그 도시를 연결하는 길만 자나크 주라고 할 수 있지 그 사이사이에 뭐가 어떻 게 존재하고 있는지는 아직 잘 모르잖아. 그런 땅에는 인간하고는 말도 통 하지 않는 마물들이 얼마든지 있다고. 그 검은 엘프도 그런 종족중 하나라 고 생각하면 되" 이 말은 이제껏 마로우에게서 들은 말 중 가장 흥미로운 말이었다. 다른 종족과 알지 못하는 미지의 땅...아마도 그런 것들이 있기 때문에 모험가라 는 직업이 있고, 또 모험가를 고용하는 영주들이 있겠지. "검은 엘프족은 어떤 전술을 쓴데? 활을 잘 쏴? 사람이 사는 마을을 습격 도 하고 그러는 모양이지?" 나는 마로우에게 이렇게 물었다. 내가 호기심을 느끼자 마로우는 신이 났 는지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줄줄 쏟아놓았다. "엘프 족에 대해서 오브라디 교수가 쓴 글을 읽어 본 적이 있어. 엘프 족 은 여자밖에는 없는 이상한 종족이라고 그 글에 씌여 있었어. 그러니 당연 히 그 숫자가 늘어나지도 줄어들지도 않겠지. 그래서 한 때는 불노불사의 종족이라는 말도 있었지만, 칼로 찌르면 죽기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인 모양 이더라. 가투신이 말했던 것처럼 말이지. 그리고 강한 의지력과 전투력을 가지고 있다고도 해. 주로 활을 사용하지만 백병전에도 강하다고 하고. 사 람을 보면 거의 피한다고 알려져 있으니까 우호적이라고도 배타적이라고도 할 수는 없는 모양이야" "마을을 습격했다잖아" "...그런데 마을을 습격했다는 가투신의 말은 좀 이상해. 오브라디 교수 의 조사에 의하면 그들은 그런 일을 한 종족이 아닌데 말이야" 마로우는 잘 모르겠다는 듯이 입술을 삐죽이면서 말했다. "그만하고 자자. 엘프든 오르크든 만나게 되면 죽여버리면 그만이잖아"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라이짐이 말했다. 나는 검은 엘프에 대해서 좀 더 묻고 싶었지만 그냥 참고 자기로 했다. 라이짐의 말도 맞고, 또 그 말을 들 으니까 잠을 자두지 않았다가는 내일 훈련중에 차이린에게 어떤 꼴을 당하 게 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용병단 생활을 하면서 가장 어려운 점은 늘 배가 고프고 또 잠이 부족하다 는 것이다. 먹을 거야 떠버리 하진에게서 사면된다고 해도 잠은 어쩔 수가 없 었다. 매일같이 서는 불침번 근무는 절대 익숙해질 것 같지 않고, 차이린의 맹훈련 때문인지 여섯 시간 일곱 시간을 자도 항상 졸리고 피곤했다. (자다가 중간에 일어난다는 게 이렇게 힘들 줄은 정말 몰랐다) 거기다가 새로운 마법 의 말도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차이린의 말은 아무리 들어도 마법의 말로 여겨지지 않았고, 동료들의 말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피곤한 몸 때문에 마음 이 집중되지 않으니 마법의 말도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나는 틈틈히 내가 예전에 들었던 마법의 말의 의미를 이해하려고 노 력했다. 몇번이고 내가 이해했다고 생각한 방식으로 마법을 연습했지만 결과 는 그리 좋지 못했다. 아자닌을 불러내는 마법이야 거의 매일 하니까 이제는 그럭저럭 익숙하게 쓴다고 쳐도, 방패마법을 빼고 나면 내가 제대로 작동시킬 수 있는 마법은 하나도 없었다. 차이린에게 들었던 전쟁에* 이 등이* 있나?* 싸움에* 최선을* 다했다는* 말이* 소용 있나?* 무조건* 이기고* 보는* 거야* 라는 말은 우보 반장을 자 다가 벌떡 일어나게 하는 데에는 소용이 있는지 몰라도 도무지 제대로 작동 하는 마법 같지는 않았다. 언젠가 가투신에게서 들었던 약한* 것들은* 죽고* 강한* 것들은* 살아남 기* 마련이다* 라는 말도 그랬다. 그때는 시간 막대기가 빨리 타 들어가더 니 이제는 연금술사의 붉은 등을 깜빡거리게 만드는 마법으로 바뀌고 말았 다. 그래서 나는 그 마법은 포기하고 아케르가 나에게 해준 말들로 마법의 말을 만들어 보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아케르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아케르의 말로는 작은 부작용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불침번 근무 때마다 머리 위에 구름이 모이지 않도록 조심하면 서 그나마 조금 할 줄 아는 방패 마법을 연습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수르카님 마법이 점점 나아집니다" 아자닌의 이런 말도 가끔은 내게 기운을 불어넣어 주었다. "하지만 아직도 방패 마법의 말을 완전히 이해하고 계신 것 같지는 않군 요" 가끔씩 마법이 작동하지 않을 때마다 아자닌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런 말은 물론 내 기운을 쪽 빼놓기도 했다. 아자닌. 꼭 그렇게 까지 말할 필요는 없잖아? 그래도 매일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데 말이야. "이해하려고 노력 해 보세요. 무슨 뜻인지,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지 를... 다른 마법의 말들도 마찬가지에요. 듣고 이해하고 그것을 마음으로 말하는 것만이 마법의 길이에요. 나와 너를 합치면 우리가 되잖아요? 그리고 수많은 우리가 모이면 그것이 바로 대자연이죠. 마법은 대자연의 힘을 불가사의한 방식으로 움직이는 능 력이에요. 사실 그 누구도 마법의 진정한 작동원리는 알지 못해요. 가장 효 과적이라고 여겨지는 방식이 계속 계승되고 보완되며 후대에 전해지는 거 죠. 하지만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방식은 분명 있어요. 그건 나와 당신과 우 리를 이해하는 것이 마법의 시작이라는 거에요. 그래야지만 대자연을 이해 할 수 있고, 대자연의 힘을 사용하는 데까지 나갈 수 있어요. 매일매일 꾸 준히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세요. 그리고 다른 사람의 마음도. 쉴새없이 변해가는 대자연을 경외심을 갖고 느끼려는 노력도 잊지말구요. " 다음 날도 고된 낮동안의 훈련이 끝나고 저녁식사를 하고 나자 십부장의 강의가 이어졌다. 차이린과 함께 천막으로 들어온 사람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그 사람이 아마 십부장인 모양이었다. 그는 비쩍 마르고 큰 키에, 십부장하고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아주 뽀얀 얼굴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래도 눈매가 매섭고 머리가 아주 짧아서 어딘가 한가닥하는 구석이 있을 것 같았다. "이분은 빛의 단검 십부의 밍밍 십부장님이셔" 차이린은 소개를 마치자마자 바로 천막 밖으로 나가버렸다. "방금 소개 받은 밍밍이다. 오늘은 정보에 대해서 강의하겠다" 굵직한 목소리로 밍밍이 말했다. 정보라. 오늘은 조금 다른 얘기인 모양 이었다. 밍밍은 잡담도 없이 바로 강의에 들어갔다. "정보를 얻기 위해서 특수 임무를 띤 정찰대가 적진에 잠입하는 일은 흔 히 있는 일이다. 하지만 꼭 그런 방법만으로 정보가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보통 정보를 얻어오는 사람을 정보원이라고 하는 데, 가장 좋은 정보원은 적지에서 포섭한 사람들이다. 먼저 적지에 살고 있는 현지인을 포섭하는 방 법이 있고, 아예 적의 병사나 간부를 포섭하는 방법도 있다. 이 두 가지가 가장 좋지만 현실적으로 어렵기 때문에 우리 병사를 적지에 침투시키게 되 는 것이다" 이렇게 말한 밍밍은 계속해서 정보의 중요성에 대해 설명했다. 밍밍의 말에 따르면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정보라는 거다. 적이 어디에 있고, 또 얼마나 있고, 무슨 무기를 가지고 있느냐 하는 직접적인 정보를 얻는 일은 뭐, 말할 것도 없이 중요하지만 그런 정보를 얻 기 어려울 때는 잡다하고 사소한 정보들이라도 가능한 수집해 그것들을 기 초로 다른 중요한 정보들을 추리해내야만 한다고 한다. "...역정보도 있다. 적의 정보원을 찾아내면 바로 죽이거나 사로잡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적의 정보원에게 역 정보를 흘려 그것으로 적이 상황을 잘못 판단하게 만드는 일은 더 중요하 다..." 사실 정보와 관계된 밍밍의 말은 흥미는 있었지만 그다지 중요하다고 생 각되지는 않았다. 실전에서 얻은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경험담을 듣게 되기 를 바랬는데 조금 실망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라이짐은 전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눈을 반짝이면서 밍밍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역 시 한때 두목 노릇을 좀 하더니 저런데 관심이 많은 모양이로군. "만약 포로가 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제군들" 밍밍이 묻자 나는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만약 에 포로가 된다면... 아마 고문당하거나 운이 좋으면 고통 없이 한 칼에 죽 게 되겠지... 나는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내가 그런 꼴을 당하게 될 것만 같 아 기분이 이상해졌다. 이런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하는데. "제군들은 용병이다. 적에게 포로가 된다고 해도 누구 하나 신경 쓰지 않 는 용병이란 말이다. 적어도 포로 교환 때 살아 돌아오는 일은 없을 것이 다. 용병을 구하기 위해 적의 정규군을 풀어준 예는 지금까지 한번도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리고 우리의 상대는 주로 마물들이다. 아직까지 마물들과 의사소통에 성공한 사람 얘기는 못 들어 봤다. 다만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은 창자를 끄집어내는 걸 좋아하는 바바 족 못지 않은 마물들이 얼마든지 있다 는 사실이다. 상상도 할 수 없는 마물들이 널려 있단 말이다" 나는 밍밍의 말에 불길한 생각이 자꾸 떠올라 기분이 나빠졌다. 아니, 나 빠졌다기보다는 두려워졌다고 말하는 편이 더 나을 지도 모르겠다. "검은 엘프 족의 예를 들어보자. 과거 우리 용병단은 검은 엘프 소탕을 위한 대규모 작전에 참전한 경험이 있다. 십부장들 중에는 그때 참전했던 사람들도 꽤 있을 것이다" 검은 엘프 족의 이야기가 나오자 나는 밍밍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마다 호기심을 느끼는 부분은 다른가보다. 하진이나 다른 훈련병들은 멍청하게 그냥 시간만 빨리 가기를 바라는 모양인데 나는 이렇 게 집중하고 있으니 말이다. "검은 엘프 소탕 작전은 삼년 전쟁 후, 타실의 대청하 하류 진출 계획의 일환으로 진행되었다. 작전의 목적은 대청하 남단에 서식 (밍밍은 이를 갈 며 서식이라는 표현을 썼다) 하고 있는 엘프 족들을 몰아내는 일이었다. 우 리 아케르 용병단은 국왕에게 고용되어 최선봉에서 엘프 족들과의 전투를 수행하게 되었다" 이 말은 지난 번 강의에서 가투신에게 들었던 말과는 조금 달랐다. 가투 신은 마을을 습격하는 검은 엘프들과 싸웠다고 말했는데. "그때 포로로 잡힌 우리 용병단윈들이 어떤 꼴이 되어서 죽었는지 아는 가?" 가투신은 극적인 효과를 노리기 위해선지 여기서 한 번 말을 멈추고 천막 안의 단원들을 둘러보았다. "검은 엘프족은 흉폭하기 이를 때 없는 종족이었다. 포로로 잡힌 우리 단 원들은 목이 잘려서 나무에 거꾸로 매달리거나, 사지가 절단돼 여기저기에 뿌려졌다. 검은 엘프 족에 의해서 말이다. 그래서 살해된 동료가 누구인지 확인하기 위해선 목잘린 시체나 절단된 신체 부위에서 소지품을 꺼내 살펴 보아야 했다. 피눈물을 흘리면서 말이다" 이 말이 나오자 훈련병들의 귀가 솔깃해진 모양이었다. 눈이 다들 반짝이 기 시작했다. 끔찍한 말과 차이린에 대한 농담이 나오면 다들 저런다니까. "뭐, 다 지나간 일이고, 여담이지만, 그때 우리는 검은 엘프 족을 잡아 껍데기를 벗겨 나무에 걸어 놓았다. 이것도 일종의 정보 공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심리전에 더 가까운 작전이었다고 생각되지만 말이다. 자, 그럼 다시 정보 얘기로 돌아가보자" 껍데기를 벗겼다고? 윽, 저녁으로 먹은 감자와 고깃덩어리들이 속에서 뒤 집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전쟁이라는 게 꼭 저렇게 끔찍한 짓을 해야만 하 는 걸까? "...하지만 너무 많은 정보는 불리하게 작용하기도 한다. 적이 흘린 역정 보와 진짜 정보 사이에서 우리는 판단을 해야만 한다. 어떤 정보가 중요하 고 또 어떤 정보가 중요하지 않은가를 결정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정보들을 모아놓고 보면 반대되는 결론이 나오는 정보들이 동시에 존재하는 일이 허다하다. 이때는 오로지 경험과 자신의 판단력에 의지하는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물론 맞는 말이긴 하지만 정보가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고, 또 무조건 믿 을 것도 못된다는, 아주 상식적인 말이었다. "항상 귀를 기울이고 보이는 것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이것이 많은 정보 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고 또 많은 정보를 가려낼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 다" 이 말을 듣고 나는 마법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항상 귀를 기울이고 그 말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생각한다... 이것이 내가 듣고 알고 있 는 마법의 본질이기 때문이었다. 마법과 정보가 비슷한 개념이라니. 좀 우 습기는 하지만 그럴싸한 생각이라고 여겨졌다. 밍밍의 강의는 간단하지만 요점을 짚어가면서 이어지더니 결국 '정보를 얻어야 한다'는 말로 끝났다. 밍밍이 나가자 또 마로우가 다가왔다. 제발, 오늘은 그냥 좀 제워달라고 마로우. "밍밍이 말하지 않은 게 있어" 마로우가 말했다. 나는 마로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연금술사의 붉은 등 빛을 받은 마보우의 금발이 빛나고 있었다. 역시 멋있는 놈이야... 하지만 나는 지금 졸려, 마로우. "역정보에 관한 얘기 말이야. 오브라디 교수에 따르면 이런 경우도 있어. 우리 정보원에게 거짓 정보를 알려 준 뒤, 적에게 붙잡히게 해서 거짓 정보 를 적에게 흘리는 경우 말이야. 그럴 경우 그 정보원은 죽게 되지만 전투에 서 승리할 가능성은 더 높아지지" 마로우가 말했다. 나는 마로우의 말에 잠이 달아나는 걸 느꼈다. "설마. 아케르 단장이 그런 짓을 할 것 같지는 않은데?" 나는 마로우에게 이렇게 말했다. "순진하구나, 수르카. 전쟁은 원래 끔찍한거야. 이기기 위해서라면 무슨 방법이든 다 사용하는 게 전쟁이라고. 그리고 모든 병사들이 모든* 일들을* 다* 알아야* 할* 필요는* 없는* 거고*" 마로우가 말했다. 마로우의 말 속에서 오랫만에 마법의 말이 들렸다. 그 래. 칼이나 휘두르는 말단 병사가 모든 걸 다 알아야 할 필요는 없겠지. 하 지만 설마 그런 방법으로 자기 부하를 희생시키는 지휘관이 있을까? 전투에 승리하기 위해서? "맞아. 마로우. 일단 이기고 나면 이긴 쪽이 저지른 짓은 모두 용서가 되 기 마련이지. 반대로 지고 나면 모두 용서가 되지 않는 거고" 라이짐이었다. 이렇게 말하는 라이짐의 눈에서 나는 복수의 일념으로 불 타던 눈빛을 볼 수 있었다. 라이짐의 눈빛이 전과 같지 않게 낯설기만 하 다. 내가 너무 졸린 거 아닐까? "라이짐. 그 말은 오브라디 교수의 말과 일치해. 사실 검은 엘프 소탕 작 전에 대한 기록을 보면 그건 인간들의 일방적인 학살과 그것에 대항한 검은 엘프 족의 복수의 역사라고 할 수 있어. 하지만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 잖아? 스파일이나 자나크 사람들은, 아, 타실이 영토를 확장했구나, 하고 생각하고 말 거고, 타실 사람들은 영토가 늘어나 조금 더 살기 좋아졌으니 누가 누구를 죽였건 신경 쓰지 않을 테니 말이야" 마로우는 이렇게 말했다. "그래. 그게 바로 약한* 것들은* 죽고* 강한* 것들은* 살아남기* 마련*이 라는 말이야" 라이짐이 말했다. 나는 라이짐의 말을 듣는 순간 약한* 것들은* 죽고* 강 한* 것들은* 살아남기* 마련* 이라는 말을 조금 더 이해하게 됐다. 그것은 자연의 무자비한 모습을 표현하는 말이었다. 그것이 마법으로 발동되면, 분 명히 정해져 있는 운명, 사라지게 되어 있는 것들의 운명을 앞당기는 마법 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시간 막대기가 빨리 타들어 건 것도 그런 이유에서 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N:김상현 #9206/10199 ━━━━━━━━━━━━━━━━━━━━━━━━━━━━━━━━━━━━━━━━ 제 목:[탐그루] 살아남는 법을 배우다 37 관련자료:없음 26/26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1-03 00:30 조회:1031 탐그루 # 마법은 마음이다 - 마음은 칼이다 # "어찌되었건 타실 사람들 입장에서 검은 엘프 족은 눈에 가시 같은 존재 였겠지. 물론 검은 엘프 족 입장에서는 타실 사람들이 철천지 원수였을테고. 하지만 오브라디 교수의 말에 의하면 그건 타실의 제국주의적 정책이 가져 온 당연한 귀결이래. 검은 엘프 족은 타실의 패권주의 전략에 의해 희생된 알려진 작은 사례일 뿐이고, 정보 통제에 의해 알려지지 않은 끔찍한 일은 더 많데. 결국 검은 엘프 족은 대부분이 살해되고 살아남은 몇몇들은 바르도 대륙 의 더 구석진 곳으로 숨어 들어갔어. 그런데 말이야. 만약 검은 엘프 족이 인간보다 더 강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인간이 검은 엘프한테 한 짓을 그대 로 인간에게 했을까? 난 그렇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 뭐. 순전히 나 혼자 만의 생각이니까..." 마로우는 이렇게 자신의 의견을 정리했다. 라이짐은 고개를 끄덕였다. 강 한 것이 약한 것을 이기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강한 것이 약한 것을 이긴다는 게 꼭 저렇게 잔인해야만 하는 것인가? 악하지만 강한 게 옳은지 약하지만 선한 게 옳은지 도대체 어떤 게 옳은 건지... 이런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떠올랐다. 아니다. 뭔가 좀 이상하다. 강한 것과 약한 것 만으로 세상을 나누는 것 부터가 잘못이다. 설마 세상이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을테니까 말이다. 그렇게 나는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긴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졸음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수르카, 일어나. 근무야" 하진이 나를 흔들어 깨웠다. 피곤했는지 꿈도 없이 깊은 잠에 빠진 모양 이었다. 사방은 온통 고요했고, 연금술사의 붉은 등이 어두운 천막 안을 힘 겹게 밝혀주고 있었다. 하진은 나에게 불밝힌 피리나무 가지를 건네주었다. "근무 잘서. 내일 아침에 보자, 수르카" 하진은 이렇게 말하고는 자신의 자리를 더듬더듬 찾아 들어갔다. 나는 불침번을 서면서 마로우의 말에서 찾아낸 마법의 말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모든 걸 다 알 필요는 없다... 이 말은 과연 무슨 뜻일까 하 고 말이다. 전쟁에서 병사가 모든 걸 다 알아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단 지 효율의 측면에서만 말하는 것인가? 누구라도 자신이 위험에 빠지게 될 것을 알게 된다면 제대로 싸울 수 없을테니까 말이다. 이런 저런 생각 끝에 되든 안되든 해보기로 했다. "모든* 일을* 다*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나는 이렇게 말했지만 마법은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법의 말에 대해서 생각하다보니 어느새 근무 시간이 다 끝나가고 있었다. 이만하면 좋 은 결과 아닌가? 이것도 마법이라고 우기고 싶다. 누군가 믿어주기만 한다 면... 훈련은 끝날 것 같지 않게 계속되었다. 마른 운동장에서 피어오르는 흙먼 지를 씹으며 뒹굴었던 시간이 있었고, 또 운동장을 수도 없이 뛰어야 했던 시간들도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주둔지의 외벽 너머로 보이는 팜 산맥은 점점 붉어져만 가고, 활활 타오를 것만 같게 단풍이 들었다. 그 풍경은 바 라보는 사람을 쓸쓸하게 할만큼 화려했다. 어느 날인가 바라본 하늘은 너무나도 높고 푸르게 빛났다. 흙먼지를 털며 일어나다 본 그 가을하늘. 나는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문득 저 가을하 늘과 저 햇살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목숨도 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을이 깊어가자 훈련병들도 틈틈이 겨울을 나기 위한 작업에 투입되었 다. 나무를 해오는 작업도 있었고, 겨울에 혹시라도 지하수가 마를 경우를 대비해 새로이 우물을 파는 작업도 있었다. 훈련이라는 이름 아래 나무를 쪼개 장작을 만드는 작업도 있었다. 한 번은 탐그루에서 온 물건을 내리는 작업에 투입 된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바코쿠가 만들었을 것이 분명한 연금술사의 등을 볼 수 있었다. 전에 는 몰랐던 그리움 같은 것이 그 연금술사의 등예서 느껴졌다. 한동안 멍하 니 바라보다 차이린에게 뒤통수를 얻어맞기는 했지만 바보처럼 헤헤거리며 즐겁기만 했다. "수르카. 너 왜 울고 있냐?" 내가 울고 있었다고? 이런 정말 난 울고 있 었다. 난 내가 웃고 있다고만 생각했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고 있었다 니... "아, 아닙니다, 차이린 십부장님. 그냥 너무 눈이 부셔서..." 이렇게 말했지만 탐그루가 그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떠난지 얼마 되지 도 않았는데 말이다. 라짐은 뭘 하고 있을까. 목숨을 걸고 라짐을 보호하기 위해 달려드는 소매치기 녀석들을 요리조리 부리면서 별빛 주점을 거뜬하게 운영하고 있겠지. 울찬과 라이짐의 패거리들은 뭘 하고 있을까. 무기점의 시하라는 잘 있을지. 또 대머리 바코쿠는 여전히 탐그루 꼬마들에게 알밤을 먹이며 연금술사의 등을 보여주고 있겠지. 나보다 먼저 떠나버린 사비오 영 감과 스타바는 지금쯤 어디에 가 있을까? 그리고 탐그루에서 떠나던 날 어 둠 속에서 천천히 흔들리던 그네... 이무르 아주머니는 차가운 땅 속에서 많이도 외롭겠지... 언제쯤 모두 다 모여 즐겁게 그 그네를 탈 수 있을 까.... 내가 이런 생각에 잠겨 있을때 라이짐은 험악한 표정으로 바코쿠가 만들 었을 것이 분명한 연금술사의 등을 거칠게 집어던지고 있었다. 라이짐도 그 것들이 탐그루에서 온거라는 걸 분명히 알텐데. 아마 라이짐도 나와 비슷한 생각들을 했겠지. 아니, 어쩌면 나보다 더 탐그루가 그리울지도 몰라. 이무르 아주머니를 생각하면 빌어먹을 루비오와 쥬크도 생각이 나겠지.. 어쩌면 그래서 일부러 저런 표정으로 거칠게 짐을 내리고 있는지도 모르지. 라이짐은 복수를 하기 위해서, 강해지기 위해서 용병단에 왔으니까. 고된 훈련과 작업 사이에도 즐거운 일은 있었다. 하진이 파는 감자와 계 란을 먹는 일도 즐거웠고, 시시껄렁한 농담에도 분위기를 맞춰주려고 웃어 주는 일도 싫지만은 않았다(하지만 차이린에 관한 농담은 좀 그만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아무리 재미있다고 해도 그렇지 매일 똑같은 얘기가 반 복되는데 지겹지도 않은지). 십부장들의 강의도 계속됐다. 그중에서 기억에 남을만한 강의도 여럿 있 었다. 또 강의의 내용과는 별도로 마로우의 해설을 듣는 일도 흥미로웠고. (대부분 지겹기는 했지만 말이다) "오늘은 지역에 관한 이야기를 하겠다" 죽음의 신 십부장은 아루마 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아루마 십부장은 키도 작았고 땅딸한 몸을 가지고 있었지만 누구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을 것 같은 단단한 인상을 풍기는 사내였다. 들리는 말로는 아주 혹독한 훈련 과 작전을 감행하는 십부장이라고 했다. 그래서 죽음의 신 십부는 신병의 생존율이 다른 십부에 비해서 높다는 말도 있었다. "전투를 벌이게 되는 지역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먼저 적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 전투를 벌이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 경우, 적들은 자신들의 주거 지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싸움에 최선을 다하기 마련이다. 되도록이 면 이런 경우는 피해야 한다. 우리가 전투할 수 있는 지역을 선택할 수 있다면 우리는 적의 본거지에서 그리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지역을 선택해야만 한다. 적이 자신들의 본거지 로 도망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함과 동시에 자신들의 본거지가 습격당할 염 려가 없다고 생각하게 되는 그런 거리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분명 모 순된 생각이지만 적은 분명 그렇게 생각한다. 죽음 앞에선 그런 생각이 가 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적은 목숨을 걸고 싸우지 않는다. 우리 는 적은 노력으로도 승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본거지. 자신의 집. 나는 이 말에서 타코를 떠올렸다. 집을 지키 기 위해서라면 목숨을 내걸고 달려든다는 타코 말이다. 눈앞에서 이리 뛰고 저리 날던 타코의 모습이 떠올라 나는 솔직히 겁이 나기도 했다. (다시 그 런 일을 당하게 되면 어쩌나 하고 말이다) 아루마는 이어서 전략적 요충지와 교차로, 교역로등을 예를 들어가면서 설명했는데 그런 전문적인 이야기는 그다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의 관 심을 끈 건 적진 깊숙한 곳에서의 작전에 관한 이야기였다. "적들이 본거지를 버리고 가는 경우가 있다. 집을 버리고 도망친 경우지. 이런 경우,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적들이 남기고 간 물건들을 모두 챙겨야 한 다" "훔친다는 말인가요?" 누군가가 물었고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훔친다는 말은 쓰지 않는다. 보급을 받는다던가, 혹은 전리품을 모은다 는 말은 해도 말이지... 그건 용병에게 있어선 의무이자 권리다" 아루마가 이렇게 말하자 순간 천막이 들썩일 만큼 큰 웃음이 터져 나왔 다. 별로 재미있는 말은 아니었지만 차이린에 관한 농담에 지겨워진 훈련병 인지라 그런 모양이다. (나도 턱을 젖히고 웃었으니 말이다) 아루마는 '웃 을 대목이 아닌데' 하는 표정으로 잠시 고민하다가 웃음이 잦아들자 다시 강의를 이었다. "적지에서 보급을 받는 일에 관심이 많은 모양이로군. 하지만 그런 경우 는 드물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의 작전은 마물들과 싸우는 일이기 때문이 다. 혹시 반란군을 토벌하게 된다면 또 모를까. 마물들이 먹고 입고하는 걸 가져서 뭐에 쓰겠나. 예를 들어서 말이지... 음... 엘프가 쓰는 화장품이나 장신구같은 걸 얻었다면 어디다 쓰겠느냔 말이다. 검은 엘프가 여자 뿐이라 는 건 다 알지?" 마지막은 아루마가 마음잡고 한 번 웃겨보려고 한 말이었던 것 같은데 이 번에는 아무도 웃지 않았다. 아루마는 무안한지 헛기침을 한 번 하고 강의 를 이어갔다. "...만약에 필사적으로 집을 지키는 적과 마주치게 됐다면. 또, 그 적이 강하고 함부로 할 수 없는 상대라면 제군들은 어떻게 하겠나?" 아루마가 묻자 마로우가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대답했다. "재빨리 후퇴합니다. 그런 상황이 길어지면 길어질 수록 우리에겐 점점 더 불리해질 뿐입니다. 오브라디 교수의 말에 의하면 안전한 후퇴만큼 좋은 전술은 없다고 했습니다. " 이 대답에 아루마의 표정이 밝아졌다. "자네, 오브라디 교수의 책을 읽었나?" "예. 물론입니다" 둘 사이에 뜨거운 눈길이 오고갔다. 결국 짝을 만났군, 마로우. 축하해. 나는 속으로 두사람에게 박수갈채를 보냈다. "그럼 일 대 일의 경우는 어떤가? 제군들 중에는 칼에 특히 자신 있는 사 람들도 있을 테니까 말이다. 또 혼자서 여럿을 만난다면 어떻게 하겠나?" 훈련병들은 꼴깍꼴깍 침을 삼키며 강의에 열중하고 있었다. 도망치는 방 법에 대한 강의가 계속 이어졌다. "혼자서 여럿을 만난다면 물론 도망치는 수가 최선이다. 도망이라고 해서 비겁하다고 생각하지 말도록. 이길 수 없을 때 피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 이다. 물론 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시기다. 언제 도망치는가 하는 문제 말 이다. 이 결정은 빨리 내려져야 한다. 물론 제군들이 작전에 나가게 되면 십부장들이 알아서 잘 통솔하겠지만, 혼자 떨어져 있거나, 혹은 제군들 중 누군가가 나머지를 지휘해야 할 경우도 있을 테니 잘 들어 두도록" 아루마 십부장은 조금 말을 돌려서 했지만 사실 그 말은 자신이 소속한 십부장이 죽었을 경우를 뜻하는 말이었다. "후퇴해야 할 상황이라고 생각되면 다음 원칙을 잊지 말고 행동하도록. 먼저 적이 포위하기 전에 후퇴한다. 적의 동향을 면밀히 분석한 후, 적이 반격을 두려워하는 지 아닌지를 먼저 판단해야 한다. 그 다음엔 전력으로 후퇴할 것인지, 아니면 예비대를 편성해 공격을 병행하면서 후퇴할 것인지 를 결정한다. 그리고 끝으로 후퇴할 때는 적이 열어 준 길로는 후퇴하지 않 는다. 이 말들을 명심하도록. 개죽음 당하고 싶지 않다면. 이상이다 " 아무 설명도 없는 말이었다. 이거, 그냥 외우라는 말인지, 뭔지 알 수 가 없군. 하지만 마로우는 다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고, 아루마 십부 장은 마로우의 표정을 살피더니 슬쩍 웃음을 지어 보였다. 둘이 아주 잘 통 하는 모양이로군, 혹시 아루마 십부장도 학자 집안 출신 아닐까. 그날 꿈에 나는 여러 여자들 사이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꿈 해몽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내가 아자닌과 라스폼과 라짐 사이에서 웃고 즐긴 꿈이 어떤 의미인지 찾아낼 수 있을 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저 꿈을 꾸었을 뿐이다, 꿈을. 그런데 어느 순간 여자들이 모두 시커먼 피부로 변하 더니 나에게 달려들었다. 단 한 번도 본 적은 없었지만 나는 그것들이 검은 엘프라고 생각했다. 불 길을 뿜어대는 검은 엘프의 모습은 두렵다 못해 끔찍하기까지 한 모습을 하 고 있었다. 나는 그 불길을 손으로 막아보려고 노력했지만 오히려 내 손에 불이 붙어 활활 타올랐다. 나는 불타고 있는 두 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린 채 어쩔 쭐 모르며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엘프가 말했다. '강한 자는 살아남고 약한 자는 죽는 거야' 낮고 음산한 목소리였다. 아니야. 왜 죽어야 해? 약하다고 죽어야 하는 거야? 그건 너무 억울해! 이유가 뭐야, 이유가! 나는 이렇게 소리질렀다. '네가 모든 걸 다 알아야 할 필요는 없지' 엘프가 차갑게 말했다. 그리곤 눈에서 나오는 불길로 나를 완전히 태워버 렸다. 불타면서 나는 온 몸이 뜨거워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이상 한 건 고통스럽다기 보다는 따뜻하고 편안한 느낌이었다. 악몽을 꾸기는 했지만 그 다음 날은 좋은 일이 있었다. 차이린이 훈련 대 신 사냥을 나가겠다고 한 것이다. 겨울을 나기 위해 짐승 가죽이 많이 필요 한데다가 고기를 확보하기 위한 목적이리라. 물론 차이린은 끝까지 사냥이 아니라 '훈련' 이라고 우겨댔다. "사냥이라고는 하지만 별 건 없을 거다. 그렇게 많이 잡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또 꼭 필요해서 사냥을 하는 것도 아니다. 이것도 실전을 대비한 훈련이라는 걸 잊지 말도록" 운동장에 정렬해 있는 훈련병들 앞에서 차이린은 이렇게 말했다. 출발하기 전, 나는 마로우에게 혹시 타코 사냥을 나가는 게 아니냐고 물 어보았다. (내가 팜산맥에서 본 짐승이라고는 타코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아닐 꺼야. 동면에 들어가기 직전인 타코는 가죽이 별 쓸모 없어. 기름 기가 너무 많거든. 물론 고기를 먹을 수도 있겠지. 아주 굶주려 있다면 말 이야. 타코 고기는 질긴데다가 너무 써. 아마 먹으래도 못먹을 걸" 나는 물론이고 훈련병들 전원이 들떠있었다. 상기된 얼굴로 저마다 옆사 람과 뭐라고 한 마디씩 떠들어대는 모습이 그랬다. 사냥이건 훈련이건 주둔 지 밖으로 나가 바깥바람도 쐬고 산도 타는 게 분명 훨씬 좋았다. 모두가 즐거운 비명을 질러댔지만 꼭 한 사람 어두운 얼굴로 우두커니 서 있는 사람이 있었다. 재훈이었다. 그러고 보니 재훈은 훈련 내내 어두운 표 정이기는 했지만 이렇게 까지 어두운 표정을 지은 적은 없었다. 아마 아케 르 용병단으로 오던 길에 만났던 타코 생각이 나서 그러는가 보다 싶었다. 우리는 사냥을 나가기 위해 주둔지 밖으로 나갔다. 십부원들은 문으로 쓰 고 있는 통나무와 이어진 끈을 조심스럽게 하지만 있는 힘껏 잡아당겨야 했 다. 자칫하다가 문이 너무 빨리 떨어져 부서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오래간만에 본 용병단 밖의 풍경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맑은 가을 햇살 아래 붉게 물든 낙엽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놀라 하늘로 날아오르는 떠버리 새들은 정말 사람들이 떠드는 것처럼 소란스럽게 지저귀며 날았다. 나는 숨 을 깊게 들이쉬었다. 온몸에 쪄들어 있던 발 냄새며 땀 냄새가 맑고 차가 운 팜 산맥의 바람에 단숨에 날아가버리는 것 같았다. "이제 슬슬 사냥을 시작해야지. 날 따라와. 두 줄로. 조용히" 차이린이 신중한 발걸음으로 앞장서 걸었다. 나는 십부원들 사이에 끼어 차이린의 말 그대로 소리를 내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아주 조심스럽게 그 뒤 를 따랐다. (만약 기침 소리라도 크게 냈다가는 차이린에게 무슨 꼴을 당할 지 안봐도 뻔했다) 차이린은 나한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장소에서 짐승의 발자국들을 찾 아내고, 나무에 남아 있는 뭔지 알아볼 수 없는 흔적들을 유심히 살피면서 산 위로 올랐다. 물론 훈련병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채 멀뚱멀뚱 차이린의 뒤만 졸졸 따라다녔다. 그것도 아주 조용히 말이다. "라마군...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듣고 그대로 따르면 된다. 중요 한 것은 내 말을 잘 따르는 일이다. 신속하게, 하지만 신중히" 산 중턱에 올랐을 때, 차이린은 뭔가 분명한 흔적이라도 발견했는지, 자 신만만한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라마가 뭡니까? 차이린 십부장님" 라이짐이 차이린에게 물었다. "라마를 모르는 사람도 있나? 그것참 웃음도 안나오네. 하긴. 도시 출신 촌놈들이 뭘 알겠어. 이거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음... 라마는 털이 많고 네 발로 걸어다니는 짐승이야. 보통 갈색 털을 가지고 있지만 흰 털을 가지 고 있는 놈도 있지. 모여 다니기를 좋아하지만 그렇게 큰 무리를 지어서 활 동하지는 않으니까 멍청한 훈련병들을 데리고 사냥하기는 딱 좋은 짐승이 지. 그렇다고 거저 잡히는 짐승이라는 말은 아니야. 아무 사고 없이 사냥을 마치려면 항상 내 말에 귀를 귀울이고 있도록" 뭐, 훈련병을 멍청하다고 말하는 건 당연하다고 해도, 탐그루 출신을 촌 놈이라고 말하다니. 이건 좀 너무 하네. "수르카, 너도 탐그루 출신이지? 너도 라마가 뭔지 몰라?" 옆에 서 있던 우보 반장이 물었다. "...응" 안다고 대답하려다가 어쩐지 거짓말 하는 건 별로 좋지 않은 생각인 것 같아서 나는 솔직하게 모른다고 우보 반장에게 말했다. "바닷가 출신인 나도 아는데... 라마에 뿔이 달려 있는 건 알아? 라마 뿔 로 만든 목걸이는 행운을 가져다 준다고 해서 비싼 값에 팔기도 하는 데. 또 라마 고기는 맛이 좋다고. 식사에도 몇 번 나왔는데 뭔지도 모르고 먹은 거야?" 우보 반장의 목소리에는 장난끼가 가득했다. 그깟 라마인지 뭔지 하는 짐 승 이름 하나 아는 게 뭐 그리 대단하다고 저러는지. 차이린은 라마를 잡기 위한 작전을 설명했다. 그렇지만 설명한 작전 (이 라기 보다는 사냥계획)은 별 게 없었다. 라마의 새끼들을 이용해 어미 라마 를 잡는다는 계획이었다. "우리는 그냥 라마 새끼들에게 겁만 주면 된다. 그럼 어미 라마들이 몰려 올 거고. 그때 준비한 그물로 어미들을 잡기만 하면 되는 거야. 겁을 주는 일은 어렵지 않아. 그냥 소리치면서 쫓기만 하면 되니까. 그 다음부터는 아 주 쉬울 거야" 도대체 어떻게 새끼들이 근처에 있다는 걸 알았는지, 또 겁을 주면 어미 가 몰려온다는 건 어떻게 알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하여간 말을 따르라고 했으니 그냥 그렇게 하면 되겠지, 하고 나는 생각했는데, 마로우는 조금 다 르게 생각한 모양이다. "차이린 십부장님. 그런데 라마 새끼가 이 근처에 있다는 건 어떻게 아셨 습니까. 그리고 활이나 칼을 사용하지 않고 그물을 사용하는 이유는 무엇입 니까. 또 새끼를 위협하면 어미가 온다는 건 사실입니까?" 마로우가 학자집안 출신답게 아주 진지한 목소리로 논리적으로 질문했다. 하지만 마로우에게 돌아온 대답은 간단했다. "쓸데없는 질문하지 마, 마로우. 이건 그냥 사냥이 아니라 실제 작전이 다. 작전 중에 그렇게 일일이 병사들에게 상황을 설명해줄 시간은 없어. 또 지금 이건 실제 작전에 대비한 훈련이기도 하니까 마로우의 질문을 교훈 삼 아서 다른 훈련병들도 주의하도록 해" 그러고 나서 차이린은 마로우에게 주둔지 입구까지 뛰어갔다 올 것을 지 시했다. 불쌍한 마로우. 그냥 나처럼 입 다물고 있을 일이지. "그리고 절대 새끼는 잡지마라. 이 점 명심하도록" 우리는 차이린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게 조심하며 그 뒤를 따랐다. 마로우 는 열심히 주둔지 입구로 뛰어 내려가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고소해하며 달려 내려가는 마로우의 뒷모습을 시선으로 쫓았다. 그런데 주둔지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나무가 생각보다 울창했다. 언젠가 이렇게 부대 주변에 나 무를 심는 것을 위장 식수라고 한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났다. 역시 아케르 용병단은 비스토브레 왕국의 정규군 못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차이린의 말 그대로 라마 새끼들을 발견 할 수 있었다. 라마 새끼는 모두 네 마리였다. 처음 보는 라마의 모습은 언뜻 보 기에 털이 북술북술한 강아지 같이 생겼다. 그렇지만 이마에 길게 뿔이 솟 아 있어 강아지와는 확연히 구별됐다. 네 마리는 모두 갈색이었는다. 꼭 입 속에서 물을 머금고 웃는 소리 같은 경쾌한 소리를 내며 서로 올라타고 깔 리고, 쫓고 쫓기며 장난치며 놀고 있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N:김상현 #9207/10199 ━━━━━━━━━━━━━━━━━━━━━━━━━━━━━━━━━━━━━━━━ 제 목:[탐그루] 살아남는 법을 배우다 38 관련자료:없음 28/28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1-03 00:31 조회:974 탐그루 # 마법은 마음이다 - 마음은 칼이다 # 차이린은 손짓으로 우리에게 라마 새끼를 포위할 것을 지시했다. 평소에 지겹도록 훈련받은 그대로 우리는 오른 편과 왼 편으로 나뉘어 천천히 라마 새끼들을 포위해 나갔다. 고작해야 라마 새끼를 포위하는 일이었지만 가슴 이 뛰고 흥분이 되었다. 어쩐지 정말 실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이닷!" 차이린이 소리치자 우리는 아까 차이린에게 들은 대로 소리를 지르면서 라마 새끼에게 뛰어갔다. 그러자 라마들은 깜짝 놀란 듯 우리를 바라보더니 이리 뛰고 저리 뛰다가 도망칠 곳이 없다는 것을 알자 희한한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어떻게 들으면 꼬마 여자아이들의 즐거운 웃음소리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말 여기저기서 어미 라마들이 몰려왔다. 어미 라마는 보통의 개보다 조금 크다 싶을 정도의 몸집이었다. 움직임은 개하고는 비교 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정말 눈으로 따라잡기 힘들만큼 빠른 속도였 다. 어미라마와 새끼라마들이 섞여 콩튀듯이 사방으로 튀고 있었다. "잡아! 잡으라구. 뭘 멍청히 보고 있나!" 차이린이 소리치자 훈련병들은 엉덩이에 불이라도 붙은 듯 재빠르게 움직 였다. 여기저기서 들고 있던 그물이 던져졌다. 몇개의 그물은 어미라마들 위에 정확히 떨어졌다. 나는 재빠르게 움직이는 라마들을 보고 있자니 무거 운 추가 달려있는 그물을 던져 포획할 자신이 없어졌다. 도무지 조준해서 던질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결국 차이린의 고함소리예 깜짝 놀라 아무렇게나 집어던졌다. (차이린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 었다) 그런데 추가 달린 그물이 허공에서 좍 펴지더니 새끼를 물고 뛰어가 던 라마 위에 정확하게 떨어졌다. "이야!" 나는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짜릿한 쾌감이 느껴졌다. 아케르 용병 단에 와서 이렇게 신나보기는 처음이었다. 여기저기서 환호성 소리가 터져 나왔다. 떠버리 하진은 얼마나 기분이 좋아 하는지 몸을 빙글 돌려 땅바닥 을 한 바퀴 구르기까지 했다. "잠깐. 그대로 있어" 나는 차이린의 말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차이린은 그물로 다가가 아주 재빠르게 그물을 열어 새끼를 놓아주고는, 어미 라마만을 그물에 잡아 올렸 다. "자. 이렇게 하는 거야. 조심해라" 차이린은 라마가 잡혀 있는 그물을 나에게 내밀었다.나는 차이린이 잡고 있던 모양으로 그물 끝을 조심스럽게 모아 잡았다. 꽤 묵직했다. 그물 안의 라마는 발버둥치는 것 포기했는지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얌전히 그물 안에 갇혀 있었다. 가까이 에서 본 라마의 뿔은 반질반질 했고, 눈부실 정도로 새하얀 색이었다. 꼭 송곳니가 길게 나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라마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옅은 초록색을 띄고 있는 라마의 동그란 눈동자는 물기가 가득했다.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한자는 죽고 강 한 자는 살아남는다'는 말도 떠올랐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건 나와 저쪽예서 침울하게 서 있는 재훈뿐인 것 같았다. 여기저기에서 라마에 게 그물을 던지고 또 고함을 치고 있는 훈련병들의 얼굴에는 사냥의 즐거움 과 기쁨만이 가득했다. 낙엽을 우수수 떨어뜨리던 훈련병들의 함성 소리가 서서히 가시고, 점심 시간이 되기 전에 사냥은 끝이 났다. 라마는 네 마리가 잡혔고, 차이린은 그만하면 됐다는 표정으로 하산을 명령했다. 훈련병들 사이에서 조금 아쉽 다는 듯한 불평이 흘러나왔다. "서너 마리면 족해. 너무 많이 잡아도 곤란하니까. 내년을 생각해야지" 차이린은 올 때와 같이 앞장서 산을 내려갔다. 얼마 내려가지 않아 우리 는 얼굴이 벌게진 채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마로우를 발견할 수 있었다. 마로우는 숨을 헐떡이면서나무에 기대고 서있었다. "마로우. 네가 똑똑한 건 알지만 작전 중에는 똑똑한 병사가 필요없다. 작전 중에는 오직 지휘관의 명령만을 따라야만 하는 거야. 문제제기나 불평 은 작전 전이나 작전 후에만 가능하다. 알겠나?" 차이린은 차이린 답지 않게 웃으면서 친절한 목소리로 마로우에게 말했 다. 그 모습이 너무나 생경해서 훈련병들은 멍하니 차이린을 바라보고 있었 다. 물론 나도 포함해서 말이다. "예를 들어 설명해 주지. 작전 중의 병사는 화살 하나에 불과해. 지휘관 이 쏘면 날아가서 박히면 되는 거야. 그러니까 십부장들은 활이라고 할 수 있겠지. 그리고 아케르 단장님은 활을 쏘는 사수라고 생각하면 되지. 마로 우. 작전 전에는 똑똑한 게 필요할 수도 있지만 막상 작전이 시작되면 병사 는 아주 단순해 져야 해. 화살처럼 말이야. 화살이 모든* 걸* 알* 필요는* 없거든* 마로우. 이게 오늘 네가 배운 내용이야. 알겠지?" 차이린은 아직도 숨을 헐떡이고 있는 마로우에게 설명을 마치자. 다시 앞 장서 산을 내려갔다. 차이린의 말에서 전에 마로우가 했던 마법의 말이 좀 더 자세하게 들렸다. 모든 걸 알 필요가 없다는 말뜻을 조금은 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밤이 되면 아자닌을 불러내서 연습을 해봐야겠다. 아마 도 물체를 움직이게 하는 마법이 분명한 것 같은데... 주둔지로 돌아가면서 나는 차이린이 마로우에게 하는 말을 들을 수 있었 다. "...라마 새끼들은 호기심이 많아서 자주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장난치고 며 놀곤 한단다. 그때 새끼를 겁주면 어미들이 달려오기 마련이지. 여기서 중요한 건 어미만 잡고 새끼들은 놔줘야 한다는 거야. 물론 그래야 내년에 또 사냥을 할 수 있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새끼가 도망치는 걸 봐야 어미 라마들이 얌전해지기 때문이야. 새끼를 잃은 어미 라마는 미친 뮤와 같단 다. 그때는 정말 라마가 무섭단다. 모성이라는 게 정말 대단한 거지... " 아니 이럴 수가! 차이린이 저렇게 상냥하게 설명을 해 주다니! 놀라고 있 는 건 나뿐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둘러보니까 다른 훈련병들도 모두 ㄳ눈질 로 차이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의 차이린은 마치 친누나 같았다. 그런데 라이짐은 조금 달랐다. 썩은 물을 마신 사람처럼 라이짐은 좋지 않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옆의 재훈도 마찬가지긴 했지만 둘의 생각은 조금 다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이짐은 분명히 이무르 아주머니를 생각하고 있을 거였고, 재훈은 자신이 살려주었던 타코에 대해 생각하고 있 는 듯했다. 점심 식사를 마친 후, 훈련병들이 하는 농담의 내용이 조금 바뀌었다. 갑 자기 아름다운 차이린과 그 차이린에게 봉사 (어떤 봉사인지는 묻지 말기 를) 하는 훈련병들에 관한 농담으로 바뀌었다. 물론 그런 농담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점심 시간이 끝나고 다시 훈련이 시작되자 차이린은 십부원들 에게 이렇게 소리 질렀다. "이 병신 같은 것들, 아직도 목도 하나 제대로 못 휘둘러? 똥구멍에 목도 를 처박아 버리기 전에 똑바로 해!" 저녁식사 후에 차이린에 관한 농담은 다시 유치찬란한 농담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자유시간 전에는 패거리들 십부의 십부장인 신다루의 강의가 있었다. 신 다루는 좀 나이가 많이 든 십부장이었다. 이마에 주름하며 눈이 쌓인 듯 희 게 샌 머리가 신다루 십부장의 나이를 말해주고 있었다. 그렇지만 목소리 하나만은 카랑카랑했다. 강의 내용은 불을 이용한 화공에 관한 것이었다. "...그럼 지금부터는 바람에 따라서 어떻게 불을 놓아야 하는 지 설명해 보지요..." 신다루 십부장은 존댓말을 썼는데, 거기다가 말투는 느릿느릿하기까지 해 서 나이가 더 많이 들어 보였다. 그렇지만 훈련병들에게는 그리 나쁜 시간 은 아니었다. 덕분에 나도 머리를 앞사람 등에 대고 잠을 잘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불화살은 적을 직접으로 불로 공격하는 용도로도 쓰이지만, 적을 적의 진형을 흐트리고 적을 분산시키기 위한 수단으로도는 자주 사용 됩니다. 물론 비가 오는 날에는 쓰지 못하겠지만 말이지요, 허허..." 졸다가 문득 깨어보니 꽤나 깊이 잠들었던 모양인지 입가에 침이 흘러나 와 있었다. 나는 혹시라도 신다루 십부장 눈에 뜨일까봐 조심스럽게 입가를 닦으면서 아무렇지도 않은표정으로 강의를 듣는 척 했다. "...음...그래서...거기" 신다루 십부장은 나를 가리켰다. 잠이 확 달아나는 느낌이었다. "...예?" 나는 뒤를 돌아보면서 왜 나를 지적했느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신다 루 십부장의 표정은 '다 아니까 그러지 마' 하고 말하는 듯 했다. "일 대 일 전투와 일 대 다수 전투의 차이점에 대해 말해봐요" 마로우 같으면 신이 나서 대답했겠지만 나는 사람 많은 곳에서 얘기하는 건 딱 질색이었다. 그나마 좀 아는 내용이어서 다행이긴 했지만 말이다. "일 대 일 전투에서는 칼 이상의 무기가 없습니다. 칼은 가장 훌륭한 공 격도구인 동시에 방어도구 입니다. 다만 다수와 다수가 맞붙는 전투에서는 방패와 짧은 칼이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예. 설명 잘 했어요. 이름이 뭐지요?" 나는 공연히 우쭐해져서 '수르카라고 합니다' 하고 소리 높여서 대답했 다. "우리 아케르 용병단은 전투시 항상 이 두 가지 장점을 다 살리려고 노력 합니다. 그러니까... 다수 대 다수의 전투에서 방패와 짧은 칼로 맞서 싸우 는 방식이 아니라, 적을 일단 분산시킨 다음 되도록이면 일 대 일로 싸우는 방식을 선호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수르카 훈련병. 그건 내 질문의 핵심 이 아니군요. 내가 물어본 건 그런 차원의 얘기가 아니라 조금 넓은 전술적 차원의 질문이었는데요 뭐, 좋아요. 수르카 훈련병. 내가 다음에 설명하려 고 한 걸 잘 대답해줬어요" 신다루 십부장은 이렇게 말하고 나서 '앞으로 조심해' 하는 표정으로 나 를 바라봤다. 신다루 십부장의 눈빛은 온화하면서도 매서웠다. 나는 신다루 십부장의 눈을 피하다가 찬과 눈이 마주쳤다. 눈 밑의 흉터가 내 눈에 와 박히는 느낌이 들었다. 찬의 눈은 나를 피하지 않고 마주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하진은 내가 일 대 일 싸움에 대한 얘기를 하니까 나와 한 판 붙었던 일을 떠올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다시 찬과 붙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물론 다음 번에는 꼭 이겨봐야 겠다는 생각이었다) 불침번을 서면서 나는 아자닌은 불러내었다. 낮에 알아낸 마법을 연습해 보고 싶었다. "내 마음의 문을 여니 길을 인도해 다오" "예. 부르셨습니까, 수르카 님" 아자닌이 말했다. "모든* 일을* 다*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 말의 의미를 어느 정도 알 것 같았다. 그리 고 이해한 생각을 바탕으로 마음을 움직여 마법의 말에 집중했다. 그러자 손에 들고 있던 시간 막대기가 공중으로 천천이 떠올랐다. "아자닌! 이거 봐! 성공이야" 나는 아자닌에게 이렇게 말했다. "물건을 공중에 띄우는 마법입니다" 아자닌은 조금 대견하다는 투로 말했다. 나는 기분이 우쭐해졌다. "이거 봐. 이게 마법이지. 음. 아무래도 난 마법에 소질이 있나봐. 오늘 사냥을 하면서 차이린의 말을 듣고 쫌 알게됐지. 하하하" "수르카 님. 같은 마법이라고 해도 마력의 차이가 있기 마련입니다. 예를 들어 훌륭한 마법사라면 수르카 님이 작동시킨 그 마법으로 이 천막을 띄울 수도 있고, 또 십부원들을 하나하나 공중으로 띄워 이동시킬 수도 있습니 다. 겨우 피리 나무 가지 하나 공중으로 띄운 정도로 자만하시면 안됩니다" 아자닌이 말했다. 꼭 저렇게 토를 단다니까. 나는 기분이 좀 상했다. 오 래간만에 성공시킨 마법이었는데 말이야. 자고 일어날 때마다 날씨가 추워지는 게 정말 피부로 느껴졌다. 아침에 구보를 할 때면 어느새 곳곳이 얼어있는 게 눈에 보였다. 겨울이 하얗게 팜 산맥 위로 오고 있었다. 겨울... 그러고 보니 나는 오랫동안 겨울이 오기를 바랬다. 겨울이 와야 정식 단원이 될 수 있다는 차이린의 말 때문이었다. 그리고 정식 단원이 된다는 건, 훈련병의 신분에서 정식 단원의 신분으로 바뀐다는 건 나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 이젠 당당히 한 사람의 성 인이 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또 적어도 그렇게 되고 나면 차이린에 게 욕설을 듣지 않아도 될 테고. 날씨가 추워지면서 아케르 용병단의 주둔지는 더욱 분주하게 움직였다. 준비해 둔 땔감이며 연금술사의 등이며 겨울나기에 필요한 물품들이 순무의 지휘하에 여기 저기 배치돼었다. 창고에 들어가는 것도 있었고, 각 천막에 보급되는 물품도 있었다. 순무는 비록 남들이 싸우고 땐 후방에서 팬대를 굴리며 있을 테지만, 저 많은 물건들을 제대로 관리하고 배치하는 일도 보 통 일이 아니다 싶었다. 내가 아케르 용병단에 와서 처음으로 맞는 출정식이 있었다. 팜 산맥 끝 자락에 있는 한 마을에서 오르크 들을 토벌해 달라는 의뢰가 들어와 가투신 의 웃는 얼굴 십부가 출정하게 된 거였다. 출정식에는 전 병력이 나와서 환송해 주는 것이 전통이라고 했다. 사실, 식 자체는 간단했다. 출정하는 십부가 모이자 아케르 단장이 앞에서 짧은 연설을 했고, (정말 짧았다. 죽지 말고 다녀오라는 말이 전부였다) 검은 뮤 네 마리 가 본부의 문을 내리자, 환송을 받으며 떠난 것이 전부였다. 내가 한 일은 훈련병들 틈에서 군대식으로 오른 손을 들어 경례한 것뿐이었 다. 인사하는 법은 사람마다 달랐지만, (오른 손으로 정중히 감자를 먹이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그냥 군대식으로 하기로 했다. 다른 방법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차이린은 가투신에게 죽지 말라고 아주 큰 소리로 외쳤는데, 그때 차이린을 바라보는 가투신의 표정이 볼만했다. 가투신과 차이린은 어떤 관계인데 저런는 것일까?) 나는 우보에게 오르크가 뭔지 아느냐고 물어보았다. "내가 살던 마을은 바닷가여서 오르크는 별로 없어서 잘 모르지만. 그 왜 있잖아, 돼지 얼굴을 가진 무식한 괴물 말이야. 손에는 돌로 만든 도끼를 들고 싸운다는... 무식하고, 힘세고, 흉폭한... 나도 본적은 없어" 우보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오르크라면 내가 좀 알지. 스파일 북부 국경에서는 오르크를 흔히 볼 수 있거든. 바바 족이 오르크를 부리는 경우도 몇 번 봤어. 우리 마을이 바바 족의 습격을 받았을 때 말이야" 하진이었다. 떠버리 하진은 뭐 좋은 일이라고 자신이 살던 마을이 불탄 얘기를 저렇게 쉽게 지껄여대는 걸까. "잠깐. 오르크가 아니라 오크라고 발음하는 거야. 스파일의 오브라디 교 수의 논문에 따르면..." 이번에는 마로우였다. 그냥 호기심에 물어본 건데 무슨 교수 이름까지 들 먹이고 난리인지. "아무려면 어때. 죽여버리면 그만이지. 무슨 마물이건 상관없잖아. 트롤 이든 고브린이든 말이야. 안 그래, 수르카?" 자칫하면 길어질 수도 있던던 오르크의 얘기는 라이짐이 이렇게 말함으로 해서 금새 끝이 났다. 라이짐 녀석. 어디서 마물들 이름은 많이 줏어 들었 군. 사실 마물들은 그렇게 흔하게 볼 수 있는 건 아니라고 들었다. 출정식 을 마치고 떠나는 가투신의 십부를 보니 나도 함께 가고 싶었다. 진짜 전투 를 할 수 있을텐데... 그날은 피바람 십부의 십부장인 마초가 강의 시간에 자신이 낙오된 경험 을 얘기해주었다. "오래 전 일이지. 내가 다른 십부에서 부관을 하고 있을 때 일이니까. 그 때 십부장 님은 지금 다른 주둔지에서 선임 십부장을 맡고 계시지" 마초는 은발에 잘생긴 얼굴을 가지고 있었는데, 미남을 보면 웬지 나는 기가 죽었다. 나는 강의를 듣는 내내 침상 바닥을 바라보면서 다른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행군 도중에 낙오를 하고 말았지. 힘들어서 낙오된 게 아니 야. 행군 도중에 우리 십부가 트롤들의 습격을 받았거든" 새로운 마물의 이름에 나는 또 한 번 호기심이 발동했다. "트롤들은 덩치가, 오르크 두 배는 되고 생긴 건 오르크 보다 더 흉칙하 지. 용병 생활을 하다보면 몇 번 마주치게 될 테니까 잘 알아두라고. 뭐, 말해주지 않아도 십부원 생활을 하다 보면 금방 알게 될 테지만 말이야. 우 리가 싸우게 되는 마물들 중에는 트롤 뿐 아니라 깊은 산 속에서만 사는 사 스카치, 떼를 지어 다니는 고브린, 그리고 오래 전에는 검은 엘프 족도 있 었지..." 마초는 여기까지 말하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마 예전에 있었다는 검은 엘프 토벌 작전에 참전했던 기억 때문인 것 같았다. "여기 사스카치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없지?" 마초가 물었다. 없기는 왜 없나. 사스카치하고 목숨을 걸고 싸운 사람이 여기 있는데 말이야. "제가 좀 알고 있습니다" 내가 대답하자 십부원들이 시선이 나에게로 모아졌다. "그래? 한 번 말해보도록" "사스카치는 온몸이 털로 뒤덮여 있어서 눈코입도 잘 보이지 않습니다. 덩치는 상당히 크고 성격은 무척 흉폭합니다. 그리고 사스카치는 인간과 계 약을 맺을 수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독한 술 한 병이면 사스카치하고 계약 할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심장은 두 개이고... 사스카치의 털은 아주 비싼 값에 거래됩니다" 나는 라스폼과 싸울 때 사빈이 했던 그대로 옮겨 말했다. 마초는 오... 놀랐는 걸 하는 표정이었다. 뭘 그정도 가지고. "잘 아는 군. 사냥꾼 출신인가 보지?" "그건 아닙니다만 한 번 사스카치와 싸워본 경험이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대답하자 훈련병들의 우와, 하는 탄성이 들렸다. 다들 나를 다르게 보는 눈치였다. 나보고 탐그루 촌놈이라고 놀렸던 우보 반장도 놀랍 다는 표정이었다. 이거 또 한 번 우쭐해지는 군. "좋아. 경험이 많은 사람이 언제든 살아남기 유리하지. 하여간 그때는 트 롤들이 매복을 할만큼 영리하다고는 생각하지 못했어. 우리 실수였지. 하지 만 십부장님 지휘 덕분에 어떻게 전열을 갖춰서 그 자리를 피하긴 했는 데... 나는 나는 행군 대열의 끝에서 다른 십부원들을 챙기다 그만 낙오하 고 말았지. 다리에 상처를 입었거든. 트롤들이 던진 바위에 다리가 깔린 거 지. 왼 쪽 다리뼈가 아작이 났어" 이렇게 말하고는 왼 쪽 바지통을 걷어 부치며 다리를 보여주었다. 훈련병 들의 시선이 마초의 다리에 모아졌다. 마초의 다리에는 살이 흉칙하게 일그 러진 흉터가 나 있었다. 잘생긴 얼굴을 가진 사람은 흉터도 멋있게 보이는 군. "나는 살아야겠다는 생각 말고는 아무 생각도 하지 못했지. 당장 먹을 것 도 없었고, 가진 거라곤 칼 한 자루뿐인데 말이야. 막막하더라고. 밤이라 사방은 온통 캄캄하지, 전우고 누구고 아무도 없지... 나는 그만 겁에 질리 고 말았어. 만약 그때 오르크든 트롤이든 뭐든 나타났다면, 겁에 질려 있던 나는 아마 칼 한번 제대로 휘둘러 보지 못하고 당했을 거야" 마초는 웃으면서 말했지만 훈련병들은 아무도 따라 웃지 못했다. 아마 다 들 나처럼 '내가 저런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어떻게 했을까'를 생각하고 있 는 모양이었다. "내가 그때 내린 결론이 뭐였는지 알아? 믿는 거다. 내 전우를, 또 십부 장 님을 믿는 거다. 이렇게 결론을 내렸지. 그래서 난 기다렸지. 주변에 표 식들을 해놓고 은신처를 만든 후 그속에 들어가 밑도 끝도 없이 기다렸어. 땅속에 들어가 있는데 정말 무섭도록 외롭고 쓸쓸했지. 이렇게 아무도 모르 게 죽는다고 생각하니 말이야" 마초의 말에 훈련병들은 다들 공감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특히 하진의 표 정이 가장 볼만했다. 하진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뭔가 생각을 하고 있는 것 처럼 보였는데, 떠버리 하진은 분명히 저런 상황이 된다고 해도 살아남으면 뭘 팔까 하는 궁리를 하게 될 것 같아서 나는 공연히 웃음이 나왔다. "전우들은 결국 돌아왔어. 날 버리지 않은 거지. 전우들은 교대로 나를 부축하면서 트롤들의 본거지까지 이동했어. 그래서 결국 트롤들을 때려 부 술 수 있었지. 나도 다리를 다치기는 했지만 앉아서 활을 쏘면서 전투를 도 왔고. 만약 내가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혼자 그 자리를 떠났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마 십중팔구 들개들의 밥이 됐던가 아니면 트롤들의 아침 식사가 되었을 거야. 뭐, 별 얘기는 아니야. 만약 사고가 생겨서 혼자가 되면 그 자리에 있는 게 원칙이라는 말이지" 그때 마로우가 마초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렇지만 자리를 피해야 할 경우도 있지 않겠습니까? 적들이 몰려온다든 지, 혹은 있던 자리를 적군이 점령했다든지 하는 경우 말입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럴 때는 어떻게든 표식을 남기고 이동하는 거야. 전우들이 그 표식을 보고 찾아 올 수 있도록 말이야. 물론 우리 편도 적군 도 다 알 수 있다면 표식이 아니겠지? 내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은 말은, 전 투가 벌어지면 믿을 수 있는 건 오직 전우밖에 없다는 말이야. 바로 자신의 옆에 있는 전우! 전우를 믿고, 또 전우에 의지해 싸우는 거야" 그 말에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잘난 척 좋아하는 마로우와 떠버리 하 진은 별로 믿음이 가지 않았지만 라이짐이나 우보 반장이라면 나를 구해줄 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무표정한 과거를 알 수 없는 찬은 내가 죽던 말던 아무 신경 도 안 쓸 것 같았고. 그런데 재훈은 어떨까. 나는 재 훈을 바라보았다. 재훈은 언제나처럼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강의를 듣고 있었다. 외톨이 타코에게도 정성을 다했던 재훈이니 아마 나를 구해주러 달 려오겠지.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N:김상현 #9208/10199 ━━━━━━━━━━━━━━━━━━━━━━━━━━━━━━━━━━━━━━━━ 제 목:[탐그루] 살아남는 법을 배우다 39 관련자료:없음 24/24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1-03 00:32 조회:1030 탐그루 # 마법은 마음이다 - 마음은 칼이다 # 강의가 끝나고 자유시간이 되자 나는 재훈에게 다가가 말을 걸어보았다. 강의시간 내내 어쩐지 우울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내가 뭘 해줄 수는 없겠 지만 그래도 말 한마디 건네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재훈. 뭐 안 좋은 일 있어?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는 데?" 그러고보니 오래간만에 재훈에게 말을 걸었다. 아니, 그러고 보니 그동안 재훈에게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재훈은 내 말 한 마디에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기 시작했 다. 찬이 그랬던 것처럼 재훈도 아무 말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내심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냥 가볍게 말 한 마디 건넸을 뿐인데... "...나는 화전 마을에서 쫓겨난 거야. 어려서 병을 앓았거든. 다들 도저히 살 수 없을 거라고 말했데. 아버지도, 어머니도... 그렇게 생각했고. 그런데 막상 살아나니까 마을에선 나를 달갑지 않게 생각했어. 화전민들은 대부분 같 이 일하고 같이 먹거든... 몸도 약한데다가...농사일에는 전혀 소질이 없는 나는 마을에서 짐만 될 뿐이었어. 어차피 난 마을에서 쫓겨났을 거야. 더 있었다면... 그래서 내가 자청하여 용병단에 들거가겠다고 했어. 튼튼해져서 돌아오겠다고... 내가 떠날 때... 어머니는 뒷곁에 계셨어... 난 차마 어머니에게 작별인사를 하러 갈 수가 없 었어. 어머니가 왜 뒷곁에 가셨는지 아니까... 아직도 어머니가 숨을 죽여가 며 흐느끼는 소리가 귓전에서 들리는 듯 해" 재훈은 이렇게 말하고는 눈을 비볐다. 재훈은 눈물 흘리는 걸 감추고 싶어 했나 보다. 나는 재훈의 그 모습을 못본 척 하고 재훈의 말을 계속 들어 주었 다. "라이짐. 너는 내가 그때 그 타코를 도와준 걸 뭐라고 했지만, 나는 너희들 처럼 그 타코를 버릴 수가 없었어. 나하고 같은 신세였다고 생각하니까... 도 저히..." 재훈은 갑자기 단검을 손질하고 있던 라이짐에게 이렇게 말했다. 재훈의 말 에 라이짐은 무척 당황해하며 죄없는 단검만 소리나게 뻑뻑 문질러 댔다. 재 훈이 말할 때 나는 재훈의 목에 남아있는 타코에게 물린 흔적을 알아 볼 수가 있었다. 나는 라이짐을 보았다. 이제 라이짐은 다리를 긁으며 시선을 이리저 리 돌리고 있었다. 라이짐은 무척 미안해하고 있었다. 라이짐은 재훈에게 뭐 라고 한 마디 쏘아붙이지도 않고 다리를 벅벅 긁으며 머리를 푹 숙이고 있었 다. "그 타코는 도망갔어. 라이짐 네 말대로 그냥 죽었어야 할 놈인 데 나 때문 에 더 고통받았을지도 몰라. 하지만 마을에서 떠났을 때에 비하면 지금 여기 서 난 행복해. 적어도... 살아있고, 이렇게 친구들과 얘기를 하고 있잖아. 그 타코를 꼭 다시 찾았으면 좋겠어. 내가 그 타코의 친구가 돼서 그 타코도 행 복하게 해주고 싶어" 나는 재훈이 용병단으로 오는 길 내내 보였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라 이짐도 그런 모양이었다. 재훈에게 화해의 악수를 먼저 청한 것은 라이짐이었 다. 뭐가 그렇게 무안한 지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말이다. 결국 이 일로 해서 우리 셋은 같은 고아라는 의식으로 뭉쳤고 남은 훈련기 간 동안 꽤 친해질 수 있었다. 나는 삼 년 전쟁 때문에, 라이짐은 원수 같은 루비오 때문에, 재훈은 부모님을 위해서 스스로 떠났기 때문이라는 각각의 이 유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낙엽이 지기 시작하는가보다 싶더니 어느새 팜 산맥의 나무들은 벌거벗은 몸으로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젠 확연히 겨울이었다. 훈련은 날이 갈 수록 쉬워졌다. 라이짐은 우리가 강해졌기 때문이지 훈련 내용이 약해졌기 때문이 아니라고 주장하곤 했다. 이제는 딱딱하게 얼어붙은 연병장을 구르면서도 다음에 어떻게 움직여야 차이린의 눈에 띄지 않고 잠시라고 쉴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되었고, 찬과 연습 시합을 벌일 때도 그리 긴장하지 않고 상대할 수 있게 되었다. 시간이 지난 후에 안 일이지만, 찬은 나와 상대할 때는 방어에만 치중하고 있었다. 어쩐지 봐준다는 생각이 들어 기분 나쁘기는 했지만, 상대를 잘못 골라서 죽도록 얻어맞는 훈련병들을 보면 저절로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어떤 점에 서는 그런 찬이 고맙기도 했다. 지다문 십부장의 강의가 있었던 날도 그런 날이었다. 나는 찬과 한 바탕 목도를 휘두르며 싸운 뒤, 어쩐지 후련한 기분으로 저녁식사를 할 수 있었 다. 찬에게 몇 번 말을 걸어볼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지만 언제나 아무 표 정도 없이 묵묵히 있는 찬을 보면 감히 말을 걸 엄두가 나지 않는다. 언젠 가 이야기할 기회가 있겠지. 나는 이렇게 생각하면서 찬과 말할 기회를 뒤 로 미뤘다. 지다문 십부장은 구릿빛으로 빛나는 피부에 입이 보이지 않을 만큼 잔뜩 수염이 나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지다문 십부장은 털보 십부장이라는 별 명을 갖고 있다. 병사들의 평도 지다문 십부장에 대해서는 대부분 호의적이 었다. 지다문 십부장은 사람의 목숨을 소중히 여기고 부하의 목숨 만큼 적 의 목숨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라고 식당에서 언뜻 들은 기억이 있다. "나는 하늘의 끝 십부의 지다문 십부장이라고 한다. 오늘은 전투에 있어 서의 원칙 몇가지에 대해서 얘기해 볼까 한다" 지다문 십부장의 목소리는 낮지만 힘이 있고 아주 우렁찼다. 나이는 마흔 이 좀 되지 않아 보였는데, 어쩐지 십부장이라기 보다는 타실 정규군의 고 급장교 같은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다. "오늘은 먼저 전투시 위치를 정하는 일에 대해 이야기를 할까 한다. 적과 싸울 때 가장 중요하면서도 가장 잘 지켜지지 않는 원칙이 바로 이 전투 위 치에 관한 원칙이다. 위치를 정하는 일의 대원칙은 하나 뿐이다. 우리는 뭉 치고 적은 흩어지게 만드는 것이 바로 그것이이다. 하지만 이 원칙을 지키기란 쉽지 않다. 지금까지 여러 십부장들의 강의를 들었으니 잘 알겠지만, 전투가 힘든 이유는 전투 상황이 언제 어디서 어떻 게 변할지 모른다는 데에 있다. 순간순간마다 바뀌어 가는 상황 속에서 그 때그때 상황에 맞는 결정을 내렸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상황이 반전 되어 있 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그렇지만 일단 원칙을 숙지하고 있어야 제군들이 나중에 실전에 참여 했을 때 본능적으로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전투에서 유용하게 쓰일 거라고 생각되는 몇 가지의 상황에 대해 서 얘기하겠다" 지다문 십부장의 목소리에 나는 가슴이 웅웅거리며 울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지다문 십부장의 강의 내용 때문이기도 하지만 목소리에 중후한 힘 이 실려 있는 탓이었다. 저런 목소리로 전투 때 소리를 지르면 얼마나 엄청 나게 울펴퍼질까. "먼저 적이 높은 곳에서 공격하고 있을 때에는 정면으로 적을 향해 돌진 하는 일은 바보나 할 짓이다. 우리가 아무리 질적 양적으로 우위를 점하고 있다해도 그건 마찬가지다. 어떤 전투든 피해를 최소화 하면서 승리할 전술 을 찾아야 하는 것이 지휘관의 의무다. 이 중에는 반드시 십부장을 하는 사 람도 나오게 될 것이니 명심하기 바란다. 퇴로가 강이나 산으로 막혀있는 곳에서는 진형을 짜지 마다. 이건 너무 상식적인 원칙이다. 이 정도는 어떤 적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멍청하기 로 유명한 오르크들도 이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사실 중요한 건 이 원칙 이 아니라 이 원칙을 어떻게 운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지다문은 여기서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오래 전 어떤 부대가 트롤들과 전투를 벌이면서 있었던 일이다. 트롤들 은 주로 산 위에서 돌을 던지는 작전을 잘 쓴다. 여러분들 중에도 그런 이 야기를 알고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트롤들이 산 위에서 돌을 던질 때 산 위로 직접 치고 들어갈 전술 을 생각해낸 사람은 그 전투 이전까진 아무도 없었다. 그 전투의 지휘관은 과감하게 병력의 일부를 우회시켜 몇 개의 산을 돌아 트롤들이 점령하고 있 는 산 정상 배후를 공격해 들어갔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트롤들이 점령 하고 있던 산 뒤편은 다른 봉우리들이 줄줄이 이어진 험한 지형이었기 때문 에, 몇 개의 산을 넘어 우회해 공격해 들어가리라고는 트롤들도, 아니 그 누구도 생각하고 있지 못했다. 트롤들은 돌 던지는 일을 중단하고 배후로 기습해 들어간 별동대와 맞서 싸워야 했다. 그 사이 주력 부대가 산으로 올 라가 정면과 배후에서 트롤들을 협공해 모두 소탕할 수 있었다. 이는 원칙 을 알고 이를 뒤집어 응용한 좋은 사례라 하겠다" 나는 일전에 들었던 아루마 십부장의 강의가 떠올랐다. 아루마 십부장은 땅에 관한 강의를 하면서 원칙들을 죽 말해버리고는 강의를 끝냈다. 그런데 지금 지다문 십부장은 원칙의 운용에 관한 설명까지 해 주고 있었다. 뭐, 말 잘하는 십부장이 꼭 지휘 잘한다는 법은 없지만 말이다. "지다문 십부장님. 그 전투가 혹시 삼년전쟁 직후에 있었던 스파일 트롤 소탕작전 때 있었던 일 아닙니까?" 마로우가 질문했다. "알고 있는 병사도 있었군. 그럼 그때 지휘관이 누구였는지도 아는가?" "저, 그게 기억이 안 나서 질문한 것입니다" 마로우는 '나도 가끔은 모르는 게 있다고' 하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하 며 말했다. "그 때 지휘관이 바로 아케르 단장님이셨다. 그 전투 이후 아케르 용병단 의 위세는 급상승했지. 사실 삼년전쟁 막바지에 있었던 바바 족의 침략 이 전에는 인간에게 적대적인 마물들의 출현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삼년전쟁 이후 오르크니 트롤이니 고블린이니 하는 마물들이 출 현하기 시작했고, 그 일을 계기로 우리 용병단의 규모가 커진 것이다. 이와 관련된 이야기들은 용병단 초기부터 있었던 십부장들에게 물어보면 몇시간 이고 그 무용담들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지겹게도 들을 수 있지. 물론 나 도 예외는 아니다. 아직도 그 시절을 생각하면 가슴이 뛰니까" 지다문 십부장의 말을 듣자 나는 삼년전쟁 이후 마물의 출현과 아케르 용 병단의 성장과정이 연관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때는 좀비들 이 없었다는 얘긴가? 왜 삼년전쟁 이후에 마물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을까? 또, 요즘 들어 좀비들이 빈번하게 출몰하는 이유는 뭘까? 나는 이런 의문들 이 연이어서 떠올랐다. "최근에 들어선 좀비들의 출현이 빈번해지고 있다. 그 원인에 대해선 성 황청에서도 조사를 하고 있고, 또 우리 용병단도 자체적으로 조사를 하고있 는 중이지만 아직 명백히 밝혀진 사실은 없다. 앞으로 제군들은 오르크나 트롤 보다는 좀비 소탕에 투입되는 일이 많아지리라 생각한다. 지금 출정 중인 가투신의 웃는 얼굴 십부의 경우, 오르크 소탕을 의뢰 받고 나가긴 했 지만, 사실 요즘에는 드문 으뢰다. 오르크는 소탕은 그다지 돈이 되는 일도 아니고, 단지 아케르 용병단의 명예 때문에 그런 의뢰를 받아들이는 것이 다" 지다문의 말에 나는 라스폼을 떠올렸다. 라스폼이 탐그루로 왔던 이유도 바로 저 좀비들이 출몰하는 원인을 찾기 위해서였다는 사실이 새삼 떠올랐 다. 아케르 용병단에서도 나름대로 정보를 수집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 었다. 그리고 지다문은 후퇴하는 적을 무작정 쫓지 말라는 원칙과, 적의 정예 부대를 만났을 경우 될 수 있는 한 피하거나 분산시키는데 주력하라는 원 칙, 혹은 적이 유인 공격을 했을 때 그걸 간파하는 방법 등을 예를 들어가 면서 설명했다. 모든 내용이 다 이해된 건 아니지만, 적어도 지다문이 들어준 몇몇 예들 은 쉽게 이해가 갔다. 고블린 들을 추적해 들어갔다가 고블린들이 준비한 함정에 걸려 전멸의 위기를 맞았던 급박한 상황에 대한 얘기나, 검은 엘프 토벌 작전 때 엘프의 최정예부대와 정면으로 맞서지 않고 가장 취약한 곳을 공격해 검은 엘프의 주력을 분산시켜 토벌에 성공했던 일 등의 예는 무척 재미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그 내용들을 다 이해했다는 말은 절대 아 니지만) "...그리고 마지막으로 중요한 원칙 하나를 얘기해주겠다. 그건 바로 궁 지에 몰린 적을 잔인하게 몰지 말라는 것이다" 지다문이 중요한 원칙이라고 해서 귀를 쫑긋 세우고 들었는데, 궁지에 몰 린 적을 몰지 말라니. 나는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얼마전 차이린과 함께 라마 사냥을 나간 적이 있다고 하니 그걸 예로 드 는 게 좋겠다. 라마의 경우, 자신의 새끼가 안전하다는 걸 알면 모든 걸 포 기하고 순순히 잡혀준다. 반대로 새끼가 위험하다고 느끼면 어떤 위험을 무 릅쓰고라도 사냥꾼에게 덤벼든다. 물론 라마는 초식 동물이고 몸집도 큰편 이 아니지만, 전력을 다해 새끼를 보호하려는 라마와 맞서 싸우는 일은 결 코 쉬운 일이 아니다. 적을 궁지에 몰지 말라는 말은 이런 말이다. 적이 최후로 남기고 싶어하 는 것을 파괴하지 말라는 말이다. 적의 가족이나 집, 혹은 생명을 직접적으 로 위협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꼭 죽이 것만이 승리하는 것은 아니기 때 문이다. 또한 이 말은 내가 앞서 말한 적을 뭉치게 하지 말라는 원칙과도 일맥 상통하는 것이다" 그런 얘기였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적에게 목숨만은 살려준다는 보 장이 있다면, 혹은 가족을 헤치지 않겠다는 보장이 있다면, 적은 흩어지고 동요하기 마련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런 원칙에 비추어서, 적을 포위한 다음에는 퇴로를 열어주는 것도 한 방편이라 하겠다. 퇴로가 없다면 적은 똘똘 뭉치기 마련이고, 만약 퇴로가 눈에 보인다면 적은 분명히 전투를 피하고 도망갈 마음이 생기기 마 련이다. 그렇게 되면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예를 하나 들어 보자. 오래 전, 한 용병단이 성황청의 의뢰로 이교도 집단을 소탕한 적이 있었다" 성황청의 의뢰라고? 나는 좀 언짢은 기분이 들었다. 성황청이 용병단에게 그런 의뢰도 한단 말인가? "그 이교도 집단은 외진 산중턱에 나무와 짚단으로 만든 집을 지어 살고 있었다. 용병단은 그곳을 완전히 포위했다. 이교도의 숫자는 적었고, 무장 도 형편없었다. 그 용병단은 협상의 여지를 완전히 없애고 마구잡이로 불화 살을 쏘아 반란군들의 주거지를 불태운 후 정예 부대를 주거지에 투입했다. 완전히 그건 학살이었다. 그런데도 용병단은 기세를 늦추지 않고 계속해서 포위망을 좁혀나갔다. 언뜻 생각하기엔 이교도들을 완전 섬멸할 수 있는 작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미 승패는 갈린 뒤였는데, 그런 무모한 작전으로 물론 이 교도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섬멸해 버리는 게, 그게 좋은 작전이었을까?. 의뢰 내용이 이교도들을 모조리 죽이라는 것도 아니었고, 단지 이교도 집 단을 해체해 달라는 것이었는데. 그런데도 그런 무모한 작전이 꼭 필요했을 까! 기록에는 나와있지 않지만 그런 대학살에 맞서 이교도들은 필사적으로 저항했고, 때문에 전혀 피해 없이 이길 수 있었던 작전에서 다수의 사상자 까지 나오고 말았다. 그런 바보 같은 일이!" 훈련병들은 조용해졌다. 지다문이 말하고 있는 것이 전술적 차원의 얘기 가 아니라 다른 차원의 얘기라는 것을 눈치 챘기 때문이었다. "이 문제는 사실 민감한 문제이다. 작전은 분명 성공적이었고, 성황청은 그 작전 이후에 상당액의 추가 비용을 지불했다고 한다. 전략적 측면이든, 전술적 측면이든 어떻게 보아도 작전은 성공적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렇 게 한 것이 옳은 일이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절대로! 사실 그 작전 이후 작전에 참가했던 십부장 중의 한 명이 용병 생활을 그만 두기까지 했다" 지다문 십부장의 목소리는 어딘지 모르게 분노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 "가장 좋은 승리는 싸우지 않고 적을 굴복시키는 것이고 다음으로 좋은 승리는 적도, 아군도 피해를 최대한으로 줄인 승리라는 옛 말이 있다. 필사 적으로 도망치는 적은 쫓지 않는 법이다. 판단은 스스로 내릴 일이지만, 적 의 생명이든 아군의 생명이든 그건 모두 다 소중한 것이다. 아무리 용병이 라고 하지만 이미 저항할 수 없는 상태가 된 적을 죽이는 일은 용병 여부를 떠나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 "지다문 십부장 님, 그건 꼭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지다문 십부장이 말을 멈추자 라이짐이 불쑥 일어섰다. 어색하고 난처한 기운이 내무반에 감돌았다. "어째서지? 말해보게" "일단 전투가 벌어지면 그건 당연히 누군가를 죽이는 일이 일어나기 마련 입니다. 지다문 십부장님께서 드신 예의 경우, 만약 이교도들을 그저 굴복 만 시켰다면, 언젠가 이교도들이 보복을 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지 않습 니까? 물론 사람이 죽는 일은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라이짐의 말에 훈련병들의 얼굴에 당혹감이 나타났다. 그건 나도 마찬가 지 였다. 과연 라이짐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언제 등 뒤에 칼이 꽂힐지 모 르는 일인 것이다. "그래. 자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더 말하지는 않겠다. 이거, 아무래도 내가 오늘 너무 개인적인 의견을 말한 것 같군. 그러니까 내가 말하지 않았 나. 판단은 제군들 개인에게 맡기겠다고" 지다문 십부장은 씁쓸하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과연 어떤 쪽 의견이 옳은 것일까.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그냥 그런 상황이 나에게는 벌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뿐이었다. 지다문 십부장은 다시 한 번 강의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해 말해준 다음 강의를 끝냈다. 어쩐지 나는 지다문 십부장의 의견에 더 마음이 끌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런 일을 내가 겪지 않아봐서 뭐라고 말할 수는 없지 만 말이다. "약골..." 강의가 끝나고 나자 라이짐이 이렇게 중얼거렸다. "적에게 관대한 마음을 가지는 건 멍청한 짓이야" 라이짐이 나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나는 라이짐의 말뜻을 알 수 있었다. 그건 자나크의 영주 하리오 오르테가의 아들, 루비오 오르테가를 두고 한 말이었다. 지다문의 의견이 더 끌리기는 해도 라이짐의 말도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거 도대체 어떤게 맞는 건지 알 수가 없군. 그런 상황이 벌어진 다면 나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좋을까. "누군지 알겠어, 수르카. 털복숭이 십부장. 이제야 기억이 나. 오브라다 교수가 쓴 트롤 소탕작전에 대한 얘기가 있어. 거기에 털복숭이 십부장 얘 기가 나오거든. 그게 바로 지다문 십부장이었어. 오늘 한 얘기는 다 지다문 십부장이 직접 참전한 전투 얘기였던 거야" 이번에는 마로우가 말했다. "지다문 십부장이 직접? 정말이야?" 내가 마로우에게 되물었다. "그럼. 여러 정황을 놓고 볼 때 거의 확실해. 지다문 십부장...생각보다 대단한 사람인 것 같아" 마로우는 이렇게 말했다. 마로우의 말이 사실이라면 정말 대단한 사람이 구나. 트롤과의 격전 때 그자리에 있었고, 오르크나 고블린 소탕 작전에도 참전한... 그는 아케르 용병단 초창기부터 아케르와 함께 한 백전의 노장이 었다. 불이 꺼지고, 연금술사의 붉은 빛이 피어올랐다. 나는 잠자리에 누워서 잠을 청했지만 지다문 십부장의 말과 라이짐의 말이 자꾸 머리에서 맴돌아 잠이 쉽게 오지 않았다. 다음 날도 차이린의 욕설과 함께 훈련은 계속됐다. 이제는 제법 차가워진 겨울 바람 때문에 입에서 흰 입김이 하얗게 새어나왔다. 이제 정말 겨울인 모양이었다. 무슨 동물의 가죽인지는 알지 못했지만 꽤 두툼한 겨울용 전투 복이 지급되었다. 비상시에 사용할 수 있는 작은 연금술사의 붉은 등도 추 가로 지급되었다. 물론 그 등은 작전 때만 쓰게 되어 있기 때문에 훈련병들 은 포장도 뜯어보지 못했다. 차이린은 이제 훈련도 다 끝나간다며 우리들을 독려했다. 그 독려에 훈련 병들이 잠깐 마음을 놓자, 우리들은 곧 목도를 들고 연병장을 수십바퀴나 기어야했다. 도대체 언제나 이 지독한 훈련들이 모두 끝날지. 오후가 되자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있었다. 타호루가 훈련장으로 찾아 온 거였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N:김상현 #9254/10199 ━━━━━━━━━━━━━━━━━━━━━━━━━━━━━━━━━━━━━━━━ 제 목:[탐그루] 살아남는 법을 배우다 40 관련자료:없음 21/21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1-04 00:48 조회:1009 탐그루 # 마법은 마음이다 - 마음은 칼이다 # 타호루는 바닥에 질질 끌리는 긴 겉옷을 입고 있었다. 거기에 은빛이 도 는 타코 가죽으로 만든 모자를 쓰고 있으니 전에 천막 안에서 봤을 때와는 달리 좀 마법사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타호루의 억세 보이는 각진 턱과 짙은 눈썹은 여전히 마법사가 아니라 보통의 용병 같다는 인상을 주고 있었다. 사실 보통 사람들이 상상하는 마법사(수염을 기른 노인 같은)와 는 좀 거리가 있어 보이는 타호루였다. 남들 보다 젊어보인다는 마법사의 특 성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자. 오늘은 타호루 님의 강의가 있겠다" 차이린은 타호루의 강의를 위해 뒤로 물러섰다. 훈련병들 사이에 희색이 돌았다. 힘든 훈련대신 강의를 듣는 편이 낫다는 생각들인가 보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마법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겠다. 강의를 듣는다고 해서 이해할 수 있는 성 질의 것은 아니지만..." 훈련병들 앞에서 꼿꼿히 선 자세로 타호루가 시니컬하게 말했다. 나는 마법 에 대해서 좀 알고 있었고, 어찌되었건 마법사도 본 적이 있는 훈련병이었지 만 나머지는 그렇지 않았는지, 좀 신기하다는 표정들이었다. 하진은 꼭 라이 짐이 타코를 처음 봤을 때 지었던 표정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긴. 나도 탐그루에 있었을 때만 해도 마법사와 마법에 대한 얘기는 별로 믿지도 않았 고, 마법사가 무서운 사람이라고는 생각도 안했으니 말이다. "먼저 마법사와 실전에서 맞붙게 될 일은 거의 없으리라는 걸 말해두고 시작하지. 자네들이 알고 있을지는 잘 모르겠네만, 지금 마법사들은 거의 성황청이 쓸어가다시피 하는 상황이다. 시장이나 영주들이 개인적으로 고용 하고 있거나 아니면 혼자 바르도 대륙을 떠도는 마법사들이 간혹 있을 뿐이 다. 자네들이 시장이나 성황청 기사들을 상대할 일은 없지 않겠는가?" 타호루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얼굴은 젊지만 역시 나이는 못 속이는 모 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라스폼과 한 번 대치한 경험이 있기는 하지만 라스 폼은 마법사가 아니라 성황청의 사제였다는 것이 떠올랐다. 마법사는 마법 을 쓰고 성황청은 성력을 쓴다고 사비오 영감이 말했었다. 마법사는 말로 마법을 걸고 사제들은 성구로 마법을 쓰는게 다른 점이라고 했던가... "하지만 떠도는 마법사들 중 몇몇은 마물들을 부리면서 마을을 습격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러니 마법사가 용병단에 꼭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내가 굳이 강의를 하지 않아도 알겠지. 자. 그럼 하나 묻자. 마법사와 검사 가 맞붙게 된다면 누가 이길 것 같나?" 타호루가 물었다. 하지만 다들 모르겠다는 표정들이었다. 잘난척하기 좋 아하는 마로우까지도 말이다. 글쎄. 나도 생각해보았지만 뾰족한 결론이 나 오는 질문은 아니었다. 사비오 영감은 라스폼이 예언의 눈동자로 찾아온 날, 라스폼과 내가 맞붙게 되면 승산이 없다고 말했다. 라스폼이 간단한 환 상이나 방패 마법 정도로도 나를 제압 할 수 있을 거라면서 말이다. 하지만 마법을 조금 쓸 줄 알게 된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그건 그다지 맞는 말 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법사가 정신을 집중하고 자신이 이해 한 마법의 말을 입 밖으로 내기 전에 칼로 쳐버린다면 승부는 간단하게 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들 모르는 것 같구만. 이토록 당연한 일을 모르나다니. 허허. 그것 참." 전혀 우습지도 않은데 타호루는 혼자 웃으면서 말했다. 훈련병들 앞에서 얘기하는 걸 즐기는 건지, 아니면 그냥 혼자 재미있어서 웃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하여간 별로 기분 좋게 들을 수 있는 웃음은 아니었다. 꼭 훈련 병들을 무시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한 번 아무나 덤벼보게. 내가 상대해 줄 테니까" 훈련병들 사이에 잠시 술렁임이 있었다. 함부로 나섰다가 망신을 당하게 되면 어쩌나, 혹은 타호루를 이겼다가 입장이 곤란해지면 어쩌나 하는 술렁 임인 것 같았다. 사실, 타호루가 아니라 보통 십부장이 저런 말을 했다면 누구라도 나섰을 것이다. 한 번 쯤은 십부장과 겨루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안해 본 사람은 없을 테니까. 그런데 지금 상대는 마법사인 것이다. 그것도 얼굴은 젊은데 노인네의 말투를 쓰는 이상한 마법사 말이다. "아무도 없나? 그럼...자네 한 번 나와 보게, 수르카" 타호루가 나를 지목했다. 나는 좀 어이가 없어서 한 동안 어떻게 해야 할 지 멍하니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이거 어쩐다?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로 모아 졌다. 그런데 차이린이 날보고 웃고 있잖아? 꼭 '안됐군'하는 표정으로 말 이다. 나는 더 생각해볼 여지도 없이 무언의 압력에 등을 떠밀려 앞으로 나 갈 수밖에 없었다. "자. 공격해보게" 타호루가 말했다. 에라, 이왕에 이렇게 된 거. 이겨버리고 말겠어. 나는 목도를 고쳐 잡았다. 그런데 타호루는 질질 끌리는 옷 밖으로 손도 꺼내지 않고 있었다. 그냥 한 칼에 끝내버리면 된다.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마법 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마법의 말을 외우는 동안에 한 칼에 끝내버리면 된다. 사실, 이건 내가 체험으로 체득한 사실이기도 하다. 라스폼과 싸울 때 라스폼이 마법의 말을 외우기 전에 쓰러뜨렸더니 승부는 아주 싱겁게 끝 나지 않았던가. 시작과 함께 쳐들거 가는 거다. 시간을 주지 않는 거야. 나 는 이렇게 생각했다. 나는 일부러 다른 곳을 보면서 어쩌면 좋을까 생각하 는 척 하면서 타호루의 다리를 겨냥했다. (아무리 목도라지만 머리를 정통 으로 맞으면 죽을 지도 모르지 않는가?) 한 걸음 떨어지는 척 하다가 그대 로 목도를 타호루에게로 날렸다. "앗!" 다음 순간 내 몸이 훈련병이들이 서 있는 쪽으로 핑그르르 돌아갔다. 나 는 조금이라도 빨리 자세를 고쳐잡고 다시 공격할 심산으로 타호루쪽으로 몸을 향했다. 하지만 불가능했다. 발이 허공에 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런. "저거봐!" "수르카가 공중에 떴어!" 훈련병들 입에서 탄성과 함께 이런 소리가 튀어나왔다. 자는 공중에서 자 세를 바로잡기 위해 몸부림을 쳤지만 아마 다른 사람들 눈에는 그저 허공에 서 버둥거리고 있는 모습 정도로 보였을 것이다. 나는 도무지 중심을 잡을 수도 없었고 다리가 땅에 닿지 않으니 힘을 쓸 수도 없었다. 타호루가 빙긋 웃으며 나를 올려다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타호루는 나 를 공중에 띄운 것으로도 모자라서 공중에 띄운 채로 천천히 회전시켰다. 머리가 땅으로 향하는가 싶더니 다시 공중으로 솟았다. 땅과 바닥이 번갈아 가며 눈 앞에서 오르락 내리락하고 있었다. 몇바퀴 돌고 나자 금방이라도 먹은 게 올라올 것 같았다. 공중에 매달린 장난감 꼴이 되자 처음의 탄성은 이내 웃음으로 바뀌었다. 이봐, 전우가 이 꼴이 된 게 보기 좋단 말이야? 그러고도 너희들이 전우냐? 나는 속으로 울부짖었다. 우워어어어.... "자. 조금 더 시범을 보여주지" 타호루는 한 술 더 떴다. 내 몸을 아예 공중에서 물구나무 선 자세로 고 정시켜버렸다. 몸이 거꾸로 뒤집히자, 나는 다시 어떻게든 원래 상태를 회 복해 보려고 버둥거렸는데, 그 모습이 또 우스웠는지 훈련병들에게서 다시 한 번 폭소가 터져나왔다. 머리로 피가 몰렸다. (부끄러워서 그랬는지 화가 나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런데 마법의 말도 하지 않고 어떻게 마 법을 쓴 거지? "간혹 말일세, 마법사가 마법의 말을 외우기 전에 해치우면 되는 게 아니 냐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허허, 우스운 생각이지. 진짜 마법사는 이 렇게 상대방이 적의를 가지는 순간 마음만을 움직여 구사할 수 있는 간단한 마법 정도는 한두 개씩 갖고 있다네. 물론 간단하다는 건 그냥 말이 간단하 다는 거지 이런 검사 하나 둘 정도는 아주 손쉽게 요리할 수 있는 마법들이 야" 타호루는 꼭 내 마음을 읽은 것처럼 이렇게 말하고는 나를 더 높이 띄워 올렸다. 으악! 땅이 순식간에 멀어졌다. 저 밑에 있는 사람들이 새끼 타코 만 하게보였다. "숙련된 마법사의 마음은 번개보다 빠르고 예리한 칼날보다 정확하지. 만 약 정상적인 상황에서 마법사를 만난다면 무조건 피해야 돼. 다른 방법은 없어. 다들 배우지 않았나? 강한 적을 만난면 피하는 게 상책이라는 걸 말 일세" 타호루가 말하는 소리가 아주 작게 들렸다. 고공에서 부는 바람은 지상에 서 보다 몇배나 세찼다. 머리칼은 온통 헝클어이고 옷이 사방으로 펄럭였 다. 이젠 훈련병들이 손톱 만하게 보였다. 번개보다 빠른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정말 지독한 마법이군. 이러다가 그냥 날 떨어뜨려 버리면 어떻게 하 지? 나는 계속 허공에서 버둥거리면서 생각했다. 다음 순간이었다. 나는 온 몸의 기운이 허공으로 빠져나가는 느낌을 받으 면서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바람이 아래에서 위로 세차게 불어 올라왔다. 고공에 띄워 졌을 때의 몇 배의 속도로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 순간의 기분을 뭐라고 할 수 있을지. 나는 그저 죽는구나, 하는 생각에 눈앞이 캄 캄해졌다. 하지만 다행히 죽진 않았다. 조금 거칠기는 했지만, 바닥에 무사히 도착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조금 거칠었다는 말은, 차가운 땅바닥에 머리부터 떨어져 뒹굴긴 했지만, 목이 부러질 정도는 아니었다는 말이다) "조금 거칠었지, 수르카? 이해하게. 만약에 자네가 다시 마법사를 만나게 될 때를 대비해 잊지 못할 교훈을 하나 주려고 한 거니 말일세. 함부로 마 법사에 대항했다가는 큰 일을 당하게 된다는 교훈이지, 허허허" 타호루와 나를 번갈아 보며 다들 웃고 있었다. 아니, 우보 반장도 웃고 있잖아? 물론 타호루의 말이 재미있어서 웃는다기 보다는 그저 내가 땅바닥 을 뒹구는 꼴이 우스워서 웃는거겠지만 나는 기분이 많이 상했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러니 마법에 재능이 없는 사람들은 그냥 칼이나 열심히 휘두르는 게 좋을 걸세. 누가 알겠나? 한 우물만 파다보면 좋은 결과가 올지... 기분 나 쁘게 듣지는 말게. 훌륭한 검사가 된다면 마법사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을 나 름대로 찾아 낼지도 모르니까 말일세" 타호루의 말이 내 귀에는 꼭 '너는 나한테 마법을 배워야만 해'하고 말하 는 것처럼 들렸다. "자. 그럼 강의는 이만 하지. 차이린 십부장. 계속해요. 난 이만 가볼 테 니" "예, 알겠습니다" 차이린이 대답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결코 마법사를 이기지 못하지..." 타호루는 돌아서면서 혼자 중얼거리 듯이 말했는데, 그 말이 또 내 귀에 는 '내게 마법을 배우지 않으면 크게 후회하게 될 거야' 라고 말하는 것처 럼 들렸다. 그래서 그랬는지 아니면 워낙 큰 일을 겪은 다음이어서 그랬는 지 알 수 없었지만, 나는 찬 바닥에서 흙먼지를 뒤집어 쓰고 멍청하게 한 동안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자유시간 내내 도저히 편하게 있을 수가 없었다. 낮에 타호루에게 당한 기억이 너무 강렬했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타호루는 나에게 그 런 창피를 준 걸까? 그렇게도 잘난 마법사라는 걸 알리고 싶었나? 아니면 내가 제자가 되기를 거부해서 그 앙갚음을 한 걸까? 그렇다면 차이린은 왜 나를 보고 그렇게 웃었지? 당하게 될 걸 뻔히 다 알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럼 차이린도 타호루도 다 한통속이었던 거 아니야? "수르카. 너무 기분 나빠하지 마. 너 아니라 누구였어도 다 그렇게 당했 을 거야" 이런 생각을 해보고 있는 데 라이짐이 내게 와서 말했다. 친한 친구는 이 런 점이 보통친구와는 다르지. 내 표정만 보고도 뭘 생각하는지 척척 알아 낸단 말이야. "그래도 기분 나빠. 칫. 지가 얼마나 잘났다고..." "수르카. 오늘 그 강의 듣고 다들 뭐라고 하는 지 알아?" 뭐라고 하냐고? 지금 날 놀리냐? 아니면 타호루를 욕하는 동기 훈련병이 라도 있는 모양이지? "다들 아케르 용병단은 다르다는 말을 하고 있어. 그렇게 강한 마법사와 함께라면 어떤 전투에서도 죽지 않을 거라는 말도 하고 말이야. 오늘 그 강 의는 마법사가 뒤에서 돕고 있다는 믿음을 주기 위한 강의였다고 생각해. 그리고 너를 지목한 것도 네가 다른 훈련병보다 칼을 잘 쓰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네가 형편없는 칼 솜씨를 가지고 있었다면 다들 그냥 웃어버리고 말았겠지만 다들 타호루가 대단하다는 말들을 하고 있잖아. 아케르 용병단 에 들어 온 것을 잘했다고도 생각하고" 라이짐이 말했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다들 날 인정한다는 소리 같기도 하 고. 이거, 금방 기분이 좋아졌다. 참. 수르카 너 변덕스럽기도 하다. "...정말...그럴까?" 나는 조심스럽게 라이짐에게 물었다. "그럼 물론이지. 그러니까 기운 내라구. 첫 눈이 오기 전에 정식 용병이 될 사람이 그렇게 풀이 죽어있으면 안되지" 라이짐이 말 덕에 나는 남은 자유시간동안 라이짐, 재훈과 농담을 주고받 으면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단지 라이짐의 말을 들었다고 해서 쉽게 기 분이 풀린 건 아니지만 말이다. 하지만 적어도 내 칼솜씨를 다들 인정하고 있다는 라이짐의 말은 내게 위안이 됐다. 어찌되었건 아케르 단장이 인정한 칼솜씨를 가진 나 아닌가. 불침번을 서면서 나는 아자닌을 불러내 타호루가 도대체 어떻게 아무 말 도 하지 않고 마법을 쓸 수 있었는지를 물어보았다. "말 자체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해와 집중도 마법의 본질은 아닙 니다. 그것들은 마음으로 가는 길일뿐이지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어떤 마 법이든 다 말없이 이루어 지는 건 아닙니다만..." 아자닌은 이렇게 설명했다. 나는 멍청하게 허공만 바라보고 있어야 했다. (아자닌의 말이 전혀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마음만으로도 마법을 작동시킬 수 있지만, 모든 마법이 다 그 런 건 아니다.. 뭐 그런 말인가?" 한참을 생각한 다음에 내가 이렇게 물었다. "훌륭한 마법사들은 마음만으로 작동할 수 있는 마법을 한 두개씩은 가지 고 있습니다. 마법사가 완벽하게 이해를 하고 있기에 언제든지 집중이 가능 한 그런 마법이지요. 그래서 그런 마법들은 간단하면서도 강력한 경우가 많 습니다. 그런 모든 마법이 준비하기도 쉽지 않고 작동하기도 쉽지 않아서는 곤란할 테니까요" 마법에 대해서 또 다른 사실을 하나 알았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에 마법과 칼을 동시에 쓰는 사람이 마법사와 맞붙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마법이 좀 약하더라도 말이야" "그건 알 수 없습니다. 전투에서의 승패란 어떤 경우든 쉽게 결과를 예측 할 수 없으니까요. 전투 상황이란 얼마나 급박하게 변해가는 것인지 수르카 님도 강의를 들어 배우시지 않았나요?" 차이린이 말했다. 하긴 그거야 그렇지. "마법과 칼을 동시에 쓰는 사람도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 경우 마법도 강력하지 못하고 칼솜씨도 그리 훌륭하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타호 루님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역사에 이름을 남긴 사람들은 다 한 길을 간 사람이라고... 대마법사 아킨 님이나 카를로스 장군님처럼..." 아자닌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과연 내가 갈 길은 어디 인가 궁금해졌다.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는 걸까. 타호루에게 말했듯이 훈련 을 일단 받고 마법을 배울지 결정을 내려야 하는 걸까. "그럼 어떤 검사도 마법사가 어느 수준 이상이라면 이길 수 없다는 말이 야?" "뭐, 어떤 경우든 먼저 공격한다면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먼 저 공격할 수있는 상황을 만들어 내는 것이 재능이겠지요" 상대 마법사가 방심하고 있을 때 공격한다... 그렇다면 기회는 단 한번 뿐일 것이다. 실수하면 바로 마법 공격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런데 나는 왜 마법사가 강한지 검사가 더 강한지를 궁금해 하는 걸까. 그런건 아무 상관없지 않나. 그냥 나는 내가 하고 싶고 좋아하는 걸 하면 그만이잖아. 그래. 칼이 좋으면 칼을 하고 마법이 좋으면 마법을 하면 그만 이지. 뭐. 운명... 나는 사비오 영감이 떠나면서 내게 남긴 운명이라는 말이 갑자기 떠올랐다. 뭐. 나중에 어떻게든 되겠지. 지금은 그냥 하고 싶은 대로하자. 생각은 나중에 해도 좋을 거야.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할 순간이 온다 면, 사비오 영감 말대로 저절로 알 수 있게 되겠지. 중요한 것은 마음이라 는 것만 잊지 않는다면 말이야. 게다가 난 역사에 이름 같은 거 남기고 싶 은 마음도 없으니까... 아자닌은 고개를 갸웃갸웃하며, 제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저리도 열심히 하고 있나, 라는 표정으로 날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N:김상현 #8555/10199 ━━━━━━━━━━━━━━━━━━━━━━━━━━━━━━━━━━━━━━━━ 제 목:[탐그루] 연재시작합니다. 관련자료:없음 1/1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0-22 14:24 조회:1731 나우 sf란에서 연재되고 있는 '탐그루'를 오늘부터 하이텔에서도 연재합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N:김상현 #8556/10199 ━━━━━━━━━━━━━━━━━━━━━━━━━━━━━━━━━━━━━━━━ 제 목:[탐그루] 영혼의 에뮬레이터 - 1 - 관련자료:없음 25/25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0-22 14:25 조회:2116 탐그루 # 마법은 마음이다 - 마음은 칼이다 # * 영혼의 에뮬레이터 내가 그 시간에 집을 나선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내가 그 시간에 집을 나오지 않았다면 나는 그 노인을 만나지도 못했을 것이고, 세헤라자드의 실 행 파일 앞에서 필터까지 타 들어간 담배를 들고 난처해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나는 어스넷에 접속했다. 혹시 내게 온 편지가 있는지, 혹은 새로운 정보 가 있는지 찾아보는 일은 내가 아침에 가장 먼저 하는 일이고, 또한 나갔다 집에 돌아오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기도 하다. "한 통의 편지가 있습니다" 컴퓨터 음성이 편지가 온 사실을 알려주었다. 트랜스 파워 7.0 버전으로 출력된 음성은 최신 버전인 7.52 버전에 비해 매끄럽지 않았다. 그러나 7.52버전은 아직 해킹이 되지 않았고, 7.0버전까지만이 락이 풀려 어스넷으 로 유통되고 있었다. 불법, 그러니까 공짜로 구할 수 있는 프로그램임을 감 안한다면 만족할 수밖에 없는 성능이다. 트랜스 파워는 1.0 버전에서부터 충격적인 신기술의 출현이었다고 한다. 인간의 목소리를 녹음 재생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성대구조를 예뮬레이션 해 발성시키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뇌의 언어중추와 성대구조를 에뮬레이 션할 발상은 참으로 획기적인 일이었다. 그렇게 하면 프로그램의 용량도 엄 청나게 적어질 뿐만 아니라 거의 인간의 음성처럼 매끄럽게 읽어낼 수 있었 다. 나는 마우스를 움직여 모니터 상의 '읽기'를 클릭 했다. "네 편지 잘 받아 봤다. 네가 추천한 '소드 엔 매직 5'의 시나리오 모드 엔딩을 지금 막 봤다. 이제 나도 온라인으로 뛰어들 생각이다. 곧 온라인에 서 만날 수 있겠구나. 마지막 미로에서 함정 피하는 팁 보내 줘서 고맙다. 답례로 '던젼 오브 드워프'에 나오는 인물들의 '에디트 코드'를 보낸다. 잘 쓰기 바란다. 그리고 주말 잘 보내길" 트랜스 파워 7.0은 영어를 원어발음으로 읽어주기는 하지만 억양을 조절 할 수 없다는 큰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 내가 읽은 편지만 해도 영어 부분만은 매끄럽게 들리질 않았다. 물론 다국어 지원 기능이 부족했던 5.0 버전이나 목소리 선택 기능이 추가되기 전인 6.5 버전보다는 나았지만 말이 다. 더 나은 프로그램을 구하고자 하는 욕망은 컴퓨터 유저라면 누구나 가 지고 있는 것이다. 어찌되었건 친구가 시나리오 모드 엔딩을 봤다니 나로서는 반가운 일이었 다. 요즘에는 대부분의 게이머들이 조금 실력이 붙었다 하면 온라인으로 뛰 어들어 승부를 겨루기에만 급급하지 시나리오 모드를 즐길 줄 모른다. 이런 시절에 나와 비슷한 경향을 지니고 있는 게이머를 만난 다는 건 얼마나 행 운인가. '소드 엔 매직' 시리즈 시나리오 모드의 기사와 마법사, 그리고 모험과 사랑의 이야기는 무척이나 잘 짜여 있어서 내겐 온라인 플레이 이상의 재미 와 감동을 주었다. 괴물들과의 싸움, 정의로운 기사의 복수담과 아름다운 사랑, 그리고 결국 악인을 물리치고 세상의 평화를 찾는다는, 어떻게 보면 단순한 줄거리라고 할만도 하지만 새로운 시리즈가 출시 될 때마다 나는 무 슨 수를 써서라도 '소드 엔 매직'을 구입하곤 했다. 매번 다른 캐릭터가 등 장한다는 참신함과 항상 비슷한 시스템을 유지하기 때문에 친근함을 준다는 점에서 '소드 엔 매직' 시리즈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게임이 되었다. 어찌되었건 잘 된 일이야. '소드 엔 매직' 시나리오 모드를 즐길 줄 아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통신에서 만난 그 친구가 때려부수기만 좋아하는 요즘 게이머들하고는 다르다는 뜻일 테니까 말이지. 편지를 읽고 난 후, 나는 새로운 정보를 찾아 어스넷으로 들어가 최신 정 보를 검색해 보았다. 건강 관련 소식 하나(다시 말해 새로 나온 약 광고)와 프로그래머를 찾는다는 소식(구인 광고가 아니라 학원 광고)말고는 별다른 소식이 없었다. '소드 엔 매직 6'는 스크린 샷만 몇 장 나온 채 계속 발매 연기 중이었다. '소드 엔 매직 온라인'에 접속하려고 하던 차에 문득 담배가 거의 떨어진 걸 발견했다. 담배는 한 개비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잠시 고민에 빠 졌다. 이 담배를 지금 피워 버리면 밥 먹은 후 담배를 피울 수 없게 된다. 그렇다고 배달을 시킬 수는 없다. 통신 배달은 아주 편리한 기능이기는 하 지만 신원 조회 과정이 까다롭기 때문에 나 같은 미성년자는 함부로 담배를 살 수 없다. 그리고 밥 먹고 나서 담배를 피우기 위해 지금 담배를 참는 건 정말 싫은 일이다. 그래서 나는 담배를 사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해가 막 지기 시작한 하늘은 탁한 검붉은 색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하 늘이 푸른 시절도 있었다는 자료를 읽은 기억은 있지만 과연 그런 때가 있 었을까? 자료에 따른다면 그건 최종 전쟁도 일어나기 전 일이고 더 거슬러 올라가 WCC(World Cyber Community)도 (몇몇 사람들은 워 크래프트 커뮤니 티라고 부르기도 하고 또 몇몇 사람들은 월드 시앤시 커뮤니티라고 부르기 도 한다. 그 둘은 항상 서로의 말이 맞다고 싸운다. 사람들의 말로는 그런 싸움의 역사가 30년도 넘는다고 한다. 설마 그럴 리가! ) 성립되기 전 일이 다. 그렇다면 나로서는 그런 시절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이 당연하다. 정부도, WCC도 푸른색의 하늘을 되찾기 위해 환경을 살리자는 캠페인을 벌이기는 하고 있다. 정부나 WCC는 푸른 하늘을 '되찾는'(그들의 표현대로)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어스넷을 돌아다니다 보면 수 십 번도 넘게 접하게 되는 띠광고 캠페인이니 정부나 WCC가 얼마나 많은 돈을 광고 에 투자하고 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하지만 도대체 푸른 하늘이 무슨 가 치가 있단 말인가. 푸른 하늘을 보고 싶다면 클릭 몇 번으로 얼마든지 볼 수 있는데 말이다. 나는 담배를 사기 위해 동네 상점으로 들어갔다. 편의점보다 갖춰놓은 물 건도 적고 가게문도 자정만 되면 닫지만, 담배나 술, 혹은 각성제를 살 수 있는 유일한 곳이기 때문에 나는 이곳을 자주 이용하곤 한다. 아마 이 가게 의 손님들 대부분이 나와 같은 미성년자 일 것이다(자동판매기로 담배를 사 던 시절은 실업 문젠가 뭔가 때문에 몇 해 전에 끝났다). 하지만 다음 달이 면 나도 성인이 될 것이고, 그러면 더 이상 이 상점 주인의 주름 투성이에 냄새나는 얼굴을 더 이상 보지 않아도 된다. 당당하게 식료품을 주문하듯이 담배를 살 수 있을 테니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담뱃갑을 열고 한 대를 피워 물었다. 해질 무 렵, 거리를 걸으며 피우는 담배 맛은 특별한 데가 있다. 불법 복제된 시디 롬을 작동시킬 때, 방안에서 각성제 병의 뚜껑을 열 때, 그리고 어스넷에서 포르노를 볼 때의 기분처럼, 뭔가 은밀하면서도 비밀스러운 일을 하고있다 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 기분도 성인이 되고, 합법적으로 담배를 사게 되면 사라져 버리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그 노인을 만나게 된 것이 다. 노인은 랩탑을 두 손으로 꼭 잡고서 내 집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나는 처음에 그가 거지이거나, 미친 사람이거나, 집에서 쫓겨 난 늙은이거나, 최종전쟁 때 부상한 상이군인이거나, 아니면 뭐 그 비슷한 사람일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노인을 무시하며 지나가는 순간 노인이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 다. 그때 내가 보았던 노인의 표정을 아마 나는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 다. 주름투성이 얼굴은 기쁨인지 슬픔인지 분간할 수 없는 묘한 표정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이봐. 젊은이." 노인이 나를 불렀다. 나는 담배 연기를 한 모금 빤 뒤 길게 내뿜으며 멈 추어 설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고민했다. 만약 노인이 처음 보는 형태의 랩탑 을 들고있지 않았다면 나는 노인의 말을 무시하고 지나쳤을지도 모른다. 하 지만 그가 가슴에 꼭 껴안고 있는 처음 보는 기종의 랩탑은 내 호기심을 자 극했고, 어쩌면 생각보다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겠다는 느낌에 집 으로 들어가는 걸음을 멈추고 노인 앞에 섰다. "내게 일 분만 시간을 주게. 그럼 자네에게 흥미 있는 제안을 하나 하지" 가래가 잔뜩 낀 듯한 노인의 목소리는 버전이 낮은 트랜스 파워에서 흘러 나오는 목소리처럼 듣기 거북했지만 나는 제안이라는 말에 좋다고 대답했 다. "음.... 내 손으로는 할 수 없었어. 정말이지 내 손으로는 못하겠더라구. 다른 모든 파일들은, 내 일생의 노력들은, 쉽게 지울 수 있었지만. 세헤라 자드 만큼은, 세헤라자드만큼은 내 손으로 지울 수가 없었어." 노인은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바쁜 사람을 세워놓고 웬 딴 소리람. 그래 도 나는 인내심을 가지고 노인의 말을 끝까지 들어보기로 마음먹었다. 제안 이라는 것이 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부탁하기로 했네. 이 랩탑을 말일 세." 부탁이라니. 무슨 소리야, 이거? 분명 제안이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무 료라는 말에 접속해보니 들어가는 것만 무료인 사이트에 간 기분이네. "이 랩탑은 내가 직접 튜닝한 컴퓨터야. 지금 생각한다면 모두 구식 부품 일 테지만 오래 사용해 신뢰할 수 있는 컴퓨터가 최신 컴퓨터보다 나은 때 가 있는 법이지. 지금은 비록 이 꼴이지만 나는 꽤 유명했던 프로그래머라 네." 알고 보니 장사꾼이었군. 나는 담배를 비벼 끄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 다. "자네에게 이걸 주지. 물론 돈은 받지 않겠어. 대신 이 안에 있는 파일 하나만 지워 줘. 세헤라자드라는 이름의 파일이야. 물론 하드를 통째로 포 맷해도 상관없어. 그 파일만 지운다면 팔아먹든 가지든 그건 자네 마음대로 야." 나는 귀가 번쩍 뜨이는 것이 느껴졌다. 구형이라도 랩탑은 꼭 하나 가지 고 싶었던 것이다. 거기다 자신이 직접 튜닝했다니 대단했다. 웬만한 전문 가가 아니면 자신의 컴퓨터를 튜닝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또 자신이 직접 튜닝했다면 세상에 하나 뿐인 컴퓨터인 것이다. 수집가들에게 비싸게 팔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게 되기만 한다면 이제 얼마 남 지 않은 아마 게임리그에서 우승을 할 경우에 받을 상금의 몇 배를 벌게 될 수도 있다. 내 들뜬 기분과는 상관없이 노인은 또다시 복잡 미묘한 표정으 로 말했다. "나는 세헤라자드를 보내줬어야 했어. 자유롭게 해줬어야 했어. 하지만 지금에 와선 그렇게 할 수가 없어. 단지 내 평생을 바친 노력뿐이었다면, 그것이 단순한 프로그램이었다면 어떻게든 할 수 있었을 텐데. 세헤라자드 만큼은 절대로 절대로 내 손으로 지울 수 없어. 앞으로도 영원히 내 손으론 지울 수 없을 거야. 자네가 내 제안을 꼭 받아주길 바라네." 노인은 이렇게 말하고는 몇 번 기침을 했다. 한번 한번의 기침이 모두 노 인의 온 몸을 들썩거리게 했다. "그런데 프로그래머였다고요?" 나는 조금 미심쩍어하면서 노인에게 이렇게 물어보았다. "전에 내가 인터넷, 아니 지금은 어스넷이지, 어스넷에서 사용한 아이디 는 zknight였다네. 밤을 말하는 나이트가 아니라 기사를 뜻하는 나이트야. 오래간만에 이런 식으로 내 소개를 해 보는군. 예전에는 꽤 유명했었지. 나와 친한 사람들은 모두 나를 '최후의 기사'라고 부르기도 했고......" 노인은 이제 다소 마음이 편안해졌는지 또박또박 끊어가며 말했다. 그러 고 보니 노인의 발음은 트랜스 파워 초기 버전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 같다 는 생각이 들었다. zknight? 최후의 기사? 그나저나 처음 듣는 이름인데. 웬만한 프로그래머라면 다 알고 있는데 말이야. "혹시 개발하신 프로그램이라도 있나요?" 그래서 나는 이렇게 물어보았다. "예전에 나는 에뮬레이터를 만들었지. 지금의 에뮬레이터에 비하면 뭐,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닌 것이겠지만 말이야." 노인은 씁쓸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런 노인을 바라보면서 별 로 유명하지 않은 삼류 프로그래머였을 게 분명하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여기 있는 프로그램은 어떤 프로그램인가요?" 나는 노인이 들고 있는 랩탑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말했잖은가. 내 일생의 노력이라고. 내 부탁을 들어줄 텐가?" 노인의 말에 나는 좋다고 대답했다. 그나저나 어떤 프로그램인지 궁금하 군. 그래도 명색이 프로 게이머 지망생인데 프로그램에 관심이 없다면 말이 안되지. "고맙네. 고마워. 젊은이는 요즘 사람답지 않게 꿈꾸는 듯한 눈을 가지고 있군. 내가 제대로 봤어." 나는 담배를 하나 더 피워 물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이 꼭 필요한 말 같지는 않았지만 이 정도는 해 주는 것이 최소한의 예의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노인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앉아 있던 자리에서 먼지가 피어올랐다. 나는 그것을 바라보면서 나도 모르게 손바닥으로 코와 입을 막았다. 요즘 유행하고 있는 전염성 바이러스에라도 감염될 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나 는 얼른 자리를 피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공짜로 랩탑을 받을 때까지는 참기로 했다. 잠시 노인은 내게 랩탑을 주는 일을 망설이는 듯 했다. 노인의 표정에는 아쉬움과 안도가 뒤섞여 있는 듯 했다. 얼마를 끌었을까. 마침내 노인이 내 게 랩탑을 내밀었다. 나는 노인의 손이 닿지 않은 부분을 잡아 조심스럽게 랩탑을 받았다. 내성을 가진 수많은 변종 바이러스들에 의해 언제 어디서 감염될 지 모른다. 모르는 사람과의 접촉은 항상 조심해야한다. 인간은 가 장 위험한 바이러스 전염체이기 때문이다. "고맙네, 젊은이. 세헤라자드를 반드시! 반드시! 지워주게. 이 늙은이의 마지막 부탁일세....." 노인은 이렇게 말하고는 돌아섰다. 휘청거리며 골목 저편으로 사라져갔 다. 해는 이미 저물어 하늘은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먼저 오존티슈를 몇 장 꺼내 랩탑을 닦아 내었다. 그 리고 혹시 모르는 일이기 때문에 랩탑을 열어 키보드와 액정 화면도 정성 들여 닦았다. 아마 내가 지나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요즘 유 행하고 있는 변종 바이러스들은 거의 모든 매개물질로 전염이 가능하고 대 부분의 항생제에 내성을 갖고 있어 밖에서 주운 물건이든, 얻어온 물건이든 안전하게 소독을 해야한다. 공짜라면 소독하는 게 더욱 당연하다. 거기다가 무엇이든 오존티슈로 소독하는 일은 중앙정부나 WCC도 적극 권장하고 있는 일이었다. 지저분한 노인이 들고 있었던 것 치고 랩탑의 상태는 괜찮아 보였다. 나 는 책상 위에 랩탑을 올려놓은 뒤, 전원을 켰다. 액정 화면이 번쩍이더니 'low battery' 메시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이런. 나는 책상 서랍 안에 모아놓은 잡동사니들을 뒤져보았다. 범용 케이블이 어딘가 있을 듯 해서였다. 하지만 나는 아무리 뒤져봐야 케이블은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덕분에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옛날 게임 시디들을 몇 장 찾을 수 있었다. 그린 크래프트 3, 손자 택틱스 5, 파이날 판타지 파이 날버전, 전우치 사가 2, 풍래의 시렌 7 등등. 다른 수집가들처럼 체계적으 로 모아본 적은 없지만 한때 관심을 갖고 옛날 게임들을 모았던 적이 있다. 그런데 지금도 이런 게임들을 플레이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그래서 나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몇 가지 떠올려 본 다음, 통신 배달 서 비스로 물품을 구입하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케이블과 충전기가 없는 랩 탑이라면 소용도 없을 뿐 아니라, 랩탑을 얻었는데 캐이블 하나 사는 정도 의 투자야 당연한 것 아닌가. 사실 무엇보다도 랩탑 안에 어떤 프로그램들 이 들어 있는지, 어떻게 튜닝이 되었는지 (튜닝한 컴퓨터를 보는 것은 이번 이 처음이다.) 궁금했다. 나는 노인에게서 받은 랩탑의 전원부에서 시리얼 넘버를 확인한 후, 어스 넷에 다시 접속해 통신 배달 사이트로 들어갔다. 메뉴에서 시리얼넘버를 입 력해 재고를 확인한 후 신용카드로 대금을 지불했다. 15분 동안 나는 '소드 엔 매직 6'에 대한 새로운 정보가 있나 어스넷 여 기 저기를 돌아다녔다. 채 몇몇 사이트를 돌아보기도 전에 벨소리가 울렸 다. 역시 즉시 배달 서비스는 좀 비싸다 싶을 만큼의 배달 서비스 요금을 지불할 가치가 있었다. 운송 망이 어떻게 구축돼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즉시 배달 서비스는 광고 그대로 20분을 넘기는 법이 없었다. 언젠가 한 번 갑자기 시디롬 드라이브가 망가지는 바람에 새벽에 즉시 배달 서비스를 사 용해 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15분밖에는 걸리지 않았다. 편의점이나 작은 상점들이 이런 배달 서비스 업체의 무한 경쟁 속에서도 살아남아 있다는 것은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마도 예 전의 푸른 색 하늘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눈으로 물건을 보고 구입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기 때문이 리라. 하지만 푸른 색 하늘이 사라졌고, 마그네틱 신호로 기록된 보조 기억 장치가 사라졌고, 비디오 테이프 대여점이 사라진 것처럼, 이제 곧 그런 상 점들도 사라지게 되리라. 배달원은 푸른 색 모자를 쓰고, 푸른 색 제복을 입고 있었다. 나는 배달 원이 내미는 문서에 서명을 한 뒤 케이블을 확인하고 문을 걸어 잠갔다. 이 런 일들도 언젠가는 사라지게 되리라. 지문을 확인한다던가 망막을 점검하 는 하드웨어나 프로그램이 대중화된 지 이미 오래인데도 기술의 발전과 무 관하게 남아 있는 전통이나 관습들은 여전히 많았다. 인간적인 것은 결코 없어지지 않는 것 같다. 나는 케이블을 연결 한 뒤, 랩탑을 가동시켰다. 도대체 무엇이 들어 있을 까 가슴 졸이며 모니터를 들여다보았다. 화면에 뜬것은 달랑 실행 파일 두 개 뿐이었다. 자동으로 실행된 메뉴 화면에 성격을 알 수 없는 두 개의 실 행파일만이 달랑 들어있었다. 요즘 유행하는 화려한 동영상 배경화면이나 (내가 쓰고 있는 것은 인기 여성 그룹 신디&신디다) 적어도 최신 버전의 윈 도우가 뜨리라는 생각을 했던 나는 실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드를 포 맷하고 윈도우를 깔 생각을 하니 눈앞이 깜깜했다. 윈도우를 깔려면 적어도 반나절을 버그들과 씨름하며 보내야 한다. 이건 순전히 20세기말에 MS사의 운영체계 독점을 막지 못한 탓이다. 경쟁 업체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지 금 MS사가 뭐가 모자라 사용자의 편의를 위해 애쓰겠는가. 어쨌든 이제 주말이니 새 랩탑의 하드를 포멧하고 프로그램들을 설치 할 시간은 충분한 셈이다. 어쩌면 주말에 랩탑에 프로그램을 까는 일로 시간을 보낸다는 게 좋을 수도 있는 거고(어차피 컴퓨터를 갖고 노는 것 말고는 할 일도 없으니 말이다). 두 개의 실행 파일은 zknight.soul과 세헤라자드.soul 두 개의 파일뿐이 었다. 컴퓨터 프로그램들은 대부분 사용법이 비슷하기 마련이어서, 나는 파 일 위에 커서를 놓고 삭제키를 눌러 그 두 개의 파일을 지우려고 했다. 하 지만 zknight라는 실행파일이 마음에 걸렸다. 그 실행파일의 이름은 랩탑을 건네 준 노인이 사용했다던 아이디였다. 그 노인이 최후의 기사라고 자신을 소개했지 아마. 나는 호기심에 그 노인이 누구인지 알아보기로 했다. 먼저 나는 어스넷에 접속해 zknight를 찾아보았다. 이 정도의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라면 자료 몇 개는 찾아 볼 수 있지 않을까, 적어도 일 생의 노력 운운하는 걸 보면 한때 날렸던 사람인데 아직 내가 모르고 있는 프로그래머일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랩탑은 내가 생각한 것 이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을 지도 모른다. 내 컴퓨터가 찾아낸 자료는 대게 몇십 년이 넘는 자료들이었다. 그 자료 를 통해 내가 얻은 zknight에 대한 정보는 놀라운 것이었다. 자신을 최후의 기사라고 소개한 노인은 지난 세기말부터 폭발적으로 유행 하기 시작한 에뮬레이터 개발에 앞장섰던 프로그래머였다(비록 지금은 자료 만 남아있지만 당시에는 1억 회 이상의 조회 수를 자랑하는 홈페이지를 가 지고도 있었던 모양이다). 특히 그가 개발한 16비트와 32비트 게임기용 에 뮬레이터는 전 세계 게이머들을 흥분하게 만든 프로그램이었다는 설명도 있 었다. 그 최후의 기사라는 노인이 에뮬레이터를 만드는 프로그래머였다고 했지, 아마. 나는 이어서 에뮬레이터에 관한 정보들을 찾아보았다. 그 정보들을 종합한 결과, 나는 에뮬레이터라는 것이 운영 체계가 다른 프로그램을 작동 시킬 수 있게 만들어 주는 프로그램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만약 그렇다면 이 랩탑에 들어 있는 프로그램과 소스가 함께 들어 있다면 고전 프로그램 수집가들한테는 귀한 자료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소스가 들어있다면 돈을 버는 건 시간 문제고, 그 가치는 부르는 게 값일 수도 있다. 오래 된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게 좋을 때 도 있군. 나는 노인의 부탁이고 뭐고 간에 일단 이 프로그램을 실행시켜 보 기로 마음먹었다.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격이지. 실행도 해보지 않고 프로그램을 지운다는 건 내 사전엔 있을 수 없었다. 나는 키보드로 천천히 zknight를 입력하고 난 후 엔터를 쳤다. 그러자 화 면이 바뀌고 랩탑에 내장되어있는 낡은 스피커에서 음성이 흘러나오기 시작 했다. 비록 기계음에 가까운 음성이었지만 나는 그 말투에서 이것이 이 랩 탑을 준 노인의 음성일 것이라고 짐작 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음성 은 트랜스 파워 1.0버전과 비슷하군. 기계음이 리얼하군. 나 참, 그야말로 구석기 시대의 프로그램이군. 나는 음성을 주의 깊게 듣기 시작했다(주의를 집중시키기 위해 데스크탑 컴퓨터까지 껐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N:김상현 #8557/10199 ━━━━━━━━━━━━━━━━━━━━━━━━━━━━━━━━━━━━━━━━ 제 목:[탐그루] 영혼의 에뮬레이터 - 2 - 관련자료:없음 26/26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0-22 14:26 조회:1582 탐그루 # 마법은 마음이다 - 마음은 칼이다 # "드디어 모든 작업을 끝냈다. 이 작업에 내 평생을 바쳤다. 그러나 완성 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완성될 줄은 정말이지 꿈에도 몰랐다. 하여간 이젠 모두 끝났다. 그래서 나는 세헤라자드를 완성하기까지의 이야 기를 여기 남겨두고자 한다. 이 음성은 '영혼의 에뮬레이터' 0.2버전으로 작성된 것이다. 0.99버전이 아니라 오래 된 버전으로 남기는 것은 두려움 때문이다. 다시는 0.99버전을 실행시키고 싶지 않았다. 내가 저지른 일. 인간의 영혼을 에뮬레이트해 컴 퓨터에 가두어 놓는 일은 애초에 시작도 하지 말아야 했다. 신과 함께 주사 위 놀이를 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내가 비록 0.99버전이라고 이름 붙였지만, 그 버전을 실행시키기 전까지 는 스스로 '영혼의 에뮬레이터' 1.0 버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실행시키 기 전까지는 인간의 영혼을 완벽하게 컴퓨터 속에 재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여기서 목소리는 지난날의 감상과 비탄에 젖은 듯 떨렸다. 잠시 멈추었다 가 계속되었다. 그런데 영혼의 에뮬레이터라니? 처음 듣는 이름인 걸? "나는 게임을 좋아하는 그저 평범한 소년이었고, 장차 프로그래머가 될 꿈을 가지고 공부하고 있었다. 그러나 에뮬레이터를 만나게 되면서 내 인생 은 바뀌었다. 그 계기가 된 것은 버전 업 된 새로운 게임기가 나올 때마다 새로운 게임기를 사야했던 내가, 아주 간단한 에뮬레이터를 접하면서부터였 다. 그 에뮬레이터는 8비트 짜리 게임기용 게임을 게임기도 게임팩도 없이 컴퓨터에서 작동시킬 수 있는 프로그램이었다. 실행 속도는 느리고 그래픽 은 깨지고, 음악은 아예 나오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 에뮬레이터를 보는 순 간 나는 에뮬레이터를 만드는 프로그래머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그 결 심은 내 일생을 완전히 바꾸어 버렸다. 먼저 나는 소스가 공개된 에뮬레이터를 분석하며 그 작업을 시작했다. 디 버깅을 하고 프로그램 루틴을 다시 검토해 변형해보았다. 8비트 게임팩에 담겨있는 프로그램은 쉽게 롬파일화하고 구동시킬 수 있었다. 그 과정은 그 리 어렵지 않았다. 적지 않은 수의 프로그래머들이 이미 시작해 놓은 일이 었고, 나는 그 프로그래머들이 통신에 올린 프로그램 소스를 이리저리 변형 시켜보기만 한 것에 불과했다. 문제는 16비트 게임기의 롬파일을 PC상에서 작동할 수 있도록 하는 에뮬 레이터를 만드는 일이었다. 그 작업은 지겹도록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계 속되었다. 그러나 버전 업 된 에뮬레이터가 게임기의 성능에 가까워질 때마 다, 게임기에는 없던 새로운 기능이 추가될 때마다 내가 올린 에뮬레이터는 전 세계 게이머들의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고 다시 그 격려에 힘입어 작업을 해 나갈 수 있었다. 그 과정 속에서 나는 점점 에뮬레이터의 세계로 빠져들 게 되었다. 내게 힘이 되어준 16비트 게임기용 에뮬레이터의 최초 버전과 파이날 버전의 소스도 이 랩탑에 저장해둔다" 이상하군. 내가 본 파일은 앞서 말한 두 파일뿐이었는데. 혹시 이 노인, 어딘가 숨겨놓은 것 아니야? 나는 당장 프로그램 작동을 중지시키고 그 에 뮬레이터 프로그램 소스를 찾아보고 싶었지만, 작동 방법도 잘 모르는 이 프로그램을 중지시켰다가 다시 처음부터 듣게 되는 불상사가 생기지 않을까 해서 참지 않을 수 없었다. 뭔가 하나를 얻으려면 반드시 투자가 필요한 법 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롤플레잉 게임에서도 아이템을 하나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한가. 그러니 일단은 참고 이야기를 들어보자구. 뭔가 더 좋은 정보가 나올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16비트 게임기의 에뮬레이터 최초 버전이 완성되었을 때를 기억한다. 전 세계에서 인터넷을 통해 나에게 날아들던 그 수많은 격려 편지들. 그 중에 서도 어린 소년, 소녀들의 솔직한 마음이 담겨져 있던 이메일들은 매일매일 나를 감동시켰다. 비록 최초 버전은 버그투성이였지만 전세계의 게이머들은 이메일을 통해 나에게 계속할 수 있도록 희망과 용기를 주었다. 그래서 나는 수많은 시행 착오 끝에 속도도 느리고 사운드는 전혀 지원하지 않는 최초의 에뮬레이터 를 그럭저럭 게임 플레이가 가능한 프로그램으로 발전시켜 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후의 작업은 그리 쉽게 진행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혼자서 하는 일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런데 그때 최초로 내가 겪은 놀라운 사건이 일어 났다. 훗날 내게 중요한 도움을 주기도 한 또 다른 에뮬레이터 개발 팀이 추진하고 있던 에뮬레이터 개발을 포기하고 그 동안 개발한 프로그램 소스 를 나에게 넘겨준 거였다. 내 에뮬레이터는 이 사건으로 인하여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고 완벽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16비트 게임기 팩에 담긴 프로그램을 원본과 거의 흡사하게 에뮬레이션 해주는 프로그램을 결국 완성 할 수 있었다." 점점 흥미가 생기는 군. 그 프로그램들의 소스를 찾기만 한다면 일생 동 안 먹고 살 돈을 벌게 될지도 모르겠는 걸. 물론 임자를 잘 만나야겠지만 말이야. 나는 다시 내 컴퓨터를 켜고, 워드프로세서를 작동시킨 후 그때그 때 중요한 사항을 메모해 나갔다. "그러는 사이 내 나이는 서른이 넘었다. 나에게도 사랑은 찾아왔고 나는 결혼을 하게 되었다(이 부분부터는 비록 기계음이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음 성을 남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 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내가 일진보시킨 에뮬레이터의 역사는 이때부터 황 금기를 맞게 되었고, 내 인생도 그와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내 인생은 에뮬 레이터의 역사와 일치하는지도 모른다. 그후 새로운 세기가 시작되면서 에뮬레이터를 제작하는 것이 유행처럼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프로그래밍의 개념이 에뮬레이션의 개념으로 대치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부터 모든 것들이 에뮬레이트되었다. 기발한 것들이 속 출했다. 모뎀을 이용해 전화의 역할을 하게 하는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것이 아니라 전화기를 에뮬레이션하고 (아무리 오래 전이지만 이런 간단한 일이 뭐 그리 기발했을까), 별도의 TV카드와 TV카드용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것이 아니라 TV자체를 에뮬레이터로 제작했다.(이것도 역시 그렇다.) 누군가는 장난으로 진공청소기나 냉장고와 같은 기계도 에뮬레이트하여 통신상에 띄 어 놓기도 했다.(이거는 정말 기발했다. 나라면 그런 쓸데없는 일을 할 바 에야 '소드 엔 매직 온라인'에 접속해 경험치나 높이지 않았을까?) 물론 어 떤 사람은 현금 자동 인출기를 에뮬레이트해 소형 랩탑으로 돈을 빼내기도 하였다.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은 군 정보기관에서 사용하는 암호 해독기의 롬파 일이 통신상에 뜬 사건이었다. 만약 그 롬파일을 구동시킬 수 있는 에뮬레 이터가 제작된다면 정보기관의 모든 암호 체계가 무너질 수도 있었다. 군 정보기관은 그 사건 이후 모든 암호 해독기를 새로 제작했다고 한다. 이 일 때문에 군 정보 기관이 나를 소환하는 바람에 수사관들에게 곤욕을 치른 기 억이 난다. 지금 생각하면 다 즐거운 추억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에뮬레이터는 한계에 부딪쳤다. 더 이상 에뮬레 이트할 것이 없어진 거였다. 어쩌면 여기서 에뮬레이터의 역사는 끝났을 지 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 세상을 놀라게 한 일이 벌어졌다. 어떤 과학자가 생물을 에뮬레이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언급한 논문을 발표한 것이다. 이것 이 시작이었다." 여기서 목소리는 다시 한 번 멈추었는데, 이번에는 뭔가 두려워하는 것 같기도 했고 뭔가 비밀스러운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러니까 꼭 미성년자가 헤로인을 먹고 대마초를 문 채 YWCA 앞에서 테트리스를 하는 기분 같은 느 낌이 들었다는 말이다. (지난 세기말에 YWCA에서는 돌리고 끼고 맞추는, 맞 나?, 테트리스를 음란 게임이라고 규정했다고 한다. 결국 얼마지나지 않아 헛소문으로 판명됐지만 지금의 YWCA를 보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을 것 같 다.) 이야기는 다시 계속 되었다. "에뮬레이터를 만들던 프로그래머들은 여기에서 중요한 분수령을 맞게 되 었다. 즉, 생물의 영혼, 그러니까 생명 자체를 이미지 캡춰할 수 있다면 생 명을 컴퓨터에서 구동시킬 수 있는 에뮬레이터 또한 충분히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사이버 공간에 살아 움직이는 생명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 은 아담과 이브의 탄생, 그리고 게임의 발명 이후 가장 중요한 역사적 사건 이었다. 수많은 프로그래머들이 이 일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인류의 역사를 다시 쓰게 될지도 모르는 이 작업에 물론 나도 동참하였다." 나도 프로 게이머가 되기로 결심한 사람이지만 이 노인의 게임에 대한 열 정은 대단하군. 뭐 지금 말한 대로라면 사실 게임의 발명이 인류의 역사에 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는 뜻 아니야. 노인이 하는 이야기가 점점 흥미 로워졌다. 어쨌든 게임에 대한 이야기니까. "내가 작업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누군가 쥐의 생명을 이미지 캡춰하는데 성공했고, 그 롬파일을 실행시킬 수 있는 에뮬레이터가 이미 개발되었으며,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쥐가 인터넷 상을 떠돌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물론 이 일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지금도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소문이 돌 즈음 인터넷 상에서 상당수의 홈페이지들이 '갉 아 먹힌' 것 같은 형태로 나타났다는 것만은 내가 눈으로 확인한 사실이다. 나는 그냥 그것을 신종 바이러스의 일종으로 생각해 버렸다. 정말 문제가 된 것은 소문이 아니라 여론이었다. 생명을 조작한다는 비난 의 여론은 복제인간을 놓고 벌어졌던 비난의 목소리와 비슷한 정도로 높아 져 갔다. 특히 비난의 목소리가 높았던 쪽은 종교계였는데, 어떤 광신도는 나에게 협박편지를 보내오기까지 했다. 그러나 나는 프로그래머로의 자부심 으로, 일생을 걸고 도전할 만한 이 작업을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여기서 목소리는 갑자기 잦아들었다. 기계음이라고는 해도 느리게 띄엄띄 엄 말하는 것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딸이 여섯 살이 되었을 때. 그들은 아내를 죽였다. 그 일은...... 광신도들의 짓이었다......나를 노린 일이었겠지만......그들이 우편으로 보낸 폭탄은 내 작업실이 아니라 집에서 폭발하였다......" 목소리는 시간을 훌쩍 뛰어넘고 있었다. 기억하기 괴로운 기억이기 때문 이리라. "나는 복수심에 불타올랐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계획을 성공시키리라 다짐했다. 몇 번의 불법적인 시도가 있었다. 기록을 위해 말한다. 나는 시 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AIDS 환자나 말기 암 환자를 설득해 그들의 생명을 이미지 캡춰하고, 또 그것을 롬파일화 하는 일을 몇 번이고 시도했다. 그때 쯤에 가서는 인간의 생명, 영혼을 롬파일화 하는 일은 종교계의 압력을 견 디지 못한 정부에 의해 불법으로 정해졌다. 하지만 그 불법을 저지른 덕분 에 나는 그 어떤 프로그래머보다도 먼저 인간의 생명을 이미지 캡춰하고 롬 파일 화하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비난의 목소리는 한층 더 높아졌다. 나를 신에게 도전하는 악마라고 부르는 자들도 있었고, 바벨탑을 쌓았던 어리석 은 인간들의 예를 들며 나를 공격하는 칼럼리스트들도 있었다. 하지만 죽은 아내를 위해서도 이 작업을 중지할 수 없었다. 여기에 내가 최초로 이미지 캡춰에 성공한 영혼의 롬파일도 수록한다." 다시 한 번 목소리가 끊겼다. 나는 담배를 하나 피워 물었다. 가슴이 뛰 고 있었다. 이 안에 인간의 영혼일 수 있는 파일들이 들어있다는 사실에, 나는 어쩐지 오싹해지는 기분마저 드는 것이었다. "......내가 '영혼' 파일을 만드는 데 성공한 직후 세계 여기저기서 영혼 을 이미지 캡춰하는데 성공했다는 소식들이 들려왔다. 어떤 사람은 자기 자 신의 영혼을 이미지 캡춰했다고 자신의 홈페이지에 띄웠고, 어떤 회사에서 는 불치병에 걸린 환자의 영혼을 롬파일로 보존하는 서비스를 실시하겠다는 광고도 띄웠다. 그러면 언젠가는 그 영혼을 되살리는 일도 가능해지리라는 것이 그 회사의 말이었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그 누구도 에뮬레이터의 제작엔 성공하지 못했 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갔다. 나의 연구도 진척을 보지 못하고 있었고 내 딸은 어느덧 열 살이 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의 오랜 벗, 내게 자신들 의 에뮬레이터 소스를 제공했던 팀에서 소식이 들려왔다. 그 팀도 영혼의 에뮬레이션 작업에 뛰어들었으며 약간의 진척을 보았다는 소식이었다. 나는 내가 그 동안 연구한 소스를 과거의 답례로 그리고 프로그램 공유의 정신으 로, 충분히 믿을 수 있는 그들에게 보내주었다. 나의 영혼의 에뮬레이터 제 작 작업은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육체를 완벽하 게 구현할 수 있는 에뮬레이터의 제작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심장이나 간, 눈이나 코를 에뮬레이트하는 것은 아예 불가능했고 머리카락 하나 조차 도 완벽하게 에뮬레이트할 수 없었다. 영혼을 담는 그릇인 육체를 에뮬레이 션할 수 없다면 영혼이나 생명의 롬파일은 절대로 구동시킬 수 없었다. 전 기가 없으면 전자제품도 없듯이 영혼과 육체에 대한, 즉 인간에 대한 연구 가 미진한 상태에선 에뮬레이션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소용없는 일이었 다. 문명이라는 것은 여러 부문이 동시에 발전하지 않는다면 한 부문의 발 전만으로는 문명 전체의 발전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때 다시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코리아 합중국에서 기철학에 관한 중요 한 논문들이 발표된 것이다. 동양사상과 동양의학에서 시작된 기철학은 인 간에 대한 새로운 관점과 해석을 제공해 주었다. 인간을 영혼과 육체로 구 분하는 이분법적 사고를 폐기하고 몸이라는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본 것이 다. 영혼과 육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둘 모두를 합쳐 몸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몸에는 기가 흐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코리아 합중국의 휴먼 사이언스 센터에서 그 기를 롬파일화 하는 데 성공했 다. 이러한 관점과 연구는 내게 큰 도움이 되었다. 전체를 부분으로 나누어 에뮬레이션하는 작업은 이제 필요 없게 되었다. 그 기철학에 의하면 부분은 모두 전체를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 부분에 만 집중하면 되는 것이다. 나는 기를 이해하기 위해 동양의 고전들을 연구 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코리아 합중국의 이제마라는 철학자의 저서 는 기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일본에서 단백질 디스크가 발명되었다. 그 디스크는 기를 롬파일 화 하는데 필요한 충분한 안정성과 속도 용량을 제공해주었다. 나는 뛸 듯 이 기뻤다. 하늘이 나를 돕고 있는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생명체의 단백 질을 이용하여 정보를 저장할 수 있게 된 이 발명은 인류의 컴퓨터 역사에 큰 획을 그은 것이었지만, 동시에 나와 같이 영혼의 에뮬레이터 작업을 하 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결정적인 도움이 되어주었다. 그후 에뮬레이터 제작은 급속도로 진전하였다. 마침내 다른 에뮬레이터 팀에서 반가운 소식이 왔다. 0.1 버전도 못되지만 약간의 성공을 거두었다 는 것이다. 나는 비록 내가 먼저 성공시키지는 못했지만, 진심으로 내 일처 럼 기뻤다. 하지만 그 팀 또한 불법으로밖에 롬파일을 입수 할 수 없어서, 나의 경우처럼 말기 암으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의 롬파일이었다. 나중에 그들이 연구해온 모든 소스를 내게 넘기고 영혼의 에뮬레이터 작업을 그만 두었을 때, 나는 내가 그들을 부러워하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목소리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뭔가 다른 일을 하기 위해 프 로그램을 중지시킨 모양이었다. 하지만 목소리는 금세 다시 이어졌다. 아마 도, 다른 날에 녹음한 듯, 목소리의 빠르기가 많이 달라져 있었다. "......딸애가 암에 걸린 일은 바로 이 즈음의 일이었다. 이 사실은 안 광신도들은 다시 나에게 이메일을 보내왔다. 이번에는 협박이 아니라 조롱 과 함께 비아냥거리는 편지였다. 딸에게 암이 생긴 것은 순전히 내가 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인류의 암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지금이라도 포기한다 면 신이 나를 용서할 것이라는 내용도 있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메일은, 누구인지 끝내 알아내지는 못했지만, 아내가 집에서 죽는 것을 보고만 있었 듯이 딸애의 죽음도 그저 바라보게만 될 것이라고 적은 이메일이었다. 추적 은 불가능했지만 그 메일을 보낸 자가 내 아내를 죽인 자일 것이라는 건 쉽 게 짐작할 수 있었다. 어디에도 보도되지 않은 폭탄의 종류를 그 메일을 보 낸 사람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경찰도, 나도 그 메일을 보낸 사람은 찾아내지 못했다. 나는 다시 한 번 복수심에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아내가 죽었을 때 보다 몇 배는 더 강한 복수심이었다. 딸애를 살리리라. 신의 뜻이 어떤 것이든, 나는 그 뜻을 거역하리라. 비록 그 애가 죽더라도 그 애의 영혼을 에뮬레이션하여 영원히 살 수 있게 하리라. 사이버 공간이면 어떤가 살아있 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여기서 목소리는 높아진 기분이 들었다. 트랜스 파워 5.0만 썼더라도 그 억양을 들을 수 있었을 텐데. 나는 좀 서글퍼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과연 그래서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이제 랩탑의 가치를 재보기 보다는 이 안에 들어있는 내용에 대한 호기심에 이끌려 목소리를 계속 들어나갔다. "나는 이 프로젝트를 '영혼의 에뮬레이터 : 세헤라자드 프로젝트' 라고 이름지었다. 내가 딸아이의 영혼과 육체를 롬파일로 만들고 얼마 지나지 않 아 현실 세계의 딸아이는 암으로 끝내 죽음을 맞이했다. 나는 사이버 세계 에서 생명을 이어갈 딸아이에게 새로운 이름을 붙여주었다. 신기하고 재밌 는 이야기를 듣기 좋아하고 또 만들어 내기도 좋아하던 딸이었기에 천일야 화에 나오는 세헤라자드로 이름 붙여주었다. 그때 그 애의 나이 열 일곱이 었다." 나와 동갑이로군.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에뮬레이터의 개발에 온힘을 기울였다. 다른 팀들도 에뮬레 이터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나는 이제 도저히 돌아설 수 없는 지점 을 지나고 있었다. 이제는 개발에 성공하던가, 그럴 수 없다면 죽던가 둘 중에 하나였다. 나는 그만큼 강한 각오로 이 일에 뛰어 든 것이다. 내 내부 에 내 아내를 빼앗아간 이들에 대한 복수심과 증오가 끓고 있었다. 어쩌면 나는 내 딸을 빼앗아간 신에 대한 복수심과 증오도 함께 가지고 있었는지 모른다." 목소리는 잠시 멈추어 선 다음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다시 이어졌다. "전혀 작동하지 않던 에뮬레이터들이 이제는 조금씩 작동하기 시작했다. 처음 작동에 성공한 '영혼의 에뮬레이터 0.2'는 비록 간단한 단어뿐이지만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비록 그래픽은 전혀 지원되지 않았지만. 나는 보 다 완전한 에뮬레이터를 만들기 위해 인체에 대한 공부를 해 나가기 시작했 다. 나는 자연스럽고 완벽하게 육체를 에뮬레이트하기 위해 먼저 해부학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동양 의학에 대해서도 더 치밀하게 공부해 나갔다. 물론 내 한국어나 중국어 일본어 실력은 턱없이 모자랐다. 나는 인 터넷의 힘을 빌어 유명한 동양 의학자들을 만나 보았다. 그들이 제공해준 인체에 대한 생생한 정보는 내 연구에 큰 도움이 되었다. 특히 동양 의학에서 나오는 경맥과 경혈에 관한 이야기들은 나에게 큰 도 움이 되어주었다. 이 자리에서 이 세부적인 지식을 다 기록한다는 건 어쩐 지 시간낭비라는 생각이 든다. 그냥 여기서는 인간의 몸에 흐르고 있는 기 가 A라는 지점에서 B라는 지점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A와 B의 관계 사이 를 흐르고 있는 것이라는 말만 남겨둔다. 조금만 더 말하자면 A, B, C 세 지점이 있을 때, 기는 세 지점을 직선적으로 '통과'하는 것이 아니라, A와 B와 C 사이에서 '존재'하고 있다는 말이다. 어찌되었건 내가 만든 에뮬레이 터들은 금세 버전업 할 수 있었고, 버전이 높아져 감에 따라서 발전에 발전 을 거듭했다. 내가 에뮬레이터를 개발하는데 가장 힘을 쏟은 부분은 바로 인체의 움직 임 부분이었다, 내 사랑하는 딸이 되살아났을 때,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는 육체가 없다면 얼마나 실망할 것인가. 나는 에뮬레이터에 내가 그 동안 수집한 여러 환자들의 롬파일만을 실험했다. 사랑하는 내 딸을 실험도 구로 사용할 순 없었다. 아내가 죽는 것을 무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고, 딸의 죽음 앞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남편으로서, 또 아버지로서 말 이다. 그런데 이러한 나의 생각은, 비록 단순한 감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지라도, 에뮬레이터를 만들어가면서 신체의 움직임이야말로 영혼의 정수임 을 깨닫게 해 주었다. 신체의 움직임 없이는 어떠한 정신도 존재 할 수 없 는 것이었다. 인간이 몸에 속해있는 심장, 위, 간장, 소장, 대장, 심지어 맹장이나 비장마저도 영혼을 구현하는 데는 필수적인 요소였다. 그것을 알 기까지 참으로 많은 시간이 필요했지만 말이다. 여기서 오해의 소지를 막기 위해 하나 덧붙이자면, 한 사람이 신체가 절 단된다고 해서 그것이 영혼의 소멸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을 해두고 싶 다. 인간의 몸에서 나오는 기가 어떤 부분이 손상된다고 해도 인간의 영혼 은 안정된 상태에 이를 수 있다. 신체의 일부를 상실한 사람이 팬텀 페인 (Phantom pain)을 겪는 것이 바로 그 이유이다.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그 사람은 원래 신체를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고, 실패한 에뮬레이터 프로그램 은 애당초 그러한 것이 프로그램에 들어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인간의 모든 신체와 조직에 대해 부분으로의 접근과 전체로의 접근을 병행 했다. 엄청난 양의 신체의 움직임과 그것보다도 더 복잡한 뇌의 움직임을 전부 에뮬레이션하는 작업은 더디고 또 더디기만 했고. 기를 직관적으로 파악해 전체적인 접근을 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혼자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작업 이었다. 그래서 나는 전 세계의 프로그래머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물론 그 중에서도 전에 소스를 나누었던 팀과의 협력이 내게는 가장 큰 힘이 되 어 주었다. 수많은 프로그래머들이 진행시킨 이 작업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성공은 결코 이루지 못했으리라. 이 자리를 빌어 그때의 프로그래머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그리고 그 동안 안부도 한 번 전하지 않았던 나를 용서해 주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지금에 와서는 그들의 생사 여부도 알지 못하지만 말이다." 목소리는 잠시 그쳤다가 다시 이어졌다. "시간이 지나갔다. 아무리 해도 끝날 것 같지 않은 이 작업은 이 일을 시 작한 프로그래머들을 하나 둘, 떠나게 했다. 내 머리에는 어느덧 흰머리가 눈에 띄게 늘었고, 주름살도 하나 둘 붙어 가고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인가 작업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은 나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몇몇 에뮬레이터 제작팀들은 불법으로 영혼을 롬파일화 한 것이 누군가의 신고로 발각되어 팀은 해체되었고 몇몇 프로그래머는 감옥으로 가게 되었다. 하지만 그 일이 아니었더라도 많은 팀들의 해체는 불가피했을 것이다. 모두들 심각한 자금 난에 허덕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에게도 그런 위기가 있었다. 그 동안 프로그래머 일을 하면서 만들어놓 은 저축도 바닥이 났고, 비축해 놓았던 식료품들도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 고, 당장이라도 밀린 집세 때문에 거리로 내 쫓길 판국이었다.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이 내가 영혼의 에뮬레이터를 개발하면서 얻은 기술을 이용해 트 랜스 파워라는 프로그램을 제작했다. 그 프로그램이 바로 내가 지금 사용하 고 있는 영혼의 에뮬레이터 0.2 버전이다. 나는 돈이 급했다. 이 성과는 나 만의 것이라고 결코 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별 수 없었다" 나는 여기까지 듣는 순간, 자신을 최후의 기사라고 밝힌 그 노인이 바로 트랜스 파워 시리즈의 첫 버전을 만들어낸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 다. 그렇게 대단한 프로그램을 만든 프로그래머라면 분명 떼돈을 벌었을 거 라고 생각했는데. 사람 팔자는 알 수 없다는 옛말이 새삼 들어맞는구나 싶 었다. 목소리는 다시 이어졌다. "나는 그 돈으로 다시 연구를 시작했다. 그리고 몇 번의 실패가 있었다. 물론 실패야 수도 없이 경험한 것이니 그 자체로는 나에게 부담이 된다던 가, 고통이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정작 문제가 된 것은 만들어진 에뮬레이 터들의 일부가 제대로 작동을 할 경우에 생기는 일 들이었다. 내가 주로 죽어 가는 환자들의 영혼을 롬파일로 만든 사실은 앞서서도 말 한 바 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영혼이 구동되었을 경우에 어떤 일이 벌어 질 것인지는 미처 예측하지 못하고 있었다. 죽음의 공포와 고통으로 신음하 는 영혼을 컴퓨터 모니터 앞에서 만나는 일은 정말이지 끔찍한 경험이었다. 그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고, 팔다리는 비정상적으로 뒤틀려 있었고, 그들의 입에서는 빨리 죽여달라는 호소만이 흘러나오고 있 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결코 놓아줄 수 없었다. 내 딸이 그런 고통을 겪 게 되는 것을 결코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작업이 완벽하게 성공 될 때 까지는 그들을 놓아 줄 생각이 없었다. 그런 나 자신을 바라볼 때면 나 스 스로도 내가 소름끼치게 느껴졌다. 나는 점점 괴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 PRINTER/CAPTURE를 OFF 하시고 [ENTER] 를 누르십시오. HiTEL───────────────────────────────────── 창작연재 (SERIAL) LN:김상현 #8558/10199 ━━━━━━━━━━━━━━━━━━━━━━━━━━━━━━━━━━━━━━━━ 제 목:[탐그루] 영혼의 에뮬레이터 - 3 - 관련자료:없음 29/29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0-22 14:27 조회:1579 탐그루 # 마법은 마음이다 - 마음은 칼이다 #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왜 그 노인이 세헤라자드 파일을 지워달라고 부탁했는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당장이라도 눈앞에 고통 받고 있는 영혼들이 나타날 것 같은 생각에 나는 랩탑을 집어던지고 다시 내 생활로 돌아가고 싶은 욕구가 일었다. 하지만 호기심은 내게 계속 들어 보라고 말하고 있었다. 하긴. 뭐, 어찌되었건 컴퓨터 속의 일이니까 나하고 는 관계없는 일이지. 그래서 나는 계속되어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 였다. "그리고 드디어 얼마 전, 나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에뮬레이터를 개발하 는데 성공하였다. 내가 갖고 있던 모든 롬파일들이 거의 완벽에 가깝게 구 동되었고, 실험 대상이 된 한 말기 폐암 환자는 내게 고통을 호소하면서도 거의 완벽한 인간의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이제 나는 냉정해져야 했다. 드 디어 세헤라자드를 되살려야 할 때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세헤라자드를 살려 낼 준비를 하면서도 나는 그래도 만약을 대비하여 고통받고 있는 영혼 이 담겨있는 파일들은 남겨두었다. 그 영혼들에게도 사죄의 말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한다. 물론 그들이 나를 결코 용서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알고 있 지만." 목소리는 다시 한 번 끊어졌다. 그리고 얼마의 간격을 두고 목소리는 다 시 이어지기 시작했는데, 아마도 세헤라자드 파일의 실행을 눈앞에 두고 있 는 모양인지 대단히 흥분하고 있다는 것이 기계음 저 편에서 느껴졌다. "그 동안 나는 내 딸을 다시 살려내기 전에 해야할 준비 작업들을 마쳤 다. 말기 암 환자도 내가 내린 처방에 관대했다. 처음에 나는 강렬한 마약 류의 진통제를 투입하는 기능을 에뮬레이터에 첨가했다. 기록을 위해 정확 하게 말한다. 나는 강력한 진통제가 투여됐을 때 인체에 흐르는 호르몬이 인간의 몸에서 작용하는 것을 에뮬레이터 상에서 영혼과 함께 구동시켜도 보았다. 하지만 별 효과는 없었다. 진통제는 말 그대로 진통제일 뿐이었다. 약효가 떨어지면 에뮬레이션된 영혼은 더욱 고통스러워했다. 그래서 나는 아예 고통을 느끼는 감각을 차단하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그저 차단시켰을 뿐 삭제한 것은 아님을 분명하게 밝혀두는 바이다. 앞서도 설명한 바와 같이 인간의 몸은 하나로 구동되는 일체형 컴퓨터와 마찬가지 이기 때문에, 그 기능 중 하나만 사라진다고 해도 전체의 작동이 미묘하게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지가 다 잘려 나간 인간도 영혼을 가지 고 있듯이 존재하는 어떤 감각을 차단한다고 해서 에뮬레이터가 작동을 하 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 발상은 그리 어렵게 나오지 않았다. 과거에 내가 게임기 에뮬레이터를 만들 때에도 게임기에는 없던 기능을 첨가시키거나 일 부 차단시키는 작업은 얼마든지 해 보았기 때문이다. 내가 실험한 영혼들은 하나같이 만족해했다. 그리고 그제야 나는 그 영혼 들을 자유롭게 해 주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행위라고 나를 비난해도 좋다. 하지만 환자들의 영혼을 담은 파일들은 언제나 내게 벗을 수 없는 짐 과도 같았다. 나는 작업이 성공하자 그들을 놓아주어야겠다는 생각 말고는 다른 생각은 결코 할 수 없었다." 목소리는 죄의식에 젖는 듯 잠시 동안 조용했다. "이제 나는 내가 만든 이 영혼의 에뮬레이터 최종 버전을 실행시키려고 한다. 이제 나의 사랑하는 딸은 되살아 날 것이고, 내가 그 동안 키워왔던 복수심과 증오도 끝날 것이다. 내게 신의 저주가 내릴 것이라고 말한 자들 이여 이젠 상관없다. 이제 작업이 끝났으니 나는 어떤 저주라도 달게 받을 것이다." 목소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끊어졌다. 드디어 그 노인이 세헤라자드 파 일을 실행시킨 모양이었다. 나는 잠시 동안 담배를 피우며 생각을 해 보았 다. 과연 그 노인에게 어떤 일이 생겼기에 자신이 일생동안 해온 작업을 모 두 포기하도록 만든 것일까? 어쩌면 세헤라자드는 무시무시한 귀신이 되어 나타났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미친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났는지도 모르고.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이젠 다 끝난 줄 알았던 나는 몸을 일으켜 세우며 스피커에 신경을 집중시켰다. ".....무슨 얘기를 해야 할까......다 부질없는 짓이었다고 해야 할 까...... 아니면 너무나도 허망하다고 해야 할까...... 세헤라자드는 내 딸 이 아니었다. 그렇다 그들이 고통받는 모습을 보았을 때, 나는 내 딸을 자 유롭게 놓아 줬어야 했다. 하지만...... 이제는 너무 늦었다. 너무 늦어버 렸다. 지금 나는 내가 지금까지 이룬 작업을 모두 지우려고 한다. 그리고 내가 목숨처럼 여기고 아꼈던 이 랩탑을 아무에게라도 전해주려고 한다. 그 래도 내 손으로는 지울 수 없기에. 내가 이룬 필생의 프로그램인 영혼의 에 뮬레이터를 그리고 내 딸을 내 손으로 지울 수는 없었다. 만약 내가 랩탑을 준 사람이 이 말을 듣게된다면 그 사람은 이 파일을 작동시켜 볼만큼 호기 심이 있는 사람일 테니 이 기록을 남겨 두게겠다. 누군가는 이 사실들을 알 기 바란다. 누군가에게라도 말하고 싶었다. 그게 전부다. 호기심은 패망의 지름길이기도 하지만 성공의 지름길이기도 하다. 인간은 그렇게 발전해온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꼭 지워주기를 바란다. 내 사랑하는 딸을 해방시켜 주기 바란다. 내 손으로는 할 수 없었던 일이다. 나는 내 딸을 두 번 죽일 순 없었다. 그리고 아무도 이 이야기를 듣지 않길 바라며 이 이야기를 남긴 다. 이 파일은 자동으로 삭제될 것이다." 여기서 프로그램은 종료되었고, 곧이어 자동으로 삭제가 되었다. 그리고 난 후, 나는 세헤라자드의 실행 파일 앞에서 고민을 하게 된 것이다. 담배 가 필터까지 타들어 간 줄도 모르고 말이다. 벌써 시간은 한 밤중이 되어 있었다. 창 넘어 보이는 밖으로 거리의 불빛 들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하늘은 언제나 그렇듯 검붉은 빛을 띄고 있었다. 지상에 켜진 불빛들이 대기 중에서 산란 현상을 일으키기 때문에, 어두운 하늘은 검은 색이 아니라 언제나 붉은 색이다. 언젠가 하늘이 푸른색이었던 시절의 밤의 하늘은 검은 색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위로는 엄청난 행성 과 항성들이 반짝이고 있었다고 한다. 왜 정부나 WCC는 왜 검은 하늘을 되 찾자는 캠페인은 벌이지 않는 걸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나 자신이 우습게 생각된다. 그냥 지워버리면 그 만인 파일 앞에서 나는 태연한 척 이렇게 아무 생각이나 하고 있는 것이다. 고민은 무슨 고민. 그냥 한 번 띄워보고, 그리고 그냥 지워 버리면 되잖아. 그래서 결국 나는 세헤라자드를 실행시키게 되었다. 처음에 zknight를 실 행시켰을 때 그렇게 했듯이, 나는 세헤라자드를 키보드를 이용해 한 자 한 자 입력하였다. 그리고 엔터 키를 치자, 화면이 어두워졌다. 화면은 순간 검은 색이 되었다. 나는 모니터의 검은 색을 바라보면서 문득 하늘을 떠올 렸다. 그리고 한 소녀의 형상이 나타났다. 노인은 허풍을 친 게 아니었다. 화면 안의 소녀는 정말로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림이나 사진, 혹은 동영상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모습이었 다. 그런데 영혼이 어떻게 옷을 입고 있을까? 음. 그런데 화면 속의 소녀가 나를 보고 있군. "아버지는 어디 가셨죠? 당신은 누구세요?" 소녀가 말했다. 조금 당황한 듯한 모습이었다. 소녀의 목소리는 노인이 남긴 기계음과는 달리, 정말로 사람의 목소리 같다고 느껴질 만큼 정교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시디음질이라고 해도 이렇게는 재생하기 어렵겠는 걸. "저는 세헤라자드라고 합니다. 지금 저를 보고 계신 분의 이름은 어떻게 되시나요?" 잠시 후, 상황을 파악했는지, 소녀가 침착을 되찾고 나에게 이렇게 물었 다. 그런데 나는 하마 터라면 세헤라자드의 질문에 대답을 할 뻔했다. 이건 프로그램이라구, 프로그램. 착각을 하다니, 원. 나는 키보드로 대충 AAA라 고 적어 넣으려고 했다. 그런데 아무 글자도 안 써지잖아, 이거. 대화창도 없구. "그냥 말씀하시면 됩니다. 이 랩탑에는 음성인식 기능이 장착되어 있으니 까요" 아하, 이런 식으로 튜닝이 되 있었군. 세헤라자드의 말을 듣고 나는 내 이름을 또박또박 말해주었다. 하지만 어쩐지 사람하고 이야기하고 있는 기 분이 드는 걸. "아버지는 어디로 가셨나요?" 세헤라자드가 다시 물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하려고 노력하는 기색 은 보였지만, 뭔가 답답한 듯한 표정이었다. "몰라. 그냥 사라졌어. 어디론가 가버렸어, 나한테 이 랩탑을 건네주고는 말이야" 내가 말했다. "아버지가 그냥...? 설마...? 그냥 가시다니......." 놀랍다는 듯 말한 뒤, 세헤라자드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이어서 천천히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불쌍한 분. 일생을 노력한 결과를 보시고 실망을 하시다니, 한 번도 제 대로 실행 시켜보시지도 않고 말이에요." 세헤라자드는 이렇게 말하고는 슬픈 표정을 지었는데, 그 표정이 너무나 정교해서 나는 내가 사람을 마주하고 앉아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런데 왜 저는 여기에 와 있지요?" 세헤라자드가 물었다. "그야 너희 아버지가 나한테 랩탑을 건네줬으니까"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음. 이거 재미있군. 정말 사람이랑 말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유가 뭔가요?" 다시 세헤라자드가 물었다. "세헤라자드 파일을 (까딱했으면 나는 '너'라고 말할 뻔했다) 지워달라고 했어" 내가 말하자 세헤라자드는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 표정은 놀랐 다기 보다는 공포와 두려움으로 가득한 얼굴이었다. "설마...저를...정말 지우실 생각은 아니시겠죠?" "별 수 없잖아. 너희 아버지 부탁은 이 파일을 지워달라는 거였고, 그 대 가는 이 랩탑이었어. 이걸 지워야 내가 다른 프로그램을 깔지. 지금은 너 때문에 내 마음대로 할 수도 없으니 말이야" 나는 이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내가 듣기에도 내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 다. 말하는 프로그램을 과연 지울 수 있을까? 이것도 살인 아닐까? "잠깐만요. 저는 사람이에요. 비록 컴퓨터 안에서 작동되는 프로그램의 형태로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저를 지운다는 건 사람을 죽이는 것과 같은 행 위예요" 세헤라자드는 내가 세상에서 단 한 번도 본적이 없는 불쌍한 표정으로 말 했다. 나는 점점 마음이 약해져 가는 것을 느꼈다. "사람을 죽이는 거 하고 같은 행위인지는 몰라도, 프로그램은 프로그램이 야. 안 그래?" 나는 주말동안 랩탑을 포맷시키고 프로그램을 깔 생각을 하며 마음을 다 잡아먹고서 이렇게 말했다. "안돼요. 제가 하고 싶은 일이,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은데. 제가 앞 으로 평생 당신을 도와 드릴 수 있다는 걸 모르시겠어요? 여기선 시간도 의 미가 없고 공간도 의미가 없어요. 저를 활용하신다면 얼마든지 하고 싶은 일을 하실 수 있어요. 돈이 필요하세요? 당장 만들어 드릴 수 있어요. 케이 블만 연결해 주세요. 자료를 찾고 싶으세요? 제가 얼마든지 찾아 드릴 수 있어요. 그러니 제발......" 세헤라자드는 필사적으로 말했다. 얼마나 필사적이었는지 나는 세헤라자 드가 모니터 바로 뒤에 실제로 존재한다고 여겨지기까지 했다. 꼭 유리 창 넘어의 사람처럼. "하지만 약속했는 걸. 너희 아버지하고 말이야. 너를, 아니 세헤라자드 파일을 꼭 지워 주겠다고 말이야. 그 대가로 랩탑을 받은 거라구. 날 좀 이 해 해줘" 나는 점점 세헤라자드에게 말려 들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내 또래 남자 치고 미소녀를 싫어하는 남자는 없을 것이다. 나도 내 하드디스크에 미소녀 관련 게임이 수도 없이 많이 들어 있다. 그런데 지 금 내 눈앞에, 완벽한 음성 지원까지 되는 미소녀의 동영상, 그것도 인공지 능까지 갖춘 동영상이 작동되는 프로그램이 있는 것이다. 도대체 왜 그 노 인은 이런 완벽한 프로그램인 세헤라자드를 지워달라고 했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해를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면 들수록 내가 세헤라 자드를 지우기는 어려워지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만약 저를 죽인다면 죽어서 귀신이 되어서라도 당신을 저주할 거예요"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세헤라자드는 듣기에도 끔찍한 음성으로 표독스러 운 얼굴을 하고서 나에게 말했다.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상식을 앞 세우기 전에 그 무시무시한 얼굴에 기가 질렸다. "아니...내 말은......" 나는 나도 모르게 변명을 하려고 하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겨우 프 로그램 앞에서 이렇게 쩔쩔매고 있는 꼴이라니. 어이가 없다는 생각도 들었 고 어쩌면 좋을 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너희 아버지가 왜 널 지워달라고 했는지는 몰라도 다 죽어 가는 늙은이 의 마지막 부탁이라고 했어. 제발 내 입장을 이해해 줘. 거기다가 이 파일 을 지우지 않으면 나는 공짜로 얻은 이 랩탑도 쓰지 못하게 된다니까" 나는 그래도 끝까지 내 입장을 세헤라자드에게 전해보려고 했다. 간절한 눈빛으로 내게 말했던 노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하지만 왜, 세헤라자드를 지워달라고 말했을까? "좋아. 너, 한 번 날 지워봐. 아마 평생 동안 후회하게 될 거야. 내가 가 지고 있는 비밀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들, 내가 바라고 또 이루어 갈 수 있었던 모든 일들... 넌 평생동안 그런 걸 생각하면서 늙어가게 될 걸? 흥. 한 번 지워 봐. 간단해. 커서를 내 파일 위에다 놓고 삭제키만 누르면 되니까" 세헤라자드는 이번에는 배짱으로 나왔다. 정말 인간이 아니라면 할 수 없 는, 아니 인간이라고 해도 보여주기 어려운 여러가지 성격을 세헤라자드는 동시에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데, 나 원 참, 세헤라자드가 배짱으로 나오니 까 왜 웃음이 나오는 거지? "어? 웃어요? 남은 지금 심각한데..." 이번에는 뾰루퉁한 표정이었다 마치 만화 속의 미소녀 주인공 같은 표정 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다시 한 번 웃음을 짓고 말았다. "재미있는 걸 보여 드릴까요? 혹시 게임 좋아하세요? 제 아버지가 만든 프로그램에 대해서 알고 있어요?" 세헤라자드가 물었고 나는 전혀 모른다고 대답했다. "잠시만요..." 잠시동안 세헤라자드는 눈을 감고 가만히 있었다. 꼭 'NOW LOADING...'하 는 문자가 화면에 뜬것처럼 말이다. "이제 됐어요." 세헤라자드는 말했고, 세헤라자드의 뒤편으로 형편없는 그래픽의 2차원 영상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러 종류의 유치한 로봇들이 나와 빔을 쏘거나 무쇠팔을 날리며 싸우고 있는 모습이었다. 게임은 게임인 모양인데 정말 오 래 된 게임인 모양이군. "아버지가 개발에 성공하셨던 게임 에뮬레이터로 실행 할 수 있는 16비트 게임 화면이에요. 정말 인기 있었던 게임이지요. 제목은 4차......" "저건 도대체 언젯적 게임이야? 저런 것도 게임이라 할 수 있나? 난 저런 게임은 안 해. 이래봬도 난 프로 게이머가 될 사람이라구" 나는 세헤라자드의 말을 자르고 말했다. 어디서 후진 게임 하나 보여주면 서 시간을 끌어보려고 하다니. 그제야 나는 정신을 차리고 노인과 한 세헤 라자드를 지워주겠다고 한 약속을 떠올렸다. "게임을 겉만 보고 판단해선 안돼요. 무척이나 오래된 게임이지만 한 번 시작하면 밤새는 줄 모르며 하게 될 걸요." "미안하다. 네가 어떻게든 해보려는 건 알겠지만. 이제는 지워야겠어. 그 러고 보니 시간도 너무 많이 지났군. 이제는 너를 지우고 새로운 프로그램 이나 깔아야겠어. 네가 무슨 소리를 하든 상관없어" 나는 이렇게 말하고 프로그램 작동을 중지시키려고 했다. 지금 중지시키 지 않으면 영원히 세헤라자드를 지울 수 없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때였다. "잠깐만요. 그럼 어떤 게임을 가장 좋아하세요?" 다급하게 세헤라자드가 나에게 물었다. 나는 별 생각 없이 '소드 엔 매직 5'를 가장 좋아한다고 말해주었다. "중세를 배경으로 하는 게임인가요? 네트워크 플레이도 당연히 지원하겠 지요? 그렇다면 저를 통신망에 연결만 시켜주세요. 그럼 세계 어디에 있는 게이머하고도 당장 연결할 수 있어요. 그리고 제작회사가 '소드 엔 매직 6' 를 개발하고 있다면 그 프로그램도 빼올 수도 있어요. 아니.... 제가 그 게 임을 당신의 마음에 꼭 들게 다시 만들어 줄 수도 있어요. 정말이에요. 믿 어주세요" 세헤라자드가 말했다. 이 말에 나는 마음이 크게 흔들렸다. 그런데 문득 노인이 남긴 말 중에서 통신상을 떠돌아다닌다는 쥐 생각이 났다. "통신을 통해서 프로그램을 구해 온다구? 아니, 네가 여기 있는 데 어떻 게 구해 올 수 있다는 말이야? 이 랩탑에 통신프로그램 같은 건 없지 않 아?" 나는 일부러 비웃는 투로 말했다. "아니, 저를 뭘로 보시는 거예요? 이래봬도 전화선 한 가닥만 있으면 전 세계 어디든 가고 싶은 곳으로 다 갈 수 있다고요" 세헤라자드가 말했다. 음. 걸려들었군. "그러니까 여기서 도망칠 수 있다는 말이구나?" 나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말하는 내 표정은 꽤 음흉해 보였으리라. 하지만 유도심문에 넘어간 세헤라자드가 멍청한 거지 내가 멍청한 건 아니 다. "그건......" "됐어. 나한테 별 도움도 되지 않고 도망칠 궁리나 하는 프로그램을 좋아 하는 게이머는 세상에 없어. 그럼 이만 작별하자구" 나는 이렇게 말하면서 전원을 끄려고 했다. 내 말은 글자 그대로 사실이 었다. 내가 미소녀를 좋아하는 것도 사실이고, 처음 보는, 아니 어쩌면 세 상에 단 하나 뿐인지도 모르는 프로그램을 지우고 싶지는 않았지만, 만약 전화선을 연결했다간 언제 도망갈지도 모르는 프로그램을 노인과의 약속까 지 어겨가면서 계속 실행시킬 이유는 없지 않은가? 게다가 이 프로그램을 지우지 않으면 나는 이 랩탑을 쓸 수도 없게 된다. "잠시만요" 이번에는 정말 다급한 목소리로 세헤라자드가 말했다. 하지만 말하는 얼 굴에는 힘이 없었다. "정 그러시다면 이젠 별 수 없는 것 같네요. 화도 내 보고, 재롱도 피워 보고, 협박까지 해 봤지만 아무 소용없군요. 그럼 마지막으로 제가 부탁 하 나만 드릴께요" 부탁이라...... 나는 좋다고 말했다. 사형수도 마지막 소원은 들어주는 법이라는데 까짓 부탁 하나 들어주지 못할게 뭐람. " '소드 엔 매직' 시리즈를 좋아한다고 하셨죠? 그럼 제가 얘기를 하나 해 드릴께요. 만약 얘기를 듣다가 재미없다면 언제라도 절 지우셔도 좋아 요." 세헤라자드는 이렇게 말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정말 애처로운 모습이었 다. 내가 현실이든 사이버든 내가 본 그 어떤 미소녀보다도 더. "그래, 좋아. 한 번 시작해봐. 하지만 그 눈물은 닦으라구. 난 그런 모습 보는 거 싫어" 만질 수만 있다면 손수건을 전해주고 싶은 심정으로 내가 말했다. 내 말 이 효과가 있었는지 세헤라자드는 눈물을 닦고 숨을 크게 들이쉬더니 말하 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여기가 아닌 곳에서 지금이 아닌 시간에 있었던 일이에요." "잠깐. 꽤 긴 얘기인 모양이지?" 그러고 보니 저녁 식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이렇게 말했다. 이왕 이야기를 들어주는 거, 제대로 들어주지. "무척 길 수도 있고, 아주 짧을 수도 있어요. 순전히 당신 마음 아니에 요?" "좋아, 그럼 잠깐만." 나는 냉장고를 열고 냉장고 안에 있던 냉동 도시락과 콜라를 꺼내, 냉동 도시락은 전자렌지에 데우고, 콜라는 컵에 따른 후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 다. "좋아. 얘기해봐" "처음부터 다시 말씀드리지요. 그러니까 여기가 아닌 곳에서, 지금이 아 닌 시간에 있었던 이야기예요." "그러니까 어디?" "여기가 아닌 곳, 바르도 대륙이죠." 바르도? 처음 듣는 이름이군. "그러니까 정확하게는 바르도 대륙의 비스토브레 제국이 비스토브레 왕국 이었을 시절부터 이야기는 시작돼요. 비스토브레 왕국은 동쪽으로는 스파 일, 서쪽으로는 타실, 그리고 중앙에 자나크라는 세 개의 주(州)로 이루어 진 국가였어요." 음. 어쩐지 내가 좋아하는 '소드 엔 매직' 시리즈의 이야기 같군. 그렇다 면 좋지. 이런 종류의 모험담을 듣는 일은 항상 신나는 일이니까. "그런데?" "그러니까 이 얘기는 왕국의 흥망과 제국의 건립에 관한 이야기예요. 이 긴 이야기는 자나크의 크지 않은 도시 탐그루에서 시작됩니다. 탐그루라는 도시에 성년식이 얼마 남지 않은 수르카라는 한 소년이 있었어요......" 세헤라자드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N:김상현 #8593/10199 ━━━━━━━━━━━━━━━━━━━━━━━━━━━━━━━━━━━━━━━━ 제 목:[탐그루] 별빛주점의 두 소년 - 4 - 관련자료:없음 17/17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0-23 09:07 조회:1635 탐그루 # 마법은 마음이다 - 마음은 칼이다 # '...... 대 마법사 아킨은 마법과 칼이 본질적으로 마음의 발현이라는 점에 서는 같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대 마법사 아킨은 왜 일생 동안 칼을 사용하 는 것을 반대했을까? 마법은 마법사의 의지가 그대로 투영되어 작동하지만, 칼은 검사의 의지에 영향을 주는 것이라고 대 마법사 아킨은 말한 바 있다. 즉, 마법은 사람이 가 지고 태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마음 그 자체에 가깝지만 칼은 누군가를 죽이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기 때문에 마음이 마법을 낳는 것과는 반대로 칼이 마음을 변하게 한다는 생각으로 칼을 사용하는 것을 대 마법사 아킨은 반대하였던 것이다. 당시에 빈번하기 시작한 성구(聖具)의 보급을 반대하였던 이유도 거기에 있 다. 아킨이 성구의 사용을 반대하면서 든 근거는 다음 두 가지이다. 먼저 성구 의 보급은 단기적으로 인간이 가지고 태어나는 마법을 사라지게 할 우려가 있 다고 대 마법사 아킨은 말했다. 이 말은 아킨이 마법이 사라지게 될 것을 우 려했다기 보다는 마음 그 자체가 사라지게 될 것을 우려했던 것이라고 여겨진 다. 그리고 이처럼 마법이 기술적인 측면으로만 발전하게 된다면 장기적으로 는 마법이 칼처럼 변이하게 될 것이라고 대 마법사 아킨은 말했다. 그렇다면 최종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라고.......' - 대 마법사 아킨 사후에 출간된 "마법의 역사:대 마법사 아킨의 일생" 중 '....... 나는 이 자리에서 국경을 지키고 있는 병사들을 치하하면서 다음 과 같은 말을 남기고자 합니다. 칼과 마법은 마칸의 일족들을 막아내는데 큰 힘을 발휘하였습니다. 특히 마 법사가 가지고 있는 마법의 힘은 마칸이 부리는 괴물들의 능력을 봉인해 그들 을 멸절시키는데 큰 역할을 한 것을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럼으로 해서 오늘날 마법사들이 칭송 받는데 비해 검사들을 상대적으로 비하 하는 풍토가 생긴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분명 칼로는 불을 일으킬 수도, 물을 다스릴 수도 없습니다. 더군다나 마칸 의 일족을 모조리 죽여 버릴 수는 있을지언정 마칸의 일족을 봉인할 수 없다 는 점 또한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러나 칼이야말로 인간의 마음을 담은 도구임을 우리는 또한 잊어서는 안 됩니다. 마법의 힘으로 국경의 바바 족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마법의 힘으 로 불경한 의도를 지닌 반란자들을 처단할 수 있었겠습니까? 물론 가능할 것 입니다. 마법사를 국경이나 반란이 일어났던 시스코로 파견했다면 말입니다. 저는 여기서 중요한 점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바로 마법사를 국경이나 시스코 로 파견하는 일이 칼의 힘이라는 점이 바로 그것입니다. 칼의 힘이야말로 자 신과 타인의 마음을 바꾸어 세계를 바꿀 수 있는 유일한 힘입니다. 칼은 선을 악으로 악을 선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칼은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는.......' - 아킨의 봉인 이후 네 번째 열린 왕국 상임 위원회에서 초대 국왕 기사단 단장 카를로스 카를로스의 발언 중 * 별빛 주점의 두 소년 내가 살고 있는 도시 탐그루는 거대한 자나크 주(州)의 많은 도시들 중 하 나에 불과하지만, 늘 여행객들로 붐비고 있는, 그래서 언제나 활기가 넘치는 도시이다. 그도 그럴 것이 수도가 있는 타실에서 스파일로 가는 여행객이나 스파일에서 타실로 향하는 여행객들 중 상당수가 내가 살고 있는 탐그루를 지 나쳐야 하기 때문이다. 자나크 주를 지나가는 여행객들은 베논이나, 하잔, 아니면 우리 탐그루 중 하나의 도시를 지나쳐야 한다. 물론 이 세 도시 중에서 우리 도시를 지나가는 여행객들이 가장 많다. 당신이 여행객이라면 언제 산적 떼의 습격을 받을지 모르는 하잔이나 베논보다 안전한 운하를 택하지 않겠는가. 대청하(大靑河)를 따라 끝도 없이 이어지는 여행길 도중에 만나는 이곳 탐그루는 모든 여행객들 에게는 오아시스나 다름 없다. 피곤에 지친 몸과 마음을 이곳에서 회복할 수 있고, 어떤 배라도 정비할 수 있는 시설이 있고, 탐그루에서 살 수 없는 것은 비스트브리아 제국 어디에서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 세 도시 중 어떤 도시도 거치지 않고 직접 팜 산맥을 넘는 사람들 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십중팔구 살인자이거나 반역죄로 쫓기는 몸이다. 탐그루에는 국경 지대인 스파일에 배치 받은 군인들이나 한 무리의 뮤 때들 을 이끌고 지나는 상인들, 혹은 방랑 무사나 용병들로 늘 붐비고 있다. 여관 이란 여관에는 늘 새로운 여행객들로 가득하고 술집에는 군인이나 무사, 용병 들이 언제나 술판을 벌이곤 한다. 이런 여행객들로 가득한 도시에서 열 네살 이 되지 않은 소년이 할 수 있는 일은 둘 중에 하나이기 쉽다. (열네 살이 채 되지 않은 소년이 일해야 한다면 그 소년이 고아이거나, 그 소년의 부모가 마 칸족의 악마인 두 경우 밖에는 없지 않을까.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부모님의 얼굴을 본적이 없다.) 여관이나 술집에서 손님을 끄는 호객꾼이 되거나 소매 치기가 되는 일. 어떤 일을 하건 간에 둘 모두 불법이며 어린 소년에게는 힘 든 일이라는 점은 마찬가지다. 호객 행위가 불법이라고 한다면 조금 의아하게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 겠지만 자나크 주의 영주 가이르 오르파의 명에 따라 호객 행위는 엄연한 불 법행위이다. 가이르 오르파는 이런 작은 도시에 배치 받은 자치대의 수입이 적다고 생각해서 그랬는지 호객 행위를 몇 해 전 불법으로 정해 버렸다. 물론 그 덕에 호객꾼들의 위험은 늘고 벌이는 줄었으며, 자치대의 벌이는 늘어났다. 그렇다고 해서 호객꾼과 소매치기가 똑같다는 말은 아니다. 소매치 기는 자치대의 수입과는 관계가 없다(물론 자치 순찰대가 소매치기를 적발했 을 경우에 소매치기의 지갑을 소매치기한다면 수입과 관계가 생기겠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아직 열네 살이 되지 않았지만이 두 가지 일 중 어 느 쪽에도 해당되지 않는다. 그런데 간혹 나를 꼬마야! 하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 꼬마라니! 이제 다음 주, 성년의 신 마소드의 날이 돌아오면 성년이 되 는 나를. 꼬마라니! 물론 나를 아는 사람들이라면 내가 키가 좀 작다고 해서 그렇게 함부로 부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나를 꼬마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긴 칼을 차고 있는 방랑 무사나 군인 뿐이다. 그러니까 그렇게 날 부르고도 다리뼈가 온전할 수 있다면 날 그렇게 불러도 좋다. 사실 나는 목도(木刀)쓰 기에는 자신이 있다. 내 목도 솜씨를 잘 모르는 사람은 내 주변에 없다. 물론 나보고 꼬마라 부르는 사람도 내 주변에 없다. 나는 아주 어릴 적부터 목도를 쥐고 노는 것을 좋아했다. 내 또래의 다른 아이들처럼 위대한 복수자 검객 아케르의 흉내를 내며 노는 코흘리개 시절을 지나 약식 결투를 통해 누군가의 다리뼈나 팔목을 분지를 수 있는 열 한두 살 의 나이를 거친 나의 칼솜씨(?)는 이 근방에선 적수가 없다. 나는 성년을 눈앞에 둔 지금까지 목도를 가지고 놀곤 하지만 내가 누군가의 종지뼈를 부순다거나 하기 전까지는 아무도 말리지 않는다. 목도는 성인이 되 지 않은 사람이 소유할 수 있는 무기류 중 유일하게 불법이 아닌 무기이기 때 문이다. 물론 내가 정식으로 검술 도장을 다녔다던가 하는 것은 아니다. 검술 도장은 돈 많은 상인의 아들이나 귀족의 자제 분들이나 다니는 곳이지 나 같 은 평민에게 열려 있는 문이 아니니까. 내가 어떻게 칼을 잘 쓰게 되었는가는 묻지 말아 달라. 나도 잘 모르니까. 누군가는 풀잎을 꺾어 피리를 만들어 부는 일에 소질이 있고 누군가는 나무를 깎아 위대한 검객 아케르의 얼굴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처럼 그저 그 렇게 되었을 뿐이다. 어느날 깨어보니 내 목검이 바람을 가르고 있었다고나 할까. 나에게 무술 학원에 다닐 만한 돈을 줄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나도 내 주변의 대부분 또래들이 그렇듯이 삼 년 전쟁이 만들어 낸 고아 중 하나이 기 때문이다. 십 년 전, 왕이 있는 수도(首都) 타실과 국경지대를 수비하고 있는 스파일 이 무슨 이유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서로 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어떤 사람은 스파일의 군사력이 타실의 군사력을 감히 능가하였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흉년이 들었다는 핑계로 타실이 곡물 수출 가격을 지나치게 많이 올린 때문이라고 하기도 하지만 그게 무슨 소리인지 난 잘 모른다. 정치는 귀 족들의 몫이지 평민의 몫은 아니니까. 타실 사람과 스파일 사람을 구별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스파일 사람 은 보통 제복 같이 딱딱한 복장을 주로 입고 다니고 타실 사람은 보통 화려하 고 장식이 많은 옷을 주로 입기 때문에 겉모습에서부터 차이가 난다. 그리고 만약 어떤 사람이 '스파일 놈들은 하나같이 무식해. 타실 사람들은 모두 교양 있고 예의가 바르지'하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분명 타실 사람이다. 그리고 어 떤 사람이 '타실 놈들은 하나같이 약해 빠졌어. 스파일 사람들은 용맹하고 강 하지'하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분명 스파일 사람이다. 주점에서 두 사람이 아 무 이유도 없이 싸우고 있다면 둘 중 하나는 분명 타실 사람이고 나머지 한 명은 스파일 사람일 것이다. 두 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별로 서로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 어찌되었건 스파일과 타실간에 벌어진 삼 년 전쟁 때문에 이곳 탐그루는, 자나크 주 전체가 그랬지만, 스파일 군과 타실 군의 격전지가 되었고 수많은 남자들이(아이와 여자도 상당수 포함해서) 죽어버리고 말았다. 왜 타실과 스파일의 일에 자나크와 탐그루가 격전지가 되었는지는 이해가 가 질 않는다. 스파일의 일은 스파일에서, 타실의 일은 타실에서 해결해야 하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 사람들은 타실과 스파일 사이에 지역감정만 없다면 비스 토부리아 제국이 지금 보다 백배는 더 좋아질 거라고 말한다. 나도 그렇게 생 각한다. 내가 삼 년 전쟁에 대해서 확실히 알고 있는 사실은 그저 그 전쟁 때문에 나도 다른 아이들처럼 부모를 잃었다는 사실뿐이다. 고아들 중 상당수가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되었고, 왕실은 그 많은 길바닥에서 울고 있는 아이들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마음대로 선정한 대리 부모들이 고아들을 기르도록 명을 내렸 다. 그러나 그 결과는 뻔했다. 사람들은 그 명을 '돈 안들이고 말로만 때우려 는 정책'이라고 불렀고(다른 많은 정책들이 그렇게 불렸던 것처럼) 대부분 그 정책을 무시하였다. 대리 부모 정책이 잘 시행되지 않자 국왕은 서둘러서 양 자를 받아 줄 경우 세금 감면과 약간의 포상을 약속했지만 그것은 더욱 좋지 않은 결과를 불러왔다. 많은 대리 부모들이 서류상의 대리 부모가 되었고 아 이들은 여전히 고아 신세로 남게 된 것이다(그 과정에서 자치 대원들과 가짜 대리 부모간에 뇌물이 오갔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심지어는 멀쩡히 부모가 있는 아이들도 세금 감면과 약간의 포상을 노린 나쁜 사람들에게 유괴 돼 타실에서 스파일로 스파일에서 타실로 팔려가기도 했다고 한다. 운이 좋은 몇몇 아이들은 대리 부모 밑에서 행복하게 살기도 했다. 그러나 적어도 이곳 탐그루엔 수많은 아이들이 이름뿐인 부모만 있는 부랑아가 되어 살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고아들이 부랑아가 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내 경우와 같이 조금 운이 좋은 경우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니 까 대리 부모도 가지고 있고(가짜든 진짜든) 일자리도 가지고 있는 경우를 말 한다. 나는 별빛 주점을 운영하는 과부 이무르 아주머니의 양자인 동시에 다 른 일자리를 가지고 있다. 이무르 아주머니는 다른 대리 부모처럼 국왕의 시책을 우습게 생각했고, 내 게 잠자리를 제공해 준다던가 따뜻한 식사를 매일 식탁에 차려 주는 대신 내 엉덩이를 걷어차며 '죽고 싶지 않으면 알아서 돈 벌어와!'하고 소리를 질렀 다. 그래도 가끔씩은 눈물이 나올 정도로 따뜻하게 대해줬다. 나는 내 부모님이 누구인지 기억할 수 없지만, 적어도 자존심은 있는 남자 였다. 그래서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내가 택하게 된 일은 지금 내가 살고 있 는 '예언의 눈동자'에서 예언자 사비오의 시중을 드는 예언자 보조역을 맡아 거기에서 잠자리와 먹을 것을 해결하게 되었다. 다른 예언자의 집을 가 본 적이 없어서 잘은 모르지만 예언자가 보조를 두 는 일이 보통 있는 일은 아닌 듯 싶다. 모든 예언자들이 앉은뱅이에 눈은 침 침하고 귀는 들리지 않는 데다가 희게 센머리마저 얼마 남지 않은 사비오 영 감 같은 꼴로 늙지는 않았을 테니 말이다. 어찌되었건 나는 사비오 영감이 앉 은뱅이에 반 귀머거리인 것에 깊이 감사하고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과 일 가게에서 과일을 나르는 일을 하고 있거나 술집에서 술잔을 닦고 있거나, 아니면 뮤를 대여해주는 가게에서 뮤 똥을 퍼 나르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 다. 물론 돈 대신 채찍을 맞아가면서(미성년의 아이에게 돈을 주는 사람이 과 연 있을까?). 물론 내 대리 부모인 과부 이무르 아주머니의 별빛 주점에서 일을 하며 먹 고사는 게 더 났지 않겠냐고 물어 볼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 사람은 분 명 이무르 아주머니가 그의 라이짐의 귀를 잡아끌면서 욕설을 퍼붓는 모습이 나 라짐의 엉덩이를 걷어차는(그래서 라짐의 엉덩이가 그렇게 커진 건가?) 모 습을 본적이 없는 사람일 테지만. 라이짐과 라짐은 이무르 아주머니의 친아들 과 친딸이다.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이무르 아주머니는 웬만한 남자 못지 않게 큰 키에 뚱뚱한 몸, 거기다가 굵 고 단련된 팔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겉모습만큼 거칠고 사내다운(이 말은 좀 이상하지만) 성격을 가지고 있다. 별빛 주점에서 함부로 까불다가 그 주먹에 당한 사내가 일개 사단 병력은 될 거라는 말도 있다. 그런 아주머니에게 붙들 려 얻어터지는 일은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나는 이무르 아주머니가 손님들을 두들겨 패 내 쫓는 모습을 몇 번이나 본 적이 있다. 며칠 전에 인사차 별빛 주점에 들렸을 때도 그랬다. 어떤 주정뱅 이가 이무르 아주머니의 딸 라짐에게 자꾸 추근거리자 이무르 아주머니가 점 잖게 말했다. "이봐. 내 딸에게서 그 손 치우지 않으면 평생동안 발가락으로 식사하게 만 들어 주겠어" 그러자 그 주정뱅이가 잔뜩 취한 음성으로 이렇게 말했다. "...걱정 안 해. 이 아가씨가 평생 떠 멕여 주겠지 뭐, 안 그래?" 그 주정뱅이는 라짐의 손을 잡으며 이렇게 말했다. 물론 이무르 아주머니를 잘 모르고 한 짓이 분명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무르 아주머니가 가만 있을 사람은 아니다. 당장에 무지막지하게 무거운 맥주 잔이 주정뱅이의 손등 에 떨어졌다. 아마 그 주정뱅이는 술에서 깬 다음 무지막지하게 후회를 했을 거다. 평생 동안은 아닐지 몰라도 한동안은 발가락으로 식사를 하게 됐기 때 문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나는 이무르 아주머니를 욕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자기 친아들을 채찍으로 때려서 죽인 과일 행상 이야기나 양자를 굶겨 죽인 여관 주인 이야기의 주인공들에 비한다면 이무르 아주머니는 천사 쪽에 가까울 테 니까(물론 이무르 아주머니가 천사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N:김상현 #8594/10199 ━━━━━━━━━━━━━━━━━━━━━━━━━━━━━━━━━━━━━━━━ 제 목:[탐그루] 별빛주점의 두 소년 - 5 - 관련자료:없음 21/21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0-23 09:07 조회:1362 탐그루 # 마법은 마음이다 - 마음은 칼이다 # 나도 가끔은 부모가 있는 집에서 따뜻한 식사를 하면서 검술 도장에 다니며 언제나 날씨가 좋은 탐그루의 시내나 대청하 강변을 걷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비스토브레 왕국의 다른 곳처럼 우기와 겨울이 찾아오기는 하지만 그렇게 길지는 않다). 혹은 어느 날 잘 차려 입은 귀족 부부가 나를 찾아내어 '사실은 우리가 네 부모다'하면서 시내의 성안으로 나를 데리고 들어가 그 날 부터 귀족의 신분으로 영주 가이르 오르파를 섬기며 사는 상상을 해보기도 한 다. 하지만 이런 상상이 내 배를 채워주지도 못하고 아무리 봐도 지저분한 탐 그루의 평범한 꼬마(이 말은 인정하기 싫지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바꾸지는 못한다는 걸 깨달은 지도 꽤 오래 된다. 나는 고아이긴 하지만 멍청한 바보는 아니다. 한때는 이곳 탐그루도 아이들을 귀여워하며 여행자에게 인정을 베풀 줄 아 는 어른들이 사는 도시였다고 한다(사비오 영감에게서 들은 말이다). 탐그루 에 사는 고아들이라면 누구나 그렇겠지만 그런 도시가 어떤 도시인지 나는 상 상도 할 수 없다. 사비오 영감의 말 대로라면 모든 게 삼 년 전쟁 때문이겠지 만, 내가 보기에 이무르 아주머니가 라짐의 엉덩이를 걷어차는 일이나 손님들 에게 늙어 죽은 뮤 뼉다귀를 곤 국물을 내 주고 은화를 챙기는 일과 삼 년 전 쟁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 보인다. 과연 삼 년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해 서 늙어 죽은 뮤 뼈로 곤 국물을 돼지 고기 국인 줄 알고 먹는 병사가 없었을 까? "수르카!" 사비오 영감이 나를 부른다. 나는 곧바로 '예!'하고 소리치고는 사비오 영 감 앞으로 뛰어갔다. "손님이다" 영감이 말했다. 나는 문 밖으로 나가 보았다. 과연 머리에 수건을 두른 아 주머니 하나가 서 있었다. 손님이 하는 말은 하나도 못 알아듣는 사비오 영감 의 가는귀가 손님 걸음 소리에는 민감하게 반응을 보이곤 하는 일은 내게 하 나의 수수께끼였다. 도대체 영감은 어떻게 손님이 온다는 것을 알 수 있을까? 사비오 영감 말대로 삼 년 전쟁 때문인지도 모르지. 탐그루의 사람들은 모두 어떤 일이 잘되면 다 자기 탓이고 잘 못되면 삼년 전쟁 때문이라고 말한다. "예언의 말씀을 듣고 싶으신 분이면 들어오십시오" 난 공손히 말했다. 이건 벌써 다섯 해 하고도 두 달이 되도록 사비오 영감 에게 배운 덕분이다. 아주머니는 잠시 망설이다가 문 앞에 쳐 놓은 붉은 색 (이라고 짐작만 될 만큼 색 바랜) 발을 지나 안으로 들어왔다. "아드님 때문에 오셨군요. 앉으세요" 아드님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아주머니는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입을 열었다. "아이구, 예언자님, 부디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제 아들놈이 스파일로 배치 를 받았는데 스파일 중에서도 전방이랍니다. 어쩌면 좋을까요, 예언자님" 아주머니의 말을 듣자 나는 스파일의 국경 넘어에 있는 바바 족을 생각했 다. 바바 족은 '바바바바'하고 말끝을 맺기 때문에 사람들이 편의대로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실제로 그들이 어떤 명칭으로 자신들을 부르는지, 또 우리 를 어떻게 부르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바바 족의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어 본 적도 없고, 어쩌면 바바 족은 우리를 '다' 족이나 '까'족으로 부르고 있는지도 모르지. 사람들이 바바 족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실은 창자를 아주 좋아한다는 점, 그래서 사람을 죽이고 나면 '어쩌구 저쩌구 바바!'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희생자의 배를 가른 뒤 창자를 꺼내 먹는 다는 것 정도다. 거기다가 그 옛날 전설에 나오는 마칸 족처럼 이름도 알 수 없는 괴물들을 소환해 부리는 능력까지 있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바바 족을 두 려워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바바 족을 야만인이라고 생각하고 두려워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바바 족에 대해서 약간의 호감도 가지고 있다. 바바 족은 삼 년 전쟁을 그치 게 해준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바바 족이 스파일의 국경을 넘자 타실과 스파 일은 싸움을 멈추고 힘을 합쳐 바바 족과 싸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삼 년 전쟁이 끝났다. 결국 타실의 일을 타실에서 해결하지 않고 스파일의 일을 스파일에게 맡기지 않은 덕분에 바바 족이 끼여들 때까지 삼 년 동안 두개의 주는 전쟁을 벌여야만 했던 것이다. 격언은 틀리는 법이 없다. 타실의 일은 타실에서, 스파일의 일은 스파일에서. "'아이구, 예언자님, 부디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제 아들놈이 스파일로 배 치를 받았는데 스파일 중에서도 전방이랍니다. 바바족은 창자를 꺼내 먹는다 는 데 이를 어쩌면 좋죠, 예언자님'이라고 하는데요" 나는 아주머니의 말을 사비오 영감의 귀에 속삭였다. 사비오 영감은 가는귀 가 먹어서 내가 귓속 말로 전해 주지 않으면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를 못한다. 하지만 내가 조금이라도 말을 틀리게 전하면 어떻게 알았는지 눈치를 주고는 손님이 돌아가면 내 머리통에 군밤을 먹이곤 한다. 하여간 귀신 같은 영감이 다. 그 덕분에 남의 말을 한 글자도 틀리지 않게 외울 수 있는 능력이 생겼 다. (쩝, 이건 능력도 아니다. 어디 써먹을 데가 있어야 말이지...) 근데 다 만 귓속말을 할 때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사비오 영감을 보면 대단하다는 생 각이 들곤 한다. 나는 귓속말이라면 질색이기 때문이다. 저 나이가 되면 간지 러운 것쯤은 참을 수 있는 걸까? "잠시만 기다려 보세요" 사비오 영감은 이렇게 말하고는 수정 구슬을 꺼내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나 도 덩달아 수정 구슬을 들여다보았지만 내 눈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기 껏해야 흠집 정도가 눈에 띄었을 뿐이다. 아무리 수정이 오래됐기로서니 이렇 게까지 흠집이 많이 나다니. 사비오 영감은 내가 보지 않을 때 이 수정 구슬 로 구슬치기라도 하는 게 아닌가 몰라. "계시를 받았습니다. 아드님이 보입니다... 스파일의 국경지대로군요... 검 은 색 뮤를 타고...중위 계급장을 달고 있습니다..." "바바 족 놈들도 보이나요? 창자는 어떻게 됐나요?" 아주머니가 소리쳤다. 하지만 사비오 영감은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가는귀가 먹었다는 걸 눈치 챌 법도 한데 저 아주머니는 좀 둔하군. 저렇게까 지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을 필요가 있을까? 나는 사비오 영감에게 아주머니의 말을 전해 주었다. "바바 족은...조용합니다. 창자는 음.... 아직 뱃속에 있습니다." 사비오 영감은 이렇게 말하고는 수정 구슬에서 눈을 떼고 아주머니를 보았 다. "염려 마십시오. 당분간은 아무 일 없을 겁니다" "그런데 우리 아들은 중위가 아니라 그냥 병사인데요?" 아주머니가 물었고 나는 사비오 영감에게 귓속말로 그 말을 전해 주었다. 내가 다 속이 뜨끔했다. 사실 솔직히 말하자면 오 년이 넘게 사비오 영감과 일해 왔지만 사비오 영감이 그럴듯한 예언을 하는 것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혹시 사기꾼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 게 한 두 번이 아니다. 물론 나같이 오갈 데 없는 고아를 거둬 준 은혜 때문에 감히 입 밖으로 그런 소리를 내지는 않 았지만. "미래의 영상입니다. 아드님은 꼭 중위가 될 겁니다" 하지만 이렇게 좀 빗나갈 때마다 사비오 영감은 슬쩍 잘도 빠져나간단 말씀 이야. 하기사 그러니까 손님이 끊기지 않겠지. 아주머니는 고맙다며 은화를 열 닢이나 내고는 고개를 몇 번이나 조아리며 밖으로 나갔다. "수르카야. 이걸로 별빛 주점에 가서 신선한 사과나 몇 개 사 오너라. 내가 안부 묻더라고도 전해드리고" 사비오 영감은 은화 한 닢을 내게 주면서 말했다. 며칠에 한 번씩, 사비오 영감은 이렇게 나에게 사과 심부름을 시키곤 한다. 내가 이무르 아주머니의 법적인 양자이기 때문에 그러는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는 몰라도, 술집에 가서 사과를 사오라고 시키는 것이다. 그나저나 사과라니. 영감은 이빨이 튼튼한 편인 모양이다. 노인들은 잘 씹 지 못해 먹지 않는 사과를 하루에도 몇 개씩 으적으적 씹어먹곤 하니 말이다. 그때마다 심부름을 가야하긴 하지만 나는 그 편이 더 좋았다. 심부름을 가면 여기저기 빈둥거릴 수도 있고, 특히 사비오 영감의 뮤와 마음껏 놀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언젠가 예언의 대가로 받았다는 이 뮤는 짧고 윤기가 도는 검은 색 털에 탄 탄한 등과 다리를 가진 멋진 놈이다. (병든 뮤가 아니라면 대체적으로 그렇게 생겨먹긴 했지만) 도대체 앉은뱅이 노인에게 뮤가 무슨 소용이 있어서 예언의 대가랍시고 주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예언의 눈동자 뒤편에 있는 창고를 뮤 축사로 개조해 키우고 있는 이 뮤는 사비오 영감에게 올 때부터 스타바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뮤를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잘 알겠지만, 뮤는 선한 눈동자에 순 박하게 보일 만큼 긴 얼굴을 하고 있다. 거기다 사람 말을 알아듣는 그 영특 함! 스타바도 예외는 아니어서 내가 축사로 들어가면 반가워하며 '뮤--'하고 울음소리를 낸다. 그러면 나는 뮤의 턱 밑을 쓰다듬어주곤 하는 것이다. 턱 밑을 쓰다듬는 법은 이 지방 호객꾼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기술이기 때문 에 나도 잘 알고 있다. 물론 그것을 배울 때에는 내가 여행객의 뮤를 쓰다듬 게 되리라고 생각했었지만 말이다. 사실 이 뮤라는 놈은 짐승답지 않게 감정이 너무 풍부한데다가 신경이 예민 해서 쉽게 친해지기가 어려운 동물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턱 밑을 쓰다듬는 기술이 호객꾼에게 필수적으로 필요한 기술이 된 것이다. 턱밑에 난 털은 길 고 억세서 처음 쓰다듬는 사람은 결을 잘못 타서 가뜩이나 예민한 뮤의 신경 을 건드려 뮤의 발길질을 당하기 십상이다. 뮤는 근본적으로는 순한 동물이지 만 일단 신경이 곤두서면 위대한 복수자 검객 아케르 정도 되는 검객이 아니 고서는 쉽게 벨 수 없는 날렵하고 포악한 동물로 돌변하곤 한다. 아마도 이 도시 호객꾼 중에서 뮤 발길질에 기절 한 번 안 한 호객꾼은 하나도 없으리 라. 하지만 나와 스타바는 이미 친해진 사이고 서로 우정(이라고 할 수 있는지 는 모르겠지만)을 나눌 수 있을 만큼의 믿음을 가지고 있다. 만약 누가 나에 게 이곳 탐그루에서 믿을 수 있는 친구를 대라고 한다면 나는 스타바와 이무 르 아주머니의 아들 라이짐을 댈 것이다. "스타바. 넌 정말 멋진 턱수염을 달고 있어, 알고 있니?" 나는 스타바의 턱밑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뮤-- 뮤-- (잘은 모르지만 남들이 그렇다고 하더군)" "널 타고 탐그루를 한 바퀴 돈다면 정말 기분 좋을 텐데" 사실 난 스타바를 타고 축사 밖으로 나가 본 적이 없다. 성년이 되지 않은 몸으로 불한당이라도 만난다면 목도로 싸우는 약식 결투로 해결할 수 없는 상 황이 벌어질지도 모르고 스타바가 위험에 빠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성년식 이 얼마 남지 않은 사내가 친구를 위험에 빠뜨리는 어린 아이 같은 행동을 할 수는 일이다. "뮤-- (나도 이 축사 밖으로 나가서 좀 뛰고 싶어. 요즘 들어 운동 부족인 지 자꾸 살이 찌는 거 같단 말이야)" "그래. 내가 성년이 되면 라이짐 자식의 패거리들하고 같이 동네나 한 바퀴 돌아보자구" 나는 웃으면서 말했지만 만약 그렇게 된다면 라이짐도 한 번쯤 스타바의 등 에 올라야 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아무리 뮤지만 친구가 아닌 다른 사람를 함부로 태우고 싶어하지는 않을 테니까. "뮤뮤뮤-- (그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그래. 곧 올 꺼야" 나는 이렇게 말하면서 스타바의 등줄기를 툭툭 쳤다. 만약 당신이 친하지 않은 뮤에게 이런 짓을 했다간 턱뼈가 부수어지기 십상이라는 것 정도는 상식 으로 알아두기를. 뮤는 아무리 순한 놈이라고 해도 자신의 등을 친구가 아닌 자에게 함부로 허락하지 않는 법이다. 나는 저녁 여물 줄 때 다시 보자고 뮤 에게 말하고는 별빛 주점 쪽으로 나섰다. 대충 짐작하고 있겠지만, 술집에서 파는 사과라니 가격은 말할 것도 없이 비쌌고, 품질은...묻지 말아달라. 삼 년 전쟁 후엔 썩어 문드러지지만 않았다면 품질에 신경 쓰는 사람은 거의 없 으니까. 더군다나 사비오 영감이라면! 시장으로 가는 길은 다른 때처럼 여행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이곳을 지나다 보면 언제나 상인과 여행자 사이에 오가는 활기 넘치는(이라 고 좋게 말했지만 사실은 값을 놓고 싸우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보통 탐그 루에서 거래되는 것은 탐그루의 특산품인 사과와 감자, 그리고 몇몇 종류의 야채들이다. 그렇지만 타지에서 물건을 받아 파는 가게는 좀 다르다. 그런 상 점 앞에는 옥돌이나 호박 같은 보석류가 진열되어있기도 하고(진열되어 있는 것은 대개 가짜지만), 피안 시에서 소금에 절여 온 바다 생선을 팔고 있는(소 금도 함께 판다) 마차 상인하며, 여행자들에게 파는 지도(대체로 정확하지 않 다는 평이다)를 파는 상점, 칼과 방패류를 파는 상점까지 다양하다. (스파일 의 무기구와 방어구들은 성능이 좋기로 유명하다) 탐그루 토박이들에게 물건을 파는 상점과 타지 사람들에게 물건을 파는 상 점은 그 겉모양부터 다르다. 탐그루 사람에게 물건을 파는 상점은 그냥 나무 로 지은 건물에 간판도 허름하고 장식도 그저 수수한 천 몇 조각이 전부다. 하지만 타지 사람을 상대하는 상점은 일단 화려하다. 타실에서 배로 실어 왔 다는, 보기만 해도 탄성이 절로 나올 만큼 매끈한 돌로 지은 건물도 있고, 그 냥 보통 벽돌로 지은 건물이라고 해도 간판이나 진열대가 화려하기 마련이다. 색색으로 물들인 돌을 엮어 만든 발이 걸려 있는 집이나, 출입구에 전통적 인 탐그루 양식인 계란 모양의 둥근 문에 잔뜩 멋을 부린 글자로 '환영합니다 (즉, 빨리 들어와서 은화를 떨구고 가라는 말)'이 적혀 있는 집, 밤에 멀리서 도 알아볼 수 있게 연금술사의 빛으로 간판에 조명을 만들어 놓은 집 정도는 흔히 볼 수 있다. 거기다 진열대로 눈을 돌려보면 그 모습은 정말 각양 각색 휘황 찬란하다. 타실에서 온 진주며 산호 같은 정말 귀한 보석들을 그냥 진열 해 놓은 보석 가게도 있고(이 가게에는 어깨가 보통 사람의 두 배는 되는 경 비원이 둘이나 있다), 스파일의 유명한 장인이 만들었다는 보석이 박혀 있는 보검을 진열해 놓은 무기점이 있는가 하면 깊은 산 속에만 산다는 얼룩무늬 곰 가죽이나 부드러운 털로 유명한 타코 가죽을 진열대가 모자라서 가게 벽에 걸어 놓은 집도 있다. 이러고 보니 탐그루에 처음 오는 여행자들은 자신들을 상대로 하는 가게와 널찍한 나무판에 과일이나 야채 몇 종류 있는 토박이들을 상대로 하는 가게를 비교하면서 너무나도 확연한 차이에 놀라곤 한다. 그렇게 차이가 나는 이유 는, 굳이 설명 안 해도 알겠지만, 이곳 탐그루 사람들 대부분이 상인이다 보 니 상술에는 훤한 게 그 이유인 것이다. 탐그루 사람 누가 근사하게 진열돼 있다고 해서 며칠 안가 사냥꾼에게 베인 자리가 떨어져 나가는 얼룩 곰 가죽 을 사겠는가(물론 아주 추위를 많이 타는 사람이라면 좀 다르겠지만). 무시무시한 얼굴을 하고 밖을 노려보고 있는 곰 가죽이 걸려 있는 가죽 가 게를 지나 연금술사의 집 앞을 지나게 되었다. 겉보기가 화려하기는 보석 가 게나 가죽 가게겠지만, 파는 물건이 화려하기는 연금술사의 집을 따라갈 곳이 없다. 내가 두 번째로 좋아하는 구경거리가 이 연금술사의 집에 전시되어 있는 연 금술사의 빛들이다(첫번째 구경거리는 시하라의 무기점에 진열되어 있는 칼들 이다). 많은 아이들이 이곳에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연금술사의 빛을 담은 등 (燈)을 정신없이 구경하곤 한다. 연금술사의 집은 사십이 넘은 우락부락한 외모의 대머리 연금술사 바코쿠가 운영하고 있는 가게이다. 이곳에서 만들어지는 대부분의 물건들은 가이르 오 르파의 성으로 팔려간다. 바코쿠는 이곳 자나크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비스토 브레 왕국 전체를 통틀어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연금술사라고 한다. 연금술이라는 말은 원래 '금을 만드는 기술'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에디손이라는 연금술사가 약과 물건들을 이용해 금을 만들려 하다가 우연하게도 빛을 발하는 물건을 만들어내게 되었다고 한다. 그 덕분에 사람들 은 기름을 태우지 않아도 밤에도 빛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정말 위 대한 발명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밤에 빛이 없으면 화장실은 물론이고 급 한 사태가 일어났을 때 도대체 어떻게 대처할 수 있겠는가(혹시 눈에서 불꽃 이 튀어나와 밤에도 물건을 볼 수 있다는 마칸 족이라면 모를까). 그런 점에 서 에디손은 인간의 활동시간을 두 배로 늘려준 위대한 연금술사이다. 하지만 붉게 빛이 나는 유리병과 푸르게 연기처럼 허공으로 퍼져나가는 빛, 혹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는 빛이나 폭포처럼 쏟아지는 빛은 무척 아름답지 만 그것이 무엇 때문에 필요한 지는 잘 모르겠다. 어차피 그런 것들은 상상도 못할 만큼 비싸기 때문에 평민들은 살 엄두도 내지 못하지만 그런 것들을 사 모으는 가이르 오르파나 귀족 여행자들은 이해할 수가 없다. 어쩌면 자신의 성에 놀러오는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어서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단순한 구경 거리라고 하기에 그 값은 너무도 비싸다. 그만한 값이라면 시하라의 무기점에 서 제일 값진 보검 열 자루는 살 수 있을 텐데. 그렇지만 사실은 내가 가장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도 연금술사가 만들어 내 는 빛이라는 것도 말해두긴 해야겠다. 그 빛은 달빛 하나 없는 캄캄한 밤에도 오히려 더 빛을 만들어내 은은하게 사람들의 눈을 끈다. 도대체 무엇으로 그 런 아름다운 빛을 만들어 내는지는 모르지만 그 빛은 사람을 뒤흔드는 힘이 있다. 붉은 빛은 사람을 흥분되게 만들고 푸른빛은 사람을 냉정하게 만든다. 노란빛은 사람을 편안하게 만들고 초록빛은 사람을 잠들게 한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N:김상현 #8595/10199 ━━━━━━━━━━━━━━━━━━━━━━━━━━━━━━━━━━━━━━━━ 제 목:[탐그루] 별빛주점의 두 소년 - 6 - 관련자료:없음 16/16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0-23 09:08 조회:1334 탐그루 # 마법은 마음이다 - 마음은 칼이다 # 바코쿠가 나를 바라봤다. 사실 대머리에 보통 어른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키, 거기다가 팜 산맥처럼 울퉁불퉁한 근육을 가지기는 했어도 바코쿠는 내가 아는 어른들 중에서 가장 좋은 편에 속하는 사람이다. 적어도 바코쿠는 상점 안을 구경하고 기웃거리는 아이들을 내쫓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빛을 내는 유 리병을 누군가가 깬다면 좀 다르겠지만). 나는 사비오 영감의 심부름으로 몇 번 바코쿠의 가게에 들어간 적이 있는데, 그때마다 아이들이 상점 안을 구경 하고 있었고, 그때마다 나도 열심히 구경하곤 했다. 바코쿠는 꽤 괜찮은 사람 이다. 이 세상에 공짜로 구경거리를 제공해 주는 어른이 도대체 몇 명이나 있 을까. 다른 상점의 주인이라면 아이들이 훔쳐가지나 않을까 뒤에서 몰래 감시 하거나 들어오자 마자 대뜸 엉덩이를 걷어차 내쫓았을 것이다. 나는 연금술 가게에 진열되어 있는 여러 종류의 빛등을 구경한 다음,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하라의 무기점으로 칼을 구경하러 갔다. 그곳에는 많은 종류 의 무기들이 진열되어 있다. 면도를 할 수 있을 만큼 예리한 도끼, 쇠로 된 방패도 부술 수 있다는 철퇴, 날카로운 쇠가 박혀있는 채찍, 아무리 두꺼운 가죽을 가진 짐승도 한 방에 뚫을 수 있다는 창... 등등. 하지만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은 칼이다. 칼잡이들이 보통 차고 다니는 넓은 날을 가진 칼이나, 귀족들이 가끔 차고 다니는 양날의 검, 양손으로 쓸 수 있는 짧은 칼(쌍으로 만 판다), 위험할 때 던질 수 있는 단검, 용병들이 자주 차고 다니는 긴 칼 같은 것들 말이다. 이런 칼들은 대부분 무기점 안에 진열되어있지만 내 눈길 을 끄는 것은 보검들과 함께 밖에 진열되어 있는 것이다. 어디서나 볼 수 있 는 흔한 칼이지만 유명한 장인이 만든 질 좋은 칼은 보검에 버금간다. 진열된 보검들은 거의가 귀족들의 장식용이다. 연금술사의 아름다운 빛처럼 이 보검들도 대부분 멋있기는 하지만 쓸모는 거의 없다. 누가 금화 열 닢을 주고 산 보검을 휘두르겠는가(대부분의 보검은 금이 가거나 이빨이 나가면 가 치가 절반 이하로 떨어진다). "또 왔구나, 수르카. 이제 다음 주면 성년이 되는구나" 시하라의 무기점 주인 시하라가 나에게 말했지만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아 마 다음 주 성년의 신 마소드의 날이 되면 무기점은 모처럼 손님들로 붐빌 것 이다. 성년이 된 아이에게 칼을 사주는 것은 돈 가진 부모들의 의무다. 물론 나는 내가 모은 돈으로 사야겠지만... 은화 열 닢으로는 단검하나 사지 못할 것이다. 나는 칼을 사줄 수 있는 부모를 가지고 있는 아이들이 부러워졌다. 시하라는 운하 노동자 같이 당당한 체격의 노인이다. 젊었을 적에는 용병단 을 전전하며 여기저기서 꽤 이름을 날린 검사였다고 하는데, 오래 전에 산적 토벌을 나갔다가 부상을 입고 은퇴하여 이렇게 자신의 무기점을 차렸다고 한 다. "성년이 되면 칼을 가지고 다니는 것이 좋지. 특히나 요즘처럼 험한 세월에 는 말이다. 길거리에서 칼을 들이대는 노상강도 때문에 하잔이나 베논에서는 골머리를 앓는다고 하니까 이곳 탐그루도 조심하지 않을 수 없지. 언제 등뒤 에서 칼날이 날아올지 모르니 말이다. 나도 이렇게 단검 몇 개는 항상 차고 있단다" 시하라는 전에 용병 생활을 했다고 하는데 왜 이렇게 경계심이 많고 소심한 지 잘 모르겠다. 아마도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것이 아니라 술집에서 입은 거 라는 소문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다른 탐그루의 상인들처럼 그저 상술 로 그러는 건지도 모르지. "저 칼은 얼마나 하나요?" 나는 붉은 색 보석이 박혀있는 보검을 가리키면서 물었다. 물론 그저 물어 보는 것이지 절대로 살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스파일에 사는 장인이 만들 었다는 저 긴칼이라면 모를까 이런 보검이라면 장식용으로라도 살 마음이 전 혀 없다. "음. 수르카. 저 칼은 너 같은 고아에게 딱 맞는 칼이다. 저 칼의 칼집에 박혀 있는 보석은 '시드의 귀'라는 이름을 가진 보석이지. 칼집에 상징물을 박아 넣을 수 있는 자리가 있는 건 알고 있지? 검사들은 칼집에 나 있는 상징 물을 박을 수 있는 자리에 자신의 의지를 표현할 수 있는 상징물을 박아 넣는 단다. 자신이 수행 무사라면 단련을 뜻하는 다이아몬드 원석을, 용병이라면 황금을, 군인이라면 국왕을 상징하는 비스토브레 왕국의 징표를 박아 넣는 거 지" 시하라. 그 말은 벌써 몇 번이나 듣는다구요! 그나마 오늘은 자신이 다이아 몬드 원석을 칼집에 박아 가지고 무사 수행을 가다가 산적을 만난 여행자를 구해주고 다이아몬드 원석을 빼고 황금을 박아 넣었단 얘기는 안 해줬으면 좋 겠는데. "그럼 이 '시드의 귀'에 대해서 얘기해 주마. 저 먼 타실에 가면 말이다, 시드라는 이름의 바닷가가 있는데, 그곳에서만 나는 귀한 보석이란다. 이 보 석에는 전설이 있단다" 시하라 영감은 이렇게 말하고는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나에게 이야기를 늘 어놓기 시작했다. 음. 오늘은 그나마 늘 듣던 얘기가 아니라 다행이로군. "시드 마을에 어떤 소년이 살았단다. 그런데 그 꼬마가 성년이 되고 얼마 되지 않아서 그 꼬마의 부모가 마칸 족이 부리는 무시무시한 오크에게 당하고 말았지. 그래서 꼬마는 복수를 맹세하고 십 년 뒤에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 고 시드를 떠났단다. 시드의 앞에는 어려움이 많았지. 먼저 그 꼬마는 용병단 에 들어가서......" 시하라 영감의 이야기는 지루하게 계속되었다. 원래 시하라는 쓸데없이 얘 기하기를 좋아하는데다가, 그걸 들어주는 사람이 있으면 언제까지라도 떠드는 습관이 있다. 이곳을 구경하는 사람들은 시하라 영감의 이야기를 별로 좋아하 지 않는데, 특히 그가 부상을 입었다는 마지막 전투 얘기는 할 때마다 내용이 달라지는 것으로 유명했다. 뭐, 나는 공짜로 칼 구경하는 값을 치르는 셈치고 시하라의 얘기를 늘 들어주지만 말이다. 사실은 시하라가 '안 살 거면 가!' 하고 소리를 지를까봐 꾹 참고 듣는 중이다. 시하라가 그럴 리는 없겠지만. "...그렇게 십 년이 지나고 어느날 그 꼬마는 아니 그 사람은 한 사람의 당 당한 성인이 되어 자신의 부모를 죽였던 오크와 오크의 주인인 마칸을 베었단 다. 하지만 어른이 된 그 꼬마는 마칸의 칼에 맞아 귀가 잘리고 말았단다. 그 런데 그때까지 이 모든 사건을 흥미롭게 지켜본 성년의 신 마소드는 그 꼬마 의 맹세가 지켜지는 것을 보고 감동해 그 잘린 귀에서 피를 뽑아 이 보석을 만들었다고 전해지지. 그래서 이 보석을 '시드의 귀'라고 하는 거란다. 보석 에 담긴 말은 너 같은 고아에게 딱 어울리는 '부모의 원수를 갚겠다는 맹세' 이고" "그렇군요" 나는 하품을 참으며 말했다. 이봐요, 시하라. 나는 원수갚을 대상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고아라구요. 아니, 원수는 관두고, 부모님께 카네이션 한 송 이 달아줘 본 적도 없다구요. 그나저나 너무 늦는다고 사비오 영감에게 혼나 는 것 아닐까? "네가 사겠다면 금화 두 닢에 주마. 물론 그런 큰돈은 없을 테니 삼 년 동 안 내 가게에서 일해주는 조건으로 이 칼을 넘기면 어떠냐?" 또 이 가게에서 일하라는 소리구만. 시하라는 얘기를 들어주는 사람을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어. 나이 헛 먹은 거 아냐? "예. 생각해 볼게요" 나는 이렇게 말하고는 무기점을 떠났다. 언젠가 돈을 벌어 꼭 긴칼을 사야 지. 용병들이 차고 다니는 것과 같은 것으로 말이야. 별빛 주점은 시하라의 무기 상점을 지나면 나오는 중앙 광장을 거쳐가야 갈 수 있다. 중앙광장에는 언제나처럼 많은 사람들이 바쁜 표정으로 정신없이 지 나다니고 있었다. 머리에 두건을 쓴 여행자들, 어깨에 짐승을 데리고 다니는 사람들, 하나라도 더 팔기 위해, 혹은 싸게 사기 위해 떠들어대는 사람들, 그 사이를 순찰하고 있는 자치 대원들...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자치 대원들의 눈 을 피해 여행자들의 지갑을 노리는 라이짐의 패거리들까지... 이곳 중앙 광장은 여행자들이 약속을 잡기에 딱 좋은 곳이다. 탐그루의 정 중앙에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탐그루의 시장인 하리오 오르테가가 살고 있 는 시청 건물이 마주 보이기 때문이다. 시청 건물은 탐그루에서 가장 거대한 건물이다. 내 키의 다섯 배는 되어 보 이는 성벽이 둘러져 있고 동서남북 네 방향으로 각각 출입문이 나 있는데 북 쪽은 자나크의 영주 가이르 오르파가 출입하는 문이고 남쪽은 시장 하리오 오 르테가나 그 밖의 귀족들이 출입하는 문이고 동문과 서문은 각각 서민들이 출 입하는 문이다. 뭐, 어찌되었건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지만. 시청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시장과 이야기 해야할 필요가 있는 사람들, 그러 니까 큰 상점의 주인이라든가 귀족아이들을 가르치는 가정교사라든가, 혹은 시장에게 뭔가 줄 것이나 받을 것이 있는 그런 사람들일 뿐이다. 나는 시장에 게 뭔가 줄 일도 없고 받을 일도 없다. 하리오 오르테가라고 하면 나는 그저 세금을 가져가는 사람이라는 생각 밖에 들지 않는다. 아니다! 하나 더 있다. 시장의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딸 뒤로아 오르테가! 뒤로아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들은 며칠 동안 밥을 못먹는 건 기본이라고 한다. 그래도 좋으니 뒤로아 를 한 번 만이라도 봤으면. 시청 문 앞에 뮤 두 마리가 보였다. 두 사람이 타고 있었는데 한 명은 내 또래로 보였고 다른 한 명은 서른쯤 되어 보였다. 어린 쪽은 귀족 같았고 어 른은 어린 쪽을 보호하기 위한 검사처럼 보였다. 시청 문 앞까지 두 사람이 다가서자 위병이 둘을 막았다. 검사처럼 보이는 쪽이 뭐라고 설명을 하려고 하는 데 어린 쪽이 검사를 말리고 말했다. "이보게, 병사. 그대들이 임무에 충실하다는 것은 내 충분히 이해하겠으나, 나는 자나크의 영주, 가이르 오르파 님의 아들일세. 왜 날 모르는 거지!? 하 긴, 사람을 알아볼 줄 아는 눈을 가진 놈들이라면 그 나이에 말단 병사로 머 물러 있지는 않겠지만 말이야" 뭐? 저 어린 쪽이 가이르 오르파의 아들이라구? 나는 어이가 없어졌다. 그 런데 내가 가끔 장난으로 라이짐에게 하는 것 보다 더 역겨운 말투로군. 그런 데 사람을 알아볼 줄 아는 눈이라니. 귀족만 사람이라는 건가? "통행증을 보여주십시오" 병사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그 병사는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게 저 꼬마의 아버지뻘은 될 것 같았다. "어허. 이보게 병사. 아직도 이해 못하겠는가? 나는 네놈이 섬기는 이곳 탐 그루의 시장이 하늘처럼 우러러보는 가이르 오르파 님의 아들이라니까. 임무 에 충실한 것은 좋지만 귀족에게 함부로 구는 경우에는 충분히 불경죄를 적용 시킬 수도 있을 것이야. 안 그런가, 쥬크" "예. 그렇습니다" 귀족이 말하자 검사가 대답했다. 저 검사, 아버지의 권세를 빌어 뮤 위에서 폼이나 잔뜩 잡는 저런 놈이나 보호해 줘야 한다니 허리에 찬 칼이 아깝다! 칼이 아까워! 하지만 그 불경죄라는 말이 효과가 있었는지 위병은 얼른 문을 열고 창을 든 병사가 으레 그렇게 하듯 창끝을 땅을 향하게 해서 경례를 붙였 다. 그제서야 그 영주의 아들은 만족한 듯 웃으며 시청 안으로 들어갔다. 검 사는 칼집으로 병사의 옆구리를 쿡 찌른 후 뒤를 따라 들어갔다. 위병 근무자 는 두 사람이 완전히 안으로 들어가자 땅을 바라보며 한 숨을 내쉬었다. 귀족 이 좋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저건 좀 너무 하는군. 문득 나는 아버지를 생각했다. 나도 지체 높은 아버지를 두었다면...아니, 그저 아버지가 있기라도 했다면...이런 생각을 하자 가슴 안쪽이 찡하게 울리 는 것이 느껴졌다. 이런. 내가 이래선 안되지. 이제 곧 성년이 될 몸인데 약 한 모습을 보여서야... 그런데, 어라. 중앙광장 저 쪽에서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 나를 보고 있 군. 라짐이었다. 라짐은 내 친구 라이짐의 여동생이다(둘 다 이름이 '짐'으로 끝나는 건 순 전히 우연일 뿐 관습은 아니다). 라짐은 동네 또래 여자 애들 중에서 가장 예 쁜 것으로 유명하지만 그보다는 높은 콧대와 조금이라도 집적거리는 남자가 나타나면 여기저기서 정의의 용사들(대부분이 라이짐 패거리지만)이 나타나는 것으로도 유명한 아이다. 라짐은 만약 라이짐의 여동생만 아니었다면 나도 정 의의 용사가 되었을지 모를 만큼 예쁘기는 하다. 무슨 말인고 하니 라짐에게 는 항상 이상한 소문들이 따라다녔다는 말이다. 누군가는 라짐이 자기 자신을 예쁘다고 생각는데 그 정도가 조금 심각해서 누가 뭐라고 말만 걸어도(설령 그 사람이 길 잃은 귀족이라고 해도) 자기를 좋아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할 정도라고 한다. 또 누군가는 라짐이 자신의 라이벌로 시장 하리오 오르테가의 딸, 뒤로아 오르테가를 생각하고 있다고 한 다. 그런 말들에 대해서 오빠인 라이짐은 이런 말을 했다. "도대체 걔 어디가 예쁜지 모르겠어. 자세히 보면 얼굴에 핏줄이 다 보인다 구. 거기다가 지독하게 먹는 걸 싫어해서 비쩍 말라있기나 하구... 거기다가 얼마나 거친 줄 알아? 어떨 때는 꼭 우리 엄마를 보는 것 같다니까. 나중에 잘 보라구 언젠가는 남자 한 둘쯤 눈 하나 깜짝 안하고 식칼로 목을 따버리는 광경을 보게 될 테니까. 정말. 하여간 얼마나 걱정이 되는지 몰라 나중에 누 가 그 뒷감당을 다 할 수 있을지" 라이짐은 이렇게 말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아무리 거칠고 싸가지가 없어도 얼굴에 핏줄이 보일 만큼 흰 얼굴과 날씬한 몸매를 싫어하는 남자가 많으리라 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 무시무시한 라짐이 내 쪽으로 걸어오 고 있었다. 나는 잠시 긴장했다. .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N:김상현 #8641/10199 ━━━━━━━━━━━━━━━━━━━━━━━━━━━━━━━━━━━━━━━━ 제 목:[탐그루] 별빛주점의 두 소년 - 7 - 관련자료:없음 28/28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0-24 07:31 조회:1325 탐그루 # 마법은 마음이다 - 마음은 칼이다 # "혹시 라이짐 봤어?" 라짐은 결코 나를 오빠라고 부르는 법이 없다(라이짐에게도 마찬가지고). "아니. 오늘은 못 봤어. 무슨 일이야?" 내가 물었다. "엄마가 찾아. 이렇게 한창 청소하고 손님 맞을 준비해야 할 때 도망이나 치고...하여간 게으름뱅이라니까. 사내가 그래가지고 어디다 써먹을 수 있을 지, 원" 라짐은 누구 들으라고 하는 소린지 이렇게 말했다. 라이짐보다 두 살이나 어리지만, 하는 행동은 정말 이무르 아주머니라니까. 물론 외모는 친자식이 맞을까 싶을 만큼 다르지만(사실 많은 남자들이 그걸 다행으로 여기고 있었 다). "혹시 보면 집으로 빨리 들어오라구 해. 엄마가 찾는다구"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라짐은 휙하고 별빛 주점 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짜 증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나는 라짐에게 지금껏 관심을 보인 적이 없는 것이 천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내가 자기를 좋아한다고 생각한다면 얼마나 끔찍한 일이 벌어질까! 친절하고 상냥한 여자라면 또 모를까, 저런 무시무시 한 여자는 절대 사절이다. 어쩌면 라짐도 속으로 '저런 지저분한 꼬마는 질색 이야!'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어찌되었건 라이짐을 찾고 있다는 걸 알았으니 그냥 과일 가게로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는 라이짐 패거리들이 모이는 곳을 찾아가 라이짐에게 무시 무시한 이무르 아주머니가 찾고 있다는 말을 전해주기로 마음먹었다. 의리가 있는 사람이라면 결코 친구의 위기를 본척만척 지나가지 않는 법이다. 라이짐은 탐그루의 고아들이 보통 가지고 있는 두가지 직업 중에서 소매치 기에 종사하고 있다(고아도 아니면서 그러는 경우는 참 드물 것이다). 나는 라이짐이 어떻게 해서 소매치기가 되었는지,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 두 목이 되었는지 잘 알고 있다. 아주 어려서부터 형제처럼 지낸 탓도 있고 라이 짐은 언제나 자신의 일을 상세하게 나에게 말해주곤 했다. 라이짐은 허풍쟁이 가 아니다. 오히려 지나칠 정도로 솔직한 게 아닌가 싶을 만큼 라이짐은 자신 의 속 얘기를 내게 털어놓곤 했다. 나쁜 쪽으로만 생각한다는 인상을 줄 때가 많긴 하지만. "...울찬과 나 둘 중에 하나가 두목이 되어야 했어. 그래서 나와 울찬은 승 부를 가리게 됐지. 별 건 아니었어. 귀족의 지갑을 먼저 빼오는 쪽이 이기는 걸로 승부를 가리기로 했으니까. 울찬 녀석은 싸움은 잘 하지만 손재주는 없 잖아. 간단하게 내가 이겼지" 언젠가 라이짐은 자신이 두목이 된 과정을 내게 이렇게 말해 주었다. 그리 고는 승부를 그렇게 정한 건 순전히 자신의 제의에 의한 것이었으며 울찬은 아무 반대도 하지 않고 승부를 받아들였다고 했다. "울찬 그 자식은 내게 두목 자리를 양보하고 싶었던 거야. 울찬은 목도 휘 두를 줄이나 알았지 조직을 관리한다는 건 골치 아픈 일이라고 생각했던 거 지. 내가 성년이 되면 더 이상 두목자리에 머물지 않고 여기를 떠날 거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다른 조직들과 부딪히면서 타협하고 혹은 싸우고 하는 일을 그때까지 미룰 수 있었던 거지. 울찬은 위태로운 두목이 되는 것보다는 안전한 부두목이 되는 걸 선택한 거야. 게다가 부두목으로 있는 건 잠시 동안 뿐이니까. 이 바닥이라는 게 다 그래. 어디에나 협상의 선은 있고 그 선을 맞 추는 게 두목이 할 일이야. 다행히 내겐 그 능력이 있었어...그 뿐이야" 그리곤 언제나처럼 하늘을 바라보며 예의 그 쓴웃음을 보였다. 라이짐은 자 신이 하는 일에 늘 회의적이었다. 그게 현명하다고 본인은 생각할지 모르지 만, 하여간 소매치기 바닥에서 오래 머물 수 있는 녀석은 아니다. 사실 이무 르 아주머니도, 라이짐의 여동생 라짐도, 라이짐이 이런 소매치기 생활을 하 고 있다는 것은 모르고 있다. 그냥 동네 어디 상점에서 막일을 하면서 돈을 벌어오는 줄로만 알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라이짐은 가계에 보태는 돈 말 고 나머지 돈을 어디에 쓰고 있을까. "난...떠날 거야. 성년이 되면. 그러면 뭔가 수가 생기겠지. 탐그루에서, 별빛 주점에서 평생 모험도 없이 일하면서 살고 싶지는 않아. 이곳 탐그루를 떠나면 뭔가 다른 일을 할 수 있을 거야. 내가 잘하고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일이" 이런 라이짐의 말에서 나는 그 돈이 라이짐의 여행자금으로 비축되고 있으 리라는 상상을 해보곤 했다. 하지만 그게 잘 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라이짐 패거리의 본부(라고 라이짐은 부른다)는 별빛 주점에서 중앙 광장을 지나 대장간이 모여있는 골목으로 들어가서 어두컴컴한 곳을 한참을 걸어들어 가야 하는 골목 깊숙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 나는 시청을 벗어나 중앙 광장 쪽에서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그때, 나를 불러 세우는 목소리가 들렸다. "수르카!" 귀에 익은 소리다. "수르카! 어쩐 일로 여기까지 행차신가?" 라이짐이 귀족을 말투를 흉내내어 내게 말했다. "아름다운 라짐 님께서 전갈을 보내셨소. 그대의 어머니, 이무르 부인께서 급하게 찾으신다 하오" 나도 귀족의 말투를 흉내내어 말했다. "칫. 그런 농담 우습지도 않다구" 라이짐이 말했다. 우습지도 않은 농담, 잘 받아 주니까 화내기는. "너 또 청소 안하고 도망 나온 거지? 빨리 들어가 봐. 또 엉덩이 걷어 채이 고 싶지 않으면" "...음. 오늘 아침에 회의가 좀 있어서...빨리 가봐야겠네. 내가 우리 애들 한테 말하고 올 테니까 잠깐 기다려" 라이짐은 이렇게 말하고는 허겁지겁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라이짐이 뭘 하나 슬쩍 골목 안을 들여다보았다. 라이짐은 부두목 울찬에게 뭔가 이야 기를 하고 있었다. 아직 성년도 아닌 주제에 하는 짓은 꼭 어른 흉내라니까. 라짐도, 라이짐도 이무르 아주머니의 피를 받은 모양이야. 장사에 눈이 밝은 것하며, 절대 지지 않으려는 근성하며...그러고 보니 라짐이 '예쁜 척' 한다 는 말도 그런 근성 때문에 나온 말이 아닐까? "빨리 가자" 라이짐이 뛰어오더니 나를 지나쳐 열심히 중앙광장 쪽으로 뛰었다. 나는 영 문도 모르고 라이짐과 함께 별빛 주점까지 뛰어가게 되었다. 누가 보면 급한 일이라도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하겠는 걸. 별빛 주점 앞에 도착한 것은 정말 한 순간 이었다. 나와 라이짐은 숨을 헐 떡이며 별빛 주점의 낡은 나무문을 열었다. 내부 장식이 지난번에 왔을 때하 고 또 바뀌어 있었다. 이무르 아주머니는 참 부지런하기도 하지. 올 때마다 내부가 바뀌지 않을 걸 본 적이 없단 말이야. 그런데...이무르 아주머니하고 라짐이 왜 나를 째려보지? "라이짐!" 이무르 아주머니가 소리쳤다. 얼결에 나는 털컥 놀라고 말았다. "이리 와, 이 웬수 같은 놈아" 이무르 아주머니가 말하자 라이짐은 고개를 푹 숙이고 이무르 아주머니에게 다가갔다. 어느 정도 가까워졌다 싶자 이무르 아주머니가 라이짐의 귀를 잡아 끌었다. 으...아프겠다. "여전히 귀 뒤는 씻지도 않았구나. 이제 성년이 된다구 제 멋대로 구는 거 냐? 어림도 없는 소리. 성년이 되기 전까지 너는 이 별빛 주점을 위해서 일 해야 할 부분이 있어. 나중에 사람을 쓰게 되건 네 지저분한 친구들을 쓰게 되건 간에 말이야" "그러게 말이야. 당연한 약속도 못 지키는 사내가 뭘 할 수 있겠어" 라짐도 거들었다. "죄송해요. 아침에 친구들하고 잠깐 할 얘기가 있어서..." 조직원이 스무 명이 넘는 소매치기 조직의 두목이 저런 꼴로 어머니에게 당 한다는 걸 알면 사람들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해졌다. 하지만 사람들이 여. 이무르 아주머니 앞에 서면, 그 누구도 함부로 굴지 못하는 법이니. 보라 저...무시무시한 얼굴을. "해야 할 일을 먼저하고, 다음에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나면, 그제서야 하 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거라고 내가 몇 번이나 말했니?" 귀를 잡은 손을 위 아래로 힘차게 휘저으며 이무르 아주머니가 말했다. 나 도 몇 번 저 기술에 결려 본 적이 있어서 잘 아는데, 저 고통과 공포란 이루 다 말로 할 수 없는 것이다. "...잘못했어요" "그래? 뭘 잘못했지" "할 수 있었는데도 해야 할 아침 청소도 안하고, 하고 싶은 일만 해서..." "알기는 잘 아는구나" 그제서야 이무르 아주머니는 손을 놓았다. 라이짐은 슬쩍 나를 쳐다보았는 데, 빨리 나가지 않고 뭐 하고 있느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보게. 라이짐. 나는 여기 볼일이 있어서 왔다구. 그러니 그런 표정 짓지 마. 나는 여유 있게 웃음까지 지어 보이며 생각했다. "수르카!" 이무르 아주머니가 소리쳤다. 어라. 왜 나한테 화살이 날아오지? "넌 무슨 일이야?" 이크. 잘못 말했다간 큰 일 난다. 나는 조심스럽게 말하기 시작했다. "에, 저...사비오 님이 사과를 사오라고 시키셔서...안부도 물으라고 하셔 서..." 이런. 완전히 겁먹은 꼬마로군. 이런 내가 싫어지는 걸. "그래. 사비오 님께 멍청한 아들 놈 때문에 고생하고 있는 거 말고는 별 일 없다고 전해 드려라. 사비오 님도 여전하시지?" 이무르 아주머니가 물었다. "예. 아주 건강하세요" 사과를 아주 잘 씹을 수 있을 만큼요. "...그래. 그렇구나. 은화 한 닢 어치 맞지?" 이무르 아주머니가 말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라짐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눈초리가 느껴졌다. 라짐의 얼굴은 너도 별 수 없는 꼬맹이로구나, 수르 카, 하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무르 아주머니는 종이 봉투에 사과 열 개를 집어넣어 주었다. 과일 가게 에서 사면 은화 한 닢에 열 두개는 주는데. 이무르 아주머니는 하여간 구두쇠 라니까. 그러니까 라이짐도 돈을 모을 줄만 알았지 쓸 줄은 모르는 거 아니 야. 보나마나 저 라짐도 마찬가지일거야. "잘 전해 드리거라. 안부 여쭙더라는 말도 잊지 말고" "예" 나는 인사를 하고 문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문 밖에 못 보던 얼굴 셋이 말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한 사람이 두 사람에게 뭐라고 주장하는 모양이었는 데, 두 사람은 여전히 별로 못 믿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용은 있어. 내가 봤다니까. 그러니까 내가 여섯 살 때였어. 시커먼 놈이 날 뚫어지게 보고 있더라구. 너희들은 모를 꺼야. 그 무시무시한 공포를. 정 말 집채만한 몸뚱이에 눈알은 보통 사람 머리통보다 훨씬 더 컸다구. 정말이 야. 그놈이 나를 짜악하고 노려보더라구. 아주 잠깐이었지만. 어린 나는 어쩔 줄을 몰랐지. 도망갈 수도 없었구, 아니 도망가지 않았지. 내가 아무리 어리 다고 해도 그 타고난 용맹함이 어디 가겠어? 그 놈이 숨을 훅, 들이쉬더라니 까. 세상에, 그때 얼마나 놀랬는지. 내 몸뚱아리가 용한테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데. 그러더니 불을 훅. 뿜는 거야.." 회색 빛에 가까워졌을 만큼 더러운 가죽옷을 입은 사내가 가느다란 목소리 로 재빠르게 말했다. 그 사내는 큰 키에 상당히 마른 체격을 하고 있었는데, 때가 잔뜩 늘어붙은 얼굴이 누가 봐도 영락없는 거지 상이었다. "그래서? 용의 불을 맞고도 살아났단 말이지?" 두 사람 중 키가 작은 쪽이 말했다. 비아냥거리는 투가 분명했다. "그렇지! 내가 좀 남다르잖아! 그런데 혹시 너희들 내 말을 못 믿는 거 아 니야? 탐그루에 온 첫날부터 날 못 믿고 의심하는 사람이 있다니!! 하잔이나 베논만 가봐. 용사냥꾼 사빈이라고 하면 다 난리야. 내가 그정도로 인기인이 라구. 그러니까 나는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라는 말이야. 더군다나 같은 사냥 꾼끼리 못믿다니 말이 안돼지. 원. 이런 경우는 태어나서 처음 당해보네. 이 옷 안보여? 진짜 용 사냥꾼들은 이런 소가죽 옷을 입고 다니는 법이야. 용의 불길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도록 말이지. 그걸 모른단 말이야?" "용사냥꾼? 내가 사냥꾼으로 길을 나선 지 이십 년이 넘었지만 용사냥꾼이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도 없다. 도대체 넌 뭐 하는 자식인데 그렇게 뻥이 세 냐?" 두 사람 중 키가 큰 쪽이 말했다. 두 사람은 모두 털가죽으로 된 옷을 입 고, 머리에는 사냥꾼의 상징인 은빛 타코 가죽으로 만든 모자를 쓰고 있었는 데, 둘 다 팔짱을 낀 모습이 거지같은 사내의 말을 별로 믿고 싶지 않아 하는 것같이 보였다. "이 팔의 상처를 봐라" 거지같은 꼴을 사내가 어느 순간 진지한 표정으로 변하더니 오른 팔을 천천 히 들어 보이면서 속삭이듯 말했다. 사내의 팔에 뭔가 있으리라는 생각에 나 는 사내의 팔뚝을 유심히 보았다. 하지만 사내의 팔뚝에는 시커먼 때밖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아마 이렇게 크고 깊게 난 상처는 처음 봤을 걸? 안 잘리고 안 죽은 게 천 만다행이지." 거지같은 사내의 말에 두 사람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사내의 팔뚝을 들여다 보았다. 나도 마찬가지로 눈을 크게 뜨고 사내의 팔뚝을 바라보았으나 역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까 용이 불을 뿜는 데까지 말했지. 나는 근데 그 순간을 놓치지 않은 거 야. 내가 아니었으면 어림도 없지. 당신들 같았더라면 벌써 통구이가 됐을 걸. 용한테 빨려 들어가는 순간 나는 휙하고 용의 뒤로 돌아간 거야. 이건 이 름도 있는 특별한 기술인데. 아마 자네들은 말해줘도 잘 모를 거야. 그 불길 이 얼마나 무시무시했는지, 불길이 닿는 곳에 있던 바위며 나무 심지어는 흙 까지 줄줄줄 녹아서 흐르더라니까. 정말 죽을 뻔했지. 이 상처는 그때, 용의 불길이 스쳐 지나간 자국이야. 훗~ 아무리 나라고 해도 그것만은 어쩔 수 없 더라니까!" 사내가 말하자 두 사람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뻥이군. 사냥꾼이 아니라 뻥꾼이군! 어디 이름이나 한 번 말해보시지?" "용사냥꾼 사빈! 사빈은 용사냥꾼! 하지만 성은 말해 줄 수 없다. 함부로 말했다가는 나는 상관없지만 내 성을 들은 너희들은 크게 다칠 테니까 말이 야. 같은 사냥꾼끼리니까 믿고 말해주는 건데. 사실 나는 쫓기고 있는 몸이라 구. 저기 타실에서는 용을 숭배하는 놈들이 많아. 그래서 용사냥꾼이라고 하 면 목숨을 걸고 좇아오는 놈들이 한 둘이 아니라구. 지금도 나를 쫓고 있을 놈들 때문에 성은 말해줄 수 없어. 어른이라면 함부로 누군가를 위험에 빠뜨 리지는 않는 법이잖아? 거기다가 나는 어른일 뿐만 아니라 용사냥꾼이니까 더 더욱 말해줄 수 없지." 거지같은 사내가 또다시 쉴새 없이 말했다. 그 말에서 내가 알 수 있었던 건 거지같은 사내의 이름이 사빈이라는 것 하나 뿐이었다. 나머지 말은 모두 거짓말 아니면 뻥 같았다. 그러니까 저렇게 많은 말을 해도 쓸만한 말은 하나 도 없는 것이다. 대단하군. 대단해. "음...그래...나는 자네 성이 뭔지 알겠는 걸?" 두 사람 중 작은 쪽이 말했다. "뭐라고? 감히 내 성을 알고 있다고?" 사빈이 소리치며 가죽옷 윗도리를 걷어 올렸다. 그러자 허리에 찬 두 자루 의 단검이 드러났다. "어허...놀라는 걸 보니 내가 제대로 짚었나본데..." 나는 작은 쪽이 말에 귀를 기울였다. 저 사빈이라는 사람, 보기와는 달리 정말로 무시무시한 수배자가 아닐까? "탐그루에 온 허풍쟁이 사빈. 맞지?" 작은 쪽 사람은 이렇게 말하고는 크게 웃었는데, 별로 우습지는 않았지만 큰 쪽도 따라 웃었다. 그저 사빈을 놀리려는 생각으로 한 말인 모양이었다. "어. 나, 나를 모, 모욕하는 거냐? 이, 이것 봐. 내 미리 경고해 두겠는데, 이, 이 단도가 본 피맛이 내가 먹은 밥보다 마, 많아. 함부로 덤, 덤비지 마. 나, 난 분명히 경고했다" 사빈은 얼굴이 벌게지더니(때 때문에 빛깔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말하고는 단도를 뽑으려고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다(흥분하니까 말을 더듬는 군). 하지만 그 꼴을 가만 보고만 있을 두 사람이 아니었다. 작은 쪽이 사빈 의 손을 꽉 잡자, 큰 쪽이 사빈의 얼굴을 주먹으로 한 방 갈겼다. 나는 신이 나기 시작했다. 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탐그루에 사는 소년 중 싸움 구경을 마다할 사람은 하나도 없지. 그때, 별빛 주점의 문이 열렸다. 라이짐이었다. 어. 라이짐도 싸움 구경을 하러 나온 건가? "여보세요. 여긴 장사하는 곳이에요. 정말 싸울 생각이라면 다른 곳으로 가 라구요. 그리고 보아하니 사냥꾼 같은데 사냥꾼은 명예심도 없나요? 두 사람 이 한 사람하구 싸우다니, 원" 퉁명스럽게 라이짐이 말했다. 싸움 구경을 못하게 만들자니 기분이 상한 건 지, 아니면 이무르 아주머니에게 당한 게 억울해서 그런 건지는 알 수 없었 다. "뭐라구?" 작은 쪽 사람이 발끈해서 말했다. 당장이라도 칼을 뽑을 기세였다. 위험하 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목도를 가지고 오는 거였는데, 이를 어째? "오라. 이제는 성년도 지나지 않은 사람을 죽이겠다? 허허. 칼이 아깝다, 아까워" 작은 쪽은 더 흥분해서 칼자루를 쥐었다. 정말 위험하다! 나는 어떻게든 달 려들 생각을 했지만 나보다 먼저 큰 쪽이 작은 쪽의 팔을 잡았다. "저 친구 말이 맞아. 이런 허풍쟁이 하나 때문에 시간을 낭비할 수야 없지. 그냥 가자구" 큰 쪽이 천천히 말했다. 작은 쪽도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그래" 하지만 화는 아직 풀리지 않았는지 조금 씩씩거렸다. "자 그럼 저 허풍쟁이는 두고 여관으로 가자구" "그래. 너 오늘 운 좋았다" 두 사람은 이렇게 말하고는 사빈을 놓고 등을 돌리려고 했다. 그때 사빈이 소리쳤다. "야! 너, 너희들 일대 일로 더, 덤벼! 아, 아니 둘 다 덤벼, 사, 사람을 모 욕해 놓고 가긴 어딜 가려고 그래!" 두 사람이 사빈을 노려보았다. "그냥 가려고 했더니..." "그, 그래. 겁나면 그냥 가! 그러면 어, 얼마나 운이 좋았는지 나, 나중에 생각할 수 있을 거다. 하, 하지만 죽은 뒤에는 해, 해 봐야 소용없어!" 사빈은 이렇게 소리쳤다. 정말 겁을 모르는 사람이로구만. 저 사냥꾼들, 그 냥 보기에도 보통 실력은 아닌 것 같은데 말이야. "그래. 죽는 게 원이라면 도와주지. 그렇게 까불고도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작은 쪽이 말했다. "아니, 죽이지는 마. 팔이나 다리 하나만 잘라 가자구. 아니면 저 잘난 혓 바닥을 뽑아버리던지 말이야" 큰 쪽이 말했다. 조금도 흥분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경험으로 저 런 사람이 훨씬 더 무섭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사빈은 그걸 아는 지 모르는 지 잔뜩 흥분한 얼굴로 두 사람에게 계속 욕설을 지껄였다. "이것 봐요. 죽든, 죽이든, 딴데가서 해 주세요" 라이짐이 말했다. "우리도 남의 가게 앞에서 사람을 죽이고 싶진 않다" 큰 쪽은 사빈을 노려보며 이렇게 말했다. 저게 진짜 무서운 사람의 말투다. 저 두 사냥꾼은 아마 살인을 해본 경험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 다. "경우 건 뭐 건 당장 따라와! 내, 내 다, 당장 네놈들 모가지에서 목소리 대, 대신에 피를 쏟게 해 줄 테니까" 사빈은 이렇게 말하고는 먼저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고 그 뒤를 두 사냥꾼이 따랐다. 참 우스운 일이군. 도대체 저 사빈이라는 거지는 왜 저런 죽을 짓을 사서하는 걸까. 혹시 나중에 치료비 달라고 하는 자해 공갈단아니야?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N:김상현 #8642/10199 ━━━━━━━━━━━━━━━━━━━━━━━━━━━━━━━━━━━━━━━━ 제 목:[탐그루] 별빛주점의 두 소년 - 8 - 관련자료:없음 20/20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0-24 07:32 조회:1273 탐그루 # 마법은 마음이다 - 마음은 칼이다 # 나는 싸움 구경을 놓친 것을 아쉬워하며 예언의 눈동자로 돌아왔다. "수르카야. 좀 늦었구나" 사비오 영감이 말했다. 나는 손에 든 사과 봉투를 사비오 영감에게 내밀었 다. "이무르 아주머니가 안부 전해 드리라고 했어요" "그래" 사비오 영감은 이렇게 말하고는 눈을 감았다. 명상에 들어가려는 모양이었 다. 사비오 영감은 하루에도 수 십 번씩 명상에 들곤 한다(라고 본인은 주장 하지만 그게 앉아서 자는 건지, 아니면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알 게 뭐 람). 나는 이제 뭘 하면 좋을 지 알 수가 없어졌다. 손님이 올 때까지는 완전히 자유인 것이다. 사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거지만, 예언의 눈동자에서 내 가 하는 일은 거의 없다. 손님이 왔을 때 손님의 말을 전하는 일을 빼면 아침 에 청소, 식사 때마다 식사 준비하기, 가끔 잔심부름 정도만 하면 되는 것이 다. 즉, 내 또래 누구나 다 하는 일을 빼고 나면 내가 하는 일이라고는 손님 의 말을 전하는 것뿐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목도를 들 고 예언의 눈동자 뒤편에 있는 뮤 축사 앞에서 목도 쓰기를 연습하곤 한다(예 언의 눈동자에서 멀리 떠날 수는 없다. 언제 사비오 영감이 나를 찾을 지 모 르기 때문이다). 목도를 휘두르는 일은 즐거운 일이다. 바람을 가르는 목도 소리를 듣는 일 도 좋고, 한 참을 휘두른 뒤에 흘리는 땀도 기분 좋다. 골목에서 가끔 목도로 누군가와 싸울 일이 생겼을 때, 이 목도 연습은 효과를 발휘하곤 한다. 하지 만 휘두르는 것은 단지 기본적인 일일뿐이다. 지금까지의 경험에 의하면 목도 로 누군가와 싸울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공격과 수비가 용이하도록 상대방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다. 상대가 다가오면 물러서고, 상대가 물러서면 다가가며 항상 상대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고 내가 공격하기 편리한 거리 말 이다. 이 균형이 깨진다면 그순간 누군가의 머리도 깨진 것이다. 이점이 바로 목도 쓰기의 기본이다. 이걸 모르고서는 백날 목도만 휘둘러 봤자 아무 소용 없다. 거리를 모르는 사람은 십중팔구 아무렇게나 목도를 휘두르다가 머리가 깨지기 십상이다. 그렇지만 그 거리를 안다는 것은 말처럼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거리는 즉 걸음이다. 걸음을 어떻게 걷느냐에 따라서 거리가 천천히 줄어들 기도 하고 갑자기 늘어나기도 한다. 요컨대 사람의 습관에 따라 달라지는 것 이다. 목도로 싸우는 일에서 제일 중요한 일이 바로 이 사람의 습관을 읽는 것이다. 상대방의 습관을 읽어 상대방이 지금 내딛은 걸음이 과연 어떤 의미 인가를 읽는 것이다. 이런 걸 익히는 데는 왕도가 없는 것 같다. 칼을 휘두르는 것 자체는 매일 휘두르기만 하면 될지 몰라도 이건 어떻게 해도 안 된다. 그저 평소에 사람들이 움직이는 것을 잘 봐두었다가 싸움의 순 간에 상대의 걸음이 저절로 읽히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다. 생각으로 되는 일 이 결코 아니다. 몸에 베어야 하는 것이다. 얼마동안 목도를 휘둘렀을까. 사비오 영감이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수르카야!" 예. 간다구요. 무슨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게 앉아보거라" 사비오 영감은 이렇게 툭하면 나를 불러 앉혀놓고 설교를 하곤 한다. 대부 분 잘 모를 소리이지만, 그래도 들어두었다가 라이짐 패거리에게 써먹는 게 재미있어서, 나는 그래도 잘 들어보려고 노력하는 편이다(시하라의 엉터리 무 용담도 매일같이 듣는 내가 사비오 영감의 얘기를 듣는 게 뭐 그리 어려울 리 는 없지 않은가). "칼쓰기가 좋으냐?" 사비오 영감이 물었다. "예" 내가 대답했다. 별로 생각해 볼 것도 없는 질문이었다. "칼이란 본시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지. 수르카야. 그렇다 면 칼을 잘 쓰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사비오 영감이 물었다. 어? 바로 조금 전에 목도를 휘두르며 내가 생각하고 있었던 것을 묻고 있잖아? 나는 거리와 칼을 휘두르는 일과의 관계를 사비오 영감에게 자신 있게 말했 다. 이것 보세요, 사비오 영감님. 저는 이제 곧 성년이 되는 몸이라구요. 거 기다가 탐그루의 내 또래 중에서 최고의 목도 실력을 가지고 있구요. "그래. 역시 너는 네가 하는 일에 대해 조금은 생각이 있구나" 사비오 영감은 이렇게 말하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 옛날 위대한 검객으로 알려진 카를로스 카를로스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을 게다" "그건 마칸 족을 몰아낸 위대한 두 사람의 전설이잖아요. 마칸 족과의 전쟁 에서 공을 세운 대 마법사 아킨과 카를로스 장군 얘기...맞지요?" 이젠 전설을 있는 그대로 믿을 만큼 어린 나이는 아니지만, 나는 전설에 관 해서 듣고 말하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전설 속에는 검객들의 싸움이 있 고, 그들의 사랑과 우정과 모험이 있다. 사실, 내 또래 중에서 그런 얘기에 흥미가 없는 사람은 아마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 전설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얘기가 비스토브레 왕국의 성립과 관련된 대 마법사 아킨과 카를로스 장군의 전설이다. 두 사람은 천 년 전, 마칸 족과 인간 사이에 벌어진 전쟁에서 인간 을 승리로 이끌고 비스토브레 왕국의 건립을 도운 가장 큰 영웅이다. 비스토 브레 왕국에서 아킨과 카를로스를 모르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다만 그 얘기가 전설이냐, 아니냐에 대해서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데, 나는 카를로스 장군의 신출귀몰한 전술과 칼 솜씨는 믿을 만 하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대 마법사의 이야기는 후대 사람들이 지어낸 이야기라고 생 각한다. 마법사가 있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은 있지만 그렇게 엄청난 마법이 진 짜 있는지 아닌지는 알게 뭐람. "그래. 잘 알고 있구나. 그런데 말이다, 대 마법사 아킨은 카를로스 장군과 함께 마칸 족과 싸웠지만 실은 칼을 싫어하는 사람이었단다" 또 다른 전설 얘기로군. 전설은 소문과 비슷한 점이 있다. 같은 장소에 같 은 사람의 이야기지만, 그 내용은 말하는 사람마다, 시간이 흐를 때마다 조금 씩 달라져서 나중에는 완전히 달라지고 만다. "대 마법사 아킨은 마법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칼은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고 생각했지. 그래서 칼은 마음을 변하게 한다고 생각하고 칼의 사용을 반대했던 거란다" "그럼 카를로스 장군은 어떻게 생각 했나요?" 내가 물었다. "카를로스 장군은 물론 다르게 생각했지. 마음은 결국 칼에 의해 움직이기 마련이고, 마음을 바꾸는 모든 것을 칼이라고 생각했단다. 그렇기에 칼이 아 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지." 나는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고개를 갸우뚱하며, 잘 모르겠는데요, 하는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칼과 마법은 같기도 하면서 다르기도 한 거란다. 그래서 칼과 마법은 이 세상을 움직이는 두 개의 큰 원칙이라고도 하지. 수르카야. 네가 이제 성년이 되면, 너에겐 남과는 다른 운명의 수레바퀴가 돌아갈 것이다. 결코 멈추지 않 는 운명의 수레바퀴 속에서 너는 환희와 절망 그리고 삶과 죽음을 쉴새없이 보게 될 것이다. 또한 수많은 갈림길들이 너를 유혹할 것이고, 더 많은 갈림 길 앞에서 너는 방황하게 될 것이다. 그때 이 칼과 마법의 두가지 원칙이 너 를 인도해 줄 것이다. 어떤 때에는 칼을 선택할 것이고, 또 어떤 때는 마법을 선택할 것이다. 그러나 네가 끝까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마음이다. 결국 마음이 네 운명을 결정지을 것이다. 잊지 말거라. 마음 을......" 또 예언자 같은 말씀이시군요, 사비오 영감. 나는 피식 웃으며 생각했다. 점심을 먹고 오후가 될 때까지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손님도 없었 고, 사비오 영감의 심부름도 없었다. 그렇다고 낮잠이나 자면서 시간을 보내 기에 나는 몸이 너무 근질거렸다. 오후가 되자 사비오 영감이 다행히도 나를 불러주었다. 만약 그러지 않았다 면 나는 지루함을 못 견디고 미쳐버렸을지도 모른다. "수르카야. 대청하 정박장에 좀 다녀오너라. 거기 가면 시하라가 네게 주머 니를 줄 거다. 그걸 받아오면 된다" 사비오 영감이 말했다. 사비오 영감은 가끔씩 진짜 예언자 같은 말을 손님 에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나에게도 하곤 한다. 아니, 눈을 감고 가만 히 있는 노인이 시하라가 어디 있는 줄 알고 이런 심부름을 시키는 지는 도무 지 알 수가 없다. 그 명상이라는 게 효과가 있기는 있는 걸까? 사실은 나도 몇 번 사비오 영감이 명상하는 것을 흉내내어 본 적이 있다. 그래서 나는 시간을 빨리 흐르게 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그러니까 다시 말 해서 낮잠을 자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는 말이다. 혹시 누군가가 집에서 사비 오 영감을 따라한다면 부작용에 주의해야 할 것이다. 밤에 잠이 오지 않고 머 리가 지끈지끈 아파 오는 현상이 생길 수 있으니 말이다. 하여간 나는 다시 한 번 탐그루 시내의 기분 좋도록 맑은 공기를 다시 한 번 맡을 수 있었다. 그것도 가장 좋은 날씨의 오후 공기를 말이다. 만약 탐그 루가 사람이 별로 없는 도시였다면 정말 좋은 공기를 늘 마실 수 있었을지 모 른다. 팜 산맥의 끝자락에서 만들어지는 짙은 숲의 공기와 대청하에서 흐르는 산뜻한 강의 공기가 어우러지는 이곳의 공기는 참으로 일품이라고들 여행자들 은 말한다(나야 이곳 출신이니 그런지 안 그런지 잘 모르겠지만). 나는 중앙 광장을 지나지 않고 탐그루 남쪽에 있는 정박장으로 향했다. 정 박장까지는 꽤 걸어야 하기 때문에 나는 걸음을 빨리 했다. 남쪽으로 해서 정박장으로 가는 길은 별로 볼거리가 없다. 정박장에서 내린 사람들을 유혹하는 여관만 여기저기 늘어서 있을 뿐이다. 여관의 모습은 좀 이상한 구석이 있다. 낮에는 젊은 여자들이 열심히 청소도 하고 물도 긷고 요 리도 하고 있는 평범한 모습이지만 해만 지면 이곳은 여기저기서 연금술사의 붉은 등이 피어오르는 곳이 되고 마는 것이다. 젊은 여자들은 하나같이 젖가 슴이나 허벅지를 드러내는 옷을 입고 붉은 등 아래에서 여행객들을 유혹한다. 그 여자들은 길가는 사람들을 나이가 적건 많건 간에 무조건 오빠라고 부르 는데, 실망스럽게도 나는 한 번도 오빠라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다. 사실 여 자들 구경을 하기 위해 해가 진 뒤에 일부러 몇 번 이곳을 왔다 갔다 한 적도 있었다. (그냥 단순한 호기심에서다, 호기심) 하지만 붉은 등의 여자들이 나 에게 말을 건 적은 거의 없고, 몇 번인가 나를 부른 여자도 나를 꼬마라고 했 다. 꼬마라니! 나도 다음 주면 성년이라구. 키가 작은 건 순전히 선천적인 거 지 내 노력 여부하고는 관계없는 일이잖아. 언젠가 라이짐은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기생들의 손이 한번만 스쳐도 몽정을 하게 된다더라" 그때 처음 알았다. 그런 여자들을 기생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그런데 나는 몽정이 무슨 말인지 몰라서 라이짐에게 몽정이 뭐냐고 물어보았다. 라이짐이 내가 모르는 말을 알고 있다니 이건 대단히 희귀한 일이다. (결코 자주 있는 일이 아니다!) "나도 잘 모르는데, 어른이 되려면 꼭 해야 하는 거래. 자다가 말이야, 오 줌싸는 것처럼 뭘 싸게 된다던데 나도 그게 뭔지는 잘 몰라" 라이짐은 이렇게 말했다. 물론 지금은 몽정이 뭔지 조금은 알고 있다. 아직 해본 적은 없지만 말이다. 아마 성년의 날이 지난 후에는 알 수 있을 지도 모 르지. 나는 기생들의 손이 닿을까봐 조심하며 걸어서 정박장에 도착했다. 정박장 에는 이제 막 탐그루에 도착한 배들과 떠날 준비가 한창인 배들, 그리고 그 배들의 여행객들로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 배들은 호화로운 장식이 되어있는 유람선도 있었고, 덩치가 커다란(보통 이 층 건물보다 크다) 화물선도 있었다. 그런가하면 천천히 움직이는 이곳 탐그 루 사람들이 쓰는 나룻배도 있고, 작지만 빠른 자치대의 순찰선도 있다. (이 곳 탐그루 자치대도 군함을 한 척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하지 만 이 순찰선 말고는 본 적이 없다) 멀리 흐르고 있는 대청하의 강물소리 위로 배의 고동소리와 사람들의 왁자 지껄 떠드는 소리가 어딜 가나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참. 사비오 영감도. 이 런 곳에서 시하라를 찾으라니.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나는 속으로 투덜거 리면서 생각했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알고 있는 한, 사비오 영감의 이런 예언자 같은 심부름 은 한 번도 어긋난 적이 없었다. 그러니 믿고 안 믿고를 떠나 그냥 해 볼 수 밖에 없는 거지 뭐. 나는 먼저 사람들이 가장 많은 정박장 마차 대기소로 향했다. 이곳은 배에 서 내린 여행객들이 배가 정비를 마치는 하루나 이틀 동안 탐그루에 머물 경 우, 탐그루 시내까지 마차로 사람과 짐을 옮길 수 있게 되어있는 곳이다. 이 곳에 마차들이 줄지어 있는 광경은 가히 장관이라 할만큼 멋진 경우도 있다. 스물 두 대의 마차들이 이곳에 한 줄로 서 있는 광경을 본 적이 있는데, 그때 가 그랬다. 여행객들을 위한 아름다운 장식으로 가득한 마차들이 줄을 서 있 는 광경을 생각해 보라. 그 앞에는 네 마리의 뮤, 혹은 두 마리의 뮤가 뮤-- 하는 울음소리를 내며 자신의 윤기 흐르는 탄탄한 모습을 뽐내고 말이다. 다 만 흠이라면 이곳에는 늘 많은 뮤가 모여있기 때문에 뮤 똥냄새가 지독하다는 점이 있다. 하지만 시내까지 걸어가기 싫은 사람들은 늘 이곳을 이용한다. 지 체 높으신 귀부인들은 향수를 적신 손수건을 코에 대고서라도 말이다(우스운 일이다. 내가 보기에 손수건에 묻힌 향수 냄새도 만만치 않게 역겨운데 말이 다). "수르카!" 누군가 나를 불렀다. 역시, 사비오 영감은 대단하군, 하고 생각하면서 뒤를 돌아보았는데, 거기에는 시하라가 아니라 울찬이 서 있었다. "무슨 일이야. 여기까지. 라이짐은 저쪽 선박장 있는 곳에 있어. 조금 있다 가 만나기로 했는데" 울찬은 굵은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확실히 울찬은 목소리가 굵다. 거기다 가 좀 뚱뚱해서 그렇지 누가 봐도 성인이라고 생각할 만큼 건장한 체격을 가 지고 있다. 그럼 뭐하나, 나한테 진 주제에. 나는 작년에 한 번 울찬과 목도로 붙었던적이 있다. 그때 울찬은 내가 탐그 루에서 가장 목도를 잘 다룬다는 말을 듣고는 발끈해서 나에게 약식 결투를 신청한 적이 있었다. 물론 결과는 내 승리였다. 울찬은 빠르고 강하지만 거리 를 맞추는 법을 잘 몰랐다. 하지만 울찬이 힘겨운 상대였다는 건 인정하고 넘 어가야겠다. 그 뒤로도 나는 라이짐의 패거리에 크고 작은 문제가 생길 때마다 내 목도 솜씨를 빌려주곤 했다. 다른 조직과의 갈등이 편싸움을 부르는 경우도 있고, 사소한 말다툼이 쉽게 약식 결투를 부르곤 한다. 나는 탐그루 최강의 미성년 검사답게(라고 하긴 좀 쑥쓰럽지만) 한 번도 라이짐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은 적이 없다. 물론 그 결과는 몇 주 동안 팔이 부러지고 다리를 절름거리고 돌 아다니는 신세가 되는 것 뿐이었다. 그래서 울찬은 나에게 경쟁의식 같은 것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는데, 한 번은 나에게 다시 약식 결투를 하자고 요청하기도 했다. 이기는 것도 좋지만 다시 팔이 부러지는 건 생각하기도 싫어 나는 정중하게 그 요청을 거절했다. 팔이 부러져 본 사람은 안다. 한 팔로 생활하는 게 얼마나 불편한 건지. 어쨌 든 다시 붙는 건 상상하기도 싫다. "혹시 무기점 주인 시하라 못 봤어?" 내가 울찬에게 물었다. "글쎄. 여기를 지나갔다면 분명히 봤을 텐데 못 봤어" 울찬이 말했다. 하긴. 지금 분명히 소매치기 영업 중일 테니까 울찬이 사람 을 놓쳤을 리는 없다. 그럼 어디로 가보나, 생각을 하고 있는데, 오전에 보았 던 거지꼴을 한 자칭 용사냥꾼이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용을 찾아가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야. 너도 보니까 꽤 험하게 살았던 모양인데. 하하하. 나에 비하면 새발의 피라고나 할까? 죽을 고비 정도가 아 니라 사실 여러번 죽었지. 아마 내 칼이 먹은 피가 내가 먹은 밥보다 많을 걸. 보아하니 군인인가? 아니면 용병? 하여간 반갑군. 위험한 일은 하면서 살 아가는 싸나이들은 원래 척 보면 통하는 법이야. 어때 같이 한 잔 할까?" .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N:김상현 #8643/10199 ━━━━━━━━━━━━━━━━━━━━━━━━━━━━━━━━━━━━━━━━ 제 목:[탐그루] 별빛주점의 두 소년 - 9 - 관련자료:없음 27/27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0-24 07:33 조회:1291 탐그루 # 마법은 마음이다 - 마음은 칼이다 # 그런데 오전에 본 것과는 전혀 딴판이어서 나는 처음에 내 눈을 의심했었 다. 사빈의 얼굴에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었던 때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 았고 옷도 진짜 소가죽이라는 걸 한눈에 알아 볼 수 있을 만큼 깨끗해져 있었 다. 혹시 닮은 사람이거나 쌍둥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 지금의 사빈은 거지꼴의 사빈과 같은 점이 너무나 많았다. 먼저 말투 가 그랬고, 움직임이 그랬다. 아무리 쌍둥이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같을 수는 없는 법이다. 게다가 오른 팔에는 정말 불에 데인 것 같은 흉터가 나 있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하고있는 차림새와 이번엔 형제 사냥꾼이 아니라 사슬 로 엮은 진짜 갑옷을 입은 검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는 점이다. 게다가 그 갑옷 입은 검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사빈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런데 사빈은 그 형제 사냥꾼 문제는 어떻게 처리하고 여기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걸까? 무릎꿇고 싹싹 빈 다음에 구걸이라도 해서 어디 여관에 가 목욕이라도 하고 나온 걸까? "...정말인가? 용을 본 적이 있다구? 대단하군. 당신, 내 한 잔 사지. 따라 오라구" 갑옷의 검사는 이렇게 말했다. 사빈은 좋다는 듯 빙긋 웃어 보이곤 검사를 따라 걸어가기 시작했다. 대낮부터 술 마실 궁리나 하다니. 자칭 용사냥꾼 사 빈은 아무래도 이렇게 술 얻어 먹는 일에 능숙한 것 같았다. "수르카!" 저 목소리는 누군지 쉽게 알 수 있다. 라이짐이다. "어쩐 일이야?" 말은 안 했지만 라이짐은 '내 영업 장소에?' 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울찬 이나 라이짐이나 마찬가지로군. 철저한 직업의식을 가지고 있다니까. 하긴 여 기 탐그루 사람들이 다 그렇기는 하지만. "혹시 무기점 주인 시하라 못 봤어?" "어, 나도 시하라를 찾고 있는데" 라이짐이 말했다. "시하라가 우리 술집에서 지금 난리를 치고 있데. 그래서 지금 가기 전에 울찬한테 일 넘기고 가려고 하던 참이었는데...잘 됐구나. 같이 가자" 라이짐이 말했다. 하여간 사비오 영감의 예언은 아무리 생각해도 엉터리 같 지만 이렇게 잘 맞아 들어간다니까. 한두 번이라면 또 모를까 매번 이런다면 그냥 그 말을 믿는 수밖에 더 있을까? 하여간 이렇게 해서 나와 라이짐은 별빛 주점으로 향하게 되었다. 온 길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라이짐은 술집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별빛 주점은 라짐이 운영하게 될 거야. 잘 됐지 뭐. 라짐은 남자 손님들한 테 인기도 많은데다가 엄마를 닮아서 장삿속은 끝내주거든. 하지만 라짐이 주 인이 되면 별빛 주점에 오는 손님 중에 처음으로 죽어 나가는 사람이 생기지 않을까 몰라" 라이짐은 이렇게 말했다. 자식. 동생 험담은 많이 해도 믿기는 믿는 모양이 로군. 하기사 믿지 못할 동생이라면 성년이 되면 여기를 떠나겠다는 생각은 못했겠지. 별빛 주점에는 손님이 많은 모양이었다. 문 앞에 닿았을 때 시끌벅적한 소 리가 다른 술집 보다 훨씬 더 높았다. 장사가 잘 되긴 잘 되는 모양이로군. 라이짐은 자신의 집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본부를 꾸렸다. 이건 아마 도 라이짐이 집안 일에 신경을 쓰고 있다는 증거가 되리라.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을 때, 나는 다른 술집보다 시끌벅적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시하라가 술에 취에 소란을 피우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보다 정 확하게 말하면 라짐에게 얻어맞고 있었다. "이 영감텡이가 어디서 수작이야, 수작이! 그렇게 여자가 그리우면 정박장 에 가서 기생을 찾던가 아니면 집에서 조용히 혼자 해결할 일이지!" 우왁! 열 세 살밖에 안된 여자애가 저런 말을! 나는 나이든 시하라가 열 세 살 짜리 여자아이에게 찝쩍거렸다는 사실보다 라짐의 저런 말투가 더 놀라웠 다. "아니, 나, 나는 말이야..." 시하라가 뭔가 얘기하려고 했지만 라짐은 쓰러져 있는 시하라의 얼굴에 가 차없이 발길질을 해 변명할 틈도 주지 않았다. 아, 불쌍한 시하라. 젊었을 적 에는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용병 생활을 했다더니, 이런 술집에서 열 세 살 짜리 여자아이한테 얻어맞는 신세가 되다니. 그런데 갑자기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렸다. 구석에서 탁자가 우당탕탕 뒤집 어졌다. 술집 안에 있는 모든 시선들이 구석으로 향했다. "내, 이, 이럴 줄, 알았어. 척보고 네놈이 살인청부업자라는 걸 아, 알았는 데. 내가 그, 그래도 널 믿고 싸나이 대 싸나이로 얘기로, 대, 대화로 풀어 볼려고 그랬더니, 기껏 한다는 짓이 칼을 들이대다니, 야, 너, 너 너무 지나 친 거 아, 아냐?" 많이 듣던 목소린데...사빈이었다. 나는 상황을 둘러보았다. 사빈과 갑옷 입은 검사는 서로 쓰러진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었다. 검사는 칼집에 손을 대고 당장이라도 뽑을 수 있도록 자세를 취하고 있었고 사빈도 금방이라도 단도를 뽑을 자세로 서 있었다. "또 당신이로군" 라이짐이었다. 짜증이 나서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이것 봐요. 싸움은 나가서 하라고 내가 몇 번을 말해야..." 하지만 라이짐은 말을 끝까지 다 맺지 못했다. 기어코 갑옷 입은 검사가 칼을 뽑아든 것이다. 여기저기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고, 순식간에 사람들 이 비켜 서 둘이 싸울 공간이 마련되었다. 라짐도, 아니, 이무르 아주머니 도 어쩔 줄을 몰라했다. 진짜 결투인 것이다. "난 살인 청부업자가 아니다. 너는 내 동생 둘을 죽였다" 검사가 말했다. "그건 결투였어, 임마. 복수하고 자시고 할 문제가 아니라구. 너 같으면 그런 모욕을 당하고도 칼을 뽑지 않을 자신이 있냐? 사람의 겉모습만 보고 그런 모욕을 주다니. 그 친구들은 계속 그따위로 살았다면 굳이 내가 아니 었더라도 누군가에게 죽었을 거야. 차라리 나한테 죽었으니 고통이나 없었 지. 이봐. 오히려 난 고맙다는 말을 들어도 부족하다구. 칼을 뽑은 건 내 하해와 같은 아량으로 봐줄테니까. 입닥치고 꺼져. " 사빈은 말을 할수록 더듬지 않고 더 냉정해졌다. 그리고 웬지 잔인하고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 같은 기운이 사빈의 주위에 감돌고 있었다. 아니, 그럼 사빈이 아까 본 사냥꾼 둘을 죽였단 말인가? 나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원수를 살인청부업자라고 잘못짚는 걸 보니 참 어이가 없었 다. "그래. 그건 결투였다. 그렇다면 내 동생의 명예를 위해 내가 너한테 결 투를 신청한다면 거절하지는 않겠지" "이봐 이봐. 그만 둬. 난 사람 죽이는 걸 좋아하지 않아. 용을 찾아 해치 우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구. 그대로 사라지라구. 그럼 나중에 오늘 운이 좋았다는 걸 알게 될 거야. 죽어서 후회해 봐야 아무 소용없어. 나라면 죽 어도 후회할 수 있겠지만 당신들은 그렇지 않잖아? 귀찮아. 가버리라구." 사빈이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검사의 긴칼이 빛을 발하며 허공을 갈랐다. 사빈의 목을 노린 칼이었다. 다시 한 번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사빈은 몸을 뒤로 놀려 칼을 피했다. 그러고 보니 사빈은 거리를 정 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반면에 저 갑옷 입은 검사는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렇게 사람이 많고 좁은 곳에서 결투를 벌이다니. 긴칼을 들고 말이다. 사람들을 모조리 벨 생각이던가 아니면 너무 흥분해서 단숨에 끝내 겠다는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잘못된 생각이라고 여겨졌다. 다만 검 사가 유리한 점도 있었다. 사슬로 된 갑옷을 입고 있다는 점이 그것이었다. 단검이라면 저 갑옷을 뚫기가 쉽지 않을 게 분명했다. 긴 창이라면 또 모를 까. 다시 검사의 칼이 번득였고 사빈은 몸을 놀려 또다시 칼을 피했다. 그런 데 저렇게 피하기만 해서 승부가 날까? 검사도 그걸 알았는지 계속 이어서 공격을 했고 사빈은 계속 피했다. 긴칼이 위에서, 아래에서, 다시 옆으로 계속 허공을 갈랐다. 사빈이 피할 때마다 둥그렇게 모인 사람들도 따라서 움직였다. 하지만 사빈이 피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다. 결국 사빈은 검사 가 밑에서 위로 쳐 올린 칼을 단검으로 막았지만 검사의 발길질을 피하지는 못했다. 사빈은 배에 발길질을 당하고 뒤로 쓰러졌고 그 때를 놓칠세라 검 사가 달려들었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람이 죽는 모습을 보게 되는 구나 싶었다(죽은 사람을 구경하고 있는 사람들의 등은 몇 번 본적이 있었 지만). 그러자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두려움과 호기심이 반반 섞인 떨림이었 다. 나는 혹시 내 가슴이 뛰고 있다는 것을 라이짐에게 들킬까봐 일부러 라이 짐의 얼굴을 외면했다. 그 순간이었다. 라이짐이 달려들어 검사의 칼 쥔 오른 팔을 잡았다. "이쯤 해둬요. 내 술집에서 살인은 안 되요" 라이짐은 검사의 팔을 잡고 이렇게 말했다. "끼여들지마. 이건 명예에 관한 문제라구. 목숨을 걸고 나하고 싸우고 싶 나?" 검사가 말했다. 보기에도 섬뜻한 눈이었다. "아니요. 난 아직 성년이 되지 않았어요. 그러니 명예의 의무를 따를 이유 는 없죠. 그리고 다시 한 번 말하겠는데 우리 술집에서 살인은 절대로 안돼 요" 라이짐이 말했다. 라이짐에게 저런 배짱이 있었다니. 역시 두목은 뭐가 달 라도 다르다니까. 그리고 라이짐은 뭘 믿고 그러는지 갑옷 입은 검사의 팔을 흔들어 칼을 빼앗으려고 했지만 어림없었다. 갑옷을 입은 진짜 검사를 성년도 지나지 않은 라이짐이 막을 수 있을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건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었다. "비켜!" 날카롭게 소리치면서 검사는 라이짐을 밀었다. 라이짐은 뒤로 힘없이 나가 떨어졌다. 기껏 내가 할 수 있었던 일은 쓰러지는 라이짐을 붙잡아 준 것뿐이 었다. 라이짐의 얼굴에 분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 라이짐의 저런 표정은 처음 봤다. 정말 섬뜻한 표정이었다. 그 사이 사빈이 일어났다. "이봐. 난 괜찮아. 죽어도 죽지 않으니까. 걱정 말라구" 사빈이 라이짐을 보며 말했다. 검사는 다시 한 번 사빈을 몰아세우려고 공 격을 시작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순간, 나는 보았다. 검사의 칼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순간, 사빈의 오른 손이 팔과 목 사이를 파고드는 것을. 단 한 순간이었다. 검사의 목에 금이 생기는가 싶더니 이내 피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허겁지겁 피를 피해 도망치기 시작했다. 검사는 칼을 떨어뜨리고 양손으로 목을 붙잡았다. 하지만 나오는 피는 조금도 멈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검사가 뭐라고 말하려고 했지만...말 대신 나오는 것 은 검붉은 핏덩이 뿐이었다. "자넨 너무 생명을 너무 함부로 했어" 사빈이 말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술집에는 라이짐 가족 말고는 쓰러져 있던 시하라 와 나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사이 모든 손님들이 나가버린 모양이었다. 검사는 죽어있었다. 조금 전까지 기세 등등하게 소리를 지르며 싸우고 있던 검사는, 이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누워서 썩기만을 기다리는 존재가 된 것 이었다. 나는 검사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그저 멍하니 쓰러져 있는 검사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주변의 모든 사물들이 정지한 듯 여 겨졌다. 입을 쩍 벌리고 쓰러져 있는 검사의 목과 입에서는 계속 피가 흐르고 있었다. 정말 시체구나...정말 누군가가 죽었구나...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시체를 보고 말았다. 죽는다는 것이 저런 것이구나. 구역질이 나려고 했다. 라이짐도 어안이 벙벙한 모양이었다. 일방적으로 공격만 당하던 사빈이 한 순간에 쓰러뜨렸다는 사실이 라이짐은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어쨌든 미안하게 됐네. 보셨지만, 이거, 제가 피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 서...저 이만하면 보답이 될지..." 사빈이 이무르 아주머니에게 뭔가를 전해주며 말했다. 금화였다. 번쩍번쩍 빛나는 금화 한 닢이었다. 이무르 아주머니는 기분 나쁘다는 표정으로 빼앗듯 이 금화를 집어가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하지만 아무 말이 없는 것으로 봐서 거래가 이루어지긴 한 모양이었다. 그때 자치 대원들이 술집 안으로 들이닥쳤다. 밖으로 도망친 사람들 중에 누군가가 신고를 한 모양이었다. "자치대원 여러분. 이건 결투였습니다. 여기모인 사람들 전원이 다 증인이 죠" 사빈이 말했다. "그래. 내, 내가 다 봤어. 결투였어. 정당한" 시하라가 벌건 얼굴로 느릿느릿 말했다. 아직 술이 다 깨지 않은 모양이었 다. "시하라. 당신 얼굴이 왜 그래요?" 자치 대원 중 하나가 시하라에게 물었다. 하지만 시하라는 라짐의 눈치를 한 번 보더니, 구경하다가 넘어져서...하고 말했다. 자치대원은 좀 의심스럽 다는 표정이었지만 쓰러져 있는 검사와 사빈을 대충 몇 번 살펴보고 결론을 얻었는지 이렇게 말했다. "좋소. 하지만 이곳 탐그루의 치안을 책임지는 자치 대원으로서 한 마디 하 겠는데, 될 수 있으면 빨리 이곳을 뜨는 게 이로울 거요. 당신, 오늘 들어서 만 벌써 셋이나 죽였어. 그걸 사람들이 알게 되면 여기저기서 떠돌이 칼잡이 들이 달려들게 뻔하니까, 혹시 그런 치들에게 죽고 싶거나 그 치들을 죽이고 싶다면 당장 여길 떠나 다른 도시에서 그러는 게 좋을 거요. 이곳 탐그루의 시민이 또 다치게 된다면 당신은 자치 대원 전부를 상대해야 할 테니까" 자치 대원은 이런 일은 숱하게 겪었다는 듯이 능숙한 솜씨로 말했다. "좋아, 좋아. 나도 이런 일은 질색이니까. 하루에 결투를 두 번씩이나 하다 니 이러다간 목숨이 열 개라도 모자라겠는데. 내가 옛날에 타실에 있었을 때 에는 말이에요, 하루에 여섯 번 결투 한 적도 있었는데..." 단검에 묻은 피를 손가락으로 닦아내면서 사빈이 말했지만 자치대원은 얘기 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 주지 않았다. "알았으니까 줄거나 주시오. 우리도 바쁜 사람들이니까" 사빈은 은화 서른 닢을 꺼네 자치 대원에게 주었다. 그러자 자치대원들은 시체를 준비해온 들것에 쓰레기 나르듯 얹은 다음 술집을 빠져나갔다. 그러자 그제서야 피비린내가 술집 안에 돌기 시작했다. 피비린내는 역했지만 맡기 싫 은 고약한 냄새는 아니었다. 이 냄새가 다 빠질 때까지 라이짐 녀석 고생 좀 하겠구만. 자치 대원들이 나가자, 사빈이 라이짐에게 다가갔다. "이봐, 아까 날 도와주려고 했지?" "아니. 난 우리 가게에서 살인이 나는 걸 막고 싶었을 뿐이에요. 보다시피 이 꼴이 되고 말았지만..." 라이짐은 자신이 이런 일을 막지 못했다는 자책감 때문인지 다소 의기소침 하게 말했다. "그거 다행이로구나. 나는 또 정의로운 사내 하나가 나 때문에 결국 죽게 되는 줄 알았지 뭐냐. 그런 일은 딱 질색인데 말이야. 나, 용사냥꾼 사빈은 누구한테 빚지고는 못사는 성격이니까 말이야. 하지만 어찌되었건 하나 빚졌 구나. 넌 운이 좋아. 나 같은 사람에게 받을 게 생겼으니 말이야. 하하하..." 사빈은 이렇게 말하고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전에 스파일의 국경지대에서도 이런 비슷한 일이 있었지. 누군가가 날 도 와주려다가 그만 팔에 칼을 맞고 말았지. 그래서 평생 외팔이로 살게 됐다구. 나는 그 친구를 위해서 평생을 돕기로 약속하고 지금까지 스파일에 돈을 인편 으로 부치고 있단다. 어떨 때는 인편에 돈을 부치는 비용이 보내는 돈 보다 많을 때도 있지만 말이다. 이 용사냥꾼 사빈, 의리와 명예를 빼면 남는 거라 곤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이야. 이름이 뭐지?" 사빈이 물었다. "라이짐" 라이짐은 이렇게 말했다. 도대체 언제까지 얘기가 계속될지 몰라서 조금 불 안한 기색이었다. "그래. 라이짐. 너는 사람 보는 눈이 있구나. 내가 의리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아보고 도우려고 한 걸 보니 말이야. 난 알아. 하지만 말이다, 남의 일 에 그렇게 끼여들었다가는 목숨이 열 두개라도 모자랄 거야. 뭐, 어찌되었건 빚진 건 빚진 거니 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갚으마. 말했지만 이 용사냥꾼 사 빈, 빚진 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갚는다" 참 허풍도. "라이짐. 아직 성년이 아니라고 했지? 그래서 그렇게 무모한 짓을 했는지는 모르겠다만, 내가 하는 말, 성년이 된 사람이 주는 교훈으로 받아들이고, 앞 으로는..." 사빈이 말을 하고 있는데 이무르 아주머니가 끼여들었다. "그만하면 됐어! 남의 술집에 와서 사람을 죽여놓고는 훈계는 무슨 훈계야! 만약에 내 아들 팔에 흠집이라도 하나 났다면 당장 머리통을 갈아 마시겠지만 그냥 참는 줄 알아. 그리고 내가 훈계 하나 하지. 죽기 싫으면 입 닥치고 당 장 나가!" 와! 역시 이무르 아주머니다. 방금 사람을 죽인 사람한테 어떻게 저렇게 말 할 수가 있을까. "그리고 너도! 이 술주정뱅이 끌고 당장 나가!" 이크. 나다. 나는 시하라를 부축해서 문 쪽으로 향했다. "라이짐. 너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다. 그렇다고 그렇게 멍청하게 서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으면 당장 엉덩이에 불 날줄 알아라" 이무르 아주머니는 라이짐에게 걸레를 내밀었다. 휴! 그나마 청소를 시키지 않은 게 다행이다. 나는 눈짓으로 라이짐에게 열심히 하라고 격려(라기보다는 그저 놀린 것에 가깝지만)를 보내고 시하라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나, 난 말이다, 그냥 라짐한테 말만 걸었어...손가락...그래, 손가락하나 안 건드렸다구..." 시하라는 문 밖으로 나가자 이렇게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일에는 관심이 없는데도 말이다. 내 머릿속에는 사빈이 쓴 기술이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었다. 동작을 읽은 걸까? 그래서 칼이 날아오는 방향을 예측하고 단검으로 한 방에 승부를 건 걸까? 그러고 보니 칼싸움에는 거리만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또래 중 목도를 가장 잘 쓴다는 자부심 을 갖고 있었는데 아까 사빈이 쓴 기술은 짐작도 못하겠다. 역시 나는 우물 안 개구리였나 보다. 정식으로 검술을 배웠다면 뭔지 알 수 있었을 텐데. 부 모를 가진 아이들이 다시 한 번 부러워졌다. "그런데 아까 사빈이라는 남자가 어떻게 한 거죠?" 내가 시하라에게 물었다. "글쎄, 워낙 순식간이어서...잘은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니, 그냥 잘 모 르겠구나" 나는 웃음도 안나왔다. 용병이었다는 사람이 뻔히 눈 앞에서 본 기술을 모르다니. 어쩌면 시하라야말로 진짜 허풍쟁이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 다. 참. 그러고 보니까 시하라에게 용건이 있었지. "저, 사비오 님이 주머니를 받아오라고 했거든요" 내가 물었다. "뭐라고! 주머니를!" 시하라가 다시 물었다. 어, 사비오 영감도 허풍을 친 걸까? "...그렇구나. 때가 됐구나. 드디어......" 시하라는 이렇게 말하고 무기점으로 갔다, 기보다는 나에게 거의 업혀가다 시피해서 무기점까지 겨우겨우 갈 수 있었다. 무기점 문은 자물쇠로 잠겨 있 었다. 아니, 대낮에 문을 닫고 술이나 마시다니, 원. 장사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하기사 그러니까 나한테 무기점을 맡아달라는 소리나 하는 거겠지. 시하라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예전에 사비오 님이 나한테 맡긴 게 있지" 시하라는 상점 안 금고에서 뭔가를 꺼냈다. 입구를 끈으로 동여 맨 누런 주 머니였다. "금화 스무 개가 들어 있을 거다. 세어 보거라" 아니? 금화? 그것도 스무 개? 나는 얼른 주머니를 열어보았다. 정말 반짝이 는 금화가 스무 개나 들어있었다. 금화가 스무 개나 있었단 말이야? 사비오 영감. 생각보다 부자로구만. "사비오 님이 탐그루에 오고 얼마 되지 않아서 나한테 맡긴 거다. 때가 되 면 달라고 말했는데 벌써 그때가 온 모양이로구나" 시하라는 혼잣말처럼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혼잣말을 하면서도 얼굴 표정 이 계속 이상해졌다. 뭔가 흥분한 얼굴 표정 같으면서도 걱정이 많은 사람처 럼 어두워 보이기도 했다. 아마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라짐에게 얻어 차이 고 창피를 당했기 때문인 것 같다. 나는 얼른 시하라에게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탐그루에 해가 지고 있었다. 서쪽 하늘이 오늘 따라 시뻘겋게 물들고 있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N:김상현 #8706/10199 ━━━━━━━━━━━━━━━━━━━━━━━━━━━━━━━━━━━━━━━━ 제 목:[탐그루] 성황청과 마칸의 강림 - 10 - 관련자료:없음 31/31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0-25 06:16 조회:1321 탐그루 # 마법은 마음이다 - 마음은 칼이다 # * 성황청과 마칸의 강림 나는 주머니를 들고 예언의 눈동자로 돌아왔다. "피 냄새가 나는구나, 수르카" 빛바랜 발을 치우고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사비오 영감이 말했다. 나는 갑자 기 죄를 지은 사람처럼 속이 뜨끔해지는 것을 느꼈다. "...저, 시하라가 이걸 전해 드리라고..." 나는 중얼거리듯 말하면서 사비오에게 주머니를 내밀었다. 사비오는 주머니 를 받고는 다시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네가 본 걸 말해보거라. 피 냄새가 몸에 밴 사연 말이다" 나는 정박장에 갔던 일과 사빈의 이야기, 그리고 별빛 주점에서 본 결투를 말했다. "그래, 네가 보기에 사빈이라는 사내와 그 검사는 왜 싸운 것 같더냐" 사비오 영감이 물었다. 나는 생각을 해 보다가 이렇게 대답하기로 했다. "그야 한 사람은 명예를 지키기 위해, 한 사람은 원수를 갚기 위해서 아니 었을까요?"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근본적으로 그 싸움은 칼 때문에 일어 난 거란다. 칼이 아니면 그런 싸움으로 누군가 죽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사비오가 말했다. "마법으로 결투를 할 수도 있잖아요" "아니. 마법을 쓸 수 있는 사람은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란다. 그런 사람만이 마법의 말로 마법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법이지.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어리석은 싸움은 피할 것이야. 하지만 칼은 다르다. 전 설의 장군 카를로스 카를로스가 말했듯이, 칼은 마음을 움직인단다. 마법과는 정 반대지" "그렇지만 칼이든, 마법이든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마찬가지잖아요" 나는 이렇게 사비오 영감에게 반박했다. "그렇지. 하지만 마법은 마음에서 나와 마음으로 돌아가지만 칼은 마음에서 나와 마음을 바꾼단다. 그래서 둘은 같으면서도 다르다고 말하는 거란다" 나는 머리에 쥐가 오르기 시작했다. 어휴! 복잡한 건 딱 질색이라니까. 내 마음을 읽었는지, 아니면 표정에 드러난 건지 사비오 영감은 다행히도 여기서 말하기를 멈추었다. "그래. 오늘은 이만 하자. 들어가서 쉬거라" 나는 내 방으로 돌아왔다. 머릿속이 너무 복잡했다. 마법 얘기야 믿지 않으 면 그만이지만 사빈이 보여준 기술이나 처음 본 시체, 그리고 피비린내가 머 릿속에서 도무지 떠나질 않았다. 그래도 여기저기 돌아다닌 탓인지 몸은 점점 피곤해져 왔고, 결국 나는 잠이 들었다. 꿈을 꾸었다. 낮에 본 죽은 검사가 피를 흘리며 내 뒤를 쫓고 있었다. 나는 도망치려고 했지만 발바닥이 땅에 붙었는지 한 걸음도 뗄 수가 없었다. 검사 는 은빛의 긴 장검을 들고 있었다. 검. 양날을 번득이는 검을 본 적은 몇 번 없다. 기껏해야 고급 장교들이 차고 다니는 것을 먼발치에서 몇 번 보았을 뿐 이다. 그런데 지금 낮에 본 죽은 검사가 검을 들고 나를 쫓고 있는 것이다(그 것도 은빛으로 빛나는 장검을!). 그런데 그 장검의 모양이 분명 어디선가 한 번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잠시 도망치던 것도 잊고 은빛 장검을 정 신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검사가 나에게 칼을 휘둘렀 다. 나는 소리쳤다. 아버지! 아버지를 부르면서 꿈에서 깬 것이 얼마 만일까. 기억도 희미한 어린 시절 에나 몇 번 그래 보았을 뿐, 성년식을 겨우 며칠 앞둔 내가 아버지를 부르면 서 잠에서 깨다니. 너무도 이상한 경험이다. 나도 다른 삼 년 전쟁의 고아들 처럼 강인하고 독립심이 강하다고 스스로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자리에서 일어나서 나는 늘 하던 예언의 눈동자 청소와 스타바 여물 주는 일을 했고, 사비오 영감의 아침상을 차렸다. 아침 식사는 감자와 소금, 그리 고 말린 고기였다. 그러는 동안 내내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생각이 있었다. 꿈 때문일까. 죽은 검사의 모습과 단 한 방에 검사를 죽인 사빈과, 그리고 기억조차 나지 않는 아버지 생각에 나는 묵묵히 말린 고기만 씹었다. 아무래도 어제 하루 동 안 너무 많은 일을 겪은 모양이군. 성년의 날이 다가오면 성년의 신 마소드가 다가오기 시작한다더니 정말 그런 모양이야. 식사가 끝나고, 아침상을 치우자 사비오 영감이 나를 불렀다. "이제 곧 성년의 신 마소드의 날이 다가오는 구나. 수르카야. 성년이 된다 는 말의 의미를 알고 있느냐?" 이래서 노인은 어쩔 수가 없다니까. 무슨 얘기를 해도 타이르는 말투가 되 어버리지. 사실 그런 말투는 성인이건 아니건 간에 듣기 싫은 말투일 거야. 다시 말해서 내가 어른이 되고 할아버지가 된다구 해도 마찬가지 일거란 얘기 지. 하지만 물어봤으니 대답은 해야지. "국왕에 대한 충성의 의무, 왕국에 대한 평화의 의무, 전쟁이 났을 때 용기 의 의무, 그리고 개인과 가족에 대한 명예의 의무를 지는 거잖아요" 나는 숨도 쉬지 않고 재빠르게 말했다. 내가 잘 외우고 있다는 사실을 자랑 하고 싶어서였다. 사실 성인을 눈앞에 둔 소년들 중에 이 네 가지 맹세를 외 우고 있지 않은 소년을 없을 것이다. 물론 어른들은 나이를 먹으면 지겹도록 지켜야 하는 맹세들이니 굳이 외우려고 하지 않아도 외워질 수밖에 없다고 말 들 하지만. 그래도 성년이 되면 마음대로 칼을 차고 다닐 수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지 뭐. "그래. 잘 알고 있구나. 그 각각의 의미를 물어보려고 한 건 아니지만 말이 다...성인이 된다는 건 그런 의무나 권리가 생기는 것만을 뜻하는 게 아니란 다. 무슨 말인고 하니..." 사비오 영감은 여기서 잠깐 말을 고르는 듯 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네가 어제 검사가 죽는 모습을 봤다고 했지?" "예" "죽는 모습을 보기 전의 너와 본 후의 네가 어떻더냐" 그러고 보니 시체를 보기전의 호기심과 두려움 같은 것이, 뭐라고 말하기는 곤란해도, 분명 달라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달라졌을 것이다. 그게 성인이 되는 거란다. 그리고 그러한 작용을 너에게 주는 게 네 마음이지" 또 마음 강의가 시작되려는 모양이군. 마법과 칼, 마음과 칼, 마법과 마음, 어휴, 골치 아파! "오늘도 너에게 그런 일이 일어날 것 같구나..." 사비오 영감은 이렇게 말하더니 팔을 뻗어 내 팔을 잡았다. 나는 조금 놀라 면서 물러서려고 했지만 사비오 영감의 눈동자를 보자 괜찮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사비오 영감이 남자를 좋아하는 남자일라구. "...너는 나이에 비해 팔이 굵구나" 사비오 영감이 말했다. "매일 목도를 휘두르니까요" "그래. 그것도 마음을 다스리는 좋은 방법이지. 다행이야" 사비오 영감은 이렇게 말하고는 내 팔을 놓았다. 그런데 어쩐지 닭살이 돋 는 것 같은 이 느낌은 뭐지? 사비오 영감이 조금 징그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앙 광장으로 가 보거라. 네 목도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을 거다" 사비오 영감은 이렇게 말했다. 또 예언 같은 얘기로군. 하지만 따를 수밖에 도리가 있나. 나는 알았다고 대답한 후 내 방으로 돌아가 목도를 챙겨 가지고 중앙 광장으로 향했다. 날씨는 여전히 좋았다. 탐그루는 사계절 내내 흐린 날 이 거의 없다. 사람들은 탐그루의 햇살과 풍경을 신의 축복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특히 가을 하늘은 바르도 대륙 어느 곳 보다도 푸르고 아름다운 것으로 유명하다(고 여행자들은 말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중앙 광장은 오늘도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그런데, 저 중에서 누가 내 목도 를 필요로 한다는 걸까. 나는 목도를 들고 누구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한 참을 서 있었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멀리 구름 한 조각이 떠 있었 다. 구름이 뮤처럼 보였다가, 사람 얼굴처럼 보였다가 하면서 내 쪽으로 천천 히 둥둥 떠오고 있었다. 구름이 머리 위를 지나갈 때쯤 해선 조금씩 지루해졌 다. 구름이 등뒤를 지날 때쯤 하품이 나왔다. 구름이 어디 갔는지 보이지도 않을 쯤 되자 나는 여기에 서서 뭘하고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사비오 영감 말을 따르는 게 아니었어. 흥. 엉터리 예언자 같으니. 나는 라이짐이나 만나볼까 하는 생각으로 별빛 주점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그때였다. "수르카!" 언제 어디서 나타났는지 라이짐이 다급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너, 내 목도를 필요로 하는 거냐?" 내가 라이짐에게 물었다. 라이짐은 놀랐다는 표정을 지었다. "응. 어떻게 알았어?" "어제부터 미래를 보는 눈이 생겼거든. 예언자의 집엔 폼으로만 있는 줄 알 아?" 이런 말은 나도 못 믿겠다. "그래 믿어. 그런데, 그런데, 너 내가 지금 네 도움이 필요하다면 믿겠어?" 라이짐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라이짐을 훑어보았다. 촌스럽고 꾀죄죄한 모 습은 그대로였지만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키(사실 이점은 좀 기분 나쁘 다)가 평소와는 다르게 다급한 표정으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급하긴 급한 가 보군. 뭔지 모르지만 좀 튕겨볼까? "물론 믿지, 라이짐. 하지만 지금 워낙 바쁜 몸이라..." 사비오 영감은 목도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만 했지 도와주란 말 은 안했다구. 어. 그러고 보니 돕고 안 돕고는 정말 내 마음에 달려있네? 그 런데 웬 마음 생각을 하고 있담? 아무래도 사비오 영감에게서 전염된 게 분명 해. 아휴, 모르겠다. 하여간 라이짐이 '제발'이라고 부탁할 때까지는 손가락 한 움직이지 말아야지. "너 아니면 상대할 수가 없을 것 같다. 이상한 놈이야. 퀭한 눈에...꼭 미 친 뮤 같은 놈이야. 도와줘, 제발. 우리 애들이 벌써 여럿 다쳤어" 어라라? 벌써 '제발'이라고 말하다니? 정말 다급하긴 다급한 모양이군. "좋아. 하지만 또 내 팔이 부러진다면 그 팔은 네가 책임지는 거 잊지 마"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빨리 따라오기나 해" 라이짐은 내 팔을 잡고 뛰기 시작했다. 하기사. 라이짐과 나는 아홉 살 때 벌써 우정의 맹세를 나눈 사이다. 그런데도 새삼스럽게 책임 운운하다니 혹시 내가 옹졸한 사람으로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라이짐의 일을 도와주다 가 팔이 부러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다른 패거리들과의 싸움은 늘상 있 는 일이다. 라이짐은 항상 패싸움이라고 하지 않고 전쟁이라고 말하곤 했다. 바보 지가 스파일의 장군이라도 되는 줄 아나!) 언젠가 라이짐은 팔에 대해서 책임지겠다며 내게 꼬마을 한 명 보내준 적이 있다. 그런데 그게 뮤 여물과 잡초도 구별 못하는 코흘리개였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부목을 감고서 왼팔로 일일이 그 꼬마에게 이래라 저래라 지시해야 했다. 어쩌면 그 코흘리개가 라 이짐 패거리들 중에서 제일 나은 놈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혼자 웃 기도 했지만. 어쨌든 혼자 일 할 때보다 더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아무튼 이번엔 그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군. 라이짐이 나를 이끌고 간 곳은 라이짐 패거리들의 거점(이라고 부르기는 하 지만 실제로는 문닫은 지 오래된 대장간 뒤에 있는 외진 곳)이라고 부르는 곳 이었다. 그곳에 라이짐이 말한 퀭한 눈의 사내가 칼(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대장 간에서 주워온 쇠막대기였다)을 들고 라이짐의 패거리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미친 뮤. 그 사내는 라이짐의 말처럼 미친 뮤의 눈을 하고 있었다. 나는 미친 뮤를 한 번 본 적이 있다. 삼 년 전쟁이 끝나고 다섯 해가 지난 뒤, 여섯 차례에 걸쳐 이루어진 포로 교환 중 마지막 포로 교환 때였다. 포로 들은 하나같이 여위고 앙상한 몰골에 눈빛만 번득이는 모습으로 허위적 허위 적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때였다. 뮤 한 마리가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아마도 포로의 무리 중에 섞여있는 뮤였던 모양이었다. 사람이 저 모양이 될 정도의 고초를 겪었다면 신경이 예민한 뮤가 오죽 했을까. 그 뮤는 침을 흘리며 몇 번이고 허공에 뒷 발길질을 해대었다. 한 검객이 나타나 단칼에 그 뮤의 목을 베었다. (뮤의 그 예민한 신경이 한 번 망쳐진 후라면 고통 없이 빨리 죽여주는 것이 얼마나 자 비로운 일인가는 뮤를 길러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으리라) 사람들은 그 검객이 바로 위대한 복수자 아케르라고 수군거렸다. 아케르는 자신의 형이 '이자림의 산적들'이라는 이름을 가진 깡패 패거리들 에게 억울하게 죽자, 형의 복수를 위해 홀홀 단신으로 이자림 패거리를 찾아 가 복수를 한 것으로 유명한 검객이다(탐그루의 꼬마 아이들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얘기지만). 열 한 살인 내가 본 아케르는 키가 장수나무처럼 높고 얼굴에 흉터가 십자모양으로 이마에 새겨진, 감히 우러러보기조차 힘든 사람 이었다. 물론 나를 매혹시킨 것은 그의 외모가 아니라 그의 칼 솜씨였다. 사 람이라면 눈으로 따라잡기도 어려울 만큼 재빠르게 이리 날뛰고 저리 날뛰는 뮤를 아케르는 잠시 바라보다가 단칼에 베었다. 그 칼 빛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그리고 그후 아케르의 흉내를 내다가 얼마나 많은 친구들의 머리통을 박살낼 뻔했는지...... 어찌되었건, 감히 위대한 복수자 아케르와 나를 비교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지금 그 미친 뮤를 베었던 아케르처럼 내 앞에서 침을 질질 흘리며 퀭한 눈동자를 하고 있는 사내를 쓰러뜨려야 하는 것이다. 사내는 벌써 여러 번 공격을 당했는지 여기저기 난 상처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고 군데군데 찢긴 옷 사이로 시커먼 땟자국과 아직도 피가 흐르는 상처들 이 보였다. 그 냄새! 나는 될 수 있으면 멀리 떨어져서 사내를 공격할 방법 을, 그 옛날의 아케르 같은 눈빛으로 바라보며 생각하였다. "야, 수르카! 너 겁먹었냐?" 아니, 이 진지한 눈빛을 보고 겁먹었느냐고? 하긴 쓰러져 있는 라이짐의 패 거리들을 보니 겁에 질려 있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리고 그 중에는 예전에 나 에게 도전했던 라이짐 패거리 중 가장 뛰어난 칼 솜씨를 가지고 있는 부두목 울찬의 모습도 보였다. 불쌍한 울찬! 그때 나한테 졌을 때 소매치기 생활을 그만 뒀더라면 이런 꼴은 당하지 않았을 텐데. 지금 울찬은 공포에 질린 어린 아이 같은(아니, 그냥 어린아이지)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나 까지 그런 부류에 포함시키진 말아 달라구. 내 자랑을 하자는 건 아니지만 나는 이런 소매치기 바닥에서 시비가 붙었을 때 몽둥이처럼 목도를 휘두르는 부류하고는 차원이 다르다. 적어도 나는 칼은 '베는' 것이지 휘두르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고, 찌르고 막는 동작만큼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도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이런 생각을 몸 으로 아무런 생각 없이 본능적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매일 훈련하고 있다.하 루도 빠짐 없이 예언의 눈동자 뒤편 뮤 축사 앞에서 칼을 휘두르는 것은 그냥 모양만이 아니다. (굵은 내 팔뚝을 칭찬하는 사비오 영감을 보라구) 그리고 그냥 칼만 휘두른다고 이런 솜씨가 다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 로지 실전, 실전을 통한 경험만이 칼쓰기를 향상시킬 수 있다. 그렇다면 이렇 게 되기까지 내가 얼마나 자주 목도를 아이들에게 휘둘렀는지는 묻지 말기를. 어렸을 적에는 이긴 적 보다 내 머리통을 깰 뻔한 적이 더 많았다는 얘기만 해두고 넘어가자. 하여간 나는 침흘리는 사내(본인은 이런 명칭을 싫어할지 모르지만 그냥 이 렇게 부르자)의 움직임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침흘리는 사내는 느릿느 릿 아무렇게나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자신에게 다가오는 아이들과의 거리를 자신의 쇠몽둥이 길이에 알맞게 조절하면서 움직이고 있었다. 함부로 달려들어서는 안 된다. 내 목도보다 저 쇠몽둥이가 기니까 말이야. "라이짐. 더 이상의 피를 원하지 않는다면 내게 나설 기회를 주게" 나는 어린아이처럼 굴고 싶지 않았다. 좀 이상하게 보이기는 하지만 저놈은 분명 성인인 것이다. 그것도 라이짐의 패거리 몇을 쓰러뜨린 성인이란 말이 다. 그래서 나는 라이짐에게 진짜 검객처럼 여유롭게 말했다. 라이짐 패거리 들이 존경의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까불지 말고 다치지나 마. 지난번에 팔 부러지는 바람에 두 달 동안 우리 애 하나 붙여줬던 거나 잊지 말라고" 걱정이라고 해주는 모양이지만 장단을 맞춰주지 않으니 기분이 좀 상하는 걸. 어찌되었건 눈앞의 일이 더 급했다. 나는 목도를 집어들고 조심스럽게 침 흘리는 사내와 거리를 맞추기 시작했다. 사내는 내가 만만한 존재가 아니라는 걸 직감했는지 퀭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등줄기를 타고 송충이가 훑어 내리는 듯한 느낌. 거기다 뮤 똥 썩는 냄새보다 지독한 냄새. 침을 흘리고 있 는 저 자네의 아무런 빛도 없는 검은 눈동자는 미친 뮤 같다기 보다는... 그 냥 침흘리는 사내라고 해두자. 지금은 싸움이 더 급하다. 나는 천천히 왼쪽으로 몸을 옮기다가 침흘리는 사내의 발놀림을 읽었다 싶 은 순간 사내의 종지뼈를 겨냥하여 목도를 날렸다. 쿵! 눈앞이 일순간 캄캄해졌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나는 허공 에서 한 바퀴 돈 뒤에 등부터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켈켈켈켈..." 침흘리는 사내는 음산한 느낌이 드는 목소리로 웃었다. 등줄기를 타고 내려 가는 송충이 수백 마리. 나는 얼른 몸을 일으켜 침흘리는 사내와 거리를 만들 었다. "조심하라니까, 저 멍청이!" 라이짐의 목소리였다.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라이짐을 혼내주는 건 잠시 뒤로 미루고 우선 저 침흘리는 사내에게 집중해야겠는 걸. 나는 다시 기회를 보다가 침흘리는 사내의 쇠몽둥이를 견제하며 내 목도를 조금씩 침흘리는 사내의 쇠몽둥이 쪽으로 이동시켰다. 그리고 사내의 쇠몽둥 이 끝이 흔들리는 순간이 왔다. 탁! 나는 내 손목의 힘만을 이용해 침흘리는 사내의 손목을 베었다. 이건 내가 자기고 있는 고급 기술 중 하나로 '손목 쳐 날리기'라고 내가 이름 붙인 기술 이었다. 이 기술에 당하면 최소한 손목이 빠지거나 부러지기 때문에 더 이상 싸운다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이 기술의 성공여부는 내가 상대방의 머리를 노 리고 있다고 여기게 만드는 것과 손목의 힘만으로 목도를 강하게 쳐 올리는 것에 있는데...자세한 얘기는 할 시간이 없다. 침흘리는 사내가 오른 손을 움 직일 수 없게 된 순간 치명타를 날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 나는 바로 이어서 사내의 목을 찔렀다. 목은 빗맞아도 숨을 쉴 수 없게 만드는 중요한 급소 중 하나다. 켁! 침흘리는 사내는 괴상망측한 소리를 내면서 내가 붙인 이름 그대로 침을 흘 리면서 뒤로 나자빠졌다. 바닥에 떨어지는 쇠몽둥이의 금속음. 우와! 하는 라 이짐 패거리의 탄성. 후훗. 이렇게 해서 동네에서 가장 강한 칼잡이 수르카의 명성이 더 높아졌다...가 아니었다. 침흘리는 사내는 고통을 전혀 느끼지 못 하는지 여전히 켈켈켈...하는 기분 나쁜 웃음을 지으며 일어났다. 이번에는 송충이 수천 마리가 등줄기를 훑어 내려갔다. 수르카 일생일대의 강적이다. 아마 바바 족이 부린다는 괴물들 다섯 마리를 상대한다고 해도(본 적도 없긴 하지만) 이보다 더 힘들진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침흘리는 사내가 다시 쇠몽둥이를 집어들지 못하도록 목도로 견제하면 서 몸을 바닥에 떨어져 있는 쇠몽둥이 쪽으로 옮겼다. 그때였다. 침흘리는 사 내가 오른 손을 들더니 뭐라고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 다. 이곳 탐그루에 살다보면 어떤 사투리든 대충은 알아들을 수 있는 데, 그 말은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 말은 억양도 없었고 높낮이도 없었다. 꼭...그저 웅, 하는 소리의 연속처럼 들렸다. "저, 저거 봐!" 울찬이 소리쳤다. 하지만 울찬이 소리치지 않아도 그 자리에 있던 소년들은 전부다 그 침흘리는 사내에게 시선을 모으고 있었다. 침흘리는 사내는 왼 손을 들고 있었다. 손바닥이 밖으로 보이도록. 그런데 그 손바닥에는 시커먼 구멍이 있었다...자세히 보니 그 구멍은 빛이 나고 있 었다. "누...눈이야..." 누군가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맞았다. 정말 그 구멍은 꼭 눈처럼 생겨먹었 다. 그게 눈이라면 그 눈빛은 꼭...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거대한 늪 같았 다. 다음 순간이었다. 어디서 왔는지 개 몇 마리가 몰려왔다. 탐그루에는 개가 그리 흔한 동물이 아니다. 여행자들 말로는 스파일이나 타 실에는 아주 흔하다고 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지금 그 개가 열 마리, 아니, 스무 마리 정도가 이곳으로 뛰어오고 있는 것이다. 어떤 놈은 시커먼 색이었 고 어떤 놈은 흰색이었고, 또 어떤 놈은 얼룩무늬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공통점이 있다면...모두 미친 사내처럼 침을 흘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침착해! 저건 그냥 개야. 달려들어!" 라이짐이 침착하게 부하들에게 지시하면서 자신도 목도를 들고 개에게 휘두 르기 시작했다. 처음에 머뭇거리던 패거리들도 라이짐이 먼저 목도로 개 한 마리의 머리통을 터트리는 모습을 보자 우르르 달려들었다. 여기저기서 비명소리와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개들과 라이짐의 패 거리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았다. 여기저기서 개의 피인지 사람의 피인지 모를 피들이 솟아오르고 있었고, 머리가 부수어진 개 몇 마리는 사지를 벌벌 떨면 서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이래서야 어떤 것이 개고 어떤 것이 사람인지 나는 도저히 구분 할 수가 없었다. 역겨운 냄새가 풍겨왔다. 나는 침흘리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때가 덕지덕지 들러붙은 사 내의 얼굴에 웃음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한번 등골을 타고 차가운 것이 내려가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상황을 살펴보았다. 침흘리는 사내가 손을 들자, 개들이 나타났다. 말 도 되지 않는 소리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지금으로서는 그 생각이 가장 들어맞 을 듯 했다. 설령 아니라 하더라도 더 이상 생각하느라고 시간을 끌 수가 없 다. 나는 재빠르게 침흘리는 사내에게 달려었다. "으아아아아!" 내 입에서는 나도 깜짝 놀랐을 만큼 큰 기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다 음 순간 내 기합소리를 신호라 생ㄳ한 듯 개들이 내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나 는 돌아보지 않았다. 일단 저 사내를 쓰러뜨리는 일이 더 급하다고 내 본능이 내게 속삭이고 있었다. 나는 달리는 힘을 이용해 온몸을 날려 있는 힘껏 사내 의 팔을 목도로 내리쳤다. 사내의 팔이 부러졌다는 것을 나는 목도 끝에 전해 져 오는 촉감으로 알 수 있었다. 팔이 부러지자, 손이 바닥으로 축 늘어졌고 사내는 고통스럽다는 표정이 아니라 뭔가 이상하다는 듯한 표정을 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은 정말 다시 생각도 하기 싫을 만큼 끔찍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를 향해 뛰어오던 개들이 깨갱거리며 몸을 뒤틀었다. 나 는 개들로 시선을 돌렸다. 살아있는 개들은 몸을 뒤틀면서 바닥에 쓰러지더니 꼭 잠든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일순간에 주변이 조용해졌다. 나는 숨을 몰아 쉬었다. 긴장이 풀리는 게 느껴졌다. "위험해 수르카!" 라이짐이 소리쳤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침흘리는 사내가 나에게 다가오 고 있었다. 팔은 부러져서 축 늘어져 있었지만 왜 이렇게 일이 되었는지 모르 겠다는 표정으로. 나는 목도를 힘껏 잡았다. 더 가까이 오기 전에 쓰러뜨려야 한다. 더 늦으면 저 녀석에게 잡힐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그러나 위기의 순간 나를 구해준 것은 내 칼이 아니라 라이짐의 명령이었 다. "쳐!" 라이짐이 명령하자 라이짐의 패거리들은 일순간에 달려들었다. 여기저기서 목도가 침흘리는 사내에게 날아들었고, 결국 침흘리는 사내는 꽁꽁 묶여 침만 겨우 흘릴 수 있는 꼴이 되어 땅바닥에 내팽개쳐졌다. "저건 도대체 뭐야?" 라이짐은 누구에게 묻는 건지 알 수 없는 질문을 던졌다. 그때였다. "모두...죽어...이제 곧. 기다려라...구세주 마칸의...강림이..." 침흘리는 사내가 웅, 하는 음성으로 말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N:김상현 #8707/10199 ━━━━━━━━━━━━━━━━━━━━━━━━━━━━━━━━━━━━━━━━ 제 목:[탐그루] 성황청과 마칸의 강림 - 11 - 관련자료:없음 34/34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0-25 06:17 조회:1237 탐그루 # 마법은 마음이다 - 마음은 칼이다 # 나는 부두목 울찬으로부터 대충의 자초지종을 들을 수 있었다. 침흘리는 사내는 팜 산맥 쪽(그러니까 하잔 쪽)에서 나타났다. 그리고 길거 리에서 사람들에게 알 수 없는 소리를 계속 지껄였다는 거다. 물론 울찬은 구 경거리가 생겼구나 싶어서 그걸 구경만 하고 있었다. 그런데 침흘리는 사내가 라이짐의 구역으로 들어오자 가만히 놔둘 수가 없어서 공격을 했다는 거였다. 그런데 내가 보았듯이 침흘리는 사내는 아무리 맞아도 꿈쩍도 하지 않았고 라 이짐의 패거리가 다 덤벼들어도 소용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마칸이라는 게 무슨 소리지?" 누군가가 말했고, 라이짐은 긴급회의를 연 뒤에(회의라고 해봐야 라이짐이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결정하는데 걸리는 시간동안 모두 라이짐을 보고만 있 었던 게 전부였다) 침흘리는 사내를 자치 순찰대 정문에 버려두자고 결정했 다. 라이짐 패거리들은 자치 순찰대와는 사이가 좋지 않으니까 물론 익명으 로. 라이짐의 부하들이 침흘리는 사내를 옮기느라 소란을 떠는 사이 라이짐이 말했다. "소문으로 들은 적은 있지만, 직접 보는 건 처음이야" "뭘?" "귀신들린 사람 말이야. 들어본 적 없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팜 산맥에서 뭔가 벌어지고 있다는 소문이야. 우리 애들이 술집에서 주워 들었다는데, 하잔은 지금 난리가 났데. 귀신들린 사람이 여기저기서 나타나는 바람에 하잔 자치대가 계엄령을 선포한 모양이더라구" 라이짐은 여기까지 말했다가 잠시 생각을 하더니 겁에 질린 어린 아이 같은 얼굴이 되어 다시 말을 이었다. "너 마칸의 전설...알고 있니?" 그건 물론 알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천 년 전에 대 마법사 아킨과 카를로스 카를로스 장군이 물리쳤다는 마칸에 대한 전설을 말 이다. "그냥 미친 사람일 수도 있어. 미쳤으니까 마칸이니 뭐니 하는 소리를 하는 거겠지" 나는 짐짓 태연한 척 말했지만 등골에는 아직도 송충이가 기어다녔다. "하긴. 그래서 자치대 앞에 버려 두자고 한 거야. 알아서 해결하겠지, 뭐" 잠시 겁에 질린 어린아이처럼 보였던 라이짐은 사라지고 다시 내가 아는 라 이짐이 내 앞에 서 있었다. "그래. 신경 쓰지 말자" "그래" 우리는 이렇게 말했지만 라이짐의 얼굴에 공포의 흔적이 남아있는 걸로 보 아 내 얼굴도 그럴 확률이 높았다. 그러고 보니 점심때가 지났잖아. 사비오 영감, 내가 없으면 밥도 못 먹을 텐데. 이거, 늦었다고 혼나는 거 아닌지 모 르겠네. 라이짐은 별빛 주점 쪽으로 걸어갔고 나도 예언의 눈동자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문득 뒤돌아 보았다. 라이짐이 별빛 주점 안으로 들어가기도 전 에 이무르 아주머니에게 붙잡혀 엉덩이를 걷어차이는 모습이 보였다. "으이구, 이 빌어먹을 자식아! 내가 세수할 땐 귀 뒤를 잘 씻으라고 몇 번 을 말해야 알아듣겠니! 이 때 좀 봐! 때! 어디서 뭘 하다 들어오는 거야! 해 야할 일을 먼저 하라고 몇 번이나 말해야 알아듣겠니!"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예언의 눈동자로 돌아갔을 때, 사비오 영감은 명상을 하고 있었다. 나는 명 상을 방해하지 않게(사실은 늦게 온 것을 들키지 않게) 조심스럽게 사과를 내 려놓으려고 했다. "늦었구나" 사비오 영감이 말했다. 나는 오는 길 내내 준비해온 변명을 늘어놓으려고 숨을 들이켰다. 그런데 말도 꺼내기 전에 사비오 영감이 먼저 입을 열었다. "마칸의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로구나" 사비오 영감이 말했다.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확실히 성년이 될 날 이 다가오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렇게 자꾸 놀랄 일이 많이 생기는걸 보면. 놀랄 일도 불행처럼 친구를 데리고 오는 모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계시를 받았다. 수르카. 계시가 아니더라도 네 꼴을 보니까 괴물과 싸운 걸 알 수 있겠다. 꼭 천 년 전 악마와 싸웠다는 카를로스 카를로스처럼 말이다. 일단 씻고 오너라. 내 할 얘기가 있다" 나는 씻기 위해 뮤 축사 옆에 있는 우물가로 걸어갔다. 뮤가 나를 보더니 소리를 내었다. "뮤.(무슨 일 있어?)" 내 꼴을 보면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쯤이야 쉽게 알 수 있을 테지. "걱정마, 스타바. 별 일 아닐 꺼야" 나는 이렇게 말하고는 두레박에 우물물을 담아 얼굴부터 천천히 씻기 시작 했다. 찬물이 얼굴에 닿자 놀란 마음이 조금 진정되는 것 같기도 했다. 귀 뒤 를 씻을 때는 이무르 아주머니께 귀가 붙잡혀 끌려가던 라이짐 생각이 나서 웃음이 다 나왔다. "뮤-- (걱정하지마. 다 잘 될 거야)" "고맙다. 스타바" 나는 말하고 다시 안으로 들어와 사비오 영감 앞에 앉았다. 사비오 영감은 천천히, 꼭 예언의 말을 전할 때처럼 내게 말했다. "뭐, 별다른 얘기를 하려고 하는 건 아니다. 그래. 그 마칸의 이야기를 하 던 자는 어찌했느냐" 나는 자치대 정문에 던져두었다고 말했다. "그래. 그 자가 뭔지 아느냐?" 나는 침흘리는 사내라고 대답할 뻔했다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자는 좀비라고 하지. 침을 줄줄 흘리고 있는 것은 이성을 잃었기 때문이 야. 좀비들은 왼 손에 새겨진 마칸의 징표로 근처를 지나는 작은 짐승들을 부 리곤 하지. 그런데 다시 좀비가 나타나다니..... " 좀비라고? 좀비라면 나도 전설에서 들은 기억이 있는데... "...혹시 좀비라면 전설에 나오는 괴물 이름 아닌가요?" 내가 사비오 영감에게 물었다. "그래. 마칸 족이 부린다는 그 괴물이란다. 괴물이라기 보다는 마칸에게 혼 을 빼앗긴 사람이지. 누구라도 좀비가 될 수 있어. " 사비오 영감은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좀비가 나타났죠?" 나는 그 침 흘리는 사내, 아니 좀비가 했던 말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입을 다물어버리고 말았다. 마칸 족이 부활한다니! 그런 말은 입에 담아서는 안될 것 같았다. "차차 얘기하자꾸나. 지금은 시장하니 말이다..." 아참. 점심 시간이 지났군. 그러고 보니 나도 배가 고픈걸. "어, 그리고 내일 점심을 먹고 나서 자치대에 가보거라. 그러면 아마 라스 폼이라는 이름의 친구를 만날 수 있을 거다. 그 친구에게 내 한 번 보자고 했 다고 전해주거라" "예" 아마 이 순간을 나는 영원히 잊을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지금 처음으로 사비오 영감이 진짜 예언자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 니, 라스폼이라고? 난생 처음 들어보는 이름인데, 내가 모르는 이름을 사비오 영감이 알고 있다면 이건 분명 예언이라고 할 만 하지. "그리고 말이다" 사비오 영감은 여전히 예언의 말을 전하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귀를 잘 씻는 건 좋은 버릇이지. 허허허..." 나도 따라 웃기는 했지만 사비오 영감도 내가 웃는 이유와 같은 이유에서 웃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자 소름이 돋았다. 혹시 내가 늘 가짜 예언 자 같다고 생각한 것도 알고 있는 거 아니야? 점심을 먹고 나자 차차 얘기한다던 사비오 영감은 명상에 들어갔고 나는 목 도를 휘두르며 시간을 보내다가 저녁때가 되어 밥을 차리고 난 후 내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이 들 때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내가 좀비와 싸웠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말이다. 그리고 나는 잠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꿈을 꾸었다. 좀비가 내 뒤를 좇고 있었다. 나는 도망치려고 했지만 발바닥이 땅에 붙었는지 한 걸음도 뗄 수가 없었다. 좀비는 은빛의 긴 장검을 들고 있었다. 아무리 꿈이지만 이렇게 매일 똑같을 수가 있는 걸까? 그런데 그 장검의 모양이 분명 어디선가 한 번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 는 잠시 도망치려고 애쓰는 것을 잊고 은빛 장검에 신경을 집중시켰다(꿈을 꾸어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다 알겠지만 꿈속에서는 간단하게 기억이 돌아 온다던가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틈을 타 좀비는 내게 장검을 휘둘렀고 나 는 또 소리쳤다. 아버지! 자리에서 일어나자, 나는 꿈 생각은 일단 접어두고(아버지를 부르면서 잠에 서 깼다는 걸 누가 알게 된다면 웃음거리가 되겠지) 늘 하던 데로 스타바의 축사에 여물을 주고 예언의 눈동자 앞길을 한 번 쓴 다음에 사비오 영감을 깨 우고 삶은 감자와 소금, 그리고 말린 고기 몇 점으로 아침 식사를 했다. 사비오 영감은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다만 감자를 먹고 난 다음에 사과 한 개를 몇 입 씹다가 나머지를(반쪽도 넘는 양이다) 나에게 주었다는 게 좀 달랐을까. 하지만 아침을 먹고 난 뒤 예언의 눈동자 구석구석을 청소하고 있 는 나에게 사비오 영감은 지나가는 말로 별 일 아니라는 듯이 내게 이렇게 말 했다. "라스폼을* 만나러* 가는* 것을* 잊지 말거라*" 물론 아무 억양도 없는 평범한 말투였지만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아무 생 각도 없이 예언의 눈동자를 나와 자치 순찰대 쪽으로 발길을 향하고 말았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아마 이무르 아주머니가 저런 어조로 말했다고 하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을지 모른다. 그러나 사비오 영감의 목소리는, 아니 영감이 풍기는 그 분위기는 뭐랄까... 뭔가 거부할 수 없는 기운을 가지고 있 었다. 그런걸 생각하면 뭐하나. 당장 자치대로 간다고 해도 라스폼인가 뭔가 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나는 우선 무작정 자치대를 찾아가는 것 보다 라이짐에게 가서 상의하는 편 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라이짐은 촌스럽고 꾀죄죄하기는 하지만 탐그루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잘 알고 있으니까 무슨 수든 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나는 왜 사비오 영감 말대로 그냥 가면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까?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냥 가서 자치대 건물의 그 두꺼 운 문 앞에 서 있는 두 명의 위병 근무자의 굳을 얼굴을 보는 것보다는 뭔가 나은 일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일 것이다. 젠장. 그냥 가보고 없더라 고 말하면 될 걸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건지. 여기저기서 이걸 사라 저걸 팔아라 소리치고 있는 잘 아는 얼굴의 상인들, 두툼한 갑옷을 입고 있는 병사들(아마도 스파일에서 타실로 향하는 것 같아 보였다), 뮤 네 마리가 이끄는 마차를 탄 귀족 하나, 그리고 그 귀족을 수행 하는 무사들, 그리고 목적지가 어딘지 짐작도 가지 않는 여행자들(어쩌면 방 랑자들인지도 모른다)...나는 어제 침흘리는 사내가 이 길거리를 걸었다는 사 실이 믿기지 않았다. 어쩌면 그냥 꿈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이짐은 별빛 주점 길 건너편 골목으로 한 참 들어가야 나오는 구석에 패 거리 몇과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여기를 라이짐은 '본부'라고 패거리들에게 말했지만 나는 그런 말을 조금도 멋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소매치기가 도대체 무슨 본부야 본부는. "라이짐!" 나는 라이짐을 큰 소리로 불렀다. 그러자 라이짐의 패거리들이 벌떡 일어나 내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멍청한 놈들. 어디서 병사들이 하는 건 봐 가 지고. "...잠깐 있다가 얘기하자. 수르카" 뭔가 회의가 있는 모양이었다. 아마 구역 문제나 수입문제로 이런 저런 얘 기를 나누고 있었으리라. 나는 라이짐의 팔을 잡아끌었다. 다른 놈들이 내 얘 기를 듣는 게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자치대에 대해서 아는 거 다 말해봐"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생각해봐도 멍청한 물음이었다. 나는 잠시 생각했다가 어제 사비오 영 감과 나누었던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라스폼이라는 사람 얘기까지 차근차근 말 해주었다. 친구에게 뭔가를 얻으려면 내가 가진 뭔가를 줘야 되는 법이니까. "...음. 그래서 위병 얼굴 보기가 무서워서 날 찾아왔다 이거지? 흠. 아직 도 볼따구니가 얼얼한 모양이군" 라이짐이 키득거리면서 말했다. 나는 라이짐의 머리통을 두들겨주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대답을 다 들은 다음에 해도 늦지는 않겠다 싶어서 꾹 참았다. "그래. 나도 어제는 당황해서 그렇게 했지만 말이야...(아마 침흘리는 사내 를 자치대 앞에 던져둔 일을 말하는 모양이다)...원래는 자치대 옆 창구에 가 서 간단한 절차를 밟기만 하면 되는 거였거든, 그게" "절차라는 게 뭐야?" "성인 한 명이 말로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거 말이야. 성인이 없을 때는 너 나 나 같은 아이도(라이짐은 아이라는 말을 하면서 쓴웃음 비슷한 것을 지었 다) 되지만 그때는 자세하게 잘 말해야 돼. 그때는 창구 직원이 성인의 역할 을 대리로 하게 돼 있거든" 나는 생각 밖으로 간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같이.. 자치 순찰대 병사들이 돌아다니면서 우리 패거리들을 두들겨 패 는 모습만 본 애들은 잘 이해하기가 힘들겠지만 원래 자치대는 쓸데없는 것 많기로 유명한 탐그루에서 가장 쓸데 있는 조직이야" 라이짐은 다시 이상한 웃음을 얼굴에 짓고 있었다. 뭔가를 비웃고 있는 듯 하기는 했지만 그게 뭔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대충 설명을 해줄게. 우리 탐그루는 자나크의 관할에 있는 도시잖아. 하잔 이나 베논하고 같이 말이야. 그런데 자나크에선 도시에 군대를 파견하지 않 고, 관리만을 보내서 도시를 관리하는 거야. 그리고 그 관리가 현지에서 그러 니까 이곳 탐그루에서 뽑은 인원으로 자치대를 만들어 관리하는 거지. 이해가 가니?" "그런데...자치대가 뭘 관리한다는 거야?" "좋은 말로는 치안 유지...그러니까 나 같은 소매치기들을 잡아 가두는 일 이나 강도, 도적, 산적으로부터 도시를 지킨다는 말이다. 하지만 중요한 임무 는 그것보다는...세금을 거두는 일이야. 세금을 거둬서 자나크의 위대한 영주 가이르 오르파를 살찌우는 거지. 무슨 말인지 알겠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자치대가 뭘 하는 곳인 진 알겠는데 말이야...그런데 어떻게 라스폼 을 만날 수 있냔 말이야" "아, 그거" 라이짐은 깜박 했다는 듯이 이마를 툭 치더니 패거리들을 불러모았다. "라스폼이 누군지 들어본 사람 있나?" 라이짐이 물었다. 라이짐은 아주 급박한 상황을 제외하고는 군대식으로 아 이들을 불렀다. 군대 용어라고 해 봐야 보나마나 술집에서 주워들은 말이 전 부겠지만. "자나크 교구에서 온 성직자가 있다는 말을 식당 앞에서 들었습니다. 그 사 람 이름이 라스폼이었던 것 같습니다" 패거리 중 특별히 얼굴이 지저분한 하나가 입을 열었다. 똘마니들까지 어색 한 군대 말투라니. 뭐? 그런데 자나크 교구에서 온 사람 같다고? "그것 말고는 들을 거 없어?" 다급하게 내가 물었다. "잘은 모르겠지만...그냥 성직자라고 하던데요" 라이짐은 얼굴 지저분한 아이의 말을 듣고 내게 다음과 같이 상황을 정리해 주었다. "그 사람은 자나크 교구에서 파견한 성직자야. 그러니까 어제 네가 친 그 남자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서 온 사람일거야. 아마 그 남자가 말한 마칸 운운 하는 얘기 때문이겠지" 그의 말은 얼핏 일리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날카롭게 질문했다. "그런데 어떻게 하룻밤만에 올 수 있지? 자나크는 여기서 뮤를 타고도 이틀 은 걸리는 거리에 있다고" "아마 하잔에 있다가 여기 소식을 듣고 왔겠지. 하잔은 여기서 반나절이면 가니까 어제 소식을 듣자마자 출발했다면 아침에 도착할 수 있었을 꺼야. 그 랬다면..." "아주 심각한 문제라는 뜻이겠군" 내가 라이짐의 말을 맺었다. 라이짐은 라스폼이라는 사람이 만약 자나크에서 파견한 성직자라면 분명 자 치대 입구에서 위병 근무자에게 사비오 영감의 심부름을 왔다고 말하면 분명 나올 것이라고 했다. 사비오 영감의 말이 맞다면 라스폼은 사비오 영감을 알 고 있을 것이고 그의 심부름을 왔다고 하면 아무리 바쁘더라도 얼굴을 내 비 칠 것 아니냐는 거였다. 말이야 쉽지. 그 무시무시한 위병 근무자에게 말을 붙이라구? 생각만 해도 겁이 다 났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냥 심부름 온 꼬마라고 말한다면 별로 뭐라고 하지는 않겠지. 그런데 꼬마? 이런... 좌우지간에 나는 위병 근무자 앞까지는 갈 수 있었다. 그런데 도무지 발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위병 근무자들은 잡담을 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들의 굳은 얼굴이 물건을 팔기 위한 상인처럼 편안하게 풀어져 있을 리는 없 다. 둘 중의 한 사람은 다리가 짧고 통통한 편이었고 다른 한 쪽은 키가 크고 어깨가 넓은 편이었다. 하지만 내 눈에는 사람이라기 보다는 창을 든 갑옷 덩 어리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내가 위병 근무자를 무서워하는 것은 사실 어렸을 적 기억 때문이다. 뭐 어 릴 적 기억이라고 해봐야 어디엔가에 또래들과 함께 수용되어 있었던 기억이 나 처음 길거리로 나와서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서 아무 어른이나 붙잡고 늘어 졌다가 그 어른이(남자였는지 여자였는지도 잘 모르겠다) 내 손을 뿌리치자 어쩔줄 몰라 길거리에 주저 앉아 울었던 기억 정도 뿐이지만 위병 근무자에 대한 기억만큼은 분명히 가지고 있다. 이무르 아주머니에게 엉덩이를 채이고 라이짐과 함께 거리고 내 쫓긴 어느 날이었다. 나는 길거리에서 운 좋게 은화 한 닢을 주울 수 있었다. 나와 라이짐은 신이 나서 이걸로 뭘 살지 떠들며 흥 분해 있었다. 그런데 그 자리가 바로 자치 순찰대 입구였고, 위병 근무자 중 하나가 나와서 은화를 빼앗아갔다. 그 위병 근무자는 긴 창을 들고 있었는데 그 창끝이 빛났던 것과 근무자가 내게 했던 말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나이도 어린 것이 남에 것에 손을 대다니" 그리고는 자신의 근무 위치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나는 그 근무자에게 달려 들었다. 그리고 나는 은화 한 닢을 도로 빼앗기 위해 위병 근무자에게 손을 잡아 당겼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겁 없는 행동이었다). 바로 위병 근무자 의 손이 내 얼굴로 날아왔다. 나와 라이짐은 겁이 나서 얼른 도망갔지만 나는 뺨을 부여잡고 엉엉 울었다...라이짐 녀석. 아직도 그걸 갖고 놀리다니. 다음 번에 만나면 가만 두지 않겠어. 나는 일단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저는 예언자 사비오 님의 심부름을 온 꼬마입니다. 혹시 안에 라스폼이라 는 분이 와 계시지 않습니까?' 중요한 일을 하기 전 심호흡을 하는 것은 사비오 영감에게서 배운 일이다. 그렇지만 왜 나는 내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인 꼬마라는 말을 이런 데에 붙 이고 싶어하는 걸까. 위병에게 다가가는 걸음은 조심스럽고도 신중했다. 한 걸음. 한 걸음. 실수 하면 안 된다. 말을 틀리게 해서도 안돼. "저, 저는..." "이것봐. 내가 뭐라고 했어. 라스폼 성직자 님께서는 틀리는 법이 없다니 까" "가만 있어봐. 확인은 해봐야지. 야, 꼬마야. 너 혹시 예언자 사비오 님이 보낸 꼬마냐?"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것 보라니까" 난생 처음으로 꼬마라는 말이 좋게 들린 순간이었다. 나는 두 위병 근무자 중 다리가 짧고 뚱뚱한 위병 근무자의 안내를 받아 난 생 처음으로 자치 순찰대 내부에 들어가게 되었다. 나중에 라이짐 녀석에게 자랑해야겠다고 다짐하면서 나는 내부를 자세히 관찰하였다. 자치 순찰대는 이 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지하에는 아마 감옥이 있겠지만 그곳은 보지 못했다. 일층은 자치대 대원들의 내무반이 자리잡고 있었고 이 층에는 자치 대장실과 그 밖의 사무실들이 모여있었다. 내가 통통한 위병 근 무자에게 안내 받은 곳은 자치 대장실이었다.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모르는 자치 대장을 직접 볼 수 있다니! 자치 대장실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부관실을 통과해야 했다. 부관은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나보다 기껏해야 한 두살 정도 더 많아 보였다. 아마도 귀족이 나 군인의 아들이리라. "어떤 꼬마가 대장 님께 용무 있어서 왔답니다." 부관은 일어나 문을 두드렸다. "대장님. 위병근무자 아스틴이 용무 있어서 왔습니다" 부관이 말하자 '들어오라고 해!'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부관은 위병 근무자 의 창을 받아 부관석옆에 기대 놓았다. "위병 근무자 아스틴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위병 근무자가 문 밖에서 말하자 안에서 예의 군대식 말투로 '들어오게'하 는 목소리가 들려 왔다. 이윽고 문이 열렸고 나는 책상에 앉아 무엇인가 열심 히 쓰고 있는 자치 대장과 그 옆에 앉아있는 한 사람을 볼 수 있었다. 저 사 람이 라스폼이라는 사람이겠군. "라스폼 님께서 말씀하셨던 꼬마가 찾아왔습니다" "그래. 수고했네. 돌아가 보도록" 아스틴이라는 위병 근무자는 오른 손을 들어올려 경례를 했고 자치 대장은 건성으로 경례를 받은 다음에 나를 쳐다보았다. 자치대장은 오십이 넘어 보이 는 얼굴에 콧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군인이라는 생각보다 는 공무원이라는 생각이 더 들게 만드는 얼굴이었다. 어딘지 싸움터보다는 관 공서가 더 어울리는 인상을 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음. 재미있군요, 성직자 님. 저 친구가 말씀하신 그 친구인가요" 자치 대장은 나를 친구라고 불렀다. 인상은 별로 맘에 들지 않았지만 말하 는 것은 정말 마음에 들었다. "예. 그렇습니다" 그리고 성직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내 쪽으로 돌아섰다. 그리고 나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라스폼이라는 성직자가 여자였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내가 태어나서 시장통에서 얼굴을 본 그 어떤 여자보다도 더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네가 사비오 영감님을 돕고 있는 수르카니?" 목소리도 새소리처럼 맑고 깨끗했다. 나는 그렇다고 조그맣게 말했는데 도 대체 무슨 정신으로 대답했는지 모르겠다. 나는 성직자의 얼굴에 완전히 정신 이 팔려 버렸다. 흰 얼굴에 조그맣고 붉은 입술과 새카맣게 빛을 발하고 있는 눈동자. 그리고 그 뒤로 흐르고 있는 윤기 넘치는 긴 머리. 비록 까만 색 성 복(聖服)을 입고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미모가 사라진 게 아니라 다 돋보이고 있었다. "그래. 들어서 알겠지만 나는 라스폼이라고 한단다. 저, 대장님. 지금부터 사비오 선생님의 댁으로 가봐야겠는데 잠시 실례해도 괜찮겠는지요" "뭐, 그렇게 하십시요. 어차피 그 미친놈. 죄송합니다. 심문은 다 마치셨다 고 하니까...저는 어르신께 올릴 보고서만 쓸 수 있으면 되니까 걱정 마십시 오. 호위 병력으로 네 명을 붙여드리겠습니다. 어이, 부관!" 자치대장이 말하자 라스폼은 손을 내저으며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이곳까지도 혼자 왔는데 여기서 무슨 호위가 필요하겠어요. 그 리고 여기 수르카도 한 사람 몫은 충분히 할겁니다. 걱정 마세요" "뭐, 정 그러시다면..." 대장이 뭔가 말하려고 하는 데 소리를 듣고 부관이 들어왔다. "성직자 님을 안내해 드리게" 대장이 말했고 부관은 아무 말도 없이 대장실의 문을 닫은 뒤 나와 라스폼 을 부관실 앞까지 바래다주었다.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아마 안에서 하는 말을 다 들은 모양인지 부관은 이렇게 말했다. 다녀오시 라. 아마 돌아올 때는 안녕히 다녀오셨습니까, 하고 인사하겠지? 정말 군대식 이로군. 겉보기는 그럴 듯 하지만 속에는 아무 것도 없는 말이야. 군대에서 하는 말들은. 말에는 마음이 담겨있어야 하는 법이라고 사비오 영감이 말했던 일이 생각났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N:김상현 #8708/10199 ━━━━━━━━━━━━━━━━━━━━━━━━━━━━━━━━━━━━━━━━ 제 목:[탐그루] 성황청과 마칸의 강림 - 12 - 관련자료:없음 27/27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0-25 06:18 조회:1237 탐그루 # 마법은 마음이다 - 마음은 칼이다 # "이곳은 참 좋은 곳이야. 사람들도 많고 활기가 넘쳐. 이런 곳에서 산다니 좋겠구나" 자치대 건물에서 나오자 라스폼이 내게 말했다.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저도 그렇게 생각한다니? 이무르 아주머니 같은 상인들과 라이짐 같은 소매 치기가 득실거리는 이곳이? 나야말로 마음에 없는 말을 하고 있잖아, 이거. "수르카는 사비오 선생님과 얼마나 같이 있었니?" 라스폼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오 년, 그러니까 육 년이 다 돼가요" 아름다운 성직자의 눈에는 마력이라도 흐르고 있는 걸까. 나는 그녀의 말 에 도무지 저항을 할 수가 없었다. 그 흔한 농담 한마디 생각 나지 않았다. 이봐 꼬마 정신 차리라구! 그러고 보니 내가 이렇게 아름다운 여자를 본 지도 벌써...기억이 가물가물 하군. 기껏해야 주근깨 투성이인 동네 처녀들이나 분가루를 덕지덕지 바른 귀 족들이 턱을 젖히고 마차에 오르는 모습을 본 기억밖에는 없으니. 라스폼은 기생들이 예쁜 것과는 또 많이 달랐다. 갑자기 라스폼이 성직자라는 게 아쉽 다는 생각이 든다. 결혼도 하지 못하고 평생 신에게 몸과 마음을 바친 이가 성직자 아닌가. 불쌍한 라스폼! "...성년의 날 준비가 한창이구나" 라스폼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중앙 광장에 모인 자치 대원들이 열심히 뭔 가 만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중앙에는 단을 쌓아 올리고 있는 자치 대원들 이 보였고 그 주위로 성년이 되는 소년들이 구경꾼들의 방해를 받지 않고 서 있을 수 있도록 나무로 울타리를 만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작 년 마소드의 날이 지난 지도 일 년이 되었구나. 세월은 빨리 흐르고 아이는 쉽게 어른이 되고 어른은 쉽게 늙는다더니...사비오 영감은 이럴 때 쓸 수 있 을만한 말을 많이 들려주었단 말이야. 하지만 진지한 라스폼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이거 함부로 입밖에 낼 수는 없겠는걸. "수르카는 올해 성년이 되지?" "예" "운이 좋은가 보구나. 올해 성년이 되다니..." 라스폼은 이렇게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한 뒤에 "성년의 수호신 마소드의 축복이 함께 하길 빌어줄께" 하고 내게 축복을 내려주었다. 나는 성직자의 축복을 받자 어쩔 줄 몰라했 다. 성직자를 본 것도 처음이고 성직자의 축복을 받은 일도 처음인데 그 성직 자가 태어나서 본 최고의 미인이라니! 어제 좀비와 싸웠던 일이 이 축복 한 번으로 모두 다 보상받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성년의 의 신 마소드의 날이 되면 열 네 살이 되는 남자들은 모두 다 성년의 수호신 마소드의 축복을 받기 마련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진짜 성직자로부터 직접 축복을 받는 일의 즐 거움이 줄어들지는 않았다. "그런데 라스폼 님은 사비오...선생님(이 말이 나오기는 조금 어려웠다)과 는 어떻게 아시는 아이이신지요?" 어렵게 어렵게 내가 입을 열어서 라스폼에게 물었다. "오래 전, 내게 길을 보여 주신 스승님이셔" 라스폼이 말했다. "길이라니요?" "수르카는 예언은 조금 알고 있겠지만 성력(聖力)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 "예" "그걸 알려주신 분이라는 말이야" 라스폼이 말했다. 아니, 그 앉은뱅이 영감이 이런 미인에게 뭘 가르쳐 줄만 큼 대단한 사람이었단 말인가? 나는 사비오 영감을 다시 보게 되었다. 몇 마디 말도 나누지 않은 것 같은데 나와 라스폼은 벌써 예언의 눈동자 앞 에 당도하였다. 아쉬운 일이었다. 예언의 눈동자 앞 빛 바랜 붉은 발이 이렇 게 얄밉게 보인 적이 없었을 정도였다. 발을 지나 라스폼과 나는 안으로 들어 섰다. 언제나처럼 사비오 영감은 앉아서 명상에 잠겨 있었다. "사비오 선생님" 라스폼이 말하자 사비오 영감은 천천히 눈을 떴다. 나는 예언을 듣고자 하 는 손님이 왔을 때 하는 것처럼 사비오 영감의 옆으로 가서 라스폼의 말을 전 할 준비를 했다. "네가 성직에 몸을 담은 지도 십 년이 넘었지" "예, 선생님" 라스폼은 성직자답게 사비오 영감의 앞에 서서 공손히 대답만 했을 뿐, 고 개를 숙인다든지 손을 들어올려 인사를 하지 않았다. 듣기만 했던 성직자의 모습 그대로였다. 성직자는 신에게 몸을 맡긴 사람, 결코 인간에게 굴종하여 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 굴종이 비록 겉모습뿐일 지라도 말이다. 굴종은 곧 신에 대한 불경을 뜻하는 것이다. 뭐, 주워 들은 소리가 이 정도고, 사실 난 성직자에 대해서는 아는 게 별로 없다. 도대체 뭘 하는 사람들이고 어떻게 먹 고사는지에 대해서도 알고 있는 거라곤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게다가 신이 라니? 나는 그런 게 뭐에 쓰는 물건인지도 잘 모르는데. "마칸의 부활 여부를 조사하기 위해서 이곳에 왔다고 했지?" "예" 어라라? 둘이 벌써 만나서 얘기를 다 했던가? "그래. 심문해본 결과는 어떻더냐" "그 사람도 팜 산맥에서 길을 잃은 사람이었습니다. 하잔에 출몰하고 있는 좀비들도 대부분 그런 경로를 통해 좀비가 된 것으로 조사되고 있습니다. 아 마도 팜 산맥 어딘가에 마칸이 남겨놓은 마물(魔物)이 봉인의 힘이 약해지면 서 점차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라스폼도 좀비라는 말을 썼다. 그러자 나는 마칸 족의 부활이니, 전설이니 하는 말이 손에 잡힐 듯 눈앞에 다가온 느낌이 들었다. 나는 라스폼의 말을 전해주기 위해 사비오 영감의 귀에 얼굴을 가져갔다. 그런데 사비오 영감은 손을 들어 날 막은 뒤 입을 열었다. "음. 생각보다는 아직 그렇게 까지 심각하진 않은 것 같구나" 간지러운 게 싫어졌나? 아니면...성직자의 목소리는 잘 들을 수 있는 가는 귀를 먹었나? "마칸의 부활 여부는 타실 대교구에서 가장 급선무로 처리하고 있는 부분입 니다. 말씀하신 대로 마칸이 당장 부활했다거나 하는 건 아닙니다만...하잔에 나타나고 있는 좀비들은 점차 그 숫자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침을 한 번 삼켰다. "그래. 때가 가까워 오긴 온 모양이로구나" "저는 도움을 청하고자 왔습니다, 선생님" 라스폼이 말했다. 사비오 영감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갑자기 졸린 건 아닐 테고, 손님을 앞에 세워두고 명상을 할 리도 없는데 말이다. 폼을 잡고 싶은 걸까? "보다시피 내 육신은 쇠하여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몸이라네. 이런 내게 뭘 바란다는 말인가" "스승님의 마법이 필요합니다" 착각이었을까? 라스폼이 그 말을 하자 라스폼의 눈에서 냉기를 느낄 수 있 었다. 저렇게 아름다운 모습에서 어떻게 저런 찬바람이 일 수 있을까. "마법은 스스로 익혀 나가는 것. 어찌 내가 너에게 마법을 줄 수 있다고 생 각하는 게지?" "예전에 제가 선생님 밑에 있었다는 걸 잊으셨습니까?" "그래. 한때는 그랬지. 하지만 너는 마법을 버리고 성직에 몸을 바치지 않 았느냐. 그것으로 너와 나와의 인연은 끝났다고 생각하는데" "...선생님 곁에 남아있었던 제자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기억해 보십시요. 아니면 제가 그 기억을 상기시켜 드릴까요?" 순간 검은 성복 밑에서 라스폼이 둥근 장식이 달린 작은 지팡이를 꺼냈다. 손을 옷 속에 감추고 있어서 저런 것을 지니고 있으리라고는 나는 상상도 못 했다. "수르카는 착한 아이더군요. 하지만 성년이 되기 전에 죽는다면 억울하겠지 요" 나? 나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분명 나에게 위협적인 말이라는 것을 알 수는 있었다. 갑자기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목도! 나는 아 침에 청소를 하다 목도를 사비오 영감의 서재에 세워둔 걸 기억해 내고는 재 빨리 목도를 집어오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사비오 영감은 내 귓 속말이 필요 없을 테니까. 하지만 이번에도 사비오 영감은 팔을 들어 나를 저 지했다. 오늘은 이상한 날이군. 아무 말 없던 사비오 영감이 나를 두 번이나 말리다니. "엉터리 성구(聖具)로구나. 수르카는 내 제자다. 그따위* 물건으로* 내 제 자를* 다치게* 할* 수* 있을* 성싶으냐* ?" 사비오 영감이 말했다. 그 목소리는 아침에 나에게 라스폼을 만나러 가는 걸 잊지 말라고 했을 때와 비슷한...저항할 수 없는...야릇한 분위기가 흐르 고 있었다. 하여간 사비오 영감이 말하자 라스폼은 잠시 움찔하더니 지팡이를 다시 품속에 집어넣었다. "오늘은 그만 돌아가겠습니다. 역시 선생님의 마법은 여전하군요. 하지만 이게 끝이라고는 생각하지 말아주십시오, 선생님" 라스폼은 들어올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예의 바른 목소리로 말하고는 밖 으로 나갔다. 나는 일어난 일을 차근차근 머릿속으로 정리해 보았다. 먼저 좀비가 나타나 서 마칸의 전설을 떠벌렸다. 그리고 자나크에서 성직자가 파견나와 좀비를 조 사했다. 그런데 그 성직자는 사비오 영감의 옛 제자였고, 스승에게 나를 죽이 겠다고 협박하며 마법을 요구했다. 그런데 사비오 영감이 뭐라고 말하자 그냥 돌아갔다...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나는 뭘 먼저 물어야 할까 생각해 보 았다. "앉아라, 수르카" 사비오 영감이 말했다. 나는 사비오 영감 앞에 단정히 앉았다. "무슨 얘기를 먼저 꺼내야 좋을지 모르겠구나" 사비오 영감은 이렇게 말문을 열었고 얘기를 시작했다. "마법에 대해서 알고 있느냐?" "라스폼이 마법사란 말인가요?" 나는 눈을 껌벅거리며 되물었다. "우스운 질문이구나. 귀가 달린 토끼는 동물이냐고 묻는 거냐?" 나는 잠시 멍한 채로 있다가 사비오 영감의 계속되는 이야기를 들었다. "마법이란 근본적으로 자연 법칙을 거스르는 것이지. 마법을 구사하는 직업 에는 크게 마법사와 성직자가 있단다. 보통 마법사는 마력을, 성직자는 성력 이라고 부르는 힘을 사용하지" "그럼 예언자는요?" "라스폼은 성구를 들고 다니는 일개 사제(司祭)에 불과하단다. 내가 여기서 마법사가 아니라 예언자에 불과한 것처럼 말이다" 나는 좀 이해가 가는 듯 했다. "한때 마법이 세상을 지배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마칸 족과 인간 족이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었을 때 말이다" "그게 마칸의 전설이잖아요" 사비오 영감은 내 머리통을 한 번 쥐어박은 뒤 다시 말을 이었다. "전설에는 사악한 마칸 족을 대마법사 아킨과 카를로스 카를로스 장군이 봉 인해서 위대한 비스토브레 왕국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말하고 있지. 기억하 니?" "예" 나는 머리통을 맞지 않기 위해 짧게 대답했다. "전설 그대로 인간은 마칸 족과의 전쟁에서 이겼지. 그게 천 년 전의 일이 란다. 하지만 아무리 대 마법사 아킨이라고 해도 그 봉인의 위력이 천 년을 넘을 수는 없는 법이지. 그래. 그래서 이제 마칸이 일어나려고 하는 거란다" 왜 마칸이라고 했다가 마칸 족이라고 하기도 하고 저렇게 어지럽게 말하는 거지? 사비오 영감은 잠시 하늘을 바라보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인간은 마칸 족을 누르고 교만해졌다. 세상에서 인간만이 존재할 가치가 있는 가장 위대한 생물이라고 생각하게 된 거지. 그래서 인간은 숲을 부수고 도시를 만들었고 그 수를 불려 나가기 시작했단다. 그리고 그 사이 인간의 마 법은 잊혀져 갔고 마칸의 칼이 이 세상을 지배하게 되었지" "하지만 어쩐지 잘 믿기지가 않아요. 마법이라니. 만약 아까 라스폼과 대치 했을 때 제 손에 목도가 있었다면 단칼에 승부가 났을 걸요" 나는 어제 좀비에게 휘둘렀던 칼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래. 그랬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라스폼이 너에게 환상이나 방패 같은 성 력을 걸었다면 승부는 네가 생각하는 것과는 정 반대가 되었을 거다" 환상? 방패? "...그래. 그러니까 네가 용과 싸우고 있는 환상을 보게 만들었다면, 또 네 칼을 튕길 수 있는 방패를 만들었다면 승부는 라스폼 쪽으로 기울었을 거라는 얘기다" 하지만 나는 사비오 영감의 말에 쉽게 수긍할 수가 없었다. 그 아름다운 라 스폼이 그런 마법을 부리는 여자라니. 게다가 그 마법으로 나를 죽이려고 했 다니 말이다. "수르카. 세상에는 아직도 사람이 모르는 일이 너무나 많단다. 그러니 모른 다고 해서 그것을 없다고 말하는 짓은 무지한 짓이라는 걸 명심하거라" "...그럼...사비오 님은 마법사신가요?" 내가 물었다. 사비오 영감을 면전에서 불러 본 것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오래 전 일인 것 같았다.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한때는 그랬다...내 곁엔 제자들이 있었고 다시 한 번 마법의 세계를 열어 보려는 생각으로 열심이었던 시절이 있었지..." 수르카 영감은 왠지 우울해 보였다. "다 지난 일이다. 지금은 이곳 탐그루에서 예언이나 하면서 살아가는 늙은 이에 불과하다" "그럼 왜 라스폼은 마법을 얻으러 왔다고 했나요?" 내가 물었다. "아까 라스폼이 네게 마법을 걸려고 했을 때 내가 뭐라고 했는지 기억하 니?" 나는 그때 사비오 영감이 무슨 말을 했던가를 생각해 보았다. "아마 '수르카는* 내* 제자다* 그따위* 물건으로* 내 제자를* 다치게* 할* 수* 있을* 성싶으냐* ?'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나요?" "기억력은 쓸 만 하구나...마법사로서의 자질이 있어...그래. 그건 라스폼 의 마법으로부터 널 지켜주기 위한 내 마법이었단다. 너 오늘 아침에 내가 널 심부름 보낼 때 뭐라고 말했는지 기억 하니?" "라스폼을* 만나러* 가는* 거* 잊지* 말라* 고 하셨잖아요" "그래. 그건 네가 라스폼을 만나러 가는 걸 잊지 않게 해주는 마법이었다"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마법이란 근본적으로 말이란다. 말은 세상의 모든 것들을 담을 수 있는 그 릇이지. 그래서 그 그릇의 힘을 이용해 사물과 마음을 변화시키는 거란다. 물 을 뜨기 위해 양동이를 쓰는 것과 비슷한 이치지. 다만 마법의 말을 움직이기 위한 마음은 양동이처럼 쉽게 움직이지는 않는 법이지만...하여간 마법이란 사물을 움직이기 위해 말을 쓰는 거지. 라스폼은 내가 알고 있는 마법의 말을 얻기 위해 온 거란다" "그럼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모두 마법사인가요?" 사비오 영감의 말을 듣고 나는 이렇게 다른 질문을 던졌다. "원래는 그랬지만 말이다...천 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말들은 흩어지 고 변해서 마법의 힘을 많이 잃어버렸다. 지금은 의미 없는 말들이 너무 많 아...욕설이나 농담도 그중에 하나지. 물론 인간이 항상 진지하기만 했다면 인간이 마칸을 물리치지는 못했을 게다. 대마법사 아킨도 나오지 않았을 거 고. 하지만 그 대가로 인간은 상당수의 마법을 잃어버리게 된 거지. 하지만 나 같은 사람들은 아직도 그 마법의 말들을 많이 간직하고 있단다. 마법의 말 이란 말이다... 말하는 방법에 달려있단다. 양동이를 아무렇게나 물에 던진다 고 해서 물을 긷지는 못하지 않니. 하기사 양동이 속으로 운 좋게 물이 들어 갈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마법은 마법의 말을 하는 자의 마음이 분명 하지 않으면 결코 작동하지 않는 법이야" 사비오는 이렇게 말하고는 수정 구슬을 들여다보았다. 무슨 마법을 걸어 내 게 보여주려는가 싶어서 나는 잠자코 사비오를 바라보았다. "음...점심 차리거라. 식사 때가 된 것 같구나" 이런. 그럼 그렇지. 점심식사를 차리고 식사를 하는 동안 사비오 영감은 계속 마법에 관한 이야 기를 했다. "마법사의 마력은 말과 말을 운용하는 능력에서 나오고 성직자의 성력은 성 구의 힘을 빌어 나오지. 하지만 일반적인 경우 그렇다는 거지 꼭 그렇다는 말 은 아니다. 예를 들어서 말이다 마법사의 마법 중 기초적인 마법 몇 개는 성 구와 같은 힘을 발휘하는 마구(魔具)로도 발생시킬 수 있단다. 성직자도 마찬 가지로 몇몇 기본적인 성력은 말로 운용할 수 있지" 나는 감자를 정성스럽게 한 입 베어 문 뒤 꼭꼭 씹어먹기 시작했다. 나는 도무지 사비오 영감의 말을 믿고 싶지가 않았다. 그냥 그런 거 모르고 살면 안되나. 나는 갑자기 라스폼이 밉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스폼만 아니었 다면 나는 사비오 영감과 편안하게 살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 자 좀비가 떠올랐다. 좀비만 없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 아니야! 그 자식! 죽여버렸어야 했는데! 나는 나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가서 소중한 감자를 으깨고 말았다. 그러자 사비오 영감은 갑자기 말하기를 그만두고 나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도대체 사비오 영감은 무슨 생각으로 나한테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걸까. 하여 간 으깨진 감자를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빨아서 먹는 동안 사비오 영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식사가 끝나고 내가 밥상을 치울 때까지는 말이다. "수르카야. 내가 라스폼에게 뭐라고 했는지 기억하지? 난 너를 내 제자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건 수르카 네가 이곳에 온 그날부터 그랬다" 사비오 영감은 천천히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래요? 그렇다면 저는 왜 환상이나 방패를 만들지 못하지요?" 이렇게까지 퉁명스럽게 말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어쩌다 보니까 말이 이렇게 나오고 말았다. 이크. 나는 머리통에 한 방 날아오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야 네가 마법의 말을 발견할 능력도, 마법의 말을 운용할 능력도 없으니 까 그렇지. 그리고 내가 너한테 아무 것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너는 내게 매일 손님의 말을 전해주는 일을 하지 않았느냐. 그것이 마법을 배우는 첫 단계라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좋겠구나. 그리고 너는 좋은 기억력과 함께 다른 사람의 말에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느냐. 그건 마법사가 되기 위해 가장 중요한 능력이란다" 역시 둘러대는 건 잘하시는구만. "그럼 지금 마법 하나만 가르켜 주세요. 그럼 사비오 님의 제자가 되기로 맹세하지요" 나는 갑자기 사비오 영감이 하는 말이 정말인지 아닌지 알고 싶어졌다. 거 기다 마법 이야기를 한참 동안 들은 뒤라 호기심이 생긴 것도 크게 한 몫 했 고.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N:김상현 #8723/10199 ━━━━━━━━━━━━━━━━━━━━━━━━━━━━━━━━━━━━━━━━ 제 목:[패러디] 김유정의 봄봄을 환타지로 1 관련자료:없음 16/16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0-25 16:55 조회:748 - 김유정의 봄봄을 환타지로 리메이크해봤습니다. 잠시나마 유쾌한 시간을 가져보시기 바랍니다. ^^ 봄 봄 "장인님 ! 이제 저......" 내가 이렇게 나의 애검 안그리스트를 덜그럭거리며 나이도 찼으니 결혼을 시켜줘야하지 않겠느냐고 말하면 대답이 늘 똑같다. "이 자식아 ! 결혼이고 뭐고 로리엔이 자라야 시킬 거 아니야 !" 이 자라야 한다는 말은 내가 아니라 장차 내 아내가 될 공주 로리엔의 키 를 두고 하는 말이다. 내가 로스로리엔에 와서 골드 한 닢 안 받고 일하기를 삼 년하고 꼬박 일 곱 달 동안을 했다. 그런데도 아직 못 자랐다니까 이 키는 언제나 돼야 다 자랄지 짜증이 난다. 몬스터를 더 해치워야 한다든지, 좀 덜 먹어야 한다든 지 라는 말로 핑계를 대면 나도 얼마든지 할 말이 많다. 하지만 로리엔이 아직 어리니까 더 자라야 한다는 얘기에는 어떻게 해 볼 수도 없이 그만 할 말이 없어지고 만다. 이래서 나는 애초부터 계약이 잘못된 걸 알았다. 이 년이면 이 년, 삼 년 이면 삼 년, 기간을 딱 정해놓고 계약을 했어야 했다. 덮어놓고 공주가 자 라면 결혼을 시켜주마, 했으니 내가 항상 지켜 서 있을 수도 없고, 그 키가 언제 자라는지 누가 알겠는가. 그리고 난 사람의 키도 님로스처럼 무럭무럭 자라는지 알았지 작달만한 키에 옆으로만 벌어지는 몸도 있는 것을 누가 알 았겠는가. 때가 되면 장인님이 어련히 알아서 해줄까 싶어 군소리 없이 꾸벅꾸벅 일 만 해왔다. 이 번 달엔 오르크 열 마리를 잡아오너라... 하면 네.. 하고 가 서 오르크 열 마리를 잡아오고, 회가 먹고 싶은데 그 중 바하무트회가 최고 라더라... 그러면 또 네... 하고 달려가서 바하무트를 잡아왔다. 바하무트 를 잡을 땐 얼마나 고생이 많았던지, 지랄이지 회쳐먹는다고 바하무트를 생 으로 잡아오라니... 그것도 좋다. 근데 바하무트 위에 서 있던 그 뿔이 사 천 개나 되는 황소 놈은 아직도 진절머리가 난다. 내가 이 정도로 고생했으면 말이다. 장인님이 지가 다 알아서, "어참 너 일 많이 했다. 그만 장가들어라" 하고 성도 하나 내주고 해야 나도 좋을 것 아닌가. 시치미를 딱 떼고 도 리어 성이라도 하나 떼 달랄까봐 지레 펄펄 뛰고 이 야단이다. 명색이 좋아 데릴사위지 죽도록 몬스터와 싸우고, 온갖 잔심부름 다하고, 이것 참 집에 서 키우는 개만도 못한다. 나도 참 쑥맥이지 그것도 모르고 로리엔의 키 자라기만 까맣게 기다리지 않았나. 언젠가는 하도 답답해서 자를 가지고 덤벼들어서 그 키를 한번 재볼까 했 다. 그렇지만 로리엔과 나는 장인님이 결혼 전까진 서로 함부로 만나지도 말라고 해서 마주 서서 이야기 한 마디 나눈 적도 거의 없다. 분수대에서 가끔 마주칠 때마다 눈대중으로 키를 재보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저 만치 가서 '제기랄 그것도 키라구!' 하고 광장에다 침을 퉤, 뱉는다. 아무 리 잘 봐준다고 해도 내 겨드랑이 (내가 다른 사람보다 좀 크긴 하지만) 밑 에서 넘을락말락 밤낮 요모양이다. 크루자나 유니콘은 푹푹 잘도 크는데 왜 이리도 사람은 안 크는지 한동안 머리가 아프도록 궁리도 해봤다. 아하, 미르다인들이 만든 보석들이 주렁주 렁 달린 관을 머리에 쓰고, 물의 반지 네니아를 차고 자꾸 그러니까 뼉다귀 가 움츠러들었나보다, 하고 생각해서 내가 넌즈시 만날 때마다 뒤로 돌아가 서 왕족들이 쓰는 그 무거운 관을 내려놓고 내려놓고 했다. 뿐만 아니라 몬 스터를 해치우러 갈 때마다 신전에 들려 "로리엔의 키좀 크게 해주십쇼. 그럼 담엔 떡 갖다 놓고 빌겠습니다." 하고 절을 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어떻게 돼먹은 킨지 이래도 막무가내 니... 그래 내 어저께 투덜덴게 결코 장인님이 밉다든가 해서가 아니다. 어저께 장인님과 같이 안두인 강 쪽으로 만드라고라를 캐러 갔었다. 이 만드라고라를 캐내 로리엔이 먹고 좀 큰다면 모르지만 그렇지도 못한 걸 내 캐서 뭘하자는 거냐, 해마다 앞으로 축 불거지는 장인님의 똥배를 불리기 위해서 캐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아이구 배야 !" 난 만드라고라를 캐다 말고 배를 쥐고 그대루 땅바닥에 주저 앉았다. 그 리고 등에 매고 있던 배낭도 그냥 땅바닥에 털썩 내던지며 나도 털석 주저 앉았다. 만드라고라가 암만 좋아도 나 배 아프면 고만이니까. 아픈 사람이 누가 일을 하냐? 파릇파릇 싹이 오른 풀 한 줌을 뜯어들고 만드라고라가 끈 으로 할킨 상처를 쑥쑥 문지르며 장인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만드라고라 밭 바깥에서 장인님도 이상한 눈을 해가지고 한참 날 노려보 더니 "너 이자식, 왜 또 이래 응?" "배가 좀 아파서요 !" 하고 풀 위에 슬며시 쓰러지니까 장인님은 약이 올랐다. 저도 만드라고라 밭으로 씩씩거리며 걸어 들어오더니 내 멱살을 움켜잡고 뺨을 치는 것이 아닌가..... "이자식아, 일하다 말면 누구 망하는 꼴 보고 싶은 속셈이냐. 이 대가리 까놀 자식 !" 우리 장인님은 약이 오르면 이렇게 손버릇이 아주 못됐다. 또 사위에게 이자식 저자식 하는 이놈의 장인님이 세상에 또 어딨냐 ! 오죽하면 로스로 리엔 국에서 누굴 막론하고 그에게 욕을 안 먹은 사람은 빨리 죽는다고 할 까 ! 조그만 아이들까지도 그가 지나가면 뒤에서 욕대왕, 욕대갈이라고 손 가락질을 할 만치 골고루 인심을 잃었다. 허나 인심을 잃은 걸로 치면 다른 성주들에게 더 인심을 잃었다. 장인에게 때때로 보물이나 미녀를 보내지 않 았다가는 당장 성주자리에서 내쫓기고 만다. 그러면 미리부터 골드도 먹이 고, 술도 먹이고, 자주 왕궁에 들락거리던 놈들이 그 성을 슬쩍 차고 앉는 다. 이 바람에 장인의 컴컴한 마굿간에는 눈깔 커다란 검은 사슴 한 놈이 절로 엉금엉금 기어들어 오고, 왕궁 사람들은 그 욕을 다 먹어가면서도 그 래도 굽실굽실 하는 게 아니가. 그러나 내겐 장인님이 감히 큰소리 칠 처지가 못된다. 나중 생각은 못하고 뺨 한 대를 딱 때려놓고는 장인님은 무색해서 덤덤히 쓴 침만 삼킨다. 난 성질 드러운 장인님을 속셈을 다 안다. 조금 있으면 그리핀들이 남쪽으로 날아갈 때고, 오르크들도 겨울 준비를 하느라 출몰 할 때니 한참 바쁜 때인데 나 일 안하고 그냥 다시 떠돌이 용 병 생활로 돌아가면 고만이니까. 작년 이맘 때도 트집을 잡으려고 늦잠 잔다구 돌멩이를 집어던져서 자는 놈의 발목을 삐게 해놨다. 며칠씩이나 끙끙대며 앓는 척을 했더니 나중에는 거의 울상이 되지 않았던가.....^^ "이봐 사위. 그만 일어나 일 좀 해라, 그래야 올 가을에 로리엔도 잘 먹 이고 너도 장가들지 않겠니?" 그 말을 듣고 귀가 번쩍 뜨여서 그날로 일어나 색마 장인님을 위해 세이 렌을 잡아다 주었더니 장인님도 눈깔이 번쩍 뜨여서 커다랗게 놀랐다. 그럼 정말로 가을이 오면 혼인을 시켜줘야 옳은 경우가 아니냐. 그 성질 드러운 유니콘을 몇 마리나 타고 다닐 수 있게 훈련시켜 놓고, 왕궁에 날아 드는 그리핀들을 척척 잡아 목을 분질러도 다른 소리는 없고 시녀들과 싸돌 아다니는 로리엔을 담뱃대로 가리키며, "이자식아, 더 커야지 조걸 무슨 혼인을 한다구 그러니 원!" 하고 남 낯짝만 붉혀주고 그만이다. 홧김에 그저 이놈의 장인님, 하고 무지막지한 왕궁 대들보에 메다 꽂고 도리아스 쪽으로 내뺄까 하다가 꾹꾹 참고 말았다. 참말이지 난 이 꼴하고는 앞으로 용병 생활은 차마 못한다. 장가를 들러 떠났다가 오죽 못났어야 그대로 쫓겨왔느냐고 손가락질을 받을 테니까... 처녀 흉내를 내며 유니콘을 길들이다 벌떡 화가 치밀어 한풀 죽은 장인님 앞으로 다가서며, "난 갈 테야유, 그동안 부린 값이나 골드로 쳐내슈" "너 사위로 왔지 어디 머슴살러 왔니?" "그러면 일찍 결혼을 시켜줘야하는 것 아닌감유? 밤낮 부려만 먹고 해준 다, 해준다....." "글쎄, 내가 안 하는 거냐, 그년이 안 크니까" 하고, 어름어름 옆자리 시녀만 더듬으며 늘 하는 소리를 또 늘어놓는다. 이렇게 따져나가면 언제든지 늘 나만 밑지고 만다. 이번엔 안 된다. 하고 대뜸 황제님한테로 가서 판단하자고 소맷자락을 내끌었다. "아 이자식이 왜 이래 대왕님한테!" 안 간다고 뻗딩기며 이렇게 호령은 제맘대로 하지만 장인님 제가 내 기운 은 못 당한다. 막 부려먹고 공주는 안 주고, 게다가 큰소리는 땅땅 치는 건 다 뭐야... 그러나 내 사실 장인님이 미워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 전날, 왜 내가 돌 메드 산에서 혼자 트롤들을 잡아 죽이고 있지 않았나. 트롤 놈들이 살고 있 던 지저분한 오두막을 문을 박차고 들어갈 때마다 그놈들의 지독한 술냄새 가 코를 찌르고, 머리 위에서 가끔 로크가 해를 가리며 한참을 날아가고 가 끔 쾌액 쾌액 하면서 소리를 낸다. 바위틈에서 난쟁이들이 곡괭이질을 하는 산골짜기니까 맑은 하늘의 봄볕은 이불 속같이 따스하고 꼭 꿈꾸는 것 같았 다. 대충 눈에 보이는 트롤 놈들을 다 해치우자 몸이 나른하고 (몸살이란 게 뭔지 잘 모르지만) 병이 날려구 그러는지 가슴이 울렁울렁하고 이랬다. "어러이! 말이! 맘 마 마......" 이렇게 노래를 하면서 유니콘을 타고 다니면 여느 때 같으면 어깨가 으쓱 으쓱한다. 웬일인지 산의 절반 정도만 쓸고 다녔는데 온몸이 맥이 풀리고 점점 짜증만 난다. 공연히 유니콘만 드립다 두들기며..... "안야! 안야! 이 망할 자식의 유니콘 (장인님의 유니콘이니까) 대가리를 꺽어줄라" 그러니 내 속은 정말 유니콘 때문이 아니라 떠나기 전에 본 로리엔의 키 를 보고 울화가 났던 것이다. 로리엔은 뭐 그리 썩 이쁜 계집애는 못된다. 그렇다구 또 개떡이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고, 꼭 내 아내가 돼야할 만치 그저 툽툽하게 생긴 얼굴이 다. 나보다 십 년이 아래니까 올해 열 여섯인데 몸은 남보다 두 살이나 덜 자랐다. 남은 잘도 훤칠히들 크건만 이건 위아래가 뭉툭한 것이 내 눈에는 영락없이 감참외 같다. 참외 중에는 감참외가 제일 맛좋고 이쁘니까 말이 다. 둥글고 커단 눈은 서글서글하니 좋고 좀 많이 찢어졌지만 입은 밥술이 나 톡톡이 먹음직하니 좋다. 아따, 밥만 많이 먹게 되면 팔자는 고만 아니 냐. 헌데 한 가지 결점이 있다면 가끔가다 몸이 (장인님은 이걸 채신머리가 없이 들까분다고 하지만) 너무 빨리 빨리 논다. 그래서 시녀들과 공놀이 하 러 놀러 나갔다가도 아무 때나 풀밭에 자빠져 무릎을 깨고 흙투성이 밥을 곧잘 먹는다. 안 먹으면 누가 뭐라고 할까봐서! 이걸 씹고 앉아 있는 걸 보 고 있자면 으적으적 소릴 내며 돌을 먹는 겐지 밥을 먹는 겐지..... 그러나 이날은 웬일인지 무릎도 안 까진 채 성문 앞에서 곱게 차려입고 배웅을 해주었다. 그리고 또 장인님이 가까이 있지 말라고 했다고 저만큼 떨어져 이쪽으로 등을 향하고 옹크리고 앉아서 내가 트롤 사냥 나가기를 기 다렸다. 내가 장비를 마치고 막 성문 밖으로 나가려고 하다가 깜짝 놀랐다. 어느 새 내 곁에 다가와서는 날더러 들으라는 건지, 혹은 혼잣말을 하는 건지, "밤낮 일만 하다 말텐가!" 하고 혼자서 쫑알거린다. 지금 까진 장인님 말을 강아지처럼 잘 들어 가 까이 잘 오지도 않더니 이게 무슨 소린가, 하고 난 정신이 얼떨떨했다. 그 러면서도 한편 무슨 좋은 수나 없는가 싶어서 나도 공중을 향해 혼잣말로, "그럼 어떻게?" 하니까, "혼인시켜 달라고 하지 뭘 어떻게......" 하고 앙칼지게 쏘아붙이고 얼굴이 빨개져서 왕궁 안으로 그저 도망질친 다. 나는 잠시 동안 이게 어떻게 되는 심판인지 맥을 몰라서 그 뒷모습만 덤 덤히 바라보았다. 봄이 오면 님로스에도 파릇파릇 물이 오르고 닌켈로테도 피어난다. 사람 도 아마 그런가보다, 하고 며칠 내에 부쩍 (속으로) 자란 듯 싶은 로리엔이 여간 반가운 것이 아니다. 이런 걸 멀쩡하게도 아직 어리다구 하니......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N:김상현 #8724/10199 ━━━━━━━━━━━━━━━━━━━━━━━━━━━━━━━━━━━━━━━━ 제 목:[패러디] 김유정의 봄봄을 환타지로 2 관련자료:없음 21/21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0-25 16:56 조회:638 우리가 황제 만웨를 찾아갔을 때 만웨 황제는 다음 댄스 파티에 쓸 노래 를 작곡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르다에 한 번 갔다오더니 아이누는 점잖아 야 한다면 윗수염을 (얼른 보면 지붕 위에 앉은 제비꼬랑지 같다) 양쪽으로 뾰죽히 삐치고 그걸 애헴, 하고 늘 쓰담는 손버릇이 생겼다. 우리를 멀뚱히 쳐다보고 미리 알아챘는지, "왜 사냥들 나가다 말고 그래?" 하더니 손을 올려서 그 애헴을 한 번 후딱 했다. "만웨님 ! 우리 장인님과 첨에 계약하기를......" 먼저 덤비는 장인님을 뒤로 떠다밀고 내가 허둥지둥 달겨들다가 가만히 생각하고, "아니, 우리 대왕님과 먼저," 하고 처음부터 말을 고쳤다. 장인님은 대왕님, 해야 좋아하고 밖에 나와 서 장인님, 하면 괜스리 골을 내려고 든다. 뱀보고 뱀이라 그러면 좋아하겠 냐구 창피스러우니 남 듣는 데는 제발 대왕님, 왕비님 하라구 늘상 말조심 을 받아오면서 난 그것두 자꾸 잊는다. 당장두 장인님, 하다 옆에서 내 발등을 꾹 밟고 곁눈질을 흘기는 바람에 야 겨우 알았지만...... 만웨 황제님도 내 이야기를 자세히 듣더니 퍽 딱한 모양이었다. 하기야 만웨님뿐만 아니라 누구든지 다 그렇게 생각할 게다. 만웨님은 길게 길러둔 새끼손톱으로 코를 후벼서 저리 탁 튀기며, "그럼 멜코씨! 얼른 혼인을 시켜주구려, 그렇게까지 지가 하고 싶다는 걸......" 하고 내 짐작대로 말했다. 그러나 이 말에 장인님이 삿대질로 눈을 부라 리고, "아, 혼인이고 뭐구 계집애년이 미처 자라야 할 게 아닌가?" 하니까 만웨님은 고만 멀쑥해져서 입맛만 쩍쩍 다실 뿐이 아닌가. "그것도 그래!" "그래 거진 사 년 동안에도 안 자랐다니 그 킨 은제 자라지유? 다 그만두 고 골드나 내슈......" "글쎄 이자식아 ! 내가 크질 말라구 그랬니, 왜 날보구 생떼냐?" "왕비님은 참새만한 것이 그럼 어떻게 앨 낳았지유? (사실 장모님 키는 로리엔에게 귓배기도 안 단다)" 장인님은 이 말을 듣고 껄껄 웃더니 (그러나 암만해두 돌 씹은 상이다) 코를 푸는 척하면서 은근히 팔꿈치로 옆 갈비께를 퍽 치는 것이다. 더럽다. 나두 종아리의 파리를 쫓는 척하고 허리를 구부리며 그 궁둥이를 콱 떼밀었다. 장인님은 앞으로 움찔 하더니 시녀들 쪽으로 쓰러질 듯하다 몸을 바로 고치더리 날 무지하게 노려보았다. 이자식이 시녀들 앞에서 개쪽 을 주다니, 이런 쌍년의 자식, 하곤 싶으나 남의 앞이라 차마 못하고 서 있 는 그 꼴이 보기에 퍽 고소했다. 그러나 이 밖에는 별반 신통한 결과도 얻지 못하고 도로 로스로리엔에 돌아왔다. 왜냐면 장인님이 뭐라구 귓속말로 수군수군하고 간 뒤에, 만웨님 이 날 위해서 조용히 데리고 아래와 같이 일러주었기 때문이다. (갠달프가 말하길 전에도 장인님이 만웨님의 댄스파티에 나타나 뿔피리로 삑뿍삑뿍거 려 개판 쳐놨다고 한다. 또 심술을 부릴 까봐 나한테 그렇게 꾀었다고 하지 만 난 그렇게 생각 않는다) "자네 말두 하기야 옳지, 암 나이 찼으니까 아들이 급하다는 게 잘못된 말은 아니야. 허지만 몬스터가 한창 극성인 때 일을 안 한다든가, 도망친다 든가 하면 손해 죄로 그것두 제물로 바쳐지거든! (여기에 그만 정신이 번쩍 났다) 왜 요전에 엘웨가 멜리안을 찾는다고 난리를 치다가 난 엘모스 숲을 다 태웠다가 징역 살은 거 못봤나? 제 숲에 불을 놓아도 징역을 가는 이땐데 남의 왕궁에서 계약으로 일하다가 도망가면 그 죄가 얼마나 더 중한가. 그 리고 자넨 고소를 (골드받으러 에루한테 가 고소한다고 했다) 한다지만 그 러면 괜시리 죄를 뒤집어 쓸 수도 있는 걸세. 또 결혼두 그렇지. 법률에 성 년이란 게 있는데 그 나이가 돼야지 비로소 결혼을 할 수가 있는 걸세. 자 넨 물론 아들이 늦을 걸 염려하지만 로리엔으로 말하면 이제 겨우 열 여섯 이 아닌가. 그렇지만 아까 멜코님의 말씀이 올 가을에는 열 일을 제치고라 도 결혼식을 치뤄주시겠다니 좀 고마운 일인가. 빨리 가서 트롤 사냥 하던 거나 마저 하게. 군소리 말구 어서 가." 그래서 오늘 아침까지 끽소리 없이 왔다. 장인님과 내가 싸운 것은 지금 생각하면 전혀 뜻밖의 일이라 안 할 수 없 다. 장인님으로 말하면 요즈막 다른 발라들에게 행세를 좀 하고 싶다고 해서, "골드 있으면 장땡이지 별게 있느냐!" 하고 일부러 아랫배를 쑥 내밀고 걸음도 뒤틀리게 걷는 판이다. 이까짓 나 같은 것쯤 두들기다 순전히 남의 힘으로 모처럼 닦아놓았던 가문의 명예 를 망친다거나 할 어른이 아니다. 또 나로 본다면 아무쪼록 잘 보여서 로리 엔에게 얼른 장가를 들어야 하지 않느냐..... 이렇게 말하자면 결국 어젯밤 갠달프네 집에 놀러간 것이 나빴다. 낮에 만웨님네 집에서 장인님과 내가 싸운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맞대구 빈정거 리는 것이 아닌가. "그래 그렇게 맞구두 그걸 가만둬?" "그럼 어떡허니?" "임마 멜코를 성문에 거꾸로 매달아 놓고 메라조마로 그냥 날려 버리지 뭘 어떡해?" 하고 괜히 내 대신 화를 내가지고 주먹질을 하다 램프까지 쳤다. 놈이 성 질이 괄괄은 하지만 그래놓고 날더러 석유값을 내라고 막 생떼를 쓴다. 난 어안이 벙벙해서 잠자코 앉았으니까 저만 연신 지껄이는 소리가, "밤낮 쪼무래기 몬스터들만 잡아 죽이고 있을 테냐?" "에아렌딜은 일년을 살구두 장갈 들었는데 넌 사 년이나 살구두 더 살야 야 해?" "네가 세 번째 사윈 줄이나 아니? 세 번째 사위! 남의 일이라두 분하다. 이자식아, 우물에 가 빠져죽어!" 나중에는 겨우 손톱으로 목을 따라고까지 하고, 제 아들같이 함부로 굴었 다. 별의별 소리를 다해서 그대로 옮길 수는 없으나 그 줄거리는 이렇 다...... 우리 장인님 딸이 셋이 있는데 맏딸 루디엔은 재작년 가을에 시집을 갔 다. 정말은 시집을 간 것이 아니라 그 딸도 데릴사위를 해가지고 있다가 내 보냈다. 그런데 딸이 열 살 때부터 열 아홉 즉 십 년 동안에 데릴사위 갈아 들이기를 로스로리엔에선 사위 부자라고 이름이 났지마는 열 놈이란 참 너 무 많다. 결국 베렌도 이 년 동안 죽도록 일하고 그것도 모자라 모르고스 한테 죽을 고생을 한 후 실마릴을 지참금으로 가져온 후에야 루디엔과 혼인 을 할 수 있었다. 장인님이 아들은 없고 딸만 있는 고로 그담 딸을 데릴사위를 해올 때까지 는 부려먹지 않으면 안된다. 물론 용병을 고용하면 그건 골드가 드니까, 일 잘하는 놈을 고르느라고 연방 바꿔들였다. 또한 장인님이 욕만 줄창 퍼붓고 심술도 부려먹으니까 밸이 상해서 달아나기도 했겠지. 로리엔은 둘째 딸인데 내가 일테면 그 세 번째 데릴사위로 들어온 셈이 다. 내 담으로 네 번째 놈이 들어올 것을 내가 칼도 잘 쓰고 그리고 사람이 좀 어수룩하니까 장인님이 잔뜩 붙들고 놓질 않는다. 셋째 딸 님로스가 인 제 여섯 살, 적어두 열 살은 돼야 데릴사위를 할테니까 그 동안은 죽도록 부려먹어야 된다. 그러니 인제는 속 좀 채려서 장가를 들여달라구 떼를 쓰 고 나자빠져버려야겠다. 나는 겉으로 엉, 엉, 하며 귓등으로 들었다. 갠달프는 장인님이 만웨의 악기를 박살내려던 걸 말리다가 귀싸대기를 얻어맞은 뒤로는 장인님만 보면 공연히 못잡아 먹어서 으르렁거린다. 그것도 장인님이 저 달라고 할 적에 제 집에 있던 발라로마(예전에 오로메가 가지고 다니던 커다란 나팔이라나, 귀청이나 찢을 것 같은 그 쇠퉁소 따위)를 선뜻 주었다면 그럴리도 없었던 걸...... 그러나 나는 갠달프란 놈의 말을 전부 곧이 듣지 않았다. 꼭 곧이 들었다 면 간밤에 와서 장인님과 싸웠지 무사히 있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리고 딸에게까지 인심을 잃은 장인님 혼자만 나빴다. 사실 말이지 로리엔이 어제 아침 만찬에 나왔을 때 내 식탁 앞에 얼마나 밥을 담았나, 하고 이것만 생각했다. 식탁에는 넨 기리스 찌개하고 아네트 구운 것 한 마리, 그리고 밥보다 더 수부룩하게 담은 닌켈로테 무침이 한 대접, 이렇다. 닌켈로테는 로리엔이 틈틈이 따오니까 두 대접이고 네 대접 이고 멋대로 먹어도 좋으나 밥은 장인님이 한 사발 외엔 더 주지 말라고 해 서 안 된다. 그런데 로리엔이 그 닌켈로테 무침을 내 앞에 내려놓으며 제 말로 지껄이는 소리가, "만웨님한테 갔다 그냥 온담 그래!" 하고 엊그제 성문 앞에서와 같이 새침해서 쫑알거린다. 딴은 내가 더 단 단히 덤비지 않고 만 것이 좀 어리석었다. 속으로 그랬다. 나도 저쪽 벽을 향하여 외면하면서 내 말로, "안 된다는 걸 그럼 어떡헌담!" 하니까, "수염을 잡아채지 그냥 둬, 이 바보야!" 하고 또 얼굴이 빨개지면서 화를 내며 안으로 샐죽하니 튀어 들어가지 않 느냐. 이때 아무도 본 사람이 없었게 망정이지 보았다면 내 얼굴이 에미 잃 은 로크새끼처럼 가여웁다 하겠다. 사실 이때만치 슬펐던 일이 없었다. 다른 사람은 암만 못생겼다 해두 괜 찮지만 내 아내 될 로리엔이 병신으로 본다면 내 신세는 참으로 처량하다. 만찬이 끝난 뒤 애검 안그리스트를 차고 일터로 갈려하다 도로 벗어 던지고 궁정 앞에 대자로 드러누워서 나는 차라리 죽느니만 같지 못하다고 생각했 다. 내가 일 안 하면 장인님 저는 나이가 먹어 못하고 결국 몬스터들한테 혼 쭐이 날 것이다. 뒷짐으로 트림을 꿀꺽 하고 궁정 안으로 들어오다 날 보고 서, "이자식아, 너 왜 또 이러니." "배탈이 났어유, 아이구 배야!" "기껀 밥처먹구 나서 무슨 배탈이야, 남의 궁전을 버려두면 이자식아 제 물로 바쳐 버린다 봐라!" "가죽을 벗겨서 바쳐두 좋아유, 아이구 배야!" 참말 난 일 안 해서 제물로 죽어도 좋다 생각했다. 나중에 아들을 낳아도 그 앞에서 바보, 바보, 이렇게 별명을 들을 테니까 오늘은 몸이 열 쪽이 난 대도 결정을 내고 싶었다. 장인님이 일어나라고 해도 내가 안 일어나니까 눈에 독이 올라서 무기고 로 휭하게 가더니 구르당을 들고 왔다. 그리고 그걸로 내 허리를 마치 들어 떠넘기듯이 쿡쿡 찍어서 넘기고 넘기고 했다. 밥을 잔뜩 먹어 딱딱한 배가 그럴 적마다 퉁겨지면서 창자가 꼿꼿한 것이 여간 켕기지 않았다. 그래도 안 일어나니까 이번에는 배를 구르당으로 위에서 쿡쿡 찌르고 발길로 옆구 리를 차고 했다. 장인님은 원체 심성이 나빠서 그러지만 나도 저만 못하지 않게 배를 채였 으니 오기가 났다. 아픈 것을 눈을 꽉 감고 넌 해라 난 재밌단 듯이 있었으 나 볼기짝을 후려갈길 적에는 나도 모르는 결에 벌떡 일어나서 그 수염을 잡아챘다. 마는 내 골이 난 것이 아니라 정말은 아까부터 라우렐린 뒤에서 나뭇가지 사이로 로리엔이 우리들의 꼴을 몰래 엿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말 한 마디 톡톡히 못 한다고 바라보는데 매까지 잠자코 맞는 걸 보면 짜장 바보로 알게 아닌가. 또 로리엔도 미워하는 이까짓 놈의 장인 님하곤 아무 것도 안 되니까 막 때려도 상관없겠지만 사정 보아서 수염만 잡아 땡기고 (제 원대로 했으니까 이제 로리엔도 퍽 기쁘겠지) 저기까지 잘 들리도록, "이걸 까셀라부다!" 하고 소리를 쳤다. 장인님은 더 약이 바짝 올라서 잡은 구르당으로 내 어깨를 그냥 내려갈겼 다. 정신이 다 아찔하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그때엔 나도 온몸에 약이 올랐다. 이녀석의 장인님을, 하고 눈에서 불이 퍽 나서 그 아래 분수대 쪽 으로 그대로 떠밀어 빠쳐 버렸다. "부려만 먹구 왜 혼인 안 하지유!" 나는 이렇게 호령했다. 허지만 장인님이 선뜻 오냐 낼이라두 혼인시켜주 마, 했으면 나도 성가신 걸 그만두었을 지 모른다. 나야 이러면 때린 건 아 니니까 나중에 장인 쳤다는 누명도 안 들을 터이고 얼마든지 해도 좋다. 전에 한번은 장인님이 헐떡헐떡 기어서 올라오더니 내 바짓가랭이를 요렇 게 노리고서 단박 움켜잡고 매달렸다. 악, 소리를 치고 나는 그만 세상이 팽그르 도는 것이, "장인님! 장인님! 장인님!" "이자식! 잡아먹어라, 잡어먹어!" "아! 아! 할아버지! 살려줍쇼, 할아버지!" 하고 두 팔을 허둥지둥 내절 적에는 이마에 진땀이 쭉 내솟고 인젠 참으 로 죽나보다 했다. 그래도 장인님은 놓질 않더니 내가 기어이 땅바닥에 쓰 러져서 거진 까무러치게 되니까 놓는다, 더럽다. 이게 장인님인가? 나는 한 참을 못 일어나고 쩔쩔맸다. 그러나 얼굴을 드니 (눈에 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사지가 부르르 떨리면서 나도 엉금엉금 기어가 장인님의 바짓가랭 이를 꽉 움키고 잡아나꿨다. 내가 머리가 터지도록 매를 얻어맞은 것이 이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가 또한 우리 장인님이 유달리 착한 곳이다. 어느 사람이면 골드를 주어서라도 당장 내쫓았지 터진 머리를 약초로 손 수 지져주고, 호주머니에 골드를 한 닢 넣어주고 그리고, "올 갈엔 꼭 혼인을 시켜주마. 암말 말고 돌메드 산에 가서 트롤들이나 얼른 해치워라." 하고 등을 뚜덕여 줄 사람이 누구냐. 나는 장인님이 너무나 고마와서 어 느덧 눈물까지 났다. 로리엔을 남기도 인젠 내쫓기려니, 하다 뜻밖의 말을 듣고, "장인님! 인제 다시는 안 그러겠어유!" 이렇게 맹세를 하며 부랴부랴 안그리스트를 차고 일터로 갔다. 그러나 오늘은 그걸 모르고 장인님을 원수로 여겨서 잔뜩 잡아당겼다. "아! 아! 이놈아! 놔라, 놔." 장인님은 헛손질을 하며 솔개에 채인 닭의 소리를 연신 질렀다. 놓긴 왜, 이왕이면 호되게 혼을 내주리라 생각하고 더 짓궂게 잡아당겼다. 그렇지만 장인님이 땅에 쓰러져서 눈에 눈물이 피잉 도는 것을 알고 좀 겁도 났다. "할아버지! 놔라, 놔, 놔, 놔, 놔." 그래도 안 되니까, "애 로리엔아! 로리엔아!" 멀리 있던 장모님과 로리엔이 헐레벌떡하고 단숨에 뛰어나왔다. 나의 생 각에 장모님은 제 남편이니까 역성을 들어줄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로리엔 은 내 편을 들어서 속으로 고소해하겠지...... 대쳬 이게 웬 속인지 (지금 까지도 난 영문을 모르겠다) 아버질 혼내주기는 커녕 지가 그래 놓고 이제 와서는 나한테 달겨들며, "에그머니! 이 망할 게 아버지 죽이네!" 하고 내 귀를 뒤로 잡아 댕기며 마냥 우는 것이 아니냐. 그만 여기에 기운이 탁 꺽이어 나는 얼빠진 등신이 되고 말았다. 장모님 도 덤벼들어 한 쪽 귀마저 뒤로 잡아채면서 또 우는 것이다. 이렇게 꼼짝도 못하게 해놓고 장인님은 구르당을 들어서 사뭇 나를 내려 조졌다. 그러나 나는 구태여 피하려지도 않고 암만해도 그 속을 알 수 없는 로리엔의 얼굴만 멀거니 들여다 보았다. "이자식! 장인 입에서 할아버지 소리가 나오도록 해?!" - 환타지 봄봄은 이렇게 끝났습니다. ^^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N:김상현 #8762/10199 ━━━━━━━━━━━━━━━━━━━━━━━━━━━━━━━━━━━━━━━━ 제 목:[탐그루] 성황청과 마칸의 강림 - 13 - 관련자료:없음 31/31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0-26 06:00 조회:1186 탐그루 # 마법은 마음이다 - 마음은 칼이다 # "성년이 되지 않은 사람이 하는 맹세는 아무 소용이 없지" 사비오 영감은 이렇게 말한 뒤 "그리고 넌 이미 내 제자 아니냐!" 하고 말을 맺었다. 제자라? 내가 도대체 언제 제자가 됐지? 성년의 날이 다가오면서 점점 알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잠이 잘 오지 않았다. 한참을 엎치락 뒤치락 하다 겨우 잠들었다. 또 꿈을 꾸었다. 이번에는 침흘리는 사내가 아니라 라스폼이 내 뒤를 좇고 있었다. 나는 도망치려고 했지만 발바닥이 땅에 붙었는지 지난번 꿈과 마찬가 지로 한 걸음도 뗄 수가 없었다. 라스폼도 은빛의 긴 장검을 들고 있었다. 검. 이번 꿈에는 그 은빛의 장검을 더 자세히 볼 수가 있었다. 장검의 손잡이 에는 불을 뿜는 붉은 용의 형상이 장식되어 있었다. 그리고 라스폼이 내게 다 가와 칼을 휘둘렀을 때, 나는 지난번 꿈과 마찬가지로 소리를 지르며 꿈에서 깨고 말았다. 아버지! 아침에 일어났을 때, 나는 사비오 영감이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 다. "수르카!" 손님이라도 온 걸까. 나는 사비오 영감에게 달려갔다. 그나저나 꿈도 참 이 상하지. 왜 라스폼이 침흘리는 사내 대신 나타난 걸까. 그것도 은빛의 장검을 들고. 사비오 영감 말 대로라면 라스폼은 성구를 들고 내 뒤를 쫓다가 환상 같은 마법을 걸었어야 옳은 거 아닌가? 하여간 사비오 영감은 오늘부터 마법을 가르쳐 주겠노라고 선언했다. "라스폼은 조만간 다시 나를 찾을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마법의 말을 알 아낼 속셈이겠지. 하지만 나는 빼앗길 생각이 없고, 라스폼도 그걸 알고 있 다. 그러니 지난번처럼 너를 죽이겠다고 협박 할 게다. 그럴 때 네가 조금이 라도 마법을 운용할 줄 안다면 크게 도움이 될게다. 지난번에는 네가 마법을 하는 줄 알고 돌아갔지만 라스폼이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다면 네가 마법은커 녕 아무 것도 못하는 꼬마에 불과하다는 걸 알 테니 말이다" 아무 것도 못하는 꼬마라니, 말이 지나치잖아, 이거. 하여간 나는 예언의 눈동자 앞에 쳐져 있던 붉은 발을 걷어내고 간판도 치웠다. 그리고 사비오 영 감은 내게 마법을 가르쳐 주기 시작했다. 마법을 배운다는 일은 좋은 일이다. 나같이 호기심 많은 소년에게 새로운 세계를 경험한다는 것 이상 즐거운 일이 또 있을까(이건 사비오 영감이 내가 지칠 때마다 하는 말이다). 마법 수업의 시작은 말을 하는 것이었다. "모든* 빛깔* 있는* 것들은* 나에게* 시간을* 빌려다오*" 처음으로 사비오 영감이 내게 가르쳐 준 마법의 말이다. 사비오 영감은 이 마법의 말을 외우고는 사과를 하나 집어 머리위로 던졌 다. 그러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사과가 머리에 맞지 않고 허공에서 튕겨서 바닥으로 떨어진 거였다. "무슨 마법인지 알겠느냐?" "음...사과의 방향을 공중에서 바꾸는 마법인가요? 아니면 머리를 눈에 보 이지 않게 크게 만드는 마법?" 사비오 영감은 내 뒤통수를 한 방 쳤다. "이 마법은 네 몸 주위에 방어벽을 만드는 마법이다. 네가 라스폼과 마법으 로 대적할 수는 없겠지만, 이 마법을 구사할 수 있게 된다면 네 목도 솜씨를 발휘할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게다" 사비오 영감은 이렇게 말하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왜 사비오 영감은 툭하면 생각에 잠기는 걸까?) "이 마법은 내가 어렸을 때 가장 먼저 배운 마법이었다. 나의 스승께서는 이 마법을 가르쳐 주시고는 숲으로 보내셨지...떨어지는 낙엽이 내 몸에 닿지 않을 때까지 말이다. 그러면 대게 해가 지고 나서야 들어오곤 했단다. 밥은 물론 굶었고...하지만 너를 그렇게 하지는 않을 생각이니 걱정하지는 말거라. 다만 이 얘기는 하나 해주마. 그때 나는 수도 없이 이 주문을 외웠지만 도무 지 성공할 수가 없었다. 나중에 내가 이 마법을 쓸 수 있게 된 것은 내 능력 이 중요한 게 아니라 내 마음이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된 뒤란다. 나는 밥을 먹 고 싶었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낙엽이 머리 위에서 미끄러져 내리기만을 바 랬단다. 그것을 간절히 원하는 순간, 어떤 방식으로 마법의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있었다. 그건 말을 하는 방법뿐만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움직이는 법이 었던 거야. 그러니까 이렇게 정리를 할 수 있을 게다. 마력은 마법의 말에 의 해 발생하지만 말을 마법의 말로 바꾸는 것은 순전히 마음의 몫이다. 그리고 그 마음을 만드는 것이 집중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니?" 사비오 영감은 이렇게 죽 말하고 나서 한숨을 내쉬고는 "물론 쉽게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열심히 해보자꾸나" 하고 말을 맺었다. "모든* 빛깔* 있는* 것들은* 나에게* 시간을* 빌려다오*" 하지만 내가 이 말을 하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사비오 영감이 하면 내가 휘두른 목도를 튕겨낼 수 있을 만큼 강한 벽이 생기는데 말이다. 이거 사비오 영감이 밤마다 빨리 손을 숨직여 내 목도를 막아내는 연습을 한 후에 날 골려주고 있는 거 아니야? "처음에 마법은 자신의 몸에 거는 것으로 시작하는 게 좋다. 그래야 나중에 남에게 어떤 작용을 하게 되는지 알게 되고, 또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니까" 사비오 영감은 이렇게 말하며 '모든 빛깔 있는 것들은 나에게 시간을 빌려 다오'를 다시 반복하는 거였다. 물론 나도 사비오 영감의 말을 수도 없이 따 라했지만 내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오전 내내 사비오 영감이 가르쳐 준 덕분에 점심 시간이 되기 전 나 는 마법의 효과를 조금 볼 수 있었다. 드디어 내 왼손이 붉게 물들어 버린 거 였다. 내 왼 손은 피가 몰려서 나는 색깔이 아니라 피가 뚝뚝 흐르는 것처럼 붉게 빛이 나기 시작했다. "스승님! (마법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나는 사비오 영감을 스승님이라고 불 렀다) 이것 보세요!" 사비오 영감은 내 뒤통수를 한 방 갈겼고 그 덕분에 나는 마법을 배우면서 내 머리에 생긴 첫 번째 혹을 가질 수 있었다. 사비오 영감은 마법을 배우는 내내 양동이의 예를 들어서 내게 마법을 설명 해 주었다. "이건 양동이로 물을 퍼내는 것과 비슷한 이치란다. 네 왼손이 붉게 된 건 올바르게 물을 퍼내지 않아서 손이 물이 젖은 거나 마찬가지야" "그런데 이 손은 언제 정상으로 돌아오나요?" "금방 정상으로 돌아갈 거다. 네 마법이 워낙 약하니까 말이다. 자, 다시 시작해보자꾸나. 모든 빛깔 있는 것들은 나에게 시간을 빌려다오... 어서!" 사비오 영감은 지치지도 않는지 계속 연습하라고 다그쳤다. 사비오 영감의 말투도 주먹만큼 친절하지 않았다. 아마 시비오 영감이 날 세게 때리는 건 내 가 맞기 싫다는 마음이 일어나게 하기 위한 건지도 모르겠다. 점심을 먹고 오후에 다시 연습을 시작했을 때, 나는 처음으로 마법을 성공 할 수 있었다. 그것은 사비오 영감 말처럼 남의 말을 주의 깊게 들었던 일들 이 도움이 되어 주었다. 그 동안 사비오 영감에게 귓속말로 뭔가를 전해주는 동안 내가 익힌 것은 결코 말만을 전해주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집중하여 내 마음을 돌아볼 수 있는 능력이 되어주었고 그게 결국 마법의 말을 내보내 는 방법이 된 것이다. 내가 주문을 외우자 머리가 멍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세상이 낯설게 느껴졌다. "성공이에요 스승님!" 나는 기뻐 소리 질렀다. 그런데, 왜 머리가 축축해지는 거지? "부작용이다" 사비오 영감이 말했다. 나는 사비오 영감의 말을 듣고 천장을 올려다보았 다. 그제서야 난 왜 내 머리가 축축해 지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내 머리 위로 갑자기 구름 한 조각이 날아와 비를 뿌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마법사 생활을 하면서 참 많은 제자들을 키워왔지만, 이런 부작용은 처음 본다. 구름을 부르는 마법은 십 년 이상을 수련해야 겨우 가능한 마법인 데다가 함부로 쓸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도대체 어떻게 했길래 빠르게 움직이 는 마법의 부작용으로 구름이 올 수 있는지, 원..." 구름은 금새 작아지더니 사라져 버렸다. 어이없는 일이었다. 분명 재대로 주문을 외웠다고 생각했는데. "자, 다시 시작해보자. 모든* 빛깔* 있는* 것들은* 나에게* 시간을* 빌려다 오* 어서 해보거라" 사비오 영감의 말은 제자를 걱정하는 스승다운 면이 확실히 있었지만 내 마 음에 썩 들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지겨웠던 것이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사비오 영감이 사과 심부름을 시킨 틈을 타 나는 라이짐 을 한 번 만나봐야 겠다고 생각했다. 자치대 내부로 들어갔던 일과 라스폼을 만났던 일 같은 걸 좀 자랑하고 싶어서 였다. 아니, 그것보다는 어제 위병 근 무자에게 뺨 맞았던 일을 갖고 놀린 것에 대한 분이 아직 안 풀려서 어떻게든 따끔한 맛을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이 앞섰지만 말이다. 별빛 주점 앞을 지나갈 때, 나는 라이짐이 이무르 아주머니에게 호되게 당 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으이구, 이 빌어먹을 자식아! 내가 귀를 씻으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 겠니! 이 때 좀 봐! 때! 너 일부러 반항하는 거냐? 그게 성년이 되는 방법이 라고 생각하는 거야? 해야 할 일도 하지 못하면서 무슨 성년이야, 성년은!" 라이짐은 이무르 아주머니에게 귀를 잡혀 움직이지도 못하는 꼴이 되어 엉 덩이를 걷어 채이고 있었다. 불쌍한 라이짐. 그런데 다음 순간 라이짐은 놀라 우리 만치 빠른 동작으로 몸을 비틀어 이무르 아주머니에게서 벗어난 뒤, 골 목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저런. 귀 씻기가 저렇게도 싫은가. "으이구, 저 망할 자식! 내일 모래 성년이 될 녀석이 저게 무슨 꼴이람. 하 여간 저 자식은 마소드의 칼에 맹세를 한다고 해도 조금도 달라지지 않을 녀 석이야" 아무리 자기 자식이라고 해도 저런 악담을 늘어놓다니 원, 이무르 아주머니 도. 나는 라이짐이 뛰어간 골목길을 따라 들어갔다. 라이짐을 찾는 일은 내 예 리한 추리력 덕분에 간단하게 이루어 질 수 있었다. 라이짐이 갈만한 곳은 그 잘난 '본부'밖에는 없을 테니까 말이다. "라이짐!" "그래. 무슨 일이야" 라이짐은 패거리도 없이 혼자 산적단 본부에 앉아 바닥에 뭔가를 그리고 있 었다. "네 엉덩이가 걱정이 되서 왔지. 음. 자세히 보니 귀 뒤를 씻은 지 일 년은 된 것 같은데..." "어제 위병에게 끌려가 따귀를 맞지 않았더니 힘이 나는 모양이지" 내 말에 라이짐이 발끈해서 대답했다. 나는 뭔가 라이짐을 놀려줄 말을 생 각하고 있는데 라이짐이 말을 할 틈을 주지 않고 갑자기 물어왔다. "그 미인 성직자하고는 무슨 관계야?" 이런. 라이짐이 탐그루 최고의 소식통이라는 걸 잊었군. 나는 하루 전에 있 었던 일들을 자세하고 세세하게, 물론 내가 자랑할 만한 부분은 과장되게, 부 끄러운 부분은 대충대충 넘어가며 라이짐에게 말해주었다. "마법을 배우고 있다...이건가. 하나 보여줄래?" "마법은 함부로 쓰는 게 아니야" 나는 나도 모르게 왼 손을 뒤로 감추며 말했다. 물론 만약 손이 붉어진다고 해도 그게 오래 가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마법사에 대해서는 들어 본 적이 있어. 네가 말하는 것처럼 자세한 얘기는 아니지만 말이야" 라이짐은 이렇게 말하더니 다시 세상을 온통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기분 나쁜 미소였다. "마법사는 그렇게 많지는 않은 모양이야. 거기다 대부분 도시 단위에 한 두 명 씩 있어서 다른 도시로 여행을 떠나는 경우는 거의 없는 모양이고. 대게 귀족들의 일급 장군 대우를 받으면서 성안에 살고 있다고 하더라구" "...그렇다면 사비오 영감은 자나크성 안에 있지 않고 여기서 뭘하고 있는 거지?" "글쎄. 죄인일 수도 있겠지. 아니면 앉은뱅이가 된 사연하고 맞물리는 게 있을지도 모르고. 뭐, 어찌되었건 라스폼이 다시 오면 어떻게 하려는 생각인 지 모르겠네" "그건 나도 잘 몰라. 하지만 그때까지 내게 마법을 가르쳐줄 생각은 있는가 봐" "어찌되었건 네가 마법사라는 건 믿지 못하겠어. 말로 마법을 부릴 수 있다 며? 아마 네가 마법사라면 우리 엄마가 매일 같이 내게 하는 잔소리로 불 뿜 는 용을 불러 올 수 있을지 모르지" 라이짐은 농담으로 한 소리였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이무르 아주머니 의 말에 마법의 말이 섞여있을지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비오 영감도 보 통의 평범한 말에서 마법의 말을 찾아내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나도 하지 못 할 이유가 없지, 뭐. "잠깐만 있어봐" 나는 정신을 집중하고 마음을 움직여 이무르 아주머니의 말로 마법의 말을 만들어 보았다. "해야 할 일이 먼저고 그 다음이 알 수 있는 일이다" 물론 나는 진지하게 말했지만 라이짐은 내 주문이 놀리는 말인 줄 알고 내 게 달려들었다. 덕분에 마법이 만들어지기도 전에 나는 라이짐에게 멱살을 잡 혀 바닥에 쓰러지는 신세가 되었다. "알았어. 알았어. 항복" 내가 말했다. "마소드의 날이 얼마 남지 않아서 살려두는 줄 알아" 고맙군, 고마워. 나는 라이짐과 잡담을 조금 더 나눈 뒤 사과를 사 가지고 예언의 눈동자로, 아니 사비오 영감의 마법 학교로 돌아왔다. "좋지 않은 소식이다" 사비오 영감이 말했다. "내일 라스폼이 오겠다는구나. 각오가 단단한 모양이야. 날 설득시키지 못 하면 강제로라도 뺐어 갈 기세야" 바로 내일? 성년의 날을 며칠 앞두고 죽는 불상사가 생길지도 모르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런데 그건 어떻게 아세요?" "라스폼은 네 이름이 수르카인걸 어떻게 알았겠느냐. 원래 마법의 세계를 아는 사람들은 아무리 먼 곳에 떨어져 있어도 그 뜻을 통할 수 있는 법이란 다" 밖에 나가서 이런 소리를 했다간 당장 거짓말쟁이로 몰릴 게 분명하다. 운 하에 떠다니는 화물선으로 타실에서 스파일까지 물건을 사고 파는 세상에 이 런 말을 믿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수르카야. 넌 라스폼을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 사비오 영감이 물었다. "그야 예쁜 성직자라고 생각하지요" 거기다가 무시무시한 목소리로 사람을 얼어붙게 만드는 재주도 있구요. "예쁘다고! 하하하!" 사비오 영감은 갑자기 턱을 젖히고 웃었다. 뭐가 그렇게 우스운 걸까. "그래.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지. 수르카. 사람의 아름다움은 한 꺼풀 벗기 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만 잊지 말거라" 그러더니 사비오 영감은 내게 반지를 하나 주었다. 몇 년을 묵었는지 흠집 이 지독하게 많은 반지였다. 뭐라고 씌여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그림인지 글 씨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글을 읽을 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이건 내가 전혀 모르는 문자였다. "내일까지 네가 내 제자 흉내라도 내려면 이게 필요할 거다" "이게 뭔가요?" "마법구(魔法具)라고 해두자. 내가 마법사의 마법 중 기초적인 마법 몇 개 는 성구와 같은 힘을 발휘하는 마구(魔具)로도 발생시킬 수 있다는 말을 한 게 기억 나느냐?" "와! 그럼 이걸로 마법을 부릴 수 있다는 말인가요?" 나는 서둘러 반지를 손가락에 끼운 뒤 말했다. "반지를 만지면서 '내* 마음의* 문을* 여니* 길을* 인도해* 다오*'라고 해 봐라" 나는 사비오 영감의 말을 따라했다. 물론 최대 한도로 사비오 영감을 흉내 내면서. 그러자 눈앞이 흐려졌다. 그래서 나는 눈을 비볐다. 그러자 차츰 흐 릿한 뭔가가 형체를 찾아갔다. 그리고 그 형체는...희고 긴 옷(이라고 해야할 지 얇은 이불이라고 해야할지는 잘 모르겠지만)을 입은 여인의 형상으로 바뀌 어 갔다. 음. 이건 분명히 눈을 비벼서 보이는 건 아닌 거 같군. "저를 부르신 분은 누구십니까" 나는 놀라 뒤로 물러서다가 뒤로 자빠지고 말았다. 라이짐 녀석이 봤다면 지독하게 놀려댔겠지만 그 녀석도 바로 눈앞에 저런 이상한 게 나타난다면 뒤 로 자빠지지 않을 수 없었을 걸. "이름을 말해줘라" 사비오 영감이 말했다. 젠장. 재미있는 모양이로군. 나는 일어나 먼지를 털 어 낸 뒤 조심스럽게, 하지만 최대한 위엄을 갖추면서 말했다. "나는 수르카다. 넌 누구냐" 솔직히 그 형체의 다리를 본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귀신은 다리가 없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형체는 다리를 가지고 있 었다. "저는 반지의 종, 아자닌이라고 합니다" 아자닌. 예쁜 이름이로군. 하지만 아자닌은 얼굴은 알아보기 힘들만큼 흐릿 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자닌의 모습이 분명하지 않구나. 네가 분명하게 마음을 집중해서 아자닌 을 부르지 않아서야. 뭐, 하지만 불러낸 것만으로도 용하긴 하구나" "사비오 님이시군요. 수르카 님은 사비오 님의 제자인가요" "그래. 지금까지 키워본 제자 중 가장 형편없는 녀석이야" 아니, 무슨 말씀을 그렇게는 섭섭하게 하십니까. 딱 하루 가르쳐주셔 놓고 는 너무하시는구만. 하지만 뒤통수를 얻어맞을 게 겁나서 나는 아무 말도 하 지 않았다. "수르카야. 이 친구가 내일 라스폼이 찾아 왔을 때 네가 엉터리 마법이라도 쓸 수 있도록 도와 줄 거다" 나는 멍청한 표정을 짓고(꼭 연금술사의 집에서 빛을 구경하고 있는 꼬마처 럼) 아자닌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아자닌이 뭘 도와 줄 수 있나요?" "물어보면 될 거 아니냐. 그럼 이만 네 방으로 가거라" 사비오는 이렇게 말하고는 명상하는 자세를 취했다. 사비오 영감이 명상에 잠길 때는 어떤 말을 해도 소용이 없지. 나는 내 방으로 걸어갔다. 아자닌도 나를 따라왔다(고 밖에 할 수 없을 것 같다. 아자닌은 땅을 미끄러지듯 움직 였을 뿐 걸음을 옮기지는 않았다). "아자닌. 네가 할 수 있는 게 뭐냐?" "주인님이 알고 계시는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도와 드립니다" "지금 당장 도와줄 수 있는 건?" "모든* 빛깔* 있는* 것들은* 나에게* 시간을* 빌려* 다오* 라는 말을 쓸 수 있게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그래 도와 줘 봐. 모든* 빛깔* 있는* 것들은* 나에게* 시간을* 빌려* 다오 *" 나는 잔뜩 기대를 하고 말했지만 마법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오후에 했던 것처럼 조그마한 구름이 몰려와 내 머리에 비를 쏟고는 사라진 것이 전 부였다. "이게 뭐야?" "아마도 수르카 님이 말씀하시는 중에 구름을 부르는 마음이 섞여 있어서 그렇다고 생각됩니다. 집중하시고 다시 해 보세요" 그리고 나는 잠 잘 시간이 훨씬 넘어서까지 구름이 나타나는 말의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이건 순전히 아자닌의 말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나는 무슨 말인지 아직 전혀 모르겠다). 물론 아자닌은 계속 다시 해 보라는 말만 해댈 뿐 아무런 도움이 되어 주지 못했고. 뒤통수만 얻어맞지 않는다 뿐이지 이건 완전히 사비오 영감 복제판이었다. 속옷까지 다 젖어 버릴 만큼 구름이 내 머리위로 날아들 때쯤 되자 나는 지 쳐 녹초가 되어버렸다. "널 도로 들어가게 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지?" "그건 일러 드릴 수 있어요. 다음에* 또* 보자* 아자닌* 하시면 됩니다" 나는 이 말을 연습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더 보내야 할까 생각해 보 았다. 그러다가 용기를 내어 말을 한다는 것이 '잘 자, 아자닌'하고 말았다. 사비오 영감 같았으면 뒤통수를 갈겼겠지. "안녕히 주무세요, 수르카 님" 어랍쇼? 이건 또 뭐야? 아자닌은 그냥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내* 마음의* 문을* 여니* 길을* 인도해* 다오* 어서 나와 아자닌!" 내가 말하자 아자닌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내 앞에 나타났다. "부르셨습니까, 주인님" "왜 제대로 된 주문을 외우지 않았는데 사라졌지?" "나타나게 하는 데에는 마법의 말이 필요하지만 사라지게 할 때는 그냥 평 범한 말로도 됩니다" 아자닌이 말했고 나는 어쩐지 놀림 받은 것 같아서 소리를 질렀다. "꺼져!" 그리고 나는 투덜거리며 잠이 들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N:김상현 #8763/10199 ━━━━━━━━━━━━━━━━━━━━━━━━━━━━━━━━━━━━━━━━ 제 목:[탐그루] 성황청과 마칸의 강림 - 14 - 관련자료:없음 20/20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0-26 06:02 조회:1141 탐그루 # 마법은 마음이다 - 마음은 칼이다 # 또 다시 꿈을 꾸었다. 이번에는 라스폼이 아니라 사비오 영감이 내 뒤를 좇고 있었다. 이번에도 나는 도망치려고 했지만 발바닥이 땅에 붙었는지 역시 한 걸음도 뗄 수가 없었다. 사비오 영감도 은빛의 긴 장검을 들고 있었다. 검. 장검의 손잡이에는 불을 뿜는 붉은 용의 형상이 장식되어 있는 바로 그 검 말이다. 그리고 사비오 영감이 내게 다가와 칼을 휘둘렀을 때, 나는 지난 번 꿈과 마찬가지로 소리를 지르며 꿈에서 깨고 말았다. 아버지! 이건 또 무슨 꿈일까. 그 빌어먹을 장검이 도대체 뭔데 자꾸 나타는 거지. 이런 저런 생각을 더 하기도 전에 나는 침대 밑에 숨겨두었던 목도를 들고 밖 으로 뛰어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사비오 영감의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 다. "수르카! 손님이 왔다" 라스폼이다. 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목도를 잡고있는 오른 손이 떨려왔다. 지금까지 어떤 누구와 싸웠을 때도 이보다 더 떨리지는 않았다. 그 무시무시 한 개를 부리는 좀비도 예외는 아니다. 그 성구가 과연 어떤 마술을 부릴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겁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내 방 밖으로 나갔을 때, 나는 사비오 영감이 라스폼과 대치하고 있는 모습 을 볼 수 있었다. "어제 왔을 때는 옛 정을 생각해서 그냥 물러갔습니다만, 오늘은 그냥 갈 수 없겠습니다. 여기서 선생님의 마법을 가지고 자나크 교구의 원로 회의에 가서 보고를 드려야 하거든요. 지체할 시간이 어제보다 적은 게 아쉽군요" 라스폼이 말했다. 그리고는 품안에서 붉은 구슬이 달린 지팡이를 꺼냈다. 전과는 다른 지팡이였다. 뭔가 무시무시한 기술을 쓰는 지팡이임이 분명했다. "도대체 나에게서 마법을 가져가 뭘 하려는 거냐?" 사비오 영감이 물었다.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선생님. 이제는 신앙의 시대입니다. 신앙의 힘이 이 혼탁한 세상을 바꾸게 될 것입니다. 모르시겠습니까? 이젠 비스토브레 제국의 황제도 성황(聖皇)과 성황청에게 함부로 할 수 없습니다. 마칸이 다시 이 세 상에 나타라려고 하고 있는 이때 세상 사람들이 믿고 의지해야 할 것은 성황 청 뿐입니다. 타실의 군대도 스파일의 군대도 마칸의 부활을 막을 수 없습니 다. 이제 마칸 족이 다시 부활한다면 예전의 대 마법사 아킨 정도의 힘을 가 지고서도 어림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황청의 힘은 더욱 커져야 합니다. 이럴 때 선생님의 마법이 얼마나 큰 도움이 될 수 있는지 모르시겠습 니까?" "네 말은 이젠 성황청의 권세가 높으니 무조건 그 뜻에 따르라는 거로구나. 하지만 나는 그런 거 잘 모른다. 내가 마법을 배웠던 것은 내가 그것을 할 수 있기 때문이었지 다른 뜻은 없었다. 물론 너도, 또 너를 따라 나를 떠났던 제 자들도 그랬다고 생각했었지... 불을 생각해보거라. 불을 만든 자가 불을 만 드는 법으로 힘을 키워 불을 만들지 못하는 자들을 다스렸더냐? 아니면 불을 만들어 비싼 값에 팔았더냐? 내가 너를 가르칠 때 했던 말들을 기억하느냐? 마법은 수단이 아니다. 그 자체가 목적이다. 마법을 닦는 것은 마음을 닦는 것이야. 그렇게 닦인 마음이 결국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이다. 마법, 그 자체 만으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어. 최종전쟁 이전의 세계에 대해선 너도 들어서 알겠지. 그 시대의 인 간들 또한 그 시대의 마법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어떻게 됐느냐? 기 형적으로 발전한 마법이 결국 그들을 최종전쟁으로 몰고 가지 않았느냐" "그래서 시대가 변했다고 말씀 드리는 것 아닙니까. 최종전쟁 때 우리 성황 청도 신의 이름을 잃어버렸습니다. 그후 천 년이 다 돼가는 지금까지도 우리 는 우리가 잃어버린 신의 이름을 되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칸의 부활을 막 고, 바르도 대륙 어딘가에 있을 신의 이름을 되찾을 때만이 이 세계를 지상 천국으로 되돌릴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제 사명은 성황 님께서 흩어져있는 모든 마법의 말을 소유할 수 있도록 도 와드리는 것이고 지금 저는 그 사명에 충실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생님. 저도 이런 방법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시간이 없습니다. 마칸 족이 언제 강림할 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입니다" "마칸 족이 부활하는 것과 성황의 힘이 더욱 커져야 한다는 것은 아무 상관 이 없다" "선생님. 고집은 이제 그만 부리시지요. 선생님 말고도 마법의 말을 간직하 고 있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습니다. 또 저 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제들이 이 일에 투입되어 있습니다. 선생님. 이젠 성황청의 시대입니다. 누 구도 시대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네가 너 하고 싶은 데로 하겠다면 나도 나 하고 싶은 데로 하겠다. 게다가 말이다...내 예언의 목소리는 이 시대가 성황이 바 라는 곳으로 흘러가지는 않을 거라고 하는구나" "선생님!" 라스폼이 소리쳤다. "그건 불경입니다" 그리고는 지팡이를 들어 뭐라고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수르카!" 사비오 영감이 외쳤다. 나도 목도를 바로 쥐고 주문을 외웠다. "모든* 빛깔* 있는* 것들은* 나에게* 시간을* 빌려다오*" 하지만 내가 조금 늦었다. 라스폼의 마법이 먼저 시작 된 것이다. 나는 지 팡이의 붉은 구슬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에 뒤로 물러섰다. 그 기운은...너 무나 뜨거웠다. 불이다! 내 머리카락에 불이 붙은 것이다. 이걸 어쩌지. 그러 나 다음 순간 머리 위로 구름이 몰려와 비를 뿌려주었다. 이런. 엉터리 주문 이 효과를 발휘할 줄이야. 어찌되었건 화상을 입는 것은 면했군. 라스폼은 놀 라는 눈치였다. 설마 구름을 불러올 줄은 도저히 몰랐을 것이다. 나는 불이 꺼지자마자 라스폼에게 달려들어 목도로 지팡이를 쳐 날렸다. 지팡이는 땅에 떨어졌다. "이 사비오의 제자를 우습게 보다니... 오늘 시간이 어제보다 적은 게 아쉽 겠구나" 사비오 영감이 중얼거렸다. 다음 순간이었다. 라스폼의 몸이 커졌다...고 느껴졌다. 커진 것은 아니었 다. 다만 얼굴이 갑자기 쭈글쭈글해지더니 노파로 변한 것이었다. "본 모습으로 돌아온 것은 오래간 만이군요" 목소리도 노파 그 자체였다. 욱! 역겨워. 나는 그제서야 지난 밤 사비오 영 감이 예쁘다는 말에 턱을 젖히고 웃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노을이* 지면* 밤이* 오는* 것은* 당연한* 이치* ......" 라스폼은 뭔가 주문을 외우려고 했다. 하지만 그걸 가만히 보고 있을 내가 아니다. 나는 아무런 마법도 걸지 않고 노파가 되어버린 라스폼의 어깨를 목 도로 내리쳤다. 늙은이를 친 건 처음이지만...어쩔 수 없었다. 라스폼은 주문 을 다 외우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끝난 건가요?" 나는 성구를 더러운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손끝으로 집어 사비오 영감 쪽으 로 던져버린 뒤에 말했다. "그런 것 같구나" 그러나 끝이 아니었다. 라스폼은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어느새 이전의 젊은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제자를 마검사로 키우고 계신지는 몰랐군요. 좋습니다. 말씀 드린 대로 시 간이 없군요. 오늘은 돌아가겠습니다." 라스폼은 지팡이를 회수할 생각도 하지 않고 돌아섰다. "다음 번에는 기사도 한 명 동행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지루한 싸움을 더 이상 계속하진 않겠습니다. 지금까진 선생님에 대한 예의였습니다. 성황 님의 뜻을 따르시는 게 좋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음을 예고하는 말을 남기는 것도 잊지 않는 라스폼이었다. "다음 번에는 힘들겠구나. 적어도 네 머리에 불을 붙이는 정도로 끝날 것 같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다" 라스폼이 돌아가자 사비오 영감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다음 번에는 무슨 주문을 준비해야 할까요?" 목도를 내리고 내가 말했다. 내 머리에서는 아직도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 었다. 성년식 바로 전날까지는 머리를 자르고 싶은 마음이 없었는데. 잘못하 다간 연금술사 바코쿠처럼 보일지도 모르겠군. "글쎄다. 아마도 성년의 신 마소드가 너를 인도해 주겠지" 점심 식사를 마지고, 손을 대면 까칠까칠한 느낌이 들만큼 머리가 짧아진 나에게 사비오 영감이 말했다. "원래 인간은 칼을 그다지 좋아하는 종족이 아니었단다. 살아가는데 마법의 힘이면 충분했던 시절이 있었으니까 말이다. 마칸 족이 괴물들을 불러와 부리 기 시작하면서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인간음 칼을 들지 않고서는 마칸 족의 괴물들과 싸울 수가 없었던 거야" "국경 넘어 바바 족도 괴물을 부린다고 하던 데요" "그런 소문은 나도 들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랴. 어차피 인간의 칼 은 발달할 만큼 발달했는데 말이다. 바바 족은 오히려 인간을 두려워 할 것이 다. 칼을 쓰기 시작한 이후로 칼의 발전과 더불어 인간의 마음 또한 칼과 같 아졌지. 바바 족이 정말 두려워 하는 것은 피도 눈물도 없는 칼과 같은 인간 의 마음이다. 그들은 인간 족에게서 살아남기 위해 괴물을 부리는 거야" 사비오 영감이 말했다. "어쨌건 대마법사 아킨이 땅 끝에 마칸 족을 가두고 봉인을 한 후, 인간들 은 칼을 버릴 수가 없게 되었지. 봉인은 말 그대로 잠시 막아둔 것에 불과하 기 때문이야. 어떤 봉인이든 풀리기 마련이야. 어쩌면 인간들 스스로 그 봉인 을 풀게 될지도 모르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슨짓이든 할 수 있는 게 인간이니까. 결국 인간은 마칸을 빌미로 칼을 버리지 않고 있는 거야. 이젠 성황청도 마칸을 빌미로 마법을 변질시키려 하는구나. 아마도 타실과 스파일 의 삼 년 전쟁은 바르도 대륙의 미래를 결정 짓게 될 운명적인 흐름의 예고 편이었던 같구나." "하지만 모든 게 마칸 족 때문이라고는 할 수는 없을 것 같은데요. 어쟀든 칼도 잘 쓰면 사람을 지키고 정의를 수호해 주잖아요" 나는 위대한 복수자 검객 아케르를 떠올리면서 말했다. "그건 거짓말이다. 칼은 일단 대장간에서 태어나면 그 순간부터 무언가를 베기 위해 존재하기 마련이다. 누군가의 죽음은 누군가의 피를 부르게 되고 그 피는 또다시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을 죽이기 마련이지. 역사가 그걸 말해주 지 않느냐?" 하여간 자기 뜻에 맞게 말 갔다 붙이는 건 잘한다니까. 나는 별로 수긍이 가질 않았지만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의 칼은 원래 모두 검이었다" 나는 꿈속에서 보았던 양날의 장검이 떠올랐다. "검은 마법의 속성을 지니고 있지. 그래서 장군들과 귀족들이 검을 가지고 다니는 것이다. 그리고 성년식 행사 때 검에 맹세를 하는 것도 거기에서 유래 하는 것이고...지금에 와서 마법이 걸려있는 칼은 얼마 없겠지만 말이다. 수 르카야" 사비오 영감은 나를 바라보았다. "마법의 말을 너에게 충분히 전해주고 싶지만 이제 나에게는 시간이 없구 나" "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나는 놀라 사비오 영감에게 물었다. "라스폼이 다시 오기 전에 나는 떠나겠다" 설마 앉은뱅이 몸으로... "설마 그 몸으로 움직이시겠다는 건 아니시죠?" "수르카야. 너는 아직도 내가 앉은뱅이에 귀머거리라고 생각하는 거냐?"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라스폼이 성황청 소속의 검사를 데리고 온다면 승부는 뻔하다. 아까 위기 는 어떻게 넘겼지만 만에 하나 너와 내가 그들을 이긴다고 해도 탐그루에서 살아서 도망갈 가능성은 없다" 그건 그랬다. 아무리 내가 목도를 잘 휘두른다고 해도 탐그루 자치대원 모 두와 싸워서 이길 수는 없는 일이다. 사비오 영감은 말을 계속 이었다. "그 반지는 내 스승에게 물려받은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마법은 그 반지 도 다 알고 있지. 내가 떠나고 나면 그 반지가 너의 스승이 되어 줄 게다. 그 리고...내 예언을 하나 남기마. 너와 나는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어떤 모습 으로 다시 만난다 하더라도 너는 나를 믿어야 한다. 나를 믿지 못하게 되거든 나와 함께 보낸 시간들을 떠올리거라. 그래도 믿지 못하겠거든 너의 뜻대로 하거라. 가장 중요한 건 너의 마음이다. 마음에게 물어보고 또 물어봐서 해답 을 찾거든 주저하지 말고 행동하도록 해라" 사비오 영감은 이렇게 말하고는 명상에 잠겨 버렸다. 나는 내 방으로 돌아와 주문을 외웠다. "구름이* 해를* 가리는* 것은* 찬바람을* 일으키기* 위해서다*" "부르셨습니까, 수르카 님" 아자닌이 나타나 말했다. 여전히 또렷하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래.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어. 도와줄 수 있어?" "문제가 무엇입니까" "사비오 영감, 아니 선생님은 여길 떠나시겠데. 여기서 난 뭘 하면 좋지" "인간사의 일은 인간에게 묻는 편이 나을 겁니다. 저는 본래 반지의 정령인 지라 그런 일은 잘 모르거든요" 아자닌이 말했다. "그래. 너야...그렇겠지" 나는 이렇게 말하고 잠시 생각을 해 보았다. 사비오 영감은 자신의 길을 갈 것이다. 라이짐도 성년식이 끝나면 어디론가 떠나가 버릴 것이다. 그렇다면 나도 내 갈 길을 가야 하는 게 아닐까. 모르겠 다. 나는 라이짐을 만나서 그냥 이런 저런 얘기나 할까 하고 예언의 눈동자를 나섰다. .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N:김상현 #8764/10199 ━━━━━━━━━━━━━━━━━━━━━━━━━━━━━━━━━━━━━━━━ 제 목:[탐그루] 성황청과 마칸의 강림 - 15 - 관련자료:없음 20/20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0-26 06:03 조회:1159 탐그루 # 마법은 마음이다 - 마음은 칼이다 # 간판마저 치워버린 예언의 눈동자는 전보다 더욱 초라해 보였다. 오래 되어 제 빛깔을 잃어 버린 발은 바람결에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흔들리고 있 었다. 내가 들어가자 사비오 영감은 점심을 먹자고 했다. 나는 삶은 감자를 가지고 왔다. 식사시간 내내 사비오 영감은 아무 말이 없었다. 사비오 영감도 내 기분을 알까? "수르카야. 너는 성년식이 끝나면 뭘 할 작정이냐" 식사가 끝나자 사비오 영감이 말했다. "아직은..." "여기에 남아있는 다면 라스폼이 다시 찾아올 때 널 가만두지 않을 게다. 그리고 너를 인질로 삼아서 나를 협박하겠지" "예..." 떠날 수밖에는 없다는 말이군. "수르카야. 너무 상심하지 말거라. 세상은 넓단다" 사비오 영감이 말했다. 역시 내 생각을 읽고 있는 모양이로구나. 나는 잠자 코 사비오 영감의 말을 계속 듣기로 마음먹었다. "이곳 탐그루는 좁은 세계다. 네가 만나보지 못한 세상이 탐그루밖에는 얼 마든지 있다. 칼의 세계도, 마법의 세계도, 타실과 스파일의 세계도, 또 네가 알고 있는 그 어떤 지식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세계도 얼마든지 있단다. 네가 성년이 되면 너는 네 행동에 많은 자유를 얻을 수 있을 게다. 그러나 자유는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라고 했다. 앞으로 세상에 나가면 누군가 자신 의 자유를 위해 너의 자유를 요구할 것이다. 너는 너의 자유를 얻고 지키기 위해 피의 댓가를 지불해야 할지도 모른다. 또는 더 큰 자유를 위해 현재의 자유를 너 스스로 버려야 하게 될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 잊지 말거라 자유는 저절로 주어지는 게 결고 아니라는 것을. 성년이 된다 는 것은 결코 성년의 신 마소드의 축복만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자신의 힘으로 자기 자신에게 축복을 내리는 순간을 맞아야 비로소 성년이 되는 것이 다" 사비오 영감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이었다. "세상은 냉혹한 곳이다. 라스폼이 무서운 사람이라는 것은 봐서 알고 있겠 지만 세상에는 라스폼보다 더한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지. 그곳으로 떠나는 네 길은 결코 평탄하지만은 않을 것이다...나는 보인다. 네가 겪을 미래가. 칼과 피와 죽음과 슬픔과 고난이 있는 너의 미래. 그러나 그 모든 운명의 폭풍이 지나고 그 끝에는..." 사비오 영감은 나를 바라보았다. 이제껏 보지 못했던 진지한 눈빛이었다. "수르카 네가 서 있구나" 사비오 영감이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무슨 소린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내가 말을 듣고 있다는 의사 표시는 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 이다). "이곳을 떠나거라. 그리고 그 세계와 맞닥뜨리거라. 그게 네 운명이다. 운 명이라는 말을 아느냐?" 사비오 영감이 물었다. 하지만 대답은 필요 없을 것 같았다. "운명은 고양이처럼 소리없이 다가와 어느 순간 호랑이처럼 포효한단다. 그 천둥치는 울부짖음 속에서 비로소 운명이 닥쳐왔음을 알 수 있게 되지. 네 운 명은 이제 코 앞까지 다가왔단다. 그리고 그 운명을 결정짓는 순간이 오면... 너는 알 수 있을 게다" 사비오 영감이 말했다. 젠장. 내가 비굴한 꼴로 살아 돌아오는 것도 운명이 었다는 말인가? 나는 사비오 영감의 말이 통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무리 진 지한 눈빛으로 나를 봐도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마법과 검...그것이 네 운명..." 사비오 영감은 혼잣말처럼 이렇게 중얼거렸다. 나는 가만히 사비오 영감을 바라보기만 했다. 이윽고 사비오 영감이 다시 말을 이었다. "바코쿠의 연금술사의 집으로 가서 여행자용 흰 등을 두 개 사오너라" 이제 사비오 영감은 떠날 준비를 하는 거로구나... 나는 좀 쓸쓸한 기분으 로 예언의 눈동자를 나섰다. 늘 보던 상점들과 거리였지만 모든 게 어딘지 낯설게 느껴지고 있었다. 나 도 이제 곧 이곳을 떠나겠구나. 엉터리 곰 가죽을 파는 상인들도, 먼 바닷가 에서 나온다는 보석들을 파는 상점도 이제는 볼 수 없게 되겠구나. 활기찬 탐 그루는 이제 나와의 작별을 준비하고 있는 듯 했다. 연금술사의 집은 언제나처럼 아이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야말로 신기해하 는 저 눈동자들도 곧 성년이 되겠지. 어라라? 이거 왜 이렇게 당연한 소리를 자꾸 하고 있는 걸까? "수르카로구나. 사비오 님 심부름 왔니?" 앗! 눈부셔! 연금술사 바코쿠였다. 아침마다 기름을 바르는 걸까? 어쩌면 머리가 저렇게 빛날 수 있지? "예. 여행자용 흰 등 두개를 사오라고 하셨어요" 내가 말했다. 바코쿠는 조금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상점 안 쪽으로 들 어가 흰 등을 두 개 가지고 나왔다. "...떠나시려는 모양이구나"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비밀로 해야 하는 것인지 아닌지 판단이 서 질 않아서였다. "사비오 님과 나는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거, 알고 있니?" 흰 등을 내어주며 바코쿠가 말했다. 역시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비슷하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사비오 영감도 이제 곧 대머리가 된다는 말인 가? "사비오 님은 나를 잘 모르지만, 나는 사비오 님을 잘 알지" 바코쿠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심장이 얼어붙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당장 이라도 어디선가 라스폼이 나타날 것 같았다. 목도를 가지고 오는 건데. "떠나시리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어. 다만 그 때가 문제였을 뿐이지. 너도 같이 가겠지?" 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이 정도쯤은 알려줘도 상관없을 듯 싶었다. 바코 쿠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의 대머리에 붉은 색 등이 비춰져 술 취한 사람처 럼 붉게 빛이 났다. "그래. 그렇다면 나하고는 다시 한 번 만날 수 있겠구나" 바코쿠는 이렇게 말하고는 내게서 은화 서른 닢을 가져갔다. 말은 그럴싸하 게 해도 계산만큼은 철저한 걸 보니 역시 탐그루 시민답군. 나는 생각하면서 연금술사의 집을 빠져 나왔다. 예언의 눈동자로 돌아와 사비오 영감에게 여행자용 흰 등을 두 개 건네주 자, 사비오 영감은 등을 이리 저리 살펴보았다. "바코쿠는 잘 있더냐?" 사비오 영감이 말했다. "예" "그 친구, 재능 있는 친구지. 아마 연금술사치고 그만한 사람은 없을 게야. 보기에는 단순 무식해 보여도 그 친구의 연금술 재능은 타고 났지. 사람들은 사람들의 겉만 보기를 좋아하니 잘 모를게다" 사비오 영감은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그래서요?" "네가 아무 얘기 없는 것 보니 흰 등을 가져오는 동안 별 다른 일이 없었나 보구나. 그럼 바코쿠에게 다시 한 번 가 주겠니? 가선 내가 안부를 묻더라고, 그리고 붉은 등을 기억하느냐고 물어봐 다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비오 영감이 똑 같은 일을 두 번 시켜도 뭔지 모 를 진지한 분위기 때문에 짜증도 낼 수 없었다. 이러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 을 것 같았다. "오는 길에 사과라도 한 봉지 사 올까요?" "아니. 일전에 사 놓은 사과가 그대로 있단다" 그러고 보니 사비오 영감 옆에 사과 봉지가 하나 놓여져 있었다. 나는 다시 상점들을 지나 연금술사의 집으로 갔다. "...그래서 안부를 묻고 붉은 등을 기억하느냐고 물어보라고 하셨어요" 내가 바코쿠에게 말했다. 바코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암. 기억하지. 붉은 등" 그리고는 얘기를 하나 시작하였다. "사비오 님은 한때 타실에서 큰 마법 학교를 운영하신 적이 있단다. 그런데 성황청 타실 대교구에서 마법사들을 모으기 시작하면서 그만 두셨지. 아마 그 때 제자들도 대부분 성황청으로 들어갔을 거야. 사비오 님은 성황청의 제의를 거부하고 떠돌이 신세로 여기 저기를 떠돌다가 이곳으로 오신 거고. 내가 아 는 건 그 정도다. 하지만 붉은 등이라면 좀 다르지. 그건 말이다..." 바코쿠는 여기까지 말하고는 헛기침을 한 번 하고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사비오 님이 처음 탐그루에 왔을 때 일이다. 사비오 님은 금화 열 두닢을 들고 내게 와서는 이곳에 작은 예언자의 집을 차리고 싶은데 도와주겠느냐고 물었지. 나는 물론 그렇게 하겠다고 했고. 자랑은 아니지만 말이다...나는 마 법사를 볼 줄 아는 눈이 있거든. 그래서 오늘의 예언의 눈동자가 생기게 된 거란다. 자. 그럼 잠깐 따라오겠니?" 바코쿠는 이렇게 말하고는 나를 연금술사의 집 지하 창고로 안내했다. "어두우니까 조심해라" 바코쿠는 여행자용 흰 등을 켜고 이렇게 말했다. 불을 켜는 방법은 간단했 다. 등 밑에 달려 있는 조그마한 손잡이를 돌리자 천천히 흰빛이 들어왔다. "복잡하게 원리를 다 설명해 줄 수는 없지만... 하여간 이걸 돌려서 관을 열면 어떤 물질이 이 유리구 안으로 흘러 들어가 원래 유리구 안에 있던 것과 섞여 빛이 난다고 해두자. 이걸 돌려서 잠그면 불은 꺼지지. 보통 일 년은 빛 을 낼 수 있단다. 밤에만 사용한다면 말이지" 바코쿠가 말했다. 역시 탐그루의 상인다운 말이었다. 여행자용 등은 수명이 다해서 새것을 사는 것 보다 유리구가 깨져서 새것을 사는 경우가 더 많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일이라구요. 지하 창고는 진기한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용도를 알 수 없는 유리병들과 색색의 가루가 들어있는 종이 상자들이 여기 저기 거미줄과 먼지를 뒤집어쓴 모습으로 방치되어 있었다. 나는 신기한 듯 불빛을 바라보는 어린아이처럼 그 것들을 바라보았다. 어린아이도 아닌 내가. 이런. "자 이리로 오너라. 이게 그 붉은 등이란다" 바코쿠가 말하면서 여행자용 등을 비추어주었다. 빛을 받은 곳에는 붉은 등 이 그려진 상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이 상자는 사비오 님이 이곳에 도착하신 날 내게 맡기신 여러 물건들이 담 겨 있단다. 뭐가 이 안에 있는지는 나도 모른다. 다만 내게 금화 한 닢을 주 시면서 이렇게 말했다는 것만 알지. '내가 떠나는 날 가지러 오겠네. 그때까 지 맡아주게'하고 말이다" 사비오 영감은 시하라하고 바코쿠에게 이렇게 떠날 때를 대비해서 금화와 물건들을 준비해 놓은 모양이었다 "이 상자를 가지고 가야 하나요?" 무거워 보이는 상자를 바라보며 내가 말했다. 꽤 무겁겠는데. "아니" 바코쿠가 대답했다. "여기서 열어 보고, 물건을 확인 한 다음에 물건들을 가지고 가야 해. 그때 사비오 님이 그렇게 말씀하셨거든" 대답을 하는 바코쿠의 왼 손에는 장도리가 하나 들려 있었다. 여행자용 흰 등의 빛을 받은 바코쿠의 머리 덕분에 지하실은 두 배로 밝아졌는지 몰라도, 장도리를 들고 있는 바코쿠의 모습은 괴기스러운 데가 있었다. 이거 좀 으시 시한 걸. 나는 장도리를 받아 들고 상자를 열기 위해 이리 힘을 주고 저리 힘 을 주어 보았다. 잘 안 열리는 데. 얼마나 지났을까. 하여간 나는 등짝에 땀 이 밸 즈음해서야 상자를 열 수가 있었다. 상자 안에는 여행에 필요한 몇 가지 물건들이 들어있었다. 작은 배낭이 하나(주머니가 지나치게 많이 달려있는), 산길을 가는 데 꼭 필요할 지팡이(가시 덤불을 헤칠 경우에만), 지도 한 장(지도를 읽을 줄 모 르는 내게 별 소용은 없겠지만),타코 가죽으로 만든 물통(잘 씻지 않으면 고 약한 냄새가 나긴 하지만 마실 만은 하다), 불을 피우는데 쓰는 불꽃 돌(술집 에서 여행자들이 담뱃불을 붙이는 걸 몇 본 일이 있다), 비상시에 약초 대신 쓸 수 있다는 치료석(治療石)(어떻게 쓰는 걸까?), 돈을 배에 차고 다닐 수 있게 단추로 잠그는 주머니가 붙어 있는 띠(이만한 주머니를 다 채우려면 은 화 수 백 닢은 있어야겠지). 무엇보다 내 눈을 끈 것은 칼 한 자루였다. 그것은 붉은 용의 문양이 칼자 루에 새겨진 전통적인 비스토브레 제국의 군용 칼이었다. 사비오 영감이 군에 몸을 담았었나? 하여간 늙은이가 이 칼을 차고 산길을 헤매고 다니는 모습이 떠올라 웃음이 다 나왔다. "이걸 가지고 가면 되나요?" 내가 바코쿠에게 물었다. "아마 그럴 거다. 그때 붉은 등의 약속은 그게 전부였으니까. 바코쿠가 말했다. 나는 배낭을 메고 그 안에 나머지 것들을 대충 우겨 넣은 다음, 칼을 두 손으로 들었다. 혁대에 차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지만 나는 아직 성년이 되지 않아서 허리에 찼다가는 자치대에 끌려가 흠씬 두들겨 맞을 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너하고는 꼭 다시 만나게 될 거다" 바코쿠가 말했다. 요즘은 사람들이 다 예언자가 되기로 작정을 했나보다. 이것 보세요, 연금술사 나으리. 저는 아직 이곳을 떠날지 안 떠날지도 확실히 모르는 몸이라구요. 맘대로 내가 이곳 탐그루를 떠날 거라고 확신하지 말라구 요. 나는 다시 예언의 눈동자 앞에 닿았다. 배낭을 짊어지고 무거운 군용칼을 들고 오자니 조금 화가 났다. 사비오 영감은 이왕 시킬 거면 한 번에 시킬 일 이지 두 번에 나누어 시키기는 원. 나는 사비오 영감에게 화를 낼 생각으로 발을 거칠게 헤치고 문안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사비오 영감이 늘 앉아있던 자리에 여행자용 흰 등 하나만이 달랑 놓여있었다. 사과 봉지도 온데 간데 없 었다. 아무 말도 없이 떠나다니. 어떻게 이럴 수가! HiTEL───────────────────────────────────── 창작연재 (SERIAL) LN:김상현 #8823/10199 ━━━━━━━━━━━━━━━━━━━━━━━━━━━━━━━━━━━━━━━━ 제 목:[탐그루] 성년의 신 마소드 - 16 - 관련자료:없음 26/26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0-27 05:33 조회:1189 탐그루 # 마법은 마음이다 - 마음은 칼이다 # * 성년의 신 마소드 나는 배낭과 칼을 멍하니 들고 한 참을 서 있었다. 도무지 어떻게, 무엇을 해야 좋을 지 알 수가 없었다. 나도 그냥 떠나야 하나? 아니다. 그럴 수는 없 었다. 성년의 신 마소드의 날이 지나기 전에 떠날 수는 없다. 성년식을 치르 지 못한 성인이 되다니. 성년의 신 마소드의 축복을 받지 못한 성인이 도대체 어딜 가서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고 해도 여기에 있을 수는 없었다. 라스폼이 다시 찾아온다면 나는 여기서 꼼짝없이 죽을 게 뻔하기 때문이었다. 사비오 영감이 마법을 쓰고, 내 가 라스폼과 같이 온다는 그 칼잡이와 붙어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 수 있다면 승산이 조금은 있을지 모르지만 나 혼자 싸운다는 건 그냥 죽겠다는 말과 똑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나는 일단 라이짐을 만나보기로 마음 먹었다. 라이짐이라면 뭔가 해답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라이짐이라면 적어도 성년이 되면 떠나기로 마음 먹은 지 꽤 돼니까 나에게 뭐라도 조언을 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라이짐은 본부에 있었다. 나는 라이짐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다시 찾아온 라스폼의 이야기하며, 목숨을 건 결투하며, 또 사라져버린 사비오 영감의 이야기까지...구름을 불러 온 얘기는 하지 않았다. 왠지 그 얘기를 하면 창피를 당할 것 같았다. 라이짐은 내 말을 다 듣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럼 우리 오래간만에 강가에나 가보자. 바람이라도 쐬면서 천천히 생각해 보자구. 거기라면 몸을 숨길 곳도 얼마든지 있으니까" 대청하 강가에는 예전부터 라이짐과 자주 가는 곳이 있다. 여행객들은 탐그 루 정박장이나 그곳에 있는 수상 식당 같은 곳으로 가기 마련이지만 탐그루 토박이라면 그런 곳은 가지 않는다(그런 곳에 가려면 돈이 너무 많이 필요하 다. 지긋지긋한 바가지!). 여행객들은 탐그루 정박장 부근에서만 왔다갔다 하 며 역시 대청하야 어쩌구 하면서 좋아하지만 우리 같은 토박이에겐 정박장 부 분은 대청하도 아니었다. 나와 라이짐은 대청하 주변에 아름답고 조용한 곳을 많이 알고 있다. 그곳들은 가끔 물새 소리만 들릴 뿐 사람도 없고 조용한 곳 이다. 다만 좀 많이 걸어야 하는 게 흠이라면 흠이다. 나와 라이짐은 특히 강변 그네 나무숲에서 자주 놀았다. 어려서부터 그네 나무는 탐그루에 사는 꼬마들에게 즐거움이 되어 주었다. 그네를 걸기에 딱 좋게 가로로 뻗은 가지 때문에 아이들은 그네나무라고 불렀지만, 사실은 뿌리 에 독성이 있어서 다른 나무들을 말려 죽이기 때문에 탐그루 시내에서는 찾아 보기 힘든 나무다(그런 나무들의 운명은 하나같다). 다만 이런 호숫가까지는 도시의 힘이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 어렸을 적부터 지금까지 라이짐과 나에게 는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라이짐" 나는 그네 나무 가지에 걸터앉아 라이짐에게 말을 걸었다. "너, 저번에 보니까 보기보다 용감하더라. 어떻게 진짜 검사의 팔을 잡을 수가 있었지?" 나는 지난번 별빛 주점에서 라이짐이 사빈을 죽이려고 하는 검사의 팔을 잡 은 일을 두고 말했다. "...그렇게 보였어?" 라이짐이 말했다.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아니야. 그저 해야 할 일을 하려고 생각했을 뿐이야. 그런 건 별거 아니 야. 난 떠날 거야. 성년식이 끝나면. 돈도 모을 만큼 모았어. 너도 잘 알겠지 만 성년이 지나서 소매치기를 하다가 잡히면...그대로 자치대 지하 감옥 행이 야" "그렇긴 하지만 별빛 주점은 어쩌고?" 내가 물었다. "울찬에게 말해놨어. 비록 고아들 몇 모인 소매치기 모임에 불과 하지만 까 짓 주점 하나 돕는 건 일도 아니라고" 하긴. 거기다가 목숨걸고 라짐에게 정의의 기사가 되고 싶어하는 꼬마들이 한 둘이 아닐 테니까 말이야. "너는 성년식이 끝나면 어떻게 할건데?" 라이짐이 물었다. "글쎄. 라스폼이 찾아 올게 뻔한 예언의 눈동자에서 죽기만을 기다릴 수는 없고...아직 잘 모르겠어" "음. 그렇구나" 라이짐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하더니 "이제부터 마법도 공부할 생각이야?" 그러고 보니 라이짐에게 아자닌 얘기를 해주지 않았군. "응. 사비오 영감이 나한테 마법을 공부할 수 있도록 좀 남겨준 게 있어" "뭔데? 마법이 적혀 있는 책이라도 있어?" 라이짐이 물었다. 그래서 나는 반지와 아자닌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다. "...하지만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야. 내가 모르는 마법은 아자닌도 모르니 까 말이야. 다른 건 좀 아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 아자닌이라는 친구 지금 불러낼 수 있어?" 라이짐이 물었다. 짜식. 아무리 어른인 척 해봐야 별 수 없는 꼬마라니까. 나는 아자닌을 불러내기 위해 반지를 만지며 주문을 외웠다. "내* 마음의* 문을* 여니* 길을* 인도해* 다오*" "부르셨습니까, 수르카 님" 아자닌이 말했지만 얼굴은 흐릿한 그대로였다. 음. 내 마법은 정말 엉터리 인 모양이군. 하지만 라이짐은 깜짝 놀랐다. 잘못했으면 나뭇가지에서 떨어질 뻔했다. 어랍쇼? 그런데 라이짐의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멍한 눈을 해 가지 고는 아자닌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어허. 반지의 정령에게 저런 표정 을 짓다니. 라이짐답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르카 님의 친구, 라이짐 님이시군요" 아자닌이 말했다. 라이짐은 멍한 표정 그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나왔어. 나...마법은 처음이야" 라이짐이 말했다. "저는 마법이 아니라 그냥 반지의 정령일 뿐입니다" 아자닌이 말했고 라이짐은 '그게 그거지, 뭐'하고 중얼거렸지만 아자닌은 알아듣지 못했는지 고개만 갸우뚱했다. "무슨 말씀을 나누고 계셨나요?" 아자닌이 묻자 나는 갑자기 궁금한 것이 하나 생겼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라면 아자닌은 뭐든지 알고 있다고 했지?" "예" "그럼...어제 별빛 주점에서 벌어진 싸움도 알고 있겠네" "예" "그렇다면 아까 사내가 쓴 기술이 어떤 거였는지 말해봐" "그 기술은 사냥꾼들이 주로 쓰는 기술로서 일격 필살기라고 부르는 기술 중 하나 입니다" "설명해봐" "사빈 님(정령이라 그런지 아자닌은 내가 아는 모든 사람의 이름 뒤에 '님' 자를 붙인다)은 검사의 공격을 계속 피하기만 하면서 그 검사의 공격 방식과 허점을 읽어두었습니다. 아마 위에서 아래도 내리치는 칼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검사가 노리고 있던 방향으로 공격해오자 안으로 파고 들어 목을 찔렀습니다. 일격 필살기의 특징은 상대방이 방심하고 있는 틈을 타서 이루어진다는 점과 빠른 속도와 정확성을 요구한다는 점입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라이짐은 신기하다는 듯이 아자닌을 바라보았다. "사비오 영감...대단하구나" 라이짐이 말했다. "대단한 건...스승님(이 호칭을 쓰기 위해 잠시 고민했다)이 아니라 아자닌 이야. 아자닌은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을 모두 알고 또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 나는 말하는 도중에 또다시 궁금증이 일었다. "그렇다면 너, 내 아버지가 뭐 하는 사람이었는지도 알아?" "저는 수르카 님이 기억하고 계시는 것만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상은 무리 입니다" "그렇군" 나는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아자닌은 정령이니까 신경 쓰지 말고 우리 얘기 좀 하자. 여길 떠나면 뭘 할건데?" "그건..." 라이짐은 아자닌의 눈치를 살피더니 나뭇가지 밑으로 늘어뜨려 놓은 다리를 앞뒤로 흔들면서 대답했다. 신경이 쓰이긴 쓰이는 모양이다. 이럴 때 친구 앞 에서 마법사 흉내를 한 번 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꺼져, 아자닌!" 나는 내가 생각해도 약간 지나치다 싶게 거만한 목소리로 아자닌에게 말했 다. "그러지요, 수르카 님" 그런데 사라지는 아자닌의 목소리가 어딘지 기분 나쁘다는 투로 들렸다. 정 령도 인간처럼 감정을 가지고 있는 걸까? 아자닌이 사라지자 라이짐은 아자닌 이 있던 자리를 살피더니 뭐라고 중얼거리고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나갔다. "팜 산맥으로 들어갈 거야" "가서 뭐하게?" "너.. 위대한 복수자 검객 아케르 알지?" 그건 물론이다. 어려서는 물론 지금까지도 나의 우상이 바로 아케르니까. "아케르의 용병단에 들어갈 생각이야" 라이짐이 말했다. "내가 가진 거라곤 이 손재주밖에 없어. 그러니 아케르 용병단에 내 손재주 가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빌려줄 생각이야" 라이짐이 말했다. "그렇구나..." 라이짐은 분명한 목표는 아니어도 뭘 해야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나 는 뭔가? 사비오 영감이 떠나고 나면 도대체 뭘 해야 하지? "나는 말이야..." 뭔가 더 얘기를 하려고 하는데 멀리서 뮤 발굽 소리가 들려와서 말은 중단 되었다. 나는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뮤 세 마리가 걸어오고 있었다. 한 마리의 등위에는 검사 한 명이 있었고 나머지에는 각각 내 또래의 남자와 여자가 타고 있었다. "누구지?" 라이짐이 물었다. 하지만 나라고 그걸 어떻게 아나? 그냥 옷차림새를 보니 귀족이라는 것만 알 수 있을 뿐이지. "거기 나무 위에 둘은 누군가?" 검사가 외쳤다. 아마도 나머지 둘의 경호원격인 검사인 모양이었다. 그다지 지체 높은 검사 같지 않은 말투와 모습으로 나는 그렇게 짐작했다. "탐그루의 라이짐과 수르카입니다. 그쪽은 누구십니까" 내가 말했다. 어? 그런데 이건 귀족이나 쓰는 말툰데. 그냥 어쩌다보니 이 런 말투가 나와버렸군. "그렇다면 당장 내려와 고개를 숙여라. 내가 모시고 있는 두 분은 자나크의 영주 가이르 오르파 님의 아드님과 탐그루의 시장 하리오 오르테가 님의 따님 이시다" 검사가 소리쳤다. 가이르 오르파의 아들과 하리오 오르테가의 딸이라고? 귀 족이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지체 높은 사람인줄 짐작도 못했던 나와 라이짐은 놀라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는 어쩌지? 하는 표정으로 라이짐을 바라봤고 라이짐은 별 수 없잖아, 하는 표정을 짓고는 나무 밑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나도 라이짐의 뒤를 따랐다. "보아하니 아직 성년이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이름이 뭐라고 했지?" 가이르 오르파의 아들이 말했다. 나이는 나보다 한 두살 많은 듯했고 어딘 가 목소리에 위엄이 있었다. 하긴, 뮤 위에 올라타고 저런 근엄한 표정을 짓 고 있으면 누구나 그렇게 보이겠지. 게다가 귀족만 입을 수 있는 흰 장옷을 입고 있으니 말이야.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시청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본 기억이 났다. 하필이면 그런 역겨운 말을 쓰는 놈과 이렇게 만나다니... "저는 수르카라고 하고 이쪽은 제 친구 라이짐입니다" 공손하게 내가 말했다. "음. 그래. 아직 성년이 아닌 모양이지?" "예. 이번 마소드의 날에 성년이 됩니다" "도련님과 같군요" 검사가 말했다. 검사의 허리에 찬 칼이 바람결에 흔들렸는데, 나는 그것을 바라보는 순간 속에서 뭔가 발끈 하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까지 성년도 아닌 귀족에게 굽신거렸다는 거야, 내가? "이것 보십시요, 검사님. 성년이 되지 않았다면 아직 지체 높은 사람이 아 니라는 말 아닙니까. 그런데 왜 나와 내 친구에게 고개를 숙이라고 했습니까? 이건 저와 제 친구를 모독한 행위입니다" "그건..." 검사가 뭐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가이르 오르파의 아들이 그를 막았다. 그리 고는 뮤에서 내려 나를 바라보았다. "꼬마야" 가이르 오르파의 아들이 이렇게 말했다. 아니 꼬마라니! 나는 당장 달려들 고 싶었지만 라이짐이 내 팔을 잡으며 말렸다. "네 말솜씨는 그럴 듯 하구나. 내가 이곳 탐그루 시민들이 명예에 대한 자 부심이 높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까지인 줄은 몰랐다. 돌아가 아버님 께 말씀드려서 포상을 내리도록 할 테니 영광과 자비로움에 감사하고 이쯤에 서 화를 풀도록 하여라" 이건 완전히 나와 라이짐을 깔보는 말이었다. 물론 무슨 수를 쓴다고 해도 귀족에게 평민이 함부로 까불 수는 없는 법이지만 나는 부화가 치밀었다. 게 다가 아버님에게 말씀 드리겠다구? 그건 '내 아버지가 가이르 오르파인걸 잘 알 테니 까불지 마' 이런 뜻 아닌가? 아버지나 믿고 까부는 주제에! "야. 언제 봤다구 함부로 말하는 거야! 네가 이제 성년이 되고 직위가 생긴 다면 내가 너에게 고개 숙여야 한다는 건 알고 있지만 아직은 아니야" 내가 말했다. 라이짐은 별 반응이 없었지만 나를 은근히 놀랍다는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나는 말을 하고 나서 하리오 오르테가의 딸을 바라보았다. 소문대로 정말 미인이었다. 하지만 라스폼을 보고 내가 체득한 것은 사람은 겉모습이 아름답다고 해서 그 속까지 아름다운 건 아니라는 것이 었다. 뭐, 생각이야 이렇게 해도 저런 미인 앞에서 쉽게 무릎을 꿇는 모습을 보일 순 없지. "말솜씨가 제법이구나. 쥬크(검사의 이름인 듯 했다). 목도를 주게. 이 친 구 말솜씨만큼 목도 솜씨도 제법인지 알아봐야겠어" 가이르 오르파의 아들은 이렇게 말하고는 검사가 건네준 목도 두 자루를 잡 았다. "이건 정식 결투는 아니지만 참관인이 셋이나 되니 약식 결투라고 해 두지. 이의 있나, 꼬마?" 가이르 오르파의 아들은 이렇게 말하며 나를 바라보았는데, 귀족의 흰 얼굴 이 이렇게 얄미워 보인 적은 없었다. "약식이라고 해도 결투는 결투니까 이름 정도는 말하는 게 예의 아닐까?" "나는 자나크의 영주 가이르 오르파 님의 아들 루비오 오르파라고 한다네. 수르카, 네 말대로 성년이 되기 전이니까 루비오라고 불러도 좋다고 해두지. 하지만 내가 이긴다면 이제 날 루비오 님이라고 부르도록 하지. 어떤가" "그건 불공평해. 수르카는 평민이니까 루비오 네가 슬카를 수르카 님이라고 부르지는 않을 거 아니야?" 라이짐이 끼여들었다. 고마운 친구. 너밖에 없다. "그래 좋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지. 내가 너를 모욕했다는 게 이 약식 결투 의 이유가 될 테니까 네가 이기면 내가 사과하고 내가 이기면 루비오 님이라 고 부르면 될 것 같군. 좋은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목도를 쥐자 검사가 말에서 내렸다. 본격적인 참관을 위해서리라. 라 이짐과 나, 검사와 귀족 아들. 어쩐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결투상대였지만 멀 리서 본다면 그럭저럭 멋진 모습으로 보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싱긋 웃음이 나왔다. "사랑스러운 뒤로아께서는 그냥 뮤 위에 계시지요. 좋은 구경이 될 겁니다. 제가 자나크에 있을 때에도 이와 비슷한 상황을 많이 겪었습니다만 그때마다 저는 제 아버님의 명예를 더럽힌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사랑스러운 뒤로 아. 안심하시고 지켜보십시오. 장래의 남편 감이 얼마나 믿음직한 사람인가를 지켜보시는 것도 좋으리라 생각됩니다" 나는 루비오의 말에서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바로 저 역겨운 말투 의 루비오가 뒤로아 오르테가의 딸과 약혼한 사이라는 사실이었다. 성년이든 아니든, 남자가 여자에게 약혼도 하지 않고 '사랑스러운'이라는 호칭을 붙이 지는 못하는 법이다. 바보 같은 놈! "먼저 하겠는가?" 루비오가 말했다. 약혼녀 앞에서 있는 폼 없는 폼 다 잡고 거기다가 진짜 검사까지 대동한 루비오의 기세는 오를 대로 올라있는 듯 했다. 거기다가 호 위역 검사가 순순히 결투를 인정해 준 사실이나 목도를 쥔 모습에서 루비오는 보통 솜씨는 아닐 듯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나도 내 명예를 더럽힐 수는 없는 법이다. 날 우습게 보았겠다. 길거리에서 실전으로 다져진 내 목도 맛을 보여주지.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N:김상현 #8824/10199 ━━━━━━━━━━━━━━━━━━━━━━━━━━━━━━━━━━━━━━━━ 제 목:[탐그루] 성년의 신 마소드 - 17 - 관련자료:없음 26/26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0-27 05:34 조회:1113 탐그루 # 마법은 마음이다 - 마음은 칼이다 # 나는 루비오의 머리를 노리고 세 번 공격 한 뒤 뒤로 물러섰다. 내 목도를 빗겨내는 솜씨가 예상대로 보통이 아니었다. 하지만 루비오도, 검사도 내 공 격을 보더니 적잖이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마 촌 무지랭이 하나 쓰러뜨리고 '사랑스러운' 뒤로아 오르테가 앞에서 어깨에 힘 줄 생각이었겠지만 내가 그리 호락호락하지는 않지. "이번에는 네가 먼저 해라" 내가 말했다. 전세(戰勢)는 이제 역전되었다. 루비오의 표정에서도 그걸 읽 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뒤로아 오르테가의 반응이었다. 그저 미소 만 지을 뿐, 그녀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괴상한 여자군. 내가 생각하고 있는데 잔뜩 힘을 준 루비오의 공격이 이어졌다. 하지만 너 무 직선적인 공격이었다. 언젠가 길거리에서 정식으로 검술 도장을 다닌 치와 맞붙은 적이 있었는데, 그 친구의 공격도 이랬던 기억이 났다. 정확하고 위력 적일지 몰라도 이런 공격은 실전에서는 별 소용이 없다. 소용이 있다면 나무 로 만든 연습용 인형을 때릴 때 뿐일 것이다. 내가 공격을 다 받아내자 검사와 루비오는 더욱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생각한 각본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아 화가 났는지 루비오는 그 정확하고 위력 적인 공격을 다시 해왔다.내겐 그공격이 너무도 뻔하게 보였다. 어렵지 않게 루비오의 손목을 쳐 올려 루비오의 목도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이른바 '손목 쳐 날리기'를 넣은 거였다. "승패가 난 것 같군" 나는 말하며 루비오에게 다가갔다. 루비오의 일그러진 표정은 정말 가관이 었다. 약혼녀 앞에서 이런 망신을 당하다니. 나는 키득거렸다. 그러나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갔다. 검사가 목도를 집은 것이다. "나는 가이르 오르파 님의 명을 받은 검사로, 루비오 님이 다치는 건 볼 수 없다. 내가 너와 맞서는 건 나의 의무다. 비록 네가 성년이 아니기 때문에 정 식 결투는 할 수 없지만 나와 싸워 이기지 않는다면 너는 루비오 님께 이길 수 없다" "옳은 말씀이에요, 쥬크" 그 순간 미소만 짓고 있던 뒤로아 오르테가가 입을 열었다. 그녀가 입을 열 자 네 남자의 시선이 동시에 뒤로아 오르테가에게 향했다. 그녀는 여전히 미 소를 머금고 있었는데 아까와 마찬가지로 도무지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 "저 건방진 평민을 쓰러뜨려 주세요, 당장" 그녀의 이 말 한마디는 전세뿐만 아니라 내 기세까지 꺾어버렸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 여자는 저런 말을 하는 걸까. 역시 귀족은 귀족 편이었다. 옳고 그른 건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출신 성분에 따라 정의도 달라지는 걸 까. 생각을 미처 다 하기도 전에 쥬크의 목도가 날아왔다. 루비오의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빠르고 강한 공격이었다. 목도를 쥔 팔이 저려왔다. 게다가 공격은 계속 이어져서 나는 뒤로 계속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 "수르카, 조심해!" 라이짐이 말하지 않았다면 나는 뒤에 있던 바위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겨 우 몸을 피한 나는 검사의 눈을 노려보았다. 내가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걸 알았는지 그도 잔뜩 긴장한 진지한 눈빛이었다. 이렇다면 내가 이길 가능성은 점점 적어지는군. 아무리 목도로 싸운다고 해도 내가 진짜 검사를 이긴다는 건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이 검사가 방심도 하지 않고 있으니. 나는 '손목 쳐 날리기'같 은 얕은 수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고는 작전을 바꿔 한 대라도 때 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면 적어도 내 명예가 더럽혀지는 건 아닐 테니 까. 쥬크가 다시 공격해오자 나는 목도를 빗기며 그대로 쥬크의 다리를 공격했 다. 다리 방어가 공격을 계속 퍼붓느라 허술해졌다는 걸 알 수 있었기 때문이 었다. 그런데 의외였다. 다리를 공격당한 쥬크는 서둘러 목도를 거두었고 그 순간 손목에 틈이 생긴 거였다. 나는 본능적으로 쥬크의 손목을 쳐 올렸다. 쥬크의 목도가 허공에 떠올랐다. "이겼다!" 라이짐이 환호성을 질렀다. 나도 어안이 벙벙했지만 라이짐이 소리치는 걸 듣고 내가 이겼음을 알았다. 짜식들 말이야. 이 수르카 님을 어떻게 보고... 그러나 기쁨을 느낄 틈이 없었다. 검사는 아무런 표정없이 허리에 찬 칼을 뽑았다. 그리고 한마디 말도 없이 내게 진검을 들고 덤벼 들었다. 기가 막혔 다. 이놈들은 룰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는 놈들이었다. 나는 목도로 그 칼을 막아내면서 몸을 비틀었다. 내 목도는 반 토막이 났지 만, 목도가 잠시 칼의 속도를 늦춰준 덕분에 칼을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 는 중심을 잃고 넘어지고 말았다. "아니 비겁하게..." 라이짐이 뭐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검사가 칼을 들고 라이짐을 노려보자 라 이짐은 말을 멈추고 말았다. 불쌍한 라이짐. 하지만 성년이 되기도 전에 억울 하게 죽을 수야 없지. 나는 라이짐을 이해했다. 쓰러져 있으면서 나는 이 상황을 빠져나갈 생각을 해 보았다. 하지만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대로 둘 다 죽는 걸까? 처음부터 귀족놈들과 다투 는 게 아니었다. 결국 질 걸 뻔히 알면서도 잠시 흥분한게 문제였다. 뒤로아 오르테가만 없었더라도 내가 이렇게 객기를 부리진 않았을텐데... 그때, 마법을 사용한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반토막 뿐인 목 도지만 방어막이 생긴다면 칼을 쥔 검사의 손목을 쳐 날릴 수 있을 것 같았 다. "모든* 빛깔* 있는* 것들은* 나에게* 시간을* 빌려다오*" 나는 주문을 외웠다. 그리고는 재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 토막뿐인 목도를 쥐고. 그러나 검사도, 루비오도, 뒤로아도 나를 꼴좋다는 듯이 바라보 고만 있었다. "팔을 다쳤군, 수르카. 세상은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니야" 루비오가 말했다. 나는 내 팔을 쳐다보았다. 왼팔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이런. "아마 다시는 칼을 쥐지 못할 겁니다. 이만 하고 돌아가시지요, 도련님" 검사가 말했다. 검사는 부끄러움이고 뭐고 아무것도 상관없다는 표정이었 다. 그래 성년도 안된 꼬마를 진검으로 베고 나니 기분이 어떠냐? "그 정도면 됐어요" 뒤로아 오르테가도 말했다. 루비오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뮤에 올랐다. "그 이름만은 기억해 두마, 수르카!" 루비오는 여전히 분했는지 벌게진 얼굴로 이렇게 말하더니 뮤의 고삐를 당 겼고 나는 멍청히 세 마리의 뮤가 호수 저편으로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수르카, 괜찮아?" 라이짐은 내게 달려와 내 팔을 잡았다. 내 팔은 금세 원래 색으로 돌아갔 다. "마법이었어?" 내 팔을 보더니 라이짐이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라이짐도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마 라이짐은 내가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엉터리로 상처를 만드는 마법을 썼다고 생각하겠지... 나는 비겁한 마법을 써서 위기를 모면한 놈이 되었다는 생각에 잠겨 있었고 라이짐은 위기에 빠진 친구를 구하지 못했다는 생각 때문에 괴로운 모양이었 다. "오늘 당장은 어디에서 보낼 거야?" 한참만에 라이짐이 물었다. "글쎄...여기서 야영을 할까 생각도 해 봤는데, 불을 피웠다가는 자치대원 들한테 걸릴 게 뻔하고...그냥 예언의 눈동자에서 오늘 하루는 보내야겠어. 라스폼도 오늘 당장은 돌아오지 않겠지" 나는 라이짐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래...오늘밤만 어떻게 해봐. 내일은 내가 무슨 수를 내볼게. 아마 좋은 곳을 찾을 수 있을 거야... 성년의 날도 지나기 전에 떠날 수는 없잖아" 라이짐이 말했고, 우리는 둘 다 침울한 표정으로 강변을 떠나 집으로 돌아 갔다. "라이짐. 아까 도와줘서 고마웠어" 별빛 주점 근처에 다다랐을 때 내가 라이짐에게 말했다. "무슨 말을. 네 마법이 아니었다면 우리 둘 다 죽었을 거야" 라이짐이 말했다. 죽음...그 말을 듣자 나는 별빛 주점에서 본 검사의 시체 가 생각나서 더욱 침통한 기분이 되었다. 내 목도가 도움이 되지 못하는 상황 에서는 마법도 크게 도움이 되지 못했다. 도움이 된 것은 오로지 내 운 뿐이 었다. 나는 서글퍼졌다. "어쩔 수 없지. 평민이 귀족을 이길 수는 없는 법이야. 무슨 수를 쓴다고 해도... 평민이 다 그렇지, 뭐" 라이짐은 차가운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냉소적인 라이짐의 태도가 이렇게 가슴 저미게 느껴진 것이 처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의 말은 맞는 말이었다. 무슨 수를 써도 이길 수 없는 상대가 있는 법이다. 어떤 상황이라 도 귀족이 나에게 존댓말을 쓰지는 않을 것이고 목도가 진짜 칼을 받을 수는 없는 법이다. "그래. 이젠 뭘 해야 할까 생각해 봐야겠어. 내일이면 무슨 수가 나겠지" 내가 말했다. "그래. 내일 만나자. 무슨 수가 생길 거야. 라이짐은 이렇게 말하고는 앞장서 별빛 주점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라이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머릿속이 다시 복잡해지고 있었다. 성년 의식을 꼭 치러야 하나 싶은 생각도 들고. 하지만 성년식은 라이짐 말 그대로 '꼭 해야만 하는 일'인 것이다. 그래. 라스폼이 오늘 당장 찾아 올 리는 없 어. 적어도 오늘 하루는 예언의 눈동자에서 조용히 쉴 수 있겠지. "엄마!" 라짐이 소리치는 것이 들렸다. 나는 별빛 주점 쪽을 바라보았다. 라이짐은 이무르 아주머니에게 붙잡혀 엉덩이를 걷어 채이고 있었다. "아니, 바로 어제 집에서 살인이 났는데 이 시간까지 어딜 싸돌아다녀! 당 장 문부터 고쳐! 그리고 귀 뒤는 아직도 안 씻었구나! 으이구, 이 빌어먹을 자식아! 내가 세수할 땐 귀도 꼭 씻으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니! 이 때 좀 봐! 때! 이렇게 해야* 할* 일도* 안 해 가지고 무슨 성인이구 나발이구 있 겠어!" 이무르 아주머니에게 엉덩이를 걷어채이는 라이짐이 이렇게 슬퍼 보이기는 처음이었다. 그런데, 이무르 아주머니의 말에서 무엇인가가 느껴졌다. 전에도 이무르 아주머니의 말이 이상하게 들린 적이 있었는데... 에라 모르겠다. 내 일은 뭔가 좋은 일이 생기겠지. 예언의 눈동자로 돌아온 나는 사비오 영감이 늘 앉아 있던 자리를 바라보았 다. 마치 그곳은...원래 있던 산이 사라진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이렇게 넓 었구나, 이곳 예언의 눈동자가. 나는 사비오 영감이 사라진 자리가 어쩐지 더 커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루비오가 아버지 운운 한 때문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그런 생각은 안 하기로 했다. 문득 칼이 떠올랐다. 보통 칼이 아니라 은빛 장검 말이다. 요즘들어 밤마다 나를 쫓고 있는...그리고 나는 라이짐과 사빈을, 또 라스폼과 루비오를 떠올 려 보았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사비오 영감이 있던 빈자리를 채워주지 못했 다. 아자닌을 부르고 싶어지는 군. "내* 마음의* 문을* 여니* 길을* 인도해* 다오*" 나는 주문을 외웠다. 아자닌이 나타났지만 뿌연 아자닌의 모습은 사비오 영 감의 자리를 채우기에는 너무 투명했다. "아자닌. 정말 먼 곳으로 떠난 모양이야...스타바도 없어졌어. 사비오 선생 님은 스타바를 타고 이곳을 떠난 거 야. 아마 아주 먼 곳으로 말이야. 타실은 아닐 테고...아마 스파일 쪽이겠지" 내가 말했다. "예. 그런 것 같군요" 퉁명스러운 말투였다. 아까 강변에서 라이짐 앞이라고 꺼지라고 말한 게 너 무 심했나? "내가 뭐 잘못했니, 아자닌?" 내가 물었다. 아무리 아자닌이 사람이 아니고 반지의 정령이라고 해도 도저 히 이대로는 얘기를 계속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니오. 전혀! 어차피 전 반지의 정령에 불과하니까 아무렇게나 대하셔도 상관없잖아요?" 이거... 성격 나쁜 건 라짐 뺨치는군. "그래. 알았어. 함부로 대한 거 사과 할께" "뭘 함부로 대하셨는데요?" 맙소사. 이젠 그만두라구. "라이짐하고 얘기할 때 좀 심하게, 사라지라고 한 말 본심이 아니었어. 인 간은 말이야...원래 좀 그래. 이해해 줘. 미안해" 내가 말했다. "좋아요. 다 잊지요. 하지만 이것만은 명심해 주세요. 저도 예전엔 인간이 었다구요" 인간이었다구? "그래? 그건 몰랐는걸? 그런데 어쩌다...그렇게 된 거야?" 나는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 아자닌을 가리키며 말했다. "차차 말씀드리지요. 먼저 사비오 님께서 남기신 말씀을 해 드릴께요" 말씀을 남기셨다구? 작별 인사도 없이 사라져 놓고는? 여하간에 아자닌은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인간은* 자신이* 본* 모든* 것을* 기억하나니*" 그러자 사비오 영감의 모습이 내 앞에 나타났다. 나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 섰으나, 곧 그것이 아자닌이 만들어낸 영상이라는 것을 알았다. (손을 대 보 니 아무 것도 만져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치 연금술사의 빛처럼). "와! 이거 쓸만한데! 모든 기억을 이렇게 다 불러낼 수 있는 거야?" 내가 아자닌에게 물었다. 하지만 대답은 사비오 영감이었다. "이 마법은 아무 기억이나 불러내는 게 아니라, 마법사가 의도적으로 기억 시킨 기억만 불러낼 수 있는 거란다. 그러니 이 마법이 네게 필요할 일은 없 을 게다" 참, 재미있는 양반이라니까. 굳이 이렇게 할 필요까지 있나? 그냥 말하고 떠나면 얼마나 좋아. 왜 그런 식으로 사라져야 했지? "인사도 없이 떠난 일은 미안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네가 라스폼에게 잡힐 경우 라스폼이 너에게 마법을 걸어 추적할 수 있기 때문이었 단다. 이해해다오" 편리하구만, 마법은. 별별 방법이 다 있네. 떠나는 마지막 모습을 내가 봤 다면 추적할 수 있다는 말은...내가 잡혔을 경우에도 안전하게 도망가겠다는 말 아닌가? 사비오 영감, 내 실력을 너무 우습게 보는 모양이야. "나는 떠난다. 어디로 가게 될지는 나도 아직 모른다. 그러니 너도 모르는 게 당연하지" 당연한 소리는 왜 하시는지 원. "성년식이 끝나면, 이곳을 떠나거라, 수르카. 이런 날을 대비해 너를 위해 연금술사의 집에 몇 가지 물건을 맡겨 놓은 거란다. 그 칼은 아직 쓸 수 없겠 지만, 성년식이 지나면 차고 다닐 수 있을 게다. 조금 무겁긴 하겠지만 네가 쓰기에 적당하리라고 생각한다" 그 말은 들으니 조금 기분이 나아졌다. 나는 나도 모르게 예, 하고 대답 할 뻔했다. "수르카. 네가 내 제자가 된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것 또한 운명이라고 해 두자. 네 모습을 처음 보는 순간 네가 바르도 대륙의 미래를 결정짓는 운 명의 한 고리임을 알았단다. 그리고 그 판단이 옳았다는 것을 이제는 확실히 알 수 있다" 사비오 영감의 말은 계속되었다. "너는 이곳을 떠나게 될 게다. 좋던, 싫던 말이다. 그리고 그때 내가 남긴 물건들이 요긴하게 쓰이리라고 확신한다. 그때를 대비해 성년식 전까지 아자 닌과 함께 마법 연습에 열중하거라. 나는 내 마법의 말들을 모두 아자닌에게 맡겨두었다. 하지만 그 말들은 네가 직접 듣고 찾아냈을 때만 아자닌에게서 나올 수 있을 거다. 그걸 탓하진 말거라. 아자닌은 반지의 정령이니까 주인이 알고 있는 것 이상을 알 수는 없지. 예언자의 집에서 했던 것처럼 다른 사람의 말들을 열심히, 집중해서 듣도록 해라. 네가 집중해서 듣기만 한다면 세상의 어떤 말에서도 마법의 말들을 발 견할 수 있을 게다" 이 말은 내가 모든 마법의 말을 알아서 다 찾아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러 자 눈앞이 아뜩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젠장. 사비오 영감에게 직접 배 운 마법도 제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는데 내가 찾아서 하나 하나 해야 한다 니. "자. 이젠 떠날 시간이 되었구나. 수르카야. 너와 나의 운명의 고리는 아직 끊기지 않았단다. 우린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거다. 그럼 다시 만나는 그날 까지 마소드의 가호가 항상 너와 함께 하기를..." 이 말을 끝으로 사비오 영감의 영상은 사라졌다. "도대체 이게 뭐야?" "들으신 그대로입니다" 젠장. 그건 나도 알아. 그게 무슨 뜻이냐는 거지. 넌 사람의 말도 못알아 듣냐. 나는 하마터면 이 생각을 입 밖으로 낼 뻔했다. 그랬다간 아자닌이 얼 마만큼 삐질 지 알 수도 있을텐데. "그래. 성년식까지 너하고 마법공부를 하다가 탐그루를 떠나라고? 그사이 라스폼과 마주치면 어쩌지? 날 죽이던가 아니면 죽을 때까지 괴롭히겠지?" "그건...아마 그렇겠죠" 재수 없는 말만 골라서 하는 군. "그래. 알았어. 어차피 나도 떠날 생각이었으니까. 혹시 지도 볼 줄 알아?" "수르카 님보다는 조금 나을 겁니다. 마법에 관한 것은 수르카 님이 찾아낸 말만 가르쳐 드릴 수 있습니다만 다른 것들은 조금 알지요. 지도나 지명, 식 물이나 동물...그런 것은 지금까지 이 반지를 가지고 계셨던 분들이 알고 계 셨던 것들이니 일러 드릴 수 있습니다" 이 말이 그나마 위안이 되는 말이었다. "그래. 그럼 먼저 지도나 한 번 보자구" 나는 아자닌에게 말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N:김상현 #8825/10199 ━━━━━━━━━━━━━━━━━━━━━━━━━━━━━━━━━━━━━━━━ 제 목:[탐그루] 성년의 신 마소드 - 18 - 관련자료:없음 21/21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0-27 05:35 조회:1133 탐그루 # 마법은 마음이다 - 마음은 칼이다 # 아자닌의 말에 따르면 이 지도는 중부 대청하, 탐그루, 팜 산맥까지 포함하 는 자나크 지역의 지도였다. 그러니까 바르도 대륙 중부지역 지도였다. "이 지도를 준비해 두신 건 아마 수르카 님이 팜 산맥으로 가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일 겁니다" 아자닌이 말했다. 그런데 내가 왜 팜 산맥으로? 알지도 못하는 짐승들과 험 한 길이 잔뜩인데, 여행에 익숙한 사람들도 돌아서 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 하는 팜 산맥으로, 내가, 왜? 그래도 지도를 보니 북쪽으로 길을 따라 가면 하잔을 지나지 않고 바로 팜 산맥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라이짐이 팜 산맥으로 들어간다고 했었지. 그렇다면 이 지도는 라이짐과 함께 가게 되리라 는 사비오 영감의 예언일까? 그럴지도...모르지... "그래. 이제 다른 수가 있는 것도 아니잖아? 사비오 영감이 말한 운명이라 는 걸 믿어보자구"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나는 평소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청소를 시작했다. 그 런데 스타바의 여물을 주러 갔다가 빈 축사를 보고는 이젠 더 이상 이런 일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습관은 무서운 법이라니까. 나는 꼭 화풀이 라도 하려는 사람처럼 손에 든 여물을 집어 던졌다. 그런데 그 순간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나는 하던 일을 접어두고(다신 하게 되지 않을 일이지만) 허리에 나무상자 에서 꺼낸 돈주머니를 찬 후, 다시 한 번 연금술사의 집으로 찾아갔다. 바코 쿠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조금 남아있다고 생각해서였다. "수르카...로구나" 다시 만나게 되리라는 예언이 이렇게 빨리 이루어지자, 바코쿠는 적잖이 당 황하는 눈치였다. 아무렴 어때. 나도 할 일은 해야 할거 아니야. "예언의 눈동자를 팔아야겠어요. 사비오 님은 떠나버렸어요" 나는 바코쿠에게 이렇게 말했다. 바코쿠는 나의 말에 꽤 놀라는 눈치였다 (사비오 영감이 떠났다는 것보다는 예언의 눈동자를 팔아야겠다는 말에 더 놀 랐겠지). "그런데 왜 나를...?" 꼭 죄지은 어린아이처럼 눈에 뻔히 들여다보이는 시치미를 떼면서 바코쿠가 말했다. "장사하시는 분이 책임을 지셔야죠. 예언의 눈동자를 사비오 영감에게 판 사람이 누군데요? 장사하는 분이라면 당연히 판 것에 대해서 책임을 지셔야 하잖아요? 혹시 바코쿠 아저씨가 아직 성인이 아니라면 책임질 필요도 없겠지 만..." 내가 당돌하게 말하자 바코쿠는 어쩔 줄 몰라했다. 이래봬도 이 수르카, 탐 그루에서 잔뼈가 굵은 몸이라구. 탐그루 사람이 어디 손해보는 일을 하는 것 봤어? "좋다. 금화 여덟 닢에 도로 그곳을 사마" 잠시 고민하다가 바코쿠가 선심 쓴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 끝까지 발을 빼려고 하는 구만. 이래서 장사꾼들은 믿을 게 못 된다니까. "열 두 닢에 파셨다면서요" 나는 이렇게 따져 물었다. "으흠. 그건 그때 일이고... 지금 내가 그곳을 다시 사서 뭘 하겠니?" 바코쿠는 헛기침까지 하면서 말했다. 녀석 보통 아닌데, 하고 생각하는 얼 굴이었다. 하지만 이제 깨달아 봐야 뭐하겠어. 바코쿠 입장에서는 내게 예언 의 눈동자를 판 얘기를 안 했더라면 좋았겠지만 지나간 일은 결코 되돌릴 수 없는 법이다. "엉터리 점 집을 운영하시든지 연금술사의 집 분점을 내시든지 그건 제가 알 바가 아니고요, 저는 사비오 님의 몫만 찾아가면 되요" "...좋다. 열 닢에 하자" 그 정도라면 나도 이의 없다. 소개비로 금화 두 닢이라면 좀 많다고 생각은 하지만 그 동안 붉은 등의 약속을 지켜 준 보답이라고 생각하면 그만이니까. 나는 금화로 열 닢을 받아 허리에 차는 주머니에 챙겼다. 금화를 은화로 바꾸 고 싶었지만 은화 천 개를 허리에 차기에는 좀 무거울 것 같아서 어쩔 수가 없었다(금화 천 개면 수르카가 열 명은 되어야겠지). 음... 그러고 보니 잔돈이 없군. 이 문제는 라이짐과 의논해야겠는 걸. 하 여간 나는 바코쿠의 가게를 나와서 라이짐을 찾았다. 라이짐은 역시 라이짐 패거리들이 모이는 곳에 있었다. "라이짐. 나 결심했어. 너하고 같이 팜 산맥으로 가기로" 나는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라이짐에게 말했다. 그런데 가장 반가워한 것은 라이짐이 아니라 울찬이었다. 아마 울찬은 이제 두목의 자리에 앉게 될 뿐 아 니라 또래 중 가장 뛰어난 칼 솜씨를 가지게 되어서 그랬으리라 여겨졌다. 그 러면 뭐하나, 이제 두목이 돼서 온갖 머리 아픈 일들을 다 처리해야 할텐데. 라이짐이 두목이 된 후에 실력을 많이 쌓았다면 또 모를까. "네가 먼저 그렇게 말하지 않았으면 내가 부탁하려고 했어, 수르카" 울찬 일이야 그렇다 치고 내가 기뻤던 건 내 말에 반가워하는 라이짐의 얼 굴이었다. 그런데 라이짐이 같이 가자고 먼저 말할 줄 알았다면 '제발' 이라 고 말할 때까지 튕겨보는건데. 그날부터 나는 라이짐이 마련해준 본부 뒤편의 작은 창고에서 생활하게 되 었다. 냄새 나고 구석 구석 마다 거미집이 쳐 있고, 거미 집에 붙어 붙어 벌 레가 창고 안에 날아다니는 벌레보다 많은 곳이었지만 라스폼을 피하자니 어 쩔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썩 나쁜 곳만은 아니었다. 구석에 짚단을 쌓아놓아 자기에 그다지 불편하지 않았고 (온갖 벌레들이 몸을 기어다니며 깨무는 것은 불편 정도가 아니었다. 자다가 몸이 따끔 거릴 때마다 창고를 다 태 운는 한이 있 어도 이 벌레들을 모조리 해치우고 싶었다) 먹을 것도 라이짐의 부하들이 때 마다 가져다주니 예언의 눈동자에서 살던 때보다 오히려 더 편한 생활인지도 모르겠다. 뭐, 식사는 감자와 소금뿐이고 물은 내가 직접 물통에 담아와야 하기는 했 지만. 역시 라이짐도 탐그루 사람다워. 지독한 구두쇠는 아닌지 몰라도 아껴 쓰는 데는 뭐 있다니까. 나는 다 식은 삶은 감자를 씹을 때 다 허리에 찬 주머니 속의 금화 열 개를 쓰고싶다는 충동을 자주 느끼곤 했지만 소금을 핥으며 꾹 참았다. 언젠가 사 비오 영감을 만나면 꼭 돌려줘야 할 금화이기 때문이었다. (이런 점에서는 나 도 역시 탐그루 사람이라고 할 만 하지) 가장 힘들었던 것은 시간을 보내는 문제였다. 함부로 돌아다니다가는 언제 어디서 라스폼을 만나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주로 목도를 휘두르며 시간을 보냈고 가끔 아자닌을 불러내어 마법 연습을 하기도 했다. (달리 시간을 보낼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지 결코 좋아서 한 일은 아니었다) 물론 아자닌이 '자, 다시 한 번 해보세요'하는 말을 지치지도 않고 계속 해 대는 것이 별로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가끔 아자닌의 말투를 듣다 보면 사비 오 영감이 보고 싶어 지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시간은 계속 흘렀지만 마법은 도저히 제대로 걸릴 기미가 보 이지 않았다. 내가 마법의 말을 하면 대부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며, 구름이 몰려오는 부작용도 아주 가끔씩 일어났다. "구름이 자꾸 오는 이유가 도대체 뭐야?" 나는 하도 답답해서 한 번 아자닌에게 물어보았다. "글쎄요. 수르카 님의 마음에 구름을 부르는 마음이 섞여 있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 말은 전에도 들었다구. "구름 하면 뭐가 떠오르세요?" 응? 아자닌이 되묻기도 하네? "음...글쎄..." 나는 얼마 전 중앙 광장에서 구름이 머리 위를 지나갈 때까지 가만히 서서 사비오 영감이 말한 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던 일이 떠올랐다. "기다리는 게 지겹다...뭐 그런 생각?" 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자 아자닌은 한 참 동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무 말도 없다가 평소의 억양 없는 목소리로 돌아가 '자, 그럼 다시 한 번 해 보 세요'하고 말했다. 아! 지겨워! 그러나 시간은 어떻게든 흘러갔고 드디어 성년의 신 마소드의 날은 오고야 말았다. 다행인지 아닌지 나는 라스폼을 만나지 않고 성년의 날을 맞게 된 것 이다. (사실 마소드의 날을 기다리는 시간이 하도 지겨워 그냥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하지만 나는 청소도 하지 않고 스타바에게 여물을 주거나 목욕을 시켜주지 않아도 되는 생활을 즐긴 시간이 더 많았다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라이짐은 그 동안 아주 바빴던 모양이었다(조직을 울찬에게 넘겨주기 위한 과정과 돈 문제, 가족 문제, 다른 똘마니 조직과의 관계 등. 아마 나보다 백 배는 더 바빴으리라). 그리고 가끔씩 꿈을 꾸었다(날 쫓는 사람이 루비오 이었다가 이무르 아주머 니였다가 바코쿠였다가 하고 바뀌기만 했을 뿐이지, 늘 같은 꿈이었다). 그리 고 성년의 날 아침이 되어서야 나는 꿈속의 양날 검이 성년의 신 마소드의 검 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검이지만 남들에게 들은 말 때문에 아마 꿈속에 그려진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면 나도 역시 다른 아이 들처럼 성년의 날에 신경이 많이 쓰이는 모양이다. 해가 지고, 여기 저기서 연금술사의 불빛이 비추어질 즈음, 나는 중앙 광장 으로 나갔다. 중앙 광장에는 일찍부터 모인 내 또래 아이들로 가득했다. 몇 몇 병사들이 예행 연습을 하고 있는 것이 보였고, 일 년에 단 한 번 평민들을 위해 연주하는 시청 소속 악단이 악기를 조율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마 소드의 날 외에는 성밖으로 나가는 일이 없다고들 한다. 그들은 평민들이 대 부분이지만 평민의 것이 아니라 귀족의 재산 같은 거기 때문이라고 한다. 설 마 사람을 재산이라고 생각할려구...) 이제 곧 나는 성년이 되고, 내일이면 팜 산맥으로 여행을 떠난다. 라이짐과 는 시간 약속까지 정확하게 다 해두었으니까 별 문제는 없을 것이었다. 어 그런데, 저거 봐라. 라이짐이 이무르 아주머니와 함께 중앙 광장으로 걸 어나오고 있었다.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주점에서 항상 지저분한 작업 복을 걸치고 있던 이무르 아주머니가 단정한 예복을 차려입고 나타난 것이다. 게다가 얼굴엔 즐거운 빛이 가득했다. 부모의 마음이라는 게 다 저런 걸까? 그렇게도 엉덩이를 걷어차던 라이짐이 었지만 성년의 날이 오니까 이렇게 차려 입힌다는 건. 이무르 아주머니의 뚱 뚱한 몸에 예복은 그다지 잘 어울리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허리를 넉넉하게 만 들어 놓아 보기에 아주 흉하지 않은 것만은 다행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무르 아주머니가 예복으로 잘 차려입고 나타났다는 것 뿐 만이 아니었다. 어색하게 걷고 있는 라이짐도 예복을 입고 나타난 거였다. 그 촌스러운 모습이라니! 게다가 내일 당장 결혼하는 새신랑처럼 깨끗하게 씻어 발그레해진 볼하며. 성년의 날을 맞은 젊은이답게 짧게 자른 머리하며. (기름 까지 바른 모양인데. 바보!) 이거 정말 가관이로군. 나는 웃음이 절로 나왔다. 특히 벌레를 씹은 것 같 은 얼굴을 하고 있는 라이짐은 정말 웃겼다. (지금 라이짐은 자신이 어떤 꼴 인지 잘 알고 있을까? 안다면 저럴 순 없겠지. 완전히 귀족이군, 귀족이야! ) "수르카!" 이크. 이무르 아주머니가 나를 불렀다. 이무르 아주머니가 부르면 겁부터 난다니까. "당장 이리 와서 라이짐 옆에 서!" 나는 번개같이 뛰어가 라이짐 옆에 섰다. 이 사람 많은 곳에서 그것도 성년 의 날 이무르 아주머니에게 엉덩이를 걷어차이기는 싫었다. "이걸 달아라" 이무르 아주머니는 내게 마소드의 상징인 마법검 모양의 장식을 달아 주었 다. 그러고 보니 라이짐의 가슴에도 그 장식이 달려있었다. 나는 이무르 아주 머니를 바라보았다. 그 무시무시한 이무르 아주머니에게도 이런 면이 다 있었 다니. 조금 가슴이 찡했다. "볼만한데, 라이짐" 라이짐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내가 말하자 라이짐은 인상을 쓰며 나를 노려 보았지만 이무르 아주머니 눈치를 한 번 살피더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 는 낄낄거리면서 주변을 한 번 둘러보았다. 나 같은 고아들은 쉽게 눈에 띄었 다. 대리부모 옆에서 꾀죄죄한 옷을 입고 있는 것들은 하나같이 다 고아들이 었다. 제대로 된 예복을 갖춰 입고 있는 아이들은 전부 부모 있는 아이들이었 고. 비록 라이짐을 놀리기는 했지만 예복을 입고 나온 아이들과 내 모습을 비 교해 보자 나는 내가 고아라는 사실을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과연 내 부모님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사실 마법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배우고 싶었던 마법이 기억을 되살리는 마법이었다. 하지만 사비오 영감 은 떠나버렸고, 아자닌은 내가 그 말을 듣고 실험해 보기까지는 그런 마법이 있는지도 없는지도 모를 것이다. 다시 한 번 나는 내가 고아라는 사실이 떠올랐고, 부모님에 대한 생각 외에 다른 생각은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사비오 영감이 그리워질 만큼. (빌어 먹을. 정말 끔찍하게 부모님이 그리운 모양이군. 사비오 영감을 다 떠올리다 니) 중앙 광장 한 복판에는 시장, 하리오 오르테가가 올라갈 연단이 마련되어 있었고 여기저기서 축제 때 쓸 술과 고기를 준비하느라 소란스러웠다. 이무르 아주머니도 자신의 아들이 성년이 되는 만큼 꽤 많은 술과 고기를 내놓았겠 지. 아무리 탐그루의 상인이라고 해도 지킬 것은 지키는 법이다. 그게 탐그루 시민의 명예심이지. 해가 완전히 지자 여기저기서 연금술사의 등이 켜졌고, 사람들은 제각기 자 신이 서 있어야 할 곳으로 가서 섰다. 나와 라이짐같이 성년식에 참가할 사람 들은 중앙 광장의 연단 밑으로, 참관하는 귀족들은 연단 위에 마련된 귀족 석 으로, 나머지 부모들은 광장 주변에 쳐진 울타리 밖으로. 식을 거행한다는 말을 하기 위해 시장의 일급 참모로 알려진 볼다니 아르타 가 연단 위에 서자 중앙 광장은 조용해졌다. 엄숙한 분위기가 흐르기 시작했 다. 이제 일 년에 한 번 있는 성년의 신 마소드의 날 행사와 뒤이어지는 축제 가 시작될 참인 것이다. "축제 때 너 뭐 할거야?" 라이짐이 내게 물었다. "글쎄...라짐에게 사랑고백이나 해볼까?" 성년의 신 마소드의 날 축제 때에는 마음에 드는 여자라면 누구에게나 춤을 권할 수 있고 마음만 맞는다면 그 이상의 일도 얼마든지 허용된다(물론 신분 이 같다면 말이다). "그렇다면 나는 그 '사랑스러운' 뒤로아에게 청혼이나 해야겠구나" 우리 둘은 키득거렸다. 하지만 어딘지 뒷맛이 쓴 키득거림이었다. 일전에 강변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라서였다. "이제 곧 여기를 떠날 거야. 잘 봐둬. 어쩌면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잖아. 그나저나 내가 떠나도 탐그루에서 날 그리워할 여자친구 하나 없다는 게 좀 섭섭한 걸" 라이짐의 이 말을 듣자 나도 성년이 되도록 마음을 고백할 여자친구 하나 없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난 도대체 이 나이 먹도록 뭘 한 걸까. (열 네 살도 많이 먹었다면 많이 먹은 나이다) 이래저래 씁쓸한 성년식이 되겠군. 부모도 없고, 평민에다가, 여자 친구 하나 없으니 말이다. 그나마 내일이면 탐그루를 떠난다는 것으로 마음에 위안을 삼아야지.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N:김상현 #8870/10199 ━━━━━━━━━━━━━━━━━━━━━━━━━━━━━━━━━━━━━━━━ 제 목:[탐그루] 성년의 신 마소드 - 19 - 관련자료:없음 19/19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0-28 01:21 조회:1146 탐그루 # 마법은 마음이다 - 마음은 칼이다 # "지금부터 성년의 신 마소드의 날 행사를 시작하겠습니다. 모두 정숙해 주 십시오. (사실 이 말은 필요 없을 만큼 중앙 광장은 조용했다) 먼저 시장님의 연설이 있겠습니다" 볼다니 아르타가 말하자 시장이 연단 위로 올라섰다. 생각보다 작은 키에 뚱뚱한 체구였다. 저렇게 생긴 시장이 어떻게 뒤로아같이 예쁜 딸을 얻을 수 있었을까? 역시 귀족의 혈통은 평민들과는 다른 걸까? "아. 저는 시장 하리오 오르테가입니다. 이렇게 성년이 되는 젊은이들을 많 이 보게 되니 참으로 가슴이 뿌듯합니다" "세금 낼 사람들이 많아져서 그렇다는 말이야" 시장의 말에 라이짐이 해설을 붙였고 그래서 그 부분이 시장의 연설 중 가 장 재미있는 부분이 되었다. 이어지는 시장의 연설은 끝도 없이 계속되었고 덕분에 나는 연단 위의 귀족들을 하나하나 살펴 볼 수 있었다. 연금술사의 빛 을 받은 귀족들은 하나같이 신비하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그들이 입고 있 는 옷들도 하나같이 빛을 잘 받을 수 있는 환한 색 옷들이었다. 특히 시장의 딸 뒤로아는 정말 아름다왔다. 세세한 것까지 신경을 많이 쓰 는 군. 귀족과 평민의 차이는 저런 자잘한데 신경을 쓰느냐 쓰지 않느냐겠지, 설마 혈통이 달라서 그렇겠어? (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뒤로아의 얼굴은 아 무리 봐도 예뻤다) 그런데 나는 연단에서 루비오 오르테가를 발견하고는 놀라 소스라쳤다. 아 니, 저 자식은 성년도 아닌 주제에 어떻게 저 위에 올라갈 수 있는 거지? "...그리고 오늘은 제 딸 뒤로아가 위대한 영주 가이르 오르파의 셋째 아들 루비오 오르테가를 남편으로 맞는 것을 약속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여러분들 의 축복을 바랍니다" 여기저기서 탄호성이 울려 퍼졌다. 루비오와 뒤로아는 일어나 군중에게 인 사했다. 그런데 꼭 한 순간 루비오가 나를 싸늘한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섬ㄳ했다. "연설이 끝난다니 즐거운 모양이야" 라이짐이 환호하는 군중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그의 이런 삐딱한 말투 가 마음에 꼭 들었다. 지금의 내 심정을 대신 말해주는 것 같아서였다. 그러 고 보니 루비오는 나와 정반대의 사람이군. 영주의 아들에 이제 곧 뒤로아와 결혼까지 하게 된다니 말이다. 나는 가슴에 달려있는 장식을 한 번 쓰다듬었 다. "이제 성년의 선서가 있겠습니다" 볼다니 아르타가 말하자 장내는 엄숙해졌다. 볼다니는 헛기침을 한 번 하더 니 맹세문을 낭독하기 시작했다. "그대들은 비스토브레 제국의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황제의 권한을 위 임받은 자들에 대한 충성을 성년의 신 마소드 앞에 맹세하겠는가" "예!" 볼다니가 맹세문을 읽자 모두 동시에 대답했다. "빌어먹을 루비오 같은 녀석에게 복종하라는 말이군" 라이짐의 말이었다. "그대들은 비스토브레 제국의 질서를 지키고 응당한 질서의 대가를 받을 것 을 성년의 신 마소드 앞에 맹세하겠는가" "예!" "저 말은 이제부터 잘못을 저지르면 지하 감옥으로 가거나 교수형을 당한다 는 말이지" 라이짐이 해석했다. "그대들은 조국, 비스토브레 제국을 소중히 여기고 제국을 위해 칼을 들 수 있는가" "예!" "저 말은 전쟁이 나면 나가 싸우다 죽으라는 말이야" 라이짐의 해설은 계속되었다. "그대들은 조국과 가족, 그리고 개인의 명예를 소중히 여기고 그것을 위한 신성한 결투의 의무를 지겠는가" "예!" "저 말 하나는 마음에 드는 군" 이번에는 내가 말했다. "그러면 이제부터 탐그루의 마법검 마소드의 제단을 올리고 단에 연금술의 불을 올리겠습니다" 맹세의 징표를 말하는 것이었다. 마법검 마소드가 예복을 입은 병사에 의해 천에 쌓여 연단 위에 마련된 제 단 위에 올려졌다. 그리고 천이 벗겨지자 여기저기서 탄성이 나왔다. 마법검은 처음 보는 것이었지만 나는 그것을 보는 순간 그것이 결코 낯설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검은 바로 꿈속에 나오던 바로 그 은빛의 장검 이었다. 그리고 그 검을 보는 웬지 모를 친근감이 느껴졌다. 가족에게서나 느 낄 수 있는 그런 친근감이 마소드의 검에서 따스하게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나는 정신없이 그 마소드의 검을 바라보았다. 내 속에서 꽝꽝 얼어 있던 슬픔 과 외로움이 천천히 녹아내렸다. 연금술사의 빛이 켜지기도 전에 검이 먼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왜 그런 지 나중에 아자닌에게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그 검은 나에게 반응하고 있었 다. 말을 통하지 않은 마법을 체험하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나는 분명 확신할 수 있었다. 마소드의 검은 내게 반응하고 있다. 가슴이 뛰고 숨기 벅차 오르 기 시작했다. 연단의 귀족들이 수군거렸다. 마소드의 검이 빛을 발하다니 어찌된 일인지 자신들도 알 수 없나보다. 그러나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그것 또한 준비된 식 순으로 받아들였는지 다시 한 번 탄성을 질렀다. "아버지!" 나는 악몽에서 깨어날 때처럼 소리쳤다. 그러나 그 외침은 탄성 사이로 녹 아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내가 외치는 순간 나는 연단 저 너머에서 나를 바 라보는 눈빛을 볼 수 있었다. 그 눈빛은 스타바의 눈빛이었다. 정확하게는 스 타바와 스타바를 타고있는 사비오 영감의 눈빛이었다. 마음으로 사비오 영감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수르카야* 이제* 너는* 성인이다* 떠나거라* 시간이 없다* 그리고* 잊지 말거라* 너와* 나는*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사비오 영감은 마법으로 이렇게 내게 속삭였다. 나는 사비오 영감 쪽으로 가려고 했다. 하지만 마법검에 맹세를 하기 위해 성년이 되는 소년들이 움직 이기 시작하는 바람에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나갈 수가 없었다. "스승님!" 나는 소리쳤다. 그러나 그 소리는 사비오 영감에게 닿지 못했고 사비오 영 감은 저 멀리 빛이 닿지 않는 어둠 속으로 천천히 사라져갔다. 내가 본 것은 진짜 사비오 영감이었을까, 아니면 사비오 영감의 마법이었을 까. 나는 아자닌에게 당장 묻고 싶었지만 사람들이 너무 많아 함부로 불러낼 수도 없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몰렸다가는 어디에 있을지 모를 라스폼에게 발 각될 염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잠자코 줄을 서서 연단으로 오르 고 있는 사람들을 따르기로 했다. 연단에 오른 소년들은 먼저 시장과 귀빈들에게 인사를 하고 성년의 검에 입 을 맞추고 있었다. 부모가 있는 예복을 입은 사람들이 먼저였고, 나 같은 고 아는 뒷 쪽에 모여 있었다. 이런 순간에도 내가 고아라는 것을 느껴야 하다니 억울하고 분했다. 연단 위에서 마소드의 검에 입을 맞추고 있는 소년들이 보였다. 저 순간이 바로 맹세의 순간이었다. 바로 저 순간을 지나야지만 진정한 성인이 되는 것 이다. 저 순간을 위해 나와 라이짐은 이곳 탐그루에서 떠날 날만을 기다리며 살아왔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단 위에 라이짐이 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시장의 일급 참모로 알려진 볼 다니 아르타가 연단 위에 오른 라이짐에게 인사하는 순서와 방법을 옆에서 알 려주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혹시라도 연단 위에 오른 사람이 실수 할까봐 그 러는 모양이었다. 시장이 높긴 높군. 라이짐이 마법검에 입을 맞추는 모습이 보였다. "라이짐!" 크게 라이짐의 이름을 부르며 환호하는 소리가 들렸다. 라이짐의 패거리들 과 이무르 아주머니인 모양이었다. 라이짐은 환호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 를 돌리더니 씩 웃어 보였는데, 나는 그 모습을 보고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 다. 라이짐 녀석. 부모도 있고 환호해 줄 사람도 있다니. 참 행운아야. 그나 저나 내가 마소드의 검에 입을 맞출 때에도 라이짐의 패거리들이 환호성을 울 려줄까? 그러면 나도 라이짐처럼 씩 웃으면서 환호성에 답해줘야지. 그렇게 생각하자 다시 흥분으로 가슴이 뛰어 올랐다. 그순 연단 위의 루비오의 얼굴을이 보였다. 루비오는 라이짐의 얼굴을 자세 히 보더니 연단 뒤에 서 있던 누군가를 불렀다. 잘 알고 있는 얼굴, 바로 쥬 크였다. 루비오는 쥬크에게 뭐라고 속삭였고 쥬크는 고개를 끄덕이며 연단 밑 으로 내려갔다. 루비오는 저 순간에 무슨 말을 했을까. 설마 나를 잡아오라는 말을 하지는 않았을 테고. 오늘은 다른 날도 아닌 성년의 신, 마소드의 날이 라구. 줄은 점점 줄어들었고 나는 이제 곧 마소드의 검에 입을 맞추게 될 거였다. 아마도 마소드의 검에 입을 맞추게 된다면 아버지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를 지도 몰라. 아니, 그렇지는 않더라도 무슨 마법의 기운이 내게 찾아올 것이 분명해. 이제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불과 열 명 남짓이었다. 마소드의 검의 마 법을 느꼈던 내가 입을 맞추면 어떤 일 일지는 알 수 없어도 뭔가 알 수 없는 다른 일이 생길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어쩌면... "수르카!" 생각을 하고 있는데 라이짐이 뒤에서 나를 부르며 내 팔을 잡았다. 내가 뒤 돌아보자 라이짐은 입으로 손가락을 가져가면서 쉿, 하는 소리를 냈다. "계획을 바꿔야겠어. 여길 피해야겠다, 수르카" "뭐라고?" "루비오가 너를 잡기 위해 자치대를 풀었데. 우리 애들이 알려줬어. 아마 귀족에 대한 불경죄로 너하고 나를 고발한 모양이야. 이젠 성인이니까... 잘 못하면 교수형을 당할 수도 있어. 그자식 어쩌면 성년의 날까지 이를 갈며 기 다렸을지도 몰라. 지독한 놈이야" 라이짐이 말했다. "무슨 소리야? 나는 아직 마소드의 검에 입도 못 맞췄다구" "귀족들이 언제 그런 거 따지는 거 봤어? 연단에서 루비오가 나를 봤어... 자치대원들은 나도 쫓고 있는 모양이더라. 빌어먹을. 미안하게 됐다. 못 알아 볼 줄 알았는데..." 이렇게 말하는 라이짐의 얼굴에 미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 일은 그때 끝난 거 아니야?" 나는 푸념하는 투로 말했다. "생각할수록 분했나보지. 하여간 네 이름을 정말 기억하기는 기억한 모양이 야" 그때였다. 자치 대원 셋이 나를 보고 뭐라고 속삭이더니 내 쪽으로 다가오 는 모습이 보였다. "빠져나가자. 어서!" 나는 라이짐을 따라 사람들 사이를 정신없이 빠져나갔다. 그 와중에 라이짐 의 예복은 엉망이 되었다. 도망치는 상황이면서도 나는 계속 뒤를 돌아보았 다. 멀리 있는데도 마소드의 검은 선명하게 보였다. "어쩔 수 없어. 해야* 할* 일이* 먼저야* 하고* 싶은* 일은* 가장* 나중이 라구*" 라이짐이 내게 말했다. 그의 말이 맞았다. 나는 결국 앞만 보고 달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라이짐의 말에서 나는 또 마법의 말을 느낄 수 있었다. 분명히 전에도 느낀 적이 있는 말인데... 그런데 우리가 빠져나가는 걸 알아차린 사람이 또 있었다. 이무르 아주머니 였다. "라이짐!" 이무르 아주머니가 소리쳤다. "수르카. 여기서 일단 갈라져야겠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어머니한테 인사도 없이 탐그루를 떠날 수는 없는 법 이니까. "별빛 주점 앞에서 만나자" "그래" 라이짐이 말했고 나는 순순히 동의했다. '제발'이라는 말이 나올 때까지 싫 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다. 이 급박한 순간에도 그런 생 각이 들다니. 순전히 마소드의 검에 입을 못맞췄기 때문이다. 마소드의 검에 입을 못맞추곤 성인이 됐다고 할 수 없으니, 어째야 할지. 라이짐은 성인인 데, 나는 언제까지 꼬마로 남을 지도 모르고... 라이짐은 마소드의 검에 미련이 남아 우물쭈물 하고 있던 내게 빨리 별빛 주점으로 가라고 손짓한 다음 이무르 아주머니에게 다가가 뭐라고 소리를 지 르며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젠장. 오늘만은 엉덩이를 걷어차지 말았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라이짐을 걱정할 틈도 없이 나는 중앙 광장을 벗어나자마자 정신없 이 뛰어야 했다. 자치 대원 서넛이 중앙 광장에서 벗어나는 길목에서 우리를 발견하고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N:김상현 #8871/10199 ━━━━━━━━━━━━━━━━━━━━━━━━━━━━━━━━━━━━━━━━ 제 목:[탐그루] 성년의 신 마소드 - 20 - 관련자료:없음 26/26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0-28 01:22 조회:1095 탐그루 # 마법은 마음이다 - 마음은 칼이다 # 정신없이 뛰기는 했지만 이제 어디로 가지? 나는 일단 내가 숨어 지내던 창 고 쪽으로 도망치기로 마음먹었다. 아무래도 그곳이 가장 안전할 것 같아서였 다. 게다가 내 배낭과 칼이 그곳에 있기 때문에 다른 곳으로 도망칠 수는 없 었다. 게다가 소중한 금화를 넣은 주머니도 그곳에 있는데 말이다. 내 금화도 아니고 언젠가 사비오 영감을 만나면 다시 돌려줘야 할 그 금화였다. (물론 급한 일이 생기면 잠시 빌려쓰기는 하겠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창고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잠시 숨을 고르면서 타코 가죽으로 만든 물통에 담긴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금세 기운이 솟는 것 같았 다. 그렇지만 이곳에 오래 있을 수는 없었다. 언제 자치 대원들이 이곳을 찾 아낼 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마음속으로 딱 백까지만 센 다 음에 별빛 주점으로 뛰어가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숫자를 세는 내내 시간이 천천히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슴이 두근두근 막 뛰었다. 젠장. 이럴 때 스타바라도 있었으면 훨씬 빨리 도망칠 수 있었을 텐데. 사비오 영감 이 타고 가 버릴 줄 누가 알았겠어. 이런 생각 때문에 숫자를 몇 번 다시 처음부터 세기는 했지만, 결국에는 백 까지 셀 수가 있었다. 나는 창고에서 밖으로 나갔다. 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멀리서 들려오는 축제의 음악소리만 빈 길을 울리고 있었다. 매년 듣는 음악이지만 탐그루의 음악은 좀 지나칠 정도로 시 끄럽다. 북 두 개 와 징 하나는 기본이고 그 위에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부는 악기들이 대 여섯 개는 있기 마련이다(아마 넓은 장소에서 연주하기 때문인 것 같다. 성안에서는 조용한 음악을 연주할지도 모르지). 북소리가 일정하게 들리고 있다. 나는 그 소리에 귀를 맡겨본다. 소리가 점점 커진다. 응? 난 지 금 중앙 광장이랑은 반대쪽으로 가고 있는데... "수르카!" 날카롭고 차가운, 내가 잘 알고 있는 음성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멈추어 섰다. "네가 성년의 날 행사에 오리라는 건 알고 있었지. 하지만 마소드의 검이 반응을 보이다니...그건 예상 못했어. 사비오가 그렇게 대단한 제자를 키우고 있는 줄은 몰랐어" 라스폼은 이렇게 말하며 내게 다가왔다. 나는 배낭 끈을 조이고 손에 들고 있던 칼을 뽑았다. 진짜 검사처럼 뽑기는 했는데...그런데 목도보다 얇은데 왜 이렇게 무거운 거야, 이거. "오호라. 또 덤비시겠다구? 좋지. 하지만 이게 안보이니?" 그러고 보니 라스폼의 검은 성복 옆에 그림자처럼 보이는 큰 뭔가가 있었 다. 저렇게 큰 사람은 있을 리가 없는데. 그림자라고는 하지만 어깨가 너무 넓은 걸.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그 그림자가 거리에 켜져 있는 연금술사의 등불 앞에 섰다. 으악! 나는 놀라서 칼을 떨어뜨릴 뻔했다. 그것은...사람이 아니었다. 살이 있어 야 할 곳에 털이 수북하게 나 있었고 코와 입은 털에 가려 보이질 않았다. 다 만 눈만은 그것이 털 덩어리가 아니라 생물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는데, 그나마 붉게 빛나고 있어서 도저히 살아있는 그 무엇이라곤 생각하기 어려웠 다. "내가 혼자 오지는 않을 거라고 했지?" 라스폼이 말했다. 라스폼의 본모습을 알고 있는 나는 그렇게 말하는 라스폼 의 모습이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었다. 라스폼은 마치...전설 속의 마녀 에질 리를 연상시켰다. 저렇게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있지만 저 성복 밑에 어떤 사 람이 감추어져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리라. "바루. 이 친구 이름이 바루야. 너무 무서워하지 마. 죽이지는 않을 테니 까. 네가 마법검과 반응할 때 알았지. 네가 쓸모 있는 놈이 될 거라는 걸"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을 했다가는 간신히 균형을 잡고 있는 내 칼끝이 흔들릴까봐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우습게 보였다가는 바로 죽음이다. "난 너를 죽이지 않아 수르카" 라스폼이 말했다. 그런데 말투는 꼭...내가 처음 본 라스폼 같은 말투였다. 부드럽고, 저항하기 힘든 바로 그런 말투였다. "성황청으로 가자. 네 힘이 필요해. 어쩌면 네가 우리가 찾고 있는 사람인 지도 모르기 때문이야. 아무 것도 무서워 할 건 없어. 그저 약간의 시험만 받 으면 돼" 라스폼은 이렇게 말하면서 점점 더 다가왔다. 나는 자연히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바루라는 짐승(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지만)이 내 옆으로 돌기 시작했 다. 아마도 바루가 내 측면을 노리고 라스폼이 내 앞에서 공격할 모양이었다. "이게 뭔지 기억하겠니, 수르카?" 살짝 미소까지 지어보이며 라스폼이 말했다. 그녀의 손에는 성구가 들려 있 었는데 전에 본 것 보다 길고 화려한 무뉘가 음각 되어있었다. 척 보기에도 무시무시한 힘이 담겨있을 것 같았다. "그냥 순순히 따라와. 너 혼자 힘으로 우리 둘을 이길 수 있을까? 네가 운 이 좋아서 나를 벤다고 해도 바루가 널 가만두지 않을 거야. 바루는 내가 부 리는 괴물이 아니거든. 나하고 좀비하고 똑같이 생각해서는 안되지. 바루는 나와 계약을 맺은 친구란다. 내가 죽어도 바루는 끝까지 그 계약을 지킬 거 야. 만약 바루를 네가 죽일 수 있다고 해도...아무 소용없을 거야. 내 손에 든 이게 널 산산조각으로 내버릴 테니까. 아마 시체도 찾기 어려울 걸?" 라스폼은 이렇게 말하면서 웃기 시작했는데, 그 웃음소리는 멀리서 들려오 는 축제의 음악소리와 섞여서 더욱 무시무시한 느낌을 주었다. 어찌되었건 라스폼의 말은 맞는 말이었다. 내가 살아 나갈 방법은 아까 처 음 만났을 때, 등을 돌려 도망치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이제 와서 등을 돌렸 다가는, 저 성구가 어떤 마법을 가지고 있건 간에, 나는 죽을 게 뻔했다. "자. 칼을 버리고 이리 와. 나하고 함께 가자. 성황청은 생각보다 좋은 곳 이란다. 자나크 교구로 함께 가자. 자나크 교구는 아름다운 곳이야. 조금 규 모가 작지만 가족적인 분위기지. 타실 대교구나 스파일 대교구보다 예쁜 누나 들도 많단다. 모두 너를 동생으로 여겨 귀엽게 대해 줄 거야. 자. 어서 칼을 버리고..." 가족적인 분위기라고...? 치사한 놈. 그런 말에 내가 넘어갈 줄 알고! 나는 칼을 버려야 할 것인가 말아야 할 것인가를 잠시 고민해 보았다. 버리지 않는 다면 죽는 수밖에는 없다. 나는 라이짐의 말을 떠올려 보았다. 해야할 일이 먼저고 할 수 있는 일은 나중이다. 나는 여기서 살아서 도망쳐야 한다. 죽는 일은 나중에 아무 때라도 할 수 있다. 성년이 되더니 나도 좀 어른스러워졌 군. 이런 생각을 다 하고 말이다. 하여간 나는 여기서 살아서 도망쳐야 했다. 죽거나 잡혀서는 절대 안 된다 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떻게? 나에게는 방법이 없었다. 아자닌은 정령에 불과하고 라이짐은 별빛 주점 앞에 있을 거였다 . "여기 있었구나!" 어디서 많이 들어본 목소리가 들린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길에 서 있었 던 세 사람의 고개가 순간 소리가 들린 쪽으로 돌아갔다. 그 자리에는 비쩍 마른 사내가 양손에 단도를 들고 서 있었다...가 아니라 순식간에 단도 두 개 를 바루의 왼쪽 가슴과 오른 쪽 가슴에 박아 넣었다. 기회는 이 순간뿐이다! 나는 아무 생각도 없이 주문을 외웠다. "모든* 빛깔* 있는* 것들은* 나에게* 시간을* 빌려다오*" 그 순간 모든 것이 멈춘 듯 느껴졌다. 바루의 움직임도 둔해졌고, 라스폼은 내 쪽으로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아무려면 어떤가.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나는 그대로 몸을 날려 라스폼의 성구를 베었다. 성구는 마치 진검과 맞닿은 목도처럼 깨끗하게 잘렸다. 성구의 끝은 얼마간 허공에 둥실 떠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성구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는 라스폼이 성력을 발휘 하는 말을 시작할까 두려워 바로 라스폼의 목에 칼을 들이댔다. 사빈은 단도 두개를 바루의 몸에서 빼내었고 바루는 우우 소리를 한 번 내 더니 바닥으로 쓰러졌다. 단 한방이었다. 전에 술집에서 본 것과 마찬가지로. "아이구 세상에! 호박이 덩굴째 굴러 들어왔네. 이 사스카치의 털이 얼마나 구하기 힘든 건데... 그냥 탐그루를 떠나려고 하는데 어디선가 사스카치의 냄 새가 나더라니, 나..참, 난 진짜 타고난 사냥꾼이라니까. 어? 그러고 보니 너 전에 날 구해준 꼬마구나? 라이짐이라고 했지?" 사빈이 주저리 주저리 떠들기 시작했다. 이봐요. 아무리 떠드는 걸 좋아해 도 지금 상황을 보고 말하라구요. "어...어떻게 한 방에 죽일 수 있었지?" 라스폼은 고개도 돌리지 못하고 눈만 돌려서 사빈에게 물었다. "아, 사스카치가 심장이 두 개라는 건 나 정도 되는 사냥꾼이면 다 알고 있 는 일이야. 전에도 한 번 싸워 본 적이 있거든. 저기 대 비스토브레 산맥의 끝자락이었는데...거기서도 사스카치 한 놈을 잡았지. 그런데 그놈처럼 이놈 도 인간과 계약을 한 모양이지? 둘 중에 누가 이놈하고 계약을 한 거야?" 사빈은 이렇게 말하고는 나와 라스폼을 한번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내가 칼 을 들이대고 있는 동안 사빈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라이짐! 너구나! 이거 미안해서 어쩌지. 아마 독주 한 병으로 이 놈하고 계약을 한 거 같은데... 아. 놀라지 마. 사스카치가 독한 술이라면 영혼도 판 다는 건 나 정도쯤 되는 사냥꾼이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니까. 그나저 나 이놈이 죽었으니 나하고 한 판 붙을 생각인가? 설마 아니겠지. 사스카치하 고 계약한 놈 치고 사스카치한테 목숨 거는 놈이 있다는 얘기는 들어 본적이 없어. 알 테지만 인간이라는 게 다 그렇지. 그냥 이용하고 이용당하고...뭐 그러는 거 아니야? 음. 그런데 그 미인 성직자는 누구신가?" 이봐요 사빈. 나를 라이짐으로 잘 못 본 건 이해할 수 있지만 나를 좀비 취 급하지는 말아달라고요. 이런 꼬마가 어떻게 저런 괴물하고 계약을 하겠어요. "구해드리고 싶은 마음은 간절합니다만 사냥꾼은 돈이 되는 사냥감하고만 싸우는 법이거든요. 상대방이 먼저 덤빈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말이에요" 하지만 사빈의 음탕해 보이는 눈동자는 라스폼이 미인이긴 하지만 성직자기 때문에 (돈이 없을 테니까..) 못 구해 주겠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이 보였 다. "돈이 되는 사냥감만 죽인다고 했나?" 라스폼이 말했다. 나는 칼을 더 깊숙이 들이댔지만 라스폼은 필사적으로 말 을 이었다. "이 친구 팔을 하나 잘라주면 금화 열 닢 내지. 내가 무사해지면 스무 닢 주고. 거래하겠나?" 사빈은 잠시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결론이 났다는 듯, 손가락을 딱 하고 튕기더니 말하기 시작했다. "잘 모르시는가본데 사냥꾼은 반드시 사냥감을 단 한번에 죽인답니다. 아무 리 짐승이라지만 결코 고통을 주어서는 안되지요. 그런데 하물며 사람이라니 요? 하하...사양하겠습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물론 라스폼이 눈치채지 못하게 속으로 말이 다). "그럼 금화 백 닢! 백 닢이면 어떤가. 평생 아무 것도 안하고 살 수 있어!" 라스폼이 소리치자 나는 라스폼의 목에 칼을 더 들이대었다. 죽여야 하나? 하지만 어떻게? 내가 길거리에서 성직자를 죽여야 한단 말인가? 내가 살기 위 해서라고는 하지만 자치 대원들이나 루비오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 이다. 아니, 그런 이유보다는...솔직히 나는 내가 누군가를 죽여야 한다는 상 황이 더 두려웠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그런 생각을 허용하지 않고 있었다. 사빈은 백 닢이라 는 말에 양손에 단도를 들고 내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사빈! 내가 목숨까지 구해줬는데 이제 와서 배신을 하겠다는 거야!" 나는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순간, 사빈의 얼굴에 의아하다는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내가 너의 사스카치까지 죽였는데 어디 그럴 수 있나. 게다가 이 사빈, 의 리와 명예를 빼면 아무 것도 안 남는 사람이라고 말 했을 텐데" 사빈은 이렇게 말하고는 내 목에 각각 단도를 들이밀었다. 나는 가슴이 철 렁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이제 죽었구나. 그런데 사빈은 엉뚱하게도 반대 편 손에 든 단도로 라스폼의 성복을 들추더니 몸을 단도로 더듬었다. 어? 이 거 혹시 변태 아닐까? "내가 생각해 봤는데 이 방법이 가장 좋겠어. 라이짐. 너는 이 성직자를 죽 일 마음이 없어. 그랬다면 벌써 죽였겠지. 그리고 성직자 님. 성직자 님은 살 고 싶으신 모양이군요. 그렇다면 이 수 밖에는 없지요" 나는 내 목에 닿은 단도를 바라보며 침을 삼켰다. 땀 한 방울이 등을 타고 내려가는 것이 느껴졌다. "라이짐은 칼을 내려" 나는 칼을 내렸다. 목에 들어와 있는 칼 앞에서는 내가 이제 성인이 되었건 어쨌건 간에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이런. 나는 정말 꼬마에 불과한 걸 까. "자. 이제 성직자 님은 뒤를 돌아보지 말고 뛰는 겁니다. 성직자 님의 하나 뿐인 성구는 부러져 있고 말로 하는 마법은 그다지 멀리까지 효력이 없다는 것 아니까 멀리, 될 수 있으면 멀리 가세요. 말로 하는 마법이 가능한 곳에서 는 제 단도도 가능할 테니 다른 생각은 마세요. 만약 돌아본다면 그때는 당신 이 모시는 신의 곁으로 바로 가게 될 겁니다. 제 실력은 아까 보셨으니 믿겠 지요?" 라스폼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몸에 칼이 닿으면 성직자고 어른이고 아 무 소용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나도 꼬마에 불과한 건 아닌가 보군. 그건 다행이야. "자, 이제 뛰는 겁니다. 하나! 둘!" "수르카. 다시 만나게 될 거다. 그때까지 건강해라. 너는 그럴만한 가치가 있으니까..." 라스폼은 이렇게 말하고 뒤돌아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대단한 자존심이었 다. 역시 어른은 틀렸다. 사빈은 한참동안 라스폼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더니 어느 정도 떨어졌다 싶 자 내 목의 칼을 거두었다. "라이짐. 이 수밖에는 없었어. 이해해라" 나는 사빈의 말에 수긍했다. 그러고 보니 사빈도 그렇게 허풍만 떠는 건 아 닌 모양이다. 실력도 있는 사냥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휴, 그나마 안심이다. 만약에 저 성직자가 뒤돌아 섰다면 나나 너나 다 죽 었을 거야. 난 단도 던지는 건 자신 없거든" 사빈이 말했다. 음... 그렇다고 실력이 있는 것도 아닌 것 같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다만 남의 일에 함부로 끼여드는 건 내 체질이 아니 라... 하지만 난 너한테 빚진 게 있으니 어쩔 수 없지, 뭐. 라이짐. 이만하면 빚은 갚은 셈이라고 생각되지만 그나저나 네 사스카치를 죽였으니 어쩌지. 그 런데 너 혹시 자치 대원들에게 쫓기고 있는 거냐?" 나는 사빈의 마지막 말에 고개를 돌려보았다. 자치 대원들이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이거, 빨리 자리를 피해야겠는 걸. 탐그루를 떠나겠다고 자치대원들한테는 말해놨는데... 이거 골치 아프군. 넌 어쩔 거냐?" 사빈이 물었다. "난 도망쳐야 해요. 지금. 당장" 나는 칼집에 칼을 꽂고 도망갈 준비를 했다. "그렇구나. 나도 이 놈을 끌고 도망쳐야겠다. 사스카치 가죽은 무지 비싼 가죽이지, 뭐. 나는 이놈 가죽을 팔아서 스파일의 끝으로 갈 거야. 그곳에 가 면 용에 대한 얘기를 들을 수 있다고 하는 말을 들었어. 나는 어디까지나 보 통 사냥꾼이 아니라 용사냥꾼이니까 말이야. 다음에 만나게 되면..." "저한테 진 빚은 아직 남아있는 걸로 하죠" 나는 사빈의 말을 끝까지 들을 시간이 없었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는 그대 로 별빛주점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탐그루 사람이라면 이런 상황에서도 이 정도의 말은 해야한다. 빚지긴 쉽지만 갚는 건 어려운 거니까) "그래! 의리와 명예뿐인 이 용사냥꾼 사빈을 잊지 말거라! 라이짐 네가 그 렇게 생각한다면, 남은 빚은 내가 언젠가 다 갚으마!" 사빈이 소리쳤지만 나는 들은 척도 안하고 뛰었다. 그냥 뛰어야 했다. 겨우 라스폼에게서 벗어났는데 이대로 잡힐 수는 없었다. 주점 앞에는 라이짐과 이무르 아주머니가 서 있었다. "라이짐! 시간이 없어! 빨리 떠나야 돼!" 나는 다급해져서 소리를 질렀다. "그래. 떠나거라. 선물 사오는 거 잊지 말고. 꼭 선물 사갖고 돌아와야 한 다. 무사히 사갖고 돌아와야 해. 나와 라짐이 기다릴테니까" 이무르 아주머니의 눈가에 뭔가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설마. 잘못 봤겠지. "예. 안녕히계세요" 라이짐이 말했다. "그리고..." 이무르 아주머니는 손을 라이짐의 얼굴로 가져갔다. "해야* 할* 일이* 언제나* 먼저다* 할* 수* 있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은* 그* 다음이고* 명심하거라" 이무르 아주머니의 손은 라이짐의 귀에 가 있었다. 그럼 그렇지. 라이짐의 얼굴에 핏기가 가시는 거 보라구. 저 천하의 이무르 아주머니가 눈물이라니. 어찌 되었건 나는 이무르 아주머니의 말에 마법의 말이 담겨 있다는 것을 이 젠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맞다! 아자닌! "내* 마음의* 문을* 여니* 길을* 인도해* 다오*" 나는 아자닌을 불러내었다. 이무르 아주머니는 놀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라 이짐으로부터 얼마간 나에 관한 말을 들었는지 곧 정상으로 돌아갔다. "부르셨습니까, 수르카 님" "아자닌. 너 지도 기억하지?" "예" "여기가 어딘지 알겠지? 우릴 팜 산맥 입구까지 안내해 줘" "예, 수르카 님" 아자닌도 상황이 급박하다는 것을 알았는지 빠른 걸음으로 움직이기 시작했 고 나와 라이짐도 막 그 뒤를 따르려는 순간이었다. 자치 대원들이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저기다!" 누군가 소리를 질렀다. 어둠 속이었지만 나는 그 소리의 임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루비오의 경호역을 맡았던 검사, 쥬크였다. "여긴 내가 막아보마. 어서 가!" 이무르 아주머니가 소리쳤고 나와 라이짐은 그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아 자닌을 따라서 뛰기 시작했다. 바람이 내 곁을 스치고 있었다. 탐그루에서의 마지막 바람이었다. 그리고 이 바람은 다시 불어와 나와 라이짐에게 길을 열 어 줄 것이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N:김상현 #8872/10199 ━━━━━━━━━━━━━━━━━━━━━━━━━━━━━━━━━━━━━━━━ 제 목:[탐그루] 성년의 신 마소드 - 21 - 관련자료:없음 29/29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0-28 01:23 조회:1154 탐그루 # 마법은 마음이다 - 마음은 칼이다 # "너희들은 뭐야! 당장 비켜! 여긴 내 가게야!" 뒤 쪽에서 이무르 아주머니의 고함 소리가 들렸다. 이무르 아주머니는 목소 리도 커. 나는 달리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나는 쥬크의 칼 빛을 보았다. 뒤이어 쓰러지는 이무르 아주머니와 솟아오르 는 핏물을 보았다. 순간 나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라이짐을 보았다. 라 이짐만은 저 광경을 보지 않았으면 했다. 라이짐은 내 옆에서 두 눈을 부릅뜨 고 그 장면을 보고 있었다. 절대로 저 광경을 잊지 않겠다는 듯이. 두 눈에 핏발이 불거진 채 꼼짝도 않고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나는 라이짐의 팔을 잡았다. 무슨 말인가 해야 할 것 같았다. 라이짐이 이대로 굳어 버릴 것 같았 다. "라이짐..." "지금은 여기서 벗어나야 해! 해야 할 일이 먼저야. 뛰어! 뒤돌아 보지마!" 라이짐은 이렇게 단호하게 말하고는 다시 달렸다. 나도 달렸다. 어머니가 죽는 모습을 본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침착하게 뛸 수 있을까. 나 라면 바로 그 자리에 주저 앉거나 이무르 아주머니에게 달려갔을 것이다. 그 리고 어린아이처럼 울며불며 쥬크에게 덤벼들었을 것이다. 그리곤 살해당하고 끝났을 것이다. 역시 라이짐에게는 냉정한 보스 기질이 있었다. 그는 이미 성 년의 날 이전부터 어른이 되었던 것 같다. 하지만 쥬크! 죽일 것까지는 없었잖아! 무장도 하지 않은 민간인을! 뱃속에 서부터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구역질이 나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도대체 어 떻게 된 건가. 무엇 때문에 사람이 죽고 다쳐야 하는가. 머리가 빙빙 돌고 뭔 가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그러나 라이짐이 옳다. 우리는 살아남아야 한다. 그래야 나중에 복수건 뭐 건 할 수 있을 테니까. 이게 바로 해야 할 일이 먼저라는 말이겠지. 라이짐은 이무르 아주머니가 죽는 순간에도 냉정하게 그런 생각을 떠올린 것이다. 옆에 서 달리고 있는 라이짐의 온몸이 벌벌벌 떨리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얼마를 뛰었을까. 앞서서 뛰던 아자닌이 멈추어 섰다. "여기가 팜 산맥 입구입니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자치대원들은 우리가 팜 산맥 쪽으로 간다고는 생각 못했는지 전혀 따라오는 기색이 느껴지지 않았다. 라이짐은 털썩 주저앉더니 울기 시작했다. 어느샌가 나도 눈물이 줄줄줄 흐 르고 있었다. 겁에 질린 나머지 나는 내가 울고 있는지도 몰랐다. "...복수할거야, 수르카" 라이짐이 말했다. "귀족 놈들. 모두 다 죽여버릴 거야. 죽일* 거야* 성년이* 된* 후에* 하는* 첫* 번째* 맹세야* 내가* 이* 맹세를* 잊어버린다면* 수르카!* 네가* 날* 죽 여줘*" 라이짐의 말에서 나는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라이짐의 말이 복수의 마음을 담고 있어서 만은 아니었다. 그 말에는 분명 어떤 마법의 말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었다. 나는 아자닌을 바라 보았다. 하지만 아자닌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쥬크도, 루비오도, 라스폼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기껏 나 같 은 '꼬마'를 죽이기 위해 괴물을 불러오고 나를 좇기 위해 무장도 하지 않은 여자를 베는 게 명예나 혹은 그 밖의 뭔가를 위하는 일일까. 나는 어른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무엇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 것일까. 사람을 죽여도 좋을 그런 이유가 있는 건가. 어른이 된다는 게 사람을 죽여도 좋을 이유를 알게 된다는 거라면 난 어른이 되지 않아도 좋다. 나와 라이짐은 팜 산맥 입구에서 조금 더 올라간 언덕에 엎드려 탐그루를 내려다보았다. 혹시 누군가에게 들킬까봐 배를 땅에 바짝 붙였다. 아자닌은 사라지게 했다. 아자닌의 몸에서 나오는 빛이 어둠 속에선 꽤 멀리까지 보일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중앙 광장에서 흘러나오는 축제의 음악과 불빛이 아 득하게 어둠 저 아래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라이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라이짐은...입술을 꼭 깨물고 있었다. 울면 안 된다, 울면 안 된다...아마도 라이짐은 속으로 이런 말을 되새기는 것 같았다. 나는 내 눈앞에서 이무르 아주머니가 살해 당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걸 막지 못했다. 바보처럼 나에겐 그런 능력이 없었다. 라이짐을 보았다. 라이짐은 언제부터인지 흙에 얼굴을 파묻고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이무르 아주머니가 준 마소드의 검 장식이 왼쪽 가슴에서 만져졌다. 가슴이 저려왔다. 장식의 핀이 심장에까지 깊숙이 박혀 피를 흘리게 하고 있는 것 같 았다. 또 눈물이 났다. "라이짐. 녀석들이 계속 쫓아올까?" 나는 울고 있는 걸 들키기 싫어 라이짐에게 이렇게 물어보았다. "...지금 탐그루는 축제 중이야. 아무리 루비오 자식이 미친놈이라고 해도 더 이상 쫓지는 않을 거야... 귀족들은 원래 평민들을 우습게 여기니까... 평 민 한 사람쯤 죽어도. 그들은 상관 없겠지. 그들은 아무런 상관없겠지..." 라이짐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 떨림이 울음을 참고 있기 때문 인지, 아니면 솟아오르는 분노를 억누르기 때문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아 마도 둘 다 이리라. 축제의 음악은 아련히 계속됐다. 중앙광장에 켜진 연금술사의 불빛은 점점 더 밝아지는 것 같았고, 그 빛은 온 세상이 행복으로 가득 차 있다고 속삭이 고 있었다. 나와 라이짐이 병든 개처럼 엎드려 있는 이곳은 빼고 말이다. 얼마가 더 지나서였을까. 라이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굴이 온통 흙투성 이였다. "가자!" "가자니? 어딜?" "가야지. 어머니를 그대로 두고 갈 수는 없잖아" 라이짐이 말했다. 그렇다. 아직은 탐그루에서 해야 할일 남아 있는 것이다. 할 수 있는 것이 라 해도 절대로 하고 싶지 않은 일이 남아 있는 것이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 도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을 이제는 해야만 하는 것이다. 만약 다시 돌아가 서 그들에게 붙잡혀 죽게 된다면 차라리 지금 죽어 버리는 게 낫다. 복수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그일을 하고 살아 돌아와야 한다. 성년의 맹세를 한 사내 가 가족의 죽음을 지키는 일을 내버리고 무슨 복수를 한단 말인가. 축제 때문에 거리는 텅 비어 있었다. 다행히도 자치대원들은 눈에 띄지 않 았다. 하지만 언제라도 자치대원들이 나타날 가능성은 있었다. 또 당장이라도 라스폼이 나타날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와 라이짐은 주위를 살피며 조심스럽 게 별빛 주점으로 향했다. "뭘 그렇게 두리번거려?" 라이짐이 말했다. 화가 잔뜩 난 음성이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 개를 숙인 채 라이짐을 따랐다. 라이짐의 걸음은 평소보다 훨씬 더 빨랐다. 라이짐. 좀 천천히 걸어. 이 짧은 다리로 쫓아가는 일이 쉽지만은 않다구. 나 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말을 하지는 못했다. 라이짐이 화가 나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도 역시...화가 나 있었던 것이다. 별빛 주점의 문은 걸쇠로 안에서 잠겨있었다. 하지만 라이짐은 주점의 간판 위에 손을 올리더니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 주점 안에는 라짐이 있었다. 라짐은 울고 있었는지 눈이 퉁퉁 불어 있었다. 하지만 라이짐과 나를 보자 언제 그랬냐는 듯 태연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 섰다. "...올 줄 알았어...그래서...기다렸어...엄마는, 자치대원들이..." 라짐은 말을 하기 시작하자 다시 울음이 나오는지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 다. 그것을 보고 있는 내 마음이 다시 저리기 시작했다. 내가 이런데 라이짐 의 마음은 어떨까 생각하니 감히 라이짐을 바라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디로 갔어?" 라이짐이 말했다. 자신의 감정을 감추고 싶은지 짧게 말하긴 했지만 나는 라이짐도 울음을 참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동생 앞에서 의연한 모습 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겠지. 열네 살 짜리 한테는 끔찍하게도 힘든 일일텐 데. "...검사가...버리자고 했어...나는 숨어서...보기만 했어...자치대원들 은...그래서...엄마를...버리자고..." 결국 라짐은 울음을 참지 못하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랫입술을 꼭 깨물며 고개를 돌리는 모습을 보니, 역시 이무르 아주머니의 딸이었다. "알았어. 어느 쪽이야?" 라이짐이 물었다. "숨어서...다 봤어... 쫓아가면서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다 봤어. 운하 쪽으 로 갔어" 라짐은 짧게 대답했다. 벌써 감정을 정리했는지, 눈에서는 빛이 나기 시작 했다. "그럼 나 간다! 꼭 돌아올께!" 라이짐이 말했다. 이렇게 떠나려는 걸까? "나도 가" 라짐이 말했다. 라이짐은 라짐에게 뭐라고 말하려고 했다가 잠시 숨을 멈추 더니 천천히 말을 잇기 시작했다. "너도 여기 있고 싶지는 않겠지. 하지만 이건 위험한 일이야. 만약에 너하 고 나하고 다 죽어버리면 복수는 누가 하지?" "......" 라짐은 대답이 없었다. "어머니는 운하 옆 우리가 자주 가던 숲에 묻을게. 그네 밑에. 거기라면 사 람들이 밟고 다니진 못할 거야. 나중에 복수를 한 후에 다시 무덤을 만들자. 어머니가 보고 싶으면 그 그네에 가서 앉아봐. 그 그네는 내가 매일 같이 타 고 놀던 거니까. 라짐 네가 그네에 가서 앉으면 어머니와 내가 너랑 함께 있 는 거나 마찬가지야. 그리고 어머니 대신 이젠 네가 별빛 주점을 지켜 줘. 만 약에..." 아마 라이짐은 자신이 죽었을 경우를 얘기하려는 것 같았지만 더이상 말하 진 않았다. 좋지 않은 상황에 좋지 않은 말만 하기는 싫은 모양이었다. "그럼 간다" 라이짐이 말하자 라짐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라짐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 했다. 무슨 말이라도 하고는 싶었지만 차마 할 수가 없었다. 별빛 주점을 나와서 운하로 가는 동안에도 축제의 음악소리는 계속됐다. 저 음악소리가 끝날 때쯤이면 우리는 탐그루에 없을 것이다. 내 걸음 속도에 맞 춰 울리는 북소리는 나를 탐그루에서 떠다 미는 것 같았다. 다른 북소리는 내 심장의 고동에 맞춰 둥둥둥 울렸다. 나에게 지금까지처럼은 살 수 없다는 걸 깨닫게 해주려는 듯 세차게 두드리고 있었다. 나는 북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라이짐에게 뒤쳐지지 않도록 걸음을 빨리 했다. 어느새 나와 라이짐은 운하에 도착했다. 라이짐은 준비해온 짧은 칼을 뽑았 다. 나도 따라서 그렇게 했다. 만약 자치 대원들이나 루비오의 부하 쥬크를 만나게 될 경우를 대비해서 그런 것이었지만, 사실 그들과 마주치게 된다면 나나 라이짐이나 살아남기는 불가능 할 것이 분명하다. 진짜 칼을 오랫동안 다룬 검사와 목도밖에는 쥐어 본 일이 없는 나나 라이짐 같은 풋내기와의 싸 움은 보지 않아도 결과는 뻔하다. 만약 급소를 찾아 한 방에 적을 쓰러뜨릴 수 있는 사빈의 기술을 익힌다 면... 내가 이길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질지도 몰라. 나는 목도로 진짜 칼을 받 았다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던 일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나와 라이짐은 천천히,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며 운하의 정박장 근처를 찾 아보았다. 정박장이 시체를 버리기에는 가장 좋은 장소 일 것이라고 생각해서 였다. 쥬크와 자치대 놈들은 그저 자신들이 평민을 벤 일을 숨기기 위해 시체 를 버리려고 하는 것일 뿐이다. 이곳에 평민의 시체가 떠오른다면 사람들은 산적이나 강도의 소행일 거라고 생각할 게 뻔했다. 라짐이 숨어서 본 게 천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들이 라짐의 모습을 봤다면 결코 살려두 지 않았을 것이다. "수르카..." 라이짐이 한숨처럼 힘없이 나를 불렀다. 나는 라이짐이 보고 있는 곳을 바 라보았다. 라이짐은 정박장에서 조금 떨어진 작은 상점을 바라보고 있었다. 문이 닫혀 있는 상점 앞에...이무르 아주머니의 시체가 놓여 있었다. 라이짐은 아무 말도 없이 상점 쪽으로 걸어갔다. 축제의 음악 소리는 점점 더 높아지고 있었다. 나는 자신의 약혼녀와 춤을 추고있을 루비오를 생각했 다. 그리고 그 뒤에서 웃고 있을 쥬크를 생각했다. 이무르 아주머니는 엎드려 있었다. 칼을 심장에 정통으로 맞은 모양이었다. 피가 이무르 아주머니의 밑에 마치 양탄자처럼 두텁게 검붉은 빛으로 말라 있 었다. 나는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피 냄새와 섞인 이상한 냄새 때문에도 그랬고 쓰러져 있는 굳어버린 이무르 아주머니의 손 때문에도 그랬다. 내 눈은 자꾸 이무르 아주머니의 손으로 가고 있었다. 그 손은... 마치 땡볕에 말라붙은 나 무 껍데기처럼 기괴한 형태로 꼬여있었다. 라이짐은 이무르 아주머니 앞으로 간 뒤 무릎을 꿇었다. 나는 그런 라이짐 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수르카. 도와줘" 라이짐이 짧고 긴박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정박장으로 달려가 천과 나무 막대기를 구해 들것을 만들어 왔다. 이무르 아주머니를 들것에 실었다. 이무 르 아주머니의 시체를 옮길 때, 나는 차마 머리 부분은 만지지 못했다. 특히 이무르 아주머니의 눈을 보게 될까봐 두려웠다. 아니, 솔직히 죽은 이무르 아 주머니를 만진다는 것이 두려웠다. 이미 뻣뻣하게 굳어버린 몸과 꼬여 있는 손,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불 편할 것 같이 꼬인 다리... 이무르 아주머니의 다리를 잡았을 때, 나는 이를 악물고 있었다. 피부로 덮인 딱딱한 돌덩어리를 잡는 것 같았다. 나는 그냥 눈을 감아버리고 싶었지만 라이짐 때문에 차마 감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이무르 아주머니를 바라볼 수도 없는 일이어서 나는 머리를 들어 상점 너머 어두운 밤하늘 쪽으로 계속 시선을 돌렸다. 별들은 다른 때와 조금도 다름없 이 반짝이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었다. 라이짐이 앞쪽으로 돌아가 이무르 아주머니의 머리 부분을 잡아 옮겼다. 이 무르 아주머니의 큰 몸을 들기에는 나와 라이짐만으로는 힘들었다. 하지만 라 이짐은 이맛살을 찌푸리면서도 온힘을 쏟아 시신을 옮겼다. 나도 그 모습을 보면서 있는 힘껏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계속해서 내게는 복수심이라기 보 다는 너무나도 두렵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어른들의 세계는 진짜 죽음이 있는 세계였다. 라이짐이 저렇게 태연하게 보일 수 있는 건 하늘 끝에라도 닿 을 복수심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와 라이짐은 금방 만들어낸 들것을 가지고 이무르 아주머니를 옮기기 시 작했다. 머리부분을 옮기지 않은 일은 다행이었지만 걷는 내내 이무르 아주머 니를 봐야 한다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몇 걸음 걷기 시작 하면서, 상황은 조금씩 나아졌다. 나는 이무르 아주머니를 바라보는 일보다 시체를 옮기는 일이 더 힘들다고 생각하기 시작했고, 그러자 이무르 아주머니 의 시신을 바라보는 일도 그다지 어렵지 않게 여겨졌다. 어느정도 두려움이 가시자 이무르 아주머니의 얼굴에 살아 계실 때의 모습이 겹쳐보였다. 무서웠 던 얼굴, 장난꾸러기 같던 얼굴, 그리고 그 인자했던 얼굴. 라이짐의 목 뒤로 힘겹게 흘러내리는 땀방울이 보였다. 죽은 이무르 아주머 니의 생전의 이런저런 모습들이 떠올랐다. 내게 주었던 성년의 날 장식과 예 복을 차려입고 중앙 광장에 나왔던 모습이 떠올랐다. 라이짐은 나와는 정 반 대의 순서로 생각하고 있겠지. 이무르 아주머니의 시신을 제대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두려워서가 아니라 부끄러워서였다. 한참을 걸어간 뒤, 나와 라이짐은 강가의 그네 나무가 모여 있는 곳에 도착 할 수 있었다. 일전에 루비오와 한 판 붙었던 곳에서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 간 곳이었다. "다 왔다... 우리가 어렸을 때 함께 놀곤 했던 곳" 들것을 내려놓고 라이짐이 말했다. 그네 나무 가지에 그네 줄 두 가닥이 걸 려 있는 것이 보였다. "...라짐이 타면 내가 밀어주고, 내가 타면 라짐이 밀어주곤 했지..." 라이짐이 말했다. 담담한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 담겨있을 증오와 복수심을 나는 알 수 있었다. 너무나도 큰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라이짐은 일부러 담담하게 말하고 있었다. "수르카. 도와줘" 라이짐이 말했다. 밤공기는 멀리까지 소리를 전한다. 이 외딴 강가의 숲속까지 중앙광장에서 울려 퍼지는 음악소리가 닿고 있었다. 음악소리에 맞추어 나와 라이짐은 손으 로 흙을 파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두 손만으로 그렇게 까지 깊게 팔 수는 없 었다. 나와 라이짐은 삽 대신 쓸 수 있는 것이 있을까 배낭 안을 찾아보았다. 라이짐의 배낭에는 작은 휴대용 삽이 하나 있었고, 나는 허리에 찬 칼이 있었 다. 그래서 나는 칼집으로 흙을 헤집고, 라이짐은 작은 삽으로 흙을 퍼내기 시작했다. 음악소리는 계속되었고 흙을 파내는 일은 도저히 끝날 것 같지가 않았다. 나는 중간에 한 번 쉬자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무르 아주머니의 시신 을 보자, 차마 그런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게다가 라이짐은 숨을 헐떡이면서 도 아무 말 없이 흙을 퍼내고 있었다. 나는 될 수 있으면 흙을 헤집는 일에만 집중하기로 마음먹고 쉬지 않고 일을 했다. 그리고 파낸 흙이 내 허리가 넘었을 즈음이 되자 라이짐이 삽을 내려놓았 다. "이만하면 됐어. 뒷일은 라짐과 울찬이 해줄 거야" 라이짐은 이렇게 말하고는 들것을 집었다. 나는 뒤에서 아무 소리 없이 라 이짐이 하는 일을 도왔다. 이무르 아주머니의 시신이 파 놓은 구덩이에 넣어 졌다. "어머니...죄송해요. 마지막까지 제게 해야* 할* 일* 을 남겨두고 가셨군 요..." 라이짐은 흙을 도로 묻기 전에 이렇게 말했다. 나는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 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는 없었지만 이렇게 하는 것 말고는 도저히 다른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라이짐이 한 말은 분명 복수의 맹세일 거였다. 그러 나 그 말은 분명 내게 마법의 말처럼 들렸다. 흙을 채우고 밟아 다지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숨이 좀 고르게 쉬어진 다 싶자 나는 몸이 떨려왔다. 땀이 말라서 그러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어떤 생각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라짐은 어떻게 할거야?" 나는 내가 떨고 있다는 것을 숨기기 위해 라이짐에게 이렇게 물었다. 나도 라이짐이 하는 것처럼 최대한도로 담담하게 말하려고 했지만 그게 그렇게 쉽 지 않았다. "울찬이 돌봐 줄 거야. 나하고 약속했으니까. 그리고 울찬이 아니더라도 상 관없어. 라짐은 절대로 약한 애가 아니야. 난 알아. 라짐의 몸에는 어머니의 피가 흐르고 있거든. 적어도*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이* 뭔지는* 알고* 있다구*" 그때였다. 나는 내 마음이 마법의 말을 받아 들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마법의 말.. 나는 라이짐의 귀를 바라보았다. 땀이 말라붙어서인지 귓바퀴에 달라붙은 소금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귀...나는 이무르 아주머니가 몇 번이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왜 마법이 작동하지 않았는지도 알 수 있었다. 나는 생각할 틈도 없이 가슴에 달린 마소드의 검 장식을 들고 주문을 외웠다. "해야* 할* 일이* 먼저이고* 할* 수* 있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은* 그* 다음이다*" 그러자 장식이 휘황한 빛과 함께 한 송이 카네이션으로 변해갔다. 라이짐은 그 광경을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라이짐이 아무 말 없이 자신의 장식도 떼어내 내 손에 건네 주었다. 나는 다시 한 번 마법의 말을 외웠다. 또 다시 마소드의 검 장식이 카네이션으로 바뀌었다. 나는 조용히 두 송이의 카네이션을 라이짐에게 건네 주었다. 라이짐은 그 두 송이의 꽃을 그네 밑 이무르 아주머니의 무덤에 올려 놓았다. 그리고, 그 제서야 라이짐은 울음을 터트렸다. 라이짐은 어린아이처럼 엉엉 소리내며 통 곡했다. 그네 줄을 붙잡고 숨을 몰아쉬며 통곡하고 있었다. 한참이 지난 후 어느정도 진정이 됐는지 라이짐이 울며 중얼거렸다. "나는 꼭 돌아온다. 그때까지 죽으면 안 된다, 더러운 것들. 절대로... 죽 으면 안 된다" 라이짐은 이렇게 중얼거리며 허리에 차고있던 짧은 칼을 뽑아들었다. 라이 짐의 칼이 달빛을 받아 번득였다. 나는 나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서고 말았 다. 칼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은 그냥 달빛의 반사가 아니라 음산하면서도 무 시무시한 기운을 발하고 있었다. "성년이* 된* 후* 처음으로* 맹세를* 하오니* 성년의* 신* 마소드여* 이* 말을* 들어주소서* 나* 이무르의* 아들* 라이짐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원 수의* 몸에* 이* 칼을* 박아* 넣을* 것을8 맹세합니다* 성년의* 신* 마소드여 * 그대에게* 이* 피를* 바치니* 나의* 길에* 가호를* 내려주소서*" 라이짐은 이렇게 말하며 짧은 칼로 왼 손 새끼손가락을 베었다. 그 순간 나 는 느꼈다. 라이짐의 말이 달빛과 어둠에 녹아 마법의 말로 변하는 것을. 라이짐의 손가락에서 솟아 나온 핏방울이 카네이션으로 떨어졌다. 카네이션 이 핏빛처럼 새빨갛게 물들어 갔다. 그러더니 꽃잎이 오그라들고, 꽃 봉오리 가 되더니 이내 작고 붉은 보석으로 바뀌었다. 나는 그 보석이 무슨 보석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시드의 귀! "성년의 신 마소드여. 그대가 나의 맹세에 응답해 주었음을 저는 압니다. 이제 저는 맹세를 지키기 위해 무슨 일이라도 하겠습니다. 필요하다면 도둑질 을 하고, 사람을 죽이고, 거짓말을 하겠습니다. 제가 가는 길에 당신의 가호 가 함께 할 것입니다" 사비오 영감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마법은 마음의 움직임인 것이다. 라이 짐의 마음이 크게 움직여 자신의 말로 마법의 말을 하게 된 것이다. 라이짐은 자신이 마법의 말을 한 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보석을 집어 들고 자신의 칼집에 박아 넣었다. 시드의 귀는 마치 오래전부터 준비되 었던 것처럼 칼집의 상징물을 박아 넣는 자리에 꼭 들어맞았다. "가자. 수르카" 라이짐이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라이짐과 함께 팜 산맥을 향해 발 걸음을 옮겼다. 저 먼 중앙 광장 쪽에서 들리던 음악소리는 어느샌가 들리지 않았고, 탐그루는 천천히 어둠에 감싸이기 시작했다. 그 어둠 속에서 탐그루 의 모든 그네가 천천히 흔들렸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N:김상현 #9255/10199 ━━━━━━━━━━━━━━━━━━━━━━━━━━━━━━━━━━━━━━━━ 제 목:[탐그루] 태양을 쫓는 아케르 41 관련자료:없음 27/27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1-04 00:48 조회:995 탐그루 # 마법은 마음이다 - 마음은 칼이다 # * 태양을 쫓는 아케르 첫 눈이 오기 전, 모든 훈련병들은 차이린의 말처럼 정식 용병이 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아케르 단장의 사열이 있다는 말에 모든 훈련병들은 초 긴장 상태로 며칠 동안이나 사열 준비를 했다. 드디어 사열이 시작되자 훈련병들은 잔뜩 긴장해 연병장에 횡대로 죽 정 렬해 섰다. 바람이 무척이나 심한 날이었다. 스파일 쪽에서 탐산맥을 넘어 불어오는 겨울바람에 얼굴이 베일 듯 추웠다. 하지만 모든 훈련병의 얼굴은 흥분한 때문인지 다들 발갛게 달아 있었다. 이윽고 아케르 단장이 나타났다. 아케르 단장은 긴머리와 검은 망토자락 을 펄럭이며 연병장 저편에서 차이린과 뭔가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오고 있 었다. 순간 세찬 돌개 바람이 불어 한 무리의 흙먼지가 아케르 단장과 차이 린을 덮쳤다. 아케르 단장은 무심한 동작으로 슬쩍 망토를 들어 차이린을 자연스럽게 가려주었다. 내 입에서는 아, 하는 소리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망토를 움직이는 아케르 단장의 동작이 너무 우아해 보였다. 아케르 단장이 훈련병들 앞에 섰다. 나는 어깨에 힘을 주고 엉덩이를 바 짝 끌어당겼다. 스파일 쪽에서 불어오는 북풍이 아케르 단장의 머리와 망토 를 계속 휘날리게 만들고 있었다. "준비 됐습니다, 아케르 단장님" 차이린이 말하자 아케르 단장은 천천이 우리 앞을 지나가기 시작했다. 아 케르가 내 앞을 지나갈 때, 나는 아케르 단장과 눈을 마주쳤다. 나는 금방 이라도 광선이 쏟아져 나올 것 같이 부리부리한 아케르 단장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피할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나는 아케르 단 장의 이마에 나 있는 십자 모양의 흉터로 시선을 돌린 채 뻣뻣히 서 있었 다. 전에 한 번 그랬던 것처럼 아케르 단장은 도열해 있는 훈련병들을 죽 한 번 훑어본 다음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아케르 단장이 바람을 뚫고 자신의 천막으로 돌아가는 뒷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본 후에야 나는 겨우 딱딱 소리 가 날만큼 경직된 몸에서 힘을 풀 수 있었다. "자. 끝났어. 그 동안 수고했다" 차이린이 웃으면서 말했다. 차이린의 말에 봄눈 녹듯이 긴장이 풀려갔다. 한 편으로는 이렇게 쉽게 사열이 끝났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동안 고생 한 게 허무했다. 저녁식사를 하기 전에 차이린이 천막에 들어와 이제 아케르 단장님의 연 설이 있을 거라고 말했다. "편하게 앉아 있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까" 차이린은 이렇게 말하고 나가버렸다. 우리는 아케르 단장이 천막에 온다 는 말에 다시 한바탕 소란을 피우며 천막 안을 치우기 시작했다. 옷가지며 이불을 정돈하기도 하고, 바닥과 침상에 떨어져 있는 쓰레기들을 보이지 않 는 곳으로 밀어넣으면서 말이다. (그런다고 지독한 땀냄새와 발냄새가 가시 지는 않을 테지만) 어느 정도 정돈이 끝났을 때쯤 아케르 단장이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머 리는 잔뜩 헝클어진데다가 망토에는 흙먼지가 두껍게 달라붙은 모습이었지 만, 나는 오히려 그런 모습의 단장이 더 친근하게 느껴졌다. "제군들" 아케르가 말하자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허리가 쭉 펴졌다. 아마 천막의 침상에 앉아 있던 모든 훈련병들이 그랬으리라. "제군들은 이제 아케르 용병단의 정예 신병이 되었다. 한 명의 낙오도 없 이 모두 끝까지 함께 한 것에 대해 기쁜 마음으로 축하한다. 훈련병의 신분 으로 많은 괴롭고 힘든 순간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순간들이 과 연 어떤 순간이었는가 생각해 보자. 이제 정식 용병이 되는 순간 제군들은 원한다면 얼마든지 그런 순간을 피 할 수 있을 것이다. 작전 중이 아니라면 우리 아케르 용병단에선 개인의 자 유를 침해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힘들고 괴 로운 훈련의 순간 순간들이 없이 제군들이 작전중에 살아남을 수 있을까? 나는 아니라고 말하겠다. 이제부터 제군들은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자기자신에게 그런 순간들을 강 요해야 하는 때가 왔다. 제군들이 이곳에서 생활하면서 느꼈으이라 생각한 다. 많은 정식 용병들이 항상 스스로를 다스리는 모습을 말이다. 아침마다 하는 구보는 물론이고 일과 시간에 하는 훈련들은 전부다 자발적으로 스스 로 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 때문인가? 자신의 생명을 위해서다" 아케르 단장은 여기서 한 번 말을 끊었다. 그와 동시에 훈련병들이 숨을 돌리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나 역시 아케르 단장이 말할 때는 도 무지 숨을 가누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다면 생명은 왜 지키는가. 누구 대답할 사람 있나? 왜 생명을 지켜 야 하는지?" 아케르가 물었다. 예상 밖의 난처한 질문이었다. 나는 대답을 찾아보려고 했지만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냥... 죽을 수는 없으니까, 하고 대답 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해야 할 일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라이짐이 대답했다. 순간, 천막 안의 공기가 팽팽하게 잡아당겨졌다. 모 두의 시선이 라이짐에게 모아졌다. 그 시선은 좋다, 나쁘다로 말할 수 있는 시선이 아니라 의외였다는, 놀랍다는 그런 시선이었다. 다들 라이짐의 말에 자신들의 과거를 돌아보는 듯했다. 저마다의 무수한 사연들을... 라이짐의 말. 나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래. 바로 그거다. 자신의 생명보다 소중한 것. 그 무엇을 이루기 위해 우리는 살아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생명보다 소중한 것은 무엇인가. 그건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명예나 지위가 목숨보다 소중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가족과 국가가 소중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건 누구 도 누구에게 강요할 수 없는 것들이다. 해야할 일은 자기자신만의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서 대의라는 말을 하고 싶다" 아케르는 다시 한 번 여기서 사이를 두었다. 훈련병들의 긴장된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누군가는 어깨가 굳어 있었고, 또 누군가는 팔을 허리에 딱 붙이고 있었다. "대의. 사람은 대의를 위해서 죽는 것이다. 이 대의라는 말속에는 앞서 말한 가족이나 국가, 명예나 지위 뿐 아니라 수많은 것들이 표함되어 있다. 각자의 뜻은 하나지만, 그 각자의 뜻을 모으면 모두의 뜻, 대의가 되는 것이다. 제군들은 바로 그 대의를 위해 이곳 아케르 용병단에서 칼을 들었 다. 나는 이 자리에서 제군들에게 내가 생각하는 대의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이제 천막 안은 분위기는 정적을 넘어서 숙연해지기까지 했다. "나는 지금 바르도 대륙이 잘못된 길, 파국을 향해 가고 있다고 생각한 다. 사라진 대륙 아모리카처럼 바르도 대륙도 침몰해 가고 있다. 성황청은 미래를 준비한다는 핑계로, 자신들이 잃어버린 신의 이름을 찾는다는 핑계 로, 잔인하게 다른 종교를 탄압하고, 부당한 방법으로 마법을 모으고 있다. 이름도 없는 신의 이름으로 귀족들과 똑같은 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또 국 왕은 어떤가? 자신의 알량한 지위를 위해 스파일과 타실간의 알력을 조정하 기에 바쁠 뿐 정작 자신의 백성들에게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보라! 바르도 대륙 어디에 진정한 대의가 있는가!" 나는 라스폼이 생각났다. 다시금 분노가 치솟았다. 라이짐은 루비오와 쥬 크를 생각하는 듯 했다. 차렷자세로 꼿꼿하계 선채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 었다. 그리고 아케르 단장의 말을 듣고 있는 모든 훈련병들의 얼굴이 다 상 기되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게 사는 세상! 이것이 나의 대의다. 누구도 누구를 함부로 대하지 않는 세상. 모든 어린아이들이 한자리에서 놀고, 먹고, 배울 수 있는 세상. 나는 이런 세상을 나의 대의라고 부르겠다" 아케르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모두 가슴을 들끓게 만들었다. 아마 아케르 단장의 말을 듣게 되는 사람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자신이 불만을 품고 있 는 대상에게 새삼 분노를 느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귀족이건, 성 황청이건, 아니면 자치대에서 세금을 뜯는 자치대장이건 간에 말이다. "이 중에는 자신의 생명만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은 지금 당장 집으로 돌아가도 좋다. 아케르 용병단 은 그런 사람을 원하지 않는다. 아케르 용병단이 바라는 사람은 보다 큰 대 의를 위해 자신을 바칠 수 있는 진짜 사나이들이다. 대의를 위해 목숨을 걸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 것이지, 그저 자신의 목숨을 위해 하루하루를 살아 가는 사람은 필요없다" 이 말에 천막 안에 있는 훈련병들은 모두들 주먹을 불끈 쥐고 당장이라도 일어설 듯 상기된 표정들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뭔가가 어긋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나는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것도 싫 고, 대의나 뭐 그런 골치 아픈 일은 생각 해 본적도 없다. 그냥 내 나름대 로 옳고 그른 건 가려가며 살아야한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런 내 생각을 아 케르 단장은 강력하게 비난하고 있었다. 나는 내가 내 자신을 부끄러워 해 야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끄러워해야 하는 할까. 그래서 대의를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걸까. "이것으로 마치겠다. 나머지는 제군들 스스로 생각해 보기 바란다. 나의 뜻과 함께할 사람들만 아케르 용병단에 남게 되길 바란다. 이제* 결정은* 내려졌다* 모두의 생명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 은 천막 밖으로 나오기 바란다" 연설을 끝낸 아케르 단장은 성큼성큼 천막 밖으로 나갔다. 한동안 천막 안에는 침묵이 이어졌다. 아무도 자리에서 움직일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아 마 다들 아케르 단장의 말을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케르 단장의 말에서 마법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 말에서 다소 거부감이 느껴졌다. 누가 결정을 내렸다는 말인가? 아케르 단장이? 아니면 우리가? 아케르 단장의 말은 분명히 사람을 흥분시킨다. 그런데 웬지 일방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대의를 위해 살아야 한다는 아케르 단장의 목소리와 언제든 자신의 마음 을 따르라는 사비오 영감의 목소리가 모두 맞는 것 같으면서도 틀리는 것 같다. 혼란스러웠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두다 생각에 잠긴 듯 굳은 표정들이었다. (사람 좋은 웃음을 잃지 않던 우보 반장까지도 말이다) "나는 내가 죽기 전에 먼저 죽여야 할 사람이 있어" 라이짐이 말했다. 다시 한번 시선이 라이짐에게 모아졌다. "만약 용병단이 복수를 위해 지나야 하는 문이라면, 나는 그문이 지옥 끝 까지 이어져 있다 해도 기꺼이 지나가겠어" 라이짐은 이렇게 말하고 천막 밖으로 나갔다. 라이짐은 마치 아케르 단장 처럼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나도 죽여야할 사람이 있어" 하진이었다. 하진도 라이짐의 뒤를 따라 나갔다. "나는 해야 할 일이 있어. 그리고 그 일을 위해 이곳에서 칼을 잡는 건 꼭 필요한 일이야" 마로우였다. 마로우가 밖으로 나가자, 움직일 줄 몰랐던 다른 훈련병들이 하나 둘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재훈과 눈이 마주쳤다. 나와 재훈은 눈이 마주치자 서로 씨익하고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조금은 멋적은 웃음이었다. 그래. 여기까지와서 물러설 수는 없잖아? 그것도 아케르 단장에게 칼로 인 정받은 사람이 말이야. 나는 이렇게 생각하면서 천막 밖으로 나섰고 재훈도 내 뒤를 따랐다. 밖에는 모닥불이 피워져 있었고, 모닥불 주변으로 술과 음식이 잔뜩 마련 되어 있었다. 저녁놀을 받은 모닥불은 포근하고 따뜻한 느낌으로 붉게 타오 르고 있었다. "자. 먹고 즐겨. 오늘이 바로 너희가 진정으로 살아남는 법을 배운 날이 야" 차이린이었다. 차이린이 말하자 훈련병들은 금새 술과 음식에 달려었다. 나도 에라 모르겠다하는 심정으로 고기를 잡아뜯어 입에 넣었다. "그거, 네가 잡은 라마 고기야" 우보가 다시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나도 따라 웃으며 고기를 씹었다. 하지만 웃고 떠들면서 즐기는 훈련병들과는 조금 다르게, 나는 그 냥 고기를 씹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사비오 영감님. 지금 내가 선택한 길 이 도대체 어떤 길인가요? 만약 사비오 영감이 내 앞에 있었다면 나는 틀림 없이 이렇게 물었으리라. 하지만 사비오 영감은 없다. 어디로 갔는지 알 수 도 없고 말이다. 그리고 있었다고 해봐야 내 뒤통수를 한 대 때리면서 이렇 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항상 자신의 마음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라고 말이 다. 그래서 나는 내 마음이 원하는 대로 고기를 씹었다. 지금은 어쨌든 배 가 고팠기 때문이다. 해가 저물고 있었다. 마지막 훈련병의 날을 밝혀주던 해가 말이다. 하늘 로 모닥불의 불씨가 의미 없이 날아가 사라지고 있었다. 다음 날로 신병 천막은 거두어졌다. 천막을 거두고, 그것을 창고에 집어넣 는 일을 하면서 나는 하진에게 받아 마신 술 한 잔이 다음날 얼마나 속을 뒤 집어 놓을 수 있는가를 깨달을 수 있었다. 훈련병들은 각각 다른 십부로 흩어졌다. 라이짐은 밍밍의 빛의 단검 십부 로, 재훈은 아루마의 죽음의 신 십부로, 마로우는 지다문의 하늘의 끝 십부 로... 이런 식으로 말이다. 나와 우보는 같은 십부에 배치 받게 되었다. 그런 데 하필이면 그게 차이린의 십부였다. 그 사실이 차이린의 입에서 나오는 순 간, 나와 우보는 둘다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필이면... 제기랄, 이 게 대의란 말인가. 우워어어어어... 이제 정식 용병이 된 훈련병들은 차례로 순무의 천막으로 가 계약서에 서명 을 하게 되었다. "계약서를 읽어봐. 읽을 능력이 없다면 내가 읽어주지" 나와 라이짐이 천막 안으로 들어가자 순무가 말했다. 하지만 탐그루 출신이 글을 모른다는 게 어디 말이나 될 법한 소리인가. 나와 라이짐은 계약서를 읽 어 내려갔다. 내용은 일 년 단위로 계약을 하고, 그 동안 숙식은 아케르 용병단에서 책임 을 지며, 급여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금화 한 닢과 은화 이 백 닢으로 하고, 그밖에 작전이나 기타 근무에 대해서는 그때 그때마다 따로 급여를 지급한다 는 것이었다. 만약 죽는다면 아케르 용병단은 유언을 집행할 의무가 있고, 그동안 모아둔 급여는 유언에 따라 정확하게 쓰여진는 말도 씌여 있었다. 이 말은 전에 순무 에게서 강의 받은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말은 가족이나 친지가 있는 용병 들에게나 필요한 얘기였다. 나나 라이짐이나 재훈 같은 고아는 죽어봐야 어디 급여를 받을 부모도 없는 것이다. 우리 셋은 만약 하나가 죽었을 경우, 나머 지 둘에게 전 재산을 준다는 내용의 유언장을 썼다. 유언장을 쓴다니 좀 기분 이 이상하기는 했지만 라이짐이 먼저 피식피식 웃으면서 서명을 했기에 별로 어색하지 않은 분위기 속에서 서명을 마칠 수 있었다. "라이짐과 수르카는 고아지만, 재훈은...?" 재훈이 서명하자 순무는 조금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물론 재훈 이 그렇게 서명한 이유가 뭔지는 나도, 라이짐도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순무의 천막을 나왔다. "잘 지내라, 죽지 말고" "수르카, 너도 죽지마" 우리는 어느덧 용병들이 쓰는 말을 자연스럽게 인사말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너도 죽지마, 재훈" "그래. 너희도 죽지마" 재훈은 아루마 십부장의 삼 번 천막으로 뛰어갔다. 나와 라이짐도 가벼운 악수를 나누고 각각 밍밍의 사 번 천막과 차이린의 육 번 천막으로 뛰어갔다. "수르카! 반갑구나" 천막에 들어서자 차이린이 반갑게 나를 맞았다. 아직 오전 일과가 시작되기 전이라 천막 안에는 십부원들이 무기를 정비하거나 잡담을 하면서 앉아 있었 다. "용의 눈, 차이린 십부에 들어 온 것을 환영한다" 차이린이 웃으면서 말했다.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가자면 십부란 꼭 열 명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 이다. 비스토브레 왕국에서 관례적으로 숫자를 쓰는 방식이다. 그저 상징적인 의미의 숫자로 쓰인 것이다.십이라는 숫자는 보통 작은 단위를, 백은 큰 단위 를, 천은 아주 많은 단위를, 만은 헤아리기 어려운 단위를 뜻한다. 그러니까 십부장이라고 해서 부하가 꼭 열 명이라는 뜻은 아니고 열 명이 넘을 수도 있 고 단 한 명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차이린의 부하는 나까지 해서 꼭 열 명이었다. 이런 경우도 그리 흔 한 경우는 아니라 나는 좀 이상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일단 동료들부터 소개해 줄께. 내 부관이자 최고참인 청강이야. 청강의 이 름이 무슨 뜻인지는 묻지마. 청강 본인도 모르고 있으니까..." 차이린은 이런 식으로 십부원들을 소개시켜 주었다. 부관이라는 청강은 큰 키에 흰 얼굴을 하고 있는 사내였다. 체리라는 그 다음 고참은 이름과는 달리 무식하게 생긴 덩치였다. 말도 버벅거리면서 빠르게 내뱉는 게 꼭 바바 족이 저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큰새라는 용병은 어깨가 넓어서 그냥 그런 이 름을 쓴다고 하는 데, 분명 본명은 아닐 것 같았다(나머지도 본명이라고 믿을 수는 없었지만). 거기다가 어느 지방인지 알 수 없는 사투리를 썼는데, 나중 에 우보가 나에게 그건 서타실 중에서도 남단의 아주 오지에서만 쓰는 사투리 라고 했다. 래드와 블루 형제의 서열은 그 다음이라고 했는데, 형제라고는 하지만 하나 도 닮은 구석이 없었다. 레드는 얼굴이 화난 사람처럼 붉었고 블루는 흰 얼굴 이었다. 닮지 않은 것은 얼굴만이 아니라 성격도 그랬다. 레드는 얼굴대로 급 하고 불같은 성격이었지만 블루는 차분한 성격이었다. 나카는 음악을 좋아하는 방랑자였는데 어떻게 흐르다보니 여기까지 오게됐 다고 내게 자신의 과거까지 말해주었다. 그리고는 노래를 한 곡조 뽑았는데, 그 노래라는 것이 아케르 용병단가에 버금가는 엉터리 노래여서 나는 그 말이 틀림없이 거짓말이라고 믿게 되었다. 그리고 기밀이라는 용병은 네모진 얼굴 에 좋은 체격을 가지고 있었다. 머리는 언제 밀었는지 빡빡이었고, 온통 상처 투성이였다. 기밀의 머리는 아무래도 상대방에게 고통을 가하는 쪽으로만 쓰 일 것 같았다. 그리고 같이 훈련받은 우보 반장과 찬, 그리고 나까지 해서 차 이린 소대는 열 명이 되었다. "소개가 대충 끝났으면 오전 일과를 시작하지. 청강은 큰새, 체리, 기밀, 나카와 함께 동편 울타리 정비 작업을 실시하도록. 순무 말이 보수해야 할 곳 이 많다고 하니까 오전 중에 끝낼 수 있도록 하고. 블루, 레드, 우보, 찬, 수 르카는 나를 따라와" 이렇게 해서 오전 일과가 시작되었다. "용병의 생활이라는 것이 싸움과 작전, 전투의 계속이라고 믿는 사람이 있 을지도 모르겠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아. 용병의 생활은 오히려 작업, 훈련, 휴식의 연속이야. 봄에는 새봄 맞이 작업이, 여름에는 비막이 작업이, 가을에 는 월동 작업이, 겨울에는 사냥이 계속되지. 그 사이사이 훈련은 하루도 빠지 지 않고 계속되고, 그러다가 시간이 남으면 작전을 나가는 거라고 생각하면 되" 차이린은 이렇게 내게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물론 반 농담조이긴 했지만, 치이린의 친절한 말투는 항상 어딘지 모르게 은근히 무서웠다. 나는 뻣뻣하게 차이린의 말을 듣고 있었다. 차이린을 따라간 다섯 명의 오전 일과는 훈련이었다. 아직 활쏘기가 서툴다 며 다섯 명을 고른 것이다. 그리고 활쏘기 연습이 시작되었는데, 이전과는 달 리 나를 저능아 취급하지도 않았고 연병장을 돌라고 말하지도 않았다. 훈련병 시절, 나를 괴롭혔던 차이린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어쩐지...조금...누 나 같다고나 할까. 이런. 나는 바로 오늘 아침에도 천막을 치우면서 라이짐과 함께 차이린의 욕을 했었다. 사람의 마음이 이렇게 간사하다니. 활쏘기 연습을 끝내고 점심식사를 마치고 나자, 오전에 작업을 나갔던 다섯 명이 훈련에 들어갔고 우리 다섯 명은 작업에 투입되었다. 점심 식사가 끝나 고 나서는 작은 소동이 있었다. 최고참 청강과 다음 고참인 체리가 말다툼을 벌인 일이었다. 누가 봐도 단단한 용병이라는 인상을 주는 청강과 덩치 크고 험악하게 보이기로는 아케르 용병단 안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드는 체리와의 싸움은 당장에 살인이라도 나지 않을까 걱정스러울 정도로 살벌했다. "청강. 그만해. 타실에서는 행차하는 국왕에게 보여준답시고 울타리 하나 치는데도 장식을 하고 꾸미는 등 쓸데없는 작업을 할지 몰라도 여긴 용병단이 야. 그만하면 됐지 뭘 더 하자고 해서 애들 고생시키고 그래" 체리가 말했다 "체리. 이왕 울타리 만드는 거 조금만 손보면 보기도 좋고 튼튼하잖아. 내 가 일부러 애들 고생시키려고 그랬겠어?" 청강이 말했다. 어쩌면 여기서 그냥 말싸움은 끝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청강이 혼잣말로 '하여간 스파일 것들은 너무 무식하다니까'라고 말하는 바람 에 싸움이 더 커졌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N:김상현 #9256/10199 ━━━━━━━━━━━━━━━━━━━━━━━━━━━━━━━━━━━━━━━━ 제 목:[탐그루] 태양을 쫓는 아케르 42 관련자료:없음 32/32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1-04 00:49 조회:1046 탐그루 # 마법은 마음이다 - 마음은 칼이다 # "뭐! 지금 뭐라고 했어! 이 기생오라비 같은 타실 놈이!" 체리가 소리쳤다. 말싸움은 점점 더 거칠어져갔다. "그것봐라. 무식한 놈들은 어쩔 수 없다니까. 수틀리면 막무가내라니까. 그 렇게 무대뽀니까 함부로 전쟁이니 일으키고 말이지" "뭐라구? 먼저 식량 수출을 중지해 스파일의 아이들을 굶어죽게 만든 게 누 군데!" "그거야 흉년 때문이었잖아. 그땐 우리 먹을 것도 없었어" "타실 놈들이 말은 잘하지. 바바 족이 쳐들어온다고 하니까 나 살려라 하고 제일 먼저 내 뺀 겁장이 주제에" "뭐가 어째고 저째? 국경 방어는 스파일의 의무 아니냐. 그것 때문에 우리 타실 사람들이 세금을 얼마나 많이 내고 있는지 알기나 해? 입조심하라구. 그 렇게 함부로 말하다간 목숨이 열 개라도 모자랄 거야" "그래? 어디 한 번 해보자!" 참 나 원. 드디어 정치 얘기로까지 번졌군. 평민이 백날 정치 얘기 해봐야 아무 소용도 없다구. 용변단에 와서까지 이런 꼴을 봐야하나. 웬만하면 그만 들 하지. 전에도 말한 바 있지만 타실과 스파일은 서로 앙숙이다. 서로 힘만 센 놈들 이다, 입만 살아 있는 놈들이다, 해대면서 걸핏하면 투닥투닥이다. 그런 것들 은 사람들마다의 개성이지 그 지역 사람들을 싸잡아 말할 수 있는 건가. 하여 튼 서로 감정이 쌓이고 쌓여 삼 년 전쟁이 일어나게 됐겠지. 어쩌면 삼 년 전 쟁 때문에 그런 감정이 생겼는지도 모르고. 나는 도대체 언제부터 서로 그런 감정을 갖게 됐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이제는 서로 욕설을 퍼부으며 당장이라도 주먹다짐이 일어날 판이 되었다. 웬만한 일이면 용병단의 규칙대로 끼어 들지 않겠지만 타실과 스파일이 싸우 는 꼴을 보는 건 정말 질색이다. "이것 봐요. 타실의 일은 타실에서 끝내고, 스파일의 일은 스파일에서 끝내 요. 여긴 아케르 용병단이라구요" 흠. 저 표정들을 보라구. 내가 탐그루의 격언까지 인용했더니 저 놀라는 표 정하고는, 원. "입 닥쳐. 신병 주제에 어딜 함부로 끼어들어" 청강이 말했다. 이크. 나는 얼른 자리를 피했다. 만약 이때 차이린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둘은 칼을 뽑아들어 결투까지 벌이 게 됐을지도 모른다.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한 표정으로 두 사람의 말을 듣고 난 차이린은 두 사람의 뒤통수를 한대씩 갈겨 적당히 싸움을 끝냈다. 그 리곤 청강의 귀를 잡아끌다시피 해 자신의 천막으로 끌고 갔다. (뭔가 타이르 려고 데리고 간 것 같지만, 나는 차이린에 대한 농담이 생각나서 혼자 키득거 렸다) 이렇게 청강과 체리가 다투고 어쩌고 하는 사이에 동편 울타리 정비 작업은 끝이 나버렸다. (아마도 차이린이 청강을 부른 걸로 봐서 어떻게 조정을 한 모양이다. 그래서 우리 다섯은 용병단 밖으로 나가 마른나무를 모아오는 작업 을 했다) 바깥 공기였다. 겨울 산 공기는 더할 수없이 맑고 차가웠다. 겨울 숲의 나 무들은 눈 모자를 쓰고, 눈 외투를 두른 채 고적하게 서 있었다. 마치 그들은 오랜 방랑 끝에 탐 산맥을 넘어와 쉬고 있는 떠돌이 방랑 노인들 같았다. 열 네 살, 성년의 겨울. 나는 그 겨울을 마음껏 누릴 수 있었다. 아, 아니 다. 생각해보니 난 성년의 신 마소드의 검에 입을 맞추지 못했다. 루비오에게 조금만 늦게 발견됐어도 마소드의 검에 입을 맞출 수 있었을 텐데. 어쨌든 이렇게 바깥에 나와보니 세상은 정말 아름다웠다. 미처 털갈이를 하 지 못해 초록색 털을 가진 산 쥐들이 여기저기서 뛰노는 모습이 보였고, 하늘 에는 은색 깃털을 가지고 있어 길조로 알려진 그륵 새들이 날고 있다. (그륵 새들이 우는 소리는 그륵 그륵, 아무리 들어봐도 가래 끓는 소리였지만) 무엇 보다도 내 눈을 끌 것은 노란 색의 부드러운 털을 가진 백년수였다. 라마보다 조금 크고, 뮤보다는 조금 작은 그 짐승은 얼굴이 몸집에 비해 좀 큰 편이어 서 둔하면서도 느려 보였다. 천년이고 만년이고 천하태평일 것 같은 모습으로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세상에 저만큼 평화로운 풍경이 또 있을까. 백년수라는 이름은 백 년을 산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라고한다. (물론 비스토브레 왕국 식 백년이다. 얼마나 오래 사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말) 산등성이를 오르내리는 일은 이제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땔감으로 쓰 기에 적당한 굵기의 나뭇가지를 모으는 일은 쉽지 않았다. 어차피 나뭇가지를 모으는 데 목적이 있다기 보다는 잠깐이라도 놀리지 않르려는 데에 목적이 있 는 작업이 아닌가 싶었다. 근처의 나무들은 벌써 다 땔감 용으로 잘라가고, 용병단 본부 뒷산의 높은 곳까지 가서야 겨우 적당한 나뭇가지들을 찾을 수 있었다. "멀리까지 나오니 힘들지? 겨울을 날만큼의 연금술사의 빛은 가지고 있지 만, 언제 무슨 작전이 있을 지 모르니 미리미리 준비해 두는 거야. 이해하겠 지?" "그러니까. 힘들 건 말건 상관없이 이해하라는 말이죠...?" 차이린은 배시시 웃었다. 그런데 그 웃는 모습이... 세상에 여자 같다는 생 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차이린의 피부는 좀 가무잡잡했지만 의외로 꽤 매 력적이었다. 흰 피부만 예쁘고, 아름답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나무를 해가지고 오다 정문 앞에서 아루마 십부장의 병력과 만나게 되었다. 재훈이 있는 십부였다. 나는 두리번거리며 재훈을 찾아보았다. "재훈!" 나는 마른 나뭇가지를 한 짐 가득 지고 있었지만 손을 흔들어 재훈에게 인 사했다. 그런데 재훈의 등에 나뭇가지 말고 뭔가 다른 것이 보였다. 귀가 뜯겨나간 타코였다. 타코는 예전에 보았던 것처럼 재훈의 등에 바싹 달라붙어 있었다. 어떻게 그 타코를 다시 찾을 수 있었을까. "처음이야, 처음!" 재훈은 등을 가리키면서 이렇게 큰 소리로 외쳤다. 무슨 뜻인지 확실히 알 수는 없었지만 아마 그 타코의 이름이 '처음'이라는 뜻인 것 같았다. 재훈은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벙글거리며 뛰어가 자기의 십부에 다시 합류했다. 자유시간에 재훈을 찾아가 볼까 하고 있는데, 차이린이 내게 말을 걸었다. "...나하고 같이 아케르 단장님께 가봐야겠다" 이런. 한 동안 잠잠하다 싶더니 또 부르는 군. 그냥 용병으로 살고 싶은데, 그렇게는 되지 않는 걸까? 단장실에는 행정 담당관 순무와 마법사 타호루가 아케르 단장과 함께 있었 다. "차이린, 설명해줬나?" "아니요. 아케르 단장님께서..." "그래. 그럼 내가 설명하지" 차이린이 뭐라고 설명하려고 했지만 순무가 말하기 시작해서 차이린은 입을 다물었다. 순무라는 사람은 시간 낭비를 아주 싫어하는 모양이었다. 길게 말 하는 꼴은 못 보는 모양이지? 그렇다면 하진이 순무에게 물건을 판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타호루의 말을 먼저 들어보지. 타호루" 아케르 단장이 말했다. 아케르 단장은 앉아 있었는 데도 마치 아케르 단장 을 올려다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예. 수르카의 반지의 정령은 적어도 천 년 이상 살았습니다. 저도 정령의 반지를 하나 가지고 있습니다만... 제 반지의 정령은 모든 일을 기억하지 못 합니다. 하지만 사비오라는 마법사가 가지고 있던 반지의 정령은 자신이 겪었 던 모든 일을 기억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그 반지의 주인이 지금은 수르카라는 말입니다. 그렇지, 수르카?" "예" "그럼 여기서 반지의 정령을 불러보게" 그러고 보니 오랫동안 아자닌을 잊고 있었다. 우보 반장을 깨운 마법을 한 후로 말이다. 해가 있을 때는 훈련이다 뭐다 바빴고 자유시간엔 자거나 먹기 에 바빴으니 말이다. "지금요?" 내가 되물었으나 네 명의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는 모습이 어서 불러내라고 재촉하고 있었다. 오래간만에 불러보는데, 이거, 어쩌지? 나는 뭐라고 말하면 서 시간을 끌어보고 싶었지만 순무의 날카로운 눈초리가 마음에 걸렸다. 별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주문을 외웠다. "내* 마음의* 문을* 여니* 길을* 인도해* 다오*" "부르셨습니까, 수르카 님" 순무는 아자닌을 보더니 조금 놀랍다는 표정이었고 타호루는 야릇한 시선으 로 아자닌을 열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차이린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아 자닌을 만져보려고 했다. (그래봐야 허공을 휘저을 뿐이지만) 아케르 단장은 아무 표정이 없었다. "저 정령의 이름이 뭔가?" 순무가 물었다. "아자닌입니다" "그래. 아자닌은 마물들에 대해서 좀 아는 것이 있나?" 마물이라고? 무슨 일인가 했더니 마물 때문이었군. 나는 혹시 타호루가 이 제 제자가 되기로 마음을 굳혔냐고 묻는 건줄 알았지. "아자닌. 마물들에 대해서 아는 것 있어?" 내가 아자닌에게 물었다. "순무 행정 담당관님. 저에게 직접 물으셔도 됩니다. 그리고 그 마물이 어 떤 마물을 뜻하시는 건지 정확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순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랬다. "내 이름을 어떻게 알지?" "반지의 정령은 주인이 알고 있는 것은 모든지 알고 있습니다. 주인이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말이죠. 그래서 어떤 사람은 정령의 노예가 되기 도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보통 주인이 바뀌면 모든 기억을 잃는 게 보통인데 이 반지의 정령은 좀 다릅니다. 그래서 제가 부득이하게 수르카를 이곳으로 부르자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타호루가 말했다. 아마도 아케르 단장에게 설명해 주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내가 아자닌의 노예가 될 수도 있다고? 처음 듣는 얘긴데... "수르카 님이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자닌. 그 대답은 안 해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이라구. "음. 놀랍군..." 순무는 정말 놀란 모양이었다. 그 냉철한 순무의 입에서 놀랍다는 말이 다 나왔다. 그러나 순무는 정말 순무답게 금방 질문을 이어 갔다. "음, 자네 (자네라는 말을 쓰기가 좀 껄끄러운지 순무는 조금 망설였다), 타호루의 말에 따르면 자네가 짐승들을 부리는 악령 씌인 사람들을 좀비라고 했다던데, 사실인가?" "예" 아자닌이 대답했다. 순무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질문을 다시 이었다. "다른 사실들도 확인 할 수 있나? 예를 들어 천 년 전, 마칸 족이 부렸던 마물들을 보면 알아볼 수 있느냐는 말이다" 순무가 물었다. 마칸 족. 나는 전에 이 천막에서 타호루와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예" 아자닌은 별 설명 없이 그렇다고 했다. "하지만 수르카가 직접 봐야 확인이 된다는 말이지?" "예" "그렇다면 결정은 났습니다. 수르카를 그곳으로 보내면 되지 않습니까" 순무가 말했다. "그건 안됩니다" 순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타호루가 끼어들었다. "이제 갓 신병이 된 수르카를 그곳에 보내기엔 너무 위험합니다. 만에 하나 수르카가...(적당한 단어를 고르는 모양이었다) 별로 좋지 않은 일이 생긴다 면 그 뒷일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차라리 그 반지를 저에게 잠시 빌려주게 한 뒤, 제가 그곳으로 가는 게..." 어랍쇼? 얘기가 점점 무슨 소린지 모를 방향으로 흘러가는 걸.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어야겠다. "아니. 타호루. 내가 이곳을 비울 수는 있어도 주둔지 담당 마법사가 이곳 을 그리 쉽게 비워서는 안되지. 난 수르카의 의견을 들어보겠어. 순무. 설명 해주게" "수르카. 가투신의 웃는 얼굴 십부가 오르크를 소탕하기 위해 떠난 사실은 알고 있겠지. 그런데 웃는 얼굴 십부에서... 그러니까 바로 어제였는데... 소 식이 왔다. 그러니까... 처음 보는 마물 때문에 작전이 지연되고 있다는 내용 이었다" "그 전령이 하는 말을 수르카 님이 직접 들으시면 어떻게 된 일인지 제가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아자닌에게 그런 능력도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보다 임무를 맡 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럴 수는 없어. 전령은 도착하자마자... 죽었거든" 나는 얼굴도 모르는 죽은 전령에게 미안하다는 감정이 들었다. 하지만 아케 르, 순무, 타호루, 심지어 차이린까지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차이린도 대강 은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니면 아케르 용병단에서 죽는 일은 아주 흔한 일 이든지. "그래서 수르카, 너를 보내고자 하는 거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마물하고 무 작정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오르크 정도는 모두들 우습 게 생각하고 있지만 처음에 오르크들이 등장했을 때에는 상당한 위협이었다. 오르크들이 인간과 다를 바 없는 작전들을 구사 한다는 것을 처음에는 생각도 못했으니까. 그런데 정체를 알 수 없는 마물이 또 나타났다니... 게다가 가투 신 정도 되는 십부장이 쉽게 다룰 수 없는 마물이라면 꽤 위험한 놈이 분명할 테고. 하지만 네가 가서 그 마물의 정체와 약점을 알아낸다면 가투신은 충분 히 그 일을 해 낼 수 있을 거야" "동타실 출신 사람을 붙여줬어야 하는 건데..." 순무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동타실 사람이 가면 뭔가 다르다는 소릴까? 그 러고 보니 동타실 출신 사람들 중에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났다. 그런데 가만. 그렇게 위험한 곳에 나 혼자 보내겠다 구? "저 혼자...요?" "물론 아니다. 차이린이 동행할 것이다. 걱정 할 필요는 없다. 가투신의 능 력은 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이니까. 어쩌면 네가 도착할 때 쯤에는 그 새로운 마물을 다 쓸어버렸는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 마물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얻 는 일이 중요해졌다. 그 마물이 혹시 마칸 족이 부리던 짐승이 부활한 것인지 도 알 수 없고, 새로운 마물이라면 약점은 무엇인지 알아야 다음에 또 그 마 물이 출현했을 때 적절히 대처할 수 있으니까" "도착할 때쯤이면 다 쓸어버렸을지도 모른다는 말은 무슨 말이에요, 순무? 전령이 부상을 당해서 왔다면 가투신의 부대는 아주 심각한 지경에 빠진 게 아닐까요? 설마 병력을 더 파견할 생각이 없어서 그렇게 말하는 건 아니겠 죠?" 차이린이 물었다. 존댓말이기는 했지만 어쩐지 훈련병에게 쏟는 욕설 같은 말투였다. "아니. 그럴 리는 없어. 전령이 죽은 이유는 마물에게 당한 것이 아니라 오 는 길에 짐승의 습격을 받아서 그런 것 같아. 늑대 이빨 자국이 선명했거든. 하지만 지금 병력을 더 파견하는 것이 무리라는 것은 솔직히 인정하겠어. 사 실 지금은 언제 어디서 좀비들이 공격해 올지 모르는 상황이거든. 게다가 좀 비들의 출현이 점점 더 빈번해지고 있는 상황이니까. 우리 본부가 왜 이곳으 로 옮겼는지 잊지는 않았겠지?" 차이린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유훈이 가투 신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본부를 옮겼다고 했었다. 아마 위급한 일이 생겼 을 때 방어에 용이한 곳이 바로 이곳인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좀비의 존재가 그렇게까지 위협적이라는 말인가? "자. 그럼 맡아주겠나?" 나는 잠시 망설였다. 어떻게 해야 하나? 맡지 않아도 될지 모르는데. 이게 내 첫 임무자 마지막 임무가 되는 건 아닐까? 아자닌에게 물어볼까? 아니 면... "수르카. 망설이지 말고 그 반지를 나에게 잠시 빌려주면 되. 아케르 단장 님. 제가 이곳을 잠시 비운다고 해도 별 문제가 생길 것 같진 않습니다. 하지 만 수르카가 무슨 일이라도 당하게 된다면 앞으로 마법사를 기를 기회는 좀처 럼 찾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타호루가 말했다. "앞뒤가 안맞아. 타호루. 자네가 간다고 해서 안전하다는 확실한 보장이 있 는 것도 아니야. 수르카가 간다고 해서 마법사를 키울 기회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수르카는 우리 용병단의 병사로 계약한 것이지 마법사로 계약 한 건 아니야" 아케르는 이렇게 타호루의 말을 막았다. "수르카. 위험할 수도 있다는 건 자네나 나나 잘 알고 있어. 하지만 난 자 네의 능력을 믿네. 내가 본 자네의 칼 솜씨는 마치 그 나이 때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았으니까" 나는 침을 한 번 삼켰다. 아케르가 다시 한 번 나의 칼 솜씨를 칭찬해 준 것이다. "맡겠습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아케르가 인정하는 용병이, 무서워서 임무를 피한다 는 건 말도 되지 않는 소리였다.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좋아. 그리고 차이린. 걱정하지 말게. 봐서 알겠지만 수르카는 차이린이 보호해야 할 어린애가 아니라 자네와 함께 할 전우일세. 자. 그럼 이제 결정 은 내려졌네. 내일 날이 밝으면 바로 출발하도록" 아케르의 말에 또 마법의 말이 섞여 있었다. 나는 아자닌에게 저 말이 어떤 마법의 말인지 당장 물어보고 싶었지만 타호루가 있어서 그냥 참기로 했다. 타호루, 저 사람이 내가 마법도 공부한다는 걸 알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를 마법사로 만들려고 할 게 뻔했다. 아니, 아케르가 인정하는 검사가 임무를 수 행할 생각은 않고 마법 공부나 하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참. 수르카. 뮤는 탈 줄은 아는가?" "저는 탐그루 출신입니다" 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탐그루 출신이 뮤를 못 탄다는 건 상식 밖의 일이 다. "그래서?" 순무는 이렇게 되물었다. 하여간 예, 아니면 아니요 밖에 모른다니까. "예. 탈줄 안다는 말입니다" "좋아. 차이린. 수르카. 이제 가서 준비하도록" 차이린과 나는 인사를 하고 천막 밖으로 나왔다. 나는 나오면서 뒤돌아 아 케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케르의 얼굴에서 나에 대한 신뢰가 느껴졌다. 가슴이 따뜻해져 왔다. 이런 느낌을 받은 지가 꽤 오래되었다는 생각이 들었 다. 그런데 타호루의 눈빛은 마음에 걸렸다. 타호루는 왠지 이대로 하는 게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수르카. 첫 임무가 좀 힘들게 됐구나. 그래도 내 부하니까 다행이야" 이게 무슨 소리야? 다행이라니? "사실, 나 이번 임무 자원한 거야. 가투신 십부장이 위기에 빠졌다는 데 내 가 안 가볼 수 없잖아. 그런데 다행히도 수르카가 내 부하라서 아케르 단장의 허락을 어렵지 않게 받아 낼 수 있었어" 설마, 차이린 십부장이 가투신 십부장을 좋아한다는 소리는 아니겠지? 나는 둘이 함께 있는 광경을 생각해보니 닭살이 올랐다. 애써서 도와주러 갔는데 가투신이 달가워하지는 않으면 어쩌지. 그럼 난 차이린의 사랑을 위해서 이용 당한 건가? "그나 저나 왜 저 순무 행정관님은 말을 그렇게 해요?" 나는 순무의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아 푸념조로 이렇게 말했다. "글쎄. 아마 탐그루 출신이라 그런 모양이지. 내가 알기로 순무 행정관은 탐그루에서 연금술사였다고 들었어. 물론 용병단에 떠도는 얘기들을 다 믿을 수는 없지만 말이야" 나는 차이린의 말을 듣는 순간 탐그루에서 사비오 영감이 남긴 물건들을 전 해준 바코쿠 생각이 났다. 고향 생각... 나는 코끝이 찡해지는 게 느껴졌다. 이런. 생각해보면 떠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탐그루가 그리워지 는 건 왜일까. 정말 떠나봐야지 고향이 좋은 걸 안다더니... "그럼 오늘은 푹 쉬라구. 그리고 아자닌도. 내일 보자" "예. 차이린 님" 차이린은 아자닌을 한 번 흘깃 보더니 자신의 천막으로 향했다. 아직은 정 령을 보는 일에 익숙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십부장들이 하나씩 가지고 있는 아담한 개인 천막이 오늘 따라 새삼 부러웠다. 만약 누가 나에게 십부장이 되 고 싶지 않으냐고 묻는다면 개인 천막 때문에라도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냄새나는 공동 천막보다는 개인 천막이 훨씬 나으니까. 차이린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뒤에 아자닌에게 물었다. "아까 아케르 단장님이 말한 말 중에 마법의 말이 있지 않았어?" "예. 이제 결정은 내려졌다는 말이 마법의 말이었습니다. 한 번 해보세요" "이제* 결정은* 내려졌다*" 그러나 역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말을 마음으로 깊이 이해하고있지 않으면 마법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알아. 안다구. 아직 취침시간 전이니까 라이짐에게나 가보자. 라이짐은 내 출정 소식을 들으면 배아파 하겠지. 혹시 다른 사람들이 보고 놀라지 않을까 해서 아자닌은 반지로 돌려보냈다. "라이짐을 찾아 왔습니다만..." 밍밍의 빛의 단검 내무반은 여덟 명의 용병이 있었다. 라이짐은 침상을 짚 고 팔굽혀펴기를 하다말고 뛰어왔다. 나는 라이짐에게 내가 맡은 임무를 대충 설명해주었다. 물론 아케르 단장 님이 내게 해준 칭찬은 잔뜩 강조해서. "...나보다 먼저 임무를 맡았구나. 우리는 삼일 후에 출정한다는 데" 라이짐도 이제 곧 첫 출정을 가지게 되는구나. 나는 어쩐지 둘 다 더 큰 세 계로 나아간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왔다. "수르카. 죽지마라" "너도. 라이짐" 나는 라이짐의 손을 꽉 잡으면서 말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아무리 친한 친 구 사이라고 해도 그런 건 좀 새삼스럽다. 천막으로 돌아온 나는 재훈의 천막에도 찾아가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피곤한데다가 푹 쉬어야 한다는 차이린의 말이 생각나서 그만두었다. 하지만 막상 불이 꺼지고 눈을 감자 내일 아침에 출발한다는 생각으로 긴장이 돼서 그런지 통 잠이 오질 않았다. 쿵닥쿵닥하는 심장 소리가 내무반 전체에 울려 퍼지는 것 같았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N:김상현 #9330/10199 ━━━━━━━━━━━━━━━━━━━━━━━━━━━━━━━━━━━━━━━━ 제 목:[탐그루] 태양을 쫓는 아케르 43 관련자료:없음 24/24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1-05 00:49 조회:1072 탐그루 # 마법은 마음이다 - 마음은 칼이다 # 나와 차이린 단 두 명의 출정이었지만 전 부대원의 환송을 받으며 출발했 다. 앞서도 말했지만 십부원이 단 한 명이든, 백 명이든 십부임에는 차이가 없는 것이다. 환송식은 전과 같이 아케르 단장의 연설로 끝났다. "제군들의 이번 출정은 대규모의 다른 출정과 다를바 없이 우리 용병단의 미래를 위한 빛나는 한 걸음이 될 것이다. 미래를 위해서 죽지 말고 돌아오도 록" 아케르의 짧은 연설을 듣고 난 후 차이린과 나는 뮤를 타고 주둔지를 떠났 다. 환송하는 사람들 중에 라이짐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라이짐에게 손을 흔 들어 주었다. "죽지마! 만약 죽으면 네 유품은 내가 다 가질 테니까!" 저게 악담인지 환송하는 말인지, 아무리 봐도 진담 같은 걸. 재훈의 모습도 보였다. 재훈의 등뒤에 달라붙어 있는 타코의 모습이 선명하 게 눈에 들어왔다. "처음! 잘 키워!" 하지만 재훈은 잘 못알아들었는지 뭐라고? 그래, 조심해. 하고 딴소리만 했 다. 아침 햇살을 후광처럼 두르고 선 아케르 단장의 모습도 보였다. 미래를 위 한 빛나는 한 걸음이라고 했지... 아케르 단장이 말하는 미래는 어떤 것일까. 그 미래의 때가 오면 난 아케르 단장과 함께 있을 수 있을까... 미래, 미래 라.... 주둔지가 차츰차츰 멀어져갔다. 주둔지밖에는 더 세찬 겨울바람이 불고 있었다. 겨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다행히도 눈이 올 것 같진 않았다. 팜 산맥은 이제 완전한 겨울이었다. 붉어 졌던 푸른 잎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는지. 발가벗고 선 앙상한 가지들은 모두 삼년전쟁 후의 고아들처럼 쓸쓸하고 외로와 보였다. "자. 서두르자, 수르카" 넋을 놓고 내게 차이린이 말했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뮤 고삐를 꽉 움켜쥐 었다. 차이린은 자주 다녀본 길인지 지도도 한 번 펴보지 않고 구불구불 이어 진 산길을 거침없이 앞장 서 갔다. "우리가 의뢰를 받은 마을은 타실의 동쪽 끝에 있는 소리장이라는 외진 마 을이야. 하긴 그렇게 외진 마을이니까 의뢰가 들어온 거겠지. 타실 정규군이 거기까지 신경을 써줄 수는 없었을 테니까. 여기서는 하룻밤거리니까 그리 먼 편은 아니지" 산길이 끝나고 소리장 마을까지 이어진 길은 비교적 평탄한 편이었다. 뮤는 워낙 잘 달리는 동물이어서 굳이 평탄한 길이 아니어도 빠르게 달릴 수 있지 만, 이렇게 평탄한 길이라면 정말 빨리 달릴 수 있는 게 뮤다. 나와 차이린은 중간중간 휴식도 취하고, 느긋하게 식사시간을 가져도 생각보다 빨리 갈 수 있었다. 하지만 한나절에 닿을 수 있는 거리는 아니어서 하룻밤은 야영을 해 야 했다. 뮤를 묶어놓을 만한 나무가 있고, 야영하기 적당한 곳을 찾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하룻밤 야영할 것을 염두에 두고 준비한 장작도 있었다. 덕분 에 해가 지기도 전에 야영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이윽고 모닥불이 올랐고 나와 차이린은 불 옆에 앉아 저녁 식사를 했다. 나 는 준비해온 마른 고기와 과일을 그냥 먹으려 했는데 차이린은 불에 구워먹는 게 더 맛있다며 말린 고기를 모닥불에 구워 먹었다. 냄새가 그럴듯했다. 나도 나뭇가지에 마른 고기르를 꿰어 이리저리 돌려가며 불에 구웠다. 의외로 맛이 좋았다. "불의 힘이지. 적당히 불의 힘을 받은 것들은 모두 조금 더 나아지지 칼도 불을 거쳐야 강해지고 물도 끓여야 뒤탈이 없잖아, 안 그래 수르카?" 나는 그렇다고 대답은 했지만 가을밤의 날씨가 꽤 쌀쌀해서 어깨를 움츠리 며 조그만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데 모닥불빛 넘어 차이린에게서 들려온 말 에서 마법이 느껴졌다. 저말은 또 어떤 마법일까? 따뜻하게 해주는 마법이면 좋겠다. "춥구나. 준비해온 모포를 좀 두르지 그러니?" 차이린이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모포를 꺼냈다. 사실 아까부터 모포 생각이 났지만 어쩐지 차이린의 허락 없이 꺼내서는 안될 것 같아서 참고 있었던 것이다. "수르카는 탐그루 출신이라고 했지?" 차이린이 물었다. 아마 지난 저녁에 임무를 받을 때 내가 한 말을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탐그루에는 전에 한 번 가본 적이 있어. 사람들이 많고 북적거리는 도시였 다고 기억해... 좀 오래 전 일이지만" "용병이 되기 전 일인가요?" "아니. 용병이 되고 난 후의 일이야. 거기에서 뭔가 좀 해야 할 일이 있었 거든. 뭔지 궁금하지는 않겠지? 의뢰 내용의 비밀을 지키는 건 용병들의 불문 율이라는 걸 잘 알 테니까 말이야" 차이린이 말했다. 모닥불의 빛을 받아 붉게 빛나고 있는 차이린의 얼굴은 어쩐지 수줍은 소녀처럼 배시시 웃고 있는 듯 했다. 어라? 이런 엉뚱한 생각 이 들다니. 이거, 내가 좀 미치고 있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 "그런데 그 발목에 찬 건 뭔가요?" 사실 해골 장식이 달려있는 그 발목에 찬 고리가 도대체 뭔지 아주 오래 전 부터 궁금했다. 하지만 함부로 물어보기 뭣해서 지금까지 참아왔는데, 기회도 되고 생각도 나고 해서 물어 본 것이다.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고 물어 본 것 이었는데 차이린의 얼굴 표정이 굳어졌다. 뭔가 건드려선 안될 것을 건드렸나 보다. "...꽤 긴 얘기란다" 차이린은 이렇게 말하고 말문을 닫아버렸다. 얼굴에 어딘지 슬픈 빛이 도는 것 같았다. 그때 한바탕 차가운 바람이 얼음칼처럼 모포 속으로 파고들었다. 모닥불이 흔들리고, 모닥불위로 날아가던 불티들이 내 얼굴도 우수수 날아왔 다.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휘저어 불티들을 헤쳤다. "진짜 야영은 처음이지?" 차이린은 내 모포 속으로 들어오더니 어깨를 감쌌다. 야릇한 냄새가 내 속 으로 훅, 하고 끼쳐 들어왔다. 언젠가 맡은 적이 있는 냄새였다. 아마도 탐그 루에 있을 때 운하 근처에 사는 기생들에게서 맡아지던 냄새 같았다. 이상하 게 그 냄새만 맡으면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이 발목고리는 내 추억이야" 차이린은 아련한 눈빛으로 모닥불을 바라보며 말을 꺼냈다. "내 고향은 여기서 아주 먼곳이다. 스파일 동쪽 끝, 바바족과의 국경지대에 서 사냥으로 살아가는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랐지. 당연히 어려서부터 활을 쏘 며 자랐어" 어쩐지 활을 잘 쏘더라니. "그런데 어린 마음에 긴 머리를 숨기고 사냥 대회에 나간 게 화근이었어. 거기서 마을 장로의 아들을 이겨 버린 거야. 어린 나이에 내가 뭘 알았겠어. 그냥 승부욕이 지나쳤을 뿐이었는데. 그런데 그게 들통이나서 마을 사람들에 게 몰매를 맞고 화형을 당하게 된거야. 우습지? 그쪽 지방에서는 여자가 사냥 개 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는단다"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여자가 사냥 대회에서 우승한 게 뭐 죽 을 죄라도 되나? "아버지가 날 도망치게 해 주셨어... 이건 아버지 유품이야" 발목을 돌리면서 차이린은 말했다. 발목에 달린 해골 모양의 장식이 쇳소리 를 냈다. 쇳소리는 바람소리와 어우러져 음산한 느낌을 주었다. 나는 저절로 몸이 떨렸다. 그런데 내가 부르르 몸을 떨자, 차이린은 내가 추워서 그러는 줄 알았던지 나를 감싼 어깨를 더 꼭 조여왔다. 이젠 가슴이 뛰는 건 둘째치 고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저, 잠깐만..." 나는 이렇게 말하고 모포 밖으로 나가 되도록이면 멀리 걸어가 오줌을 누었 다. 그것도 될 수 있으면 소리가 나지 않게 나무에 흐르도록 조심스럽게 조준 해서 말이다. 그렇지만 한참동안 모닥불을 보고 있어서 그런지 앞이 잘 안보 여서 조준이 빗나가 소리가 나고 말았다. 오줌줄기가 쌓여있던 마른 잎 위에 떨어져 큰 소리가 났다. 이런. 나는 웬지 부끄러웠다. 바로 돌아오지 못하고 한참을 서성인 뒤에야 모닥불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빨리 들어와. 오줌누고 나면 더 추워" 나는 고개를 숙이고 재빨리 모포 안으로 들어간 뒤 땅바닥만 바라 보았다. 차이린은 내가 귀여워 죽겠다는 듯이 나를 꼭 안아주었다. "수르카. 죽지마, 정말로" 나는 차이린의 품속에서 숨이 막혀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웬 여자가 이렇게 힘이 센거지. 차이린의 뜨거운 숨결이 규칙적으로 볼에 와 닿았다. 나 는 그 와중에서도 한가지 사실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소문이 맞을 때도 가끔 은 있다는 것이 그것이었다. 우보 반장이 차이린은 젖가슴이 하나도 없다는 말을 했을 때, 나는 여잔데 설마, 했지만 두꺼운 가죽 옷 너머로 느껴지는 차 이린의 가슴은 정말 남자 가슴 같았다. 하지만 차이린은 이런 내 마음을 아는 지 모르는지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난 처음에 수르카가 고아라는 걸 알았을 때 나하고 처지가 같다는 생각을 했어. 그래서 일부러 수르카를 내 십부로 오게 한 거야" "라이짐도, 재훈도 고아입니다" 나도 모르게 당황해서 큰 목소리로 말하고 말았는데 오히려 더 귀엽게 보였 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다운 말투로 말하고 싶었는데 이렇게 품에 안 긴 상황에서야 어떻게 말해도 소용없을 것 같다. 나는 차라리 아예 꼬마처럼 가만히 품에 안겨 있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아. 하지만 라이짐과 재훈은 원하는 십부장이 있었어" 가만. 그럼 날 원한 십부장은 하나도 없었다는 말인가? 아케르가 인정한 칼 솜씨를 가지고 있는 이 수르카를? 이거, 정말 대실망이다. 그런데 차이린은 왜 나를 더 꽉 안는 거지? 그러자 갑자기 하진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차이린 은 남자 병사들을 수도 없이 가지고 놀았다는 그 말. 까맣게 잊고 있었다. 바 보 같이. '너 그 소문 못들었냐? 차이린이 병사를 밤중에 몰래 불러내서 마음대로 가 지고 논다는 거. 옷을 벗기고 만지고 핥고 어쩌고 하면서... 반항하지 못하도 록 목에 칼을 들이대고 그런대더라. 만약 반항했다간 그대로 죽여버린 뒤 연 병장에 묻어버린데. 그래서 대게는 그냥 순순히 말을 듣는다더라. 사소한 일 에 목숨까지 걸 필요는 없잖아? 내 생각엔 차이린이 아직도 결혼을 안 한 이 유가 그런 재미를 못버려서 그런 것 같애...' 물론 내 목에 칼을 들이대지는 않았지만 하진의 말이 떠오르자 조금 겁이 났다. 차이린의 미소가 어쩐지 연약한 사냥감을 노리고 있는 사냥꾼의 미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그런데, 이젠 별로 안 춥거든요..." "그래?" 차이린은 순순히 나를 풀어주었다. 천만 다행이었다. 혹시 내가 마법을 쓸 줄 아니까 만만히 볼 수 없는 상대라고 생각해서 그런 걸까? 아니면 내가 아 직 꼬마라서 봐준 건가? 그런데 꼬마라니! "자. 이제 자자. 이게 뭔지 알지?" 차이린이 시간 막대기를 꺼냈다. "먼저 자라. 네 개가 타면 해가 뜰 거야" 그제야 나는 내 임무가 뭐였는지를 떠올렸고, 곧이어 잠이 들었다. 오래간만에 꿈을 꾸었다. 그런데 꿈속에서 나는 발가벗고 있었다. 아자닌이 꿈속에서 나를 만지고 있었다. 그것도 온 몸 구석구석을 말이다. 나는 아자닌 의 손을 치우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꿈 속에서 아자닌은 환영이니까 그런가 보다 하고 생각했다.(그런데 어떻게 날 만질 수 있지?). 나는 아자닌에게서 도망가려고 했지만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묘하게 기분이 좋기도 했고... 문득 오줌이 마렵다는 느낌이 들었다. 오줌을 눠야한다. 안 그랬다간 그냥 싸 고 말텐데... 나는 아자닌에게 사라지라고 명령하려고 아자닌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아자닌의 얼굴이 선명하게 눈에 보였다. 아자닌은... 차이린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수르카. 일어나. 나도 좀 자자" 나는 차이린의 얼굴을 보는 순간 꿈이 계속되고 있는지, 현실인지 구별을 못해 뒤로 도망치려고 했다. "왜 그래, 수르카. 나쁜 꿈이라도 꿨니?" 그제서야 꿈이 아님을 깨달은 나는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땅에 서 냉기가 올라와서 그런지 온 몸이 찌뿌둥했다. 기분이 영 찜찜했다. 왜 그 런가 찬찬히 살펴 봤더니...바지가 젖어 있었다. 오줌을 싼 걸까. 하지만 오 줌을 쌌다고 생각하기에는 양이 너무 적었다. 뭐, 그런 일은 나중에 생각하기 로 하자. 나는 차이린에게 모포와 자리를 양보한 뒤, 차이린이 눈을 감은 것을 확인 하고 모닥불에 옷을 말리기 시작했다. (추워서 옷을 벗을 수는 없는 일이고, 그저 모닥불에 젖은 부분을 가까이 가져갈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옷을 말리 려고 불에 가까이 다가서자 진짜로 오줌이 마려웠다. 별 수 없이 옆에 있는 관목숲으로 들어가 바지를 내렸다. 그런데 손에 끈끈한 것이 만져졌다. 이게 도대체 뭐야? 그제야 나는 내가 몽정을 했다는 것을 알았다. 언젠가 라이짐에 게서 들은 적이 있기는 했지만 설마 이렇게 몽정을 하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나는 찜찜한 기분을 없애고 마법 연습도 할 겸 아자닌을 불러냈다. "부르셨습니까, 수르카 님" "그래. 마법 연습 좀 하려고" 나는 방패 마법을 몇 번 시도 해 보았다. "모든* 빛깔* 있는* 것들은* 나에게* 시간을* 빌려다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요즘엔 별로 연습도 하지 않았는 데다 가 어찌된 일인지 도무지 마법의 말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전에 마법을 성공 시켰던 순간을 떠올려보았다. 그때는 뭔가 간절히 원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마법도 이루어졌던 것 아닐까? 나는 그때의 기분을 떠올리며 마 법의 말을 다시 외워보았다. 역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거기다가 예전하고는 다르게 집중을 하고 마음을 움직이려고 하니까 작은 먹구름조차 나타나질 않았다. 만약 라스폼의 불 공격을 다시 받게 된다면 이젠 막을 방법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혹시 차 이린이 내가 잘 때 무슨 나쁜 짓을 해서 그런 거 아닐까? 어쩌지 어쩌지. 불을 생각하자 나는 아까 차이린의 말에서 마법의 말이 섞여 있었던 것을 기억했다. "아자닌. 차이린이 아까 한 말 중에 적당히* 불의* 힘을* 받은* 것들은* 모 두* 조금* 나아진다* 이게 마법의 말이었지??" 내가 아자닌에게 물었다. "예. 적당히* 불의* 힘을* 받은* 것들은* 모두* 조금* 더* 나아진다* 그말 이 마법의 말이었습니다" "혹시 무슨 마법인지 알 수 있을까?"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렇게 물었다. "저는 수르카님이 아시는 것 이상은 모릅니다. 수르카 님이 알아내면 저도 알 수 있게 되겠죠" 칫. 그럼 그렇지. "넌 옛날 주인들하고 같이 했던 일을 다 기억한다며" "예" "그런데 마법은 모른다는 게 말이 돼?" 나는 좀 기분이 상해서 이렇게 물었다. "마법은 마음에서 나옵니다. 같은 마법의 말이라고 해도 마법사가 그 마법 의 말을 이해하고 있는 정도에 따라 마법의 위력도 달라지고, 각기 다른 마법 이 나오기도 하죠. 수르카님도 방어막을 만드는 마법에서 구름을 불러오신 적 이 있잖아요? 그러니까 같은 효과를 가진 마법의 말이라고 해도 마법사 마다 이해하는 방식이 다르니까 제가 알 수 없는 거에요" 하여간 말은 잘해요. "적당히* 불의* 힘을* 받은* 것들은* 모두* 조금* 더* 나아진다*" 다시 신중하게 마법의 말을 외쳐보았지만 역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내가 제대로 그 마법의 말을 이해하고 있지 못한 게 틀림없다. 어떻게 하면 제대로 이해하는 것일까. 이해, 집중, 마음. 이해, 집중, 마음. 가만. 그럼 내 마음을 크게 움직였던 말들 중에서 한 번 마법을 찾아볼까? 나는 아케르 단장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내 마음을 크게 움직인 말이니 성공 할 지도 몰라. 내가 조금이라도 이해를 했으니 그렇게 느꼈을테고, 그래서 내 마음이 움직였을 테니까 말이야. 나는 아케르의 말로 마법을 실행해보기로 마 음먹었다. "이제* 결정은* 내려졌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 그래 이제 결정은 내려졌다. 수르카는 돌 이라고. 마법에 있어서는 그 말을 이해하고 이해한 후 거기에 집중하는 마음이 가장 중요한것 같은데, 마법의 말을 이해한다는 게 말이 쉽지 결코 간단한 일이 아 닌 것 같다. (방패 마법인줄 뻔히 알면서도 제대로 그 마법을 걸지 못하는 걸 봐도 그렇다) 나는 몇 번을 더 시도해 보았지만 역시 아무런 마법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 이제 확실히 결정은 내려졌다. 오늘은 그만하자구 돌탱이 수르 카야... "아자닌. 들어가. 다음에 또 부를께" 밤하늘의 총총한 별빛들이 동쪽 끝에서 달려오는 새벽빛의 군단에 밀려 희 미해지고 있었다. 탐그루는 잘있을까. 혼자서 별빛 주점을 운영해야 하는 라 짐과 이제는 떠나버린 사비오 영감, 다 들 어떻게 살고 있는지. 시간은 흐르 고. 나도 어른이 되겠지. 언젠가는 당당한 모습으로 고향 탐그루로 돌아갈 수 있겠지...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N:김상현 #9331/10199 ━━━━━━━━━━━━━━━━━━━━━━━━━━━━━━━━━━━━━━━━ 제 목:[탐그루] 태양을 쫓는 아케르 44 관련자료:없음 23/23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1-05 00:50 조회:954 탐그루 # 마법은 마음이다 - 마음은 칼이다 # 다음 날, 나와 차이린은 무사히 목적지인 소리장에 도착했다. 차이린은 평 지든 산길이든 걸음걸이가 전혀 흐트러지지 않고 일정한 속도로 꾸준히 걸었 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차이린은 순발력과 인내, 지구력 등을 모두 갖춘 타고난 사냥꾼이었다. 어떤 짐승도 서두르지도 뒤처지지도 않는 이런 추격을 받는다면 제풀에 쓰럴질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소리장은 외진 곳에 있는 마을이었지만 꽤 규모가 큰 마을이었다. 논, 밭뿐 만 아니라 상점과 뮤 축사도 꽤 많았다. 마을은 산밑에 있었는데, 산 쪽에는 광산으로 보이는 동굴들이 여기저기 있었다. 작업복을 입은 사람들이 들것으 로 뭔가를 부지런히 나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마을 입구에는 창으로 무장한 자치대 병사 둘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나와 차이린을 보자 얼굴이 환해지며 반가운 목소리로 말을 물었다. "아케르 용병단에서 오신 분들입니까?" "예. 가투신의 웃는 얼굴 십부를 지원하기 위해서 왔어요. 그들은 어디 있 죠?" 보초는 앞장서 마을로 우리를 안내했다. "저희 소리장 마을은 철광석을 캐내 타실과의 교역하고 있습니다. 꽤 풍족 한 편에 속하는 마을이지요. 하지만 군대를 파견하기에는 너무 멀어요. 이곳 자치대장인 아삼 님도 그 문제 때문에 꽤 애를 쓰셨는데... 타실에서 제때제 때 군대만 파견된다면 아케르 용병단에 의뢰를 할 필요도 없었을 겁니다. 이 곳까지 와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음. 아까 그 광산은 철광인 모양이군. 그렇다면 이곳에는 시하라의 무기 점에서 본 것 같은 장인이 만든 칼도 꽤 있을지 모르겠는 걸. "정확하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처음에는 오르크 토벌을 부탁드렸습니다. 어디서 왔는지 오르크 패거리들 이 나타나 말썽을 부려서요. 이 근처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데... 게다가 이제 오르크들은 산 속 깊은 곳에서나 있는 줄 알았거든요. 하여간 그것들이 갑자기 나타나 저희 자치대는 많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전혀 준비가 안돼 있 었으니까요. 저희 일은 보통 마을 치안을 유지하는 게 다였거든요. 뭐, 하지 만 그 문제는 용병단에서 오신 분들이 금새 처리했습니다. 하룻밤만에 오르크 들을 싹 다 없애 버렸으니까요" 보초는 자기가 해치운듯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런데 하루 밤만에 오르 크들을 없애 버렸다니. 물론 나는 오르크를 본 적은 없지만 이곳 자치대가 해 결하지 못한 문제를 그렇게 쉽게 해결했다니 나는 가투신을 다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문제는... 생전 처음 본 마물이 나타난 거였습니다. 그 마물도 오 르크들이 갑자기 나타났던 방향에서 나타났지요. 그 무시무시한 마물 녀석도 우리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을 것 같아 용병단의 가투신 십부장 님과 즉석 에서 그 마물에 대한 건을 계약에 추가했습니다. 그런데 죽지를 않아요, 그 마물이. 세상에!" 여기까지 말한 보초는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죽지 않는다구요?" 죽지 않는 괴물도 있나? 사비오 영감의 말대로 세상엔 별별게 다 있군. "예. 칼로 찌르고, 창으로 찌르고 활을 쏘고, 불로 태워보기도 하고... 하 여간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완전히 불사신이었습다. 하여간 이렇게 훌륭하신 분들이 와 주셨으니 이제 금방 해결되리라 믿습니다" 보초가 말하는 사이에 우리는 어떤 건물 앞에 도착했다. 삼 층으로 된 목제 건물이었는데, 입구에 '소리장 자치대'라고 크게 쓰여 있었다. "여기 가투신 십부장 님과 저희 아삼 자치대장님이 계십니다" 부초는 이렇게 말하고는 자치대 입구에 있는 보초를 불렀다. "아케르 용병단에서 나오신 분이야. 안내해 드려" "들어가자꾸나, 수르카" 나는 보초에게 뮤 고삐를 넘겨주고 자치대 안으로 들어갔다.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건물인 듯, 갓 베어낸 나무 냄새가 났다. "지은 지 얼마 안 되는 건물인가 봐요" 차이린이 보초에게 물었다. "얼마전 오르크 소동 때 불에 탄 자치대 건물을 새로 지은 겁니다. 오르크 들은 기분나쁠 정도로 불을 무서워하길 않지요. 아니, 불을 아주 잘 쓴다고 말하는 편이 낫겠군요. 자. 여깁니다" 이층 첫 번째 문에 자치대장실이라는 글이 씌여 있었다. 이층으로 올라오는 사람들 소리를 들었는지 내 나이또래의 아이가 뛰어나왔다. "부관. 아케르 용병단에서 오신 분들이야. 안내해 드려" 보초는 이렇게 말하고 돌아갔다. 어느 마을이나 부관은 나이 어린 병사들이 맡는 모양이었다. "안으로 들어오십시요" 지극히 딱딱하고 사무적인 말투였다. 부관 일에 별 흥미를 못 느끼는 모양 이다. 불쌍한 부관이군. 좀 웃으면서 말하면 어디가 덧나나? 탐그루나 여기나 다 똑같군, 부관이라는 자리를 맡으면 다 저렇게 되나 보지. "대장님. 아케르 용병단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부관이 말하자, 안에서 들어오라는 말이 들렸고, 부관이 문을 열었다.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손님용 의자에 앉아있는 가투신 십부장의 얼굴이었 다. 가투신은 나를 보더니 대단히 반가와 하려는 것 같았는데, 차이린을 보더 니 금새 얼굴이 굳어졌다. (짙은 눈썹이 다 꿈틀거릴 정도로 말이다) 정면 책 상에는 아삼 자치대장이 앉아 있었다. 아삼은 얼굴에 주름이 많고 비쩍 마른 할아버지였다. 거기다가 머리는 거의 다 벗어져서 도무지 자치대장이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타실에서 이런 곳까지 사람을 파견했다고 하더니 다 늙은 사 람을 한직으로 쫓아낸 거구만. 또 한 사람, 신경이 쓰이는 복장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전에 라스폼 이 입고 있었던 것과 같은 검은색 긴 성복을 입고 있는 젊은 남자였다. 혹시 라스폼의 패거리가 아닐까...가 아니라 라스폼의 패거리가 틀림없었다. 칼을 차고 자치대장실에 들어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 사람은 우리가 들 어가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아케르 용병단의 용의 눈 십부장 차이린이고 이쪽은 제 부하 수르카 입니다. 자치 대장님께 인사드립니다" 차이린이 공손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자치대장도 고개를 숙여 인사를 받았다. "나는 이곳 소리장의 자치대장 아삼이라고 하오" 목소리도 영락없는 늙은이였다. 나는 아삼 대장이 병력을 이끌고 전투에 임 하는 모습을 생각해보자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여전히 검은 성복의 남자가 신경이 쓰였다. "저는 타실 교구에서 파견 온 타우라고 합니다. 이곳에 마물이 출현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사실여부를 조사하기 위해 왔습니다" 예의 바른 목소리였다. 하지만 저 예의바른 목소리에 속았던 적이 있지 않 은가. 누군가 장미는 꽃보다 가시라고 했다. 나는 라스폼을 만난 후 꽃 뒤에 가려진 가시가 더 무섭다는 걸 알았다. 차이린을 바라보았다. 혹시라도 차이 린이 반지 얘기를 꺼내서는 안 되는데... 다행히도 차이린은 이미 눈치를 챘 는지 걱정 말라는 신호를 보냈다. "사실 여부가 아니라 내가 진짜 그 마물을 만나서 싸웠다고 하잖아요" 가투신이 짜증난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소리장 마을에 내려오는 전설에 따르면 이곳에 출현하는 마물은 인간도 홀 려 부릴 수 있는 마물이라고 합니다. 바바 족이 그 비전을 이어받아 오늘 날 마물을 부리고 있다고도 하고요. 만약 가투신 님이 봤다는 그것이 진짜 전설 속의 마물이라면 무슨 이유로 가투신 님을 공격했을까요?" 타우가 말했다. 아주 예의바르면서도 사람 속을 뒤집어 놓는, 잔뜩 깔보고 있는 듯한 말투였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그거야 그 놈 맘이지. 내가 그 놈 속에 들어가 본 것도 아니고... 혹시 모르죠. 이 근처 어디에 바바 족 놈들이 숨어있을지 도" 가투신은 아주 상대하기도 싫다는 듯이 말했다. "제 임무는 그 마물이 진짜 전설 속의 마물인지 아닌지를 알아내는 것입니 다" 만난지 얼마 안 됐지만 나는 벌써부터 타우의 말투에 짜증이 나고 있었다. 계속 저런 말투를 듣고 있어야 했을 가투신의 고초를 생각하니 안됐다는 생각 이 들었다. "알아내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 마물을 타고 성황청으로 돌아가기라도 할 생각이신 가요?" 이번에는 가투신이 타우의 말투를 흉내내 말했다. "성황청은 큰 조직입니다. 그 조직의 말단에 종사하는 제가 뭘 알겠습니까. 시키면 시키는 대로 명을 받들뿐이지요. 저는 그저 사실 여부를 확인하라는 임무만을 받아왔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확인되면 어떻게 하실 거냐구요?" "그야 성황님께 보고 해야죠. 저는 아무런 권한이 없습니다" "풋내기 성직자로군" 가투신은 들으라는 듯 중얼거렸다. "예. 이번 건이 제가 처음 받은 임무입니다. 정식으로 성직자가 된 건 한 달도 되지 않습니다. 경력이 있는 성직자들은 지금 하잔으로 거의 다 파견 을 나간 상태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저 같은 풋내기가 오게 된 겁니다" 몹시 불쾌하다는 듯이, 하지만 여전히 예의 바른 말투로 타오가 말했다. 가투신은 조금 당황하는 듯 했다. 음. 만만치 않은 상대로군. "가투신. 다른 부하들은...?" 분위기를 바꿔보려는 듯, 차이린이 가투신에게 물었다. "일층 내무반에서 쉬고 있어요. 어제 내내 마물을 찾아다니느라 녹초가 됐 거든요. 그나저나 네가 오다니 의외구나. 너 이제 용의 눈 십부에서 일하게 됐나 보구나? 이제 확실히 용병 폼이 나는데..." 여전히 눈웃음을 치면서 말하기는 했지만 차이린을 힐끔힐끔 보며 어쩐지 달갑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예" 나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길게 말했다가 혹시라도 내 정체를 타오라는 저 성직자가 눈치챈다면 문제가 커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 여기서 시간 끌지 말고 일단 내무반으로 가지요" 차이린이 앞장서 문 밖으로 나갔다. "그럼 저는 밖으로 나가서 좀 더 조사를 해보겠습니다" 타오도 이렇게 말하고 나갔다. 휴! 천만 다행이었다. 내무반까지 따라오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오늘 막 온 성직자에요. 본 그대로 신출내기인 모양인데 오자마자 나를 부 르고, 자치대장에게 시시콜콜 따지고... 짜증나 죽겠어요" 가투신은 내무반으로 가는 내내 타오 욕을 해댔다. "희멀건 얼굴에 성직자라니... 흥. 풋내기. 저런 놈은 좀비 하나만 봐도 당 장 겁먹고 도망칠 놈이야. 어휴, 재수 없어. 안 그래요, 수르카?" 예, 예. 물론이죠. 하지만 이름은 말하지 말라구요. 저는 성황청에게 좇기 고 있는 몸이라니까요. "가투신, 아까 수르카 이름을 부르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순무 행정 담당관 말이, 수르카는 성황청에 발각되면 안 된다고 하더라구요" 차이린이 가투신에게 말했다. 가투신은 그 말을 듣더니 입술을 굳게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아들었다는 말인 모양이다. "반지의 정령 때문인 모양이군요. 그것 때문에 성황청이 쫓는다... 그렇군 요. 성황청이 마법을 찾아 모으는 일에 열중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그런데 이런 외진 곳까지 성직자를 파견할 정도의 조직이라면 이미 수르카의 행방을 눈치 챘는지도 모르지요. 어쨌든 뭐..." 가투신의 말은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는 뜻인지, 아니면 내가 어떤 죄를 짓 고 도망치는 중이라 해도 신경 쓰지 않겠다는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내무반은 일 층에 있었다. 우리가 들어가자 내무반에서 쉬고 있던 십부원들 이 일어났다. 모두 일곱이었는데 계속된 수색에 지친 듯 하나같이 피곤한 얼 굴이었다. "쇠가위는 왜 같이 오지 않았습니까?" 십부원 중 누군가가 물었다. 쇠가위가 바로 그 늑대에게 물려 죽었다는 전 령이었던 모양이다. 가투신은 대답하지 않고 차이린을 보았다. 대충 짐작은 하고 있지만 내 입으로 말하기는 싫다, 그런 뜻인 것 같았다. "쇠가위는 본부에 도착하자마자 죽었어. 그래서 내가 온거야" 차이린이 말했다. 십부원들의 표정이 굳었다. 어두운 분위기가 내무반에 감 돌았다. "자. 남은 우리들은 죽지 말아야겠지요. 아케르 단장님이 어떤 지시를 내렸 는지 말해줘요" 분위기를 바꿔보려는 듯 가투신 십부장이 꾸면낸 큰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 만 나는 가투신 십부장의 짙은 눈썹이 계속 꿈틀거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케르 단장님은 소리장에 지원 병력을 보내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차이린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다행히도 이 말에 십부원들은 별 반응을 보이 지 않았다. "그 대신에 자세한 조사를 위해서 여기 수르카를 파견했습니다" 십부원들은 저게 무슨 소리야? 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수르카. 아자닌을 불러봐" 차이린은 길게 설명할 것 없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 "내* 마음의* 문을* 여니* 길을* 인도해* 다오*" "예. 부르셨습니까, 수르카 님" 아자닌이 나타났다. 이번에는 꽤 선명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간밤에 마법 연습을 좀 한 보람이 있었다. 일곱 명의 십부원 입에서 일제히 탄성이 터져나 왔다. "반지의 정령 아자닌은 어떤 마물이라도 그 마물의 정체와 약점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 그리고 이 정령을 부를 수 있는 건 여기 있는 수르카 뿐이고. 그래서 내가 수르카와 함께 이곳으로 온 거다. 이제 그 마물 을 없애는 건 시간문제라고 할 수 있지" 아자닌은 차이린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잠자코 있으라 고 손가락을 입에 가져갔다. 십부원들은 하나같이 놀랍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직 아자닌이 도움 준 건 하나도 없는데 말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놀랍다는 표정 밑으로 활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아까의 피곤하고 지친 기색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음. 이런 게 바로 지도자의 역할이로군. "아자닌, 무슨 마물인지 알 수 있겠어? 필요한 게 있으면 여기 있는 사람들 한테 물어봐" 살짝 묻는다고 물었는데 차이린과 가투신까지 도합 아홉 명의 눈이 모두 나 에게 집중되었다. "어떻게 생겼던가요?" 아자닌이 가투신에게 물었다. 가투신은 정령이 말을 걸자 조금 당황했는지,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말을 하기 시작했다. "음. 내 눈 높이가 녀석의 배 정도였으니까 키가 아주 컸고, 귀가 뿔처럼 두 개 머리 위에 달려 있었고, 가느다란 꼬리가 있었고, 두 발로 서 있었고, 앞발인지 팔인지 끝에는 날카로운 손톱이 달린 손이 있었고, 손가락은 열 개 였던 것 같고..." 가투신은 생각나는대로 주저리주저리 말했다. 가투신도 수줍음을 탈 때가 있는 모양이다. 소문난 아케르 용병단의 십부장이 고작 반지의 정령 앞에서 부끄러움을 타다니. "온통 시커먼 색이었던 같은데" "그건 우리가 밤에 봐서 그래 이 멍청아" "내가 확실히 봤어. 등에 비늘이, 그러니까 두 줄로 비늘이 나 있었다구" 가투신의 말이 막히자 여기저기서 십부원들이 소리쳤다. 아자닌은 십부원들 의 말을 잠자코 다 듣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N:김상현 #9332/10199 ━━━━━━━━━━━━━━━━━━━━━━━━━━━━━━━━━━━━━━━━ 제 목:[탐그루] 태양을 쫓는 아케르 45 관련자료:없음 23/23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1-05 00:51 조회:1072 탐그루 # 마법은 마음이다 - 마음은 칼이다 # "혹시 공격 당하신 적 있나요?" 아자닌이 가투신에게 물었다. "사실, 그놈하고 마주친 건 딱 한 번, 그것도 밤이었어요. 그날 우리는 정 말 최선을 다해 싸웠어요, 아니 싸웠다기 보다는 우리쪽의 일방적인 공격이었 지요. 그런데 그놈이 아무리 찌르고 베도 죽지 않는 거에요. 분명히 내 칼이 그 마물의 등을 뚫었는데 고통스러워하는 기색도 없이, 마치 이제 가야 할 때 가 됐다는 듯이 싸우다 말고 뒤돌아 가버리는 거에요. 우리는 어안이 벙벙해 서 그냥 그 마물의 뒷모습만 바라보고 있었죠. 칼에는 피도 아니고 이상한 냄 새가 나는 초록색 액체가 찐득찐득하게 묻어 흐르고 있더라구요. 하여간 그 후로는 아무리 돌아다녀도 그 마물을 찾지 못했어요. 덥썩 계약은 해놨는데 그 마물의 그림자도 안보이니 이거 어떻게 해야 할지..." 한 번 만났다구? 그런데 무슨 불사신이니 ,죽어도 안 죽는 마물이니, 하는 타령이람? 아까 마을 입구에서 본 보초가 한 말은 그야말로 허풍에 지나지 않 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래서 소문은 믿을게 못된다니까. "마을의 피해는요?" "매일 밤 자치대원들이 보초를 서니까 별 피해는 없죠. 무리지어 떠돌아 다 니는 부랑자 패거리들과 몇 번인가 충돌했던 적이 있다고는 하는데. 별 피해 는 없었대요" "그런데 별 피해도 없었다는 데 왜 그 마물을 죽이려고 하지요?" "그야, 계약이니까 아자닌" 차이린이 말했다. 아자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정령이 계약이 무엇인 지 이해하기란 힘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자닌은 전에 사 람이었던 적도 있었다고 했잖아? 그럼 이해하고 있을텐데. 별로 기분이 안 좋 은 건가? "제가 보기에 가투신 님이 만났다는 그 짐승은 오우거의 일족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큰 덩치에 비늘로 된 피부라면 오우거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자닌은 마지못해 말한다는 표정이었다. "오우거? 그게 뭐야?" "오르크 사촌 쯤 되는 놈인가?" "제길. 안 싸워본 마물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또 새로운 마물이야? 도대체 이거 바르도 대륙이 인간이 사는 데야, 마물이 사는 데야." "아이구. 이거 또 언제 일을 마치고 돌아가냐. 요즘은 완전히 씨리즈로 마 물이 나타나는구만" 또 여기저기서 불만의 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잠깐. 모두 조용히들 해. 지금은 일단 말을 들어보자고" 금발머리를 짧게 자른 십부원이 말했다. "로키 부관. 고마워요" 가투신이 말했다. 짧은 금발 머리가 가투신 십부의 부관인 모양이었다. "만약 그놈이 오우거라면... 보통 어디를 잘 다니지?" "오우거는 햇빛을 싫어합니다. 오우거의 피부는 항상 젖어있어야 하기 때문 이지요. 아마 물이 흐르는 냇가 근처의 동굴이나, 지하수맥과 이어진 동굴 속 에 숨어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간단하게 찾을 수 있겠는데요. 그렇게 큰 덩치가 숨을만한 동굴 이 어디 흔하겠어요" "그런데 그 오우거라는 놈 정말 인간이 부릴 수도 있는 건가?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이건 보통 일이 아닌데" 차이린이 물었다. 아직도 정령에게 말을 거는 게 익숙하지 않은지 꼭 지나 가는 말투였다. "그런 전설이 있습니다. 성황청에서 온 타우 님이 확인하고 싶어하는 전설 이 바로 그 전설인 모양입니다. 하지만 전설이라는 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변 질되기 마련이어서 실제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 다. 전설을 다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아마 바보겠지요. 하지만 전혀 안 믿는 사람은 더 바보입니다. 전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전설은 아케르 용병단의 소문 같다는 말이로군. 맞기도 하고 틀리 기도 한. 하지만 전혀 근거없는 소문은 없는 거고. "아자닌, 하여간 오우거라는 건 확실한 거지?" 아자닌이 알고 있는 오우거에 대한 지식이 아케르 용병단 소문 정도라면 곤 란하기 때문이었다. "예. 예전에 직접 본 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이 가는군. 아자닌은 좀 답답할 때가 있긴 해도 알고 있는건 확실하게 말하니까 말이야. "그럼 어디가 그 오우거 놈의 약점인지 알 수 있을까요?" 이번에는 가투신이 물었다. "오우거는 심장을 찌르면 단번에 죽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알려진 바로는 그 심장이라는 게 머리에 있다고 합니다" "어쩐지....워낙 덩치가 커서 그놈의 머리는 건드려보지도 못했으니... 됐 어요! 그럼. 오늘 중으로 일을 끝낼 수 있겠네요. 로키! 가우린! 모두 출동 준비해요. 당장 나갈 테니까" "저, 아직 점심 전입니다만" 십부원 하나가 이렇게 말했다. "점심은 가면서 먹어도 되요. 햇빛이 있을 때 놈을 끝장내야 합니다. 어서 서둘러서 장비를 챙겨요" 가투신은 서둘러 자신의 장비를 챙기기 시작했다. 그래서 가투신과 차이린 그리고 나는 뮤를 타고, 나머지 일곱 명의 십부원 들은 걸어서, 오우거 사냥에 나가게 되었다. 아자닌은 내 등뒤에 서 있었는 데, 그냥 허공에 떠있는 것 보다 보기 좋을 것 같아서 내가 그렇게 하라고 아 자닌에게 부탁했기 때문이다. "저... 가투신 십부장 님 오르크 소탕은 재미있었어요?" 차이린이 애교를 떨며 가투신에게 물었다. "워낙 형편없는 놈들이어서... 하루만에 끝냈어요. 수도 얼마 안돼고 조직 도 엉망이더군요. 다만 워낙 흉칙하게 생겨서 이곳 자치대 사람들이 겁먹었던 거 뿐이에요. 자. 서둘러 갑시다. 본부에서 우리 소식을 기다리게 하지 말구 요. 자! 출발해요!" 재빨리 차이린의 질문에 대답한 카투신은 십부원들을 향해 딴청을 피웠다. 이렇게 해서 웃는 얼굴 십부는 출발하게 되었다. 마을 사람들이 우리의 출 발을 구경하러 집밖으로 많이 나와 있었다. 내가 보기에는 뮤 뒤에 서 있는 정령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그냥 병력을 바라보는 사람보다 훨씬 더 많은 것 같았다. 나는 아자닌을 사라지게 하고 싶었지만 차이린이 그냥 가자고 해 어 쩔 수 없었다. 차이린의 말로는 십부원들의 사기(士氣)하고 관계가 있다나, 뭐 어쨌다나. 수색은 광산에서 소리장 마을로 흘러 들어오는 냇가를 거슬러 가며 하기로 했다. 수색 도중 만나는 동굴들은 모두 샅샅이 뒤진다는 것이 가투신의 계획 이었다. 단순하지만 확실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계획이었다. "오우거의 약점이 어딘지 아자닌에게 잘 들었지요. 심장이에요, 심장. 창 끝을 잡고 머리에 있는 심장을 노려 단번에 찔러요. 제일 먼저 찌른 사람에게 는 은화 한 닢, 오우거를 죽인 사람에게는 금화 한 닢을 상금으로 주겠어요. 자! 저기 저 동굴부터!" 가투신의 말이 끝나자 십부원들은 일제히 동굴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첫 동굴에서 병사들이 발견한 것은 박쥐 몇 마리와 쥐 몇 마리뿐이었다. "자, 다음 동굴로!" 행렬은 냇가를 따라 천천히 산 위로 올라갔다. "가투신. 빨리 찾아야겠어요. 해가 지면 우리 난처하겠죠? 그쵸?" 차이린이 걱정하는 목소리로 말했지만 가투신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병사 들에게 계속 지시를 내렸다. "자, 다음 동굴로!" 가투신은 될 수 있는 한 차이린을 외면하며 말했다. 십부원들이 우르르 동 굴로 뛰어들어갔다. "자, 다음 동굴로!" 이제 가투신은 차이린에게 완전히 등을 돌리고 말했다. 십부원들이 와르르 동굴에서 뛰어나왔다. "이봐요, 가투신 이거 너무 무식한 방법 아니에요? 왜 사람을 쳐다보지도 않는 거에욧" 차이린과 가투신 사이에 무슨 일이 있기는 한 모양인데, 알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의 상황으로 봐선 가투신이 차이린을 싫어한다는 건 확실한데. 이상 해... 왜 차이린은 가투신에게 저렇게 안달복달일까. 참, 불가사의한 한 쌍이 야. 점심을 먹고 나서도 수색은 한참동안 계속되었지만 도무지 성과가 없었다. 게다가 철광산에 가까와 질수록 폐광이며, 동굴들은 더 많이 나왔다. 따라가 던 냇물도 몇 줄기로 갈려서 지류를 따라 찾아볼 생각은 엄두도 못내고 본류 만 따라 동굴을 찾아 올라갔다. "카투신. 오늘은 이만하고 내일 계속 해요" 차이린이 말했다. 가투신은 차이린을 보는 대신 서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서쪽 하늘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정말 얼마 지나지 않아 해가 질 것 같았다. 산 속에서는 해가 얼마나 빨리 지는지 산을 타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 으리라. "철수해요! 오늘은 이만해야겠어요. 로키! 가우린! 병력 모아요!" 이렇게 해서 첫 날은 아무 소득 없이 끝났다. "너무 서두른 게 탈이었던 모양이에요. 조금 더 생각해보고 움직였어야 했 는데 빨리 의뢰를 마치고 귀환하려는 생각에 그만 마음만 급해 계획없이 수색 을 나섰네요. 내일은 이 근방의 지리를 잘 아는 사람을 찾아 안내를 맡기거 나, 지도라도 한장 구해야겠어요" 내려오는 길에 가투신이 말했다. 물론 차이린의 뜨거운 시선을 외면하고 부 관을 바라보면서 말한 것이다. 차이린은 가투신에게서 그 뜨거운 시선을 떼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저도 아무 생각 없이 가투신만 따라 왔는데, 생각해보니 그렇네요. 수르 카. 아자신은 무슨 흔적이라도 찾았데?" 차이린은 여전히 가투신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나에게 물었다. "아자닌, 무슨 흔적이라도 있었어?" "예. 오우거의 것이라고 생각되는 발자국이나 냄새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가투신 님이 만났다는 그 마물이 오우거 인지도 확실하지 않고요" 지금 와서 그게 무슨 소리야? 나는 어이가 없었다. 그럼 도대체 뭐냐고 묻 고 싶었지만 누가 들을까봐 차마 묻지도 못했다. 우리는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내무반으로 돌아왔다. 첫날 작전은 완전히 실패 였다. 다만 소득이 있었다면 마물의 이름 (그나마 확실하지도 않은)을 알았다 는 정도일까. "아자닌. 오늘 수고했어. 내일은 찾을 수 있겠지?" "그거야 모르죠. 수르카 님이 보거나 들어야 저도 알 수 있으니까요" 언제나 이런 소리밖에 못하는 아자닌. 어떨 때는 정말 답답하다니까. "그래 알았어. 들어가" 아자닌은 사라졌다. 무슨 일인 지 계속 기분이 나빠 보였다. "그런데 차이린. 오늘 잘 곳이 마땅치 않은데... 비어 있는 개인 숙소가 하 나 뿐인데... 이거 어떻게 하죠?" 가투신은 정말 심각하고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말을 듣는 순간 차이린 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지만 나는 분명히 보았다) 가 투신이 저 별빛 같이 반짝이는 눈동자를 봤다면 오늘 밤 절대로 편히 못잘텐 데. "차이린은 내가 사용했던 개인 숙소에서 자는 게 좋겠어요. 난 내무반에서 십부원들과 자면 되니까요. 십부원들과 같이 자니까, 사람이 많아서 안전하니 까, 걱정하지 말고 편히 자세요" 차이린의 얼굴에 실망의 빛이 흘렀다. (역시 나 혼자만 본 게 분명했다. 아 니라면 누군가 반응을 보였을 텐데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가 투신은 말까지 더듬어 가며 뭐가 안전다는 거고, 누구보고 걱정말고 편히 자 라는 걸까... "방은 나가서 왼쪽 첫번 째 방이에요. 내일 봐요, 차이린. 피곤할 텐데. 빨 리 푹 쉬도록 해요" 가투신은 차이린을 거의 내 쫓다시피 등을 떠밀어 내보냈다. 게다가 서둘러 문을 닫고 나서는 안도의 한숨까지 내 쉬었다. 저럴 것까지는 없을 텐데. 가 투신이 도대체 왜 저러는 지 알 수가 없군. "가투신 십부장 님. 차이린 십부장 님이 그렇게 싫어요?" 나는 도저히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가투신에게 이렇게 묻고 말았다. "수르카. 그런 게 아니에요. 그건..." 가투신은 말을 계속 할 수가 없었다. 벌컥 문이 열리며 차이린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차이린! 그냥 가서 쉬라니까!" 가투신이 깜짝 놀라서 대뜸 소리 질렀다. "아. 여기 가투신 님 방에 있던 걸 좀 정리해 왔어요" 차이린의 손에는 가투신의 옷이며 잡동사니 물품들이 차곡차곡 정리돼 들려 있었다. 옷가지 사이에는 속옷도 섞여있는 것 같았다. 가투신의 얼굴이 붉어 졌다. 음. 차이린이 가투신의 속옷까지... "예, 예. 미안해요. 그것도 모르고. 저기... 고마워요, 그러니까, 차이린" 가투신이 더듬더듬 말하자 차이린은 싱긋 웃어보이고 밖으로 나갔다. 가투 신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데 금새 다시 문이 열렸다. "차이린, 하지만 계속 이런 식이면..." 이번에도 가투신은 계속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문을 열고 들어 온 것은 차이린이 아니라 성직자 타우였기 때문이다. 타우는 가투신이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방안에 들어오지도 못하고 문 밖에 서서 말했다. "전. 타우인데요." "아. 타우 님이시군요. 그냥, 제가 잘못 알고... 미안합니다" 이봐요, 가투신. 타우한테까지 그럴 건 없다구요. 풋내기 성직자한테 그런 것 같고 미안하다고 말할 필요 있어요. 사람이 살다보면 실수를 할 수도 있 지. 어차피 성직자는 연애도 할 수 없으니까. 걱정할 필요 없다구요. 막 대해 요 막... 이라고 생각하면 안되겠지? "오늘 보니까 철광산 쪽으로 마물을 찾아 가셨었다면서요" "그런데요?" 이제서야 제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시는 군. 그러셔야죠, 가투신 님. "저도 오늘 산을 둘러보았습니다. 전 그 마물의 발자국이라고 짐작되는 흔 적을 찾아냈죠" 타우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했다. 가투신과 차이린의 미묘한 신경전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제멋대로 놀고 있던 십부원들이 일제히 타우를 바라보았다. "내일 같이 가서 확인해보죠. 제가 흔적을 찾은 곳까지 안내해 드리겠습니 다" "음... 예" 가투신은 분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말을 마친 타우는 보란듯이 문을 꽝 닫고 밖으로 나갔다. "들었죠? 내일이면 다 끝날 거예요!" 가투신이 외치자 병사들이 환호성을 올렸다. 아니, 저렇게 좋아할 만큼 여 기서의 일이 힘들었나? "가투신 십부장님. 그럼 내일 저는..." "그냥 따라오기만 해요. 내일은 반지의 정령을 안 불러도 될 것 같아요.. 아, 그리고 로키! 내일 내 몫으로 횃불 몇 개만 준비해 줘요" 가투신은 얼른 내무반에 자리를 만들어 누워버렸다. 가투신이 그대로 모포 를 덮고 누워 버리자 더이상 차이린과의 미묘한 관계에 대해서 물어볼 수가 없었다. 나도 자리를 만들어 누웠다. 근무는 없었다. 자치대원들이 건불 밖에 서 근무를 서고 있었다. 오래간만에 천막이 아니라, 지붕이 있는 진짜 건물에 서 불침번 근무도 없이 편히 잠들 수 있었다. PRINTER/CAPTURE를 OFF 하시고 [ENTER] 를 누르십시오. HiTEL───────────────────────────────────── 창작연재 (SERIAL) LN:김상현 #9376/10199 ━━━━━━━━━━━━━━━━━━━━━━━━━━━━━━━━━━━━━━━━ 제 목:[탐그루] 태양을 쫓는 아케르 46 관련자료:없음 25/25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1-06 00:33 조회:1038 탐그루 # 마법은 마음이다 - 마음은 칼이다 # 다음날 평소보다 일찍 아침 식사를 마치고 수색을 나섰다. 선두에는 뮤를 탄 타우가 섰고 가투신 십부장과 차이린 십부장 역시 뮤를 타고 뒤를 따랐다. 그런데 나는 도대체 왜 수색에 따라나선 걸까 아자닌도 필요 없다는데. "여깁니다" 출발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타우가 흔적을 찾았다는 곳에 도착했다. 그 흔적은 어제 우리가 따라갔던 본류가 아니라 다른 지류를 따라 올라간 곳 에 있었다. 흔적을 발견하자 차이린은 재빨리 뮤에서 내려 그 흔적을 살펴보 았다. "우와. 정말 큰 놈이네요. 가투신이 말했던 것 보다 훨씬 더 덩치가 크겠는 데요. 발자국이 보통 사람의 네 배도 넘겠어요. 파인 정도로 봐서는 체중도 엄청나네요. 왼 발과 오른 발이 거의 같은 정도로 파인 걸 봐서는 무기는 들 고 있지 않은 것 같구요. 하여간 놈은 여기서 천천히 저쪽 위로 걸어갔어요. 이렇게 선명한 발자국을 남긴 걸 보면 추적자 같은 건 신경도 쓰지 않나보네 요" 과연 차이린이었다. 사냥꾼 마을 출신다웠다. 타우는 입을 딱 벌리고 듣고 있더니, 감탄했다는 듯이 말했다. "오. 놀랍군요. 놀라워요. 진작 오셨으면 일이 훨씬 더 쉬웠겠습니다" 갑자기 가투신이 칼을 뽑아들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오우거를 찾아 나서는 구나. 나도 칼을 뽑아야 하나. "타우 님. 타우 님의 역할은 여기까집니다" 타우는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가투신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씀이신지... 칼은 또 왜 뽑아드시고..."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었다. 가투신은 도대체 왜 저러는 거지? 그렇게까 지 저 성직자가 미웠나. "어제 수르카가 반지의 정령을 말 등에 태우고 갔는데 그걸 모르지는 않겠 지요?" "얘기는 들었습니다만. 그게 저와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거죠? 칼은 좀 내려 놓으시죠" "시치미 떼지 마세요. 일이 끝나면 수르카를 넘겨달라고 하실 생각 아니었 나요?"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전 그럴 생각도 없고 그럴 이유도 없습니다" 타우는 끝까지 자기는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뗐다. 내가 듣기에도 정말 그런 것 같았다. 그가 여기에 온 이유는 그저 마물을 조사하기 위한 임무 때문이었 다고 하지 않았는가. "로키! 가우린! 이 성직자 님을 묶도록 해요" 가투신이 말이 끝나자 마자 두 명의 십부원이 와락 타우에게 달려들었다. 옆에 차고 있던 포승줄로 타우를 잡아 묶으려는 순간이었다. 타우는 재빨리 검은 성복 옷자락을 펄럭 제끼더니 뭔가를 꺼냈다. 성구였다. 일전에 라스폼 이 가지고 있던 구슬 달린 성구와 모양은 같았지만 구슬의 색과 크기가 달랐 다. "타거라*" 타우가 이렇게 외치자 순식간에 포승줄을 들고 있던 십부원 둘이 가슴을 부 여잡고 쓰러졌다. 나는 반사적으로 칼을 뽑아들었다. 이건 실제상황이었다! 나는 가슴이 쿵쾅거리고 칼을 쥔 손이 덜덜 떨렸다. 먼저 뮤에서 내려 오우거의 흔적을 살펴보던 차이린을 보호해야겠다는 생각 이 들었다. 나는 가능한 빨리 차이린 쪽으로 뮤를 몰아갔다. 어느새 가투신이 먼저 칼을 휘두르며 타우에게 덤벼들고 있었다. 그렇지만 타우가 뮤에서 뛰어 내리는 것이 조금 더 빨랐다. "다가오지마! 조금만 더 움직이면 이 여자 목숨은 없다!" 타우는 땅에 새겨진 오우거의 흔적에 온통 신경을 쏟고 있던 차이린의 가슴 에 성구를 들이댔다. 쓰러진 십부원의 가슴에선 아직도 김이 올라오고 있었 다. 무슨 마법인지는 모르겠지만, 마법이 이렇게 빠르고 강력하다니. "물러서요! 빨리! 성구의 사정거리 밖으로 나가요. 빨리!" 가투신이 뮤의 고삐를 세차게 뒤로 잡아당기며 소리쳤다. 남은 다섯 명의 십부원들도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젠장. 잘도 알아냈구나, 가투신. 네 빌어먹을 말투 때문에 방심하고 말았 다. 음흉한 자식" 타우가 말했다. 꼭 늙은 모습으로 변했던 때의 라스폼 같은 말투였다. 제 길. 성황청 놈들은 왜 하나 같이 저모양이지. 순식간에 두 얼굴의 사나이가 되는구만. 변신이 따로 없네. 따로 없어. 나는 곁눈질로 타우를 주시했다. 빈틈만 보이면 저 자식 한 칼에... 아케르 용병단에 들어와 받은 훈련은 폼으로 받은 게 아니라구. 무언가 내 안에서 꿈 틀거리는 게 느껴졌다. "네놈들 몽땅 다 죽여주겠어. 어느 놈부터 죽여주랴? 저 꼬마? 아니면..." 꼬마라고? 너. 실수했다. 계속 내 안에서 무엇인가 꿈틀거렸다. 손에 들고 있는 칼이 저절로 떨리는 것 같았다. 이대로 있을 수는 없다. 시간을 끌면 끌 수록 불리하다. 이렇게 인질을 붙잡고 있는 상대에게는 생각할 틈을 주어선 안된다. 나는 뮤에서 내려 천천히 타우 쪽으로 걸어갔다. 순간 십부원들의 시선이 나에게 모였다. 나는 숨을 깊게 한 번 들이 쉬었다. "꼬마. 서! 가까이오지마! 가까이오지 말라니까!" 타우는 크게 당황하듯 말을 더듬으며 나에게 성구를 돌려댔다. 내가 한발자국이라도 더 다가가면 타우는 나에게 마법을 쏘아 보낼 것이다. 칼은 안 된다. 타우가 '타거라' 라고 외치는 시간이 훨씬 짧을 것이다. 타우는 지금 내가 들고 있는 칼에만 온통 신경을 쏟고 있다. 내가 마법을 쓸 것은 상상도 못하고 있다. 타우는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있다. 경계하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정작은 방심하고 있다. 승부는 방패마법의 성공여부에 달려있다. 과연 지금 이순간 방패마법이 제대로 작동할 수 있을까. 기회는 단 한 번뿐이다. 꼭 성공시켜야 한다. 실패하면 차이린의 생명이 위험하다. 반드시 성공시켜야 한다. 나는 내 마음의 한 점에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집중했다. 서서히 어떤 울림이 느껴졌다. 나는 더 더 더 그 울림에 집중했다. 조금만 조금만 더! "모든* 빛깔* 있는* 것들은* 나에게* 시간을* 빌려다오*" 나는 온 마음을 모아 외쳤다. 빛깔 있는 모든 것들에게 간절히 바라는 마음 으로 마법의 주문을 외웠다. 내가 실수하면 모두의 생명이 위험하다. 공기가 내 앞으로 두텁게 모여들었다. 주변의 사물들이 정지한 듯 느껴졌 다. 성공하고 있었다! 방패마법이 성공하고 있었다! "타거라*" 타우가 소리쳤다. 내 가슴을 향해 화르륵 불꽃이 날아왔다. 저절로 눈이 감 겼다. 뜨거운 기운이 밀려오는 게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실 패인가? 나는 참담한 심정으로 눈을 떴다. 불꽃이 내 앞에서 지글거리고 있었 다. 성공이다! 성공했어! 하지만 방패마법이 완전하게 시전되지는 않았다. 뜨거운 기운이 방패마법을 태우며 밀려들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본 타우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당황해하고 있다. 이제 단 한 번 뿐인 기회가 온 것이다. 나는 조금도 여유를 두지 않고 그대 로 칼을 휘둘러 타우의 손목을 내리쳤다. 그 순간 내 마법도 끝났다. 내가 만 들어낸 방어벽과 함께 타우가 쏘아보낸 불꽃이 지글거리며 허공으로 사라졌 다. "으으악!" 타우는 발작하는 사람처럼 잘린 손목을 잡고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손목 끝에서 검붉은 핏물이 쏟아져 나왔다. 붉은 색의 피가 차이린과 내 몸으로 투 두득 튀었다. 그제서야 타우의 잘린 손이 바닥으로 툭 하고 떨어져내렸다. 땅 에 떨어진 손에는 여전히 성구가 쥐여 있었다. 타우의 잘린 손 끝에서 김이 피어올랐다. 이무르 아주머니의 뒤틀린 손. 나는 머릿 곳이 새하얘지는 기분 이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가투신은 잠시 상황을 파악하는 사이에 차이린이 재빨리 움직였다. 차이린 은 타우의 턱을 주먹으로 한 대 올려붙였다. 타우는 다시 한 번 비명을 지르 며 뒤로 쓰러졌다. 타우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나는 손이 잘린다는 생각은 미처 못했다. 여전히 내 칼이 목도라고 생각하 고 있었던 것이다. 그냥 손목을 내리친다고 생각했는데. 성구를 빼앗기만 했 어도 됐을 텐데. 아까 보다도 손이 더 떨려왔다. 저... 새빨간 피. 피. 추워 서 그런 거야. 나는 쉴새없이 속으로 되뇌었다. 추워서 떨고 있는 것 뿐이야. 추워서... "잘했어요, 수르카. 수르카 솜씨가 이 정도인지는 몰랐는데요" 가투신은 이런 피투성이를 보고도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나는 장난으로라 도 웃을 기분이 아니었다. 내가 휘두른 칼에 팔이 잘린 한 사람이 눈앞에서 뒹굴고 있다. 핏물과 잘려나간 손과 거기서 올라오는 김과... 세상이 빙글빙 글 돌고 있었다. 추워서 그런 거야, 추워서 어지러운 것 뿐이야. "처음 사람을 벤 모양이군요. 걱정 말아요. 곧 익숙해 질 테니까" 가투신은 이렇게 말하며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내 등을 두드려줬다. 가투신 뒤에 있던 십부원들이 타우에게 달려들어 쓰러져 있는 타우의 가슴 과 머리를 마구 발로 걷어찼다. 동료 둘이 공격당해 쓰러진 것을 본 십부원들 의 표정은 하나같이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고마워. 수르카. 하나 빚졌어" 차이린이 어느 새 내 옆으로 다가와 말했다. 하지만 나는 별로 감사하다는 말을 듣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나는 시냇물로 걸어가 세수를 했다. 아무리 손을 닦아도 칼을 쥐었던 손에는 여전히 피가 묻어 있는 것 같다. 마음을 진 정시키며 아자닌을 불렀다. "아자닌, 저 성구가 어떤 성구였지?" "적을 강한 열로 공격하는 성구입니다. 작동 주문은 '타거라' 입니다" 나는 성구로 공격당했던 두 십부원을 바라보았다. 둘은 일어나 앉아 있었 다. 충격을 받은 것 같았지만 그럭저럭 괜찮아 보였다. 차이린이 항상 지니고 있던 치료석으로 두 명에게 건네 주었다. "성구로 공격을 당했는데... 어떻게 살아남았지? 분명히 가슴에 적중하는 걸 봤는데" "이 성구는 강약을 조절할 수 있었습니다. 타우 님은 죽일 마음은 없었던 모양입니다" 나는 눈앞이 어지러워졌다. 가슴에 큰 돌덩이가 내려앉는 것 같았다. 내가, 이 손으로, 살의도 없었던 성직자의 손을 잘라 버리다니... 이 칼로 사람을 베다니... "이 놈은 제가 없애겠습니다. 금화는 받지 않아도 좋아요" 십부원 중 한 명이 가투신에게 말했다. "아니요. 아직 살려둬요. 좋은 생각이 있으니까" 가투신은 이제 땀까지 뻘뻘 흘리면서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타우를 바라보며 말했다. 타우의 손목에서는 여전히 피가 뚜껑을 연 적포도주 병을 쓰러트려 놓은 것처럼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우리를 도와줘요. 괜찮겠죠?" 가투신은 또 타우에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앞으로 평생동안 가투신이 웃는 모습을 볼 때마다 이 광경을 떠올리게 될 것은 생각이 들었다. 전처럼 결코 같이 웃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가투신은 이어서 로키 부관에게 타우를 치료해 줄 것을 당부했다. 로키는 붕대로 대충 타우의 손목을 감은 다음 치료석을 문질러 지혈만 했다. 땀으로 범벅이 된 타우의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해져 갔다. 차이린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오우거가 남긴 발자국을 다시 추적해 나갔다. 추적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우리는 오우거의 동굴을 발견했다. 오우거 가 숨어있는 동굴이라는 것은 나도 쉽게 알 수 있었다. 동굴 입구에 아까 냇 가에서 보았던 큰 발자국이 나 있었던 것이다. "오우거의 발자국이 맞습니다" 아자닌이 발자국을 보더니 말했다. 참 빨리도 말해주는군. 동굴에는 오래 전에 한 번 무너졌었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입구의 절반 정 도가 쏟아져 내린 바위로 막혀 있었다. 바위는 오래 전에 떨어진 것 같았다. 이미 무너질 것은 다 무너져 내린 것 같았다. 다시 무너질 위험은 없어 보였 다. 가투신이 동굴 앞에 서서 '어이' 하는 소리를 질렀다. 소리는 몇 번이나 메아리쳐 되돌아 울려나왔다. "꽤 깊은 동굴인 모양이에요" 가투신은 준비해온 횃불에 불꽃 돌로 불을 붙였다. "일단 들어가 보도록 하지요. 자. 내가 앞장 설 테니 따라와요" 가투신이 앞장서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만약을 대비해서 가우린과 아까 부 상을 입은 두 명은 동굴 밖에 남기로 했다. 남은 셋은 금화 벌 기회를 놓친 게 아쉬운지 많이 섭섭하다는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 보았다. 그래도 별 수 없 었다. 작전 중의 십부장 명령은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아, 그리고 로키. 저 성직자 님도 모시도록 해요. 등 뒤에 단검을 들이대 는 거 잊지 말고요" "정중하게 하겠습니다" 타우의 등을 단검의 손잡이로 쿡쿡 찌르며 로키가 말했다. 동굴 안에 들어서는 순간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자연 동굴이라면 당연히 전체적으로 울퉁불퉁해야 할텐데, 동굴 내부는 계란을 잘드는 칼로 쪼개 놓은 것처럼 완전히 매끄러웠다. 나는 벽면을 만져보았다. 칼날처럼 차가운 금속으 로 된 벽면이었다. "이게 뭐지, 아자닌?" "이곳은 자연 동굴이 아니라 인공적인 구조물인 것 같습니다. 아마도 고대 의 유적인 것 같습니다" 고대의 유적이라고? 무슨 고대의 유적이 이렇게 대단해 보이냐. "유적이든 뭐든 이 안에 오우거가 있는 게 확실해요. 안으로 더 들어가 보 지요" 가투신은 다시 앞장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나머지 우리는 햇불로 주위 의 벽면을 비추어보며 가투신의 뒤를 따랐다. 반들반들한 벽면에 햇불이 비쳐 눈부시게 반사했다. 도대체 이건 무슨 금속으로 만들어진 벽이지. "잠깐. 여기 이상한 문자가 쓰여 있어요" 얼마나 걸어갔을까. 차이린이 말했다. 가투신은 차이린이 말한 벽면에 횃불 을 비추었다. 네모진 판 위에 붉은 글씨로 뭐라고 적혀있었다. 그런데 흰 바 탕에 쓰여진 붉은 것이 글씨라는 것 외에는 무슨 문자인지 알 수가 없었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문자였다. 판 아래 쪽에는 동굴 입구 쪽을 가리키며 화살 표가 그려져 있었다. 자세히 뵈 판 위쪽으론 사람이 밖으로 걸어가고 있는 듯 한 모양의 그림도 있었다. 그림은 꼭 자를 대고 그린 것 처럼 직선으로만 그 려진 그림이었다. 이것도 그림이라고 세 살 먹은 애도 이것 보단 잘 그리겠 다. "이게 뭐지?" 혼잣말처럼 가투신이 중얼거리자 아투가 입을 열었다. "제 고향 홀리우드의 고대 문자와 비슷해 보이는데요" "홀리우드? 처음 듣는 이름인데?" 차이린이 물었다. "지금은 홀리우드라고 부르는 사람이 거의 없지요. 홀리우드는 성스러운 숲 이라는 뜻의 고대어입니다. 지금은 그냥 성림장 마을이라고 하지요. 자나크의 로스안 시 근처에 있는 조그만 마을입니다" "로스안 시... 그곳이 고향이었군. 그 동네 사람들이 호전적이지 아마. 아, 미안 아투가 그렇다는 말은 아니야. 그런데 그곳 고대어는 좀 알아? 저 문자 알아 볼 수 있겠어?" 차이린이 물었다. "어렸을 때 좀 배우기는 했는데... 그거 배우면서 참 많이도 맞았는데. 너 무 오래 전이라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만. 로스안은 '잃어버린 천사'라는 뜻이었고... 이건... 음... 에, 그, 시, 트라고 읽는 것 같은데요" 로키는 손가락으로 한 자 한 자 짚어가며 더듬더듬 읽어 나갔다. "무슨 뜻이야?" "에그시트... 에그시트라... 배웠던 단언데... 음..음.. 확실하진 않지만, 도망친다. 탈출하다... 뭐 그런 뜻이었던 것 같은데요... 확실하진 않습니다" 고대 유적 입구에 도망치라고 써져 있다면 그건 아마 경고의 뜻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보니 사람 그림도 도망치라는 뜻인 것 같았다. 어 쩌면 저 안 쪽에 생각보다 더 무섭고, 위험한 것이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르겠 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까보다 동굴 속이 더 음침해보였다. "그렇다고 여기까지 와서 도망 칠 수는 없는 일이지요. 자, 더 들어가 봅시 다. 다들 경계태세를 더 강화하도록 해요" 안으로 더 들어가보니 갈래 길이 나왔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한 쪽 길 은 몇 걸음 안쪽에 천장이 무너져 있어 더이상 갈 수가 없었다. 무너져 내린 곳에는 두껍게 바위 이끼가 끼어있었다. 이렇게 금속으로 튼튼하게 지어진 곳 이 무너져 있다니. 혹시 누군가 일부러 한쪽 길을 막아 놓으려고? 아니면 오 우거가 무너뜨렸나? 진짜 음침하고 이상한 곳이군.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N:김상현 #9377/10199 ━━━━━━━━━━━━━━━━━━━━━━━━━━━━━━━━━━━━━━━━ 제 목:[탐그루] 태양을 쫓는 아케르 47 관련자료:없음 21/21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1-06 00:34 조회:944 탐그루 # 마법은 마음이다 - 마음은 칼이다 # 얼마를 더 들어갔을까. 드디어 동굴의 끝이 보였다. 가까이 가보니 그곳은 끝이 아니라 문이 있었다. 문 위에는 역시 고대 문자가 적혀있었다. 'STAFF ONLY' 우리는 요모조모 문을 살펴보았지만 어떻게 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다 시 로키가 문자를 더듬거리면서 읽어 나갔다. 서늘한 동굴 안에서 땀까지 흘 려가며 열심이었다. 그러게 어렸을 때 제대로 배웠어야지. 배워서 남주나. "스, 타, 프, 온, 리... 지팡이만 가능하다... 지팡이만 있으면 될 것 같습 니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자신감이 생겼는지 마지막에 가선 또박또박 말했다. "음...지팡이만 가능하다..." 가투신은 이렇게 중얼거리더니 '지팡이!' 하고 외쳤다. 문은 까딱도 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다음에는 칼자루를 지팡이처럼 들고 문 여기저기에 이리 저 리 대보았지만 역시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쩐다..." 가투신이 머리를 싸매고 있는 사이예 차이린이 용감하게 문에 다가가 문 옆 에 달려 있는 지팡이 같이 생긴 것을 확 잡아 당겼다. 모두 깜짝 놀라 뒤로 한 걸음씩 물러섰다. 문에서 바람이 새어나가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우리는 모두 화들짝 놀라 너나 할 것없이 또 한 걸음씩 뒤로 물러섰다. 잠시 동안 아무 일도 일어 나지 않았다. 십부원 몇 명은 동굴 밖으로 언제든 뛰어나갈 준비를 하고서도 문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쉬이잉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차이린이 뒤돌아보며 보란듯이 씨익 웃었다. 문이 열리며 안쪽에서 환한 빛이 쏟아져나왔다. 연금술사의 등 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환한 빛이었다. 그 흰빛은 연금술사의 등처럼 정다운 느낌 같은 건 없이 그저 차갑기만 했다. 잠시 눈이 밝은 빛에 익숙해 지는 동안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눈이 빛에 익숙해지자 문 안쪽으로 거대한 홀이 보였다. 홀 안은 처음보는 낯 설고 기괴한 풍경으로 가득차 있었따. 그리고 우리가 찾아 다니던 오우거가 있었다. 그것도 셀 수 없이 많은 오우 거들이 말이다. 오우거들은 하나같이 유리로 만들어진 관 속에 들어있었다. 오우거들은 가투신이 말했던 것처럼 정말 엄청난 덩치들이었다. 꼭 집채만한 바윗돌들이 거대한 병 안에 갇혀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가까이가 오우거가 갇혀 있는 유리를 두드려 보았다. 둔탁한 소리가 났다. 유리 안에 투명한 액체가 가득차 있었다. 어떻게 유리를 이렇게 티끌 하나 없이 투명하게 만들 수 있는 거지. 놀랍군. 놀라워. 오우거들을 자세히 들여다 보니 팔도 다리도 다 달려있, 피부는 십부원들이 말했던 것처럼 짙은 회색의 비늘로 뒤덮여 있었다. 잠시 동안 아무도 말이 없었다. 사방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유리병과 그 안에 들어있는 오우거의 모습에 질려버린 것이 다. 차이린 십부장 조차 입을 열 엄두를 내지 못했다. 어디선가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홀의 한 구석에서 오우거 한마리 가 그르렁 거리는 소리를 내며 어슬렁 어슬렁 걸어나왔다. 여전히 모두들 잠 자코 있었다.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함부로 공격했다가 유리병 속에 갖혀있는 오우거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면 그야말로 대책이 없었다. "저 오우거는 겁에 질려 있습니다. 우리들을 무서워하고 있어요" 침묵을 깨고 아자닌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내가 보기에도 오우거는 지치고 힘이 없어 보였다. 우리들을 향해 걸어오던 오우거가 어느 순간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깨를 늘어뜨리고 바닥에 주저앉은 오우거는 겨우 숨을 있었다. 등에 나 있는 긴 상처가 눈에 띄었다. 흉칙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불쌍해보였 다. 너무나 긴 세월을 쓸쓸하고 외롭게 살아와 이제는 죽을 때를 맞이한 것 같은 그런 모습이었다. 다시 오우거가 천천히 일어났다. "동료를 깨울 모양입니다" 아자닌이 말하자 모두의 얼굴이 삽시간에 새파랗게 변했다. 저 무시무시한 오우거들이 동시에 덤벼든다면 결과는 불을 보듯이 분명했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물론이고 누구도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답답했다. 어떻게든 무슨 수를 내야할텐데... 이 상황에 아케르가 있었다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아마 조금도 망설이지 않 고 '이제 결정은 내려졌다'고 말하지 않았을까. 그렇다. 이제 결정은 내려졌 다. 한시라도 빨리 다른 오우거들을 깨우려고 하는 저 오우거를 해치우지 않 으면 우리 모두 죽은 목숨이다. 그 순간 나는 아케르의 말이 마음 속에서부터 느껴져왔다. "이제* 결정은* 내려졌다*" 나는 온힘을 다해 소리쳤다. 내 안에서 뭔가 끓어 올랐다. 십부원들이 미친듯 오우거에게 달려들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오우거에게 달려들어 창을 꽂기 시작했다. 오우거는 조금 전의 맥없던 동작과는 달리 거칠게 양팔을 휘저으며 창들을 막아냈다. 정말 빠른 동작이었다. 내 마음에서 오우거를 죽여야 한다는 마음이 계속 뿜어져 나왔다. 누군가의 창이 오우거의 손바닥을 뚫었다. 오우거는 소리를 지르며 몸을 비틀었다. 칼 을 쥔 손이 피를 원했다. 하지만 내 마음 한 구석에서선 샘솟듯 뿜어져 나오 는 살의를 밀어내며 저항하는 기운이 있었다. 이래서는 안 된다는 소리가 계 속들려왔다. 잘려나갔던 타우의 손이 살아 있는 것처럼 눈 앞에 떠올랐다. 차이린이 재빨리 활을 꺼내 오우거의 머리를 겨냥해 날렸다. 공기를 날카롭 게 가르며 날아간 화살이 오우거의 눈에 가서 박혔다. 화살이 눈에 꽂힌 채 바르르 떨었다. "우워어어어어어!" 오우거가 눈을 감싸며 비명을 질렀다. 그 틈을 놓칠새라 여러 개의 창이 오 우거의 몸에 거 박히기 시작했다. 먼저 로키의 창이 머리에 날아가 박혔고 이 어서 다른 십부원들의 창도 오우거의 몸에 박혔다. 오우거는 창이 꽂힌 채로 벌떡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더니 경련을 일으키며 다시 쓰러졌다. 쓰러진 오우거는 있는 힘껏 몸을 오그리며 아주 구슬픈 신음소리를 내며 울었다. "물러서요!" 가투신이 소리쳤다. 상황이 끝난 마당에 혹시라도 피해가 생길까 걱정이 되 는 모양이었다. "내가 먼저 찔렀다!" 누군가가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내가 심장을 찔렀어. 그러니까 내가 죽인 거야!" "아니야! 나야!" "내가 분명히 봤어! 로키가 가장 먼저 머리에 있는 심장을 찔렀어!" 십부원들은 모두 손에 칼을 빼어들고 살기등등하게 소리쳤다. 나도 오우거 의 가슴에 칼을 박아넣고 저렇게 소리치고 싶었다. 무엇이든 찌르고 베고 싶 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가 여전히 마음 한 구석에서 들려왔 다. 나는 칼을 잡고 어쩔 줄 몰라하는 꼴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 다. "이 놈 눈에 화살을 박은 건 나야!" 차이린이 말했다. 아니, 차이린 마저? "그건 순전히 내가 먼저 손바닥을 찔러서 틈이 생겼기 때문이야!" 십부원들의 공을 다투는 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나는 귀를 막고 싶었다. 내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도, 십부원들 입에서 나오는 소리도, 모두 듣기 싫었다. 문득 재훈이 등에 업고 있었던 귀가 뜯겨져나간 타코가 떠올랐다. "잠깐. 저 자식 뭐하고 있는 거야?" 로키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죽은 줄 알았던 오우거가 한 쪽 벽면으로 천천 히 기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고통스러워 하면서도 맹목적으로 기어가고 있었 다. 공을 다투고 있던 십부원들은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보기만 했다. 이윽고 오우거의 손이 한 쪽 벽면의 붉은 원에 가 닿았다. 사방에서 붉은 빛들이 빠 르게 점멸하며,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여자의 말은 한 마디도 알아들 을 수 없었다. 고대 아모리카의 언어인가 보다. 하지만 더 생각을 이어갈 수 없었다. 그 목소리가 아주 급박하게 들렸기 때문이다. 무엇인가 경고의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여기는...파괴다...육십...오십구...오십팔..." 로키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해석이 필요없었다. 십부원들은 벌써 입구까지 달려가 있었다. 가투신이 뭐라고 명령을 내리기도 전에 십부원들은 문 밖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에그시튼가 뭔가 하는 벽면에 씌여 있던 탈출 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역시 경고가 분명했어. 나는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정 신없이 십부원들을 따라 달렸다. 다들 정말 급박한 모양이었다. 그 와중에서 도 로키는 타우를 거의 질질 끌다시피 하면서 뛰고 있었다. 역시 정식 용병은 뭐가 달라도 다르군. 타우가 금화로 보이나 보지. 하지만 그럴 필요도 없었 다. 타우도 필사적으로 달리고 있었다. 살아야겠다는 일념이 가득한 얼굴로 말이다. 얼마나 빨리 뛰었는지 금새 밖이 보였다. 밖으로 나오자 그제서야 십부원들 은 한 시름 놓았다는 듯 땅바닥에 털퍼덕 주저 앉았다. "내가 용병 생활을 꽤 오래 해왔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네요" 가투신이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그때였다. 등 뒤에서 귀에 익은 친근한 소 리가 들려왔다. "우워어어어어어어!" 오우거다! 오우거는 창이 여기저기 박혀있는 꼴로 우리를 향해 달려오고 있 었다. 저게 사람이냐, 마물이냐. 음... 마물 맞구나... 나는 말할 것도 없고 십부원들 전부가 칼을 뽑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 다. 다음 순간 엄청난 굉음이 산 전체에 울려퍼졌다. 꼭 수천 개의 벼락이 바 로 눈 앞에 떨어진 것처럼 거대한 소리였다. 그 소리의 충격과 동굴에서 밀려 나온 엄청난 바람에 우리는 모두 뒤로 벌렁 나가 자빠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나는 한 참이 지난 다음에야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 어났다. 내가 했던 마법의 말은 이제 그 효력이 없어졌지만, 마법이 내게 강 요했던 살의와 그 살의를 거부하던 단호한 목소리가 여전히 귓가를 맴돌고 있 었다. 상황은 끝나 있었다. 오우거는 동굴에서 폭풍처럼 몰아쳐 온 바람에 등을 직격 당해 앞으로 날아가 땅에 반쯤 박혀 있었다. 처참한 모습이었다. 상황이 끝난 것을 안 가투신이 처음 문을 연 차이린과 머리에 있는 심장을 찌른 로키에게 각각 금화 하나씩을 약속했다. "그런데 이 놈을 계속 데리고 다녀야 하는 겁니까?" 아직 긴장이 덜 풀렸는지 숨을 거칠게 몰아 쉬며 로키가 말했다. "사실 오우거의 미끼로 쓰려고 했는데요. 음... 난처해졌네요. 결국 내 손 으로 없애야겠군요" 가투신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표정으로 타우를 해치우겠다고 말하고 있었 다. 그리고는 주먹만한 돌을 집어들었다. "너무 원망하지 말아요. 같잖은 마법으로 내 부하들을 공격한 댓가니까" 나는 가투신이 무슨 행동을 하려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타우의 표정이 일생에 단 한 번 밖에 없을 죽음 직전의 공포로 일그 러지고, 가투신의 싸늘하게 웃는 얼굴을 보는 순간 더이상 나 자신을 속일 수 없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 광경을 외면하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고개를 돌리기 전에 먼저 가투신의 손이 허공을 갈랐다. 끔찍한 비명소리. 머리통이 부수어지는 소리. 피와 뇌수가 뿜어져 오르는 소리. 다시 한 순간 정적. 타우의 비명소리가 일순간에 멎었다. 구역질이 올라왔 다. 하늘이 노랬다. 쓰러지면 안ㄳ다. 쓰러지면 안ㄳ다. 그랬다가는 가투신을 비롯해 모두가 나를 어린애 취급 할 것이다. 결코 어른이 되지 못할 것이다. 다음 일은 간단하고도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십부원들은 나무를 잘라 들것 을 만들었고 여덟 명의 십부원들이 오우거의 시체와 타우의 시체를 나누어 들 었다. 싸늘하게 굳어버린 타우의 시체와 오우거의 시체는 이제 단순한 살덩어 리 이상의 의미가 없었다. 십부원들에게는... 그러나 나에게는 아니었다. 이 무르 아줌마의 시체가 단순한 살덩어리가 아니었듯이. "저. 이제 들어갈께요" "잠깐만. 아까 그 마법은 도대체 뭐였지?" 대강 알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아자닌에게 확실히 확인하고 싶었다. "그 마법은 살의를 불러오는 마법이었습니다. 무언가를 미치도록 죽이고 싶 도록 만드는. 이제 들어가게 해주세요" 아자닌의 말투가 평소와 달랐다. 웬지 나를 비난하는 것처럼 들렸다. "들어가, 아자닌" 나는 힘없이 말했다. 웬지 모르게 아자닌에게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나는 아무말 없이 가투신 십부장을 따라 소리장 마을로 내려왔다. 내려오는 내내 한마디도 하고 싶지 않았다. 너무나 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 다. 아케르 단장의 말을 이해했다고 생각한 순간 마법의 말이 작동했다. 주변 에 있던 십부원들은 미친듯이 오우거에게 돌진했다. 결과를 놓고 본다면 나쁘 지 않다. 아니 어쩌면 그게 최선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마음 속의 무 언가는 단호하게 그것을 거부했다. 나는 소리장 마을로 내려오는 내내 두 마 음 중 어떤 것에도 손을 들어주지 못했다. 아! 그러고보니 왜 나는 그 마물에게 말을 걸어볼 생각을 못했지. 그 마물 을 달래볼 수도 있었을텐데. 사실 그 마물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뿐이지. 우리 를 죽이려고 한 게 아닌지도 모르잖아. "생각하지 말아요, 수르카. 아까 수르카가 타우를 베지 않았다면 누군가 크 게 다쳤거나 죽었을 거예요. 수르카의 판단은 옳았어요" 내가 괴로와하고 있다는 걸 눈치 챘는지, 가투신이 나에게 다정하게 말했 다. 웃으면서 말하는 가투신이 전과는 다르게 좀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정말 로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을까? "하지만 우릴 해치려고 한 게 아닐지도 모르잖아요..." "수르카는 용병이에요. 현자가 아니라구요. 배웠을텐데요. 먼저 공격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 건지..." 가투신은 여전히 상냥한 표정으로 말했다.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구요. 그게 칼의 법칙이에요" 가투신의 이 말은 전에도 들은 기억이 있다. 말은 조금 달랐지만 내용은 크 게 다를 것이 없었다. 그때 가투신이 했던 말은... 피리 나무가지를 빨리 타 들어 가게 하는 마법이 됐었지. "강하다는 건 별 게 아니에요. 필요한 순간에 망설이지 않는 게 강한 거지 요. 또, 자신이 일단 한 행동에 대해서 후회하지 않는 게 강한 거에요" 가투신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이렇게 말을 맺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에 대답을 할 수도, 고개를 끄덕일 수도 없었다. 여전히 두 개의 생각이 머리 속 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그나저나 큰일이네요" 가투신이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사람을 그렇게 잔인하게 죽이고도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 게 과연 강한 건가? "차이린이 살았던 사냥꾼 마을의 관습중엔 남자에게 생명을 빚진 여자는 그 남자하고 결혼해야 한다고 하던데요" 가투신이 말했다. 뭐라고? 설마! 순간 내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생각은 다 날아가 버렸다. 내가, 차이린과, 결혼을?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N:김상현 #9378/10199 ━━━━━━━━━━━━━━━━━━━━━━━━━━━━━━━━━━━━━━━━ 제 목:[탐그루] 태양을 쫓는 아케르 48 관련자료:없음 21/21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1-06 00:35 조회:1127 탐그루 # 마법은 마음이다 - 마음은 칼이다 # 마을 자치대에 오우거의 시체와 타우의 시체를 인도하며 가투신은 슬픈 표 정으로 늙은 자치대장에게 말했다. "타우 님은 끝까지 용감했습니다. 이 놈에게 팔을 물어 뜯기고도 끝까지 싸 우려고 했으니까요. 이건 타우 님의 유품입니다" 가투신이 성구를 자치대장 아삼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저 잘린 손에서 저 성구를 빼내었을 것을 생각하니 나는 다시 한 번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그런데 오늘 꼭 떠나야 합니까?" 자치대장 아삼이 말했다. "하루가 급해서 그렇습니다. 곧 월동 준비에 들어가야 하거든요" 아삼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약속한 잔금입니다. 저 오우거까지 잡아주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으니 조금 더 얹어드립니다. 점심식사는 조촐하지만 저희가 마련했으니 그거나 드 시고 가시지요" 가투신은 그것마저 거절할 수는 없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점심식사는 중앙 광장에 마련되어 있었다. 상 위에는 비싼 고기류와 탐그루 에서도 구경만 했지 먹어본 적은 없는 화려한 빛깔의 과일들로 가득했다. 나 를 포함한 열 한 명의 용병단원들은 굶주린 사람처럼 상에 달려들어 고기와 과일을 먹어치웠다. 아자닌은 불러내지 않았다. 어차피 먹지도 못할 거 보면 속만 터지지 뭐. 상 저쪽에서 차이린이 고기를 먹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가투신의 말이 진 짜 정말 사실일까? 차이린과의 결혼, 결혼이라구? 두통이 날 것만 같았다. 갑 자기 식욕이 싹 사라졌다. 그때 아삼이 내 옆으로 걸어와 말했다. "아. 수르카 님이시군요. 이번에 공이 크셨다면서요. 가투신 님께 말씀 들 었습니다" "저... 저는 뭐, 그냥..." 공이라고 해봐야 성직자의 손을 잘라 버린 것밖에는 없다구요. 그나저나 공 이 좀 있다고 이렇게 존댓말을 쓸 것까지는 없을 텐데. "뭐 필요하신 것 없으십니까? 저희 마을은 철이 많이 납니다만... 선물이라 도 하나 드리고 싶은데..." 자치대장 아삼은 이렇게 말하면서 나를 존경하는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았 다. 어린 놈이 정말 대단하군, 뭐 그런 표정이었다. 정말 뭐든지 말해도 괜찮 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장인이 만든 칼 얘기나 한 번 꺼내볼까. "저, 아직 용병단에 들어온지 얼마 안돼서... 칼이라고는 이거 하나 뿐인데 요..." 나는 사비오 영감에게 받은 칼을 들어 보여줬다. 의외였다. 아삼은 내 칼을 한참동안 유심히 바라보았다. 아삼이 지금 칼을 살펴보고 있는 건 무슨 뜻일 까. 이미 칼도 갖고 있는 놈이 바라는 것도 많다는 뜻일까. "음. 이건 삼 년 전쟁도 훨씬 전에 만들어진 칼이군요. 스파일의 유명한 장 인 한소가 만든 칼입니다" 뭐라고? 장인이 만든 칼? "문양으로 보면 군용으로 제작됐구요. 아마 장군이 쓰던 칼이었을 겁니다. 세상에! 어디서 구하셨습니까, 이 귀한 걸...?" 장군이 쓰던 칼이라고?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사비오 영감은 대체 어디서 이런 칼을 구한 걸까. 엉터리 예언으로 누군가에게서 얻은 게 분명하 지 뭐. 영감이 수완도 좋지. "...그냥 선물 받은 거예요. 제 말은, 그러니까, 이런 칼이 있는데, 뭐가 더 필요하겠냐는..." 나는 대충 생각나는 대로 지껄였다. 내 말에 아삼은 '역시'하며 고개를 끄 덕이더니 옆자리로 옮겨갔다. 아마 돌아가면서 칭찬이나 한 마디씩 해주려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정말 차이린 문제는 어떻게 해야 되지? 나는 잠시 고민 한 뒤에 결국 차이린의 옆자리로 옮겨가기로 마음먹었다. "저, 차이린 십부장 님. 하나 여쭤봐도 될까요?" 조심스럽게 차이린의 옆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그래. 뭔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고기를 씹으며 차이린이 말했다. 그래. 가투신이 한 말이 사실일 리가 없어. "그러니까요... 차이린 십부장 님이 살았던 사냥꾼 마을에서는요... 생명의 은인과 결혼을 해야 한다는... 그런 법이 혹시, 혹시나 있나요?" 나는 어렵게 어렵게 입을 열어 이렇게 물었다. "응. 있어. 알고 있었구나" 비록 고기를 씹고는 있었지만 얼굴을 붉히며 차이린이 말했다. 으악! 나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그런데 이런 와중에도 또 가슴이 울렁거리는 건 왜일 까. 나는 다시 한 번 식욕이 싹 달아났다. 화장실에 가서 세수나 한 번 해야 겠다. 정신을 차려야돼 수르카.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고 있으면 살 수 있대잖아. 수르카. 일단 진정하자. 화장실은 그냥 통 몇 개 세워놓은 용병단 화장실하고는 격이 달랐다. 모두 다 고급해 보이는 나무로 만들어진 건물이었다. 화장실치고는 너무 잘 만들어 져 있었다. 냄새도 거의 나지 않았다. 철을 생산해서 돈을 많이 버는 곳이라 니 그럴 만도 하겠지. 물은 얼음처럼 차가왔다. 이제 좀 정신이 들었다. 다시 자리로 돌아가자, 차이린은 가투신의 부하들과 떠들며 요란하게 식사 를 하고 있었다. 꼭 평생 한 번도 놀아 보지 못한 사람이 놀 기회가 주어지자 한을 풀려고 노는 것처럼 말이다.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차이린은 깔깔거리며 가투신의 부하들을 거칠게 툭툭 치기도 했다. 가투신의 부하들은 어쩐지 긴장 한 표정으로 어색하게 웃으며 차이린과 어울리려고 애쓰고 있었다. 나는 될 수 있으면 방해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차이린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하잔에는 좀비들이 그렇게 많이 나온다던데" "그래서 도시가 완전히 엉망이 됐다고들 하잖아" "참, 세상 일이란 알 수 없다니까. 하잔도 한때는 상업이 발달된 훌륭한 도 시였다고들 하던데 말이야. 탐그루에 운하가 생기기 전까지는 말이야..." 탐그루라고? 탐그루 이야기가 나오자 나는 귀가 번쩍 트였다. "...탐그루에 운하가 생기면서부터 하잔은 점점 망해갔지, 뭐. 타지에서 계 속 들어오던 상인들이 줄고, 그러다 보니 돈이 돌지 않게 되고, 또 그렇게 되 니까 가난해 지고... 그나마 가끔씩 하잔을 들리던 상인들도 산적으로 변한 하잔 사람들에게 돈을 뜯기는 일이 생기고... 이러다 보니 어쩔 수 없이 하잔 의 장사꾼들은 하잔을 떠나던가 아니면 농사꾼이 되는 수밖에 없지 않았겠어? 거기다가 시장이 세금을 하도 뜯어서 살기 어렵다는 말도 있던데...거기다 좀 비까지 나온다니, 원" "자. 이제 하잔 얘기는 그만 하지" 차이린이 말했다. 좀 이상하다 싶을 만큼 차가운 말투였다. 그러자 셋은 고 개를 끄덕이고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역시, 가투신의 부하들이라고 해 도 차이린의 성격을 알기는 아는 모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나는 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저런 성격의 차이린과 함께 산다면 어떤 기분일 까? 혹시 채찍을 맞으며 설겆이를 하게 되는 건 아닐까? 밤, 밤이 두려운 남 자가 되면 어떻하지? 호, 혹시 애도 나보고 나라고 하는 건 아닐까? 차이린이 명령하면 무슨 수를 쓰든 해내야 되니까. 오, 마소드여! 그런데 그러고 보니 내가 왜 자꾸 이런 생각을 하는 거지. 차이린과 같이 산다... 아, 그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다시 속이 거북해져왔다. "수르카. 왜 안 먹고 있어? 많이 먹어야지" 차이린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이거, 너무 친절한 거 아니야? 평소처럼 말하라구요. 평소처럼! 볼이 불 붙은 듯 화끈거렸다. "저, 그렇게 까지, 친절하게 말씀, 안 하셔도... 전 아직 어리니까요... 어, 리, 다, 구, 요......" "지금 내 부하라고는 너 하난데. 네가 널 안챙기면 누가 널 챙기겠어" 차이린은 다시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챙긴다구요? 챙긴다면... 가진다는 뜻? 화끈거리는 게 점점 볼에서 밑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이런. 나는 억지로 고기 몇 점을 집어 마구 씹기 시작했다. "그래. 그래야지, 수르카. 수르카는 먹는 모습이 참 보기 좋구나" 보기 좋다구요? 아, 이젠 다 끝났어. 끝났다구. 차이린한테 덤비는 건 무모 한 짓이야. 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어. 그만 포기하자 수르카. 그냥 한 세상 그렇게 살다가는 거지 뭐. 십부원들 사이에서 폭소가 터져나왔다. 시시껄렁한 무용담이나 늘어 놓고 있는 거겠지. 지금 내 심정을 당신들이 알아? 아냐구? 그런데 차이린이 친절하게 대해주니까 기분이 좋기는 하다. 이러다가 내가 차이린을 '아름다운 차이린' 이라고 정말 부르게 되는 건 아닐까? 끔찍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어쩐지 좋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자꾸 이러면... 안 되는 데. 그래 차이린만 옆에 있으면 난 무적이야. 누가 날 괴롭힐 수 있 겠어. 좋게, 좋게 생각하자구 수르카. "...그런데 하잔에 반란군이 생겼다는 말은 정말일까" 가투신의 부하 하나가 옆에 앉은 누군가에게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 자 차이린이 그 부하를 살벌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옆에서 보고 있는 나까지 서늘해 지는 눈빛이었다. 눈이 직접 마주친 십부원은 순간 깜짝 놀라며 고개 를 숙이고 고기를 열심히 씹기 시작했다. 마치 세상의 모든 중요한 일이 고기 씹는 일에 달려있다는 듯이 말이다. 아, 안돼.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고 해도 역시 안되는 건 안되는 거야. 저 눈빛. 저건 사람의 눈빛이 아니야. 얼마 지나지 않아 식사가 끝났다. 식사가 끝났다는 걸 신호라도 하듯, 여기 저기서 담배 연기가 피어 올랐다. 나는 담배를 피울 줄 몰랐으므로, 담배를 피우는 십부원들을 바라보면서 물이나 좀 마시기로 했다. "이렇게 빨리 떠나신다니, 섭섭합니다. 바쁘시다니 제가 더 잡을 수는 없겠 지요. 다음에 또 무슨 일이 생기면 또 저희를 도와주러 오시는 걸로 믿고 있 겠습니다" 다짐을 받듯이 자치대장 아삼이 가투신에게 말했다. 아마 누군가 다른 사람 이 저런 말을 했다면 아마도 순 거짓말처럼 들렸겠지만 아삼처럼 나이 많은 자치대장이 예의바른 태도로 말을 하니 진심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 긴, 이런 외진 곳에 다시 마물들이 나타나는 날이면 아케르 용병단 말고 또 누구를 믿을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껏 오르크 몇 마리와 오우거 한 마리를 당하지 못하는 자치대원들이라면 말이다. "예, 꼭 그렇게 하지요. 하지만 공짜는 아니란 거 아시죠?" 가투신이 웃으면서 말했다. 역시 나에게는 징그럽기 그지 없는 웃음이었다. 저렇게 징그러운 웃음 앞에서 저렇게까지 예의 바른 태도를 유지할 수 있다 니. 아삼 대장은 확실히 뭐가 달라도 다른 사람인가보다 싶었다. 아삼과의 짤막한 인사가 끝나자 가투신은 바로 장비를 점검하고 부대를 이 끌어 마을을 빠져나갔다. 이번에는 모든 십부원들이 뮤를 타고 떠났다. 마을 을 빠져나가는 길에 뒤를 돌아보았다. 소리장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왔다. 멀 리 보이는 광산하며, 낮지만 아름다운 집들하며... 그리고 꼬마들이 우리를 따라오면서 뭐라고 자기들끼리 떠드는 모습도. 저 꼬마들 중에는 나처럼 용병 이 되고 싶은 아이들도 있겠지. 그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다소 마음이 편해지 는 것 같았다. 오우거의 생각은 잊자. 타우에 대한 생각도 잊자. 이제 나는 용병이다. 이런 일에는 익숙해 져야 한다. 가투신의 말처럼 말이다...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불편한 구석이 남아있지만. 차츰 나아질 것이다. "자, 그럼 우리 노래나 한 곡 할까요!" 마을을 빠져나가자 가투신이 소리쳤다. 우리들은 큰 소리로 아케르 용병단 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용병단가를 왜 그렇게 악을 쓰면서 부르게 만들었는지 노래를 부르면서 나는 알 것 같았다. 좋지 못한 기억들, 억울하다는 마음, 불 안한 마음... 용병단가를 부르면서 나는 내 안에 쌓여있는 것들이 밖으로 나 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건 아마 다른 병사들도 마찬가지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하늘에서 뭔가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눈이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회색하늘 가득히 나비가 날듯 눈송이가 떨어지고 있었다. 앞서 가던 가투신의 어깨에도 차이린의 머리에도 눈이 떨어져 내렸다. 뮤가 내뿜는 뜨거운 숨이 하향게 퍼져나가고, 십부원들은 이제 폭설로 변한 눈송이들을 물 리치겠다는 듯 더 열심히 용병단가를 불러댔다. 좁은 산길에 눈이 쌓이고, 또 쌓이고, 또 쌓였다. 가끔씩 뮤가 눈길에 미끄러지고, 눈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이 쏟아지고 더 빨리 쌓여갔다. 사람도 숲도 산도 흰눈에 뒤덮여 보이는 풍경이 모두 현실이 아닌 것만 같고, 순식간에 전혀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았 다. 나는 천천히, 천천히 생각에 잠겨 앞 사람의 하얀 등만 바라보며 뮤를 몰 았다. 성년이 된 후의 첫 번째 눈이었다. 돌아가는 길은 그리 길지 않았다. 나도 한 번 본 길이라 그런지 몰라도 훨 씬 빨리 돌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하루에 갈 수는 없는 거리인지라 우 리는 결국 야영을 한 번 하게 됐다. 야영 준비도 사람이 많아서 금방 이루어 졌다. 차이린은 장작을 쌓아 불을 붙이고, 우린 눈을 치우고 천막을 쳤다. 진 짜 그럴싸한 야영지가 꾸려졌다. 야영을 위해 세워진 천막 위에도 금새 눈이 쌓였다. 꼭 눈으로 만들어진 집 같았다. 그나저나 정말로 걱정되는 일이 남았다. 정말로 차이린이 나한테 결혼하자 고 하면 어떻게 하지? 모닥불 앞에서 차이린의 품에 안겨있었던 일이 다시 떠 올랐다. 그 고운 피부와 따뜻한 체온과 볼에 닿았던 차이린의 뜨거운 숨결... 그러자 가슴이 울렁거리고 이상하게 몸 여기저기가 간지러워졌다. 그날 밤, 나는 꿈을 꾸었다. 병속에 갖혀있던 오우거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 나에게 덤벼드는 악몽이었다.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한 밤중에 홀로 깨었다. 천막 안은 십부원들의 체온 때문에 그다지 춥지는 않았다. 잠에서 깨 자 이런저런 온갖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나는 일단 밖으로 나갔다. 땀이 마르자 금새 몸이 떨려왔다. 사방은 온통 눈으로 덮여 있었다. 눈은 달빛을 받아 사방에서 보석처럼 반짝였다. 이렇게 아름다운 세상을 멸망시키려고 마칸이 강림한다니... 그 흉하게 생긴 오우거 들도 마칸과 관계 있는 걸까? 망할. 그 빌어먹을 마칸이라는 건 도대체 뭐지? 누군 마칸이라고 하고, 또 누군 마칸 족이라고도 하고, 아무도 마칸이 뭔지 모르면서 무서워만 하는 게 아닐까? 유리벽에 갇혀 있던 그 많은 오우거들도 마칸 족이 만든 건가? 아니면 전설 의 아모니카 대륙에 살던 고대인들이 만든 걸까? 벽면에 있던 글씨는 로스안 의 고대 언어라니까 그 오우거들은 아마 고대인들이 만든 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고대인들이 그렇게 흉칙한 오우거를 만들 이유가 없잖아. 그렇다면 고 대인들도 마칸의 강림을 막기 위해 오우거를 만든 건가? 음... 그러면 고대인 들도 마칸의 강림을 막지 못해 아모리카 대륙과 함께 사라진 건가? 그렇다면 마칸 족과 싸워 그들을 봉인했다는 대마법사 아킨과 대장군 카를로스 카를로 스는 얼마나 대단한 사람들인가! 그런데 아케르 단장의 능력과 힘은 도대체 어디까지일까? 아케르 단장이 마 칸을 막아낼 수 있을까? 단장은 용변단의 힘을 키워 그들처럼 마칸을 막아내 려는 건가? 아케르 단장은 보면 볼수록 신비한 사람이다. 그는 웬지 내가 모 르는 거대한 힘을 갖고 있는 것 같다. 거대한 힘이 아니라 거대한 야망을 갖 고 있는 건가?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 그렇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고 있으니 모를 일이다. 정말 아케르 단장에게는 사람을 매혹시키는 뭔가가 있다. 아케르 단장과 내가 아킨과 카를로스처럼 힘을 합쳐 마칸을 없애는 거야. 무시무시한 전투 끝에 마칸을 없애고, 우리 두 사람은 상처투성이의 몸을 서 로에게 기대며, 불타오르는 듯한 석양을 배경으로... 추워서 이가 딱딱 부딪 쳤다. 자다말고 이게 무슨 짓이냐. 나는 벌벌 떨면서 다시 천막 안으로 들어 갔다. ----------------------------------------------------------------------- 늘 읽어주시는 독자여러분께 알려드릴 사실이 있어 이렇게 몇자 적게 되었 습니다. 탐그루가 12월 초에 출판될 것 같습니다. 연재 시작한지 불과 두 달만에 출판이라 사실 저도 어리둥절할 따름입니다. 제 소설을 읽어주시고, 추천과 메일을 보내주신 독자여러분의 덕분이라 생각하며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물론 출판이 되더라도 연재는 계속 될 것이고, 출판이 된 후에도 출판 된 분량까지만 삭제하기로 출판사와 얘기가 되어 있으니 필요하신 분들은 미리 다운을 받아두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래주실 분들이 과연 계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제 소설 탐그루를 읽어주시는 독자 여러분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리며, 탐그루가 더 재미있고 감동적인 이야기가 되도록 노력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늘 건강과 행복이 함께 하시길 빕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N:김상현 #9429/10199 ━━━━━━━━━━━━━━━━━━━━━━━━━━━━━━━━━━━━━━━━ 제 목:[탐그루] 봄이 꽃은 아니다 49 관련자료:없음 25/25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1-07 00:22 조회:1009 탐그루 # 마법은 마음이다 - 마음은 칼이다 # * 봄이 꽃은 아니다 다음 날 우리는 본부에 도착하자 전 병력이 나와 우리를 환영해 주었다. 이 상하게 라이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출정을 나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대열 중에서 재훈의 모습은 볼 수 있었다. 재훈은 환 하게 웃으며 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등에는 여전히 귀가 뜯겨진 타코가 매달 려 있었다. 재훈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있는데 차이린이 내게 다가왔다. 순간 긴장이 됐. 얼굴이 붉어졌다. 어떻게 해야 하나. "수르카. 이미 네가 눈치채고 있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인데..." 오, 제발! 무슨 말이든 좋으니까 제발, 결혼하자는 말만은... "...가투신이 내 목숨을 구해 준 적이 있어. 아주 오래 전 일이지만. 하지 만 다른 사람들한테는 비밀로 해줘. 부탁해" 차이린은 이렇게 말하고는 가버렸다. 나는 재훈의 등에 매달려 있는 타코를 바라보았다. 타코의 초록 눈동자가 말똥말똥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긴장이 풀렸다. 한도의 한숨이 저절 로 나왔다. 하지만 그 한숨이 죽은 오우거를 위한 것이었는지, 귀 뜯긴 재훈 의 타코를 위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차이린의 청혼을 받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서였는지는 모르겠다. 이어서 작전 경과 보고가 있었다. 다른 병사들은 전부 막사로 돌아갔지만 가투신과 차이린, 그리고 나는 바로 아케르 단장의 천막으로 불려갔다. 가 투신이나 차이린은 십부장이라지만, 나는 왜? 어이가 없군. 나도 다른 병사 들처럼 풀고 쉬고 싶은데 말이다. 하지만 아자닌이 알아낸 것에 대한 보고 도 있어야 한다고 가투신이 말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다. 아케르 단장의 천막 안에는 순무와 타호루, 그리고 아케르가 앉아있었다. 모두들 꽤 기다리고 있었던 눈치였다. "가투신. 먼저 보고해보게" 행정담당관 순무가 말했다. "예. 소리장 건은......" 보고 내용은 길고도 자세했지만 도무지 재미가 없었다. 간단하게 요약하 자면 '우리는 소리장 마을에 가서 금화를 받고 오르크들의 본거지를 찾아내 토벌했다'면 끝날 말을 가투신은 이 설명 저 설명 붙여가며 길게 늘어놓았 다. 하지만 순무는 가투신의 말을 주의 깊게 들으며 종이에 뭐라고 적기도 하고, 보충 질문을 할 때도 있었다. "그 마물 이름이 오우거라고?" 순무가 물었다. "오우거라면 마칸 족이 부렸다는 마물입니다. 고대 아모리카인이 부렸다 는 전설도 있습니다" 타호루가 아케르 쪽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반지의 정령, 아자닌이 알려줬어요. 덕분에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었죠" 가투신은 이렇게 말하고는 다시 얘기로 돌아갔다. 나는 또다시 지루해지 기 시작했지만 가투신의 얘기가 오우거를 없애 달라는 부탁을 받은 곳까지 이르자, 순무가 가투신의 지루한 얘기를 중단시켰다. "...그리고 차이린과 수르카가 도착했다는 말이지?" "예" "차이린 얘기해보게" 순무가 다시 물었다. 아케르 단장은 주의 깊게 듣고는 있었지만 표정의 변화가 하나도 없었다. 오우거의 이야기가 나오자 눈을 반짝인 사람은 타호 루였다. "아자닌의 도움을 받아 저희는 그 마물이 오우거라는 것을 알아내고 바로 수색을 시작했습니다. 오우거는 피부가 항상 젖어있어야 하고 햇빛을 싫어 하기 때문에 시냇물이 흐르는 곳 근처에 있는 동굴에 숨어있을 거라는 게 아자닌의 설명이었습니다. 하지만 첫날은 별 소득 없이 복귀했습니다. 그때 타우라는 이름을 가진 성직자가..." "잠깐. 성직자가 있었다고?" 순무가 차이린의 말을 끊으며 물었다. "예. 풋내기인 것 같았습니다. 첫 임무였다고 하더군요" "어떻게 처리했나?" 순무가 물었다. 나는 타우의 마지막이 떠올랐다. 으. 나도 모르게 신음소 리를 냈다. 산산조각으로 흩어지던 타우의 머리... 그리고 뿜어져 나오던 핏물과 뇌수... 아마 일생동안 잊지 못할 거야. "제가 해결했어요. 오우거에게 당한 걸로 처리했죠... 물론 저항이 있었 지만 수르카의 마법으로 막아낼 수 있었어요" 가투신이 말했다. 음. 나의 마법이라... 나는 아케르 단장의 표정을 살펴 보았다. 역시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수르카가 마법을?" 타호루였다. 나는 뜨끔했다. 이러다가 또 마법 배우라는 얘기가 나오면 어쩌지? 나를 또 허공에 띄울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 성직자가 불로 공격하는 마법을 쓰자 수르카는 방어 마법을 써서 막 은 후 단칼에 성직자의 팔을 베었지요. 처음 치고는 아주 괜찮은 솜씨였어 요" 나는 뿌듯한 게 가슴속에 차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한 편에서는 잘려나간 타우의 손과 이무르 아주머니의 손이 겹쳐 떠오르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방어 마법이라... 어떤 마법의 말이었나?" 타호루가 나에게 물었다. "모든* 빛깔* 있는* 것들은* 나에게* 시간을* 빌려다오* 였습니다" "누구에게 배운 마법이지?" "스승님께 배웠습니다" "그렇군..." 타호루는 뭔가 생각하는 듯 했다. 역시 나를 제자로 삼으려고 하는 모양 이다. "수르카가 해치울 수 있었다면 정말 풋내기인 모양이야" 순무가 말했다. 아니, 칭찬은 못해 줄 망정 꼭 저런 말을 해야 하는 걸 까? 그러잖아도 복잡한 심정인데... "그런데 성황청에서는 왜 풋내기를 소리장으로 파견했을까? 노련한 사람 들도 얼마든지 있었을 텐데" "경험이 있는 성직자들은 다른 곳으로 다 파견 나간 모양이었어요. 성황 청의 기사단에 편입된 모양이던데... 제 기억에... 하잔으로 파견을 갔다는 것 같더군요" "하잔으로 갔다... 음..." 하잔이라는 말에 순무는 뜻밖의 일격을 당한 검사 같은 표정을 지었다. 뭔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을 당했다는 표정이었다. 아니, 어쩌면 조금 걱정 이 된다는 표정 같아 보이기도 했다. "칼에 베었다면... 마물에게 당한 걸로 처리하기가 쉽지 않았을텐데?" "돌로 해결했어요. 조금 지저분하긴 했지만 뒤탈은 없을 거예요" "팔에 베인 곳도?" "돌로 조금 손을 봤어요. 칼에 베인 줄 모를 겁니다" 가투신이 대답하자 순무는 인상을 조금 찌푸렸다. "이거 큰일입니다, 단장님" 순무가 말하자 아케르는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가투신의 얼 굴을 바라보았다. 가투신도 통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돌로 칼에 베인 자리를 뭉갰다면 틀림없이 성황청에서 이상하게 생각할 겁니다. 이빨 자국이 나 있어야 하는데 그런 상처가 나 있다면 틀림없이 조 사에 착수할 겁니다" 순무가 아케르에게 물었다. "만약 본격적으로 조사를 하게 된다면 아자닌과 수르카의 존재를 확실히 알게 될 것입니다. 아무래도 그들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 보다 더 수르카의 마법을 필요로 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장 걱정인건 그들이 이미 수르카의 존재를 눈치채고 풋내기를 보낸 것이라면, 그들에게 빌미를 주게 될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황청과 본격적으로 대립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만약 그들이 우리가 하잔에서 작전을 수행할 때..." 순무가 말했다. 아니, 하잔이라고? 우리가 하잔으로 출동한다는 말인가? 하잔에서도 좀비들 때문에 의뢰가 들어왔나보지. "그 얘긴 나중에 하지. 보고 계속하게" 아케르가 순무의 말을 자르면서 말했다. 아케르의 말하자 천막은 순식간 에 다른 공기가 들어차는 듯 싶었다. 그다지 큰 목소리도 아니었고 그렇다 고 말투가 다른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그의 말에 천막 안의 순무 와 타호루, 차이린과 가투신, 그리고 나는 일제히 가투신의 말에 집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차이린이 이어서 소리장 동굴에서 일어난 일들을 말했다. 고대 유적과 문 자, 오우거들이 유리병에 갖혀 있던 모습, 또 오우거의 특징과 천둥소리에 대해. 차이린의 보고는 카투신의 보고에 비해 훨씬 간단했지만 내용을 전달 하는 데는 더 효과적이었다. "이 이야기는 좀 조사를 해 봐야 겠습니다. 오우거에 대한 정보가 너무 부족합니다. 어쩌면 지금 불어나고 있는 좀비를 퇴치하고 나면 오우거가 문 제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건 내가 알아서 정보를 수집해 보도록 하지" 타호루의 말이 끝나자 아케르는 아마의 흉터를 엄지 손가락으로 누르며 간단히 말했다. "성황청이 문제입니다" 이번에는 순무가 말했다. 성황청 얘기가 나오자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만약 성황청이 수르카의 존재를 알아낸다면 방법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수르카를 넘겨주던가, 아니면 성황청과 대립하던가 말입니다. 그것도 하잔 에서 말입니다" 순무가 말했다. 나를 넘겨준다고? 저런 무시무시한 말을 정말 아무 감정 도 없이 하는 군. 저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겠지. 나는 아케르를 바라보았 다. 역시 표정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만약이 아니라 성황청은 분명히 알아낼 걸세. 이미 알고 있을 지도 모르 지" 아케르가 말하자 나는 다시 한 번 가슴에서 뭔가가 내려앉는 소리가 들렸 다. 과연 아케르는 나 하나 때문에 성황청과 대립하는 쪽을 택할까? "나는 단 한 번도 내 부하를 내 준 적이 없다. 그런 적이 있나, 순무?" 아케르가 물었다. 순무는 없다고 대답했다. "성황청과 대립하는 게 무서워서 부하를 내 준다면 이 아케르 용병단은 바르도 대륙의 웃음거리가 될 걸세. 그리고 그게 굳이 수르카 문제가 아니 더라도 언젠가는 성황청과 대립하게 되리라는 건 예상하고 있지 않았나, 순 무. 그곳이 하잔이 되든, 아니면 다른 곳이 되든 말일세" "네. 이번에 하잔에서 성황정과 붙게 된다면 오히려 우리에겐 좋은 기회 가 될 지도 모릅니다. 마칸의 강림이 우리에겐 더할나위 없는 기회이듯이 말입니다. 준비는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깜짝 놀라 가투신과 차이린을 바라보았지만 둘은 별다른 반응이 없 었다. 그렇다면 이들에게는 마칸의 강림이 무시무시한 공포가 아니라 기회 라는 건가? 무슨 기회라는 얘기지? "그럼 시기를 좀 앞당기는 것으로 하지. 수르카. 걱정 말게. 자네 때문에 생긴 일이 아니니까" 나는 지금까지 아케르에게 들었던 그 어떤 말보다도 더 뜨거운 것이 가슴 에서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아케르는 나를 인정했을 뿐 아니라 부하로서 나를... 신뢰하고 있는 것이다. "성황청 문제는 이제껏 준비해오던 일을 조금 앞당기는 것으로 하지. 그 문제는 내가 알아서 처리하겠네. 자. 그럼 더 할 말 있나?" "수르카에 대한 문제입니다" 타호루가 말했다. "수르카는 마법에 소질이 있을 뿐만 아니라 마법으로 이번 작전에서 큰공 을 세웠습니다. 계속 이대로 차이린의 십부에 놔두실 생각이십니까?" 타호루의 말에 차이린의 표정이 굳어졌다. 어떤 십부장이라고 해도 자기 부하를 함부로 어떻게 하겠다는 말을 듣고 기분이 좋을 십부장은 없을 것이 다. 차이린의 모습을 보자 웬지 뿌듯해졌다. 이제 나도 어딘가에 소속돼 있 는 것이다.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다는 건 더이상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고 아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럴 때일수록 더 당당하게 말해야 한다. 나를 믿고 신뢰하는 아케르 단장 앞에서 말이다. "저는 차이린의 용의 눈 십부원입니다" 그러자 아케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행동 하나로 아케르의 '결 정은 내려졌다'. "그럼 보고는 이만 마치지" 나는 아케르가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말 몇 마디로 내 가슴에 뭔가를 채워 넣을 수 있고, 몸짓하나로 부하들을 자유자재로 부리니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용병 단장으로 끝날 사람이 결코 아니다. 정말로 뭔가 큰일을 해낼 것 같다. 그런데 아케르는 왜 군인이 되지 않았을까? 군 인이 되었다면 장군도 문제없었을 텐데. 틀림없이 무슨 사연이 있을 거야. 아케르의 천막에서 나온 나와 차이린은 천천히 용의 눈 십부 천막을 향해 걸어갔다. "차이린 십부장님. 아까 ..오히려 기회라는 말이 무슨 뜻..." "수르카. 네가 마법의 능력도 있고 반지의 정령도 부린다는 걸 아니까 하 는 말인데, 다른 십부원들에게 비밀로 해준다고 약속하면 하나 말해줄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밀이라는 말에 나는 어쩐지 긴장이 됐다. "십부원이 되기 위한 훈련은 그저 기본적인 훈련일 뿐이야" 차이린이 말했다. 그 훈련이 기본적인 훈련이면 도대체 본격전인 훈련은 뭐야? "내 말은, 수르카, 말단 병사는 누구나 될 수 있다는 말이야. 다시 말해 서... 십부원이라고 하면.... 음.. 그러니까... 소모품에 불과하다는 말이 야" 나는 차이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차이린의 표정에는 근심이 서려있었 다. "너희가 받은 훈련은 아주 기초적인 과정에 불과해. 나이도 대부분 어리 고, 칼을 써본 경험들도 없으니까...첫 번째 전투에서 신병들 대부분이 죽 어"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설마...그렇다면 출정을 나간 라이짐도? "그래서 타호루는 계속 네가 마법사로 남아야 한다고 말하는 거야. 사실 나도 네가 타호루에게 마법을 배우면서 계속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내 목숨을 구해줘서 하는 말이 아니야. 너하고 나는 같은 고아인데다가, 수 르카, 나는 네가 좀 다르게 느껴져" 결혼 이야기는 이제 끝난 줄 알았는데. 설마 생명을 구해준 사람하고는 몇 명이라도 다 결혼해야 된다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 설마... "그래서...너는 꼭 죽지 않았으면 좋겠어. 무슨 일이 있어도 말이야. 하 지만 네가 내 부하로 남겠다고 말했을 때, 나는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 그럼 내가 차이린의 십부에서 죽었으면 좋겠다는 말인가? "마칸의 부활에 대한 소문은 이제 소문이 아니야 사실이지. 수르카는 정 치에 대해서 잘 모르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국왕은 무능하기 짝이 없는 인물이야. 아니 그걸 유능하다고 해야 하나. 성황청과 스파일 사이에서 재주를 넘듯 권력을 유지하고 있으니까. 어쨌든 국왕은 마칸의 부활 같은 데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그런 판인데 평민들이 죽건 살건 콧방귀도 안뀌는 게 당연하지. 국경너머 바바 족의 위협은 스파 일을 구슬려 막아내고, 성황청의 힘을 이용해 마칸의 부활에 대비해서 민심 을 잡아야 할텐데 말이야. 이번에 하잔에 좀비가 나타났을때도, 그 일은 몽 땅 성황청에 맡겼다는 거야. 타실 정부군은 한 명도 못보낸다는 얘기지. 참 그것도 군대라고. 그래서 우리가 하잔에 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거야. 국왕 은 우리를 파견해 성황청을 견제할 속셈인 거지" 하잔에 간다고? 나는 놀라 눈을 크게 뜨고 차이린을 바라보았다. "출동인가요?" "아니야. 아직 확실히 결정난 건 아니야" "우리 용의 눈 십부도 출동하게 되나요?" "물론. 하잔에 가게 되면 우리 십부 뿐만 아니라 주둔지 전 병력이 다 출 동하게 될 거야" "좀비들이... 엄청나게 많은 모양이군요" "아니. 좀비들은 성황청이 맡을 거야. 출동하게 된다면 우리가 할 일 은... 반란군을 막는 일이 될 거야" "반란군이라구요?" "다 국왕이 무능한 때문이지. 좀비들이 나타났을 때, 즉각적인 조치를 취 했다면 하잔 사람들이 반란군이 되는 일은 막을 수 있었을 거야. 하지만 멍 청한 국왕은 하잔이 어디에 붙어 있는 지도 모를 걸. 마물이 나타났다 하면 무조건 성황청에게 맡겼으니까. 하지만 성황청도 전력을 다해서 좀비들을 없애려고 하진 않을 거야. 만약 반란군들이 예상 밖의 거센 저항을 한다 면... 성황청은 간단히 손을 뺄게 틀림없고. 그때가 되면 국왕은 우리에게 의뢰할 게 분명하니까" 나는 차이린이 소리장 마을에서 마지막 식사 때 왜 하잔 이야기를 하지 못하게 막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이제 정말 큰 일이 닥칠 모양이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N:김상현 #9430/10199 ━━━━━━━━━━━━━━━━━━━━━━━━━━━━━━━━━━━━━━━━ 제 목:[탐그루] 봄이 꽃은 아니다 50 관련자료:없음 25/25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1-07 00:23 조회:946 탐그루 # 마법은 마음이다 - 마음은 칼이다 # "물론 당장은 아니야. 아마 겨울동안에는 이곳에 머물 것 같아. 만약 내 년 봄까지 반란이 진압되지 않는다면, 그때는 정말 출동하게 될 거야" 당장이 아니라는 사실에 마음이 놓였다. "수르카. 마칸이 부활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 같아?" 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전설은 전설일 뿐이지 결코 현실로 다가오리라 고는 생각도 못해보았기 때문이었다. "전쟁이야. 그때는 전쟁이라고. 바르도 대륙 전체가 대혼란에 휩쌓일 거 야. 마칸의 부활로 잠재되 있던 갈등들이 다 폭발할 테니까. 그 대혼란엔 마물들의 잦은 출현도 한몫하겠지. 우리가 본 그 오우거 같은 놈들은 물론 이고 더한 것들이 여기저기서 마을을 덮치고 집을 불태울 거야. 언제 어디 서 마칸 족이 습격할 지 모르는 상황이 되고 만다는 말이야. 아이들과 여자 들은 저항 한 번하지 못하고 죽을테고, 남자들은 군대에서 칼 한 번 휘둘러 보고 죽는 거지. 너나 나 같이 말단에 있는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지. 언제 죽는냐가 문제일 뿐이야. 무슨 말인지 알겠니, 수르카?" "그런데 그게 성황청과 다툰다는 말하고는 무슨 상관이 있어요?" 나는 이렇게 차이린에게 물어보았다. "국왕이 스파일과의 힘 겨루기에 신경을 쓰고 있는 동안 성황청이 비야적 으로 성장했지. 사병을 모으고 마법사들을 모으고, 또 성구를 대대적으로 제작해 기사단도 만들었지. 마칸의 일족이 부활한다면 아마 공식적으로 맞 설 수 있는 상대는 성황청뿐일 거야. 그들은 마칸의 강림에 대비해 오랫동 안 준비해 왔다고 하니까 말이야. 좀비들이 돌아다니는 게 마칸 족의 부활과 관계가 있다는 사실이 확인 된 것도 불과 얼마 되지 않았어. 사실 나도 아자닌이 악령에 씌인 사람들이 바 로 좀비라고 했다는 말을 타호루에게 들을 때까진 설마하고 있었지. 사실 좀비 같은 마물들이 늘어난다는 건 마칸의 부활이 다가오고 있다는 징조라 는 건 오래 전부터 전해 왔던 얘기거든..." 여기서 차이린은 조금 부끄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아케르 단장님도 그걸 예측하고 오래 전부터 용병단을 정비해 오 셨지. 물론 마칸의 부활에만 대비해서 준비해온 것은 아니야. 그렇지만 현 재까지 여섯 군데나 되는 용병단이 아케르 단장의 지휘 하에 있고. 또 아케 르 단장님에겐 직속 십부가 있지. 단장님의 직속 부하들이 몇 명이고 어떤 능력이 있는지는 나도 잘 몰라. 하지만 그 직속 십부가 마칸 족의 부활과 성황처에 대비해 오래 전부터 아케르 단장님이 준비해 온 거라는 건 알지. 만약 네가 마법을 공부하고, 그래서 진짜 마법사가 된다면 너는 아케르 단장님의 직속 십부로 들어갈 수 있을 거야. 직속 십부원이 되려면 적어도 남과 다른 특별한 능력을 하나는 가지고 있어야 하니까. 어쩌면 네가 마법 을 배워 직속 십부에 들어가는 게 조금이라도 더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지도 몰라" 말을 마친 차이린은 길게 한 숨을 내 쉬었다. "...네가 내 부하라고 당당학 말했을 때, 나는 정말 기뻤어. 그래서 이 사실을 너도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얘기해 주는 거야, 수르카" 나는 차이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차이린이 나를 보는 눈은 정말이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애정을 담고 있었다. 가끔 이무르 아주머니에게서 볼 수 있었던 그런 눈빛이었다. 그러고 보니 용병단에 들어오길 잘했다는 생각 이 들었다. 이곳에는 적어도 나를 걱정해주고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얼마든 지 있지 않은가. "...그런데 차이린 십부장님. 그렇게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왜 여기 용 병단에 들어오셨어요?" "사람은 누구나 죽어, 수르카. 다만 어디서 어떻게 죽느냐만 다를 뿐이 야. 나는 아케르 단장님의 부하로 죽는다면 조금도 억울할 게 없다고 생각 해. 너, 여기에는 몰락한 귀족이나 평민밖에 없다는 거 알고 있지?" 그건 당연한 일 아닌가? 귀족이 뭐 하러 이런 위험한 일을 하겠는가. "여기 모인 사람들 대부분은 귀족을 원수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야. 귀족에게 부모를 잃은 사람도 있고, 다른 귀족에게 치여 평민이나 다를 바 없게 된 귀족들도 있지. 다들 그런 처지란 말이야. 나도 마찬가지야. 스파일과 타실 사람들이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건 알지? 하지만 이곳에는 그런 감정을 내세우는 사람이 거의 없어. 그건 대부분의 용병단원들에겐 적 어도 한두 가지씩은 귀족에 대해 사무치는 게 있기 때문이지. 물론 타실 병 사와 스파일 병사가 가끔씩 싸움을 벌이기도 하지만 그건 어쩌다 한 번 씩 일 뿐이야.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듣고 보아와서 그런 거지 결코 서로 미워 해서가 아니야. 스파일과 타실의 그런 식의 감정 싸움은 사실은 귀족들이 조장하고 있다는 걸 모두 알고 있으니까. 알고 있으면서도 한 번씩은 자기 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거지" 그런 이유에서 체리와 청강은 서로 싸우면서도 한 십부에 있을 수 있는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나와 라이짐도 귀족을 미워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새 삼 들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도 그런지는 몰랐다. 아니, 그런지 안 그런 지 별 관심이 없었다는 편이 더 맞는 말일 것이다. "아케르 단장님이 계획하고 있는 건, 귀족이 없는 세상이야" 나는 그 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귀족이 없는 세상이라구? 그 럼 평민들이 정치를 해야 한다는 말인가? "귀족을...다 죽인단 말인가요?" 차이린은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아니. 귀족도 평민도 없는 세상을 만들어 보자는 거지. 하늘 아래에서 모두 다 평등한 세상 말이야" 차이린은 이렇게 말하며 하늘을 바라 보았다. 차이린의 눈동자는 뭔가로 가득 차 반짝이고 있었다. 그곳엔 이상을 위해 자신을 내던질 결심을 한 고 귀한 인간의 모습이 있었다. "그걸 위해서라면 나는 죽어도 한이 없어. 그래서 내가 여기, 아케르 용 병단에 있는 거야. 수르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야. 우린 아케르 단장님 을 쫓는 게 아니라, 아케르 단장님이 꿈꾸는 세계를 쫓고 있는 거야. 우리 모두 같은 꿈을 꾸고 있는 거지" 나는 차이린에게 들었던 그녀의 어린시절이 떠올랐다. 철없이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가 사냥대회에서 우승을 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형을 선고받 고 도망쳤다는 얘기를 말이다. 라이짐이라면 아마 차이린의 생각에 박수를 보내겠지. 라이짐도 루비오같 은 귀족들이 사라질 수만 있다면, 그런 귀족에게 억울하게 죽지 않아도 되 는 세상이 온다면, 라이짐 또한 기꺼이 목숨을 바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어떤가? 나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물론 루비오도 미웠고 루비오의 부하 쥬크도 미웠지만 전쟁을 해서까지 그런 세상을 이루어야 겠 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 탐그루를 떠난 이후로는 나 스스로 무 엇인가 보고, 듣고, 판단하며, 생각하기 보다는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생각 을 수긍하거나 부정하는 소극적인 태도가 대부분이었던 것 같다. 하긴 탐그 루에서는 그런 말들을 해 줄 사람이 거의 없었으니까. 물론 나도 아케르 단장 님과 차이린 십부장이 바라보고 있는 세상을 함께 보고 함께 만들어 가고 싶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나의 꿈인가? 나는 아직 어떤 것을 이룬다거나, 어떤 세상을 만들어 보고 싶다거나 그런 생각은 많 이 해보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아케르 단장 님의 꿈에 동참하기 전에 나만 의, 나 자신만의 꿈을 먼저 가져보고 싶다. 그런 다음에 다른 사람의 꿈에 귀기울여도 괜찮은 거 아닐까...... "저는... 아직은 다른 사람의 꿈을 위해서 내 목숨을 바칠 수 있을 것 같 지 않아요. 하지만 아케르 단장님이나 차이린 십부장님을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내 말을 듣고 난 차이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천막에 들어가자 나는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무반에 서 나를 반기는 우보 반장(아직도 반장이라는 말이 튀어나오곤 한다)이나 기밀의 모습이 어쩐지 나보다 한 수 아래인 것 같았다. 아마 귀족들은 이런 기분을 가지고 평민들을 바라보겠지. 그렇다면 나하고 귀족하고 도대체 뭐가 다른 걸까. 겨우 한 번 출정을 다 녀온 주제에 뭔가 조금 더 알고, 경험했다고해서 다른 사람이 낮게 보인다 니 말이다. 아마도 루비오 같은 놈도 태어나면서부터 평민을 깔보지는 않았 으리라. 자라면서 귀족들의 모습만 보고, 귀족들이 하는 행동만 봐서 평민 들을 그렇게 대하게 됐을 것이다. 그럼 나나 루비오나 별 다를 바 없는 것 아닌가? 생각이 생각에 꼬리를 물고 뱅뱅 돈다. 어지럽다. 정말 나는 생각 이 많아서 탈이다. 그나저나 저 과거를 알 수 없는 찬이 날 노려보고 있다. (그냥 날 쳐다 본 거겠지만 찬의 눈빛은 어쩐지 사람을 노려보고 있는 것만 같다. 아마 오 른쪽 눈 밑에 가로로 난 흉터 때문에 더 그런 기분이 드는 거겠지) 하여간 기분은 나쁘다. "수르카! 활약이 대단했다면서? 다들 전설의 오우거 배틀이었다고 하던 데..." 우보가 여전히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나에게 농담을 건넸다. "그냥, 뭐..." "얘기 다 들었다. 축하해. 첫 임무에서 살아 돌아왔으니 말이야" 차이린의 부관을 맡고 있는 청강이 말했다. "예. 고맙습니다" 최고참인 청강의 표정은 정말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동료 한 명이 인 정받을 만한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부관 입장에서 싫을 리가 없겠 지. 나는 일전에 청강이 나에게 신병 주제에 함부로 끼어 들지 말라고 말했 던 게 생각났다. 이제부턴 함부로 끼어들어도 되는 건가? "이젠 인정할 수밖에 없겠어. 전투 경험이 있으니 신병이라고 할 순 없겠 지" "죽지 않은 게 순전히 운이라고만은 할 순 없지. 운도 실력이란 말이 있 잖아?" 레드와 블루 형제도 이렇게 각각 한 마디 씩 했다. 음. 다들 이렇게 날 인정해 주다니 정말 싫지 않은 기분인데. 그런데 체리는 나를 보고 한 번 손을 흔들었을 뿐 별 말은 하지 않았다. 아마 청강이 먼저 자기가 하고 싶 은 말을 했기 때문에 그런 모양이었다. 이게 스파일과 타실 간에 쌓여있는 어쩔 수 없는 감정이라는 걸까? 그런 감정이 쌓일 때까진 오랜 시간이 걸렸 으니까 없어지는 데에도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 "오! 수르카의 복귀를 축하하는 자리에 축가가 없다면 말이 안돼지" 나카가 거창한 몸짓으로 이렇게 말하고 노래를 시작했다. 옛날부터 전해 내려온다는 용사의 노래였다. 죽음이 네 곁에 있다, 언제나 그래서 넌 춤을 춘다, 칼춤을 춤에 놀란 죽음의 신은 네 곁을 떠나가리라 네 원수 너의 적에게, 이 순간 가사는 들어줄 만 했지만 역시 노래는 도저히 들어 줄 수 없는 수준이었 다. 전에도 말했지만 나카의 노래보다는 아케르 용병단가가 낫겠다. "큰새. 너도 한 마디 해야지" 청강이 말했다. "와?" 왜, 라는 뜻의 말인 것 같았지만 솔직히 알아들을 수 없는 사투리였다. 이거 통역이라도 한 명 있어야 겠는 걸. "너, 너 마물을 두, 둘이나 죽였다던데, 정, 정말이야" 기밀이었다. 착한 친구라는 생각은 드는데 말을 더듬는 건 좀 답답하단 말이야. "아니야. 그냥..." 성직자의 손을 벤 일에 대해선 도저히 말할 수가 없었다. 도저히 말이다. 다시 작업과 훈련이 계속되었다. 나는 칼날을 벼리고 (소리장에서 내 칼 이 유명한 장인이 만든 칼이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나는 더 열심히 칼날 을 손질했다. 언제 한 번 마로우에게 찾아가 자랑해야지) 불침번을 설 때는 마법 연습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이제 방패를 만들어내는 마법은 어느 정도 마음 먹을 대로 구사할 수 있게 됐지만, 다른 마법의 말들은 별 성과 가 없었다. 꼭 한 번 '적당히* 불의* 힘을* 받은* 것들은* 모두* 조금* 더* 나은* 모양 이* 되는* 거란다*'라고 했을 때, 마법 비슷한 일이 벌어지긴 했다. 천막에 서 자고 있던 모든 십부원들이 몽정을 한 거였다. (물론 그걸 알게 된 건 다음날 일이었다. 꼭 생선 썩는 냄새 같은 그 오줌도 물도 아닌 것의 냄새 라니, 휴) 다음날 나는 아자닌에게 물어보았다. "이건 도대체 왜 그런 거지?" "글쎄요. 마법은 정직하니까. 아마 수르카님이 그렇고 그런 마음으로 그 말을 이해했기 때문에 그런 거 아닐까요? 그때 혹시 차이린 님을 생각했던 거 아니에요?" 아자닌이 농담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말투로 말했다. 이거, 웃을 수도 없고, 참. 그러고 보니 마법의 말을 외울 때 차이린 생각을 했던 일이 생각 났다. 차이린이 날 안고 있었던 일이 시도 때도 없이 머릿 속에 떠올랐다. 아마 그 바람에 마법의 말이 다르게 작동한 모양이다. 그런데 나는 왜 차이 린의 말을 그렇게 이해한 걸까. 겨울나기 준비를 하며 며칠이 지나갔다. 내가 소리장 마을로 떠난 다음 날 출정한다던 라이짐의 십부가 드디어 복귀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라이 짐이 속해 있는 밍밍의 십부가 작전을 마쳤다며 미리 전령을 보냈다고 한 다. 그 동안 나는 라이짐에 대해서 걱정을 많이 했다. 신병들은 거의 다 죽 기 마련이라는 차이린의 말을 들은 때문이었다. (훈련병 시절에 들은 사망 률이 낫다는 얘기는 이로써 다 헛소문이라는 게 밝혀진 셈이 되었다. 어떤 용병단이든 신병들의 신세는 오십 보 백 보인 것이다). 다행히 라이짐은 살아서 돌아왔다. 당당히 밍밍의 빛의 단검 십부원으로 말이다. 나는 뮤에 올라 타 있는 라이짐은 무척이나 지쳐 보였다. 얼굴 살 이 쏙 빠져서 어딘지 험악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몸은 성해 보 였다. 그건 다행이었다. 왜냐하면 밍밍의 십부원 여덟 명 중에 살아온 것은 넷 뿐이었기 때문이다. 소문은 금새 멀리까지 퍼진다. 저녁식사가 시작되자마자 용병들은 여기저기서 줏어들은 소문들을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밍밍이 무리하게 작전을 감행하는 바람에 십부원 반이 죽었 다는 말도 있었고, 밍밍의 십부가 싸운 마물들이 마법을 쓰는 이상한 마물 들이었다는 말도 있었다. 소문은 믿을 것이 못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던 나 는 라이짐의 말을 들어보기 전에는 함부로 판단하지 않기로 했다. 해가 지고, 자유시간이 되자, 나는 라이짐이 있는 빛의 단검 십부의 천막 으로 찾아갔다. "라이짐!" 나는 라이짐의 손을 잡았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고 해도 이러는 건 좀 너 무하다 싶었던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나는 라이짐이 살아있다는 게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죽지 않았구나" 웃으면서 라이짐이 말했다. 하지만 어딘지 기운이 없어 보이는 웃음이었 다. "...안 다쳤어?" 나는 어쩌다 십부원 반이 당했는지 궁금했지만 안부를 묻는 게 먼저였다. "응. 우리...이렇게 된 거...뭐라고들 해?" 소문을 묻는 모양이었다. "그냥 소문이지 뭐" "우리는 고브린한테 당한 게 아니야. 밍밍 십부장님은 대단한 사람이야. 밍밍 십부장님이 아니었다면 우린 아마 다 죽었을 거야" 밍밍 십부장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기는 하지만 그렇게 대단한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는데. 라이짐이 이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면... "좀비들한테 습격 당했어... 좀비들" 라이짐이 말했다. 아니, 겨우 좀비한테 넷이나 당했단 말인가? "...좀비가 아니라 좀비떼였어... 수십, 아니 수 백 마리는 됐을 거야. 여기저기서 타코며 새며, 늑대며...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 이거 봐" 라이짐은 팔을 걷어 나에게 보여주었다. 그러자 보기에도 흉측한 긴 상처 자국이 팔꿈치부터 어깨까지 이어져있었다. 치료석으로 잘 치료한 모양인지 상처는 거의 아물어있었지만 아직도 진무른 곳이 조금 남아있었다. "늑대한테 할퀸 자리야. 나는 그나마 다행이었어... 신병이라고 좀 안쪽 에 있었거든... 바깥쪽에 있던 넷은 전부 다 죽었어... 밍밍 십부장님의 단 검 솜씨는 정말 대단했어. 언젠가 너도 볼 기회가 있을 거야. 빛의 단검이 라는 십부 이름이 그냥 나온 건 아니라구" 라이짐이 말했다. 그래. 그러고 보니 차이린은 활을 잘 쏘니까 용의 눈이 라는 이름의 십부를 지휘하고 있고, 가투신은 늘 웃는 얼굴이니까 또 그렇 고. 그럼 죽음의 신이라든가 하늘의 끝 십부는 도대체 무슨 뜻인 거야? 그 러고보니 밍밍 십부장의 무용담을 듣느라 정작 중요한 것을 묻지 않았네. "그런데 좀비 떼라니? 좀비들이 한꺼번에 덤볐단 말이야?" "...응. 한 둘 씩 나타나던 녀석들과는 정말 달랐어. 내가 만났던 좀비들 과는 정말 차원이 달랐어. 다른 마물과 싸우는 것 같았으니까. 잘 조직된 군대 같은 느낌이 들더라" 말을 하던 라이짐의 얼굴에 어두운 빛이 돌았다. 나는 그 빛이 무엇을 뜻 하는 지 조금 알 것 같았다. 라이짐도 마칸 일족의 부활에 대해서 알고 있 는 것이다. 아니, 알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짐작은 하고 있을 것이다. 마 칸의 부활이 임박하면 할 수록 마물이나 좀비들이 점점 늘어나기 마련이라 는 말이 떠올랐다. "언제 녀석들이 이곳으로 닥칠지 몰라... 밍밍 십부장님이 그렇게 말씀하 셨거든" "그래. 그래서 경계근무가 두 배로 늘어난 거 아니야" 사실, 아직 한 번도 나가 본적이 없긴 하지만, 나도 이제 곧 주둔지 외벽 에 세워둔 망루에 올라가 경계근무를 서게 될 거라고 차이린이 말했었다. "혹시 좀비들이 언제 들이 닥칠지 아자닌한테 물어 볼 수 있을까?" 나는 망설이지 않고 바로 아자닌을 불렀다. "내* 마음의* 문을* 여니* 길을* 인도해* 다오*" "아... 안녕, 아자닌" 라이짐은 라이짐 답지 않게 말을 더듬으면서 말했다. "안녕하세요, 라이짐 님" 아자닌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 그런데, 아자닌... 얼굴이 보여..." 라이짐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아자닌의 표정을 볼 수 있었다. 알아 볼 수 없을 만큼 부연 얼굴이었는데... 도대체 언제 이렇게 된 거지?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N:김상현 #9431/10199 ━━━━━━━━━━━━━━━━━━━━━━━━━━━━━━━━━━━━━━━━ 제 목:[탐그루] 봄이 꽃은 아니다 51 관련자료:없음 23/23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1-07 00:24 조회:1034 탐그루 # 마법은 마음이다 - 마음은 칼이다 # "예. 수르카님의 마법이 그만큼 강해졌다는 뜻입니다" "그렇구나..." 라이짐은 이렇게 말하면서 아자닌을 다시 바라보았다. 선명해진 아자닌을 보니 아자닌은 의외로 예쁜 얼굴이었다. 흰 얼굴에 큰 눈과 통통한 볼과 붉 은 입술... 그리고 어디 식인지 알 수 없는 긴 옷을 입고 있었다. 긴 옷은 발목까지 내려오는 치마였고 팔은 팔꿈치까지 옷깃이 내려와 있었다. 전에 는 아자닌의 옷 색이 흰빛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색은 흰빛이 아니라 노 란빛이었다. 거기에 검은 색으로 허리와 팔 끝에 띠가 둘러져 있었고, 예전 에 본 장신구는 목걸이와 발목고리였다. 차이린의 해골 발목거리하고는 비 교도 되지 않을 만큼 예쁜 발목고리였다. 무슨 보석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푸른빛이 도는 보석이 여러 개 박혀있었다. 그런데 가슴이 꽤 많이 파여 있는 옷이군. 팔소매 밑으로 드러나 있는 팔 은 예전에 탐그루에서 본 라짐의 팔 만큼이나 가늘었다. 이렇게 가늘었구 나, 아자닌의 팔이... 그런데 언제부터 내가 정령의 외모에 이렇게 관심이 많아진 거지? "좀비들이 많이 나타나는 이유가 뭐야?" 나는 얼른 물었다. 내 생각이 눈치채일까봐 그랬기도 했지만 라이짐이 저 런 음흉한 표정으로 아자닌을 바라보는 게 싫어서이기도 했다. "좀비들은 마칸이 인간과의 전쟁에서 사용하는 여러 수단 중에 하나입니 다" 그러고 보니 좀비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궁금했다. "아자닌, 좀비는 어떻게 만들어지지?" 라이짐이 물었다. 내가 먼저 물어보려고 했는데.. 짜식이 평소에 안 하던 행동을 하네. "저주가 걸린 물건으로 사람을 좀비로 만든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 저주 걸린 물건을 사람이 만지게 되면 좀비로 변하는 것이지요. 그 물건은 물건 을 잡은 손바닥으로 바로 녹아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 녹아 들어간 자리에 마칸의 눈이 생겨납니다. 마칸 족은 그 눈으로 세상을 보고, 주변에 있는 동물들에게 마법을 걸어 인간을 공격하게 합니다" 그럼 원래 좀비는 사람이었단 말이잖아? 나는 문득 가투신이 목을 베었던 좀비를 떠올려 보았다. 이래저래 가투신은 끔찍한 기억만 내게 남겨 주는 군. "그게 어떤 물건인지는 알 수 없고?" "예. 하지만 보면 알 수 있다고들 합니다. 전해오는 말로는 그 저주 걸린 물건은 가장 갖고 싶어하는 물건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제 생각엔 저주 걸 린 물건이란는 걸 알면서도 갖게 된다는 말인 것 같습니다" 저주 걸린 걸 알면서도 손으로 만지다니....? 바본가? "알면서도 저주에 걸리다니... 그게 무슨 말이지?" 라이짐이 물었다. 또 내가 먼저 물어보려고 했는데 라이짐에게 선수를 빼 았겼다. 이거 웬지 계속 기분이 나빠진다. "그냥 말 그대로입니다. 아마 그 상황이 오면 이해할 수 있게 될 거에요" 라이짐에게 얘기 할 때는 웬지 더 방긋방긋 웃으며 말하는 것만 같다. 그 모습에 나는 이거 정말로 기분이 나빠졌다. "알았어. 알았어. 뭐 하나 제대로 말해주는 게 없잖아. 알듯말듯 그게 뭐 야. 꺼져버려! 아자닌!" 나는 나도 모르게 아자닌에게 소리치고 말았다. "예. 알.겠.었.요. 수.르.카.님" 아자닌은 또박또박 말을 끊어서 하더니 사라져 버렸다. 이거, 또 기분이 상했나 본데. "야, 너, 왜..." 라이짐이 말했지만 나는 여전히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였다. 그게 라이짐 때문인지, 아자닌 때문인지, 아니면 죽은 좀비가 원래 사람이었다는 얘길 들은 때문인지, 아니면 나도 얼마든지 좀비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서 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이것저것 전부 다 마음에 안든다. "길바닥에 떨어진 물건은 쳐다 보지도 마, 라이짐" "그래야지, 너도 조심해" 그나저나 자유시간이 끝날 때가 다 됐는데... "그럼. 라이짐. 죽지마" 내가 라이짐에게 인사했다. "너나 죽지마. 난 죽을 수 없어. 알잖아" 하긴. 복수의 맹세를 하고 마소드의 은총을 받은 라이짐이 그렇게 쉽게 죽을 리가 없지. 나는 마소드의 검에 입을 맞추지 못했다는 사실이 또 떠올 랐다. 만약 그것 때문에 마소드의 은총이 나에게 내리지 않는다면 어쩌 지..... 에잇. 이런 생각은 관두자. 죽으려고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 다는 옛말도 있잖아. 어떻게든 살아남게 되겠지. 뭐. 라이짐과 얘기를 마치고 용의 눈 십부로 돌아가는 길이 오늘따라 더 어두 운 것 같았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니 하늘 가득 시커먼 먹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다. 으시시했다. 마칸의 부활이 눈앞에 닥쳐왔다는 게 정말 실감나게 느껴지는 어두운 풍경이었다. 성황청의 기사단인지 뭔지 하는 것도 눈에 보 이는 것만 같았다. 여러 덩이의 거대한 먹구름들이 서로 얽혀 있는 모습이 성황청과 아케르 용병단과 부활한 마칸이 서로 싸우고 있는 모습처럼 보였 다. 탐그루를 떠난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나는 어느새 세상이 조금은 더 좁아져서 내 눈에 들어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난 세상은 무한하 게 넓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아케르 단장의 이야기는 나를 바꾸어 놓 고 있었다. 내가 좀 나이가 들어가는지도 모르겠다. 그뒤로 한동안 좀비나 마칸이나 성황청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가 거의 없 었다. 겨울동안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크게 우려했던 좀 비들의 습격도 없었다. 우리는 차이린의 말 그대로 훈련과 사냥을 하면서 춥고 긴 겨울을 보내고 있었다. 가끔 망루 경계 근무를 나가기도 했지만 한 일이라고는 함께 근무서는 십 부원과 농담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게 전부였다. 가끔씩 망루 근처까지 먹 이를 찾아 내려온 짐승들때문에 놀란 적도 있지만 그리 대수로운 일은 아니 었다. 눈 덮인 팜 산맥은 언제 봐도 아름다웠다. 탐그루에서 바라본 팜 산맥은 그저 먼 곳의 풍경에 지나지 않았지만 팜산맥 안에서 본 팜 산맥은 느낌이 달랐다. 사방이 온통 나무였다. 눈 쌓인 나무는 마치 하얀 꽃이 피어난 듯 보였고, 이따금 바람이 불어와 쌓인 눈송이들이 날리면 마치 꽃잎이 날리는 듯 세상이 온통 흰 향기로 가득 차곤 했다. 겨울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을 꼽으라고 한다면 역시 사냥을 나간 일이 었다. 부대 밖으로 나가는 일이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단조롭기 짝이 없는 눈 치우는 일이나, 담장 보수하는 일 보다 활동적인 일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십부원들과 함께 정말로 웃고 즐기면서 할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차이린은 사냥꾼 마을 출신답게 언제나 십부원들을 정확하고 빠르게 사냥 감이 있는 곳까지 인도해주었고, 일단 사냥감이 눈에 띄면 십부원들은 동네 꼬마들이 뛰어놀듯 와와거리며 사냥감에 달려들곤 했다. 사냥은 라마나 뮤 같이 중간 크기의 짐승들 사냥이 대부분이었지만 가끔 큰 맹수를 사냥하는 일도 있었다. 처음 맹수 사냥이라는 말을 들었을 땐, 좀 위험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막상 사냥을 해보니 그렇게 어려 운 일은 아니었다. 팜 산맥에서 겨울을 나는 맹수들은 거의 동면을 하고 있다. 동면하고 있 는 맹수를 찾아내는 게 가장 중요했다. 차이린이 맹수가 동면하고 있는 위 치를 찾아내기면, 우리가 할 일은 그냥 자고 있는 맹수를 찌른 후 들고 오 면 그만이었다. 보통의 경우, 우리가 주로 잡는 맹수는 은빛 털의 곰이나 두 개의 어금니가 입 밖까지 자라서 꼭 뿔처럼 보이는 호랑이였다. 가끔은 황금빛 털을 가진 그리즐리나 여름에는 하루종일 먹기만 한다는 초록색 왕 구렁이를 잡을 때도 있었다. "이걸 좀 봐" 사냥을 나가면 차이린은 매번 이런식으로 말을 꺼내어, 십부원들에게 동 물에 관한 짧은 강의를 해 주었다. "이 통나무 말이야. 여기 구멍 보이지?" 차이린은 이렇게 말하면서 쓰러져 있는 통나무에 나 있는 구멍을 가리켰 다. "여기에 고드름이 있잖아. 이 통나무 안에 있는 짐승이 내 쉬는 숨 때문 이지" "신호 같군요. 잡아달라는" 청강이 통나무에 칼을 쿡쿡 쑤셔박자 통나무가 움찔움찔했다. "곰 같은 데요? 힘이 아주 좋아요" 칼에 묻은 피를 천으로 닦아 내면서 청강이 말했다. 차이린은 고개를 끄 덕이더니 십부원들에게 손으로 공격을 지시했다. 나는 물론이고 모든 십부 원들이 통나무에 매달려 힘을 쓰자, 통나무가 기울어지고, 은빛 털을 가진 곰이 통나무에서 굴러 떨어졌다. 청강 에게 찔린 곳이라 생각되는 몸 여기 저기에 피가 묻어있었다. 근데 그와중에도 곰은 계속 자고 있었다. 잠을 자 도 이렇게 대단하게 자다니! 아마 저 곰의 일생 중 마지막 잠이 되겠군. "잠깐" 차이린은 이렇게 말하더니 곰의 목뒤에 단도를 박아 넣었다. "사냥꾼은 짐승을 죽일* 때는* 한번에* 고통* 없이* 죽이는* 거야* 청강. 앞으로 그런 행동은 좀 삼가해 줘" 청강은 조금 얼굴을 붉혔다. 그런데 차이린의 말은 어디서 한 번 들은 기 억이 났다. 맞다. 언젠가 용사냥꾼 사빈이 했던 말이었다. 그런데 그때 들 었을 때는 마법의 말 같지 않더니 이제는 마법의 말로 들리는 군. 아마 내 가 마법의 말을 찾아내는 능력도 좀 늘어난 게 아닌가 싶다. 그런데 참으로 오래간 만에 찾아 낸 마법의 말이었다. 사냥을 한 날 밤은 늘 회식이 있었다. 모닥불이 운동장 한 가운데에 피어 오르고, 십부원들은 그 주위에 둘러앉아 술도 마시고 그날 사냥한 고기도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나카는 노래는 못했지만 연주는 그럭저럭했기 때문에 나카의 연주에 맞추 어 십부원들은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악기는 키르타라는 이름의 악기였는 데 아주 오래 전부터 있었던 유서 깊은 악기였다. 모닥불은 탁탁 소리를 내 면서 나카의 연주에 박자를 맞추어 주었고, 우리는 아케르 용병단에서 즐겨 부르는 노래들을 흥에 겨워 부르고 또 불렀다. 그중 가장 내 마음에 든 곡 은 비스토브레 정규군도 즐겨 부른다는 곡이었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 온 곡이라는데, 구슬픈 가락이 마음에 들었다. 나는 그 곡을 혼자 '고향가' 라고 이름 붙여 보았다. 우리는 칼을 든 왕국의 전사 고향 생각 나는 날엔 눈물을 삼키고 입으로는 전진 공격 용맹스런 전사들 쉬고 싶은 생각나면 들판을 달리고 목마르고 배고프면 흙먼지를 씹네 내 칼이 원수의 목을 베어 그 피가 대지를 살릴 때까지 그 피가 세상을 밝힐 때까지 이 노래는 언제나 탐그루를 생각나게 한다. 나카의 말에 따르면 부대마다 지역마다 이 노래는 다 가사가 다르다고 한다. (용맹스런 전사들을 왕국의 근위병들로 바꾸어 부른다던지, 혹은 원수의 목을 바바의 목이라 부른다던 지 말이다) "나, 이번에 휴가 나갈까 해" 노래가 끝나자 레드가 말했다. 술이 좀 올랐는지 벌게진 얼굴이었다. "내 고향 로스안으로 말이야. 뭔가 좀 사가지고 갔으면 좋겠어... 어머니 가져다 드리게" 구슬픈 노래를 부른 다음이어서 그런지 까끌까끌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였 다. 나는 레드에게 뭔가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야 고아로 자라서 상관없지만, 저렇게 부모님이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은 부모님께 뭔가 해주고 싶을테니까. 그날 나는 불침번을 서면서 아자닌 앞에서 마법을 연습했다. 카네이션을 만들어 내는 마법 말이다. "먼저 바꾸고 싶은 물건을 들고 마법의 말을 외우셔야 합니다" 나는 시간막대기는 일단 치워두고 우선 생각나는 대로 천막 바닥에 구르 고 있는 돌을 하나 주워 손에 들었다. "해야* 할* 일이* 먼저이고* 할* 수* 있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은* 그* 다음이다*" 나는 이무르 아주머니가 이 말을 했던 마음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정 신을 집중해 마법의 말을 외웠다. 하지만 생각만큼 쉽게 되지 않았다.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몇 번이고 마법을 외워보았지만 역시 잘 되지 않았다. 이해하고 있는 말을 마음으로 담는 일이 이렇게 힘든 일이었구나 하는 게 새삼 느껴졌다. 몇 번을 더 연습한 끝에 나는 마법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 손에 쥔 돌이 빛을 발하더니 꽃으로 변하는 게 눈에 들어왔다. "성공이야, 아자닌!" 나는 너무 기뻐서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앗! 큰일이닷! 불침번을 서면서 시끄럽게 했다가는 큰 봉변을 당하고 만다. 기밀은 평소에는 무척 사람이 다정하고 착한데 잠자는 걸 방해 받으면 순식간에 사람이 변한다고 한다. 밤에 떠들다가 잠에서 깨어 일어난 기밀의 박치기에 쓰러진 불침번이 한둘 이 아니다. 그 이름도 무시무시한 기밀폭주에 당한 것이다. "꼭 그런 것 같지는 않군요" 아자닌이 말했다. 이제 아자닌은 여러가지 표정들이 자세히 알아볼 수 있 을 만큼 분명하고 또렷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지금 아자닌의 표정은 비웃는 것 같기도 하고 어이없다는 것 같 기도 했기 때문이다. 나는 꽃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러고 보니 마법으로 만들어진 꽃은 카네이션이 아니라 흰 백합이었다. "왜 이렇게 된 거지?" "글쎄요. 아마 재료에 문제가 있는게 아닐까요?" 그래서 나는 손에 잡히는 것들은 모두 한 번씩 잡고 마법의 말을 외웠다. 그 결과 은화 한 닢은 민들레가 되고, 쇠로 만들어진 못은 튜울립이, 담배 꽁초는 호박꽃이 됐다. 침상에 뒹굴고 있던 단추를 국화로 바꾼 다음 후에 는, 거의 포기하는 심정으로 바닥에 버려져 있던 못을 잡고 마법의 말을 외 워보았다. "해야* 할* 일이* 먼저이고* 할* 수* 있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은* 그* 다음이다*" 그러자 못은 빛을 내면서 카네이션으로 바뀌었다. "아자닌. 이거 어떻게 된 거야. 아까 못을 들고 했을 때는 튜울립이 되더 니" "...수르카 님. 미묘한 마음의 변화에 따라 마법효과가 불규칙하게 나타 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쨌든. 그것도 재주네요. 재주" 아자닌이 말이 좀 기분 나쁘긴 하지만 하여간 내 손에는 카네이션이 들려 있었다. 레드가 휴가를 떠날 때 이 마법을 써서 카네이션을 선물해야겠다. "그런데 아자닌. 오늘 내가 들은 말 기억해? 한 번에 고통 없이 죽인다는 말 말이야" "예. 하지만 완성된 마법의 말은 아닙니다" "그렇구나. 그럼 나머지 마법의 말을 찾아야겠네" 나는 푸념 비슷하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수르카 님이 진심으로 그 말을 이해하신다면, 찾아내신 마법의 말에 스스로 말을 덧붙여 새로운 마법의 말을 만들어 내실 수도 있습니다" 마법의 말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고? "마법의 말을 조합해서 새로운 마법의 말을 만들 수도 있지요. 진정한 이 해를 바탕으로 한다면 수르카 님도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진정한 이해... 처음에 동면하고 있는 맹수들을 찌를 때, 나는 소리장 마 을에서 죽어간 오우거를 떠올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나는 맹수를 잡는 것과 오우거를 잡는 일이 얼마나 다른가를 알 수 있었다. 맹수를 잡은 것은 순수하게 필요에 의해서였고, 오우거를 죽인 일은 계약에 의한 일이었다. 자신의 진정한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계약에 의해서 누군가를, 무엇인가 를 죽이는 게 정말 용납될 수 있는 걸까.... 그때도 고통을 주지 않기 위해 단번에 죽여야 하는 건가. 갑자기 너무 위선적인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죽 어가는 마당에 고통이 다 무슨 소용인가. 그럴 바에야 죽이질 말지. 이렇게 저렇게 생각하면서 해답을 찾아내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밖이 훤하 게 밝아오고 있었다. 이상하다. 내가 마지막 불침번이 아닌데... 생각해보 니 시간 막대기를 내려놓고 깜빡하고 있었다. 이런 멍청하기는. 시간 막대 기는 다 타버린지 오래였다. 이런 멍청이. 나는 내 머리를 쥐어박으며 후회 했지만 이미 날은 환히 밝아있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N:김상현 #9482/10199 ━━━━━━━━━━━━━━━━━━━━━━━━━━━━━━━━━━━━━━━━ 제 목:[탐그루] 봄이 꽃은 아니다 52 관련자료:없음 21/21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1-08 00:30 조회:950 탐그루 # 마법은 마음이다 - 마음은 칼이다 # 레드가 휴가를 떠나는 날이 왔다. 같이 휴가를 떠나겠다던 블루는 함께 떠나지 않고 남겠다고 했다. 전 날 너무 많이 먹는다며 레드가 시비를 걸어 싸운 게 결정적인 이유가 된 것 같았다. (나는 이때까지 레드와 블루가 진 짜 형제인 줄만 알았다) 나는 레드가 천막을 나서자마자 뒤따라 나갔다. 지금 버려도 좋은 물건이 있으면 아무거나 하나만 잠시 빌려 달라고 했다. "왜? 내가 그리워질 것 같은 모양이지?" "그런 징그러운 소리하지 말고. 그리워할 사람은 블루 하나면 족하지 않 아?" 레드에게 한 마디 해주었다. 하여간 다들 실없는 농담들을 입에 달고 사 니... 걱정이다, 걱정. 그러자 레드는 미안한듯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주머 니에서 작은 열쇠를 하나 꺼냈다. "오래 전부터 간직해온 기념품이야. 첫 전투 때 주운거지. 지금 갖고 있 는 물건이라곤 이거 밖에 없는 거 같은데" 나는 그 열쇠를 받아 손에 쥐고 일단 심호흡을 해서 숨을 고른 뒤 마법의 말과 마법의 말이 성공했을 때의 느낌을 되살려 떠올렸다. 마음이 모아지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어느 정도 집중이 되었다 싶자, 천천히 마법의 말을 외웠다. "해야* 할* 일이* 먼저이고* 할* 수* 있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은* 그* 다음이다*" 내가 마법의 말을 외우자 레드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내가 마법을 쓴다는 걸 알고는 있었겠지만, 이렇게 정말로 마법을 쓰는 걸 보니까 놀라운 모양 이었다. 열쇠가 환하게 빛을 낸 뒤에 꽃으로 변했다... 가 아니라 엉뚱하게 도 소금덩어리로 변했다. "뭐야, 이거. 웬 소금! 너 지금 내가 이 잘 안 닦는다고 놀리는 거야?" 하지만 신기한 구경을 한 다음인지라 그다지 기분이 상한 것 같지는 않았 다. "아니, 긴 여행을 하게 되면 소금이 꼭 필요할 것 같아서. 소금을 먹지 않으면 탈진하는 수도 있다구. 거기다 예쁜 아가씨를 만났는데 이를 안 닦 아서 입냄새라도 나봐. 말짱 도루묵이라고" 나는 대충 이렇게 둘러대었다. 그러자 레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역시 너밖 에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미안하게시리... "그래. 마음 써줘서 고마워" 레드는 정말로 고맙다는 표정이었다. 음... 쑥쑤럽긴 하지만 뭔가 뿌듯하 긴 한 걸. "그런데 소금은 준비해 가거든? 그러니까 그냥 열쇠로 되돌려 줘. 사실 그 열쇠 내 행운의 부적 같은 거야" 뭐라고? 나는 한 방 얻어맞은 기분이 되었다. "...저, 그러니까 말이야. 저... 원래대로는 못 바꿔. 그건, 마법의, 기 본 법칙에, 어긋나는..." "무슨 헛소리야? 그냥 속임수 쓴 거 내가 모를 줄 알고? 이봐. 내가 사는 로스안 시에도 마술사들은 많아. 로스안에는 서커스 단이 없는 줄 알아?" 뭐야, 그럼. 내 마법은 아예 처음부터 믿지도 않았다는 말이잖아? "이거 봐, 레드. 이건 진짜 마법이야. 속임수 마술 같은게 아니라고" "이거 사람을 바보로 아나. 너 뒤져서 열쇠 나오면 어쩔래?" "뒤져봐! 뒤져봐!" 레드는 씩씩거리면서 내 몸을 뒤지기 시작했다. 물론 열쇠가 나올리는 없 었다. 하필이면 그때 블루가 천막에서 나오다 나와 레드를 보았다. 블루의 표정이 굳어졌고, 레드는 어쩔 줄 몰라했다. "너, 잠깐 여기서 기다려. 두고 보자" 숨을 거칠게 내 쉬면서 레드는 이렇게 말하고는 블루를 따라갔다. 물론 나는 용병단 식당 쪽으로 정신 없이 뛰어갔다. 그 자리에 조금만 더 있다간 레드에게 얻어맞을 분위기였다. 우여곡절끝에 레드는 결국 나를 찾아내지 못하고 휴가를 떠났다. 그후에 몇몇 작은 사건들이 있었다. 사냥을 나갔는데 체리가 실수로 발을 헛디뎌 까딱했으면 죽을 뻔했던 일도 있었고, 눈이 너무 많이 내려 길이 막 히자 그 눈을 치우기 위해 며칠동안 삽으로 눈치우는 일만 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눈을 다 치우기도 전에 햇살에 눈이 녹아버려 허망했던 적도 있다. 어느날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새로운 의뢰를 받기 위해 주둔지를 떠나 있던 가투신이 탐그루에서 편지를 받아 가지고 온 거였다. "수르카!" 그날 자유시간에 라이짐이 뭔가를 손에 쥐고 나에게 헐레벌떡 뛰어왔다. 나는 저자식 도대체 왜 저러나, 하는 표정으로 라이짐을 바라보았다. 라이 짐의 얼굴에는 희색이 돌고 있었다. 좋은 일이라도 있는 모양인데. "편지야. 라짐이 편지를 썼어!" 라짐의 편지라는 말에 나는 얼른 라이짐이 손에 쥐고 있던 편지를 빼았았 다. 그런데 내가 손에 들고 있는 종이에는 라이짐 십부의 명단이 적혀있었 다. "라짐이 너희 십부원 이름들을 다 알고 있니?" "무슨 소리야?" 라이짐은 이렇게 말하면서 품에서 편지를 꺼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도 실수는 있는 법이지. 나는 헛기침을 한 번 했다. 라이짐. (라짐은 여전히 누구도 오빠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아케르 용병단에서 왔다고 해서 혹시 라이짐을 아느냐고 여쭤봤더니 안다 고 하시더라. 살아서 거기까지 갔다는 걸 알고 얼마나 반가웠는지 몰라. 그 래서 이렇게 소식이나 좀 알리려고 몇 자 적는 거야. (가투신이 읽어 볼 걸 염두에 둔 글인 것 같았다. 라짐이 이런 말투로 글을 쓰다니 꼭 교양 있는 귀족 아가씨 같은 걸) 나는 잘 있어. 별빛 주점도 잘 운영되고 있고. 내가 성년이 아니라고 괄 시하는 사람들은 아직 못 봤어. 엄마가 남겨준 건 별빛 주점 뿐이 아니라 별빛 주점의 전통도 함께 남겨주셨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나는 이 대 목에서 예쁘고 작은 이무르 아주머니가 상상이 되어서 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패거리들도 잘 있어. (라이짐의 부하였던 친구들을 말하는 모양이었 다) 특히 그 뚱뚱한 울찬은 매일 같이 별빛 주점에 들러. 가끔 청소도 도와주 고 귀찮은 사람들도 쫓아주곤 해. 나야 돈 드는 것도 아니니까 그저 고맙기 만 할뿐이지. 또 패거리들도 자주 와서 여러가지 일들을 도와주곤 해. 아무 래도 이곳을 떠나기 전에 인덕을 많이 베푼 모양이지, 라이짐? 아니면 제대 로 안 하면 혼내주겠다고 겁을 주고 갔거나. (나는 울찬이 별빛 주점 일을 돕겠다고 약속했던 일을 떠올렸다. 그래도 약속을 지키는 걸 보니 의리 있 는 녀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라짐에게 목숨을 걸려고 얼치기 검사 들도 여전히 꽤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니 걱정 말고 그곳 생활이나 잘해. 공연히 이곳에 와볼 생각일랑 하 지 말고. 우리 약속했잖아. 해야 할 일을 끝내고... 엄마를 옮겨 묻기로... (라이짐의 눈이 분노로 잠시 반짝였다) 그날까지 나 여기서 열심히 일하면서 기다릴 게. 라이짐도 건강하게 잘 있어. - 라 짐 추신 : 달 없는 밤에는 등 뒤를 조심하고 길게 자란 수풀을 걸을 때는 발 밑을 조심해. "마지막에 이건 무슨 소리야?" 라이짐에게 물었지만 라이짐도 통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라짐의 편지는 짧은데다 자세한 소식이 없긴 했어도, 어찌되었건 그리운 탐그루의 소식인지라 나와 라이짐은 이 몇 줄 안 되는 편지를 읽고 또 읽어 보고 했다. 편지가 오고 난 뒤, 한동안 라이짐은 답장을 쓴다면서 여기저기 편지를 부칠 방법을 알아보았지만 마땅한 인편이 없어서 결국에는 그만두었다. 그 러는 사이, 밤이 점점 짧아지기 시작했고, 앙상하게 남아있던 나뭇가지에 조금씩 푸른 물이 오르기 시작할 무렵이 돌아왔다. 네 열 다섯 번 째 해가 밝은 것이다. 그 즈음에 레드가 휴가에서 돌아왔다. 돌아온 레드는 떠날 때 일을 잊지 않고 내 머리통에 커다란 혹을 선물했다. 그리곤 고향에서 사온 선물이라면서 붉은 갑에 들어있는 담배를 한 갑 주었다. "로스안 특산품인 담배야. 스무 갑, 한 보루 단위로만 팔지. 이거 구하기 힘든 거야. 바르도 대륙에선 제일로 치는 담배라고" 내가 담배 못 피운다는 거 뻔히 알면서 이런 걸 선물이라고 주다니. 나는 그 담배를 받자마자 보는 앞에서 담배를 돌덩어리로 바꾸어 버렸다. "이건 또 무슨 해괴한 짓이냐?" "이 돌로 잘 문질러서 때 좀 벗겨내라구!" 그래서 나는 머리에 큰 혹을 하나 더 얻게 되었다. 그리고 날이 조금씩 더 풀리기 시작할 무렵의 어느 날이었다. 천막에서 칼날을 벼리고 있는데 차이린이 들어왔다. 전달 사항 시간이었다. 평소에는 그저 죽지 말라는 말을 하는 게 고작인 시간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좀 달랐 다. "작전이다" 차이린이 말했다. 작전이라는 말에 십부원들의 얼굴이 긴장으로 팽팽해졌 다. 나도 귀가 번쩍 트인 것은 물론이고. "놀라지 마. 이번 임무는 국왕의 칙명에 의한 거야. 우리는 하잔으로 간 다" 이 말에 천막 안에 있던 병사들이 작은 탄성을 내질렀다. 국왕의 칙명이 라... 전에 차이린에게서 들었던 하잔의 반란군 얘기가 떠올랐다. 자신들의 손을 더럽히기 싫을 때, 우리에게 의뢰를 맡긴다는 가투신의 말이 떠올랐 다. "하잔의 반란군들을 토벌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야. 이번엔 이곳 주둔지 전 병력이 출동해. 최고 책임자는..." 아케르 단장의 지휘를 받게 되는 걸까? "...순무 행정 담당관이 맡을 거야. 마법사 타호루도 동행하고" 차이린이 말했다. 뭐? 순무가? 그 쫌생이 같은 양반이? 순무가 전투에 대 해서 도대체 뭘 안다구. 급여 계산이나 식료품 조달 같은 일은 잘 할 수 있 을지 몰라도 말이다. "그럼 순무 님의 지휘를 받게 되나요?" 내가 물었다. "아니. 실제 작전 책임은 최고참 십부장인 지다문 십부장이 맡게 될거야" 털보라는 별명에 걸맞는 수염을 잔뜩 기른 지다문 십부장의 얼굴이 떠올 랐다. 그리고 이해하기는 쉽지 않았지만 내용만큼은 머릿속에 선명하게 들 어오도록 설명했던 강의 내용이 떠올랐다. 그리고 마로우가 했던 말도 떠올 랐다. 수없는 격전을 치룬 백전의 노장이고, 무슨 교수가 쓴 글에도 나올 만큼 유능한 전사가 바로 지다문 십부장이라는 것. 나는 일단 안심이 되었 다. (사실 누가 지휘를 한다고 해도 순무가 하는 것 보다는 백배 안심이 된 다) "작년부터 반란의 기미가 보였는데, 겨울을 나며 반란군의 세력이 줄어들 긴 커녕 더 커진 모양이야. 반란군들이 하잔의 시청을 점거하고 자치대원들 은 전부 다 죽였다고 하니까. 각오 단단히 해 둬. 늘 하는 말이지만, 죽지 않으려면 말이야" 차이린의 말을 들으며 내 몸이 움츠러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번에 는 진짜 전투다. 반란군들과 우리 용병단 간의 진짜 전투 말이다. 어쩌면 죽게 될지도 모른다. 치료석을 단단히 준비해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질문있나?" "단장님께서는 왜 안가십니까" 이 소리에 천막 안에 있던 사람들의 눈길이 모두 한 곳으로 쏠렸다. 찬이 었다. 찬이 질문을 하는 건 처음 보는데. 그런데 다들 놀란 표정들을 보니 그런 생각을 한 사람은 나 뿐만은 아닌 모양이군. "스파일에 일이 있으신 모양이야. 무슨 일로 스파일에 가시는 지는 비밀 이라 나도 몰라. 하지만 그곳 일이 끝나는 대로 하잔으로 오신다고 했어. 또 질문 있나?" 나는 그때 찬의 얼굴에 실망의 빛이 도는 것을 느꼈다. 찬이 왜 저러지? 찬도 겁이 나느 걸까? 하긴 아케르 단장님과 함께라면 훨신 더 든든할테니 까. "그럼 푹 쉬라고. 내일 오전 중에 준비를 마치고, 점심 먹고 바로 출발할 테니까 말이야" 차이린은 이렇게 말하고 밖으로 나갔다. "주둔지 전 병력이 나간데. 들었지, 수르카?" 우보가 나에게 말했다. 그럼 나라고 귀가 없냐? 나는 뭐라고 한 마디 해 주려다 참고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여, 여기 내가 오, 온 게 지난 번 눈 오, 올 때였는데, 전부 다 나가는 건, 이, 이번이 처음이야" 기밀이 더듬거리면서 말했다. 기밀의 박박 민 머리가 어쩐지 더 반짝이고 있는 것 같았다. "담배는 모두 두고 간다. 작전이 끝나면 하잔에서 얼마든지 피울 수 있으 니까, 괜히 가져갔다가 적에게 발각되 죽거나, 나한테 걸려서 맞아 죽는 불 상사가 생길지도 모르니까" 마지막으로 청강의 짤막한 전달사항이 있었다. 전달사항이 끝나자 모두들 자기 개인 사물함을 정리하고, 필요한 짐들을 챙겼다. 차이린의 부관을 겸 하고 있는 청강은 부지런히 짐을 챙기고 있었고, 래드와 블루 형제는 뭐라 고 떠들면서 서로 큰소리로 말하고 있었고, 큰새와 체리는 일찌감치 짐을 다 챙기고 자리에 누워서 눈을 감고 있었다. 용병단 밥을 많이 먹고 적게 먹고의 차이를 떠나서 여유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찬은 여전히 칼날을 갈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자세히 본 적이 없었는데, 찬의 칼은 예전의 시하라의 상점에서 한 번 본적이 있는 칼이었다. 양손칼 이라는 칼이 바로 찬의 칼이었는데, 양손으로 쥐지 않으면 도저히 들 수 없 다는 뜻에서 양손칼이라고 불리는 칼이었다. 음. 그래서 예전에 목도로 나 하고 붙었을 때 그렇게 방어만 한 거였을까? 양손칼은 세워놓으면 거의 내 가슴까지 올라오는 무지막지하게 큰칼이다. (아마 나 같으면 휘두르기는커 녕 들고 서 있기도 힘들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찬의 칼집에 상징물을 박아 넣는 자리에는 아무 것도 없군. 이러니 도저히 무슨 사연이 있는 사람인 지 알 수가 있나, 원. 나는 찬을 바라보다가 결국 나도 내 칼의 날을 벼리기로 했다. 이제, 팔 을 베는 게 문제가 아니라, 진짜로 사람을 죽이게 될 지도 모른다. 칼날을 가는 동안 계속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오늘 밤은 잠자기는 틀린 것 같다. 오래간 만에 꿈을 꾸었다. 나는 제단 위에 올려진 마법 검 앞으로 걸어가 고 있었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마소드의 검이 밝은 빛을 내기 시작했다. 나는 천천히 다가가 마소드의 검을 잡았다. 마소드의 검을 손에 쥐자, 나는 죽음의 신이 바로 내 옆에 있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칼을 휘두르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춤을 끝내고, 칼에 입을 맞추려는 순간, 마소드의 검이 죽 음의 신으로 변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N:김상현 #9483/10199 ━━━━━━━━━━━━━━━━━━━━━━━━━━━━━━━━━━━━━━━━ 제 목:[탐그루] 봄이 꽃은 아니다 53 관련자료:없음 17/17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1-08 00:30 조회:946 탐그루 # 마법은 마음이다 - 마음은 칼이다 # 기분 나쁜 꿈이었다. 불침번 근무 때문에 우보가 깨우지 않았으면 나는 더 끔찍한 꿈속으로 빠져들었을지 모른다. "수르카. 안색이 안 좋은데?" 우보가 말했다. 놀리는 투가 아니라 정말 걱정하는 투였다. 나는 그냥 고 개를 끄덕인 다음 우보 반장, 아니 우보에게 그냥 괜찮다고 말하고 불침번 을 서기 시작했다. 이제 곧 날이 밝으면 작전에 출동해야 하는데, 하필이면 마지막 시간 불 침번을 서게 되었다. 물론 마지막 시간 불침번이나 취침 직후에 서게 되는 불침번은 중간에 깨지 않고 잘 수 있다는 이점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처 음으로 겪게되는 전원 출동 명령이 떨어진 날에 마지막 시간 불침번이 되었 다는 게 어쩐지 무슨 징조 같이 여겨졌다. 꿈 때문인지도 모르지. 나는 무 슨 얘기라도 하고 싶어졌다. 이럴 때 아자닌을 언제라도 불러낼 수 있다는 게 다행이었다. 안 그랬다면 멍하니 서서 얼마나 지루한 시간을 보내야 했 을까. "내* 마음의* 문을* 여니* 길을* 인도해* 다오*" "예. 부르셨습니까, 수르카 님" 아자닌의 얼굴이 연금술사의 붉은 등 아래에서 발그스레하게 보였다. "내일 작전에 나가는 거 알고 있지?" 나는 아자닌에게 물었다. 아자닌은 물론 알고 있다고 했다. "나, 내일 작전에 나가면... 혹시 죽을 지도 모르겠지?" 이 말은 솔직한 내 심정이었다. 죽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내 머리를 떠 나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넌 어떻게 되니?" 나는 아자닌에게 이렇게 물었다. 사실, 이런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생각이었지만 불길한 예감이 자꾸 내 머리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새로운 주인이 나타날 때까지 반지 안에 갇혀 있겠지요. 하지만 그런 일 은 없을 거예요" 아자닌은 그냥 내가 죽지 않으면 좋겠다 라는 뜻으로 말했을 것이다. 용 병단에서는 언제나 인사처럼 듣는 말이었지만, 정령에게 들으니까 왠지 힘 이 났다. "수르카님이 죽으면 타호루 님이 당장 달려와서 절 가져 갈 거에요" 그 말을 들으니 나는 인상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타호루가 아자닌을 노 리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하곤 있었지만, 아자닌도 이렇게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마법 연습 좀 해야겠어. 도와줄래?" 나는 이렇게 말하고는 조금 익숙해지기 시작한 방어 마법을 준비했다. (솔직히 이 마법을 뭐라고 불러야 할 지 잘 모르겠다. 아자닌도 방어마법이 라고 했다가 또 언제는 방패마법이라고도 하니까 말이다). "모든* 빛깔* 있는* 것들은* 나에게* 시간을* 빌려다오*" 내 마법의 말에 주변의 공기가 단단하게 모이는 것이 느껴졌다. 이 상태 라면 어느 정도의 공격까지 막아낼 수 있을까? "아자닌. 이 정도면 잘 된 거야?" "예. 이 정도면 불의 성구에서 내뿜는 열기 정도는 완벽하게 막아낼 수 있을 겁니다" 나는 흐뭇해졌다. 이젠 방패 마법도 어는 정도 쓸 줄 알고, 칼이야 뭐 내 전공이니까... 잘하면 작전에 나가서 죽지 않고 돌아오는 일이 그렇게 불가 능한 일은 아닐듯 싶었다. 불길한 예감도 어느덧 많이 가신 것 같다. 기상시간이 지나고 오전 내내 출동 준비가 있었다. 순무의 지휘 아래 이 동 천막과 식량, 예비로 쓰기 위한 칼이나 창, 그리고 활이나 화살같은 무 기류를 창고에서 꺼내 뮤가 끄는 마차에 실었다. (그런데 왜 뮤차라고 부르 지 않고 마차라고 부르는 걸까?) 순무는 빠진 물품이 없는지, 아니면 더 보충해야 할 것이 있는지 점검하 며 오전 내내 부지런히 움직였다. 비록 예나 아니오 말고 다른 말을 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순무지만 이런 일을 하는데 있어서는 정말 천부적인 능 력이 있었다. 자질구레한 물건 하나 하나까지 챙기는 꼼꼼함과 기억력에는 나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용병들이 감탄하는 눈치였다. 탐그루의 연금술사 출신이라는 말이 정말일지도 모르겠는 걸. 꼼꼼하게 이것저것 챙기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일 것이다. 그런데 재훈이 보이지 않았다. 벌써 본지 꽤 되는 것 같은데 말이다. 들 리는 소문에는 타호루의 제자가 되었다는 말도 있었다. 나는 어떻게 된 걸 까 궁금해하면서 뮤가 끄는 마차 안에 짐을 실었다. 출정식은 아케르 단장이 공석인 관계로 행정담당관 순무가 대신했다. "이번 작전은 아직까지 충분한 정보가 확보되어 있지 않아 언제 돌발상황 이 벌어질지 모른다. 그러니까 언제 어떻게 반란군들이 공격해 올지 모르는 상황인 것이다. 그러니 모두 언제나 긴장하고, 언제나 경계를 늦추지 마라. 그리고 때가 되면 우리는 하잔을 접수하게 될 것이다. 문제 될 건 없다. 현 장에서 작전을 지휘할 지다문 십부장은 모두 다 알다시피 여기 아케르 용병 단 최고 고참 십부장이며, 뛰어난 작전계획 수립과 운용능력을 가지고 있는 십부장이기도 하다. 그럼, 지다문" 순무도 연설은 꽤 많이 해본 모양이었다. 사람들 앞에서 평소처럼 막힘이 없었다. 거기다가 짧게 연설하는 법까지 배운 걸 보면 정말 연습께나 했겠 는 걸. 순무의 연설에 이어서 지다문 십부장이 연단에 올라왔다. 하늘의 끝 십부 를 이끄는 지다문 십부장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비록 연단 위에 서 있어 서 그렇게 보이는 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지다문 십부장이 상당히 멋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털보 십부장이라는 별명에 꼭 맞게, 입을 다 가릴 만큼 자 라난 수염은 말하는 입 모양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지다문 십부장은 과연 어떤 독특한 능력을 가지고 있을까? "내가 이번 작전의 지휘를 맡게 된 것에 대해서 이의가 있는 사람은 아무 도 없으리라고 본다. 모든 십부장들이 나를 잘 따라주고, 그 십부장 밑의 병사들이 각자의 십부장을 잘 따라 준다면 우리는 큰 피해 없이 복귀하게 될 것이다. 이상" 역시 짤막한 연설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용병단은 효율적이라는 면에서 는 탐그루의 장삿꾼 보다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건을 사고 파는 일은 흥 정이 따르기 법이고 그러다보면 항상 말이 많아지고 시간이 지체되기 십상 이다. 그렇지만 이곳 아케르 용병단에서는 그런 일이 거의 없다. (떠버리 하진은 예외겠지만) 순무가 연단에 다시 올랐다. "출발!" 순무가 외치자 용병들은 모두 함성을 질렀다. 사기 진작을 위한 함성이었 다. 나도 누구 못지 않게 크게 소리를 질렀다. (내가 좀 심했는지 옆에 서 있던 우보는 '제가 미쳤나' 하는 시선으로 나를 돌아보기까지 했다) 함성소 리가 잦아들고, 각 십부장들이 자신의 십부를 선도해 마차에 올랐다. 마차 는 천막이 쳐있다 뿐이지 손수레를 크게 만들어 놓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탐그루 시절부터 마차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이런 마차들이야말로 위급한 상황이 발생 했을 때, 재빠르게 도망가기 좋고, 또 수리하기도 편해 관리가 용이하다는 것을. (하도 덜컹거려서 마차 안에서 편히 쉬거나, 잠을 잘 생각은 아예 접어두어야 한다) 마차에 오르기 전에 차이린의 연설이 있었다. 하여간 용병들도 연설 깨나 좋아한다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뭐 할 때마다 연설, 연설, 또 연설. 하나 좋은 점은 예전에 들었던 탐그루 시장 하리오 오르테가의 연설보다는 훨씬 짧다는 점이다. 거기다가 대부분 꼭 알아둬야 할 것에 대해선만 얘기하니까 말이다. 그런데 그게 용병단과 탐그루의 차이일까, 아니면 귀족과 평민의 차이일까? "이제 우리는 작전 지역으로 출발한다. 평소에 훈련받은 대로만 하면 되. 우보, 찬. 둘은 이번이 첫 출정이 되겠구나. 그 동안 갈고 닦은 실력들을 맘껏 발휘해 봐. 그리고 죽지 말고. 도착은 이틀 뒤니까 다른 얘기는 가면 서 차차하도록 하지. 아, 그리고 전달사항이 하나 더 있다" 차이린이 깜박 잊고 있었다는 듯이 마차에 타다 말고 말했다. "이동간에 무슨 일이 있어도 아무 것도 줍지 말라는 지시야. 적들이 길에 저주의 마법이 걸린 물건을 떨어뜨려 놓았다는 정보야. 그걸 집으면 바로 작동한다니까 사소한 일에 목숨 걸지 말라구. 아무리 갖고 싶은 물건이 떨 어져 있다 해도 못본 척해. 내 말 명심해" 소리장 마을에서 돌아 온 날, 아자닌이 들려준 마칸의 함정과 비슷했다. 과연 어디서 얻게 된 정보일까? 또 이번 반란군들도 마칸 족의 부활과 어떤 관계가 있는 건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에 차이린은 전달사항을 마치고 마차에 올랐다. 뮤는 체리가 몰았고, 그 옆에 차이린이 앉았다. 나도 뮤 모는 일은 자신있는데... 물론 고참이 하는 게 당연한 일이겠지만 어쩐지 뮤를 몰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사비오 영감이 타고 가 버린 스타바가 갑자기 보고 싶 다. 음... 그게 아니라 아무래도 차이린 옆에 앉으면 좋겠다는 생각 때문인 가... 하여간 병사들은 모두 마차에 올랐다. 마차 안에는 열 사람이 겨우 앉을 수 있을 만한 공간만 양옆으로 나 있었고, 가운데에는 우리가 싣고 가기로 되어있는 짐들(그리니까 약품, 예비 천막같은 것들)을 실은 상자가 가득 놓 여 있다. 그래서 왼 편에 앉은 사람은 오른 편에 앉아 있는 사람의 얼굴도 제대로 보기가 힘들었다. 마차에 오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출발했다. 먼저 마초와 산다루의 십부 가 마차에 끈을 매어 주둔지의 외벽을 열었다. 마차가 조심스럽게 외벽의 문을 내리고 나자, 행렬은 줄지어 주둔지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우리가 이 곳을 비운 사이 누가 오면 어떻게 하려고 저러는 거지? 밖에서 문을 닫을 수도 없는 일일 테고 말이다. 문을 닫아놔도 이렇게 텅비어 놓고 떠나다니 이거 뭔가 잘못된 거 아니야? 그때 타호루를 태운 뮤가 행렬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 뒤에는 재 훈이 있었다. "움직이는* 모든* 것들은* 사라지고* 사라진* 모든* 것들은* 움직일* 것 이다*" 타호루가 외치자 용병단 주둔지가... 천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깜짝이 야!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주둔지를 없애 버리면 돌아와서 어 떻게 할 작정이지? 아니, 도대체 어떻게 한 거지? "마법 처음 봐, 수르카?" 청강이 말했다. 이런. 마법인 줄 누가 모르나. "놔둬. 이제 겨우 첫 작전에서 간신히 살아온 애한테 뭘 바래" "수르카가 이번 작전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야 모르지. 어렵지 않을까?" "뭐, 우리 옆에만 있으라구" "그럼. 그래야 살아남을 확률이 높아지지..." 레드와 블루 형제가 실없이 한마디씩 했다. 레드와 블루도 긴장하고 있었 다. 하지만 정말 대단한 마법이야. 타호루가 저렇게 대단한 마법사였다니. 저 정도의 마법사라면 도대체 어느 정도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걸까. 기회 가 나면 아자닌에게 물어보기로 하고 덜컹거리는 마차에 몸을 맡겼다. 마차가 팜 산맥을 넘어 내려갈 때였다. 아직 닦이지 않은 길을 오래 달린 탓인지 모두 멀미에 시달려 출발할 때의 소란스러움은 사그라들어 있었다. 고참들 몇몇은 졸고 있었고, 나를 포함한 신참들은 멀미에 시달린데다, 곧 있을 전투에 대한 두려움으로 모두 얼굴이 노래져 있었다. 갑자기 기밀이 벌떡 일어나더니 달리고 있는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기밀은 길 옆으로 후다 닥 뛰어갔다. 기밀은 길가에 잠시 웅크려 있는가 싶더니 다시 얼굴이 벌개 질 정도로 마차로 달려왔다. 나는 손을 내밀어 기밀이 마차에 오르도록 도 와주었다. "꼬.. 꽃이야. 보...봄맞이 꽃인데... 아..아직... 피지 않았네... 이 거...봐.. 아직.. 봉우리만 달리고... 피지 않았어..." 정말 기밀이 내민 꽃은 아직 봉우리인 채였다. 다른 때 같았으면 벌써 여 기저기 군락을 이루어 활짝활짝 피어 있을 꽃인데. 올해는 아직도 봉우리인 채였다. 마칸이 부활하고, 좀비, 오우거가 나타나고, 성황청이 여기저기 들 쑤시고 다니고, 바르도 대륙 전체가 흉흉해지자 봄맞이 꽃도 올해는 다른 해보다 늦게 피어나나 보다. "기밀. 걱정하지마. 몇 천년이고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봄마다 피었던 꽃 인데, 올해라고 피지 않겠어...? 우리 인간들이 바르도 대륙에서 모두 없 어져버리는 날이 와도 봄맞이 꽃은 계속 피어날 걸" "그... 그렇겠지...?" 마차는 계속 덜컹거렸다. 싱그러운 봄바람은 어디에서도 불어오지 않았 고. 마차 안은 웬지 어둡고 뜨뜻미지근한 공기로 가득차 있다. 하잔... 하 잔에 도착하면 봄이 와 있을까? 하잔에는 봄맞이 꽃들이 피어 있을까?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N:김상현 #9484/10199 ━━━━━━━━━━━━━━━━━━━━━━━━━━━━━━━━━━━━━━━━ 제 목:[탐그루] 영혼의 에뮬레이터 3 54 관련자료:없음 26/26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1-08 00:31 조회:1118 탐그루 # 마법은 마음이다 - 마음은 칼이다 # * 영혼의 에뮬레이터 3 - 세헤라자드 댄스 "...이렇게 해서 수르카는 하잔으로 떠나게 되었답니다" 세헤라자드가 말했다. 나는 창 밖을 내다보았다. 벌써 해는 하늘 한 가운데까지 솟아올라 있 었다. 처음에 세헤라자드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을 때, 나는 소오드엔매 직 시리즈 같은 모험담을 기대했다. 그런데 세헤라자드의 이야기는 갈수 록 내가 기대한 방향과는 점점 다른 곳으로 흐르고 있었다. "난 수르카라는 아이, 좀 이해가 안가. 정의감에 불타는 주인공도 아니 고, 그렇다고 친구 라이짐처럼 복수를 꿈꾸는 것도 아니고... 도대체 왜 그렇게 사는지 말이야. 까짓 오우거 한 마리 잡은 거 가지고 그렇게 힘들 어하질 않나. 왜 그런 사소한 것들에 그렇게 고민을 하는 거지? 오우거든 오르크든 그냥 다 죽여버리고 강해져서 복수해버리면 그만 아닐까?" "생각해 보세요. 열 네 살 꼬마가 칼을 잡고 누군가를 죽여야 할 상황 에 처했다면 그 아이는 어떤 기분이었을까요? 물론 요즘 같아선 이해가 가지 않을 않을 수도 있겠죠. 물론 제가 이야기하고 있는 바르도 대륙에 서도 이런 경우는 흔한 일이랍니다. 삼년전쟁이 있었고, 거리에는 고아들 이 넘쳐나고 있는 세계니까요. 그런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열 네살의 소년이 칼을 쥐는 일은 아주 쉽게 찾아 볼 수 있지요. 하지만 그런 와중 에도 수르카와 같이 여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답니다" "그러니까 내 말은 수르카가 왜 그렇게 여리냐는 거야. 그래서 어떻게 어른이 되고, 또 어떻게 살아남겠어, 그런 험악한 세상에서" "소오드엔매직과 같이 하나가 남을 때까지 무조건 싸우기만 하는 세계 는 그렇게 오래 갈 수가 없는 법이에요. 바르도 대륙에 전설처럼 내려오 는 아모리카 대륙도 그러한 길을 걸었다가 결국에는 멸망해 버렸다고 하 지요" "그런건 잘 모르겠지만... 마법은 마음에 들어. 말이 바로 마법이 되는 세계, 꼭 소오드엔매직의 마법 같잖아? 소오드엔매직에서는 광고 카피가 마법으로 쓰이긴 하지만 말이야. '침대는 가구가 아닙니다' 가장 히트 친 변신마법이었지" 세헤라자드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 명랑한 웃음 소리에 나도 덩달아 기 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그 용병단 단장 아케르라는 사람도 마음에 들어. 내가 플레이 했던 소오드엔매직5에 나오는 용병단 대장 같단 말이야. 자신이 플레이하 는 주인공이 처음에 일개 단원으로 시작해서 결국 용병단장이 되는 이야 기... 거기에 나오는 용병 단장 같다는 느낌이 들어. 뭐, 그 용병단장은 나중에 전사하게 됐지만 말이야. 그리고 아케르 단장의 전술, 소오드엔매 직의 전술과 비슷한 점이 있어. 우리는 모으고 적은 흩어지게 한다... 소 오드엔매직 전술의 기본이지" "소오드엔매직과 비슷한 부분만 재미있게 들으신 모양이네요" 세헤라자드의 또박또박 말을 이어나갔다. "이 이야기는 게임이 아니에요. 게임은 아무리 자유도가 높다고 해도 결국 프로그래머가 준비 한 그대로 진행되기 마련이지요. 그게 인물이든, 혹은 전술이든 말이에요. 하지만 이야기는 달라요. 언제 어디서 어떤 일 이 벌어지게 될지 아무도 모르지요. 어떤 경우에는 이야기를 하고있는 저 자신두 깜짝 놀랄 때가 있어요. 그런 면에서 보면 이야기는 살아있는 인 생과 닮았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네요" "그래 봐야 이야기가 이야기 지, 뭐" 나는 입술을 비죽거리면서 세헤라자드에게 말했다. 어쩐지 내가 좋아하 는 소오드엔매직 시리즈를 깎아 내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를 우습게 생각하시면 안돼요. 이야기는 어쩌면 세상 전부일 수 도 있어요. 이야기를 하는 순간은 하나의 세계가 창조되는 순간이랍니다. 제가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수르카가 살고 있는 세상이든, 혹은 소오드엔 매직의 세상이든, 아주 오래 전 모닥불가에서 마을의 장로가 동네 꼬마들 에게 들려주었던 사냥담이든 어떤 것이든 상관없어요. 그것들은 모두 하 나의 세계이자. 여러 개의 세계에요. 바로 이곳, 어스넷이 존재하고 있는 지금과 마찬가지인 살아 움직이는 세계라고요" 세헤라자드는 아주 진지하게 내게 말했다. 하지만 나는 세헤라자드가 진지하게 말하긴 했어도 그런 사실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냥 재미있는 얘기 듣는 데 뭐가 그렇게 거창해? 난 무슨 소린지 하 나도 모르겠다" "한 번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만약 이 세상의 시간과 공간이 무한하다 면요. 만약 그렇다면 우리가 상상하는 모든 세상이 다 존재 할 수도 있다 는 생각이 들지 않으세요? 어쩌면 수르카가 살고 있는 세상도 진짜 존재 하는 지 모르지요" "이봐, 세헤라자드. 미안하지만 네가 아무리 말해도 나한테 이야기는 이야기일 뿐이야. 네가 진짜 사람이 아니라 그저 프로그램인 것처럼 말이 야" 말을 하고 나니 아차, 싶었다. 세헤라자드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을 하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바로 몇 시간 전에 세헤라자드의 도움을 받아 에도다이묘의 올웨이즈해피를 무너뜨렸던 내가 말이다. 나는 미안하다는 생각 때문에 말을 끝내 놓고 한동안 세헤라자드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 다. 의외로 세헤라자드의 표정은 생각보다 어둡지 않았다. "시간과 공간이 무한하다면 저도 실재 하는 사람인지도 모르죠. 어쩌면 제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진짜고 이 밖의 세상이 가상의 세계인지 어떻 게 알겠어요" 세헤라자드의 눈이 꿈꾸는 듯한 빛으로 바뀌었다. 이 친구가 이야기를 하도 길게 오랫동안 하더니 좀 이상해 진 게 아닌가 싶었다. 말도 되지 않는 소리를 저렇게 자연스럽게 늘어놓다니 말이다. 나는 화제를 바꾸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거, 어제 빌어먹을 에도다이묘의 국왕 올웨이즈해피 녀석 콧대를 눌 러서 힘이 난 건 좋은데 어휴,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어. 해가 중천이야. 세헤라자드. 네 얘기는 조금 쉬었다가 들어야겠다. 지금은 졸려 죽겠 어..." 나는 하품을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하세요. 하지만 앞으로 펼쳐질 얘기는 다소... 아니 아직은 말 하지 않는 게 낫겠어요" 세헤라자드는 좀전과 달리 어두워진 표정으로 말했다. "왜? 그 반란군들을 토벌하러 가서 수르카가 죽기라도 하니? 아니면 라 이짐?" "그건 들어보시면 알겠지요. 하지만 적어도 통쾌하게 반란군을 무찌르 는 얘기는 아닐 거예요. 그곳 하잔에서 수르카는 새로운 결심을 하게돼 요. 네... 여러 경험들을 통해서 점점 변해가는 거에요. 아마 어른이 되 어가는 거겠죠" 세헤라자드가 다시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래, 세헤라자드의 죽끓는 변 덕이 어디 한 두번이냐. 웃어라. 난 잘란다. "참. 그건 그렇고 어제 약속 지켜줘서 고마워. 이젠 너를 믿을 수 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드네" 아까의 미안한 마음이 여전히 마음에 걸렸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약속을 지켜야 하는 거 아닌가요?" 세헤라자드는 여전히 웃는 낯으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세헤라자드의 얼굴에서 '나는 진짜 사람이라고요'하고 말하는 듯한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세헤라자드를 정말 사람으로 대우해줘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 다. 아까 말하는 걸 보니까 자기가 진짜 존재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넘어서서 정말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세헤라자드의 생각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야지만 세헤라자드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한 명의 친구를 사귄다는 것이 한 사람의 인생에서 얼마 나 중요한 것인지는 누구나 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런 사실들은 물론 소오드엔매직 온라인의 세계에서 몸으로 배운 것이다. 나는 세헤라자드가 있는 랩탑의 전원을 내리지 않고 잠자리에 들었다. 세헤라자드가 죽었는 지 살았는지 모를 끔찍한 기분을 느끼지 않게 해 주기 위해서였다. 그리 고 나는 세헤라자드의 친구이니까. "일어나세요, 일어나세요" 세헤레자드의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히는 바람에 잠에서 깨어났다. 일 어나보니 온통 캄캄했다. 불을 끄고 잠이 들었는데 어느새 밤이 된 모양 이다. 랩탑과 데스크탑에서 부연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좀 자게 내버려 둬. 주말이라구, 주말. 졸려 죽겠는데 왜 자꾸 그러는 거야" 나는 잠에서 덜 깬 목소리로 세헤라자드에게 투정 부리듯이 말했다. 잘 자고 있는데 깨우는 일은 정말 짜증난다. 기밀의 심정이 이해가 간다. 나 도 확 세헤라자드에게 박치기를 해버려? 그만두자. 그래봤자. 모니터만 깨질 걸, 뭐. "편지가 왔어요. 아주 중요한 편지인 모양이에요" "그래?" 나는 중요한 편지라는 말을 듣고서야 간신히 일어나 데스크탑으로 향했 다. 모니터에서 우체부 아이콘이 왔다갔다하며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있었 다. "어차피 일어나면 알게 될 거, 꼭 깨울 것까지는 없잖아" "아주 중요한 편지인 것 같다니까요. 빨리 읽어보세요" 세헤라자드는 '난 다 알지'하는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그래 알았다, 알았어. 나는 이렇게 말하면서 통신 프로그램을 작동시켰다. 어스넷에 접 속하자 트랜스파워의 정다운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한 통의 편지가 왔습니다" 사용자가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을 꼭 이렇게 새로운 사실인양 말하는 게 프로그램이지. 나는 편지의 제목을 읽어보았다. 거기에는 "손맥 소프 트사에서 드립니다"라는 정중한 문구가 쓰여져 있었다. 이런. 겨우 스팸 메일 때문에 날 깨운 거란 말이야? 그래도 손맥 소프트회사라고 하면 일 본의 엘프 사를 합병한, 국내 굴지의 게임 소프트 회사로 알고 있었는데, 겨우 하는 일이 이런 스팸메일이나 보내는 일이라니. 그나저나 내 통신 프로그램에 분명히 스팸메일 거부 유틸이 깔려있는데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걸 보면 스팸메일 거부 프로그램을 업그레이드 할 때가 된 모양이다. 스팸메일과 거부 프로그램의 관계는 꼭 바이러스와 백 신 프로그램의 관계와 같다니까. 레벨이 오를수록 더 강한 몬스터가 등장 하는 RPG 게임같기도 하고. 나는 세헤라자드의 얼굴을 짜증난다는 표정으 로 한 번 바라본 다음, 편지 읽기를 선택해 클릭했다.(단잠을 깨운 일에 대한 경고의 뜻으로 말이다) "어제 비류 님의 게임 잘 감상했습니다. 외교를 이용한 정말 멋진 플레 이였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손맥 사의 프로 게임팀 홍보담당 최 과장이라 고 합니다" 나는 이 첫마디를 듣는 순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손맥 소프트사가 프로 리그에 진출 해 적극적으로 많은 아마 게이머들을 영입하고 있다는 글을 계시판에서 읽은 기억이 났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편지를 드린 이유는 비류 님의 플레이가 매우 인상적이었기 때 문입니다. 저희 게임팀에 꼭 필요한 분이라 여겨졌습니다. 오늘은 저희 팀에서 선수면접이 있는 날입니다. 바쁘시더라도 한 번 본사로 오셔서 절 찾아 주시면 제가 바로 면접을 주선하겠습니다. 아무 때고 오늘 중에 저 희 회사를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정문에서 홍보부 최 과장을 찾아주시 기 바랍니다" 나는 비류라는 내 닉네임이 정말 내 닉이 맞는지 몇 번이고 다시 생각 해 보았다. 맞기는 맞는데... 이 짧은 편지 한 통에 잠이 확 달아났다. 혹시 꿈인가 해서 마우스로 머리를 한 번 두드려보기까지 했다. 분명 생 시였다. 나는 괴성을 지르면서 벌떡 일어났다. "세헤라자드, 들었지? 나, 이제 프로 선수가 되는 거야! 세헤라자드, 다 네 덕이야. 고마워. 고마워. 넌 정말 행운을 불러다 주는... 사람이 야!" 나는 기뻐서 이렇게 소리쳤다. "손맥 소프트 사가 그렇게 유명한 회사인가요?" 세헤라자드는 여전히 '난 다 알지' 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데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나는 흥분된 목소리로 설명을 해주었다. "손맥 소프트사는 미소녀 게임분야에서는 알아주는 회사야. 원래 명칭 은 손놀이 산맥인데 그냥 줄여서 손맥 소프트라고 불러. 몇 해 전에 일본 의 엘프사를 합병하고 세계 시장으로 진출한 대단한 게임 회사지. 아마 18금 미소녀 게임분야에 있어서는 적수가 거의 없을 걸. 세계 정상급 만 화가들을 고용해서 케릭터 디자인을 하는 걸로도 유명해" 나는 손맥 소프트 사의 걸작, '춘향전2 - 변학도의 복수' 편을 머리에 떠올리며 말했다. 완벽한 스토리, 변학도와 이몽룡 두 주인공 중 하나를 선택해 전혀 다른 스토리를 진행시킬 수 있게 만들어진 시스템, 방대한 동영상과 높은 게임 완성도는 손맥 소프트사를 세계 굴지의 게임 소프트 회사로 만드는 데 큰 몫을 하였다. (특히 춘향이의 그네 타기 장면의 CG 동영상은 그 환상적인 카메라 연출로 어스넷에서 가장 인기 있는 동영상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게다가 일본의 유명 만화가를 스카웃해 디자인한 주인공 춘향이의 케릭터는 팬시 상품으로도 크게 히트하기도 했다. 손맥 소프트가 그 게임을 시작으로 엘프사를 합병할 수 있는 교두보를 쌓았다 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물론 '춘향전2 - 변학도의 복수'가 성인용 게임이기는 하지만 나는 벌 써 오래 전에 플레이 해보았다. 미성년자가 18금 게임을 즐길 수 있는 건 불법 복제 CD를 구하는 것만큼이나 흔하고 쉬운 일이다. "그런 회사에서 비류 님께 지금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는 건가요?" 세헤라자드는 놀랐다는 표정을 조금 과장되게 지어 보이면서 말했다. "응. 손맥 사는 얼마 전에 '손맥 암행어사'팀을 창단 했거든. 미소녀 게임 시장에 머물러 있던 손맥사가 이제 다른 장르로도 영역을 넓히기 위 해 온라인 RPG 게임에 진출한 거야. 사실 프로 게임리그만큼 좋은 홍보수 단도 없지. 그런데 정말 스카우트 제의를 받게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어.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꿈이면 깨지마라. 깨지마라" 아직도 계속 가슴이 뛴다. "참. 그런데 편지를 읽어보지도 않고 어떻게 중요한 편지라는 알았어?" "어스넷 상에서 저는 어떤 프로그램과도 만날 수 있답니다. 프로그램과 만나는 일은 사람을 만나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아요. 제가 아무리 원래 사람이었다고는 해도 지금은 프로그램인 게 확실하니까요. 아니 프로그램 도 사람도 아닌 다른 무엇인지도 모르죠. 어쨌든 편지 읽는 프로그램같은 경우, 그저 어떤 프로그램인지 제가 인식만 할 수 있다면 의사가 통할 수 있답니다. 사람으로 따지자면 마음을 열고 상대방을 이해하는 과정과 마 찬가지겠지요" 세헤라자드의 말에서 나는 세헤라자드가 처음과는 많이 달라졌다는 생 각이 들었다. 전에는 프로그램이라는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그렇게 화를 내던 세헤라자드였다. 그런데 지금의 세헤라자드는 자신이 프로그램이라 는 것을 인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프로그램들이 꼭 생명을 가지 고 있다는 듯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세헤라자드, 네가 프로그램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거야?" "어제 어스넷의 세계로 들어간 순간 깨달았어요. 그곳도 하나의 세계임 을요. 제가 이야기하고 있는 바르도 대륙처럼, 또 비류 님이 살고있는 곳 처럼, 제가 살고 있고, 살아가야 할 이곳도 하나의 활기찬 세계라는 걸 깨달았다는 말이에요. 어스넷에도 살아있는 생명이 있고, 뛰놀 수 있는 공간이 있고, 공기와 물과 하늘과 땅이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세헤라자드는 꿈꾸는 듯한 눈동자로 내 등뒤의 허공을 바라보며 말했 다. 나는 그제야 세헤라자드가 왜 수르카의 이야기와 내가 살고 있는 세 계를 비교해가며 그렇게 자세히 말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세헤라자드는 어제 어스넷에서 소속감 같은 걸 느낀 모양이었다. "너 그럼 여기를 떠나서 어스넷의 세계로 가고 싶겠구나" 나는 조심스럽게 이렇게 세헤라자드에게 물었다. 세헤라자드는 천천히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럼 왜 내가 자고 있는 동안에 어스넷으로 가지 않았어? 선도 연결되 어 있었고, 컴퓨터도 켜져 있었는데" "이야기를 끝내겠다고 약속했으니까요. 그리고 제가 이야기를 중단하면 바르도 대륙의 운명은 어떻게 되겠어요"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는 어조로 세헤라자드가 말했다. 약속이라 는 말에서 나는 랩탑을 건네주었던 노인과의 약속이 떠올랐다. 세헤라자 드를 없에 주겠다던 약속. "바르도 대륙의 이야기가 영원히 계속 됐으면 좋겠다..." 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야기가 끝난다면 세헤라자드는 더 이상 내 곁에 있지 않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내 손으로 지워버리든, 아니 면 세헤라자드 스스로 어스넷으로 떠나버리든 말이다. 내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세헤라자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 일단 지금은 세 헤라자드에게 들어야 할 이야기가 있고, 세헤라자드는 적어도 이야기가 끝나기 전에는 가지 않겠다고 말했으니까, 생각은 이쯤에서 끝내자. 또 서둘러 손맥소프도에도 가봐야 하니까 심각한 생각은 나중으로 미루자. "자. 나는 늦기 전에 손맥 사에 가봐야겠어. 무슨 옷을 입고 가야 하 지? 면접이라는데 그래도 신경을 써야 할 것 같아. 첫인상이 중요하잖아. 이제 진짜 프로리그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으니까 말이야" 전세계가 어스넷 망으로 연결되어 있고, 하늘에는 몇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항공 유람선이 다니는 시대에 면접 같은 구시대의 풍습이 남아있는 이유가 뭘까 생각하면서 옷을 골랐다. 심지어 어떤 회사는 아직도 면접에 서 손금과 관상을 본다고 한다. 세상에! 무슨 옷을 입고 가는 게 좋을까. 프로 게이머답게 사이버룩으로 입을 까, 아니면 점잖게 그냥 평범한 정장을 입는 게 나을까. "하지만 편지 내용을 들어보니까 그냥 면접인 모양이던데요. 그럼 정식 계약을 하기 전에는 아직 진짜 프로 선수가 아니잖아요?" 옷을 고르다 말고 나는 갑자기 기운이 쏙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그렇 게까지 말할 건 없잖아, 세헤라자드? "말하자면 교두보지. 진짜 프로 게이머가 되기 위한 교두보" 나는 교두보라는 말에 일부러 힘을 주면서 말했다. "손맥 소프트가 온라인 RPG시장에 뛰어들기 위해 프로 게임리그에 뛰어 든 것 처럼요?" "그렇지. 그런 면에서 나와 손맥소프트는 벌써부터 인연이 닿아 있었던 게 아닐까? 그렇지, 세헤라자드?" 나는 그냥 평범한 정장을 입기로 마음먹고, 한복을 개량한 양복 저고리 와 승마바지 형태로 된 바지를 옷장에서 꺼내며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그런데 다른 프로 게임팀에서 제의가 왔다고 해 도 그렇게 기뻐하셨을까요?" "글쎄. '샤넬 워터파워' 팀이나 'YWCA 빅마마스' 팀 보다는 '손맥 암행 어사' 팀이 훨씬 마음에 들긴 하지만, 어차피 프로 게이머가 되고 싶었던 게 내 꿈이니까, 역시 기뻐했을 거야" 나는 이렇게 일단 말해 놓고는 "하지만 '고조선 막무가내' 팀이라면 좀 기분 나빴을 지도 모르겠다" 하고 말을 덧붙였다. '고조선 막무가내'는 속칭이고, 실제 이름은 '고 조선 한나라' 팀인데, 만년 꼴찌 팀인데다가 게임을 즐기는 젊은 층이 가 장 싫어하는 보수 언론사가 창단한 팀이라 생각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싫어하는 팀이다. 물론 세헤라자드에게는 그런 설명을 백날 해 봐야 알아듣지도 못하겠지만.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N:김상현 #9536/10199 ━━━━━━━━━━━━━━━━━━━━━━━━━━━━━━━━━━━━━━━━ 제 목:[탐그루] 영혼의 에뮬레이터 3 55 관련자료:없음 24/24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1-09 00:24 조회:1114 탐그루 # 마법은 마음이다 - 마음은 칼이다 # 나는 갈아입을 옷가지를 집어들고 세헤라자드에게서 뒤돌아섰다. "게이머가 게임 팀을 선호하는 게 당연하기야 하겠죠. 그런데 그 회사 에 대해서는 원래 잘 알고 계세요?" "진짜 훌륭한 게이머는 게임뿐만 아니라 게임에 대한 상식도 풍부한 법 이야. 손맥 소프트 사는 내가 좋아하는 온라인 RPG 게임은 아직 만든 적 이 없지만, 그래도 알만큼은 알고 있다고. 손맥 소프트 사의 걸작 '춘향 전2 - 변학도의 복수'는 물론 플레이 해 봤고, '심청이가 용궁에 갔을 때 무슨 일이 있어나?'나 '구운몽 - 그대 꿈꾸는 여인' 같은 별로 알려지지 않은 초기 게임들도 다 플레이해서 엔딩을 본 경험이 있지" 이전의 미소녀 게임이 가지고 있던 도식인 '허리는 개미, 가슴은 수박' 의 공식을 깨고 아주 사실적인 여체 묘사로 화제가 되었던 '한없이 투명 에 가까운 블루 - 릴리를 위하여'를 플레이 할 때가 떠올랐다. 여자 허리 에 붙은 군살을 기가 막히게 사실적으로 묘사한 케릭터 디자인과 게이머 를 흥분의 도가니로 밀어 넣는 치밀한 스토리는 나를 매혹 시켰다. 아직도 숨겨진 이벤트를 찾아내고, 최단시간 엔딩을 보는 일이 계시판 에 오르내리고 있는 걸 보면 나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즐기 는 명작임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 - 릴리를 위하여'가 히트를 기록하지 못한 건 순전히 자본력을 앞세운 대기 업의 게임에 밀려 홍보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손맥 소프트는 원래 스토리 진행에 강점을 가지고 있던 손놀이 소프트 사와 케릭터 디자인이 뛰어난 태백산맥 소프트 사가 병합해서 만들어진 게임 회사야. 창립자 이명훈 씨와 김길호 씨는 서로 지분을 반반씩 나누 기로 하고 두 회사의 장점을 살려서 미소녀 게임 '춘향전 - 폭주 어사출 도'를 만들어 빅 히트를 기록했지. 그러다가 일본의 인기 만화가 클림프 에게 케릭터 디자인을 의뢰해 '춘향전2 - 변학도의 복수'를 세계적으로 히트시키면서 굴지의 게임 회사로 성장하게 된 거야. 당시 '춘향전2 - 변학도의 복수'에서 이몽룡으로 플레이했을 경우 마지 막에 암행어사 출두 장면은 역대 우리나라 정치인들이 포졸로 등장한다는 얘기로 아주 유명해. 수 백 명의 포졸들이 모두 다 개성적인 얼굴 표정과 움직임을 보인 것도 대단했고. 특히 출도하던 도중에 돌부리에 걸려서 쓰 러지는 바람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던 포졸이 누구냐를 놓고 벌어졌던 논쟁은 정말 흥미진진했지. 쿠테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고 대규모 학살을 자행했던 전 세기의 대머리 장군이 바로 그 포졸이라는 것이 지금은 정설 이 돼있지. 하여간 춘향전 시리즈 2탄의 빅히트로 손맥 소프트는 급 성장 하게 되고, 뒤이어 '어우동 시리즈' '동서고금 시리즈' '미소녀 봄봄 시 리즈'등을 연이어 히트시키면서 오늘의 위치에 이른 거지" 나는 바지를 입으면서 중간에 단 한번도 말을 끊지 않고 말했다. "정말 게임에 대해서 박학다식 하시네요" "이봐, 세헤라자드. 난 게임이 취미고, 게임이 특기고, 게임이 생활인 게이머야. 적어도 이정도는 돼야 프로 게이머의 자격이 있는 거라구" 나는 이렇게 말하고 넥타이를 매었다. 세헤라자드가 사람이라면 넥타이 를 매줄 수도 있을 텐데. "정말 대단하세요. 전 취미라고는 음악감상하고 춤추는 거 정도밖에는 없었는데. 아는 거는 학교에서 배운 게 전부였어요. 특기라고는 그저 남 들보다 육감이 좀 발달했다는 거 정도랄까? 비류 님처럼 그렇게 어떤 것 하나에 몰두하면서 살아 본 적이 없어요" "그렇구나. 자기가 진짜로 좋아하는 게 없으면 인생의 절반은 잃어버린 거라고들 하던데. 안됐구나. 이제부터라도 좀 취미를 가져보는 게 어때?" 나는 언젠가 영국에 사는 내 소오드엔매직 온라인 게임 상의 부인이 했 던 말을 꼭 내가 생각해 낸 말인 것처럼 했다. 영국에 사는 내 온라인상 의 부인은 내가 가지고 있는 게임에 대한 열정을 칭찬하면서 그런 말을 덧붙였었다. "음악이나 좀 들었으면 좋겠네요. 춤도 좀 추었으면 좋겠고요... 하지 만 전 18금 성인용 게임은 별로 흥미 없어요. 옷 갈아입는 걸 보는 일도 요" 세헤라자드의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너, 내가 옷 갈아입는 거 봤어?" "이 랩탑의 시각 센서는 비류님이 생각하는 것 이상이랍니다. 인간처럼 입체적으로 보일 뿐만 아니라, 그것도 사방에서 볼 수 있죠" 세헤라자드의 말에 나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몸매 자랑하기에 나 는 너무 말랐단 말이야! 나는 헛기침을 하면서 밖으로 나갈 준비를 했다. "설마 그냥 가버리진 않겠지?" 데스크탑도 켜놓고, 선도 연결해 놓은 상태여서 나는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가려고 마음먹었으면 벌써 갔어요" 세헤라자드는 웃으면서 말했다. 세헤라자드의 웃는 얼굴이 참 보기 좋 다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들었다. 해가 진 후에 집밖으로 나오는 일은 담배 사러 나오는 일 밖에는 없던 내가, 저녁 여덟 시가 넘어서 밖으로 나온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내 일 가면 좋겠지만, 최과장이라는 사람이 오늘 중으로 꼭 와달라고 한 말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문의를 해보니 프로 게이머 면접은 행정 적인 문제 때문에 오늘 자정에 정확하게 끝난다고 담당자가 친절한 목소 리로 알려주었다. 시뻘건 밤하늘 아래의 도시는 언제봐도 음흉한 몬스터가 으르렁거리고 있는 모습처럼 보인다. 지하철의 계단을 내려가면 꼭 몬스터의 아가리 속 으로 들어가는 기분이 든다. 손맥 소프트 사에서 가장 가까운 역에 하차 하자 막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방이 온통 낯선 풍경으로 가득했기 때 문이다. 밖에 나오는 일이 거의 없어서 시내 지리를 잘 모른다. 그래서 나는 최 과장이 첨부해 보내준 약도를 가지고 갔음에도 불구하고 길을 물어물어 가야만 했다. 해가 진 후의 시내는 길가는 사람에게 길을 물어볼 수도 없 을 정도로 살벌하다. (뉴스만 보면 알 수 있는 일이지만 그건 너무 위험 한 모험이다. 행인이 언제 강도나 강간범으로 돌변할지 아무도 모른다) 하는 수 없이 나는 눈에 보이는 가게마다 들어가 작은 물건을 하나씩 사 면서 길을 물어봐야 했다. (덕분에 내 주머니에는 껌과 초콜렛으로 가득 하게 되었다) 고생 고생 끝에 손맥 소프트 사에 도착하자, 시간은 열 시가 다 되어 있었다. 손맥 소프트사의 건물은 생각보다 높았다. 나는 한 십 층 건물쯤 을 생각했는 데, 언뜻보기에도 삼사십층은 되어 보였다. 나는 일단 건물 이 높다는 사실에 압도당해버린 기분이 들었다. 프로 게이머 면접을 왔다 는 사실이 어쩌면 정말 꿈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 나는 혹시 아무도 없으면 어쩌나, 혹은 최과장이라는 사람을 수위가 모 른다고 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정문으로 조심스럽게 걸어 들어 갔다. 자동문이 양옆으로 열리는 소리가 오늘따라 크게 들렸다. 수위가 나를 쳐다보았다. 꼭 무슨 도둑이나, 외판원을 보는 듯 한 시선이었다. "저...손맥 소프트 사의 최 과장님을 만나 뵈러 왔는데요..." 나이가 꽤 들어 보이는 수위는 깨끗한 푸른색 정복을 차려입고 있었는 데, 다림질이 얼마나 잘 되어 있던지, 제복 어깨선에 손을 댔다가는 그대 로 손이 베일 것 같았다. "최 과장? 홍보담당 최과장 말인감?" 복장과는 달리 말투는 완전 할아버지였다. "잠시 지둘려 보더라고" 이게 과연 어디 사투리일까 생각하는 사이, 수위는 인터폰으로 역시 알 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억양이 강한 사투리로 최 과장을 찾았다. "성함이 워떠케 되시는 감?" 수위가 내 이름을 물었다. 무슨 말인지 확실하게 알 수는 없었지만 성 함이라는 말 때문에 대강 내 이름을 묻는 말이라는 건 알아들을 수 있었 다. 나는 내 이름을 말한 다음에 비류라는 닉도 말해주었다. 수위는 내게 조금 더 기다려 보라는 뜻이라고 생각되는 말을 했고, 나는 어떤 자세로 기다리면 좋을까를 생각해 보면서 발을 이리저리 놀렸다. 불편한 기다림의 시간은 정말 길었다. 사실 담배 한 대 피웠으면 지나 갔을 시간이었지만 이곳이 금연구역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어서 나는 그 냥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면서 기다리고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이 건물은 그냥 높기만 한 게 아니라, 내부도 아주 깨끗하고 인테리어도 깔끔했다. 벽면에 달려있는 시계도 최신 디자인을 가미한 복고풍 벽시계 였다. 시계는 열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런 곳에서 근무하는 손맥 사의 사람들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나는 양복저고리를 매만지면서 옷매 무새를 바로 했다. 얼마 후 최 과장이 나타났다. 처음에 나는 내 앞으로 걸어오고 있는 사 람이 최 과장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짱딸막한 키와 뚱뚱한 몸은 그렇다고 쳐도, 촌스러운 빨간 색 넥타이에 구질구질하게 구겨진 양복, 며칠 면도도 안한 게 분명한 얼굴은 도저히 이 사람이 이렇게 좋은 건물 에서 일하는 사람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아, 비류 님이시군요. 반갑습니다. 최 과장입니다. 저, 시간이 없으니 까 자세한 설명은 가면서 드리기로 하죠" 나는 인삿말도 제대로 못하고 최과장을 따라갔다. "손맥 소프트는 이 건물 이십 이층이고, 프로 게임팀 사무실도 이십 이 층입니다. 만약 오늘 계약을 하게 되신다면 본격적인 게임 플레이는 내일 부터 당장 시작됩니다" 엘리베이터에 오르면서 최 과장이 말했다. 이건 내가 생각했던 면접과 는 너무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엘리베이터는 사방이 투명하게 되어있 어서, 나는 이십 이층까지 올라가는 동안 아찔한 기분을 느꼈다. "오늘 일단 계약서를 보시고, 마음에 드시면 서명만 하시면 됩니다. 정 식 선수가 되면 하루라도 빨리 게임에 적응하셔야 하니까 좀 바빠지실 거 각오하시고요" 엘리베이터가 열리자 최 과장이 거의 뛰다시피 사무실로 움직였다. 나 도 역시 뛰다시피 최과장을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거의 하지 않고 다니 던 넥타이가 목을 조여서 답답했다. 이렇게 정장을 하고 오는 게 아니었 다. 사무실은 이십 이층 구석 자리에 있었다. '손맥 소프트 - 세계 최강의 게임을 위하여'라는 글이 붙어 있는 문을 열고 들어가자 시끌벅적한 소리 가 먼저 들려왔다. 사무실은 굉장히 넓었는데, 세계 굴지의 게임회사라기 보다는 무슨 증권회사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여기저기서 전화벨이 울리고 있었고, 바쁘게 서류를 들고 뛰어가는 직원들이 있었고, 거의 싸우듯이 논쟁을 벌이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분이 저희 프로게임 팀 팀장이십니다. 인사드리세요" 사람들 사이를 겨우겨우 헤집고 들어가자 안락의자에 앉아서 정신없이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 앞에서 최 과장은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곧 누군가 '최 과장님!'하고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고, 최 과장은 '알았 어, 지금 가!' 하고는 어디론가로 사라져 버렸다. 팀장은 여자였다. 나이는 스물을 갓 넘었을까? 여드름투성이 얼굴에 사 무실 분위기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찢어진 청바지와 가죽 자켓을 입고 있 었다. 내가 헛기침을 한 번 하자, 모니터에서 잠시 시선을 떼더니 나를 바라보았다. 마주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질 미인과는 좀 거리가 있었지 만 독특한 분위기의 여자였다. 나를 바라보는 눈초리가 날카로워 보였다. "비류 님이시죠? 저는 손맥 암행어사 팀의 팀장 장미호입니다" 팀장은 이렇게 말하고는 아직도 어안이 벙벙한 나에게 종이 한 장을 내 밀었다. "읽어보시고 맘에 드시면 서명하세요" 나는 종이를 받아들자 팀장은 마치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의자 를 돌리더니 모니터에 시선을 집중했다. 모니터에는 최근에 프로리그에서 각광을 받고 있는 격투 게임인 'Heart of Fighters, Special'이 떠 있었 다. 뚱뚱한 스모 선수와 날렵하게 생긴 키 작은 여자 격투가가 대전을 벌 이고 있었는데, 둘의 움직임은 격투게임 전문가가 아닌 내가 보기에도 고 수의 움직임이라는 생각이 들만큼 다양하고 빨랐다. 여자 격투가가 몸을 숙여 스모 선수의 하단을 공격해 들어가면, 스모 선수는 느린 스피드에도 불구하고 부드럽게 공격을 피하면서 역습을 노렸고, 스모선수의 역습을 여자 격투가가 반격기로 받아내는 순간, 스모선수의 양팔이 반격기를 다 시 받아내는 동작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졌다. 저게 바로 프로의 세계구 나. 저절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나는 일단 계약서를 보았다. 내용은 간략하고도 명료했다. 일 개월 계 약이 조건으로, 계약금 오 천 달라에 성과급 천 달라가 지급된다는 게 계 약서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나머지는 매일 출근만 하면 된다는 걸 로 해석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저, 일개월 계약이라는..." 내 물음은 팀장의 함성소리 때문에 끊어지고 말았다. 나는 모니터를 들 여다보았다. 스모 선수가 여자 격투가를 쓰러뜨린 뒤, 두 손을 하늘로 뻗 으며 승리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그리고 화면 밑에는 알아볼 수 수 없는 언어가 출력되고 있었다. "아, 미안해요. 인도는 지금 골든 아워거든요. 이 경기는 뉴델리에 중 계되는 경기에요. 우리가 이겼죠" 기쁨을 참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팀장이 말했다. 저렇게 입을 벌리고 웃다가는 여드름이 다 터져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이 생길 정도였다. "밑의 글씨는 뭐예요?" "인도어에요. 세계 최강의 게임 소프트사, 손맥!" 벌써 손맥 소프트는 많은 선수들의 스폰서를 하고 있었나보다. 어스넷 에 본격적으로 진출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정말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걸. "어때요. 서명할래요? 아참. 일 개월 뒤의 계약 문제를 물으셨죠? 먼저 한 달간 인턴 게이머로 활동하고 그 뒤에 일 년 단위로 계약 할 수 있어 요. 일단 계약하면 출근은 내일부터고, 아마 내일 소오드엔매직 온라인 유럽 지역에 먼저 출전하게 될 거예요. 최과장이 다 말해주지 않았나요? 음. 아직 듣지 못했다면 바빠서 그랬으려니 하고 이해해요. 지금 브라질 쪽 수출 홍보 문제도 최과장이 담당하고 있어서 정신이 없거든요. 그나저 나 잘생겼군요" "예?" 나는 한 마디도 못하고 팀장의 얘기를 듣기만 하다가 어이없는 질문을 받고 당황하고 말았다. "잘생겼다고요. 그것 때문에 직접 오라고 한 거예요. 프로 게이머는 외 모도 중요하지요. 전 세계로 모습이 방영되니까요. 이만한 조건이면 어디 가도 밑지는 건 아니에요. 어때요? 서명할래요?" 나는 별로 생각해 볼 시간도 없고 이것저것 따져볼 분위기도 되지 않아 서 계약서에 바로 내 인적사항과 크레디트 카드 번호를 적고 서명을 한 다음에 팀장에게 건네주었다. "입금은 바로 되니까, 아무 곳에서나 확인해 봐요" 팀장은 사무실을 나서는 나에게 내일 저녁 여덟 시까지 오면 된다고 말 해주었다. "내일, 그러니까 정확하게는 모래 새벽 세 시부터 네 시간 동안 프랑스 파리에 중계 방송되는 프로그램에 출연해야 되니까요. 그냥 몸만 오면 되 요. 코디나 화장같은 건 다 알아서 해주니까. 늦지 말아요" 팀장은 이렇게 말하고 다시 원위치로 돌아갔다. 그래서 나는 양복을 입 고 간 보람도 없이 그냥 서명만 하고 바로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분명히 프로 게이머가 된 게 확실한데, 나는 도무지 실감이 나질 않았 다. 예상했던 것 보다 별로 기분도 좋지 않았다. 그저 모든 일이 다 현실 이 아닌 것처럼 여겨졌다. 꼭 내가 공상 속의 세계에서 걷고 있는 것 같 은 느낌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집 앞 편의점을 지나다가 편의점에 있는 현금 자동 인출 기 생각이 났다. 한 번 확인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현실감이 별로 느껴지지 않아서였다. 내 크레디트 카드에는 사천 이백 오십 삼 달 라 하고 이십 일 센트가 입금되어 있었다. 나는 내 현금 입출금 내력서를 보았다. 세금과 이체 수수료, 그리고 팀 회비가 공제된 금액이라는 설명 이 마지막 일 센트까지 아주 자세하게 적혀 있었다. 어찌되었건 돈이 들 어 있다는 걸 증명해 주는 종이쪽지를 보고 나니 조금 현실감이 생기는 것도 같았다. 여전히 믿기지 않기는 마찬가지 였지만. 나는 세헤라자드에게 감사의 선물을 하나 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랩탑 베터리를 사갈까? 그럼 내가 세헤라자드와 이십 사시간 동안 어디든 지 함께 다닐 수 있을 텐데. 아니면 핸드컴도 좋을 것 같았고. 에물레이 터와 세헤라자드 롬파일을 옮기기만 하면 될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건 좀 물어 본 다음에 생각해보는 게 좋겠군. 밖으로 나다니 고 싶어할지 아닐지 알 수 가 없으니까 말이다. 그러고 보니 음악을 듣고 싶다고 했으니 씨디나 한 장 사가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데 그것도 어떤 음악을 좋아하는 지 알 수가 있나. 그렇다고 세헤라자드 처지에 꽃이나 인형을 선물 할 수도 없는 일이고. 그래서 나는 일단 빈손 으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문을 여는 순간, 나는 내가 집을 잘못 찾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었다.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혹시 내가 돌아오 면 자동으로 음악연주가 되도록 음악 프로그램에 예약을 걸어 놓은 게 아 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지금 내 귀에 들리고 있는 음악은 잘 모르는 음악이었기 때문이었다. 언젠가 들어본 기억이 있 는 곡이기는 했지만 어떤 것인지는 확실하게 모르는 노래였다. 하지만 연 주되고 있는 악기가 기타소리라는 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비록 기타라 는 걸 직접 연주하는 걸 본 적은 없지만 말이다) Wise man says, only fools rush in but I can't help falling in love with you 기타선율에 맞추어 감미로운 남성의 음성이 내 방을 메우고 있었다. 나 는 그 웬지 방 안 흐르는 분위기가 깨질까봐 불도 켜지 않고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like a river flows, surely to the sea, darling so it goes, something are mean to be 나는 내 테스크탑 앞에 선 다음에야 그 곡이 내 컴퓨터에서 흘러나오고 있으며, 세헤라자드가 그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 다. 세헤라자드의 몸은 마치 뼈가 없는 사람처럼 부드럽게 움직이고 있었 다. 가끔은 격정적으로, 또 가끔은 가냘프게. 나는 멍하니 그 광경을 바 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춤추고 있는 세헤라자드의 볼에서는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 다. 세헤라자드는 왜 춤을 추면서 울고 있는 거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걸 까. 세헤라자드는 내가 들어온 것도 모르고 계속 눈물을 흘리며 춤추고 있었다. 우아하게 감미롭게. 세헤라자드의 모습은 가슴이 아릿아릿할 정 도로 아름다왔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N:김상현 #9537/10199 ━━━━━━━━━━━━━━━━━━━━━━━━━━━━━━━━━━━━━━━━ 제 목:[탐그루] 영혼의 에뮬레이터 3 56 관련자료:없음 26/26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1-09 00:25 조회:1017 탐그루 # 마법은 마음이다 - 마음은 칼이다 # Take my hand, take my whole life too, for I can't help falling in love with you 음악이 끝나자, 세헤라자드는 털썩 자리에 주저앉더니 고개를 양 무릎 사이에 파묻고 울기 시작했다. 나는 한 참 동안이나 불도 켤 생각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왜...울었어?" "미안해요. 나 바보 같죠?" 세헤라자드는 눈물을 닦으면서 애써 웃음을 지어보이며 말했다. 음악이 끝나서 그런지 내 방이 평소보다 훨씬 더 황량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여 기저기 널려 있는 옷가지들하며, 아무렇게나 열려 속을 드러내고 있는 CD 케이스 따위가 그런 느낌을 더욱 들게했다. "...어스넷에 갔었어요. 제가 좋아했던 노래를 찾아서요. 그리고 음악 을 틀어놓고 춤을 췄어요. 예전처럼요. 하지만 제 몸의 느낌이 예전 같지 않았어요. 뭐랄까, 제가 생각한 그대로 움직이는 내 팔과 다리는 너무 낯 설었어요. 너무도 가볍고, 정확하고... 꼭 기계처럼... 제가 아닌 것 같 았어요. 그래서 저는..." 세헤라자드는 다시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표정이 되어서 이렇게 말했 다. 나는 그저 세헤라자드의 얘기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미안해요. 무엇인가 아주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것 같았어요" 눈물을 닦아내며 세헤라자드가 말했다. 손수건이라도 주고 싶다는 생각 이 들었다. 전에 한 번 그랬던 것 처럼... 세헤라자드가 뭘 잃어버렸다는 이야기인지 잘 모르겠지만 나는 무턱대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이었을 때가 그립다는 얘기겠지. 아니면,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알고 지내던 사 람들에 대한 그리움, 또 자신이 살았던 집과 그 앞에 있던 길과 길가의 나무들과 또 어쩌면 학교에 대한 그리움... 몸을 가졌을 때 느낄 수 있었 던 모든 것에 대한 그리움. 그런 것들을 이젠 영영 잃어버렸다고 생각하 니까 슬펐던거야. "그런데 그 곡 무슨 곡이야? 네가 춤추던 그 곡 말이야. 아주 좋던데" 나는 분위기를 바꾸어보려고 이렇게 물어보았다. "어스넷 클레식 사이트에서 가지고 온 파일이에요. 킹 엘비스라는 음악 가의 'Can't stop falling in love with you'라는 곡이지요" "깊어만가는 우리는 사랑을 나는 멈출 수 없어요... 멋진 제목이야" "예. 이제는 잊혀져 가는 고전이지요" 세헤라자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더니 뭔가를 찾는 것처럼 주변을 살펴보았다. "왜? 또 가지고 온 거라도 있어?" "잠깐만요..." 세헤라자드는 사라져버렸다. 나는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 한 참 동안 랩탑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아무 말도 없이 사라져 버리다니. 혹시 도망 쳐 버린 건 아닐까? 아니면 다른 음악 파일이라도 찾아 볼 생각으로 어스 넷으로 간 걸까? 얼마 지나지 않아 세헤라자드가 나타났다. 그런데 혼자가 아니었다. 세 헤라자드의 옆에는 갈색과 흰색이 뒤섞인 이상한 공이 하나 있었다. 공은 한동안 모니터 안을 떼굴떼굴 굴러다니더니 나를 보자 흠칫 놀라 세헤라 자드의 다리 뒤로 숨었다. "스테아에요. 사람을 보는 건 처음인가 봐요. 부끄러워하는 걸 보니까 말이에요" "스테아?" 나는 그제야 그 공이 눈도 있고 코도 달려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꼭 고양이 같이 생겼는데, 고양이치고는 너무 뚱뚱했다. "예. 어스넷에서 우연히 만난 친구에요. 인사해. 비류 님이야" 세헤라자드는 공을 집어들더니 모니터 쪽으로 들이밀었다. 공은 짧은 네 다리를 허공에 마구 휘저으며 싫다는 시늉을 했다. 나는 세헤라자드가 갑자기 농구공 튀기듯 그 고양이같이 생긴 생명체를 튀길 것 같다는 생각 이 들었다. "처음이라 그러는 모양이에요. 스테아!" 스테아라는 이름의 뚱뚱한 고양이가 자꾸 버둥거리자, 세헤라자드는 결 국 들고 있기를 포기하고 바닥에 내려놓았다. 스테아는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자 다시 세헤라자드의 다리 뒤로 숨었다. 그 뚱뚱한 몸으로 가느 다란 다리 뒤에 숨어봐야 눈 코 입이나 가릴 수 있을까 싶었다. "...고양이? 설마!" 아무리 진짜 고양이가 아니라 프로그램 고양이라고 해도 저렇게 뚱뚱할 수가 있나? 게다가 색깔이 섞여있는 걸 보니 순종도 아니고 잡종 같은데. 나는 랩탑을 넘겨준 노인이 남긴 말 중에서 누군가 쥐의 생명을 롬 파일 화하는 데 성공했다는 말이 떠올랐다. 어쩌면 그 노인이 들었다는 말이 소문이 아니라 사실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스넷을 돌아다니는 생명체들이 생각보다 많았어요. 이렇게 쉽게 스 테아를 만난 걸 보면요. 이 고양이는 킹 엘비스의 곡을 찾아다니다가 만 났어요. 엘리 드보아 홈페이지였는데, 스테아가 열심히 엘리 드보아 사진 을 뜯어먹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못하게 하려고 쫓아다니다 보니 너무 귀 여워서 이렇게 데리고 오게 됐어요" 엘리 드보아라면 작년에 개봉한 '영혼의 그림자'의 여주인공으로, 최근 에 인기 급상승 중인, 나도 잘 알고 있는 여배우다. 원제가 'Shadows of Night' 였던가... 그런데 여배우 사진을 뜯어먹는 고양이라. "고양이가 쥐는 안 잡고 웬 여배우 사진을 뜯어먹는데?" "글쎄요. 그거야 스테아 마음이지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매일 같이 이것저것 뜯어먹는 모양이지? 그러니까 그렇게 살이 쪘지" "뚱뚱해서 보기 싫으세요? 귀엽지 않아요?" 귀엽냐고? 나는 말이 나오질 않았다. 그래. 관두자. 사람마다 심미안에 는 차이기 있기 마련이니까. 그나저나 이제는 세헤라자드의 기분이 꽤 나 아진 것 같아서 다행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빨리 돌아왔어? 좀 더 놀다가 오지. 어스넷이 더 편 하지 않아?" 양복저고리를 벗어 던지면서 내가 물었다. "사실 이것저것 좀 구해 올 게 많았는데요, 좀 이상한 일이 있어서 빨 리 돌아왔어요" 세헤라자드는 돌아왔다는 표현을 썼다. 이제는 나나 세헤라자드나 거의 완전히 서로에 대해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이상한 일?" "누가 절 뒤쫓는 것 같았어요... 아, 사람이라는 말이 아니라 프로그램 이요. 제가 가는 곳마다 계속 추적해 오더라고요. 그러다가 엘리 드보아 홈페이지에서 절 캡춰하려고 하잖아요? 그걸 피하느라고 얼결에 스테아를 데리고 돌아오게 된 거에요. 다행히도 비류 님 시스템 보안 장치가 좋아 서 이곳까지 오지는 못하더라고요" 하긴. 내가 보안에 좀 신경을 쓰기는 했다. 뭐 내가 국가 안보나 세계 평화에 관련된 데이터를 취급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스팸 메일 보내는 치들이나 폭탄 메일 보내는 이상한 친구들 (주로 소오드엔매직 온라인에 서 나에게 패한)로 부터 내 시스템을 보호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아마 세헤라자드를 추적했다는 그 프로그램도 그런 업자들일 가능성이 높 았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혹시 내가 엘리 뒤보아 홈페이지에 간 걸 알고 '엘리 뒤보아 누드 사진 100메가! 일단 가입만 하시라!' 따위의 스팸 메 일을 보낼 궁리는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참. 오늘 계약은 어떻게 되셨어요?" "응. 했어" 나는 계약 내용을 설명해 주려다가 관뒀다. 세헤라자드에게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 계약 조건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어찌되었건 다 네 덕이야. 선물을 하나 해 주고 싶었는데... 뭐가 좋 을지 몰라서 그냥 들어왔어. 뭐 필요한 거 있어?" "예? 선물이요?" 선물이라는 말에 깜짝 놀라면서 세헤라자드가 말했다. 뜻밖이라는 표정 이었다. "핸드컴은 어때? 그럼 밖에 나갈 수도 있지 않을까?" "안돼요!" 세헤라자드가 갑자기 소리치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몸을 움츠리고 말았 다. "저를 복사하는 일은 안 되요.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른다고요. 어떤 일 이 생기게 될지 정말 아무도 몰라요. 저와 똑같은 제가 생긴다면... 휴. 생각만 해도 끔찍해요. 그 얘기는 나중에 해요. 제가 저 자신을 더 잘 알 게 된 다음에요" 세헤라자드가 복사되는 걸 싫어할 지는 몰랐다. 아직도 나는 세헤라자 드를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헤 라자드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지 않았으니 말이다. 누구라도 자기 자신이 복제된다면 그렇게 좋은 기분은 아닐 거다. "그래도 밖에 나가고 싶지 않아? 답답하지 않아?" "가끔씩 그러긴 한데요..." "그럼 랩탑 베터리는 어때? 내가 사 줄 수 있어" "...그럼 저 데리고 밖으로 나가기도 할 거에요?" 수줍은 듯 웃으면서 세헤라자드가 말했다. "물론이지. 같이 햇빛이나 쬐면서 얘기하는 것도 좋을 거야" 사실 내가 랩탑이 꼭 필요하다고 느꼈던 이유는 공원에서 햇빛을 받으 면서 게임을 플레이 해보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세헤라자드와 함께 라면, 게임은 못하겠지만 얘기는 많이 나눌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이 들었다. 꼭 데이트 같겠는데? "참. 나 옷 갈아입어야 하는데, 이거 어쩌지?" 나는 양복을 벗으려다 말고 세헤라자드에게 물어보았다. "안 봐요. 변태는 아니라고요" 아무리 그래도 세헤라자드가 뻔히 볼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냥 옷을 갈아입을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나는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바지 를 막 벗으려는데 누군가 초인종을 눌렀다. 그래서 나는 대충 위에다가 양복저고리만 걸치고 화장실에서 나왔다. 이건 또 무슨 일이람? "어스폴에서 왔습니다. 문 좀 열어 주십시오" 굵직한 사내의 목소리였다.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걸 느낄 수 있 었는데, 그건 낯선 남자의 굵고 거친 음색의 목소리 때문이 아니라 어스 폴이라는 말 때문이었다. 아무리 선량하게 사는 사람이라고 해도 어스폴 이라는 말을 들으면 긴장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전 세계 어느 곳에서 든 수사권을 발휘할 수 있고, 통합정부의 지원을 받는 초국가적인 수사기 관이 자신을 찾는다고 하면 일단 기억을 더듬어보게 되기 마련이다. 털어 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고, 어스넷에서 등록번호를 찾아 정식으로 등 록시킨 프로그램을 사용해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예, 저, 잠시만..." 나는 어스폴 수사관을 사칭하는 강도들이 많다는 말을 뉴스에서 그렇게 많이 들었으면서도 아무 생각 없이 문을 열어주고 말았다. 문 밖에는 검 은 양복에 검은 선글라스를 낀 시커먼 얼굴의 사내가 하나 서 있었다. 사 내는 먼저 내 이름을 말하더니 본인이 맞느냐고 물었다. 물론 나는 그렇 다고 대답했다. "어스폴 이진우 수사관입니다. 잠시 물어 볼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들 어가도 좋겠습니까?" 이진우 수사관은 신분증을 보여주면서 이렇게 말하고는 내 대답을 기다 렸다. 나는 신분증의 사진과 얼굴을 비교해 볼 시간도 없이 수사관에게 들어오라고 했다. 내가 자리를 권하기도 전에 수사관은 내 책상에 털썩 앉았다. 실내에서도 선글라스를 벗지 않다니 좀 이상했다. 어스폴 수사관 들은 원래 다 그런가? "늦은 시간이고 하니까 간략하게 물어보겠습니다. 온라인에서 사용하는 별명이 비류 맞습니까?" "예" "잠시. 기록을 좀 보지요. 부모님은 캐나다에 계시고, 이곳에선 혼자 사시는 군요. 사회 보장 기록에 따르면 중학교 3학년 때부터 혼자 사신 걸로 되어 있고... 생활비는 매달 부모님이 부쳐주시는 군요. 이상의 사 실이 확실합니까?" "예" "마약이나 환각제를 복용하신 경험이 있나요?" "예?" "그냥 형식적인 질문입니다. 마약이나 환각제를 복용하신 경험이 있나 요?" "아니오" "유민철 씨를 아십니까?" "예" 유민철이라고 하면 소오드엔매직 온라인에서 에도다이묘 편에 붙어 나 를 배신했던 친구였다. 마법으로 불태워버린 게 너무 잔인했나? 설마... 그것 때문에? 아니면 그 친구가 무슨 죄라도 지었단 말인가? 그것도 어스 넷이 나설 만한 국제적인 범죄를? 혹시 그 친구가 마약이라도 했단 말인 가?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내 머릿속에는 별별 생각이 다 떠올랐다. "유민철 씨 게임 닉네임이 오소리가 맞습니까?" "예" "지난 새벽, 소오드엔매직 온라인 상에서 유민철 씨와 좋지 않은 관계, 다시 말해 서로 대립하는 관계였던 게 사실입니까?" "예" "비류 씨는 과도하게 복수심에 불타 마법으로 유민철씨를 태워버리신 것도 사실이고요?" "예" 이 질문에서 나는 다시 한 번 가슴이 내려앉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 게 죄가 된단 말인가? 이럴 줄 알았으면 대충 칼로 죽여 버리던가 포로로 잡는 건데... 설마. 그런 황당한 일이 있을라고... 어쩐지 세헤라자드의 이야기 속에 나오는 순무 행정담당관 앞에 서서 질문을 받고 있다는 느낌 이었다. 무조건 예, 예하고 있는 나 자신을 생각해 보니 말이다. "금일 20시에서 22시 사이에 어디에 계셨습니까?" "저, 손맥 소프트 사에 면접 보러 갔었는데요" "그 사실을 증명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예, 거기 팀장이..." "묻는 말에 짧게 대답해 주세요. 손맥 소프트 사에는 몇 시에 도착하셨 습니까?" "그러니까...한 아홉 시 반쯤이었나...아니, 참 열 시 정각이었는데요" 나는 건물 일 층에서 최 과장을 기다리면서 복고풍 시계를 보았던 기억 을 떠올리면서 말했다. "집에서 나가신 건 몇 시경이셨습니까?" "한 여덟 시쯤이요" "두 시간이나 걸리셨나요?" "제가 시내 지리를 잘 몰라서요..." "알겠습니다. 그러니까 여덟 시에서 열 시 사이에 어디에 계셨는지 증 언해 줄 사람은 없다는 말이죠?" "예" 수사관은 이렇게 쉴새 없이 묻더니 랩탑을 쳐다보았다. 아차! 세헤라자 드를 잊고 있었다. 세헤라자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수사관과 나를 번갈아가면서 보고 있었다. "저, 그건 제가 좋아하는 시뮬레이션 게임입니다" "저도 압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리는 데, 묻는 말에만 대답해 주세 요" 나는 안도의 한 숨을 내 쉬었다. 어스폴에서 내가 이상한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어쩐지 안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어스 폴이 알면 문제가 생길지도 모르고, 문제가 생기지 않더라도 귀찮아 질 게 분명했다. 내일 프로 게이머로서 첫 걸음을 내딛는 내가 번잡한 일에 휘말려서 시간을 낭비할 순 없다. "저, 그런데 무슨 일인지 물어봐도 되나요?" "금일 20시에서 22시 사이에 유민철 씨 댁에 불이 났습니다. 유민철 씨 는 그 자리에서 불타서 숨졌고요" 나는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오소리, 그 자식이 그렇게 죽었단 말인가? "아직까지 살인인지, 사고인지, 혹은 자살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일 단 저희 어스폴에서 사건을 맡았으니 곧 밝혀지리라 생각됩니다. 비류 씨. 중요 참고인자격으로 동행을 요청합니다. 허락하시겠지요? 거부하실 수도 있지만 만약 거부한다면 나중에 귀찮은 일이 더 많아질 겁니다" 나를 범인으로 생각는 건가? 나는 세헤라자드를 바라보았다. 세헤라자 드는 아무 말도 없이 스테아를 쓰다듬어주면서 나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걱정스러워 하는 눈빛이었다. 나는 대답을 망설였다. "비류 씨는 어제 플레이로 일약 아마리그의 대 스타가 되셨더군요. 그 래서 프로팀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온거고요. 모든 아마 게이머들이 꿈꾸는 일을 이루셨습니다. 맞지요?" "...예" "그런데 어제 승리는 비류 씨가 유민철 씨를 꺾고 얻으신 거지요. 그리 고 다음 날, 유민철 씨는 불에 타 숨졌다... 어쩐지 우연치고는 생각해 볼 여지가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만약 지금 동행하지 않으시면 나중에 검사 앞에서 이 우연에 대해서 꽤 오랫동안 설명해야 할 겁니다. 그러니 그냥 따라오시는 게 좋을 겁니다. 어차피 오늘은 그렇게 오래 걸리지도 않을 테니까요" 시커먼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웃음까지 지으면서 이진우 수사관이 말했 다. "예" 결국 나는 설득 당하고 말았다. 옷가지를 마저 챙겨 입고 문밖을 나서 다, 나는 세헤라자드를 한 번 돌아보았다. 세헤라자드의 근심 어린 표정 을 보니 가슴이 뜨거워졌다. 목에 뭔가가 걸려 있는 느낌이었다. 수사관은 밖에 후버카를 대기시켜두고 있었다. 장관급 인사들 조차 방 탄처리 된 리무진 정도가 고작인 세상에 후버카 같은 고급 차를 몰고 다 닌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어스폴의 위세에 질려버렸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N:김상현 #9538/10199 ━━━━━━━━━━━━━━━━━━━━━━━━━━━━━━━━━━━━━━━━ 제 목:[탐그루] 영혼의 에뮬레이터 3 57 관련자료:없음 23/23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1-09 00:25 조회:1123 탐그루 # 마법은 마음이다 - 마음은 칼이다 # 난생 처음 타보는 후버카였다. 지하철의 자기부상열차와 비슷한 방식으 로 작동하지만 승차감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차는 정말 허공에 떠서 가 는 것처럼, 아니 실제로 떠서 가기는 하지만,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앞으 로 나갔다. 꼭 전설 속에 나오는 날으는 양탄자에라도 오른 기분이었다. 후버카의 운전사도 검은 옷에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어두운데도 불구하고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걸 보니, 선글라스는 실용적인 목적에서 라기 보다는 전시용이겠다 싶었다. 후버카는 소리 없이 시 외곽으로 질주하더니 깊은 산 속을 지나 한 참 을 달렸다. 나는 창 밖을 내다보았다. 붉은 하늘 아래 도시의 불빛이 어 지럽게 번쩍거리고 있었다. "비류 씨. 만약 여기서 뛰어 내리면 목뼈가 부러지던가 아니면 총에 맞 던가 둘 중 하나입니다" 이진우 수사관의 말에 나는 도망갈 생각이 없다고 해명하고 싶었다. 그 리고 친구 놈이 죽은 것과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다고 말하고도 싶었다. 하지만 이진우 수사관의 시커먼 얼굴 앞에 나는 주눅이 들고 말았다. 그 래서 나는 겨우 '예'하고 대답하고 말았다. "도시의 불빛이 보이는군요" 이진우 수사관이 말했다. 나는 또 한 번 '예'하면서 창 밖을 바라보았 다. 온통 노랗고 빨간 도시의 불빛들. 사실 불빛이 더 환하게 보인 다는 점과, 하늘이 붉어졌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낮과 밤은 그리 큰 풍경의 차 이를 보이지 않는다. 낮과 밤이 별 차이가 없어진 건 순전히 인공적인 불 빛 때문이다. 하지만 생활하기는 더 편해진 것 아닐까? 나는 불을 끈 방 처럼 밖도 어둡다는 사실을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옛날 사람들은 그런 어둠 속에서 어떻게 밖을 돌아다녔을까. "국경에 가보신 적 있습니까? 그곳에는 아직도 불빛이 없는 곳이 있지 요. 그곳에서는 땅에 반짝이는 불빛 대신 별이 하늘에서 반짝인답니다. 상상해봐요. 땅은 온통 시커먼데 하늘엔 점으로 반짝이고 있는 빛들을. 그건 참으로 아름다운 광경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이진우 수사관의 눈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글라스 밑에 가려진 눈빛을 보면 그말이 과연 진심인지, 아니면 반어적 표현인지를 알 수 있을텐데. "문명이 발전한 때문이지요. 사라질 것들은 사라지기 마련 아닌가요?" 가만히 듣기만 하는 것도 좀 이상하다 싶어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이 만들어낸 불빛, 전등, 전광판, 네온사인, 스카이라이트, 물 론 컴퓨터도 있지요. 하지만 그것들이 영원하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전 아 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들은 언젠가 사라집니다. 그리고 별빛은 인간이 모두 없어지는 그날이 와도 조용히 저 하늘에서 우리를 굽어보고 있겠지 요. 가이아를 아십니까?" "가이아 이론이라면 들어 본적 있어요. 하지만 그런 걸 믿는 사람은 어 린아이들 뿐이나, 어린아이 같은 어른들 뿐 아닌가요. 지구가 살아있는 생명체라니요" "들어보신 적이 있군요. 물론 저도 가이아 이론 신봉자는 아닙니다. 하 지만 가이아의 입장, 그러니까 지구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면 단순히 동 화적인 생각이라고 만은 할 수 없을 것 같군요. 오십 억 년이라는 세월동 안 하늘에서 반짝이던 별빛이 지구의 일생으로 본다면 불과 몇 초에 불과 한 시간동안 존재한 인간에 의해 사라졌습니다. 비류 님이 그런 입장이라 면 어떠시겠습니까. 만약 암세포가 몸에 퍼져 순식간에 눈이 보이지 않게 된다면요" "아마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겠지요. 수술이나, 항암제 주사라든가 뭐 그런 거요..." 나는 농담처럼 웃으면서 말했다. 어쩐지 대화가 좀 심각하게 진행된다 싶어서였다. "그렇지요. 비류 씨처럼 아마 지구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곧 자 신의 몸에서 자라난 암세포들을 멸절시켜 버리겠지요. 그것도 단 한 순간 에요. 물론 지구가 그 결정을 내리는 데에는 몇 초의 시간이 필요할 겁니 다. 그리고 아마도 우리는 그 몇 초의 시간동안 겨우 존재하고 있는 건지 도 모릅니다" "종말론을 믿으시나요?" "제 얘기는 종말론이 아닙니다. 어느 시기고 종말론자들은 있어왔지요. 하지만 대게 그들은 종말을 강요하여 인생을 포기하는 사람들을 만들어내 고, 그들이 포기한 인생을 빨아먹는 기생충들이었습니다. 객관적으로 볼 때, 인간이 닥친 위기는 두 가지 입니다. 가이아의 분노와 무작정 서로 증오하게 된 인간들이지요" "내부의 적과 외부의 적이라는 말처럼 들리네요. 언제나 있어온 위협에 대해 너무 심각하게 말씀하고 계신 거 같아요. 환경문제가 거론된건 산업 혁명이후 계속이었고, 통일전쟁 때 핵무기를 남발 했다면 지구가 남아났 겠어요? 사실 통일전쟁이후 통합 정부가 들어서면서 핵전의 위협은 사라 졌잖아요" 나는 어스넷에서 주워들은 상식들을 꿰어 맞춰가면서 이렇게 시사 평론 가 흉내를 내어 보았다. "그렇지만 국지전은 언제나 존재하지요. 지금 일어나고 있는 브라질리 아 공화국의 내전도, 네오 아랍 연방의 왕위 계승권 분쟁도 그렇지요. 그 리고 그것들은 언제 전면전으로, 핵전으로 확대될 지 모르는 불타는 화약 고와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였다는 말을 들었어요. 인류 역사상 전쟁으 로 사람이 죽지 않은 날은 하루도 없었다는 말도요" "그런 날이 영원히 계속될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운이 좋은 도박사라 도 시작해서 끝날 때까지 풀하우스가 계속 나올 수는 없죠. 언제 스네이 크아이가 나올지 아무도 모르죠" 스네이크아이는 주사위 두 개를 던지는 게임에서 둘 다 일이 나오는 최 악의 경우를 말한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다. 라스베가스 사이트에서 장난 삼아 보드 게임을 해본 게 이럴 때 도움이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최악의 경우는 존재하지 않았던가요? 세 번의 세계 대전이 있었고, 두 번의 전술 핵무기 사용이 있었고, 또 통일 전쟁이 있었고요. 하지만 인류 는 존재하잖아요. 도시의 저 불빛처럼 말이죠" "설마 전쟁을 좋아하는 건 아니겠죠. 비류 씨는 전쟁으로 인류가 발전 했다고 보십니까?" "전 다만 전쟁을 인정하는 거에요. 있는 걸 있다고 말할 뿐이라고요" "그래서 소오드엔매직 같은 게임을 좋아하시는군요. 어차피 게임인데 어떠냐 하는 생각으로. 비류 씨는 전쟁이 어떤 건지 아십니까? 사람이 죽 는 걸 본 적이 있나요?"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이진우 수사관의 유도심문에 넘어갔다는 느낌 이 들었다. 나는 아니라고 조그맣게 대답한 다음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예언의 날은 오늘이고, 오늘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세익스피어의 대사였다. 고전 게임 시리즈를 즐긴 게 이럴 때 도움이 될 줄이야. 게임을 열심히 하는 게 유식해 지는 길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한 우물을 파라는 말은 이럴 때 적용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 이 들었다. 한 이 십분 쯤 달렸을까. 산 중턱에 서 있는 어스폴의 지부에 도착했 다. "안가입니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예?" "안전 가옥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서부터는 안심하셔도 됩니다" 아니 내가 무슨 범죄 조직에 쫓기는 범죄자라도 된다고 저런 말을 하는 건지. 하지만 나는 이번에도 그냥 '예'하고 대답하고 말았다. 건물은 이 층이었는데, 그야말로 실용적으로,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직사각형으로 빈틈없게 지어진 건물이었다. 낮은데다가 두꺼운 벽면으로 되어있어서, 웬만한 폭격에도 끄떡없겠다 싶었다. 하지만 좀 규모가 작은 건 아닌가 싶기도 했다. 정문을 통과할 때, 나와 이진우 수사관은 전자검색대를 지나야했는데, 이진우 수사관은 자신의 총을 경비에게 주고 그곳을 지나갔다. 이진우 수 사관의 총은 지난 세기를 배경으로 하는 게임에서나 볼 수 있는 화약식 9 밀리 15연발 자동권총이었다. 빔 무기가 있는 세상에 저렇게 위험한 골동 품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도 있나 싶었다. 검색대의 금속 탐지 장치가 반짝이는 게 보였다. 금속 탐지 장치 밑를 지날 때, 나는 전자파가 내 몸을 뚫고 지나간다는 생각보다는 오히려 이 진수 수사관과 경비의 시선이 내 속을 훤히 뚫어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 다. 나는 이진우 수사관을 따라 지하로 내려갔다. 그런데 걷는 모습이 이상 했다. 아니, 그냥 보기에는 별로 이상할 것이 없었지만, 오른 발이 땅에 닿을 때 나는 소리와 왼 발이 땅에 닿을 때 나는 소리가 틀렸다. 왼발이 내는 소리가 더 크다는 걸 알아차렸을 때, 나와 이진우 수사관은 한 엘리 베이터에 타게 되었다. "긴장하기 마세요, 비류 씨. 여기는 죄 없는 사람을 다그쳐 죄를 만드 는 그런 구시대적인 곳이 아닙니다" 이진우 수사관은 다시 한 번 웃으면서 말했는데, 꼭 내 귀에는 '여기는 죄 없는 사람도 다그치면 죄가 나오기 마련인 곳'이라고 하는 것처럼 들 렸다. 나는 '예'하고 대답을 하기는 했지만 어쩐지 주눅이 들어서 어깨를 움츠렸다. 이러다가 정말 죄인처럼 보이게 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었 다. 엘리베이터는 지하로 한도 끝도 없이 내려가갔다. 이렇게 깊을 리가 없는 데. 물론 후버카를 타고다니는 어스폴의 지부가 이층 건물이라면 당 연히 지하가 꽤 깊을 거라는 생각을 하고는 있었지만, 이건지나치게 오래 내려간다 싶었다. 어쩌면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느낌이 들게 하기 위해 엘리베이터가 내 려가는 시간을 조작해 두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동을 좀 주고 소리가 계속 나게 말이다. 그런데 일단 조작이라는 생각이 들자 이 진우 수사관의 태도며 겨우 불에 탄 시체 한 구 때문에(어스폴이 관여하 는 사건들은 보통 국가 원수 암살이나 비행기 폭파쯤 되는 사건들이다) 나 같은 평범한 열 일곱 살 짜리 애를 여기 까지 데리고 온 게 다 장난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면 '속았죠? 깜짝 카메라 였습니다! 기분이 어떠셨습니까?' 하고 누군가 마이크를 들이대면서 나타 날 것 같았다. 하지만 문이 열리자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조명과 카메라가 아니라 어두 컴컴한 복도였다. 나는 꼭 지옥의 입구에 도착한 기분이 들었다. 불안감 이 엄습했다. "자. 따라오시죠" 나는 여전히 주눅이 들어서 꼭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이진우 수사관 을 따라갔다. 취조실이라고 쓰여 있는 문 앞에 도착했을 때, 나는 도살장 에 끌려간 소의 기분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안은 벽면에 큰 거울이 하나 달려 있었고, (영화에서 본 것처럼 그 너 머에서 누군가 지켜보고 있겠지), 초록색 빛을 내는 스텐드가 놓여있는 책상과 의자 두 개가 놓여 있었다. "비류 씨는 조사를 받으신 경험이 없으시죠. 나이도 나이니 만큼..." 이진우 수사관은 누런 색 표지의 파일을 하나 꺼내 눈으로 읽었다. 실 내에서도 여전히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기 때문에 어디를 보고 있는 지 알 수는 없었지만. "...지금까지 경범죄 한 번 저지른적도 없군요. 아주 깨끗해요" 이진우 수사관의 말은 상당히 도발적으로 들렸다. 꼭 죄가 없는 게 죄 라도 된다는 듯한 말투였다. "시작하죠. 먼저 20시부터 22시 사이에 있었던 일을 말씀해 보세요" 나는 순서대로 천천히, 그리고 자세히 대답을 했다. 선글라스를 쓴 이 진우 수사관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고 내 말을 듣기만 했다. 나는 이진 우 수사관이 내 말을 믿어주지 않는 것 같아서 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껌 과 초코렛을 꺼내 보여주면서 이게 다 손맥 소프트사에 가는 길에 산 거 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좋습니다.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취조에 들어가지요" 이진우 수사관은 고개를 한 번 끄덕 하고는 질문을 시작했다. "유민철 씨, 그러니까 별명이 오소리죠. 어떻게 알게 되셨습니까" 이렇게 취조는 시작됐다. 유민철이 좋아하는 음식은 무엇이었는가? 온 라인 상에서 유민철과 만난 시간은 보통 언제인가? 온라인상에 나눈 대화 내용은 주로 무엇이었는가? 유민철이 좋아하던 게임은 무엇이었는가? 유 민철의 취미는? 유민철이 좋아하는 여성상은? 이런 질문들이 계속 이어지 자 나는 내가 아는 유민철에 대한 취조를 받고 있는 게 아니라 꼭 스켄들 난 연애인에 대해 묻는 기자들과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메니저라도 된 기 분이었다. 이런 저런 대답들을 하는 과정에서, 물론 나는 최대한 피해가려고 했지 만, 어쩔 수 없이 자잘한 나의 범죄사실들이 드러났다. 아이디 도용, 불 법 복제 소프트웨어 구입, 게임 정보를 얻기 위한 해킹, 미성년자 음란물 접촉 등... 대답하지 않고는 얘기를 할 수 없게 물어보는 이진우 수사관 의 집요한 질문 때문이기도 했지만 내 생각에 그건 내 얼굴을 향해 비추 어진 초록색 빛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어스넷 계시판에서 읽 은 자백을 하게 만드는 불빛에 대한 잡담이 떠올랐다.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빛에는 그 색에 따라 각각의 속성이 있다고 한다. 붉은 빛은 사람을 흥분되게 만들고, 푸른빛은 사람을 냉정하게 만들 고, 노란빛은 사람을 편안하게 만들고 초록빛은 사람을 잠들게 한단다. 그 런데 초록색 불빛 앞에 선 사람은 잠이 올 만큼 마음이 편안해 져서 도저히 거짓말을 할 수 없게 되며, 최근 수사기관에서 실험적으로 이를 응용하고 있다는 게 그 게시판에 적혀 있었던 내용이었다. 역시 이곳은 죄인을 만드는 곳이었어...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중 얼거린 순간, 나는 혹시 이진우 수사관이 듣지 않았을까 가슴이 철렁 내 려앉았다)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진우 수사관은 나와 유민철이 저지 른 어스넷 상에서의 자잘한 범죄 사실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중요 참고인으로 오신 분의 증언을 가지고는 죄를 물을 수는 없습니 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러고 보니 영화에서 본 것처럼 '변호사가 오기 전까지는 한마디도 안 하겠소' 하고 말할 걸 그랬나보다 싶었다. 하지만 이진우 수사관의 선글 라스 밑에 가려져 있는 눈초리를 생각해보니 도저히 그런 말은 입밖에 낼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무엇보다 변호사를 살 돈도 없고 말 이다) 질문은 끝도 없이 계속 이어졌다. 내가 대답을 하면 이진우 수사관은 그냥 고개만 끄덕이고 넘어가는 부분도 있었고, 또 어떤 부분에서는 자세 히 물으면서 뭔가 적기도 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배가 고파올 무 렵이 되자, 이제 나는 나보다 유민철에 대해서 더 잘 알게 된 느낌이 들 고 있었다. 내가 이런 사실까지 알고 있었나 싶었던 대답들을 계속 했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서 언젠가 오소리 녀석이 꼭 한번 자신은 동성애자 들을 혐오한다는 요지로 '그런 것들은 다 성전환 수술을 받지 않으면 거 리를 걷지 못하게 만들어야 해' 하고 말했던 적이 있었는데, 나는 그런 것까지 다 기억해냈던 것이다. 수사관의 집요함 때문인지, 아니면 초록색 빛 때문인지 모르겠다. 영원히 계속 될 것 같았던 질문은 결국 끝났다. 나는 고개를 책상에 박 고 잠시 쉬었고, 이진우 수사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고개를 들었 다. 그런데 단 한순간, 이진우 수사관이 눈을 비비기 위해서 선글라스를 벗었다. 이진우 수사관의 눈동자는 탁한 회색이었다. 인조 눈이구나. 아 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다리도 아마 티타늄으 로 만들어진 인조 다리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이진우 수사관은 혹시 통일전쟁 참전 용사가 아닐까? 하지만 내 의문을 확인할 틈은 없었다. 나는 바로 취조실에서 나와 다 시 엘리베이터에 올랐기 때문이었다. 올라가는 길도 내려오는 길만큼이나 길었다. 아무래도 조작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색대를 지나 안전가옥 밖으로 나갔을 때, 정오의 햇빛이 눈부시게 내 려 쬐고 있었다.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잠 한 숨 못 자고, 빵 한쪽 못 먹은 나는 아주 탈진 직전이었다. "참고인 조사시간은 열 두 시간이 한계이기 때문에 그냥 돌려 보내드립 니다. 하지만 조만 간에 정식 조사가 있을 예정이니까 준비해 두시는 게 좋을 겁니다. 그런데 하나 개인적으로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또 질문인가? 나는 짜증이 났지만 해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비류라고 닉을 정하신 데는 무슨 이유가 있는 겁니까?" "그냥...사전 펼쳐서 찾은 이름이에요. 무슨 왕 이름이라고 하던데요" "비류 왕은 비류 백제를 연 국왕이었습니다. 훗날 아우인 온조 백제의 왕 온조와 대립하게 되지요" 이진우 수사관은 선글라스를 벗었다. 탁한 회색 눈동자가 햇빛 아래 드 러났다. 진짜 회색 눈동자구나. 인조 눈이 분명했다. 인조 눈을 직접 본 게 처음이라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꼭 다른 생명체를 보고 있는 듯한 느 낌이 들었다. "눈치채셨는지 모르겠지만, 이 눈은 통일전쟁 때 얻은 눈입니다. 그리 고 이 다리도 통일전쟁 때 얻은 다리지요. 전쟁에 참전한 사람이었을 거라는 내 예상이 맞았다. 나는 이진우 수사 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시커먼 얼굴에 햇빛이 닿자 전쟁에서 얻은 화상 을 피부이식 수술로 메운 흔적이 드러났다. 꼭 그림 위에 물감을 두껍게 발라놓은 듯 이진우 수사관의 얼굴에는 층이 져 있었다. "오늘 아마 그리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저 역시 나이 어린 게이머를 수사하는 일이 그리 흥이 나는 일은 아니지요. 온라 인 게임이나 즐기는 친구들이 진짜 삶이 어떤 건지 뭘 알겠어요. 아... 미안합니다. 비류 님을 두고 한 말은 아닙니다." "소오드엔매직 온라인을 싫어하시나요?" "아주 개인적인 사견입니다만, 그런 전쟁게임을 즐기는 사람들, 혹은 빔 레이져를 가지고 서바이벌 게임을 하는 사람들, 저는 아주 혐오합니 다. 전쟁이 뭔지 아십니까? 사람이 죽는다는 게 뭘 뜻하는 지 아십니까? 죽는 거라구요. 끝이란 말입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N:김상현 #9602/10199 ━━━━━━━━━━━━━━━━━━━━━━━━━━━━━━━━━━━━━━━━ 제 목:[탐그루] 영혼의 에뮬레이터 3 58 관련자료:없음 24/24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1-10 00:29 조회:1130 탐그루 # 마법은 마음이다 - 마음은 칼이다 # 두 번째 듣는 물음이었다. 나는 무슨 대답을 해야 좋을 지 몰랐다. 그 냥 모른다고 대답하자니 성의없이 말하는 것 같은 인상을 주게 될 것 같 고, 그렇다고 안다고 대답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예의 바른 말투에서 나온 말치고는 너무나도 도발적인 말이었다. 하지만 이진우 수사관의 질 문에 분명 나는 기분이 상했다. "미안합니다. 좀 흥분했군요. 어쨌든, 이번 사건 제가 자원해서 맡았 습니다. 그리고 어떻게든 해결할 생각입니다. 곧 다시 뵙게 되겠지요" 이진우 수사관의 탁한 회색 눈이 반짝였다. 나는 이진우 수사관을 바라 보는 게 짜증이 났다. "저도 개인적인 것 하나 여쭤봐도 될까요?" "그러시죠" "그 양복하고 선글라스는 어스폴에서 지급되는 건가요?" "...꼭 그런 건 아닙니다" "지급되는 거라면 당장 디자인 바꾸라고 탄원서라도 내고 싶은 심정이 라서요. 그런 촌스러운 선글라스에 양복은 처음 봐요" 나는 화를 억누르고 있다는 티를 있는대로 내면서 이진우 수사관에게 말했다. "다음에 다시 뵙게 될 때 참고하지요" 역시 기분이 상한 게 분명했지만 그래도 예의 바른 예의바른 말투로 이 진우 수사관이 말했다. "이왕 참고하시려면 총도 좀 바꿔주세요. 화약식 총을 가지고 다니는 수사관 옆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무섭네요. 그런 구식 총은 언제 폭발할 지 모르잖아요" 이진우 수사관은 내 말에 대꾸도 하지 않고 어스폴의 이층 건물 안으로 휙 돌아 들어가 버렸다. 나는 그래도 한 방 먹여줬다는 생각에 씨익 웃으 면서 한 참을 걸어나와 큰길까지 나갔다. 마침 지나는 택시가 있었다. "손님 어디서 밤샘이라도 하신 모양이지요?" 노란 정복에 모자까지 쓴, 젊은 택시 운전기사가 나에게 물었다. "어스폴 지하 취조실에서 살인 사건 중요 참고인으로 밤샘 조사를 받았 다면 믿겠어요?" "그거 참 우연이로군요. 저도 밤새 어스폴 국장을 태우고 창녀촌을 돌 아다녔는데요" 낄낄거리면서 택시운전기사가 말했고 나는 집 위치를 대충 말해준 뒤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집에 돌아가자마자, 나는 침대에 몸을 던졌다. 세헤라자드도 내 언짢은 기색을 눈치챘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 얼굴을 비추던 초록 색 불 빛과 끝없이 이어지던 질문들과, 장님이나 끼면 딱 좋을 것 같은 선글라 스를 생각하다가 잠이 들었다. "일어나세요. 벌써 일곱 시 반이에요" 세헤라자드의 목소리에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꿈을 꾼 것 같기는 한데 무슨 꿈이었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다만 벌거벗은 채, 이진우 수사관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받던 광겅은 기억이 났지만 말이다. 나는 일 곱 시 반이 오전을 말하는 걸까, 오후를 말하는 걸까 한 참 동안 생각하 다가 여덟 시까지 오라는 팀장의 말을 떠올리고는 벌떡 일어났다. "이런! 제길! 빌어먹을! 젠장!" 나는 누구한테 하는 건지도 모를 욕설을 퍼부으면서 대충 옷가지를 챙 겨 입었다. 그리고 세수는 할 생각도 하지 않고, 주머니 안에 있던 이를 닦을 새도 없이 껌을 대신 씹으며 집밖으로 뛰쳐나갔다. 나 자신도 믿기 어려울 정도의 속도로 지하철역까지 뛰어간 다음, 자기부상열차가 역에 정차할 때마다 속으로 욕설을 지껄이며 발을 동동 굴렀다. 역에서 내리자 마자 간밤에 익혀두었던 길을 찾아 정신없이 손맥 소프트사가 있는 건물 까지 갔다. 도착하자마자 시계를 보니 복고풍의 시계는 여덟 시 십 오 분 을 가리키고 있었다. "또 오셨는감? 최 과장 불러드릴까?" "나중에 시간 나면요" 무슨 수위의 말이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대충 아무렇게나 말 하고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이십 이층까지 올라갔다. 내가 이십 이층에 닿 았을 때, 마침 팀장이 사무실에서 나오고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비류! 어스폴에서 수사관이 다녀갔어요" 나를 보더니 대뜸 팀장이 이렇게 물었다. "죄송합니다, 이거, 첫날인데, 늦잠을, 긴장이 되다보니... 그리고 어 스폴은 참고인 조사 때문에 다녀왔던 겁니다" 팀장의 표정이 찡그려졌다. "프로 선수는 이미지가 중요한데... 하여간 큰 일이 아니었으면 좋겠네 요. 물론 이런 일에 대한 대비책으로 정식 계약까지 한 달의 유예기간을 두는 거긴 하지만요... 선수 대기실은 저 쪽이에요. 가면 우리 직원들이 알아서 다 해줄 거예요" 나는 알겠다고 말하고 팀장이 가리킨 방향으로 빨리 걸음을 옮겼다. "잠깐. 껌은 뱉고 가요" 팀장이 등뒤에서 말하기 전까지 나는 내가 껌을 씹고 있었다는 사실조 차도 잊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껌을 뱉어 주머니 안에 있던 껌 봉지에 싼 후, 다시 그것을 주머니에 넣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 있는 사람들은 벌써 유니폼을 갖춰 입고 있었다. 그중 둘은 초등 학생이나 되었을까 싶은 꼬마 애였고, 나머지 다섯 중 둘은 내 또래의 청 년이었다. 그리고 둘은 나보다 한 두 살쯤 위로 보이는 여자였고, 마지막 으로 사십은 훨씬 넘었을법한 사내도 하나 있었다. "아, 비류 님이시군요. 앉으세요" 청년 하나가 내게 자리를 권했다. 나는 그제야 내가 아주 늦지 않았다 는 생각에 안도하면서 안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선수 대기실은 열 평 남짓한 곳이었다. 양옆으로 긴 의자가 놓여있었 고, 문 맞은 편 벽에는 큰 철제 캐비넷이 하나 놓여 있었다. 나한테 자리 를 권한 청년 말고는 모두 긴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하나같이 나를 똑바 로 쳐다보고 있었다. "비류 님? 반가워요. 난 리파이. 소오드엔매직 게이머에요" 나보다 한 두 살 많을 듯 싶은 여자였다. 키가 크고 굉장히 마른 체격 을 하고 있었는데, 게이머라기 보다는 모델 쪽에 더 가까운 외모가 아닐 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잠깐만요. 음. 직모로군요. 영양이 부족해서 윤기가 별로 안 나는 머 리네요. 일단 정돈이 끝나면 영양크림도 좀 해야겠군요. 그리고 짙은 검 은 색 머리보다는 갈색이 나을 것 같아요. 전체적으로 엉망이로군요. 손 봐야 할 곳이 한 두 군데가 아니에요. 짧게 자르는 수 밖에 없을 것 같 은데... 일단 좀 다듬고 시작하지요" 내게 자리를 권했던 청년이 내 목 밑에 흰 천을 두르면서 말했다. "우리 코디네이터에요. 철수라고 부르면 되요" "찰스에요" "본인은 찰스라고 주장하지만" "그리고 코디네이터가 아니라 복장 예술가에요" 리파이의 말에 철순지 찰슨지 모를 청년이 대답했다. "그리고 이 쪽은 실버우드. 역시 소오드엔매직 온라인 팀 중에 한명입 니다" 맞은 편에 있던 짧은 노랑머리 글레머를 가리키면서 리파이가 말했다. "여긴 다 소오드엔매직 온라인 팀이잖아. 일일이 그렇게 덧붙이지 않아 도 되" 소개받은 실버우드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안경을 끼고 턱 선이 얇은, 아주 날카로워 보이는 인상의 여자였다. 이거, 다들 만만한 상대 같진 않 은데. "혹시 오해할까봐 미리 말하는 데 저 둘은 같이 살아. 그러니까 행여 마음에 두지 말라고. 예쁘다고 다 여자는 아니니까..." 사십 줄은 되 보이는 남자가 말했다. "브루터스. 함부로 말하지 말아욧!" 실버우드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나는 움찔 했지만 대기실 안의 선수들 은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난 부르터스라고 하네. 이 바닥에서 이 십 년은 굴러먹었지" "퇴물이라는 말은 죽어도 안 하는군" 이름을 알 수 없는 키가 작고 눈이 큰, 귀엽게 생긴 친구가 말했다. 말 하는 청년의 얼굴에는 냉소가 가득 베어나고 있었다. "아, 소개하는 분위긴가? 난 아톰이야. 참고로 말하자면 난 이성애자 야" 아톰의 말에 실버우드와 리파이가 동시에 '아톰!'하고 소리쳤다. "그리고 이 꼬마 둘은 아무 말도 안 하니까 신경 쓰지 마. 하나는 남자 아이고 하나는 여자아인데 뭐 머리도 짧고 옷도 똑같이 입혀놓으니 누가 누군지 알 수는 없지. 같이 목욕하는 리파이나 실버우드라면 모를까. 원 래 이름은 아람이 보람인데, 보통 우리는 그냥 류와 켄이라고 불러. 아람 이 보람이라는 이름은 못 알아들어. 물론 류와 켄이라고 불러봐도 거의 소용은 없지. 소오드엔매직 온라인하고 원주율 외우는 것 말고는 아무 것 도 안하는 친구들이야" 그러고 보니 류와 켄이라는 두 꼬마는 서로 뭐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는 데 자세히 들어보니 숫자를 번갈아 가면서 말하고 있었다. 아톰의 말 그 대로 누가 여자아이인지 누가 남자아이인지는 알 수 없었다. "쌍동이인가요?" "보통 쌍동이가 아니라 자폐아 쌍동이지. 한 마디로 병신 쌍동이야" "아톰. 말이 좀 지나쳐" "아, 미안해요. 부루터스. 하지만 사실인 걸 뭐"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 하면서 아톰이 말했다. "그럼 제가 소개드릴 차례인 것 같군요. 전 비류 입니다. 오늘 처음 왔 고, 한 달 계약 임시직입니다" 나는 최대한도로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일종의 기선제압을 위한 분 위기 연출을 해보려고 한 것이었는데, 찰스에 의해 머리에 핀이 꽂힌 채 그러니까 꼭 코흘리개 꼬마 여자아이 같은 모습이어서 분위기를 잡는다고 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었다. "아마 리그에서 플레이하는 모습 봤어요. 조금만 다듬으면 훌륭한 게이 머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보이더군요. 하여간 온걸 축하해요" 리파이가 말했다. 분위기로 봐서는 리파이가 주전 선수고 나머지가 서 포트를 하는 입장이 되는 것 같았다. "첫날이니까 정신없죠, 비류 님? 하지만 걱정 말아요. 일단 자리에 앉 아서 마우스만 잡으면 본능적으로 본래 실력이 나올 테니까" 실버우드였다. 날카롭게 소리칠 때의 표정은 어디로 가고 상냥하게 웃 으면서 말이다. 저 여자는 어쩐지 세헤라자드가 이야기에서 들었던 라스 폼 같은 여자라는 느낌이 든다. 조심해야겠어. "칫. 실력은 무슨. 보나마나 잘생겨서 뽑혀온 게 분명해. 요즘은 미소 년 취향 게이머가 인기잖아?" 아톰이 말했다. 이거, 자폐아들을 병신이라고 놀리는 것도 보기 안 좋 았는데, 이건 도저히 못 참겠다 싶었다. 나는 뭐라고 한 마디 쏘아주려고 했지만 부루터스가 나보다 먼저입을 열었다. "너무 신경 쓰지 말게, 비류. 저 친구는 세상 만사를 다 저렇게 생각하 는 친구니까. 무조건 불만이지" "놔 둬요. 이대로 살다가 죽게. 할 줄 아는 거라곤 아무 것도 없는 병 신 같은 게 입이라도 살아 있어야죠. 안 그래요?" "자기 자신한테도 냉소적이지. 이상한 친구야. 하긴, 요즘 세상에 이상 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지. 비류, 자네도 모르지. 혹시 집에 돌아가 면 여자 속옷을 입고 물구나무를 서서는 뭐라고 중얼거리면서 시간을 보 내는 지도" 그 정도까지는 아니고 세헤라자드라는, 인간의 영혼을 에뮬레이션 한 프로그램하고 이야기하면서 지냅니다, 라고 대답하면 역시 이상한 사람 취급 받겠지. 나는 그냥 그렇지는 않다고만 부루터스에게 말했다. 그리고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어때요, 맘에 들어요?" 머리 손질이 끝나자 찰스는 거울을 내 눈앞에 들이밀었다. 이게 나인가 싶을 정도로 머리는 근사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내 긴 검은 색 머리는 어 디로 가고 손에 찔리면 따가울 정도로 아주 짧은 옅은 갈색 머리의 미소 년이 거울 속에 있었다. "맘에 들어요. 근사한데요" "내가 그랬잖아요. 복장 예술가라고" 찰스는 나에게 유니폼을 내밀었다. 나는 대기실 옆에 붙어있는 샤워실 겸 탈의실로 가서 유니폼으로 갈아입었다. 잔잔한 광택처리가 된 회색 옷이었다. 원피스 형식으로 된, 지퍼가 달려있는 옷이었는데, 앞에는 '손 맥 소프트' 뒤에는 '세계 최강의 게임을 위하여'라는 붉은 색 글씨가 쓰 여져 있었다. 옷을 갈아입고 나가자 모두들 한 마디씩 던졌다. 어울린다는 둥, 보기 좋다는 둥... 거의가 다 그저 인사 치례인 것 같았지만. "선글라스만 끼면 어스폴 요원 같겠는데?" "아톰, 어스폴이라는 이름, 함부로 말하지마" 부루터스가 눈을 부라리면서 아톰에게 말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벌써 선수들에게까지 소문이 퍼진 모양이었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면서 대답을 피했다. "어쩌면 MS사 놈들이 의뢰한 짓인지도 몰라. 여기에 도청장치를 해 두 었는지도 모르지" "부루터스. 과대망상이 너무 지나쳐요. 무슨 일이든 다 MS사 짓이라고 하는 것도 한 두 번이지" "리파이. 왜 내 말을 안 믿는 거야? MS사 녀석들은 날 내쫓고 그것도 모자라서 항상 날 감시하고 있다니까. 내가 안전할 수 있는 곳은 오직 바 로 여기, 선수 대기실과 중계실 뿐이야!" "그래서 매일 여기서 사는군요. 식사 때마다 벌벌 떨면서 좌우를 살피 면서 식당으로 가고요, 하하하!" 아톰은 아무리 봐도 좀 지나치다 싶었다. 그런데 MS사 얘기가 뭔지 나 는 궁금해졌다. "MS사가 뭐 어쨌다는 거에요?" "MS사는 이제 기업이 아니라 국가나 다름없어. 그것도 무소불위의 능력 을 가진 대제국이라구" 부루터스는 진지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설명을 했다. "시스템 프로그램으로 컴퓨터 시장을 거의 독점했던 지난 세기에 이어 서 이번 세기에는 거의 모든 프로그램을 독점하고 있다는 건 자네도 잘 알 걸세. MS뮤직 마스터, MS그래픽 마스터, MS비디오 마스터, MS워드 마 스터, MS어스넷 마스터... 거기다가 이제는 트랜스파워 시리즈를 번들로 제공해서 다른 번역기 회사들을 다 망하게 만들고 있지" 독점이든 아니든 MS사 거는 불법 복제 CD만 쓰는 나와는 별 상관없는 얘기였다. "소프트웨어 독점으로 규모가 커진 MS사는 인공위성 산업에 뛰어들어 크게 성공한 다음에 이제는 어스넷을 거의 장악하고 있어. 어스넷을 좌지 우지하는 막강한 힘으로 MS사는 이제 통합정부와 더불어 세계 권력의 양 대 산맥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지. 이제는 그 힘으로 세계를 정복할 야망에 불타고 있는 거야. 어스넷에 용들을 뿌리고 있는 것도 다 MS사의 수작이라고" "용이라고요? 드래곤요?" "아니. 용이야, 용. Y, O, N, G, 용. Your Online Network is now Gone 의 약자지. 제거해야 할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뭐든지 닥치는 데로 먹어버 리는 용" "바이러스인가요?" "아니, 과대 망상이야. 신경 꺼" 키득거리면서 아톰이 말했다. "과대 망상이라니? 용은 MS사에서 오래 전부터 준비해온 네트 상의 인 공 생명체야! 스스로 사고와 진화를 거듭하는 생명체! 아톰, 말조심해! 각국의 대통령, 수상, 국왕들이 모두 MS사에서 미는 사람들이 당선됐다는 거 몰라? 모든 종교의 수장들도 마찬가지라구? 교황인 바울 6세나 25대 딜라이라마, 호메이니 14세, 모두 다 MS사의 지원을 받는 사람들이야" 처음에 용 얘기를 들었을 때, 나는 뚱보 고양이 스테아를 떠올렸다. 하 지만 이건 정말 과대망상이다. 다른 사람들은 매일 듣는 얘기인지 전혀 신경도 쓰지 않고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N:김상현 #9603/10199 ━━━━━━━━━━━━━━━━━━━━━━━━━━━━━━━━━━━━━━━━ 제 목:[탐그루] 영혼의 에뮬레이터 3 59 관련자료:없음 23/23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1-10 00:30 조회:1003 탐그루 # 마법은 마음이다 - 마음은 칼이다 # "이제 MS사 녀석들은 게임시장까지 넘보고 있어. 게임시장은 워낙 넓은 데다가 탄탄한 소프트웨어를 구축하고 있는 회사들이 많아서 독점은 힘들 겠지만 말이야. 하지만 대부분의 게임에 대한 중계권을 소유하고 있으니 그것도 독점이라면 독점이겠지" " 왜, 이번에는 손맥 암행어사들을 노리고 있다고 하지 그러세요?" 실버우드가 이렇게 쏘아주었다. "그래. 바로 그거야. 어스폴 요원들이 비류를 따라다니는 건 우리 손맥 소프트사를 노리고 있기 때문이야. 아니, 어쩌면 나를 노리고 있는지도 몰라. 벌써 십 년 동안 나를 따라다닌 녀석들이었으니까. 나를 바로 노리 고 들어오면 내가 눈치챌까봐 신입 게이머를 추적하는 척하고 있는 거지. 맞아! 이제 나는 살아서 다시는 마우스를 잡을 수 없게 될지도 몰라!" 발작적으로 부루터스가 소리쳤다. 나는 놀란 눈으로 부루터스를 바라보 았지만, 역시 다른 사람들은 늘 겪는 일인지 별 반응이 없었다. "걱정 말아요, 부루터스. 우리가 지켜줄게요" "고마워 리파이, 너밖에 없어" 거의 리파이에게 기대다시피 하면서 브루터스가 말했다. "하지만 진짜 여자였으면 좋았을 텐데" "...부루터스가 남자라는 증거를 못 잡아서 저도 그게 아쉬워요" 리파이의 말에 모두들 웃음을 터트렸다. 다만 류와 켄이라는 꼬마들은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서로 숫자를 계속 이어가고 있었다. "3.14부터야" "뭐라고요, 실버우드?"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해서 나는 이렇게 물었다. "매일 만나면 3.14부터 시작해서 한자리씩 계속 외워 나간다고요" "다음은 1592야, 실버우드. 매일 들으면서 세 자리밖에 못 외웠어?" "아톰. 그렇게 머리가 좋으면서 왜 매일 타이밍 계산은 그렇게 늦지?" "늦는 게 아니야. 정확한 거지. 대충 때려잡는 실버우드의 플레이 방식 하고는 달라" "아아, 그만 둬요. 이번에는 실버우드 차례에요. 앉아요" 이렇게 찰스가 두 사람을 말렸다. 복장 예술가 찰스가 부지런히 나머지 멤버들의 코디를 차례대로 해주는 동안 나는 시시껄렁한 농담이나 들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래도 부루터스의 그 용 얘기는 들어 줄만 해. 바이러스 음모론이 나온 건 사실 꽤 됐거든. 사실 통합정부와 MS사는 필요한 순간에 필요한 정보를 차단하고, 공급할 수 있길 바라지. 그건 어느 시대의 어떤 권력기 관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통합정부와 MS사는 이제 어스넷을 통해 그 야 망을 거의 실현해가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맥락에서 바이러 스 음모론도 나오고 용을 어스넷에 뿌린다는 말도 나오는 거겠지" 부루터스의 강박관념에 대해서 말하다가 리파이가 덧붙였다. "웃기는 소리. 용이 뭐의 약자인줄 알아? Your Obsession Never Gone의 약자라고. 네 강박 관념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아톰의 말에 모두들 웃음을 터트렸다. 원주율을 외우고 있던 류와 켄, 그리고 얼굴이 시뻘게진 부루터스를 빼고 말이다. "그런데, 비류 님. 그 닉 뜻이 뭐에요?" 실버우드가 안경테를 손가락으로 올리면서 물었다. "백제의 왕 이름이에요. 전신으로 추앙 받고 있는" 나는 이진우 수사관에게 들었던 말과 내 생각을 대충 합쳐서 이렇게 말 했다. "역시. 소오드엔매직 온라인에 딱 맞는 닉이네요" "근사해. 혹시 그 비류 왕이라는 사람, 딸은 없었나? 있으면 그 이름 내가 가지게" "닉 바꾸지 마. 인기 떨어져" "언제 팬이라도 있었어? " "그래도 부루터스 같은 닉은 바꾸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내 한마디에 대기실이 온통 소란스러워졌다. 나는 어쩐지 좀 뿌듯한 기 분이 들었다. 다들 즐거워하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래? 그럼 좋아하는 게임은 소오드엔매직 밖에는 없나? 그래도 취미 로 뭐 하는 게임 있을 거 아닌가?" "저는 취미도 소오드엔매직이고 특기도 소오드엔매직이고 직업도 소오 드엔매직을 가지고 싶어요" 직접 묻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노골적인 반말도 아닌 아톰의 질문에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무래도 이렇게 대답하는 편이 한 달 뒤에 정식 계약을 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 교과서 같은 대답은 별로 재미없어요, 비류 님. 그런 말한다고 해서 정식 계약 때 우리가 도와줄 수 있는 것도 아니라구요. 정식계약은 팀장이 결정해요. 그리고 팀장의 관심은 오로지 성적에만 있어요. 잊지 말아요. 여긴 프로의 세계라는 걸" 리파이가 말했다. 드라마 속에 나오는 선생님이나 쓸 것 같은 말투였지 만 말속에는 가시가 박혀 있었다. 하긴, 아직 내 실력을 검증 받은 건 아 니니까. 이런 저런 잡담을 나누는 사이에 찰스의 복장 예술은 끝이 났다. "시간이 되면 대기실에서 게임 중계실로 옮겨요. 우린 거기를 온에어 실이라고 부르죠. 거기에는 상주하고 있는 AD한 명이 있이요. 중계실이라 고 별건 없어요. 조명하고 카메라 한 대 뿐이니까요. 나중에 인터뷰하는 리포터가 오긴 하는데, 그건 경기가 끝난 다음의 일이지요" 나도 소오드엔매직 프로리그 중계를 본 적이 있어서 아는데, 사실 게이 머의 모습이 중계되는 건 아주 짧은 몇 순간밖에는 없다. 끝나고 난 후에 인터뷰 때나 좀 화면에 나올까. 그것도 잘생기고 인기 있는 게이머에 한 해서 말이다. 하지만 나 정도 외모라면 그리 빠지는 편은 아니니까. 음... 정말 그런가... 어쩌면 내 외모 때문에 내가 이곳에 오게 된 거라 는 아톰의 말에도 일리가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음... 아무래 도 나 한테도 용이 침투한 거 같은데... "류, 켄. 소오드엔매직 온라인!" 꼭 무슨 주문을 외우는 것처럼 리파이가 외치자, 숫자를 외우던 두 꼬 마가 리파이를 바라보았다. 둘의 멍한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저런 꼬마 들이 어떻게 게임을 할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생길 정도였다. 온에어실은 대기실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사무실 몇 개를 지나치자 '중계실'이라는 푸른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여기 22층은 손맥 사가 거의 전세 내다시피 해서 쓰고 있는 곳이에요. 이곳에서 게임 기획부터 시나리오 작업, 캐릭터 디자인, 프로그래밍, 마 케팅, 그리고 각종 회의들이 다 이루어지지요. 비류 님도 알아두시면 좋 을 거에요. 우리 게이머들이 쓰고 있는 대기실은 원래 창고였는데 우리 손맥 암행어사 팀이 생기면서 대기실로 고쳐서 쓰고 있어요. 아직은 우리 팀이 손맥 소프드에서 그렇게 대단한 지위를 갖고 있는 건 아니에요. 소 속도 홍보밑에 속해 있고. 팀장 보셨죠? 말이 팀장이지 사실은 홍보부 부 장이에요. 최과장이 팀 운영을 맡아서 하고 있지만 다른 잡무도 많고...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어요?" "리파이 님. 그 말은 성적이 좋지 못하면 팀이 사라질 수도 있다는 말 이군요" "비류 님, 제대로 보셨어요. 우리 말고 하트오브화이터즈 팀은 격투게 임이란 격투게임엔 다 출전하고 있어요. 역시 손맥 암행어사라는 이름이 고요. 승률은 한 30% 되나? 그래도 광고 문구가 전 세계로 중계되니까 그 럭저럭 유지는 하고 있는 모양이에요. 하지만 우리는 이기는 거만 가지곤 부족해요. 그야말로 톡톡 튀는 플레이를 하지 않고서는 살아남기 힘들죠" "저한테 부담감을 주기 위해서 하는 말인가요?" 나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그저 잘해야 한다는 말이에요. 어쩌면 여기 프로 게이머의 세계는 소 오드엔매직의 세계보다 더 냉정한 세계일 수도 있어요. 죽이지 않으면 죽 는 세계보다, 튀지 못하면 사라져버리는 세계가 더 냉정할 수도 있다는 말이에요" 리파이의 말에 나는 전의가 불타올랐다. 세헤라자드의 이야기에 나오는 수르카처럼 미적미적하게 살았다가는 모처럼 꿈을 이룰 수 있는 기회를 잃게 될지도 모른다. 적어도 라이짐처럼, 그렇게 강인한 마음을 먹어야 한다. 내가 이곳까지 오게 된 것도 어쩌면 라이짐과는 조금 다를지 몰라 도 복수심 때문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불에 타죽은 친구 녀석 생각을 생각하면. 통신상으로만 만난 친구라 그런지, 또 그렇 게 갑자기 죽어버렸다는 말을 들어서 그런지 몰라도 녀석의 죽음이 도대 체 실감이 나질 않았었다. 하지만 그 이진우라는 수사관 말 그대로 녀석 의 죽음을 밟고 이 자리에 섰다는 생각에 어딘지 찜찜한 생각이 드는 것 도 사실이다. 중계실은 거의 작은 스튜디오를 생각하게 할만큼 잘 꾸며져 있었다. 물 론 진짜 스튜디오를 본 적은 없지만 선수대기실이나 손맥 소프트 사무실 의 어수선한 분위기에 비해 그랬다는 말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대형 액정 화면이 바로 눈에 들어왔다. 그 밑으로 게이머들이 앉을 수 있는 자 리와 검퓨터가 놓여있었고, 그곳을 비추는 조명이 천장에 여러 개 달려 있었다. "여기 중계 담당 이정화 입니다. 오늘 새로 오신 분이시죠?" 반바지에 민소매옷을 입고, 모자를 거꾸로 쓴 젊은 여자가 나에게 인사 했다. 좀 살집이 있어서 그런지 맨살이 많이 드러나게 입고 있으니 귀엽 다는 인상이 풍겼다. "예, 비류 입니다" "사진으로 본 것보다 더 낫군요. 가만있자... 왼쪽으로 고개 좀 돌려 보실래요? 예, 좋습니다. 어떻게 해야 좋을 지 알겠네요. 걱정 마세요. 제가 근사하게 잡아드리죠. 자, 그럼 리허설 해봐야 하니까 다들 올라가 세요" 모자를 고쳐 쓰면서 이정화가 소리쳤고, 우리는 허둥지둥 스테이지로 올라갔다. 순간 조명이 켜졌고, 스튜디오 안이 후끈 달아올랐다. 분위기 가 그랬다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더워지는 게 느껴졌다는 말이다. 조명 때문에 너무 눈이 부셔서 눈살이 다 찌푸려졌다. 우리가 스테이지에 오르자 이정화는 자질구레한 지시를 계속 내렸다. 이쪽에 앉아라, 저쪽에 앉아라, 엉덩이를 바짝 끌어 당겨라, 고개를 돌려 봐라, 어깨를 펴라, 손을 똑바로 해라... 얼굴에 땀방울이 흐르기 시작했 다. 뜨거운 조명에 신경을 쓰면서 이리저리 움직였더니 그런 모양이었다. "좋아요" 리허설이 끝나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더운 것도 더운 거였지만 리허설 이 이렇게 힘드니 진짜 촬영에 들어가면 얼마나 힘들까. 방송에서는 잠깐 밖에 나오지 않는 화면이었지만 이렇게까지 힘든 준비과정을 거치는 줄은 정말 몰랐다. 진짜 방송에 들어가면 이렇게까지 힘들지 않다는 리파이의 말이 조금 위안이 되기는 했지만 말이다. "자, 그럼 작전 회의 들어갑시다. 류, 켄. 작전 회의" 리파이의 말에 우리는 다시 의자에 앉았다. 실버우드가 마우스를 몇 번 클릭하자 액정화면에 전체 지도와 병력 표시가 떴다. '손맥 암행어사'는 북쪽 중앙에 위치하고 있었고 그 옆으로 '고조선 막무가내'와 '샤넬 넘버 식스' '닌텐콤 지팡고' 'SNKNET 선라이즈'등의 이름이 붙은 국가들이 눈 에 들어왔다. 리파이는 액정화면 앞으로 가더니 빔 포인터로 지역을 짚어 가면서 상황을 설명했다. "오늘의 주요 작전은 동쪽의 '고조선 막무가내'와의 전투가 될 거에요" "왜? 서쪽의 YMCA 빅마마스도 중앙 진출을 노리고 있는데" "정보 분석이 있었죠. 류, 켄. 정보 분석" 리파이가 말하자 류와 켄이 고개를 들고 액정 화면을 바라보면서 말했 다. "막무가내는 고조선 일보 어스넷 판의 유럽 지역 진출을 노리고 있다" "소오드엔매직 온라인은 물론이고 거의 모든 매체를 이용한 홍보 강화 에 돌입했다" "이미 어스넷 고조선 일보 홈페이지에 홍보 강화 징후가 드러났다" "유럽지역 에어 전광판 광고도 이미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회사의 홍보를 위해 온갖 수단 방법을 다 동원하는 무리한 플레이를 할 것이 분명하다" "고조선의 위치 상 강대한 샤넬이나 닌텐콤을 치지는 못한다. 만약 그 쪽 전투에서 패할 경우 계속적인 플레이가 어려워진다" "지난 번 플레이 때 상대적으로 전쟁준비보다 일반 내정에 치중했던 우 리가 목표가 될 것이다" 아무런 억양 없이 흘러나오는 말에 나는 소름이 돋았다. 아니, 꼬마 애 입에서 나온다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만큼 치밀한 정보분석 능력에 질 려서 소름이 돋았다. "칫. 유럽지역 진출의 교두보라. 우리를 밟고 가겠다, 이건가?" "아톰. 생각해 보면 고조선 일보가 유럽지역을 노릴 수 있는 것도 순전 히 트랜스 파워 덕분이야. 한 세기 전이면 상상도 못했을 일이지. 하긴, 그때는 모든 신문이 자국 기사로 도배가 되어있던 시기기도 하지만" "실버우드, 각 국가지(國家紙)를 너무 폄하하지마. 그래도 유익한 지역 정보는 국가지에서 나온다고" 아톰이 어쩐 일로 긍정적인 발언을 다 했다. 나는 좀 어울리지 않는다 는 생각이 들어서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러니 MS사가 점점 커지지. 이젠 트랜스파워 없이는 아무 것도 못할 지경이야. 요즘 같은 시기에 누가 외국어를 공부하겠어? 어스넷에서 정보 를 얻으려고 해도 외국어를 쓰는 사이트에서는 트랜스파워밖에는 방법이 없어. 요즘엔 아예 트랜스파워 아니면 글자가 깨져서 나오는 사이트도 있 다니까. 게다가 이번에 번들로 제공한 트랜스파워 때문에 다른 번역기 업 체는 다 망했지. 이런 식으로 어스넷을 장악하고, 통합정부도 장악하고, 나중에는 지구를 정복할 야심이 있는 거야, MS사는! 내가 그 음모를 알아 냈기 때문에 날 내쫓은 거라구! 빌어먹을. 내가 그날 용의 정체만 눈치채 지 못했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난 살해 당할 거야. 그것도 비참 하게. 머리통이 모니터에 처박혀 죽을지도 몰라. 아님 키보드를 삼키고 죽을 지도..." 부루터스의 과대망상에 이제는 나도 좀 익숙해진 느낌이었다. 리파이가 다시 부루터스를 다독거렸다. 그 모습이 이젠 일상적인 풍경처럼 보였다. (사십 줄의 아저씨가 젊은 처녀 품에 안겨서 울먹이는 모습이 말이다) "자, 그럼 준비하지. 게임 시작 세 시간 전이야" 리파이의 말에 모두 컴퓨터 모니터에 떠있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시간 은 자정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방송 전까지 다시 잡담과 농담의 연속이었다. 아톰은 여전히 투 덜거리면서 예의 냉소적인 말을 지껄였고, 류와 켄은 다시 원주율을 외우 고 있었다. 실버우드와 리파이는 서로 될 수 있으면 이야기를 하지 않으 려는 듯한 분위기였는데, 아마도 정말로 같이 산다는 걸 티내고 싶지 않 은 듯 보였다. 부루터스는 계속 MS사의 음모에 대해서 중얼거렸고, 이제 는 MS사만 없어지면 낙태문제와 환경문제도 해결될 뿐만 아니라, 지구 평 화와 인류 발전도 이루어질 수 있다는 수준에까지 이르고 있었다. "뭐, 궁금한 거 없어요? 처음이라 긴장되는 모양인데. 어차피 게임 시 작하면 다 알게 되겠지만 뭐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봐요" "음... 보통 다른 회사도 인원수가 이 정도인가요?" 나는 별달리 물어보고 싶은 건 없었지만 그래도 멍하니 넋 놓고 있는 것보다는 낫겠다 싶어서 이렇게 물어보았다. "그래요. 처음에는 NPC보다 인간 게이머가 훨씬 우수하다는 생각 때문 에 병사 하나하나까지 다 게이머를 고용한 회사도 있었지요. 하지만 사공 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말도 있잖아요? 너무 많은 게이머는 통제 가 어렵고 집중된 플레이를 방해하기 일쑤죠. 어떤 원칙이 정해진 건 아 니지만 자연스럽게 열명 안팍 정도의 인원으로 팀을 짜게 된 거에요. 우 리 팀도 그래서 일곱 명이지요. 원래는 여섯이었지만... 비류 님. 이 말 듣고 기분 나빠하지 말아요. 사실 인터뷰할 남자가 필요했거든요. 최 과 장 만나보셨죠? 그 사람 아이디어였어요. 사실 우리 팬들은 거의 다... 여성들이지요" 나는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대충 무슨 말인지 알 수는 있을 것 같았다. 리파이 정도의 외모라면 좋아할 만한 여자가 꽤 되겠다 싶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러니까 다 레즈 펜이라는 말이지요?' 하고 물을 수는 없는 일이어서 나는, '아, 그렇군요' 하고 말았다. 그나저나 내 실력 때문이 아니라 외모 때문이라는 말은 나를 한층 더 실망하게 되 었다. "하지만 시작은 다 그래요. 저도... 그렇게 시작했어요. 아시겠죠, 무 슨 말인지?" 그렇다. 시작은 다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세헤라자 드의 이야기 속에 나오는 라이짐이 떠올랐다. 라이짐은 복수를 위해서라 면 눈 앞에 어떤 일이 닥쳐도 다 해낼 각오를 가지고 하잔으로 출발했을 거다. 누군가를 죽여야 할 순간이 오면 그것이 몬스터든 반란군이든 가리 지 않고 죽일 수 있을 정도로 독한 마음을 갖고 말이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N:김상현 #9604/10199 ━━━━━━━━━━━━━━━━━━━━━━━━━━━━━━━━━━━━━━━━ 제 목:[탐그루] 영혼의 에뮬레이터 3 60 관련자료:없음 21/21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1-10 00:31 조회:1163 탐그루 # 마법은 마음이다 - 마음은 칼이다 # 이런 생각을 하자 처음이니 만큼 놀라운 플레이를 해서 꼭 인정받아야 겠다는 각오가 생겼다. 처음에는 무시당해도 좋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인정받으면 그만이다. 그래. 그게 프로지. 그게 살아남는 방법이지. 나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찰스가 들어온 건 그때였다. 나는 일이 다 끝났으니 그냥 가지 않았을 까 생각했는데, 찰스는 무슨 상자까지 하나 들고서 방송실로 들어왔다. "메이크업이에요. 땀이 너무 많이 나면 찰스가 해결해 주죠. 물론 극적 인 효과를 위해서 놔두기도 하지만 그 판단은 이정화 씨가 내려요" 찰스를 바라보고 있는 나에게 리파이가 말했다. 역시 팀의 리더 답게 내 마음을 읽어내고 있었다. 게임이 시작됐다. 나는 이정화의 옆자리에 놓여진 모니터에 비추어지는 내 모습을 보았다. 가슴이 뛰었다. 이제 프로 게이머로서의 첫 발이 내딛 어지는 순간이다. "위치해요" 조명이 켜지고, 모니터에 아나운서와 해설자의 모습이 보였다. 해설자 는 전설의 게이머 유정일이었다. 본명보다는 '나이트무버'라는 닉으로 더 유명한 게이머. 홀홀단신으로 프로계에 입문, 이 스폰서, 저 스폰서를 전 전하면서 갖은 고생 끝에 모든 난관을 뚫고 몇 차례나 온라인 RPG의 우승 을 거머쥐었던 사나이. 야전의 일인자.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모니터에 서 정확하게 목표물을 클릭하는 인간 적외선 스코프. 절대 굴복할 줄 모 르는 근성과 의지. 이제는 은퇴하여 조용히 살고 있다는 잡담을 어스넷 계시판에서 읽은 기억이 났다. 한 스폰서에 의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중에는 게임계에서 밀려나 결국 해설자의 위치에 머물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말도 있다. 지 금 그 전설의 나이트무버가 나의 플레이를 해설하기 위해 저 자리에 있는 것이다. 나는 그 사실 자체가 흥분이 되어 지금 나이트무버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지도 알 수가 없었다. "자. 시작이다" 지금까지 내가 본 리파이의 모습과는 달리 냉철한 말투로 리파이가 말 했다. 저런 모습 때문에 인기가 많은 모양이다. 아마도 이미지 관리 차원 에서 더 냉철하게 말하는지도 모르지. 그냥 시작이에요, 해도 그만일 텐 데. "고조선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국경으로 병력을 분산배치하고 있다" "별동대를 보낼 가능성이 높다" "기만 전술이다. 속지 말고 국경 수비를 강화해야 한다" 류와 켄이 억양없는 목소리로 계속해서 말했다. 나는 내가 조종하는 캐 릭터를 살펴보았다. 나는 소속도 없는 레벨 1의 십부장었다. 과연 여기서 열 명의 병사를 데리고 뭘 하라는 말일까? 만약 아마 리그였다면 내가 속 해 있는 땅을 떠나 무사수행이나 몬스터 사냥을 해서 레벨을 올렸을 것이 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도 없다. 류와 켄은 계속해서 마우스를 움직여 정보를 모아오고 있었고, 리파이 와 실버우드는 국왕과 왕비답게 병력을 이리저리 모으고 다시 배치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나는 둘의 마우스 움직임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팔에 뼈가 없구나. 나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보통 반사신경과 유연성 에 있어서 여성 게이머가 남성 게이머보다 낫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지 만 저 정도까지인 줄은 미처 몰랐다. 나는 리파이를 바라보았다. '난 뭘 하면 좋죠?' 하는 표정으로 말이다. 하지만 리파이는 그냥 날 한 번 처다 보더니 다시 마우스를 움직이기 시 작했다. 별로 말하고 싶지 않다는 투였다. 나는 십부장의 위치이긴 했지만 소속되어있는 부대도 없었고, 움직일 수 있는 유니트도 보병 열 명밖에는 없다. 그렇다고 아톰이나 부루터스가 지휘하는 부대에 소속 시켜달라고 해서 플레이를 하고 싶지도 않았고, 류 와 켄과 함께 정보를 모으는 일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순전히 정보 수집 능력에 있어서 류와 켄을 따라갈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십부장 주제에 국왕과 왕비처럼 국정에 관여할 수도 없으니 정말이지 내 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불과 몇 시간 전 만해도 한 국가를 다스렸던 내가 이 꼴이라니 정말 초라하기 짝이 없다는 생각이 들 었다. 나는 비록 열 명 남짓한 병사들이지만 그래도 내 부하라는 생각으로 훈 련을 시키기 시작했다. 그건 순전히 따로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가 끔 해설 화면을 보았다. 나이트무버가 설명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책상 위에 굴러다니고 있는 무선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저 때가 처음 프로 세계에 입문한 게이머들이 가장 힘들 때이다. 나도 경험해 봐서 안다. 아마리그에서 뛰어난 플레이를 했던 사람일수록 프로리그에 와서 형편없는 레벨과 위치에 당황하기 마련이다. 프로세계에 서는 먼저 시작한 선배들이 중요한 임무를 줘서 레벨 업을 빨리 시킨 후 에 중용 하는 방식을 쓰곤 하는데, 오늘은 좀 어려울 것 같다. 고조선의 공격 때문에 정신이 없기 때문에 그럴 시간적 여유는 없을 것이다. 저... 이름이... 비류라는 캐릭터는 오늘을 넘기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살아남는데 치중해 경험치를 보존하고 다음 번을 기약하는 편이 나을 것 이다" 나는 말투가 좀 이상하다고 생각해서 이어폰을 보았다. 이어폰에는 '프 랑스 중계'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트렌스파워를 통해 불어로 번역된 말 이 다시 우리말로 번역이 된 모양이었다. 그래도 이만한 번역이면 훌륭했 다. 그런데 지금 나이트무버가 내 걱정을 해 주고 있잖아? 나는 모니터에 비추어진 나이트무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이트무버의 표정은 정말로 나를 생각해주고 있는 얼굴이었다. 나는 나이트무버에게 감사의 인사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사실 나는 내 한 몸 추스르기도 바쁜 처지였다. 이렇게 NPC나 훈련시키고 있는 내 꼴이라니. 나는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벽면의 액정 화면을 바라보았다. 내가 멍청한 NPC 십부장처럼 부 하들을 훈련 시키고 있는 사이, 게임은 벌써 상당히 진행되어 있었다. 고 조선의 별동대는 상당히 깊숙한 곳까지 진출해 있었다. 하지만 아톰의 병 사들이 공격을 개시하자 별동대는 힘 한번 못써보고 그대로 궤멸 직전까 지 간 모양이다. 그사이 부루터스는 보급을 다 마치고 다시 예비대를 편 성하고 있었고, 리파이와 실버우드 콤비는 바쁘게 병력을 재배치 하고 있 었다. 특히 왕비이자 마법사 군단의 지휘관인 실버우드의 솜씨는 정말이지 놀 라웠다. 최고의 레벨을 지닌 마법사들로 짜여진 군단자체도 놀라웠지만, 마법사들을 적절히 아톰이 이끄는 기사군단 사이사이에 배치시키는 모습 은, 거의 인간이라기 보다는 게임을 위한 슈퍼 컴퓨터 같다는 느낌을 줄 정도였다. 실버우드의 목줄기를 타고 땀방울이 쉴새없이 흘러내리고 있었 다. 게임은 계속 진행되었고 나는 단독으로 열 명의 NPC를 데리고 나가서 여기저기 떠돌면서 전투에 참가했다. 이렇게 해서라도 해서 레벨을 올려 야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형편없는 내 레벨로는 대부분의 전투에서 이 기기는 커녕 꽁무니를 빼고 도망치기 일쑤였다. 비참한 내 처지를 생각해 보니 눈물이 다 글썽였다. 불과 얼마 전만 하더라도 일개 국가를 다스렸 던 내가 겨우 별동대 하나 때문에 꼬리를 내려야 하다니... 하지만 나를 걱정해주는 나이트무버를 생각해서라도 자잘한 전투일지라도 최선을 다해 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명 때문에 흘러내린 땀방울이 눈동자에 들어왔다. 눈물인지 땀인지 알 수 없는 것을 나는 손등으로 닦아내었다. 혹시 울고 있는 것처럼 보이 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나는 고개를 돌려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놀랍게도 내 모습이 비추어지고 있었다. 조명을 받은 짧은 머리의 나는 내가 보기에 '저게 과연 나일까' 싶을 만큼 멋진 모습을 하고 있었다. 천 만다행으로 울고 있는 것 같이 보이지는 않았다. 젠장. 카메라 발 하나는 죽여주는 군. 그럼 뭘 해. 아무도 인정 안 해주는 풋내기 플레이어 주제 에. 이런 식으로 나가다가는 한 달 후에 있을 재계약문제는 완전히 꿈으 로 끝나버릴 공산이 컸다. 어떻게든 튀어야 하는데, 어떻게든 공을 세워 야 하는데. 전황은 다시 바뀌어 고조선의 주력과 우리 손맥 암행어사의 주력이 '세 잔'이라는 도시에서 붙게 되었다. 벽면의 엑정화면을 통해서 바라본 상황 은 정말이지 혼전에 혼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전략이나 전술이 끼여들 여 지도 없이, 정신없는 난전 속에서 두 팀은 서로의 병력만 잃고 있었다.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고 있는데, 병력이 몇 번 뒤엉키는가 싶더니 아차 하는 사이 전황이 우리에게 불리해졌다. 우리측 주력은 포위 당해 이제는 세잔시에 갖혀 다 죽게 생긴 형국이었다. 나는 리파이를 바라보았다. 리 파이의 얼굴에 흐르고 있는 땀은 꼭 조명 때문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빌어먹을. 지난 번 플레이 때 내정에 힘을 쏟은 게 잘못이었어. 까짓 자금은 다른 나라를 쳐서 만들었어야지! 고조선 녀석들이 이렇게 빨리 대 쉬 해 들어올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어" 아톰이 정신없이 마우스를 움직여 자신의 병력을 다시 정비하면서 말했 다. 아톰의 이마에 ㄳ혀있던 땀방울이 흘러내리자 찰스가 스테이지 위로 올라오려고 하는 것을 이정화가 말리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모니터를 들 여다보았다. 아톰은 뒤이어서 '이럴 줄 알았어. 우리가 하는 일이 다 이 렇지 뭐, MS사 쯤 되는 스폰서를 두지 않고서는 여기서 우승한다는 건 꿈 도 꿀 수 없는 일이야'하고 말했지만 모니터에 비추어진 땀흘리는 아톰의 모습은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다. 승리가 눈앞에 있는데!'하고 말하는 것처럼 보이고 있었다. 역시 방송의 힘은 대단하구나.어쩌면 카메라가 담 는 것은 보이는 그대로가 아니라 보여주고 싶은 것들 뿐인지도 모르겠다 는 생각이 들었다. "이젠 수가 없어. 완전ㄳ 포위 당했어" "실버우드. 어떻게 지는 게 멋있게 지는가를 생각하는 건 나중으로 미 루자고. 지금은 일단 이 상황을 벗어나는 게 급해" 역시 리더답게 리파이가 말했다. 하지만 리파이의 얼굴에도 그다지 자 신감이 드러나 있는 것 같진 않았다. 방법이 전혀 없을까? 나는 지도를 차근차근 분석해 보았다. 어느 새 남아있는 우리 주력은 세잔 시 중심부 에 포위 당해 있었고, 고조선의 군단은 도시 전체를 완전히 포위한 상태 였다. 내가 만약 이런 상태에 놓여있다면 어떻게 했을 것인가? 나는 세헤라자드의 얘기에서 들었던 전술들을 떠올려 보았다. 용병단에 서 십부장들이 했던 강의 말이다. 물론 거기에는 포위 당했을 때 빠져나 가는 방법 따위는 없었지만 그래도 분명히 응용할 수 있는 뭔가가 있으리 라 여겨졌다. 모니터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한참동안 생각을 하고 있자니, 뭔가 하나 짚이는 구석이 있었다. 그리고 그 짚이는 구석에 생각을 집중 시키자, 작은 아이디어가 하나 떠올랐다. 물론 위험부담이 큰 모험이었지 만, 포위 당해서 전멸 당해버리는 것보다는 나을 성싶었다. "잠깐. 류, 켄. 고조선의 성향을 분석해봐" 순간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집중되었다. 나는 마른침을 한 번 삼켰다. "고조선은 강한 화력을 바탕으로 조직력과 기동성을 앞세운 군단을 이 끌고 있는 국가이다. 주로 광산 채굴로 자금을 모으고 있으며 그 규모 는..." "그거 말고, 고조선 일보의 성향 말이야" 내 말에 다들 '저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하는 표정이 되어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런 시선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고조선 일보는 대표적인 극우 보수 언론이며..." "지극히 보수적이고 완고한 성향에다가, 과격한 논조로 그때 그때의 이 슈를 만들고, 조작해 판매부수를 증가시키는 ..." "검열제도의 부활에 대해 여러차례 강한 의지를 보인바 있다" "재벌에게 유리한 기사들을 자주 싣고, 그 대가로 적지 않은 광고 수입 을 올리고 있다는 비공식적 발표도 있다" "대체적으로 노동자와 농민의 이익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좋아. 그만 됐어요. 리파이 님. 날 고조선 대사로 파견해 줘요. 레벨 1짜리 대사도 가능하겠죠?" 내 말에 리파이는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생각할 것 없어요. 어차피 여기서 더 손해볼 건 없잖아요" "무슨 생각이에요, 비류 님?" "일단 보내만 줘요. 성공하면 다 알게 될 거고, 실패한다면 알아봐야 소용없을 테니까" 내 말에 리파이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마우스를 움직였다. 갈 데까지 갔 구나, 하는 표정이었다. 그 즉시 나는 대사로 임명되어 고조선으로 향했 다. 출발하기 전, 나는 모든 무기들을 다 버려 두고 떠났다. 만약 무기가 없는 상황에서 고조선의 국왕이 나를 잡으려고 한다면, 오늘 애써서 쌓아 놓은 경험치가 다 날아가 버릴 지도 모를 상황이었지만 손맥 암행어사 팀 이 망해버린다면 내 경험치도 아무 소용없기는 마찬가지다. 내 모니터에 펼쳐지고 있는 말달리는 대사의 동영상이 오늘따라 더욱 급박하게 느껴졌 다. '고조선 막무가내' 팀의 성 앞에 도착하자 험상궂은 경비들이 앞길을 막았다. "무슨 일이냐!" 어차피 NPC다. 나는 마우스를 움직여 내가 대사로 왔음을 알리는 메시 지를 클릭했다. 그러자 무장한 병사들이 내 몸을 수색했지만 나는 애당초 아무 무기도 소지하지 않고 갔으므로 통과는 별로 어렵지 않았다. "마우스 다루는 건 익숙해 보이는데?" "부루터스. 마우스 잘 다룬다고 외교 잘하는 거 아니야" 아톰은 왜 저렇게 사사건건 걸고 넘어가는지. 하지만 나는 무시하고 성 안으로 들어가 고조선의 국왕 앞에 섰다. 나이든 국왕이 긴 옷자락을 끌 면서 천천히 나타났다. "우리에게 맞서고 있는 귀국의 능력을 높게 평가하네. 그래. 항복의 의 사라도 표명하기 위해서 왔는가?" 지나치게 방송을 의식한 말투였다. 나는 모니터를 보았다. 내가 보고 있는 화면이 그대로 모니터에도 나타나고 있었다. 프랑스 파리의 국민들 이 지금 나의 모습을 보고 있으리라. 나는 극도의 긴장으로 마우스 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간신히 억제하며 말했다. "존경하는 고조선 국왕 폐하. 그건 아닙니다. 저는 다만 백성에 대해 말씀 드리기 위해 찾아 온 것입니다" "그래. 한 번 말해보게" 나는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이제 모험의 순간이 온 것이다. "귀국이 영토를 늘리기 위해 저희 미약한 본국에 출정을 감행한 사실은 익히 잘 알고 있는 바입니다. 하지만 민심을 잃는다면 백성이 떠날 것이 고, 백성이 떠난다면 나라도 영토도 아무 의미가 없으리라 사료되옵니다" "그래서?" "도시의 백성들을 일단 전장에서 피하게 하심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자 고로 민심을 잃고 존경받은 군주가 없고, 백성을 잃고 강성한 국가가 없 는 법입니다" 내 말에 한참 동안 고조선의 국왕은 대답이 없었다. 나를 바라보고 있 던 동료들의 표정에 감탄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보수적인 성향의 고조 선 일보가 프랑스 진출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좋은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주력할 것이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게임의 승패는 물론 중요한 것이지만, 사실 차후의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만약 이대로 전투 가 계속 된다면 민심이 떨어질 것이 분명하고, 내가 이 사실을 방송으로 전달한 이상, 공격을 계속해 들어간다면 고조선 일보의 이미지는 깎일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조금 부족했다. "궁지에 몰린 쥐가 발악을 하면 제 아무리 날랜 고양이라도 상처를 입 기 마련입니다" 나는 침묵하고 있는 고조선의 국왕에게 이렇게 일침을 놓았다. 길을 열 어주지 않으면 서로 큰 피해를 보게 될 거라는 협박이었다. 어찌되었건 우리가 필사적으로 공격을 한다고 해도 전멸을 면하기는 힘들겠지만, 고 조선도 상당수의 병력을 잃게 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내 말이 먹혀 들어갈지는 사실 아무도 모르는 거였다. 동료들의 굳게 쥔 주먹이 핏기를 잃고 하얗게 긴장되어 있었다. PRINTER/CAPTURE를 OFF 하시고 [ENTER] 를 누르십시오. HiTEL───────────────────────────────────── 창작연재 (SERIAL) LN:김상현 #9670/10199 ━━━━━━━━━━━━━━━━━━━━━━━━━━━━━━━━━━━━━━━━ 제 목:[탐그루] 영혼의 에뮬레이터 3 61 관련자료:없음 30/30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1-11 00:31 조회:1062 탐그루 # 마법은 마음이다 - 마음은 칼이다 # 얼마나 지났을까.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나는 꼭 시간이 정지해 있는 기분이었다. 땀방울들이 달아올라 수증기가 되어 사라지고 있었다. 나는 목뒤를 만져보았다. 딱딱하게 말라붙은 작은 소금 덩어리들이 만져졌다. "좋다. 백성들을 대피 시키라. 과인은 장군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귀 하의 뜻을 존중하기로 결정했노라" 순간 동료들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성공인 것이다. 부루터스가 흥분한 얼굴로 내 어깨를 세게 두드렸고 아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놀랍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고, 리파이와 실버우드도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 로 나를 쳐다보았다. "류, 켄. 모두 너희들 덕분이야" 나는 류와 켄에게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하지만 류와 켄은 아무 표정도 없이 뭐라고 그저 번갈아 가면서 숫자를 중얼거릴 뿐이었다. 남은 플레이시간은 온전히 철수 작전에 소모되었다. 우리는 세잔 시의 시민들과 섞여서 안전하게 빠져 나올 수 있었다. 비록 도시 하나를 잃기 는 했지만 주력부대가 살아남았으므로 앞으로 얼마든지 만회할 수 있는 여지는 있었다. 게임이 끝날 시간이 되자 리포터가 도착했다. 형광 빛이 도는 푸른색 짧은 원피스에 빨갛게 염색한 파마 머리를 늘어뜨리고 화장을 진하게 한, 방송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미인이었다. 찰스는 부지런히 리포터의 얼굴에 분을 바르고 옷을 다듬었다. "비류 씨. 성공적인 데뷰를 축하한다고 말씀드려야 할 것 같군요. 나이 트무버가 성공적인 데뷰 경기였다고 격찬할 정도였으니까요... 각오가 새 로우실 것 같은데요" "이제 시작일 뿐인 제겐 과찬의 말씀입니다. 하지만 나이트무버의 칭찬 은... 프로 초년생에게 이 이상 기쁜 일은 없을 겁니다" "오늘 일로 소오드엔매직 본사에서 보너스 경험치 십만 포인트를 받아 단숨에 레벨 51이 되신 건 알고 계시겠죠? 다음 번에는 군단장으로 출전 하시겠군요" "그건 순전히 저희 리더 리파이가 결정할 몫입니다. 제가 대답할 수 있 는 부분이 아닙니다" 나는 리파이에게 손을 흔들어주면서 말했다. 리파이는 내 말에 좀 어색 해졌는지,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살포시 내렸다. 게임이 끝내고 난 후, 샤워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손맥 암행어사의 유니폼이 원래 비실용적으로 디자인만 강조해서 만든 옷인지라, 유니폼 안이 땀으로 범벅이 되었기 때문이다. 조금만 신경을 써서 소재를 좋을 걸 썼다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리파이의 말처럼, 회사에서는 아직 우리 를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고 있지 않는다니까. 샤워실을 이용하는 순서는 실버우드와 리파이가 먼저였다. 여자라서 먼 저 한 건 절대 아니었다. 단지 류와 켄이 자기들끼리만 샤워를 할 수 없 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어서 남자 넷이 샤워실을 이용했다. 몸에 달라 붙은 소금 결정과 땀이 씻겨 내려가는 느낌은 지금까지 한 어떤 샤워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개운했다. 대기실에는 팀장이 와 있었다. 팀장 역시 얼굴에 희색이 만면했다. "오늘 수고들 많았어요. 특히 비류 님. 성공적인 데뷰, 축하해요" 팀장은 나에게 악수까지 청했다. 나는 얼굴을 붉히면서 팀장의 손을 잡 았다. "다음 출근은 새벽 네 시에요. 여덟 시부터 브라질리아 공화국 리오 데 자네이로로 중계가 있어요. 모두들 신경 좀 써줘야 겠어요. 이번에 우리 손맥 소프트에서 진출할 중요 시장 중 하나니까요. 뭐, 대단한 걸 바라지 는 않아요. 오늘 한 것만큼만 해주면 돼요" 팀장이 말을 마치고 대기실 밖으로 나가자, "멍게" 아톰이 팀장의 등을 향해 조그맣게 외쳤다. 몇몇이 키득거렸다. "팀장 별명이에요" 리파이가 설명했지만 그건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가 가는 대목이었다. 우리는 적당히 인사를 나누고 각자 집으로 흩어졌다. 류와 켄은 항상 보호자가 올 때까지 부루터스가 대기실에서 돌봐왔다고 한다. "이 친구들 보호자는 늘 늦게 와. 사랑과 믿음의 집 원장이 얘들 보호 자지. 나이 지긋한 노처년데, 오로지 돈만 보고 이 친구들을 데리고 있는 사람이야. 돌보기는 커녕 돌보는 시늉도 안 하지. 차라리 내가 여기서 데 리고 살고 싶은데" 부루터스의 말을 듣자 나도 화가 났다. 사랑과 믿음의 집은 아마 사설 사회보장 고아원인 모양이었는데, 비록 만나보지는 않았지만 그 원장이라 는 사람 꼴이 대충 짐작이 갔기 때문이었다. "배부른 소리하지 말아요, 부루터스. 그런 병신들 돌보는 것도 하루 이 틀이지. 그만하면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어요. 어, 그런데 다들 왜 그 런 눈으로 날 봐?" 이렇게 말하는 아톰의 표정은 꼭 '내가 이런 놈인 거 몰랐어?'하고 말 하는 것 같았다. 밖에는 벌써 해가 빌딩 마천루에 걸려 있었다. 게임도 끝났겠다, 조금 마음의 여유가 생기자, 세헤라자드 생각이 났다. 사실 오늘 내가 한 외교 수완은 거의 세헤라자드에게 배운 거라고 봐도 틀린 말이 아니다. 네버밍 크와의 외교를 성공적으로 이끈 건 순전히 세헤라자드가 상대방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원하는 가를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내가 오늘 한 말도 그 원칙에서 벗어나는 건 아니었다. 그리고 궁지에 몰린 쥐 얘기는 세헤라자드의 얘기에서 그대로 옮긴 거였고. 나는 세헤라자드에게 또 하나 빚진 셈이 되었다. 돌아가는 길에 잊지 말고 랩탑 베터리라도 사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속한대로 같이 공원을 걷는 것도 좋겠지. "잠깐만요, 비류 님" 리파이였다. 사복을 입은 리파이는 정말 모델 같아 보였다. 날씬한 체 격에 나보다 큰 키하며, 등까지 내려오는 윤기있는 검은 생머리...정말 나무랄 때 없는 미인이었다. "시간 있으면 잠깐 얘기나 좀 할까요?" "중요한 얘긴가요?" "아니, 그런 건 아니고요, 좀 궁금한 게 있어서요. 왜, 시간 없으세 요?" "좀 피곤해서요. 짧은 시간 동안에 너무 많은 일을 겪었거든요" 나는 어스폴에 있는 지하실 얘기도 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그럼 별 수 없지요. 다음에 시간 나면 얘기하는 걸로 하지요" 리파이는 이렇게 말하고는 아쉽다는 듯 어깨를 한 번 으쓱하더니 돌아 섰다. 나도 좀 아쉬운 마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분명히 난 동성연애자를 차별하는 구시대 인간은 아니지만, 동성연애자와 마주 앉아 얘기하고 싶 은 마음은 그다지 일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대가 아무리 미인이라고 해도 말이다. 하지만 아직 그런 일에 익숙해지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살아 가며 이것저것 많은 경험을 쌓아가면 사람과 사람살이에 대한 이해도 점 점 깊어질 것이다. 그때가 돼면 많은 것을 자연스럽게 대할 수 있겠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베터리를 하나 사가지고 들어갔다. (지난 번에 산 아답타에 충전기도 달려 있었으므로 충전기는 사지 않았다) 세헤 라자드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벼웠 다. 같이 공원에 나가서 이야기를 나누면 세헤라자드가 얼마나 좋아할까. 햇살 아래 웃는 세헤라자드의 얼굴을 본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아마 아 주 묘한 느낌이 들겠지. 문을 열고 집에 들어서자 불을 켜져있었다. 음악이 흐르고 있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음악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사실 세헤라자드의 춤추는 모습 이 보고 싶었다) "세헤라자드? 깜짝 놀랄 만한 게 있어. 뭔지 맞춰봐" 혹시 어스넷을 통해서 내가 오늘 보인 활약상을 다 알고 있으면 어쩌나 싶긴 했지만, 그래도 저녁때 손맥 소프트사로 가면서 제대로 인사도 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나는 일부러 과장된 음성으로 세헤라자드를 불렀다. 그 런데 랩탑 모니터 안에 세헤라자드는 없었다. 스테아라는 이름의 그 뚱뚱 한 고양이도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화면에는 온통 시커먼 색 뿐 이었다. 가버렸구나! 나는 의자에 털석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가버릴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는데. 나는 멍하니 의자에 앉아 까맣게 텅 빈 모니터 화면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럴 줄 알았어. 멍청하게 그렇게 쉽게 믿어버리는 게 아니었는데. 프로 게이머로서의 첫걸음을 성공적으로 내딛었다는 기쁨 이 한 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나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숙였 다. 지휘관의 테마를 듣고 싶은 심정이었다. 믿는 게 아니었어. 약속 좋아하네. 그렇게 쉽게 믿어버리는 게 아니었 는데. 다만 전윈이라도 꺼버리고 나갔더라면, 아니 랩탑과 데스크탑을 연 결하는 선만이라도 끊어놓고 나갔어도 되었을 텐데. 이왕 일이 벌어졌으 니 후회해봐야 아무 소용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자꾸 아쉬움이 남았다. 하지만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들었다. 만약 세헤라자드가 아니었다면 나는 프로 게이머가 되지도 못했을 거다. 이 일은 프로 게이머가 되기 위 해, 내가 겪은 하나의 환상 같은 것 아니겠느냐고. 하지만 난생 처음 본 노인이 건네준 랩탑은 내 이런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이 책상 위에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의자에 앉아 멍하니 생각을 하고 있자니 졸음이 쏟아졌다. 리파이에게 말한 그대로 나는 하룻동안에 너무 많은 일을 겪은 것이다. 프로 게이머 계약에, 어스폴 지하 취조실에, 첫 경기에... 눈을 감자 갑자기 피로가 몰려왔다. 그때 어디선가 꿈결처럼 음악소리가 들려왔다. 꿈이구나. 나는 생각했 다. 세헤라자드가 춤을 추었던 바로 그 곡이었다. 나는 그대와 사랑에 빠 지지 않을 수 없다... 문득 감상적인 기분이 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마 음이 가라앉았다. 비록 꿈이지만 기분은 좋군. 나는 세헤라자드와 춤을 추고 있었다. 손을 맞잡고 천천히 좌우로 돌면서... 세헤라자드가 밝게 웃고 있었다... 노래는 계속 이어졌고... 세헤라자드의 얼굴이 천천히 사 라지기 시작했다. 마치 햇빛 아래의 안개처럼, 구름 저편에서 사라지는 달처럼, 혹은 스모그에 지워지는 도시처럼... 나는 눈을 떴다. 머리가 멍했다. 눈물이 말라 눈이 뻑뻑했다. 나는 눈 을 한 번 힘껏 감았다가 다시 떴다. 테스크탑의 화면에 세헤라자드의 얼 굴이 보였다. 아직도 꿈인가? "어때요? 놀랐죠?" 세헤라자드의 말에 나는 이게 꿈이 아니라 생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세헤라자드의 모습이 선명하게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장난친 거야?" 세헤라자드의 얼굴을 보자, 나는 먼저 화가 났지만, 화가 났다는 사실 을 감추고 일단 이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헤라자드가 떠나지 않 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기분이 풀렸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잠시동안이 나마 세헤라자드에 대한 믿음을 저버렸다는 생각에 조금은 부끄러워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도 이만하면 괜찮지 않아요?" "장난이라면 재미없었어" 세헤라자드의 말이 무슨 뜻인지 나는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지만 그냥 생각나는 대로 대답했다. "컴퓨터로 먹고사는 사람의 시스템을 함부로 건드린 건 죄송해요. 하지 만 가만히 놔 둘 수도 없는 일이고 해서요..." 세헤라자드는 말꼬리를 흐렸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나는 그제야 내 컴퓨터가 좀 달라져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디스플레이 전반이 완전 히 달라져 있었고 내가 좋아하던 배경화면도 처음 보는 검사와 마법사의 그림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이거 뭐야? 내 어스넷 브라우저 어디 갔어? 트렌스파워는? 소오드 엔매직 아이콘은 또 어디로 간 거야?" "잠깐만요. 먼저 진정하세요. 차근차근 물어주셔야 저도 하나씩 대답을 하지요" 나는 한참 동안 바뀌어버린 내 시스템에 대한 불만을 생각나는 대로 지 껄이다가 결국 세헤라자드의 제의에 동의했고, 그 결과 새로운 사실을 알 아낼 수 있었다. 그건 스테아라는 그 뚱보 고양이가 어스넷 사이트를 먹 는 걸 좋아할 뿐만 아니라 시스템을 먹는 것도 좋아한다는 사실이었다. "아주 잠깐이었어요. 그냥 혼자 놀고 있길래 그런가 보다 하고 내버려 두었더니만 갑자기 비류 님의 데스크탑으로 달려가더니만... 그렇게 되 버렸지 뭐예요. "말리지도 않았어?" "중요한 시스템 파일을 벌써 다 먹어치워 버린 후였다고요, 그게" 세헤라자드는 그래서 일단 그 망할 뚱보를 압축해서 하드디스크 구석자 리에 처박아 버린 다음에 시스템 복구를 시작했다고 했다. "필요한 프로그램들을 어스넷에서 구해오는 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 었어요. 그런데 시스템 일부가 사라져 버렸다고 해서 그 일부분만 복구할 수는 없더라구요. 그래서 저는 일단 비류 님 시스템을 기억해 둔 다음에 포맷을 했지요... 잠깐만요. 그렇게 화부터 내시지 말라고요. 안 그랬으 면 이나마도 복구하지 못했을 거에요" 세헤라자드의 말이 맞기는 했다. 어찌되었건 잘못은 그 망할 뚱보녀석 에게 있지 세헤라자드에게 있는 건 아니니까 말이다. "그러니까 그 쓸데없는 놈을 왜 데리고 온 거야" 쓸데없는 놈이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가는 순간, 나는 용이 떠올랐다. 부루터스가 말했던 용 말이다. 당장 내 컴퓨터가 멀쩡한지 다시 한 번확 인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에 나는 마우스를 잡았다. "너, 이놈 정체가 뭔지 알아? 어쩌면 이건 MS사에서 만들어 퍼트렸다는 어스넷 상의 인공 생명체인지도 모른다구" "아니에요. 제가 스테아의 등록정보는 확인해 봤어요. 러시아 연맹에 사는 한 프로그래머가 캡춰한 롬 파일이었어요. 그게 어떻게 어스넷상으 로 흘러 들어왔는지는 알 수 없지 만요" "이미지 켑춰라. 그럼 세헤라자드 너처럼 그런 과정을 통해서 생긴 생 명체라는 말이야?" "예" "그럼... 너희 아버지 말고도 그걸 성공한 사람이 있었다는 말이네?" "그런 것 같아요. 제 생각에는 아마 쥐의 영혼을 에뮬레이션 한 사람이 아버지보다 빨랐던 것 같아요. 스테아는 아마 그 쥐를 막으려고 이미지 캡춰 한 모양이에요. 어쩌면 쥐를 이미지 캡춰한 사람이 스테아도 이미지 캡춰했는지도 모를 일이지요. 톰과 제리처럼 한쌍을 만들고 싶었나보죠. 그사람..."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알지? 등록 정보가지고 그런 것까지 알 수 있었 어?" "그냥 짐작이에요" 세헤라자드가 혀를 내밀면서 말하는 모습에 나는 그저 웃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여기 저기 아이콘들을 클릭해 본 결과, 다행히도 내 컴 퓨터의 대부분은 무사했다. 홈페이지도 아무 문제없었고, 하드에 남아있 던 정보들도 크게 손상된 건 없었다. 그리고 뜻밖에도 팬레터들이 날아와 있었다. 오늘 데뷰를 무사히 치른걸 축하한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기쁘긴 했지만 어린해처럼 마냥즐거워 할 수 만은 없었다. 그만큼 부담감이 더해 지는 기분이었다. "그런데요..." "응. 말해봐" 다소 화가 풀린 나는 세헤라자드에게 친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드디스크를 살피다가 궁금한 게 하나 생겼거든요?" "뭐? 뭐가 궁금한데...?" "아뇨, 히든 디렉토리에 암호화 시켜서 저장해 놓은 정보들 말이에요" 나는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맞다, 그 디렉토리 때문에라도 랩탑과 테스크탑을 이어놓아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으흠... 그건 안돼. 비밀이야. 내게도 사생활이란 건 있거든. 음... 그러니까 한 사람의 당당한 남자로서의 사생활이라고 할 수도 있고..." "그럼 별 수 없죠. 전 그냥 궁금했거든요. 남자들은 원래 그렇게 가슴 은 수박 만하고 허리는 개미 만한 여자만 좋아하는 건가 하고요" 나는 헛기침을 하면서 의자에서 일어났다. 이런, 망할, 봤구나! "아, 그건... 그러니까.... 대체! 비밀 번호는 어떻게 알아낸 거얏!" 나는 잽싸게 대화의 방향을 바꾸어 나갔다. "그냥 보안 시스템과 친해지기만 하면 되는 일이에요. 특별히 알아낼 것도 없지요. 보안시스템에게 다가가서 그냥 생각을 듣고, 마음을 이해하 기만 하면 되요. 물론 사람의 차원에서 그렇다는 말이죠. 전자 신호의 세 계에서는 그걸 다르게 표현하지 하지만, 인간의 언어로 번역하자면 그렇 단 말이에요" "아, 그렇구나... 오늘 날씨가 참 좋지?" 나는 다시 한 번 대화의 방향을 바꿨다. 이거... 너무 허둥대고 있는 거 같은데. "여기 약속했던 베터리 사왔어. 충전 되 있는 걸로 사왔으니까 지금 당 장이라도 어때? 그래, 나가자.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공원이 하나 있어. 거기서 바깥바람이나 쐬자고. 어차피 나 오늘 낮에는 할 일도 없잖아.. 경기야 새벽에 있으니까... 어제 내내 심심했지? 나가자, 당장" 나는 허둥거리면서 베터리를 들고 세헤라자드 앞에서 서성거리면서 말 했다. "저, 밤새 플레이 하셔서 피곤하실 텐데..." "아냐, 돌아와서 자지 뭐" 나는 랩탑에 베터리를 넣고 세헤라자드에게 빨리 나가자고 재촉했다. "스테아를 기르고 싶거든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돌아서 문을 잠그고 있는데 세헤라자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거, 완전 히 약점을 잡혔군. 잡혔어. "알았어, 알았어. 있다가 공원에 가서 얘기하자" 세헤라자드는 조용해졌고, 나는 겨우 한 시름 놓았다 싶었는데, 이번에 는 전혀 엉뚱한 문제에 부딪치고 말았다. 공원으로 걸어가는 길에 사람들 이 나를 자꾸 힐끔힐끔 바라보는 거였다. 핸드컴이 대중화된 시기라고는 해도 구형 랩탑을 들고 다니는 열 일곱살 짜리 남자를 처음 보는 건 아닐 테지만, 가끔씩 랩탑을 열고 뭐라고 중얼거리는 내 모습이 이상해 보이는 모양이었다. 제길. 내가 이런 꼴이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세헤라자드, 이제 거의 다 와가니까 조금만 조용히 해 줄래?" "내가 뭐라고 했나요?" "스테아 얘기하고 그 동영상 얘기는 좀 있다가 하자구. 공원에 가서 말 이야" 다급한 마음에 그냥 세헤라자드를 들고 나오기는 했지만, 이거 후회 막 급이었다. 사람들이 쳐다 본다는 게 이렇게 싫은 일인지 예전에는 미처 생각도 하지 못했다. 출근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감당하기 조금 어렵기는 했지 만, 나는 무사히 공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사실 이곳에 오는 건 참으로 오래간 만의 일이었다. 캐나다에서 이혼해버린 엄마 아빠가 마지막으로 나를 보기 위해 이곳으로 왔을 때, 그러니까 내가 열 네 살 때였으니까, 꼭 삼 년 전의 일이다. 공원 입구에 서자 인공호수와 주변에 만들어진 인조 숲이 한 눈에 들어 왔다. 호수 위엔 매연과 인조 숲에서 뿜어지는 정화 공기가 뒤섞인 탁한 새벽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역시 새벽 공기는 건강에 나쁘다니까. 나는 벤치에 앉으면서 아톰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새벽 안개는 정말 회 색에 가까워 보일 만큼 탁했다. 하지만 평소에 마시는 공기도 저것보다 나을 건 별로 없으리라는 생각에 나는 그냥 아침의 상쾌함만 느끼기로 마 음먹었다. "자, 무슨 얘기부터 할까" "스테아요. 지금 압축해서 하드 구석에 가둬두긴 했지만, 그건 좀 불쌍 하지 않아요? 기르고 싶어요" "그냥 지워버리면 안될까? 솔직히 난 너 하나만으로도 벅차" "죽여버리시겠다고요?" 깜짝 놀라면서 세헤라자드가 되물었다. 세헤라자드가 저렇게 놀라는 걸 보니 내가 잘못 말했나? "뭐, 죽일 수야 없지. 그래. 그럼 그냥 길러. 단, 더 이상 내 시스템을 뜯어먹지 못하게 먹을 건 네가 구해다 주고. 그 뚱보 녀석 묶어놓을 수 있는 끈이라도 하나 구해. 그럼 괜찮겠지, 뭐" 이 정도면 되겠다 싶어서 나는 안심하는 마음으로 이렇게 말했다. 그런 데 내가 앉아 있는 벤치 옆에 누워있던 걸인 하나가 나를 바라보았다. 어 디서 구했는지 때가 꼬질꼬질한 모자를 눌러쓴 그 늙은 걸인은 별 괴상한 놈 다 보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랩탑한테 중얼거 리고 있는 모습이 이상하긴 한 모양이다 싶었다. 나는 그 걸인에게 그냥 손을 한 번 흔들어주고 말았다. "자, 그럼 얘기를 시작해 볼까요" 세헤라자드가 말했다. "저기, 그건 그냥 호기심이야, 호기심. 나는 사실 그런데 별 관심 없 어. 그냥 남들이 추천하는 사이트길래 어떤 건가 궁금했을 뿐이야. 원래 내 나이 때는 그런데 호기심이 왕성해. 그러니까 네가 생각하는 거 처 럼..." "아니오. 탐그루 얘기 말이에요. 하잔으로 떠난 수르카와 라이짐 말이 에요" 아참. 그러고 보니 탐그루 얘기를 까맣게 잊고 있었군. "맞다. 그래서 어떻게 됐지? 수르카와 라이짐은 반란군을 토벌하기 위 해, 그 하잔이라는 도시로 떠났잖아. 이제 반란군을 토벌하고 충분히 레 벌업 하는 두 사람을 볼 수 있겠지" "레벌업이라... 글쎄요. 레벨이 달라지기는 하겠지만 그게 과연 업일 지는 잘 모르겠네요. 하여간 이야기는 하잔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 는 솔한장이라는 마을에서 시작됩니다. 그곳에 아케르 용병단이 주둔지를 차렸기 때문이지요..." 세헤라자드의 탐그루 이야기는 이렇게 또 시작되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N:김상현 #9671/10199 ━━━━━━━━━━━━━━━━━━━━━━━━━━━━━━━━━━━━━━━━ 제 목:[탐그루]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 62 관련자료:없음 20/20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1-11 00:32 조회:979 탐그루 # 마법은 마음이다 - 마음은 칼이다 # *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 내가 아케르 용병단 단원들과 하잔 입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팜 산 맥 어귀의 솔한장이라는 마을에 도착한 것은 오후 늦은 시간이었다. 출발 한 지 이틀이 지난 뒤의 저녁 이었다. 이동간에 별다른 사고는 없었다. 모두들 평소처럼 웃고 떠들어 대고 있어서, 내 눈에는 꼭 놀러 나온 사람 들처럼 보였을 뿐이다. 나는, 이제 정말로 실전에 참가하게 되었구나, 하 면서 잔뜩 긴장하고 있는데 말이다. 솔한장 마을을 일차 집결지로 삼은 이유는 이곳에서 성황청의 성직자 들, 국왕의 칙사들이 모두 모여 함께 작전회의를 하기 위해서라고 차이린 이 귀뜸 해줬다. 그나저나 성황청이라면 나는 좀 껄끄러운데... 솔한장 마을은 주둔지로 쓰기에는 딱 좋은 마을이었다. 하잔과의 거리 도 그다지 멀지 않았고, 무엇보다 넓은 공터가 있기 때문이었다. 공터는 마을의 중앙에 있었는데, 아마 탐그루의 중앙 광장쯤 되는 곳인 모양이었 다. 마을의 장로가 피곤한 기색이 짙은 얼굴로 우리를 그곳 공터로 안내 했다. 우리는 공터에 도착하자 타고 온 마차에서 내려, 준비해온 천막을 치고 주둔지를 꾸미기 시작했다. 일단 각 십부가 머물 수 있는 천막이 쳐지고 나자, 나머지 인원들은 야전 지휘소로 쓸 천막을 치기 시작했다. 지휘는 순무가 맡았다. (그 까다로운 순무는 해가 지기 전에 일을 마쳐야 한다면 서 쉬는 시간 한 번 없이 우리를 몰아 부쳤다) 우리가 일을 하고 있는 사 이, 지다문 십부장은 자치대 건물로 갔다. 먼저 작전 회의에 참석하기 위 해서인 모양이었다. 우리는 간신히 해가 지기 전 지휘소로 쓸 천막을 다 칠 수 있었다. (순 무는 이만하면 이 일은 끝났고... 하고 중얼거리면서 지휘소 천막으로 들 어가 버렸다. 뭔가 또 할 일이 생긴 모양이었다) 하여간 해가 지기 전에 공터는 원래 우리가 있던 주둔지만큼은 아니어도 꽤 쓸만한 모양을 갖추 었다. 땅거미와 함께 여기 저기 연금술사의 빛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지다문 십부장이 돌아오자 십부장들이 지휘소 천막에 모여 회의를 시작 했고, 덕분에 병사들은 공터를 벗어나지만 않는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시간을 가지게 되었다(해가 진 다음이니까 경계근무에 걸리지만 않았 다면 말이다). "어이, 수르카. 밥 먹기 전에 한 판 어때?" 차이린의 부관 청강이 내게 도박이나 한 번 하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지 만 나는 점잖게 사양하고는 천막 밖으로 나갔다. 언제 나타났는지 하늘에 는 별이 가득했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내가 이곳 아케르 용병단으 로 찾아오던 밤을 생각했다. 그때만 해도 나에게 이런 일들이 생기리라고 는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떠버리 하진이 찾아온 것은 그때였다. 하진은 정말 반가운 듯 목소리를 높이며 나에게 다가왔다. (떠버리 하진의 장삿속은 탐그루의 노련한 장사 꾼 못지 않단 말이야. 양손에 벌써 물건이 가득 들어있는 가방을 들고 있 잖아!) "어이! 이게 누구야! 수르카 아니야! 소문은 들었어. 벌써부터 활약이 대단하다면서? 소리장에 가서 수도 없이 마물들을 베었다더니, 사실이 야?" 하진은 내게 대답할 기회도 주지 않고 정신없이 말을 이어나갔다. "저번에 그랬으니 이번에도 큰공을 세워야지, 안 그래? 음. 내가 좋은 충고 하나 해주지. 이런 큰 작전에는 치료석 같은 것 말고도 꼭 챙겨야 할게 있어. 예를 들면 말이야... 적의 칼을 빗나가게 하는 이 부적은 어 때? 너라면 내가 특별히 은화 열 세 닢에 넘기지. 다른 사람들한테는 스 무 닢씩 받고 주는 건데 비밀만 지켜준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줄 수 있어. 아니면 용기를 높여 주는 이 마법약은 어때? 은화 백 닢은 줘야 만져볼 수 있는 거지만 너한테 라면 쉰 닢에도 줄 수 있어. 그렇지만 더 이상 깎 는 건 곤란해. 그럼 나한테는 남는 게 하나도 없단 말이야" 나는 알아들을 수도 없는 이상한 문자가 적혀있는 종이 쪽지나, 술하고 오줌을 섞어 흔들어 놓았을 게 뻔한 자칭 마법약에 은화를 투자하는 일은 절대 하지 않을 생각이다. 하지만 오래간만에 보는 하진의 얼굴은 반가웠 다. "별로. 하지만 단검 같은 거라면 몇 개 사두고 싶은데" 단검을 그다지 잘 던지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품에 몇 개 차고 있다면 조금 안심이 될 것 같았다. 하진이 파는 것 중에서 먹을 것과 무기 종류를 뺀다면 나머지는 전혀 믿을 수 없다는 건 내 변하지 않는 생각이다, (탐그루 출신 사람에게 함 부로 엉터리 물건을 팔 수는 없는 법이다) "단검! 역시 현명한 생각이야. 몇 자루 가지고 있으면 마음이 든든해지 지. 라이짐도 몇 자루 샀다구. 라이짐하고 친구, 맞지? 그렇지. 내 기억 력은 절대 빗나가는 법이 없다니까. 자, 여기 장식도 없고 화려하지도 않 은 이 실용적인 단검을 좀 봐. 만약의 경우에는 얼마든지 마음놓고 던질 수 있어. 게다가 던지기 딱 좋게 무게 중심도 맞추어져 있지. 이건 스파 일 정규군에 납품하던 단검인데, 내가 아는 사람을 통해서 왕창 얻어온 물건이라구. 별써 여러 명이 샀지. 가격도 비싸지 않아. 은화 다섯 닢에 한 자루. 이젠 얼마 안 남았다구. 얼마나 인기가 좋은지, 원" 나는 하진의 가방 안을 들여다 보았다. 단검은 열 자루 정도가 있었다. 나는 주머니에서 은화 스무 닢을 주었다. "다섯 자루" 내가 말했다. 하진이 어떤 경로로 단검을 얻어오는 지는 알 수 없었지 만 하여간 은화 다섯 닢이라면 너무 비싸다는 생각으로 나는 일단 깎아보 기로 했다. "이봐. 누군 땅파서 장사하는 줄 알아? 너무 하잖아, 수르카. 내가 탐 그루 사람들 장삿속 밝은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건 너무 하는 거라구" 하진은 일단 이렇게 말했다. 저거야말로 장사꾼들의 전형적인 수법이 지. "알았어" 나는 이렇게 말하며 주머니에서 꺼냈던 은화를 도로 집어넣으려고 했 다. 이 행동은 주효했다. 바로 하진은 내 손을 잡아 은화를 뺏듯이 채 가 더니 단검 다섯 자루를 나에게 넘겨주었다. "참. 이렇게 밑지면서 장사를 하다니 원. 이러다가 거덜나겠다. 너하고 는 훈련소에서 같이 흘린 땀 때문에 뭐라고 할 수도 없고... 하여튼 라이 짐이나 수르카나 똑 같군. 누가 탐그루 사람이 아니랄까봐" 역시 라이짐도! 그럼 그렇지. 나는 단검 다섯 자루를 잘 챙겨두었다. 다섯 자루를 동시에 가지고 다니기에는 좀 무겁겠지만 그래도 필요할 때 가 생긴다면 내 목숨을 구해줄지도 모를 물건이다. "참. 넌 용의 눈 십부에 있다면서? 차이린? 하하하! 고생 좀 하겠군. 어때? 밤마다 한 명씩 그런다는 말이 사실이야? (하진은 내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 걸 잠시 유심히 관찰하더니)...알지? 무슨 말인지" 하진은 이렇게 말하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나도 따라서 웃었지만 내 웃 음의 의미는 좀 달랐다. "넌 어느 십부에 있어?" "난 아루마의 죽음의 신 십부에 있어. 잘 알겠지만 얼마 전 타노 마을 반란군 소탕 작전에 나가서 수도 없이 베고 돌아왔지. 나도 한 몫 했다 구. 우리 아루마 십부장은 대단한 사람이야. 키가 좀 작다고 해서 우습게 볼 사람이 아니야. 무지하게 무서운 사람이라고. 이번에 보면 알 거야. 왜 죽음의 신 십부라고 불리는지 말이야" 하진은 이렇게 말하면서 어깨를 흔들었다. 그나저나 하진은 반란군 소 탕 작전에 나간 적이 있다니 경험이 있는 셈이로군. "타노마을에선 어땠어?" "작은 마을이어서 별 재미없었어. 우리 고참들 하는 말 들어보니까 반 란군 소탕 작전이 가장 재미있다고 하더라. 일단 무장하고 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그때부터는 완전히 우리 세상이래. 아무도 덤빌 생각도 못하고 말이야. 음식이며 술이며 무기며 닥치는 대로 챙겨도 뭐라고 아무도 말못 한데. 여긴 오래되긴 했어도 꽤 큰 도시니까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말이 야. 아루마 십부장님은 그런 작전에는 아주 탁월한 능력이 있는 분이야" 하진이 말했다. 그런데 아루마의 죽음의 신 십부라면 재훈이 있었던 곳 이잖아? 생각난 김에 나는 하진에게 재훈의 소식을 물었다. "아, 재훈" 하진은 장사꾼의 표정이라기보다는 순진한 소년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재훈은 이제 우리 십부원이 아니야. 아케르 단장의 직속 십부로 갔다 는 말이 있어. 이상한 재주가 있어서 타호루가 추천한 모양이야. 짐승을 부릴 줄 안다나, 뭐 어쨌다나. 타호루의 제자가 됐다는 소문도 있고... 아케르 단장의 십부원이 건, 타호루의 제자 이건 잘됐지 뭐. 우리보다 죽 을 확률은 훨씬 적을 테니까" 재훈이 그랬구나... 이럴 때 죽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니 좋겠다. 타 호루가 제자가 되어주지 않겠느냐고 물었을 때 만약 좋다고 대답했더라 면... "그럼 다음에 또 보자, 수르카. 이 몸은 좀 팔아야 할 게 많이 남아서" 하진은 이렇게 말하면서 다시 장사꾼의 표정으로 돌아가서는 어디론가 뛰어갔다. 나는 허리에 찬 전대를 만져보았다. 전대 안에는 한 푼도 사용 하지 않은 사비오의 금화가 그대로 들어있었다. 평소에는 내 자리 머리맡 에 있는 사물함에 넣어두었던 것이다.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 사 비오 영감이 그랬으니, 그 날이 오면 꼭 돌려줘야지. 사비오 영감이 탐그 루를 떠난 게 며칠 전 일 같은데, 지금 내게는 정말 오래 전에 있었던 일 처럼 느껴졌다. 탐그루를 떠난 후 짧은 시간 동안이었지만 내게는 너무도 많은 일이 일 어났다. 탐그루를 떠나기가 무섭게 타코들의 공격을 받았고, 가투신을 만 나 이곳으로 오게 되었고, 훈련을 받아 정식 용병이 되고, 말로만 듣던 위대한 복수자 검객 아케르를 만나 아케르의 칭찬을 듣기도 했고, 그 사 이 재훈과 우보같은 용병단 친구들도 사귈 수 있었고, 첫 임무를 받아 차 이린과 단 둘이 소리장 마을로 가기도 했고, 마법과 칼로 성직자와 맞서 싸우기도 했다. 아직까지는 운이 좋았다. (목이나 팔이 제자리에 붙어있 는 걸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마법도 운좋게 필요할 때에 정확하게 작 동이 되어 주었고, 칼도... 어찌되었건 아직까지는 제대로 내게 힘이 되 어 주었다. 하지만 이런 운이 언제까지 계속 될 수 있을까. 나는 하잔에 가까이 올 수록 점점 더 불안해졌다. 용병단에서 죽지 말라고 하는 인사는 언제 어 떻게 죽을지 모르는 용병들의 생활을 말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겁난 다. 솔직히 무섭다. 칼을 들고 싸운 다는 것이 말이다. 나에게도 차이린 이나 라이짐 같이 싸워야 할 분명한 이유가 있다면 두렵지 않을 수 있을 까? 싸움터에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아직은 모르는 게 너무 많다. 나는 허리에 찬 칼을 꼭 쥐어 보았다. 그러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 래. 이유 같은 거 생각하지 말자. 나는 칼을 쓰는 일 밖에는 할 줄 아는 게 없어. 아케르도 인정한 칼솜씨야. 그렇다면 나를 믿고 나를 아껴주는 사람을 위해 싸우다 죽을 수도 있는 거지. 뭐. 아케르가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하나같이 나에 대한 믿음과 애정이 담 겨 있는 말이었다. 나 하나 때문에 성황청과 대립하는 쪽을 택한 아케르. 그렇다면 싸움에서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나를 믿고 나를 생 각해주는 아케르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 아닐까. 하지만 그것만은 아닌 것 같다. 가투신의 말이 떠올랐다. 강한 자는 살 아남고 약한 자는 죽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라고 가투신은 말했다. 그렇 다. 나는 강해져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식사집합 종소리가 울렸다. "수르카. 내가 땄어!" 청강이 웃으면서 천막에서 나왔다. 도박을 많이 해보지 않아 도박의 참 맛이 뭔지 잘 모르겠지만, 돈을 좀 딴 게 저렇게도 기쁠까? 아무래도 이 상하다. 내 기억에 의하면 청강은 따는 날보다 잃는 날이 더 많은 거 같 은데 말이야. 나는 다른 십부원들과 함께 식당으로 향했다. 십부원들은 하나같이 작 전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대고 있었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 다. 죽는다는 것, 그리고 전투에 나간다는 것. 모든 것이 내게는 부담스 럽고 어려운 일로만 여겨졌다. (사실 내가 작전에 참가도 했고, 공도 세 웠다고 동료들은 알고 있었지만 내가 한 일이라고는 차이린과 소풍 한 번 다녀 온 것밖에는 되지 않는다. 풋내기 성직자 타오의 팔을 잘라낸 일을 제외하면 말이다) 식당은 공터에서 멀지 않은 낡은 건물에 임시로 마련돼 있었다. 그 건 물은 언제 지었는지 짐작도 가지 않을 만큼 낡아 있었다. 아마 원래는 무 슨 모임 같은 곳을 갖는 강당인 모양이었다. 벽에는 난생 처음 보는 오래 된 그림들이 가득 그려져 있었다. 색이 다 바래 있어서, 자세히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어떤 벌거벗은 남자의 윤곽과 어떤 여자의 얼굴은 알아 볼 수 있었다. "저건 오래된 종교화야" 마로우였다. 언제 나타났는지 내 옆으로 다가와 말했다. "마로우. 오래간만이네" 나는 오래간만에 훈련병 친구를 만나 반가운 마음에 이렇게 인사했다. "음. 그래 오래간 만이야. (하지만 마로우의 눈은 그림에 가 있었다) 천년 전에는 꽤 교세가 높았던 어떤 종교의 종교화지. 성황청이 삼년전쟁 중에 완전히 다 없애 버린 줄 알았는데, 이런 곳에 아직 저런 그림이 남 아 있는 줄은 몰랐는 걸" 놀랍다는 듯이 마로우가 말했다. "그렇구나. 그런데 어느 십부에 있어?" 나는 마로우의 잘난 척 하는 소리가 듣기 싫어서 이렇게 물었다. 칫. 금발머리에 미남이라고 너무 잘난 척 하는 거 아냐? "음. 지다문 십부장 님 밑에 있어. 하늘의 끝 십부. (마로우의 눈은 여 전히 그림에 가 있었다) 고문도구를 숭배하는 이상한 종교였다는 글을 읽 은 적이 있어. 자기들이 섬기는 신이 그 고문도구에서 죽었기 때문에 그 랬다고 하던데... 수르카, 저 남자가 바로 그 신인 모양이야. 저것 봐. 고문당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아?" 마로우가 말했지만 내 눈에는 벌거벗은 한 남자가 두 팔을 들어올리고 있는 모습의 희미한 윤곽 말고는 보이는 게 없었다. "...나는 언젠가 용병 생활이 끝나면 학자가 될 거야. 스파일에 사는 오브라디 교수 같은 대학자 말이야" 참 나 원. 오래간만에 만나서 고작 한다는 얘기가. "그럴 거면 용병단에는 왜 들어온 거야?" 나는 마로우에게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럴 만한 일이 있었어. 역사의 흐름에서 비껴나 있는 책상 위의 학자 가 되기보다는 역사의 한 가운데에서 함게 그 흐름을 호흡하는 그런 학자 가 되고 싶었거든" 어랍쇼? 이건 또 무슨 소리야.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N:김상현 #9672/10199 ━━━━━━━━━━━━━━━━━━━━━━━━━━━━━━━━━━━━━━━━ 제 목:[탐그루]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 63 관련자료:없음 24/24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1-11 00:32 조회:1006 탐그루 # 마법은 마음이다 - 마음은 칼이다 # "이제 시대는 다시 칼을 요구하고 있어. 나는 그 한가운데에 있고 싶었 고... 지금 비스토브레 왕국의 역사학계는 너무 권위적이고, 고지식한데 다, 고리타분해. 학자들 간에 이견이라는 것도 다 탁상공론에 불과 하고 말이야. 최고의 역사학자라는 평을 받고 있는 오브라디 교수도 스파일에서나 인 정받지 다른 곳에서까지 인정을 받는 건 아니거든. 특히 타실 쪽에서는 아주 무시하고 있는 형편이지. 그러다 보니 제대로 된 역사 연구가 이루 어 질 수 있겠어? 그저 자기네 학파가 옳다는 주장만 되풀이해서 하고 있 는 거야" 어쩐지 정치 얘기 같군. 그렇다면 그건 딱 질색이지. "그래. 만나서 반가웠다. 언제 한 번 만나서 그, 학자, 오브리다 교수 인지 얘기를 다시 하자구. 지금은 밥이나 먹자구. 아. 배고파라" 나는 이렇게 말하면서 음식을 나누어주는 배식구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지. 그리고 오브리다 교수가 아니라 오브라디 교수야. 스파일의 오브라디 교수" "아무튼" 오브라디건 오브라다건 그게 무슨 상관이람. 오브라디 오브라다. 그래 알았다구. 오브라디! 나는 준비되어 있던 식기를 집어들었다. 요리장은 내 식기에 으깬 감자와 야채 몇 종류, 그리고 고기 한 덩어리를 담아주었 다. 흰 모자를 쓴 요리사는 이제 내게 더 이상 죽지 말라는 말을 농담으 로 던지지 않았지만, 나는 처음 용병단에서 식사를 할 때 들었던 농담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요리사는 내게 죽지 말라고 말하고는 혼자 껄껄 웃었다. 그때 그 행동이 지금 생각하면 웬지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나는 식기를 들고 앉을 자리를 찾았다. 식당 벽 여기 저기에 알 수 없 는 그림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그나저나 고문 도구를 숭배하는 종교라... 그거 어쩐지 근사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걸. 비스토브레 왕국엔 국교가 따로 있지 않다. 전에는 성황청이 모든 종교 를 주관하는 일 따위도 없었고 말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믿고 싶은 종교 를 믿는 걸 당연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사비오 영감에게 언젠가 들은 얘 기다) 하늘을 섬기는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땅을 섬기는 사람도 있었고, 성년의 신 마소드를 섬기는 사람도 있고, 뭐 그런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성년의 신 마소드를 섬기느냐 하면 그것은 또 아니다. 나는 종교에 있어 서는 자유주의자다. 그런데 이건 사비오 영감이 자신을 자유주의자라고 했으니까 나도 그럴 거라는 생각에서 하는 말이지 사실 자유주의가 뭔지 잘은 모른다. 어쩐지 이거 또 정치 얘기 같은 걸. 성년의 날에는 마소드를 섬기고 날 이 어두워지면 연금술사의 빛을 섬기고, 남들이 그러면 기회주의자고, 내 가 그러면 자유주의자인가? (다시 말해 아무 것도 섬기지 않는다는 뜻 아 니야?). 그런데 용병은 무슨 신을 섬겨야 되지? 칼의 신? 아케르 용병단 가에 따르면 '피에 굶주린 악마들'을 섬겨야 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성황청에서는 과연 어떤 신을 섬기고 있을까? 그러고 보니 그게 좀 이상했다. 내가 살던 탐그루가 워낙 종교하고는 거리가 먼 곳이라고 해도 그 대단한 위세의 성황청이 어떤 신을 섬기는지도 모르고 있다니 이 상하지 않은가. 혹시 나만 모르고 있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다 모르 고 있는 거 아니야... 내가 성황청에 대해서 알고 있는 거라고는 성황청이 모든 종교를 관장 하고 있다는 것 (국왕이 그렇게 정했다니 그렇게 알고 있을 뿐이다), 마 법을 모으고 있다는 것, 그리고 여기 식당에서 종교 의식을 가지지 못하 게 했다는 것 정도뿐이다. 이거, 그러고 보니 나는 라스폼하고 한 판 싸 우기는 했어도 라스폼이 어떤 사람인지 전혀 알지 못하는 군. 좀 먹어보자고 자리를 잡고 앉기는 했지만 이 생각 저 생각이 자꾸 머 리를 어지럽히는 바람에 나는 제대로 식사를 할 수가 없었다. 내가 씹고 있는 것이 감자인지, 야채인지 도무지 분간이 가질 않았다. "수르카. 왜 그래?" 누군가가 내 어깨를 툭 치면서 말했다. 라이짐이었다. "아, 아니야. 그냥 좀..." 나는 대충 얼버무리면서 식사를 계속하려고 했다. "걱정되니? 겁나나보지?" 라이짐이 말했다. 이 자식. 이런 순간까지 날 놀려먹을 생각으로... "여길 봐, 수르카" 라이짐이 식당 안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식당 안을 둘러보았지만 내 눈에는 식사를 하고 있는 용병들 말고는 들어오는 게 없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 다 그래. 나도 마찬가지야. 누구나 죽는 건 겁나고 두려운 일이야. 그러니까 겁먹는 걸 두려워하지 마. 그건 당연한 거야. 겁먹고 떨고 있다고 해서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다구. 죽을 때가 되면 죽 는 거고. 공부한 것만큼 성적이 나오는 거라구. 긴장 풀고. 될 대로 되라 지 라는 마음으로 부ㄳ쳐봐. 뭐. 좀 실수 했다고 해서 세상이 당장 어떻 게 되는 건 아니잖아" 라이짐은 이렇게 말하면서 내 옆에 앉았다. 친구... 나는 가슴이 찡해 왔다. 짜식. 그래도 친구라고 챙겨주긴 하는 군. 식당으로 쓰고 있는 건 물 안을 밝혀주고 있는 연금술사의 빛이 더욱 환하게 타오르는 느낌이 들 었다. "누구나 한 번은 죽어. 언제 어떻게 죽느냐만 다를 뿐이지" 언젠가 차이린이 했던 말과 비슷한말이군. 다만 차이린은 '어디서 어떻 게 죽느냐만 다를 뿐'이라고 했었지. 라이짐도 겁을 낸다. 나도 겁을 낸 다. 죽는 건 누구나 다 두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해도 기분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수르카. 내가 했던 맹세 생각 나?" 라이짐이 말했다. "응" 나는 감자를 씹으면서 대답했다. (기분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지만 내가 씹고 있는 게 뭔지는 알 수 있게 되었다. 라이짐 덕분이겠지) "나는 내 맹세를 지킬 거야. 그 전에는 죽어도 죽을 수 없어" 죽어도 죽을 수 없다구? 말이 좀 이상하군. "난 맹세했어. 복수할 때까지 살아남겠다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하겠다고. 내가 용병단에 와서 배운 게 뭔지 알아?" 나는 감자를 씹다말고 라이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강한 놈이 살아 남는 거야. 약한 놈은 다 죽을 수밖에 없어" 그건 나도 알아, 친구. "그런데 강하다는 게 뭔지 알아?" 나는 대답을 하려고 했지만 감자가 목에 걸려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하 지만 라이짐은 내 대답은 들어보지도 않고 말을 이었다. "그건 망설이지 않는 거야. 가투신이 좀비의 목을 베었던 일처럼 말이 야. 망설였다면 가투신도 너도, 나도 다 죽었을 거야. 난 맹세했어.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남기로. 그러니까 나도 상황이 되면 망설이지 않겠어. 절대로" 이렇게 말하는 라이짐의 얼굴엔 무엇인가 슬픈 기운이 해질녁의 그림자 처럼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동안 뭔가 내가 모르는 사연이 있었나보 군. 갑자기 식당에서 만나자마자 이렇게 긴 얘기를 늘어놓다니 말이야. 어쨌든 마로우하고는 딴판인 걸. 역시 친구는 오래된 친구가 제일이라니 까. "그리고 난 그 맹세를 지킬 거야. 꼭. 수르카. 너도 망설이지 마. 죽일 수 있을 때 죽이지 않으면 네가 죽어" 라이짐의 말에는 마법의 말이 섞여 있었다.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그래 알았어. 라이짐. 죽지마" 나는 감자를 다 넘기고 이렇게 말했다. 감자를 넘겨서 그런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 그런지 속이 후련해진 기분이 들었다. 그래. 죽일* 수* 있을* 때* 죽이는* 거야* 그게 뭐 문제가 된다고 그렇게 고민했지? 오우거? 죽이지 않았으면 다 죽었어. 내가 공을 세운 것도 망설이지 않고 성직자 타우의 팔을 베었기 때문이야. 다들 그렇게 말했잖아. 나는 이를 악물었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자 뭔가 내 안으로 들어오려고 꿈틀거리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을 억누르려고 노력했다. 그러자 몸이 반항을 하기 시작했다. 가슴이 뛰고 숨이 차오르기 시작했 다. 칼을 쥐었을 때 보다 몇 배는 더 흥분이 되는 느낌이었다. 나는 팔로 내 양어깨를 감쌌다. "수르카? 괜찮아?" 라이짐이 물었다. "...응...그냥 좀..." 나는 이렇게 말하면서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조금 진정이 되는 것 같았다. "왜 그래? 어디 아파?" 라이짐이 물었다. 그래. 어쩌면 칼을 쥐었다는 것부터가 잘못이었는지 도 몰라. 하지만 이제 와서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용병이 되기 전 생 활로. 이젠 칼과 피가 없는 세상으로는 결코 돌아 갈 수 없다. 사비오 영 감도 떠났고 라스폼은 언제 나를 찾아낼지 모르는 상황이다. 나도 살아남 는 거야. 라이짐처럼, 또 가투신이나 차이린, 그리고 아케르 단장이 했던 것처럼. "너도 죽지 마, 수르카. 꼭이야" 라이짐이 내게 말했다 식사를 마치고 나자, 차이린의 전달 사항이 있었다. 임시로 만들어진 천막 안에 십부원들이 하나 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천막에는 나무로 만들 어진 침상이 길게 두 줄 깔려 있었다. 십부원들은 차례로 하나 둘 자리에 앉았다. 얼마 후, 십부원 모두가 모이자 차이린은 말을 시작했다. (근무 를 나간 레드와 블루는 제외하고 말이다) "결정 된 사항 몇 가지를 전달하겠다" 어쩐지 불길한 표정이었다. 연금술사의 흰 빛이 위태롭게 흔들리는 것 같았다. "먼저, 우리 용의 눈 십부는 잠정적으로 해체된다" 뭐라고? 해체? 내가 놀라기도 전에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특히 청강과 채리는 아주 뜻밖이라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뭐라고 말하려고 했다. "잠깐. 내 말 끝까지 들어. 질문은 그 다음에 하고" 차이린은 이렇게 십부원들을 진정시킨 다음 다시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 했다. "지금부터 십부원들은 가투신의 웃는 얼굴 십부에 임시로 편입된다" 십부원들은 또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거, 도대체 어떻게 일이 돌 아가고 있는 거야? "아니, 차이린 십부장 님, 전..." 채리가 뭐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차이린이 손을 들어 채리가 계속 말하 려는 것을 막았다. 끝까지 들어보라구, 채리. 너무 성질이 급한 거 아니 야? 나도 뭐라고 묻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나는 속으로 이렇게 중얼 거리면서 참았다. "아주 잠깐 동안 만이다. 나와 수르카, 그리고 찬은 특수 임무를 맡게 되었다" "그럼, 차이린 십부장님, 저희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용의 눈 십부가 사라지는 건 아닙니까?" "머, 먹는 건 이제 누, 누구하고 머, 먹어야 하나요" 차이린이 이렇게 말하자 여기 저기서 질문이 쏟아졌고, 차이린은 짜증 난다는 표정으로 설명을 시작했다. 차이린의 설명은 다음과 같았다. 먼저 지다문 십부장이 회의에 참석한 결과 알게된 사실. 성황청은 애초 에 여기에 좀비들이 나타나는 원인을 조사하기 위해서 온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하잔에서 반란군이 나타나자 국왕에게 파병을 요청했고, 국왕은 무슨 이유에선지 파병을 거절하고 용병단을 보내기로 결정했다는 것. 그리고 성황청은 회의 대표로 일개 성황청 기사단 기사를 보내 왔다는 사실. 그것으로 성황청은 자신들이 하는 일에 우리는 도와주러 온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결국 성황청과의 작전 회의에서 지다문 이 얻을 수 있었던 직접적인 정보는 거의 없었다. 그래서 지다문 십부장은 반란군 토벌 작전에 있어서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먼저 정보를 수집하기로 했고, 그 임무를 특임 부대를 구성해 맡기 기로 했다는 거였다. 그리고 그 특임 부대로 차이린과 찬, 그리고 내가 선택되었다는 것이었다. "돌아오면 바로 다시 용의 눈 십부가 재편성되니까 걱정하지 마. 그냥 임시적인 조치일 뿐이야" 차이린은 이렇게 설명을 맺었다. 간단하게 설명하려고 차이린이 노력하 기는 했지만 설명이 다 끝났을 즈음에는 취침 시간이 이미 지나있었다. 경계근무를 나가 있는 레드와 블루의 교대를 위해 우보와 청강이 나가고 도 한참이 지난 후였으니 말이다. (레드와 블루는 취침 시간 전 경계근무 마지막 조고, 우보와 청강은 취침시간 후 경계근무 첫 번째 조였다) 레드 와 블루가 들어오고 나자, 지금까지의 설명을 나카가 해 주었는데, 그러 자 또 한 동안 소란스럽게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터져나왔다. "하지만 왜 수르카와 찬입니까?" 마지막으로 청강이 물었다. 불만 가득한 목소리였다. 그래. 그건 나도 궁금하다. 도대체 왜 나와 찬이지? 나는 찬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찬은 아무 표정도 짓지 않고 그냥 물끄러미 차이린을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 다. 저런 표정을 하고 있으니 도저히 속마음을 알 수가 없다니까. "수르카와 찬의 경력 때문이야... 자세한 얘기는 하지 않겠어. 하지만 피해를 최소화하자는 지다문 십부장님의 결정이니까 불만은 가지지 말도 록 해. 공식적으로는 내일 점심시간부터 웃는 얼굴 십부에 편입되는 거 야. 하지만 실제로는 청강이 병력들을 지휘하도록 해" 지휘권을 가진다는 말을 듣자 청강은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불만이 좀 풀리긴 한 모양이었다. 경력 때문이라고? 역시 아자닌의 능력이 필요한 일인 모양이었다. 아자닌이 내 곁에 있다는 게 좋을 때도 있지만, 이럴 때는 좀 마음에 안 든단 말씀이야. 전달사항이 끝나자, 십부원들은 천천히 침구류를 깔기 시작했다. 하지 만 표정들은 제각각이었는데 ,청강은 인상을 쓰고 있었고, (아마 부관인 자신을 제치고 나와 찬이 특임 부대에 뽑혔다는 것 때문일 것이다) 기밀 은 여전히 더듬거리면서 뭐라고 중얼 거리고 있었고, 나카는 별 생각 없 이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수르카와 찬은 잠깐 나 좀 봐" 차이린이 말했다. 이거, 나는 잘 시간도 없다니까. 무슨 일만 있으면 꼭 부른단 말이야. 나와 찬은 차이린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밖은 이제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혹시 있을지 모를 반란군들의 침입에 대비해서 연금술사의 빛을 거의 꺼버렸기 때문에 길은 어둡다 못해 숨을 쉴 때마다 어둠이 콧구멍으 로 밀려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차이린을 따라서 차이린의 천막으로 들어갔다. 천막 안은 연금술사의 붉은 등이 켜져 있었다. 붉은 등 아래에 선 차이린은... 역시 예뻤다. 예 전에 탐그루 정박장 근처에서 본 붉은 등 아래의 여인들처럼. 으흠. 이 거, 자꾸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되는 데. 차이린 앞에만 서면 왜 자꾸 이 러는 걸까? "먼저 이제부터는 한 팀이니까, 다 털어놓을 게" 차이린은 나와 찬에게 침상에 앉을 것을 권한 다음에 말을 꺼냈다. 그 런데 털어놓는다니? "이번 임무는 아주 중요한 임무야. 그리고 사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잔에 들어가서 정보를 얻어 오는 일이 아니야" ----------------------------------------------------------------- 먼저 시리얼 계시판의 자료 삭제를 막기 위해 수고하시는 '담' 님의 노 력에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하이텔 연재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하이텔에서도 계시물 삭제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어 마음이 불편합니다. 하지만 '담' 님과 계시판지기 님의 대화를 읽고, 나우에서처럼 달랑 공지 하나 띄워 놓고 무자비하게 삭제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되어 한 편으론 마음이 놓입니다. '담' 님과 '계시판지기' 님의 대화를 읽고, 계시판판지기 님 또한 시리 얼 계시판의 계시물 보존에 대해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걸 확인했 습니다. 그렇지만 계시물 보존은 보존해주는 것이 아니라 보존해야 될 것 이라고 생각합니다. 계시물이 많아 이용자가 불편함을 느낀다는 것이 삭제의 주요 원인이라 고 한다면 그것은 크게 잘못된 서비스입니다. 그야말로 구더기 무서워 장 못담그는 경우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삭제된 글 중의 어떤 것은 그것을 읽는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어 놓을 수 있는 글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잠깐의 불편함은 누구의 인생도 바꾸어 놓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서 비스를 선택해야 할지는 자명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추천'을 받은 글들은 보존하겠다 라는 계시판지기 님 의 말입니다. 이것 또한 무척이나 얇은 생각입니다. 어떤 글의 가치가 몇 번의 추천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이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아주 나중에 가서야 그 글의 가치가 재평가되는 경우는 비일비재 합니다. 그리고 글 쓴이에게는 그 글이 어떤 것이든 무척이나 소중한 것 입니다. 어떻게 몇 번의 추천으로 우열을 가려 그 글의 보존 여부를 가리 겠습니까.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다시 한 번 '담' 님의 노력에 경의를 표합니다. 그리고 계시판지기 님 께서도 다른 많은 이용자들의 요구에 귀를 기울여 사려 깊은 판단으로 시 리얼 계시판의 더 큰 발전을 위해 적극 나서주시기 바랍니다. go newconf 2280 방에서 삭제 계시물 반대를 위한 논의가 있습니다. 한 번쯤 그곳에 들려 '담' 님의 노력에 힘이 되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N:김상현 #9721/10199 ━━━━━━━━━━━━━━━━━━━━━━━━━━━━━━━━━━━━━━━━ 제 목:[탐그루]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 64 관련자료:없음 22/22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1-12 00:37 조회:961 탐그루 # 마법은 마음이다 - 마음은 칼이다 # 나는 차이린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반사적으 로 찬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찬은 여전히 무표정이었다. 이런. 저것도 능 력이군. 능력이야. "우리는 이제부터 좀비를 조사하는 일을 맡게 된 거야" 차이린이 말했다. 어쩐지. 아자닌의 능력이 필요한 일이 뭘까 했더니 바로 이런 일이었군. "그래서 수르카가 끼게 된 거야. 어떤 방식으로 인간이 좀비가 되는 지, 또 막을 수 있는 방법은 뭔지, 그런 걸 자세히 알아내는 게 우리의 임무야" 차이린이 말했다. "그런데 이제부터라고요?" 나는 이렇게 물었다. 설마 지금 떠나자는 말은 아니겠지. "응. 그래...자. 이제 소개할 사람이 있어" 소개라고?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누구요?" 내가 물었다. 찬도 표정은 바뀌지 않았지만 눈을 움직이는 게 어디서 누가 나타날지 경계하는 모양이었다. 음. 저렇게 표정 없이 눈을 굴리니 까 좀 무서운 느낌이 드는 군. 언젠가 써먹어야지, 나도. 찬의 눈길이 차이린 뒤에 있던 그림자에 멎었다. 그리고 나도 거기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그림자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림자는 천천히 움직이며 연금술사의 빛 아래에 섰다. 검은 옷을 입고 있는 좀 작은 편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눈이 붉은 빛을 받아 유난히 반짝였다. 입고 있는 옷 은 헐렁하게 큰 망토 같은 옷이기는 했지만 아무 장식도 없고 짧아서 움 직이기는 편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케르 단장님의 직속 십부원이에요. 뭐라고 불러도 좋지만, 에이스라 고 불러주세요" 검은 두건 너머에서 입이 움직이며 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목소리가 여자잖아? "에이스는 아케르 님의 직속 십부원이야. 이번 임무는 바로 이 에이스 를 돕는 일이야" 차이린이 말했다. 에이스라... 처음 듣는 이름이군. 그런 이름도 다 있 었나? "그림자 뒤에 숨는 게 특기인 모양이죠?" 내가 에이스에게 물었다. "예. 음지에서 일하며 양지를 지향하는 게 제 일입니다" 에이스가 말했다. 목소리는 고왔지만 얼굴이 보이지 않으니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찬을 바라보았다. 찬의 얼굴에는 별로 경계하는 빛 도 없었다. 그렇다고 안심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한마디로 아무 표정이 없었다는 말이다) 찬의 오른 쪽 눈 및에 가로로 길게 나있는 흉터 가 연금술사의 빛을 받아 묘하게 일렁였다. "내가 했던 말 기억해? 물건 줍지 말라는 전달 사항 말이야. 그게 다 에이스가 수집한 정보 덕택에 할 수 있는 말이었어. 그렇지, 에이스?" 차이린이 물었다. "예. 좀비가 되는 사람들은 전부다 뭔가를 집었다가 그렇게 되었다는 게 제가 얻어낸 정보입니다. 아직 그 이상은 알지 못하고 있지만 말입니 다" 에이스가 말했다. "아자닌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나는 나도 모르게 이렇게 말해버리고 말았다. 이런. 이 말은 하면 안 되는 거 같은데 말이야. 이런 자리에서 말해버리면 내가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 말 안 했다는 게 되잖아? "아자닌... 반지의 정령 이름인가요?" 에이스가 물었고 차이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음. 잘하면 그냥 넘어갈 수도 있겠군. 나는 찬의 눈치를 보았다. 여전히 찬은 입을 굳게 다물고 아무 표정도 없이 앉아만 있었다. 저거, 순 겉멋 아니야? "사실 제가 필요한 건 세 사람이었습니다. 아자닌의 주인인 수르카 단 원과 유능한 사냥꾼, 그리고 경험 많은 십부장. 이렇게 세 분, 직접 만나 뵙게 되니 마음이 놓이는군요" 에이스가 말했다. 하지만 에이스의 얼굴에는 표정이 드러나지 않아서 도대체 무슨 의도로 하는 말인지 짐작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 아자닌 의 주인은 나고, 경험 많은 십부장은 차이린인데, 그럼 찬은 사냥꾼이라 는 말인가? 하지만 그 말에도 찬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이 좁은 천막 안에 표정을 읽을 수 없는 사람이 둘이나 있었다. 하 나만 있어도 불편할 판국인데 말이다. 아무래도 요즘은 무표정이 유행인 가보다. 틈나는 대로 연습해 봐야지. 웃지만 않으면 되는데. 아무래도 저 런 표정으로 있으면 얼마 안가 웃음을 터트릴 거 같단 말이야. "어떤 일인지는 제가 설명해 드리지요" 에이스가 말했다. "아케르 단장님께서는 오래 전 부터 마칸 족의 부활에 대비해서 여러 방면의 정보들을 모아왔습니다. 저도 그 중에 한 부분을 맡아서 진행시켜 왔지요. 제가 맡은 부분이 바로 좀비에 관한 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곳 하잔에 유독 좀비들이 눈에 띄게 많다는 사실을 알아내고는 이곳에 와 서 조사를 진행했지요. 그러던 중 좀비들이 분명히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움직이고 있다는 것 을 알아냈습니다. 그래서 저는 좀비들이 움직이는 방향을 거꾸로 되밞아 추적해 들어갔습니다. 좀비들의 움직임에 어떤 방향성이 있다면 그 근원 지가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 말이지요. 그런데 추적은 제겐 역부족이었습니다. 전 흔적을 읽어내는 기술을 습 득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름대로 노력해 봤지만 어려웠습니다. 게다가 좀비들에게 한 번 습격을 당하고 보니 더 이상 일을 진행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그래서 아케르 단장님께 다른 직속 십부원을 붙여달라고 부탁드리게 된 겁니다. 하지만 직속 십부원들은 늘 임무가 있기 마련이 죠... 자세한 설명은 드릴 수 없습니다만. 그래서 저는 직속 십부원 대신 에 유능한 사냥꾼과 경험 있는 십부장을 부탁드리게 된 겁니다" 에이스는 여기까지 꼭 준비된 연설문을 읽듯이 쉬지 않고 줄줄 말했다. "단장님께서는 그렇다면 반지의 정령이 도움이 될 거라고 말씀하셨습니 다. 아자닌이라는 반지의 정령이 마칸과 관계된 일이라면 자세히 알고 있 을 거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수르카 단원도 이곳에 오게 된 것입니다" 에이스는 잠시 숨을 고르는가 싶더니 이렇게 말을 맺었다. 아. 아케르 단장 님이 나를 추천했구나... 역시 아케르 단장 님은 계속 나한테 신경을 쓰고 있었어... 이런 생각을 하자 나는 가슴이 벅차 오르 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런 중요한 임무를 내게 맡기다니. "왜 우리가 직접 좀비 문제를 조사하는 지는 알겠지? 성황청은 그런 정 보를 절대로 우리에게 넘겨주지 않아.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차이린이 덧붙였다. "그럼 하잔에 들어가서 정보를 알아오는 일은 하지 않나요?" "물론 진행시키지. 그게 국왕이 우리에게 맡긴 진짜 임무니까 말이야. 하잔 시를 조사하고 정보를 얻는 임무는 밍밍의 십부가 맡아서 하게 될거 야" 차이린이 말했다. 밍밍의 십부라면... 라이짐이 있는 십부였다. 아마 인원 수가 가장 적기 때문에 그 임무를 맡게 된 모양이었다. 나는 라이짐 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반란군들이 있는 하잔 시내에 들어가게 된다... 어쩐지 라이짐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갔어야 하는 데... 그 위험한 일을... "자. 그럼 일단 들어가서 쉬시기 바랍니다. 새벽에 출발하셨으면 합니 다. 어쩌면 꽤 긴 임무가 될지도 모르니까요. 되도록이면 빨리 일을 끝마 쳤으면 합니다. 그럼 저는 아까 말씀드린 팜 산맥 쪽에서 기다리고 있겠 습니다" 에이스는 차이린에게 이렇게 말하고는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천 막 밖으로 나갔다. 검은 옷을 입고 있으니 눈에 뜨이지는 않겠군. 아마 바로 저 사람이 밤에 아케르의 천막을 찾는다는 바로 그 직속 단원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에이스 하나 뿐이 아니라 여러 명일지도 모르지. "자, 들었지? 들어가면 바로 출발할 수 있도록 짐 챙겨두고 자. 불침번 한테 새벽 해 뜨기 직전에 깨워 달라고 하는 거 잊지 말고" 차이린이 말했다. 나와 찬은 앉아있던 침상에서 일어섰다. "잠깐만. 수르카 한테 좀 할 얘기가 있는 데, 먼저 가도 상관없겠지, 찬?" 차이린이 말했다. 또야? 이거, 나는 이래저래 편하게 용병 생활 할 팔 자가 아닌가 보다. 무슨 일을 해도 이렇게 다른 사람보다 특별대접을 받 는다니까. 나 참. "그래. 고마워. 찬. 식량은 준비 안 해도 되. 내가 마련해 놨으니까. 아침에 수르카하고 함께 여기로 오면 되" 차이린이 말했고 찬은 알았다는 표시로 고개를 까딱 하더니 인사도 없 이 나가버렸다. 건방지군, 찬. 나는 생각하면서 도로 자리에 앉았다. "수르카, 할 얘기가 있어. 지다문 십부장이 너를 보내겠다고 했을 때, 나는 너하고 함께 가겠다고 자원했어. 수르카가 내 부하기 때문만은 아니 었어... 말했잖아. 너는 좀 특별하게 느껴진다고. 이거편애를 하는 거 아 닌지 몰라... 만약 그렇다면 나는 십부장 자격이 없는지도 모르지" 나는 문득 오늘 만난 하진이 건넨 농담이 떠올랐다. 설마... 차이린, 정말 그런 마음을 먹고 있는 건 아니겠죠? 나는 총각이라구요. 하지만 생 각만으로도 또 볼이 달아오르고 있었다. 이런. "...그런데 찬은 왜 같이 가는 거예요, 차이린 십부장 님" 긴장하고 있다는 걸 숨기기 위해 이렇게 물어보았다. 사실 궁금하기도 했다. "찬에게는 꼭 가야 할 이유가 있어. 때가 되면 알게 될 거야. 용병단원 의 과거는 절대로 묻지 않는 다는 거, 알고 있지?" 차이린이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으흠. 그런데 이거 아직도 너 무 긴장이 되는 군. 조심해야하는데. 그런데 어떻게 조심해야하지? 힘으 로는 당해낼 수 없을텐데. "너무 겁먹지 마, 수르카. 특수 임무라고는 하지만 그렇게 까지 위험한 일은 아닐 테니까 말이야. 그냥 정보만 얻어서 돌아오면 되. 특별히 누구 와 싸우거나 하는 일은 없을 거야. 만약에 우리가 성황청의 기사단과 만 나게 되는 일이 생긴다고 해도 우리는 되도록 피하거나 도망칠 테니까" 그렇다면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런데 왜 넷씩이나 가는 걸까. 관두자. 그저 해야할 일만 하면 되는 거지, 뭐. '왜?' 는 나 중에 생각하는 거야. 그런데, 이 말, 어쩐지 라이짐의 말과 비슷하군. "예. 알았습니다"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르카... 이번에도 한 번 멋지게 해보자구" 차이린도 따라 일어나면서 말했다. 그러고 보니 궁금한 게 한가지 더 있었다. "그런데 그 에이스라는 이름이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이거 든요? 어디 식 이름이지요? 차이린 십부장님?" 나는 될 수 있으면 예의 바르게, 부하와 지휘관 사이라는 점을 강조해 서 물었다. 혹시라도.. 차이린이... 나를 어떻게 하면 진짜 안돼니까. 그 런데, 나는 왜 자꾸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사실은 내가 이상한 거 아니야, 이거. "에이스는 진짜 이름이 아니야. 진짜 이름은 아케르 단장님이나 순무 행정관 말고는 아무도 모를 거야. 그 에이스라는 이름은 그냥 전설에서 따온 이름이야" "전설이라구요?" "그래. 전설 속에 나오는 하늘을 날아다니며 적들을 해치운다는 위대한 전사의 이름이야" 그렇군. 그러고 보니 그 검은 망토와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이름을 쓰는 사람은 처음 봐요" "그래. 나도 처음 봐. 에이스는 사람이 아니니까" "예? 사람이 아니라구요?" 나는 깜짝 놀라 차이린에게 이렇게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에이스는 검은 엘프 족이야. 너도 들어 본 적 있지? 타실 남쪽에 살던 종족이 있었다고. 그때 살아남은 검은 엘프 족은 대부분 다 노예가 됐고 나머지는 바르도 대륙 여기저기에 뿔뿔이 흩어졌지. 에이스는 그때 살아 남은 몇 안 되는 검은 엘프 중 하나야" 나는 차이린의 말을 듣자 에이스가 어쩐지 너무 정중하게 말하더라 싶 었다. 어차피 노예신세가 되느니 우리 용병단에 들어온 게 에이스를 위해 서는 잘 된 일이다 싶었다. 우리는 어찌되었건 과거는 묻지 않으니까. "다른 종족이라고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 검은 엘프 족은 귀가 뾰족하 고 피부가 검다는 점만 빼면 사람하고 똑같으니까. 아니, 오히려 여러가 지 면에서 사람보다도 나은 면이 많아. 그러니 그냥 보통 단원하고 똑같 이 생각하면 될 거야" "곧 익숙해 지겠지요, 차이린 십부장 님"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무래도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그렇게 편 하게 대하기는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은 엘프 족은 계급에 대한 의식이 투철해. 자신보다 지위가 높은 사 람의 말은 무조건 복종해. 그래서 노예로 쓰이는 거겠지만... 하지만 여 기선 노예가 아니라 한 명의 당당하 아케르 용병단의 단원이야" "네... 차별하지 말라는 말이죠? 알아요. 저도 고아라서 그런 건 사무 치게 잘 알고 있어요" "자, 그럼 조금 눈 붙이고 바로 출발하자. 준비 잘 해와. 어쩌면 이 임 무가 꽤 오래 걸릴 지도 모르니까" 나는 고개를 숙여 차이린에게 인사를 한 후 천막 밖으로 나갔다. 밖은 여전히 어두웠다. 이런 어둠 속에서 임무를 수행해야 하다니. 겁 나는 게 당연하다. 이렇게 깜깜한데. 나는 조심스럽게 한 발 한 발 움직여 천막으 로 돌아갔다. 그런데, 아무래도 아자닌하고 얘기를 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우리가 타고 온 뮤가 끄는 빈 마차 안으로 들어가 아자닌을 불러내었다. 비록 마차 안이 좁긴 했지만 어차피 정령이니 별 불만은 없겠지. "내* 마음의* 문을* 여니* 길을* 인도해* 다오*" 아자닌이 나타났다. 아자닌은 마차 한 가운데에 쌓아둔 상자들이 있는 곳에(정확하게는 그 안에) 나타났다. "부르셨습니까, 수르카 님" 아자닌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런데... 고개를 숙이자 아자닌이 입고 있는 노란색 긴 옷의 앞섶이 내려가면서 가슴이 드러났다. 목걸이가 늘어져 푸른빛을 내면서 가슴이 더 훤히 드러나는 느낌이었다. 음. 그런 데 나는 왜 아무 생각도 없이 아자닌의 가슴을 보고 있는 거지? 이거 마 법이 점점 확실해 지는 게 정말 말 그대로 확실히 눈에 보이는데. "아자닌. 들었으니까 알고 있지? 이제 내가 뭘 하게 되는지" "예, 수르카 님" "아마 네가 하게 될 일은 좀비들이 어디서 오는지, 어떤 이유로 이곳 하잔에 모여 있는지를 알아내는 일을 하게 될 거야" 아자닌은 고개를 끄덕였다. "좀비들이 왜 하잔쪽으로 오고 있는지 현재로선 알 수 없지만, 좀비들 이 만들어지는 근원지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이봐, 아자닌. 그건 아까 에이스가 한 말이라구.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N:김상현 #9722/10199 ━━━━━━━━━━━━━━━━━━━━━━━━━━━━━━━━━━━━━━━━ 제 목:[탐그루]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 65 관련자료:없음 22/22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1-12 00:38 조회:910 탐그루 # 마법은 마음이다 - 마음은 칼이다 # "그래, 그것 때문이야. 혹시 거기에 대해서 알고 있는 거 있어?" 나는 아자닌에게 이렇게 물었다. 아까 천막 안에서, 비록 아무도 뭐라 고 하지는 않았지만, 물건을 집으면 좀비가 된다는 사실을 숨기고 있었던 셈이 되었다는 생각 때문에 뭔가 알아내게 된다면 아침에 차이린에게 알 려 줄 생각에서였다. "그 장소가 어디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만 그곳이 마법으로 보 호되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타호루가 쓴 마법 기억하시지요? 용병단의 주둔지를 감추는 마법 말입니다. 그 근원지는 그런 종류의 마법 으로 보호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임무가 다 해결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 그럼 그곳을 보면 알 수 있어?" "주의 깊게 본다면요" 그래... 아자닌이 그럼 그렇지. 그런 대답은 아무나 다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아자닌. 그때 타호루가 쓴 마법이 정확하게 어떤 거야?" "그 마법은 사람이나 건물, 혹은 그 밖의 여러 물건들을 눈에 보이지 않게 만드는 마법입니다. 보통의 경우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끝나 지만, 타호루님의 마법은 실제로 사라진 거나 마찬가지의 상태로 만들기 까지 하는 것 같습니다" "사라진 거나 같다구?" "그러니까 타호루님의 마법으로 다리를 없앴다면, 다리가 있던 자리에 발을 디뎠을 때 밑으로 떨어진다는 말입니다" 그것 참. 신기한 일도 다 있네. "아니, 다른 사람이 쓰면 그냥 보이지만 않게 되는 데, 타호루가 쓰면 그렇게 진짜로 사라지게 된다구?" "예" 아자닌이 대답했다. "같은 마법인데도 무슨 이유에서 이렇게 다르게 작동할 수 있는 거지?" "같은 마법이라고 해도 마법사의 마법을 해석하는 능력과 이해하는 마 음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작동 할 수 있습니다. 수르카님도 방패 마법 으로 비를 불러오신 적이 있으시잖아요" 음. 생각해 보니 그것도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군. 나도 저 말을 연습하면 마법을 쓸 수 있을까?"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말은 나도 하겠다" 나는 좀 퉁명스럽게 입을 비죽거리면서 말했다. "하지만 꼭 그 마법을 쓸 수 있다는 법은 없습니다" "다른 마법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지? 도대체 어디다 쓰는 지도 모르는 마법의 말, 모아서 뭐하나..." 나는 여전히 투덜거렸다.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수르카 님. 수르카 님이 어느 정도 마법의 말에 익숙해지시면, 알고 있는 마법의 말을 조합해 새로운 마법을 만들어 내실 수도 있을 겁니다" 어쩐지 좀 나를 타이른다는 투였다. 그래. 그 말은 전에도 들은 기억이 났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제대로 쓸 줄 아는 마법도 얼마 없다. 그런데 마법을 창조해 내다니. "그런데 보이지도 않고 존재하지도 않는다면 찾아내 봤자 소용없지 않 겠어? 나는 화제를 좀 바꾸어보고 싶은 마음에 이렇게 물었다. "마법으로 풀 수 있습니다" "혹시 그런 마법 알고 있어?" "수르카님이 아신다면요" 이거, 그렇다면 그곳까지 가 봐야 아자닌도 나도 아무 소용없겠군. 하 지만 그 장소를 성황청보다 먼저 찾아낸다면 임무가 성공했다고 할 수도 있겠지. 게다가 아자닌 없이는 그곳을 찾아내기가 쉽지 않을테니까. 물론 내가 주의 깊게 살펴봐야 찾을 수 있는 거 겠지만 말이야. "알았어, 아자닌. 들어가" "예. 수르카 님. 그런데 너무 자주 이상한 생각하지 마세요. 건강에 나 쁘다구요. 흥, 그리고 끝까지 제 옷에 대해선 한 마디도 없네요?" 아자닌은 이렇게 말하고는 사라져버렸다. 아니,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나는 천막 안으로 돌아갔다. 우보가 불침번을 서고 있었다. "특수임무를 맡게 된 소감이 어때?" 역시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우보가 말했다. "그냥 그렇지 뭐. 해뜨기 전에 일어나야 한다는 거 알지?" "그래. 찬 한테 들어서 알고 있어. 안심하고 자" "고마워. 그럼 수고" 나는 자리로 돌아가 배낭을 챙겼다. 찬은 벌써 잠든 모양이었. 이거, 몇 시간 못 자겠는데. 나는 치료석 몇 개와 떠버리 하진에게 산 단검, 그 리고 칼 손질할 도구 따위를 챙겨 넣고 자리에 누웠다. 이제 출발할 때 야영에 대비한 침구류만 챙기면 된다. 그런데 임무를 맡게 됐는데 해방감 같은 게 느껴지는 걸 왜일까. 이곳 을 떠나 다른 십부원과는 다른 특별한 일을, 그것도 비밀로 한다는 게 어 쩐지 좀 내가 선택받은 사람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료들에 비해 조금 밖에 쉴 수 없다는 게 단점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어쩐지 나는 꼭 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르카. 잘 자. 그리고... 죽지마" 내가 자리에 눕자 우보가 말했다. "그래, 너도" 눈을 감았다. 피곤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하긴. 오늘도 너무 많은 일을 겪은 탓이겠지. 꿈을 꾸었다. 내가 마소드의 검을 들고 칼춤을 추는 꿈이었다. 나카의 노래가락에 맞추어서 말이다. (꿈속에서 나카가 부르는 노래는 들어줄 만 했다. 하긴 그러니까 꿈이겠지) 칼을 위에서 아래로 베면 내 뒤의 검은 그림자가 허공으로 치솟았고, 내가 칼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베면 검은 그림자가 오른쪽으로 비켜갔다. 그렇게 한 참 춤을 추고 있는데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 왔다. 나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 에는 처음 보는 여자아이가 하나 있었다. 얼굴은 분명히 보이지 않았지만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나는 춤을 멈추고 여자아이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 다. 그러자 여자아이는 검은 성복을 입은 성직자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얼굴은 도저히 알아볼 수가 없었다) 나는 칼을 쥐고서 어찌할 바를 모르 고 소리를 질렀다. 베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내가 망설이고 있는 사이 그 소녀가 내 어깨를 잡고 나를 흔들기댔다. 꿈에서 깨자, 불침번을 서고 있던 체리가 나를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를 뻔했지만 다행히도 꿈에서 일찍 깨어 그런 불상 사는 면할 수 있었다. (그랬다가는 십부원들 사이에서 두고두고 웃음거리 가 될 게 뻔하다) 자리에서 일어나 침구류를 개어 배낭에 챙겼다. 찬도 일어나 침구류를 챙기고 있었다. 찬이 가지고 다니는 양손칼도 눈에 띄었 다. 그러고 보니 오랫동안 마소드의 검을 잊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 다. 나는 그 순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그 칼이 아버지의 칼이었음을 말이다. 그리고 칼도 내 마음을 알고 반응을 보였었다. 그 순간, 도대체 어떻게 해서 내가 그 칼이 아버지의 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지, 또 마 소드의 검이 내게 반응하게 된 건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지만, 그래도 내게는 분명한 현실이었다. 아마 누군가에게 이런 얘기를 했다가는 소리 를 지르며 꿈에서 깨어나는 것보다 훨씬 더 망신을 당하게 될 게 뻔해. 찬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한 번 바라보고는 먼저 천막 밖으로 나갔 다. 이제 임무로구나. 나는 숨을 천천히 조절하기 시작했다. 이제 에이스 와 차이린, 그리고 찬과 내가 맡은 임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차이린의 천막으로 간 찬과 나는, 차이린의 막 자다 일어난 부시시한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나와 찬이 천막 앞에 도착하자마자 차이린이 얼 굴만 살짝 천막 밖으로 내 놓았기 때문이었다. 차이린은 얼굴에 물도 묻 히지 않았는지 허연 게 다 일어나 있었고 눈에는 뭔가 지저분한 것도 끼 어있었다. "...잠깐만" 차이린은 이렇게 말하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이런. 저런 여자를 보고 결혼을 생각하고 또 어쩌고 하는 나도 참. 나는 속으로 혀를 끌끌찼다. 이런 나 자신이 안쓰럽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이제 곧 특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부대 밖으로 나가야 돼는 내가 이거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어도 괜찮은 거야? 뭔가 단단히 각오를 다지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하지만 이렇게 머릿속이 복잡할 때는 내가 자주 하는 생각이 있다. 에라, 모르겠다. 어떻게든 되겠지, 뭐. 잠시후 차이린이 들어오라는 말을 했고 나와 찬은 차이린을 따라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 잠깐 사이에 차이린의 얼굴은 아주 깨끗해져 있었고, 평소처럼 피부에도 윤기가 돌고 있었다. 음. 여자가 무섭다더니 아마 이런 걸 두고 무섭다 그러나 보지. 잠깐 사이에 이렇게 변하다니 말 이야. 혹시 차이린이 변신 마법을? 지금 보니까 또 예쁜 것도 같구, 참. 천막 안에는 차이린의 배낭과 어깨 끈이 달려있는 큰짐이 하나 있었다. "이건 우리가 먹을 식량이야. 말린 고기하고 과일. 그리고 소금도 좀 있어" 물론 차이린의 말은 그러니까 그 짐을 지라는 거였다. 나는 찬을 바라 보았다. 찬은 역시 아무 표정 없이 꿋꿋이 가만히 서 있었다. 이거 봐, 찬. 나이가 나보다 많은 건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나보고 이걸 들라는 건 아니겠지. 나는 내심 불안한 표정으로 찬을 바라보았다. (찬은 나보다 키 가 머리 하나는 더 컸으므로 사실은 올려다보았다고 말하는 편이 더 낫겠 다). "예" 찬이 대답했다. 어? 찬이 대답을 다 하네. 그런데 정작 내가 놀란 것은 찬이 말을 했다는 게 아니었다. 찬이 대답을 하고는 짐을 들어 어깨에 매 는 게 아닌가. 원래 매고 있던 배낭 위에 더해서 그 큰짐을 말이다. 거기 다가 허리에는 무식하게 큰 양손칼까지 차고 있고. 이거, 아무래도 힘이 무식하게 센 녀석인 모양이야. 전에 붙었을 때는 몰랐는데. "찬. 수고 좀 해줘. 가다보면 아마 금방 다 없어질 거야. 먹을 거니까. 그때 가면 아마 사냥을 해서 식량을 마련해야 할 거야" 음. 아무래도 찬이 꼭 가야할 이유가 있다는 차이린의 말은 바로 이런 뜻이었구나. 그래 맞아. 찬은 짐꾼과 사냥보조로 가는 거였어. 하핫. 나 하곤 차원이 다르잖아 이거. 좀 미안할 걸. 차이린과 찬, 그리고 나까지 셋인 우리 일행은 솔한장을 빠져나가 팜 산맥쪽으로 걸어갔다. 그러고 보니 이곳은 탐그루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 은 곳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같은 자나크 주에 있지만 살면서 한번도 와보지 않았던 곳 하잔. 팜 산맥 입구에서 고개를 돌려보니 저 밑 으로 탐그루가 보일 것만 같았다. (물론 여기서 한 나절은 걸어야 닿는 곳이기도 하고 거기다가 새벽 안개 때문에 절대로 보일 리가 없다는 걸 뻔히 알고 있었지만 시선이 자꾸 그쪽으로 향했다) 탐그루. 언젠가는 내 가 돌아가야 할 곳. 나는 탐그루 쪽을 바라보면서 마소드의 검을 떠올렸 다. 언젠가는 반드시 저곳으로 돌아가리라. 그리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마소드의 검을 얻으리라. 나만의 성년식을 위해서... "수르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차이린이 나를 불렀다. "예, 차이린 십부장님" 나는 정중하게, 그리고 힘있는 말투로 이렇게 대답했다. "그쪽은 북쪽이야. 탐그루는 저쪽이라구" 내가 바라보고 있는 쪽과 정 반대 방향을 가리키면서 차이린이 말했다. 나는 부끄러워졌다. 반대쪽을 바라보고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내가 탐 그루를 생각하고 있다는 걸 차이린이 알아버렸다는 게 부끄러웠다. 어쩔 줄 몰라서 한동안 그냥 바닥만 보면서 걸었다. "수르카. 고향에는 언제든지 갈 수 있어. 이번 겨울에 왜 휴가 가지 않 았어?" "누구나 말못할 사정 하나 정도는 가지고 있다구요" 나는 조금 목소리를 낮춰서 말했다. 탐그루에서 마지막으로 본 루비오 와 주크의 모습이 떠올랐다. "하긴. 용병이 됐다면 뭔가 사연이 있을 테니까. 국왕의 군대에 있는 군인들처럼 한가하게 휴가나 즐길 용병은 별로 없겠지. 휴가 중에는 급 여도 나오지 않고. 레드처럼 용병단 짠밥이 많으면 또 모를까" 이렇게 덧붙인 후 차이린은 다시 성큼성큼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그 뒤를 따라가며 여전히 탐그루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탐그루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라이짐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혹시 마소드의 검이 나를 부르고 있는 게 아닐까. 내 가 자꾸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걸 보면 말이야. 팜 산맥 입구에도 안개는 짙게 깔려있었다.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안개, 라고 말하면 허풍일 테고, 그냥 옷이 좀 젖는다 싶을 정도의 안개 였다. 안개를 통해서 바라본 숲은 마치 잠들어 있는 거대한 용 같다는 생 각이 들었다. (잠들어 있건 아니건 간에 용을 본 적은 한 번도 없지만 말 이다) 안개 속에 잠겨있는 숲에선 벌써 봄기운이 느껴지느 것 같았다. 아 직 좀 쌀쌀하기는 했지만 푸른 기운이 몸으로 느껴졌다. 우리 일행은 안개가 다 걷히기 전에 에이스와 약속한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제시간에 오셨군요, 차이린 십부장님" 에이스였다. 나는 에이스가 어디에 있나 주위를 살펴보았지만 역시나 또 에이스는 보이지 않았다. 이럴 때는 찬을 보는 게 좋다. 찬이 보고 있 는 곳에 아마 에이스가 있을 테니까 말이다... 가만, 그럼 내가 찬 보다 도 에이스 보다도 못하단 말인가? 이거, 기분 나쁘군. 에이스는 나무 뒤에서 천천히 걸어나왔다. 그러니까 안보였던 거로군. 난 또 무슨 마법이라도 쓴 줄 알았네. 햇빛 아래에서 본 에이스의 눈은 회색이었다. 회색 눈동자도 다 있나? 나는 좀 껄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저런 색의 눈동자는 본 적이 없어. 거기다 저렇게 반짝이다니. 이상한 일 이군. 하긴 정말 이상한 건 아주 짙은 갈색의 피부와 뾰족하게 하늘로 향 해 있는 두 귀였다. 하여간 바르도 대륙에는 별 종족들이 다 사는 모양이 로군. "그래. 에이스. 지금부터 어디로 갈 거지?" "성황청 기사단이 이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캠프를 차리고 있습니다. 다행히도 이 곳까진 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언제 이쪽으로 오게 될 지는 아무도 모르지요" "그래. 그럼 여기서 대충 식사를 하고 움직이도록 하지. 나중에는 시간 이 없을지도 모르니까. 에이스도 같이 먹자" "고맙습니다" 먹을 거라고는 말린 고기와 과일, 그리고 약간의 소금뿐이었지다. 하지 만 아침에 배가 고플 때 먹는 소금 찍은 말린 고기의 맛은 정말 별미였 다. 말린 과일(무슨 과일인지는 아직도 모르고 있다)의 달콤한 맛에 더해 씹을 수록 진한 맛이 우러나오는 말린 고기의 맛이 정말 기막혔다. 전에 도 몇 번이나 먹어본 적이 있었지만 이렇게 맛있게 먹어본 기억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이거, 작전도 나가기 전에 이렇게 입맛이 돌다니. 뭔가 문 제가 있는 거 아닐까? 식사가 다 끝나자 에이스는 우리를 안내하여 팜 산맥 안 쪽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좀비들의 발자국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 드리죠. 그 다음에는 차이린 님의 능력만 믿겠습니다" 에이스의 햇빛을 받아서 반짝이는 검은 피부는 윤기가 흐르고 있었고, 뽀족한 귀만 뺀다면 어디 가도 미인이라는 소리를 들을 만한 용모였다. 에이스의 눈은 분명히 보통 사람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하지만 회색으로 반짝이고 있는 눈동자는 내게 여전히 에이스가 인간이 아닌 다른 종족이 란 걸 의식하게 했다. 한 명의 단원으로 생각하라는 차이린의 말을 따르 기는 좀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예쁘게 생겼다고 해도 말이 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N:김상현 #9723/10199 ━━━━━━━━━━━━━━━━━━━━━━━━━━━━━━━━━━━━━━━━ 제 목:[탐그루]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 66 관련자료:없음 20/20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1-12 00:38 조회:996 탐그루 # 마법은 마음이다 - 마음은 칼이다 # 에이스를 힐끔힐끔 바라보면서 걷고 있는 나와는 다르게, 찬은 역시 말 없이 묵묵히 걷고 있었다. 배낭 하나만 지고 있는 나도 꽤 힘이 드는 데... 찬은 더 힘들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저 표정 없는 얼 굴을 보면 그렇게 힘들어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원래 힘이 센 걸까? 아 니면 표정 짓는 법을 잃어버린 건 아닐까? 얼마를 더 걸었을까. 우리 일행은 에이스가 발견했다는 좀비 발자국이 있는 곳까지 올 수 있었다. "여깁니다, 차이린 십부장님" 꽤 숲이 울창한 곳이었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안개는 다 걷히고, 나뭇 잎 사이로 뽀얀 햇살이 부끄러운 듯 속살을 내 비치고 있었다. 차이린은 허리를 숙이고 발자국을 유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으흠. 만 약에 차이린이 아자닌처럼 헐렁한 옷을 입고 저런 자세를 취한다면 앞쪽 에에 서 있는 편이 좋겠군. 아니, 그런데 왜 나는 자꾸만 이런 생각만 하 고 있는 거지? 좀 미친 거 아니야? "좀비 발자국이 맞아. 좀비는 사람하고는 다르게 걷거든. 보통 사람은 발뒤꿈치가 먼저 땅에 닿지만 좀비는 항상 발바닥 전체로 걸어. 그래서 꼭 휘청거리면서 걷는 것처럼 보이지... 이 발자국이 그래. 꽤 큰 녀석인 데. 살도 꽤 쪄있겠어. 그런데 이 주변에 들개 발자국들이 나 있는 걸로 봐서는 들개들을 부렸던 것 같은데... 어떻게 찾은 발자국이지, 에이스?" 차이린은 혼잣말처럼 이렇게 말하다가 에이스에게 물었다. "우연히 찾았어요. 부끄러운 일이지만" 에이스는 이렇게 말했다. 그 순간, 나는 에이스의 회색 눈동자 빛이 바 뀌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눈빛은 이전에 내가 보았던 늙은 모습으로 변한 라스폼의 눈동자처럼...싸늘한 기운을 발하고 있었다. 이거, 겁나는 걸. 하여간 에이스가 이 발자국의 주인을 그냥 살아 돌아다니게 만들지는 않았을 테니까 말이야. "시체는" 찬이 말했다. 나는 놀라서 찬을 바라보았다. 이거, 오늘은 말을 자주 하는 군. 하루에 두 마디씩이나? 하지만 억양이 없는 말이어서 그 말이 묻는 말인지, 아니면 하다가 그냥 중간에서 끊은 말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알아서 했습니다" 에이스가 말했다. 역시 별 억양 없는 말이었지만 어딘지 기분 나쁘다는 듯한 기색이 보이는 말이었다. 그러고 보니 에이스의 나이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피부가 검은 데다가 미인이기는 했지만 저렇게 눈이 동그랗고 피 부에 윤기가 흐르는 여자는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설령 누군가에게 에이스의 나이를 듣게 된다고 해도 확신 할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 다. 라스폼도 겉보기에는 젊고 매력 있는 여자처럼 보였으니까 말이다. 차이린이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입에 손가락을 가지고 가서 조용히 하 라는 표시를 하고 말이다. 그러고 보니 무슨 소리가 나는 것도 같았다. 나는 자세히 소리를 들어보았다. 뮤가 걷는 소리였다. 에이스는 손을 들어 따라오라고 신호한 뒤 천천히 몸을 움직여 소리가 나는 반대 방향으로 걸었고, 차이린과 찬, 그리고 나는 그 뒤를 따랐다. 음. 어차피 찬은 조용할 테니까 상관없지, 뭐. 에이스가 인도한 곳은 덤 불이 우거진 곳이었다. 그곳에 우리는 몸을 숨겼다. "왜 여기까지 온 건가, 사이진 형제" 멀리서 목소리가 들렸다. "성황청의 기사인가요?" 차이린에게 물었지만 내가 들은 대답은 고작 '쉿!'하는 바람소리뿐이었 다. "타슈. 그건 오로지 우리 단장님이신 리바르도 님만 알고 계실 뿐이네. 아무리 자네가 기사단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는다고 해도, 함부로 단 장님의 권위를 무시하는 그런 말을 하는 건 곤란하다구, 형제" 또 다른 목소리가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상대는 둘 뿐인 모양이었다. 나는 허리에 찬 칼을 움켜쥐었다. 굳이 싸우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건 아 니었지만, 그래도 칼을 잡아야 안심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성황청 사람들은 평소에도 저렇게 정중하게 말을 하는 군. 게다가 형제라고? "아니, 사이진 형제. 내가 물은 건 그런 뜻이 아니라 이곳에서 도대체 좀비를 어떻게 찾으면 좋을 지 몰라서 그걸 물어본 걸세. 형제" 당황하는 목소리였다. 음. 성황청의 사람들은 변명도 저렇게 웃기는 말 투로 하는 군. "뮤에서 내려서 찾아보지. 형제" "그래, 그렇게 하지. 형제" 그리고 잠시 후, 두 사람이 내리는 소리가 들렸고, 이어서 뮤를 묶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찬이 양손칼에 손을 가지고 갔다. 조심스러운 움 직임이었지만 그냥 보기에도 힘있어 보이는 동작이었다. 나하고는 좀 다 르군.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겁이 나서 칼을 잡는 나하고는 확실히 다 르다. 찬은 정말로 죽여버릴 생각인 모양이었다. 그래. 저런 게 바로 강하다 는 거야. 라이짐이 말했듯이 죽일* 수* 있을* 때*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법이니까*... 그런데 이 말을 생각하자 가슴이 뛰어 오르고 숨이 차오는 것이 느껴졌다. 차이린이 나와 찬을 바라보고는 손을 흔들어 그만 두라고 신호하지 않았다면 뭔가 내 안에서 터져 버렸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순간, 두 명의 성황청 기사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두 사람은 철로 만들어진 갑옷을 입고 있었다. 거기다가 허리에는 칼과 마법구까지 착용 하고 있었다. 성복의 모양을 본딴 검은 망토로 한껏 멋을 부리고는 있었 지만, 저래가지고 어디 싸우겠나 싶었다. 아니, 저렇게 무거운 철로 된 갑옷을 입고 뮤에 올라가서 제대로 움직이기나 하겠어? 아무리 뮤가 힘이 좋아도 그렇지, 저런 꼴로는 칼 한 번 휘두르기 어려울 텐데. "이거, 하잔에 있을 때가 나았다고 생각되는 군, 사이진 형제" 한쪽이 말했다. "타슈 형제. 난 솔직히 무서웠네. 갑자기 우르르 달려드는데 이거 뭐 당할 재간이 있어야지 말일세. 오로지 신께서 은총을 내리시리라 믿고 뮤 에 오르는 수밖에 없었네" 성황청의 기사들은 도망쳤다는 말도 저렇게 웃기게 하는 군. "그래. 누군들 안 그랬겠나. 애당초 하잔에 들어간 게 잘못이었는지도 모르겠네. 형제" "사이진 형제, 이번엔 자네가 단장님의 권능을 의심하는구만"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대답하는 걸 들어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 "잠깐!" 사이진이라고 불리운 쪽이 대답 대신 이렇게 말하는 바람에 타슈라는 사람이 한 말이 농담인지 아닌지는 영원히 알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이거, 우리 쪽을 바라보고 있잖아! 분명히 보일 리가 없는데... 나는 당장이라도 칼을 뽑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차이린은 아무 기색도 없이 잠자코 그들을 보고만 있었다. 보고만 있다고는 해도, 나는 알 수 있었다. 차이린은 만약 발각된다면 '기회가 있을 때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는 말을 당장 실천으로 옮길 게 분명하다는 것을 말이다. 둘은 천천히 우리 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마른 침을 삼켰다. 찬은 당장이라도 튀어나갈 듯 양 손으로 칼자루를 굳게 쥐었다. 찬의 오 른 쪽 눈 밑에 가로로 나있는 흉터가 씰룩이고 있었다. 에이스는 뭘 하고 있나 고개를 돌려보려고 하고 있는 데, 바로 우리 오른 쪽에서 누군가 나 타났다. "이런. 꼬마였군" 꼬마라는 말을 듣는 순간 나는 혹시 나를 본 게 아닐까 해서 가슴에서 뭔가가 뚝,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아니었다. 우리가 숨은 곳 오른편 덤불에서 예닐곱 살로 밖에 보이지 않는 여자아이가 서 있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 "......" 꼬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얼굴은 완전히 굳은 채로 말이 다. 겁에 잔뜩 질려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하잔에서 온 꼬마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군.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된 걸지 짐작은 가나, 타슈 형제?" "글쎄. 하여간 살아있는 걸 보면 이 근처에 좀비는 없다고 나는 판단이 되네. 이제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게 어떤가 형제" "그래, 좋네. 타슈 형제" 둘은 이렇게 말하고는 아까 뮤에서 내리는 소리가 들린 쪽으로 뒤뚱거 리면서 사라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뮤가 떠나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멀어지자 에이스가 먼저 일어났고, 나를 포함한 나머지도 덤불에 서 일어났다. "성황청 기사단이 이렇게 외진 곳까지 올 줄은 솔직히 몰랐습니다. 죄 송합니다. 이 에이스가 실수를 했군요" 에이스는 낭패라는 듯이 뾰족한 귀를 만지면서 이렇게 말했다. "차이린 십부장님. 저 친구들이 성황청 기사들이에요?" "그래. 전에도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어" "그런데 저런 꼴로 어디 제대로 싸울 수나 있겠어요, 뒤뚱거리면서 걷 는 모습하고는..." "그건 몰라서 하는 말이야" 찬이었다. 나는 찬을 바라보았다. 표정 없는 얼굴에서 억양 없는 말이, 분명히 내 쪽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래. 찬의 말이 맞아. 성황청의 기사들은 마법구를 사용하기 때문에 저렇게 무거운 갑옷으로 몸을 보호하는 거야. 그래야 한 칼에 죽지 않을 테고, 그러는 사이에 마법구를 사용할 시간을 벌 수 있으니까 말이지. 물 론 칼만 들고서 맞선다면 우리 용병단의 적수가 되지 않을 테지만 말이 야" 차이린이 이렇게 해석을 해 주었다. "그나저나 이 꼬마는 어디서 온거죠..." 에이스였다. 에이스는 혼잣말처럼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꼬마가 있었군. 꼬마는 허름한 회색 긴치마 하나 말고는 입고 있는 게 없었다. 치마 밑으로 보이는 다리에는 상처 투성이였다. 이 숲을 헤매고 다닌 지 꽤 되는 모양이었다. 얼굴에는 여러날 동안 한 번도 씻지 않았는지 때가 가득했다. 하지만 얼굴에는 보통 꼬마들에게서 볼 수 없는 강한 인상이 풍기고 있었다. 새카맣고 동그란 눈동자에서는 강렬하 고 맑은 빛이 흐르고 있었다. 하긴. 그러니까 팜 산맥을 헤매고 다녔어도 살아남을 수 있었겠지. 그런데 꼬마의 다리를 타고 뭔가가 내려오고 있는 게 보였다. 오줌이었다. "저런... 잔뜩 겁에 질려있구나. 이거 어쩐다" 차이린은 이렇게 말하고는 꼬마 쪽으로 다가갔다. "꼬마야. 겁먹지 마. 우린 좋은 사람들이란다. 꼬마야 이름이 뭐지?" 순간 수르카인데요 라고 말할 뻔했다. 역시 습관은 무서운 거야. 꼬마 는 여전히 잔뜩 겁에 질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이거 참..." 그런데 다음 순간, 고마는 몸을 휙 돌리더니 우리가 숨어 있던 덤불 쪽 으로 뛰어갔다. 그러자 에이스가 꼬마 쪽으로 몸을 움직이는가 싶더니 꼬 마를 허리에 끼고 잽싸게 덤불에서 빠져 나왔다. 자세히 보지 않았으면 놓쳤을지도 모를 만큼 빠른 동작이었다. "꼬마야, 그쪽은 위험하단다" 에이스가 꼬마 아이를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들개 때문이었나 보지?" 차이린이 말했다. "예. 혹시라도 땅을 파보면 곤란하니까..." 에이스가 말했다. 그런데 무슨 소리들을 하고 있는 건지 나는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차이린 십부장님, 무슨 말이에요?" "쇠독" 찬이 말했다. 오늘이 무슨 날인가? 지금까지 용병단에서 본 찬이 말하 는 모습 전부를 합쳐도 오늘 하루동안 본 것만큼도 안되겠네. "그래. 찬이 맞아. 저곳에는 쇠독이 뿌려져 있어. 냄새를 맡아봐" 나는 냄새를 맡아보았다. 조금 정신을 집중시키니까 옅은 피 냄새 같은 것이 나는 것도 같았다. "에이스는 저곳에 좀비 시체를 묻고, 혹시 들개들이라도 달려들까 봐 쇠독을 뿌려놓은 거야. 피 냄새인줄 알고 시체를 찾아온 짐승도 쇠독 냄 새를 맡으면 물러가기 마련이거든. 잘못해서 눈이나 상처에 쇠독이 들어 가면 눈이 멀거나 상처가 곪아터지게 되니까 말이야. 물론 보통 사람이라 면 물로 씻어내면 그만이니까 별 해는 없겠지만 말이야. 하지만 저런 꼬 마라면 위험하지" "다음에 이런 냄새를 맡으면 조심하십시오. 언뜻 피 냄새 같기도 하지 만 잘 맡아보면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으니까요, 수르카 단원" 에이스가 말했다. 그럼 나도 꼬마라는 뜻인가? "꼬마야" 찬이었다.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꼬마라니! 또. 또 과민반 응이다. 찬은 꼬마 쪽으로 걸어가서는 허리를 숙여 꼬마아이와 키를 맞추 었다. "많이 무서웠지? 이제 끝났어. 이리와" 찬은 꼬마아이의 얼굴을 엄지손가락으로 닦아주었다. 놀라고 있는 건 나뿐만이 아니라 차이린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차 이린도 의외라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얼굴을 닦아내는 찬은 여전 히 표정이 없었다. 저렇게 무서운 표정을 한 채 꼬마아이를 달래려고 하 다니. 애가 불쌍하다. 한 번쯤 웃어주면 어때서 끝까지 무표정을하고, 폼 내는 것도 정도지. 이봐 그만 하라구, 찬.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N:김상현 #9778/10199 ━━━━━━━━━━━━━━━━━━━━━━━━━━━━━━━━━━━━━━━━ 제 목:[탐그루]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 67 관련자료:없음 20/20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1-13 00:22 조회:988 탐그루 # 마법은 마음이다 - 마음은 칼이다 # 역시나 찬이 얼굴을 닦기 시작하자 꼬마아이의 표정이 조금씩 변하더 니...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역시. 그러면 그렇지. 꼬마아기가 울자 찬 은 꼬마아이를 안았다. 찬이 저런 행동을 하다니.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도대체 찬은 어떤 사람인지 알 수가 없네. 나 뿐만 아니 라 차이린이나 에이스도 저 꼬마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생각하고 있는데 저렇게 쉽게 나서서 꼬마아이에게 다가가 달래고 있으니. "겁을 먹어서 그런 것 뿐이야. 걱정하지마" 찬이 나에게 말했다. 내 기억에 아마 찬이 나에게 말을 건 것은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 찬이 말하자 나는 몸을 움찔했다. 놀란 탓도 있었지만, 찬의 오른 쪽 눈 밑에 난 흉터가 갑자기 꿈틀거리는 느낌이 들어서 그랬 다. "이제 우는 걸 보니 안심이 된다. 너무 무서운 일을 겪은 모양이야. 그 렇게 되면 충격을 받아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지" 찬은 꼬마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찬은 생각보다 아는 게 많네?" 나는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찬에게 말을 걸어본 적은 한 번도 없었지 만 지금은 꼭 말을 걸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 말도 않고 있으면 어쩐지 찬에게 당하고 있는 꼴이 될 것 같았다. "별로" 무표정한 얼굴로 찬이 말했다. "찬. 너 곧 잘 이야기 하는구나?" 차이린이 웃으며 말했다. "그냥" 찬은 이렇게 말하면서 꼬마아이의 머리를 계속 쓰다듬기만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꼬마아이는 울음을 그쳤지만 다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이린이 이름을 물어도, 나이를 물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찬은 차 이린에게 그만 두라는 듯 손을 휘젓더니 식량을 담아온 배낭에서 말린 고 기와 과일을 꺼내 주었다. 그러자 꼬마아이는 몹시 배가 고팠는지 훌쩍거 리면서도 그것을 받아 열심히 먹었다. "그런데 이제 어쩔 거야, 찬?" 내가 찬에게 물었다. 꼬마아이를 데리고 계속 임무를 수행한다는 건 어 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데리고 갈 거야"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가 이제부터 좀비들 의 근원을 찾아가는 길은 위험한 일입니다. 꼬마아이를 데리고 간다는 건 우리 모두에게 위험한 일일뿐만 아니라 그 꼬마아이에게도 좋지 않은 결 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에이스가 찬에게 말했다. "여기 버리는 것도 좋지 않아" 찬은 에이스를 바라보며 무표정하게 대꾸했다. "우리가 성황청의 기사들과 싸우지 않았던 건 순전히 이 꼬마 애 덕분 이야. 그런데 버리고 갈 수는 없지.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고, 난 이 아 이를 그냥 두고 갈 수 없어" "좋아. 아케르 용병단원은 하고 싶은 일이라면 뭐든지 다 할 수 있으니 까 그냥 그렇게 해. 하지만 끝까지 책임져야 해. 나중에 귀찮다고 버리던 가 하면 내가 가만 안 있을 거야" 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꼬마 애는 무슨 일인지 궁금하다는 눈으로 찬과 차이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용병단으로 오던 길에 만났던 귀가 뜯어진 타코 생각이 났다. 그때 나 는 아무 생각도 없이 타코를 버리고 가려고 했지만, 재훈은 끝까지 타코 를 데리고 갔고, 결국 타코를 부리게 되었다. 그런데 나는 왜 이런 걸까. 감정이 메마른 걸까. 꼬마아이를 보고도 불쌍하다는 생각 같은 것도 못하 다니. 과연 찬이 하고 있는 행동은 강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행동일까, 마음이 약해서 하는 행동일까. 내가 이곳에서 칼을 휘두르기로 마음먹은 건 순전히 나를 생각해주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위대한 복수자 검객 아케르는 물론이고 차이린이나 청강, 라이짐, 우보, 또 조금 다르긴 하지만 기밀... 이런 사람들이 나를 아끼고 생각해 주는 것 때문에 나는 용병단에 몸을 바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내가 왜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런 생각을 해주지 못하고 있는 걸까. 찬을 보면서 나는 부끄럽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탐그루를 바라보고 있던 것을 차이린에게 들켜버린 것 보다 백 배는 더 부끄러웠다. (물론 비스토 브레 왕국 식 백 배다) "자, 그럼 다시 출발하지. 찬. 그 꼬마 애를 잘 챙겨 줘" 차이린은 이렇게 말하고는 좀비의 흔적을 찾아 움직였다. 우리는 차이 린의 뒤를 따랐고, 이렇게 해서 우리 일행은 다섯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차이린의 인도로 우리는 좀비의 흔적을 찾아 하잔으로부터 팜 산맥을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찬은 자기 배낭에다가, 식량을 담은 큰짐에, 꼬마아이까지 등에 졌지만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지친 기색도 드러내지 않았다. 대단한 힘이다. 저런 힘을 가진 찬과 내가 어떻게 싸울 수 있었 지? 해가 높이 솟자 따사로운 봄기운이 여기저기서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 지랑이가 여기저기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나는 어쩐지 소풍을 나온 기분 이 들었다. 전에 소리장 마을을 찾아갈 때도 그러더니. 이런 생각이 과연 '피에 굶주린 악마'인 용병에게 맞는 어울리기나 하나. 그나저나 다시 마주치게 될까봐 걱정했던 성황청의 기사는 단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다. 운이 좋은 거라고 차이린은 말했지만, 에이스는 내내 좀 이상하다는 표정이었다. "잠깐. 여기서 좀 둘러보고 가겠습니다" 우리 일행이 산등성이에 올라갔을 때, 에이스가 말했다. 에이스는 이렇 게 말하고는 나무를 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빠른 동작이었다. 등성이에 는 작은 개울이 흐르고 있었다. 찬은 그 개울물에 꼬마아이를 데리고 서 더니 꼬마아이의 옷을 벗겼다. 꼬마아이는 별 저항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아무리 꼬마라지만 부끄럽지도 않나? 아니, 어쩌면 찬이 하도 무 섭게 생겨서 가만히 있는지도 모르지. 하여간 찬은 꼬마아이에게 뭐라고 소근거리더니 물 속에 꼬마를 집어넣고는 씻겨주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차이린은 재미있다는 듯이 미소를 지으면서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어쩌면 좋을지 몰랐다. 다들 뭐 하나씩 일을 하고 있는데 말이다. 그래서 나는 에이스를 따라서 나무를 타기로 했다.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으니 어쩐지 덤으로 따라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무 위로 올라가자 에이스가 산밑을 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에이스 옆에 있는 굵은 나뭇가지 위에 올라갔다. 가까이 가자 에이스의 몸에서 야릇한 냄새가 풍겨오는 게 느껴졌다... 언젠가 차이린에게서 맡 은 적이 있는 냄새였다. 가슴이 뛰었다. 정말 소풍 나온 기분이군. 사람 도 아닌 검은 엘프에게서도 이상한 감정을 느끼니. 아무래도 난 비정상인 가봐. 이상하게도 에이스를 보고 가슴이 뛰기 시작하자 차이린이 다른 단 원들하고 똑같이 생각하라고 한 말을 지킬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었다. 나와 에이스는 같이 산밑을 내려다보았다. 산밑에는 검은 망토를 두른 성황청의 기사들이 한 장소예 모이고 있었다. "이상합니다. 저렇게 한 곳에 모이다. 수색을 포기할 리가 없는데..." 성황청의 기사들 중 제일 앞에 선 덩치 큰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바 로 옆에 기수가 성황청의 검은 깃발을 들고 있었기 때문에 더 눈에 들어 왔을 지도 모르겠다) "저 사람은 누구죠?" "리바르도 기사단장입니다. 일 처리가 꼼꼼한 장군으로 소문 난 사람입 니다. 성황청의 핵심 인물중 하나라고 보면 됩니다. 다른 사람에 비해서 예감이 발달했다고 하더군요. 그걸 성황청 기사들은 권능이라고 부르는 모양입니다" 에이스는 그 장군 만큼이나 꼼꼼하게 설명해주었다. 성황청에는 기사단이 셋 있는데 그 기사단은 각각 기사 단장의 이름을 따서 리바르도 기사단, 베이커 기사단, 그리고 아리우스 기사단이라고 부 른다고 했다. 이곳에는 리바르도 기사단만 와 있는데, 다른 기사단들은 아마도 동타실과 스파일에 있는 것 같다고 에이스는 덧붙였다. "그나저나 저렇게 모여서 뭐할 생각이지?" "글쎄요..." 에이스도 그냥 지켜보자는 투였다. 잠시 후, 기사들이 모이자 기사단의 검은 깃발은 하잔 쪽으로 향했다. "하잔으로 돌아갈 모양인데..." "그렇군요... 우리 용병단과 합류할 생각인가? 그건 아닐텐데..." 에이스는 이렇게 중얼거리듯 말했고, 필요한 정보를 얻었으니까 나와 에이스는 나무 위에 더 있을 필요가 없어졌다. 나무에서 내려오자 찬이 꼬마아이에게 옷을 입혀주고 있었다. 어디서 가지고 왔는지 다리와 팔에는 흰 천이 보기 좋게 감겨 있었다. 상처를 감 싸주는 것과 동시에 따뜻하게 해주려는 배려인 것 같았다. "예쁘지? 찬이 감아 준거야. 찬, 보기보다 재주가 많아" 차이린이 말했다. 찬은 그냥 무표정한 얼굴로 꼬마아이의 옷차림새를 다듬어 주었다. 그러자 꼬마아이가 손을 뻗었다. 나는 꼬마아이의 표정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꼬마아이는, 역시 찬처럼 표정이 없기는 했지만, 많 이 안정을 되찾은 모양이었다. 꼬마아이의 작은 손가락이 찬의 눈 밑에 나있는 흉터에 닿았다. "아퍼?" 꼬마가 처음으로 한 말이었다. 나는 놀라면서 꼬마아이와 찬을 바라보 았다. "오래 전 일이야" 찬은 이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그레텔이야. 아저씨는?" 꼬마아이가 말했다. 결국 말문이 열렸구나! "난 찬이다. 만나서 반갑다" 찬은 이렇게 말하고는 꼬마아이를 다시 등에 업었다. "그럼 이제 다시 출발하지" 차이린은 좀비가 남긴 흔적을 찾아서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우리가 머물렀던 산등성이를 지나기 전에, 산밑으로 하잔쪽으로 이동하고 있는 성황청의 리바르도 기사단의 검은 깃발이 보였다. "찬 아저씨..." 그레텔이 말했다. 넋나간 사람 같은 목소리였다. 모두의 눈이 그레텔에 게 향했다. "저 깃발..." 이렇게 말하는 그레텔은 다시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이 두려 운 얼굴이 되어있었다. 찬은 그레텔이 보고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그 순간 보았다. 찬의 표정에 어떤 기색이 떠오르는 것을 말이다. 너무 짧은 순간이었기 때문에 그것이 고통스러운 표정이었는지, 아니면 분노하는 표정이었는지, 혹은 미안하다는 표정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 만, 늘 무표정하기만 한 찬의 표정이었기 때문에 나는 솔직히 조금 놀라 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놀래는 기색을 보이자 오히려 찬이 조금 당황하 는 것 같았다. (표정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너, 하잔에서 왔구나" 에이스가 그레텔에게 물었다. 그레텔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이 꼬마, 성황청에게 당한 거 같습니다. 부모를 잃었겠지요. 어쩌다가 이곳까지 와서 헤매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에이스는 이렇게 말하고는 자신이 그 동안 알아낸 사실이라면서 하잔에 서 벌어진 일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에이스의 말에 따르면, 지난 해 하잔은 큰 흉년이 들었다고 한다. 거기 다가 좀비들까지 하잔에 나타나자 하잔의 시민 몇몇이 자치대에 찾아가 항의를 했다고 한다. 물론 그 몇몇 시민의 요구는 당연한한 것이었다. 흉 년인데다가 좀비들도 막아주지 못하면서 세금을 너무 많이 요구하는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자치대장은 전혀 얼토당토 않은 이유를 들어 그 시민들을 두들겨 팬 후 지하 감옥에 가두었다고 한다. 게다가 그 몇몇 시민들을 마칸의 사주를 받은 좀비 일족이라고 몰아 붙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 그 때 성황청에서 좀비 조사를 위해 성직자들과 기사단을 파견했습니다. 그리고 그게 반란의 시작이었습니다..." 성황청에서 온 성직자들은 처음부터 시민들이야 어떻게 생각하든 별 상 관 하지 않았다고한다. 먼저 성황청의 기사단은 마법으로 좀비들을 하잔 시에서 몰아냈다. 하지만 그 뿐으로 성황청 사람들은 자치대에게 숙식을 제공할 것을 요청했고, 자치대장은 요청을 받은 즉시 숙식 제공을 시민들 에게 떠맡긴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핑계를 대고 세금을 더 걷은 모양이 었다. 그 와중에 착복하는 관리들이 있었던 것은 물론이고 말이다. 그러 자 불만이 쌓인 일부 시민들과 팜 산맥 일대에서 조사를 벌이던 성황청이 충돌을 일으키게 되었다는 거였다. "...성황청 사람들과 하잔 사람들은 전부터 별로 사이가 좋지 않습니 다. 오래 전에 하잔에 전해 내려오던 종교가 성황청의 교리에 어긋난다면 서 종교행사 자체를 철저하게 막은 적이 있거든요. 그게 아마 삼년전쟁 전의 일일 겁니다. 꼭 그래서는 아니었겠지만 하잔의 시민들은 성황청 사 람들에게 달려가 사람이 굶어 죽게 생겼는데 지금 뭘 하고 있느냐고 물었 지요. 좀비들을 몰아냈으니 이제 하잔 시 밖으로 나가도 되지 않겠느냐는 게 그 사람들 주장이었습니다. 아마 흉년 때문에 성황청의 기사단에게 제공하는 식량이 문제가 된 것 같았습니다. 게다가 겨울이 끝나가자 춘궁 기가 겹치기도 했고요" 에이스의 설명은 계속되었다. 누군가 항의를 시작하자 그 숫자는 점점 늘어났고, 좀 위험하다 싶을 만큼 많은 수의 시민들이 모여들자 성황청 기사들 중 누군가가 한 시민을 칼로 베었다는 거였다. 그러자 격분한 시 민들이 성황청 기사들에게 달려들었고 일단 성황청의 기사들은 일단 그 자리를 피했다. "그런데 그 날 그와 비슷한 일들이 여기저기서 여러 번 발생한 것 같습 니다. 제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여기저기서 산발적으로 성황청의 기사들 과 충돌이 있었고, 그 와중에 죽은 시민도 여럿 되는 모양입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반란의 기미는 없었습니다. 단지 그들은 분노한 시민들 이었지 반란군은 아니었으니까요" 에이스는 이렇게 말하고는 그레텔을 바라보았다. 그레텔의 얼굴에는 아 직도 공포의 빛이 흐르고 있었다. "피를 본 시민들이 몰려들고, 하잔시 중앙광장에 주둔지를 차리고 있던 성황청 기사들에게 달려들었습니다. 손에 손에 농기구를 들고 말입니다. 칼을 들고 갑옷을 입은 기사라고는 하지만 많은 시민들이 동시에 덤비는 데에는 별 수없어 다 줄행랑을 쳤습니다. 그렇게 도망친 기사들이 일단 하잔 시 밖에 모이자 리바르도 단장은 조직적으로 움직일 것을 명령한 모 양입니다. 시민들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자, 성황청 기사들은 다시 주둔지 로 되돌아왔습니다. 물론 주둔지는 엉망으로 망가져 있었습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N:김상현 #9779/10199 ━━━━━━━━━━━━━━━━━━━━━━━━━━━━━━━━━━━━━━━━ 제 목:[탐그루]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 68 관련자료:없음 21/21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1-13 00:23 조회:893 탐그루 # 마법은 마음이다 - 마음은 칼이다 # "에이스는 그럼 그때 하잔에 있었던 거야?" 차이린이 발자국을 추적하다 말고 물었다. 때문에 우리 일행은 잠시 멈 추어 서게 되었다. 봄 바람이 나뭇가지 사이로 불어오고 있었다. "예. 그때까지는 그랬습니다. 물론 밤에는 독자적으로 좀비에 대한 조 사도 좀 했습니다만... 하여간 주둔지가 망쳐진 걸 본 성황청 기사들은 그대로 시내로 진격해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시민들에게 화풀이를 시작한 겁니다. 때리고, 차고... 물론 처음부터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가족을 잃은 시민들이 성황청의 기사들에게 달려들었습니다. 한 두 명이 아니었습니다. 그러자 어느 순간부터 성황청의 기사들은 달려드는 시민들 을 모조리 칼로 베기 시작했습니다. 목을 베었지요. 간단하게" 이렇게 말하는 에이스의 목소리는 '아침 식사는 잘 했어요? 전 그냥 간 단하게'하고 말하는 투와 다를 바가 없었다. 아니, 성황청의 기사들이 사 람들을 무자비하게 죽이는 모습을 보고도 어떻게 저렇게 태연하게 말 할 수 있을까. 나는 에이스의 이야기에 계속 귀를 기울였다. "그게 반란의 시작이었습니다. 여기저기서 흩어져서 성황청과 충돌을 일으키던 시민들도 그 사건 이후로 뭉치게 되었습니다. 아마 지휘관의 역 할을 자청한 사람이 있는 모양입니다만 거기까지는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어찌되었건 제 임무는 좀비를 조사하는 일이었으니까요. 하여간 성황청의 기사단이라고 해도 시민들이 뭉쳐 조직적으로 공격해오자 물러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수적으로는 절대적으로 열세였으니까요. 아마 리바르도 단장 이 국왕에게 증원군을 요청한 때가 그때였을 겁니다. 그 후 국왕은 아케 르 용병단에 그 일을 의뢰하게 된 거죠" "그런 거였군, 그럼 반란군이 시청을 점거했다는 건 무슨 말이지?" 차이린이 물었다. "아참. 말씀 안 드렸군요. 조직화된 시민들은 그대로 자치대 건물을 장 악하고 무기고에서 칼과 활을 꺼내 무장을 했습니다. 제가 보기에 무기를 배분하는 방식은 용병들이 흔히 하는 방식과 비슷했습니다만... 하여간 그리고 나서 무기를 확보한 시민들은 그대로 시청으로 공격해 들어갔습니 다. 그날 시장도, 자치대장도 모두 목숨을 잃었지요" 흉년이 든 데다가 좀비들에게 시달리고, 또 무건운 세금에 시달리던 시 민들이 그런 행동을 하게 된 건 너무나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 다면 그 시민들을 뭐라고 불러야하지? 당연한 행동이라면 반란군이라고 부를 수 없잖아. 이런 생각을 하자 갑자기 내 안에서 뭔가가 어긋나는 기 분이 들었다. 아니, 분명 뭔가가 어긋나고 있었다. 차이린은 다시 흔적을 찾아 움직였고, 에이스도 뒤를 따르며 말을 이었 다. "그리고 시청을 점거한 시민들은 시민 대표를 뽑고, 포로로 잡은 자치 대원 하나에게 국왕에게 전하라고 했습니다. 더 이상 살인은 없을 거라 고, 또 사태를 마무리하기 위해서 성황청의 단장을 처벌하라고 전하라고 했다더군요. 물론 그 자치대원은 하잔을 벗어나자마자 성황청 기사단장 리바르도에게 찾아가 그 말을 전했습니다. 이 시점이 국왕에게 증원군을 요청한 시점인지도 모르죠. 하여간 하잔에 대해서 제가 아는 건 이게 전 부입니다" "그럼 그레텔이라는 이 꼬마는 어떻게 된거지?" "아마 성황청의 기사들에게 부모를 잃은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아까 성 황청 기사들을 보고 오줌을 싼 거겠죠" 에이스는 역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말했다. 나는 그레텔을 바라보 았다. 그런 끔찍한 일을 겪고 살아남은 아이로구나... 나는 그레텔의 눈 에서 흐르던 강렬한 빛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바로 라이짐이 시드의 귀를 마법으로 얻을 때 보여주었던 그 눈빛이었다. 그런데, 에이스의 말에 따르자면 도대체 누가 반란군이라는 말인지 나 는 알 수가 없어졌다. 누가 반란군이고 누가 나쁜 놈인지 말이다. 나는 칼을 쥐어보았다. 안심이 되기는커녕 뭔가 내 몸에 맞지 않는 것이 허리 에 달려있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시민과 반란군의 차이가 무엇인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어쩐지 그 런 질문은 함부로 꺼내서는 안될 것 같았다. "그럼 그 시민들이 반란군이 된 건 언제부터일까요, 차이린 십부장님" 그래서 나는 차이린 쪽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물었다. "무기를 드는 순간 누구나 폭도가 되고 반란군이 되는 거야" 차이린이 대답했다. 하지만 차이린의 목소리에도 그다지 자신감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는 차이린의 말속에 마법의 말이 섞여 있다 는 걸 알 수 있었다. 실로 오래간 만에 느껴보는 마법의 말이었다. 무기 를 드는 순간 보통 사람도 살인자가 되고 만다. 차이린의 말은 내 마음에 울림을 전하고 있었다. 비록 자신 없는 말투였다고 해도 말이다. 나도 칼 을 차고 있는 사람이다. 그들도 칼을 차고 있는 사람이다. 결국 나와 그 들은 아무 차이도 없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하지만 한 가지 의문점이 생기기는 했다. "그런데 왜 국왕은 군대를 파견하지 않고 우리를 부른 걸까요?" 나는 에이스에게 이렇게 물었다. "자신의 손을 더럽히기는 싫다는 거겠지" 찬이 대답했다. 나는 찬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말하는 찬의 얼굴에 또 다시 어떤 표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렇지만 그 표정이 어떤 표정인지 알 수 없기는 아까와 마찬가지였다. 나는 내가 왜 반란군과 싸워야 하는지 다시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국 왕의 군대가 하기 꺼리는 일을 우리가 한다... 언젠가 가투신이 했던 말 이었다. 민간인을 죽이고, 여자와 어린아이를 죽이는 일... 혹은 정치적 인 보복 같은 일들... 우리는 이제부터 그런 더러운 일을 하려고 하는 것 이다. 하지만 왜? 용병이니까! 그렇다면 나는 왜 용병이 되었는가... 그런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머릿속을 뱅뱅 돌수록 내 안에서 무엇인가 어긋나고 있는 느낌은 커지기 만 했다. 나는 마음을 고쳐먹기 시작했다. 수르카. 정신차려. 죽일* 수* 있을* 때* 죽이지* 않으면* 죽는* 거야* 라이짐을 봐. 강해지고 있잖아. 라이짐은 지금 하잔 시 안에서 어떤 일을 겪고 있을지 몰라. 그런데 넌 지금 여기서 쓸데없는 생각만 하고 있는 거야. 수르카. 강해져야 해. 강 해져야 해. 너를 믿고 있는 위대한 복수자 검객 아케르를 생각해. 또 차 이린을 말이야. 나는 심호흡을 했다. "여긴 것 같아" 내가 어느 정도 마음에 안정을 찾아갈 때쯤 해서 차이린이 말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우리 일행은 그야말로 숲 한가운데에 멈추어 서 있었다. 사방을 둘러봐도 나무뿐인 곳이었다. "흔적이 여기서 시작되고 있어. 이 전의 발자국은 정상적인 사람의 발 자국인데 말이야. 아마 여기서 좀비로 변한 모양이야. 가만있자... 그런 발자국이 한 두 개가 아닌데... 모두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어... 내가 알 수 있는 건 여기까지야. 이제 아자닌이 필요한 때가 온 것 같구나, 수르 카" 차이린이 말했다. 나는 아자닌을 불러냈다. "내* 마음의* 문을* 여니* 길을* 인도해* 다오*" "예, 부르셨습니까, 수르카님" 아자닌이 말했다. 얼굴도 분명히 보였고 가느다란 팔과 다리도 그대로 였다. 하지만 아자닌의 옷은 늘 보던 노란 치마가 아니었다. 아자닌은... 가죽으로 만들어진 갑옷을 입고 있었다. 나는 놀랐지만 아무도 지금의 아 자닌이 평소의 아자닌과 다르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있는 모양이었다. 차 이린은 아무 생각 없어 보였고, 에이스와 찬도 아무 생각 없이 차이린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아자닌이 정령이라는 걸 생각나게 해 주는 사람은 오 로지 그레텔 뿐이었다. 그레텔은 신기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아자닌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에서 사람이 좀비로 변했어. 아자닌. 한 번 살펴 봐줄래?" 차이린이 말했다. "예. 이곳에서 좀비가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여기에는 마법의 기운이 남아있군요. 수르카 님. 한 번 저기를 파 보시겠어요? 조심스럽게요" "왜 파는 데, 아자닌?" 내가 물었다. 차이린도 궁금하다는 듯이 아자닌을 바라보았다. "그 안에 마칸의 마법이 담겨 있는 어떤 게 있을 겁니다. 아마 전쟁 때 마칸 족이 묻어놓은 걸 거라고 생각됩니다. "그래. 알았어" 하지만 왜 하필이면 나지? 하긴. 내가 짐도 별로 없고 나이도 어리니 별 수 없지 뭐. 차이린이 배낭에서 작은 삽을 꺼내 나에게 주었다. 나는 땅을 파기 시작했다. 땅을 파기 시작하자 이무르 아주머니를 묻던 날이 생각났다. 그 뒤틀린 팔다리와 외면하려고 했지만 보고야 말았던 눈동 자... 나는 그 끔찍한 기억을 머리에서 몰아내기 위해 더욱 더 열심히 땅 을 팠다. 얼마나 지났을까. 팔뚝 하나가 들어갈 만큼을 땅을 팠을 때, 뭔가 단단 한 것이 삽 끝에 걸리는 것이 느껴졌다. "조심하세요. 수르카 님" 아자닌이 말했다. 알았어. 조심하지 그럼. 잘못하다간 나도 좀비가 될 지도 모르는 판국인데 조심 않하게 됐어, 지금. 나는 삽 끝에 걸린 것이 손에 닿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삽으로 살살 흙을 긁어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이상한 형체를 가진 뭔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찾았어. 아자닌. 그런데 이게 뭐지?" 삽으로 흙을 긁어내자 꼭 긴 막대기가 묻혀있는 것 같은 모양이 드러났 다. "잠시만요. 기억을 좀 더듬어 보겠습니다..." 아자닌이 대답을 하자마자 갑자기 막대기의 중간이 터져 올랐다. 그리 고 거기에서 푸른빛이 도는 물이 마구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으악!" 나는 깜짝 놀라면서 뒤로 물러섰다. 차이린이 번개같이 칼을 뽑아들었 고, 에이스도 양 손에 작은 단검을 빼어들었다. 그리고 찬은 어느새 양손 칼을 뽑아 들고 싸울 준비까지 하고 있었다. 그레텔은 위험한 상황이라는 걸 예감했다는 듯이 찬에게 바짝 붙어있었다. 그러고 보니 나만 칼을 안 빼들고 있잖아? 나는 얼른 일어나 칼을 뽑아 들었다. 하지만 푸른 물을 온 몸에 뒤집어쓰고 이런 자세를 잡아봐야 별 소용이 없을 것 같다는 생 각이 들었다. "마칸이 심어놓은 뿌리입니다. 그 뿌리를 타고 마법이 전해져 희귀한 아이템을 만들어 내고 그 아이템이 사방에 뿌려집니다. 그 아이템을 집으 면 그 순간 좀비가 되는 것입니다. 그 아이템은 치료석이나 단검, 보석, 금화 등 여러 종류입니다. 하지만 마음을 가다듬고 자세히 보면 그것이 마칸의 상징임을 알 수 있다고 전설에 나와있습니다" 푸른 물을 뒤집어쓴 채 입 속에 들어간 것들을 내뱉고 있는데, 아자닌 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 이런, 정령하고는. "거기 혹시 푸른 물을 뒤집어쓰면 좀비가 된다는 말은 없어?" 잔뜩 기분 상한 목소리로 내가 말했지만 아자닌은 없습니다, 하고는 말 았다. "음. 길가는 사람들이 물건을 집은 뒤에 좀비로 변한다는 게 바로 이 말이었군요. 이제 좀 더 명확해지는 느낌입니다" 에이스가 말했다. 에이스의 회색 눈동자가 조금 더 반짝이고 있는 듯 했다. "이곳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 아이템들을 집었다면... 다들 끔찍한 꼴 이 되고 말았겠군" 차이린이 말했다. 그런데 그런 말을 하면서 나를 슬슬 피하는 이유는 뭐야? 분명히 푸른 물을 뒤집어 쓴 거로는 좀비가 되지 않는다고 했는데. 꼭 좀비라도 본 사람같이 말이야. "찬!" 차이린이 소리쳤다. 나는 찬 쪽을 반사적으로 돌아보았다. 차이린은 꼭 좀비라도 본 사람같은 표정이 아니라 정말 좀비를 봤다는 걸 나는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찬의 바로 뒤에... 좀비가 하나 서 있었다. 좀비는 차이린 이 설명한 그대로 휘청거리면서 찬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옷이 깨끗한 걸 로 봐서 좀비가 된지는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았지만, 얼굴만큼은 내가 전 에 본 좀비들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었다. 침은 질질 흘리면서 도무지 아 무 빛도 나지 않는 어둠 같은 눈빛을 하고 있는 게 말이다. "팔을 들어올리지 못하게 해!" 좀비가 팔을 들어올리려고 하자 차이린이 한 번 더 소리쳤다. 찬은 그 대로 양손칼을 휘둘러 좀비의 허리를 베어버렸다. 정말 그 큰칼을 가지고 하는 동작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빨랐다. "수르카!" 차이린은 왜 또 날 부르는 거지?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내 뒤에 또 좀 비가 하나 있었다. "으악!" 나는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등 뒤로 다가오던 좀비는 여자 옷을 입고 있었다. 흉한 모습이기는 했지만 분명 여자임에는 틀림없었다. 이제 어떻 게 하면 좋지? 나는 잠시 차이린과 에이스 쪽을 바라보았다. 그쪽에도 좀 비들이 여럿 나타난 모양이었다. 차이린과 에이스는 칼을 휘두르며 좀비 들과 싸우고 있었다. 나는 망설이고 있을 시간이 없다는 걸 알 수 있었 다. 죽일* 수* 있을* 때*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 이 마법의 말을 중얼거린 순간 나는 무언가 내 안으로 들어오려고 꿈틀 거리고 있는 것을 느꼈다. 전에도 이런 느낌을 받은 적이 있는데... 나는 내 안으로 그것이 들어오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기어코 내 안으로 들어 온 그것은 이윽고 내 안에서 터져 올랐다. 나는 그대로 칼을 휘둘러 좀비의 머리를 베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베 어본 사람의 목이었다. 아니, 사람이 아니라 좀비다. 칼날이 목을 베고 지나가는 감촉이 손바닥 전체로 전해져왔다. 나는 짜릿했다. 쾌감에 가까 운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제대로 칼날이 들어 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었다. 그런데 좀비의 몸통에서 피가 뿜어져 나오는 바람에 나는 피를 뒤 집어쓰게 되었다. 내가 서 있는 곳 근처에는 더이상 좀비가 없다는 걸 확 인 한 뒤, 찬 쪽으로 뛰어갔다. 그레텔을 업고 싸우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 같았다. 찬이 있는 쪽에는 들개들이 덤벼들고 있었다. 찬은 양손칼을 마치 단검 다루듯이 위에서 아래도 또 양옆으로 휘두르면서 들개들을 베고 있었다. 찬의 칼이 한 번 움직일 때 마다 들개 두 세 마리의 목과 허리가 끊어지 고 있었다. 찬의 그 놀라운 움직임을 보는 순간 나는 찬이 꼭 동행했어야 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찬의 몸놀림은 마치 춤을 추는 무희처럼 아름 다왔다. 그런데, 이거, 나한테도 달려들고 있잖아! 나도 정신없이 들개들과 싸 우기 시작했다. 몸에 맞지 않는 것을 들고 있다는 어색한 느낌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나는 사비오 영감의 스타바 축사 앞에서 칼을 휘둘렀던 일 을 떠올렸다. 나의 칼은 들개를 베는가 하면 다시 물러나 거리를 만들고 있었고 그러는가 싶다가는 다시 다가가 들개들을 베었다. 춤이다. 꿈에서 나카의 노래에 맞추어 추었던 춤 말이다. 그리고 찬이 추고 있 는 저 춤 말이다. 나의 칼은 박자를 타고 계속 움직여 나갔다. 거기에는 공격이나 방어에 대한 생각이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그저 몸이 가는 대 로 칼을 맡기면 그만이었다. 내 칼이 한 번 움직일 때마다 들개의 목과 허리가 베어졌고 그때마다 핏물이 튀어 올랐다. 나는 내 몸이 점점 피로 물들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비릿한 피내음! 나는 점점 내가 추고 있는 칼춤에 도취되어 가고 있었다. "수르카! 좀비를 찾아봐!" 찬이 소리쳤다. 그렇다. 좀비를 찾아서 베어내지 않으면 들개들은 계속 몰려들 거다. 나는 칼을 휘두르면서 나무 뒤편으로 움직여 나갔다. 나무 와 나무 사이가 좁아 쉽게 칼을 휘두르기가 어려워졌다. 만약 내 칼이 나 무에 막히는 순간이 온다면, 그 순간 들개에게 목줄을 물리겠지. 죽일 수 있을 때 죽이는 거다. 나는 계속 칼을 휘둘렀다. 그 좁은 나무 사이에서 몸을 놀리면서 말이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N:김상현 #9780/10199 ━━━━━━━━━━━━━━━━━━━━━━━━━━━━━━━━━━━━━━━━ 제 목:[탐그루]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 69 관련자료:없음 26/26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1-13 00:23 조회:979 탐그루 # 마법은 마음이다 - 마음은 칼이다 # 드디어 좀비를 찾았다. 좀비는 오른 팔을 들어올리고 있었다. 내가 들 개들을 베면서 다가가자 좀비가 조금 뒤로 물러서는 것 같았다. 기회다! 내 본능이 이렇게 소리쳤다. 나는 잠시 춤을 멈추고 들개들이 내 쪽으로 신경을 집중시키도록 만들고, 그사이 몸을 움츠렸다가 펴면서 몸을 좀비 쪽으로 날렸다. 나는 달려가던 기세 그대로 칼을 아래에서 위로 쳐 올렸 다. 내 칼은 그대로 좀비의 오른 팔을 베었다. 다음 한 번의 동작으론 감 각이 이끄는 대로 좀비의 목을 쳐 날렸다. 다시 한 번 핏물이 뿜어져 올 라왔고, 나는 그것을 뒤집어썼다. 핏물이 몸에 닿자 쾌감이 온 몸으로 퍼 져나갔다. 입술이 자꾸 씰룩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웃음이 자꾸 나오려고 했다.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조금 전까지 내게 달려들던 들개들 몇몇은 그대로 쓰러져 몸을 떨었고 나머지 몇몇은 어디론가 도망쳐 사라져버렸다. 나는 들개들을 추적해 모 조리 죽여버리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겨우겨우 그 충동을 억누르며 찬 과 에이스, 그리고 차이린이 있는 곳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곳도 상황 은 거의 다 끝나있었다. 팔을 잃은 좀비 하나만이 서 있었고 바닥에는 들 개와 좀비의 몸이 동강나 있었다. 다시 한 번 비릿한 피내음이 맡아졌다. 나는 그대로 움직이고 있는 좀비에게 다가가 칼을 휘둘렀다. 좀비의 허리 가 끊어지면서 핏물이 튀어 올랐다. "수르카!" 차이린이 소리쳤다. 나는 차이린을 바라보았다. 핏물을 온 몸에 뒤집어 쓰고서 말이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차이린을 바라보았다. 핏물이 입으로 스며들어왔다. 쇠독 냄새하고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강렬한 쇠냄새가 목구멍을 타고 내려 가는 것이 느껴졌다. 나를 바라보고 있는 차이린의 얼굴이 천천히 흐려졌다. 그리고 나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수르카? 정신이 들어?" 내가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 온 것은 차이린의 얼굴이었 다. 차이린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옆에 에이 스와 찬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레텔의 얼굴도 보였다. 그러고 보니 나는 누워있었다. 내가 있는 곳도 시체 더미가 쌓여있던 곳이 아니라, 조 금 널직한 평지에 가까운 곳이었다. "네가 정신을 잃으니까 아자닌도 사라져 버렸어. 어떻게 된 거야, 수르 카?" 차이린이 물었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아나? 그러고 보니 내가 무슨 마법 을 걸기는 한 모양인데... 아마 나한테만 작용하는 마법인 모양이었다. "내* 마음의* 문을* 여니* 길을* 인도해* 다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도 하지 않고 아자닌을 불러내었다. 아자닌 은 평소와 같은 노란색 옷을 입고 있었다. "예. 부르셨습니까, 수르카 님" "어떻게 된 거야? 설명 좀 해줘" 내가 아자닌에게 이렇게 묻자 다들 아자닌을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들 도 역시 무슨 일이 벌어진건지 궁금하기는 한 모양이었다. "수르카 님은 마법을 쓰셨습니다" 아자닌이 말했다. 그래 그건 나도 안다. 그게 뭐냔 말이야. 하지만 다 른 사람들은 마법이라는 말에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거, 마법 쓸 줄 아는 사람 처음 보나? 이거 왜들 이러는 거지? "그 마법은 수르카 님의 칼과 반응하는 마법이었습니다. 수르카 님의 마법과 수르카 님의 칼이 반응하자, 순간적으로 수르카 님은 잠시 자신의 능력을 뛰어넘는 칼솜씨를 가지게 되신 겁니다. 그 때문에 기력이 빨리 빠져나가 정신을 잃으신 겁니다" 그랬군... 나는 내 옆에 놓여져 있는 칼을 바라보았다. (아마 차이린이 날 위해 여기 놓아둔 것이리라) 유명한 장인이 만든 칼이라더니만, 정말 그런 모양이로군. 나는 아자닌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그런데 아까 그 푸른 물을 쏟아내던 건 도대체 뭐였는지 좀 물어봐 주 세요, 수르카 단원" 에이스였다. "직접 물으셔도 되요" 나는 그제야 몸을 일으키면서 말했다. 좀 어지럽기는 했지만 그밖에 다 친 곳은 없는 것 같았다. "아까 수르카 님이 건드리신 것은 마칸이 오래 전에 심어놓은 저주였습 니다" 그 말은 아까도 했잖아, 이 정령 아가씨야. "그런데 그 푸른 물은?" "아마 수르카 님이 적의를 가지고 건드리자 반응을 보인 모양입니다. 사람으로 따지면 피하고 같은 거니까 별로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큰 해는 없을 겁니다" 큰 해는 없다고? 그럼 확실한 것도 아니잖아. 이거 참. 그런데 그러고 보니 이상한 게 하나 있었다. "그런데 좀비의 근원지는 보이지 않게 하는 마법으로 보호되고 있다며" "예" "그럼 왜 아까 그곳은 그렇게 쉽게 눈에 들어온 거야?" 내가 아자닌에게 다시 물었다. "좀 전에 수르카 님이 파신 곳은 좀비의 근원지가 아닙니다. 좀비의 근 원지에서 뻗어나온 뿌리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그곳에서 좀비를 만드는 마법이 나오기 때문에 주변의 좀비들이 보호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음...흥미로운 정보로군요" 검은 엘프, 에이스였다. "그랬구나... 그럼 내가 뒤집어 쓴 그 파란 물은 근원지에서부터 흘러 나온 물이겠네?" "예" 너무나도 뻔뻔스럽게 아자닌이 말했다. 나는 아자닌이 좀 얄밉다는 생 각이 들었다. 뻔히 알면서도 얘기를 해주지 않다니 말이다. 아무리 정령 이라지만 너무 하는 거 아니야? "좀 미리 말해주지 그랬어?" "그래서 제가 조심하라고 말씀 드렸잖아요" 여전히 당연하다는 듯이 뻔뻔스럽게 차이린이 말했다. 으이구. 그러면 그렇지 이 정령아. "알았어. 당장 꺼져!" 나는 아자닌에게 이렇게 소리를 질렀다. 아자닌이 사라지자, 에이스는 이만하면 좀비에 대한 조사는 다 한 셈이 라고 말하고는 차이린에게는 부대로 복귀해도 된다고 말했다. "아자닌의 도움이 컸습니다.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 뿌 리를 따라가다 보면 뭔가를 발견할 수 있게 되겠지요. 나중에 결과는 제 가 단장님께 직접 보고드릴 테니 차이린 십부장은 별로 신경 안 쓰셔도 될 겁니다" "그래요. 그럼 그렇게 해요, 에이스" "잠깐만요. 한가지 빼먹은 게 있어요, 에이스. 좀비의 근원지는 마법으 로 보호되고 있다구요. 아자닌에게 들은 말인데 근원지를 찾아 내 봐야 그곳은 보이지도 않는다고요" 나는 에이스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러자 에이스의 회색 눈이 야릇한 빛 으로 바뀌었다. 비웃는 듯한 눈이었다. "마법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수르카 단원 뿐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합니 다" 차가운 목소리였다. 나는 한 방 먹은 기분이 되었다. 그럼 에이스도 마 법사였단 말인가? 검은 엘프 마법사라. 검은 엘프가 쓰는 마법도 인간이 쓰는 마법과 비슷한 건가? "자, 그럼 여기서 갈라져요. 에이스, 죽지 말아요" "다들 죽지 마시길..." 나는 조금 불만이다. 벌써 돌아가다니. 칫. 이럴 거면서 뭐터러 식량은 잔뜩 가지고 왔냐 말이야. 식량 때문에 찬만 고생한 셈이 됐잖아? "그런데 그레텔은 어쩌지?" 차이린이 찬의 등에 매달려 있는 그레텔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하잔으로 되돌려보내, 다른 친척에게라도 가 있어야겠죠" 찬이 대답했다. "무슨 소리야, 찬?" 내가 찬에게 물었다. "하잔으로 돌려보낸다고. 내가. 끝까지 책임져야지" "하지만 어떻게?" 차이린이 물었지만 찬은 대답하지 않았다. "좋아. 작전 기간이라고는 하지만 뭐, 내가 십부장이니까 허락하겠어. 하지만 작전에 차질 없도록 해" 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여기서 이만 헤어지도록 합시다. 저는 이제 그 뿌리를 따라서 계 속 정보를 모으는 일을 해야 하니까요. 조심해서 돌아가십시오" 에이스가 말했고 이걸로 임무는 끝났다. 특수임무라고는 하지만 그렇게 긴 임무는 아니었다. 한 나절도 걸리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돌아오는 길은 올 때 보다 짧았다. 지난 번 소리장까지 가는 길도 갈 때 보다는 올 때가 더 짧았던 기억이 났다. 그건 도대체 왜일까? 하여간 노을 이 질 무렵, 멀리 용병단이 있는 임시 주둔지가 보였다. 나는 새 한 마리가 주둔지로 날아드는 것을 보았다. 그 새는 머리가 몸에 비해 좀 크고 머리에 뿔처럼 생긴 긴 깃털이 나 있었다. 언젠가 유훈이 휘파람으로 불러모은 적 이 있던 떠버리 새였다. 그런데 왜 주둔지에 날아드는 걸까? "떠버리 새가 왔구나" 차이린이 말했다. "왜 온 거죠, 차이린 십부장님?" 나는 차이린에게 이렇게 물어보았다. "떠버리 새는 연락용이야. 다리에 편지를 넣을 수 있는 통을 매달아 뒀 지. 아마 하잔에 먼저 도착해 있는 우리 정보원이 날린 새일 거야. 어쩌 면 아케르 단장이 날려보낸 떠버리 새인지도 모르지" 떠버리 새롤 연락을 한다구? 어떻게 떠버리 새로 연락을 할 수 있는 거 지? "무슨 수로 새를 날리고, 또 어떻게 알고 새가 날아오고 하는 거죠?" "동타실 사람들 중에는 이상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 동 물을 부리는 재주가 있는 사람도 있고, 힘이 무지막지하게 센 사람도 있 지. 마법사도 동타실 출신 사람들이 많고, 진짜 뛰어난 검사들도 동타실 출신인 경우가 많아. 우리 부대의 연락책은 유훈이 맡고 있지. 역시 동타 실 출신인 모양인데, 휘파람으로 새를 불러모으는 능력이 있지. 다른 능 력이 더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그럼 동타실 출신 사람들은 어디가나 환영받겠네요. 그렇게 능력이 많 으니까 말이에요" 그런데 말해놓고 보니까, 아케르 용병단에 동타실 출신 사람들은 거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런 걸까? 너무 능력이 뛰어나다 보니 용병단 에는 잘 들어오지 않는 걸까? "그렇지만도 않아.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동타실 중에서도 악마의 입이라고 불리는 지역 사람들 뿐이야. 그리고 거기 출신들은 대부분 타실 에서 천대받는 사람들이야" "왜요?" "악마의 입이라는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다 저능아 아니면 기 형들이야. 뭔가 이상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그리고 유훈도 내가 보기에는 정상 같지 않았어" 차이린이 말했다. 정상이 아니다... 나는 유훈이 계속 중얼거리면서 길 을 걸어갔던 일이 떠올랐다. 정상이 아니다... "거기다가 악마의 입에 사는 사람들은 예전에 한 번 반란도 일으킨 적 이 있어. 그 사람들이 무슨 힘이 있다고 타실의 정규군한테 대항했는지는 모르겠어. 정상인도 아니면서 말이지. 하긴 그러니까 어딜 가든 천대받을 수밖에 없지. 아마 동타실 악마의 입 출신들이 다른 사람들하고 동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는 곳은 바로 여기, 아케르 용병단 뿐일걸" 반란... 나는 이 말을 듣자 시민과 반란군의 차이는 칼을 들었느냐 들 지 않았느냐 일 뿐이라는 차이린의 말이 떠올랐다. 지금 찬의 등에 업혀 있는 꼬마도 칼을 든다면 반란군일까? 만약 그렇다면 나는 그레텔을 베어 야 하나? 그리고 나서 죽일 수 있을 때 죽인 거라고 말 할 수 있을까? 나 는 또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자꾸 이러다간 나도 동타실 사람처 럼 될지도 몰라... 그만 생각하자. 뭐, 어떻게든 되겠지. 그때, 그레텔이 찬에게 뭐라고 조그맣게 말하는 모습이 보였다. 뭐라고 하는 거지 지금? 하여간 그레텔의 말을 듣자 찬이 말했다. "반지 속에 여자가 있다" 뭐라고? 나는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찬을 바라보았 다. "그레텔이 한 말이야" 음. 그거 참 이상하군. 그레텔은 아자닌이 반지의 정령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 텐데 말이야. 그런데 어떻게 반지 속에 여자가 있다는 말 을 할 수 있는 거지? "그레텔. 너, 이 반지 안에 여자가 있는 게 보여?" 나는 그레텔에게 반지를 가까이 가져가 보여주며 물었다. 그레텔은 고 개를 끄덕였다. 이상한 일이군. "할아버지" 그레텔이 내 칼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말했다. "그건 또 무슨 말이야?" "할아버지가 있어" 그레텔이 다시 한 번 말했다. 음. 이건 도저히 내 머리로는 무슨 일인 지 파악할 수 없는 상황이로군. 나는 다시 한 번 아자닌을 불러내었다. "예, 부르셨습니까. 수르카 님. "너 지금 그레텔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 있어?" "그레텔은 정령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정령을 볼 수 있다고?" 차이린이 내가 물어볼 말을 대신 물어보았다. "그리고 아마 그 칼 속에 담겨 있는 정령의 모습도 본 것 같습니다" "넌 안보여?" 내가 묻자 아자닌은 뭔가 숨기는 기색으로 '수르카님이 볼 수 없는 건 저도 볼 수 없지요'하고 말했다. "가만. 그럼 이 할아버지를 불러낼 수 있니?" 나는 그레텔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러자 그레텔이 양손을 앞으로 올리 고는 말했다. "바람은* 보이지* 않으나* 어디선가* 늘* 불어온다*" 그레텔의 말은 마법의 말이었다. 나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그레텔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마법의 말에 기겁을 하고 말았다. 아니, 저게 어떻게 된 일이야. 놀라고 있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차이린도 놀라고 있었고, 찬도(표정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지만) 움찔하는 게 느껴질 만큼 놀라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은 그레텔의 목소리였다. 저런 꼬마 여자아 이 입에서 마법의 말이 나오자, 그 목소리가 젊은 아가씨의 목소리처럼 들리고 있었다. 나는 아자닌은 바라보았다. 아자닌은 그레텔을 바라보면 서 생각에 잠긴 모양이었다. 또 기억을 더듬고 있는 걸까? """""""""나미트 할아버지 나와요. 바람은* 보이지* 않으나* 어디선가* 늘* 불 어온다*" 그레텔은 잠시 시간을 두었다가 이렇게 말했다. "무슨 소리야?" 나는 아자닌에게 물었다. "나미트는 칼의 정령의 이름입니다. 그리고 '바람은* 보이지* 않으나* 어디선가* 늘* 불어온다*'는 나미트를 부르는 주문입니다" "나미트 장군이라고!" 차이린은 놀랍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삼 년 전쟁 때 이름을 날렸던 장군이잖아. 스파일 국 최고 용장이었 지. '스파일의 붉은 용'이라는 별명이었지. 타실군에게 포로가 되어서 죽 은 걸로 알고 있었는데... 그런데 그 나미트 장군이 정령이 되어 그 칼 안에 있다고?" "나미트...장군이라고요?" 나는 차이린에게 이렇게 되물었다. "그래. 나미트 장군. 타실 사람도, 스파일 사람도 두려워하는 진짜 군 인이었지. 나도 언젠가 순무 행정 담당관에게 들은 말이야. 순무는 용병 단에 들어오기 전, 연금술사 생활을 하면서 여기 저기 떠돌아 다녀서 아 는 게 많거든" "연금술사요?" "그래. 꽤 독창적인 연금술사였다고 들었어. 보통 귀족들을 위해 장식 용 등이나 만드는 연금술사가 꽤 많은 데, 순무는 그런 사람들하고는 좀 다른 사람이었다고 하더라. 여기 와서 새로 만든 것도 꽤 있어. 시간 막 대기도 순무가 용병단에 도입한 물건이고, 작전 때 쓰는 신호 불, 장례식 때 쓰는 불 만드는 검은 돌... 이런 게 다 순무 작품이야" 내가 탐그루에서 알고 지낸 바코쿠 하고는 외모도 다르고 만드는 물건 도 다르지만 그래도 연금술사였다니. 그런데 도대체 왜 그렇게 깐깐한거 야, 예, 아니오 말고는 대답 할 수도 없게 하고... 참. 이거 쓸데없는 얘 기하느라 중요한 걸 잊었다. 그렇게 유명한 장군이 이 칼 안에 있다구? 칼이 갑자기 흔들리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 흔들린다고 하기보다는 떨 리는 느낌에 더 가까웠다. 이거, 아자닌 하고는 좀 다른 걸. "나를 부른 사람이 도대체 누구신가..." 내 눈앞에 한 노인이 나타났다. 키가 무척 크고 (가투신 보다 머리 한 두 개 정도는 더 커 보였다) 흰 수염을 길게 기른 노인이었다. 노인은 갑 옷을 입고 있었는데, 대장군 카를로스 카를로스의 문양이 새겨진 붉은 색 갑옷이었다. 그리고 갑옷의 어깨 받침까지 긴 흰머리가 아무렇게나 흘러 내려 있었다. 시커먼 얼굴빛에 굵직한 목은 누가 보기에도 대단한 검사라 는 인상을 주고 있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N:김상현 #9865/10199 ━━━━━━━━━━━━━━━━━━━━━━━━━━━━━━━━━━━━━━━━ 제 목:[탐그루]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 70 관련자료:없음 24/24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1-14 00:29 조회:935 탐그루 # 마법은 마음이다 - 마음은 칼이다 # "스파일의 나미트 장군..." 차이린이 말했다. 뭐가 그렇게 놀라운지 입을 떡 벌리고서 말이다. 찬 도 놀라는 눈치였다. 하지만 그레텔은 별일 아니라는 듯이 나미트 장군, 아니 칼의 정령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까 오래간만에 몸을 좀 푸는 가 했더니, 바로 자네였군. 자네 이름 이 수르카, 맞지?"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나미트 장군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 늙은이를 오래간 만에 불러줘서 고맙네. 아무리 정령이 되었다지만 가끔은 운동도 좀 해야지. 안 그런가 젊은 친구?" 나미트 장군은 이렇게 말하고는 주위를 살펴보았다. "음. 저 여자하고 남자란 말이지...?" "예?" "저 친구들이 자네가 죽일 것들이냐고... 이 친구하고는. 그런데 저 친 구는 또 누구야? 정령인 것 같은데... 이봐. 아무리 나미트라고 해도 정 령은 못 죽여" 나는 웬지 박력이 넘치는 나미트 장군의 말투에 질려버렸다. "누가 죽이라고 했다고 그래요?" "아니야? 그럼 말고. 그런데 왜 부른 거야?" 이거 겉모습만 노인이지 말하는 건 완전히 어린애로구만. 나는 나미트 장군의 모습을 어이가 없어서 한 동안 바라보았다. 이제는 별로 무섭지가 않았다. "아자닌?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 좀 해줘" 나는 구원을 요청하는 사람처럼 다급하게 아자닌을 불렀다. 아자닌은 나미트 장군을 바라보더니 천천히 설명을 시작했다. "나미트는 수르카 님의 칼에 담겨 있는 정령입니다. 수르카 님이 누군 가와 싸우고 있을 때 부르시면 나타나 수르카 님을 도와드릴 수 있는 능 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정령이기 때문에 물리적인 힘은 없지만, 수 르카 님에게 아마 나미트가 사람이었을 때 가지고 있었던 칼 솜씨를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아까 좀비들과 싸울 때 내가 쓴 마법은..." "나미트를 부르지 않고 그 힘만을 부르는 마법입니다" 아자닌이 말했다. 어라? 그런데 이번에는 나미트 장군 표정이 이상해지 네? "어이, 여자 정령. 거, 다 아는 것처럼 그렇게 나서지 마. 그 정도는 나도 얘기 해 줄 수 있는 거라고. 그리고 어따대고 함부로 나미트라 그러 는 거야. 나이도 어린 게" 나미트 장군이 기분 나쁘다는 말투로 아자닌에게 말했다. "같은 정령끼리 뭘 그러십니까. 정령이 무슨 나이가 있고 신분이 있습 니까" 아자닌이 차갑게 나미트에게 쏘아 부쳤다. 말 자체는 공손 한 것 같은 데 말이다. 아자닌의 저런 모습은 처음 보는 걸. "이봐. 귀족이고 나발이고 내가 말하는 건, 그렇게 거기 서서 잘난 척 하지 말라는 거야. 보아하니 마법하고 관계 있는 정령 같은데 말이야. 아 킨의 제자라도 되나?" 나미트가 말했다. 아킨? 전설에 나오는 대 마법사 아킨? "나미트. 함부로 그 아킨 님의 이름을 부르지 말아요. 그쪽이야말로 카 를로스 카를로스하고 관계가 있는 모양인데..." "야! 어디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위대한 초대 왕립 기사단장님의 이름 을 함부로 입에 담아! 이거 아주 못쓰겠구먼" "잠깐!" 둘이 시끄럽게 말하기 시작하자 내가 소리 질렀다. 둘은 입을 다물었지 만 차이린과 찬은 놀란 눈치였다. 특히 찬은 표정은 변하지 않아도 정말 놀랐는지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음. 무표정한 얼굴이 저런 표정을 지으 니까 재미있는데. 나는 둘이 왜 싸우는지, 또 대마법사 아킨이나 카를로 스의 이름을 말한다는 게 뭐 그리 기분 나쁜 일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 쯤해서 멈추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둘 다 들어가" 내가 말하자 두 정령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휴우. 정령의 일은 정 령 세계에서 끝내라구. 여긴 인간 세계야. "수르카...이거 어떻게 된 일이야?" 차이린이 물었다. "글쎄요, 차이린 십부장님. 하지만 그건 제가 아니라 그레텔한테 물어 보셔야 할 것 같은데요" 나는 그레텔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렇지만 돌아가는 길 내내 그레텔 에게서 들을 수 있었던 말은 거의 없었다. 기껏해야 '찬' '여자' '할아버 지' '신' 이게 들을 수 있는 말의 전부였다. (그런데 신이라니? 성년의 신 마소드? 아니면 또 뭐지?) 오늘따라 내 손의 반지와 내 허리의 칼이 이상하리만치 무겁게 느껴지고 있었다. 우리 일행이 솔한장 마을로 돌아왔을 때, 상황은 많이 바뀌어 있었다. 국왕의 특사가 우리 임지 주둔지 지휘소에 찾아와 있었다. 그리고 팜 산 맥을 내려가던 성황청의 리바르도 기사단도 우리 아케르 용병단의 임시 지휘소에 깃발을 꽂고 있었다. 아케르 용병단 주둔지에서 본 성황청의 기사단은 멀리서 본 것과는 다 소 달랐다. (아마 모두 같은 옷을 입고 모여있어서 그렇겠지만) 검은 깃 발아래 모인 검은 옷의 기사들은 모두 다 부동자세로 뮤 옆에 서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두꺼운 갑옷과 투구는 그들의 대단한 위세를 말해주고 있 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모습을 가까운 곳에서 본 경험이 있었다. 뒤뚱거리면서 걷는 꼴 하고는. 그래가지고 어디 타코 한 마리나 잡겠나. 기껏해야 느려터지고 병든 백년수 한 마리 잡으면 다행이겠지. 내가 보기엔 그 꼴로는 반란군한테 어림도 없다. 성구가 잘 작동하기만 빌라고, 기사 여러분. 나는 속으로 한껏 그들을 비웃어 주었다. 하여간 어디가나 정치적인 일들이로군. 도대체 반란군 토벌 작전에 국 왕의 특사에다가 성황청에서는 기사단까지... 이게 도대체 뭐 하는 짓들 인지, 원. 도대체 뭐 먹고 살 일이 났다고 저렇게 모여드는 걸까? 나는 그런 거 모른다. 그냥 칼로 싸우면 그만이다. 십부장 말만 따르면 그만이 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기로 마음을 다잡아먹었다. 거기다가 복잡할 생각 을 할 여유도 별로 없었다. 내가 피범벅이 된 꼴로 천막에 들어서자 천막 안에서 쉬고 있던 (그러니까 도박을 하고 있거나 떠들고 있던) 동료들이 뭐라고 한마디씩 던졌기 때문이었다. 나는 지난번 소리장 마을에서 돌아 왔을 때처럼 대충 얼버무렸다. 찬이 데리고 온 그레텔은 꽤 인기가 있었다. 여기저기서 동료들이 그레 텔에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그레텔은 찬 옆에 꼭 붙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표정 없는 두 사람의 모습하고는. 꼭 부녀지간 같단 말이 야. 도착하자마자 나는 일단 옷을 빨고 몸을 씻었다. 핏물이 씻겨 내려가는 것을 보고 있자니 좀 껄끄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견딜만했다. 다시 천막으 로 돌아왔을 때, 찬은 그레텔과 함께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나카가 꼬 마 아가씨를 위해 노래를 불러주겠다며 소란을 피웠지만 그레텔과 찬은 아무 표정도 없이 그냥 앉아만 있었다. 아무래도 저 두 사람 잘 어울리는 것 같단 말이야. 그나저나 찬은 그레텔을 어떻게 하잔으로 데려다 준다는 말일까? 또 그레텔은 어떤 과거를 가지고 있는 아이일까? 하지만 둘 다 말이 없으니, 이거 알 도리가 있나. 식사시간이 되자, 나는 십부원들과 함께 식사를 하기 위해 천막에서 나 왔다. 일단 뭘 좀 먹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오늘도 너무 많은 일을 겪었어. 식사를 하면서 나는 아자닌과 나미트 장군을 계속 생각하지 않을 수 없 었다. 이거, 아자닌 하나 만으로도 상대하기 벅찼는데 이거 나미트 장군 까지... 하지만 나미트 장군의 칼 솜씨는 정말 대단했다. (나는 '몸으로' 그걸 느껴서 잘 알고 있었다) 어쩐지 하잔에서 이제 벌어질 전투가 기대 되었다. 아니, 그렇지만 시민들을 베어야 한다는 생각에 별로 기분은 좋 지 않은 걸. 그렇다고 해도 약해져서는 안되지. 나는 나미트 장군이 내 안으로 들어와 칼을 휘두르던 일을 떠올려 보았다. 그것은 정말 짜릿한 일이었다. 좀비들과 싸우는 일도 그렇고 나미트 장군이 내 안으로 들어오 는 일도 그랬다. 아마 그보다 더한 쾌감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 다. 그래. 그 뿐이야. 내가 잘하는 건 칼뿐이고, 칼이 나에게 즐거움을 준다면 내가 할 일은 그것뿐인 거지, 뭐.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데, 그레텔이 찬과 함께 벽에 그려진 벽화 앞에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제는 윤곽조차 희미한 그 옛날 종교화 앞에 말 이다. "저 아저씨... 아파해... 슬퍼하고 있어..." 그레텔은 이렇게 말하면서 벽화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었다. 저 벽 화 안에도 정령이 있다는 말인가? 나는 얼른 그레텔을 지나쳐서 식당 밖 으로 나갔다. 정령 둘도 골치 아픈데 하나라도 더 붙었다가는, 원... 밖으로 나가자 청강이 서서 뭔가를 씹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어이, 수르카. 많이 먹었어?" "그게 뭐에요?" 뭔데 저렇게 맛있게 씹고 있는 거지? "피리나무 가지야. 담배가 없으니까 이거라도 씹어야지" 청강이 말했다. 우보가 언젠가 담배를 피우게 되면 식사 후에 괴롭다더 니 정말 그런 모양이로군. 나는 피리 나무가지를 씹고있는 청강을 보면서 생각했다. 도대체 뭐가 좋아서 담배를 피우는지 통 모르겠단 말이야. 그 지독한 냄새하며 연기! 도대체 뭐가 그렇게 좋은 걸까? "안에서 그레텔 봤어?" 청강이 물었다.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레텔은 당분간 식당에서 데리고 있을 모양이더라. 우리하고 같이 천 막에서 잘 수는 없잖아? 아무리 어려도 여자는 여자니 말이야..." 청강은 이렇게 말하면서 웃음을 지었다. 나도 따라서 웃기는 했지만, 아니 청강. 농담이라도 그렇지 어떻게 그렇게 험악한 농담을! "국왕의 특사가 왔어. 성황청의 기사들도... 이제 곧 전투가 시작 될 거야. 각오 단단히 해둬" 청강이 말했다. 나는 어둠 저편에서 피어오르고 있는 임시 지휘소의 불 빛을 바라보았다. 지휘소 안에는 지금 국왕의 특사와 성황청의 기사단이 회의를 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성황청의 기사들은 여전히 뮤 옆에서 부동 자세를 하고 있군. 무거운 갑옷까지 입고서 말이야. 힘들겠는데. "국왕의 특사는 여기에 왜 온 거죠?" 사실 나는 이게 궁금했다. 도대체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온 걸까? "글쎄. 보니까 세 명이나 왔던데. 하나는 타실 출신인 것 같고, 다른 하나는 스파일 출신, 또 하나는 자나크 출신이었어. 아마 이곳 하잔의 일 처리에서 주도권을 잡으려는 걸 거야. 정치라는 게 그렇지. 이곳 하잔이 이젠 경제적으로는 별 가치가 없지만, 만약 스파일과 타실이 또 한 판 붙 게 된다면 꽤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가 될 수 있으니까. 아마 탐그루 다음 으로 중요한 곳이 될지도 모르지... 그러니까 혹시라도 이곳의 주도권을 빼앗길까봐 각 주에서 한 명씩 온 거겠지" 그런 거였구나. 역시 정치는 복잡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 나는 그냥 칼이나 휘두르는 게 맞는 것 같군. 그것 말고는 도무지 자신 있는 게 없 어. 정령들 다루는 일도 이제 자신을 잃어간다. 하나 같이 다들 왜 그렇 게 억센지. 어유! 골치 아퍼. "그런데 수르카, 너 탐그루 출신 맞지?" "예. 그런데요?" "자나크 출신 특사가 탐그루 출신이라는 것 같던데. 혹시 아는 사람일 지도 모르겠네. 나이도 수르카와 비슷한 거 같던데" "누구라는 데요? 이름이 뭐에요?" "그거야 모르지. 그냥 생각이 나서 물어본 거야" 청강은 이렇게 대충 말하고는 혼잣말처럼 "그나저나 성황청에서 온 기사단, 좀 마음에 걸려" 나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청강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말로 하지 않아도 이렇게 하면 사람들은 계속 이야기를 이어나가기 하기 마련이다) "우리하고 같이 가게 될 모양이야. 하잔에 좀비의 본거지가 있다나, 뭐 어쨌다나" 음. 그래서 아까 낮에 성황청의 기사들이 모여서 산밑으로 내려가던 거 였군. 하지만 어째서 하잔이 좀비들의 본거지라고 생각하게 된 걸까? 내무반에서 저녁식사 후의 자유시간을 오래간만에 좀 즐기고 있는데 차 이린이 들어왔다. "자. 이렇게 해서 내일 아침부터 용의 눈 십부는 다시 정상적으로 움직 이게 되었다. 그러니 별 걱정하지 말고 이제 곧 있을 전투나 준비해 둬. 국왕의 특사까지 왔다니까 이제 곧 작전이 시작될 거야" 식사 후엔 언제나 차이린의 전달사항이 있다. 사실 들어야 할 얘기들이 고, 또 듣는 게 그렇게 힘든 일도 아니지만 꼭 자유시간을 뺏기는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별다른 일 있으면 내가 와서 다시 얘기할 테니까 쉬고들 있어. 작전 중이라는 거 명심하고 긴장들은 늦추지 말고. 하지만 특별한 일이 벌어지 지 않는 이상 오늘내일 중에는 출동이 없을 거야. 내일도 별 일이 없으면 훈련이나 좀 하지. 괜찮지?" 여기저기서 한숨 섞인 원망의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좋아할 줄 알았어. 역시 훈련이 최고지. 아, 그리고 다들 자 기의 근무 시간 꼭 확인하고" 차이린은 이렇게 말하면서 근무시간표를 두고 갔는데, 나는 야간에 청 강과 경계근무를 서게 되었다. 이거, 특수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사람한 테 너무 하는 거 아닌가. 오늘 하루 정도는 근무를 빼주면 얼마나 좋아. 그런데 취침 시간이 되기 전, 나는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밍밍의 빛의 단검 십부가 하잔에서 돌아왔다는 거였다. 물론 일찍 돌아왔다는 말은 일 이 금방 끝났다는 말일 수도 있지만...그게 아니었다. 살아 돌아온 것은 밍밍 십부장과 라이짐 뿐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천막에서 나와 밍밍의 십부가 있는 천막으로 뛰어갔다. 어두운 밤하늘이 유달리 낮게 내려앉아 있었다. 천막에는 두 사람이 누워 있었다. 순무와 타호루가 걱정스러운 눈빛으 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라이짐!" 나는 소리치며 두 사람이 있는 쪽으로 뛰어갔다. 라이짐은 살아있었 다... 얼굴에 피가 배어 나온 붕대를 감고 있었지만 말이다. "수르카..." 라이짐이 말했다. "별 상처는 아니야. 흉터는 남겠지만... 둘이 친구였던가?" 나는 타호루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라이짐 옆에 앉았다. "어떻게 된 거야, 라이짐" 내가 묻자 라이짐은 하잔에서 겪은 일을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하잔은 지금 반란군들로 가득 차 있어... 도시 전체가 다 반란군이 야... 개자식들... 조직도 잘 갖추어진 모양이야... 칼과 창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공격해왔어... 다 죽었지...나도 몇 죽였어... 십부 장님이 단검을 던졌어... 내가 살아남은 건 순전히 운이 좋아서... 십부 장님은 나를... 그러다가... 그러다가..." 라이짐은 두서없이 말했지만, 하잔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 지는 대충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나는 밍밍 십부장을 바라보았다 십부장은 의식이 없었다. 어디를 어떻게 다쳤는지 상반신은 완전히 붕대로 감겨있었다. 비 쩍 마르고 큰 밍밍 십부장의 얼굴은 원래 희기도 했지만 피를 많이 흘렸 기 때문인지 아주 창백해 보였다. "등에 화살을 맞았어..." 타호루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밍밍 옆에 치료석이 뒹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무리 치료석이라지만 상처가 너무 깊을 땐 별 소용이 없다. 나 는 어쩐지 비통한 기분이 들었다. "라이짐..." "겁먹지 마, 수르카" 겁이라고? 내가? 밍밍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정말 겁이 났다. 밍밍의 얼굴이 이무르 아주머니처럼 굳어가고 있었다. "겁먹지마... 나도 처음에는 무서웠어... 혹시 죽게 되지나 않을까, 아 니면 누군가를 죽이게 되지나 않을까... 하지만 일단 피를 보면 걱정은 그걸로 끝이야... 당장 칼을 휘두르지 않으면 죽는 상황에서 생각 같은 거 할 시간 없어..." 그의 말은 맞았다. 비록 좀비와 싸울 때에 느꼈던 감정에 불과하지만,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는 이 생각 저 생각 많이 들었지만, 막상 싸움이 시 작되자 내 몸은 마치 춤을 추는 것처럼 좀비들과 들개들에게 반응했었다. 그래. 그런 거다. 칼잡이는 칼을 잡으면 그만이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 그리고 죽지 말고" 라이짐이 말했다. "수르카. 이제 그만 하고 나가 있게. 라이짐도 이젠 좀 쉬어야지" 순무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하고는 밖으로 나왔다. 멀리 하잔이라 고 짐작되는 곳에 드문드문 불빛들이 보였다. 용의 십부가 있는 천막으로 돌아가던 중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등 위에서 들렸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N:김상현 #9866/10199 ━━━━━━━━━━━━━━━━━━━━━━━━━━━━━━━━━━━━━━━━ 제 목:[탐그루]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 71 관련자료:없음 24/24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1-14 00:30 조회:880 탐그루 # 마법은 마음이다 - 마음은 칼이다 # "재훈?" 연금술사의 빛이 있기는 했지만 아주 약하게 해놓았기 때문에 나는 이 렇게 재훈이 맞는지 다시 물어봤다. "그래. 수르카. 나야" 재훈이 천천히 내 쪽으로 다가서면서 말했다. 재훈은 꾀죄죄한 티는 많 이 벗었지만 여전히 검고 깡말라 있었다. 그런데 재훈의 표정이 이상했 다. "재훈. 오래간 만이야. 아케르 단장님 직속 십부원이 됐다며? 또 어떤 사람은 타호루의 제자가 됐다고도 하던데... 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 도 로 원래 십부로 돌아가게 되기라도 한 거야?" 나는 농담으로 이렇게 재훈에게 말했다. 라이짐이 살아있다는 걸 안 이 상 너무 의기소침해 있으면 별로 좋아 보이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그런 데 내 농담을 듣자 재훈의 얼굴이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처럼 변 했다. "왜, 왜 그래?" 나는 조금 당황하면서 재훈에게 물었다. 재훈은 갑자기 내 손을 잡았 다. "수르카... 미안해... 나 때문이야... 나 때문에 저렇게 된거야, 라이 짐은... 또 빛의 단검 십부도..." 재훈이 울음을 참으며 말했다. 나는 재훈의 얼굴을 그냥 멍하니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무슨 얘기야? 너도 라이짐하고 같이 나갔어?" 내가 재훈에게 물었다. 재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 잘못이야... 내가 타코들을 잘못 부리는 바람에... 타코들이 갑 자기 그렇게 날뛸 줄은 몰랐어... 그 사람들... 좀비인줄 알고... 라이짐 에게..." 재훈은 말을 더 잇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재훈의 말에서 대충의 내용 을 짐작할 수 있었다. 밍밍의 빛의 단검 십부는 재훈과 함께 하잔으로 잠입했다. (어쩌면 타 호루도 함께 있었을지 모르지만 내 생각에 타호루는 가지 않았을 것 같 다. 그렇게 위험한 임무에 타호루가 앞장서 갈리가 없다) 그리고 정보를 수집하던 중 재훈이 타코를 부른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 그런데 타 코들이 갑자기 날뛰기 시작한다. (타코들은 집을 빼앗기지만 않는다면 얌 전하다고 하던데) 그러자 반란군들이 일행을 덮친다. (그렇다면 재훈은 어떻게 상처하나 입지 않을 수 있었을까?) 의문점은 아주 조금(?) 남았지만 그래도 나는 재훈의 말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책하지 마. 그런다고 라이짐이 벌떡 일어나거나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오지는 않아" 내가 꽤나 어른인 것처럼 재훈에게 충고했다. 그러자 재훈은 고개를 가 로 저었다. "그런 게 아니야" 재훈은 이렇게 말하고는 중얼거리는 듯 말하기 시작했다. "...라이짐 한테 미안하다고 전해 줘, 진심으로 미안하다고...차마 직 접 말 못하겠어" 재훈은 이렇게 말하고는 그대로 돌아서서 사라져 버렸다. 이런. 그냥 가버리면 어떻해. 아직 무슨 일인지 다 듣지도 못했는데... 웬지 어둠 속 으로 사라져가는 재훈을 바라보고 있자니 앞으로 오랫동안 재훈을 못보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취침시간 바로 직전에 다시 차이린의 전달사항이 있었다. "내일 새벽에 출동한다" 차이린은 이렇게 출동 사실을 알린 뒤, 설명을 시작했다. "밍밍의 십부가 돌아온 건 다 알고 있지? 빛의 단검 십부는 하잔에서 반란군에게 당했어. 살아 돌아온 건 십부원 하나와 밍밍 뿐이야" 일부러 시간을 내어 말하지 않아도 십부원들은 그 정보를 이미 다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만 알고 있는 사실도 있었다. 왜 재훈이 함께 있었다 는 말은 하지 않는 걸까?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그냥 입다물고 있 기로 했다. 차이린의 말에 따르면 하잔 시는 전체적으로 원형에 가까우며, 그 중앙 에 십자형의 길이 나있다고 했다. (십자로의 교차지점이 바로 중앙광장이 라고 한다) 중앙에서 네 갈래로 나뉘는 길은 각각 북로, 동로, 서로, 남 로라고 부르는데, 네 개의 길로 나뉜 부분들은 각각 북동쪽에 자치대구 역, 북서쪽에 시청 구역, 남동쪽에 주거구역, 남서쪽에 상업구역으로 부 른다고 했다. (하잔에서 정말 그렇게 부르고 있는지 아니면 대충 그렇게 부르기로 한 건지는 잘 모르겠다). 반란군들은 시 전역을 장악하고 있었 고, 지휘소는 자치대건물 아니면 시청건물에 있을 거라고 했다. "이 정보는 오늘 돌아온 밍밍의 십부가 알아낸 거야. 이 정보가 그리 정확하다고 만은 볼 수 없지만... 너무 피해가 컸어..." 차이린이 말끝을 흐리며 말했다. 그러나 곧 평정을 찾아 내일 있을 작 전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반란군들이 일단 하잔시 여기저기예 흩어져 있다는 정보가 사실이라면, 우리 용병단은 산개공격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작전 지휘를 맡고 있는 지다문의 생각이라고 했다. 그래서 일단 하잔 입구(서로의 입구)에 도착 하면 바로 하나의 커다란 진을 짠 뒤, 곧바로 하잔 시청으로 진격할 계획 이라고 한다. 물론 반란군들도 보초가 있을 것이고 나름대로 철저히 준비 를 하고 있겠지만 새벽에 바로 공격해 들어간다면 습격 당했다는 걸 알아 낸 뒤라고 해도 별 소용이 없을 거라는 게 차이린의 설명이었다. "그리고 자치대 건물 쪽은 성황청에서 맡아서 도와주기로 했어. 어떻게 된 일인지는 묻지 말아줘. 성황청에서 찾아와서 돕겠다고 한 거니까" 차이린이 말했다. 성황청에서? 그러자 나는 성황청이 끼어든 일과 재훈 의 말이 연결 되는 일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재훈은 좀비의 습격인 것 처럼 보이기 위한 공작을 위해 하잔에 들어간 거였다. 그렇다면 타호루하 고 함께였을 지도 모른다. 그렇게 해서 성황청을 끌어들일 계획이었던 거 다. 그렇다면 누가 그 일을 계획했을까. 순무가? 아니면 타호루가? 꼭 그렇 다고만 볼 수는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다른 목적이 있어서 재훈이 거기에 갔던 것은 아닐까? 혹시 우연이었다던가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하자 수 많은 가능성들이 머리에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 고, 나는 머리에 쥐가 나기 시작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나저나 내 생 각이 옳다면 재훈이 타코 때를 조종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이 됐단 말인 가? 타호루가 가르쳐줬을 수도 있지. 아니면 재훈의 능력이 원래 그렇게 뛰어났는지도 모르고. "되도록이면 빠르게 공격하는 게 이번 작전의 핵심이야" 차이린은 이렇게 강조했다. "만약에 반란군들이 알아차리고 먼저 공격해온다면 내 뒤만 따르면 돼. 지다문 십부장님하고 어떻게 대응할지는 다 정해 놓았으니까 말이야. 청 강. 체리. 무슨 뜻인지 알지?" 이제 그야말로 실전이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아무도 내색은 하고 있지 않지만 모두 다 긴장하고 있을 거였다... 라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레드 도, 블루도, 청강도, 체리도 심지어는 나와 신병 동기생인 찬까지도 전혀 두려워하는 것 같지 않았다. 표정으로 겁먹었다는 게 드러나고 있는 건 우보 하나 뿐이었다. (아니, 사실은 나까지 포함해 둘) 만약 누군가의 지 시에 따라 재훈이 하잔에 간 게 사실이라면, 그리고 지금 우리가 움직이 고 있는 것도 모두 그 사람의 머리에서 나오는 생각이라면, 어쩌면 우리 는 너무나 위험한 길을 가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들이 자꾸 머리에 떠올라, 나는 잠도 자는 둥 마는 둥 했다. 나는 도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걸까? 내일 과연 제대로 싸울 수 있을 까? 그래도 나는 믿을 수 있는 정령을 둘이나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조금 위안이 되어주었다. (사실 말하는 꼴로 봐서는 아자닌도 나미트도 별로 든든한 건 아니지만) 거의 잠도 자지 못하고 나는 야간 근무를 나가게 되었고, 근무를 서면 서 나는 칼자루를 자꾸 쥐어보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칼자루가 쥐면 쥘 수록 내 손에 꼭 달라붙는 느낌이 들었다. 마법과 칼...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사비오 영감은 나에게 아자닌과 나 미트 장군을 함께 주고 떠난 걸까. 사비오 영감은 타호루도 잘 아는 훌륭 한 예언자라던데 말이야. 분명 무슨 꿍꿍이가 있어서 나한테 주었을 텐 데... 사비오 영감은 칼은 일단 대장간에서 태어나면 무언가를 베기 위해 존재 하기 마련이고, 누군가의 죽음은 누군가의 피를 부르게 되고, 그 피는 또다 시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을 죽이기 마련이라고 말했다. 역사가 그걸 말해주 지 않느냐고 하면서 말이다. 그런 사비오 영감이 나에게 칼을 맡긴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도 삼년전쟁 때 이름을 날렸다는 나미트 장군의 정령 이 담겨있는 칼을 말이다. "걱정하지 마. 나, 아루마의 죽음의 신 십부에 있는 동기녀석한테 들은 얘긴데, 타노 마을 반란군 작전은 아주 간단했다고 하더라. 거의 다 훈련 도 받지 않은 녀석들인데다가 조직력도 형편없어서 우리하고는 상대가 안 됐다고 그러더라. 여기도 마찬가지일거야. 그러니까 걱정 말라고" 그러고보니 같이 근무를 서고 있던 청강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는 마을이 아니라 도시다. 거기다가 밍밍의 빛의 단검 십부는 전멸당 했고. 나는 이런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겁먹은 놈 취급받게 될까 봐 억지로 참았다. 근무를 마치고 나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아자닌을 불러 볼까하는 생각 이 들었다. 그래도 뭔가 얘기를 하면 좀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 다. 그래서 나는 불침번을 서고 있던 기밀에게는 오줌 좀 누고 온다고 말 하고는 밖으로 나가 아자닌을 불렀다. (사람들이 보지 못하도록 빈 마차 안에서 말이다) "내* 마음의* 문을* 여니* 길을* 인도해* 다오*" 내가 마법의 말을 외우자 아자닌이 나타났다. 하지만 늘 하던 인사대신 아자닌은 고개만 숙이고 가만히 있었다. 어라? 이건 또 왜 이러는 걸까? "아자닌. 나미트 장군 때문에 화났어?" 나는 일부러 웃음까지 지어 보이면서 아자닌에게 이렇게 물었다. "아닙니다, 수르카 님" 그러고 보니 화난 얼굴이 아니었다. 어쩐지 좀 슬퍼 보이는 얼굴이었 다. 아자닌이 감정을 드러내는 걸 본 적이 몇 번 없는 나인지라, 나는 그 런 아자닌이 신기했다. "왜 그러세요?" "아니. 좀 슬퍼 보여서" 그러자 아자닌은 무슨 이유에선인지 얼굴까지 붉히며 말하기 시작했다. "사실, 저, 나미트 장군에 대해서 알고 있었어요" "뭐?" 나는 놀람 반, 분노 반으로 이렇게 반문했다. "아니, 알고 있었으면서도 지금까지 한 마디로 안 했단 말이야?" "...예" 아자닌은 고개를 조금 떨구고는 입을 열었다. "...수르카 님이 마법에 대해서 잘 알게 될 때까지 선택할 시간을 드리 고 싶었어요. 그리고 수르카 님이 들으신 마법의 말들도... 저... 다 아 는 말들이었어요... 잠깐만요. 제 얘기를 먼저 다 듣고 말씀하세요. 언젠 가 꼭 말씀드리려고 했어요... 정말이에요... " 아자닌이 말을 다 끝마치기도 전에 나는 아자닌의 말을 잘랐다. "그런데 선택할 시간이라는 게 무슨 말이야?" "사비오 님께서는 수르카 님이 자신의 의지로 칼과 마법 중 하나를 선 택하시기를 바라셨습니다. 물론 수르카 님이 칼을 좋아하고 알고 계셨지 만요... 그런데 저는 수르카 님의 마법이 타고난 재능에서 나오는 거라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작동하지 않았던 마법, 혹은 부작용을 일으켰던 마 법들은 모두 수르카님이 그 마법을 말할 때 마음에 문제가 있었을 뿐, 그 것을 듣고 생각하고 이해하고 말하는 과정 자체는 정말 타고났다고 밖에 말할 수 없는 면이 있었습니다. 라스폼과 싸웠을 때 구름을 불러오신 일 기억하시나요?" 아자닌은 내 말에 대답할 생각은 안하고 이렇게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그래. 기억해. 하지만 그게 선택이랑 무슨 상관이야?" 나는 다시 이렇게 아자닌에게 다그치면서 물었다. "구름을 불러오는 일같이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일은 대마법사들만 할 수 있는 마법입니다. 그런 마법을 자신이 이해한 마법의 말에서 마음 을 바꾸는 것만으로 성공시킨 수르카님의 능력은 대마법사가 될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수르카 님에게 칼의 정령에 대 한 말씀을 드리지 않았던 겁니다. 만약 제가 칼의 정령에 대해 말씀드렸 다면 수르카 님은 마법 따위는 잊어버리셨을 게 분명합니다. 그래서 전..." "알았어" 나는 아자닌의 말을 또 한 번 잘랐다. 하지만 아자닌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수르카 님이 마법을 쓰실 수 있어야 저도 마법을 쓸 수 있다는 말은 사실이에요... 전 주인이 남긴 마법 중 제가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은 꼭 한가지 뿐이거든요. '인간은* 자신이* 본* 모든* 것을* 기억하나니*' 이거 하나 뿐이에요" 이거, 배신감 느껴지는 군. 어쩐지 아자닌이 지금까지 날 속여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생각해보면 속인 것도 아닌데 말이다. "알았어. 하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해" 나는 이렇게 말하고는 내 생각을 죽 얘기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굳이 마법이다 칼이다 선택이니 뭐니 그런 말을 하려고 한 것은 아니다. 사실 내가 칼을 좋아해서 칼을 쓰는 용병이 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법이 나를 구해준 적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그냥 평소의 내 생각을 아자닌에게 말해주었다. "나는 칼쓰기가 좋을 땐 칼쓰기를 하고, 마법을 쓰고 싶을 때는 마법을 하는 거 뿐이야. 선택이다 뭐다 하지마. 그리고..." 나는 아자닌에게 뭐라고 따끔하게 말해주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지만 그 냥 참기로 했다. "앞으로는 속이지 않을 거지?" 나는 아자닌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것으로 족했다. 지금 문제는 내일 있을 전투였다. 나는 천막으로 돌아왔다. 붉은 취침등 아래 죽은 듯 잠들어 있는 용병 들의 모습이 보였다. 탐그루에 있었을 때, 언젠가 술집에서 군인들이 떠 드는 걸들은 기억이 있다. 군인은 매일 죽는 거라고. 그리고 군인은 늘 수의를 입고 사는 직업이라고. 비록 용병이지만 우리도 군인임에는 틀림 이 없다. (진짜 군대와 우리 용병단은 많이 다르겠지만 말이다) 지금 잠 든 얼굴들 중 몇은 아마 내 기억 속에 영원히 잠든 얼굴로 남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 수르카. 아, 안자?" 불침번을 서고 있던 기밀이 말했다. 나는 그냥 고개를 가로 저은 뒤 자 리에 누웠다. 어쩐지 잠이 잘 오지 않을 것 같았다. "그, 그런데, 밍밍 십부장, 조금 전에 죽었다며?" 기밀이 말했다. 나는 그냥 핏 웃고 말았다. 소문을 다 믿다니. 도끼는 잘 휘두르는지 몰라도 내가 보기엔 너무 순진한 게 탈이야. 기밀. 그러나 새벽이 오고, 출동 신호와 함께 임시 주둔지 앞 막사 앞에 정렬 했을 때, 나는 기밀이 들은 소문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먼저 방패를 나누어준다. 돌격 시 사용하도록. 시청에 도착하면, 방패 는 버리고 그대로 시청 안으로 돌진한다. 일곱 개의 십부의 임무는 다음 과 같다..." 지다문 십부장이 정렬한 앞에서 작전 개요를 설명했다. 용병단에 긴장 감이 감돌고 있었다. 평소의 떠들어대던 용병단 같지 않다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일곱 개 십부라고? 그럼 부상당한 몸으로 라이짐과 밍밍 단 둘이 출전한단 말인가? "하늘의 끝 십부와 패거리 십부는 시청 계단을 올라가고, 피바람와 웃 는 얼굴 십부는 일 층과 현관을 맡는다. 그리고 용의 눈 십부는 지하를, 그리고 죽음의 신 십부와 빛의 단검 십부는 시청 외곽을 맡는다" 지다문이 말했다. "그리고 라이짐 단원을 빛의 단검 십부의 임시 십부장으로 임명한다. 이 임명은 작전이 끝날 때까지 유효하다" 지다문의 말이 끝났다. 기밀이 들은 소문은 사실이었다. 밍밍이 죽은 것이다. 그리고 단 한사람이라도 남아있으면 십부로 인정하는 아케르 용 병단의 관례에 따라 라이짐은 임시 십부장이 된 게 분명했다. "그럼 야전 장례식을 시작하겠다. 일동 차렷!" 지다문이 말하자 병사들 사이에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이어서 십 부장들과 라이짐이 밍밍의 관을 들고 나왔다. 모두들 침통한 표정이었다. "전우를 보내는 마음으로 묵상" 지다문이 말했고, 우리는 비스토브레 왕국의 사람들이 누구나 그렇게 하듯이 죽은 자에게 고개를 숙였다. 이어서 순무가 검은 색 돌을 꺼냈다. 언젠가 차이린이 말했던 장례식 때 쓴다는 불 만드는 검은 돌인 모양이었 다. 라이짐이 그 돌의 위에 튀어나온 부분을 누른 뒤 관 위에 떨어뜨렸다. 그러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맹렬한 불길이 솟아올랐다. 연금술사의 붉은 등은 사람에게 기운을 북돋거나 흥분하게 만들고 푸른 등은 사람을 냉정 하게 만들고 노란 등은 사람을 편안하게 만들고 초록등은 사람을 잠들게 만든다는 건 들은 적이 있지만, 연금술사가 이런 불길을 만드는 기술도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순식간에 관은 다 타서 사라졌고 그 자리에는 이 내 검은 잿더미만이 남았다. 저 검은 돌을 만들던 순무의 마음은 어땠을 까 궁금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N:김상현 #9867/10199 ━━━━━━━━━━━━━━━━━━━━━━━━━━━━━━━━━━━━━━━━ 제 목:[탐그루] 하잔 대학살 72 관련자료:없음 23/23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1-14 00:30 조회:933 탐그루 # 마법은 마음이다 - 마음은 칼이다 # * 하잔 대학살 라이짐과 십부장들은 그 잿더미를 준비해 온 상자에 담았다. "장례를 마친다. 이상이다. 출동 전까지 모든 준비를 완료하도록" 지다문 십부장이 말하자 십부장들은 부하들을 불러 무기류와 기타 장구 류들을 손보게 했다. 저것이 용병의 최후로구나. 나는 처음 보는 장례 모 습에 겁부터 더럭 났다. 다른 십부원들 표정에서는 분노의 빛을 볼 수 있 었지만 말이다. (특히 라이짐의 표정이 그랬다) 나는 고개를 돌려 다른 곳을 살펴보았다. 찬이 보였다. 찬은 그레텔을 부대에 남겨두고 갈 모양 이었다. (하잔에 데려다 준다고 약속은 했지만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지 금은 어렵겠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찬은 순무에게 그레텔에 대해 보고하 고 있었다. 순무는 얘기를 듣더니 고개를 끄덕였고, 찬은 다시 십부 대열 에 합류했다. 차이린은 먼저 청강과 채리를 시켜서 방패를 나누어주었다. 훈련병 시 절에 받았던 훈련이 떠올라 기분이 새로웠다. 방패는 사실 화살을 막아주 는 것 말고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방패를 들고 싸우는 검사를 본 적 이 있는가? 아마 아무도 본 적이 없을 것이다. 칼로 공격과 방어를 완벽 하게 할 수 없다면 그 사람은 이미 검사가 아닌 것이다. 하지만 밍밍이 화살에 죽었다는 것을 안 이상, 맨몸으로 하잔에 들어간다면 그것 또한 우스운 일일 거다. 나는 나무로 만들어진 두꺼운 방패를 왼 팔뚝에 끈으 로 고정시켰다. 아마 이 무거운 나무토막이 내 몸에 화살이 박히는 걸 한 두 번은 막아겠지. "그럼 부대 출발!" 지다문 십부장이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용병들도 따라서 외 치기 시작했다(나도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다. 그래야 좀 기운이 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첫 실전이다. 어디선가 흘러온 구름 때문에 하늘은 온통 검푸른 빛이었다. 행군이 시작되었다. 지다문 십부장도 걸어서 작전에 참가했다. 그러니 까 뮤나 마차는 한 대도 동원되지 않은 것이다. 지다문 십부장은 이번 작 전을 반란군이 모여있는 시청 안에서 끝내버릴 작정인 모양이었다. 행군하는 동안, 우리는 성황청의 기사들과 마주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하잔의 서로로 진입해 들어가기로 했고 성황청의 리바르도 기사단은 동로로 진입해 들어가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긴장감에 팔 뚝에 매어놓은 방패 끈을 몇 번이고 다시 고쳐 매었다. "이봐, 긴장 되?" 청강이 말했다. 나는 아니라고 말했다. "말했잖아. 간단한 일이야. 도착하면 뛰어서 시청까지 가고, 그 다음에 하늘의 끝 십부하고 패거리 십부가 현관에 있는 녀석들을 해치우면 그대 로 지하로 뛰어 들어가면 되. 그 다음엔 차이린 십부장님에게 맡기라구. 그러면 어느 새 우리는 아케르 용병단가를 부르면서 주둔지로 돌아갈 수 있을 거야" 청강은 웃으면서 여유 있게 말했다. 하잔 서로의 입구에 도착하자 부대는 전열을 정비했다. 사실 정비고 뭐 고 할 것도 없었지만, 동로에서 공격해 들어갈 성황청의 기사들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시간을 끄는 일에 지나지 않았다. 지다문 십부장이 타들어가 고 있는 피리 나무 가지를 보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저걸로 시간을 맞추고 있는 모양이었다. (담배 대신 씹고있지 않는 걸로 봐서 말이다) 나는 하잔시를 바라보았다. 가까운 곳에서 바라본 하잔시는 야트막한 건물과 붉은 나무집으로 가득했다. 높지 않은 건물들이 올망졸망 모여있 는 모습이 새벽의 어스름을 받아 탁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서로에 나 있 는 입구 말고는 모두 통나무를 깎아서 만든 외벽이 자리하고 있었다. 아 케르 용병단 만큼은 되지 않지만, 저 정도 외벽을 만들려면 조직적인 지 시가 없이는 불가능 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잔, 여기는 확실히 타노 마을하고는 다른 모양이야. 나는 칼자루를 꼭 쥐었다. 아무 마법의 말도 하지 않았지만 칼자루가 얼마나 손에 잘 맞는지 꼭 내 손안으로 당장이라도 빨려 들어갈 듯한 느 낌을 주었다. 나는 부대가 두 줄로 정렬하는 동안 라이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라이 짐은 신다루의 패거리 십부원들과 함께 있었다. 아무리 임시 십부장이라 고 해도 이름뿐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신다루 십부장 바로 옆에 서 있는 라이짐의 모습은 어쩐지 평소보다 더 키가 커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 다루 십부장이 좀 나이가 들어 보이는 편이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어 쩌면 라이짐이 머리에 두르고 있는 붕대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돌격!" 이윽고 지다문 십부장이 소리쳤고 우리들은 줄을 맞추어 서로로 돌진해 들어갔다. 서로의 입구는 어디서 구해왔는지 통나무들로 막혀있었고, 문 양 옆으 로는 높다란 망루가 두 개 서 있었다. 입구에는 두 사람의 경비가 서 있 었다. "망루!" 지다문 십부장이 소리치자 차이린과 아루마가 각각 망루에 화살을 하나 씩 날렸다. 나는 망루에 누가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지만 차이린과 아루 마의 눈에는 분명히 보인 모양이었다. 각각의 망루에서 한 명씩이 쓰러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바닥에 떨어지는 사람의 소리는 꼭 속이 빈 통나무가 바닥에 떨어져 깨지는 소리 같았다. 그와 거의 동시에 앞을 막아선 두 명의 경비를 지다문의 부하들이 각각 한 칼에 해치우는 모습이 보였다. 두 경비들은 둘 다 목이 떨어져 나갔 다. 하나는 그냥 힘없이 쓰러졌지만 나머지 하나는 목이 없어진 게 도저 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팔을 휘저으며 뒤로 몇 걸음 물러선 다음에 쓰러 졌다. 핏물도 몇 걸음 움직인 쪽에서 더 많이 뿜어져 나왔다. 피. 피를 보자 나는 다시 흥분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미트가 나에게 속삭이 고 있는 듯 했다. 날 불러... 날 불러... 누군지 말만해... 무엇이든 한 칼이면 끝나... 나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고 앞으로 뛰어가는 동료들을 따랐다. 통나무 로 막아놓기는 했지만 어차피 그저 형식에 불과할 뿐이었다. 우리는 쉽게 통나무 장벽을 통과했다. "그대로 전진! 아루마! 차이린! 좌측! 가투신! 마초! 우측! 신다루! 라 이짐! 후방!" 통나무를 먼저 넘어간 지다문 십부장은 잠시 돌아서서 이렇게 지시했 다. 그러자 대형은 앞에 셋, 뒤에 셋의 형태가 되었다. (이제까지 두 줄 로 죽 늘어져서 행군해온 형태와는 많이 틀렸다) 차이린은 신속하게 우리 십부를 좌측 뒷줄로 이동시킨 뒤 정렬시켰다. 익숙하다는 느낌도 있었지 만 노련하다는 느낌이 더 강한 움직임이었다. 그러고 보니 다른 십부들도 마찬가지였다. 양 한 마리가 이끄는 사자 열 마리 보다 사자 한 마리가 이끄는 양 열 마리가 더 강하다는 말이 떠올랐다. 어차피 병사들은 다 마 찬가지다. 정말로 특별한 능력이 있다면 아케르의 직속 십부나 타호루의 제자가 되기 마련이고 나머지는 다 그게 그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케 르 용병단원들의 명성이 높은 이유는 바로 이 십부장들 때문이라는 생각 이 들었다. 생각은 그렇게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부대가 서로를 따라 바삐 이동하 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숨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힘들어서 차 오르는 숨이 아니었다. 긴장과 흥분, 공포와 쾌감이 동시에 몸을 교차하 는 것이 느껴졌다. 길 양옆으로 야트막한 집들이 보였다. 언제 지었는지 당장 무너진다고 해도 별로 이상할 것이 없는 집들이었다. 그래도 한때는 상업의 중심지였다는데, 어떻게 저렇게 낡은 집들이 남아있는지 의문이 생겼다. 간혹 창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우리를 바라보는 모습이 눈에 들 어왔다. 그런 얼굴들은 하나같이 아주 늙거나 아니면 아주 어린 얼굴이었 다. 시청은 어디에 있을까? 나는 길을 따라서 뛰면서 이런 생각을 해 보았 다. 내가 보기엔 다 그 건물이 다 그 건물 같은데 지다문 십부장은 어떻 게 앞장서서 길을 찾아가고 있는 걸까. 그때였다. 앞에서 한 무리의 사람 들이 나타났다. 모두가 하나같이 여자, 아니면 어린아이들이었다. 간혹 나이든 노인들도 눈에 띄었지만 젊은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멈춰서시오!" 노인 하나가 앞으로 나와서 말했다. 그러자 지다문 십부장이 멈추어 섰 고 부대도 따라 멈추어 설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무장을 하지 않고 있었 다. 그렇다면 반란군은 아닐텐데. "우리는 국왕의 칙명을 받은 부대요. 당장 길을 비키지 않으면 뚫고 지 나가겠소" 지다문 십부장이 말했다. 우렁찬 목소리가 새벽의 하잔시를 울렸다. "당신들은 모르오. 이곳에서 성황청 기사단이 무슨 짓을 했는지" 노인이 말했다. 노인의 목소리는 지다문 십부장보다 작기는 했지만 강 하고 힘이 들어가 있었다. "당신들은 모르오. 성황청 기사단은 여기서 좀비를 수색한다는 구실로 우리들의 먹을 것을 빼앗고 잠자리를 빼앗았소. 흉년에다 좀비에다, 당장 먹을 것도 부족한데 말이오. 그리고 그걸 항의하는 사람들을 성구로 태웠 고, 살아남은 자들은 그대로 자치대 지하감옥에 가두었소. 그리고 눈에 거슬리는 사람들은 모조리 죽였소. 아이들도, 여자도 가리지 않고 말이 오. 이 마을의 제사장도 성황청의 뜻을 어기고 있다며 성구로 태워버렸 소. 그런데 그 횡포를 보고만 있으란 말이오?" 노인이 말했다. 나는 그레텔이 떠올랐다. 더러운 꼴로 팜 산맥을 헤매 고 다녔던 그레텔의 모습과 그 겁에 질린 얼굴. "노인장. 그건 우리가 알 바가 아니오. 우리는 반란군을 토벌하라는 임 무를 받고 온 부대에 불과하오. 그런 말을 성황청 기사단에게 가서 하건, 국왕에게 가서 하건, 내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우리에게는 아무 소용없는 말이오" 지다문이 말했다. 조금도 수그러짐이 없는 기색이었다. "우리는 그때 결심했소. 이대로 죽느니 싸우다 죽겠다고! 젊은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무기를 쥐고 싸우기로 했소. 성년도 되지 않은 아이들이 부모의 원수를 갚겠다면 칼을 달라고 했소. 그리고 지금도 그들의 결심에 는 변함이 없소" "싸우다 죽고 싶으면 마음대로 하시오. 하지만 노인장이 내 칼에 죽지 는 않았으면 좋겠소. 당장 길을 비키시오!" 지다문이 소리쳤다. 지다문 십부장의 목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내 간이 다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 하지만 노인은 표정하나 변하지 않은 채 지다 문 십부장을 노려보았다. 지다문 십부장은 노인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그러더니 뒤로 돌아서 명령을 내렸다. "돌파한다!" 한마디였다. 지다문 십부장은 이렇게 말하고는 노인을 밀쳐내었다. 노 인은 힘없이 뒤로 밀려나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지다문 십부장은 그 행동 하나로 이렇게 명령한 셈이 되었다. 뚫고 지나간다. 하지만 죽이 지는 마라. 부대가 전진하자 사람들이 막아서려고 했다. 하지만 누군가가 주먹을 내지르고 발길질을 하자 막아선 사람들이 조금씩 흐트러지기 시작 했다. 나는 뒷줄에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을 때리고 밀치는 일이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막아선 사람들이 조금씩 흐트러지고 부대가 앞으로 나아가기 시 작하자 내 왼편으로 여자와 어린아이들이 나에게 욕설을 해대기 시작했 다. "도대체 우리하고 무슨 원수를 졌다고 이러는 거야!" "당장 하잔에서 나가! 너희도 성황청하고 다를 게 하나도 없어!" "더러운 귀족들의 개 같으니라고. 내 손에 칼만 있었다면 너희들 눈깔 을 다 후벼팠을 텐데" "분명히 경고했다. 후회하지마, 이 개자식들아!" 그제야 나는 내가 정말 작전에 참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가 나에게 주먹질을 했다. 나는 방패로 사람들을 밀쳐내며 앞으로 전진했 다. 어디선가 돌이 날아왔다. 또 어디선가는 발길질이 날아와 내 무릎 밑 을 걷어찼다. 나는 점점 내가 흥분되고 있음을 느꼈다. 단원 중 누군가가 시민 하나의 배를 걷어찼다. 그러자 누군가의 욕설이 날아왔고, 그 욕설 은 이내 비명소리로 바뀌었다. 또 다른 단원이 칼을 휘두른 것이었다. 피 가 튀어 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누군가가 또 칼을 휘두르기 시작하자 여 기저기서 칼을 뽑아들었다. "중지해!" 지다문 십부장이 소리쳤지만 상황은 이미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 러 있었다. 단원들은 모두 이미 흥분해 있었다. 하지만 지다문 십부장은 적극적으로 단원들을 말렸고, 잠시 후 살인은 중지되었다. 지다문 십부장 의 얼굴에 낭패의 빛이 떠올랐다. 나는 쓰러져 있는 사람의 얼굴을 보았다. 가슴에 깊숙이 칼을 맞고 쓰 러져 있는 사람은 여자였다. 그 여자는 입을 벌리고 쓰러져 있었다. 나는 탐그루를 떠나던 날 보았던 이무르 아주머니를 떠올랐다. 분명 뭔가 잘못 되어 가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게 아니었다. 우리는 반란군을 치러 가는 길이다. 시민들을 죽이려고 온 것이 아니다. 하지만 눈앞에 여 자의 시체가 놓여있었고 이 살인 덕분에 우리는 사람들을 뚫고 지나갈 수 있었다. 시민이 죽었다. 무장도 하고 있지 않은 여자가 말이다. 사람들은 흩어 졌지만 드문드문 떨어져 우리에게 적의에 찬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누군 가가 돌을 던지고는 도망쳤다. 시민들의 대열을 뚫고 지나가느라 대열은 많이 흐트러져 있었다. 하지만 지다문 십부장과 다른 십부장들의 통솔 덕 분에 대열은 다시 정상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때, 앞에서 마차 한 대가 나타나 길을 막아섰다. 그리고 다음 순간, 마차의 덮개가 내려가더니 열 명 남짓한 활을 든 사람들이 나타났다. 이 번에는 진짜다. 활을 들었으니 반란군이 분명해.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반란군은 두 줄로 서 있었는데, 앞줄은 서 있었고 뒷줄은 앉아 있었다. 다음 순간 앞줄이 화살을 쏘고 앉았고 뒤이어 뒷줄이 일어서며 화살을 쏘 았다. 그래봐야 열 개 남짓한 화살이었다. 꽤 정확하게 날아오기는 했지 만 반수가 땅에 박혔고 반수도 방패에 가서 박혔다. 뒤에서 함성이 들려온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긴 창을 들고 있는 반란군들이 우리의 등뒤에서 뛰어오고 있 는 모습이 보였다. 순간 대열이 흐트러졌다. "동요하지마라! 그대로 전진한다!" 지다문 십부장이 말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앞으로 뛰어가기 시작했 다. 비록 열 대의 화살이었지만 계속 날아오는 화살에 누군가가 다리를 맞고 쓰러졌다. 그러고 보니 반란군들을 처음부터 다리를 노리고 쏜 모양 이었다. "쳐!" 지다문 십부장은 이렇게 외치면서 마차에 뛰어올랐고, 마차위에 있던 사람들은 활을 버리고 무기를 칼로 바꾸었다. 하지만 그들은 지다문 십부 장의 상대가 아니었다. 아무리 날고 뛰는 반란군이라고 해도 오랫동안 사 람을 죽여온 전문가와 상대할 수는 없는 법이다. 지다문 십부장은 칼을 휘두르며 그대로 사람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순식간에 누군가의 목과, 팔 과 다리가 끊어져 핏물과 함께 튀어 올랐다. 그 열 명은 나중에 마차에 오른 단윈들이 제대로 칼 한 번 휘둘러보기도 전에 모조리 쓰러져 버렸 다. 문제는 등뒤에서 달려드는 반란군들이었다. 나는 지다문의 표정을 보았 다. 지다문은 고민하고 있었다.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 순식간에 정해 야만 하는 것이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지다문은 무엇이 먼저 해야 할 일인지 결정했다. "그대로 전진한다! 뒤는 신경쓰지 마!" 지다문이 말했고 부대는 그대로 마차를 넘어 뛰어가기 시작했다. 마차 를 뛰어넘으면서 나는 잘린 목 하나를 보았다. 고통인지 분노인지 모를 표정으로 일그러진 얼굴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목 밑으로 흘러내린 핏 물이 두껍게 흐르고 있어서 마치 그 목은 핏물에 박힌 듯이 보이고 있었 다. 나는 순간 움찔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좀비들과의 싸움에서 익힌 그대로, 나는 조금씩 더 흥분해가기 시작했다.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를 불러... 나를 불러... 누구를 먼저 죽일까... 나는 이번에는 고개를 흔들지 않았다. 그저, 씨익 하고 한 번 웃었을 뿐이었다. 지다문의 판단은 옳았다. 앞에서도 창을 든 반란군들이 달려오고 있었 던 것이다. 만약 거기서 멈추어서서 배후의 적과 싸웠다면 아마 우리는 꼼짝없이 포위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대로 뚫고 지나간다!" 지다문이 소리쳤고 우리는 창을 들고 앞을 가로막고 있는 병사들에게 달려갔다. 나는 나도 모르게 함성을 내 질렀고, 그건 다른 병사들도 마찬 가지였다. 그리고 싸움이 벌어졌다. 아니, 말이 전투고 싸움이지 사실은 너무나도 일방적인 승부였다. 창을 들고 있는 반란군들은 한 번 제대로 손 한번 놀려보지 못하고 목이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기밀이 도끼를 휘 두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청강이 칼을 휘두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가투신이 칼을 휘두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들이 칼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신체의 일부가 잘려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목이 잘리거나 팔뚝이 떨어져나간 순간, 그들은 더 이상 반란군이 아니라 그저 한 명의 시민일 뿐이었다. "수르카!" 누군가가 위험을 알리려는 듯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나는 옆을 돌 아보았다. 내 나이 또래의 소년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소년의 눈에는 증오와 분노가 가득했다. 나는 방패을 고쳐 쥐고 한 손으로 칼을 들었다. 막기만 할 생각이었다. 죽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다음 순간 소년의 창이 내 가슴으로 날아들었다. 나는 방패로 그것을 비켜내었다. 창날은 그냥 단검이었다. 반란군들이 든 창은 긴 막대기에 끈으로 단검을 단단히 고정시킨 것에 불과했다. 창끝으로 눈이 간 순간 왼쪽 허벅다리에 불이 붙은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다른 누군가가 내 다 리를 찌른 것이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내 다리를 바라보았다. 내 다리에 서 핏물이 흐르기 시작하는 것이 보였다. 다시 한 번 창이 내 목을 노리 고 날아들었다. 나는 또 방패로 창을 비켜내기만 했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야... 수르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는 나에게 너무나 도 강한 유혹이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N:김상현 #9928/10199 ━━━━━━━━━━━━━━━━━━━━━━━━━━━━━━━━━━━━━━━━ 제 목:[탐그루] 하잔 대학살 73 관련자료:없음 21/21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1-15 00:57 조회:865 탐그루 # 마법은 마음이다 - 마음은 칼이다 # "죽일* 수* 있을* 때*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 다음 순간 나는 방패를 집어던지고 양손으로 칼을 고쳐 잡았다. 내 앞 의 소년에게 칼을 휘둘렀다. 소년의 목이 몸에서 분리되어 떨어져 나갔 다. 머리가 붙어 있던 자리에서 피가 솟아올랐다. 나는 소년의 핏물을 뒤 집어썼다. 지금 내 몸에 흐르고 있는 것들이 소년의 피인지 내 피인지 알 수 없었다. 내 다리를 겨누어 창이 날라왔다. 허약해보이는 젊은 남자가 어설프게 창을 찌르고 있었다. 나는 창을 칼로 비켜내면서 남자의 얼굴에 칼을 날 렸다. 남자는 정수리부터 턱까지 쪼개져 피를 뿜으며 그대로 쓰러졌다. 칼이 부르는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타오르는 듯한 고통은 어디 로 사라졌는지 조금도 느낄 수가 없었다. 모든 고통을 느끼는 마음이 어 둠 속으로 닫힌 것 같다. "전진! 전진!" 멀리서 지다문 십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행렬을 따라 뛰었다. 주변은 모두 피바다가 되어 있었다. 잘린 목과 팔다리가 여기저기서 나뒹 굴었다. 나는 누군가의 몸통을 밟는 바람에 미끄러질 뻔했다. 몸통에는 목도 달려있지 않았고 양팔도 어디로 갔는지 없었다. 뒤에서는 아직도 창 을 든 반란군들이 우리를 뒤쫓고 있었다. 만약 앞에서 다시 반란군들이 나타난다면 상황은 아주 어렵게 될지도 모른다. 더욱 투지가 타올랐다. 살기가 끓어 올랐다. 죽이는 거야. 다 죽여버리 는 거야. 나는 나도 모르게 나 자신에게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얼굴 에 뭔가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검은 구름이 어 느새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폭우가 쏟아졌다. 순식 간에 여기저기서 피의 강이 생겨나 사방으로 흘렀다. 전력으로 전진한 덕분인지 우리는 따라오는 반란군들과 마주치지 않고 시청 앞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사 층 건물인 시청은 그냥 보기에도 하잔 에서 가장 높은 건물인 것 같았다. 낮고 허름한 집들 사이에서 시청 건물 은 단연 돋보였다. 탐그루의 시청과는 달리 높은 외벽도 만들어져있지 않 았고, 벽면도 낡고 허름했다. 나무로 만들어져 있어서 불을 놓으면 순식 간에 타버릴 것 같았다. 그러나 우리는 시청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던 것은 물론이고 우리는 시 청을 향해 화살 한 대도 날리지 못했다. 시청 위와 시청 맞은 편 건물에 서 무수히 화살이 날아왔기 때문이다. 나는 잠시 방패를 버린 것을 후회 했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고 날아오는 화살을 칼로 막기로 했다. 정신없 이 칼을 휘둘러 화살을 막아내고 있을 때 차이린이 소리쳤다. "수르카! 뒤로!" 그러자 우보와 청강, 그리고 채리가 방패를 들고 내 앞으로 막아섰다. 화살들이 방패에 와 박히는 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빗줄기엔 우박이 섞여 도시 전체를 두드리고 있었다. 화살은 계속 날아들었고, 이젠 빗소리와 우박 떨어지는 소리와 방패에 날아와 박히는 화살소리가 분간이 가질 않 았다. 몇 명이 화살에 맞아 쓰러졌다.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여기서 죽을 수는 없다. 절대로 죽을 수 없다는 생각이 내 안에서 폭발하는 화산 처럼 솟아올랐다. 우보도 청강도 차이린도 나를 돕고 있었다. 그런데 내 가 죽다니. 나는 절대 죽을 수 없어. 절대로. 나는 시청을 바라보았다. 시청의 옥상에서 누군가가 지휘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흰 망토를 두른 사내였다. 사내가 지휘관이라는 생각을 안 건 나 하나 뿐이 아니었다. 차이린이 사내를 발견하자마자 화살을 날 렸다. 하지만 사내는 들고 있던 방패로 가볍게 화살을 막아내었다. 비록 멀리 떨어져 있었고 또 빗줄기 때문에 제대로 볼 수는 없었지만 나는 사 내가 은발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어쩐지 그 사람이 슬퍼하 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표정까지 보이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전진! 계속 전진!" 다시 지다문의 목소리가 빗줄기 사이를 뚫고 들려왔다. 나는 어디로 전 진하는 지도 모르면서 앞서 뛰어가는 십부원을 따라 뛰기 시작했다. 그 때, 어깨에 뭔가 강하게 내리치는 느낌이 들었다. 화살에 맞은 모양이었 지만 나는 뒤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얼마를 뛰었을까. 내 눈에 뮤에 올라타 사람들을 베고 있는 리바르도 기사단의 검은 깃발이 보였다. 기사들은 사람들을 베고 있었다. 비가 쏟 아지기 시작하자 뮤는 이리 뛰고 저리 뛰기 시작했고, 기사들은 뮤를 제 대로 다루지 못해 겨우겨우 칼만 휘두르고 있었다. 간혹 성구에서 빛이 뿜어져 나와 사람을 태우는 모습도 보였지만 그런 기사들은 몇 되지 않았 다. 기사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그저 사람들을 베고 역시 자치대 건물과 맞은 편에서 쏟아지고 있는 화살줄기를 피하기에 급급해하고 있었다. "동로로 퇴각!" 지다문이 소리쳤고 우리는 그대로 동문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바닥에 뒹굴고 있는 잘린 머리들이 하나같이 눈을 부릅뜨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 다. 나는 그것들 중 하나를 밟고 지나갔다. 몸이 휘청거리면서 쓰러질 뻔 하긴 했지만 후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도 리바르도 기사단이 어 느 정도 반란군들을 분산시켜 놓아서 우리는 더이상 큰 피해없이 무사히 동문을 통해 하잔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하잔시를 벗어나자마자 나는 쓰러지고 말았다. 나미트의 정령이 몸 밖 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비는 계속해서 내리고 있었다. 난 지고 말았다. 아주 쓰라리고 아프게 마음이 돌아오고 있었다. 빗물이 얼 굴을 따라 흘렀다. 우리는 비를 맞으며 하잔 시를 빙 돌아 주둔지로 돌아갔다. (십부원들 이 번갈아 가면서 나를 업고 왔다고 한다) 이제는 공격이 아니라 방어를 생각해야 할지도 모를 지경이 되었다. 비록 패하기는 했지만 지다문 십부 장을 탓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지다문 십부장이 아니었다면 내 목도 눈을 부릅뜬 채 하잔 시 어딘가를 굴러다녔을 것이다. "우리가 속았어. 녀석들, 일부러 시청에 모여있다고 거짓 정보를 흘리 고 함정을 판 거야" 청강이 말했다. "그런데 그 자식 봤어?" 채리였다. "그 흰 옷 입은 새끼 말이지. 나도 봤어" 큰새가 흥분하면서 말했다. 다리의 붕대에서 피가 배어 나올 정도로 말 이다. "그 새끼가 지휘관이 분명해. 시민들이 그렇게 조직적으로 움직이고, 전술을 구사할 수는 없는 법이라구" "당연하지. 어쩌면 그 새끼가 사람들은 선동했는지도 몰라" 레드와 블루가 한마디씩 했다. "전투가 끝나면 노래 한 곡 작곡해야겠어. 흰옷의 시민군과 검은 옷의 성황청이라는 제목으로 말이야" 나카가 말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천막밖에는 비가 쏟아져 내리고 있 었다. 나는 천막 사이로 간간이 떨어지는 물방울들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우리 용의 눈 십부는 나은 편이었다. 지다문의 하늘의 끝 십부는 한 명이 죽었고, 십부원 하나가 완전히 의식불명상태에 빠져버린 가투신의 웃는 얼굴 십부도 있었으니까 말이다. (비가 오는 와중이었지만 장례 의식이 있었고, 쏟아지는 빗속에서도 연금술사의 검은 돌은 맹렬하게 관을 태웠 다). 우리 십부에 부상자라고는 나와 큰새 뿐이었다. 큰새는 다리에 화살 을 맞았고, 나는 왼쪽 다리에 창을 맞고 오른 쪽 어깨에 화살을 맞았지만 둘 다 그리 깊은 상처는 아니었다. (치료석으로 치료가 가능한 상처였 다). 치료석이 상처 부위에 닿자, 돌에서 간지러운 기운이 퍼져 나와 내 상 처부위를 핥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내 왼다 리와 오른팔은 거의 정상에 가깝게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약간의 흔적만 남기고 사라져 버린 내 상처를 바라보면서 이것도 어쩌면 마법인 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리를 치료받을 때, 나는 내 다리에 창을 찔러 넣은 사람이 누구인가 를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누구인지는 모두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내 머리에 떠오르는 얼굴은 내가 목을 베었던 내 또래 소년의 얼굴뿐이었다. 나는 하잔에서 빠져 나올 때 일부러 잘린 목을 밟고 뛰었던 일이 생각났 다. 강해지는 거다. 강해지는 거다. 나는 이렇게 중얼거렸지만 내 눈앞에 어른거리는 잘린 목의 눈동자는 내가 그렇게 중얼거릴 수록 더욱 강한 눈 빛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얼결에 팔을 휘저으며 그 얼굴을 치워버리 려고 했다. "어이, 수르카. 뭐해?" 청강이 말했다. 나는 모기가... 어쩌구 하면서 입을 닫았다. 다들 태연 한데, 다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저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나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막 입구 쪽으로 걸어 갔다. 내 표정을 다른 십부원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다리는 이제 거 의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상처가 깊지 않은 탓도 있겠지만 복귀하기 전, 내가 준비해간 치료석으로 얼른 치료를 한 덕분인 모양이다. 그래.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않는 거야. 죽은 사람 처음 본 것도 아니고, 죽은 자가 나에게 해를 입힐 수는 없을 테니까. 이럴 때는 내게 도움이 되는 생각만 하자, 수르카. 앞으로는 작전에 나갈 때 꼭 치료석을 준비해 가는 거야. 그래. 그렇지. 이런 생각만 하는 거야. 비는 도무지 그칠 기색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차이린도 회의에 들어가서 언제 나올지 알 수가 없었다. 회의가 길어진다는 말은 그만큼 상황이 어렵다는 말도 될 것이다. 나는 지다문 십부장이 이제는 무슨 계 획을 생각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내 생각대로 이제는 방어에 치중하기 시 작할까? 아니면 다른 수라도...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다른 수가 내 머리에서는 나오지 않았다. 나는 반란군들의 그 조직적이고 잘 짜여진 움 직임을 떠올려 보았다. 비록 한칼에 나가떨어질 만큼 훈련은 제대로 받지 못한 병력들이었고 무장도 그다지 잘 갖추고 있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그 런 적들을 상대로 과연 어떤 전술을 구사하는 게 효과적일까. 멀리서 차이린이 비를 맞으며 돌아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나도 차이 린을 따라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차이린은 들어오자마자 얼굴에 묻은 빗 방울만 대충 털어내고는 전달사항을 전하기 시작했다. "좋은 소식과 또 좋은 소식이 있어" 차이린이 말했다. 좋은 소식이라. 반란군들이 항복이라도 하기로 했단 말일까. "먼저 아케르 단장님이 오늘 저녁에 도착하실 예정이야" 차이린이 말하자 십부원들의 안색이 바뀌었다. 모두다 하나같이 반가운 빛들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아케르 단장님은 지원 병력과 함께 오신다. 이게 좋은 소식 두 개야" 우와, 하는 함성이 천막 안에서 울려 퍼졌다. 아케르 단장과 지원 병 력. 이 정도면 얼마든지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소식이었다. "우리는 지원병력과 내일 다시 공격한다. 성황청 기사들은 참가하지 않 을 모양이야" 차이린이 말했다. 흥. 겁먹은 모양이로군, 둔한 기사 녀석들. "차이린 십부장 님, 지원 병력은 어디 병력입니까?" 채리가 차이린에게 물었다. 물론 그저 궁금해서 물어본 거였겠지만, 차 이린의 얼굴에 아주 잠깐 곤란하다는 표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아직은 몰라. 이곳 상황을 보고 받으시고는 지원 병력하고 함께 오 신다는 말씀만 알려오셨으니까 말이야" 아마 유훈의 떠버리 새 편으로 연락을 한 모양이었다. 차이린은 서둘러 전달사항을 마치고 자신의 천막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황급히 돌아간다는 인상은 나만 받은 모양이었다. 다들 조금도 이상할 것 없다는 표정으로 다시 즐겁게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그 즐거운 소란에 참여하고 있지 않은 사람은 나와 우보, 그리고 찬뿐이었다. 찬은 뭔가 생각을 하고 있는 듯 했고 (아마 식당에서 생활하고 있을 그레텔을 생각하는 거겠지), 우보는 그저 겁에 질려 있는 듯 보였다. 나는 겁에 질린 사람처럼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자리에서 일어 나 라이짐이 임시로 묶고있는 신다루의 패거리 십부 천막으로 향했다. 라 이짐에게 전해줘야 할 재훈의 말도 있었고, 또 이번 작전에서 별 탈 없이 돌아왔는지도 궁금했다. 그리고 내가 겁먹고 있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보 이고 싶지 않았다. 라이짐을 빼고는. 라이짐을 만나고 나면 그래도 괜찮 아질 것 같았다. 라이짐은 천막 안에 있었다. 나를 보더니 바로 천막 밖으로 나와 나를 반겨주었다. 라이짐과 나는 비를 피하기 위해 가까운 건물 안으로 들어갔 다. 중앙 광장 근처의 건물들은 우리가 도착하기 전에 성황청 리바르도 기사단이 솔한장 마을에서 징발했기 때문에 대부분 비어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천막을 친 것은 자체 경계에 용이하다는 이유도 있었지 만 용병단의 오랜 관습 (야전에서는 천막 생활을 한다는) 때문이었다. 하 지만 관습도 없고, 자체 경계에도 별 신경을 쓰지 않는 모양인지 성황청 기사들은 건물 안에서 묶고 있는 모양이었다. 다행히도 나와 라이짐이 비 를 피하고 있는 건물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말이다. "라이짐. 죽지 않았군" 나는 애써 웃으면서 라이짐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도, 수르카" 라이짐이 말했다. 상처가 다 아물었는지 이마에 붕대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가까운 곳에서 보니까 왼쪽 눈썹 바로 위부터 오른쪽 이마까지 칼 에 맞은 흉터가 길게 사선을 그리며 그어져 있었다. "흉터가 남았구나" "응. 별 거 아니야" 좀 쑥쓰러운지 라이짐이 이마를 한 번 문지르면서 말했다. 나는 재훈이 전해달라고 한 말을 하기는 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만나자마자 그런 얘 기를 꺼내기가 좀 뭣했다. "지원군이 온다면서?" 그래서 나는 먼저 라이짐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래. 서부산맥군이라는데, 뭐 하는 놈들인지는 모르겠어" 라이짐이 말했다. 어라. 차이린은 어떤 부댄지는 아직 모르겠다고 했는 데. "어디서 들었어?" 아마 소문을 들었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말을 듣자마자, 그거 소문이 지? 하고 말할 순 없어서 나는 이렇게 물었다. "회의에 참석했으니까. 알잖아. 난 십부장이라고. 물론 임시직이고 부 하도 한 명 없지만" 라이짐은 또 쑥쓰러운지 어색하게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아, 맞군. 그럼 이제 라이짐을 빛의 단검 십부장님이라고 불러야하 나?" 나는 농담처럼 가볍게 이렇게 말했다. "그만둬, 그런 얘기" 하지만 라이짐은 정색을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밍밍의 죽음이 아직 라 이짐에게 많은 부담을 남기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 밍밍 십부장님에게서 유품으로 단검을 받았어..." 말꼬리를 흐리면서 라이짐이 말했다. 라이짐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전 에 본 적이 있는 눈빛이었다. 이무르 아주머니가 죽었을 때 보여준 그 눈 빛 말이다. "...내일 복수하겠어. 기껏 반란군들한테 그렇게 당하다니... 지금 복 수를 하지 못한다면 나중에 어떤 복수도 하지 못해" 라이짐이 강경한 어투로 말했다. 그 복수가 어떤 복수인지 나는 알 수 있었다. 복수... 그 말은 나에게 섬ㄳ한 느낌을 주었다. 만약 내가 죽인 그 소년이 형제가 있고 친지가 있다면 그들은 나를 향해 바로 이런 복수 의 맹세를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N:김상현 #9929/10199 ━━━━━━━━━━━━━━━━━━━━━━━━━━━━━━━━━━━━━━━━ 제 목:[탐그루] 하잔 대학살 74 관련자료:없음 23/23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1-15 00:57 조회:805 탐그루 # 마법은 마음이다 - 마음은 칼이다 # "미하엘이야. 그 자식 이름은" 라이짐이 말했다. "미하엘이라고? 그게 누군데" "흰옷의 여우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는 반란군 두목이야. 오늘 회의에 서 들었어. 한때는 용병단에서 날리던 십부장이었데... 나중에 혼자 용병 단을 꾸렸다고도 하고. 하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용병 일을 그만두고 고향 으로 내려갔던 모양이야. 바로 하잔 말이야. 그러다가 어쩌다 보니 반란 군 두목이 된 거지" 라이짐은 미하엘에 대해 증오와 복수심으로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 "어쩌다보니 반란군 두목이 됐다는 말은 맞지 않아. 성황청 기사단이 시민들을 죽이는 바람에 이렇게 된 거라구. 사실 그러니까 잘못은 성황청 에 있는 거지 시민군에 있는 게 아니야" 나는 라이짐에게 이렇게 말해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시민군이라니..."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라이짐은 나에게 이렇게 되물었다. 새로 생긴 이마의 흉터가 꿈틀거렸다. "녀석들은 적이야. 반란군이라구. 그거 이상 무슨 생각이 필요해? 그 자식들이 무슨 이유로 적이 됐고 무슨 이유로 우리를 공격하는 지는 알아 서 뭐해? 수르카. 우리는 용병이야. 돈을 받고 사람을 죽이는 녀석들이란 말이야" 라이짐은 이렇게 말했다. 솔직히 라이짐이 냉소적이고 조금 강한 성격 을 가지고 있다는 걸 모르고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렇게 무시무 시한 말투로 말하는 걸 직접 듣게되자 조금은 겁이 났다. "밍밍 십부장님은 나를 구하려다가 돌아가셨어. 밍밍 십부장님 장례식 때 난 맹세했어. 반란군들을 하나라도 더 죽이는 게 복수라고. 그런 소리 를 하다니. 수르카. 넌 아직도 어린애구나" 라이짐이 적의에 가득찬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나는 그런 라이짐의 말 에 당황스럽고도 씁쓸했다. 어린애라구... 내가 너무 약한 마음을 가진게 아닌가 하고 생각해 본 적은 있지만 그게 내가 어려서라고 생각해 본 적 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 라이짐이 나에게 어린애라는 말을 한 순 간 나는 내가 어리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 이 들었다. 문득 마소드의 검에 입을 맞추지 못한 일이 떠올랐다. 그래. 어쩌면 그래서 내가 자꾸 이렇게 약한 마음을 먹는지도 몰라. 나는 라이 짐을 바라보았다. 라이짐은 조금 심한 말을 했다 싶은지 미안한 표정이었 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과하지는 않을 모양이었다. "밍밍 십부장님이 죽은 건 너 때문이 아니야... 재훈도 그렇게 말했어" "재훈? 재훈 때문이라구?" 라이짐이 나를 무섭게 쏘아보면서 말했다. 나는 말을 잘못 꺼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거, 잘못 말했다가는 재훈에게 라이짐의 분노가 쏟아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내 말은..." "재훈이 타코를 부린 건 작전 그대로였어. 우리가 하잔에 들어간 건 정 보수집에도 목적이 있었지만 좀비들이 아직 마을에 나타난다는 정보를 만 들어서 성황청 기사단도 함께 작전에 참가하게 만드는 데도 있었다고. 그 건 밍밍 십부장님 생각이었어. 재훈의 잘못은 없어. 다만 잘못이 있다면 반란군들이 그렇게까지 잘 조직이 되어 있는지 몰랐던 우리 탓이겠지. 밍 밍 십부장님이 죽은 건 나 때문이야. 나를 구하려다가..." 라이짐은 뭐라고 더 말을 하려고 했지만 그만 두었다. 그때 일을 떠올 리기 싫은 모양이었다. "난 복수 할거야. 될 수 있으면 미하엘 그 녀석을 이 단검으로 쓰러뜨 리겠어. 목을 뚫어버리던지... 아니면 머리통을 날려 버리겠어" 라이짐이 품에서 단검을 한 자루 꺼내면서 말했다. 언젠가 아자닌에게 서 들을 적이 있는 바로 그 단검인 모양이었다. 그때, 등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나와 라이짐은 재빨리 돌아섰 다. 아직 낮에 있었던 작전의 긴장감이 가시지 않은 모양이었다. 등뒤에 는 늙은 노인이 하나 서 있을 뿐이었다. "네 놈들이 바로 그 용병들인 모양이지... 클클클" 노인이 괴상한 숨소리를 내면서 말했다. 노인의 얼굴에는 검버섯과 주 름이 가득했다. "클클클... 네 놈들이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줄이나 알아.... 클클 클" 비록 주름진 얼굴이었지만 나와 라이짐을 비웃고 있다는 것만은 알아볼 수 있는 표정으로 노인이 말했다. "죄 없는 사람을 죽인 자들은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기 마련이지... 클 클클... 그리고 칼 들고 있는 자네... 복수를 하고 싶나. 복수를 한다고 해서... 클클클... 죽은 자가 살아 돌아오지는 않아" 노인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노인의 말에 가슴이 내려 앉아버렸다. 죄 없는 사람... 아니다. 그들은 창을 들고 있었다. 하지만 내 나이 또래의 소년은 어쩌면 나보다 어렸는도 모른다... "당장 입 닥쳐. 죽여버리기 전에" 라이짐이 이렇게 소리치자 나는 깜짝 놀랐다. 라이짐의 목소리가 커서 놀란 것이 아니라 노인에게 그렇게 함부로 말하는 모습에서 놀란 것이다. 이게 어른이 된 사람의 모습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감히 그런 말 은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말이다. "내 얼굴을 봐... 이 정도 늙으면 죽는 건 무섭지 않아... 클클클..." 노인은 이렇게 말했다. "칫. 가자, 수르카" 재수 없다는 듯이 라이짐이 말했고, 나와 라이짐은 그 노인을 내버려두 고 그냥 돌아가기로 했다. "젊은이... 클클클... 자네는 살인자가 될 사람이 아니야... 클클클" 건물을 빠져나가는 데 등뒤에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 말 을 무시하려고 했다. "그래. 이만 헤어지자. 그럼, 라이짐. 죽지 마" 나는 이렇게 말하고 천막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노인은 한 번 더 말했다. "죽지 말라고 했겠다... 아무나 잡아죽이는 녀석들이 하기에 딱 좋은 인사로군... 클클" 나는 노인의 말을 무시하고 라이짐에게 인사를 한 뒤 천막 쪽으로 뛰어 갔다. 천막에 들어가기 전, 나는 노인이 있던 건물 쪽을 바라보았는데, 지금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어쩐지 어디선가 노인이 나를 바라 보고 있는 것만 같아서 나는 얼른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수르카. 비오는 데 어딜 그렇게 다니는 거야?" "상처 덧나면 어쩌려고, 얌전히 앉아서 쉬어도 될까말까 한데" 레드와 블루 형제가 이렇게 한 마디씩 던졌다. 그러고 보니 상처가 좀 욱신거리는 것 같기도 하군. 나는 그냥 대답 없이 내 자리로 돌아가 옷을 벗고 마른 수건으로 다리의 상처를 닦았다. "수르카, 어딜 다녀 온 거야?" 청강이었다. 청강이 내게 이렇게 물었다. 확실히 청강은 차이린의 부관 으로서 자격이 있다. 십부원들을 챙기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지. 그게 부관이라는 자리 때문에 그런 건지, 아니면 타실 사람 특유의 어떤 친절 인지는 잘 알 수 없지만. "그냥... 이런저런 소식이 있나 해서요" 나는 청강에게 이렇게 말했다. 상처가 덧날 위험을 무릅쓰고 비까지 맞 아가면서 기껏 친구를 만나서 '아직 어린애 군' 하는 소리를 듣고 왔다고 대답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무슨 소식?" "반란군 지도자 이름이 미하엘이라는 걸 알았어요. 전에 용병이었다고 하던데요?" 그러자 청강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아니, 저건 또 무슨 얼굴이 야? "혹시 흰옷의 여우, 미하엘?" 채리가 옆에서 끼어 들었다. "예" 내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큰새와 나카, 그리고 레드와 블루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그, 예전에 아케르 단장하고 함께 바르도 대륙을 누비고 다녔다는 그 흰옷의 여우 말이야?" "어쩐지, 반란군치고 너무 잘 조직이 돼 있다 싶었어. 그 흰옷을 보고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이거, 왕년에 잘나가던 용병하고 한 판이라... 이거 겁나는데..." 나카가 말했다. (물론 조금도 겁난다는 표정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 미하엘이라는 사람이 꽤 유명한 사람이긴 한 모양이로군. 어 쩌면 차이린은 일부러 얘기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잘못하면 사기가 떨어질지도 몰라서 말이다. 그런데, 찬이 정말 오래간만에 한 마 디 했다. "강한 적이 그대를 명예롭게 하리라" 찬이 말하자 십부원들의 시선이 전부 찬에게 집중되었다. "그래. 찬이 오랫만에 멋 있는 말을 하는군, 내일이 기대되는데" "맞아. 한 판 제대로 해 보자고. 적들이 강해야 싸울 맛이 나지" "이젠 뭐 더 이상 인정 사정 볼 거 없겠어" 찬의 말에 모두 이렇게 한마디씩 던졌다. 강한 적이라는 말에 어쩐지 십부원들이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또 다른 얘기는 없어?" 청강이 물었다. "글쎄요... 참. 아케르 단장님은 서부산맥군하고 함께 오신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서부산맥군?" 이 말 한마디가 활기가 오르던 천막에 찬물을 끼얹은 꼴이 되었다. 십 부원들의 표정에 하나같이 긴장과 공포의 빛이 떠올랐다. "그렇군..." 누군가 이렇게 중얼 거렸고, 십부원들은 각각 자기 자리로 아무 말없이 돌아갔다. 그냥 멍하니 있는 것은 나와 우보뿐인 것 같았다. 나는 기밀에 게 도대체 서부산맥군이 뭐냐고 물어봤다. "도, 동타실 악마의 입 지, 진압작전에 차, 참가했던 부대야. 무, 무서 운 놈들이라고들 해. 아, 아무나 다 죽이고... 우, 우리편까지 죽인다는 소, 소문이야" 기밀은 더듬거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설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아군 을 죽이는 부대가 어디있담? 소문은 소문이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기밀의 말을 들은 나는 과연 서부산맥군의 병사들이 어떤 사람들일지 궁금해졌 다. 다른 사람에게는 웬지 함부로 물어 볼 수 없는 분위기였다. 다른 사 람들은 별로 얘기하고 싶지 않다는 표정들이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해 서 찬한테 물어보나마나 묵묵부답일테고. 아케르 단장이 폭우를 뚫고 도착했다. 천막 안에 앉아서 칼을 정비하다 가 아케르 단장의 도착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서둘러 천막 밖으로 나왔 다. 뮤를 탄 검은 망토의 사내가 연금술사의 빛을 받아 검붉게 빛나고 있 었다. 아케르 단장이었다. 지원병력과 함께 온다는 말과는 달리 아케르는 단 한 명과 함께 왔을 뿐이었다. 빗속인데다가 어두워서 윤곽밖에는 보이 지 않았지만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드는 사내였다. (아마 서부산맥군에 대해서 별로 좋지 않은 말을 들었기 때문에 그랬으리라). 아케르 단장이 왔다. 이 소식 하나만으로 부대원들의 사기는 높아진 느 낌이 들었다. 그만큼 다들 아케르 단장을 믿고 따른다는 말이 되리라. (물론 나도 마찬가지고) 과연 아케르 단장은 어떤 작전으로 하잔 반란군 을 진압할 것인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자마자 차이린과 찬, 그리고 나는 아케르 단장의 호출 을 받았다. 좀비 조사 보고를 하라는 거였다. 아케르 단장은 임시 지휘소 천막에 있었다. 천막 안에는 아케르 외에 지다문 십부장과 못 보던 얼굴이 하나 있었다. 아케르 단장과 함께 온 용병인 모양이었다. 긴 금발머리를 어깨까지 길러 늘어뜨린, 흰 얼굴에 단아한 느낌을 주는 미남이었다. 어쩐지 나는 그의 외모가 마로우와 비슷 하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마로우의 분위기가 조금 더 지적인 쪽에 가 깝다면 지금 이 사내는 조금 냉정해 보이는 쪽에 가까웠다. 이 사내가 도 착하는 모습을 보고 별로 좋지 않은 느낌을 받았던 나는 어쩐지 주눅이 들었다. (너무 미남자라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순무와 타호루는 보이지 않았다. 재훈도 마찬가지였고. 그들은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걸까. "차이린. 보고하도록" 아케르 단장의 머리와 어깨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저, 단장님. 에이스가 따로 보고 드린다고 했습니다만" 차이린이 말했다. "음. 에이스에게 약간의 문제가 생겼어. 내가 다른 임무를 맡긴 게 있 는데 그 과정에서 조금 어려움이 있는 모양이야. 하지만 에이스에 대해선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좋을 거야. 그러니 간략하게 보고해보게" 차이린은 에이스를 만나서 좀비의 근원지를 찾아낸 이야기와 그곳에서 좀비와 전투를 벌인 얘기, 그리고 아자닌이 말한 좀비의 근원지에 대한 얘기를 간략하게 말했다. "그랬군" 아케르 단장은 이렇게 말하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수르카. 이번에도 수고 많았다. 내 기대 이상으로 잘하고 있어" 아케르 단장은 이렇게 말하면서 내 어깨를 두드렸다. 나는 꼭 아케르 단장이 나를 보고 웃는 것 같아 얼굴이 달아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이거, 나야 말로 사기 충천인걸. "그리고 지다문 십부장" "예" "무슨 할 말이 있다는 거지?" 아케르가 묻자 지다문 십부장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야기를 했다. "...저는 서부산맥군이 이 작전에 투입되는 것에 반대합니다" 지다문이 말했다. 그러자 금발의 미남이 말했다. "지다문 십부장님. 저희 서부산맥군의 전투력을 못 믿겠다는 말씀이십 니까?" 목소리도 단아한 외모 그대로였다. 그런데 어쩐지 용병 같은 느낌이 안 드는 걸. "그게 아니오, 발렌시아 십부장. 내 말은 아직 서부산맥군이 투입되기 에는 시기가 이르다는 말이오" 지다문이 말했다. 분명히 지다문 십부장 쪽이 나이가 많아 보이는데, 어쩐지 지다문 십부장이 변명하듯 말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물론 지다문 십부장님께서 이번 작전에 먼저 투입되셨고, 따라서 마무 리를 짓고 싶어하시는 심정, 십분 이해합니다. 하지만 더 이상의 피해는 볼 수 없다는 것이 아케르 단장님의 생각이십니다. 그래서 이 먼 하잔까 지 서부 산맥에서 달려온 저의 성의를 봐서라도 지다문 십부장님께서 이 해를 해 주셨으면 합니다" 발렌시아 십부장이 말했다. 미남자는 이름도 멋있군. 어쩐지 귀족 이름 같아서 귀에 좀 거슬리기는 하지만 말이야. "나는 이번 작전에 욕심이 있어서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니오. 서 부산맥군의 용맹성과 전투력은 잘 알고 있는 바지만, 그러나 그렇다고 해 서 서부산맥군이 이번 작전에 투입된다면..." 자다문은 여기까지 말하고 더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차이린과 지다문 의 표정을 살폈다. 도대체 무슨 얘기가 오가고 있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 기 때문이었다. 둘의 표정은 뭔가를 숨기고 싶어하는 표정이었다. 발렌시 아를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불길한 예감이 다시 살아났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N:김상현 #9930/10199 ━━━━━━━━━━━━━━━━━━━━━━━━━━━━━━━━━━━━━━━━ 제 목:[탐그루] 하잔 대학살 75 관련자료:없음 20/20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1-15 00:58 조회:908 탐그루 # 마법은 마음이다 - 마음은 칼이다 # "지다문 십부장님. 뭔가 착각하고 계시는 것 아닙니까? 저희가 이곳에 온 이유는 앞서 말씀 드렸듯이 조속한 작전의 종결입니다. 그리고 저희 서부산맥군은 이 작전을 누구 보다도 빠르게 종결시킬 수 있습니다. 혹시 저희 부대의 능력을 의심하는 말씀이라면 무척 불쾌합니다. 그게 아니라 면 공연한 시간낭비를 하고 싶지는 않군요" 발렌시아가 말했다. 분명 예의바른 어투였지만 말속에 가시가 숨어 있 다는 것은 나도 느낄 수 있었다. "절대 발렌시아 십부장의 능력을 의심하는 게 아니오. 발렌시아 십부장 과 서부산맥군이 뛰어나다는 건 누구나 다 알고 있오. 하지만..." "별 쓸데없는 제주 일 뿐입니다" 발렌시아는 겸손한 말을 거만한 태도로 말하는 놀라운 능력을 발휘해서 말했다. "물론 발렌시아 십부장의 피해를 최소화해야 한다는 말에는 나도 동의 하오. 아니, 그건 동의의 문제를 떠나서 지휘관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 는 당연한 생각일 것이오. 허나, 이번 작전은 그 성격상 서부산맥군이 개 입하기에는 조금 이른 경향이 있소. 이번 작전에는 자칫 민간인들을 다치 게 할 우려가 크단 말이오. 더구나 서부산맥군이라면... 민간인들이 큰 피해를 입게 될 건 당연하니까.... 그러니까..." 지다문이 말했다. 나는 그의 말에서 서부산맥군이 어떤 부대인지 대충 은 짐작할 수 있었다. 아군도 공격하는 무지막지한 놈들이라는 기밀의 말 이 떠올랐다. 그런 소문이 도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 "민간인 피해라고 말씀하셨나요? 그게 대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씀이십니까?" "발렌시아 십부장. 우리 아케르 용병단은 민심을 잃어서는 안될 입장이 라는 걸 잊고 있는 것 아니오? 이런 마당에 민간인들을... 함부로 죽인다 면 그건 어쩌면 우리 용병단에 치명적 오점이 될 수도 있소" "그들은 반란군입니다, 지다문 십부장님. 민간인이 아닌 반란군도 있습 니까? 그리고 이곳 바르도 대륙은 넓습니다. 소문이 아무리 뮤의 다리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소문은 전해지면서 점점 변하기 마련입니다. 이번 작 전에 저희 서부산맥군단이 투입 된다면 하잔의 반란군을 처단한 아케르 용병단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될 것입니다" "아니오. 하잔의 민간인을 학살한 아케르 용병단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 게 될 거요. 그렇게 된다면 우리가 국민의 생명을 함부로 한다는 말이 될 것이고 그럼 과연 어떤 사람들이 우리를 따르겠소?" "그들은 평민에 불과합니다" 발렌시아가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 소름이 끼칠 만큼 차가운 말투였다. 그 말을 듣자 지다문 십부장이 갑자기 흥분해서 말했다. "아니, 어디서 그런 말을... 그 말이 귀족의 논리와 다를 바가 어디 있 소?" 둘의 말이 점점 더 격해지자 드디어 아케르 단장이 나섰다. "잘 들었네, 두 사람 의견" 그러자 지다문과 발렌시아는 말싸움을 중지했다. "발렌시아의 논리가 귀족의 논리와 다를 바 없다는 건 나도 인정하네. 하지만 지금 우리 용병단에는 자금과 명성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 아닌가" 아케르가 말했다. 아케르의 말은... 발렌시아의 손을 들어주고 있었다. "하지만 지다문 십부장의 의견도 맞아. 그럼 신병의 의견은 어떨까. 수 르카. 어떻게 생각하나?" 아케르 단장이 나에게 묻자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어떤 대답을 해야 할 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아케르의 눈을 바라 보았다. 아케르는 나에게 솔직한 대답을 원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이 마의 십자 모양 흉터가 눈에 들어왔다. "귀족의 논리와 같다는 말은... 맞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고민 끝에 이렇게 대답했다. 그러자 조금도 여유를 두지 않고 발 렌시아가 말했다. "수르카 단원. 그건 약한 사람이나 하는 말이야. 대를 위해서는 소가 희생되어야 하는 법, 아무리 자네가 어린 일개 단원이라고 해도 그런 걸 모르면 되나" 나는 아케르가 나에게 질문했을 때보다 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아직 어리다고 말한 라이짐의 말이 떠올랐다. 정말 그런 걸까. 아케 르 단장은 바르도 대륙 전체에서 귀족들을 없애려고, 아니 귀족제도를 없 애려고 하는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도시의 시민들 정도는 작은 희생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만약 그렇다면 그 생각은 옳은 생각인가. 나 는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한가지는 확신 할 수 있었다. 내가 지다문 십부장의 생각이 옳은 것 같다고 말했을 때, 아케르의 표정에, 비 록 아주 잠시였지만, 고민하는 기색이 나타났다는 거였다. 아케르 조차 도, 그 잘하는 '이제 결정은 내려졌다' 를 말하기가 쉽지 않은 문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잠시 침묵이 천막 안에 이어졌다. 아케르가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기 때문이다. 그의 머릿속에는 여러가지 생각들이 동시에 떠오르고 있겠지. 시민을 죽일 수도 있다는 생각, 또 그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 그렇지만 부하들의 피해를 최소화 해야한다는 생각, 그러면서 작전에는 성공해야 한다는 생각... 이런. 내가 그런 생각을 하려니까 또 머리에 쥐가 나려고 하는 군. 침묵의 시간이 끝나고, 아케르가 결정을 내렸다. "수르카 단윈의 대답은 잘 들었다. 그럼 결정하겠다. 내일 지다문 십부 장이 병력을 이끌고 하잔에 들어가도록" 아케르가 말하자 발렌시아가 뭐라고 말하려고 하다 그냥 입을 다무는 게 보였다. 지다문의 표정에 안도의 빛이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내가 대 답한 말이 아케르의 결정을 도왔다는 생각이 들어서, 안도의 마음과 함께 동시에 기쁜 마음이 들었다. "단장님께서 결정을 내리신 마당에 더 이상 뭐라 말씀드리지는 않겠습 니다. 하지만 모두들 머리에 흰 띠를 두르고 나가도록 해 주실 것을 부탁 드립니다" 발렌시아가 말했다. 여전히 차갑고 냉정한 어조였다. 나는 발렌시아의 말이 무슨 말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케르가 수긍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은 볼 수 있었다. "좋다. 그렇게 한다. 지다문. 흰 띠를 준비하도록" 아케르가 받아들인 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지다문도 말없이 씁 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따라서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날, 우리는 하잔 재 출정에 나섰다. 지난번과 같은 패배를 반복하 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만반의 준비를 다 갖추었다. 무장은 지난번과 다 를 게 별로 없었지만, 가장 많이 달라진 것은 진형이었다. 지다문 십부장 은 이번에는 밀집 대형을 사용하지 않고 세 팀으로 나누어 각각 북문과 동문, 그리고 서문으로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녀석들은 틀림없이 각각의 길에 분산되어 있다가, 적이 들어오면 그 방향으로 뭉치는 전술을 쓰고 있을 거라는 게 지다문 십부장의 생각이 야" 차이린이 취침 전 전달사항 시간에 설명해주었다. 과연 그럴 법한 얘기 였다. 만약 반란군들이 원래 모여있었다면 도대체 어떻게 그 많은 무장한 숫자가 질서 정연한 대형을 갖추고서 튀어나올 수 있었단 말인가. "우리는 원래 흩어져 있을 때 강해. 모두다 자기만의 무기, 자기만의 기술을 가지고 있잖아? 이번에는 그런 우리의 특성을 최대한으로 살려야 지. 한 명당 열 씩은 벤다는 각오로 임해" 진형은 크게 바뀌었는지 몰라도 작전은 그다지 복잡하지 않았다. 지다 문의 하늘의 끝 십부와 신다루의 패거리 십부가 북문으로, 가투신의 웃는 얼굴 십부와 마초의 피바람 십부가 동문으로, 아루마의 죽음의 신 십부와 우리 용의 눈 십부가 서문으로 동시에 들어가는 것이 작전 계획의 전부였 다. "목적은 시청을 점령하는 거야. 시청으로 들어가 반란군들을 모조리 쓸 어버리고 나면 작전은 끝나. 지난 번 전투에서 알았겠지만 적들은 조직력 은 있을지 몰라도 개개인은 약해. 거점과 우두머리만 해치우면 간단하게 끝낼 수 있을 거야" 차이린은 이렇게 말을 맺었다. 나는 차이린에게 라이짐은 어디에서 싸 우게 되느냐고 물어보았다. 역시 라이짐은 이번에도 신다루의 피거리 십 부에서 싸울 모양이었다. 라이짐은 밍밍 십부장의 원수를 갚겠다는 마음 가짐으로 싸울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는 밖을 바 라보았다. 비는 아직도 내리고 있었다. 나도 라이짐 못지 않게 싸워야 한 다. 지지 말아야지. 빗방울들이 바닥에 떨어져 튀어오르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이렇게 마음을 다져 먹었다. "수르카. 무슨 생각해?" 잠들기 전, 우보가 나에게 물었다. 우보는 여전히 겁에 질린 표정이었 지만 전날만큼 심하지는 않았다. 늘 사람 좋은 미소도 어느 정도 살아나 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여전히 겁이 나는 모양이로군. 어쩌면 나도 저런 얼굴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지 말아야 겠다는 생각" 나는 우보에게 웃음을 지어보이면서 대답했다. 사람 좋아보이는 미소 앞에서 너무 딱딱하게 굴 수는 없는 법이다. "난 타실 바닷가에서 태어났어. 피안 시 알아? 물고기가 많이 잡히는 곳 말이야. 나는 피안에서 멀지 않은 마을 출신이야. 큐브장 마을이라 고... 들어본 적 있을지도 모르겠다" 들어 본 적 없는 마을이긴 했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난한 마을이야. 고기잡이 배 한 척 살 여유 없는 사람들로 가득한 마을이지. 몇 집 되지도 않지만 말이야. 고기잡이배를 빌리려면 피안 시 에 대여료와 세금으로 금화 하나를 내야 해. 그건 물고기를 가득 잡더라 도 겨우 몇 마리 말고는 다 뺏긴다는 말이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보도 그다지 살기 좋은 마을에서 태어난 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 귀족을 미워했어. 그래서 용병이 된 거야. 내가 살았던 마을에는 이런 전설이 있거든. 마칸이 부활할 때 새로운 왕이 나타난다는 전설 말 이야... 그 왕이 귀족을 없애고 모두가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든다는 전설 이야" 나는 언젠가도 이 이야기를 우보에게서 들은 기억이 났다. "나는 그 왕이 아케르 단장님이라고 믿었어.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고. 하지만 나는 지금 살기 위해서 무장도 하지 않은 사람들을 밀치고 때리고 죽이고 있어. 귀족이 없는 세상을 꿈꿔 아케르 용병단에 들어왔는데, 지 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은 귀족을 돕는 일이라니 말이야" 우보의 표정에는 사람 좋은 미소라기 보다는 썩은 사과를 베어 물었을 때 같은 씁쓸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우보. 그건 네가 강하지 못해서 그래. 단장님은 그런 세상을 앞당기기 위해 지금 이 작전을 수행하고 계신 거야. 나, 어제 봤어. 단장님이 고민 하시는 모습을.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 대를 위해서는 소 가 희생되어야 하는 법 아니야?" 나는 우보에게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우보에게 하는 말이라기 보다는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라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들고 있었다. 정말 그럴까? 나는 정말 그렇게 생각하거 있는 걸까? "그래, 맞아. 어쩌면 나는 너무 약한 건지도 몰라. 나, 무서워 솔직히" 우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내가 한마디라도 더 쏘아붙였다가는 당장이 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은 얼굴이었다. "나도 무서워, 우보" 나는 우보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건 진심이었다. 나도 죽고 싶지 않았 다. "그러니까 강해져. 강해져야 죽지 않지. 마음 독하게 먹자, 우리. 우리 의 앞길을 막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다 죽여버리는 거야. 그리고 살아남는 거야. 그리고 나서 웃으면서 귀족들이 없는 세상을 기다리자구. 어때?" 이렇게 우보에게 말했지만 별로 내키지 않는 말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 다. 어쩐지 내가 아니라 라이짐이 하는 말인 것만 같았다.. "...그래, 우리 꼭 그런 날을 맞아 행복하게 살자. 그러니까 죽지마. 수르카" 조금 나아진 표정으로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려고 노력하면서 우보가 말했다. 나는 가슴 속에 뭔가 따뜻한 느낌이 차오르는 것 같았다. "너도 죽지마, 우보" 새벽이 오자, 부대는 출동 준비를 시작했다. 아직 비가 오고 있으니 연 기하는 게 어떻겠냐는 의견도 있었던 모양이지만, 지다문 십부장은 강경 했다. "우리가 비를 맞으면 적도 맞는다. 그리고 이런 빗속에서라면 오히려 우리의 기습 효과가 더 커질 수 있다" 지다문 십부장은 이런 말로 반대 의견을 일축했다. 우리는 비를 맞으면 서 출정식을 가졌다. 아케르 단장이 단상에서 연설했다. "제군들의 노고는 잘 알고있다. 제군들이 지난 작전에서 보여군 용기도 역시 잘 알고 있다" 아케르 단장도 비를 맞고 있었다. 그 모습은 어쩐지 믿음이 갔다. 비록 아케르 단장은 국왕의 대표들과 성황청 기사단의 대표와 회담이 있어서 작전에는 직접 참가하지 않았지만, 비를 맞으면서 연설하는 모습만으로도 나는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작전 계획 자체도 아케르가 승인한 거라는 걸 다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작전 자체에 대한 믿음도 갖고 있었다. "제군들 죽음을 죽여라. 이상" 아케르는 짧게 연설하고 연단에서 내려왔다. 몸을 돌리는 아케르의 검 은 망토에서 빗방울이 튀어오르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이 너무나도 멋있 다는 생각을 했다. 아케르의 매력은 과연 어디에 있는 걸까. 위대한 복수 자 검객의 명성? 아니면 훌륭한 판단을 내리는 지휘관의 능력? 알 수 없 었다. 늘 몇 마디 되지 않는 말로 부하들을 설득하고 용기를 북돋아 주는 모습은 내게 있어서 하나의 동경이었다. 출정식이 끝나자 방패가 다시 보급되었고, 이어서 차이린이 흰 띠를 가 지고 와서 나누어주었다. "이걸 꼭 머리에 메도록 해. 부적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되. 죽지 말라 는 부적. 그러니까 절대로 풀거나 풀어지게 해서는 안돼. 알았지?" 차이린은 이렇게 말하면서 흰 끈을 일일이 나누어주었다. 흰 띠에는 이 상한 문자가 적혀있었다. 처음 보는 문자인데... 나는 그것을 머리에 묶 었다. 아마 빗속이기 때문에 시민군으로 잘못 알고 서로 싸우는 일을 방 지하기 위해서 나누어주는 게 아닌가 싶었다. PRINTER/CAPTURE를 OFF 하시고 [ENTER] 를 누르십시오. HiTEL───────────────────────────────────── 창작연재 (SERIAL) LN:김상현 #10004/10199 ━━━━━━━━━━━━━━━━━━━━━━━━━━━━━━━━━━━━━━━━ 제 목:[탐그루] 하잔 대학살 76 관련자료:없음 18/18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1-16 00:40 조회:873 탐그루 # 마법은 마음이다 - 마음은 칼이다 # 지다문 십부장의 명령에 따라 우리는 하잔을 향해 떠났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비는 조금도 수그러들 기세가 아니었다. 비올 때 입는 장옷을 걸 치고 있는 단원들도 보이긴 했지만, 어차피 전투가 벌어지면 비옷은 움직 임을 둔하게 하기 때문에 아예 입고 가지 않는 단원들이 더 많았다. 나도 비옷을 입지 않았다. 비를 맞으며 걷는 내내 어제의 일을 생각했다.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 일들. 내 칼에 쓰러져간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들의 부모며 형제며 친구 들. 그들은 분명 나를 저주하고 나에 대해 복수를 맹세했을지도 모른다. 만약 내가 하잔에서 죽는다면? 라이짐, 차이린, 십부원들도 복수를 다짐 하겠지. 어쩌면 내가 한 일은 단순히 칼을 휘둘렀을 뿐이라고, 내가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그냥 쉽계 말할 수 있는 게 아닐 지도 모른다. 바드로 대륙의 시작과 끝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복수의 고리에 나 또한 가 담하게 된 건지도 모른다. 복수가 복수를 낳는다면 용서가 용서를 낳을 수 있을까. 그럼 나는 누구예게 용서를 빌고 누구를 용서해야하는 걸까. 과연 어제 내가 한 짓은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일까. 용서받지 못한다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하나... 라이짐이 했던 어리다는 말, 또 발렌시아의 했던 말들. 내가 이런 생각 을 하게 된 것은 정말로 내가 약해서일까. 그래. 약해서, 어려서 그런 걸 지 몰라.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마음을 강하게 먹자 수르카. 나는 이렇게 다짐했다. 그래야 라이짐에게 부끄럽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나 는 내가 보는 앞에서 부모님이 살해당하지는 않았다. 조금만, 조금만 더 라이짐을 이해하려고 노력해보자. 적어도 나를 믿고 도와주는 동료들에 게 짐은 되지 말자. 어느덧 다시 하잔 시의 서문 앞이었다. 하잔의 서문과 망루가 보였다. 지다문의 지휘 아래 부대가 셋으로 나뉘어졌다. 십부장들과 부관들에게 각각 피리 나무 가지 하나씩이 지급되었다. 시간 막대기가 다 타버리는 순간 동시에 공격한다는 계획이었다. 다시 한 번 하잔이다. 나는 시간 막대기를 받아드는 차이린의 얼굴에서 긴장감을 느낄 수 있었다. 사실 불안한 마음은 단원 누구나 다 가지고 있 을 있었다. 특히 지난번의 전투를 떠올려 본다면 말이다. 나는 내가 벤 내 또래 소년의 얼굴과 내가 밟고 지나간 누군가의 머리가 떠올랐다. 비 까지 내려서 그런지 끔찍하다는 생각이 더 커졌다. 나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러면 조금이라도 두려운 생각들을 떨쳐버릴 수 있을 것 같아 서였다. "...이봐, 수르카. 그런다고 빗방울이 피해가는 것도 아니잖아? 어차피 비는 다 맞게 돼 있어. 귀족이든 평민이든 가리지 않느다구" 나는 청강의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서로 긴장하고 있을 때다. 청강은 아무 말이나 하고 싶은 심정이겠지. 그러나 나는 아무런 말도 하 고 싶지 않았다. "농담이야, 수르카. 긴장 좀 풀어. 그런 얼굴로 반란군을 만날 거야? 반란군들이 보고 안쓰럽다고 생각하겠다, 머리에 끈도 더 동여매고" 청강은 애써 웃으며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청강에게 웃어 보였 다. 청강은 그러니까 훨씬 낫다고 말했지만 사실 그의 말이 재미있어서 웃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청강이 나를 생각해 주는는 게 고마워서 웃은 것뿐이다. 그래. 다들 나를 생각해 주고 있어. 부모도 형제도 없는 내가 마음을 줄 수 있다면 바로 내 동료들뿐인 거야. 수르카. 마음을 독하게 먹어. 나를 죽이려고 하는 것들은 다 죽여버리는 거야. 전부 다. 나는 이 렇게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져먹었다. 가투신과 마초의 십부가 동문으로 떠났고, 얼마후 지다문과 신다루의 십부도 북문으로 떠났다. 차이린은 초조한지 장옷 밑에 둔 시간 막대기를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 용의 눈 십부와 아루마의 죽음의 신 십부는 서문 앞에서 시간 막대기가 다 타들어 가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 다. 나는 아루마의 죽음의 신 십부장을 바라보았다. 죽음의 신 십부장은 이 름과는 달리 곱상하게 생긴 십부장이었다. 나이도 그리 많아 보이지 않았 다. 아루마 십부장도 다른 십부원과는 남다른 능력을 갖고 있겠지. 만약 위급한 상황이 생긴다면 십부원들이 의지할 사람은 십부장 밖에 없다. 나 는 그 만약의 경우가 생긴다면 아루마 십부장에게라도 의지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정말이지, 죽기는 정말로 싫은가 보구나, 수르카. 차이린이 이제 거의 끝까지 타들어간 피리 나무 가지를 던졌다. 드디어 시간이 된 것이다. "공격!" 짧지만 강하게 차이린이 지시했고, 아루마 십부장도 거의 동시에 지시 했다. 우리는 각각 좌우를 맡아 경계하면서 서문으로 향했다. 빗속에서 작전에 참가하는 일은 꼭 달 없는 산길을 걸어가는 일과 같았다. 어디서 뭐가 나올지 전혀 알 수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시야도 비 때문에 좁아졌 고 빗소리 때문에 다른 소리도 잘 들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불안감이 늘 어야 하겠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어쩐지 담요를 뒤집어쓰고 있는 것 처럼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지는 느낌이 들었으니 말이다. 어쩐지 비가 나 를 보호해 주고 있는 것 같았다. 머리만 담요 속에 숨기고 안심하고 있는 어린애 같은 꼴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서문에 다가서자, 차이린과 아루마의 화살이 빗속을 가르며 망루로 날 아가는 것을 신호로 전투가 시작되었다. 지다문 십부장의 생각이 옳았다. 반란군들은 이 비를 뚫고, 바로 다음날 공격해 오리라고는 전혀 상상도 못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망루의 보초들은 전날과 마찬가지로 어이없게 쓰러졌고, 서문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도 단원들의 칼에 그대로 쓰러졌다. 서문에 설치되어 있던 장애물을 넘어가면서 나는 비때문에 진흙으로 변한 땅에 처박힌 시민군 병사의 모습을 보았다. 그것은 어쩐지 진짜 시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것들이 모두 비현실적인 풍경인 것만 같았다. 어쩌면 다행인지도 모른다. 나는 칼자루를 굳게 쥐었다. 빗속을 뚫고 시청 앞까지 가는 동안, 우리 부대는 거의 저항을 받지 않 았다. 기껏해야 건물에서 날아온 화살 몇 개가 전부였다. 하잔 시내는 바 로 전날 피가 튀고 팔다리가 나뒹굴던 격전지였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나는 지금 내가 전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너무 쉽다. 너무 쉬워. 사 층의 목조건물인 시청이 눈앞에 드러났다. 저 허름 한 건물 앞에서 화살 세례를 받았던 일도 떠올랐다. 이렇게 쉽게 끝날 것 같지는 않은데... 시청 앞에 도착하자 다른 부대가 도착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병사들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너무나 쉽게 도착했기 때문이었다. "차이린은 지하로! 가투신과 마초는 밖에서! 그리고 신다루는 나를 따 른다!" 지다문이 큰 소리로 명령했다. 역시 지다문 십부장의 목소리는 컸다. 이 빗속에서도 조금도 수그러드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런 데, 그때였다. 시청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내려오고 있었다. 무장을 하 고 있는 반란군들이었다. 아마도 시청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었 다. 모두의 시선이 반란군들에게로 쏠렸지만, 나는 등 뒤에서 이상한 느 낌이 들어 뒤를 돌아보았다. 탐그루를 떠나던 날, 축제의 음악소리 때문 에 라스폼과 사스카치의 발걸음 소리를 놓쳤을 때 느꼈던 느낌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내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 본 상황도 그때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우리는 포위 당해 있었다. 실제 무장한 반란군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지만, 어디서 나타났는지 셀 수없이 많은 시민들이 그 뒤에 서 있었다. 당했다. 나는 온 몸이 오그라드는 것을 느꼈다. 언젠가 탐그루 자치대 위병에게 뺨을 맞았을 때보다 더, 그리고 라스폼이 마법구를 들었을 때 보다 더 몸이 떨렸다. 시민들과 반란군들은 하나같이 눈을 부릅뜨고서 비 를 맞으며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눈빛들은 마치 새끼를 잃은 뮤 같 이 섬뜩했다. 두릅뜬 눈들이 모두 나를 노려보고 있는 것 같았다. 두려웠 다. 죽음이 눈 앞에 다가와 있는 느낌이 바로 이런 것인가 보다 싶었다. 나는 지다문 십부장을 바라보았다. 지다문의 얼굴에는 낭패의 기색이 너 무나도 확연히 드러나고 있었다. 죽을 수는 없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어. 나는 방패를 집어던지고 칼을 뽑아들었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만이 나를 인도하 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방패가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빗소리와 함께 들렸 다. 다들 죽을 각오로 싸움에 임할 생각이었다. "더러운 용병단 녀석들! 다 죽어버려!" "나는 삼 년 전쟁도 겪었고 바바족의 침략도 경험해 봤지만 너희 같은 놈들은 정말 처음이다!" "네놈들이 우리형을 죽였어!" 시민들이 이렇게 하나 둘 소리치기 시작했다. 이제 도저히 살아날 수는 없 것 같았다. 특히 우리형을 죽였다고 소리치는 꼬마의 눈은, 나를 정면 에서 노려보고 있었다. 내가 죽인 바로 그 또래 소년의 동생이라는 생각 이 들자, 팔에서 힘이 빠졌다. 하지만 나는 칼을 다시 고쳐 잡았다. 안돼. 이렇게 약해져서는. 죽든 살든 한 번 해보고 죽는 거야. 수르카. 약해지면 안돼. 너는 강해. 아케 르 단장도 인정하는 검사야,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마음을 독하게 먹 으려고 노력했다. 그래. 이게 어른이 되는 거야. 이런 고비를 하나 둘 넘 기면서 어른이 되어가는 거야. 그때였다. 빗소리가 점점 작아지는가 싶더니 하늘이 완전히 어두워졌 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없었다. 지금까지 내 옆에 서 있었던 다른 십부원들이 아무도 보이지 않았따. 기괴한 분위기가 사방에 감돌았다. 숨 막히게 어두운 기운이 사방에서 밀려들었다. 소름이 쫙 끼쳤다. 꿈인가?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다들 어디 로 갔지... "넌 날 죽였어" 앞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보았다. 바로 어제 내가 죽인 소년이 눈앞에 서 있었다. 이건 꿈이야. 아니, 이럴 수가 없어. "그것도 목을 잘라서 말이야. 보여? 여기가?" 소년이 자신의 머리를 빼들어 한 손에 잡고 얼굴을 보여주었다. 목에는 내 칼이 긋고 지나간 흔적이 분명히 보이고 있었다. "수르카. 너는 나를 버리고 갔다" 이번에는 다른 쪽에서 들려온 목소리였다. 나는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 다. 이무르 아주머니였다. 이무르 아주머니는 뒤틀어진 손과 꼬여있는 다 리로 천천히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눈은 이미 썩어 들어가고 있었고 얼 굴에는 흙이 잔뜩 묻어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거야. 도대체 이게 뭐야! 소리를 지르고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수르카! 잘 만났구나! 오늘은 네가 죽는 날이야. 안 그래?" 이번에는 라스폼이었다. 옆에는 두 개의 심장에 단검이 박혀있는 사스 카치도 있었다. 그들이 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죽인 사람 들도 하나 둘 나타나 나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뒤로 물러섰다. 이 대로, 이젠, 정말로, 죽는구나... 그때 내가 쥐고 있는 칼자루에서 전해 지는 힘이 느껴졌다. 나미트 장군의 기운이었다. 나미트 장군은 나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수르카. 죽일 수 있을 때 죽이지 않으면 네가 죽는 다 는 거 잊었어? 수르카... 나를 불러... 이대로 죽을 수는 없잖아... 맞는 말이었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었다. 나는 살아남아야 한다. 살아 남아서 탐그루로 돌아가야 한다. 아니, 마소드의 검에 입을 맞춰야 한다. 죽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하자 죽어서는 안될 이유들이 자꾸 떠오르기 시작 했다. 내 눈앞에 나타난 사람들이 더 다가오기 전에 모두 죽여야 해! "죽일* 수* 있을* 때*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 칼에서부터 아주 세찬 기운이 뿜어져나와 내 안으로 흘러 들어오는 것 이 느껴졌다. 나미트 장군이었다. 나는 그대로 달려들어 내가 목을 벤 소 년부터 다시 한 번 목을 베었다. 한 번 베었던 목이라 그런지 너무 쉽게 떨어져 나갔다. 나는 그대로 몸을 돌리면서 누군지 알 수도 없는 사람을 베었다. 다시 몸을 돌려 누군가를 베고 나면 또 누군가가 달려들었다. 하 지만 그때마다 내 칼은 춤을 추면서 멈추지 않고 상대를 베어나갔다. 핏 물이 튀어 올랐다. 칼을 휘두를 때마다 좀비를 베었을 때와는 비교도 되 지 않을 쾌감이 내 몸을 휩쓸고 지나갔다. 죽음이 네 곁에 있다, 언제나 그래서 넌 춤을 춘다, 칼춤을 춤에 놀란 죽음의 신은 네 곁을 떠나가리라 네 원수 너의 적에게, 이 순간 나카가 불렀던 노랫가락이 떠올랐다. 내 곁에 조금 전까지 머물고 있던 죽음은 춤에 놀라 나를 향해 내게 다가오는 사람들을 향해 떠나갔다. 그 때마다 피와 살점이 허공으로 튀어올랐다. 나는 그대로 사람들을 베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내 춤을 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모조리, 모조리 죽여버리는 거다! 나는 소리쳤다. 핏물을 뒤집어썼는지, 입으로 자꾸만 비릿한 것이 흘러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눈 물이 나왔다. 사람을 베는 쾌감과 두려움가 공포와 또 알 수 없는 무수한 감정들. 신음소리가 저절로 새어나오고, 참으려해도 참으려해도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슬펐다. 나는 갑자기 내 머리를 적시는 빗물을 느낄 수 있었다. 바닥의 진흙과 내 손에 묻는 핏물이 보였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는 다시 하잔 시청 앞에 서 있었다. 통곡하듯 울면서 칼을 들고 서 있었다. 나는 정신을 차려 다시 한번 이곳을 살펴보았다. 나는 하잔 시에 돌아 와 있었다. 그리고 하잔의 시청이 보였고, 시청 앞에서 뒤엉켜 싸우고 있 는 용병단원들과 반란군들이 보였다. 모두다 진창에서 한 번씩은 뒹굴었 는지 누가 누구인지 알아 볼 수 없을 지경이 되어 있었다. 모두 겁에 질 린 표정이었다. 단원들도 시민들도 하나같이 겁에 질려 아무런 행동도 취 하지 않고 있었다. 그저 겁에 질려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있을 뿐이었다. "수르카 단원이로군" 머리 위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았다. 소리를 낸 사람은 뮤에 올라 있었다. 빗속이었지만 나는 그 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흰 얼굴과 단아한 모습. 발렌시아 십부장 이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N:김상현 #10005/10199 ━━━━━━━━━━━━━━━━━━━━━━━━━━━━━━━━━━━━━━━━ 제 목:[탐그루] 하잔 대학살 77 관련자료:없음 18/18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1-16 00:40 조회:759 탐그루 # 마법은 마음이다 - 마음은 칼이다 # "놀라운 정신력이야, 수르카 단원. 죄의식의 환각에서 그렇게 쉽게 벗 어나다니 말이야" 발렌시아가 말했다. "지금 시청 근처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다 환각에 빠져있지. 모두 자기 가 경험한 가장 끔찍하고 무서웠던 일들에 사로잡혀서 어쩔 줄 몰라하고 있어. 어떤 사람은 너무나 두려워서 스스로 죽기도 하지... 그런데 혼자 힘으로 거기서 빠져 나올 수 있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놀라워" 발렌시아는 이렇게 말하면서 싸늘한 웃음을 지었다. 나는 발렌시아의 말에서 내가 겪은 일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발렌시아는 환각을 만들어 내는 마법사인 모양이었다. "자네는 차이린 십부장의 십부원인가?" 나는 울음을 멈추고 그렇다고 대답했다. "차이린은 훌륭한 부하를 뒀군. 신병이라고 해서 염두에도 없었는데... 내가 잘못본 것 같은데. 이해하게, 수르카. 나는 원래 말 같은 거 가려서 하는 성격이 못되니까 말이야" 발렌시아는 이렇게 말하고는 다시 냉정한 얼굴로 시청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 그럼 이제 슬슬 시작해 볼까" 발렌시아는 이렇게 말하고는 왼손을 들어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발렌 시아의 등뒤에 서 있던 낯선 십부원들이 시청 앞으로 돌격해 들어갔다. 흰옷을 입고 있는 병사들이었다. 발렌시아가 이끄는 서부산맥군인 모양이 었다. "하잔 시민을 위해서 준비한 게 있지" 발렌시아는 이렇게 말하고는 마법의 말을 외웠다. "우리는* 죽지* 않는다* 우리가* 아닌* 것들은* 살아남지* 못한다*" 듣기만 해도 섬ㄳ한 주문이었다. 나는 그 주문이 어떤 계열의 주문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소리장 마을에서 오우거 앞에서 외웠던 주 문과 비슷한 계열의 주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마법에 살의만을 느낄 수 있었다. 발렌시아는 나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마법의 말을 이해하고 있었다. 저 마법의 말은 무척이나 위험하다. 어쩌면 병사들을 광란의 상 태에 빠트리는 마법의 말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법의 말을 외우자 흰옷을 입은 병사들이 순간 모두 움찔했다.그리고 다들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웃음을 가득 담은 얼굴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마치 굶주린 들짐승들이 오랫만에 찾은 사냥감을 즐거운듯 쫓 는 것 같았다. 바로 조금 전 내가 저곳에서 빠져 나올 때 모습이 바로 저 랬을 거라는 생각을 하자 나는 끔찍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시청 앞을 바라보았다. 흰옷을 입은 병사들이 미친듯이 칼을 휘두 르는 모습이 보였다. 피가 튀어 오르고 있었다. 그들의 움직임은 거칠었 고, 정말이지 적이고 아군이고 가리지 않고 벤다는 소문이 돌만한 모습이 었다. 흰옷을 입은 병사들은 머리에 흰 띠를 두르지 않은 사람들만을 골 라서 베고 있었다. 나는 내 머리의 흰 띠를 나도 모르게 손을 만져 확인 해 보았다. 발렌시아가 머리에 흰 띠를 매게 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저 미친 듯이 날뛰고 있는 서부산맥군은 머리에 흰 띠가 있는 사람은 공격하 지 말라는 암시를 받았을 거였다. 어쩌면 띠에 쓰여진 이상한 문자가 저 마법에 걸린 병사들의 공격을 방지해 주는 부적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는 생각이 들었다. 시청 앞의 살육은 이어지고 있었다. 병사 하나가 여자의 배를 발로 찬 뒤 그대로 목을 베는 모습이 보였고, 달아나는 사내의 등판에 칼을 박는 모습이 보였고, 누군가의 목을 집어던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저건 아 니다. 저건 아니야. 나는 나도 모르게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건 학살이야. 짐승도 저렇게 죽이진 않아. 내가 저 한 가운데에 있었다니... 나는 칼을 휘두르면서 시청 앞을 빠 져 나왔던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그렇다면 내가 벤 것들은 무엇이었을 까. 나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지만 내가... 저들처럼 나도 아무 저항할 능 력이 없는 보통 사람들을 베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아니, 어쩌 면 지금 저 흰옷의 서부산맥군이 나보다 더 나은지도 모르겠다. 나는 적 도 아군도 가리지 않고 마구 베지 않았던가. 나는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대를 위해서는 소가 희생되어야 한다고 말했던 발렌시아의 말이 생각났 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발렌시아가 이곳으로 온 것은 결국 아케르의 허 락이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대건 소건, 아니면 귀족 없는 세 상이건 또 반란군이건 시민군이건, 이건 아무 의미 없는 도륙이었다. 무 장도 하고 있지 않은 사람들까지 죽이다니. 이건 루비오가 또 쥬크가 아 무 이유 없이 이무르 아주머니를 베었던 일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나는 혐오감이 일었다. 나에 대한, 또 용병단에 대한 혐오감이었다. 구역질이 올라왔다. "걱정 말게, 수르카. 이제 곧 끝날 걸세. 내 부하들은, 서부산맥군은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지 않아...." 땅바닥에 엎드려 구역질을 하고 있는 나를 향해 발렌시아가 말했다. 나 는 엎드린 채 시청 앞을 바라보았다. 발렌시아의 말은 맞았다. 흰옷의 병 사들은 하나같이 강하고 난폭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저렇게 아무에게나 칼을 휘두르다가는 얼마 가지 않아 이 자리의 시민들은 모조리 죽어버릴 거였다. 발렌시아가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비웃음이 가득했다. 이대로 멍하게 서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칼을 들 고 다시 시청 앞으로 뛰어갔다. 하지만 무엇을 위해서? 이미 끝나버린 싸 움을 더 빨리 끝내기 위해서? 아무 저항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더 많이 베기 위해서? 아니면 나 혼자 서부산맥군의 학살을 막기 위해서? 혼자로 서는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지금의 나로선 이 상황을 막아낼 아무 런 힘이 없다. 나는 다시 제 자리에 멈추어 설 수밖에 없었다. 나는 뒤돌아보았다. 발렌시아가 여전히 나를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꼭 '이거 뭐야 어린아이나 마찬가지 아니야?'하고 말하는 듯 했다. 물론 거리가 있어서 들릴 리도, 입 모양이 보일 리도 없지만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과연 내가 심약한 어린아이인가? 만약 내가 강하다면 지금 흰옷 의 서부산맥군과 함께 시민들을 베었을까? 만약 내가 지금 충분히 강하다 면 차라리 서부산맥군을 베어버리고 싶다. 저 발렌시아도. 흰옷의 병사들은 나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자신들의 임무에 충실 하고 있었다. 누군가를 베고, 또 베고, 누군가의 피가, 목이 또 팔이 허 공으로 솟고 있었다.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고, 나는 빗소리인지 누군가 의 신음소리인지 알 수 없는 소리에 휩싸여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라이짐의 모습이 보였다. 라이짐은 자신의 짧은 칼로 닥치는 대로 아무 나 베고 있었다. 흰옷을 입고 있지 않은 단원들 중에서 유일하게 싸우고 있는 단원이었다. 나는 라이짐을 말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겁 이 났다. 저 살육의 현장으로 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제 시민들을 내가 벤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고, 그렇다고 흰옷의 서부반 란군의 행동을 중단시킬 용기도 내게는 없었다. "라이짐..." 나는 이렇게 입 속에서만 조그맣게 내 친구의 이름을 부를 수 있었을 뿐이었다. 서부산맥군의 살육은 계속되고 있었다. 아무 저항할 능력이 없 는 사람들을 저렇게 베고 있는 모습을 보니 만약 내가 약하다고 한다면 그건 흰옷의 서부산맥군을 막지 못해서이지 결코 시민들을 베지 않아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투는 쉽게 끝이 났다. 아니, 그건 전투였다고 말할 수 없다. 공포에 빠진 사람들을 그저 칼로 도륙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흰옷의 서부산맥단 원들은 정렬하기 시작했고 바닥에는 죽은 사람과 죽어 가는 사람들, 그리 고 정신을 잃은 사람으로 가득했다. 어느 새 비는 가늘게 변해 힘없이 허 공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시체가 널려있는 모습을 보았다. 빗줄기가 가늘어지자 피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핏물은 진창과 뒤섞여 보기 싫은 검은빛을 내고 있었다. 나는 바닥에 널려있는 시체들을 바라보았다. 시체라기 보다는 걸레조각이 나 천 조각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느낌이었다. 나는 시체들을 살펴 보았다. 내가 벤 사람의 시체도 이곳에 나뒹굴고 있을 것이다.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아무 죄도 없이 죽어간 이 사람들. 그리고 이 사람들을 죽인 용병단. 그렇다면 나는 도대체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 걸까. 이런 생각을 하다가 나는 낯익은 얼굴을 찾아내고는 멍하니 서 있 을 수밖에 없었다. 낯익은 얼굴의 몸통은 어디로 갔는지 찾아 볼 수가 없 었다. 나는 그 목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공포로 일그러져 있는 그 얼굴은 한 쪽 눈알이 반쯤 빠져 나와 있었다. 하지만 누구인지는 금새 알아 볼 수 있었다. "우보!" 먼 타실의 바닷가에서 태어난 우보. 나와 함께 훈련을 받으며 농담을 나누었던 우보. 귀족이 없는 세상을 꿈꾸던 우보. 나에게 죽고 싶지 않다 고 말했던 우보. 그 우보는 이렇게 죽었다. 누가 죽였는지도 알 수 없었 다. 머리에 흰 끈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흰옷의 서부산 맥군이 죽였을 수도 있고, 라이짐이 죽였을 수도 있고, 혹은... 내가 죽 였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나는 내가 좀 전에 쾌감에 떨며 칼을 휘둘렀 던 일을 떠올려 보았다. 칼을 휘두르는 그 와중에 나는 내가 누군가를 이 렇게 처참하게 베고 있다는 건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나는 다시 헛구역질이 속에서 올라와 허리를 숙이고 토하기 시작했다. 일전에 소리장 마을에서 타우의 팔을 베었을 때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 로 참혹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무도 나에게 뭐라 말하지 않았 다. 흰옷의 서부산맥군은 나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었고 내가 알고 있는 단원들은 거의 모두가 정신을 잃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정신을 잃 지 않았더라도 지금 이런 참상 앞에서 나에게 뭐라고 할 단원은 아무도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등뒤에서 뮤 발굽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시청 안으로 진입한다. 수르카 단원. 자네는 여기서 기다리게. 보아하니 전투를 계속하기에는 너무 지친 것 같군" 발렌시아가 말했다. 나는 속에 있는 것들을 토해내다가 눈물까지 흘려 서 앞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지만, 발렌시아가 나를 비웃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나는 발렌시아를 노려보았다. 나에게는 저 발렌시아의 행 동을 끝까지 지켜봐야 할 의무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 아직 힘이 남아있군" 노려보고 있는 내 눈을 보고는 발렌시아가 말했다. "또 나를 따를 남부산맥단원은 없나?" 나는 발렌시아가 무슨 말을 하는 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잠시 생각 을 해본 뒤에야 나는 내가 남부산맥단원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늘 남부산맥군끼리 모여있는 데다가 다른 지부의 단원들에 대해선 생각해보 지 않았기 때문에 한 번도 궁금해하지 않았던 사실이다. 발렌시아의 말이 끝나자 몇 사람이 일어났다. 가투신과 차이린, 지다문과 아루마, 그리고 신다루와 마초였다. 십부장들은 역시 달랐다. 그들은 피와 진흙 때문에 엉망인 몰골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자신들의 병력을 확인하고 또 정렬해 보려고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전투를 할 수 있을 것 같은 단원은 둘 뿐이었다. 찬과 라이짐. "지다문 십부장님. 그 동안 수고 하셨습니다. 그럼 이제 미약한 힘이지 만 저희 서부산맥군이 끝을 내도록 하겠습니다" 발렌시아가 뮤에서 내리지도 않은 채 지다문 십부장에게 말했다. 지다 문 십부장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진흙과 피를 뒤집어 쓴 꼴로 발렌시아 를 바라보고 있었다. 분하다든가 화가 난다든가 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허탈하다는 듯한, 의욕을 완전히 잃은 듯한 표정이었다. "저희가 남은 잔당을 소탕하는 동안 지다문 십부장님께서는 이곳에서 병력들을 모으고 쉬고 있으시기 바랍니다. 뭐, 아니면 지다문 십부장님께 서 그렇게도 소중하게 생각하시는 반란군들의 시체를 수습하는 일도 좋습 니다만" 발렌시아가 말하자 서부산맥군 전체가 웃음을 터트렸다. 발렌시아는 지 다문 십부장을 벌레 보는 듯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지다문 십부장도 마찬가지의 시선으로 발렌시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알았소. 발렌시아. 그럼 시청 안으로 들어가 깃발이나 꽂으시오. 아무 무장도 하지 않은 시민을 죽였다는 오명의 깃발을 말이오" 지다문이 말했다. 비록 초라한 모습이었지만 목소리만큼은 여전히 우렁 차게 울리고 있었다. 나는 지다문의 말에 내가 부끄러워지는 것을 느꼈 다. 내가 용병이 된 게 고작 이런 오명의 깃발을 날리기 위해서였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도대체 왜 용병단에 들어온 것일까. 왜! 왜! "아, 좋습니다. 저희가 깃발을 꽂는 동안 십부장님께서는 여기에 두 다 리를 꽂으셔도 좋겠군요. 보기 좋지 않겠습니까? 시청 옥상에는 오명의 깃발이 휘날리고, 시청 앞에는 지다문 십부장의 늠름하신 정의의 깃발이 휘날린다면 말입니다. 물론 오명의 깃발이 없었다면 지금처럼 서 있지는 못했겠지요" 발렌시아의 말에 다시 한 번 서부산맥군 단원들의 웃음소리가 터져 나 왔다. 지다문은 뭐라고 한 마디 더 하려는 듯 숨을 들이쉬었으나, 이내 말하기를 포기하고 자신의 병사들을 찾았다. 어떻게든 남아 있는 십부원 들의 생사를 확인할 생각인 모양이었다. 십부장들이 남부산맥군의 병력을 정비하는 사이, 발렌시아는 뮤에서 내 려 자신의 병력을 이끌고 시청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런. 진흙이 묻는군" 발렌시아가 뮤에서 내리자마자 처음으로 한 말이었다. 나는 그의 모습 에서 내가 생각했던 용병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는 그저 잔인한 살인 마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차이린을 도울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별로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았고 발렌시아에게 무시당했다는 생각 때문에라도 이대로 멈춰서 있을 수는 없었다. 여기서 멈춘다면 무너진 지다문의 자존심은, 또 남부산맥군 의 사기는 그대로 땅에 떨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발렌시아 의 행동을 끝까지 지켜봐야 할 의무가 있다. 나는 발렌시아의 뒤를 따랐 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N:김상현 #10006/10199 ━━━━━━━━━━━━━━━━━━━━━━━━━━━━━━━━━━━━━━━━ 제 목:[탐그루] 하잔 대학살 78 관련자료:없음 19/19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1-16 00:41 조회:906 탐그루 # 마법은 마음이다 - 마음은 칼이다 # 시청 안에 있던 반란군들은 거의 다 쓰러져 있었다. 아마 극심한 공포 끝에 탈진했거나 기절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흰옷의 서부산맥군 하나가 바닥에 쓰러져 꿈틀거리는 반란군의 목을 베는 게 보 였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어때? 악마의 입 작전하고 똑같지?" 목을 벤 서부산맥군이 묻자 모두다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따라 웃지 도, 웃는 시늉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서부산맥군이 입은 옷뿐만 아니라 사람 그 자체가 나하고는 완전히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부산맥군은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은 정상적인 웃음과는 너무도 큰 차이가 있었다. 이건 마법이다. 나는 생각했다. 마법이 아니고서야 사람들을 이렇게까지 악독하게 만들 수는 없다. 나는 내가 소리장 마을에서 오우거를 잡기 전 외웠던 마법을 떠올려 보았다. 그러자 나는 내가 그때 한 짓이 얼마나 끔 찍한 일이었나를 알 수 있었다. 발렌시아 십부장은 앞장서 계단을 올라갔다. 눈에 뜨이는 반란군들은 죽었건 살았건 가리지 않고 목이 베어졌다. 나는 그런 서부산맥군의 행동 을 말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말릴 수가 없었다.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이 얼마나 나쁜 일인지 알 수는 있었지만 그들을 말릴 수 있 는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마 환각 마법에 빠진 게 분명한 저들에게 덤벼 들었다가는 당장에 목이 떨어져 나갈 게 분명했다. 나는 겁이 난다. 그래서 그들을 말리지 못한다. 이렇게 생각하자 나는 괴로웠다. 마음이 뒤틀리고 있는 게 느껴졌다. 뭐라고 마법의 말이라도 한 번 외쳐보고 싶었다. 그들의 환각을 깰 수 있는 마법의 말 말이다. 그 러나 마음이 아무리 마법을 원하고 있다고 해도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 었다. 나는 너무도 초라하고 멍청하고 나쁜 놈이다. 그러자 나는 서부산 맥군이 하는 행동을 하나도 놓치지 말고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 봐둬, 수르카. 저들이 하는 짓을. 일생동안 잊어서는 안돼, 수르카. 저들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맹세이기도 하고 죽어가는 시민들에 대한 네 속죄이기도 한 거야. 나는 스스로 이렇게 다짐했다. 그때 누군가 계단을 뛰어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서부산맥군의 시선이 계단 밑으로 모아졌다. 라이짐이었다. 라이짐은 조 금도 겁먹지 않은 표정으로, 아니 화를 참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계단을 뛰어오르고 있었다. 나는 잠시 라이짐을 기다렸다. 라이짐의 얼굴을 보자 절대로 혼자서는 끝까지 따라갈 자신이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수르카. 네가 어리다고 말한 거 취소한다" 라이짐은 내 옆에 오자마자 이렇게 말했다. 라이짐이 나를 인정한 순간 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 말이 조금도 기쁘지 않았고 반갑지도 않았다. 아니, 오히려 라이짐의 얼굴이 전과는 너무나 다르게 보이고 있었다. 진 흙과 핏물로 얼룩이 져있는 라이짐의 얼굴은 꼭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같 이 낯설게 느껴졌다. 미친 듯이 사람들을 베던 라이짐의 모습이 떠올랐 다.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라이짐이 싫다는 느낌이 들었다. 발렌시아는 사 층에 올라가자 시장실을 발로 차 부수었다. 시장실 안에 는 아무도 없었다. "옥상이다!" 발렌시아가 소리치자 흰옷의 서부산맥군은 그대로 옥상으로 뛰어 올라 갔다. "미하엘은 죽이지 마!" 발렌시아는 이동하는 서부산맥군의 등 뒤에 대고 이렇게 소리쳤다. 나 와 라이짐은 서부 산맥군의 뒤를 따랐다. 라이짐은 분노에 가득찬 얼굴이 었고,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좋을 지 몰라 당황하고 있었다. 옥상으로 오르는 문을 통과하자 뿌연 안개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와 라 이짐은 칼을 고쳐 잡고 다음 일어날 일을 대비했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 는 것은 다섯 명의 시민군과 흰옷을 입은 그들의 지도자 뿐이었다. 흰옷 의 시민군이 라이짐에게 들은 하얀 여우 미하엘인 모양이었다. 다섯 명의 병사들은 필사적으로 서부산맥군을 막아보려고 노력했지만 아무 소용없었 다. 몇 번 칼이 맞부딪치는가 싶더니 다섯 명은 그대로 피를 뿜으면서 쓰 러졌다. 나와 라이짐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저렇게 죽일 것까지는 없잖아..." "칫, 다섯 놈뿐이었잖아" 내가 중얼거리자 라이짐이 바로 뒤이어 말했다. 이럴수가. 나는 라이짐 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돌아 보았다. 아무리 봐도 내가 알고 있던 라이짐 이 아니었다. 발렌시아가 옥상에 올라온 것은 그때였다. 발렌시아가 보이자 서부산맥 군은 좌우로 비켜섰다. 발렌시아는 옥상에 오르자 제일 먼저 발을 털었 다. "진흙이야. 비가 오다니 원..." 기분 나쁘다는 표정으로 발렌시아가 말했다. "저것들 치워. 보기 흉하다" 발렌시아가 말하자 서부산맥군 몇이 나와 조각이 나 쓰러져 있는 다섯 구의 시체를 아무렇게나 옥상 밑으로 던져버렸다. "좀 낫군" 발렌시아는 이렇게 말하고는 미하엘에게 다가갔다. 미하엘은 무장을 하 고 있지 않았다. 나는 미하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이는 아케르 단장 보다 그리 많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얼굴에 있는 주름이 그의 나이를 말 해주고 있었다. 둥글고 각진 얼굴은 탐그루 어디에서 사과장사를 하고 있 다고 해도 믿을 만큼 평범했고, 하얀 여우라는 별명의 흔적은 오로지 은 발의 머리에서만 찾아 볼 수 있을 뿐이었다. "자네가 올 줄은 몰랐네. 발렌시아" 미하엘이 말했다. 지친 표정이었다. "미하엘 십부장님. 아니, 이젠 그냥 미하엘님이라고만 부르지요. 지난 번에 만났을 때를 기억하십니까?" 발렌시아가 말했다. 미하엘은 모든 것을 다 포기했는지 아주 평심한 얼 굴로 발렌시아를 바라보았다. "그래. 기억하고 말고" "다시 만나게 되면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쪽은 미하엘 님이셨죠?" "그래. 그랬다" 미하엘은 약간의 웃음 마저 지어 보이면서 말했다. "뭘 망설이나, 발렌시아. 여기서 끝내지. 자네와 나와의 인연을... 지 옥에서라도 자네는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으니까" "제가 싸우는 방식을 늘 못마땅해 하셨죠?" 발렌시아는 뭔가 대답을 들어야 겠다는 표정이었다. 깊은 원한이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묻는 발렌시아의 얼굴이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자네는 그때 아무 죄도 없는 신도들을 베었어" "그게 성황청이 원했던 방식 아닙니까?" "성황청은 몰라. 성황청의 눈에는 신도들이 그저 고문도구의 상징이나 달고 다니는 이교도로만 보였겠지. 성황청 것들. 자신들이 믿고 따르는 신의 이름도 모르는 것들이 오랜 전통을 가진 종교를 힘으로 없애려고 하 다니" 미하엘은 혼잣말처럼 발렌시아를 바라보지 않고서 말했다. 나는 식당으 로 쓰고있는 건물 벽에 그려진 그림을 떠올렸다. 아마도 미하엘은 그 종 교의 신자인 모양이었다. "오늘 저는 제가 그때 썼던 방법을 그대로 썼습니다. 그때 미하엘님은 꼭 그런 방법이 아니어도 이길 수 있다고 말씀하셨지요? 오늘 그 결과는 어떻습니까" 발렌시아가 물었다. "내가 진 건 확실해. 전투의 지휘관으로서는 말이야. 어쩌면 그건 처음 부터 예견되어 있던 일인지도 모르지. 하지만 하잔은 이겼네" 미하엘이 대답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 죽어있는 하잔의 반란군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 으신단 말씀이십니까" 발랜시아는 아주 비꼬는 말투로 미하엘에게 말했다. "맞네. 하잔의 시민은 이곳 시청에서 죽어갔네. 그것도 비열한 방법을 쓰는 용병에게 말일세. 비열하다는 표현은 용서하게. 하지만 내 머리로는 그 이상 이 상황을 적당하게 표현할 방법을 찾지 못하겠군. 시청에서 우 리가 죽었다는 건, 시청에서 영원히 산다는 말과 같아. 다시 말해서 우리 는 질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싸웠다는 말일세. 자네 상징적이라는 말을 아는가? 우리는 부당한 귀족과 성황청에 대항한 상징으로 이곳에서 영원 히 살아남을 걸세" 나는 미하엘의 말에 머릿속이 텅 비는 느낌을 받았다. 하잔 시민들은 자신이 싸워야 할 이유를 알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아무 생각 도 없이 강해져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칼을 휘둘렀던 나는 그럼 무엇인가? "물론 비열한, 아니 그저 용맹한 발랜시아 십부장께서는 결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말이야" 미하엘의 이 말에 발렌시아는 당황하는 듯 했지만 다시 냉정한 기색을 되찾고 말했다. "제가 듣기에는 당신이 믿는 하늘이 오늘 당신을 저버렸다는 말처럼 들 리는군요" "그렇게 보이나?" 미하엘은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그 웃음은 허세 같아 보이지 않았 다. 오히려 자신만만하고 당당해 보이는 웃음이었다. "내가 그렇게 쉽게 신을 의심했다면 그날 자네 못지 않게 신도들을 베 었을 걸세. 하지만 나는 그날 보았어. 지옥이 어디인지, 또 천국이 어디 인지 말이야. 말했잖은가. 자네는 영원히 알 수 없을 거라고. 무엇이 옳 고 또 무엇이 그른지 말이야" 미하엘이 말하자 발렌시아의 얼굴에 노기가 치솟았다. "그런 말로 빠져나가려고 하지 마시죠, 미하엘님. 결국 당신은 그날 거 기서 도망쳤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이렇게 저와 다시 만나게 됐고요. 어 쩌면 이거야말로 신의 뜻 아닐까요? 제가 옳았고 당신이 틀렸다는 걸 말 해주는 신의 뜻 말입니다" "비천한 인간의 눈으로 신을 평가하지 말게" 미하엘이 말했다. "그냥 날 죽이게. 어차피 나는 여기서 죽을 수밖에 없어. 저 밖을 보 게. 자네와 자네의 부하들이 죽인 아무 죄도 없는 사람들 말일세. 나도 이제는 저들을 따라야겠네. 내가 아직 삶에 미련이 남아있을 거라고 생각 하나, 발렌시아? 천만에. 나는 이곳에서 죽겠네. 비열한 승리를 얻은 자 들에게 오명을 남기기 위해, 또 이곳 시청에서 영원히 살아 바르도 대륙 을 지키기 위해서 말일세. 죽어도 좋아" 미하엘은 이렇게 말하면서도 여전히 웃음 짓는 얼굴이었다. "천만의 말씀" 화가 머리끝까지 올랐는지 붉어진 얼굴로 발렌시아가 말했다. "당신은 여기서 죽지 않습니다. 하잔 반란군의 수괴로 당신은 국왕과 성황의 앞에서 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틀림없이 당신에게는 사형보다 더한 형벌이 내려질 것입니다.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지하감옥에서 남 은 일생동안 서서 살아야 할 지도 모르고 국왕 앞에서 팔다리가 뜯겨져 나가는 꼴이 되어 죽을 지도 모릅니다. 아니, 허리를 작두로 자를 수도 있지요. 그러면 극심한 고통 속에서 한나절은 보내야 죽을 수 있을 겁니 다" 발렌시아가 흥분된 어조로 빠르게 말했다. 하지만 미하엘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것도 좋지. 그러면 나는 그 고통 속에서 내가 용병이었던 시절에 지 은 죄를 속죄하겠네. 물로 그래도 그대 지었던 죄를 천분지 일도 용서받 지 못하겠지만 말이야" "끌고 가!" 이 말로 대화는 끝났다. 발렌시아가 차갑게 명령을 내리자 부하들이 달 려와 미하엘을 붙잡았다. 나는 미하엘의 말을 전부 다 이해할 수는 없었 지만 적어도 미하엘이 옳고 발렌시아가 틀렸다고 판단할 수는 있었다. 라 이짐은 물론 다르게 생각하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랬다. 그리고... 이제 내 마음 속에서 어떤 결심이 서고 있었다. "눈알이 뽑히고 팔다리가 잘려나간 후에는 어떤 표정을 지을 수 있을지 궁금하군" 붙잡혀 가는 미하엘에게 숨을 씩씩거리며 발렌시아가 말했다. "적어도 지금의 자네 보다는 보기 좋은 표정이겠지" 웃으면서 미하엘이 말했다. 발렌시아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옥상에서 내려갔다. 이렇게 시민군 지도자가 생포됨으로 해서 하잔 토벌 작전은 일 단 끝이 났다. 나와 라이짐은 함께 주둔지로 돌아왔다. 그러나 빗물과 핏 물로 범벅이 된 하잔 시내를 통과해 주둔지로 돌아오면서 나와 라이짐은 한 번도 서로를 돌아보지 않았다. ----------------------------------------------------------------- 환동(fntsy) 자료실에 탐그루 1회 - 72회까지 올렸습니다. 아래 한글 한글 3.0이상의 버전을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괴로움도* 시간과* 함께* 흘러간다* ^^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N:김상현 #10073/10199 ━━━━━━━━━━━━━━━━━━━━━━━━━━━━━━━━━━━━━━━━ 제 목:[탐그루] 영혼의 에뮬레이터 4 79 관련자료:없음 18/18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1-17 00:54 조회:964 탐그루 # 마법은 마음이다 - 마음은 칼이다 # * 영혼의 에뮬레이터 4 - 써클 프로젝트와 용의 날 "...이렇게 수르카와 라이짐은 서로 한마디 말없이 부대로 복귀하게 되 었습니다. 하잔의 피바람은 잠시 멎었고, 두 사람은 하잔에서 일어난 모 든 일을 각자의 눈과 각자의 마음으로 힘겹게 뒤돌아보기 시작합니다" 여기까지 세헤라자드의 이야기를 들은 나는 생각에 잠겼다. 이제야 세 헤라자드가 하고 있는 얘기가 어떤 종류의 이야기인가 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열 네 살의 나이에 나는 여기서 어머니와 아버지를 보내면서 무슨 생각 을 했던가. 그날은 아마 바람이 많이 불던 날이었던 것 같다. 몹시도 쌀 쌀한 날씨였고, 나는 자꾸 옷깃을 여미기만 했다. 어머니는 나에게 다시 는 보지 못하게 될 지 모르겠다는 암시의 말을 어렵게 어렵게 돌려서 얘 기 하였고, 아버지는 아무 말도 없이 잎담배를 빨고만 있었다. '모험가는 진짜 쿠바 잎담배와 진짜 스위스 아미 나이프가 아니라면 상대하지 않는 법이야'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셨던 분이니까. 혼자 남겨진 나에겐 쿠바 산 잎담배 보다는 아미 나이프가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계속 뇌리에 감돌았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다시는 볼 수 없다, 다시는 보지 않는다, 라고 몇 번이나 되뇌었다. 그러고 있으면 울음을 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랬다. 그날은 정말 바람이 차가왔다. 나는 결국 하늘을 올려다보고 말았 다. 이미 비행기는 까마득한 점이 되어 있었다. 탕, 탕, 탕 나는 손가락 총을 그 점에 겨누어 쐈다. 나는 그 까마득한 점이 사라질 때까지 몇 번 이고, 몇 번이고 손가락 총을 겨누어 쐈다. 아무리 쏴도 비행기는 떨어지 지 않았다. 이윽고 그 한 점마저 사라져 버렸다. "너, 그 얘기, 꼭 날 비난하는 것처럼 들려" 한참 사이를 두었다가 나는 세헤라자드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진우 수 사관이 나에게 했던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전쟁이 무엇인지 아느냐, 사람이 죽는 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아느냐... 나는 이진우 수사관의 그 탁 한 회색 눈동자가 떠올랐다. 나를 비난한다는 걸 훤히 드러내 보여주던 바로 그 탁한 눈동자 말이다. "내가 소오드엔메직 온라인을 하는 게 기분 나뻐? 그래서 말을 그렇게 하는 거야? 그건 단지 게임일 뿐이잖아" 나는 공연히 세헤라자드에게 이렇게 말해버리고 말았다. 꼭 이진우 수 사관에게 당한 걸 세헤라자드에게 분풀이라도 하듯이 말이다. "...글쎄요" 세헤라자드는 이렇게 말하면서 통 속내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꼭 가면을 쓴 듯 감정이 없어 보이는 미소였다. 그 표정을 보자 세헤라자 드가 어쩌면 정말 동영상 프로그램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글쎄요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비류 님의 전령으로 소오드엔메직의 세계로 들어갔을 때, 저는 들었답 니다. 수많은 유니트들의 숨소리를 맥박을. 조금 이상하게 들릴 지 모르 지만 숨쉰다는 표현 말고는 마땅히 표현할 말이 없네요. 프로그램이 내는 여러 소리들은 인간이 들을 수 있는 소리는 아니니까요. 아니, 만약 들으 실 수 있었다고 해도 관심 없으셨겠지요. 소오드엔메직에 등장하는 유니 트들은 비류 님에게는 그저 마우스를 클릭하면 달려갔다가 또 사라지는 그림에 불과할 테니까요. 예. 사실 그 유니트들이 프로그램인 건 맞아요. 그저 사람이 만들어낸 컴퓨터라는 세계에서 통용되는 하나의 기호일 뿐이 지요. 하지만 이런 생각을 어때요? 어쩌면 사람도 유니트들과 마찬가지로 하 나의 기호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요. 인간계라는 거대한 프로 그램에서 통용되는... 저는 그 유니트들의 소리를 들으면서 인간에게 영 혼이 있다면 저 유니트에게는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보았답니다" "유니트 들이 살아있는 생명이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아니에요. 전 그저 컴퓨터가 만들어낸 '가상의 공간'이라는 곳도 비류 님이 살고 계시는 곳과 같은 하나의 세계일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 다는 말씀을 드리는 거에요. 일단 그렇게 생각하고 나자, 세상이 달라 보 이더군요. 모든 세계가 사실 전부 다 존재하고 있는 거라면, 모든 이야기 와, 모든 음악과, 모든 그림과, 어쩌면 작은 돌 조각 하나에도 세계가 깃 들어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이야기는 세헤라자드가 전에도 했던 얘기였다. "...네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건, 이미 네가 컴퓨터 세계에서 통용되 는 기호로 전환된 인간의 영혼이기 때문인지도 모르지" 사실 세헤라자드의 말을 나는 쉽게 이해 할 수도, 또 쉽게 인정하고 싶 지도 않았다. 그래도 가만히 듣고만 있을 순 없었다. 이진우 수사관도 마 찬가지지만, 내가 전투 게임을 좋아한다고 해서 날 살인자 취급하는 건 너무 부당하지 않은가. "그리고 난 사람이야, 세헤라자드. 네 눈에는 내가 프로그램을, 그래, 네 말대로 컴퓨터라는 세계에서 통용되는 기호의 세계를 모르고 있는 사 람으로 보일 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냥 사람일 뿐이야. 사람은 사람의 세 계밖에는 모르는 게 정상 아닐까?" "예, 맞아요. 적어도 지금 그 두 세계를 동시에 이해할 수 있는 건 아 마 저밖에 없을 거고요. 그리고 비류 님. 저는 비류 님이 사람을 죽인다 고 비난한 적 없어요. 왜 그런 생각을 가지고 계신지는 잘 모르겠지만. 비류 님. 두 개의 세계는 결코 간섭할 수 없어요. 다시 말해서 비류 님이 수많은 유니트들을 아무 이유도 없이 지웠다고 해도, 그건 다른 세계에서 일어나는 다른 차원의 문제일 뿐이라는 말씀이에요. 거기에는 비난의 여 지가 끼어들 틈이 없답니다. 완전히 분리된 다른 두 세계의 일이니까요. 예를 들어 볼까요? 비류 님이 지금 여기서 돌멩이를 집어서 저 호수에 집어던졌다고 하죠. 그랬다고 해서 돌멩이의 세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 는 걸까요? 그것 또한 돌멩이 세계에서 벌어지는 하나의 사건은 아닐까 요? 그냥 저는 다만 그 두 개의 세계를 다 볼 수 있다는 말씀을 드렸을 뿐이에요.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할까요?" "관둬, 머리만 아프다. 그것보다 그래서 라이짐과 수르카는 어떻게 됐 는데?" 나는 좀 졸립긴 했지만 세헤라자드의 이야기를 조금만 더 듣고 자야겠 다는 생각으로 이렇게 말했다. 어차피 다음 출전은 새벽 네 시다. 아직 정오도 되지 않았으니까 조금 더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일단 작전을 마치고 돌아온 수르카와 라이짐은 잠시 숨을 돌렸답니다. 그리고 각각 자신들의 기억과 마음을 살펴보기 시작했지요" "라이짐은 여전히 복수심에 불탔을 테고, 수르카는 사람을 죽였다는 것 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세헤라자드는 내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나보다 먼저 내 앞에 나타난 사람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비류 씨. 여기 계셨군요" 검은 선글라스가 햇빛을 받아 희게 반짝였다. 나는 눈이 부셔서 그랬는 지, 아니면 겁이 나서 그랬는지, 혹은 무서워서 그랬는지도 모르겠지만, 거의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여 이진우 수사관의 눈을 피했다. "뭔가 열중하고 계시는 군요. 찾고 계신 정보라도 있으신 모양이죠? 아 니면 소오드엔메직에서 더 잘죽이기 위한 연습이라도 하시던 중이던가" 저 빛나는 선글라스 밑에서 회색눈동자가 나를 노려보고 있겠지. "제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몇 몇 사람에게 물어보는 걸로 족했습니다. 다행히도 어떤 사람이 비 류 씨가 공원쪽으로 걸어가고 있는 모습을 기억하고 있더군요. 구형 랩탑 을 들고 중얼거리면서 걷고 있는 모습을 말이지요. 사실 그게 비류 씨라 고는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전에 만났을 때 그 낡은 랩탑을 봐뒀 거든요. 그런 모델을 들고 다니는 사람은 흔치 않죠" 꼭 미친 사람이라도 대하는 듯한 태도였다. 이진우 수사관은 허락도 구 하지 않고 내 옆자리에 앉았다. 조금이라도 빈틈을 보였다가는 당장 내 어깨에 손이라도 얹을 기세였다. "저... 동영상을 보고 있었어요" 이진우 수사관이 어디를 보고 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었지만, 꼭 세헤라자드를 보고 있는 것만 같아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참으로 어색하 게도 말이다. "그 나이 때는 그런 미소녀 그림을 좋아하기 마련이지요. 저도 어렸을 때는 미소녀 동영상을 만지고 싶어한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사람 의 손으로 만질 수는 없는 거지요 키스라는 게임 아십니까?" "예. 꽤 역사가 오래된 게임이죠. 여자 옷 갈아 입히는 게임 말씀하시 는 거 아닌가요?" "예. 사람의 손을 프로그램이 대신하는 게임입니다" 이진우 수사관은 이렇게 말하면서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눈을 피하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이진우 수사관이 나에 대해 품고 있을 의심을 더욱 키워줄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차라리 적당한 선에서 맞서는 게 낫 겠다 싶었다. 그래서 나는 눈에 힘을 주고 이진우 수사관을 노려 보았다. (그래 봐야 내 눈만 아플 뿐이지만) "가끔가다가 현실과 가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을 보곤 합니다. 요즘 나오고 있는 키스 프로그램들을 본 적이 있는데, 일제 인물 이미지를 뜬 것과 구분이 안갈 정도로 정교한 것들도 많이 있더군요. 비류 님이 좋아 하시는 그 동영상처럼... 아, 물론 비류 씨 같은 프로 게이머들을 비난하 고 싶어서 하는 말은 아닙니다. 가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아주 드물다는 걸 저도 인정합니다. 수사관 일을 하고 있다고 해서 그렇 게 꽉 막힌 사람은 아니니까요" 이렇게 말하면서 이진우 수사관은 어울리지 않게 미소를 지었는데, 그 때문에 얼굴에 피부 이식을 받은 자리가 더욱 흉하게 도드라져 보였다. 나는 다시 한 번 고개를 돌리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이건 의심이나 두려 움 같은 문제가 아니라 타인에 대한 예의에 관한 문제였다. "그런 사람이 만약에 여자를 본다면 어떤 눈으로 바라볼까요. 아마 마 우스를 움직이는 것 처럼 간단하게 여자의 옷도 벗겨질 거라고 생각할 겁 니다. 그리고 화면 속의 여자처럼 강제로 자신에게 당하는 걸 모든 여자 가 다 즐긴다고 생각하겠지요. 동영상 좋아하시죠? 만약에 비류 님이 그 런 사람이라면 어떨까요. 만약 비류 님이 그런 사람이라면 그 화면 속의 여자와 비슷하게 생긴 여자를 만나게 된다면. 너는 나만을 좋아해야 한 다, 너는 항상 내 말에 복종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기 쉽지 않을 까요? 하하하, 물론 비류 님이 정말 그렇다는 건 아닙니다" 이진우 수사관의 웃음은 가식적이라는 게 너무 드러나는 웃음이었다. 나는 세헤라자드와 이야기하고 있는 내 모습을 혹시 이진우 수사관이 본 게 아닐까하는 생각을 잠시 해보았다. 하지만 아닐 거였다. 그랬다면 세 헤라자드라도 눈치를 챘을 게 분명했다. 만약 보았다면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거죠?" "그냥 수사관으로서의 추측입니다. 소오드엔메직을 좋아하는 게이머가 있다. 그런데 그 게이머가 친구와 게임상에서 싸웠다. 그런데 그 게이머 는 현실과 가상을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어느 날, 게임에서 했던 방법 그대로 친구를 죽인다... 하하하. 이건 추측입니다. 추측은 추 측일 뿐이니까 너무 기분 나빠하지 마세요. 사실 용이라는 프로그램에 대 해 떠도는 소문도 현실과 가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만들어 냈을 지도 모르겠다고 저는 추측하고 있습니다" 용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나는 MS사 얘기를 하고 나서 벌벌 떨던 부루 터스가 떠올랐다. 부루터스야말로 이진우 수사관이 보면 잘 만났다 하고 달려들어 단숨에 먹어치울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진우 수사관의 말은 결국 내가 오소리 녀석을 죽였다는 말 아니야? "지금 절 의심하신다는 말씀을 그렇게 빙 돌려서 말씀하신 건가요?" "죄송합니다만 의심하는 게 제 직업입니다. 비류 님이 게임을 직업으로 가지고 계시는 거와 마찬가지이지요" "어떻게 하면 의심을 푸시겠어요? 그날 전 다 말씀 드렸어요. 일이 있 던 시간에 제가 손맥 소프트 사로 가고 있었고, 또 가는 길에 뭘 했는지, 또 가서 무엇을 했는지 다 말씀 드렸잖아요" "그럼 다음 질문에도 떳떳히 대답할 수 있겠어요?" "또 질문 할 게 남았나요? 좋아요. 한 번 해보세요" "아이디를 도용하신 적이 있지요? 그때 실제로 도둑질을 하는 느낌이 드시던가요? 혹시 도둑질을 하는 게 기분 좋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진 않 았나요? 정보를 빼올 때마다 이게 돈이나 패물과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해 보신 적은 있으신지. 또, 미성년자는 할 수 없는 게임을 하신 적이 있다 고 했지요. 그때 화면을 보면서 자위행위를 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눈 을 감고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을 떠올리면서라도. 혹은 그런 게임을 하 면서 저렇게 하면 여자들이 나에게 달려 들 거라는 생각은 해 보신 적이 없나요? 길가는 여자들이 전부 게임 속의 여자처럼 말 몇 마디에 옷을 벗 을 거라고 생각하기도 했죠?" 나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어떻게 저런 질문을 던질 수가 있을까. 나는 이진우 수사관의 계속되는 질문을 끊고 거의 소리치듯 말했다. "이진우 수사관 님. 사람을 괴롭히는 게 취미신가요? 혹시 전쟁에서 누 군가한테 그런 식으로 당하신 기억이라도 있나요? 왜, 영화에서 보는 것 처럼 다리를 벌리고 중국 연맹 국 장교 앞에 서 벌거벗은 적이라도 있나 요?" 이진우 수사관의 입가에 웃음이 싹 가셨다. 나는 순간 움찔 했지만, 그 런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입술을 꾹 다물었다. "지나쳤다면 이해하십시오.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이건 제 직업이니까 요..." 이진우 수사관은 분노를 삭이고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선지 이를 악 물고 나에게 말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N:김상현 #10074/10199 ━━━━━━━━━━━━━━━━━━━━━━━━━━━━━━━━━━━━━━━━ 제 목:[탐그루] 영혼의 에뮬레이터 4 80 관련자료:없음 20/20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1-17 00:57 조회:807 탐그루 # 마법은 마음이다 - 마음은 칼이다 # "게임은 제 직업이에요. 그게 그렇게 못 마땅하신 지는 몰라도 저는 이 진우 수사관 님이 그 이상으로 못마땅하군요. 어떻게 사람을 의심하고 괴 롭히는 게 직업이 될 수가 있죠?. 그리고 그 대상이 저라는 건 정말 참기 힘든 일이에요" 그런다고 겁먹어서는 안 된다 싶어서 나는 용기를 내어 이렇게 말했다. 말하는 입술이 떨리는 게 느껴졌다. "좋습니다. 오늘은 더이상의 대화가 어려울 것 같군요. 다음에 또 뵙 죠. 그런데 다음에도 이렇게 당당하게 큰 소리를 칠 수 있을 지 궁금하군 요" 이진우 수사관은 이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제나 제가 이렇게 질문만 하다 돌아갈 거라고 생각하진 말아주십시 오" 듣기만 해도 가슴이 얼어붙을 만큼 차가운 말투였다. 나는 잠깐 숨이 멎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하나 더. 전 화약식 총을 더 좋아합니다. 빔 식 총은 아무 소 리 없이 사람을 토막낼 수도 있고, 불태워 버릴 수도 있지요. 하지만 화 약식 총은 살상 보다 위협의 효과가 더 크죠. 화약이 폭발하는 소리를 들 어보신 적 있습니까? 명중률은 형편없지만, 소리만큼은 정말 위협적입니 다. 고막이 한참동안 울릴 정도지요. 그리곤 죽을 사람이 살 수 있게 되 지요" 나는 뭐라고 바로 대응하려고 했지만 이진우 수사관은 내게 숨돌릴 시 간도 주지 않고 돌아서 가 버렸다. 나는 이진우 수사관의 등뒤에 감자를 한 번 먹였다. "진짜 전쟁에 참전한 사람은 다 미쳤다더니 정말인지도 모르겠어" "어디서 그런 말을 들었어요?" 혼잣말로 한 말을 듣고 세헤라자드가 물었다. "물론 전쟁에 참전하지 않은 사람한테서 들었지" "참, 비류 님도 이 상황에서 농담이 나와요... 전 십년감수 했다구요" 이진우 수사관과의 긴장된 한 판 승부를 마치고 나자 갑자기 졸음이 쏟 아졌다. 나는 대충 랩탑을 챙겨들고 집으로 향했다. 오늘 따라 하늘 여기 저기에 떠 있는 입쳬 광고들이 신경에 거슬렸다. 잠시도 시선을 못 떼게 하는 그 빛의 발광이 진저리나게 지겹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으로 돌아오자 마자 나는 랩탑의 배터리를 뺄 생각도 하지 않고 그냥 자리에 누웠다. 비록 싸구려 메트리스에 누웠고, 오랫동안 햇빛에 말리지 않아 냄새가 나는 이불을 덮기는 했지만, 일단 허리를 웅크리고 머리끝까 지 이불을 뒤집어쓰자 편하기만 했다. "잠깐만요. 비류 님. 연결을 해 주셔야 스테아를..." 세헤라자드가 뭐라고 더 말하기는 했지만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만큼 졸린 상태였다. 뚱보 고양이 한 마리 때문에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 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는 말이다. "스테아한테 답답하더라도 조금만 참으라고해 줘" 이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이 말이 꿈속에서 한 말인지 현실에서 한 말 인지는 나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눈을 뜨자 사방이 온통 캄캄했다. 또 늦었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두 대의 모니터가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세헤라자드? 지금 몇 시야?" 나는 입가에 흘러내린 침자국을 닦아내면서 물었다. 하지만 세헤라자드 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거, 또 화났나보다 싶어서 나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랩탑으로 향했다. "세헤라자드?" 화면에는 세헤라자드가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사라져 버린 게 아니 었다. 처음에 나는 내가 아직 꿈을 꾸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코 꿈이 아니었다. 세헤라자드는 지금까지 내가 한 번도 본적이 없는 형상으로 바뀌어 있었다. 세헤라자드의 모습은 도트가 어지럽게 깜빡이고 있는 모습이었다. 아니, 이건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그저 '도트가 어지 럽게 깜빡이는 듯' 보였을 뿐이다. 그 모습은 신기루 같기도 했고, 또한 바람결에 흩날리는 꽃가루 같기도 했다. 돌개바람에 흩날리는 모래 먼지 같기도 했고, 또한 비바람 속에 흔들리는 나뭇잎 같아 보이기도 했다. 이 처음 보는 광경에 놀라 아무 말도 더 하지 못하고 우두커니 서있기 만 했다. 세헤라자드가 부수어졌단 말인가? 아니면 에뮬레이터에 무슨 이 상이 생기기라도 했단 말인가? 하지만 그런 생각은 계속 모니터를 바라보 면 바라볼수록 사라져갔다.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세헤라자드는... 춤을 추고 있었던 것이다. 잠시 뒤, 깜빡이던 조각들이 모여 조금씩 형체를 갖추어 간다 싶자, 순 식간에 세헤라자드는 다시 내가 알고 있는 세헤라자드의 모습으로 돌아왔 다. 나는 넋을 놓고 세헤라자드를 계속 바라만 보고 있었다. 정말 보기 좋았다 같은 말을 할 수 있는 기분이 도저히 아니었다. 나는 그저 놀란 토끼모양으로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잘 안되네요" 뭐가 잘 안 된다는 소리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그냥, 응 그렇구 나, 하고 대답해버리고 말았다. "푹 잤어요? 오늘도 게임이 있다고 하셨던 거 같던데, 늦지 않으셨는지 모르겠어요" 나는 시계를 보았다. 세 시가 넘어가고 있었지만, 사실 그렇게 늦은 시 간은 아니었다. 하루 전만 같았어도 부랴부랴 달려나갔을 지 모르지만, 나는 네 시까지 선수대기실로 가기만 하면 되고, 또 일찍 가봐야 그렇게 급하게 해야 할 일들이 있는 게 아니니까. "미안. 그냥 자버렸어. 너무 피곤해서 말이야" 나는 이렇게 말하면서 랩탑과 데스크 탑을 연결했다. "스테아...맞지?...하여간, 그 고양이 풀어줘. 무슨 프로그램으로 압축 했니?" "급한대로 QRF 65로 압축했어요" "춥겠다...얼른 풀어줘" 내 말에 세헤라자드가 웃었다. 세헤라자드도 QRF가 Quck ReFrigeration 의 약자라는 걸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약속한 거 잊지마" "먹이하고 목줄이요. 전 약속 한 건 잊지 않아요" 세헤라자드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말했다. 나는 불을 켜놓고 집을 나섰 다. 사실 불을 켜놓건 꺼놓건 아무 상관도 없겠지만, 누군가 있는데 불을 끈다는 게 좀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선수 대기실에서 보낸 시간은 생각만큼 지루하지 않았다. 사실 전날에 비해 조금 바쁘게 움직였다고 말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그건 순전히 리 파이 덕분이었다. 내가 대기실에 들어서자 리파이는 기다렸다는 듯이 찰 스에게 순서대로 빨리 '복장 예술 작업'을 마칠 것을 부탁했고, 이어서 준비해 놓은 작전의 대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어제의 패배를 오늘의 승리로 바꾸는 게 프로 게이머의 보람이라고 생 각해요. 오늘은 일단 세잔 시 탈환은 포기합니다. 아톰과 부루터스는 내 정에 힘을 쏟아줘요. 장군 둘이면 두 시간 안에 원상태로 복구가 가능하 겠지요?" "한 시간 반이면 될 거야. 아톰 이 친구가 농땡이 치지만 않는다면" "미안하지만 한 시간 반이나 걸리려면 좀 농땡이를 쳐야 겠네요" "저하고 실버우드는 이번에는 외교에 치중할 생각입니다. 류, 켄. 자료 모으고 있지?" 류와 켄은 잠시 원주율을 외우는 걸 멈추고 리파이를 바라보았다. 리파 이는 잠시 시간을 줬지만 류와 켄이 아무 말 없자 무시하고 그냥 설명을 계속했다. 겉보기로는 형제인지 자매인지 알 수 없는 저 남매가 보기에는 저렇게 자폐아처럼 보여도 자료를 분석하는 능력하나 만은 대단하니 하늘 을 그래도 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오늘의 주인공은 아마 비류 님이 될 거에요. 비류 님. 비류 님 은 오늘 샤넬 넘버 식스와 닌텐콤 지팡고, 그리고 SNKNET 선라이즈와의 외교를 맡아서 해 줘요. 이건 내가 결정하기 전에 이미 위에서 결정 난 사항이에요" 위라고 해봐야 멍게 팀장밖에 없다는 걸 다들 잘 알고 있는데도 리파이 는 굳이 '위에서'에 힘을 주어 말했다. 나에게 조금이라도 더 중압감을 주려는 의도였다면 그 말을 그런대로 성공을 거둔 것 같다. 젠장. 인정하 기는 싫지만 한 달 뒤의 계약 여부를 결정하는 건 오로지 팀장의 몫인데, 팀장 눈밖에 난다면 진짜 정식 프로게이머가 되는 건 물 건너 간 일이 될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나는 류와 켄에게 물어봐서 자료나 많이 수집해 야겠다고 생각했다. "자, 다음은 세부계획으로 들어갑니다" 아주 지루하고 재미없는 시간이 이어졌다. 파악된 적 병력의 숫자와 부 대 위치, 파악되지 않은 적 병력의 숫자와 부대위치에 대한 추정, 그것을 토대로 한 작전 계획의 수립, 또 이중 삼중의 계획... 하지만 세헤라자드 의 이야기를 듣기 전부터 나는 이런 계획들이 별로 쓸모 없다는 걸 몸으 로 깨닫고 있었다. 세헤라자드의 이야기에 나오는 전술 강의 내용처럼 '적은 항상 네 번째 경로로 들어오기 마련'인 것이다. 사실 어떤 일이 어떻게 생기게 될 지 누가 알 수 있겠는가. 이런 자세한 계획을 세우는 일이야말로 어떻게 보 면 어리석기 그지없는 일에 불과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오랫동안 프로 게 이머에 몸 담아온 이 사람들이 그런걸 모르고 있을 리는 없다. 그래도 계 획을 하나라도 더 생각하고 준비해야 만약의 사태에 좀 더 빨리 대처할 수도 있고 다른 생각이 빨리 날 수도 있기 때문이리라. 말하자면 '이미지 트레이닝'이라고나 할까. 어찌되었건 프로의 전술을 듣는 일은 재미있었다. 예를 들어 후퇴 계획 을 토론하다가 부루터스가 말한 소오드엔메직 온라인 1편에 있었던 버그 얘기는 처음 소오드엔메직의 세계에 맛을 들이기 시작할 무렵 계시판에서 반신반의하면서 읽었던 잡담 중 하나였는지라 더욱 흥미로왔다.. "...그래서 베타 테스트 버전으로 난다긴다하는 프로 게이머들이 모여 서 전투를 시작했지. 물론 동등한 조건으로 준비된 국가에서 하는 전쟁이 었지만, 아무리 게임 테스트라고 해도 서로의 자존심이 걸려있는 문제였 으니까. 그런데 말이야, 내가 어떤 게이머와 한 판 붙게 됐거든. 그때 평 지에서 행군하던 보병 군단끼리 붙게 되는 바람에 누가 먼저 상대의 꼬리 를 잡느냐가 승부를 가리는 관건이 되었지. 서로 대형이 잘 짜여 있는 상 태라 만약 정면 충돌했다가는 누가 이기든 피해가 심할 게 불을 보듯 뻔 한 사실이었거든. 그때 나는 상대의 움직임을 예상하고 지형을 감안해서 꼬리에 닿을 수 있는 최단 거리를 계산해 스포트를 클릭하는 방법을 썼어. 사실 녀석이 병사 수는 조금 더 많았지만 행군 속도는 내가 더 빨랐거든. 그런데 말이 야, 몇 번을 해도 실패를 하는 거야. 녀석의 행군속도가 갑자기 더 빨라 진 거지. 아무리해도 거리는 좁혀지질 않고 오히려 내가 녀석에게 꼬리를 잡히고 말았어. 그러니 어쩌겠어. 그대로 도망칠 수밖에. 녀석의 대형을 흐트러트리는 기만 작전을 썼어야 하는데, 하고 생각해봤지만 뭐, 후회해 도 소용없었지" "그런데 어떻게 그 게이머는 그렇게 빨리 행군을 할 수 있었지요?" 나는 대답을 알고는 있었지만 부루터스에게 직접 듣는 게 나을 것 같아 서 일부러 호기심을 가장하면서 이렇게 물었다. "버그가 있었던 거야. 그러니까 똑같이 움직이더라도 후퇴명령으로 움 직이면 속도가 십 퍼센트 상승한다는 걸 이용한 거였지. 그걸 알았을 때 모두들 아차, 하는 표정이었지. 특히 게임 프로그래머들은 그일 때문에 줄초상이 났지... 그래서 베타 테스트 후에 후퇴 커멘드를 없애려고 했다 가, 나중에는 후퇴를 하면 사기치가 떨어지는 걸로 조정을 했어" "부루터스 님은 그때 기분이 어땠어요?" 내가 다시 물었다. (사실 내가 정말로 궁금했던 건 바로 이 부분이었 다) "그건 버그라기보다는 전술이었다고 생각하기로 했지. 그래야 나도 발 전이 있을 거 아니야. 언제나 남 탓만 해봤자 얻을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으니까. 그리고 사실 그 짧은 시간 안에 프로그램의 버그를 찾아내 그 걸 활용한 녀석이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었고 말이야. 그래서 박수를 쳐줬 지. 진심으로. 그런데 그 친구가 누군지 알아?" 물론 나는 대답을 알고 있었다. "나이트무버 유정일이었어. 난 그때부터 녀석이 정말 대단한 프로 게이 머가 될 거라는 걸 알 수 있었지" 부루터스는 이렇게 말하고는 마치 자신이 나이트무버 유정일인 것처럼 뿌듯해하는 표정이 되었는데, 나는 그 마음을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았 다. 내 마음도 뿌듯해져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훌륭한 상대에 대한 존 경심은 프로게이머라면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마음이리라. (그렇다고 내 가 나이트무버 유정일의 적수가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말이다) "...지겨워, 부루터스. 이제 몇 번만 더 들으면 백 번이야" "그래? 그럼 백 번 채울 때까지 들어, 아톰" 부루터스의 능청스러운 목소리에 우리는 모두 웃고 말았다. 그리고 그 덕에 잠시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이정화는 어제보다 더 노출이 심한 은색 탱크탑에 핫팬츠 차림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정화의 어깨에 조명이 닿지 않아 줄이 가 있었다. 게이머 들은 메이크업도 하고 조명에 닿지 않는 곳이 많아서 덜한데, 이정화는 연출자라서 그런가 보다 싶었다. 그런데 왜 화장을 하지 않는 걸까. 그 의문은 찰스와의 대화에서 쉽게 알아 낼 수 있었다. "너무 무리하지 말아요. 그러다가 피부 상한다니까" "찰스. 충고는 고맙지만 그냥 넘어갑시다. 어차피 더 상할 피부도 없는 것 같은데" "간단히 유브이 연고라도 좀 바르지 그래요?" "화장품 알레르기가 있는 걸 어떻게요?" 화장품 알레르기라. 그런 게 있는 여자도 있었군 싶었다. 그런데 세헤 라자드는 사람이었을때, 그러니까 피와 살이 있는 사람이었을 때, 과연 화장을 했을까하는 의문이 생겼다. 만약에 화장을 했었다면... 지금은 그 런 걸 그리워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런 생각이 들자, 나는 가루가 되어 화면을 맴돌던 세헤라자드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모습 은 예쁜 여자를 바라볼 때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과는 다른 종류의 아름 다움이었다. 붉게 빛나는 도시의 풍경에서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과 좀 비슷한 구석이 있기는 했지만 그것과도 다소 달랐고, 차라리 언젠가 어스 넷에서 본 오로라의 장관에 더 가까운 모습이었다. (물론 그것과도 다른 느낌이긴 마찬가지지만 말이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리허설을 마치자 곧 게임이 시작되었다. 어제보다는 덜하긴 했지만 여전히 긴장감이 느껴졌다. 특히 모니터에 내 모습이 나타 날 때나, 나이트 무버가 내 얘기를 했을 때는 더욱 그랬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N:김상현 #10075/10199 ━━━━━━━━━━━━━━━━━━━━━━━━━━━━━━━━━━━━━━━━ 제 목:[탐그루] 영혼의 에뮬레이터 4 81 관련자료:없음 17/17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1-17 00:58 조회:936 탐그루 # 마법은 마음이다 - 마음은 칼이다 # "어제 비류 게이머가 보여준 플레이는 외교의 정석이라고 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지만 게임의 정석이라고는 말할 수 있겠습니다. 고조선 일보의 유럽 진출을 약점으로 외교를 했으니 말입니다. 사실 상대가 처해있는 실 질적인 입장과 위치를 빨리 파악한다는 게 이론상으로는 쉽지만 실제 마 우스의 움직임과 목소리로 재빠르고 적절하게 대응하기는 쉽지 않지요. 비류 게이머는 신인답지 않게 노련하고 침착하다는 평을 들을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트랜스파워를 거치지 않고 바로 나오는 이어폰을 낀 덕분에 나 미트무버의 말을 더 확실하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나를 나이트무버가 칭 찬했다... 어쩌면 수르카가 아케르에게 칭찬을 받았을 때 이런 느낌이 들 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과연 이런 감정만 가지고 자신 을 칭찬해 준 사람을 위해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게 가능할까? 사 실 이건 내가 알 수 없는 부분이다. 그것과 꼭 같은 상황에 처해보지 않 았으니까 말이다. 리파이는 나에게 군단장 직을 내려줬다. 그리 규모가 크지도 않고, 거 의 지난 번 전투 때의 패잔병을 모아 만들어진 병력으로 이루어진 군단이 긴 했지만 내가 프로게이머가 되는 첫 걸음을 성공적으로 내딛었다는 생 각에 뿌듯했다. 내가 군단 병력의 훈련을 실시하고 실버우드에게 마법사 증원을 요청하 는 사이 소오드엔메직의 정세는 빠르게 돌아갔다. 초반에는 샤넬 넘버 식스와 닌텐콤 지팡고가 먼저 동맹을 맺는가 싶더 니 협상과정 막판에 SNKNET 선라이즈가 고조선 막무가내를 침공하는 바람 에 동맹은 깨어지고 말았다. 둘이 각각 넘버 식스와 지팡고에게 파병을 요청했기 때문이었다. 이때 섣부르게 동맹을 맺었다가는 전장에서 언제 다시 적으로 돌변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적에게 등을 보이는 꼴이 될 수도 있었다. 우리는 숨을 죽이고 정세를 관망했다. 너무나도 급격한 변화에 함부로 몸을 실었다가는 언제 어디서 당하게 될 지 모를 판국이었기 때문 이었다. "이런식이면 곤란한데... 예측을 할 수가 없어..." 혼잣말처럼 리파이가 말했다. 리파이의 잔뜩 긴장된 얼굴에서 나는 지 난 번 플레이를 마치고 들은 팀장의 말을 떠올렸다. 튀는 플레이로 눈에 뜨이지 않으면 안 된다... 아마 리파이의 고민도 그런 것이리라. 이런 급 박한 상황에서 완전한 안전을 찾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안 정적인 플레이를 하면서 팀의 인기도에도 기여할 수 있는 플레이를 찾아 내는 것 말이다. "YWCA 빅마마스!" 아톰이 소리쳤다. 나는 벽면의 액정화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중앙 진출 을 노리고 있던 YWCA 빅마마스의 군단이 국경을 넘고 있는 모습이 보였 다. YWCA 빅마마스의 군단은 검은 색 갑옷에 YWCA 로고가 그려진 방패와 긴 창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YWCA - 청소년의 순결은 사회의 순결'이라 고 씌여 있는 군단기가 펄럭였다. "제길! 녀석들이 중앙 진출을 노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는데...! 왜 미리 대비하지 못 한 거야!" "아톰. 일단 수습이나 할 생각 해. 병력 재정비하는데 한 시간 반이면 넉넉하다고 했지? 지금 삼 십분 지났으니까 한 시간 남았어. 불평할 시간 있으면 마우스나 한 번 더 클릭 해!" 별로 말이 없는 편이던 실버우드가 차갑게 소리쳤다. 아톰은 실버우드 를 한 번 노려보더니 '하긴, 별 수 없지' 하는 표정으로 병력 정비에 들 어갔다. 한 시간이면 한 국가를 멸망시키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이 말은 YWCA가 우리 손맥을 무너뜨리는 데 충분한 시간이라는 말이기도 했다. "젠장. 때가 안 좋아... 빅마마 녀석들한테는 딱 좋은 타이밍이겠지만 말이야. 저렇게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싸우고 있으니 빅마마 녀석들이 견 제해야할 세력이 별로 없는 셈이잖아? 아마 우리를 공격하는 데 총력을 기울일 생각일 거야" "부루터스. 하지만 우리를 이기면 세잔을 놓고 고조선하고 붙어야 할텐 데" "리파이, 모르는 말이야. 고조선하고 YWCA는 한 통속이라고. 아마 동맹 을 맺고 나머지를 하나씩 차례로 없애 나갈지도 몰라" 아톰 쪽으로 물자를 계속 지원하면서 부루터스가 말했다. "YWCA와 고조선의 성향은 비슷하다" "둘 다 보수적인 경향에 여론 형성에 영향력이 크다는 점도 비슷하다" "둘이 동맹을 맺을 수 있는 가능성은 아주 높다" "그렇게 된다면 두 팀이 소오드엔메직 온라인 세계의 승리자로 군림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우리를 제거하고 둘이 동맹을 맺을 수 있는 고리를 만들려는 작전일 가능성도 존재한다" 부루터스의 분석에 류와 켄이 거들었다. 덕분에 모두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막막한 기분이었다. "아톰. 정비하는데 걸린다는 한 시간 말이야, 좀 앞당길 수 없어?" "실버우드. 그런 말 할 시간 있으면 마우스나 한 번 더 움직여!" 아톰은 성난 목소리로 실버우드에게 소리쳤다. 그러고 보니 아톰과 부 루터스를 제외한 나머지들은 멍하니 국경쪽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나도 마찬가지 였고. 내 군단은 아직 훈련도 제대로 되지 않은 데다가, 사기치도 낮고, 그다 지 훌륭한 백부장들을 거느리고 있지도 못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무 모하게 국경으로 출전했다가는 어이없게 전멸할 게 뻔했다. 나라도 지금 내가 거느리고 있는 군단 같은 유니트를 만난다면 레벨 올릴 기회다 하고 무작정 달려들었을 거다. 물론 레벨 1의 십부장보다야 낫지만 여전히 나 는 풋내기에 불과한가보다 싶었다. "비류 님. 무슨 수 없겠어요?" 정신없이 국경 쪽으로 그나마 정비가 된 유니트들을 별동대로 편성해 내보내면서 리파이가 나에게 물었다. 리파이의 손이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는 게 보였다. 하지만 저런 식으로 조금씩 국경에 별동대를 내 보내 봤 자, YWCA의 좋은 표적이 될 뿐이었다. 물론 리파이는 시간을 벌어보자는 계산이 있었겠지만, 별동대들은 국경을 넘어 수도로 진격해 들어오고 있 는 YWCA의 기세에 눌려 그다지 큰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나라고 무슨 수가 있겠어? 나는 어깨를 으쓱 했다. 아톰에게 배운 제스 처였다. 하지만 내가 그런 제스처를 보이자 리파이의 얼굴에 당황을 넘어 서서 황당하다는 빛이 보였다. "비류 님. 여기서 프로 생활 끝내고 싶지 않으면 무슨 수를 내 봐요" 리파이가 너 같은 풋내기가 그따위 행동을 하다니, 하는 표정으로 말했 다. 나는 코를 긁적이면서 류와 켄에게 YWCA의 성향을 자세히 말해달라고 했다. 일단 지난 번 플레이처럼 시작하면 뭔가 좋은 결과가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에서 나온 행동이었을 뿐 별다르게 뾰족한 수가 있어서 한 행동은 아니었다. "YWCA는 지난 세기부터 있어왔던 종교단체의 정신을 계승하자는 취지로 새롭게 조직된 단체이다. 그러나 그 단체의 진짜 정신은 다 사라지고 여 론 조작을 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한 지 오래다" "Young Wisdom Christian Association의 약자이다" "언론에 호소하여 정당에 YWCA의 노선에 맞는 정책을 추구하도록 압력 을 넣는 일을 하곤 한다" "YWCA 정신은 모든 종교의 화합, 모든 인종의 화합, 모든 국가의 화합 이라는 통합 정부의 노선과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문제는 무조건 적으로 화합만 외치고 있다. 그건 화합이 아니라 획일이다" 이어서 류와 켄은 YWCA의 역사와 인원, 조직, 지부, 심지어 본사 전화 번호까지 줄줄이 이어나갔다. 그걸 알아서 나보고 도대체 뭘 어쩌란 말인 가 싶었지만 모두의 눈길이 나에게 모아져 있었다. 아, 눈부셔, 저 초롱 초롱한 기대의 눈빛들. 나는 뭔가 진지하게 생각하는 시늉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머릿속에는 프로 게이머고 나발이고 빨리 여기서 도망치고 싶다 는 생각이 가득했지만 말이다. 나는 세헤라자드가 들려주었던 이야기며, 어스넷 계시판에서 읽었던 이 야기며, 또 이진우 수사관이 했던 말에 심지어 지금까지 받았던 스팸 메 일 내용까지 모조리 다 떠올려 보았지만 아무런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비류. 전신으로 추앙 받는 국왕의 이름을 닉으로 쓰는 사람답게 좀 뭔 가 뾰족한 수를 내봐" 부루터스가 말했다. 부루터스의 얼굴에는 간절한 빛마저 보이고 있었 다. 하지만 나는 도저히 부루터스의 기대를 충족시켜줄 만한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눈앞이 캄캄했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고, 하기 싫 었고, 하지 않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새 YWCA의 군대는 수도 바로 턱밑까지 밀려들어왔다. 나는 그 모 습을 바라보면서 어이가 없었다. 이렇게 쉽게 무너지다니 말이다. 어쩌면 나는 모두를 실망시켰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도, 아버 지도, 나에게 아무런 기대도 걸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매달 생활비를 부쳐 주긴 하지만, 그래도 뭔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싶았는데... 갑자기 코끝이 매워지더니 눈물이 핑 돌았다. 어제의 성공이 오늘의 절 망으로 이어지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나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고개를 책상머리에 기대었다. 생각 같아서는 마우스를 입에 물고 콱 죽어 버리고 싶었다. 도대체 내가 이 자리에 있는 의미가 무엇일까. 내가 할 수 있는 게 도대체 뭘까. 어쩌면 나는 게임에 소질이 없는 게 아닐까. 재 능도 없이 운만 믿고 이렇게 프로의 세계에 뛰어드는 게 아니었다. 사실 내가 프로리그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게 다 세헤라자드의 덕이었지 내 능력은 아니지 않은가. 이진우 수사관이 했던 재수 없는 말이 떠올랐 다. 현실과 게임을 구분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 어쩌구 저쩌구... 어 쩌면 그게 나였는지도 모르겠다. 게임 속의 현실에서는 한 국가의 왕이고 수 만 병력의 사령관이지만 현실 세계에서는 그냥 평범한 열 일곱 살 짜 리 남자애에 지나지 않는 것이 바로 지금의 나다. 모든 게 다 어리석게만 여겨졌다. 내가 프로 게이머의 꿈을 가졌던 일이, 또 세헤라자드를 만난 일이, 정보를 수집한답시고 멍청하게 어스넷을 싸돌아 다녔던 일이, 또 내가 태어났다는 사실조차... "도대체 난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걸까..." 나는 멍하니 허공을 주시하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어떤 의도를 가지 고 한 말이었다기 보다는 그저 내 속에 있는 것을 밖으로 털어 내는 느낌 이었다. 말하자면 답답한 마음에 죽고 싶다고 중얼거리는 노인처럼 말이 다. "비류! 뭘 어떻게 한 거야?" 부루터스가 소리쳤다. 별로 목소리를 높이는 일이 없는 부루터스가 소 리를 지르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내가 뭘 잘못 건드렸나보다 싶어 서 주변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나는 아무 것도 건드리지 않았다. 그냥 의 자에 주저앉아 있었을 뿐이었다. "저, 저건... 뭐야?" 아톰이었다. 다들 뭔가 놀라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도대체 왜 그러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그때, 전투 효과음이 들려왔다. 수도가 함락 당하 는 모양이었다. 나는 액정화면이고 모니터고 보고 싶지가 않았다. "비류 님...이...이거 어떻게 한 거에요?" 리파이가 눈에 힘을 잔뜩 주고서 나를 바라보았다. "제가 한 거라곤 여기 앉아서 신세 한탄이나..." "마법의 말이라도 외운 거에요?" 리파이의 말에 나는 액정화면을 바라보았다. 나는 처음에 프로그램에 버그라도 생긴 줄 알았다. 화면 한 가운데에 시커먼 구멍이 뚫린 듯 보였 기 때문이었다. 누가 모니터에 돌이라도 집어던진 걸까? 하지만 그건 아 니었다. 버그가... 불을 뿜어 도시를 불태울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맙소사! 저건 드래곤이잖아! 망할 놈의 MS사 결국 소드엔메직에도 용 을 풀어 놓았군. 내가 여기 있는 걸 눈치챈 거야!" 부루터스는 이렇게 말하면서 책상 밑으로 숨었다. 아톰은 입을 쩍 벌 리고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고 그건 리파이와 실버우드도 마찬 가지였다. 류와 켄은 분석이 불가능한 상황에 부딪치자 어떻게 해야 좋을 지 모르겠는지, 원주율도 세지 않고 화면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돌 아가는 상황을 보니,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는 질문은 정작 내가 던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N:김상현 #10112/10199 ━━━━━━━━━━━━━━━━━━━━━━━━━━━━━━━━━━━━━━━━ 제 목:[탐그루] 영혼의 에뮬레이터 4 82 관련자료:없음 17/17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1-18 00:33 조회:763 탐그루 # 마법은 마음이다 - 마음은 칼이다 # 화면에는 새까만 드래곤이 그 거대한 날개를 펼치고 있었다. 몸집은 웬 만한 크기의 성과 비슷했고, 날개를 펴자 성을 덮고도 남을 정도였다. 그 검은 드래곤은 온몸의 비늘을 날카롭게 세우고 사방으로 두리번거리며 파 괴할 대상을 찾고 있었다. 붉게 빛나는 눈동자가 모니터 쪽을 향하자 꼭 나를 노려보는 것만 같았다. 소오드엔매직 시리즈에서 한 번도 출현했던 적이 없는 생물체였다. "버그?" "아니면 소오드엔메직 소프트에서 깜짝 쇼라도 준비한 건가?" "저것 봐! YWCA 기사단을 다 잡아먹고 있어!" 아톰의 말은 사실이었다. 용은 YWCA 기사단 유니트들을 하나씩 하나씩 먹어치우더니 이제는 천천히 움직여 혼전 중에 있는 닌텐콤 지팡고 쪽으 로 가고 있었다. 그것은 날아가지 않았다. 어떤 유니트도 낼 수 없는 빠 른 속도로, 성곽을 뚫고, 산을 뚫고, 강 위를 걸어서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책상 위의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알 수 없는 상황이군요. 용이 나타나다니. 이야말로 미증유의 사건 이라 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습니까, 나이트무 버?" "온라인 중계방송 초창기에 헤커가 온라인 상에 침입해 플레이어들을 무차별로 살해하고 도주한 사건은 있었습니다만... 그 헤커도 분명히 프 로그램에 등장하는 케릭터를 에디트 했지, 이렇게 완전히 등장하지 않는 케릭터로 일을 벌이지는 않았습니다. 게다가 그 사건 이후로 모든 온라인 게임에 해커를 방지하기 위한 해커 방지 시스템이 장착되어 그런 불상사 는 아직까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이거, 도저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는지 알 수가 없군요. 저것 보십시오. 이동은 전혀 지형에 구애받지 않고 완전히 자유롭게 하고 있는데, 유니트들에게는 피해를 입히고 있지 않습 니까? 만약 저게 어떤 해커의 짓이라면 대단히 놀라운 솜씨를..." "...예. 지금 소오드엔메직 사에서 잠시 게임을 중단하겠다는 통보가 있었습니다. 그럼 여기서 잠시 전하는 말씀 듣고, 계속 중계방송을 이어 드리겠습니다" 음악소리가 들리더니 광고가 이어졌다. 트렌스파워가 연결되어 있지 않 아서 무슨 광고인지는 알 수 없었다. 브라질리아 공화국 말은 모르니 까... 그런데 문제는 그게 아니라, 나이트무버도 모르는 일이 지금 게임 상에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액정화면이 닫혔고, 나는 동료들의 얼 굴을 바라보았는데, 동료들도 어리둥절한지 서로의 얼굴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비류 님이 뭐라고 중얼거리니까 저 용... 같이 생긴 게 나타났어요" "쓸데없는 소리 좀 하지 마, 리파이. 저게 바로 MS사에서 심혈을 기울 여 만들어낸 어스넷 상의 인공 생명체, 용이야! 용! 이제 다 끝장이야! 손맥 암행어사는 오늘로 망하는 거야! 저것들이 여기까지 밀어닥치다 니..." 부루터스가 부상을 입고, 아이템도 다 떨어진 상태에서 몬스터들에게 완전히 포위 당한 검사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부루터스. 지금 저 용은 어찌 되었건 우릴 도와 준거잖아요. YWCA는 군단 하나를 순식간에 잃었다구요. 우리는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 았구요" 아톰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적어도 저 용이 우리에게 원한이 있다던가 한 건 아니라는 건 분명했다. "그건... 틀림없는 속임수야! 우리를 노리지 않았다는 것만 봐도 뭔가 우리를 노리고 있다는 꿍꿍이가 있는 거 아니겠어? 아톰, 네가 몰라서 그 래. 그 MS사 녀석들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녀석들인지. 아마, 다 죽여버릴 생각으로 그랬는지도 몰라. 전부 다 죽인 후에 우리를 죽이면 우리를 죽 이려고 했다는 의도를 숨길 수 있으니까. 맞아. 그게 MS사의 일 처리 방 식이야. 우린 완전히 당한 거야!" 부루터스는 이제 완전히 망상에 사로잡힌 모양이었다. 이렇게 말하고는 책상 밑으로 들어가더니 나올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 모습에 나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지금 분위기는 마음놓고 웃을 수도 없는 노 릇이어서, 나는 입을 가리고 고개를 숙였다. "자, 이제 어쩌지?" "기다려 봐야지, 리파이. 아마 소오드엔메직 사에서 무슨 조치가 있을 거야" "전에 네트에 바이러스가 침입해서 게임이 중지됐을 때 어떻게 했었 지?" "그날 경기 내용은 무효가 됐지, 아마. 뭐, 잘 됐네" "실버우드. 잘 되긴 뭐가 잘됐다는 거야? 오늘 망하나 내일 망하나 그 게 그거 아니야?" "잠깐. 아직 상황이 정리되지는 않았지만, 이것만큼은 분명한 것 같아 요. 먼저 저 용이 뭐든 간에 이건 순전히 사고라는 사실, 그리고 소오드 엔메직 온라인 사에서 발표가 있기 전까지는 어떻게 될 지 알 수 없다는 사실 두 가지는 분명한 것 같아요" "그래. 리파이 말이 맞아. 그냥 앉아서 기다려 보자구. 어떻게든 해결 이 되겠지. 사실 우린 손해 볼 거 없잖아? 어차피 망하던 중이었으니까" "그 주둥아리가 망해버렸으면 좋겠다, 아톰" 실버우드는 곱지 않은 눈으로 아톰을 흘겨보면서 말했다. 나는 액정 화면이 있는 벽면을 바라보았다. 화면은 소오드엔메직 사에 서 송출을 차단시켰는지 푸른색 화면만 떠있었다. 나는 용을 생각했다. 세헤라자드의 말에 따르자면 어스넷을 돌아다니는 생명체가 분명히 있기 는 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 생명체는 도대체 정체가 뭘까? 진짜 영혼이 에뮬레이션 된 생명체? 아니면 부루터스의 말처럼 누군가가 만들어낸 인 공 생명체?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 내 눈으로 똑똑히 본 저 용, 드래 곤도 해커의 장난인지, 아니면 인공 생명체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혹시 용의 영혼을 에물레이션 한 것은 아닐까? 설마 그럴리가? 용이 실재 한다 고 믿을 나이는 벌써 지났다. 화면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방송은 다시 시작되었다. "예, 다시 스튜디오입니다. 나이트무버. 지금 소오드엔메직 온라인 측 에서는 아무런 답변도 하지 않고 있는데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글쎄요. 아마 해커의 침입이라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것 같습니다. 그밖 에는 어떻게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여지가 없으니까요" "그렇군요. 지금 저희 어스넷 중계 계시판에는 사고와 관련된 글이 수 없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가만있자... 이 중에 하나를 읽어보지요. '어떤 해커의 장난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만한 능력을 가진 해커라면 그런 장난 안하고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을 텐데' 하고 의견을 보내주신 분이 계십 니다. 또 이런 의견도 있군요. '어스넷을 돌아다니는 생명체가 있다는 소 문이 돈 지 꽤 오래됐는데, 어쩌면 오늘의 사건은 그 소문을 사실로 입증 해 주는 증거가 될지도 모른다' 하하하. 노파심에서 말씀드리는 거지만 지금 제가 읽어드리는 의견은 순전히 계시판에 올리신 분의 사견일 뿐 저 희 방송사의 의견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어디 또 보면... 압도적 으로 어스넷에 사는 생명체가 아니냐는 생각이 많군요. 나이트무버. 어떻 게 생각하십니까?" "제가 전문 프로그래머는 아니지만 생명을 가진 프로그램이라는 말은 과학적으로 성립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프로그램은 아무리 복잡해도 프로그램일 뿐입니다. 스스로 성장할 수도 없고, 스스로 사고할 수 있는 능력도 없지요. 프로그램은 그저 주어진 자극에 반응을 보이는 전자 신호 에 불과하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될 겁니다. 그리고 사실 생명과 프로그램 의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복제와 번식의 차이일 겁니다. 프로그램은 아무 리 그 수가 증식된다고 해도 완전히 똑같은 프로그램만 나오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지요. 단 하나의 개체가 태어난다고 해도 모체와 구별되지 않습 니까? 미약한 지식이지만 거기에서 변화와 적응을 통해 진화가 이루어진 다고 알고 있습니다" "예, 그렇군요. 하지만 인간도 복제 인간이 탄생하고, 또 스스로 변화 하는 프로그램도 등장하지 않았습니까?" "저도 그런 기사를 본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스스로 변화하는 프로그 램이라고 해도 기본적으로 프로그래밍 된 그대로 반응하는 것에 지나지 않고, 복제인간의 경우, 완전히 같은 사람들이 나오리라는 예상을 깨고 모두 다른 개체가 발생했다는 비공식 발표도 있었습니다" "그 말씀은 프로그램도 복제를 통해 다른 개체가 생길 수 있다는 말씀 이신가요?" "하하하, 이해를 잘못하신 것 같군요. 저는 생명과 프로그램의 차이점 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 얘긴 그만 두지요. 제가 무슨 생명 공 학자나 컴퓨터 윤리학자도 아니고요. 전 그저 게이머일 뿐입니다. 비전문 가인 제가 말 한 번 잘못했다가는 종교단체나 과학 연맹에서 제 아이디로 폭탄 메일을 보낼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알겠습니다, 나이트무버. 지금 어스넷을 검색하고 있는 데 말입니다, 이런 글을 쓰신 분도 계시군요. '때가 왔도다. 일곱 머리를 가진 용의 등 장으로 세상은 그 마지막 날을 보게 되리니. 종말의 날은 아무도 모르게 도둑같이 오리라' 하하하, 이거 쓰신 분께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몇 세기 가 지나도 종말론은 항상 있는 모양입니다" "역시 비공식적인 사견입니다만, 전 종말론을 사기라고 생각합니다. 지 구가 내일 망해도 사과나무를 심는 심정으로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저는 이런 사고방식이야말로 게이머가 가지고 있어야 할 최고의 덕목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예. 현역시절 나이트무버는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하 는 플레이를 보여주신 걸로 유명하지요. 팬의 한 사람으로서 그때 플레이 를 참 좋아합니다만..." "하하하. 감사합니다. 이렇게 중계 방송 중에 팬을 만나 뵙게 될 줄은 몰랐군요. 그리고 하나 덧붙이자면, 아마 종말론의 교주 분들은 신도들의 돈을 모아 현금이나 채권을 사서 가지고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자, 그럼 어떻게 된 일인지 다시 한 번 느린 그림을 보면서 말씀드리 지요..." 공식적인 발표가 없으니 아나운서나 나이트무버나 별로 할 말이 없는 모양이었다. 물론 듣기에 재미는 있었지만 게임과는 별 상관없는 말이었 다. 하긴, 이런 상황에서도 말이 끊기지 않게 하는 거야말로 아나운서와 해설자의 능력인지도 모른다. 얼마나 지났을까. 류와 켄의 숫자놀음에 나도 모르게 동참하고 있을 무 렵 (내가 원주율을 외운다는 말이 아니라, 다음에 나올 숫자가 뭘까 속으 로 생각해 보았다는 말이다)이 되자 공식 발표가 나왔다. 일단 오늘의 플 레이는 전부 무효로 돌리며, 그 원인은 해커의 난입이었다는 게 발표의 요지였다. 결국 그말은 소드엔매직 온라인 측에서는 아직도 그 원인을 파 악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멍청한 놈들. 보고도 모른단 말이야? 어떻게 저게 헤커의 장난일 수가 있어! 이건 다 MS사의 음모야, 음모라구! 어스넷을 먹어치운 다음 지구 전체를 삼킬 작정이야. MS는 빅브라더라가 될 야심을 갖고 있는 거야. 아... 우리는 모두 다 MS사의 노예가 될 거야. 틀림없어!" 부루터스는 책상 밑에서 큰소리로 절규했지만, 리파이는 그런 말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부루터스의 저런 처절한 절규도 드문 일은 아닌 모 양이야. 나를 제외하고는 다들 신경도 쓰지 않고 있으니 말이다. "다음 경기 때 대비책이나 좀 마련해야겠어요. 실버우드하고 제가 전체 적인 작전 계획을 만들어 올 테니까 아톰은 부루터스와 함께 부대 정비를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는 방법이나 연구해 보세요. 그리고 부루터스. 이 제 다 끝났으니까 책상 밑에서 나오고요. 여긴 안전해요, 알잖아요?" 이렇게 말하는 리파이는 꼭 자상한 어머니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저런 어머니가 있었던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는 늘 말이 없고, 내 게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는다는 말만 했다. 나 때문에 망쳐진 자신의 운 명 운운하시면서... 제길. 왜 또 코끝이 찡해지는 거지? 지난 번 경기 때와 마찬가지로 리포터가 들어와 인터뷰를 했다. 리포터 는 어제 본 빨간 색으로 염색한 파마머리의 그 리포터였다. 다만 입고 있 는 옷은 몸의 윤곽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반투명 원피스로 바뀌어 있었다. "오늘 경기에서 좀 놀라셨을 것 같은데요. 의외의 일이 벌어졌으니 말 이죠. 앞으로 대책은 있으신가요? 주장으로서 한 말씀 해 주시죠" "별로 할 말이 없네요. 파워 볼 경기가 비 때문에 몰수당했다고 해서 다음 번 경기에 비에 대한 대비책을 세우진 않겠지요. 그저 팬 여러분들 께서 다음 경기를 지켜봐 주시길 바랄 뿐입니다" 리파이는 이렇게만 대답하고 책상 밑에서 간신히 기어 나온 부루터스를 데리고 스튜디오를 빠져나갔다. 그 뒤를 동료들이 따랐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N:김상현 #10113/10199 ━━━━━━━━━━━━━━━━━━━━━━━━━━━━━━━━━━━━━━━━ 제 목:[탐그루] 영혼의 에뮬레이터 4 83 관련자료:없음 18/18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1-18 00:34 조회:654 탐그루 # 마법은 마음이다 - 마음은 칼이다 # 선수 대기실에선 팀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경기, 아주 실망이에요. 리파이. 이런 식으로 나가다간 우리 팀 해체는 아주 시간 문제겠어요" 별 감정 없는 말투였지만 가슴이 다 철렁 내려앉는 말이었다. 모두의 얼굴이 굳어졌다. "예. 시청률은 높았어요. 하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지요. 중요한 건 해커가 들어왔다는 사실이 아니라 팀 플레이가 형편없었다는 거에요" "...예" 아무도 대답이 없자 주장으로서 져야할 의무라고 생각했는지 리파이가 대답했다. "하지만, 팀장 님. 오늘 플레이는 지금 현재 병력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최선의 플레이 였다고요" "아톰. 최선은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최상의 플레이죠" "아니, 지난번에 다 죽게 된 걸 겨우 살려놓은 일 개 군단으로 뭘 어쩌 라는 거예요?" "내가 기대하는 건 멋진 플레이에요" "가끔은 멋지게 질 수도 있는 거 아니에요?" "멋지다는 말은 이겼을 때에만 붙일 수 있는 말 아닌가요?" 팀장의 목소리는 냉정했다. "다음 경기 때 두고 보겠어요. 나이트무버의 오늘 해설 못 들었어요? 최선을 다하다 보면 최상의 플레이가 나오기 마련이라는 말이던데요. 맨 주먹으로 싸운다는 정신으로 한 번 해 보세요. 틀림없이 최상의 결과가 나올 거예요. 잊지 말아요. 헝그리 정신! 안그러면 정말 헝그리하게 살게 될 거에요" 이 말은 꼭 최상의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최선을 다하지 않은 걸로 알 겠다는 말처럼 들렸다. 다들 고개를 숙이고는 있었지만 잘 들어보면 이를 가는 소리가 들릴 것 같은 표정들이었다. 류와 켄은 멍하니 팀장 얼굴을 바라보고만 있었지만 말이다. "내일은 경기가 없고, 모래 저녁 여덟 시까지 오세요. 모래 밤 열 두 시부터 뉴델리 중계가 있어요. 알죠? 뉴델리가 그 시간이면 골든 아워라 는 거? 하루의 여유가 있으니 연습을 확실하게 해오리라고 믿어요. 좋은 결과 기대하겠어요" 이 말을 남기고 팀장은 선수 대기실에서 나가버렸다. "빌어먹을. 나이트무버의 말을 어떻게 그렇게 해석할 수가 있지? 스포 츠 맨 정신은 어디로 간 거야?" "실버우드. 스포츠 맨 정신은 돈으로 사고 파는 거야" 역시 아톰다운 말이었다. "지원은 하나도 안 해주면서 바라는 건 많아. 고조선 막무가내처럼 막 무가내 정신으로 다른 팀 병력을 다 사서 모으면 누군들 그런 플레이 못 하겠어?" 실버우드는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었다. "스카우트 관행은 파워 볼 리그에서도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어, 실버 우드. 게다가 세상 어디를 간들 돈으로 안 되는 일이 있겠어?" "아톰. 제발 그런 소리 좀 집어 치워. 그 주둥아리 당장 찢어버리기 전 에!" 당장이라도 양손으로 아톰의 입을 찢어버릴 기세로 실버우드가 말했다. 나는 좀 분위기를 바꿔야 겠다 싶었다. "리파이 님. 그런데 왜 팀장은 선수 대기실에서 꼭 그런 얘기를 하는 거죠?" 서로 욕하는 것보다는 팀장을 욕하는 게 낫겠다 싶어서 나는 이렇게 화 제를 돌려보았다. 원래 어떤 나라든 서로 치고 받고 싸우다가도 외적이 나타나면 뭉치기 마련이니까. "아마 속으론 스튜디오로 당장 쳐들어 가서 뭐라고 하고 싶었겠지만 생 방송 중이었으니까 그러고 싶어도 못그랬겠지. 그 멍게 얼굴이 방송 나갔 다간 시집은 다갔다고 생각하고 있을 걸, 아마. 하긴, 그 얼굴에 화장품 으로 얼굴에 떡칠을 하지 않으면 남자 눈에 들어오기나 하겠어?" 아톰의 말에 모두들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팀장의 던진 말의 충격이 아직 덜 가셨는지 그다지 큰 웃음소리들은 아니었다. "자. 그럼 집에 가서 좀 쉬고 리파이가 말한 대로 준비 좀 해 오자구. 류하고 켄은 내가 볼께. 어서들 가봐" 부루터스가 말했다. 아직도 MS와 용의 충격이 가시지 않았는지 얼굴에 근심이 가득해 보였다. "너무 걱정 말아요, 부루터스. 다 잘 될 거에요. 여긴 안전하니까" 리파이가 부루터스의 등을 다독거리면서 말했다. 부루터스의 얼굴이 당 장이라도 울 것처럼 변했다. 하지만 슬픈 얼굴은 아니었다. 벌겋게 달아 오른 부루터스의 얼굴은 오히려 분노로 가득 찬 얼굴이었다. "젠장... 이렇게 되면... MS 녀석들...내가 꼬리를 잡겠어...두고 봐...증거를 잡아 낼 테니..." 두 주먹을 꼭 쥐고서 부루터스가 중얼거렸다. 나는 선수 대기실에서 나 가면서 그 모습을 뒤돌아보았다. 그냥 피해망상에 시달리는 환자라기 보 다는 당장 살인이라도 저지를 것 같은 얼굴이어서 나는 그 모습이 자꾸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오늘은 시간이 좀 되겠지요?" 건물 밖으로 나갔을 때, 리파이가 웃으면서 내게 말했다. 나는 빨리 돌 아가 세헤라자드에게 탐그루의 뒷 얘기를 듣던가, 아니면 그냥 자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또 한 번 거절하자니 주장에 대한 예의가 아니겠다 싶었다. "예... 그런데 뭐 특별한 일이라도..." "아뇨. 그냥 신입 팀원한테는 다 제가 먼저 한턱을 내 왔거든요. 어때 요? 제가 잘 아는 전통 음식점이 있어요" "아직 아침인데..." "아침이라고 음식점이 일 안하나요? 빼지 말고 오늘은 같이 해요. 그렇 게 시간 많이 뺏지 않을게요" 나는 승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렇게 눈웃음을 치면서 자신을 바라보 는 미인의 제의를 거절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아무리 동성연애자라고 해 도 말이다. 리파이는 실버우드에게 먼저 가라고 손짓한 뒤, 나를 식당으 로 안내했다. 식당은 '춘향전2'에나 나올 법한 한옥 집이었다. 벽면이 반투명 유리로 되어있지 않고 그냥 흙벽으로 되어 있었다면 박물관에 온 듯한 느낌이 들 만큼 복고풍의 건물이었다. 지붕의 기와하며, 나무로 된 기둥하며 (물론 진짜 나무는 아니겠지만), 벽에 걸려 있는 한지 위에 붓글씨로 그린 대나 무 그림까지 모든 것이 다 그랬다. 실내는 여러 개의 독실로 되어 있었다. 메니저가 우리를 그 중 하나로 안내했고, 나와 리파이는 신발을 벗고 방으로 들어갔다. 우리가 방석을 깔고 자리에 앉자 남자 종업원이 푸른색 전통 한복을 입고 주문을 받으러 왔다. 따뜻한 기운이 바닥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따뜻하기는 했지만 맨바 닥이라 몸을 가누기가 좀 불편했다. "뭐 드실래요, 비류 님?" "전통 음식은 잘 몰라요. 매운 것만 아니라면 먹어 보지요" 방석은 익숙치가 않아서 나는 이렇게도 앉았다가 저렇게도 앉아 봤다가 하면서 대답했다. 하지만 어떻게 앉아도 다리가 금새 저려왔다. 옛날 사 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이런 자리에 앉아 식사를 할 수 있었을까? "그럼 불고기 백반 드셔보신 적 있으세요? 맵지도 않고 먹을 만 할 거 에요" "전에 먹어 본 적 있어요. 그걸로 하지요" 나는 무릎을 꿇고 앉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이 편이 다리는 좀 덜 저렸기 때문이었다. 사실 불고기는 냉동 식품으로 밖에는 먹어보지 못 했다. 이런 식당에서 진짜 구워먹는 불고기는 어떤 맛일까 궁금했다. "그렇게 어려워하실 필요 없어요. 겨우 제가 세 살 더 많은데요" 내가 무릎을 꿇고 앉으니 그런 생각이 드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냥 이 편이 편하다고 말했다. 사실, 리파이도 치마를 입고 있어서 무릎을 꿇고 앉아있었다. "그럼 스무 살이에요?" "예. 프로에 입문한지는 육 년이고요. 사실 경력으로 보나 실력으로 보 나 주장 자리에 앉을 건 아니었는데, 손맥 소프트에서 워낙 좋은 선수를 사오는 걸 꺼려서요. 투자라고는 도대체 모르는 사람들이에요" "예. 잘 모르긴 하지만 그런 것 같더군요" 나는 팀장의 그 차가운 목소리를 떠올리면서 말했다. "사실 경력으로 보자면 부루터스 님이 주장이 되어야 겠지만... 좀 문 제가 있거든요, 그분. 지금까지 봐서 알겠지만..." 설명을 피하긴 했지만 그건 나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MS사 이야 기만 나오면 벌벌 떠는 사람을 주장 자리에 앉힐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그분 왜 그러시는 건지 아세요?" "원래 부루터스 그 분, MS사에서 게임 프로그래머였어요. 그러다가 MS 사 회장이 갈리면서 중간 직원들을 정리할 때 명예 퇴직을 하신 모양이에 요. 아마 그 때문에 이혼도 하게 된 것 같고요" 더 이야기를 듣지 않아도 나는 부루터스가 어쩌다가 그렇게 됐는 지 알 수 있었다. 정리 해고라... 흔한 일이긴 하지만 비극적인 일인 것도 사실 이었다. 부루터스의 심정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래도 게이머로 재기하셨으니 다행이네요. 원래 게임 프로그래머였군 요" "그렇게 들었어요. 한창 때에는 트랜스파워 초기 버전 프로그래밍에도 참가했었다고 자랑을 늘어놓곤 하셨지요. 이제는 그저 게이머 일을 하는 데 만족하고 계신 모양이에요. 밖으로 나가는 걸 두려워하시긴 해도... 좋은 분이에요. 실력도 있구요. 특히 프로그램 시스템을 이해하는 건 어 느 프로 게이머 못지 않다고 생각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분노에 가득 차서 벌겋게 달아오른 부루터스의 낯빛과 꼭 쥔 두 주먹이 떠올랐다. 잠시 후, 이번에는 소매가 짧은 개량 한복을 입은 여자 종업원이 밑반 찬을 가지고 들어왔다. 봉인이 붙어있는 물병과 함께 말이다. 꽤 비싼 식 당인가 보구나. 프랑스에서 직수입한 레비앙 생수의 상표를 보자 이런 생 각이 들었다. 하긴, 요즘 어디를 가도 국산 생수를 파는 곳이 드물긴 하 다. (아무리 국산 생수라도 겉에는 레비앙이나 알로하 같은 외국 상표를 붙인 병에 내오곤 하니까 말이다) 아주 가난하거나 아주 목이 마르지 않 다면 국산 생수를 마실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으리라. "MS사가 독점의 이점을 악용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사람을 괴롭히는 줄은 몰랐네요" "예. 어떻게 보면 사실 인터넷 시절부터 예견되어 왔던 일이었는지도 모르지요. 모두들 어어 하고 방치하다가 이제는 MS사의 독점을 막기에는 역부족이 되었죠" 리파이는 레비앙 생수를 컵에 따라 입술에 적시면서 말했다. "인터넷이 어스넷 전신이지요?" "예. 그때도 어스넷의 60% 이상을 미국이 차지하고 있었다고 들었어요. 그리고 실제로 주소를 제공하는 일은 미국에서 했었으니까, 사실 어스넷 이나 인터넷이나 그게 그건지도 모르겠네요" "그러다가 MS사가 새로운 망을 개발해서 독점으로 운영하기 시작했지 요?" "예... 흔히 말하는 써클 프로젝트 덕분이었지요" 써클 프로젝트란 MS사에서 쏘아 올린 66개의 인공위성을 말하는 거였 다. 66개의 인공위성으로 적도를 완전히 빙 둘렀기 때문에 써클 프로젝트 라는 별명이 붙었다고 한다. 그 인공위성이 만들어내는 전파 통신망으로 전 세계를 연결한 것이 오늘의 어스넷이다. "그래서 MS사는 자연히 독점을 하게 된 거지요. 물론 수많은 해커들과 프로그래머들이 독점에 반대하면서 MS사 시스템에 침입해 해킹을 하려고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갔지요" "보안 시스템 개발에 돈 깨나 들였다고 하던데요" "돈도 돈이지만 좀 쓸만한 프로그래머다 싶으면 MS사에서는 돈으로 다 사들였죠. 해커 출신이든, 아니면 공게 소프트웨어 제작자든... 아시잖아 요. 돈이면 안 되는 게 없다는 걸" "어쩐지 아톰 같은 말투군요" "그런가요?" 리파이는 이렇게 말하면서 웃음을 지었다. 어쩐지 냉소 같아 보이긴 했 지만 그렇다고 해서 리파이가 예뻐 보이지 않은 건 아니었다. 이런 미인 이 동성애자라니 안타까웠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N:김상현 #10114/10199 ━━━━━━━━━━━━━━━━━━━━━━━━━━━━━━━━━━━━━━━━ 제 목:[탐그루] 영혼의 에뮬레이터 4 84 관련자료:없음 18/18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1-18 00:35 조회:765 탐그루 # 마법은 마음이다 - 마음은 칼이다 # 다시 종업원이 들어와 불판과 고기를 가지고 왔다. 고기에서 나는 단내 가 코를 찔렀다. 그러고 보니 배가 몹시 고팠다. "좀 우울한 얘기를 했네요. 식사 후에는 좀 재미있는 얘기를 하죠" "게임 얘기요?" "게임 얘기는 좀 접지요. 집에 돌아가면 순전히 게임 생각만 해야 할 테니까요. 그냥 세상 돌아가는 얘기나 좀 하죠" "정치와 종교 얘기만 아니라면 저도 좋아요. 소화 안 되는 건 딱 질색 이거든요" 내 말에 리파이는 웃음을 터트렸다. 누가 비싼 돈 내고 식당에 와서 식 사하면서 정치나 종교 얘기를 할까? 종업원이 불판 위에 고기를 올려놓고 굽기 시작했다. 소매가 짧은 한복 을 입고 있는데는 이유가 있는 모양이었다. 긴소매로는 고기를 굽기 불편 할 테니 말이다. 고기가 익자, 연기가 올라오면서 맛 있는 냄새가 풍겼 다. 냄새를 맡자 배가 더 고파진 느낌이었다. 어떤 고체 연료를 사용하는 지는 몰라도 불길이 아주 세서, 고기는 금새 다 익었다. 종업원은 다 익 은 고기를 작은 접시에 담아 내려놓고는 고개를 숙이고 물러갔다. 불고기는 예상했던 것 보다 훨씬 달고 맛있었다. 전에 먹어보았던 냉동 불고기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였다. 시원한 맛이 나는 동치미 국물도 늘 먹던 냉동 도시락에 딸려 나오는 국물에 비하면 아주 별미였다. 한식 은 만드는 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고 과정이 복잡해서 가정에서 만들어 먹기에는 부담이 가긴 하지만, 가끔씩 이렇게 직접 손으로 만든 걸 먹는 것도 좋겠다 싶었다. (사실 그걸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였다. 다만 시간 이 없고 돈이 없는 게 문제일 뿐이지) 식사가 끝나자 식혜가 후식으로 나왔다. 캔 식혜와는 달리 너무 달지도 않았고 뒷맛이 깔끔했다. 나는 창 밖을 내다보았다. 밖에서 보기에는 안 이 보이지 않지만, 안에서는 밖이 보이도록 만들어진 반투명 유리였다. 나는 아주 잠시, 어스폴 지하 취조실 생각을 했다가 금새 지워버렸다. 비 싼 돈 내고 고급 요리 먹은 다음에 소화 안 되는 생각이나 하는 건 좀 바 보 같은 짓 아닐까. "리파이 님은 부자 신가봐요. 이런데 자주 오세요?" "자주는 아니지만 한 달에 한 번은 오지요" "게이머 연봉으로는 힘들지 않아요?" "사실 다른 일도 좀 하죠" "뭔지 여쭤봐도 실례가 되지 않을 지요" 식혜를 조금 더 마시면서 내가 말했다. "가끔씩 프로그램을 만들어요. 정식 직원은 아니고 여기저기서 오는 일, 프리랜서로 하고 있지요. 간단한 프로그램을 만드는 일도 하고, 디버 깅도 좀 하고... 잡다한 일이에요" 의외였다. 리파이가 프로그래머 일도 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해봤기 때문 이었다. "대단하시네요! 프로그램에도 조예가 깊은 줄 몰랐어요. 정말 멋저요" 멋있으면 뭐하나, 그림의 떡인데. 식혜를 다 마시고 나자 와인이 한 잔씩 나왔다. 푸른 한복을 입은 남자 종업원이 나에게 잔을 주더니 따라주었다. 분명히 리파이가 연장자고 나 는 손님의 입장이었지만 전통 음식점이라 남자가 먼저 맛을 봐야 하는 모 양이었다. 나는 언젠가 아버지에게 와인 마시는 법을 배웠던 기억을 더듬 어 향을 맡아보고는 입술에 살짝 와인을 적신 다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는 맛과 향을 확인했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여야 하는 거지만 나는 종업원이 빨리 나가달라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인 거다. "썩 잘하시는 데요? 비류 님이야말로 이런 곳에 자주 오시곤 하나 보지 요?" "여렸을 적에 좀 배워둔 적이 있지요" 열 일곱 살 짜리가 무슨 어린 시절이 있었겠냐만, 그래도 난 이렇게 말 했다. "그러고 보니 미성년자 아니에요? 그렇게 와인을 마셔도 되나?" "아버지 말씀에 '열 넷이 넘으면 남자고, 남자는 술, 담배, 여자를 멀 리 할 수가 없다'고 하셨어요" 물론 아버지 말씀에 동성애자 여자는 제외라는 말도 있었지만 그 말은 차마 꺼내지 못했다. 하지만 내 말이 재미있었는지 리파이는 웃음을 터트 렸다. "술, 담배, 여자? 비류 님 열 일곱 살 아니에요?" 악의 없이 한 말이었겠지만 어쩐지 어리다고 깔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었다. "중세 때는 한 사람 몫을 충분히 할 수 있는 나이였어요. 그때는 전쟁 이 있었고 지금은 강도들이 들끓으니까 비슷한 거 아닌가요?" 나는 이렇게 내 언짢은 기분을 우회적으로 표현했다. "아, 죄송해요, 비류 님. 제 말뜻을 좀 오해하신 것 같네요. 제 말 은... 아버님이 참 재미있는 분이라는 뜻이었어요" 리파이가 말을 바꾸었다. 그럼 그렇지. 아무리 미성년자라고 해도 프로 끼리는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법이다. (이것도 사실은 언젠가 아버지가 한 말이었지만) "아버님은 뭐하시는 분이세요?" "모험가에요" "모험가? 탐험가하고 비슷한 직업인가요?" "비슷하지요. 전 세계를 돌아다닌다는 점에서는요. 하지만 모험가 쪽이 훨씬 위험하고 보수도 더 많지요. 인공위성이 뜬 세상에 탐험가는 별 소 용이 없지만 모험가는 아직도 필요하다고 말씀 하시곤 했죠. 사실 무슨 모험을 그렇게 많이 하는 지 전 잘 모르지만요" 정말 나는 아버지가 어떤 일을 하는지 잘 모른다. 내가 아는 건 아버지 가 주로 내전이 일어나고 있는 지역으로 일을 찾아 떠났고, 어머니는 늘 그걸 못마땅하게 생각했다는 것뿐이다. "어쩐지 근사하게 들리는 군요. 모험가라... 어떤 일을 하는 걸까요?" 아마 모험가가 하는 일은 정보 수집 같은 일일 것이다. 어쩌면 청부 살 인이나 테러를 할 지도 모르고. 하지만 나는 그런 말을 입밖에 내지는 않 았다. 나는 화제를 바꿔야 겠다고 생각했다. 아버지 생각 역시 소화가 잘 되는 생각은 아니니까. "아까 중계방송 때 들은 얘긴데, 어스넷을 돌아다닌다는 생명체에 대해 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리파이 님?" "글쎄요. 꽤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해요. MS사라면 그러고도 남지 않을 까 싶네요" "사실 어스넷을 통합하면서 바이러스 프로그램이 떠돌아다니는 걸 방지 하려고 MS사에서 바이러스 분야의 전문가들을 여기저기서 영입한 건 사실 이잖아요? 그런데도 바이러스는 끊이질 않고 하니까 그런 소문이 돈 건 아닐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생명이 있는 프로그램이니 어쩌니 하는 얘기는 어쩐지 동화 같아요. 솔직히 공상과학 영화나 환타지 소설도 아니고 그런 게 진짜로 있을 리가 있겠어요?" 나는 세헤라자드와 뚱보 고양이 스테아 얘기를 하려다가 그만 두었다. 아무리 팀의 주장이라고는 해도 아직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함부로 세헤라자드 얘기를 해서는 안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사람들이 실제로 존재하는가, 혹은 존재하지 않는가로 의견이 분분한 생 명이 있는 프로그램과 친구 사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쩐지 좀 우 쭐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와 리파이는 그밖에 세상 돌아가는 일들 하며 연예계 얘기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한 번은 내가 엘리 뒤보아를 좋아한다고 말하자 리파이는 자기도 그렇다고 했는데, 말을 하고 보니 좀 어색한 분위기가 흐르기도 했다. (연적과 이야기를 나누는 기분이었다고나 할까) 그러다 보니 어느 새 시간은 열 한시가 지나 있었다. "이제 가봐야 겠네요. 시간 그렇게 많이 보내신 건 아니죠?"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리파이가 말했다. "별 말씀을요. 최근에 먹어본 식사 중에서 최고의 식사였는걸요" 나는 불고기의 단맛을 떠올리면서 말했다. 아직도 입에 침이 고였다. (아마 아주 오랫동안 다시 먹어보기 힘들겠지...) "그 때 보여주신 외교, 정말 멋있었어요. 사실 이 얘기를 하고 싶어서 식사 대접 한 거예요" "칭찬인가요?" "하루 쉬는 동안 외교 준비 좀 해오시라고요. 앞으로 비류 님은 외교 담당 게이머로 성장하시는 게 좋을 거에요. 팀을 위해서나, 또 본인 이미 지를 위해서나..." "어쩐지 진짜 프로들이나 하는 말 같군요" "그래요. 프로. 앞으로도 멋진 플레이 보여주시리라 믿어요. 팀을 위해 서. 프로답게" 결국 목적은 나한테 부담감을 주려는 데 있었던 모양이었다. 팀을 위해 서, 프로답게. 이 말이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귓가를 계속 맴돌았다. 집에 돌아가면 좀 편히 쉴 수 있겠다 싶었는데, 문 앞에 낯익은 얼굴이 서 있는 게 보였다. 이젠 지긋지긋하다. 저 선글라스와 저 시커먼 얼굴 그리고 바바리 코트. 그리고 또 말이야... 저렇게 나는 어스폴 특수 수사 원입니다 라고 광고하듯이 폼 잡고 서 있어도 되는 건가. 범인들이 보고 다 도망가겠다. 나야 뭐 털어도 먼지 하나 안 나올 사람이니까. 그래봐야 자기 고생이지. 맘대로 하라구. 어디 한 번 죽을 때까지 따라다녀 보시 지. "비류 씨? 기다렸습니다. 생각보다 좀 늦으셨군요" 내가 문 앞으로 다가가자 이진우 수사관이 말했다. 정말 집요하군, 집 요해. "팀 주장하고 아침 먹었어요. 이번에는 증인도 있어요" "아, 그건 압니다. 리파이라는 게임 닉을 쓰는 여성하고 식사를 하셨더 군요. 서울옥이라는 전통 음식점에서요. 별실에서 불고기 이 인분을 드셨 고, 후식으로 식혜하고 와인을 시키셨더군요" 어스폴의 정보 수집 능력이 뛰어나다는 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사실이 었지만 사실 이 정도까지일 줄은 몰랐다. 정말 어이가 없었다. 어떻게 이 정도까지 조사를 할 수 있었을까? 이건 분명히 누가 미행을 했다는 얘긴 데 나나 리파이나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다. "저 좀 들어가서 쉬면 안될까요? 좀 피곤해서요" "잠깐이면 됩니다. 오늘 용이 게임에 난입해 들어왔지요? 참, 어이가 없더군요. 요즘 세상은 참 문제 많아요. 그런 짓을 한다고 해서 누가 알 아줄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들 무모한지..." "누구 말인가요?" "물론 해커를 말하는 겁니다. 왜 그런 짓을 했을까요? 역시 현실과 가 상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 아닐까요?" 여전히 날 의심한다는 듯한 말투였다. "그럴 수도 있겠지요. 어스폴의 뛰어난 수사력으로 그런 사람을 추적하 는 건 어떨까요? 지금 막 시합을 마치고 돌아온 게이머를 괴롭히는 일은 이제 그만 둬도 좋지 않겠어요?" "하하하, 재미 있으시군요. 하지만 비류 씨가 프로 게이머인 것 처럼, 저는 프로 수사관입니다. 괴롭힌다는 표현은 옳지 않죠. 그저 각자의 직 업에 충실하다고 봐야겠죠. 이해하시죠? 프로답게요. 그리고 리파이라는 분, 참 매력적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이진우 수사관의 질문은 계속되었다. 나는 어스폴 지하 취조실에서 이 어지던 끝도 없는 질문들이 떠올라 다시 마음이 답답해졌다. "주장은 뛰어난 게이머죠. 그 이상은 몰라요" "프로그래밍도 한다는 거 모르시나요?" "오늘 들었어요. 게이머와 프로그래머 둘 다 한다고 하던데요. 자. 이 제 그만 가주세요. 아니면 정식으로 영장 발부 받아서 찾아 오시던지요. 그럼 취조실에 가둬두고 얼마든지 질문을 던지실 수 있지 않겠어요?" 나는 짜증이 났다. 자고 싶을 때 건드리는 일은 정말 화가 나는 일이 다. 마음 같아서는 세헤라자드의 이야기에 나오는 기밀 박치기로 한 방 먹여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만약 그랬다가는 저 무지막지한 화약식 총을 꺼내들겠지...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N:김상현 #10197/10199 ━━━━━━━━━━━━━━━━━━━━━━━━━━━━━━━━━━━━━━━━ 제 목:[탐그루] 영혼의 에뮬레이터 4 85 관련자료:없음 27/27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1-19 00:25 조회:423 탐그루 # 마법은 마음이다 - 마음은 칼이다 # "영장을 가지고 오라?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영장을 보여줄 수 있습니 다. 당장이라도 비류 님 방에 들어가서 접속하면 영장을 프린팅 할 수 있 죠. 정말 보고 싶어요?" "아... 아니요.... 꼭 그렇다는 건 아니구... 아무래도 오늘은 시합을 한 날이라 아직 긴장이 풀리지 않았나봐요. 어쨌든 전 정말 억울하다구 요!" "어때요? 오늘도 수많은 건물을 파괴하고, 또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겠 죠? 정말 요즘 사람들이 게임에 열광하는 걸 보면 한심합니다. 어떻게 된 게 바깥에 핀 진짜 꽃은 외면하고 모니터에 그려진 가짜 꽃에는 열광을 하니..." 이진우 수사관은 한심하다는 듯 혀까지 끌끌차며 말했다. 그는 아무래 도 게임과 무슨 원수진 게 있나보다. "그건 이진우 수사관님도 좀 편협하신 생각 같은데요. 게임이 뭐가 어 때서 그렇게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죠? 제가 프로 게이머인 것도 이진우 수사관 님이 이렇게 집요하게 구는데 한 몫을 한 것 같네요" "물론 그렇진 않아요. 공과 사는 확실히 구분하니까. 그래도 못마땅한 것은 사실이에요. 가상현실이 원인이 되서 일어나는 범죄가 얼마나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는지 알기나 해요? 아마 그 통계를 보면 프로 게이머 라는 사실을 무슨 훈장처럼 말하고 다니진 못할 겁니다" "범죄의 원인이 게임 때문이라구요? 완전히 구시대적인 발상이군요. 너 무 음지에만 있다보니 양지를 전혀 못보고 살았군요. 게임은 말이죠. 이 젠 예술이라구요. 예술! 지난 세기에 영화가 예술의 중요한 한 부분으로 자리잡았듯이 이젠 게임이 다른 모든 장르를 압도하는... 정말 종합예술 이됐다구요!" "게임이 예술이라구? 지금 나하고 장난치자는 겁니까... 비류 씨! 저질 스러운 방법으로 유혹하여 어린 여학생의 옷이나 벗기고, 총이며 칼을 들 고 다니며 잔인하게 사람들을 죽이고, 말초신경을 자극하기 위해선 그야 말로 무슨 수단이든지 가리지 않는.... 그런 게임이 예술이라구? 몰라도 너무 모르는군. 이런 어린아이가 프로 게이머라니. 다 썩었어. 다 썩었다 구" 이진우 수사관은 이제 아예 삿대질가까지 해대며 흥분하고 있었다. 아 까가지의 여유만만하던 자세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이젠 바바리 코트를 펄 럭이며 내 얼굴에 닿을듯이 고개를 숙이고는 열변을 토했다. 침까지 튀겨 가면서 말이다. "저... 좀.. 진정하세요. 수사관 님이 말한 그런 게임도 분명 있어요. 하지만 다른 게임들도 있다구요. 그림에도 포르노가 있고, 소설에도 포르 노가 있고, 영화에도 포르노가 있는데, 게임이라고 포르노가 없겠어요? 나이 어린 제가 문자 한 번 써볼까요?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 있잖 아요. 또 구더기 무서워 장 못담그랴 하는 말도 있구요. 이진우 수사관님 말대로 저질들도 분명 있어요. 그렇지만 명작이나 걸작들도 분명히 있다 구요. 그거 아세요? 지금은 영화나 소설을 보고 감동받아 울었다는 사람 들 보다, 게임을 플레이하고 감동받아 울었다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는 사 실 말이에요..." "그럴리가 없어! 그럴리가 없다구! 게임에 어디 카사불랑카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같은 명작이 있을 수 있냐구? 있으면 말해보라구" "그러니까... 아저씨는 구식이라는 거에요" 나는 은근히 수사관 님에서 아저씨로 호칭을 바꿔 불렀다. 이진우 수사 관은 여전히 흥분한 채라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음... 그런데 좀 심했 나? 그냥 노총각 정도로만 해둘 걸 그랬나... "아저씨... 카사블랑카 3 이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5, 네이키드 런치 동화 버젼, 데드 얼라이브 로맨스 버전, 중력의 무지개 2, 백치의 부 활... 등등. 이것들 중 하나라도 구경해보신 적 있나요? 카사 블랑카에서 는 fly me to the moon을 직접 자기가 연주하는 미니 게임이 있고, 바람 과 함께 사라지다에선 스칼렛을 아기 때부터 직접 자기가 육성할 수도 있 고, 그 안에 나오는 아이템 중에 하나인 디킨스의 데이비드 카퍼필드는 그 자리에서 클릭해 게임 중에 그 소설을 직접 읽을 수도 있다구요. 뭐, 그 소설을 게임 중에 읽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요. 그리고 선택에 따라서 무수히 분기하는 멀티 스토리는 기본이라구요. 생각해보세요. 자기가 애 써 키운 스칼렛이 온갖 고초를 겪어가며 성장하고 좌절하고 운명을 이겨 나가는 것을요... 당연히 원래의 영화보다 감동이 배가 될 것 같지 않아 요?" 사실 위의 말 중 백치의 부활은 내가 생각해도 좀 심한 것 같다. 뭔가 더 대단한 걸 얘기해야겠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나온 말이다. 하지만 나머지는 다 확실하게 출시된 게임이다. 다 내가 엔딩을 본 게임들이니 까. 어쨌든 지난 세기의 거장 도스토예프스키에겐 미안하지만 위의 말이 이진우 수사관에겐 확실히 충격적이었나 보다. 이진우 수사관은 정말 그 런게 있단 말이냐? 라는 듯한 표정으로 멍하니 입을 딱 벌리고 서 있었 다. "흠흠... 오늘은 이만 가보겠어요. 사적인 대화를 하는 게 아니었는 데.... 미안합니다. 하지만 조심해요. 내가 반드시 증거를 찾아낼테니까. 만약... 내가 당신이 오소리 살해범이라는 증거를 못찾아 내게 된다면 당 신은 결백하다는 뜻이니까. 내 말을 너무 나쁘게만 듣지 말기 바랍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었다. 이대로 돌아가서 다시는 이진우 수사관의 얼굴을 보지 않을 수만 있다면 이진우 수사관을 껴안고 노래라도 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참. 그리고 아까 그 말 말씀입니다만..." 또 뭐가 남았나? "양 쪽 다 한다는 말은 동성애자가 아니라 양성해자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니 알아서 주의하세요. 물론 개인의 사생활에 간섭을 해서는 안되겠 지만, 또 하고 싶지도 않습니다만 그 리파이라는 사람 뭔가 수상쩍은 부 분이 많아요. 이건 순전히 개인적으로 비류 씨가 어린 나이에 보호자도 없이 흉흉한 세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해주는 말입니다" 이진우 수사관은 이렇게 말하고는 사라져버렸다. 어쩌면 나에게 식사를 대접한 데 다른 속셈이 있는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 각해보니 끔찍한 기분이 들어야 정상일텐데, 이상하게도 기분이 무척이나 좋아졌다. 뭔가 실낱 같은 가능성이 생긴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음... 이 래선 안 되는데... 잘못하면 아주 이상한 삼각관계가 될지도... "세헤라자드, 나 왔어" 문을 열고 들어자 빠른 템포의 흥겨운 음악이 들렸다. 지난번에 들었던 킹 엘비스의 곡인 모양이었다. 창법이 좀 다르기는 했지만 목소리가 비슷 했다. "아, 오셨군요. 보세요, 스테아에요" 세헤라자드가 음악을 멈추고 나에게 말했다. 나는 내 눈을 의심하지 않 을 수 없었다. 뚱보 고양이 스테아는 어디로 가고 날렵하게 생긴 갈색 얼 룩 고양이 한 마리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앞발을 모으고 앉아 있는 모습이 꼭 작은 호랑이 같은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이거 뭐야? 압축했다가 풀었더니 이렇게 된 건가?" "같이 좀 뛰었더니 금방 이렇게 되더라구요" 그것 참 편리하군. 이렇게 쉽게 살이 빠지다니 말이다. 만약 내가 다이 어트 식품 제조 회사 사장이라면 틀림없이 스테아를 모델로 썼을텐데. '뚱보 스테아 : Before - 날렵한 스테아 : After'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래, 그렇구나. 그럼 밥은 또 언제 주니?" "사실 살이 금새 빠지긴 하는 데 또 금새 찌기도 하거든요. 그래서 제 가 수시로 어스넷에가서 먹을 프로그램들을 가지고 와요" "뭐? 자리를 비운단 말이야? 고양이한테 생선 맡기기 라는 말도 몰라?" 나는 어이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당장 데스크탑을 확인해 보았다. 다 행히도 아무 문제는 없는 것 같았다. "뭐야? 또 복구 시켜 놓은 거야?" "아니에요. 이걸 이용했지요" 세헤라자드는 방울이 달려 있는 목줄을 들어 내 눈앞에서 흔들었다. 방 울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린데... "내 보안 시스템?" 세헤라자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보안 시스템을 응용해서 만든 거에요. 방울은 경고음을 변환한 거구 요. 어때요? 쓸만하지요?" 세헤라자드는 자신이 이런 대단한 물건을 만들었다는 게 스스로 대견한 지 함박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어차피 프로그램이잖아. 혹시 고양이가 목줄을 끊고 달아나지는 않을 까? 아주 가끔이지만 보안 시스템을 뚫고 바이러스나 스팸 메일이 들어오 는 경우도 있다구. 그리고 너도... 내 보안 시스템을 통과 한 적이 있잖 아" 이 말을 하는 데는 조금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라도 세헤라자 드가 이 말을 듣고 기분이 나빠지면... "저야 보안 시스템을 이해하고, 또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까 그 게 가능했지만 스테아는 불가능해요. 스테아는 사람이 아니라 고양이라구 요" "그럼 혹시 그 목줄, 먹어버리진 않을까?" "스테아가 좋아하는 건 그림 파일과 바이러스 정도인 모양이에요. 나머 지는 먹지 않더라구요. 좀 더 두고 봐야 알겠지만요" 그렇군. 하여간 근심은 하나 던 셈이었다. "그럼 넌 자주 어스넷을 들락날락 하겠구나. 먹을 거 구하러" "예. 지금은 그래요" "그럼 혹시 다른 생명체 본 적 있어? 오늘 무슨 일이 있었냐면..." "저도 봤어요, 그 중계. 솔직히 놀랐어요. 그 용 말씀 하시는 거죠?" 나는 세헤라자드에게 오늘 소오드엔매직 온라인에 침입한 용에 대한 이 야기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세헤라자드는 이미 다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 다. "비류 님이 궁금해하실 것 같아서 좀 조사 해 봤어요. 그 용, 소오드엔 매직 5 프로그램에 들어있는 용이었어요" "뭐?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내가 5편은 완벽 클리어 했다구. 그런 캐릭터가 등장한다면 내가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어. 5편에 그런 용은 나 오지 않아" "예. 나오지 않아요. 하지만 프로그램 안에 몇 개의 원화 파일이 있는 걸 확인했는데, 그 중에 하나였어요. 거기 보니까 용의 원화며 등장하지 않는 여자 케릭터 원화, 또 하늘을 나는 화차의 원화같은 게 몇 개 있더 라구요" 원화라. 듣고 보니 일단 프로그램 안에 그런 게 있을 수는 있겠다 싶었 다. 예전에 '춘향전2'에서도 프로그램 안에 숨겨져 있던 원화 몇 장이 계 시판에서 큰 화제거리가 됐던 기억이 났다. "그런데 그 원화가 어떻게 게임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지?" "아직은 가정일 뿐이지만... 혹시 게임 안에서 스스로 성장 한 건 아닐 까요?" "프로그램은 프로그램일 뿐이야, 세헤라자드. 스스로 성장할 수도 없 고, 스스로 사고할 수 있는 능력도 없어. 프로그램은 그저 주어진 자극에 반응을 보이는 전자 신호에 불과하다구" 나는 나이트무버의 해설을 떠올리면서 세헤라자드에게 설명했다. "세포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인간같이 아무리 복잡한 생명체라고 해도 기본 세포는 그저 자극에 반 응할 뿐이고, 분열해서 수를 늘려나갈 뿐이잖아요. 그런 세포가 모여서 생명을 이룬다면 혹시 프로그램도 생명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요?" 세헤라자드의 말에 나는 어이가 없었다. "말도 안돼. 세포 일 억개를 모아 놨다고 해도 생명체가 되지는 않아. 거기에는 말이지 생명이 없어. 내가 생명 공학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말 이야, 이정도는 알아. 인간이 세포 백 개로 되어있다고 해보자구. 그렇다 고 해서 단세포 백 개를 모아 놓으면 인간이 되나? 그건 아니잖아" "제 아버지도 그 부분을 연구할 때 가장 힘들어 하셨어요" 세헤라자드가 말끝을 흐렸다. 나는 랩탑을 나에게 주었던 그 ZKNIGHT라 는 노인이 떠올랐다. 동양 철학 운운하면서 인간의 기니, 전체를 부분이 포괄하고 있으며, 하나에 집중하는 것이 전체를 담는 일이니 어쩌니 하고 메시지를 남겨놓았던 바로 그 노인이다. "어쩌면 생명과 생명이 아닌 것을 가르는 기준은 바로 영혼인지도 모르 겠어요" "영혼... 세헤라자드. 넌 영혼의 에뮬레이터로 에뮬레이션 된 프로그램 이잖아" "제트기 조종사라고 해서 제트 엔진의 구조와 원리를 이해하고 있는 건 아니지요" 그 말은 맞았다. 그렇다면 과연 영혼은 뭘까. "영혼이 사라지는 순간을 죽었다고 말하는 걸까? 뇌사자를 죽었다고 생 각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지 않아? 그렇다면 인간의 영혼은 두뇌에 있나?" 나는 이렇게 물었지만 세헤라자드의 대답을 딱히 염두에 두고 한 물음 은 아니었다. 그냥 나 자신에게 던진 물음이었다. 화면에 우체부가 정신없이 왔다갔다하기 시작한 게 바로 그 순간이었 다. 또 편지가 온 모양이었다. 어쩌면 영국에서 온 편지인지도 모른다.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마우스를 클릭해서 편지를 열었다. "...때가 왔노라..." 기분 나쁜 남자의 음성이었다. 착 가라 앉아있는 목소리였지만 어딘지 음산한 구석이 있었다. "...때가 왔도다. 일곱 머리를 가진 드래곤의 등장으로 세상은 그 마지 막 날을 보게 되리니. 종말의 날은 아무도 모르게 도둑같이 오리라..." 편지는 이런 음성을 남기고는 자동 삭제되었다. 갑작스러운 편지의 등 장은 나를 오싹하게 만들었다. "이건 또 뭐야?" 나는 어이가 없었다. 종말론을 믿는 사람이 아직도 있다는 건 알고 있 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종말론의 포교를 스펨메일로 하다니 기가 막혔 다. 세기말에 그렇게 법석을 떨었다고 하던데... 이젠 세기가 바뀌었으니 또 무슨 명분으로 종말론을 전도하려는 거지? 참 머리도 좋아. 음 그게 아니라 뻔뻔한 건가.... "나이트무버, 맞지요? 경기 해설하신 분말이에요. 그 분 말씀이 생각나 네요. 오늘 지구가 망해도 사과나무를 심는 심정으로 살아야 한다... 종 말론을 강요하는 사람은 다 사기꾼이다... 그런 요지의 말씀을 하셨던 것 같은데요. 맞지요?" "이 편지는 너무 깊게 생각하지 않는 게 좋겠어. 내 두뇌에선 정치와 종교 폴더는 아예 없으니까... 기억 용량에도 한계가 있구" 내 말에 세헤라자드는 웃음을 지었다. 스테아가 저 사람 왜 저러나, 하 는 표정으로 나와 세헤라자드를 번갈아 가면서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관 심을 끌어보자는 수작인지 발라당 누워서 요염한 표정으로 다시 나와 세 헤라자드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세헤라자드는 그런 스테아가 귀여워 죽겠 는지 스테아를 반짝 안아올려서 턱 밑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스테아는 기 분이 좋아졌는지 그르르, 하는 가래 끓는 소리를 냈다. "스테아에게도 생명이 있어요. 저에게 생명이 있는 것 처럼요. 생명이 있는 한 일단 사는 게 중요한 게 아닐까요? 전 생명이 시간이 아닐까 생 각해요. 주어진 시간, 주어진 생명...저는 주어진 시간이 다 되었지만, 결국 이렇게 다른 형태로 살아 있어요. 사실, 이렇게 형태가 바뀐다음, 처음으로 춤을 추면서 저는 제가 이런 형태로 살아있다는 게 정말 싫었어 요. 어쩐지 모든 게 다 거짓말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하지만 지금은 달라요. 나는 시간을 벌었다... 시간이 있는 한 살아야 한다..." "살아서 뭘 하는데?" 내가 말해 놓고도 아톰의 말투 같다는 생각이 들만큼 냉소적인 말투였 다. 나는 의자에 기대앉았다. 갑자기 피로가 몰려왔다. 무엇을 하면서 살 아야 하고, 살아서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 건가? 피로가 한층 더 몰려왔 다. "당장 뭘 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적어도 지금은 킹 엘비스의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출 수는 있으니까요" 음악이 흐르기 시작했다. 킹 엘비스의 'Can't stop falling in love with you'였다. "사람의 몸으로 춤을 추는 일은 이제 더이상 불가능 하다는 걸 알았어 요. 그래서 전 지금의 저에게 충실하기로 했어요. 한 번 보실레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세헤라자드의 몸이 천천히 투명하게 변하더니 사 방으로 흩어졌다. Wise man says, only fools rush in but I can't help falling in love with you 세헤라자드의 몸은 이제 화면을 떠다니고 있었다. 스테아는 무슨 일인 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세헤라자드의 흩어진 몸을 앞발로 휘저었고, 덕 분에 세헤라자드의 몸은 물에 떨어진 잉크처럼 조금씩 확산되기 시작했 다. like a river flows, surely to the sea, darling so it goes, something are mean to be 안개처럼 사방으로 퍼져나간 세헤라자드의 몸은 화면의 이곳 저곳을 흐 러기 시작했다. 어떨 때는 소용돌이처럼, 또 어떨 때는 반짝이는 모래바 람처럼 음악에 맞추어 움직였다. 나는 그 광경에서 불타오르고 있는 세헤 라자드의 생명을 보았다. 아니, 어쩌면 그 생명이 바로 세헤라자드의 영 혼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Take my hand, take my whole life too, for I can't help falling in love with you 음악이 잦아들자, 세헤라자드의 몸도 천천히 밑으로 가라앉았다. 마치 뒤집으면 눈이 내리는 마을로 변하는 장난감처럼, 세헤라자드는 깃털이 떨어지는 것처럼 천천히, 소리 없이, 하지만 박자를 잃지 않고 바닥에 떨 어졌다. 스테아가 바닥을 앞발로 건드리자 세헤라자드의 몸이 먼지처럼 일어났다가 다시 가라앉는 게 보였다. 가라앉은 세헤라자드는 음악이 끝나자 모래성처럼 모여들더니, 어느 새 다시 사람의 형상이 되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세헤라자드를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좀 이상하죠? 하지만 이게 제가 개발한 춤이에요" 조금 쑥쓰러운지 낯빛을 붉히면서 세헤라자드가 말했다. "그냥 이렇게 살면 되는 거지요. 시간이 있는 한 말이에요" "그래. 시간이 있는 한" 나는 이제는 죽은 오소리 유민철을 떠올렸다. 이제 그 친구는 없다. 불 에 타 영원히 사라져 버린 것이다. 더 이상 유민철은 소오드엔매직을 즐 길 수도 없고 동성애자를 욕할 수도 없고, 또 어스넷을 돌아다닐 수도 없 는 것이다. 나는 아주 잠시였지만 소오드엔매직 온라인 게임을 할 때, 절 망적인 상황이 되자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는 게 부끄러워졌 다. 나미트무버의 사과나무 이야기는 너무도 간단하고 평범한 말이었지만 역시 진실이었다. "...시간이 다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죽음이라는 게 도대체 뭘 까..." 나는 엄지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누르면서 중얼거렸다. 어쩐지 두통이 날 것만 같다. "그건 아무도 몰라요. 예전에 어떤 성인이 그랬데요. 삶도 모르는데 죽 음을 어떻게 아느냐고요. 전 그 말이 제 맘에 딱 들어요. 삶에 충실한 게 먼저고 나머지는 다 살아나가면서 하나 하나 해결해야 될 문제라고 생각 해요. 하잔시의 전투에서 살아 남은 수르카와 라이짐도 해결해야 할 문제 들이 산더미 같이 쌓여 있죠. 그래도 그 둘은 운이 좋아요. 누가 뭐래도 일단 살아 있잖아요!" 그래. 그러고 보니 탐그루의 이야기를 잊고 있었다. "그래. 그래서 어떻게 되지? 하잔은 용병단에게 점령당했고, 시민군 지 휘자가 잡혔으니 반란은 진압됐겠지" "예. 그리고 재판이 있었지요. 그리고 수르카와 라이짐은 세상을 바꾸 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사람들끼리 서로 죽고 죽이는 게 도대체 무엇인 지, 각각 자기나름대로의 생각들을 키워 나가게 된답니다..." 이렇게 세헤라자드의 이야기는 또 시작되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N:김상현 #10198/10199 ━━━━━━━━━━━━━━━━━━━━━━━━━━━━━━━━━━━━━━━━ 제 목:[탐그루] 잃어버린 신의 이름 86 관련자료:없음 18/18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1-19 00:26 조회:385 탐그루 # 마법은 마음이다 - 마음은 칼이다 # * 잃어버린 신의 이름 작전은 끝났는지 모르지만 하잔에서 처리해야 할 일은 아직도 많이 남 아있었다. 서부산맥군은 그 길로 미하엘을 솔한장 부근에 설치한 임시 주 둔지의 천막에 가두었다. 아마 국왕의 대표들이 재판을 열 때까지 미하엘 을 그곳에 가두어둘 계획인 모양이었다. 외모와는 딴판으로 잔혹한 성격 을 가진 발렌시아의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우리 남부산맥군이 (서부산맥군은 절대로 우릴 아케르 용병단이라고 부 르지 않았다. 항상 조금은 깔보는 투로 남부산맥군이라고 불렀다) 가장 먼저 한 일은 우보를 비롯한 다섯 명의 장례를 치르는 일이었다. 우리는 마지막 전투에서 다섯을 잃고 열 한 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다행히도 부 상자들은 대부분 치료석으로 치료가 가능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단원들 이 입은 마음의 상처는 그 무엇으로도 치료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내가 보 았던 것은 나 자신도 잊고 있었던 무서운 기억들이었다. 말하자면 최악의 악몽이라고나 할까. 다른 사람들도 정도는 달랐지만 자신이 가장 두려워 하는 것들을 본 모양이었다. 라이짐은 쥬크가 이무르 아주머니를 베는 것을 보고 쥬크에게 달려갔다 가 쥬크에게 당하는 환영을 보았다고 했다. 장례를 준비하면서 만난 떠버 리 하진은 자신이 모은 돈이 모두 사라져 버리고 대신 그 자리에 문드러 진 살과 뼈 피가 놓여 있는 광경을 보았다고 했다. "...그리고 들은 얘긴데 가투신은 차이린하고 결혼하는 걸 봤다더라. 거의 미치기 일보 직전까지 갔었데" 하진은 장례를 준비하는 와중에도 이렇게 농담을 건넬 수 있었지만 나 나 또 대부분의 단원들은 그렇지 못했다. 다들 침울해 보였다. 다만 알 수 없는 것은 찬이었다. 과연 찬은 어떤 것을 보았을까? 내가 아는 단원들 중에서는 찬이 가장 회복이 빠른 것 같았다. 찬은 별 말도 없이 평소처럼 묵묵히 일만했고, 쉬는 시간에는 칼만 만지작거리고 있었 다. 무슨 광경을 보았는지는 차마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런 일 이 아니더라도 찬에게는 뭘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기는 마찬가지지만 말 이다) 장례식은 임시 주둔지 소리장 마을 중앙광장에서 있었다. 지난 번 밍밍 십부장의 장례와 달랐던 점은, 관이 다섯 개라는 점도 있었지만, 주관이 순무가 아니라 아케르 단장이었다는 점이다. 전 부대원이 정렬한 앞에 다 섯 개의 관이 놓여졌고, 그 위에 각각 연금술사의 검은 돌이 올려졌다. 봄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겨울을 끝내는 듯한 봄비가 아니라 다가올 겨 울을 알리기 위한 봄비 같았다. 차갑고 어두운 기운이 중앙광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우보의 관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다른 십부원들의 마음에는 복수의 마음이 불타올랐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달랐다. 나는 내가 우보를 죽였다 는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중앙광장에 모인 사람들 모두가 합세해 우보를 죽인 거나 마찬가지다. "...누가 죽었는가는 중요한 일이 아니다. 우리에게 죽음은 늘 따라다 니는 일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죽었는지, 혹은 누가 죽였는지도 중요하지 않다. 그런 의문이 죽은 자를 살아 돌아오게 만들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제군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어떻게 그들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느냐는 것뿐이다. 지난 역사를 돌아 보면 세상을 바꾼 자들과 그렇지 못 한자들이 수도 없이 많다. 그들의 차이는 죽어간 이들의 목숨을 과연 헛되게 했느냐 그렇지 않느냐 뿐이다. 제군들. 내가 말한 대의를 기억하는가. 앞으로 무엇을 해야할 지 생각 해 보았는가. 우리들의 큰뜻은 이들의 죽음으로 조금 더 앞당겨졌다. 이 제 죽어간 이들을 위해 잠시 묵상에 잠기자" 아케르가 말을 마치자 모두들 숙연한 분위기에서 고개를 숙였다. 역시 아케르답게 짧은 연설로 많은 단원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었지만, 나는 이제 더이상 아케르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아케르의 말은 시민들을 죽인다고 해도 결국 그 죽음을 잘 이용만 한다면 다 용서받을 수 있다는 말로 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또 그 죽음이 큰뜻을 이루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던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죄없는 시민들이 죽는 일은 없어야 했다. 이것이 약한 생각이라 고 해도, 혹은 어린 생각이라고 해도 이제 할 수 없다. 나는, 내 마음은 그런 살육을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나는 허리에 찬 나미트의 칼을 쥐었다. 칼자루가 아니라 칼집을 쥐었 다. 이 모든 일이 다 칼 때문에 일어난 것 아닌가? 내가 휘두른 칼은 무 엇이었는가. 또 시민들이 휘두른 칼은 또 무엇이었는가. 나미트의 칼집을 잡고 있는 나의 마음은 한없이 복잡하기만 했다. 나는 타오르는 다섯 개 의 관과, 나미트의 칼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무엇인가, 무엇인가 내 가 알 수 없는 다른 길이 꼭 있을 것만 같았다. 칼과 저 죽음 사이에. 관 에 붙은 불꽃은 맹렬히 타오르다가 어느 한 순간 사그라들었다. 다음 날 재판이 있었다. 서부산맥단원들과 남부산맥단원들은 증인의 자 격으로 임시로 만들어진 재판정에 참석했다. (즉 하나도 빠짐 없이 참석 해야 했다는 말이다). 임시 재판소에는 단원들이 앉을 수 있는 넓은 자리 앞에 재판장 석이 만들어졌고, 그 맞은편에 죄인이 앉을 의자가 놓여졌다. 그리고 재판장 석 옆에는 서기가 한 명 앉아있었다. 입고 있는 옷으로 보아 성황청 소속 의 사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케르 단장은 진압대장의 자격으로 재판석 바로 옆에 만들어진 자리에 앉았다. 재판에 관여할 권한은 없었지만 그래 도 아케르 단장이 앞에 앉으니 보기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저기 앉은 아케르 단장이 존경스러웠을지도 모르겠다. 하잔에서 내가 아무 것 도 보지 않고 아무것도 행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미하엘이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나는 미하엘은 뒷모습 밖에 볼 수 없 었다. 국왕에게 권한을 위임받은 특사 셋의 얼굴과 성황청의 자격을 위임 받은 리바르도 기사단장의 정면을 보이고 앉아 있었다. 그런데! 국왕의 특사중 자나크 대표로 온 사람이... 바로 내가 아는 그 얼굴이었다. 루비오였다. 루비오는 탐그루에서 보았을 때보다 몇 배는 더 화려한 옷을 입고 거만한 자세로 재판장 석에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을 보 고 나는 놀라 옆에 앉아 있는 라이짐을 바라보았다. 복수를 맹세한 라이 짐이 당장이라도 달려가 루비오를 벨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라이 짐의의 표정은 생각보다 담담했다. (분노를 억누르고 있다는 게 느껴진 것은 물론이다). "루비오 녀석이 특사로 온다는 건 회의에서 들어서 알고 있었어. 예전 의 나 같았으면 그대로 루비오를 죽여버리고 나도 죽었을지 모르지. 하지 만 이번 작전에서 내가 배운 게 하나 있어. 나중을 위해서 지금 굽히는 거야. 아케르 단장님이 부자가 되고 싶어서 귀족 비위를 맞추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거지. 난 알아. 복수란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걸. 비록 원수의 가랑이 사이를 기어다녀야 하는 한이 있어도 말이야. 그러다가 기회가 포 착되는 순간 복수하는 거야. 단 한순간에. 다시는 일어설 수 없도록 말이 야" 라이짐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라이짐의 말투는 아케르의 그것을 닮 아가고 있었다. "라이짐. 너 변했구나" 나는 라이짐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래. 변했지. 그리고 내 이제 내 목표는 루비오 하나가 아니야. 이 대 바르도 대륙의 모든 귀족들이야. 그리고 그날까지 죽지 않을 거야. 그 리고 그날까지 루비오가 다른 사람의 손에 죽지 않도록 성년의 신 마소드 의 가호가 있기를" 이렇게 말하는 라이짐의 눈은 한 방울의 피와 마법의 말로 시드의 귀를 만들어 냈을 때의 라이짐과는 참으로 많이 달라져 있었다. 재판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그저 재판석에 앉은 사람이 물으면 미하엘 이 답하는 것이 전부였다. 먼저 국왕의 대표들이 심문했다. "피고 미하엘은 선량한 시민을 선동하여 하잔에 반란을 일으킨 사실을 인정하는가?" "나는 시민을 선동한 적이 없다. 아니, 누구도 하잔의 시민들을 선동하 지 않았다. 우리 모두가 앞장서서 싸웠고 우리 모두가 함께 무기를 들었 다" 천천히, 하지만 분명한 어조로 또박또박 미하엘이 말했다. "반란을 부정하는가?" "바르도 대륙에선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먹을 것과 잠자리를 빼앗아간 사람에게 대항하는 것을 두고 반란이라고 하는가? 우습군. 그것이 반란이 라고 한다면 반란이라고 해 두지. 원래 짐승과 인간은 말이 안 통하는 법 이니까" 대답하는 미하엘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그가 어쩐지 비웃음을 짓 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대답이 끝나자 루비오의 얼굴에 분 노의 빛이 나타났다. 나는 라이짐을 보았다. 라이짐은 눈을 감고 있었다. 차마 보기 싫다는 뜻인지, 아니면 졸려서 저러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혹시 루비오의 눈을 피하기 위해 그런 건 지도 모르겠다. "피고 미하엘은 반란군의 자금을 만들기 위해 시민들의 재산을 약탈한 사실을 인정하는가?" "나는 물론이고 그 누구도 물건을 훔치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다. 자기 자신은 굶어가면서도 시민군들에게 먹을 것을 내 준 아낙네와, 힘을 내서 싸우라고 자신의 전재산이 틀림없을 소며 돼지를 내준 사람들이 있었을 뿐이지. 하잔 시내에선 한 번도 약탈이나 강도, 도둑질 같은 없었다" "그게 약탈이 아니고 무엇인가? 거기다가 또 아직 성년이 되지 않은 어 린 아이들에게도 무기를 나누어 주어 앞장서게해서, 그들을 방패막이로 썼다는 사실은 인정하겠지?" 이 질문을 던진 것은 루비오였다. 라이짐이 이를 악물고 있다는 게 느 껴졌다. (이로서 라이짐이 자고 있지는 않았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나 역 시 루비오를 아무 감정없이 바라보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 라이짐이 느끼고 있을 분노가 어느 정도일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심문하 고 있는 루비오의 얼굴은 멋모르는 혈기로 가득했다. 저런 게 바로 어린 거야. 나는 생각했다.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함부로 드러내는 게 말이야. "부모의 원수를 갚겠다고 외치는 사람은 아무리 나이가 어리다고 해도 칼을 쥘 자격이 있다" 미하엘이 대답했다. 라이짐은 후련한 감을 느낀 모양이었다. 라이짐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 질문을 던진 걸 언젠가 후회하게 해주지, 루비오" 심문석의 루비오는 이것만 묻고는 나머지 재판시간 내내 조용히 있었 다. 가끔 지루한지 손으로 심문석의 종이를 만지작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렇다면 피고 미하엘은 반란 및 약탈과 미성년자에게 무기를 제공 한 사실을 인정한 것으로 기록한다. 기록을 위해 묻는다. 이 사실을 시인 하는가?" "물론 아니다. 그러나 당신들은 결국 당신들 맘대로 기록하겠지. 내가 말한 사실들이 죄가 된다면 얼마든지 명예롭고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그 죄값을 받겠다. 그리고 아케르..." 미하엘이 말했다. 순간, 재판정에 긴장이 감돌았다. 감히 단장님의 이 름을 부르다니, 뭐 이런 분위기 말이다. 나는 아케르의 얼굴에 잠시 스친 당혹감을 놓치지 않았다. 한때의 전우를 재판정에서 이렇게 만나게 된 심 정이 결코 좋지 않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말해보게, 미하엘" 그래도 아케르는 역시 아케르였다. 다시 평소의 표정을 되찾고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이렇게 말한 것이다. 아케르가 대꾸하자 재판정의 긴 장감은 조금 수그러들었다. 아케르와 미하엘이 한 때 전우였다는 사실을 다들 상기했기 때문이리라 싶었다. "높은 곳에 앉아 있으니 보기가 좋군. 그들이 뭘 약속했나. 금화? 권 력?" 미하엘이 도발적인 어조로 말했다. 재판장 중 타실 대표가 뭐라고 미하 엘에게 말하려고 했지만 아케르는 자리에서 일어나 타실 대표가 말하는 걸 막고는, 천천히 말했다. "용병이 늘 하는 일이지. 의뢰를 받고 해결해주는 것" 단순하지만 명확한 말이었다. 금화를 받고 의뢰를 해결하는 용병의 역 할에 충실했을 뿐이라는 말도 되고, 또한 개인적인 감정은 없다는 말이 될 테니까 말이다. 그런데 루비오 녀석은 전혀 듣는 시늉도 하지 않고 여 전히 손장난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크게 될 녀석은 아니었다. 저런 녀석이 만약 영주가 된다면 그 영지가 어떤 꼴이 될지. 나는 이렇게 생각하면서 라이짐을 보았다. 라이짐은 눈을 크게 뜨고 아케르에게 집중 하고 있었다. "그래. 자네가 아니었더라도 이렇게 되었으리라는 건 알고 있어. 하지 만 자네의 손에 묻은 피가 보이지 않나? 그게 무고한 사람들의 피라는 걸 자네는 알고 있지 않나" 미하엘이 말하자 재판정이 웅성거렸다. 누군가 미하엘에게 소리를 쳤지 만 아케르는 손을 들어 그를 제지하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세상 그 어떤 일도 피가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네. 특히나 내가 하려고 하는 일은" 이 말 또한 아케르다운 말이었다. 귀족들이 알아듣지 못하게 자신의 입 장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었다. 라이짐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나는 그 피가 단순히 '피'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걸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다. 거기에는 울부짖는 여자와, 고아가 된 아이들과, 목이 잘린 시체가 있었 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N:김상현 #10199/10199 ━━━━━━━━━━━━━━━━━━━━━━━━━━━━━━━━━━━━━━━━ 제 목:[탐그루] 잃어버린 신의 이름 87 관련자료:없음 16/16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1-19 00:26 조회:387 탐그루 # 마법은 마음이다 - 마음은 칼이다 # "무엇인가 이루기 위해선 피를 흘려야 한다... 그렇다면 피를 흘린 자 들에게는, 이미 죽어버린 사람들에게는 무엇을 이룬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미하엘이 담담한 말투로 물었다. "그게 국가를 위하는 일이고 대륙을 위하는 일이라면 결코 헛된 피가 아닐 걸세. 그 사람들의 자손은 좀 더 나은 세상에서 살 수 있을테니까" 아케르의 대답이었다. 장례식 때 했던 말과 같은 맥락의 말이었다. "자고로 국가와 대륙을 들먹이는 놈들은 다 하나같지" 미하엘이 말했다. 이 말은 내게는 귀족이나 아케르나 마찬가지라는 말 로 들렸다. 하지만 라이짐에게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말 삼가하시오!" 어른이나 쓰는 말투로 라이짐은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다시 장내가 소 란스러워졌고 타실 대표는 미하엘의 말을 중단시켰다. 아케르는 다시 자 리에 앉았다. 아케르의 표정은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아케르 의 말은 어쩐지 평소와 달리 아케르 다운 무엇인가가 빠져 있었다. 아케 르도 하잔과 미하엘의 일에 대해서 고뇌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장내가 다시 조용해 지자 이어서 성황청 대표 리바르도 기사단장의 질 문이 있었다. "그대는 이단의 종교를 믿었던 사실이 있는가?" 고문 기구를 숭배하는 종교를 말하는 모양이었다. "지금도 믿음은 그대로이다" "그 종교가 성황청의 교리와 어긋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성황청의 교리가 무엇인지 묻고 싶군" 답변답지 않게 혼자 중얼거리듯 미하엘이 말했다. "모든 종교가 하나라는 것, 그리고 그 하나 안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가? 당신이 믿는 종교가 이단인 이유는 그 하나 안에서 자유롭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리바르도 기사단장이 말했다. "어차피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이지 둘이 될 수 없는 것이다. 하나 안에 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말은 결국 어떠한 둘도 인정 할 수 없다는 말 아 닌가. 나는 그런 교리 따위는 거부한다. 그리고 나뿐만 아니라 바르도 대 륙의 그 어떠한 사람도 그러한 교리에는 결고 가둘 수 없을 것이다" 미하엘은 이렇게 말하면서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지만 이내 곧 다시 평 심한 말투로 돌아갔다. 아마 발렌시아가 말한 이단 종교집단에 대한 학살 의 기억 때문이리라 생각되었다. "그것은 신성모독의 발언이다. 서기. 기록하도록" "신성 모독이라고 했나, 지금? 성황청에 신성이라는 것이 있었나?" "무례한 말이로군, 미하엘" "무례하다니? 신성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그 안에는 믿음 따위는 없는 게 너희 성황청 아닌가? 그 안에 믿음이 있다고 한다면 그건 오로지 권력 에 대한 믿음뿐일 것이다. 도대체 성황청이라는 조직이 왜 필요한 것인 가? 뭐하러 사람들의 믿음을 하나로 묶겠다는 말인가? 성황청에는 오로지 권력에 눈이 먼 어리석은 자들만이 가득하지 않은가?" 라이짐은 다시 눈을 감고 있었다. 이번에는 진짜로 잘 모양인가보다 싶 었다. 이제는 아예 대놓고 하품을 했다. 무식한 녀석. 나는 속으로 중얼 거렸다. "우리의 교리에 따르면 모든 신성은 성황님에게로 모아진다. 그렇게 모 아진 신성을 성황님은 다시 온 세상에 퍼트리는 일을 맡고 계시는 것이 다. 그것은 의무이지 자비지, 독선이나 헤게모니 쟁탈하고는 거리가 먼 말이다" 리바르도 기사단장은 이제 꼭 전도하듯이 말하고 있었다. "교리? 성황청에 교리가 있었는가? 아니 신이 있었는가? 너희 성황청은 천년전쟁 때 신의 이름을 잃어버리지 않았는가? 잃어버린 신의 이름을 찾 기 위해 모든 종교를 모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 종교 저 종교 기웃거 리며 구걸하듯 자신들의 신의 이름을 찾는 것들이 뭐 의무이자 자비라고? 성황이니 뭐니 앞잡이를 내세워 종교를 한데 아우른다는 핑계로 힘을 키 워나가는 게 너희 성황청 아닌가? 내 말이 틀렸다면 어디 당신들의 신의 이름을 한 번 말해보라구. 그럼 내가 당장 개종할테니까" 미하엘의 이 말에 나는 조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재판정 안의 다 른 단원들은 모두 이런 얘기에 관심이 없어 보였지만 말이다). 성황청의 신에 대해서 내가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게 이유가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 다. 미하엘의 말이 사실이라면 성황청은 자신들의 신의 이름을 찾기 위해 모든 종교를 모으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신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면 안 된다는 둥 그런 거였구나. (원래 잘 모르는 얘기가 나오면 나도 기분이 나빠지곤 하니까 성황청의 그런 태도가 이해가 가기는 한다) "말을 삼가라. 성황님의 자리는 이미 오래 전부터 존재해온 대 비스토 브레 제국의 상징적인, 또한 절대적인 위치 자리이다" "그래. 분명 그렇지. 하지만 예전의 성황청은 그저 왕의 종교행사를 주 관하는 제사장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성황청은 모든 종교를 자신의 권 력 아래에 놓고 주무르기 시작했다. 모든 종교는 결국 하나라는 핑계로 말이다. 이것이 권력에 눈이 멀었다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미하엘은 격앙된 어조로 말했다. "지금 너의 그런 불경스러운 말이 모두 성황청의 교리를 거스르는 행위 라는 사실을 알고나 있는가?" "불경이라는 말 입에 담지 말라. 그 말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였는 가. 하잔에서도 제사장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불경이라며 제사장을 베 어버린 게 너희 성황청이 한 짓이다" "...제사장은 우리의 신성을 모독했다" 리바르도는 조금 당황한 듯 보였다. 아마도 제사장을 벤 일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나 보다. "신의 이름을 입에 올린 것이 죄가 된단 말인가? 도대체 입에 담을 수 없는 신의 이름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단 말인가? 하긴. 이름도 모르 니 너희 성황청 놈들은 함부로 입에 담으려고 해도 담을 수도 없겠지만 말이다" "우리 성황청의 위대한 신의 섭리를 더럽히고 있구나" "신의 섭리. 그런 애매한 말로 늘 도망치는 군. 신의 섭리가 무슨 만병 통치약이라도 되는 모양이군" 이 대목에서 나는 웃음을 쿡, 터트렸다가 겨우 참을 수 있었다. 미하엘 의 거침없는 말이 웬지 통쾌했다. "신의 섭리다, 혹은 하늘의 뜻이다. 이 말은 결국 '네 말은 틀리지만 내 말은 맞다. 그 이유는 몰라도 된다' 이게 어디 말이나 되는 소린가. 너희들은 항상 이렇게 '아니지만 그 이유는 몰라도 된다. 일단 믿어라'로 일관하는데 그 모른다와 아니다 속에 얼마나 많은 피가 배어있는지 아는 가?" 미하엘이 거의 소리치듯 말했다. 피... 이것은 미하엘이 아케르에게 했 던 말이기도 했다. 나는 피라는 말을 듣자 하잔에서 벌어졌던 일이 다시 눈앞에 되살아나는 듯했다. 검게 말라 붙어가는 피, 진흙과 뒤섞여 보기 에도 끔찍했던 빛깔의 피, 그리고 여자와 어린아이들이 흘린 피... 물론 내가 아케르의 의견에 정면으로 반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기에 나는 말솜씨도 모자르고 생각도 모자른다. 그러나 적어도 그런 피는 다시 보고 싶지 않다. 그건, 죄악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말이다. "피고에겐 더 이상의 재판이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된다. 하지만 지금까 지 발언한 모든 사항들이 이미 피고의 유죄를 증명한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으리라 생각한다. 기록을 위해 질문한다. 이 사실을 시인하는가?" "내가 한 말이 유죄를 증명한다는 네놈의 말이 바로 성황청이 내세우는 교리가 얼마나 엉터리인가를 인정하는 말이라는 걸 시인한다" 이 말에 리바르도 기사단장은 다시 한 번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다. "서기는 피고가 시인했으니 그 사실을 낱낱이 기록하도록" 재판은 이렇게 끝났다. 마지막으로 피고에게 발언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미하엘이 뭐라고 더 말하려고 했지만 성황청 기사 둘이 재판정으 로 들어와 끌고 나가버렸다. "우리는 무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바로 네 놈들이 우리에게 무기를 들 게한 거다" 어차피 기록에는 남지 않겠지만 미하엘은 이렇게 마지막으로 외치고는 끌려나갔다. 나는 마지막으로 외친 미하엘의 말이 마법의 말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언젠가 차이린이 말했던 마법의 말과 같은 말이었다. 말하는 마음은 달랐지만 말이다. 어떤 마음으로 말해야 저 말이 마법의 효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저게 패자의 모습이야. 패자에게는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아. 오직 승 자만이 자신의 말에 사람들을 귀기울이게 할 수 있어" 임시 재판정을 빠져나가면서 라이짐이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승자... 그것이 아케르 단장이 원하는 거였고 또한 라이짐이 원하는 거다. 하지만 이제 나에게는 그런 건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그 어떤 승리라고 해도 그 런 끔찍한 학살을 하고 난 뒤에 얻어지는 승리라고 한다면 아무 의미가 없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라이짐의 말은 맞는 말이기도 했다. 임시 재판정에 모인 단원들 은 아무도 미하엘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 같지는 않았다. 다만 그저 목 에 뭔가가 걸린 것처럼 껄끄러운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라이짐과 천막으로 돌아가는 데, 루비오가 우리 앞을 지나갔다. 타실의 대표와 뭔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루비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루비오는 잠시 우리에게 눈길을 주기는 했지만 우리를 전혀 알아보지 못 하는 듯했다. "기억도 못할 거야. 워낙 많은 사람들을 괴롭히고 죽였을 테니" 루비오가 지나가자 라이짐이 말했다. 나는 루비오가 내 옆을 스쳐갔을 때, 루비오의 손에 끼워진 반지를 볼 수 있었다. 결혼 반지인 모양이었 다. 뒤로아 오르테가... 탐그루 최고의 미인이라는 소리를 들었던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는 겉보기에는 아름다웠을지 몰라도 속은 차가운 여자였다. 그때 강변에서 루비오와 싸움이 붙었을 때, 뒤로아 오르테가는 싸움을 즐기는 듯 했다. 물론 나도 싸움 구경하는 걸 좋아하기는 하지만, 내 약혼자가 관계된 싸움이라면 결코 그렇게 즐기며 구경하지는 못했으리 라. 이렇게 생각하자 어쩌면 뒤로아 오르테가는 생각보다 더 무서운 여자 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쥬크 녀석이 근처에 있다면 그 놈은 피해야겠어, 수르카. 검사는 자 기와 싸웠던 상대의 얼굴은 잊지 않는 법이거든" 라이짐이 나에게 말했다. 그때 루비오는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박수를 치면서 깔깔거리며 웃고 있었다. 나와 라이짐은 그런 루비오를 한 참 동 안 바라보았다. 오후에는 선고가 있었다. 선고에는 타실에서 왔다는 국왕의 대표 한 사 람만이 참석한 모양이었다. 오후 선거 공판은 반드시 참석하지 않아도 좋 다는 말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참석하지 않고 행정담당관 순무를 찾아갔 다. (덕분에 오후에 선고 공판은 텅비다시피한 임시 재판정에서 열렸다고 했다). 할 얘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잔에서 시청 계단을 오를 때부터 마음먹은 일이었다. 이제는 그 얘기를 해야만 한다. 더이상 미루고 싶지 않았다. 어렵사리 결정을 내렸는데 다시 마음이 약해져 결정을 번복하게 된다면... 생각하기도 싫었다. 현재로선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 다. PRINTER/CAPTURE를 OFF 하시고 [ENTER] 를 누르십시오.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0241/11996 ━━━━━━━━━━━━━━━━━━━━━━━━━━━━━━━━━━━━━━━━ 제 목:[탐그루] 잃어버린 신의 이름 88 관련자료:없음 18/18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1-20 00:38 조회:1958 탐그루 # 마법은 마음이다 - 마음은 칼이다 # 순무는 임시 지휘소 천막 안에서 뭔가를 끄적이고 있었다. "순무 행정 담당관님. 여쭈어 볼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순무는 나를 한 번 슬쩍 올려다보더니 다시 끄적이는 일을 계속했다. "순무 행정담당관님, 저..." 다시 한 번 시도했는데 이번에는 순무가 말을 막았다. "수르카. 여기가 용병단이긴 하지만 군대식 방식을 따르고 또 존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 "예" "그렇다면 군대에는 지휘계통이라는 말이 있다는 걸 알고 있겠군" "예?" "할 말이 있으면 십부장에게 먼저 말해. 십부장이 없으면 부관에게 말 해서 십부장에게 전하도록 하고. 그러면 십부장이 나한테 보고할 걸세" 결국 내 말은 듣기 싫다는 말이었다. 애써 마음을 단단히 먹고 여기까 지 찾아왔는데 좀 맥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은 바쁘니 어서 나가봐" "예" 결국 순무 앞에서 나는 '예'라는 말 세 번만 하고는 임시 지휘소 천막 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예, 아니면 아니오 밖에 허용하지 않는 순무의 말이 오늘따라 더 얄밉게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순순히 따르기로 했다. 어차피 이제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차이린의 천막을 찾아갔다. 차이린은 개인 천막 안에서 낮잠을 자 다가 나를 맞았다. 자다가 일어난 부시시한 얼굴이었지만, 어쩌면 이제는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그런 차이린 모습마저 소탈하 고 좋아 보였다. 차이린은 의자에 자리를 권하고는 자신은 침상에 걸터앉 았다. "무슨 일이야, 수르카?" 차이린이 졸린 눈을 비비면서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래서 나는 차이 린에게 순무에게 찾아갔던 이야기와 지휘계통을 따르라는 말을 들었던 이 야기를 차근차근 했다. "응... 그랬구나... 그래 무슨 말을 하려고?" 차이린은 이렇게 물었다. 나는 내 결심을 털어놓으려고 했다. 그때 천 막이 열리면서 누군가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너무 놀라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는데, 때문에 의자가 뒤로 넘어갈 뻔했다. "수르카. 그렇게 놀라지 마. 오래간만에 만나는 데 반갑지도 않니?" 검은 성복을 입은 여자 사제, 라스폼이었다. "그나저나 이렇게 빨리 만나게 될 줄은 몰랐어. 어차피 만나게 될 건 알았지만 말이야. 다행이야 수르카" 이렇게 말하는 라스폼의 얼굴은 무척이나 즐거운 듯 보였다. 이제 어떻 게 해야하지? 바로 도망쳐야 하나? 하지만 저렇게 출입구를 딱 막고 서 있으니... "내가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 했지? 거봐 이렇게 다시 만나게 돼잖아. 몸은 어때? 어디 아픈데 없구? 키도 많이 자랐고, 더 늠름해 보이는구나" 라스폼이 이렇게 말하자 차이린은 졸린 눈을 비비면서 알 수 없다는 표 정을 지었다. "둘이 아는 사이야?" 보면 모르나. 나는 도망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라스폼에게 뭐라고 말해 야 할지도 몰랐기 때문에 어정쩡하게 그저 서 있기만 할 수 밖에 없었다. "아, 인사가 늦었군요. 저는 성황청 자나크 교구에서 파견 나온 라스폼 이라고 합니다. 차이린 십부장님이시죠? 수르카 단원에게 좀 물어볼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순무라는 분이 여기로 가 보라고 하셔서... 하여간 만 나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라스폼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의자라도 들고 싸워야 하나 생각을 해보 았다. 칼은 다시는 안 쓰기로 맹세했기 때문이었다. "수르카. 너무 긴장하지 마. 나는 혼자 널 찾아 왔잖아? 물론 나를 도 와주던 사스카치가 이제는 없지만 말이야" 차이린은 라스폼의 말에 여전히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고, 나는 라 스폼의 말이 협박인지, 아니면 그냥 하는 말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하 지만 어찌되었건 라스폼이 혼자라는 건 사실이었다. 천막밖에도 사스카치 나 그 비슷한 것은 없는 것 같았다. "그래. 수르카. 할 말이라는 게 뭐야? 이 성직자분 얘긴가?" 차이린이 물었다. "저..." 나는 뭐라고 대답하려다가 그만 두었다. 라스폼의 말 그대로 여기서 무 슨 말을 한다고 해도 벗어날 수는 없을 거였다. 순무가 만나보라고 말했 다면 순무 성격상 무슨 생각이 있을 것 같은 느낌도 들었고 말이다. 떠나 는 것은 떠나는 거고, 나는 일단 라스폼의 말을 들어보기로 마음먹었다. "일단 이 성직자 분과 말씀을 나누고 오겠습니다, 차이린 십부장님" 나는 이렇게 말하고 난 후, 라스폼을 따라 천막 밖으로 나갔다. "오래간 만이지? 수르카. 우리 좀 걸으면서 얘기하자. 예전에 탐그루에 서 처음 만났을 때처럼 말이야" 라스폼은 천막에서 나오자마자 이렇게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둔지 안에서는 나를 함부로 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네가 여기 아케르 용병단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반가웠는지 몰 라. 그렇게 찾아다녀도 찾을 수가 없었는데 말이야. 수르카. 먼저 오해를 풀기로 하자. 나는 수르카에게 도움을 청하고 싶었던 거지 절대로 수르카 를 해칠 마음이 있었던 건 아니야" 라스폼이 말했다. 겉과 속이 다른 건 여전하군 라스폼. "그래서 사빈에게 금화 백 개를 줄 테니 내 팔을 잘라달라고 말 했나 요?" 나는 라스폼에게 이렇게 쏘아붙였다. 하지만 라스폼은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내 말을 받았다. "그야 네가 내 목에 칼을 들이대고 있으니 어쩔 수 없었지. 너 같으면 네 목에 칼이 들어 왔는데 가만히 있을 수 있겠니? 그때는 그저 살고 싶 다는 마음뿐이었어, 수르카. 그랬던 나를 이해할 수 없겠니?" 참. 말은 잘하는 군. 말로는 속일 수 있어도 눈빛은 속일 수 없다는 걸 모르나. 그때 그 눈빛은 정말 나는 죽이려고 했던 눈빛이었는데. "그럼 여기는 왜 온 거죠? 목에 칼을 들이댔던 사람을 찾아왔다면 좋은 목적을 가지고 오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나는 조금 비꼬는 투로 이렇게 말했다. 단원들이 천막과 천막 사이를 오가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에 조금은 자신감이 붙은 탓도 있었다. "그 때와 같아. 역시 부탁을 하나 하기 위해서야, 수르카" 라스폼은 이렇게 말했다. "네가 마소드의 검과 반응을 보였던 일을 기억하지, 수르카?" 나는 라스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무슨 의도로 그걸 묻는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아름다운 저 얼굴 밑에 숨겨진 얼굴이 궁금해졌다. 아마 그 속에 숨겨진 얼굴은 다른 표정을 짓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마법을 모으고 있어, 수르카. 다가오는 마칸의 강림을 대비해 서지. 하지만 너나, 또 사비오 님의 마법에 그렇게 집착하고 있는 건 아 니야. 한 사람의 마법사에게 그렇게까지 집착해야 할만큼 우리가 마법을 모으지 못한 것도 아니고 말이야. 다시 말해서 마법이 그렇게 아쉬운 상 황은 아니라는 거야. 하지만 네가 마소드의 검과 반응을 보인 건 달라. 우리 성황청이 알고 있기로는 네가 마소드의 검과 반응을 보인 데는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거든. 아, 오해하지는 마. 너를 성황청으로 데려가겠다 는 말은 아니니까 말이야" 내 표정이 굳는 것을 보더니 라스폼이 말했다. "솔직히 아케르 님에게 너를 성황청에 잠시 파견해 줄 수는 없느냐고 부탁한 건 사실이야. 하지만 아케르 님은 절대 너를 넘겨주지 않을 모양 이더라. 자신의 부하는 끝까지 책임지는 사람이라고 하더니 정말 그런 것 같아" 나는 라스폼의 말에서 아케르가 여전히 나를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내 마음은 이미 돌아서 있었다. 아케르 단장을 위해 목숨 을 바치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더군다나 무고한 사람들을 베는 일은 결 코 다시는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아케르 단장에게 미안하다는 마음이 들기는 했다. 하지만 나는 이제 다시는 내가 죽인 사람의 피를 보고 싶지 않았다. 이젠 더 이상 용병단에 남아있을 수는 없었다. "그냥 작은 부탁이야, 수르카. 내가 아케르 단장님께 시간과 장소를 말 씀드릴 테니 그때 그곳에 와 주기만 하면 되" 이게 무슨 소리지? 나는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라스폼을 바라보았다. "아. 다 왔군. 기억하겠니, 수르카?" 걷다보니 어느새 나와 라스폼은 주둔지 외곽에 만들어진 뮤 축사까지 왔다. 그런데 뮤 축사에서 귀에 익은 소리가 들려왔다. "뮤... (오래간 만이야, 수르카)" "스타바!" 나는 소리치면서 스타바에게 달려갔다. 정말 오래간 만이었다. 스타바 는 예전처럼 순해 보이는 긴 얼굴에 까맣고 커다란 선한 눈으로 나를 바 라보고 있었다. 턱밑의 수염도 전처럼 멋지고 풍성하게 자라 있었고 말이 다. 거기다 몸을 덮고 있는 검은 털에는 더 윤기가 흐르고 있었고 전체적 으로 살도 조금 더 오른 게 훨씬 건강해진 것 같은 모습이었다. 하긴, 매 일 축사에만 갇혀 있다가 밖으로 나가게 됐으니 그럴 만도 하지. 가만. 그런데 스타바가 왜 여기에 있지? "라스폼. 사비오 선생님은" 나는 라스폼을 노려보면서 말했다. "아. 또 오해를 하는구나, 수르카. 사비오 님은 우리도 찾지 못했어. 이 스타바는 스파일에서 내가 찾아낸 거야. 사비오 님은 대청하를 건너자 마자 스파일의 임프 시에 이 스타바를 남겨두고 사라지셨지. 어디로 가셨 는지는 아무도 모르더라고. 그냥 자신을 찾는 성직자에게 스타바를 주라 고만 말씀하셨대" 라스폼은 아주 즐겁다는 듯이 웃으면서 말했다. "아마 너에게 주라는 뜻이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이렇게 데리고 온 거 야. 선물이야, 수르카" 나는 스타바의 등을 쓰다듬어 주면서 라스폼의 말을 들었다. 분명 무슨 속셈이 있는 게 뻔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스타바를 다시 만나게 되어 정 말 기뻤다. "뮤...(수르카, 다시 만나니 정말 반가워)" "그래, 나도" 그런데 스타바를 다시 만난 게 즐겁기는 했지만 어쩐지 라스폼이 마음 에 걸렸다. 내가 탐그루에서 배운 것 중에 하나가 절대로 세상에 거저 얻 어지는 건 없다는 거였다. "저한테 원하는 게 뭐죠?" 나는 라스폼에게 이렇게 물었다. 하지만 어지간한 부탁이라면 들어줄 생각이었다. 만약 스타바에게 조금이라도 상처가 있었다던가 했다면 나는 이렇게 순순히 라스폼에게 이렇게 묻지는 않았을 것이다. 거저는 없는 법 이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했잖아. 그냥 내가 원하는 시간에 내가 원하는 장소에 가 주기만 하 면 된다고. 더 이상 없어. 그 시간과 장소는 내가 아케르 님께 말씀 드릴 거야. 그러니 넌 그냥 그렇게 하기만 하면 되" 라스폼이 웃는 얼굴로 말했지만 나는 그 웃음 너머에 꿍꿍이가 너무 궁 금했다. 이렇게 쉽게 일이 진행 될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그게 뭘 뜻하는지 알기 전에는 아무리 스타바를 가지고 흥정을 하려고 해도 안될 거에요" 탐그루에서 배운 방식 중에 하나가 바로 이 허세다. 물론 나는 무슨 수 를 써서라도 스타바를 얻을 생각이었다. 어차피 떠날 때 뮤 한 마리가 있 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으니까. "...그냥 알아보고 싶은 게 있어서 그래. 전설이 하나 있지" 라스폼은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까마귀의 집이라는 들판이 있어. 삼년전쟁 때 의 격전지였지. 그곳에 마법을 가지고 있는 선택받은 자가 서면 역사가 바뀐다는 전설이 말이야. 물론 여러 종류의 전설이 내려오는 데, 그 중에 선택받은 자는 마소드의 검에 반응을 보인다는 전설도 있거든. 우리는 그 걸 확인하고 싶은 거야" 선택받은 자라고? 나는 라스폼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0242/11996 ━━━━━━━━━━━━━━━━━━━━━━━━━━━━━━━━━━━━━━━━ 제 목:[탐그루] 잃어버린 신의 이름 89 관련자료:없음 20/20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1-20 00:39 조회:1820 탐그루 # 마법은 마음이다 - 마음은 칼이다 # 내가 마소드의 검에 반응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선택받은 자니 전설이니 하는 얘기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확인하면?" 내가 물었다. 그래. 확인하면 나를 어쩔 건데? "네가 만약 전설 속의 그 인물이라면 우리가 어떻게 해도 소용없는 거 아니야? 어떻게 해도 전설의 예언은 들어맞게 될 테니까 말이야. 만약 네 가 전설 속의 인물이 아니라면 더 이상 널 찾는 일은 하지 않겠어. 그럴 필요가 없을 테니까. 어때? 우린 그냥 네가 바로 그 용사인지 아닌지 알 고 싶은 거 뿐이야" 라스폼이 말했다. 듣기에는 그럴싸해 보였지만 조금 이상한 구석이 있 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뭐하러 스타바까지 찾아서 저한테 주면서 그런 부탁을 하는 거에요?" 내가 라스폼에게 물었다. 라스폼의 말이 사실이라면 성황청이 얻는 것 은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이 될 테니, 탐그루 출신인 나는 그게 의심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탐그루에서는 이익이 없는 일에 뛰어드는 사람은 믿지 말라고 했다. 더군다나 뭔가 투자까지 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더더욱이나 말이다. "그야 너한테 신경을 계속 써야할지 말아야 할지를 결정하는데 도움이 될 테니까 말이야, 수르카. 솔직히 말해서 만약 네가 진짜 전설의 그 용 사라면 우리가 널 보호해줄 수도 있어. 아, 그런 표정 짓지 마, 수르카. 그냥 순수한 보호라는 말이야. 널 성황청으로 잡아들인다던가 하는 짓은 안 해. 정말이야. 성직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아" 라스폼이 말했다. 솔직히 그렇게 믿음이 가는 말은 아니었지만 내 생각 에 흥정에 응할 가치는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스타바를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고, 만약에 라스폼이 다시 공격해 온다면 그때는 스타바를 타고 도망치면 그뿐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그때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하자. "좋아요. 응하죠" 내가 대답했고, 라스폼은 웃으면서 고맙다고 말하고 돌아갔다. 나는 스 타바의 등을 쓰다듬었다. "스타바, 나하고 함께 라스폼이 말한 곳으로 가 줄 거지?" "뮤...뮤우... (물론. 우린 친구니까)" "그래 고마워. 그리고 그 날이 우리가 여기 용병단을 떠나는 날이 될 거야" 나는 스타바에게 이렇게 말했다. "뮤우...뮤... (그런데 수르카, 네 친구는?)" 맞다. 그러고 보니 라이짐을 까맣게 잊고 있었군. 라이짐에게는 떠난다 는 말도 꺼내지 않았는데 말이다. 나는 라이짐을 찾아가 이제는 용병단을 떠나겠다는 이야기를 하기로 했다. 라이짐은 예상했던 대로 신다루의 십부 천막에 있었다. 라이짐도 재판 결과는 나중에 들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 하고 재판정에 가지 않고 순무를 찾아갔으니 말이다. 나는 라이짐에게 잠시 할 얘기가 있다고 했다. 라이짐은 고개를 끄덕이 며 천막 밖으로 나왔다. 주둔지가 있는 솔한장 마을은 어쩐지 슬픈 느낌 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짙은 어둠의 그림자가 마을을 온통 뒤덮고 있는 느 낌이었다. 하긴 하잔의 그 대학살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지켜봤으니 그럴 만도 하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와 라이짐은 얘기를 하기 위해 일전 에 비오던 날 얘기를 나누었던 건물로 들어갔다. 건물에 들어가자마자 나 는 지난번에 왔을 때 이상한 소리를 지껄였던 기분 나쁜 노인이 혹시 있 나 안을 살펴보았다. 다행인지 건물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무슨 일이야, 수르카?" 라이짐이 물었다. "너, 칼을 쓰는 게 좋아?" 나는 라이짐에게 이렇게 물었다. 처음부터 다짜고짜 떠난다고 말하기는 조금 어색했기 때문이었다. "그냥. 써야할 이유가 있기 때문이지 뭐... 나라고 미친 놈처럼 칼을 마구 휘두르는 게 좋겠어? 나도 그런 건 싫다. 다들 나와 같은 심정일테 구. 그런데 왜?" 라이짐이 다시 물었다. 써야 할 이유가 있다... 그의 말은 분명 맞는 구석이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나는 동감 할 수는 없었다. 써야할 이유가 있다고 함부로 휘둘러댄 결과가 바로 하잔의 그 살육아닌가. "나, 하잔에서 사람을 죽였어. 솔직히 누구를 죽였는지도, 또 얼마나 죽였는지도 기억이 안 나지만... 어쩌면 우보를 죽인 게 날 수도 있어. 나, 그때, 정신이 없었거든..." 나는 나미트의 얘기는 하지 않고 그냥 이렇게만 말했다. "수르카. 그건 우리 모두 마찬가지야. 누군들 무기를 들지 않은 사람을 죽이는 일이 좋겠니. 하지만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는 거 너도 알잖아. 아케르 단장님 말씀 못 들었어? 우리가 할 일은 하잔 시민들의 죽음을 헛 되게 하지 않는 일 뿐이야" 라이짐이 타이르는 듯한 말투로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글쎄. 하지만 나, 그 이유라는 거 이해 못하겠어. 솔직히 귀족이 없는 세상을 꿈꾼다는 아케르 단장님 말씀도 이해가 안가. 그게 무슨 소용이 있나 싶어... 무기도 들지 않은 사람들이 그렇게 죽는다면 말이야" 나는 라이짐에게 이렇게 솔직하게 말을 털어놓았다. "수르카. 너 왜 그래? 너는 귀족들이 밉지도 않아? 내가 맹세하는 거 못 봤어? 나는 귀족들이 모두 사라지는 그날까지 절대로 멈추지 않을 거 야. 나, 성년의 신 마소드에게 맹세했어. 루비오를 죽일 때까지 무슨 짓 이라도 다 하겠다고 말이야" 라이짐의 말에 나는 탐그루를 떠나던 날, 라이짐이 보여주었던 눈빛이 떠올랐다. "그래. 네가 맹세한 건 잘 알고 있어. 하지만 맹세한 건 너고, 나는 아 니야. 그리고 무슨 짓이든 다 하겠다는 그 말 말이야, 난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걸 이번에 확실히 알았어. 하잔에서 말이야. 무기도 들지 않은 여자와 어린아이를 죽이는 일... 아무리 대단한 목적이 있고 필요에 의해서라고 해도... 나는 앞으로 두 번 다시 그런 일을 하지 않겠어. 나 는 너 같은 사람이 될 수 없다는 말이야" 나는 라이짐에게 이렇게 말했다. "착한 척 하지마, 수르카. 너 아직도 어린애니? 네 말대로라면 내가 탐 그루에서 했던 맹세는 뭐가 되는 거야? 난 수르카 네가 내 유일한 친구라 고 생각했는데 너무 섭섭하다" 라이짐이 말했다. 그의 말은 점점 격해지고 있었다. "아니, 나는 네 맹세가 나쁘다는 게 아니라... 그냥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는 말이지. 무고한 시민을 베는 일... 이젠 난 못해. 아무리 큰 꿈을 위해서라고해도 사람을 죽이는 일은 이제 못하겠어" "그럼 손에 피를 묻히는 나는 어쩌라고? 네가 그렇게 말하면 나는 뭐 야? 살인마? 악마? 마칸? 나만 나쁜 놈이라는 거야?" 라이짐이 흥분해서 말했다. "...나는 너하고 다른 모양이야" 라이짐이 화를 낼까봐 나는 그래도 조심스럽게 이렇게 말했다. 떠나가 는 마당에 라이짐과 얼굴 붉히는 일은 만들고 싶지 않았다. "잘난 척 하지마, 수르카. 그게 얼마나 비겁한 말인 줄 알아? 넌 싸우 기가 겁나는 거야. 칼을 손에 쥐는 게 겁나는 거라고. 죽을까봐 말이지. 그래서 지금 그렇게 말하고 있는 거야. 죽기 싫으니까. 귀족이 없는 세상 이든, 복수든 너한텐 중요하지 않겠지. 넌 지금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 는 거라구, 수르카" 라이짐이 말했다. 이건 좀 지나친 거 아닌가 싶었다. "그렇게 함부로 말하지 마. 너한테는 너한테 중요한 게 있고 나한테는 나한테 중요한 게 있어. 복수나 아케르 단장 님의 말이 너한테 소중한 것 처럼 나한테는..." "네 목숨이 중요하다는 말이겠지?" 아무도 죽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말하려고 했지만 라이짐이 내 말을 끊 으면서 말했다. 라이짐 다운 비꼬는 말투긴 했지만 내 말을 비꼬다니. 나 는 기분이 아주 나빠졌다. "아니야! 내 말을 모르겠어? 난 칼을 좋아하지만 이렇게 함부로 칼을 쓰고 싶진 않아.그것도 죄 없는 사람한테는 더더욱 말이야" "그래서? 이제 어쩌겠다는 거야?" 라이짐은 이렇게 말했다. 역시 또 잔뜩 비비 꼰 말투였다. "나, 그래서, 떠나기로 했어. 여기 아케르 용병단을" 나는 라이짐에게 이렇게 말했다. 라이짐은 내 말에 조금 놀랐는지 잠시 머뭇거렸다. 우리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내가 잘못 본 모양이야. 네가 용감하게 싸우는 걸 보고 너도 충분 히 어른이 됐다고 생각했는데. 겨우 그 정도에 겁먹다니, 수르카" 나는 한동안 가만히 있다가 이렇게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라이짐" "너, 사람을 죽인다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인 줄 알았어? 이봐 수르카. 그 정도 가지곤 안돼. 너 약해 빠졌구나. 너 같은 놈이 칼을 들다니. 칼 이 아깝다, 아까워" 라이짐은 이제 나를 아주 깔보면서 말하고 있었다. 나도 이대로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 그 말 취소해. 난 지금 그냥 너하고 나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 을 뿐이라는 말을 한 거잖아. 그런데 너는 나한테 지금 무작정 화를 내고 있어. 왜 그러는 거야? 너... 내 친구인 거 맞아?" 나는 라이짐에게 이렇게 말했다. 화를 참으면서 말이다. (이런 말을 하 면서 상대방에게 화를 낼 수는 없지 않겠는가) "꼬마처럼 징징대지 마. 사람 몇 죽였다고 잔뜩 겁먹어서 나한테 그런 말이나 하고" 꼬마? 나는 더는 참을 수 없었다. "그렇게 사람 죽이는 게 좋아? 그래. 그 잘난 단검으로 날 한 번 찔러 보시지. 그리고 말해봐. 대를 위해서 소를 희생시틴 거라고. 넌 변했어, 라이짐. 여자하고 어린애나 죽이는 살인자!" 마지막 말은 화가 나서 그냥 내뱉기는 했지만 하는 순간 후회가 되는 말이었다. 이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었는데 말이다. "살인자? 그러는 넌 살인자가 아닌가? 네 손에 묻은 피는 어쩔 거야? 그 피는 무기를 들고 너를 덮친 마물의 피였던가? 수르카. 아까부터 계속 말하는 데 잘난 척 좀 그만해" 피... 나는 내 손에 묻은 피라는 말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라이 짐의 말은 사실이었다. 네 피 묻은 두 손. 하잔 시민의 피. 내가 죽인 내 또래 소년의 얼굴과 나를 덮쳐오던 사람들의 얼굴들, 그리고 우보의 눈알 이 빠져나간 그 얼굴. "맞아... 내 손에는 피가 묻었어. 그래서 떠나겠다는 거야. 네 말대로 겁이 나서나 어려서가 아니야. 다시는 피를 묻히고 싶지 않아. 다시는.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이 피를 씻고 싶아" 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자 라이짐은 잠시 생각에 빠진 듯 했다. "그래. 떠나고 싶다면 떠나. 하지만 손에 피를 묻힌 사람은 결국 다시 피를 묻히고 살 수 밖에 없어. 지금은 여길 떠나면 다 해결 될 것 같겠지 만 어떻게든 너는 다시 손에 피를 묻히게 될 거야. 네 피가 아닌 다른 사 람의 피를" 한참이 지난 다음, 라이짐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지금 말한 말투는 비꼬거나 화난 말투가 아니었다. 나를 생각해 주고 있다는 게 느 껴졌다. 친구... 라이짐과 나는 친구였다. "그럴지도 모르지" 과연 내가 다시는 손에 피를 묻히지 않을 수 있을까... "앞으로는 칼을 쓸 일이 없게 되길 바랄 뿐이야" 내가 말했다. 그러자 라이짐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그래. 나도 그랬으면 좋겠어. 하지만 그렇지 않을 거야. 너 가투신 십 부장이 했던 말 기억해?" "응. 차이린하고 결혼하느니 차라리 애를 낳겠다고 했지" 나는 생각나는 대로 이렇게 말했고, 우리 둘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 게 우스운 말은 아니었지만 나는 지금의 이 긴장된 분위기에서 빠져나가 고 싶었다. 그리고 라이짐도 그건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아니었다면 이렇게 웃을 리가 없지) "아니, 내 말은 약한 자는 죽고 강한 자는 살아남는 게 세상의 법칙이 라는 가투신 십부장의 말 말이야" 웃음이 멈추자 라이짐이 이렇게 말했다. 그래. 그 말은 기억이 났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르카. 지금의 바르도 대륙에선 칼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어. 지금은 그런 세상이란 말이야. 칼 없이 네 생명을 노리는 것들과 싸울 수 있겠 어? 칼 없이 세상을 바꿀 수 있겠어? 네가 하는 말은 결국 약한 자들이 자기 변명을 위해서 하는 말밖에는 안돼. 진정으로 칼 쓸 일이 없게 하려 면 그런 세상을 만들어야 하고 그런 세상을 위해서는 칼을 써야만 하는 거야" 라이짐은 밍밍의 단검을 꺼내 보여주며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쩌면 라이짐의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칼 쓸 일이 없는 세 상을 위해 칼을 쓴다... 하지만 말은 그럴싸해 보여도 칼을 쓴다는 일이 결국 어떤 참사를 불러왔는지 똑똑히 목격한 나에게 그런 말은 이제 의미 가 없었다. "...칼을 쓰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그런 세상은 말들 수 있다고 생각해. 아니, 오히려 칼을 쓰는 일이 또 다른 칼을 쓰는 일을 불러오게 될 거라 고 생각해"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0243/11996 ━━━━━━━━━━━━━━━━━━━━━━━━━━━━━━━━━━━━━━━━ 제 목:[탐그루] 잃어버린 신의 이름 90 관련자료:없음 19/19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1-20 00:39 조회:1979 탐그루 # 마법은 마음이다 - 마음은 칼이다 # 나는 사비오 영감이 했던 칼에 대한 말이 떠올랐다. "칼은 일단 대장간에서 태어나면 무언가를 베기 위해 존재하기 마련이고, 결국 누군가를 죽게 만들기 마련이야. 그리고 누군가의 죽음은 누군가의 피 를 부르게 되고, 그 피는 또다시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을 죽이기 마련이고" 나는 라이짐에게 이렇게 말했다. 문득 사비오 영감에게 고맙다는 생각 이 들었다. 사비오 영감이 그 말을 해주지 않았다면 나는 어쩌면 아무 소 리도 하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필요악이라는 말이 있어. 나쁘지만 피할 수 없다는 말이지. 뮤 똥이 무서워서 뮤를 기르지 않을 수 있어? 냄새가 지독하기는 하지만 뮤를 타 려면 꼭 맡아야 하는 냄새. 칼을 쓰는 건 그런 일이라고 생각해" 라이짐이 밍밍의 단검을 이리저리 놀려보면서 말했다. "그래. 너하고 나는 그 점에서 생각이 다른가 보다" 나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더 이상 말해봐야 결론이 나지 않을 게 뻔 했기 때문이었다. 라이짐도 수긍하는 눈치였다. "...떠나게 되면 꼭 인사하고 가라. 그때 빌어줄게. 네가 앞으로 칼 쓸 일이 없게 되기를 말이야. 진심이야.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은 하지 만... 운이 좋다면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르지" 라이짐이 밍밍의 단검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어쩐지 조금은 쑥스러워 하는 눈치였다. "그래. 꼭 그러도록 노력할게" 나는 이렇게 말하고는 라이짐과 악수를 나누었다. 오래간만에 잡아본 라이짐의 손이었다. 하지만 어쩐지 딱딱하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다. 차이린의 천막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라이짐의 단검을 떠올려 보았 다. 라이짐은 아마도 시드의 귀가 박혀 있는 검을 어딘가 감추어 두고 다 시는 꺼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루비오를 위해서 말이다. 나는 다시 차이린의 천막을 찾았다. 라이짐과의 얘기 덕분에 마음이 좀 정리가 되어서 차이린에게 떠나겠다고 말하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그래... 누구나 한 번은 그렇게 생각하기 마련이지" 내 얘기를 끝까지 다 들은 차이린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나도 그랬으니까. 또, 여기 아케르 용병단에서 그런 생각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 하나도 없을 거야. 모두들 떠나겠다고 한 번은 말하지. 사람마다 이유는 다르지만... 너같이 사람 죽이는 일이 싫어서 떠나겠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고, 전투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떠나는 경우 도 있고, 또 동료와의 사이가 좋지 않아서 떠나는 경우도, 드물긴 하지 만, 있어" 나는 차이린을 바라보았다. 차이린의 표정은 담담했다. 십부원이 떠나 겠다는 말을 하는 건 자주 겪은 일인 듯 싶었다. "하지만 수르카. 용병일을 그만 두면 네가 뭘 할 수 있지?" 차이린이 물었다. 나는 그 질문을 듣는 순간 머릿속이 텅 비는 듯한 느 낌을 받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떠난다는 생각만 했지 뭘 하면 좋을지는 전혀 생각도 해보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용병단에 전해오는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어. '한 번 손을 피로 물들인 사람은 피를 묻히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 무슨 저주의 말 같지만 사 실은 수르카, 너한테 딱 들어맞는 말이라고 생각해. 이미 넌 사람을 죽인 다는 게 뭔지 알아. 그런 사람이 과연 정상적으로 살아 갈 수 있을까? 네 가 장사를 할 수 있을까? 손님들이 다 허약한 적으로 보일걸? 네가 농사 를 지을 수 있을까? 지주나 귀족들을 다 죽여버리고 싶어서 몸이 근질근 질해 질 거야. 그럼 산적이나 도둑? 그런 일을 하느니 용병생활이 차라리 낫겠지. 수르카. 너의 떠나고 싶다는 마음, 또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다는 마음 은 이해해. 아케르 용병단은 들어오는 게 그리 힘들지 않은 만큼 나가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아. 그거야 순무가 알아서 할 일이지만... 하지만 나 는 너에게 나가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구나. 아무 계획도 없이 용병단을 떠나는 건 어쩌면 자살행위인지도 몰라. 무슨 뜻인지 알겠니, 수르카?" 차이린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차이린의 말은 사실이었다. 혼자 떠돌아다니다가는 개죽음 당하기 십상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꼭 그런 게 아니더라도 뭘 하면 좋을지 생각도 없이 용병단을 떠났다가는 어 떤 고초를 겪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 그럼 이렇게 하자, 수르카. 오늘 하루 곰곰이 한 번 생각해봐. 떠나면 뭘 할 수 있을지, 또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말이야. 그리고 내일 다 시 얘기하자. 어때? 좋지?" 차이린이 말했고 나는 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일단 생각해 보자. 하지만 떠난 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고, 떠나서 뭘 하면 좋을 지에 대한 생각을 집중적으로 하는 게 낫겠어. 아무런 준비도 없이 떠났다간 또다시 살인을 하게 될 일을 피할 수 없을 테니까 말이야. "수르카. 내 얘기를 좀 들어줄래?" "나도 떠나고 싶었던 적이 있었어. 아케르 용병단을 찾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야. 전에 얘기했지만 나는 복수심에 가득 차 이곳에 왔지. 아버 지에 대한 복수 말이야" 차이린은 이렇게 말하면서 발목에 찬 해골모양의 고리를 바라보았다. 뭔가를 추억하고 있는 듯, 눈에 물기가 고이고 있었다. "그런데 첫 작전에서 나는 한 남자를 죽이게 됐어. 산적 토벌 작전이었 지...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팜 산맥의 한 줄기에서 말이야. 다모장이라 는 마을을 자주 습격하던 산적이었어. 그 때를 기억해. 작전이 시작됐고, 나는 정신없이 활을 당겼어. 그런데 그때 누군가 뒤에서 날 덮쳤지. 산적 이었어. 나는 살기 위해 발버둥쳤지만 그 산적은 나보다 힘이 셌지. 아마 거기서 난 죽었을지도 몰라. 가투신이 없었다면 말이야" 아. 가투신이 목숨을 구해줬다는 말이 바로 이 때를 두고 한 말이었구 나. 나는 생각했다. "가투신이 산적을 밀어냈어. 산적하고 거리가 생기자 나는 그대로 활을 당겼지. 화살이 날아가 산적의 목을 관통했어... 나중에 다들 놀라운 솜 씨라고 칭찬했지만 사실 나는 가슴을 노리고 쐈지. 뭐, 지나간 일이니까 얘기해도 별 상관은 없을 거야. 그 일 때문에 내가 십부장의 자리까지 오 르게 됐지만 말이야" 그런 일이 있었구나. 나는 차이린에게서 웬지 모를 친근감을 느꼈다. "그런데 말이야, 휴가를 나가서였어. 겨울이었지. 그냥 좀 쉬고 싶었을 뿐이었어. 그후 몇 번의 전투가 더 있었는데, 그때마다 나는 죽을 고비를 넘기고, 또 누군가를 죽이곤 해서 지쳐있었던 거야. 그래서 나는 휴가를 얻어서 용병단을 빠져 나왔지. 그런데 갈 곳이 없었어.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일이었고. 나도 모르게 다모장 마을로 향했어. 그곳이라면 나 를 반겨줄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거든. 어찌되었건 우리 아케르 용병단은 다모장 마을을 산적으로부터 구해준 은인이니까 말 이야" 차이린의 목소리가 조금씩 낮아지고 있었다. "물론 아무도 날 기억하지는 않았지. 아케르 용병단의 이름은 남아있었 지만 말이야. 그래서 나는 술집에서 아케르 용병단의 이름을 팔면서 술을 마셨어. 남자들하고 어울려서 말이야... 재미있었지" 차이린이 남자들에게 둘러싸여서 술을 마시고 있는 모습은 어쩐지 잘 상상이 되질 않았다. 설마. 아마 술을 사준다고 하니까 그냥 공짜가 좋아 서 달려든 사람들이었겠지. "그런데 뒤에서 누가 나한테 달려들었어.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피했 지. 손에 단검을 든 녀석이었어. 녀석은 정말 날 죽일 생각으로 달려들었 던 거야. 나도 역시 필사적으로 막아 낼 수 밖에 없었어. 나는 단검을 빼 앗아 들고 녀석의 목에 겨누었지. 그런데 아직 솜털도 안 벗겨진 꼬마녀 석이더라고. 나는 어이가 없어서 녀석을 놔줬어. 그날 듣게 된 얘긴데, 그 녀석이 바로 내가 목을 뚫어버렸던 산적의 아들놈인 모양이더라. 활을 쏘는 여자 용병을 찾아 복수하겠다고 맹세했다는 거야. 나는 고민에 빠졌 지. 왜 내가 이런 짓을 하고 있어야 하나, 왜 내가 누군가의 원수가 되어 야 하나.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는 생각과 그 꼬마녀석에 대한 생각이 엇갈리는 걸 느꼈어"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나도 용병단을 떠나기로 마음먹었지. 더 이상 원수를 만들고 싶지는 않았거든. 그제야 나는 내가 죽인 사람들이 한 가정의 가장이며, 또 누군 가의 아들이고 아버지라는 걸 알게 된 거야" "그런데 왜 떠나지 않았나요?" "처음에는 가투신... 가투신 때문이었어. 가투신에게 진 빚을 갚기 전 에는 떠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거지" 차이린의 말은 진지했지만 어쩐지 좀 닭살이 돋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나중에는 내가 너한테 말했듯이 내 모든 걸 아케르 단장의 뜻에 맡기기로 했어. 아케르 단장의 뜻을 알고, 또 그 꿈을 알게 된 후에 말이 야. 그때 나는 아케르 단장의 깃발 아래에서라면 죽어도 아무런 후회가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지. 하지만 그건 나중 일이고, 처음에는 가투신 때 문이었어. 그저 간단한 거였어. 누군가를 위해서. 누군가 나를 생각해 주 고 있다는 걸 고마와하면서 말이야" 이게 무슨 소리일까?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을 흘러갔고, 사람을 죽인다는 게 꼭 누군가의 원수 가 되는 일 만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됐어. 그러니까 적응하게 된 거지 뭐. 수르카. 내 말은 일단 이곳에서 지내다 보면 네가 이곳에 있는 이유를, 또 있어야 하는 이유를 찾게 될거라는 말이야" 결국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었군.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비록 차이린에 게 바로 반박할 수는 없었지만, 나는 차이린도 아케르 단장의 말 때문에 남아있는 거라는 생각을 했다. 사람을 그렇게 죽이면서 거창한 구실을 갖 다 붙이는 건 너무나도 싫었다. 그건 성황청이 하는 짓과 마찬가지고 귀 족이 하는 짓과 마찬가지였다. 차이린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케 르 단장에게 목숨을 맡기기에는 사람을 죽이는 일이 너무나도 싫었다. 이 점이 차이린과 나와의 다른 점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오늘 밤 생각해 보고 내일 다시 말씀드리지요" 나는 차이린에게 이렇게 말했고 차이린은 그렇게 하라고 했다. 저녁을 먹고 난 후, 이 생각 저 생각하면서 천막 밖에서 노닥거리고 있 는데, 나를 찾아와 말을 건 뜻밖의 사람이 있었다. 찬이었다. 평소에도 아무 말이 없는 찬이 나에게 말을 걸다니 정말 의외였다. "떠난다는 말을 들었다" 찬이 말했다. "아직 결정한 건 아니지만... 그래" 하여간 용병단에 소문 도는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차이린 한테만 말했 는데 그 말이 어떻게 찬 귀에까지 들어가게 된 거지? "물어볼 게 있어. 떠나게 되면 그레텔을 데려가 줄 수 있는지..." 찬이 말했다. 나는 찬을 바라보았다. 역시 아무 표정도 짓고 있지 않았 지만 좀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잔에 데려다 준다며" "그레텔은 하잔의 제사장 딸이었어. 지금은 죽은 제사장 말이야" 찬이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그레텔은 돌아갈 수 없어. 본인도 원하지 않아" 나는 찬의 말에 잠시 생각을 해 보았다. 그레텔을 데리고 간다. 이거, 만약 그랬다가는 여기저기서 정령들이 달려들 것 같았다. 아자닌하고 나 미트 장군만해도 처리하기 곤란한데... "알았어. 아직 떠나는 걸 결정한 건 아니니까 떠나게 되면 생각해 볼 게" 그래서 나는 찬에게 이렇게 애매하게 말해놓았다. 이봐, 찬. 나는 지금 어디로 떠나야할지, 아케르 용병단을 떠나서 뭘 하면 좋을지, 아무것도 모르겠다고. "...고맙다, 수르카" 찬이 말했다. 아니, 고맙다니? 찬은 내가 말할 틈도 주지 않고 휙 돌아 서 가버렸다. 어쩐지 눈 깜박하는 사이에 찬에게 발목을 붙들린 것만 같 다. 내가 떠난다는 소문은 이미 모든 십부원들이 다 알고 있었다. 청강과 채리는 나에게 뭐라고 말을 하면서 잡아보려고 했고, 큰새와 레드 블루 형제는 별 반응이 없었다. 나카는 나에게 노래를 한 곡 불러주겠다고 했 다. (들으면 용병단에 남아있게 된다나 뭐 어쨌다나) 물론 나는 거절했다 (용병단에 남아있느냐 떠나느냐의 문제하고는 상관없이 나카의 노래는 정 말 듣기 싫었다). "가, 가는 거야?" 기밀이 물었다. "생각중이야" 나는 이렇게 말하고 눈을 붙이려고 했다. "무, 무서워서 그, 그래? 칼을 드, 드는 거 말이야. 칼을 들면 용기가 나, 나지 않아? 나, 나는 카, 칼을 들면 요, 용기가 나는데. 그, 그런 말 있잖아. 무, 무기를* 드는* 순간* 사람은* 변한다고*" 기밀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그 말이 마법의 말임을 알 수 있었다. 게 다가 기밀이 한 말은 차이린이 전에 했던 말에서 일부를 들었던 말이었 다. 그 마법의 말의 나머지 부분을 이제 다 듣게 된 것이다. "야, 기밀. 그 말 어디서 들었어?" "뭐, 뭐가?" 기밀은 전혀 못 알아듣겠다는 표정이었다. 우스운 일이었다. 자기가 해 놓고도 마법의 말인지 모르다니 말이다. 음. 오늘 근무 때 아자닌에게 물 어봐야겠군. 적어도 무슨 종류의 마법인지는 말해주겠지.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0282/11996 ━━━━━━━━━━━━━━━━━━━━━━━━━━━━━━━━━━━━━━━━ 제 목:[탐그루] 칼의 법칙 91 관련자료:없음 24/24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1-21 00:13 조회:1977 탐그루 # 마법은 마음이다 - 마음은 칼이다 # * 칼의 법칙 나는 불침번 근무를 서게 되었다. (아마 동료들의 자는 모습을 보면서 생각해 보라는 차이린의 배려로 그렇게 된 것 같았다) 동료들은 모두 잠 들어 있었다. 으흠. 나는 아자닌을 불러내었다. "내* 마음의* 문을* 여니* 길을* 인도해* 다오*" "부르셨습니까, 수르카 님" 아자닌이었다. 노란 옷과 가느다란 팔다리, 흰 얼굴. 아주 오래간만에 아자닌을 보는 것 같았다. (사실 며칠 되지도 않았지만 말이다) "내가 왜 불렀는지 알지?" 나는 아자닌을 보자마자 다짜고짜 이렇게 말했다. "예. 이제는 마법에 대해서 제가 알고 있는 걸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순순히 털어놓는 군, 아자닌. "무기를* 드는* 순간* 세상과* 사람은* 변한다* 가 무슨 마법이지?" "무엇인가를 변화시키는 마법입니다. 하지만 아직 완성 된 말은 아닙니 다. 예전에 들으셨던 '고통 없이 한 번에 죽인다'는 말처럼 말이죠" 그래. 그러고 보니 예전에 차이린이 했던 '고통 없이 한 번에 죽인다' 는 말도 있었다. 하지만 무슨 마법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설혹 어디선가 그 말의 남은 부분을 들었다고 해도 그 두 개를 연결시키는 건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고통* 없이* 한번에* 죽인다*' 는 말도 뭔가를 변화시키는 마법 의 말인가 보지?" "꼭 그렇다고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말을 이해하신 마음에 따라 다 르게 구현되기 때문입니다" 변화시키는 마법이라... 결국 내가 어떻게 그 말을 이해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말이니 아자닌이 도울 수 있는 건 여기까지 겠군. 나는 이렇게 생 각했다. 그런데 도대체 지금까지 아자닌이 나한테 가르쳐 준 게 뭐가 있 나? 사비오 영감도 참. 마법을 배우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말하고 나한 테 반지를 주더니만. 이거 이래가지고서야 별 도움도 안되잖아. "아자닌, 지금까지 나한테 뭐 도움 준 거 있어? 아무리 생각해도 별로 도움 받은 게 없는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면 섭섭하죠... 지금까지 수르카 님이 마법의 말을 이해하 도록 그렇게 열심히 도와줬는데..." "그래? 그럼 어디 한 번 도와준 그 마법의 말들 한 번 말해봐" 나는 아자닌에게 이렇게 말했다. 흥. 아무리 기억력이 좋아도 내가 지 금까지 들은 마법의 말을 다 생각해내려면 좀 힘들걸. "정령과 관계된 주문이 있습니다 입니다. '내* 마음의* 문을* 여니* 길 을* 인도해* 다오*" 내가 잘 아는 마법이었다. 아자닌을 부르는 마법이니 말이다. "그것도 있잖아. '바람은* 보이지* 않으나* 어디선가* 늘* 불어온다*' 말이야" 기억력은 나도 좀 좋은 편이지(사비오 영감에게 맞아가면서 키운 능력 이다). "그런데 나도 그레텔처럼 아무 때나 정령을 불러오는 마법을 쓸 수 있 나?" "그건 정령술사들이 쓸 수 있는 마법입니다. 마법은 보통 사람의 마음 을 이해하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하지만 정령술사의 마법은 사람의 마음 을 이해한다고 해서 되는 마법이 아닙니다. 정령의 마음을 이해하는 마법 이지요. 때문에 수르카 님이 그 마법을 제대로 쓰려면 무척 힘드실 겁니 다" 아자닌이 말했다. 그렇군. 그런데 정령술사라는 말을 처음 듣는데? "정령술사가 뭐야, 아자닌?" 나는 아자닌에게 이렇게 물었다. "정령을 부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으이구. 그정도는 나도 말할 수 있겠다. "마을에 따라서는 제사장이라고 부르는 곳도 있습니다" 음. 이 얘기는 처음 듣는 군. 탐그루에는 제사장이 없었지만 다른 곳에 는 있는 모양이지, 뭐. 그러고 보니 하잔에는 제사장이 있었다는 말을 재 판에서 들은 기억이 났다. 어쩌면 성황청의 기사들이 제사장들을 죽인 이 유도 정령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제사장의 능력을 두려워해서였는지도 모르겠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나는 정령술사가 아닌데 어떻게 너를 부를 수 있지?" "저는 반지의 정령입니다. 반지의 정령은 좀 다릅니다. 그러니까 저는 수르카 님에게 속해 있다는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수르카 님이 저의 주 인님이 되는 것입니다" 그랬군. 그런데 말을 하는 아자닌은 굉장히 우쭐거리는 듯한 태도로 말 했다. 정령 세계에서는 반지의 정령이라는 사실이 자랑거리라도 되는 모 양이지. "그리고 또 뭐가 있는지 말해 봐" "'약한* 것들은* 죽고* 강한* 것들은* 살아남기* 마련이다*', '적당히* 불의* 힘을* 받은* 것들은* 모두* 조금* 더* 나은* 모양이* 된다*' 이 두 가지는 활성화 마법입니다. 수르카 님은 아직 완전하게 이 마법의 말을 이해하고 계신 것 같지 않습니다" 아자닌이 말했다. 음. 나는 아침에 내무반에 퍼졌던 썩은 생선 냄새와 순식간에 타들어가 버렸던 시간 막대기가 생각이 나서 헛기침을 한 번 했 다. "'전쟁에* 이등이* 있나?* 싸움에* 최선을* 다* 했다는* 말이* 소용* 있나?* 무조건* 이기고* 보는* 거야*'이 마법의 말은 자고 있는 사람을 깨워 자신의 소망을 말하게 하는 마법입니다" 나는 자다말고 벌떡 일어나 헛소리를 중얼거렸던 우보 반장 생각이 났 다. 결국 잠꼬대를 하게 하는 마법이라는 소리잖아. 그래서 나는 다시 한 번 헛기침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모든* 일을* 다*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는 마법의 말이 있습니다. 이 마법의 말은 물체를 띄우는 마법의 말이지만 아직 수르카 님의 이해와 집중이 부족한 관계로 시간 막대기 하나를 겨우 띄울 수 있 는 수준입니다" 아니, 꼭 저런 소리까지 해야하나 싶었다. 나는 기분이 상했지만 정령 에게 그런 티를 낸다는 게 별 의미가 없는 것 같아서 그만 두었다. "'모든* 빛깔* 있는* 것들은* 내게* 시간을* 빌려다오*' 이 마법은 방 어 마법입니다" 그래. 내가 그래도 마법 비슷하게 쓰는 건 그거 하나지. 그런데 그 마 법의 말을 들으니 어째 라스폼과 싸웠던 일이 떠올라서 기분이 상하는 걸. 오늘 바로 그 라스폼하고 거래를 했으니 참 세상일은 알 수 없는 거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오래 살아봐서 하는 소리는 아니지만) 어제의 원수가 오늘의 거래 상대라. 역시 나는 탐그루 출신다워. "'해야* 할* 일이* 먼저이고* 할* 수* 있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은* 그 * 다음이다*' 이 마법은 어떤 물건을 다른 물건으로 바꾸는 마법입니다" 나는 이무르 아주머니 생각이 났다. 이무르 아주머니가 늘 했던 그 말 을 이해했던 순간도 떠올랐다. 그리고 긴 맹세의 말을 하던 라이짐의 모 습도 떠오르고. 그리 오래 된 일도 아닌데 어쩐지 까마득한 옛 기억을 더 듬는 기분이 들었다. (라이짐은 바로 오늘 봤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죽일* 수* 있을* 때*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 '이제* 결정 은* 내려졌다*' 이 두 마법은 전의와 관련된 마법입니다. 그리고..." 아자닌은 빨리 넘어가려고 했지만 나는 아자닌의 말을 막았다. "똑바로 말해. '죽일* 수* 있을* 때*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 는 나미트의 정령을 내 안으로 불러들이는 마법이고 '이제* 결정은* 내려 졌다*'는 나와 다른 사람의 전의를 불러일으키는 마법이잖아" 아자닌은 내 말에는 그냥 예, 하고는 계속 설명을 이어갔다. 길게 말하 기 싫다는 투였다. 나는 뭐라고 한 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그냥 참았다. "'움직이는* 모든* 것들은* 이제* 곧* 사라질* 것들이고* 사라진* 모든 * 것들은* 이제* 곧* 움직일* 것들이다*' 그리고 이 마법은 물건을 숨기 거나 사라지게 하는 마법입니다" "타호루가 썼던 마법이지. 그래. 알았어" 나는 아자닌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아자닌에게 죽 마법의 말을 들으면서 보니 나미트 장군과 관련 된 말은 다 대충 넘어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자닌. 대충 넘어간 마법의 말이 있는 거 알지?" 역시 내 말에 아자닌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기억력 하나는 좋다니 까. 잠깐 스쳐지나간 말도 다 기억하고 있으니 말이야. 그나저나 아자닌 이 나미트를 보통 싫어하는 게 아닌가 보다. "나미트 장군이 그렇게 싫어?" 나는 아자닌에게 이렇게 물었다. "...바르도 대륙의 사람들이 타실 사람, 스파일 사람 따지는 것처럼, 정령들도 마법의 정령과 칼의 정령을 따진 답니다. 마법의 정령은 무엇인 가를 창조하고 축복하는 일을 하고 칼의 정령은 파괴와 저주하는 일을 하 지요" 아자닌은 한참을 아무 말도 없이 있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그렇군. 어 차피 나미트 장군이야 불러봐야 별 소용이 없으니까 부르지 말지, 뭐. 그 때였다. 천막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나는 발걸음 소리를 듣자 저절로 칼 을 찾게 되었다. 이런. 다시는 칼을 잡지 않겠다고 해놓고서는 무의식적 으로 이런 상황에서 칼을 찾고 있으니, 내 모습이 한심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해도 말이다) 나는 인기척이 나 는 곳으로 걸어가 보았다. 거기에는... 그레텔이 서 있었다. "그레텔? 무슨 일이야?" 아니, 왜 밤중에 이 꼬마가 싸돌아다니는 거지? 그런데 그러고 보니 그 레텔의 모습은 많이 변해있었다. 허름한 회색 긴치마 하나 입고 다리에 상처투성이로 팜 산맥을 해메고 다니던 꼬마는 어디로 사라져 버렸고, 깨 끗한 흰옷에, 동그랗고 까만 눈동자가 반짝이는 예쁘장한 소녀가 내 앞에 서 있었다. "...여자. 할아버지" 그레텔이 말했다. 여자는 아자닌을 말하는 거고, 할아버지는 나미트를 말하는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레텔이 제사장의 딸이라고 찬이 말한 게 떠올랐다. 정령을 볼 수 있는 건 혈통 때문인 모양이라는 생각이 들었 다. 언젠가 타호루는 마법사도 혈통과 관계가 있는 것 같다는 말을 했었 는데... "할아버지, 불러" 그레텔이 말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할아버지를 부르라는 말인 지, 아니면 할아버지가 우리를 부르고 있다는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 거, 그레텔하고 얘기할 때는 통역이라도 하나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 다(어떻게 보면 찬보다 더 답답할 때가 있다니까). "무슨 말이니, 그레텔?" 그래서 나는 그레텔에게 이렇게 물었다. "바람은* 보이지* 않으나* 어디선가* 늘* 불어온다*" 이건 내가 한 말이 아니다. 그레텔이 한 말이다. 그레텔이 말하자 칼이 떨리기 시작했다. (허리가 간지러울 정도로 말이다) "부르셨소, 칼의 주인" 나미트가 나타났다. 나는 나미트를 올려다 보았다. (그는 키가 무척 컸 기 때문이다) 길게 기른 흰 수염과 대장군 카를로스 카를로스의 문양이 새겨진 붉은 색 갑옷도 그대로였다. 시커먼 얼굴빛과 굵직한 목도 그대로 였고. 하지만 이거, 칼의 주인은 난데 왜 그레텔이 불러도 나타나는 거 야? "아자닌, 왜 그레텔이 불렀는데도 나미트가 나타나는 거지?" 내가 아자닌에게 물었다. 아자닌은 당황스럽다는 표정이었다. 하긴, 그 럴만도 했다. 마법을 정리해보라고 했는데 나미트를 부르는 주문 얘기는 쏙 빼고 지나간 아자닌이니까 말이다. 이거, 아자닌에게 충고 한 마디 해 줘야겠군. 칼의 정령 세계의 일은 칼의 정령 세계에서, 마법의 정령 세계 일은 마법의 정령 세계에서 처리하라구. "그레텔 님께서 부르셨군요. 저는 칼의 주인이 불렀는 줄 알고 실례를 범했습니다" 나미트가 공손하게 그레텔에게 말했다. 이거, 보기보다 그레텔이 무서 운 사람인 것 같은 데. 나한테는 반말을 찍찍 해대던 나미트가 저렇게 공 손하게 대하는 걸 보니 말이야.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그레텔. 너 아무 정령이나 그렇게 부를 수 있니?" 내가 그레텔에게 물었다. "그레텔 님은 칼의 정령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 다. 즉 정령술사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레텔이 정령술사였다는 걸 알게 되자 하나 궁금한 게 생겼다. "그레텔. 너 그럼 아무 정령이나 부를 수 있어? 그러니까 그 식당 벽에 있던 정령도?" 사실 그게 궁금했다. 그레텔은 벽화를 보면서 뭐라고 중얼거리기만 했 을 뿐 정령을 불러내지는 않았다. "그 정령은 봉인 돼 있어" 봉인? 마칸 족을 봉인했다는 말은 들어봤지만 정령을 봉인한다는 말은 처음 듣는 데? "정령술의 힘으로 정령을 나오지 못하도록 막는 걸 말합니다. 봉인 된 정령은 봉인한 정령술사에 의해서만 풀 수 있습니다. 물론 봉인을 건 정 령술사 보다 강력한 정령술사라면 봉인한 본인이 아니더라도 봉인을 풀 수도 있습니다" 음. 그렇군. "그레텔보다 강력한 정령술사가 벽화의 정령을 막았나보구나" 나는 아자닌에게 이렇게 말했다. "엄마" 그레텔이 대답했다. 그레텔의 엄마가 봉인을? 이거, 아무래도 하잔에는 내가 모르고 있는 일이 좀 있는 모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레텔 님. 누구를 베어 드릴까요. 지금 제가 보기에는 자고 있는 사 람을 빼고는 아무도 벨 사람이 없습니다만" 내가 생각하고 있는데 나미트 장군이 말했다. 또 저런 끔찍한 소리를 하는군. 나미트 장군.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정령이 사람을 벨 수 있다는 말이지? "수르카 님. 경험하셨지 않습니까" 아자닌이 내 생각이 끝나자마자 바로 말했다. 내 생각을 읽은 모양이었 다. 아자닌 앞에서는 함부로 생각도 못한다니까. 가만. 경험했다고? 그 럼... "그럼 내 몸으로 들어와서 사람들을 죽인단 말이야?" 나는 아자닌에게 물었다. 하지만 대답은 그레텔과 나미트가 했다. 둘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인 거였다. 이거 어쩌지. 나는 좀 심각한 생각에 빠져 들었다. 만약에 찬의 부탁대로 그레텔과 함께 이곳을 떠난다면 길 가다가 그레텔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날 살인자로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 들 었기 때문이었다. 거기다가 꼭 그레텔이 아니더라도 칼의 정령을 다스릴 수 있는 제사장의 피를 이어받은 사람을 만난다고 해도 역시 결과는 마찬 가지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나미트 장군이 내 안으로 들어왔을 때의 쾌감이 상기되었다. 무서 운 일이었다. 누군가에게 조종당한다는 느낌 말이다. 아니, 꼭 그 느낌이 아니더라도 사람을 베면서 쾌감을 느끼는 나 자신이 더 무서웠다. 물론 나미트가 내 몸에서 빠져나간 후의 일이지만 말이다. "그레텔. 내 말을 좀 들어봐" 나는 그레텔 앞에 오른 쪽 무릎을 꿇고 눈을 맞춘 뒤 얘기를 시작했다. "너, 하잔에서 있었던 일 기억하지? 검은 옷을 입은 무서운 사람들 말 이야" 그레텔은 고개를 끄덕였다. 검은 옷이라는 말이 나오자 그레텔의 얼굴 에 공포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말만으로도 공포를 느끼다니. 정말 두 려운 일이었나 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 나미트 장군이 내 안으로 들어오면 어떻게 되는 지 알아? 그런 일 이 다시 생겨" 나는 그레텔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러자 그레텔은 당장이라도 울 것처 럼 표정이 일그러졌다. "잠깐. 그레텔 님. 그런 말에 귀기울이실 것 없습니다. 저는 피와 살을 지켜주는 은인, 제 목숨을 걸고 그레텔 님과 또 여기 수르카도 지킬 수 있습니다" 나미트가 말했다. 이거, 말 내용도 맘에 안 드는데 끝까지 나한테는 반 말이군. 그런데 정령도 목숨이 있었나? 목숨을 걸고 지킨다구? 아마 내 목숨을 말하는 거겠지. 잘한다 잘해, 남의 목숨 가지고...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0283/11996 ━━━━━━━━━━━━━━━━━━━━━━━━━━━━━━━━━━━━━━━━ 제 목:[탐그루] 칼의 법칙 92 관련자료:없음 22/22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1-21 00:13 조회:1801 탐그루 # 마법은 마음이다 - 마음은 칼이다 # "그레텔 님. 그 말은 믿으시면 안됩니다. 그 말은 사람을 죽이는 모든 살인자들이 하는 변명입니다. 무엇인가를 위해 목숨을 건다고 하면서 그 무엇을 위해 사람을 죽이는 자들이란 말씀입니다" 아자닌이 말했다. 서서히 분위기가 험악해 지는 걸. 설마, 또... "입 닥쳐, 여자 정령. 함부로 말하지 마. 거 보아하니 약해빠진 소리만 계속 해대는 데 말이야, 이 나미트 장군, 일생을 국가와 국왕을 위해 목 숨 바쳐 싸웠어. 내가 아니었다면 얼마나 많은 스파일 사람들이 바바 족 들에게 죽었을 지 알아? 그런데 꼭 칼 한 번 안 잡아 본 것들이 꼭 뒤에 가서는 그런 소리를 해대지. 날보고 살인마라는 둥, 악마라는 둥하고 말 이야"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나미트가 금새 발끈했다. "사람을 죽이는 사람들은 늘 그렇게 말하지요. 자신이 더 많은 생명을 지켰다고. 하지만 하나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열 명의 목숨을 빼앗는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함부로 말하지 마, 여자 정령. 나는 내 목숨을 걸고 조국과 국왕을 위 해 싸웠던 사람이야" "사람을 죽이는 사람은 누구나 목숨을 걸고 싸우는 법입니다. 자신의 목숨을 걸지 않고 다른 사람을 죽일 수는 없으니까요. 그건 순전히 피해 갈 수 없는 운명이지 본인의 의지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아자닌이 말했다. 역시 지지 않고 맞서는 군, 아자닌. "그만 좀 해!" 나는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둘 다 조용해졌다. (이래 봬도 내가 정령 의 주인이라고) 그런데, 내가 소리치자 누군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찬이었다. 이런. 나 때문에 깬 모양이었다. 미안한 걸, 이거. "찬?" 그레텔이 말했다. 찬은 그레텔을 보더니 손을 흔들었다. (아무 표정도 없이, 그것도 자다가 깨서 저런 행동을 하니까 좀 이상하기는 했다. 거기 다 연금술사의 붉은 빛까지 받았으니 내가 보기에는 귀신이 나타난 것 같 은 느낌마저 들었다) "깼어?" 그레텔이 물었다. "그냥. 좀 시끄러워서" 간단해서 좋긴 하군. 그런데 찬이 말하자 그레텔의 표정이 이상해 졌 다. 꼭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미안해..." 그레텔은 이렇게 말하고는 눈을 감았다. 어라? 왜 저런 심각한 표정을 짓는 거지? "바람은* 나의* 손길을* 기다리리라*" 그레텔이 말했다. 어, 이건 마법의 말인데. 그런데 그 말이 끝나자 순 식간에 나미트 장군이 사라져 버렸다. "어떻게 된 거야?" 나는 아자닌과 그레텔에게 동시에 물었다. "찬이 시끄럽데" 그레텔이 말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나미트 장군은 봉인되었습니다" 어쩐지 기쁘다는 듯한 음성으로 아자닌이 말했다. 봉인이라고? 아니, 내 정령을 그레텔 마음대로 봉인했단 말이야? 아무리 그레텔이 찬을 좋아 한다고 해도 이거 좀 너무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좀 시끄 럽다고 했다고 해서 봉인까지 시켜버리다니 말이다. "그런데 너는 왜 봉인이 되지 않았지?" 나는 어이가 없기는 했지만 일단 아자닌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레텔에 게 물어봐야 통역이 없는 이상 알아듣기 힘들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저는 반지의 정령이기 때문입니다. 반지의 정령은 다른 정령과는 달리 몸에 착용하고 있기 때문에 주인 외에는 아무도 봉인할 수 없습니다. 불 러낼 수도 없고요" 아자닌이 말했다. 하지만, 아자닌. 그렇게 의기양양해 할 필요까지는 없는 것 같은데. 나는 잠시 생각을 해 보았다. 어차피 나미트 장군을 다시 불러낼 생각 은 없었다. 어쩌면 그레텔이 나미트 장군을 봉인시킨 게 다행인지도 모르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게 사비오 영감이 말했던 운명이라는 걸까? 아니면 내 마음이 원하고 있는 일이 이루어졌다는 면에서 마법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사비오 님께서는 이런 상황을 다 생각하고 계셨던 것 아닐까요" 아자닌이 말했다. 그래. 사비오 영감은 나에게 아자닌과 나미트를 다 남겨주고 떠났다. 그리고 스파일의 임프 시인가 하는 곳에 스타바를 남겨 두고 갔다는 라스폼의 말을 들어봐도 그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진짜 예언 같은 예언을 하는 건 몇 번 보지 못했지만 어쨌든 사비오 영감은 예언자니까. 그런데 왜 사비오 영감은 나에게 스타바를 전해주었을까. 이 의문이 들 자 하나씩 다른 의문들이 꼬리를 물고 일기 시작했다. 라스폼의 제의를 받아들이라는 의미였을까? 그리고 왜 하필이면 스파일의 임프라는 곳에 스타바를 맡겼을까? "예언은 끝까지 가 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법입니다" 또 내 생각을 읽고 아자닌이 대답했다. 하긴 그랬다.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 지 지금 알고 있다고 해도 그게 어떤 과정을 거쳐가는지 알 수 없 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기도 했다. 그래. 어쩌면 내가 이곳 아케르 용병단에 오게 된 것도, 또 하잔을 거 치게 된것도 모두 운명인지 몰라. 그러니까 나한테 팜 산맥으로 가는 지 도를 남겼겠지. 어쩌면 이 모든 일에는 방향이 있는지도 몰라. 사비오 영 감이 그랬잖아? '이곳을 떠나거라. 그리고 그 세계와 맞닥뜨리거라.' 하 고 말이다. 그리고 사비오 영감은 이렇게도 말했다. '네 운명은 이제 코 앞까지 다가왔단다. 그리고 그 운명을 결정짓는 순간이 오면... 너는 알 수 있을 게다' 하고 말이다. 어제 내가 라이짐과, 또 차이린과 얘기하면 서 내가 생각했던 것은 결국 운명이라는 말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운명... 운명은 고양이처럼 소리 없이 다가와 어느 순간 호랑이처럼 포 효한다고 했지. 그리고 그 천둥치는 울부짖음 속에서 비로소 운명이 닥쳐 왔음을 알 수 있게 된다고도 했고. 그래. 내 운명에 나를 맡겨 보는 거 야. 뭘 하면 좋을지 같은 건 나중에 생각해도 되. 용병이 되겠다고 여기 까지 왔지만 나는 결국 사람을 죽일 수 없다는 걸 알게 됐잖아? 그래. 결 심은 그 마지막 순간까지 늦추자. 그래도 늦지 않을 거야. 결정의 순간이 다가오면 분명히 알 수 있을 테니까. "그레텔. 이리와" 찬이 그레텔을 부르자 그레텔은 쪼르르 찬에게 뛰어갔다. 짧은 다리가 종종거리며 움직이는 모습이 귀여웠다. 그러고 보니 좀 미진한 부분이 떠 올랐다. "오늘 내가 들은 마법 말이야. 사실은 그거 때문에 널 부른 거였거든? 뭔가를 변화시키는 마법이라고 했지? 그게 무슨 소리인지 조금 더 설명해 줘. '고통* 없이* 한번에* 죽인다*'하고 같은 말이야? 아니면 '해야* 할* 일이* 먼저이고* 할* 수* 있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은* 그 다음이다*'같 은 건가?" 나는 아자닌에게 이렇게 물었다. "...'무기를* 드는* 순간* 세상과* 사람은* 바뀐다*', '고통* 없이* 한 번에* 죽인다*' 이 두 말은 물건이 아니라 사람하고 관계가 있는 마법 같 습니다. 제가 알 수 있는 것은 이 정도 뿐입니다. 직접 마법을 던지시는 분이 어떻게 그 마음을 이해했느냐에 달려있기 때문에 어떤 결과가 나타 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 동물로 바뀌는 마법일 수도 있고 반면 동물을 꽃으로 바꾸는 마법일 수도 있습니다" 아자닌이 말했다. 예까지 들어가면서 애써 말했지만 아자닌의 말은 결 국 모른다는 소리였다. 하여간 그렇다면 누구를 연습상대로 골라야 할지. 나한테 먼저 해보는 게 순서겠지만 그건 좀 무리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이 들었다. 어떤 결과가 나타날 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레텔을 한 번 바라보았다. (절대로 실습 대상으로 삼고 싶어서 본 건 아니다) 그레텔은 찬의 품에 안겨서 자고 있었다. 아마 저렇게 자다가 근무 나 가는 길에 식당으로 데려다 줄 모양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안고 자다니. 그레텔은 겁도 없지 혹시 찬 녀석이 변태라면 어떻게 하려고. 그런데 왜 나는 자꾸 이런 쪽으로만 생각이 되는 걸까.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는 내 가 싫다, 싫어. 나는 그냥 나 자신을 의식하고 연습 해보기로 했다. 의사도 처음에는 자기 자신에게 먼저 실험해 본다는 말이 떠올랐다. "무기를* 드는* 순간* 세상과* 사람은 변한다" 나는 주문을 외웠다. 하지만 역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그 레텔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봐도 귀엽고 예쁜 여자아이였다. 그래. 이 마 음으로 한 번 해보자. 어쩌면 갑자기 그레텔이 자라서 어른이 될지도 모 르지. 나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마음을 하나로 모아야 한다. 그리고 조금 씩 정신을 집중하고 어느 정도 마음이 일치했다고 느꼈을 때 다시 한 번 주문을 외웠다. "무기를* 드는* 순간* 세상과* 사람은* 변한다" 역시 아무 일도 일어 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두 말을 섞으면 어떻게 될 까. "무기를* 드는* 순간* 고통 없이 한 번에 죽는다" "고통* 없이* 죽는* 순간* 무기는 세상을 바꾼다" "무기가* 고통* 없이* 한번에* 세상을 바꾼다" "고통* 없이* 마음은* 세상을* 변하게 한다" "무기가* 없이* 세상은* 변한다" 나는 생각나는 대로 아무렇게나 말을 섞어보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말을 이해하지 않으면 마법은 결코 작동하지 않습니다" 아자닌이 상기시켜 주었다. 그래, 알았어. 나는 그냥 처음에 했던 마법 의 말로 연습하기로 마음 먹었다. "무기를* 드는* 순간* 세상과* 사람은* 변한다" 나는 좀 크게 주문을 외웠다. (그래야 마법이 작동될 것 같아서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바로 반응이 나타났다. "조용히 좀 해! 잠 좀 자자! 수르카! 너 자꾸 그러면 나, 무기를 드는 수가 있어!" 청강이었다. "아자닌, 저거, 내가 이해한 마음의 결과야?" 나는 조용히 아자닌에게 속삭이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닙니다" 아자닌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래서 나는 마법 연습을 때 려치우고 그냥 근무나 서기로 마음먹었다. 마법의 말을 만드는 일은 조금 나중으로 미루지 뭐. 다음 날, 나는 순무의 호출을 받았다. 지휘계통이라는 말은 아무래도 높은 사람 편하라고 만들어 놓은 말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윗사람한테 의견을 말하는 데는 한 계단 한 계단 밟아 올라가야 하지만, 윗사람이 아 랫사람한테 말하는 건 아무렇게나 할 수 있는게 지휘계통이라는 말의 뜻 이니 말이다. 순무가 나를 부른 것은 다름 아닌 라스폼 문제 때문이었다. "라스폼을 만나 봤지?" "예" 또 지겨운 예, 아니오 문답시간이로군. "라스폼이 제의한 내용을 다 들었나?" "예" "어때? 그 제의를 받아들이기로 했고?" "예" "그래, 좋아. 그럼 오늘 밤 까마귀의 집 벌판으로 가게" "예" "자세한 사항은 차이린이 나중에 전달해 줄 걸세. 우리도 어느 정도는 대비를 하고 있어야 하니까, 저녁때쯤에 세부 사항을 전하지. 알겠나?" "예" 이거 참 간단하군. 그냥 해라, 이렇게 말하면 그만이니 말이다. 나는 이렇게 예, 예 하고 대답만 하고 있는 내 자신이 한심스럽다는 생각이 들 었다. 그런데 웬지 순무 앞에만 서면 예, 아니오 밖에 못하겠으니... "그리고, 점심 먹고 아케르 단장님을 만나 보도록. 단장님께서 하실 말 씀이 있다고 하시니까" "예" "그리고 차이린에게서 들었는데, 아케르 용병단을 나가고 싶다고 했다 면서" "...예" 나는 그냥 고민하고 있는 중이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순무의 얼굴을 보 니 그런 말은 씨알도 안 먹힐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그만 두었다. 그나 저나 아케르 단장이 나를 찾는 건 내가 떠난다는 이야기를 차이린에게서 들었기 때문인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케르 단장은 확실히 나를 생각해주고 있다. 이런 생각이 들자 정말 내가 떠나기로 결심한 것이 잘 한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만약에 용병단을 떠나게 된다면 자네는 은화 열 여덟 닢을 빚지게 된다는 걸 잊지 말게" "예?" 나는 무슨 소리인지 몰라서 이렇게 되물었다. (되묻는 말도 예, 였다) "계약 기간이 끝나기 전이니까 무상으로 지급되었던 의복과 목검, 식비 를 그대로 제하고 나면 자네가 받은 급여로 충당하고도 은화 열 여덟 닢 이 모자란다는 말일세. 내 말 이해가 가나?" "예" 하여간. 누가 탐그루 출신 아니랄까봐 장사 속 차리기는. 나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하여간 나한테는 사비오 영감의 금화가 있으니까 어딜 가 도 돈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사비오 영감한테 돌려 줘야하는 금화잖아? 음. 일단 조금 쓰고 나중에 메꾸면 되 지, 뭐. 어떻게 보면 금화는 내가 보관하고 있는 셈이니까 약간의 보관료 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그래. 가 봐" 순무는 이렇게 말했고 나는 다시 십부원들이 있는 천막으로 돌아갔다. 부대는 다시 주둔지를 옮길 준비에 들어가 있었다. 개인 짐을 챙기는 사 람들도 있었고, 솔한장 마을 술집에 가서 대낮부터 술을 마시는 단원들도 몇 있었다. 나는 솔직히 누구하고도 어울리고 싶은 마음이 일지 않았다. 떠나게 될지 아닌지도 확실하지 않은 마당에 같은 천막을 쓰는 십부원들 과 웃고 떠든다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0284/11996 ━━━━━━━━━━━━━━━━━━━━━━━━━━━━━━━━━━━━━━━━ 제 목:[탐그루] 칼의 법칙 93 관련자료:없음 21/21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1-21 00:14 조회:1911 탐그루 # 마법은 마음이다 - 마음은 칼이다 # 천막 안으로 돌아갔을 때, 남아있는 것은 찬 하나였다. 찬은 그레텔과 놀고 있었다. (고 말하면 좋겠지만 실은 그냥 멍하니 앉아 있는 것에 불 과했다) "그레텔, 찬!" "수르카" 그레텔이 말했다. 그래. 그 말은 반갑다는 뜻이지? 그래, 알겠어. 말없 는 사람의 말은 좋은 대로 이해하면 그만이지, 뭐. 어쩌면 그게 올바른 마법을 구현하는 방법인지도 모르고 말이야. "여기서 뭐하고 있었어?" 내가 그레텔과 찬에게 물었다. "그냥" 찬이 말했다. '그냥'이라. 도대체 찬은 왜 저렇게 무뚝뚝 한걸까. 좀 친절하게 말하면 안되나? "여자" 그레텔이 말했다. 아자닌 말인가? 나는 그레텔의 눈치를 살폈다. 그냥 아무 뜻도 없이 한 말인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마음대로 아자닌을 불러냈을 테니까 말이다. 아니지. 반지의 정령은 좀 남다르다고 아자닌이 그랬는데. 이거,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알 수가 없으니 답답하군. 그냥 아자닌이 보인다는 말이야, 아니면 아자닌이 보고 싶다는 말이야? "할아버지, 자" 이번에는 조금 더 이해가 가는 말이었다. 나미트 장군이 봉인되어 있다 는 걸 이렇게 말한 것 같았다. 음. 그런데 이 말을 듣고 보니 그레텔이 나미트의 정령을 봉인했다는 게 다시 상기되었다. 그래. 그 편이 낫지. 나는 나미트의 그 강력한 힘과 그 힘에 도취되어 마구잡이로 칼을 휘둘렀 던 나 자신이 떠올랐다. 끔찍한 기억이었다. 그 죽어갔던 하잔의 시민 들... 그리고 그걸 즐겼던 나... 생각하기도 싫었다. 다만 다시는 그런 일이 없어야 할텐데, 하는 생각만이 들었다. 하긴. 내가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도 다 그래서긴 하지만 말이다. "떠나기로 했어?" 찬이 물었다. 그래도 찬이 그레텔보다는 낫다. 어찌되었건 찬은 이해가 가는 말을 하곤 하니까 말이다. "아직" 나도 찬의 말투를 흉내내서 이렇게 말해보았다. 재미있을 줄 알았는데 하고 나니 별로 재미는 없었다. 찬은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도무 지 남의 일에는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찬이었다. "그레텔을 잘 부탁해. 가게 되면" 찬이 말했다. 그레텔을 부탁한다. 나는 잠시 생각을 해 보았다. 그레텔 이 나미트를 봉인해 버린 이상 나미트가 혹시라도 필요해질 상황이 생긴 다면 그레텔이 없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런일이 있어 서는 안되겠지만... 아케르 용병단을 떠난 후에는 언제 위급한 상황이 생 길지 모른다) 그리고 어차피 스타바를 타고 떠나게 될 테니까 꼬마 애 하 나 더 데리고 간다고 해서 그렇게 힘이 들거나 돈이 많이 들것 같지도 않 았다. 그래. 좋다고, 좋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떠날지 말지도 결정하지 않았는데, 뭐. "좀비" 그레텔이 말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울고 있어, 식당" 그레텔의 말에 나는 갑자기 긴장이 되는 것이 느껴졌다. 찬이 칼을 들 고 일어섰고, 나는 영문도 모르고 따라갔다. 좀비가 식당에 나타났다는 말인가? 그레텔이 앞장서서 식당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나도 그 뒤를 따랐다. 만약에 정말로 좀비가 나타난 거라면 어쩔 수 없이 칼로 베야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식당에 좀비가 있는 건 아니었다. 식당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레텔은 식당 안으로 들어가더니 벽화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레텔은 그 벽화를 바라보더니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 표 정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 섬뜩한 모습이었다. "...좀비들은 이미 죽었기 때문에 죽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마라. 좀비 는 살아있다..." 그레텔이 말했다. 나는 그레텔의 목소리를 듣고 소름이 돋았다. 그레텔 의 목소리는 남자 목소리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찬을 바라보았다. 찬은 아무 표정도 없이 그저 그레텔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소리야?" 내가 찬에게 물었다. "몰라" 찬이 대답했다. 괜한 물음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말았어야 했는데. 아침 식사는 부대에서 제공되었지만 점심은 솔한장 마을에 나가서 사 먹어야 했다. 식당에서 근무하는 단원들도 모두 쉬러 솔한장 마을로 갔기 때문이었다. 계산에 빠른 순무는 점심 값으로 은화 다섯 닢씩을 나누어주 었다. 물론 다섯 닢이면 어디 가서 최고급은 아니더라도 먹을 만한 음식 을 먹을 수 있는 돈이다. 나는 라이짐을 찾아보았다. 라이짐도 막 점심을 먹으러 솔한장으로 나 갈 참이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라이짐에게 점심 먹으러 같이 가자고 했 고, 라이짐도 좋다고 했다. 같은 십부원끼리 행동하는 게 좋기야 하지만 나는 언제 떠나야 할 지 모르는 마당에 십부원들과 어울린다는 게 좀 껄 끄러웠고, 라이짐은 임시라고는 하지만 아직도 십부장이기 때문에 다른 십부원들과 함께 있는 게 싫은 모양이었다. "수르카. 우리 주둔지로 돌아가지 않을 모양이더라" 라이짐이 말했다. "그래? 그럼 어디로 간데? 설마 탐그루에 또 좀비가 나타나는 건 아니 겠지?" 반 농담조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아니. 물론 아니야. 여기 하잔에 남는데. 국왕의 군대가 올 때까지 여 기서 임시로 계엄군 역할을 하게 될 모양이야" 그렇군. 하잔 반란 진압에 가장 공이 큰 아케르 용병단이 계엄군을 맡 게 된다. 어쩐지 잘 어울리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듣기에 나쁜 말은 아니 었다. 그렇다면 아케르는 계엄 사령관 직에 앉게 되겠구나 싶었다. "그렇구나. 국왕의 군대는 바쁜 모양이지?" "뭐, 높은데서 오가는 얘기니 내가 알 수 있는 건 아니지. 하지만 그렇 게 하기 위해서 아케르 단장님이 국왕의 대표들을 만난 건 사실인 것 같 아. 뭐, 정치적인 얘기가 오고 간 모양이야" 라이짐은 별 관심 없다는 듯이 말했지만, 사실 그런 일들에 관심이 없 는 것 같지는 않았다. 원래 탐그루에서 소매치기 패거리의 두목 일을 할 때부터 라이짐은 협상과 타협에 재능이 있었으니 말이다. 그만하면 정치 에 관심을 가질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지 않을까? 우리가 들어간 곳은 '여행자들을 위한 집'이라고 쓰여 있는 촌스러운 간판이 걸린 식당이었다. (글씨가 다 바래있는 것을 보니 어쩐지 사비오 영감의 예언의 눈동자 생각이 나기도 했다) 나와 라이짐은 별 생각 없이 그 안으로 들어갔다. 더 돌아다녀 봐야 거기서 거기일 것 같았고, 더 돌 아다니려고 마음을 먹었다고 해도 배가 고파서 더 이상 찾아다닐 힘도 없 었기 때문이었다. 식당 안은 밖에서 보기보다는 넓었고 나무로 만들어진 깔끔한 식탁이 여러 개 놓여있었다. 생각보다는 좋은 식당을 찾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 다. 자리는 꽤 가득 차 있었는데, 앉아 있는 사람 중에는 낯익은 용병들 의 얼굴이 눈에 띄었다. (십부장급은 보이지 않았는데, 아마 따로 뭘 먹 으러 갔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에 삼각건을 둘러 맨 아주머니가 주문을 받았다. 나와 라이짐은 은화를 모아 삶은 감자와 과일, 고기 약 간, 그리고 맥주 두 잔을 시켰다. (맥주를 시킨 건 라이짐이었다) "여기 술은 맛이 좋을 것 같아. 좋은 맥주에서 나는 냄새가 나거든" 누가 술 팔던 집에서 안 살았다고 할까봐 라이짐은 이렇게 말했다. 그 런데 그러고 보니 이렇게 밖에서 맥주를 마시는 건 오늘이 처음이라는 생 각이 들었다. 성년이 된 후에 마신 술이라고는 하진이 부대 주둔지 안에 서 파는 이상한 술밖에는 없었으니 말이다. (마실 때는 잘 몰라도 마시고 난 다음날에는 속이 뒤집어지는 술 말이다) 곧 식사가 나왔고 나와 라이짐은 맥주를 마시면서 식사를 했다. 라이짐 은 연달아 맥주를 마시면서 맛이 좋다고 말했지만 내 입에 맥주는 쓰기만 했다. 하지만 성인도 됐는데 쓰다고 안 마시면 놀림 당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나는 꾹 참으면서 맥주를 마셨다. "카! 술맛한 번 좋다. 원래 술은 이렇게 시끌벅적한 곳에서 소란스럽게 마셔야 진짜 술맛이 나는 법이라니까. 수르카, 너도 한 잔 해" 라이짐이 꼭 무슨 대단한 술꾼이나 되는 것처럼 소란을 피우면서 말했 다. 내가 알기로 라이짐이 마셔본 술이라고는 패거리들과 탐그루 뒷골목 에서 몰래 마신 몇 잔밖에 없을 텐데 말이다. 나는 어쩐지 웃음이 나왔 다. 하지만 라이짐은 내가 기분이 좋아서 웃는 거라고 생각했는지 별 말 없이 다시 술잔을 권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도저히 마시기가 힘들어서 잔 에 입술만 대고 말았다. "...그런데 그 좀비 놈들이 왜 하잔으로 몰려드는 걸까?" 옆 테이블에 앉은 누군가가 말했다. "글쎄. 하잔에 뭐 먹을 게 있다고 몰려드는 지 알 수는 없지만 별별 이 상한 소문이 다 있더군. 하잔이 저주받은 곳이라서 그런다는 말도 있고, 예전에 무슨 이상한 종교 집단이 좀비들을 부른다는 말도 있고..." 이상한 종교집단 얘기가 나오자 나는 그레텔 생각을 했다. '...좀비들 은 이미 죽었기 때문에 죽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마라. 좀비는 살아있 다...' 과연 그건 무슨 소리였을까? 지금 옆 테이블에 앉아있는 용병들이 하고 있는 얘기와 관계가 있을까? "소문들이라는 게 늘 그렇지 뭐. 그런데 일일이 신경쓰다간 머리털 다 빠질 걸" "아냐. 그래도 난 신경이 쓰여. 이곳에 저주라도 내렸다면... 휴! 생각 만 해도 끔찍해.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부적이라도 하나 사둘까? 어쩌면 자치대나 시청 사람들하고 좀 거래를 해야 될지도 모르겠는데" "사람 죽이는 용병이 무슨 저주를 겁 내고 그래?" "그래. 그런 게 무슨 상관이야? 우린 용병이지 정치가나 성직자가 아니 라고. 그냥 칼을 들고 멍청하게 휘두르기만 하면 되지" 누군가가 큰 소리로 말했고 그러자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 는 따라 웃을 수가 없었다. 하잔의 그 참극을 본 이후, 나는 어쩐지 용병 단 사람들이 전과는 다르게 보였다. 하지만 라이짐은 옆 테이블의 대화를 듣더니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뭐가 재밌어?" 나는 라이짐에게 이렇게 물었다. "칼을 들면 사람은 바뀌기 마련이야. 그냥 멍청하게 휘두르는 건 다 마 찬가지지만 어떤 사람은 반란군이 되고 어떤 사람은 살인자가 되고 또 어 떤 사람은 정의의 검객이 되기도 하는 거지. 그걸 가르는 기준이 뭔 줄 알아?" 내 물음에 라이짐은 이렇게 다시 되물어왔다. "칼을 든 사람의 마음 아닐까?" 나는 이렇게 말했다. 사실 이게 내 생각이기도 했다. 마법처럼 칼도 무 엇인지를 이해하고 그 이해가 따르는 방향으로 쫓아가면 그것이 다른 결 과를 낳게 될 것 같다는 생각 말이다. "아니야. 그건 바로 힘이야" 라이짐이 말했다. "힘있는 놈이 휘두른 칼은 정의의 칼이 되기 마련이고, 힘없는 놈이 휘 두른 칼은 죽일 놈의 칼이 되는 거야. 약한 건 죽고 강한 건 살아남기 마 련이라는 말 몰라?" 전에 용병단으로 오는 길에 가투신에게 들었던 말이었다. 하지만 지금 라이짐의 입에서 그 말을 다시 들으니 예전에 들었을 때와 조금 느낌이 달라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살아남아야 한다는 뜻으로 그 말을 이해 했다. 죽지 않기 위해서, 살아남기 위해서 강해져야 한다는 뜻으로 말이 다. 하지만 지금 라이짐의 말을 들어보니 나와는 다르게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강해져야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거야. 정의의 칼을 휘두르기 위해서 말이지. 루비오 녀석을 보고도 내가 참을 수 있었던 이유가 거기 있어. 만약에 아무 힘도 없는 지금의 내가 루비오를 벤다면 사람들은 나를 살인 자라고 부를 거야. 그게 당연하지. 하지만 내가 강해지고 또 권력을 얻은 다음에 칼을 휘두른다면 사람들은 다르게 말할 거야. 위대한 복수자 검객 같은 칭호를 받게 될지도 모르지. 아케르 단장님처럼 말이야" 여기서 라이짐은 씨익 웃었다. "오늘 하얀여우 미하엘은 사형을 언도 받았어. 아마 조만간에 타실로 압송되어 국왕 앞에서 죽게 될 거야. 물론 죽이고 살리는 건 사실 국왕 마음이지. 국왕이 죽이라고 하면 그 자리에서 죽는 거고 살리라고 하면 일생동안 미하엘은 지하 감옥에서 썩게 되겠지. 이건 순전히 미하엘의 힘 이 약하기 때문이야" 라이짐은 이렇게 말하면서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정의일까? 과연 미하엘이 힘이 있다고 해서 무죄가 되고 힘이 없다고 해 서 사형을 언도 받는 것일까. 나는 꼭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그건 힘의 문제를 떠나서 그저 더러운 정치놀음인 것이다. 강하건 약하건 상관 없이 말이다. 내가 예전에 알았던 위대한 복수자 검객 아케르도 결국 이런 사람이었 던가. 강해지기 위해서라면 아무나 죽여도 좋고, 또 약한자를 죽여 놓고 는 나중에 잘 둘러대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 말이다. "무기를 드는 순간 세상은 바뀐다는 말 들어본 적 있어?" 내가 라이짐에게 물었다. "들어본 적은 없지만 내 말이 그 말이야. 수르카. 무기를 드는 순간 세 상은 바뀌기 마련이야. 그리고 어떻게 바뀌느냐는 바로 무기를 든 사람의 힘에 달려있고" "난 그 말이 그런 뜻이라고는 생각 안 해" 나는 라이짐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무기를 드는 순간 그 사람이 강하건, 약하건 세상은 지옥으로 변 한다고 생각해. 서로 죽이고 죽는 지옥 말이야. 하잔에서 네가 본 건 강 한 자가 다스리는 세상이었는지 몰라도 내가 본 건 그냥 지옥이었어. 그 저 죽이고 죽는 일 말고는 아무 의미도 없는 지옥" "거기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사람과 의미를 찾지 못하는 사람의 차 이가 강한 사람과 약한 사람의 차이 아닐까. 아케르 단장님이 장례식 때 했던 말이 이런 뜻이었다고 생각하는데...?" 라이짐이 단숨에 내 말을 반박하고 나섰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0332/11996 ━━━━━━━━━━━━━━━━━━━━━━━━━━━━━━━━━━━━━━━━ 제 목:[탐그루] 칼의 법칙 94 관련자료:없음 19/19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1-22 00:31 조회:1834 탐그루 # 마법은 마음이다 - 마음은 칼이다 # "그렇게 강해져서 도대체 뭘 하겠다는 거야? 복수를 하고 싶다는 네 마 음은 잘 알겠지만 나는 꼭 그런 방법만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약한 사 람을 죽여놓고 거기서 의미니 뭐니 찾는게 무슨 소용이 있어? 사람이 죽 는 다는 게 그렇게 간단한 거야?" "시청에서의 너는 어른이었는데, 지금의 넌 전과 다를바 없는 어린애구 나. 그런 마음으로 어떻게 세상을 바꿀 수 있겠어? 단장님의 큰 뜻을 어 떻게 따를 수 있겠어?" 이렇게 말하는 라이짐에게서 나는 예전의 라이짐을 찾아볼 수가 없었 다. 다시 한 번 눈앞의 라이짐이 낯설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이짐은 이제 정말로 변했구나 싶었다. "세상을 바꾼다는 게 무슨 뜻인지는 나도 알아. 귀족이 없는 세상, 평 민이 짐승처럼 추급받지 않는 세상, 사람의 목숨을 소중히 여기는 평화로 운 세상... 다 좋아. 그렇지만 아무리 좋은 뜻이라고 해도 사람을 그렇게 죽여서 얻어지는 거라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 죽은 사람의 가족에게 뭐라 고 말할 수 있겠어? 친구들에게는 또 어떻게?" "...난 세상을 바꾸는 일에 내 목숨을 걸 수 있어. 무엇인가를 위해 죽 을 수 있는 마음이라면 그런 약한 소리 따위는 하지 않을거야" 라이짐은 목이 타는지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럼 네가 존재하는 이유가 뭐야? 그렇게 죽이고 죽어서 뭘 얻겠다는 거야? 라이짐. 너는 복수해야 하잖아. 그날까지 죽지 않기로 맹세했잖아. 네가 죽으면 세상이 바뀌든 귀족이 다 죽어버리든 무슨 소용 있겠어" "세상을 바꾸는 건 내가 아니야. 세상을 바꾸는 건 칼이야. 칼의 법칙" 라이짐의 말투에서 비장함이 묻어났다. 나는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끼 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칼을 휘두르는 건 사람이야, 라이짐" "칼을 휘두르는 사람을 움직이는 게 바로 칼의 법칙이지. 강한 자가 약 한 자를 억누르고 약한 자는 강한 자를 따르는 칼의 법칙. 수르카. 마음 이 바로 칼이야" 마음... 나는 마음이라는 말을 듣자 사비오 영감이 내게 했던 예언의 말이 떠올랐다. 성년이 되어 세상에 나가면 누군가 자신의 자유를 위해 나 의 자유를 요구할 것이라는 말 말이다. 그리고 나의 자유를 얻고 지키기 위 해 피의 대가를 지불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말도 떠올랐다. 라이짐은 자신의 자유를 위해 누군가의 피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는 걸까. 혹시 죽기 싫어 도망만 치고 있는 것은 아닐 까. 나는 자신이 목숨을 걸 수 있다고 여기는 것에 아낌없이 목숨을 바칠 수 있는 라이짐이 솔직히 약간은 존경스러웠다. 물론 한편으론 그런 라이짐 이 두렵기도 했지만 말이다. 나라면 결코 그렇게 하지 못하리라. 아니, 나 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하잔에서 사람들을 죽이면서 나는 그 걸 깨달았는지 모른다. 라이짐은 어찌되었건 진정한 성인이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라이짐. 마음이 바로 칼이라는 말에는 반대야. 나는 마법을 알 아. 마법은 결코 마음을 움직이지 않아.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게 마법이지. 과연 세상을 바꾸는 것이 칼일까? 꼭 그 방법만 있는 걸까? 마음에서 우러 나오는 다른 것으로 세상을 바꿀 수는 없을까?" 나는 나 자신에게 물어야 할 말을 이렇게 라이짐에게 물었다. 내 태도가 좀 수그러들었다고 느꼈는지 라이짐은 약간의 미소마저 머금은 얼굴이 되었 다. "우리가 성년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멀었다고 생각해. 진정한 어른이 되 면, 그러니까 몸만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어른이 되는, 그 때가 오면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어쩌면 나와 너, 아니 우리 모 두가 그런 의문들을 갖고 있고, 그 의문에 대한 해법을 찾아가는 과정이 곧 어른이 되는 과정 아닐까? 누군가는 나이는 어려도 어른일 수 있고 또 누군 가는 늙어 죽는 순간이 와도 어른이 되지 못하고 어린애로 남아 있을 수도 있겠지" 나는 뭐라고 칼과 마법에 대해서 다시 말하려고 했지만 참았다. 더 이 상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게 너무 피곤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만 두자. 지난번에도 한 얘기 같아" "그래. 오늘은 그만 두자. 어쩌면 다시 못 만나게 될 지도 모르잖아. 안 그래, 수르카?" 라이짐의 말을 듣자 나는 정말로 내가 떠나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이 들었다. 라이짐과의 이야기 속에서 나는 벌써 용병의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말뜻은 알겠어. 하지만 다시 못 만나지는 않을 거야. 우린 친구잖 아?" 나는 라이짐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래. 우린 친구지... 그런데 수르카. 나도 들은 얘긴데, 여자를 알기 전에는 진짜 어른이 아니라더라" 라이짐의 말에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그럼 차라리 여자를 알아나가는 과정이 어른이 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그럼 여자는 어쩌지? 날 때부터 어른인가?" "글쎄. 잘은 모르지만 여자도 자신이 여자라는 걸 알게 될 때까지는 어 른이 아닌 거 아냐?" 우리는 한바탕 웃음을 터트렸다. 꼭 탐그루에 있던 시절에 기생들이 목 욕하는 모습을 훔쳐보고 돌아오는 길에 떠들던 것 같은 느낌이었다. 라이 짐과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잔을 들어 술집에서 자주 보았던 사람 들처럼 술잔을 맞부딪쳤다. "그런데 뭘 위해서 마시지?" 라이짐이 물었다. 그러고 보니 술집에서 본 사람들은 모두 뭔가를 기원 하면서 마시던데... "죽지 말기 어때?" 나는 이렇게 말했다. 내 말에 라이짐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죽지 말자, 수르카" "좋아, 절대로 죽지 말자" 라이짐과 나는 이렇게 말하고는 잔을 들이켰다. 그런데 아무리 기분이 좋아도 술을 정말 쓰기만 하단 말이야. 나는 코를 잡고 억지로 약사발을 들이키는 사람처럼 술을 목구명으로 넘겼다. 술을 마실 때는 그나마 좀 참을 수 있었지만 마시고 난 후에는 역시 참 기 어려울 만큼 속이 좋지 않았다. 라이짐은 좋은 술을 마셨다며 기분 좋 게 껄껄거리면서 천막으로 돌아갔지만 나는 세상이 다 흔들려서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라이짐 녀석 술이 센 걸까, 아니면 내가 술이 약한 걸까? 아 휴! 모르겠다. 아케르 단장을 만나야 하는데 이렇게 얼굴은 벌개져가지고 비틀거리는 꼴로 만날 순 없지. 아케르 단장이 용병단을 떠나겠느냐고 묻 는다면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까. 나는 천막 안에 누워서 잠시 눈을 붙였 다. 내가 잠든 시간은 아주 잠시였지만 그사이 나는 꿈을 꾸었다. 가투신과 차이린이 싸우는 꿈이었다. 차이린은 가투신에게 결혼하자고 말했고 카투 신은 결혼하느니 차라리 애를 낳겠다고 말했다. 둘의 싸움은 점점 격해지 더니 마침내 칼을 뽑는 데까지 이르렀다. 가투신은 칼을 뽑아 차이린에게 겨누었고, 차이린은 칼을 뽑지 않았다. '무기를 드는 순간이 시민군이 되는 순간이지' 차이린이 말했다. '무기를 드는 순간은 진압군이 되는 순간이야. (실제하고는 다르게 아 주 남자다운 목소리였다)' 가투신은 이렇게 말하고는 차이린의 목을 베었다. 나는 비록 꿈속이었 지만 깜짝 놀라 가투신에게 달려가 가투신의 팔을 잡았다. '뭐야, 이 꼬마!' 그런데 가투신의 모습이 어느 새 나미트로 바뀌어 있었다. 차이린도 어 느 새 아자닌으로 바뀌어 있었다. '수르카 님. 어떤 칼을 뽑으실 건가요. 진압군의 칼인가요? 아니면 시 민군의 칼인가요?' 나는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었는데 아자닌이 나에게 다가와 내 어깨를 잡고 흔들기 시작했다. "둘 다 싫어!" 나는 이렇게 말하면서 꿈에서 깨었다. 그 덕분에 나를 흔들어 깨우던 차이린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하고 누가 그렇게 싫다는 말이니?" 차이린이 물었다. 나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꿈속에서의 질문이었다고 해도 대답할 수 없었을 것이고, 지금 차이린의 질문에도 나는 대답할 수 가 없었다. 과연 나는 어떤 성격의 칼을 더 싫어하는 걸까. 둘다 싫다고 얼결에 답해버리기는 했지만 그게 진짜 내 마음인지는 나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아케르 단장님하고 약속이 있지 않았니? 순무가 그러던데" 차이린이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머리가 아팠다. 이거, 겨우 맥주 한 잔에 이렇게 되다니 몸이 좋지 않은 걸까. (라고 말하고 싶지만 아무래도 그냥 난 원래 술에 약한 체질인가 보다) "아직 늦지 않았어. 어서 가봐" 차이린이 웃으면서 말했다. 차이린의 웃는 얼굴은 보기 좋았다. 예쁘다 거나 여자로서의 매력이 있다던가 하는 모습과는 달랐다. 나를 생각해 주 는 웃음. 나는 그 웃음이 좋았다. 꿈속에서 차이린을 보았던 일이 아득하 게 이해되고 있었다. 차이린이 내게 꿈속에서 물었던 말은 떠날지 말지를 물은 것이었다. 용병이 되어 손에 피를 묻히면서 살아가느냐, 아니면 여 기를 떠나 평범하게 살아가느냐. 그 대답이라면 라이짐과 얘기하면서 벌 써 마음 속으로 결정을 내려 놓고 있었다. 어느 질문이든 둘 다 아니라는 게 내 마음의 대답이었다. 나는 그저 내 마음을 따라서 살고 싶을 뿐이다. "차이린 십부장님, 저 그럼 갔다 오겠습니다. 고마와요, 깨워주신 거" 나는 이렇게 말하면서 아케르 단장이 있는 임시 지휘소 천막으로 달려 갔다. "수르카. 거기 않지" 아케르가 나에게 자리를 권했다. 나는 마음의 준비를 했다. 내가 떠날 지 말지를 물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자네한테 할 얘기가 있네" 나는 숨을 죽였다. 아케르 단장의 이마에 있는 흉터는 어쩐지 사람을 위압하는 기운이 풍겨나왔다. 그 기운을 뭐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하여 간 아케르의 흉터는 마법만큼 강하고 웅변만큼 마음을 움직이는 무언가가 있다. "성황청 일이야. 들어서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라스폼이라는 사 제, 자네를 넘겨달라고 하더군" 의외였다. 아케르 단장이 라스폼의 일로 이렇게 나를 부를 줄을 몰랐는 데 말이다. "...걱정말게. 라스폼이 두 번 다시 그런 소리를 꺼내지 않을테니까. 전에도 말한 적 있지 않은가. 우리 용병단은 부하를 넘겨주는 일 따위는 결코 하지 않네" 아케르는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자네가 오늘 밤 라스폼의 부탁으로 '까마귀의 집 벌판'으로 가 기로 했다는 말을 듣고 조금 의외라고 생각했네. 성황청에게 왜 쫓기는 몸이 되었는가는 묻지 않겠어. 하지만 라스폼이 자네가 거기로 가야하는 이유를 명확하게 얘기해주지 않았을 것 같아서 이렇게 자네를 부른 거라 네" 나를 그곳으로 가라고 한 라스폼의 의도? 라스폼 말로는 삼년전쟁 때 격전지였다는 그곳에 마법을 가지고 있는 선택받은 자가 서면 역사가 바 뀐다는 전설이 있다는 둥, 그 선택받은 자는 마소드의 검에 반응을 보인 다는 둥 하는 이상한 소리였다. 그리고 그 전설이 사실인지 확인해야 한 다고도 했다. 마소드의 검과 내가 반응을 보인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전설의 용사라니... 물론 그런 사람이면 좋겠다는 생각도 전혀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랬다가 성황청의 추적을 받게 된다면? 생각 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그곳은 예로부터 마소드의 검이 발견 됐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지. 알 고 있나?" 마소드의 검이 있었다고? 나는 마소드의 검이 그냥 성년의 신을 상징하 는 검이라는 것만 알고 있었을 뿐, 그런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무 슨 전설이지? 나는 아케르 단장에게 모른다고 말했다. "아주 오래 전, 마칸 족과 인간 사이의 전쟁 때, 까마귀의 들판에 있는 바위 하나에 마소드의 검이 꽂혀 있었다는 전설이 있네. 대마법사 아킨과 초대 기사단장 카를로스 카를로스가 그곳에서 그 칼을 뽑았다는 전설도 있고. 성황청이 이곳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 같네. 좀비 의 등장이 마칸의 부활과 관계가 있다면 좀비들이 하잔으로 모이는 이유 가 그 마소드의 검 전설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야" 아케르가 말했다. 아마 에이스가 수집한 정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었다. "우리가 모은 정보로는 자네가 성년식 행사에서 마소드의 검과 반응했 다는 얘기가 있던데. 아, 물론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 그런 건 묻지 않겠 네. 사실 우리는 그런 데에는 관심이 없어. 다만 성황청이 어떻게 움직이 는 가를 주시하고 있을 뿐이지. 그래서 오늘, 자네의 도움이 필요해졌네. 그래서 이렇게 부른 거네, 수르카" 이게 바로 본론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내 도움이라니? 나는 갑자기 더 럭 겁이 났다. 설마 라스폼을 없애라거나 뭐 그런 거면 어떻게 하지...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0333/11996 ━━━━━━━━━━━━━━━━━━━━━━━━━━━━━━━━━━━━━━━━ 제 목:[탐그루] 칼의 법칙 95 관련자료:없음 17/17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1-22 00:31 조회:1819 탐그루 # 마법은 마음이다 - 마음은 칼이다 # "떠나고 싶다는 말을 했다고 들었네" 아케르가 말하자 나는 속이 뜨끔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직 결정하지는 않았습니다" 나는 웬지 미안해서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차이린 말로는 한 번은 떠나야 할 것 같다고 하더군" 한 번은 떠나야 할 것 같다고 했다고? 차이린이? "자네가 겪은 일, 그걸 이겨내는 게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건 알고있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네가 그 정도 일을 이겨내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 지는 않아" 아케르가 말했다. 아케르의 말은 사람을 끌어들이는 힘이 있었다. 그게 흉터에서 나오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한 말솜씨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 다. 지금 아케르가 한 이 말도 결국은 '사람 죽이는 일에 익숙하게 될 거 다'는 말이었지만 마음으로 와 닿기에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나에 대한 믿음과 애정, 그리고 격려라는 생각이 먼저 드는 말이었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만약 아케르가 여기를 떠나서 시민군 이 되겠는가, 아니면 진압군이 되겠는가, 하고 물었다면 나는 둘 다 싫다 고 간단하게 대답할 수 있었을 거였다. 하지만 아케르의 말은 전혀 다른 생각에서 나오는 말이라고 느껴졌다. 어쩌면 같은 말일지도 모르는데 말 이다. "하지만 차이린의 말도 일리는 있어. 이곳에서 그런 것들을 극복하지 못하고 좌절하기 보다는 떠나서 더 많은 것들을 경험하고 돌아오는 것도 괜찮겠지. 자네를 처음 봤을 때가 생각나는군. 그때 자네 모습은 내가 본 어떤 다른 신병과도 달랐어" 굳이 칭찬의 말이라고 할 수는 없는 말이었지만 이 말만으로 나는 아케 르에 대한 믿음이 다시 생기는 것이 느껴졌다. "떠나든 말든 그건 자네 뜻에 달려있네. 하지만 내가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들어주겠나?" 나는 다시 한 번 속이 뜨끔했다. 결국 누군가를 죽여달라는 부탁이었을 까. "어떻게 결정하든 꼭 오늘 약속은 지키고 떠나주었으면 하는 게 내 부 탁일세. 사실, 나는자네가 오늘 까마귀의 들판으로 가기로 했다는 말을 듣고 다행이라고 생각했네. 성황청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는 기회니까 말 일세" 말하자면 정보수집 차원의 얘기인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다행인 건 나 도 마찬가지였다. 누군가를 죽이라는 말을 했다면 아마 나는 뭐라고 대답 하기 어려운 지경에 빠졌을 것이다. "그 다음은 상관하지 않겠네. 무기한으로 휴가를 달라고 하면 무기한으 로 휴가를 주겠네. 아니면 그냥 떠나고 싶다고 하면 그냥 떠나도록 해주 겠네. 어때. 들어주겠나, 내 부탁?" 아케르가 말했다. 나는 거절할 이유도 없었고 또 거절하고싶다고 해도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당연히 그렇게 하겠다고 나는 대답했다. "약속을 지키는 일은 성인으로서 당연히 지켜야 할 의무라고 생각합니 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사실 수틀리면 그냥 도망갈 생각을 하고 있었으 면서 말이다) 저녁식사를 하고 난 후, 나는 차이린과 함께 까마귀들의 집으로 갈 준 비를 했다. 차이린은 천막 안에서 챙기는 편이 낫겠다며 내 자리 바로 앞 에서 짐을 챙겨주는 일을 도와주었다. 먼저 칼을 챙기고 내 머리맡에 있는 개인 짐칸에서 배낭을 꺼내 침상 위에 펼치자 천막 안에 있던 십부원들이 참견을 시작했다. "차이린 십부장님, 밤공기가 차던데요" 청강이 말했다. "그래?" 차이린은 이렇게 말하고는 천막 밖으로 나갔다. 역시 차이린은 날 아껴 준단 말이야. "수르카. 혹시 모르니까 치료석은 넉넉히 챙겨" "그래. 무거우니까 걸어가면서 추위를 막아줄 거야. 아마 땀을 뻘뻘 흘 리게 될 걸?" 치료석을 집어넣고 있는데 이런 소리들이 들려왔다. "난 다칠 일 없으니까 치료석은 필요 없어. 이건 순전히 내 뮤를 위한 거야" 나는 이렇게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사실, 십부원들의 말은 꼭 비아냥거 리는 투였지만 맞는 말이긴 했다. 나는 먼저 내가 모아두었던 치료석을 내 짐칸에서 꺼냈다. 반질반질한 겉면이지만 투박하게 생긴 이 치료석은 무겁긴 해도 언제 어디서건 그만큼의 값어치를 한다. 조금 무겁더라도 참 아야지.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차이린은 내가 치료석을 배낭에 넣는 사이 천막 밖으로 나가더니 시커 먼 옷을 한 벌 가지고 왔다. 무늬 하나 없이 단순하게 만들어진 옷이었는 데, 아마 입고 있는 옷 위에 덧입는 옷인 모양이었다. "특수 전투복이야. 실전 때 주는 건데, 원래 겨울에 입는 거야. 올 겨 울에는 주둔지에서만 시간을 보내는 바람에 실전이 없어서 지급이 되지 않았던 거야. 입어" 차이린이 자상한 누나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나는 누나가 없으니 까 그런 것 같다는 말이다) 가까이에서 보니 까만 색이어서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전투복에는 주머니며 띠가 많이 달려있었다. 주머니는 가슴 왼 편과 오른 편에 하나씩, 그리고 밑에도 오른 편과 왼편에 각각 하나씩이 달려 있었고, 허리춤에는 뭔가를 꽂아 넣을 수 있게 띠가 만들어져 있었 다. 나는 그것들을 보자 뭔가를 채워 넣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나는 하진에게 산 단검을 허리춤의 띠에 꽂아 넣었다. 하진에게 서 산 단검은 아무 무늬도 없고 모양도 단순했기 때문에 띠에 꼭 맞게 들 어갔다. 마음에 드는 군(스파일 군에 납품하는 물건이라는 말은 믿을 수 가 없었지만 말이다). 띠는 네 개 뿐이었기 때문에 남은 단검 하나는 그 냥 배낭에 넣었는데 내가 단검을 차는 모습을 보자 십부원들이 참견을 했 다. "거긴 담배 꽂는 곳이야, 수르카" "말린 고기도 좋지" "떠나려면 그 정도 준비는 해 둬야지" 레드와 블루가 이렇게 한 마디씩 던졌다. 이런. 하여간 용병단에 도는 소문이란. 단검을 차고 나니까 배낭에 치료석만 달랑 있는 게 좀 마음에 걸렸다. 뭔가 좀 집어넣어야 겠는데. 그래서 나는 팜 산맥 지도며, (오랫 동안 꺼내지 않아서 구겨질대로 구겨져 있었지만) 은색 타코 털이 회색으 로 보일 만큼 낡은 타코 가죽으로 만든 수통이며 또 천과 숫돌까지 집어 넣었다. (칼을 정비할 필요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수르카. 먹을 것도 가지고 가봐. 혹시 오래 있게 될지도 모르니까" "예?" 혹시 갈아입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옷가지까지 챙기고 있는데 차이 린이 말했다. 나는 지난번에 찬이 짊어지고 갔던 무지막지하게 큰짐이 떠 올랐다. 찬이 그걸 매었으니까 망정이지 내가 그걸 매었더라면...윽, 생 각만 해도 죽겠다. 그런데 이번에도 그런 큰짐을 챙겨 주면 어쩐다? "아니, 저, 오늘밤만 넘기면 되는 데, 그건...좀..." "준비해 둬야지. 무슨 일이 생길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야" 차이린은 이렇게 말하고 다시 천막 밖으로 나갔다. 미치겠다, 이거. 자 상한 건 좋지만 너무 신경 쓰는 거 아니야? "완전 무장하는 군, 수르카" "혼자서도 산적단 하나는 상대하겠는데?" 큰새와 체리도 이렇게 한마디 씩 던졌다. 비꼬는 투가 분명했지만, 나 는 별로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사실 내가 생각해도 하룻밤 그냥 나갔 다 오면 되는데 너무 많이 챙기는 거 아닌가 했지만 말이다) "산적단 같은 것들을 일일이 상대하지는 않아"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있으면 풋내기처럼 보일 것 같아서 나는 이렇게 쏘아주고 다시 짐을 챙겼다. 그런데 옷가지까지 챙기고 나니, 내 인 짐칸 에 남아 있는 옷 속에 차는 복대가 눈에 들어왔다. 사비오 영감의 금화가 담긴 복대 말이다. 하도 많이 차고 다녀서 때가 반질거리는 복대였지만, 어쩐지 이거 하나만 놔두고 가기도 뭐해서 나는 그것도 허리에 찼다. 언 젠가는 꼭 돌려줄께요, 사비오 영감. 나는 복대를 차면서 이렇게 생각했 다. 내가 겨울용 전투복을 올리고 거기에 복대를 차고 있는데 차이린이 들 어왔다. 역시 식량을 가득 담은 큰짐을 하나 들고서 말이다. "이 정도는 가지고 가야지. 무슨 일이 생길지 어떻게 알아?" 차이린이 말했다. "차이린 십부장님. 저, 아무리 그래도..." "혼자 가는 게 아니야" 나는 내가 돼지가 아니라는 얘기를 하려고 했는데 차이린이 내 말을 끊 었다. "예?" 이건 또 무슨 소리지? "찬도 같이 가기로 했어. 혹시 성황청에서 무슨 수작을 부리는 게 아닌 가 해서 우리도 나름대로 준비는 해 놓았지. 혼자 가는 것보다는 찬하고 함께 가는 게 마음이 놓일거야. 물론 이번 일은 보수가 없지만 고맙게도 찬이 자원해 줬어" "자원이요? 그레텔은 어쩌고요?" 나는 차이린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거야 찬 마음이지. 용병단에서 작전 외의 일은 완전 자유라는 거 잊 었니, 수르카?" 예의 자상한 얼굴로 차이린이 말했다. 나는 찬을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니까 찬도 배낭에 치료석이며 숫돌 따위를 챙기고 있었다. 길게 자란 머리가 내려오지 않도록 이마에 끈까지 동여매고서 말이다. "그레텔도 같이 가" 찬이 말했다. "이봐, 찬. 나는 지금 여길 떠나는 게 아니야. 그냥 라스폼, 그러니까 성황청 사제하고 약속을 지키러 가는 거 뿐이라구" 나는 이렇게 찬에게 말했지만 찬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래도' 하고 말 했다. 그래도 라니? 그래도 간다? 그래도 난 너를 못 믿겠다? "짐은 뮤가 지는 거지 네가 지는 게 아니잖아?" 자상한 미소와 함께 차이린이 말했다. 이것 봐요 차이린. 스타바는 내 친구라구요, 친구! 그레텔과 찬이 함께 가는 것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뮤 축사에 나와 차 이린, 찬과 그레텔이 도착했을 때 또 다른 사람이 서 있었다. 라이짐이었 다. 잘 다녀오라는 인사라도 하려는 모양인가? 하긴 공식적인 작전이 아 니라 출정식이 없기는 하지만... 어라? 그런데 왜 저렇게 전투복을 차려 입고 있는 거지? 거기다 배낭까지... "참. 내가 말 안 했구나. 라이짐도 함께 가" "예?" 벌써 세 번째로 '예?' 하고 되묻는 군. "라이짐이요? 왜죠?" "내가 말 안 했던가? 찬하고 라이짐이 이번에 너하고 동행하겠다고 자 원했어" 차이린이 말했다. "어린애 혼자 밤에 나다니는 건 위험해서" 라이짐이 웃으면서 말했다. 저것도 농담이라고 하는 건가?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0334/11996 ━━━━━━━━━━━━━━━━━━━━━━━━━━━━━━━━━━━━━━━━ 제 목:[탐그루] 백발 영웅의 전설 96 관련자료:없음 19/19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1-22 00:32 조회:1937 탐그루 # 마법은 마음이다 - 마음은 칼이다 # * 백발 영웅의 전설 오래간만에 올라보는 뮤 등이 혹시 불편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을 했지 만 다행히도 그다지 불편하지 않았다. 그래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는 데 스타바가 내 한숨소리를 들었는지 내가 등에 오르자 '뮤...뮤... (출 발이구나, 수르카. 그런데 좀 긴장한 것 같은데?)'하는 소리를 했다. "별 일 아니야. 너하고 첫 여행이라서 그런가봐" 나는 스타바에게 이렇게 말해 안심을 시켜주었다. (기보다는 내가 안심 하려고 한 말이라는 편이 낫겠다) "출발하자, 수르카" 라이짐이 말했다. 그런데, 어쩐지 라이짐은 나보다 더 긴장해 있는 것 같았다. 저것 좀 봐. 고삐를 저렇게 꽉 쥐고 있는 걸 보라구. 칫. 날 어 린애라고 놀릴 때는 언제고 지금은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이다니. 라이 짐, 실망이야. 아니지. 내가 데리고 가는 어린애니까 뭐, 내가 참지. 그 레텔은 찬의 등에 매달려 있었는데 둘 다 무표정 그대로였다. 장하다, 그 레텔과 찬. 칭찬이라도 한 마디 해 주고 싶군. "그럼 조심해서 다녀와, 죽지 말고" 차이린이 말했고, 우리는 뮤에 올라 솔한장 마을을 떠났다. 떠날 때 나 는 차이린의 표정을 보았다. 웃고는 있었지만 꼭 어디 아픈 사람처럼 어 색하게 웃고 있었다. 달빛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거겠지. 밤하늘에 뜬 둥근 보름달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하지만 찬의 등에 매 달려 있는 그레텔의 눈이 달빛을 받아 붉게 빛나고 있어서 어쩐지 불길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붉은 달 아래의 솔한장 마을은 음산 한 묘지처럼 보이고 있었다. 내가 지금 가고있는 까마귀들의 집이라는 곳, 삼 년 전쟁 때 격전지였다던데, 그렇다면 그곳도 오갈데없는 묘지 네... 이 일이 끝나면 어떻게 해야 좋을까. 용병단을 떠나야 하나. 그렇다면 이제 뭘 하고 살아야 하지? 손에 피를 묻힌 사람은 다시 피를 묻히지 않 고는 살 수 없다고 하던데. 아케르 단장님 말대로 아주 긴 휴가나 한 번 다녀올까. 그럼 여길 떠나서 어디로 가야하나. "무슨 생각해, 수르카?" "어디로 가면 좋을까 하고..." "솔한장하고 까마귀의 집하고는 일직선이야. 그냥 죽 가기만 하면 되. 솔한장을 등지고 말이야. 그러다 보면 절벽이 하나 나오고 그 밑이 까마 귀의 집이야" 라이짐은 내 말을 잘못 이해한 모양이었다. 나도 가는 길은 차이린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서 다 외우고 있었다. "줄줄 말하는 걸 보니까 꽤나 외운 모양이지? 하긴 어린애가 밤에 길을 잃었다가는 큰 낭패지" 나는 라이짐에게 이렇게 한 마디 해주었다. 그러자 라이짐은 머리를 긁 적이며 내가 뭐, 어쩌구 하고 말았다. 좀 이상하군. 평소 라이짐 같았으 면 이렇게 그냥 넘어가지는 않았을 텐데. 분명히 뭐라고 한 마디 했을 텐 데 말이다. 얼마를 갔을까. 우리는 절벽이 보이는 곳까지 올 수 있었다. 까마귀의 집 들판까지 온 모양이었다. 까마귀의 집 들판은 절벽으로 막혀있었다. 절벽은 팜 산맥에서 갈라져 나온 여러 작은 산맥들 중 하나와 닿아 있다 고 했다. "다 왔다" 라이짐이 말했다. "그런데 이제 어쩌지?" 그러고 보니 여기까지 오라는 말은 들었지만 뭘 어쩌라는 말은 없었다. 그냥 가보면 알 거다... 이 정도가 내가 들은 전부였다. "...여기는 삼년전쟁 때 격전지였다고 하더라. 타실 군의 주력과 스파 일 군의 주력이 정면으로 붙은 게 삼년전쟁 중에 몇 번 안 되는 데, 그 중 한 번이 바로 여기 까마귀의 집 벌판이었데. 여기 있는 이 절벽을 서 로 차지하기 위해 싸웠다고 들었어. 이곳에서 정면으로 붙은 두 부대는 누가 이겼다 졌다를 말하기가 곤란할 정도로 양쪽 다 큰 피해를 입었다고 해.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어서 시체를 태우는데도 며칠이나 걸렸다고 하 더라. 그 검은 연기가 몇 년이나 이 들판에 가득 차 있었데. 그리고 그후 여기에 까마귀들이 몇 해 동안 그렇게 극성을 부렸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까마귀들의 집이라는 이름이 붙은 거래" 라이짐은 내 말에는 대답할 생각도 하지 않고 이렇게 그냥 생각이 나서 말한다는 식으로 감정없이 말했다. 하지만 나는 라이짐의 말에서 하잔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죽어 가는 사람들, 여기저기서 튀어오르는 핏 물, 비명소리와 신음... 나는 다시 한 번 까마귀의 집 벌판을 바라보았 다. 웬지 까마귀의 집 들판에는 죽음의 냄새가 나는 공기가 흐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죽어간 생명들. 그들의 숨결이 느껴지는 듯 싶었다. "여기 어디에 바위가 있다고 들었는데" 나는 더 이상 끔찍한 생각에 빠져들기 싫어서 이렇게 말했다. "그래. 그 바위를 한 번 찾아보자. 거기 마소드의 검이 꽂혀 있던 곳이 라고 했으니까. 가보면 무슨 좋은 수가 생길 거야. 밤새도록 그냥 이렇게 있을 수만은 없잖아?" 라이짐은 이렇게 말하고는 절벽 밑으로 뮤를 몰았다. 우리 일행은 꽤 오랜 시간 동안 절벽 밑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하 지만 아무런 성과도 얻을 수 없었다. 도무지 바위라고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거 어쩐다, 하는 표정으로 나와 라이짐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 보았다. "...무서워하고 있어" 그레텔이 말한 게 바로 그때였다. 저건 또 무슨 소리람? 나는 그레텔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무 표정도 없이 붉게 빛나는 눈을 깜박이면서 그레 텔은 꼭 숨소리처럼 아무 억양 없이 이렇게 말했다. "찬. 쟤 왜 저러는 거야?" 라이짐이 뮤 고삐를 들어 뮤를 세우면서 말했다. 나와 찬도 멈추어 따 라서 멈추어 섰다. (뮤는 신경이 예민해서 동료가 멈추면 혹시 무슨 일이 일어난 게 아닌가 하고 상당히 신경이 날카로와 진다) "겁먹지 마, 라이짐. 별거 아니야. 그레텔은 그냥 정령술사일 뿐이라 고" 나는 스타바의 목줄기를 두드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당황하는 라이짐의 모습을 보는 건 참 오랜 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까지 겁먹은 듯 한 목소리로 말하다니 정말 평소의 라이짐 답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레텔. 그게 무슨 소리야?" 나는 그레텔에게 이렇게 물었다. "무서워해... 바위..." 나는 찬에게 무슨 소리를 하느냐고 물어보려고 했지만 도무지 변화가 없는 찬의 표정을 보고 질려버려서 그냥 차라리 아자닌을 부르기로 했다. 통역치고는 별 쓸모 없는 통역인 때가 많은 아자닌이지만 찬보다야 낫겠 지 싶었다. "내* 마음의* 문을* 여니* 길을* 인도해* 다오*" "예, 부르셨습니까. 수르카 님" 아자닌이 말했다. "지금 그레텔이 무슨 소리하는 지 들었지. 도대체 뜻이 뭐야?" "바위의 정령이 무서워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아자닌이 말했다. "그럼 그 전설의 바위가 멀지 않았다는 말인가?" 라이짐이 말했다. 꼭 죄지은 사람처럼 고삐를 잡은 두 손을 꼭 모으고 목을 움츠리고서 말이다. "예. 수르카님이 계신 곳입니다" 아자닌이 말했다. 뭐라구? 나는 발 밑을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누워있 는 사람 만한 평평한 바위가 달빛을 받아 붉게 빛나고 있는 게 보였다. 이거, 바로 여기였잖아? "찾기 쉽다더니..." 탄식하는 것처럼 라이짐이 중얼거렸다. "겁먹고 있어..." 그레텔이 다시 한 번 말했다. 그런데 그 말이 꼭 죽은 사람이 중얼거리 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너무 음산한 느낌이 들어서 나는 등줄기에 소름 이 다 돋았다. 젠장. "왜 겁을 먹고 있다는 거야, 바위의 정령이?" 내가 다시 아자닌에게 물었다. "저도 정령이기는 하지만... 이건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인간의 형태 로 정령화 된 정령들에 대해선 누구 보다도 많이 알고 있지만 이렇게 바 위에 깃든 정령은 잘 모릅니다. 정령의 마음을 완전히 이해 할 수 있는 것은 정령술사 뿐이지요" 아자닌이 말했다. 그럼 바위에 깃든 정령이 사람이 아니라면 뭐지? 마 칸 족의 정령인가? 바바 족? 아니면 귀신이나 도깨비라도 되나? 나는 스타바에서 내렸다. 바위나 좀 더 가까이 에서 볼까하는 마음이 들어서였다. 거기다가 뮤에 계속 타고서 여기에 서 있어봐야 아무 소용도 없을 것 같기도 했다. 내가 스타바에서 내리자 뒤이어 라이짐과 찬도 뮤 에서 내렸다. 음. 어쩐지 내가 대장이 된 기분이 들었다. "한 번 살펴보자. 무슨 이유가 있겠지. 아직 그레텔의 말이 틀렸던 적 은 없잖아?" 나는 이렇게 말하고 바위를 살펴보았다. 하지만 내가 발견한 것은 누워 있는 사람 만한 넓고 평평한 바위 위에 내가 서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여기" 찬이 말했다. 찬은 바위에 난 틈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찬이 찾은 틈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가느다랗고 손가락 만한 틈이 있었다. 찬. 눈도 좋군. "마소드의 검이 박혀있었던 자리입니다" 아자닌이 말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말해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마소드의 검... 나는 성년식 날 보았던 마소드의 검이 떠올랐다. 은빛 의 장검, 마소드의 검... 꿈에서 휘둘러보았던 불을 뿜는 붉은 용의 장식 이 박혀 있던 마소드의 검... 그런데 왜 여기 박혀있던 그 검이 아버지의 검이라는 생각이 드는 걸까. 또 이 자리에 박혀있던 검을 뽑았던 사람은 누구일까. 아니, 이 검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으며 또 왜 성년의 신을 상징하는 검이 되어 탐그루에 있게 되었을까... 같은 의문들이 꼬리에 꼬 리를 물고 일어났다. "이거 도저히 모르겠다" 나는 이렇게 혼잣말을 했다. 하긴. 내 머리로 이런 걸 다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다. 내 머리는 기억력 하나는 좋은데 뭔가를 잘 생각하는 일에는 약하단 말씀이야. "정령의 이름과 부르는 주문을 알아내 달라고 그레텔 님에게 부탁해보 면 어떨까요?" 아자닌이 물었다. 참. 그 수가 있었군. 그레텔한테는 그런 능력이 있었 으니까 말이야. 나는 그레텔에게 다가가 정령의 이름과 부르는 주문을 알 아내 달라고 부탁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레텔이 먼저였다. 그레텔은 양손 을 앞으로 올렸다. 그런데 마법의 말을 외우지는 않고 잠시 생각에 잠긴 듯 하더니 예전에 보았던 이상야릇한 눈빛이 되었다. "그레텔이 왜 그러는 거지, 아자닌?" 그레텔의 표정이 갑자기 공포로 일그러졌다. 나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 어난 건가 싶어서 그레텔의 아랫도리를 살펴보았다. (혹시 오줌을 싼 게 아닐까 해서 말이다). "저기, 저기..." 그레텔은 촛점 없는 눈동자를 하고서 이렇게 말했다. 무슨 의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뭔가 긴박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건 눈치로 때려잡을 수 있었다. "지금 그레텔 님은 자신의 몸을 통해 정령의 목소리를 전하고 있는 것 입니다. 바위의 정령은 형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자닌이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그런데 뭐가 그렇게 급박하다는 거 야? 나는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러고 보니 멀리서 무슨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기는 했다. 워낙 조용한 밤이어서 소리는 분명하게 들렸지만 무슨 소리 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무슨 벌레들이 내는 소리 같기도 했고 낙엽이 바 스락거리는 소리 같기도 했다. 하지만 분명한 건 바위의 정령이 겁을 먹 을 만큼 두려운 것이 내는 소리라는 거였다. (그런데 바위의 정령은 도대 체 무얼 겁내고 있는 걸까?) "뮤..." 스타바가 울기 시작하자 다른 두 마리의 뮤도 날카롭게 울기 시작했다. 신경이 예민한 뮤이니 만큼 그 이상한 소리가 신경에 거슬리는 모양이었 다. 멀리서 어떤 형체가 달빛을 받아 조금씩 드러나고 있었다. 그것은 꼭 꿈틀거리고 있는 벌레 같은 모양이었다. 아니, 탐그루의 운하에서 본 대 청하의 물결 같았다. 아주 먼 곳에서부터 천천히 움직여오는... 그렇지만 쉬지 않고 다가오는 거대한 물결 말이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0397/11996 ━━━━━━━━━━━━━━━━━━━━━━━━━━━━━━━━━━━━━━━━ 제 목:[탐그루] 백발 영웅의 전설 97 관련자료:없음 24/24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1-23 00:27 조회:1910 탐그루 # 마법은 마음이다 - 마음은 칼이다 # 찬이 양손칼을 뽑아 들었다. 라이짐도 자신의 짧은 칼을 뽑아 들었다. 칼집에 박힌 시드의 귀가 달빛을 받아 더욱 붉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나도 나미트의 칼을 뽑지 않을 수 없었다. 어마어마한 수의 좀비들이 우리를 향해 몰려들고 있었다. 어느 해인가 탐그루에 큰 비가 내려 대청하가 범람했었다. 지금이 꼭 그때 같았다. 거 대한 파도처럼 다가오는 좀비의 눈동자들이 달빛을 받아 하나같이 붉게 빛났다. 좀비들의 붉은 눈동자들은 마치 지평선을 칼로 베어 내 그 상처 에서 흘러나오는 붉은 피 같았다. "제길. 라스폼! 이자식. 대체 무슨 속셈이야!" "수르카. 침착해" 라이짐이 말했다. 겁먹었던 라이짐은 어디로 가고 갑자기 원래의 라이 짐으로 돌아간 모습이었다. "일단 뮤를 메. 찬하고 내가 엄호할게" 나는 타코의 동굴에서 싸웠던 일이 떠올랐다. 그때는 라이짐이 짐을 챙 기고 내가 엄호했었는데... 하여간 라이짐의 말에 따라 일단 뮤 세 마리 의 고삐를 묶었다. 그러면 세 마리가 동시에 한 방향으로 움직이기 전에 는 움직이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물론 급하니까 어쩔 수 밖에 없이 쓴 미봉책에 불과했지만) 그리고 그레텔은 바위 위에 올려놓고 우리 셋은 등 을 지고 좀비 들과 대치했다. (꼭 누가 보면 그레텔을 보호하는 세 명의 검사 같은 느낌이 들었을지 모르겠다) "너무 많아..." 숲... 나는 붉은 불꽃을 내 뿜는 숲 한가운데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좀비들이 내 뿜는 눈빛은 타오르는 불꽃에 비교할 수 있을 정도였다. 칼 을 쥔 손이 떨리고 있었다. 나는 너무도 무서웠다. 머릿속에 드는 생각이 라고는 오로지 죽기 싫다는 생각 뿐이었다. "그나마 여기가 들판인 게 다행이야. 깊은 산 속이었다면 짐승들도 함 께 덤벼들었을 거야" 라이짐은 이렇게 말하고는 웃음까지 지어 보이면서 나에게 용기를 주었 다. 하긴 그랬다. 지금 보니 좀비들은 수가 많다 뿐이지 별다른 무기를 든 것도 아니고 짐승을 부리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침을 질질 흘리 면서 퀭한 눈을 하고서 허우적거리면서 걸어오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찬을 돌아보았다. 찬은 무표정한 얼굴로 아자닌을 바라보고 있었 다. 맞다. 아자닌이 있었지. 하지만 아자닌은 정령이니까 별 상관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아자닌을 어떻게 할까 생각하기도 전에 이 미 좀비들은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가까운 곳에서 바라본 좀비들은 두렵 다거나 끔찍하다는 생각이 들기 이전에 나를 질리게 하고 있었다. 썩은 고기에서 풍기는 냄새보다 더 고약한 악취하며 도대체 얼마동안 입은 건 지 원래 색과는 아주 동떨어진 색으로 변해버린 더러운 옷가지하며, 얼굴 들은 모두 끔찍할 정도로 주름 잡히고 일그러져 있었다. "쳐!" 라이짐이 소리치자 꼭 그게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찬이 달려나갔다. 나 는 제일 먼저 바로 앞에서 나를 노려보고 있던 좀비의 목을 베었다. 거의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이런 상황에선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다. 좀비 의 목이 떨어져 나갔고 핏물이 달빛을 받아 빛을 발하면서 머리에 쏟아졌 다. 다음은 왼쪽이었다. 나는 왼쪽에 있던 좀비의 허리를 베었다. 허리가 끊어지면서 창자가 쏟아져 나왔다. 창자는 젖은 이불처럼 바닥에 쏟아졌 다. 좀비의 입에서 의미를 알 수 없는 괴성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나는 동작이 끊어지지 않게 몸을 회전하면서 그 힘으로 다시 또 다른 좀비를 베었다. 목이 허공으로 날아올랐고, 핏물이 다시 한 번 내 몸을 적셨다. 맨 정신에 베는 좀비의 느낌은 나미트가 내 안에 있을 때 느꼈던 쾌감 이나 뭐 그런 것하고는 거리가 있었다. 살과 뼈를 지나는 느낌이 손으로 전해지는 건 꼭 주먹만한 벌레를 손바닥으로 때려잡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었다. 그다지 죄책감이 들지는 않지만 조금 찜찜한 기분이 든다는 점에서 그랬다는 말이다. 나는 계속해서 사방을 돌면서 베어나갔다. 그때였다. 나는 한 좀비와 눈이 마주쳤다. 내 또래로 보이는 좀비였다. 그러자 나는 하잔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죽기 직전의 공포로 일그러진 얼굴과 비명소 리와 피와 바닥을 뒹구는 팔다리들... 잠시 정신을 놓은 사이 내 칼의 움 직임이 끊어지자 좀비들은 내게로 다가왔다. 좀비들의 썩는 살 냄새가 코 로 파고들었다. "으아악!" 나는 소리치면서 좀비들을 발로 차 거리를 만든 다음 다시 베어나갔다. 좀비의 배를 걷어찼을 때 물컹한 느낌이 기분 나쁘게 발로 전해졌다. 내 가 왜 이럴까. 저건 좀비다. 가만두었다가는 어떤 짓을 할지 모른다. 일 단 베고 보는 거다. 나는 이렇게 나 자신을 다잡았다. 찬은 일전에 보았던 것처럼 양손칼을 단검 다루듯 자유자재로 놀리고 있었다. 찬의 칼을 수직으로 올라갔다가 조금도 끊어지지 않고 수평으로 이어지는가 하면 다시 비스듬하게 베어 올라가고 있었다. 그때마다 좀비 의 몸이 잘려 허공으로 솟았다. 핏물 때문인지 달빛 때문인지 찬의 칼이 붉게 빛났다. 라이짐은 짧은 칼의 이점을 최대한으로 살려 팔자모양으로 베어나가고 있었다. 실전에서 저런 엉성한 솜씨를 부렸다면 (차이린의 표현대로) 당 장 목이 날아갔겠지만, 좀비들이 다른 짐승들을 부리지 못하는 덕분에 라 이짐도 그럭저럭 좀비들을 막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순간순간 균형을 잃 고 있어서 어쩐지 불안한 감을 지울 수가 없었다. 몇인가의 목과 허리를 더 끊어놓고 있는데 뒤에서 날카로운 그레텔의 비명이 들려왔다. 좀비 몇이 그레텔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그레텔!" 찬이 소리쳤다. 하지만 또다른 좀비가 찬의 어깨를 움켜 잡았다. 찬은 그 좀비의 목을 벤 뒤 다시 몰려드는 다른 좀비들에게 양손칼을 휘두를 수밖에 없었다. 라이짐도 나도 좀비들에게 들러싸여 그레텔 쪽으로 한 걸 을도 다가갈 수 없었다. 그때 그레텔의 눈이 더욱 붉어지는가 싶더니 입 에서 주문이 흘러나왔다. "바람아* 내* 손길이다* 죽일* 수* 있을* 때*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 그레텔이 말했다. 마법의 주문인데 저건... 하지만 내가 미처 생각을 끝내기도 전에 내 몸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오래 기다리게 하는 군" 내 안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미트였다. 나는 갑자기 피가 머리로 솟구치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몸을 움직여 순식간에 나와 그레텔 사이에 있는 좀비들을 일직선으로 베어 나갔다. 단칼에 몇 좀비의 허리가 끊어졌고 몸을 돌려 다시 한 번 베자 또 몇이 그렇게 쓰러 졌다. 나미트가 내 몸안으로 들어왔을 때 내가 휘두르는 칼은 나미트의 검법 인 모양이었다. 나미트의 검법은 아주 빠르고 강하게 연속해서 이어지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아마 그때 너무 많은 힘이 소모되기 때문에 나미 트가 빠져나가고 나면 힘이 빠져서 쓰러지게 되는 모양이었다. 끝도없이 핏물은 허공으로 솟고, 창자와 살덩이는 땅으로 쏟아져 내려 갔다. 그레텔의 얼굴에 내가 벤 좀비의 핏물이 튀어 흐르기 시작했다. 비 록 좀비라고는 해도 피는 붉은 색이었다. 붉은 핏물은 달빛을 받아 더 선 명하게 붉었다. "뮤우우우우...!" 뮤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제발 스타바가 아니었으면... 쉴새없이 몰려드는 좀비들 때문에 그레텔의 옆에서 떠날 수가 없었다. 좀비의 숨소 리가 들려왔다. 내 심장이 따라 뛰었다. 그리고 살이 베이는 소리와 고통 에 신음하는 허리 끊긴 좀비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마치... 사 람이 내는 신음소리와 비슷했다. 빌어먹을 것들! 나는 다시 베어 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가 막고 있 어야 할 곳을 막지 못해서 좀비들이 사방에서 다가오기 시작해서 이미 싸 움은 방어가 아니라 그저 혼전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어느 쪽에도 좀 비가 있었고, 세 명이 휘두르는 칼은 서로 닿을 듯 가까워지기도 하고, 또 아주 멀어지기도 하면서 각각 좀비들을 베어나갔다. "으으아악!" 라이짐이었다. "라이짐!" 나는 소리쳤지만 그레텔의 곁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나미트 장군은 그레텔을 보호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나미트의 칼은 내 칼이었다. 내가 마음만 먹는다면 분명히 라이짐 쪽으로 갈 수 있었겠지만, 문제는 사방에서 덤벼드는 좀비들이 너무나 많 다는 사실이었다. "라이짐!" 나는 다시 한 번 소리쳤지만 내 소리는 그저 공허한 울림밖에는 아무 것도 남기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울림마저도 좀비들이 내는 기괴한 음성에 묻혀 금새 사라져 버렸다. 그때였다. 찬이 미친 듯이 양손칼을 휘두르면서 라이짐 쪽으로 다가간 것은. 찬은 양손칼을 이제는 아주 피리나무 가지를 잡고 흔드는 것처럼 휘두르면서 좀비들을 뚫고 라이짐에게 다가갔다. 여기저기 좀비들이 쓰러 지는 통에 나는 라이짐을 볼 수 있었다. 라이짐은 좀비에게 목덜미를 물 리고 있었다. 눈앞이 아찔해지는 게 느껴졌다. 저것들이 물기도 하는 구 나...! 구해야 하는데, 라이짐을. 라이짐을. 찬이 라이짐의 목을 물고 있던 좀비를 베자 라이짐은 뒤로 쓰러졌다. 나도 좀비들을 베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그래도 라이짐이 목에 손을 대고 뒹구는 모습은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찬이 문제였다. 좀비들이 찬에게 너무 가까이 다가오게 되는 바람에 양손칼의 움직임이 한 번 끊겼 다. 그러자 좀비들은 당장이라도 물어뜯을 기세로 찬에게 달려들었다. 좀 비들의 얼굴은 굶주린 짐승을 생각하게 했다. 흘리는 침과 그 이상한 숨 소리.. 아마 나미트의 힘이 아니었다면 나는 그 기세에 질려서 칼을 버렸 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몰려드는 좀비 앞에서도 찬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지만 그래도 당황하 는 기색이 역력했다. 양손칼을 휘두르기 어렵게 되자 찬은 내가 했던 것 처럼 발로 좀비를 걷어 차 거리를 만들려고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기 에 좀비는 너무 가까웠고, 나는 내 주변으로 몰려드는 좀비들을 베기에 정신이 없었다. "라이짐 기다려. 조금만 기다려! 이 자식들..." 내 목소리인지 나미트 장군의 목소리인지 알 수 없는 소리가 목에서 터 져 나왔다. 미친듯이 칼을 놀리고는 있었지만 이제 끝이라는 절망감이 들 었다. 눈앞에 다가오는 좀비들은 아무리 베어도 다른 얼굴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더 끔찍하고 더 보기 흉한 녀석으로 말이다. 이대로는 얼마 가지 못해서 다들 좀비에게 물려 죽을 거라는 생각이 들 었다. 나는 그냥 눈을 감고 주저앉아 버리고 싶었다. 아마 나미트 장군이 아니었다는 나는 벌써 주저앉아 버렸을지도 모른다. 어쩐지 슬펐다. 몸은 계속 움직이면서 좀비들을 베어나가고 있기는 했지만 마음에는 절망감과 공포가 가득 차올랐다. "다 태워 버려!" 갑자기 좀비들 너머에서 소리가 들려 왔다. 그리고 그와 거의 동시에 불길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전에도 본 적이 있는 불길이었다. 내가 방 패 마법으로 막아내었던, 바로 성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길 말이다. 나 는 나미트 장군의 힘을 빌어 계속 몸을 움직이면서 좀비들을 베고 있었지 만 불길에 정신이 팔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불길은 좀비들을 가르고 있었다. 마치 물결을 가르는, 탐그루의 운하에 서 보았던 배 같이 말이다. 좀비들은 성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길에 아 무 저항도 하지 못하고 쓰러졌다. 어떤 좀비는 불타면서 고통스러운지 팔 을 허공에 휘저으며 몇 걸음 가다가 쓰러지기도 했다. 또 어떤 좀비는 불 길을 막아보려는 듯 양손을 앞으로 내밀었지만 아무 소용도 없었다. 불길 은 손을 태우고 그대로 좀비의 머리통을 불길로 날려버렸다. 순간 좀비들이 당황했는지 좌우로 흩어지기 시작했고 주위에 벨 것이 없어진 나는 멍하니 그 광경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라이짐은 목에 손을 대고 뒹굴고 있었다. 찬과 그레텔은 역시 아무 표정 없이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자칫했으면 찬도 좀비들에게 물렸을 상황이었지만 지금 저 불길 덕분에 찬도 위기를 벗어난 듯 했다. 잠시 후, 시커먼 연기가 붉은 달빛을 받아 탁한 검붉은 빛을 하고서 허 공으로 솟기 시작했고, 고기 타는 냄새가 진동을 하기 시작했다. 사방에 좀비들의 시체가 땅인지 시체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널려있는 모 습을 보자 나는 맥이 풀리면서 뒤로 쓰러졌다. 나미트가 빠져나간 모양이 었다. 나는 땅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서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살펴보았 다. 연기가 조금씩 바람결에 날려 사라지고 나자 누군가의 어렴풋한 윤곽 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나는 먼저 휘날리고 있는 검은 색의 깃발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어서 뮤에 타고 있는 리바르도 기사단의 모습이 드러났 다. 어느새 기사단은 가까운 곳까지 다가와 있어서 나는 그들을 올려다보 지 않을 수 없었다. 모두 같은 갑옷을 입고서 뮤에 올라있는 기사단의 모 습은 마치 거대한 동상들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만 들고 있었다. 기사단의 모습은 마치 여기저기서 아직도 오르고 있는 연기 는 기사단의 모습에 신비로운 감마저 더해주고 있었다. 도대체 이들이 우 리를 구해준 이유는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지도 않고 나는 이들에게 구원 받았다는 착각에 빠지고 말았다. 하지만 착각은 곧 깨졌다. 아직도 불타 고 있는 좀비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를 뚫고 뮤를 탄 한 검은 옷의 성직 자가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어휴, 냄새! 이거, 냄새가 좀 고약하긴 하지만 그만한 성과는 있었던 것 같구나. 수르카. 다시 만나게 되서 반갑다" 라스폼이었다. 함정이었구나. 나는 라스폼에게 달려들고 싶다는 생각에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제대로 몸이 가누어지지 않았다. 하늘에는 어느 샌가 까마귀들이 수없이 날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속셈이야, 라스폼!" 나는 칼을 땅에 꽂아 일어나면서 말했다. "이제 너는 성황청으로 가게 된단다. 좋은 일 아니니? 내가 말했잖아. 성황청에는 예쁜 누나들도 많이 있고 그 누나들이 가족적인 분위기로 너 를 반겨줄 거라고" 라스폼이 말했다. 나는 간신히 몸을 일으킨 다음 자세를 바로 하고 말 했다. "약속을 지키면 더 이상 날 쫓는 일은 하지 않겠다고 했잖아!" 당당하게 말하려고 했지만 다리가 후들거렸다. 나미트가 빠져나간 뒤에 오는 현상이었다. 그나마 기절하지 않은 건만 해도 다행이었다. 쓰러지면 안된다. 나는 이를 악물고 생각했다. "뒤쫓지 않겠다고 했지 데리고 가지 않겠다고는 말 안 했어" 라스폼이 가증스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나는 분노가 솟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곳곳에서 까마귀들이 좀비의 시체를 쪼아먹는 모습이 보였 다. "...어떤 일이 생기나 보기만 하겠다고 했잖아. 그리고 난 후에 분명히 그냥 두겠다고 말했어. 성직자가 거짓말해도 되는 거야?" "호호호. 그래. 성직자는 거짓말을 하면 안되지. 하지만 성황청의 큰뜻 을 위해서는 얼마든지 거짓말을 할 수 있어. 성직자라고 해서 그렇게 꽉 막힌 사람들은 아니거든. 수르카. 맞아. 그냥 널 내버려두겠다는 말은 거 짓말이었어. 미안해" 뻔뻔스럽게 웃으면서 라스폼이 말했다. 나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걸 느 낄 수 있었다. 이제 이렇게 쓰러지는 건가 싶었다. 여기저기서 까마귀들 이 우는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오고 있었다. "타슈, 사이진. 저 꼬마를 붙잡아. 이제 여긴 볼일이 없어. 빨리 떠나 자구. 이 냄새도 견디기 힘들고 말이야. 이제 복귀하면 되겠어요, 리바르 도 단장 님. 성공을 축하해요" 라스폼이 검은 깃발 아래 서 있는 기사에게 말했다. 재판정에서 본 바 로 그 리바르도 기사단장이었다. "별말씀을, 라스폼 자매. 이게 다 라스폼 자매의 훌륭하신 계획 덕분이 었습니다. 덕분에 저희가 수월하게 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 입니다.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라스폼 자매" "별말씀을, 리바르도 기사단장 님" 가증스럽게 웃고 있는 라스폼의 말을 들으면서도 나는 더 이상 아무 말 도 할 수 없었다. 이젠 화 낼 힘도 없었다. 서 있는 것만으로도 다리가 떨렸다. 라스폼이 명령을 내리자 두 명의 뮤를 탄 갑옷 입은 성직자가 천 천히 걸어 나왔다. 그러고 보니 둘 다 낯익은 기사들이었다. 좀비의 근원 지를 찾아 에이스와 함께 특수 임무를 수행했을 때 본 얼굴들이었다. "모짤트 님. 이제 거기서 나오시지요. 모짤트 님의 임무는 끝났습니다" 모짤트? 나는 누구를 말하는 걸까. 나는 갑옷 입은 성직자가 바라보고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자리에는 찬이 서 있었다. "찬...?" 나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모짤트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수... 수르카 미안해... 찬은 성황청의 첩자였어. 다... 내탓이야. 정 말 미안해" 라이짐은 쓰러진 채로 목에서 손을 떼지 않고 이를 갈며 말했다. 첩자?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온 몸의 기운이 다 빠져나가는 걸 느낄 수 있었 다. 나는 뒤로 벌러덩 나자빠지고 말았다. "아, 그러고 보니 몰랐겠구나. 이제부터는 친하게 지낼 테니까 인사나 다시 해. 이쪽은 모짤트. 우리가 고용한 전문가야. 오래된 용병 가문의 후예지. 좀 재미 없는 사람이어서 그렇지 일처리는 정말 깔끔하게 한다 고" 라스폼이 비열한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아들이라고? 나는 찬을, 아 니 모짤트를 바라보았다. 모짤트는 무표정한 얼굴로 가만히 서 있기만 했 다.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마. 서로 속고 속이는 게 이 바닥 속성이니까. 너희 용병단도 첩자들을 여기저기 보내 놓고 있잖아? 모짤트는 내가 가장 아끼는 아이 중 하나지. 호호호" 아주 기분이 좋은 모양이군, 라스폼. 나는 찬, 아니 모짤트를 노려보았 다. "오해하지 마, 수르카. 나는 그저 계약에 충실한 용병이었을 뿐이야. 너도 용병이니까 이해하겠지" 모짤트가 나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멍청한 얼굴로 그저 모짤트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라스폼 님. 이제 저와의 계약은 끝났습니다. 이 말은 우리의 관계는 이것으로 끝이라는 뜻입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0398/11996 ━━━━━━━━━━━━━━━━━━━━━━━━━━━━━━━━━━━━━━━━ 제 목:[탐그루] 백발 영웅의 전설 98 관련자료:없음 24/24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1-23 00:28 조회:1788 탐그루 # 마법은 마음이다 - 마음은 칼이다 # "그렇게 말하니까 섭섭한데. 내가 가장 아꼈던 용병이 바로 모짤트 너 였는데... 그 꼬마는 어쩔 거야?" "저와 함께 갈 겁니다" 모짤트가 그레텔의 손을 꼭 잡으면서 대답했다. "그 아이도 능력이 있다고 했지? 데리고 가면 아마 쓸모가 있을 거야. 모짤트. 우리하고 함께 가는 게 어때? 그 꼬마도 우리가 잘 돌봐 줄수 있 는데 말이야" "계약에 그런 얘기는 없었습니다. 계약에 명시된 바는 여기까지입니다" 당장이라도 칼을 휘두를 기세로 모짤트가 말했다. 정말 계약직이긴 한 모양이었다. "아, 좋아. 그게 약속이었으니까. 성직자는 약속을 잘 지키지" "거짓말도 잘하고" 나는 남은 힘을 짜내어 이렇게 말했다. 모짤트의 눈이 번득였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모짤트. 그래도 우리 친하게 지낸 시간들이 있 잖아? 그래. 이제 자유야, 자유. 가고 싶은 곳이 있다면 얼마든지, 마음 대로 가도 좋아. 다만 좀 아쉬울 뿐이야 모짤트. 이렇게 헤어지게 되다니 말이야. 얼마든지 더친해질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아쉬워서 어쩌 지, 이거?" 라스폼이 음탕해 보이는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나는 라스폼의 말이 역겨웠지만 이젠 한 마디 쏘아붙일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런데 저 친구 얘기는 못 들었는데. 모짤트, 아마 수르카 친구인 모 양이지?" "라이짐에게 손대지 마!" 라이짐의 이야기나 나오자 나는 없던 힘이 솟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나 는 힘껏 목소리를 내었지만 그다지 큰 목소리는 아니었다. "...승부는 나지 않았어, 라스폼. 저 친구가 첩자인 걸 알면서도 여기 까지 함께 끌고 온데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나?" "글쎄. 이유라기 보다는 너희 용병단이 좀 멍청하다고 할 수 있겠지. 만약에 내가 모짤트에게 암살이나 파괴를 의뢰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 마 단번에 용병단을 무너뜨릴 수도 있었을 거야. 하지만 우리는 신의 섭 리 아래 평화를 사랑하는 성직자들이지. 그래서 이 정도로 끝내는 거야. 뭐 꼭 그렇지만도 않지. 사실 용병단과 정면으로 싸워서 둘 다 피해가 나 면 이득을 보는 것은 엉뚱한 사람들 아니겠어?" "그렇게 상대방을 호락호락하게 보다니 멍청한 건 정말 성황청이야. 그 동안 찬이 성황청에게 정보를 계속 주고 있었다는 걸 우리가 몰랐다고 생 각해? 그렇게 우리가 멍청해 보여? 라이짐은 이렇게 말하면서 몸을 일으켜 세우려고 했다. 그런데 그러고 보니 차이린도 에이스와 함께 특수 임무를 수행하러 갈 때, 찬이 꼭 함께 가야 할 이유가 있다고 말했던 게 기억났다. 알면서도 데리고 온 이유가 뭐였을까? "으아아악!"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라이짐이 비명을 지르면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 다. "라이짐!" 벌렁 나자빠져 있던 나였지만 나는 이렇게 소리쳤다. 라이짐은 오른 손 을 세차게 흔들면서 괴로워하고 있었다. 얼굴에 흐르고 있는 땀방울이 달 빛을 받아 반짝였다. "저런. 수르카의 하나 뿐인 친구가 좀비가 되가는군" 라스폼이 말했다. 좀비라고?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라이짐이 일어서 려고 하다가 잡으면 좀비가 된다는 아이템을 집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도대체 어쩌다가 그 빌어먹을 아이템이 여기까지 굴러오게 된 걸까. 눈앞 이 아찔했다. "어쩔 수 없지. 친구에게 손대는 걸 용서해라" 라스폼은 이렇게 말하면서 성구를 들어 라이짐에게 겨누었다. 나는 방 패 마법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지막 기운을 다 쓴다고 해도 라스폼이 주문을 외우는 시간이 내가 방패마법을 걸고 라이짐 쪽으로 뛰 어가는 시간보다는 짧을 거였다. "안돼!" 나는 이렇게 소리쳤다. 바로 그 순간, 사방에서 소낙비가 쏟아지는 것 처럼 날개소리가 들려왔다. 까마귀들이 동시에 날아오른 거였다. 순간, 마치 월식이라도 있는 것처럼 사방이 어두워졌다. 아주 잠시였지만 라스 폼의 행동이 멈추었다. 나는 까마귀 때가 날아오른 이유 같은 데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모든* 빛깔있는* 것들은* 내게* 시간을* 빌려다오*" 내 주변의 공기가 단단하게 모였고, 나는 라이짐 쪽으로 뛰어갔다. "타거라!*" 하지만 라스폼이 조금 더 빨랐다. 나는 몸을 날려 라스폼의 성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길을 막으려고 했지만 전부를 막을 수는 없었다. 내가 만든 방어벽에 불꽃이 부딪쳤지만 그건 일부분이였고, 나머지 불길은 그 대로 라이짐의 가슴에 쏟아졌다. "아아아아악!" 라이짐은 소리지르면서 뒤로 쓰러졌다. "라이짐!" 나는 라이짐에게 다가갔다. 라이짐은 의식을 잃고 있었다. 나는 손으로 라이짐의 가슴에 붙은 불길을 꺼보려고 했지만, 이미 불길은 라이짐의 가 슴을 태워버린 뒤였다. 라이짐의 가슴은 시커멓게 타들어가 있었고, 시꺼 먼 연기마저 피어오르고 있었다. 나는 가슴의 상처를 살펴 본 뒤에 라이 짐의 오른 손을 보았다. 오른 손 바닥에 시커먼 눈동자가 달라붙어 있는 게 보였다. 마칸의 눈. 라이짐은 좀비가 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 인지 손바닥의 눈동자는 흐리멍텅한 빛이었다. 하지만 나는 라이짐을 돌 볼 겨를도 없었다. 여기저기서 뮤들이 울부짖었고, 라스폼이 명령하는 소 리가 들렸다. "빌어먹을. 다 태워버렸는데! 다시 태워버려!" "공격하라! 전열을 갖춰!" 라스폼과 리바르도 기사단장이 번갈아 가면서 소리쳤다. 하지만 뮤들이 날뛰기 시작하고, 성황청의 기사들은 혼란상태에 빠져버렸다. 사방에서 기괴한 신음소리가 이어졌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시커먼 벽 이 눈앞에 놓여 있었다. 아니, 그것은 벽이 아니었다. 벽이라면 불타는 빛의 붉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을 턱이 없었다. 그것은... 좀비들이었다. 좀비들이 다시 살아난 거였다. 좀비들은 불에 그을려 하나같이 끔찍한 몰 골을 하고서 사방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얼굴이 불길에 일그러진 좀비도 있었고, 한 쪽 팔이 불에 타 사라진 좀비도 눈에 띄었다. 나는 생각이고 자시고 할 틈이 없었다. 그저 라이짐을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칼을 집어 들었다. "수르카 이제 됐어... 저, 저기..." 희미한 미소마저 띤 얼굴로 라이짐이 손을 들어 절벽 위를 가리켰다. 나는 그곳을 올려다 보았다. 그곳에는 수많은 뮤들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곳에는 아케르와 타호루가 수백명의 뮤를 탄 용병단윈들을 지 휘하고 있었다. 절벽 위에 선 아케르의 검은 망토와 긴 머리가 바람을 받 아 펄럭이고 있었다. 바로 아케르의 옆에 서 있는 타호루가 꼭 난장이처 럼 느껴졌다. 나는 그 순간 알 수 있었다. 아케르는 모든 걸 다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를 이곳으로 보내고 절벽 위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다. 좀비들이 다시 살아나기를 말이다. 물론 아케르가 그렇게 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아케르가 모든 걸 알고 계획하고 있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보통 이렇게 되면 아케르에 대한 존경심이 일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아케르가 존경스럽다기 보다는 두렵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달빛을 받아 검붉게 빛나고 있는 아케르 단장의 그림자를 보고 있자니, 나는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케르 단장의 모습은 달빛을 받아 음산하게, 하지만 한 편으로는 위압적으로 보이고 있 었다. 한 순간, 나는 아케르의 얼굴이 보였다고 느꼈다. 비록 거리가 멀어서 실제로 보인 것은 아니었겠지만 말이다. 내가 본 아케르의 얼굴에는 자신 감과 강인함이 드러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왕. 나는 우보가 말했던 전설속의 왕을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가 그런 생각을 한 것이 달빛 때문인지, 사방에서 울려퍼지고 있는 뮤의 울음 소리때문인지, 아니면 혼란과 살육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꿈은 아니었다. 아케르 단장이 천천히 오른 손을 들어 신호를 보내자 뮤를 탄 단원들이 불화살을 쏘아 날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순 식간에 수 백 개의 불화살이 허공을 갈랐다. 주변이 대낮처럼 밝아졌다. 불화살이 바람을 뚫고 나르는 소리가 꼭 맹렬히 타오르는 불길이 바로 옆 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일게 만들었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불화 살이 내는 빛을 받은 아케르의 모습이 빛났다. 그 모습은 마치 거대한 동 상과도 같이, 밑을 굽어보고 있었다. 모든 상황을 손아귀에 쥔 지휘관답 게 말이다. 밝혀졌던 허공은 화살들이 땅에 떨어지자 이내 다시 어두워졌 다. 불화살은 절벽에서 마치 성난 대청하의 물결처럼 뿜어져 내려와 여기 저기 떨어졌고, 불화살이 박히자 그 자리에 있던 좀비들과 기사들이 물러 서는 바람에 공간이 생겼다. 나는 라이짐을 보호해야 겠다는 생각으로 몸 을 일으켰다. 하지만 불화살은 우리가 있는 곳에는 떨어지지 않았다. 불 화살은 골고루 퍼져 여기 저기 넓게 박여 있었다. 사방에 박혀있는 불화 살이 계속해서 타오르고 있었다. 나는 라이짐을 돌아보았다. 라이짐의 손 바닥에 있던 눈동자가 조금씩 빛을 발하고 있었다. "모든* 일을* 다*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비록 거리는 멀었지만 나는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타호루가 마법의 주문을 외우는 소리를. 그 주문은 나도 알고 있는 주문이었다. 타호루가 나를 공중에서 빙빙 돌릴 때 사용했던 마법이었다. 그때 사용한 마법이 이 마법인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타호루의 마법의 말이 끝나자, 뮤를 탄 단원들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단윈들의 모습이 마치 쏟아질 준비를 하고 있는 시커먼 먹구름처럼 느껴 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타호루의 손이 한 번 우직이는 가 싶자 단원들 은 저마다 불화살로 만들어진 빈 공간을 찾아 떨어지기 시작했다. 유성. 아마도 하늘에서 떨어지는 별똥별들이 저렇게 떨어지리라. 뮤를 탄 단원들은 엄청난 속도로 쏘아져내렸다. 허공에 뜬 뮤의 울음소리가 밤 하늘에 울려 퍼졌다. 나는 악마가 세상에 내려온다면 아마 저런 모습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원들을 실은 뮤는 아주 사뿐하게 땅에 착지했다. 먼지만 조금 일어났 을 뿐, 땅에 내린 뮤들은 앞발을 들어올리고 힘차게 울음소리를 내었다. 뮤들이 높은 곳에서 잘 뛰어 내린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이정도까지 인 줄은 알지 못했다. 아마 높은 곳에서 마법으로 떨어지는 훈련을 오랫동안 받은 뮤들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땅에 내린 단원들의 얼굴을 보았다. 그러나 내가 알고 있는 얼굴은 하나도 없었다. 모두 다 하나같이 낯선 얼굴들이었다. "...아케르 단장님...직속...십부원...들이야. 수르카. 이제 넌 살았 어..." "무슨 소리야 라이짐! 너도 살 수 있어. 살 수 있다구!" 라이짐은 이렇게 말하고 나서 쿨럭거리기 시작했다. 입에서 시커먼 피 가 쏟아져 나왔다. 가슴 깊숙한 곳까지 다친 모양이었다. 나는 어쩔 줄 몰라하면서 라이짐의 가슴에 손을 대었다가 또 입가에 묻은 피를 손으로 닦아내었다가 하고 있었다. 나는 라이짐의 오른 손 바닥을 다시 한 번 보 았다. 눈동자가 나를 또렷한 눈빛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라이짐의 오른 손을 꼭 쥐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저 라이짐 곁에서 손을 잡고서, 그저 바라만 보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내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사이 땅에 내린 아케르의 직속 십 부원들은 칼을 휘두르면서 좀비들과 성황청의 기사들을 마구잡이로 베기 시작했다. 사방에 흩어져 떨어진 단원들의 모습은 꼭 돌개바람처럼 빠르 게 움직이면서 사방의 성직자와 좀비들을 모조리 베어내고 있었다. 단원 들이 일으키는 바람에 휩쓸려 들어간 성직자들의 허리가 끊어지고, 또 목 이 허공으로 날아오르는 모습이 달빛아래 펼쳐지고 있었다. 직속 십부원 의 칼은 부드러운 고기를 잘라내듯 갑옷 입은 성직자들을 베고 있었다. 찬의 양손칼도 저렇게 지 강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이 짐은 저들을 아케르의 직속 십부원이라고 불렀다. 직속 십부원들이 남다 른 사람들일 거라는 생각은 해보았지만 이 정도까지 일 거라고는 상상도 해보지 못했다. 몇몇 성직자들이 성구에서 불을 뿜었다. 하지만 단원들의 움직임은 성 직자들의 움직임을 완전히 읽고 있었다. 성구를 사용하기 위해서 성구를 단원에게 겨누는 순간 저게 인간의 움직임인가 싶으리만치 빠르고 부드럽 게 단원들은 뮤를 몰아 성직자가 성구를 정확하게 겨눌 수 없도록 만들었 고, 덕분에 불길은 허공을 가르거나 아니면 엉뚱하게도 다른 성직자에게 가 박히곤 했다. 불이 붙은 성직자들은 더 이상 크게 낼 수 없겠다 싶을 만큼 큰 비명소리를 지르면서 뮤에서 떨어져 쓰러졌다. "침착해! 전열을 갖춰, 전열을!" 리바르도 기사단장은 목소리를 높여 기사단을 지휘 해보려고 노력했지 만 역부족이었다. 오히려 소리를 지르면서 돌아다닌 덕분에 단원들의 좋 은 표적이 되고 말았다. 몇 명의 단원이 리바르도의 길을 막아서자, 리바 르도는 재빨리 뮤를 돌려 빠져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등뒤에 있 던 단원의 칼이 리바르도의 갑옷을 뚫고 등 깊숙이 박혔다. 리바르도는 비명을 지르면서 허리를 젖혔다. 입에서는 피가 뿜어져 나왔다. 멍하니 그 광경들을 지켜보고 있는데, 이번에는 한 성직자의 목이 날아 와 내 옆에 떨어졌다. 입을 쩍 벌리고 있는 그 성직자의 얼굴은 놀란 듯 커다랗게 눈을 뜨고 있었고 표정은 완전히 겁에 질려 있었다. 나는 떨리 는 손으로 성직자의 눈을 감겨주었다. 어두운 달빛 아래 어느 것이 좀비의 목이고 어느 것이 상황청 기사의 목인지는 전혀 분간이 되지 않고 있었다. 누군가가 소리치는 소리, 누군 가의 비명소리, 또 누군가의 살려달라는 음성, 그리고 분노한 듯한 기합 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지옥이었다. 지옥에서 날아와 지상 에 떨어진 피에 굶주린 악마들이 만들어내는 지옥. 나는 하잔의 풍경을 다시 한 번 볼 수 있었다. 갑자기 온 몸에 냉기가 몰려드는 게 느껴졌다. 나를 이를 부딪치면서 그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보고야 말았다. 도저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살육극은 결국 끝이 났다. 나는 주위를 둘 러보았다. 시체의 행렬이 끝나는 지점이 어디인지 알 수 없을 만큼 많은 시체들이 여기저기 널려있었다. 삼년전쟁 때의 격전지가 또 한 번 예전 못지 않은 시체들로 산을 이룬 거였다. 널려있는 시체들은 멀리서 바라본 다면 아마 새까맣게 몰려 있는 개미 때를 연상시킬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었다. 이곳에 있는 생명체 중 살아남은 것은 거의 없는 듯 했다. 멀리 뮤 를 몰고 달아나고 있는 성황청 기사들도 보이기는 했지만 그 수는 불과 몇에 불과했다. 낯선 얼굴의 단원들도 이만하면 됐다 싶었는지 굳이 뒤쫓 지는 않았다. 여기저기서 임자 잃은 뮤들의 울음소리가 구슬프게 들려왔 다. 나는 그제야 타호루가 날려보낸 단원들을 살펴볼 수 있었다. 낯선 얼굴 의 단원들은 모두 다 검은 색 긴 옷을 입고 있었다. 성복과는 조금 다른, 에이스가 입고 있었던 옷과 비슷한 옷이었다. 이제 뮤를 타고 있는 낯선 얼굴들 사이에 서 있는 사람은 단 둘 뿐이었 다. 찬, 아니 모짤트와 그레텔이었다. 라이짐의 입에서 한 줄기 피가 흘러내렸다. 나는 손으로 그 피를 닦아 내려고 볼에 손을 대었다. 순간 라이짐의 눈이 나를 노려보았다. 퀭한, 미친 뮤의 눈동자였다. 나는 이런 눈이 뭘 뜻하는 지 알고 있었다. 나는 라이짐이 했던 맹세의 말이 떠올랐다. 이무르 아주머니의 무덤 앞에서 라 이짐은 만약에 자신이 복수를 하지 못하게 된다면 내 손으로 자신을 죽여 달라고 라이짐은 말했었다. 좀비가 되어 복수를 못하게 되느니 차라리 내 손으로 죽여야하나. 라이짐은 정말로 그런 걸 원하고 있을까. 나는 절망 적인 기분이 되었다. 라이짐을 죽이느니 차라리 내가 죽고 말지. 나에게 라이짐은 형제나 마찬가지인 존재다. 그런 라이짐을 내 손으로 죽여야 한 다니... "...좀비들은 이미 죽었기 때문에 죽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마라. 좀비 는 살아있다..." 그레텔의 목소리였다. 나는 그레텔을 돌아보았다. 그레텔의 붉은 눈동 자가 이글거리며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레텔이 한 말은 전에 식당 벽 면에 갖혀 있다는 정령이 했던 말이었다. 나는 그 말의 의미를 생각해보 았지만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수르카 단원?" 낯선 얼굴들 가운데 에이스의 얼굴이 보였다. 뾰족한 귀와 짙은 갈색의 피부가 눈에 들어왔다. 회색 눈동자가 달빛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나는 멍청한 표정으로 에이스를 바라보았다. "...에이스?" "맞군요. 수르카 단원이. 난 에이스 언니 동생이에요. 나이스라고 하지 요. 사실 이렇게 인사까지 할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상황도 상황이려니 와 " 회색 눈동자가 말했다. 어떻게 저렇게 닮을 수가 있을까. 혹시 쌍동이 일까. 머릿속에서 이런 생각이 맴돌고만 있었다. 나는 지금 무슨 일이 일 어났는지, 또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지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생각을 정리하려고 안간힘을 써보았지만 내 돌탱이 같은 머리는 도저히 돌아가지를 않고 있었다. 그때였다. 다시 사방에서 기괴한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좀비들이 또다 시 살아나는 모양이었다. 여기저기서 다시 살아나고 있는 좀비들은 이제 두려움이나 공포의 대상이 아니었다. 나는 이제 완전히 포기해버리고 싶 은 심정일 뿐이었다. 힘없이 일어나는 좀비들을 바라보다가 나는 라이짐 을 보았다. 라이짐도 이제는 완전히 좀비가 되어버린 듯, 자리에서 일어 나려고 하고 있었다. 나는 어쩔 줄 몰라하면서 라이짐을 양팔로 꽉 누르 고만 있었다. 다시 일어나고 있는 좀비에 대한 생각은 해 볼 틈도 없었 다. 이젠 정말로 라이짐을 죽여야만 하는 걸까. "아, 걱정 말아요, 수르카 단원. 연락했으니 이제 곧 끝날 거에요" 나이스는 이렇게 말하고는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는 듯 했다. 나는 나이스의 말에서 이제는 정말로 라이짐을 죽여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나 이스의 말도 이제 마음놓고 죽이라는 뜻처럼 들렸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0399/11996 ━━━━━━━━━━━━━━━━━━━━━━━━━━━━━━━━━━━━━━━━ 제 목:[탐그루] 백발 영웅의 전설 99 관련자료:없음 26/26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1-23 00:28 조회:2268 탐그루 # 마법은 마음이다 - 마음은 칼이다 # 그러나, 나이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일어나고 있었던 좀비들이 힘 없이 허물어졌다. 라이짐도 힘을 잃고 그대로 축 늘어졌다. "이제 끝났어요. 언니가 지금 좀비의 근원을 파괴했거든요" 나이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라이짐의 손바닥에서 금화 하나가 툭 떨어졌다. 나는 라이짐의 손바닥을 살펴보았다. 손바닥에는 아무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다. 에이스도 나이스도 마법사임이 분명했다. 마법사들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대화가 가능하다고 들었다. "...왜 이제서야 파괴한 거지? 진작 파괴할 수 있었잖아?" "그랬다면 성황청의 기사단을 한 번에 괴멸시킬 수 있는 기회는 오지 않았겠지요" 나이스가 말했다. 그 말을 듣자, 나는 내가 왜 여기에 왔는지, 아케르 의 부탁이 의미한 게 무엇이었는지, 또 찬이 배반자라는 걸 알면서도 계 속 놔둔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대충 짐작할 수가 있었다. 나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살아있는 몇몇이 고통의 신음소리를 내고 있 었다. 나는 처음에는 살아남은 성황청의 기사들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 만 아니었다. 그들 대부분은 보통의 사람들이었다. 거의가 화상을 입기는 했지만 아직 숨이 붙어있기는 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사람들 주변에는 치료석들과 단검과 금화과 인형, 연금술사의 등, 지팡이, 지도 거기다 수 통과 뮤 털로 만들어진 모자가 널려 있었다. "저것들은 다 뭐지, 나이스?" 내가 나이스에게 물었다. "다시 사람으로 돌아오면 손에 쥐었던 아이템들이 저렇게 빠져나갑니 다" 나이스가 친절한 목소리로 설명해주었다. 하지만 내 귀에 나이스의 목 소리는 냉정한 라스폼의 목소리보다 더 끔찍하게 들리고 있었다. 나이스 의 말은 다시 사람으로 돌아갈 수 있는 사람들을, 단지 성황청의 기사들 을 궤멸시키기 위해 다 죽였다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아케르는 말할 것 이다. 그들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는 다면 우리의 행위는 정당한 것이 라고. 하지만 나는 도저히 동의할 수 없었다. 약하다고 해도 좋고 어리다 고 해도 좋았다. 사람들. 그들은 원래 사람이었고, 또 사람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내 앞에 있는 라이짐처럼 말이다. 나는 그레텔이 한 말을 되새겨 보았다. '좀비들은 이미 죽었기 때문에 죽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마라. 좀비는 살아있다' 그 말은 경고의 목소리였다. 식당의 벽면에 갖혀 있다던 정령이 나에게 외친 경고의 목소리였던 것이다. 나는 내가 마구잡이로 베었던 좀비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떠올랐다. 무고한 사람을 결코 죽여서는 안 된다고 말 했던 내가, 결국, 또 한 번 사람들을 죽이고 만 것이다. 머릿속에서 천둥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가슴을 쥐어 뜯고만 싶었다. 어느새 라이짐의 숨결이 천천히 잦아들고 있었다. 나는 라이짐의 몸에 손을 대 보았다. 라이짐의 몸이 천천히 굳어가고 있었다. 안돼! 라이짐을 이대로 죽게 내버려둘 수는 없어. "라이짐! 내 말 들려 라이짐? 넌 죽으면 안 돼. 너 맹세했잖아. 루비오 하고 쥬크, 그 자식들 다 죽여버리기 전에는 죽어도 안 죽겠다고. 성년의 신 마소드 앞에서 맹세했잖아. 라이짐, 정신차려, 라이짐!" 라이짐을 이대로 보낼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라이짐을 살려야한다. 마 법! 그래, 마법이다. "아자닌!" 아자닌은 내 바로 곁에 있었다. "어떻게 하는 거야. 빨리 말해 아자닌. 너 사람 상태를 바꾸는 마법 안 다고 했지? 빨리 말해, 무기를* 드는* 순간* 세상과* 사람은* 변한다* 또 뭐야, 고통없이* 한번에* 죽인다* 그거 어떻게 섞는 거야, 빨리 말해, 아 자닌!" 나는 아자닌에게 고래고래 고함을 쳤다. 하지만 아자닌은 그저 말없이 나를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무기를* 드는* 순간* 고통 없이 잠에서 깨어난다" 나는 먼저 이렇게 말하면서 라이짐의 몸에 손을 대었다. 라이짐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고통*없이* 죽는* 순간* 무기는 세상을 바꾼다" 라이짐은 아주 잠시 몸을 뒤틀었다. 하지만 그것은 마법 때문이 아니라 고통 때문이었다. 나는 그것을 표정으로 알 수 있었다. "무기를* 드는* 순간* 단번에 세상은 바뀐다" 내가 이 말을 마치는 순간 라이짐은 으, 하는 신음 소리를 내었다. "고통 없이 마음은 잠에서 깨어난다" 이 말은 조금이라도 작동할 줄 알았다. 하지만 라이짐의 몸은 그저 고 통으로 떨기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라이짐의 고통스러워하는 얼굴 을 바라보았다. 내가 이렇게 무력하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무기가* 없는* 세상은* 고통없이 죽는다" 라이짐의 얼굴에 땀방울이 맺혔다. 이제 라이짐은 고통과 싸우기 시작 하는 모양이었다. 나느 어떻게 든 라이짐이 눈이라도 뜨기를 바랬지만 라 이짐의 눈은 잔뜩 찡그린 채로 조금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나는 라이짐의 가슴에 손을 대고 몇 번이고 더 생각나는 대로 아무렇게 나 말을 섞어보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느새 내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말을 이해하지 않으면 마법은 결코 작동하지 않습니다" 아자닌이 차갑게 말했다. "닥쳐!" 나는 공연히 아자닌에게 화를 내었다. 이렇게 끝낼 수는 없었다. 내 친 구 라이짐을 그냥 이렇게 보낼 수는 없다. 어느새 나는 내가 아는 마법의 말이란 말은 다 외치고 있었다. "모든* 빛깔* 있는* 것들은* 살아남기 마련이다" 라이짐은 점점 더 큰 고통을 느끼고 있는 모양이었다. 라이짐은 이를 악 물고 있었다. 역시 라이짐은 라이짐이었다. 라이짐은 결코 죽고 싶지 않다는 의지를 발휘하고 있었다. "약한* 것들은* 죽고* 강한* 것들은* 내게 시간을 빌려다오"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한 번 마법의 말을 외쳐보았다. 하지만 라 이짐의 고통은 점점 더해만 갈 뿐이었다. 라이짐은 이를 악무는 것으로도 모자란지 인상을 찌푸리고 내 손을 꽉 잡았다. 라이짐의 손은 떨리고 있 었다. "적당히* 불의* 힘을* 받은* 것들은* 모두 해야 할 일이 먼저이다" 다는 다시 한 번 마법의 말을 외쳐보았다. 하지만 내 손을 잡은 라이짐 의 손에서 힘이 점점 빠져나가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나는 다급해졌다. "할* 수* 있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은* 조금 더 나은 모양이 된다" 결국 라이짐은 내 손을 놓고 말았다. 이도 더이상 악물지 않았다. 라이 짐의 입에서 후우욱, 갸날픈 숨이 새어 나왔다. 라이짐의 몸은 이제 굳어 있다는 게 완전히 느껴지고 있었다. 라이짐의 가슴에 올려놓은 내 손이 마치 나무토막에 손을 올려놓은 듯 한 느낌이었다. 나는 몇 번이고 다시 생각나는 대로 마법의 말을 내뱉어 보았지만 싸늘 하게 식어가는 라이짐을 되돌리지는 못했다. 어느새 나는 소리내어 울고 있었다. 내가 죽인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들도 이렇게 눈물을 흘 리는 친구가, 또 가족이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가 내 잘못이 었다. 내가 용병단에 오지만 않았어도, 그날 내가 객기로 루비오와 한 판 붙지만 않았어도, 지금 라이짐은 이렇게 죽어가지는 않았을 거였다. 나는 순간 손에 피를 묻히고 산다는 게, 그래서 사람을 죽인다는 게 얼마나 끔 찍한 것인지 이제 뼈저리게 알 것 같았다. "라이짐* 무기를* 들지* 말았어야* 했어* 고통없이* 한번에* 죽이면* 되는* 거라는*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어* 세상을* 바꾼다고* 거기에* 목숨을* 바쳐도* 좋다고* 생각하지* 말았어야* 했어* 세상을* 바꾸는* 건 * 무기가* 아니라* 사람이야* 살아* 있어야*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거 야* 적도* 살아* 있어야* 하고* 우리도* 살아* 있어야* 하고* 생명이* 있 는* 것은* 다* 살아* 있어야* 해* 살아서* 변해나가는 거야*" 잠시 후 내 손에서 뜨거운 기운이 발산되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나도 모르게 양 손을 라이짐의 가슴에 얹었다. 그러자 라이짐의 몸으로 뜨거운 기운이 빨려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라이짐의 굳어가던 몸이 조금씩 부드 럽게 풀리기 시작했다. 나는 라이짐을 바라보았다. 라이짐의 머리카락에 서 빛이 나고 있었다. 나는 다시 말했다. "라이짐* 일어나* 일어나* 생명이* 있는* 것은* 살아야만* 해*" 라이짐의 눈동자가 떠졌다. 아직 완전하게 제 빛을 찾지는 못했지만, 라이짐의 눈동자가 빛이 나고 있었다. 라이짐의 머리에서는 여전히 눈부 신 빛이 뿜어져나오고 있었다. "수르카 님의 의지가 마법을 만들었습니다" 아자닌이 말했다. 하지만 나는 별로 기쁘지 않았다. 내가 벤 수많은 사 람들의 얼굴이 눈앞에 떠올랐다가는 다시 사라졌다. "...수르카?" 라이짐이 말했다. "그래. 라이짐. 죽지 않았구나" 라이짐의 머리에서 빛나던 빛이 서서히 희미해졌다. 빛이 사라지자 나 는 잘못 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라이짐의 머리카락이 하얗게 변해있었다. 아니야. 잘 못 본 거겠지. 멀리 절벽에서 마법으로 공중에 떠서 천천히 내려오고 있는 타호루와 아케르의 모습이 눈에 보였다. 타호루의 긴 옷과 아케르의 망토는 바람에 날려 하늘을 향해 날리고 있었다. 나는 하늘을 향해 치솟은 아케르의 머 리카락이 꼭 뱀 같아 보인다는 생각을 했다. 다발로 묶여있는 뱀. 아케르 는 어쩐지 악마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아케르를 다시 보게 된다면 공포부터 느끼게 될 것 같았다. 아케르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아마 도 아케르는 다음 작전을 구상하고 있거나, 이곳을 수습할 계획을 생각하 고 있겠지만, 지금의 내가 보기에 아케르는 누군가를 어떻게 죽일 것인가 부터 궁리하고 있는 사람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나는 저들을 두 번 다 시 보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이길로 떠날 거야, 라이짐. 이제부터 뭘 할지 같은 건 정하지 않았어. 하지만 오늘 나는 알았어. 더 이상 사람을 베면서 살수는 없다는 걸" "손에 피를 묻힌 사람이 정상적으로 사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잖아" 라이짐이 말했다. 라이짐의 머리는 정말로 희게 변한 모양이었다. 달빛 아래 라이짐의 머리가 은빛으로 빛났다. 희게 변한 머리를 하고 있는 라 이짐의 모습이 너무도 낯설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잔에서 입은 이마의 상 처도 그런 느낌을 더욱 강하게 하고 있었다. "그럴지도 몰라. 하지만 더 이상 용병으로 살진 않겠어" 나는 이렇게 말했다. 라이짐은 몸을 일으켰다. 공중에서 내려오던 아케 르와 타호루는 어느덧 땅에 닿아 이쪽으로 뮤를 몰고 오고 있었다. 아케 르의 모습이 조금씩 더 선명해 질 수록, 나는 이곳을 빨리 떠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아케르는 타호루와 뭔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달빛은 받아 아래를 굽어보고 있던 동상 같던 아케르의 모습은 이제 땅으로 내려 왔다. 어쩌면 이 순간이 아케르가 대륙을 지배하는 자가 되기위한 첫 걸 음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두 사람이 만약 대륙의 패권을 차지하게 된다면, 이 대륙은 지옥으로 변하고 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 다. 귀족없는 평민들의 지옥... "수르카. 정말로 네 뜻이 그렇다면 일단 가. 아케르 단장님께는 내가 말할게. 수르카는 조금 긴 휴가를 떠난 거라고. 난 믿어. 넌 다시 돌아 와. 돌아 올 수밖에 없어. 여기서 네가 벤 사람들을 너는 평생 잊을 수 없을 테니까" 라이짐이 말했다. 라이짐의 뒤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아케르가 이젠 이 마의 십자 모양의 흉터까지 아주 분명히 보였다. 같은 달빛을 받고 있는 라이짐과 아케르 두 사람이 어쩐지 겹쳐 보인다는 생각이 들고 있었다. 두 사람은 아마도 이 순간부터 꽤 오랫동안 같은 길을 걷게 되리라. 아케르는 들판에 널려있는 시체 사이로 뮤를 몰아 다가오고 있었다. 붉 은 달빛이 그 모양을 더욱 음산한 느낌으로 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나는 시체 사이로 뮤를 몰아 오고 있는 저 모습이. 아케르와 라이짐의 앞날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내가 벤 사람들, 나는 잊지 않아. 아니, 잊을 수도 없고, 또 잊 어서도 안돼.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앞으로 내가 가는 길에 피는 없을 거 야 "그게 약한 사람과 강한 사람의 차이야. 죽은 사람의 피를 어떻게 받아 들이느냐 하는 차이" 라이짐이 말하는 순간, 나는 라이짐의 얼굴에서 아케르의 얼굴을 보았 다. 흉터 때문에 잠시 잘못 보았다 싶기는 했지만 라이짐의 앞날에 대한 불길한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라이짐의 말에 나는 뭐라고 한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나는 그만 두었다. 떠나는 마당까지 라이짐과 싸우고 싶 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찬, 너도 가. 지금 단원들이 여기로 오고 있을 거야. 잡히면 넌 죽을지도 몰라. 용병이라니까 그 정도는 알고 있겠지. 그러니까 빨리 가. 아까 내 목숨을 구해준 보답이야" 내가 대답을 하지 않고 망설이는 사이, 라이짐이 모짤트 쪽으로 고개를 돌려 말했다. 찬, 아니 모짤트는 아무 말도 없이 옆에 있던 뮤에 그레텔 과 함께 올랐다. 낯선 단원들이 모짤트를 막아섰다. "길을 내줘! 십부장으로서 명령한다! 뒷일은 내가 책임진다!" 라이짐이 소리쳤다. 그러자 단원들이 움찔 하더니 조금씩 물러서면서 길을 내 주었다. 라이짐의 목소리가 내뿜는 기세에 눌린 듯 했다. "라이짐 십부장 님, 어쩔려고 그러시는 겁니까" 나이스가 끼어 들었다. "난 오늘 이 자리에서 두 번 죽었어. 이제 내 목숨은 수르카와 찬에게 두 번이나 빚진 목숨이야. 일단 그것부터 생각하겠어. 뒷일은 내가 책임 진다. 나이스. 난 십부장이다" 라이짐의 말에서 나는 라이짐이 나와 함께 동행 한 이유를 알 수 있었 다. 라이짐은 십부장 자격으로 현장 지휘를 위해 이곳으로 온 모양이었 다. 비록 임시라고는 해도 라이짐이 동행해야 내가 의심하지 않을 테고, 그래야 마지막 순간까지 라스폼과 성황청의 기사단을 속일 수 있었을 테 니까. 나이스는 십부원들에게 물러 설 것을 명령했다. 십부원들은 양옆으로 갈라져 길을 만들어 주었다. "가라. 수르카." 라이짐이 말했다. "살아있다면 꼭 다시 만나게 될 거야" 나는 라이짐에게 이렇게 말해 주었다. 어쩌면 다시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스치고 지나갔지만 말이다. "그리고. 죽지 마라. 수르카" 라이짐이 뒤돌아서며 말했다. "그래, 너도. 라이짐" 나는 스타바를 몰고 단원들 사이를 헤쳐나갔다. 좌우로 늘어서 있는 검 은 옷의 단원들이 음산한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는 상관없 다. 나는 별로 거리낄 게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제 용병이 아니니까. 그런데 내 옆으로 찬, 아니 모짤트가 따라붙었다. "같이 가자" 모짤트가 말했다. "왜? 성황청에서 계속 날 따라다니라고 하디?" 나는 이렇게 쏘아 주었다. "이제 라스폼에게는 빚진 게 없어. 이제 자유라는 말이야" 말하는 모짤트의 눈빛은 진실해 보였다. 찬은 표정이 없으니 거짓말인 지 아닌지 알 수가 없었지만 이런 상황인데 설마 속일까 하는 생각이 들 었다. 아니, 그것보다는 그냥 따라오면 또 어떤가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 다. 라스폼도 따라오고 싶으면 따라오라지. 첩자가 붙어있건 아니건 따라 오려면 얼마든지 따라올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고 보니 라스폼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날 고용하는 건 어때. 혼자는 힘들텐데" 모짤트가 말했다. 듣고 보니 혼자 가는 것보다는 일행이 있는 게 나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검 다섯 자루에 내가 필요할 때까지라면 고용하는 걸 생각해 보지" 나는 하진에게 산 단검을 생각하면서 말했다. "좋아" 모짤트가 말했다. 하지만 이렇게 모짤트와 함께 동행하는 게 좋은 일일 까 싶었다. 또 그레텔 같은 정령술사와 함께 간다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나미트는 생각하기도 싫었다. 게다가 모짤트가 혹시라도 나를 속이고 있 는 거라면 어떻게 할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또 나중에 가서 보수를 더 달 라고 하면 어떻게 하나 싶기도 했다. 이럴때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래. 뭐, 어떻게든 되겠지!" "어디로 갈 거야?" 모짤트가 물었다. 나는 어디로 가면 좋을지 생각해 보았다. 아무 곳도 떠오르지 않았지만 허리에 찬, 사비오 영감이 남기고 간 금화가 오늘따라 든든하게 느껴졌다. "임프시!"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왕 가는 거 사비오 영감을 따라가 보자는 생 각에서였다. "일단 대청하를 건너서 스파일로 가자. 임프시에 가면 무슨 일이든 생 기겠지"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가야겠다고 마음먹기는 했지만 막상 떠날 때가 되자 아쉬움이 남은 까닭이었다. 멀리서 라이짐이 아케르에게 다가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시체의 산에 둘러싸인 두 사람의 모습이 꼭 아버지 와 아들 같아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자, 스타바" 스타바는 힘있게 뮤, 하는 울음소리를 내며 달리기 시작했다. 내 뒤를 찬과 그레텔이 타고 있는 뮤가 따랐다. 눈 앞에는 막막하기만 한 넓은 들 판이 끝도 없이 열려 있었다. -------------------------------------------------------------------- 드디어... 1부 '칼과 마법'이 끝났습니다. 며칠 쉬겠습니다. ^^; PRINTER/CAPTURE를 OFF 하시고 [ENTER] 를 누르십시오.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0948/11996 ━━━━━━━━━━━━━━━━━━━━━━━━━━━━━━━━━━━━━━━━ 제 목:[탐그루] 영혼의 에뮬레이터 5 100 관련자료:없음 25/25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2-03 00:15 조회:2007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 영혼의 에뮬레이터 5 - 이나바머와 자유해커연맹 "...이렇게 해서 수르카는 스승을 찾아 대청하 너머 스파일에 있는 임 프 시로 향하게 되었답니다" 세헤라자드의 이야기가 여기까지 이어졌을 때, 시간은 어느덧 해질녘이 되어있었다. 오늘 당장 게임이 없는 게 다행이었다. 발목에 무거운 쇠로 된 추라도 달려있는 듯 몸이 무거웠다. 만약에 게임이 있었다면 나는 아 마도 조명 아래에서 말라비틀어진 개구리 꼴이 되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피곤했음에도 불구하고 내 머릿속에는 하잔에서 죽어간 사람들과 용병단장 아케르에 대한 생각이 자꾸 떠올랐다. 처음에 나는 아케르가 멋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형의 원수를 갚은 위대한 복수자 검객. 거기에다 귀족 제도를 없애고자 하는 굳은 신념을 가진 사나이. 그런데 가면 갈수록 세헤라자드의 이야기에 나오는 아케르 는 무시무시한 괴물처럼 느껴졌다. 만약 이진우 수사관이 아케르의 이야 기를 들었다면 아마도 침을 튀기면서 또 한 번 전쟁과 살인에 대한 열변 을 토했으리라. 꼭 이진우 수사관을 생각해서는 아니지만 나는 아케르가 그렇게 까지 나쁜 사람이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종종 발전과 진보 를 위해서는 희생되는 측면이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했었기 때문이다. (아니, 사실은 아버지가 나에게 해준 말이 그랬다) 그렇다면 아케르가 꿈 꾸는 이상은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과연 미하엘이 재판정에 서 했던 말처럼 누군가를 죽이는 일은 나쁘기만 한 것일까. 아니면 아케 르의 말처럼 후손을 위한, 국가와 대륙을 위한 어쩔 수 없는 희생은 숭고 하고 아름다운 일일까. 나는 쉽게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세헤라자드. 나는 피를 보는 게 싫어서 용병단을 떠나는 수르카와 자 신의 이상을 위해 용병단에 남는 라이짐 중에서 어떤 쪽이 옳은 지 잘 모 르겠어. 너는 어떻게 생각해?" "글쎄요" 세헤라자드는 스테아의 목 밑을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그러고 있는 세 헤라자드의 얼굴은 마치 아무 것도 생각하고 있지 않은 어린아이처럼 보 였다. "자신의 믿음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던지는 사람들은 역사에 기록된 예 는 적지 않죠. 흔한 예로 예수 님이나 안중근 같은 사람이 있겠지요. 그 런 사람들의 인생은 누가 보아도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을 거에요. 자신 이 생각하고 있는 신념에 목숨을 바치고, 사실 그런 사람들 덕분에 비류 님이나 제가 이나마라도 살고 있는 지도 모르지요.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 다면 인류의 발전은 없었을 테니까요. 불과 백 년 전만 하더라도 인간의 영혼이 이렇게 에뮬레이션 된다는 걸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어요. 인류는 쉬지않고 발전해왔고, 그리고 그 과정에는 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뒤따랐죠" "그럼 너는 아케르가 옳다는 말이야? 자신의 신념을 위해 하잔의 무고 한 양민들을 학살한 아케르가 말이야?" "...하지만 반면에 신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세상에 다시없는 악인 으로 역사에 남은 사람도 있잖아요? 나찌의 히틀러가 그 대표적인 예죠. 히틀러가 젊었을 시절, 독일의 금융시장은 유태인들이 장악하고 있었습니 다. 독일인들은 거리에서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 일부 유태인들은 호사스 러운 생활을 즐기곤 했지요. 그런 상황이었으니 히틀러에게 유태인은 완 전한 악마로 보였겠죠? 그래서 히틀러는 자신의 신념 그대로 유태인들을 학살했지요. 그리고 그 이후는 역사에 나오는 그대로고요" "세헤라자드. 너 보기보다 많이 유식하구나" 난 좀 비꼬는 투로 이렇게 말했다. 물론 이차세계대전에 관한 게임들은 많이 플레이 해 봤기 때문에 히틀러에 대해서 조금은 알고 있었지만 세헤 라자드가 말한 건 잘 모르고 있었던 것이었다. (나하고 동갑이라는 거 뻔 히 다 아는데 나보다 더 똑똑하다면 좀 문제가 있는데... 이거) "스테아 먹이 구하느라고 브리테니커 사이트에 한 번 다녀왔거든요" 세헤라자드의 말에 난 웃음을 터트렸다. 부끄러워하는 세헤라자드의 모 습이 너무 귀여웠다. "그래. 알았어.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히틀러하고 예수 님하고 일대 일로 비교하다니. 그건 좀 무리 아닌가 싶다. 비교할 사람이 그렇게 없었어?" 물론 내 머리에 종교와 정치가 담겨있는 폴더는 없지만, 그래도 신이나 지옥 같은 말이 나오면 이상하게 좀 무서워지곤 한다. 함부로 말했다가 진짜 무슨 저주나 천벌 같은 걸 받으면 나만 손해잖아? 세헤라자드야 어 찌되었건 프로그램이니까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말이다. "전 그냥 신념을 가진 사람이라는 점에서만 비교한 거에요" "예수 님은 신...이잖아" "저는 인간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위대한 거죠. 신이었다면 뭐가 그렇게 위대하겠어요?" 자칫하면 종교 얘기로 번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안 된다. 정치와 종교 얘기는 바보나 하는 거라고 아버지가 그랬는데. "그래도 어디 가서 그런 소리하지 마. 언제 폭탄 메일이 날아와서 어스 넷 계정이 날아갈지 모르니까 말이야. 봤잖아. 스팸메일 형태로 종말론을 뿌리는 광신도가 있는 세상이라고... 어쩌면 어느 날 소포를 열었는데 폭 탄이 터질지도 모르는 세상이라고" 나는 농담조로 이렇게 말했지만 세헤라자드는 웃지 않았다. 아니, 오히 려 얼굴이 어두워졌다. "세헤라자드?" 나는 그제야 세헤라자드의 어머니가 어느 날 날아온 소포 폭탄에 희생 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수 있었다. 바보 같으니라고. 어쩌면 이렇게 머 리가 안 돌아가냐. 나야말로 수르카 못지 않은 돌탱이인지 모르겠다. "...저도 사실 뭐가 선이고 뭐가 악인지 잘 모르겠어요" 한 참이 지난 다음에야 세헤라자드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냥 아무 소리하지 못하고 세헤라자드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예수 님과 히틀러의 예를 드는 데 저는 별로 주저하지 않았어요. 어느 쪽을 선이다, 혹은 아니다라고 저는 말할 수 없거든요. 만약 선이 있다면 선이 아닌 것은 다 악이겠지요. 히틀러를 따랐던 사람이 보기에 유태인은 악일 거라는 말이에요. 유태인이 본 히틀러도 물론 두말할 것도 없이 악 이겠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선과 악이 존재하는 걸까요? 그건 그냥 자기가 보기 나름 아닐까요?" "잠깐. 너무 복잡해. 나는 머리가 그렇게 좋지 않아" 세헤라자드의 말이 끊어진 틈을 타서 나는 분위기를 좀 좋게 만들어 보 고 싶어서 이렇게 농담을 던졌다. 그러나 세헤라자드는 내 말은 들은 척 도 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어스넷 여기저기를 다니다 보면 엄청난 양의 정보들을 접하게 되요. 그래서 하루가 다르게 제가 변하고 있는 걸 느낀답니다. 그런데 뭐가 문 제냐고 물으실 수도 있겠지만 사실 전 너무 무서워요. 영원히 모르고 살 아도 될 것을 알게 되는 게 아닌가, 너무 많은 것을 알게 되어 인간이 아 닌 존재가 되어 가는 게 아니가 하는... 점점 변해가는 제 자신이 두려워 요." 나는 세헤라자드가 느끼고 있을 두려움이 이해가 갔다. 처음 걸어가는 길에 혼자 있다고 생각해보면 나는 그런 상상만으로도 공포를 느낀다. 그 런데 하물며 자신의 몸이 완전히 낯선 다른 형태로 바뀌어 혼자 낯선 길 에 서 있다면 그 기분이 어떻겠는가. "...하여간 저는 잘 모르겠어요. 머릿속에 생각이 많아지면 많아질 수 록 점점 더 모든 게 알 수 없다는 생각만 들어요. 과연 어느 쪽이 옳은 가. 과연 어느 쪽이 맞는 말을 하고 있는 걸까. 서로 반대되는 두 가지 생각이 있다면 과연 둘 중 하나는 반드시 틀린 걸까... 이런 식으로요" "그래 알았어, 세헤라자드" 나는 세헤라자드를 그만 괴롭히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사람이 죽는 건 너무 무서운 일이야. 죽으면... 어찌되었건 끝 이잖아? 그리고, 세헤라자드. 아버지한테 언젠가 들은 말인데, 사람은 평 생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거 말고 다른 걸 생각하면 안 되는 법이래. 그러지 않으면 두 가지 직업밖에 가질 수 없다 그러셨어" "그 직업이 뭔데요?" "소설가하고 철학자" 내 말에 세헤라자드는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를 보니 그래도 나는 좀 마음이 놓였다. "세헤라자드. 나 지금부터 잘 거 거든. 그런데 그 동안에 어스넷 갔다 올 일 없으면 선 뽑아 놓을게. 아무래도 너 당분간은 좀 안정을 취하는 게 나을 것 같아" 내 말에 세헤라자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스테아는 좀 굶겨. 뚱뚱한 거 보다 날렵한 게 훨씬 보기 좋으 니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눈을 감자마자 졸음이 쏟아졌다. 날카로운 전화 벨 소리가 세 번 울리자 자동 응답기가 작동했다. "비류입니다. 제가 지금 집에 있다면 틀림없이 자고 있을 거고, 없다면 담배라도 사러 나갔을 겁니다. 전 별로 갈데가 없으니까요. 삐 소리가 나 면 메세지를 남겨 주세요. 일어나는 즉시, 돌아오는 즉시 연락 드리겠습 니다" 나는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내 목소리를 들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너무 조금 밖에 자지 못해서 그런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비류 님? 나 리파이에요. 새로운 YWCA공략법 때문에 그러니까 이거 들 으면 저희 집으로 빨리 연락 주세요. 전화 번호는 메일로 보냈고요. 이 연락을 받는 즉시 연락주세요. 급한 일이에요. 빨리요" 리파이는 이렇게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사이 나는 이불을 뒤집어 쓰고 멍청하게 누워 있었다. 전화 스피커 폰 리모콘을 누를 생각도 하지 못하고 말이다. 전화는 끊어졌다. 한 참이 지난 다음에야 나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머리가 멍했다. 다리는 여전히 추가 달린 듯 무거웠다. 원래 불규칙하게 생활하 는 게 습관이 되어 놔서 낮에 자고 밤에 일어나는 일이 다반사인데 요즘 은 웬지 너무 힘들고 피곤하다.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짧게 자른 머리의 촉감이 낯설게 느껴졌다. 나는 메일을 확인하고 리파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 리모콘이 어 디 있는지 몰라서 한 참을 찾다가 결국 본체에 달려 있는 스피커 폰 버튼 을 누른 뒤였다. "리파이와," "실버우드의 집입니다" "저희와 통화하시려면" "마법의 말을 외쳐 주세요" "손맥. 세계 최강의 게임을 위하여!" 마지막 말은 둘이 함께 외쳤다. 나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프로들은 메 세지도 프로답게 남기는구나 싶었다. 나도 메세지를 바꿔 볼까하는 생각 이 들었다. "리파이 님. 저 비류에요. 급한 연락이라면서 자동 응답기를 켜 놓으셨 네요" 나는 이불을 개고 아주 최소한의 방 정리를 하면서 말했다. "아, 비류 님. 죄송해요. 잠깐 작업하는 사이에... 저, 급한 일이에요. 아무 소리하지 말고 제 말만 들으세요. 지금 당장 지하철 11호선 네오면 목 역으로 오세요. 꽤 오랫동안 자리를 비워야 할 지 모르니까 간단한 짐 도 챙겨 오세요. 갈아입을 옷이나 칫솔, 또 자주 쓰는 소프트웨어도 챙겨 서요. 지금 당장요" 내게 말할 기회도 주지 않고 리파이가 쏜살같이 말한 다음 전화를 끊었 다. 이건 또 무슨 경우지? 나는 게임과 관련된 전화일 거라고 생각했는 데, 좀 의외였다. 집을 비워야 한다니. 아니, 무슨 파워볼 리그 선수도 아니고 합숙 훈련이라도 하겠다는 걸까? "오랫동안 못 돌아 오시겠네요" 세헤라자드였다. 세헤라자드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애처롭게 눈을 깜박이면서 말이다. "응. 들은 그대로야" "리파이라는 여자, 예뻐요?" 좀 기분 나쁘다는 듯이 들리는 말투였다. 설마 질투를 하는 걸까? 아버 지는 나에게 여자를 대할 때 주의해야 할 세 가지 중에서 두 번째로 질투 를 꼽았다. "응. 예뻐. 그러니까... 세헤라자드의 한 십분의 일 정도의 미모니까 굉장한 미인이지" 나는 서둘러서 가방 안에 시디 몇 장과 내 세이브 파일, 손자병법 (이 건 하도 자주 읽어서 표지가 너덜너덜하게 됐다) 같은 걸 챙기면서 말했 다. 세헤라자드는 내 농담이 싫지 않은지 웃음을 지었다. "저, 그 동안에 여기 혼자 있어야 하나요?" "스테아도 있고, 또 어스넷..." 나는 여기까지 말했다가 어스넷으로 가는 게 세헤라자드에게 좋지 않다 는 걸 떠올렸다. 간난 아기를 물가에 놓고 갈 수는 없겠다 싶었다. "세헤라자드. 하나 물어볼게. 너 아무 소리 않고 조용히 있을 수 있는 한계가 몇 시간이야?" "매일, 24시간, 365일이에요" 내가 무슨 뜻으로 물어본 말인지 금새 눈치 챈 모양이었다. "그럼 아주 조용히 해 줘야 해. 이건 랩탑의 주인이자 네 보호자로서 하는 말이야. 꼭 약속 들어줘" "예" 세헤라자드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일일까? 게임과 관련된 일이라면 이렇게 급박한 연락을 할 일이 없 지 않은가. 나는 아예 세헤라자드를 등에 매는 가방 안에 집어넣고 집을 나섰다. MPEG 연주기를 듣는 학생처럼 이어폰을 랩탑에 연결해서 귀에 꽂고 말이 다. (MPEG연주기 치고 내 랩탑은 너무 컸지만) 일단 리파이와 만나고 나 서는 조용히 해야 하지만 가는 동안에도 조용해야 한다는 법은 없으니까 나는 이렇게 하기로 했다. 밖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붉은 색 하늘이 음산하게 도시를 감싸고 있었고, 수많은 광고 간판들이 빛을 내면서 붉은 하늘에 저항을 하고 있 었다. 나를 사라, 나를 먹어라, 나를 입어라, 이런 식으로 말하면서 말이 다. "세헤라자드, 내 말 들려?" 미니 마이크로폰을 상의 윗 주머니에 꽂고서 말했다. "예. 바람소리하고 거리에 다니는 사람들 소리도 들려요. 지금 누군가 비류 님 왼편으로 걷고 있는 사람, 남자 맞지요? 굽이 두꺼운 구두를 신 고, 키가 아주 큰" 세헤라자드는 이렇게 어설픈 탐정 흉내를 내었다. "미안하지만 아니야. 뚱뚱한 아주머니라고" 나는 코를 만지는 척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길거리를 다니면서 쉴새없 이 중얼거리는 사람들이 종종 있는데 그런 사람처럼 보이고 싶진 않았다. "잠깐만요. 이번에는 맞춰 볼게요. 음...지금 스쳐 지나간 사람은 아이 죠? 키도 작고 마른. 신발은 고무 깔창으로 된 운동화를 신었고요" "이번에도 틀렸어. 스니커즈를 신은 날씬한 아가씨야" 나는 그 아가씨를 잠시 돌아보면서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거리에는 저렇게 예쁜 여자도 많은데 내가 아는 여자라고는 영국 에 사는 팬팔 친구와 양성애자 게이머, 그리고 항상 귀찮게 하는 프로그 램 하나 뿐이잖아? 나는 지하철을 타기 위해 계단을 급하게 내려갔다. 퇴근 시간이어서 사 람들이 많이 오르락 내리락 하고 있었다. 표정 없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 는 저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과연 전부 다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아갈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헤라자드의 이야기에 나오는 하잔이 생각났다. 죽 어 가는 사람들. 그리고 죽이는 사람들. 과연 그들이 닿게 되는 마지막은 어디일까. 발전을 위해 피를 필요로 하는 사람과 마음을 찾아가는 여정을 걷고 있는 사람. 어쩌면 여기 지하철 역을 메우고 있는 사람들도 그렇게 나누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계속해 서 빠른 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사람들이 모두 바쁘게 움직이고 있으니 나마저 그렇게 되는 모양이다. 하긴, 리파이가 급한 일이라고 했으니까 좀 빨리 가는 것도 좋겠지. "잠깐만요. 이번에는 맞춰 볼게요. 지금 비류 님 왼쪽 뒤편에서 비류 님을 따라오는 사람 중에 한 쪽 다리가 티타늄 의족인 사람이 있어요. 음...비류 님하고 걸음을 맞추고 있구요. 맞지요?" 티타늄 다리? 나는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지만 세헤라자드의 말이 맞는 다면 그게 누구인지는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나는 매표소에서 줄을 서 서 기다리면서 매표소 유리에 비친 내 뒤에 있는 사람의 얼굴들을 살펴보 았다. 사실 그렇게 주의 깊게 살필 것도 없었다. 시커먼 선글라스에 바바 리를 입고 있는 이진우 수사관의 모습은 조금만 주의를 기울인다면 누구 라도 어스폴 수사관이라는 걸 눈치 챌 수 있을 만큼 특이한 모습이었다. 아니, 미행을 하는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따라올 줄은 미처 몰 랐다. 어쩌면 전화 내용을 도청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싶었다. "미행 당하고 있어, 세헤라자드" "예. 알고 있어요" "좀 골탕을 먹여주고 싶은데" 나는 침을 튀기면서 열변을 토하던 이진우 수사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 이번 기회에 한 번 혼을 좀 내 줘야지. 나는 표를 산 뒤 시치미를 떼고 음악을 듣는 것처럼 박자를 맞추어 고개를 끄덕이면서 개찰구를 지 나 자기 부상 열차를 타기 위해 안전선밖에 섰다. 나는 사람들을 보았다. 언젠가 어스넷 질서 광고에서 본 것인데, 이웃나라 일본이나 미국 같은 경우, 지하철을 탈 때도 줄을 서서 타곤 하는 게 아주 보편적인 일이라고 들었다. 그런데 우리 나라는 왜 이럴까. 하긴. 어정쩡하게 남들 하는 거 따라 할 줄이나 아는 3류 국가와 세계를 주도해 나가는 1류 국가를 비교 하긴 좀 힘들지. 나는 잠깐 생각해 보다가 어쩌면 이 무질서를 잘만 이용 하면 쉽게 이진우 수사관을 따돌릴 수 있겠다 싶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0949/11996 ━━━━━━━━━━━━━━━━━━━━━━━━━━━━━━━━━━━━━━━━ 제 목:[탐그루] 영혼의 에뮬레이터 5 101 관련자료:없음 29/29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2-03 00:15 조회:1761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내 계획은 이랬다. 일단 자기 부상열차에 탄 다음에 열차가 출발하기 전에 재빨리 내리는 거였다. 시간만 잘 맞는 다면 충분히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진우 수사관은 사람들에 떠밀려서 쉽게 움직이지도 못할 것 이고, 또한 내가 자기 부상 열차에 탔는지, 아닌지도 잘 모를 테니까 말 이다. "좋아, 세헤라자드. 꽉 잡아. 사람들을 뚫고 내리려면 좀 힘이 들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나는 꼭 엑션 게임 주인공의 대사처럼 이렇게 말했다. 왠지 게임을 하 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오래된 게임이긴 하지만 내가 좋아 하는 메탈기어 리퀴드의 주인공 솔리드 스네이크처럼 도시에서 미행자들 을 따돌리면서 목적지로 향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열차 도착 신호음이 역에 울리자, 사람들은 미끄러지듯 다가오는 자기 부상 열차로 눈길을 돌렸다. 나도 일부러 이진우 수사관을 보지 않고 열 차 쪽을 바라보았다. 주머니 속에 꽂아 넣은 주먹이 꼭 쥐어졌다. 가슴이 뛰어 올랐다. 진짜 게임 같다. 진짜 게임. 이윽고 자기 부상 열차의 문이 열리자 사람들이 꾸역꾸역 내리기 시작 했다. 문 양 옆으로 비켜서 있기는 했지만 중심을 잡기가 어려울 만큼 사 람들은 거칠게 움직였다. 사람들이 어느 정도 내리자, 나는 내 의사와는 관계없이 타려는 사람들에 밀려서 열차 안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몸을 움 직이기가 쉽지 않았다. 여기서 다시 내려야만 이진우 수사관을 따돌릴 수 있는데. 나는 어쩐지 오기마저 생겼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내는 짜증 섞인 음성이 들려왔다. 밀고 밀리는 사람들 때문에 가방에 들어 있는 세 헤라자드가 걱정이 되었다. 사실, 사람들에게 밀려서 도저히 몸을 가누기 조차 힘든 상황이었지만 나는 꼭 내려야 한다는 일념으로 사람들을 헤치 고 지나갔다. "어어, 밀지 말아요" "이거 참. 요즘은 어린 놈들이 더 한다니까. 예의가 없어요. 예의 가..." "거 조심 좀 합시다" "지금 뭐 하는 거에욧!" 치한을 보는 듯 곱지 않은 시선으로 한 여자가 소리쳤다. 몇 사람의 발 을 밟았고, 몇 사람을 거의 넘어질 정도로 밀치고 또 몇 사람의 여자 가 슴이 (절대로 고의가 아니다) 팔꿈치에 닿기는 했지만 나는 출입구까지 가는 데 성공 할 수 있었다. "출입문 닫겠습니다, 출입문 닫겠습니다" 안내 방송 대신 자기 부상 열차 기관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만 더 가면 되는 데... 나는 팔을 뻗었지만 그야말로 약간의 차이로 도저히 나갈 수 없을 것 같았다. 이번 역에선 포기해야겠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 는데 갑자기 강한 힘이 나를 밀쳐내었다. 나는 그 힘에 밀려서 문이 닫히 기 직전에 열차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내 키 정 도 되는, 평범한 회색 양복을 입은 곱슬머리의 사내가 날 바라보고 있었 다. 곱슬이 좀 심해서 아침마다 빗질하기가 힘들겠다 싶은 사내였는데, 얼굴만 가지고는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나이 들어 보이는 이 십 대 같기도 하고 어려 보이는 사십 대라고 해도 믿을 것 같은 얼굴이었기 때 문이었다. 다만 양복 어깨선이 꼭 끼는 걸로 봐서 대단히 단단한 체구를 가진 사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비류 씨. 저는 리파이 씨의 친구입니다. 따라오세요" 꼭 소포 배달 온 무뚝뚝한 우체부 같은 말투로 사내는 이렇게 말하고는 앞장서서 걸었다. 나는 리파이의 친구라는 말에 그 사내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된 거야?" "저 사람이 밀어서 밖으로 나왔어요" 내가 중얼거린 말에 세헤라자드가 대답했다. 그래. 그건 나도 안다고. 뻔한 소리만 하는 걸 보면 세헤라자드가 정말 프로그램은 프로그램인가 보다 싶다니까. 사내는 그 뒤로 소개는커녕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앞장서서 걷기만 했 다. 아니, 무슨 친구를 지하철로 보내나? 그것도 처음 보는 사람을 지하 철에서 밖으로 밀쳐내는 친구를 말이다. 나는 이 나이를 짐작 할 수 없는 사내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것 보세요. 지금 어디로 가는 거예요?" 내 질문에 사내는 나를 한 번 쓱 처다 보았을 뿐, 역시 아무 말이 없었 다. "잠깐만요. 지금 어디로 가는지, 또 왜 가는 지 얘기를 해야 할 거 아 니에요" "이거 참, 답답하네. 좀 뭐라고 말 좀 해 봐요" "이것 보세요. 이름이 도대체 뭐예요? 생전 모르는 사람을 따라가야 하 는 제 마음이 어떤지 아세요?" 내가 몇 번이나 물었지만 사내는 묵묵 부답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사내 를 붙잡아 세우고 묻기에 사내가 풍기는 분위기는 좀 무서운 데가 있었 다. "혹시 어스폴 수사관인가요? 수사관이라면 신분증을 보여줘야 할 거 아 닙니까" 나는 최후의 수단으로 목소리를 높여서 이렇게 물어보았다. 그러자 사 내가 멈추어 섰다. 나는 가슴이 쿵, 하고 딱딱한 것에 부딛치는 느낌이 들었다. "아닙니다" 사내는 이렇게 말하고는 계속 걷기만 했다. 이거 참 모를 일이군. 그러 고 보니 사내는 우리 집 주변을 빙빙 돌고만 있었다. 왼쪽으로 보이는 공 원이 네 번째로 보이고 있었다. 도대체 이 사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건 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메탈기어 리퀴드에서 미행자를 확인할 때 같은 자리를 맴돌았던 기억이 났다. 미행자를 확인하는 건가? 그런데 왜? 내가 무슨 적국 스파이라도 된단 말인가? "여깁니다" 사내가 말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긴 공원이잖아? "비류 님. 좀 놀라셨죠. 죄송해요" 리파이가 나무로 가려진 벤치에 앉아 있었다. 리파이라는 것은 목소리 를 듣고서야 겨우 알아낼 수 있었다. 야구모자를 푹 눌러쓴 데다가, 옷도 평소의 리파이하고는 정말 다르게 카키색 작업용 점퍼를 입고 있었기 때 문이었다. "리파이? 무슨 일이에요?" "비류 님 집 전화, 도청 당하고 있더라구요. 그래서 이렇게 수를 쓴 거 죠. 어스폴 요원이 따라다닌다면 좀 곤란할 것 같아서요" "아니, 내 말은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요. 게임 얘기를 좀 하자 그러셔 서 그런가 보다하고 나왔더니 이게 무슨 일인지, 원..." "비류 님. 일단 진정하시고 여기 앉으세요" 리파이가 앉아 있던 벤치 옆자리를 두드리면서 말했다. 진정하라니? 내 가 흥분이라도 했단 말인가? 그런데 그러고 보니 얼굴이 좀 화끈거리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하철에서부터 한참동안 긴장해 있었다. 나는 숨을 크게 내쉬면서 리파이의 옆에 앉았다. 하지만 나를 여기까지 데리고 온 사내는 선 채로 좌우를 살피고 있었다. "저 사람은 누구에요?" 나는 턱으로 사내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아무 말도 없이 날 끌고 온 게 좀 괘씸하기도 하고 기분 나쁘기도 했다. (한마디로 별로 마음에 들지 않 는 친구였다) "우리가 고용한 사람이에요. 경호원이라고 해도 좋고... 신경 쓰지 마 세요" 리파이는 이렇게 간단하게 대답했지만 나는 쉽게 리파이의 말을 받아들 이기가 힘들었다. '우리'가 고용했다니? '우리'라면 누굴 말하는 걸까. 팀? 회사? 또 경호원이라니. 게이머가 그렇게 위험한 직업이었나? "잠깐만요, 비류 님. 이제부터 하는 얘기는 중요한 얘기니까 잘 들어주 세요" 내가 이런 저런 궁금한 점을 물어보려고 하는 데 리파이가 먼저 말을 시작해 버렸다. "혹시 FHA라는 말 들어보신 적 있으세요?" FHA? 난생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압축 프로그램인 LHA라면 또 모를 까... "전혀요" "그러시겠죠. FHA는 Free Hacker Association의 약자에요. 자유 해커 연합이라고도 하죠" 자유 해커 연합? "뭐 하는 사람들인지는 모르겠지만 별로 좋지 않은 느낌이 드는 데요" 나는 고용되었다는 사내를 보면서 말했다. 사내는 나와 눈이 한 번 마 주쳤는데 꼭 나를 벌레 바라보듯 하고 있었다. 정말 자꾸만 맘에 안 드는 짓만 하는 친구로군. 기회만 나면 혹시 빗질하다가 빗 부러진 적 있느냐 고 한 번 물어봐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있는데 리파이가 말을 이었다. "먼저 솔직하게 말씀 드릴게요. 전 FHA에 속해있어요. 비류 님이 어스 폴에 추적을 당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나름대로 조사를 해 봤어요" "지금 제 뒷조사를 해 봤다고 말하는 건가요?" 갈수록 태산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일 것 같았다. 전화로 사람을 불러내고, 그 복잡한 지하철에서 사람을 밀쳐내더니 이제는 FHA라는 단체 얘기에 거기다가 뒷조사라고? 나는 어이가 없었다. "죄송해요. 그러니까 지금 이렇게 솔직하게 말씀 드리고 있잖아요" 리파이가 말했다. 나는 뭐라고 받아치려고 했는데, 리파이의 표정이 하 도 애처로워서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양성애자건 뭐건 미소녀에게 약한 게 내 약점인가 보다) "...먼저 FHA가 어떤 단체인지부터 설명을 드릴게요. MS사가 해커들과 에뮬레이터를 만드는 프로그래머들을 모으고 있는 건 알고 계시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한식집에서 나눈 이야기었다. "그때 모든 해커들과 프리웨어 프로그래머들이 MS사에 들어간 건 아니 에요. 많은 수는 아니지만 MS사에 반기를 들고 저항한 사람들도 있었죠. FHA는 그때 저항한 프로그래머들의 모임 중 하나에요" 아, 그렇군요. 그런데 날보고 어쩌란 말이야? 나는 여전히 기분이 나빴 다. 아마 리파이가 남자였다던가, 혹은 미인이 아니었다면 나는 분명히 뭐라고 쏘아붙였을 거다.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비류. 인간 말종. "우리는 MS사 잘못된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해요. MS사는 서클 프로젝 트 이후 어스넷을 완전히 장악하기 위해 별의 별 수단을 다 써왔지요. 저 희가 알아낸 것만 해도 상당 부분이에요" "그래서 저항하고 있다... 이런 말인가요?" 나는 리파이의 말에 조금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어스넷에 별의 별 단 체가 다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은 있었지만 이런 단체가 실제로 있고 이렇 게 활동까지 하고 있는 줄은 정말 몰랐다. "궁극적으로 MS사가 노리는 것은 어스넷의 모든 정보를 MS사가 독점하 는 거지요. 말하자면 정보를 완전히 통제하고 관리하고 싶어하는 거지요. 어쩌면 이 계획은 통합정부와도 관계가 있는 지도 몰라요. 아직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요" 이 말은 어쩐지 부루터스가 하면 어울릴 말인 것 같았다. MS사를 바라 보는 곱지 않은 시선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건 좀 정도가 지나치 다 싶었다. "혹시 이제 용에 대한 이야기도 하는 거 아니에요?" "그래요. 하지만 제가 생각하기엔 용도 관계가 있는 것 같아요" "제 말은 강박관념 아니냐는 말이에요" 딴에는 심각하게 한 말이었는데 리파이는 웃음을 터트렸다. "비류 님은 기억력도 좋으시군요. 아톰이 그냥 지나가는 말로 한 번 한 농담을 아직도 기억하시다뇨" 나는 리파이의 말에 '웃어줘서 감사합니다' 같은 의미의 미소를 지어 보여주었는데, 내가 생각해도 어색하기 짝이 없는 미소였다. (차라리 입 을 막고 가만히 있을 걸) "오늘 절 따라오시면 강박관념이 아니라는 걸 아실 수 있으실 거예요. 증거들을 보여드리죠. 그보다 먼저, 제 설명을 마저 들어주세요" 이번에는 애처롭다기 보다는 설명하는 게 즐겁다는 듯한 얼굴로 리파이 가 말했다. "비류 님.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은 정말 중요한 일이에요. MS사의 독주 는 벌써 한 세기 전부터 시작된 거였어요. 그 사이, 수많은 사람들이 MS 사에 저항했지만 거의가 개인적인 차원의 저항에 지나지 않았어요. 예를 들면 MS사의 홈페이지에 낙서를 한다던가, 어스넷 계시판에 항의 문건을 올리다던가 하는 식으로요... 조직적인 저항이 시작된 건 정말 얼마 되지 않은 일이에요. 비류 님. 정보가 누군가에 의해 독점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그건 또다른 형태의 독재에요. 아직 출현하지 않은 형태 의 독재. 비류 님도 누군가가 통제하고 있는 세상에서 사는 걸 원하시진 않잖아요?" "정치 얘기라면 그만 하세요. 별로 듣고 싶지 않으니까" 나는 이렇게 딱 잘라서 말했다. 정치와 종교 얘기라면 딱 질색이다. '어스넷의 자유를 위하여' '고조선 일보 폐간' 같은 말머리를 단 계시물 이라면 근처에도 가지 않고, 또 그런 말머리를 단 메일이 날아오면 읽어 보지도 않고 삭제하는 나다. 그런데 정치 설교를 하겠다니. 나는 고개가 절로 가로 저어졌다. "비류 님. 이건 누군가는 꼭 해야 하는 일이에요. 누군가 막지 않으면 MS사는 결국 어스넷을 지배하게 될 거예요" "그래서요? 지금은 통합정부가 지배하고 있지 않나요? 아니, 솔직히 지 금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것이든 통제를 받지 않나요?" 나는 언젠가 아버지에게 들었던 말을 리파이에게 쏟아 부었다. "바로 어스넷이죠. 아직까지 어스넷은, 적어도 자유로워요. 비류 님도 어스넷에서 돌고 있는 불법 사이트에 가보신 적 있으시죠? 일단 주소만 있으면 그곳에서 뭘 하던 아직까지는 아무도 막을 수 없어요" "그건 당연한 소리 아니에요? 그 넓은 어스넷을 무슨 수로 뒤져서 막겠 어요. 막는다고 해도 주소만 바꾸고 또 하면 그만인데" 리파이가 뭐라고 대답하려는 데, 거지 노인이 옆을 지나갔다. 술에 취 한 사람처럼 휘청이면서 말이다. 노인은 뭐라고 계속 중얼거리고 있었다. 곱슬머리 사내가 노인을 보더니 우리 쪽으로 천천이 걸음을 옮겼다. 나는 사내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사내는 노인이 달려들더라도 확실하게 막을 수 있는 위치를 찾아 움직이고 있었다.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그냥 호수 를 바라보기 위해 걷는 사람처럼 보였지만 메탈기어 리퀴드로 훈련된 내 눈에는 분명히 사내의 움직임이 눈에 들어왔다. 경호원이라더니 정말 맞 는 말인 것 같았다. "계속하세요" 노인이 지나가자 사내가 말했고, 리파이는 고개를 한 번 까딱, 하고는 말을 이었다. "MS사가 바로 그 일을 하려는 거에요. 서치로봇이라는 말 들어보신 적 있으세요?" "어스넷을 돌아다니면서 새롭게 생긴 사이트나 업데이트 된 사이트를 찾아서 알려주는 프로그램을 말해요" 리파이의 말에 이번에는 세헤라자드가 대답했다. 이어폰을 뺐어야 했는 데. "잠깐. 조용히 해. 나 지금 얘기 중이야" "예?" "아, 아니..." 나는 뭐라고 대답하려다가 그만 두었다. 그 대신에 곱슬머리 사내를 바 라보면서 "저 사람, 뭐라고 부르면 되죠?" 하고 말했다. 그러자 사내의 눈빛이 차갑게 내 눈에 와 박혔다. (아마 세헤라자드에게 한 말이 자신에게 한 말인 줄 아는 모양이었다) "오토라고 부르세요. 아무 뜻도 없는 말이에요. 근무 중에는 항상 저러 니까 너무 신경쓰지 마세요" 리파이는 이렇게 말하고는 오토라고 불린 사내에게 계속 일 보라고 말 하는 사장같은 태도로 손짓을 보냈다. "꼭 품에 화약식 권총이라고 한 자루 차고 있을 것 같아요, 저 오토라 는 사람" "빔 핸드건이에요" 리파이가 말했다. 빔 핸드 건이라고? 맙소사. 무슨 은행이라도 털 생각 인가? 빔 핸드건이라는 말을 듣자 나는 등줄기를 타고 전류가 내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저 오토라는 사내, 이진우 수사관보다 더한 존재 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MS사의 횡포는 정도가 지나친지 오래예요. 서클 프로젝트 성공 이후, 어스넷을 개설한 MS사는 어마어마한 규모로 성장했지요. 거의 독점으로 공급하고 있는 프로그램도 많고요. 트랜스 파워 얘기는 아시죠? 트렌스 파워를 번들로 제공하고 프리웨어로 풀고 있는 건 순전히 다른 업체에서 만들고 있는 번역 프로그램들을 사라지게 하려는 의도지요" "그 얘긴 전에도 했어요" 나는 이렇게 말하고는 잠시 생각을 해 보았다. 리파이가 MS사에 맞서 싸우는 건 순전히 리파이의 자유다. 어차피 자기 인생은 자기가 사는 거 니까. 하지만 부루터스 같이 MS사에 반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또 모를까 인기 있는 프로 게이머가 뭐가 부족해서 그런 생각을 갖나 싶었 다. "그리고 겨우 그런 얘기나 하려고 절 부른 건가요?" "...별로 관심이 없으시군요" "정치와 종교 얘기는 제 머릿속에 없어요. 폴더를 다 삭제해 버렸거든 요" "아버님의 영향이겠군요. 하긴 비류 님은 그 유명한 만델라의 아드님이 니까 그럴 만도 하겠네요" 만델라라고? 나는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다시 한 번 리파이를 바라보 았다. 만델라는 아버지가 모험가 일을 하면서 쓰는 닉 네임이었기 때문이 다. "...지금 만델라라고 하셨나요? 아버지를 아세요?" "아뇨. 그냥 이름만 알죠. 모험가시고, 통일전쟁 참전 용사고, 전쟁이 후 다음 전쟁을 막기 위해서라면 세계 어느 곳이나 찾아가는, 유명한 반 전운동가" 리파이의 설명은 그야말로 아버지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 말이었다. 사람들중에 아버지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아버지가 반전 운동가에 평화주의자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저 돈을 받고 일을 하는 사람일 뿐. 통일전쟁 이후 아버지는 정치나 종교라는 말만 나오면 욕설부터 나오는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 (어머니에게서 들은 말이다) 정치와 종교가 결국 통일전쟁의 원인이 되었 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오로지 그 정치와 종교 때문에 싸우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 일을 하고 돈을 버는 일에 열중할 뿐이다. "어떻게 아셨죠...?" "비류 님의 아버지가 만델라라는 건 알기 어렵지만 만델라의 아들이 비 류 님이라는 걸 아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았어요" "그 반대 아닌가요?" "비류 님에게 아버지가 누구인지 물어 볼 수는 없지만 만델라를 아는 사람에게 만델라의 아들이 어떤 사람인지 아느냐고 물어볼 수는 있거든 요" "생각보다 발이 넓으시군요" "아버님 발이 넓으신 거겠죠" 그러고 보니 아버지가 아는 사람이 많기는 많다 싶었다. 그게 아니라 아버지를 아는 사람이 많은 건가... "만델라는 이 바닥에서는 꽤 유명한 분이에요. 사실 저는 만델라 님을 존경해요" 존경이라고? "바닥이라는 표현 쓰지 말아주세요. 저는 그 '바닥' 싫어해요" 나는 화가 났다는 걸 분명히 알 수 있는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 와 아버지가 결국 이혼까지 가게 된 이유가 바로 그 '바닥' 때문이었다. '가족이 인간 사회의 최소단위였던 시절은 끝났다. 이젠 공동체와 소모 임의 시대야. 인생에 있어서 가족이야 그저 우연히 얻게 된 거에 불과하 지만 공동체는 다르다. 같은 꿈과 이상을 지닌 사람들... 나는 그 사람들 을 위해 죽을 수는 있어도 가족을 위해서 죽을 수는 없다... 그런데 왜 결혼했느냐고? 지금은 그냥 이렇게 해 두지. 만델라 일생 일대의 실수였 다고. 그리고 이젠 그 실수를 만회하고 싶다고' 아버지가 속해 있던 '바닥'이 뭐였는지 나는 모른다. 그런 걸 알기에 나는 너무 어린 나이였고, 알 수 있게 된 나이가 되자 알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0950/11996 ━━━━━━━━━━━━━━━━━━━━━━━━━━━━━━━━━━━━━━━━ 제 목:[탐그루] 영혼의 에뮬레이터 5 102 관련자료:없음 23/23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2-03 00:16 조회:1860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싫다면 쓰지 않을 게요. 비류 님. 지금 우리는 비류 님의 도움이 절실 하게 필요해요" "저는 별로 도움이 될 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요. 해킹에 대해서 알고 있는 거라고는 대수롭지 않은 것들 뿐이고, 프로 게이머로서의 능력도 아 직 검증 받지 못했다고요" 나는 푸념하는 조로 이렇게 말했다. 사실, 정말 내 마음 그대로를 말한 거긴 했지만, 혹시라도 나한테 FHA인가 뭔가 하는 단체에 가입하라고 할 까봐였다. "아버님 연락처가 있으시죠?" 물론 아버지의 이리듐 전화 번호가 있기는 했다. 하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버님과 연락을 해야만 해요. 지금. 그것도 당장요" "아버지 연락처를 제가 안다고 해도 그렇게 쉽게 알려줄 수는 없을 것 같은데요. 혹시 저 오토라는 사람이 제 머리에 빔핸드건이라도 들이댄다 면 또 모르겠지만요" 나는 차갑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런데 오토의 눈빛을 보니 정말 당장이 라도 나한테 달려들어 총을 겨눌 것 같은 눈빛이었다. 나는 마른침을 삼 켰다. "좀... 곤란하게 된 것 같은데" "예. 공원 입구 쪽을 보시면 그런 생각이 들거예요" 세헤라자드가 말했다. 나는 조용히 하라고 한 마디 해 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공원 입구 쪽에서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이진우 수사관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오토. 저 사람 누군지 알겠어요?" "빨리 여길 떠야 겠습니다. 어스폴이에요" 내 말에 오토가 대답했다. 리파이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나도 얼결에 따 라 일어났다. "따라오세요" "잠깐만요. 내가 따라가야 할 이유는..." "어스폴 취조실에서 고문당해 죽고 싶지 않으면... 뛰어요!" 어스폴 취조실이라고? 그 말을 듣자 나는 저절로 리파이와 오토를 따라 뛰기 시작했다. 일단 그곳으로 다시 끌려가서는 안 된다는 생각만이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리파이. 도대체 어쩌다가 내가 이 꼴이 된 거죠? 내가 도대체 뭘 잘못 한 거죠?" "미안해요. 하지만 지금은 일단 죽어라고 뛰어요!" 미안하다고? 말은 잘하는 군. 하지만 이거 도대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었다. "뛰어서 어쩌게요. 어차피 오늘 저녁에는 게임이 있잖아요" 나는 이 말을 하느라 리파이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바람에 까딱했으면 쓰러질 뻔했다. "게이머 둘이 없다고 해서 게임이 진행되지 않는 건 아니에요" 리파이는 앞을 보면서 말했다. 리파이의 모자가 순간 바람에 날려 벗겨 졌는데, 리파이는 긴 머리를 바람에 날리면서 모자는 주울 생각도 하지 않고 계속 달리기만 했다. 그런데 사람 둘이라니. 나하고 리파이? "게다가 당분간은 게임이 어려울 거예요" "무슨 소리죠?" 오토는 뒤를 돌아보면서 회색 양복 상의에 손을 집어넣었다. 설마 빔핸 드건을 뽑을 생각은 아니겠지? "그 날 나타난 용 때문에 소오드엔메직 온라인망이 엉망이 되었거든요. 복구하는 데 시간이 꽤 걸릴 모양이에요"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거죠?"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이진우 수사관이 손에 뭔가 들고 있는 게 언뜻 보였다. 화약식 총일까? 나는 내 발이 더 빠르게 움직이는 걸 느낄 수 있 었다. 젠장! 게임도 아니고 총든 어스폴 수사관에게 쫓기는 꼴이라니! 차 라리 되돌아갈까? 그래서 이진우 수사관에게 납치 당했던 거라고 말할까? "잘하면 실업자가 될 거라는 말이에요" 말은 잘하는 군. 나는 너무 짧은 시간 사이에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 싶었다. 친구가 죽지를 않나, FHA에, 아버지 얘기에, 이젠 총을 든 어스폴 수사관한테 쫓기고 있으니 말이다. 이게 다 세헤라자드가 들어 있 는 노트북을 준 노인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노인만 아니었더라면 그냥 살던 대로 살면 그만이었을 것을 말이다. 정신없이 뛰다보니 이진우 수사관이 들어온 반대편에 있는 공원 입구가 눈에 들어왔다. "도대체 언제 까지 뛰어야 하는 거죠?" 나는 목구멍이 타들어 갈 만큼 숨이 차오르는 걸 느끼면서 리파이에게 물었다. "나가면 바로 후버카가 있어요" 후버카? 리파이가 그렇게 부자였나? 내가 뭐라고 다시 물어보려고 하는 데 검은 색 바바리에 검은 선글라스 를 낀 사내가 우리 쪽으로 달려오는 게 보였다. 이진우 수사관보다 얼굴 이 희고 키가 훨씬 큰 사내였다. 어스폴 요원이 분명했다. (아무래도 저 복장은 어스폴에서 일괄 지급되는 복장인 모양이었다) "서!" 어스폴 요원이 품에서 빔 핸드건을 뽑아들면서 소리치는 순간, 오토는 정말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달려가더니 단숨에 어스폴 요원의 얼굴 을 주먹으로 때려 쓰러뜨렸다. 어스폴 요원은 뒤로 쓰러지면서 빔 핸드건 을 발사했는데, 빔은 어디로 발사 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반사적 으로 몸을 날려 공원 가에 있는 인조 잔디밭에 엎어졌다. 꼭 파워볼 리그 선수가 슬라이딩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 "비류 님! 후버카는 이 쪽이에요!" 나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리파이를 따라 뛰었다. 아무도 못 봤 으면 좋았을 걸. 나중에 설마 겁쟁이라고 놀리는 건 아니겠지... 공원 입구에는 정말로 후버카가 서 있었다. 오토가 운전석 문을 열고 타자, 자동으로 뒷좌석 문이 열렸다. "잠깐만요. 나도 꼭 타야 하는 건가요? 내 생각에는..." "면허증 있어요?" 리파이가 후버카에 타면서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예? 아직 미성년자라서..." "운전 안 할거면 그냥 뒷좌석에 타요" 나는 또 말문이 막혔다. 애라 모르겠다. 취조를 받느니 그냥 타는 편이 낫겠지. 나중에 누가 물어보면 빔 핸드건을 든 이 인조 강도한테 납치 당 했다는 식으로 말해야겠다. 그럼 조금이라도 죄가 가벼워질지 모르니까 말이다. 그런데 내 말을 사람들이 믿어줄까 그게 문제로군. 두 번째로 타 보는 후버카는 지난번에 탔던 것 보다 훨씬 넓고 푹신한 의자였지만 훨씬 불편하고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실내 공기 가 좀 탁한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아마 창에 코팅처리가 되어있어서 어 둡기 때문에 그런 모양이었다. 오토는 능숙한 솜씨로 후버카를 잽싸게 몰아나갔고, 나는 리파이 옆에 앉아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요?" "그냥 따라 오시기만 하면 되요. 중요한 건 다 챙겨 오셨죠?" "그런 것 같네요" "그러길 빌어요. 어스폴에서 나머지는 다 실어 갈 테니까요" 리파이가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눈앞이 아찔했다. "컴퓨터도 실어 가진 않겠죠, 설마?" "아마 어스폴 조사실에서 완전히 분해될 거예요. 포기하세요" 리파이의 말은 아찔해진 내 눈앞을 완전히 캄캄하게 만들어 버렸다. 내 가 모은 동영상들, 사진들, 게임들, 세이브파일들, 지금까지 모은 문 서... 지난번에 시디에 하드를 구운 게 벌써 한 달이 다 되어 가는데... 한 달치는 포기하는 수밖에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하드를 구운 시디를 몇 장 챙겨온 게 천만 다행이었다. "내가 무슨 죄가 있다고..." "어스폴이 원래 그래요. 저희만 해도 그렇지요. 아무 단서도 없으면서 추적을 계속 하고 있다니까요. 만약 꼬리가 밟히기라도 하는 날에는..." 리파이는 엄지손가락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어스폴이 날 이렇게까지 쫓는 이유가 도대체 뭐죠? 내가 이렇게까지 취급받을 죄를 지은 기억은 없는데요" 나는 울상이 되어서 말했다. "칫. 그럼 제가 애써서 만들어놓은 시스템도 다 날아간 건가요?" "조용히 해" "아까부터 자꾸 무슨 말씀이세요?" 이상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리파이가 나에게 물었다. 물론 프로그램하고 얘기하는 거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냥 두세요. 저도 부루터스처럼 병이 있는 모양이죠, 뭐" "스트레스 성 노이로제인가요? 그럼 저 제가 가지고 다니는 약이 있는 데..." "리파이. 나 진짜로 스트레스 받기 전에 그만 둬요" 나는 이렇게 말하고는 좌석에 몸을 완전히 기대고 눈을 감았다. 이건 완전히 납치 당하고 있는 선량한 시민 꼴이었다. 게임이라고 해도 이런 황당한 상황은 잘 연출이 되지 않는 법인데... "너무 기분 나빠하지 말아요. 우리도 추적 당한지 꽤 오래 됐어요" "어스폴 기밀 자료실이라도 해킹한 모양이죠? 아니면 어스폴 계시판에 폭탄 메일이라도 보냈던가" "이나바머 때문이죠" "이나 바보요?" 나는 일본 코믹 아케이드 게임인 '이나 중학 바보 탁구부'를 생각하면 서 말했다. 그런데 물어보는 내가 생각해도 정말 바보 같은 질문이다 싶 었다. "ENABOMBER. Earth Net Armageddon Bomber. 어스넷에 존재하는 연쇄 폭 파 테러범한테 어스폴이 붙인 명칭이에요. 아직 비공개 수사 중이지만 우 리는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죠" "영어를 잘 하시네요" 다행히도 리파이는 웃지 않고 대답했지만, 나는 비꼬는 듯한 말투로 대 답했다. 아무래도 기분이 많이 상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이나바머하고 리파이가 있다는 그 FHA인지 곳하고 무슨 상 관인데요?" "물론 아무 상관없죠" 창밖을 내다보면서 리파이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어느 새 후버카는 시 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초록색 나무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린벨트 정책이란 말 들어 본 적 있으세요?" "도시 주변에 있는 숲을 개발하지 못하게 만든 법 맞죠?" "예. 전 시대가 우리에게 남겨준 유일한 선물이지요" 이렇게 말하는 리파이의 표정은 어딘지 비장한 구석이 있었다. "사실 그나마 다행이지요. 지난 세기에 그린벨트를 풀어야 한다고 주장 했던 국회의원들의 말대로 발전과 개인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린벨트 를 풀었다면, 이런 광경은 절대 볼 수 없었을 거예요" "그렇군요" 어스넷 그린피스 사이트에서 읽은 적이 있는 내용이었다. 거기에는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린벨트를 풀지 않았던 역대 대통령의 이름을 거론하면서 '그 대통령이 자유와 인권을 수호하는 데는 실패했는 지 몰라도 그린벨트를 수호하는 데에는 성공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지 지한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비록 지금은 살아있지 않은 대통령이지만 지하에서나마 이 내용을 알게 된다면 기뻐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 뒤에 바로 이어진 수많은 실정에 대한 비판의 글을 읽지 않는다면 말 이다) "무작정 발전, 발전, 발전... 그렇게 발전만 추구해온 인간들은 발전을 위해 너무나도 많은 것들을 파괴해 왔지요. 숲이며 강이며 산이며 바다 며...결국 이러다가 인간은 혼자 남게 될 거예요. 그리고 고독 속에서 죽 어가겠죠" "그렇게 된다고 해도 그건 내가 죽은 다음 일일 걸요" 죽은 다음에 무슨 소용이 있으랴.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리파 이의 말은 어쩐지 이진우 수사관을 생각나게 하는 말이었다. "비류 님. 그렇게 생각한 사람들이 우리에게 시커먼 하늘과 오염된 강 을 물려주었어요. 다음 세대에 지금보다 더 나쁜 환경을 물려주고 싶은 건가요?" "전... 그냥... 저 죽은 다음의 일이라는 얘기를 했을 뿐이에요" 리파이가 갑자기 무서운 말투로 돌변해서 나는 간신히 모기만한 목소리 로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과학 기술과 발전... 정보화와 어스넷... 이런 것들이 우리를 편하 게 만들어 줬다는 말에 저는 동의해요. 만약 어스넷이 없었다면 얼마나 답답했겠어요. 트렌스파워가 없었다면 다른 언어로 만들어진 문서나 자료 를 본다는 건 수 년 동안 어학 공부를 하지 않고는 불가능했을 거예요. 거의 외교관 수준으로 어학 공부를 하지 않고서 다른 나라 말로 만들어진 온라인 게임을 플레이 할 수 있겠어요? 하지만 무조건 적인 발전에 반대 하는 사람들도 전 이해해요. 어쩌면 그런 사람이야말로 정말로 맑고 아름 다운 영혼을 지닌 사람들인지도 몰라요. 인류를 위해서 불편함을 감수하 고 감수해야 한다는 사람들이니까요" 이렇게 말하는 리파이의 눈동자는 물기로 젖어 반짝였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사람 중에 발전을 막기 위해 극단적인 방법을 쓰 는 사람도 있다는 거죠. 이나바머처럼요" 리파이는 이렇게 말하고는 이나바머에 대해서 설명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나바머에 대한 정보는 대략 이래요. 어느날 어스 넷 중앙 처리 요원이 모니터를 켜는 순간 갑자기 전류가 역류하면서 모니 터가 꺼져 버렸지요. 단순한 하드웨어 고장으로 넘겨버릴 수 있었던 걸 그 요원은 이상하다고 생각해서 조사해 보았고 모니터가 나간 게 일종의 바이러스에 의한 거라는 걸 알게 되었지요. 그 바이러스 프로그램 소스에 는 독특한 흔적이 남아있었어요. 프로그램 소스에 Y.O.N.G라는 문자가 암 호화 되서 666번 반복되어 있었거든요. 그 요원은 어스폴에 바이러스 사 범이 나타났다고 신고했고, 이렇게 해서 이나바머는 어스폴 기록에 처음 으로 등장하게 되지요. 그게 십 이년 전이에요" 리파이의 말에 따르면 그 뒤로 666번의 Y.O.N.G라는 단어가 들어있는 바이러스는 이곳 저곳에서 발견되었다. 소양강 댐 중앙 관리 시스템에 침 투해서 모니터를 꺼트린 적도 있었고, 평범한 프로그래머의 집 PC 모니터 를 티우기도 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통합정부의 한 관리가 모니터를 켜는 순간, 모 니터가 폭발하는 사건이 일어났죠. 이나바머는 모니터의 회로를 과부하 시켜서 폭파시키는 수준에 이른 거에요. 그날 그 관리는 얼굴에 화상을 입는 걸로 끝났죠. 하지만 666번의 Y.O.N.G만으로는 만족 할 수 없었는지 이나바머는 거기에 이렇게 적었죠. 'It's just beginning of The Armageddon' 이라고요. 아마겟돈의 시작이라는 선전포고였어요. 그 후로 어스폴에는 그 바이러스 사범에 이나바머, 그러니까 어스넷 아마겟돈 폭 파범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전담반을 만들었어요" "그렇군요. 그런데 그 사람하고 리파이하고 무슨 관계가 있나요? 혹시 그거 FHW가 한 건가요?" 만약 그렇다면 FHA는 종말론자 모임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모 르지. 리파이도 방에 들어가면 문을 걸어 잠그고 채찍으로 자신의 등을 때리면서 '주여, 죄를 지었나이다'하고 중얼거리는 지도.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1008/11996 ━━━━━━━━━━━━━━━━━━━━━━━━━━━━━━━━━━━━━━━━ 제 목:[탐그루] 영혼의 에뮬레이터 5 103 관련자료:없음 17/17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2-04 00:15 조회:1819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우리하고는 아무 관계도 없어요. 비류 님이 이나마머하고 아무 관계가 없는 것처럼요. 어스폴은 우리를 의심하는 것과 같은 이유로 비류 님도 의심하고 있는 것 같아요" 나? 나는 웃으면서 손으로 나를 가리켰다. 이 무슨 어이없는 말을. 나 는 프로그램으로 모니터를 폭파시킬 실력도 없고 배짱도 없고 그럴 이유 도 없다. "오소리라는 닉을 가진 비류 님 친구 분 있지요? 그 분 모니터에 이나 바머의 흔적이 남아있었어요" 리파이의 말에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모니터가 터져서 오소리가 죽었다구요?" "그날 이나바머는 처음으로 새로운 방법을 시도했어요. 집에 들어오는 가스관을 자동으로 조정해 고의로 누출을 시켰지요. 물론 차단기나 경보 기는 다 고장을 내 놓고요. 요즘은 대부분의 가전기기들이 어스넷으로 제 어되고 있잖아요? 보일러나 전등 같은 것은 벌써 지난 세기에도 집밖에서 전화로 조종이 가능했지요. 하지만 모니터 폭발과 가스 누출을 동시에 사 용하는 순간, 펑! 모두 끝나버린 거죠" 리파이는 꼭 영화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재미있다는 듯한 말투로 말했 다. 사람이 죽었는데 저렇게 아무 감정없이 얘기할 수 있는 걸까. "그런 사실들을 다 어떻게... 아셨어요?" "고조선 일보에 난 내용이잖아요. 신문도 안봐요?" "거기에 이나바머 얘기도 났나요?" "아뇨. 그냥 단신으로 사건 이야기만 났죠. 하지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정보하고 합쳐지니까 새로운 정보가 된 거죠" 그렇군. 평소에 신문을 좀 봐둘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치 얘기 가 하도 많아서 신문 보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리파이의 설명을 듣고 나니 불에 타 죽었다는 이진우 수사관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 약 이진우 수사관이 이나바머를 추적하고 있었다면...그렇다면 나를 이나 바머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말이 되나? "그럼... 나를 지금까지 의심하고 있었단 말인가요?" "아마도요. 도청까지 하고 있었고, 전담 요원까지 편성해서 비류 님을 추적하고 있었잖아요" "하필 왜 나를... 이해가 안가요" "어스폴에서 프로파일링 한 내용을 읽은 적이 있어요" 리파이가 말했다. 프로파일링? 프로가 만든 파일 반지? 리파이는 영어 를 너무 자주 쓴단말이야. 이거, 휴대용 트렌스 파워를 들고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고. "프로파일링이요?" "연쇄 살인범을 추적 할 때, 범인의 수법이나 범행 시간대, 주로 쓰는 범행 수법 등을 분석해서 범인이 어떤 사람일 것이다, 라고 미리 예상하 는 걸 말해요" "그러니까 셜록 홈즈같은 거군요. 사건 현장을 보고 범인의 키나 성별, 오른손잡이인지... 뭐 그런 거 알아내는 거 같은" 나는 '모리어티 교수의 복수 7'을 플레이했던 기억을 떠올리면서 말했 다. "비슷해요. 어스폴이 생각하고 있는 이나바머는 먼저 소심한 성격이에 요. 아주 오랫동안 준비한 다음에 대상을 정하면 단 한번에 바이러스를 보내고 다시는 그곳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죠. 혹시라도 보안시스템을 건 드렸을 경우에는 완전히 포기하고 다른 곳으로 가버리고요. 그리고 혼자 살아요. 시간대가 대낮일 때도 있고 한밤중일 경우도 있으니까 그런 분석 이 나온 모양이에요. 불규칙적인 생활을 할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에요. 그리고, 당연한 얘기겠지만, 프로그램에 대해서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 지요. 특히 해킹에 대해서요. 각종 보안 시스템의 구조를 잘 알고 있고 요. 아이디를 도용해서 침투하는 식의 방법은 거의 쓰지 않아요. 시스템 자체를 해킹해서 새로운 아이디를 만들어내기도 하고, 그냥 슈퍼 유저로 접속해 일을 벌이기도 하지요. 하여간 신출귀몰한 사람인 모양이에요. 그 리고 가상현실의 세계에 빠져서 사는 사람일 거예요. 그러니까 죄책감도 없이, 그런 일을 계속 수행할 수 있는 거겠죠. 그리고 또 열등감을 가지 고 있는 사람일 거에요. 흔히 말하는 사회에 대한 불만, 소외, 그런 것의 피해자겠지요" "셜록 홈즈 같지는 않군요" 나는 이렇게 말했다. 셜록 홈즈는 초인적인 직관력으로 범인 자체를 꽤 뚫는 사람이지 결코 세세한 단서를 가지고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 다는 식의 추리는 하지 않으니 말이다. 물론 세세한 단서의 중요성을 가 장 강조한 사람이 바로 셜록 홈즈이긴 하지만 말이다. "셜록 홈즈라기 보다는 파일로 벤즈에 가까운 방법이에요" "심리 분석...이라는 말인가요?" 파일로 벤즈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그렇겠다 싶어서 나는 찍어보 았다. 리파이의 얼굴에 미소가 드러났다. "그렇죠. 어스폴은 이런 식으로 하나 하나 추적해 들어가고 있어요. 느 리지만 신중하게. 그리고 정확하게요. 어스폴의 수사력은 조직 면에서나 인력 면에서나 세계 최강이니까요" 하긴. 그러니 열 일곱 살 짜리를 추적하는 일에 전담 수사관을 두겠지. "그런데 그 이나바머라는 사람은 왜 그런 일을 하는 걸까요? 그러니 까... 동기 말이에요" "저도 그 점이 이상해요. 그저 정신병자라고 밖에는 생각이 안 되요. 현대문명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그렇다고 해서 무 슨 협박 편지나 선언문 같은 걸 보내는 것도 아니고, 순전히 자기 만족을 위해 범죄를 하는 사람치고는 너무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하고. 한 마디로 모순된 사람이에요. 아마 정신 분열증이라도 있는 사람일 지 모르겠네요" "아니면 광신도거나요" 나는 이렇게 말했다. 전도를 위해 스팸메일을 보내는 사람도 있는 세상 이다. 어쩌면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연쇄 살인을 저지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제 이야기에 나오는 아케르 같은 사람이 아마 그런 종류의 사람일 거 예요" 이어폰에 대고 세헤라자드가 속삭였다. 나는 음악을 듣는 것처럼 고개 를 연신 끄덕이면서 창 밖을 내다보았다. "무엇을 위해 죽을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 그 무엇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야말로 누군가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이지 요. 그런 사람을 확신인간이라고 부른데요. 브리태니커 사이트에 가면 별 별 글들이 다 있어요. 전세기의 영국사람 콜린 윌슨이라고 하는 사람이 그런 단어를 만들어 냈대요" "그렇구나..." 창밖을 내다보면서 혼잣말처럼 내가 중얼거렸다. "뭐가 그렇다는 말이에요?"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이라는 말이에요" 나는 이렇게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내뱉고 말았다. 이거, 이어폰을 끼 고 있자니 정신이 헛갈리고, 빼고 있자니 세헤라자드에게 미안하고, 어떻 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군. "아뇨. 이나바머가 사람을 죽인 일은 이번이 처음이에요. 지금까지는 일종의 경고나 연습이었고 이제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리라는 게 어 스폴의 분석이에요" 처음으로 사람을 죽였다는 말에 나는 세헤라자드의 말이 꼭 들어맞는 건 아니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도대체 이나바머는 어떤 사람일까. 아케 르나 라이짐처럼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는 살인도 불사할 수 있는 사람일 까. 아니면 수르카처럼 끝까지 고민하는 사람일까. 정보가 부족하니 뭐라 딱히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런데 왜 하필 날 의심하는 거죠, 어스폴은?" "용의 선상에는 우리도 있어요. 다른 여러 공동체도 있고요. 거기마다 전담 수사관을 파견했는지도 몰라요. 의심하는 게 어스폴의 일이니까요" 의심하는 게 어스폴의 일이라. 이진우 수사관의 말이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도 아직 본격적으로 우리를 추적하고 있는 건 아닌 것 같지만 요. 그래도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오토를 고용했죠" "경호원까지 고용할 정도면 돈이 많으신가 봐요. 고급 한식 점에 한 달 에 한 번씩 가고, 프로그래머 일로 버는 돈하고 게이머 연봉을 합치면 꽤 되는 모양이죠?" "음. 지금 프로파일링 하는 건가요? 아니에요. 돈 있는 사람이 우리 중 에 있을 뿐이에요" 리파이는 이렇게 말하고 웃음을 지었다. 후버카는 이제 도시에서 꽤 많 이 빠져 나와 있었다. 후버카는 숲과 어우러진 신도시를 지나 국도로 접 어들었다. 길옆으로 아직 개발이 되지 않은 낮은 집들이 눈에 들어왔다. 낮은 집들은 거의 폐가였다. 그러고 보니 국산 농산품이 사라졌다는 이야 기가 떠올랐다. 눈에 들어오는 집들은, 예전에는 농사를 지었을 사람들이 살던 집이겠지만 지금은 거미와 쥐들만 살고 있는 폐가가 되어 있었다. 세헤라자드가 답답하지 않을까. 나는 가방의 지퍼를 조금 열어 주었다. "이런 광경 처음 봐요. 저는 도시에서만 살았거든요" 세헤라자드가 말했다. "나도 직접보는 건 처음이야" 나는 중얼거리는 것처럼 조그맣게, 상의에 달아놓은 마이크에 대고 속 삭였다. "음악 들으세요?" 리파이가 물었다.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곡인가요?" "세헤라자드..." 나는 얼결에 이렇게 대답을 해 버렸다. "림스키 크로사코프의 곡이군요. 생각보다 취향이 고전적이시네요" 나는 뭐라고 변명을 해야 하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리파이가 다행히도 먼저 이렇게 말해주었다. 그런데 세헤라자드라는 곡이 있었나? 그거 참 다행이로군. "좀 자두세요, 비류 님. 다음 포스트는 여기서 멀어요" 리파이는 이렇게 말하고는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았다. 어떻게 저렇게 태 평하게 잘 수가 있지. 나는 가슴이 아직도 벌렁거리는데 말이다. "졸리세요?" "아니. 조금도" 그러고 보니 까마귀의 집 벌판에서 임프 시로 떠난 수르카의 심정이 지 금 내 심정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 다음 이야기는 어떻게 되니? 이제 라이짐은 나오지 않는 건 가?" "수르카와 라이짐은 서로 다른 두 개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수르카 는 마법의 길을, 라이짐은 칼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단순화 시켜서 말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보다는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는 방법을 조금 달 리했다고 말하는 편이 나을 것 같네요. 앞으로 겪게 될 두 사람의 이야기 가 그렇게 단순하게 나누어지지만은 않을 테니까요" 나는 새로운 곳으로 떠난 수르카가 어떤 일을 겪게 될지, 또 어떤 마음 으로 새로운 세상과 사건들을 헤쳐나갈지 궁금해서 이렇게 물었다. "예. 까마귀의 벌판을 떠난 수르카는 임프시로 가기 위해 뮤를 타고 달 렸습니다. 찬이었던 모짤트와, 또 어린 정령술사 그레텔과 함께 말이지 요. 드디어 어느날 임프 시로 들어가는 입구에 흐르고 있는 대청하의 도 도한 물결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세헤라자드의 이야기는 다시 시작되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1009/11996 ━━━━━━━━━━━━━━━━━━━━━━━━━━━━━━━━━━━━━━━━ 제 목:[탐그루] 추락과 타락 104 관련자료:없음 27/27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2-04 00:16 조회:1780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 추락과 타락 대청하의 물결은 잔잔하지만 힘있게 흐르고 있었다. 아침햇살을 받은 대청하는 푸르게 반짝이고 있었다. 흔들리는 물결 위로 새들이 날고 있었 고, 간혹 강물에서 솟구쳐 오르는 힘찬 민물고기 때가 만들어내는 파문이 멀리서도 눈에 보였다. '과연 언제부터 흘러왔는지, 또 언제까지 흘러갈지 아무도 알지 못하지 만 저 푸른 물결은 지켜보고 있었으리라.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의 얼굴 을. 또 그들이 품었던 꿈과 희망을. 그 모든 걸 품고 대청하는 바람이 불 어오는 곳에서 바람이 끝나는 곳까지 쉬지 않고 흘러가리라' 이 말은 내가 한 말이 아니라 까마귀의 집 벌판에서 뮤를 타고 달려 온 이후 처음으로 발견한 낡은 표지판에 적힌 글이다. 표지판 위에는 큰 글 씨로 '사비치 다리에서'라고 쓰여 있었고, 내가 읽은 글귀 밑으로 아마 뭐라고 더 적혀 있었던 것 같은데, 표지판이 나무로 되어있어서 비바람에 삭아버렸는지 나머지 부분은 떨어져 나가고 없었다. 나는 글을 찬찬히 읽어보다가 문득 마법의 말을 느낄 수 있었다. 글로 도 마법의 말을 느낄 수 있다는 걸 안 건 처음이었다. 하지만 저 글귀 중 에 어떤 게 마법의 말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라이짐을 소생시켰던 내 마법의 말을 떠올렸다. 마법이 작동했던 것은 내가 마음으로 이해한 말을 진심으로 집중해서 했기 때문에 가능했 다. 아무리 마법의 말을 찾는다고 해도 이해하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렇게 생각을 해보니 마법의 말을 찾아낼 수 있는 내 능력도 별 로 달갑지 앉았다. 비록 라이짐을 살릴 수 있기는 했지만 마법의 능력도 그다지 달갑게 여겨지지 않았고 말이다. 그래도 일단 낡은 표지판에서 마 법의 말을 느꼈으니 찬찬히 한 번 더 읽어 기억해두었다. "찬, 아니, 모짤트. 저게 무슨 소릴까?" 모짤트라는 이름이 도대체 입에 익질 않아서 나는 용병단을 떠난 후 내 내 이름을 잘못 불렀다. 지금처럼 말이다. 다행히도 모짤트는 내가 뭐라 고 부르던 별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근처에 대청하가 있다는 말이야. 그리고 저 말로 미루어 봐서 지도에 있는 사비치 다리가 근처에 있다는 걸 알 수 있지" "그건 나도 알아" 어떻게 이 모짤트란 녀석은 당연한 소리를 무슨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말하곤 하는지 모르겠다. 어떻게 보면 아자닌보다 더 한 녀석인지 도 모르겠다. 그래도 아자닌은 정령이니까 그렇다 쳐도 모짤트는... 아니 다. 무엇인가 모짤트에게 물을 생각을 한 내가 멍청한 거지. 나는 절벽의 끝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밑으로 잔잔하지만 힘있게 흐르는 대청하와 대청하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폭 은 마차 다섯 대도 너끈히 지나갈 수 있을 만큼 넓었고 길이는 얼마나 긴 지 그 끝이 안 보일 정도였다. (대청하가 그만큼 넓다는 얘기도 되겠다) 탐그루에 있을 때는 상상도 해보지 못한 규모의 다리였다. 용병단 외벽처 럼 통나무를 굵은 밧줄로 이어서 만든 모양이었다. 양옆으로는 행인이나 마차가 떨어지지 않도록 역시 굵은 밧줄이 쳐져 있었고, 강바닥에서는 군 데군데 굵은 기둥으로 다리를 받치고 있었다. 다리 밑으로는 부지가 형성 되어 있었다. 부지에는 천막들이 여럿 세워져 있었다. 아마 그곳에서 누 군가 살고있는 모양이었다. 바로 어제만 하더라도 모짤트가 준비해 온 말린 고기도 다 떨어지고, 작은 마을이라도 하나 발견하지 못한 우리는 굶어죽을 지도 모른다는 위 기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어쩌면 나 혼자만의 걱정이었는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다행히도 더 늦기 전에 우리는 대청하와 임프시도 들어가는 다리 에 도착할 수 있었다. 비록 절벽 끝에서 발견하긴 했지만 말이다. 어찌되 었건 꽤 오래 뮤를 달린 덕분에 먼지는 잔뜩 뒤집어 쓴데다가 제대로 씻 지 못해 얼굴에는 때가 덕지덕지 달라붙은 꼴이라고는 해도, 결국 임프 시의 입구까지 오기는 온 셈이다. 개미 때처럼 다리 쪽으로 몰려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짐을 가득 실은 마차며 뮤에 탄 사람이며, 등에 짐을 지고 가는 상인이며, 또 아이 를 업고 가는 아주머니며 여기저기서 철없이 뛰노는 어린아이며... 오래 간만에 보는 활기찬 모습이었다. 탐그루를 떠난 이후 한 번도 보지 못한 풍경이었다. "야. 마차 한 번 많다. 모짤트. 무슨 일이라도 난 거 아닐까?" "글쎄. 내가 알기로 이쪽은 늘 붐비는 걸로 아는데" "왜?" "이유야 나도 모르지" 모짤트는 또 답답한 소리를 했다. 물어본 나만 바보가 된 기분이다. "모짤트. 지도 볼 줄 안다더니 그거 정말이야? 어쩌다가 이렇게 절벽 끝으로 오게 된 거야?" "난 용병이지 지도 제작자가 아니야. 거기다가 지도를 완전히 다 믿는 건 지도를 아주 믿지 않는 일 만큼이나 어리석은 일이지. 지도가 대체로 정확하지 않다는 건 너도 알텐데" 하여간 말은 잘한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그냥 피식 웃고 말았다. "그나저나 내려가긴 해야 할텐데 어디로 돌아서 내려가야 할까?" "가만... 여기가 좋겠다. 그레텔, 꼭 잡아" 모짤트는 이렇게 말하더니, 히야! 하는 소리를 지르면서 그대로 절벽 밑으로 뮤를 몰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아니, 저게 미쳤나? 나는 또 한 번 어이가 없어졌다. 모짤트의 뮤는 절벽을 마 치 평지 달리듯 그대로 달려 내려갔다. 흙먼지가 일었고, 부스러진 돌덩 이들이 모짤트가 몰고 있는 뮤와 함께 밑으로 떨어져 내렸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짤트에 집중되었다. 모짤트는 뮤가 땅에 닿자 그대로 고삐를 끌 어당겨 뮤를 세우더니 워워! 하는 소리를 질렀다. 사람들이 내지르는 탄 성이 절벽 위에까지 들려왔다. 그런데 문제는 뒤이어 사람들의 시선이 나 에게 집중된 거였다. 돌아 내려가야 할텐데, 할텐데... 그래도 나를 바라 보고 있는 사람들의 기대를 차마 저 버릴 수는 없었다. 저 중에는 예쁜 아가씨도 있을 것이고, 또 내 또래의 소년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 그냥 돌아 내려 갈 수 있겠는가. 게다가 모짤트가 한 일을 나라고 하지 못하란 법도 없고 말이다. "스타바, 자신 있지?" "뮤우우우... (너 돌았니?)" "히야!" 나는 모짤트가 한 그대로 고삐를 당기면서 소리쳤다. 그러자 스타바도 뮤는 뮤인지라 뮤우! 하는 소리를 내면서 절벽 밑으로 뛰어내려가기 시작 했다... 아니, 뛰어 내려 갔다기 보다는 날아 내려갔다는 편이 낫겠다. 이렇게 빠를 수가! 사실 모짤트가 내려가는 걸보고 저만하면 그리 어렵지 만은 않겠다 싶었는데 막상 절벽을 내려가 보니, 이건 장난이 아니었다. 바람은 휙휙 귓가를 스치고, 여기저기 떨어져 내리는 돌 부스러기는 혹시 절벽이 무너져 내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하고, 급속도로 가까워지 는 땅은 이대로 세상 하직이구나 싶게 만들었다. 지면에 바로 스타바의 발이 닿는 순간, 나는 으악! 하는 소리를 질렀다. 그와 동시에 스타바는 가볍게 몸을 비틀어 몸을 멈추어 세웠다. "뮤우! (너 한 번만 더 그랬다간 죽어!)" 알았어, 알았어. 나는 스타바의 등을 두드리면서 말했다. 그런데 사람 들의 시선이 온통 나와 모짤트에게 모아져 있었다. 나는 좀 쑥스러워져서 어흠, 하고 헛기침을 한 번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뮤 세우는 솜씨가 좋군, 젊은이" "그래, 신호가 좀 독특하긴 하지만... 으악! 이라고 했던가?" 마차를 타고 있는 상인들이 이렇게 한 마디씩 던졌다. 나는 그런 말들 을 못들은 척 하면서 모짤트 쪽으로 스타바를 몰고 갔다. "야, 모짤트. 너 왜 그런 짓을 한 거야? 그냥 조금만 돌아 내려가면 되 잖아? 사람들 시선 끄는 게 그렇게 좋아?" "그냥. 빨리 내려와서 좋지 않아?" 그래. 뻔한 대답 나올 줄 알면서 또 물어본 내가 바보다. 이제 모짤트 에게 물어보는 일은 그만 둬야겠다. "이봐, 모짤트. 넌 내가 고용한 사람이야. 그거 잊지 않았겠지? 제발 무슨 짓을 하려거든 나한테 말하고 해. 알았어?" "알았어" 대답은 잘하니 시원시원해서 좋긴 하지만 이거 뭐라고 해야 할지. 분명 히 뭐라고 변명을 할 줄 알았고, 변명을 한다면 여지없이 뭐라고 한소리 해주려고 했던 내 생각은 완전히 글러버리고 말았다. '알았어' 한 마디로 대답할 줄 누가 알았나. 얼마간 시간이 지나자 사람들의 시선은 우리에게서 멀어져갔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있는 데다가 거기에 뮤를 타고 있는 검사가 한 둘이 아니 어서 그런 모양이었다. 멀리서 보기에는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으니 꽤 활기차 보였지만 가까이 에서 본 사람들의 얼굴은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상당히 지치고 피로한 기색들을 하고 있었다. 다리가 마차로 완전히 가득 들어차 있어서 옴짝달싹 못하는 꼴이 되어서 그런지, 아니면 겪은 일이 많고 피 곤해서 그런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웬 마차들이 이렇게 많지? 탐그루에 있을 때도 이렇게 많은 마 차들을 본 적이 없는데 말이다. 게다가 마차 사이사이에 뮤를 탄 검사들 이나 여행자하며, 걷고 있는 사람들까지 가세해 다리는 온통 사람으로 북 적이고 있었다. 위에서 내려다 볼 때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데, 마차들 이 너무 많다 보니 다리를 건너가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아 니, 아무리 마차가 많기로서니 기다렸다가 다리를 건너가야 하다니. 도저 히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됐다. 걷는 것 보다 느리다면 뭐 하러 마차를 모 는지. 하긴, 짐들이 있으니 그럴 수도 있긴 하겠다 싶었다. 다리를 건너가는 마차들은 모두 다리 오른편에 몰려 있었고, 다리에서 건너오는 마차들은 모두 왼편에 붙어 있었다. 마차가 많으니까 저렇게 자 연스럽게 통행방법이 정해진 모양이었다. 참 보기 힘든 풍경이다 싶었다. 이런 걸 뭐라고 부를까? 우측 통행? "왜 이렇게 마차들이 많은 걸까? 무슨 일이라도 난 거 아냐?" 내가 찬에게 묻자, 옆에서 마차를 끌고 있던 상인 하나가 대답했다. "어이, 검사 양반. 이 다리는 임프 시로 향하는 다리라오" "그래서요?" 상인은 누가 몇 번 깔고 앉은 것 같이 납작한 모자를 쓰고 있는 뚱보였 는데,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가만히 서 있기도 힘들어하는 것 같았 다. "이보게, 젊은 검사 양반. 이곳이 자나크에서 스파일로 향하는 교통의 요지 아닌가. 그러니 상인들이 들끓을 수밖에. 그나저나 빌어먹을, 임프 시로 들어가는 길들은 이렇게 족족 마차로 막힌다니까. 망할 놈의 도시 지" "다른 길들도 다 이런가요?" "그렇다마다. 게다가 툭하면 공사중이다 뭐다 해서 여기저기 막아놓기 일쑤고... 하여간 임프 시 같은 도시도 드물 거야. 암. 드물고 말고. 아 마 이 바르도 대륙에서 건물 짓는데 걸리는 기간이 가장 짧은 곳도 임프 시고, 그 건물 다시 고치는데 드는 기간이 가장 짧은 곳도 임프 시일 걸 세. 아마 상점에서 물건 사다 말고 이 건물 언제 무너지나 걱정하는 곳도 임프 시뿐일걸?" 상인은 이렇게 말하고는 껄껄거리며 웃었다. 꼭 늙은이의 탄식처럼 들 리는 웃음소리였다. "그런 곳에 왜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간데요?" "별 수 없지. 장사꾼들은 물건을 팔려면 어디든 가야하니까 말일세. 임 프 시가 아니라 세상 다시 없는 국경지대라도 물건 팔려면 별 수 있겠 나?" 상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래도 이 많 은 마차들이 지나다니는 곳이라면 탐그루 못지 않게 활기찬 곳이겠다 싶 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바가지 씌우는 상점도 꽤 있을지 모르겠다. "젊은 검사. 어디서 오는 길인가? 나는 탐그루에서 오는 길인데" 탐그루라고? 나는 갑자기 귀가 번쩍 뜨였다. "그래요? 저도 탐그루에서 오는 길..." 이라고 말하면 거짓말이겠다 싶어서 말을 멈추었지만 그 상인은 대충 알아들었다는 듯이 웃음을 지었다. "설마 오우거들 때문에 도망치는 건 아니겠지?" "예? 오우거들이요?" "그래. 좀비가 좀 없어지는가 싶더니 이제는 오우거가 난리야. 이번에 는 탐그루 쪽으로 몰려들고 있는 모양이더라구. 물론 자나크 주에서는 아 직 별 거 아니라면서 사람들을 안심시키고 있는 모양이지만 말이야. 하지 만 검사가 그렇게 쉽게 고향을 등질리가 없으니... 젊은이는 아마 용병이 겠구만. 내 짐작이 맞지?" 생각해 내는 과정은 틀렸지만 어쨌든 결과는 맞아떨어졌다. 하지만 내 관심사는 이 상인이 내 과거를 어떻게 맞추었나가 아니라 탐그루에 오우 거가 나타난다는 사실이었다. 좀비들이 하잔으로 몰려 간 다음에 하잔에 는 반란이 일어났고, 이어서 용병이 들이닥쳤다. 탐그루도 혹시 그런 운 명에 처하게 되지나 않을지. 별빛 주점은 무사할까. 라짐은 별 탈 없이 잘 있어야 할텐데. 무기상점의 시하라나 연금술사 바코쿠, 또 라이짐의 패거리들... 갑자기 모두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들 무사해야 할 텐데. 다리 밑은론 대청하의 강물이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저 강물을 따라가 면 탐그루에 닿을 수 있겠지. 나는 탐그루에서 못 다한 일이 있다는 걸 기억했다. 성년의 검 마소드에 입을 맞추지도 못했고, 또 빌어먹을 루비 오와 쥬크 녀석에게 복수도 하지 못했다는 사실 말이다. 마소드의 검에 입을 맞추기만 했다면 이런 꼴은 당하지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 다. 어른이라면 이럴 때 어떻게 하는 게 옳은 걸까. 대범하게 아무 생각 도 하지 않는 게 좋을까? 아니면 마소드의 검을 찾아서 탐그루로 돌아가 는 게 옳은 걸까. 사비오 영감을 찾는 일은 나중으로 미루고 말이다. 이 런 저런 생각 때문에 머릿속이 복잡했다. 나는 왜 굳이 사비오 영감을 찾 아서 임프 시로 가야한다고 생각했을까? "탐그루는 잘 있나요?" "뭐, 자치대원들이 아직은 잘 막아내고 있는 모양이야. 떠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은 사실 별로 못 들어 봤거든. 하지만 오우거 때문에 상인들의 왕래가 줄어들어서 조금 어렵긴 한 모양이더라구. 다행히도 그 오우거 놈 들은 밤에만 들이닥친다던데. 물론 탐그루야 운하로 먹고사는 도시니 그 나마 천만 다행이지" 뚱보 상인의 말에 나는 조금 안심이 됐다. "하여간 말세야 말세. 마물들이 들이닥치질 않나, 또 성황청에서는 얼 씨구나 하고 세상의 종말이 다가왔다는 둥, 이제는 신에게 모든 걸 맡겨 야 한다는 둥 떠들어대고. 국왕이나 영주들은 여기저기서 전설이니 영웅 이니 하는 소리들로 사람들을 현혹하기만 하니 말이야. 거기다가 하잔에 는 반란군까지 일어났다니, 원... 젊은 검사. 하잔 사태 얘기는 들어봤 나?" 하잔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찔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상 인의 눈을 피하면서 못들어 봤다고 조그맣게 대답했다. "하잔에 좀비들이 나타난다 싶더니 어느새 거기 살던 사람들이 죄 반란 군으로 돌변해 버렸다네. 좀 살만하다 싶으면 불만 가진 놈들은 꼭 나타 나기 마련이라니까. 내가 듣기에 하잔에 살던 사람들이 전부 좀비로 변해 버렸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진압군들이 겨우겨우 상대했다는 말도 있네. 하잔 사람들, 아마 좀비들한테 물이 든 모양이야" 상인의 말에서 나는 발렌시아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소문이 뮤의 다리 를 가졌다고 해도 퍼지면 퍼질수록 내용은 바뀌기 마련이라는 말 말이다. 아니, 하잔의 시민들이 좀비들한테 물이 들었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리일 까. 나는 그게 아니라고 상인에게 얘기해주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진압군들이 거기서 좀비들을 싹 쓸어버렸다는 거지. 아마 당분간은 좀비 걱정은 안 해도 좋을 모양이야. 그리고 바바 족 녀석 들도 요즘은 좀 잠잠하고. 이것 참. 성황청 녀석들이 잠잠하다 싶으면 바 바 족이 말썽이고, 바바 족이 조용하면 성황청이 여기 저기 돌아다니면서 헛소리를 해 대니, 원. 이건 도둑들을 단속한다 싶으면 마물들이 설치고, 마물들을 좀 잡는가 싶으면 도둑들이 극성인 꼴이지 뭔가" "그런데... 성황청이 무슨 소리를 하고 다닌다고요?" 나는 성황청이라는 말이 귀에 쏙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까마귀의 집 벌판에서 그렇게 된 후에 성황청의 움직임이 궁금했다. "그래, 성황청. 마칸의 강림이 임박했으니 성황에게 의지해야 한다는 둥, 성황 생존, 불신 마칸 같은 소리나 해 대고... 그 소리, 멀쩡하게 자 기 일하면서 사는 사람들 얼마나 불안하게 하는 소리인줄 아나? 뭐, 좀비 들한테 기사단 하나를 잃었다는 소문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워낙 교세가 대단하니 별 문제는 없는 모양이야. 뭐, 나야 신자가 아니니까 성황청이 건 뭐건 장사나 잘 됐으면 좋겠지만. 젊은 검사. 이래도 나, 이 임프 시 에서 꽤 알아주는 장사꾼이야. 나중에 한 번 들러주게. 임프 시에 들어가 면 헌다이라는 자이벌 가문이 있는데, 그곳에서는 마차를 만들어서 팔지. 무지막지하게 큰 곳이야. 우리는 거길 공장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탐 그루에서 왔다면 아마 그렇게 큰 마차 만드는 공장은 본 적이 없을 걸세. 난 거기에 마차 바퀴를 만들어서 납품하는 장사꾼이야. 이렇게 탐그루까 지 오가면서 재료도 구해오고, 시세도 알아보고 하지" 상인은 이렇게 말하고는 손바닥에 들어갈 만큼 작고 얇은 나무 판 하나 를 내밀었다. 나무판에는 '마차에 대한 모든 것 - 오리오 마차 대표 오리 오' 라고 쓰여져 있었다. "내 이름이 오리오야. 혹시 마차를 구입하고 싶다든가 하면 이거 들고 꼭 들러주게. 내가 없어도 이걸 보면 우리 직원들이 아주 싼값에 물건을 구해다 줄 걸세..." 결국 장사꾼이었군. 나는 그냥 알았다고 말하고는 나무토막을 품에 처 박았다. 나중에 보지 않을 때 버리던가, 뭐, 정 급할 때 땔감으로 쓸 수 도 있겠다 싶었다. 땔감으로 쓰기에 좀 작다면 쪼개서 식사 후에 이를 쑤 셔도 좋고 말이다. 나는 성황청을 생각했다. 성황청 녀석들은 마법사를 모으는 걸로도 모 자라서 이제는 말세니 어쩌구 하면서 사람들에게 헛소리를 해대는 모양이 었다. 도대체 어쩌면 좋을 지 모르겠다. 어떻게든 내가 할 수만 있다면 성황청 녀석들도 막고, 아니, 그 오우거부터 막고, 그보다 먼저 마칸인지 뭔지 하는 녀석들을 막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운명. 사비오 영감은 나에게 운명에 대해 이야기했다. 운명은 고양이처 럼 소리없이 다가와 어느 순간 호랑이처럼 포효한다... 천둥치는 울부짖 음 속에서 비로소 운명이 닥쳐왔음을 알 수 있게 된다... 그 운명을 결정 짓는 순간이 오면... 알 수 있으리라... 나는 까마귀의 집 들판에서 임프 시를 향해 몸을 옮기면서 이것이 나의 운명이라는 걸 예감했다. 만약 이 것이 운명이라면... 어쩌면 무슨 수가 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 다. 그러자 머릿속의 생각이 하나로 모아졌다. 사비오 영감을 찾아야 한다. 사비오 영감을 찾으면 뭔가 분명해 질 것 같았다. 그래, 애당초 임프 시로 방향을 정한 것도 다 사비오 영감 덕분 이었다. 라스폼이 스타바를 데리고 날 찾아 온 순간 그걸 알았어야 했다. 사비오 영감은 내가 사비오 영감을 찾아내길 바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마차 한 번 안 빠지는 구만. 평소보다 훨씬 더 밀리는 것 같은데. 마차 끌고 다니는 상인이야 늘 있었지만 요즘에는 고향을 떠나는 사람들까지 많아졌으니 말이야" "고향을 떠난 사람이라뇨?" "글쎄. 어디 출신들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기 저기서 마물들이 나타나 니까 사람들이 큰 도시로 몰려들고 있어. 아무래도 촌구석이나 작은 도시 보다야 군대도 있고 자치대도 강한 큰 도시가 더 안심이 되는 모양이지. 게다가 국왕이 조그만 마을들은 아주 들쑤셔 놓고 있는 모양이더라고. 반 란군이 있네 어쩌네 하면서 말이야. 뭐, 소문이긴 하지만 어느 마을에는 좀비들이 너무 많아서 국왕의 군대가 어쩔 수 없이 마을 하나를 통째로 날려버린 일도 있다고 하더군. 뭐, 반란군이나 좀비나 죽여버리면 다 그 만이긴 하지만 죄 없는 사람들은 안됐지. 옛 속담에도 저주에는 눈이 없 다고 하지 않나. 반란군 옆에 있다가는 반란군으로 몰려서 죽기 딱 좋지. 피하는 게 상책이야" 상인의 말에서 나는 다시 하잔을 떠올렸다. 좀비로 변한 마을이니 통째 로 날렸느니 하는 말 뒤에 숨어 있는 뜻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죽어가 던 하잔 시민들의 얼굴과 바닥을 뒹굴던 시체들이 떠올랐다. 하지만 나는 마른 침을 한 번 꿀떡 넘기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말을 돌렸다. "여긴 반란군이 없겠지요, 뭐. 그런데 저 많은 사람들이 도시에 몰리면 다 뭘 하고 먹고 산데요?" 내가 묻자 상인은 껄껄거리면서 웃었다. 이번에는 '뭘 좀 모르는 구만' 하는 것 같은 웃음이었다. "임프 시에 가보면 알게 될 걸세"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1010/11996 ━━━━━━━━━━━━━━━━━━━━━━━━━━━━━━━━━━━━━━━━ 제 목:[탐그루] 추락과 타락 105 관련자료:없음 20/20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2-04 00:17 조회:1711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상인은 이렇게 말하고는 다시 조금씩 마차를 몰기 시작했다. 마차가 느 릿느릿 움직이자 상인의 뱃살이 움직임에 맞추어 출렁였다. 이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겠는데. 배도 고픈데 말이야 그러고 보니 아직 다리에도 도착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리 마차며 사 람이 많다고 해도 그렇지 이건 좀 너무 한다 싶었다. 나는 다리 밑을 내 려다보았다. 천막을 치고 있는 사람들이 불을 피우고 있는 모습이 보였 다. 식사준비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봐, 얼마나 걸릴 것 같아?" 설마 저 밑에 있는 사람들이 다리를 건너가려고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니 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중엔 가겠지... 저길 봐" 모짤트는 손가락 끝으로 다리 옆을 가리켰다. 그러고 보니 다리 한 쪽 견에 천막을 쳐 놓고 먹을 것을 파는 사람들이 보였다. 아주 마차를 개조 해서 물건을 팔 수 있도록 마차 짐칸 옆을 열어 놓은 사람까지 있었다. 보통 파는 건 구운 고기와 삶은 알 같이 먹을 것인 모양이었고, 장신구나 치료석 같이 간단한 물건들을 팔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도 보였다. "저런 사람들이 있다는 건 여기가 평소에도 얼마나 마차가 많은가를 보 여주는 거야. 다리 밑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아마 여기서 물건을 사고 팔 면서 사는 사람들일걸" 그러고 보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 사람들 때문에 다리는 더 복잡해졌고, 어쩌면 그 복잡해진 덕으로 물건이 더 많이 팔리는 지도 모른다. 그러니 항상 이곳을 건너가기가 더 힘들어질 밖에. 어휴, 골치 야! "그리고 수르카, 아까 상인한테 우리가 용병 출신이라는 거 말 안한 건 잘했어. 자기가 어디 출신인지를 처음 본 사람에게 곧이곧대로 말하는 건 본명을 말하는 것만큼 멍청한 짓이지" 모짤트가 말했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모짤트는 그럼 네 본명이 아닌가?" 나는 이렇게 물었지만 묵묵부답이었다. 하긴, 본명이든 아니든 무슨 상 관이 있으랴 싶었다. 내가 모짤트를 고용했다고는 하지만 겨우 단검 몇 자루에 고용한 용병이고, 어차피 그저 잠시 동행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하 는 게 더 옳을 테니 말이다. 다리까지는 얼마나 복잡한 지 한 참을 기다려 두세 걸음 나아가는 게 고작이었다. 병든 뮤라도 이것보다는 빠르겠다 싶었다. 아니, 병든 사람 이 기어가도 이것보다는 빠르리라. 나는 하품이 절로 나왔다. 이런 식으 로 가다가는 언제 도착할 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레텔도 기다리기가 지루 했는지 찬의 등에서 아주 잠들어 있었다. 하지만 결국 기다린 보람인지 어쩐지는 몰라도 다리에 오를 수는 있었 다. 도대체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다리에 올랐을 때, 나는 상상외로 다리가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 지 않을 수 없었다. 스타바도 놀랐는지 뮤 소리를 내면서 중심을 잡으려 고 몸부림을 쳤다. "이봐, 모짤트. 이러다가 다리 무너지는 거 아니야?" "이봐, 젊은 검사. 그런 소리는 함부로 하는 게 아니야" 내 얘기를 듣고 아까 마차 바퀴를 만들어 판다던 상인이 잔뜩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임프 시에서 지은 건물 밑을 지나갈 때 무너진다는 소리했다가 맞아 죽은 사람 얘기도 못 들어 봤나? 말은 불행의 씨앗이 되는 법이야" 상인의 목소리는 어느새 타이르는 투로 바뀌어 있다. 그래도 마법의 말 을 좀 안다는 내가 지나가는 상인에게 이런 말을 듣게 될 줄은 정말 몰랐 다. 그런데 왜 다들 이 다리로 지나가는 거지요? 언제 무너... 아니 그냥, 좀, 여길 지나가는 사람들은 불안하지도 않나요?" 하마터면 무너진다는 소리를 할 뻔했다. "그래도 좀 믿을만한 구석이 있으니까 그렇지. 이 다리에는 스파일의 영주 루티아 아그리파의 전속 마법사인 사비치가 무너지지 않는 주문을 걸어 놓았다구" "마법이 걸려 있는 다리라고요...?" "왜 다리 이름이 사비치 다리겠어? 마법을 건 마법사 이름을 따서 사비 치 다리지. 통나무를 아무리 굵은 밧줄로 이어 놓았다고 해도 이 많은 사 람이 올라가 있는 데 다리가 멀쩡할 리가 있나? 다 마법의 힘이라네" 그래도 명색이 사비오 영감의 제자였던 내가 마법이 걸려있는 다리라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니 조금은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같은 상인에게 하루에 두 번이나 마법에 대한 충고를 들을 수 있는 거지. 한심하다 수르카. 그런데 마법사 이름이 왜 다 사비치, 사비오 하 는 식으로 다 앞에 사비가 들어가는 걸까? 같은 스승 밑에서 배우면 이름 을 비슷하게 짓는 풍습이라도 있나? 하긴, 라짐과 라이짐도 꼭 그래야 한 다는 법이 없는 데도 이름이 비슷하니까 그런 관습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나는 앞을 내다보았다. 그래도 어느 새 다리를 한 삼 분지 일은 건너온 모양이었다. 해가 머리 위에서 비추고 있었다. 다리 위에 올라선 사람들 은 저마다 햇볕을 즐기고 있는 듯 했다. 햇살이 따사로웠다. 바람은 싱그 럽게 강에서 불어오고 있었고. 하지만 다 좋은데 배가 너무 고팠다. "모짤트. 점심 먹을 시간 되지 않았어?" "그래. 여기서 뭐 하나 사먹지. 은화 있지?" 나는 주머니에서 은화 몇 개를 꺼냈다. 용병단에서 나올 때 가지고 온 거였다. 만약 내가 이렇게 그냥 떠나버린 걸 알면 순무가 어떤 표정을 지 을 지 궁금했다. 내가 용병단을 나간다면 받은 급여를 다 제하고도 은화 열 여덟 닢을 빚지게 된다고 말했던 순무인데, 내가 받은 급여까지 이렇 게 챙겨 가지고 나왔다는 걸 알면 아마 속이 좀 쓰리겠다 싶었다. "그런데 왜 내가 사야 하는 거야?" "네가 내 고용주니까" 이거, 자기 좋을 때만 고용주 운운하는 걸 보면 내가 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용주면 고용주답게 모짤트에게 지 시를 내려야 할 것이고, 친구라면 친구답게 서로 공평하게 돈을 내야 할 텐데, 지금 나는 지시는 지시대로 내리지 못하고, 돈은 돈대로 내고 있는 거 아닌가 싶었다. 이러려면 뭐 하러 같이 왔을까? 관두자. 혼자보다야 일행이 있는 편이 마음 놓이긴 하니까 말이다. 적어도 노숙할 때 마음놓 고 잠들 수 있고 말이다. (불침번서는 일이 그렇게 쉽진 않지만) "엄마... 나 저거 하나 사줘" 앞에 있는 마차 짐칸에 타고 있던 꼬마아이가 옆에 앉은 엄마에게 먹을 것을 사달라고 조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말았다. "조금만 참아. 임프 시에 도착하면 아버지 친구 분이 나와서 먹을 것 사 주실 거야" "그래도 배고픈데..." 입술을 죽 내밀고 사내아이가 중얼거렸다. 나는 마차 사이를 헤집고 스 타바를 몰아 간신히 길가에 서 있는 개조된 마차까지 갈 수 있었다. "아! 검사님. 여기 기가 막히게 맛있고 한 입만 먹어도 배부른 음식들 이 가득합니다. 말린 고기, 말린 과일, 말씀만 하시면 방금 대청하에서 잡아 올린 싱싱한 민물고기도 구워드립니다" 빠르게 지껄이는 상인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통속에 있는 싱싱하다는 민물고기를 슬쩍 한 번 바라보았다. 잔뜩 힘이 빠져 비실거리는 모습이었 다. 탐그루 출신에게 바가지를 씌우려고 하다니. "저, 말린 고기하고, 저 물병에 들어있는 물이요" "아니, 한창 힘쓸 나이의 검사님이 그것만 드셔서 돼나. 적어도 말린 과일하고 맥주 한 잔은 하셔야지 요기가 되지요. 아무리 요즘 살기 어렵 다, 어렵다 해도 먹는 건 잘먹어야 하지 않겠어요? 옛말에도 있잖아요, 먹는 게 남는 거다" 나는 떠버리 하진 같은 사람이 또 있구나 싶었다. "요즘은 하도 힘들다, 힘들다 하는 사람이 많아서 이거 장사도 통 안돼 요. 빌어먹을 불황이라나 뭐 어쨌다나. 하긴, 임프 시에서 벌어먹는 사람 치고 잘 사는 사람은 자이벌 몇 뿐이지만요" 헌다이라는 가문을 말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못들은 척 하고 그냥 말린 고기와 물만 달라고 했다. 이런 곳에서 말린 과일이나 생선을 잘못 먹었 다가는 며칠 고생 할 수도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그렇게 하슈. 뭐 어차피 잘 팔리지도 않는 거... 여기저기서 피 난 온 사람들이라고 잘 사먹지도 않는다니까. 거참! 이거 순전히 망할 놈 의 반란군들 때문이지. 거기다 마물들 까지 속을 썩이니, 아이고! 내가 못살지 못살아" 반란군에 대한 얘기를 듣자 돌이키기 싫은 하잔의 기억이 다시 살아나 는 게 느껴졌다. 하잔 말고 다른 곳에도 반란군들이 일어나고 있는가. 그 러니 소문이 이렇게 도는 거겠지. 그곳에서도 사람들이 죽어갈 것이다. 하잔에서 내가 죽인 사람들처럼... 나는 용병단을 떠나면서 라이짐에게 '이제 다시 피는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게 앞으로 내가 살아가야 할 운명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만약 누군가 사비오 영감이 나에게 준 반지 와 칼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한다면 이제는 반지를 택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 몸 속으로 들어와서 나를 미치게 만드는 나미트 장군보다야 멍청한 소리를 하는 아자닌이 더 낫겠다 싶기도 했고 말이다) 말린 고기와 물을 사가지고 오다가, 나는 아까 본 꼬마와 꼬마의 어머 니가 있는 마차에 먼저 들렀다. "저, 실례가 되지 않는 다면 좀 같이 나눠 먹고 싶은데요. 생각해 보니 너무 많이 산 것 같아서요" 나는 이렇게 말하면서 말린 고기와 물이 담긴 병을 꼬마의 어머니에게 내 밀었다. 꼬마의 어머니는 상당히 나이 들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얼굴 에 잔주름이 가득한데다가 검게 그을려 그렇게 보이는 모양이었다. 한 오 십은 되어 보였지만, 아이의 나이로 봐서는 그렇게 까지 나이를 먹었을 것 같지 않았다. 아마도 고생을 많이 한 탓인 것 같았다. "고맙습니다, 검사 님" "고맙긴요. 그냥 나누어 먹자는 건데요. 너무 많이 샀는데 잘됐지요, 뭐" 나는 멋적게 웃으면서 말했다. 말린 고기를 바라보는 꼬마아이의 커다 랗고 맑은 눈동자가 반짝였다. 배가 고픈데 말린 고기를 봐서 그런 모양 이었다. "저 검사님의 성함을 여쭈어 봐도 좋을까요?" "예, 저는..." 나는 이름을 말하려다가 모짤트의 말이 떠올라서 그만 두기로 했다. "알아서 뭐하시게요. 그냥 이름 없는 검사하고 고기 몇 점 나누어 먹었 다고 생각하시면 그만이지요" "저희는 하잔 근처에 있는 솔한장이라는 마을에서 왔습니다" 하잔이라는 말에 나는 속이 뾰족한 것에 찔린 모양으로 뜨끔했다. 설마 하잔에서 온 피난민을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는데. 나는 표정 이 일그러지는 걸 들킬 까봐 손으로 입을 닦는 시늉을 했다. "그곳이 고향이신 모양이죠?" 나는 짐짓 태연한 척 이렇게 물었다. 사내아이의 눈빛이 나를 쏘아보고 있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좀비들한테 시달리고, 나중에는 성황청한테, 마지막에는 용 병단까지 마을로 들어와서 결국 고향을 떠나게 됐어요. 그래도 저희는 나 은 편이에요. 임프 시에서 작은 가게를 하나 하는 친척이라도 있으니까 요. 들리는 소문에 이제 하잔에는 오우거라는 마물까지 나타나서 정말 살 기 어려운 곳이 된 모양이더군요" 씁쓸하게 웃으면서 아이의 어머니가 말했다. 나는 뭐라고 말을 하고 싶 었다. 적어도 사과의 말이나 아니면 그 비슷한 말이라도 말이다. 하지만 내 입술은 완전히 붙어 버린 듯 움직이질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냥 말린 고기를 들고 다시 있던 곳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네 말이 맞았어, 모짤트. 자기 과거는 함부로 말하는 게 아니야" 모짤트는 대답 없이 말린 고기를 받아들고는 천천히 씹었다. 그러고 보 니 모짤트가 찬이었을 때부터 자신의 과거 얘기는 한 마디도 안 한 이유 를 조금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짤트는 내가 건네준 말린 고기 를 그레텔에게도 주었다. 그레텔은 별로 배가 고프지 않은지 고기를 입에 물고 아주 조금씩 빨기만 했다. 앞에 있는 마차에 탄 꼬마 애는 말린 고기를 한 입 가득 물고 우물거리 고 있었다. 한 순간 나와 눈이 마주치는 듯 했지만 나는 얼른 하늘을 쳐 다보는 척 하면서 눈을 피했다. 하지만 계속 피하고 있는 것도 이상하겠 다 싶어서 나는 억지로 웃음을 지으면서 꼬마 아이에게 손을 흔들었다. 뭐라고 말 한 마디라도 해주고 싶었는데. 이제 잘 될 거라든가, 아니면 좋은 일이 있기를 빈다든가 하는 말 말이다. 하지만 하잔이라는 말을 듣 는 순간, 나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나마 내가 용 병이었다는 걸 숨긴 게 다행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망할 놈의 길, 왜 이따위로 막히는 거야!" 날카로운 음성이 들려왔다. 순간 차이린인가 싶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웅크리면서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았다. 소리를 낸 사 람은 쫙 달라붙는 번쩍이는 가죽 바지에 붉은 색 망토를 걸친 여자였다. 칼을 차고 있지 않은 걸로 봐서는 용병이나 검사는 아닌 것 같았지만, 짧 게 자른 머리하며 목소리는 용병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그때 한바탕 돌개바람이 세차게 불어왔고, 바람결에 여자의 붉은 색 머리가 크게 출렁 였다. "이제는 바람까지! 어휴, 짜증나. 비토!" 망토 깃을 여미면서 여자가 소리쳤다. 그러자 역시 붉은 망토를 두른 검사 하나가 여자의 곁에 다가와 섰다. "망토 벗어 줘" "예?" "춥단 말이야! 젠장, 내가 미쳤지, 이 추운 날 무슨 먹고 살 일 났다고 강바람을 쐬러 나오다니" 사람들이 힐끔힐끔 여자를 쳐다보았지만 여자는 아랑곳없이 계속 투덜 거렸다. "신분이 아주 높거나 아주 낮은 여잘 거야" 모짤트가 말했다. "무슨 뜻이야? 수행원도 있는 걸 보니 귀족이겠지" "천방지축인 귀족의 딸일 수도 있지만 저 얼굴로 봐서는 귀족 집 첩일 수도 있다는 말이야. 곱상하니 꼭 기생 같잖아" 모짤트의 말에 나는 웃음이 절로 나왔다. 내용이 재미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별로 말이 없는 모짤트가 이렇게 자세하게 설명을 다 하니 말이 다. 어쩌면 과거를 숨기라는 충고를 내가 받아들였다는 것 때문에 기분이 좋아져서 그런 게 아닐까 싶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1066/11996 ━━━━━━━━━━━━━━━━━━━━━━━━━━━━━━━━━━━━━━━━ 제 목:[탐그루] 추락과 타락 106 관련자료:없음 18/18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2-05 00:10 조회:1736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속도가 느리기는 했지만 행렬은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기는 하고 있었 다. 느린 진행에도 이제는 좀 익숙해져서 가만히 스타바에게 기대고 있는 것도 견딜 만 했다. 다리 밑으로 흐르고 있는 대청하의 물결을 바라보는 게 유일한 소일거리였다. "비토. 이 속도로 해지기 전에 집에 닿을 수 있겠어?" "물론입니다, 아씨" 비토라고 불린 사내가 고개를 숙이면서 말했다. 하지만 모짤트 말 그대 로 아씨라는 호칭이 첩에게 붙는 호칭인지 아니면 귀족의 딸에게 붙는 호 칭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무서워, 무서워..." 이번에는 또 뭐람? 한동안 조용하다 했더니 그레텔이 또 음산한 목소리 로 중얼거렸다. 이거, 이렇게 사람 많은 데서 아자닌을 불러내서 물어 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무슨 소리야, 그레텔?" "수르카, 가만 있어봐" 모짤트는 이렇게 말하더니 등에 업혀 있던 그레텔을 바로 안고는 머리 를 쓰다듬었다. "잘 어울리는 한 쌍이군. 아무 말 없는 여자 애와, 가끔 헛소리하는 남 자" 내 딴에는 비꼰다고 한 말이었지만 모짤트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 다. 분명히 내 말을 들었을 텐데 말이다. "...이대로는 못 있어... 힘이 빠져... 어쩌지? 어쩌지?" 그레텔은 모짤트의 품에 안겨서 계속 중얼거렸다. 나는 순간 까마귀의 집 벌판에서 그레텔이 중얼거렸던 일을 떠올렸다. 만약 지금 그레텔이 어 떤 정령의 목소리를 말하는 거라면, 이 근처에 좀비가 있다는 말이 되지 않을까? 아니다. 좀비는 근원이 파괴당해버렸으니 더 이상 나타나지는 않 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슨 일이지?. 오우거? 그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오우거는 대낮에 나타나지 않는 법이라고 아자닌이 그랬는데... 그럼 도대체 뭘까? 나는 무의식중에 허리에 찬 칼자루를 꼭 쥐었다. 엉성한 마법보다는 칼 이 나를 지켜줄 수 있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이렇게 다급한 상황이 닥 치자 칼을 먼저 찾는 나 자신이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이렇 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함부로 칼을 휘둘렀다가 다른 사람이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나. 내가 칼자루를 쥐자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걸 모짤트도 느꼈는지 뮤 허 리에 채워 둔 양손칼의 손잡이를 슬쩍 끌어당겼다. 양손칼은 하도 커서 허리에 차고 다니기엔 무리가 있기 때문에 뮤 허리에 채워 둔 거였다. 모 짤트는 양손칼을 평소에는 등에 메고 다녔지만 그레텔이 등에 달라붙어서 다니기 시작한 이후에는 꼭 뮤 허리에 채워두곤 한다. 나는 일단 주위를 살펴보았다. 하지만 어디에도 마물이 나타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하긴, 기미가 보인다고 나타나고 안 보인다고 안 나타나 는 게 마물은 아니지만. 모짤트도 날카로운 눈초리로 여기 저기를 살펴보 고 있었다. 모짤트가 살펴보는 것은 주로 사람들인 것 같았다. 사람들 사 이에 마물이 섞여 있단 말일까? 나는 하잔의 악몽이 되살아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만약 다시 그 런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누군가를 베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 없는 상황 이 닥친다면... 나는 아마 미쳐버릴 지도 모른다. 침이 어렵게 목구멍을 타고 내려갔다.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건 모짤 트도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다리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스타바가 뮤뮤 소리를 내며 제자리 걸음을 했다. 왔구나! 나는 칼을 뽑아들고 싶었지만 칼을 뽑은 상태에서 중심을 잡으려고 몸을 흔들었다가는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다치게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냥 칼자루만 잡은 상태에서 스타바에게 몸을 의지할 수밖 에 없었다. 나는 한 손으로는 칼자루를 쥐고, 또 한 손으로는 뮤 고삐를 당겨 쥐고 상황을 지켜보았다. 다리 위의 뮤들이 일제히 기성을 질러대었 고,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끝이야... 힘이 모자라..." 그레텔이 야릇한 목소리로 말을 하는 것과 동시에 앞쪽에서 탁,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를 시작으로 천둥치는 듯한 소리가 계속 울 려퍼졌다. 나는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았다. 나는 아주 잠시 내 몸이 허 공으로 솟고 있다는 착각을 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내 앞에 있던 사람들 이 그대로 밀려내려 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착각을 한 거였다. 그런데 왜 밀려 내려가고 있는 거지? 뒤에서 누군가가 미는 걸까? 스타바가 뮤 소리를 내면서 뒷걸음질을 쳤다. "모짤트!" "저길 봐!" 모짤트는 다리 앞쪽을 가리켰다. 나는 앞을 보았다. 다리 중간이 밑으 로 떨어져 내려가고 있었다. 벌써 다리 밑으로 추락하고 있는 마차들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들이 비명소리를 내지르면서 다리를 거슬러 뛰기 시작했다. 마차를 몰고 있던 사람들은 황급히 마차를 돌리려고 했지만 워낙 다리 위에 마차 가 많아서 그건 불가능했다. 일단 다리 중간이 끊어지자 그 위에 있던 사람들이 떨어지는 것은 순식 간이었다. 필사적으로 다리에 매달리는 사람도 있었고, 신경이 예민한 뮤 가 미친 듯이 날뛰자 뮤를 포기하고 그대로 내쳐 달리는 사람도 눈에 들 어왔다. 하지만 마차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거의가 손 한 번 써보지 못하 고 다리와 함께 강물로 떨어져내렸다. 눈 앞예 낯익은 마차가 있었다. 나는 그 마차에 타고 있던 꼬마와 눈이 마주쳤다. 꼬마의 눈은 반짝이며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걸까 궁금해하는 듯 이 깜빡였다. 앞에 서 있던 마차가 천천히 밀려 내려갔다. 다리 중간이 끊기자, 뒷부분도 덩달아 경사가 밑을 향해 져버렸기 때문이었다. 나는 스타바를 앞으로 몰고 가려고 했다. 어떻게든 그 꼬마를 살려야한다는 생 각이 들었다. 내가 죽였던 사람들의 얼굴이 잠시 스쳐지나갔다. 앞서 있던 사람들이 바로 앞에 있던 다리가 끊기자 그대로 소리를 지르 면서 달려오기 시작했다. 서둘러 마차에서 뛰어내리는 사람도 있었고 중 심을 잡지 못하고 쓰러지는 사람, 또 쓰러진 사람을 밟고 정신없이 뛰는 사람도 보였다. 순식간에 다리 위는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이래가지고 는 꼬마가 탄 마차까지 가기는 힘들 것 같았다. 나는 스타바에서 내려 꼬 마에게로 갈 작정이었다. "포기해" 그러나 모짤트가 스타바의 고삐를 잡아 쥐었다. 빌어먹을! 하지만 맞는 소리였다. 내가 달려간다고 해서 더 나아질 상황은 아니었다. 다리는 점 점 더 기울고 있었다. 거기다가 뒷사람들 때문인지 행렬은 점점 더 앞으 로 밀려가기만 하고 있었다. "뛰어내려!" 내가 있는 힘껏 소리쳤다. 하지만 꼬마는 계속 눈만 깜박일 뿐이었고, 꼬마 곁에 있던 아주머니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기만 했다. "뛰어내리라니까!" 다리가 한 번 더 크게 흔들리는가 싶더니, 밀려 내려가는 속도가 더 빨 라졌다. 마차 몇 대가 더 강물로 떨어졌고, 사람들과 뮤 몇 마리도 비명 소리와 함께 강물로 떨어져 내려갔다. 이제 마차 한 두 대가 더 떨어지고 나면 다음 차례는 꼬마가 탄 마차가 떨어질 차례였다. "이대로 있으면 죽어" 침착을 잃지 않고 모짤트가 말했다. 나는 다시 한 번 마차에서 내리라 고 소리쳤다. 워낙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커서, 내 소리를 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마차를 몰고 있던 꼬마의 아버지가 달려와 아주머니와 꼬마 를 마차에서 내렸다. 하지만 다음 순간 다시 한 번 다리가 흔들리더니 꼬마애가 타고 있던 마차가 그대로 밀려 내려갔다. 꼬마 애의 부모가 쓰러졌고, 순식간에 사 람들이 더 빠른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해서 나는 꼬마 애를 시야에서 놓치 고 말았다. 하지만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고 움직일수록 다리는 점점 더 빠른 속도로 기울고 있었다. 끊어진 다리에 매달려 있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었다. "수르카. 빨리"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어" 나는 마음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 상황에서 가능한 내가 알고 있는 마법의 말이라고는 사람을 띄우는 마법밖에 없었다. 나는 타호루가 마법 으로 병사들을 절벽에서 땅으로 날려보냈던 광경을 되살리면서 마법의 말 을 외웠다. "모든* 일을* 다*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내 마법의 말은 고작 시간 막대기를 허공에 띄울 정도의 힘밖에 없다는 걸 나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 는 최선이었다. 이마의 땀방울이 입술까지 흘러 내려왔다. "시간이 없어. 이제 곧 우리도..." 모짤트가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다리는 다시 한 번 흔들렸고, 더 많은 마차와 사람들이 한꺼번에 강 밑으로 떨어졌다. 사람들의 아우성이 더욱 높아졌다. 날카로운 여자의 비명소리와 굵직한 남자의 신음소리가 여기저 기서 들려왔다. 엉망으로 뒤엉켜 다리의 입구 쪽으로 몰려들고 있는 사람 들의 얼굴에는 공포의 빛이 가득했다. "모든* 일을* 다*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나는 다시 한 번 마법의 말을 외웠다. 그러자 이제는 사람들에 가려 보 이지 않게 된 다리 끝에서 사람을 태운 뮤 한 마리가 허공으로 떠올라 오 는 게 보였다. "가야한다니까!" 결국 모짤트는 내게 소리를 질렀다. 스타바도 드디어 신경이 곤두서는 지 발을 이리저리 옮기며 뮤 소리를 높게 내었다. 나는 계속 마음을 집중 하고 일단 떠오른 뮤를 다리 위로 옮기려고 애썼다. 하지만 시간 막대기 한 번 들어올린 실력으로는 뮤를 움직이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수르카. 지금은 뒤에서 계속 밀려오는 사람들한테 다리가 끊어졌다는 걸 알리는 게 더 급해" 나는 이마의 땀을 훔쳐내었다. 그리고 간신히 떠오른 뮤와 뮤에 탄 사 람이 다리 위에 내리는 것을 보고 스타바의 고삐를 움켜쥐었다. 더 이상 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 누군가를 구하고 싶다고 해서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을 수는 없는 거였다. 모짤트의 말은 지금 내가 해야 할 일 은 계속 밀려오는 사람들을 막는 일이고, 그 다음에 사람을 구하는 일을 해야 한다는 걸 상기시켰다. "맞아. 가자!" 나와 모짤트는 거의 동시에 히야! 하고 외치고는 그대로 마차 위로 뮤 를 몰고 올라갔다. 이 아수라 장에서는 도저히 뒤쪽으로 빠져나갈 수 없 기 때문이었다. 스타바와 모짤트의 뮤는 아주 가볍게 마차위로 뛰어 올라 갔다. 마차 위에 오르자 사람들이 전체적으로 눈에 들어왔다. 소리를 지 르면서 여기 저기 뛰고 있는 사람들은 저마다 살아보겠다고 난리였다. 누 군가를 잡아뜯고, 또 누군가를 쓰러뜨리고, 누군가에게 매달리고, 그 와 중에도 물건을 챙기는 사람과 그것을 빼앗는 사람도 있었고... 나는 눈을 돌려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서로 죽이는 곳이 지옥이라고 생각했는데, 서로 살겠다는 곳이 지옥으로 보이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다리가 끊어졌다!" 나는 있는 힘껏 소리쳤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아지는 게 느껴졌다. 지 다문 십부장 목소리 만큼은 되지 않을 지 몰라도, 목이 터져라 외치는 내 목소리가 그렇게 작지만은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생각 할 겨를이 없다. 나는 쉬지 않고 스타바를 몰면서 소리쳤다. 스타바는 이 마차 위에서 저 마차 위로 마치 징검다리를 밟는 것처럼 가뿐하게 몸을 날려 뛰어갔다. "다리가 끊어졌다! 도망쳐!" 하지만 내 목소리는 사람들의 혼란을 더욱 가중시키는 꼴이 되고 말았 다. 다리가 끊어졌다는 걸 미처 모르고 있던 다리 입구 쪽 사람들이 정신 없이 다리에서 빠져 나오려고 하는 바람에 다리 위는 이제 완전히 엉망으 로 엉켜버렸다. 일단 다리에서 빠져 나오자, 나는 다리를 바라볼 수 있었 다. 다리 한 가운데는 완전히 끊어져 있었고 그곳으로 떨어지고 있는 사 람들과 마차가 눈에 들어왔다. "빌어먹을..."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면서 중얼거렸다. 내 마법이 조금만 더 강했어도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릴 수 있었을 텐데. 아니, 어쩌면 사람들을 다 살릴 수 있었을 지도 모르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 "수르카. 사람들 구하는 거 포기한 거야?" 모짤트가 말했다. 나는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몰라 그냥 모짤트를 바라 보기만 했다. "아니라면 따라와" 모짤트는 다시 한 번 히야! 하고 외치고는 다리 밑을 향해 뮤를 몰았 다. 나는 그제야 모짤트가 무슨 말을 했는 지 알아들을 수 있었다. 천막 을 치고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가 사람들을 구하자는 얘기였 다. 나도 스타바를 몰아 모짤트의 뒤를 따랐다. 다리 밑으로 내려가는 길은 절벽만큼은 안되었어도 꽤 가파른 길이었 다. 하지만 나는 별로 무섭지도 않았고 귓가를 스치는 바람도 그다지 신 경 쓰이지 않았다. 그 꼬마를 구해내야 한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맴돌 뿐이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1067/11996 ━━━━━━━━━━━━━━━━━━━━━━━━━━━━━━━━━━━━━━━━ 제 목:[탐그루] 추락과 타락 107 관련자료:없음 24/24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2-05 00:10 조회:1609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다리 밑에서는 벌써 구조 작업이 시작되었다. 천막을 치고 살고 있던 사람들은 조그마한 통나무 뗏목 몇 척으로 사람들이 떨어져 내리는 곳과 부지사이를 오가고 있었다. "죽은 사람은 포기해! 바리바! 사람들 안 내리고 뭘 꾸물거려! 루크! 넌 빨리 사람들 토하게 하라니까 뭘 하고 있는 거야!" 키가 작고 다부지게 생긴 노인이 소리쳤다. 크고 우렁찬 목소리였다. 노인의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했지만 귀가 아주 크고 눈빛이 또렸해서 나 는 한 눈에 그 노인이 이곳의 장로라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 "도우려고 왔나, 아니면 방해하려고 왔나?" 노인이 소리치는 일을 그만 두고 나를 노려보면서 말했다. "도우려고 왔습니다" "그럼 뮤에서 내려! 칼 놔두고! 그 꼬마 애는 나한테 맡기고. 저쪽으로 빨리 가!" 노인의 목소리에 나와 모짤트는 훈련병 시절만큼이나 재빠르게 뮤에서 내려 뗏목 쪽으로 뛰어갔다. "저 노인, 용병 출신 아닐까?" 그 와중에서도 나는 모짤트에게 이렇게 물었다. 하지만 모짤트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하는 눈빛으로 나를 한 번 바라보고는 말았다. 뗏목이 있는 곳에는 쓰러져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하나같이 얼굴에 핏 기가 없었고, 몇몇은 떨어지다가 어디에 부딪쳤는지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래도 어떤 사람은 몸을 일으켜 세우고 구토를 하고 있었고, 어떤 사람 은 앉아서 멍하니 강물을 바라보고 있기도 했다. "도우려고 온 거에요?" 뗏목이 있는 곳에서 사람들을 지휘하고 있던 여자가 물었다. 얼굴이 완 전히 검은 색이어서 눈과 이빨만 희게 보이는 여자였다. 검은 얼굴을 한 사람은 탐그루에 있을 때도 몇 번 본적이 있었지만, 검은 얼굴의 여자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런데 그 질문은 또 뭘까. 당연히 도우려고 왔지 방해하러 왔을까. 어찌되었건 여자의 질문에 나와 모짤트는 고개를 동시 에 끄덕였다. "그럼 멍청하게 서 있지 말고 저기서 사람이나 받아줘요" 여자의 말에 우리는 뗏목이 서 있는 곳으로 갔다. 뗏목 위에는 강물에 서 건진 사람들이 여기저기 누워 있었고, 다른 두 사람이 건져올려진 사 람들을 땅에 내려놓고 있었다. 나와 모짤트는 아무 말 없이 쓰러져 있는 사람을 옮겨 내렸다. "도와주러 온 거요?" 남자가 물었다. 웃통을 벗은 남자였는데, 왼쪽 어깨에 벌거벗은 여자 문신이 있었다. 나는 잠깐 문신에 눈을 돌렸다가 남자 쪽으로 고개를 돌 렸다. "그럼 도와주러 왔지 방해하러 왔겠어요?" 나는 짜증난다는 투로 대꾸했다. 좋은 말도 세 번 들으면 질린다는데, 화나는 질문을 세 번이나 받는데 기분 좋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 사람도 있으니 그렇지. 하여간 사람들 눕히고, 숨이 붙어있는 것 같으면 등 뒤에서 잡고 세 번 세차게 위 아래로 흔들어요. 이렇게" 문신 없는 쪽이 시범을 보였다. 그러자 쓰러져 있던 사람이 물을 토하 면서 정신을 차렸다. "세 번이에요. 세 번이 넘으면 가망 없는 거니까 다른 사람으로 빨리 옮겨가요. 하나라도 더 구해야 하니까"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끔찍한 말을 하는 데 질려서 나는 벌거벗은 여자 문신을 한 남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하지만 너무 걱정 말아요. 살 사람만 건져 오니까" "바리바, 빨리" 다른 쪽이 말하자 바리바라고 불린 남자는 그대로 뗏목을 몰고 가버렸 다. "들었지?" 하지만 내가 말하기도 전에 모짤트는 쓰러져 있는 사람을 흔들고 있었 다. "저길 봐" 금새 다른 뗏목이 사람들을 싣고 왔고, 거기에서 사람을 내리기가 무섭 게 또 다시 뗏목 한 척이 오고 있는 게 보였다. 나는 바리바라는 남자가 한 말뜻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런 상황이니까 세 번이라는 원칙이 선 모양이었다. 나는 쓰러져 있는 사람을 들어보았다. 무겁기도 무거웠지 만 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나는 있는 힘껏 들어올린 다음에 세차게 흔 들었다. 하지만 키가 좀 큰 사람이어서 발이 땅에 닿아 위 아래로 흔들기 가 쉽지 않았다. "...사람 내리는 일이나 도와요, 여긴 내가 할께" 어느 새 시커먼 얼굴의 여자가 달려와 사람들을 토하게 하면서 말했다. 젠장. 키 작은 건 내 탓이 아니라구! "아, 그리고 이거 받아요" 여자가 치료석을 내밀었다. "다친 사람도 있으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치료석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다른 뗏목이 도 착하지 않은 사이에 쓰러져 있는 사람들 중에 피 흘리는 사람들에게 치료 석을 대었다. 뗏목에 실려온 사람들은 전부 어른이었다. 꼬마는 하나도 눈에 띄지 않 았다. "혹시 꼬마 애 하나 못 봤어요? 나는 바리바가 세 번째로 왔을 때 이렇게 물었다. "꼬마들은 다 죽었어" 바리바는 이렇게 말하고는 다시 사람들을 내렸다. 나는 꼬마 애의 눈빛 을 떠올렸다. 한 입에 말린 고기를 덥석 집어넣고는 우물거리던 모습이 아른거렸다. 어쩌면 다리에서 떨어지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다른 쪽에서 구출했을 지도 모르니까... 나는 애써 이렇게 생각하면서 뗏목에 서 사람들을 내리는 일을 도왔다. 얼마나 지났을까. 부지에는 이제 쓰러져 있는 사람 십 수명을 제외하고 는 거의 정신을 차린 듯 했고,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은 뗏목에서 사람을 내리거나 토하게 하는 일을 돕고 있었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된 모습이었 다. "인사나 하지, 나 바리바야" 사람을 내리다 말고 바리바가 불쑥 이렇게 말했다. 잠깐동안 나는 이름 을 말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고민을 했다. "난... 그냥 이름 없는 사람이라고 해 둬요. 어차피 다시 만날 일도 없 을 테니"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조금 미안한 느낌이 들었다. "하하하,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자이벌은 아니군. 다행이야" 자이벌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군. 나는 자이벌이 뭔지 궁금했지만 물어 볼 수는 없었다. 사람을 내리는 일이 더 급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다음 순간, 바리바의 얼굴이 굳었다. "망할 녀석들. 사스카치도 제 말하면 나타난다더니 자이벌 녀석이 저렇 게 나타날 줄은 몰랐네" 나는 고개를 돌려보았다. 멀리서 부지 쪽으로 뮤를 타고 오고 있는 몇 몇이 보였다. "자이벌 놈들이야" 이렇게 말하고 바리바는 강 쪽으로 침을 뱉었다. "귀족 이름인가요?" "아니, 귀족보다 더한 놈들이지. 이곳 임프에서는" 바리바의 눈매가 매섭게 빛을 발했다. 나까지 공연히 겁이 나게 만드는 눈빛이었다. 나는 바리바의 눈을 피하고 사람들을 내리는 일을 돕기 시작 했다. "아! 고생들 많으시오. 이제 우리가 왔으니 안심하시길. 여행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보니까 사고가 난 모양이더군요. 나는 임프 시의 자이벌, 헌다이 가문의 셋째 아들 문삼이라고 하오" 푸른 망토를 두르고 있는 사내였다. 문삼이라는 사내는 어쩐지 얼굴에 루비오처럼 거만한 빛이 흐르고 있었지만, 루비오 보다도 더 천박해 보이 는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신경 쓰지 말아" 마지막 한 사람을 내리면서 바리바는 말했고, 내가 그 사람을 받자 바 로 뗏목을 끌고 다시 강으로 돌아갔다. "아아! 이 얼마나 비극인가! 백주 대낮에, 이 화창한 날에 사람이 죽어 가다니! 국경의 전선이라고 해도 이런 비극은 결코 그 슬픔이 낮아지지 않겠네" 저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람? 그런데 그러고 보니 저 헌다이 가문 의 문삼이라는 친구 옆에 두 사람이 뮤에 타고 있었는데, 한 사람은 문삼 이 하고 있는 말을 열심히 적고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붓으로 뭔가 열심 히 그리고 있었다. 문삼이 뮤에서 내렸다. "사비치의 마법도 이제 한계에 달한 것일까? 아니면 마칸의 강림에 하 늘도 놀란 것일까. 어이하여 이런 비극이 우리 눈앞에 나타났더란 말이 냐. 눈물이 앞을 가리는 도다" 문삼은 양팔을 벌리고 더 이상 슬플 수가 없다는 표정으로 소리쳤다. 이건 완전히 나카의 엉터리 노래만도 못한 소리였다. 나는 다시 도착한 다른 쪽 땟목으로 뛰어갔다. 일어난 사람들과 모짤트, 그리고 얼굴 검은 여자는 문삼이 뭐라고 지껄이든 신경 쓰지 않고 사람들을 토하게 하고 바 로 눕히고, 또 피 흘리는 사람은 치료석으로 치료를 했다. "음... 아니야. '나타났더란 말이냐' 보다 '다가왔더란 말이냐'가 낫겠 어" 문삼은 이렇게 말하고는 천천히 다가왔다. 제발 내 쪽으로는 오지 않았 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 그래도 물비린내 때문에 속이 편치 않 은 데 저런 녀석하고 이야기했다가는 속이 완전히 다 뒤집어 질 것만 같 았다. "오오, 생명을 살리고 있는 고귀한 소년이여. 그대의 이름은 뭔가?" 하필이면 나람? 거기다 무슨 고귀한 소년이야, 고귀한 소년은? "헛소리 할 시간 있으면 좀 돕기나 해요" "아, 물론이지. 도우려고 왔으니까. 지체 높은 자이벌의 자비심과 인덕 은 세상이 다 아는 바니까. 얘들아. 도와드려라" 문삼이 말하자 뮤를 타고 뒤따라 온 몇이 내려 사람을 구하는 일을 돕 기 시작했다. 하지만 뭔가 적고 있던 사람과 붓으로 뭔가 그리고 있던 두 사람은 그대로 뮤에 오른 채였다. "대청하의 도도한 물결은 흘러 저 먼바다로 흘러가고, 자이벌의 은혜를 입은 자가 흘리는 감동의 눈물은 임프 시에 흐르리라" 눈물을 닦는 시늉을 하면서 문삼이 말했다. 자이벌? 그게 대체 뭐길래 그러는 걸까? 귀족의 다른 말일까? "이름 모를 소년. 그대의 용기와 노력을 치하하고 싶은데 괜찮겠는가?" "용기와 노력을 치하할 손이 있으면 치료석으로 사람이나 좀 치료해요. 피 흘리는 사람이 꽤 되니까" "오! 역시 영웅다운 말투야. 서기. 적어 둬. 아름답게" "예" 뭔가 적고 있던 사람은 뭐라고 다시 적어 내려갔다. 도대체 뭐라고 적 었을까. 어쩌다 나한테 이런 일이... "오오! 이제는 아름다운 스칼렛 아가씨께서도 친히 오셨군요. 안녕하십 니까, 스칼렛. 위대한 자이벌, 세스타 가문의 둘째 따님이시여" 문삼이 칭송해 마지 않는 여자는 붉은 망토를 두른, 다리 위에서 잠시 보았던 신분이 높은지 낮은지 알 수 없던 아가씨였다. 하지만 이제는 세 스타 가문의 둘째 딸이라니까 첩은 아니겠다 싶었다. "헌다이 가문의 셋째 아들, 문삼. 만나서 반가워요" 문삼과는 다르게 꼭 벽에 붙은 간판을 읽는 것 같은 말투로 스칼렛이 말했다. 저런 이상한 말이 자이벌들 끼리 쓰는 말인 모양이다. "음... 지금 얘긴 적지 마, 서기. 어쩐지 전체적인 맥락에서 좀 안 어 울리는 것 같다. 메모만 해 뒀다가 나중에 내 자서전 외전에 적을 수 있 게 정리하도록" "예, 문삼 님" "그 이상한 취미는 여전하군요" "오오! 자서전 집필을 이상한 취미라고 말씀하시다니! 이 가슴이 메어 지는 듯 합니다. 이 비천한 제가 훗날 헌다이 가문을 잇게 되었을 때, 지 금 적고 있는 이 글들은 사람들에게 전해져 우리 헌다이 가문의 이름을 빛낼 것입니다" "아마 가문을 빛내려면 머리를 미는 게 더 빠를 거에요" 스칼렛이라는 여자는 이렇게 말하고는 망토를 휘날리면서 내 쪽으로 걸 어왔다. 왜 다들 나한테 오는 거야, 이거? "저, 거기 계시는 고귀한 분, 혹시, 마법사 님이 아니신지요?" "예?" 나는 스칼렛이 누구에게 말하는 건가 주위를 살펴보았다. 하지만 주변 에 마법사처럼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아, 맞군요. 한 참 동안 찾아다녔습니다. 멀리서 본 얼굴이라 반신반 의했는데... 이렇게 뵙게 되니 정말 영광입니다, 마법사 님" 스칼렛의 말에 나는 그제야 내가 마법으로 띄운 뮤에 타고 있던 사람이 바로 스칼렛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다리 위에서는 워낙 혼란스러워서 누구인지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는데, 스칼렛의 말을 듣고 찬찬히 생각해 보니 알아볼 수가 있었다. "나는 마법사는 아니지만 마법 학교 학생입니다. 마법을 쓰고 있는 사 람이 누구인지 정도는 알 수 있지요. 스칼렛이라고 합니다. 생명을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스칼렛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마법 학교라고? 그런 곳도 있었나? "너무 많은 사람이 다리 밑으로 떨어졌습니다. 제가 한 일은 보잘것없 는 데요, 뭐. 됐으니 그만 두세요" 귀족이 나에게 고개를 숙이다니. 나는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몰라서 사 람을 내리다 말고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내가 흔들지도 않았는데 옮기던 사람이 물을 한 뭉큼 토해내었다.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하지만 나 는 더 한 냄새도 견뎌 본 적이 있었다. 스칼렛은 인상을 찌푸렸지만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 사람을 내려놓았다. "이 사람은 조금만 있으면 괜찮아 질 거에요. 걸을 수 있으면 좀 도와 줘요" 나는 그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다. 촛점을 잃은 눈이기는 했지만 내 말 을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있던 사람은요?" "마법사 님. 비토 말씀이신가요? 저기 있네요" 스칼렛의 말에 고개를 돌려보니 무릎을 꿇고 토하고 있는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스... 스칼렛님... 우욱... 죄송합니다. 지켜 드리지... 우욱... 못해 서..." 숨을 몰아쉬면서 비토가 말했다. "몸이나 챙겨, 비토" 스칼렛은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보기엔 저 문삼이라는 사 람보다는 스칼렛이 훨씬 더 괜찮은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래봐야 귀족은 귀족일 뿐이겠지만 말이다. "나중에 얘기해요. 도울 생각이 없다면 방해나 하지 말고 저쪽 구석으 로 가던지" 나는 사람 하나를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그러자 스칼렛은 내 발 밑에 있던 치료석을 집어들더니 꽤 능숙한 솜씨로 그 사람의 머리를 문질렀다. "눈에 피가 맺혀 있는 걸로 봐서 머리 속이 다친 모양이에요" "마법 학교에서 그런 것도 배우나요?" "예... 마법 학교 출신이 아니신가보지요?" 나는 대답 대신에 도착하고 있는 땟목 쪽으로 뛰어갔다. 그렇다. 사비 오 영감이 나를 임프 시로 부른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바로 나를 마 법 학교에 보내기 위해서였던 거다. 마법 학교에서 마법을 배우고, 위대 한 마법사가 되라는 그런 예언의 말이 바로 라스폼에게 딸려보낸 스타바 에게 담겨 있었던 것이다. 가슴이 뛰어올랐다. 뭔가 새로운 일이 눈앞에 서 벌어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1068/11996 ━━━━━━━━━━━━━━━━━━━━━━━━━━━━━━━━━━━━━━━━ 제 목:[탐그루] 추락과 타락 108 관련자료:없음 21/21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2-05 00:11 조회:1735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나는 다시 한 사람을 받아 바닥에 눕혔다. 그런데 어디서 많이 본 얼굴 이었다. "오리오?" 한다이 가문에 마차 바퀴를 납품한다던 그 장사꾼이었다. 오리오는 몸 을 세우더니 속엣것을 다 토해내고는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나에게 말했 다. 원래 토하고 나면 눈물이 나긴 하지만 저렇게 까지 줄줄 흘릴 줄은 몰랐다. "...젊은 검사 양반이로군" "알아보는 거 보니까 정신이 좀 들었나보네요" 오리오는 대답 대신 다시 한 번 토하기 시작했다. 나는 다른 사람을 받 은 다음, 오리오가 토하지 않은 자리에 눕혔다. "내 마차... 비싸게 주고 산 놈이었는데... 아이고..." 오리오가 강을 바라보면서 탄식했다. "무너지지 않는 다리라면서요?" "오랫동안 멀쩡하다가 오늘 하필이면 무너질게 뭐냐? 망할 놈의 임프 시 같으니라고. 다리는 한 동안 안 무너지길래 안심했더니... 아이고, 건 물이 안 무너진다 싶으면 연금술사의 등이 터지고, 연금술사의 등이 안전 하다 싶으면 다리가 무너지고... 내 이러다 죽지, 죽어, 아이고..." 넋두리처럼 오리오가 말했다. "그런 말씀 마세요. 말은 불행의 씨앗이 되는 법이라면서요" 내 말에 오리오는 갑자기 눈물을 닦아내고는 정색을 했다. "젊은 검사... 못들은 걸로 해줘" 이렇게 말하고 오리오는 터덜터덜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걸을 수 있 으면 좀 도와 달라고 말해볼까 하다가 그만 두었다. 오리오의 뒷모습이 너무 안쓰러워 보였기 때문이었다. 해가 지기 전에 살아 있는 사람은 다 건져낼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도 상당수의 시체가 물에 가라앉아 있었다. "한 이 삼일 있으면 물에 뜰 거에요. 그 정도 시간이 지나야 몸 속에 바람이 차거든요. 그때쯤 이곳으로 오시면 찾으실 수 있을 거에요" 혹시 아버지를 보지 못했느냐고 묻는 소년에게 검은 얼굴의 여자가 말 해주었다. 그때 나는 멍하니 앉아 한 여자의 시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말린 고기를 주었던 꼬마의 어머니였다. 옷과 얼굴의 주름으로 겨우 알아볼 수 만 있었을 뿐, 여자의 시체는 허옇게 변해버린 데다가 늦게 건져 올린 덕 에 몸은 퉁퉁 불어있었다. 꼬마와 그 애 아버지의 시체는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살아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보기는 했지만 만약 살아있다 면 틀림없이 이곳으로 와서 시체를 찾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를 찾 는 저 소년을 마지막으로 사람들은 모두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남아있는 것은 임자 없는 시체들뿐이었다. 내 마법이 약했기 때문이다. 그런 자책감이 들었다. 만약 내 마법이 강 했더라면 이 여자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다리 위에 모든 사람들이 하나도 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해 봐야 죽은 사람이 돌아오지 않는 다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죄책감이 드는 걸 어쩔 수는 없 었다. 다 내 마법이 약한 탓이다. 나는 다시 한 번 이렇게 생각했다. 아 직 어린애구나, 하고 말했던 라이짐의 말이 귓가에 울리는 것 같았다. 어 른... 성년이 되긴 했지만 나는 한 사람 몫을 다하고 있지 못 하고 있구 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훌륭한 마법사였다면, 내가 강한 마법사였 다면... 위대한 마법사였다면... 아니 다 필요없으니 떨어져내리던 사람 들을 구할 수 있었을 정도의 마법사만 됐다면... 그렇다면 마소드의 검에 입을 맞추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제대로 된 한 사람 몫을 다 하지도 못하면서 마소드의 검에 입만 맞춘다 고 해서 진정한 어른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나는 탐그루로 돌아가 마소드의 검에 입을 맞추어야만 어른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 던 나 자신이 부끄러워 졌다. 이제는 생각이 바뀌었다. 진정한 성인이 될 때까지, 어른이 될 때까지 마소드의 검에 입을 맞추지 않으리라. 나는 이렇게 결심했다. 그것이 진정한 어른이 되는 길이고 진정한 어른 의 생각일 거라는 마음에서였다. "수르카, 일어나" 모짤트였다. 어느새 자신의 뮤와 함께 스타바까지 끌고 와서 내 옆에 서 있었다. "할 수 있는 만큼 했어. 그러고 나서 고민할 거면 사람들을 왜 구한 거 야. 수르카" "그러는 너는" "나? 나야 네가 고용했으니까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한 것뿐이지" 모짤트의 말에 나는 한 쪽 입술을 올려 억지로 미소를 만들었다. "모짤트, 넌 참 편하겠다. 만사를 다 그런 식으로 생각할 테니까" 하지만 내 말에 모짤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뮤에 올라타더니 그레 텔의 머리를 쓰다듬을 뿐이었다. "이름 없는 검사. 오늘 여기서 자고 가야겠는데?" 바리바였다. 어느새 웃옷을 걸치고 있었는데, 팔뚝과 배꼽이 다 드러나 는 짧은 옷이었다. 여름이라지만 해가 지면 쌀쌀한데 춥지도 않은가 싶었 다. "그래도 좋을까요?" "어차피 지금은 임프 시로 못 가. 다른 다리를 찾아서 사람들은 다 남 쪽으로 돌아갔지만 그러자면 이틀거리라고. 하루 자고 가" "저기 남아있는 사람들은 누구죠?" 나는 고급스러워보이는 마차와 그 주변에 모여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면 서 말했다. "자이벌들이지. 자이벌들은 배로 임프 시로 갈 거 같아. 아까 보니까 문삼인가 하는 친구가 떠버리 새를 날려보내더라고" 떠버리 새로 연락을 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럴 때 이렇게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지는 몰랐다. "다리는 언제 복구될까요?" "글쎄. 마법사가 올 때까지겠지" "사비치인지 하는 마법사요?" "글쎄. 사비치가 온다면 사비치 다리라는 이름이 그대로 있을 거고, 또 전 번처럼 다른 마법사가 오면 또 이름이 바뀌겠지. 전 번 다리 이름은 홀리워터 다리였다고 하더라구. 꽤 오래 전 일이라 잘 모르긴 하지만. 성 스러운 물이라나, 뭐라나 하는 뜻이었는데, 아마 성황청 출신 마법사였던 거 같아" 바리바는 묻지도 않은 말까지 대답했다. 그런데 사람이 이렇게 많이 다 니는 다리가 그렇게 자주 무너진다는 말일까? "저, 마법사 님" 이번에는 스칼렛이었다. 오늘 참 여럿이 나를 찾는다 싶었다. 스칼렛의 옆에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휘청거리며 서있는 비토가 있었다. "이제 곧 배가 올 거 에요. 같이 타고 가시는 영광을 베풀어주실 수 있 으신지요" "잘 됐군, 이름 없는 검사. 자이벌 애인이 생기겠는 걸?" 스칼렛이 말하자 바리바가 웃으면서 말했다. "...제 생명을 구해주셨으니 작지만 보답이라도 하나 해 드리고 싶어서 요. 아마 아버님도 그러시길 바랄 겁니다" 나는 모짤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모짤트는 상관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나저나 자이벌 애인이 생겼다는 건 또 무슨 말일까. "세스타 가문의 주인이 보답을 한다면, 휴우! 굉장하겠군. 이름 없는 검사. 운이 좋아. 그것도 아주 아주 말이지. 그래서 사람도 가려서 구해 줘야 한다니까" 비꼬는 듯한 말투로 바리바가 말했다. "마법사 님께 함부로 말하지 말아요" 스칼렛은 바리바를 한 번 노려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마법사 님 이라는 게 날 말하는 걸까? 나는 조금 쑥스러워졌다. "보셨겠지만 제 마법은 미약합니다. 그런 제가 보답을 받을 만한 일을 한 건지 잘 모르겠군요" "역시. 대마법사 님 답게 겸손하신 말씀입니다. 하긴, 요즘같이 성황청 에서 마법사들을 데려가는 시절에 함부로 자신의 마법을 보여주신다는 것 자체가 큰 용기였겠지요" 맞다. 나는 성황청을 잊고 있었다. 라스폼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 고, 설혹 죽었다고 해도 성황청이 나를 뒤쫓지 않으리라는 법도 없는 상 황인데 말이다. 나는 순간 혼란에 빠졌다. 그렇다면 나는 스칼렛을 구해 주지 말았어야 했는가. 나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 말이다. 또 내 마법이 더 강했다면 더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었겠지만 그만큼 성황청의 추적을 받을 확률도 높아지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마법사 님 덕분에 저는 이렇게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보잘 것 없겠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보답을 드리고자 합니다"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이면서 스칼렛이 말했다. 스칼렛의 말에 내가 죽 였던 사람의 얼굴과, 또 강물로 추락하던 사람들의 얼굴과, 내가 구한 사 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들의 죽음을 슬퍼할 가족이 있고, 또 그들의 생존을 기뻐할 형제가 있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잠시동안 이었지만 내 안전만 생각했다는 사실이 부끄러워졌다. "..예. 좋습니다. 어차피 임프 시로 가야하니까요. 그런데 그 마법학교 얘기 좀 자세히 해 주실 수 없나요?" 나는 스칼렛에게 이렇게 물었다. "이름 없는 검사인 줄로만 알았는데, 사실은 마법사였군. 임프 시에 가 면 평생 놀고먹을 수도 있겠어" 바리바가 말했다. "마법사 님들을 모독하는 말씀이 아니었기를 빕니다. 마법사를 욕한 입 은 저주를 받기 마련이니까요. 혹시라도 그 흉칙한 문신이 벌떡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스칼렛은 내 눈치를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다리 위에서 봤을 때의 모 습과 비교한다면 정말 참아도 너무 많이 참는다 싶은 말투였다. 하지만 나는 바리바 편을 들지도 않고 스칼렛 편을 들지도 않기로 마음먹었다. 바리바와 스칼렛 사이의 일은 바리바와 스칼렛이 해결해야 하는 게 옳을 테니 말이다. 배는 상상 밖으로 컸다. 탐그루에 있을 때 본 화물선에 비해 조금도 떨 어지지 않는 규모였다. 한 밤중에 연금술사의 등을 일렬로 죽 붙이고 강 을 건너오는 배의 모습은 미리 듣지 않았다면 마물이 나타난 게 아닐까 생각될 만큼 생경한 광경이었다. 처음에 나는 배에 줄줄이 달린 연금술사 의 등이 까마귀의 집 벌판에서 본 좀비의 눈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했 다. 하지만 내가 정말로 놀란 것은 그 배가 헌다이 가문이 사적으로 소유하 고 있는 배라는 사실이었다. 이렇게 큰배에 온 식구가 다 탈만큼 식구 수 가 많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배를 다 채우려면 적어도 백 명은 있어야 할 테니까 말이다. 배는 크게 네 층으로 되어있었다. (물론 배에 탄 뒤에 알게 된 거였다) 겉으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배 갑판 위에 있는 객실과 조종실 밑으로 동 력실과 승무원 실이 마련되어 있다는 걸 알았을 때, 나는 이건 배가 아니 라 거대한 집이로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저 배에 몇 명이나 타게 되나요? 스칼렛" "글세요. 문삼이 먼저 타겠고, 저하고 수행원들하고 해서 한 열 명이나 될까요?" 열 명? 고작 열 명? 나는 어이가 없었다. "아니, 이렇게 큰 배에 고작 열 명이 탄다고요?" "그리 큰 배는 아닙니다. 임프 시에서 크기로 따지자면 열 손가락 안에 도 들지 못하는 배에 불과합니다" 여전히 공손하게 스칼렛이 말했지만, 나는 좀 따져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얘기는 배 크기가 아니에요. 아까 그 많은 사람들이 다리를 못 건 너 가는 바람에 남쪽으로 돌아가는 걸 봤지요? 이런 큰 배가 올걸 알면서 그 사람들을 그냥 돌려 보낼 수 있는거에요, 스칼렛?" "그야, 이건, 헌다이 가문의 배니까 다른 사람이 타는 건 허락을 맡아 야 하니까..." 내 말에 스칼렛을 당황했는지 얼굴을 붉혔다. "아직 남아 있는 사람이 있으니까 그 사람들을 태워요. 그러지 않으면 나도 다른 사람들 처럼 남쪽으로 돌아서 임프 시로 가겠어요" 나는 단호하게 딱 잘라서 말했다. "...마법사 님과 같은 지혜가 제게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마 법사 님. 저 배는 헌다이 가문의 배입니다. 그건 헌다이의 셋째 아들 문 삼이 결정할 문제입니다" 문삼이라면 아까 그 나카만도 못한 엉터리 노래를 불렀던 친구 아닌가? "스칼렛. 그럼 나는 어떻게 배에 탈 수 있죠? 내가 구한 건 세스타의 스칼렛이라고 알고 있었는데요" "그건 헌다이의 셋째아들 문삼도 마법사님을 존경하기 때문에..." 날 존경해? 물론 기분 나쁜 말은 아니지만 황당한 말이었다. "그렇다면 문삼에게 말해요. 나는 남아 있는 사람들과 함께가 아니라면 배에 오르지 않겠다구요" 나는 이렇게 말하고는 정말 당장이라도 남쪽으로 갈 기세로 모짤트에게 떠날 준비를 갗추라고 말했다. 그러자 스칼렛은 알겠다며 문삼쪽으로 달 려갔다. "수르카. 그런데 남쪽으로 돌아가는 길은 지도에 없어" 모짤트가 낮은 목소리로 나에게 속삭였다. "없으면 자고 내일 가면 될 거 아냐!" 애써서 잡은 분위기를 모짤트가 망쳐 놓기는 했지만, 어찌되었건 남아 있던 스무 명 남짓의 사람들과 함께 배에 오르게 되었다. (스칼렛이 무슨 말로 문삼을 설득했는지는 알 수 없다) "...자이벌의 은혜를 입은 자가 흘리는 눈물이 대청하를 흐르고 있도 다..." 다만 노래도 아니고 그렇다고 시도 아닌, 온몸에 소름이 끼치는 문삼의 헛소리를 들으며 배에 오른 게 끔찍하긴 했지만 말이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1122/11996 ━━━━━━━━━━━━━━━━━━━━━━━━━━━━━━━━━━━━━━━━ 제 목:[탐그루] 추락과 타락 109 관련자료:없음 23/23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2-06 00:11 조회:1715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배에서 두 가닥 굵은 밧줄이 내려왔고, 밧줄에는 넓은 나무판이 달려있 었다. 문삼은 그것을 승강장이라고 불렀는데, 나는 거기에 오르면서 그게 승강장이든 아니든 무너지지 않기만을 바랬다. "마법사 님. 혹시 무슨 예감이라도 드시는 지요. 땀을 흘리고 계시 니..." "아뇨. 혹시 무너지지 않을까 하고요" 나는 밧줄을 양손으로 꼭 붙들고서 스칼렛에게 이렇게 말했다. (신경이 예민한 뮤도 아무 렇지 않게 나무판 위에 올라서 있는데 이게 무슨 창핀 지) "역시 마법사 님이십니다. 이런 상황에도 저의 안전을 걱정해주시다 니..." 스칼렛은 얼굴을 붉히면서 말했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이 연금술사의 빛을 받아 더욱 붉게 보이고 있었다. 얼굴은 예쁜데... 꽤 무딘 것 같다. (물론 나는 밧줄을 붙잡은 양손에 더 힘을 쏟았을 뿐 그런 말은 하지 않 았다) 배에 오르자 밤하늘 밑으로 대청하가 꿈틀꿈틀 흐르고 있었다. 실낱 같 은 별빛에 비추어진 대청하는 마치 마물의 눈빛처럼 음산해보였다. 같은 강이지만 낮과 밤의 모습이 이렇게 다를 줄은 몰랐다. "마법사 님. 여기 안으로, 객실로 드시지요. 바람이 찹니다" 스칼렛이 친절하게 나에게 자리를 권했지만 나는 점잖게 사양했다. 모 짤트는 스칼렛과 함께 그레텔을 안고 객실로 들어갔지만 말이다. 내가 스 칼렛을 따라 들어가지 않은 것은 순전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고 있자니 탐그루 생각이 났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면서 고향 생각에 잠기는 여유를 누리는 게 얼마만의 일인지. 나는 탐그루로 흘러갈 강물에 내 소망을 담아 보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작은 나무판자라도 하나 있으면 내 그리움을 적어 보내련만. 라짐은 잘 있는지. 또 시하라와 바코쿠는 뭘 하고 있을지. 강바람을 맞고 있자니 저절로 이런 저런 상념 들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갑판에는 사고를 당한 사람들이 여기저기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나는 천천이 사람들 사이를 지나면서 무슨 얘기들을 나누 고 있는가 귀를 기울여보았다. 혹시라도 탐그루 소식을 들을 수 있지 않 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누군가 큰소리로 자신의 삼년 전쟁 때 무용담을 늘어놓는가 하면 (십 중팔구 거짓말이겠지만), 누군가는 그 사이를 못참고 도박판을 벌리기도 했다. (주사위를 던져 숫자를 맞추는 놀이라는 건 알겠는데 은화가 오가 니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하지만 역시 가장 크게 화제로 떠오른 것 은 요즘 바르도 대륙을 떠돌고 있는 여러 소문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여 러 무리의 사람들 중, 마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 다. 나는 슬그머니 그 쪽으로 걸어갔다. "...처음에는 고브린이다 오르크다, 다음에는 트롤이다 뭐다 나타나더 니 이젠 좀비가 나타나서 하잔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지. 이건 순전히 다 마칸의 강림이 임박했다는 증거라고.타실에는 이런 전설이 있지. 마칸이 다시 돌아올 때, 마물들이 속출하리라..." 장사꾼으로 보이는 사내가 이마에 땀을 닦아가면서 이야기 했다. "그건 어디나 있는 전설이야. 문제는 마칸의 강림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야. 마칸의 강림 이야기는 이미 역사책에도 나오는 얘기 아닌가? 다 시 돌아온다고 해서 별로 이상할 것은 없지. 정작 문제는 마칸의 강림을 누가 어떻게 막느냐야. 역사에 나오는 대마법사 아킨이나 카를로스 카를 로스 같은 영웅이 지금 바르도 대륙에 단 한 명이라도 있느냐는 거지" 이번에는 술주정뱅이 같아 보이는 코가 빨간 사내가 말을 이었다. 아무 래도 이 두사람이 대화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잔에서 용병단이 좀비들을 물리쳤다는 소문은 들었나?" "물론이지. 하잔 사람들이 다 좀비로 변하는 바람에 모조리 죽여버렸다 면서?" 하잔 이야기가 나오자, 자리를 피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한 번 하잔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얼굴과 다리 밑으로 떨어지던 꼬마의 얼굴이 떠올랐다. 오늘밤은 편안하게 잠들기가 다 틀린 것 같다. "그래. 나도 그 얘기 들었어. 아케르 용병단에서 백발 영웅이 나타났다 지?" 주정뱅이가 말했다. 그런데 백발 영웅이라고? 나는 자리를 피하려던 걸 음을 멈추고 주정뱅이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백발 영웅이라고? 난 못들어 본 얘긴데?" "이 친구 소식이 늦구만. 하잔에서 온 사람에게 직접 들은 얘긴데, 좀 비들이 하잔 시 근처 벌판에 잔뜩 몰려들었는데, 백발 영웅이 달빛을 타 고 하늘에서 내려왔다더구만. 내가 직접 본 사람한테 들은 얘기니까, 확 실한 얘기야" 나는 까마귀의 집 벌판을 떠올렸다. 어떻게 이런 소문이 난지 모르겠지 만, 얘기가 좀 빗나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용병단 소문만 엉터리인 줄 알았는데, 세상에 떠도는 소문은 다 엉터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백발 영웅은 키가 보통 사람 두 배는 되고, 힘도 어마어마한 장사 라고 하더구만. 양손에 황금으로 만들어진 단검을 휘두르면서 좀비들을 모조리 베어버렸다더군. 그것도 혼자서 말이야" "그럼 용병단은 거기서 뭘 하고 있었고?" "그 백발 영웅에게 구출된 거지. 좀비들에게 포위 당해서 전멸 직전에 말이야" 백발 영웅이라고? 그렇다면 틀림없이 라이짐 얘기인 것 같은데. 그런데 내 얘기는 전혀 없군. "잠깐만. 임프 시에는 이런 전설이 있다네. '마칸의 강림을 막을 두 영 웅이 바람을 타고 오니 하나는 북쪽의 눈보라처럼 오고 하나는 남쪽의 봄 바람처럼 오리라' 그렇다면 아마 그 백발 영웅이 두 영웅 중 하나일지 모 르겠는데? 북쪽의 눈보라라면 백발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맞아, 맞아. 그 백발 영웅이 바로 그 북쪽의 눈보라일거야" "소문을 너무 믿는 거 아니에요? 전설이야 전설일 뿐이고 직접 거기에 서 본 것도 아닌데 그렇게 믿는 건 무리 아닐까요?" 나는 참지 못하고 이렇게 말하면서 끼어 들었다. "거, 어린 검사. 내가 하잔에서 직접 보고 온 사람에게 들은 이야기라 고 하잖아" "전설은 전설이라니? 전설이 다 맞는다는 거 몰라?" "그래. 역사는 전설을 따라 흐르기 마련이라고" 여기저기서 웅성거림이 시작되자, 나는 천천히 자리를 떴다. 내 말은 완전히 무시당했다. 나는 진짜 그 자리에 있었는데도 말이다. 아마 이 광 경을 라이짐이 봤다면 이것도 칼의 법칙이라고 말하겠지. 내가 힘이 있었 다면 사람들이 귀기울였을 거라고 말이야. 칫. 백발 영웅이라고? 웬지 씁 쓸한 기분이 들었다. "마법사 님. 강바람이 찬데 안들어 오시고 뭐하시는지요?" 스칼렛이었다. 그러고 보니 스칼렛에게 마법학교 얘기를 해줄 수 있느 냐고 물었었지. "별로 춥지 않아요. 강바람이 좋네요. 혹시 마법학교 얘기 좀 해 줄 수 있어요?" 이렇게 해서 나는 강물을 바라보며 스칼렛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스칼렛에게 들은 마법학교 이야기는 아주 흥미로웠다. 마법학교는 스파 일 정부에서 지원하는 모양이었다. 처음에 건물을 지을 때부터 시작하여 강사나 학생 기숙사까지 모두 정부에서 돈을 댔다는 거였다. 거기다가 학 생들의 수업료며 그곳에서 마법을 가르치는 사람들의 인건비며 모두 지원 한다고 했다. 그래서 스파일 측이 얻는 것은 다만 마법사가 되고 나면 성 황청으로 마법사 전부를 넘겨주지 않고 그 중 몇몇을 선발하여 스파일의 대마법사 사비치의 수제자로 데리고 가는 거라고 했다. 아마 그 몇 명의 마법사를 확보하기 위해서 그 많은 돈을 대는 모양이어었다. "그렇게 좋은 환경에서 배우면 정말 훌륭한 마법사들이 많이 나오겠군 요. 그런데 귀족이 아니더라도 입학이 가능한가요?" 나는 솔직히 부러운 심정으로 스칼렛에게 이렇게 말했다. "물론이지요. 저도 귀족이 아닌걸요. 마법학교에는 아무나 다 입학 할 수 있지요. 마법사의 재능을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으니 까요" "그렇다면 정말 많은 사람들이 마법사가 되겠군요" 그런데 왜 임프 출신 마법사에 대한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마법사 님. 마법사 님께서는 이미 다 겪으신 과 정이겠지만 그 과정은 정말 힘들거든요. 많은 학생들이 중간에 포기할 정 도에요. 먼저 마법을 배우는 사람은 그 몸가짐을 바르게 하기 위해서 머 리를 짧게 잘라야 합니다. 또 옷은 항상 마법 학교에서 지정해 준 옷을 입어야 하지요.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수업은 빽빽하게 이어집니다. 점 심 시간 잠시를 제외하고 말이죠. 정규 수업이 끝나면 중요한 마법의 말 을 보충해서 반복 학습하고, 그리고 나서야 저녁을 먹습니다" "그리고 나서 자유시간을 갖나보죠?" "아니오. 저녁 식사가 끝나면 밤까지 계속 학교에 남아서 각자 공부해 야하거든요. 마법의 말은 스스로 이해해야 하니까요. 그 시간을 야자라고 부릅니다. 야간 마법 자각의 시간이라는 뜻이에요. 마법사 님께서 공부하 실 때는 그걸 뭐라고 부르셨는지는 몰라도요. 그리고 나서야 각자 집으로 돌아가는데..." "설마 매일같이 그렇게 보낸단 말은 아니겠지요" "예? 마법사 님은 그렇게 공부하시지 않았나요?" 내 질문에 스칼렛은 오히려 이렇게 반문했다. 그래서 나는 아, 물론입 니다만 참으로 힘드시겠습니다 어쩌구 하면서 말을 얼버무렸다. 스칼렛은 조금 과장된 음성으로 마법학교의 일과에 대해 계속 말했다. 마치 나는 마법 공부를 이렇게 열심히 하고 있어요, 하고 자랑하고 있는 것처럼 말 이다. "저 같은 경우, 집에서도 마법 공부는 이어지지요. 부족한 마법의 말이 나 이해가 어려운 마법의 말, 마법의 계열, 마법의 언어 찾기 같은 걸 따 로 공부해야 하거든요. 그래서 특별히 성황청에서 마법사 한 분을 모시고 와서 한동안 함께 공부했던 적도 있어요. 지금은 바쁘시다면서 성황청으 로 돌아가셔서 혼자 공부하고 있지만요" 성황청에서 마법사를 불러와서 개인 교습을 받는다는 말인 모양이었다. 그거 돈 깨나 들어가는 일이겠다 싶었다. "그래도 해야 할 공부가 많아 항상 시간이 모자라요. 예습에 복습에 매 일 이어지는 과제에, 외워야 할 것도 많고, 석차도 신경 써야 하고..." "석차요?" "예. 마법 학교 과정은 십 년이에요. 십 년 과정은 초보, 중급, 고급의 세 단계로 나뉘는 데 각 단계를 넘어가기 위해서는 학급에서 팔 할 안에 드는 성적은 내야 하거든요. 내지 못하면 바로 마법학교에서 쫓겨나니까 요..." 여기서 스칼렛은 조금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고급 과정이 끝나면 본격적인 전공 마법을 배우는데, 전공 마 법 과정에 가려면 고급 과정에서도 삼 할 안에 드는 석차여야 해요. 그리 고 그 중에서도 아주 일부분만 진짜 마법사가 되어 성황청이나 스파일로 갈 수 있지요. 물론 마법사 님 정도의 대단한 마법사 시라면 그 정도쯤은 문제도 아니겠지만요" 마법 얘기가 나오자 나는 솔직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마법 에 대해서 아는 거라고는 정말 뮤똥 만큼 밖에 없다. 너무 당연한 얘기를 너무 당연한 수준으로 이해하고 있는 정도 말이다. 나는 말을 돌리기로 했다. "스파일의 대마법사가 된다면 정말 대단할 일이겠네요" "예. 그렇기는 해요.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스파일의 대마법사가 되기 를 꿈꾸면서 마법학교에 입학하지만 적응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 다. 물론 그중에서도 스파일의 사비치 대마법사님의 수재자가 되는 사람 은 정말 극소수이고요..." 생각했던 것 보다 마법학교 과정이 너무 힘들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 었다. 아니, 그렇다면 중간에서 탈락한 사람들은 물론이고 성황청이나 스 파일로 가지 못한 학생들은 대체 어디로 간단 말일까? 나는 스칼렛에게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마법사는 포기해야죠. 다른 길을 알아보는 수밖에요" 나는 약한 자는 죽고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는 말이 싫어서 용병단을 떠 났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법을 배우는 학교에서도 이런 식으로 그 말이 적용되는 지는 알지 못했다. 언젠가 가투신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평화 로워 보이는 저 숲에도 약자와 강자의 법칙은 존재한다는 말 말이다. 과 연 칼의 법칙은 어디에서고 결코 피해갈 수 없는 것일까. 나는 칼을 쓰지 않으면 더 이상 피를 보지 않아도 될 거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모 른다. 하지만 어디에나 이렇게 칼의 법칙이 다스린다면 피보다 더 끔찍한 걸 보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죽는 것만큼, 낙오하고 따돌림 당하고, 뒤쳐지는 일도 끔찍한 일일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마법사 님을 만나 뵙게 돼서 정말 영광이에요. 혹시... 갈 길이 급하시지 않다면 저희 집에서 며칠 묵으시면서 제게 마법을 가르 쳐 주실 순 없나요?" 잔뜩 심각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스칼렛이 이렇게 자신의 의도를 드러 냈다. 나는 스칼렛의 말을 듣는 순간 기분이 상했다. 결국 나를 개인 교 습 선생으로 쓰고 싶다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스칼렛. 그 얘기는 못들은 걸로 할게요" 나는 이렇게 툭 던지듯이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실 기분이 상한 탓도 있었지만 내가 가르쳐 줄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는 걸 나 자신 이 잘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대청하에서 불어오는 강바람이 차갑게 온 몸에 부딪쳐 왔다. "아, 아닙니다, 마법사 님. 저는 다만 그래주실 수 있는지 여쭈어 본 것뿐입니다. 그러니까 제 의도는..." "은혜를 갚는 거였다면 배를 태워준 걸로 족해요. 거기다가 사람들까지 태워주셨으니 그만하면 할만큼 충분히 하셨습니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는 아예 모짤트와 그레텔이 있는 선실로 돌아가 버 렸다. 스칼렛이 나를 불러 세우려고 했지만 나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솔 직히 이대로 가다가 스칼렛의 개인 교습을 하게 되면 내가 마법에 대해서 는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게 들통날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배에서 내릴 때도 탈 때와 마찬가지로 밧줄을 두 손으로 꼭 쥐고 있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진땀을 뻘뻘 흘려야 했다. "저, 마법사 님, 제가 실례를 범했다면..." "실례는요, 무슨. 배 잘 타고 왔어요. 문삼이라는 분에게도 그렇게 전 해주세요" 나는 이렇게 말하고는 도망치듯이 모짤트와 함께 정박장에서 빠져 나왔 다. 스타바도 내 마음을 아는지 걸음을 서둘러주었다. 밤의 임프시는 아름다웠다. 여기저기서 연금술사의 등이 타오르고 있었 고, 눈에 뜨이는 상점들하며 높은 건물들과 연금술사의 빛으로 장식한 간 판들이 정겨웠다. 탐그루의 정박장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 었다. 물론 탐그루보다 연금술사의 등도 훨씬 더 많았고, 건물이나 상점 도 훨씬 많긴 했지만 말이다. 나는 숨을 길게 들이쉬었다. 차가운 밤공기 가 상쾌하게 내 안을 정화시켜주는 느낌이 들었다. 오래간만에 맡아보는 진짜 도시의 밤공기였다. "그렇게 서둘러서 빠져 나온 이유가 뭐야, 수르카? 오늘은 그 스칼렛이 라는 여자 집에서 편하게 잘 수 있었는데" 모짤트의 말투는 억양이 없어서 꼭 비꼬는 것처럼 들렸다. "날 대단한 마법사로 알잖아. 들키기 전에 이쯤에서 끝내는 게 낫겠다 싶었지" "너 마법 할 줄 알잖아" "그야 그렇지. 하지만 정말 대수롭지 않은 것 뿐이야. 다리를 세우는 대마법사가 있는 세상에 내 마법이 어디 마법이라고 할 수나 있겠어?" "뮤우-(너무 그러지 마, 수르카)" "그래. 하지만 그 다리는 무너졌지" 모짤트는 이렇게 말하고 다시 뮤를 몰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다리가 왜 무너진 걸까 하는 의문이 새삼 들었다. 자기 전에 아자닌에게 물어볼 게 또 하나 생긴 셈이었다. "검사님. 여기 좋은 데 있어요. 아가씨 있어요. 아주 싸고 예뻐요" 어디서 나타났는지 호객꾼 꼬마가 나타나서 말을 붙였다. 이제 겨우 열 살이나 되었을까 싶은 꼬마 남자아이였다. 비쩍 마른 체격에 말라서 갈라 진 피부가 연금술사의 등 밑에서 꼬마아이를 더욱 처량하게 보이게 했다. 나는 꼬마에게 정중하게 우리는 그저 잘 곳을 찾는 사람들이라고 말해주 었다. 탐그루에 있을 때 비록 잠시였지만 호객꾼 일을 해 본적이 있어서, 행인이 함부로 말을 하면 얼마나 기분이 나쁜지 나는 잘 알고 있었기 때 문이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1123/11996 ━━━━━━━━━━━━━━━━━━━━━━━━━━━━━━━━━━━━━━━━ 제 목:[탐그루] 추락과 타락 110 관련자료:없음 19/19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2-06 00:11 조회:1619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그러고 보니 어디 가서 자나 하는 걱정이 들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삼 층이 넘는 높은 건물들뿐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잘사는 곳이라면 여 관비도 만만치 않을 텐데. 보나마나 내가 내야할게 뻔하고. 그렇다면 사 비오 영감이 남긴 금화를 또 축내게 되는 건 아닌지 하는 걱정이 앞섰다. "위대한 검사님들. 잠시만요. 저, 싸고 좋은 여관이 하나 있습니다. 침 대도 있고, 뮤 여물은 공짜로 드려요" 아까 그 꼬마였다. "아까는 아가씨 있다며" "위대한 검사님들. 싸고 좋은 여관이 하나 있습니다. 침대도 있고, 뮤 여물은 공짜로 드려요" 내 질문에 꼬마는 약간 더듬거리면서 이렇게 다시 한 번 말했다. "너, 일 시작한지 얼마 안됐구나?" 꼬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짤트. 여기로 가자. 어차피 시간도 늦었고 배도 고픈데" "네가 고용주니까 네 맘이지" 등에 업혀 자고 있는 그레텔을 다시 한 번 바로 업으면서 모짤트가 말 했다. "그 말, 나보고 숙박비 내라는 말보다 더 무섭다" 나는 이렇게 말했지만, 모짤트는 미소 한 번 짓지 않았다. 무뚝뚝하긴. 하긴 저런 태도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웬지 모짤트에겐 믿음이 간다. 적어 도 강한 검사라는 믿음 말이다. "뮤-뮤우-(어, 이 꼬마는 뭐야?)" 꼬마가 스타바의 고삐를 잡고 길을 안내하려고 하자 스타바가 소리를 질렀다. 나는 얼른 스타바의 등 두들겨주면서 안심을 시킨다음에 뮤에서 내렸다. "고삐는 그렇게 확 잡으면 안돼. 천천히, 하지만 강하게 잡아야지. 그 래야 뮤가 우습게 보지 않는단 말이야. 그리고 이 턱에 있는 수염을 결 따라서 조심스럽게 쓰다듬고. 너, 이런 것도 안 배웠니?" 꼬마는 어쩔 줄 몰라하면서 몸을 이리저리 비틀었다. 나는 어쩐지 꼭 호객꾼 일을 막 시작했을 때의 날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좋아. 내가 가르쳐주지" 나는 스타바의 고삐를 잡고 걸어서 여관까지 갔다. 가는 동안 나는 뮤 다루는 법을 가르쳐 주었고, 꼬마는 하이르라는 자신의 이름과 자신이 여 관집 장남이라는 것, 그리고 여관이 생각보다 싼 곳이라는 걸 가르쳐 주 었다. 이야기를 나누며 걷고 있는 내내 탐그루 시절이 떠올라 즐겁긴 했 지만 다리가 너무 아팠고 배도 너무 고팠다. 여관은 높다란 건물들 뒤편에 있는 단층짜리 허름한 건물이었다. 입구 위에는 '테이르 여관'이라고 손으로 적어 놓은 간판이 걸려있었다. 정말 싸구려 티가 나는 간판이었다. 하지만 다리가 너무 아팠고, 배도 고파 속 에서 뭐가 바늘로 찌르고 있는 느낌이 들 지경이어서 딴 곳을 찾아볼 엄 두가 나지 않았다. 이렇게 멀 줄 알았으면 뮤를 타고 오는 건데. 하지만 하이르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긴 싫어서 나는 가슴을 죽 펴고 아무렇지 도 않다는 듯 여관 안으로 들어섰다. "어서오세요!" 얼굴이 뮤처럼 긴 주인이 과장된 음성으로 우리를 맞았다. 하이르의 동 글동글한 얼굴과는 딴판인 얼굴이었다. "하이르. 여기 뭐가 맛있니?" 나는 주인에게 묻기 전에 하이르에게 먼저 이렇게 물었다. "그냥 정식이 맛있어요. 비싸지만 정말 맛있어요. 피곤에 지친 여행자 들에게 참 좋습니다" 손님을 끌 때 쓰는 억양이었다. 교육받은 말이 분명했다. "하이르. 정식 말고, 네가 보기에 뭐가 맛있겠니? 너라면 뭘 먹겠냐고" "...감자 죽하고 고기 찜이요" "아저씨. 일단 감자 죽하고 고기 찜 좀 가져다주세요. 배부터 채우게 요" 나는 이렇게 말하고 모짤트를 한 번 흘낏 쳐다보았다. 모짤트는 당장 박수라도 칠 것 같은 분위기로 '그만 하면 훌륭해'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 다. 나는 속으로 탐그루 출신이라는 게 자랑스러워졌다. 하이르가 뭘 기준으로 감자죽과 고기 찜을 추천해 주었는지는 알 수 없 었지만 오래간만에 먹는 제대로 된 식사는 정말 맛있었다. 다만 잘 마시 지도 못하는 맥주까지 곁들여서 먹은 바람에 머리가 좀 어지러워진 것 빼 면 말이다. 방은 두 개를 잡았다. 한 방에 둘이 자기엔 너무 비좁았기 때문이었다. 모짤트는 내일 보자면서 잠든 그레텔을 업고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술기 운 때문에 조금 비틀거리면서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몸을 던졌다. 여관방은 비좁을 뿐만 아니라 벽면으로는 찬바람이 세어 들어왔다. 하 룻밤에 은화 세 개 짜리 여관이 다 그렇겠지만 말이다. 침대가 하나 있기 는 했지만 누우니 침대가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이 삐그덕거렸다. 그래도 이불이 두꺼운데다가 청소가 잘 되어 있어서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점은 마음에 들었다. (아마 화장실이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런 모양이었다) "내* 마음의* 문을* 여니* 길을* 인도해* 다오*" 나는 몸을 일으켜 침대에 걸터앉아 아자닌을 불렀다. "예, 부르셨습니까. 수르카 님" "오늘 아침에 읽은 글에서 마법의 말을 느꼈어. 글에서도 마법의 말을 알 수 있나?" "글은 말과 달라서 어느 정도 이상의 분량을 읽어야 마법의 말을 발견 할 수 있습니다. 글쓴이의 의도는 쉽게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은 목소리와 억양, 분위기 등의 요소로 한 마디를 해도 말하는 이의 의도가 분명하게 드러나지만 말이지요. 보통 마법사의 경우 대략 책 한 권은 읽 어야 마법의 말 한 두 마디를 찾아 낼 수 있습니다. 오늘 수르카님이 읽 으신 부분은 일부분에 불과하기 때문에 저도 어떤 말이 마법의 말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솔직히 놀랐어요. 몇 줄 되지도 않는 글을 읽고 마법을 느끼시다니요. 그런 능력을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이 가끔씩 있다곤 하지 만... 정말 사비오 님이 제자하나는 잘 키우셨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자닌이 미쳤나? 왜 이렇게 날 띄우지? 주인이 너무 친절하게 굴면 손 님은 그 집 물건에 대해서 한 번 쯤은 의심해보아야 한다는 탐그루에서 배운 교훈이 떠올랐다. "내가 마법사의 재능이 정말 있긴 있는 걸까?" "예. 정말 대 마법사가 될만한 재능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래. 하지만 내가 나미트 장군을 불러내지 않는 건 그래서가 아니야" 내 말에 아자닌이 당황했다. 내가 제대로 짚었구나 싶었다. "아자닌. 내가 마법의 길을 선택할지, 아니면 칼의 길을 선택할지는 아 무도 모르는 거야. 나도 잘 모르는데 누가 알겠어? 물론 아자닌의 충고가 내가 결정하는데 좀 영향을 줄 수는 있겠지. 하지만 그런 말을 듣는다고 해서 쉽게 마음이 변하고 그러지는 않아" 나는 침대에 죽 드러누으며 말했다. "이제는 그럴 나이가..." 하지만 나는 말을 다 끝맺지 못했다. 침대 다리가 부서지면서 그대로 침대가 내려앉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깜짝 놀라 일어서려고 했지만 순간 적으로 발이 땅에 닿지 않아 침대에서 버둥거리는 꼴이 되고 말았다. 아 자닌이 고개를 돌렸다. 웃음을 참는 기색이 역력했다. "웃지마!" 나는 겨우 일어서면서 말했다. 오래간만에 좀 무게 잡고 말해보려고 했 더니 침대가 도와주질 않는군. "임프 시는 왜 다 이 모양이지? 뭐든지 무너지고 뭐든지 쓰러지고..." 나는 자칫 이런 낡은 여관도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는 말을 할 뻔했다. 낮에 그런 끔찍한 일을 당하고도 불행의 씨앗을 뿌리는 건 멍청한 짓이리 라. 그런데 사비치 다리가 어떻게 그렇게 쉽게 무너져 버렸을까. 설마 내 가 한 말 때문은 아니겠지. 아닐 거야. "스파일의 대마법사가 마법을 걸어논 다리가 어떻게 그렇게 쉽게 무너 질 수 있는지 좀 얘기해봐" "아마도 다리를 서둘러 짓다보니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아무리 대마 법사라도 마법의 말을 충분히 이해하고 집중해서 말할 시간이 없으면 실 수를 하기 마련이지요. 아마 다리가 무너진 중간 지점에서 마법사의 집중 력이 흐트러졌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부작용 같은 건가? 집중을 하지 않고 방어 마법을 썼다가 구 름이 나타나는 것처럼?" "예" 나는 부작용이 자칫하면 이렇게 엄청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생 각에 더럭 겁이 났다. 내 마법이 부작용을 일으켰던 일들이 떠올랐다. 사 실 누군가가 몽정을 하게 된다던가, 자다가 벌떡 일어나게 만드는 부작용 정도였지만 자칫 잘못했으면 정말 엄청난 결과가 발생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그렇구나. 그럼 그 마법이 어떤 마법이었는지 알 수 있어?" 나는 조심스럽게 아자닌에게 물었다. "제가 보기에 그 다리는 밑에서 받치고 있는 기둥 하나 하나에 마법으 로 보호를 걸었던 것 같습니다. 기둥에 깃들어 있는 정령에 마법사의 의 지를 강요하는 방식으로요" "그렇군. 다리에 정령이 있었어. 그러니까 그레텔이 알아차릴 수 있었 지" "수르카 님. 만물에는 다 정령이 깃들어 있답니다. 예를 들어서 지금 수르카 님이 걸터 앉아 계신 침대에도요" 모든 것에 정령이 깃들어 있다는 말은 좀 생소하게 느껴졌다. "그럼 그 대마법사는 정령술사인가?" "정령에게 마법사의 의지를 강요할 수 있는 마법사입니다. 그런 능력은 정령의 세계를 깊게 이해한 마법사만이 쓸 수 있습니다. 예전에 수르카님 은 아직 그런 마법을 쓸 수 없다고 말씀 드렸던 걸 기억하시겠지요. 수르 카 님은 아직 정령을 이해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글자에서 마법의 말을 읽어 내실 수 있었으니, 곧 정령의 세계를 이해하실 수도 있 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글자에서 마법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은 글 자에 깃들어 있는 정령을 이해하는 능력과 흡사하기 때문입니다" 아자닌의 말에서 나는 또 다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는 건 다른 사람의 마음 뿐 아니라 모든 물건의 마음이라는 말인가?" "예. 그렇게 이해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만약 내가 정령을 이해할 수 있는 마법사였다면, 그래서 그레텔처럼 위 험을 미리 알았더라면, 마법으로 다리를 보호하지는 못했을 지라도 사람 들을 대피시킬 수는 있었을 것이었다. 나는 미간을 손가락으로 누르면서 생각에 잠겼다. 마법사의 길이 어려운 길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막상 어려움에 닥치자 눈앞이 캄캄하게 느껴졌다. 과연 내가 마법사가 될 수 있을까? 스칼렛이 말했던 마법학교의 과정이 떠올랐다. 정말 그 정도 의 과정을 거쳐야만 진정한 마법사가 될 수 있으리라. "알았어, 아자닌. 이제 자야겠어. 너무 피곤해" 나는 아자닌을 사라지게 한 다음에 침대에 누웠다. 이불을 끌어당기면 서 나는 이불의 정령은 과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하는 생각을 해보았 다. 그리고 한참을 생각한 끝에 결국 이불의 정령이 있기는 있나? 하는 생각을 하다가 결국 잠이 들었다. 아침엔 영 개운치가 앉았다. 오랫동안 뮤를 타고 달린 덕분에 피로가 쌓인 데다가 꿈자리까지 뒤숭숭했기 때문이었다. 간밤에 나는 대청하에서 본 시체들과 하잔에서 본 시체들이 모조리 일어나 나에게 다가오는 꿈을 꾸었다. 그래서 나는 잠에서 깨어나서도 한참 동안 식은 땀을 흘리면서 침대에 걸터 앉아 있어야 했다. 아침 식사를 하고 나와 모짤트는 테이르 여관을 거점으로 삼고 사비오 영감을 찾아다니기로 했다. 뮤는 여관에 맡겨두었다. 아무래도 좁은 골목 길을 다니려면 좀 걷더라도 뮤가 없는 편이 나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레텔은 모짤트가 업고 나왔다. 그레텔을 보아 줄 사람도 없거니와 그레텔 과 함께 가는 걸 모짤트가 원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모짤트는 양손칼을 허리에 가로로 찼다. 거기다가 단검도 두 자루나 찼고 말이다. (하여간 모짤트 녀석은 보기와는 달리 힘은 무지막지하다니까) 뭐 대단한 일을 하 러 나간다고 그렇게 무장을 하는 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도 빈손으로 가 기는 뭣해서 허리에 나미트 장군의 검을 차지 않을 수 없었다. 일단 검을 차면 꼬마 소리는 듣지 않기 마련이니까. 물론 칼을 쓸 생각은 없었다. 처음으로 둘러본 임프 시는 신기한 것도 많았고, 재미있는 것도 많았 다. 먼저 삼 층이 넘는 높은 건물들이 많다는 게 눈에 뜨였다. 그래서 길 을 가면서 두리번거린 통에 여기저기서 호객꾼들이 몰려와 물건을 팔기 위해 혈안이 되 덤벼들기도 했다. 탐그루나 여기나 마찬가지로 어리숙한 여행자는 장사꾼들의 좋은 표적이 되나 보다. (하긴 여기저기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두리번거리는 녀석과 여자아이를 업고 다니는 녀석 둘이 촌뜨기 라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마차가 많다는 것도 재미있었다. 마차는 큰 것, 작은 것, 화려한 것, 단순한 것 등 다양했다. 사람들은 그런 마차들을 각각 대형마차, 소형마 차, 고급마차, 경주용마차 하는 식으로 부르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마차 경주를 하는 사람도 아닌데 왜 경주용 마차를 타고 다니는 걸까?) 특별히 물건을 싣고 다니는 것도 아닌데 밖을 나다닐 때 꼭 마차로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많은 점도 좀 이상했다. 아마 마차를 타고 다니는 게 걸어다니 는 것 보다 부자처럼 보이기 때문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마차 수가 워낙 많았기 때문에 번화가에서는 걸어다니는 편이 훨씬 더 빨랐다. 뮤를 타고 왔더라면 아마 마차 때문에 제대로 돌아다니기 힘들었을 것 같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1124/11996 ━━━━━━━━━━━━━━━━━━━━━━━━━━━━━━━━━━━━━━━━ 제 목:[탐그루] 추락과 타락 111 관련자료:없음 26/26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2-06 00:12 조회:1755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사람들이 입고 다니는 옷도 탐그루에서는 못 본 옷들이 많았다. 대체적 으로 젊은 사람이 입는 옷은 화려한 것들이었다. 그런데 좀 다녀보니 다 들 비슷한 무늬가 들어가 있는 옷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붉은 줄과 흰 줄이 쳐져 있는 옷들이 눈에 많이 띄었는데 해질 녘이 다 되어서 우연히 만난 한 옷가게 주인이 그런 걸 두고 유행이라고 부른다고 알려 주었다. "광대들이나 입으면 어울릴 것 같은 옷들을 입고 다니는 게 유행이란 말이에요?" "하하하. 젊은 사람들은 그걸 개성이라고 하지요. 특이하게 입어서 자 신을 드러내니까 말이에요. 그런걸 우리는 패숀이라고 부른답니다" "패숀이요?" "예. 유행을 뜻하는 고어지요. 임프 시에는 고어가 많이 남아있답니다" 나는 오우거를 잡기 위해 소리장 마을에 갔을 때, 가투신의 십부원 아 투가 고대어에 대해 했던 말들이 기억 났다. 아투의 고향 홀리우드에도 고대어를 쓰는 사람이 많이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곳 임프 시도 그런 모양이었다. 그런데 다들 광대 같은 옷을 입은 자신을 특이하다고 생각한 다고? "그런데요, 다들 비슷한 광대 옷을 입고 다닌다면 오히려 개성이 드러 나지 않는 게 아닐까요?" "나야 옷 장사니 그런 건 모르죠. 그냥 젊은이들이 찾는 옷을 갖다 놓 고, 그게 많이 팔리면 그만이니까요" 장사꾼다운 대답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정말 사비오라는 이름은 못 들어 보셨나요?" "예. 귀머거리일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고. 또 앉은뱅이일 때도 있 고, 아닐 때도 있는 대머리가 다 된 노인을 본 기억은 없어요. 하하하" 사실 내가 좀 애매하게 물은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 말고는 사 비오 영감을 설명할 말이 없었다. 라스폼에게 쫓기는 몸으로 마법사라고 알리고 다녔을 리는 없고, 스타바도 두고 갔으니 마차를 타고 다녔는지 걸어다녔는지도 알지 못하니 말이다. 이런 식으로 찾아다녀서야 한도 끝 도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충고 한마디 해 드리죠. 그런 식으로 사람 찾아다니다간 절대로 아 무도 못 찾아요. 이거 완전히 국경에서 병사 하나 찾기지, 그러지 말고 포기하던가 다른 방법을 찾아보는 게 어때요?" "다른 방법이라면요?" "점 집을 찾아가 보는 게 어때요?" "예언자의 집 말씀이신가요?" "그게 그거지, 뭐. 요 길 건너편에 가면 예언의 눈동자라는 점 집이 있 는데 한 번 가봐요" 예언의 눈동자라고?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눈앞에 번개가 번쩍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예언의 눈동자요? 그럼 혹시 거기 예언자가 앉은뱅이에 귀머거리 노인 아닌가요?" "그건 아닌데요. 거긴 여자 예언자가 점을 쳐주는데" 옷가게 주인의 말에 나는 좀 실망했지만 그래도 예언의 눈동자라는 이 름이 그다지 흔한 이름은 아닐테니 사비오 영감하고 무슨 관계가 있지 않 을까 하는 생각에 조금은 기대를 가지고 예언의 눈동자로 향했다. 거리에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물론 내가 일부러 번화가를 찾아다니면서 사비오 영감의 자취를 찾았기 때문에 그런 것도 있었다. 탐그루에는 여행 자들과 호객꾼, 상인들로 붐볐다. 나는 임프 시의 번화가를 걸으면 탐그 루 같을 거라는 생각을 했는데, 사실은 좀 달랐다. 임프 시는 여행자들이 별로 없었고 젊은이들과 무슨 일인지 바쁘게 뛰어다니는 사람들과 또 마 차들로 붐비고 있었다. "모짤트. 이번에는 정말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예감이 와" "난 신경 쓰지 마. 어차피 네가 고용했으니 경호원으로 쓰던, 청부업자 로 쓰건 그건 다 네 마음이야" 그레텔까지 업고서 계속 끌고 다니는 게 좀 미안해서 한 말이었는데 모 짤트는 꼭 내 마음을 읽은 사람처럼 이렇게 말했다. 말하는 것뿐만 아니 라 하는 짓도 아자닌 닮아간다니까. 그나마 그레텔이 아무 말 안하는 것 만 해도 다행이다. 그레텔이 입을 열면 이젠 겁부터 난다. 예언의 눈동자에는 번화가의 뒷골목을 한참 헤매서야 찾을 수 있었다. 골목에 접어들자 모짤트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좌우를 살폈다. 정말 경호 원 노릇이라도 하려는 걸까? 이런 골목에서 별 일이 있으려고. 예언의 눈동자라고 손으로 쓴 나무 간판과 입구에 붉은 발이 쳐져 있는 걸 본 순간, 나는 이곳에서 분명히 사비오 영감의 행적을 알 수 있으리라 는 확신이 들었다. "아이고, 예언자 님, 감사합니다. 덕분에 제가 잊어버리고 있던 돈 주 머니를 찾았습니다. 이거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요"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이 집 예언자는 꽤 능력 있는 예언자인 모양이었다. 어쩌면 사비오 영감과 아무 관계가 없는 예언자라고 해도 예언으로 사비오 영감이 있는 곳을 알아낼지도 모 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목소리의 주인공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나는 어이가 없어 까딱 했으면 뒤로 쓰러질 뻔했다. "바리바!" "...이름 없는 소년 검사?" 아니, 어쩌자고 이곳에 바리바가? "...먹고 살자니 별 수 없잖아. 그래도 배타고 다닐 때는 좋았는데 말 이야" 바리바는 좀 쑥스러운지 머리를 긁적이면서 말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가짜 예언자 노릇을?" 나는 검은 얼굴의 여자를 보면서 말했다. "뭐, 꼭 이 일만 하는 건 아니고...참. 인사 안 했지. 이쪽은 루크야. 내 아내지"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어요" 내 어깨를 툭 치면서 루크가 말했다. 나는 별로 놀라지 않았지만 모짤 트가 놀란 모양이었다. 모짤트는 눈에 뜨일 만큼 몸을 꿈틀하면서 단검을 꽂아둔 허리춤으로 손을 가지고 갔다. "아. 이해해. 루크는 바다 건너에 있는 황금 군도 출신이야. 그곳 여자 들이 좀 거칠긴 하지" 그제야 모짤트는 몸의 긴장을 풀었다. 하지만 허리춤으로 가져간 손을 내리지는 않았다. "이젠 얘기해 줘도 되지 않아, 이름?" "먼저 이곳 이름이 왜 예언의 눈동자인지부터 말해주세요" "그래. 찾는 사람이 이곳 이름과 같은 이름의 점 집을 했다고 했지. 음..." 바리바는 턱을 쓰다듬으면서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을 지었다. 팔뚝의 여자 문신이 눈에 들어왔다. "이렇게 하지. 내가 잘 아는 술집이 있어. 그곳에 가서 얘기하자" "술값은 내가 내고요?" "하하하. 아니야. 술값은 내가 내지. 그냥 외상이 좀 있는데 그것만 갚 아주면 되" "좀 너무 하는 거 아니에요?" "이름도 모르는 판에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지 않아?" 좋아, 좋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도 운명이라면 받아들이지 뭐. 건물들 너머로 해가 지고 있었다. 건물들이 붉게 물들어가면서 주위가 서서히 어두워져갔다. 술집으로 가는 길은 바리바와 루크가 앞장섰다. 바 리바가 자주 간다는 술집은 번화가 중에서도 아주 사람이 많고 복잡한 길 을 지나 있었다. 그 인파 사이를 바리바와 루크는 어깨를 좌우로 살짝 살 짝 돌려 가면서 잽싸게 빠져나갔지만 나와 모짤트는 어정쩡하게 행인들과 계속 부딪치면서 따라갔다. 게다가 모짤트가 허리에 가로로 찬 양손칼은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갈 때 정말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결국 모짤트는 양 손칼을 가슴에 품고 가게 되었다. "차라리 그레텔을 안고 칼을 업고 가는 게 어때?" 모짤트는 나에게 뭐라고 대꾸했지만 행인들이 지나는 소리에 묻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행인들은 그러고 보니 우리가 가는 반대 방향으로 걷고 있었다. 하나같이 어두운 표정들이었고, 나와 어깨가 부딪친 사람도 표정 한 번 바꾸지 않고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내 뒤로 사라져갔다. 어쩐지 음산하다는 기분이었다. 자꾸 나와 모짤트가 뒤로 쳐지는 바람에 몇 번이고 바리바와 루크는 우 리와 보조를 맞추기 위해 멈추어 서야 했다. 결국 겨우겨우 바리바가 자 주 간다는 술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와, 도대체 여긴 어딘데 이렇게 사람이 많지?" 술집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입구에서 나는 옷을 털어 내면서 이렇게 말 했다. "원래 사람이 이렇게 까지 많은 곳은 아니야. 오늘이 무슨 날이라고 했 던 것 같은데..." 무슨 날이라. 어쩐지 사람들의 표정이 다들 하나같이 어두웠던 게 떠올 랐다. 누구 장례식에라도 참석하는 사람처럼 말이다. "자, 신경 쓰지 말고 들어가자구" 바리바를 따라 지하로 내려가자 육중한 철문이 나타났고, 문 앞에 잘 차려입은 우락부락하게 생긴 근육질의 사내 하나가 우리를 막아섰다. 지 하로 내려가서 있는 술집도 이상했지만, 저런 사내를 경호원으로 두고 있 다니, 좀 심상치 않은 술집이다 싶었다. "바리바. 오래간 만이야. 오늘은 좀 해줘야 겠는데. 요즘 주인이 수금 안 된다고 난리야" "물론이야. 그것 때문에 온 건데, 시크. 요즘 장사는 잘 되?" "그럭저럭. 요즘 다 불황이다 뭐다 하지만 그래도 여기서는 배타는 것 보다는 많이 주니까" 둘은 아는 사이인 모양이었다. 아마 바리바가 뱃사람이었던 시절 함께 배를 탔던 사이인 것 같았다. "저 둘은 손님인가?" "응. 소개하지. 이쪽은 시크. 내 오랜 친구야. 그리고 이 둘은 이름 없 는 검사와 그 친구, 그리고 그 딸... 인지 뭐 그건 모르겠지만, 하여간 그래" 아무말도 없이 옆에 서 있던 루크가 키득거렸다. "이봐, 두 친구. 여기서는 무기를 휴대할 수 없어. 칼은 줘. 잘 맡아 뒀다가 돌아가는 길에 돌려주지" 눈알을 부라리면서 시크가 말했다. 나는 모짤트를 한 번 쳐다보았다. 그런데 모짤트도 시크 못지 않게 눈을 부라리면서 시크를 노려보고 있었 다. 용병에게 칼은 생명이나 마찬가지다. 식사 때도 작업 때도 몸에서 떼 지 않는 게 칼인데. 뭐, 나야 어찌 되었건 상관없지만 모짤트는 좀 불편 하겠다 싶었다. "여기 규칙이니까 이해해" 시크가 한 걸음 다가섰다. "난 내 규칙대로 하겠어" 모짤트는 한 걸음 물러서면서 그레텔을 고쳐 업으며 이렇게 말했다. 다 음 순간, 시크가 한 걸음 물러서는가 싶더니 갑자기 모짤트에게 달려들었 다. 칼을 빼앗을 심산이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모짤트가 한 박자 더 빨 랐다. 모짤트는 가볍게 몸을 돌려 시크를 피함과 동시에 시크의 멱살을 잡아 벽에 밀어 부쳤다. 시크는 멱살을 잡고 있는 모짤트의 양손을 잡아 떼려고 했다. 하지만 모짤트가 얼마나 세게 잡았는지 시크가 아무리 힘을 써도 모짤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금새 숨이 막히는지 시크의 얼굴이 붉어졌고, 목줄기에 핏줄이 불쑥 드러났다. 바리바가 휘파람을 불었다. "굉장해! 시크를 저 정도로 몰아 부치다니. 나 같은 건 상대도 안되겠 는데?" 모짤트는 멱살을 왼손으로 고쳐 잡더니 시크를 천천히 들어올렸다. 루 크의 양발이 땅에서 떨어졌다. 한 손으로 저렇게 하다니! 모짤트가 힘이 좋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정도 인지는 몰랐다. 그런데 더 놀라운 건 다 음 순간 모짤트가 양손칼을 뽑아서 악, 소리 한 번 지를 틈도 주지 않고 시크의 양다리 사이에 박아 넣은 거였다. 양손칼의 시퍼런 날이 번득이자 붉어졌던 시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팔에 힘이 빠지는 걸" 감정 없는 목소리로 모짤트가 말했다. 만약에 모짤트가 손을 놓는다면 시크는 시퍼런 날을 깔고 앉게 될 거였다. 나는 시크의 얼굴에서 예전에 한 번 본적이 있는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죽음의 공포로 일그러진 표정 말이다. 나는 혹시라도 모짤트가 진짜로 손을 놓아버리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적당히 해" "말 걸지마. 팔에 힘이 더 빠진단 말이야" "아, 알았어... 들어가. 십 오 번 방으로 가면 되" 시크가 말하자 모짤트는 양손칼을 벽에서 뽑아낸 뒤 시크를 놓아주었 다. "내가 사람 보는 눈은 있구만. 보통 칼잡이는 아니다 싶었지. 노인을 추적하는 무명의 검사 둘과 꼬마 여자 애 하나라. 무슨 사연이 있겠는데" 철문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가면서 바리바가 말했다. "자세한 거 알려고 하지 마요. 잘못하면 다치는 수가 있으니까" "하하하. 내 그런 소리하는 사람 백 명은 봤다. 알고 보면 좀도둑이나 강도질로 수배 받은 사람이 대부분이지...아, 네가 그렇다는 말은 아니 야" 바리바가 모짤트의 눈치를 한 번 살피고서 이렇게 말하고는 안쪽으로 먼저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갑자기 루크가 모짤트의 팔짱을 끼는 게 아 닌가. 나는 루크가 별로 마음에도 없는 행동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루크의 얼굴에는 그리 드러나는 건 아니었지만 자포자기 의 끝에서 오는 허망함 같은 것이 베어있었다. 꼭 바리바의 얼굴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분명 무슨 사연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루크를 따라 들어간 안 쪽은 전혀 술집 같은 분위기가 아니었다. 술집 바닥에는 한 번도 본적이 없는 것이 깔려 있었다. 붉은 색의 천이었는데, 하도 두꺼워서 발에 닿는 촉감이 푹신하게 느껴졌다. 천장에는 탐그루에 서 아이들이 몰려서 구경하던, 바로 그 분수처럼 빛을 쏟아내는 연금술사 의 등이 오색의 빛을 쏟아내고 있었고 양옆으로 뭐 하는 곳인지 문이 일 정한 간격을 두고 있었다. 주방인가? 주방이 저렇게 많을 리는 없고, 술 마시는 사람을 위한 여관도 함께 하는 건가? 십 오 번이라고 적혀있는 문 앞에 서자, 바리바가 문을 열었다. "손님이 먼저 들어가셔야지. 오늘은 내가 사는 거니까" 외상값이 꽤 되는 모양인가 보다. 저렇게 기쁜 얼굴인걸 보면 말이다. "이곳은 보통의 술집과는 격이 다른 곳이야. 이런 술집을 임프 시에서 는 사롱이라고 부르지. 상류사회라는 뜻의 고대어에서 따온 말이야. 뭐, 이상하게 생각은 하지마. 임프 시에는 원래 고대어가 많이 남아있으니까. 사롱이 꽤 많지, 임프 시에는" 속에 뭘 채워넣었는지 푹신하게 만들어져 있는 의자에 몸을 묻으면서 바리바가 말했다. 바리바의 말에 따르면 사롱은 보통 귀족이거나 자이벌 가문의 아들쯤 돼야 올 수 있는 술집이라고 한다. 사롱이라는 말이 바로 말로만 듣던 기생들과 함께 술을 먹는 곳일 줄은 몰랐다. 이곳에서 일하 는 여자들은 정말 예쁘고 늘씬한 여자들뿐이고 술도 순전히 최고급만 있 다고 했다. 그러니 당연히 일반 평민은 꿈도 못 꿀만큼 술값도 비싸거니 와 옷차림새가 형편 없다던가 돈이 없어 보이는 사람은 입구에 서 있는 시크가 들여보내 주지 않는다는 거였다. "그런데 그렇게 비싼 술집 외상값을 날 보고 갚으란 말이에요?" "하하하. 내가 귀족이나 자이벌로 보여?" 그런데 귀족하고 자이벌이 다른 말인가? 나는 바리바에게 자이벌이 무 슨 뜻인지 물어보았다. "자이벌은 귀족하고 아주 비슷한 놈들이야. 다른 점이 있다면 귀족이 아니라는 것뿐이지" "그게 무슨 얘기에요? "자이벌은 돈이 아주 많은 평민을 말해. 공장을 가지고 있는 평민들이 보통 자이벌이 되지. 공장이 뭔지 알아? 마차나 배를 만드는 아주 큰 곳 을 말해. 다리나, 성곽을 짓는 공사를 책임지는 사람, 혹은 아주 크게 장 사를 하는 사람도 자이벌이라고 하지" "그러니까... 부자 평민?" "그래. 무지무지하게 큰 단위의 부자지" 바리바는 이렇게 말하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럼 평민이 돈을 많이 벌면 귀족하고 같은 대우를 받는다는 말인가 요?" "그렇다고 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안 그래. 어떤 평민도 자이벌이 될 수는 없으니까. 그런 말 알아? 가난한 사람은 언제나 가난하고 부자는 언 제나 부자다. 부자는 언제나 부자이고 자이벌은 언제나 자이벌이다. 가난 한 사람이 부자가 되기에 부자들의 힘이 너무 강하고, 부자가 자이벌이 되기에 자이벌의 힘 또한 너무 강하지. 그래서 임프 시에는 이런 말이 있 어" 여기서 바리바는 말을 한 번 끊었다. "적당히 사는 거야. 적당히" 바리바의 얼굴에 억지로 짓는 것이 분명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러니 내가 무슨 돈이 있어서 여길 들락날락하겠어. 사실 외상이라는 거 말이야. 내가 여기서 좀 부업으로 하는 게 있거든. 그걸 좀만 도와주 면 돼. 공평하지 않아? 나는 정보를 주고, 너는 일을 도와주고. 어때? 할 만 하지 않아?" "무슨 부업?" 나는 혹시 사람을 죽여달라던가 하는 부탁이 아닐까 겁이 더럭 났다. 물론 나 같으면 안하고 말겠지만 모짤트라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사람 을 죽일 테니까 말이다. 다시는 피 흘리는 사람을 보지 않겠다고 용병단 을 떠나왔는데. "돈 받아다 주는 일이야. 여긴 워낙 큰돈이 오가니까 가끔 외상 갚을 안 갚는 자이벌이나 귀족들이 있거든. 뭐, 보통은 말로 다 해결이 되는 데 몇몇 술값 내기 싫어하는 치들이 있어. 나는 그런 치들한테서 돈을 받 아다 주는 일을 해. 그 대가로 돈도 받고, 이렇게 술도 마시고 그러는 거 지" "돈을 받아다 주어야 한다... 그래서 검사가 필요하다... 그런 뜻인 가?" 모짤트가 물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1186/11996 ━━━━━━━━━━━━━━━━━━━━━━━━━━━━━━━━━━━━━━━━ 제 목:[탐그루] 추락과 타락 112 관련자료:없음 23/23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2-07 00:23 조회:1658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솔직히 그래. 사실 이번에 내가 맡은 사람이 좀 힘든 상대거든. 자이 벌 녀석이야. 돈도 많은 녀석이 술값내기는 얼마나 싫어하는 지, 원. 어 떤 방법을 쓰는 게 좋을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아까 자네 친구가 하는 거 보니까 간단하게 해결되겠어. 원래 자이벌 놈들은 겁이 좀 많거든" 낄낄거리면서 바리바가 말했다. "날 고용하는 건가?" 모짤트가 물었다. "아니. 그냥 거래야. 원하는 정보를 주고, 원하는 노동력을 제공받는 거지. 나하고 루크가지고는 그 자이벌 녀석 경호하는 놈들을 다 해결하기 어렵거든. 잘 되지 않았어?" "좋아. 그럼 정보를 줘" 거래를 하자는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반말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탐그루 출신답다면 출신다운 버릇인데, 거래를 하는 순간 두 사람은 동등해 진다 는 게 내 생각이니까. "아. 돈이 먼저야. 정보는 다음이고" "정보가 확실하다는 건 어떻게 믿지?" "나, 이 바닥에서 굴러먹은 지 삼 년이야. 뱃사람 출신 바리바라고 하 면 모르는 사람이 없어. 신용이야, 이 장사는. 신용 없으면 아무 것도 하 지 못하지. 만약 내가 너한테 엉터리 정보를 준다던가 하면 밖에 나가서 떠들고 다니면 되. 뱃사람 출신 바리바가 사람을 속였다고. 그럼 난 이 바닥에서 먹고 살기는 다 틀리게 되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지?" "이 바닥을 떠날 생각으로 거짓정보를 준다면?" 모짤트가 물었다. 모짤트의 말에 바리바는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좋아. 그럼 하나 말해줄까? 너희가 찾는 사람 이름이 사비오 맞지?" 바리바의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사비오 영감, 아니 스승님을 안단 말이야?" "하하하. 이제 보니 그 분 제자였군. 자이벌 아가씨가 마법사 어쩌고 할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나는 모짤트를 쳐다보았다. 모짤트가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였다. "좋아. 네 부탁을 들어주지. 약속을 지킨다니까 한 번 믿어보겠어" "그럼 거래가 된 거다" "좋아" 바리바는 손을 내밀었다. 거래의 악수를 하자는 거였다. 나는 바리바의 손을 잡았다. 문이 열리고 여자 셋이 들어왔다. 둘은 젊은 여자였다. 술과 안주를 각 각 쟁반에 담아가지고 들어왔는데, 하나는 조금 마른 편이었고 다른 하나 는 살집이 있는 편이었다. 용병단에서 차이린만 보던 내 눈에 두 여자는 이야기 속에 나오는 요정이나 공주처럼 보였다. 남은 하나는 나이가 좀 들어 보이는 여자였는데, 젊었을 때 예쁘다는 소리 깨나 들었을 것 같은 얼굴이었지만 어딘지 라스폼 같이 기분 나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 런 분위기 때문인지 머리를 올려 묶은 것도 꼭 전투를 준비하고 있는 용 병 같은 느낌이 들었다. "바리바, 왔군. 일은?" 여자 목소린가 싶게 굵은 목소리였다. 아마 이 나이 먹은 여자가 이곳 주인인가 보다 싶었다. 술집 주인이라고 하면 다 이무르 아주머니 같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바리바는 대답 없이 돈주머니를 품에서 꺼내 여자에게 건네주었다. 여 자는 주머니를 뒤집어 안에 들어있던 주화를 꺼내 하나하나 세었다. "모자란데" "한군데 남았어. 이 친구들 도움이 필요해. 오늘은 한 잔 마시고 그 일 은 내일 처리하지. 괜찮지?" 여자는 나와 모짤트를 쳐다보았다. "시크를 솜씨 좋게 다루었다는 말은 들었어. 좋아. 내일 저녁때 와. 믿 어도 좋겠지?" "바리바는 신용 빼면 시체야" "그런 말하다가 진짜 시체가 되는 수가 있어" 나이든 여자는 전혀 농담처럼 들리지 않는 말을 던지고는 씩 웃었다. 나는 그 분위기에 아주 질려 버렸다. "겁주지 말라고. 안 그래도 나 심장 약해" "잘 모셔라. 특히 저기 심장 약한 분. 조만간에 대청하에 떠다니게 될 지도 모르니까" 이렇게 말하고 여자는 나가버렸다. 무슨 농담을 그렇게 끔찍하게 하는 지. 하지만 늘상 있는 일인지 바리바는 키득거리기만 했다. 같이 들어왔던 젊은 여자 둘이 나와 바리바 옆에 앉았다. 내 옆에 앉은 쪽은 살집이 있는 쪽이었는데 내 옆에 앉자 살내음이 훅 풍겨왔다. 나는 나도 모르게 숨이 턱 막혔다. "어머, 이런 곳 처음 인가 봐, 검사 님. 얼굴이 다 빨게 지셨네" "하하하. 밍크. 그 분 우습게 보지 마. 대단한 분이라고. 어제 대청하 에 있는 사비치 다리 무너진 거 알지? 그때 사람 여럿 구해내신 분이야. 거기다가 자이벌 애인에, 마법사이기까지 한..." "그만해, 바리바" 나는 가뜩이나 여자가 옆에 앉아서 쑥스러워 죽겠는데 그런 소리까지 들으니 얼굴이 더 붉어졌다. 그런데 좀 이상한 게 있었다. 모짤트 옆에 루크가 앉은 거였다. 거기다가 팔짱까지 꼭 끼고 말이다. 바리바는 꼭 다 른 집 싸움 구경하는 사람처럼 별 반응이 없었고, 반면 모짤트는 좀 당황 했는지 어쩔 줄 몰라하면서 벽에 세워둔 양손 칼을 만지작거렸다. 여전히 루크의 얼굴에는 그 자포자기의 표정이 나타나 있었다. 나는 루크에게 뭐 라고 한 마디 물어볼까 했다가 그만 두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분명히 즐기자고 온 술집인데 분위기가 이렇게 되 다니. 나는 이왕 이렇게 된 거 얘기나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게 낫겠다 싶었다. "밍크는 여기서 일해요?" 나는 옆에 앉은 여자에게 물었다. 탐그루에서도 기생은 많이 보지 않았 던가? 어려울 건 없지. 겁먹지 말고 침착하게, 침착하게 말하는 거야 수 르카. (물론 정박장 부근에서 돌아다니고 있는 모습이나 담 너머에서 옷 을 갈아입고 있는 모습 같은 걸 본 게 전부 긴 하지만) "그럼 여기서 일하지 저기서 일하겠어요?" 밍크는 이렇게 말하면서 독한 술을 입에 털어 넣고는 인상을 찌푸리며 손수건으로 입을 닦았다. "밍크. 그런 짓 하지마" 바리바가 말했다. "농담한 거 가지고 뭐 그래, 바리바" "지금 밍크는 술 마신 게 아니야. 손수건에다가 술을 버린 거지" 나는 밍크의 손목을 잡아끌어 손수건을 보았다. 과연 손수건은 술에 젖 어 있었다. 이런 식으로 술병을 빨리 비우려는 걸까? "미안. 버릇이 돼서. 어차피 공짜 손님인데 뭘 그래, 오빠" 밍크가 말했다. 바리바는 그래, 적당히 사는 거지, 뭐라고 중얼거리면 서 옆에 앉아 있는 여자를 간지럽혔다. 여자가 싫지 않은 비명소리를 질 렀다. 나는 보기가 민망해서 고개를 돌렸는데, 이번엔 모짤트를 간지럽히 고 있는 루크의 모습이 보였다. 이거 어째야 할지. 나는 밍크와 눈이 마 주쳤다. 밍크는 큰 눈을 깜박이면서 뭘 망설이고 있느냐는 듯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저, 밍크. 왜 이런데서 일해요? 얼굴도 예쁜데. 내가 전에 살던 곳에 서는 밍크 정도로 얼굴이 예쁘면 좋은 남자가 줄을 서는데. 이런데서 일 해서야 어디 좋은 남자 만나겠어요?" "당장 돈이 급하니까 그러죠. 요즘 일자리 잡기가 얼마나 힘든지 알아 요? 집에 가면 내가 돈벌어오기만 기다리는 동생들이 줄줄이에요" "고아... 인가요?" 조심스럽게 내가 물었다. 밍크는 술잔을 들더니 이번에는 진짜로 마셨 다. "아버지가 계셔요. 아무 일도 안하고 계시지만. 요즘 사정이 어렵다 뭐 다 해서 일하시던 공장에서 쫓겨났어요"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난 좀 낫죠. 어쨌든 돈을 버니까요. 동생들도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도 하고 일도 하고... 저기 저 친구는 빚 대신에 부모가 팔아 넘겼어 요. 그것보다는 낫지요" 밍크의 말에 나는 충격을 받았다. 아무리 돈이 없기로 자식을 파는 부 모가 있단 말인가? "입 닥쳐 이년아" 바리바 옆에 앉아 있던 여자가 말했다. 예쁜 얼굴에서 저런 험악한 소 리가 나올 줄은 몰랐다. 물론 욕설이라기 보다는 그저 친근감을 나타내는 말 같긴 했지만 말이다. "그래. 우리 같은 년들 팔자가 다 그렇지" 밍크는 이렇게 말하면서 다시 한 번 술잔을 들이켰다. 아무래도 분위기 가 너무 침울해 진 느낌이었다. "바리바. 뱃사람이었다며. 그런데 왜 임프 시로 오게 된 거야?" 나는 좀 분위기나 띄워볼까하는 생각으로 바리바에게 이렇게 물었다. 무용담이라도 늘어놓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바리바는 내 질문에 씁쓸한 미소를 지으면서 옆에 앉은 여자에게 한 잔을 받았다. 독한 술인지 멀리 서도 술 냄새가 역하게 풍겼다. 바리바는 술잔을 들어 입에 털어 넣더니 옆에 있던 여자를 끌어안았다. 여자가 교태를 부리며 뭐라고 속삭이는 게 보였다. "배 얘기는 하지마, 이름 없는 검사. 저 친구, 그 시절 얘기하는 거 싫 어하거든" 루크가 말했다. 그러자 옆에 앉은 여자를 주물럭거리면서 바리바가 키 득댔다. "아냐. 싫어하다니. 그저 추억일 뿐이지. 이제 나한테 뱃사람 시절은 끝났어. 삼 년 전에 말이야. 로스안 항구를 거점으로 바다 곳곳을 누비고 다녔던 시절이 있었지. 빙하지대를 거슬러 올라가 바바 족들에 대한 정보 를 캐오는 일이나, 상인들의 의뢰를 받아 구하기 어려운 유물들을 황금 군도에서 구해 오는 일, 황금군도에서 루크를 만났지, 대륙의 남쪽 끝에 서 바라보던 해돋이, 파도와 싸우던 기억들, 고래 사냥을 나갔다가 엉뚱 하게 거대한 오징어를 잡았던 일... 하하하. 바다는 말이야, 생각보다 무 시무시한 곳이야. 이름 없는 검사. 운하를 따라 타실과 탐그루를 오가는 일은 소꿉놀이나 마찬가지야" 나는 바리바의 말 속에 마법의 말이 섞여있다는 걸 느꼈다. 하지만 술 취해서 하는 말이어서 그랬는지 마법의 말이 약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바 다를 여행하는 뱃사람이라. "그런데 왜 뱃사람 시절이 끝났다는 거죠?" 처음 들어보는 신기한 바다 이야기들이 바리바의 입에서 술술 흘러나오 자 나는 궁금한 나머지 이렇게 물어보았다. "이젠 다 지났으니까 얘기해도 상관없겠지, 바리바?" 바리바는 루크에게 고개를 한 번 까딱 해 보인 다음 다시 한 번 술을 입에 털어넣었다. 나는 어떤 술인가 내 옆에 앉은 여자가 따라준 술에 입 술을 대 보았는데 으악! 이건 완전히 불덩이잖아. 입술에 불이 붙는 기분 이었다. 이런 걸 어떻게 저렇게 꿀꺽 꿀꺽 마실 수 있는 거지? "성황청 녀석들이 의뢰한 게 있었어. 황금 군도에서 유물을 찾아오는 일이었지. 성황청의 그런 의뢰는 자주 있는 일이었어. 쓸모 없어 보이는 조각상이나 고대문자로 쓰여진 문서, 그림... 모든 게 다 돈이 되었지. 그런데 그때는 두꺼운 책을 가져다 달라는 거였어. 그 의뢰 바로 전 의뢰 때 가져온 문서에서 알아냈다며 근처에 두꺼운 책이 하나 있을 거라면서 말이야. 성황청 성직자도 하나 같이 갔었지" 루크는 모짤트에게서 팔짱을 풀더니 술을 따라 한 모금 들이키고는 이 야기를 시작했다. "로스안에서 출발해서 황금 군도로 가는 도중에 있었던 일이야. 갑자기 날씨가 이상해지더니 파도가 우릴 덮쳤지. 황금군도로 가는 뱃길이 항상 그렇지 뭐. 그러니 큰 돈을 받아가면서 일할 수 있었던 거고. 선원들 반 수가 죽었어. 그 성황청 성직자도 그때 같이 죽어버렸어야 했는데... 하 여간 우리는 대륙 남단의 한 작은 바닷가 마을에 도착 할 수 있었어. 이 름 없는 검사. 용에 대해서 들어 본 적 있어?" 나는 탐그루에 있을 때 만났던 용사냥꾼 사빈을 떠올렸다. 하지만 진짜 용사냥꾼인지 알 수도 없을 뿐더러 용이 있는지 없는지를 가지고 백주 대 낮에 결투까지 벌였던 걸 생각해 보면 용이 있는지 없는지는 정말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들어 본 적이 없다고는 하지 않았다) "그 마을에서 우리는 용을 만났어. 마을 이름은 세불장이었어. 지금도 기억해. 너무 작은 마을이라 교역도 없고, 제대로 된 항구도 없었지만 말 이야. 용은... 나는 밤에 얼핏 한 번 보았을 뿐이지만... 무시무시했어.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울음소리를 내면서... 달려들었지" "그만!" 바리바가 루크의 말을 끊었다. "그래. 그래서 난 도망쳤다. 루크하고 같이. 하지만 안 그랬으면 나하 고 루크도 죽었을 거야. 그랬어야 했나? 거기서 죽었어야 했냐고!" 벌써 취했는지 분명치 않은 발음이었다. "술만 마시면 저런다니까. 알았어, 바리바" "지금도 밤만 되면 녀석이 보여... 빌어먹을" 바리바는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다시 한 번 술잔을 기울였다. 저렇게 빨 리 마셔도 괜찮을지. 나는 바리바가 측은하게 보였다. 바리바의 팔뚝에 있는 여자 문신도 풀이 죽어있는 듯 보였다. "적당히 살다가 적당히 죽는 거야... 적당히. 빌어먹을" "바리바. 네 잘못이 아니야. 아무도 널 탓하지 않아, 바리바" "그만 둬. 적당히 살다가 죽을 테니..." 바리바는 이제 옆에 앉아있는 여자에게 거의 안기다 시피한 자세가 되 어 중얼거렸다. "그리고 끝이었어. 살아 돌아오긴 했지만 그후 다시는 바다에 나가지 못하게 됐지. 바리바. 겁장이" "그래. 난 겁장이야. 그러니 이렇게 살다 죽겠어" 바리바의 눈이 번득였다. 나는 모짤트의 눈빛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섬뜩했다. "그래서 선장하고 함께 여기저기 떠돌다가 삼 년 전에 여기 임프시 대 청하 부지에 자리를 잡았지. 가끔 급한 사람들 뗏목으로 강을 건네주는 일도 하고, 엉터리 점 집 일도 하고, 또 사롱 외상값 받아다 주는 일도 하고... 그러면서 사는 거지. 그 노인 봤지? 목소리 크고 꼬장꼬장한 노 인 말이야. 그 노인이 여기 와서 만난 은인이지. 우리한테 일자리도 주고 살 곳도 마련해 줬으니까" 루크는 꼭 바리바 같은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나는 그 미소를 보면 서 저 두 사람이 정말 부부긴 부부인가 보다 싶었다. "수전노 영감" "그래. 바리바. 수전노는 수전노지. 하지만 임프 시에서 돈을 아끼는 건 죄가 아니야" "그래. 돈 없는 게 죄겠지. 우리처럼" 바리바는 꼭 뭘 붙잡으려는 사람처럼 허공에 손을 휘저으면서 말했다. 나는 바리바를 바라보았다. 이미 취기가 가득 오른 얼굴에는 슬픈 빛이 가득해 보였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1187/11996 ━━━━━━━━━━━━━━━━━━━━━━━━━━━━━━━━━━━━━━━━ 제 목:[탐그루] 추락과 타락 113 관련자료:없음 21/21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2-07 00:23 조회:1614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그래. 하여간 그렇게 된 거야. 황금군도에는 나도 그때 같이 갔었어. 그래서 잘 아는 거야" "됐어, 다 지난 일이야. 나는 살았고, 녀석은 죽었어"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지만 바리바는 이렇게 말하면서 손을 휘저었 다. 루크가 뭐라고 말하려는 듯 숨을 한 번 깊게 들이쉬었다가 그만두었 다. 덕분에 루크는 꼭 한 숨을 쉬는 것 처럼 보였다. 그러고 보니 바리바 앞에 놓여있던 술병이 완전히 비어있었다. 입술만 대도 타는 것 같은 술 을 한 병이나 그렇게 급하게 마셨으니 멀쩡할 리가 없었다. "그럼, 이름 없는 검사. 약속을 지켜 주겠지?" "물론. 시간과 장소는?"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모짤트가 먼저 물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예언의 눈동자로 와. 일 끝나면 바로 정보를 줄게" 루크는 이렇게 말하고는 고개를 책상 밑에 박고 뭐라고 주정을 하고 있 는 바리바를 들쳐업었다. "진짜 부부 맞아요?" 나는 루크에게 이렇게 물어보았다. "그래. 서로 사랑하는 방법이 다른 사람과 좀 다를 뿐이야" 루크는 이렇게 말하고는 먼저 밖으로 나갔다. 여관으로 돌아오는 길은 몹시 소란스러웠다. 술집으로 들어갈 때 보았 던 행인들이 임프 시 중앙 광장에 모여있는 모양이었다. 연금술사의 등이 웅성거리고 있는 소리가 나는 쪽에서 부옇게 밝아오고 있는 게 보였다. "그런데 왜 이렇게 어두컴컴한데서 술들을 마시는 거지? 자이벌이나 귀 족들은 이런데서 술을 마셔야 술맛이 나나?" 나는 이렇게 말해놓고, 라이짐과 하잔에서 마셨던 맥주를 떠올렸다. 죽 지 말자며 잔을 부딪쳤던 일과 칼과 또 마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라이짐은 술은 왁자지껄한 분위기에서 떠들면서 마셔 야 제 맛이 난다고 했는데. "귀족들이 하는 일이 다 그렇지. 어두컴컴하고 음침한 곳에서 뭔가 은 밀하게 속삭이고, 다음 날이 되어서 누군가 죽어야만 보통 사람들은 눈치 챌 수 있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말이야" 어느 새 또 잠든 그레텔을 바로 업으면서 모짤트가 말했다. "그런 적이 있었나 보지, 모짤트?" "그런 일은 매일 있어" 모짤트가 대답했다. 그 순간 갑자기 사람들의 함성소리가 들려왔다. 나 는 반사적으로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사람들이 성난 강 물처럼 우리 쪽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나는 하잔에서 본 시민들이 떠올랐 다. "이건 또 뭐야!" 모짤트는 대답대신 내 팔을 잡아끌고 뛰기 시작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모짤트를 따라 뛰기는 했지만 도대체 왜 내가 도망치고 있어야 하는 가 싶었다. "이쪽으로" 침착한 목소리로 모짤트가 골목길을 향하면서 말했고 나는 모짤트를 따 랐다. 곧 이어서 사람들이 골목을 스쳐 뛰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쫓기는 듯 다급한 모습들이었다. 누군가 쓰러지는 모습이 보였다. "무슨 일일까, 도대체" 나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내 질문에 대답이라도 하듯, 방패와 곤봉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사람들을 뒤쫓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무장한 사람들은 자치대 병력인 듯 모두 같은 제복을 입고 있었다. 무장한 쪽이 쓰러져 있 는 사람의 머리통을 곤봉으로 내리치는 모습이 보였다. 막아야 한다. 하 잔에서 쓰러져 있던 시민의 목을 베던 서부산맥군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 는 충동적으로 칼자루를 쥐고서 달려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모짤트가 내 손을 잡았다. "그만둬. 우리가 낄 문제가 아니야" 그제야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상황을 판단해 볼 수 있었다. 행인들을 자치대가 쫓고 있다. 그렇다면 시민들은 반란군인가? 반란군이 있다는 조 짐은 보이지 않았는데... "야! 너희들!" 무장한 제복 둘이 우리에게 다가오면서 소리쳤다. 나는 일단 일어나 두 제복과 맞섰다. "너희들 뭐야!" 거친 말투였다. "지나가는 여행객입니다. 무슨 일입니까?" 대답은 모짤트였다. 하지만 모짤트는 언제라도 양손칼을 뽑을 수 있도 록 양팔을 자연스럽게 굽히고 있었다. 나도 칼을 뽑을 수 있도록 오른 팔 을 접어두었다. "그럼 상관 말고 돌아가. 빌어먹을 놈들. 평민이면 일하고 먹여주는 데 로 가만히 있을 일이지 밖으로 뛰쳐나와서 뭐 하는 짓거리들이야?" "이게 다 테이르인지 뭔지 하는 녀석 때문이야. 자, 이제 그만 가자구. 곧 끝날 것 같은 데 말이야" 둘은 이렇게 말하고는 골목 밖으로 나가 다시 시민들을 쫓아갔다. 테이 르라면 어디선가 들어 본적이 있는 이름인데... 맞다. 우리가 묶고 있는 여관 이름이 테이르 여관이었다. 둘이 무슨 관계가 있을까? "좀 잠잠해 지면 돌아가지" "모짤트. 아무래도 뭔가 잘 못 되어가는 거 아니야?" 내 말에 모짤트는 대답하지 않고 밖을 예의 주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무뚝뚝하긴, 모짤트. 한참을 더 어두컴컴한 골목에서 기다려 잠잠해진 후에야 우리는 여관으 로 돌아갔다. 긴 얼굴의 여관 주인이 우리를 반겼다. "아, 무사하셨군요. 저는 무슨 일이라도 생기셨나 걱정했습니다" "숙박료는 선불로 지불했잖아요. 그런데 걱정은 뭘..." 나는 공연히 여관 주인에게 퉁명스럽게 말했다. 여관 주인은 껄껄 웃었 다. "제가 오늘이 테이르의 날이라는 걸 깜박 잊고 말씀 드리질 않았네요" "테이르의 날이 뭐에요?" "꼭 십 일년전, 이곳 임프 시 자이벌들에게 대항해 싸우다 죽은 반란군 두목입죠" 여관 주인은 꼭 바리바가 지었던 것 같은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왜 내가 본 임프 시 사람들은 다 저런 표정들일까. "자이벌들이요?" "예. 열악한 조건에서 더 이상 일할 수 없다고 동료들을 모아 자이벌에 게 항의했던 사람입니다. 대단한 용기었죠. 다들 테이르라는 이름만으로 도 존경심을 가지곤 하니까요. 오늘이 그 테이르의 날 열 번째 행사가 있 는 날입죠. 이 날만 되면 여기저기서 평민들이 모여 자이벌에게 항의를 한답니다. 그러면 자이벌들은 자치대에게 그 사람들을 해산 시켜줄 것을 부탁하곤 하지요" "자이벌이 자치대하고 그렇게 친한가요?" "아뇨. 자치대하고 돈이 친한 거겠죠" 여관주인은 여전히 냉소를 입에 물고서 말했다. "원래 임프 시가 그래요. 자이벌들은 평민들을 개처럼 부려먹고, 자기 들은 귀족처럼 사니까요. 물론 다들 자이벌을 싫어하지만 별 수 있겠어 요. 힘없는 평민 주제에. 요즘에는 한술 더 떠서 해서 자이벌들이 다른 도시에서 온 사람들을 반값에 부려먹는다는 말도 있습디다" 나는 자이벌들이 어떻게 해서 돈을 모으는지, 또 왜 가난한 사람이 결 코 부자가 될 수 없다는 말이 떠도는지 대충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저는 오늘 하루 종일 여관에 틀어박혀 있었는지 궁금하다는 표정이군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여관주인이 스스로 이렇게 말했다. "튀어나온 마차가 먼저 약탈당하기 마련 아닙니까. 어차피 제가 간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으니까요. 적당히 살다가 적당히 죽는 거죠" 여관 주인은 웃으면서 말했지만 어쩐지 나는 그 말에서 슬픔을 읽을 수 있었다. "그거 좀 너무 자학적인 말 아니에요?" 나는 하잔에서 죽어간 사람들이 이 말을 듣는다면 분통을 터트릴 것 같다 는 생각으로 여관 주인에게 물었다. 그들은 단 하루만 더 살았더라도 뭔가 다르게 생각했을 거였다. 그리고 그들의 죽음은 오히려 너 나은 세상을 위 한 몸부림이었는지도 모르고 말이다. "임프 시에는 이런 교훈이 하나 있어요. 다리 위에서처럼 어딘가로 가기 위해서는 줄을 서야 하지요. 그럼 처음에는 누구나 줄의 맨 끝이지요. 하지 만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 둘 뒤에 서고, 그러다 보면 목적지에 닿을 수 있 다는 거, 아시죠?" "그거 당연한 거 아닌가요?" "여기 임프 시에서는 아닙죠. 제일 뒤에서 서는 건 평민들뿐입니다. 항 상 누군가는 배를 타고 유유히 사람들을 앞서가기 마련이니까요. 그래서 다들 포기하고 사는 거죠. 목적지에 도달하기도 전에 죽을 거 뻔히 아니 까요. 그래서 다들 그렇게 산답니다. 대충, 대충. 뭐, 안 그러는 사람도 없지는 않지요. 하지만 그러다가 머리에 자치대원들 곤봉이라도 맞으면 자기 손해 아닌가요?" 도저히 내 말은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것 같은 말투였다. "알았어요. 적당한 고기하고 감자죽이니 좀 주세요. 적당히 배가 고프 네요..." 내 말에 여관주인은 과장되게 껄껄 웃으며 주방쪽으로 향했다. "아자닌. 내일이면 사비오 영감의 자취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저녁을 먹고 잠들기 전, 나는 아자닌을 불러내어 말했다. "운명이 수르카 님을 인도해 줄겁니다" 아자닌이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 목소리에 어쩐지 힘이 좀 나 는 것 같았다. "여긴 참 이상한 도시야. 세상에는 귀족과 평민만 있다고 생각했는데, 하 여간 이 바르도 대륙에는 별의 별 일들이 다 일어나고 있다니까. 자이벌이 라는 이상한 사람들에, 매년 테이르를 추모하는 사람에, 적당히 살다 죽으 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돈 때문에 자식을 파는 부모가 있질 않 나, 돈 때문에 술집에서 남자들 시중을 드는 사람도 있고..." 나는 이렇게 말하면서 침대에 드러누웠다. 그러고 보니 다리 위에서 만났 던 오리오라는 사람 말이 떠올랐다. 그 많은 사람들이 임프 시에서 뭘 먹고 사느냐는 물음에 오리오는 가보면 알게 될 거라고 대답했었다. 다들 아주 싼 임금에 일하면서 겨우겨우 먹고살고 있겠다 싶었다. 나는 침대 위에서 몸을 돌렸다. 다리 하나가 부서지는 바람에 무너진 침대는 이제 네 다리가 다 부서져 있었다. "세상에는 조화와 군형이라는 게 있습니다. 그 침대 다리처럼요. 하나가 무너지면 다 무너지기 마련이지요" "무슨 소리야, 그게?" "그저 예감일 뿐이에요. 내일 꼭 사비오 님을 찾게 되길 빌겠어요" 답답한 소리 아니면 못 알아들을 소리라. 애라 모르겠다. 잠이나 자자. 나도 임프 식으로 적당히 살다 적당히 죽는 생각이나 하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리고 수르카 님. 사비오 님이 하셨던 말씀 명심하세요. 어제 수르카 님은 마소드의 검에 입을 맞추는 행위가 결코 어른이 되는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하셨지요. 사비오 님께서는 성년이 된다는 것은 결코 성년의 신 마소드 의 축복만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자기 자신에게 축복을 내리는 순간을 맞아야 비로소 성년이 되는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자닌이 좀 변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에는 저런 말하지 않았 는데 말이다. "아자닌. 너 좀 이상하다?" "수르카 님의 마법이 더 강해지셨나보죠" 생긋 웃으면서 아자닌이 말했다. 맞다. 그러고 보니 마법의 말을 잊고 있었다. "참. 아까 바리가가 했던 말 기억해?" "예" "어떤 마법의 말이었어?" "그건 마법의 말이 아니라 마법의 마음이었습니다" "마법의 마음?" "예. 어떤 간절함이 만들어낸 강한 마음이 말을 마법의 기운을 띄도록 만 든 것이지요" "간절한 마음만으로도 마법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줄은 몰랐는 걸" "그런 마음은 누구나 가지고 있을 수 있답니다. 다만 이제 수르카님이 그 런 마음을 느낄 수 있는 경지에 이르신 거지요" 또 칭찬이로군. 이번에는 무슨 말로 나를 현혹하려는 걸까. "알았어. 들어가" 나는 아자닌이 더 이상한 말을 하지 못하도록 사라지게 만든 다음, 침 대에 누워 생각에 잠겼다. 이제 아자닌은 마법의 말을 찾아주는 정령이 아니라 내 마음을 정리해 주는 정령이 된 느낌이었다. 마음만으로 마법을 만들 수 있다. 어쩌면 말은 다만 마음을 전하는 도구에 불과한지도 모른 다. 사비오 영감도 그렇게 말했다. 말은 우물에서 물을 퍼내는 바가지에 불과하다고 말이다. 이렇게 하나씩 깨달아가면서 어른이 되는 거겠지. 나는 아자닌이 한 사비오 영감의 말을 생각해 보았다. 그 말은 맞는 말 이었다. 내가 나 자신의 삶에 축복을 내려야 나는 진정한 성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적당히 살다가 적당히 죽겠다는 말이야말로 어린애가 하는 말일 거다.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일단 사비오 영감을 찾는 거야. 그걸 위해서 내일 바리바의 돈 받는 일 을 돕고. 그러다 보면 무슨 수가 나겠지. 운명이 나를 올바로 인도해 주 기를. 나는 이렇게 생각하다가 잠이 들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1188/11996 ━━━━━━━━━━━━━━━━━━━━━━━━━━━━━━━━━━━━━━━━ 제 목:[탐그루] 눈보라와 봄바람 114 관련자료:없음 26/26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2-07 00:24 조회:1671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 눈보라와 봄바람 라이짐은 세수를 하다말고 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오랫동안 바라보았 다. 희게 샌 머리가 너무 낯설었다. 가끔 신기한 듯 자신을 바라보는 동 료의 시선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날 이후 라이짐에게는 세상이 온통 낯 선 것들로만 가득 차 있는 느낌이었다. 사방이 온통 막혀있는데다가 그나 마 하나 있는 창문에서도 빛이 들어오는 건 오후의 한 때 뿐이라 그런지 도 몰랐다. "자네의 흰머리를 보니 내가 타실에 끌려가서 죽는 것 보다 여기서 늙 어 죽는 게 먼저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군" 은발의 미하엘이 이렇게 농담을 건넸다. 라이짐은 별로 대꾸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저 가만히 앉아 시간이 빨리 가기를 바랄 뿐이었다. 이곳 시청 지하 임시 수용소에 들어온 지 벌써 일 주일이 지났다. 첩자 였던 찬을 놓아준 벌로 아케르의 특별 지시로 오게 된 것이다. 이곳에서 갇혀 지내는 것은 좀 불편하기는 하지만 사실 라이짐에게 진짜로 벌로 느 껴지는 것은 칼을 쥘 수 없다는 명령이었다. 라이짐은 이곳에서 나가더라도 아케르의 지시가 있기 전까지 칼을 쥘 수 없다는 명을 받고 있었다. 갇혀 있다는 것, 또 나가도 칼을 쥘 수 없 다는 것을 생각하면 조금 억울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별로 후회는 하지 않았다. 라이짐으로서는 수르카와 찬을 보내 주지 않을 수 없었다. 목숨을 구해준 사람을, 하나 뿐인 친구를 붙잡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수르카는 장기 휴가로 행정 처리 할 수 있지만 찬은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잖나" 순무. "첩자를 놓아준 건 중죄에 해당해. 목을 베일 수도 있었지만 아케르 단 장님 특별 지시로 이 정도로 끝나는 줄 알아. 운이 좋았어" 신다루 십부장. 라이짐도 그런 말들을 다 이해하고는 있었다. 사실 더 심한 벌을 각오 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아케르가 아무 말도 없었던 것은 라이짐에 게는 의외였다. 아케르는 그저 라이짐을 한 번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눈 으로 바라보고 말았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직도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빛이었다. "자네는 왜 용병이 되었나?" 미하엘이 대야를 치우고 있는 라이짐에게 물었다. 하필 왜 미하엘 같은 반역자와 같은 방을 사용하게 했을까. 이곳 책임을 맡고 있는 지다문 십 부장의 생각이었을까? 아니면 아케르 단장님의 생각? "복수. 죽여야 할 사람이 있어서" 아무래도 라이짐은 미하엘과 이야기하기가 껄끄러웠다. 아무리 싸움이 끝났다고 해도 한 때 목숨을 걸고 맞붙었던 상대와 편하게 지내기는 어려 운 일이었다. "귀족인가" "그런 셈이지. 그것도 아주 지위만 높은" 라이짐은 반말로 대답했다. 아무리 한 방에 있고 자신보다 연장자라고 는 해도 반역자에게 존대말을 쓰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아케르는 말하지. 죽일 수 있을 때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고. 하 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누가 죽이지 않아도 스스로 죽는 법이라고. 죽일 수 있을 때... 라는 걸 누가, 어떻게 판단내릴 수 있겠는가?" "자살하고 싶다면 이 방에서 나가서 해" 라이짐이 차갑게 내 뱉었다. 시체 보는 일은 참을 수 있지만 이 방에서 미하엘이 죽어버리면 그 처리는 고스란히 자신에게 돌아올 게 뻔했다. 그 럼 내가 이곳에 들어온 이유는 혹시 감시역이 아니었을까하고 라이짐은 생각했다. "가족이 그 귀족에게 죽었나? 아니면 친구?" 라이짐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 귀족이 죽는다고 해서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오지는 않아" "죽은 사람을 살려내려고 복수하는 건 아니지" 혼잣말처럼 벽을 바라보면서 라이짐이 말했다. "그리고 죽여야 할 귀족을 죽이는 건 하나의 작은 상징일 뿐이야. 시청 앞에서 나는 배웠어. 강한 자가 아니면 말할 자격도, 들어줄 사람도 없다 는 걸. 강해지는 거야. 귀족보다 더. 그게 귀족을 없애는 방법이지" "꼭 그럴까?" 미하엘은 이렇게 말하면서 받아들이기 불편한 미소를 지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미하엘이 저런 미소를 지으면 라이짐으로서는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라이짐은 될 수 있으면 벽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려고 노력했 다. "자네를 보면 꼭 젊은 시절의 아케르를 보는 기분이 들어. 거칠고, 강 하고, 무엇보다 굳은 의지가 있지. 안 그런가?" 아케르의 이름이 나오자 라이짐은 잠시 미하엘을 돌아보았다. "아케르가 용병단을 이끌기 전에 별명이 위대한 복수자 검객이었지. 알 고 있었나" "탐그루에서는 꼬마들도 아는 얘기야" 라이짐은 다시 벽을 주시하면서 말했다. "혹시 이렇게 알고 있지 않나? 이자림의 산적들에게 형이 죽어서 복수 했다는 식으로? 내 말이 맞나?" 라이짐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런 식으로 소문이 나지 않았다면 아케르도 형처럼 귀족들에게 살해당했을 테니까" "무슨 말이야?" 라이짐은 미하엘이 한 말을 듣고는 이렇게 되물었다. "소문은 소문일 뿐이라는 말이지" 미하엘은 이렇게 말하고는 잠깐 뜸을 들였다. 라이짐이 관심을 가져주 기를 바라는 태도였다. 라이짐은 그 태도가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야기를 듣고 싶어한다는 표를 내지는 않았다. "아케르 단장에게는 형이 있었지" 마침내 미하엘이 입을 열었다. 라이짐은 평심하게 미하엘의 말을 듣는 척 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아케르의 복수담이라니 주먹이 꼭 쥐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테이르라는 이름의 형이 말이야. 테이르는 임프 시라는 곳에서 착취당 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칼을 뽑았네. 그러니까... 벌써 꽤 오래된 얘 기군. 임프 시에는 자이벌이라는 녀석들이 있지. 평민이지만 돈이 아주 많은 녀석들이야. 임프 시야 원래 돈으로 사람 따지는 걸로 유명한 곳이 니 그런 이상한 계급이 생겨났다고 해서 이상할 것도 없지. 하여간 자이 벌들은 아주 싼값에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을 부려먹는 걸로 자신들의 부를 축적하고 있었지. 아마 지금도 마찬가지일 걸세. 자이벌들은 귀족에게 뇌 물을 주고, 귀족들은 자이벌들이 그렇게 비 인간적인 행동을 하는 것을 눈감아 주고... 그런 악순환이 계속됐었지" 미하엘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테이르는 의협심이 강한 사람이었어. 나 보다 두 살 많았지. 나하고 아케르하고 동갑인 건 아는가? 그때 아케르는 막 국경근무를 마치고 돌아 온 예비역 병사였고, 나는 내가 믿는 종교의 작은 민간 사제직을 수행하 고 있었네. 테이르가 임프 시로 떠나겠다는 말을 했을 때, 나와 아케르는 당연히 동행하겠다고 했네. 그 때 테이르가 임프 시로 가기로 마음 먹은 것은 단순히 의협심 만은 아니었어. 그 곳에서 자신이 사랑하던 여인이 목을 메 죽었기 때문이었지. 사실 자이벌들이 했던 짓거리들도 다 그 죽 음을 조사하던 과정에서 드러난 일이었네만" 라이짐은 꼭 쥔 주먹에 땀이 배는 것이 느껴진다. "그 여인은 자이벌 가문의 아들 녀석에게 농락 당했다네. 녀석은 불과 돈 몇 푼 던져 주는 걸로 끝내려고 했지만 여인은 완강히 거절했어. 아마 자치대에 고발할 생각이었던 모양이었네. 하지만 가만있을 자이벌 녀석이 아니었지. 산적들을 고용해 그 여인을 죽이고 말았네. 자살로 위장했지만 조사하던 과정에서 사정을 알게 된 순간, 우리는 여인의 죽음이 결코 자 살이 아니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네. 그래서 칼날을 벼리고 그 자이벌 녀석을 찾아갔지. 단 셋이었네. 처음에 녀석은 완강히 부인하더군. 하지 만 계속 다그치자 녀석은 결국 더러운 꼬리를 드러내었네. 고용해 두었던 산적들을 그대로 우리에게 보낸 거야. 우리는 가볍게 녀석들을 해치웠다 네. 사실, 우리는 녀석이 그런 더러운 수를 쓸 걸 예상하고 여럿이 덤비 더라도 상관없을 만한 골목길에서 진을 치고 있었거든" 라이짐은 젊은 시절의 아케르와 미하엘을 상상해 보았다. 둘이 칼을 쥐 고 산적들과 맞서 싸우는 모습을 말이다. 젊은 시절 아케르는 명성에 걸 맞은 검사였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미하엘의 모습을 상상해 보니 라이짐 은 약간의 거부감을 느끼게 되었다. 미하엘도 분명 아케르 못지 않은 검 사였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단 세 명이서 녀석을 찾아가 베는 일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네. 여인을 죽인 제도와 맞서 싸우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하게 된 거였지. 테이르는 대단한 사람이었어. 타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임프 시 에서 싼값에 착취당하고 있는 평민들을 규합했으니 말이야. 얼마 지나지 않아 테이르의 조직은 상당한 수준이 되었네. 테이르를 중심으로 모인 사 람들은 곧 모든 평민들에게 일하지 말 것을 호소했지. 더 이상 정당한 대 가 없이 일하는 건 바보짓이다... 지금도 내 귓가에 들리는 듯 하구만. 테이르의 목소리가 말이야" 미하엘의 눈가가 젖어드는 게 보였다. 어두운 감방이지만 말이다. "싸움은 근 십 년 동안 계속 되었네. 처음에는 사람들을 모으기에만 급 급했지만 일단 사람이 모이고 나니 조금씩 일이 진척되기 시작했네. 좋은 날들이었지. 매일 같이 사람들을 만나고, 전단을 만들어 돌리고, 한 명이 라도 더 동참하기를 바라면서 여기 저기 돌아다니고, 밤이면 밤마다 싸구 려 술을 마시면서 다음 날에 있을 일들을 의논하곤 했네. 노랫소리는 여 기저기서 울려 퍼지고, 사람들은 하나가 되어 우리 주변에 있었고... 그 때가 내 기억 속에서 아케르와 함께 보낸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 되 버릴 줄은 정말 몰랐네만. 전술의 기본에 이런 게 있지. 적은 나누고 아군은 뭉친다. 자이벌들은 바로 그 전술을 썼네. 임금을 올려준다는 말과 뇌물 로 조직을 흐트러뜨리고, 자신들은 하나가 되어 테이르의 조직에 맞섰네. 결국 우리의 싸움은 오래 가지 못했어. 하나 둘 자이벌의 일터로 되돌아 갔지. 그리고 마지막까지 일하기를 거부하면서 남아있던 사람들에게는... 다시 한 번 산적들이 들이 닥쳤다네. 그날은 비가 몹시도 내리던 날이었 네. 사방이 온통 비에 젖어 있었지. 산적의 칼에 쓰러지는 사람, 산적을 베는 사람, 쓰러져 신음하는 사람,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급하게 뛰는 사 람... 갑작스러운 기습이었지. 혼전이었어.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도 구분하기 힘들만큼 말일세. 전투는 끝이 났고, 산적들은 물리쳤네만 우리 중 상당수도 죽었지. 테이르도 그 와중에 전사했어. 지금 와서 해 보는 생각이지만, 녀석들은 처음부터 테이르만 노리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어. 그래서 그런 혼전을 유도했는지도. 뭐 이제 와서 확인 할 수 없는 일이네 만. 아케르는 그날 내게 처음으로 눈물을 보였지. 그날의 혼전 중에 입은 이마의 상처에서 흘러내리는 핏물이 눈에 들어가서 눈물인지 핏물인지 알 수 없는 게 흘러내렸던 기억이 나는구만. 내가 시청에서 한 말 기억하나? 자네도 그 때 있었던 것 같은데. 하잔의 시민들은 죽어서 영원히 살게 되 었다는 말 말일세. 비록 테이르는 죽었지만 자이벌에 대항하는 사람들의 상징으로 영원히 살게 되었다네. 지금도 임프 시에서는 테이르의 죽음을 추모하며 행사를 벌인다네" "그리고 아케르 단장님은 복수했고?" 라이짐이 미하엘에게 물었다. 미하엘은 조금 과장된 동작으로 아차, 하 고 외친다. "그렇군. 위대한 복수자 검객의 무용담을 빼먹었군. 사실 꼭 그랬던 건 아니야. 복수를 위해 여러 날을 보냈지만 테이르의 죽음으로 조직은 많이 무너졌다네. 많은 사람들이 포기하고 자신의 길을 떠났지. 다시 자이벌의 일터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갔고, 결국 남은 몇이서 목숨을 걸고 복수를 하기 위해 자이벌의 저택으로 쳐들어갔네. 지금 생각해 보면 무모한 짓이었어. 우리는 열 명도 되지 않았고 녀석들은 쉰 명이 넘었으 니까. 다섯 배의 적을 기습으로 물리친다... 말이야 그럴 듯 하네만 별로 효과적인 방법은 아니었지. 우리들 거의 대부분이 싸우다 죽었고, 아케르 는 이마에 칼자국을 하나 더 얻었지. 결정적으로 복수에는 실패했다네. 녀석은 그날 집에 있지 않았던 거야. 말하자면 녀석의 속임수에 우리가 넘어갔던 거지. 산적들이 모여 있는 걸 보고 당연히 집에 있으리라고 생 각한 우리의 실수 였네. 하지만 산적들은 그날 완전히 궤멸 당했네. 그 산적 패거리 이름이 이자림의 산적들이었고, 아케르는 그날 싸움을 승리 로 이끈 덕분에 위대한 복수자 검객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거지" "복수는?" "결국 하지 못했어. 자이벌들은 한 번 이상 기회를 주지 않았지. 다시 는 공격할 수 없었어. 만약 계속 복수의 뜻을 비친다면 죽여버리겠다는 협박도 그치지 않았고. 하지만 아케르의 명성이 높아지는 바람에 녀석들 도 함부로 대하지는 못했지. 말하자면 긴장은 남아있지만 평형은 유지되 는, 그런 상태가 된 거라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케르는 사람이 바뀌었지. 아무리 능력이 뛰어난 검사라고 해도 자이벌이나 귀족들의 힘 앞에서는 아무 소용없다고 생각하게 된 거라네. 그래서 아케르는 사람들 을 모아 일하기를 거부하는 식의 테이르가 썼던 싸움의 방식을 버리고 용 병단을 만들게 된 거지. 용병단을 키워 귀족들보다 강한 힘을 가지게 되 면 그 힘으로 귀족들을 누른다... 이게 그날 이후 가지게 된 아케르의 생 각이라네. 나하고는 달랐지. 나는 사람들을 모아 귀족들에 대항하고, 그 러다 보면 더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사람들의 힘으로 결국 귀족 제도 자체를 없앤다는 게 내 생각이었지. 아니 그게 바로 테이르의 생각이었 지" 라이짐은 미하엘의 말에 반박하고 싶었지만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몰라 그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두 생각 사이의 차이점이 뭔지 라이짐으로서는 알기 어려웠다. "죽어서 영원히 산다. 나는 이 말이 마음에 들었어. 이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그날 테이르와 함께 죽어간 사람들을 헛되게 한다는 생각이 들 뿐 이었네" "패배를 상징으로 삼는다는 건 결국 패배를 인정한다는 말 아닌가?" "글쎄. 귀족을 힘으로 억누른다면 그게 결국 뭘 말하는 걸까. 새로운 귀족의 탄생을 뜻하는 건 아닐까?" 재판 날 보였던 당차고 단호한 주장과는 달리 미하엘은 이렇게 말하고 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때문인지 라이짐도 더 이상 뭐라고 말하기 가 쉽지 않았다. 그냥 이 정도에서 멈추는 편이 좋아. 반란군의 두목과 더 이야기 해 봐야 얻을 수 있는 건 없지. "자네는 정말이지 좋았던 시절의 아케르를 보는 느낌이 들어. 그 때의 아케르는 순수하고 열정적이었고, 또 강했지. 꼭 자네처럼 말이야" 라이짐은 대꾸하지 않았다. 미하엘은 다시 한 번 라이짐이 받아들이기 힘든 미소를 지었다. 이번에는 그 미소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차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미하엘의 미소는 따뜻했다. 그래서 라이짐은 받아들이기 가 힘들었던 것이다. "간수가 올 때가 됐는데... 식사 시간은 멀었나?" 라이짐은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는 적으로 맞서 싸운 상대였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미하엘이 그다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적은 단순히 적이라고만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적에게도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고 피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아무도 죽일 수 없다. 적은 오직 적일 뿐이라고 생각해야만 한다. 그래야 내 가족과 친구, 그리고 내 피를 지킬 수 있는 법이다. 라이짐은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았다. "하지만 이제 아케르는 변했어. 이제 하잔을 거점으로 삼았으니 각 용 병단 지부를 불러들일 걸세. 이미 그렇게 했나? 이 안에 있으니 자세한 건 모르겠군. 하지만 예상할 수는 있지. 여기서 조직을 개편하고 이 기회 를 놓치지 않겠지. 아케르의 최종 목표는 타실의 국왕이야. 어쩌면 타실 을 쓰러뜨리고 자신이 새로운 국왕이 될 지도 모르지. 그걸 위해 스파일 과 일단 손을 잡을지도 몰라. 이런 싸움에서 적의 적을 친구로 만드는 것 이상 좋은 방법은 없으니까 말이야" "예언자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군. 그 목소리로 사람들을 선동했나?" 라이짐은 한 참을 듣다가 이렇게 한 마디 했다. 하지만 미하엘의 얼굴 에는 예의 그 받아들이기 힘든 미소만 흐르고 있었다. "예언자의 목소리라. 그렇지는 않을 걸세. 두고보면 알게 되겠지만, 그 저 앞뒤를 생각 해보고 판단하는 것 뿐이야. 자네도 앞으로 용병단에서 계속 일하려면 그런 능력도 길러야 해" 이제는 받아들이기 힘든 말까지 하고 있다. 라이짐은 어쩔 줄을 몰라하 면서 문 밖을 내다보는 시늉을 했다. 이제야 미하엘과 같은 방을 쓰게 된 게 칼을 잡지 못하게 된 것보다 더 큰 벌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도 어색한 순간이 더 이어지기 전에 간수가 음식을 가지고 나타나 주었 다. 식사를 가져온 건 건 훈련 동기인 하진이었다. "여, 라이짐. 잘 있었어? 오늘은 어제보다 낯빛이 더 좋은데. 이제 얼 마 안있으면 밖으로 나가게 될 거야. 하잔의 예쁜 아가씨들이 기다리고 있다고. 그때를 대비해서, 라이짐. 염색약이나 한 통 구해다 줄까?" 하진이 장사꾼처럼 이 얘기 저 얘기 늘어놓는 게 고마운 건 이번이 처 음인 것 같았다. 하지만 라이짐은 하진이 자신의 백발이 된 머리를 힐끔 힐끔 바라보는 시선이 여전히 낯설고 거북했다. 사방이 온통 고요한 밤이었다. 라이짐은 잠에서 깨어나 있었다. 잠에 취한 상태의 라이짐은 온통 어둠에 휩싸여 아무 것도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신세가 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실 감방이라고는 해도 천막과 다 른 점은 붉은 연금술사의 등이 없다는 점뿐이었다. 처음에는 이 어둠에 익숙해지기가 힘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별써 일 주일도 넘 게 이곳에서 잠을 자온 것이다. "미하엘. 미하엘" 꼭 꿈결처럼 미하엘을 부르는 소리가 문 밖에서 들려왔다. 라이짐은 자 신이 자고 있는 것인지 깨어있는 것인지 순간 혼란이 왔다. "미하엘. 일어나십시오" 이윽고 문이 열리고 누군가의 어두운 그림자가 나타났다. 문밖을 밝히 고 있던 연금술사의 등이 눈을 찔렀다. 라이짐은 꿈이 아니라는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지만 그 그림자의 주인이 바로 지다문 십부장이라 는 걸 알아차린 순간 일단 그냥 누워있기로 했다. 일단 무슨 일인지 상황 을 파악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다문. 무슨 일인가?" "모시고 가기 위해서 왔습니다" 미하엘을 타실로 압송하는 일의 책임을 지다문 십부장이 맡았는가 보다 싶었다. "벌써 그렇게 됐나? 이제 나도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군" "그게 아닙니다. 지금 밖에 마차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미하엘. 여기를 빠져나가는 겁니다" "탈출... 인가?" "저는 미하엘 님을 따르기로 결심했습니다" 탈출이라는 말에 잠이 확 달아나는 느낌이 들었다. 라이짐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적의 첩자인 모짤트를 그냥 보냈기 때문에 여기 들어온 라이짐이었다. 다시 한 번 적이 자신의 눈앞에서 사라지는 걸 볼 수는 없 었다. PRINTER/CAPTURE를 OFF 하시고 [ENTER] 를 누르십시오.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1262/11996 ━━━━━━━━━━━━━━━━━━━━━━━━━━━━━━━━━━━━━━━━ 제 목:[탐그루] 눈보라와 봄바람 115 관련자료:없음 19/19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2-08 00:21 조회:1627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라이짐. 가만히 있게" 지다문 십부장이 허리에 찬칼을 보여주면서 말했다. 라이짐은 일단 무 기가 될만한 게 없나 눈으로 찾아보았다. 하지만 눈 씻고 봐도 무기로 쓸 만한 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설마 타실에 끌려가서 개죽음 하실 생각은 아니시겠지요. 지금 빨리 나오셔야 합니다. 그게 하잔에서 죽어간 시민들을 위하는 일입니다" 미하엘은 고개를 한 번 끄덕 하더니 지다문을 따라 나섰다. 또 한 번 가만히 서서 적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는 수밖에 없는거가? "라이짐. 같이 가지 않겠나. 나는 자네가 아케르처럼 되는 걸 바라지 않아" 문 밖으로 나가다 말고 돌아서서 미하엘이 말했다. 여전히 미하엘은 받 아들이기 힘든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여기서 자네는 틀림없이 강해질 수 있어. 하지만 강해지는 목적이 약 자를 누르는 것이라면 귀족과 다를 것이 뭐가 있겠나" "귀족을 누른다는 점이 다르겠지" 라이짐 대답하자 지다문이 성큼 한 걸음 다가왔다. 라이짐은 지다문을 노려보며 물러서지 않았다. "그 마음 계속 가지고 있기를 바라네. 결코 또 다른 귀족이 되지는 말 게. 가능하다면...아케르에게도 그렇게 전해주게" 미하엘은 이렇게 말하고는 지다문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고 열쇠꾸러미가 짤랑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은 잠그지 말게" "하지만 저 친구가..." "아니, 괜찮아" 문은 잠기지 않았다. 하지만 라이짐은 문을 열고 나가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서서 닫힌 문만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오래 간 만에 바깥 공기를 마셔보니 속이 다 후련해졌다. 갑갑한 지하 감방에서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고 지낸 며칠간이 꿈결처럼 여겨졌 다. 아직 징계가 완전히 풀린 것은 아니었다. 아직 칼을 쥐어선 안 된다 는 조건하에, 라이짐은 감방 징계에서는 풀려났다. 미하엘의 탈출 사건은 아케르 단장님 선에서 어떻게 높은 사람들과 해 결을 본 모양이었다. 가끔 단원들 사이에서 이야기가 되기는 하지만 아무 런 후속조치도 취해지지 않았다. 어쩌면 아케르가 일부러 미하엘을 놓아 준 것이 아니냐, 미하엘에게 동정적인 지다문을 경비 책임자로 맡긴 게 그 증거 아니냐, 이런 소리도 있었다. 하지만 소문은 소문일 뿐이다. 이제 곧 여름이었다. 아직은 즐기기에 딱 좋을 만큼 따사로운 햇볕이었 다. 싱그러운 바람이 라이짐의 머리칼을 날리며 지나갔다. 이렇게 평화로 운 하잔 시를 걷고 있자니 언제 이곳에서 전투가 있었는가 싶었다. 언제 이곳에서 미하엘과 맞서 싸웠던가 싶었다. 언제 이 길이 피로 물들었던가 싶었다. 이제 기운을 차려야 한다. 앞으로 어떤 전투가 나를 기다릴지 모 르지만 여기서 축적한 힘으로 다음 전투를 준비해야 한다. 라이짐은 생각 했다. 시내를 돌아다니는 사람은 둘 중 하나였다. 칼을 찬 계엄군과 칼을 차 지 않은 시민. 라이짐은 누가 보아도 특이한 존재다. 가끔 길가는 사람들 이 라이짐을 힐끗 힐끗 쳐다보았다. 라이짐은 모두들 자신의 흰머리를 보 고 있는 것 같아 어색하게 사람들의 시선을 피했다. 아마 용병단의 군복 이 분명한데 칼을 차고 있지 않기 때문에 날 보고 있는 걸 거야. 시민들은 칼을 찬 사람을 보면 일단 주눅이 들고 있었다. 단원들이 옆 을 스치면 시민들의 시선은 바닥으로 내려갔고 걸음도 조심스럽게 옮기곤 했다. 계엄군 몇몇이 과일 가게 앞에서 상인에게 뭔가 묻고 있었다. 험악한 인상의 단원들이었다. 어디 소속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낯이 설었다. 상점 주인은 연신 고개를 조아리다가 사과가 가득 담긴 봉지를 내밀었다. 그러 자 계엄군들이 뭐라고 왁자지껄 떠들며 사과를 씹어 먹기 시작했다. 라이 짐은 탐그루에서 보았던 자치대원들이 했던 일이 떠올랐다. 저런 짓은 귀 족의 개들이나 하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 달려가 뭐라고 해 주고 싶었지만 라이짐에게는 칼이 없었다. 문득 미하엘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강해지는 목적이 약자를 누르는 것이라면 귀족과 다를 것이 뭐가 있겠 나' 라이짐은 고개를 저었다. 저들에게 저런 행동은 필요하다. 다음 전투를 위해서. 더 큰 승리를 얻기 위해서. 어쩌면 귀족 없는 세상이 오면, 저 상인은 저들에게 감사를 해야 할 것이다. 라이짐은 이렇게 생각했다. "반란군이다!" 누군가가 외쳤다. 반사적으로 허리춤에 손이 갔지만 칼은 없었다. 라이 짐은 일단 물러서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했다. 사내 하나가 황급히 뛰어가고 있었다. 시민이 분명하지만 손에는 긴칼 이 들려 있었다. 뒤를 몇 명의 동료들이 쫓고 있었다. 그 중 하나는 낯익 은 얼굴, 떠버리 하진이었다. "라이짐! 위험해! 녀석 칼을 가졌어!" 황급한 상황이지만 친절하게 하진이 설명ㄳ다. 라이짐은 바닥을 뒹굴고 있던 주먹만한 돌을 집어 사내에게 던졌다. 돌은 칼을 들고 달리던 사내 의 얼굴로 정확하게 날아갔다. 하지만 사내는 칼로 돌을 퉁겨 내었다. 예 상 밖의 솜씨였다. 사내가 라이짐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라이짐이 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 다는 걸 알고 인질로 삼으려는 생각이 분명했다. 죽을 수는 있어도 동료 에게 피해를 줄 수는 없다. 라이짐은 순간적인 판단을 내리고 오히려 사 내 쪽으로 달려들었다. 예상 밖의 행동에 사내가 당황하는 사이, 라이짐 은 사내를 밀쳐내었다. 하지만 사내의 힘은 라이짐보다 강했다. 라이짐이 전력을 다해 부딪쳤지만 사내는 그저 멈추어 섰을 뿐, 충격을 받은 듯 보 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라이짐이 시간을 번 틈을 타 동료들이 사내를 에워쌌다. 라이짐 도 돕고 싶었지만 그저 바라볼 수밖에는 없었다. 라이짐까지 계엄군은 다섯이었다. 게다가 아까 상점에서 사과를 빼앗아 간 친구들까지 가세하자 이제 사내는 열 명을 상대해야 했다. 하지만 사 내는 포위 당하기 전에 벽에 등을 기댔다. 열 명이라고는 하지만 한 번에 서너 명 이상 공격하기는 어려운 형국이었다. 사내가 먼저 칼을 휘둘렀다. 빠르고 정확한 솜씨였다. 열 명의 계엄군 이 밀리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으악!" 사과를 씹던 친구가 오른 팔을 잡고 뒤로 나동그라졌다. 팔에서 핏줄기 가 뿜어져 나왔다. 이어서 두 친구가 어깨와 배를 움켜잡고 쓰러졌다. 라 이짐은 달려가 사과를 씹고 있던 친구가 떨어뜨린 칼을 잡았다. 그 친구 의 오른 손은 아직도 싸우고 싶다는 듯 칼자루를 꼭 붙들고 있었다. 라이 짐은 손을 치워내고 칼을 잡았다. 징계중이라는 건 생각하지 않았다. 이 건 실전이다. 이건 전투다. 칼을 쥔 라이짐의 손이 이상하리만치 침착하 게 움직이고 있었다. "라이짐!" 누군가 라이짐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라이짐은 돌아보지 않았다. 지 금은 더 이상 희생자가 나오지 않도록 하는 게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모두 물러서! 왜 그렇게들 허둥대는 거야!" 라이짐이 이렇게 소리쳤다. 다들 움찔하며 물러섰다. 칼을 든 사내는 도대체 무슨 일인가 하는 눈으로 라이짐을 바라보았다. "하진! 오른 쪽을 맡아!" 라이짐은 이렇게 소리치며 들고 있던 칼을 집어던졌다. 칼을 던지리라 고는 상상도 못한 사내가 칼을 퉁겨내기 위해 칼을 휘두르는 순간 빈틈이 생겼다. 하진의 칼이 사내의 겨드랑이를 베고 지나갔다. 피가 솟으며 사 내의 칼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러자 모두 죽일 기세로 사내에게 달려들었 다. "잠깐!" 라이짐이 외치는 소리에 다시 한 번 다들 멈칫하였다. "죽이지는 말자" "이 자식이 내 전우의 손을 베었어!" 누군가 라이짐의 말을 받아쳤다. "이 친구 목을 벤다고 해서 떨어진 손이 붙지는 않아" 라이짐은 이렇게 말하면서 떨어진 사내의 칼을 집어들었다. "당장 죽이는 것 보다 일단 살려두고 얻을 수 있는 것은 다 얻은 후 죽 인다. 그게 오히려 네 친구의 잘린 손에 대한 댓가를 얻을 수 있는 방법 아닐까? 라이짐의 말에 다들 수긍하는 눈치였다. 어느 사이 몰려든 구경꾼들이 뭐라고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자. 돌아가시오. 이제 구경거리는 다 끝났으니까" 라이짐이 말했다. 라이짐이 집어든 칼을 머리 위로 들며 날카로운 눈초 리로 한 번 노려보자 사람들이 흩어졌다. "라이짐. 너 머리만 변한 게 아니라 사람도 변했구나" 붙임성있게 하진이 라이짐에게 농담을 건넸다. 라이짐은 그런 하진이 싫지 않았다. 아니, 자신을 무슨 괴물 보듯이 피하는 단원들에 비한다면 하진은 오히려 고마운 축에 들어갔다. 흩어지고 있는 군중들 사이에서 클클클 하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라이 짐은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예전에 수르카와 한 번 본 적이 있는 노인 이었다. "클클클... 많이 배웠군. 머리가 헛으로 샌 건 아닌 모양이야. 클클 클" 여전히 기분 나쁜 음성이었다. "클클클. 어쩌면 전설의 백발 영웅, 북쪽의 눈보라인지도 모르겠어, 클 클클. 내가 사람은 제대로 보았는지도..." 동료들이 쓰러진 사내를 붙잡고 다친 단원들을 수습하는 동안, 라이짐 은 사라지는 노인의 뒷모습을 멍하니 지켜보고 서 있었다. "자네, 생각보다 무모한 데가 있군. 나이에 걸맞지 않게 말일세" 타호루의 천막에 불려간 라이짐은 자리에 앉아 가만히 타호루의 말을 듣고 있었다. "칼을 쥘 경우 목이 베어질 거라는 거 알고 있었나?" "단장님께 벌써 답변한 내용입니다. 당시는 전투 상황이었습니다" "아, 그래. 나는 지금 자네를 비난하려고 하는 게 아니야. 오히려 자네 의 행동은 칭찬 받아 마땅하지. 배우지 않았나. 급박하게 바뀌는 전투 상 황에서 원칙만을 지키려고 하는 건 멍청한 짓이라는 걸" 타호루는 이렇게 말하면서 라이짐의 주위를 빙빙 돌았다. 라이짐은 시 선을 타호루에 두지 않고 눈앞의 책상에 두려고 노력했다. "하잔의 시민들이 자네를 뭐라고 부르는지 아는가? 백발의 영웅, 북쪽 의 눈보라라고 한다네" "들은 적이 있습니다" 타호루가 등뒤에서 물었지만 나는 앞을 보고 대답한다. "자네가 정말 백발 영웅이라면... 나는 확인해 보고 싶네. 전설을" 라이짐은 수르카가 용병단을 떠난 이유가 전설을 확인해야 한다는 라스 폼의 말이었음을 상기했다. 불쾌했다. 그때처럼 말이다. 아케르의 명령으 로 까마귀의 집 벌판에 가기는 했지만 별로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라이 짐은 차라리 수르카가 그곳으로 가지 않기를 바랬다. 물론 결국에는 다 잘 되긴 했지만. "이런 것 본 적 있나?" 아무 장식도 없는 낡은 반지를 내밀면서 타호루가 말했다. 라이짐은 타 호루의 말에 따라 반지를 꼈다. "이렇게 말해보게. 승리는* 우리의* 것이다*" "승리는* 우리의* 것이다*" "아니, 그렇게 심드렁하게 말고. 승리하고 싶지 않나? 우리가 귀족들을 꺾고 대륙의 강자가 되는 걸 바라지 않는가?" 타호루의 말에 라이짐은 숨을 가다듬고 다시 한 번 말했다. "승리는* 우리의* 것이다*" 그러자 눈앞에 부연 사람의 영상이 나타났다. "오... 과연...! 에질리 오랜간만이야!" 타호루가 과장된 음성으로 외쳤다. 그러나 에질리라 불리운 반지의 정 령은 타호루의 말을 싹 무시하고 라이짐을 향해서만 시선을 보내고 있었 다. 라이짐은 가만히 타호루를 보고만 있었다. 정령은 전에도 본 적이 있 었다. 하지만 신기하기는 아자닌을 보았을 때나 마찬가지였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1263/11996 ━━━━━━━━━━━━━━━━━━━━━━━━━━━━━━━━━━━━━━━━ 제 목:[탐그루] 눈보라와 봄바람 116 관련자료:없음 18/18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2-08 00:21 조회:1523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라이짐. 물어보게. 에질리에게" 타호루가 말하지만 라이짐은 무슨 의미인지 알지 못해 가만히 있었다. "자네가 진정한 전설의 주인공인지 말해 달라고 해" "에질리, 내가 정말 전설에서 말하는 바로 그 사람인가?" 라이짐이 부연 형상에게 물었다. "하나는 북쪽의 눈보라처럼 오고 또 하나는 남쪽의 봄바람처럼 온다" 에질리는 낮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역시. 에질리는 문제가 많아. 이럴 때 아자닌이 내 손에 있었더라 면...!" 타호루가 분하다는 듯 말했다. "뭘 알고 싶으신 겁니까?" "내가 이 반지를 손에 얻었을 때 들은 얘기가 있네. 진정한 반지의 주 인이 나타나면 분명히 알게 될 거라고 했지. 이 반지를 주었던 사람이 말 일세. 하나는 북쪽의 눈보라처럼, 하나는 남쪽의 봄바람처럼 온다... 무 슨 얘기인지는 그 때도 모르고 지금도 모르네. 확인해보고 싶었지만 아직 은 무리인가 보군" 백발 영웅이니, 북쪽의 눈보라니 하는 말에 라이짐은 별로 관심이 없었 다. 원래 소문이나 전설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 편이기도 했지만, 지금 라이짐의 관심사는 오로지 다음 전투를 준비하고 훌륭한 용병이 되는 것 뿐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하나 분명한 게 생겼군. 자네가 이 반지의 다음 주인이라는 거 말일세" 라이짐은 손가락을 바라본다. 난생 처음으로 반지가 끼어져 있는 손가 락을 본 라이짐은 반지를 낀 손이 자신의 것이 아닌 듯 여겨졌다. "이 반지에는 마력이 있네. 이 반지를 끼고 있는 동안 정령은 반지를 낀 자의 소원 세 가지를 들어주지. 그리고 다음 반지의 주인이 나타날 때 까지 봉인되어 있다네. 이제 자네가 정령을 깨웠으니, 자네가 반지의 주 인일세" 세 가지의 소원을 들어준다는 말에 라이짐은 호기심이 생겼다. 정말 소 원이 이루어 진다면 뭘 부탁할 것인가. 복수? 아니, 그건 너무 쉽다. 모 든 귀족을 없애달라는 부탁을 해 볼까? 그런 어려운 소원도 가능할까? 그 렇다면 어머니를 살려달라는 부탁도 가능한 건가? "잠깐. 하지만 하나 해 줄 얘기가 있네. 소원은 함부로 빌어서는 안되 네" 타호루가 말했다. "반지를 끼고 있는 동안, 자네는 분명 자네가 소망하고 있는 바 세 가 지를 이루게 될 것일세.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말이야. 모든 일에 는 순리가 있는 법. 이루어 질 때가 되면 모든 소원은 다 이루어 질 거라 네. 다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타호루는 말하기 꺼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소원이 이루어지는 순간, 자네는 소원에 상응하는 것을 잃게 될 거라 는 거지. 그것은 대 자연의 섭리네. 한 생명이 태어나는 순간, 고통과 피 가 뒤따르고, 평화가 찾아오기 위해선 한 번의 전쟁이 있어야 하는 것처 럼 말일세" 타호루의 말이 불길한 예감으로 다가왔다. 라이짐은 반지를 빼서 당장 타호루에게 되돌려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니 겁내지 말게. 잃는 것 없이는 얻는 것도 없는 법 아니던가. 고 난을 겪지 않고서는 안락한 생활을 누릴 수 없는 것처럼 말일세. 불행을 겪지 않고서 행복을 누릴 수 없는 것처럼 말일세" 타호루는 이렇게 말하고는 왠지 섭섭하다는 표정이 되었다.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었네. 이 반지를 내 일부라고 생각 했었네. 이제 는 자네의 반지이지만 말이야" "소원은 어떻게 빌면 됩니까?" "자네가 원하는 것을 반지가 찾아낼 걸세. 그저 신경 쓰지 말고 기다리 기만 하면 돼. 소원이 이루어지는 순간, 자네는 알 수 있을 테니까 말일 세" "타호루 님은 어떤 소원을 비셨습니까?" 내가 타호루에게 묻자 타호루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저 지나간 일이라고만 알아두게. 나는 그릇된 생각으로 일생의 기회를 망쳤어. 자네는 그런 일을 겪지 않게 되길 바라네. 반지의 정령은 주인을 따르는 종이지만, 진정으로 반지를 소유하려는 순간이 정령이 반 지의 주인을 배반하는 순간이 되기 쉬우니까" 애매한 말로 넘어가려는 걸 보니 어리석은 소원을 빌었겠구나 싶었다. 라이짐은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 라이짐은 에질리를 바라보았다. 반 지의 정령은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아까부터 계속 자신을 뚫어져랴 바라 보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또 다른 일은 할 수 없습니까? 아자닌처럼 과거의 마물들에 대한 지식 이 있다던가..." "이 반지의 정령은 자신을 돌아보게 해 주지. 이야기를 나누어 보면 알 걸세. 처음에는 잘 못 알아들을 수도 있네만... 곧 익숙해 질 걸세. 나도 그랬으니까. 별로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타호루는 이렇게 말하고는 라이짐에게 천막으로 돌아가 보라고 말했다. "참 한가지. 반지가 봉인되기 전에 에질리와 얘기를 많이 나누어 두게. 반지를 부르는 주문은 '승리는 우리의 것이다' 일세. 잊지 말고 자주 부 르게. 처음에는 좀 익숙하지 않겠지만 자주 만나다 보면 여러 가지를 알 수 있을 걸세. 자네 자신에 대해서, 또 세상에 대해서 말이야" 라이짐은 목례를 하고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외롭지 않을 걸세. 아무도 없는 밤중에 홀로 일어난 기분이 들 때, 주의의 누구도 믿을 수 없어 괴로울 때, 죽음으로 보낸 사 람이 그리워 질 때, 에질리를 부르게. 아마 힘이 되어 줄 걸세" 천막을 나서는 라이짐에게 타호루가 말했다. 라이짐은 반지를 낀 손이 꼭 무슨 황금 덩이를 든 것처럼 무겁다는 느낌을 받았다. 라이짐이 나가 자 에질리가 뒤를 따랐다. "내 소원이 이루어 질 수 있을까?"" 라이짐이 에질리에게 물었다. "주인님께서 진심으로 원하시는 것이 있다면 반드시 이루어질 겁니다. 저는 그저 그 과정을 지켜 볼 뿐입니다" 정령의 목소리는 마치 마른 나뭇가지를 스치는 바람이 내는 소리처럼 음산하기만 했다. 라이짐은 쓴웃음을 지었다. 언젠가 수르카가 반지의 정 령은 답답하다는 말을 했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라이짐은 수르 카의 심정을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 네가 사라지는 순간은 언제지?" "말씀만 하시면 됩니다" "그래. 그럼 사라져. 내가 다음에 부를 때까지" 말이 끝남과 동시에 에질리는 사라져 버렸다. 라이짐은 반지를 바라보 았다. 세 가지 소원이라. 정령은 진심으로 원하면 소원은 이루어진다고 했다. 라이짐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별빛이 유난히도 반짝이는 밤하늘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라이짐은 반지를 끼었을 때, 불길한 예감이 들었던 것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천막으로 향했다. 연금술사의 등이 바람 에 흔들렸다. 아케르 용병단의 개편식이 하잔 시 중앙 광장에서 성대하게 열렸다. 중 앙 광장에 도열해 있는 용병단원들을 시민들이 구경하고 있었다. 몇몇은 아무 생각 없이 구경거리 났다는 식으로 용병단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대 부분의 시민들은 속으로 이를 갈고 있을 거였다.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말이다. 하지만 날카로운 창과 칼로 무장한 병사들에게 시민들은 욕설은 커녕 성난 눈길 한 번 주지 못하고 있었다. 적어도 나와 있는 시민들은 말이다. 라이짐은 정복을 입고 맨 앞줄에 서 있었다. 이 개편식은 하잔 토벌 작 전의 성공을 축하하는 공식적인 축제의 자리임과 동시에 지금까지 나뉘어 있었던 용병단의 지부가 하나로 합쳐지는 걸 자축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라이짐에게 가장 기쁜 일은 사실 하잔 토벌작전의 승리도, 부대 개편도 아니었다. 가장 기쁜 일은 이번 개편식에서 정식으로 십부장의 자리에 오 르게 되었다는 거였다. 그것도 지금까지 아케르 단장 직속 십부 중 일부 로 존재했던 검은 엘프 십부의 십부장으로 말이다. 이름은 '라이짐의 눈 보라 십부'가 되었다. 아케르가 직접 지은 이름이었다. 지금까지 어둠 속 에 가려져 정보를 모으는 일과 은밀한 작전만을 수행해 왔던 검은 엘프 십부를 지휘하게 되다니, 라이짐으로서는 정말 꿈만 같았다. 라이짐은 설 래임으로 가슴이 벅차 오르는 것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개편식에서 지금까지 다섯 개로 나누어져 있던 지부는 하나로 묶였고, 각각의 지부는 백부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사실 이 개편을 두고 말들 이 많았다. 이러한 개편은 십부장들의 권위를 떨어뜨리고 자율성을 강조 해 온 아케르 용병단의 전통에 위배되는 것이라는 의견들이 있었던 모양 이었다. 하지만 아케르는 예의 그 '결정은 내려졌다' 한 마디로 반대의견 들을 잠재우고 개편을 단행했다. 라이짐은 식장을 바라보면서 미하엘이 했던 예언자의 말투를 떠올렸다. 과연 그의 말대로 개편은 이루어졌다. 이제 진정으로 아케르 용병단은 대 륙의 패권을 행해 움직이기 시작하는 건가. 라이짐은 이제 일어날 일들에 대한 기대감이 마음에 가득차는 것을 느꼈다. 라이짐이 직속 십부장으로 임명 된 일은 아주 예외적인 일이었다. 나머 지 직속 십부는 공개도 되지 않은 마당에 검은 엘프의 십부를 공개적으로 거느리게 된 점도 그렇고, 다른 십부장들에 비래 너무 어린 나이에 십부 장이 되었다는 점도 그랬다. 어찌되었건 이제 개편식이 끝나면 라이짐은 아케르 용병단에서 가장 나이 어린 십부장이 될 것이었다. "...다음은 임명식이 있겠습니다" 다섯 명의 각 주둔지 선임 십부장들이 연단 위에 올랐다. 제일 처음은 라이짐도 알고 있는 발렌시아 십부장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연단에 오른 사람은 신다루 십부장이었다. "발렌시아 십부장을 제 일 백부장으로, 마사다 십부장을 제 이 백부장 으로, 제이슨 십부장을 제 삼 백부장으로, 미쥬 십부장을 제 사 백부장으 로, 그리고 신다루 십부장을 제 오 백부장으로 각각 임명한다" 아케르가 이들에게 백부장을 상징하는 칼을 나누어주는 것으로 임명식 은 마무리되었다. 간략하고 효율적인 것을 선호하는 용병단의 관례는 축 제의 날이라고 해도 예외가 되지는 않았다. 아케르는 훈시도 없이 그저 임명된 백부장들과 악수를 나누며 짧은 격려의 말을 전하는 것으로 끝냈 던 것이다. 마지막에 이름이 불리운 신다루 십부장의 이름을 듣자, 라이짐은 지다 문 십부장을 떠올렸다. 저 자리에는 지다문이 섰어야 했다. 하지만 지다 문은 스스로 자신의 지위를 버리고 떠났다. 그 사실이 라이짐을 조금은 불쾌하게 만들기도 했지만, 어찌되었건 이 들은 이제 아케르 용병단 최초의 백부장이 되었다. 라이짐은 그들이 박수 를 받으며 연단에서 내려오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음은 나로구 나. 라이짐은 긴장으로 입술이 마르는 걸 느꼈다. 혓바닥으로 자꾸 입술 에 침을 발라보았다. 입술은 꼭 말라붙은 나무 껍질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다음은 특별 임명입니다. 라이짐. 앞으로" 라이짐은 연단에 올랐다. 아케르 용병단윈 전원이 라이짐을 바라보았 다. 라이짐은 도저히 단원들 쪽으로는 눈길도 돌릴 엄두가 나질 않았다. 중앙 광장을 메운 단원들의 모습은 마치 거대한 벌집같이 보이고 있었다. 라이짐은 당장이라도 저 벌집에서 벌들이 날아와 자신을 쏠 것 같은 착각 에 빠졌다. 당장이라도 누군가 네 까짓게 무슨 십부장이냐고 당장이라도 시비를 걸 것만 같았다. 아니면 누군가 욕설을 퍼부으며 자신에게 달려들 것 같기도 했다. 단원들의 표정을 읽을 수가 없다는 게 라이짐으로서는 겁이 났다. "라이짐 단원을 새로 편성된 눈보라 십부의 십부장으로 임명한다" 아케르는 간단하게 선언하고 라이짐에게 십부장을 뜻하는 칼을 내밀었 다. 라이짐은 떨리는 손으로 칼을 받아들었다. "라이짐. 앞으로 많은 활약을 기대하겠네" 아케르가 라이짐에게 악수를 청했다. 라이짐은 당장이라도 숨이 막혀버 릴 것 같은 느낌을 지우려고 애쓰면서 아케르의 손을 맞잡았다. 그때 박 수 소리가 들려 왔다.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라이짐은 그제야 도열해 있 는 병사들을 바라볼 수 있었다. 여전히 표정을 일일이 읽을 수는 없었지 만 다들 자신이 십부장이 된 것을 환영해 주는 것만 같았다. 라이짐은 이렇게 해서 아케르 용병단 사상 최연소 십부장이 되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1264/11996 ━━━━━━━━━━━━━━━━━━━━━━━━━━━━━━━━━━━━━━━━ 제 목:[탐그루] 눈보라와 봄바람 117 관련자료:없음 20/20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2-08 00:22 조회:1625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축제의 불꽃이 중앙 광장에 피어오르고 있었다. 하잔 시에서 제공받은 음식과 술이 여기 저기 넘칠 만큼 넉넉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시내 술집 이란 술집에서 다 불러 모른 기생들과 그래도 그 수가 모자라서 탐그루와 베논에서 부른 기생들로 하잔 중앙 광장은 혼란스럽기까지 했다. 라이짐 은 오래간만에 보는 여자들의 모습에 정신이 아뜩해 졌다. 맥주 몇 잔 마 셔보기도 전에 말이다. 하지만 라이짐은 그 사이에 끼어서 즐길 수가 없 다. 이제 라이짐에게는 챙겨야 할 십부원들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부관으 로 있는 에이스, 그리고 나이스, 자이스, 바이스, 레이스, 조이스, 마이 스, 카이스. 라이스가 그들이었다. 에이스와 나이스는 이미 구면이고, 나 머지들도 그리 낯설지 만은 않았다. 검은 엘프 족은 다 비슷하게 생겼기 때문이었다. "왜 안 놀고 있어? 좀 마시고 놀아" "검은 엘프 족은 어울려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나이스가 말했다. 라이짐은 에이스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보통 때는 자유시간에 뭘 하면서 시간을 보내지?" "쉽니다. 이렇게" 에이스는 자리에 덜퍼덕 주저앉고는 눈을 감았다. 그러자 나머지도 그 렇게 했다. 라이짐은 순간 당황했다. 십부장 체면에 십부원들을 떠날 수 도 없었고, 그렇다고 십부원들이 하는 대로 따를 수도 없었기 때문이었 다. 저렇게 앉아 눈을 감고 있는 게 쉬는 거라니. 정말 멍청한 짓이라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어쩔 수는 없었다. 자유시간에는 무엇을 하던 상관하 지 않는 용병단의 관습 때문이었다. 축제의 불꽃 아래 춤추고 노래하는 단원들의 모습이 정겹게 여겨졌다. 라이짐은 문득 저들이 이제 진정한 자신의 전우이고 가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라짐의 얼굴이 한 순간 떠올랐지만 애써 지워버렸다. 잘 있을 것 이다. 편지도 받아 봤으니. 하지만 조만 간에 한 번 만나보기는 해야 할 텐데. 언제 시간이 나면 휴가라도 신청해야 할텐데. 하지만 십부장이 된 이상 라이짐에게는 해야 할 일이 더 많아 질 게 분명했다. 축제를 구경하던 시민들이 라이짐을 신기하다는 듯한 눈으로 바라보았 다. 라이짐은 시선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서 그냥 눈을 모닥불 쪽으 로 돌려버렸다. 그러자 소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사람이야?" "생각 보다 너무 어린데?" "아케르 용병단에서 가장 어린 십부장이래요" "역시 다르긴 달라. 좀비들을 한 칼에 물리쳤다고 하잖아" "괴물일 거야, 틀림없이" "쉿, 듣겠어" 라이짐을 두고 하는 말들이었다. 그 백발 영웅이 어쩌고 하는 얘기인 모양이었다. 라이짐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나를 두고 하는 말인가?" 라이짐은 허리에 찬 십부장의 칼자루가 든든하게 여겨졌다. "저, 그게 아니라..." "백발영웅? 도대체 그게 무슨 전설인가?" 라이짐은 일부러 힘을 주어 이렇게 물었다. 궁금하기도 하거니와 시민 들 앞에서 우습게 보이고 싶지도 않아서였다. "그러니까... 마칸의 강림 때... 백발의 영웅이 나타나서 사람들을 구 원할 거라는..." "그런 전설이라면 집어치워. 마칸을 막는 일이 한 사람의 힘으로 되는 일이 아니지 않는가? 지금은 축제다. 즐기고 싶다면 저 안쪽으로 가고 아 니라면 여길 떠나도록" 라이짐은 이렇게 말하고는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마칸의 강림이라. 지 금 라이짐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게 여겨지는 말이었다. 당장 눈앞에 있 는 십부원들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도 모르겠는 판국인데 말이다. "여어, 라이짐!" 훈련 동기 하진이었다. 나는 반갑게 하진을 맞았다. "십부장 된 거 축하한다. 그렇다고 나한테 명령 내릴 생각은 하지 마. 작전 중이 아니라면 너한테 명령받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으니까" 하진은 정말이지 조금도 거리낌없이 라이짐을 맞아 주었다. 라이짐은 그런 하진이 고마웠다. 사실 돌이켜 보면 라이짐의 용병생활은 최악이라 불리울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몇 번의 전투를 겪으며 전우들은 모두 죽었 다. 동기들도 죽거나 용병단을 떠나 이제 남아 있는 동기라고는 하진 정 도뿐이었다. "힘들지, 요즘" 라이짐은 뜬금없이 하진에게 이렇게 물었다. "나? 아니. 뭐가 힘들어. 팔아야 할 물건들이 좀 쌓여있긴 하지만 말이 야. 힘든 건 너 아니야?" 하진은 아무렇지도 않게 별 생각 없이 대꾸했지만 라이짐의 마음은 그 렇지 못했다. 라이짐은 하진의 대답을 듣는 순간 그 질문이 바로 자기 자 신에게 던져진 것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아냐. 내가 뭘..." 라이짐은 이렇게 대답은 했지만 마음 한구석 답답한 것이 맺혀 있는 듯 한 느낌까지 지워버릴 수는 없었다. "나도 알 건 다 알아. 사람들이 널 이상하게 보잖아. 너, 마음 편하게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나 말고 또 있어?" 그렇게 묻지 않아도 그건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이제 라이짐에게 남아 있는 동료는 정말 찾기 힘들었다. 밍밍의 십부원들은 다 죽어버렸 고, 신다루의 십부원들과는 친해질 기회도 없었으며, 동기 중에 남은 것 은 하진 하나. 하잔 작전 이후, 용병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떠나 버린 동 기도 있었다. 그렇게 약해 빠져서야 어디서도 견딜 수 없을거라고 라이짐 은 속으로 생각했지만. "게다가 이제 십부장의 자리까지 올랐으니 더 힘들 거야. 아마 질투하 는 사람도 있을 거고, 또 시기하는 사람도 있을 거고 말이야. 오다가 들 었는데, 뭐 기분 나빠하지는 마, 널 좋지 않게 보는 단원들도 꽤 있는 모 양이더라구" 라이짐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가 하얗게 된 것을 두고 별의 별 말들이 많은 모양이었다. 라이짐은 대충 알고 있었다. 전설의 영웅이라는 둥, 아케르가 점찍어둔 후계자라는 둥, 가까이 하는 사람들은 모조리 죽 는 다는 둥, 심지어는 마칸의 화신이라는 말까지 있다는 것을 말이다. "하진. 고맙긴 하지만... 넌 왜 나한테 잘 해주는 거야?" "글쎄. 내가 잘해줬나? 난 그냥 그대론데? 내가 보기에 넌 변한 거 하 나도 없어. 내 눈에는 그저 탐그루 출신 동기로밖에 안보여. 머리? 하하 하. 신경쓰지 마. 머리가 하얗게 세는 게 그리 신기한 일은 아니야, 나한 테는. 난 국경출신이라고. 잊었어? 난 바바 족도 봤어. 바바 족하고 손짓 발짓으로 얘기하는 장로의 모습도 봤고, 바바 족이 들고 다니는 괴상하게 생긴 창도 봤지. 죽은 사람의 창자를 끄집어내는 바바 족도 직접 봤다고. 게다가 국경지대에는 얼마나 괴상한 일들이 많이 벌어지는 지 알아? 넌 말해줘도 믿지 않을 거야. 혹시 기회가 닿으면 물어보라고. 국경지대에서 근무하고 돌아온 병사들이 왜 미치는지 말이야. 하하하" 하진은 바바 족에게 가족이 몰살당했다고 라이짐은 알고 있었다. 하지 만 하진은 조금도 그 일에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바바 족의 이야기를 하 고 있었다. "고마워, 하진" 라이짐은 이렇게 말로라도 고맙다고 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아서 이렇 게 말했다. 하지만 하진은 어깨를 한 번 으쓱 하고는 말았다. "십부원들이나 소개 시켜 줘. 검은 엘프 족은 몇 번 보기는 했는데 얘 기해 본 적은 없거든" "그래" 라이짐은 하진에게 부관 에이스부터 시작해서 막내 라이스까지 순서대 로 소개시켜 주었다. 검은 엘프 족은 항상 순서대로 있기 때문에 얼굴이 다 비슷비슷하게 생기긴 했어도 그다지 어렵지 않게 소개시켜 줄 수 있었 다. "귀가 뾰족하네" 하진이 말했다. 당연하지 않아? 검은 엘프 족이니까 그렇지, 하고 라이 짐은 말하려고 했지만 그만 두었다. 하진에게는 조금이라도 싫은 소리를 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 같아서는 쓸데없는 게 뻔한 부적 쪼가리라도 하 진이 팔려고 든다면 당장이라도 살 생각이 있었다. "이봐요, 에이스. 내가 좋은 모자를 하나 아는 데 살래요? 그 예쁜 얼 굴이 귀 때문에 이상하게 보이잖아요. 내가 가지고 있는 건 갈색 모자에 요. 누가 뭐라고 해도 검은 얼굴하고는 잘 어울리는 색이지요. 한 번 써 보면 남자들이 줄을 설 걸요?" 하진이 떠버리기 시작하자 에이스는 이상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하진을 바라보았다. "하진. 검은 엘프 족은 보수를 받지 않아" 라이짐이 설명해 주었다. 검은 엘프 족은 보수도 받지 않고, 아주 기본 적인 옷과 장비만을 제공받고 아케르 용병단에서 일하고 있다는 걸 말이 다. "원래 그런 종족이야, 검은 엘프 족은" "어쩐지. 내가 본 검은 엘프 족은 다 노예 신분이었어. 왜 그런가 그랬 더니 원래 그런 녀석들이었구만. 하긴, 누구든지간에 일단 주인으로 정해 지면 그 사람 말만 듣는다며, 검은 엘프 족은" 하진은 이렇게 말하고는 에이스 옆에 앉았다. "에이스. 혹시 예쁘다는 말 들어 본 적 있어요?" "지금 처음 듣는 말입니다" "오호. 이거 아무래도 인연인 것 같군요. 나도 누구보고 예쁘다는 말은 처음 해 보거든요? 어때요. 아주 바쁘지 않다면 저하고 춤이라도 한 번 추는 게?" 에이스는 라이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명령을 내려 달라는 표정이었 다. 라이짐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자신이 편하게 대할 수 있는 유일한 단원과 부하 사이에 누구를 택해야 하는 지 말이다. 하지만 곧 결론은 내 려졌다. "하진. 그만 둬. 에이스는 내 부하야" 라이짐의 말에 하진의 얼굴이 찡그려 졌다. 검은 엘프 족 하나에 뭐 그 리 신경을 쓰고 난리냐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라이짐으로서는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십부장이 된 지금의 라이짐에게는 누가 뭐라고 해도 자신 의 부하 보다 소중한 것은 없었다. 밤이 깊고 축제의 불꽃이 사그라들 무렵이 되자, 단원들은 마음에 드는 기생들을 하나 씩 끼고 천막이나 빈집으로 들어갔다. 하진도 어디서 구했 는지 기생 하나를 끼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술과 음식은 아직 좀 남아있었지만 라이짐은 술도, 음식도 별로 먹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십부장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별로 실감이 나질 않았 다. 라이짐은 축제의 불꽃아래 서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 다. 검은 엘프 족에게 악감정이 있어서 하는 생각은 아니지만, 어쩐지 검은 엘프 족은 사람 같지가 않았다. 아무리 사람처럼 생겼다고는 해도 말이 다. "여기 계속 있을 건가?" 위엄을 갖추려고 노력하면서 라이짐이 에이스에게 물었다. "명령하신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내 말은 이제 어디 가서 좀 쉬어야 되지 않겠냐는 말이야" "알겠습니다" 에이스는 일어나더니 나머지 여덟 명의 자매를 일으켜 세웠다. 그러더 니 여덟 명을 이끌고 어디론가 걸어가기 시작했다. "잠깐. 어디로 가는 거야?" "숲으로 갑니다" "숲? 팜 산맥 쪽인가?" 라이짐의 물음에 에이스가 고개를 끄덕인다. "거기에 너희들 숙소가 있나?" "예" "나는... 어쩌지?" 라이짐이 십부장으로 임명된다는 말을 들었을 때, 가장 걱정했던 부분 이 바로 이 부분이었다. 인간도 아닌 다른 종족을 어떻게 지휘해야 할 것 인가 하는 부분 말이다. 순무의 말에 따르면 검은 엘프 족은 일단 자신이 따르기로 되어 있는 사람에게 절대 복종하기 때문에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고는 했다. 라이짐도 그러러니 하고 넘어갔지만, 이건 좀 힘들겠다 싶었다. 순무는 또 모르는 것이나 필요한 것이 있으면 에이스에게 물어보 라고 했다. 에이스가 다 알아서 해결 해 줄 거라면서 말이다. "십부장 님께서는 숙소가 따로 있으시지 않습니까" 그러고 보니 까맣게 잊고 있었다. 오늘부터 라이짐에게도 개인 천막이 생겼다는 걸 말이다. "알았다. 내일 아침에 보고하도록" 라이짐은 이렇게 에이스에게 말했다. 에이스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팜 산맥 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라이짐은 에이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에이스가 완전히 어둠 속으로 사라진 다음에야 돌아섰다. 라이짐은 신다루의 십부에 있을 때 썼던 개인 사물함에서 물건들을 챙 겼다. 이제 이곳을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해졌다. 나는 십 부장이다. 라이짐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아직도 실감은 나지 않 았다. 자리에서 짧은 칼을 챙길 때, 라이짐은 눈물이 날 뻔했다. 칼집에 박혀 있는 시드의 귀가 탁하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라이짐은 맹세의 말을 다시 한 번 떠올려 보았다. 내 앞길에 축복이 가득하기를. 루비오 녀석에게도. 그래야 나를 다시 만날 때까지 죽지 않고 살아 있을 테니까. 라이짐은 이 렇게 중얼거리면서 눈물을 참았다. 짐을 싸고 있는 손에 잔뜩 힘을 주고 서 말이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1317/11996 ━━━━━━━━━━━━━━━━━━━━━━━━━━━━━━━━━━━━━━━━ 제 목:[탐그루] 눈보라와 봄바람 118 관련자료:없음 20/20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2-09 00:17 조회:1607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라이짐은 십부장에 임명된 게 그다지 좋은 일이 아니었다는 걸 며칠 지 나지 않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야말로 라이짐이 맡고 있는 눈보라 십 부의 십부장은 이름뿐인 십부장이었다. 하는 일이라고는 에이스의 보고를 정리해 회의 때 제출하는 것 말고는 일이라곤 없었다. 좀 심하게 말해서 아무 의견도 낼 줄 모르고, 아무 이의도 제기하지 않는 십부원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 말고는 할 일이 없었다. 이들은 훈련이 필요없었다. 라이짐이 보기에 검은 엘프 족은 타고난 정 보 수집가들이었다. 아케르에게 보고서를 올리면 아케르는 다시 수집해야 할 정보를 적어 라이짐에게 주었고, 라이짐은 그것을 다시 에이스에게 전 해주면 그만이었다. 그러면 에이스는 알아서 부하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케르가 필요로 하는 정보를 수집해 오는 것이다. 라 이짐은 검은 엘프들의 빠른 일처리 능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예를 들어 동타실의 교구에 대한 정보를 얻어 오는데 걸리는 시간은 불과 보름 남짓이었다. 라이짐은 나중에야 어떻게 그렇게 빨리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가를 알 수 있었다. 검은 엘프 족은 먼 곳에서도 말을 하지 않고도 의사 를 소통하는 능력이 있었다. 보통의 마법사들처럼 마법을 쓸 줄 아는 것 은 물론이고 마법사들끼리만 쓸 수 있다는 직접 소통이 가능한 거였다. 하지만 검은 엘프의 직접 소통은 거리에 제한을 받았다. 너무 먼 거리에 떨어져 있으면 소통이 불가능했다. 보름이라는 시간은 정보를 얻으러 가 는 시간과 직접 소통이 가능한 거리까지 돌아오는 시간의 합이었다. 하지만 검은 엘프 족은 빠른 정보 수집에 있어서는 거의 믿기지 않을 만큼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정보와 중요하지 않은 정보를 거의 구분하지 못했다. 라이짐이 십부장 직을 수행하기 시작 한 지 삼일 째 되던 날 에이스로부터 보고를 받으며 라이짐은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전날 아케르 단장이 요구한 정보는 최근 성황청의 동향 파악이었다. 에 이스는 성황청의 타실 교구와 자나크 교구, 그리고 스파일 교구에 각각 십부원을 파견하였다. 가장 먼저 도착한 것이 바로 자나크 교구에 파견 갔던 나이스였다. 나이스가 파악해 온 동향은 다음과 같았다. "자나크에 주둔하고 있던 리바르도 기사단이 궤멸 당한 이후, 자나크 교구는 새로운 기사단 창설을 위해 까마귀의 집 벌판에서 살아 돌아온 몇 몇 기사들을 교관으로 두고 새로운 기사들을 교육시키고 있습니다. 하지 만 그 속도는 대단히 느립니다" 이 정보는 상당히 유용한 것이었다. 당분간 자나크에서 성황청이 군사 적으로는 그다지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정보 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정보를 제외하고는 거의가 쓸모 없는 정보였 다. 자나크 교구의 식단이나 음식물 거래처, 혹은 쓰레기를 묻는 장소 따 위가 그것이었다. 그나마 기사단과 관련된 정보라고 내 놓은 것도 한심했 다. "새로운 기사단의 깃발을 만들기 위해, 성황청은 베논에 사는 장인 셋 을 불러왔습니다. 그들은 리바르도 기사단의 깃발보다 더 크고 더 화려한 깃발을 제작하기 위해 한 달간의 시간을 얻었습니다. 한 명의 장인은 깃 발을 만들고, 다른 하나는 깃발에 수놓을 장식을 고안하며, 나머지 하나 는 깃대를 만들고 있습니다" 이런 점이 눈보라 십부원들만 그런 것인지, 아니면 원래 검은 엘프 족 이 다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라이짐은 에이스의 보고를 꼼 꼼히 하나도 놓치지 말고 정리할 것을 명령받았다. 정보는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전체적인 맥락에서 중요하게 쓰일 수 있다는 거였다. 그래서 라 이짐은 오전 중의 대부분의 시간을 에이스의 보고를 받고 아케르에게 제 출할 보고서를 작성하는 데 사용해야 했다. 남는 시간은 거의 정식 주둔지가 된 시청에서 칼쓰는 연습이나 단검 던 지는 연습을 하면서 보냈다. 함께 이야기할 상대도 없었고, 사실 그렇게 이야기하고 싶은 상대도 없었다. 십부장이 된 이후 혼자 있는 시간이 많 아진 건 그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이 시간들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막막 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나름대로 시간을 보내는 데 익숙해졌다. 에 이스의 보고를 받는 일과 저녁에 아케르에게 보고하는 일만 잊지 않는다 면 나머지는 완전한 자유시간인 것이다. 그런데 보고를 받기 시작한지 며칠 되지 않아서, 라이짐은 정보라는 것 에 흥미를 느끼게되었다. 가만히 앉아서 바르도 대륙이 돌아가는 형국을 한 눈에 볼 수 있다는 게 상당히 즐거운 일이라는 걸 알아가게 되었다는 말이다. 라이짐은 오전의 한 때를 시청의 옥상에서 정보를 정리하면서 보 냈다. 특히 에이스의 보고를 받기 시작한 지 며칠 되지 않아서 탐그루의 소식을 에이스에게서 보고 받았을 때, 라이짐은 거의 흥분에 가까운 감정 을 가지게 되었다. 거기에는 오우거들이 탐그루에 출몰하고 있다는 소식 이 적혀 있었다. 라짐. 라이짐은 다급한 마음으로 오후의 보고 시간이 빨리 오기를 기다렸다. 가능하다면 탐그루로 직접 달려가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에 라이짐은 아 케르에게 제출한 보고서를 정리하면서도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탐그루라" 아케르는 나즈막하게 말했다. 뭔가 생각에 잠겨 있다는 증거였다. "빨리 손을 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스파일과도 약속한 부분이고 말입니다" 타호루가 말했다. 라이짐은 아케르의 천막에서 타호루, 순무와 함께 아케르에게 에이스로 부터 전달받은 정보를 보고하고 있었다. "스파일과의 약속은 하잔을 지킨다는 부분이었습니다. 탐그루까지 책임 진다는 건 아니었습니다" 순무의 설명을 듣자, 라이짐은 아케르의 생각이 어떤 것인지 대강 짐 작할 수 있었다. 아케르는 일단 스파일과 손을 잡고 용병단의 세력을 더 욱 확장시킬 생각인 것이다. 일단 하잔을 거점으로 삼아 타실의 군사적 위협을 저지하며 스파일의 방패가 된다. 스파일 입장에서는 국경에서 병 력을 빼오지 않아도 되니 손해 볼 것은 없을 것이다. 다만 문제가 되는 부분은 아케르를 과연 스파일 측이 얼마나 신뢰하고 있는가 하는 부분이라고 라이짐은 생각했다. 하지만 몇 차례 스파일의 사 자가 다녀갔고, 아케르 역시 몇 번이고 스파일에 갔던 사실을 상기해보고 는 아마도 그런 믿음은 이미 오래 전에 얻어놓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이 들었다. 어쩌면 아케르가 하잔 진압군으로 오게 된 것도 스파일 측의 입김이 작 용했던 것은 아닐까. 혹시 아케르는 하잔을 거점으로 자신의 입지를 다지 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라이짐은 이런 의문들이 들었지만 이내 곧 지워버렸다. 지금 나는 일개 십부원일 뿐이다. 명령을 수행하는 것만이 내가 할 일이다. 생각은 나중 에 한다. "탐그루에 오우거가 출몰한다면 타실에서도 노리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 다. 함부로 개입했다가 마찰을 빚게 되면 피해를 입는 것은 우리뿐일 것 입니다" 순무가 말을 이었다. 그러자 타호루는 숨쉴 틈도 두지 않고 자신의 의 견을 말했다. "너무 계산적인 의견입니다. 만약 탐그루 까지 확보하게 된다면 저희 용병단의 영향력은 훨씬 커집니다. 아시다시피 탐그루는 전략적으로나 전 술적으로나, 또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습니다. 위험부담 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만큼 얻는 것도 크지 않습니까? 만에 하나 타 실이 오우거의 등장을 빌미로 탐그루에 군사력을 동원한다면 저희로서는 나중을 생각할 때 불리한 위치가 됩니다. 대륙의 패권을 장악하려면... 탐그루의 장악은 필수 입니다. 다만 그 시기가 조금 앞당겨 지느냐 아니 냐의 문제일 뿐입니다" "아닙니다. 그렇게 쉽게 생각할 문제가 아닙니다. 만약 저희와 타실이 먼저 부딪친다면 승패는 불을 보듯 뻔합니다. 아무리 우리 용병단이 강하 다고 해도 불과 일 개 군단입니다. 타실의 정예 군단과 맞붙어 싸운다면 도저히 승산이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스파일로서는 탐그루에 군사력을 보낼 수 있는 빌미를 얻게 됨과 동시에 명분도 세울 수 있게 됩니다. 스 파일로서는 우리 용병단이야 있던 없던 별 상관없지 않겠습니까?" 순무의 말이 끝나자 아케르는 고민의 기색이 얼굴에 떠올랐다. 라이짐 은 아케르의 표정을 주시했다. 여기서 내려지는 결정은 앞으로 용병단의 미래를 결정할 수도 있을 만큼 중요한 거였다. 아케르가 느끼는 고민의 무게만큼 그 결론이 가지고 올 파장도 클 게 분명했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라이짐?" 아케르가 라이짐에게 물었다. 라이짐은 허리가 곧추섰다. 라이짐은 아 케르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의견을 묻는다기 보다는 네 능력을 알고 싶다 는 시험의 눈빛이었다. 라이짐은 마른 침을 한 번 삼켰다. "스파일을 믿을 수 있느냐 믿을 수 없느냐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라이짐은 생각하고 있던 것을 그대로 말했다. "그래. 그 말도 맞지. 하지만 먼저, 문제의 본질은 오우거라는 것을 잊 지 말게. 오우거를 물리치는 것이 먼저야. 그래야 탐그루 시민들의 지지 도 얻을 수 있는 거네. 시민의 지지 없이 버티기란 쉽지 않지. 지금 우리 가 겪고 있는 문제도 바로 그것이고. 어차피 하잔에서는 오래 버티기 힘 드네. 한 번 생각해 보게. 지금 하잔에서도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일고 있는 걸" 아케르의 말에 라이짐은 거리에서 쓰러뜨렸던 사내를 떠올렸다. "다행히도 오우거에 대해서는 지난번에 얻은 정보가 있네. 머리에 심장 이 있다는 것, 이건 중요하지. 타실 군이 가슴을 찔러봐야 오우거는 죽지 않을 테니 말이야. 또 하나, 오우거는 반드시 그 본거지가 있다는 것. 우 리가 그 본거지를 파괴한다면 오우거는 쉽게 소탕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 네" 아케르의 말에 천막 안의 공기가 차갑게 내려앉았다. 다들 아케르의 기 세에 눌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만약 누군가 숨이라도 크게 내 쉰다면 당장이라도 천막이 날아가 버릴 것 같다고 라이짐은 생각했다. "그리고 스파일 문제인데... 라이짐. 만약 타실이 개입한다면 스파일은 우리를 돕기 위해 즉시 군사력을 동원할 걸세. 타실도 그걸 알고 쉽게 움 직이지는 않을 테고. 우리가 이곳 하잔에 주둔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스파일 정부의 믿음 덕분이었네" 라이짐은 이 말이 아케르가 그 동안 자리를 비우고 스파일에 자주 갔던 일을 말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라이짐은 절로 고개를 끄덕였 다. "스파일이 우리에게 믿음이 없었다면 처음부터 하잔의 계엄군으로 주둔 할 수 있도록 하지 않았을 거네. 이제는 우리가 스파일에 대한 믿음을 가 져야 할 때라고 생각하네" 아케르의 눈빛은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럼, 이제 결정은 내려졌네. 일단 탐그루에 정보를 얻기 위한 특임부 대를 파견하는 것으로 하지" 이 말로 회의는 끝났다. 더 이상 의견이 나올 수가 없었다. 단장의 결 정이 내려진 이상 말이다. 라이짐은 자신의 의견이 크게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 한 편으로는 혹시 탐그루에 갈 수 있게 되지 않을까하 는 기대를 가져보았다. 라이짐이 가게 될 가능성은 높았다. 누가 뭐라고 해도 정보를 담당하고 있는 눈보라 십부의 십부장이고, 또한 탐그루 출신 아닌가. "특임부대 구성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반대의견을 폈던 순무지만 결정이 내려지자 바로 그 사실을 인정하고 아케르에게 이렇게 물었다. "눈보라 십부만으로는 좀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야. 검은 엘프들은 정확하지만 중요한 정보를 알아내는 능력은 부족하거든" "그렇다면 제게 생각이 있습니다" 타호루가 말했다. 탐그루로 떠나는 날, 라이짐은 가투신과 함께 마차의 선두에 서 있었 다. 마차 안에는 차이린과 에이스가 타고 있었다. 특임 부대가 구성된 것 이다. 이 특임 부대의 임무는 두 가지 였다. 탐그루의 동향 파악과 오우 거의 본거지 파악. 이 두 가지는 모두 다 앞으로 용병단의 거취문제에 있 어서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이 특임부대의 구성은 타호루의 의견이 받아들였다. 먼저 타호루는 라이짐을 거론했다. 라이짐이 생각했던 것 그대로 탐그 루 출신 십부장이기 때문이었다. 다음은 차이린이었다. "라이짐이 아무리 뛰어난 단윈을 데리고 간다고 해도 한계가 있습니다. 오우거의 본거지를 파악하려면 발자국을 추적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 다면 차이린 외에는 대안이 없습니다" 라이짐도 그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차이린은 사냥꾼 출신에다 가 지난번 솔한장 마을에서 오우거 소탕을 의뢰받았을 때 경험을 쌓은 십 부장이기도 하기 때문이었다. 다만 문제는 가투신이었다. 순무는 가투신 을 거론하지 않고 다만 전투 경험이 많은 십부장이 필요하다고만 했을 뿐 이었다. 여러 십부장의 이름이 거론되었으나 소식을 들은 차이린은 대번 에 가투신을 추천했다. "가투신은 오우거와 싸워본 경험이 있는 유일한 십부장이기 때문입니 다" 차이린은 이렇게 말했지만 아무도 그말을 액면 그대로 믿는 사람은 없 었다. 화창한 날이었다. 탐그루의 운하가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모습이 라이 짐의 눈앞에 어른거렸다. 기회가 닿는다면 루비오 녀석을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아직도 때는 아니라고 라이짐은 생각했다. 라짐을 만나 볼 수 있겠구나. 라이짐은 라짐에게 받은 편지를 지난 겨울부터 품속에 간직하고 있었다. "자, 이제 떠나요. 환송해주는 병력이 없는 게 섭섭하긴 하지만" 차이린은 마차 안에서 잔뜩 들뜬 모습으로 말했다. 위장잠입이기 때문 에 차이린은 귀족의 딸로 변장을 하고 있었다. 긴 머리 가발을 쓰고, 화 사한 드레스까지 입고서 말이다. 에이스는 차이린의 몸종 역으로 마차에 타고 있었다. 라이짐은 마부역이었다. 라이짐은 고개를 돌려 가투신을 바 라보았다. 가투신은 뮤에 올라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것이 차 이린을 호위하는 검사 역을 맡았기 때문인지, 아니면 차이린과 함께 간다 는 사실 자체가 싫어서 그런 건지 라이짐은 알 수 없었다. "가투신. 잘 부탁 드립니다. 제 목숨은 이제 가투신 님의 손에 달려 있 어요" 귀족의 말투를 흉내내어 차이린이 말했다. 그 말을 듣자 가투신은 차이 린을 외면하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 출발합니다" 라이짐은 이렇게 말하고는 뮤 고삐를 힘차게 잡아당겼다. 다시 탐그루 로 돌아가는 거다. 햇살이 싱싱한 물고기의 비늘처럼 튀어 오르고 있었 다. 뮤가 앞발을 들고 힘찬 울음 소리를 내었다. 눈앞으로 탐그루가 바짝 다가선 느낌이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1318/11996 ━━━━━━━━━━━━━━━━━━━━━━━━━━━━━━━━━━━━━━━━ 제 목:[탐그루] 영혼의 에뮬레이터 6 119 관련자료:없음 24/24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2-09 00:18 조회:1695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 영혼의 에뮬레이터 6 - 호밀밭의 파수꾼 폐가들이 즐비한 곳을 지나 산 속으로 들어간 후버카는 외길을 따라 한 참을 더 들어가더니 작은 산장에서 멈추어 섰다. 통나무로 지어진, 언뜻 보기에도 굉장히 오래 되어 보이는 산장이었다. 이렇게 산 속에 그림 같 이 지어진 산장은 에스넷 동영상 사이트에서 구경해 본 적은 있었지만 직 접 이렇게 눈으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숲 아래 지어진 통나무 산장은 마치 무슨 고전 게임 속의 풍경이라도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게 만들 었다. "비류 님. 여기에요" 리파이가 말했다. 덕분에 세헤라자드의 이야기는 끊기게 되었다. 하잔 에 남은 라이짐이 이제 탐그루로 가서 과연 어떤 모험을 겪게 될 것인가 를 생각하고 있던 바람에 리파이가 무슨 말을 했는지 잘 알아듣지 못했 다. "비류 님. 내려야 한다고요" 리파이의 말에 현실 감각이 돌아왔다. 낯선 풍경이 차창 밖에 펼쳐져 있었다. "꼭 내려야 하나요?" 나는 솔직히 내리기가 겁이 났다. 일단 이진우 수사관을 피해서 오기는 했지만 여기가 어디인지, 또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상황에 던져지기가 싫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어쩌시려고요. 여기까지 와서 돌아갈 수는 없잖아요?" 리파이는 나를 한심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면서 말했다. 물론 리 파이의 말이 일리가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내리기 싫은 걸 어떻게 하라 는 건지. 나는 한참을 망설인 다음에야 후버카의 문을 열고 마치 지뢰밭 에라도 들어가듯이 조심조심 내렸다. 사방이 온통 나무였다. 높은 나무들이 나를 굽어보고 있었다. 쭉쭉 뻗 은 나무들은 마치 나를 내려다보듯 했고, 알 수없는 위압감이 느껴졌다. 익숙하지 않은 풍경이라 그런 모양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본 나무들은 다 몇 그루씩 모여있기 마련이었고, 다들 가꾸어져 있거나, 그냥 방치돼 시 들고 있거나 둘 중에 하나였다. 하지만 지금 이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 는 풍경은 하늘 전체가 흔들리는 것처럼 장엄했다. 나는 절로 고개가 숙 여졌다. 낯선 풍경 아래서 공포를 느끼게 될 줄은 몰랐다. 게임에서는 낯 선 장소가 나오면 흥미롭고 기대가 되었는데 말이다. "비류 님. 게임을 플레이 할 때에는 용감하시더니 오늘 보니까 꼭 그렇 지만도 않은 것 같네요" "제발 절 좀 그냥 놔둬요" 게임은 게임일 뿐이고 이건 현실이다. 현실에는 세이브 로드도 없고 컨 티뉴 플레이라는 것도 있을 수가 없다. 젠장. 어쩌다가 이렇게 어스폴한 테 쫓기는 몸이 된 걸까. 도대체 어디서부터 일이 꼬였는지. 나는 내 처 지가 한심하게 여겨졌다. 평소에 내가 접하던 공기와는 다른 느낌의 공기였다. 나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공기가 너무 가볍고 차다는 느낌이었 다. "공기 좋죠? 시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이 정도로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있어요" "별로. 오히려 좀 이상한데요?" 나는 차가운 공기에 적응이 되지 않아서 몇 번이고 심호흡을 해 보았 다. "좋지 않아요?" "그러고 보니까 좋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 겠네요" 나는 이렇게 말하고는 히죽 웃어버리고 말았다. 전혀 웃을 상황이 아니 었는데도 말이다. 어쩐지 찬 공기가 사람을 이상하게 만드는 것 같아서 나는 좀 불편한 기분이 되었다. 난생 처음 와보는 곳에 대한 불안감, 난 생 처음 맡아보는 색다른 공기에 대한 낯설음, 난생 처음 겪는 범죄자가 되어 버린 기분... 이런 것들이 나를 불편하게 만들고 있었다. "여기가 우리 포스트에요" "접선 장소란 말인가요?" 나는 메탈기어 리퀴드를 플레이 할 때의 기억을 더듬어서 이렇게 말했 다. 메탈기어 리퀴드의 주인공 솔리드 스네이크는 포스트를 이용해 아군 스파이와 만나곤 했다. "예. 이제 곧 사람이 올 거에요" 오토는 차에서 내리더니 주의 깊게 여기저기를 살폈다. 물론 직업이 경 호원이라니까 좀 이해가 가긴 했지만 이런 산 속에 누가 있다고 저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이 근처에는 동물이라고 해봐야 쥐나 들고양이 정 도밖에 없을 텐데 말이다. "들려요?" 리파이가 물었다. 그러고 보니 리파이는 환경론자인 모양이었다. 근처 에 지하철도 없고, 사람도 없는 이런 곳이 꼭 무슨 대단한 마음의 고향이 라도 되는 것처럼 구는 걸 보면 말이다. "새소리라면 아까부터 듣고 있어요. 꼭 모뎀이 내는 접속음 같은데요?" 내 딴에는 농담이라고 한 말이었는데 리파이는 집게손가락을 입에 가져 가면서 조용히 하라는 시늉을 했다. "후버카 소리에요, 비류 님" 세헤라자드가 말했다. 나는 그냥 그런가보다 싶은 마음으로 별 생각 없 이 산장 쪽을 바라보았다. 솔직히 이제 리파이가 누굴 만나서 뭘 하든 내 가 어쩔 수 있는 일은 없지 않은가 싶었다. 우리가 온 외길을 따라서 후버카 한 대가 올라오는 모습이 보였다. FHA 인지 뭔지 하는 데는 돈도 많군. 전부 다 후버카니 말이다. 그런데 어디 서 많이 본 모델인데... 차 문이 열리자 낯익은 사내가 나타났다. 이진우 수사관의 파트너였다. 나는 어쩔 줄을 몰라하면서 좌우를 살폈는데 그건 리파이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리파이는 몇 걸음 산장 쪽으로 주춤 하더니 오토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이진우 수사관의 파트너는 코피가 났는지 코에 휴지를 말아 넣고 있었다. 물론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오른 손에 뽑아 들고 있는 빔 핸드건이었지만 말이다. 이진우 수사관의 파트너가 들고 있는 빔핸드건은 담배 갑 만한 크기에 꼭 리모트 컨트롤러처럼 생긴 것이었다. 내가 보기 엔 그렇게 무거울 것 같지도 않은데 두 손으로 빔핸드건을 모아 쥐고 있 었다. "손들어!" 콧구멍에 박아 넣은 휴지가 빠져나갈 만큼 큰 소리로 파트너가 외쳤지 만, 다음 순간 오토의 빔핸드건에서 발사된 빔이 파트너의 입을 막았다. 파트너는 그대로 황급히 차 속으로 다시 들어갔고, 오토가 발사한 빔은 후버카의 문에 시커먼 흠집을 남겼다. 급박한 와중이었지만 나는 어스폴 의 후버카가 빔을 견딜 수 있게 만들어졌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빔을 쏘는 걸 직접 본 건 처음이었다. 하지만 아무 소리도 없고, 게임에서처럼 날아가는 광선도 보이지 않는 빔핸드건은 어쩐지 순 장난감 같다고 느껴 졌다. "차에 타요. 빨리!" 빔핸드건을 차를 향해 몇 번 더 쏘면서 오토가 말했다. 오토가 빔핸드 건을 쏘고 있다는 건 순전히 후버카 여기저기에서 불꽃이 튀는 걸로 알 수 있었다. 정말이지 빔핸드건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아직까지도 나는 현실감각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지금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나는 리파이를 따라 후버카 안으로 뛰어들면서 나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보았다. 오토는 후버카에 오르자 마자 시동을 걸었다. 그래서 문을 채 닫기도 전에 나는 후버카가 지면에서 떠오르는 걸 볼 수 있었다. 다음 순간 빔이 바닥에 박히면서 먼지를 일으켰다. "위협 사격하는 거에요. 신경 쓰지 말아요" 후버카의 핸들을 잡으며 오토가 말했다. 순간 내 몸이 앞으로 꺾였다. 아무리 승차감 좋은 후버카라지만 이 정도로 험악하게 몰면 더 이상의 승 차감은 바랄 수가 없다는 건 나도 인정하지만 의자에 부딪친 머리가 아파 오자 은근히 화가 났다. "비류 님. 문 닫아요!" 급하게 출발하는 바람에 나는 문도 닫지 못했다. 리파이의 말을 듣고서 문을 닫으려고 했지만 하필 그때 오토가 차를 급회전하는 바람에 몸이 차 밖으로 쏠렸다. 나는 필사적으로 한 손으로 매달리면서 다른 손으로는 문 을 닫으려고 했다. 까딱하면 열린 문 밖으로 나동그라질 뻔했다. 나는 다 시 중심을 잡으면서 열린 문고리에 손을 뻗었다. "위험해!" 오토가 소리쳤지만, 사실 소리치기도 전에 문짝은 날아가 버리고 말았 다. 빔이 깨끗하게 절단을 해 버린 거였다. 나는 문 위에 달려있는 손잡 이를 잡고서 문짝이 달려있던 자리를 살펴보았다. 꼭 제련소에서 다듬은 것처럼 반질반질하게 잘려나가 있었다. 은빛의 잘려나간 단면을 보면서, 그제야 나는 빔핸드건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차 문이 이 정도라면 사람은 볼 것도 없이 잘려나갈 게 뻔했다. "망할 녀석들! 일부러 노리고 쏜 거야!" 조준 사격을 하기 힘들도록 이리저리 핸들을 돌리며 조금씩 산장 옆쪽 으로 후버카를 몰아나가면서 오토가 소리쳤다. "창문 코팅 할 때 안티 빔 코팅도 하는 거였는데..." "일단 어떻게 여기서 빠져나갈지나 생각해 보자구요" 먼지투성이 꼴로 재채기를 간신히 참으면서 내가 리파이에게 말했다. 하필 내가 있는 쪽 문짝이 잘려 나가는 바람에 들어오는 먼지는 내가 고 스란히 뒤집어 쓰게되었으니 말이다. 오토는 후버카를 산장 뒤편으로 몰고 갔다. 어차피 산장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인 외길은 이진우 수사관의 후버카가 막고 있고, 수 사관은 절대로 외길에서 물러나지 않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일단 빔 세 례에서 벗어나 보자는 계산인 모양이었다. 아무리 빔 무기라지만 통나무 집을 통째로 베어 낼 수는 없을 테니까 말이다. "제길. 이제 녀석들이 지원 병력을 부르기만 하면 끝장이야" 후버카에서 내리면서 오토가 중얼거렸다. "어쩌죠?" 아니, 나한테 물어보면 어쩌란 말인가? 나는 먼지를 털어 내면서 잠시 소오드엔매직 식으로 생각을 해 보았다.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은 없다. 전력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숫자는 우리가 하나 더 많지만 저쪽은 무기가 둘이니까 그건 확실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도망치는 수가 있는데, 이 산 속에서 발로 뛰어 도망간다는 건 우스울 뿐만 아니라 불가능한 일 이다. 얼마 가지 않아 잡힐 게 뻔하다. 유일한 출구가 봉쇄 당해있는 이 상, 후버카로 여길 빠져나간다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방법은? "항복하죠. 죽을 수는 없잖아요?" "농담하지 말아요, 비류 님. 여기서 항복하면 우리가 모든 죄를 다 뒤 집어쓰게 된다 고요. 생각해 보세요. 살인 사건의 강력한 용의자가 공무 집행 방해에 도주까지 한 상황이에요" "아뇨. 살인사건 중요 참고인이 정체 불명의 괴한들에게 납치 당한 걸 로 보는 게 더 맞겠죠" "중요 참고인이라고요? 그 말이 그 말이잖아요? 재판 전에는 모두가 다 무죄라고 해서 끝까지 무죄가 되는 건 아닌 것 처럼요" "엎드려요!" 리파이와 나는 오토의 말 한 마디에 말다툼을 멈추고 그대로 제자리에 엎드렸다. 둘 다 조금이라도 더 깊숙이 엎드리려다가 머리까지 부딪치고 말았다. 머리가 아프긴 했지만 아직도 나는 웃음이 나왔다. 문짝이 그렇 게 잘려나가는 걸 보고서도 말이다. 확실히 빔 무기는 현실감이 없어. 그때 나는 쩌렁, 하고 울리는 발사음을 들을 수 있었다. 이진우 수사관 이 화약식 총을 쏜 모양이었다. 화약 식 총의 발사음을 들은 것도 난생 처음 있는 일이었다. 화약식 총의 폭발음은 게임에서 듣던 것과는 크게 달랐다. 무엇보다도 이렇게까지 소리가 클 줄은 몰랐다. 총성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세 번 이어졌는데, 그때마다 통나무로 된 산장의 처마며 벽 면이 부수어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나무쪼가리가 날아와 후버카에 떨 어지는 걸 보니 이제야 조금 실감이 나는 것 같았다. "리파이. 말싸움은 다음으로 미루죠. 그것보다 여기서 살아나면 어떻게 할 거예요?" "여기서 다음 장소로 이동하기로 했는데... 다 틀렸죠. 아마 이쪽으로 오던 길이었다고 해도 총소리를 듣고 예비 포스트로 가버렸을 거예요" "접선하기로 한 사람?" 리파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아가 부딪친 머리가 얼얼했지만 리파 이는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목줄기를 타고 땀방울이 흐르는 게 눈 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리파이의 목은 생각보다 길었다. 이런 상황에 목에 시선이 가다니. 내가 정말 급박한 상황에 처해 있는 게 맞는 걸까? "그대로 있어요, 움직이지 말고" 오토는 잘려나간 문으로 이렇게 말하고는 통나무 뒤편으로 조심스럽게 이동했다. 그러더니 벽면의 끝에 몸을 기대고 빔핸드건을 도로 품에 넣었 다. 아니, 무슨 생각으로 저러는 거지? 하지만 나는 그냥 움직이지 않기 로 했다. 일단은 오토가 시킨 대로 하는 게 좋으니까 말이다. 이제 이진 우 수사관에게 붙잡히게 되면 무조건 나는 인질이었다고 말하는 거다. 애 당초 자기부상 열차에서 도로 내리게 된 것도 순전히 저 오토가 밀었기 때문이었고, 이후에 공원으로 가고, 후버카에 타고 한 것도 다 오토가 시 킨 대로 한 거라고 말하면 될 것 같았다. 그래. 이 시나리오로 밀어 부치 는 거야.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빔핸드건을 든 이진우 수사관의 파트너가 통 나무집 뒤편에서 나타났다. 빔핸드건을 먼저 앞으로 하고 천천히 후버카 쪽으로 이동하는 데, 오토가 손날로 파트너의 손목을 내리쳤다. 빔핸드건 이 바닥에 떨어졌다. 하지만 그 순간 파트너는 발을 올려 오토를 걷어찼 고, 오토는 크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빨리 집어요, 비류!" 리파이가 소리쳤다. 하지만 나는 못들은 척 하고 가만히 있었다. 내가 빔핸드건을 들면 내 유일한 시나리오가 날아가게 될 게 뻔한데 어떻게 그 럴 수가 있겠는가? 리파이는 내 얼굴을 한 번 쳐다보더니 잘려나가지 않 은 쪽 문을 열고 후버카에서 내렸다. 이번에는 오토가 몸을 돌리면서 팔꿈치로 파트너의 머리를 가격했다. 팔로 막아내기는 했지만 충격 때문에 조금 몸이 주춤했다. 그 순간을 놓 치지 않고 오토의 발차기가 파트너의 배에 박혔다. 파트너는 고개를 숙였 다. 리파이는 빔핸드건을 집어들었다. 이제 상황이 바뀌었다. 파트너는 주 먹을 쥐고 다시 싸울 태세를 갖추었으나 빔핸드건을 들고 있는 리파이를 보더니 포기했는지 두 팔을 내리고 어깨를 한 번 으쓱 했다. "아마추어한테 당했군" 파트너가 말했다. "하지만 멋진 솜씨야. 어디서 배웠지?" "우리 동네 뒷골목. 어렸을 때 골목 대장이었지. 나머지 하나한테 무기 를 버리라고 말해" 어느새 뽑아든 빔핸드건을 겨누고 오토가 말했다. "직접 말하지 그래? 바로 저긴데" "리파이!" 마지막에 소리친 건 나였다. 언제 왔는지 이진우 수사관이 한 손으로는 리파이의 목을 감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머리에 총을 겨누고 있었다. "자, 이제 공평하지? 비류 씨. 이쪽으로 오세요. 인질로 잡혔던 거 다 압니다. 이제야 사건이 하나로 풀리는군요. 누가 범인이었는지, 또 누가 지금까지 누명을 쓰고 있었는지가. 이렇게 해서 또 한 번 어스넷 상의 불 순 공동체 하나가 검거되는군요" 이진우 수사관은 선글라스를 벗고 있었다. 때문에 회색 눈동자가 햇빛 을 받아 번뜩이는 걸 나는 분명히 볼 수 있었다. "빔을 집어요! 빨리!" 리파이가 소리쳤다. 그러고 보니 리파이가 들고 있던 빔핸드건이 바닥 에 떨어져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나는 그냥 차에서 내려서 조심 스럽게 사태를 지켜보기로 했다.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되든 별 탈 없으 려면 내 입장을 분명히 해서는 안될 것 같아서였다. "이봐, 곱슬머리. 그거 버려. 어스폴 요원에게 빔을 겨누다니, 그게 얼 마나 큰 죄인지 아나?" "잘은 모르지만 설마하니 어스폴 요원 코피를 터트린 것만 하겠어?" 이진우 수사관에게 오토는 이렇게 대꾸하면서 파트너 사내의 뒤편으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머리에 빔핸드건을 대고 강제로 일으켜 세운 뒤, 다 시 다리를 걷어차 무릎을 꿇렸다. "화약식 총으로 그 거리에서 한 방에 날 맞출 수 있을까?" 빔을 이진우 수사관에게 겨누면서 오토가 말했다. "그쪽은 힘들겠지만 난 가능해. 이건 레이저 조준 식이거든" 오토의 빔핸드건에서 나온 빛이 붉은 점이 되어 이진우 수사관의 눈썹 사이에 맺혔다. "곱슬머리. 내 눈을 봐. 삼년전쟁에서 얻은 내 눈을. 아마추어에게 그 렇게 쉽게 당하진 않아" 이진우 수사관은 화약식 권총의 공이를 당겨 엄지손가락으로 고정시킨 상태로 방아쇠를 당겼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1319/11996 ━━━━━━━━━━━━━━━━━━━━━━━━━━━━━━━━━━━━━━━━ 제 목:[탐그루] 영혼의 에뮬레이터 6 120 관련자료:없음 30/30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2-09 00:18 조회:1674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이렇게 하면 내가 죽어도 그 순간 총은 발사된다. 보아하니 화약식 총 에 대해서도 조금은 알고 있을 것 같은데, 아닌가?" "그래도 어스폴이라고 체면은 차리시는 군" 둘 사이에 긴장이 팽팽하게 당긴 고무줄처럼 흐르고 있었다. 만약 한 쪽이 먼저 줄을 놓아버린다면 다른 한쪽은 크게 다칠게 분명한 상황이었 다. 아니, 아주 작은 소리만으로 그 고무줄은 끊어져 두 사람 다 다쳐버 리게 될 지도 모른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나는 별의별 생각이 다 떠올랐지만 도저히 좋은 생각이 나질 않았다. "세헤라자드, 어쩌지?" 나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용사냥꾼 사빈을 생각해 보세요. 수르카와 라스폼이 대치했을 때, 사 빈이 어떻게 했나를요" 세헤라자드가 말했다. 나는 일단 리파이가 떨어뜨린 빔핸드건을 집어들 었다. 오토와 이진우 수사관의 시선이 나에게로 모아졌다. "서로 만족 할 수 있는 지점이 있을 거에요. 타협하시죠" 나는 양손으로 조심스럽게 빔핸드건을 집어들고서 말했다. (쓰는 법을 모르기 때문에 혹시라도 오발을 하게 될 우려가 있어서였다) "무슨 타협! 어스폴은 범죄자하고 타협한 전례가 없어!" 꿇어 앉아 있던 이진우 수사관의 파트너가 말했다. "...육 년 전 테헤란에서 있었던 여객기 인질 납치범 사건 때 타협했잖 아요. 그리고 또... 예. 이 년 전에 통일정부청사 폭파 협박범하고도요" 내가 줄줄 말하자 파트너의 얼굴이 굳어졌다. (물론 세헤라자드가 읽어 준 브리테니커 백과사전 덕분이었다) "그래, 어떤 타협을 원하지요, 비류 씨?" 총으로는 리파이를 여전히 겨누고서 이진우 수사관이 물었다. "이진우 수사관 님. 지금 쫓고 있는 사람은 FHA가 아니라 이나바머지 요?" "생각보다 많이 아는 군. 아버지한테서 들었나요?" 아버지라고? "예? 우리 아버지를 아세요?" "그 유명한 만델라의 아들이라는 걸 몰랐겠어요? 어스폴의 정보력은 세 계 최강이라고 몇번을 말해야하는지..." "그렇군요. 하지만 지원 병력도 부르지 않고 이렇게 무리하게 따라온 걸 보면 공을 세우고 싶긴 싶으신 모양이로군요" 내가 말하자 이진우 수사관의 얼굴이 미세하게 떨리는 걸 느낄 수 있었 다. 피부이식 수술을 받아서 그런지 떨림은 얼굴 전체로 퍼져나가고 있었 다. "훌륭한 아버지를 뒀어요. 그런 것도 가르쳐 주시던가요, 비류 씨?" "아뇨. 하지만 혼자 공을 세우려다 면직 당한 어스폴 수사관 얘기는 들 어본 적이 있지요" "그런 말은 나중에 하고 지금은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 건지가 먼저 인 것 같은데" 오토가 다시 상황을 상기시켜주었다. "제 타협안은 이래요. 이진우 수사관 님. (나는 엄청나게 정중하게 말 했다) 이만하면 제가 이나바머가 아니라는 건 확실하지 않나요? 저는 아 무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요. 게임을 싫어하는 이진우 수사관님의 마음 은 이해하지만 (사실은 전혀 이해 못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무고한 시 민을 범인으로 몰아붙이는 건 너무해요. 언론에서 알면 가만있지 않을 거 에요. 게임을 싫어하는 수사관, 프로 게이머를 범인으로 몰다. 아니면 모 험가 만델라의 아들, 어스폴에 구속 되다. 모종의 거래가 있었던 듯. 이 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뭐, 어스폴 수사관 단독으로 범인을 추적하다 무고 한 사상자 발생. 이런식의 기사가 나가면 계속 어스폴에 계시기 힘들겠지 요?" 이번에는 아무도 대답이 없었다. 나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말을 이었 다. "이나바머를 제가 찾겠어요. 친구의 원수를 갚는다고 생각해도 좋고, 제 누명을 벗기 위해서라고 생각해도 상관없어요. 이진우 수사관 님과 파 트너는 이나바머 전담반이죠? 다른 사건은 별로 관심도 없으시죠? 예를 들어서 게이머들끼리 모여서 소모임을 만들었다던가, 혹은 통일정부 정책 에 반대하는 공동체를 건설하고 있다던가 하는 거요" 나는 리파이를 염두에 두고 이렇게 말했다.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는 거죠, 비류 씨?" "일주일만 주세요. 일주일이면 이나바머를 잡아오겠어요" "잠깐. 무슨 수로 그렇게 하겠다는 거지? 어스폴이 몇 년 동안 추적했 어도 흔적하나 남기지 않은 이나바머야. 그런데..." "아버지한테 말씀 드렸어요" 내 말에 네 사람의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일주일, 일주일이면 돼요" "무슨 근거로 일주일이라는 거지?" 이번에는 이진우 수사관의 파트너가 물었다. "아버지는 지금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계세요. 제가 연락을 취해서 여기 까지 오시는데 이틀, 자료 모으시는데 이틀, 추적하는데 이틀, 그리고 소 재 파악하고 알려드리는데 하루. 이렇게 일주일이에요. 설마 아버지가 자 식의 목숨이 달려 있는데 모른 척 하겠어요?" "이진우 수사관 님, 속지 마십시오. 비류, 그 말을 어떻게 믿지?" "전 게임을 사랑하는 프로 게이머에요. 프로 게임의 세계에 발을 들여 놓은 사람은 돌아갈 수 없다는 게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예요. 무슨 말인지 알겠죠, 이진우 수사관 님?" 이진우 수사관은 '전혀 이해는 안가지만 어쩔 수 없이 인정한다' 는 듯 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무기들은 다 치우죠. 여기서 더 이상 싸울 이유가 없으니까 요" 나는 빔핸드건을 집어들고 이진우 수사관의 파트너 쪽으로 걸어갔다. 파트너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꼭 국가 원수에게 금일봉을 하사 받 는 불우이웃 같은 표정으로 내가 건네주는 총을 받았다. 팽팽하던 긴장은 내가 빔핸드건을 웃는 얼굴로 파트너에게 건네주는 순간 풀어졌다. "비류 씨. 이건 솔직히 직무 유기입니다. 거기다가 월권 행위기도 하고 요. 순전히 아버님 덕분인 줄 아십시오" 이진우 수사관은 조심스럽게 화약식 권총의 공이를 돌려놓고, 안전장치 를 채웠다. "어쩌다가 만델라 같은 분 아드님이 전쟁 광이 되었는지 모를 일이로군 요" "아버님은 항상 다양한 의견을 존중하시거든요. 아무리 좋아도 한 가지 의견만을 수용하는 건 파시즘이라고 누누히 말씀하셨거든요. 시행착오가 있어도 다양성을 존중해야한다. 그게 아버지 삶의 원칙이죠. 물론 제가 그 원칙의 가장 큰 피해자이긴 하지만요" "그럴 만도 하군요. 지구 어느 곳이든 달려가시는 분이니까요. 아버님 을 좀 본받으시라고 충고하고 싶어요, 비류 씨" "이진우 수사관 님이 게임에 대해서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고려한 다면 저도 한 번 생각해 보지요" 내 말에 이진우 수사관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하여간 말씀은 잘하시는 군요, 비류 씨. 진짜 이나바머라면 비사교적 이고 혼자 있는 사람일 테니 정말 이나바머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어요" "이제 좀 솔직해지시죠, 이진우 수사관 님" 나는 좀 기분이 상해서 이렇게 말했다. "처음부터 절 의심했던 게 아니지 않았나요? 단지 아버지를 끌어들이기 위해서 그렇게까지 지나치게 절 괴롭혔던 거구요"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이진우 수사관은 이렇게 말하면서 나에게 명함을 내 밀었다 "이 뒤에 적혀 있는 번호는 제 직통 전화번호입니다. 24시간, 365일 통 화가 가능하니까 언제라도 이나바머에 대한 단서가 잡히시면 연락 주세 요. 자, 가지" 이진우 수사관이 말하자 파트너가 바지에 묻은 흙을 털어 내면서 자리 에서 일어났다. "다음 번에 만나게 되면 이 빚은 꼭 갚아주지" 돌려 받은 빔핸드건을 점검하면서 파트너가 말했다. "좋아. 다음 번에 만나면 뭐라고 불러줄까?" "편한 대로 불러. 아마추어한테 당한 멍청이라고 해도 좋고. 그쪽은?" "난 오토. 조사해보면 알겠지만 난 정식으로 허가 받은 경호업체 요원 이야. 무기소지 허가증도 있고" "문 잘라낸 건 미안해. 그쪽이 조금만 늦게 후버카를 뒤로 뺐다면 한 방에 엔진을 정지시킬 수 있었을 텐데" "아마추어의 운이었다고 생각하지" 이렇게 인사를 나누고 난 후, 이름을 알 수 없는 파트너는 이진우 수사 관과 함께 후버카를 타고 외길을 따라 사라졌다. "저 친구 말이 맞습니다. 우리가 아마추어라고 얕봤다가 당한 거지요. 아마 앞으로 다시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을 겁니다. 다시 이런 식으로 만 나게 된다면 기회는 없겠지요. 우리도 좀 더 보강을 해야겠어요" 오토는 조금 흥분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어스폴 요원과 대결해서 밀리지 않았다는 데에서 오는 흥분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비류 님. 아버님하고는 언제 연락했어요?" "좀 됐어요" "저하고 만나기 전인가요, 후인가요?" "전이죠. 한 삼 년 됐나?" 내가 대답하자 리파이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럼 무슨 수로 이나바머를 일 주일 안에 잡겠다고 말한 거예요?" "그건 순전히 시간을 벌자는 뜻이었어요. 이진우 수사관이 반전주의자 고, 아버지가 반전주의자로 알려져 있으니까, 그냥 한 번 넘겨짚은 거지 요" "외교는 소오드엔매직에서만 잘하시는 줄 알았는데 의외네요" "그냥 아마추어의 운이라고 해 두죠" 나는 오토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뭐, 어찌 되었건, 우리는 다음 포스트로 이동합시다. 그렇게 오랫동안 기다려 주지는 않을 테니까요" 오토는 문짝이 떨어져 나간 후버카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오토의 빔핸드건 솜씨는 예상외로 훌륭했다. 빔핸드건의 모드를 열선으 로 바꾸더니 떨어져 나간 문짝을 완전히 고정시켜버린 거였다. "열리지는 않겠지만 졸다가 차 밖으로 떨어져 나가는 일은 없을 겁니 다" 오토는 이렇게 말하고는 다음 포스트로 후버카를 몰았다. 차창 밖으로 다시 숲과 폐가들이 이어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후버카는 고속도로에 접어들었다. "이제는 어쩔 수 없이 우리 일을 도와줘야겠군요, 비류 님" "글쎄요. 일단 좀 두고 보죠" 나는 애매하게 대답했다. 일단 상황을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에 생각나는 데로 얘기하긴 했지만 도저히 수습할 방법이 떠오르질 않았다. "삼 년 전에 어떻게 연락 하셨어요?" "아버지 이리듐으로요. 전화번호가 있어요" "아버님이 직접 받으시나요?" "아뇨. 항상 대리인이 받았어요" 너무나도 외로울 때, 아니면 트렌스파워의 번역음이 아닌 사람의 진짜 목소리가 듣고 싶을 때, 나는 아버지에게 전화를 하곤 했다. 들을 수 있 었던 건 대리인의 차가운 목소리뿐이었지만 말이다. 나는 차창 밖을 내다 보았다. 어쩐지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난생 처음 보는 것처럼 생경하 게만 느껴지고 있었다. "비류 님. 이제 조금 더 나아지신 거에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포기하 지 않으셨잖아요? 수르카처럼요. 또 전설적인 나이트무버처럼요. 훌륭했 어요" 세헤라자드가 말했다. 과연 그럴까? 내가 선택한 길이 과연 옳았을까? 아무도 죽지 않았고 다치지 않았다. 그리고 만족할만한 선에서 위기는 벗 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계속 내 마음에 남는 건 내가 이진우 수사관에게 잡혔을 경우 계속해서 인질이라고 주장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거였다. 난 단지 현재의 상황을 아무 탈 없이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 뿐이었다. 피 하고 싶다는 생각. 나중은 어떻게 되더라도. 다른 사람은 어떻게 되더라 도 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아닌 것 같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자기 자신의 안위만 생각하고 산다면... 그게 어디 사람인가. NPC보다 못한 존 재지. 생각할수록 부끄러웠다. 아버지라면 이런 경우 어떻게 행동했을 까... 아버지라면... 그냥 해 본 말이긴 했지만 어쩌면 이진우 수사관은 정말로 처음부터 아 버지를 염두에 두고 있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왜? 혹 시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닐까? 뭐, 평소에 신경 쓰지 않다가 이럴 때 신경쓰는 게 좀 우습긴 하지만 말이다 후버카는 휴게소에서 멈추어섰다. 나는 리파이를 바라보았다. 출발하자 마자 휴계실이라니? 혹시 오토가 설사라도 하는 건 아니겠지? "여기가 저희 이 차 포스트에요" 내 눈빛을 읽었는지 리파이가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렇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메탈기어 리퀴드에서처럼 만약에 첫 번째 접선 장소에서 문 제가 생겨서 만나지 못한다면 다음에 만나기로 약속된 장소라는 말이죠?"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게임은 확실히 여러모로 쓸모가 있단 말이야. "얼마 전 어스넷 계시판에서 읽은 내용인데, 이제는 게임을 통해서 얻 게되는 지식이나 정보의 양이 책이나 방송을 통해서 얻게 되는 정보의 양 보다 많다고 하더군요" 리파이가 대답했다. "그래도 구시대 적인 사람들은 있지요. 예를 들어서 이진우 수사관은 게이머들을 싫어하는 모양이더라구요" 리파이가 후버카에서 내리자 리파이의 뒤를 따르면서 내가 말했다. (내 가 있는 쪽 문은 완전히 막여 있었으니까 말이다) 사실 한 세기 전만 하더라도 게임은 동네 꼬마들의 구경거리거나 청소 년들의 심심풀이 시간 때우기 정도로밖에 인식되어 있지 않았다. 마치 영 화가 처음에 시장통의 구경거리로 시작되었듯이 말이다. 하지만 영화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람들에게 예술로서, 또 훌륭한 고급 오락물로 인식 되었듯이 게임도 지금은 하나의 예술장르로 완전히 자리잡았다. 물론 영 화가 예술로 인식된 이후에도 영화를 '딴따라'라고 부르며 비하하는 사람 들이 있었듯이 이진우 수사관 같은 사람들은 여전히 게임을 비하하고 있 지만 말이다. 구닥다리. 나는 속으로 조그맣게 내뱉었다. 시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임에도 불구하고 휴게소는 아주 구식이었 다. 더러운 화장실, 불친절한 상인, 비싼 가격, 아무렇게나 만들어진 주 차장. (아직까지도 맨바닥에 선을 그어서 주차장 표시를 하는 곳이 있다 니)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흘러도 나아지지 않는 곳은 있는 법인가 보다. 그건 사람도 마찬가지겠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변화하려는 의지가 없 다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 조금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잠시라 도 방심하고 살았다가는 순식간에 구닥다리가 된다고 생각하니까. "정말 엉망이군요" 나는 차를 빼다가 가벼운 접촉사고라도 났는지 주차장 한 복판에서 실 랑이를 벌이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자동 주차 시스템을 도 입할 수도 있고, 정 안되면 구식 이 층 주차 시설이나 지하 주차 시설을 만들면 저런 문제는 충분히 피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비류 님. 말씀 잘 하셨어요. 이게 독점의 나쁜 점이에요" 리파이가 말했다. "여기 휴게소는 수 십 년 동안 전혀 변하지 않았지요. 보세요. 화장실 양옆으로 음식을 팔고 있잖아요?" 휴게실 정 중앙에 자리잡은 화장실 문 양 옆으로 수입품일 게 분명한 생 호도 과자를 파는 가게와 화공약품으로 처리했을 생오징어 구이를 파 는 가게의 모습이 보였다. "아무리 사람들이 가장 많이 다니는 곳이라지만 먹을 걸 화장실 바로 옆에서 팔다니요? 말도 안 되는 일이죠. 하지만 여기서라면 얼마든지 그 렇게 할 수 있어요" 리파이는 걸음을 천천히 하면서 말하고 있었다. 아마 약속장소에 도착 하기 전에 이야기를 끝내고 싶은 모양이었다. "고속도로 휴게실은 고속도로가 만들어진 이 후, 한 번도 변하지 않은 최고의 상권이에요. 생각해 보세요.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 중에 휴게실에 들르지 않는 차가 얼마나 되겠어요. 또 그 사람들 대부분이 화장실을 이 용하기 위해서 휴게실에 오잖아요? 그러니 자연 화장실이 휴게실의 중심 이 되고 그 옆으로 먹을 것을 파는 곳이 자리잡게 되는 거지요" "하지만 그게 합리적인 거 아닌가요?" 나는 굳이 반대의견을 펴고 싶지만은 않았지만 리파이의 말이 조금씩 이상한 곳으로 흐른다 싶어서 이렇게 한 번 제동을 걸었다. "비류 님. 독점이 아니었다면 휴게실을 운영하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좋 은 다른 방법들을 떠올렸을 거에요.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말이 지요. 하지만 그런 노력 없이도 장사가 되니까 아무런 발전이 없는 거죠. MS사의 문제점도 거기 있어요. 운영체계를 독점하게 되자, MS사는 아무런 발전도 보이고 있질 않아요. 물론 주기적으로 버전을 업데이트하기는 하 죠. 하지만 정작 중요한 부분이 바뀐 적이 있나요? 다운이 되지 않는 버 전이 어디 있었나요? 없었어요. 패치하는 시간만 더 걸릴 뿐이지 실제로 바뀌는 건 없다고요" 이럴 줄 알았다니까. 결국 리파이는 자신들이 MS사에 맞서 싸우는 이유 를 정당화하려고 이야기를 꺼낸 거였다. "트랜스 파워는 지금도 발전하고 있어요. 매년 새로운 언어를 지원하는 버전이 나오잖아요?" "비류 님. 트렌스 파워도 지금은 경쟁중이니까 더 나은 버전이 나오는 거죠. 얼마 전에 번들로 트렌스 파워를 제공했던 것 아시죠? 물론 공짜니 까 유저 입장에서는 아무리 써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은 그렇 지 않답니다. 번들로 끼워준 걸 쓰게 되면 다른 경쟁업체는 망하기 마련 이고 그렇게 되면 결국 독점을 하게 되는 거죠. 독점 이후에 어떻게 될지 는 말씀 드리지 않아도 아시겠죠?" "저는 불법복제품을 쓰니까 별로 상관없네요" 나는 이렇게 대꾸했다. 그러자 리파이의 얼굴에 희색이 돌았다. "그게 바로 자유 해커 연맹의 이념이에요. 정보의 공유화. 궁극적으로 모든 정보는 오픈되어 있어야 하고 모든 소프트웨어는 무료로 제공되어야 해요. 개인적으로 이용하는 부분에 한해서 말이지요" 리파이의 말은 그런데 별 관심이 없는 내가 듣기에도 모순되는 점이 있 었고, 또 지나치게 흥분하고 있는 부분도 있었다. 먼저 모든 소프트웨어 가 무료로 제공된다면 누가 소프트웨어를 개발할 것인가? 단순히 명예나 유명해지고 싶은 욕망 때문에 프로그램을 만드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 의 프로그래머들은 먹고살기 위해 프로그래밍을 할 거였다. MS사가 독점 하는 걸 막겠다는 생각은 이해할 수 있지만 그런 말을 하면서 경쟁 체계 를 무너뜨리고 있는 MS사의 횡포를 비약하고 있는 건 아무리 생각해 봐도 오류였다. 그 생각은 자유로운 정보의 공유라는 개념과 모순되는 것 아닐 까? 하지만 이런 생각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사실 내가 잘 모르는 부 분이기도 했고, 함부로 반론을 꺼냈다가 리파이에게 설득 당할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리파이는 나보다는 그런 주제에 대 해서 생각을 많이 해 보았을 테니까 말이다. 잘 모를 때는 입을 다물어 라. 즐기는 드라마 게임에서 배운 진리 중에 하나이다. 나는 문득 세헤라자드가 말했던 히틀러와 예수님의 비유를 떠올렸다. 신념이라는 것 말이다. 리파이에게는 신념이 있었다. 나는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신념 말이다. 나는 불법 복제 시디를 쓰면서 정보의 공유니 하 는 생각은 해보지도 않았고, 번들로 제공된 트렌스 파워를 쓰면서 독점에 대한 경계심을 가져본 적도 없다. 리파이의 신념은 과연 옳은 것일까? 리 파이의 신념은 히틀러의 그것과 같을까, 아니면 예수님의 그것과 같을까. 혹은 그것들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신념을 가지고 있는 걸까. 리파이와 오토는 휴게실 구석에 있는 이리듐 폰 박스 쪽으로 걸어갔다. 완전 밀폐된 박스들은 꼭 벽돌을 늘어놓은 것처럼 일렬로 서 있었다. 리 파이는 세 번째 박스를 두드렸다. "통화중이세요?" "바티칸 시티에 살고 있는 친구와 전화를 하려고 하는데요. 급하신가 요?" "아뇨. 저는 파키스탄에 사는 친구한테 전화를 좀 하려고요" 암호인 모양이었는데 듣기에 너무 뻔하게 암호 같다는 느낌이 드는 말 이었다. 오토는 분명 경호에 있어서는 프로다. 하지만 리파이는 확실히 아마추어 같은 티가 나고 있었다. 엉성한 암호에, 아직 체계화되지 않은 논리에... 그런데 그런 걸 느끼면 느낄 수록 FHA가 점점 더 친숙하게 느 껴지고 있었다. 이건 또 왜 그러는 걸까?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1385/11996 ━━━━━━━━━━━━━━━━━━━━━━━━━━━━━━━━━━━━━━━━ 제 목:[탐그루] 영혼의 에뮬레이터 6 121 관련자료:없음 18/18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2-10 00:09 조회:1733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문이 열리자, 나는 지금까지 했던 생각이 다 날아가 버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문을 열고 나온 사람이 아톰이었기 때문이었다. 이건 좀 지나친 데. "아톰?" "그래, 나야. 몰랐지?" 아톰이 박스 안에서 나오면서 말했다. 정말 의외였다. 아톰 같이 세상 일에 다 비관적인 사람이 이런 낭만적인 단체에서 일을 하다니 말이다. "아톰. 매일 같이 했던 말들, 그러니까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야, 뭐 그런 투의 말들이요. 그거 다 위장이었어요?" "아니. 나 원래 그래" 아톰이 말했다. 그것도 아주 특별히 냉소적으로 말이다. "그럼 부루터스하고 실버우드도 FHA에요?" "아뇨, 비류 님. 실버우드는 제가 FHA인 줄은 알고는 있지만 같이 일하 지는 않아요" "부부 사이에도 숨기는 게 비밀 조직인데... 그렇게 다 떠벌리고 다녀 도 되는 거야 리파이? 거기다가 암호는 또 어디서 그렇게 유치한 걸 만들 었는지. 게임한 번 안해본 사람처럼 말이야. 아니, 그보다 암호는 무슨 암호야? 다 알고 지내는 처지에" "만약 감시당하고 있다면 바티칸 시티 대신에 런던에 사는 친구가 찾아 온다고 말하기로 했잖아. 다 안전을 위해서야, 아톰. 이런 일을 하는 데 는 안전이 제일이라고" "하하하. 감시당하고 있다면 이미 늦었지. 한가하게 암호나 나누고 있 는 사이에 포위 당했을 텐데 이제 와서 알아 뭐하겠다고" "하여간" 아톰도 꽤 합리적인 구석이 있는 친구다 싶었다. 나는 그래서 혼자 고 개를 숙이고서 키득거렸다. "그런데 왜 이런 곳에서 모임을 갖게 된 거죠?" "순전히 비류 때문이지. 저기 서있는 리파이가 위대한 전신의 힘을 빌 어서 FHA의 새 장을 열어보겠다고 했거든" 아톰의 해설을 들으면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속으로 아톰에게 가운 데 손가락을 들어 보이면서 말이다) "아버지에게 전화하세요" 리파이가 말했다. "왜죠?" "일단 그렇게 시작해야 할 것 같네요. 이진우 수사관하고 약속을 하셨 으니 어스넷 지명수배자 명단에 들고 싶지 않으시다면 당연히 전화를 하 셔야 하지 않겠어요?" "그게 아니라 아버지의 힘이 필요한 거겠죠. 이진우 수사관하고 마찬가 지로" 나는 리파이의 꿍꿍이를 이제 대충 짐작 할 수 있었다. 새로운 FHA 사 람을 구하던 리파이는 나에게 눈독을 들이고 접근한다. 그런데 조사를 해 보니 아버지가 유명한 반전운동가였다. 아버지를 끌어들이기 위해 리파이 는 나를 이용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래서 도청 당하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어스폴 요원들이 따라 붙을 것을 예상, 나를 불러낸다. 어쩌면 오토를 고 용한 것도 그 때문인지 모른다. 그게 내 뒷조사를 하기 전의 일인지 후의 일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어찌되었건 조금 일이 꼬이긴 했지만 리 파이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다...뭐 이런 내용 말이다. "비류 님. 선택의 여지가 없을텐데요" "리파이. 선택의 여지는 많아. 여기서 당장 죽어버려도 되고, 또 어스 폴에 투항하는 방법도 있지. 사실 그런 방법이 더 마음에 들 거야, 저 친 구는. 생각해 봐. 뭐 하나 제대로 하는 일도 없는 FHA에 가담하느니 힘있 고 든든한데다가 합법적인 어스폴에 투항하는 편이 낫지 않겠어?" 아톰이 나에게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아톰의 말은 나를 부끄럽게 만 들었다. 나는 리파이가 했던 말들을 떠올렸다. MS사의 독점욕과 음모, 그 리고 그것에 대항해서 싸우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 나는 그런 이야기 를 듣고도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아톰의 말 그대로 어스폴에 붙을 생각이나 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인질로 잡혀있었다고 말 하려고 했으니 말이다. 어떻게 할까. 나는 잠시 동안 망설이다가 전화박스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혼자살기 시작한 이후로 단 한 번도 아버지에게 도움을 요청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예외다. 여기서 누군가 구원해 주지 않으면 나는 점점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고 말 것이다. 그게 리파이의 신념이건, 혹 은 나를 쫓는 이진우의 신념이건 말이다. 나는 목소리가 듣고 싶어졌다. 트렌스 파워의 변역음이나 나에게 뭔가 강요하는 목소리가 아닌 진짜 아 버지의 목소리를 말이다. "같이 들어가요" 리파이가 전화박스 안으로 당장이라도 따라 들어올 기세로 다가오면서 말했다. "죄송하지만 안 되요" "암호라도 있나요? 암호를 들키게 될까봐 그러는 거에요?" "아버지는 암호를 안다고 해서 통화할 수 있는 분이 아니에요. 그쪽 트 렌스파워에 입력이 되어 있다고요, 제 목소리가" "그럼 통화 내용 같이 들어도 상관 없겠네요" "저 말고 다른 사람이 있으면 그쪽에서 알아차리고 연결시키지 않죠. 프로들은 리파이 님 처럼 어리숙하지 않답니다" 내 말에 리파이는 기분이 상한 것 같기는 했지만 최소한 수긍은 한 모 양이었다. 뒤로 물러서는 리파이의 얼굴에 자존심이 상했다는 빛이 역력 했다. 나는 전화박스의 문을 닫고 아버지의 이리듐 전화 번호를 눌렀다. "교환입니다" 전에 들은 적이 있는 대리인의 음성이었다. 아마도 트렌스파워의 번역 음이 틀림없으리라. 사실 이 대리인의 목소리가 나를 기다린다는 걸 알면 서도 나는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 때마다 일종의 기대를 가지고 전화를 하 곤 했다. 언젠가는 아버지가 받겠지, 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비류입니다. 아버지를 찾습니다" 암호는 평범한 말이어야 한다. 다만 그 억양이나 토씨를 무엇으로 사용 하는 가가 중요하다... 언젠가 아버지가 나에게 해 준 말이었다. "만델라님은 지금 외부에 계십니다. 뭐라고 전해드릴까요" 역시 같은 대답이었다. 하지만 내가 음성을 대리인에게 전하면 아버지 는 며칠 내에 나에게 반응을 보여주었다. 내 이메일 주소로 짧은 편지글 을 보내 준 적도 있었고, "그냥... 도움이 필요하다고 전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전화는 끊어졌다. 어스폴에게 쫓기고 있다는 말을 할까 했지만 나는 그 런 말까지는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리파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정보 망이 두텁다. 어쩌면 내가 이런 전화까지 하지 않았어도 이미 사정을 다 알고 뭔가 행동을 준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게 아버지 스타일이니까. 언젠가 한 번 생활비를 도둑맞았을 때, 나는 대리인에게 그냥 안부를 묻 고 싶다고만 한 적이 있었다. 전화를 하기는 했지만 차마 도움이 필요하 다고는 말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사실 막막하기는 했지만 아버지 에게 도움을 청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었다. 나는 그게 내가 아버지 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이라 생각했던 거였다. 그렇다고 해서 전화를 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멍청하게 현금카드를 빼앗기고 후들거리는 다리 로 집에 돌아온 열 다섯 살 짜리 소년이 무슨 일을 할 수 있었겠는가? 그때 나는 아버지에게 도와달라는 말을 남기지 않았던 걸 다행으로 생 각한다. 며칠 뒤에 한푼도 축나지 않은 현금카드가 집으로 배달되었다. 역시 아버지는 놀라운 존재였다. 항상 매끄럽고 틀림없이 일처리를 하고, 멀리서도 자식의 속마음을 환히 꿰뚫어보고 있는 아버지는... 고맙긴 하 지만 웬지 내게는 제대로 살라는 질책으로 여겨졌다. 다른 어떤 것보다 더 무서운 무언의 책망이었다. 곁에 있어도 멀리 있어도 아버지의 존재감 이 느껴진다. 때로는 감시자로 때로는 파수꾼으로 그리고 대부분은 이해 할 수 없는 존재로. "어때요? 저희 일, 도와주신다고 해요?" "그냥 도움이 필요하다고만 했어요. 선택은 아버지께서 내려요. 그 동 안은 기다리는 수밖에 없지요"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정말로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 지에게 인정받고 싶었는데. 이제 프로 게이머가 되었으니 스스로 독립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목구멍이 바늘구멍만 해진 느낌이 들었다. 바 보 같으니라고. 바보 같으니라고. "그럼 정말로 어스폴에 자수하게 될 지도 모르겠군" 아톰이 비꼬는 말투로 말했다. "그렇게 되면 절 인질로 잡지 그래요?" 이런 말까지 하기는 싫었지만 이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만델라의 아들을 인질로 잡는다? 하하하. 그것 참 근사하군. 만델라 추종자들이 당장이라도 폭탄 한 두개쯤은 배달해 주겠는데? 아니면 길거 리에서 빔핸드건을 맞게 될지도 모르고" 아톰의 농담에 나는 미소를 보여주었다. 세상만사 다 귀찮은 노인이나 지을 법한 미소였다. 나는 후버카의 뒷좌석에 탔다. 오른쪽에는 리파이가 앉았고, 앞좌석에 는 아톰이 앉아있었다. "비류 님. 며칠 피해있기로 하지요. 당장 어스폴이 우리를 추적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안전한 게 제일이잖아요?" "리파이. 솔직히 말해. 어스폴에 붙을까봐 겁난다고" "오토. 아톰 입좀 막아줄래요?" 리파이가 아주 기분 나쁘다는 투로 말했다. "어. 그럴 수는 없지. 오토 임금을 지불하는 게 누군데" "돈 자랑하는 건가요?" "아니. 돈 많은 걸 과시하는 거야. 하하하" 아톰이 말했다. 아톰이 그렇게 부자였던가? "이 차 비싸지 않아요? FHA는 수익사업체라도 몇 개 가지고 있는 모양 이지요?" 나는 이렇게 리파이에게 물었다. "아니에요. 아톰이 산 거에요" "비류. 신경 쓰지 마. 문짝 하나 날아갔다고 화낼 만큼 속 좁은 사람 아니니까. 아버지가 봤다면 뭐라고 했을지 모르겠지만" 아톰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아톰도 아버지의 힘을 빌려 살고 있는 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아톰도 나와 비슷한 생각으로 살고 있는지도 모르지. FHA에서 일하는 것도 아버지에게서 독립하고 싶다는 의 지의 표현인지도. 나는 수르카를 생각했다. 수르카는 혼자 힘으로 자신의 길을 선택해가 며 살고있는데. 그것도 나보다 세 살이나 어린 나이에 말이다. 삼 년 전 의 나는 도대체 뭘 하고 있었던가. "그래서 수르카는 어떻게 됐지?" 나는 차창 밖을 내다보면서 이렇게 세헤라자드에게 물었다. 창 밖은 이 제 서서히 어두워들어가고 있었다. 붉게 물들어가는 산자락에 솟은 나뭇 가지들이 을씨년스럽게 느껴졌다. "수르카는 사비오를 찾기 위한 첫 걸음을 내딛었습니다. 그건 어쩌면 사비오를 찾는 길이 아니라 자신을 발견해 나가는 길인지도 모르지요" 자신을 발견해 가는 길이라. 나는 눈앞에 펼쳐진 고속도로를 바라보았 다. 꼭 나 들으라고 하는 말 같군. 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하는 멍청한 녀 석이라고 말이야. "사비오를 찾던 수르카는 우연히 오브라디 교수를 만나게 됩니다. 오브 라디 교수와의 만남은 수르카를 새로운 모험의 길로 인도하게 됩니다" 세헤라자드의 이야기는 이렇게 다시 시작되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1386/11996 ━━━━━━━━━━━━━━━━━━━━━━━━━━━━━━━━━━━━━━━━ 제 목:[탐그루] 범버쿠 냠냠 범버쿠 122 관련자료:없음 24/24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2-10 00:10 조회:1695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 범버쿠 냠냠 범버쿠 "이건 완전히 속은 기분이야" 사비사 마법학교의 응접실에 앉아서 사비사가 오기를 기다리면서 나는 모짤트에게 이렇게 말했다. 모짤트는 그레텔을 쓰다듬으면서 고개를 끄덕 였다. "그건 아니야. 바리바는 바리바가 원하는 걸 손에 넣었고 너는 네가 알 고 싶어하는 걸 알게 됐잖아. 그럼 된 거지" "그건 용병 사이에서나 통할 얘기지. 그게 말이나 돼? 망할 놈의 바리 바 녀석. 뻔히 알면서 부려먹은 거 밖에 더 되냐고. 나 원 참. 사비사 마 법학교 교장이 사비오 영감 동생이라는 걸 왜 나만 모르고 있었지?" "그야 넌 임프 시 출신이 아니니까" 옳은 말이긴 하지만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사비오 영감. 마법학교 교 장의 형이라면 그만한 명성은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이렇게 감쪽같이 몰랐다니. 하긴, 마법사니, 정치니, 성황청이니 하는 거에 관심이 없는 탐그루 사람들이니 그럴 법도 하긴 하지만 말이다. 나는 내 앞에 놓여있는 찻잔에서 모락모락 올라가고 있는 김을 바라보 았다. 평소에는 아무 관심도 없이 바라보았던 김이지만 지금 내 눈에는 꼭 힘없이 운명에 끌려다니고 있는 내 모습 같게만 여겨졌다. 바리바와 함께 아침에 돈을 받으러 간 것까지는 좋았다. 내 딴에는 어 떻게 하면 최고로 험악한 인상을 지을 수 있을까 연구까지 해서 나갔다. 그런데 술값을 안내고 있다는 자이벌 녀석이 하필이면 다리 밑에서 만났 던 재수 없는 자이벌 문삼 녀석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여간 녀석도 내 앞에서 체면 구겨지기는 싫었는지 순순히 돈을 내 놓았고, 거기까지는 문 제없이 일이 진행되었다. 그런데 스칼렛이라는 아가씨와 거기서 만나게 되면서 일이 틀어졌다. 아니, 틀어진 건 아니고 결과적으로는 잘 된 일이 었지만 말이다. 바리바에게 돈을 건내 주면서 사비오 영감에 대해서 묻자 바리바는 아 주 선심이라도 쓰듯이 사비오 영감이 사비사 마법학교의 교장 사비사의 형이라는 정보를 주었다. 그런데 스칼렛이 한 마디 던졌던 것이다. '그걸 모르는 사람도 있나요?' 알고 보니 예언의 눈동자라는 이름도 임프 시에서는 꽤 유명한 사비오 영감이 낸 시집이름이었다. 예언의 말로 해석 될 수 있는 전설들을 시 형 태로 바꾸어 모아 놓은 책이었다. 하지만 내가 뭐라고 따져 묻기도 전에 바리바는 돈을 들고 루크와 함께 후다닥 사라져 버렸고, 나는 스칼렛에게 붙잡혀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 '그 유명한 사비오 선생님의 제자 분이셨군요. 역시 제가 사람을 제대 로 봤어요. 따라 오세요. 제가 안내해 드리지요' 하여간 그렇게 해서 나와 모짤트는 이곳 응접실에서 사비사를 기다리게 된 것이다. "여기 온지 얼마나 됐지, 모짤트?" "글쎄. 점심때가 지난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배가 고팠다. 이거, 밥은 안주고 이상하게 쓴맛이 나는 차 한 잔만 주고 마는 거 아닌가 싶었다. "좀 더 기다려 보지" "모짤트. 그렇게 말 안 해도 그 수밖에 없어" 내 말에 모짤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린 고기를 그레텔에게 주었다. 그레텔은 말린 고기를 빨면서 멍한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 거 자꾸 주지 마. 밥 제때 안 먹으면 키 안 커" 나는 내 키가 자라지 않은 게 순전히 못 먹은 탓이라고 생각하고 있었 기 때문에 이렇게 말했다. "말린 고기를 먹는 건 그리 해롭지 않지. 말린 고기에는 꼭 필요한 영 양소들이 많이 들어 있거든. 소금과 고기, 거기에 양념으로 들어가는 육 두꽃 열매. 아주 이상적인 배합이지" 나는 말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았다. 거기에는 키가 크고 어 깨가 떡 벌어진 구릿빛 얼굴을 한 사람이 서 있었다. 나이는 대략 쉰이나 되었을까. 배가 나오고 전체적으로 살이 쪘다는 인상이었지만 젊었을 적 에는 힘깨나 썼을 것 같아 보였다. 사비오 영감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 다. "사비사 선생님이십니까?"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면서 말했다. "유감스럽게도 아닐세. 지금 나도 점심 식사를 기다리던 중이었거든" 일단 일어나기는 했는데 다시 앉자니 예의에 어긋나는 것 같고 그렇다 고 해서 서있자니 더 할 말이 없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예. 저는 사비사 선생님을 뵈려고 온 사람입니다" "나는 오브라디 교수라고 하네. 자네는 어쩐 일로 이곳에 왔는가?" 오브라디 교수? 언젠가 마로우에게서 들어 본 이름이었다. "혹시 스파일의 바로 그 오브라디 교수님이신지요?" "아, 나를 아는 사람도 있었군. 임프 시에는 학문에 관심이 있는 사람 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는데, 이거 생각을 수정해야겠어" "저는 탐그루 출신입니다만" "아, 그런가? 역시 임프 시에는 도무지 학문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없 다니까. 다들 돈 버는 일에만 안달이지 그밖에 일에는 관심이 있는 사람 이 하나도 없어. 어리석은 일이지. 돈을 모으는 게 인생의 목적이나 되는 것처럼 말일세. 자이벌들을 보게! 인생을 허비하고 있지 않은가? 돈을 모 으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서 말이야. 창 밖을 보게.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 운가. 또 아름다운 시와 음악은 또 어떤가. 임프 시에는 도대체 문화가 없어" 오브라디 교수는 갑자기 열변을 토했다. "저, 일단 앉으시지요" 나는 오브라디 교수에게 자리를 권했고, 오브라디 교수는 성큼성큼 걸 어와 내 옆자리에 앉았다. 보폭이 넓고 힘찬데다가 일정한 게 교수라기 보다는 꼭 군인 같은 걸음이었다. "오래간 만에 나를 아는 사람을 만나니 기분이 좋군. 자네 이름이 뭔 가?" "저는 탐그루의 수르카라고 합니다" 나는 잠시 이름을 말해야 할까 망설이다가 이렇게 말했다. 아무래도 마 로우가 존경한다는 유명한 교수인데 별 문제가 있으랴 싶었다. "탐그루. 좋은 곳이지. 대청하는 아름답게 흐르고, 운하에는 정겨운 배 들이 늘 다니고 있지. 거리에는 인심 좋은 상인들에, 중앙 광장에는 활기 가 넘치고. 이곳하고는 바람이 달라. 타실에 갈 때마다 몇 번 들러 보았 네만, 뭐랄까 임프시처럼 돈에 죽고 못사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 같진 않더군" 탐그루. 오브라디 교수의 입에서 나오는 탐그루는 내가 기억하는 탐그 루하고 조금 멀기는 했지만 그리움을 불러일으키기는 했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그렇게 아름답게 보이는 곳이었던가. 그곳에 있을 때 나는 왜 그 런 생각을 해보지 못했는지. "돈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인생에는 여러 요소가 있네. 예를 들어보 지. 사람이 물만 먹고 살 수 있나? 아니면 고기만 먹고 살 수 있나? 이것 저것 섞어 먹어야 사람답게 살 수 있지 않겠나. 영양소가 뭔지 아는가? 그건 몸 속에서 피와 살로 바뀌는 것들을 분류한 말이야. 예를 들어보지. 고기는 사람의 살을 만들고 소금은 피를 진하게 만드네. 야채는 사람을 늘 싱싱하게 만들고 기름은 사람을 강인하게 해주지. 이 모두가 다 중요 한 일 아니겠는가? 인생도 마찬가지야. 돈은 인생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 아. 아까 말한 음악이며 시며, 또 자신이 좋아하는 풍경 같은 것과 마찬 가지로 말이야. 또 돈이라는 건 꼭 필요한 거긴 하지만 어떻게 버느냐도 중요하지. 직업이라는 거 말일세. 돈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 경우를 한 번 생각해 보게. 아무리 돈이 좋다고 해도 그렇게 벌어야 쓰겠나?" 오브라디 교수의 말에 나는 속으로 찔끔하지 않을 수 없었다. 꼭 나를 비난하는 목소리 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하잔... 죽어간 사람들... 아마 도 나는 평생 동안 하잔을 잊지 못할 것이다. 아니, 하잔에 진 빚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낫겠다. 나는 그 빚을 일생동안 갚지 못할 것만 같았다. "...이렇게 돈을 버는 데에는 여러 방법이 있네. 학문도 그중 하나지. 물론 나에게는 좀 더 중요한 하나이기는 하지만 말일세" 여기까지 말하고서 오브라디 교수는 별로 우습지도 않은데 입을 크게 벌리고 껄껄 웃었다. "흠. 그런데 자네는 아무 말이 없군. 자네 같은 사람이 어쩌면 가장 위 험한 사람일 수 있어. 아무 말이 없으면 말이 사람 마음 안에서 자라나서 무시무시한 괴물이 되는 수가 있거든. 예를 들어보지.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아주 미워하고 있어. 그 미워하는 마음이 매일같이 자라나고 또 자라나서 결국에는 이렇게 생각을 하게 되지. '차라리 저 자식을 죽여버 리겠어' 하고 말일세. 이런 식으로 살인은 일어나기 마련이야. 왜 살인을 하게 되는 걸까? 그건 상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야. 만약 예 를 든 그 사람이 미워하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었다면 살인을 하지 않았으 리라고 나는 생각하네. 마음을 이해하고 나면 아주 단순한 결론을 얻을 수 있으니까 말일세. 그 사람도 사람이구나, 하고 말일세" 모짤트가 힐끔 오브라디 교수를 한 번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다시 말린 고기를 빨고 있는 그레텔에게 시선을 돌렸다. "마음을 이해하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지요" 나는 이렇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대단한 진리는 아니겠지만, 나는 적어 도 누군가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알고 있었다. "자네, 좀 다르게 생각하는 군. 탐그루가 임프보다는 낫다는 말은 아까 했지만 내가 지금껏 봐온 학생들하고는 달라. 이곳 임프 시에 온 지도 벌 써 한 달이 다 되어 가는데, 자네 같은 마음으로 공부하는 학생은 하나도 없었어" "아닙니다. 전 여기 학생이 아닙니다. 누구를 좀 찾으려고요" "사비사? 하하하. 그 친구한테서 뭘 배우려는 지는 몰라도 포기하게. 마법은 스스로 알아나가는 거지 누가 가르쳐 줄 수 있는 게 아니야. 예를 들어보지. 이곳 마법학교에서는 마법의 말을 적은 책을 나누어주고 그 말 을 외우고 있나 외우고 있지 않나 매달 시험을 치뤄 성적을 매기지. 그래 서 모든 학생들이 아주 열심이야. 마법의 말을 외우느라고. 하지만 그 학 생들 중에서 마법을 쓸 수 있는 학생이 얼마나 되는 지 아나? 열 명에 한 명도 안돼. 이곳 이름이 마법학교이니 나머지는 그 한 명을 위한 들러리 에 지나지 않는 꼴이지. 그나저나 여기 마법학교에서 그런식으로 마법을 배우려는 거라면 포기하게. 마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사람을 보니 반가 워서 하는 충고야. 새겨듣게" 아주 나를 마법을 배우려는 사람으로 단정을 지으며 오브라디 교수가 말했다. 그런데 마법의 말을 외운다니 그게 무슨 소리지? 물론 나도 이제 는 글에서도 마법을 느낄 수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마법의 말을 적어 놓은 책을 나누어주고 그걸 외우게 한다니 이해가 가질 않았다. 글 은 말과 달라서 글쓴이의 마음을 쉽게 알 수가 없는 법일텐데 말이다. 그 런데 그 책에 쓰여 있는 말을 이해하고, 책을 쓴 사람과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마법의 말을 외운다니 그게 가능한 건가? "포기하라고. 알겠나?" "저, 저는 사비사 선생님을 찾아 온 게 아닙니다" "아. 그런가? 그럼 누구를 찾아왔지? 사비사를 기다리고 있다고 하지 않았나?" "사비사 선생님의 형이신 사비오 선생님을 찾아서 왔습니다" "사비오?" 내 말에 오브라디 교수의 눈이 커졌다. "알고 계시나요?" "알다마다. 나하고는 절친한 친구지. 자네, 사비오하고 어떤 관계인 가?" 갑자기 흥미를 느꼈는지 내 어깨에 손까지 얹으면서 오브라디 교수가 말했다. "한때 마법을 배웠습니다" "그랬군!" 무릎을 탁 치면서 오브라디 교수가 외쳤다. 그런데 하필 내 무릎을 칠 건 뭐람. 힘이 얼마나 좋은지 나는 악, 소리를 지를 뻔 했다. "어쩐지 마음에 대해서 얘기하는 게 심상치 않아 보였어. 역시 그랬구 만" 오브라디 교수는 이렇게 말하고는 사비오 영감은 잘 있느냐는 둥, 그 친구가 쓴 예언의 눈동자를 읽어보았느냐는 둥, 별 소리를 다 늘어놓았 다. 물론 교수답게 달변에다가 조리있게 말을 하기는 했지만 계속 듣고 있는 일도 고역이었다. 특히 바로 옆에서 얘기를 듣자니 침이 튀는 데다 가 귀가 아파올 만큼 목소리도 컸다. 다행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비사 를 부르러 갔던 스칼렛이 돌아왔다. "마법사 님. 교장 선생님께서는 지금 너무 바쁘셔서 오후에나 시간이 나시겠답니다. 그 전에 저하고 같이 식당에 가서 식사나 좀 하고 오시지 요" 스칼렛이 말했다. "잘 됐군! 나도 식사를 하려던 참이었는데. 우리 같이 가면서 이야기나 좀 하지. 그런데 자네 마법사였나? 사비오한테 마법을 배웠다면 마법사 소리 듣기 어려울 텐데?" 오브라디 교수는 이렇게 말하고는 다시 한 번 껄껄 웃었다. 이번에는 좀 웃음소리가 지나치게 크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모짤트마저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서 나는 쓴 맛이 나는 차는 몇 모금 마시지도 않고 스칼렛 을 따라 식당으로 향하게 되었다. 마법학교는 상당히 넓고 잘 꾸며져 있었다. 거대한 정문을 통과해 들어 오면 바로 앞에 대마법사 아킨의 동상이 서 있고, 그 옆에는 커다란 비석 에 '마법은 마음이다'라는 말이 적혀있다. 그리고 그 주변으로 공원이 조 성되어 있었는데, 푸른 잔디밭과 갖가지 빛깔의 꽃들이 어우러져 산뜻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하늘을 바라보고 뭔가 생각에 잠겨있는 듯한 대마법 사 아킨의 동상을 지나면 삼 층짜리 거대한 교사동이 있고, 그 옆으로 도 서관과 마법 실습 실 그리고 그 뒤로 식당과 교장 사옥이 있다. 식당으로 들어가면서 나는 교장의 사옥을 바라보았다. 탐그루의 시청만 큼은 되지 않았지만 거의 그에 비견될 만큼 큰 건물이었다. 마법학교의 교장이 저렇게 큰 건물에 사는 이유가 뭔지. 나는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 었다. 그만큼 힘이 있다는 얘기일까? 아니면 돈이 많다는 말일까. 어쩐지 사비오 영감이 가지고 있던 금화가 너무 많다 싶었는데 돈 많은 동생을 둔 덕분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스칼렛. 하나 물어볼게요. 여기서는 마법의 말이 적혀 있는 책 을 외운다는 게 정말인가요?" "예?" 스칼렛이 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당연하지 않아요? 마법학교에서 마법을 공부하는게?" "아니, 내 말은 그 책에 적혀 있는 말을 외워서 마법을 쓸 수 있느냐는 거에요" "마법은 그렇게 쉽게 가능한 게 아니라고 배웠는데요" "물론 쉽지는 않죠. 그런데 내 말은 그 마법의 말을 이해하지 않고 그 냥 외운다고 해서 마법이 되느냐는 말이에요" "열심히 노력하는 것만이 좋은 결과를 가지고 오는 법이라고 배웠어요" 스칼렛은 여전히 이상하다는 표정이었다. "스칼렛.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요, 노력도 노력 나름이죠. 마법이 무 슨 장사할때 품목 외우는 일도 아니고 말이에요" "그럼 무슨 특별한 방법이라도 있나요?" 순간 스칼렛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아마 내가 무슨 대단한 방법이라도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마 내가 무슨 특별한 수단으로 마법을 배울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말한다면 당장이라도 가정교사로 들 어오지 않겠느냐고 물어볼 것 같았다. 물론 지난 번에 내가 화를 낸 일을 기억한다면 그렇게 묻지는 않겠지만. "말해봐야 헛수고야. 여기는 원래 마법을 배우는 일이 외우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만 있으니까 말일세. 예를 들어보지. 태어나서 계속 자라나 면서 성인이 될 때까지 걸어다니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에게 뛰는 법을 설명해 준다면 이해를 하겠나? 여기 임프 시에서 마법을 배우고 있는 학 생들이 그렇다네" 오브라디 교수가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여전히 침을 튀기면서 말이 다. 식당에는 식사를 하고 있는 학생들로 가득했다. 그런데 그러고 보니 남 녀를 가리지 않고 하나같이 똑같은 흰옷을 입고 있었다. 머리 모양도 남 자는 아주 짧았고, 여자도 남자보다는 조금 길었지만 스칼렛처럼 짧은 모 양이었다. 나는 전에 스칼렛이 배에서 나에게 들려주었던 이야기가 떠올 랐다. 사비사라는 이곳 교장은 꼭 이렇게 해야만 마법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걸까. 생각이야 어찌되었건, 식사는 아주 먹음직스럽게 보 였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1387/11996 ━━━━━━━━━━━━━━━━━━━━━━━━━━━━━━━━━━━━━━━━ 제 목:[탐그루] 범버쿠 냠냠 범버쿠 123 관련자료:없음 27/27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2-10 00:10 조회:1485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시장한 것만큼 좋은 요리사는 없는 법이지, 하하하" 오브라디 교수는 허겁지겁 음식을 먹어치우고 있는 나를 바라보면서 말 했다. 그런데 그러고 보니 스칼렛이 여전히 이상한 사람 바라보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요리 솜씨 같은 걸 따지고 싶지는 않을 만큼 배가 고프긴 했지만 그래도 좀 맛있게 먹는다고 해서 그렇게 바라볼 이유 가 있을까? "저, 마법사 님. 여기서는 그렇게 드시면 안돼요" 스칼렛은 조심스럽게 내게 말했다. 그럼 어떻게 먹으라는 걸까? "먼저 양 옆에 있는 야채를 드시고요, 그 다음에 가운데 있는 고기에 소금을 뿌려 드시는 거에요. 그리고 나서 감자를 드시고요" "꼭 그래야 하는 이유가 뭐죠?" 나는 수저 위에 감자를 으깬 조각을 올려 놓으면서 말했다. "마법사 님. 마법사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예절이라고 배웠는데요" 이 말에 오브라디 교수가 웃음을 터트렸다. 물론 남자답고 호탕한 웃음 소리를 두고 내가 뭐라고 할 건 아니지만 이건 좀 해도 너무한다 싶을 만 큼 큰 웃음소리였다. 식당 안의 학생들의 시선이 모두 우리가 앉아 있는 테이블로 모아졌다. "예절은 중요하지만 마법하고는 상관없어요, 아가씨" 오브라디 교수는 이렇게 말하고는 고기 조각을 입에 밀어 넣었다. "아니, 어떤 경우에는 예절도 별로 중요하지 않답니다. 중요한 것은 사 람 마음이지요" 고기를 우물거리면서 오브라디 교수가 말했다. 나는 오브라디 교수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지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지금 저 모습만큼은 별로 마음에 들지가 않았다.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저렇게 고기를 씹으면 서 말하면 누가 좋은 말이라고 생각할까. 과연 스칼렛의 표정은 아주 불 결한 것을 보기라도 했다는 듯이 일그러졌다. 오브라디 교수는 말을 잘하 는 지는 모르지만 말하는 방법은 별로 좋지 못하군. 식사를 마치고 나자 오브라디 교수는 잠시 시간을 내 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사비사는 수르카가 온 걸 아니까 뭐 큰 문제는 없을 거에요, 아가씨. 저 쪽 마법 실습실에 있을테니 사비사한테는 그렇게 전해 줘요" 스칼렛은 좀 불만스럽다는 표정을 짓기는 했지만 알겠다고 말하고는 교 사동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 오브라디 교수라는 사람, 학생에게 사비사 라고 이름을 함부로 말하다니. 아무래도 생각보다 높은 사람인가보다 하 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고기를 아무렇게나 씹어대면서 말하는 무식한 사람이거나 말이다) "수르카. 자네에게 꼭 보여 주고 싶은 게 있어서 이렇게 부른 걸세" 오브라디 교수의 목소리는 낮게 깔려 있었다. 갑자기 이렇게 돌변하다 니. 나는 긴장이 되어 몸가짐을 한 번 다시 바로 했다. "여길 한 번 보게" 오브라디 교수는 마법 실습 실에 들어서면서 이렇게 말했다. 마법 실습실은 나무로 지어진 단층 건물이었다. 삼 층 짜리 거대한 교 사동에 비한다면 그 크기는 작았지만 내부는 정말이지 휘황찬란하게 꾸며 져 있었다. 내부 벽면과 바닥은 모조리 짐승의 가죽으로 치장되어 있었고 천장에는 오색의 빛을 뿜는 연금술사의 등이 있었다. 그 밑으로 도대체 뭐에 쓰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유리병과 쇠막대기, 작은 연금술사의 등같이 자잘한 것들이 올려져 있는 책상들이 있었고 두꺼운 책들이 죽 꽂 혀 있는 책꽂이도 있었다. "와... 대단하군요" 나는 나도 모르게 탄성을 발했다. "그 정도 가지고 뭘 그러나. 저 안쪽으로 들어가 보면 먼 남쪽 범버쿠 정글에서 잡아온 악어나 바바 족 영역에서 사는 백곰 같이 진기한 동물들 의 가죽도 있다네" 오브라디 교수의 목소리는 여전히 가라앉아 있었다. 그런데 악어는 뭐 고 백곰은 또 뭘까. 언제 한 번 들어본 것 같기는 한데... 하여간 세상에 는 알 수 없는 동물이 너무 많다니까. (내가 탐그루 출신 도시 촌놈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말이다) "저 친구들 보이나?" 오브라디 교수가 손가락으로 안에서 마법을 연습하고 있는 몇 명을 가 리켰다. 좀 떨어져서 보니 다 같이 짧은 머리에 같은 흰옷이라 누가누군 지 구분이 되질 않았다. "여기서 가장 촉망받는 마법 학생들이지. 한 번 보게" 그 중 하나가 수저를 손에 들고 땀을 뻘뻘 흘리며 마법의 말을 외우고 있는 모습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비스토브레* 왕국의* 바른* 시민은* 일찍* 일어나* 새* 아침을* 맞는 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기* 때문이다* 부지런한* 국민이* 위대한* 국가를* 건설한다*" 무슨 마법의 말인지 통 감을 잡을 수는 없었지만 하여간 마법의 말은 마법의 말인 것 같았다. 미약하기는 했지만 마법의 말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고 또 수저가 아주 조금이기는 했지만 휘는 걸 눈으로 확인 할 수 있 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한 쪽에서도 열심히 마법의 말을 외우고 있었다. "국왕에* 충성하라* 바바* 족에* 맞서* 싸우라* 명예를* 소중히* 하라* 그리고* 의무를* 다하라*" 이번에도 무슨 마법의 말인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마법의 말인 것 같기는 했다. 유리 병속에 들어있는 촛불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으니 말 이다. "계급을* 따르는* 자는* 계급에* 맞는* 대우를* 받기* 마련이다* 인생 을* 헛되이* 보내지* 마라* 그대의* 삶을* 결코* 가벼이* 여기지* 마라* 그대는* 그대의* 계급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이다*" "저 사람은 무슨 마법을 하고 있는 거죠?" 나는 궁금해서 이렇게 물어보았다. "연금술사의 등의 빛깔을 바꾸고 있는 걸세" "도대체 저런 마법이 무슨 소용이 있나요?" "그것보다 나는 저 학생들의 정신력에 감탄하고 있네" 오브라디 교수는 이렇게 말하고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낮은 목소리로 천천이 말을 했다. "만약 저 친구들이 '범버쿠 냠냠 범버쿠' 이렇게 외우기만 해도 저 정 도 마법은 할 수 있을 걸세. 지금 저 친구들이 하고 있는 건 마법의 말을 이해하고 그 마법을 구현하고 있는 게 아니라 그저 말을 중얼거리면서 자 신의 의지를 모으고 있는 것뿐이네. 강한 집중과 자신의 마음이 아무 마 법도 없는 말을 마법으로 바꾸고 있는 거지" "그렇군요" 말하자면 마법이 아니라, 마법의 부작용 같은 거였다. 나는 어이가 없 어졌다. 한때 잠시나마 마법학교에서 마법을 익혀 훌륭한 마법사가 되려 고 생각했던 내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지금 비스토브레 왕국에서 마법을 교육하는 일이 다 저모양이라네. 성 황청이 마칸의 강림에 대비해서 마법의 말을 모으는 일을 하고 있다지만 다 헛수고지. 저런 식의 마법의 말 모으기라면 도대체 무슨 성과가 있겠 나? 실력 있는 마법사를 영입하는 일은 효과가 있을 지 몰라도 마법의 말 만 가지고서는 아무 것도 못할 걸세. 성황청도 아마 성구로 발현되는 마 법 말고는 거의 쓸모 있는 마법이 없을 걸세" 나는 까딱했으면 '정말 그래요' 하고 대답할 뻔했다. 내가 성황청의 사 제들과 싸웠다는 말을 했다가는 어디서 어떤 꼴을 당하게 될 지 모르는 판국에 말이다. "수르카. 자네 사비오에게서 마법을 배웠다고 했지" "예. 그렇습니다만..." "자네의 사명은 뭔가?" "...사명이라고요?" "그래. 사명. 사비오 같이 예언의 능력이 있는 마법사가 제자를 내보냈 다면 분명 사명이 있었을 것 아닌가. 마법 제도를 개혁하라는 말을 하지 않던가? 아니면 제대로 된 마법 몇 개로 마법학교를 날려버리라고 하지는 않았나? 자네가 이곳으로 온 이상 분명 이유가 있을 걸세" 오브라디 교수는 진지하게 물어보았지만 나는 별로 진지하게 답하고 싶 은 생각이 없었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도 알아들을 수 없었거니와 사비오 영감은 그런 말을 내게 한 적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냥... 마음을 따르면 운명을 만나게 될 거라고 하셨는데요" 내 말에 오브라디 교수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운명... 운명이라. 사비오다운 발상이로군. 좋아. 자네나 나나 어떤 운명과 맞닥뜨리게 될 지 모르지만 사비오가 그런 말을 했다면 어디선가 우리의 운명이 서로 만나게 될 모양이지. 아니, 이미 같은 운명의 궤도를 달리고 있는지도 모르고. 사비오 그 친구 정말 속을 알 수 없는 친구라니 까" 오브라디 교수는 이렇게 말하고는 교사동 쪽으로 가버렸다. 나는 멍하 니 모짤트와 그래텔을 바라보았다. "이게 무슨 경우야?" "교장실로 돌아가지" 내 말에 모짤트가 현명한 대답을 했다. 그래. 운명인지 뭔지는 몰라도 일단 목적 한 건 이루고 봐야 할 테니까. 그래야 바리바한테 속은 게 덜 억울하겠다 싶었다. 교장실에 다시 돌아갔을 때, 나와 모짤트는 어이없게도 오브라디 교수 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운명의 궤도 운운하더니 그 궤도가 실습실에서 교장실로 이어진 건가? 나는 솔직히 오브라디 교수에게 뭐라고 한 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분위기가 그렇지 못했다. 오브라디 교수는 폭삭 늙은 사 람과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기 때문이었 다. "아, 마침 와 주었군. 이리와 앉게" 오브라디 교수가 꼭 자기가 주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나를 손짓으로 불 렀다. 아까의 착 가라앉은 목소리는 어디로 갔는지 처음 만났을 때의 높 은 목소리로 돌아와 있었다. "자네가... 형 제자인가?" 폭삭 늙은 사람이 나에게 말했다. 얼굴에 주름이 가득하고 비쩍 마른 사람이었다. 이 사람이 사비사란 말인가? 사비오 영감 동생이라고 하지만 아무리 봐도 사비오 영감보다 열 살은 더 많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머리 는 희다기 보다는 칙칙한 회색으로 새어 있었고, 그나마 얼마 남지도 않 아서 거의 대머리에 가까운 얼굴이었다. 거기다가 탁한 음성은 거의 백 살은 더 된 노인 같다는 느낌을 주고 있었다. "예. 그렇습니다" "제자라니. 형답지가 않아. 제자들 때문에 그만큼 고생 했으면 됐지 도 대체 무슨 일로 또제자를 다 키운 걸까? 형도 이젠 늙은 걸까. 그렇지?" 혼잣말인지 나한테 하는 말인지 알 수 없는 말로 사비사가 말했다. 나 는 대답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생각하면서 오브라디 교수를 바라보았 다. 오브라디 교수는 신경 쓰지 말고 앉으라고 나에게 손짓했다. 그래서 나는 모짤트와 함께 오브라디 교수 옆에 앉았다. "이보게, 사비사. 사비오도 다녀갔고, 그 제자도 왔네. 아직도 동의 못 하겠는가? 이제 시대는 바뀌고 있어. 모든 게 바뀌어야 할 때라는 말일 세. 자네의 방식이 낡았다는 사비오의 말을 기억하는가?" 훨씬 젊어 보이는 오브라디 교수가 사비사에게 반말을 하는 모습을 보 니 좀 이상한 광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법은 심오한 거야. 그렇지? 그리고 인생도 심오한 거고. 모든 일은 흘러야 할 곳으로 흐르기 마련이고 마법의 길도 마찬가지야. 그렇지?" 사비사의 말은 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중간중간 그렇지? 하 고 되묻는 건 또 왜일까. "답답하군, 사비사. 이제 그만 포기하게. 새로운 사람들이 오고 있어. 그들에게 자리를 양보해야지. 자네가 교재로 쓰고 있는 마법 책, 백 년 도 더 된 거라는 거 알고 있지? 그런 되지도 않는 마법의 말로 뭘 어쩌겠 다는 건가" "그 책은 이 마법 학교의 초대 교장인 데리데 님께서 대마법사 아킨 사 후에 출간된 '마법의 역사' 를 읽고 크게 감명 받아 단 삼 일 만에 완성한 불멸의 저서야. 그렇지? 마법은 말에 담겨 있다는 대마법사 아킨의 말도 모 르나? 그렇지? 대마법사 아킨의 책에서 영감을 받아 지은 책이니 마법을 배 우는 사람에게 이 이상으로 더 좋은 교재가 어떻게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렇지?" 아! 머리가 복잡해 진다. 무슨 말을 저따위로 한단 말인가? 괴롭구나 수르카 그렇지? "마법이 말에 담겨있다는 말은 옳지만 그런 식으로 쓰는 건 아킨의 말 을 자네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 거네. 그 말은 마법은 마음이라는 아킨의 말을 이해한 후에나 쓸 수 있는 말이야. 그리고 아킨이 언제 바른 시민이 되라는 말을 했던가? 그 말은 한참 후에 책 표지에 광고로 실린 말 아닌 가?" 흥분했는지 오브라디 교수의 입에서 다시 침방울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데리데 님을 무시하는 건가? 책표지는 책이 아닌가? 그렇지? 데리데 님께서 그런 걸 모르고 쓰셨겠는가? 다 혜안이 있으시니까 그렇게 쓰신 거겠지? 데리데 님의 책으로 마법의 말을 외우다 보면 차연히 다 알게 되 고 마법도 쓸 수 있게 된다네. 그렇지? 그건 우리 마법 학교의 마법사 양 성률을 보면 알 수 있지. 그렇지?" 사비사의 주름 투성이 얼굴도 조금씩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차연 히가 아니라 자연히 아닌가? 사비사도 꽤 흥분하고 있었다. "데리데가 이곳 마법 학교의 초대 교장이었고, 또 학문적 업적이 많다 는 건 알고 있네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식으로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네" 오브라디 교수는 대화가 조금 달아오른다 싶었는지 목소리를 조금 낮추 고 말했다. 하지만 사비사는 점점 더 달아오르고 있었다. "맹목적인 추종이라니? 자고로 훌륭한 위인에게서는 항상 배울 게 많은 법이야. 그건 시대가 변하든 말든 상관없는 진리지. 그렇지? 게다가 훌륭 한 시민이 되자는 말이 뭐가 어떻다는 말인가. 그런 말을 외움으로 해서 더 나은 시민이 된다면 그 이상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지?" 아무리 노인이라지만 정말이지 너무 노인 같은 말이었다. 아, 지겨워 그렇지? "내가 누차 말하네만 그런 말을 마법의 말이라고 가르치느니 차라리 자 네 이름을 계속 외우게 하게. 그게 훨씬 더 솔직한 방법 아닐까? 아니면 마법학교 간판을 내리고 훌륭한 시민을 만드는 집이라고 이름을 바꾸던 가" "이곳에서 훌륭한 시민을 배출해 낸 건 오랜 역사와 전통이 보증하는 일일세. 이곳 출신 시장과 장관, 장군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렇지? 그들 은 모두 훌륭한 스파일의 일꾼이고 더 나아가 비스토브레 왕국의 일꾼일 세. 그렇지?" "그렇다면 이곳이 왜 마법학교인가? 마법사는 나오지 않고 엉뚱한 사람 들이 나온다면 말일세. 어쩌면 이곳은 이제 더 이상 마법사를 배출하는 곳이 아니라 단지 '사비치 마법학교졸업생'이라는 간판을 내어주는 곳이 되었는지도 모르겠군" 이 말에 사비사는 얼굴이 완전히 벌겋게 달아올랐다. 손이 부들부들 떨 리는 게 눈에 띄었는데 저러다가 쓰러지는 거 아닌가 싶기까지 했다. "우리 사비치 마법학교를 모독하지 말게! 이곳은 배움의 터전이고 학문 의 요람이고 마법의 산실이야! 그렇지!" "당연히 안그렇지!. 진짜 훌륭한 사람은 반드시 마법 학교를 나와야 한 다는 법은 없다는 걸 명심하게. 마법 학교 나오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훌 륭한 마법사는 나올 수 있는 법이야. 물론 장관이나 시장은 말할 나위도 없고 말일세" "지금 나를, 아니 사비치 마법학교를 비난하는 건가? 그렇지?" "아니, 안그렇지! 여기저기서 마물들이 출몰하고 마칸의 강림이 눈앞에 닥쳤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구닥다리 마법 책을 붙들고 있는 자네를 한 심하다고 생각하는 것뿐이네" 한동안 지루하게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내 귀가 번쩍 트이는 게 느껴졌 다. 마칸의 강림이라는 말 때문이었다. "흥. 마물들이라고 해 봐야 용맹한 우리 임프 시 자치대원들 앞에서는 한낱 종이인형에 지나지 않고, 마칸의 강림이라고 해도 훌륭한 우리 마법 학교 졸업생들과 성황청이 있으니 아무 문제 될 것 없네. 그렇지?" "그래 그래 그렇지 그렇고 말고. 더 이상 얘기 할 필요가 없을 것 같 군. 참. 자네, 기다리고 있었겠구만" 오브라디 교수가 생각났다는 듯이 나를 보고 말했다. 그냥 이야기를 듣 고만 있던 나는 갑작스러운 오브라디 교수의 말에 내가 여길 왜 왔나 잠 깐 기억이 나질 않아 당황하고 말았다. "저, 사비사 선생님. 저는 사비오 선생님을 찾고 있습니다" "제자라고 했던가?" "예" "나는 도무지 형의 방식을 이해 할 수가 없어. 시장통으로 제자들을 끌 고 나가서 사람들 말이나 듣게 하고 매일같이 마음이니 어쩌니 하는 이상 한 소리나 하고 말이야. 그렇지?" 또 중얼거리는 것 같은 말투로 사비사가 말했다. "이보게. 그게 몇 년 전 얘긴 줄이나 아는가?" "그래. 이제 형의 마법학원은 없지. 성황청에서 학원들을 일괄적으로 통합해 버렸으니까" 사비사의 이 말에서 나는 타호루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타호루는 마법 학교가 성황청에 흡수될 때 사비오 영감과 함께 성황청과 싸웠다고 했다. 지금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알 수 없는 라스폼도 그 때 사비오 영감의 제자였다고 했고 말이다. "형의 제자라니 반갑기는 하네만 형이 어디로 갔는지는 나도 몰라. 형 은 아주 오래전 부터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걸 좋아했으니까 말이야. 지 금 국경에서 바바 족하고 함께 있을지, 남쪽 범버쿠 정글에서 헤메고 있 을지, 아니면 타실에서 국왕을 만나고 있을지 아무도 모르지. 그렇지?" 사비사의 이 말을 듣고 나는 실망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내가 여기까지 온 건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였을까? 바리바 이 나쁜... "사비사. 사비오가 여기 와서 뭐라고 하던가. 마칸의 강림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하지 않던가?" "물론이지. 그래서 나는 여기서 최선을 다하고 있고. 훌륭한 시민을 만 들어 내는 것 이상 최선을 다하는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렇지?" "도대체가 말이 안 통하는 군, 자네하고는. 오래 전, 스파일의 프라브 리티 마법 학교에서 함께 수학하던 시절처럼 말이야. 그때도 자네는 이렇 게 답답한 친구였지. 그렇지?" "함부로 말하지 말아. 중간에 쫓겨난 주제에. 그렇지?" "쫓겨났다고? 하하하. 내가 그만 둔거지 그게 어떻게 쫓겨난 건가. 그 때 벌벌 떨면서 교장한테 빌었던 게 누군데?" "오브라디!" 갈라지는 음성으로 사비사가 외쳤다. 그러고 보니 둘은 같은 학교 출신 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교장한테 빌었다니, 무슨 사고라도 쳤던 모양이다 싶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1388/11996 ━━━━━━━━━━━━━━━━━━━━━━━━━━━━━━━━━━━━━━━━ 제 목:[탐그루] 범버쿠 냠냠 범버쿠 124 관련자료:없음 24/24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2-10 00:11 조회:1962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그때나 지금이나 자네는 도저히 눈뜨고 봐 줄 수가 없군. 어디서 엉터 리 병법 책 하나 번역해서 내 놓고는 어쩌다 운이 좋아서 이름뿐인 교수 직에 오른 주제에 어떻게 그렇게 함부로 말을 할 수 있나? 그렇지?" "엉터리 병법 책이라는 말은 맞지만 이름뿐인 교수직이라니? 그런 관점 에서 본다면 나는 자네가 그렇게도 좋아하는 스파일의 훌륭한 시민 아닌 가? 국가 보조금까지 받아가면서 학문을 연구하고 있으니 말이야" 오브라디 교수는 아주 즐기고 있는 듯 웃으면서 말했다. "오죽 답답했으면 하루도 못 견디고 여길 떠났을까. 사비오 말이야" "오브라디. 자네도 쫓겨나고 싶은가? 국가 보조금 운운하면서 여기 밥 이나 축내고 있는 주제에. 그렇지?" "아니. 내 발로 나가겠네. 더 이상 여기 있을 이유가 없을 것 같군. 이 제 슬슬 그렇지도 지겹고 말이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면서 오브라디가 말했다. 나는 어떻게 하면 좋을 지 눈치를 살피려고 하고 있었는데 모짤트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바람에 나도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자. 가지" 아니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오브라디 교수는 나에게 이렇게 말을 던지 더니 성큼성큼 걸어서 교장실 밖으로 나갔다. 모짤트가 그 뒤를 따르자 나도 별 수 없이 따라서 밖으로 나가고 말았다. 그래도 그냥 나가기 뭐해 서 사비사에게 목례까지 남기고 말이다. "이제 차라리 홀가분하군. 자. 이제 어디로 갈 텐가?" 교사동에서 나오자마자 오브라디 교수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바깥 공 기가 시원하기는 했다. 교장실 안에서 하도 답답해서 더 그렇게 느껴지는 가 보다 싶었다. 그렇지? 의 홍수에서 빠져나오니 살 것 같았다. "글쎄요. 일단 여관으로 돌아갔다가..." "그럼 같이 가세" 이렇게 말하고 오브라디 교수는 다시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예의 그 군 인 같은 걸음걸이로 말이다. 아니 내가 무슨 오브라디 교수하고 동행해야 할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저러는 걸까. "저런 식으로 마법을 가르치니 다리가 무너지지" 오브라디 교수가 분통터진다는 말투로 말했다. 그러고 보니 아자닌 말 에 다리가 무너진 건 마법사의 마법이 부정확하게 걸렸기 때문이라는 말 을 했던 기억이 났다. "마법사의 실수였다는 말인가요?" "뭐, 마법사의 마법이 완벽할 수는 없어. 사실, 마법이라는 거, 대단히 위험한 거라고 나는 생각하네. 마법사가 자신의 실력을 과신하는 순간이 바로 마법이 마법사를 배신하는 순간이거든. 이번에 사비치 다리 붕괴 사 건의 사비치 같은 경우가 그렇지" 나는 종종걸음으로 겨우겨우 오브라디 교수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사 비사하고 말을 트고 지내는 걸 보면 분명히 노인인데, 왜 이렇게 빠른 거 야, 이거. 이런 걸 두고 노익장이라고 하는 건가. "사비치가 사비오의 형이라는 건 알고 있나?" 오브라디가 물었다. 이름이 다 비슷비슷해서 설마 했는데 정말 친 형인 줄은 몰랐다. 이 정도면 대단한 마법 가문이 아닌가? 형제들이 다 유명한 마법사라니. "몰랐습니다" "훌륭한 마법사지. 스파일의 유일한 대마법사고, 현존하는 세 사람의 대마법사 중 하나니까 말이야. 타실의 제마, 자나크의 푸케와 함게 말일 세. 하지만 대마법사라고 해서 아킨 정도의 대단한 능력을 지닌 대마법사 는 아니야. 그냥 영주나 국왕이 부리는 마법사니까 그런 칭호가 붙는 거 지 아킨 수준의 마법사는 결코 아니지. 아킨에 비한다면 겨우 어린아이 수준이라고나 할까" 제마니 푸케니 하는 이름은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특히 스파일에도 마 법사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름이 푸케라는 거나 대마법사의 칭호 를 받고 있다던가 하는 건 처음 듣는 사실이었다. "어떤 마음도 완전할 수는 없어. 예를 들어보지. 완벽하게 순수한 분노 가 있을까? 분노라고 우리는 흔히 말하지만 그 안에는 너무나도 복잡하고 미묘한 것들이 숨겨져 있다네. 그 안에는 슬픔,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을 향한 애틋함, 두려움, 벗어나고 싶어하는 욕망 이런 것들이 얼마든지 들 어가 있다네. 마음 안에 있는 여러 요소들을 조절하고 하나로 모아 집중 하는 것이 마법을 이루는 힘이기는 하지만 마법이 작동한다고 해서 마음 이 완전히 하나라는 건 아니야. 그걸 잊는 순간 마법사는 자신을 맹신하 게 되고 그 순간이 바로 실수를 낳곤 하지. 사비치 다리의 붕괴는 그런 그릇된 과정을 통해서 세워진 거지" 오브라디 교수의 말은 마법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나에게 일깨워 주었 다. "아니, 그럼 마법이 부실하게 걸려 있는 걸 알면서도 어떻게 그대로 내 버려 둘 수 있는 거죠?" 나는 다리에서 떨어지던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물었다. 눈이 반짝이던 꼬마는 다리 밑으로 떨어져버렸다.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알 수 없지만 십 중팔구 죽었을 것이고, 그 애 아버지의 시체를 발견한 이상 설혹 살아있 다고 해도 이제 그 꼬마는 아버지 없는 신세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런 죽음이 생길 수 있는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는데 왜 무리해서 다리를 만드 는 걸까. "돈 때문이지. 사비치는 스파일 곳곳의 경제 발전을 위해 여기 저기서 마법을 남발하고 있네. 다리를 세우고, 건물을 짓고, 숲을 불태우고, 흙 을 단단하게 만들어 마차가 다닐 수 있도록 하고... 너무 많은 일을 하다 보니 실수가 나기 마련이지. 왜 그렇게 많은 일을 하는 고 하니 바로 돈 때문이야. 자이벌에 대해서는 아는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이벌들은 엄청난 금액의 세금을 스파일 정부에 내고 있네. 또 상당 액의 뇌물을 스파일 고위 공직자들에게 정기적으로 주고 있고 말이야. 이 건 공공연한 비밀이라네. 하여간 그렇게 돈을 들였으니 다시 그만큼의 돈 을 벌기 위해 기를 쓰는 거지. 그래서 마법이 아니면 불가능한 공사를 하 고 마법사를 불러오는 거야. 물론 고위 공직자들하고 선이 닿아 있으니 마법사가 오지 않을 수 없고 말이야. 이게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 지 아는 가? 자이벌들과 영주 사이의 연결고리가 만들어지는 결과를 초래하지. 매 번 돈이 오가니 서로 친해지지 않을 수가 없지. 그러니 누이 좋고 매부 좋게 서로 돕고 사는 거야. 이게 흔히 말하는 자이벌 - 주정부 유착이라 는 걸세. 이래서야 주정부 단위나 국가 단위의 큰 공사는 모조리 자이벌 들이 독점하게 되고 그렇게 손쉽게 공사를 따낸 자이벌들은 대충대충 공 사를 하게 되기 쉽고 그러다가 사비치 다리 붕괴 사고 같은 게 발생하는 걸세. 다리 공사로 자이벌이 된 세스타 가문이나 마차 수출권을 따내서 자이 벌이 된 헌다이 가문 같은 것들이 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된 걸세. 그때 마다 마법사는 고생이지. 다리를 세울 때 기둥을 고정시키는 마법을 써야 하고, 또 마차를 배에 실을 때 배가 가라앉지 않는 마법을 써야 하는 둥 말이야. 마칸의 강림이 눈앞에 닥친 상황인데 마법사가 정작 중요한 일은 하지 않고 뭘 하고 있는 건지, 원..." 오브라디 교수의 말은 완전히 이해가 가지는 않았지만 대충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결국 자이벌들이 돈을 버는 건 순전히 뇌물 때문이라는 말인 것 같았다. 나는 속에서 분노가 일어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자이벌이 아니라 제대로 된 사람이 공사를 맡아서 진행시켰다면 다리가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 꼬마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게다가 그 사비치라는 마법사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기 가 마법을 걸었으면 정기적으로 돌아보면서 점검을 하는 게 옳은 행동 아 닐까? "아마 사비치도 당분간은 근신해야 할거야. 어쩌면 징계를 받게 될지도 모르지" 꼭 내 마음을 읽은 것처럼 오브라디 교수가 말했다. "당연한 일이죠. 사람이 죽었는데 책임을 져야 할 거 아니에요" "하지만 대수롭지 않은 징계일 거야. 마법사가 해야 할 일은 많고 마법 사는 부족한 게 현실 아닌가. 아마 기껏해야 서약서 한 장이나 쓰고 검은 리본이나 며칠 달고 다니는 걸로 끝나겠지" "예?" 서약서? 리본? 목을 베는 것까지 가지는 않더라도 그 정도 처벌은 너무 약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그게 뭐하는 짓인가? "스파일 영의 대마법사라고 하면 대단한 자리야. 막강한 권력을 누릴 수 있는 자리지. 그 자리에 오르면 다리 하나 무너진 것쯤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아" 오브라디 교수의 말에 나는 마음이 답답하게 막혀오는 게 느껴졌다. "책임은 그럼 누가 지나요? 사람이 죽었는데요" "아마 다리 공사 책임자가 지게 될 거야. 목이 베어질 수도 있고, 상당 히 오랫동안 지하 감방에서 지내야 할 지도 모르지" "아니, 다리 공사 책임자가 책임을 왜 지나요? 다리가 무너진 건 마법 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지 다리 차체에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니잖아요" "대마법사는 힘이 있지만 공사 책임자는 힘이 없어. 그게 이유지" 오브라디 교수가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수르카. 이런 일은 임프 시에서는 흔한 일이야. 아니, 이 바르도 대륙 전체에서 흔한 일인지도 모르지. 힘 있는 자는 항상 힘이 있는 위치에 머 무르고, 당하는 건 언제나 나약한 보통 사람들 뿐이지. 임프 시는 그 정 도가 더 심한 것 같네만. 아마 그래서 이곳에선 적당히 살다가 적당히 죽 는다는 말이 유행하는 지도 모르겠네" 오브라디 교수의 말에서 나는 바리바를 떠올렸다. 적당히 살다 적당히 죽는다. 아무 목적도 없이. 아무런 꿈도 희망도 없이 말이다. 나는 공연 히 서글퍼졌다. "그래서 마법사는 더더욱 조심해야 하는 거야. 대개의 경우 마법사는 보통의 사람보다 높은 위치에 서기 마련이니까 말일세. 자신의 권력에 취 하다 보면 정작 중요한 건 놓치기 쉽상이지. 마법사는 항상 사람들을 생 각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하네. 자신의 마법에 늘 책 임을 지고, 언제나 돌아보고, 완전하지 않다는 걸 인정해야 하고 말일세. 그것이 바로 힘과 지위에 따른 책임이라는 거지. 마법의 발동은 마음의 이해에서부터가 아닌가 그런 기본을 잊게 되면 모든 것이 무너져버리는 거야. 다리도, 사람도, 그리고 세상 전체가. 마칸의 강림은 아마도 그것 때문인지도 몰라. 이 세계가 최초의 문명이 아니라는 건 여러 유적이나 자료로부터 알 수 있지. 다른 문명이 멸망했던 것처럼 이 문명도 이런 추 세가 계속된다면 멸망하게 될지도 모르겠네. 마칸의 강림은 인간에 대한 응징이 아니라 오히려 이 세계의 멸망을 경고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네" 오브라디 교수ㄳ 말은 알듯말듯하게 어려운 말이었짐만 어쩐지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었다. "그럼 교수님도 마법사신가요?" 나는 숨을 간신히 고르면서 오브라디에게 물었다. (어떻게 저렇게 줄줄 말하면서 이렇게까지 빨리 걸을 수 있는지) "하하하. 아니야. 나는 교수지 마법사가 아닐세. 이론은 잘 알지만 사 실 마법은 전혀 못하지. 사람마다 능력은 따로 있는 법이라고 나는 생각 하네. 예를 들어보지. 자네가 마법을 쓸 수 있는 것처럼 나는 지식을 쓸 줄 아는 능력이 있는 걸세" 쓴다는 말이 사용한다는 말인지 아니면 책을 쓴다는 말인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아무리 많이 안다고 해도 아까 교 장실에서의 오브라디 교수처럼 조리 있게 말할 자신은 전혀 없었다. "그 덕에 국가 보조금으로 이렇게 돌아다닐 수 있는 거지만 말일세" "병법 책을 쓰신 일 말씀하시는 건가요?" 나는 마로우에게 들었던 기억을 더듬어서 이렇게 물었다. "그래. 보잘것없는 병법 책 덕분이지. 사실 그 책은 내가 쓴 게 아니 야" 오브라디 교수는 미소를 머금고서 말했다. "고대의 학자들이 써놓은 책을 모아 놓은 것에 불과하지" "전투에서의 승리는 얼마나 빨리 전장에 적응하느냐에 달려 있다, 또 싸울 때는 이길 수 있는 상황에서 싸우는 것이다, 이런 말들이 다 고대의 학자들이 한 말이었나요?" 나는 용병단에서 십부장들에게 들었던 강의 내용을 기억나는 대로 말해 보았다. "내 책을 읽었는가?" 오브라디 교수는 놀랐는지 걸음까지 늦추면서 말했다. "누군가에게서 들은 말입니다. 기억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지요" 내 말에 오브라디 교수가 껄껄 웃었다.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기는 했지만 그러고 보니 오브라디 교수의 말을 듣느라 중요한 걸 잊고 있었 다. 지금 왜 내가 오브라디 교수와 함께 가고 있는 거지? "사실 나는 그 책이 군에서 교재로 쓰이게 된 덕분에 이렇게 국가 보조 금으로 여기 저기 떠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지. 명목상으로는 더 나은 군 사용 지도 제작을 위한 탐사활동이지만 사실 내가 하는 일은 그냥 이렇게 놀고 먹는 거라네" 오브라디 교수는 이렇게 말하고는 다시 웃음을 지었는데, 어쩐지 이번 웃음은 좀 자조적이라는 생각이 드는 웃음이었다. "수르카. 자네는 사비오에게서 마법을 배웠지?" "예" "자네가 올바른 젊은이라는 건 알 수 있겠어. 그것만으로도 말이야. 내 제의를 하나 하지. 자네 사비오를 찾는 이유가 뭔가? 자네가 진짜 사비오 의 제자라면 아마도 운명을 찾아서 사비오를 뒤쫓고 있으리라 생각하네 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의 운명은 결정되었네. 자네가 이곳으로 오게 된 것도, 또 나를 만나게 된 것도 다 운명일세. 우리는 같은 운명의 궤도 위에 놓여 있는 거라고. 하하하" 나는 곰곰이 생각을 해 보았다. 오브라디 교수가 아까 왜 목소리를 낮 추고 운명 어쩌고 했는지 말이다. 어쩌면 오브라디 교수는 처음 나를 만 났을 때 이미 사비사와의 만남을 포기하고 있었던 것 아닐까? 그런데 국 가 보조금도 떨어지고 해서 마법학교에 머무르고 있던 처지라 아무나 붙 잡고 빌붙을 생각을 하고 있다가 그 대상으로 날 택한 것 아닐까? 그래서 운명 운운 하면서 미리 암시를 해 두었다가 이렇게 따라오고 있는 거 아 닐까? "수르카. 아까부터 누가 계속 따라오고 있어" 하지만 제대로 생각해보기도 전에 모짤트가 뜻밖의 말을 하는 바람에 생각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나는 살짝 뒤를 돌아보았다. 언뜻 사람 의 그림자가 내 눈을 피해 골목길로 잠시 피하는 모습이 보였다. 성황청 의 끄나풀일까? 어찌되었건 등 뒤에 누가 따라오고 있다는 건 불안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교수님. 혹시 누구한테 원한 사신 적 있으세요?" "글쎄. 내가 워낙 여기저기 돌아다닌 데다가 좀 말이 많은 편이어서 적 이 될만한 사람들이 있기는 하네만" 그렇다면 오브라디 교수의 적일 가능성도 있었다. "따라오고 있다는 사람 때문인가? 음. 아마 성황청일 가능성이 높군" 오브라디 교수가 턱을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성황청이요? 왜죠?" "사실 지도 제작 핑계를 대고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성황청도 진행 하고 있는 일이라서 말이야" "마법을 모으시나요?" "그건 아닐세. 사실 고대 유적을 좀 찾아다니고 있지. 여기 임프 시에 서는 고대 동굴이 하나 있어서 들른 거네만. 예상 밖으로 성황청의 움직 임이 날렵하구만. 워낙 큰 도시에 있는 유적이니 이미 가져갈 건 다 가져 갔으리라고 생각했네만..." "하여간 일단 등 뒤에 있는 친구를 좀 어떻게 해야 겠는데요" "몇 명이나 되는 것 같나?" "한 명입니다" 모짤트가 말했다. "아무래도 자네들을 우습게 보고 있거나 아니면 아주 실력 있는 놈이겠 구만. 이럴 때는 기습공격이 제격이지. 이렇게 하세..." 오브라디 교수의 말에 따라 우리는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양옆 으로 붙어서 뒤를 따르고 있던 녀석이 들어오면 바로 공격할 심산으로 말 이다. 나와 모짤트는 백에 붙어서 숨을 죽이고 있었고, 오브라디 교수는 따라 오던 친구가 골목길에 접어드는 순간 시선을 끌기 위해 그레텔을 안고 골 목 한 가운데에 서 있었다. 누구던지 간에 칼을 뽑을 시간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를 보는 일이 싫어서 용병단을 떠난 내가 여기 까지 와서 사람을 죽일 수는 없는 법이었다. ------------------------------------------------------------------ 한바탕 쓰고, 또 한바탕 연재했습니다. 며칠 쉬겠습니다. ^^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1994/11996 ━━━━━━━━━━━━━━━━━━━━━━━━━━━━━━━━━━━━━━━━ 제 목:[탐그루/외전] 반지 삼 원칙 1/3 관련자료:없음 18/18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2-22 00:27 조회:1150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 탐그루 외전 - 반지 삼 원칙 작은 돌 하나를 올려놓고 그곳에 마법을 불어넣기만 하면 탑은 완성이 다. 하지만 꽤 오랜 시간동안 탑의 마지막을 장식할 돌을 찾지 못했다. 불안하다. 마법학교가 있는 시스코를 떠난지도 벌써 일 년이 되었다. 꽃 필 무렵에 시스코를 떠나, 스파일의 수도 조안에서 그리 멀지 않은 이곳 나한장 마을에 도착하자 폭염의 여름이었다. 스승님의 계시를 쫓아 탑을 쌓기 시작한 게 엊그제 같았는데...... 눈이 내리는가 싶더니 또 다시 꽃 이 피었다. 지난 해 봄맞이 꽃은 나오미의 얼굴 같더니 올해 봄맞이 꽃은 처량한 내 얼굴만 같다. 타호루의 눈동자에 물기가 어렸다. 타호루가 그에게 마법의 길을 알려 준 스승으로부터 정령이 담겨 있는 반지를 하사 받은 것은 그의 나이 열 여덟 되던 해의 일이었다. 수석 제 자에게만 물려준다는 정령의 반지를 하사 받은 타호루는 날아갈 듯 기뻤 다. 그러나 앞으로 있을 다른 제자들의 시기와 질투를 생각해보니 한 편 으론 걱정스럽기도 했다. 그렇게 타호루가 기쁘기도 하고 걱정스럽기도 한 복잡한 심정으로 며칠을 보낸 후였다. 스승이 타호루를 부르더니 정 색을 하고 말했다. "이제 자네는 이곳을 떠나야 할 거야." 갑작스런 그 말에 타호루의 눈이 커졌다. 떠나야 한다니? 반지를 물려 준 제자를 내쫓기라도 하겠다는 걸까? "사람들은 말할 지도 모르지. 반지 때문에 질투와 증오의 마음을 가지 고 있을 다른 제자들에게서 자네를 잠시 떨어뜨려 놓기 위해서 그러는 거 라고. 물론 나도 제자들에게 그렇게 이야기 해야할지 모르지만 그건 아닐 세. 단지 그런 계시가 내렸을 뿐이야." 계시라는 말에 타호루는 반론의 여지가 없음을 알았다. 계시로 반지를 받은 자가 계시를 저버릴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이제 자네는 이곳을 떠나면 많은 시련을 겪게 될거야. 그게 하루가 될 지 한 달이 될지 한 해가 될지 계시는 알려주지 않았네. 계시가 알려준 것은 자네가 이곳을 떠나 나한장 마을에 탑을 쌓아야 한다는 것뿐이었네" "탑이라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자네와 반지의 정령 사이에 이어진 운명의 고리를 완성시켜주는 탑 말 일세. 나한장 마을에 가서 탑을 완성시키게. 그렇게 되면 반지의 정령을 부를 수 있는 마법의 말을 깨닫게 될 것이야. 그러고나면 자네가 발견한 마법의 말이 자네의 운명을 이끌어 갈 거야. 말없이 그러나 쉬지 않고 흐 르는 대청하처럼 말이야." "하지만 스승님..." "당장 떠나라고 하지는 않겠네. 며칠 동안 천천히 떠날 준비를 하고 주 변을 정리하도록 하게." 며칠. 겨우 며칠 가지고는 아무 것도 정리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떠나 는 것이나, 고생하는 것, 위험한 일을 겪게될 것, 등등은 전혀 두렵지 않 았다. 그러나 하나. 그것만은 마음에 걸렸다. 타호루는 고개를 숙인 채 침울한 표정으로 스승에게 받은 반지를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자, 이제 믿음을 뜻하는 왼손 약지에 반지를 끼게" 타호루는 반지를 조심스럽게 왼손 약지에 끼었다. 바르도 대륙의 모든 사람들이 다 알듯이 왼 손 약지는 신뢰와 믿음의 상징, 바로 마법의 상징 이다. 그렇기에 마법의 반지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왼 손 약지에 끼는 게 보통이었다. "떠난다는 걸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게나. 자네가 이곳을 떠나 반지의 정령의 인도를 받는다면 자네와 나의 운명의 고리는 다시 이어질 걸세" 스승은 타호루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려는 듯, 미소를 지었으나 열 여 덟 나이의 타호루는 도무지 편한 마음을 가질 수가 없었다. 이곳을 떠나 야 한다니. 스승은 타호루에게 나가보라고 손짓을 했다. 반지를 물려받아 이졔 나오미에게 더 가까와졌다고 생각했던 타호루는, 시스코를 아니 나오미를 떠나야 한다는 스승의 말에 하늘이 무너지는 것 만 같았다. 여기저기서 봄맞이 꽃이 피어오르고, 좋은 소식을 알려준다는 그륵새들 은 그륵그륵울며 사람들에게 봄소식을 알려주고, 힘들게 겨울을 난 백년 수들도 싱그러운 들판에 가득 몰려나와 한가롭게 풀을 뜯고, 동면에서 깨 어난 타코들도 신나게 무리를 이뤄 돌아다니고 있는데, 타호루만은 세상 이 온통 깜깜하고, 억장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반지를 물려받아 이제 나오미에게 더 가까와졌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떠나야하다니. 삼 일 동안 타호루는 배낭 안에 먹을 것과 옷가지를 챙기고, 수통을 구 하고, 혹시라도 만나게 될지 모르는 마물들에 대한 대비책으로 마법이 깃 들어 있는 지팡이를 구하고 시간을 허비하느라 정작 하고 싶었던 일을 하 지 못했다. 정작 타호루가 가장 마음 쓰이는 것은 나오미였다. 떠나기 전 에 어떻게든 나오미에게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타호루가 나오미에게 연 정을 품은 건 스승 밑에서 마법을 공부하기 시작한 사 년 전부터였다. 타호루의 나이 열 네살. 타호루는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그 대상은 타 호루 보다 두 살이나 많고 게다가 스승의 딸인 나오미였다. 나오미는 얼 굴에 주근깨가 가득했고 어떻게 보면 좀 고집스럽겠다 싶을 만큼 두터운 눈두덩과 큰 입술을 가진 평범한 여인이었다. 어린 나이에 마법을 배우기 위해 고향을 떠난 타호루가 고향 마을 누나 와도 같은 다정함을 주는 나오미에 이끌렸던 것은 어떻게 보면 너무나 당 연한 일이었다. 시간이 흐를 수록 나오미에 대한 타호루의 연정은 내부에 서 점점 자라나 미칠 듯이 숭배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나이가 들면 서 타호루는 이런 자신의 마음이 사랑이 아니라 단순한 욕정에 불과한 것 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으나 그런 생각도 자신의 연정을 다스리기 에는 역부족이었다. 나오미의 곁을 떠나야하다니. 차라리 반지를 돌려주고 여기에 남아 있 겠다고 애원을 해볼까? 이제 떠나면 언제나 다시 나오미를 볼 수 있을까? 타호루는 낯이 화끈 달아올랐다. 가슴이 콩딱거렸다. 타호루는 작은 개울 물에 가서 차가운 물로 얼굴을 씻었다. 한 번 달아오른 마음과 몸이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개울물에 비추어진 자신의 얼굴을 보자, 타호루는 불현듯 열등감이 솟 아올랐다. 류시마에 비하면 잘생긴 얼굴도 아니었고, 투호에 비하면 남자 답지도 못했다. 이런 내가 나오미에게 가당키나 할 것인가. 나오미와 결 혼하게 되면 스승의 뒤를 잇게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류시마나 투호도 나름대로 나오미에게 접근하고 있는 것 같다. 그렇지만 스승 님의 뒤를 이으면 나오미를 얻을 수 있는 것도 사실 아닐까. 그렇다면 류시마나 투 호에 비해 특별히 뛰어난 것도 없는 내게 이번 일은 나오미를 얻을 수 있 는 유일한 기회일지도 모른다. 얼굴을 씻다 말고 타호루는 쭈그리고 앉아서 한 참 동안을 열등감에 시 달리며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 있었다. 하지만 이내 타호루는 벌떡 일어 나 가슴을 죽 펴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이렇게 하면 좀 기분이 나아졌 다. 지금이야말로 용기가 필요한 때다. "긴* 여행도* 시작은* 한걸음부터고* 씨앗이* 아니었던* 꽃은* 없다*" 타호루는 용기를 북돋아 주는 마법의 말을 외쳤다. 덕분에 용기가 나기 는 했지만 타호루의 마법에 자극을 받은 개구리들이 겁 없이 타호루를 향 해 껑충껑충 솟아올랐다. 타호루는 팔짝팔짝 뛰어 덤벼드는 개구리를 잡 아 냅다 패대기친 다음 성큼성큼 스승의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대문을 활짝 열고 안으로 들어갔을 때까지는 좋았는데, 나오미를 보는 순간 타호루의 용기를 북돋워주는 마법은 온대간대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나오미를 보는 순간 몸이 바짝 얼어버린 거였다. "... 저... 스승님... 께서는..." 당장이라도 좀 전에 패대기 친 개구리 꼴로 바닥에 사지를 뻗고 누워버 렸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드는 타호루였다. "안에 계십니다" 아주 정중하게, 그래서 조금도 사적인 정이 느껴지지 않는 어조로 나오 미가 말했다. 타호루는 변변한 인사도 건네지 못하고 안채로 들었다. 스승은 안채에 앉아 명상에 잠겨있었다. 타호루가 온 것을 알았는지 스 승은 이내 눈을 뜨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타호루를 바라보았다. "자. 이제 준비가 다 되었는가" "...예" 스승 님 앞에서 감히 마법의 말을 외칠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타호루는 여전히 주눅이 든 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다. "그럼. 이제 떠나게. 다만 한 가지, 반지의 정령에 대해서 내 해줄 말 이 있네" 타호루는 이렇게 말하면서 타호루 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정령의 삼 원칙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는가?" 타호루는 고개를 흔들었다. 마법도 아직 초보인데 정령은 말할 것도 없 었다. "정령의 삼 원칙은 이렇다네. 먼저 정령은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 자신 을 먼저 보호한다네. 이것이 제 일 원칙이지. 그 무엇도 이 원칙을 깨트 릴 수는 없어. 그리고 다른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한이 있더라도 주인의 명령에 따른다는 것이 제 이 원칙일세. 제 일 원칙에 위배되지만 않는다 면 정령은 주인의 명이라면 그게 어떤 것이든 다 따르게 되어있지. 그리 고 마지막으로 제 삼 원칙이 있네. 제 일 원칙과 제 이 원칙을 위배되지 않는 한도에서 주인에게 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원칙일세" 스승은 타호루의 머릿속에 정령의 삼 원칙을 심어놓기라도 하겠다는 듯 이 느릿느릿하면서도 또렷한 목소리로 타호루에게 말했다. 타호루는 스승 의 말을 분명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알아들을 수 있었음에도 불 구하고 타호루는 별로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때 타호루에게 중요한 것은 나오미를 떠나야 한다는 사실 뿐이었다. 타호루는 스승에게 작별의 인사를 하고 안채를 나섰다. 그냥 떠나버릴 까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차마 나오미에게 작별 인사도 없이 떠날 수는 없었다. 타호루는 다시 한 번 용기를 주는 마법의 말을 외칠까 생각해 보 았지만 그만 두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나오미에게 작별인사를 하 고 싶었다. 나오미는 수북한 눈두덩을 껌뻑이면서 왜 자신을 찾아왔는지 모르겠다 는 표정으로 타호루를 바라보았다. "나오미. 저는 이제 떠나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물어 볼 말이 있어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떨지 않으려고 무진 해를 쓰면서 타호루가 말했다. 나오미는 조금 당황 하는 기색이었다. "만약 제가 이 반지와의 운명을 잇고, 다시 여기로 돌아온다면..." 타호루는 여기까지 말하고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도무지 입이 떨어 지질 않았다. "예. 돌아오신다면 어떻게 하시겠다는 말씀이신지요" 빨리 말하고 가버리라는 투였다. 타호루는 사랑을 고백하고 기다려 달 라는 말을 하려고 했지만 나오미의 정중하지만 거리감을 두는 말투에 그 만 완전히 자신감을 잃고 말았다. "... 그때까지 건강하십시오" 나오미의 말에 마법이 깃들어 있어서였을까. 타호루는 이렇게 말해버리 고 말았다. 나오미는 고맙다는 말을 조금도 고맙지 않다는 식으로 말하고 는 돌아서가버렸다. 타호루는 나오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뒷모습 만이라도 기억해두고 싶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법사 님께서 오셔서 탑을 세우실 거라는 계시 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한장 마을의 장로가 타호루에게 허리를 꺾어 예를 표하면서 말했다. 과연 계시가 있기는 했구나. 타호루는 이제 겨우 주춧돌뿐인 탑을 바라보 았다. "저것이 바로 그 탑의 주춧돌인가요?" "저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저는 계시에 따라 주춧돌을 옮기라고 마을 청년들에게 이야기 했을 따름입니다" 타호루는 주춧돌을 살펴보았다. 마법의 기운이 강하게 풍기고 있었다. 타호루는 과연 이곳이 나와 반지를 이어줄 마법의 탑이 설자리이구나 하 는 느낌이 들었다. 탑을 쌓는 일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마법으로 돌을 들어 올려 쌓 고, 그곳에 돌이 머물러 있도록 강제하는 일이 그다지 어려운 마법은 아 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적당한 돌을 고르는 거였다. 크기도 크기려니와 더 중요한 것은 탑에 적당한 마법이 서려 있는 돌을 찾는 거 였다. 돌에 적당한 마법의 기운이 없이는 탑을 쌓는다고 해도 소용이 없 없었다. 타호루는 나한장 마을을 기점으로 탑에 쓸 돌을 찾아 끝도 없이 돌아다 닐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시간을 자꾸만 흘러갔고 금새 끝날 것 같았던 탑 쌓는 일은 점점 지지부진해졌다. 아무래도 자꾸 이런 식으로 나가다가는 탑 쌓는 일을 끝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것과 비례해 나오 미를 다시 만난다는 희망도 점차 멀어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제 타호 루의 마음은 나오미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마치 세상 모든 일 이 나오미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는 듯 했고, 나오미가 없어지면 세상이 온통 암흑 천지로 변해버릴 것만 같았다. 나오미가 있는 시스코 쪽의 하 늘이 어두워지면 나오미에게 슬픈 일이 생겼나보다 싶어 하루 종일 우울 했다.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천천히 힘들게 탑을 모양을 갖추어 나갔다. 드 디어 마지막 돌 하나면 탑이 완성되는데, 마지막 돌을 찾아낼 수가 없었 다. 이제 여기서 끝인가. 일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건만. 타호루는 매일매 일 상심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어느 날 밤이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1995/11996 ━━━━━━━━━━━━━━━━━━━━━━━━━━━━━━━━━━━━━━━━ 제 목:[탐그루/외전] 반지 삼 원칙 2/3 관련자료:없음 23/23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2-22 00:28 조회:860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타호루 님... 타호루 님..." 비록 꿈 속이었지만 타호루는 반지의 정령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라는 것을 알았다. "사랑은* 이제 * 우리의* 것입니다*" 반지의 정령은 이렇게 말하고는 사라졌다. 꿈에서 깨어난 타호루는 뛸 듯이 기뻤다. 바로 그 말이 반지의 정령을 부르는 마법의 말임을 듣는 순 간 알았던 것이다. "사랑은* 이제* 우리의* 것이다*" 타호루는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이렇게 외쳤다. 그리고 반지의 정령이 나타났다. "아......" 타호루는 반지의 정령을 바라보고는 작은 탄성을 발하지 않을 수 없었 다. 영영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반지의 정령이 이렇게 눈앞 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반지의 정령은 여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부르셨나요, 반지의 주인이시여." 반지의 정령이 말했다. 정령은 하얀 얼굴에 차가워 보이는 인상이었는 데, 목소리에서도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타호루는 조심스럽게 반지의 정령에게 물었다. "반지의 정령이여.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 "저는 반지의 정령. 에질리입니다." 여전히 서리라도 묻어날 것 같이 차가운 목소리였다. "그래, 에질리. 너와 나는 운명의 고리로 이어져 있다고 들었다." 타호루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에질리. 네가 나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지?" 타호루가 말했다. 반지의 정령이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는 알지 못 했지만, 떠나던 날 스승에게 들었던 정령의 삼 원칙이 떠올랐다. "지금부터 제가 할 수 있는 것을 말씀 드리겠어요. 단 한 번만 말씀 드 릴 테니까 귀기울여서 들어주세요" 이번에는 차갑다 못해 거만하게까지 들리는 말투였지만 타호루는 신경 쓰지 않았다. "저는 타호루 님의 세 가지 소원을 들어 드릴 수 있습니다" 세 가지 소원? 타호루는 마른침을 삼켰다. 목이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 다. "하지만 무조건 들어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세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먼저 저와 관련된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아요. 혹시라도 '백 가지 소원을 들어줄 수 있느냐' 라던가 '영원히 내 곁에서 내 소원을 들어다오' 같은 소원을 빈다면 곤란하니까요" 타호루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원칙은 정령의 제 일 원칙과도 통하는 구석이 있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소원은 제 방식대로 이루어집니다. 인간과 정령이 다르듯이 소 원이 이루어지는 방식은 인간의 방식이 아니라 정령의 방식으로 이루어집 니다. 이런 점들을 충분히 생각하시고 소원을 빌어주세요" 이 말은 조금 실망스러웠다. 엉터리로 소원을 들어줘 놓고도 정령의 세 계는 다 이렇게 하는 거라고 생떼를 부릴 수도 있는 것 아닌가. 하지만 타호루는 실망한 기색을 내비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이어지는 정령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마지막 원칙입니다. 저는 주인님께서 진심으로 원하는 소원만 들어드릴 수 있습니다. 진심으로 원하지 않는데 순간적인 감정때문에 '세 상을 멸망시키고 싶다' 같은 소원을 빌어서는 하늘이 무너져도 그런 소원 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 세 가지 원칙만 지켜주신다면 어떤 소원이든 다 이루어 질 거예요. 다시는 말씀드리지 않을 테니 알아서 주의해 주세 요" 다시는 말하지 않겠다는 정령의 말이 충분히 거슬릴 만도 한데 타호루 는 조금도 신경쓰지 않고 당장 짐을 챙겼다. 시스코로 가기 위해서였다. 탑을 쌓는 일은 이제 타호루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나오미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타호루는 탑 쌓는 일을 팽개치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나한장 마을을 떠났다. 일 년 만에 돌아온 시스코는 낯설기만 했다. 겨우 일 년이 지났을 뿐인 데, 기억하고 있던 시스코의 모습과는 너무도 큰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었 다. 타호루는 정신없이 마법학교로 뛰어갔다. 이제 세상 보다 더 커져버 린 나오미를 그리는 타호루의 마음은 흥분과 기대로 벅차 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타호루가 만나게 된 것은 꿈에 그리던 나오미가 아니었다. 타호 루가 본 것은 류시마의 품에 안겨 있는 나오미였다. 타호루는 가슴이 ㄳ 어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비록 열 아홉의 나이라고는 해도 분별력 쯤 은 갖추고 있었다. 둘이 껴안고 있다고 해서 둘이 반드시 결혼을 하게 되 는 건 아니지 않은가. 타호루는 이렇게 스스로에게 말하면서 투호를 찾아 갔다. "둘은 사랑에 빠졌어, 타호루" 타호루 보다 두 살이나 위인 투호였지만 스승으로 부터 반지를 물려받 은 타호루에게 타호는 존대를 했다. "... 돌이킬 수 없습니까?" "결코. 스승님은 늙고 병 드셨어. 이제 곧 두 사람은 결혼을 하게 될 거야" 타호루의 가슴 속에 자리잡고 있던 그리움과 갈망이 그만큼의 질투와 분노로 변했다. 지금껏 나한장 마을로 가 있었던 것도 둘의 결혼을 위한 하나의 의식처럼 여겨졌고, 자신을 보낸 스승의 의도도 거기에 있었는지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분별력이 있다고는 해도 분노로 불타오르기 시작한 타호루의 마음은 이제 결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타호루는 아무도 없는 숲 속으로 들어가 반지의 정령을 불러내었다. "부르셨습니까, 반지의 주인이시어" "소원을 빌기 위해 너를 불렀다. 나는 반드시 나오미와 결혼을 해야겠 다" 타호루는 분노로 가득한 마음으로 말했다. "그 소원이 누군가의 불행을 불러온다고 해도 말입니까?" 반지의 정령이 되물었지만 타호루의 결정은 이미 누구도 돌이킬 수 없 는 지경이 되어 있었다. "불행해지기는 누가 불행해진단 말인가?" "나오미의 일생이 불행해 질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반지의 정령. 정령의 제 이 원칙에 따라 누군가 해를 입게 되는 한이 있어도 저는 주인 님의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게다가 주인님의 소원은 진심이시군요. 스승 님을 찾아가세요. 소원은 반지의 방식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반지의 정령은 이렇게 말하고는 사라졌다. 사라져가는 에질리의 얼굴에 는 회심의 미소가 스치고 지나갔지만 워낙 잠시 동안이었던 데다가 소원 이 이루어진다는 말에 흥분한 타호루에게는 그 미소가 눈에 뜨일리가 없 었다. 타호루가 서둘러 스승의 집으로 찾아가자 스승은 병상에 누워 있었다. 스승의 곁에는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 나오미와 류시마가 앉아 있었다. "제가 돌아왔습니다, 스승님" 타호루가 누워 있는 스승 앞에서 무릎을 꿇고 말했다. "그래... 탑은 세워졌는가?" 스승이 물었다. 타호루는 진실을 말해야 할까 잠시 망설였지만 이미 희 미하게 꺼져 가고 있는 스승의 눈빛을 보며 타호루는 세워졌다고 거짓으 로 말하고 말았다. "그렇군. 그렇다면 이제 자네는 반지와 함께 하는 새로운 운명이 시작 될 거야. 그리고 자네가 세운 탑은 몬스터들의 왕 마칸이 습격하는 날이 왔을 때 세상 사람들에게 용기를 불어 넣어 주게 될 거야. 고맙네, 고마 워. 자네는 정말 뜻 깊은 일을 해낸 거야. 이제 마지막 유언의 말을 남길 테니 모두들 귀담아 듣도록. 나오미. 너는 타호루와 결혼하도록 해라." "스승님!" 류시마가 소리쳤다. 하지만 타호루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스승의 유언을 어길 수 있는 제자는 없는 법이고, 아버지의 유언을 어길 수 있는 딸도 없을테니까. "계시를 쫓아 반지의 정령을 부르고 탑을 세운 타호루가 마법 학교를 이어가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비록 타호루가 류시마보다 능란한 마법 을 구사할 수 없다고 해도 반지의 정령이 있으니 마법 학교를 이어가는 데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야. 류시마, 알아듣겠나?" 류시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굳게 쥔 류시마의 주먹이 떨리고 있었다. 그 순간에도 타호루에게는 나오미의 모습만이 눈에 들어왔다. 복잡한 심 경과 경멸의 빛이 함께 담긴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데도 타호루 는 기쁘기만 했다. 결혼식은 마법학교의 오랜 관습에 따라 스승이 죽기 전에 아주 서둘러 치러졌다. 병든 스승은 이제 거의 보이지도 않는 눈으로 제자들 앞에서 두 사람의 결혼을 축복했고, 제자들은 그 축복의 증인으로 결혼식을 지켜 보았다. 다만 류시마만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결혼식을 지 켜보았을 뿐이었다. 예복을 차려입은 타호루와 나오미는 제자들 앞에서 영원한 사랑의 서약 을 하고 입을 맞추었다. 하지만 입을 맞추는 순간 나오미의 눈이 류시마 에게 향하고 있었다는 걸 알아챈 사람은 오직 나오미와 눈이 마주친 류시 마 한 사람 뿐이었다. 입을 맞추기 전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눈을 감은 타호루가 눈치채지 못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결혼식이 끝나고 신방에 들었을 때, 타호루는 가슴이 터질 듯 했다. 해 는 이미 진지 오래, 신방의 문이 닫히고 둘 만의 시간이 시작되자 타호루 는 이제 자신의 눈앞에 환상이 현실로 다가왔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 다. "나, 나오미..." 떨리는 목소리로 타호루가 나오미를 불렀다. 나오미는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이제 우리는 부부가 되었소. 나오미. 내 그대를 사모하는 마음을 알아 주오" 침착하게 숨을 들이쉬고 타호루가 말했으나 나오미는 묵묵부답이었다. 타호루는 나오미의 손을 잡았다. 나오미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떨지 마오, 나오미. 이제 내가 당신의 미래를 책임지겠소." 타호루는 서둘러 방을 밝혀주던 연금술사의 등을 껐다. 그날 밤 아무도 나오미의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보지 못했다. 게다가 자연의 법칙 에 따라 어둠이 사랑의 비밀을 타호루에게 속삭여 주었을 때도 타호루는 다른 곳을 바라보며 눈물짓는 나오미의 얼굴을 보지 못했고, 타호루의 등 뒤에서 차갑운 얼굴로 두 사람을 내려다보고 있는 반지의 정령 에질리도 보지 못했다. 아침해가 밝았을 때, 타호루는 마땅히 있어야 할 나오미가 자리에 없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침식사라도 차리러 나간 걸까? 타호루는 덜 깬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안채에도, 마당에도, 부엌에도, 문 밖 에도 나오미는 없었다. 사라진 사람은 나오미 뿐만이 아니었다. 류시마도 사라졌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점심때도 훨씬 지난 후의 일이었다. "스승님. 나오미가... 사라졌습니다." 타호루는 누워 있는 스승에게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병든 몸을 이끌고 결혼식까지 치른 스승은 이제 귀마저 멀어 있었다. "... 타호루. 운명의 고리를 잊지 말게. 정령과 자네의 운명의 고리가 앞날을 이끌어 줄 것이야......" 스승은 이렇게 중얼거리고는 눈을 감았다. 아무도 떠나는 나오미와 류시마를 보지 못했다. 아마도 해뜨기 한 참 전에 몰래 시를 빠져나간 모양이었다. 타호루는 떨리는 목소리로 반지의 정령을 불러냈다. "결혼의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해 놓고는 이게 무슨 짓인가?" 성난 목소리를 낮추어 말하느라 타호루의 목소리는 야릇하게 떨리고 있 었다. "저는 반지의 정령. 소원은 반지의 방식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반지의 정령의 말을 듣는 순간, 타호루는 자신의 생각이 너무 짧았다는 것을 알았다. 결혼이 아니라 사랑을 빌어야 했다. 하지만 이미 나오미는 떠난 후였고, 후회 해봐야 돌이킬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사실 타호루는 지금 당장 나오미를 불러달라고 소원을 빌 참이었다. 하 지만 그 소원마저 '반지의 방식대로' 이루어진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타 호루는 보다 신중해지기로 마음먹었다. 나오미가 류시마와 함께 떠난 이상 당장 두 사람을 찾아낸다고 해도 달 라질 건 없을 것이다. 천천히, 서두르지 말고, 확실히 계획을 세워 두 사 람을 쫓아야 한다. 타호루는 마법학교의 일은 모조리 투호에게 맡기고 나 오미를 찾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스승님이 가신지 칠 일도 되지 않았는데 떠나겠다니." "이미 마음을 정했습니다." "스승님의 유언을 어기겠다는 건가?" "스승님의 유언은 제가 나오미와 결혼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타호루는 이렇게 말하고는 자신의 목소리가 어쩐지 점점 에질리를 닮아 가고 있다고 느꼈다. "... 그렇게까지 억지를 쓰니 붙잡을 수 없겠군." 혼잣말처럼 투호가 중얼거렸다. 타호루는 투호에게 마지막이 될지도 모 를 작별인사를 하고 시스코를 떠났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 얼마나 가 야할지는 오로지 운명만이 알고 있을 뿐이었다. 다시 여름이 오고, 수확의 계절을 지나, 들판 가득 눈이 덮이고, 동면 에 들어갔던 타코들이 다시 무리를 지어 돌아다닐 무렵, 타호루는 나오미 를 찾을 수 있었다. 그가 나오미를 다시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은 마법의 힘도, 정령의 힘도 아니었다. 이제 자라날 대로 자라난 집념, 오직 그것 만이 타호루를 이끌었을 뿐이었다. 나오미는 스파일의 끝, 국경의 작은 마을 비소장 마을에서 류시마와 살 고 있었다. 타호루는 담 너머에서 조심스럽게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류 시마의 잘생긴 얼굴은 어느새 시커멓게 그을려 예전의 얼굴이 아니었다. 비록 먼발치에서였지만 류시마의 팔뚝은 이제 더이상 마법을 공부하던 사 람의 가느다란 팔이 아니었다. 굵고 거친 농사꾼의 팔뚝이 되어 있었다. 나오미도 마찬가지였다. 타호루가 마음 속으로 그리던 성숙하고 아름다운 나오미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찾아 볼 수 없었고, 그저 평범한 시골 아 낙 하나가 남편이 짊어지고 온 땔나무를 받아들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타호루를 여기까지 이끈 집념은 타호루를 더 이상 물러설 수 없게 만들었 다. 타호루는 담 너머에서 류시마가 다시 밖으로 일을 나가는 모습을 물그 러미 바라보았다. 널찍한 류시마의 등판에서는 믿음직스러운 남자의 향취 가 풍기고 있었지만 타호루의 눈에 비친 류시마는 오직 분노와 증오의 대 상일 뿐 다른 것은 보이지 않았다. "반지의 정령이여. 내 두 번째 소원을 비니 나오미가 나만을 사랑하게 해다오." 류시마의 모습이 사라지자 타호루는 반지의 정령을 불러내 간절한 마음 으로 말했다. 집념은 마음을 변하게 하고, 변한 마음은 반지의 정령을 움 직였다. "저는 에질리. 주인 님께서 진심으로 원하시니 소원은 이루어질 것입니 다. 다만 반지의 방식대로 말입니다." 반지의 정령은 이렇게 말하고는 다시 사라졌다. 이번에도 역시 집념으 로 눈이 멀어버린 타호루에게 반지의 정령이 지은 회심의 미소는 보이지 않았다. 지난번 소원을 들어 준 후 반지의 정령이 지었던 미소보다 더 의 기에 찬 미소였는데도 말이다. 그날 밤 에질리는 바로 나오미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바람을 타고 들어간 에질리는 나오미의 마음에서 류시마의 기억을 지워버렸고, 결혼식 날 타호루와 했던 입맞춤과 사랑을 맹세만을 떠올리게 만들어 놓았다. 나 오미는 잠들어 있는 류시마를 뒤로하고 타호루를 향한 주체할 수 없는 사 랑의 감정으로 가득 차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타호루는 뛰쳐나오는 나오 미를 의기양양해서 품에 안았다.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둘러 마 을을 벗어났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1996/11996 ━━━━━━━━━━━━━━━━━━━━━━━━━━━━━━━━━━━━━━━━ 제 목:[탐그루/외전] 반지 삼 원칙 3/3 관련자료:없음 19/19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2-22 00:29 조회:909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타호루는 먼저 스승이 묻혀 있는 시스코로 돌아갈까 생각해 보았다. 하 지만 류시마가 찾아올 것이 분명한 시스코로는 돌아갈 수 없었다. 나오미는 타호루를 너무나도 사랑하였기에 한시도 타호루의 곁에서 떠 나려고 하지 않았다. 타호루는 비소장 마을을 떠나 임프 시에 닿을 때까 지 나오미와 한시도 떨어져 있을 수가 없었다. 밥을 먹을 때는 물론이고 심지어 화장실에 갈 때도 그랬다. 사람들은 딱 달라붙어 있는 두 사람이 지나가면 등뒤에서 뭐라고 수근거렸다. 타호루는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마음 한 구석에서 자라기 시작한 허망한 마음을 도저히 달랠 수가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임프 시에 도착했을 때도 타호루는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제 이곳에서 우리는 새로운 미래를 시작하는 거야." 타호루는 임프 시의 공기를 한껏 들이키면서 나오미에게 말했다. 나오 미는 사랑에 빠진 사람이 누구나 그렇듯 꿈꾸는 눈동자를 하고 타호루의 팔에 매달렸다. "사랑해요, 타호루." "행복한 미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어." "사랑해요, 타호루." "나는 나오미를 위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어. 대마법사가 되어 성 안 에서 살지는 못하겠지만, 장터에서 마법을 팔아서라도 나오미를 행복하게 해 주겠어." "사랑해요, 타호루." 나오미의 말은 타호루와의 첫날밤 고개를 숙이고 있었던 나오미와는 전 혀 다른 마음에서 나오고 있었다. 타호루는 나오미의 마음에 반응하여 가 슴 깊은 곳에서 공명하는 울림을 느낄 수 있었다. 임프 시에서 시작된 둘의 두 번째 결혼 생활은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당장 먹고 살자니 무슨 일이건 하기는 해야 겠는데, 마땅한 기술도 없고 능력도 없는 타호루에게 몸으로 때우는 일을 하기란 쉽지 않았다. 마법을 팔아 살아가려고 했지만 마법사가 있다는 소문이 퍼져나가면 류시마가 찾 아내기는 물 한 사발 들이키는 것 보다 쉬울 것만 같았다. 그래서 결국 타호루는 시장 통에서 나오미와 함께 임프 시 뒷산에서 해 온 나무를 파 는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도끼를 들고 나무를 베기에 마법만을 익힌 타호루의 팔은 너무도 가늘었고 사람들과 영악한 돈 거래를 하기에 는 너무도 세상 물정을 몰랐다. 하루 벌어 하루 먹으며 사는 게 암담하고 힘들기만 했다. 하지만 나오미의 사랑은 계속되었다. 아침에 일어나 눈뜨면 나오미는 타호루를 사랑했고, 세수를 하면서도 나오미는 타호루를 사랑했다. 밥을 먹으면서도 나오미는 타호루를 사랑했고 산에서 나무를 하면서도 나오미 는 타호루를 사랑했다. 시장통에서 나무를 팔면서도 나오미는 타호루를 사랑했고. 잠을 잘 때도 나오미는 타호루를 사랑했다. 처음 얼마간, 타호루는 그동안 키워왔던 자신의 집념으로 모든 것을 이 겨낼 수 있었다. 배가 고프면서도 사랑은 해야만 했고, 하늘이 온통 노랗 게 보이더라도 사랑은 해야만했지만 그래도 타호루는 자신이 세상에서 가 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마음 한 구석에서 자라나고 있었던 허망한 마음은 더욱 더 자라나 사랑은 이제 사랑이 아니었다. 타 호루는 그것을 알게 된 순간 다시 한 번 자신을 다잡았다. 그래도 일 년 이라는 시간동안 자신을 이끌어 왔던 집념을 한 순간에 물거품으로 만들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무를 하고, 시장에 나가 나무를 팔고, 나한장 마을에서 묶었던 움막 만도 못한 집에서 생활하면서, 점점 더 하루하루를 넘기기가 힘들어지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래도 나오미가 곁에 있으니까 라는 생각으로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타호루는 점점 자신의 마음이 단순한 자 존심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 꿈꾸었던 나오미가 이제 늘 곁에 있게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조금도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 까닭이었다. 나오미의 성숙한 육체도 이제 타호루에게는 살덩어리로만 보 였고, 두툼한 입술도 매력적이라기 보다는 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멍하 니 정신을 놓고 있으면 도대체 자신이 여기서 뭘하고 있는 건가 라는 생 각에 깜짝 깜짝 놀라는 때가 많아졌다. 허망한 마음은 그러는 사이에도 점점 더 자라났다. 그래도 다행히 겨울이 오기 전에 타호루는 겨울을 날 수 있을 만큼의 돈을 모을 수 있었다. 나오미와 함께 하는 동안 타호루의 팔뚝도 제법 두 꺼워졌고 약삭빠른 장사속에도 조금은 눈을 뜨게 된 덕이었다. 겨울 내내 타호루는 나오미와 사랑을 했다. 나오미는 조금도 지치지 않 고 타호루를 사랑했으며 타호루는 그것이 순전히 반지의 정령 때문이라는 사실이 자꾸만 떠올랐다. 도대체 사랑이란 무엇인가, 아니 왜 이렇게 살 아야 하는지 이제는 알 수가 없었다. 만사가 다 허망하다는 생각뿐이었 다. 그리고 반지의 정령 에질리는 그런 타호루를 항상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겨울 날, 타호루는 나오미에게 짜증을 부리고 말았다. "나오미. 당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이오?" "타호루, 당신을 사랑해요." "그래. 그건 알고 있소. 그렇다면 그 다음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이오?" "타호루, 당신을 사랑해요." "나오미. 당신의 행복이 반드시 나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오. 나오미도 나오미만의 생각과 생활이 있어야 하지 않겠소?" "타호루, 당신을 사랑해요." 타호루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타호루는 나오미를 내 팽겨치고 밖으로 나갔다. 나오미는 눈물을 흘리면서 방에서 따라나왔다. 아마 그때 류시마가 그 광경을 보고 있다는 걸 타호루가 알아차리지 못 했다면 타호루는 자신의 다리를 붙잡고 늘어지는 나오미를 한 대 쳤을지 도 모른다. "타호루. 난 적어도 네가 나오미를 행복하게 해 주고 있을 거라고 생각 했다" 류시마는 나오미가 사라진 그날부터 타호루를 추적하기 시작했던 것이 다. 타호루가 나오미를 찾아 갈 수 있었던 것이 집념 때문이었다면 류시 마가 타호루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나오미를 향한 사랑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반지의 정령 에질리가 류시마에게 길을 알려 주었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찌되었건 타호루는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류시마의 눈을 보는 순간 움찔하지 않을 수 없었다. 류시마는 예전에 타호루가 알고있었던 류시마 가 아니었다. 타호루의 눈앞에 선 류시마는 눈빛은 증오와 분노로 이글거 리고 있었고 오랜 여행 탓인지 볼은 쑥 들어가 있었다. 시커멓게 그을린 얼굴에는 때가 덕지덕지 달라 붙어있었고, 입가는 제대로 먹지 못한 탓인 지 허옇게 일어나 있었다. 류시마는 나오미를 바라보았다. 나오미는 류시마는 신경도 쓰지 않고 타호루만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사악한 마법사가 되었군, 타호루. 스승님께 반지를 물려 받은 것은 알 고 있었지만 사람의 마음을 조종하는 그런 죄악을 저지르다니" 류시마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류시마의 마음은 증오나 분노를 넘어서 있었다. "사악한 마법사에게는 마법이 필요없지" 류시마는 허리춤에서 날 선 단검을 뽑아 들었다. "후회는 없겠지?" 타호루는 뒤로 주춤 물러서다가 쓰러지고 말았다. 그러자 나오미가 타 호루의 팔에 매달렸다. "자...잠깐. 내가 죽는다면 나오미는 영영 이대로 살아야 한다" 타호루는 필사적으로 외쳤다. 이렇게 죽고 싶지는 않았다. 도대체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생각하고 있었는데 바로 그 순간 류시마에게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타호루는 나오미를 바라보았다. 나오미의 눈은 여 전히 꿈을 꾸고있는 듯 했다. 타호루는 난생 처음으로 나오미의 입 냄새 가 역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법을 풀겠나, 지금 당장? 그렇다면 네놈의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아, 알았다. 잠시만... 시간을 다오" 다행히도 류시마는 허락해 주었다. 타호루는 나오미와 함께 방에 들어 갔다. 혹시라도 반지의 정령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자신을 죽이고 반지를 가져갈 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사랑은* 이제* 우리의* 것이다*" "부르셨습니까, 주인님" "마지막 소원을 빌겠다. 다시 나오미가 류시마를 사랑하게 해 다오. 나 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다. 그리고 죽고 싶지도 않고" 칼을 들고 있는 류시마가 문 밖에 있다고 생각하니 말하는 목소리가 자 꾸만 떨려왔다. "저는 에질리. 주인님께서 진심으로 원하시니 소원은 이루어질 것입니 다. 다만 반지의 방식대로 말입니다. 이제 다시는 이렇게 말할 필요가 없 겠군요" 반지의 정령은 이렇게 말하고는 나오미의 기억을 되돌려놓았다. 이번에 는 타호루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반지의 정령이 짓고 있는 미소를 말이 다. 다음 순간, 나오미의 눈에서 꿈꾸는 듯한 빛이 사라졌다. "류시마 님! 류시마 님!" 나오미는 타호루는 본 척도 하지 않고 이렇게 소리쳤다. 그러자 류시마 가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두 사람은 깊은 포옹을 했다. 타호루는 둘의 모습을 보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순간 손가락에 끼었던 반지가 손 가락에서 빠져 나와 돌덩이로 변해 바닥에 떨어졌다. 아마도 마법의 힘을 잃어버린 때문이리라고 타호루는 생각했다. 그런데 류시마는 포옹을 풀더 니 단검을 들고 타호루 쪽으로 움직였다. "모... 목숨만은 살려준다고 했지않은가......" 타호루가 벽 쪽으로 엉금엉금 기어가면서 말했다. "한때 한 스승에게서 마법을 배운 내가 약속을 지키지 않을 수는 없지" 류시마는 이렇게 말하고는 타호루의 양쪽 눈을 단 칼에 베었다. 타호루 는 눈을 붙잡고 바닥을 뒹굴었다. "으아악!" 타호루는 양손으로 눈을 감싸쥐었으나 여전히 핏물은 넘쳐났다. "류시마! 류시마!" 고통에 몸부림치면서 타호루가 외쳤다. 하지만 눈 먼 타호루는 이미 류 시마도, 나오미도 방을 나가버렸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 다시는 앞을 볼 수 없다는 생각을 하자 한편으로 답답하기도 했고 한편으로 괴롭기도 했다. 도대체 어쩌다 자신이 이렇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스승에게 배웠던 마법들 덕분에 간신히 목숨은 건 질 수 있었지만 반지의 정령도 사라진 이상,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 저 막막하기만 했다. 그날 해가 지기 전, 타호루는 손가락에서 빠져나간 돌덩이를 찾을 수 있었다. 비록 앞은 보이지 않았으나 마법은 느낄 수 있 어서였다. 돌덩이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법은 타호루에게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것은 완성되지 않은 탑에 대한 기억이었다. 해가 진지 오래였지만 타호루는 나한장 마을로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나한장 마을에 닿았을 때 타호루는 자신을 인도하고 있는 것이 여전히 반지와 이어져 있는 운명의 고리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무 것도 보이 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길 한 번 틀리지 않고 나한장 마을을 찾을 수 있었 기 때문이었다. 타호루는 탑 앞에 서자 마법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 자신과 반지 사이의 운명은 어떤 형태로든 끝나게 될 거였다. 타호루는 탑을 더듬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꼭대기에 닿았을 때, 예전에 채우지 못한 자리에 이제는 돌덩이가 되어버린 반지를 올려놓 았다. 그러자 온 몸에 힘이 다 빠져나간 타호루는 바닥으로 떨어지고 말 았다. 등부터 바닥에 떨어졌지만 타호루는 조금도 아프지 않았다. 그저 자고만 싶다는 생각 뿐이었다. 그날 밤 꿈에서 타호루는 다시 반지의 정 령을 만날 수 있었다. 타호루는 비탄과 슬픔에 잠겨 말했다. "이제 너와 나의 운명의 고리는 끝났다. 나의 운명이랄 것은 이제 없구 나." 그러자 반지의 정령 에질리가 말했다. "사랑은* 이제* 나의* 것입니다*" ------------------------------------------------------------------- - 외전을 올립니다.......^^; 며칠 안에 연재를 재개하겠습니다. - '드림 존' 이라는 잡지가 창간된다고 합니다. SF, 환타지, 추리를 포괄하고, 그리폰 북스를 기획하셨던 분이 참여했다고 합니다. '어메이징 스토리' 같은 잡지가 될 수 있을까요.... 기대가 큽니다. e PRINTER/CAPTURE를 OFF 하시고 [ENTER] 를 누르십시오.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2234/12886 ━━━━━━━━━━━━━━━━━━━━━━━━━━━━━━━━━━━━━━━━ 제 목:[탐그루] 영혼의 에뮬레이터 7 125 관련자료:없음 20/20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2-26 00:18 조회:1844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 영혼의 에뮬레이터 7 - ㅇ ㄱ ㅁ ㅎ ㅐ ㅜ "...수르카는 잔뜩 긴장하고서 뒤ㄳ고 있던 사내가 나타나기를 기다리 고 있었습니다.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쩌면 다시 살인을 하 게 될지도 모른다는 마음이 앞선 탓이었지요. 그러면서도 칼로 손이 가고 있는 자기 자신을 돌아보니 한편으로 기가막히기도 하고......" "비류 님, 다 왔어요." 리파이가 말하는 덕분에 세헤라자드의 이야기는 끊기고 말았다. 한참 재미있게 듣고 있던 중이어서 나는 나도 모르게 리파이를 노려보고 말았 다. 그런데 내 눈을 본 리파이는 내가 무슨 의지라도 보여주고 있다고 생 각했는지 굉장히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하긴. 내가 노려본다고 해봤자 아무도 무서워 하지 않을테니까. "안가에요." 리파이의 말에서 나는 어스폴의 안전 가옥이 연상되어서 잠시 동안 침 묵을 지켰다. 후버카는 언뜻 보기에 그저 평범한 숲처럼 보이는 곳에 당 도해 있었다. 자세히 숲을 관찰해 보니 위장천막까지 되어 있는 콘크리트 구조물이 보였다. 저 정도 건물이라면 폭격에도 멀쩡하지 않을까 싶었다. 어스폴 지부처럼 말이다. "Safety house. 아버지는 세상이 언제 망할지 모른다고 항상 전전긍긍 하며 사시고 계시지. 아버지는 이런 대피소를 만들어 놓으면 정말 안전할 수 있다고 믿으시는 건지. 또 그렇게 혼자 살아 남으면 그것도 살아남는 거라고 할 수 있을까. 어쨌든 아버님 덕에 요긴하게 쓰긴 하는 군. 이곳 은 어스폴도 모르고 통합 정부도 모르는 곳이야. 지도에는 아마 산으로 나와있을걸?" 내가 아무 말없이 앉아 있자 아톰이 앞좌석에서 내 쪽으로 몸을 틀어서 말했다. 꼭 무슨 장난이라도 치는 어린애 같은 얼굴이었다. 늘 그런 아톰 이기는 했지만 오늘 따라 좀 더 심하다 싶었다. 흥분이 되는지 귓불까지 벌개져 가지고서 말이다. "자. 내려시지요, 신사 숙녀 여러분. 아톰이 자랑하는 안전 가옥에 오 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과장된 어투로 아톰은 이렇게 말하고는 먼저 후버카에서 내려 문까지 열어주었다. 리파이는 이런 일이 자주 있었다는 듯이 태연하게 우아한 자 세로 차에서 내렸지만 나는 영 어색하기만 했다. 나와 리파이가 내리자 오토는 운전사답게 차를 어디론가 몰고 가버렸다. "여깁니다, 신사 숙녀 여러분.." "적당히 해 둬, 아톰. 지금 그렇게 한가롭게 농담할 만큼 여유가 있는 건 아니야." 리파이가 입을 비죽거리면서 말했다. "글쎄.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모든지 생각하기 나름 아니겠 어? 어차피 이렇게 살다가 죽을 인생이야. 하루라도 즐겁게 사는 편이 낫 지 않겠어?" "즐거워 보이질 않으니까 문제지. 아톰은 항상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고 있어. 못 느끼겠어?" "토론은 그만 두고, 이제 어떻게 되는 건지 누가 말좀 해 줘요." 내 말에 아톰과 리파이는 설전을 멈추었다. 도대체 FHA니 뭐니 하더니 기껏 하는 짓은 어린애들도 하지 않을 말싸움이라니. 나는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콘크리트 구조물은 어스폴 안가 못지 않은 곳이었다. 다만 어스폴 건물 보다 더 낮은 건물이라는 점과 콘크리트 두께가 더 두꺼워 보인다는 점이 좀 달랐을까. 나와 리파이는 아톰의 인도로 안가에 들어갔다. 리파이는 전에도 와본 적이 있는지 이 집에 익숙한 것 같았다. (아마 좌우를 두리 번거리며 조심스럽게 한발 한발 내딛는 내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보였으리 라) 정문을 통과해 들어가자 널찍한 마루가 나왔다. 당장이라도 방에서 사 람이 튀어나올 것처럼 깨끗하게 청소가 되어있었고, 마루에 갖추어진 오 디오에서는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난생 처음 들어보는 곡이었는데, 아마 클래식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졸음이 쏟아지는 걸 보면 틀림 없이 클래식이 분명하다. 또하나 분명한 것은 어떤 게임에도 배경음악으 로 쓰인 적이 없는 곡일 거라는 거다. 그랬다면 당장에 알았을 것이다) "음악이 나오는군요." "아. 아버지 취향이지. 문을 열고 들어가면 이렇게 자동으로 음악이 나 오게 되어 있어. 곡은 아까 오는 길에 전화로 골라 두었는데..." "청소가 잘 되어 있네." 리파이가 아톰의 말을 끊고 말했다. "응. 오토가 여기 청소도 하고 있거든. 오토는 여기 관리인이기도 해." "그럼 아버님께서 고용하신 사람인가요?" "아니야. 여기 관리는 내가 맡고 있어. 그러니까 내가 고용했지. 신원 은 확실한 사람이야. 어스넷에서 찾은 전직 용병 명단 중에서 내가 직접 골랐으니까." 아톰은 꽤나 진지한 말투로 말했다. 자신이 일하는 방식을 과시하려는 듯한 목소리였다. (물론 아톰치고는 진지하다는 말이다. 말하면서도 아톰 특유의 시니컬한 표정은 여전히 짓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아톰의 얼굴은 한 쪽 입술만 비죽 올라가서 꼭 나를 비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아톰이 원래 그런 사람인 걸 알고 있는 나로서는 그다지 기분이 상하지는 않았다. "음악이 마음에 드세요?" 리파이가 물었다. "클래식 맞지? 가사가 없는 노래는 대부분 클래식이더군. 하하하." "예, 뭐..." 마음에 들고 안들고를 떠나서 처음 들어보는 곡이었다. 음악이 흐르고 있는 가운데 세 사람이 마루에 우두커니 서 있자니 좀 어색한 공기가 흘 렀다. "이곳이 아버님이 만든 곳이라고 하셨죠?" "그래. 하지만 아버지는 내가 여기 있는지, 뭘 하고 있는지 신경도 쓰 지 않으니까 걱정 마. 아버지한테는 이런 곳이 십 수 군데는 있거든." "그럼 우리는 당분간 여기서 지내게 되겠군요." 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일단은 이진우 수사관과 얘기가 되었으니 까 집으로 돌아가도 그만이겠지만 분명히 추적하고 있을 게 뻔한데 돌아 가기도 좀 뭣했다. 하필이면 아버지 핑계를 댔을 게 뭐람. 하지만 별 다 른 수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비류 님. 애써서 곡을 골랐는데 좀 관심이라도 가져주시지 그러세요?" 나는 리파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몰라서 멍청한 얼굴을 하고서 리 파이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세헤라자드요. 림스키 크로사코프의 곡이요." 이런. 나는 리파이의 말을 듣고 나서야 내가 계속에서 이어폰을 꽂고 있는 걸 그렇게 둘러댔다는 걸 기억해냈다. "아. 림스키... 그 곡이라기 보다는, 세헤라자드 게임 음악이에요. 모 르세요? 마법 소녀 세헤라자드? 그 왜, 미소녀 게임 있잖아요, 손맥에서 오래 전에 개발한..." 나는 생각나는 대로 지껄이고 말았다. 이러다가는 오래 못 가지. 이어 폰에서 세헤라자드가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웃지 말라고 당장 한 소 리 해 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그랬군요. 저는 또 이런 곡을 좋아하시는가 싶어서 오는 차 안에서 아 톰에게 부탁했지요. 정신없이 주무시고 계시기에..." "서서 뭐하고 있는 거야? 의자는 앉으라고 만들어진 거지 감상하라고 만들어 진 게 아니라고." 우리는 마루에 놓여 있는 커다란 쇼파에 앉았다. 쇼파에 몸을 기대자 내 키에 맞게 쇼파가 자동으로 움직였다. 진짜 고급 쇼파인 모양이었다. 인공 지능에 센서가 부착되어 있을 게 분명했다. "아버지 취향이야. 비류. 좀 불편하지 않아? 나한테 맞추어져 있던 거 라 센서가 잘 인식하지 못할 수도 있어." "아뇨. 별로." "이제 이어폰은 좀 빼지 그러세요. 중요한 얘기를 좀 해야 하는데." 리파이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애써서 세헤라자드라는 곡을 튼 이유가 거기에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좀 쑥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이어폰 을 뽑았다. 그런데 이어폰을 뽑자니 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세헤라자 드는 물론 내 입장을 이해하겠지만 어쩐지 좀 미안하기도 하고 걱정도 되 었던 것이다. "더 올 사람은 없나요?" 내친김에 가방도 벗어 무릎 위에 올려놓으면서 내가 말했다. 쇼파가 다 시 내 허리선을 따라 꿈틀꿈틀 움직였다. "우리가 전부야. 사실 나하고 리파이가 전부라는 말이 맞겠지. 비류는 포.섭.대.상.이니까 말이야." 아톰은 포섭대상이라는 말에 일부러 힘을 주어서 말했다. 강조하려는 건지, 아니면 농담처럼 흘려버리려는 생각인지 알 수가 없었다. "FHA는 점조직이에요. 제가 알고있는 사람은 아톰이 전부고, 아톰이 알 고 있는 사람은 와일드건이라는 사람이에요. 대부분의 연락은 어스넷을 통해 그것도 닉을 사용해서만 이루어지구요. 사실 아톰과 저도 이렇게 만 나면 안 되는 건데." "그건 나도 원했던 거야. 포섭당했으니까 뭐 시키는 대로 한다고 해서 별로 이상 할 건 없잖아? 하하하." 아톰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다면 FHA의 전체 조직의 규모나, 또 명단 을 알고 있는 사람은 몇 없으리라. 아니, 어쩌면 FHA가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고 있는 건지 알고 있는 사람도 몇 없겠다 싶었다. "비류 님께 이제 솔직히 말씀 드릴게요. 사실 비류 님을 포섭하라는 지 령은 와일드건이 내린 거 였어요. 만델라 님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 것도 와일드건이었고요." 와일드건이라는 사람은 꽤 넓은 정보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일지도 모르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어쩌면 아톰이나 리파이 같은 하위 세포를 수도 없이 거느리고 있는 사람인지도 모르지. 그런데 도대체 무슨 일 때 문에 어스폴에서 FHA를 쫓고 있는 걸까? "솔직하게 얘기한 김에 계속 얘기해 보세요. 도대체 FHA에서 하는 일이 뭐에요?" "구체적으로는 MS사가 하고 있는 일을 방해하는 것뿐이에요. 현 단계에 서는." "서치로봇 얘기를 물어보세요." 세헤라자드였다. 세헤라자드가 말하자 리파이와 아톰의 시선이 가방에 몰렸다. 이어폰이 빠졌나? 아니면... "좀 꺼내 주세요. 너무 오랫동안 갇혀 있었다고요. 답답해요." 세헤라자드가 난처해하고 있는 내 입장은 생각도 하지 않고서 계속 말 했다. "비류, 뭐야? 설마 멀티폰 같은 걸로 도청하고 있었던 거야? 벌써 어스 폴에 투항하고 있었나?"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이번에는 아톰답지 않게 웃음기가 싹 사라진 말투였다. "비류 님. 핸드컴이라도 들어있나요?" 이번에는 리파이가 물었다. 멀티폰이나 핸드컴이라고 생각하다니. 하 긴. 인간의 영혼이 에뮬레이션 된 프로그램이 내 가방 안에 있다는 걸 믿 을 사람이 있을까. 마침 그때 오토가 들어오지 않았다면 나는 어쩔 줄 몰라하고만 있었을 지도 모른다. 오토는 들어오자마자 다음 지시를 기다린다는 듯이 아톰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나는 자연스럽게 오토를 바라볼 수 있었다. "아. 일단 들어가 있어." 하지만 오토가 구원은 되지 못했다. 나는 아주 잠시 시간을 벌 수 있었 을 뿐이었고, 그 시간동안 멍청하게 오토의 얼굴만 쳐다보았을 뿐이다. "비류 님. 설명을 해 주세요." 리파이가 당장이라도 가방을 열어 볼 기세로 내 쪽으로 몸을 움직이면 서 말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나는 가방을 열어 랩탑을 꺼냈다. "저, 인사해. 리파이와 아톰이야." 랩탑을 열자 세헤라자드가 나타났다. 세헤라자드는 눈부시다는 듯이 눈 을 찌푸리면서 리파이와 아톰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세헤라자드의 표정은 리파이와 아톰의 표정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톰은 당장이라도 턱이 쑥 빠져버릴 것처럼 입을 벌리고 있었고, 리파이는 가뜩이나 큰 눈 을 있는대로 크게 뜨고 있었으니 말이다. "아! 리파이 님, 아톰 님! 소오드엔매직 중계방송에서 뵌 적이 있어요. 리파이 님은 방송에서보다 훨씬 미인이시네요. 아톰 님은 훨씬 귀엽게 생 기셨고요. 기분 나빠하진 마세요. 그냥 제 생각을 말씀 드린 거니까요." 꼭 말못해서 죽은 귀신이라도 들러붙은 것처럼 세헤라자드가 재잘거렸 다. 하지만 리파이도 아톰도 아무 말 못하고 있었다. "리파이 님. 전에 MS사의 서치로봇에 대해서 설명하시다가 말았어요. 서치로봇을 개발해서 MS사가 어떻게 하려고 한다고 설명하시려던 것 같았 는데요.." "비류 님. 이게 뭐죠?" "세헤라자드에요." 나는 이렇게 말하고 더 설명하지 않았다. 도대체 뭐라고 설명을 할 수 가 있단 말인가? "아니, 차근차근 처음부터 이야기 해봐, 비류. 도대체 무슨 일이 내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거지? 이거, 별로 오래 살지도 않았는데 별 꼴을 다 보겠네." 아톰이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2235/12886 ━━━━━━━━━━━━━━━━━━━━━━━━━━━━━━━━━━━━━━━━ 제 목:[탐그루] 영혼의 에뮬레이터 7 126 관련자료:없음 21/21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2-26 00:19 조회:1657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나는 젯나이트를 만난 이야기부터 아톰의 말 그대로 '차근차근' 말했 다. (하지만 그 탐그루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 말까지 해 버리 면 어쩐지 우스운 꼴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리파이는 내내 주의 깊 게 내 이야기를 들었고, 아톰은 가끔씩 전혀 재미없는 농담을 던지면서 낄낄거렸다. "그런데 그 젯나이트라는 분이 트랜스 파워 초기 버전을 제작하신 분이 라고 하셨나요?" "이 랩탑에 남겨진 내용으로는 그랬어요." "그렇다면 MS사에서 이미 영혼 자체를 에뮬레이트 할 수 있는 프로그램 을 개발했는지도 모르겠군요." 리파이가 말했다. 하지만 대답을 기다리는 것 같지는 않았다. "리파이. 웬 부루터스 같은 말이야? 난 솔직히 못믿겠어. 인간 흉내를 내는 프로그램은 얼마든지 있다고. MIT에서는 벌써 지난 세기에 인간의 습성을 모방하는 프로그램을 개발했다고." "그렇지만 그 컴퓨터는 직관이 없이 논리에 의해서만 움직일 뿐이었지 요." 세헤라자드가 기분 나쁘다는 듯이 그렇게 말하자 아톰은 다시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이건 튜링 테스트라도 해 봐야 겠는데요." 리파이가 말했다. "튜링 테스트라고요? 무슨 뜻이죠?" "지난 세기에 나온, 영국의 수학자 앨런 튜링의 이름을 딴 테스트에요. 칸막이를 한채 질문을 던져가며 30분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사람과 이 야기를 나누고 있는지 아닌지를 분간할 수 없다면 그 프로그램은 지능이 있는 걸로 봐야 한다고 튜링은 주장했죠." "저는 지능이 있는 게 아니라 영혼이 있어요, 리파이." "보아하니 말하는 건 논리적이야. 기계라는 증거가 될 수 있지." 아톰이 턱에 손을 괴고서 말했다. "프로그램은 항상 논리적으로 말할 지 몰라도, 사람은 항상 논리적으로 말하지는 않아요. 비논리적으로 말한다고 해서 사람이라는 증거가 되나 요? 도든 사람들이 다 자기 같다고만 생각하지 마세요, 아톰." "역시 논리적이야." "지금 저보고 논리적이라고 하는 아톰이야말로 논리적이네요. 제가 논 리적이라고 해서 프로그램이라면 아톰이 혹시 전자두뇌를 달고 있는 안드 로이드인지 어떻게 알겠어요?" 아톰은 이 말에 두 손을 번쩍 들며 졌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정말로 논리적이야. 하지만 좀 믿을 수 있을 것도 같은데." "프로그램이라면 저렇게까지 다양한 표현을 쓰기 힘들 것도 같네요. 그 럼 하나 물어보지요. 누군가를 사랑해 본 적 있어요? 부모님이나 친구 말 고." 리파이가 물었다. 잠시동안 세헤라자드는 머뭇거렸다. 얼굴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제 영혼이 캡처 되었을 때는, 그러니까, 열 일곱 살이었어요. 그런 걸 알기에는 좀 어린 나이였지요." "진짜 사람이군요." 리파이가 말했다. "혹시 사랑을 알고 있으면 사람이고 모른다면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하려 고 물은 게 아니었나요?" "그냥 반응을 보려고 했어요. 만약에 프로그램이라면 이렇게 당황하지 는 않았겠죠. 이 정도 반응이 입력되어 있는 프로그램이라면 사랑이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쯤은 당연히 입력시켜 놓았을 테니까요." "그걸 노리고 당황하도록 프로그램 되어있을 수도 있잖아?" 아톰이 말했다. 하지만 진짜로 그렇게 생각한다는 표정은 아니었다. "그럴 수도 있죠. 하지만 전 제 느낌을 믿어요. 세헤라자드. 만나서 반 가워요." 리파이가 모니터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면서 말했다. "저도요, 리파이." 세헤라자드는 인정받았다는 게 기쁜지 얼굴까지 붉히면서 말했다. "잠깐만. 그럼 몇 가지 물어보지." 아톰은 여전히 인정하기 싫다는 얼굴이었다. "먼저, 그 옆에 있는 고양이는 뭐야? 설마 고양이의 영혼이라고 말하지 는 않겠지?" "아. 스테아 말이군요. 아톰. 스테아는 세헤라자드의 애완 동물이에 요." 이번에는 내가 대답했다. "그래? 그럼 먹이는 뭘 주지?" "그림 파일하고 바이러스 정도. 가끔은 시스템 파일을 먹기도 해요." "그럼 세헤라자드는 뭘 먹고?" 그래. 그러고 보니 세헤라자드는 뭘 먹더라? 나는 먹을 걸 준 기억이 없는데. "아톰. 나나 스테아는 인간의 영혼이 에뮬레이트 되었을 뿐이지 육체를 가진 생명체는 아니에요. 그러니까 당연히 단백질이나 탄수화물로 대사를 하지 않지요. 그저 전기만 있으면 되요." "그럼 스테아는 왜 파일을 먹는 건데?" "습관이지요. 아마 스테아는 동물이기 때문에 자신이 지금 어떤 형태가 되었는지 인식하고 있지 못하는 것 같아요." 스테아를 쓰다듬으면서 세헤라자드가 말했다. "하긴. 프로그램이면 어떻고 또 아니면 어때? 다만 FHA에 세헤라자드가 관심이 있는지 없는지가 문제가 될 뿐이지, 뭐." 아톰은 어깨를 한 번 으쓱 했다. "그래요. 아톰 말이 맞아요. 세헤라자드. 우리 일에 관심 있어요?" "먼저 그 MS사가 개발하고 있다는 서치로봇에 대해서 말씀해 주세요." 세해라자드가 말했다. "그래요, 세헤라자드. 비류 님, 서치로봇에 대해서 아시나요?" "어스넷을 돌아다니면서 새롭게 생긴 사이트나 업데이트 된 사이트를 찾아서 알려 주는 프로그램을 말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나는 세헤라자드에게 들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예. 그런 프로그램을 말하지요. 그런데 저희가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MS사는 새로운 형태의 서치로봇을 개발하고 있는 것 같아요." "서치로봇이라기 보다는 감시로봇이지. 사이트들을 돌아다니면서 정보 를 관리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사이트를 박살내는." 아톰이 덧붙였다. "그게 용이라고 우리 FHA는 생각하고 있어요." "부루터스의 강박관념이지. 사실 나는 그게 용이라는 걸 믿지는 않아. 그런 게 존재한다는 사실도, 또 그런 걸 만들어 내는 녀석들이 있다는 것 도." 아톰을 말꼬리를 길게 늘이면서 허공을 바라보았다. 나는 아톰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 걸까 생각해 보았다. 아톰은 분명 신념에 따라 움직 이는 사람은 아닐 것 같았다. 어쩌면 내가 생각한 대로 순전히 아버지에 대한 반발심 때문에 FHA에서 일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는지도. "사실 아톰의 반응이 옳아요. 아직까지 증거는 없거든요. MS사에서도 그 서치로봇과 관련된 곳들은 철저하게 보안장치를 해 두어서 뚫고 들어 가기가 쉽지 않지요. 용이라는 말을 알아내기는 했지만 아직은 그 어떤 증거도 없어요." "FHA가 하는 일은 그런 사실을 알아내서 그걸 사람들에게 알리는 건가 요?" "그건 이나바머가 하고 있지." 아톰이 말했다. "얼마나 멋져. 단신 열혈 테러리즘으로 MS사의 음모에 맞선다. 잘만하 면 반전용사 만델라의 인기를 넘어설지도 모르지. 언론에서 잘 받쳐주고 어스폴이 여기저기 바쁘게 돌아다니면서 선전해 준다면. 하하하." "아톰!" 꼭 엄마가 아이를 타이르는 투로 리파이가 말했다. 늘 저런 아톰을 보 아왔다고는 하지만 늘 보아왔기 때문에 짜증도 나는 모양이었다. "이나바머하고 우리는 상관이 없어요. 아직까지 우리의 노선은 사실을 알아내고 사람들에게 알리는 거죠. 하지만 쉽지는 않아요. MS사에서 서치 로봇과 관계된 서버들은 네트워크와 이어놓지 않은 모양이에요. 따로 분 리되어 있는 일체형 컴퓨터에서만 작동하고 있는 듯 하고요. 아직까지는 어떤 방법으로 어스넷과 접속되고 있는지 알아내지 못했어요." "도대체 무슨 수를 써서 그 서치로봇들을 어스넷에 풀어놓았는지 모르 겠단 말이야. 어쩌면 MS사가 아니라 다른 회사에서 만들어낸 서치로봇일 지도 모르지. 아냐. 서치로봇이라고 단정지을 수도 없어. 그냥 추측일 뿐 이지. 어쩌면 소문처럼 어스넷에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들이 돌아다니고 있는지도 몰라." "소문이 아니었어요, 아톰." 세헤라자드가 눈앞에 있는데 그런 소리를 하다니. 아톰도 조금 멋쩍었 는지 공연히 헛기침을 한 번 했다. "소드앤매직 온라인에 등장했던 용도 그럼 세헤라자드 같은 존재일까?" 아톰이 누구에게 묻는 건지 알수 없는 투로 묻고는 혼자 대답하기 시작 했다. "그래. 이번 소오드엔매직 온라인에 용이 등장한 것은 쇼킹이었어. 아 무도 상상하지 못했거든 실제로 그런 게 존재한다고는 말이야. 아무리 소 문이 돈다고 해도 소문은 소문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 으니까. 그런데 사람들이 말하는 '용'이 진짜 '용', 드래곤이었을 지 누 가 알았겠어?" "그걸 조사해보는 게 우리 일이에요. 만약 그게 진짜 MS사의 음모라면 통합정부든, WCC든, 어스폴이든 대충 조사하는 시늉만 하다가 말 가능성 이 높거든요." "망할 놈의 MS녀석들. 기껏해야 싸구려 복제 시디나 팔던 녀석들이." 아톰의 말은 MS사의 창립 일화를 비꼬는 말이었다. MS사는 지난 세기, 작은 음악 시디 제조업체였다. 지난 세기 말 전 세계적으로 클래식 열풍 이 불어닥쳤을 때, 다른 업체들은 모두 최고의 음악가와 최고의 음질을 광고하는 클래식 시디를 제조하고 있었다. 그러나 MS사는 달랐다. 유로 통화의 실패로 유럽 지역이 위기에 휩싸였을 때, 재능은 있지만 이름이 없는 음악가들을 싼값에 고용하여 시디 한 장에 수 백곡이 넘는 클래식 음악 파일을 모은 편집 시디를 팔았다. 사실 음악가 이름을 보고 클래식 시디를 사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가사가 없으니 클래식이라고 말하 는 사람이 수두룩한 마당인데 말이다) 하지만 집에 클래식 시디 한 장쯤은 있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았 던 시대적 흐름과 싼 것을 선호하는 사람들의 기호가 맞아떨어져 MS사는 작은 음악 시디 업체에서 한 순간에 도약했다. 그후 MS사는 특허와 물량 공세를 통한 통한 독점으로 연타석 홈런을 날렸다. 독점에 맛을 들인 MS 사는 계속해서 독점할 수 있는 영역을 찾아다녔고 독점할 수 없는 것은 씨를 말려 아예 싹을 없앴다. 그 와중에 통합정부와 WCC에 계속해서 정치 자금을 대었다는 말도 있고. 하여간 불과 100년이 지나기 전에 MS사는 인 공위성을 666개나 쏘아 올릴 수 있는 거대 기업으로 성장했다. 그들이 지 은 MS사의 이름처럼, 정말 Master Softcom이 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MS사 의 성공의 비결은 순전히 독점에 있다는 말인데. 이렇게 생각해 보고 나 니 독점에 대해서 핏대를 세우면서 설명했던 리파이의 말이 조금 납득이 가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도 아직 정보의 공유가 어쩌고 하는 부분은 이 해 할 수 없지만 말이다. "자. 비류 님. 이제 대충은 다 들으셔서 아시겠지요? 우리가 하는 일은 이래요. 그리고 비류 님은 이제 돌아갈 수 있는 선을 넘었구요." "제가 약속 한 건 일 주일 안에 이나바머를 찾겠다는 것밖에 없었어 요." 나는 이렇게 말했다. 발을 뺄 수 있는 여지는 남겨두어야 한다. 나는 아버지의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왜, 무서워? 어스폴에 쫓기는 몸이 되니까 인생 종칠까봐 겁나는 거 야?" 도발적인 말투와 몸짓으로 아톰이 나에게 말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 다. 잠시 침묵이 있었다. "일단 무슨 일부터 시작해야 할지 생각해보도록 하지요. 비류 님이 그 렇게 말씀 하셔도 분명 같이 할 수 있는 길이 있을 거에요. 세헤라자드도 도움이 될 거에요." 침묵을 깨고 리파이가 말했다. 아마 리파이는 어떻게든 나를 끌어들이 고 싶은 모양이었다. 만약 아버지가 FHA의 일을 돕게 된다면 상당히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 같이 할 수 있는 게 있기는 있지." 아톰이 전혀 어울리지 않게 무게를 잡으면서 말했다. 덕분에 모두의 시 선이 아톰에게 모아졌다. (심지어 세헤라자드마저 아톰을 주시했다) "오래 간 만에 하트오브화이터즈나 한 판 어때? 세헤라자드도 좋지?" 나는 헛웃음을 지었지만, 아톰은 방에 들어가 대형 액정패널과 게임기 를 가지고 나왔다. 결국 우리는 잠들기 전까지 하트오브화이터즈를 했다. 승률은 말하기도 싫다. 64연패라는 대 기록을 세웠으니 말이다. 아톰은 모두가 불가능할 거라고 말했던 108콤보를 손바닥 뒤집듯이 쉽 게 구사했다. 세상에! 하트오브화이터즈의 철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도 평생 한 번 성공할까말까 하다는 108콤보를 말이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모든 캐릭터의 108콤보를 그날 난 처음 봤다는 사실이다. 욕이 저절로 나 왔다. 108콤보 같은 걸 가능케 하다니 프로그래머들이 저주스러웠다. 108 콤보를 막다가 한 번 삐끗하면 그대로 끝이었다. 에너지 게이지가 중간에 다 달아도 108콤보는 끝까지 들어갔다. 몇번이나 패드와 아톰의 이마를 번갈아보며 고민해야했다. 관두자 이깟 일로 남의 머리를 깨다니 그건 프 로 게이머가 할 짓이 아니다. 우워어어어.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2236/12886 ━━━━━━━━━━━━━━━━━━━━━━━━━━━━━━━━━━━━━━━━ 제 목:[탐그루] 영혼의 에뮬레이터 7 127 관련자료:없음 18/18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2-26 00:19 조회:1706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하지만 그런 아톰도 리파이에게는 꼼짝 못했다. 리파이의 동체시력은 거의 신의 수준이었다. 반격기 공방전에 들어가면 영락없이 아톰이 지고 말았다. 거기에다가 리파이는 심리전의 대가였다. 아톰도 나름대로 심리 전을 한다며 끊임없이 리파이의 신경을 건드리는 말을 해댔지만 리파이는 미소까지 지어가며 아톰의 말을 받아 넘겼다. 잡기, 풀기, 회피, 횡이동, 이지선다를 심리전을 펼쳐가며 귀신처럼 구사했고 그 와중에 초보도 안 맞는다는 초필살기까지 맞추는 사람 잡는 심리전의 대가였다. 세헤라자드 도 스테아를 공중에 던지면서까지 나를 응원하기는 했지만 순전히 동정인 것 같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대전 액션 게임도 좀 열심히 해 두는 건데. 결국 아톰의 패드가 벽으로 날아가 박살나며 게임이 끝났다. 게임이 끝나고 우리는 각자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방에 있던 푹신한 침대에 몸을 던졌다. 집에 있던 침대에 익숙해져서 좀 불편하리라고 생각 했지만 사실은 아주 편했다. 역시 센서와 인공지능이 부착되어있는 침대 인 모양이었다. 부자가 좋긴 좋구나. "비류 님." 세헤라자드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참. 세헤라자드. 미리 충전해 둬야겠다." 나는 이렇게 말하면서 랩탑을 침대 밑에 있는 전원과 연결했다. "이렇게 해 두면 며칠 동안은 별 지장 없을거야." "그게 아니라요, 리파이, 예쁘다고 생각하세요?" "아니. 아름답다고 생각해." 나는 이렇게 말하고는 혼자 키득거렸다. 사실 리파이가 예쁘다고 생각 하지 않을 남자는 별로 없을 것 같았다. (비록 여성 팬이 더 많긴 하지 만) "그렇군요." 세헤라자드는 이렇게 말하고는 뭔가 생각하는 표정으로 스테아를 쓰다 듬었다. "난 피곤해. 좀 자야겠어. 넌 안 자도 되나?" "리파이가 예뻐요, 제가 더 예뻐요?" 세헤라자드가 이렇게 묻는 순간, 나는 뒤통수를 한방 얻어맞은 느낌이 되었다. 여자가 이런 질문을 던질 때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라던데. "그야, 나름대로 매력이 있으니까." 이불을 턱 밑까지 끌어당기면서 내가 말했다. 분명하게 이렇다, 저렇다 하고 대답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는 질문 같았다. "아니에요. 그냥 물어본 거에요. 주무세요." 세헤라자드의 목소리는 어딘지 좀 과장된 느낌이었다. 나는 뭔가 이상 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그냥 눈을 감았다. 안 그래도 복잡한 머릿 속에 세헤라자드 생각까지 끼어들었다가는 당장이라도 폭발해 버릴 것 같 았기 때문이었다. "비류 님, 일어나세요." 리파이의 목소리에 나는 잠에서 깨었다. 아톰의 안가에는 방이 꽤 많아 서 모두 다 다른 방에서 자고 있었는데, 리파이가 찾아 올 줄은 몰랐다. "이제 안 해요. 하트오브화이터즈는 질렸어." 나는 잠에서 덜 깬 목소리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연락이 왔어요. 급한 일인 것 같아요." "아버지?" 나는 혹시 아버지가 아닐까하는 생각에 가슴이 철렁 내려 앉는 게 느껴 졌다. "아니에요. 부루터스에요." "부루터스는 FHA하고는 관계가 없다면서요?" 부루터스라는 말에 조금 실망스럽기도 했지만 다행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럼 그렇지 아버지가 연락했을리가 없지. "예. 그런데 중요한 일이 발생한 모양이에요. 일단 나와서 보세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마루로 나갔다. 마루에는 역시 자다 깬 얼굴을 한 아톰이 먼저 나와 있었다. "부루터스가 제 아이디로 편지를 보냈어요." "부루터스가 왠일이지. 리파이한테 연애편지라도 보낸건가." 아톰이 말했다. 나는 마루에 있는 컴퓨터를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부루 터스의 편지가 도착해 있었다. 음성 파일도 아니고, 그저 단 두 줄의 메 시지만이 적혀있었다. "드디어 증거를 잡았다. MS 녀석들 본때를 보여주마." "겨우 이것 때문에 깨운 거예요?" 졸린 눈을 비비며 내가 말했다. "아니요. 이제 가야 돼서 깨운 거예요. 지금 우리는 손맥으로 돌아갈 거에요. 부루터스를 만나러." "내일 가면 안 되요?" 자다 일어나서 이게 무슨 꼴이람. "혹시라도 MS사가 먼저 눈치를 채고 부루터스에게 간다면 위험해 질 수 도 있어요. 와일드건의 지시도 있었구요." FHA의 상위 지시자라는 와일드건 말이로군. 와일드건이 누군지는 몰라 도 그 말은 옳은 것 같았다. "밖에 오토가 대기 중이야. 비류. 짐 챙겨. 어쩌면 여기로 돌아오지 않 을 수도 있으니까." 아톰이 말했다. 나는 세헤라자드가 들어 있는 랩탑과 가방을 챙겼다. 자기 전에 랩탑을 충전해 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버카에 오르고 나서야 문득 생각이 났다. 그런데 나는 왜 리파이와 아톰을 따라가고 있 는 걸까? 후버카 안에서 리파이와 아톰은 나에게 계속 MS사의 횡포와 이것에 맞 서 싸워야 하는 당위를 설명했다. 계시판에서 말로만 들었던 의식화라는 게 바로 이런 거구나 싶었다. 나는 뭐라고 항변하고 싶었지만 별로 생각 을 해 보지 않았던 부분인데다가 함부로 반론을 펼쳤다가 꼬투리를 잡히 게 될 까봐 그냥 고개를 끄덕이면서 듣는 시늉만 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한 쪽 귀에는 이어폰을 꽂고 있었는데, 세헤라자드는 가끔씩 이런 말만 했다. "그런 측면도 있지요." 도무지 나 스스로 판단을 내리기에는 힘이 들었다. 알고 있는 사실도 없고, 알고 싶은 사실도 없는 나에게 이거 다들 너무 하는 거 아닌가 싶 었을 뿐이다. 애당초 나에게 중요한 것은 별로 없었다. 부모님은 캐나다 영주권을 얻 고 각가 세계 각지를 떠돌면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었고, 나는 이곳에서 어영부영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게 내 세계의 전부였다. 가끔 내가 굉장한 사람이 되어 부모님에게 자랑스러운 자식이 되고 싶다는 생 각을 해 본 적도 있다. 하지만 결국, 나는 그저 게이머가 되고 싶었을 뿐 이었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는 그 작은 꿈마저 사라져 버릴 지경에 이르 렀지만 말이다. 후버카가 손맥 소프트 앞에 도착했다. 24시간 가동되는 손맥 소프트가 있는 빌딩은 다른 건물들처럼 붉은 하늘 아래에서 밝은 빛을 발하고 있었 다. 아름답다.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다른 것을 생각하고 싶지가 않았 다. 용이 있으면 어떻고 서치로봇이 있으면 어떻단 말인가. 이나바머를 일 주일 안에 찾겠다고 이진우 수사관과 약속했으니, 그것만 지키면 그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FHA의 입장이 이해도 갔 다. 오는 차 안에서 내내 MS사의 횡포에 대해서 듣고 있자니 정말 MS사가 나쁜 놈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도대체 나는 결정 을 내릴 수가 없었다. 어스폴의 앞잡이가 되는 게 안전하기는 하겠지만 마음이 편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FHA의 일을 돕자니 어스폴 일이 걱정되 었다. 아버지가 옆에 있었다면 뭐라고 말했을까? 이런 생각이 들자 나는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왜 나는 스스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걸까. 내가 정말 원하는 건 무엇일까.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어하는 건 무엇일까. 아버지라면 원하는 걸 하면 된다고 했겠지만 나는 내가 뭘 원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톰이 차라리 낫지. 그래도 자 기가 하고 싶은 걸 하고 있는 것 같으니까 말이다. "프로는 아니지만 조심할 건 조심하는 게 좋지." 아톰이 말했다. 만약을 대비해서 후버카는 건물 앞에 세워두고 오토가 대기하기로 했다. 그런데 차를 저렇게 정문 앞에다가 세워 뒀다가 주차 단속 요원에게 걸리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입 밖으로 그 생 각을 내지는 않았다. (아톰의 표정이 너무 진지했기 때문이었다. 평소의 아톰 답지 않게 말이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나는 양쪽 귀에 이어폰을 꽂 았다. 세헤라자드가 꼭 살아 있느 사람처럼 내 바로 옆에 있는 것 같아서 든든한 기분이 들었다. 외국어에 가까운 사투리를 쓰는 수위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손맥 소프트 사무실 앞에 도착하자 뭔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와 는 달리 좀 조용하다 싶기도 했고 오싹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뭐라고 말 할 수는 없지만 평소와는 다른 느낌. 몇 번이고 다닌 복도였는데 오늘따 라 생경하게만 여겨졌다. 그런데 나만 그렇게 느낀 건 아닌 모양이었다. 리파이와 아톰도 긴장하고 있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무래도 이 근처 어딘 가에서 끔찍한 일이 일어난 것만 같았다. "뒤야, 비류." 아톰이 말했다. 누군가 뒤에 있다는 소리인 것 같았다. 그래서 이상한 기분이 들었던 걸까? 나는 뒤돌아보려고 했지만 리파이가 내 팔을 잡으면 서 말렸다. "그냥 앞만 보고 가요." 꽤나 프로답게 말하려고 애쓰고 있는 표정이었지만 잔뜩 긴장하고 있는 모습이 조금도 프로답지 않았다. "언제부터 따라온 거야?" "후버카는 아니겠죠. 오토는 프로니까." 나는 아톰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톰은 내 말이 담고 있는 뜻을 (그러니 까 아마추어 같다는) 알아차렸는지 조금 기분 나쁘다는 듯한 표정이 되었 다. (하지만 나는 이로써 하트오브화이터즈 64연패의 대기록을 세운 일에 대한 작은 마음의 보상을 얻을 수 있었다) "여기 복도에 있던 사람이에요. 엘리베이터 옆쪽에 숨어 있다가 따라오 고 있어요, 비류 님." 세헤라자드가 말했다. 세헤라자드의 소리를 인식하는 센서가 성능이 나 쁘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지금 상황을 빠져나갈 수 있는 정보는 아니었다. "오토한테 따라오라고 하는 거였는데." 아톰은 정말 긴장이 되는지 얼굴에 땀까지 흘리고 있었다. "겁내지 마, 아톰." 리파이가 말했다. 하지만 내 눈에는 말하고 있는 리파이야말로 정말로 겁을 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겁을 내기는, 무슨 겁을 낸다고." 아톰은 이렇게 말하면서 꼭 바닥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겁내는 사람처 럼 조심스럽게 걷고 있었다. "내가 앞장서 문을 열께. 다음 일은 다음에 생각하자고." 리파이가 선수 대기실 앞에 도착하자마자 말했다. 그런데 나는 하나도 긴장이 되질 않고 있었다. 뒤에 있는 사람이 누구건 아무런 상관이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어스폴이라면 이진우 수사관과 이미 얘기가 끝났 으니 어떻게든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또 그럴 리야 없겠지만 만약 MS사 에서 부루터스가 뭔가 눈치를 챈 것을 알고 사람을 보낸 거라면 역시 별 로 긴장할 게 없을 것 같았다. 설마 사람을 다치게 하기야 할까. 혹시 납 치라면 또 모를까. 만약 그렇게 된다면 나야 어스폴에 변명할 말이 생기 니 더 좋을 수도 있고. 그러고 보니 내가 긴장하고 있지 않은 이유는 순 전히 내가 리파이나 아톰과는 입장이 다르기 때문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 다. 그야말로 입장이 다르기 때문에... 그때였다. 리파이가 막 문 손잡이를 잡고 돌리려는 순간 문에 시커먼 점이 생기는가 싶더니 그대로 구멍이 뚫려버렸다. 무슨 일이지? "빔이야! 빌어먹을!" 아톰이 소리치자 리파이는 재빨리 문을 열었고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도 없이 선수 대기실 안으로 슬라이딩하듯 미끄러져 들어갔다. 그러자 빔 핸드건이 연속해서 발사되었다. 나는 엎드려서 바닥에 고개를 박고 꼼짝 도 할 수 없었다. 뒤쪽에서 불타오르는 소리가 연속해서 들렸다. 이건 게 임이 아니라 실제 상황이었다. PRINTER/CAPTURE를 OFF 하시고 [ENTER] 를 누르십시오.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2304/12886 ━━━━━━━━━━━━━━━━━━━━━━━━━━━━━━━━━━━━━━━━ 제 목:[탐그루] 영혼의 에뮬레이터 7 128 관련자료:없음 18/18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2-27 00:17 조회:1785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죽일 생각이야! 다 죽일 생각이야!" 아톰이 머리를 감싸쥐고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 소리가 꼭 빔핸드건 을 삼켜버린 듯 아톰의 말이 끝나자 더 이상 빔은 이어지지 않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고 문 밖을 내다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엘리베이터 가 작동되는 소리가 들리는 걸로 봐서 우리에게 빔을 갈긴 녀석은 엘리베 이터를 타고 사라진 것 같았다. "다친 사람 없어요?" 리파이가 일어나면서 말했다. 그런데 아톰의 표정이 이상했다. 뭔가를 바라보고서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다친 사람은 없는 것 같아." 아톰이 방 한쪽에 둔 시선을 떼지 않고 무엇엔가 홀린 사람처럼 말했 다. 뭔가 끔찍한 예감을 안고 천천히 아톰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류와 켄이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목과 몸이 따로 떨어져 있는 류가 있었고, 그 앞에 넋놓고 앉아 있는 켄이 있었다. "이게... 도대체." "도대체 왜." 리파이와 아톰은 이렇게 중얼거렸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멍 하니 서 있었다. 류는 꼭 장난감 인형처럼 깨끗하게 목과 몸이 따로 분리 되어 있었다. 핏자국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목이 베이면 피가 한발은 솟 는다던데 빔이 류를 관통하면서 상처부위를 태웠기 때문인 모양이었다. 그순간 왠일인지 어스넷을 돌아다니다가 호기심에 들렀던 변태 사이트가 떠올랐다. 그곳은 각종 잔인한 사진이란 사진은 다 모아 놓은 곳이었는 데, 거기에 빔핸드건에 죽은 시체들 사진들도 함께 있었다. 그때 내가 본 사진과 그리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다만 빔핸드건이 노린 대상이 무기 를 들고 있는 군인이나 무장 강도가 아니라... 의사표현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자폐증에 걸린 꼬마 아이라는 점을 빼면 말이다. 류는 마치 망가 진 인형처럼 바닥에 놓여 있었고, 켄 또한 망가진 채 주저 앉아 있었다. "6, 6, 6, 6, 6, 6, 6, 6......." 켄은 류가 죽었다는 걸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잘린 류 의 머리를 앞에 두고 간혹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원주율을 외우고 있었다. 대답을 기다리듯 류의 머리를 바라보고 있는 켄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 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눈물이 나올 것만 같고 마구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움켜쥔 두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고 다리에 힘이 빠져 나가 주저 앉고 싶었다. "어, 어떻게 해야 하지, 리파이? 어스폴에 신고해야 하나? 우리가 누명 을 쓰게 될 거야. 젠장. 오토 말고는 빔핸드건을 들고 있는 사람은 없잖 아. 어스폴이 믿어 줄까? 아냐. 안 믿을 거야. 어쩌면 우릴 다 다 죽여버 릴지도 몰라. 어떻하지? 어떻하지?" 아톰은 정신없이 왔다갔다하면서 계속 중얼거렸다. 리파이도 충격을 받 았는지 놀란 표정을 숨기질 못하고 있었다. "침착하세요, 비류 님." 세헤라자드가 말했다. 나는 여러번 크게 심호흡을 했다. 지휘관의 테마 를 듣는다면 조금 나을 것 같은데. 하지만 나에게는 그럴 만한 여유가 없 었다. "잠깐. 일단 생각을 좀 해 보지. 아톰. 중얼거리는 거 그만 둬. 왔다 갔다 하지도 말고." 어느새 냉정을 되찾은 리파이가 이렇게 말했다. 지금 리파이의 표정은 소오드엔매직 온라인 게임에서 보여주었던 냉정한 표정 그대로 였다. 그 때의 표정이 연출된 상황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여간 리파이의 말에 아톰은 입을 다물고 다리를 후들후들 떨면서도 제자리에 섰다. "먼저, 부루터스는 어디 있지?" "맞아. 아까 그 녀석, 부루터스였어. 드디어 부루터스가 미친 거야. 정 신 분열증인가, 왜 그런 거 있잖아. 리파이한테 그런 메일을 보낸 것도 순전히 부루터스가 미쳤기 때문이었어." "아톰. 그건 말도 안돼. 아무리 정신 분열증에 걸린 사람이라고 해도 빔핸드건으로 류를 죽이고 난 후에 여기서 우리가 올 걸 기다리고 있다가 등뒤에서 우릴 쏴?" 리파이는 이렇게 말하면서 부루터스가 다루던 컴퓨터를 살펴보았다. 나 는 류의 시체가 컴퓨터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그곳 근처에도 가고 싶지 않았지만 리파이는 컴퓨터를 살피면서도 꽤 담담한 표정이었다. "편지를 한 통 받았던 모양인데요." 마우스를 이리저리 움직여 시스템을 살피던 리파이가 말했다. "무슨 편지?" "지운 흔적이 있어요. 그것도 아주 급하게." "무슨 소리야?" "로그파일에 나타나 있어요. 저한테 편지를 보낸 후에 편지 한 통을 받 은 것 같은데... 그걸 읽자 마자 바로 삭제했네요." "거봐. 미친 거라니까." 아톰의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해지고 있었다.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당장 이라도 구토를 할 것만 같은 얼굴이었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진짜로 부루터스가 MS사의 서치로 봇 계획을 알아냈고, 그것 때문에 누군가 여길 왔었고, 그리고 나 서......" "추리 소설을 너무 많이 본 거 아니야? MS사가 사업 기밀이 빠져나갔다 고 해서 사람을 죽여? MS사가 그정도로 무모하고 잔인한 곳이었나." 아톰이 말했다. "빨리 나가자, 리파이. 도저히 못 견디겠어." 아톰이 이렇게 말하지 않아도 나는 아톰의 얼굴만 봐도 더 이상 못 견 디겠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리파이 말도 일리가 있어요. 그렇게 류와 켄을 보살폈던 사람 이 도대체 왜 이런 일을 저질렀겠어요." "미친놈이 그런 걸 가릴 리가 있어? 십 년을 키운 개도 어느 순간 덤벼 들어 무는 수가 있다고." 내 말을 자르면서 아톰이 소리쳤다. "당장 나가자. 이제 정말로 더는 못 견디겠어. 빨리 여길 떠야해. 류를 죽인 놈들이 다시 돌아오면 어떡해? 우린 지금 무기도 없잖아." 아톰이 두려워하는 눈빛으로 켄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켄은 여전히 고 개를 끄덕이면서 6, 6, 6, 6 만을 외우고 있었다. "침착해. 아톰. 먼저 될 수 있는 한 상황을 파악해야 돼. 이대로 도망 가면 영락없이 우리가 의심받게 돼." "지, 지문은 어쩌지?" 아톰이 더듬거리면서 말했다. "여긴 선수 대기실이야. 우리 지문이 있는 게 당연해. 그건 신경쓰지 않아도 돼." "신고는요?" "어스폴에 목소리를 남기고 싶어? 신고전화는 모조리 트렌스파워로 기 록된다고. '어스폴 사람들'에서 봤어." 아톰은 당장이라도 나갈 기세로 말했다. "잠깐만. 여기 오늘 자 포스트 잇 파일이 하나 있어." 리파이가 마우스를 움직였다. 나는 류와 켄을 보지 않으려고 노력하면 서 리파이의 어깨 너머로 모니터를 보았다. 모니터에는 의미를 알 수 없 는 문자가 적혀 있을 뿐이었다. "이게 뭐지요?" "ㅇ, ㄱ, ㅁ, ㅎ,ㅐ, ㅜ." 리파이는 적혀 있는 말을 소리내어 읽었다. "뭔가 쓰다가 만 것 같은데..." 아톰도 창백한 얼굴을 하고서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이기면 해? 오가면 해? 마지막에 '우'는 뭐지?" 아톰은 이렇게 덧붙이고는 문고리를 잡았다. "리파이. 하여간 이제 여길 뜨자. 만약에 어스폴이 닥치면 우린 빼도 박도 못하고 여기서 끝장나는 거야." "기억 할 수 있겠어요?" "아, 가만히 애무. 이렇게 외워두죠." 나는 이렇게 말하고는 아톰을 따라 문밖으로 나갔다. "아톰. 이 친구는 어쩌지? 켄 말이야" 리파이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6이라고 계속해서 중얼거리고 있는 켄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젠장. 하고 싶은 대로 해! 지금은 빨리 나가는 게 먼저야" 아톰 말 그대로 우리는 서둘러 도망쳐야했다. 류를 살해한 것이 부루터 스 건 혹은 제 삼 자건, 지금 우리의 상황은 누명을 쓰기에 딱 좋았다. 아니 설령 누명을 쓰지 않더라도 이진우 수사관이 나를 어스폴 지하 취조 실로 끌고 갔을 때 했던 말처럼 '살인사건 중요 참고인'이 될 것이다. 어찌되었던 리파이가 켄을 들쳐 안고는 엘리베이터 쪽으로 뛰어왔고, 아톰은 쓸데없이 병신한테 관심은, 어쩌고 하고 중얼거렸지만 특별히 말 릴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고 있는 데, 불현듯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 었다. "리파이. 신고해야겠어요." 나는 좀 높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더 강한 인상을 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려면 너나 해. 목소리하고 발신지가 남는다니까?" "어차피 수위가 우릴 봤잖아요? 신고 안 하는 편이 더 의심받아요." 그제야 아톰도 리파이도 우리가 살인 현장을 목격한 충격 때문에 너무 도 당연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그, 그럼 어쩌지?" "내가 할 테니까 걱정 말아요. 난 아직 미성년자니까요." 나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미성년자니까 아직 성문(音紋)을 등록하지 않았다. 아무리 어스폴이라고 해도 당장 나라는 걸 알아차리지는 못할 것 이다. 만약 내 목소리라는 것을 어스폴이 알아낸다고 해도, 이진우 수사 관이 있는 이상 별로 나에게 큰 영향은 없을 것이다. 설마 약속까지 했는 데 날 잡아넣지는 않겠지. 우리는 밖으로 나가자마자 공중전화를 이용해서 어스폴에 신고를 하기 로 했다. 아톰과 리파이는 후버카에 먼저 올랐고 나는 혼자서 공중전화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자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류의 참혹한 시체와, 또 불에 타죽은 오소리 녀석과 우리를 향해 날아오던 빔과 이진우 수사관과 거기다가 이나바머인지 뭔지 하는 것까지...... 게다가 이번에는 '아가만 히애무'인지 뭔지 하는 이상한 암호문까지 얻었으니. 게임이라고 해도 이 런 게임이 없겠다 싶었다. 게임에서는 이럴 때 새로운 등장인물이 나타나 서 주인공을 도와주기도 하고 또 아니면 주인공이 가지고 있는 능력으로 위기를 헤쳐나가기도, 그것도 안 되면 세이브를 하고 이것저것 시도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나는 그중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다. 나는 수화기를 집어들고 어스폴 신고 전화인 111번을 눌렀다. 신호음이 들리자 어스폴에 그냥 신고해버리고 어스폴에 아버지 이리듐 번호를 알려 줘 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된다면 더 이상 이런 빌어먹을 게 임 같은 상황은 더 이상 벌어지지 않을텐데 하는 생각도 들었다. "지금 접수원이 다른 신고 전화를 접수하고 있습니다. 잠시 기다려 주 십시오." 조잡한 미디 음악 저편으로 상냥한 트렌스파워 여자 교환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지만 아버지를 팔아 넘길 수는 없었다. 또다시 이런 식으로 아버지에게 기댈 생각을 하다니. 도대체 언제쯤에야 이런 악순환을 끊어버릴 수 있을까. 나는 한 사람의 당당한 성인으로 내 가 한 일은 내가 책임지는 그런 사람이 결코 될 수 없는 걸까. "용이에요." 세헤라자드가 말했다. "뭐라고?"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2305/12886 ━━━━━━━━━━━━━━━━━━━━━━━━━━━━━━━━━━━━━━━━ 제 목:[탐그루] 영혼의 에뮬레이터 7 129 관련자료:없음 18/18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2-27 00:17 조회:1609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드래곤이라고요. 용. 드래곤." "그게 무슨 소리야?" "683번에 남상준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지극히 사무적인 말투였다. 나는 손맥 암행어사 팀의 선수 대기실에 시 체가 있다는 말만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아마도 이제 이 공중전화 박 스도 추적이 될 게 뻔하니 빨리 자리를 뜨는 게 상책일 듯 싶었다. "D, R, A, G, O, N. 용이라고요." 전화박스를 나오는데 세헤라자드가 말했다. "그래. 드래곤이 용이지." "참 답답하게도. 한글 자판 상태에서 DRAGON을 타이핑 한 거라니까요. 아마 누군가 굉장히 다급했나봐요." "맞아. 부루터스는 그걸 남긴 거야. 용을 찾았다는 걸 말이야." 나는 서둘러 후버카에 오르며 말했다. "알아냈어요. '아가만히애무'가 뭔지." 후버카에 오르자 리파이가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요. 드래곤이라는 말이죠?" 문을 닫으면서 내가 말했다. 너무 세게 당겼는지 부서질 듯한 소리를 내면서 문이 닫혔다. "예. 그건 알았어요. 그런데 그게 무슨 소용 있어요? 왜 부루터스는 거 기에 그런 메시지를 남겼을까요? 부루터스가 지운 메시지는 또 뭘까요? 우리에게 빔을 날린 그 친구는 왜 메시지는 그냥 남겨 뒀죠?" "...그건 아직 몰라요." 내 계속되는 질문에 리파이가 난처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래. 그럼 일단 용을 찾고 봐야 겠네. 그럼 뭔가 단서가 나겠지. 그 런데 저거 어쩌지?" 아톰은 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말했다. (차마 똑바로 쳐다볼 수 없다는 듯이 말이다) "6, 6, 6, 6, 6, 6, 6..." "젠장. 이거 입 좀 다물게 할 수 없을까." 아톰은 켄은 '이거'라고 표현하면서 못 견디겠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쏘 아붙이기 좋아하는 리파이도 아톰에게 뭐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고개를 까딱거리며 멍청한 눈빛으로 같은 숫자만 외우고 있는 켄의 모습이 보기 싫기는 아톰이나 리파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어쩐지 리파이의 얼굴에 는 괜히 데리고 나왔다 싶은 후회의 빛마저 보이고 있었다. 나도 도대체 왜 리파이가 켄을 데리고 나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내 눈에도 켄이 고개 를 끄덕거리면서 같은 숫자를 외우고 있는 괴물처럼 보였다. 불쌍하다는 생각에 앞서서 피하고 싶다는 생각이 먼저 드는 게 부끄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5에요, 비류 님." "응?" "다음 숫자는 5라고요" 나는 세헤라자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듣기 위해 한참을 생각 해야했다. 세헤라자드의 말뜻을 알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그래서 날보고 어쩌라고?" "비류 님. 너무 기분 나빠하지 마세요." 내가 세헤라자드에게 퉁명스럽게 말하자 앞자리에 켄을 안고 앉아 있던 리파이가 대답했다. "지금 리파이한테 한 말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비류 님은 켄한테서 도움을 받은 적이 있죠? 그러면서 어떻게 이럴때 도와줄 생각은 하지 않으세요?" 세헤라자드가 말했다. 나는 대답 할 말이 없었다. 세헤라자드의 말은 구구절절 다 맞는 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돕고 싶다는 생각 보다 는 멀리에 두고 피하고 싶다는 생각은 여전했다) "그래. 그럼 어떻게 할까." "먼저 5부터 시작하세요" 조금 비꼬는 듯한 아톰의 말투를 흉내내어 내가 말했지만, 세헤라자드 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아톰과 리파이를 한번씩 번갈아 가면서 보았다. 둘의 표정은 긴장으로 굳어있었다. 이런 후버카 안에서 켄과 숫자놀음이나 하고 있어야 하다니. 나는 잠시 망설였다. "5." "7." "2." "8." 이렇게 해서 켄은 내 무릎위에 앉게 되었고, 리파이와 아톰은 홀가분한 표정이 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다들 너무 했다. (아무 말 없이 운전하 고 있는 오토가 부럽게 여겨진 건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 아톰이 먼저 자신의 계획을 이야기했다. "바보 같은 소리가 아니야. 분명히 실현 가능성이 있어. 그리고 지금으 로서는 그게 최선인 것 같고 말이야." "아무도 바보 같다고 안 했어. 그리고 내 생각에도 용을 잡는 게 유일 한 돌파구인 것 같아. 부루터스가 용이라고 했으니 먼저 용을 찾아보면 뭔가 나오겠지." 리파이가 아톰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리파이의 얼굴에는 아톰을 생각해 주고 있는 기색이 보이고 있었다. 저런 표정을 지을 때 보면 리파이는 꼭 누나 같다니까. (물론 나는 누나가 없긴 하지만) 그런데 왜 켄한테는 저 런 표정으로 대해주지 않지? "그러니까 아톰의 얘기는 소드앤매직 온라인망에 침입해서 용을 사냥하 자는 말이지요?" 내가 아톰의 말을 정리해서 다시 묻자 아톰은 기쁜 표정이 되었다. (그 러는 동안 켄은 3을 네 번 혼자 외웠다) "그래. 바로 그거야, 비류. 그 자식을 잡으면 정보를 얻을 수 있지 않 겠어? 녀석이 뭘로 이루어져 있고 어떻게 만들어 졌는지 말이야. 그러니 까 용의 정체를 알면 다 알 수 있다는 얘기야." "그런데 내 말은 어떻게 잡느냐는 거야. 이거, 완전히 고양이 목에 방 울 달기지. 좋은 생각이긴 하지만 어떻게 잡자는 거야? 당신이 뭐 드래곤 슬래이어나 돼는 거야? 아니면 뭐 비장의 소환수라도 있나보지?" 리파이의 말에 잠시 후버카 안에 침묵이 감돌았다. 하긴 도대체 무슨 수로 잡겠다는 말인지.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라......" 아톰은 턱을 쓰다듬으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귀엽게 생긴 아톰이 그 렇게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보니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그래. 고양이야." 잠시 시간이 지난 뒤에 아톰이 외쳤다. "고양이라뇨?" "그래, 아톰. 고양이가 어쨌다는 거야?" 리파이가 엉뚱한 소리 좀 늘어놓지 말라고 핀잔을 주었다. "고양이가 있잖아.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아톰이 이렇게 말하자 나는 그제야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그 스테아라는 고양이를 세헤라자드가 데리고 온 것처럼 용 도 데리고 올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얘기야?" 리파이도 내가 이해한 것과 거의 동시에 아톰의 말을 이해한 모양이었 다. "비류 님. 스테아를 데리고 온 것처럼 용도 데리고 올 수 있을까요?" "모르죠, 7" 세헤라자드가 대답했고 나는 그대로 세헤라자드의 말을 옮겼다. "하지만 해 볼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한숨을 내 쉬듯이 리파이가 말했다. 하긴 그렇다. 달리 또 무슨 방법이 있겠는가. 이런 상황에서 말이다. 우리는 후버카에서 내려 안가로 들어갔고, 오토는 차를 차고에 세워둔 다음에 들어오겠다고 말라고 사라졌다. "자. 그럼 이제 계획을 세워보지. 그런데 소드앤매직 망은 폐쇄되어 있 는데 어떻게 하면 좋지?" "여기서 해킹하는 건 어때, 아톰?" "섣불리 해킹했다가 여기가 드러나면 곤란한데." 안가의 현관문을 열면서 아톰이 말했다.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은데." 문이 열리자마자 리파이가 말했다. 안가의 쇼파에는 이진우 수사관과 파트너가 앉아 있었다. 이진우 수사관은 캔맥주를 들고 있었고 파트너는 말린 오징어 다리를 씹고 있었다. "아. 이거 근무 중에 이렇게 마시는 건 근무수칙에 위배되는 거긴 하지 만 좀 실례했습니다. 아톰 씨. 너무 좋은 맥주라서요. 진짜 독일 맥주는 맛이 이렇군요." "그거 수출용이에요. 우리 입맛에 맞게 다시 만든 거라고요. 그러니 진 짜 코리아 맥주나 마찬가지죠." 깜짝 놀라고 있는 건 아무래도 나뿐인 것 같았다. 리파이도 아톰도 꽤 침착하게 이진우 수사관을 맞고 있었다. 하긴. 사람이 죽은 걸 본데다가 빔 세례를 몇 번이나 받았으니 이진우 수사관이 나타났다고 해서 그렇게 걱정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이진우 수사관을 보는 순간 숫자 외우 기를 그만 두었고, 켄은 계속해서 5를 중얼거리게 되었다. "취할까봐 걱정하진 않으셔도 될 겁니다. 이 친구는 마시지 않았으니까 요. 그렇지 않은가, 유하린 수사관?" "예, 맞습니다. 하지만 이름은 부르지 않으시는 게 더 좋을 뻔했는데 요." 기분 나쁘다는 듯이 오징어를 씹으면서 유하린 수사관이 말했다. "이런. 제가 깜빡했군요. 이 친구는 그냥 유 수사관이라고 불러주세요. 이름에 컴플렉스가 있거든요." "예쁜 이름이구만요, 뭐." 아톰이 눈썹을 씰룩거리면서 쇼파에 앉으며 말했다. 아톰이 자리에 앉 자 나와 리파이도 따라서 앉았는데 모두 자리에 않자 차가운 기운이 거실 에 감돌았다. "여긴 어떻게 알아냈죠?" "리파이 씨. 몇 번을 말해야 되죠. 어스폴을 우습게 보시면 안됩니다." "FHA에는 못 미칠지 모르지만요." 유하린 수사관이 덧붙였다. 하린이라. 좀 이상한 이름이긴 하군. 여자 이름이라... 혹시 성전환자? "저희는 세계 제일을 자랑 한 적도 없고, 자랑 할 수도 없죠. 적어도 이런 외딴 곳에 있는 아지트에 주인보다 먼저 도착해 있을 만큼의 실력은 되질 못하니까요." 아톰이 말했다. 태연한 척 하고 있기는 했지만 주먹을 폈다 쥐었다 하 고 있는 게 눈에 띄었다. 아마 불안하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런데 어쩐 일이시죠?" 리파이가 물었다. 리파이도 침착한 척 하려고 하기는 했지만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부루터스 사건 때문입니다." 이진우 수사관이 말했다.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게 느껴졌다. 다 알고 있구나 싶었다. 우리가 선수대기실에 다녀온 거며, 빔세례를 받은 것까지...... 설마 좀전에 신고했는데 벌써 여기를 알아낸 건 아닐 테지.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2306/12886 ━━━━━━━━━━━━━━━━━━━━━━━━━━━━━━━━━━━━━━━━ 제 목:[탐그루] 영혼의 에뮬레이터 7 130 관련자료:없음 22/22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2-27 00:18 조회:1775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감식반 말이 빔은 두 차례에 걸쳐서 발사 된 것 같다고 하더군요. 한 번은 류를 살해 할 때고 또 한 번은 비류 씨 일행이 선수 대기실에 들어 갔을 때 인 것 같다고." "그렇게 말했습니다." 이진우 수사관이 유하린 수사관을 바라보자, 유하린 수사관은 이렇게 대신 말을 맺었다. 그런데 비류 씨 일행이라니. 그렇다면 나를 핵심인물 로 보고 있다는 말이야? 갈수록 태산이군. "약속을 이행하시고 계시는 것 같더군요. 부루터스의 편지에 그렇게 기 민하게 움직이신 걸 보면." 이진우 수사관의 말에서 나는 어스폴이 어떻게 이곳을 알아 냈는 지 알 수 있었다. 부루터스의 편지가 배달된 장소를 추적한 모양이었다. "빌어먹을......" 아톰이 분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 아톰 씨. 너무 기분 나빠하지 마십시오. 추적 방지 장치가 되어 있는 장비를 전화선에 장착하신 건 알겠습니다만 추적 방지장치가 발전하 면 추적장치도 발전하기 마련이니까요." "들인 돈이 꽤 되실 텐데 아깝겠어요. 하지만 뭐 저희도 들인 돈이 있 으니까." 유하린 수사관이 옆에서 이진우 수사관을 거들었다. 덕분에 아톰의 얼 굴은 붉게 물들어 버렸다. 아톰의 주먹이 가늘게 떨렸다. "저희가 알고 싶은 건, 언제 비류 씨 일행이 이나바머를 추적할 거냐는 겁니다.." "그럼 그게 이나바머의 수법이었다는 말씀이신가요?" 내가 물었다. 이나바머와 부루터스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다고는 생각 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이진우 수사관은 류가 살해당한 일이 이나바머와 어느 정도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뇨. 수법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소심한 이나바머가 그렇게 대범하게 빔핸드건을 들고 찾아가서 사람을 죽일 리는 없죠." "미친놈들이 무슨 일관성이 있다고......" "아닙니다. 미, 친, 놈일 수록 미친 놈 나름대로의 일관성이 있기 마련 이지요." 아톰이 뭐라고 한 마디 하려고 했지만 유하린 수사관이 말을 끊었다. 그것도 '미친놈'이라는 말에 아주 힘을 주어서 말이다. "우리도 나름대로 단서는 확보하고 있습니다만 그렇게 쉽지는 않군요. 아버님과 연락은 하셨나요, 비류 씨?" "...예." 나는 조금 작은 목소리로 말했지만 당당하게 말하려고 애쓰면서 말했 다. 적어도 완전한 거짓말은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좋습니다. 기간은 일 주일이었습니다. 일 주일이 지나면, 분명히 말씀 드리건대, 어스폴 지부에서 만나 뵙게 될 겁니다." 이진우 수사관은 이렇게 말하면서 웃음을 지었는데 정말 야비해 보이는 웃음이었다. 이진우 수사관의 말은 어떤 죄명을 뒤집어씌우는 한이 있더 라도 잡아넣고야 말겠다는 다짐처럼 들렸다. 하지만 아톰마저도 이진우 수사관의 말에 뭐라고 덧붙이거나 대꾸하지 못했다. 완벽한 안가랍시고 피해 있었는데 이렇게 쉽게 추적을 당하게 되 자 기가 꺾여버린 탓일 거였다. 아마도 이진우 수사관은 '이곳도 찾아냈 다. 어디로 도망친다고 해도 다 찾아낼 수 있다'는 말인 것 같았다. "비류 씨. 신고하신 건 잘하신 일이었습니다. 신고하지 않으셨다면 제 가 제 위에 계신 분들을 설득하는 게 힘들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 만 신고해 주신 덕분에 일처리 하기가 아주 쉬웠습니다." "제 아버지 이름을 들먹인 건 아니고요?" 나는 계속 호락호락 당하고 있는 것 같아서 이렇게 한 마디 쏘아 붙였 다. "전에도 그런 비슷한 질문을 던지셨죠? 기억이 납니다. 저는 이번에도 역시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여전히 야비한 웃음을 지으면서 이진우 수사관이 말했다. 웃음 짓는 이 진우 수사관의 모습은 이제까지 나에게 어떤 심한 말을 했을 때보다도 더 얄미워 보였다. "하지만 켄을 데리고 온 건 잘못이었습니다, 비류 씨. 동료애라든가, 뭐 그 비슷한 거라고 이해를 해 드리려고 해도 그건 좀 위험한 행동이었 습니다." "하지만 켄을 납치하기 위해서 류를 살해했다고 생각할 사람은 없을 테 니 어쩌면 그게 혐의를 벗는 길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죠" 유하린 수사관이 이진우 수사관의 말에 덧붙였다. 나는 켄을 데리고 온 건 내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그런 말을 할 분위기가 아니라 서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켄의 신병은 우리가 인도하겠습니다." "살인사건의 중요 참고인으로요?" 나는 비아냥거리는 투로 말했다. 원주율 외우는 것 밖에 못하는 켄을 설마 취조라도 할까 싶었다. "뭐라고 말씀하셔도 좋습니다. 유하린 수사관" 이진우 수사관이 말하자 유하린 수사관이 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름이 유하린이었군." 안쪽에서 오토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다섯 명의 고개가 그쪽으로 돌아갔 다. 오토는 언제든지 빔핸드건을 뽑을 수 있도록 양복 단추를 풀고 있었 다. "이름을 가르쳐 주지 않은 이유를 알겠어." "함부로 상상하지 말지 그래." "그러지. 유, 하, 린. 양. 아, 실수." 오토는 유하린이라는 이름을 아주 강조해서 말했다. 유하린 수사관의 얼굴 근육이 씰룩 거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이만 하고 돌아가지요, 이진우 수사관 님." 유하린 수사관이 말했다. "그러지. 맥주 잘 마셨습니다." 이진우 수사관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유하린 수사관도 따라 일어났다. 나는 하마터라면 함께 일어날 뻔했는데, 다행히도 리파이가 눈짓을 주는 바람에 따라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다. "참. 잊어버릴 뻔했군요. 오늘 재미 있는 얘기를 하나 들었습니다. 소 드앤매직 온라인이라는 게임 망 있지 않습니까? 그 망이 어제 부로 일단 폐쇄되었다고 하더군요. 도저히 해커가 뿌려 놓은 바이러스를 복구할 수 가 없었다구 하더군요." 아주 평범한 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이진우 수사관은 말했지만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 지는 명확했다. 이진우 수사관도 우리처럼 드래곤의 비밀 을 푼 모양이었다. "그걸 왜 알려 주시는 거죠?" 리파이가 물었다. "그냥 지나가는 말로 한 겁니다." 유하린 수사관이 대답했다. "이렇게 하나 덧붙여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저희는 분명히 이나바머를 추적하고 있습니다. 이나바머는 분명한 범법자니까요. 하지만 이나바머가 이제 정말로 미쳤다면 어떻게든 빨리 막을 방법을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 까 싶습니다." "류의 살인범으로 이나바머를 지목하신단 말인가요?" "아톰 씨. 그건 말이죠, 하하하. 수사상의 비밀이니까 대답하지 않겠습 니다. 그리고 제 얘기의 핵심은 이겁니다. 이나바머를 잡는 것도 중요하 지만 이나바머가 뭔가 알고 있다면, 그건 이나바머를 체포하는 문제와는 조금 다르게 생각해 봐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우리보고... 용을 추적하라는 말씀이시군요." 리파이가 말했다. 지금까지 허공에 뜬 듯 진행되던 대화가 순간 구체적 으로 다가왔다. "그럴 수도 있지요. 하지만 만약에 그런 뜻으로 해석하셨다고 해도 그 건 순전히 비공식적인 견해일 따름입니다." 대놓고 시키는 것보다 더 기분 나쁜 말투였다. "참. 그리고 또 하나 잊었군요." 유하린 수사관은 이렇게 말하고는 품에 손을 집어넣었다. 순간 오토의 몸이 긴장되는 게 눈에 띄었다. 하지만 유하린 수사관이 꺼낸 것은 카드 한 장이었다. "소드앤매직 온라인 코리아 합중국 지부 키카드입니다. 비공식적으로는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만 공식적으로 이건 오토 씨가 길에서 주운 겁니다. 일단 그렇게 해 두는 게 서로를 위해서 좋을 것 같군요" 유하린 수사관은 이렇게 말하고는 손목의 스냅을 이용하여 키카드를 오 토에게 집어던졌다. 하지만 오토는 그것을 받을 생각도 하지 않고 유하린 수사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영화에서 보면 카드를 멋있게 받는 장면 이 나오곤 하지만 생각해 보니 오토의 행동이야말로 프로다운 행동이다 싶었다. 카드를 받는다면 한 순간이라도 허점이 생길 테니 말이다. "왜 우릴 돕는 거죠?" 나는 이진우 수사관을 바라보면서 물었다. "직업이니까요, 비류 씨. 이게 우리 직업입니다." 이진우 수사관은 이렇게 대답했다. 프로다운 차가운 태도로 말이다. "다시 만나면 정말로 한 판 붙게 될지도 몰라." 문을 열고 나가려는 두 사람의 등에다 대고 오토가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다시는 안 만나길 바래. 이게 솔직한 내 심 정이야." "그럼 이만." 두 사람은 이런 말을 남기고는 켄을 데리고 안가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 '아가만히애무'가 적혀있는 파일, 지웠어야 했는데." 탄식하는 투로 리파이가 말했다. "그거보다는 여기서 편지를 받아본 게 실수였어." "보안장치가 완벽하다면서? 그 말을 믿은 게 잘못이지." "다투는 건 나중에 해도 되니까 일단 어떻게 해야 할 지 생각해 보죠." "아무래도 어스폴 손바닥 안에서 놀고 있는 기분이야." "그래. 우리는 철저하게 이용당하고 있어, 리파이. 이렇게 이용해 먹다 가 이용가치가 없어지면 잡아넣겠지, 우릴 통째로." 아톰이 오래간만에 비관적인 말을 했다. 예의 쓴웃음까지 지어가면서 말이다. 이제는 완전히 평정을 되찾은 듯 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대처할까를 생각해 보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요?" 내가 물었다. 그러자 대답한 쪽은 오토였다.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죠. 나름대로 역이용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봐야할 겁니다." 오토가 그럴싸한 대안을 제시했다. 역시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 식의 대안이긴 했지만. 잠시 대화가 이어졌지만 별다른 해결책은 나오지 않았다. 용을 찾아야 한다는 것과 우리에게 소드앤매직 온라인 지부의 열쇠가 있다는 점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잠입하는 편이 낫겠다는 거였지만 다음 행동에 대해 서는 이견이 분분했다. 하지만 어느 정도 토론이 진행되자 일단 잠을 자 두는 편이 낫겠다는 데에 이르러서 모두가 합의를 볼 수 있었다. "잠을 제대로 못 자면 좋은 생각이 나오기 어려운 법이거든." "그래. 그러니까 잠이나 푹 자고 생각해 보자고. 오토도 좀 쉬어. 어스 폴이 여길 알아버렸으니 뭐 더 이상 신경 써서 지키지 않아도 될 거야." "다른 장소도 한 번 물색해 보겠습니다." 오토는 이렇게 말하고는 들어왔던 뒷문을 통해 나갔다. 아마 오토의 숙 소는 밖에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자리에 누워서 세헤라자드의 랩탑을 충전시키며 생각해 보았다. 누가 류와 켄을 죽였을까? 무슨 이유로? 또 그렇게 해서 얻어지는 이익은 뭘까? 역시 정신병자의 소행일까? 아니면 다른 의도라도? "비류 님. 머리 속이 복잡하시죠?" 세헤라자드가 스테아를 쓰다듬으면서 이렇게 물었다. 나는 대답대신 양 손으로 머리를 벅벅 긁었다. 내 머리에서 떨어지는 비듬을 본다면 충분히 대답이 되겠지 싶었다. "그런데 왜 다들 그렇게 켄에게 좋지 않게 대하는 거죠?" 세헤라자드가 물었다. "글쎄, 나는..." "다들 잘 지냈잖아요. 류하고 켄과는 함께 게임을 하는 동료 아니었던 가요?" "그야 그렇지만..." "그러면서 어떻게 그렇게 냉정할 수가 있어요? 하나는 죽고 하나는 제 정신이 아닌데도요. 어쩌면 그럴 수가 있어요?" 세헤라자드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비난하는 조의 말보다 더 내 가슴을 찔렀다. 아톰이야 원래 그랬으니까 그렇다손 치더라도 리파이는 좀 심했 다 싶었다. 켄을 데리고 온 게 리파이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나마 다행이 다. 안 그랬다면 나는 그곳에다 켄을 버리고 왔다는 죄책감 때문에 두고 두고 괴로왔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끄러운 마음이 가시는 것 은 아니어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발끝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제 얘기는 아직 안 끝났어요." 한참이 지난 다음에 세헤라자드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그랬다. 한참 아슬아슬한 순간에 얘기가 끊어졌었지, 아마. 그런데 워낙 많은 일이 일 어나다 보니까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래. 수르카 일행이 성황청 사람들한테 쫓기는 대목이었지?" "성황청 사람이라고는 안 했어요." 세헤라자드가 말했다. "그래? 그럼 누구지?" 나는 조금 궁금증을 과장해서 말했다. "어디까지 얘기했는지 잘 기억 안 나시죠? 제가 다시 한 번 정리해 드 릴게요. 수르카 일행은 뒤에서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 는 골목으로 들어가 일단 숨어있기로 했지요. 수르카는 칼의 손잡이에 손 을 올려 놓고 복잡한 심정으로 추적자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이렇게 세헤라자드의 이야기는 다시 시작되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2355/12886 ━━━━━━━━━━━━━━━━━━━━━━━━━━━━━━━━━━━━━━━━ 제 목:[탐그루] 더 높이 더 멀리 더 빨리 131 관련자료:없음 22/22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2-28 00:10 조회:1820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 더 높이 더 멀리 더 빨리 나는 잔뜩 긴장을 하고서 칼자루를 손에 쥐었다. 점점 발자국 소리가 가깝게 들려왔다. 순간 아주 끔찍한 물건을 손에 쥐고 있다는 생각이 머 리 속을 번쩍하고 지나갔다. 그래, 어떻게든 칼을 뽑지 않고 이 상황을 해결해보자. 그러다가 죽게되면 그냥 죽는 거야. 평생 칼을 휘두르며 사 는 것 보다야 그게 백배 낫지. 나는 칼자루에서 손을 떼었다. 나도 모짤트 처럼 벽을 등지고 섰다. 그러자 이윽고 사내 하나가 나타 났다. 나는 찬이 혹시라도 양손칼을 뽑아들을까 걱정하면서 몸을 달려 재 빨리 사내의 목을 잡아 쓰러뜨렸다. 생각보다 사내는 너무 힘없이 쓰러졌 다. "뭐야, 이 친구." 나는 엎어져 있는 사내의 팔을 꺾으면서 말했다. "자... 잠깐만요. 저, 저는 그냥 스칼렛 아가씨의 분부대로 말씀을 전 하려고..." 나는 그제야 사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전에 본 얼굴이었다. "저는 비토라고 하는데요. 마법사 님, 저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저를 구해주셨잖습니까, 다리에서." 나는 어이가 없어졌다. 대단한 녀석일 줄 알았는데 겨우 스칼렛 몸종이 었단 말인가? 아니, 스칼렛은 왜 이 친구를 우리한테 보내서 미행을 시킨 거지. 그것보다 그냥 와서 얘기를 하면 될 것을 미행 씩이나 하다니. 도 저히 이해가 가질 않았다. "이봐, 그럼 그렇다고 말을 할 것이지 왜 등뒤를 몰래 따라온 거야. 기 분 나쁘게." 나는 비토의 팔을 풀어주면서 말했다. 비토는 어기적거리면서 일어났 다. "그야 너무 빨리 걸어가시니까 그렇죠. 또 스칼렛 아가씨 말씀이 만약 허락을 못 받으면 어디를 숙소로 정하고 계시는지 알아내라고 분부하셨거 든요." 내가 팔을 좀 심하게 비틀었는지 연신 팔을 풀어 내리면서 비토가 말했 다. "무슨 허락?" 모짤트가 날카롭게 눈을 번득이면서 말했다. 모짤트의 얼굴은 사실 누 가 봐도 겁먹게 생기긴 했다. 눈 밑에 가로로 나 있는 흉터하며, 도무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눈빛하며, 몇 백명 정도는 눈 하나 깜짝 않고 해치웠을 것 같은 표정까지 더하면 으으. "예, 저, 마법사 님하고 교수 님하고 함께, 그러니까, 마법사 님께는 은혜를 갚을 기회를 달라고 전해 달라고 하셨고, 교수님께는, 지내 실 곳 이 마땅치 않으시다면, 한 번 모시고 싶다고, 그러니까, 그게......"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비토는 더듬거리면서 말했다. 뭐 확실하게 알아 들을 수 있는 말은 아니었지만 대충 그 내용은 짐작할 수 있었다. "교수님을 찾는 모양인데요?" "아가씨한테 가서 말씀 드려. 교수님께서는 별로 생각 없으시다고." 그레텔을 모짤트에게 건내주면서 오브라디 교수가 말했다. "이 아이 좀 이상하군. 보채지도 않고, 아무 소리도 없으니 말이야. 혹 시 무슨 큰 충격을 받았다던가 아니면 무슨 병이 있는 거 아닌가?" "같이 다니는 사람을 꼭 닮아서 그래요." 나는 이렇게 말하고는 비토가 있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고 골목길에서 나가려고 했다. "자, 잠깐만요, 마법사 님. 그냥 가시면 안됩니다." 비토가 처량한 표정으로 내 팔을 붙잡으면서 말했다. "지금 가시면 저는 해고 되거든요. 지금 가뜩이나 시절도 어수선한데 여기서 짤리면 어디 가서 제가 밥이나 빌어먹을 수 있겠어요. 마법사 님, 교수 님. 집에 가면 저 하나 바라보면서 사는 처자식이 있는 몸이거든요. 요즘 안 그래도 자이벌들이 사정이 어렵다면서 툭하면 모가지 치는 시절 인데, 저 여기서 쫓겨났다가는 저희 식구 모두 거리로 쫓겨 나구요, 완전 히 굶어 죽거든요. 마법사 님, 교수님, 제발..." 거의 울먹이면서 비토가 애원하듯이 말했다. 나는 어쩔 줄을 몰라서 오 브라디 교수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 "음... 수르카. 자네 저녁 어디서 먹을 생각이었나?" "예?"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오브라디 교수가 이렇게 말했다. "특별한 약속이 없다면 오늘은 자이벌들이 먹는 음식 한 번 먹어보지 않겠나? 임프 시까지 와서 자이벌들이 먹는 음식 한 번 먹어보지 못하고 돌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 줄 아는가? 자넨 복 터진 거야." 오브라디 교수는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비토를 따라 들어간 자이벌의 집은 들어가기 전부터 벌써 사람을 질리 게 만들었다. 탐그루의 시청보다 훨씬 높은 담에다가 망루까지 갖추어진 모습은 집이라기 보다는 작은 요새를 연상케 했다. 두 명의 험상궂은 경비를 지나 정문을 통과하자 마차가 한 대 보였다. "타시지요." 타라니? 나는 비토를 돌아보았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부터는 마차로 들어갑니다. 본체까지는 꽤 멀거든요." 나는 설명을 듣고서도 한 참 동안 실감이 나지 않았다. 아무리 집이 크 다고 해도 마차로 타고 들어가야 할만큼 넓을 수가 있을까? 하지만 오브 라디 교수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마차에 올랐고 그 뒤를 모짤트와 그레 텔이 따랐다. "마법사님, 안 타십니까? 혹시 마법으로 날아가실 생각이신가요?" 아마 라이짐이 이렇게 물었다면 나는 턱을 한 번 갈겨 주었을지 모른 다. 하지만 비토는 정말 진심으로 나에게 묻고 있었다. 마법사가 뭐 하늘 을 날아다니는 마물이라도 되는 줄 아나보지? 하긴, 난 마법사가 아니니 까 그런지 아닌지도 알 수 없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차에 올랐다. 될 수 있으면 아주 우아한 자세로 보이도록 애쓰면서 말이다. "하하하. 자이벌의 땅을 밟더니 벌써 반은 자이벌이 된 것처럼 행동하 는 구만." 오브라디 교수가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마부 자리에 앉아 있는 비토가 혹시 듣지나 않았을까 걱정이 되었다. "교수님. 탐그루 상인에게는 탐그루 상인의 법도가 있고 임프 자이벌에 게는 임프 자이벌의 법도가 있지 않겠습니까?" 조금 과장된 음성으로 내가 말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모 짤트가 쿡, 하고 웃음을 터트린 거였다. 아니, 모짤트가 웃다니? 내가 한 말이 그렇게 우스웠나? "자이벌의 법도는 두 가지라네. 탐욕과 오만. 그런데 그렇게 행동하기 에 자네는 너무 예의바르군. 하하하." 오브라디 교수는 꼭 비웃는 듯한 말투로 내게 이렇게 말했다. 그래서 나는 마차가 달리는 내내 입술을 비죽 내밀고 있었다. 자이벌의 저택 본체는 탐그루의 시청 이상이었다. 화려한 장식에 곳곳 에 달려 있는 연금술사의 등을 제외하고도 자이벌의 저택은 성이나 요새 를 연상케 할만큼 웅장하고 거대했다. 나는 처음 본 자이벌 저택의 위용 에 그대로 기가 죽어버렸다. (도저히 집이 이렇게 생겨먹었으리라고는 상 상도 해보지 못한 탓이다) "이보게. 탐그루 상인의 법도가 어떤 건지는 모르겠네만, 임프 시에서 그렇게 위를 올려다보다 간 '나 촌사람이오'하고 떠들고 다니는 것과 같 다네." 오브라디 교수가 점잖게 충고해 주지 않았다면 아마도 나는 고개를 계 속 올리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세스타 가문의 왕초를 만나기는 생각보다 무지하게! 쉬웠다. 삼층까지 계단으로 걸어 올라가고 경비원이 지키고 서 있는 문을 두 개 정도 지나, 방문객 대기실이라고 쓰여있는 방안에서 아주 조금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 으니까 말이다. 방문객 대기실이라고 쓰여 있는 방안은 들어서는 순간 여기가 방문객 대기실이라면 안은 도대체 얼마나 화려할까 하는 생각이 들만큼 장식되어 있었다. 천정에는 탐그루에 있을 때도 한 번도 본 적이 없을 만큼 커다란 연금술사의 등이 오색의 빛을 뿜어대고 있었고, 바닥에는 바리바와 함께 갔던 술집 바닥에 있었던 것 보다 훨씬 두껍고 화려한 붉은 천이 깔려 있 었다. 벽에는 사방을 빙 둘러 초상화들이 걸려 있었다. 그림 속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날카로운 눈빛을 갖고 있었고, 희고 긴 손가락이 인상 적이었다. 의자는 오브라디 교수같이 덩치 큰 사람 셋은 너끈히 앉을 수 있을 만큼 크고 푹신한 것이었는데, 놀라운 건 그런 의자 하나에 꼭 한 명만 앉게 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여긴 누가 앉는 거죠? 거인? 아니면 마물?" "글쎄. 아마 자이벌들은 특별히 엉덩이가 큰 모양이지." 내 말에 꼭 놀리는 투로 오브라디 교수가 말했다. 나는 기분이 상했지 만 그래도 오브라디 교수가 말했듯이 오늘은 자이벌들이 먹는 특별식을 먹을 수 있겠지, 하는 마음으로 참을 수 있었다. 기다리는 동안 지루하지 않게 악사들이 옆에서 음악을 연주해 주었고 (용병단에서 들었던 나카의 연주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훌륭한 연주였다. 다만 무슨 곡인지 알 수 없었다는 것이 좀 아쉽긴 했지만) 의자 옆에 놓 여 있는 책상에는 아름답게 조각된 작은 인형들이 놓여 있었다. (아마 어 린아이들을 위한 장난감이겠지만 나는 한 개를 챙겨 주머니에 넣었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그레텔이 점점 불안해하고 있었다. 모짤트가 몇 번 주의를 주었는데도 그레텔은 안절부절 못하고 결국에는 책상 위에 있는 인형들을 쥐어뜯기 시작했다. 모짤트는 에라 모르겠다라는 심정인지 그런 그레텔을 그냥 나두었다. 모짤트의 무릎 위에서 그레텔이 인형들을 거의 다 쥐어뜯어 놓을 즈음이었다. "자이벌 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비토가 정중하게 인사했다. 하지만 기다리고 있었던 건 우린데? 나는 좀 어이가 없었다. 저게 도대체 어느 나라 말투야? 비토를 따라 방문객 대기실 옆에 나 있는 문으로 들어서자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큰방이 나왔다. 온통 붉은색 천으로 치장된 방은 긴 책상이 놓 여 있어, 멀리 앉아 있는 세스타 가문의 자이벌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 었다.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저는 세스타 가문의 오하루라고 합니다." 스칼렛이 둘째 딸이라고 했으니 대충 오십 정도 된 사람이려니 했던 나 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오하루는 얼굴에 검버섯이 수도 없이 핀 노 인이었다. 족히 일흔은 넘었으리라. 오하루는 화려한 붉은 색에 금줄까지 수놓아져 있는 옷을 입고 있었다. "자, 이리 가까이 와 앉으시지요." 오하루는 피곤한 기색이었다. 우리에게 앉을 것을 청하자 마자 자리에 주저앉듯이 앉아버렸다. 우리는 긴 책상을 한참을 거슬러 올라가 겨우 오 하루의 옆자리에 앉았다. 정말이지 지나치게 긴 방이었다. 아마 이렇게 방을 길게 만든 이유는 순전히 과시욕이리라. 나는 오브라디 교수가 했던 말을 상기했다. 자이벌의 법도는 탐욕과 오만이라고 했겠다. 그 말이 꼭 들어맞는 것 같군. "먼저 저희 귀하지 못한 딸년을 구해주신 마법사님, 진심으로 감사드립 니다." 우리가 앉자 오하루는 말문을 열었다. 늙은 목소리는 낮은데다가 떨리 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들은 자이벌에 대한 이야기와는 조금 다르게, 오 하루는 그렇게 나쁜 사람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정중한 태도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것 같았고, 떨리는 목소리는 동정심마저 자아내게 하고 있었 다. "제가 뭔가 보답을 해 드리고 싶습니다만, 이렇게 초라하고 가진 것 없 는 제가 뭘 해드릴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처음에는 딸년을 드릴까도 생 각해 보았습니다만, 아무래도 그건 무리인 것 같고, 마법사 님의 취향을 모르니 미처 선물을 준비하지도 못했습니다. 하지만 옷이라면 별 무리가 없으리라 생각하고 몇 벌을 준비했습니다." 오하루는 이렇게 말하고는 박수를 두 번 쳤다. 그러자 뒤에 쳐져 있던 붉은 천이 열리며 스칼렛이 상자를 들고서 들어왔다. 스칼렛은 흰 드레스 를 입고 있었는데, 이렇게 입으니 가죽옷을 입고 천방지축으로 다리 위를 뛰어다니던 스칼렛은 어디로 갔는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어깨선이 다 드러나는 드레스는 스칼렛의 여성미를 강조하고 있었다. 휴우. 저 정도 옷이라면 값으로 따지면 아마 뮤 열 마리는 입고 다니는 셈이겠지. "먼 자폰에서 구해 온 옷입니다. 모험가들에게서 구입한 것입니다만, 마음에 들지 않으시더라도 일단 받아주십시오." "비단으로 만든 옷입니다. 받아주세요." 스칼렛이 말했다. 나는 예, 하면서 받아들였다. 그런데 비단이 뭐지? "제가 의상에 조예가 깊지는 못합니다만 비단이라면 남쪽 범버쿠 정글 에서 난다는 벌레에서 뽑은 귀한 명주실로 짠 천을 말씀하시는 것 아닙니 까?" 오브라디 교수가 말하자 오하루는 무릎을 탁 쳤다. "역시 명성 그대로 모르시는 것이 없군요. 맞습니다. 명주실로 짠 천이 지요." 벌레에서 뽑은 실이라고? 나는 상자를 한 번 쳐다보았다. 벌레라는 말 을 들으니까 도저히 상자를 열어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상자를 열면 징 그러운 벌레들이 꿈틀거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소중히 간직하겠습니다." 예의 상 내가 이렇게 말하자 오하루가 말했다. "아닙니다. 편하신 대로 바꿔 쓰십시오. 이만한 물건이라면 어디가도 집 한 채 값은 나올 겁니다." 집 한 채라고? 나는 깜짝 놀랐다. 내가 촌뜨기는 촌뜨긴가 보다. 세상 에 옷 한 벌이 집 한채 값이라니. "옆에 계신 검사님은...?" "경호원입니다." 모짤트가 짧게 대답했다. 그러자 오하루는 모짤트 쪽으로는 눈길도 주 지 않고 오브라디 교수 쪽으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마법사 님께는 천천히 여쭙기로 하고, 먼저 이곳까지 모신 이유를 설 명해 드려야겠습니다." 오하루는 이렇게 말하고는 기침을 몇 번했다. 상대가 아니다 싶으니까 완전히 무시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조금씩 불쾌해지기 시작했다. "오브라디 교수님께서는 지도 작성을 위해 여행 중이신 걸로 알고 있습 니다만." "예. 부끄럽지만 정확한 바르도 대륙의 지도 작성을 위해 여기 저기 다 니고 있습니다. 아직 그다지 성과를 얻은 건 아닙니다." "정부 보조금을 얻고 계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예." "정부 보조금이라는 것이 그렇지요. 사실 꼭 주어야 한다고 각 시의 자 치대에 주 정부가 지시는 하지만 자치대 입장에서는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기 마련이지요. 그래서 정부 보조금으로 다니시는 몸이라 좀 힘겨우시 리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렇지 않습니까?" "하하하. 좀 지나친 말씀이신 것 같군요." 오브라디 교수는 말은 지나치다고 했지만 얼굴에는 흡족한 빛을 드러내 고 있었다. 오브라디 교수도 돈 앞에는 어쩔 수 없는 걸까?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2356/12886 ━━━━━━━━━━━━━━━━━━━━━━━━━━━━━━━━━━━━━━━━ 제 목:[탐그루] 더 높이 더 멀리 더 빨리 132 관련자료:없음 22/22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2-28 00:11 조회:1560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제가 배우질 못해서 배우는 일에는 좀 뜻이 있습니다. 이곳 임프 시는 보셔서 알겠지만 학문의 수준이 아주 형편없습니다. 오브라디 교수님 같 이 학식이 높으신 분의 가르침이 꼭 필요한 곳이지요. 이곳에서 강연을 한 번 해 주심이 어떠십니까? 강연을 해 주신다면 저희 가문의 영광이고, 또 나아가 임프 시의 영광이 될 것입니다. 제 짧은 소견으로는 이곳에 오 브라디 교수님의 강연을 바탕으로 작은 학당을 하나 설립하면 어떨까 합 니다만." "아. 학당이요. 좋습니다. 그거 아주 훌륭하신 생각입니다." 오브라디 교수는 침까지 튀어가면서 오하루에게 말했다. 결국 목적이 거기 있었구만. 유명한 교수를 초빙해서 강연 한 번해서 자기 가문을 높 이려는 속셈이겠지. 나는 오브라디 교수의 태도가 역겹다는 생각이 들었 다. "마법사 님께서도 꼭 참석해 주셨으면 합니다. 아마 자리가 두 배는 빛 나게 될 것입니다." 오하루가 말했다. 말은 그럴싸하게 들렸지만 결국 나를 마법사로 추켜 세워서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는 말이라고 생각되었다. 물론 태도는 여전 히 공손했지만 말이다. "하하하. 이거 정말 영광입니다. 유서 깊은 대 세스타 자이벌 님을 위 해 강연회를 가지게 되다니요. 그렇다면 주제는 뭐에 대해서 하면 좋겠습 니까? " "그거야 전적으로 교수님께서 택하실 문제이지 저 같은 일개 장사꾼이 말씀드릴 문제는 아니겠습니다만, 여쭈어 주시니 굳이 한 말씀 드리지요. 요즘 시국이 불안정하지 않습니까. 국경에서는 바바 족이 다시 우리 바르 도 대륙을 넘본다는 소리도 있고, 이곳 임프 시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지난 해 우리 임프시의 경기가 침체되어 로스 안 시에서 엄청난 금화를 빌려오지 않았습니까. 덕분에 저희 자이벌들도 이렇게 힘든 때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시민들의 생활이야 말할 나 위가 없고 말씀입니다. 이러한 시국이니 교수님께서 이곳 임프 시의 시민 들에게 희망찬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가르침을 주시는 게 어떨까 생각합 니다." "아. 역시 자이벌 님은 다르시군요. 그저 학문의 전달이 아닌, 실생활 에 유용한 강연을 부탁하시는 말씀으로 알아들었습니다. 제가 최선을 다 해 강연을 이끌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브라디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자. 그럼 이제 여쭙지요. 마법사 님께 제가 어떤 보답을 드리면 좋겠 습니까." 오브라디 교수의 대답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오하루가 나에게 말했 다. 말이 끝나자 바로 나에게 질문을 돌리는 솜씨가 역시 장사꾼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오브라디 교수님의 강연을 듣고 결정하겠습니다. 그렇게 도움이 되는 강연이라면 듣고 나서 남는 것도 있겠지요." 나도 탐그루 출신이다. 장사꾼이 밑천을 함부로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런데 내 말에 세스 타는 무릎을 탁 치며 좋다고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나친 행동이었 다. 그렇게도 내 비위를 맞춰주고 싶은 걸까?) "역시 현명하시고도 겸손하신 말씀입니다." 나는 지나친 칭찬에 어색해서 머리를 긁적였다. 오하루의 배려 덕분에 우리는 귀빈만 묵어갈 수 있다는 별채에 묶게 되 었다. 스칼렛의 안내를 받아 별채로 가는 길 내내 나는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오브라디 교수의 행동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수르카. 왜 그렇게 표정이 어둡지? 혹시 내가 돈 때문에 강연을 한다 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해가 진 뒤였기 때문에 스칼렛은 연금술사의 등을 들고 있었다. 흰 여 행자용 연금술사의 등이 스칼렛의 걸음에 맞추어 흔들리고 있었다. "그럼 아닌가요?" "아니기도 하고 맞기도 하지. 누가 뭐래도 돈없이는 살 수 없으니까. 돈도 칼과 마찬가지야. 돈 자체야 무슨 문제가 있겠어. 다 쓰기 나름이 지." "그건 장사꾼들이나 하는 말이라구요." "하하하. 그런 말은 내 강연이 끝나면 하는 게 어때? 그리고 오하루는 나에게 돈을 주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어. 정부 보조금으로 연구를 하는 게 힘들지 않느냐고 물었을 뿐이지." 오브라디 교수의 말은 나도 다 생각이 있다는 말쯤으로 들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일단 구겨진 내 인상이 펴지지는 않았다. 별채 앞에 다다르자 스칼렛은 별채 정문에 서 있는 경비원에게 우리를 인도했다. 별채는 이 층짜리 건물이었다. 이런 곳이 손님을 위해서 따로 지어져 있다니. 도대체 자이벌은 돈이 얼마나 많은 걸까? 이런데 쏟아 부 을 돈이 있으면 노동자들에게 한 푼이라도 더 줄 일이지. 하긴. 마땅히 줘야 할 돈들 주지 않고 모은 돈이니 이렇게 낭비할 수도 있는 거겠지. 나는 속으로 침이라도 한 번 뱉고 싶었지만 스칼렛이 보고 있었기 때문에 꾹 참았다. "그럼 편히 쉬시지요." "예. 며칠간은 강연 준비를 좀 해야겠네요. 들어가서 쉬시지요." 오브라디 교수가 스칼렛에게 인사했다. 나도 오브라디 교수를 뒤따라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 때였다. "그럼 편히 쉬세요, 마법사 수르카 님." 이런. 오브라디 교수가 내 이름을 말하는 걸 들은 모양이었다. 나는 오 브라디 교수를 흘겨 보았다. 하지만 오브라디 교수는 돈 때문이 아니니까 걱정 말라던 표정 그대로였다. 별채라고 하더니 실내는 오하루를 만났던 건물 못지 않게 화려하고 아 름다웠다. 오색의 빛을 내뿜는 연금술사의 등은 세스타 가문의 상징이 아 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사실 바닥에 깔려 있는 붉은 천이 세스타 가문의 상징이겠지만 내 눈에는 오색의 연금술사의 등이 훨씬 더 아름답 게 여겨졌다.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비토가 어느 새 우리를 따라 들어와서 이렇게 말했다. "참. 그러고 보니 이곳에서 식사를 하기로 했었지. 수르카. 자이벌들이 어떻게 먹고 사나 보면 눈이 휘둥그레해 질 걸." 웃음을 지으면서 오브라디 교수가 말했다. 하지만 나는 별로 오브라디 교수의 웃음을 달갑게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돈 때문에 오하루라는 그 자이벌 앞에서 벌벌 떠는 모습 하고는. "오하루 님께서는 다른 손님이 있으셔서 함께 식사를 하실 수 없으시다 고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죄송하다고도 전해달라고 하셨습니 다." 별채에 있는 식당으로 우리를 안내하면서 비토가 말했다. 식당은 깜짝 놀랄만큼 컸다. 단 넷이 (그것도 한 명은 어린애인데) 식사를 하기에는 너무 큰 식당이었다. 용병단에 있는 식당도 이렇게 크지는 않았는데. 무 엇보다 시선을 끈 것은 식당 한 가운데에 놓여있는 무지막지하게 긴 식탁 이었다. 저쪽 끝에 한 사람 앉고 이쪽 끝에 한 사람 앉는 식으로 식사를 했다가는 대화는커녕 얼굴을 알아보기도 힘들겠다 싶었다. 다행히도 요리 가 한쪽에만 차려져 있는 걸 보니 모여서 먹으라는 말 같았다. 요리는 순전히 야채와 채소만 있었다. 가지 수가 많기는 했지만 적어도 고기는 나오리라고 생각했는데 예상 밖이었다. 역시. 떼돈 번 사람이라 다르긴 다르군. 생명의 은인이니 어쩌구저쩌구 하더니 구두쇠 짓하고는. "전채야. 인상 펴라구 수르카. 아직 본 요리는 안 나왔으니까." 자리에 앉으면서 오브라디 교수가 말했다. 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지만 아직 요리가 덜 나왔다는 말은 틀림없는 것 같았다. "식사 전에 입맛을 돋구기 위해서 먹는 음식이라는 말이지. 푸른 채소 가 많은 걸 보니까 오늘 요리는 바다 요리겠군. 맞나?" "맞습니다." 고개를 꾸벅 숙이면서 비토가 말했다. 채소를 몇 번 집어먹지도 않았는 데 바퀴가 달린 테이블이 몇 개가 이어서 들어왔다. "저게 진짜 요린가요?" 나는 믿어지지가 않아서 오브라디 교수에게 이렇게 물었다. 일곱 명이 요리를 들고 왔고, 그들이 식탁 위에 요리를 올려놓기 시작하자 나는 저 절로 눈이 휘둥그래졌다. 물고기는 분명한데 몽땅 다 처음 보는 물고기들 뿐이었고, 마물이 아닌가 생각될 만큼 흉측하게 생긴, 손에 집게가 달려 있는 것도 있었다. 또 뚱뚱한 물고기도 보였고 넓적한 물고기도 있었다. 나는 뭘 먹어야 할까 한 참을 망설이다가 눈에 익은 물고기만 몇 점 집어 먹었다. 이 많은 음식을 우리보고 다 먹으라는 말인가? "남는 음식은 어쩌죠, 비토?" 나는 좀 걱정이 되어서 이렇게 물었다. "남기실까봐 걱정이 되시는 모양이군요. 걱정 마십시오. 다 드시고 난 후에는 여기 별채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서열 순서대로 먹습니다. 여기에 서 청소를 하는 하녀들까지 식사를 마치고 나면 나중엔 남는 게 없습니 다." 남긴 음식을 먹는다는 말인가? 나는 좀 의아했지만 내색은 하지 않으려 고 했다. 혹시라도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면 기분 나 빠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수르카. 여기 임프 시에는 굶는 사람도 있고, 또 이렇게 다 먹지도 않 을 음식을 과시용으로 차리는 사람도 있는 곳이라네." 오브라디 교수가 집게가 달린 이상한 요리를 집어들면서 이렇게 말했 다. "비토. 자리를 좀 비켜 주겠나? 마법사 님과 좀 할 얘기가 있어서 말이 야." 오브라디 교수가 말하자 비토는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피했다. "모짤트. 자네도 듣게. 중요한 얘기니까." 담담하게 먹는데 열중하고 있던 모짤트가 오브라디 교수를 바라보았다. 만약에 내가 모짤트의 저런 눈길을 받는다면 겁부터 더럭 났겠지만 오브 라디 교수는 아무렇지도 않은듯 얘기를 이었다. "수르카. 자네는 내가 돈 때문에 강연회를 수락했다고 생각하겠지?" "군사용 지도를 제작하는 데 돈이 들테니까요."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지도 제작인 것만은 틀림이 없네. 역사학자로서 이 바르도 대륙의 곳곳을 찾아가기에 딱 좋은 구실이기도 하고, 또 완전 한 바르도 대륙의 지도를 제작하는 것이 나의 꿈이기도 하니까 말이야. 아마 세상에는 내가 완전한 지도를 만드는 걸 평생의 업으로 삼고 있다고 알려져 있을 걸세." 오브라디 교수의 말에 나는 예전에 용병단에서 마로우에게 들었던 이야 기가 떠올랐다. 마로우는 자네에 완전한 바르도 대륙의 지도를 제작하고 있는 사람으로 오브라디 교수를 설명한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오브라디 라는 사람은 교수에, 역사학자에, 병법 책 저술가에, 지도 제작자까지 겸 하고 있다는 말일까. "그 외에도 여러 일을 하고 있다는 걸 자네도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 네. 하지만 내 목적은 오직 하나일세. 마칸의 강림을 막는 일이지." 오브라디 교수의 말에 식당안에 이상한 공기가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 공기는 내 등줄기를 훑어 내려가면서 소름을 돋게 만들었 다. "교수님도 마칸의 강림을 알고 계신가요?" "좀비니 오우거니 하는 것에 대해서도 조금은 알고 있지. 중요한 유적 지는 바다에 있기도 하고 바바 족의 영역에 있기도 해서 아직 다 둘러보 지 못했네만 지금까지 바르도 대륙을 떠돌면서 내가 모은 자료에 의하면, 지금 마물이 출현하는 것은 마칸의 강림에 대한 분명한 징후라는 결론이 서네." 오브라디 교수는 식사를 멈추고 이렇게 말했다. 덕분에 그레텔을 제외 한 나와 모짤트는 오브라디 교수를 바라보고만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수르카. 자네 사비오가 쓴 책을 본 일이 있나?" "없습니다." "사비오가 쓴 책 중에 전설을 모은 책이 하나 있지. 그 책 제목이 바로 '예언의 눈동자'일세. 이곳 임프 시에서는 꽤 알려진 저작이지." "저는 시집이라고 알고 있었습니다만......" 나는 바리바를 생각하면서 말했다. 예언의 눈동자라는 이름에 속아서 그렇게 심부름꾼 수준으로 전락해 버리고 만 그때 일이 떠올랐다. "그래. 시집은 시집이지. 하지만 그건 사비오 나름대로 세상에 경고하 기 위한 시집이었다네. 예를 들어서 이런 시를 아는가? '과연 언제부터 흘러왔는지, 또 언제까지 흘러갈지 아무도 알지 못하지만 저 푸른 물결은 지켜보고 있었으리라.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의 얼굴을. 또 그들이 품었 던 꿈과 희망을. 그 모든 걸 품고 대청하는 바람이 불어오는 곳에서 바람 이 끝나는 곳까지 쉬지 않고 흘러가리라...'." 나는 사비치 다리에 도착하기 전에 보았던 표지판을 떠올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오브라디 교수가 말하자, 그 시는 마법의 말로 느껴졌다. 글로 읽었을 때 보다 훨씬 더 명확해진 느낌이었다. "'...바람은 붉은 용과 함께 오리라. 북쪽에서는 눈보라로, 남쪽에서는 봄바람으로 오리라.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의 꿈과 희망을 대청하가 계속 바라볼 수 있도록'." "눈보라하고 봄바람 얘기는 들어본 적이 있어요." 다음 부분은 나무판이 떨어져 나가 있어서 읽을 수가 없었는데, 사비오 영감이 쓴 책에는 전문이 다 실려있는 모양이었다. "배 위에서 말이지." 모짤트가 말했다. 그렇지. 눈보라니 봄바람이니 하는 말은 배 위에서 들은게 맞다. 그래서 나는 모짤트에게 그렇다고 말하긴 했는데, 내가 라 이짐이 등장하는 괴상한 무용담을 듣고 있었을 때, 모짤트는 분명히 선실 안에 있었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좀 이상하다고 여겨졌다. "어떻게 알았어?" "나도 들었어. 그때." 모짤트가 말했다. 말만 없는 줄 알았더니 소리도 없군. 칫. 내 등뒤에 서 듣고 있었던 모양인데 그걸 눈치채지 못했다니. 이거 좀 당한 느낌인 데. "이 시는 봄바람과 눈보라의 전설을 인용한 것이지. 이 시가 암시하고 있는 바를 알겠나?" 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솔직히 모르겠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시니, 암시니 하는 말은 나에게 너무 어려운 말이었다. "이 말은 눈보라와 봄바람이 세상을 구원한다는 전설과 붉은 용의 전설 을 교묘하게 시의 형태로 모은 것이지." "아마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 누군가가 간판을 부쉈는지도 모르겠군 요." 아무 말도 없던 모짤트가 불쑥 대화에 끼어 들면서 말했다. "그래. 잘 봤네. 자네는 역시 말이 없는 만큼 생각이 깊은 모양이로군. 하지만 그런 식으로 자꾸 말하는 게 도움이 될 걸세. 속에서 분노가 자라 면 살인자가 될 수가 있고 의문이 쌓이면 바보가 될 수 있어. 하하하." 오브라디 교수는 호탕하게 웃었다. "이제 나는 여기 임프시에 있는 유적을 탐사할 생각일세. 붉은 용의 전 설을 아는가?"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2357/12886 ━━━━━━━━━━━━━━━━━━━━━━━━━━━━━━━━━━━━━━━━ 제 목:[탐그루] 더 높이 더 멀리 더 빨리 133 관련자료:없음 25/25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2-28 00:11 조회:1710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그 붉은 용이 새겨져 있는 칼은 본적이 있어요. 언젠가 그 붉은 용의 문양이 삼년전쟁 전에 스파일에서 썼던 문양이라는 말도 들은 적이 있고 요. 카를로스 장군을 뜻하는 말이라는 것도 들었어요." 내 기억력은 역시 훌륭해. 마로우에게 용병단에서 꼭 한번 들었던 것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으니 말이지. "그래. 상당부분 알고 있구만. 사실 내가 알고 있는 것도 그 정도일세. 아직은 분명하지도 않지만 말이야. 스파일이 군사력을 키우면서 붉은 용 의 문양을 채택했던 것은 순전히 붉은 용이 가지고 있는 상징 때문이었다 고 생각되네. 이건 역사학자로서의 견해야. 나하고는 정 반대의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지만." "어떤 상징이라고 생각하시는데요?" "붉은 용은 칼의 속성을 상징한다네. 바로 힘이지. 파괴를 하기도 하지 만 사람을 다스리기도 하는 힘 말일세. 그래서 붉은 용이 스파일의 상징 물이 된 거지. 하지만 말일세, 다른 견해도 있어. 전설 속의 최종 전쟁의 원인이 바로 붉은 용이었다는 견해가 바로 그걸세. 내가 채집한 전설과는 조금 거리가 있지만, 하여간 그 견해에도 일리가 있다고는 생각이 되네. 일단 붉은 용의 정체를 파악하지 않고는 마칸의 강림을 막을 수 없어." "왜 그렇죠?" 모짤트가 물었다. 모짤트는 마칸의 강림에 대해서 나보다 더 관심이 있 는 모양이었다. "붉은 용이 최종전쟁을 일으켰다는 전설과 카를로스를 상징하는 붉은 용의 전설. 이 두가지의 공통점은 마칸의 강림과 붉은 용이 밀접한 관계 가 있다는 걸 나타내기 때문이지. 그래서 나는 지도 제작도 겸하면서 붉 은 용을 추적하고 있다네. 여기 임프시에 온 것도 여기 있는 유적지에 붉 은 용의 단서가 있다는 말을 들어서야." 오브라디 교수의 말을 듣자 나는 오브라디 교수가 적어도 돈에 팔리는 사람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같이 가겠어요." 나는 오브라디 교수가 같이 가자는 말도 하지 않았지만 더 생각해보지 도 않고 이렇게 말했다. 운명 때문이든 뭐든 마소드의 검에 새겨져 있던 붉은 용의 문양과 거기에 얽혀 있을 비밀을 추적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 기 때문이었다. "그럴 줄 알았네."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오브라디 교수가 말했다. "사비오. 그 친구 생각해볼수록 제자를 잘 고른 것 같단 말이야. 난 점 점 더 자네가 맘에 들어... 이상하게 생각하진 말게. 하하하." 좀 과장된 웃음이긴 했지만 나도 따라 미소를 지었다. 오브라디 교수는 아케르 이후에 나를 인정해 주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첫 번째 사람이었 다. 그래. 이제 뭔가 할 일이 생겼다는 생각이 들어. "그럼 내일 가보는 걸로 하지. 어차피 강연회 준비하야 대충 하면 되니 까. 그럼 일단 식사나 마치자구." "붉은 용, 붉은 용. 무서워..." 오브라디 교수가 말하자 그레텔이 덧붙였다. 나는 그레텔의 말을 듣는 순간 혹시라도 붉은 용이 어디서 튀어나오지나 않을까 긴장했다. (그레텔 이 뭐라고 입만 열면 무시무시한 사고가 일어나니 그럴 만도 하지 않은 가) 하지만 무표정하게 그레텔을 쓰다듬고 있는 모짤트의 모습을 보니 그 런 건 아닌 모양이었다. "그거 줘봐." 모짤트가 나에게 말하자 나는 손에 들고 있던 나이프를 모짤트에게 건 내주었다. "그거 말고, 아까 대기실에서 챙긴 거." 대기실에서 챙긴 마차모양의 장식품을 말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것을 주머니에서 찾아 모짤트에게 주었다. 귀신 같기는 그걸 또 언제 봐 같고. "또 떠나는 거야?" "그래, 그레텔. 또 떠나." 모짤트가 말했다. 나는 언뜻 모짤트의 표정에 어두운 그림자가 스치는 것이 보이지 않았나 싶었다. 왜였을까. 나는 모짤트의 눈 밑에 난 흉터가 꼭 몸부림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왜 그랬나를 생각하고 있자니 머 릿속이 복잡해졌지만, 그레텔이 마차를 식탁 위에 굴리면서 모처럼 즐거 워하는 모습을 보니 좀 나아지는 기분이었다. "자, 그럼 이제 대충 먹었으니 식사는 끝인가. 이만 각자의 방으로 돌 아가자자구." 오브라디 교수가 먼저 일어났다. 오브라디 교수가 식당 밖으로 나가다 말고 깜박 잊은 것이 있다는 듯이 말했다. "그리고 깜박 잊었는데. 잘 때는 꼭 창문을 닫고 자라구. 뭐 세스타 가 문도 예전 같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지." 오브라디 교수는 알쏭달쏭한 말을 내던지고는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뭐 감기 조심하라는 말이겠지. 숙소로 돌아온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자 리에 누웠다. 아마 내일이면 오브라디 교수와 유적 탐사를 떠나게 된다는 기대감 때문에 그런 모양이었다. 나는 아자닌을 불러내었다. "아자닌. 모짤트는 왜 그런 걸까?" 나는 몸부림 치듯 꿈틀거렸던 모짤트의 흉터를 떠올리면서 혼잣말처럼 말했다. "누구나 과거는 있기 마련이지요. 흉터는 대게 그런 과거를 뜻합니다." 언제나 하는 당연한 소리이긴 하지만 오늘 말은 조금 일리가 있다 싶었 다. "나도 흉터가 있지만 과거하고는 상관이 없는데." 언제 생긴 흉터인지는 모르지만 나도 흉터가 하나 있다. 무릎에 말이 다. (아마 어렸을 적에 넘어져서 생긴 흉터이리라) "그래도 얼굴에 있는 흉터라면 뭔가 사연이 있지 않겠어요? 그것도 모 짤트 님 정도 되는 검사라면 말이지요." 하긴. 그 흉터는 분명히 넘어져서 생긴 흉터는 아니었다. 어쩌면 벽에 머리를 부딪칠 때 생긴 흉터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칼에 맞은 흉터라면 분명 사연이 있기는 있을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아케르도, 라이짐도 이마에 흉터가 있었네." 나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 "저 푸른 물결은 지켜보고 있었으리라.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의 얼굴 을. 또 그들이 품었던 꿈과 희망을." "예. 그 말은 마법의 말입니다." 아자닌이 설명했지만 아자닌이 설명하기 전에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 었다. "그렇군. 아자닌. 이 말은 사람의 과거와 관계된 마법이야." "예, 수르카 님." 아자닌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꼭 경의를 표하는 귀족처럼 말이다. 나는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그렇지만 사람의 과거를 마법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걸까?" "마음입니다, 수르카님." 아자닌이 말했다. "그래. 마음이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마음을 이해하면 되는 것이다. 그것으 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도 있고, 사람이 알고 있는 것을 불러 낼 수 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당장은 마음 보다 몸이 피곤했다. "나 이만 잘게. 아자닌. 잘 자." "창문을 닫고 자야지요. 수르카 님." "아, 그래. 창문." 나는 일어나서 창가로 걸어갔다. 창 밖으로 보이는 정원의 모습이 휘황 찬란 했다. 온통 사방에 연금술사의 등이 켜 있었다. 멋지다! 라는 소리 가 저절로 나왔다. 좀 더 오랫동안 바깥 풍경을 보고 싶었지만 눈이 저절 로 감겼다. 나는 창문을 닫고 다시 자리에 누웠다. 다음 날 아침식사가 끝나자마자, 오브라디 교수는 우리를 담당하고 있 는 비토에게 강연회 준비가 어느 정도 진척되었는지 물었다. "지금 강연회장은 거의 다 준비가 되었습니다. 오실 분들에게 초청장도 발송했으니 아마 내일 저녁때쯤이면 다들 도착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좀 촉박하긴 하겠군. 그럼 나는 강연회 준비를 위해서 여기 마법사 님, 검사님과 함께 좀 다녀오겠네." "아, 그러시다면 이걸 받아 가시지요." 비토가 끈이 달린 작은 주머니 하나를 내밀었다. "강연회 준비에 쓰시라고 오하루 님께서 성의를 보이신 겁니다." 주머니 안에는 번쩍이는 금화가 세 개나 들어있었다. "아, 이렇게는 필요 없어." 역시 오브라디 교수야. 나는 씨익 웃으면서 생각했다. 돈에 팔리지 않 는다더니 정말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는 자네가 가지게. 두 개면 딱 맞을 걸세." 오브라디 교수는 이렇게 말하고는 금화 두 개가 들어있는 끈 달린 주머 니를 챙겼다. 나는 혹시 얼굴에 실망하는 빛이라도 돌까봐 일부러 먼 산 을 바라보았다. 비토가 본다면 좀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 다. "자, 가지. 마법사와 검사." 당장이라도 낄낄거리면서 웃을 것 같은 표정으로 오브라디 교수가 말했 다. 별로 우습지 않다고 한 마디 해 주고 싶었지만 나는 그만 두었다. "마차가 준비되었습니다." 뮤 두 마리가 끄는 마차가 천천히 우리쪽으로 다가왔다. 뮤 두 마리는 뭐가 그렇게 이상한지 호기심 가득한 큰 두 눈을 껌뻑이면서 우리 일행을 바라보았다. "일단 테이르 여관부터 들렀다가 가지요. 거기서부터는 전 스타바로 갈 래요." 나는 마차를 끌고 있는 뮤의 턱 밑을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스타바? 그게 뭔가, 수르카?" "고향 친구에요." 나는 이렇게 말하고 마차에 올랐다. 오브라디 교수는 알듯 말듯하다는 표정으로 내 뒤를 따랐고 모짤트도 그렇게 했다. 마차가 막 출발했을 때 였다. 높은 여자의 음성이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비토! 혹시라도 자리를 뜨시면 알려 달라고 했잖아?" 굳이 당황해 하는 비토의 표정을 살피지 않더라도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알 수 있었다. 스칼렛이었다. "마법사 님. 같이 가요." 마차 옆에 뮤를 대고 스칼렛이 말했다. 급하게 뮤를 몰아 왔는지 볼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거친 숨을 몰아 내쉬는 뮤를 보니 틀림없이 그랬 으리라 싶었다) 나는 좀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오브라디 교수를 바라보았 다. "좋아요. 좋아. 이렇게 아름다운 아가씨와 함께라면 언제나 좋지요." 오브라디 교수는 활짝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결국 따라가게 하겠다 는 말이었다. 테이르 여관에 들러 배낭에 몇 가지 물품을 챙긴 우리 일행은 각각 뮤 에 올랐다. 오브라디 교수는 덩치에 걸맞는 큰 뮤를 여관에서 빌렸다. "뮤를 잘 타시네요, 오브라디 교수님." 스칼렛이 뮤에 오르는 오브라디 교수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하하하. 나도 젊었을 적에는 뮤를 타고 여행 깨나 다녔답니다. 연애도 많이 했고, 술도 많이 마셨지요. 한 번은 저 먼 시스코 시에서 뮤 경주대 회에 나가서 우승을 한 적도 있고요. 우승 기념 매달은 누구에게 선물로 주었지만 말입니다. 하하하." 오브라디 교수는 칭찬을 받으니 기분이 좋은지 웃음으로 말을 시작해 웃음으로 말을 끝냈다. "뮤- (저 친구 기분이 안 좋은 것 같은데?)" "스타바, 무슨 소리야?" "뮤우- 뮤- (무거워 죽겠데)" 나는 오브라디 교수를 태운 뮤를 바라보았다. 좀처럼 표정을 읽기 힘든 뮤라고는 하지만 정말 힘겨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뚱땡이. 나는 속으로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어다. 오브라디 교수를 따라서 시 외곽을 한 참을 달린 우리는 울창한 숲을 하나 만날 수 있었다. "여기에 유적이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만, 혹시 들어보신 적 있으신지 요?" 오브라디 교수가 스칼렛에게 정중하게 물었다. "예. 여기에 동굴이 하나 있지요. 전에 성황청에서 한 번 탐사했던 것 으로 알고 있어요." 스칼렛이 뮤 고삐를 끌어당기면서 말했다. 유적이라. 나는 전에 소리장 마을에 있는 유적에서 오우거에게 당한 기억이 있었기 때문에 유적이라고 하니 일단 불길한 생각부터 들었다. 그레텔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야 겠군. 혹시라도 무슨 문제가 생긴다면... 다시 칼자루에 저절로 손이 갔 다. 여전히 칼은 나를 지켜주는 제일 첫 번째의 것이었다. 칼이 없었다면 나는 어떻게 됐을까. 망할 나미트 장군. 나는 칼자루를 잡고 있자니 거부 감이 들고, 손을 떼고 있자니 불안했기 때문에 어쩔줄 몰라했다. 이럴 때 는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나는 한참을 생각한 후에 모짤트의 뒤편으로 몸을 숨기기로 했다. "마법사 님, 뭐하시는 거죠?" 스칼렛이 이렇게 직접적으로 금방 물어보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 던 나는 당황하면서 스타바를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도록 했다. "아, 뒤를 봐 주는 겁니다. 그렇지, 모짤트?" 모짤트는 대답 없이 내 얼굴을 한 번 바라보고는 앞을 향해 뮤를 몰았 다. 나는 좀 멋적은 기분이 되어서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오브라디 교수를 등에 싣고 있는 뮤는 정말 힘이 드는지 자꾸만 뒤로 쳐졌다. "어허. 이 놈 힘 좋게 생겼더니만 생각보다 약골인걸. 내 뮤 보는 눈이 틀릴 리가 없는데..." 오브라디 교수가 중얼거렸다. 나는 그런 말 하기 전에 살이나 좀 빼는 게 어떻겠느냐고 말하려다가 그만 두었다. "그런데, 오브라디 교수님. 왜 스칼렛에게 그렇게 정중하게 말하는 거 죠?" 나는 좀 불만스럽다는 듯한 기색을 드러내면서 오브라디 교수에게 물었 다. 사실 그랬다. 그렇게까지 정중하게 대할 이유는 없을 것 같은데 말이 다. "왜. 내가 자이벌한테 아부라도 하는 것 같이 보이던가?" "솔직히... 그런 느낌도 있어요." "그렇군. 그런데 말일세, 수르카. 그건 자네가 날 잘 몰라서 하는 말일 세." 오브라디 교수가 간만에 웃지 않고 진지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건 말이지, 스칼렛이 여자이기 때문이라네." 오브라디 교수는 이렇게 말하고는 껄껄 웃었다. 울창한 숲에 굵은 오브 라디 교수의 웃음 소리가 울려 퍼지자 여기 저기서 놀란 새들이 날아오 르는 소리가 들렸다. "사실 젊었을 적에 키워 놓은 버릇이지. 모든 여자는 다 존중받을 만한 가치가 있거든. 외모나 가진 것만 따져서 여자들을 함부로 대하는 놈들이 있는데, 그치들은 여자라는 존재가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지 아직 몰라서 그래. 여자란 얼마나 아름답고 위대한 존재인지. 오, 아름다운 여인이여. 그대 앞에선 시간 조차 눈 멀어 숨죽이고 멈추어서니.... 하하하. 내가 좀 흥분했군. 기회가 닿으면 이 시의 나머지 부분을 들려주겠네." 오브라디 교수가 웃자 이번에는 오브라디 교수를 태운 뮤가 꼭 바람 빠 지는 것 같은 울음 소리를 내었다. "뮤- 뮤- (저 친구가 불쌍해)." "나도 그래, 스타바." 바람둥이나 할 소리군. 나는 속으로 혓바닥을 낼름거리면서 중얼거리듯 말했다. 뮤를 타고 숲 한 가운데로 어느 정도 깊숙이 들어왔구나 싶자 동굴 하 나가 눈에 들어왔다. 예전에 보았던 오우거가 살고 있는 동굴과 비슷한 동굴이었다. "여기로군." 오브라디 교수는 뮤에서 내렸고, 덕분에 오브라디 교수를 태웠던 뮤는 한 숨 돌리게 되었다. 나를 포함한 나머지 일행도 뮤에서 내렸다. 모짤트 는 그레텔을 업고, 손에는 양손칼을 들고서 천천히 앞장을 섰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2433/12886 ━━━━━━━━━━━━━━━━━━━━━━━━━━━━━━━━━━━━━━━━ 제 목:[탐그루] 더 높이 더 멀리 더 빨리 134 관련자료:없음 18/18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2-29 00:24 조회:1733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이봐. 그 꼬마는 두고 가야되는 거 아니야." "오브라디 교수님. 그레텔은 정령술사입니다. 정령의 기운을 느낄 수 있어요. 누구 보다도 먼저 위험을 알아차릴 수 있다구요." 모짤트가 대답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서 나는 이렇게 오브라디 교수 에게 설명했다. "마법사 님, 정말 대단하십니다. 대단히 실례되는 말씀이지만 나이도 그리 많지 않으신데도 불구하고 뛰어난 검사와 스파일 최고의 교수님, 거 기다가 정령술사까지 함께 하시니 말이에요." 그런데 내가 설명을 끝내자 의외로 스칼렛이 이렇게 말하면서 내 쪽으 로 다가왔다. "그건 과찬의 말씀이에요, 스칼렛. 그리고, 그 마법사라는 호칭, 좀 그 래요. 그냥. 수르카라고 불러요." 나는 스칼렛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름을 이미 알고 있는 마당에 계속해 서 이름을 숨긴다는 것도 쑥쑤러운 일이었다. "그럼 그렇게 부를게요, 수르카 님. 괜찮죠?" 내 말에 스칼렛이 지나치다 싶을 만큼 기쁜 낯을 하고서 말했다. 나는 쑥스러워져서 스칼렛의 시선을 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이런 말하기 뭐하지만, 스칼렛. 나 그렇게 대단한 마법사는 아니 에요. 말한 그대로 나이도 어리고, 마법이라고 해봐야 별로 아는 것도 없 다구요. 그러니 제발 그렇게 대단한 사람 대하듯 하지 말아줘요." 나는 동굴 안으로 걸어 들어가면서 이렇게 말했다. "수르카 님." 동굴 안에 어느 정도 들어섰기 때문에 표정을 살필 수는 없었지만 나는 스칼렛의 눈동자가 반짝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위험하다. 나는 내 안에 서 이런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걸 들을 수 있었다. "제가 수르카 님을 존경하는 건 대단한 마법사 님이라서 만은 아니에 요. 제, 생명의, 은인이시잖아요." 스칼렛은 이렇게 말하고는 눈을 피했는데, 상기된 목소리에서 나는 스 칼렛의 볼이 틀림 없이 달아올랐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덕분에 나도 좀 가슴이 뛰면서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했는데, 그리 나쁜 기분만은 아니 었다. 이거, 어떤 위험이 눈앞에 닥칠지 모르는 상황인데 너무 태연하게 굴고 있는 거 아닐까? 모짤트가 들고 있는 여행자용 흰 등이 앞을 비추어주고 있었다. 나는 불빛을 따라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사실 언제 어디서 무엇이 튀어나 올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나마 나는 오우거 작전 때의 경험이라도 있지만 오브라디 교수나 모짤트는 오우거에 대해 알고는 있을지 몰라도 경험이 없기 때문에 앞장을 서고 있다는 게 불안하기만 했다. 동굴의 벽 면도 오우거 작전 때 소리장 마을에서 보았던 동굴의 벽면처럼 말끔하게 처리되어 있었다. 다만 장식처럼 보이는 것들이 좀 있는 게 다르긴 했지 만 내 눈에는 그게 그거처럼 보였다. "여기는 뭐하는 곳이었을까요?" 모짤트가 오브라디 교수에게 물었다. "글쎄. 아마 무슨 종교 집회장이었던 것 같네. 여기 저기 의자의 흔적 들이 보이지 않는가? 천정에는 연금술사의 등이 매달려 있었던 흔적도 있 고, 또 저렇게 앞쪽에 뭔가 할 수 있는 공간이 있고. 아마도 저기에 제단 이 있었을 거야. 고대인들은 이쪽 의자가 있는 쪽에 앉거나 서서 제사에 참여했겠지." 오브라디 교수의 설명을 듣자 나는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렇기는 한데 내가 보기에는 꼭 살롱같은 분위기가 풍긴단 말이야. 바리바가 만약에 같 이 왔더라면 틀림없이 그렇게 말했을 텐데. "그런데 저건 뭔가? 모짤트 군. 한 번 비추어 보게." 오브라디 교수가 동굴 위쪽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모짤트는 여행자용 흰 등을 높게 올려 비추었다. 그곳에는 밤하늘의 별 빛처럼 빛나는 것들 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초록색으로 빛나는 점들은 꼭 보석을 한 웅큼 집어 허공에 뿌려놓은 것 같았다. "위험해!" 모짤트가 소리치면서 양손칼을 뽑아들었다. 사방에서 푸드덕거리는 소 리가 메아리치기 시작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 다. 모짤트는 양손칼을 휘둘러 날아들고 있는 것들을 몰아내려고 애썼지 만, 칼이 워낙 길어서 그다지 소용이 닿을 것 같지는 않았다. "잠깐만요. 이 아이들을 죽이지 마세요. 놀라서 그러는 거니까요." 침착한 목소리로 스칼렛이 모짤트의 어깨에 손을 얹으면서 말했다. "피는* 불타는* 물*" 스칼렛이 나지막이 중얼거리자 사방에서 푸드덕거리는 소리가 멈추었 다. 덕분에 나는 머리를 감싸쥐고 있는 멍청이 꼴이 되었다. "스칼렛. 대단하군." 모짤트가 탄성 어린 어조로 말했다. 사방에는 박쥐들이 땅바닥에 떨어 져 있었다. 박쥐들은 이름과는 달리 땅에서는 잘 움직이지 못했다. 꼭 다 리 짧은 인형 같은 모습으로 뒤뚱거리면서 중심을 잡고 겨우 서 있기만 할뿐이었다. 그것도 진짜 쥐처럼 찍찍 거리면서 말이다. "대수롭지 않은 마법입니다." 스칼렛이 볼에 홍조를 띄고서 말했다. 정말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내가 보기엔 대단한 마법이다 싶었지만 말이다. "혹시 스칼렛 양, 동타실 출신인가요?" 나는 동물을 부릴 줄 알았던 유훈과 재훈을 떠올리면서 말했다. "아니에요. 그냥, 학교에서 배운 마법일 뿐이에요. 동타실 출신 사람들 은 타코는 물론이고 맹수들까지 부릴 수 있다지만 저는 겨우 박쥐나 정도 날지 못하게 만드는 수준이에요" "그렇군요" 나는 스칼렛을 정말 다시 보게 되었다. 모짤트는 양손칼을 다시 허리에 차면서 스칼렛을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어디 보자. 이 박쥐들은 흡혈 박쥐로군. 앞니가 날카로운 걸 보면 알 수 있지." 오브라디 교수는 허리를 숙여 바닥에 서 있는 박쥐들을 바라보면서 말 했다. 박쥐들이 우는 소리가 꼭 덜 떨어진 새들이 모여 합창을 하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 "흡혈 박쥐라면 앞니로 피를 빠나요?" "아닐세, 수르카. 박쥐들은 앞니로 상처를 만들어서 거기서 흘러나오는 피를 핥지, 피를 빨지는 않아. 아마 박쥐의 침 속에는 피가 멈추지 않게 하는 뭔가가 들어있는 모양이야. 피를 빠는 건 전설 속에 나오는 뱀파이 어 정도겠지. 왜, 사람의 입모양이 그렇지 않은가. 가만 있자. 수르카, 자네는 잘 모를테고, 스칼렛 양. 자네라면 알겠지? 사람의 입모양이 어떻 게 보면 음식을 씹는 것 보다 오히려 피를 빠는데 더 적합할지도 모른다 는 것 말이야." 오브라디 교수가 말을 마치고 야릇한 시선으로 스칼렛을 바라보면서 말 했다. 모짤트가 얼굴을 붉히면서 헛기침을 했다. 뭔가 좀 야한 얘기를 하 는가보다 싶었는데 잘 이해가 가지는 않아서 그냥 스칼렛 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스칼렛은 눈에 띄게 당황해하면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 다. "사실 전에 한 번 뱀파이어에게 당한 사람의 시체를 본 적이 있거든. 혹시라도 다시 살아나지 않도록 가슴에 말뚝까지 박아 넣었지. 그리고 어 쩐지 내 예감이 좀비 떼가 나타났던 것처럼 뱀파이어 일족도 다시 나타날 것 같단 말이야."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오브라디 교수는 자신이 만들어 놓은 이상야릇 한 분위기를 쇄신해보려는 듯이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묵묵히 모짤트가 따랐고, 다시 그 뒤를 나와 스칼렛이 따랐다. "스칼렛, 그렇게 훌륭한 마법을 사용할 수 있으면서 날 그렇게 대단하 게 보는 이유가 뭐에요?" 얼마 정도 사이를 둔 다음에 내가 스칼렛에게 물었다. "수르카 님. 전 수르카 님을 대단하게 본 적 없어요." 스칼렛의 얼굴에 찬바람이 일었다. 내가 또 무슨 말실수라도 한 걸까? 하지만 나는 도저히 스칼렛의 말뜻을 알 수가 없었고, 그래서 다시 앞만 보고 걷기만 했다. "수르카 님은 너무 냉정하세요." "......" 지금 찬바람을 쌩쌩 날리며 말하고 있는 사람이 누군데 적반하장도 유 분수지, 나 참. 나는 언젠가 라이짐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여자가 어떤 존재인지 알게 되는 순간 이미 어른이 된 거라고 라이짐과 웃으면 서 말한 적이 있었다. 역시 그 말이 맞기는 맞는 모양이다 싶었다. (물론 그 때 나누었던 대화는 지금과는 조금 다른 의미였지만 말이다) 한참동안 침묵이 흘렀다. 네 사람이 내는 걸음 소리와 어디선가 들려오 는 돌 부스러지는 소리, 그리고 뒤뚱거리고 있을 박쥐들이 우는 소리 외 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마치 시간이 정지 되어버린게 아닌가 싶기까지 했다. "오...!" 침묵을 깬 건 오브라디 교수였다. 오브라디 교수의 탄성을 듣고 나는 순간 흠칫 놀랐다. 갑자기 소리를 지를 게 뭐람. 나는 놀란 가슴을 진정 시키기 위해 심호흡을 하면서 천천히 오브라디 교수가 있는 쪽으로 걸어 갔다. "이걸 좀 보게." 오브라디 교수가 벽에 붙어있는 그림을 보면서 말했다. "이게 바로 고대 문명의 흔적일세. 아모리카 대륙, 잃어버린 인류의 과 거지." 오브라디 교수는 자신의 목소리에 도취된 듯 했다. 나는 그림을 살펴보 았다. 머리에는 뾰족한 뿔이 여럿 솟아있는 모자를 쓰고, 한 손에는 괴상 하게 생긴 것을 치켜들고 있는 여자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워낙 빛이 바 래있어서 원래 색이 어떤 것인지, 또 입고 있는 옷이 어떤 옷이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꼭 내가 처음 아자닌을 불러냈을 때의 모습처럼 말이다. "이게 바로 아모리카 대륙에서 숭상했던 여신의 모습일세. 옛 사람들은 이 여신이 자유와 평등을 가져다준다고 믿었던 것 같네. 최종전쟁 때 가 장 먼저 사라져 버린 것 중에 하나라고 하는 말도 있네만. 이 귀한 그림 이 여기에 있다니." 오브라디 교수는 조심스럽게 그림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런데 오브라디 교수의 손이 닿자 그림의 귀퉁이가 부스러져 내려갔다. "음. 이 귀중한 걸 가지고 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함부로 옮길 수가 없겠군. 인류의 유산을 개인적인 욕심 때문에 훼손시켜서는 안되 지." 오브라디 교수는 걸음을 옮기면서 말했다. "교수님. 아모리카 대륙에 대해서는 들어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잃 어버린 아모리카 대륙과 붉은 용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모짤트가 오브라디 교수에게 물었다. 모짤트의 목소리가 유적 안에서 괴기스럽게 울려 퍼졌다. "지난 사료들을 조사해보면 볼수록 아모리카 대륙의 멸망과 붉은 용 그 리고 마칸이 밀접한 관계가 있는 걸 알 수 있었다네." 오브라디 교수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두 가지 전설이 있네. 먼저 아모리카의 유적 근처에서 발견되는 전설 은 이렇다네. 그 전설에 이르기를 인간이 아모리카 대륙에 살게 된 것은 한 선지자 덕분이었다고 한다네. 그때 흰빛의 신이 아직 타락하지 않은 인간들을 이끌고 아모리카 대륙으로 건너갔다고 하는데, 그 거대한 배에 탔던 사람들의 수가 천 명을 헤아렸다고 하더군. 비스토브레식 천 명이긴 하지만 대충 짐작은 할 수 있겠지? 그리고 그 배의 이름은 오월화(五月 花)였다고 하네. 하여간 오월화 호가 아모리카 대륙에 닿았을 때, 사람들은 그곳에 붉은 용이 살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네. 붉은 용은 포악하게 사람들을 사냥 했고, 심지어는 사람의 머릿가죽을 벗기기도 했다고 전설은 전하지. 그러 나 카스터 장군이 이끄는 번개 부대가 붉은 용을 섬멸 시켰고, 붉은 용이 살던 자리에 인간은 지상 최강의 제국을 건설했다고 하네." 오브라디 교수는 목이 마른지 타코 가죽으로 만든 물통으로 물 한 모금 을 마신 후에 다시 이야기를 이었다. 이렇게 음침한 곳에서도 청산유수로 강의를 하는 걸 보니 교수가 맞긴 맞는 것 같았다. "또 다른 전설도 있지. 붉은 용이 평화롭게 살고 있던 아모리카 대륙에 어느 날 오월화 호가 들이닥치면서 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전설일세. 붉은 용은 오월화를 타고온 하얀 살인자들에게 용감히 맞서 싸웠지만 결 국은 그들의 모략과 음모에 빠져 대부분이 잔인하게 학살당해 자취를 감 추었다고도 하지. 내 생각엔 이 전설에서 말하는 붉은 용은 하나의 상징 같아. 붉은 용을 섬기던 어떤 부족이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네. 아직 자료가 부족해서 정확 한 사실은 알 수 없지만 말일세. 이 전설과 관련된 고대시(古代詩)가 한 편 있는데 들어보겠나?"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2434/12886 ━━━━━━━━━━━━━━━━━━━━━━━━━━━━━━━━━━━━━━━━ 제 목:[탐그루] 더 높이 더 멀리 더 빨리 135 관련자료:없음 18/18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2-29 00:24 조회:1525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오브라디 교수는 우리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지긋이 눈을 감고 시 를 읊었다. "그들이 우리의 들소를 가지고 갔다. 그들이 우리 부족을 가지고 갔다. 우리에게 그들의 삶의 방식을 강요했다. 우리 아이들에게 그들의 말을 가 르쳤다. 그러나 언젠가 때가 오면 우리 부족은 돌아오리라. 붉은 용과 함 께 돌아오리라." "시(詩)라기 보다는 그냥 이야기 같은데요?" 나는 좀 운율이 맞지 않는다 싶어서 이렇게 물었다. "고대어를 번역해서 그렇다네. 원문은 운율이 아주 잘 맞는 시야. 내 기억력이 좋지 않아서 원문으로 외울 수는 없지만 말일세. 원래 제목은 '인디 보호구역' 이라고 하네. 인디가 뭔지, 또 왜 보호구역인지는 알 수 없네만. 하여간 붉은 용은 다시 돌아왔고 인간들이 세운 막강한 제국을 단 한 순간에 무너뜨렸다고 한다네." "그런데 어떻게 그 두 전설이 그렇게 다를 수 있지요? 과연 붉은 용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알 수가 없어요." 이번에는 스칼렛이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오브라디 교수에게 질문했다. 오브라디 교수가 답변을 하는 동안 나는 칼의 법칙을 생각했다. 강한 것 은 살고 약한 것은 죽는 다는 용병단에서 배웠던 칼의 법칙 말이다. 어차 피 전설은 싸움의 승자가 이어가는 것이다. 아마 붉은 용이 흰 빛의 신이 이끄는 사람에게 졌을 때는 오브라디 교수가 먼저 말한 전설이 이어져내 려왔을 거고. 붉은 용이 이긴 다음에는 오브라디 교수가 나중에 말한 전 설이 이어져 내려왔을 거다. 나는 허리에 찬 나미트 장군의 칼자루를 만 져보았다. 이번에는 뽑아야겠다는 생각에서 만진 것이 아니라 그저 칼에 대한 생각을 하다보니 한 번 만져보고 싶었다. "전설과 소문은 비슷한 데가 있어요." 나는 칼자루를 만지작거리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런데 유적 안이 워낙 조용한데다가 막힌 공간이어서 내가 말하자 모두의 시선이 나를 향 했다. 내 목소리가 이렇게까지 컸나? 나는 조금 당황하면서 다시 말을 이 었다. "뭐가 진짜인지, 알 수가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는 말이에요." "그래. 수르카가 내 설명을 잘 이해하고 있는 것 같군. 사실 무엇이 진 짜냐고 묻는다면 전부 다 진짜라고 말할 수 있겠지. 말하는 사람의 입장 에 따라서 달라지고, 또 듣는 사람의 입장에 의해서도 달라지고, 그리고 말하는 사람이 처해 있는 상황에 따라서도 달라지는 게 바로 그 '진짜'라 는 말이니까 말일세." 오브라디 교수는 내 말에 이렇게 덧붙여 설명했다. "그런데 말일세, 그 인간들이 붉은 용에게 전멸 당하기 전에, 아마도 마칸의 강림이 있었던 것 같아. 마칸에 대한 여러 문헌을 종합해보면 거 의 틀림없는 것 같아. 뭐, 판본에 따라서는 매칸이라고 적혀 있는 문헌도 있고, 마카닉이나 마신이라고 적혀 있는 문헌도 있어. 그런데 알 수 없는 건 말이야, 꼭 이 마칸이라는 게 원래는 인간에게 부림을 당했던 것 같단 말이야. 노예처럼 말이지." 오브라디 교수는 턱에 손바닥을 대고 손가락을 까딱거리면서 말했다. "이건 아직 가설일 뿐이지만 내 생각에 한 때는 인간과 마칸이 함께 잘 살았던 적이 있었던 것 같아. 그런데 어느 날 마칸이 붉은 용을 부활시키 고 인간을 멸망시켰지. 아모리카 대륙은 바다 속으로 가라앉아 버렸고 말 이야. 그리고 이건 여담이네만, 천 년전 대마법사 아킨과 초대 왕립 기사 단장 카를로스가 마칸의 강림을 봉인했을 때, 아킨은 마법으로, 카를로스 카를로스는 붉은 용의 힘으로 마칸을 봉인했다고 스파일 사람들은 믿고 있네. 그래서 붉은 용의 문양을 카를로스의 상징으로 쓰기도 하네만 사실 스파일 그 누구도 과연 붉은 용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하고 있지." 오브라디 교수는 이렇게 말하고는 다른 편에 그려져 있는 그림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여기도 있군. 이 그림은 붉은 용의 전설과 맞물려 자주 발견되는 그림 일세." 나는 그림을 바라보았다. 새의 깃털을 길게 박아 만든 모자를 쓴 노인 의 옆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노인은 뭔가를 손에 들고 있었는데 그림이 흐려서 제대로 알아 볼 수는 없었지만 아마도 바지 같은 옷 종류처럼 보 였다. "음. 여기 뭐라고 적혀 있군. 가만있어보자... 인디도 레비스를 입는 다... 이건 알 수가 없군. 그림까지 남아 있는 걸 보면 고대에는 꽤 이름 높은 문화였겠지만 지금에 와서 인디가 뭔지, 또 레비스가 뭔지 알 수가 있나." 다시 턱에 손바닥을 괴고 손가락을 까딱거리면서 오브라디 교수가 말했 다. "본 기억이 있습니다." 잠시 동안 침묵이 있은 후에 모짤트가 말했다. 나는 연금술사의 흰 등 을 받아 잔잔하게 흔들리고 있는 모짤트의 눈을 바라볼 수 있었다. 지금 모짤트의 눈은 이상하게도 추억에 잠긴 노인처럼 보였다. "그래? 그럼 이게 무슨 말인지 아는가?" 오브라디 교수가 턱을 괴었던 손을 내려 벽에 붙은 그림을 가리키면서 모짤트에게 물었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로 말이다. 아무래도 오브라 디 교수는 뭔가 알아내는 일에 있어서는 다혈질인 모양이었다. "아닙니다. 저는... (여기서 모짤트는 잠시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는 것 같았다) 저는 모히칸이라는 종족의 후손이라고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려서 저런 모자를 본 기억도 있습니다." "모히칸? 언젠가 들어본 적이 있는 말이로군. 어쩌면 마칸과 관계가 있 는 것 같기도 하고. 발음도 비슷하지 않은가. 물론 이런 판단은 학문적으 로는 가치가 없는 판단이긴 하네만." 오브라디 교수가 말을 듣자, 나는 그래서 모짤트가 마칸에 관심이 있었 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종족이 마칸과 관련이 있다면 당연히 관심이 갈 만도 하겠지 싶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나와 모짤트한테도 공 통점이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나는 실로 오래간 만에 아버지를 떠올렸다. 어른이 될 때까지 떠올리지 않기로 하긴 했지만 자신의 종족을 찾아다니는 모짤트와 나는 어쩐지 비 슷하다는 생각이 들자, 아버지가 떠오르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 언젠가 그 붉은 용이 그려져 있는 마소드의 검을 찾게 된다면 모든 사실 을 다 알 수 있을 지도 모르지. 이렇게 생각을 하고 있자니 어쩐지 모짤 트가 조금 더 친근하게 느껴졌다. 아마 모짤트에 대해서 하나 둘 알아가 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오브라디 교수님. 아모리카 대륙에 지상에서 가장 막강한 대 제국이 건립되었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강성한 국가가 왜 망했을 까요? 또 붉은 용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흰빛의 신이 이끄는 인간이 강 성해진 후에 어떻게 이길 수 있었을까요? 강성해지기 전에도 이기지 못했 는데요." 스칼렛이 물었다. "그건 말일세, 강연회 때 얘기할 주제니까 그때 얘기하도록 하지. 다만 강함 뒤에는 항상 약함이 도사리고 있다는 말만 해 두면 어떻겠나. 그나 저나 스칼렛 양은 마법을 마음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군." 오브라디 교수가 이렇게 말하자 스칼렛은 갑자기 수줍음을 타는 듯 한 얼굴이 되어버렸다. 마법 얘기가 나와서 그런가보다 싶었다. 어쩐지 스칼 렛은 마법이라는 말에 약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수님. 그런데 반말로 말씀하시네요." 나는 귓속말로 오브라디 교수에게 속삭였다. "음. 잠시 동안 스칼렛 양을 내 제자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야." 오브라디 교수는 이렇게 말하고는 입을 굳게 다물고서 고개를 끄덕였 다. 그때였다. "원... 다섯 개의 원... 더 높이, 더 멀리, 더 빨리...... 새. 무서운 새들." 그레텔이었다. 나는 가슴에 차가운 것이 뚝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모짤트도 조금 긴장했는지 양손칼로 손을 가지고 갔다. "무슨 말인가, 모짤트?" 오브라디 교수가 모짤트에게 물었다. "글쎄요. 이쪽 벽면을 바라보면서 말하고 있다는 건 알겠습니다만." 모짤트는 벽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그러자 오브라디 교수는 아주 황급 하게 모짤트가 가리킨 벽쪽으로 뛰어갔다. 덕분에 유적지가 쿵쿵거리고 울렸는데, 나는 당장이라도 무너지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여기에 뭔가 있군." 오브라디 교수는 이렇게 말하더니 벽면을 후욱, 불었다. 그러자 두껍게 붙어있던 먼지가 허공으로 날리더니 아주 낡은 그림이 하나 드러났다. 이 상하게 생긴 모자를 뒤집어 쓴 마물의 형상이었다. 전체적으로 새처럼 생 기긴 했지만 눈은 지나치게 커다랬고, 입에는 새와 같은 부리가 있었다. 저런 마물이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다시 한 번 칼자루를 쥐었 다. 저 날카로운 부리에 찍히면 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불안감이 엄습 해왔다. "가만. 여기 이런 말이 적혀 있어. 로스안. 로스안이라는 말이야?" 대단한 발견을 했다는 듯이 오브라디가 흥분된 어조로 외쳤다. 로스안 이라면 들어 본 적이 있는 곳이었다. 소리장 마을의 오우거 작전 때 로키 가 로스안 근처 홀리우드 출신이라는 말을 했던 기억이 났다. 로스안이 잃어버린 천사라는 뜻이라고 했던가? "로스안 오리피. 다섯 개의 겹쳐진 원과 더 높이 더 멀리 더 빨리..... 음 무슨 뜻일까? 더 높이 더 멀리 더 빨리 라는 말이 아모리카 제국의 몰 락과 무슨 관계가 있는 걸까? 다섯 개의 겹쳐진 원은 또 뭘 뜻하는 거지? 다섯 개의 대륙? 다섯 개의 인종? 다섯 개의 미덕? 심상치 않은 기호와 문구가 적혀 있는 걸로 봐서.... 오리피라는 것이 뭔가 대단한 것인 것 같은데. 지명? 사람이름? 제사? 어쨌든 단서를 하나 잡긴 잡았군. 뭐 자 세한 것은 로스안에 가서 조사해보면 더 알아낼 수 있겠지. 성황청 녀석 들 이곳을 뒤졌다고 하더니 이런 것 하나 못 알아내고. 날 보라구 단박에 알아냈잖아. 이런 것 쯤이야 식은 죽 먹기지. 하하하!" 의기양양한 얼굴로 오브라디 교수가 외쳤다. 그런데 발견한 사람은 그 레텔이 아니었나? 저렇게 확고부동한 말투로 말하니 뭐라 말도 못하겠네. "자! 가세! 이제 돌아가서 점심이나 먹자그! 하하하" 성큼성큼 걸어나가는 오브라디 교수를 우리는 따라나갈 수밖에 없었다. 저렇게 걷다가 혹시 유적이라도 무너지면 큰일이니까 말이다. 유적 밖으로 나가자 햇살이 눈에 따가웠다. 연금술사의 빛에 익숙해졌 기 때문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오브라디 교수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 훌쩍 뮤에 올랐다. (뮤가 죽는 소리를 내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말이 다) "다음 목적지는 정해졌어. 로스안. 로스안으로 가는 거야. 거기에 가면 오리피가 뭔지 알 수 있을 걸세. 그럼 붉은 용을 찾아내는 데 또 한 걸음 다가선 셈이 되는 거지. 여기서 이런 단서를 얻게 될 줄이야. 그레텔 덕 분이야. 꼬마라고 한 거 사과하네, 어린 정령술사." 그레텔 쪽으로 고개를 숙이면서 오브라디 교수가 말했다. 아까하고는 완전히 딴판이네. 오브라디 교수는 정말 종잡을 수가 없어. 동굴에서 나가는 길에 스칼렛은 다시 한 번 마법의 말을 외웠다. 그러 자 바닥에서 뒤뚱거리던 박쥐들이 다시 소란스럽게 푸드덕거리면서 날아 올랐다. 날아오르는 박쥐들을 바라보는 스칼렛의 얼굴에서 나는 푸근한 누나 같은 인상을 받았다. 동물을 사랑하고 있는 걸까? 그래서 마음으로 마법의 말을 외울 수 있었던 걸까? 그런데, 그렇다면 아까 오브라디 교수 가 마음으로 마법의 말을 이해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는 말은 무슨 말 일까? 갑자기 여러 의문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러자 역시나 머리에 쥐가 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먼저 생각나는 대로 오브라디 교수에게 하나 묻기 로 했다. "그런데, 오브라디 교수님. 로스안에 가서는 어떻게 단서를 찾아 나설 생각이시지요?" 역시 눈앞에 닥친 문제부터 푸는 게 순서라니까. 나는 정오의 햇살에 눈을 찌푸리면서 오브라디 교수에게 물었다. "무슨 걱정인가? 여기 어린 정령술사가 있지 않은가." 나는 걱정이 되어서 오브라디 교수에게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물은 거였 지만 오브라디 교수는 하도 의기양양해 있어서 별로 걱정이 되지 않는 모 양이었다. 그레텔이 아까 동굴에서 했던 것 처럼 뭐든지 다 찾아낼 수 있 는 건 아닌데. (아니, 그보다 별다른 부작용 없이 뭔가를 찾아낸 건 이번 이 처음 아니었던가? 오브라디 교수가 한 번 쓴맛을 봐야지 그레텔이 입 을 벌리는 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알지) 하지만 오브라디 교수의 얼굴 을 보아하니 내가 그런 말 해봐야 듣는 시늉도 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군요. 축하드립니다, 오브라디 교수님." 스칼렛이 정중하게 오브라디 교수에게 말했다. "별 말씀을. 덕분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스칼렛." 이제는 제자가 아니라 '다시' 여자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젊었을 때 좀 여기저기 떠돌았다고 하더니, 여자를 밝히는 법만 배웠나 보지? 바람둥이 였을 게 틀림없어. 나는 모짤트가 뮤에 오르는 모습을 보면서 천천히 스타바의 등에 올라 타려고 했다. 그때였다. 숲에서 시커먼 그림자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황급히 칼자루를 쥐었고, 모짤트는 순식간에 양손칼을 뽑아들고 그 림자 쪽으로 뮤를 몰았다. 마물인가? 이런 순간에 기습을 당하게 될 줄이 야. 순식간이었지만 여러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오브라디 교수도 적잖이 당황하고 있는 것 같았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2435/12886 ━━━━━━━━━━━━━━━━━━━━━━━━━━━━━━━━━━━━━━━━ 제 목:[탐그루] 더 높이 더 멀리 더 빨리 136 관련자료:없음 21/21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2-29 00:25 조회:1727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마로우?" 모짤트는 이렇게 말하면서 칼을 거두었다. 마로우? 훈련 동기 마로우? 나는 조심스럽게 검은 그림자가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그림자의 정체는 마로우가 틀림없었다. 다만 도저히 그 잘생긴 마로우라고는 생각 하기 어려울 만큼 꾀죄죄한 몰골을 하고 있다는 점만 빼면 말이다. 마로 우는 기력이 다했는지 쓰러진 채 바둥거리고 있었다. 모짤트는 혹시 주변 에 무슨 위험요소가 있는지 날카로운 눈초리로 살폈고, 나도 주위를 살폈 다. 혹시라도 마물이 나타날지 모를 일이었다. 유적 안에서 본 그 새처럼 생긴 마물이 당장이라도 나타날 것만 같았다. 나는 마로우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얼굴에는 땟국물 흐른 자리가 선명 했고, 바람결에 날리곤 하던 멋진 금발은 며칠을 안 감았는지 머릿기름 때문에 거의 덩어리가 져 있었다. 거기다가 옷꼴은 넝마를 주워입었는지 아주 거지꼴이었고 팔과 목 곳곳에 상처 투성이었다. 도대체 누가 마로우 를 이꼴로 만들었을까. 마로우를 처음 본 순간 마물이 아닐까 생각한 것 도 무리는 아니다 싶었다. 사람이 이렇게 순식간에 변할 수도 있구나. "으... 오브라디 교수님......" 쓰러진 채 일어나려고 바둥거리던 마로우가 갈라지는 음성으로 말했다. 오브라디 교수는 황급히 뮤에서 내렸다. "자네, 나를 아는가? 무슨 일이지? 차근차근 말해보게." 오브라디 교수의 얼굴에 의기양양했던 빛은 다 사라지고 이제는 걱정과 불안 만이 가득했다. "찬? 수르카? 여기 어쩐 일이야...? 마로우가 다 죽어가는 음성으로 말했다. "이봐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라고." 나는 어이가 없어서 이렇게 말해주었다. "으... 배가......" "배가? 배가 왜?" "...배가... 고파." 마로우는 이렇게 말하고는 의식을 잃었다. 다시 세스타 가문의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에 마로우를 데리고 가는 일 은 내 몫이 되었다. 스칼렛이야 약혼하지 않은 여자니까 다른 남자와 함 께 뮤에 탈 수는 없는 노릇이고, 오브라디 교수 뒤에 마로우를 실었다가 는 당장이라도 뮤가 쓰러져 버렸을 것이고, 모짤트는 등에 그레텔을 업고 있었으니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돌아오는 길 내내 마로우의 몸에서 풍기는 지독한 냄새를 다 맡아야만 했다. "마로우 녀석, 어디 쓰레기통이라도 뒤졌었나?" "이 분과는 어떤 사이신가요, 수르카 님?" 내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스칼렛이 물었다. "내가 이 친구를 알았을 때는 적어도 냄새는 나지 않았어요. 그때는 깨 끗하고 멋진 검사였지요."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다시 말해서 과거는 하나도 드러내지 않으면서 알고 보면 좋은 놈이라는 식으로만 말했다는 거다) 스칼렛도 알아들었는 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식으로 내 말을 받아들였는지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수르카. 전우를 그렇게 함부로 말하지 마." 스칼렛의 질문을 피해간 것에 대해 의기양양해 있는데 모짤트가 한 마 디했다. 전우라. 오래간만에 들어보는 단어였다. 그러고 보니 마로우와 함께 했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훈련병 시절의 일이며, 또 사냥을 나갔던 눈 덮인 팜 산맥이며...... 때에 절은 마로우의 얼굴에는 고생의 흔적이 가득했다. 곱고 근사했던 마로우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든 지금의 마로우를 보자, 한때 서로 등을 맞대고 적과 싸우기로 맹세한 용병단의 전우를 냄새가 좀 난다고 해서 함 부로 대한 내가 부끄러워졌다. "미안해." 나는 이렇게 사과를 하기는 했는데 이게 모짤트에게 하는 사과인지, 마 로우에게 하는 사과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둘 다에게 한 사과였으 리라. 저택의 별실은 어차피 빈방이 많았으니까 마로우 하나 눕히는 것은 문 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마로우를 씻기는 것이었다. 다행히도 비토를 비롯 한 몇몇 하인들의 도움을 받아 마로우는 원래의 모습을 완전히 찾지는 못 했어도, 어느 정도 사람의 모습으로는 돌아갈 수 있었다. "오랫동안 제대로 된 걸 먹지 못한 것 같더군. 이럴 때는 쌀을 끓인 물 을 조금씩 먹여서 제정신을 찾게 해야 하네. 섣부르게 말린 고기라도 먹 였다가는 큰일 나. 굶주린 속에 고기가 들어 갔다간 당장 창자에 구멍이 나고 말 걸세" 오브라디 교수는 역시 모르는 것이 없었다. 오브라디 교수의 말에 따라 따뜻한 물로 씻은 마로우는 별실에 마련된 깨끗한 침대 위에서 쌀을 넣고 끓인 물을 떠먹여주는 가운데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마로우는 저녁식사 전에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젊은 데다 가 건강한 몸이라 역시 회복이 빠른 것 같다고 오브라디 교수는 말했지만 사실 내가 보기에 마로우의 빠른 회복은 마로우의 상처가 대수롭지 않은 거였다는 증거처럼 여겨졌다. "죄송합니다, 오브라디 교수님. 처음 뵙는 자리에서 이런 모습을 보여 드리다니. 교수님을 찾아오느라 무려 세 끼를 굶었더니 이렇게 되었습니 다." 세 끼라고? 딱 하루 굶었다는 말인가? 나는 어이가 없었다. 그럼 도대 체 그 몸의 상처와 온몸의 썩은 냄새는 뭐였지? "다리가 끊어지는 바람에 남쪽으로 나 있는 다른 다리로 돌아서 오느라 이렇게 되었습니다." 마로우의 말에 따르면 마로우는 산적의 습격을 받기도 하고 (마로우의 칼에 나가 떨어진 걸 보면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좀도둑일 게 분명하지 만) 마물의 공격도 받았으며 (기껏해야 타코 한 두마리하고나 싸웠으니 긁힌 상처밖에 남지 않았겠지) 식량이 떨어져 벌레를 잡아먹으며 (아마 쓰래기통을 뒤졌던 게 아닐까?) 이곳 임프 시까지 오게 되었다고 했다. "그래. 그런데 어떻게 나를 찾았나?" "남쪽으로 빙 돌아서 오는 길에 사람들에게서 오브라디 교수님의 이야 기를 들었습니다. 임프 시 마법학교에 계시다는 말이었습니다. 저는 무작 정 스파일로 가서 오브라디 교수님을 찾을 생각이었습니다만 이렇게 빨리 찾게 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정말 기쁩니다." 마로우가 볼까지 상기되어서 이렇게 말했다. 오브라디 교수도 이렇게까 지 절실하게 자신을 찾아 온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사실 내가 보기엔 운이 좋아서 마로우가 일 찍 임프 시에 닿았기 때문에 이렇게 만날 수 있었지, 만약 운이 없었다면 마로우는 스파일의 이름 없는 마을에서 조용히 사라져 버리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런데 우리가 유적지로 간 건 어떻게 알았어, 마로우?" 내가 물었다. 유적지 앞에서 그렇게 마물처럼 갑자기 나타나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말했다가는 마로우의 자존심 에 상처를 주게 될 것 같아서 그만 두었다. "여기저기 물어보고 다녔지.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이야기 해 주더라고. 유적지가 있는 숲 쪽으로 가는 걸 봤다고. 생각해 보면 고마운 사람이었 는데 인사말도 한 마디 못했네." 억세게 운이 좋은 친구로군. "그래. 다들 잘 있고?" 모짤트가 물었다. 다른 친구들의 소식을 묻는 걸 보니 스파이로 잠입해 있었던 몸이지만 모짤트는 아직도 용병단에 정이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너하고 수르카가 떠나고 나서 얼마 안 있어서 동기들은 다 떠났어. 더 이상 용병단에 남아 있을 수가 없었던 거야. 아마도, 너하고 같은 이유였 을 거라고 생각해." 말 꼬리에 마로우의 시선은 나를 향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떠날 동기들이 있을 거라는 짐작을 했었지만 이렇게 빨리 다들 떠나게 되었을 줄은 몰랐는데. "그럼 라이짐은?" "라이짐은 남았어. 또 하진도. 남아 있는 훈련 동기는 그렇게 둘 뿐이 야." 역시. 라이짐은 남았구나. 나는 라이짐을 떠올려 보았다. 헤어진지 얼 마 지나지도 않았지만 마지막으로 본 게 꽤 까마득한 옛 일처럼 여겨졌 다. "자네들, 아케르 용병단에 있었군." 오브라디 교수가 낮은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예. 교수님. 하잔에 있었습니다" 대답을 할까말까 망설이고 있었는데 마로우가 눈치도 없이 덥석 말해버 리고 말았다. "하잔에서의 이야기는 소문에 듣고 있었네. 그곳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 지 말일세." 오브라디 교수는 이렇게 말하고 입을 굳게 다물었다. 나는 그 다문 입 에서 천마디 말보다 더한 웅변을 듣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입을 굳게 다무는 게 오브라디 교수의 특기 인 것 같았다) "그래. 용병단을 떠나서 나를 찾은 이유가 뭔가." "교수님. 저는 역사의 현장에 있고 싶었습니다. 아케르 용병단이라면 틀림없이 앞으로 바르도 대륙의 역사를 이끌어 나갈 집단이라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오브라디 교수는 예의 굳게 다문 입을 하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역사의 현장을 보고 나니, 제가 무모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 다. 역사책에서 읽었던 사실과 현실에서의 사실을 너무 큰 차이가 있었습 니다. 제가 겪은 살육의 현장을 담담하게 써내려 갈 자신이 없어졌습니 다. 그 일을 겪고 나니 과거 시스코의 반란이나 삼년전쟁도 다른 의미로 다가오더군요. 하여간 제가 깨달은 것은, 저는 역사를 쓰는 사람이지 역 사에 참여할 사람은 아니라는 거였습니다." "비겁한 말이로군." 오브라디 교수가 입을 열었다. 나는 그 순간 마로우의 얼굴이 굳는 것 을 보았다. "차라리 죽는 게 무서워서 나를 찾았다고 할 일이지" 오브라디 교수는 이렇게 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 쪽으로 걸어갔 다. 저녁 노을이 오브라디 교수의 얼굴에 닿아 긴 그림자를 만들어 냈다. "자네, 역사에 관심이 있는가?" "아버님께서 오브라디 교수님께 배운 적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한 때 귀족 가문이었던 루베 가문의 후손입니다." "삼년전쟁 때 평민으로 몰락해버린 가문이로군. 학자 가문으로 유명했 지. 스파일의 수도에 불을 질렀다지, 아마." "아닙니다." 마로우가 몸을 반쯤 일으켜 세우면서 말했다. "그렇게 알려져 있다는 말이야. 내가 기억하기에 루베 가문은 실천을 중요시하는 학자 가문으로 알고 있네만, 자네는 그 피를 절반만 이어받은 모양이로군. 그때 방화범으로 잡힌 마리누스 루베는..." "저희 아버님이십니다." 마로우의 말에 오브라디 교수가 침대 쪽으로 돌아섰다. "마리누스 루베라고 하면, 삼년전쟁에 반대하여 당시 스파일의 영주, 프란스 페르도 장군의 저택에 불을 지른 사람 아닙니까?" 모짤트가 오브라디 교수에게 물었다. 나는 전혀 들어본 적도 없는 일을 다들 잘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 내 제자이기도 했어.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는, 훌륭한 사람이 었다고 기억하고 있네.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스파일 방화사건에 연루 가 되었고, 그 때문에 사형을 당했네. 참 아까운 친구였지. 그 불 덕분에 프란스 페르도 장군은 스파일의 영주로 아주 자리를 굳힐 수 있었어. 음. 모짤트. 자네, 생각보다 많이 알고 있군." 모짤트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아마 스파일에 불이 났을 때 그 근처에 있었던 모양이구나 싶었다. "그건 모략이었습니다. 아버님께서 평소 프란스 페르도 장군에 반대하 는 발언을 자주 하는 지식인으로 널리 알려진 것을 역이용해 누명을..." "그만 하지, 마로우. 내가 묻고 싶은 건 그런 가문의 후예가 너무 나약 한 거 아닌가 하는 것뿐이네." "솔직히 말씀 드리겠습니다. 제 꿈은 프란스 페르도 장군이 삼년전쟁의 주범이었음을 밝히는 역사 논문을 발표하는 것입니다. 그 꿈을 위해 역사 의 현장에 서고자 했던 것이고요. 하지만 그렇게 죄없는 사람들을 죽여가 면서까지 역사의 현장에 서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거기다가...... 전 죽 기 싫었습니다. 정말 죽기 싫었습니다." 마로우의 눈동자에 물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나는 마로우의 가느다란 금발이 힘없이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개인적 감정으로 역사를 기술하다가는 맥을 놓치고 올바른 역사 기술 자체를 그르칠 수 있지." 오브라디 교수는 이렇게 말하고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하지만 좋은 동기 부여는 되겠지. 자네도 마음에 드는 군. 임프 시 같 이 척박한 땅에서 별 괴상한 공부벌레들만 보다가 제대로 박힌 젊은 친구 들을 보니 그런 모양이야. 하하하." 오브라디 교수는 이렇게 말하고는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나는 별로 마음이 편치 못했다. 기껏해야 돈 몇 푼에 자이벌들 을 위한 강연회에 강사로 나선 오브라디 교수가 저렇게 학문 운운하는 게 어쩐지 다 위선같이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좋아. 나는 이제 실리포니아로 갈 걸세." 오브라디 교수는 내가 뭘 생각하고 있는지 전혀 짐작도 가지 않는지 이 렇게 말했다. "실리포니아라니요? 로스안으로 간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수르카. 스파일 남서쪽 지방을 통틀어서 실리포니아라고 부른다네. 로 스안은 거기에 있는 항구 이름이고. 거기에 가서 오리피가 뭔지 알아내야 지. 아모리카 제국의 멸망과 분명 연관이 있을 거야. 어때. 다시 한 번 역사의 현장에 서는 거야, 마로우. 이 오브라디 교수와 함께 말이지. 어 때 같이 가겠나?"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2477/12886 ━━━━━━━━━━━━━━━━━━━━━━━━━━━━━━━━━━━━━━━━ 제 목:[탐그루] 더 높이 더 멀리 더 빨리 137 관련자료:없음 26/26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2-30 00:12 조회:1602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그것 때문에 제가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마로우의 표정에는 감격의 빛마저 흐르고 있었다. 나는 모짤트를 바라 보았다. 모짤트도 꽤 기뻐하는 눈치였다. 일행이 하나 더 늘어서 그런 건 지, 지고 갈 짐이 좀 줄게 되었다 싶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모짤트 말처 럼 '전우'에 대한 옛 감정이 남아서인지 나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별 다른 결론은 찾지 못했다. 아마 셋 다일지 모른다. 모짤트가 나와 비슷한 사람이라면 말이다. 그날 밤 나는 아자닌을 불러내었다. 낮에 들은 스칼렛의 마법에 대해서 묻기 위해서였다. "'피는 불타는 물' 이 마법의 말로 스칼렛이 박쥐를 날지 못하게 만들 었어. 기억해?" "예. 그 마법의 말은 아주 오래 전에 들은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좀 이상하군요." "뭐가?" "그 마법의 말은 뱀파이어 일족의 것이라고 있어는데......" "설마. 벰파이어는 사람의 피를 빨아먹고 산다는 마물 아니야?" 나는 낮에 오브라디 교수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리면서 말했다. "예. 그래서 저도 이상하다고 말씀 드리는 겁니다. 그 마법의 말은 벰 파이어가 마물들을 부릴 때 쓰는 마법의 말입니다." "그럼 정말 이상하네. 스칼렛은 어떻게 그런 마법의 말을 찾아냈을까? 설마 마법 학교에서 벰파이어가 쓰는 마법의 말을 가르쳤을 리는 없는데 말이야." 나는 턱을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그건 스칼렛 님께 직접 여쭈어 보시는 편이 나을 겁니다." 아자닌이 말했다. 하긴. 어디서 배웠는지야 물어보면 알 수 있겠지. 그 런데 내가 정말 궁금한 것은 그 마법의 말의 뜻이었다. 생각해 보면 이해 가 가지 않는 말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게 과연 어떤 뜻인지 마음으로 이 해하기란 쉽지 않았다. 피는 불타는 물이란게 무슨 뜻일까? 물이 불에 탄 다는 게 말이 되는 말인가? 그냥 불의 속성을 가진 물이라는 뜻인가. 그 런데 어떻게 물이 불의 속성을 가질 수 있는 거지? 그 얘기는 서로 정반 대되는 성질의 것이 함께 있을 수 있다는 말인데... 그럼 칼과 마법도 함께 있을 수 있다는 얘긴가? 그렇다면 과연 카를로 스나 아케르의 칼도 그 안에 마법의 속성을 지니고 있는 것일까? 옛말에 칼로 흥한 자는 칼로 망하기 마련이라고 했는데. 아케르의 칼도 다른 누 군가의 칼로 망하게 되는 건가? 또 바람이 불면 곧은 나무는 부러지기 마 련이라는 말도 있고. 마로우의 행동은 곧지는 않았지만 바람을 피해가는 행동이라고 볼 수도 있고, 그럼 그게 어떤 결과를 낳게 될 까? 바람을 거 스르지 않고 휜다면 말이다. 그것 또한 살아남는 방법의 하나가 될까? 그 래서 오브라디 교수는 마로우에게 함께 하자고 부탁한 걸까? 나는 또 한 번 머릿속이 어지럽게 뒤엉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나도 모 르게 절로 한숨을 내 쉬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 들으셨던 마리누스 루베의 방화사건 얘기를 좀 해 드릴게요." 아자닌은 내 마음을 훤히 뚫어보고 있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는 말했다. "그 방화사건은 프란스 페르도 장군에 반대하는 무리들이 프란스 페르 도 장군의 집에 불을 지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프란스 페르도 장군 에 반대하는 무리들은 자신들의 뜻을 좀 과격하게 알리려고 했을 뿐이었 을지 모르지요. 하지만 그 결과는 정 반대였습니다. 사람들은 프란스 페 르도 장군이 어떤 사람인지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그 집에서 죽어간 사람 들, 어린 하녀와 프란스 페르도 장군의 손자가 불에 타 죽었다는 사실에 분개하기만 했지요. 결과적으로 그들이 의도했던 것이 무엇이었던 간에, 그 사건 이후 프란스 페르도 장군은 스파일의 영지에서 더 견고한 지위를 구축하게 되었지요." "프란스 페르도 장군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휘두른 칼이 오히려 프란스 페르도 장군을 키워 주었고, 또 프란스 페르도 장군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칼로 흥하려고 했지만 칼로 망했다는, 그런 말인가?" "예. 그게 프란스 페르도 장군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휘두른 칼이 낳은 결과였습니다." 아자닌의 말은 나를 깊은 생각에 빠트렸다. 나는 적어도 아케르 용병단 에서 칼이 무엇인지 배웠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아자닌의 말은 칼의 또 다른 속성을 나에게 알려주었다. 다행히도 나는 사비오 영감이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칼이든 마법이든 모두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말 말이다. 칼과 마법은 늘 그자리에 그 모습 그대로 있지만 사람들의 마 음이 칼도 마법도 흔들어 놓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왜 오브라디 교수는 스칼렛이 마법의 말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 는 것 같지는 않다고 했을까? 스칼렛의 마법은 분명히 작동했잖아?" "마법의 말을 외치는 마법사의 의도가 정확하기만 하다면 마법은 분명 작동합니다. 하지만 작동한 마법이 진정한 마법인지는 아무도 모르지요. 수르카 님도 '모든 빛깔 있는 것들은 내게 시간을 빌려다오'라는 마법의 말을 완전히 이해하고 계시는 건 아니잖아요? 다만 집중을 통해서 방패를 만들어 내고 있을 뿐이지요. 누가 알겠어요. 수르카님이 진정으로 마법의 말을 이해하신다면 '모든 빛깔 있는 것들은 내게 시간을 빌려다오'라는 마법의 말로 죽은 사람을 살아오게 할 수 있을 지요." 아자닌의 말에 나는 급소를 찔린 느낌이 들었다. 마법이 마음에서 나온 다는 걸 알면서도, 또 그런 마법을 쓴 적이 있으면서도, 거기다가 임프 시 마법학교의 무조건 외우는 교육이 잘못되었다고 격분했던 나 또한 진 정한 이해가 부족하 채 마법의 말을 쓰고 있다는 걸 아자닌이 지적해서였 다. 나는 부끄러워졌다. 도대체 하루에 몇 번씩 부끄러워해야 하는 건지. "그래, 알았어. 아자닌. 난 좀 혼자 생각 좀 해 봐야 겠어." 자리에 벌렁 드러누우면서 내가 말했다. "예. 푹 주무세요. 그래야 내일 오브라디 교수님의 강연회 때 졸지 않 죠." 아자닌은 이렇게 사람속을 박박 긁어 놓는 농담을 던지고는 사라졌다. 하지만 나는 아자닌을 다시 불러내서 뭐라고 한 마디 해주고 싶다는 생각 이 들질 않았다. 강연회때 오브라디 교수는 과연 무슨 말을 할지. 천장을 바라보면서 나는 칼의 수많은 모습들을 생각했다. 칼은 탐그루 에도 있었고, 소리장 마을에도 있었고, 하잔에도 있었고, 이곳 임프 시에 도 물론 있었고 마법 학교에서도, 스파일에서도, 어디에나 있었다. 문제 는 그 칼의 모습이 언제나 다른 모습이라는 거였다. 사비오 영감은 근본 적으로 칼은 사람을 해치는 거라고 말했지만, 그렇게 간단하게 말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런 모든 칼의 모습을 다 알고 있는 사람이나 가능한 일이 리라. 그런데 칼을 다시는 쓰지 않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내가 마법에 대 해서 알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나는 마음으로 이해했던 마법의 말 들을 중얼거려보았다. 어느정도 이해가 되는 것도 있었지만 아자닌의 말 그대로 의도만 가지고 행하고 있는 마법이 분명히 있었다. 문득 오브라디 교수의 말이 떠올랐다. "차라리 '범버쿠 냠냠 범버쿠'를 하는 게 낫지." 나는 속말로 몇번 범버쿠 냠냠 범버쿠 냠냠 해보다가 결국 잠이 들었 다. "수르카 님, 수르카 님." 나는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분명히 소리는 들려오고 있었지만 눈 을 뜰 수도,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수르카 님, 수르카 님." 하지만 시간이 좀 지나자 가라앉은 밤공기를 타고 목소리가 들려온 덕 분에 나는 그 소리가 꿈속에서의 소리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누구... 세요...?" 나는 멍한 머리를 겨우 흔들어 깨우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사방은 온통 휘장을 쳐 놓은 듯 고요했다. 게다가 연금술사의 등도 모두 꺼져 있 어서 숨을 들이쉴 때마다 바람 대신에 어둠이 속으로 밀려 들어오는 것만 같았다. "저 스칼렛이에요. 들어가도 될까요?" "자, 잠시만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연금술사의 등을 켰다. 노란빛이 방안에 가득 들 어차자 방이 두 배는 더 따뜻해지고, 아늑해지는 것 같았다. "늦은 시간에 실례했습니다. 하지만 오지 않을 수 없었어요." 스칼렛은 내가 문을 열어주자마자 들어오라는 말도 안 했는데 발부터 방안으로 들여놓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늦은 시간인데, 안 자요?" "수르카 님. 강연이 끝나면 떠나시겠지요?" 내 질문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스칼렛이 물었다. 나는 좀 어이가 없기 는 했지만 그래도 근엄하게 허리를 꼿꼿이 펴고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돌아가서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요, 마법사 님. 아니, 수르카 님." 스칼렛의 눈동자가 노란 연금술사의 빛을 받아 반짝였다. 꼭 그래서 만 은 아니었겠지만 나는 눈을 좀 심하게 비볐는데, 덕분에 눈 속으로 눈곱 이 들어가는 바람에 몇 번 눈을 깜박여야만 했다. "지금 아니면 말씀 드리지 못할 것 같아서 이렇게 찾아 왔어요. 저, 마 법 수행을 떠날까해요. 아버님께서도 수르카 님과 함께 간다고 말씀드리 면 분명히 허락해 주실 거예요." 스칼렛의 얼굴은 진지하다 못해 너무 순진해 보여서 나는 속으로 '이렇 게 젊고 예쁘장한 아가씨도 저런 바보 같은 얼굴을 할 수도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스칼렛. 내일 얘기해요." 나는 이렇게 말하면서 스칼렛이 나갈 수 있도록 문을 열려고 했다. 따 라 오겠다니.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싶었다. 그것도 마법수행이 라는 이름을 붙여서 말이다. "허락해 주세요. 제 목숨은 어차피 수르카 님께서 가지고 계신 거나 다 를 바가 없지 않습니까. 아버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다고요." 목숨을 구해주었다. 목숨을 하나 빚졌다. 이거, 어디서 많이 듣던 얘기 같은데. 어쩌면 나는 머리 짧은 여자하고는 무슨 악연이 닿아 있는게 아 닐까 싶었다. "자. 알았으니까 이제 그만 돌아가요." "허락해 주신 거지요?" "알았다고 했지 허락한다고는 안 했어요. 스칼렛. 이제부터 우리가 가 야할 길이 얼마나 험하고 무시무시한 길이 될 지 알아요? 마물이 언제 어 디서 나타날 지 모르고 산적들도 틀림없이 만나게 될 거라고요. 스칼렛. 산적들을 만나면 어떻게 되는 지 알아요?" 나는 좀 겁을 줘서 보내 버리는 게 낫겠다 싶어서 말을 이런 식으로 꺼 냈다. "아마 스칼렛 같이 예쁜 여자는 바로 잡아가 버릴 거예요. 그리고 겁탈 하고나서 죽이겠지요." 스칼렛의 눈동자는 여전히 반짝이고 있었다. "아니면 죽이고 겁탈하던지."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스칼렛은 품에서 짧은 단검을 꺼내어 들었다. "자, 잠깐. 내가 그렇게 한다는 말이 아니라요, 내 말은..." 스칼렛은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단검을 휘둘렀다. 나는 절로 몸이 움 찔하면서 뒤로 물러섰지만 스칼렛의 칼날이 가른 것은 내가 아니라 스칼 렛의 오른 팔이었다. 굵은 핏줄을 건드렸는지 피가 순식간에 덩어리져 나 왔다. 그리고 나서 스칼렛은 내가 앗, 하는 소리를 낼 시간도 주지 않고 그 붉은 핏덩이를 한 입에 꿀꺽 삼키더니 말했다. "피는* 생명이니* 피를* 소중히* 하라*" 스칼렛은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있는 듯 했다. 노 란 불빛을 받은 스칼렛의 눈빛이 한 순간 보라색으로 빛나는가 싶더니 다 시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스칼렛의 팔뚝은 언제 그런 상처가 있었냐 는 듯이 멀쩡하게 돌아와 있었다. "비록 이정도 상처 밖에는 치료할 수 없지만 제 마법도 이 정도는 할 수 있어요, 수르카 님. 저 한 몸 지킬 정도는 된다는 말이에요." 스칼렛이 진지하게 나에게 말했다. 그래서 나는 입가에 피를 좀 닦으라 고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말로 꺼내지는 못했다. 스칼렛이 마법 학교를 다닌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이 정도 실력을 가지고 있을 지는 정말로 몰랐다. 사실 마법 학교의 마법을 조금은 우습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스칼 렛을 보니 우습게 볼 것만은 아니겠구나 싶었다. "저, 마법 학교에서 석차 낸다고 했죠? 스칼렛, 혹시 장학생 아니에 요?" 나는 잠시 몸을 움찔 했던 게 부끄러워서 머리를 긁적긁적 하면서 스칼 렛에게 물었다. "중간 정도예요, 제 마법 솜씨는." "그렇군요..." 나는 말꼬리를 늘이면서 전혀,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는 표정을 지어 보 였다. 그런데 동물을 부리고, 상처를 순식간에 치료하는 스칼렛이 중간 정도라면 마법 학교의 학생들 솜씨는 어느 정도라는 말일까. 나는 솔직히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르카 님. 짐작하고 계시겠지만 이 마법은 학교에서 배운 게 아니에 요." "예..." 나는 또 한 번 말꼬리를 늘였다. 나도 이미 다 알고 있었다는 듯이 말 이다. "사실 이런 마법들은 금지되어 있어요. 이 마법이 데리데 대 마법사의 뜻이 아닌데도 불구하고요. 수르카 님은 물론 데리데 님을 알고 계시지 요?" "예..." 스칼렛이 눈치만 조금 빠르다면 내가 지금 무슨 뜻으로 말하고 있는지 알아차릴텐데. 대답을 기다리던 스칼렛은 입가에 묻은 피를 혀로 핥고는 말을 이었다. "대마법사 데리데 님은 마법의 말은 그저 마음의 흔적일 뿐이라고 말씀 하셨어요. 이 말은 마법의 말은 전혀 중요하지 않고 그 마음이 중요하다 는 뜻이라고 배웠어요. 그런데 사비사 교장 (스칼렛은 여기서 잠시 머뭇 거렸다) 선생님은 그 말이 마음이 중요하고 마법의 말은 중요하지 않다는 데 너무 촛점을 맞추셨어요. 그 때문에 마법의 말은 책에 쓰여진 좋은 말 들을 외워서 하고, 오로지 마음만으로 마법을 행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 고, 그렇게 학생들을 가르치고 계시지요." 여기까지 숨도 쉬지 않고 말하고 나서, 스칼렛은 잠시 숨을 골랐다. "그런데 제 생각은 달라요. 마법의 말이 마음의 흔적이라면 그 흔적을 조심스럽게 따라가다 보면 그 마음에 닿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게 이 해한 마법이 진정한 마법 아닐까요?" "예..." 나는 한숨이 나올려고 하는 걸 겨우 참았다. "학교에서 제가 쓰는 마법의 말은 모조리 금지되어 있어요. 아버님은 제가 그저 마법의 소질이 있는 정도라고 생각하실 뿐, 제가 진정으로 꿈 꾸는 마법사의 길이 뭔지, 또 제 꿈을 위해서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할지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으세요. 그저 성황청에서 과외 선생님이나 불러오 면 그만이라고 생각하시죠." 나는 이번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스칼렛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히려 한숨을 내쉬고 싶은 것은 나인데 말이다. "그날, 사비치 다리에서 수르카 님의 마법을 보는 순간, 저는 깨달았어 요. 수르카 님이야말로 말의 흔적을 따라가 진정한 마음의 마법을 구사하 는 마법사이시라는 걸요. 저는 수르카 님을 따라 진정한 마법의 길을 걷 고 싶어요. 아버님께서도 허락해 주실 거에요." "마법의 길이라니요. 스칼렛. 내가 보니까 그런 마법의 말들을 찾아낸 능력만으로 스칼렛은 이미 훌륭한 마법사예요." "역시 그러셨군요." 스칼렛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스칼렛을 따라서 고개를 끄덕여볼까 했지만 무슨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는 지 몰라서 그냥 잠자코 있었다. "제 생각이 맞았어요. 수르카 님께서는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그 말 의 흔적을 찾아가 마음으로 이해해 마법을 쓰시는, 진정한 마법사 님이 맞군요. 부인하지는 못하시겠지요? 지금 마법의 말들을 찾아냈다고 말씀 하셨으니까요." "그럼, 그 마법의 말들이 스칼렛이 찾아낸 마법의 말이 아니었단 말인 가요?" "예. 그 마법의 말들은 그저 저희 가문에 전해 내려오는 마법의 말일 뿐이에요." 스칼렛의 말에 나는 이마 한 가운데에 기밀의 박치기라도 당한 듯한 느 낌을 받았다. 나는 대수롭지 않은 마법사이니 나를 따라서 마법을 배우려 고 한다면 포기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고 말해주려고 했다. 그런데 스칼 렛이 이렇게 말해버리다니. 이젠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눈앞이 캄캄하 기만 했다. "...하지만 아버님께 어떻게 허락을 받기가 쉽지 않을텐데요. 보아하니 아버님께서는 스칼렛을 아끼고 계시는 것 같던데요." 한참이 지난 후에야 나는 이렇게 그래도 마지막으로 한 번 스칼렛을 만 류해 보려고 말했다. "사실, 지금 저희 세스타 가문에서 마법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건 저 뿐이거든요. 전해내려오는 마법의 말이지만 이 마법의 말로 마법을 쓸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아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저는 그런 능력을 가 지고 태어났어요." 스칼렛이 이 말을 했을 때, 나는 용병단에서 들었던 타호루의 말이 떠 올랐다. 타호루는 귀족과 마찬가지로 마법사도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다 고 했다. 그렇다면, 적어도, 아케르가 말하는 귀족 없는 사회라고 해도 마법사는 특별한 존재로 남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별로 탐탁치 않게 생각하시는 것 같지만 집안에서 마법사가 나온다면 그것 또한 무척 기쁜 일이니 말리지는 않으실 거예요. 사실 아 버님은 우리 세스타 가문이 예전 같지 않게 피가 탁해져 가문의 마법들이 사라져가고 있다고 늘 걱정하셨어요." 이렇게 해서 나의 만류 계획은 완전히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순순히 스칼렛을 따라오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저, 그래도 일단 저는 오브라디 교수님과 함께 가기로 한 몸입니다. 오브라디 교수님께서는 저보다 연장자이시니 제 마음대로 일행을 늘리고 줄이고 할 수는 없는 일이지요." 혹시라도 스칼렛이 기분 나빠할까 봐 일부러 정중한 말투까지 써가면서 스칼렛에게 말했지만 스칼렛의 얼굴빛은 오히려 더욱 밝아졌다. "아, 그럼 더 잘됐네요. 내일 강연회 장에서 오브라디 교수님께 직접 여쭈어 보지요. 틀림없이 함께 갈 수 있을 거예요. 수르카 님. 함께 갈 수 있게 돼서 정말 기뻐요." 스칼렛은 이렇게 말하고는 종종걸음으로 방에서 나갔다. 나는 한참 동 안을 멍하니 서 있다가 침대에 몸을 뉘었다. 생각 같아서는 내일 강연회 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휑하니 도망가버렸으면 좋겠는데. 은근히 내일 강 연이 기대가 되기도 하고. 아, 모르겠다. 모르겠어. 나는 복잡한 머리를 두 손으로 꽉 움켜쥐고 눈을 질끈 감았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2478/12886 ━━━━━━━━━━━━━━━━━━━━━━━━━━━━━━━━━━━━━━━━ 제 목:[탐그루] 영혼의 에뮬레이터 8 138 관련자료:없음 20/20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2-30 00:13 조회:1620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 영혼의 에뮬레이터 8 - 드래곤 슬레이어 "...그렇게 수르카는 잠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곧 오브라디 교수 의 강연이 이어질 것이고, 강연이 끝나면 로스안으로 떠나게 될 거라는 걸 알고 있는 수르카는 꿈자리가 그리 좋지 만은 않았습니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너무 컸기 때문이겠지요." "그거 나하고 비슷한데 그래" 이제 온라인에 나타난 용 (처럼 생긴 도저히 정체를 알 수 없는 프로그 램)을 사냥하러 가야하는 내 처지도 수르카와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생각 이 들어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나저나 너무 피곤한 걸. 세헤라자드. 나 좀 자야 겠어. 수르카는 졸 립더라도 졸면 그만이지만 난 그랬다간 죽을 지도 몰라. 용한테 물려서 말이야." 나는 내 손으로 목을 조르는 시늉을 하면서 세헤라자드에게 말했다. 세 헤라자드는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세헤라자드. 너 정말로 그 용 잡을 수 있겠어? 스테아는 고양 이었지만 이번엔 용이라구. 진짜 용 말이야. 사실 리파이도 아톰도 다 너 만 철석같이 믿고 있는 모양이던데." 나는 이불을 목까지 끌어당기면서 이렇게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걱정 이 되는 게 사실이었다. "먼저 용에 대해서 좀 알아보죠, 뭐. 소드앤매직 시리즈에 출현하는 용 들은 보통 어떤 타입인가요?" "글쎄. 나도 자세한 건 모르고. 소드앤매직 시리즈는 보통 AS&M에 충실 하게 제작된다는 거 정도만 알고 있어." 나는 조금 우쭐대는 투로 세헤라자드에게 이렇게 말했다. "AS&M이 뭔가요?" "Advanced Sword & Magic의 약자지. 소드앤매직 사에서 만든 소드앤매 직 룰 북Rule Book이야. 어스넷 돌아다니다 보면 쉽게 찾을 수 있을 거 야." "예. 알았어요. 그럼 저, 피곤하시더라도 저 좀 전화선에 연결한 다음 에 주무시겠어요? 좀 찾아봐야지요. 적을 알아야 싸움에서 승리 할 수 있 지요. 사실 전에 찾은 밑그림 한 장하고 등록정보 정도 가지고 용과 맞서 기는 좀 무리일 것 같네요." 세헤라자드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그러고 보니 다들 피곤해서 그냥 빨 리 자자는 말만 했지 어떻게 용을 사냥할지는 전혀 이야길 하지 않았구나 싶었다. 그냥 세헤라자드에게 미루기만 급급하고 말이다. 소드앤매직의 프로라는 사람들이 싸움을 앞두고 전혀 프로답지 않은 행동을 하다니. 어 쩐지 나도 세헤라자드의 이야기에 나오는 수르카처럼 자꾸 부끄러워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랩탑을 들고 거실로 나가서 일단 충전을 시작한 다음, 세헤라자드 를 전화선에 이어주었다. "미안해 세헤라자드. 너에게만 힘든 일을 맡기는 것 같아." "너무 걱정마세요, 비류 님. 누가 알아요? 제가 드래곤 슬레이어가 되 어서 돌아올지." 드레곤 슬레이어라. 나는 웃음이 나오는 걸 겨우 참을 수 있었다. 세헤 라자드가 가죽으로 만들어진 갑옷을 입고서 손에는 커다란 창을 들고 드 래곤과 싸우는 모습을 생각해 보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이런 넌센스가 있나. 하긴. 미소녀 게임 중에도 드래곤 슬레이어가 등장하는 경우가 있 기는 하다. 하지만 그 경우에는 미소녀라고 해도 시커먼 살결에 우락부락 한 근육질의 외모를 강조하는 경우가 더 많은데. 이미 해는 정오가 넘어가 있었다. 잘 자고 일어나니 머리가 다 맑아지 는 느낌이었지만, 눈을 뜨자 이거 너무 늦게 일어난 거 아닌가 싶어 버럭 겁부터 났다. 그래서 나는 고무공이 튀기는 것처럼 잽싸게 자리에서 일어 나 거실로 나갔다. 거실에는 졸린 눈을 비비고 있는 아톰과 긴 생머리가 아무렇게나 흩어진 리파이가 있었다. "잘 잤어요, 비류 님?" "세헤라자드는 아직 안 일어났나? 랩탑에 안보이던데. 그 뭐더라, 스테 아라는 고양이도 안보이고." 둘은 이렇게 각각 인사를 건넸다. 그런데 세헤라자드가 아직 안보인다 는 말에 나는 예전에 했던 걱정이 잠시 되살아 났다. 혹시 그냥 도망쳐 버린 건 아닐까 하는 걱정 말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때와는 달리 마음 한 구석에 뭔가 묵직한 것이 내 걱정을 누르고 있었다. 이런 걸 믿음이라 고 하는 걸까? 사실 그렇게까지 말할 수는 없었지만 어찌되었건 적어도 세헤라자드가 분명히 다시 돌아오리라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냥, 아무 이 유도 없이, 나는 세헤라자드가 분명히 돌아오리라고 생각했다는 말이다. "냉장고 열어보면 뭐 아무 거라도 있을 거야. 근사한 정식을 찾을 수는 없겠지만 대충 속이나 채워 둬. 아무 것도 먹지 않는 것보다야 낫겠지." 아톰이 씻기 위해서 수도꼭지에 달려 있는 온도 센서를 만지작거리면서 말했다. 아톰의 조언대로 나는 냉장고를 열었다. 냉장고 안에는 정식은 아닌지 몰라도 적어도 길거리에 있는 패스트 후드 점에서 파는 것들이 가 득 차 있었다. "이걸 누가 다 사다났어요?" "여기 원래 관리인이 있었다잖아요. 지금은 오토가 그 일을 하고 있지 만. 그런데 신경쓰지 말고 일단 좀 먹어요, 비류 님." 헝클어진 생머리 그대로 리파이가 말했다. 좀 묶기라도 하지. 만약에 지금의 리파이를 밤길에 만난다면 귀신이나 만난 줄 알고 기절할지도 모 르겠다 싶었다. "저, 머리 좀 어떻게 하지 그러세요. 그거 혹시라도 샌드위치 속에서 나오면 끝내주겠는데요?" 나는 입에서 한도 끝도 없이 긴 머리카락을 뽑아내는 시늉을 하면서 리 파이에게 말했는데, 리파이는 그냥 피식 웃고는 머리를 한 번 두 손으로 넘기고는 말았다. "적어도 샌드위치에서 내 머리카락이 나오는 일은 없을 거에요." 나는 냉장고에서 샌드위치 대신에 두툼한 햄버거와 콜라 캔을 꺼냈다. "그럼 햄버거에서도 나올 일 없겠네요. 그거 참 다행이에요." 나는 일부러 비꼬는 투로 말했다. 사실 리파이가 머리를 박박 밀건, 아 님 완전히 산발을 하건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긴 했다. (좀 보기야 흉하 겠지만) 그래도 애써서 한 충고를 이렇게까지 무시할 건 없지 않나. 아톰 말 그대로 대충 속을 좀 채우고 나니 기운이 났다. "속이 든든해야 싸움도 하지. 소드앤매직에서도 봐. 병사들 굶주리게 하고 전투에서 이길 수 있어?" 아톰이 물이 뚝뚝 떨어지는 낯을 하고, 손에는 빵과 우유를 들고서 말 했다. "수건 없어요?" 리파이는 머리가 엉망이더니 아톰은 얼굴을 씻고 나서 수건으로 닦을 줄도 모르다니. 아무리 게이머라지만 해도 좀 너무하는 거 아닌가 싶었 다. "있어. 수건뿐이겠어? 에어타월에 오존 소독까지 완벽하게 다 준비되어 있지." "그럼 좀 작동시켜 보는 건 어때요?" "귀찮아." 아톰은 정말 귀찮다는 얼굴로 말하고는 빵을 입에 넣고 씹기 시작했다. 나는 뭐라고 한 마디 더 할까 하다가 그만 두었다. 세헤라자드 이야기에 나오는 용병단도 전투 말고는 완전히 자유였으니, 우리도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다 싶기도 했고, 얼굴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이런 말 할 자격 이 있나 싶기도 해서였다. 그래서 나는 대충 배가 좀 불러오자 바로 세면 실로 가서 씻기로 했다. 세면실은 집에 비해서 그렇게 호사스러운 건 아니었고, 보급형 보다 조 금 나은 수준의 것이었다. 냉 온수 수도꼭지와 네방향 샤워 시설 (요즘에 여덟방향 샤워시설도 많이 쓴다고 하던데), 간이 증기탕, 에어타월 정도 가 전부였다. 나는 일단 네방향 샤워시설로 몸을 씻고, 증기탕에서 잠깐 땀을 흘린 다음에 에어타월로 몸을 말렸다. 이를 닦아야 겠는데 생각해 보니 칫솔이 가방 안에 있었다. 그래서 나 는 머리를 완전히 다 말린 후에 천천히 세면실 밖으로 나갔다. 리파이와 아톰은 진지하게 뭔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두 사람을 지나 가방에서 칫솔을 꺼네 다시 세면실로 향했다. "비류. 칫솔은 세면실 뒤에 많이 있는데 하나 꺼네 쓰지. 칫솔 함부로 가지고 다니다가 바이러스 감염될라." "이거, 아주 싸구려 칫솔은 아니에요." 나는 내 칫솔을 아톰에게 들어 보이면서 말했다. 적어도 이렇게 갖고 다니는 칫솔은 진공모드로 전환되는 칫솔이라는 걸 말해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아톰은 별로 관심이 없는지 다시 리파이와의 대화에 몰두했다. 이를 닦으며 나는 거울을 보았다. 수염이 여기저기 비죽 자란 얼굴을 보니, 이제 앞으로 일어나게 될 일들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이러다가 내 가 제명에 못죽지. 나는 나도 모르게 이런 할아버지 같은 생각을 하고 말 았다. 아무래도 세헤라자드 얘기의 영향이 큰 것 같았다. 처음에는 그저 호기심으로 듣기 시작한 세헤라자드의 이야기였다. 하지 만 이제는 어쩐지 자기 전이나 시간이 날 때마다 꼭 들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곤 한다. 내가 잊어버리면 세헤라자드가 알려주고, 세헤라자드 가 아무 말 없으면 내가 해 달라고 하니 말이다. 왜 세헤라자드의 이야기 에 나는 자꾸 빠져들고 있는 걸까. 아마 세헤라자드 이야기의 주인공이 나와 비슷한 점이 있어서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한 번 해보았다. 어쩌면 세헤라자드가 그걸 노리고 이야기를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이야기가 끝나 면 세헤라자드는 지워져야 할 운명이었으니. 이제는 세헤라자드를 지워주겠다고 한 약속도 희미하게 여겨지고 있다. 그 젯나이트라는 노인과의 약속이 생경하게만 느껴졌다. 이야기가 끝나면 세헤라자드는 어떻게 할 까. 순순히 지워달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전에 도망쳐 버릴지도 모르는 일이고. 아마 전자의 경우라면 나는 망 설일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이제는 내 손으로는 결코 지워버리지 못할 지 도 모르겠다. 젯나이트도 나와 같은 심정에서 세헤라자드를 지워달라고 부탁했던 걸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왜냐하면 세헤라자드가 말하길 아 버지는 자신을 제대로 실행도 시켜보지 않았다고 했으니까 말이다. 일단 의문이 떠오르기 시작하자 머릿속을 꽉 채워버릴 만큼 복잡한 생 각들이 자꾸만 떠올랐다. 이럴 때는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지. 나는 답 답한 마음이 들기만 했다. 그러고 보니 이를 너무 오래 닦고 있었다. 나는 대충 입속을 소독수로 행구어 낸 다음 세면실에서 빠져 나왔다. "어이, 비류. 좀 앉아봐. 할 얘기가 있으니까." 아톰이 손을 흔들어 나를 불렀다. 나는 가방 속에 칫솔을 집어 넣은 다 음에 거실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 자동으로 소파의 쿠션이 조정되었지만 너무 뒤로 몸이 숙여지는 바람에 몸을 앞으로 기울여야 했다. "비류 님. 세헤라자드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야 할 것 같아요." 리파이가 아주 조심스러운 어투로 말했다. "세헤라자드는 지금 여기에 없어요. 용 사냥을 하려면 정보가 있어야 한다면서 어스넷으로 들어갔거든요." "그래도 세헤라자드는 사람이 아니라 프로그램이잖아. 누가 알아? 여기 에 보이지 않게 멀티 창을 열어놓고 우리가 하는 말을 듣고 있을지." 하지만 말을 하고 있는 아톰도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이 렇게 큰 소리로 말하는 걸 보니 말이다. 만약에 듣고 있다면 세헤라자드 는 어떤 기분이 들까 궁금했다. "세헤라자드의 능력은 저도 몰라요. 말을 잘하고, 춤을 좀 잘 춘다는 것 정도? 참. 거기다가 보안 시스템을 뚫을 수 있는 능력도 있는 것 같아 요. 어느정도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보안 시스템이요? 그거 다행이네요. 만약에 세헤라자드를 제대로 이용 할 수만 있다면, (리파이는 여기서 잠시 랩탑쪽으로 눈치를 살폈다) 아 니, 세헤라자드가 우릴 도와 줄 마음이 있다면 MS사의 여러 비밀 문서들 을 볼 수도 있겠네요." "그 정도 보안 시스템도 뚫을 수 있을 지는 모르겠어요. 세헤라자드가 뚫은 건 제 보안 시스템이었거든요." 나는 세헤라자드에게 들켜버린 내 '사적인' 공간을 떠올리면서 말했다. "그래? 그럼 오늘 어스넷에 가서 크랙 사이트 좀 돌아보라고 하지 그랬 어." "아톰. 지난 다음에 그런 얘기 해봐야 아무 소용없어." "그런 것 보다 정말로 세헤라자드가 우릴 도울 마음이 있는지 알아보는 게 더 급하지 않을까요?" 이렇게 말하고 나니 어쩐지 이제는 도저히 FHA에서 발을 뺄 수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FHA사람들이 할 생각을 내가 하고 있으니 말이 다. 어쩌면 나는 이렇게 말했어야 했을지 모른다. '그것보다 내가 FHA를 도울 마음이 있는지를 먼저 알아보는 게 우리한테는 더 급한 일 아닐까 요?' 그런데 '우리'라고? "그래. 어찌되었건 세헤라자드를 우리 팀으로 생각하는 게 중요하긴 해. 아마 와일드건도 같은 생각일 거야. 잘하면 어스넷의 인공 생명체와 동맹을 맺게 될 지도 모르겠어. 그런데 우리하고 동맹을 맺을 만한 조직 을 갖추고 있을까? 어스넷 인공 생명체들이 말이야." 아톰은 키득거리면서 말했다. 아톰은 도무지 진지할 줄을 모르는 사람 이었다. "아톰. 그런 얘기는 나중에 하고, 먼저 세헤라자드가 오길 기다려 보자 구. 일단 돌아오면, 우릴 얼마만큼 도울 생각인지, 또 진심으로 도울 생 각인지, 그렇다면 능력은 어느 정도 인지 알아보는 게 먼저일 것 같아." 역시 리파이는 여기에서도 리더다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다만 머리가 엉망이라는 점만 빼면 말이다) "그런데 언제 떠났는데 아직 안돌아오고 있는 거지?" 아톰이 묻자 나는 불안감이 다시 고개를 쳐드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아 무래도 불안감을 누르고 있는 그 무거운 것이 믿음은 아닌 것 같았다. 아 마 그저 예감 정도가 아닐까 싶었다. 내 소드앤매직 경험에 따르면, 예감 에 따라서 움직이는 것만큼 위험 한 것도 없는데.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2479/12886 ━━━━━━━━━━━━━━━━━━━━━━━━━━━━━━━━━━━━━━━━ 제 목:[탐그루] 영혼의 에뮬레이터 8 139 관련자료:없음 16/16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2-30 00:13 조회:1657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비류 님. 그나저나 이제는 완전히 우리와 함께 하시기로 한 것 같네 요. 반가워요. 이렇게 함께 일하게 되서요." "...예." 나는 그냥 조그마한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다. 어찌되었건 이진우 수 사관도 내가 FHA와 함께 할 거라 생각하고 있을 거였고, 또 이나바머인지 뭔지 하는 녀석을 잡기 전에는 이진우 수사관과의 거래가 끝난 게 아니니 까 어찌되었건 당분간은 FHA와 함께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왕 함께 한 다면 두 가지를 분명하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함께 하는 동안은 최선을 다하자는 거였다. 이건 소드앤매직 온라 인에서 내가 배운 것들 중 하나로, 일단 누군가를 돕기로 결정하게 되면 무조건 최선을 다해서 하는 게 좋다는 거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중에 는 아무 소득도 없이 멍청하게 시간만 낭비하게 되기 십상이고, 거기다가 덤으로 돕기로 약속한 사람의 신뢰도 잃게 되기 마련이다. (상대가 NPC가 아니라 진자 사람인 경우에만 한정된 일이지만) 이 정도의 깨달음도 없이 게임을 해왔다면 아마 나는 아마추어 리그의 고수가 될 수 없었을 것이 다. 내가 알고 있는 유명한 철학자의 말이 있다. '야구의 세계에는 야구의 철학이 있고, 게임의 세계에는 게임의 철학이 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각자의 인생 철학이다.' 사실 세상에 나쁜 게 얼마나 있겠는가. 다 자기 하기 나름이지. 게임에 빠져서 인생 망가진 사람 얘기야 어스넷 게시판 어디에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지만, 게임 열심히 해서 인생 잘 살고 있는 사람 얘기는 게시판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그만큼 게임을 열심히 해서 좋게 된 사람이 많다는 얘 기 아닐까? 개가 사람을 물었다면 뉴스가 되지 않지만 사람이 개를 물었 다면 뉴스가 된다는 말처럼 말이다. 그런데 아무리 이렇게 생각을 하긴 했어도 어쩐지 불법단체와 함께 한 다는 사실이 찜찜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불법적인 일을 내가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는 건 아니다. 어스넷을 누비고 다니면서 불법적으 로 알아낸 패스워드가 얼마이고, 또 등록번호가 얼마인가. (미성년자 성 인물 접촉은 말할 것도 없고) 하지만 그런 것과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 은 같은 불법이지만 분명 다른 점이 있었다. 얼굴이 보이는 사람이 있다 는 점도 그랬고, 나를 알고 있는 어스폴 경찰이 있다는 점도 그랬다. 다 시 말해서 나는 더 이상 나를 숨길 수 없고, 얼굴이 밖으로 드러나 있다 는 점이 지금의 내 처지라는 거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게 해 뒀으면 해요." 나는 이렇게 말했다. 리파이와 아톰의 시선이 동시에 나를 향했다. 나 는 꼭 뭔가에 찔리는 느낌이 들었지만 망설이지 않고 말을 이었다. "이번 일은 분명히 같이 하겠어요. 세헤라자드가 싫다면 설득해서라도 요. 하지만 정식으로 FHA의 일원이 된 건 아니라는 걸 분명히 해 두고 싶 어요." 내 말에 아톰은 어깨를 으쓱하면서 '당연하지' 하는 표정을 지었고 리 파이는 뭐라고 말하려다 그만두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침묵이 있었다. 나는 리파이와 아톰의 얼굴을 번갈아 가면서 바라 보았다. 아톰은 고개를 숙이고서 열심히 코를 긁는 척 하면서 속을 후비 고 있었고, 리파이는 '내 얼굴에 뭐 묻었나?'하는 표정으로 눈을 깜박였 다. 이거 혹시 나만 혼자서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 거 아닐까. "그런데 리파이, 용하고 싸워본 적 있어?" "소드앤매직에 용이 나왔던 건 1편에서, 그것도 몬스터로 잠깐 등장했 던 걸로 알고 있어. 그 이후엔 없지 않았나?" "그래. 내 기억에도 그래. 아마 다른 게임들하고의 차별화 전략 때문이 었겠지. 용이 중요한 유니트가 되는 게임이 하도 많으니까 말이야. 소드 앤매직에서 최고의 무기는 사람이잖아? 최고의 유니트도 바로 사람이고. 물론 최고의 몬스터도 사람이고." "그래. 소드앤매직의 모토는 보다 사실적인 게임이지. 만약 누군가가 용을 소드앤매직에 침투시킨 거라면 그런 사실적인 모토에 제동을 걸기 위한 한 방편인 것 같은데, 비류 님 생각은 어떠세요?" 리파이가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하지만 내 생각은 좀 달랐다. 사실 적인 게임과 용의 등장과는 별로 상관이 없을 것 같았다는 말이다. "세헤라자드 말로는 용의 원화가 프로그램에 깔려 있었다고 하던데요?" "그래?" 아톰은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방으로 뛰어들어가더니 시디 한 장을 가지고 왔다. "한 번 확인해 보지." 아톰은 시디를 집어넣더니 무서운 속도로 파일을 분해해 낸 후, 그림 파일들을 찾기 시작했다. 프로 게이머라기 보다는 해커 같은 모습이었다. 그런데 저 많은 그림 파일들을 일일이 다 찾아보려면 시간 좀 걸리겠다 싶었다. "잠깐, 아톰. 그거 게임 상에는 안 뜨는 화면일 거 아니야? 내가 한 번 찾아볼게." 리파이는 이렇게 말하고는 아톰이 쥐고 있던 마우스를 빼앗아 들었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마우스를 움직여나갔다. "프로그램을 분석해서 사용하지 않는 파일들을 찾아주는 프로그램이에 요." 내가 좀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자 리파이가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역시 막무가내 해커와 프로 프로그래머는 이런 점에서 다르구나 싶었다. "찾았어요. 여기." 리파이는 화면에 몇 장의 그림을 띄웠다. 세헤라자드가 말했던 용의 그 림과 처음 보는 여자의 얼굴 몇 장, 그리고 날개가 달려 있는 말이 끄는 마차의 모습이 있었다. "이게 뭘까?" "글쎄. 아마 게임에 쓰려고 했다가 나중에 삭제된 유니트들인 것 같아. 봐. 완벽하게 삼차원으로 전신이 다 되 디자인 되어 있잖아, 여자 같은 경우에는 장신구들도 다 만들어 놓았고." 리파이가 마우스로 그림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쓰지도 않을 거 뭐 하러 이렇게 남겨 놨을까. 용량만 차지하게 말이 야." 아톰이 머리를 긁적이면서 리파이에게 말했다. "아마 기념으로 남겨 놓았을 거야. 프로그래머들은 의외로 그런 걸 좋 아한다고. 기념으로 남겨두는 거 말이야." "그런데 사실적인 거 좋아하는 소드앤매직에 왜 용이나 하늘을 나는 마 차 같은 걸 기획했을까." 혼잣말처럼 아톰이 중얼거리자 지금이다 하고 내가 받아쳤다. 소드앤매 직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함부로 소드앤매직을 이야기해선 안되지. 아무리 원화에 대한 언급이라고 해도. "뭐가 등장하는지가 사실적인 게임을 만드는 데 그렇게 중요한 것 같지 는 않아요. 사람이 칼만 들고 싸운다고 해도 얼마든지 황당해질 수 있는 거고, 또 용이 아니라 환타지 게임에 핵폭탄이 등장한다고 해도 얼마든지 진짜 같을 수 있지 않을까요?" "아, 대단한데 비류. 무슨 문학 강좌 듣는 기분이야." 아톰은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잠깐만요. 이걸 봐요. 용은 유니트가 아니었던 모양이에요." 리파이의 말에 모니터를 들여다보기는 했는데 유니트가 아니었다는 말 과는 전혀 상관 없는 이상한 문자들이 화면에 떠 있었다. "이걸 보면 용은 아마 제 3의 세력으로 등장시키려고 했던 모양이에요. 유니트들을 부릴 수 있게 되어있거든요. 명령을 받아서 움직이는 게 아니 라요." 프로그램 소스와 관계 있는 화면인 모양이었는데, 나는 그냥 고개만 끄 덕일 수 밖에 없었다. "그래. 그런 식으로 다른 게임이랑 차별화를 시키려고 했군. NPC로 용 을 등장시킨다. 어쩌면 용이 PK전문 요원일지도 몰라, 소드앤매직사에서 고용한. 가만. 그럼 PK 사냥꾼들 중에 전문 드래곤 슬레이어가 탄생했을 지도 모르겠는데. 하하하. 재미 있는데 왜 등장 시키지 않았을까?" "어쩌면 뭔가 문제가 있었을지도 모르지요. 여기있는 프로그램 만으로 더이상 확인은 불가능 하지만요." "그럼 스스로 성장했을지 모른다는 세헤라자드의 말이 맞지도 모르겠네 요." 나는 리파이의 말에 콧등을 긁으면서 말했다. "스스로 성장했다고 가정해 보면, 가만있자. 드래곤. 그래. 부루터스는 드래곤이라고 했어. 스스로 성장한 인공 생명체와 MS사에서 만들고 있는 서치로봇. 뭔가 관련이 있을지도 몰라." 아톰이 눈을 반짝이면서 말했다. 별로 진지할 때가 없는 아톰이긴 하지 만 가끔은 도움이 되는 말도 하곤 한다니까. "뭔가 실마리가 잡히고 있어. 드래곤, 용, 서치로봇. 무슨 연관이 있는 것 같지 않아?" "그래. 소드앤매직에 나타난 용하고 MS사의 서치로봇이 분명 다르긴 하 지만 어떻게든 연관이 있는 것 같아. 이진우 수사관이 우리에게 소드앤매 직 사 코리아합중국 지부 카드키를 준 것도 그렇고, 또 부루터스가 남긴 그 드래곤이라는 문자도 그렇고 말이야." 조금은 들뜬 분위기로 아톰이 말했다. 잠시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그 시간 동안 나는 용과 드래곤과 서치로봇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있었는데, 아마 리파이와 아톰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부루터스는 어디로 사라져 버린 거지? 켄 살해범은 누구고 말 이야." 아톰이 침묵을 깨고 말했다. 그러자 일순간에 분위기는 가라앉아 버렸 다. (그리 높게 뜨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그래. 아직 하나도 해결 된 건 없어." "원점이라는 표현이 더 맞겠군요." "모든 여행에는 시작이 있기 마련이지요." 나와 리파이가 한 마디씩 한숨을 대신해서 털어놓고 있는데, 반가운 목 소리가 들려왔다. 세헤라자드였다. 나는 세헤라자드가 랩탑에 떠 있는 모 습을 보자 랩탑의 액정 화면이라도 한 번 쓰다듬고 싶은 심정이 되었지만 꾹 참으면서 정보는 좀 얻어 왔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럭 저럭이요." "그런데 왜 이렇게 늦은 거야? 걱정했잖아." 내 표정이 '도망쳐 버렸을까봐 걱정했다'는 걸로 보이면 어떻게 하나 싶었는데 세헤라자드의 얼굴을 보니 '어디 다쳤을까봐 걱정했다'는 걸로 보였던 모양이었다. 세헤라자드는 조금 부끄럽다는 얼굴이 되어 있었다. "다들 주무시고 계시길래 좀 자세히 조사하느라고 늦었어요. 먼저 용에 대한 정보를 좀 얻고 나서 소드앤매직 사에 침투해 봤어요. 보안 시설이 엄격하게 되어있기는 했지만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요." 침투라는 말에 리파이와 아톰이 눈을 반짝였다. "그래서?" 좀 다급하다는 듯이 아톰이 몸을 랩탑쪽으로 가까이 하면서 말했다. 세 헤라자드는 조금 인상을 찌푸리면서 뒤로 물러선 다음에 잠깐 뜸을 두고 말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2545/12886 ━━━━━━━━━━━━━━━━━━━━━━━━━━━━━━━━━━━━━━━━ 제 목:[탐그루] 영혼의 에뮬레이터 8 140 관련자료:없음 16/16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2-31 00:12 조회:1567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게임 망 자체를 하드웨어적으로 차단해 놨기 때문에 여기서 해킹해서 소드앤매직 온라인으로 침투하는 건 불가능한 것 같던데요. 선을 아주 끊 어놨더라고요." "이진우 수사관이 카드키를 준 게 다 이유가 있었군." 아톰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스폴의 정보망이 넓다는 걸 다시 한 번 확 인시켜준 셈이 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왜 직접 조사하지 않고 우릴 시킨 걸까?" "아톰. 어스폴이 용에 대해 관심이 있다고 해도 특별한 사건이 있는 것 도 아닌데 덮어놓고 소드앤매직 온라인 망을 조사할 수는 없는 일 아니겠 어? 세헤라자드 말 그대로 망을 하드웨어적으로 차단시켜 놓았다면 뭔가 숨기고 있는 게 분명하긴 하지만 말이야. 그렇다고 어스폴이 요원을 보내 서 함부로 수사했다가 만에 하나 들키기라도 한다면 어떻게 하겠어? 당장 어스폴의 월권행위다 뭐다 하면서 여론이 좋지 않게 돌아갈 게 뻔한데." "그래. 위험 부담은 줄이고 될 수 있는 한 우리를 부려먹겠다 이건 거 같군." "손을 더럽히기 싫다는 말일 수도 있지요." 나는 이렇게 말했다. 어쩐지 내가 세헤라자드 이야기에 나오는 수르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용당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기분 나쁘 게도. 하지만 만약 이용당하고 있는 거라고 해도 호락호락 넘어가지는 않 을 작정이었다. 좀 더 머리를 쓰고 운이 닿아 준다면 오히려 우리가 이진 우 수사관을 역이용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와일드건에게 보고해야겠어요, 비류 님." 리파이었다. "우리가 얻은 정보하고 소드앤매직 온라인 망에 침투하겠다는 거, 그리 고 세헤라자드 얘기하고 비류 님은 정식 일원이 된 게 아니라는 것도 보 고하죠." 리파이의 말에 나는 잠시 생각을 해 보았다. "저, 세헤라자드 이야기는 좀 미뤄줄 수 없어요?" 나야 일단 드러나게 되었으니 별 수 없다손 치더라도 세헤라자드만큼은 위험에 빠뜨리고 싶지 않았다. "아직 세헤라자드의 존재는 세상에 알려져서는 안될 것 같아요. 어떻게 알아요. 광신도들이 공격해 올 수도 있고 법적으로 문제가 될 수도 있어 요. 거기다가 언론이 안다면 크게 떠들어 댈 게 분명하고요. 지금 MS사라 는 적 하나를 두고 싸우기도 벅찬데 언론에다가 법이라는 적까지 만들어 서 되겠어요?" "하긴. 법하고 언론이야 MS사 편을 들게 분명하긴 해요." 리파이는 일단 수긍하는 눈치였다. "거기다가 광신도들은 또 얼마나 무섭다고. 아마 길거리에서 성수를 뒤 집어 쓰게 될지도 몰라. 하하하." 아톰은 별로 우습지도 않은 말을 해 놓고는 혼자 크게 웃었다. "그렇다고 보고를 안할 수는 없으니까 세헤라자드 얘기만 빼고 보고 하 지요. 괜찮겠지요, 비류 님?" 리파이는 아톰을 한 번 쏘아 본 다음에 이렇게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 덕였다. "이번 일은 우리 팀이 하는 일로 하지요. 우리는 이제 한 팀이에요." "팀 웍이 입증되지는 않았지만." 리파이가 아톰을 다시 한 번 쏘아보자 아톰이 얼른 덧붙였다. "그래도 리더의 능력은 충분하니까 말이야." 역시 여자의 싸늘한 눈초리는 누가 봐도 무섭구나 싶었다. "그리고 소드앤매직 사 약도하고 평면도, 그리고 보안 시스템하고 침투 경로 같은 걸 좀 알아왔어요. 그리고 제가 작전을 좀 짜 왔는데 괜찮겠지 요? 보안장치하고 경비상태를 염두에 두고 짠 작전이니까 그리 어렵지는 않을 거에요." 세헤라자드가 말했다. 작전까지 짜 왔다니. 이로서 세헤라자드가 FHA를 도울 마음이 있다는 게 분명해 진 것 같았다. 나는 어쩐지 세헤라자드가 나를 따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마음이 뿌듯해졌다. "이거, 아무래도 리더는 세헤라자드인것 같아요." 리파이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자 세헤라자드는 얼굴을 붉혔다. "리더라니요. 그냥 드래곤 슬레이어라고 불러주세요." 세헤라자드의 말에 우리 모두는 오랜만에 유쾌하게 웃을 수 있었다. 세헤라자드의 계획에 따라서 우리는 오토가 모는 후버카에 올라 소드앤 매직 온라인 코리아 합중국 지부가 있는 영월 지역으로 향했다. "그런데 영월 지역에 게임 회사들이 모여 있는 이유가 뭘까?" 앞좌석에 앉은 아톰이 뒤를 돌아보면서 물었다. 나는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가만히 있었지만 세헤라자드는 이어폰을 통해서 자신의 생각 을 말했다. "땅값이 싸서요. 세헤라자드가 그러네요." "세헤라자드 말이 맞아요. 영월지역은 사실 사람이 살기에는 부적합한 곳이에요. 지난 세기에 댐을 지었거든요." "맞아. 댐들. 지난 세기에 지은 댐들이 다 문제지." "그 지역에 안개가 심해 근처에 사는 주민들이 각종 호흡기 질환으로 고생한다는 얘기는 이미 지난 얘기지요. 사실 더 중요한 건 생태계 파괴 의 문제에요. 수많은 물고기들이며 새들이 다 죽어버렸지요. 흐르던 강물 을 막았으니 문제가 생기지 않을 리가 있겠어요?" "이해가 안 가요. 그때 사람들은 어떻게 그런 뻔한 결과도 예측 못하고 마구 댐들을 지어 놨을까요. " "정부가 하는 일이 다 그렇지 뭐. 댐만 그런가? 간척지는 또 어떻고. 잘 살던 물고기들 다 다른 나라로 내 쫓아 버린 게 간척사업 아니야? 갯 벌을 모조리 다 없애 버렸으니 삭막해지지 않을 수가 없지. 또 핵 폐기물 시설은 어때? 정부가 하는 일 중에 제대로 된 게 뭐가 있겠어. MS사의 서 클 프로젝트에 참가한 거 빼면 내 생각에는 하나도 없는 것 같아." 아톰은 이렇게 빈정거리는 투로 말했지만 리파이는 차분하게 나에게 설 명 조로 말했다. "그때는 그때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겠지요. 바로 눈앞에만 봤을 때는 셀 수 없이 많은 이유가 있었겠지요. 비류 님도 한 번 잘 생각해 보세요. 지금 FHA를 돕는 일도 바로 눈앞에 닥쳤기 때문에 하고 있다고만 생각하 지 마시고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든 나를 FHA에 끌어들이려고 하는 것 같 아서 마음에 들지 않기는 했지만 하여간 리파이는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일이든 이렇게 차근차근 챙겨주려고 하는 걸 보면 말이다. 역시 리파이는 정말 누나 같은 사람이구나 싶었다. 후버카는 천천히 국도를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차창 밖으로 과거에는 농촌이었을 황량한 벌판과 시커먼 색의 비둘기들이 날고 있었다. 비둘기 가 한 때는 평화의 상징이다 뭐다 해서 사랑 받았던 적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토종 텃새인 참새를 몰아낸, 그저 흔한 텃새의 한 종류에 불과하다. 지난 세기 올림픽이 열렸을 때 대량으로 날려보낸 비둘기들이 이제는 참새를 몰아내고 이렇게 허공을 날고 있었다. 탁한 공기에 적응하 기 위해 깃털도 어두운 색으로 털갈이를 하고서 말이다. "난 저런 삭막한 농촌 풍경이 싫어. 높은 건물들과 네온사인, 그리고 길거리에 빛나는 수많은 헤드라이트... 이런 게 더 좋지." 나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비류 님. 너무 긴장하고 계신 거 아니에요?" 세헤라자드의 말에 나는 절대 아니라고 했다. "어떻게든 되겠지. 차라리 여기서 끝나는 게 나을지도 몰라. 이렇게 어 스폴에게 이용당하고 또 살인 사건 참고인이다 뭐다 해서 쫓겨다니느니 말이야." "그럼 전 어쩌고요." 세헤라자드의 목소리는 풀이 죽어있었다.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분 명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으리라 싶었다. "걱정하지 마. 세헤라자드는 염려없어.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너만은 보살펴줄께." 나는 일부러 좀 밝은 기색으로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이 말은 사실 내 가 듣고 말이었다. 누구 한테라도 말이다. "비류 님도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보살펴 드릴께요." 세헤라자드의 말을 듣고 나는 깜짝 놀랐다. 세헤라자드가 내 속마음을 읽었나? 그래도 그 말을 듣자 가슴 한 켠이 뭉클했다. 사실 세헤라자드에 게 긴장한 거 아니냐는 말을 듣기 전까진 내가 긴장하고 있다는 생각을 해보지 못했다. 그런데 세헤라자드에게서 구체적인 계획까지 브리핑 받고 나니까 긴장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제 나는 맨손으로 얼굴을 드러 내고 불법을 저지르기 위해 가고 있는 것이다. 변변한 장비 하나 없이 말 이다. 믿을 수 있는 건 세헤라자드 하나 뿐이었다. "절 믿으세요?" "물론."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네가 날 믿어 줬으니까." 세헤라자드는 잠시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하릴없이 차창밖에 날 고 있는 거무튀튀한 색의 비둘기들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으... 이 묘 한 분위기는 도대체 뭐지. 살갖에 소름이 돋는 것 같다. 어떻게든 이 묘 한 분위기를 벗어나야 될텐데. "그런데 수르카는 어떻게 됐지?" 나는 될 수 있는 한 자연스럽게 보이기 위해서 노력하면서 세헤라자드 에게 말을 건넷다. 그런데 내 말에 반응을 보인 것은 리파이였다. "수르카가 누구죠?" "음. 세헤라자드하고 저만 아는 비밀 암호에요." 나는 리파이에게 입에 검지 손가락을 가져가면서 이렇게 말했다. 세헤 라자드와 리파이가 동시에 웃음을 지었다. "수르카는 이제 오브라디 교수의 강연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것 도 강연회 장 제일 앞줄에서 세스타 가문의 오하루와 함께 말이지요. 하 지만 그 강연회는 수르카가 생각했던 것 같은 엄숙하거나 딱딱한 분위기 의 강연회는 아니었어요. 오히려 그 강연회는......" 세헤라자드의 이야기는 이렇게 다시 시작되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2546/12886 ━━━━━━━━━━━━━━━━━━━━━━━━━━━━━━━━━━━━━━━━ 제 목:[탐그루] 라면 전쟁 141 관련자료:없음 22/22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2-31 00:12 조회:1631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 라면 전쟁 강연회 장은 천 명은 들어와서 앉을 수 있을 만큼 넓었지만 좌석은 얼 마 되지 않았다. 앞쪽으로는 정해진 좌석이 있었다. 그 좌석에 앉은 사람 들은 옷차림으로 보아 하나같이 귀족 아니면 자이벌 가문의 사람인 것 같 았다. 나머지 사람들은 앉아 있는 지체 높으신 분들의 뒤쪽으로 서 있었 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유명한 교수가 와서 강연을 한다니 허영심 때문에 찾아왔는지 잡담이나 하면서 소란스럽게 강연을 기다리고 있었다. 앞쪽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더했다. 그 사람들은 서로 인사를 하느라 정신이 하 나도 없어 보였다. "아, 솔로 가문의 나하인 님. 오셨군요." "예. 시트 가문의 게우배 님도 오셨습니까? 아, 이런 자리에서 만나 뵙 게 되니 어쩐지 학식이 높아진 기분입니다. 강연회 끝나고 조금 가르쳐 주시지요." "하하하, 지나친 겸손의 말씀이십니다." 뭐 이런 종류의 전혀 알맹이 없는 겉치레 인사들 이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냥 방에서 떠날 준비나 하고 있겠다면서 남은 모짤트와 그 레텔이 조금은 부럽기도 했다. 나도 방에 남아서 쉴걸 그랬나. "오브라디 교수님. 조금이라도 많은 사람들이 들어오게 해야 한다는 오 하루 님의 특별 지시 때문에 조금 소란스럽게 되었습니다. 이 일을 어쩌 지요? 이게 다 제 불찰입니다." 비토는 강연회장에 들어서기 전에 어쩔 줄을 몰라하면서 꼭 죄지은 사 람처럼 머리를 조아리며 오브라디 교수에게 말했다. "아. 그거 잘됐군요. 오늘 강의 내용을 많은 사람이 듣게 된다니 말입 니다. 모든 일은 좋은 쪽으로 생각하는 편이 낫지요. 치통 하나만 빼면 말입니다. 하하하." 오브라디 교수는 강연회 장에 들어서며 이렇게 말했다. 사실 나는 얼마 되지 않는 시간 동안에 이렇게까지 준비를 해 놓은 것 에 내심 놀라고 있었다. 강단은 탐그루의 성년식 때 본 것보다 훨씬 더 큰 것으로 준비가 되어있었고 그 뒤로는 '오브라디 교수 초청 대 강연회 - 세스타 가문 모심' 이라는 글씨가 대문짝 만하게 쓰여있었다. 글씨 양 옆으로는 꽃으로 아름답게 장식이 되어있었고, 왼 편으로는 세스타 가문 의 붉은 깃발이, 오른 편으로는 오브라디 교수의 초상화가 걸려져 있었 다. 아마 뒤쪽에 서 있는 사람에게 얼굴을 알리려는 의도인 것 같았다. 다른 건 다 빨리 준비할 수 있다고 쳐도 초상화까지 준비하다니. 나는 정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교수님. 저 그림은 언제 그리신 거예요?" "헌다이 가문의 전속화가가 전에 마법학교에서 날 보고 그려 두었던 걸 크게 그린 모양이야. 왜 헌다이 가문 화가가 세스타 가문에 그림을 제공 해 주었는지는 묻지 말거라. 그건 나도 잘 모르니까. 하지만 이 정도로 이해해 두면 될 것 같구나. 자이벌들은 다 서로 친하지. 어떻게 보면 경 쟁상대이긴 하지만 서로 힘을 합해야 할 때 합하지 않으면 큰 힘을 낼 수 가 없을 때가 있거든." 오브라디 교수 또한 자신의 초상화를 보는 데에 넋이 빠져서 평소의 그 활달한 말투가 아니었다. 역시. 돈 앞에서는 오브라디 교수도 별 수 없구 나. 나는 허리에 찬 금화를 만지작거리면서 생각했다. 만약 이 금화가 없 었다면 나도 오브라디 교수처럼 돈 앞에 저런 모습을 보였을지 모르겠다 고 생각하니 사비오 영감에게 감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강연회는 좀 다를 거다. 강연회라고 하면 그냥 가만히 앉아서 말 이나 듣다가 지루해지면 딴 생각 좀하고, 그러다가 끝나면 박수나 치고 나중에 친구들한테 무슨무슨 강연회에 참석했다고 자랑이나 할 생각으로 찾아왔다면 아마 후회하게 될 거야. 오늘 내가 강연이 뭔지 확실히 보여 주지." 무슨 다른 생각이라도 있어서 하는 말인지, 아니면 그냥 허풍인지 알 수 없는 투로 오브라디 교수가 말했다. "어이, 이름 없는 마법사. 반가워." 등뒤에서 누군가 내 어깨를 툭 치면서 말했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바리바와 루크였다. "아, 그래 반가워." 나는 반사적으로 이렇게 말하고 말았지만 생각해 보니 바리바를 만난 게 반가울 리가 없었다. "바리바. 날 속이고도 잘도 먼저 인사를 하는구나. 모짤트가 봤다면 가 만 있지 않았을 걸?" 나 정도 되니까 참는 다는 의미로 한 말이었지만 말해 놓고 보니 내가 무슨 모짤트의 시종밖에 되지 않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 난 속인 적 없어. 만약에 네가 누군가에게 속았다면 그건 네 자 신에게 속은 거겠지." "이름을 예언의 눈동자라고 정한 건 바리바의 잘못이 아니라고." 루크는 바리바의 팔뚝에 매달리면서 말했다. 루크의 얼굴은 꼭 좋아 죽 겠다는 듯 밝게 보였는데 나는 어쩐지 그런 표정마저도 나를 놀리는 것 같아 기분이 상했다. "그래.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거야?" 나는 인상을 쓰면서 말했다. 마음 같아서야 한 방 갈겨주고도 싶었지만 주위의 시선 때문에 도저히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어쩌면 모짤트가 옆 에 없으니 함부로 싸우기 뭐했는지도 모르겠다) "임프 시에 대대적으로 홍보를 했거든. 악단에 광대에 꽃가루에 전단을 수도 없이 뿌려댔지. 하긴 못 봤겠구만. 시 밖으로 나갔다 왔으니... 사 실 오브라디 교수의 이름은 예전부터 잘 알고 있었어. 친한 친구 녀석이 오브라디 교수의 제자였거든. 그런데 홍보 전단을 받아보니까 생각이 나 더라고. 그래서 한 번 와 봤지. 특별히 할 일도 없고 해서 말이야. 이거 봤어?" 바리바는 이렇게 말하고는 나에게 종이 한 장을 내 밀었다. 거기에는 강단 위에 적혀 있는 '오브라디 교수 초청 대 강연회 - 세스타 가문 모 심'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고 강단에 걸려있는 오브라디 교수의 초상 화가 있었다. 그런데 내 눈길을 끈 것은 그 밑에 조그맣게 그려져 있는 그림이었다. 그림에는 젊고 잘생긴 남자가 머리에서 광채가 나는 꼬마와 함께 강물에서 사람들을 건져 올리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었다. 나는 그림 옆에 붙어 있는 문구를 보고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비치 다리의 영웅이자 위대한 대마법사 참석 - 그림 : 헌다이 가문 의 문삼' 나는 사비치 다리 밑에서 문삼이 엉터리 시를 중얼거리면서 화가에게 그림을 그리게 했던 일이 떠올랐다. 망할 놈의 문삼 자식. 이렇게 써먹으 려고 그림을 그리라고 했구나. "이건 봤어?" 바리바가 말했다. 바리바는 그림 위에 조그맣게 적혀 있는 글자를 가리 켰다. (마법사 님. 인명을 구하시는 존귀하신 일을 함께 하게 돼 영광입니다. : 문삼) (문삼. 그대는 우주의 법칙을 아는 자이벌이로군. 어서 내 일을 돕게 나. : 대마법사) "이게... 나야?" "하하하. 그래. 나도 있어. 자세히 보면. 이 그림 왼 편에 고개 숙이고 있는 사람 있지? 그게 아마 날 보고 그린 걸 꺼야. 안 그래, 루크?" "바리바. 그건 나라니까. 고개를 숙여도 미인은 미인이라구." 둘은 이렇게 말하고는 웃음을 터트렸다. "어쩐지, 날 불러낸 거, 순전히 이용해 먹으려는 게 분명해. 진작 알았 어야 했는데." 나는 당장 강연회 장을 빠져나가고 싶었지만 사람들이 들어차 있어서 그러기에는 이미 늦어 버렸다. 게다가 오브라디 교수와 함께 떠나기로 했 는데 혼자만 빠져나갈 수는 없는 일이고 말이다. 나는 다시 한 번 남아 있는 모짤트와 그레텔이 부러워졌다. "그런데 그 친구는 만났어?" 바리바가 물었다. "무슨 친구?" "그 왜 거지꼴을 해 가지고 냄새 풀풀 풍기던 친구 말이야. 오브라디 교수를 찾고 있다고 하던데." "마로우?" "응. 그런 비슷한 이름이었던 것 같았어." "오브라디 교수가 뮤를 타고 숲으로 가는 걸 봤거든. 그래서 알려 줬 지. 좀 씻겨 놓으면 괜찮게 생겼을 것 같던데. 안 그래, 바리바?" 루크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그렇게 된 거였구나, 하면서 내 이마를 한 대 쳤다. 어쩐지 바리바 녀석, 우리가 전단을 못 받아 봤을 거라는 걸 알 고 있다 싶더니만. "하여간 좋은 강연이면 좋겠다. 나도 오래간 만에 옛 친구나 생각하면 서 시간 보낼 수 있어서 좋고. 하하하. 이렇게 대충대충 좋게 좋게 사는 게 인생이지. 루크. 가지." "그래. 그럼 안녕히, 대마법사 님." 둘은 이렇게 말하고는 웃으면서 뒤쪽에 모여있는 사람들 사이로 사라져 갔는데, 나는 꼭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여전히 나를 놀리고 있는 것 같아 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나는 준비되어 있던 맨 앞자리에 비토의 안내를 받아 앉았다. 옆자리는 바로 오하루였다. 가까운 곳에서 보니 얼굴에 가득한 주름과 노인 특유의 냄새, 거기다가 뮤가 기분 좋을 때 내는 것 같은 숨소리까지 들려서 오하 루는 꼭 사람이 아니라 마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마법사 님. 오늘 이렇게 참석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일어나 셔서 간단한 인사말이라도 하나 해 주시지요." 오하루가 정중한 어조로 띄엄띄엄 말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나왔 는데 이 많은 사람 앞에 서서 인사를 하라니. 나는 바리바가 보여준 전단 을 생각하면서 절대 인사는 할 수 없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소개는 무슨..." 나는 이렇게 이야기하면서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오하루는 내게 빠져나 갈 틈을 주지 않았다.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귀빈들은 모두가 제 형제 같은 친구들입니다. 제 형제 앞에서 인사 말씀 한 마디는 해 주셔야지요. 마법사 님께서는 제 딸 아이 생명의 은인이십니다. 만약 인사하시지 않는다면 제가 무슨 대단한 결례라도 범했다고 친구들은 생각할 것입니다." 오하루가 그르렁거리는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면서 말했다. 오하루의 눈 빛은 비록 많이 탁해진 노인의 눈빛이었지만 내 가슴을 꿰뚫는 힘을 가지 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강요하는 듯 하기도 했고, 어떻게 보면 동정심을 자아내는 눈빛이기도 했다. 이런 눈빛 앞에서는 누구라도 반박을 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래서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면서 예, 예 할 수밖에 없었다. "자리가 불편하실 수도 있으시리라 생각합니다. 초야에 묻혀 사시며 나 무와 풀을 사랑하셨을 게 분명하신 분께 사람들에게 인사하기를 권한다는 게 좀 어색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제 입장과 친구들 앞에서의 체면을 봐서라도 간략하게 인사 부탁 드립니다." 내가 만약 정말로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다면 나는 아주 흔쾌히 오하루 의 부탁에 응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별로 대수로운 사람도 아닌데 사 람들 앞에서 인사를 하고 어쩌고 한다는 게 아무래도 사람들을 속이는 일 처럼 여겨져서 나는 마음이 불편했다. 저 사람들은 내가 전단에 그려진 대마법사인줄로만 알고 있을 뿐이지 진짜 내가 누구인지는 알지 못할 것 아닌가. 하지만 이렇게까지 정중하게 직접 부탁하는 데 들어주지 않을 수 도 없는 노릇이고. 나는 속이 바짝바짝 타는 것 같았지만 어쩔 수 없었 다. "어려운 부탁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장사꾼이 되다 보니 아 무리 불편하고 어려운 일이라고 해도 이익을 위해서 꼭 해야 할 필요가 있다면 반드시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상대방이 아무리 절천 지 원수라 해도 웃으며 식사를 해야 할 순간도 있고, 국경 너머의 바바 족과도 필요하다면 교류를 가질 수 있다는 말이지요. 아, 이거 제가 너무 주제 넘은 말씀을 드리는 것 같군요." 오하루는 이렇게 말하고는 고개를 살짝 숙여 예를 표했다. 이렇게 나이 먹은 사람이 이 정도까지 했으니 이젠 별 수가 없겠다 싶었다. 게다가 탐 그루 출신인 내가 장사꾼이 이렇게 본전을 드러내면서 말할 때 흥정으로 답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서 나는 일단 예, 알겠습니다하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좀 강연을 들어보다가 어떻게든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런데 오하루의 말을 듣고 나니 어쩐지 라이짐이 떠올랐다. 라이짐은 필요하다면 원수의 다리 사이를 기어다니는 한이 있다고 하더라도 때를 기다렸다가 한 번에 다시는 일어설 수 없도록 치는 것이 복수라고 말했었 다. 라이짐은 자신의 복수를 위해서라면 어쩌면 더한 일도 할지 모른다.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아케르 단장을 존경하게 됐는지도 모르고 말이다. 그러고보니 오하루도 칼의 법칙을 아는 사람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 다. 자신의 강함과 약함을 적절하게 드러내 이용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말이다. 사실 내가 이 자리에서 위대한 마법사라고 추켜세워지면 자신의 위세도 덩달아 올라가기 때문에 그런게 거의 분명했다. 아마 헌다이 가문 하고 짰을 지도 모르고. "그리고 그렇게 인사 드리는 게 오브라디 교수님의 강연에 힘을 실어드 릴 수 있을 겁니다. 저는 이런 행사를 많이 치루어봐서 잘 알고 있습니 다. 이런 때에 찬조 출연해 주시는 분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그런 것을 상승효과라고 우리 장사꾼들은 부릅니다만. 마법사 님. 오늘의 강연 은 이곳 임프 시의 시민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불어 넣어주기 위한 자리입 니다. 부디 도와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오브라디 교수의 강연에 힘을 불어넣어 줄 수 있다고? 나는 불쾌했지만 일단은 앉아 있기로 했다. 오브라디 교수하고 함께 떠나기로 한 마당에 도움은 되지 못할 망정 폐를 끼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오브라디 교수가 강단에 올라섰다. 사람들이 박수로 환호했고 오브라디 교수는 고개를 숙여 청중들의 인사에 답했다. 오브라디 교수는 처음 만났 을 때의 느낌과는 다르게, 대단히 속물적이고 대단히 고상한 척 하는 모 습으로 보이고 있었다. 아마 바리바가 보여준 전단에다가 오하루의 장사 꾼 속을 드러낸 말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말이다. "먼저 내빈 한 분을 소개시켜 드리고자 합니다. 이름을 밝히기를 꺼려 하시는 마법사 님이십니다." 비토가 연단 위에 올라서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장내에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고 나는 처음에 이 말이 정말 나를 부르는 말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오하루는 느릿느릿 박수를 치면서 일어나라는 눈짓을 보 냈고, 나는 엉거주춤 일어나 뒤쪽으로 인사를 했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 들 중에서 뒤쪽에 서 있는 바리바와 마로우만이 눈에 들어왔다. 바리바는 가소롭다는 듯한 표정으로 아주 환호까지 하면서 박수를 치고 있었고, 마 로우는 어이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들 잘 알고 계시겠지만 이분은 사비치 다리의 불행한 사고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데 큰공을 세우신 위대한 마법사 님이십니다. 그러면서도 이 름은 결코 밝히지 말아달라고 부탁하셨고, 어떠한 댓가도 바라지 않는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이때 오하루에게 받은 집 한 채 값은 나간다는 명주옷을 생각하면서 찔끔했다) 오늘 이 자리에는 세스타 가문의 오하루 님의 특별한 부탁으로 나오시게 되셨습니다. 다시 한 번 큰 박수 부탁드 립니다." 나는 비토의 마지막 말을 듣는 순간 아마도 이 말 한마디 때문에 나를 강연회에 끼워 넣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름 없는 마법사라니. 아마 어쩌면 내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별 대수롭지 않은 마법사라는 게 알려질까 봐 그렇게 했을지도 모르겠다 싶었지만, 아마 스 칼렛이 내 이름을 알면서도 말하지 않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다음은 오브라디 교수님을 소개시켜 드리겠습니다. 오브라디 교수님은 스파일 주립 대학에서 교수직을 역임하셨고 현재는 바르도 대륙의 완전한 모습을 밝혀줄 지도의 작성을 위해 탐험 중이십니다. 중요 저서로는 스파 일 군사 교범 다수와 '바르도의 역사' '마법의 역사' '전쟁터에서 살아 남는 방법 100가지' 등이 있으십니다. 바쁜 와중에도 불구하고 세스타 가 문의 오하루 님의 부탁으로 특별히 이 자리에 나와 주셨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의 박수를 부탁드립니다." 다시 터져 나오는 환호와 박수에 답하면서 오브라디 교수가 고개를 숙 였다. 그런데 나는 그 순간 볼 수 있었다. 오브라디 교수의 입가에 스치 는 웃음을 말이다. 그 웃음은 어쩐지 상황을 다 알고 있다는 자신감을 표 현하는 것 같기도 했고, 뭔가 꿍꿍이가 있는 어린애 같기도 했다. 과연 어떤 내용의 강연을 하려고 그러는 걸까.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2547/12886 ━━━━━━━━━━━━━━━━━━━━━━━━━━━━━━━━━━━━━━━━ 제 목:[탐그루] 라면 전쟁 142 관련자료:없음 18/18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8-12-31 00:13 조회:1523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먼저 이 자리에 모여주신 여러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제가 뭐 그 리 대단한 사람도 아닌데 제 강연을 듣기 위해서 이렇게 와 주셨으니 뭐 라고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좋을지 모르겠군요." 오브라디 교수의 얼굴에는 장난끼가 가득했다. 큰 목소리로 말하고는 있었지만 분명 뭔가를 숨기고 있는 듯 했다. 오늘 강연은 뭔가 다를 거라 고 큰소리 친 게 그냥 허풍만은 아닐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강연 내용으로 임프 시에 닥친 난국과, 이것을 이기기 위한 방 안, 그리고 그것을 통한 희망찬 미래의 제시가 제가 여기 앞에 앉아 계시 는 오하루 님의 부탁이셨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조금은 의아하게 여길 지점에서부터 이 강연을 시작해 보려고 합니다. 여러분. 사라진 대륙, 아 모리카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오브라디 교수는 여기까지 말하고는 말을 끊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장 내를 훑어보았다. 장내에 침묵이 흘렀다. 오브라디 교수는 꼭 그 침묵을 즐기는 것처럼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아시는 분도 계시겠습니다만 저는 전공이 역사입니다. 저는 지나간 역 사를 통해서 현재와 미래를 이야기하는 것을 배웠고, 또 그런 책을 써왔 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도 저는 역시 역사 이야 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모리카. 사라진 대륙. 위대한 인류의 과 거라 부르는 사람도 있고 씻지 못할 인류의 오점이라 부르는 사람도 있습 니다. 하지만 저는 역사학자로서 아모리카가 왜 강성해졌으며 또한 왜 망 했는가를 찾는 일을 일생의 업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 작업이 제 대에 다 끝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죽는 날까지 한 번 이 작업에 온 몸을 던져보려고 합니다." 오브라디 교수의 얼굴은 강연장에 울려 퍼지고 있는 자신의 목소리를 즐기는 듯 했다. 아주 잠시 숨을 들이킨 오브라디 교수는 밝은 얼굴로 다 시 말을 이었다. "굳이 제가 연구한 결과라고 말씀드릴 것까지도 없지만, 아모리카 대륙 위에는 한때 인류 최강의 제국이 존재 했었습니다.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 면 그 제국은 인류 역사 상 다섯 번째의 제국이었습니다. 그들은 강했습 니다. 지금은 전설로밖에 남아있지 않지만 그들은 전 세계를 지배했으며 어디를 가도 그들의 말과 문화를 접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의 유적 은 아직까지도 바르도 대륙 곳곳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곳 임프 시 에서도 그들이 사용하던 언어와 유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곳 임프라는 시 이름도 과거 아모리카 대륙의 고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강연장에 작은 웃음이 돌았다. 오브라디 교수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먼저 그들이 어떻게 그렇게 강해졌는가부터 이야기를 시작해 보고자 합니다. 강함을 알아야 약함도 알 수 있는 법이고 또한 우리가 역사적 사 실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점 중 하나가 바로 과거의 지혜이니까요. 사실 지금에 와서 아모리카에 대해서 연구하는 작업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자료도 불충분한 상태에서 과거를 논한다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일이라고 손가락질 하는 역사학자들도 종종 있곤 합니다. 하지만 자료가 불충분하 다고 해서 연구를 외면한다면 그건 진정한 의미에서의 학문이라고 할 수 없을 겁니다. 역사란 오로지 현재, 지금의 것이지 온전한 과거의 것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잠시 뒤를 둘러보았는데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멍 한 표정들을 하고 있었다. 내용이 좀 어려워지니까 그런가 보다 싶었다. 오브라디 교수도 그걸 눈치 챘는지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다시 이야기를 이었다. "그렇다면 아모리카 제국이 강성해진 가장 큰 원인은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아모리카의 문화가 칼의 문화였다는 것입니다. 아모리카 제 국은 전쟁으로 일어난 국가였고 전쟁으로 강성해진 나라였다는 데에는 학 자간에 큰 이견이 없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도 전설로 들어 어느 정도 알 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만. 저, 앞줄에 계신 분." 오브라디 교수는 앞줄에 앉아 손장난을 하고 있던 한 자이벌을 가리켰 다. 순간 강연회장의 분위기가 긴장감으로 바뀌었다. 오브라디 교수 말 그대로, 강연회라고 하면 대개 가만히 앉아서 말이나 듣다가 지루해지면 딴 생각하고, 그러다가 끝나면 박수나 치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던 자이벌 같이 높은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지니 그런 모양이었다. 지적을 받은 앞줄 에 앉아 있던 중년의 자이벌의 허리가 곧추섰다. "카를로스 장군과 대마법사 아킨의 이야기를 알고 계십니까?" "예." "카를로스 장군의 칼과 대마법사 아킨의 마법이 대립했다는 이야기도 알고 계시겠지요?" "예" "그 둘의 차이점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니까, 카, 칼은 실제적인 힘이고, 마, 마법은, 뭐랄까 좀 더 어려 운, 그런, 힘이라고..." "예. 그러니까 칼은 물리적인 힘이고 마법은 물리적인 힘보다 한 단계 위의 힘이라는 설명이시군요. 맞습니까?" "...예." 장내에 웃음이 터져나왔다. 오브라디 교수가 꼭 아주 새로운 사실을 알 았다는 듯한 말투로 말했기 때문이었다. 지적을 받았던 자이벌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고, 앞줄에 앉아 있던 자이벌들이 긴장하고 있다는 게 피부로 느껴졌다. "예. 저 분이 말씀 하셨듯이 아모리카의 힘은 바로 그 물리적인 힘에서 나왔다고 보고 있는 것이 역사학계의 정설입니다. 제가 모은 자료에 따르 면 아모리카는 그 탄생부터 바로 물리력과 연관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광활한 아모리카 대륙에 도착한 고대인들은 원래 아모리카 대륙에 살고 있던 종족들을 마치 사냥을 하듯이 죽여 없앴습니다. 이것이 붉은 용의 전설이지요. 아까 대답하셨던 분, 붉은 용의 전설에 대해 알고 계십니 까?" 아직도 붉게 달아오른 볼을 하고서 그 자이벌이 예, 하고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분도 알고 계신 걸 보니 다들 알고 계시겠군요." 다시 한 번 장내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오브라디 교수는 웃음이 사라 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강의를 이었다. "아모리카 대륙에 살았던 사람들은 전쟁으로 역사를 열었습니다. 그리 고 강성해지는 과정도 바로 그 전쟁을 통해서였던 것 같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아모리카는 적어도 세 번의 거대한 전쟁을 주도했고, 수없이 많은 국지전을 수행한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교수님. 전쟁을 하면 국민들이 살기 어려워지고 또한 나라의 경제가 어려워지지 않습니까?" 오브라디 교수의 말을 끊고 한 젊은 자이벌이 질문했다. 아까 질문을 받은 자이벌 옆에 앉아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그 자이벌의 아들이 아닐 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같은 옷에 같은 장식인 걸로 봐서 말이 다) "예. 좋은 지적이십니다. 보통은 그렇지요. 하지만 말입니다. 예를 들 어서. 음... 여러분들은 모두 라면을 드셔 보신 적 있으실 겁니다." 오브라디 교수가 말했다. 라면이라고 하면 유서 깊은 서민들의 음식이 다. 귀족들이야 천박한 맛이라면서 잘 먹지 않지만 평민들은 값도 싸고 값에 비해 맛도 좋기 때문에 자주 먹는 음식이다. (탐그루에 있을 때 나 도 자주 먹었던 음식이다) "라면은 보통 밀가루를 반죽한 것을 면 형태로 튀겨서 준비해 두었다가 먹기 직전 스프와 함께 끓여 먹는 음식이지요. 또 곳에 따라서는 스프와 함께 끓이지 않고 스프만 끓여내 말아먹기도 하지요. 저는 여러가지 이유 에서 라면을 참 좋아합니다. 그건 다른 음식에 비해 조리시간이 짧기 때 문이기도 하고, 또 몸에도 좋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결정적으로는 맛이 있 기 때문이지요. 얼큰한 국물맛과 쫄깃쫄깃한 면발. 지금도 침이 꿀꺽 넘 어갑니다. 그려." 난데없는 요리 얘기에 사람들은 좀 어안이 벙벙한 듯 웅성거리며 좌우 를 둘러보고 있었다. "누가 뭐래도 라면의 생명은 스프이지요. 갖은 양념과 조미료로 이루어 진 이 스프 만들기의 비결은 아마 어떤 식당에서도 그 누구에게도 가르쳐 주지 않는 그 식당만의 비밀일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국경의 시스코 에서 파는 라면을 아주 좋아합니다. 만약에 제가 역사학도가 되지 않았다 면 시스코의 그 라면집 앞에서 과일이라도 팔면서 살았을 겁니다. 그러면 매일같이 맛 있는 라면을 먹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어쩌면 스프의 비결 을 알려 달라면서 매일 같이 무릎을 꿇고 그 식당 주인에게 매달렸을지도 모르겠군요." 오브라디 교수는 또 라면 생각이 나는지 군침을 삼켰다. 나도 그 모습 을 보고 있자니 예전에 먹어 본 라면의 얼큰한 국물이 생각나서 입맛을 다시지 않을 수 없었다. "보통 라면의 면발은 하루가 갑니다. 하루가 지나면 눅눅해져서 제 맛 이 나지 않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여행길에 라면 가지고 가보신 분이라면 다 아시겠지만, 라면은 눅눅해져도 눅눅한대로 또 별미를 갖고 있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오브라디 교수의 말에 뒤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내 주변에 앉아 있는 귀족 자이벌들은 조용해졌다. (눅눅한 라면 요리를 먹어 보았 을 리가 없기 때문이겠지) "그리고 아마 모두들 집에서도 한 번 쯤은 라면 요리를 해 드셨을 겁니 다. 스프를 손가락으로 찍어 먹어보면서 이건 어떻게 만드나, 하고 생각 해 보신 적도 있을 거고요. 그렇지요?" 이 말에 뒤쪽에 서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웃음이 나왔다. 물론 공감했 다는 뜻이리라. 뒤쪽의 웃음소리가 커지자, 앞쪽에 앉아있는 사람들은 조 금 숙연해지기까지 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아마 식당에서 라면을 사 가지고 왔을 때, 요리사가 요리법을 설명하 면서 이런 말을 했을 겁니다. '물이 끓으면 면발을 넣으세요' 라고 말이 지요. 예. 그게 원칙이지요. 하루가 지나면 먹지 않는 게 원칙인 것처럼 말이지요. 하지만 꼭 그렇습니까? 전 학생시절에 라면을 매일 같이 끓여 먹었습니다. 그러다 보면 라면을 가지고 별짓을 다 하게 되지요. 면을 먼 저 넣고 끓여도 아무 탈없이 맛있게만 먹었습니다. 하루는 커녕 면발에 붙은 곰팡이를 털어 내서 끓여먹어 본 적도 있었는데, 전 맛만 좋습디 다." 오브라디 교수의 말에 다시 한 번 웃음이 터져 나왔다. 오하루는 심기 가 불편한지 헛기침 소리까지 내었다. 덕분에 가래 끓는 소리가 함께 들 려서 나도 따라서 헛기침을 하고 말았다. "그렇습니다. 앞뒤, 전후, 선후가 뒤바뀔 수도 있는 것입니다. 라면처 럼 말이지요. 전쟁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무기가 필요한 게 당연한 일이 겠지만, 무기가 먼저 있고, 그 무기를 소비하게 위해 전쟁이 있을 수도 있는 있는 것입니다. 자세하게 얘기해 볼까요? 전쟁을 위해서는 무기가 필요합니다. 무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수많은 인력과 자원이 필요하구요. 아마도 아모리카가 첫 번째로 대규모의 전쟁 을 주도했을 무렵에는 이미 자원과 인력을 확보한 상태였던 것 같습니다. 사료에 따르면 당시의 전쟁은 지금으로선 상상하기도 어려울 정도의 큰 규모였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최종전쟁의 전설에 대해서는 좀 이견들이 있습니다만, 적어도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수 백 명을 쓰러뜨 릴 수 있는 활과, 마차 수 십대를 가를 수 있는 칼, 그리고 도시 하나를 불태워 버릴 수 있을 만한 불화살을 과거 아모리카는 보유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제가 이런 전설을 액면 그대로 다 믿는 바보는 아닙니다. 하지만 남아 있는 자료나 전설에 따르면 제가 지금 말했던 것 보다 더 황당한 이 야기가 있기도 합니다. 하여간 이정도 대규모의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 는 지금 임프 시의 자이벌들께서 운영하고 계시는 공장의 몇 백배가 되는 공장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런 공장에서 무기를 만들고 또 그것을 전쟁으 로 소모하고, 그러다 보면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람들의 일자리와 또 경제 효과가 발생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전쟁이 끝나면 어떻습니까. 그 많은 일자리와 경제 효과는 사 라져 버리지 않겠습니까?" "계속 날카로운 지적이시군요. 실례지만 어디의 누구십니까?" "저는 헌다이 가문의 장남 문태라고 합니다." "아. 마법사 님을 도와 인명을 구조하셨던 문삼 님의 형뻘 되시는 모양 이로군요." "사촌 형 뻘 됩니다." "어쩐지 좀 남다르시다 했습니다. 몰라 뵌 점 사과드립니다." 오브라디 교수는 목을 살짝 숙여 예를 표했고 사람들은 과연 둘이 인사 를 나누는 건지 아니면 싸우는 건지 알 수가 없어서 좀 당혹스러워 하는 것 같았다. (나처럼 말이다) 둘이 워낙 격식을 차리다 보니 표정이 없어 서 감정이 상한 상태로 이야기를 하는 건지 아닌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다시 라면 얘기를 좀 더 하겠습니다. 라면의 면발을 다 건져 먹고 나 면 남은 국물이 아까울 때가 있습니다. 또 조금만 면을 더 먹었으면 좋겠 다 싶을 때도 있고요. 제가 오늘 여러분께 요리 비법을 하나 알려드리지 요. 필요하신 분은 적어도 좋습니다. 그럴 때는 말입니다, 국물이 식기 전에 얼른 물 한 컵을 부으세요. 그리고 면 만 넣고 다시 끓이는 겁니다. 그럼 아주 금방 새로운 라면이 하나 나오는 거지요. 아, 스프는 넣을 필 요가 없습니다. 특별히 짜고 매운 걸 좋아하시는 분이 아니라면요." 여기서 오브라디 교수는 꼭 요리사처럼 손짓 발짓을 섞어가면서 사람들 에게 요리를 설명해서인지 사람들 사이에서 또 다시 웃음이 터져나왔다. PRINTER/CAPTURE를 OFF 하시고 [ENTER] 를 누르십시오.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2603/12886 ━━━━━━━━━━━━━━━━━━━━━━━━━━━━━━━━━━━━━━━━ 제 목:[탐그루] 라면 전쟁 143 관련자료:없음 15/15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1-01 00:03 조회:1480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라면이 그런데 전쟁인들 않그렇겠습니까? 물 한 컵하고 면만 있으면 얼마든지 더 식사를 이어갈 수 있는데 그토록 수익이 많이 남는 장사를 전쟁이 끝났다고 포기할 리가 없지요. 아모리카 제국은 탄생에서부터 멸 망까지 전쟁과 함께 했습니다. 적이 없으면 적을 만들어서라도 전쟁을 일 으켰지요. 그리고 그 적을 상대로 구무기들은 소비시키고, 신무기들은 시 험운용했다고 합니다. 또한 그렇게 전쟁을 통해 생생히 성능이 입증된 무 기들을 다른 약소국가들에게 아주 비싼 값에 팔아넘겼지요. 그것도 최고 의 성능을 가진 최신예 무기는 절대 팔지 않고 당시 자신들이 주로 쓰는 무기 보다 조금 나쁜 무기들로만 팔아 넘겼지요. 무기를 수출한 나라와 나라와 언제 전쟁을 하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또한 그렇게 수출되는 무기 의 가격은 상상을 초월하는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하늘을 나르는 무기의 경우에는 비스토브레 왕국 전체에 있는 금화를 다 모아도 몇 개 사기 힘 들 정도였다고 사료는 전하니까요." "아니, 늘 그렇게 전쟁 상태를 유지하면서 어떻게 국민들을 안심시키고 인도할 수 있단 말입니까? 전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계속 되는 반론이로군요. 오늘 제가 좀 혼이 나는 것 같습니다. 평소 에 공부를 좀 더 해두었더라면 좋았을 것을요. 아니면 진작에 라면 집 앞 과일 장사로 나섰던가. 하하하." 오브라디 교수가 웃자 몇몇 사람들이 따라 웃는 모습이 보였다. 강단 위에 서 있으니 유머 감각이 점점 더 늘어나는 모양이었다. (진짜로 사람 웃기는 재주가 늘어났다는 말이 아니라 사람들이 더 잘 웃게 되었다는 말 이다) "지금부터 그 설명을 드리지요. 많은 학자들이 간과하고 있는 아모리카 제국의 진짜 저력 중 하나 입니다만. 그것은 바로..." "저, 말씀 도중에 죄송합니다만." 오하루가 오브라디 교수의 말을 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하루의 얼 굴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모두 시선을 오하루 쪽으로 돌렸고, 덕분에 강연 회 장에는 차가운 공기가 가득 차는 것만 같았다. 꼭 예전에 아케르 단장 이 말을 하면 천막 안이 꽁꽁 얼어붙는 듯 했던 것 처럼 말이다. "오브라디 교수님. 좀 외람 된 말씀입니다만 이 자리에 모인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다지 학식이 깊지 못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강의가 너무 딱딱하게 학술적으로만 흐르고 있는 것 같아서 이 자리를 준비한 사 람으로 좀 불편한 마음이 듭니다. 물론 저기 질문을 던지고 계시는 헌다 이 가문의 청년이나 또 학식 높으신 많은 분들께는 보람되고 알찬 강연이 겠습니다만, 이 자리에서 임프 시 시민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한 강의를 하겠다고 말씀하신 만큼 조금 강의를 쉽게 해 주셨으면 합니다. 이거 나 이가 들으니 머리가 돌아가질 않아서 말입니다. 허허허..." 마지막에 농담조로 바뀌기는 했지만 오하루의 말은 꼭 아랫사람을 부리 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비록 말투 자체는 정중했지만 말이다) 아마 오 하루의 본심은 귀족이나 자이벌이 잘 모르거나 관심을 두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는 그만 이야기해 달라는 뜻인 것 같았다. 오브라디 교수는 오하루 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웃음을 지었다. "이거, 의외의 일격이로군요. 문태 님의 질문에도 쩔쩔 맸는데, 이거 오하루 님의 날카로운 지적까지 당하고 나니 이거 도저히 당할 방법이 없 겠는데요. 하하하. 항복입니다. 이제부터는 간단 간단하게 빨리 요점만 말씀드리기로 하지요. 먼저 질문에 답해드리겠습니다. 문태님의 지적은 옳습니다. 먼저 아모리카에 대해서는 남아 있는 자료가 너무 적기 때문에 대부분이 전설을 통한 추측뿐이라는 걸 말씀드리고 싶고요, 그 자료가 너 무 적은 이유 중 하나가 아모리카는 너무 생명이 짧은 나라였기 때문입니 다. 나라의 탄생부터 멸망까지가 기껏해야 삼백년이었다는 게 학계의 정 설입니다." "겨우 삼백년 동안 어떻게 그런 강대한 국가를 건설할 수 있었단 말씀 이신지요?" 오하루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문태는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다. 이번에 당혹스럽다는 표정을 지은 쪽은 오하루였다. 오하루는 뭐라고 작게 중얼 거렸는데, 내 귀에는 '나중에 두고 보자 녀석'쯤으로 들렸다. "물론 비스토브레 식 백년입니다." 오브라디 교수가 답하자 웃음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그 삼백년 동안 아모리카가 강성해 질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마칸의 힘을 빌었기 때문이라고 전설은 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전설을 통해 어느 정도는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마칸이 결국에는 인간을 멸망시키 기 위해서 인간과 전쟁을 벌였으며 그 결과 인류 문명 대부분이 파괴되었 다는 걸 말입니다. 그리고 그 마칸의 부활을 막기 위해 천 년 전 카를로 스 장군과 대마법사 아킨의 위대한 모험과 전투가 있었던 것입니다. 마칸의 힘이 어떤 것인지 지금에 와서는 알 수 없습니다만 어쩌면 마법 보다 강력하고 이 땅에 존재하는 어떤 무기보다도 더 위험했던 게 아닌가 추측할 수 있을 뿐입니다만. 먼저 하던 얘기를 마저 하지요. 늘 전쟁 상 태이면서도 어떻게 국민들을 설득할 수 있었는가? 저는 조금 새로운 의견 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모리카가 대단히 자유로운 나라였다 는 점에서 강성한 제국을 이룰 수 있는 기초를 다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 입니다." 오브라디 교수는 극적인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 인지 여기서 말을 꽤 오 래 중단했다가 사람들의 모습을 천천히 둘러본 후에 다시 입을 열었다. "예를 하나 들어보지요. 전해 내려오는 전설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아모리카의 왕 중 하나는 누군가의 칼에 맞아 암살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엄청난 범죄가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다음 왕은 결코 복수를 하지 않았습니다. 상식적으로 국왕이 죽었다면 국왕 주변에 있던 시민들과 혐 의를 받고 있던 사람들은 모조리 척살을 당해야 마땅했을 테지만 말입니 다. 또 이런 전설도 있습니다. 국왕 중 하나가 바람을 피웠습니다. 본처 를 놔두고 귀족의 딸과 말입니다. 사실 이게 무슨 죄가 되겠습니까. 이 자리에 앉아 계신 자이벌 분들은 아마 이런 전설이 있다고 하면 기가막혀 하실 겁니다. 안 그렇습니까?" 이 말에 뒤쪽에 서 있던 사람들 쪽에서는 폭소가 터져 나왔고, 앞줄에 앉아있던 높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헛기침을 하며 불편한 기색을 감추질 못했다. "그런데 그렇게 바람을 피운 국왕이 국민들에 의해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 것입니다. 이 전설로 미루어 볼때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다음의 두 가지 입니다. 먼저 하나가 아모리카에는 국왕에 대해서도 자유롭게 비 판할 수 있는 자유가 있었다는 것, 또 하나가 그렇게 비판하고 감시하는 기능이 구축되어 있고, 국민들도 어려서부터 그런 교육을 받았다는 것입 니다. 이렇게 자유를 보장하는 제도적 장치와 교육이 없이는 아모리카는 결코 그렇게 강성한 제국을 이룩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당시 다른 나라들 로부터 '죽음의 상인' 이니 '유일무이한 깡패 국가'니 하는 비판을 받았 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지요." 오브라디 교수는 퍽이나 마음이 불편할 앞자리에 앉아 있는 높은 사람 들을 고소하다는 눈으로 한 번 죽 살피고는 강의를 이었다. 물론 나도 참 통쾌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뒷자리에 서 있는 사람들도 대개가 그런 듯 싶었다. "자, 그럼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지요. 그렇게 강성했던 아모리카 제국 이 왜 그렇게 빨리 멸망했는가가 제가 말하고자 하는 본론입니다. 미리 결론을 말하자면 맹목적으로 강함을 추구한 자는 결국 자신이 만들어낸 강한 힘에 의해 멸망당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모두 제초제가 뭔지 아 시죠? 제초제는 잡초들에게 독약 같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영양제라고 할 수 있죠. 제초제는 잡초의 성장을 촉진시켜 스스로 말라죽게 하는 것 입니다. 차근차근 앞과 뒤, 좌우를 살피지 않고, 자신의 역량과 힘을 키 우기도 전에 몸피만 키우는 행위는 곧 자살행위와 같은 것입니다. 아모리 카 제국도 그런 경로를 밟았던 것 같습니다." 나는 오브라디 교수의 이 말에서 마법을 느낄 수 있었다. 이 말은 스칼 렛이 아모리카의 유적지에서 박쥐들을 부릴 때 사용한 마법의 말과 비슷 했지만 뭔가 더 강하고 뜨거운 게 느껴지는 말이었다. 나는 오브라디 교 수의 말을 이해해 보려고 노력했다. 맹목적으로 강함을 추구한 자는 자신 이 만들어낸 강함에 의해 스스로 멸망한다. 결국 칼로 흥한 자는 칼로 망 한다는 그런 옛말과 비슷한 맥락의 말일까? "아모리카는 너무나도 강했습니다. 나중에는 세상의 모든 인간들이 동 경하고 부러워 할 만큼 강해졌습니다. 지금까지도 아모리카 제국을 꿈의 이상향으로 여기고 있는 사람들이 로스안 남아 있다는 게 바로 그 증거입 니다. 하지만 그렇게 속성된 강함 뒤에는 멸망의 단초가 숨겨져 있었습니 다. 아모리카 인들은 마칸을 이용해서 그렇게 빨리 강해진 것 같다는 말 씀은 이미 드린 바 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아모리카인들은 마칸이 아모 리카인들을 배반했을 때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맹신한 데에서 온 결과이기도 했고, 또한 칼로서 세상을 지배하고자 한 데서 온 결과이기도 했습니다. 이제 다시 말씀드릴 필요는 없겠습니다만 저는 이 자리에서 강조하고 싶습니다. 아모리카는 마칸의 힘을 빌어 세상을 지배하고자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칸의 반란을 피 할 수 없었고 결국 인류 전체에 마칸의 강림이라는 무시무시한 결과만을 남기게 된 것입니다." "잠깐만요, 오브라디 교수님!" 멀리 뒤 쪽에서 질문이 던져졌다. 앞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고 개를 뒤로 돌렸고, 오브라디 교수는 강의를 중단했다. 나도 물론 뒤를 돌 아보았다. 질문한 사람은 바리바였다. "그런데 말씀하셨던 붉은 용이란 무엇입니까? 제가 알고 있기로는 카를 로스 장군도 붉은 용으로 마칸을 물리쳤고, 또한 붉은 용이 마칸이 강림 했을 때 나타났다는 전설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전설에서는 붉은 용이 인류와 아모리카를 멸망시킨 악마의 모습이기도 하고 또 어떤 전설에서는 인류를 마칸의 손에서 구원하는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했습니다. 도대체 붉은 용이란 무엇입니까?" 거의 고함을 지르듯 바리바가 물었다. 나는 바리바가 술에 취했을 때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바리바는 용때문에 뭔가 가슴 아픈 과거가 있 는 사람이라고 루크는 말했다. 그런 바리바니 전설 속에 등장하는 붉은 용의 정체가 궁금한 건 당연할 지도 모른다. 어쩌면 오늘 이 강연회에 나 타난 것도 그것 때문에 온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서 감히 교수님의 말을 끊고 그래, 평민 주제에." "건방진 녀석이로군." "도대체 어디서 온 녀석이야?" 나는 앞에 앉아있었기 때문에 자이벌이나 귀족들이 이렇게 한마디씩 던 지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가슴속에 예전에 느낀 적이 있었던 귀족 에 대한 분노가 다시 일었다. "아주 어려운 질문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는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 다. 앞서 말씀드렸던 그대로 제 이야기는 전설과 남아 있는 유적, 유물, 사료 등을 가지고 제가 연구한 바를 토대로 한 것입니다. 사실 저도 그 붉은 용의 정체가 무엇인지, 또한 붉은 용이 과연 앞으로 닥쳐올지 모르 는 마칸의 강림을 막을 수 있는 열쇠가 될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는 사람 중 하나입니다.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은 좀더 기다리셔야 되겠 습니다. 죄송합니다." 오브라디 교수의 말에 바리바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먼 거리였지만 나는 바리바의 눈빛이 잠깐 번득이는 것을 보았다. "잠깐. 오브라디 교수님. 마칸의 강림이라니요. 또 인류의 멸망이라니 요.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지금 마물들이 좀 나타난다고 해서 사람들 을 혼란시키고 현혹하는 사람들이나 지껄이는 말입니다. 이 자리는 사람 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자리 아니었습니까? 오브라디 교수님, 말씀을 삼가해 주십시오." 문태였다. 문태는 조금 건방진 투로 이렇게 말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2604/12886 ━━━━━━━━━━━━━━━━━━━━━━━━━━━━━━━━━━━━━━━━ 제 목:[탐그루] 라면 전쟁 144 관련자료:없음 16/16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1-01 00:04 조회:1336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문태 님. 그 말씀은 과거 아모리카 인들이 했던 말과 똑 같습니다. 그 시대에도 저와같은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겠죠. 하지만 문태 님같은 분 들이 그런식으로 미래를 준비하려는 움직임을 막았을 거라고 저는 생각합 니다. 그 사람들은 한 손으로는 희망과 미래를 말하고, 또다른 한 손으로 는 전쟁을 일으키는 사람들이었지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지금 저희 자이벌 가문을 모독하시는 겁니 까?" 문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순간 강연회장이 소란스러워졌다. 강 연회장 앞뒤에서 저마다 모두 한마디씩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말씀 삼가하십시오! 여긴 강연회 장입니다. 강사의 의견이 자신의 생 각과 다르다고 해서 함부로 말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하실 말씀 있 으시면 나중에 질문 시간에 하십시오!" 오브라디 교수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누군가가 외쳤다. 얼굴은 잘 보 이지 않았지만 목소리만으로 나는 그게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마로우가 분명했다. "아아. 이곳 강연장 뒤편에 가보면 널찍한 공터가 하나 있습디다. 저한 테 불만을 갖고 저자식은 말로 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그리 로 오시기 바랍니다. 강연이 끝나고 그 공터에서 일대 일로 붙어 보지요 뭐." 오브라디 교수의 말에 다시 사람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오브라디 교수 는 신이 났는지 뒤편에 선 사람들 쪽으로 아주 고개를 돌려버렸다. "제가 지금까지 아모리카의 이야기를 한 것은 오늘 날 우리 임프 시와, 또 비스토브레 왕국 전체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역사는 현재를 비추어주는 거울이라는 표현을 자주 씁니다. 이것은 역사에서 뭔 가 배울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고, 또한 그만큼 역사가 중요하니까 저 같 은 역사학자도 먹고 살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교수님! 아무리 역사라고는 하지만 겨우 전설 몇개로 추정해낸 정보로 사람들을 우롱하시는 것 아닙니까? 아니 어떻게 옛 말에 그렇게 의존하실 수 있습니까? 그게 진정한 역사학자의 자세입니까?" 문태였다. 문태는 필요 이상으로 핏대를 올려 소리쳤다. 아마 다음에 어떤 이야기가 이어질지 대충 눈치를 챈 모양이었다. 물론 나도 뻔히 눈 치를 채고 있었다. 오브라디 교수가 강연회 전에 한 말이 이제 바야흐로 실천 될 모양이다 싶어서 나는 잔뜩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문태의 말은 오브라디 교수의 강연에 찬 물을 끼얹는 격이 됐다. "옛말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오브라디 교수가 낮은 목소리로 말하자 강연장에 침묵이 감돌았다. 나 는 나도 모르게 마른 침을 한 번 삼키고 말았다. "옛말 틀린 말 하나 없다." 이 말이 나오자 다시 강연회장은 웃음바다가 되었고 문태의 얼굴은 빨 갛게 달아올라서 당장이라도 뜨거운 김을 뿜어낼 것 같은 모습이 되었다. "문태 님. 이 자리는 그저 강연의 자리입니다. 강연이라 함은 한 학자 의 의견을 말하는 자리라고 이해하실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제 의견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반론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그건 제 의견을 끝까지 들 어주신 후에 하십시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제 강연회는 아무 반론 도 할 수 없는 높으신 분들의 연설과는 다른, 아주 자유롭고 열려 있는 자리입니다." "말을 삼가하시오! 귀족의 권리는 국왕이 각 영지의 귀족들에게 나누어 준 것이고 국왕의 권리는 하늘이 내려준 것입니다. 그런 발언은 얼마든지 귀족 모독죄로..." "자, 우리는 강연을 계속하지요. 뒤에 잘 들리십니까?" 오브라디 교수는 문태의 말은 완전히 무시하고 큰소리로 말했다. 그러 자 서 있던 평민들이 일제히 '예!'하고 답했다. 나는 웃음이 나오려고 하 는 것을 억지로 참아야만 했다. 화를 억누르고 있는 귀족들 사이에서 웃 음을 터트리기는 좀 뭣했기 때문이었다. "요약해서 말씀 드리지요. 아모리카는 칼로 흥한 나라였습니다. 그리고 그 칼의 힘을 유지하기 위해 온갖 사악한 짓을 다 했습니다. 하지만 국민 들의 머리와 입을 막지 않았기 때문에 그나마 강대한 힘을 오랫동안 유지 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힘을 지켜주던 마칸 에 의해 아모리카 제국은 결국 멸망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비스토브레 대륙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지금 지나 치게 칼의 힘에 의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타실과 스파일 간의 삼년전쟁 과 틈만 나면 우리를 노린다고 말하는 바바 족 이야기를 상기하십시오. 지금 우리는 과연 자유롭게 사고하고, 말할 수 사람을 키우기 위한 교육 을 하고 있습니까? 제가 보니 마법학교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마법의 말을 학생들에게 외울 것을 강요하더군요. 그렇다고 우리 국민들이 자유 롭게 말을 할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까? 훌륭하고 잘생긴 교수가 강연 내 용 때문에 귀족 모독죄로 잡혀갈 수도 있으니 입 조심하라는 말을 듣는 세상입니다." 오브라디 교수의 말은 마법의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오브라디 교수의 마음은 마법의 말처럼 강연장을 사로잡고 있었다. 뒤쪽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고함이 터져 나왔고 그 고함이 분노로 가득 찬 것이며 그 분노가 어 디로 향하고 있는 것인지,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런데다가 지금 우리는 마칸의 강림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이런 판국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멍청하게 앉아서 아모리 카 제국의 전철을 되밟아서야 되겠습니까? 아닙니다. 아모리카에서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리고, 비스토브레 식의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 야 하는 것입니다. 이 일에 모두가 관심을 기울이고, 또한 무작정 옛것을 지키자고 말하는 자들과 싸우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희망은 없습니다. 아 모리카의 전철을 밟자고 말하는 자들에게, 칼의 힘만을 믿고 말하는 자들 에게 미래는 없습니다. 여러분. 저는 여러분에게 희망을 드리고자 합니다. 자이벌? 자이벌이 왜 필요합니까. 사실 자이벌이야 말로 임프 시가 로스안으로부터 거액을 꾸어오게 만든 장본인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왜 자이벌들은 그대로 자이 벌이고 고통받는 것은 평민뿐이어야 합니까. 귀족? 왜 귀족에게 함부로 말을 하면 귀족 모독죄가 되는 것입니까? 우리는 모두 같은 바르도 대륙 에서 난 사람 아니었습니까?" 오브라디 교수의 목소리는 흥분으로 떨리고 있었다. 그 때였다. "테이르의 뜻을 받들자!" "망할 놈의 귀족들을 없애버리자!" "모조리 다 죽여버렷!" 분위기가 험악하게 바뀌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몇 명이 고함을 지르는 가 싶더니, 그대로 연단 쪽으로 달려드는 바람에, 금새 강연회장은 아수 라장이 되었다. "모든 게 다 뜻대로 될 수는 없는 법이지." 오하루는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 팔을 흔들었다. 나는 그게 무슨 신호인지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오하루의 개인 경호 원들을 부르는 신호였다. 사병들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들은 기억은 있었 지만 칼로 무장한 경호원들이 강연장 곳곳에서 진을 갖추어 뛰어드는 모 습을 보자, 나는 겁이 더럭 났다. 나는 오브라디 교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오브라디 교수는 너무나도 당황한 나머지 무슨 말을 이어야 할지도 모르고 있었다. 분명히 오브라디 교수는 자신의 강연이 이런 사태까지 야기시킬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 을 것이 분명했다. 오하루는 손짓으로 경비 병력의 일부를 강단 위로 보냈다. 오브라디 교 수는 당황한 나머지 어떻게 손 한 번 써보지 못하고 네 명의 경호원에게 잡혀 무대 뒤편으로 끌려갔고, 나머지 경호원들은 소리를 지르고 있는 뒤 편에 서있는 사람들을 향해 줄을 맞추어 뛰어갔다. 어떻게 해야 하지? 나 는 일단 자리에서 일어나 오브라디 교수를 쫓아가려고 했다. "마법사 님. 여기 계시는 게 안전할 겁니다." 오하루가 앉은 채로 나를 올려다보면서 말했다. 오하루 쪽으로도 몇 명 의 경호원들이 뛰어오고 있었고, 뒤쪽에서는 사람들과 경호원들 사이에 몸싸움이 일어났다. 자이벌들이나 귀족들은 서로 소리를 높여 자신의 개 인 경호원들을 부르고 있었고, 그탓에 강연장은 평민과, 귀족과, 자이벌 과, 경비원들로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오하루 님.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강연회 중에 강사를 잡 아가시다니요." 나는 흥분으로 가슴이 너무 뛰어올라 목소리를 떨지 않으려고 노력하면 서 오하루에게 말했다. "보셨지 않습니까. 오하루 님은 귀족 모독죄에 선동죄까지 범했습니다. 그건 형제나 다름 없는 이 귀족 분들과 동료 자이벌들 앞에서 절 모욕한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해하십시오, 마법사 님. 강연회를 준비한 저 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목소리였다. 나는 오브라디 교수가 사라진 강단 뒤편을 바라보았다. 당장이라도 그리로 뛰어가야 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용병단에서 익힌 감각은 나에게 지금은 그래서는 안 된다고 침착하게 속 삭여 주었다. '지금 나 혼자 덤벼 봐야 넷을 당할 수는 없다. 게다가 지금 오브라디 교수를 구하면 바로 임프 시를 빠져나가야 한다. 그런데 모짤트와 그레텔 이 별채에 남아있는 상황에서 어쩌다 운좋게 내가 오브라디 교수를 구한 다고 해도 다음 상황은 절망적이다.' 내 안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 나는 일단 마로우를 찾기로 마음먹었다. 다행히 마로우도 나와 같은 판단을 내렸는지 나를 찾아 두리번거리고 있 었다. "오브라디 교수님은?" "마로우, 일단 네가 별채로 가서 모짤트와 그레텔을 찾아와. 나는 오브 라디 교수님을 어디로 끌고가는 지 알아볼 테니까. 어서!" 나는 용병단에서 배운 지휘관의 역할을 생각하면서 이렇게 말했는데, 마로우는 나를 지휘관으로 인정하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는 것 같았다. "웃기는 소리하지 마. 내가 오브라디 교수님을 따라 갈 테니까 네가 별 채로 가." "너, 지금..." 말싸움을 할 시간이 없다는 건 내가 마로우보다 훨씬 더 잘 알고 있었 다. "알았어. 그럼 나중에 어떻게 만나지?" "별채에 갔다가 강연장 뒤편으로 오면 내가 있을 거야. 나도 혼자서 넷 하고 맞설 만큼 무모하진 않아. 아무리 오브라디 교수님이 끌려가고 있다 고 해도 말이야." 마로우는 이렇게 말하고는 무대 뒤편으로 뛰어 올라갔다. 하지만 마로 우의 목소리가 하도 흥분되어 있어서 나는 아무래도 걱정이 되었다. 눈앞 에 피를 흘리는 마로우의 얼굴이 잠시 스쳤다가 사라졌다.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불길한 생각이 불길한 결과를 불러올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들 사이를 뚫고 강연장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경비원 들은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칼집을 휘둘러댔고, 뒤쪽에 서 있던 사람들 역시 마구 주먹질을 해대고 있는 바람에 쉽게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어이, 대마법사!" 나는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리바였다. "잠깐." 바리바는 이렇게 말하고는 내 쪽으로 오기 위해 경호원들과 몸싸움을 벌였다. 하지만 경호원들은 그리 호락호락하게 길을 내 주지 않았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2605/12886 ━━━━━━━━━━━━━━━━━━━━━━━━━━━━━━━━━━━━━━━━ 제 목:[탐그루] 라면 전쟁 145 관련자료:없음 15/15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1-01 00:04 조회:1462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바리바!" 나는 바리바의 이름을 불렀는데,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바리바의 이름 을 불렀는지 나 자신도 헛갈릴 지경이었다. 사방에서 고함소리와 비명소 리, 신음소리가 섞인 모습을 본 경험이 없는 건 아니지만, 언제나 이런 상황이 되면 당황하기 마련이었다. "이거 안되겠군." 바리바는 앞에 있던 경호원을 거칠게 밀쳐 길을 만들어 내쪽으로 다가 왔다. 그러자 떠밀린 경호원이 칼집으로 바리바의 뒤통수 쪽을 후려쳤다. "바리바!" 나는 경고의 뜻으로 외쳤지만 이미 늦었다. 바리바는 벌써 경호원의 행 동을 눈치 채고는 휙 돌아서서 칼집을 잡은 뒤 경호원의 얼굴을 한 방 갈 겼다. 경호원은 얼굴에서 한 가닥 핏줄기를 뿜으면서 사람들 사이로 사라 져 버렸다. 다시 몇 명의 경호원이 주먹과 칼집을 바리바에게 날렸지만 바리바는 아주 가볍게 주먹을 잡아 팔을 비틀거나 칼집을 잡아 허공에 던져버리면 서 내게 다가왔다. "도와주지. 이걸로 전에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은 잊자구." 바리바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나는 바리바가 오브라디 교수의 강 연에 자극을 받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일단 여길 빠져나가자, 바리바." "그래. 루크도 밖에 있어. 그런데 오브라디 교수님은?" "일단 나가서 얘기하자." 나는 이렇게 말하면서 바리바와 함께 사람들을 뚫고 강연장 입구 쪽으 로 향했다. 입구 쪽에는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사람도 있었고, 여자와 어린아이들도 있었다. "젠장. 꼭 테이르의 날 행사장 같군." 바리바가 말했다. 루크가 바리바와 나를 알아보고 이쪽으로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다치지 않았어?" "몇 명 뿐이야. 오래간만에 손을 썼더니 이거 좀 뻐근한데." 바리바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고 보니 바리바의 솜씨가 보통은 아니 었다 싶었다. "심하게 한 건 아니겠지? 조심해 그러다 죽으면 어쩔려고." "다행히 죽여야 할만큼 실력이 있는 녀석들은 없었어." "테이르의 날에도 이랬으면 얼마나 좋아, 바리바?" 루크가 바리바의 팔에 매달리면서 말했다. "대충 살다가 대충 죽는 거지 뭐." "오늘은 대충 사는 것 같지 않던데." 내가 바리바에게 말했다. 바리바는 조금 부끄럽다는 듯한 표정이 되어 서 루크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리바. 오브라디 교수님이 경호원들한테 잡혀갔어. 난 오브라디 교수 님을 구하고 싶어. 도와주겠어?" 나는 오브라디 교수를 따라간 마로우를 걱정하면서 말했다. "...글쎄." 바리바는 조금 과장된 몸짓으로 팔짱을 끼면서 말했다. 그런데 루크가 웃음을 터트렸다. 지금 한 시가 급한데 뭘 하고 있는 거야, 이 두 사람. "'제발'이라고 말한다면 도와주지." "제발!" 나는 다급하게 '제발'이라고 외쳤다. 상대가 라이짐이었다면 한 번은 말을 돌렸을 텐데. 하여간 오래간 만에 해 보는 말장난이었다. "바리바가 마음을 좀 고쳐 먹은 모양이야. 오브라디 교수를 도와주는 게 문제가 아니라 당장이라도 그 교수를 따라다닐 기세던데?" 루크가 바리바를 붙잡은 팔을 풀면서 말했다. "어떻게 하면 돼?" "너 길 알려 줬던 내 친구 알지?" "아, 그 거지 같은 친구?" "지금은 미남자니까 헛갈리지 말아." 거지라는 말에 공연히 내가 기분이 상해서 이렇게 말하고는 다시 설명 을 시작했다. "강연장 뒤쪽으로 가면 그 친구가 있을 거야. 잘 찾아봐. 그 친구를 도 와주면 되. 그럼 내가 뮤를 끌고 강연장 뒤쪽으로 찾아갈게. 바리바. 몸 조심해. 절대 싸우면 안 돼. 일단 올때까지 기다려. 모짤트하고 함께 올 테니까. 알았지?" 내 말에 바리바는 빙긋 웃더니 루크와 함께 강연장 뒤편으로 향했다. "절대로 싸우면 안돼!" 나는 아무리 주먹이 세다고 해도 칼을 든 넷을 이길 수는 없을 거라는 생각에 이렇게 외쳤다. "바리바는 혼자서 맨주먹으로 선상 폭동을 막은 적도 있어. 걱정 마!" 루크가 바리바 대신 대답했다. 나는 강연장 뒤쪽으로 뛰어가는 두 사람 의 모습을 보면서 어떤지 미덥지가 않았다. 이런 다급한 상황에 팔짱을 끼고 달려가는 사람들이 어디있담.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나있었다. 나는 일단 별채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강연장에서 들려오는 소란스러운 소리가 조금씩 작게 느껴지다가 내 귓가 를 스치는 바람결에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별채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이럴 때 빨리 갈 수 있 는 마법이라도 하나 알고 있었다면 좋았을 걸. 혹시 지금까지 들은 마법 의 말 중에서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의 말이 있을까 나는 곰곰이 생각해 보 았다. 사비치 다리에 적혀있던 문구가 먼저 떠올랐다. '대청하는 지켜보 고 있었으리라.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의 얼굴을. 또 그들이 품었던 꿈과 희망을.' 하지만 이말 만으로는 부족했다. 바리바가 했던 말에서도 마법 을 느꼈는데, 뭐였더라. 말은 잘 기억이 나질 않았지만 바다에 대한 기억 을 떠올리는 말이었다는 것만큼은 기억이 났다. 바다라고 하면 대청하에 소금을 뿌린 것과 비슷하다는 정도밖에 알지 못하는 나에게 그 말로 마법 의 말을 만드는 건 무리였다. 그럼 스칼렛이 했던 말은? '피는 불타는 물' 지금 상황에서 박쥐를 부릴 일은 없을 것 같은데... "수르카 님!" 뒤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고개를 뒤로 돌렸다. 스칼렛이 었다. 소리로 봐서는 꽤 멀리 떨어져 있을 것 같았는데 어느새 스칼렛은 바로 내 등뒤에 와있었다. "수르카 님. 틀림없이 별채 쪽으로 가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스칼렛이 말했다. 스칼렛은 처음에 사비치 다리 위에서 보았던 것처럼 가죽으로 만들어진 바지를 입고 있었다. "도와줘요. 뮤가 필요해요." 나는 스칼렛에게 다급하게 부탁했다. "지금은 마법이 더 낫겠네요." 스칼렛은 이렇게 말하고는 내 손을 꼭 잡았다. 나는 놀라서 손을 빼버 렸는데, 스칼렛은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다시 내 손을 잡았다. "시간이 없지 않나요?" "그야 그렇지만..." "그럼 빨리 눈을 감아요." "눈이요?" "제가 인도할 거란 말이에요. 수르카 님이 눈을 뜨면 혼란이 생긴단 말 이에요. 어서요!" "저, 혹시 입맞춤 할거라면 서로가 서로를 더 잘 알게 된 다음에..." "수르카 님!" 나는 찔끔해서 눈을 감아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내 손을 잡은 스칼렛이 말했다. "안개가* 자욱한* 밤은* 피와* 생명을* 나누는* 시간*" 스칼렛의 말은 마법의 말이었다. 나는 전에 동굴에서 들었던 스칼렛의 마법의 말과 비슷한 어떤 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분명 스칼렛의 마 법은 내 마법의 말이 가지고 있는 느낌과도 달랐고 다른 어떤 사람의 말 에서 느낄 수 있었던 마법의 말과도 달랐다. "눈을 뜨세요." 스칼렛이 말했고, 나는 눈을 떴다. 눈앞에는 바로 별채가 꼭 허공에서 떨어진 것처럼 놓여져 있었다. 나는 너무 놀라 잠시 주춤거렸지만 스칼렛 앞에서 주춤하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마법이로군요." 나는 간신히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해 놓고 보니 스칼렛이 우 러르고 있는 대마법사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닐 듯 싶었다. "예. 공간이동 마법이지요." 별채 안으로 먼저 들어가면서 스칼렛이 말했다. 나는 스칼렛의 뒤를 따 르면서 물었다. "저, 지난번에 박쥐들을 부린 마법도 그렇고, 지금 마법도 그렇고. 분 명히 좀 다른 마법인 것 같은데, 맞나요?" "......" 스칼렛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상황이 다급해서 대답하지 않는 것 같지는 않았다. 스칼렛은 마법과 관련해서 뭔가 숨기고 있는 것만 같았 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2675/12886 ━━━━━━━━━━━━━━━━━━━━━━━━━━━━━━━━━━━━━━━━ 제 목:[탐그루] 라면 전쟁 146 관련자료:없음 21/21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1-02 00:26 조회:1359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수르카. 무슨 일이 났구나?" 막 계단을 오르려는데 이 층에서 모짤트가 그레텔을 데리고 내려오고 있었다. 모짤트는 등에 커다란 배낭을 두 개나 지고 있었다. "그래 무슨 일이 일어났어." "어떻게 아셨나요, 검사님?" 좀 의외라는 듯이 스칼렛이 모짤트에게 물었다. "창밖으로 내다보니까 강연장이 좀 심상치 않았습니다." 모짤트는 계단을 내려오면서 말했다. "심상치 않은 정도가 아니야. 지금 강연장은 아수라장이라고." "그럼 이제 어떻하지? 오브라디 교수님은?" 모짤트의 물음에 나는 갑자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내가 모짤트를 찾 은 것은 같이 떠나기 위해서였지만, 사실 만약의 경우 칼을 써야 할 상황 이 되면 도움을 얻기 위해서였다. 누군가 나에게 비겁하다고 말할지라도, 다시는 칼을 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제 어떻게 하면 좋지? "스칼렛. 우리 전부를 공간 이동 마법으로 옮길 수 있어요?" "제 마법으로는 한 명이 한계예요." 내가 여기서 그레텔과 뮤를 지키고, 모짤트와 스칼렛이 공간이동 마법 으로 강연장을 다녀온다면 좋겠지만, 아무래도 내가 가는 편이 훨씬 이치 에 닿을 듯 싶었다. 바리바도 마로우도 나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럼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군요. 모짤트. 오브라디 교수님은 지금 잡 혀가고 있어." "강연장 뒤편에 경호원 숙소가 있어요. 아마 오브라디 교수님은 그쪽으 로 끌려가셨을 거에요." "그렇다면 급하군. 다들 뮤에 타요. 뮤 축사에 뮤가 넉넉히 있을지 모 르겠는데..." "뮤는 넉넉할 거예요. 제 공간 이동마법으로는 한 명밖에 안 되지만 뮤 보다는 마법이 어찌 되었건 더 빠르니까요." "제가 먼저 스칼렛과 함께 가지요. 모짤트는 오브라디 교수님이 타실 뮤하고 마로우가 탈 뮤를 끌고 나중에 와. 내 스타바도 잊지 말고. 우리 는 오브라디 교수님을 구하자마자 떠날 거니까." 나는 이렇게 말했다. 말을 하는 순간 사람은 자신의 의지를 분명히 하 게 된다. 나는 지고 싶지 않았다. 하잔 시에서도 살아남았던 내가 겨우 칼 든 경호원 넷이 무서워서 피한다는 생각은 하기도 싫었다. 바리바는 맨손으로 경호원들을 상대하면서 형편없는 녀석들이라고 말하기까지 했는 데 말이다. 다만 문제는 내가 칼을 쓰고 싶어하지 않는 다는 것뿐이었다. "수르카. 칼을 쓴다는 게 여전히 두렵나 보지?" 내 생각이 표정에 나타났는지 모짤트가 이렇게 말했다. "그레텔을 봐. 아무 것도 무서워하지 않지. 그건 그레텔이 모든 것을 자신의 마음으로 대할 수 있기 때문이야. 칼도 마찬가지야." 모짤트는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래서 나는 모짤 트의 눈을 피하지 않고 대꾸했다. "난 무섭지 않아." "무서워해야 할 건 칼이 아니야. 네 마음이지." 모짤트의 말에 나는 말문이 막혀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이어서 짧은 순 간이었지만 사비오 영감이 떠올랐다. 사비오 영감은 칼도 마법도 모두 마 음이라고 말했었고, 나는 그 말을 기억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 을 잡는 일 자체를 두려워하고 있었다니. 나는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서 얼른 모짤트와 눈을 피하고 말았다. "검사 님. 한 마리 더 끌고 오세요." 스칼렛이 말하자 모짤트는 알았다고 말하고는 그대로 별채 밖으로 뛰어 나가 버렸다. "스칼렛, 그 말은..." "지금은 오브라디 교수님이 먼저예요." 역시 따라 오겠다는 말일까? 하지만 스칼렛 말 그대로 지금은 시간이 없었다. 나는 스칼렛의 손을 먼저 잡고 눈을 감았다. "안개가* 자욱한* 밤은* 피와* 생명을* 나누는* 시간이다*" 스칼렛이 말했고, 다음 순간 나와 스칼렛은 강연장의 뒤편에 서 있었 다. 나는 이상한 느낌도 없이 이렇게 순식간에 장소를 이동할 수 있다는 사실에 여전히 놀라고 있었다. (다만 스칼렛이 나를 마법사로 보고 있다 는 것 때문에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을 뿐이다) "이쪽으로 오세요." 스칼렛이 앞장서서 나를 인도했다. 나는 스칼렛을 따라가면서 어쩐지 스칼렛에게 마법으로도 지고, 기세로도 눌리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여기에요, 수르카 님." 하지만 설명은 필요 없었다. 오브라디 교수가 강연 도중에 했던 말 그 대로, 강연장 뒤편에는 꽤 널찍한 공간이 있었다. 그리고 그 공간 너머, 강연장 맞은편에 야트막한 건물이 하나 있었는데, 그곳이 아마 스칼렛이 말한 경호원들의 숙소인 모양이었다. 숙소라고는 하지만 다른 건물들과는 달리 허름하다고 느껴질 만큼 낡은 건물이었다. 건물 앞에는 세 명의 경호원을 맨 주먹으로 때려눕히고 있는 바리바와 두 명의 경호원과 칼로 맞서고 있는 마로우, 그리고 바닥에 쓰러져 있는 경호원들과 오브라디 교수를 감싸고 기회를 노리고 있는 경호원이 있었 다. 루크는 멀리 물러서 발을 동동 구르며 싸움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도와야 해요! 저 사람들은 아버지 개인 경호원이기 때문에 제 말은 안 듣는다고요." 누가 모르나. 나는 스칼렛에게 손짓으로 뒤로 피할 것을 부탁했다. 스 칼렛은 내가 칼을 뽑으려고 하자 조심스럽게 뒤로 움직였다. 나는 칼을 들고 천천히 경호원들의 숙소 쪽으로 다가갔다. 만약에 누군 가가 칼을 휘두른다면 어떻게 해야 좋을까. 나는 반사적으로 칼을 빗겨낸 다음에 바로 목을 향해서 칼을 휘두를 것이 분명했다. 이런 싸움에서 대 충 피하려고만 하다가는 아주 쉽게 당하고 만다는 건 하잔에서 이미 배운 바였다. 그렇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오늘 내 손에 죽을 게 분명했다. 경호원 둘이 나를 발견하고는 칼을 뽑아들고 다가왔다. 나는 바리바가 한 명을 매다 꽂는 순간 다른 한 명의 칼이 날을 번득이며 바리바의 등쪽 으로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 바리바는 앞으로 몸을 굴려 겨우 칼날을 피 할 수 있었지만 아무래도 그렇게 오래 버틸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마로우 는 용병단에서 배운 그대로 칼을 빗기고 목을 향해 칼날을 날리고 있었지 만, 역시 상대가 많다 보니 그쪽도 오래 버틸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나를 향해 다가오던 경호원 둘이 씨익, 웃음을 지었다. 나는 그 웃음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하잔에서 서부산맥군이 지었던, 바로 그 살의를 가 득 품은 웃음이었다. 그 웃음을 통해서 그들의 마음이 느꼈졌다.. 그들은 칼을 들고 오로지 살인만을 생각하고 있을 거였다. 마법이다. 나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강연회 장에서 내내 느꼈던 게 마법의 말이었 고, 스칼렛이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게 마법의 말이었다. 모짤트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내가 마법의 말을 찾는 것에만 급급했지, 마법의 말을 만드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었었다. 마음이 없이는 마법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렇게 생각하자 차분해 지 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사실 내 마음을 이끌고 있는 것은 스칼 렛에게 지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비록 천박한 느낌일지는 몰라도 내 마음 은 분명 스칼렛 보다 훌륭한 마법을 사용해 이 상황을 헤쳐나가고 싶다는 쪽 이었다. 좀전에 모짤트는 칼을 든 사람의 마음이 위험한 거지 칼이 위험한 건 아니라고 말했다. 사비치 다리에 쓰여 있던 말은 대청하가 마음으로 사람 들을 대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스칼렛이 한 마법의 말 은, 비록 그 느낌이 다른 마법의 말과 다르기는 하지만 오브라디 교수의 강연해서 확인한 그대로 분명 마법의 말이었다. "칼을* 든* 자의* 마음이여* 대청하는* 그대의* 모습을* 기억한다* 남 을* 상하게* 하는* 마음은* 자신도* 상하게* 할* 것이다* 다친* 마음은* 생명을* 피로* 바꾼다*" 나는 마법의 말을 외웠다. 모짤트의 말에서, 또 오브라디 교수의 강연 에서 내가 마음으로 느꼈던 문장이었다. 마법이든 칼이든 결국 마음에서 비롯하는 것이니까. 내 마법의 말이 끝나자, 두 사람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시더니, 칼을 잡은 손에서 피가 솟구치며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나는 바리바와 마로 우 쪽을바라보았다. 거기서도 칼을 들고 있던 경호원들이 모두 손에서 피 를 흘리며 힘없이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수르카 님..." 스칼렛이 탄식처럼 내 이름을 불렀고,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성공이었 다. 그것도 단 한 번에. 나는 오랫동안 마법에 대해서 생각해 왔던 것에 안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꼭 급박한 상황이 되어야지만 집중이 되 는 건 도대체 무슨 이유일까? "역시 제 생각이 옳았어요. 수르카 님은 다른 사람의 말을 듣기만 해도 그 말로 마법의 말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대마법사세요." "스칼렛. 나는 공간이동마법도 모른답니다." 나는 조금은 의기양양해서 칼을 다시 칼집에 꽂아 넣고, 오브라디 교수 쪽으로 걸음을 옮기면서 스칼렛에게 말했다. "공간이동 마법은 저희 가문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마법의 말 중 하나예 요. 저희 가문 사람들 중에서도 이 말로 마법을 걸 수 있는 사람은 그리 흔치 않지요. 그런데 수르카 님은 분명히 제 말을 듣고 새로운 마법의 말 을 만들어 내셨어요. 박쥐 같은 밤짐승을 부리는 마법을 다른 말과 섞어 마법의 말로 만드셨단 말이에요. 그러니 대마법사 님이시지요." 나는 스칼렛의 말에 기쁘다기 보다는 부끄럽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스칼렛. 대마법사라는 말은 좀 아껴두세요. 나중에 진짜로 대마법사를 만나면 그때는 뭐라고 부르려고 그러세요? 어쩌면 오브라디 교수님이야말 로 진짜 대마법사 님인지도 몰라요. 스칼렛. 몇마디 강연으로 강연회장을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바꾸어버렸잖요. 그래서 이렇게 여러 사람들을 피 곤하게 만들고요." 나는 오브라디 교수가 들으라는 듯 큰소리로 말했다. "아, 수르카. 미안하지만 사실 내 강연은 실패였어. 나는 정말로 임프 시의 시민들이 희망을 원한다면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해야한다고 말하 려고 했는데 말이야. 그런 식으로 자이벌에게 자극도 주고 시민들에게는 희망과 용기도 전하고, 그럴려고 했는데 결과는 평민들을 선동하는 꼴이 되고 말았지. 사실 솔직히 나는 지금의 왕권 체제와 영주 체제를 옹호하 는 쪽에 더 가까운 사람이라고. 정말로 선동할 뜻은 조금도 없었어. 음... 조금, 아주 조금은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오브라디 교수는 내 말을 듣더니 이렇게 횡설수설했다. 경호원들에게 잡혀 고생을 하고 나니 겁을 먹어 중언부언 하는지도 몰랐고, 어쩌면 학 자의 자존심 때문에 내게라도 제대로 된 강연 내용을 전하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는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나야말로 마법사의 자존 심으로 새로운 마법을 만들어 내고야 말았으니까 말이다. 게다가 오브라 디 교수의 말에 마법이 섞여 있었던 것은 지금 오브라디 교수가 뭐라고 말하던, 강연을 하는 오브라디 교수의 마음에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으니까. "이제 곧 모짤트가 올 거예요. 그럼 떠나지요." 나는 스칼렛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잠깐만요. 절 두고는 절대로 갈 수 없어요. 오브라디 교수님. 강연료 아직 못 받으셨지요?" 스칼렛이 오브라디 교수에게 물었다. "으흠, 그렇습니다만 스칼렛 양." 이미 망신이라면 다 당한 마당에 뭐 그리 지킬게 있는지 어깨에 힘까지 주어가면서 오브라디 교수가 말했다. 나는 바리바를 바라보았다. 바리바 는 루크와 함께 마로우를 부축하고 있었다. "그리고 로스안으로 유적 탐사를 떠나시려면 돈이 필요하고요. 맞지 요?" "유적 탐사하는 데는 돈이 그다지 많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스칼렛 양." "로스안은 여기 임프 시하고는 달라요. 제가 알기로 실리포니아 전역이 벌써 성황청과 스파일의 세력 다툼으로 아주 험악한 분위기 일 걸요? 뇌 물을 써야 할 일도 많고 또 장비가 필요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으흠. 상당히 많이 알고 계시는군요." 오브라디 교수는 좀 곤란하다는 투로 말했다. 그렇게 말하면 스칼렛이 강연료를 대신 주기라도 할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보여도 자이벌 가문에서 밥을 먹고 컸으니까요." 스칼렛이 목에 힘을 주면서 말했다. 아무래도 오브라디 교수가 설득될 것 같은 분위기다 싶었다. "수르카!" 뒤쪽에서 모짤트가 뮤를 몰고 오는 모습이 보였다. 모짤트는 고삐를 잡 고 두 마리의 뮤를 직접 끌고 오고 있었고, 스타바는 아주 의연하게 혼자 서 내 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하겠다는 말씀이시죠?" "같이 가요." "하지만 스칼렛 양, 함께 가는 건 좀 위험하기도 하고 말이지요..." "스파일 수도, 프라브리티에 아는 친척이 있어요. 그 분한테 부탁하면 금화 백 닢쯤은 쉽게 얻어낼 수 있을 거예요." "금화 백 닢?" 오브라디 교수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나는 허리에 차고 있는 사비오 영 감의 금화 얘기를 꺼내서 스칼렛이 따라오는 걸 말려야 할까하는 생각을 잠시 해 보았다. 그렇지만 스칼렛 같은 마법사가 함께 한다면 어쩐지 든 든할 것 같기도 해서 나는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판단을 내리기 전에, 오브라디 교수가 먼저 말했다. "마침 모짤트가 데리고 온 뮤도 세 마리로군요. 스칼렛 양. 같이 가시 는 걸로 하지요. 내 별로 아는 것 없지만 수르카와 모짤트의 힘이라면 아 가씨 하나 지키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닐 겁니다." 오브라디 교수가 허리를 꺾어 스칼렛에게 인사를 했다. 결국 설득 당했 군. 금화 백닢이라는 말에 말이야. "오브라디 교수님. 로스안으로 가실 겁니까?" 바리바가 마로우를 부축하면서 말했다. 힘겹게 일어선 마로우가 강연장 쪽을 가리켰다. 나는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강연장 쪽에서 경호원들 이 무더기로 몰려나오고 있었다. 거칠게 달려오고 있는 경호원들은 마치 테이르의 날 행사 때 보았던 자치대 병력의 모습처럼 보였다. "제길. 떼거지로도 오는 구만." 바리바가 손 관절을 꺾으며 목을 두어번 좌우로 흔들면서 말했다. 모짤 트는 뮤에 그레텔을 앉혀 놓고 뮤에서 내렸다. 본격적으로 한 판 벌일 생 각인 모양이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2676/12886 ━━━━━━━━━━━━━━━━━━━━━━━━━━━━━━━━━━━━━━━━ 제 목:[탐그루] 라면 전쟁 147 관련자료:없음 24/24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1-02 00:27 조회:1230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사실 저도 로스안으로 갈 마음을 먹고 있었습니다." 바리바가 달려오고 있는 경호원들과 오브라디 교수를 번갈아 보면서 말 했다. "이름 없는 마법사. 기억하지? 나 한때는 뱃사람이었어. 그런데 희망을 잃고 여기 임프 시까지 흘러 들어온 거지. 사실, 오늘 강연회에 왔을 때 는 좀 바보 같은 생각으로 왔지. 그냥 아는 사람의 스승이 강연을 한다니 까 한 번 들어봐야겠다 하고 말이야. 그런데 강연을 듣고 마음이 바뀌었 어. 그 친구를 만나봐야 겠다고 말이야." "바리바. 대충 살다가 죽겠다더니?" "대충이라도 그 용하고 한 번 결말을 지어야겠어. 오브라디 교수님. 저 도 용에 대해서 좀 알고 있는 게 있습니다. 전에 로스안에서 배를 탈 때 였습니다. 황금 군도 근처에 표류했을 때 알게 된 놈이지요. 도움이 되어 드릴 수 있을 겁니다." "바리바..." 루크의 눈가에 물기가 어리는 걸 나는 볼 수 있었다. "그래. 이거 이 오브라디 교수의 지도 제작단이 점점 늘어가는 군. 하 하하. 이거 아무래도 내 인기가 급상승 중인 것 같은데." 오브라디 교수는 아주 기분이 좋아졌는지 이런 상황에서도 싱글벙글 하 고 있었다. "교수님. 교수님의 낙천적인 성격은 제가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지금 은 여유를 부릴 상황이 아닌 것 같은데요?" "마로우. 어차피 싸움을 피하기는 어려운 상황인 것 같은데. 옛 성현 말씀에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하지 않았나?" 마로우와 오브라디 교수가 토론을 나누는 사이, 나와 모짤트, 그리고 바리바는 일단 몰려드는 경호원 쪽으로 뛰어갔다. "옛말 틀린 말 하나 없다는 식의 말씀이시군요." 마로우는 아주 오브라디 교수와 이야기하는데 재미를 붙인 모양이었다. 나는 한숨을 내 쉬면서 다가오는 경호원들을 바라보았다. 이제 경호원들 은 단숨에 우리를 집어삼킬듯 가까워져 있었다. 다시금 하잔에서 느꼈던 것 같은 공포심이 마음 속에서 피어 오르고 있었다. "그거야 농담이지, 마로우. 자네는 재능은 있어보이네만 감각이 부족 해. 학자라고 해서 모두 고리타분한 말만 하는 건 아니라네." "제 말씀은 그게 아니라..." 경호원들의 함성 소리가 두 사람의 대화를 삼켜버렸다. 바리바는 맨주 먹으로 일단 달려드는 녀석들을 때려뉘었고, 모짤트는 양손칼을 칼집에 넣은 채로 휘둘러 서넛씩을 한 번에 쓰러뜨렸다. "칼을 내려 놔, 모짤트." 나는 이렇게 말하면서 숨을 들이쉬었다. 모짤트는 내 눈을 한 번 물끄 러미 바라보더니 점잖게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았다. 하지만 덕분에 몇 명 의 경호원이 더 달라붙어서 몸을 뒤로 뺄 수밖에 없었다. "칼을* 든* 자의* 마음이여* 대청하는* 그대의* 모습을* 기억한다* 남 을* 상하게* 하는* 마음은* 자신도* 상하게* 할* 것이다* 다친* 마음은* 생명을* 피로* 바꾼다*" 나는 자신감을 가지고 다시 한 번 마법의 말을 외웠다. 나는 슬쩍 스칼 렛을 한 번 바라보았다. 스칼렛의 감탄하는 표정을 다시 한 번 보고 싶다 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뭐 한 거야, 수르카!" 모짤트가 외쳤다. 어라? 나는 경호원들을 바라보았다. 곤봉으로 무장한 경호원들이 모두 멀쩡하게 서 있었다. 게다가 문제는 그게 아니라 경호원 들의 눈에서 이상한 빛이 흐르고 있다는 거였다. "이 자식들, 갑자기 더 세졌어!" 바리바가 간신히 곤봉을 양손으로 잡아 막아내면서 소리쳤다. "수르카. 너!" 모짤트는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나를 한 번 노려보았다. 모짤트의 매서 운 눈빛을 보니 소름이 쫙 끼쳤다. "자, 잠깐, 나는..." 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나에게 곤봉이 날아들기 시작했기 때 문이었다. 나는 탐그루에서 목도를 연습하던 시절, 신나게 목도를 휘둘렀 던 기억을 떠올리면서 칼집 채로 나미트의 칼을 휘둘렀다. (기억이 떠올 랐다는 말은 여기 저기 얻어맞았다는 말이다) "수르카 님. 제가 해 보죠." 한 참 싸우고 있는데 스칼렛이 등뒤에서 이렇게 말했다. 뒤를 돌아보니 스칼렛이 야릇한 손짓을 하며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피의* 주인을* 따라* 모든* 피들은* 순환을* 멈춘다*" 스칼렛이 마법의 말을 마침과 동시에 딱 멈추어 서자, 경호원들의 눈에 서 쏟아져 나오는 빛이 수그러드는가 싶더니 모두들 멍청하게 제자리에 서 버렸다. 마치 시간이 정지된 듯, 경호원들이 제자리에 멈추어 버렸다. 나는 경호원들이 꼭 마법 학교 교정에서 보았던 석상 같다는 생각이 들었 다. "이 마법은 효력이 아주 짧아요. 수르카 님. 어서 자리를 피하지요." "...대충 정리 된 것 같군요. 오브라디 교수님. 일단 토론은 이쯤에서 끝내고 자리를 피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그러지. 마로우. 하지만 잊지 말게. 과거의 것은 온전히 과거의 것일 수 없다는 걸 말이야." "하지만 어차피 역사는 사실 아닌가요?" "사실이라기 보다 창작에 가깝지. 역사학자중에 시인이 많은 이유가 거 기에..." 오브라디 교수의 말을 다 듣기도 전에 나는 큰소리로 외쳤다. "모짤트! 마로우! 오브라디 교수님을 모시고 일단 뮤에 타!" 내 말에 모짤트는 오브라디 교수를 번쩍 들어 뮤에 태웠고, 마로우는 오브라디 교수에게 뭐라고 궁시렁 거리면서 뮤에 올랐다. "그런데 뮤가 좀 모자란데..." 내가 말하자 뒷쪽에서 잠자코 있던 루크가 휘파람을 크게 불었다. 그러 자 배낭을 옆구리에 매달고 있는 뮤 두 마리가 먼지를 일으키면서 달려왔 다. "문삼 녀석한테 마지막으로 좀 뜯어냈지.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은 몰랐 지만 말이야. 아주 좋은 뮤 두 필이야." 바리바가 말했다. 바리바는 마지막 싸움이 좀 힘겨웠는지 거친 숨을 몰 아 쉬고 있었다. "저 사람들은 왜 저렇게 된 거지?" 모짤트가 바닥에 드러누워서 아직도 피가 흐로고 있는 손을 부여잡고 있는 있는 경호원들과 마찬가지로 멍한 눈을 하고 정지해 버린 경호원들 을 번갈아 가면서 보고는 이렇게 물었다. 마법이라는 걸 보면 모르나. 이 렇게 지나버린 다음에 묻다니 말이야. "강연 내용에 감동 받아서 그래. 신경 쓰지 마, 모짤트" 나는 스타바에 오르면서 말했다. "저도 감동 받았어요, 수르카 님." 뮤에 오르고 있던 스칼렛이 눈을 반짝이면서 말했다. "그런데 그 마법도 가문에 전해 내려오는 마법인가요?" "그 마법은 아무래도 최면술이라는 마법과 비슷한 것 같아. 최면술은 사람의 정신을 일순간에 빼앗는 마법이지. 하지만 상대방이 마법에 대해 서 경계를 하고 있다던가, 마법사에게 집중하고 있어서는 쉽게 걸리지 않 지. 이 마법의 기원은 아주 오래 되었다네. 그러니까 내가 북부 스파일을 여행하고 있을 때야..." 오브라디 교수는 아직도 강연이 계속되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이렇게 말 을 이었다. 나는 오브라디 교수의 말은 일단 무시하기로 했다. 지금은 여 기를 빠져나가는 게 더 급했다. "제 마법은 이렇게 보잘것 없습니다, 수르카 님." 스칼렛은 고삐를 당기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어쩐지 스칼렛과 마법 으로 대결을 벌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름 없는 마법사. 우리 통성명이나 좀 하지. 내 이름은 바리바야." 바리바가 루크와 함께 뮤에 오르면서 나에게 말했다. 바리바의 얼굴에 흐르는 땀방울이 햇살에 빛나고 있었다. 나는 바리바의 질문에 주저하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내 이름은 수르카. 하지만 대마법사도 아니고 검사도 아니야." "그래. 결국 이름을 말해 주는 군. 난 영원히 이름도 모르고 지내게 되 나 했지 뭐야." 바리바는 웃으면서 말했다. "이름 없는 지도 제작단." 오브라디 교수가 말했다. "그래. 우리는 이제 이름 없는 지도 제작단이 되는 거야. 어때? 하하 하. 이름은 없지만 이름을 얻게 될 지도 모르고, 또 백지에 지도를 그려 나가는 게 어쩐지 이름 없다는 말하고 맞는 것 같지 않아?" 오브라디 교수가 말했지만 다들 반응이 좋지 않았다. "교수님. 그보다는 오브라디 교수 탐험단이 낫지 않겠습니까?" 아직 몸이 덜 풀렸는지 조심스럽게 뮤에 오르면서 마로우가 말했다. "아냐. 내 이름을 앞에 내세우긴 좀 그래. 나는 사실 역사학자 아닌가. 차라리 불멸의 지도 제작단이 어떤가?" "그럼 역사학자 오브라디의 지도 제작단은 어떻습니까?" "말 많은 지도 제작단이 낫겠군." 모짤트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오흠. 자, 그럼 이제 떠날까?" 모짤트의 말을 들었는지 헛기침을 하면서 오브라디 교수가 말했다. "어서 빨리요! 저 사람들이 마법에서 깨어나면 곤란하다고요." "걱정 말게, 수르카. 시간은 넉넉해. 우리의 목적지는 로스안 아닌가?" 오브라디 교수가 말했다. "잠깐. 교수님. 로스안으로 출발하기 전에 다리 밑에 가서 짐을 좀 챙 겨 오자면 어떻겠습니까. 다행히도 제가 정박장에 뗏목을 대 두었으니까 요. 수르카. 아주 그쪽으로 해서 돌아가는 건 어때?" "그래요. 거기 가서 짐을 좀 챙기는 편이 낫지요. 여행을 하게 되면 준 비해야 할 게 많다고요." 바리바와 루크가 말했다. "그쪽으로 해서 돌아가는 길은 나도 잘 알지." 마로우가 말했는데, 나는 혹시 그 길로 해서 로스안으로 가다가는 모두 다 얼마 전의 마로우처럼 바로 그 거지꼴이 되는 게 아닌가 싶어서 웃음 이 나왔다. 언제 멈추어 서 있는 경호원들이 깨어날 지 알 수 없는 상황 이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지도 제작단 이름은 뭘로 하지요, 오브라디 교수님?" "마로우. 내 생각에는 역사 탐사와 관련이 있는 이름이 좋을 것 같은 데." "교수님 성함을 따는 게 가장 무난할 것 같습니다." "아냐. 내 이름은 학자로 남아있고 싶네. 차라리 임프 시에서 출발했으 니 임프 탐사대는 어떤가?" "임프 시에서 난리가 나겠군." 바리바가 희죽거리면서 말했다. "하지만 교수님께서 이끄시는 탐사대 아닙니까? 교수님의 이름을 따는 것이 마땅히..." 도대체 무슨 쓸데 없는 대화들을 저렇게도 오래 나누고 있는지. 그냥 먼저 떠나버릴까 하는 생각이 다 들 정도였다. "교수님. 빨리 정하시지 않으시면 여기서 탐사대의 마지막을 보게 될 거예요." 나는 퉁명스럽게 내뱉었지만 오브라디 교수와 마로우는 곰곰이 생각만 하고 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지." 모짤트의 인내심에 한계가 온 모양이었다. 모짤트는 이렇게 말하고는 뮤 고삐를 급하게 끌어당겼다. "그래. 우리가 잠시 무엇을 찾고 있었던가를 잊었던 것 같군. 우리는 아모리카의 유적을 찾아 로스안으로 떠나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당연히 아모리카 탐사대가 맞지." "그렇지만 지도 제작단의 이름 아니었습니까?" "그래. 아모리카 탐사대라고 하면 좀 혼란이 있겠군. 그럼 말일세..." 오브라디 교수는 끝까지 말을 마칠 수가 없었다. 등 뒤에서 깨어난 경 호원들이 고함을 지르면서 달려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히야!" 모짤트가 소리치며 서 있던 뮤들을 다그쳤다. 일곱 마리의 뮤가 동시에 소리를 지르며 앞으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모짤트의 뮤 다루는 솜씨는 역시 일품이란 말이야. "...아무리 생각해봐도. 아모리카 탐사대야, 아모리카 탐사대, 어때 근 사하지 않나?" 뮤를 달리는 급박한 상황에서도 오브라디 교수는 태연히 말했다. 학자 라는 사람들은 다 저런 것일까? "좋습니다, 오브라디 교수님." 마로우가 말했다. "그나마 의견의 일치를 보았으니 다행이긴 한데..." 모짤트가 뮤를 거칠게 몰면서 중얼거렸다. "앞으로 도대체 이 사람들과 어떻게 함께 다닐 수 있을지 의문이야." 루크가 말했다. "워낙 훌륭하신 분들이니까 잘 되겠지. 그리고 근사하지 않아? 아모리 카 탐사단? 참, 수르카." 바리바가 나를 불렀다. 나는 스타바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바리바 쪽으 로 고개를 돌렸다. "로스안에 가면 내가 아는 술집이 하나 있어. 어때, 한 잔 사겠지?" "거래하자는 거야, 바리바?" "아니야. 부탁이야." 나는 바리바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스칼렛 쪽으로 돌렸다. 짧은 머리이지만 바람결에 휘날리는 모습은 꼭 물결이 이는 듯 출렁이고 있었다. "스칼렛, 마법 수행은 어떻게 잘 될 것 같아요?" "수르카 님과 함께라면 다..." 스칼렛은 내 쪽으로 조금 고개를 돌려 숙이며 말했다. "경호원들은 따돌린 것 같은데..." 나는 스타바를 좀 더 빨리 몰았다. 거리에 나와 있던 사람들이 일곱 마 리의 뮤가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는 모습을 놀란 토 끼 눈이 돼서 바라보았다. 이제 시내만 빠져 나가면 한숨 돌릴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눈이 시릴듯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흰구름 몇 점이 한가롭게 흐르고 있었다. 저기 저 구름 이 흘러가는 쪽이 로스안인가? 항구도시 로스안. 그러고보니 바다는 처음 이었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말로만 듣던 바다를 직접 볼 수 있겠지. 그 곳은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을까, 또 어떤 일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까.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2677/12886 ━━━━━━━━━━━━━━━━━━━━━━━━━━━━━━━━━━━━━━━━ 제 목:[탐그루] 폭풍의 눈 148 관련자료:없음 19/19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1-02 00:27 조회:1298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 폭풍의 눈 라이짐은 별빛주점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라이짐의 눈빛은 마치 넋을 잃은 사람처럼 빛을 잃고 있었다. 어두컴컴한 별빛주점은 누가 보더라도 술집이라기 보다는 폐가를 연상시키고 있어서, 이곳이 예전의 활기찬 별 빛주점이라고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 같았다. 텅 빈 별빛주점을 지키고 있는 것은 구석구석에 집을 마련해 놓은 거미 몇 마리와, 적막, 그리고 어둠뿐인 것 같았다. "라이짐. 힘 내. 그렇게 의기소침해 있지 말고. 응?" 차이린이 의자에 두껍게 깔려있는 먼지를 치울 생각도 하지 않고 앉으 면서 말했다. 그탓에 차이린의 화려한 꽃무늬 장식의 긴치마가 먼지를 풀 썩여서 가투신은 손을 휘저어 먼지를 쫓지 않으면 안되었다. 라이짐은 먼 지가 일던 말던 신경 쓰지 않고 자리에 앉아 있었다. "차이린! 좀 조심해요! 치마을 입고 그렇게 펄럭이면 어떻해요? 애초에 귀족 아가씨 역할을 맡긴 게 잘못이지, 어휴!" 가투신은 아주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말했고 차이린은 얼른 다시 자리에 서 일어났지만 또 한 번 먼지가 일어나는 바람에 가투신은 아주 입구 쪽 으로 물러서 버렸다. 라이짐은 가투신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여간 우아하고 고상한 거하고는 거리가 있다니까. 누가 도대체 차이 린한테 귀족 아가씨 역을 맡긴 거야? 보나마나 순무가 분명해. 하여간 용 병단에는 감각이 있는 사람이 없다니까, 감각이." 가투신은 이렇게 투덜거리면서 문을 열었다. 햇빛이 문을 타고 들어와 별빛주점을 떠도는 먼지를 비추었다. 먼지가 빛을 받아 커튼처럼 바람에 흔들렸다. 라이짐은 그 빛을 보면서 두꺼운 벽을 연상했다. 자신과 라짐 사이에 두터운 벽이 놓인 것 같았다. 탐그루에 돌아오기만 하면 만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조심하십시오, 가투신 님. 누가 볼 지 모릅니다." "이봐 에이스. 누가 우릴 의심하려고 마음만 먹었다면 저 엉터리 귀족 아가씨를 보면 대번에 눈치 챘어요. 이런 먼지 속에서 질식해 죽으니 싸 우다 죽는 게 낫겠어요!" 가투신이 여전히 불쾌하다는 듯이 소리를 질렀다. 아마도 가투신은 라 이짐이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는 것이 불편한지 평소보다 훨씬 과장된 음 성이었다. "생전 치마를 입어 봤어야지요, 가투신. 너무 구박하지 말아요, 예?" 차이린이 좀 애처로운 목소리로 말했지만 라이짐은 여전히 아무 말도 없었다. 차이린은 이렇게 말하고는 가투신에게 좀 조심해 달라는 뜻으로 라이짐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망연자실해 있는 라이짐이 안스러운 모양 이었다. "라이짐. 동생 일은 너무 걱정하지 마. 아직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 는 거잖아?" 차이린이 라이짐에게 말했다. 하지만 라이짐의 굳게 다물어진 입은 쉽 게 열릴 것 같지 않았다. "처음부터 여기에 올 걸 그랬어. 그랬으면 정보를 얻는 동안에 라이짐 동생 정보도 들을 수 있었을 텐데..." 차이린이 라이짐을 위로하려는 듯 말했지만 라이짐은 그런 말을 듣는 다는 것 자체가 불쾌했다. 차이린이든 가투신이든 경력에 차이가 있다 뿐 이지 같은 십부장이라고 라이짐은 생각했다. 그런 라이짐에게 꼭 나이 어 린 동생에게나 쓰는 말투로 이야기하는 차이린이 마음에 들지 않았음은 물론이었다. "아닙니다. 임무가 우선이지요. 됐습니다. 시간 끌지 말고 여기서 나가 도록 하지요." 라이짐은 이렇게 말하면서 일어섰다. 냉정해져야 한다. 라이짐은 속으 로 자신에게 다시 한 번 다짐했다. 라이짐은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던 모 자를 집어들었다. 백발은 사람 눈에 잘 뜨일 염려가 있기 때문에 라이짐 은 출발할 때 부터 모자를 깊숙히 눌러쓰고 있었다. 백발을 가리는 건 물 론이고 혹시라도 탐그루에서 누가 알아본다면 임무를 수행하는 데 곤란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처음 별빛주점 앞에 라이짐이 도착했을 때, 라이짐은 도저히 자신의 눈 을 믿을 수가 없었다. 별빛주점의 간판은 어디로 갔는지 사라져 버렸고 입구는 오랫동안 사람의 출입이 없었던 듯 거미줄까지 쳐져 있었다. 라이 짐은 황급히 문을 열었지만 라이짐을 맞은 것은 라짐이 아니라 먼지 쌓인 별빛주점의 탁자들뿐이었다. 별빛주점을 나와서 여관으로 돌아가는 길에 라이짐은 허탈한 마음으로 눌러 쓴 모자 너머 보이는 탐그루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탐그루는 일 년 사이에 많이 변해 있었다. 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해 보였고, 거리를 뛰노는 아이들의 얼굴은 생기를 잃고 있었다. 라이짐은 그 모습을 보면서 마치 하잔의 주눅든 시민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거리의 한쪽에는 스파일의 정규군이 줄을 맞춰 길을 걷고 있었고, 반대 편에는 타실의 정규군이 행진하고 있었다. 스파일의 부대는 카를로스 장 군을 상징하는 붉은 용의 문양이 그려진 방패를 들고 있었고, 타실의 부 대는 대마법사 아킨을 상징하는 지팡이의 문양이 그려진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라이진은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지나가는 두 부대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라이짐은 이곳이 아무 일도 없는 듯 평온해 보이지만 실은 언제 깨질지 모르는 살얼음판을 걷고 있다는 것을 그 광경 을 보는 것만으로도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판단은 옳았다. 성황 청의 리바르도 기사단 병력에 자치대 병력까지 해서 네 개의 부대가 이곳 탐그루에 주둔하고 있으니 라이짐의 판단은 결코 틀린 게 아니었다. 탐그루에 처음 도착했을 때 라이짐은 먼저 별빛주점을 찾지 않았다. 오 히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가투신이었다. 탐그루에 별빛주점이라 는 술집이 있고, 그곳을 운영하는 나이 어린 주인 라짐이 라이짐의 여동 생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가투신은 라이짐에게 먼저 별빛주점을 둘러보 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아닙니다. 임무가 먼저지요. 동생이 어디 가겠습니까?" 라이짐은 이렇게 잘라 말했고 덕분에 애써서 라이짐을 생각해 주려고 했던 가투신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묵묵히 뮤를 몰 수 밖에 없었다. 마부로 분한 라이짐이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자신을 기억할 사람이 가장 적은 정박장 쪽의 여관이었다. 라이짐은 자신이 탐그루에 있었을 때는 없 었던 새로 생긴 여관을 골라잡았다. 호객꾼이나 눈에 뜨이는 소매치기 중 에 아는 얼굴이 보여도 아는 내색을 하지 않았던 것은 물론이고, 오히려 모자를 깊숙이 눌러쓰면서 눈을 피했던 라이짐이었다. 탐그루에서는 검문 검색이 강화되어 있었다. 계엄령이 선포되어 있는 하잔과 마찬가지로 시민의 무기 패용은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다. 아마 도 언제 등장할지 모르는 반란군이나, 혹은 상대방 세력의 스파이를 경계 하기 위한 검문인 듯 했다. 따라서 검문은 꽤나 철저하게 이루어지고 있 었다. 게다가 네 개의 부대가 각각 따로 진행하는 검문과 검색이었기 때 문에 차이린의 미소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라이짐의 말솜씨 (라기보다 는 뇌물을 건네주는 실력)이 아니었다면 탐그루에서 움직이는 것이 그리 수월하지 만은 않았을 거였다. 아니, 수월하지 않다기 보다는 아케르 용 병단이라게 발각되 스파일과의 신뢰가 깨지는 사태가 발생했을지도 모른 다. 성황청과의 앙금을 생각한다면 발각되었을 때 목이 베어졌을 지도 모 르는 일이었다. 여관방에 돌아오자, 라이짐을 맞은 것은 바람결에 힘없이 흔들리는 커 튼 뿐이었다. 라이짐은 어쩐지 축 늘어져 흔들리는 커튼의 모습이 꼭 자 신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탐그루에 도착해서 라이짐이 얻을 수 있었던 정보는 상당히 많았다. 그 동안 탐그루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좀비가 출현하면서 탐그루에는 많은 변화가 찾아들었다. 좀비들이 등장 하기 시작하자 여기저기서 탐그루를 노리고 달려 든 세력들이 있었다. 먼 저 손을 뻗친 건 성황청이었다. 좀비 조사를 핑계로 성황청의 성직자들이 대거 탐그루에 오기 시작했고, 곧이어 성황청은 성구로 무장한 힘을 배경 으로 자치대장은 물론이고 시장까지 한 손에 쥐고 좌지우지 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 모양이었다. 자치대장은 그 뒤로 몇 번 바뀌었지만 시장은 바뀌지 않았다. 시장인 하리오 오르테가가 원래부터 성황청 쪽 사람들과 접촉을 계속 유지해 온 것 때문일 수도 있었고, 설혹 아무 대비가 없었 다고 하더라도 하리오 오르테가는 힘이 있는 쪽에 달라붙는 데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뒤로아 오르테가를 자나크의 영주 가이르 오르파 의 아들 루비오 오르파에게 시집 보낸 것도 그런 배경에서였다. "뭐, 그때 사람들은 별로 관심이 없었다오. 시장이 누가 되건 자치대장 이 누가 되건 장사하는 거 하고 뭔 관련이 있겠수?" 물건을 사는 척 하면서 넌지시 물어 본 말에 정박장에서 행상을 하는 한 아주머니는 이렇게 대꾸했다. 성황청이 탐그루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가장 먼저 행동을 취한 것은 자나크의 영주 가이르 오르파였다. 가이르 오르파는 황급히 루비오 오르파를 탐그루로 파견했다. 성황청이 탐그루를 거점으로 확보한다면 꼼짝없이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비록 영주의 권리가 국왕에게 하사 받은 것이라고 해도 성황청의 권력은 국왕의 그것 과는 차별되는 속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이르 오르파로서는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 루비오 인지 뭔지 하는 젊은 친구, 한 번 본 적이 있는데 아주 애 송이더구만. 솜털도 벗겨지지 않은 녀석이 자나크 영주의 아들입네 하고 거만을 떠는데 아주 눈꼴시어서 혼났지 뭔가?" "하하하. 그랬구만. 내가 듣기로는 그 루비오라는 녀석보다는 뒤로아 오르테가라고, 그 녀석 마누라가 아주 능력이 있는 모양이던데?" "맞아. 뒤로아. 이름이 기억나. 시장의 딸이지 아마? 굉장한 미인이라 고 들었는데." "그러니까 스파일의 장군이며 타실의 장군들이 다리를 후들거리면서 달 려들었겠지." "하하하. 오줌 안 싼 게 다행이로군." 정박장 부근 술집에서 떠들던 두 사람의 대화. 라이짐은 하잔에서 보았던 루비오의 얼굴을 떠올렸다. 다시 한 번 분노 가 솟구쳐 올랐지만 라이짐은 겨우겨우 억누를 수 있었다. 지금 분노한다 는 건 바보나 할 짓이다. 복수는 한 순간에, 완전히 끝장을 낼 수 있을 때 하는 것이다. 분노를 아껴라.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쏟아 붙는 거 다. 라이짐은 이렇게 생각하면서 맥주잔을 기울였다. 자나크의 영주 가이르 오르파는 일종의 대사 형식으로 루비오를 파견했 지만 하리오 오르테가는 일단 뒤로아 오르테가도 함께 온다는 사실에 안 도한 모양이었다. 뒤로아 오르테가를 위한 특별한 축제까지 기획했었다고 하니까 말이다. 축제는 성황청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한다. "성황청에서 반대가 심했다고 합니다. 좀비가 나타나는 데 축제를 벌인 다는 것은 교리에 어긋난나는 게 성황청의 입장이었습니다." 이건 에이스가 직접 수집한 정보였다. 낮동안 라이짐은 가투신, 차이린 과 함께 탐그루를 돌아다니면서 직접 눈으로 정보를 모으기도 하고, 또 사람들에게 이것저것 묻기도 하면서 소문을 챙겼다. 에이스는 주둔군이 있는 곳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정보를 모은 다음 여관방에서 해가 진 후에 만나곤 했다. 새로 생긴 여관에 짐을 풀었기 때문에 확실히 깨끗한 점은 좋았지만 약간 비좁은 것이 문제긴 했다. 하지만 어차피 차이린 때문에 한 방에 모두 묶을 수는 없어서 셋은 각각 방을 얻었다. 하지만 마부와 검사가 따로 방을 쓴다는 걸 여관 주인이 좀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 같은 눈치였는데 가투신이 은화를 두둑히 쥐어준 덕분인지 별 탈은 없었다. "하잔에서의 작전 이후, 좀비들은 일단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말하자면 성황청으로서는 탐그루에 계속 성구로 무장한 병력을 주둔시킬만한 이유 가 사라진 거였지요. 그런데 운이 좋았는지 나빴는지 오우거들이 출현하 기 시작했습니다. 잘 알고 계시겠습니다만 오우거들의 출현으로 성황청은 오히려 탐그루에서의 입지를 더 강화시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에이스의 보고였다. 오우거들은 용병단에서 알아낸 정보 그대로 밤에만 공격을 해 오곤 했 다고 에이스는 말했다. 그리고 무리를 지어서 한 군데를 공격했다가는 다 시 물러서고, 또 다른 곳을 공격 했다가는 다시 다른 쪽으로 빠져나가고 하는 일을 반복했다는 거였다. "그러다가 한 번은 대대적으로 공격을 했던 모양입니다. 만약 성황청이 가지고 있는 성구의 힘이 없었다면 막아내기 어려웠을 거라고 사람들이 그러더군요. 그때 피해도 꽤 있었던 모양입니다만, 그 일 이후로 당분간 오우거들은 집단적으로 나타나거나 하지는 않게 되었습니다." 에이스의 설명에 따르면 그 뒤로 성황청 기사단은 오우거들이 나타나면 그쪽으로 기사단을 파견해 성구로 오우거들을 물리치기는 했지만 무슨 이 유에서인지 뒤쫓지는 않았다고 한다. "역시 성황청에서는 오우거들이 본거지가 있다는 걸 모르고 있었던 거 야. 그러니까 방어만 하고 있는 거겠지. 게다가 혹시 공격해 들어갔다가 오우거들에게 역습 당할 우려도 크고 하니까 말이야. 그렇겠지, 라이짐?" 차이린이 말했다. "차이린. 내 생각은 달라요. 아마 탐그루에 조금이라도 더 주둔할 핑계 거리를 찾기 위해서 오우거들을 물리치는 시늉만 했을 거예요." 가투신은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겨 있다가 이렇게 말했다. "그랬다면 왜 아직까지도 소극적인 방어만 하고 있는 거지요? 만약 본 거지가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당장이라도 본거지를 쳐부수지 않았을까요? 오히려 그게 탐그루에서의 입지를 더 확실히 다질 수 있는 기회일 텐데 요." 차이린이 의문을 제기했다. 성황청의 무슨 꿍꿍이 갖고 있는지 당장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지만, 어찌되었건 그들이 오우거를 대처한 방식은 성공 적이었다. 시민들은 자치대 보다 성황청이 더 믿을만하다고 여기게 되었 고, 성황청도 '마물과 마칸을 물리치는 성황청 기사단'으로 인식되고 있 었다. 하지만 성황청의 의외의 곳에서 적을 만났다. 자나크에서 파견된 루비 오와 뒤로아 부부였다. 유명무실한 임시 대사직으로 탐그루에 도착한 루 비오는 탐그루예 타실과 스파일의 정규군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 것이 다. 이로서 성황청의 입지는 조금 약화되었고 성황청의 독주로 치달을 것 만 같았던 탐그루의 주도권은 삼파전 양상을 띄게 되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2746/12886 ━━━━━━━━━━━━━━━━━━━━━━━━━━━━━━━━━━━━━━━━ 제 목:[탐그루] 폭풍의 눈 149 관련자료:없음 18/18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1-03 00:13 조회:1096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뒤로아의 역량이 예상 밖으로 뛰어났던 모양이었 다. 뒤로아 오르테가는 탐그루에 도착하자 마자 스파일의 안토니오 장군 에게 직접 찾아가 일 개 군단을 주둔시켜 줄 것을 부탁했다고 한다. 그리 고 안토니오 장군의 군대가 스파일에 도착하기도 전에 타실의 카이사 장 군에게도 찾아가 같은 부탁을 한 것이다. 안토니오 장군과 카이사 장군의 부대는 거의 같은 날 탐그루에 도착했 고, 이렇게 해서 성황청과 스파일, 그리고 타실의 군대가 탐그루에 주둔 하게 된 것이다. 성구로 무장 하고 있다고 해도 마땅히 병력을 지휘할 사 람이 없었던 성황청에서도 비스토브레 대륙에서 그 명성이 자자한 두 장 군이 이끄는 두 개의 군단이 탐그루에 주둔했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동 타실에 주둔하고 있던 베이커 기사단을 불러 들였다. 성황청도 그리 호락 호락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해서 탐그루에는 세 부대가 주둔하게 되었다. 북쪽에 성황청, 동쪽에 스파일, 서쪽에 타실, 그리고 나머지는 자치대 병력들이 자리해 자연스럽게 탐그루는 네 개의 영역으로 나뉘게 되었다. "그런데 탐그루에 그렇게 군대가 많이 주둔하게 되면 자나크 측의 입장 에선 불리한 거 아닐까?" "어찌되었건 성황청이 개입한 이상, 탐그루를 자나크의 힘으로 지킬 수 는 없었을 겁니다. 어차피 자나크는 타실과 스파일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자나크는 스파일과 타실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이지 자나크 스스로의 힘으로 존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지금 성 황청 단독의 힘만으로도 자나크 주 전체를 언제든 집어 삼킬 수 있을 겁 니다. 또 성황청에게는 좀비의 등장이라는 분명한 명분도 있었습니다." "성황청 녀석들, 슬슬 본색을 드러내고 있는 거예요. 하잔에서도 보세 요. 그때 당했던 꼴을 생각하면..." 가투신은 어울리지 않게 몸서리를 치는 시늉까지 해가면서 이렇게 말했 다. 가투신이 지금 몸서리를 치는 이유는 하잔 시청 앞에서 죄의식의 환 영 마법에 걸렸을 때 차이린과 결혼하는 환상을 겪었던 기억 때문이었다. "그러니 자나크 영주 입장에서는 타실과 스파일의 군대를 끌어들이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라이짐은 시시껄렁한 농담을 꺼내는 대신에 이렇게 말했다. 차이린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렇구나. 사냥꾼들 속담에 '두 마리의 호랑이를 끌어들인다'는 표현 이 있어." 차이린이 말했다. "산 속에서 호랑이를 만났을 때, 한 마리와 만났다면 당장에 호랑이 밥 이 되겠지만, 호랑이 두 마리가 나타난다면..." "두 호랑이가 다투는 사이에 두 호랑이 모두를 잡거나 그것이 여의치 않다면 도망쳐 살아날 가능성이라도 생긴다는 얘기이겠지요." 라이짐이 덧붙였다. 차이린이 말한 속담은 처음 듣는 것이었지만 내용 을 추려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돌개바람이 세차게 창턱을 넘어 왔다. 커튼이 펄럭이는 사이로 별빛이 애처롭게도 희미하게 반짝이고 있 었다. "그리고 오우거의 대 공세가 한 번 더 있었던 모양입니다. 간신히 막아 내기는 한 모양입니다만 피해는 꽤 컸던 것 같습니다. 그때 작전 기록은 여기저기 부대 별로 흩어져 있어서 정확한 정보는 얻어내지 못했습니다." 원래 있던 자치대에 성황청, 스파일의 정규군, 타실의 정규군까지 각각 작전을 개별적으로 진행시켰으니 제대로 된 기록이 남아 있을 턱이 없었 다. 라이짐이 보기엔 병력상으로 무려 네 개의 군단이 모여있지만 이렇게 지휘개통이 서 있지 않아서는 각개격파 당하기 딱 좋아 보였다. "어쨌든 두 마리의 호랑이를 끌어들인다는 작전이 성공한 것 같습니다. 적어도 오우거들에겐 다행이었군요. 그 많은 병력이 오우거 하나 제대로 막아내지 못했다면 말이지요." 라이짐이 창밖 풍경을 무심히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그 호랑이들을 불러모으는 전략을 구사한 게 바로 뒤로아 오 르테가란 말인가요?" 가투신이 조심스럽게 라이짐에게 물었다. "예. 지금까지 입수한 정보를 종합해 보면 그런 결론이 나옵니다." "대단한 여성이겠군요, 그 뒤로아라는 여자. 양쪽에서 두 명의 장군을 동시에 불러들이다니 말이지요. 한 번 만나보고 싶네요." 가투신의 말을 들은 차이린의 눈에서 질투같기도 하고 분노 같기도 한 눈빛이 번쩍였다. "그럼 이제 모을 수 있는 정보는 다 모은 건가?" 차이린이 라이짐에게 물었다. 훈련병 시절 이후로 늘 상냥하게 대하는 차이린이었지만 라이짐은 그런 차이린의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런 말투를 들으면 아직도 자신을 어린 아이나 훈련병으로 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라이짐은 곧 생각을 고쳐 먹었다. 아 직 자신이 진짜 십부장으로 인정받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차이린이 저렇 게 구는 거라고. 언젠가 자신의 능력으로 인정받겠다고 말이다. "병력 배치 상황이나 지휘관 명단은 에이스가 이미 다 수집했습니다. 그리고 오우거의 본거지를 찾는 일은 저희가 직접 해결해야 하니까 탐그 루를 떠나는 길에 찾는 편이 낫겠습니다. 귀족의 딸이 오우거가 출몰하는 산 속에서 어슬렁거린다면 누가 봐도 수상할 테니까요." 라이짐이 또박또박 대답하자 차이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문서로 작성할 필요가 있지 않겠어, 라이짐? 떠버리 새로 일단 중간 보고를 하도록 하는 게 어때?" 차이린이 다시 물었을 때, 라이짐은 작은 기회가 왔구나 싶었다. "떠버리 새가 연락용이라는 것은 성황청도 알고 타실이나 스파일도 모 두 알고 있습니다. 연락용 떠버리 새가 발각되면 저희뿐만 아니라 용병단 전체가 위험해 질 수도 있습니다." "그럼... 어쩌지?" 차이린이 좀 당혹스럽다는 듯이 라이짐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 문제는 에이스가 이미 해결했습니다. 대부분의 중요한 정보는 저희 십부원들이 다 공유하고 있습니다. 검은 엘프 족의 기억력과 직접소통 능 력은 상상 이상이지요. 차이린 십부장 님." 라이짐은 차이린의 얼굴에 아차 하는 빛이 스치는 걸 놓치지 않았다. 시작은 비록 이 정도지만 언젠가 진짜로 인정받을 날이 있겠지. 라이짐은 이렇게 생각하면서 스스로만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엷은 미소를 지었다. "사실 우리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오우거의 본거지를 알아내는 것 아니 었나요? 이제 여기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다 얻었으니 어서 돌아가는 편 이 낫겠어요. 차이린도 얼른 바지로 갈아입어요. 차이린에게 치마는 너무 안 어울려요." "너무 구박하지 마세요, 가투신. 나도 좋은 집에서 태어나 칼 한 번 잡 아보지 않고 컸다면 치마가 잘 어울렸을 거예요." 차이린은 꼭 아양을 떠는 술집 기생 같은 말투로 가투신에게 말했다. 가투신은 좀 역겹다는 표정을 짓기는 했지만 고개를 돌려버렸기 때문에 그 표정을 볼 수 있었던 건 라이짐 뿐이었다. 라이짐은 도대체 차이린이 왜 가투신을 좋아하는 지, 또 왜 가투신은 차이린을 그렇게 싫어하는 지 알 수가 없었다. 누군가는 누구를 좋아하고, 또 누군가는 누군가를 좋아 하지 않고. 저런 걸 사랑이라고 하는 걸까. "그럼 이제 탐그루에서 할 일은 다 끝난 셈이군요. 어서 하잔으로 돌아 가는 편이..." "아직 하나가 남아있습니다." 라이짐이 말했다. 어쩐지 회의의 주도권이 자신에게 쥐어진 것 같아서 라이짐은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조심해야 한다. 빨리 올라간 만큼 빨리 떨어지기 쉽다는 것을 라이짐은 탐그루 소매치기 패거 리 시절부터 체험으로 알고 있었다. 실제로 울찬이 수르카에게 도전했다 가 진 이후에 다시 예전의 위치에 오르기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울찬이 졌다는 소식이 퍼지자, 꼬마들까지 울찬을 무시하는 모습 을 보았던 걸 라이짐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탐그루에 반란군이 있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반란군이라고요?" "예. 아직까지 정확한 정보가 있는 건 아닙니다만 적어도 반란군이 성 황청 편도, 스파일이나 타실의 편도 아니라는 건 확실합니다. 아마도 탐 그루에서 자생적으로 조직된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만... 만약에 우리 용병단이 탐그루를 장악하기 위해서라면 한 번 접촉해 보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 반란군이라면 평민들이 조직했을 가능성이 크니까 말이야. 어쩌 면 우리와 뜻을 같이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렇지 라이짐?" 차이린의 가르치는 듯한 말투를 견디는 일은 라이짐에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루비오를 향한 복수심을 억누르면서 견뎌온 라이 짐의 인내심은 차이린의 말투가 아니라 더한 것도 참을 수 있었다. "지금 에이스가 정보를 수집 중입니다." "워낙 비밀스러운 조직인데다가 점조직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접촉 이 쉽지 않았습니다. 곧 어떤 조직인지 알아 낼 수 있을 겁니다." 에이스가 기다란 귀를 만지작거리면서 대답했다. 검은 엘프 족은 뭔가 잘 되고 있지 않을 때 귀를 만지는 습관이 있는 모양이었다. 에이스 자매 들은 하나같이 라이짐에게 질책을 받게 되면 귀를 만지면서 대답을 하곤 했다. "에이스 일은 에이스 일이고, 이제는 별빛주점을 찾아갈 때가 된 것 같 습니다. 라짐이라면 어쩌면 반란군에 대해서 알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라짐은 술집을 운영하고 있으니 의외로 많은 사실들을 알고 있을 겁니 다." 게다가 동생이기 때문에 설혹 자신이 반란군의 일원이라고 하더라도 라 이짐에게 솔직히 다 이야기 해 줄 것이라는 설명은 덧붙이지 않았다. 그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라짐을 만나게 된다. 라이짐은 가슴이 뛰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어떻게 변했을까. 그 동안 뭘 하면서 어 떻게 살아왔을까. 어머니의 묘는 옮겼을까. 여전히 강가의 그네는 흔들리 고 있겠지. 탐그루를 떠나던 날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네가 바로 눈 앞에 서 흔들리고 있는 것 같았다. 라이짐은 만감이 교차했다. 묻어두었던 복 수심과 또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라짐에 대한 걱정... 하지만 라이짐은 흔들리는 감정을 숨기기 위해 오히려 냉정하게 말했다. "혹시라도 제게 만약 무슨 일이 생긴다면 바로 용병단으로 귀환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다음 날. 라이짐은 낡은 폐가와도 같은 별빛주점에 앉아 자신을 책망하고 있었다. 어머니에 이어서 동생 라짐까지. 라이짐의 심장은 텅 빈 별빛주점에 날리고 있는 먼지처럼 갈기갈기 찢어지고 있었다. 여관방에 모여 앉은 가투신과 차이린, 그리고 라이짐은 머리를 맞대고 앞으로의 일을 의논했다. 라이짐은 커튼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앞날이 저 커튼처럼 거대한 힘에 저항하지 못하고 맥없이 흔들리는 신세가 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에 가슴이 착잡했다. "이제 어떻게 하지? 에이스의 보고만 기다리고 있어야 하나? 어차피 에 이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정보라면 그냥 돌아가는 게 낫지 않아?" "그래요, 라이짐. 여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한 것 같은데요." 조금은 기운이 빠진 듯 보이는 라이짐에게 차이린과 가투신이 이렇게 한 마디 씩을 던졌다. 하지만 라이짐의 입장은 단호했다. "제가 여기 온 것은 정보를 담당하고 있는 눈보라 십부장이어서만은 아 니었습니다. 그건 바로 제가 탐그루 출신이었기 때문이지요. 반란군에 대 한 정보를 제가 얻을 수 없다면 도대체 제가 여기 온 이유가 뭐겠습니 까." "그럼 어떻게 할까? 정보를 얻어 보겠어?" 차이린이 말했다. 차이린의 본심이야 그저 걱정이 되는 정도였겠지만 라이짐은 여전히 자신을 가르치려고만 든다는 느낌이 들었다. "반나절만 주십시오. 제가 알아서 알아보겠습니다. 해 지기 전에 돌아 오지요." "혼자 가겠어요?" 가투신이 물었다. 하지만 걱정된다는 말투는 아니었다. "예. 그게 더 편할 것 같습니다. 제가 알고 있던 사람들은 낯선 얼굴을 보면 경계 할테니까요. 그리고 혼자 다니는 게 검문이나 검색을 피하기에 도 더 용이합니다." "그런데 반나절 갖고 충분하겠어? 다른 곳에서 자고 와도 좋으니까 천 천히 조사해 보고 와. 기다리고 있을 게." 차이린이 자상한 말투로 챙겨주었다. 하지만 다른 곳에서 자고 와도 좋 다는 말이 라이짐의 귀에는 오늘밤은 가투신과 함께 보내고 싶다는 말로 들렸다. 꼭 그래서 만은 아니었지만 라이짐은 고개를 저었다. "만약에 내일 아침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저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걸로 알고 먼저 떠나십시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2747/12886 ━━━━━━━━━━━━━━━━━━━━━━━━━━━━━━━━━━━━━━━━ 제 목:[탐그루] 폭풍의 눈 150 관련자료:없음 19/19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1-03 00:14 조회:966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라이짐은 이렇게 딱 잘라 말하고는 가투신과 차이린이 뭐라고 말할 여 유도 주지 않고 여관을 나섰다. 점심이 조금 지난 무렵이었다. 라이짐은 단검이라도 몇 자루 챙겨 나올까 했지만 그만 두었다. 혹시라도 검문에 걸리게 될 경우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가는 빠져 나올 길이 없기 때문이었 다. 게다가 누군가에게 단검을 써야 할 상황이 온다면 정보수집 계획은 이미 틀려버린 거나 마찬가지였다. 라이짐은 이렇게 생각하면서 스스로 안심시키려고 했지만 사실 칼 없이 돌아다니고 있다는 것 자체가 징벌이 되는 용병생활에 익숙해진 라이짐에게 무기가 없다는 건 꼭 벌거벗고 거 리를 나선 것처럼 불쾌한 일이었다. 라이짐은 먼저 울찬을 찾았다. 울찬이라면 적어도 라짐이 어떻게 된 건 지 알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울찬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 았다. 예전에 소매치기 패거리들과 함께 썼던 본부에는 아예 사람의 흔적 이 없었고, 정박장이나 중앙광장에도 울찬의 모습은 찾아 볼 수가 없었 다. 그러고 보니 정박장 부근을 제외하면 소매치기의 모습도 찾아보기 힘 들었다. 하긴 군대가 주둔해 있는 마당에 소매치기 패거리가 예전처럼 활 개를 친다는 게 더 이상하겠지. 라이짐은 이렇게 생각하면서 호객꾼들 중 에 낯익은 얼굴들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라이짐은 고작 일 년 사이에 모 르던 호객꾼들이 더 많아졌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을 뿐 별 소득은 없었다. 해지기 전까지 과연 일을 끝낼 수 있을까 라이짐은 조금씩 불안 해 지기 시작했다. "라이짐 두목!" 옛 친구들을 찾는 일을 포기하고 다른 방법을 찾아볼까 하고 있는데 낯 익은 얼굴 하나가 보였다. 한때 수르카가 라이짐의 패거리를 위해 목도를 휘두르다 팔이 부러졌을 때 보내 준 적이 있는 부하였다. "민트?" "라이짐 두목!" 호객꾼 꼬마는 오른팔 소매로 콧물을 닦으면서 예전처럼 자신을 라이짐 두목이라고 불렀다. "그래, 민트. 호객꾼 일을 하고 있니?" "아직 성년이 되지 않은 꼬마가 호객꾼 일을 하는 건 불법이에요." "원래도 그랬잖아. 그렇다고 호객꾼이 없어지나?" "세금을 내야죠." 민트의 말에서 라이짐은 자치대가 이제는 본격적으로 드러내 놓고 돈을 갈취하는 구나 싶었다. 그러고 보니 민트의 얼굴에 땟물이 그대로 남아있 는 게 보였다. 잘 먹지를 못하는지 입가도 갈라져 있었다. "그럼 넌 어디서 일하니?" "정박장이요." "호객?" "구걸이에요." "굶지는 않겠구나." 라이짐은 애써 웃음까지 지어 보이면서 민트에게 말했다. 그러자 민트 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래도 살아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라이짐 두목도 다시 만 나고요..." 라이짐은 자신을 만난 걸 왜 이렇게 까지 반가워하는지 알 수는 없었지 만 일단 울찬의 소식을 물어봐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라짐의 소식도 알 수 있겠지. "라이짐 두목이 떠나고 나서 탐그루에 성황청 기사단이 들이 닥쳤어요. 그리고 종교, 교리, 의무, 뭐 그런 말을 하면서 고아들을 다 데리고 가 버렸어요." "성황청이?" 라이짐은 깜짝 놀라서 말했다. 그런 정보는 얻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군사 정보 주집에만 초점을 맞추었다고 해도 그런 큰 일을 알아내지 못했 다니. 역시 에이스를 통한 정보 수집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대리부모들이 고아 자식에게 관심이 없다지만 그걸 화제로 삼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니.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는 라이짐이었다. 이제서야 왜 예 전의 동료들이나 울찬을 찾을 수 없었는지 알 수 있었다. "...울찬도 잡혀갔나?" "울찬 두목은 죽었어요." 민트는 죽었다는 말을 꼭 길거리에 동전이 하나 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처럼 감정 없는 말투로 말했다. "죽었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라이짐은 황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난데없는 충격적이 소식을 접한 라 이짐은 민트의 눈빛이 예전 같지 않음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민트의 얼굴에 죽음의 그림자를 맛본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표정이 어려있음도 알지 못했다. "성황청 기사단 기사들이 다 잡아들일 때, 울찬 두목, 혼자 싸웠어요." 언제나 타협점을 찾는 일을 우선으로 했던 울찬 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고 라이짐은 생각했다. 성구를 들고 있는 성황청의 기사단과 맞붙을 생각 을 했다니 말이다. "...왜 그랬지?" "라짐을 지키려고요. 라이짐 두목 동생 말이에요." 라이짐은 라짐이라는 말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라짐이? 라짐도 잡혀갔나?" "라짐은 타실 군대가 잡아갔어요." "무슨 말이야, 도대체. 차근차근 말해봐." "죽었어요, 다들. 히히. 누구나 그런 말을 해요. 성황청에 잡혀간 사람 들은 다 죽었다고. 그리고 타실에 끌려간 사람들은 모두 재판을 받고 죽 을 거라고요." 민트의 눈빛은 이제 완전히 빛을 잃었고, 입에서는 침이 줄줄 흘러내리 고 있었다. "무슨 말이야, 말을 해봐, 말을!" 라이짐은 소리쳤지만 민트와는 더 이상 정상적인 대화가 불가능 할 것 같았다. "정박장에 흐르는 강물을 보셨나요? 저는 봤어요. 그 강물에 핏물이 흐 르는 걸요. 히히. 전 봤어요. 가라앉았던 시체들이 떠오르고 물고기들이 펄쩍펄쩍 뛰어오르는 모습을요. 다들 그래요. 이제 끝장이라고. 마칸이 돌아 온다고요. 히히." 민트는 퀭한 눈으로 이렇게 말했다. 무슨 의미가 있는 말이라기 보다는 아무렇게나 지껄이는 말이었지만 라이짐은 민트의 말을 들으니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돋았다. 민트의 눈은 촛점이 없었고 까만 눈동자에는 백치 특유의 무심함이 흐르고 있었다. 민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해 답답해진 마 음에다가 두려운 마음까지 들자 라이짐은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좋을 지 알 수가 없었다. 한 참을 더 중얼거리고 나서야 민트는 원래 눈빛을 되찾았다. "어? 라이짐 두목? 여기서 뭐해요? 어서 가야죠. 살아남은 아이들의 집 으로요." "성황청에 잡혀가지 않고 남은 고아들이 있었나?" 라이짐은 혹시 민트가 다시 멍한 눈으로 돌아가 버리지나 않을까 걱정 하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예. 대리 부모들이 그나마 신경 써준 아이들이 있는 곳이죠. 아니, 저 같이 쓸모 없다다면서 성황청에서도 데리고 가지 않은 녀석들도 있어요." 라이짐은 다른 말은 알아들을 수가 없었지만 쓸모 없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는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누가 보아도 민트는 정상이 아니 었던 것이다. 어찌되었건 적어도 뭔가 중요한 정보를 놓치고 있었다는 걸 알았으니 라이짐은 도저히 그냥 용병단으로 돌아갈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라짐이 어떻게 된 건지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무엇보다도 앞서고는 있었지만, 라이짐은 일부러 그런 생각을 누르려고 애를 썼다. 사적인 감 정으로 자신의 임무를 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좋아. 같이 가자. 그곳으로." 라이짐은 침착하게 말했다. 흥분해서는 안 된다, 라이짐. 라이짐은 이 렇게 스스로에게 몇 번이고 다짐했다. "라이짐 두목. 나 배고파요." 민트가 말했다. 라이짐은 주머니에서 은화 몇 닢을 꺼내 민트에게 던져 주었다. 민트는 히죽거리면서 은화를 받아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거기 가도 아는 얼굴이 하나도 없을지 몰라요. 그래도 제 잘못은 아니 에요." 민트는 조심스럽게 라이짐의 눈치를 살피면서 이렇게 말했다. 라이짐은 민트의 말이 호객꾼들이 별로 좋지 않은 여관으로 인도할 때 자주 쓰는 말이라는 걸 알 수 있었지만 별로 신경 쓰지는 않기로 했다. 지금의 라이 짐으로서는 민트를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민트는 정박장에서 골목골목을 누비며 중앙광장 쪽으로 간 다음에 다시 구불구불한 뒷골목들을 몇 개나 지나서야 어느 길목으로 들어섰다. 라이 짐으로서는 골목으로 돌아서 가는 게 다행스럽다고 여겨졌다. 여기저기 검문과 검색이 있는 걸 뻔히 알고 있는데, 함부로 돌아다니다가 재수 없 게 걸려드는 날엔 용병단 일이고 뭐고 다 끝나버릴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 다. 민트가 안내한 골목은 대부분 성황청과 스파일, 타실 간의 경계선에서 약간 떨어진 길인 모양이었다. 보편적으로 경계선이 취약한 지역이기도 했고 서로의 영역에 신경을 쓰다 보니 자연 검문이나 검색이 약한 곳이기 도 했다. 민트는 아마 구걸 생활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이 길을 익힌 것 같았다. 살아남기 위해서 말이다. 라이짐은 자신이 지나온 길을 잘 기억 해 두었다. 언젠가 탐그루에 용병단이 들어오게 되었을 때 꼭 필요한 정 보가 될 것 같았다. 이런 생각을 하자 지금까지 수집한 정보가 다소 부실 한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너무 많은 정보가 있어도 올바른 판단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걸 배워 알고 있었기 때 문에 라이짐은 일단 이정도 선에서 만족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민트를 뒤따라 걷는 동안 라이짐은 자치대 병사와 스파일의 병사들도 볼 수 있었다. 타실의 병사나 성황청의 기사들도 보였다. 그러고 보니 모 두 각각 다른 특징이 있었다. 복장이 다른 점도 그랬지만 그것보다는 걷 는 모양과 진형이 조금씩 달랐다. 먼저 자치대 병사들은 탐그루가 고향인 사람들이 대부분임에도 불구하 고 잔뜩 주눅이 들어있는 듯 보였다. 그러니 꼬마들에게 세금을 뜯을 생 각이나 하겠지. 타실의 병사들은 대단히 자유분방해 보였다. 거리를 걸으면서도 잡담을 나누는 모습을 쉽게 찾아 볼 수 있었고, 줄을 맞추어 걷고는 있었지만 어 딘지 자유롭다는 생각이 드는 행렬이었다. 분명히 규율이 엄격한 부대로 보이진 않았지만 자유 분방한 용병단의 생활을 아는 라이짐으로서는 타실 의 병사들이 전투가 닥쳤을 대 의외로 강한 면모를 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파일의 병사들은 그냥 겉보기로는 상당히 강해 보였다. 단단히 줄을 맞추어 걷는 모습이나 굳은 얼굴, 그리고 지휘관의 손짓 하나에도 빠릿빠 릿하게 반응하는 모습이 진짜 군인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저런 군 대도 약점이 있다. 용병단에서 배운 그대로 전투는 상황에 따라서 얼마든 지 급변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저런 병사들은 지휘관을 잃게 되면 오 합지졸이 되기 마련이다. 가장 눈에 뜨이지 않는 게 성황청의 기사들이었다. 성황청의 기사들은 대개 각자 행동하는 듯 했고, 모두가 뮤를 타고 있었다. 성구로 무장하고 둔탁한 갑옷을 입고 있는 성황청의 기사들은 전에도 한 번 상대해 본적이 있다. 성황청은 크게 신경쓰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들은 성구에 지나치 게 의존하고 있는 탓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전투를 위해서 뽑힌 사람들 이 아니라 성직자들을 무작위로 뽑아 무장을 시켜 놓은 것이니 스파일이 나 타실의 정규군이나 우리 용병단에도 적수가 되지 못한다. 골목길을 택해서 빙빙 돌아 온 바람에 시간이 꽤 걸리긴 했지만 결국 목적지에는 도착할 수 있었다. "여기에요, 라이짐 두목." 민트가 말했다. 라이짐은 미트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라이짐의 눈에 시하라의 무기 상점이 들어왔다. "시하라?" "나같이 남은 꼬마들을 도와주고 있어요." 라이짐은 좀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하라하면 옛날에 용병이었네 어쩌고 하면서 무용담을 늘어놓기나 좋아하는 허풍쟁이에 주정꾼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는데, 고아들을 거두어 기르고 있다니 말이다. 시하라의 무기 상점은 오랫동안 손을 보지 않았는지 입구 앞에는 쓰레 기가 바람결에 굴러다니고 있었고, 벽면에는 낙서와 어지러운 얼룩이 무 늬처럼 박혀 있었다. 그리고 문은 닫혀 있었다. 아직 대낮인데 예전처럼 또 어디 가서 한 잔 하고 있는 걸까? "시하라! 문 열어요!" 무기 상점의 뒷문을 두드리면서 민트가 소리쳤다. 문은 얇은 철판이어 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중앙 광장까지 들릴 것 같아 라이짐은 주위를 살피지 않을 수 없었다. "민트냐? 잠깐 기다려라."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2748/12886 ━━━━━━━━━━━━━━━━━━━━━━━━━━━━━━━━━━━━━━━━ 제 목:[탐그루] 폭풍의 눈 151 관련자료:없음 21/21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1-03 00:14 조회:1106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시하라의 목소리였다. 라이짐은 흰머리가 드러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모자를 고쳐 썼다. 문이 열리고 시하라의 얼굴이 보였다. 시하라를 보는 순간 라이짐은 보이지 않는 벽에 머리를 부딪친 듯한 충격을 받았다. 고 작 일 년 사이에 시하라의 모습이 너무도 늙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노인이기는 했지만 당당했던 체격은 어디로 갔는지 찾아 볼 수가 없었고, 쑥 들어간 볼과 이마에 잔뜩 늘어난 주름은 시하라의 모습을 너무도 낯설 게 보이게 하고 있었다. "라, 라이짐? 맞지? 수르카의 친구. 귀족 모독죄로 쫓기고 있다더니만 이렇게 돌아왔구나. 바, 반갑다." 시하라는 라이짐을 한 눈에 알아보았다. 반가워서였을까. 시하라의 목 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시하라는 옛친구를 다시 만난 것 처럼 라이짐의 손을 덥석 잡았다. 무기점 안에 들어가자 탁한 공기와 뭔가 썩는 냄새가 사방에서 진동했 다. 라이짐은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열되어 있던 무기 류는 하나도 없었고, 진열장이나 책상은 어디다 치웠는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바닥에 두꺼운 이불이 깔려 있었다. 여기저기 취사도구와 쓰레기들 이 어지럽게 섞여 뒹굴고 있었고, 이불 위에는 남루한 옷차림의 아이 두 엇이 드러누워 자고 있었다. "좀 지저분하지? 미안해. 이거 앉을 자리를 권하고 싶은 데 어디 마땅 한 자리가..." 시하라는 이부자리를 뒤적이면서 뭔가를 찾는 시늉을 했지만 라이짐은 그냥 아무곳에나 털퍼덕 앉았다. 시하라가 자신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게 분명했기 때문에 이렇게 행동하는 편이 더 신뢰를 줄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 일은 안됐어." 시하라가 라이짐의 맞은 편에 자리를 잡고 앉은 다음에 말했다. 라이짐 은 대답대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상황에서 사적인 대화는 별로 나누고 싶지 않은 라이짐이었다. 민트는 누워 있는 고아들 옆자리로 가더니 몸을 웅크리고 누워 잠을 청 했다. "아이들을 보살펴 주시는 모양이지요?" "그래. 아무도 하지 않으니 나라도 해야지." 시하라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몇 번 쿨럭거리면서 기침을 했다. 라이짐 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찾아 시하라에게 건네주었다. "고맙네." "어쩌자고 이런 때에 돌아온 건가, 이렇게 어수선한 때에." "아무도 돌아오지 않으니 저라도 돌아와야지요." 라이짐이 말에 시하라는 웃음을 지어보이려고 했지만 이내 터져나오는 기침 때문에 웃을 수가 없었다. "무기점은 이제 안 하시나요?" "성황청이 들어온 이후에 무기점 세금이 두 배로 올랐다네. 그나마 계 엄령인지 뭔지가 내린 후에는 아예 다 압수해가 버렸고 말이야. 하지만 그 덕분에 이렇게 좋을 일을 하고 있으니 그 낙에 사는 거지." 시하라는 일 년 사이, 탐그루에서 있었던 일을 비교적 자세히 라이짐에 게 설명해주었다. 하지만 대부분이 에이스가 얻어온 정보와 겹치는 것이 었고 새롭게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오우거의 대 공세에 관한 이야기와 라 짐이 어떻게 해서 타실의 병사들에게 잡혀갔는가 하는 것 뿐이었다. 오우거의 대 공세는 한 밤중에 일어났다. 성황청의 기사와 타실, 스파 일의 병사, 거기다 자치대까지 나선 방어작전은 지휘 계통이 전혀 서 있 지 않은 상태에서 네 군데에서 동시에 진행되었고, 피해도 상당했던 모양 이었다. 시하라는 '지휘계통'이나 '거점'같은 군사 용어를 정확하게 사용 하면서 라이짐에게 당시의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시하라가 술에 취해서 했던 용병 시절 무용담이 전부 거짓말은 아니었던 것 같다. "스파일의 안토니오 장군은 좀 거친 스타일의 장군인 것 같고, 베이커 기사단의 기사단장은 좀 똑똑한 것 같아. 타실에서 왔다는 그 카이사 장 군은 부하들을 잘 이끄는 것 같고. 이렇게 스타일이 다르니 함께 하기란 쉽지 않겠지. 그렇지만 그 탓에 탐그루의 많은 시민들이 죽고 다쳤어. 특히 강제로 징발 당한 청년들이 피해가 컸어." 시하라는 굳이 설명하지 않았지만 라이짐은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훈련도 제대로 받지 않은 신병들의 사망률이 가장 높은 건 당연했다. "그 후로는 아직 오우거들의 대대적인 공세는 없어. 하지만 내가 생각 하기에 오우거 녀석들은 힘을 모으고 있는 것 같아. 아마 조만간에 다시 공격해 들어오겠지. 그때도 이렇게 엉터리로 막았다가는 다들 살아남기 어려울 지 몰라. 탐그루를 지키러 왔다는 녀석들이 전투에는 신경을 쓰지 않고 쓸데없는데 신경을 쓰고 있으니 말이야." 시하라는 이렇게 말하면서 혀를 끌끌찼다. "성황청의 성구 덕분에 막아낼 수 있었다는 말은 뭐지요?" "그야 그렇지. 하지만 소문이라는 게 늘 어지럽게 돌아다니기만 하니까 말이야..." 시하라는 이렇게 말하면서 말끝을 흐렸다. 라이짐은 누워 있는 꼬마들 을 바라보았다. 민트와 마찬가지로 얼굴에는 땟자국이 선명했고, 입가에 는 갈라진 흔적이 보이고 있었다. "그런데 이 꼬마들은 어떻게 된 겁니까? 고아들은 다 성황청에서 데리 고 갔다고 하던데요." "글쎄. 데리고 갔다고 해야 하나." 시하라에 말에 따르면 좀비들의 등장이후 성황청의 기사단이 탐그루에 주둔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고아들을 모으는 일이 시작되었다고 했다. 물론 초기에는 눈에 뜨이게 진행 된 건 아니었지만 베이커 기사단장이 주둔하 기 시작한 이후부터 상황은 바뀐 모양이었다. "무슨 말로 시장을 설득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새로운 법이 선포됐지. 대 리 부모들이 특별히 반대하지 않는다면 성황청에서 고아들을 맡아서 키우 도록 하겠다고 말이야. 잘 알겠지만 대리부모들이야 고아들을 달갑게 여 기지 않잖아. 대개의 경우 말이야. 그래서 많은 고아들이 성황청의 베이 커 기사단을 따라가 버리고 말았다네. 그런데 법령으로까지 성황청이 하 는 일을 보호해 준 걸 보면 성황청이 시장에게 아마도 어떤 이권을 약속 했을지도 모르지. 무슨 이유에서 고아들을 데리고 갔는지는 아직 아무도 모르고 말이야." "그래도 혹시 무슨 이유에서 고아들을 데려 갔는지 짐작가는 부분이 있 습니까?" "잘은 모르겠지만, 아주 끔찍한 일인 것만은 틀림없어. 민트를 봤는 가?" 라이짐은 고개를 끄덕였다. "민트는 북쪽에 있는 성황청 주둔지에서 도망쳐 나온 몇 명의 고아 중 하나지. 그런데 그곳에서 온 꼬마들은 하나같이 정신이 이상해졌어. 다 죽었다는 말을 하고, 또 자신들은 쓸모가 없어서 쫓겨온 거라고 말하면서 벌벌 떨기도 하고..." "라짐도 거기에 끌려 간 건가요?" 라이짐은 사적인 감정을 일으키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걱정스러 운 말투로 시하라에게 이렇게 묻고 말았다. "그건 아니야. 라짐은 별빛주점 단속 때 걸렸지. 라짐은 고아가 아니니 까 별 상관은 없었어. 라짐은 성인은 아니지만 가장이니까 말이야." "단속이라뇨?" "반란군을 색출한다면서 가끔가다가 타실의 병사들이 술집이나 식당을 덮칠 때가 있는데 아마 그때 반란군의 끄나풀이 있었던 모양이야. 라짐이 야 술집의 주인이니까 책임을 피할 수 없었지. 반란군과 조금이라도 관계 가 있는 사람들은 다 잡아 가두는 게 타실 쪽 사람들이니까. 타실은 반 국왕 파나 반 귀족 파한테는 무자비하게 구니까." 반란군이라는 말을 듣자 라이짐은 제대로 찾아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 다. 하지만 라짐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요? 그래서 라짐은 어떻게 되었나요?" "라짐이 잡혀가게 돼자 울찬이라는 친구가 타실 사람들한테 덤벼들었던 모양이야. 승산 없는 싸움이었을 거야. 하지만 울찬을 잡혀가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하더군. 자기는 약속을 지켰다고 전해달라고 말이야. 민트도 그 때 같이 있었어. 타실 병사들은 울찬과 민트를 잡아놓고는 어떻게 할까 하다가 둘 다 성황청에 넘겨 버렸지. 울찬의 생사여부까지는 나도 잘 모 른다네. 아니, 성황청에 끌려간 친구들이 전부 어떻게 되었는지를 모르는 마당이니 그건 당연한 거겠지." 라이짐은 시하라의 말을 듣고 울찬을 생각했다. 라짐을 지켜주겠다는 약속을 울찬을 지키려고 했던 거였다. 그렇게 생각하자 라이짐의 가슴 속 에선 성황청에 대한 분노가 다시 한 번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사실 여길 찾아 온 건 반란군 때문이었습니다." 라이짐은 일단 이렇게 말했다. 어찌되었건 지금 반란군에 대한 정보를 전해 줄 수 있는 건 시하라 하나 뿐인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래. 자네 표정을 보아하니 반란군에 대해서 들었던 것 같군. 가입하 고 싶은 모양이지?" 라이짐은 특별히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래. 이해하네. 나도 젊었다면 반란군에 가담해서 망할 놈의 국왕 놈 이나 귀족 놈들, 성황청 녀석들을 싸그리 쓸어버렸을 걸세. 비록 지금은 고아들이나 이렇게 엉망으로 돌보고 있는 정도지만 말일세." 시하라는 이렇게 말하면서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하면 됩니까." "바코쿠를 찾아가 보게. 그 친구가 많이 알고 있을 거야. 바코쿠가 반 란군의 탐그루 지부장일 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네." "그런 소문이 있나요?" "아니. 전혀 없어. 시청에 연금술사의 등을 납품해서 살아가는 연금술 사가 반란군이라니, 그게 믿어지나?" "그럼..." "떠버리 새를 날리는 걸 본 적이 있어. 그 뿐일세." "이건 고아들을 돌보는 데 쓰시라고 드리는 겁니다." 라이짐은 은화 몇 개를 집어 시하라에게 주면서 말했다. 시하라의 표정 이 어두워졌다. "이 시하라, 이제는 자네가 주는 은화를 거절하지 못할 지경이 되고 말 았군. 바코쿠가 반란군이라는 내 생각이 맞기만을 빌겠네." 라이짐은 뒷문을 열고 나갔다. 얇은 철문은 녹이 슬었다는 걸 알려주기 라도 하겠다는 듯이 끼익 하는 신음소리를 내었다. 밖으로 나온 라이짐은 바코쿠가 운영하는 연금술사의 집을 찾아가면서 몇 차례나 검문 검색을 하는 병사들을 피해 다녀야 했다. 하지만 다행히 도 민트가 했던 것처럼 골목골목을 빠져나가는 방법으로 그리 어렵지 않 게 큰길을 지키고 있는 병사들을 피할 수 있었다. 라이짐은 검문을 받고 있는 시민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하나같이 지치고 피곤한 기색이 역력 했다. 무엇이 저들을 저렇게 만들었을까. 활기차고 기운 넘치던 탐그루 시민들로부터 기력을 빼앗아 간 것은 과연 무엇일까. 라이짐이 생각하기 에 그것은 바로 칼이었다. 성황청의 칼과, 타실의 칼, 그리고 스파일의 칼이 탐그루에서 부딪치면서 탐그루의 시민들로부터 삶의 의욕을 빼앗아 간 것이었다. 귀족들을 없앤다고 해서 과연 그들에게 다시 활기찬 삶이 돌아올 수 있 을까. 라이짐은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하지만 대답은 없었다. 아니, 그 건 누구도 말할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 보면 성황청이 탐 그루에 기사단을 몰고 온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성황청이 탐그루를 거점으로 삼으려고 했기에 성황청과 로스안에서 대립하고 있던 스파일로 서는 주둔군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고 스파일이 탐그루에 주둔군을 보내 자, 타실도 군대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건 삼년전쟁의 재판이로군. 라이짐은 이렇게 생각하면서 혼자 쓴웃음 을 지었다. 생각해 보면 삼년전쟁도 사람들에 따라 다르게 말하기는 하지 만 그저 서로 먼저 당하기 전에 친다는 생각으로 일어났던 전쟁이 아니었 던가. 물론 스파일이야 타실이 먼저 식량 원조를 제한 했던 걸 이유로 들 것이고, 타실은 당연히 스파일이 먼저 병력을 움직였다는 걸 이유로 들것 이다. 하지만 그런 것은 이유라고 할 수 없다. 이유라고 한다면 오직 칼 일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들고 두 개의 주를 움직인 바로 그 칼의 힘 말이다. 칼의 힘이란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지는 것 아닐까. 승자가 휘 두르면 그것은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정의의 칼이 되고, 패자가 휘두르면 그것은 악의 칼이 된다. 귀족의 칼을 막고 아케르의 칼이 대륙을 지배한다. 아케르의 싸움이 끝 나고, 귀족과 아케르의 칼이 뒤바뀌는 순간 아케르는 승자의 칼을 휘둘러 귀족들을 벨 것이고 귀족들은 패자의 칼을 쥐고 자멸하게 될 것이다. 하 지만 아직 그 순간은 오지 않았다. 현재로선 아케르가 귀족들을 꺾을 수 있을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다만 그것을 위해 최선을 다할 뿐. 라이짐은 이 이상의 것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해야 할 일이 우선이니까. 라이짐은 이렇게 생각하면서 바코쿠가 운영하는 연금술사의 집으로 들 어갔다. 다행히 안에는 손님이 하나도 없었다. 하긴 계엄령이 내려진 판 국에 누가 연금술사의 등을 사려고 할까 싶긴 했다. 그래도 시하라가 운 영하던 무기점처럼 망하지 않을 걸 보면 귀족 손님들이 아주 끊기지는 않 은 모양이었다. "가만있자, 라이짐?" 바코쿠는 자신의 눈을 의심한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리면서 라이짐을 맞 았다. 라이짐은 웃으면서 바코쿠에게 인사했다. 바코쿠는 자리를 권했고, 라이짐은 의자에 앉자마자 용건을 밝혔다. "라짐이 잡혀간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글쎄. 반란군들이 거기서 회합을 가졌다지, 아마?" "그건 저도 들었습니다. 저는 반란군에 대해서 듣고싶어서 여기 까지 온 것입니다." 라이짐은 이렇게 말하고는 반란군에 대해 은근히 떠보았다. "반란군에 대해서 알고 계시죠?" 하지만 바코쿠는 이렇다할 반응도 보이지 않고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 이었다. "제가 만나본 사람들이 한결같이 그러더군요. 바코쿠를 찾아가라, 그럼 더 많은 걸 알게 될 것이다. 바코쿠는 생각하고 있는 것 이상으로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다." 라이짐의 말이 끝나자, 바코쿠는 자리에 앉아 턱을 괴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거 미안하구만." 라이짐은 연금술사의 등에서 의미없이 뿜어져 나오고 있는 빛줄기를 바 라보았다. "반란군에 대해서 내가 알고 있는 건 자네가 알고 있는 것 정도야. 라 짐이 왜 잡혀갔는지에 대해서 알고 싶은 모양인데 그렇다면 차라리 타실 주둔군을 찾아가 보지 그래? 내 생각에 라짐은 그저 운이 없었던 거야. 반란군의 모임이 하필이면 별빛주점에서 있었을 게 뭐야? 미안해. 나로서 는 이게 한계야." 바코쿠는 이렇게 말하면서 머리를 긁적였다. 라이짐은 바코쿠의 말을 듣는 순간 마지막 실낱같은 희망마저 사라져 버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 이 들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2797/12886 ━━━━━━━━━━━━━━━━━━━━━━━━━━━━━━━━━━━━━━━━ 제 목:[탐그루] 폭풍의 눈 152 관련자료:없음 19/19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1-04 00:19 조회:883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저도 듣고 온 게 있습니다. 바코쿠. 떠버리 새를 날리는 걸 본 사람이 있어요." 그러나 라이짐은 포기할 수 없었다. 이것은 라짐의 행방에 관한 문제이 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떠버리 새? 그게 무슨 소린가?" 바코쿠는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는 민대머리를 긁적이면서 이렇게 말했 다. 순간 라이짐은 바코쿠가 뭔가 숨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무슨 소린지 모르시겠다면 이렇게 다시 묻지요. 누군가 바코쿠가 떠버 리 새를 날리는 걸 본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그 새가 어디 로 날아가는지 살펴보았지요. 그리고 몇 가지 우연과 노력이 겹쳐져서 바 코쿠가 반란군 탐그루 지부의 지부장이라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바로 성황청이나 주둔군에 알리지 않고 저에게 알려 주었습니 다. 은화 몇 푼에 말이지요." 라이짐은 이렇게 말하면서 바코쿠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바코쿠 의 얼굴은 태연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라이짐이 느끼기에 그 얼굴은 분명 냉정한 거짓말을 하는 얼굴이었다. "그런가?" 바코쿠는 이렇게 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걸려들었다. 라이짐은 등을 보이며 돌아서는 바코쿠의 모습에서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미안하지만 하나 묻지. 자네 그런 식으로 행동하다가는 달 없는 밤에 등뒤를 조심하지 않을 수 없지 않겠어?" 바코쿠가 말했다. 순간 라이짐은 용병단에서 다져진 본능이 위험하다고 속삭이는 걸 느꼈다. 바코쿠는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고, 오른 손은 등뒤 에 숨겨져 있었다. 아마도 짧은 칼을 쥐고 있을 게 분명했다. 바코쿠가 팔 한 번 휘두르면 목이 베일 정도의 거리까지 다가오자, 라이짐도 자리 에서 일어섰다. 라이짐과 바코쿠의 눈이 마주쳤다. 라이짐은 바코쿠의 눈 을 바라보면서 자신이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바코쿠도 알고 있 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만약 운 좋게 바코쿠의 첫 공격을 피할 수 있다고 해도 라이짐에게는 무기가 없었고, 만약 무기가 있어서 바코쿠를 쓰러뜨릴 수 있다고 해도 정보를 얻겠다는 애초의 목적은 달성할 수 없을 게 뻔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바코쿠의 머리에 땀방울이 송송 맺히는 걸 보자, 라이짐은 자신의 볼에도 역시 땀방울이 흘러내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라이짐은 필사적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서 죽지 않고도 바코 쿠로부터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을 말이다. "다시 한 번 묻지. 달 없는 밤에는 등뒤를 조심하라는 말, 내 말이 틀 렸나? 다시 묻는 바코쿠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라이짐은 바코쿠의 말을 다시 한 번 듣는 순간 라짐이 보내준 편지의 추신에 붙어 있던 말이 떠올 랐다. '달 없는 밤에는 등뒤를 조심하고 길게 자란 수풀을 걸을 때는 발 밑을 조심해.' 맞다. 그때 수르카 녀석과 함께 이 말이 무슨 뜻일까 궁금해했던 적이 있었다. 라이짐은 조심스럽게, 아주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길게 자란 수풀을 걸을 때는, 발 밑을 조심해야 겠지요." 라이짐은 말을 하면서도 언제 바코쿠의 등뒤에 숨겨진 손이 칼을 날릴 지 예상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바코쿠의 손이 천천 히 앞으로 나왔다. 생각했던 대로 바코쿠의 손에 들려진 것은 단검이었 다. 바코쿠는 책상에 단검을 박아 넣었다. 탁, 하는 소리가 울리자 라이 짐은 저절로 몸이 꿈틀 했다. "다행이야. 라짐이 알려 준 모양이로군. 난 아직까지 살인은 해 본 적 이 없어. 이 일을 계속하게 되면 언젠가 하게 되겠지만 말이야." 바코쿠는 이렇게 말하면서 길게 한 숨을 내 뱉었다. 바코쿠의 손이 떨 리고 있는 것을 보면서 라이짐은 바코쿠가 탐그루 지부장까지는 아닐 것 이라고 생각했다. 그나저나 라짐이 반란군의 일원이 되었으리라고는 전혀 상상도 해보지 못한 라이짐이었다. 게다가 그렇게 편지에다 쓰는 대담한 방식으로 암호를 남겨 놓았을 줄이야. 늘 품에 지니고 다니며 틈만 나면 라짐의 편지를 읽어보지 않았다면 솔직히 어떻게 되었을지 알 수 없는 일 이었다. "오늘은 일찍 문을 닫지. 솔직히 말해서 암호를 교환한 건 이번이 처음 이야." 바코쿠는 이렇게 말하면서 연금술사의 집 문을 닫고 문 앞에 '오늘은 쉽니다'라고 적힌 알림판을 걸었다. "반란군이 어떤 단체인지는 알고 온 거야?" 바코쿠가 물었다. 문을 닫고도 안심이 되지 않는지 바코쿠는 '반란군' 이라는 단어를 말할때 아주 조심스럽게 말했다. "귀족제도에 반대하는 세력으로 알고 있습니다." 라이짐은 이렇게 말했다. 만약 반란군이 귀족 제도의 반대에 한 뜻으로 모여주기만 한다면 앞으로의 일에 힘이 될 수 있을 거였다. "그래. 대충은 맞아 들어가." 바코쿠는 좀 씁슬한 미소를 짓고 이렇게 말했다. 라이짐은 바코쿠의 그 런 얼굴을 바라보면서 마른침을 한 번 삼켰다. 침이 말라붙은 목구멍에 걸려 쉬비게 내려가지 않았다. "큰 뜻은 그렇지. 평민이라면 누구나 귀족들에 대해서 반감을 가지고 있으니까. 하지만 사실 반란군은 아직 힘을 모으고 있는 정도야. 여기 저 기 지부들은 형성되어 있지만 구심점이 없다는 말이지. 그저 귀족에 대한 반감으로 뭉친 지역도 있고, 또 한시적으로 곳곳에 내려진 계엄령에 반대 하기 위해 규합된 세력도 있고, 또 어떤 지역은 단순히 개인적 원한 관계 때문에 이루어진 곳도 있어. 이렇게 이해 관계가 엇갈려 있으니 한 뜻으 로 뭉쳐지기에는 좀 시간이 필요할 거야. 이런 일에는 원래 앞장서서 한 목소리로 여러 사람의 목소리를 모으는 사람이 필요한 법이거든." 라이짐은 문득 그 역할을 아케르가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그런 얘기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하기로 하고, 우선은 당장 할 일부터 말해두지." 바코쿠는 이렇게 반란군에 대한 설명을 끊고 일단 라이짐을 끌어들이고 보겠다는 심산인 모양이었다. 더 많은 정보를 주는 건 위험하다고 생각했 을지도 모른다. 사실 이 정도 소득이라면 많이 부족하지만, 이대로 아케 르 용병단으로 복귀하기에는 좀 미흡하다. 이렇게 생각한 라이짐은 얼른 바코쿠에게 다시 물었다. "바코쿠 님이 탐그루 지부장이신 건 맞습니까?" 그냥 생각났다는 듯이 라이짐은 말했지만, 꼭 쥔 자신의 주먹에 땀이 차고 있는 걸 라이짐은 느낄 수 있었다. "아냐." 바코쿠는 좀 쑥스럽다는 듯한 미소를 짓고 말했다. "여기 저기 세포 조직이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솔직히 자세한 건 나도 몰라. 여기 지부장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걸. 그저 떠버리 새만 날려주는 게 내 일이니까. 라이짐은 라짐으로부터 말을 들은 거겠지? 언제 포섭된 거야?" 바코쿠는 라이짐이 라짐에게 포섭된 거라고 짐작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꽤 됐습니다." 라이짐은 이렇게 애매하게 대답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거짓말이라는 게 금새 들통날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완전한 믿음을 얻지 못한 이상, 아직은 긴장을 늦출 수 없다고 라이짐은 생각했다. "라짐이 나를 찾아가 보라고 한 거야? 그럼 진작부터 그렇게 말을 할 일이지 왜 그렇게 날 떠본 거지?" "저도 안전을 기해야 했으니까요. 죄송합니다." "아냐, 아냐. 괜찮아. 누구나 목숨은 하나고 또 가장 소중한 게 목숨이 니까." 바코쿠는 손까지 흔들어 가면서 라이짐에게 괜찮다는 말을 했다. 일단 은 성공적이다. "저도 반란군의 일원이 되고 싶습니다. 제가 귀족에게 부모님을 잃었다 는 사실은 알고 계시겠지요. 그런데 이번에는 동생마저 놈들에게 끌려갔 습니다. 저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습니다." 라이짐은 한 걸음 더 들어가기로 마음먹고 이렇게 말했다. 라이짐의 말 은 진심은 아니었지만 거짓 또한 아니었기에 설득력이 있었다. "그래. 그 마음은 이해하겠어. 그래. 내가 도울 일이 뭐야? 일단 자네 는 내 세포로 해 둘게. 여기 탐그루에 계속 남아있을 건가? 귀족 모독죄 로 고발 된 일이 있으니 누가 자네를 알아본다면 좀 곤란할 텐데. 가짜 이름이 필요하겠는 걸." "아닙니다. 전 탐그루를 떠날 겁니다. 지금은 하잔에 적을 두고 있습니 다." "하잔에? 하잔도 계엄령이 내려져 있다고 하던데. 라이짐, 자네는 위험 을 그림자처럼 달고 다니는 모양이야, 하하하." 라이짐이 연금술사의 집에 발을 들여놓은 이래 처음으로 듣는 웃음이었 다. 라이짐은 이제는 됐다 싶었다. 저렇게 억지로라도 웃는 바코쿠의 모 습을 보니 적어도 믿음은 얻었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잔에서 탐그루까지라면 떠버리 새로도 충분히 연락이 가능하리라고 봅니다." "그래. 알았어. 이 걸 가지고 가." 바코쿠는 새장을 라이짐에게 내밀었다. 떠버리 새가 큰 머리를 갸우뚱 거리면서 라이짐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머리에 뿔처럼 돋아난 노란 깃털이 흔들렸다. "가지고 가서 열흘 동안 키워. 먹이는 그냥 감자 껍데기 정도 주면 되. 가능하다면 벌레를 좀 잡아 줘도 좋지만. 열흘 정도 지난 후에 날려보내 면 여기까지 날아왔다가 다시 돌아 올 거야. 닷새가 지나도 돌아오지 않 으면 사고가 생긴 걸로 생각하면 되고. 지금까지 나도 두 번 사고가 있었 어. 아마 떠버리 새가 놈들에게 죽었거나 다른 새들한테 잡혀 먹힌 거겠 지. 연락은 암호문으로 해. 여기 암호표가 있으니까 이걸 보고 암호문을 작성하면 되." 암호표라니. 단 한 번에 이렇게 많은 성과를 얻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 했던 라이짐은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걸렸구나 싶었다. 반나절 동안 얻은 정보가 탐그루에 도착해서 삼 일 동안 얻어낸 정보보다 더 유용한 것이었 다. 라이짐은 암호표를 보는 순간 더 이상 바코쿠에게 반란군에 대해서 묻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만에 하나 바코쿠에게 의심을 사는 것 보다, 안 전하게 암호표와 함께 돌아가 나중에 정보를 모으는 일이 더 중요했다. "우선 제가 할 일은 뭡니까." "하잔에 우리 세포가 있는지는 나도 모르니까 일단 하잔의 동태를 파악 해서 나한테 알려 줘. 다음 지령이 뭔지는 답신 편으로 보내 줄게." 지다문은 이렇게 말하면서 푸른 색 연금술사의 등을 켰다. 라이짐은 바 코쿠를 바라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젠 한 시름 덜었다는 생각이 들었 다. "푸른빛은 사람을 냉정하게 만들지. 라이짐.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에 너무 흥분하지 말게." 바코쿠의 표정이 굳었다. 라이짐은 바코쿠의 태도를 보는 순간, 지금부 터 하려는 말이 라짐과 관계가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꼭 그게 아니더라도 냉정을 잃어서는 안되겠기에 라이짐은 연금술사의 푸른빛에 몸을 맡기기로 했다. "먼저 좋은 소식. 라짐은 죽지 않았어. 세상은 불평등한 곳이야. 미인 은 어디가도 쉽게 죽지 않는 법이지." 바코쿠의 말을 듣는 순간 라이짐의 가슴이 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미 인이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라이짐의 머릿속에 온갖 불길한 상상들이 솟 구쳐 오르기 시작했다. 하잔 작전이 끝난 다음 기생들과 어울려 어디론가 사라졌던 용병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라이짐의 머리에 떠오른 것은 수염 투성이에 몸에서는 역한 땀 냄새가 나고 거대한 몸집을 가지고 있는 용병 들이 여자들을 희롱하는 풍경이었다. "라짐은 타실에서 온 카이사 장군의 첩이 되었다네." 라이짐은 이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버리는 것 같은 느낌 을 받았다. 만약 연금술사의 푸른 등이 아니었다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바코쿠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을지도 몰랐다. 일단 라이짐은 희게 변한 머 릿속에 아무런 영상도 떠올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바코쿠의 얼굴을 바 라보았다. "자신이 원한 일이었어. 타실의 고위층에 침투한 반란군은 아직 없거 든. 그런 눈으로 날 보지마. 라짐은 더 큰 뜻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거니 까." 바코쿠는 냉정하게 잘라 말하려고 했지만 말하는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 다. 죄책감을 느끼고 있을 게 뻔했다. 아무리 큰 뜻이라고는 하지만 귀족 의 첩이 되다니. 라이짐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코쿠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을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라짐도 나하고 마찬가지였어. 복수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거야, 라짐 도. 라짐도 역시 나처럼 루비오 하나 죽는 걸로 복수가 끝난다고 생각한 게 아니야. 라이짐. 침착해. 손에 피를 묻힌 거나 귀족의 첩이 된 거나 마찬가지 아니야? 라짐은 훌륭한 선택을 한 거야. 하지만 생각과는 정반대의 말이 입에서 튀어나오고 말았다. 푸른빛을 등지고 있기 때문인 모양이었다. "망할 놈의 계집애. 살아있기만 하라고 했더니 고작 한다는 짓이 귀족 의 첩이라니. 내가 죽으면 누가 복수를 할 거냐고 한 말 때문에?" 라이짐은 이렇게 말하면서 무의식적으로 모자를 벗어 움켜쥐었다. "아, 아니. 라이짐..." "됐어요. 살아있다는 걸 알았으니까요." "그게 아니라 머리가 말이야..." 바코쿠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서 말했다. 순간 라이짐은 아차 싶었지 만 이내 냉정하게 말투를 바꾸어 이야기를 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2798/12886 ━━━━━━━━━━━━━━━━━━━━━━━━━━━━━━━━━━━━━━━━ 제 목:[탐그루] 폭풍의 눈 153 관련자료:없음 20/20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1-04 00:19 조회:803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변장한 겁니다. 머리를 다 밀까 했지만 바코쿠 생각이 나서 밀지는 않 았어요. 대머리는 보기 흉할 것 같더라구요." 이 말에 바코쿠는 고개를 끄덕였고, 라이짐은 억지로 헛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웃음 뒤에 오는 씁쓸한 느낌을 지울 수는 없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어떤 심정일지 짐작은 가. 라이짐. 라짐을 먼발치 에서라도 한 번 보겠어?" 바코쿠가 말했다. 그럴 수만 있다면. 라이짐은 고개를 끄덕였다. 바코쿠가 라이짐을 안내 한 곳은 타실의 주둔지 바로 옆에 있는 건물이 었다. 보안상의 이유 때문에 당연히 병사들이 건물 입구를 지키고 서 있 었지만 바코쿠가 연금술사의 등을 손보기 위해서 왔다고 하자 웃으면서 통과 시켜주었다. 둘은 카이사 장군 부대의 병사들이 분명했다. 바코쿠의 일에는 별로 의심의 눈길을 보내지 않고 그저 웃으며 바코쿠를 보내 준 다음에, 하고 있던 농담을 다시 이어나갔으니 말이다. 자유스러운 게 좋 지 만은 않지. 자유시간에만 주어지는 게 아니라면 말이야. 라이짐은 이 렇게 생각했다. "이 친구는 오늘 일 도와줄 조수지요. 제 친구 아들놈입니다. 며칠 데 리고 있으려고요." 바코쿠가 말하자 병사들은 라이짐도 몸수색 한 번 해보지 않고 통과시 켜 주었다. 아마 전에도 몇 번 찾아온 적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건물은 이 층으로 되어 있었다. 바코쿠는 옥상에 올라가 타실 진지 쪽 을 가리켰다. "저 쪽에 있을 거야. 저기 중앙에 있는 천막 말이야." 바코쿠가 말했다. 라이짐은 몸을 숙여 조심스럽게 바코쿠가 가리킨 천 막 쪽을 지켜보았다. "언제 나올지는 나도 몰라. 하지만 그렇게 오래 끌 수는 없으니까 운에 맡긴다고 생각해야지. 보통 저녁때 산책 겸해서 나오는 것 같긴 하던데." 바코쿠가 말했지만 라이짐은 온통 신경을 눈에 집중시키고 있어서 바코 쿠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노을이 지고 있었다. 저물녘의 붉은 햇살이 탐그루에 낮게 깔리고 있었 다. 라이짐은 중앙에 있는 천막을 바라보면서 저 곳에 라짐이 있겠지, 라 짐이 있겠지 하고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타실의 병사들이 뭐라고 떠들면 서 천막 앞을 지나는 모습이 보였고 어디선가 연기가 피어오르는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아마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모양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옅은 붉은 빛의 노을이 서서히 짙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곧 검 붉게 변했다. "해가 지면 돌아가야 해. 너무 늦어지면 의심할지 몰라." 시간이 얼마 없었다. 라이짐은 천막을 뚫어 보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눈 에 힘을 주어 천막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천막에서 사람이 나올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자, 이제 그만 가지. 하여간 저기에 있다는 걸 알았으니 된 거 아닌 가?" "잠깐." 라이짐은 바코쿠를 바라보지도 않고 손짓으로 바코쿠에게 가만히 있으 라고 신호하면서 천막쪽을 보았다. 천막의 입구가 열리고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천천히 걸어나왔다. 라짐이었다. 라짐이 분명했다. 불과 일년 사이에 라짐은 많이 변해 있었다. 키도 더 큰 것 같았고 몸 도 많이 성숙해져 있었다. 라짐은 여전히 예뻤다. 흰 피부와 가느다란 팔 도, 비록 거리가 멀긴 했지만 라이짐은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런데 라짐이 예쁘다는 생각이 들자, 라이짐의 가슴에는 분노의 마음이 오히려 더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올해가 라짐도 성년이 되는 해 아니었던가. 라짐이 입고 있는 드레스로 봐서, 첩이라고는 하지만 꽤나 카이사의 사랑 을 받고 있는 것 같다고 라이짐은 생각했다. 라짐의 옆에는 덩치가 커서 키가 라짐의 두 배는 되어 보이는 사내가 서 있었다. 망토와 장식으로 봐 서 카이사 장군이 분명했다. "카이사 장군이야. 덕장으로 소문난 장군이지. 부하들에게 관대하고 매 사에 공정해서 지휘관으로서는 나무랄 데가 없다는 소문이야. 삼 년 전쟁 때는 하급 위관급 장교였지만, 그때도 적군을 함부로 죽이지 않았다고 하 더라구. 같은 비스토브레 왕국 사람이라면서 말이야. 그만큼 분별력이 있 는 남자라는 소리겠지." 바코쿠는 라이짐이 듣거나 말거나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떠들었다. 조금 이라도 라이짐을 안심시켜주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라이짐이 만약 바코쿠 의 얼굴을 보았다면 바코쿠가 뭔가 숨기고 있다는 걸 쉽게 알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카이사 장군은 생각보다 훨씬 젊은 사람이었다. 주름하나 없는 흰 얼굴 에 말끔하게 면도까지 한 얼굴이 먼 거리였지만 라이짐의 눈에 박혀오는 듯 들어왔다. 라짐은 웃으면서 그런 카이사 장군의 팔짱을 끼고 걷고 있 었다. 거리가 멀어서 라이짐은 그것이 가식된 웃음인지, 아니면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웃음인지 알 수 없었다. 저 웃음이 진짜라면. 장군의 첩으로 도 행복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이제 가지. 잘 있다는 걸 알았으면 되잖아?" 바코쿠의 말에 라이짐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바코쿠의 말이 옳았다. 개 인적인 일에 너무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막 돌아서 려는 순간이었다. 라짐이 라이짐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 거였다. 라 이짐은 순간 라짐이 자신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라짐은 다시 웃으며 앞으로 고개를 향했고, 라이짐은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라짐이 자신을 알아보았던 거라면 좋겠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 순간은 너무도 짧 았고 또한 한 순간 뿐이었다. 라이짐은 바코쿠를 따라 건물 밖으로 나왔다. 어느 사이 탐그루에는 어 둠이 깔려 있었다. "노을은 너무 짧지. 너무도 빨리 변한다고 생각하지 않아? 낮과 밤이 말이야." "노을처럼 변화의 순간이 빨랐으면 좋겠습니다." 라이짐은 바코쿠와 헤어져 재빨리 여관쪽으로 향했다. 계엄령 때문에 해가 진 후에 돌아다니다가는 어떤 봉변을 당하게 될지 몰랐다. 라이짐은 하지만 곧바로 큰길을 따라서 여관에 돌아갈 수는 없었다. 민트가 인도해 준 골목길을 기억해 둔 라이짐은 조심스럽게 이 골목 저 골목을 지나 정 박장 쪽으로 향했다. 정박장을 바라보자 문득 어머니의 시체를 발견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손바닥 보듯이 훤한 정박장이었다. 라이짐은 자신이 잘 알고 있는 정박장 근처에 있는 골목 구석진 곳을 찾아 바닥에 털퍼덕 주 저앉았다. 라이짐이 앉은 곳은 하늘도 잘 보이고 정박장 쪽도 감시 할 수 있는 곳이었다. 라이짐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 때 담배라도 필 줄 안다 면 좋았을 텐데. 담배를 피우면 고민이 덜어진다고 말했던 고참들의 말을 떠올리면서 라이짐은 생각했다. 정박장에는 병사들이 순찰을 하고 있었다. 아마 자치대 병력인 모양이 었다. 자치대원들의 걸음걸이는 역시 풀이 죽은 듯 보였다. 라이짐은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문득 별똥별 하나가 떨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별똥별이 떨어지는 순간에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고 하 던데. 라이짐은 무슨 소원을 빌면 좋을까 생각하다가 반지의 정령이 떠올 랐다. 여기라면 에질리를 불러내도 좋겠지. 라이짐은 타호루가 했던 말을 떠올려 보았다. "...무엇보다 외롭지 않을 걸세. 쓸쓸한 밤중에 홀로 일어났을 때, 주 위 사람 누구도 믿을 수 없어 괴로울 때, 죽음으로 보낸 사람이 그리워 질 때, 에질리를 부르게. 아마 힘이 되어 줄 걸세." 지금이 바로 그런 때였다. 라이짐은 조용히 반지의 정령을 불렀다. "승리는* 우리의* 것이다*" 라이짐이 말하자 에질리가 나타났다. 부연 그림자처럼 분명치 않은 모 습이긴 했지만 누가 보아도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라이짐 님, 부르셨습니까." 에질리가 말했다. 에질리의 목소리는 감정이 없어서 꼭 차가운 귀족 여 자에게 존대말을 듣는 기분이 들었다. "소원을 들어준다고 했지, 에질리." "예. 그렇습니다." 너무나도 무뚝뚝한 말투였다. 만약 에질리가 조금만 더 친절하게 라이 짐에게 말했다면 라이짐은 생각도 해보지 않고 빌어먹을 귀족 놈들을 다 죽여달라고 부탁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에질리의 차가운 말투 덕분에 라 이짐은 타호루가 했던 경고의 말을 떠올릴 수 있었다. 타호루는 소원에 상응하는 것을 잃게 될 거라는 말을 했다. 그것이 대자연의 섭리이고 한 생명이 태어나는 순간, 고통과 피가 뒤따르고 어쩌고 하는 예까지 들어가 면서 설명을 했었다. "내가 원하는 건 다 이루어진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주인님께서 진심으로 원하시는 것이 있다면 반드시 이루어질 겁니다. 저는 그저 그 과정을 지켜 볼 뿐입니다." 라이짐으로서는 전에도 들었던 말이었다. 여전히 차가운 말투로 말하는 에질리에게 라이짐은 도저히 뭐라고 말을 덧붙일 수가 없었다. "내가 지금 진심으로 원하고 있는 것은 뭘까..." 라이짐은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처럼 나직하게 말했다. "그건 저보다 본인이 더 잘 알고 계시겠지요." "그래. 그건 내가 세상에서 제일 잘 알고 있겠지." 라이짐은 이렇게 말했지만 라짐을 보고 나니 마음이 흔들린 것은 사실 이었다. 그저 평범한 집에서 평범하게 살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다 면 나는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았어도 되었을 것이고 라짐 또한 카이사 장 군의 첩이 되지 않았어도 되었을 텐데. 라이짐은 이런 생각을 하니 눈시 울이 뜨거워지는것 같아서 에질리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누구에게도 눈물 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일시적인 감정으로 비는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에질리가 말했다. "그래? 소원하나 들어주는 데도 별 희한한 조건이 다 붙는구나." 라이짐은 불쾌하다는 듯이 이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말하는 순간 자신이 지나치게 흔들리고 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라이짐. 정신 차려. 지 금 이 모습은 수르카를 약하다고 질책하던 라이짐의 모습이 아니야. 강해 져야지, 라이짐. 라짐도 봐. 웃으면서 카이사의 팔짱을 끼잖아? 마음을 굳게 먹어야해. 절대 쓰러지지 않도록. 다시는 이런 약한 마음을 품어서 는 안 돼, 라이짐. 이렇게 생각하면서 라이짐은 입술을 깨물었다. 조금 피곤한 탓인지 말라있던 입술이 입안에서 녹아 내리는 것 같았다. "에질리. 그런데 어쩐지 너는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고 있는 것 같구나." 라이짐은 중얼거리면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유난히 반짝이는 몇 개의 별이 눈에 들어왔다. "소망의 별입니다. 고대인들은 저 별을 바라보면서 소원을 빌면 모든 소망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소망의 별?" 처음 들어보는 별 이름에 라이짐은 조금 놀랍다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그런데 내가 저 별들을 보고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지?" 라이짐은 여전히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말했다. "저는 반지의 정령, 주인님께서 보신 것은 저도 볼 수 있고, 주인님께 서 생각하시는 것은 저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내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걸 한 번 말해봐." 라이짐은 에질리를 한 번 시험해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이렇게 말했다. "주인님의 마음에는 불씨가 있습니다. 루비오라는 귀족을 향한 복수심 의 불씨이지요. 그것은 이제 조금씩 번져나가 모든 귀족을 향해 타오르고 있습니다." 라이짐은 에질리의 말을 듣고 조금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에질리의 말은 거의 정확하게 자신의 심정을 이야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 만 라이짐은 놀란 기색을 하지 않고 에질리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게 내 소원이 될 수 있을까." "그 불길이 사그라들지 않는다면 소원은 이루어 질 것입니다." 라이짐은 조금 전에 했던 강해지자는 자신의 결심과 에질리의 말이 통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조금은 다행스럽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뭔가 를 잃게 된다는 말은 여전히 앙금처럼 마음 한 구석에 남아있었다. "그렇다면 내가 잃게 될 건 뭘까." "산 위에 오르기 전에는 산 위에서 바라보는 풍경을 아무리 말씀 드려 봐야 알 수 없는 것처럼 라이짐 님의 소원이 라이짐 님으로부터 가져갈 것이 무엇인지는 지금 말씀드려봐야 소용없습니다. 아마도 스스로 깨닫게 되시겠지요. 무엇이 사라졌는지. 또 무엇이 진정한 소원이었는지 말입니 다." 에질리의 대답에 라이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말이 좀 겁나는 건 사실이야. 내 마음을 읽을 수 있다니 너 도 알겠지. 하지만 지금 심정 같아서는 어떤 대가를 치르고라도 소원을 이루고 싶어." "그 마음이 라이짐 님의 소원을 이루어지게 할 것입니다." 그때였다. 자치대원들이 바쁘게 뛰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라이짐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에질리. 들어가." 라이짐은 이렇게 말하고는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폈다. 자치대원들의 움 직임으로 보아 틀림없이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게 틀림없 었다. "오우거다! 오우거가 나타났다!" 누군가 소리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외치는 목소리를 들어보건데 결코 적은 수의 오우거가 아닌 듯 싶었다. 어쩌면 대 공세가 벌어지고 있는지 도 모른다. 라이짐은 서둘러 여관방으로 돌아갔다. 소망의 별빛이 밤하늘 에 걸려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2799/12886 ━━━━━━━━━━━━━━━━━━━━━━━━━━━━━━━━━━━━━━━━ 제 목:[탐그루] 폭풍의 눈 154 관련자료:없음 20/20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1-04 00:20 조회:869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라이짐 일행은 에이스의 안내를 받아 탐그루 시 외곽에 있는 높은 그네 나무 위에 올라가 있었다. 여관에서 나오는 데 약간의 소동이 있기는 했다. 가투신과 차이린이 단 둘이 있었으니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고 해 도 가투신이 징그럽다는 표정을 하고 있는 걸로 봐서 라이짐은 대충 짐작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우거가 나타났다는 말을 전하고 짐을 챙겨 나오 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일단 뮤와 마차를 챙겨 정박장 쪽으로 돌아간 일행은 정박장 부근 숲에 뮤와 마차를 숨기고 마차 밑바닥에 감추어 두었던 무기를 꺼내 무장한 뒤 에이스의 안내로 나무 위에 올라 설 수 있었다. 가투신과 차이린은 칼을 들었고, 라이짐은 단검을 몇 자루 챙겼다. 칼을 가지고 갈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지만 아무래도 칼쓰기보다는 단검을 쓰는 게 더 자신이 있었기 때 문이었다. 라이짐은 떠버리 새가 들어 있는 새장은 마차 안에 숨겨두었지 만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암호표는 품에 감추었다. 물론 가투신과 차이 린에게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길 경우 암호표를 가지고 가 달라는 부탁 을 해 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여긴 어떻게 찾아냈어요, 에이스?" 가투신이 나뭇가지 사이에서 자리를 잡기 위해 버둥거리면서 말했다. 가투신이 몸을 움직일 때마다 나뭇가지가 비명소리를 질렀지만, 가투신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조금이라도 더 편한 자세를 잡기 위해 애썼다. "그래, 에이스. 여긴 참 좋은 장소네. 왜 이런 장소에 관측병하나 없는 지 모르겠어. 저쪽에서 움직이고 있는 게 스파일의 안토니오 장군의 부대 인가 보지? 용장이라더니 정말 그런 것 같네. 저것 봐. 십부를 여기저기 밀집대형으로 배치해서 오우거들을 각개격파하려고 하고 있잖아." 차이린은 나무에 오르자마자 가장 편한 자세를 찾은 후 관찰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어느새 귀족의 복장은 집어던지고 평소의 전투복으로 갈아 입은 차이린의 몸놀림은 과연 아케르 용병단의 십부장 답게 가볍고 재빨 랐다. 그런데 이렇게 먼 곳에서 조금씩 흔들리는 연금술사의 빛만을 보고 차이린은 진형과 공격방법을 파악하고 있을 줄이야. 라이짐도 차이린의 말처럼 과연 그런지 살펴보려고 애를 써 보았지만 라이짐의 눈에는 그저 작은 불빛이 조금씩 흔들리는 정도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사냥꾼 출신이 라 눈이 좋은 건지, 아니면 경험에서 얻어진 십부장의 능력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여하튼 차이린의 능력이 그리 범상한 것은 아닐 것 같다고 라이 짐은 생각했다. "이곳 정박장에 가까운 탐그루 동편은 자치대와 스파일 주둔군의 경계 선입니다. 스파일의 안토니오 장군은 마물을 상대로 전략을 쓴다는 것 자 체를 창피하게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고, 자치대는 사기가 떨어질 데로 떨 어져 군기가 엉망이니까 이런 좋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라이짐은 에이스가 '차지'라는 단어를 쓴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나무에 오르기 전 정박장에서 본 두 구의 시체가 어떻게 해서 생 기게 된 것인지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 그런데 왜 하필 이쪽에 자리를 잡았지요? 스파일이야 우리하고 동맹을 맺은 거나 마찬가지인데 성황청이나 타실의 그 카이사 장군인지 뭔지 하는 녀석이 싸우는 걸 보는 게 낫지 않나요?" 이제는 좀 자리를 잡았는지 나무에 매달린 채 움직이지 않으면서 가투 신이 말했다. "라이짐 십부장 님께서 혹시 오우거가 나타난다면 오우거가 출현한 쪽 에 자리를 잡으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맞아. 우리의 임무는 오우거의 본거지가 어디인지 파악하는 거니까 말 이야. 라이짐.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더니, 십부장이 되더니 정말 많이 달 라졌는걸?" 차이린이 꼭 대견한 자식을 칭찬하는 어머니 같은 투로 말했다. 라이짐 은 그 말투가 계속 거슬렸지만 능력으로 인정받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 하고 있었으므로 별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기분이 상하는 건 어 쩔 수 없는 일이어서 라이짐은 침착한 말투를 과장해서 차이린에게 말했 다. "일단 전투가 어느 정도 진행되면 오우거들은 물러날 것입니다. 아무리 지휘 체계에 문제가 있다고 해도 오우거의 침입을 막아낼 병력은 되니까 요. 오우거의 수가 얼마나 되는 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일개 군단이면 막아낼 수 있을 겁니다. 오우거들이 일단 퇴각을 시작하면 그때 차이린 십부장 님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경어를 쓰기는 했지만, 라이짐의 말투는 꼭 자신이 차이린의 상관이라 도 되는 것 같았다. "그래, 알았어. 내가 여기 온 게 그것 때문인데 내가 모르겠어? 너무 신경 쓰지 마. 그런데 오우거들은 본거지에 떼로 잠들어 있던데, 그 수가 어느 정도인지 모른다는 게 좀 마음에 걸리네. 혹시 본거지가 여러 군데 일 수도 있는데 말이야." "에이스. 답변 드려." 라이짐이 무뚝뚝하게 에이스에게 지시했다. "지난 번 전투에 따르면 오우거들은 부대를 나누지 않고 한 쪽으로만 공격해 들어갔던 모양입니다. 이건 오우거들이 공격하는 시간에 차이가 있는 걸 가지고 판단한 사실입니다. 전투 일지를 완벽하게 구하지는 못했 지만 어느 정도는 대충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여하간 오우거가 처음에 공 격을 개시한 지점이 바로 여기 탐그루 동편이었고 이번에도 마찬가지 였 습니다. 아마도 오우거의 본거지가 있는 방향은 바로 이쪽 동편일 것입니 다. 그러므로 본거지 하나일 것입니다. 하나 이상이라해도 한 지역에 밀 집에 있을 것입니다." 에이스가 차분한 목소리로 차이린에게 설명했다. 차이린과 가투신의 고 개가 끄덕여졌다. "에이스는 참 부지런해. 언제 그렇게 정보를 모으는 거지?" "밤입니다." 에이스는 칭찬의 말이라는 것 자체를 못 알아챘는지 이렇게 대답했다. 가투신은 쿡, 하고 웃음을 참았다. "자이스와 레이스의 힘도 컸습니다. 에이스는 제 지시를 받아 이번 작 전에 두 명의 자매를 동원하고 있거든요." "그렇군요. 음지에서 일하면서 양지를 지향하는 검은 엘프 십부, 아니 눈보라 십부라는 건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까지 대단할 줄은 미처 몰랐어요. 이거, 좀 부끄러워지는데요?" "그래요, 가투신. 이거 정말 대단한 부하를 뒀구나, 라이짐." "제 부하 통제는 제가 합니다. 칭찬은 감사합니다만 그 정도에서 그쳐 주시지요. 게다가 지금은 작전 중 아닙니까." 라이짐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차이린에게 이렇게 말했 다. 차이린의 말은 좋은 부하를 두었기 때문에 너같이 경험 없는 십부장 도 쉽게 작전을 응할 수 있다는 것처럼 들려서 라이짐은 기분이 상했다. "그리고 에이스. 다른 생각하지 말고 직접소통에만 신경을 쓰도록. 언 제 자이스하고 레이스에게서 연락이 올지 모르니까." 라이짐은 이렇게 공연히 에이스에게 핀잔을 주는 투로 말했고, 에이스 는 귀를 만지작거리면서 입을 다물었다. 차이린도 대충 라이짐의 기분을 눈치챘는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이거 나무 위에서 전투를 구경만 하고 있자니 좀 좀이 쑤시 는데. 이럴 때는 사실 신명나게 칼춤이나 한 바탕 추고 싶어진단 말이에 요." 어색한 분위기를 바꾸어 보려는 듯 가투신은 이렇게 말하고는 혼자 웃 었다. 하지만 아무도 가투신의 웃음에 동조해 주지 않아서 가투신은 어색 하게 입을 닫았다. "공세는 여기 저기 몇 번을 거친 다음에 새벽녘이 되기 전에 끝날 겁니 다. 에이스 말에 따르면 전에도 그랬다고 하니까요. 오우거의 젖은 피부 는 햇빛에 약하니까 어찌되었건 공세는 해 뜨기 전에 끝날 겁니다." "안토니오 녀석이 새벽까지는 막아줘야 할 텐데요." 가투신은 이렇게 말하면서 혼자 키득거렸다. "예, 맞아요, 가투신. 혹시나 녀석들이 새벽까지 막아주지 못하고 퇴각 해 버리거나 한다면 우리 작전에 차질이 생길 지도 몰라요." 가투신의 말에 아양 섞인 말투로 차이린이 말하는 모습을 보면서 라이 짐은 아주 고개를 돌려버렸다. 라이짐 생각에 차이린의 태도는 어이가 없 었다. 작전 중에 사적인 감정을 앞세워 잡담이나 하고 있다니 말이다. 라 이짐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에질리가 말했던 소망의 별빛이 유난히 반짝이고 있는 것 같았다. 과연 저 별빛이 사람들의 소망을 이루 어 줄 수 있을까. 만약 저 별이 자신의 소망을 들어 줄 수 있다면 좋으련 만. "아, 저기. 오우거들이 움직이고 있어요." 가투신이 몸을 일으키면서 말했다. "어떻게 하지, 라이짐? 새벽까지 여기서 기다렸다가 본거지를 추적할 까?" "그것도 좋지만 일단 오우거들을 따라서 움직이는 걸로 하지요. 새벽까 지 여기 메달려 있다가는 몸이 굳어서 움직이기도 힘들 겁니다. 그리고 성황청과 카이사 장군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한 번 알아보는 것도 도움 이 될 테니까요." 라이짐은 이렇게 말하고는 그네 나무 가지를 잡고 가볍게 한바퀴 돌면 서 나무에서 내려갔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라이짐의 마음에는 카이사 장 군의 전투하는 모습을 한 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앞서고 있었다. 이게 과 연 내 사적인 감정 때문은 아닌가. 라이짐은 냉정하게 한 번 생각해 보았 다. 하지만 결론은 '아니다'였다. 전투하는 모습을 보아두는 것은 틀림없 는 라이짐의 임무일 터였다. 비록 개인적인 욕망과 겹친다고 하더라도 공 무임에는 틀림 없다. 라이짐은 이렇게 생각하면서 오우거들이 사라져간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라이짐. 그렇게 서둘러서 움직이면 안 돼. 체력이 떨어진단 말이야. 새벽까지 버텨야 하는데 그렇게 빨리 걸어서 되겠어?" 앞서나가려는 라이짐을 향해 타이르는 투로 차이린이 말했다. 차이린의 말을 듣고 나서야 라이짐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발걸음이 빨라져 있었 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생각이야 그럴싸하게 하기는 했지만 라이짐의 마 음은 어느 새 라짐을 향해 있었던 모양이었다. 라이짐은 자존심이 상하기 는 했지만 차이린의 말을 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기분이야 어찌되었건 들을 말은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라이짐이었다. 차이린은 서두르지도 않고, 그렇다고 쉬지도 않으면서 조심스럽게 탐그 루 동편을 돌아 오우거의 발자취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숲길은 험했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닥에 있는 나뭇가지들이 다리를 찔러왔다. 전투의 공기가 점점 짙어지고 있다고 라이짐은 생각했다. 숲에서 뿜어져 나오는 맑은 공기로도 전투의 기운을 약하게 하지는 못하는 모양이었다. 전투의 냄새. 피 냄새와 땀 냄새, 그리고 살의와 욕망이 뒤섞여 있는 전투의 냄새에 라이짐은 어느새 익숙해져 있었다. 이런 냄새를 맡으면 라 이짐은 가슴이 뛰곤 했다. 이제 나는 진정한 용병이 되어가고 있다. 라이 짐은 숨을 깊게 들이키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허파 가득 전투의 열기가 들어차 온 몸의 피를 뜨겁게 덥히고 있었다. "이것 봐. 역시 무기는 들고 있지 않아. 왜 이렇게 멍청한 방법을 쓰는 걸까. 아무리 마물이라지만 말이야. 트롤이나 고브린들도 작은 무기류 하 나 정도는 쓰는 걸로 알고 있는데 말이야. 이거, 오우거들이 아무리 떼거 지로 공격한다고 해도 이래서야 어디 성공하겠어?" 차이린이 바닥에 있는 오우거의 발자국을 대충 한 번 훑어보더니 이렇 게 말했다. "난 그것보다는 왜 오우거들이 탐그루를 공격하고 있는지가 의문이에 요. 왜 오우거들은 탐그루에만 집착하고 있는 걸까요? 바로 가까운 베논 에는 나타났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이 없고, 하잔에는 좀 나타난다 싶더니 이제는 나타난다는 소식도 없고 말이지요." "맞아요, 가투신. 그때 오우거들이 좀 나타난다고 하잔을 떠나는 사람 들도 있었죠." 차이린은 가투신이 무슨 말을 하든 장단을 맞춰주기로 마음 먹었는지 가투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차이린의 걸음에 맞추어 걸으니 숨에 여유가 붙어서인지 가투신도 차이린도 말이 많아졌다. 하지만 라이짐은 말을 하 는 대신에 생각을 더 하기로 했다. 오우거들은 왜 탐그루에만 나타나고 있는 것일까. 이 말을 듣는 순간 정보를 모으는 데만 집중했지 분석하는 데에는 좀 소홀했구나 하는 생각 이 들었다. 먼저 하잔에 나타났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또 하잔에서 오 우거들이 금새 탐그루로 공격 위치를 옮긴 이유는 뭘까. 또 좀비들이 대 대적으로 하잔 쪽에 나타났던 이유는 뭘까. 분명히 뭔가 이유가 있기는 있을 텐데. 하지만 현재 가진 정보로는 아무것도 추론할 수가 없었다. "잠깐." 차이린이 손을 들어 일행에게 걸음을 멈추라고 신호했다. 그러고 보니 길 앞에 뭔가 시커먼 그림자가 거친 숨을 몰아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오우거?" 가투신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라이짐은 서둘러 단검을 빼들었다. 하지 만 가투신과 차이린은 무사태평한 걸음으로 오우거에게 다가갔다. 차이린 은 천천히 앞으로 걸어간 뒤 몸을 숙여 살펴보았다. "가슴에 깊은 상처를 입었군요. 피를 많이 흘렸어요." "각개격파 전술이 유용했나 보군요." 가투신은 이렇게 말하면서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라이짐은 말로만 듣 던 오우거를 처음 보았다. 라이짐은 오우거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오우거 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면서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멀리서 보았을 때 보 다 배는 더 커 보이는 마물이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라이짐은 좀 묘한 기분이 들었다. 과연 이 마물이 아케르 용병단의 다음 목표인가 싶기도 했다. 하긴 라이짐 덩치의 거의 세 배나 되는 마물을 가 까운 곳에서 보고 있자니 조금은 현실감이 들지 않는 게 당연한 지도 몰 랐다. "그건 순전히 오우거들이 무장을 하고 있지 않은 탓이지요. 머리에 심 장이 있다는 건 다행히도 아직 아무도 모르는 모양이에요." 차이린은 이렇게 말하면서 오우거를 조금 더 살피려고 했다. 다음 순 간, 라이짐의 단검이 달빛을 받아 일순간 번득인다 싶더니 오우거의 이마 한 가운데에 박혔다. 보통사람의 다섯 배는 됨직한 오우거의 이마에 박힌 단검은 꼭 민둥산에 솟아난 작은 나뭇가지 정도로밖에 여겨지지 않았기만 오우거에겐 치명적이었다. 거친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던 오우거는 생 의 마지막 숨을 토해내더니 부르르 떨면서 사지를 쭉 뻗었다. 라이짐은 단검을 오우거의 이마에서 뽑았다. 초록색인 오우거의 핏물이 빛을 받아 반짝이며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라이짐의 갑작스러 운 행동에 가투신과 차이린 둘 다 놀라는 기색이었다. "아무리 마물이라지만 고통받지 않고 죽을 권리는 있습니다." 라이짐은 손가락으로 찐득찐득한 오우거의 피를 닦아낸 다음에 단검을 도로 품에 집어넣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2884/12886 ━━━━━━━━━━━━━━━━━━━━━━━━━━━━━━━━━━━━━━━━ 제 목:[탐그루] 폭풍의 눈 155 관련자료:없음 23/23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1-05 00:10 조회:407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어느 정도 걸었을까. 연금술사의 불빛이 흔들리자 차이린은 뒤돌아 검 지손가락을 입술에 가져가 조용히 하라는 시늉을 했다. 아마 안토니오 장 군이 이끄는 주둔지 부근인 모양이었다. 라이짐은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지만 나뭇가지나 지푸라기를 밟을 때마다 나는 소리는 어쩔 수 없었 다. 라이짐은 차이린의 발걸음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차이린도 자신이 걷 는 방법과 별반 다를 게 없는 것 같은데 소리는 거의 나지 않고 있었다. 체중의 차이일지 아니면 경험의 차이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라이짐으로서 는 결코 따라잡을 수 없는 선을 보는 것만 같아서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 다. 주둔지에 가까워지자 모두들 나무 뒤편에 몸을 숨기고 숨을 죽였다. 라이짐은 조심스럽게 안토니오 장군이 이끄는 주둔군을 살펴보았다. 길에 서 보았을 때의 모습과는 정말 다르게 하나 같이 지치고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다. "자! 뭣들 하는 거냐! 어서 일어나!" 멀리서 보기에도 한 눈에 장군이라는 걸 알아볼 수 있는 사내가 망토를 휘날리며 소리쳤다. 머리는 아주 짧게 깎은, 사십 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사내였다. "안토니오 장군..." 라이짐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지금 아케르 용병단은 스파일과 동맹관 계에 있기 때문에 동료라고 할 수도 있는 장군이지만 언제 적으로 만나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였다. 안토니오 장군은 들리는 그대로 용장인 모양이었다.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여기 저기를 돌아다니면서 병사들을 다그치고 있었다. 안토니오 장군이 나타나기만 하면 병사들은 빠르게 움직였고, 안토니오 장군이 어 깨를 두드리고 지나간 병사는 눈빛부터 달라보였다. 비록 거리가 멀기는 했지만 라이짐은 충분히 그런 기색을 눈치 챌 수 있었다. 하지만 저런 병 사들일 수록 지휘관에게 너무 의존하게 되기 때문에 지휘관이 죽는다면 어이없이 무너져 버릴 공산이 크다. 게다가 장군이 나타나기 전에 보여주 었던 그 힘 빠진 모습이란. 용장 밑에 약졸 없다는 말은 그야말로 병법 책에나 나오는 이론인 모양이라고 라이짐은 생각했다. "저렇게 다그치기만 해서야 어디 병사들이 기운이 나겠어요?" 가투신이 희죽거리면서 말했다. 가투신은 안토니오 장군이 하도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소리내는 것에는 신경에 쓰지 않아도 된다고 판단한 모양 이었다. "하지만 저 장군은 틀림없이 가장 위험한 곳에서 최전선에 있는 병사와 함께 전투에 나설 겁니다." 라이짐은 이렇게 말했다. "...장군님. 부상이 심합니다." 병사 하나가 안토니오 장군에게 말하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대충 내 용만 짐작 할 수 있을 뿐 내용은 잘 들리지 않았다. 병사의 말을 들은 안 토니오 장군은 병사가 가리킨 쪽에 쓰러져 있는 병사를 살펴보았다. 그러 더니 혼자 뭐라고 중얼거리고 나서 큰소리로 외쳤다. "우리가 고용된 칼잡이들과 다른 점이 뭔지 아나?" "우리는 스파일 주 정규군입니다. 용병과는 다릅니다." 평소에 교육받은 내용인지 일어서 있던 병사가 말했다. "잘 아는 군. 그렇다면 이 칼이 보이나?" 안토니오 장군은 이렇게 말하고는 칼을 뽑아 들었다. 연금술사의 빛을 받은 칼날이 퍼렇게 일렁였다. "영주님께서 직접 하사하신 칼이다. 더 이상 싸울 수 없는 부하나 도망 치는 부하를 베라고 주신 칼이지. 자리에서 일어나겠나, 병사!" 안토니오 장군의 목소리는 밤하늘을 쩌렁쩌렁 울렸다. 만약 가까운 곳 에서 자신에게 퍼부어지는 저런 목소리를 들었다면 오줌을 찔끔 했을지도 모르겠다고 라이짐은 생각했다. 쓰러져 있던 병사가 오줌을 찔끔했는지 라이짐으로서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건 쓰러져 있던 병사가 벌떡 자리에 서 일어났다. "좋아. 부관. 이 친구 의무대로 보내." 안토니오 장군은 이렇게 말하고는 망토자락을 휘날리면서 다른 쪽으로 돌아갔다. "휴우. 무시무시한 사람이군요." "거기다가 부하를 아끼고요." 가투신의 말에 차이린이 이렇게 덧붙였다. 저런 장군과 만약 전장에서 만나게 된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장군을 쓰러뜨리는 것이 먼저일 거라 는 생각이 들었다. 틀림없이 저 장군은 검사로서도 강한 축에 들것이고, 그만큼 자신감이 있을 테니 전투에서 꼭 최전선에 설 거라는 판단은 맞을 것 같다고 라이짐은 생각했다. 그렇다면 그만큼 장군을 없애 버리기도 쉽 겠지. 라이짐은 이렇게 생각하면서 차이린의 뒤를 따랐다. 다시 얼만큼 걸어가자 빛이 번쩍이는 것이 보였다. 연금술사의 등에서 나오는 빛과는 다른, 차가우면서도 강력한 빛이 번개처럼 번쩍이고 있었 다. "성구... 인가?" "성구입니다. 예전에 하잔에서 보았던 것과 비슷합니다. 하지만 빛이 좀 더 강하군요." 라이짐이 혼자말처럼 중얼거리자 에이스가 바로 설명했다. "이상한데. 저렇게 강한 것 같지는 않았는데." "그래. 나도 먼발치에서 보기는 했지만 저 정도까지는 아니었던 것 같 아요." 가투신이 오래간만에 차이린의 말에 동조했다. 라이짐은 문득 자신이 뭔가 놓치고 있는게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지만 그게 무엇 인지, 또 번쩍이는 성구의 불빛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아직 알 수 없었 다. "여기서부터는 허리를 숙이고 가기로 하지요. 거리가 충분하기는 하지 만 조금 위험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가투신이 먼저 몸을 숙이면서 말했다. 라이짐도 성구에서 뿜어져 나오 는 열기에 당하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기 때문에 허리를 숙였다. 그 러자 지면에서 오우거가 남기고 간 고약한 냄새가 풍겼다. 피 냄새인지, 아니면 젖은 피부에서 나는 냄새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라이짐으로서는 냄새를 기억해 두는 편이 좋겠다고 여겨졌다. 역겨운 냄새이긴 했지만 이 냄새를 기억해 두는 것이 언젠가 자신의 목숨을, 또 전우의 목숨을 구하 게 될 지 알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라이짐은 인상을 쓰면서도 냄새 를 피하지 않았다. "라이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지만 그렇게 맡아서는 별 소용 없어." 차이린은 이렇게 말하고는 손바닥으로 손 부채를 만들어 부쳤다. "이런 식으로 해야 냄새가 섞이지 않고 코도 지치지 않아. 코가 지쳐버 리면 아무 냄새도 못 맡게 되지." 차이린의 말에 라이짐은 조금 기분이 상하기는 했지만 순순히 차이린의 말을 따랐다. 진짜 실력으로 인정받을 때까지는 누구에게라도 배워야 한 다고 라이짐은 생각했다. 배울 것은 배우고, 기분 나빠도 참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 라이짐은 이렇게 생각하면서 다시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이 냄새와 함께 차이린의 말도 아마 잊혀지 지 않는 기억으로 남게 될 것 같다고 라이짐은 생각했다. "마, 맙소사. 저거 봐요." 가투신이 소리를 지르려다가 간신히 참으면서 말했다. 가투신이 굳이 표현하지 않아도, 차이린도, 라이짐도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광경에 놀라 고 있었다. 다만 에이스는 그저 담담한 표정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 는가를 살피고 있었을 뿐이지만 말이다. 번쩍이는 빛을 뿜어내고 있는 성구는 예전에 본 한 손에 가볍게 들고 열을 뿜어내던 성구와는 크기도 달랐고 위력도 완전히 달라서 성구가 아 니라 다른 어떤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성구는 거의 창만 한 크기였으며, 뮤에 탄 성황청 기사단원들은 그것을 양손으로 받쳐들고 마법의 말을 외치고 있었다. "불* 타올라라*" "벼락의* 힘*" "바람아* 불어라*" 마법의 말을 각각 달랐으며 마법의 말에 따라서 성구에서 나오는 빛의 속성도 달라지는 듯했다. 불과 관계된 마멉의 말이 작동시킨 성구에서는 불기둥이 뿜어져 나와 오우거들을 태우고 있었다. 벼락의 힘이라는 마법 의 말로 작동시킨 성구에서는 번쩍이면서 강력한 빛이 나와 그 빛을 맞은 오우거는 그대로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허공으로 오우거의 팔다리가 튀 어오르는 것을 라이짐은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성구의 숫자는 제한 된 모 양이어서, 몇몇 오우거들은 접근에 성공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오우거 들은 작은 성구의 표적이 되거나 아니면 바람의 성구에서 뿜어지는 바람 에 밀려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조금도 늦추지 마시오, 형제들! 저들에게 허점을 보여서는 안되오!" 흰 수염이 길게 난 노인이 배에 힘을 잔뜩 주고서 외치고 있었다. 아마 도 저 사람이 베이커 기사단장인 모양이었다. "정말 대단해. 저 정도 위력이라면 일개 군단도 상대하겠는 걸?" 차이린이 질렸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라이짐은 번쩍이는 성구의 불빛을 바라보면서 공포심을 느꼈다. 성구에서 불빛이 뿜어져 나오면서 들리는 소리는 등골에 소름이 돋을 만큼 오싹했다. 성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소리 는 마치 비명소리나 절규 같았다. 저 소리가 왜 그렇게 끔찍하게 들리는 걸까. 아마 전에 한 번 성구에 당한 적이 있으니까 그렇겠지 하고 라이짐 은 생각했다. 라이짐은 성구의 위력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저 성구에 당 했다가는 시체도 찾기 어려울 지경이 될게 뻔했다. 작은 성구에 맞은 것 만으로도 거의 죽을 지경에까지 갔었는데. 암 수르카의 마법이 아니었다 면 살아남기 힘들었을 것이다. 라이짐은 이렇게 생각하면서 성황청 기사 들의 움직임을 눈여겨보았다. 만약 적으로 성황청의 기사단을 만나게 된다면, 그 기사단이 저런 성구 로 무장하고 있다면, 갑작스러운 기습공격과 근접전 외에는 대안이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대안이 아무리 있다고 해도 이와 같은 성구로 무장한 성황청은 정면으로 맞서고 싶지 않은 상대였다. 저런 불기둥이라면... 라 이짐은 불기둥 하나에 적어도 열 댓은 됨직한 오우거들이 통구이가 되는 모습과 벼락에 맞아 산산 조각이 나는 오우거들을 바라보면서 이런 생각 을 했다. "여길 지나가는 건 오우거들도 힘들겠지만 우리도 힘들겠어." "시간이 걸리더라도 좀 돌아서 가지요. 그래야 카이사 장군의 군대도 볼 수 있을테니까요." 차이린의 말에 라이짐이 바로 덧붙였다. "그리고 에이스. 기억 해 둬. 아무리 강한 무기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약점은 있을 거야. 일단 기억해 놓으면 나중에 무슨 수가 나겠지." 라이짐은 침착한 목소리로 에이스에게 지시했지만 어떤지 전에 라스폼 의 성구에 당했던 가슴이 뜨끔거리는 것만 같았다. "그럼 우회해서 가지요. 저 오우거들이 계속해서 미련하게 저 강력한 성구에 달려든다면 우리가 먼저 카이사 장군의 진영에 도착하게 될지도 모르겠어요." 차이린은 이렇게 말하면서 방향을 더 북쪽으로 잡아 이동했다. 차이린 의 예상은 그렇게 틀리지 않았다. 성구의 불빛은 계속해서 번쩍이고 있었 고, 라이짐 일행은 오우거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카이사 장군의 부대 근처에 도착할 수 있었다. 카이사 장군의 부대는 경계근무를 서고 있는 몇을 제외하고는 다들 앉 아서 담소를 나누고있었다. 그런데 한 사람, 뭔가를 덮고 누워있는 사람 이 눈에 들어왔다. 라이짐은 덮고있는 것이 눈에 익다는 생각을 했다. 그 것은 망토였다. 그리고 그것을 알아낸 순간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말했 다. "저 자입니다. 타실의 카이사 장군." 라이짐의 말에 차이린과 가투신은 누워 있는 사람쪽을 주목했다. "어떻게 알죠?" 가투신이 물었지만, 라이짐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누워 있는 카이사 장군을 뚫어져라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부하들이 조심스럽게 카이 사 장군의 옆을 지나는 모습이 보였다. 아마도 잠을 방해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 나도 알겠어. 카이사 장군이 틀림없어. 저 조심스러운 병사들의 발걸음을 봐. 지휘관을 존경하지 않는다면 부하들이 저렇게 행동할 리가 없지." "그나저나 망토를 덮고 자는 장군이라니요. 난 그런 장군 얘기는 들은 적도 없고, 보는 것도 처음이에요." 차이린과 가투신은 이렇게 한 마디씩 던졌다. 그런데 저렇게 까지 군기 가 문란한 건 무슨 이유일까. 그러고 보니 카이사 장군이 누워 있는 주변 의 병사를 제외하고는 담배를 피우는 병사도 눈에 띄었고 농담을 하거나 멍하니 주저 앉아 있는 병사들도 보이고 있었다. "오우거를 물리칠 생각은 없는 모양인데." "글쎄요. 저 카이사 장군이라는 사람,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가투신은 이렇게 말하면서 머리를 긁적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멀리 보이는 성구의 불빛이 잦아들자, 누군가 카이사 장군의 옆으로 뛰어가 카이사 장군을 조심스럽게 흔들어 깨웠다. 그러자 카이사 장군은 기지개를 켜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구가 잠잠한 모양이지?" 카이사 장군은 몇 마디를 더 하긴 했지만 라이짐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이게 전부였다.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카이사 장군은. 오우거들이 성황청이 있는 북 쪽을 먼저 두드린 다음에 이쪽으로 온다는 걸 뻔히 다 알고 있었던 거지. 그러니까 저렇게 무사 태평 누워 있을 수 있는 거 아니겠어?" 차이린은 카이사 장군이 한 몇 마디를 가지고 이렇게 추리했다. 라이짐 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생각보다 훨씬 더 상대하기 어려운 장군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전장에서 아무렇게나 드러누워 잠을 청하는 모습도 대범함으로 여겨졌고, 부하들의 조심스러운 행동도 지휘관 에 대한 믿음일 거라고 여겨지게 되었다. 혹시 라짐 때문에 카이사 장군 을 너무 과대평가하고 있는 게 아닐까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아직은 어떤 판단도 내릴 수 없었다. "잠깐만. 저 진형을 좀 봐." 차이린이 말했다. 그러고보니 진형이 좀 다르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병사들 앞에 이상한 것들이 잔뜩 놓여있었고, 병사들은 그 것 뒤에서 진 을 짜고 있는 모양이었다. 라이짐은 병사들 앞에 놓여있는 게 뭔지 알 수 없었다. 잘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저게 뭐지, 에이스?" "장애물을 세 단계로 놓아둔 것 같습니다. 처음 것은 넘기 힘들게 위에 뾰족한 쇠를 뿌려놓은 포대입니다. 안에는 흙으로 채워져 있는 것 같고 높이는 사람 키 정도 입니다. 다음 장애물은 뾰족한 창을 가득 세워놓은 구역입니다. 만약 오우거들이 첫 번째 장애물을 넘는다고 해도 창에 다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있는 것은 구덩이입니다.구덩이 안에 는 아마도 창을 수도 없이 꽂아 놓았을 것입니다. 병사들은 그 뒤에서 모 여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에이스가 말했다. 차이린의 시력으로도 그정도까지 파악은 되지 않았는 지, 차이린도 에이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추적할 생각이 전혀 없는 모양이지요?" "그래요. 추적할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아요. 그저 방어에만 치중하고 있는 게 틀림없어요." 가투신이 턱을 쓰다듬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카이사 장군은 탐그루를 장악할 것까지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모 양입니다. 삼년전쟁을 겪었으니 전쟁을 피하고 싶은 마음도 있을 테고, 국왕 주변에서는 권력다툼이 심하다고 하니, 타실은 그저 탐그루에서 스 파일만 견제한다면 성공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카이사 장군은 그런 임무를 띄고 여기까지 왔을 겁니다. 그리고 몇 번 전 투를 치러 본 다음에 저런 진지를 구축했겠지요." 라이짐이 말했다. 그러자 가투신이 무릎을 치면서 라이짐의 의견에 동 의를 표했다. "그러니까 카이사 장군은 공을 세우고 싶어하지 않는군요. 그냥 여기서 는 방어가 최선이니까 그 이상은 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 부하를 아끼는 장군이라고 하니까, 아마도 피해를 최소화 하는 걸, 공을 세우는 일 보다 중요시하고 있는 모양이지요." 가투신이 말했다. 가투신의 말을 듣자, 라이짐은 자신의 생각에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만약 가투신의 설명이 맞다면 아케르 용병단이 이곳으로 오게 되었을 경우, 말만 잘한다면 카이사 장군과의 충돌은 충분히 피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2885/12886 ━━━━━━━━━━━━━━━━━━━━━━━━━━━━━━━━━━━━━━━━ 제 목:[탐그루] 폭풍의 눈 156 관련자료:없음 20/20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1-05 00:11 조회:360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적이지만 웬지 대단하군요. 저 정도 장군이라면 어쩌면 생각보다 더 굉장한 위치까지 올라갈지도 모르겠어요." 차이린이 말했다. "글쎄요. 권력다툼이 심하다고 하니, 어쩌면 저런 진짜 군인일 수록 진 급이 어렵지 않을 까요? 어쩌면 이곳에 오게 된 것도 그래서 인지 모르지 요." 가투신은 이렇게 차이린의 말에 이의를 표했다. 라이짐은 가투신의 말 을 듣고 나니 어쩐지 카이사 장군이 귀족처럼 여겨지질 않았다. 귀족이라 고 해서 다 같은 귀족은 아닐지도 모르겠구나. 라이짐은 생각했다. 저런 장군이라면 어쩌면 귀족 제도가 사라진다고 해도, 아니면 귀족이라는 신 분 자체의 힘이 전혀 없어진다고 해도 전혀 개의치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런 귀족들을 포섭해 나간다면 아케르 용병단은 더 적은 피를 흘리고 원하는 바를 이룰 수도 있을 텐데. 하지만 루비오나 또 라이 짐이 지금껏 보아왔던 귀족들을 생각해 볼 때 저런 귀족이 그리 흔하지만 은 않을 것이다. 라이짐은 쓴웃음을 지었다. "어쩌면 다행인지도 모르지요. 저런 장군이 더 높은 위치에서 작전을 지휘한다면 적으로 상대하기 힘들 테니까요. 사실 우리로서는 멍청한 귀 족들이 장군의 위치에 많이 가길 빌어야하지 않을까요?" 라이짐은 이렇게 말했다. 그러자 가투신과 차이린이 웃음을 지었다. "그래. 정말..." 차이린은 라이짐의 말에 뭐라고 대꾸하려고 했는데, 오우거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자 이야기를 멈추었다. 오우거들은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지 르며 카이사 장군의 진영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이제 슬슬 빠져야 하지 않겠어요, 차이린? 이제는 탐그루 동편으로 가 서 기다리고 있지요. 봐야 할 건 다 봐둔 것 같으니까요." 가투신이 말했지만 차이린은 이미 떠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남쪽으로 돌아가지요. 혹시라도 성황청 기사단 녀석들이 숲에다가 연 습삼아 성구를 작동시킬지도 모르잖아요? 그랬다가는 우리도 오우거 꼴이 될지 모르니까." 차이린은 이렇게 말하면서 남쪽으로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탐그루의 서편을 돌아 남쪽으로 접어들자, 대청하의 모습이 눈에 드러 났다. 달빛을 받은 대청하는 조용히 일렁이고 있었다. "자치대원들이 이 근처를 지키고 있을 텐데요." "가투신. 너무 걱정 마십시오. 에이스의 정보에 따르면 이쪽이 가장 허 술한 지역이니까요. 자치대 사람들은 도무지 싸울 기색도 보이지 않는다 고 합니다. 아마 지금도 막사 안에 틀어박혀서 잠이나 자고 있을 겁니 다." "하지만 적을 너무 우습게 봤다가 당할 수도 있다는 걸 잊지 말아요, 라이짐. 아무리 자치대원들이 싸우기를 싫어한다고 해도 미친 척하고 한 두 사람 똑바로 근무를 서고 있다가는 우리 모두 죽게 될 지 모르잖아요? 나는 사소한 일에 목숨을 걸고 싶지는 않다구요. 조심할 건 조심해야지 요." 가투신이 말했다. 그런데 라이짐은 가투신의 충고를 들으면서 차이린의 충고를 들을 때 느꼈던 무시당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라이짐은 그제야 자신이 차이린에 대해 가지고 있던 반감이 부당한 것이 아닌가 하 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차이린이 여자이기 때문에 반감을 갖게 된 것은 아니었을까? 이런 생각이 들자 라이짐은 자신이 차이린에 대해서 가졌던 생각과 행동들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한 용병단에서 생활하는 동료가 단 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우습게 생각하고 있었다니. 남쪽으로 돌아가는 길은 조용했다. 대청하가 흐르는 소리가 들릴 정도 로 말이다. 라이짐은 정박장에 다가가자 어머니가 죽었던 날이 떠올랐다. 그리고 어머니를 묻었던 무덤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바람결에 흔 들리던 그네와 복수의 맹세, 그리고 팜 산맥 입구에서 내려다 보았던 탐 그루의 전경이 눈앞에 잡힐 듯 그려졌다. 다시 돌아오면 어머니의 묘를 옮기자고 라짐에게 말했었지. 라이짐은 목구멍이 바늘구멍 만하게 작아지는 것 같았다. 침을 삼키기가 힘이 들었 다. 복수심보다는 슬픔이 앞서는 걸 어쩌지 못하는 자신을 라이짐은 다그 치고 싶지 않았다. 어둠 때문이었을까. 라이짐은 잠시동안 만이라도 이런 감정의 사치를 누리고 싶었다. "조심. 라이짐." 차이린이 라이짐의 팔을 잡아끌었다. 라이짐은 차이린에게 이끌려 수풀 속으로 몸을 숨겼다. 자치대 병사는 그저 달이나 한 번 구경해 볼까하는 마음으로 나왔던 모양이었다. 그 병사는 기지개를 한 번 켜더니 다시 탐 그루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라이짐은 잠시동안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돌아보았다. 여전히 부끄러웠다. 어머니가 죽음으로 가르쳐 준 교훈을 라이짐은 잠시 잊었던 거다. 해야 할 일이 먼저고, 할 수 있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은 그 다음이 라는 교훈 말이다. 라이짐은 심호흡을 했다. "고맙습니다, 차이린 십부장 님." 라이짐은 고개를 숙여서 차이린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다. 차이린은 좀 당혹스럽다는 표정을 지었고, 라이짐이 도대체 어떤 마음에서 이런 인사 를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라이짐은 자신을 깨우쳐 준 차이린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새벽녘이 되기 전에, 나무 위에 있던 라이짐 일행은 오우거가 돌아오고 있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비록 일원화된 지휘체계를 갖추고 있지는 못 한 탐그루에 있는 주둔군이지만 두 번에 걸친 오우거의 공세를 겪으면서 나름대로 오우거를 대처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 둔 모양이었다. 그것이 안토니오 장군 식의 각개격파든, 성황청 식의 강한 성구든, 아니면 카이 사 장군식의 방어든 말이다. "행군 속도가 늦군요. 행렬 자체도 정비되어 있지 않고 길어요." 가투신이 말했다. "그래요. 어제 오우거들의 공세는 탐그루 주둔군의 승리라고 말할 수 있겠어요. 안토니오 장군이 용장이라고는 하지만 무작정 오우거들을 추적 하지 않는 걸 보면 피해가 있기는 있는 모양이에요. 그렇다면 아주 머리 가 없는 장군은 아니겠군요." "하지만 이 경우는 달라요, 차이린. 만약 지금 오우거들을 추적한다면 본거지를 찾아 낼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그렇군요. 여러모로 우리에게는 아직 운이 남아 있는 모양이에요. 안 그래, 라이짐?" 차이린은 대화의 끝에 라이짐을 끌어들였다. 라이짐은 잠시 사이를 두 고 생각을 한 후에 이렇게 대답했다. "그 운이 언제까지나 남아있으리란 보장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라이짐의 말뜻은 초조한 마음마저 담고 있었다. "그래요. 이거, 너무 늦으면 안 되겠는 걸요. 조금만 더 시간을 줬다가 는 우리가 오우거에 대해서 알고 있는 정보를 녀석들도 다 알아차리겠어 요." "이제 행렬이 끝난 모양이에요. 부상을 입은 오우거들이 저렇게 마지막 으로 가고 있는 걸 보면요." 차이린은 이렇게 말하고는 나무에서 내려왔다. 라이짐도 행렬을 바라보 고는 있었지만 저기가 끝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없었는데, 역시 사냥꾼의 눈은 틀리구나 싶었다. 오우거의 행렬을 따라가는 일은 패잔병의 뒤를 추적하는 일처럼 별다른 긴장감 없이 진행되었다. "이 오우거는 다리를 질질 끄는 군요. 마지막에 뒤따라가고 있는 녀석 인 모양이에요." "저 녀석은 몸을 앞으로 숙이고 걷고있어요. 지쳤다고 볼 수도 있겠지 만 바닥에 떨어져있는 이 찐득찐득한 초록색 피로 볼 때 배를 다친 것 같 아요." "라이짐. 이것 봐. 걸음의 보폭이 사람보다 크지? 보통 사람의 한 걸음 안에 들어있는 발자국 수가 발자국을 남긴 사람의 수라고 하잖아. 오우거 는 보폭이 더 넓으니까 이 정도라고 생각해 보면... 상당히 많은 수지?" 발자국을 세는 게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바닥에는 무수히 많은 발자국 들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차이린은 이렇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런데 라이 짐이 생각하기에 차이린이 동물의 발자국을 읽는 능력이 있다는 건 알겠 지만 자신의 능력을 너무 과신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차이린은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을 마음껏 떠들어대고 있었다. "그렇군요." 차이린의 능력을 의심하는 건 아니었지만, 라이짐으로서는 어쩐지 조금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었다. 적을 과소 평가하는 것만큼이나 자신을 과대 평가하는 것도 위험하다고 생각해 온 라이짐이었기 때문에 차이린의 행동 이 더더욱 마음에 걸리고 있는지도 몰랐다. 어느 정도 오우거들을 추적하는 일이 지겨워 졌을 무렵이었다. 라이짐 은 문득 주위를 돌아보았다. 오우거들은 팜 산맥 상당히 깊은 곳까지 들 어가고 있는 모양이었다. 주위에 우거진 숲들이 하늘을 덮고 있어서 간간 이 나뭇잎 사이로 비추는 별빛만이 머리 위에 있는 것이 하늘임을 말해주 고 있었다. "잠깐. 여기서부터 발자국이 일정해 지고 있어요. 틀림 없어. 이 근처 에 오우거의 본거지가 있을 거에요. 라이짐은 한 번 도 본적이 없지? 오 우거들의 본거지 말이야." 차이린이 조금은 들뜬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 말했다. 라이짐은 고개를 끄덕였다. "꼭 전설 속에 나오는 마물들의 소굴인 것 같았어. 지하 음침한 곳에 있다는 것도 그랬고, 유리병 속에 들어있는 오우거들도 그랬고..." 차이린은 좀 오싹한 생각이 드는지 몸을 떨었다. "하여간 이 근처가 분명하니까, 여기서부터는 조심하기로 해요." 가투신도 따라서 긴장이 되는지 굳은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오우거의 본거지가 있는 동굴은 차이린이 발자국이 일정해 졌다고 말한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동굴의 입구는 커다란 오우거가 허 리를 숙이지 않아도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컸지만 주변에 나뭇가지들이 많 은데다가 어두워서 잘 눈에 뜨이지는 않았다. "나중에 여길 찾아 올 수 있으려면..." 아마 무슨 표시를 남겨두려는 듯이 차이린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라 이짐은 차이린의 행동을 보다가 아무래도 자신의 방식대로 하는 편이 낫 겠다고 생각하면서 에이스에게 말했다. "에이스. 기억해 둬." 간단한 말이었지만 또한 명료한 말이기도 했다. 라이짐의 말을 듣고 나 서야 차이린은 자신이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는 조금 부 끄러운 표정을 지었다. "자. 가지요. 더 이상 머뭇거릴 이유가 없지 않아요?" 가투신은 조금이라도 빨리 떠나야 할 것 같다는 듯이 서두르면서 말했 다. "동굴 안을 살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라이짐은 이렇게 말했지만 차이린도 가투신도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라이짐으로서는 잘 이해가 가질 않았다. 이왕 여기까지 온 거, 오우거의 본거지가 어떤 형태로 생겼으며 구조는 어떠한지, 또 길은 잘 뚫려 있는 지 등을 알아보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하는 게 라이짐의 생각이었다. "라이짐. 그건 네가 저기 들어가 보지 못해서 하는 소리야." "소리장 마을에서요, 그러니까, 동굴이 무너지고, 그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고대 언어에, 그러니까..." 가투신은 뭔가 설명하려고 했지만 말이 잘 이어지지 않는지 어눌하게도 말을 이렇게 토막토막 늘어놓았다. "내가 요약할게요, 가투신." 그런 가투신의 모습을 보더니 차이린이 도와야 겠다는 듯이 이렇게 말 했다. "저 동굴에는 마법이 걸려있어. 저기 들어가면 동굴이 무너진단 말이 야." 차이린은 이렇게 라이짐에게 설명했다. "그렇게 쉽게 오우거를 막을 수 있다면 우리가 이렇게 고생한 게 보람 있는 일이었겠군요, 차이린 십부장 님." 라이짐은 조금 납득이 가질 않는 구석이 있긴 했지만 그냥 이렇게 말하 고는 말았다. 사실 어찌되었건 이제는 빠른 복귀만이 중요할 뿐인 것 같 았다. "그래요. 사실 오우거를 막는 일이 너무 쉽기 때문에 더욱더 서둘러 돌 아야가 하는 거예요, 라이짐." "가투신 십부장 말이 맞아. 녀석들이 알아차린다면 우리가 고생한 건 다 헛수고지, 뭐." 차이린이 덧붙였고 일행은 다시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길,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뿌옇게 푸른 빛 도는 하늘이 나 뭇잎 사이로 비추어 보였다. 여기저기 풀잎마다 달려 있는 이슬방울들이 새벽을 환히 웃으며 반기는 듯 했다. 임무가 끝났구나. 라이짐은 조금은 마음이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자. 그럼 여기서 다들 기다려요. 마차하고 뮤를 가지러 가야 하는데 다 갈 필요는..." "다 갈 필요 없잖아요, 가투신 십부장?" 차이린은 물론 자신과 함께 가자고 한 말이었겠지만, 가투신은 얼른 말 을 이었다. "아. 에이스하고 함께 갈게요. 그래도 좋지요, 라이짐?" "나쁠 것은 없습니다만..." "그럼 다 같이 가지요. 가투신 십부장만 고생하는 게 되잖아요, 그럼." "뭐하러 다 움직여요? 돌아갈 길이 바쁘다고요. 내가 얼른 다녀 올 테 니까 여기서 혹시 자치대나 주둔군이 나타나지나 않나 잘 지켜봐 줘요." "알겠습니다. 에이스. 가투신 십부장님 명령을 들어." 가투신의 말에 차이린이 다시 토를 달려고 하는 것 같아서 라이짐은 이 렇게 말했다. 에이스는 알겠다고 말했다. 검은 엘프족은 거역하는 법이 없으니까. "바보 같이..." 돌아서서 가는 가투신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차이린이 이렇게 중얼거 렸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2886/12886 ━━━━━━━━━━━━━━━━━━━━━━━━━━━━━━━━━━━━━━━━ 제 목:[탐그루] 폭풍의 눈 157 관련자료:없음 19/19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1-05 00:11 조회:372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그나저나 이제는 빨리 돌아가는 일만 남았습니다, 차이린 십부장 님." 바보 같이, 라고 말한 감정의 화살이 혹시라도 자신에게 돌려질까 걱정 하면서 라이짐이 말했다. 하지만 말해놓고 나서도 어색해서, 라이짐은 새 벽 이슬을 머금은 잡초를 뽑아 아무 의미 없이 입에 넣었다. 촉촉한 이슬 이 입술을 따라 들어오자 문득 앞으로의 일들이 걱정됐다. 녀석들이 알아 내기 전에 빨리 하잔에 도착해야 하는데. 혹시 기회가 닿는다면 라짐을 구해낼 수도 있지 않을까. 아니야. 그럼 반란군은 타실의 정보원을 잃게 되는 거잖아. 임무가 먼저라면 라짐을 희생하는 편이 나을 지도 몰라. 이 런 생각이 들자 라이짐의 머릿속은 한없이 복잡해지기만 했다. 다행히도 머릿속이 복잡해진 라이짐을 차이린은 더 이상 건드리지 않았 다. 아마도 기분이 상해 있는 모양이었다. 에이스를 순순히 내 주어서 그 랬거나, 아니면 마지막에 오우거의 본거지를 찾는 일을 라이짐의 부하가 마무리 해서 그런 것 같았다. 하지만 라이짐 생각에 어느 쪽이든 도대체 기분 나빠해야 할 이유는 없는 듯 했다. "차이린 십부장님." 라이짐은 한참 동안 침묵이 이어지자 이렇게 말을 꺼냈다. "도대체 가투신 십부장님께 왜 그러시는 겁니까?" "그것보다 가투신 십부장이 왜 나에게 이러는 지가 더 궁금한데, 나 는." "그야 동료니까요. 전우니까요." "라이짐. 내가 그렇게 여자 같지 않아? 내가 그렇게 별로야?" 차이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라이짐은 차이린의 저런 모습을 전에는 본 적이 없구나 싶었다. "사람 마음은 알 수가 없으니까요." 라이짐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잘 모르는 세계의 일이기 도 했고, 남의 사생활에 끼어들고 싶은 생각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케 르 용병단의 용병답게 말이다. "어, 라이짐. 꼭 뭐 좀 안다는 것처럼 말하네." 라이짐의 말을 들은 차이린은 당장 이렇게 비꼬았다. 만약 그때 새벽 햇살 아래 말을 타고 오고 있는 성황청 베이커 기사단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면 차이린의 비꼬는 말은 계속 이어졌을 것이다. 기사단은 셋 이었다. 셋은 각각 성구를 들고 있었고, 그 성구는 간밤의 전투 때 사용했던 성구가 분명했다. 긴 성구의 끝에는 구슬이 달려 있었 고, 세 성구에 박혀 있는 구슬은 각각 붉은 색과 노란 색, 그리고 투명한 색이었다. "차이린 십부장님." 세 기사는 차이린의 뒤쪽으로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에 라이짐은 이렇게 차이린에게 위험을 알려주었다. "네가 그런 말을 할 자격은 없어, 라이짐. 무슨 말인지 알아?" 하지만 차이린은 흥분한 탓인지 라이짐의 경고를 완전히 무시하고 있었 다. 셋은 점점 더 다가오고 있었다. 성구의 끝에 달려 있는 구슬이 햇살 을 받아 반짝였다. "차이린 십부장님."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지는 잘 몰라도, 난 가투신이 좋아. 그 뿐이야. 내 감정에 내가 솔직해 지겠다는 데 도대체 무슨 상관이야?" "차이린 십부장님." "라이짐. 너도 좀 솔직해 져야 해. 내 말은 말이지..." 라이짐은 더 이상 시간을 끌 수가 없었다. 라이짐은 차이린을 팔을 잡 아끌었다. 차이린은 엉겁결에 라이짐에게 안기는 꼴이 되었고, 라이짐은 몸을 비틀어 가까운 풀숲에 몸을 숨겼다. 차이린이 뭐라고 말을 하려고 했지만 라이짐은 차이린의 입을 손으로 비틀어 막았다. 그제야 차이린도 사태를 직감했는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 오우거가 지나갔다는 건 알았지만 추적자가 있을 줄은 몰랐는 데......" 부끄러운지 차이린은 얼굴까지 붉히면서 이렇게 나지막이 말했다. 차이 린은 사실 부끄러울만 했다. 추적자를 눈치채지 못했으니 사냥꾼으로서도 실수를 한 셈이 되었고, 적이 등뒤에서 다가오는 걸 알면서도 반응하지 못했으니 용병으로서도 실수를 한 셈이었기 때문이었다. 차이린은 라이짐 얼굴을 본다는 것조차 민망한지 아주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려버렸다. "누구나 실수는 있는 법입니다.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라이짐은 시야에서 기사들이 어느 정도 멀어졌다 싶은 생각이 들자 이 렇게 말했다. "아니야. 정말 고마워. 하나 빚졌어, 라이짐." "빚은요. 저는 전우로서 행동한 것 뿐입니다." 차이린의 얼굴은 다 자란 남동생을 바라보는 누이의 얼굴처럼 뿌듯함이 가득 차 있었다. 라이짐은 그런 차이린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별로 좋지 않기는 했지만, 그래도 용병으로서 인정을 받는 것 같아 만족스럽기도 했 다. 그런데 기사들이 갑자기 멈추어 서더니 라이짐이 몸을 숨기고 있는 풀 숲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라이짐은 혹시 자신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들었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차이린도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손으로 자신 의 입을 막았다. 빌어먹을. 성구를 들고 있는 성황청 녀석들은 정말 상대 하고 싶지 않은데 이렇게 정면에서 딱 마주치게 되다니. 라이짐은 조심스럽게 뒤쪽을 바라보았다. 가투신이 오고 있는 게 보였 다. 하필 이때 나타나다니. 하지만 후회해도 소용없었다. 세 명의 기사들 은 이미 방향을 정했기 때문이었다. 가투신은 뮤를 타고, 에이스는 마차 를 몰면서 라이짐이 있는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거기! 마차 타고 오는 녀석들!" 기사단 중 하나가 가투신을 가리키면서 소리쳤다 가투신은 대충 상황을 눈치 챘는지 웃으면서 자신에게 소리를 지른 기사에게 손을 흔들었다. "여! 수고 많으세요, 기사 여러분! 간밤에 고생 많으셨어요. 오우거들 은 다 물리치셨나요?" 가투신은 계속 기사들이 있는 쪽으로 다가가면서 소리쳤다. 라이짐은 대충 가투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 알 수 있었다. 칼로 쓰러뜨릴 수 있는 거리까지 다가간 후에 베어버릴 심산인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라이짐은 생각했다. 라이짐과 차이린을 성황청의 기사단은 눈치채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노란 구슬이 박혀있는 성구를 든 기사는 가투신 쪽으로 다가가고 있었 고, 나머지 둘은 뒤쪽에 떨어져서 다가가는 기사를 엄호하고 있었다. 라 이짐은 그 둘을 한 순간에 쓰러뜨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라이짐이 단검을 차이린에게 건네주자, 차이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차이린이 활을 가지고 있었다면 상황은 더 쉬웠겠지만 지금으로서는 단검 말고는 대안이 없었 다. "지금 계엄령이라는 걸 모르나? 칼까지 차고서, 뭐 하고 있는 거얏!" 성황청 사제답지 않게 거친 말투로 기사가 가투신에게 소리쳤다. 아마 간밤의 전투가 사제를 병사로 바꾸어 버린 모양이었다. "아, 지금 저는 자치대 임무를 수행 중입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가투신은 품으로 손을 가지고 갔다. 그러자 세 개의 성구가 일제히 가투신에게 향했다. 라이짐은 단검을 던질 기회를 놓쳤다 고 생각했다. "덥군요. 한 모금 드시겠습니까?" 가투신이 든 것은 수통이었다. 기사는 성구를 조금 내리면서 아니라고 말했고, 뒤에 서있던 둘도 성구를 내렸다. 이때다! 가투신은 수통을 다시 허리에 차는 척 하다가 수통을 놓고 칼자루를 잡 은 다음, 단숨에 칼을 뽑아 바로 앞에 다가온 기사의 목을 베었다. 기사 의 목이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라이짐은 차이린과 함께 단검을 던졌다. "크윽!" 가슴에 단검을 맞은 기사가 성구를 놓치면서 그대로 뒤로 나가 떨어졌 다. 하지만 차이린과 라이짐의 단검이 한 사람에게 몰려 버렸다. 남은 기 사는 그대로 성구를 겨누며 마법의 말을 외웠다. "불* 타올라라*" 순간 불기둥이 기괴한 소리와 함께 성구에서 뿜어져 나왔다. 라이짐은 그 소리를 들으면서 다시 한 번 오싹해 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불기둥 은 라이짐이 있는 곳을 지나 가투신의 바로 옆을 스쳤다. 다행히도 빗나 간 모양이었다. 가투신은 일단 불길을 피해 수풀 쪽으로 뮤를 달렸다. 문제는 에이스였 다. 에이스는 그저 멍하니 마차에 앉아만 있었다. 에이스가 누군가 명령 을 내리기 전에는 움직이지 않는 검은 엘프 족이라는 게 라이짐은 원망스 러웠지만 라이짐은 자리에서 일어나 기사쪽으로 단검을 던지면서 에이스 에게 소리쳤다. "에이스! 피해!" 단검은 기사의 어깨 쪽에 박혔다. 차이린은 마차 쪽으로 뛰어갔고 에이 스는 피하기는 커녕 오리려 차이린 쪽으로 마차를 몰았다. 라이짐은 마지 막 남은 단검을 꺼내들었다. 붉은 구슬이 박힌 성구를 들고 있던 기사는 단검을 보자 제대로 겨누지도 않고 다시 마법의 말을 외웠다. "불* 타올라라*" 마법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라이짐은 반사적으로 몸을 날렸다. 불길은 수풀 쪽으로 날아가 커다란 나무둥치 하나를 태웠다. 성구에서 나온 새 울음 소리 같기도 하고 어린아이의 비명소리 같기도 한 소리가 공기를 날 카롭게 찢어 갈랐다. 라이짐은 차이린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차이린이 불길이 날아간 방 향 쪽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라이짐이 발견한 것은 차이린을 껴안고 뒹굴 고 있는 가투신의 모양이었다. 불길이 날아오자 가투신은 몸을 날려 차이 린을 감싸준 모양이었다. 옆에 있던 나무둥치는 시커먼 연기를 토하면서 불타오르고 있었다. 성구를 작동한 기사는 일단 단검이 닿지 않을 거리를 확보할 생각인 모 양이었다. 불길이 어디에 닿았는지 확인도 해보지 않고 일단 뮤를 달렸 다. 라이짐은 단검을 던지려고 했지만 너무 거리가 멀었다. "에이스! 차이린에게 활을!" 가투신이 에이스에게 지시했다. 에이스는 마차 안으로 들어가 활과 화 살을 꺼내 차이린에게 던져주었다. 차이린은 활과 화살을 받아들자마자 활시위를 당겼다. "되겠어요?" 가투신이 차이린에게 물었다. 가투신의 어조에서 불안감이 느껴졌다. 기사는 꽤 먼 거리를 확보한 다음에 성구를 들었다. 하지만 팔에 박혀 있 는 단검 때문에 조금 시간이 걸리고 있었다. 라이짐은 차이린을 바라보았 다. 차이린의 얼굴에 흐르고 있는 땀방울이 반짝이는 게 보였다. "불* 타올라..." 마법의 말이 미처 다 외워지기도 전에 차이린은 활시위를 놓았다. 화살 은 순식간에 날아가 기사의 목을 꽤뚫었다. 기사는 그대로 뮤에서 뒤로 떨어졌다. 차이린은 긴장이 풀렸는지 긴 한숨을 토해냈다. "차이린! 역시 차이린이야!" 가투신은 이렇게 말했다가 얼굴을 붉히고 있는 차이린을 보더니 좀 머 쓱해졌는지 허공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어서 출발해야겠습니다. 연기를 보고 성황청 기사들이 알아차릴 지 모 릅니다." 라이짐이 말했다. "아니에요. 벌써 알아차렸어요. 빌어먹을!" 가투신이 소리쳤다. 뮤를 탄 기사들이 눈에 들어왔다. "에이스! 일단 달려!" 라이짐이 마차에 오르면서 말했다. 차이린도 마차에 올랐고 가투신은 뮤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뒤따라오던 성황청 기사들이 사태를 파악하고 성구를 작동시키기 전에 마차와 가투신의 뮤는 일단 길에 접어들 수 있었 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등뒤에서 성구가 불을 뿜어대었다. 라이짐은 이 제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성구에서 빛이 뿜어져 나올 때마다 들리는 소리 가 바로 어린아이의 울음소리라는 걸. "성황청 녀석들, 오우거들을 쫓고 있었어! 아까 그놈들이 선발대였던 모양이야!" "여기서 살아남는 다면 획득한 정보가 하나 더 늘었군요." 단검을 꺼내 들고 흔들리는 마차 뒤편으로 몸을 옮기면서 라이짐이 말 했다. 성구는 계속해서 불길을 뿜어내었다. 마차와 뮤는 재빠르게 좌우로 움직이며 달렸다. 마차 너머로 보이는 서쪽 하늘이 어두컴컴 했다. 수없 이 많은 먹구름들이 탐그루를 통째로 집어 삼킬 기세로 진군해오고 있었 다. -------------------------------------------------------------------- - 잠시 쉬겠습니다. 소박한 행복이 모든 이에게 함께 하길 바랍니다. ^^ PRINTER/CAPTURE를 OFF 하시고 [ENTER] 를 누르십시오.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4105/14637 ━━━━━━━━━━━━━━━━━━━━━━━━━━━━━━━━━━━━━━━━ 제 목:[탐그루] 서커스 들판 158 관련자료:없음 14/14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1-23 00:16 조회:1501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 서커스 들판 우리 일행은 로스안 시를 목표로 남쪽으로 남쪽으로 향했다. 가도 가도 끝이 없을 것 같이 넓은 들판 한가운데서 우리 일행은 너무나도 작고 초 라하게 느껴졌다. 여섯 마리의 뮤가 일렬로 움직이는 모습을 누군가 멀리 서 보았다면 거대한 들판 한가운데에서 길을 잃은 여행자들로 보이지 않 았을까? 어디를 둘러봐도 지평선만 보이는 들판에선 자꾸 무엇인가를 잃 고있는 것만 같았다. 들판을 오래 걷고 있노라면 주위의 시간이 정지되어 버리는 느낌이 든 다. 한 번은 여행자들을 따라다닌다는 무피들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들었 다. 재수 없는 무피들. 뒤돌아 보면 항상 제자리에 멈추어서서 영원히 움 직이지 않을 것처럼 우리를 바라본다. 생긴 건 꼭 쥐처럼 생겨가지고. 눈 은 앞으로 몰려 툭 튀어나와 있고 거기에 옆으로 길게 늘어진 가느다란 수염가닥들. 무엇보다 가장 흉칙한 것은 온 몸을 감싸고 있는 붉은 빛 털 이었다. "무피들은 여행자들을 발견하면 일정한 간격을 두고 계속 여행자의 뒤 를 쫓지. 학자들 간에 이견이 있기는 하지만 어떤 사람은 여행자들이 흘 린 음식 찌꺼기를 주워 먹기 위해 그런다고도 하고, 또 어떤 학자는 여행 자들이 지쳐 쓰러질 때를 기다려 뒤를 쫓는다고도 하지. 상대방이 강할 때는 무해해 보이는 동물이지만 약하다 싶으면 맹수처럼 달려들지." 오브라디 교수의 설명을 듣고나자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무피들이 꼭 내가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뒤를 돌아보 면 언제 따라오고 있었냐는 듯이 멈추어서는 무피의 습성은 진짜 시간이 정지되어버린 것 같은 착각에 빠트리곤 했다. "오브라디 교수님. 무피라는 이름이 고대의 놀이에서 나왔다는 설이 있 지 않습니까?" "그래. 뒤를 돌아보면 멈추어 서는 놀이에서 따온 이름이라는 설도 있 지. 하지만 내 견해로는 고대 언어 중에서 움직인다는 말과 소변이라는 말을 합성한 말 같네. 보게. 우리가 뒤돌아보면 꼭 소변을 보는 사내처럼 멈추어 서는 것 같지 않아?" 오브라디 교수의 말에 스칼렛은 얼굴을 붉혔다. 나는 그런 스칼렛을 보 기가 민망해서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꼭 어린애 만한 무피들이 언제 쫓 아 왔냐는 듯이 두 발로 땅을 딛고 서서 뒤를 돌아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정말 소변을 보고 있는 것 같은 걸. 푸른 들판은 끝도 없이 이어져 있는 듯 했다. 하늘을 떠도는 조각 구름 과 그 밑으로 이어지는 야트막한 능선, 그리고 여행자들을 위해서 존재하 는 듯한 작은 샘물들. 특히 샘물이 있는 곳 근처에는 반드시 높게 자란 빛나는 황금색의 나무들이 있어서 샘물이 정말 들판을 여행하는 여행자들 에게 황금 같은 것임을 일깨워 주고 있었다. "샘물이다! 오브라디 교수님. 잠시 목 좀 추기고 가지요. 뮤도 아주 가 끔 씩은 물을 마셔야 한다고요." 샘물을 가장 먼저 발견하는 것은 바리바였다. 선원 출신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바리바의 눈은 다른 사람 보다 배는 좋은 것 같았다. 하루에 한 번씩은 샘물이 있는 곳 근처에서 쉴 수 있었다. 꼭 누군가 일부러 준비해 둔 것처럼 황금의 샘은 (샘물이 있는 곳을 우리는 그렇게 불렀다) 점심 즈음이 되면 눈에 뜨이곤 했으니 말이다. 샘물 근처에서 쉬 고 있노라면, 목이 길고 노란빛의 짧은 털로 뒤덮여 있는 짐승들이 몇 마 리 나타나 우리와 함께 물을 마시곤 했다. 그러면 우리는 점심을 먹고 남 은 것들을 목 긴 짐승들에게 던져주었다. 목이 긴 짐승은 작은 얼굴에 뿔 이 다섯 개나 달려 있는 희한한 녀석이었다. 똑바로 서면 사람보다 두 세 배는 너끈히 큰 키를 가지고 있었지만, 항상 목을 낮추고 움직였기 때문 에 그다지 크게 보이지는 않았다. "기린이라고 하는 동물이야." 물이 뚝뚝 떨어지는 낯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모짤트가 말했다. "세상에는 정말 신기한 것들이 많아요." 스칼렛은 목이 타는지 계속해서 물을 마시면서 말했다. "전 임프 시에서만 자라서 아무 것도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에요. 이렇 게 나와보니 정말 세상은 넓고도 신비하네요." 내리 쬐는 햇살은 황금빛 나무의 이파리들을 지나 스칼렛의 이마에 흐 르고 있는 땀방울들을 금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나도 탐그루에서만 자 란 탓일까. 내게도 이런 풍경들은 하나같이 낯설게고 신기하게 느껴졌다. "저기 봐. 여행자들의 수호신이야." 나는 고개들 돌려 바리바가 말한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백년수들 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몸집에 비해 큰 머리에 노란색 털을 가진 백년수가 느릿느릿 움직이는 모습은 한없이 평화로운 풍경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 풍경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내가 평화만이 가득한 낙원을 걷 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여행을 하다보면 야영을 할 수밖에 없을 때가 있다. 불을 피우지 않고 서는 잘 수도 없고 쉴 수도 없다는 건 당연한 이치다. (불을 피우지 않고 잠들었다가는 무피나 다른 맹수들의 먹이가 되기 쉽상이다) 야영시 피우 는 땔감의 대부분이 백년수의 배설물이다. 임프 시를 떠난 첫날 밤, 오브 라디 교수는 백년수의 배설물을 많이 모을 수 있다는 말은 근처에 맹수가 없다는 말이라고 했다. 백년수의 배설물은 연기도 없고 오래 타는 연료이 기도 해서 들판을 여행하는 여행자들에게 백년수는 여행자들을 돕는 동물 로 인식되고 있다고 한다. 아마도 그래서 저렇게 느릿느릿하고 둔해터진 백년수들이 여행자들의 식량이 되지 않고 백년도 넘게 넘게 살 수 있나보 다. 들판에서 한 번은 전문 사냥꾼조차도 상대하기 힘들다는 리치 패거리들 을 본 적도 있었다. "리치들도 한 때는 맹위를 떨치던 마물이었지. 인간이 사는 마을에 무 리를 지어 공격해 들어가기도 했고, 주로 여자와 어린아이의 피를 마시는 걸로 악명을 떨쳤었지." 오브라디 교수는 우리를 발견하고는 경계의 눈빛으로 으르렁거리며 달 아나는 리치의 뒷모습을 보면서 말했다. 뒷모습으로만 보자면 리치들은 정말 사람과 많이 닮았다. (길게 자란 송곳니 두 개와 마치 해골처럼 콧 구멍만 보이는 얼굴을 본 후에는 절대로 그런 생각이 들지 않겠지만) "그런 걸 보면 인간의 힘이 참 무섭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 때 저 리치 들은 인간을 보면 좋다고 달려들었을 테지만 지금은 사람 그림자만 보여 도 꽁지가 빠지게 도망을 치니까요." "맞아요. 마로우 님." 말하는 스칼렛의 얼굴에는 안쓰럽다는 빛이 가득했다. 곱게 자란 딸이 라 그런지 마물에게 까지도 인정이 많은 모양이었다. (내 눈에는 철부지 같아 보이기만 했다. 삶이 뭔지 죽음이 뭔지도 모르는 철부지 아가씨. 마 물에게 잔인하게 죽은 시체를 보면 저런 생각을 할 엄두도 못낼텐데) "그런데 오브라디 교수님. 바르도 대륙 곳곳에 다양한 종류의 마물들이 출몰하고 있다는 건 다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만, 이상하리만치 요즘은 마물들이 나타나질 않는군요." 마로우가 시야에서 멀어져 가는 리치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러게 말일세. 사실 좀비가 등장하기 전에는 이곳에서더 고브린이나 트롤 같은 마물들은 쉽게 찾아 볼 수 있었는데 말이야. 좀비가 등장하고, 오우거가 나타나고... 이상하게도 강력한 마물들만이 마치 짜기라도 한듯 이 교대로 나타나고 있단 말이야." "질병도 그렇지 않습니까? 전설에 이르길, 한때는 흑사병이 맹위를 떨 쳤다고 하지만 지금은 그게 무슨 병인지 아는 사람이 없을 정도고, 또 에 이즈병이 세상을 뒤덮은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병에 걸린 사람이 있 다는 말을 들어 본 적도 없습니다. 오히려 지금 유명한 병이라고 한다면 피를 토하며 죽는 폐적증이나 창자가 다 녹아버린다는 호열병 아닙니까? 마물들도 아마 그런 병들처럼 주기가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자네 말은 맞네. 하지만 감기처럼 언제나 존재하는 마물들도 있기 마 련일세. 오크나 트롤처럼 말일세." "감기라. 하긴 그렇습니다. 천년 전에도 사람들이 폐적증이나 호열병에 걸리지는 않았겠지만 감기에는 걸렸을 테니까요." "그래. 하지만 감기가 없었다면 인간은 교만해졌을지도 모를 일이야. 모든 병을 다 정복할 수 있다고 우쭐거렸지만 감기만은 정복하지 못했으 니까. 꼭 그래서만은 아니겠지만, 인간은 대자연 앞에서 경외심을 가져야 한다네. 겸손하게 말이지." 오브라디 교수는 이렇게 말하면서 먼 지평선을 응시했다. 길은 정말 끝도 없이 이어져 있었다. 눈앞에는 지평선뿐이었고, 탁 트 여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우리 일행이 과연 올바르게 길을 찾아 가고 있는가 의심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간혹 돌개바람이 일어 흙먼지가 날리 고 나면, 혹시 거꾸로 되돌아 걸어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잠시 동안이지만 눈을 감은 탓이다) 오브라디 교수가 준비 한 여행자용 지도와 방향을 알려준다는 남방벌레 덕분에 그럴 리가 없다 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남방벌레는 항상 머리를 남쪽으로 하지. 하긴 그러니 이름이 남방 벌 레가 되었을 테지만. 하하하. 어떤 장사꾼은 이 벌레를 지니고 다니면 사 람의 수명이 늘어나고 머리가 맑아진다고도 말한다네. 하지만 그건 아무 런 근거도 없이 장사 속에서 나온 말일 뿐이지." 길쭉한 몸에 머리 쪽은 빨갛고 몸통 쪽은 푸른 남방벌레를 만지작거리 면서 오브라디 교수가 말했다. "하지만 사람의 피가 도는 일이 땅에서 나오는 기운과 관계가 있다는 말도 있고, 남방벌레도 땅의 기운 때문에 머리를 남쪽으로 향하는 것이니 혹시나 관계가 있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오브라디 교수의 설명에 마로우가 문제제기를 했다. "글쎄. 남방벌레가 머리를 남쪽으로 향하는 것은 모든 남방벌레의 고향 이 남쪽이기 때문이라는 말을 들은 적도 있네만." "이름이 남방벌레라고 무조건 남쪽이 고향이겠습니까? 지금 오브라디 교수님께서 들고 계시는 남방벌레도 임프 시에서 사신 것 아닙니까."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4106/14637 ━━━━━━━━━━━━━━━━━━━━━━━━━━━━━━━━━━━━━━━━ 제 목:[탐그루] 서커스 들판 159 관련자료:없음 16/16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1-23 00:16 조회:1256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처음에 마로우가 오브라디 교수에게 이런 식으로 물었을 때에는 저렇게 막 물어서는 안 되는 게 아닐까, 혹시 오브라디 교수의 기분이 상하는 건 아닐까 싶기도 했지만, 임프 시를 떠난 이후로 줄기차게 계속되다 보니 이제는 마로우가 가만히 있는 게 더 이상하게 여겨졌다. (물론 마로우가 오브라디 교수의 말이 끝나고 나서 한 마디라도 덧붙이지 않은 적은 거의 없지만) 하지만 지금은 마로우가 뭐라고 하던 말건, 별로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몸이 피곤했기 때문이었다. "수르카 님, 얼마나 더 가야 하지요?" 스칼렛이 나를 바라보면서 물었다. 오랫동안 뮤를 탄 탓에 피곤한 기색 이 얼굴에 확연히 드러나고 있었다. "글쎄요." 나는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지금 우리의 지휘관이 누 구냐고 묻는다면 오브라디 교수밖에는 없을 것이고, 오브라디 교수는 뭔 가를 열심히 찾고 있는 듯 보였기 때문이었다. "스칼렛 양. 조금만 더 가 봅시다. 야영하기에 적당한 곳을 찾아야 하 니까요." 오브라디 교수의 얼굴에는 진지한 학자의 빛이 흐르고 있었다. 그 빛에 질려버렸는지, 아니면 아직도 더 이동해야 한다는 사실에 질려서 였는지, 스칼렛은 당장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 힘없이 예, 하고 대답했다. 그런 스 칼렛을 보니 그래도 상당히 잘 버티는구나 싶었다. 아마도 이런 고생은 난생 처음일 것이 분명한데, 스칼렛은 힘든 티를 내지 않으려고 무척이나 노력하고 있었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말이다. 힘들다는 소리를 곧잘 하는 바리바에 비한다면 스칼렛의 인내심은 꽤 높게 살 만했다. "휴! 교수님. 좀 쉬었다 가지요? 이거 죽겠어요, 저는 뱃사람이지 마부 가 아니라고요." "바리바. 떠날 때는 근사하게 말하더니 출발하고 나니까 계속해서 죽는 소리만 하다니." "계속해서라니 무슨 소리야, 루크. 난 그저 적당한 시기에 적당히 쉬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하지만 늘 쉬자고 먼저 말하는 건 바리바 아니었어?" "그래. 생각해 보니까 그런 것도 같네." "하하하. 두 사람이 사랑 싸움인가?" 오브라디 교수는 계속 되는 강행군이 좀 미안하다고 생각되었는지 쑥스 러워하는 바리바의 말에 덧붙이면서 헛웃음을 지었다. 사실 바리바의 말은 엄살이 아니었다. 뮤를 타는 일은 사실 그렇게 쉬 운 일은 아니다. 뮤가 걸을 때마다 온몸에 전해지는 충격도 그렇고, 또 뮤 걸음걸이에 박자를 맞춰 몸을 맡기는 일 또한 그리 쉽지 만은 않다. 처음 뮤를 타는 사람은 멀미까지도 하니까 말이다. (사람이 이 정도니 뮤 야 오죽 힘들까) "오브라디 교수님. 이제 곧 해가 집니다." 모짤트가 말했다. 그제야 벌써 저녁 무렵이 다 된걸 알았다. "하늘에 있는 저 반짝이는 것들. 소망의 별이 떴군. 이 시간대가 여행 자들에겐 가장 힘든 시간이지. 이렇게 어둑어둑해질 무렵이 되면 누구라 도 고향 생각이 나니까." 동편 하늘을 바라보면서 오브라디 교수가 말했다. 어둑어둑 해지는 동 편 하늘에는 유난히도 밝은 별 몇 개가 지평선과 평행으로 빛나고 있는 게 보였다. "예. 소망의 별이 보이면 해가 진다는 말이지요. 가장 밝은 별이라 어 떤 때는 달이 떠 있어도 소망의 별이 보일 때가 있으니까요." "자네 천문학에도 관심이 있었군. 그럼 소망의 별과 관련된 천체의 비 밀은 아는가?" "소망의 별은 옛부터 천문학의 오랜 과제 중 하나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 같군요." "그래. 그렇다네. 수많은 별 중 저렇게 자로 잰듯 일직선으로 늘어선 별들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천문학에서는 거의 불가사의로 남아있다 네. 거기다가 밝기까지 비슷하니 말일세. 천문학자들은 오랫동안 이 문제 를 풀고자 고심했지. 어떤 학자는 결국 별을 위한 신전을 짓기까지 했으 니 말이야. 소망의 신전이 거기에서 유래됐지 아마." "하지만 모든 현상은 다 학문으로 풀 수 있지 않겠습니까? 마법조차 학 문으로 풀어내려는 연구가 어느정도 성과를 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하지만 학문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너무도 무한하다네. 학문 이란 것은 해답을 찾기 보다는 항상 새로운 의문들을 만들어 내지. 그래 서 소망의 별과 같이 풀리지 않는 신비는 항상 학자들을 자극하곤 한다 네." "마치 완벽한 바르도 대륙의 지도를 작성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그렇지." 오브라디 교수는 이렇게 말하면서 무릎을 탁 쳤는데, 나는 그 순간 오 브라디 교수를 태운 뮤가 쓰러지는 게 아닌가 싶었다. 뮤가 가쁜 숨을 토 해내면서 몸을 꿈틀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껏 그래왔 던 것처럼 뮤는 쓰러지지 않았다. 녀석. 성격도 좋지. 스타바 같으면 당 장에 길길이 날뛰어 오브라디 교수를 떨어뜨렸을 텐데. "교수님. 해가 집니다." 다시 한 번 모짤트가 말했다. 모짤트는 꼭 돌로 만들어진 담벼락이 화 를 낸다면 지었을 법한 얼굴로 말하고 있었다. 화가 난 것도 아니고, 정 중한 것도 아닌, 밋밋하지만 분명 느낄 수 있는 그 무엇이 모짤트에게는 흐르고 있었다. "그래. 그야 나도 알지. 하지만 조금이라도 더 안전한 곳을 찾아 숙영 지를 마련해야 하지 않겠나? 옛 현자들의 말에 이르기를, 작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할 수 있어도, 숙영지 마련하는 데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할 수 없다고 했네." 오브라디 교수는 모짤트가 화를 낸다고 생각했는지 조금은 변명하는 사 람처럼 이렇게 말했다. "오브라디 교수님? 제가 알기로는 경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할 수 없다는 말로 알고 있었습니다만." 마로우가 오브라디 교수의 말이 끝나자 역시 기다렸다는 듯 바로 말했 다. "하하하. 마로우 군. 역시 마로우 군이야. 자네가 제법 많은 독서를 통 해 나이에 비해 꽤 높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네. 늘 나를 놀라게 하는군. 하지만 그 말은 지식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경 우에 속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드네. 올바른 숙영지의 선택이 바로 경 계의 시작 아니겠는가?" "예,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 말은 숙영지 선택에 너무 힘을 기울였 다가 정작 중요한 경계에 실패하는 게 아닐까 하는 우려에서 나온 것입니 다. 다시 말해서..." 아무래도 또 얘기가 길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바로 지난 저녁만 해도 마로우와 오브라디 교수는 이런 사소한 의견 나누기에서 시작해서 해가 진 다음에야 대충 이야기를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덕분에 식사시 간도 늦어졌고, 휴식시간도 자연 줄어들고 말았다. 모짤트의 저 표정! 이 러다가 무슨 일 나는 거 아니야? "오브라디 교수님. 제가 알기로는 작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할 수 있어도 배식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할 수 없다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있 습니다만." 나는 마로우의 말투를 흉내내어 이렇게 말했다. 그러자 오브라디 교수 뿐만 아니라 일행 전체가 웃음을 터트렸다. (사실 이 말은 훈련병 때에 동료들과 나누곤 했던 농담이었다) "그래, 그래. 수르카. 자네는 역시 마음에 충실한 사람이야. 이렇게 자 신의 마음을 간략하고도 확실하게 표현할 수 있다니 말이지. 그러니까 배 가 고프다는 말이로구만." 오브라디 교수는 여전히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자, 대충 자리를 잡지." 그제야 우리는 야영지를 찾기 시작했다. 나는 지평선을 바라보며 스타바를 몰았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어 두워져가는 하늘의 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동쪽은 서쪽보다 먼저 어두워 진다. 동쪽 하늘은 어둠보다 별이 먼저 지나는 길이다. 스타바가 뮤 소리를 냈다. 나는 스타바의 머리를 쿡쿡 눌러주었다. 스 타바는 분명히 이제는 쉬고 싶다는 뜻을 나에게 전했다. 하지만 나는 조 금은 더 뮤를 몰아야 했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자리를 찾기 위해서, 혹 시 있을지 모를 마물들의 기습에 대비해서 말이다. "여기쯤이 어떻겠나?" 오브라디 교수가 사방을 한 번 휘휘 둘러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어떤 이유에서 특별히 여기를 선택하신 거죠?" 마로우가 기대에 가득 찬 얼굴로 오브라디 교수를 바라보면서 물었다. "내 오랜 경험으로 판단하기에, 어딜 가도 다 똑같은 들판이라면 아무 곳이든 상관없을 것 같아서 한 말이라네." 오브라디 교수가 근엄한 얼굴로 잔뜩 무게를 잡고 말했다. 바리바와 루 크는 서로를 바라보며 키득거렸다. 모짤트는 역시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나는 스타바를 몰고 야영지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는 길에 오브라디 교수 에게 들었던 땅속에 함정을 파고 여행자를 노린다는 실크웜이라는 이름의 마물이 혹시라도 숨어 있을 만한 곳이 있을까 걱정스러웠기 때문이다. 아 무리 찾아보아도 실크웜 집 근처에 보인다는 붉은 빛이 도는 흙이나 실크 웜이 먹다가 뱉은 뼛조각들은 보이지 않았다. 모짤트는 땔감으로 쓰기 위해 들판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나뭇가지들 과 백년수의 마른 배설물들을 모으고 있었다. 언제나 그레텔을 거의 업고 다니다시피 하면서 아무 말 없이 자신이 맡은 일을 하는 모짤트를 보면, 나는 입으로 떠드는 사람보다는 행동을 먼저하는 사람이 얼마나 든든한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바리바와 루크는 사냥준비를 했다. 준비해 온 식량이 별로 부족한 것은 아니었는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조금이라도 식량을 아껴야 한다면서 바 리바와 루크는 저녁 때면 그리 크지 않은 동물들 몇 마리를 잡아오곤 했 다. 선원 생활을 한 탓인지 바리바는 물과 식량에 대해서 대단히 민감한 반응을 보이곤 했다. 특히 식사량을 조절하고 물을 아껴먹으라는 말은 아 예 입에 달고 다녔다. 물론 식량이나 야영도구, 물통, 연금술사의 등 같 은 건 모두 바리바와 루크의 것이었으니까. 탐그루 출신인 내가 보기에는 그저 자기 물건을 아끼는 마음에서 나온 행동이 아닐까 싶기도 했지만 말 이다. "저기 봐! 황토끼야, 황토끼!" 갑자기 바리바가 소리쳤다. 나는 바리바가 가리키고 있는 쪽을 바라보 았다. 집채만한 그림자가 서쪽하늘에서 날아와 천천히 야영지 옆 들판에 내리고 있었다. 그 짐승은 커다란 귀와 동그란 눈, 그리고 톡 튀어나온 두 개의 앞니를 가지고 있었다. 스칼렛은 처음 보는 짐승이라서 그런건지 입을 거의 쩍 벌리고서 황토끼를 보고 있었고, 모짤트는 조금 긴장된 얼 굴로 황토끼를 노려보고 있었다. 황토끼는 과연 정말 지독하게 커다란 짐승이었다. 깡총깡총 뛸 때마다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이 쿵쿵하고 울렸다. 황토끼는 주변을 살피더니 바닥에 자라 있는 풀들을 앞니로 뜯기 시작했다. 황토끼의 털은 사냥꾼들이 노리는 제 일 품목이라고 들은 적이 있었다. 황토끼의 사람 머리통 만한 붉은 색 눈동자를 보니 노련한 사냥꾼이 아닌 다음에야 도저히 잡을 엄두가 나지 않을 것 같았다. 저런 커다란 동물이 초식동물이라니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 둬, 바리바." 모짤트가 바리바에게 말했다. 바리바는 손에 창을 쥐고서 황토끼 쪽으 로 다가가고 있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4107/14637 ━━━━━━━━━━━━━━━━━━━━━━━━━━━━━━━━━━━━━━━━ 제 목:[탐그루] 서커스 들판 160 관련자료:없음 15/15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1-23 00:17 조회:1335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잡아봐야 다 먹지도 못해. 게다가 저런 놈 상대하다가 어디 한 군데 부러지기라도 하면 너만 손해야." 모짤트의 말은 바리바를 걱정하고 있는 듯 들렸다. 하지만 바리바는 루 크를 한 번 바라보더니 배에 힘을 잔뜩 주고는 창을 토끼의 머리를 향해 집어 던졌다. "저런, 바보같이!" 창을 던지는 모습을 보자 모짤트가 바리바 쪽으로 뛰어 갔다. 너무나도 급작스러운 일이라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판단 내리기 어려웠 지만, 모짤트는 아주 다급하게 행동하고 있었다. "위험해!" 모짤트가 소리치는 것과 동시에 황토끼의 커다란 귀가 펄럭였다. 그러 자 사방에서 흙먼지가 날리면서 바람이 일었고, 바리바가 집어던진 창은 힘없이 방향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는 그제야 상황이 얼마나 급박 한지 깨닫고는 허리에 찬 칼자루를 쥐고 바리바 쪽으로 뛰어갔다. 바리바 의 얼굴은 완전히 하얗게 질려 있었다. 만약 저 황토끼가 바리바에게 달 려든다면... 그런데 황토끼는 바리바에게 별 관심이 없는지, 커다란 귀를 펄럭이면 서 보석처럼 별들이 흩뿌려져 있는 밤하늘 속으로 천천히 날아 사라져갔 다. "멍청하게. 뭘 어쩌려고 그런 거야?" "난, 그저..." 바리바는 머리를 긁적이면서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상황에서도 오브라 디 교수와 마로우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가만있어보자. 오늘이 떠난 지 삼 일째 되는 날이고, 임프 시에서 로 스안까지가 일주일 정도 걸린다고 치면, 여기는......" 지도를 바닥에 펴놓고 오브라디 교수가 말했다. 오브라디 교수가 뮤에 서 내린 덕분에 뮤가 겨우 숨을 돌리고 있었다. "... 서커스 들판이겠구만." 오브라디 교수가 말했다. 서커스 들판? 무슨 뜻일까 궁금했는데 나보다 먼저 마로우가 오브라디 교수에게 물었다. "교수님. 서커스 들판이 무엇입니까?" "좋은 질문했네, 마로우 군. 서커스란 고대 언어로 원을 상징하는 말이 라네. 거기에서 원을 만들고 행해지는 모든 일이라는 뜻이 파생되었지. 제사라는 뜻도 있고, 놀이라는 뜻도 있고, 또 좁은 의미에서는 공연이라 는 의미도 있다네." 오브라디 교수는 정말 모르는 것이 없었다. 거기다가 저 정도 말솜씨라 면 설혹 모르는 일을 묻는다고 해도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바탕으로 대충 말을 만들어 대답 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여기엔 전설이 있지. 오래 전, 동쪽에서 불어오는 봄바람을 타고 다니 던 요정들이 있었다네. 그들을 사람들은 동춘이라고 불렀지. 동춘의 요정 들이 했던 일은 사람에게 웃음과 희망을 주는 일이었다고 하네. 사람들은 동춘의 요정들에게 박수를 보내었고, 동춘의 요정들은 그 박수와 웃음을 먹고살았지. 하지만 사람들이 마칸에게 의지하기 시작하면서 동춘의 요정 들은 하나 둘 사라져 갔다네. 사람들의 박수가 마칸에게 몰렸던 까닭이 지. 하여간 그렇게 동춘의 요정들은 자취를 감추었고, 마지막으로 이 들 판에서 거대한 원을 남긴 뒤 사라졌다는고 하네. 그래서 그들을 기념하기 위해 이곳을 서커스 들판이라고 이름 붙였다는 전설이 있네." 대단한 얘기를 한 것처럼 오브라디 교수는 의기양양해 했지만 듣고 있 었던 것은 나와 마로우 뿐인 것 같았다. 바리바와 루크는 입을 다물고 묵 묵히 식사준비에 여념이 없었고, (사냥에 실패한 게 부끄러운 모양이었 다) 모짤트는 그레텔을 업고 밤새 땔 땔감을 모으느라 정신없이 오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스칼렛은 바리바와 루크를 돕고 있었지만 오브라디 교수의 말에는 별 신경을 쓰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오브라디 교수가 들려준 동춘의 요정에 관한 전설을 들으며 밤하 늘을 올려다 보았다. 이젠 아주 깜깜해진 밤하늘 너머로 동춘이라는 이름 을 가진 요정들이 사람들에게 마법의 말로 웃음을 뿌려주는 모습이 보이 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주 잠시였다. 나는 뮤에서 내려 모짤트가 하는 일을 돕기로 마음먹었다. 오브라디 교수와 마로우의 지겨운 토론이 계속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제가 알기로 원은 보통 단결이나 동료애를 상징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 니다. 아마도 이곳에 원을 상징하는 서커스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이곳을 지나는 여행자들이 동료애를 잃지 말고 단결하라는 뜻에서 붙은 게 아닐 까요?" "흠. 그것도 그럴싸한 이야기로군. 확실히 자네는 학자로서의 자질이 있어. 독창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펴나갈 줄을 안단 말이야. 자네, 혹시 이 여행이 끝나면 스파일 주립대학에서 더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가?" 마로우는 이 말을 듣고 기뻐하는 기색이 분명히 드러나는 웃음을 지었 지만, 나는 마로우가 그러거나 말거나 말없이 모짤트를 돕기로 했다. 어 쩐지 말만 앞서는 마로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일이라고는 하나도 하지 않으면서 동료애는 무슨 놈의 동료애람? "마로우 군의 의견에 따라 약간의 의식을 가지기로 했다네." 저녁식사가 끝나자 오브라디 교수가 말했다. 이제는 완전히 어두워진 밤하늘로 모닥불의 불티가 허공으로 솟았다. 불빛을 받은 모두의 얼굴은 붉게 상기된 것처럼 보였다. "사실, 마로우 군이 말을 꺼내지 않았더라도, 삼 일 동안의 강행군을 하느라 모두들 지쳐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네. 동료애가 없이 여행을 안전하게 마치기란 마른하늘에서 소낙비가 내리는 것을 기대하는 것만큼 이나 어려운 일이지. 오늘은 좀 늦게 자는 한이 있더라도 뭔가 의미 있는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이렇게 아모리카 탐사대의 일원이 되었는데도 아직 서로를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일세." 오브라디 교수의 말은 나에게 아케르 용병단 시절, 훈련병의 마지막 날 보았던 모닥불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날도 불티는 이렇게 허공으로 솟 아 아무렇게나 사방으로 흩어지다가 사라져 버리곤 했다. 나는 불티를 바 라보면서 사람의 생명이라는 것도 저런 게 아닐까 싶었다. 어디로 향하는 지, 무엇을 위해서 인지도 모르다가 아무 의미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불 티 같은 게 생명 아닐까. 그런데 왜 다들 아둥바둥하면서 사는 건지. "자, 그럼 오늘을 위해서 준비한 건 아니네만, 내가 아끼던 걸 꺼내야 겠구만." 오브라디 교수는 이렇게 말하면서 커다란 병을 하나 꺼냈다. "흠. 사실은 내가 술을 좀 좋아한다네. 임프 시를 떠나기 전에 한 병 슬쩍 해둔 게 있지. 저 먼 동타실의 악마의 집 근처에 있는 안동장이라 는 마을에서 난다는 쇠주라는 독주일세. 아주 귀한 거지. 쇠처럼 강력한 술이라는 의미로 쇠주라네. 하하하. 나중에 혼자 몰래 마실까 했네만, 오 늘 보다 더 좋은 일에 쓰일 수는 없겠지." 오브라디 교수는 이렇게 말하면서 스칼렛에게 목례를 했다. 도둑질 한 걸 눈감아 달라는 뜻이리라. 하지만 스칼렛은 오히려 미안하다는 듯한 표 정을 지으면서 오브라디 교수의 인사에 답례했다. 나는 스칼렛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모닥불 빛을 받아 붉게 빛을 발하고 있는 스칼렛의 볼이 정 말 예뻤다. '오늘 우리 주점에서 들은 말인데, 미인을 발견했을 때 의심 해봐야 할 게 두 가지 있다더라. 먼저 화장을 짙게 해서 예뻐 보이는 게 아닌가 의 심해 보고, 둘재는 연금술사의 붉은 등 아래에서만 예쁜 게 아닌가 의심 해 봐야 한데.' 탐그루에 있을 때, 언젠가 라이짐이 나에게 말했던 기억이 났다. (아마 라이짐 자신은 뜻도 모르면서 한 말이겠지만) 하지만 지금 내 생각으로는 의심해 봐야 할 게 한 가지 더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바로 마음이었다. 힘든 기색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쓰는 스칼렛의 모습이 나는 마음에 들었다. 아마도 그 마음이 지금 스칼렛을 아름답게 보이게 만들고 있는 건 아닐까. 나는 이렇게 생각하면서 혼자서 그냥 웃음을 지 었다. "아, 수르카 군. 술을 좋아하는 모양이로군. 하지만 조금 기다리게. 술 이라는 건 나이순으로 따르는 게 법도니까 말일세. 하하하." 오브라디 교수는 이렇게 말하고는 호탕하게 웃었다. 내 웃음의 의미를 잘못 생각한 게 분명했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기분 좋게 웃는 오브라디 교수를 방해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모두들 혹시 술노래라고 아는지 모르겠군. 예이츠라고 하는 방랑시인 이 지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멋진 노래지. 귀를 쫑긋 세우 고 잘 들어보게나. 사랑이 도대체 무엇인지 이 시에는 다 들어 있다네." 술은 입으로 흘러들고 사랑은 눈으로 흘러든다. 우리가 늙어 죽기 전에 알아야 할 진실은 이것뿐. 술잔을 입에 대면서 나 그대를 쳐다보고 한숨짓는다. "가만있자. 모짤트가 먼저 받아야 하나, 아니면 바리바가 먼저 받아야 하나." 술노래를 부르며 흥에 취해 자기가 먼저 한 잔 마신 다음 오브라디 교 수가 모짤트에게 물었다. 그러자 모짤트는 손을 움직여 바리바에게 먼저 주어야 한다는 시늉을 했다. 바리바는 모짤트에게 뭔가 말하려고 하더니 그만 두었다. 아마 나이를 물어보려고 했다가 그만 두는 게 분명했다. 아 직 그런 걸 묻기에는 서로 별로 친해지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걸까? 바리바와 루크가 먼저 오브라디 교수가 따라주는 쇠주를 양철로 만들어 진 컵에 받아 마시자 그 다음은 모짤트였다. 모짤트는 양철컵을 단숨에 들이키고는 입맛을 다셨다. 나는 탐그루에 있을 때 떠돌이 검사들이 저렇 게 술을 마시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 단숨에 목구멍에 독주를 털어 넣고 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입맛을 다시는 모습을 말이다. 그때 그 모습 을 보면서 남자답고 멋있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지금 모짤트의 모습을 보 니 다시 한 번 멋있다는 생각이 드는 걸 어쩔 수 없었다. "그다음엔, 마로우, 자넨가? 아니면 수르카인가?" "전 술 못합니다. 입술만 대기로 하지요. 수르카가 마시고 싶어하는 것 같던데 먼저 주는 게 어떻습니까?" 마로우는 이렇게 말하면서 뒤로 빠졌다. 그런데 오브라디 교수는 나에 게 꼭 술잔을 따라 줄 것 같이 하다가 갑자기 스칼렛에게 물었다. "아가씨에게 나이를 묻는 게 실례라는 건 알고 있지만, 성년이 지났는 지만 좀 물어도 좋겠지요, 스칼렛 양?" 스칼렛에게 말하고 있는 오브라디 교수의 얼굴엔 친절함과 상냥함이 가 득했다. 내게는 오브라디 교수의 친절함이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장사꾼 의 친절 같아 보였다. 아마 저 표정은 스파일의 수도 프라브리티에 산다 는 스칼렛의 친척 때문이겠지. "술을 마셔도 좋은지 물으시는 것 같은데요, 작년에 성년식을 치렀어 요. 올 봄에 생일이 지났으니 성년이지요." "아, 그럼 둘의 생일을 비교해서 생일이 빠른 사람에게 먼저 잔을 주어 야 하겠군요. 누가 먼저지... 수르카?" PRINTER/CAPTURE를 OFF 하시고 [ENTER] 를 누르십시오.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4203/14637 ━━━━━━━━━━━━━━━━━━━━━━━━━━━━━━━━━━━━━━━━ 제 목:[탐그루] 서커스 들판 161 관련자료:없음 19/19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1-24 00:09 조회:1323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생일. 나는 이 말을 듣는 순간 성년식의 날이 떠올랐다. 그날 보았던 마소드의 검과 아버지의 영상, 그리고 사라지던 사비오 영감의 뒷모습도.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스칼렛에게 먼저 잔을 권했다. 모짤트가 했 던 그 손짓이었다. 내가 고아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마로우는 헛기침을 했고, 모짤트는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둘의 분위기에서 뭔가 심상찮은 눈치를 챘는지 오브라디 교수는 아무 말도 없이 스칼렛에게 잔을 따랐다. 스칼렛은 조심스럽게 잔을 비우고는 내게 잔을 내밀었다. 나는 잔을 받아 들었다. "술을 잘 드시는군요. 아주 독한 술인데 말이지요, 스칼렛 양." "술은 생명의 물이지요. 어려서부터 포도로 만든 술은 자주 마셨습니 다. 가문의 전통이지요." 내가 고아라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는지 스칼렛은 당연하다는 듯 이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나는 스칼렛이 내가 고아라는 사실을 알아차리 지 못한 게 어쩐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오브라디 교수가 쇠주를 따라주자 단숨에 들이켰다. 성년의 날에 는 대리 어머니였던 이무르 아주머니라도 있었지만 지금은 아무도 없다. 술이란 바로 이럴 때 마시라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으악! 그런데 이건 완전 불덩어리잖아! 쇠처럼 강력한 술이라더니 정말 목구 멍이 쇠로 만들어 졌다고 해도 견디기 힘들 지경이었다. 나는 눈물이 다 핑 돌았는데 그것은 순전히 다 쇠주라는 술 때문이었다. 술이 한 잔씩 돌아가고 나자 이 이야기 저 이야기를 서로 두런두런 나 누었다. 그후 나는 단 한잔도 더 마시지 못했고, 불길 때문인지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숨기며 겨우겨우 대화에 참여 할 수 있었다. "하하하. 그러니까 네 말은 전설 속의 인디 족이 용맹한 전사들이었다 는 말인가? 그리고 네가 바로 그 후손이고? 마음에 들어, 마음에 들어." "꼭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야." "아니긴 뭐, 하하하." 바리바는 웃으면서 모짤트의 어깨를 툭 쳤다. 모짤트는 희미하긴 했지 만 미소마저 지으면서 바리바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로우와 오브라디 교수는 서커스에 대한 토론을 계속 나누고 있었다. "자네의 말은 이성적이기는 하지만 낭만도 개성도 없어. 창조가 시작되 는 곳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일세. 좋은 학자가 되려면 가슴을 뜨겁게 만 드는 일도 중요하지. 훌륭한 학자들 중에 시인이 많은 데는 다 이유가 있 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곳에서 동춘의 요정들을 보았다는 사람들의 말을 믿을 수는 없습니다. 그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 요정이 있다고 믿느니 차라리 마칸이 용을 부린다는 말을 믿겠습니다." 머리와 가슴이라. 그럴듯하게 들리는 말이었지만 말이 말을 낳는 대화 에 참여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고 바리바와 팔짱을 끼고 있는 루크와 말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말을 하면 꼭 이상한 일이 생기곤 하는 그레텔과는 더더욱 이야기를 나눌 수 없고. 그렇다면 스칼렛과 이야 기를 나누어야 하나? 스칼렛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내 쪽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나는 스칼렛의 커다란 눈망울이 불빛을 받아 반짝이는 것을 보고는 고개를 돌 려버렸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가슴은 뛰고 볼이 화끈거렸다. 술 때문 일 거야. 아깐 괜히 눈시울도 뜨거워지고 그랬잖아. 아뮤 이유도 없이 말 이야. 이건 순전히 다 술 때문일 거야. 오브라디 교수가 너무 심했어. 말 이 성년식이지 애들한테 술을 먹이다니. 왜 이렇게 가슴이 뛰지. "마법사님. 저와 동갑... 이신가요?" 조심스럽게 스칼렛이 나에게 다가와 물었다. "그럴지도 모릅니다." 나는 스칼렛을 바라볼 엄두가 나지 않아서 모닥불 안으로 마른 나무 쪼 가리를 집어던지면서 말했다. 그런데 이렇게 말을 해 놓고 보니 꼭 내가 대마법사의 흉내를 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쩐지 나 를 바라보는 스칼렛의 얼굴이 존경의 빛을 띄고 있을까봐 겁이 더럭 났 다. 이 위기를 어떻게 탈출한다? 보통 때라면 화제를 돌리는 방법을 썼겠 지만 지금은 도저히 스칼렛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랬다가는 틀림없이 떨리는 목소리를 들켜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어색 해서 양손을 비비다가 반지의 감촉을 느꼈다. 그랬다. 아자닌이다. "내* 마음의* 문을* 여니* 길을* 인도해* 다오*" 나는 아자닌이 진정으로 내게 길을 인도해 주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이 렇게 마법의 말을 외웠다. "예. 부르셨습니까, 수르카 님." 아자닌의 목소리가 이렇게 반가운 적은 없었다. 나는 웃으면서 아자닌 을 바라보았다. 모닥불 빛을 받은 아자닌의 얼굴이 꼭 노을을 받은 구름 처럼 보였다. "마법사 님. 정령... 이로군요." 스칼렛은 믿기지 않는 다는 듯한 표정으로 아자닌을 바라보면서 말했 다. 이게 웬일인가. 아자닌이 스칼렛을 정면으로 뚫어지게 바라보며 내게 로는 시선도 안 돌리는 거 아닌가. "예. 제 정령 아자닌입니다, 스칼렛." 나는 조금은 당황해하며 말했다. "자, 잠깐. 저거 뭐야?" 바리바였다. 바리바는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거의 뒤로 벌렁 나가떨 어질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자닌. 내 반지의 정령." 나는 이렇게 짤막하게 바리바에게 대답했다. 아자닌을 보고 이정도로 놀라니 만약에 나미트 장군을 본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생각해보니 웃 음이 절로 나왔다. 그러고 보니 모두의 시선이 내게 몰려 있었다. (아자 닌만 빼고) 다만 모짤트는 사람들의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을 뿐이었다. 나는 어쩐지 우쭐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자닌이로군. 나를 기억하겠나?" 오브라디 교수는 마로우에게 하던 말을 끊고 자리에서 일어나 내 쪽으 로 다가오면서 말했다. "예, 오브라디 교수님. 스파일의 끝자락에서 마지막으로 뵈었지요." 아자닌이 말했다. 그제서야 아자닌이 평소의 담담한 표정으로 돌아왔 다. 지금 아자닌의 얼굴에는 어쩐지 재회의 기쁨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래. 악마의 입 전투 후 처음이지. 아니, 그건 전투라고도 할 수 없 었지. 어떻게 보면 병력 인수인계식이었다고나 할까... 하하하. 이 말을 성황청 사제가 듣는다면 신성모독이라고 당장 화부터 내겠군." 오브라디 교수는 이렇게 말하면서 다시 한 번 크게 웃었는데, 내가 듣 기에 항상 오브라디 교수의 웃음은 억지로 웃는 것 같아 자연스럽지가 않 았다. "제자 분들이 모두 다 성황청으로 가기로 결정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계 셨으니까요." 말을 하는 동안 아자닌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당장이라도 눈물을 흘릴 듯이 말이다. 나는 아자닌의 슬픈 표정을 처음 보아서 아무래도 어색했 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오늘따라 아자닌이 왜 저러지? "그래. 미리 알았다면 사비오와 작전을 짜고 아자닌 자네와 지형에 대 해서 이야기하며 침투경로를 찾을 이유도 없었을 텐데 말이야. 지금 생각 해보면 정말 헛짓이었지. 도대체 뭐 하러 그랬을까? 한 순간에 다 돌아서 버릴 줄 알았다면 말이지." "교수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마로우가 물었다. "그래. 자네는 모르겠군. 꽤 오래 전의 일이니까. 하하하. 아마 자네 부모가 자네 나이 때였을지도 모르겠구만. 성황청이 막 득세하기 시작했 을 무렵의 일이었으니까 말일세." "잠깐, 잠깐. 저게 뭐냐고? 아니 귀신이 나타났는데 어떻게 다 저렇게 태연할 수가 있지? 이봐 모짤트. 다들 귀신 들린 것 아니야?" 바리바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이렇게 말했다. 다행히도 모짤 트와 루크가 바리바에게 조심스러운 손길을 (양팔을 꼭 붙들고 군밤을 한 방 먹여주는) 보내준 덕분에 곧 조용해졌다. "성황청이 처음 건립되었을 때, 사설 마법학교들을 흡수했다는 말을 들 은 적이 있어요, 오브라디 교수님." 스칼렛이 말했다. 태연한 목소리였지만 눈은 아자닌을 향해 있었다. 그 런데 아자닌이 스칼렛을 바라보는 눈빛이 차가웠던 건 나만의 착각이었을 까? "그래 어느 정도는 알고 있군. 스칼렛 양. 그런데 흡수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요? 흡수되지 않은 마법학교 교장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또 흡수를 거부한 학생들은 어떻게 되었는지도?" 오브라디 교수는 흥분했는지 목소리가 조금씩 높아졌다. "흡수가 어떤 말인지는 아버님에게 들었어요. 아버님의 경영 방식이기 도 해서... 저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조금 부끄럽다는 듯이 목소리를 죽이면서 스칼렛이 말했다. "하긴. 자이벌들이 하는 짓이나 성황청이 그때 했던 짓거리나 마찬가지 지. 아참. 자네들은 혹시 모를까봐 내 하는 말인데 흡수란 말과 비슷한 말로는 통합, 통폐합, 정리, 계열사 축소 같은 것들이 있다네." 오브라디 교수는 상대가 스칼렛이라는 걸 잊었는지 자이벌에 대해서 함 부로 말하면서도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다. 너무 기분파라니까, 오브라디 교수는. "저, 그런데 제가 듣기로 성황청의 마법학교 흡수는 백년 전 일이라 고..." "예. 맞습니다, 스칼렛 님. 비스토브레 식으로는 백년 전 일이고 정확 하게는 팔 십 하고도 삼 년 전 일이지요." 스칼렛의 말에 아자닌이 바로 덧붙였다. 머리 나쁜 바리바는 그게 무슨 소린가 한 참을 고민해야 했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대번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머리가 나빠서라기 보다는 아자닌을 본 충격에서 아직 헤어나지 못한 탓이 크겠지만 말이다) "그럼, 교수님 그때 나이가...?" "글쎄? 한 오륙십 되었던 것 같은데. 잘 모르겠군. 원래 나이라는 놈이 백 살만 넘어가면 다 그게 그건 거 같고, 더 이상 세기도 싫어져서 말이 야. 그러니까 다들 꽤 오래된 일은 다 백 년 전 일이라고 하지 않던가. 하하하" 내가 조심스럽게 오브라디 교수에게 묻자 오브라디 교수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이렇게 답하고는 호탕하게 웃었다. 조금 전까지 흥분되어 있 던 목소리는 오간 데가 없었다. "제가 알기로는 마법사만이 오래 산다고 들었습니다만." 나는 언젠가 타호루에게 들었던 마법사는 보통 사람 보다 오래 산다는 말을 상기하면서 오브라디 교수에게 말했다. "귀족의 피가 따로 없다고 믿는 사람이 마법사의 피는 따로 있다고 믿 는 건 좀 이상하군, 수르카. 피 없는 사람이 없듯이 마음 없는 사람이 어 디 있고, 뼈 없고, 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인간이라는 것은 모두 가 서로 다르며 모두가 서로 같은 존재라네. " 오브라디 교수는 내 말에 당장 이렇게 말했다. 하긴 그것도 그렇긴 하 지만... 다르면서도 같다고? "재능이라는 것은 차이가 있을 수 있잖아요? 오브라디 교수님?" 나는 이렇게 오브라디 교수에게 물었다. 그러자 오브라디 교수는 조금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긴. 아무리 다 같은 인간이라지만 귀족으로 태어나는 사람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것 처럼 마법사로 태어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군. 그러 니까 같으면서도 다르다고 하지 않았나. 하지만 이 문제는 좀 어려운 문 제야, 수르카 군. 다시 말해서 인간은 태어날 때 모든 가능성을 다 가지 고 태어나느냐, 아니면 그 일부만 가지고 태어나느냐 하는 문제인데... 이 문제는 고대로부터 평등의 문제, 기회 균등의 문제 등으로 발전되기도 했지. 그러니까 성선설이냐 성악설이냐 라는 얘기인데. 그러니까 내가 뭐 랬나. 인간이라는 존재는 말이야......" 아무래도 오브라디 교수도 잘 모르고 있는 부분을 건드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항상 단정적인 말투로 이건 이렇다, 저건 저렇다 하고 유창하게 말하는 오브라디 교수가 조금 당황하고 있으니 말이다. 어쩌면 오브라디 교수의 아픈 구석을 찌른 말일지도 모르겠다. 혹시 오브라디 교수는 마법 사가 되고 싶었다가 실패했던 과거가 있는 건 아닐까? 그래서 재능 이야 기가 나오니까 당황하고 있는 게 아닐까? "엄마..." 오브라디 교수의 말은 그레텔이 입을 여는 바람에 중단되었다. 나는 절 로 몸이 움찔했다. 모짤트도 뒤에 세워 놓았던 양손칼을 고쳐 잡았다. "엄마..." 그레텔의 목소리는 찬바람을 머금고 내 가슴을 뚫고 지나갔다. 나는 어 둡고도 낮은 그레텔의 목소리에 관통 당해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저려오 는 느낌을 받았다. 그레텔의 표정은 평소처럼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나는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그레텔의 눈이 뭔가로 젖어있다는 걸 알 수 있었 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4204/14637 ━━━━━━━━━━━━━━━━━━━━━━━━━━━━━━━━━━━━━━━━ 제 목:[탐그루] 서커스 들판 162 관련자료:없음 22/22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1-24 00:10 조회:1171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아자닌. 어떻게 된 건지 알겠어?" 나는 아자닌에게 물었다. "어머니를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누가 그걸 모르나. 나는 답답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쩌면 아 자닌이 정령이 아니라 사람이었다면 멱살을 잡고 흔들었을지도 모르겠다 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다른 건 없는 거지?" "제가 알 수 있는 것은 그것뿐입니다." 나는 그레텔이 그냥 보통 어린아이처럼 엄마를 그리워하는 게 아닐까 하는 마음에서 물었지만 아자닌은 내 질문의 요지를 전혀 알아듣지 못하 고 이렇게 대답했다. 오래간 만에 봐서 반가운 건 좋지만 아자닌은 너무 답답하단 말이야. 나는 가슴이 뭔가 무거운 것으로 꽉 들어차 있는 느낌 이 들었다. 왜 이런 걸까. 아자닌이 아무리 답답한 소리를 해도 이렇지는 않았는데. "왜, 혹시, 귀, 귀신이라도 나타난다는 거야, 그럼?" 바리바가 대충 상황을 눈치 챘는지 이렇게 말했다. "죽은 자의 기억이 마음을 울리는 때가 있는 법이긴 하지요." 아자닌의 알듯 모를 듯한 말을 듣자 나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설마 귀 신이 나타난다는 건 아니겠지. 설마. 당장 눈앞에 이무르 아주머니의 얼 굴과 또 하잔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얼굴과 임프 시의 사비치 다리에서 떨 어지던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를 것만 같았다. "엄마..." 그레텔은 다시 한 번 이렇게 말했다. 그레텔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슬프 게 들렸다. 이제 그레텔의 목소리는 가슴 안으로 들어와 내 안을 온통 흔 들어 놓고 있었다. 나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뭐라고 더 말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답답한 가슴은 더욱 더 무거워지고 있었다. 이상한 기 분마저 들었다. 귀신 생각을 해서 그런 걸까? "수르카 님. 그레텔 님의 손을 잡아 보세요." 아자닌이 말했다. "손? 무슨 손?" "왼 손으로 그레텔 님의 손을 잡아 보세요." 아자닌이 다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쩐지 오싹한 기분이 드는 목소 리였다. 나는 왜 그러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아자닌의 목소리는 차마 그런 질문을 할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 반지의 주인은 분명 난데 말이다. 나는 묻기는커녕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천천히 그레텔의 손을 잡았다. 그레텔이 나의 눈을 바라보았다. 어린아이의 손이란 건 이렇게 작은건가. 나는 새삼 내 손이 크다는 사실에 놀랐다. "왼 손입니다. 수르카 님." 아자닌의 목소리에 모두들 숨을 죽이는 게 느껴졌다. 가끔씩 나뭇가지 들이 탁, 탁, 소리를 내면서 터져 나가는 소리가 정적을 깰 뿐이었다. 나 는 조심스럽게 아자닌을 올려다보았다. "왼 손?" "예. 반지를 낀 손이요. 왼 손으로 그레텔의 손을 잡아보세요." 나는 아자닌의 말 그대로 그레텔의 손을 왼 손으로 잡았다. 그레텔의 까만 눈동자가 순간 이글거리면서 내 눈 속으로 빨려 들어오는 것만 같았 다. 나는 잠시 주춤거렸다. 그러자 그레텔이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뭐야, 아자닌." 나는 아자닌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런데, 나는 돌아보는 순간 뒤로 나자빠질 뻔했다. 그 자리에는 아자닌이 아니라 난생 처음 보는 여자가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산 자와 죽은 자의 세계는 다른 법인데, 나에게 산 자의 세계를 허락 해 준 반지의 정령과 그 주인에게 감사합니다." 인자한 표정의 중년의 아주머니였다. 분명 나이가 들었다는 걸 알 수 있는 외모였지만 단정하게 빗은 머리에는 윤기가 흐르고 있었고, 얼굴에 는 잔주름 하나 보이지 않았다. 나는 너무 놀라 할 말을 잃었다. 입에서는 어, 어 하는 소리만 흘러나 올 뿐 비명소리 하나 나오지 않았다. "흠. 오래간 만에 보는 군. 반지의 능력이지. 산 자의 기억으로 죽은 자를 부르는 능력 말일세. 그레텔이라는 아이, 정령술사라고 했던가? 어 린 나이지만 제법이로군. 내가 사람은 잘 본 것 같네." 끝에 오브라디 교수 특유의 너털웃음은 웃지 않았지만 오브라디 교수는 제법 신이 나는 모양이었다. 어떻게 귀신을 보고도 저렇게 태연할 수가 있지? "자. 다들 겁먹지 말게. 저건 반지의 능력으로 그레텔의 기억의 심연에 서 끌어낸 형상일 뿐이니까 말이야." 내 생각을 읽었는지 오브라디 교수가 말했다. (이런 경우를 두고 '귀신 같다'고 하던가?) "귀, 귀신이 아니라구요?" 바리바가 루크의 손을 꼭 잡은 채로 말했다. 겁에 질린 바리바에 비해 서 루크는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레텔. 엄마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란다. 너의 능력은 이런 데 쓰라 고 있는 게 아니다. 죽은 자와 산 자를 만나게 하는 건 정령술사의 능력 중 하나지만, 그걸 이렇게 너 혼자만의 것으로 해서는 안되지." "엄마." 귀신(이 아니라고는 했지만)이 말했지만 그레텔은 전혀 그말을 듣지 않 고 어머니의 형상에게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그레텔. 너의 미래에는 너의 아름다운 삶이 있어야 한단다. 그 미래에 있어야 할 사람은 엄마가 아니야. 무슨 말인지 알겠니, 그레텔?" "엄마..." 그레텔의 눈동자가 흐려졌다. 나는 가까운 곳에 있었기 때문에 그레텔 의 표정이 어둡게 내려앉는 걸 아주 자세히 볼 수 있었다. "그래. 그래야지. 그레텔. 착하구나. 이제 날 보내주렴. 세상은 넓고 험하지만 그만큼 재미있고, 행복한 곳이란다." "엄마." 그레텔은 이렇게 말하고는 굳게 입을 닫았다. 비장해보이기까지 한 모 습이었다. "장하다. 그레텔. 엄마는 네가 자랑스럽구나." 도대체 뭐가 장하다는 건지, 뭐가 자랑스럽다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레텔의 어머니의 형상은 그순간 사라져 버렸다. 그러자 그레텔이 손을 놓았고 나는 힘없이 뒤로 쓰러졌다. "이, 이게 뭐야." "정령술사의 소환술 중 하나라네, 바리바. 처음 보는 모양이지? 하하 하. 서커스 들판이 좋은 곳이긴 한 모양이로구만. 이 오브라디 교수도 근 삼 십 년만에 보는 장면인 걸. 하하하." 오브라디 교수는 이렇게 말하면서 너털웃음을 지었다. 나는 그제야 정 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로우와 루크, 바리바는 완전히 넋이 나간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모짤트와 스칼렛은 상당히 담담해 보였 다. "아자닌? 아자닌은?" "불러." 그레텔이 나를 보면서 말했다. 어느 사이 그레텔은 평소의 그레텔로 돌 아와 있었다. "내* 마음의* 문을* 여니* 길을* 인도해* 다오*" 마법의 말을 외우자 아자닌이 나타났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오브라디 교수님의 설명 그대로 입니다." "아자닌도 잘 아는 구만. 그래. 수르카 군. 이해가 가지 않는 모양인 데, 지금 자네가 본 건 아자닌의 반지를 이용해서 그레텔이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어머니의 형상을 불러낸 것이라네. 그레텔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그레텔의 어머니는 곧 실제했던 그레텔의 어머니와 다를 것이 없지. 왜냐하면 그레텔의 어머니가 존재했던 방식은 그레텔이 그레텔의 어머니 를 인식하고 있었던 방식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거든." 그 말은 아까도 들은 말과 비슷한 말이었지만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생전에 알지 못한 사람은 형상으로 불러낼 수 없다는 말씀이 십니까?" "마로우 군. 그것은 세상을 너무 단면적으로 알고 하는 말일세. 예를 들어 자네가 입고 있는 옷에는 얼마나 많은 이들의 마음이 담겨있는가. 물론 마로우 자네가 직접적으로 그들의 마음을 인식할 수는 없겠지만 자 네의 마음은 어떻게든 자네도 모르게 반응을 보이기 마련이지. 어떠한 물 건이든 사람이 만든 것에는 만든 이의 마음이 담겨있기 마련이니 말이야. 우리가 먹는 음식은 어떠한가? 또 우리가 마시는 물은. 내가 마신 물이 오줌이 되어 버려지고, 그 오줌이 말라 구름이 되고, 구름은 다시 비가 되어 다른 이들이 마시게 되지 않는가." "세상의 모든 것들은 다 연관되어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알겠습니다." 마로우는 이렇게 말하면서 고개를 끄덕였고, 나도 옆에서 따라서 고개 를 끄덕였다.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현을 나는 왜 이런 식으로밖 에 할 수 없는 걸까?) 머리에 쥐가 나려고 하기는 했지만 나는 온 정신을 집중해서 오브라디 교수의 말을 이해하려고 노력했고, 그 결과 다음과 같 은 질문을 오브라디 교수에게 던질 수 있었다. "오브라디 교수님. 쉽게 설명해 주세요." 내가 되묻자 오브라디 교수는 잠시 인상을 찌푸리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래. 알았네, 수르카 군. 쉽게 설명해 주지." 오브라디 교수의 말에 모두가 숨을 죽이고 오브라디 교수에게 집중했 다. 모두들 무슨 말이 나오나 잔뜩 기대하고 있는 얼굴들이었다. "자네는 도대체 내 말을 이해하려고 하질 않는 구만. 조금만 생각해 보 면 쉽게 알수 있는 것을. 좋아. 자네 수준으로 다시 설명해주지. 그러니 까, 사람들은 보통 아까 본 그레텔의 어머니의 형상과 비슷한 현상을 귀 신이라고 부른다네. 다른 말로는 유령이라고도 부르고. " 오브라디 교수의 말에 나는 맥이 탁 풀려 버렸다. "그럼... 귀신이 아자닌을 통해서 나타난 건가요?" "그렇다고도 말할 수 있겠지, 수르카 군." "잠깐. 귀신은 죽은 사람의 영혼을 말하는 거 아닌가요, 오브라디 교수 님?" 여전히 겁에 질린 얼굴로 바리바가 오브라디 교수에게 물었다. 오브라 디 교수는 질문 잘했다는 듯이 무릎을 한 번 탁, 치더니 설명을 시작했 다. (저렇게 매일 무릎을 쳐대다가는 무릎이 남아나지 않겠다 싶었다) "그럼 귀신에 대해서 설명해 주지. 귀신이란 말은 옛부터 세상의 이치 를 뜻하는 말이었다네. 귀라는 말은 어두움, 추함, 악함 등을 뜻하는 말 이고, 신이란 말은 밝음, 아름다움, 선함 등을 뜻하는 말이었지.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 귀신이라는 말이 인간의 정신, 그것도 특히 죽은 이의 영 혼을 뜻하는 말로 바뀌어 불려지게 되었다네. 이것이 귀신이지." 오브라디 교수의 말은 거의 강연에 가까운 말이었다. 하지만 예를 들어 설명한 것도 아니고, 내가 생각하기에 너무 어려운 개념들이어서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렇지만 하나 정도는 구체적인 걸 물을 수 있을 것 같았 다. "귀신이 무엇인지는 잘 들었습니다. 그런데 귀신은 모두 정령을 통해서 나타나나요? 귀신은 정령술사와 반지가 있어야만 하는 겁니까?" "그건 아니야. 자네는 반지로 정령을 불러내는 마법을 쓰지만, 반지 없 어도 할 수 있는 마법들이 있지 않는가? 마음으로 이해한 말들을 통해서 말일세. 마찬가지로 귀신도 자네의 마음이 이해한다면 얼마든지 부를 수 있겠지. 하지만 거기에는 특별한 능력 또한 필요하다네. 보통의 마법사들 은 평범한 사람의 말에서 마법을 찾아내지 않는가. 그렇게 정령술사들은 귀신의 마음을 찾아낼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라네. 음. 더 자세한 건 정령술사에게 물어보게. 내가 아는 건 다 이야기했으니까 말일세. 하 하하." 오브라디 교수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마지막까지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해한 척 했다는 말이다) 나는 우리 일행 중 유 일한 정령술사인 그레텔을 바라보았다. 그레텔에게 묻느니 차라리 입을 다물고 말지. "그레텔. 사람은 누구나 죽는 거야. 죽으면 절대로 돌아오지 않아." 모짤트였다. 모짤트의 작은 목소리가 조용하게 내려앉은 어둠을 타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모두들 아무 말 없었다. 타오르는 불길은 그림자를 흔들면서 조용히 빛을 내고 있었다. "그런데 바리바. 자네는 왜 그렇게 무서워하는 건가, 아까부터?" 한참의 사이를 뒀다가 바리바가 말했다. 아무래도 자리를 마련한 게 오 브라디 교수 본인이니 이런 분위기가 계속 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싶은 모양이었다. "예. 저는 선원이었습니다. 한 번 귀신을 보고 데인 적이 있지요. 루크 도 잘 알고 있는 이야기이지요." 바리바는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한 번은 로스안에서 출발해서 폭풍지대를 지날 때의 일이었습니다." "폭풍지대라니요?" 마로우가 바리바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마로우는 여행을 시작한 지 이틀이나 지났지만 아직도 바리바에게 말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나도 말 을 놓고 있는데 말이다. 귀족 출신이라 그런가? "잘 모르나? 로스안에서 배를 타고 조금만 나가면 폭풍지대가 있어. 그 너머에 황금군도가 있고. 거기는 일년 열 두 달 내내 폭풍이 불기 때문에 보통의 배로 황금군도에 간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지. 그래서 배로 먼바다까지 갈 수 없는 거라고. 기껏해야 고기잡이ㅡ배가 연안에 나가는 정도랄까. 나도 들은 말인데 아주 오래 전에는 배를 타고 먼바다를 건너 다른 대륙과 만나기도 했었다고 하더라고. 하지만 뭐 지금은 그냥 전설처 럼 되버린 얘기지만 말이야. 하여간 로스안에서 황금군도로 가는 길은 나 바리바 님밖에는 모른다고." 우쭐거리면서 바리바가 말했다. 조금 전까지 귀신에 놀란 모습은 어디 로 갔는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바리바. 왜 그 얘기도 하지 그래? 그래서 성황청에게 쫓기고 있다는 말 말이야." 루크가 옆에서 말참견을 하자 바리바는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말했다. "하여간 그래서 폭풍지대를 지날 때의 일이었어. 사실 폭풍이 늘 분다 고는 하지만 폭풍이 약한 곳과 약한 때가 있거든. 해가 유난히 높이 뜬 날 가끔씩 그런 날이 오면 바다가 황금군도로 가는 길을 터 줄 때가 있 어. 하지만 그거 보통 사람이 맨 정신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야." "바리바가 선원이었을 때 별명은 버서크였어요. 미친놈이라는 뜻이죠." 하긴. 맨주먹으로 선상 반란을 잠재운 적이 있는 바리바니 미친 놈이라 는 별명이 붙을 만도 하구나 싶었다. 루크의 말에 바리바는 다시 한 번 헛기침을 하고는 말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4205/14637 ━━━━━━━━━━━━━━━━━━━━━━━━━━━━━━━━━━━━━━━━ 제 목:[탐그루] 서커스 들판 163 관련자료:없음 19/19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1-24 00:11 조회:1288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하여간 폭풍지대를 지날 때였어. 귀신이 나타났지. 뭐,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항해 때 가장 골치 아픈 게 귀신이야. 폭풍이나 높은 파도를 불 러오기도 하고, 암초가 있는 곳으로 배를 유인하기도 하지. 사이렌이나 그렘린 얘기는 다 알고 있지?" "사이렌은 선원을 노래로 유혹한다는 마물 아닌가요?" "그래. 마로우는 아는구만. 그렘린은 배 밑창에 달라붙어서 배를 못 가 게 하는 마물이야. 다행히도 고양이를 무서워해서 고양이 몇 마리만 준비 해 놓으면 되지. 하여간 그런 알려진 마물들 말고도 수도 없이 많은 몬스 터들이 바다에는 우글거린다고. 귀신도 그 중에 하나지." 바리바는 여기까지 일사천리로 말해 놓고는 갑자기 술잔을 들더니 쇠주 를 한 모금 마셨다. "뭐, 오늘 이 자리도 다 털어놓자고 만들어진 자리고, 오늘 여기 있는 사람들을 앞으로 한두 번 볼께 아니니까 내 얘기하지." "바리바. 취했구나." 루크는 또 그 얘기냐는 듯이 혀를 끌끌찼다. 그러고 보니 일전에 임프 시에 있는 살롱에서 바리바가 용에 대해서 이야기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우리는 성황청 성직자를 태우고 황금군도로 가는 길이었어. 무슨 책인 지 뭔지를 찾으려고 말이야. 그런데 그날 밤에 본거야. 귀신을 말이야." 바리바의 얼굴에 지금까지 우쭐거리면서 말하던 빛은 어디로 갔는지 사 라져 버렸고, 어둡고 괴이한, 어떻게 보면 공포스럽다고도 할 수 있을 만 한 표정이 흘렀다. "귀신이 말했지. 다들 죽게 될 거라고. 모조리 말이야. 한 사람도 빠지 지 않고. 나는 그말에 겁에 질리고 말았지." 루크는 고개를 숙이고는 바닥에 있는 돌을 집어 만지작거렸다. "귀신이라면. 어떻게 생겼던가?" "교수님. 제가... 알던 사람이었지요." 바리바의 표정은 거의 울 것 같이 일그러져 있었다. "저주하겠다고 했습니다. 그 친구. 절 죽을 때까지 따라다니겠다고 했 지요. 그래서 저는 바다에 나가지 않기로 했던 겁니다." "전에 듣기에는 용 때문이었다고 했던 것 같은데?" 나는 조심스럽게 바리바에게 물었다. 사실 이 여행에 함께 하게 된 것 도 용의 정체를 알아내겠다고 한 거였는데 지금 이야기는 조금 다르다 싶 었다. "그래. 용 때문이야. 사실은 그 친구 때문이었고. 그 죽은 친구, 그 친 구가 용이 되어서 나타났어. 모두 죽었지. 그래. 난 도망쳤고. 그 친구, 사실 내가 죽인 친구였어. 그래. 내가 죽였지. 그리고는 비겁하게 도망쳤 어. 용 앞에서. 용으로 나타난 그 친구 앞에서 말이야." 이렇게 말하는 바리바는 뭔가를 견디고 있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대충 바리바의 과거를 눈치 챌 수 있었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 다시 배 에 오르고 싶어하는 마음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살롱에서 바리바와 함께 술을 마시다가 들었던 마법의 말을 떠올릴 수 있었다. 바리바는 바 다의 추억을 이야기하면서 마법의 말을 나에게 들려주었다. 아마도 그 친 구에 대한 간절한 마음과 바다의 기억이 바리바의 마음을 움직여 마법의 말을 만들어 내었던 모양이었다. "으흠. 그래. 자네 말은 잘 알겠네. 그런데 사람이 용의 모습으로 나타 났다면... 우리는 용에 대한 또 하나의 단서를 찾아낸 셈일세." 오브라디 교수가 말했다. "전설 중에 용을 부리는 사람의 이야기나 용을 타고 다닌 사람들의 이 야기가 자주 나오는데, 나는 지금까지 그걸 곧이곧대로 해석하려고만 했 네. 하지만 바리바의 말을 들으니 용이 인간과 더욱 밀접한 관계에 있었 다는 걸 알게 되는구만. 자네 친구가 용으로 나타났다면 어쩌면 그건 반 지의 힘으로 귀신을 불러내는 것과 비슷한 일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네. 귀신은 앞서 말했듯이 일단 인간의 정신적인 측면과 육체적인 측면 을 아우르는 개념이니까, 아마 여기서 어떤 단서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군. 일단 오리피 신전을 찾아보면 뭔가 더 분명한 단서가 나오겠지. 그 레텔도 있으니 말이야. 물론 이 오브라디 교수의 눈으로 확인을 해 봐야 겠지만, 모든 게 로스안에 가면 밝혀지리라 생각하네." 오브라디 교수는 이렇게 말하면서 굳은 의지를 보여주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런데 황금군도로 항해하는 일을 했다니. 그것 참. 성황청이 그런 식 으로까지 잃어버린 신의 이름을 찾고 있는 줄은 몰랐군." "이 칼이 뭔지 압니까?" 양손칼을 번쩍 들고서 모짤트가 말했다. 꼭 무슨 장군이나 되는 것처럼 말이다. 아무래도 모짤트 녀석, 술이 좀 들어간 모양이다 싶었다. "바바 족의 영역 북쪽으로는 무엇이 있는지 아십니까." 모짤트는 어느 새 칼집에서 양손칼을 꺼내들고 말했다. 칼날이 모닥불 빛을 받아 퍼런 이빨을 번득였다. "북쪽 바다는 빙산이 가로막고 있잖아. 그래서 배로는 바바 족의 영역 으로 갈 수 없는 거고." "그 말은 맞아, 마로우. 하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지. 거기에도 용이 산다고. 그 용 때문에 배들이 지날 수 없는 거야." "거기에도 용이 산다고 했나, 지금?" "예, 오브라디 교수님. 그곳을 지나는 선원들이나 고래잡이를 나간 뱃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거기엔 용이 살지요." "그래. 그러고 보니 나도 얼핏 한 번 들었던 것 같군. 황금군도 근처나 빙산지대 근처, 또 타실의 악마의 입 근처, 남단의 범버쿠 정글에서도 용 이 나온다는 말이 있지. 그런데 그 칼이 용과 무슨 상관인가?" "절 키워 주셨던 분이 계십니다. 제겐 아버지 같은 분이셨지요." 모짤트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걸 들어본 적이 없는 나는 귀를 쫑긋하 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키워주신 분이라니? 그럼 모짤트도 고아였단 말일까? "그 분이 이 칼을 제게 주셨습니다." "그 분은 지금 돌아가셨나 보군." 오브라디 교수가 말했다. 그러자 모짤트의 표정이 단번에 어두워졌다. 모짤트는 양철잔으로 손을 가지고 갔다. 잔을 입으로 가지고 가는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예. 그날을 기억합니다. 몹시도 맑은 날이었지요. 저는 아저씨를 아버 지라고 불렀습니다. 사실 그 분은 처음부터 제게 진짜 아버지가 있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래도 전 늘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따랐지요. 예. 그 날을 기억합니다. 아버지는 그날 배를 타고 나가셨지요. 늘 그랬던 것 처 럼. 아버지는 고기를 잡아서 생활을 하고 계셨거든요. 저는 그날 아버지 에게 돌아올 때 꼭 제가 좋아하는 바다가재를 잡아달라고 졸랐습니다. 기 억합니다. 아버지의 얼굴을. 활짝 웃으면서 많이 잡아다 주겠다고 말씀하 셨지요, 저에게..." 모짤트는 이렇게 말하면서 모닥불 쪽으로 손바닥을 내밀었다. 꼭 모닥 불을 거머쥐려는 사람처럼 말이다. 하지만 모닥불의 불빛은 손가락 사이 를 지나 모짤트의 얼굴에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그날 제게 이 칼을 주셨던 건 무슨 의미였을까요. 혹시 돌아오지 못할 거라는 걸 알고 계셨기 때문일까요? 그랬다면 왜 바다가재는 잡아다 주시 겠다고 했을까요. 살찌고 큰놈으로 만 잔뜩 잡아오겠다고 하셨는데... 왜 지요? 왜?" 나는 모짤트가 이렇게 많은 말을 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모짤트가 이 렇게 많은 말을 하는 이유가 단지 술 때문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나는 그게 용하고 관계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칼의 상징물 이 박혀있던 자리에는 하얀 용의 문양이 박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에게 이 칼을 주셨을 때, 용의 문양은 빠져 있었습니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분명히 아버지께서 빼놓으신 거라고. 그리고 이 칼을 주고 떠나신 거나, 빙산지대 쪽으로 배를 몰고 갔다는 친구 분들의 말에서 저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지요. 그리고 저는 청부업자일을 하면서 여기저기를 떠돌았습니 다. 용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돈이 필요했으니까요. 예. 성황청의 의 뢰를 기꺼이 받아들였던 것도 조건 중에 용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는 것이 끼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이용만 당한 셈이 되 었지만 말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모짤트의 목소리는 힘이 없었다. 그리고 왜 힘이 없는지 는 나와 마로우만이 알고 있었다. "전 빚지고는 못삽니다. 그래서 수르카를 따라 임프 시까지 오게 된 거 지요. 그러다 보니 오브라디 교수님도 만나 뵙게 된 거죠. 전 이게 다 운 명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언젠가 그레텔이 저에게 말해주더군요. 운명을 따르라고. 그러다 보면 모든 걸 다 알게 될 거라고 말했었죠." 모짤트가 그레텔의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었다. "그레텔. 나는 친부모님에 대한 기억이 하나도 없어. 그래도 넌 기억이 라도 할 수 있잖아. 엄마와 함께 했던 시간들을." 모짤트는 취해 있었다. 목소리가 꼭 노래처럼 박자를 타고 흐르고 있었 다. "... 나는 없어. 진짜 아버지의 기억도, 내 고향도 말이야." "모짤트가 항구 도시 출신인 줄은 몰랐는데? 어디야? 시네 쯤 되나?" 바리바가 모짤트에게 물었다. 잔뜩 취했는지 바리바의 눈은 벌겋게 충 혈되어 있었다. "스파일의 시네... 아니야. 거기가 내 고향인지는 아무도 몰라. 그냥 내가 어렸을 때 거기서 자랐다는 것 말고는 말이야." "시네 출신이었군. 나도 몇 번 가 본 적 있어. 좋은 항구였지. 좀 춥다 는 점만 빼면 말이야." "그래. 스파일의 끝이지. 거긴 고래 사냥을 하면서 살아가는 도시야, 바리바." "그러고 보니 너 말도 곧잘 하는 구나." 바리바가 웃으면서 말했다. 바리바의 발음도 이제 거의 엉망진창이 되 어가고 있었다. "그냥." 언젠가 나도 모짤트에게 저렇게 말을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냥, 이 라고 대답하는 모짤트의 표정은 내가 전에 보았던 모짤트보다 몇 배는 더 슬퍼 보였다. "말을 줄이면서 살았지. 함부로 말을 했다가는 죽을 것 같았거든. 아버 지가 죽은 게 내가 그날 가제를 잡아 달라고 졸랐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어. 너도 뱃사람이라 알겠지. 뱃사람들이 얼마나 말을 조심하는 지 말이야. 하지만 난 살아야 했어. 아버지와 용의 관계가 무엇인지, 내 진짜 부모님은 누구인지, 내 고향은 어디인지, 또 내가 진짜로 누구인지 알게 될 때까지. 그래서 이름도 수시로 바꾸면서 살았어. 언젠가 내 진짜 이름을 불러줄 수 있는 사람을 찾을 때까지는 말이지." "그래? 그럼 모짤트는 네 진짜 이름이 아니었구나. 그럼 진짜 이름은 뭐야?" "그래요, 말해 봐요, 모짤트." 바리바와 루크가 모짤트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러자 모짤트의 눈에 서 늘한 빛이 감돌았다. 나는 저 눈빛을 본 적이 있다. 저 눈빛은 사람을 베 기 전, 모짤트가 뿜어내곤 했던 살기였다. "미안해." 모짤트의 말은 담담했지만 듣는 사람의 속을 싸늘하게 만들고 있었다. "내 진짜 이름을 들을 수 있는 건 내 진짜 이름을 알고 있을 내 핏줄과 나 자신 뿐이야. 언젠가 그 날이 오리라 믿어." "하지만 상식적으로 네 이름을 많이 말해야 혹시라도 네 이름을 기억하 고 있는 사람을 만나게 될 확률이 더 높지 않겠어?" 마로우가 말했지만 모짤트는 대답대신에 마로우를 한 번 노려보았다. 마로우는 더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허공을 보면서 오늘 날씨가 어쩌구 하 면서 입을 다물었다. "모히칸 족이 어딘가 분명히 있을 거야. 그래서 난 칼잡이로 살면서 여 기 저기를 떠돌고 있지. 언젠가 이 바르도 대륙 어느 한 구석에서 만나게 되리라 믿어. 내 가족을, 내 핏줄을..." 모짤트는 이렇게 말하고는 술잔을 들어 한 잔 마셨다. 손목을 탁 꺾으 면서 단숨에 말이다. 나는 다음에 목구멍이 어떻게 되는 지 잘 알고 있었 기 때문에 몸서리를 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도 연구는 좀 해 보았네만 모히칸 족의 이야기는 아직 들어보지 못 했네. 하지만 자네 말이 사실이라면 언젠가 만나게 될 수 있을 걸세. 바 로 이 아모리카 탐사대에서 말일세." 오브라디 교수가 말했다. 위로를 하려는 듯 목소리를 낮게 깔고서 말이 다. 모짤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목이 타들어 가는 듯한 느낌을 즐기고 있 는 모양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술을 저렇게 잘 마실 수 있을까. 나 는 도저히 자신이 없었다. "예. 그래서 여기 있습니다. 교수님과 함께 한다면 언젠가 용에 대해 알게 되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레텔이 말했던 것처럼 말이지요. 운명을 따르다 보면." 모짤트가 다시 그레텔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모짤트도 나와 같은 고아였구나. 나는 생각했다. 어쩌면 그랬기 때문에 그레텔을 처음 보았을 때 도와주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나는 더욱 더 답답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내 가슴에 들어차 있던 무 거운 것들이 점차로 더 커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옷소매를 만지작 거리면서 숨을 들이쉬었다. 하지만 기분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네가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건 아니야, 모짤트." 마로우였다. 마로우는 아까 눈빛 한 번에 입을 다물었던 게 속상했는지 단단히 마음을 다잡은 모양으로 목소리를 깔고서 말했다. "그래서?" 모짤트의 목소리는 더욱 낮아져 있었다. (아마도 술 때문이겠지...)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4275/14637 ━━━━━━━━━━━━━━━━━━━━━━━━━━━━━━━━━━━━━━━━ 제 목:[탐그루] 서커스 들판 164 관련자료:없음 18/18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1-25 00:28 조회:1215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넌 그래도 찾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살아갈 수 있잖아. 난, 난 말이야. 아버지는 돌아가셨지만 어머니는 살아 계셔. 그리고 어디 살아 계시는 지 도 알고 있고." 마로우가 말했다. "자네 아버지 마리누스 루베가 사형당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네만, 어 머님이 살아 계신줄은 몰랐군. 그래, 자네 어머니는 어디에 계시는가?" 오브라디 교수가 물었다. "타실입니다, 교수님." "타실?" "삼년전쟁이 끝나고 포로 교환 때 조건부로 끌려갔던 여자들을 알고 계 시는지요." 마로우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포로교환에 대한 이야기는 알고 있 었지만 조건부로 끌려간 여자라니.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치는 자존심의 문제가 걸리는 경우가 더 많지요, 교수님. 자존심이 라고 해 봐야 실은 어린애들이 서로 한 대씩 때리다가 싸움으로 번지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데도 말이지요. 어머니는 그런 식으로 타실에 끌려가 셨습니다." "삼년전쟁 후에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귀족들을 서로 볼모로 이주시켰다는 말을 들은 적은 있었네만 루베 가문이... 그런 가문이 교환 되었는지는 몰랐네." 오브라디 교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는 오브라디 교수의 말에서 그 말이 대충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었다. 마로우의 어머니는 볼모로 끌려간 것이다. 타실로 말이다. 하지만 진짜 실세가 있는 귀족을 볼모로 보낼 수 는 없었으리라. 아무리 전쟁 직후라고 해도 호락호락하게 당하고 있지는 않았을 테니 말이다. 그러니 반역자인 루베 가문 같은 사람들을 볼모로 보낸 게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왜 자네는 가지 않았나?" "어머님의 뜻이셨습니다. 저는 영문도 모르고 가족과 헤어져 유모의 아 들인 것처럼 위장해 스파일에 남을 수 있었습니다. 어린 저에게는 아득한 기억일 뿐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마로우는 씁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처음에는 원망도 했던 것 같습니다. 나중에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함 께 갈 걸, 하고 생각도 해보았던 것 같고요. 하지만 결국에는 포기하게 되더군요. 그렇게 전 유모 집에서 몇 해를 컸습니다. 그리고 성년이 되던 날이었습니다. 저를 맡아서 키워주셨던 유모가 저에게 한 통의 편지를 내 밀더군요. 그 편지는 어머님께서 쓰신 편지였습니다. 저는 그 어머님의 편지를 받고 알았지요. 어머님이 타실의 수도 니브리티에 계시다는 것을 요, 또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학자로서 이름을 날려 훗날 아 버님의 누명을 벗겨달라고. 저는 당장 어머니가 계시는 타실로 가고 싶었 습니다. 하지만 어머님께서는 제가 성공하기 전까지는 절 보지 않겠다고 말씀하셨답니다. 성공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의 제 모습은 어머 님을 뵙기에 부끄러울 뿐입니다." 마로우는 이렇게 말하고는 술잔을 만지작거렸다. "저는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 루베 가문의 전통이지요. 제가 듣기로는 국왕이 하사한 술잔도 마시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귀족 나부랑이였군." 모짤트는 이렇게 말하면서 마로우가 만지작거리는 양철 잔을 빼앗아 들 고는 다시 한 번 술을 목구멍에 털어 넣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또 한 번 몸서리를 쳤지만 마로우는 담담하게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래. 귀족 나부랑이였어. 그래서 귀족 나부랑이들한테 부모님을 잃은 거지. 난 그래서 귀족이 싫어. 하지만 귀족 제도가 싫다는 거지 귀족이라 는 인간이 싫은 건 아니야." 마로우의 말은 내가 그 동안 가지고 있었던 귀족에 대한 생각이 얼마나 부족했던가를 일깨워 주었다. 나는 귀족이 무조건적으로 싫다고만 생각했 지 거기서 조금도 더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것이다. 귀족도 사람이다. 자이벌들도, 산적들도, 혹은 바바 족이라고 할 지라 도 모두가 다 사람이다. 똑같이 공평하게 생명을 나누어 갖고 태어난 존 재들인 것이다. 부끄러웠다. 마법을 조금 쓸 줄 안다는 걸 갖고 은근히 자랑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내가, 마음을 길을 찾아간다고 생각하고 있었 던 내가 겨우 이정도 생각밖에 하고 있지 못했다니 말이다. 내가 이런 생 각을 하거나 말거나 마로우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언젠가는 꼭 찾아 갈 것입니다. 어머님의 소원대로 아버님의 누명을 벗고 당당하게 말이지요. 하지만 아버님이 누명을 벗는다고 해도 제게는 별다른 의미가 되진 못합니다. 그건 단지 루베 가문의 문제일 뿐이지요. 궁극적으로 제 목적은 아버님과 같은 사람이 다시 생겨나지 않게 되는 일 입니다." 마로우의 말에 오브라디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자네는 그런 목적이 있었군. 나도 자네의 뜻에 근본적으로는 동 의하지만, 사실 인간이 만든 어떤 정치체계라도 완전한 것은 없지. 불행 인지 다행인지 인간이 만들어 낸 것 중에서 또는 앞으로 만들어 낼 것 중 에서도 완전한 것은 있을 수 없다녜."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어쨌든 저도 지금까지 공부를 해왔으니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눈 앞에 벌어지고 있는 악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 지 않겠습니까?" "그래. 그건 자네의 악이지. 다른 귀족들의 눈에는 그것이 선으로 보일 지도 몰라." 오브라디 교수가 말하자 마로우의 눈이 커졌고 나는 숨을 죽였다. "자네는 인간과 세상을 더 겪어보아야겠군. 지금처럼 그런 의문들을 가 지고 열심히 살아간다면 학문은 저절로 자네에게 길을 열어줄 것이네. 자 네의 모습이 참 보기 좋군. 하하하." 오브라디 교수가 웃자 분위기는 잠시 누그러지는 듯 했다. 하지만 도발 적으로 마로우는 모짤트를 바라보더니 말을 했다. "어디 계신지 알면서도 가지 못하는 내 마음을 알겠어? 나야말로 괴로 워. 그러니 혼자 세상 고통 다 짊어진 것처럼 굴지 말란 말이야." "내가 그랬나? 내가 너에게 그런 말을 들을 정도로 우스운 모습이었나? 말하는 것 만큼이나 행동으로 옮겨 본 후에 다시 말하는 건 어때? 뭔가 도움이 되는 걸로 말이야. 입만 살아가지고..." 모짤트가 받아치자 당장이라도 싸움이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로 바뀌어 버리고 말았다. 모두들 당황하는 것 같았지만 오브라디 교수가 그 중에서 도 가장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동료애를 좀 돈독히 해 보자는 의미 에서 가진 자리에서 싸움이 일어나게 생겼으니 말이다. "미안하지만 난 입만 살아있는 게 아니야. 칼도 살아있어." 마로우는 이마에 땀까지 흘리면서 말했다. "이 양손칼은 아주 어렸을 적부터 나와 함께였지. 마로우, 네가 내뱉은 말보다야 적겠지만 내 칼이 마신 핏물이 네가 마신 물보다는 많을 거다." 모짤트는 정말 취한 모양이었다. 나는 모짤트가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걸 한 번도 본 일이 없었다. "넌 왜 늘 그런 식이지? 내가 하는 말을 넌 다 아무 가치 없다고 생각 하고 있지? 그렇지? 네 눈빛을 보면 알아. 내가 오브라디 교수님하고 이 야기를 하기만 하면 넌 늘 그런 눈으로 날 봤어. 날 경멸하는 바로 그 눈 말이야. 내가 하는 말이 그렇게도 마음에 안 들어? 네가 보기엔 내가 하 는 말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 같은지 몰라도 내가 보기엔 네가 휘두르 는 칼이야말로 의미가 없는 것 같은데." 이 때 한 자락 바람이 마로우쪽으로 불었다. 바람은 불티를 안고 있어 서 마로우는 눈을 감고 손을 휘저어 불티를 비켜내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그렇게 말하고 있는 자신을 스스로 조롱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널... 무시했었나?" 당장이라도 칼을 뽑아들 기세였던 모짤트는 이렇게 말하더니 피식 웃으 면서 다시 한 번 술잔을 기울였다. "그랬군." 모짤트가 이렇게 말을 닫아버리자 마로우도 더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게 불티 때문이었는지 다른 이유가 있어서였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누가 더 불행한가 견주어 보는 시합 같은데."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이었지만 이 말을 한 순간 나는 내가 왜 계속해서 답답한 마음이 들었는가를 알 수 있었다. 나는 이야기할 부모님에 대한 기억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레텔의 말이 어떻게해서 내 가슴을 뚫고 지나 갈 수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저 나이 때 마음껏 엄마를, 아빠를 불렀어 야 했던 것이다. 나는 모짤트의 표정이 왜 슬퍼보였는지 알 수 있었다. 모짤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왜 마로우가 귀족도 사람이라는 말을 했을 때 부끄러웠는지 알 수 있었다. 내 부모가 귀족이 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어렸을 때부터 마음 깊숙한 곳에 있었기 때문이 었다. "그렇군. 하하하. 다들 쇠주를 마시고 쇠처럼 깡깡 소리를 내며 부ㄳ히 는군. 쇠주가 쇳물도 녹이는 독주였구만. 쇠보다 강한 마음을 다 상하게 한 걸 보니까 말이야. 모두 다 술때문이야, 술. 마로우 군도 술 냄새에 취한 게지. 아닌가? 하하하." 평소보다 훨씬 더 과장된 어투로 오브라디 교수가 말했다. 나는 그저 씨익 한 번 웃고 말았다. 모짤트는 좀 어색한지 모닥불에 마른나무 가지 를 밀어 넣었다. 불티가 한 순간 붉은 꽃가루처럼 하늘로 흩어졌다가 사 라졌다. 나는 그 불티를 바라보면서 밤하늘의 별들도 언젠가는 저렇게 사 라져 버리는 게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상상을 해보았다. "다들 그렇게 말씀하시니 정말 부끄러워집니다. 저는 참 행복하게 살았 구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스칼렛이었다. 한참동안 이야기를 들으며 꽤나 심각해졌는지 표정부터 가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사실 저도 귀족이니 자이벌이니 하는 말이 싫어요. 다 같은 사람인데 왜 그런 말이 사람보다 앞서는지도 잘 모르겠구요. 그게 그렇게는 중요한 건가요? 귀족이라는 게, 또 자이벌이라는 게 말이지요." 스칼렛은 나즈막하게 말했지만 목소리에는 좀 억울하다는 느낌이 묻어 나고 있었다. "예. 저는 자이벌이에요. 오브라디 교수님도, 마로우 님도, 모짤트 님 도, 아니 여기 계신 분들이 다 싫어하시는 바로 그 자이벌이에요. 오브라 디 교수님도 그러셨지요? 자이벌들이 하는 짓거리가 다 그렇다고요. 아니 에요. 다 그렇지는 않아요. 적어도 저는 그렇지 않다고요. 솔직히 지금 이 여행, 저에게는 너무 힘들어요. 조금만이라도 쉬었다 가고 싶을 때도 있고, 늘 따라다니던 비토가 없다는 것도 불편하고요. 하지만 저 견디려 고 애쓰고 있어요. 힘들어도 이 악물고 참고, 졸려도 눈 부릅뜨면서 참고 있다고요." 스칼렛의 목소리는 꼭 관청에 가서 하소연을 하는 시민의 그것을 닮아 있었다. 모두들 아무 말이 없었다. 고작 삼일간의 여행이었지만 서로 어 떤 생각과 마음을 가지고 여행하고 있는지는 정작 몰랐기 때문이었다. "다른 거 바라지 않아요. 그냥 이거 하나만 알아주세요. 제가 자이벌로 나고 싶어서 난 건 아니라는 걸요." 이렇게 말하고 있는 스칼렛은 아름다워보였다. 스칼렛에게서 뭔가 애쓰 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라이짐에게서도 그런 모습 을 본 적이 있다. 비록 나와 맞지는 않았지만 라이짐이 복수를 다짐하면 서 한 송이 카네이션을 시드의 귀로 바꿀 때, 라이짐은 진정으로 멋 있었 다. 어쩐지 나는 스칼렛이 좋아질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물론 여자로 서가 아니라 친구로서 말이다. "그건 다들 알고 있습니다. 스칼렛 님. 그런 마음을 고대에는 자격지심 이라고 불렀지요. 자기 자신을 스스로 낮추어 생각하는 일을 일컫는 말입 니다. 뭐, 그렇게 자격지심을 가질 필요는 없다고 생가합니다." 아자닌이었다. 나는 아자닌을 처다보았다. 묻지도 않았는데 말을 하다 니. 이거 아자닌도 취했나? 술에 취하지는 않았을 테고. 내가 취해서 그 런 걸까. 아니, 어쩌면 지금 서커스 벌판에 흐르고 있는 분위기에 아자닌 마저 취했는지도 모르지. "그런데 스칼렛 양. 스칼렛 양의 가문은 꽤 유서가 깊은 모양이에요. 마법의 말도 전해져 내려오는 걸 보면 말이지요." "사실 그 말은 비밀의 말입니다, 오브라디 교수님." "비밀의 말이라면...?" "아무도 알아서는 안 되는 말이라는 거지요. 저는 이 말을 돌아가신 할 머님에게서 들었습니다. 어머님도 모르시는 말이라고 하시더군요. 제가 무슨 피를 타고났다고, 아마 그렇게 말씀하셨던 걸로 기억합니다." "피라." 오브라디 교수는 이렇게 말하면서 턱밑을 쓰다듬었다. 오브라디 교수의 눈빛은 남들이 모르는 걸 자기만 알고 은밀히 즐기는 듯한 구석이 있었 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4276/14637 ━━━━━━━━━━━━━━━━━━━━━━━━━━━━━━━━━━━━━━━━ 제 목:[탐그루] 서커스 들판 165 관련자료:없음 19/19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1-25 00:28 조회:1058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혹시 피는 생명이라는 말, 알고 있나 모르겠군요?" "예. 제가 그 말을 하면 치료마법이 되더군요." "절반의 피는 절반의 마법을 만드는 모양이로군요, 스칼렛 양. 아, 오 해는 하지 마십시오. 저는 학자지 결코 마법사는 아닙니다. 그냥 해본 말 입니다." 스칼렛은 아무 말 없이 허공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모닥불 빛에 비친 스칼렛의 목선이 참 곱게 보였다. 오늘따라 이거 왜 이러지. 정말 모르겠네. "수르카 군은 탐그루 출신이지?" 넋을 놓고 있는데 오브라디 교수가 나에게 물었다. "예?" "탐그루에서는 무슨 일을 했나?" 오브라디 교수가 물었다. 나는 어떻게 대답을 해야 좋을까 잠시 망설였 다. 다들 자신의 아픈 구석을 털어놓는데 말이다. 그렇지만 나는 별로 하 고 싶은 말이 없었다. 이무르 아주머니의 이야기를 하기에는 라이짐이 부 담이 되었고, 그렇다고 탐그루에서 목검을 들고 다니면서 '탐그루 최강 검사' 운운하고 다녔던 시절 얘기를 할 수도 없고 말이다. "전 고아입니다." 아무도 그렇게 묻지 않았고, 또 물을 리도 없지만 나는 이렇게 말을 시 작했다. "제가 기억하는 건 아버님의 모습, 그것도 흐릿하게 남아 있는 몇 장면 뿐입니다. 어머니의 모습은 기억조차 없습니다." 다들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될 수 있으면 담담하게 이야기를 끌 어가려고 노력하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기억 속에서 아버님은 칼을 들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칼은, 아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마소드의 검입니다. 아니 웬지 마소드의 검이라는 느낌 이 들었습니다." "마소드의 검? 설마 탐그루에 있다는 성년의 신 마소드의 검을 말하는 건가?" 오브라디 교수가 자리에서 일어날 기세로 허리를 내 쪽으로 쭉 피며 말 했다. "예. 그렇습니다만..." "그럼 혹시 자네가 마소드의 검에 반응했다는, 성황청이 쫓고 있는 바 로 그 소년이었단 말인가?" 오브라디 교수의 말에 모두들 놀랐지만, 사실 가장 놀란 건 바로 나였 다. "어떻게 그런 걸...?" "나는 정보를 수집하고 분류하고 그 정보에서 다른 사실을 예측하는데 일가견이 있다네. 수르카 군. 내가 누군가? 학자 아닌가? 하하하." 오브라디 교수가 하도 크게 웃어젖히는 바람에 나는 내가 무슨 말을 하 고 있었는지를 거의 잊어버릴 지경이 되었다. 잠시 생각을 가다듬은 후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실 아까 생일 얘기가 나왔을 때 저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습니 다. 저는 생일이 없습니다." 나는 될 수 있으면 어둡게 보이지 않으려고 엷은 미소까지 지어 보이면 서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게 더 어색하게 보였나 보다. 내 이야기에 다들 고개를 숙이고있는 모습이 어쩐지 죄책감 같은 걸 느끼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이렇게까지 미안해 할 필요는 없을 텐데. 오히려 내가 더 미안해졌다. "아... 또 기억나는 게 있습니다. 삼년전쟁 때의 일이었을 거라고 생각 됩니다. 기억 속의 아버지는 무장을 하고 계셨거든요. 갑옷에 칼을 차 고... 물론 오래 된 기억이니까 정확하진 않을 겁니다. 마소드의 검이라 고 짐작되는 칼을 들고 계셨구요. 아버지께서는 제 손을 꼭 잡으면서 이 렇게 말씀하시더군요." 나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었다가 천천히 내 뱉었다. 내 숨결에 모닥 불이 흔들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닥불은 힘없이 흔들리면서 사 람들의 얼굴에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오늘이 너의 생일이다. 축하한다.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말에 스칼렛이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스칼렛의 눈동자엔 웬 지 따스해 보이는 별빛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 눈빛을 보니 어쩐지 나를 동정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나는 스칼렛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뜨거운 것이 목구멍에 걸려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진짜 억울한 건, 아무리 기억하려고 해도 그날이 언제인지 알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실 생일 이야기는 아무에게도 하지 않고 지금껏 지내왔지요. 또 묻는 사람도 없구요. 이무르 아주머니는 항상 너 는 라이짐과 생일이 같다고 말씀하셨지만......" 나도 취했나? 이렇게 말하는 내 눈에 모닥불이 흐리게 비추어지고 있었 다. 나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목구멍에 걸려있는 뜨거운 것 이 몸밖으로 나올 것만 같아서 였다. 나는 아주 입을 굳게 다물어 버렸 다. 그러고 있자니 좀 서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닥불이 약해지고 있는 것 같았다. 모짤트가 안에 땔감을 집어넣자 한 순간 불길이 살아나면서 불티들이 사방을 훤하게 비추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아무도 말이 없었다. 나는 무릎을 모은 다음 양손으 로 다리를 감싸안았다.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손에 반지가 만져졌다. 그 래. 언제까지나 이렇게 있을 수는 없겠지. 나는 눈을 떴다. 아자닌이 나 를 바라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너무 재미없는 얘기를 한 모양이에요." "그렇군." 오브라디 교수가 말했다. 나는 순간 내가 정말로 재미없는 얘기를 했다 는 소리인줄 알았다. 하지만 오브라디 교수의 표정을 보아하니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오브라디 교수는 불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자. 이제 그만 자야겠군. 가만있자. 불침번은 어제 바리바가 마지막이 었으니까. 오늘은 모짤트부터 서면 되겠구만." 오브라디 교수의 말에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스칼렛이 나에게 뭔가 말하려는 듯 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웃으면서 스칼렛을 바라보았지만 스칼렛은 말을 잇지 못하고 그냥 돌아서 버렸다. "아자닌. 들어가." 이렇게 말하는 내 목소리는 내가 듣기에도 힘이 없었다. 야영을 하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게다가 이렇게 따뜻한 계절에는 말이다. 다만 주의해야 할 것은 모닥불의 온기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리를 잡아야 한다는 점과 바닥에 돌이 있으면 아침에 상당히 괴롭게 된다는 것 정도이다. 나머지는 불침번이 알아서 하니까. "모짤트 군. 술을 많이 마신 것 같은데, 괜찮겠나?" "예." 모짤트는 웃으면서 말했다. 하여간 대답은 시원시원하게 한다니까. "그리고 수르카는 오늘 마지막 불침번을 서도록 하게.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그냥 수르카가 술에 좀 약한 것 같으니까." 오브라디 교수의 시간표에 따르면 나는 마지막 불침번이었다. 마지막 불침번은 중간에 일어나지 않아서 좋기는 하지만 해가 뜨는 걸 바라보고 있으면 좀 서글픈 생각이 들곤 하는데. 애라 모르겠다. 좋은 건 좋은 쪽 으로 생각해야지. 나는 이렇게 생각하면서 준비해온 모포 속으로 몸을 파 묻었다. 혹시 바닥에 돌이 고여있지 않은가 몸을 좌우로 굴려보았지만 걸 리는 것은 없었다. 그래. 그냥 자지 뭐. 좀 답답한 구석이 남아있기는 했 지만 생일에 대한 섭섭한 마음을 털어놓고 보니 시원해진 것도 사실이었 다. 따뜻한 모닥불 앞에서 모포 속에 들어가 있자니 금세 스르륵 눈이 감 겼다. 마지막으로 본 것은 불티들이 어지럽게 떠돌아다니고 그 사이로 커 다란 별똥별이 길게 꼬리를 끌며 떨어져 내리는 장면이었다. "자. 수르카 님. 일어나세요. 좋은 밤입니다. 동편의 밤하늘에는 소망 의 별들이 떠있고 저 먼 어둠의 골짜기 한 구석에서는 마물들이 축제를 벌이고 있답니다. 이런 밤에 잠자는 것은 죄악이라고요. 자자 인생을 즐 기자구요. 호오호오호오." 꿈 속에서인지 현실에서인지 경쾌하고 맑은 목소리로 누군가 이렇게 말 했다. 그리고 음악소리와 아이들 웃음소리가 왁자지껄하게 들리는 것만 같았다. 환청인가? 가만있자. 내 앞 불침번이 누구였더라. 나는 잠이 덜 깬 와중에서 생각했다. 스칼렛이었던가? 아니, 그건 어제였고, 오늘은 아 마 오브라디 교수님이었을 거야. 그런데 눈을 뜨자 내 눈앞에 나타난 것은 온통 하얀 얼굴에 눈 주변과 입술을 붉게 화장한 광대였다. (코에 붉은 공을 달고 있는 것을 보니 확 실하게 광대였다) 처음에는 마물인줄 알고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덕 분에 나는 바닥에 뒤통수를 부딪치고 말았다. 돌 뿌리인 모양이었다. 지 독하게 아픈 걸 보면. "누, 누구냐." 나는 아픈 걸 간신히 참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잠에서 덜깨서 그런지 내 목소리는 하나도 위협적이지 않았다. "아. 제 소개를 드리지 않았군요. 저는 아름다운 요정중의 요정, 서커 스 들판을 떠도는 유쾌한 방랑자, 언제나 즐겁게 떠버리는 귀여운 종달 새. 짜짜자잔. 바로, 바로, 그 이름도 유명한, 니난자라고 합니다. 만나 서 즐거워요. 즐겁다구요. 호오호오호오!" 광대 화장을 한 얼굴이 이렇게 말하면서 빙글빙글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춤추며 맴을 도는 동안, 나는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 니 모닥불은 타오르고 있었지만 주변에는 사람의 흔적을 찾아 볼 수가 없 었다. 그리고 서커스 들판 전체가 온통 환했다. "오늘은 백 년에 한 번씩 있는 공연 중에서도 천 년에 한 번 있을까 말 까 한 '당신을 위한 지루하지 않으면서도 언제나 새로운, 깨끗하고 맑은 영혼을 위한, 그리고 아주아주 운이 좋아 오늘 서커스 들판을 찾아온 당 신만을 위한, 즐거운 공연'의 서커스의 밤입니다. 이렇게 선택되신 것을 먼저 축하드리고요, 지금부터 해 뜰때까지, 평생에 다시 없을 즐거운 시 간. 당신은 행운아. 즐겨요. 행복해요. 사랑해요. 호오호오호오!" 나는 말을 다 듣고 나서야 그 광대 얼굴이 얼굴뿐이라는 걸 알아챌 수 있었다. 게다가 얼굴 크기는 거의 내 키만해서 이 니난자라는 이상한 광 대를 만약 길거리에서 마주친다면 으악 소리를 지르면서 도망쳤을지도 모 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머리뿐인 괴상한 생명체가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거기다가 호오호오호오하는 그 이상한 웃음하고는. "잠깐만. 그런데 공연이라니. 그리고 깨끗하고 맑은 영혼을 위한 뭐 어 쩌구 하는 공연이라니 무슨 말이야? 내가 좀 착하기느 해도... 그 정도는 아닌데." 나는 처음 보는 얼굴(글자 그대로의 얼굴이었다)에게 반말을 했다. 하 지만 조금도 어색하거나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런, 이런, 이런. 이 니난자, 멍청하게도 가장 중요한 걸 가장 나중 에 말씀드리게 되었군요. 제가 원래 이렇습니다. 두서가 없고 앞뒤가 없 다 보니 이런 실수를 종종 저지르곤 하지요." 니난자라는 이름의 얼굴은 이렇게 말하고는 꼭 자책이라도 하겠다는 듯 이 제자리에서 뒤집어져서 콩콩 몇 번을 튀었다. 그리고 나서 바로 섰을 때, 니난자의 주먹만한 두 눈에서는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고, 머리 위로 는 혹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너무 우스꽝스러워서 웃음을 터트 리고 말았다. "호오호오호오! 웃으셨군요! 저는 웃음을 먹고 살지요. 냠냠 맛있는 웃 음." 다음 순간, 얼굴이 조금 줄어드는가 싶더니 니난자의 얼굴 밑으로 몸통 이 나타났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나는 마른 풀잎을 비비는 것 같은 소리를 들었고, 몸통이 나타나는 순간 머리 밑으로 어설픈 환영과도 같은 잔상이 떠오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오늘의 공연은 말씀드렸듯이 '당신을 위한 지루하지 않으면서도 언제 나 새로운, 깨끗하고 맑은 영혼을 위한, 그리고 아주아주 운이 좋아 오늘 서커스 들판을 찾아온 당신만을 위한, 즐거운 공연'입니다. 이 모든 것은 서커스 들판의 보석, 영원히 남아있을 영혼의 안식처, 바로 동춘의 요정 들이 보내드립니다. 만약 공연이 재미없으시면 당장 제 얼굴을 한 대 후 려갈기세요. 재미없는 시간을 보내기에는 인생은 너무 짧은 것. 웃으면서 놀면서 호오호오호오!" "동춘의 요정?"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오브라디 교수가 들려주었던 전설이 떠올렸다. "혹시 그 사라져 버렸다는 전설의..." "쉬잇!" 니난자는 입술을 잔뜩 오무려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약간 줄어 들기는 했지만 여전히 커다란 얼굴에서 뿜어져 나오는 입김에 나는 몸을 움찔하면서 입을 다물고 말았다. "사라져 버렸다니요? 구름이 많다고 해가 사라진 건가요? 바다가 깊다 고 물고기들이 사라져 버리던가요? 숲이 깊다고 나무가 사라져 버리지도 않지요. 저희 동춘의 요정들은 언제나 당신을 위해서 이곳 서커스 들판에 서 기다려 왔답니다. 부디 그런 말씀은 하지 말아주세요. 말아주세요. 하 면 안돼요. 즐겁지 않으니까요." 다시 마른 풀잎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꼭 천둥처럼 번쩍이는 잔상과 함께 니난자의 몸통이 사라져 버렸다. "이렇게 되어 버린답니다. 그러니 제발! 제발 사라졌다느니 전설이라느 니 하는 말씀은 하지 말아주세요. 그런 부정적이고, 어둡고, 음침하고, 괴롭고, 살벌하고, 끔찍하고, 지독하고, 무거운 말은 저희 동춘의 요정들 에게는 독약이에요. 독약, 으엑."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4278/14637 ━━━━━━━━━━━━━━━━━━━━━━━━━━━━━━━━━━━━━━━━ 제 목:[탐그루] 서커스 들판 166 관련자료:없음 17/17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1-25 00:29 조회:1155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니난자는 이렇게 말하고는 독약을 먹은 사람처럼 눈을 뒤집으면서 혀를 내밀었다. 그리고는 다음 순간 혓바닥으로 얼굴을 지탱해 물구나무를 서 는가 싶더니 혀를 굴려 하늘로 날아올라 한 바퀴 돈 뒤, 멋지게 바로 섰 다. 흙을 먹었는지 퉤퉤 거리면서 침을 뱉는 니난자의 얼굴을 보자 또다 시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호오호오호오! 웃으셨어요! 웃으셨어요! 네네. 그렇게 웃으면서 놀면 서." 니난자는 이렇게 말하면서 공중으로 몸을 번쩍 띄웠다. 그리자 어두운 밤하늘에 은하수와도 같은 별빛을 발하며 니난자의 머리 밑으로 다시 몸 통이 드러났다. "저희 동춘의 요정들은 영혼의 울림을 먹고산답니다. 영혼의 울림이 뭘 까요? 메롱, 사실은 저도 잘 몰라요. 영혼의 울림이라니? 그게 도대체 뭔 가요? 뭘까? 간단하게 분명하게 확실하게 구체적으로 말하면, 에잇! 그건 바로 웃음과 박수입니다. 박수는 이렇게 치는 거지요. 보세요. 니난자의 박수치는 방법을." 니난자는 뒤돌아 서더니 엉덩이 두 쪽을 움직여 박수소리를 내었다. 거 기다가 마지막에는 방귀까지 한 번 뀌어서 나는 또 한 번 웃음을 터트리 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자 니난자의 엉덩이 밑으로 두 개의 다리가 생 겨났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또 그 번쩍이는 빛과 함께 말이다. 이건 도대체 뭘까. 동춘의 요정들은 마법을 쓸 때 저런 효과가 발생하는 걸까. 그렇다면 일종의 부작용? 광대니까 그저 연기를 위한 속임수일지도 모르 지. 하지만 걸어가면서도 가끔씩 소리와 함께 번쩍이는 건 좀 이상하다 싶긴 했다. "자. 이제 제 몸에 다리가 생겼으니 서둘러 공연장으로 가지요. 달과 별의 시간은 혼자 우울하게 지내기에는 아주 넉넉한 시간인지 모르지만 동춘의 요정들과 함께 하기에는 늘 모자르답니다." "그런데 팔은...?" "아. 팔을 말씀하시는 군요. 이런. 당신은, 아주 세심한 성격의 소유 자? 저희 삼촌은 제가 팔이 붙어있던 없던, 아니 밥을 눈으로 먹건 배꼽 으로 먹건 전혀 상관하지 않으시는데 말이죠. 예. 물론 팔이 있으면 좋지 요. 밥도 제대로 먹을 수 있고 귀를 후빌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코를 만지는 정도라면 그다지 어려울 것도 없어요." 정말 대단한 수다다. 내가 한 마디 하면 열 마디 백 마디를 하니. 하여 간 니난자는 숨 한 번 들이쉬지 않고 이렇게 떠버리더니 오른 발을 번쩍 들어 올려 코를 긁었다. 얼굴은 흙투성이가 되었고 코에 달려있던 빨간 공은 삐익삑 소리를 내면서 자지러졌다. 나는 쿡, 하고 웃음을 참았다. (어쩐지 크게 웃으면 안될 것 같아서였다) "이런. 별로 재미가 없었나보군요." 다시 한번 번쩍이는 빛이 보이는가 싶더니 니난자에게 오른 팔이 생겨 났다. 그러고 보니 소리는 마른 잎 부스럭거리는 소리라기 보다는 종이를 구기는 소리 같기도 했다. "자, 지금 '당신을 위한 지루하지 않으면서도 언제나 새로운, 깨끗하고 맑은 영혼을 위한, 그리고 아주아주 운이 좋아 오늘 서커스 들판을 찾아 온 당신만을 위한, 즐거운 공연'의 일원들이 오직 당신 한 사람만이 나타 나기를 바라면서 기다리고 있다구요. 자! 어서요! 서둘러요!" 니난자는 이렇게 말하면서 내 주위를 두 바퀴 돈 뒤 정신없이 뛰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숨 돌릴 틈도 없이 니난자를 쫓아 뛰었다. 서커스 들판은 온통 천막과 놀이 기구로 들어차 휘황찬란했다. 니난자는 그 복잡한 천막 과 놀이 기구 사이로 요리 조리 잘도 길을 찾아갔다. "어서요! 어서!" 니난자가 나를 재촉했지만 나는 아직 잠에서 덜 깬 게 아닌가 하는 생 각이 들었다. 이거,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보통 이럴 때 는 볼을 한 번 꼬집어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나는 왼 손을 볼에 대었 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나는 그만두기로 했다. 꿈이라면 깨지 않았으 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고 있었다. 그런데 뭔가 허전한 걸. 나는 손을 바 라보았다. 반지! "아! 지금 눈치 채셨군요. 반지가 없지요? 걱정 마세요. 공연이 끝나는 순간 당신의 일행과 함께 반지는 제자리로 돌아갈테니까요. 아까도 말씀 드렸듯이 이 공연은 '당신을 위한 지루하지 않으면서도 언제나 새로운, 깨끗하고 맑은 영혼을 위한, 그리고 아주아주 운이 좋아 오늘 서커스 들 판을 찾아온 당신만을 위한, 즐거운 공연'이니까요. 반지의 정령도 예외 가 될 수는 없지요." 니난자가 당신을 어쩌고 하는 긴 공연 제목을 다 말하기도 전에 새로운 음악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수많은 종류의 악기들이 동시에 연주가 되 고 있는 모양이었다. 북소리는 신나게 음악에 박자를 맞추어 주고 있었 고, 현악기와 관악기들이 음악을 이끌어가고 있었다. 그 선율이 어찌나 신나던지 나는 발걸음 마저 가벼워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음악소리가 점점 커지기 시작하자, 유난히 환한 빛이 보였다. 나는 빛을 보는 순간 저 정도의 빛이 보이려면 연금술사의 등 백 개는 있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 이곳이 이곳 서커스 들판의 자존심, 웃음과 즐거움의 본산, 서커 스 들판의 아름다운 요정, 동춘의 요정들이 특별한 공연을 가지는 천막입 니다! 호오호오호오!" 이렇게 말하면서 니난자는 몇 번이고 재주를 넘고 있었지만 나는 미처 박수를 보낼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빛이 새어나오고 있는 곳은 내 가 본 중에서 가장 거대한 천막이었다. 천막은 색색의 천으로 광대의 얼 굴과 처음 보는 동물들의 모습으로 수놓아져 있었고, 거대한 원뿔 모양을 하고 있었다. 원이라. 나는 오브라디 교수가 서커스의 어원이 원이라고 했던 말을 기억했다. 어쩌면 이 천막의 모습을 본따 서커스 들판의 이름 이 붙은 게 아닐까. 아마 오브라디 교수가 이 광경을 보았다면 어떻게든 설명하려고 했겠지만 나는 그만두기로 했다. 꿈이라면 깨지 않았으면 좋 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내가 이곳이 원이건 삼각형이건 무슨 상관이람. "자! 안으로 들어오시지요. 지금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우리 아름다운 동춘의 요정들이 목이 빠질 지경이에요." 니난자는 이렇게 말하면서 내 팔을 잡아끌었다. 나는 가슴이 두근거렸 다. 이런 기분을 느낀 적이 있었던가. 이건 스칼렛을 가까운 곳에서 바라 볼 때 느꼈던 두근거림과도 틀렸고, 또 전투를 앞두고 느꼈던 두근거림과 도 틀렸다. 심장은 박동질 하면서 내 온 몸의 핏돌기들을 힘차게 돌리고 있었고, 나는 핏돌기 하나하나가 살아나 내 온 몸에 짜릿한 기분을 느끼 게 하고 있었다. "아, 물론 천막 밖에 있는 놀이기구들도 재미 있답니다. 음악과 함께 한도 끝도 없이 돌아가는 회전 목마! 저 먼 대청하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 는 대회전차! 마음먹은 대로 몰며 친구와 경주놀이도 할 수 있는 모의 마 차! 세상이 완전히 뒤집어지는 비룡열차! 죽음의 공포를 즐길 수 있는 마 칸의 집! 성년이 되지 않은 사람은 이용을 삼가 해야 하는 아름다운 집시 여인의 엿보기 서비스! 하지만 그중에 제일은 동춘의 요정들이 심혈을 기 울여 만든 이 공연이랍니다." 우와! 나는 니난자에게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흥분이 되었다. 니난자는 과장된 몸짓으로 당장이라도 온몸이 터질 것처럼 부풀어올랐다. "동춘 서커스의 꽃, '당신을 위한 지루하지 않으면서도 언제나 새로운, 깨끗하고 맑은 영혼을 위한, 그리고 아주아주 운이 좋아 오늘 서커스 들 판을 찾아온 당신만을 위한, 즐거운 공연'은 천 년 동안 단 한 분에게도 실망을 끼쳐 드린 적 없는 최고의 공연. 누가 뭐래도 최고의 공연. 그리 고 나중에 여유자금이 생기면 이 들판 뿐만이 아니라 바르도 대륙 전체를 서커스 공연장으로 만들어나갈 거라구요. 그때 우리 동춘의 요정을 다시 한 번 찾아주세요. 그 때는 '모두를 위한 모두가 꿈꾸는 바르도 대륙 놀 이동산, 동춘의 판타스틱 슈퍼 엑티브 울트라 스페셜 드림 존'으로 초대 드릴 것을 약속드립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다 좋은 말이긴 하지만 그 동춘의 뭐뭐뭐라는 게 뭐지?" "예! 당신은, 지금, 좋은 질문? 이곳 실리포니아에 떠도는 고대어이지 요. 아는 분들은 다 아시고 모르는 분들은 통 모르시는 말이죠. 호오호오 호오......" "그러니까 무슨 뜻인데?" "그러니까... 좋다는 말이지요. 호오호오호오!" 나는 니난자의 뺨을 타고 거대한 땀방울이 하나 쪼르륵 흘러내리고 있 었다. "그렇구나. 그런데 여유자금이 얼마나 필요한데?" 나는 허리에 찬 금화를 생각하면서 말했다. 그러고 보니 잘 때 베낭 안 에 넣어 두었다는 게 떠올랐다. 이런 일이 생길 줄 알았으면 가지고 올 걸 그랬나? "호오호오호오! 무슨 말씀! 요정들이 돈을 탐내는 걸 보신 적이 있나 요? 요정들이 돈으로 뭘 사고 파는 걸 보신 적이 있나요? 저얼대! 없을 겁니다! 요정들은 간단하게 마법의 말 몇 마디로 돌멩이를 금화로 바꿀 수도 있고, 흙더미를 귀한 소금덩이로 바꿀 수 있지요. 그런 요정에게 무 슨 돈이 필요하겠습니까. 중요한 건 단 하나..." 니난자는 이렇게 말하면서 눈을 부릅뜨고 내 앞으로 다가섰다. 갑자기 니난자가 다가오자 나는 움찔하면서도 니난자에게 집중하지 않을 수 없었 다. "... 인간의 웃음소리지요." 니난자는 이렇게 말하면서 호오! 하는 기괴한 웃음소리를 내면서 제자 리에서 공중제비를 돌았다. 천막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추어 말이다. 저렇게 공중제비를 잘 도는 사람은 본 적이 없는데. 하나 뿐인 팔로 잘도 도네. "그런데 니난자. 니난자는 여기 동춘의 요정들 중에서 뭘 하고 있어?" 나는 계속해서 돌고 있는 니난자를 바라보면서 팔짱을 끼고서 이렇게 물었다. "이런, 이런. 제가 소개를 드리지 않았던 가요? 저는 아름다운 요정 중 의 요정, 서커스 들판을 떠도는 즐거운 방랑자, 언제나 즐겁게 떠버리는 귀여운 종달새, 니난자라고요." "그 얘긴 들었어. 그게 아니라, 여기 동춘의 요정들 공연에서 무슨 일 을 하고 있냐고." "아차차차참! 이런 돌대가리 니난자. 죄송해요. 과격한 표현을 써서. 제 별명이 여기서는 '때 지난자' 이지요. 중요한 걸 항상 까먹어서 그래 요. 나아쁜 다들 '때'라고 부르며 놀린다니까요. 제 역할은 '당신을 위한 지루하지 않으면서도 언제나 새로운, 깨끗하고 맑은 영혼을 위한, 그리고 아주아주 운이 좋아 오늘 서커스 들판을 찾아온 당신만을 위한, 즐거운 공연'에 초대된 분을 이곳으로 모시고 오는 일입니다. 이런. 이러는 사이 에도 자꾸 시간은 흘러만 가는군요. 어서요! 어서!" 니난자는 내 팔을 잡고 천막을 마치 연기처럼 통과했다. 나는 멈추어 서서 니난자의 팔을 끌어당겼다. "뭘하세요? 어서요, 어서 들어오세요!" 머리만 쏙 내밀고서 니난자가 말했다. 그러더니 내 표정(도대체 어떻게 나보고 천막을 통과하라는 말인지)을 보더니 호오! 하는 그 경쾌한 웃음 을 터트렸다. "제 팔을 잡고 있으면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벽도 물이 흙에 스미듯이 지나갈 수 있지요. 제가 말씀 드리지 않았던가요? 저는 광대이자 환영술 사. 그 이름도 유명한 니난자." 말하고 있는 니난자의 목 부분에서는 밝은 빛이 나오고 있었다. 천막 안에서 새어나오고 있는 연금술사의 빛과는 다른, 꼭 빛을 내는 벌레가 꾸물거리고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빛이었다. "환영술사?" "너무 늦었어요! 어서요! 어서!" 나는 니난자의 손을 잡고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천막을 통과할 때의 그 느낌이란! 마치 뼛속까지 뭔가가 간지럽히면서 뚫고 지나가는 느낌이 었다. 곧 나는 천막을 뚫고 들어가 완전한 어둠 속에 서 있었다. 분명히 천막 밖에서는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는데. 보통 시간이 지나면 눈이 어둠 에 익숙해지기 마련인데, 천막 안은 완전한 어둠 그 자체였다. 니난자는 다시 내 팔을 잡아 끌었다.. "자! 여기 앉으세요. 이제 곧 공연이 시작됩니다!" 나는 아주 눈을 감아버리고 손으로 더듬어 자리를 찾아 앉았다. 자리라 기 보다는 마른 풀들은 엮어 깔아놓은 것이었다. 내가 자리에 앉는 걸 확 인한 니난자는 손을 놓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나는 반사적으로 니난자를 잡으려고 손을 휘저어 보았다. 하지만 손에 잡히는 것은 완전한 어둠뿐이 었다. "이제부터 공연이 시작됩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놀라지 마세요. 동 춘의 요정들이 보여드리는 것은 언제나 새롭고 유쾌한 마법이니까요." 니난자의 숨결이 오른쪽 귓가를 간지럽히는 게 느껴졌다.그리고 다음 순간 니난자의 목소리가 멀리서 우렁차게 울려퍼졌다. "자! 시작입니다! 음악!"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4394/14637 ━━━━━━━━━━━━━━━━━━━━━━━━━━━━━━━━━━━━━━━━ 제 목:[탐그루] 서커스 들판 167 관련자료:없음 18/18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1-26 00:22 조회:1084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순간 사방에서 대낮처럼 환한 빛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잠시동안 눈을 감지 않을 수 없었다. 계속해서 흥겨운 축제의 음악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몇 번 눈을 깜박인 다음에야 천막 안과 무대가 눈에 들어왔다. 들어올 때는 보이질 않아서 전혀 몰랐는데, 무대는 사람 허리 높이 정 도의단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나는 한 가운데 무대가 제일 잘 올려다보이 는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나는 무대 위와 주변을 둘러보았다. 원형으로 되어 있는 무대 한 가운데에는 노란 별이 중앙에 담겨 있는 둥근 원이 그려져 있었고, 그 위쪽으로 관악기와 현악기와 타악기들이 허 공에 떠서 스스로 연주를 하고 있었다. 니난자는 무대의 원 한 가운데에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입을 쩍 벌렸다. 허공에 떠있는 악기들 도 악기들이었지만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천막 안에 나는 혼자가 아니었 다. 키와 나이가 다른 수없이 많은 내가 천막안에 앉거나 서 있었다. "저...뭐 잊으신 것 없나요?" 니난자가 하나 뿐인 팔을 살짝 흔들면서 나에게 말했다. 참. 박수를 잊 고 있었군. 나는 힘차게 박수를 쳤다. 그러자 수많은 나의 형상들이 함께 니난자에게 박수를 보냈다. 나는 그게 신기해서 박수를 더욱 크게 쳤다. 박수소리에 음악소리가 들리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러자 니난자의 온 몸에서 빛이 뿜어져나왔다. 니난자가 그 빛에 휩싸 이더니 이제는 완전한 사람의 모습이 되어 다시 나타났다. 반짝이는 천으 로 만들어진 옷을 입은 니난자는 무척이나 즐거워 보였다. 나는 바로 옆으로 고개를 돌려보았다. 그러자 천막 안에 둘러 않은 수 없이 많은 나의 형상들이 일제히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마치 거울로 둘 러싸여 있는 방안에 들어온 기분이 들었다. 마법인 모양이야. 니난자가 환영술사라고 했으니까 어쩌면 니난자가 만들어낸 환영일지도 모르지. "안녕하십니까. '당신을 위한 지루하지 않으면서도 언제나 새로운, 깨 끗하고 맑은 영혼을 위한, 그리고 아주아주 운이 좋아 오늘 서커스 들판 을 찾아온 당신만을 위한, 즐거운 공연'을 찾아주신 당신을 진심으로 환 영합니다. 오늘의 공연은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요정이지만, 동춘의 요정들 중 에선 가장 못생기고, 가장 재미없고, 거기다가 아무런 재치도 없는 제 사 회로 이어지겠습니다. 이 점 먼저 양해 드리고요. 자!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먼저 시작은 맛뵈기로 차력을 보내드리겠습 니다. 차력이라는 것은 고대로 전해 내려오는 무술의 일종으로 차력의 달 인은 돌덩어리를 이빨로 씹어 가루로 만들 수 있고, 나무 조각을 주먹으 로 꽉 쥐어서 아침 이슬을 짜낼 수 있는 경지에 이른다고 합니다. 동춘의 요정들 중에서도 차력에 통달한 위대한 달인! 세상에 단 명뿐인 위대한 차력의 계승자! 때여죽여도, 때려죽여도 살아나는 맷집의 달인! 아, 이건 아니군요. 하여간, 멋지고 단단한 근육질의 사나이! 뭇 여성들 의 마음을 설레이게 하는 아름답고 강한 남자, 조이입니다!" 그러자 우렁찬 박수소리가 다시 한 번 천막 안을 메웠다. 어디 선가 한 줄기 빛이 들어와 무대에 입장하고 있는 사내에게 비추어졌다. 조이라는 이름의 사내는 가면을 쓰고 있었다. 차력의 달인이라는 걸 강 조하려는 듯이 뿔이 두 개가 나있고, 언뜻 보기에도 험상 굳어 보이는 표 정을 하고 있는 가면이었다. 그런데 조이는 니난자의 소개를 듣고 상상했 던 모습과는 달리 근육질도 아니었고 그리 큰 체구도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좀 여위었다 싶을 정도로 보통에 가까운 체격의 사내에 불과했다. 차력의 달인이라고? 조이가 두꺼운 쇠몽둥이를 집어들자 음악소리다 딱 멈추었다. 나는 조이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조이의 차력은 너무나도 위험하고 너무나도 무서운 기술들로만 이루어 져 있습니다. 이 공연을 보시는 분들은 호기심에라도, 아니 그저 심심해 서라도 절대로 따라해서는 안되겠습니다. 기술에 따라서는 생명이 위험해 지거나 남자 구실을 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참. 오늘 공연에 참 석하신 분은 성인이 맞으시지요? 예. 맞다고 하시는군요. 그렇다면 좀 더 노골적인 표현을 써도 좋겠군요. 한마디로 고자되기 딱 좋으니까 절대로 따라하시지 말라고요. 사실 제가 얼마 전 공연에 참석하셨던 분한테 들은 얘긴데요..." 니난자의 말은 조이가 한 번 니난자를 바라보자 그냥 끝나버리고 말았 다. 조이는 쇠몽둥이를 집어들더니 앞에 놓여있는 나무판을 내려쳤다. 그 러자 나무판은 탁,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사방으로 튀어 날아갔다. 아 마 진짜 쇠몽둥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한 행동인 모양이었다. 조이는 내 쪽을 한 번 바라보더니 쇠몽둥이를 입가에 대어 조용히 해달 라는 시늉을 했다. 나는 숨을 죽였다. 어떤 걸 보여줄까? 아마 저 쇠몽둥 이를 휘겠지? 그런데 조이는 휘기는커녕 쇠몽둥이를 오른 손에 들더니 왼 손가락으로 천천히 쓰다듬었다. 마치 사랑스러운 애완동물을 쓰다듬는 것처럼 말이 다. 다음 순간, 조이는 손가락으로 쇠몽둥이를 툭툭 쳤고, 그러자 쇠몽둥 이에서는 빵 조각처럼 조각들이 힘없이 부서져 땅바닥에 떨어졌다. 조이 는 조금도 힘들어 하는 기색이 없었다. "우와!" 나는 탄성을 발하며 박수를 쳤다. 그러자 조이는 꼭 원래 그런 모양이 었던 것처럼 흉하게 여기 저기가 떨어져 이가 빠진 쇠몽둥이를 입가에 대 고 조금만 조용히 해달라는 시늉을 하더니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조각들 을 집어들었다. 나는 다음엔 무슨 일이 벌어질까 궁금해서 다시 숨을 죽 였다. "으랏차!" 용을 쓰는 조이의 기합소리가 울려퍼지가 조각이 언제 떨어져 나갔느냐 는 듯이 제자리에 달라붙고 있었다. 한 조각. 또 한 조각. 어느 새 쇠몽 둥이는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그러자 근사한 음악소리가 천막안을 메 웠고, 나는 박수를 쳤다. 니난자가 흉내 내지 말라고 했지만 저건 흉내는 커녕 시늉도 못낼 기술이다 싶었다.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조이의 쇠몽둥이는 동춘의 요정들이 공연을 시작 한 이래로 단 한번도 바꾸지 않았습니다." 니난자의 말에 나는 다시 한 번 박수를 쳤다. 이거 웬지 신나는 데. 저 렇게 힘 센 남자를 보는 것 만으로도 어쩐지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것 같 은 느낌이었다. 조이는 이어서 몇 가지 차력을 더 선보였다. 한 손가락으로 물구나무를 선 다음, 손가락의 힘만으로 공중에 뛰어올라 세 바퀴 반을 돌고 바로 서 는 기술을 보여주기도 했고, 머리로 쇠몽둥이를 반토막 낸 다음에 힘으로 다시 붙이는 기술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때마다 나는 박수를 쳤고, 조이 는 정말로 내 박수소리를 먹고사는 사람인지, 박수를 받을 때마다 더욱 더 힘이 세졌다. 몇 가지 기술을 더 보여준 조이는 니난자를 바라보더니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니난자가 고개를 끄덕이고 입을 열었다. "자! 이어지는 순서는 한 분께서 나와서 도와 주셔야 겠습니다. 가만있 자... 누가 좋을까요. 아! 저쪽에 계시는 분! 무대 중앙으로 나와 주세 요." 그래봐야 전부 난데 무슨 소릴, 이라고 생각했는데 순간 내 앞에 앉아 있던 나의 형상이 손을 번쩍들었다. "저요?" 나는 깜짝 놀라 내 앞에 앉아 있던 나의 형상을 바라보았다. 그건 분명 나였다. 아니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대답을 할 수 있는거지? "아뇨. 거기 바로 뒤에 앉아 계신 분이요." "...저 말인가요?" 나는 나도 모르게 조그마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예. 맞습니다. 어서요! 어서 내려오세요. 여러분 박수 부탁드립니다!" 그러자 수많은 나의 형상들이 박수를 쳤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져서 꼭 밀려나듯이 자리에서 무대로 올라갔다. 나를 바라보는 나의 형상들은 하 나같이 부럽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는 않 았지만 기분은 좋았다. "자. 이름이 뭐지요?" "수르카라고 합니다." "여러분! 이 분의 이름을 기억해 주세요. 혹시라도 사고가 생기거나 해 서 수르카 님이 다시 자리로 돌아갈 수 없게 된다면 누군가 이분을 아시 는 분께 사고가 났다고 전해 주셔야 하지 않겠어요? 뭐라고요? 제수 없는 소리하지 말라고요? 호오호오호오!" 니난자의 말에 객석에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뭐? 사고? 실수? 나는 도 로 들어갈까도 싶었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도저히 돌아갈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조이를 바라보았다. 험상 굳은 표정의 가면은 가까운 곳에 서 보니 은근히 무서운 기분이 들었다. 조이는 몸을 숙이더니 양손으로 내 발목을 잡았다. 뭘하려고 하는 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찔끔 오줌이 나올 것만 같았다. 혹시 내 발목을 끊었다 가 다시 붙이는 건 아니겠지? "으랏차!" 기합소리와 함께 조이는 내 발목을 잡아 나를 빙글빙글 돌리더니 힘껏 공중으로 집어던졌다. 으악! 예전에 타호루가 나를 공중으로 띄운 적이 있지만, 그건 마법이었고, 지금 내가 당하고 있는 것은 완전히 힘으로만 하는 기술이었다. 나는 빙글빙글 돌면서 허공으로 날아 올라갔다. 너무나 도 빨리 천막 안의 풍경이 빙글빙글 돌아가서 나는 눈을 감지 않을 수 없 었다. 내 몸은 하늘 끝까지 닿을 듯이 올라가더니 한 순간 멈추었다. 도 는 힘 때문에 떨어지기 전에 잠시 공중에 떠있게 된 모양이었다. 온몸의 피가 머리끝과 발끝에 모이는 느낌이었다. 귓가에는 바람소리와 웃음소리 와 박수소리가 함께 들려오고 있었다. 나는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입에 서는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창피해서라기보다 완전히 질려 버렸기 때문이었다. 나는 정말로 한 참을 공중에 멈추어 서서 돌다가 바닥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밑에서 보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내가 느끼기에 공중 에 멈추어 서있던 시간은 거의 영원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으랏차!" 조이는 이렇게 소리치면서 껑충 뛰어올라 내 몸을 붙잡은 다음, 바닥에 떨어지기 전 다시 한 번 위로 던졌다가 떨어지는 나를 붙잡아 바로 세웠 다. "여러분! 박수 부탁드립니다! 위대한 동춘의 자랑, 유일하고 위대한 차 력술의 전승자, 조이였습니다! 그리고 여기 이 분, 수르카 님에게도 큰 박수 부탁 드립니다!" 나는 박수소리와 함께 휘청거리면서 자리로 돌아왔다. (그것도 최대한 도로 아무 일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서 말이다) 하지만 그리 나쁜 기분 은 아니었다. 이 많은 사람들의 박수소리를 들으니 기운이 나는 것 같았 다. 나는 박수와 웃음을 먹고 산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어지는 공연은 동춘의 요정들 중에서도 최고의 요정! 아름답고 깜찍 한 소녀. 누가 보더라도 한 번 깨물어 주고 싶은 귀여운 우리들의 천사! 대자연과 교감하는 능력을 지닌 위대한 조련사 칭칭 양입니다!" 나는 박수를 쳤다. 그러자 수많은 나의 형상(인지도 이제는 정확하지 않지만)들이 환호성을 울리며 박수를 쳤다. 박수소리가 한참 높아졌을 때 즈음해서, 칭칭이라고 소개받은 꼬마 여자애가 무대 위로 올라왔다. 칭칭 은 니난자보다 훨씬 짙은 화장을 해서 얼굴을 알아 볼 수는 없었지만 짧 은 팔다리를 움직이는 모양새가 귀여웠다. 꼬마는 입에 짧은 피리를 하나 물고 있었다. 나는 저 피리로 뭘 하려는 걸까. 칭칭이 길게 피리를 불었다. 그러자 천막 바깥쪽에서 요란스러운 푸드 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순간 천막을 통과해 들 어오고 있는 수많은 새 때가 눈에 들어왔다. 작은 놈, 큰 놈, 뚱뚱한 놈, 마른 놈, 크기도 다양했고, 빨갛고 파랗고 노랗고, 색깔도 모두 달랐다. 새 때가 그렇게 동시에 사방에서 날아들자 일순간에 천막 안이 어두워졌 다. "뭐, 뭐야!" "으악! 새똥이다!" 여기저기서 내 목소리가 들렸다. 객석이 난장판이 되는 것은 아주 순식 간이었다. 사방에서 비명소리와 함성소리가 터져 나왔다. 내 무릎에도 새 한 마리가 날아와 앉았다. 부리가 아주 가늘고 길었고, 동그란 눈이 인상 적이었다. 게다가 광이 날 정도로 까만 깃털을 가지고 있는 새였다. 무슨 새지? 다음 순간 피리 소리가 높게 울려 퍼지자, 내 무릎에 앉아있던 새는 머 리를 무대 쪽으로 돌리더니 푸득거리며 날아가 버렸다. 어떤 새가 내 무 릎에 앉아있던 새인지 알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 새 때들이 모두 칭칭의 머리 위에 모였다. 칭칭이 다시 피리를 불었다. 그러자 새 때가 피리소리를 따라 천천히 칭칭의 주변을 돌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웅성거림이 환호성으로 바뀌었 다. 하지만 칭칭은 그 환호성에 만족하지 않고 피리를 불어 새 때를 위로 아래로, 또 흩어지게 했다가 다시 모이게 하면서 거의 춤을 추듯 몸을 움 직였다. 때맞추어 니난자가 신호를 보내자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고 악기들이 연주하는 음악과 피리소리는 하나로 어우러져 날고 있는 새 때 를 춤추게 했다. 이런 대단한 광경을 보고서야 나는 박수를 치지 않을 수 없었다. 저런 기술을 뭐라고 부를까? 저것도 마법인가? 어느덧 박수가 멎고 연주도 멈추었다. 피리소리는 음악의 끝 부분과 이 어져 계속 연주되는가 싶더니 한 순간 아주 높고 빠른 음으로 바뀌었다. 그러자 새 때가 칭칭의 주변에 내려앉았다. 피리소리가 멎었다. 무대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칭칭은 천천히 모여있는 새 때를 밟고 올라서더니 다시 피리를 불었다. 그러자 새 때가 날아오르기 시작했고 음악소리에 맞추어 칭칭은 천천히 허공으로 떠올랐다. 나는 목이 아플 지경이 될 때까지 칭칭을 바라보았 다. 마침내 칭칭은 천장을 뚫고 허공으로 사라져 버렸다. 나는 다시 탄성 과 함께 박수를 보냈다. 세상에, 저런 기술이 있었다니! 동춘의 요정들은 생각보다 훨씬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4395/14637 ━━━━━━━━━━━━━━━━━━━━━━━━━━━━━━━━━━━━━━━━ 제 목:[탐그루] 서커스 들판 168 관련자료:없음 18/18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1-26 00:23 조회:948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지금까지 동춘의 요정 중에서 가장 귀여운 칭칭의 무대였습니다. 큰 박수 부탁드립니다! 물론 칭칭은 지금 바르도 대륙 어딘가를 떠돌고 있을 테니 박수 소리를 듣지 못할 테지만요. 칭칭은 저렇게 새를 타고 누군가 를 찾아 다닌답니다. 누구냐고요? 그건 비밀! 호오호오호오!" 모두들 무릎을 치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별로 재미 있는 농담도 아닌데 무릎을 치면서 웃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웃음이라는 건 꼭 웃겨야 나오는 건 아닌 모양이로구나. 이게 무슨 말인지. 하여튼 유치하 지만 웬지 재밌고 웃겼다. "자! 이어지는 무대는 성인들만을 위한 무대입니다. 혹시 이중에 아직 성년식도 치르지 못한 분이 계시다면 얼른 눈을 가리거나 밖으로 나가 주 세요. 이 공연은 성인이 되지 않은 사람이 보았을 경우 심각한 정서적 장 애를 일으킬 수 있으니까요. 자! 그럼 기대해 주세요. 동춘의 요정들은 하나같이 요염하고 아름답고 예쁘다는 건 바르도 대륙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실은 외로 운 요정들도 많이 있다는 건 모르셨을 거에요. 동춘의 요정들의 꽃! 세상 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인! 최종전쟁 때 무수히 많은 군단을 미모로 물리 쳤다는 전설의 주인공! 언제나 뭇 사내의 마음을 설레이게 하는 여인. 그 러나 조금은 외로운 여인. 설희의 무대입니다!" 지난자의 소개가 끝나자 요란스러운 함성과 함께 박수가 터져 나왔다. 요염한 미인이라. 나는 마른 침을 한 번 꿀꺽 삼켰다. 조명이 비추자 설희라고 소개받은 여인이 천천히 무대에 등장했다. 니 난자의 소개로는 나이 많은 여자일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나 정도 또 래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 여자였다. 역시 얼굴에는 짙은 화장을 하고 있 어서 예쁘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솔직히 미인인지 아닌지, 아니 누구 인지조차 알아보기 힘들 지경이었다. 설희는 희고 긴 천으로 만들어진 옷을 질질 끌면서 무대에 등장했다. 객석은 일순 조용해졌다. 누군가의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 았다. 설희는 한 순간 객석을 주시하더니 긴 옷을 집어던졌다. 앗, 하는 탄성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설희를 바라보았다. 하반신에는 아주 짧은 치 마를 걸치고 있었고, 위에는 가슴만 겨우 가리는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 를 천 조각 하나만을 두르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휘익위익 하고 휘파람 부는 소리가 들렸다. 천막 안에 가득 들어 차 있는 수없이 많은 내가 모 두 눈을 크게 뜨고 뚫어져라 설희를 주시하고 있었다. 설희는 눈이 부실 지경인 하얀 피부에 나이에 맞지 않게 풍만한 몸을 하고 있었다. 니난자가 설희를 소개한 말을 그대로 믿을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설희의 모습은 적어도 남자라면 누구라도 가슴 설레이게 할 만큼 의 미모였다. 저렇게 육감적인 미모가 다 있다니. 나는 속으로 감탄했다. 천막 안에 있는 수없이 많은 나의 모습은 각양각색이었다. 휘파람을 불 면서 음란한 말을 외치는 나, 부끄러워하면서 얼굴을 붉히는 나, 마른침 을 삼키면서 눈을 시뻘겋게 뜨고 있는 나, 음란하다고 마구 욕하고 있는 나, 그 와중에도 졸고 있는 나, 모두 다 틀림없는 나였다. 나는 옆 사람을 돌아보았다. 분명 나의 모습을 한 사람이 침을 꿀꺽꿀 꺽 삼키면서 내가 보는지도 모르는 채 설희를 넋나간 눈으로 보고 있었 다. 어휴! 골치 아퍼!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내가 왜 이렇게 많 은 거야. 관두자 관둬. 머리 쓰는 일은 나하고 안 맞는다니까. 게다가 이 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느라고 설희를 못보고 있잖아! 이제 생각은 그만해 야겠다. 아무려면 어때. 니난자도 그랬잖아. 나만을 위한 공연이라고. 근 데 나만을 위한 공연 맞아 이거? 나는 머리를 비우고 그저 단순하게 공연 을 즐기기로 마음먹고 설희를 바라보았다. 악기들은 다시 연주를 시작했다. 듣고 있자니 몸이 비비꼬이는 것 같은 이상한 곡이었다. 설희는 그 곡에 맞추어 몸을 비틀었다. 그 동작은 뱀이 똬리를 트는 것 같기도 했고, 보이지 않는 기둥에 몸을 비비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얼굴이 빨개지고 가슴이 뛰었다. 오래간 만에 느껴보는 기분 이어서 나는 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쁜 여자는 남자의 가슴을 제 멋대로 뛰계 만드는 마법을 지니고 있는 걸까? 설희가 요염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딱히 나를 보고 있다 기 보다는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지만, 뭐 어때. 어차피 다 나인 데) 나는 설희의 눈을 바라보았다. 까만 눈동자가 조명을 받아 반짝이면 서 내 심장을 마구 자극했다. 나는 숨이 차오르는 걸 느꼈다. 얼굴이 화 끈거렸다. 이것도 마법일까? 마법이라면 설희는 나의 마음의 어떤 부분을 이해하고 있는 걸까. 공연만 즐기겠다고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막상 이렇 게 설희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몸을 비트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다른 생각이라도 하고 있지 않으면 도저히 가만히 앉아 있을 자신이 없었다. 누군가 (라고 해도 내 형상을 하고 있지만) 무대 위로 뛰어 올라갔다. 우우, 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공연을 방해하려고 하다니! 나 는 주먹을 불끈 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몇몇이 나와 똑같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설희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음악에 맞추어 뛰어 나온 나의 형상을 하고 있는 사람을 한 바퀴 돌리더니 뭐라고 조그맣게 중얼거 렸다. 그러자 무대에 올라간 나의 형상을 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런 저항 도 하지 못하고 멍한 눈을 하고서 자리로 돌아갔다. 저런 마법을 본 기억 이 있는데. 최면술이라고 했던가? 그렇다면 설희는 진짜 마법사?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설희는 음악에 맞추 어 천천히 무대 밑으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우리들 사이에 나있는 좁은 자리를 요리조리 걸으며, 설희는 웃음과 손짓을 우리들에게 보냈다. 함성 과 아우성. 어색한 웃음과 붉어진 볼. 아. 부끄럽게 재네들 왜 저래. 내 가 다 창피해지잖아. 어 그런데 내 쪽으로 오고 있잖아? 가까운 곳에서 본 설희는 정말로 아름다웠다. 까만 눈동자는 생각보다 훨씬 크고 시원시원한 느낌이었고, 오똑하지만 끝이 둥글려져 있는 콧날 은 한 번 깨물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두툼한 아랫입술은 잘 여물은 사과 같았고, 구불거리면서 등까지 내려가 있는 머릿결은 바람 이 불면 가닥가닥 날릴 것 같았다. 거기다 훅 끼쳐오는 여인의 향기! 하 지만 설희의 짙은 화장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마 조명을 잘 받기 위해 서 두껍게 뭔가를 바른 모양인데, 나는 어쩐지 진짜 설희의 얼굴이 아닌 것만 같아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인생은* 한줄기* 바람* 머물지 않는다*" 설희의 말은 마법의 말이었다. 순간 나의 몸이 공중으로 떠오르는가 싶 었다. 조이가 했던 것처럼 또 허공에서 빙글빙글 돌게 되는 게 아닌가 걱 정이 되었지만 그건 아니었다. 나는 앉은 자세 그대로 설희의 얼굴 정도 까지 떠오른 다음, 거기에 머물러 있었다. 객석 여기저기에서 동시에 탄 성이 울려퍼졌다. 만약 세상에서 가장 푹신한 의자에 앉아있다고 해도 이 런 기분은 아닐 것 같았다. 설희와 눈 높이가 맞자, 머릿속에 별의 별 상 상이 다 떠올랐다. "이제 뭘 할 거죠?" 나는 설희에게 이렇게 물었다. 솔직히 겁이 났기 때문이었다. 내 말에 설희는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입술 사이로 드러난 가지런한 치아가 꼭 하얀 옥수수 같았다. "이야기꾼이 다음 이야기가 어떻게 될지 말해 주는 거 본 적 있으세 요?" 맞는 말이었다. 어쩌면 설희는 내가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서 당황하고 있는 모습을 즐기고 있을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설 희를 즐겁게 해 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길 보세요, 수르카 님." 설희가 내 이름을 부르자 나는 가슴이 순식간에 얼어붙어 버리는 것 같 은 느낌이 들었다. 어떻게 내 이름을 알았을까? 하지만 물어볼 수는 없었 다. 설희가 손끝으로 가리키고 있는 허공에서 꽃이 피어나고 있었기 때 문이었다. 진짜 꽃이 분명했다. 종이로 만든 꽃에서는 향기가 나지 않는 법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꽃이 먼저 피고 줄기가 밑으로 자라는 모습을 보고 있자 니 좀 이상하기는 했다. 어떻게 한 걸까? 마법의 말도 외우지 않고서 말 이다. 나는 용병단에 있을 때 타호루에게 들었던 한 두 가지 마법쯤은 마 음만으로 작동시킬 수 있다는 말이 떠올랐다. 꽃은 한송이에서 시작해 무더기로 피어나 내 주변을 감쌌다. 객석에 앉 아 있는 우리들 모두가 환호성을 올렸다. 설희는 만족했다는 듯이 웃으면 서 우리들을 둘러보았다. 모두가 하나같이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나도 포함해서 말이다) 음악소리가 고조되는가 싶더니 한순간 낮아졌고 그와 때를 같이해서 꽃 들도 투명해지더니 사라져 버렸다. 나는 다시 천천히 공중에서 내려와 자 리에 앉았다. 꽃들의 잔향이 내 주변을 떠돌았다. "어떻게 한거죠?" "마법사는 마법의 비결을 결코 이야기 해 주지 않습니다. 적어도 이곳 동춘의 요정들은 비밀을 지키기로 했답니다." "그럼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았어요?" "그것도 비밀." 설희는 꽃향기와 같은 미소를 남기고 가벼운 걸음으로 무대로 돌아갔 다. 요란한 환호성과 박수소리가 천막에 울려 퍼졌다. 설희는 허리를 살 짝 숙여 답례한 뒤 천천히 무대 밖으로 퇴장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흥겨 운 음악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음악에 맞추어 퇴장하는 설희의 뒷모습 에서 나는 한 순간도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아! 정말 아름답지 않습니까? 동춘의 요정들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꽃, 설희였습니다. 여러분 큰 박수 부탁드립니다!" 니난자가 애써 말하지 않아도 나는 박수를 칠 마음이 되어 있었다. 설 희. 다시는 볼 수 없겠지. 나는 이런 생각이 들자 조금은 우울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되었다. "다음 순서입니다. 환상의 공중 곡예사! 아주 작은 안전 장치 하나 없 이, 날개도 달지 않고 허공을 나르는 두 명의 콤비! 바르도 대륙 어디에 서도 볼 수 없는 최고의 최상의 최대의 묘기! 주먹을 꼭 쥐고 보십시오. 언제 무시무시한 사고가 생길지 모르니까요. 여러분! 시바카와 스카이입 니다! 큰 박수로 맞아 주십시오! 니난자의 소개가 끝나자 경쾌한 행진곡이 흘러나왔다. 모두들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박자에 맞추어 박수를 쳤다. 시바카는 근육질의 남자였고, 스카이는 검은 피부를 가진 여자였다. 둘다 짝 달라붙는 옷을 입고 있었 는데, 과연 어떤 기술을 보여줄 것인지 다들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설희가 남기고 간 향기에 취해서 공연에 집중하기 가 어려웠다. 둘은 무대 양 가장자리에 놓여진 높다란 기둥 위에 각각 올 라가 그네에 몸을 싣고 행진곡에 맞추어 왕복을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몸을 풀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가볍게 서로의 손을 공중에서 맞잡고 회전 하면서 그네를 갈아타기도 했고, 자신이 탄 그네에서 손을 놓은 다음에 한바퀴를 돌아 되돌아오는 그네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리기도 했다. 하지만 분명 둘의 표정이나 음악의 분위기로 봐서 그리 대단한 수준의 묘기를 보 여주고 있는 건 아닌 듯 싶었다. 사실 누가 보아도 저 정도의 기술이라면 굉장한 묘기라고 할만도 한데 말이다. "자! 지금 보고 계시는 기술은 공중 삼회전 후에 그네를 바꾸어 타는 기술입니다." "실패한다면 두 사람은 바닥에 떨어져 필경 목숨을 잃게 될 것입니다." "이번 기술은 두 바퀴를 제자리에서 돈 다음에 돌아오는 그네에 몸을 싣는 기술입니다. 바르도 대륙의 그 어떤 공중제비 기술자도 이 정도의 묘기를 보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성공입니다! 여러분 박수 부탁 드립니다!" 사이사이 니난자가 이렇게 설명을 붙여주었고 두 사람은 그 설명에 답 이라도 하듯이 바로바로 기술들을 선보였다. 계속해서 박수는 터졌고, 긴 장에 정말로 주먹을 꼭 쥐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하지만 나는 통 공연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너무도 많은 생각들이 머 리에서 떠나질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쩐지 무대에 오른 동춘의 요정 들이 어디선가 한 번 마주쳤던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였다. 도대체 어디 서 이 요정들을 보았을까? 특히 설희. 언제, 어디선가 한 번은 보았을 것 같은 친숙한 느낌. 하지만 이제 다시는 만날 수 없겠지. 공연이 끝나면 무대 뒤로 한 번 가볼까? 어쩌면 만날 수 있을 지도 몰라. 만약 만나게 된다면 마법의 비밀을 물어봐야지. 어쩌면 내 마법으로 동춘의 요정들과 함께 할 수 있게 될지도 몰라. 생각이 여기에까지 이르자, 나는 동춘의 요정들 곁을 떠나고 싶지 않다 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태어나서 이렇게 즐거웠던 순간이 있었던가. (그 리 오래살았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는 나이이긴 하지만) 저 요정들과 함 께 하고 싶다. (아마도 따뜻한 마음씨를 가지고 있는 요정들이리라) 이 서커스 들판에서, 이 원형의 천막 안에서 저들과 함께 웃으며 박수치며 영원히 살고싶다. (누군가를 위한 공연을 하면서 말이다) 이런 생각들로 머릿속이 온통 어지러웠다. 묘기를 보이던 두 사람은 이제 마지막 묘기를 선보일 모양이었다. 음악 이 고조되었고 이제 곧 당장이라도 근사한 묘기가 펼쳐질 순간이었다. "이번 묘기는 오늘을 위해 두 사람이 특별히 준비한 묘기입니다. 바르 도 대륙의 그 누구도 아직까지 성공시킨 적이 없는 기술! 오늘 처음으로 시도되는 기술입니다. 이름하여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다'! 먼저 시 바카가 그네를 타면서 시간을 조절합니다. 그러면 반대편에서 스카이 역 시 그네를 타면서 시간을 조절하지요. 그러다가 한 순간 둘의 시간대가 맞았을 때 두 사람은 그네에서 손을 놓고 공중에서 팔과 다리를 맞잡아 원을 만들어 한 바퀴 돈 다음에 그네를 바꾸어 타게 됩니다. 일단 그네에 서 손을 놓고 나면 한바퀴를 완전히 돌 때까지 그네를 잡을 수 없기 때문 에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다'라는 이름이 붙은 기술입니다. 이 기술 의 성공을 위해서는 두 사람의 호흡이 딱 맞아야하고, 완벽한 시간 계산, 그리고 몸을 띄워 공중에서 몸을 어느 정도 정지시킬 수 있는 기량이 필 요합니다. 여러분! 숨을 죽이고 봐 주시기 바랍니다!" 니난자의 말이 끝나자 객석을 비추던 빛이 사라졌다. 무대에 시선을 집 중시키기 위해서 였을 것이다. 하지만 어두워지자 나는 더 복잡한 생각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니난자의 설명 그대로 두 사람이 그네를 타고 왕복을 시작했다. 잔뜩 긴장된 분위기였다. 나는 생각을 접고 잠시 두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았 다. 거리가 멀어서 정확하게 알아 볼 수는 없었지만 두 사람의 얼굴에는 기술을 반드시 성공시키고야 말겠다는 다짐과 각오가 느껴졌다. 객석에 앉아 있는 우리 모두가 그걸 느꼈는지, 천막 안이 쥐죽은듯 조용해졌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4396/14637 ━━━━━━━━━━━━━━━━━━━━━━━━━━━━━━━━━━━━━━━━ 제 목:[탐그루] 서커스 들판 169 관련자료:없음 20/20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1-26 00:24 조회:1076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두 사람이 그네에서 손을 놓고 서로 팔과 다리를 맞잡았다. 그리고 회 전을 시작했다. 하지만 시간을 놓쳤는지 그네는 제자리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한순간 아앗, 하는 비명소리가 객석에서 들려왔다. 하지만 두 사 람은 공중에서 계속 돌았다. 어떻게 된 거지? 나는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버리고 말았다. "그만! 그만! 마법이라는 걸 다 알아 차리잖아!" 니난자가 이렇게 말하면서 무대 중앙으로 뛰어갔고, 두 사람은 난처한 표정으로 마치 영원히 제자리에 머물러 있겠다는 듯이 허공에서 하염없이 돌고만 있었다. 니난자의 우스꽝스러운 몸짓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두 사 람이 허공에서 난처한 표정으로 돌고 있다는 생각때문인지는 몰라도 여기 저기서 웃음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고, 나도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즐 거운 기분에 양 볼이 간지러울 지경이었다. 이렇게 늘 웃으면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더 절실해졌다. 슬프고 어둡고 괴로운 생각 같은 건 하지 않고 살았으면. 그냥 이렇게 웃으면서 영원히 살 수는 없는 걸까? 모두가 이렇게 기쁘고 즐거운데. 뭐가 그렇게 원수가 졌다고 서로 죽일 듯이, 아니 실제로 죽이면서 살아가고 있는 걸까. 시바카와 스카이는 여전히 회전을 계속하면서 천천히 무대로 내려왔고 니난자는 다시 우스꽝스러운 몸짓으로 두 사람을 받아보려고 허둥거렸다. 결국 두 사람을 받기는 했지만 니난자는 그대로 벌러덩 뒤로 나자빠졌고, 나는 박수를 치면서 웃었다. 객석안은 모조리 폭소로 가득차 버렸다. 시 바카와 스카이는 손을 흔들면서 무대 밖으로 나갔고 그제야 니난자는 몸 을 털어 내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언제 무슨 일이있었냐는 듯 이 객석을 향해 외쳤다. "시바카와 스카이였습니다! 큰 박수 부탁드립니다!" 박수소리가 높아지자 다시 음악이 연주되었고 니난자는 제자리에서 몇 바퀴 돌기도 하면서, 또 껑충껑충 재주도 넘으면서 춤을 추었다. 모두가 그 박자에 맞추어 박수를 보냈고, 니난자는 흥겨운지 점점 더 빠르게 춤 을 추다가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웃음소리가 들리자 음악이 멈추었고, 니난자는 옷을 털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으흠! 이거 실수가 많군요, 천년 만의 공연이다 보니.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천 년에 한 번 있는 공연이니 저희가 얼마나 긴장이 되고 떨리 겠습니까. 이런 경우는 경험부족이라고 할 수도 없고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요. 자! 하여간 다음 순서로 이어지겠습니다. 다음은 이 바르도 대륙 최고 의 만물 박사, 전설의 하나돌 교수님의 차례입니다. 먼저 소개를 올리자 면 하나돌 교수님은 바르도 대륙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면 남김없이 모두 알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믿기지 않으신다고요? 호오호오호오! 사실 하나돌 교수님은 바르도 대륙뿐만 아니라 이 우주 어느 곳에서 일 어나는 일이건 전부 다 알고 계시지요. 실은 하나돌 교수님께서 이름을 알리는 걸 꺼리시기 때문에 그렇지, 바르도 대륙 전체를 통틀어서 하나돌 교수님 만한 기억력을 가지고 계신 분은 드물지요. 하나돌 교수님께서는 모든 우주의 비밀을 말해주는 수정 구슬도 가지고 계셔서, 당장 답변해 드리기 어려운 것들은 수정 구슬을 통해서라도 알아내 주십니다. 제 말씀 을 못 믿으시겠다고요? 그럼 한 번 직접 물어보시지요. 만물 박사 하나돌 교수님이십니다!" 만물박사라. 지금까지 멋진 공연을 보여줬으니 뭔가 다른 걸 보여주려 는 모양이지. 나는 하나돌 교수를 박수로 맞았다. 모든 우주의 비밀을 알 고 있다고? 정말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그리고 수정 구슬 얘기는 또 뭘까? 하나돌 교수는 조명을 받으면서 무대 중앙으로 걸어나왔다. 하나돌 교 수는 풍채 좋은 체격에 툭 튀어나온 배가 교수라기 보다는 푸줏간 주인 같은 인상을 풍기는 사내였다. 걷는 걸음걸이가 당당한 것이 개선 장군 같은 느낌을 주었다. 말하자면 아무 말없이 외모와 행동만으로도 분위기 를 잡는다고나 할까. "한 번 아무 질문이나 던져 보세요. 모든지 대답해 드릴 겁니다." 니난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누군가가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예. 저기 저분. 말씀하시지요." 니난자가 손을 든 쪽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진행은 니난자가 하고 하나 돌 교수는 답변만 할 모양이었다. "오늘 황토끼 한 마리를 보았습니다. 황토끼는 눈이 빨갛던데 그 이유 가 뭡니까?" "답변드리겠습니다. 으흠."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크게 헛기침을 하면서 하나돌 교수가 말을 시작 했다. "먼저 황토끼는 서쪽 황야에 살고 있는 동물입니다. 바르도 대륙에서 황토끼가 서식하고 있는 지역은 그곳뿐이지요. 한때는 바르도 대륙 전체 에 퍼져 살았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만 지금은 더 작고 빠른 짐승들에게 자리를 빼앗겨 서쪽 황야에서 말고는 살지를 못하지요. 그곳에는 초식 동 물이 적고, 또 무리 생활을 하는 황또끼에게 함부로 달려들 맹수도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눈이 왜 빨간 가를 물으셨지요? 그건 핏줄 때문입니다. 황토끼는 다른 동물과는 달리 아주 투명하고 맑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마도 초 식 동물 중에서도 특히 온순하고 착한 마음씨를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입 니다. 핏줄이 온 몸에 퍼져 있다는 건 다 알고 계시겠지요. 어떤 동물이 건 자신의 키의 천 배가 되는 핏줄을 온 몸에 감고 있답니다. 이 말은 모 든 동물들이 눈 뒤에 핏줄이 감겨있다는 말이지요. 하지만 다른 짐승들은 눈의 색깔 때문에 핏줄이 비쳐 보이지 않지만 황토끼만은 워낙 맑고 투명 한 눈동자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핏줄이 그대로 비쳐 보이기 때문에 눈이 붉게 보이는 것입니다. 이 말은 황토끼가 어느 동물보다도 더 맑고 순수 한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 되겠지요. 황토끼에게 공격당한 사람 이야 기를 들어보신 적 있으십니까? 없을 겁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눈이 충 혈된 사람이 특별히 더 맑은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아니지요." 숨 한 번 쉬지 않고 막힘없이 말을 이어간 하나돌 교수의 답변이 끝나 자 박수가 터져나왔다. 답변이 끝나자마자 여기저기서 손이 올라갔다. "저... 그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무엇입니까?" "그건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것이 뭐냐는 질문과 같군요. 세상에 있는 것은 모두 다 아름다운 마음으로 보면 아름답게 보이지만 더러운 마음으 로 보면 더럽게 보이기 마련입니다. 결국 아름다움과 추함을 결정하는 것 은 사람의 마음이라는 얘기지요. 답변드립니다. 가장 아름다운 것은 사람 의 마음입니다. 가장 더럽고 추한 것도 마음이지요." 이번에는 꽤 난해한 대답이었다. 박수도 물론 나왔지만 박수보다는 와, 하는 탄성이 더 높게 들렸다. "제 주머니에 뭐가 들어있는지 맞춰보세요." 니난자가 지적하지 않았는데도 어떤 사람이 재빨리 물었다. "저쪽 분이 조금 더 손을 빨리 드신 것 같군요." 하나돌 교수가 이렇게 말하자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저 혹시 카를로스 카를로스 장군이 어떻게 생긴 사람이었는지 아시나 요? 그림 한 점 남아있지 않은 전설의 인물이라는데요." "카를로스 장군은 평범하게 생긴 사람이었습니다. 다만 팔이 남들보다 길었지요. 하지만 그것 말고는 장군 같아 보이는 인상을 풍기진 않는 사 람이었습니다. 카를로스 장군의 성이 왜 카를로스인지 아십니까? 그건 평 민 출신으로 장군이 되어 국왕이 성을 하사했을 때, 카를로스라는 자신의 이름을 성으로 정했기 때문입니다." 외모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답변하지 않았지만 다른 사실을 더해서 충분 히 답변이 된 것 같은 느낌을 주는 대답이었다. 나는 하나돌 교수의 화술 에 놀라고 있었다. 동물에서 시작해 철학을 지나 이제는 역사까지. 막히 는 부분이 없었다. 주머니에 있는 것은 맞히지 않고 딴청을 피우긴 했지 만 누군가의 주머니에 뭐가 들어있는지 맞출 수 있는 사람은 투시 마법을 할 수 있는 사람이지 만물박사는 아닐 거야. 하나돌 교수는 주머니에서 구슬을 꺼냈다. 영롱한 푸른빛이 도는 구슬 이었다. "저 분 질문에 답변을 드리지요. 사실 제 능력으로 개개인의 비밀까지 알아낸다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이점 먼저 사과드립니다." 하나돌 교수는 이렇게 말을 하고는 구슬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과연 맞출 수 있을까? "주머니 안에는 먹다 남은 말린 고기 조각 조금하고 먼지, 그리고 작은 돌멩이가 하나 들어있군요. 돌멩이는 하얀빛이고 쇠못으로 십자 모양이 그려져 있습니다." 하나돌 교수의 말이 끝나자 질문을 던졌던 사람이 벌떡 일어나 주머니 에 든 것을 털어내었다. 하나돌 교수의 말 그대로였다. 이번에는 박수갈 채가 쏟아져 나왔다. 정말 신비한 구슬이로구나. 갑자기 질문하고 싶은 것이 떠올랐다. 나는 손을 번쩍 들었다. 니난자 가 나에게 발언권을 주었다. 나는 숨을 들이쉬었다가 천천히 내 쉬면서 질문을 던졌다. "동춘의 요정들과 영원히 함께 살 수 있는 방법은 없나요? 함께 이곳에 서 살고 싶어요." 내 질문에 일순 천막 안이 조용해졌다. 나는 어쩐지 해서는 안될 말을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질문하신 분, 몹시 난처한 질문이시로군요." 하나돌 교수는 이렇게 말하면서 잠시 머뭇거렸다. 우리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몰렸다.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나의 모습들을 보고 있자니 이 런 질문은 하지 말걸 그랬나 보다 싶었다. "동춘의 요정들과 함께 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세 가지만 준비하면 되지요. 먼저 슬픈 과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의 눈물과, 사람을 벤 적이 있는 칼에 맺힌 눈물 같은 아침 이슬, 그리고 아침이슬처럼 깨끗한 사람 들의 마음. 이렇게 세 가지를 가지고 동춘의 요정들을 부르시기만 하면 됩니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더 궁금한 게 있으실 텐데요. 잠시만." 하나돌 교수는 이렇게 말하고는 다시 유리 구슬로 시선을 돌렸다. 천막 안에 침묵이 이어졌다. "생일이 언제인지 알고 싶지 않은가요?" 하나돌 교수의 말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고 말았다. 생일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지금까지의 모든 공연에서 하나 잊고 있었던 게 있 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바로 내 동료들이었다. 지금까지 여러 힘들고 기쁜 일을 함께했던 나의 동료들. "그건..." "수르카. 네 생일은 바로 오늘이란다." 하나돌 교수는 말했다. 나는 천막 안을 둘러보았다. 천막 안에는 아무 도 없었다. 텅빈 자리와 허공에 떠도는 먼지만이 내 눈에 들어오고 있었 다. "자, 잠시만..." 나는 이렇게 말하면서 무대 위로 뛰어 올라갔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 만 나는 무대에서 모짤트와 그레텔과 바리바와 루크와 또 오브라디 교수 의 모습을 보았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나를 바라보면서 미 소를 짓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천막 안은 처음에 내가 들어왔을 때처럼 어두워졌다. 나는 자리에 멈추어 섰다. 그러자 누군가가 나의 손 을 잡았다. "이제 곧 해가 떠요." 니난자였다. 니난자는 나의 팔을 이끌고 천천히 천막 밖으로 향했다. "어떻게 된 거지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요? 이곳에 더 머물 고 싶다는 말은 안들은 걸로 해주세요. 내 동료들은 다 어디 있죠?" 나는 다급한 마음이 되어서 니난자에게 이렇게 마구 물어보았다. 하지 만 니난자는 딴청을 피우면서 말했다. "호오호오호오!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던가요. 밤은 홀로 지새우기에는 짧지만 동춘의 요정들과 함께 하기에는 짧은 시간이라고요. 자. 이제 어 둠이 걷히고 있으니 당신은 당신이 왔던 곳으로 돌가가야 할 시간이예요. 그리고 잊지 마세요. 동춘의 요정들은 사라지지만 언제나 당신과 함께 한 다는 것을요. 정말 잊지마세요. 동춘의 서커스는 끝나지 않았어요." 니난자는 이렇게 말하며 어슴프레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다급 하게 외쳤다. "자, 잠깐!" "뭘 잠깐이야? 이제 일어나야지. 서둘러 출발하지 않으면 로스안에 닿 기 전에 굶어 죽을 지도 몰라. 바리바의 사냥솜씨를 철썩같이 믿고 있는 건 아니겠지, 설마?" 마로우였다. 마로우가 내 손을 잡아 당겨 일으켜 세우면서 말했다. 꿈 을 꾼 걸까? "잠깐. 내가 마지막 근무라고 했잖아. 그런데 어떻게 된 거야, 마로 우?" 나는 어느 사이 떠오른 햇살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물었다. "어제 자네가 오늘이 자네 생일이라고 했지 않은가? 국왕의 정규군도 생일날에 근무를 세우지는 않는 법이지. 안 그런가? 그건 그렇고. 빨리 짐을 챙기게. 이럴 시간이 없어." 오브라디 교수가 아직도 우스꽝스럽게 헝크러진 머리칼을 한 채 이렇게 말했다. 나는 여전히 어리둥절 기분으로 짐을 챙겼다. 머리 맡에 놓여져 있던 나미트 장군의 칼에 이슬이 맺혀 있는 것이 보였다. 아침 이슬? 그 렇군. 그렇게 된 거였군. 나는 아쉬운듯 천천히 칼에 맺힌 이슬을 닦아내 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왜 안보이죠?" 나는 모짤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서 이렇게 물었다. "아침 먹기 전에 땔감 구한다고 나갔어. 그런데 모짤트라니. 행여 그런 말 하지마. 어제 밤에 이제부터 크라이라고 불러달라고 했잖아. 그렇게 몇 번이고 부탁을 했는데 그러면 안되지. 수르카. 어제 너무 많이 취했던 거 아니야?" "모짤트는 이제 크라이가 됐다고 했어요." 마로우의 말에 스칼렛이 이렇게 덧붙였다. 나는 동쪽을 바라보았다. 햇빛을 등지고서 크라이가 걸어오고 있었다. 크라이는 의미를 짐작하기 어려운 알듯 말듯한 미소를 지은 채 걸어오고 있었다. 그 미소의 의미를 알 수는 없었지만, 나 역시 크라이에게 미소를 보내주었다. 서커스 들판 가득히 선물처럼 햇살이 뽀얗게 내려앉고 있었 다. 오늘 나는 저 따뜻한 햇살 속에서 태어난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4468/14637 ━━━━━━━━━━━━━━━━━━━━━━━━━━━━━━━━━━━━━━━━ 제 목:[탐그루] 영혼의 에뮬레이터 9 170 관련자료:없음 22/22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1-27 00:13 조회:927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 영혼의 에뮬레이터 9 - 토요일 밤의 튜링 테스트. "... 서커스의 밤이 지나고, 수르카 일행은 서로에 대해 전과는 다른 친밀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후 수르카 일행은 마치 소풍을 가듯 유쾌한 분위기 속에서 로스안으로 가는 여정을 계속했습니다." 세헤라자드의 이야기는 한 번도 끊기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나는 세헤 라자드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가 지금 소드앤매직 코리아 합중국 지부 로 향하고 있는 느낌과 수르카가 로스안으로 향하고 있는 기분이 정반대 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지금 아직은 완전히 신뢰할 수 없는 동료들과 불법을 저지르러 가는 것이고, 수르카는 더 믿음이 돈독해진 동 료들과 함께 새로운 세계를 찾아 떠나고 있었다. 하지만 나나 수르카나 전혀 경험해 보지 못한 세계에서 뭔가를 구하려한다는 것과 또 동료가 있 다는 점은 분명히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빌어먹을. 후버카가 말썽을 부리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이거, 소드 앤매직 코리아 합중국 지부까지 걸어서 가면 한 시간도 넘게 걸릴텐데. 광고를 믿은 내가 잘못이지. 뭐? 십년을 타도 새차 같은 차?" "'당신만을 위한'은 빠트렸어." 리파이가 팔짱을 끼고서 말했다. 차가 고장이 난지 한 시간이 넘었지만 도저히 고쳐질 것 같지 않았다. 오토가 나름대로 열심히 손을 보고는 있 었지만 말이다. 어쩌면 오토의 저 곱슬곱슬한 머리를 스트레이트 파마로 곧게 펴는 것 보다 더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절로 웃음이 나왔다. "뭐가 그렇게 좋아서 웃고 있는 거야? 아까부터 차안에서도 실실 웃으 면서 있더니만. 지금 상황에 웃음이 나와, 웃음이!" "웃으면 건강에 좋다고 하던데." 나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오토가 피식 따라서 웃었다. "하긴 우습긴 우습다. 걸어갔으면 벌써 도착했을 시간인데 이렇게 가만 히 앉아서 차 고치는 거 구경이나 하고 있으니까 말이야. 이런 식으로 가 다간 여기서 밤샐지도 모르겠는데?" "오토. 얼마나 더 있어야 다 고쳐지겠어요?" 오토는 말 대신에 다섯 손가락을 죽 펴서 리파이에게 보여주었다. "오십 분?" 내가 말했다. 그러자 오토는 손바닥을 양옆으로 흔들어 내 말이 틀렸다 는 표시를 했다. "모르겠다는 말이야." 아톰이 설명했다. "그럼 이렇게 하지요. 우리는 일단 소드앤매직 온라인 코리아 지부로 가요. 오토는 후버카를 고치는 데로 따라와서 합류하기로 하고요. 어차피 오토는 밖에서 기다려야 할테니까요. 너무 시간이 지체됐어요." "그런데 우리가 일을 끝낼 때까지 다 고칠 수 있겠어?" 오토는 대답 대신에 카드키를 꺼내 아톰에게 던졌다. "꼭 갑니다." 아톰이 오토가 던진 카드키를 멋지게 한 손으로 받으려다가 카드를 날 려보내는 바람에 우리는 한 참 동안 카드키를 찾아 수풀을 헤집고 다녀야 했다. "자! 그럼 이제 떠나지." 카드키를 찾자 아톰이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하여간 아톰은 미안한 마음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다니까. "그런데 리파이, 길은 확실히 알아요?" 일단 출발을 하려고 보니 조금 걱정이 되어서 나는 리파이에게 이렇게 물었다. "프로 게이머 삼년차 때 연수 간 적 있어요. 아톰도 물론 알고 있고." "오토는 지도가 있어. 후버카에 입력시켜 놓았으니까 찾아오는 데는 문 제없을 거야. 그나저나 이거 걸어가는 건 자신 없는데." 아톰이 뭐라고 하건 간에 우리는 출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시에서 맡던 공기에 비한다면 정말 상쾌하기 그지없는 공기가 흐르고 있었지만 그래도 한 시간을 걸어가야 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기 때문에 발걸음 은 무거워졌다. 영월은 경치 하나는 좋은 곳이었다. 연초록빛의 나뭇잎들과, 그 위를 날고 있는 비둘기들, 그리고 포장 도로 주변으로 보이는 흙과 돌멩이들이 가슴을 죽 펴게 만들었다. 상쾌한 기분이었다. "세헤라자드. 여기 공기를 맡을 수 있는 센서가 있었으면 좋았겠어. 정 말 기분 좋아, 여기 공기. 꼭 놀러 나온 기분이라고." "너무 들뜨지 마, 비류. 우린 지금 놀러가는 게 아니잖아? 거기다가 소 드앤매직 온라인 코리아 합중국 지부에 도착한다고 해도 용에 대해서 정 보를 얻게 되리라는 보장도 없고. 아니, 어쩌면 켄 살인범이 빔머신건을 들고 우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지. 그것도 산탄형으로 말이야." "아톰은 수사물을 너무 많이 봤어. 보나마나야. 매번 삼류 범죄물만 받 아 보지? 그러니까 제대로 된 추리가 안나오지. 아톰. 지금 가장 걱정해 야 되는 건 우리가 이진우 수사관 손바닥 안에서 놀아나고 있는 게 아닌 가 하는 점이라고. 안 그래? 카드키 하며 미리 안가에 와서 기다리고 있 었던 점도 그렇고." "어쩌면 켄이 죽은 것도 이진우 수사관하고 상관이 있을지 모르겠네 요." 나는 나무 위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회색 비둘기들이 나무 위에서 열매를 쪼고 있었다. 언젠가 아버지와 공원에 놀러갔을 때, 돈을 주고 비둘기 먹이를 샀던 기억이 났다. 그때 하늘도 분명 회색이었을 테 지만 이상하게도 기억 속의 하늘은 파란색이었다. 어스넷을 너무 많이 돌 아다닌 탓일까? WCC와 통합정부의 어스넷을 통한 환경보호 캠페인을 너무 많이 봤는지도 모르겠다. 하얀 비둘기 한마리가 회색 비둘기들 사이에서 허공을 향해 힘차게 날개짓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멍하니 비 둘기가 사라질 때까지 서 있었다. "봤어요, 지금?" "하얀 비둘기?" "그게 뭐 대수라고. 하긴. 어렸을 때 아버지께서 그러시더구만. 흰 비 둘기는 길조라고 말이야. 그 말을 듣고 한 번은 흰 비둘기를 보려고 시내 공원에서 하루 종일 앉아 있었던 적도 있었지. 어렸을 적 얘기야. 지난 세기만 해도 비둘기들은 거의 다 흰색이었다는 걸 몰랐거든, 그때는." 아톰이 말했다. 나는 아톰의 목소리가 그다지 냉소적으로 들리지 않았 다. 아니, 오히려 조금은 물기에 젖은 듯 느껴지기까지 했다. "저도 비둘기를 본 적이 있어요." 세헤라자드가 말했다. 물론 나밖엔 듣지 못했지만. "지금도 비둘기는 보인다구, 세헤라자드." "그게 아니라요, 젖을 먹이는 비둘기를 본 적이 있단 말이에요. 얼마나 예뻤는데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요. 갓 알에서 깨어나 꼼지락거리는 새끼 비둘기와 구구거리면서 젖을 먹이던 어미 비둘기의 모습이요." "그런데 비둘기가 젖을 먹인다고? 비둘기는 조류잖아. 젖을 먹이는 건 포유류 아닌가?" 내 말을 들었는지 리파이가 바로 말을 받았다. "언젠가 동물 도감에서 읽은 적이 있어요. 비둘기는 젖을 주는 유일한 조류라고요." "리파이. 그게 말이 되는 소리라고 생각해, 지금? 부리로 어떻게 젖을 빨아?" 아톰이 쏘아 붙이자 대화는 뚝 끊겨 버렸다. 어쨌든 지금은 비둘기의 생태에 대해서 토론을 벌일 시기는 아니었다. 모두 아무 말이 없자 걷는 속도는 조금 더 빨라진 느낌이었다. 이제 다 리가 뻐근하다 싶을 무렵이 되었을 때, 우리는 소드앤매직 온라인 코리아 합중국 지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소드앤매직 온라인 코리아 합중국 지부는 단층 건물이었다. 거기다가 외장에는 전혀 돈을 들이지 않았는지 벽면은 낡아있었고, 주변에 쳐져 있 는 철조망은 잔뜩 녹이 슬어서 손톱으로도 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 다가 우중충한 빛깔! 한마디로 실망이었다. 초 현대식 건물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소드앤메직 사의 이미지와 맞는 건물을 기대했는데. "자. 이제 솜씨를 발휘할 때야, 사이버 아가씨." 아톰이 말했다. "세헤라자드가 왜 자길 사이버 아가씨냐고 묻는데요." 나는 세헤라자드의 말을 전했다. "그냥. 사이버 붙는 거 많잖아? 그래서 한 번 붙여봤어. 사이버 스페이 스부터 시작해서 사이버 룩, 사이버 드링크, 사이버 레크리에이션, 사이 버 모델, 사이버 종교, 사이버 섹스...아. 이건 좀 그렇군." "자길 아가씨로 생각하냐고 묻는데요?" "물론이지. 솔직히 세헤라자드같은 미인은 상당히 드물어." "미인이라 좋겠어, 아톰." 리파이가 입술을 비죽거리면서 중얼거렸다. 역시 여자는 아주 사소한 일에도 질투를 하기 마련인 모양이다. 여자와 이야기할 때 조심해야 할 게 두 가지가 있다고 아버지가 그랬다. 자신을 좋아한다고 착각하게 만드 는 말과 질투를 하게 만드는 말. 나는 리파이의 얼굴을 보면서 아버지 말 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맙데요. 그런데 자기는 사이버가 아니래요." 나는 세헤라자드의 말을 전한 다음, 지금부터 계획이 어떻게 되는지 물 어보았다. "답답해요, 그렇게 전해 받고 전해 들으니까. 그냥 밖에다 랩탑을 놔줘 요. 스피커로 말하게. 출력은 작지만 여긴 도시처럼 시끄럽지 않으니까 잘 들릴 거에요." 세헤라자드의 계획은 간단했다. 먼저 컴퓨터 게임업체 건물답게 게임이 없을 때는 건물이 완전 자동 시스템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 이 이런 외딴 곳에 상주하면서 근무할 사람이 있을 리가 없다) "그러니까 간단해요. 카드키를 가지고 정문으로 들어가세요. 그럼 나머 지 보안 시스템은 저하고 스테아가 해결할 거에요." 세헤라자드는 아주 자신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보안 시스템을 뚫을 수 있어?" "질문이 좀 잘못 됐네요. 보안 시스템'도' 뚫을 수 있냐고 물어봐 줘 요." 세헤라자드의 말에 아톰은 졌다는 표정으로 양손을 들었다. "그런데 어떻게 한다는 거예요, 세헤라자드?" 설마 아직까지 질투심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겠지만 리파이는 눈썹을 찡그리면서 세헤라자드에게 물었다. "카드키 꽂는 곳 있지요? 거기에 랩탑하고 이을 수 있는 단자가 있어 요. 케이블은 비류 님이 챙겨왔어요." "그럼 다 된다고?" 아톰은 어쩐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예." 세헤라자드는 큰 눈을 깜박이면서 말했다. 어떤 미소녀 게임에서도 보 지 못한 깜찍한 모습이었다. 세헤라자드같은 여자가 눈을 깜박거리면서 부탁하면 아마 이진우 수사관 같은 남자도 침을 질질 흘리면서 부탁을 다 들어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헤라자드만 믿어." 나는 이렇게 말해버리고 말았다. 덕분에 나는 리파이의 눈썹이 한 번 더 꿈틀거리는 걸 볼 수 있었다. 나는 헛기침을 한 번 한 다음에 말을 이 었다. "그런데 스테아는 어떻게 움직이지? 보안 시스템을 뚫고 다닐 수 있게 조련이라도 시켰어?" "아뇨. 하지만 이게 있지요." 세헤라자드는 방울이 달려 있는 끈을 들어 보여주면서 말했다. "이걸로 조종이 가능할 거예요. 랩탑하고 이어져만 있다면 말이죠." "그래. 그럼 일단 하나는 해결 됐군. 그런데 그러고 나면?" "보안 시스템하고 전력은 제가 책임 질 거예요. 하지만 소드앤매직 온 라인 시스템을 가동시키는 건 사람이 직접 할 수밖에 없어요. 외부와 이 어진 케이블을 하드웨어적으로 차단시켰으니까 저로서는 방법이 없다고 요." "잠깐만. 용 사냥은 네가 맡기로 했잖아. 그런데 네가 보안 시스템에 매달려 있으면 우린 어떻게 하라고?" "게임이 설치된 방에 인터폰이 하나 있어요. 일이 끝나면 제가 인터폰 을 울릴게요. 그럼 랩탑의 케이블로 인터폰 밑에 달린 단자하고 이어주세 요. 그럼 돌아올 수 있을 거예요." 아톰의 말에 세헤라자드가 아주 명쾌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세헤라자드. 전에 이런 일 해 본적 있는 모양이지요?" "없어요. 한 번도. 하지만 전 일류 범죄물만 받아 봤지요." 리파이는 세헤라자드의 말에 빙긋이 웃었다. 소드앤매직 온라인 코리아 합중국 지부 건물에 접근하는 동안 나는 꼭 도둑이 된 것처럼 사방을 살펴보았다. 조금은 긴장이 되었는지 누가 보지 않을까 하는 쓸데없는 걱정도 되었고 가슴도 뛰었다. 하지만 사방에는 아 무도 없었고, 바람소리와 간간이 들려오는 새 울음소리만이 들려올 뿐이 었다. "자. 연결했어. 이제 어떻게 하면 되지?" 내가 세헤라자드에게 말했다. "제가 들어간 다음에 문을 여세요. 그럼 긴 복도가 나오거든요? 복도 끝에서 오른 쪽으로 돌면 큰방이 보여요. 거기가 목적지인 소드앤매직 게 임룸이에요. 절대 실수하지 않을 거예요." 세헤라자드의 말에 우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이제 시작한다." 나는 랩탑과 카드키를 꽂는 시스템을 연결했다. "참. 스테아, 방울 떼 놓아야 하지 않을까?" 나는 노파심에 이렇게 물었다. "사람이 보기엔 방울이지만 그냥 프로그램일 뿐이에요." 세헤라자드는 이렇게 말하고는 스테아와 함께 사라져 버렸다. 이제 시 스템 안으로 들어간 거였다. "자. 그럼 이제 가지." 아톰이 막 카드키를 꽂으려는 순간이었다. 전류가 통할 때 나는 소리가 문 너머에서 들리더니 철컥, 하면서 문이 열렸다. 세헤라자드가 마음대로 연 모양이었다. "사람을 가지고 노는군요." "그나저나 이진우 수사관한테 받은 카드 키는 전혀 쓸모가 없어졌네. 안 그래, 비류?" 리파이의 말에 아톰이 낄낄거리면서 말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4469/14637 ━━━━━━━━━━━━━━━━━━━━━━━━━━━━━━━━━━━━━━━━ 제 목:[탐그루] 영혼의 에뮬레이터 9 171 관련자료:없음 20/20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1-27 00:14 조회:786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안으로 들어서자 세헤라자드가 말한 그대로 복도가 있었다. 나는 복도 의 끝을 향해 걸어가면서 랩탑을 바라보았다. 세헤라자드가 랩탑 밖으로 나가면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텅 빈 액정화면을 볼 때마다 나는 세헤라자 드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빠지곤 한다. 이번에도 과 연 돌아와 줄까? 물론 도망치려고 마음먹었다면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그리고 내가 불안해하건, 불안해하지 않건 언제나 돌아왔던 것도 사실이 고. 하지만 세헤라자드는 인간의 영혼이다. 지난번까지 돌아왔다고 하더라 도 이번에는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더 좋은 곳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르고, 마음에 드는 시스템에 마음을 빼앗길 수도 있다. 다시 말해서 마 음이 변할 여지는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런 생각이 들때마다 나 는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그런 불안한 마음을 달랬다. 아직 세헤라자드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고. 복도 끝에서 오른 쪽으로 돌아서는 순간, 나는 세헤라자드의 말이 틀리 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벽 한 면을 다 채우는 문이 있었고 문 입구에 소드앤매직 온라인이라는 글자가 크게 적혀 있었던 것이다. 나는 웃음이 나왔다. 이렇게 쉽게 찾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리파이가 문손잡이를 잡았다. 그리고 나서 내 얼굴을 한 번 쳐다보았는 데, 꼭 '내가 지금 열어도 될까?' 하고 말하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빨리 열어. 그래야 뭐가 되도 되지. 뜸 들여봐야 좋을 건 하나도 없다 구." 아톰이 재촉하지 않았어도 리파이는 바로 문을 열 생각이었던 모양이었 다. 한 번 숨을 들이쉬는가 싶더니 리파이는 문을 잡아당겼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고, 세헤라자드와 스테아가 이미 해제시켜 놓았는지 경보장치도 작동하지 않았다. 심장이 가쁘게 박동질했다. 늘 접해왔던 소드앤매직이었지만, 이렇게 온라인 지부에 직접 들어오게 될 줄이야. 내부는 예상 밖으로 넓고 깨끗했다. 번쩍거리는 타일로 된 바닥에 책상 이며 컴퓨터들이 모두 먼지 하나 없는 상태로 놓여져 있었다. 꼭 우리가 들어오기 바로 전까지 누군가 깨끗이 청소를 해 놓은 다음, 일부러 몇 군 데에 종이 몇 조각을 떨어뜨리고 책상을 움직여 놓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 였다. 어쩌면 무인 청소 로봇이라도 한 대 운영하고 있는지 모르지. 중앙에는 스튜디오에서 본 것보다 작은 액정 화면 하나가 있었고, 그 밑으로 선들이 밖으로 보기 흉하게 튀어나와 있는 컴퓨터가 한 대 있었 다. 아마 몇 대의 컴퓨터를 이어서 만든 워크스테이션 급 컴퓨터인 모양 이었다. 그 옆으로는 컴퓨터의 괴기한 모습과는 잘 어울리지 않게 최고급 마샬 엠프와 스피커가 놓여있었다. 스피커에도 먼지 하나 없기는 했지만, 나는 왜 저렇게 스피커만 고급을 가져다 놓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보다 시스템이 별론데." "모르는 소리 마. 겉보기만 보고 어떻게 알아? 원래 진짜 전문가들은 필요한 것만 딱 갖추고 나머지는 무시하는 법이라고." 리파이가 입술을 비죽였다. 여전히 기분이 좋지 않은 듯 했다. 나는 리 파이가 그러거나 말거나 계속해서 안을 둘러보았다. 모양도 색도 각각인 의자와 책상들이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 그리 정돈된 것 같지는 않았지만 프로그래머나 시스템 관리자들이 매달려 작업하기에는 괜찮은 환경이겠다 싶었다. "왜? 감격적인가 보지, 비류?" 아톰이 나에게 물었다. 안을 둘러보고 있는 내 표정이 조금은 놀란 듯 보인 모양이었다. "글쎄요. 그냥 좀... 상상하던 것하고는 조금 달라서요." "방송 나갈 곳이 아니니까. 하지만 스피커는 좋은 거네요. 그나저나 아 마 여기 있는 프로그래머들, 별로 씻는 거 좋아하지 않고, 옷 잘입는 거 좋아하지 않고, 그런 사람들일 거예요." 나는 리파이가 화장 안한 얼굴에 모자 안에 머리를 집어넣고 나왔던 모 습을 떠올려보았다. 아마 자기가 그러니까 다른 프로그래머들도 그러리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초기에 해커라고 하면 컴퓨터에 미친 사람을 뜻하는 말이었어. 원래는 전문 운동 선수를 뜻하는 말이었지. 왜 있잖아, 어깨만 넓고 말은 더듬더 듬하는 파워볼리그 선수 같은, 운동 말고는 아무 것도 모를 것 같은 사람 말이야. 그런 식으로 컴퓨터 밖에 모르는 사람을 해커라고 했어. 머리는 며칠씩 감지 않아 푸석푸석하고, 식사는 컴퓨터 앞에 앉아서 빵으로 때우 고, '누가 뭐라고 그래도 난 컴퓨터밖에 몰라! 컴퓨터만 있으면 되!'하고 말할 것 같은 사람 말이야." "말의 요지가 뭐야?" 아톰이 주저리주저리 떠들자 리파이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을 잘랐다. 여자라고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리파이는 확실히 눈치가 빠르다니까. 몇 마디 듣고 씻지도 않고 대충 밖으로 나온 리파이를 비난하는 말이라는 걸 알아차린 걸 보면 말이다." "... 그러니까 해커라는 말은 결국 의미가 변질됐다는, 뭐 그런..." 아톰도 리파이의 말에 놀랐는지 이렇게 말끝을 대충 얼버무리고 말았 다. 아톰은 꼭 세상 다 산 사람처럼 냉소적일 때도 있지만 이렇게 순진한 구석도 있다니까. "쓸데없는 말하려면 시스템이나 점검해봐. 어떻게든 이걸 부팅 시켜봐 야 할 것 아니야. 그래야 용이고 나발이고 정체를 알아내지. 아톰. 우리 가 여기 온 목적을 잊지마." 리파이의 말에 아톰은 머리를 긁적이면서 여기저기 선들을 살폈다. 나 는 솔직히 어떻게 해야 좋을 지를 몰랐다. 내가 알고 있는 거라고는 랩탑 하고 데스트탑을 잇는 정도인데. 나는 이곳의 시스템이 어떻게 되어있는 지 전혀 알지도 못하면서 선을 만지면서 뭔가 찾는 시늉을 할 수밖에 없 었다. 가만히 서있기에는 리파이의 표정이 너무 무서웠다. 역시 이럴 때 는 주장답다니까. "작동이 전혀 안 되는데?" 아톰이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서 말했다. 그러고 보니 그랬다. 불이 들 어와 있는 곳이라고는 천장에 달려있는 싸구려 형광등 몇 개 말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세헤라자드가 여기 전력 공급을 아직 못하고 있는 거 아냐? 세헤라자 드가 그랬잖아. 보안 시스템하고 여기 전력 공급하는 걸 끝내고 돌아오겠 다고. 뭐, 아직까지 경보가 울린 것 같지는 않으니 보안 시스템은 어떻게 처리한 모양이지만." "아냐, 아톰. 천장에 불 들어온 거 안보여? 그게 아니야. 아직 작동법 을 찾지 못한 것 뿐이지." 그랬다. 하여간 여기서 용의 실체를 파악할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단서 를 잡을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일단 오기는 했지만, 우리 중 그 누구도 실제 소드앤매직 온라인의 작동법을 아는 사람은 없는 것이다. 나는 조금씩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여 기까지 오기는 했지만, 여기서 아무 단서도 찾지 못한다면 내 모험은 끝 나게 되는 것이다.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고 아무 것도 찾지 못한 채. 내가 생각하고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는 내가 살인 용의자로 어스폴에 체포되고, 아버지가 어스폴에 출두하게 되는 일이다. 아버지에 대해서 많 은 것을 알고 있지는 못하지만, 아버지가 주로 하는 일에 비추어 보아 아 버지는 어스폴에 수배된 인물일 가능성이 높았다. 나는 항상 아버지에게 뭔가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다 컸다 고. 아버지 없이도 훌륭하게 잘 자랐다고 말이다. 처음 프로리그 무대에 섰을 때, 그때도 나는 이런 종류의 절망감을 느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때처럼 주저앉아 울고 싶은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어떻게든 이겨낼 수 있다는 근거 없는 확신이 내 마음 속에 있었다. 그건 바로 세헤라자드가 있기 때문이었다. 세헤라자드와 함께라면, 세 헤라자드가 도와준다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물론 냉정하게 생각해 본 다면 이런 경우를 생각할 수도 있다. 세헤라자드가 돌아오지 않는 경우 말이다. 그렇게 되는 경우는 상상하기도 싫었지만, 만약 그런 일이 벌어 진다면 모든 게 다 물거품이 되어버릴 게 분명했다. "찾았어." 아톰이 말했다. 리파이와 나는 아톰을 바라보았다. 아톰은 함박웃음을 지으면서 색이 군데군데 벗겨져 나간 흔적이 잇는 낡은 전원 어뎁터를 흔 들고 있었다. "이거야, 이거. 이게 빠져 있었어."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너무 간단한 걸 잊고 있었구나 싶었기 때문 이었다. "아톰. 여기다 꽂으면 돼. 나는 전원을 연결하는 커넥터를 찾았거든." 리파이도 뭔가 되어 가는 조짐이 보이자 조금은 기분이 나아진 모양이 었다. 리파이의 얼굴에도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자. 그럼 일단 작동시켜 보지요. 그래야 용이 뭔지를 알 수 있을 테 고, 그 다음에야 살인범이든 부루터스의 행방이든 알 수 있게 되지 않겠 어요?" 나는 이렇게 아무 도움도 되지 않을 게 분명한 당연한 소리를 마치 새 로운 사실인양 큰소리로 말했다. 이래봐야 내가 아직까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숨길 수는 없겠지. "그래요, 비류. 일단 작동부터 시키지요." 리파이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렇게 말하고는 전원을 커넥터에 꽂았다. 그런데, 너무나도 이상하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부팅은 물론이고 엑정 화면 조차도 뜨지 않은 것이다. "단선인가?" 아톰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고 리파이는 인상을 썼다. "테스터라도 가지고 오는 건데. 이거, 선이 이렇게 복잡하게 되어 있어 서야 어디가 단선 된 부분이고 어디가 아닌지 알 수가 있나." "일단 전원이 있는 곳부터 시작해서 천천히 찾아보죠." "비류 님. 그 말은 맞지만 아톰이 찾은 곳은 메인 전원이 있는 곳이고, 그곳부터 병렬로 연결되어 있어서 단선이 있을 수 있는 부분은 메인 전원 부터 갈라지는 지점까지 뿐이에요." "그리고 문제는 그 부분이 무지하게 길다는 거지." 아톰은 엉클어져 있는 전원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투덜거렸다. 하 긴. 아톰이 전원의 끝 부분을 한 참만에 찾아낸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난감한 표정으로 모두 멍하니 서 있었을 때, 인터폰이 울렸다. 세헤라 자드인 모양이었다. "다 끝났나?" "그럼 전기는 확실하게 들어온다는 말인데..." "뭐, 일단 세헤라자드의 말부터 들어보자구. 한 번의 실수도 없이 평생 을 살 수 있는 인간은 없잖아? 세헤라자드도 인간의 영혼이라니 완벽할 수는 없겠지." 아톰은 이렇게 말하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빨리 연결하라는 신호였다. 나는 세헤라자드가 랩탑을 떠난 직후에 처음으로 내가 할 일을 찾았다. 그것은 케이블로 랩탑과 인터폰을 잇는 일이었다. (사실 두 손과 그 끝에 손가락만 달려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내게는 뿌듯한 순간이었다) "세헤라자드?" 나는 랩탑의 액정모니터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하지만 화면에는 세헤라 자드 대신, 수많은 입자가 떠돌아다니는 모습이 보일 뿐이었다. 마치 세 헤라자드가 킹 엘비스의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출 때 보여주었던 것과 비슷 한 모습이었다. 어느 새 내 뒤로 리파이와 아톰이 다가왔다. 돌아오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 나는 세헤라자드를 처음 어스넷으로 내 보냈던 일을 떠올리자 곧 불안해 지고 말았다. 아톰과 리파이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아무 말도 없이 모니터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아톰의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아톰의 손에도 나처럼 땀이 흐르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모니터를 떠돌던 입자들이 회오리바람처럼 나선을 그 리며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서 회오리바람이 조금씩 사람의 형상을 갖 추는가 싶더니 차츰 세헤라자드의 모습으로 변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안도라기 보다는 기쁨에 더 가까운 감정이었다. 나는 환 하게 웃으며 세헤라자드를 바라보았다. "전력은 처음부터 공급이 되고 있었어요. 아마 여기 공기 정화장치나 보안 장치를 작동시키기 위해서 전력은 끊지 않은 모양이에요. 하지만 보 안장치는 완전히 손보지 못했어요." "보안장치 때문이야? 그럼 어떻게 하지?" "뭐가요?" 아톰이 성급하게 물었지만 세헤라자드는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 다는 표정이었다. "제 말은 보안장치 중에 서치로봇을 이용한 게 있었다는 말이에요. 그 래서 시간도 좀 오래 걸렸죠." "서치로봇이라면......" "비류 님. 끊임없이 어스넷을 돌아다니면서 변동된 사항이 있는가 없는 가를 살피는 프로그램이요. 전에 한 번 들으신 적이 있으셨을 텐데요." 세헤라자드가 장난기 어린 어조로 나에게 말했다. 물론 그건 알고 있었 다. 하지만 내가 말하려고 했던 것은 그런 게 아니었다. "내 말은 말이야, 그러니까 그렇게 보안 시스템 사이를 떠돌면서 오류 를 발견하는 프로그램이 있다면 도대체 무슨 수로 어떻게 막았냐는 얘기 야." "스테아 덕분이지요. 서치로봇의 패턴을 확인해 보니까 한 바퀴 돌고 다시 돌아오는 식이더라고요. 이해하기 쉽게 말씀드리자면, 스테아를 서 치로봇이 다니는 길목에다가 두고 왔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네요." "그럼 스테아가 하는 일이 뭔데요, 세헤라자드?" 리파이는 프로그래머로서의 호기심인지 눈을 반짝이면서 물었다. "그러니까, 서치로봇이 스테아의 몸을 지나면서 변환된다고... 아니. 이렇게 보다 좀 더 이해하시기 쉽게 설명드리죠. 함수 아시죠? 스테아를 함수 박스처럼 변형시켰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처음에 출발하던 때의 정 보를 가진 서치로봇을 삼킨 다음에 돌아오는 서치로봇을 먹어치우고, 대 신 처음에 삼킨 서치로봇과 같은 형태로 변환해서 돌려보내는 거지요. 그 럼 보안 시스템이 눈치를 채지 못해요." "변환? 그런 능력이 스테아한테 있었나?" "비류 님. 스테아와 저를 너무 얕보지 말아주세요. 우리는 나날이 성장 하고 있다구요." 말하는 세헤라자드는 조금 흥분 된 듯이 보였다. 돌아올 때의 입자 같 은 모습도 그렇고 말투도 그렇고, 정말 어딘지 많이 변한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세헤라자드는 랩탑을 떠났다 돌아올 때마다 조금씩 변해왔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조금 섬뜩해졌다. 사람이 성장하고 변하는 것처럼, 아무리 에뮬레이트된 영혼이라고해도 생명이기 때문에 조금씩 변 해나가는 게 오히려 당연한 건가?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4470/14637 ━━━━━━━━━━━━━━━━━━━━━━━━━━━━━━━━━━━━━━━━ 제 목:[탐그루] 영혼의 에뮬레이터 9 172 관련자료:없음 17/17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1-27 00:15 조회:846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잠깐만. 말이 로봇이지 그거 사실은 프로그램 아니야? 그럼 전송되는 데 전류와 거의 같은 속도로 흐를 거 아니야. 그런데 무슨 수로 그 사이 를 뚫고 들어갔지?" "물론 사람에게는 불가사의한 속도이겠지요. 하지만 비류님 리파이 님 의 걸음걸이가 빨라 보이나요? 쫓아가면 못 따라 잡을 것 같아요? 제게는 그 서치 로봇이 움직이는 속도가 무척 느리게 여겨져요. 상대적인 속도 감각이죠." 세헤라자드는 더욱 의기 양양해져서 말했다. 리파이는 고개를 끄덕이면 서 아, 그랬구나 하는 표정을 지었고 아톰은 아무려면 어때, 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두 세계는 완전히 같으면서도 완전히 다른 차원의 세계에요. 완전히 같다는 것은 제가 인간이기 때문이고, 완전히 다르다는 것은 제가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아직은 확실히 모르겠어요. 제가 인간을 포함한 것인 지. 제게 인간이 포함된 것인지. 하여튼 저는 인간의 감각과 비슷한 형태 로 서치로봇을 느낄 수 있어요." 아무래도 나는 이해가 가질 않는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렇게 세헤라자드가 나에게 다시 한 번 설명해 주는 걸 보니 말이다. 나 는 좀 전에 들었던 섬ㄳ한 느낌이 두려움으로 변해가는 걸 느낄 수 있었 지만 애써 그런 생각은 지우려고 노력했다. 어찌되었건 지금은 세헤라자 드의 도움이 필요한 시점이었고, 다른 생각은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래. 이제 알았어. 그런데 왜 시스템에 전원이 안 들어오고 있는 거 지?" 한 참 사이를 둔 후에 생각났다는 듯이 아톰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아 톰은 처음에 했던 질문의 답을 아직도 얻지 못하고 있었다. "참. 제가 말씀드린다는 걸 잊었네요. 생각해 봤는데요. 왜 시스템에 전원이 들어오지 않는지." 이렇게 말하고 있는 세헤라자드의 표정은 의자에 접착제를 잔뜩 발라놓 고 누군가 앉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장난꾸러기의 표정처럼 짓궂어 보였 다. "어스넷 가전제품 사이트에서 얻은 정보인데요, 신고된 가전제품의 고 장 중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고장 신고가 뭔지 아세요?" 여전히 세헤라자드는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세헤라자드는 그냥 얘기해 줘도 될 걸 어쩐지 잘난 체 하고 있다는 느낌으로 뜸을 들이고 있었던 것 이다. 아톰은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리파이는 세헤라자드의 말하는 방식 에 짜증이 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짜증이 나는 만큼 도대체 무슨 말인 가 알고 싶어서 달아올라 있었다. 마치 컨티뉴가 없는 게임을 플레이 하 고 있는 사람처럼 말이다. "전원이에요." "그래. 그래서 우리도 전원을 찾았어. 하지만 전원 케이블은 연결 했는 데." "전원이 이어졌으면 스위치를 올려야지요." 세헤라자드의 말에 아톰이 자신의 이마를 탁, 올려쳤다. 그러고 보니 다들 가장 당연하고 가장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다. 나도 역시 어이가 없 을 지경이 되었다. "전원 스위치는 인터폰 옆에 있는 박스를 열면 됩니다. 비류 님." 세헤라자드가 마치 공연중인 마법사가 조수에게 부탁하는 듯한 태도로 나를 불렀다. 나는 기분이 나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인터폰 옆으로 걸 어가 박스를 열고, 스위치를 위로 올렸다. 그러자 시스템은 물론이고 방 안에 있던 모든 컴퓨터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소드앤매직 게임룸에 소리 가 가득 찼다. 한창 더운 여름 날, 애어컨디셔너가 작동될 때 나는 소리 같았다. "알고는 있었는데 어떻게 말씀드릴 방법이 없어서 답답하더라고요. 비 류 님. 잘하셨어요." 물론 정중한 말투긴 했지만 꼭 유치원생을 칭찬하는 말처럼 들렸다. 누 가 본다면 세헤라자드가 사람이고 내가 프로그램인 줄 알 것 같았다. 하 지만 나는 그런 생각도 다 접어두기로 했다. 지금 중요한 건 어찌되었건 용의 정체를 파악하는 것과 가능하다면 잡아갈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나는 랩탑을 들고 액정 화면 앞에 앉았다. 아톰과 스테아는 긴장이 되 는 지 앉지 못했지만, 나는 랩탑을 가장 안전하게 고정시킬 수 있는 곳이 내 무릎 위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앉지 않을 수 없었다. 액정화 면에는 파란 화면만이 떠 있었다. 그 흔한 타이틀 화면이나 로고 화면도 없는, 그저 파란 화면 왼쪽 귀퉁이에 'now loading...'하는 글자만 떠 있 는 화면이었다. 구석에 설치되어 있는 스피커에서는 약간의 울림 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있었다. 다음 순간, 가슴을 두드리는 거대한 소리와 함께 소드앤매직의 오프닝 음악이 흘러나왔다.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소리가 하도 커서 세헤라자드가 담겨 있는 랩탑을 떨어뜨릴 뻔 했다. "망할! 이거 소리가 너무 커! 어떻게 줄이지?" 아톰이 소리소리 질렀고 리파이는 화면만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방송 중계 때 늘 보던, 소드앤매직의 오프닝이었지만 이렇게 소드앤매직 지부에서 직접 보게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방송 때 음악이 잘 나가나 확인해 보기 위해서 설치된 스피커인 모양 이야! 그런데 소리가 너무 큰데!" 리파이가 외쳤다. 나는 리파이의 바로 옆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대충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지만, 아톰은 잘 들리지 않는지 리파이의 얼굴에 귀를 거의 가져가다시피 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자 조금 야릇한 느낌이 들었다. 내 귀에 전류가 흘러내리는, 간지러운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나도 서 있을걸.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내가 도대체 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리파이의 말을 들은 아톰은 성큼성큼 걸어가 엠프에 붙어있는 볼륨을 낮추었다. 게임 룸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나는 귀에서 이명이 들려 손가 락으로 귓구멍을 두드렸다. "그런데 지금 생각난 건데, 우리가 뭔가 잊고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 각이 들어. 어떻게 보면 심리적인 함정에 빠진 건 아닐까? 아톰이 볼륨을 줄이는 순간에 생각해 본 건데, 너무 간단하고 기본적인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잊고 있는 게 잊지 않았나 싶거든? 시끄러우면 소리를 줄이면 그 만인데 아무런 생각도 하질 못했으니 말이야. 그러니까, 세헤라자드..." 오프닝 곡이 끝나가 리파이가 말했다. 하지만 말은 중간에 끊겨버리고 말았다. 화면에 소드앤매직 맵 화면이 떴기 때문이었다. 아톰은 서둘러 본체와 연결되어 있는 컴퓨터를 찾아 이리 뛰고 저리 뛰었고, 리파이는 머릿속에서 생각이 끊어졌는지 미간을 찌푸리고서 뛰어다니는 아톰을 바 라보고 있었다. "리파이, 뭐해! 빨리! 어떻게든 수를 써봐야 할 거 아니야!" 아톰이 소리쳤다. 나는 아톰의 말을 들으면서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 다. 방송에서 늘 보던 풍경이 화면에 뜨고 있는데 나이트무버 유정일과 아나운서 굳뉴스의 목소리가 없으니 뭔가 허전하다는 생각이었다. 나는 세헤라자드를 쳐다보았다. 세헤라자드는 뭔가 곰곰이 생각하고 있는 표정 을 하고 있었다. 'now loading'과는 분명 다른 느낌이었다. 처음 이 표정 을 보았을 때, 나는 'now loading'이라는 글자를 떠올렸다. 그렇지만 지 금의 세헤라자드을 바라보고 있자니 전혀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만 큼 세헤라자드에게 익숙해 진 건지, 아니면 세헤라자드가 변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이거야. 이거 한 대야." 연결되어 있는 컴퓨터를 찾았는지 아톰이 소리쳤다. "잠깐. 한 대라고? 한 대 가지고 어떻게 소드앤매직을 한다는 말이야?" 누구 들으라고 하는 소리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리파이는 신음처럼 이 렇게 내뱉었다. "또 도전인가, 친구." 마샬 엠프를 통해 굵고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뭐, 뭐야, 저거?" 아톰이 놀라 소리쳤다. 나는 순간적으로 저 목소리가 트랜스파워를 통 해 번역된 누군가의 음성일 거라는 착각에 빠졌다. 틀림없이 NPC가 내는 음성일 게 분명했는데도 말이다. "인간들은 이해 할 수가 없어. 분명히 진다는 걸 알면서도 도전하는 걸 보면 말이야. 그 끈기 하나는 인정해 주지. 끈기를 뺀다면 사실 인간에게 남는 미덕은 배신과 예측하기 어려운, 엉뚱한 행동을 한다는 점뿐일 테니 말이야". 우리는 완전히 넋이 나간 사람처럼 액정화면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분명히 컴퓨터가 내는 음성일 것이 분명했지만, 도대체 어디서 나는 음성인지 알 수가 없었다. 설마...... "용?" 리파이가 화면을 바라보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바로 그 순 간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용이 나타났다. 화면에는 용의 머리 부분이 클로즈업되어 비추어지고 있었다. 용은 붉은 눈을 부라리면서 우리를 노 려보고 있었다. 거대한 몸집에 붉은 색 피부, 그리고 거칠게 돋아나 있는 비늘에는 싸움에서 입은 흉터가 군데군데 남아있었고, 날카롭게 드러난 이빨 사이로 움직이는 혓바닥은 당장이라도 불을 뿜을 것 같은 무시무시 한 표정이었다. 내가 보기에만 그런지는 몰라도 전보다 용은 훨씬 더 커 지고 강해진 느낌이었다. (하나 더 덧붙이자면 훨씬 더 징그러워진 것 같 기도 했다) 화면이 천천히 넓어지는가 싶더니 용의 전신이 나타났다. 용은 거대한 날개를 서서히 위아래로 움직이고 있었다. "저거... NPC 맞지? 그렇지?" 아톰은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다는 듯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그래. 저건 NPC야.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 "리파이. 저 목소리를 듣고도 그렇게 태연하게 말이 나와?" 나도 이때까지는 아톰의 말에 그저 왜 저렇게 놀라나 싶을 뿐이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우리는 모두 입을 다물지 않을 수 없었다. "NPC라고? 세상에 사고하는 생명체는 인간뿐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 가, 친구?" "아... 아니 지금 뭐라고 말하는 거야?" 아톰의 표정은 완전히 질려있었다. "말을 인식하는 프로그램은 전에도 있었어. 좀 발전된 형태일 뿐이야." 여전히 리파이는 프로그래머다운 이성적인 눈으로 용을 바라보고 있었 다. 하지만 딱 이때까지 뿐이었다. "암컷으로 보이는 친구. 이름이 리파이라고 했나?" 용이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었다. 놀란 것은 리파이뿐만이 아니었다. 나 는 잘못했으면 이번에는 진짜로 세헤라자드가 담겨있는 랩탑을 떨어뜨릴 뻔했다. "세, 세헤라자드. 저거 NPC 아니야? 맞지? 그렇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 직접 들어가 보지 않고서는요." 아톰은 거의 절박하다시피 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세헤라자드의 대답은 시큰둥했다. 그러자 아톰은 리파이에게 다시 물었다. "리파이. 이래도 내가 놀라는 게 이상해?" "솔직히 놀랍기는 해. 그래. 아톰이 놀라고 있다는 사실 말고. 저 용말 이야." 리파이는 어느새 아주 흥미진진하다는 표정으로 바뀌어 있었다. 처음에 자신의 이름이 불려졌을 때 보였던 놀란 표정은 어디로 갔는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다시 한 번 묻겠다, 인간들. 리파이. 자네가 두목인 것 같은데. 도전 인가, 아닌가?"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4635/14637 ━━━━━━━━━━━━━━━━━━━━━━━━━━━━━━━━━━━━━━━━ 제 목:[탐그루] 영혼의 에뮬레이터 9 173 관련자료:없음 22/22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1-28 00:49 조회:303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용의 눈알은 당장이라도 화면 밖으로 튀어나올 듯 무시무시한 빛을 발 했다. 나는 마른침을 한 번 꿀꺽 삼켰다. 분명히 용의 형상을 한 NPC일텐 데. 아냐. 부루터스가 했던 말들을 생각해보면 뭔가 비밀이 있다는 말인 데, 그건 혹시 저 용이 생명이 있다는 말은 아니었을까. 나는 머릿속이 자꾸만 혼란스러워졌다. "잠깐. 우리는 여기 정보를 얻고 싶어서 온 거야. 부루터스라는 이름 들어 본 적 있어?" 아톰이 말했다. "부루터스. 기억이 나는군." 용은 이렇게 대답하고 콧김을 내 뿜었다. 소리가 하도 진짜 같아서 나 는 화면에 콧물이 튀지나 않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왜? 인간의 일은 인간들끼리 해결하도록." "관둬, 아톰." 눈을 번득이면서 리파이가 말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이야기 해 줄 거야?" "승부다, 친구. 이긴다면 이야기 해 주지. 부루터스 건, 뭐 건 말이야. 도전하겠나?" 상당히 호전적인 친구로군. 처음 만나자 마자 도전이니 어떠고 하더니 이제는 이야기를 하는 데에도 승부를 하자니 말이다. 게임 속의 NPC라서 그런 걸까? "도전이 아니라 승부지." 리파이는 당연하다는 듯이 딱 잘라 말했다. 그리고 나서는 이렇게 덧붙 였다. "그런데 너를 뭐라고 부르면 되지?" 리파이의 표정은 진지했지만 뭔가를 숨기고 있는 사기꾼이 하는 말처럼 들렸다. 리파이의 얼굴에서 학자들에게서나 볼 수 있을 법한 탐구욕이 보 였다. "용에게는 이름이 없다. 용이라는 이름도 인간들이 멋대로 붙인 것에 불과해. 이름 있는 모든 것들은 인간의 것이지. 우리들은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것이 아니야. 굳이 우리를 이름지어 부르고 싶다면 날 이렇게 불 러주게. 밥이라고." "밥? 먹는 밥? 그럼 반찬도 있나?" 리파이의 표정에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 의미를 짐작할 수는 없었 지만 분명 리파이는 뭔가를 시도하고 있는 듯 했다. "이름이 마음에 들건 마음에 들지 않건 그거야 자네 마음이네. 난 나에 게 도전할 건지 아닐지를 물었을 뿐이야. 결정은 자네 마음이지. 자. 나 는 인간처럼 한가롭지 않아. 그럼 이 정도에서 끝낼까? 도전은 하지 않는 건가?" 리파이는 아주 잠시 실망의 빛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곧 평소의 주장 다운 냉철함으로 돌아갔다. "이봐. 도전이 아니라 승부라고 했잖아. 누구 맘대로 도전이야. 우린 최고의 팀이라구. 상대가 밥이건 반찬이건 문제없어." "좋을 대로." 흉칙한 모습의 용은 이렇게 말하고는 혓바닥을 날름거리면서 기괴한 소 리를 내 질렀다. 웃음소리인지, 아니면 기합을 모으기 위한 소리인지. 당 장이라도 역겨운 냄새가 액정화면에서 흘러나올 것만 같았다. 나는 용에 대한 내 생각이 자꾸만 '진짜 생물이 아닐까' 하는 쪽으로 기우는 것 같 아서 스스로 겁을 집어먹고 말았다. "그나저나 이거 어떻게 해야 하지?" 아톰은 시스템과 연결되어 있는 컴퓨터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뭐가 문제야?" "이거, 꼭 한 대 밖에 이어져 있지 않아." "그럴 수도 있지. 아마 여긴 테스트용으로 가져다 놓은 걸 테니까 말이 야." 리파이는 꼭 남의 일 얘기하듯이 말했지만 나는 아톰의 말을 듣는 순간 불길한 예감에 휩싸여 버렸다. 일 대 일로 싸운다면 도저히 승산이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소드앤매직이 다른 게임과 다른 점이라고 한다면 그건 인간끼리의 게임이라는 점이다. 즉 소드앤매직의 장점은 인 간이 다스리는 국가의 개념, 인간을 부리는 플레이어의 개념, 그리고 그 인간의 조합을 이용한, 컴퓨터는 상상할 수 없는 새로운 전법의 구상에 있는데 만약 한 대의 컴퓨터만이 접속 가능하다면 이건 그냥 전략 시뮬레 이션이 되버리는 게 아닌가. "리파이. 지금 아톰이 한 말, 무슨 말인지 몰라요? 아톰의 말은 지금 우리 중 누구 하나만이 용과 싸워야 한다는 거라고요. 팀웍도 아무 의미 가 없고 사용 가능한 유니트들이 전부 다 NPC라는 게 뭘 의미하는 지 모 르겠어요?" 아톰은 리파이의 말에 그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만 있어서, 나는 이 렇게 리파이에게 항의하듯 다그쳤다. 하지만 리파이의 얼굴은 표정하나 변하지 않았다. "비류 님. 지금 비류 님 말씀은 지금 우리가 용을 상대로 싸운다면 그 건 닫힌 세계에서 싸운 다는 말씀이시지요? 저도 알아요. 유니트와의 대 화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게임이 되어버렸다는 걸. 온라인의 세계가 아니 라 방안에서 혼자 전략시뮬게임을 하게 됐다는 말씀이시잖아요. 하지만 그래서요?" 내 항의에 가까운 말에도 리파이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이렇게 대답 했다. 나는 너무도 당당하게 말하는 리파이 앞에서 아주 할 말을 잊어버 리고 말았다. "고전 전략시뮬게임 해 본 적 없으세요? 고전 게임들은 컴퓨터의 인공 지능과 겨루는 게 보통이었지요. 기껏 온라인을 지원해봤자 유니트를 어 떻게 생산하고 어떻게 구사하는가가 전부였지요." "리파이. 지금 문제는 우리가 그런 시스템에 익숙하지 않다는 거야." "아톰답지 않아, 그런 말." 리파이는 액정화면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액정화면 속의 용은 저 친구 들 지금 뭘 하고 있나 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용을 보면 볼 수록 자꾸 생물처럼 느껴져서 아예 화면을 들여다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이 름이 밥이라고 했던가? 이름도 부르지 말고 그냥 용이라고 생각해야지.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이름을 부르면 자꾸 친숙해 지니 말이다. 하다못 해 시스템에도 이름을 붙이면 정이 드는 법이니까) "시스템이 뭐가 어때서? 미리 준비한 유니트가 아니라 게임을 진행하면 서 유니트를 하나하나 만들어 가면서 싸우는 시스템이잖아? 그게 뭐. 고 전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은 다 그런 식이었다고. 그리고 그 편이 시간도 아낄 수 있고 좋아. 언제 국가 만들고 언제 세력 확장해서 이길 수 있겠 어? 이런 식으로 빨리 끝내버려야지." 리파이는 완전히 자신감을 갖고 있는 모양이었다. 얼굴에 생기가 흐르 고 있었다. 그 자신감이 어디서 오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프로 게 이머로서의 자존심이 아닐까 추측해 볼 수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게 제가 바라던 사항이기도 해요, 비류 님." 어떤 측면에서 리파이가 그런 게임을 바란다는 말인지는 알 수 없었지 만, 나는 리파이의 자신감에 눌려 더 이상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토요일 밤의 튜링 테스트란 말 들어본 적 있어?" 리파이가 말했다. 언젠가 한 번 들어본 적도 같은 말인데. "튜링 테스트란 말은 전에 내가 했던 것 같은데. 인간인지 프로그램인 지 대화를 통해 알아내는 테스트를 말하는 거잖아. 그런데 토요일 밤은 뭐야?" 여전히 기분 나쁘다는 듯한 표정으로 아톰이 말했다. 정말이지 아톰은 급박한 상황이 되면 평소의 냉소적인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어 린애가 되어 버린다니까. 아톰은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꽤 오래 전 일이야. 나도 어스넷에서 얻은 정보야." 리파이는 액정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액정화면에 떠 있는 용은 숨을 고르는지 등을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화면을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다시 한 번 액정화면에서 눈을 떼고서 다른 컴퓨터 쪽으로 눈을 돌렸다. 내가 본 모니터에는 소드앤매직 타이틀 모양의 월 페이퍼 위에 작은 아이콘들 이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었다. "한 때 튜링 테스트가 유행 한 적이 있었어. 어스넷에 있는 한 작은 사 이트에서 그랬지. 그 사이트 이름이 '토요일 밤' 이었어. 아마추어 프로 그래머들이 모여서 인공지능을 연구하는 사이트였지. 그런데 그 사이트 이름이 왜 '토요일 밤'이었냐 하면 토요일 밤이면 채팅방이 열렸거든." "채팅방이야 흔하잖아?" 아톰이 말했다. "그래. 흔해. 아니, 흔하다 못해 어디에나 다 있지. 하지만 그 '토요일 밤' 사이트에서 열렸던 채팅방은 좀 달랐어. 그건 바로 아마추어 프로그 래머들의 기량을 겨루는 시간이 되었거든." 리파이는 자신이 하고 있는 말에 도취되는 듯, 점점 열을 올리고 있었 다. 나는 그런 리파이를 보기가 조금 민망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내 앞에 있는 컴퓨터의 마우스를 만지작거렸다. 칼 모양의 포인터가 내 움직임에 따라서 위로 아래로 움직였다. "그러니까, 리파이. 네 말은..." "그래. 그 방에서 거기 프로그래머들이 개발한 인공지능과 채팅을 나누 었기 때문이야." 리파이는 이렇게 말하면 꼭 사건을 해결한 명탐정처럼 손가락을 퉁겨서 딱, 하는 소리를 내었다. "인공지능과 대화를 나눈다. 그래. 알겠어. 튜링 테스트를 실시했다는 거지?" "그래. 거기서 선택한 방법은 30분 동안 대화를 나누어서 지금 이야기 하고 있는 중에 누가 인공지능을 가진 프로그램인지 아닌지를 맞추는 거 였어. 그 대화방 이름이 바로 '토요일 밤의 튜링 테스트' 였지." "그런데 채팅방이라면 아무 말 없이 잠수하거나 할 수 있지 않아?" "그건 아니야. 사용자의 수에 따라서 여러 개의 방이 열리고, 방에는 각각 여섯 명씩 만 들어갔지. 인공지능을 가진 프로그램까지 말이야. 자 유롭게 대화를 나누기는 했지만 돌아가면서 질문을 하고 또 질문을 받아 야 했기 때문에 잠수 같은 건 통하지 않았어." "그래서 어떻게 됐죠, 리파이?" 나는 리파이의 말을 듣다보니 결과가 궁금해졌다. "결과는 실패였어요. 의도는 참신했지만. 어스넷에는 별의 별 사람들 다 있잖아. 처음에는 헛소리를 해 대는 사람들 때문에 실패했어. 자기가 꼭 인공지능인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데." 나는 리파이의 말에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이해가 갔기 때문이었다. 채팅방에 갑자기 들어와서 분위기 흐리는 별 희한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 은가. 한 번은 채팅방에서 잡담을 나누고 있는 데 어떤 사람이 자기는 지 금 팔목을 베었다는 둥, 이제 죽어간다는 둥 하는 소리를 하는 바람에 완 전히 분위기 다 깨진 경우를 경험 한 적도 있었다. (물론 그 때는 진짜인 줄 알고 등골이 다 오싹해졌지만 말이다) "물론 나중에는 사람을 가려서 받아서 그런 일은 거의 없었다고 해요. 사실 아까 제가 이름 물어 본 거 있지요? 용 이름말이에요." 리파이는 목소리를 낮추고 이렇게 말했다. 화면의 용은 여전히 숨만 고 르고 있었다. 계속 저러고 있는 걸 보면 프로그램은 프로그램인 모양인데 말이야. "그 질문, 꽤 유명한 질문이에요. 처음에는 인공지능을 가진 프로그램 들이 속속 다 무너졌다고 해요. 컴퓨터가 이름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리파이는 이렇게 말하고는 천천히 다시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 수록 인공지능이 업데이트되면서 지금 대화를 나 누고 있는 상대가 사람인지 아닌지를 점점 알기가 힘들어졌죠. 그러다보 니 사람들이 너무 진지하게 프로그램인지, 사람인지를 가리려고 하는 바 람에 진짜 사람이 들어도 난처할 질문들만을 쏟아 부었다고 해요. 죽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뭐 이런 철학적인 질문도 있었고, 또 너 여자 몸의 구조에 대해서 아느냐, 성적으로 신체를 접촉해 본 적이 있느냐, 이 런 식의 곤란한 질문도 있었데요. 정작 튜링 테스트에는 관심이 없고 음담패설을 늘어 놓는 데 신경을 쓰 는 경우였겠지요. 하여간 그러다 보니 이번에는 프로그래머들이 문제가 되었지요. 실제로 사람처럼 생각을 하고 대답을 하는 프로그램을 만들려 고 했던 애초의 의도가 점점 변하게 되었으니까요. 그러니까 생각을 하는 프로그램을 만들려고 하진 않고 엉뚱하게 예상되는 질문에 대답을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쪽으로 기울었다나봐요. 엄청난 양의 답변을 데이터 베이스로 구축하는 작업을 한 프로그래머도 있었다고 해요." "그럼 완전히 끝났겠군. 뭐 어스넷 사이트들이 거진 다 그렇지만 말이 야. 꼭 정치가들 하는 꼴 같다니까. 처음에는 그럴싸하게 시작했다가 끝 은 흐지부지 되는 게 말이야. 뭐, 정치가만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그렇지는 않았어, 아톰." 간만에 평소모습으로 돌아온 아톰에게 리파이가 바로 대꾸했다. "그때 개발 된 엔진들이 나중에 게임 엔진으로 많이 활용됐으니까. 사 실 그 '토요일 밤' 사이트에서 활약했던 프로그래머 중 하나가 소드앤매 직 온라인의 NPC 대화 엔진을 개발했거든. 사실 진짜 사람처럼 생각하고 이야기하는 엔진을 개발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지만 '사람처럼 보이는 대답만 하는' 엔진을 만들기는 그렇게 어렵진 않거든." 리파이는 이제 아주 흥이 나서 자칫하다가는 게임 엔진 만드는 법에 대 한 강의까지 할 기세였다. 하지만 리파이의 말에 제동을 거는 목소리가 있었다. "자네들 버릇이 좋지 못하군. 도전을 하겠다고 하더니 이렇게 기다리게 하는 건 어디서 배운 버릇인가? 인간들이란." 용이었다. 나는 용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몸이 움찔 하면서 경련이 일 어났다. 아무래도 저 목소리, 프로그램이라면 너무 잘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용의 목소리는 짜증이 나지만 일단 한 번은 참겠다는 느낌 이 그대로 묻어 났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트렌스파워라고 해도 저 정도까 지 감정을 표현 할 수는 없을텐데. "좋아. 상대해 주지. 하지만 잠깐만 기다려. 작전회의 중이니까." 리파이는 이렇게 액정화면에 대고 말했다. "지금까지 한 얘기 다 들었겠군." "들으면 어때? 듣는다고 내 말을 다 이해했을 것 같아? 아무리 잘나봐 야 프로그램은 프로그램일 뿐이야. 그저 적당히 말을 이해한 척 하고 대 답할 뿐이라고." 리파이는 이렇게 말하고는 컴퓨터 앞에 앉았다. "내가 상대해 주지, 뭐. 그렇게 어려울 것 같지도 않으니까 말이야." "잠깐만." 아톰은 앉으려는 리파이를 막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먼저 할 게. 아무래도 나보다야 리파이가 실력이 나으니까. 내가 먼저 플레이를 하면 그동안 리파이가 시스템을 익히고, 그게 낫겠지. 안 그래?" 아톰의 말에 리파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톰이 자신의 실력보다 리파 이가 낫다는 걸 인정하다니. 나는 내 귀를 한 번 의심해 보고 싶은 심정 이 되었다. 뭐가 아톰을 이렇게까지 절박하게 만들었을까. "그래. 좋을 대로. 하지만 잊지 마, 아톰. 우리의 목적은 용의 정체를 알아내는 거라는 걸 말이야."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이겨야겠지." 아톰은 이렇게 말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손을 털면서 마우스를 잡는 모 습이 꽤나 긴장하고 있나보다. "가만있자. 그러니까 이거는..."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4636/14637 ━━━━━━━━━━━━━━━━━━━━━━━━━━━━━━━━━━━━━━━━ 제 목:[탐그루] 영혼의 에뮬레이터 9 174 관련자료:없음 22/22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1-28 00:50 조회:288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아톰은 이렇게 말하면서 모니터에 시선을 집중시켰다. 나는 액정화면을 바라보았다. 액정화면에는 여전히 용의 모습만이 보이고 있을 뿐이었다. 혹시 액정화면에 용이 플레이하는 모습이 보인다면 훨씬 더 게임을 풀어 가기 쉬울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그건 좀 어려울 것 같았다. 아톰의 모니터에는 현재 아톰이 가지고 있는 유니트의 시선에서 보이는 풍경이 나타나 있었다. 소드앤매직 온라인의 화면이 분명했지만, 성도 없 고, 병사도 없고, 마법 학교도 없는 화면이 나타나자 어쩐지 나는 전혀 다른 게임을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화면에는 평범한 농민처 럼 보이는 사람 몇과 나무로 만들어진 집 몇 채만 나타나 있었다. "이런 종류의 게임은 일단 빨리 유니트를 만들어서 초반에 끝장을 내 버리는 게 좋아. 러쉬가 최고지. 그런 말 있잖아. 러쉬 앞에 장사없다 고." 아톰은 이렇게 말하고는 일꾼들을 클릭 하더니 나무를 베기 시작했다. "먼저 기본 유니트들을 만들어야겠지? 뭐, 그래도 유니트 생성 순서나 유니트 상성은 비슷하겠지." 관리를 주로 맡아서 했던 게이머인 만큼 아톰은 침착하게 자원을 모으 고 그것으로 건물들을 늘려가면서 일단 기본 유니트들을 만들기 시작했 다. "이건 게임이 아니라 그냥 장난 수준이 되어 버렸구만. 소드앤매직이 무슨 아케이드 게임인가? 실시간 전략 시뮬레이션 식으로 운영해야 하다 니 원." 마우스를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아톰이 말했다. 아톰의 눈은 모니터에 집중되어 있었지만 표정은 당장이라도 그만두고 싶다는 듯이 보였다. "아톰. 그렇게 함부로 말하지 마. 그래도 이런 전략 게임이 지난 세기 에는 대 인기를 끌었다고. 지금도 고전 게임으로 분류되어서 많은 메니아 층을 거느리고 있고 말이야. 그러니까 소드앤매직도 이렇게 실시간 시스 템을 기본으로 하고 있는 거잖아." "알아, 알아. 그런데 동료도 없이 이 짓을 하고 있자니 한심해서 그래. 젠장. 십부장이라도 하나 있으면 훨씬 수월하겠구만." 대답은 그렇게 하면서도 단축키를 일일이 지정해가면서 정성을 쏟는 걸 보니 아톰은 역시 진짜 프로게이머다 싶었다. 리파이도 설정되고 있는 단 축키들을 열심히 보고 있었다. 어느 사이 아톰의 진형에 작은 나무 건물들이 꽤 들어찼다 싶더니 병사 유니트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이것 봐. 말이 되는 것 같아? 나무 집을 짓는 다고 사람이 생기나? 축 사 짓는다고 말이 생기고? 인구가 늘고 그래서 농경지가 늘어나고 가축을 수입하고 하면서 하나하나 유니트들이 생산되는 거지." "따지지 말고 게임에나 몰입해, 아톰." "난 원래 떠들어야 게임에 몰입이 되는 스타일이라." 아톰은 계속 투덜거렸지만 어느새 아톰의 보병은 일 개 군단이 되어 있 었다. "뭐 하는 거야? 정찰하기는 아직 이른 거 아니야?" 아톰이 농민들을 뽑아 약간의 병력과 함께 아직 가보지 않은 쪽으로 보 내는 걸 보고 리파이가 말했다. "적당한 시기인것 같은데요, 리파이." 아무래도 아톰은 대답하지 않을 것 같아서 내가 대신 대답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당연한 일이다. 이런 종류의 게임에서는 아무래도 먼저 유니 트를 만들고 먼저 적의 위치를 찾아내는 쪽이 유리하기 마련이다. "너무 단순해, 이런 게임은. 정해진 순서대로 짓기만 하면 되거든." 아톰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결코 과장이나 허풍이 아니었다. 한 사람 의 프로게이머로서, 또 손맥 소프트의 관리 책임 게이머로서 쌓아온 경력 과 실력으로 마음에서 진솔하게 흘러나온 말이었다. 과연 아톰은 그 많은 건물들을 일일이 단축키로 설정해 놓아서 정찰을 나가는가 하면 어느 새 새로운 유니트들을 만들고 있었고, 유니트들을 훈련시키는 것은 물론, 아 주 짧은 시간이지만 유니트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또 정찰을 계속했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자 화면이 단축키 때문에 자주 이곳저곳으로 바뀌 었고, 그 빈도가 높아질 수록 나는 게임을 따라가기가 점점 힘이 들었다. 내 눈에는 그저 번쩍번쩍 하면서 화면이 바뀌는 것으로 보이는 정도였지 만 아톰이 마우스를 움직이는 속도로 보아 분명 어떤 명령을 계속해서 내 리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었다. "주력을 보병으로 하고 있어요. 아무래도 초반에 승부를 가르자는 계산 일 거예요." 내가 게임을 따라가고 있지 못하다는 걸 눈치챘는지 리파이가 말했다. 아직까지 나는 이 정도로 빨리 진행되는 게임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준은 되지 못하는구나 싶어서 조금은 자조적인 기분이 되었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한데." "그래. 나도 봤어." 아톰과 리파이가 이렇게 한 마디씩 주고받았다. 뭐가 이상하다는 건지 금방은 알아들을 수가 없었지만, 화면 하단에 나오는 전체 지도를 살펴보 니 정말 이상하기는 했다. 세 방향으로 보낸 정찰 유니트들이 지도의 거 의 모든 지역을 돌아다녔지만 용의 흔적을 발견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액정화면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용은 숨을 들이쉬고 또 내쉬면서 내 눈을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얼른 눈을 피했다. 솔직히 겁이 더럭 났 다.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지? 아톰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혀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말이 별로 없어 진 것만 보아도 분명 힘든 상황일 것이 분명했다. 적이 보이지 않으니 직 접 게임을 하고 있는 당사자야 얼마나 답답할지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세헤라자드. 얘기 좀 해 봐. 어떻게 되 가고 있는 거야?" 나는 답답해서 세헤라자드에게 물어보았다. 하지만 세헤라자드는 눈을 감고 'now loading' 표정만 짓고 있을 뿐이었다. 세헤라자드도 뭔가 생각 에 빠져 있는 모양이었다. 세헤라자드의 표정은 꼭 심각한 고민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무슨 생각을 저렇게 하고 있는 걸까? "마법인가? 벌써 투명이나 은폐 같은 마법을 쓸 만한 마법사를 키울 시 간이 없었을 텐데. 그럼 뭐지? 유니트들을 전부다 사냥꾼으로 바꾸고 숲 에 숨어있는 걸까? 아냐, 그럼 도저히 이길 수가 없을 텐데.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아톰은 이렇게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마우스와 단축키를 누르는 손은 여전히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너무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 는 모습이 예사롭게 여겨지지가 않았다. "아톰. 침착해. 아직 찾아보지 않은 지역에 숨어있을 지도 모르잖아." "젠장!" 리파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톰이 소리쳤다. 나는 아톰이 지르는 소리에 내가 오히려 깜짝 놀라 몸을 움찔 했다. "비겁하게 굴지 말고 나와! 보나마나 어디 굴 파고 쏙 들어가 있는 모 양인데, 그런 식으로 하면 시간은 끌 수 있을지 몰라도 결국엔 지게 되어 있어! 전 병력을 다 정찰로 보내면 되! 어디 얼마나 버틸 수 있나 보자 구." 아톰은 흥분한 모양이었다. 마우스를 놓고 컴퓨터에 달려있는 트랜스파 워 마이크를 거의 삼킬 기세로 소리치고 있었다. "친구. 시끄럽군." 용이었다. 목소리가 들리자 아톰과 리파이의 시선이 동시에 액정화면으 로 돌아갔다. (그건 물론 나도 마찬가지였다) 용은 웃고 있었다. 아니, 웃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씰룩이는 눈가와 죽 올라간 입술의 끝이 꼭 우리를 비웃고 있는 듯 보였다. "시간을 너무 끌었나?" 용의 말이 끝나자 갑자기 아톰이 애써서 지어놓은 집에 불이 붙었다. 아톰은 당황한 모양이었다. 마우스를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어디에서 공격 이 되고 있는 건지 살펴보았지만 아무 것도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분 명 불은 계속해서 붙고 있었고, 비록 아톰이 재빨리 마법사들을 운용해서 불을 끄고 있다고는 해도 쉽게 불길이 잡힐 것 같지는 않았다. 어떻게 된 거지? 나도 아톰 못지 않게 눈알을 굴리면서 뚫어지게 모니터를 응시했지 만 도저히 어디서 공격이 계속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따분해." 용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들렸다. 그 목소리는 장난감 인형을 갖고 놀 다 지루해지자 내팽치고 있는 어린아이 같았다. 바로 그때였다. 순식간에 마차가 화면 안에 거의 가득 찰 정도로 나타나더니 순식간에 아톰의 집들 을 불태웠다. 아톰은 너무 놀라 보병들에게 공격 명령을 내리는 것도 잊 고 화면만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물론 보병이 자동으로 마차에 공격 을 가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마차의 공격을 불과 몇 초 지연시켰을 뿐이었 다. 간간이 마법사의 불꽃이 작렬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마차의 수에 비교 해 본다면 거대한 바윗돌에 차돌을 던져 튀는 불꽃 정도에 지나지 않았 다. 다음 순간, 마차들은 완전히 사라졌다.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전혀 보이지도 않게 말이다. 아톰은 마우스를 뒤집었다. 완전히 졌다는 프로 게이머의 의사표시였다. "인간지능은 이것 밖에 안돼나. 거의 인공지능과 비슷한 수준이구만." 거드름을 피우는 듯한 용의 목소리가 게임 룸에 울렸다. 나는 가슴을 면도날이 스치고 지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어떻게 졌는지도 모르게 지다니. 그것도 자신이 직업으로 삼고 있는 게임에서 말이다. 아톰의 표 정은 완전히 하트오브화이터즈에서 108콤보를 한 대도 빼놓지 않고 다 얻 어맞은 게이머의 표정 그대로였다. "어떻게 한 거지?" "아주 간단한 마법이지. 아니, 마법이라고 할 수도 없어. 스스로 생각 해보라구. 프로게이머의 자존심도 없나?" 용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울려 퍼졌다. 그리고 이어서 들린 소리에서 나는 한 가지 사실만큼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게임을 시작할 때 들었던 용의 울음소리는 웃음소리가 확실하다는 사실 말이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아톰은 아무 말이 없었다. 하긴, 리파이도 아톰에게 대답을 바라고 물 어 본 것은 아니었겠다 싶었다. "세헤라자드, 어떻게 된 거야? 마법인가? 어떻게 벌써 저렇게 마법사를 키울 수 있었지?" 나는 세헤라자드에게 물어보았다. 하지만 세헤라자드는 그저 고개를 갸 웃거릴 뿐이었다. "마법사가 저 정도의 마법을 쓰려면 일단 마법학교가 있어야 하고, 또 마법학교에 마법연구실과 신전, 거기다가 수도원 정도는 있어야 한단 말 이야. 그런데 그 사이에 저렇게 많은 유니트들을 만들 수 있었지?" 아톰은 여전히 분한지 자리에서 일어나 왔다갔다하면서 이렇게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말을 중얼거렸다. "치트 아닐까?" "그럴지도 몰라. 어차피 저 녀석 프로그램이잖아. 같은 프로그램끼리니 치트 쓰기도 쉬웠겠지." "아냐. 온라인 시스템에서 치트 사용에 성공했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어. 시스템 자체가 치트를 받아들일 수 없게 되어 있는 걸. 치트 키를 썼다면 아톰에게도 똑같이 적용됐을 거야." "어차피 같은 통속이라니까! 저 녀석 틀림없어. 속인 거야. 무슨 수를 썼는지 모르지만. 틀림없어." 아톰은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나는 그런 아톰의 모습에서 프로다운 모습을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꼭 어스넷의 온라인 게임에서 패한 초등학 생 같은 모습이었다. 리파이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아톰을 그냥 내버려두 고 있었고, 나도 별로 말하고 싶은 기분은 아니었다. 한참동안 아무도 말 이 없었다. "그런데, 아까 용이 부린 유니트 마차 맞지요? 그런데 그런 모양의 마 차 본 적 있어요?" 세헤라자드가 침묵을 깼다. 마차라. "글쎄요. 유니트 모양이야 워낙 다양하니까. 어떤 거든 만들 수 있잖아 요? 마음만 먹는다면. 아마 마차하고 불 화살 공격 유니트를 합쳐 놓은 모양이었던 것 같은데. " 리파이가 말했고, 바로 그 순간 나는 내 머릿속에 깜빡이고 있던 형광 등이 켜진 느낌이 들었다. "그래. 원화 그림이었어. 용하고 함께 있던 원화 말이야." 내 말에 아톰과 리파이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리파이쪽 으로 고개를 돌린 다음 다시 말을 이었다. "기억 안나요? 리파이도 봤잖아요. 용의 원화를 찾았을 때요." 리파이는 아차, 하는 표정으로 이마를 쳤다. "그래. 유니트 모습의 자유도가 높다는 선입견 때문에 잊어버리고 있었 어. 그래. 그 날개가 달려있는 말이 끄는 마차." "하늘에서 내려온 거예요." 세헤라자드가 말했다. "그래... 그랬군." 아톰은 이제야 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드앤매직은 보통의 게임처럼 '위에서 내려다보는' 디스플레이를 지원 하는 것이 아니라 중심이 되는 유니트가 '앞을 바라보는' 디스플레이를 지원한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에서 빠른 속도로 내려오는 유니트들이 마 치 갑자기 나타난 듯 보였던 거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꼭 마술의 비밀 이 풀려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가만있자.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되는 거지?" 아톰이 말했다. 리파이는 아주 흥미 진진 해졌다는 듯한 표정으로 용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하긴. 토요일 밤의 튜링 테스트를 이어가야지." "도전인가?" 리파이의 말에 용이 대답하는 것처럼 물었다. 하지만 이제 용의 목소리 는 처음처럼 그렇게 무시무시하게 여겨지지는 않았다. "도전이 아니라 승부라고 했잖아. 하지만 좀 시간을 줘. 넌 하늘에서 싸우고 우리는 땅에서 싸운다면 너무 불공평하잖아?" "그래. 꽤 많이 알아냈군. 그 정도면 칭찬해 줄만 해." "미안하지만 결국 칭찬 받는 건 네가 될 거야." "인간의 자존심인가? 좋아. 한 번 최선을 다해보게. 하지만 그 정도에 서 만족하는 게 좋을 거야. 이길 수는 없을 테니까." "그래." 리파이는 이렇게 말하고는 컴퓨터 앞에 앉았다. "뭐 하려고?" "분석. 마법으로 싸우는 수밖에 없어. 빌드 오더를 어떤 식으로 해야 대공 마법을 쓸 정도의 마법사가 나올지 분석해 보는 거야. 이거, 오래간 만에 피가 끓어오르는데." 리파이는 아주 흥미 있다는 듯이 미소를 머금고 이렇게 말했다. "나도 도와줄게. 빌드 오더 작성하는 건 나도 자신 있어."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4637/14637 ━━━━━━━━━━━━━━━━━━━━━━━━━━━━━━━━━━━━━━━━ 제 목:[탐그루] 영혼의 에뮬레이터 9 175 관련자료:없음 22/22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1-28 00:50 조회:286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아톰도 진지한 표정으로 리파이의 옆에 앉았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 처럼 보여도 막상 저렇게 문제가 생기면 서로 돕는 다니까. 그게 프로의 세계일까? 사실 나도 빌드 오더가 유니트 들을 생성하는 순서라는 것 정 도는 알고 있었지만 함부로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지금 저 두 사람은 이 기기 위해서 자신의 자존심을 걸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엉성해 보여도 팀웍이 있어요. 안 그래요, 비류 님?" 세헤라자드가 말했다. 리파이와 아톰을 바라보는 세헤라자드의 눈동자 에는 부럽다는 빛이 가득했다. "그래." 너하고 나처럼, 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입을 뗄 수가 없었다. 나 는 지금까지 일방적으로 세헤라자드에게 도움을 받기만 했던 것이다. "프로의 세계가 다 그렇겠지. 일단 목적이 생기면 서로 도울 수 밖에 없을 테니까." "비류 님도 프로 게이머잖아요." 세헤라자드가 나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글쎄. 그저 테스트 기간에 있는 게이머라고 생각하는 편이 낫겠지. 솔 직히 아마추어에서 통하는 실력이라고 해서 프로 세계에서도 통한다는 법 은 없거든." "누구나 시작은 그런 법이에요." "너, 제법이다. 처음 봤을 때하고는 정말 틀려졌어. 처음에는 떼쓸 줄 이나 알고 철부지 같은 짓이나 하는 줄 알았는데, 충고까지 해 주고 말이 야." 나는 반은 거의 비아냥거리는 식으로 세헤라자드에게 말했다. "글쎄요. 저도 인간이니까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변하는 지도 모르지 요. 비류 님도 많이 변했잖아요?" 세헤라자드의 말에 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물론 많은 일을 겪기는 했다. 친구가 죽었고, 살인 누명도 써 보았고, 프로 게이머 자격 도 얻었고, 실제 게임도 치러 보았고, 무엇보다 지금은 소드앤매직 온라 인 지부까지 들어와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내가 변했을까? "그래. 인간이니까." 나는 세헤라자드의 눈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사실 내 자신을 돌아보기 싫어서 생각해낸 말이었지만, 이런 말을 하고 나니 문득 세헤라자드의 손 을 잡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쥐 이야기는 들어 본 적 있으시죠?" "응?" 다른 생각을 하고 있어서였는지 세헤라자드의 질문이 너무 동떨어진 것 처럼 느껴진 나는 이렇게 되묻고 말았다. "미친 과학자가 쥐의 지능을 가진 프로그램을 만들었다는 소문 말이에 요. 그 쥐가 떠돌아다니면서 사이트들을 갉아먹었다는 소문. 물론 헛소문 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이 있었지요. 하지만 저하고 스테아를 보면 사 실일 수도 있겠다 싶지 않으세요?" "뭐, 사실 일 수도 있겠지."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쥐에 대해서는 전에 젯나이트가 남긴 음성을 들 어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세헤라자드가 말하는 걸 직접 들으니 조금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 쥐 소문이 돌 때쯤 이상한 대화명을 가진 사람이 돌아다닌 다는 말은 들어 본 적 있으세요?" 이렇게 묻는 세헤라자드의 눈동자는 반짝거렸다. 뭔가 이야기하고 싶은 게 있는 것이 분명했다. "글쎄. 처음 듣는데?" "어제 이곳 보안 장치를 좀 알아보러 다니는 동안에 몇가지 알아낸 사 실이 있어요. 그 중에 하나가 바로 그 이상한 대화명을 가진 사람 이야기 에요." "이상한 대화명이라는 게 뭔데?" 나는 별의 별 이상한 대화명을 다 보아왔기 때문에 어떤 걸 들어도 별 로 이상할 게 없을 거라고 생각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건 좀 있다가 말씀 드리고요, 먼저 제가 얻은 정보를 말씀 드릴게 요. 어스넷의 꽤 큰 대화 사이트들에 요즘 이상한 잡담이 많이 오르고 있 더라고요. 내용은 하나 같았어요. 어스넷에 이상한 사람이 돌아다니고 있 다는 거였지요. 별로 말수도 없고, 뭐하는 사람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사람이 하는 행동때문에 난리가 난 사이트들이 꽤 되더라고요." "세상에 이상한 사람이 어디 한 둘인가." "그 사람이 하는 일이 뭔 지 들으시면 좀 다르게 생각하실 걸요? 바로 대화방에서 상대방이 지금 뭘 하고 있으며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 맞춘다 는 거예요." 세헤라자드의 말에 나는 좀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이내 곧 이성적으로 돌아가 세헤라자드의 말에 반박했다. "그야 대화내용을 듣고 있으면 가능한 일 아닌가? 있는 곳이야 좀 어렵 긴 하지만 해킹을 통해서 알아낼 수도 있는 거고." "그럼 그 사람이 지금 입고 있는 옷이나 먹고 있는 음식을 알아 맞추는 거는요?" "글쎄. 둘 중에 하나겠지. 운이거나 속임수거나." "제 생각은 좀 달라요." 세헤라자드가 눈을 깜박였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세헤라자드의 마법에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집중해서 이야기를 듣고, 또 무슨 부탁을 하든 다 들어줄 수밖에 없는 마법 말이다. "저하고 같은 형태의 생명체가 아닐까요?"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정말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인간의 영혼 을 에뮬레이트 하는 실험에 성공한 사람이 젯나이트 뿐 아니라 또 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스테아처럼 정체를 알 수 없는 영혼들도 얼마든지 어스넷을 돌아다닐 수 있겠다 싶었다. "그래. 일리가 있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고 있는 내가 과연 스스로 생각해서 얻은 결론 때문인지, 아니면 그저 세헤라자드의 깜박이는 눈 때 문인지는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어떻게? 아니, 어떻게라기 보다는 왜 그러는 거지? 너 같이 영 혼을 가진 생명체라면 어딘가에 정착해서 살고 싶어하지 않을까? 대화방 이나 돌아다니면서 그런 쓸데 없는 일이나 하고 다니진 않을 것 같은데." "사람마다 성격이 다르듯이 어스넷을 떠돌아다니는 영혼도 그렇겠지 요." 세헤라자드의 말은 함축적인 의미가 있었다. 어스넷에 영혼이 떠돌아다 니고 있다는 걸 기정사실화 함과 동시에 그들에게 인격을 부여하고 있었 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해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네가 말한 그 이상하다는 이름이 뭔데 그래?" 나는 일단 세헤라자드에게 이렇게 물어보았다. 이름을 알면 나중에 혹 시라도 마주치게 되었을 때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였다. "'토요일 밤' 과 '밥'이에요. 같은 인물이 대화명을 바꾸고 있던 지 아 니면 두 명의 다른 사람이겠지요." 나는 세헤라자드가 이름을 말하자 '이상한 이름' 이라고 굳이 말한 의 미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나는 모니터 상의 용을 바라보았다. 용은 얼마든지 기다려 주겠다는 듯이 자신 만만한 표정으로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용이 숨을 들이쉴 때마다 고장난 수레바퀴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 렸다. 설마, 저 용이...? "리파이의 추리로는 저 용은 사람이 대화하는 걸 흉내낼 수 있는 프로 그램이라고 했어. 네 말뜻은 알겠는데. 그래도 어떻게 그 사람이 입고 있 는 옷이나 먹는 음식을 맞출 수 있다는 거지?" "제가 지금부터 말씀드리려고 하는 게 바로 그 점이에요." 세헤라자드의 표정은 진지했다. 나는 일단 세헤라자드의 말에 귀를 기 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진화한 것 아닐까요? 그 토요일밤의 튜링 테스트에 참가했던 프로그램들이요." 세헤라자드의 말이 믿어지지는 않았다. 프로그램이 진화하다니. 언젠가 나이트무버 유정일이 말했듯이, 프로그램은 단순한 복제만 이루어질 뿐이 지 어떠한 형태로도 생명처럼 자신과 다른 특성을 지닌 후손을 만들지 못 하는 것이다. 그런데 진화라니. "설마." 마법도 효력이 다 했는지 나는 이렇게 바로 세헤라자드의 말에 반박했 다. "아니에요, 비류 님.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스테아는 어때요? 또 저는 요? "그건 진화라기 보다는 그냥 발전한 거에 지나지 않아. 너나 스테아야 어찌되었건 생명이니까 살아있는 동안에 조금씩 학습을 통해 발전하는 게 당연하지." "인간의 눈으로 보면 저도 프로그램이기도 해요. 그렇다면 프로그램도 스스로 학습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지 않을까요?" 세헤라자드가 던진 의문에 나는 생각에 빠져들고 말았다. 그러고보니 그런 점들이 틀림없이 있었다. 세헤라자드도 어스넷을 돌아보기 전에는 그저 자신의 생명만을 겨우 인식할 수 있는 수준이었지만 곧 변환하는 법 을 알게 되었고 내 앞에서 춤까지 추지 않았던가. 그리고 이제는 원하는 정보를 척척 얻어다가 활용하기도 하고 보안 시스템도 마음대로 하고있으 니 말이다. 스테아도 마찬가지다.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고양이인가보다 싶더니 이젠 서치 로봇을 복사하는 일까지 하고 있지 않은가. "저는 그게 바로 저 용이라고 생각해요." 세헤라자드가 말하자, 나는 액정 화면 속의 용을 바라보았다. 징그럽게 만 느껴졌던 용이 이제는 어디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생명체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뭐, 흥미 있는 가설이기는 해. 네가 인간의 영혼을 에뮬레이트해서 만 들어진 생명체이기 때문에 비슷한 생명이 있다고 믿고 싶어하는 마음이 만들어낸 가설일 가능성이 높지만 말이야." "꼭 그렇게 말씀하셔야겠어요? 제가 생각하고 있는 거는 다..." "그러니까 내 말은, 이겨야 알 수 있겠다는 말이야. 저 놈한테 직접 물 어보면 될 거 아니야?" 나는 용에 시선을 두고서 이렇게 물었다. 어쩐지 이제 곧 벌어지게 될 리파이와 용 사이의 대결에 모든 게 걸려있지 않은가 싶은 생각이 들었 다. 나는 고개를 돌려 리파이와 아톰을 바라보았다. 리파이는 땀까지 흘 려가면서 빌드오더를 작성하고 아톰과 함께 작전을 짜고 있었다. 하지만 잘 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리파이는 이 가능성, 저 가능성을 다 타 진해 보고 있겠지만, 사실 용이 다음 번에도 같은 전법으로 나온다는 보 장도 없는 것이고, 또 용이 가지고 있는 유니트가 또 어떤 게 있는지도 알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세헤라자드의 이야기 속에 나오 는 용병단 사람이 말했듯이 '적은 항상 네 번째 방향으로 오기 마련' 이 니까. "빌드 오더를 이렇게 해서야 되겠어? 적이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데 무작정 건물만 짓고 있을 수는 없잖아?" "젠장. 아까 못 봤어, 리파이? 하늘에서 마차들이 러쉬해 오면 그때는 방어고 뭐고 다 소용 없다니까." "꼭 하늘에서만 온다는 법이 어디있어? 이래가지고는 칼 한자루 딸랑 찬 보병 백 명만 달려와도 방어선 다 무너지겠다." "이건 일종의 도박이야, 리파이. 방어도 하고 마법 유니트도 키울 수는 없어. 두 마리 토끼를 한 번에 좇을 수는 없다고." "난 이번에 분명히 이겨야겠어.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두 마리 토끼 를 다 잡아야 해. 좇기만 해서는 무슨 소용이 있겠어?" 둘의 대화는 물론 잘해보자고 하는 대화였겠지만 도저히 결말이 날 것 같지 않게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저러고 있는 두 사람을 지켜보기만 하 고 있는 내 신세가 좀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경험 없는 초년생 이라고는 하지만 나도 프로 게이머임에는 틀림이 없는데 말이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난감해. 누군가는 싸우고 있고, 또 누 군가는 이렇게 멍하니 앉아만 있고... 나 원 참." 나는 혼잣말처럼 이렇게 세헤라자드에게 말했다. 하지만 세헤라자드는 내 말을 꽤나 심각하게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꼭 이길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위로라고 하는 말인 모양이었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위로 같지는 않은 말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저 세헤라자드의 얼굴만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 다. 바보 같게도. "그래. 이기겠지. 그리고 용이 뭔지 알아내겠지. 어떻게든. 그리고 나 서 켄을 살해한 놈이 누구인지, 또 부루터스가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는 지 뭐 그런 걸 다 알아 낼 수 있을 거야." 나는 세헤라자드에게 위로 받은 사람처럼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이 말 은 그저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지금 저 액정화면에서 나를 노려보고 있는 저 용의 정체를 밝혀낸다고 해도 지금으로서는 부루터스와의 연관성을 찾 아 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희망을 가지세요. 절망적인 순간에도 희망을 잃지 않는 게 프로 게이 머의 정신이잖아요." "그래. 나이트 무버 유정일도 그런 말을 했지. 하긴. 그런 마음가짐으 로 살았으니까 그렇게 대단한 게이머가 된 거였겠지만 말이야." 나는 내 데뷰전 때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나이트 무버 유정일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저 분들 보세요. 지금 저렇게 다투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분명히 동료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요? 서커스 벌판에서의 수르카와 그 일행처럼 요." 세헤라자드의 말 덕분에 나는 탐그루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떠올릴 수 있었다. "그래. 아톰과 리파이, 분명 동료의식으로 묶여 있을 거야. 나는 잘 이 해가 가지 않지만 말이야." 나는 턱을 만지작거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리파이와 아톰의 빌드오더 이야기는 끝도 없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나중에는 게임 경력이 어 쩌니, 승률이 어쩌니 하는 소리까지 나올 만큼 말이다. "어차피 한 참 기다려야 할 것 같으니까 다음 얘기나 좀 해봐." 나는 한숨을 내쉬듯이 이렇게 말했다. 세헤라자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하지만 이거 너무 자주 얘기를 하고 있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 요. 이거 좀 곤란한데요. 얘기가 끝나면 전 죽게 될지도 모르는데." 세헤라자드의 말에 나는 피식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도저히 그럴 수 없으리라는 것을 나도 알고, 또 세헤라자드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나는 세헤라자드를 지워버리기에는 너무도 많은 빚을 세헤라자드에 게 지고 있었다. "그래. 그 얘긴 탐그루 이야기가 끝나면 계속 하기로 하자구. 그래서. 그 서커스 벌판을 떠난 수르카는 어떻게 됐지?" "아뇨. 그 얘기가 아니에요. 탐그루에서 탈출하는 라이짐 일행의 이야 기가 나올 차례라고요. 수르카 이야기는 그 다음이에요." "아, 그래. 맞다. 잊어버릴 뻔했네. 그래. 그래서 어떻게 됐지? 기사단 의 추적을 따돌리고 탈출에 성공했나? 아니면 기사단에게 잡혀서 포로가 됐나?" "다행히도 라이짐 일행은 성황청 기사단의 추적을 따돌릴 수 있었습니 다. 그리 큰 피해 없이 탈출했다는 사실에 라이짐 일행은 일단 안도했지 요. 하지만 그 순간에도 탐그루는 더 복잡하고 절망적인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리파이와 아톰이 작전 회의를 계속하는 동안에 이렇게 세헤라자드의 이 야기는 다시 시작되었다. PRINTER/CAPTURE를 OFF 하시고 [ENTER] 를 누르십시오. 『환상 문학관-환상장편 (go FAN)』 3865번 제 목:[탐그루] 지는 꽃 피는 꽃 176 올린이:손서호 (김상현 ) 99/01/29 00:12 읽음:1640 관련자료 없음 -----------------------------------------------------------------------------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 지는 꽃 피는 꽃 달빛이 붉게 하늘을 물들이고 있는 밤이었다. 핏빛으로 번지고 있는 달 빛은 마치 밤하늘에 깊게 패인 상처처럼 보였다. 불길한 생각들이 예감처 럼 라이짐의 머릿속을 흔들어 놓고 있었다. 하지만 그럴 수록 조금이라도 더 몸을 똑바로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라이짐은 허리를 곧추 세웠다. 탐그루의 스파일 군 주둔지는 적막이 흐르고 있었다. 탐그루 시내 한 복판에서 술에 취한 사내가 내지르는 소리가 들릴 지경이었다. 어둠은 탐 그루 곳곳에 깊숙이 내려앉아 있었고, 주둔지의 유일한 빛인 연금술사의 등만이 바람결에 흔들리며 불빛을 어지럽게 흐트러뜨리고 있었다. 라이짐은 뒤를 돌아보았다. 하잔에서 한 순간도 쉬지 않고 강행군해 온 아케르 용병단의 병사들이 눈을 번득이고 있었다. 단원들이 내 뱉는 숨결 이 적막 속에서 은밀한 번져나가고 있었다. 어둠 속에 희미하게 보이고 있는 아케르 용병단은 어둠을 착착 소리없이 밟아 죽이며 전진하고 있었 다. 아케르의 옆으로는 발렌시아 제 일 백부장, 마사다 제 이 백부장, 제이 슨 제 삼 백부장, 미쥬 제 사 백부장, 그리고 신다루 제 오 백부장이 늘 어서 있었고, 바로 뒤에는 순무와 타호루가 각각 부관의 자격으로 서 있 었다. 라이짐은 아케르의 직속 십부장 자격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줄의 가 장 끝에 서 있었다. 직속 십부장이라는 위치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기도 했지만 다른 십부장들을 제치고 가장 앞줄에 서게 된 데에는 탐그루에서 유용한 정보를 입수해온 공로가 높이 평가됐기 때문이었다. 아케르는 보통 이상으로 라이짐의 공로를 인정했던 것이다. 라이짐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행여나 실수라도 하게 될 까봐 입은 굳게 다물고 어깨를 죽 펴고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서 있었다. 공로를 세워 지위에 오르게 되면 그만큼 뒷말도 무성한 법이라는 걸 라이짐은 잘 알고 있었다. 당당하게 자신만만하게 보여야 한다. 아무도 나를 앝보게 해서는 안된다. 라이짐은 이를 악 물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이 많았소. 나, 안토니오 장군이오." 안토니오는 아케르를 보자마자 대뜸 이렇게 한 마디 던지면서 오른 손 을 내밀었다. 씻을 상황이 되지 않아서인지 손에는 시커먼 때 자국이 선 명했고, 두꺼운 갑옷의 겉면에는 말라붙은 피와 땀방울들이 마치 무늬처 럼 수놓아져 있었다. 야전군인의 전형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아케르요. 이렇게 맞아 주시니 고맙소." 아케르는 점잖게 안토니오의 손을 잡았다. 둘이 악수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라이짐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사실 이 자리에 함께 하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라이짐은 두 사람이 얼마나 불편 할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안토니오 장군이야 분명 지원군을 받아들이는 입장이고, 아케르 용병단 은 지원을 해 주는 입장인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안토니오 장군은 스파일 의 정식 군단장이고 아케르야 일개 용병단의 대장에 불과하니 둘이 편안 한 마음으로 만나 웃으며 이야기하기란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 다. 하지만 안토니오 장군의 태도로 보아 안토니오 장군은 격식이나 신분 의 고하를 따지는 사람 같지는 않았다. 어쩌면 그렇게 아케르를 대해야 할만큼 상황이 다급하다는 말이 될 지도 모르지. 라이짐은 아무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케르 용병단은 흔들리는 연금술사의 빛 아래에서 정렬해 있었고, 하 늘에는 수많은 별들이 도열하여 탐그루를 굽어보고 있었다. 달빛은 점점 더 탁한 검붉은 빛으로 변하고 있었고, 그 주변에 둘러쳐진 붉은 달무리 에서는 웬지 침범할 수 없는 신성한 느낌마저 풍기고 있었다. 두 사람의 지휘관이 서로의 얼굴을 굳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둘 다 그리 편하지 않은 마음일 거라는 것을 알고 있는지 다들 아무 말이 없었 다. 하나같이 굳은 얼굴이었다. 불어오는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어 정적 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줄 때까지, 라이짐은 두 사람이 인사말을 나눈 후 아무 말도 없었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나도 긴장한 모양이 로군. 라이짐은 생각했다. "바람이 부는 군." 아케르가 말했다. 아케르는 이렇게 말하면서 먼 하늘을 응시했다. 라이 짐은 아케르의 목소리에서 이 말이 담고 있는 의미가 탐그루에 불고 있는 바람을 뜻하는 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연금술사의 빛이 아케르의 얼굴 에 닿아 이마에 새겨진 십자모양의 흉터에 그림자를 만들었다. "하지만 별로 좋은 소식은 아니지. 이젠 폭풍이 밀어닥칠 게 틀림없을 테니 말이오." 푸념하는 투로 안토니오 장군은 이렇게 하늘을 보면서 말했다. 겉보기 에는 태연해 보였지만 안토니오 장군도 틀림 없이 긴장하고 있었다. "아마 장군께서 그 폭풍의 눈이 되시겠소." 분명 점잖은 말투였지만 라이짐이 듣기에 아케르의 목소리는 도발적이 었다. 정렬해 있는 아케르 용병단의 병사들과 안토니오 장군의 병사들이 순간 바짝 긴장했다. 안토니오 장군의 볼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안토니오 장군이 아무리 자존심을 내세우려고 해도 상황이 그리 좋지 못하다는 걸 에이스를 통해서 라이짐은 알고 있었다. 라이짐이 알고 있다는 말은 아케 르 용병단에서 알아야 할 사람은 다 알게 되었다는 걸 의미한다. 지금 아 케르의 태도도 분명 상황을 잘 알고 있는 데에서 오는 자신감일 것이다. "그렇지. 말씀 잘 하셨소. 폭풍의 눈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면 별이 보인 다지요?" 안토니오 장군은 이렇게 말하더니 갑자기 큰 소리로 껄껄 웃기 시작했 다. 과장된 웃음도 아니었고, 그리고 우습다는 느낌이 드는 분위기도 아 니었는데, 안토니오 장군의 목소리는 허공에 울려 숙영지에 흐르고 있는 적막을 더욱 두텁게 만들었다. "기왕지사 이렇게 된 거 솔직하게 털어놓겠소. 우리, 밀리고 있소. 오 우거 한 놈 잡는 데 우리 애들 다섯 명이 필요하고, 다섯 명중에 한 두 놈은 꼭 다치니 시간이 흐를수록 상황은 점점 더 안 좋아지고 있소. 성 황청 녀석들, 있을 때는 걸리적거리는 것 같더니만 막상 그렇게 꽁무니를 빼고 보니 우리가 밀리기 시작할 줄 누가 알았겠소?" 라이짐은 속으로 쾌재를 올렸다. 이 말은 분명 안토니오 장군이 한 걸 음 양보하겠다는 뜻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아케르도 라이짐과 같은 생 각인지 약간의 미소마저 지으면서 안토니오 장군의 말에 동의를 표하고 있ㄳ다. 둘 사이에 흐르던 어색한 분위기가 조금씩 누그러 들었다. "하여간 이렇게 도와주러 오셨다니 고맙소. 솔직하게 말해서 원수같은 골빈 정치가들이 멍청하게 신병 나부랭이 천 명을 보내 온 것 보다, 이름 높은 아케르 용병단에서 이렇게 직접 와 주니 이 안토니오, 든든하외다." 안토니오가 함부로 스파일의 고위층을 헐뜯는 말을 하는 것을 보면서 라이짐은 에이스의 보고를 떠올렸다. 안토니오 장군은 용맹한 장군으로 이름이 나 있긴 하지만 국왕이나 귀족들과 사이가 좋지 않아서 항상 후방 지휘관으로만 돌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후방의 군단장으로만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것도 수도에서는 항상 멀리 떨어져 있는 군단장으로 말이지요. 백부장이나 참모 시절에는 바바 족과의 전투에서 많은 전과를 올려 촉망받는 지휘관이었습니만, 아 무래도 성격이 불같아서 수도 근처에 두기 불편했던 모양입니다." 에이스의 보고는 정확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런 장군이 병력을 이끌고 수도 주변이나 전방에서 바바 족과 대치하고 있다면 언제 병력을 돌려 자신의 목에 칼날을 들이댈지 알 수 없을 테니 말이다. "원래 먼 길 온 손님한테는 술을 권해야겠지만 애들한테 술 마시지 말 라고 해 놓고 내가 마실 수야 없지 않겠소. 내 대신 이걸 드리리다." 안토니오는 허리에 찬 칼을 뽑아들었다. 날 선 칼 빛이 달빛을 받아 퍼 렇게 빛을 발하자 라이짐은 자신도 모르게 몸이 움찔하고 말았다. "내 나이가 올해로 마흔 넷이오. 기념할 만한 해지. 전장에서 산지 삼 십년이 되는 해니까 말이오. 나, 말도 잘 못하고 뛰어난 전략 한 번 써 본 적 없지만, 그래도 이 안토니오, 전쟁터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잘 알 지. 아케르. 이번 작전은 당신이 지휘해야 한다는 거, 나 잘 알고 있소. 누구에게도 물러서야 할 때가 있다는 걸 잘 아니까. 오늘 당신, 맘에 들 었소. 내 이 칼 넘기지. 무슨 칼인지 알겠소?" 나는 물론이고 아케르도 그 칼이 의미하는 바룰 잘 알고 있었다. 그건 바로 스파일의 영주가 하사한 지휘관의 칼이었다. 칼자루에 새겨진 카를 로스 장군의 문양이 달빛을 받아 붉은 빛으로 번들거렸다. 라이짐은 순간 눈에 힘이 모아졌다. 위험할지 모른다. 칼빛이 라이짐의 감각을 자극하고 있었다. "난 잘 모르오만 스파일에서 가장 유명한 장인 한소가 만든 칼이라고 합디다. 그 칼로 사람 몇 베지는 못했소만, 그래서 아마 베는 맛은 더 있 을 거외다." 안토니오는 날을 공중으로 향하게 해서 아케르에게 칼을 내밀었다. 베 는 맛이라. 라이짐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불길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저런 성격의 사람이라면 언제 어디로 튈지 도저히 알 수 없다. 라이짐은 여차 할 경우 단검을 뽑을 수 있도록 조심스럽게 오른 발을 뒤로 뺐다. "좋은 칼이오." 아케르는 칼자루를 받아 쥔 뒤 조용하게 두 번 휘둘렀다. 칼빛이 번쩍 이며 어둠을 흔들어 놓았고,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라이짐의 귓가에 파고 들었다. 아케르의 등 뒤에 정렬해 있던 병력들의 눈빛이 더욱 빛을 발하 는 듯 했고, 안토니오의 옆으로 서 있던 병력들은 눈을 땅으로 내리 깔았 다. "폭풍의 눈은 조용하지만 폭풍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오, 안토니오." 아케르는 이렇게 말하면서 칼자루를 다시 안토니오에게 넘겨주었다. 안 토니오는 잠시동안 아케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힘이라..." 칼을 도로 받아들며 안토니오 장군은 이렇게 중얼거렸다. 안토니오 장 군은 칼날을 살펴보고 있었고, 라이짐은 그런 안토니오 장군을 예의 주시 하고 있었다. 다음 순간, 안토니오의 표정이 밝아지는가 싶더니 갑자기 다시 크게 웃었다. "아케르. 당신, 정말 마음에 드는 군. 마음에 들어. 하하하!" 안토니오 장군의 웃음소리가 탐그루를 날려 버릴 듯 밤하늘로 울려퍼졌 다. 그러자 아케르 단장도 안토니오 장군의 웃음을 받아 역시 호탕하게 웃었다. 두 사내의 웃음소리가 사방에서 메아리쳐 주둔지에 정렬해 있는 두 부대의 병사들의 마음속으로 파고들었다. 그제야 라이짐은 아무도 눈 치 채지 못하게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이번 웃음은 라이짐의 가슴에도 뜨거운 기운으로 와 닿았다. "술자리는 오우거들을 소탕한 다음으로 미룹시다." 웃음을 멈추고 아케르가 말했다. 아케르도 안토니오 장군이 마음에 드 는 모양이었다. "좋지, 암. 좋고 말고." 연신 고개를 끄덕이면서 안토니오 장군이 말했다. 사석이었다면 당장이 라도 아케르 단장의 어깨에 손을 올릴 분위기였다. "우리 병사들이 먼 길을 오느라 피곤하오. 이 정도로 끝내고 이제 쉬는 게 어떻겠소?"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아케르 단장이 안토니오에게 물었다. 안토니오는 여전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좋다구, 좋아." 안토니오는 이렇게 말하고는 다시 칼집에 칼을 집어넣었다. 아케르는 안토니오에게 등을 보이고 돌아섰다. 백부장들에게 병력의 해산을 명령하 기 위해서였다. 아케르의 등 뒤에서 안토니오는 카를로스의 문양이 새겨 진 칼자루를 만지작거리면서 웃음을 지었다. 라이짐은 그 웃음이 어린아 이의 그것과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햇살이 높은 곳에서 내리 붇고 있었다. 바야흐로 여름이 온 것이다. 아 직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된 건 아니었지만 먼길을 온 피로에다가 조금도 쉬지 못하고 아침 일찍 출발했기 때문에 라이짐은 헐떡이는 숨을 겨우 조 절할 수 있었다. 산길을 오르는 길은 에이스와 차이린이 인도했다. 길을 기억하는 능력 에 있어선 에이스를 따라갈 사람이 없기 때문에 에이스가 앞장 선 것은 이해할 수 있었지만 차이린이 바로 옆에서 길 인도를 하고 있는 것은 좀 의외였다. 아무래도 사냥꾼 출신이라는 점이 작용한 탓도 있겠지만 전체 행군 속도를 조절하는 데에도 차이린을 따라갈 사람이 아케르 용병단 안 에는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번 임무는 특임 부대가 수행하기로 결정되었다. 지난 임무에 함께 했 던 라이짐과 차이린, 가투신과 에이스는 물론이고 가투신 십부윈인 로키 와 하진도 함께 하게 되었다. 로키는 고대 언어를 그나마 좀 읽을 수 있 기 때문에 특임 부대에 편성 된 것이었다. 그건 사실 별로 이상할 것도 없었고 어쩌면 거의 예견되다시피한 부분이기도 했다. 하지만 하진은 어 떤 능력이 있어서라기 보다는 라이짐이 주장해서 함께 오게 된 거였다. 라이짐이 생각하기에 하진은 수르카를 포함한 동기들이 모두 사라진 지 금, 용병단에 남아있는 유일한 동기이기도 했고 친구이기도 했다. 아케르 가 함께 가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누가 좋겠냐고 물었을 때 라이짐은 에 이스 자매를 떠올리지 않았다. "동기 하진과 함께 가고 싶습니다." 라이짐은 이렇게 대답했고 아케르는 좋다고 말했다. 그것으로 결정은 내려졌지만, 아케르는 왜 하필 하진이냐고 라이짐에게 물었다. 라이짐은 이렇게 대답했다. "경험만 쌓는다면 훌륭한 단원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동기인 제가 하진의 가능성은 누구보다도 더 잘았고 있습니다." 라이짐의 말에 아케르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사실 라이짐이 하진을 추천 한 것은 단지 하진의 성격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라이짐의 머리가 희게 새었을 때, 라이짐을 이상한 눈으로 보지 않았던 것은 하진 한 명 뿐이었다. 떠버리는 성격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장사할 때를 제외하고 는 늘 솔직하다는 점 또한 라이짐에게는 믿음을 주었다. 지금은 한 사람 의 동료가 아쉬울 때다. 너무나도 빠른 속도로 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지 금, 라이짐에게는 친절하고 따뜻한 눈길보다 질투와 시기의 눈길이 더 많 이 몰리고 있을 게 분명했다. 이럴 때 흰 머리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 던 하진이라면 분명히 좋은 동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라이짐은 이런 생 각으로 하진을 추천했다. "단장님이 왜 칼을 도로 넘겨주었는지 알아? 안토니오, 그 자식 칼은 주면서 칼집은 단장님에게 건네주지 않았다고. 무슨 말인지 알아? 칼잡이 가 칼집을 포기하지 않을 때에는 승부에 미련이 남아있다는 뜻이잖아. 단 장님은 그걸 감지한 거야. 사실 안토니오는 스파일의 장군이잖아. 아마 단장님 보다 자신이 한 단계 더 높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겠 지, 틀림 없이. 그러니까 칼집을 남겨둘 정도의 자존심은 있었던 거야. 칼을 되돌려준 단장님의 행동은 체면을 세워주겠다는 뜻도 있었고, 거기 다가 앞으로 같이 일할 사이니까 믿음도 주겠다는 뜻도 있었던 게 틀림없 어. 그런 것 같지 않아?" 하진은 지치지도 않는지 라이짐 옆에서 계속 이렇게 떠벌였다. 라이짐 은 한 귀로 듣고 한귀로 흘리면서 앞서 가고 있는 에이스와 차이린의 뒷 모습을 보았다. 이제 거의 다 온 것 같은데. 나무들의 배치가 눈에 익었 다. 어디선가 새들이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뭇잎들이 햇빛을 받아 초 록으로 반짝이며 흔들리고 있었다. 『환상 문학관-환상장편 (go FAN)』 3866번 제 목:[탐그루] 지는 꽃 피는 꽃 177 올린이:손서호 (김상현 ) 99/01/29 00:13 읽음:1462 관련자료 없음 -----------------------------------------------------------------------------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오우거의 본거지를 파괴하는 일은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아케르는 용병 단의 공로를 최대한으로 하고 피해는 최소화하기 위해서 비밀을 유지하는 방식을 선택했는지 모르겠지만, 라이짐으로서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방식이었다. 만약 대대적으로 토벌 작전을 벌인다면 어찌되었건 공은 안 토니오 장군과 나누어 가지게 된다. 하지만 이렇게 특임 부대를 통해 비 밀리에 작전을 성공시킨다면 용병단이 공을 독점할 수 있을 게 분명했다. 물론 그것이 아케르 개인의 공명심에서 나온 생각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는 라이짐이었지만 그래도 다른 단원들에게 알리지 않고 이렇게 비밀리 에 일을 진행하고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에이스의 말대로 라이짐이 맡고 있는 임무는 항상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하 는'게 아니었던가. 이런 일에 익숙해 져야 한다. 라이짐은 스스로를 이렇 게 타일렀지만 오전의 햇살은 너무나도 눈 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혹시 칼자루를 안토니오에게 돌려준 것도 어쩌면 그런 포석이 깔려 있 는 게 아닐까. 나중에 공을 독차지하게 되더라도 안토니오와의 관계를 매 끄럽게 가지기 위해서 말이다. 아케르 단장이야 평소에 별 말 없이 사람 들의 의견을 귀담아 들은 다음에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하고 최종적으 로 결정해서 지시하는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속마음을 알기가 그리 쉽지만 은 않았다. 아케르의 지시는 일단 수행한 다음에야, 아, 이런 뜻으로 이 런 지시를 내렸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런 방법을 배워두는 것도 좋지. 틀림없이 언젠가 써먹을 때가 있을지 몰라. 라이짐 은 생각했다. "그런데 성황청 녀석들, 겁먹은 게 분명해. 그렇게 쉽게 물러나다니 말 이야. 혹시 스파일 하고 타실 장군들한테 엿먹으라는 심정으로 병력을 물 린 것 아닐까? 왜, 소문에 듣자하니 스파일에 있는 실리포니아 쪽에서 성 황청하고 한 판 붙고 있다고 하던데. 충분히 그럴 수 있지 않겠어?" "한 판, 붙고 있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숨이 차는지 말을 토막토막 뱉어내면서 로키가 말했다. 로키의 고향이 로스안에서 가까운 홀리우드라고 했던가. "들리는 소문이 그렇다고. 뭐, 진짜인지 아닌지는 알 수가 있나. 하여 간 로스안에서 성황청하고 스파일 군이 마찰이 있는 건 사실인 것 같아." "칫. 웃기는, 소리, 하지 마. 실리포니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 같이, 용맹하고, 훌륭한 전사들이야. 성황청, 나부랭이하고는, 비교 가, 되지 않는다고." 여전히 숨을 헐떡이면서도 로키가 말했다. "그래, 그래. 알았어. 하지만 성황청이 나부랭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 로 만만한 조직은 아닌 것 같던데.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성황청이 희한 한 성구를 개발했다며? 예전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강력한 걸 말 이야." 하진의 말을 듣는 순간, 라이짐은 뭔가 일이 어긋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탐그루에서 가투신, 차이린과 함께 빠져 나올 때, 그렇게도 맹렬 히 추격해 왔던 성황청의 기사단이 이렇게 쉽게 탐그루에서 손을 떼리라 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보낸 에이스가 얻어온 정보 에 따라 성황청이 탐그루에서 병력을 철수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라이 짐은 가장 먼저 그 의문이 들었다. 더 나은 성구를 개발했고, 또 오우거 의 본거지를 추적할 정도의 집념을 보이던 성황청이 어째서 그렇게 쉽게 탐그루를 포기하고 돌아섰을까. 어쩌면 성황청 내부에 어떤 문제가 생겼 을지도 모르고, 성구를 운용하는 데 문제가 생겼을지도 모른다. 혹시 우 리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도 모르고. 아마 아케르 단장도 그 정도의 생각은 하고 있을 것이다. "기회의 여신은 앞머리는 길지만 뒷머리는 없다구 하지. 앞에서 올 때 잡지 않으면 지나간 후에는 아무리 잡으려고 해도 잡아지지 않는 것이 기 회다." 어떤 위험 부담이 있다고 하더라도 용병단에게 있어서 탐그루를 장악할 만한 기회가 지금 밖에 없음을 아케르는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라이짐 은 그런 아케르의 말에 일단 따르기로 마음먹었다. 아케르 단장의 지시는 일단 다 따른 다음에야 의미를 알 수 있는 경우가 허다하니까. 라이짐의 눈에 나뭇가지 끝에 위태롭게 새집이 하나 얹혀 있는 것이 보 였다. 저곳에서 새가 자라나 하늘을 날아다니면서 울게 된다니. 라이짐이 보기에 새 집은 나무 둥치를 발로 한 번만 걷어차도 땅바닥으로 떨어져 버릴 것만 같았다. 어떤 경우에든 추락은 한 순간이다. 잊으면 안된다, 라이짐. 라이짐은 스스로에게 이렇게 다짐했다. 햇빛은 여전히 따가웠고, 둥지속의 새끼 새들은 쉬지않고 재잘거렸다. "성구? 성구가 무서워? 용병은, 칼로 말하고, 칼로 승부하는, 사람들이 야. 칼, 이외의 것은, 사용하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아. 그게, 우리, 용병단의 전통이라고." "그래? 그럼 활을 쏘는 사람은 용병이 아닌가? 또 타호루 님의 마법은 또 어떻고?" "말하자면, 그렇다는 거지. 하지만, 병사들은, 역시 칼이, 잘, 어울 려." "그렇게 계속 떠들 힘이 남아있다면 좀 더 부지런히 차이린을 쫓는 게 어때요?" 아마 가투신이 이 순간 나타나 둘의 대화를 중지시키지 않았다면 오우 거의 본거지에 도착할 때까지 두 사람은 이야기를 계속 나누었을 것이다. 둘의 대화를 중지시킨 가투신은 지친 기색은 없어 보였지만 이마에 흐르 는 땀방울이 이 작전이 그리 쉽지 만은 않다는 걸 말해주고 있는 듯 했 다. "이곳입니다." 에이스가 말했다. 다 왔다는 생각에 조금은 후령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 만, 지난번에 올 때보다 훨씬 오래 걸은 느낌이 들었다. 라이짐은 길게 숨을 내쉬며 호흡을 골랐다. 찝질한 땀방울이 입안으로 들어왔다. 한 번 왔던 곳이지만 며칠 사이 동굴 근처에는 잡풀이 많이 자라나 있 어서 꼭 다른 장소처럼 보였다. 아마도 그사이 한 차례 내렸던 비 때문에 그런 모양인 것 같다고 라이짐은 생각했다. "풀이 많이 자라있네요." 가투신이 주변 나 있는 풀을 보면서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을 팔뚝으로 한 번 닦고 난 후 말했다. "여름에는 하루가 다르게 풀이 자라곤 하지요." 여기저기 무성하게 솟아올라 있는 잡풀을 보면서 차이린이 말했다. 잡 풀은 바르도 대륙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하디 흔한 은빛의 꽃망울들이 달려있었다. 저 꽃망울이 영글어 터져 은빛 가루를 날리면 은빛의 가루는 여기저기로 날아가 싹을 틔우고, 그러고 나면 잡풀은 여지없이 늘어나곤 하는 것이다. 잡풀에 어울리지 않게 반짝이는 은빛 꽃가루라. 라이짐은 심호흡을 몇 번 한 다음에 숨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털썩 주저 않고 싶 었지만 일단은 참아야 했다. 차이린이 분석을 마칠 때까지는 일단 서 있 어야 했다. "오우거들이 매일 밤 탐그루를 습격하러 나가지만 늘 같은 길로만 다니 는 모양이에요. 이것 보세요. 잡풀이 쓰러져 있는 방향이 일치하잖아요? 게다가 여기 꽃가루가 날린 방향을 보세요. 늘 비슷한 시간대에 비슷한 방향으로 이동하지 않는다면 이런 흔적은 생기지 않아요." 차이린이 풀에 묻어있는 꽃가루를 가리키면서 이렇게 설명했다. 하지만 라이짐은 그게 은빛 꽃가루인지, 남아있는 이슬인지, 아니면 그냥 햇빛을 받은 이파리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하긴 이 여름 날 햇살 아래 이슬이 남아있을 리가 없긴 하지만 말이다. "이제 들어가지요." 가투신이 허리를 숙이고 있는 차이린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차이린. 차이린이 훌륭한 사냥꾼이라는 거 다 알아요. 그렇게까지 하 지 않아도요. 그러니까 이제 그냥 임무에 충실하는 게 어때요?" 요컨데 재주를 자랑하는 일은 그만 두라는 말이었다. "...예." 차이린은 부끄러운지 붉어진 얼굴을 하고서 간신히 가투신에게 대꾸했 다. 라이짐은 그런 차이린의 모습을 아직까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가투 신 옆에 서 있던 로키는 늘 보아왔던 풍경이라는 듯이 슬쩍 미소를 짓고 는 먼저 동굴로 향했다. 라이짐은 에이스와 함께 그 뒤를 따랐다. 여행자용 연금술사의 등이나 횃불을 켜려고 했지만 동굴 안은 무척 밝 았다. 연금술사의 빛과는 조금 다른, 초록색 빛이 동굴 안에 들어가자 눈 에 들어왔다. 동굴 내부는 매끈한 벽면으로 되어 있었다. 라이짐은 이런 동굴은 처음 보는 지라 벽면에 손을 대 보았다. "손대지 맛!" 차이린이 날카롭게 라이짐에게 소리쳤다. 라이짐은 놀라서 손을 떼고 말았다. "라이짐. 내가 지난번에 이야기했잖아. 이 동굴에는 마법이 걸려 있다 고. 한 순간 잘못하는 날에는 오우거와 함께 이 동굴에 영원히 묻히게 될 지도 몰라." 말하는 차이린의 표정은 진지했다. 그 표정에 모두들 더욱 긴장이 되는 지 묵묵히 차이린의 뒤를 따르기만 했다. 떠버리 하진마저도 아무 말이 없었다. 발걸음 소리가 벽면에 부딪쳐 동굴 안에 울리고 있었다. 발걸음 소리는 메아리가 되어 몇 배의 소리로 되돌아 왔다. 누가 듣는다면 일개 백부는 움직이고 있다고 여겨질 만큼 소리가 컸다. "여긴 자연적으로 생긴 동굴이 아니라 사람이 만든 동굴이야. 고대의 유적이라고." 차이린은 나즈막하게 이렇게 말했다. 매끈한 벽면 때문에 울리는 차이 린의 목소리는 사람의 목소리가 아닌 것처럼 메아리쳤다. 그 소리를 듣자 라이짐은 꼭 들어서는 안 될 소리를 듣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벽면은 금속인 모양이었다. 초록색 빛을 받은 벽면이 꼭 이끼가 달라붙어 있는 것같은 탁한 초록빛을 내고 있었다. "저건 뭔가요, 로키?" 가투신이 로키에게 물었다. 가투신이 가리킨 곳은 동굴 위쪽에 달려있 는 빛의 근원지였다. "전에 본 글자입니다. 에그시트. 도망치라는 뜻이지요." 로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요......?" 가투신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었다. 라이짐은 그 얼굴을 보면서 뭔가 심 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동굴은 꽤 깊었다. 한참을 들어간 후에야 라이짐 일행은 통로가 아닌 곳에 다다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곳은 예상했던 오우거의 본거지가 아 닌, 두꺼운 철로 만들어진 벽면이었다. "읽어봐, 로키." 차이린이 로키에게 지시했다. 로키 차이린의 태도가 좀 마땅치 않은 모 양이었다. 차이린의 말을 들었을 때, 로키의 눈썹이 꿈틀거리는 것을 라 이짐은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로키는 군말 없이 벽면 에 적혀 있는 글자를 읽었다. 벽면에는 'G-6'라는 고대어가 적혀있었다. "먼저 지-6이라고 씌여 있군요. 고대인들은 문자와 번호로 장소를 표시 하는 걸 좋아했습니다. 이름을 붙이기가 귀찮았던 모양이지요." 로키는 농담이라고 한 모양이었지만 아무도 웃지 않았다. 그만큼 분위 기는 가라앉아 있었던 것이다. 로키는 벽면에 적혀 있는 말을 읽은 뒤, 문 옆에 달려 있는 작은 상자로 시선을 옮겼다. 그곳에 적혀있는 말도 역 시 고대어였고, 'Insert card and enter Password'라고 적혀있었다. "여긴 이렇게 적혀 있군요. 인서르트 카르드 엔드 엔터르 파소드." "무슨 뜻이지요?" "카르드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군요. 하여간 뭔가를 집어넣고 파소드를 행하라. 이런 뜻입니다. 가투신 십부장님." "파소드는 무슨 뜻이지요?" "소드는 칼이라는 뜻이지만, 파가 앞에 붙으니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 다. 파는 보통 높고 강한 걸 뜻하는 말인 것 같은데요." "난감하군요." 가투신은 턱에 손을 괴더니 이렇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난감한 것은 가 투신 혼자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모두들 하나같이 굳은 얼굴이었다. "일이 꼬이고 있어. 이 뒤에 오우거의 본거지가 있는 게 분명한데..." 차이린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이렇게 육중한 철문으로 봉해져 있다면 분명 그 뒤에는 뭔가가 숨겨져 있을 게 분명했다. 라이짐은 철문을 두드 려 보았다. 어찌나 두꺼운지 울리는 소리마저 들리지 않았다. 성황청 기 사단도 어쩌면 여기까지 왔을 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 건 바로 그 순간 이었다. 마지막으로 본 성황청 기사단은 분명 오우거의 뒤를 추적하고 있 었다. 만약 성황청 기사단이 이곳까지 왔다면 이 철문 앞에서 포기했을 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내가 성황청 기사라면 강력한 성구로 문을 박살 냈을 텐데. 하지만 지금 이 문에는 작은 흠집하나 없었다. 그 렇다면 여기까지 오지 않았다는 말이 되는 걸까? 라이짐은 머리가 혼란스 러워졌다. "뭔가를 집어넣고 파소드를 행하라. 도대체 뭘 집어넣으라는 거야? 또 파소드는 뭐고?" 하진이 투덜거렸다. 그런데 라이짐은 파소드라는 말을 듣자 마소드의 검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마소드의 검은 마법이 담겨있는 검이라는 말 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파소드도 마소드처럼 마법이 담겨 있는 어떤 칼을 뜻하는 말이 아닐까? 그렇다면 마법으로 열라는 말이 분명하 다. 그런데 지금 마법을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라이짐은 왼 손으로 양 쪽 관자놀이를 누르며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생각해 보았다. 검지에 끼워진 반지가 이마에 닿았다. 별 선택의 여지가 없을 것 같았다. 라이짐은 조심스레 마법의 말을 외웠다. "승리는* 우리의* 것이다*" 그러자 부연 빛을 발하며 에질리가 나타났다. "예, 부르셨습니까. 반지의 주인이시여." 로키와 하진은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고, 차이린은 놀란 게 분명했지만 태연한 척 입술을 굳게 다물고 서 있었다. 놀라지 않는 것은 가투신과 에 이스뿐인 것 같았다. "타호루 님의 반지로군요." 가투신이 말했다. 하긴. 예전에 가투신과 함께 용병단을 찾아 올 때에 도 가투신은 정령에 대해서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마 정령을 전에 본 적이 있는 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그런건 지금 중요한 일이 아니 다. "에질리. 여기를 통과하기 위해선 마법의 말이 필요한 거 같은데. 도와 줄 수 있어?" "저는 반지의 정령. 주인이 원하는 일은 뭐든지 해 드릴 수 있습니다." 아무 감정 없는 에질리의 목소리는 동굴 안에 한기가 들게 만들었다. 라이짐에겐 그런 에질리의 목소리가 전과는 달리 점점 익숙해지고 있었 다. "이 문은 고대의 마법으로 봉인되어 있습니다. 느낄 수 있습니다. 마칸 의 힘을. 그리고 고대인의 힘을." 이렇게 말하는 에질리의 목소리는 가식적으로 존칭을 사용하고 있는 듯 했다. 라이짐은 어쩐지 에질리가 비웃음을 짓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부연 형상이라 분명하게 알아볼 순 없었지만. "그래서. 열 수 있다는 말이야 없다는 말이야?" 『환상 문학관-환상장편 (go FAN)』 3867번 제 목:[탐그루] 지는 꽃 피는 꽃 178 올린이:손서호 (김상현 ) 99/01/29 00:14 읽음:1505 관련자료 없음 -----------------------------------------------------------------------------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라이짐이 짜증난다는 듯이 에질리에게 물었다. 에질리는 천천히 몸을 라이짐 쪽으로 돌렸다. 모두의 시선이 에질리에게 모아졌다. 라이짐은 에 질리의 기세에 눌려 하마터라면 한 걸음 뒤로 물러날 뻔했다. 하지만 라 이짐은 반지의 주인답게 에질리에게 맞섰다. "에이스의 육체가 필요합니다."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에질리가 말했다. "에이스의 육체라고?" "저는 반지의 정령. 이 문의 마법을 통과하려면 누군가의 육체가 필요 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에이스의 육체가 가장 좋을 것 같군요." 라이짐은 에이스를 돌아보았다. 에이스는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지만 긴 귀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걸로 보아서 좀 곤란하다고 느끼는 모양이었다. "...에이스에게 지장이 있는 일은 아니겠지?" "저는 잠시 육체만 빌릴 뿐입니다. 에이스에게 어떠한 지장도 있을 리 가 없지요." 차라리 자신의 육체를 빌릴 수는 없느냐고 라이짐은 묻고 싶었다. 부하 를 아끼는 훌륭한 지휘관이라면 분명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라이 짐은 그렇게 말할 수 없었다. 그러기에 라이짐은 육체를 빌려준다는 일이 너무 겁이 났던 것이다. "검은 엘프족의 육체에는 정령이 쉽게 깃들 수 있습니다. 사람은 좀 곤 란하지요." 라이짐의 생각을 읽었는지 에질리는 이렇게 말했다. 라이짐은 속으로 안도의 마음이 드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 만 부하를 융통성 있게 부리는 것도 지휘관이 해야 할 일이라고 자위하면 서 라이짐은 이렇게 말했다. "좋아. 그렇게 하지." 하지만 라이짐은 에이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물론 지금 의 라이짐으로서는 에질리의 말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알 수 없 었지만 에질리의 요청을 허락하는 것 말고는 다른 수가 없었다. 이는 만 약 에이스가 육체를 빌려주는 일이 싫다고 말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말이었다. "에이스. 에질리의 말을 들어. 명령이다." 라이짐의 말에 에이스는 검은 엘프 족답게 '예, 알겠습니다', 하고 짧 게 대답했다. 하지만 라이짐의 귀에 에이스의 목소리는 어쩐지 힘이 없는 것 같이 들렸다. 에질리의 형상이 천천히 떠가는 듯 에이스에게로 옮겨졌다. 차이린은 놀랍지 않다는 표정을 지으려고 너무 애쓴 나머지 어색하게 굳은 얼굴이 되었고, 하진과 로키는 입을 쩍 벌리고 에질리가 에이스의 몸 속으로 스 며드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안개가 햇살 속에서 나무들 사이로 사라지는 것처럼 에질리는 에이스의 몸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에이스? 에질리?" "지금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반지의 주인이여." 라이짐의 질문에 에이스가 대답했다. 에이스의 목소리는 완전히 에질리 의 그것으로 변해있었다. 하지만 라이짐이 놀란 것은 에질리의 목소리 때 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눈빛이었다. 에이스의 눈빛은 싸늘하게 식어 라이 짐을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 에이스가 가지고 있던 감정 없는 눈빛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라이짐만 그렇게 느낀 것은 아니어서 모두가 입을 굳게 다물고 에이스의 몸을 빈 에질리의 행동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에이스의 몸을 빈 에질리는 천천히 문 옆에 달려 있는 상자로 향하더니 오른 손을 상자 위에 얹었다. "마칸의 힘은 강력합니다. 이토록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이 렇게 건제한 걸 보면 말이지요." 에질리의 목소리였다. 라이짐은 늘 보던 에이스의 입에서 에질리의 목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다는 사실이 생경하게 여겨졌지만, 그래도 애써서 태연하게 물었다. "지금 그 말은 마법의 말인가?" "아닙니다. 그저 혼잣말입니다." 라이짐은 마법의 말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지만 그래도 에질리 의 대답이 그리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여기는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그러니까 오우거의 여러 본거지 중 한군 데이지요." "잠깐. 에이스, 아니 에질리. 지금 그게 무슨 말이지?" 차이린이 물었다. 라이짐은 차이린의 목소리에서 다급함을 느낄 수 있 었다. "팜 산맥에는 오우거의 본거지가 여러 군데 있어요. 여긴 그 중에 한 군데에 불과합니다. 이 철문 뒤로는 통로가 있고, 그 통로는 각각의 본거 지와 지하로 이어져 있습니다." "그,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요?" "모두 불태우는 수밖에 없습니다." 가투신의 말에 에질리의 목소리가 답을 했다. "젠장. 팜 산맥이 완전히 불바다가 되겠구만." 이제는 좀 진정이 되었는지 로키가 인상을 쓰면서 중얼거렸다. 그러자 라이짐이 재빨리 덧붙였다. "여름이니까 불은 크게 번지지 않을 거야." 하진은 지금 무슨 말이 오가고 있는지 몰라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잠깐만, 잠깐만. 지금 무슨 소리들을 하는 거야? 내가 지금 듣기로는 여기 말고도 오우거의 본거지가 여러 군데 있다고 하는 것 같은데, 거길 일일이 다 찾아서 불태우자고? 그게 말이나 될 법한 소리야? 우리 가지고 는 어림도 없고, 아니 아케르 용병단 전체가 다 나선다고 해도 도저히 될 법한 일이 아니잖아. 안 그래?" 하진이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았다. "하진. 문제는 말이야, 에질리가 그곳들을 다 찾아낼 수 있느냐에 달려 있는 것 같은데." "찾아낼 수는 없습니다." 라이짐의 말에 에질리가 즉시 대답했다. 라이짐은 너무 빨리 벽에 부딪 쳐 버리게 되자 실망할 틈도 없었다. 단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좋을까 를 생각하는 데에 급급할 뿐이었다. "하지만 모두 불태울 수는 있지요. 바로 여기서요." 에이스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라이짐은 에이스가 그런 식으로 미 소를 짓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에질리의 미소라면 저럴지 모르지. 친 절한 듯 하지만 실은 비웃는 것 같은 미소. 목소리하고 똑같아. 존칭을 쓰는 것 같으면서도 비웃는 말투. 라이짐은 소름이 돋았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거지? 찾을 수도 없는 곳을 불태울 수 있 다니?" "오우거의 본거지는 위험에 처했을 경우 스스로 불타 없어지도록 마법 이 걸려 있습니다. 여기서 그 마법을 동시에 통제한다면 한 순간에 오우 거를 날려버릴 수 있습니다." 에질리의 말에 가투신과 차이린의 얼굴에 놀랍다는 듯한 기색이 보였 다. 그들은 에질리에 대해서 새삼 감탄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뭘 망설이지? 에질리 시작해." "무슨 말이야, 라이짐. 신참 주제에 네가 지금 그런 결정을 내리겠다 고?" 라이짐이 채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로키가 라이짐의 말을 잘랐다. "아냐. 지금은 라이짐의 판단이 옳아. 여기서 그냥 돌아갈 수는 없잖 아?" "그건 그렇지만 차이린 십부장 님. 만약 팜 산맥에 산불이라도 나게 된 다면 어떻게 될지 아십니까? 이 근처만 해도 화전을 일구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피해를 보게 될 지도 모릅니다." "그래? 그럼 그냥 돌아갈까? 그리고 오늘 밤 오우거에게 죽게될 사람들 의 가족에게는 뭐라고 말하지? 화전 일구는 사람들이 피해를 볼지 몰라서 그냥 돌아왔다고 할까?" 라이짐이 말하자 로키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함부로 말하지 마.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명이 걸려 있는 문제야. 가볍게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게 아니야." 화를 간신히 억누르면서 로키가 라이짐에게 쏘아붙였다. "로키. 미안하지만 네 의견은 중요하지 않아. 이곳의 현장 지휘관은 나 를 포함해서 여기 십부장 두 분이야. 그리고 함부로 말하는 건 너지 내가 아니야. 이곳이 날아가던, 팜 산맥 전체가 불더미가 되건 결정은 지휘관 이 하는 거야." 라이짐은 마음속에서 뭔가가 불타오르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일단 로 키와 말다툼을 벌이게 되자 자신이 정말로 팜 산맥을 통채로 날려버릴 수 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 속에서 타오른 불길은 머리끝을 향해 치솟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큰 소리가 터져 나올 것 같았지만 라이짐은 꾹 참았다. "차이린 십부장 님. 가투신 십부장 님. 이제 결정은 내려졌습니다." 라이짐은 이렇게 말해놓고도 자신의 말투가 아케르의 그것과 닮았다는 사실에 스스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흥분한 탓일까. 라이짐은 조금은 후회의 마음이 들었지만 가투신과 차이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별 수 없지요. 지금이 아니라면 언제 또 기회가 있을지 모르 니까요." 가투신은 이렇게 대답했지만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차이린은 대답 도 하지 않고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라이짐. 그럼 빨리 해치우고 돌아가자구." 하진이 심드렁한 표정을 하고서 라이짐에게 말했다. 그는 무슨 일이 났 냐는 듯한 얼굴로 동굴 벽을 툭툭 차고 있었다. 라이짐은 그런 하진의 모 습에서 배울 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진은 다른 사람의 일은 전혀 관심 이 없다. 자신에게 유리하고 필요한 부분이 발견되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머리가 희게 변했을 때도 태연하게 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에질리." 라이짐은 에이스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라이짐의 말은 빨리 하라는 재촉의 말이었다. 에질리가 스며든 에이스는 고개를 끄덕였 다. 이제 곧 에이스가 이곳을 불태우리라. 내 명령에 의해서. 라이짐은 이렇게 생각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작전을 지휘하고 있다고 생 각하니 뿌듯함과 함께 웬지 모를 희열이 느껴졌다. 그래. 이런 식으로 성 장하는 거야. 에이스의 오른 손이 잠시 움직이는가 싶더니 동굴 안에 흐르고 있던 초 록색 불빛이 붉게 변했다. 순식간에 동굴 안이 피칠을 한듯 붉게 물들었 다. 사방에서 경고 나팔 소리 같이 높고 찢어지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이제 곧 동굴은 불타게 됩니다." "뭐?" 가투신은 에질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동굴 입구 쪽을 향하여 뛰기 시작했다. 천장에서 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생 처음 듣는 어조 의 목소리였다. 고대어인 것 같았다. 말뜻은 알 필요가 없었다. 만약 여 기서 빠져나가지 못한다면 모두다 불타 죽게 될 게 분명한 마당에 지금 무슨 소리를 나건 그 의미를 알아봤자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었다. 모두들 앞다투어 가투신의 뒤를 따라 통로를 거슬러 뛰기 시작했다. "에이스, 뛰어!" 라이짐은 이렇게 소리쳤다. 검은 엘프 족의 습성을 잘 알고 있는 라이 짐은 명령 없이 에이스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 다. 하지만 에이스는 움직이지 않았다. "뭐해!" "저는 반지의 정령. 전 죽지 않습니다. 뛸 이유가 없지요." 『환상 문학관-환상장편 (go FAN)』 3872번 제 목:[탐그루] 지는 꽃 피는 꽃 179 올린이:손서호 (김상현 ) 99/01/30 00:04 읽음:1510 관련자료 없음 -----------------------------------------------------------------------------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라이짐은 에이스의 얼굴에서 살기를 읽을 수 있었다. 두려움 보다는 공 포심에 가까운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표정이었다. 이건 결국 자기 자신을 죽이려는 것 아닌가? 에질리는 정말 다른 생명은 자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건가? 하지만 지금은 시간이 없었다. "에이스 뛰어!" 라이짐은 이렇게 말하고는 강제로 에이스의 손을 잡고 뛰기 시작했다. 동굴 벽면이 점점 더 자주 붉게 물들었다. 라이짐의 눈에는 불타오르는 빛처럼 여겨지기도 했고 흘러 내리는 핏물처럼 보이기도 했다. 동굴에 울 리고 있는 낯선 여자의 목소리도 점점 다급하게 들려왔다. 여기서 죽는 걸까. 라이짐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바람이 라이짐의 머릿결을 함 부로 흐트러트리고 있었다. "빨리! 빨리!" 어느 새 동굴의 입구가 눈에 들어왔다. 입구에는 가투신이 서서 어서 뛰라고 손짓을 하고 있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라이짐은 속으로 이 렇게 중얼거렸다. 꼭 잡고 있는 에이스의 손을 놓아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잠시 머리를 스쳤다. 그렇게 하면 조금이라도 더 빨리 밖으로 나갈 수 있 을 것만 같았다. 다음 순간 맑은 공기가 느껴지면서 햇살이 눈을 찔렀다. 동굴이 불타버 리기 전에 나오는 데 성공한 것이었다. 라이짐은 자신도 모르게 고함을 질렀다. "으아아아아" "이거, 오우거를 보지도 못하고 임무를 완수한 셈이 되었어. 우습지 않 아? 라이짐?" 하진이 숨을 헐떡이면서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까지 말을 늘어놓을 줄 이야. 못 말린다니까. 그때였다. "빨리 뛰어! 동굴 근처에 있으면 위험해!" 가투신은 이렇게 말하면서 수풀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가투신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나머지 사람들도 가투신의 뒤를 따라 뛰었다. 라이짐 도 수풀 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 순간이었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충격 이 라이짐의 등 뒤에서 밀려왔다. 라이짐이 그 충격으로 허공으로 휘말려 올라갔다. 곧이어 산이 무너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한참동안 라이짐은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고 쓰러져 있었다. 불기둥이 등뒤에서 뿜어져 나온 것도 같았고, 허공과 땅이 뒤집힌 것도 같았다. 라 이짐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가투신과 차이린이 비슷한 처지로 쓰러져 있 는 모습이 보였고 하진이 머리부터 땅에 떨어져 정신을 잃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라이짐은 하진에게 다가갔다. "하진. 괜찮아?" "...괜찮아. 근데 이거 어쩌지?" 하진은 이렇게 말하면서 왼 팔로 오른 팔을 들어올렸다. 하진의 오른 팔은 부려져 꼭 관절이 하나 더 생긴 것 같은 꼴로 덜렁거리고 있었다. 하진의 얼굴에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가만있어. 내가 팔에 댈 만한 걸 찾아볼게." 라이짐은 이렇게 말하고는 튼튼한 나뭇가지가 있나 살펴보았다. 귀가 여전히 멍했다. 꼭 피리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느낌이었다. 라이짐은 나뭇 가지를 찾다 말고 동굴 쪽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동굴 입구에서는 시커먼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고, 연기는 여기저기로 흩어져 시야를 방해하 고 있었다. 매캐한 냄새가 풍겼다. 도대체 무슨 불길인데 이렇게 맹렬할 수 있는 거지? 이런 불길은 본 적이 없는데. 다음 순간, 연기를 뚫고 에이스가 나타났다. 라이짐은 에이스를 보는 순간 몸이 굳어버렸다. 에이스의 오른 쪽 눈과 귀가 날아가 버렸기 때문 이었다. 눈과 귀가 있어야할 자리에는 시커먼 흔적만이 남아있었고 얼굴 의 나머지 부분은 불길에 데었는지 흉측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에, 에이스!" 라이짐은 반사적으로 이렇게 소리쳤다. "전 살아 있습니다." 에질리의 목소리였다. 라이짐은 에이스에게 뛰어갔다. 내가 손을 놓았 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이 뇌리를 스치자 라이짐은 죄책감에 가슴이 조여 오는 것만 같았다. 아무리 다급한 순간이 되었더라도 에이스의 손을 놓아 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부하를 팽개치고 제몸만 살리는 지휘관이 되다 니. "에이스..." 라이짐은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이만 돌아가지요. 저는 반지의 정령. 다시 부르시면 언제라도 돌아오 겠습니다." "...이제 소원은 둘 남은 건가?" 라이짐은 통나무처럼 꼿꼿이 서 있는 에이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런 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건 소원이 아니었습니다. 반지의 원칙에 따라 제가 스스로 판단해 행동한 것이지요." 에질리의 말이 끝나자 에이스의 남아있는 왼 쪽 눈이 감겼다. 라이짐은 아주 잠시였지만 에이스의 손이 자신의 손끝을 스치고 지나갔다고 느꼈 다. 에이스는 힘없이 라이짐에게 쓰러졌다. 라이짐은 에이스를 받아 안았 다. 라이짐은 에이스의 뒤편으로 뭔가 떨어져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그 것은 로키의 신발이었다. 신발 안에는 로키의 발이 담겨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 사방으로 흩어져 있는 창자가 눈에 들어왔다. 햇살은 너무나도 눈부시게 내려와 나뭇가지에 걸쳐 있는 살조각들을 비추고 있었다. 살조 각들이 햇빛을 받아 마치 아침 이슬을 머금은 붉은 색 꽃처럼 빛나고 있 었다. 팜 산맥이 불길에 휩싸였고, 많은 화전민들이 집을 잃었다. 운이 없는 사람은 목숨까지 잃었지만 그 탓을 아케르 용병단에 돌리는 사람은 없었 다. 화전민들은 산불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 턱이 없었던 것이다. 라이짐 은 그런 화전민들에게 동정심이나 죄책감을 품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 런 죄책감을 느껴봐야 화전민에게도, 자신에게도 도움이 될 게 없다는 것 이 라이짐의 생각이었다. 장례식은 야전에서 치루어졌다. 아케르 용병단의 오랜 전통에 따라 로 키의 시신은 연금술사의 검은돌로 불태워졌다. 맹렬하게 불타오르는 검은 돌을 바라보면서 라이짐은 누구를 향한 것인지 알 수 없는 분노를 느꼈 다. 그것은 이미 사라져버린 오우거를 향한 것도 아니었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마칸에 대한 것도 아니었다. 물론 로키의 죽음과는 아무 상관도 없 는 귀족들을 향한 것도 더더군다나 아니었다. 하지만 타오르는 불길을 바 라보고 있자니 라이짐은 뭔가를 불태우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이었다. 어떻게든. 어떤 방식으로든. 로키의 장례식이 끝나자 본격적으로 탐그루 주둔군에 대한 개편작업이 이루어졌다. 성황청이 없어진 이상, 새롭게 탐그루를 정리할 필요가 있었 던 것이다. 아케르 용병단은 스파일의 안토니오 군단장과 함께 탐그루 동 편의 계엄 주둔군이 되었다. 백부장들과 십부장들은 각각 구역을 맡아 그 구역의 치안을 책임지게 되었다. 라이짐이 맡은 지역은 정박장이 있는 지 역이었다. "여긴 너무 한가해. 재미가 없다고. 원래 정박장 근처에는 기생들도 많 고 사람들도 많은 법인데 말이야. 예쁜 여자도 많고 말이야. 하긴 그러니 까 여기에 아케르 단장이 지휘 본부를 마련했겠지." 하진이 말했다. 라이짐은 지휘 본부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건물에 서 정보를 수집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 임무에 하진도 함께 하게 한 것은 라이짐의 역시 라이짐의 요청이었다. 라이짐은 정보를 관리할 사람이 하 나 더 필요하다고 아케르에게 말했던 것이다. 사실 그렇게 일손이 많이 필요한 일은 아니었지만 팔을 다친 하진을 위해서 뭔가 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진의 공식적인 직책은 부관이었다. "...하긴. 이 팔을 해 가지고서야 어디 여자 하나 꼬실 수나 있겠나" 하진이 붕대를 감은 팔을 들어올리면서 말했다. 하진은 농담으로 한 말 이었지만 라이짐은 하진의 말을 거의 듣지 못하고 있었다. "이봐, 라이짐. 내 말 듣고 있어?" "응?" 로키의 죽음 이후, 라이짐은 멍하니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한가로운 시간이 많아진 탓만은 아니었다. "또 로키 생각하는거냐?" "...아니야." "잊어버려. 끝난 일이야. 너답지 않아." 하진은 의자를 뒤로 까딱거리면서 라이짐에게 말했다. 라이짐은 창 밖 을 바라보았다. 칼을 휘두르면서 훈련중인 징발한 신병들이 눈에 들어왔 다. 햇살아래 기름을 먹인 목도가 어둡고 묵직한 빛을 내고 있었다. "그만두라니까." 라이짐은 하진을 바라보았다. 하진은 책상에 다리를 올리고 의자를 계 속해서 까딱거리고 있었다. 누가 본다면 불친절한 자치대 행정 담당관처 럼 보일 만한 모습이었다. "작전이 있으면 누군가 죽는 거야. 그게 당연한 일이야. 사실 누군가 죽었다는 게 뭐가 그리 중요해? 로키가 살고 네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 각하는 거야?" 하진의 말은 라이짐의 가슴 한복판을 찔렀다. 맞는 말이었다. "바람이라도 좀 쐬자." 라이짐은 이렇게 말했다. 뭔가 기분전환을 하고 싶었다. "바람?" "정보 수집 활동이라고 해 두면 더 좋고." "그래. 보고서에는 그렇게 쓰면..." 하진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의자가 미끄러지면서 그대로 뒤로 넘어졌 기 때문이었다. 라이짐은 웃음을 터트렸다. 아케르 용병단이 스파일의 안토니오 장군과 함께 탐그루의 동편을 장악 하게 되면서 가장 큰 변화를 보인 것은 사람들의 표정이었다. 라이짐은 사람들의 표정에서 예전만큼은 아니더라도 웃음과 생기를 발견하고는 절 로 기분이 좋아지곤 했다. 바르도 대륙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노점상은 여행자들을 위해서 말 린 고기를 파는 노점상 정도지만 탐그루에는 다른 어느 곳보다 많은 종류 의 노점상이 있었다. 기념품이나 옷가지를 파는 것은 물론이고 먹을 것의 종류가 가장 다양한 곳도 바로 이곳 탐그루였다. "저건 뭐야? 아니, 이건 또 뭐고?" 하진은 신기한지 노점상 위에 올려져 있는 음식들을 바라보면서 말했 다. "이건 오르크 창자에 고브린 눈알,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우거의 심장을 으깨 검은 엘프의 땀방울을 향료로 뿌린 음식이야. 마물탕이라고 하지." 라이짐은 물론 농담으로 한 말이었지만 하진은 진짜인줄 알았는지 노점 상 아주머니에게 오우거의 심장은 빼고 줄 수 없느냐고 물어보았다. "오우거 심장? 그런 거 찾으려면 저어기 딴 데 가서 알아보시지." 쉰은 족히 넘어 보이는 아주머니는 칼 찬 계엄군이 전혀 무섭지 않은지 이렇게 아랫사람에게 대하듯 말했다. "하진. 농담이었어. 저건 단과자야. 밀가루를 반죽에 익힌 것 위에 설 탕을 녹여서 입히고..." "알아. 나도 농담이었어. 그런데 여기 사람들은 계엄군을 무서워하지 않는데? 하잔하고는 또 달라." "여기 사람들이야 장사만 잘 되면 늘 싱글벙글이지." 라이짐이 말했다. "이보게, 칼 찬 양반. 나 여기서 삼년전쟁도 겪었고 별 희한한 마물들 도 다 겪어 보았어. 그런데 이제 와서 내 아들 뻘 되는 아그들이 칼차고 돌아다닌다고 해서 무서울까." 노점상 아주머니는 이렇게 말하고는 호탕하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그 랬다. 사람들이야 누가 여기에 오건 아무 상관이 없었다. 장사만 잘되면 그만이고 자식들만 잘 크면 그만이고 굶지 않고 세금 적게 내면 그만인 것이다. 라이짐은 노점상 아주머니에게 이야기하고 싶었다. 귀족들이 착취하고 있는 것을 모르느냐고. 지금 우리가 이곳에 와 있는 것은 귀족을 없애기 위한 첫걸음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라이짐은 그런 말을 하는 대신에 단과 자를 한 봉지 사서 하진과 나누어 먹었다. 달콤하면서도 씹는 맛이 나는 단과자는 어려서부터 자주 사먹곤 하던 거였다. 라이짐의 별빛주점이 처 음에는 단과자 집으로 시작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 단과 자 한 봉지 팔아봐야 얼마나 남는다고 그 돈을 모아 술집을 차렸으니 어 머니가 얼마나 억척스러웠을 지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여기 사람들이 장사가 잘 되는 건 아케르 단장이 안토니오 군단 병사 들도 정기적으로 외출 외박이 가능하도록 부탁했기 때문이지. 게다가 우 리 용병단이야 일과가 끝나면 완전히 자유니까." 라이짐은 정보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답게 분석적으로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장사보다는 정박장에 있는 기생들 수입이 더 좋아진 것 같던 데. 이제는 아주 공주님이라고 불리더라고." 하진의 말에 라이짐은 웃음을 지었다. "그래. 하지만 기생들도 먹고살아야 하지 않겠어?" "그래. 기생보다야 기생을 거느리고 있는 포주들이 더 많이 벌겠지만. 하여간 장사꾼들이란. 만약 귀족들이 물건을 팔아줬다고 해도 이 사람들 은 싱글벙글이었겠지." 하진은 붕대 감은 팔을 흔들면서 이렇게 말했다. "하진. 이 사람들이 우리의 뜻을 알까?" 혼잣말처럼 라이짐이 하진에게 물었다. 하진은 바로 대답했다. "우리가 아니라 너야." "...그런가?" 하긴 그렇지. 라이짐은 생각했다. 하진이야말로 장사만 잘 된다면 어디 에 가서든 잘 살 수 있는 사람일 거였다. 라이짐은 그런 하진을 잘 받아 들일 수가 없었다. 아케르 용병단에 모인 사람들은 하나같이 귀족에 대해 서 반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고, 십부장들의 정신 교육도 주로 귀족 제도의 모순점과 귀족에 대한 반발심을 키우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 다. 그건 특히 하잔에 주둔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본격화되었는데, 덕분에 아케르 용병단 병사들은 귀족이라는 말만 들어도 이를 부드득 갈 지경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하진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하진에게 관심이 있는 건 오직 장사와 여자뿐인 것 같았다. 그렇다면 하진은 왜 아케르 용병단 에 계속 남아 있는 걸까. 언젠가 한 번 하진은 자신이 국경 출신이며 부 모를 바바 족이 부리는 마물들에게 잃은 적이 있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 다. 하지만 그 말을 하는 하진의 표정은 조금도 어둡지 않았던 걸 라이짐 은 기억하고 있다. 원수를 갚기 위한 것도 아니고, 대의를 위한 것도 아 니라면. "그럼 네 뜻은 뭐야?" 라이짐은 말을 돌리지 않고 하진에게 물었다. "뜻? 그런 게 꼭 있어야 하나?" 『환상 문학관-환상장편 (go FAN)』 3873번 제 목:[탐그루] 지는 꽃 피는 꽃 180 올린이:손서호 (김상현 ) 99/01/30 00:06 읽음:1424 관련자료 없음 -----------------------------------------------------------------------------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하진의 표정은 그런 질문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 정이었다. "저길 좀 봐." 하진이 길 건너편에서 검문을 하고 있는 안토니오 군단의 병력을 가리 키면서 말했다. 두 명의 병사가 한 사내의 소지품을 검사하고 있는 모습 이 보였다. "저 친구는 장사꾼이야. 보면 알지." 하진의 설명은 이어졌다. "단장님이 생필품을 밀거래 하는 건 완전히 불법으로 정한 건 알고 있 지? 감자나 고기류 같은 주식을 밀거래 하면 죄질에 따라서 처형시킬 수 도 있다고 말이야." 라이짐은 잠자코 검문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사내가 들고 있던 보따 리에서 감자 덩어리가 떨어졌다. 두 명의 병사는 사내를 붙잡았고, 사내 는 몸부림을 쳤지만 억센 군인의 힘을 당해내지는 못하고 있었다. "저 친구는 이제 처형당할지도 몰라. 넌 목숨을 걸고 있다고 했지, 용 병단의 일에. 저 사람을 봐. 식량을 밀거래 하려고 했어. 목숨을 걸고 일 을 하는 건 마찬가지지만 저 사람에게 그런 거창한 뜻이 있을까?" 하진의 말에 라이짐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대답했다. "저 사람에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 거야." "하하하. 넌 탐그루 출신이면서도 장사에 대해서 모르는구나. 장사는 말이지, 도박하고 비슷한 데가 있어. 라이짐. 넌 도박 잘 못하지?" 하진은 야릇한 미소를 짓고서 라이짐에게 물었다. 비웃는 것 같으면서 도 뭔가 알고 있다는 듯한 미소였다. "장사도 도박도 뭔가를 걸고 하는 거야. 그게 자본금이던, 집문서 건, 생명이건 간에 말이지. 그런데 말이야, 도박이든 장사든 참 이상한 게 있 어. 그건 말이야, 아주 작은 가능성만 있어도 도저히 손을 뗄 수가 없다 는 거지. 말하자면 미끼를 물었다가 간신히 줄을 끊고 도망친 물고기가 또다시 미끼라는 걸 알면서도 덥석 무는 것과 같다는 거야. 분명히 저 사 람도 그런 거지. 저 사람이 밀매를 하다가 잡히면 죽을 지도 모른다는 걸 몰라서 그러는 것 같아? 그건 이익을 얻어야 할 이유라던가, 혹은 물건을 꼭 팔아야 할 이유가 있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고. 그걸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욕심? 욕망? 하여간 그런 게 도박사의 피고, 장사꾼의 피라는 거 야." "난 사람이라면 해야 할 일을 먼저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하진의 말이 설교조로 흐르자 라이짐은 자신의 생각을 이런식으로 정리 해서 대답했다. 하지만 하진은 웃으면서 라이짐의 말을 받았다. "하하하. 그거야 그러면 참 좋겠다는 거지. 다시 말해서 희망사항일 뿐 이라고. 라이짐.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어. 이성에 따라서 움직이는 사람과 감정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 너나 아케르 단장님 같은 사람은 네 말대로 해야 할 일을 먼저 하는 사람이야. 이유에 따라 움직이 는 사람 말이야. 그러니까 강하고, 거칠고,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또 누군가를 부릴 수 있지. 자신이 희생되더라도 자신의 뜻 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말이야. 목숨을 걸고 해야할 일을 위해서 말이야. 하지만 라이짐, 세상은 욕망을 따르는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어. 대부분이 그래. 너도 그랬잖아. 저 사람들 장사만 잘 되면 다들 싱글벙글 이라고. 물건만 팔리고 자기만 잘 살면 그만이야. 귀족? 성황청? 마칸? 저 사람들 귀를 붙잡고 아무리 떠들어봐라 다 헛소리지." 라이짐은 하진의 말을 들으며 검문에 걸린 사내를 바라보았다. 끌려가 는 사내가 마치 벌레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직 욕망에 따라 꿈틀거릴 뿐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는 벌레 말이다. "저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겠어." 라이짐은 혼잣말처럼 사내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라이짐의 목 소리에는 비장함마져 서려있었다. "어, 라이짐. 잠깐만. 물론 그 말은 무언가에 목숨을 걸고 사는 사람다 워. 하지만 나를 좀 봐. 난 그저 살아야겠다고 생각해서 살고 있다고. 차 라리 죽겠다니. 하하하. 그 말은 나보고도 죽으라는 말처럼 들리는 데? 라이짐. 세상 사람들이 다 너처럼 사는 건 아니야." 라이짐은 하진의 말이 끝나자 뭔가 마음속에서 자라나는 걸 느낄 수 있 었다. 뜨겁고 강한,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두려운 마음마저 드는 그 무엇 이었다. 그것은 라이짐을 통째로 뒤바꾸어 놓을 수도 있는 씨앗 같은 거 였다. 하지만 라이짐은 그 씨앗이 자라나 소망이 되고, 그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 목숨을 걸 게 될 거라는 걸 아직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곳에선 치안 유지가 주 임무인 것 같아. 안토니오 군단도 그 렇고, 우리도 그렇고 말이야." 하진이 오래간만에 진지한 말을 꺼냈다. 너무 라이짐 앞에서 자기 얘기 를 하고 있다 싶었던 모양이었다. 라이짐은 하진과 함께 하면서 점점 하 진을 다시 보게 되었다. 분명 하진에게는 능력이 있었다. 일 처리하는 것 도 그렇고 말하는 방식도 그랬다. (시간이 날 때마다 어디서 구했는지 물 건들을 내다 파는 것도 불가사의한 능력이었다) "그야..." 라이짐은 아케르 단장이 치안을 강조했던 걸 떠올렸다. 그런데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왜 아케르는 굳이 치안만을 강조하고 있는 걸까. 라이짐 이 반란군에 대해서 보고했을 때, 아케르는 암호표와 떠버리 새를 받아들 고는 알았다고만 말했다. 두 일 사이에 무슨 관련이 있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라이짐은 뭔가 자신이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 다. 역시 아케르의 지시는 일단 따른 후에야 그 의미를 알 수밖에 없는 것일까. 비가 내릴 듯 하늘에 먹구름이 두껍게 깔려 있던 날이었다. 탐그루의 우기는 여름에 한 번 뿐이지만 지독하게 많은 비를 내리 퍼붓곤 했다. 라 이짐은 그 날 지휘본부에서 열리는 배알식에 배석되었다. 탐그루 시장과 의 배알식이었다. 비록 말석이었지만 라이짐은 아케르나 안토니오, 또 카 이사 같은 탐그루에서 거물급에 해당하는 인사들과 한 건물 안에 있게 되 었다는 사실 자체가 가슴 뛰는 일이었다. 배알식이 있는 건물은 시청 근처에 있는 자치대 건물이었다. 목조로 되 어진 이 건물은 지어진지 그리 오래 되지 않아 갓 대패질을 한 나무에서 나는 냄새가 풍겼다. 벽면에는 흰 벽지로 도배가 되어 있었고 천장에는 화려하지 않은 연금술사의 등이 은은한 빛을 뿜어대고 있었다. 라이짐의 시선은 카이사 장군에게 집중되었다. 자신도 모르게 카이사의 말에 귀를 기울였고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라짐 때문이었다. 하지만 바코쿠에게서 들었던 그대로, 라짐 은 자신의 일에 충실하고 있을 거였고, 일개 십부장 신분으로 라짐에게 접근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러니 일단은 두고 보는 수밖에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는 라이짐이었지만 카이사를 눈여겨보지 않을 수 없었다. 라이 짐이 보기에 카이사는 그다지 격식 같은 걸 중요시하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그걸 다행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거 배가 고프군요. 배알식도 좋지만 이거 뭘 좀 먹고 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요?" 당장이라도 웃음을 터트릴 듯한 얼굴로 카이사 장군이 말하자 카이사 장군의 부하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트렸다. 누가 보더라도 예의상 웃는 게 분명한 웃음이었다. "오, 카이사 장군. 먹는 걸 좋아한다는 얘기를 들었소이다. 굉장한 미 식가로 소문이 자자하던데. 오늘 요리에 대해서 한 말씀 해 주쇼." 안토니오 장군이 커다란 목소리로 카이사 장군에게 물었다. 배알식이 마련된 자치대 응접실이 쩌렁쩌렁 울렸다. "미식가는요, 무슨. 전 그냥 배고프면 다 맛있게 먹는 사람입니다." 카이사 장군의 농담에 안토니오 장군이 과장된 웃음을 터트리자 모두들 웃기 시작했다. 라이짐은 어색하게 따라 웃었다. 이런 자리에 배석된다는 의미는 이런 분위기에도 익숙해 져야 한다는 뜻이리라. 라이짐은 될 수 있으면 어색하게 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참. 오늘 자리는 아케르 단장님 때문에 마련된 자리인데요. 어떻습니 까. 배가 많이 고프시지 않은가요?" "시장님이 곧 오실 겁니다." 아케르는 담담하게 이렇게 한 마디 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좀 딱딱한 말이긴 했지만 아케르는 웃음을 지음으로서 분위기에 거슬리지 않게 말을 이끌었다. 라이짐은 그런 아케르의 태도에서 역시 익숙한 사람은 뭔가 달 라도 다른 법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나도 언젠가 저렇게 상석에 앉아 서 분위기를 이끌 수 있을까. 아니다. 이끌어야 한다. 그렇게 되지 않고 서야 목숨을 거는 보람이 없지. 배알식 장소가 마련된 자치대 응접실에는 긴 테이블이 마련되었고 아케 르와 안토니오, 카이사가 상석에 앉았고, 나머지 백부장들은 서열순으로 앉아있었다. 이윽고 탐그루 시장 하리오 오르테가가 나타나자 모두들 자 리에서 일어났다. 라이짐은 순간 몸이 굳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리오 오르테가의 뒤편으로 낯익은 얼굴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꿈엔들 잊을 수 있었을까 저 얼굴을. 거만함이 기름기처럼 얼굴에 줄줄 흐르고 있는 저 루비오 오르파 의 얼굴을.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아름답기는 하지만 차가운 인상을 가지 고 있는 뒤로아 오르테가도 잘 알고 있었다. 뿐만 아니었다. 세 사람의 뒤에 서 있는 두 사람도 라이짐은 잘 알고 있었다. 하리오 오르테가의 일급 참모 볼다니 아르타와 루비오의 경호 무 사 쥬크였다. 볼다니 아르타의 얼굴은 성년식 날 한 번 보았을 뿐이지만 라 이짐은 분명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쥬크가 어머니를 베던 영상이 라이짐의 머릿속에 또렷하게 떠올랐다. 그러자 성년식날의 모든 일들이 하나씩 분명 하게 라이짐의 머리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어머니의 딱딱하게 굳은 시체 를 바닥에 묻던 일과 또 탐그루를 바라보면서 했던 맹세의 말까지. "인사가 늦어서 죄송합니다. 저는 탐그루의 시장 하리오 오르테가 옳습 니다. 그리고 이쪽은 자나크 영주님의 아드님이시고 지금은 이곳 행정 업 무를 돕기 위해 파견 나와 계신 루비오 오르파입니다. 그 옆에 계신 분은 다들 잘 알고 계시겠지만, 루비오 오르파의 부인이자 제 딸인 뒤로아 오 르테가 옳습니다." 하리오 오르테가가 소개를 하자 두 사람이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라이짐은 고개를 숙이고 있는 쪽이 아니라 그쪽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 의 표정을 보았다. 모두들 뒤로아 오르테가에게 시선이 가 있었다. 하긴. 저 정도 미모와 매력을 가지고 있으니까 스파일과 타실의 장군을 불러들 일 수 있었겠지. 어떤 수를 썼는지는 알 수 없지만. 보나마나 몸으로 유 혹했겠지. 정박장의 기생들처럼. 루비오에 대한 라이짐의 악감정은 뒤로 아에게까지 번지고 있었다. "아케르 단장님이신가요?" 비굴해 보이는 웃음을 지으면서 하리오 오르테가가 아케르에게 말했다. "아케르입니다." 아케르는 고개를 숙여 하리오 오르테가에게 예를 표했다. 라이짐은 정 중하게 하리오 오르테가에게 인사하는 아케르의 모습을 보자 속이 뒤집히 는 것 같았다. 식욕이 싹 달아나 버린 느낌이었다. 하지만 아케르의 생각 을 라이짐이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일단 고개를 숙인다. 그리고 설령 가 랑이 사이를 기어가는 한이 있더라도 때를 기다린다. 그리고 한 순간에 귀족들을 박살낸다. 이것이 아케르의 생각일 거였다. 라이짐은 그런 아케르의 모습을 보면서 진정한 복수는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죽이는 것? 물론 그것도 중요하다. 성년의 신 마소드 앞에서 맹 세한 내용이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것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힘 으로 루비오 오르파를 누를 수 있어야 한다는 거였다. 강한 자가 휘두른 칼은 정의이고 약한 자가 휘두른 칼은 불의다. 라이짐은 칼의 법칙을 상기했다. 루비오. 벌써 두 번째 마주치는 군. 하지만 언제까지나 내가 이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말아다오. 넌 그냥 내가 힘이 생길 때까지 살아있어만 주면 된다. 라이짐 은 이렇게 생각하면서 입술을 꼭 깨물었다. 다시 한번 무엇인가가 속에서 꿈틀거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운명처럼 자라나기 시작한 감정의 씨앗이었다. 라이짐의 가슴에 심어진 씨앗은 이제 겨우 떡잎을 펼친 정도 였다. 하지만 그것은 이제 머지 않아 라이짐의 인생을 뒤바꿔 놓게될 운 명의 씨앗이었다. 라이짐은 지금 자신이 느끼고있는 감정이 자라나 결국 자신을 완전히 뒤바꾸게 될 것이라는 걸 알지 못했고, 지금은 단지 손에 끼워진 반지를 만지작거리면서 분노를 삭일 뿐이었다. 모두들 자리에 앉자 다시 잡담이 오가기 시작했다. 라이짐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상대가 없었다. 상석에 앉은 장군들은 물론이고 바로 옆에 앉 아있는 발렌시아 백부장에게 말을 걸기에도 라이짐의 지위는 너무 낮았 다. 누가 뭐라고 물어준다면 좋을 텐데.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조금이라 도 덜 어색한 분위기에서 자리에 참석해 있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 만 잡담은 라이짐과는 거리가 먼 질문과 대답만이 오갈 뿐이었다. "오래간 만입니다, 뒤로아 부인." "예. 오래간 만이에요, 카이사 장군님." 고개를 숙여 두 사람이 인사를 나누는 모습을 라이짐은 보았다. 안토니 오 장군도 뒤로아에게 목례를 건넸다. 저 두 장군을 불러들인 뒤로아 오 르테가의 능력은 과연 어떤 것일까. 라이짐은 뒤로아의 얼굴을 빤히 쳐다 보고 있자니 가슴이 뛰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분노와는 다른 감정으로 뛰 어오르는 가슴이었다. 저 여자는 내 여자가 된다. 갑작스럽게 이런 생각이 라이짐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라이짐은 이런 생각이 들자 스스로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복수심을 불태우 기에도 충분치 않을 마당에 뒤로아 오르테가를 넘보는 생각을 하고 있다 니. 『환상 문학관-환상장편 (go FAN)』 3874번 제 목:[탐그루] 지는 꽃 피는 꽃 181 올린이:손서호 (김상현 ) 99/01/30 00:06 읽음:1493 관련자료 없음 -----------------------------------------------------------------------------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하지만 라이짐은 분명 느낄 수 있었다. 뒤로아 오르테가가 분명히 자신 의 여자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욕망. 하진이 말했던 욕망 때문에 지금 나는 이런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아름다운 여자를 보고 있 자니 그 여자를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고, 또 그런 가능성이 아주 조금 이라도 있기 때문에 욕망을 떨쳐버릴 수가 없는 걸까. 잡혀가던 사내의 벌레 같은 뒷모습이 떠오르자 라이짐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 자신의 생 각을 부정하려고 했다. 그러나 오히려 뒤로아를 향한 욕망만이 더욱 커지 는 기분이었다. "라이짐. 점잖게 있지 않고서." 발렌시아가 라이짐에게 핀잔을 주었다. 라이짐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의자를 바짝 끌어당겨 앉았다. 하지만 라이짐은 이미 뒤로아의 시선을 받 은 후였다. "저 분은 누구시지요?" 뒤로아가 입을 열자 모두들 조용히 뒤로아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뒤로 아는 라이짐을 가리키고 있었다. 또 한 번 가슴이 뛰어 올랐다. 이번에는 또 다른 흥분이었다. 모두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는 흥분이면서 동시에 쥬 크나 루비오가 자신을 기억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불안에서 오는 흥분이었 다. "제 직속 십부장입니다. 라이짐. 인사드리게." 라이짐은 자리에서 일어나 뒤로아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라이짐의 다 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루비오 녀석은 나를 기억하지 못할 게 분명 하지만 검사는 한 번 상대한 사람의 얼굴은 잊지 않는다. 혹시 나를 기억 하고 있는 건 아닐까. 라이짐은 시선을 뒤로아 쪽으로 둘 수가 없었다. "저분 머리 색깔이 눈에 띄어서요. 은발은 아닌 것 같고. 하얗게 센머 리 같아요. 할아버지 처럼요." 뒤로아의 말에 모두들 웃음을 터트렸다. 물론 당사자인 라이짐이야 기 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사람들 사이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이 있지요. 북쪽에서 온 백발의 영 웅이 마칸의 강림 때 세상을 구원한다는 전설이요." "아. 저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눈보라 전설을 말씀하시는 거 아닌가 요?" 뒤로아의 말에 재빨리 카이사 장군이 덧붙였다. "맞아. 그러고 보니 나도 들어본 것 같군." "아케르 단장님. 훌륭한 부하를 두고 계시는군요." "저 친구가 세상을 구원하면 아케르 단장님이 세상을 구원한 거나 다를 바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 때가 오기 전에 저 친구에게 잘 보여두어야겠군요. 저 친구한테 잘 보여야 지금의 자리라도 유지할 수 있지 않을까요?" "미안하지만 제가 먼저 잘 보여야겠습니다. 라이짐이라고 했나?" 모두들 라이짐의 흰머리카락을 농담거리로 삼고 있었다. 라이짐은 그 모든 말들을 이를 악물고서 버텨냈다다. 이 정도쯤이야 참을 수 있다. 더 한 소리를 듣는다고 해도 참을 수 있다. "혹시 염색약이 필요하시다면 말씀하시지요. 제가 잘 아는 염색약 파는 상인이 하나 있습니다만. 백발이 성성한 노인도 그 염색약 한 방울이면 십 년은 젊어지지요." 루비오가 말하자 모두들 웃음을 터트렸다. 라이짐은 루비오의 말을 듣 는 순간 자신을 기억하고 있지 못하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그것은 한 편으로는 안심이 되는 일이기도 했지만 한 편으로는 기분 나쁜 일이기 도 했다. 그 말을 기억해두마, 루비오. 내 머리를 온통 네놈의 피로 물들 일 테니. 하지만 라이짐은 이런 생각들이 안에서 자라나고 있는 욕망의 씨앗에 비료가 되어 준다는 사실 또한 알지 못했다. 다만 쥬크가 한 순간 예사롭지 않은 눈빛으로 바라보았다는 사실만이 신경 쓰일 뿐이었다. 만찬이 끝나고, 자유시간이 되자 라이짐은 혼자 그네나무가 있는 곳으 로 갔다. 어머니의 시신이 묻혀있는 곳이었다. 한 번은 보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두고 갔던 카네이션은 물론 사라지고 없겠지만 바람 결에 그네는 여전히 삐걱이며 흔들리고 있을 것이고 어머니의 무덤은 조 용히 그러나 따뜻하게 라이짐을 기다려 주고 있을 것만 같았다. 해가 진 탐그루에는 삼엄한 경계가 펼쳐져 있었다. 여기저기 병사들이 서서 지나는 사람들을 검문하고 있었고 누군가 죄를 짓고 도망치는지 경 고의 의미를 담은 나팔소리가 울려퍼지기도 했다. 하지만 경계를 맡은 병 사들은 라이짐은 검문하지 않았다. 다만 라이짐이 지나친 후에 자기들끼 리 뭐라고 수근거릴 뿐이었다. 라이짐의 흰머리가 도움이 되는 순간은 이 런 순간뿐인 것 같았다. 라이짐의 오른 손에는 탐그루부터 가지고 온 짧은 칼이 들려 있었다. 행여 전투에 가지고 나갔다가 잃어버리게 되지나 않을까 해서 늘 개인 사 물함에 넣어두기만 했던, 시드의 귀가 박혀 있는 칼이었다. 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사물함에 넣어두고 있다보니 자꾸만 자신이 했던 맹세가 흐려지 는 느낌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라이짐은 그네나무 밑, 어머니의 시신을 묻었던 곳에 당도ㄳ다. 이 칼로 땅을 파서 어머니를 묻었었지. 라이짐은 그때의 참담 한 심정이 되살아나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네나무 앞에서 라이 짐은 망연해 지고 말았다. 어머니의 무덤은 어디로 갔는지 사라져 버렸고 그 자리는 움푹 파인 채 잡풀만이 무성하게 자라있을 뿐이었다. 처음에 라이짐은 자신이 잘못 찾아온 게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 만 아니었다. 몇 번을 살펴보아도 자신이 어머니를 묻었던 바로 그 자리 가 분명했다. 한참동안을 멍하니 서있다가 라이짐은 무덤이 있던 자리를 살펴볼 수 있었다. 무덤은 짐승이 파헤치거나 하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누군가 어머니의 시신을 파낸 후에 다른 곳에 이장한 게 분명했다. 사람 이 아니고서야 도저히 남길 수 없는 삽질의 흔적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 다. 라짐이로구나. 라이짐은 생각했다. 라짐. 같이 옮겨 묻자고 약속해 놓 고는. 라이짐은 라짐이 시체를 이장했다는 생각을 하자, 자신이 복수하겠 다는 약속을 지킬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 게 아닌가 싶었다. 라이짐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소망의 별이 라이짐을 가소롭다는 듯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나를 무시하는구나. 만찬에 서 들었던 비웃음 섞인 농담과 조롱의 말들이 다시 한 번 생생하게 살아 나는 듯 했다. 하지만 라이짐은 입술을 깨물었다. 어떻게든 인정받으리 라. 상석에 앉아 나를 조롱했던 녀석들을 전부 다 무릎 꿇게 하리라. 순 간 입술이 터져 피가 베어 나왔다. 라이짐은 핏물을 혓바닥으로 조심스럽 게 핥았다. 전장의 냄새가 당장이라도 풍기는 듯했다. 라이짐은 무덤자리 를 다시 한 번 내려다보았다. 군데군데 말라죽은 꽃송이들이 눈에 띄었 다. 그 꽃송이들은 자라난 잡풀 때문에 말라죽은 카네이션이었다. 라이짐은 어머니의 무덤가에서 떠나 탐그루 시내로 돌아갔다. 어둠이 내려앉은 탐그루에는 죽음 같은 적막이 떠돌고 있었다. 간간이 피어오르 고 있는 연금술사의 등빛만이 향기처럼 퍼져 이곳이 사람이 사는 곳이라 는 걸 알리고 있을 뿐이었다. 라이짐의 발걸음은 저절로 라짐이 있는 곳 을 바라볼 수 있는 건물 쪽으로 향했다. 라이짐은 착잡한 심경이었다. 세 상이 모두 자신을 등지고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뭔가 하지 않 으면 안된다. 뭔가 이루지 않으면 안된다. 이대로 쓰러질 수는 없다. 라짐을 볼 수 있는 건물 앞에 당도했을 때가 되어서야, 라이짐은 자신 이 왜 이곳으로 왔는지 생각해 보았다. 분명 라짐을 보고 싶기 때문일 거 였다. 하지만 라이짐은 라짐을 본다는 것이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생각했 다. 자신을 믿고 있지 않은 라짐이었다. 라이짐은 라짐마저 자신을 등진 이 상황에서 라짐의 모습을 보려고 하는 건 그저 약한 모습에 지나지 않 을 거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그렇게 생각하자 모든 게 분명해지는 느낌 이었다. 가족도 중요하지 않다. 동료도 어떤 의미에서는 중요하지 않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다. 내가 뭔가 이루지 못하면 아무도 나에게 기대지 않을 것이고, 내가 강해지지 않으면 아무도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이 있다 고 믿지 않을 것이다. 멀리 서 있는 경비병들이 경계의 눈초리로 라이짐을 바라보았다. 그렇 다. 이제는 더 이상 멍청한 행동을 계속할 이유가 없다. 라이짐은 돌아섰 다. 등뒤에서 뭔가가 라이짐을 끌어당기는 듯 했지만 라이짐은 그것을 뿌 리치고 발걸음을 옮겼다. 강해지는 거다. 정말로 강해지는 거다. 라이짐 은 돌아서서 천천히 자신의 숙소로 향했다. 라이짐은 한 번도 뒤를 돌아 보지 않았다. 탐그루 여기 저기서 수집해 온 정보를 종합하는 시간이 되면 라이짐은 에이스를 만나야 했다. 에이스를 바라보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한쪽 귀와 한쪽 눈은 날아가 버렸고, 얼굴은 화상으로 거의 일그러져 있 는 에이스의 모습은 라이짐이 보기에도 어려울 만큼 흉측하기 이를데가 없었다. "...성황청의 움직임은 이렇다할 게 없습니다." "베이커 기사단은?" "타실 쪽으로 향했다는 정보 외에는 아무런 정보도 없습니다. 타실 어 딘가에 몸을 숨긴 게 분명합니다." 에이스의 보고는 새로울 것도 없었고 가치 있는 것도 없었다. 하진이 하품을 하고 있는 게 결코 지나친 행동은 아니었다. 이제 여름도 막바지 로 접어들고 있었다. 여름 내내 라이짐은 에이스로부터 비슷한 정보만 들 어 왔던 것이다. "지금 나머지 자매들은 어디에 있지?" "나이스와 자이스는 탐그루에 있습니다. 레이스와 조이스는 팜 산맥 일 대에, 그리고 마이스, 카이스, 라이스는 각각 스파일과 타실, 자나크에서 정보를 수집중입니다." "마이스, 카이스, 라이스는 정확한 위치를 모른다는 건가?" "예. 직접소통 구역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에이스의 직접소통 능력은 상당히 먼 거리까지 가능하지만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면 소용이 없었다. 대개의 경우 거리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 지만 어떤 날은 날씨나 지형 따위에 영향을 받기도 했다. "예쁘다는 소리, 이제 다시는 못 듣겠군." 하진이 의자에 몸을 기대고서 중얼거렸다. 라이짐은 바늘로 가슴 한 복 판을 찔리는 느낌이 들었다. "하진! 함부로 말하지 마." 라이짐은 부하에게 함부로 말하는 하진에게 소리쳤다. 소리치는 라이짐 의 마음에는 에이스에 대한 죄책감이 많이 작용하고 있었다. "뭐 어때, 검은 엘프 족인데. 저 치들 무슨 소리해도 표정하나 변하는 거 못 봤다." 하진은 이렇게 말하면서 귀를 후벼팠다. 하진의 팔은 치료석 덕분에 어 느 새 다 나아 있었다. "기억합니다, 하진 님. 저보고 예쁘다는 소리 들어본 적 있느냐고 물어 보셨지요." 순진하다고 해야 할지, 멍청하다고 해야 할 지 모르겠지만 에이스는 이 렇게 대답했다. 라이짐은 차마 에이스의 말을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검 은 엘프 족이 주인의 말에 절대적으로 복종하고 또 이런 식의 대답만 한 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라이짐이었지만 이 순간 만큼은 정말로 피하고 싶었다. "기억력하나는 좋구만. 에이스. 하지만 이제 신경 꺼. 다신 그런 소리 들을 일 없을 테니까." 하진의 말은 냉정하다 못해 악의가 서려 있는 것 같았다. 라이짐은 자 리에서 벌떡 일어나 하진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하진은 얼른 화재를 옮겼 다. "에이스. 수영 좋아해?" "수영이요?" "그래, 수영. 물 속에서 팔 다리를 움직이면서 물고기가 되는 상상에 빠지는 거 말이야.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하면서 원초적인 행동의 하나지. 몰라?" 에이스는 수영이 뭔지는 알고 있었지만 하진이 덧붙인 말이 이해가 가 지 않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라이짐. 여름 다 가기 전에 수영이나 한 번 하러 가자구. 정박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수영장이 있는 걸로 아는데." 하진의 말에 라이짐은 대청하의 한 지류에 돌담을 쌓아 물을 고이게 해 만들어 놓은 수영장을 떠올렸다. 한때 그곳은 귀족만이 갈 수 있는 곳이 었다. 계엄령이 내린 초기 잠시 폐쇄되긴 했지만, 나중에 아케르가 탐그 루의 동편 주둔군으로 오게 되면서 민간인에게 다시 개방한 곳이었다. "오늘 일은 다 끝났으니까." 라이짐은 이렇게 말했다. 뭔가 기분전환을 할 수 있는 거리가 필요했으 니까 한 번 가보는 것도 좋겠지. 『환상 문학관-환상장편 (go FAN)』 3876번 제 목:[탐그루] 지는 꽃 피는 꽃 182 올린이:손서호 (김상현 ) 99/01/31 00:11 읽음:1508 관련자료 없음 -----------------------------------------------------------------------------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수영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귀족들은 평민들도 올 수 있게 되었다는 소 문에 아주 발을 끊어버린 상태였고, 평민들은 평민들 나름대로 별로 가고 싶어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오랫동안 귀족들만 쓰는 곳이라는 인식이 머 리에 박혀 있어서 그런지도 몰랐다. 하긴, 계엄령인데. 아무리 시간이 남 아돈다고 해도 수영장이나 올 사람은 그리 많지 않겠지. "우와! 좋구나, 좋아. 이거, 안 와봤으면 평생 후회할 뻔했는데?" 하진은 얇은 소매 없는 옷 하나에 밑에는 짧은 바지 하나만을 걸치고 이렇게 말했다. 라이짐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따가운 햇살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 다. 강물에 닿은 햇살은 은색으로 부서져 가루가 되어 날리고 있었다. 여 기저기서 뛰어오르는 물고기들은 마치 햇살에 몸을 던지는 듯 했다. "나 먼저 들어간다!" 하진은 소리치고는 물 속으로 그대로 몸을 날렸다. 튀어 오르는 물방울 들이 하나하나 손에 잡힐 듯 분명하게 라이짐의 눈에 들어왔다. 어쩐지 어린 시절의 추억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어이! 들어와! 진짜 시원해!" 하진이 소리쳤다. 라이짐은 에이스를 바라보았다. 에이스를 위해서 가 죽으로 만든 수영모와 안대를 준비해 주었다. 날아가 버린 오른쪽 눈과 귀 때문이었다. 하지만 에이스는 수영모와 안대를 하고는 불편하다는 표 정만 지을 뿐이었다. "에이스. 물에 한 번 들어가 보지 그래? "명령이신가요?" 에이스가 물었다.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검은 엘프 족인지라 도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런 말을 하는 건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지만 라 이짐은 그 말에서 반감을 느낄 수 있었다. "아냐. 명령이라니." 오우거 본거지 앞에서의 사건 이후, 라이짐은 한 번도 에이스에게 싫은 소리를 한 적도 없었고 억지로 명령을 내린 적도 없었다. 빚이다. 라이짐 은 에이스를 바라볼 때마다 에이스에게 빚을 졌다고 생각했다. "십부장 님. 먼저 들어가세요. 전 별로..." 에이스의 얼굴에 당혹감이 떠올랐다. 라이짐은 그런 에이스를 바라보면 서 어떻게 하면 좋을 지 알 수가 없었다. 여자라 수영을 싫어할 수도 있 다는 생각도 들었고, 어쩌면 검은 엘프 족은 관습적으로 물을 꺼리는 지 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늘 산에서 생활하는 게 아닐까? "알았어." 라이짐은 멋쩍은 듯 한 번 웃고는 물 속으로 몸을 날렸다. 한 마리 물 새처럼 라이짐은 가볍게 물 속으로 몸을 날렸다. 순간 모든 소리가 사라 지고 라이짐은 어둠 속에 잠긴 느낌이 들었다. 라이짐은 발을 놀려 물 위 로 헤엄쳐 올라갔다. 빛이 다가오고 있었다. 탄생. 라이짐은 수면 위로 다시 떠오르는 순간 새로운 탄생을 경험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비 릿한 물내음이 섞인 공기가 싱그러웠다. "라이짐. 이것 좀 봐." 하진이 물에 떠서 수면 밑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수면 밑으로 투명한 초록빛의 덩어리들이 움직이는 게 보였다. "물비늘고기야. 우린 물비늘고기라고 불렀어, 이걸." 이렇게 말하는 하진의 목소리는 뭔가에 젖은 듯 축축했다. 라이짐은 물 비늘고기를 손으로 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잡으려고 하면 물비늘고기는 그대로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져 사라졌다. "하하하. 그런 방법으로는 안 되지. 자. 봐." 하진은 웃옷을 벗어 조심스럽게 물비늘고기를 떠내었다. 그러자 초록색 의 덩어리가 수면 위로 올라왔다. 라이짐은 물비늘고기를 유심히 들여다 보았다. 물비늘고기에는 투명한 다섯 개의 눈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퍼져 있었고, 물이끼를 담고 있는 창자와 두근거리는 심장이 그대로 들여다보 았다. "오랫동안 물 밖에 두면 안돼. 말라버리면 사라진다고." 하진은 이렇게 말하고는 물비늘고기를 놓아주었다. 지류를 잘못타고 들 어온 물고기들이 여기저기서 펄쩍펄쩍 뛰어올랐다. "라이짐. 난 어려서 이 물비늘고기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해 봤어. 이것들은 도대체 뭘 하고 살고 있는 놈들일까. 뭘 먹고 어떻게 살아갈까. 그래서 물비늘고기를 잡으려고 물 속으로 손을 뻗었지. 하지만 잡히지 않 았어. 그리고 조금 더 컸을 때, 이렇게 천으로 물비늘고기를 잡은 적이 있었어. 그런데 잡아서 집으로 오는 사이에 다 말라붙어 버리더라고. 천 위에 남은 거라곤 진득진득한 흔적뿐이었으니까." 하진이 이렇게 말했을 때 마치 꿈결처럼 한 마리 날개 달린 물고기가 수면 위에서 뛰어올라 날개를 퍼덕이며 숲 속으로 날아갔다. 입에 물고 있는 작은 물고기가 라이짐의 눈에 들어왔다. "물나그네새는 결혼과 식사는 물 밖에서 하지." 혼잣말처럼 라이짐은 중얼거렸다. "나, 그때 생각했어. 세상에 모든 것들이 사실은 바람 속에 있으니까 형상을 갖추고 있는 게 아닐까. 이 바람을 넘어가면, 그래서 다른 세계로 가게 되면 모두 사라져 버리는 게 아닐까 하고 말이야. 물비늘고기가 물 밖에 나가면 사라져 버리듯이. 하하하. 우습지? 내가 이런 생각을 다 했 다고 하니까." 라이짐은 다리사이를 빠져나가는 물비늘고기의 뭉클한 감촉이 느껴지자 문득 잡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몇 번이고 물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잡히는 것은 한 웅큼의 물과 비릿한 내음뿐이었다. "한 번 잡아봐." 하진의 말에 라이짐은 웃통을 벗어 던졌다. 하잔의 까마귀 들판에서 성 황청 기사단의 성구에 당했을 때 얻은 가슴의 흉터가 햇빛을 받아 꿈틀거 리듯 나타났다. "하잔에서 생긴 거야." 아무도 묻지 않았지만 라이짐은 애써 이렇게 설명해 주었다. 라이짐은 에이스를 바라보았다. 에이스는 어울리지 않게 수영모와 안대를 하고서 라이짐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에이스. 라이짐은 조그맣게 에이스의 이름 을 불러보았다. 가슴 저 깊은 곳에서 시린 것이 움찔거렸다. 라이짐은 벗은 웃옷으로 물비늘고기를 건져 올렸다. 물비늘고기는 아무 저항도 하지 못하고 꿈틀거릴 뿐이었다. "먹지도 못하고, 낚시 할 때 미끼로도 쓰지 못하는 이걸 누가 물비늘고 기라고 이름 붙였을까. 아니, 왜 물비늘고기라고 부르는 거지?" "그야 비늘이 없으니까. 하하하." 하진의 농담에 라이짐은 웃음을 지었다. 라이짐은 웃옷의 한 켠을 잡아 힘껏 물비늘고기를 집어던졌다. 물비늘고기는 한 참을 날아가 강물 속으 로 빠져들었다. "그거 재미있겠는데. 누가 더 멀리 던지나 내기할까?" "좋지." "진 사람이 오늘 저녁 사는 거 어때? 라이짐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고 두 사람은 물비늘고기를 잡아 힘껏 집어던졌다. 물비늘고기가 햇빛을 받아 초록빛을 내면서 강물 저편으로 사라져갔다. "내가 이겼어." "라이짐. 승부는 무조건 삼세번이야. 이거, 어깨가 아직 덜 풀렸나본 데. 팔을 다쳤던 게 아무래도 치명적이었나봐." 하진의 너스레에 라이짐은 다시 한 번 웃었다. 두 사람은 한 번 더 물비늘고기를 잡아 집어던졌지만 결과는 마찬가지 였다. "이상하네? 자세도 내가 더 좋고 던지는 방법도 내가 더 나은데. 이거, 아무래도 라이짐 네가 있는 쪽에 바람이 부는 모양이야. 운이 좋아, 라이 짐." 하진은 끝까지 졌다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라이짐은 그걸 가지고 뭐라 고 하지 않았다. 평화롭다. 투명한 햇살 아래 있으니 세상 사람들이 모두 맑고 순수하게만 생각됐다. 모두가 이런 세상에서 살 수는 없는 걸까. 아 무 노력도 없이 그런 세상은 결코 오지 않겠지. 누군가 앞에 나서서 이끌 어 줘야해. 자신의 욕심말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벌레같은 사람들을 위해 서. 그리고 그런 과정에는 피가 필요한 거야. 어쩔 수 없이. 하지만 모두 가 이런 세상에서 살기 위해서는 도대체 얼만큼의 피가 더 필요할까. "한 번만 더해. 마지막으로. 도전을 피하지는 않겠지?" 하진의 말에 라이짐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두 마리의 물비늘새가 허공을 날았다. 라이짐은 초록색으로 보이는 물비늘새를 바라 보다가 문득 하늘에 새 때가 날고 있는 것을 보았다. "저건 뭐지?" "새는 아닌 것 같아, 라이짐. 꽤 멀리 떨어져 있을 텐데 저렇게 크게 보이다니 말이야. 그러고 보니 이상하네. 저것 봐. 뭐 이상한 게 떨어지 고 있잖아?" 라이짐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처음에 몇 마리 보이지 않았던 새들이 하 나 둘 숫자가 늘어나는가 싶더니 어느 새 허공을 완전히 뒤덮을 만큼의 숫자가 되어 뭔가를 땅으로 떨어뜨리고 있었다. "새똥 아닐까? 그런데 저렇게 큰 새똥을 본 적이 없는데." 하진이 말하는 순간 라이짐은 불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진. 일단 돌아가자. 뭔가 좋지 않은 예감이..." 라이짐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오우거의 본거지가 무너질 때 났던 것만 큼 커다란 굉음이 울려 퍼졌기 때문이었다. 하늘을 날고 있는 것이 뭔가 를 떨어뜨린 자리에서 불기둥이 솟아올랐다. 마치 땅속에 숨어있던 불길 이 땅거죽을 뒤집으면서 솟아오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젠장." 하진은 서둘러 물위로 나가서는 옷가지를 챙겨 입었다. 라이짐도 서둘 러 대충 옷을 걸치고는 에이스와 함께 재빨리 주둔지 쪽으로 뛰어갔다. 굉음은 계속 되었고, 주둔지가 가까워 지자 이곳 저곳에서 검은 연기들이 눈에 띄었다. "뭐야, 저, 저건?" 하진이 말하지 않았어도 라이짐은 이미 바라보고 있었다. 하늘에서 떨 어지는 물건이 땅에 닿자 굉음과 함께 불기둥이 솟아오르고 있는 게 또 한 번 눈에 들어왔다. "맙소사. 마물이 분명해!" 하진이 뛰는 속도를 더하면서 말했다. 하늘을 날 수 있는 마물에 대한 정보는 들어 본 적이 없는데. "에이스! 저게 뭔지 알겠어?" "...모르겠습니다." 하나 밖에 남지 않은 귀를 만지작거리면서 에이스가 말했다. 도대체 어 떻게 되가는 일인지 라이짐은 알 수가 없었다. 여기저기서 천둥소리 같은 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었고, 탐그루는 일순간에 불바다로 변해버렸다. 시 커먼 연기가 탐그루를 완전히 집어삼킬 기세로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었 다. 멀리서 비명소리와 아우성이 어지럽게 들려오고 있었다. 라이짐은 조금 전까지 자신이 있었던 지휘 본부 바로 옆 건물 앞에서 멍청하게 멈추어 서버리고 말았다. 건물은 완전히 무너져 있었고, 곳곳에 서 불길이 솟고 있었다. 대부분이 나무로 만들어진 건물인지라, 시내의 불길은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지휘 본부 쪽으로 가지." 라이짐은 애써 침착하게 말하려고 했지만 말끝이 떨리고 있었다. 설마 지휘본부까지 당한 건 아니겠지. 설마. 단장님이 그렇게 쉽게 죽었을 리 는 없어. 라이짐은 속으로 이렇게 몇 번이고 되뇌면서 지휘 본부 쪽으로 뛰어갔다. 바람이 스쳐가고 있었다. 어느 새 불길에 휩싸인 탐그루는 열 기를 뿜고 있었다. 아무래도 시내 쪽으로 간다는 건 불가능할 것 같았다. 지휘본부 앞에서 라이짐은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지휘본부마저 완전히 불길에 휩싸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단장님..." 라이짐은 망연한 표정으로 지휘본부를 바라보았다. 검붉게 타오르고 있 는 불길은 뜨거운 열기를 내뿜으면서 라이짐을 비웃듯이 내려다보고 있었 다. 라이짐은 불길이 마물보다 더 두려운 생명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럴 때가 아니야. 어떻게든 사태를 수습할 생각을 해야지. 하늘에는 여전히 커다란 새들이 날고 있었고, 새들이 뭔가를 떨어뜨릴 때마다 휘파람 소리 같은 높은 음이 기분 나쁘게 울려 퍼졌다. 그때 라이 짐이 있는 곳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엄청난 굉음과 함께 불길이 치솟았다. 라이짐은 물론이고 하진과 에이스도 불길이 내뿜는 폭 풍 같은 바람에 종이 인형처럼 날려 떨어졌다. 라이짐은 바닥에 떨어질 때의 충격보다 소리에 받은 충격이 더 컸는지 잠시동안 아무 소리도 들을 수가 없었다. 라이짐은 다행스럽게도 등부터 떨어졌지만 에이스와 하진은 잘못 떨어진 모양이었다. 라이짐이 일어났을 때, 두 사람은 쓰러져서 꿈 틀거리기만 할 뿐 움직이질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에이스! 하진!" 라이짐은 일어나 소리쳤다. 하지만 아무도 대답이 없었다. 설마 또다시 전우가 눈앞에서 죽어 가는 모습을 보게 되는 건 아닐까. 라이짐은 에이 스와 하진이 쓰러져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때였다. 라이짐의 눈앞에서 밝은 빛이 번쩍였고, 라이짐은 그대로 뒤로 쓰러졌다. 뭐였는지 판단할 틈도 주지 않고 근처에서 계속 굉음과 열기가 라이짐에게 밀려들어왔다. "에이스! 하진!" 라이짐은 다시 한 번 외쳤다. 하지만 소리는 거의 입에서만 맴돌고 있 는 모양이었다. 라이짐의 귀에는 한동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 저 멍한 이명만이 계속될 뿐이었다. 게다가 눈앞도 거의 보이질 않고 있 었다. 바로 앞에서 불길이 솟는 것을 보아서 그런 모양이라고 라이짐은 생각했다. 라이짐은 이마에 흐르고 있는 땀방울을 닦으려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비릿한 피내음이 훅 풍겼기 때문이었다. 분명히 다치기는 한 모 양이지만 지금으로서는 확인할 길이 없었다. 이대로 죽는 걸까. 라이짐은 하늘을 날고 있는 마물들의 모습과 마물이 떨어뜨리고 있는 이상한 덩어리를 떠올려보았다. 분명 무작위로 떨어뜨리고 있는 게 분명 했다. 저 높은 곳에서 목표물을 정확하게 명중시킨다는 것도 불가능 할 것 같았고, 또 마물이 특별히 노릴 만한 것이 있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 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완전히 무방비로 마물에게 노출되어 있다. 보이 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다. 다만 사방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 때문에 내가 불길 속에 갇혀 있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라이짐은 절망적인 기분 이 되었다. 이렇게까지 절망적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았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소리가 조금씩 들리는가 싶더니 눈앞이 보이기 시 작했다. 라이짐은 지휘본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주저앉아 있었다. 몇몇 군데에서 불길이 오르고 있기는 했지만 라이짐과는 조금 떨어진 곳이었 다. 완전히 불길 속에 갇혀있지는 않다는 걸 알게되자 일단 안도의 한숨 이 나왔다. 하늘을 바라보았다. 언제 마물이 나타났었냐는 듯이 하늘은 온통 푸른빛으로 가득했다. "라이짐!" 하진이었다. 하진은 에이스의 부축을 받으면서 라이짐 쪽으로 절룩이면 서 다가오고 있었다. 하진의 뒤편으로 검은 연기가 불길과 함께 솟고있는 모습이 보였다. 얼굴 여기 저기에 검은 얼룩이 묻어있기는 했지만 불을 피하긴 한 모양이었다. 크게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거의 너덜거리다시 피 하고 있는 오른 팔을 제외하고. "또 팔이 부러졌어. 빌어먹을." "앞으로는 팔만 조심하면 되겠네. 다른 곳은 하나도 안 다친 걸 보면." 라이짐은 억지로 웃음까지 지어 보이면서 농담을 건넸다. 하진은 고통 을 참고 있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라이짐의 농담에 애써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상황은 그럴 만큼 여유 있지 않았다. 언제 다시 마물들이 나타날 지, 또 마물이 노리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에이스. 하진 팔에 부목이나 좀 대줘." 라이짐은 일단 지휘본부 쪽으로 걸어갔다. 아케르 단장을 찾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아케르를 찾아 어떻게든 이 상황을 넘길 수 있는 명령을 받 아야만 했다. 아케르 단장님이라면 무슨 수를 내실 거야. 『환상 문학관-환상장편 (go FAN)』 3877번 제 목:[탐그루] 지는 꽃 피는 꽃 183 올린이:손서호 (김상현 ) 99/01/31 00:12 읽음:1407 관련자료 없음 -----------------------------------------------------------------------------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지휘본부는 완전히 무너져 내려앉아 있었다. 앙상하게 남은 기둥이 시 커먼 연기를 토하며 겨우 서 있었다. 당장이라도 숨이 막혀버릴 듯한 연 기가 코를 찔렀다. 마물의 이름조차 모르고 있는 상황이지만 지금까지 보 아 온 어떤 마물보다 강하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라이짐은 마물이 떨어 뜨린 덩어리의 파편을 집어들어 보았다. 도대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 만 이 덩어리 하나가 지휘본부를 통째로 날려버릴 만한 위력이 있다는 것 은 분명했다. "라이짐." 타호루였다. 타호루는 온 몸에 재를 뒤집어 쓴 꼴을 하고 있기는 했지 만 별다른 상처는 없어 보였다. 마법을 사용한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단 장님도 살아 있을 가능성이 있다. 라이짐은 생각했다. "타호루 님. 단장님은...?" "저 뒤에 계시네." 타호루가 가리킨 곳에는 검은 연기가 자욱할 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 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연기가 서서히 걷히면서 아케르의 모습이 나타 났다. 아케르는 제자리에 서 있었다. 마치 그대로 굳어버린 동상 같은 느 낌이었다. "단장님!" 라이짐은 아케르를 부르면서 아케르가 서 있는 쪽으로 뛰어갔다. 아케 르는 탐그루 시를 바라보고 있었다. 탐그루는 완전히 불길에 휩싸여 있었 다. 멀리서 요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불을 끄기 위해서 동분 서주하고 있는 사람들의 소리 같았다. "탐그루가 불타고 있네." "...예." 의미를 짐작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하지만 아케르의 음성은 뭔가 아쉽 다는 느낌을 강하게 풍기고 있었다. "자네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아케르가 라이짐 쪽으로 돌아서면서 말했다. 아케르의 눈빛은 라이짐을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듯 위압감을 발하고 있었다. "퇴각합니다. 저로서는 수가 없습니다." 라이짐은 잠시 생각해본 다음에 이렇게 말했다. 하늘을 나는 마물을 막 을 수 있는 방법을 라이짐은 알 수가 없었다. 공격하라고 지시를 내린다 면 그건 죽으라는 말과 같은 거였다. 아무리 강한 궁수가 화살을 쏜다고 해도 마물이 있는 곳까지 날아갈 턱이 없었다. "그래. 나도 퇴각할 생각이네." 하지만 자신의 생각이 아케르의 입에서 나오는 걸 듣게 되자 라이짐은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케르 단장이 이렇게 쉽게 물러설 생각 을 하다니. "우리가 준비한 단 한가지의 방법이 실패한다면 말이지." 아케르는 다시 탐그루 쪽으로 눈을 돌리면서 말을 이었다. "아까 본 마물은 그리폰이라는 이름의 마물일세. 준비한 방법은 하나 뿐이야. 타호루. 진행되고 있나?" 어느 새 등뒤로 다가온 타호루에게 아케르가 말했다. "예. 지시했습니다." "라이짐에게 설명해 주겠나?" 아케르의 말에 타호루는 숨을 한 번 깊게 들이 쉰 다음, 설명을 시작했 다. "그리폰은 분명 땅에 있는 것들에게는 강하지만 약점이 있네. 그건 공 중에서는 멈출 수 없다는 점과 날고 있는 그리폰의 몸 자체는 아주 약하 다는 거지. 날개가 조금만 다쳐도 중심을 잃고 땅으로 떨어진다고 전설은 전하고 있네. 그나저나 그리폰은 다시 돌아올 걸세. 이곳으로. 그리고 그 때는 악마의 입 출신 사람의 능력을 믿어볼 수밖에 없지." 타호루는 이렇게 말했다. "악마의 집 출신의 능력이라면 유훈과 재훈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지." 라이짐은 더 이상 대화를 나눌 수 없었다. 그리폰이 사라져간 남쪽 하 늘에서 다시 비행음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타호루는 소리를 듣자 천천 히 마법의 말을 외웠다. "절망* 속에서도* 결코* 죽지* 않는다*" 타호루의 주변이 푸른빛으로 변했다. 방추형의 집채만한 공간이었다. "어서 들어오게. 일단 이 안에 있으면 안전하니까." 타호루가 말했다. 라이짐은 에이스와 하진에게 이쪽으로 오라고 소리쳤 다. 하진과 에이스는 아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는지 휘청거리며 걸어 왔다. "나머지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라이짐은 아케르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비록 자신은 안전한 마법의 보호아래 있다고는 하지만 탐그루에 있을 동료들이 걱정되었기 때문이었 다. "지금 이 상황에서는 단원들이 알아서 피하길 바랄 수밖에 없네. 그리 고..." 말하고 있는 아케르의 표정은 초조해 보였다. 라이짐은 이런 아케르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난 백부장들을 믿네." 라이짐은 아케르의 말에서 강한 자의 판단이란 이런 거구나 하고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때, 상황이 반전될 때가까지 참 고 기다린다. 동요하면 상황의 변화를 알아차릴 수 없다. 라이짐은 정신 없이 굴었던 자신의 모습이 부끄럽게까지 여겨졌다. "이제 됐습니다!" 타호루가 남쪽 하늘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라이짐은 남쪽하늘을 바라보 았다. 그곳에서는 한 무리의 새 때가 허공을 향해 치솟고 있는 모습이 보 이고 있었다. 유훈과 재훈이로구나. 라이짐은 생각했다. 유훈은 오랫동안 떠버리 새를 부리는 일을 해 왔고, 재훈은 하잔에서 작전 때에 이미 타코 를 부리는 능력을 보여준 바 있었다. 짐승을 부리는 능력이 있다는 건 알 고 있지만 그걸로 과연 그리폰을 막을 수 있을까. 라이짐은 목이 아플 지 경으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너무 높은 곳이어서 잘 알아 볼 수는 없었지만 남쪽에서 날아온 두 무 리의 새 때가 날고 있는 그리폰과 부딪쳤다. 라이짐은 주먹을 굳게 쥐었 다. 하얗게 긴장된 주먹이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그리폰이 떨어뜨리고 있는 게 뭘까 라이짐은 한 번 생각해 보았다. 그 리폰은 불을 뿜는 마구를 사용하는 마물인지도 모른다. 라이짐은 저런 것 을 어디선가 한 번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휘파람 소리를 내면서 그리폰은 시커먼 덩어리를 끊임없이 탐그루로 떨어뜨리고 있었다. 하늘이 금방 새카만 점으로 뒤덮이는가 싶더니 탐그루에서 불길이 치솟는 게 보였다. 집들이, 시청이, 중앙 광장이, 별빛주점이 불타고 있을 거였 다. 탐그루에서 솟는 불길처럼 라이짐의 가슴에서도 분노가 치밀어 오르 고 있었다. "내 마력이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타호루가 중얼거렸다. 타호루의 눈빛은 낮게 가라앉고 있었다. "저길 봐!" 하진이 외쳤다. 하진은 두 무리의 새 때 중 한 무리를 가리키고 있었 다. 공중에서 불길이 솟았다. 땅으로 파편이 거미줄처럼 늘어지면서 떨어 지고 있었다. "효과가 있어!" 하진은 기쁜 모양이었다. 라이짐은 하진을 바라보았다. 얼굴이 온통 땀 투성이였지만 기쁜 빛을 가릴 만큼은 아니었다. 하지만 하진의 기쁨도 잠 시, 반대편의 새 때는 어이없이 땅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로군." 그리폰들은 타호루가 말한 것처럼 약하지만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마물인 이상 틀림 없이 무슨 약점이 있을 거였다. 라이짐은 어디선가 본 듯한 그리폰들이 떨어뜨리고 있는 시커먼 덩어리와, 그리폰의 약점과, 또 남쪽 어디에선가 새들을 부리며 고군분투하고 있을 유훈과 재훈을 생각하 느라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고개숙여!" 갑자기 타호루가 외쳤다. 라이짐은 엉겁결에 고개를 숙이기는 했지만 다음 순간 머리 위에서부터 전해진 충격에 등뼈가 산산조각이 나는 고통 을 느꼈다. 충격 때문에 내장이 뒤틀리는 것만 같았다. 마법 방어막에 정 통으로 그리폰의 공격이 가해진 모양이었다. "단장님! 하진! 에이스!" 얼마나 지났을까. 라이짐은 이렇게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중얼거렸다. 몸을 일으키자 벌써 세 번째 받는 공격의 충격으로 라이짐은 온 몸이 부 서질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한 번의 직격으로 마법 방어벽은 사라져버렸다. 공기가 투명해 진 것을 보고 라이짐은 알 수 있었다. 아케르 단장과 에이스는 겨우 일어나 있었 지만 타호루와 하진은 쓰러져 거의 의식이 없어 보였다. "타호루 님!" "...이젠 앞이 보이지 않아. 마법의 힘이 약해졌어." 타호루가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타호루의 눈이 이상했다. 눈이 빛나 고 있어야 할 자리에 움푹 들어간 흔적만 보이고 있을 뿐이었다. 라이짐 은 타호루의 눈이 없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어리석은 과거에 대한 댓가지. 신경 쓰지 말게." 보이지 않을 게 분명했지만 라이짐이 자신의 눈을 보고 있다는 걸 눈치 챘는지 타호루는 이렇게 말했다. 타호루의 표정은 어두웠다. 흉터는 과거 를 말해준다고 했던가. 라이짐은 타호루도 말못할 과거가 있을지 모르겠 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복되는데 얼마나 걸리겠나?" 아케르가 타호루에게 물었다. "좀 걸릴 것 같습니다." "또 한 번 그리폰들의 습격이 지나간 모양이로군." "다음 번에는 조금 더 나아질 것입니다. 유훈과 재훈도 한 번의 경험을 통해서 많은 걸 깨달았을 겁니다. 전투 경험과 선천적인 능력, 거기다가 마법어를 다루는 능력이 더해져서 아마 이 일대에 있는 새들은 거의 다 모아 싸울 수 있을 겁니다." "그만. 좀 쉬겠네." 아케르는 이렇게 말하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라이짐은 아무 일 없었다 는 듯이 눈부신 푸른색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하늘이 두렵다는 생각이 들 었다. 그리폰들이 언제 또 나타날지 모른다. 그리고 이번에는 마법의 보 호도 없다. 라이짐은 이를 악물었다. 그러지 않고서는 다리를 떨지 않고 서 있을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라이짐은 떨리는 가슴을 억누르고 아케르에게 물었다. 아케르는 아무 말도 없이 허공만을 바라보았다. "퇴각한다." 한참이 지난 다음에야 아케르는 이렇게 말했다. 결정을 내리는 일에는 언제나 망설임이 없었던 아케르였지만 이번만큼은 결정을 내리기 쉽지 않 은 모양이었다. 탐그루를 시작으로 하는 원대한 계획이 아케르에게는 있 었다. 먼 미래를 바라보는, 그리고 아주 먼 과거에서부터 준비해 왔던 계 획이었다. 하지만 뜻밖의 마물의 출현으로 아케르는 모든 것을 포기해야 만 할지 모른다. "일단 그리폰의 공격이 탐그루 시에 집중되고 있는 게 분명하니 병력을 탐그루 밖으로 빼는 게 우선이겠지. 팜 산맥 일대로 임시 주둔지를 옮기 는 것으로 한다. 위치는 각각..." 그 때였다. 한 줄기의 빛이 날아오는가 싶더니 아케르의 표정이 일그러 졌다. 라이짐은 반사적으로 몸을 숙였다. 벌써 그리폰의 공격이 시작된 걸까? 아케르는 앞으로 쓰러졌다. 아케르의 등에서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ㄳ긴 옷 사이로 피와 살점이 어지럽게 흩어지고 있는 게 보였다. 이런 상처를 전에 본 적이 있다. 라 이짐은 정박장 쪽을 바라보았다. 정박장에는 거대한 화물선이 서서히 모 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화물선은 정박장에서 흔히 보았던 것처럼 나무로 만들어진 거대한 몸집 을 하고 있었다. 시청 만한 건물이 물 위에 떠있는 듯해서 라이짐은 그 크기에 일단 압도되어 버렸다. 아마도 가장 큰 화물선을 인원 수송용으로 개조한 모양이었다. 배에 칠해진 기름 냄새가 역하게 풍겼다. 화물선 위에는 성황청의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아무리 그리폰에게 정신이 팔려 있었다지만 어떻게 저렇게 커다란 화물선이 들어오는 걸 모 르고 있을 수 있었을까. 아니, 그보다 성황청이 그렇게 순순히 물러날 리 가 없다고 생각했어야 했는데. 정보를 담당하고 있었던 라이짐으로서는 모든 일이 자신의 책임인 것만 같았다. "뭔가? 무슨 일이지?" 타호루가 바닥을 더듬으면서 중얼거렸다. 몇 번의 빛이 화물선 쪽에서 더 날아왔다. 아마도 번개의 힘을 내는 성구인 모양이었다. 성구에서 뿜 어져 나오는 빛이 끔찍한 소리를 동반한 채 라이짐 주위를 스쳐 지나갔 다. "성황청 기사단입니다." 라이짐은 성황청이라는 말을 입에 담는 것 자체가 부끄러웠기 때문에 재빠르게 말했다. 꼭 어린아이가 거짓말을 할 때 그러는 것처럼. "성구인가...... 이 타호루의 실수로군. 눈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완 전히 긴장을 풀고 있었어. 조금만 더 집중했다면 녀석들의 움직임을 느낄 수 있었을 텐데..." 타호루의 뒤늦은 후회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에이스와 하진이 라이짐 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순무 행정 담당관님은 어디 계십니까?" 다급하게 라이짐이 타호루에게 물었다. "탐그루 시내에서 물자를 보호하고 화재를 진압하는 일을 지휘하고 있 을 걸세." 화물선은 이제 완전히 정박장에 멈추어 섰다. "전원 하선한다! 제 일진은 아케르를 쫓는다. 리바르도 기사단장의 원 수! 나머지는 그리폰을 맡는다. 실시!" 화물선의 선수에 서 있는 사내가 큰소리로 지시했다. 전에 보았던 베이 커 기사단장이 아니었다. 훨씬 젊고 기운 넘쳐 보이는 사내였다. 바로 옆 으로 베이커 기사단장의 모습이 보였다. 성황청에 나머지 두 개의 기사단 이 한꺼번에 정박장을 통해 탐그루로 쳐들어 온 것이다. 라이짐은 두 명 의 기사단장 뒤편으로 어두운 빛을 내고 있는 사내를 보았다. 사내의 등 뒤에는 후광이 비추고 있는 것 같았다. 자세히 보니 후광은 약한 빛이기 는 했지만 배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저것도 일종의 방어 마법인가. 누군 지는 알 수 없었지만 성황청 고위 인물일 게 분명했다. 저자는 누굴까. 하지만 한가롭게 생각이나 하고 있을 틈이 없었다. "지시를 내려주십시오." 에이스가 라이짐에게 말했다. 에이스의 목소리에는 감정이 없어서 라이 짐은 상황이 위급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지경이었다. "여기를 피한다!" 라이짐은 일단 아케르를 들쳐업었다. 이곳에 있다가는 상처 때문에 죽 건, 성황청 기사들에게 죽건, 어떻게든 죽을 수밖에 없다. 화물선에서 나 무가 마찰하는 음이 들려왔다. "에이스. 타호루 님을 부탁해." "예." 화물선은 마치 입을 쩍 벌린 것 같은 모습으로 변하고 있었다. 시커먼 저 입에서 당장이라도 기사단이 뮤를 끌고 내릴 것이다. "하진! 걸을 수 있지?" "부러진 건 팔이지 다리가 아니야." "좋아. 그럼 뛴다!" 라이짐은 이렇게 소리치고는 탐그루 시내를 향하여 뛰기 시작했다. 라 이짐은 뒤를 돌아보았다. 성황청 기사단의 모습이 마치 좀비 때처럼 배에 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아케르의 숨결이 점점 약해져갔다. 아직 죽지 않았다. 여기서 이렇게 죽을 수는 없다. 단장님도, 나도, 그 누구도. "벼락의* 힘*" 성구를 작동시키는 마법의 말이 섬뜩하게 들려오자, 곧이어 성구에서 번개가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뮤를 타고 작동을 시키는 탓인지 형편없이 빗나가고 말았다. 하지만 뮤의 속도를 사람이 따를 수는 없는 법이고, 게 다가 라이짐과 에이스는 사람을 업고 있었다. 이제 곧 거리가 좁혀진 후 에는 도저히 벗어날 길이 없다. 라이짐은 좀 더 빨리 정박장을 떠났어야 했다는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 어떤 행동이 최선인가? 라이짐의 머리가 정신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환상 문학관-환상장편 (go FAN)』 3878번 제 목:[탐그루] 지는 꽃 피는 꽃 184 올린이:손서호 (김상현 ) 99/01/31 00:13 읽음:2099 관련자료 없음 -----------------------------------------------------------------------------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서!" 이렇게 외친 것은 타호루였다. 라이짐은 본능적으로 타호루의 말에 멈 추어섰다. 에이스는 당연히 멈추어섰고 하진도 라이짐을 바라보면서 뛰기 를 멈추었다. 의아하다는 표정이었다. "거리가 얼마나 되나." 타호루가 라이짐에게 물었다. 라이짐은 성황청 기사단을 바라보았다. "아니지. 손을 주게." 타호루의 말에 라이짐은 타호루에게 손을 맡겼다. 성황청 기사단은 점 점 더 다가오고 있었다. 뮤들의 숨소리가 느껴질 만큼 가까워졌다. 기사 중 누군가가 성구를 겨누었다. 이제 다 끝나는가. "모든* 일을* 다*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타호루가 마법의 말을 외웠다. 라이짐은 전에도 이 말을 들은 적이 있 었다. 타호루의 말이 끝나자 뒤쫓던 성황청 기사단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시선을 기사단에 집중해!" 타호루가 소리쳤다. 라이짐은 순간 몸을 긴장하면서 기사단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허공으로 떠오른 뮤들은 울부짖으며 몸을 뒤틀었다. 기사들 은 몸을 가누기 위해 허우적거렸고, 어떤 기사는 뮤에서 떨어지기도 했 다. 타호루는 라이짐의 손을 놓았다. 그러자 순식간에 떠올랐던 기사단이 땅으로 떨어졌다. 신경이 예민한 뮤들은 울부짖으며 날뛰기 시작했고 기 사들은 갈팡질팡하면서 어쩔 줄을 몰라하고 있었다. "다시 뛰어!" 살펴보던 라이짐은 그대로 다시 뛰기 시작했다. 숨이 턱밑까지 차 올랐 지만 여기서 멈춘다면 성구의 밥이 될 게 분명했다. "시간은 벌었지만 길지는 않을 걸세. 이젠 마법도 쓸 수 없어. 기력이 다 했으니 말일세. 이제는 모든 걸 운에 맡기는 수밖에..." 타호루가 에이스의 등에서 힘없이 중얼거렸다. 기사단이 전열을 가다듬기 전에 성구의 사정권 밖으로 피하는 것만이 살아날 수 있는 길이다. 라이짐은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도저히 무리일 것 같았다. 이미 정신을 차린 기사들이 벌써 성구를 작동시키기 시작했고 점점 정확해 고 있었다. 다시 마법을 쓸 수 없을까 해서 라이짐은 타호루 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표정으로 봐서 도저히 다시 마법을 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타호루는 에이스의 등에 매달리다시피 간신히 업혀 있었다. 그때였다. 바로 옆에서 불길이 솟았다. 라이짐은 뛰면서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그리폰들이었다. 그리폰이 시커먼 덩어리들을 다시 떨어뜨리고 있었다. 성구의 작동이 멈추었다. 라이짐은 뒤를 돌아보았다. 성황청 기 사들은 허공을 향해 성구를 작동시켰다. 한 줄기 빛이 솟아오르는가 싶더 니 이내 수많은 빛의 줄기가 소나기처럼 허공으로 솟았다. 그리폰들이 공 중에서 불타기 시작했다. 노란빛은 번개처럼 뿜어져 올라가 그리폰들을 공중에서 태워버렸다. 바람을 뿜는 성구도 작동해 그리폰들을 좌우로 흔 들어 놓고 있었다. 그리폰들은 완전히 갈팡질팡하는 모습이었다. 떨어뜨 리고 있는 덩어리들이 바람에 흩날려 여기저기로 흩어졌다. 이번에는 바로 앞에서 불길이 솟았다. 조금만 더 빨리 갔더라면 그대로 죽었을 게 분명했다. 라이짐은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라이짐은 쓰러진 채로 뒤를 바라보았다. 등뒤로 성황청 기사단이 뮤에서 내려 다가오고 있 는 모습이 보였다. "에이스." 라이짐은 에이스에게 단검을 내 주었다. 최후의 수단이었다. 하지만 이 걸로 얼마나 시간을 벌 수 있을까. "잔재주도 이제 끝이다. 이렇게 우리를 고생시키다니. 칭찬 받을 만 해." 기사 중에 하나가 성구를 겨누고서 쳤다. 라이짐은 그 기사를 향해 단 검을 던졌다. 그 순간 성황청 기사들 한 복판에서 폭음과 함께 불길이 치 솟았다. 라이짐은 성황청 기사들이 갈기갈기 찢겨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 라이짐의 얼굴에 피묻은 살덩어리가 떨어졌다. 라이짐이 살덩어리를 떼어 내며 말했다. "멋있군. 칭찬받을 만해" 하지만 만약 그리폰들이 떨어뜨린 저것이 우리들 머리 위에 떨어졌다 면? "하진. 이젠 됐어."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내면서 라이짐이 말했다. 자신의 피인지, 아니면 적의 피인지 구분은 할 수 없었지만 냄새만큼은 똑같이 전장의 냄새를 풍 기고 있었다. "운이... 따라줬군." 하진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라이짐은 하진을 바라보았 다. 하진의 왼쪽 가슴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불길에서 뿜어져 나 오는 파편에 맞은 모양이었다. "아니, 우리가 운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은 거야." "젠장. 팔만 부러지나 했더니. 이거, 앞으로는 돌아다니지도 못하겠는 걸." 하진은 끝까지 여유 있는 척 했다. 하지만 피의 양으로 보아서 간단히 끝날 상처는 아닐 듯 싶었다. "라이짐. 내 말, 내 말 들리나?" 아케르였다. 정신이 조금씩 돌아오고 있는 모양이었다. "예. 단장님." "전면 퇴각을 지시하게. 탐그루를 떠나 하잔에 집결한다." 아케르의 목소리는 거의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아슬아슬하게 이어졌다. 성황청이 개입한 이상 여기서 더 전투를 벌인다는 것은 무리라는 판단일 거였다. 그렇다면 조금이라도 더 빨리 이 사실을 알려야 했다. 하지만 어 떻게? 라이짐은 일단 자리를 뜨기로 마음먹었다. 탐그루 시에 들어가면 누구라도 만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라이짐은 일단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폰의 공격이 뜸해져 있다. 성 황청 기사들이 작동시키고 있는 성구의 빛이 그리폰들을 계속해서 떨어뜨 리고 있었다. 바람의 성구는 그리폰들을 탐그루 바깥쪽으로 계속 유도하 고 있었다. 일사불란한 성황청의 공격에 그리폰들도 당황했는지 공중에서 우왕좌왕했지만 타호루의 말처럼 일단 날기 시작하면 공중에서는 멈출 수 는 없는 모양이었다. 멈추지 못하고 계속 날고 있는 그리폰에게 이번에는 재훈과 유훈의 새때도 공격을 계속했다. "하진. 걸을 수 있어?" "아니." 하진은 억지로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가. 여기 있으나 움직이나 내가 살 가능성은 똑같아. 신경 쓰지마." 하진의 말은 옳았다. 하진의 왼쪽 가슴에서 피가 계속 흘러나오고 있는 게 보였다. "그럼 약속해. 죽지 않는다고." 라이짐은 일어서면서 말했다. 하진은 웃으려고 했지만 웃음 대신 기침 이 터져 나왔다. 폐를 다쳤는지 입에서 피가 한 웅큼 쏟아졌다. "그래. 죽어도 그 약속은 지킬게. 너무 걱정하지 마. 바바 족이 마을을 완전히 날려버렸을 때도 살아남았던 나야." 입가의 피를 닦으면서 하진이 말했다. 이런 마당에 농담까지 던지다니. 왈칵 울음이 쏟아질 것 같았다. 하지만 라이짐은 그대로 뒤 돌아서서 시 내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돌아보면 시간만 더 끌게 될 것이 분명했기 때 문이었다. 미안해. 미안해. 라이짐은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이렇게 빚만 지고 살아남는 구나. 내 생명은 벌써 몇 명에게 빚진 생명인가. 이 생명을 결코 가볍게 하지 않겠다. 목숨을 건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살아 남는다. 어떻게든 살아남는 거다. 그리고 살아남은 값어치를 하는 거다. 내게 이 생명을 지키게 해 준 사람을 위해서. 라이짐은 얼굴에 흐르는 것 을 닦아내었다. 라이짐은 아직 그것이 머리의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피라 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탐그루 시내는 온통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여기저기서 연기와 불꽃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간혹 소리를 지르며 뛰어가는 사람들과 망연히 자리 에 쓰러져 있는 사람, 또 기를 쓰고 불을 끄려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 다. 지옥이다. 지옥이 있다면 이런 모습일 것이다. 순간 라이짐은 마칸의 강림과 마물의 출현에 대한 전설이 무섭도록 가깝게 느껴졌다. 하늘을 향 해 나무에서 튀어 오르는 불티들이 어지럽게 흩날리는 게 보였다. 라이짐 은 그 불티들을 보면서 벌레처럼 꿈틀거리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 렸다. 내가 구원해 주리라. 라이짐은 생각했다. 내가 저들을 구원할 것이 다. 평화롭게, 다들 웃으며 살 수 있는 세상은 누군가 이끌어 주지 않으 면 오지 않는다. 눈앞의 이익만을 좇아 떠도는 저 불티같은 인간들을 구 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나 하나 뿐이다. 라이짐은 생각했다. 이제 라이 짐의 안에서 떡잎을 내었던 씨앗은 이제 줄기를 뻗고 빠른 속도로 자라나 고 있었다. "라이짐 십부장님." 에이스가 라이짐에게 물었다. "이제 날 십부장이라고 부르지 마. 정보부장님이라고 불러." 라이짐은 탐그루 시장과의 배알식 때 자신을 비웃던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말했다. "하지만 라이짐 님의 공식적인 직책은..." "내가 결정했다. 내 위치는 이제 내가 만들어 간다." 에이스는 왼쪽 귀를 잠시 만지작거리더니 말했다. "나이스와 자이스입니다. 그리폰의 공격을 피해서 각각 몸을 숨기고 있 다고 합니다. 다음 지시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직접소통?" 라이짐은 나이스와 자이스가 탐그루에 있다는 것이 떠올랐다. 그래. 직 접소통능력이 있었다. 단순히 정보를 교환할 수 있는 능력으로만 생각했 었는데. 라이짐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나이스에게 당장 발렌시아 백부장에게 퇴각할 것을 지시하라고 해. 아 케르 단장님이 직접 지시하신 거라고. 이어서 마다사 백부장, 제이슨 백 부장, 미쥬 백부장에게도 그렇게 지시하라고 해. 지침은 다음과 같다. 모 든 물자와 시민은 포기한다. 제 일 순위로 전투력을 보존하는 데 총력을 기울인다. 일차 집결지는 하잔이다. 그리고 자이스에게는 순무 행정 담당 관을 찾아서 같은 내용을 전달하라고 해. 그리고 순무를 찾건 못 찾건 다 음 지시사항은 신다루 백부장이야. 그리고 잊지마. 아케르 단장님의 직접 지시라고 말하는 것을. 다 기억하겠지?" 라이짐은 숨도 한 번 쉬지 않고 에이스에게 말했다. "하지만 아케르 단장님은 지금 쓰러져 계시지 않습니까?" "단장님은 지휘 불능 상태고 지금 전체 작전을 통괄할 수 있는 건 나뿐 이다! 지금은 내가 단장이다. 지금은 내가 아케르란 말이야. 에이스!" 라이짐은 소리쳤다. 라이짐은 자신이 뭔가 변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또 앞으로 이 변화가 자신의 운명에 어 떤 영향을 끼칠지는 모르고 있었다. 다만 가슴에서 뜨거운 피가 솟아나와 맹렬히 혈관을 타고 흐르고 있는 것만을 느낄 수 있을 뿐이었다. 타오르 는 불꽃에서 나오는 열기가 라이짐의 몸을 후끈 달아오르게 하고 있었다. "예. 알겠습니다." 에이스는 이렇게 말하고는 눈을 감았다. 직접소통을 시도하고 있는 것 이다. "라이짐." 아케르 단장이었다. 완전히 의식을 잃고 있는 줄 알았는데. 라이짐은 순간 뜨끔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만 표시는 내지 않았다. 아케르의 목 소리는 당장이라도 멈출 듯 다시 이어졌다. 이마의 십자 모양의 흉터가 붉게 두드러져 보였다. "예. 단장님." "퇴각이 우선이 아니다. 우선 순위는 안토니오 군단의 안전한 퇴각이 다. 성황청 기사단은 우리 용병단이나 타실의 카이사 군단, 스파일의 안 토니오 군단을 노릴 것이다. 일단 탐그루 동편의 발렌시아 백부장의 주둔 지에 집결하라고 지시해. 그리고 안토니오 군단이 물러날 때 까지 성황 청 기사단을 막으라고 해." 아케르는 겨우겨우 말을 잇고 있었다. 라이짐은 아케르의 생각을 이해 할 수 없었다. "단장님. 전투력을 보존하지 못하면 훗날을 기약할 수 없습니다." "...내가 결정했다." 라이짐의 말에 아케르가 못을 박았다. 생각은 나중에 하라는 뜻이리라. 라이짐은 고개를 끄덕였다. "단장님 뜻 그대로 전해." 라이짐이 말했다. 조금은 기운이 빠진 목소리였다. "그리고 라이짐. 직접소통으로 지시를 내리기로 한 거, 잘했다." 아케르는 다시 의식이 흐려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발음이 부정확하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훌륭했어. 나라도 그렇게 빨리는......" "그만 말씀하십시오." 라이짐은 아케르의 손을 잡았다. 아케르의 온기가 라이짐에게 전해지고 있었다. "우리는 하잔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다시 시작하는 거야. 아케르, 여기 서 물러서지 않는다. 다시 함께 하는 거야, 라이짐 정보부장." 이 말을 끝으로 아케르는 의식을 잃었다. 그런 상태에서도 아케르의 눈 은 꿈을 꾸고 있는 사람처럼 한군데에 머물지 않고 정신없이 움직였다. 그런 아케르를 보며 혼잣말처럼 라이짐이 중얼거렸다. "네. 꼭. 살아남는다면요." 성황청의 성구는 계속해서 빛을 뿜어 올리고 있었고, 그리폰들의 공격 도 멈추지 않고 계속되고 있었다. 시민들은 여전히 어찌할 바를 모르고 뛰어다니고 있었고, 에이스는 직접소통을 계속하고 있었다. 라이짐은 자리에서 일어나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한 기세로 몰려다니고 있는 불길을 바라보았다. 그 불길을 바라보고 있는 라이짐의 가슴속에서 도 뭔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생지옥으로 돌변해 버린 이곳에 언젠가 돌아 오리라. 이렇게 나약한 모습으로가 아니라 진정으로 강해져서 돌아온다. 그때 내 생명의 빚을 갚겠다. 그날 밤 탐그루는 밤이 없었다. 대낮 같은 지옥만이 있을 뿐이었다. 탐 그루는 밤새 불타 올랐다. 탐그루와 함께 라이짐이라는 이름의 한 소년도 불타 버렸다. 이제 새벽이 오면 아름답던 운하의 도시 탐그루는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잿더미가 된 심장을 가진 한 청년이 그 폐허에서 일어날 것이다. ---------------------------------------------------------------- 잠시 쉬겠습니다. ^^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6218/19898 ━━━━━━━━━━━━━━━━━━━━━━━━━━━━━━━━━━━━━━━━ 제 목:[탐그루] 까페 사이환 185 관련자료:없음 20/20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2-20 00:21 조회:2740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 까페 사이환 로스안에 온지도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프라브리티로 떠난 오브라디 교수와 스칼렛도, 홀리우드로 떠난 바리바와 루크도, 그리고 목적지를 밝 히지 않고 어딘가 잠깐 다녀온다며 떠났던 크라이도. 아직 아무도 돌아오 지 않았다. 테이블 위 사과즙이 담겨있는 잔이 열기에 달아올라 당분이 찐득찐득하 게 굳어 가고 있었다. 오랜만에 홀가분하게 지낼 수 있게 되서 좋을 거라 고 생각했는데, 막상 혼자 지내다보니 며칠 되지도 않아 벌써 지루하고 심심했다. 이럴 때 말 없는 모짤트, 아니 크라이라도 함께 있었다면 훨씬 덜 지루했을 텐데. 한낮의 더위와 함께 시간이 더디게만 흘러갔다. 더운 계절이 시작된지도 꽤 오래 됐다. 음료수들은 모두 푸른 색 연금 술사의 등 빛처럼 차게 식혀져 나왔지만 몇 모금 마셔보기도 전에 미지근 해지곤 했다. 여기저기서 담배연기가 천장으로 오르고 있었다. 연기가 가 득 찬 까페 안을 바라보고 있으면 꼭 불이 난 건물 안에 갇혀 있는 기분 이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담배 연기 때문에 기침도 많이 했지만 지금 은 익숙해져서 괜찮다. 하지만 이 더위와 옷을 축축하게 적시는 땀방울만 큼은 아무리 해도 적응이 되질 않는다. 지금 내가 앉아 있는 곳은 사이환 까페다. 천장에는 환한 연금술사의 등빛이 밤의 기운을 몰아내며 빛을 뿌리고 있었고, 까페에 앉은 손님들은 저마다 이야기를 나누며 한가로운 한 때를 보내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이 가진 슬프고 쓸쓸한 오래된 기억들 사이로 노래가 흘러간다. 세월이 가면 알게 되겠지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이라고 입맞춤은 그저 입맞춤일 뿐이고 한숨은 그저 한숨일 뿐이라는 걸 떠나간 내 님은 돌아오지 않고 사랑도 이젠 그저 사랑으로 남게 되려나 세월이 가면 알게 되겠지 까페 중앙에 놓여져 있는 커다란 건반악기 앞에 앉은 샘이라는 이름의 검은 엘프가 악기를 연주하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노래가 끝나자 박 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라이짐. 어때. 좋은 곡이지?" 사빈은 여전히 내 이름을 라이짐으로 잘못 알고 있었다. 나야 어차피 본명을 밝히지 않는 편이 나으니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하 여간 기분 나쁜 일이다. "너하고 함께 했던 탐그루의 일이 생각나는군. 정말 지옥이었지. 기억 나? 그 탐그루 운하 대전투 말이야. 너하고 나 단 둘이서 완전 무장한 백 명의 자치대원들과 맞섰잖아. 사방에서 핏물이 물보라처럼 날리고, 어느 게 내 손인지, 어느 게 내 목인지 분간이 가질 않을 정도였지.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살아남은 게 용하다는 생각이 들어. 물론 이렇게 흉터가 남 기는 했지만 말이야." 사빈은 오른 팔 소매를 걷어붙이면서 말했다. 그러자 사빈 옆에 서 있 던 화장을 짙게 한여자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면서 사빈의 팔뚝에 남아있 는 흉터를 바라보았다. 팔에는 불에 그을린 흉터가 남아있었다. 전에 탐 그루에서 만났을 때는 용과 싸우다가 생긴 흉터라고 했는데. 사빈은 매사 가 이런 식인가 보다. 사빈과 맞서 싸웠던 사냥꾼이 사빈을 뻥쟁이라고 불렀던 건 절대로 과장이 아니었다. "정말? 세상에 이렇게 큰 흉터가 남다니. 왜 싸웠어요?" 사빈 옆에 서 있던 여자가 큰 가슴을 흔들면서 사빈에게 물었다. 어쩐 지 알록달록한 무뉘가 있는 소를 연상시키는 여자였다. 천박한 화장에 얼 룩덜룩한 무늬의 드레스를 보니 더욱 그런 생각이 굳어졌다. "쉿. 아무 말도 하지 마. 그렇게 먼 과거의 일은 기억나지 않아." 사빈은 검지 손가락을 흔들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웩! 나는 헛구역질이 나는 걸 겨우 고개를 숙여 참았다. "사빈. 오늘밤에 뭐 할거야?" 사빈의 팔뚝에 매달리면서 콧소리를 한껏 섞어서 여자가 말했다. "그렇게 먼 미래의 일도 역시 모르지. 부탁이니까 이제 그만 좀 자리를 비켜 주겠어? 옛 전우하고 나누고 싶은 얘기가 있어서 말이야." 사빈은 과장된 몸짓으로 여자를 보내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까 그 노래, 제목이 뭐지요?" 나는 사빈에게 물었다. 어차피 별로 할 일도 없던 차였다. 사빈이랑 얘 기나 하면서 시간을 때울 작정으로 물었다. "'세월이 가면'이라는 곡이지. 사랑과 추억에 관한 노래야." 사빈은 이렇게 말하면서 턱을 젖혔다. 그러면서 사빈의 눈은 출입구를 향하고 있었는데 마치 누군가를 간절히 기다리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 노래를 들으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어. 한 때는 이 노래를 절대로 듣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적도 있었지. 샘에게 절대로 이 곡은 연주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던 적도 있으니까. 쉿. 어떤 사연이 있는지는 묻지 말 아 줘. 그 이야기를 했다가는 적어도 쇠주 열 병은 마셔야 잠자리에 들 수 있을 거야." 물론 아무도 사빈에게 무슨 사연이냐고 묻지 않았고, 나도 역시 전혀 관심이 없었다. 사빈은 사람들이 모두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 무지무지하 게 궁금해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다른 사람한테는 뭐라고 말해요? 혹시 국경에서 바바 족과 싸우며 불 렀던 군가라고 하진 않았어요?" 나는 어이가 없어서 이렇게 말했다. 보나마나 팔뚝의 흉터를 이 사람에 게는 저렇게 이야기하고, 저 사람에게는 이렇게 이야기하듯이 저 곡에 관 한 과거도 마음대로 얘기할게 뻔하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 다. "응? 지금 뭐라고 했지?" 자기 목소리에 도취되어서 내 말이 잘 들리지 않았는지 사빈은 내게 이 렇게 되물었다. "아뇨. 그냥 오늘 손님이 많다고. 사람이 참 많네요, 여기 까페 사이환 에는." 까페 안의 손님들은 각지에서 모인 제각각의 사람들이었다. 비록 스파 일 주에 속해있다고는 하지만 실리포니아라는 별칭이 붙어있는 곳에 있는 만큼 이곳은 스파일과는 조금 분위기가 다른 곳이었다. 아마도 항구 도시 이기 때문에 그런 속성이 더 강해졌으리라. 타실에서 온 상인은 물론이고 스파일에서 도망쳐온 귀족, 국경지대에서 온 군인, 자나크에서 온 연금술사, 성황청 사람들도 있고, 멀리 남단에 있다는 범버쿠 정글에서 온 탐험가까지... 이곳 로스안은 그야말로 바르 도 대륙 사람들의 집합소였다. 나는 이렇게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 아무런 충돌 없이 잘 지내고 있었 다는 사실 자체가 신기하기 그지없었다. 특히 타실 사람과 스파일 사람은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거리기 마련인데 말이다. (사실 말다툼 정도는 늘 있었지만 사빈이 정치적으로는 항상 중립을 지킨며 능란하게 싸움을 말려 서 대부분의 싸움이 크게 번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최근에 로스안을 둘러싸고 성황청과 스파일 주둔군 사이에 분쟁 이 생기면서 사정이 조금 달라진 모양이었다. 성황청이 로스안의 정치에 관여하고, 또 기사단 병력을 일부 파견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조금씩 로스 안에도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일행들을 기다리며 보내는 하루하루가 불안했다. 특히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은 성황청의 기사들과 스파일에서 온 군인들 이었다. 두 세력은 거의 엇비슷해 보였고 언제나 당장이라도 싸울 기세로 상대방에게 으르렁거리곤 했다. 다행히도 이곳 자치대가 적당히 알아서 균형을 맞추어 주고 있어서 위태로운 균형이 아슬아슬하게 나마 계속 이 어지고 있었다. (싸움이 나면 곤란해지는 것은 나 같은 여행자들 뿐이다) "사빈. 이 쪽으로 좀 와 주게." 구석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두 명의 스파일 병사가 사빈을 불렀다. 두 사람은 주사위 도박을 하고 있었다. 용병단에서 자주 보았던 모습인지라 그냥 그런가보다 했지만, 바로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 종업원인 것을 보 니 아마 사빈은 이곳을 도박장으로도 운영하고 있는가 보다 싶었다. "잠시 실례." 사빈은 이렇게 말하고는 가벼운 걸음으로 자리를 떴다. 사빈은 탐그루 에서 보았던 반 거지꼴의 사빈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비쩍 마르고 큰 키에 희멀건한 얼굴과 뻥은 그대로였지만, 일단 까만 정 장에 발목까지 내려오는 겉옷을 걸친 모양도 그렇고 늘 향수 냄새를 풍기 며 까페 안을 걸어다니는 모습이 귀족이 따로 없었다. 아마 누군가 한 때 사빈이 용사냥꾼입네 하면서 거지꼴을 하고서 돌아다녔다는 말을 한다면 그 사람은 당장 거짓말장이로 몰릴 지경이었다. "이, 이거 봐요, 젊은 검사 양반. 도대체 저 친구 뭐하던 사람이었데 요?" 내 옆에 앉아 있던 한 여행객이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용 사냥꾼이었데요. 용을 백 마리도 넘게 잡았다지요, 아마?" "용 사냥꾼? 우와, 대단하군. 난 용이라고는 구경도 못해봤는데. 그런 데 왜 이런 구석에서 까페나 하고 있는 거래요? 용이라면 값도 상당히 나 갈텐데. 백 마리나 넘게 잡았다면 성도 하나 세울 수 있겠네." "잘 모르셔서 하시는 말씀이세요. 이곳 주방장은 삼년전쟁 때 수도 방 어 작전의 영웅이라구요. 천 명의 적을 단 열 명으로 막아낸 최강의 십부 장이었데요. 여기 까페지만 단순한 까페가 아니라구요. 그 이름도 유명한 사이환이라구요." 물론 나는 농담으로 한 말이었지만 여행객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과연 그렇군 하는 표정이었다. 사빈과 함께 있으면 사람이 다 이상해진다니까. 그래도 이렇게 다시 만다다니 보통 인연은 아닌 거 같다. 내가 이곳 로스안에 혼자 남게 된 건 오브라디 교수의 제안 때문이었 다. 서커스 벌판을 벗어나니 로스안과 스파일의 수도 프라브리티로 가는 갈림길이 나왔다. 그곳에서 오브라디 교수는 일단 일행을 나누자고 제안 했다. "한꺼번에 움직이는 건 별로 효율적인 방법이 아닌 것 같네." 오브라디 교수는 갈림길에 놓여진 작은 푯말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나 무로 만들어진 푯말은 깨끗한 새것이었다. 아마도 최근에 다시 만든 모양 이었다. 아마 지나는 사람이 많은 모양인가보다 싶었다. 맑은 하늘 아래 선 푯말이 더욱 하얗게 빛을 내고 있었다. 누가 매일 광이라도 내는 걸 까. 푯말 문제야 그렇다 치고, 어찌 되었건 오브라디 교수의 제안은 다음과 같았다. 먼저 자신과 스칼렛은 프라브리티에 산다는 스칼렛의 친척에게 탐사 자금을 빌리러 가고, 바리바와 루크는 홀리우드를 거쳐 로스안으로 가라는 거였다. "왜 바리바와 루크는 홀리우드를 거쳐서 가야 한다는 거에요?" "내가 부탁했어, 수르카." 바리바가 대답했다. "우리 둘에겐 시간이 필요해." 루크의 표정은 진지해 보였다. 보통 이런 말을 할 때 루크는 바리바의 팔에 매달려서 말하곤 했는데 지금은 그냥 가만히 서서 나를 똑바로 바라 보고 있었다. "그냥 로스안에 가기전에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거라고 생각해줘."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끄덕이지 않는다고 해서 바리바와 루크가 홀리우드에 가지 않을 것도 아니니까 말이다) "그럼 저하고 찬, 아니 모짤트, 아니 크라이는 어떻게 하지요? 또 그레 텔은요?" 나는 오브라디 교수에게 이렇게 물었다. (이름이 하도 자주 바뀌니 헛 갈리는 것도 그리 창피한 일은 아닐 테지만 가만히 보니 이름을 잘못 부 르는 건 나뿐인 것 같았다) "먼저 로스안에 가서 기다리고 있어. 여관도 좀 잡아 놓고, 그곳 사정 도 좀 파악하고." "오리피 신전 탐사는 어쩌고요?" "일단 로스안으로 집결한 다음에 가기로 하지. 어차피 그레텔하고 함께 가야 할 테니까 말일세. 내 말 알겠나?" "그런데 왜 우리만 따로 떼 놓으시려는 거예요? 바리바와 루크는 그렇 다고 쳐도, 나머지는 함께 다녀도 상관없잖아요." 나는 일행이 분산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하다가는 필경 무슨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중간에 사고가 나서 다시는 못 만나게 될 지도 모르고, 아니면 오브라디 교수와 스칼렛이 돈을 갖고 도망쳐 버 릴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이런 저런 생각 다 잊어버리더 라도 일행과 떨어져 있는다는 것이 불안했다. "흠. 그건 말일세." 오브라디 교수는 뭐라고 말을 하려고 했지만 잘 나오지 않는 모양이었 다. 오브라디 교수의 뺨이 붉어졌다. 왜 저렇게 얼굴을 붉히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언뜻 드는 생각이 혹시 스칼렛과 단 둘이 있고 싶어서가 아 닌가 싶었다. 만약에 그런 거라면 더더욱 두 사람만 달랑 보낼 수는 없 다. 오브라디 교수는 위험인물이다. 만약 스칼렛에게 흑심을 품고... "나도 따라가겠어요. 세상이 이렇게 험한데요. 바리바와 루크는 상관없 다손 치더라도 스칼렛하고 오브라디 교수님만 따로 보내 드릴 수는 없어 요. 절대로!" 나는 무슨 고집인지 이렇게 말해버리고 말았다. 지금 생각해 보니 참 어리석은 짓이었다. 나는 그때까지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오브라디 교 수가 돈을 빌리러 가는 걸 구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걸 말이다. "안돼!" 갑자기 오브라디 교수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나는 오브라디 교수가 이 렇게까지 화를 낼 필요가 있을까 싶었지만, 일단 일행의 대표가 이렇게까 지 부득부득 따로 가겠다고 하니 더 이상은 따라 가겠다고 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물러서는 게 별로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지만 용병 때 배운 그대로, 아무리 틀린 명령이라고 해도 지휘관으로 인정했다면 지휘관의 명령을 따라야한다. "...좋아요. 오브라디 교수님. 하지만 그 넓은 로스안 어디서 기다리고 있으란 말이에요? 저도 크라이도 로스안에는 초행이라고요." 나는 오브라디 교수를 바라보지 않고 이렇게 물었다. 그러자 바리바가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오브라디 교수 대신 대답했다. "내가 잘 아는 까페가 있어. 거기서 만나기로 하지. 사이환이라는 까페 야." "아, 그래요. 사이환이라는 까페. 하지만 거길 도대체 어떻게 찾으란 말이에요? 이거야 원, 탐그루에서 과일 가게 찾기지."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6219/19898 ━━━━━━━━━━━━━━━━━━━━━━━━━━━━━━━━━━━━━━━━ 제 목:[탐그루] 까페 사이환 186 관련자료:없음 21/21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2-20 00:21 조회:2128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나는 일부러 이렇게 비꼬는 말투로 바리바에게 말했다. 하지만 바리바 는 조금도 흔들리는 기색 없이 나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로스안에서는 누구나 사이환으로 가.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바리바의 말은 정말 사실이었다. 나와 크라이는 로스안에 도착 하자마자 말린 고기를 파는 노점상에게 사이환이라는 까페를 물었고 그 사람은 이렇게 대답했던 것이다. "로스안에는 초행인 모양이로군. 사이환을 모르다니." 나는 솔직히 조금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유명한 까페라지만 로스안처럼 큰 도시에서 이렇게 쉽게 찾을 수 있을 정도의 까페라니. "그럼 이곳 사람은 누구나 사이환 까페를 다 안단 말이에요?" 내 질문에 노점상은 모자를 눌러쓰면서 이렇게 대꾸했다. "누구나 사이환으로 가지. 문제가 생기면 말이야. 무슨 문제인지는 몰 라도 좀 심각한 문제가 있나 보군. 혹시 ㄳ기는 거 아니야?" 노점상의 말에 나와 크라이는 뜨끔해서 서로의 얼굴을 쳐다 보았다. "그 뮤 말일세." 상인이 나와 크라이가 타고 있는 뮤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말했다. 스타바는 낯선 사람에게서 손가락질을 당하자 숨을 거칠게 쉬면서 예민하 게 반응했다. "여기서는 뮤를 타고 다니면 안 돼. 칼은 차고 다닐 수 있지만 말이야. 그걸 모르는 걸 보니까 쫓기는 게 분명하군." "그건 쫓기는 걸 알 수 있는 단서가 아니라 우리가 초행이라는 걸 알 수 있는 단서 아닌가요?" 나는 스타바에서 내리면서 잔뜩 인상을 쓰고 말했다. 내 지적에 노점상 은 킬킬거리면서 잠시 웃으며 말을 받았다. "하여간 사이환으로 가 봐. 거기 가면 어떻게든 될거야. 말했잖아. 문 제가 생기면 누구나 사이환으로 간다고." 그렇게 해서 나와 크라이는 사이환으로 찾아갔고, 그곳에서 사빈을 만 났던 것이다. 사빈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용사냥꾼이랍시고 탐그루에 왔을 때의 모 습과는 전혀 딴판인 모습이었다. 앞서도 말했지만, 잘 차려입은 모습의 사빈을 알아보는 데는 시간이 좀 걸렸다. "이게 누구야! 탐그루에서 만났던, 음, 그러니까, 이름이..." 나는 알고 있던 얼굴을 만나서 기쁜 마음에 먼저 이름을 크게 부르며 사빈에게 달려갔다. "사빈!" "아, 그래 맞다. 라이짐. 라이짐 맞지. 사스카치 백 마리에게 쫓기는 걸 내가 구해줬지, 기억해?" 역시 아직도 내 이름을 모르고 있었다. 여전히 라이짐으로 알고 있다 니. 나중엔 나보고 백발의 영웅이라고 부르는 거 아니야? "이거야, 이거. 기억하지?" 사빈은 벽에 걸려있는 사스카치의 가죽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까페 안 에 있던 손님들의 시선이 그곳에 집중되었다. 사빈은 살짝 눈치를 살피더 니 일부러 목소리를 크게 높이고는 이렇게 말하기 시작했다. "탐그루에서 말이야. 사스카치떼를 앞세운 바바 족의 별동대가 들이닥 쳤던 일 말이야. 그때 나하고 함께 목숨을 걸고 싸웠잖아. 기억나지? (물 론 사빈은 내가 대답할 틈을 결코 주지 않았다) 사방에서 사스카치의 괴 성이 울려 퍼지고, 바바 족의 괴상한 말소리, 지독한 피비린내, 자치대원 들은 손 한 번 써보지 못하고 사스카치 앞에서 쓰러져 나갔지. (사빈은 여기서 목소리를 아주 낮게 깔고 심각한 어조로 밀담을 나누듯 말했다) 그래. 그건 말 그대로 지옥이었어. 우리는 전우야. 시체의 산을 넘고 넘 어 지옥에서 살아돌아온 전우. (다시 목소리가 커졌다) 만나서 정말 반갑 다. 전우" 사빈은 이렇게 말을 끝내고는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나를 부둥켜안 으면서 내가 말을 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이봐, 사빈. 나는 말이야..." "옛 전우를 만나서 오늘은 기분이 좋군. 샘. 오늘 온 손님들에게 맥주 한 잔씩 돌려. 라이짐. 걱정하지 마. 여기 왜 온 건지는 몰라도 갈 때까 지 무료로 숙소를 제공해 줄 테니까. 식사도 물론 무료고. 아, 사양하지 마. (나는 여전히 황당하다는 표정만 짓고 있었다)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옛 전우에게 이 정도는 기본이지. 이 용사냥꾼 사빈, 의리와 명예 빼면 시체라는 건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니까. 하하하. 오늘은 유쾌한 날이 야." 사빈은 이렇게 말하면서 건반 악기 앞에 앉아 있던 검은 엘프에게 음악 을 부탁했다. 순식간에 까페 사이환에 활기찬 음악이 흘러 넘치기 시작했 다. "그런 일도 있었나?" 크라이가 그레텔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사빈은 신이 나서 돌 아다니면서 손님들과 탐그루에서의 무용담을 떠들어댔고, (가만히 듣고 있자니 말할 때마다 해치운 괴물의 숫자와 종류가 많아지고 점점 더 황당 한 내용으로 흐르고 있었다. 한 시간만 더 지나면 나와 사빈은 바르도 대 륙 역사 이래 최고의 영웅이 될 판이었다) 종업원들은 분주히 공짜 맥주 를 나르기 시작했다. "글쎄. 아마도." 나는 그냥 이렇게 얼버무리고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숙소와 먹을 것을 무료로 준다고 하는 데 굳이 사빈을 뻥쟁이라고 말할 필요는 없겠다 싶었다. "약간은 과장이지만, 뭐 사실인 것도 좀 있고, 하여간 아는 사람인 건 분명해." 나는 긴 옷자락을 휘날리면서 다른 테이블로 옮겨가는 사빈을 바라보면 서 이렇게 말했다. 무료인 게 좋긴 하지만 크라이까지 속이고 싶지는 않 았다. "이봐, 여기도 술 한 병 가지고 오라구." 사빈이 종업원에게 큰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사내들이 사빈을 보면서 이렇게 한 마디씩 던졌다. "손님하고는 술 안 마신다면서, 사빈." "맞아. 오늘 무슨 날인가보지?" "특별한 날." 목소리를 잔뜩 깔고 사빈은 이렇게 말했다. 영업이 끝나고 난 뒤에 나는 사빈에게 이곳에 온 목적을 대충 설명해 주었다. 물론 아모리카 탐사대라는 이름과 그 목적이 완전한 바르도 대륙 의 지도를 만드는 거라고만 말해주었을 뿐, 관련된 사람들의 이름은 하나 도 말하지 않았다. 혹시라도 사빈이 아는 이름이 나온다면 어떻게 뻥을 보태 이상한 이야기로 만들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그러니까 네 말은 이곳에서 일행이 올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거 지? 좋아. 문제없어. 일 년이고 이 년이고 이곳에 있으라구." 사빈은 친절하게 웃으면서 나에게 이렇게 말했지만 내가 듣기에 사빈의 말은 앞으로 두고두고 나를 이용하겠다는 말처럼 들렸다. 자신의 허풍을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바바 족은 무슨 말이고 사스카치는 또 무슨 말이에요?" 나는 사빈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러자 사빈은 단정하게 기름을 발라서 빗어 넘긴 머리를 다듬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자리가 좀 비좁지? 그래도 이해해 줘. 나도 근사한 여관이라도 하나 잡아주면 좋겠지만 말이야 요즘 여관에 방이 남아나질 않아서 어쩔 수가 없다구." 무슨 엉뚱한 소리람. 나는 사빈에게 다시 물었다. "완전 무장한 백 명의 자치대원들이랑 싸웠다는 말은 뭐예요? 또 그 때 흉터가 생겼다니요?" 하지만 사빈은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다시 말을 이었다. "여관이란 여관엔 모두 외부인들로 꽉꽉 차 있어. 배를 타기 위해서 온 사람들 말이야. 이곳 로스안 항구는 성황청이 봉쇄했거든. 위에서 어떻게 손을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곳은 지금 성황청 땅도 아니고, 스파일 땅도 아니야. 원래 로스안이나 홀리우드는 실리포니아라는 별칭으로 불리울 만 큼 독립적인 성격이 강한 곳이었으니까 뭐 별다를 건 없지만, 문제는 성 황청하고 스파일 주둔군이 서로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 다툰다는 거지. 배 도 뜨지 못하게 된지 오래고, 외부인들은 검문 때문에 잘 다니기도 힘들 어. 만약 여기가 불편하다면 내가 무리를 해서라도 여관 방을 알아봐 줄 게. 하지만 도둑 많고 잘 속이기로 유명한 여기 로스안 여관에 묵는 것 보다는 여기가 나을 거야." "사빈. 내가 묻는 말에나 대답해요. 말돌리지 말고요." 나는 짜증을 부리면서 이렇게 물었다. 그러자 사빈은 진지한 표정으로 내 손을 꼭 잡았다. 당장이라도 감격의 눈물을 흘릴 것 같은 표정으로 말 이다. 내 옆에 앉아있던 크라이가 쿡, 하면서 웃음을 참았다. "어쨌거나 우리는 살아남았어. 그렇지 않아? 그리고 난 너한테 생명의 빚을 졌다는 걸 잊지 않고 있었다네. 무엇보다도 그게 중요해. 이 사빈, 의리와 명예 빼면 시체나 다를 바가 없는 사람이이니까." 사빈은 이렇게 교묘하게 또다시 말을 돌렸다. 나는 그냥 포기하기로 했 다. 내가 어떻게 한다고 해서 사빈이 달라질 것 같지도 않았고, 또 어찌 되었건 빚을 졌다는 기억 하나 만으로 나와 크라이에게 호의를 베푸는 사 빈의 모습이 좋아 보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럼 좋은 시간 보내. 내 말은 분명히 진심이니까." 사빈은 '진심'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서 이렇게 말했다. 진심이란 말 은 사실인 것 같다. 다만 진실이 아니라 좀 문제이긴 하지만. 사빈은 오 른 손을 내 밀었다. 나는 저 손을 맞잡는 순간 사빈과 일종의 거래를 하 게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좋아, 그럼." 나는 이렇게 말하면서 사빈의 손을 잡았다. 별로 망설이지는 않았다. 공짜 싫어할 사람이 세상에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고, 나도 공짜를 좋아 하는 사람 중의 하나니까. 그리고 앞으로는 말을 놓기로 마음먹었다. 이 런 종류의 거래를 하게 된다면 분명 나는 사빈과 동등한 위치에 놓이게 될 테니까. 여하간 그날부터 나는 사빈이 마련해 준 숙소에서 묵을 수 있었다. 사 빈이 말한 숙소는 까페 사이환에 붙어있는 작은 방이었다. 물론 공짜로 얻은 잠자리이니 만큼 별로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생각보다 너무 좁은 곳 이었다. 아마 낮시간에 종업원이나 주방장이 잠시 쉬는 곳인지 사방에 옷 가지들이 널려있었다. 하지만 지내기에 그렇게 불편한 곳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게다가 음식도 공짜로 준다고 했으니까. "그럼 난 갈게. 편히 쉬어." 사빈은 이렇게 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은 따로 있는 모양이지?" "글쎄. 이곳 로스안에서 이 사빈의 집이 아닌 곳은 없지. 사람을 알고, 사람을 좋아한다면 누구나 그렇겠지만 말이야." 사빈은 이렇게 말하면서 긴 겉옷의 단추를 잠궜다. "참. 하나 물어볼 게 있어." "뭔데, 라이짐?" "그 옷 이름이 뭐야? 처음 보는 옷인데." "오버코트라고 하는 옷이야. 이곳에서는 그리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는 옷이지." "고대어?" "그래. 지나치게 가죽을 많이 쓴 옷이라는 뜻이야." 사빈은 이렇게 말하고는 웃으면서 밖으로 나갔다. 오버코트의 끝자락이 바람에 휘날렸다. 멋있는데, 저 옷. 한 벌 구해서 입고 싶은 걸. 그날 밤, 잠자리에 들기 전, 크라이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수르카. 오브라디 교수님한테 너무 했어." 밑도 끝도 없이 너무 했다니. 나는 크라이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 는지 통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 오브라디 교수님 자존심도 생각했어야지. 돈 꾸러 가는 게 뭐 그렇게 좋은 일이라고." "강연회의 댓가로 금화를 넙죽 받던 사람인데 자존심은 무슨 자존심." 난 크라이의 말을 듣고도 크라이에게 오히려 거의 성내는 투로 이렇게 되물었다. "그때 그건 당연한 댓가였잖아. 하지만 지금 오브라디 교수와 스칼렛이 프라브리티에 사는 친척을 찾아가는 건 그냥 달라고 하는 거야. 빌린다고 는 하지만 기약이 없으니까. 오브라디 교수님은 그걸 구걸이라고 생각하 시고 거고." 크라이가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이렇게 차근차근 설명을 해 주 자, 나는 내가 실수를 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말하자면 오브라디 교수 의 마음은 장사꾼의 마음이었던 것이다. 뭔가를 주고 그 대가로 받는 돈 이라면 거리낄 게 없지만 그냥 거저 달라고 하는 건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마음 말이다. 사빈의 호의를 받아들인 나로서는 그 때 오브라디 교수에게 화를 냈던 내 행동을 후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때는 이 미 늦었다. 말은 주워담을 수 없는 것이다. 나는 다음에 오브라디 교수를 만나면 어떻게 해야 좋을까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별 뾰족한 수는 떠오 르지 않았다. "그리고, 나 내일 떠난다." 크라이가 밑도 끝도 없이 이렇게 말했다. "떠나다니? 어디로?" "그레텔하고 같이 알아 볼 게 있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알아보긴 도대체 뭘 알아본다는 말일까? "오브라디 교수님이 돌아오기 전에 올게. 걱정하지 마." "뭔진 모르겠지만 나도 같이 갈게." "한 사람은 남아있어야 해. 바리바와 루크가 언제 올지 모르니까." 크라이는 단호했다. "도대체 뭔데 그래. 내가 알아보고 네가 남으면 안되는 일이야?" "곧 돌아와. 별 가망을 없겠지만." 크라이는 이렇게 말하고는 돌아누워 버렸다. 그러자 대충 짐작이 같다. 아마도 크라이가 찾고 있는 자신의 가족과 관계가 있는 일이리라 싶었다. 하지만 어디에서 어떻게 찾겠다는 건지는 알 수가 없었다. 다음 날, 크라이는 그레텔과 함께 어디론가 떠나버렸고, 나는 혼자서 이렇게 사이환 까페에 남아서 모두를 기다리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6220/19898 ━━━━━━━━━━━━━━━━━━━━━━━━━━━━━━━━━━━━━━━━ 제 목:[탐그루] 까페 사이환 187 관련자료:없음 18/18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2-20 00:22 조회:2163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한낯의 더위가 까페안으로 넘쳐 들었다. 나는 목이 말라서 남아 있는 사과즙을 단숨에 들이켰다. 하지만 갈증이 가시기는커녕 오히려 목에 찝 찔한 것이 남아있는 기분이 들어 오히려 갈증은 더 심해졌다. "저, 미안하지만 여기 물 한 잔만 가져다주겠어요?" 나는 옆에 가던 종업원에게 이렇게 부탁했다. 어차피 나야 이곳 주인인 사빈에게 귀빈 대접을 받기로 약속된 몸이긴 했지만 하루 종일 앉아서 물 심부름을 수도 없이 시키니 좀 미안하다는 생각이 드는 게 사실이었다. 종업원은 고개를 숙여 내 말을 알아들었다는 표시를 한 다음에 주방으로 들어가 푸른 빛을 내는 연금술사의 등 밑에서 차갑게 식은 물 한 잔을 가 지고 왔다. 나는 데워지기 전에 실컷 마시는 게 낫겠다 싶어서 단숨에 물 한 잔을 비웠다. 갈증은 좀 가시는 것 같았지만 여전히 뭔가 답답한 것이 속에 남아있는 느낌이 들었다. "사빈 님. 절 좀 도와주세요." 갑자기 한 여자가 사빈에게 매달려 간청을 하기 시작했다. 무슨 사정일 까? 사빈은 진지한 표정으로 여자에게 자리를 권했다. "전 로스안을 떠나고 싶어요. 이곳은 지긋지긋해요. 사람들이 말하는 아모리카를 찾아서 떠나려고 해요." "아모리카 대륙은 없습니다. 이미 천년 전에 전쟁으로 사라져 버렸지 요." "그건 저도 알고 제 애인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제 애인은 무슨 일이 있어도 아모리카를 찾아가겠다고 해요. 그게 일생의 꿈이라고요. 그이는 아모리카 대륙이 분명히 어딘가 있을 거래요." "흔히 말하는 아모리카 드림이군요. 하지만 아가씨. 여기서 행복하지 못하면 어디 가서도 행복할 수 없습니다." 사빈은 목소리를 잔뜩 깔고서 이렇게 말했다. 사빈이 어떤 사람인지 알 고 있는 나로서는 웃음이 나오는 걸 억지로 참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한 번 끝까지 들어봐야겠다 싶었다. "저 사람한테는 여기가 아닌 곳이라면 어디나 아모리카가 될 수 있어 요. 그리고 저는 그런 저 사람을 사랑하고요." 여자는 이렇게 말하고는 근심 어린 표정으로 구석에서 주사위 도박을 하고있는 한 사내를 바라보았다. 사내는 담배를 입에 물고 인상을 쓰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가 뭡니까." "여길 떠나기 위해 돈이 필요하다며 도박을 하고 있어요 지금. 그런데 돈을 따기는커녕 계속 잃고만 있잖아요. 도와주세요, 제발." 여자의 표정은 간절해 보였다. 사빈은 숨을 한 번 깊게 들이쉬었다가 내 쉬더니 사내의 옆으로 걸어갔다. 나는 사빈이 주사위를 던지는 종업원 에게 눈짓을 주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11에 걸게." 사빈은 사내에게 조용히 말했다. 주사위가 던져졌고 사람들의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다시 11에 걸게. 모두 다 걸어." 사빈이 말했고 주사위가 다시 한 번 던져지자 사람들이 아까의 환호성 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커다란 함성을 올렸다. "이제 됐어. 이 돈을 가지고 로스안을 뜨게. 그리고 이곳에 다시는 얼 씬거리지 마." 사빈은 이렇게 말하고는 돌아서서 다른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여자 와 사내가 사빈에게 고맙다고 계속해서 인사를 했지만 사빈은 본 척도 하 지 않았다. 사빈에게 저렇게 근사한 면도 있었구나. "이거 봐. 혹시 속임수 아니야?" 도박을 하던 손님중 하나가 주사위를 던지는 종업원에게 말했다. "속임수라뇨? 사빈의 까페 사이환에 속임수라는 건 없습니다." 종업원의 말에 나는 고개를 숙이고 웃었다. 매일 뻥만치는 사빈이지만 이곳 사이환에는 늘 사람들로 가득하다. 그 중에는 사빈에게 도움을 청하 거나 사빈의 무용담을 듣기 위해서 오는 사람들도 상당 수가 있었다. 아 마도 저렇게 가끔씩 멋진 사빈의 행동도 한몫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아 니, 어쩌면 사람들은 사빈의 말이 허풍이라는 걸 잘 알기 때문에 오는 지 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까 사빈에게 도움을 청한 여자의 말처럼 사람들은 여기를 떠나면 뭔가 다른 것이 있을 거라는 기대를 가지기 마련 일 것이고, 그런 마음이 허풍을 믿게 만드는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었다. 아까 그 연인처럼 사람들은 여러가지 서로 다른 꿈과 희망을 갖고 살아 가는 데 나는 도대체 여기서 지금 뭘 하고 있는 걸까. 일단 이런 생각이 들자 도저히 이대로 앉아 있기가 어려웠다. 일 주일 내내 이곳 까페 사이 환에서 한 번도 나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팔뚝과 다리가 근질근질했 다. 뭐, 대수로운 희망은 아니더라도 바람 한 번 정도 쐬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하면서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설마 잠깐 나갔다 오는 사이에 바리바나 루크가 돌아오진 않겠지. "손님. 어디 가십니까?" 짧은 머리에 내 나이 또래로 보이는 종업원이 나에게 물었다. 지난 일 주일 동안 매일 보아온 정장차림의 종업원이었지만, 이제는 여드름이 막 나기 시작한 종업원의 얼굴을 보는 것 자체가 지겨웠다. "너무 답답해서 바람 좀 쐬고 온다고 사빈에게 말해줘요." 나는 이렇게 말하고는 돌아서서 나가려고 했다. 그때 종업원이 나에게 다시 한 번 물었다. "손님. 혹시 누구 기다리는 분 있으시지 않으십니까? 일 주일 내내 기 다리시는 것 같던데요." "...예. 어떻게 알았어요?" "늘 이 테이블에 앉아서 문 쪽만 바라보고 계셨으니까요." 종업원은 자신의 추리력에 놀라지 않았느냐고 묻는 것 처럼 환하게 웃 으면서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하긴. 지난 일 주일 내내 그런 꼴로 있었 으니 눈치 채지 못한 게 바보겠지. "그 분들 성함을 말씀해 주시면 제가 전해 드리겠습니다." 이런 수가 있었구나. 나는 종업원의 말을 듣는 순간 내가 정말 바보같 이 굴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종업원에게 말해놓고 크라이하고 함께 갔 으면 됐을 걸. 그런 간단한 생각 하나 못해서 일 주일 씩이나 이렇게 혼 자서 바보같이 굴었구나 싶었다. 돌대가리, 수르카. "음. 절 찾아 올 사람은 두 사람이에요. 남자 하나 여자 하나고요, 남 자는 뱃사람이고 여자는 피부가 검으니까 금방 눈에 띌 거에요." "알겠습니다, 라이짐 님." 종업원은 이렇게 말했다. 종업원에게 부탁하는 것도 문제가 있긴 했구 만. 내 이름을 사빈이 잘못 알고 있는 게 이럴 땐 불리하군. "그리고 한 가지 더. 절대로 내 이름은 말하면 안돼요. 그냥 그 두 사 람 보고 기다리던 사람이 있었다고, 그런데 잠시 자리를 비웠다고만 전해 줘요. 곧 돌아올 테니까." "알겠습니다. 손님." 문을 열고 까페 밖으로 막 나가려던 참에 사빈이 나를 불렀다. "라이짐!" 순간 나는 사빈이 나를 부르는 소리에 라이짐이 근처에 있나 보다 싶어 서 깜짝 놀랐다. "어디 가는 거야?" "답답해서 바람 좀 쐬려고." 종업원에게 물어보라고 얘기하고 싶었지만 나는 꾹 참고서 이렇게 사빈 에게 말해주었다. 사빈은 내 말을 듣더니, 하긴 늘 앉아만 있었으니까, 하고 중얼거리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밖은 위험하니까 조심해. 너도 들어서 알고 있겠지만 여기서는 성황청 기사들하고 스파일 군대가 늘 긴장상태로 대치하고 있다고. 해가 지면 이 상한 사람으로 오해받기 딱 좋아. 그리고 절대 뮤를 타고 다니면 안되 고." "알고 있어." 나는 축사에서 혼자 쓸쓸히 여물을 뜯고 있을 스타바를 생각하면서 말 했다. "뮤를 타고 움직이는 행위는 금지되어 있다고. 주둔군이나 자치대원보 다 빨리 움직이면 안되니까 생긴 포고령이야. 죄가 없는 사람은 추격받을 일이 없는 법이지." "알고 있다니까." "꼭 명심하라는 의미야, 라이짐." 사빈은 이렇게 말하고는 훈계조로 말을 이었다. "하여간 몸 사리는 거 잊지 마. 쓸데없이 잡혀가거나 하는 일없도록 조 심하라구. 물론 문제가 생기면 내가 해결 해 주겠지만. 여기 자치대장 튜 니티하고 나하고는 친구라고. 하지만 너무 그것만 믿으면 안 돼. 사실 이 곳 자치대장이 그렇게 통큰 남자는 아니거든." 사빈은 약간은 거드름까지 피우면서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치대장하고도 친한 모양이지?" "튜니티 그 친구는 누구하고도 다 친해. 성황청 친구들하고도 친하고, 스파일 주둔군하고도 친하지. 그 덕에 여기서 자치대장을 오래 해 먹는 친구야." 내가 비꼬는 투로 말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는지 사빈은 여전히 거드 름을 피우고 있었다. "그게 뭐야? 자유주의자인가?" 나는 맞는 말인지도 모르면서 일단 사비오 영감에게 들었던 말을 사빈 에게 했다. 아무 쪽에도 속하지 않는 사람을 사비오 영감은 자유주의자라 고 했었다. "뭐 거창하게 말하자면 그렇고, 사실은 그냥 중립이라고 말하는 편이 낫겠지. 하지만 라이짐, 중립이라는 건 힘이 없으면 지키지 못해. 내가 타실의 한 마을에서 겪었던 일인데 그 마을을 트롤들이 습격한 적이 있었 지. 엄청난 수의 트롤들이 말이야......" 나는 사빈의 허풍을 더는 듣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해 지기 전에 돌아올게." 나는 이렇게 말하고는 후다닥 밖으로 나갔다. 사빈은 내가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돌아서자 바로 옆에 있던 종업원을 붙잡고 이야기를 계속했 다. 종업원은 재미있다는 듯이 사빈의 말을 주의 깊게 듣고 있었다. 이곳 사빈의 사이환 까페를 찾는 사람들은 질리지도 않는 걸까? 까페 밖으로 나서자마자 뜨거운 햇살이 얼굴로 쏟아졌다. 나는 일단 눈 에 뜨이는 나무 그늘 밑으로 몸을 햇살로부터 숨겼다. 누가 봤으면 꼭 소 나기가 오는 날에 처마 밑으로 몸을 숨기는 사람처럼 보였을 것이다. 나 는 나무 그늘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로스안은 항구 도시답게 짭잘한 내음이 풍기는 바람이 불고 있었다. 덕 분에 나는 더위를 완전히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여름 날 바람이 불 면 시원하지 않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게 묻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틀림없이 여름 날 바닷가 도시에 가 본적이 없는 사람 일 것이다. 소금기가 섞여있는 바람은 '몸에 짝짝 달라붙는다'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기분 나쁘게 몸에 감겨오기 마련이다. 그런 바람 아래서 시 원함을 느끼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물론 날씨가 워낙 더우니까 바람 없는 것 보다 좀 낫다고 느껴질 때가 있기는 하다. 땀이 마르는 느 낌이 드는 아주 잠시 동안만. 스타바를 끌고 왔으면 조금 나았을 텐데. 하지만 뮤를 타고 다니는 건 위법사항이라고 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축사에서 잘 지내겠지, 뭐. 나는 에라 모르겠다 싶은 심정으로 일단 바다가 있는 쪽으로 발걸음 을 옮겼다. 그러고 보니 로스안에 와놓고는 아직 바다는 구경도 못했다. 처음으로 온 항구 도시에서 바다를 보지 않는다니 말이 되나. 물론 거대 한 대청하가 흐르는 탐그루에서 자란 내가 바다를 본다고 해봤자 별 감흥 이이 생길리도 없지만 그래도 바다를 본 적은 없으니까 한 번 쯤 봐 두는 것도 좋겠다 싶었다. 로스안은 대도시답게 높은 건물과 상점들로 가득차 있었다. 거리를 걷 고 있는 사람들의 수도 엄청났다. 다만 걷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다 지쳤 는지 조금은 힘이 빠지고 짜증이 나는 얼굴들이었다. 거리에서 가끔씩 보 이는 스파일의 병사들도 더위에 지쳤는지 창에 몸을 기대고 있거나 벽에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저래 가지고서야 어디 제대로 전투에 참가할 수나 있겠나. 나는 이렇게 생각하면서 바다 쪽으로 계속 발걸음을 옮겼다. "지금 뭐 하고 있는 건가!"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였다. 나는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장군 복을 입은 사람이 망토자락을 휘날리면서 벽에 기대 서 있던 병사들에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6284/19898 ━━━━━━━━━━━━━━━━━━━━━━━━━━━━━━━━━━━━━━━━ 제 목:[탐그루] 까페 사이환 188 관련자료:없음 21/21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2-21 00:02 조회:2129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죄송합니다, 오이디프 장군님! 병사들이 너무 지친 것 같아서 제가 좀 쉬라고 했습니다!" 십부장인 모양이었다. 오이디프라고 불린 장군은 눈살을 한 번 찌푸리 더니 "이래가지고 성황청 녀석들이 깔보지 않을 수가 있겠나!" 말을 마친 오이디프 장군은 그냥 돌아서서 다른 곳으로 향했다. 용병단 생활을 해 본 적이 있는 나는 저런 모습이 보기 좋다는 생각을 했다. 부 하를 아끼는 지휘관의 모습 같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더운데 갑옷 을 입은 성황청 기사들은 얼마나 더 더울까. 나는 이렇게 생각하면서 다 시 발걸음을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는 로스안 항구에 다다를 수 있었다. 항구에는 배들이 닻을 내리고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꼭 폐선들 같은 느낌이었 다. 왜 배들을 바다에 나가지 못하게 항구에 묶어 놓은 걸까. 나는 천천 히 배들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시야를 막고 있던 큰 배를 지나가자 그 곳에 바다가 있었다. 이것이 바다! 기껏해야 소금을 풀어놓은 대청하 같겠지 라고 예상하고 있었던 나는 바다를 보는 순간 입이 딱 벌어지고 말았다. 바다는 절대로 강이 아니었 다. 바다는 단지 푸른색의 물이 아니었다. 바다는 단순히 많은 양의 물이 아니었다. 나를 완전히 압도하는 거대한 크기의 바다가 마치 오래 전부터 나를 기 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묵묵히 그곳에 있었다. 그 바다 앞에서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런 바다 위를 은빛의 갈매기들이 날고 있었다. 반짝이는 갈매기의 은 빛 깃털이 여름햇살을 받아 반짝였고, 갈매기가 지나간 자리 밑의 바다도 역시 은빛으로 반짝였다. "바다를 처음 보는 모양이지?" 머리에 두건을 두른 노인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나는 대답 대신 그 저 머리를 몇 번 위 아래로 움직일 수 있었을 뿐이었다. 바다는 여전히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 숨 막히는 광경이었다. 대답하고 싶어도 말이 안 나왔다. "어디 출신인가? 보아하니 검사 같은데. 스파일 출신인가?" "...자나크 출신입니다." 한참동안 멍하니 있던 나는 간신히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머리에 두건 을 두른 노인을 바라보았다. 얼굴에는 수염이 덥수룩했고, 팔에는 빛이 바랜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나는 어떤 문신인가 유심히 살펴보았지만 팔 뚝에 무성하게 자라난 털 때문에 잘 보이지는 않았다. "그렇군. 처음 본 바다가 어떤가?" "거대해요. 무서워요." 나는 여전히 바다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소금 끼 섞인 바다 내음이 몸 속 깊은 곳까지 스미는 기분이었다. "누구나 바다를 처음 보면 그렇게 놀라기 마련이지. 부끄러워하지 말 게, 젊은 검사." 노인은 나를 한 번 흘낏 바라보더니 배들이 정박해 있는 정박장 쪽으로 향했다. 나는 노인이 떠나고도 한동안 못박힌 듯 서 있었다. 갈매기의 한 마리가 시야를 가리며 눈앞으로 바짝 지나갔다. 그제서야 나는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딱히 할일이 없던 나는 나는 노인이 사라진 정박 장 쪽으로 걸어갔다. 정박장은 호박돌로 지어져있었다. 저 많은 호박돌을 어디서 구해 가지 고 왔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보통의 정성과 노력이 아니면 저렇게 지을 수 없었을 것이다. 물살이 밀려와 호박돌에 부딛쳐 산산히 흩어지면서 하 얀 물보라를 남기고 있었다. 저게 파도로구나. 대청하도 물결을 만들기는 하지만 바다의 파도에 비한다면 힘없는 노인의 맥빠진 손짓이나 마찬가지 였다. 정박장에 배들이 있는 모습은 탐그루에서도 그리 어렵지 않게 볼 수 있 는 광경이었지만 진짜 바다의 항구에 있는 배들은 정말 색다르게 느껴졌 다. 배의 종류도 가지각색이었고, 크기도 가지각색이어서 탐그루에서 화 물용 배와 여행객 용 배밖에 보지 못한 나에게는 정말 신기하기까지 했 다. 무엇보다 거대한 바다에 비하자니 배의 모습이 너무나도 작고 초라해 보였다. "저 배는 뭔가요?" "통나무로 된 거 말인가? 저건 고깃배지. 제일 흔한 배야. 여기 로스안 정박장에 있는 배들 대부분이 저런 배지. 우린 저걸 통통배라고 부른다 네. 왜 그렇게 부르는지는 묻지 말아주게. 뱃사람들이 쓰는 말은 보통 말 하고 좀 다르거든." "그 옆에 조금 더 큰 배는요?" "비슷한 배야. 하지만 저 배에서는 낚시로만 물고기를 낚는다네. 나룻 배라고 하지." "역시 왜 그렇게 부르는 지는 모르시나요?" "뱃사람들은 다 그렇게 부르지. 저 배는 아는가?" "큰배요? 화물선 맞지요?" 나는 탐그루에서 화물선을 본 기억을 더듬어 이렇게 말했다. "그럼 자네는 탐그루 출신이겠구만." 회심의 미소를 짓고 노인이 말했다. 나는 예언자의 말이 꼭 들어맞았을 때 놀라는 손님처럼 놀라면서 어떻게 알았느냐고 노인에게 물었다. "나야 바다에서만 살아서 운하를 운항하는 배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그래도 자나크 출신인 자네가 화물선을 안다면 운하가 있는 도시겠다 싶 었지." 노인은 이렇게 말하고는 껄껄거리면서 웃었다. "여긴 세 종류밖에 없네요, 배가." 나는 정박장을 죽 둘러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여기 정박장들은 다 비슷비슷하다네. 먼 바다에 나가는 일이야 모험가 들이나 하는 일이지 우리같은 뱃사람 들은 고기 잡는 거 말고는 잘 몰 라." 노인은 이렇게 말하고는 한 고깃배 위로 올랐다. 아마 자신의 배인 모 양이었다. 배의 끄트머리 부분에는 쌍으로 된 장식물이 붙어있었다. 나는 가까이 다가가 그 장식물을 바라보았다. 장식물은 한 쌍의 용을 형상화 한 것이었는데, 하나는 몸이 통통하고 전체적으로 둥그스름하게 만들어진 용이었고, 다른 하나는 길고 날렵하게 생긴 용이었다. "이거 말인가? 행운을 비는 장식물이지. 하나는 암놈이고 하나는 숫놈 이라네." 노인은 이렇게 말하더니 통통하게 만들어진 용의 모양을 본뜬 형상물을 배에서 떼어내었다. "항해를 나가기 전에 이 조각을 떼어서 두고 간다네. 그리고 이렇게 말 하지. '걱정 말거라. 둘은 꼭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노인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노인의 말이 마법의 말이라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 둘이 다시 만나려면 배가 돌아와야 하지 않겠나? 안전한 항해를 비 는 작은 의식이이라고 할 수 있지." 노인은 이렇게 말하고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노인의 미소에서 도무지 그 끝을 알 수 없을 것 같은 쓸쓸함을 느꼈다. 무슨 사연이 있겠 구나 싶었지만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 아마도 다시 돌아오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 담겨 있는 말이기 때문에 마법의 말이 되지 않았을까. 아 마도 이런 식으로 세상에는 마법의 말들이 숨겨져 있으리라. 그리고 그 말이 어떤 말인지도 모르면서 사람들은 오늘도 그 마법의 말을 쓰고 있겠 지. "하지만 결국에는 돌아오지 않는 배가 생기기 마련 아니겠는가. 그렇게 되면 여기에는 암놈만 남게 되는 거지." 노인은 이렇게 말하면서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노인의 수염이 눈 부신 햇살아래 빛이 났다. "그럼 남은 조각은 어떻게 하나요?" "허허허. 불태워 버린다네." "불태워요? 왜죠?" 나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고가 생긴 건 안된 일이지만 조각을 불태워 버릴 것 까지는 없을 텐데. 오히려 두 조각이 만나게 되려면 바 다에 버리는 게 옳지 않을까 싶었다. "둘이 만나지 못했다는 걸 하늘에 알려야지. 그래야 다음 항해를 나가 는 배에 붙어있는 조각들이 어이쿠, 이거 안되겠구나 하면서 안전하게 배 를 인도해 주지 않겠는가." 노인은 이렇게 말하고는 호탕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 뒤에는 고독 함과 쓸쓸함, 외로움 같은 게 묻어 있었다. "사실 하늘과 바다는 나 같은 뱃사람에게는 둘이 아니고 하나라네. 하 늘과 바다, 둘 중에 하나라도 노하면 이런 작은 고깃배야 완전히 상어를 앞에 두고 피흘리는 다랑어 꼴 아니겠나. 어쩌면 저 위와 저 밑에는 우리 가 살고 있는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가 있는지도 모르지. 그래서 뱃 사람들은 바다를 두고 저 밑은 지옥이라는 말도 한다네." "뱃사람들은 말을 조심한다고 들었어요." 노인의 말을 듣고, 나는 크라이가 했던 말을 떠올리면서 말했다. 크라 이는 어린 시절 바다로 떠나는 아버지에게 바다가재를 잡아달라는 말을 했기 때문에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았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런 크라이 였으니 과연 말을 아낄만도 하지. 나는 크라이의 심정이 이해가 되었다. "지옥이든 천국이든 하여간 우리 같은 사람들이야 거기에 뭐가 있는줄 모르니 항상 두려울 수 밖에 없지. 그래서 뱃사람들은 미신이 많아. 하늘 님이나 바다님의 기분을 맞춰주려고 항상 전전긍긍이니까 말일세. 뱃사람 들이 말을 조심하는 데는 그런 이유가 있지. 행여 하늘님이나 바다님이 듣고 노하면 큰일이니까." "그런데 오늘은 말씀을 많이 하시는 군요." 나는 조심스럽게 노인에게 이렇게 물었다. 노인은 다시 한 번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오랫동안 바다에 못 나갔더니 입이 근질근질해지는 모양이야." 노인은 닻을 올리면서 말을 이었다. "배가 나갈 수가 있어야 말이지. 성황청인지 뭔지 하는 것들이 들어온 다음에 항구는 온통 봉쇄가 되었다네. 큰 배 나가는 거야 뭐 군사적인 이 유나, 정치적인 이유로 막는다고 쳐도, 이거 고기잡이배를 나가지 못하게 하니 나 같은 어부들은 다 굶어죽게 생겼다네. 굶어 죽는 건 둘째치고 바 다가 너무 그립다네." 나는 노인의 말을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나쁜 성황청 녀석들. 나 는 죽었을지 살았을지 모를 라스폼과 성구를 사용하던 기사들이 떠올라 주먹을 꽉 쥐면서 생각했다. 그런데 좀 이상하기는 했다. 도대체 뭐 먹고 살 일이 났다고 어부들 출항을 막는 걸까. 성황청에서 출항을 막아야할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걸까. "차라리 나도 농사나 지을 걸 그랬어. 저길 보게." 노인은 바닷가의 저 편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말했다. 거기에는 사 람들이 뭔가를 열심히 퍼 나르고 있었다. "소금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라네." "염전이라고 하는 거지요?" "그래." 탐그루에 있던 시절 소금을 파는 사람들을 많이 보기는 했지만 소금이 저런 식으로 만들어지는 지는 몰랐던 지라 나는 조금 신기한 눈으로 염전 을 바라보았다. "걱정* 말거라* 둘은* 꼭*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갑작스럽게 마법의 말을 듣게 되어 깜짝 놀라면서 노인을 향해 돌 아보았다. 노인은 막 떼어낸 용조각을 나에게 던졌다. 나는 두 손으로 용 의 조각을 받았다. "하지만 이제 더이상 못참겠어. 뱃사람이 바다를 못나간다면 더 이상 뱃사람이 아니지. 난 폭풍우에도 견뎠고 집채만한 파도도 견뎠고, 바다 한 가운데 폭풍지대에서 조난 당했을 때도 조각 판자 하나가지고 열흘을 버텼던 사람이야. 까짓 성황청 놈들때문에 바다에 못나간다면 말이 안돼 지." 노인은 비장한 각오를 한 듯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나가면 곧 자치대원들의 배가 따라붙을 걸세. 자치대원들도 성황 청의 눈치를 봐야하니까 어쩔 수 없을 걸세. 이곳 자치대장 튜니티는 처 신을 잘 하지." "중립... 이라면서요?" 나는 사빈의 말을 떠올리면서 말했다. "그래. 중립. 그것도 재주지. 아마 그 중립을 지키기 위해서 날 죽일지 도 모르겠네. 하지만 바다에서 한 평생을 보낸 내가 그렇게 호락호락하진 않을 걸세. 젊은 검사양반. 만약 내가 돌아오지 않으면 그 조각을 태워주 겠나?" 노인은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나는 노인을 말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잠깐만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난 바다로 나가야겠어.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네. 살만큼 산 늙은이 가 목숨이 아까워서 벌벌 떨고 있는 꼴이라니. 아무리 퇴물이라고는 하지 만 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다네." 노인은 요지부동으로 마음을 굳힌 모양이었다. 하지만 내버려두면 죽을 게 분명하다는 걸 알면서도 노인을 바다로 내 몰 수는 없었다. "잠깐만요. 왜 그렇게 생명을 가볍게 여가는 거지요? 뱃사람으로서의 자존심이 중요하시다는 거, 저 이해해요. 하지만 그게 생명과 바꿀 만큼 중요한가요? 죽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해요. 생명이 있는 건 살아야 한다 고요." 내 말에 노인은 잠시 생각에 잠긴듯한 표정이 되었다가 입을 열었다. "자네, 말하는 걸 보니 사람께나 베었겠구만." 노인은 예리한 눈초리를 하고서 나를 노려보면서 말했다. 노인의 눈이 내 속을 훤히 꿰뚫어 보는 것만 같아서 나는 노인의 눈을 피하고 말았다. "나이에 맞지 않게 굵직한 자네 팔을 보고 알았어야 했어. 자네 나이로 보아하니 둘 중에 하나였겠지. 산적아니면 용병. 내 생각에는 용병이었을 것 같네만."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노인은 내 반응을 잠시 살피더니 말을 이었다.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네. 뭔가를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사람과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하는 사람. 물론 나도 생명 이 소중하다는 건 알고 있다네. 하지만 여기를 보게. 여기 있는 배들 주 인들은 다 젊은이들이야. 이 친구들, 모두 죽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야.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바다에 나가지 못하면 더 이상 뱃사람이 아니라 고. 뱃사람이 뱃사람 답게 살지 못하면 그게 어디 생명이 있다고 할 수 있겠나?" 노인은 배의 돛을 올렸다. 당장이라도 배를 몰고 나갈 기세였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6285/19898 ━━━━━━━━━━━━━━━━━━━━━━━━━━━━━━━━━━━━━━━━ 제 목:[탐그루] 까페 사이환 189 관련자료:없음 20/20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2-21 00:03 조회:1982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난 살 만큼 살았다네, 젊은이. 그리고 내 목숨이 사라져서 이 친구들 에게 희망을 줄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네. 그게 바로 진짜 생명을 지키 는 일이야." "하지만..." "젊은이. 생명이 있는 건 살아야 한다는 자네 말은 맞아. 하지만 살아 있지 않은 것처럼 살때는 행동으로 그 상황을 부셔나가야 한다네. 내 말 은 곧 더 큰 생명도 있다는 말이야" 더 이상 노인을 말리기는 무리일 것 같았다. 그때였다. 바로 등뒤에서 날카로운 음성이 들려왔다. "뭣하는 건가!"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성황청의 깃발이 먼저 눈에 들어왔고, 이어서 말을 타고 있는 성황청의 기사 셋이 눈에 들어왔다. 셋은 각각 성구를 손 에 들고 있었는데 전에 본 적이 없는 붉은색과 노란색, 그리고 투명한 색 의 성구였다. 성구를 보는 순간 나는 긴장으로 몸이 굳었다. 나는 누구보 다도 성구의 위력을 잘 알고 있는 사람 중의 하나이리라. "출항은 금지되어 있다는 걸 모르나!" 기사의 목소리는 위협적이었다. 기사는 이렇게 말하고는 투구를 벗었는 데, 얼굴이 온통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분명히 더위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만약에 지금 성구를 작동시킨다면 노인은 목숨을 버 려가면서까지 나가고 싶어했던 바다에는 나가보지도 못하고 죽게 될 게 분명했다. 어떻게든 말려야 한다! 나는 다급한 심정에 생각나는 대로 마 법의 말을 내 뱉었다. "걱정* 말거라* 둘은* 꼭*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자 올라가 있던 배의 돛이 천천히 내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노인을 바라보았다. 노인의 촛점 없는 눈으로 돛을 내리고 있었다. 아마 내 마법 의 말이 최면 마법으로 작동한 모양이었다. 다행히도 기사들은 내가 마법 의 말을 외웠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이봐요, 노인 양반. 거 하루만 참으시지 그래요. 내일이면 고깃배들에 한해서 봉쇄령도 풀릴 텐데." 투구를 벗은 기사의 바로 옆에 있는 다른 기사가 말했다. 조금은 성직 자 다운 기사였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게 말이야. 베이커 기사단장님은 참 자상도 하시지. 이곳에 오시 자마자 사람들을 위해서 그런 조치도 취해주시고 말이야." "그게 뭐 베이커 기사단장님 결정인가? 탐그루를 장악한 마당이니까 더 이상 봉쇄할 이유가 없어진 것뿐이지, 뭐." 투구를 벗은 기사가 말했다. 나는 탐그루라는 말에 놀라 하마터라면 그 기사에게 탐그루를 장악했다는 말이 무슨 말이냐고 물어볼 뻔했다. "그런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니네, 형제." 아무 말도 없던 다른 한 사람의 기사가 이렇게 말하자 투구를 벗었던 기사가 입을 다물었다. "가지." 기사들은 조용히 말을 몰고 사라져갔다. 잠시 후, 노인은 고개를 흔들 어 정신을 차리더니 나를 바라보았다. "자네가 날 살렸군." 노인은 마법의 말을 이해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자신이 마법에 걸렸 다는 사실이 조금도 놀랍지 않은 듯 아주 침착한 목소리였다. "그것 보세요. 생명이 있는 건 다 살게 돼 있다구요." 용 조각을 돌려주면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한 쌍의 조각이 영원히 함께 하길 빌겠습니다." "아닐세." 노인은 이렇게 말하면서 용 조각을 받지 않았다. "이건 자네와 나 사이의 징표로 삼지. 언젠가 인연이 닿아 다시 만나게 되길 빌겠네." "하지만 그렇게 하면 항해는..." "남은 하나는 내가 간직하고 있겠네. 배에는 다른 조각을 세워 놓으면 되. 그저 마음의 선물이라고 생각하게." 노인의 말에 나는 용 조각을 주머니에 넣었다. "걱정* 말거라* 둘은* 꼭*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래. 둘은* 꼭*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노인도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노인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정박 장을 떠났다. 나는 정박장을 떠나 로스안의 여기 저기를 돌아보았다. 고대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는 곳이라고 오브라디 교수는 로스안을 소개했지만 꼭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 물건 파는 사람들, 군인들, 자치대원들. 도시는 다 비슷비슷한가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항구도시 나 운하도시나 그게 그거라서 그런 걸까? 다만 임프 시에서 보았던 줄무 늬 옷과 뿔 모양의 장식이 달려 있는 고대 여신의 조각들만이 고대의 냄 새를 풍기고 있을 뿐이었다. 오리피 신전이 어디인지 물어볼까 했지만 시 간이 너무 많이 흘러 있었다. 해질 무렵이 되어 사빈의 사이환 까페로 돌아오는 길에 자치대원들에게 검문을 받게 되었다. 자치대원하고는 좀 좋지 않은 기억이 있는 나인지 라, 자치대원이 나를 붙잡아 세우자 일단 겁부터 났다. 성인이 되었어도 달라진 건 없구나. 아직도 양볼에 얼얼한 느낌이 드는게, 어렸을 때 자치 대원에게 뺨을 얻어 맞았던 악몽같은 기억이 되살아나는 듯 했다. 자치대 원들은 혼자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는 게 수상하게 여겨졌는지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다. "지나는 길이라고? 그냥 지나는 사람이 어디 있어. 뭔가 하는 일이 있 을 것 아니야? 뭐하는 데?" "검술 수행중입니다." "집은 원래 어디고?" "자나크 주에 있습니다." "이름은?" 이 질문에서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라이짐입니다." "지금 어디에 있나?" "사빈의 사이환 까페에 있습니다." 이 말을 하자 자치대원은 잠시 머뭇거렸다. "사빈하고 친해?" "... 옛 전우였습니다." 나는 이렇게 말해버리고 말았다. 사빈의 허풍을 듣기 싫어했으면서 막 상 이렇게 급박한 상황이 되니까 허풍에 동조해 버리다니. 나는 좀 부끄 러운 기억이 되었다. "놔 둬." 자치대원 뒤에서 누군가 지시를 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자치대 원의 어깨 뒤 쪽을 발돋음을 해서 넘겨다보았다. 키가 크고 턱에 퍼런 면 도자국이 남아있는 사내가 날 바라보고 있었다. 사내의 뒤편으로 두 명의 자치대원이 호위를 서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꽤 높은 사람인가 보다 싶었 다. "대장님. 검문 중이었습니다." 자치대원이 허둥거리면서 경례를 붙이면서 말했다. 대장님이라고? 저 사람이 바로 자치대장 튜니티인 모양이었다. "라이짐이라고 했나? 지금 그럼 사이환으로 돌아가는 길이지?"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잘 됐군. 나도 거기로 가는 길이었는데." 이렇게 해서 나는 자치대장 튜니티와 함께 사빈의 사이환 까페로 향하 게 되었다. 골목을 지나 큰 길에 접어들었을 때였다. 집 앞에서 바닥에 금을 긋고 놀고 있던 꼬마들이 튜니티를 보자 소리를 지르면서 달려들었다. "대장님! 보여주세요! 대장님!" 아이들은 모두 하나같이 웃으면서 튜니티에게 뭔가를 보여달라고 떼를 썼다. 나는 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튜니티와 아이들은 번갈아 가면서 보 았다. 아이들은 보통 자치대장을 무서워 하는 법인데. "참, 이 친구들." 튜니티는 이렇게 말하고는 품에서 단검을 꺼내 들었다. 호위하고 있던 두 명의 자치대원도 빙긋이 웃으면서 튜니티를 바라보았다. "자. 꼭 한 번 만이다." 튜니티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단검을 돌리기 시작했다. 단검은 튜니 티의 손끝에 붙어있는 듯 했다. 튜니티의 손에서 돌아가고 있는 단검은 왼손에서 오른손으로 옮겨갔다가 다시 팔을 타고 올라와 어깨를 타고 반 대편으로 가기도 했고, 다음 순간 잠시 어디로 갔는지 사라져 버렸다가 꼬마애의 머리에서 나타나기도 했다. 꼬마가 환성을 질렀다. "나도 커서 꼭 대장님 같은 훌륭한 자치대장이 될 거예요!" "맞아. 나도 칼 돌리는 거 연습할 거야." 이렇게 말하는 꼬마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더니 튜니티는 다시 사이환 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단검을 도로 품에 넣는 순간, 나는 달빛 을 받아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단검 끝에 달려 있던 가느다란 실 이었다. 속임수였구나.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튜니티는 속임수를 통해서 아이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 사실을 안 순간,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왜 허풍만 떠는 사빈을 좋아하는 걸까, 왜 사빈이 하는 허풍 을 다 믿는 걸까 생각한 적이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지금 튜니티가 보여 준 작은 속임수와 비슷한 게 아닐까. 어쩌면 사람들은 사빈의 허풍을 들 으면서 꼬마들처럼 소박한 꿈과 희망을 가지게 되는 건지 모르겠다. "전우라면 언제 적 전우를 말하나?" 튜니티가 나에게 물었다. 나는 뭐라고 대답을 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 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니 사빈이 거짓말쟁이가 될게 틀림없었고, 그렇다 고 해서 사빈처럼 뻥을 치자니 그건 또 자신이 없었다. "그냥, 탐그루에 있을 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일단 말끝을 흐린 다음 튜니티의 눈치를 살폈다. 사빈이 튜니티하고 친하다고 했으니 내가 이곳에 오기 전에 혹시 튜니티 에게 어떤 식으로건 탐그루에서 있었던 일을 말해주지 않았을까 해서였 다. "그래. 탐그루 전선에서 만난 전우인 모양이로군." 튜니티는 뒷짐을 지더니 걸음을 천천히 하면서 말했다. 아마 호위하고 있는 두 사람에게 들으라고 하는 말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탐그루 전선이 라고? 이건 또 뭐야? "십일 년 전. 삼년전쟁 때의 일이지. 탐그루를 사이에 두고 스파일 군 과 타실 군이 대치하고 있었지. 탐그루는 일단 전쟁이 발발하면 전략적 요충지가 되니까 말이야. 상대적으로 군사력이 약한 자나크 주는 가만히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지. 그때, 사빈은 저항군의 일원으로 탐그루에서 자나크 사람들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지. 그래. 자네는 그때 어떤 전투 에 참가했었나?" 튜니티의 물음에 나는 어이가 없어서 한 동안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삼년전쟁 때 나는 겨우 네 살 정도였다. "...대답이 없는 걸 보니 상처가 깊은 모양이로군. 흉터라도 남았는가 보지? 이보게들. 잘 봐두게. 겉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마음의 흉터가 가장 깊은 법이야. 나는 이 친구의 눈빛을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네. 얼마나 많 은 흉터를 가지고 있는지, 얼마나 아픈 과거를 가지고 있는지 말일세." 튜니티는 한껏 폼을 잡으면서 말했다. 꼬마애들 앞에서 칼돌리기를 보 여 줬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보고 있는 내 가 다 닭살이 돋아서 도저히 눈뜨고 봐 주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좋아. 그만 하는 게 좋겠어. 그게 전쟁에서 살아남은 사람에 대한 예 의지." 튜니티는 이렇게 말하고는 입을 닫았다. 나는 더 이상 어떤 말도 할 수 가 없었다. 어쩌면 투니티도 사빈처럼 내 입을 닫아버리기 위해서 이런 분위기를 유도한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저, 대장님. 그럼 이 친구 나이가..." 호위하고 있던 자치대원 중 하나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튜니티에게 물 었다. 그러자 튜니티는 입술에 검지손가락을 가져가 조용히 하라는 신호 를 보냈다. 이번에도 물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지만 그건 순전히 황 당해서였다. 이렇게 아무 말도 없이 걷고 있는 사이에 눈앞에 환한 빛이 들어왔다. 아주 잠시 동안이었지만 나는 완전히 다른 세계로 들어와 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빛에 눈이 익숙해지자, 나는 내가 사이환 까페 앞에 서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빛. 까페 사이환에서는 밝은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해 저문 뒤에 사이환 까페를 바라본 건 처음이었다. 까페 사이환 은 오색 찬란한 연금술사의 등 빛에 감싸여 신비롭게 보이고 있었다. 저 곳에서는 무슨 허풍을 떨어도 다 그럴싸하게 보일 것만 같았다. 해가 진 후에 이렇게 밝은 빛을 본다는 건 사실 마법과도 같은 신비한 일임에 틀림이 없다. 연금술사의 등이 만들어지기 전 사람들은 밤에 공연 을 한다고 하면 미쳤다고 했을 것이다. 어쩌면 아직도 사람들은 그때의 기억을 마음 깊은 곳에 간직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래서 어두운 밤하늘 아래 환하게 빛나는 연금술사의 등을 바라보면서 나름대로의 환상과 꿈을 갖게 되는 거 아닐까. 그렇게 생각을 하고 보니 어쩌면 사람들이 모두 사 이환 까페를 찾는 이유가 뭔지 알 것도 같았다. 까페 안에 들어서자 샘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가사 알아 들을 수 없 는 기묘한 노래였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6286/19898 ━━━━━━━━━━━━━━━━━━━━━━━━━━━━━━━━━━━━━━━━ 제 목:[탐그루] 까페 사이환 190 관련자료:없음 17/17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2-21 00:04 조회:2083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오래 된 음악이로군.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고대의 노래지. 제 목은 카사블랑카일세." 카사블랑카? "사람 이름인가요? 아니면 지명?" "글쎄. 사람들마다 다르게 이야기 하지만 내 생각에는 오래 된 마법의 장소인 것 같아. 어쩌면 마법사의 이름인지도 모르고. 가사에 이런 내용 이 있거든. 카사블랑카를 보면 모든지 이룰 수 있다네. 헤어진 연인을 찾 고, 노인은 젊은 날을 되찾을 수 있지. 카사블랑카에 오면..." 튜니티의 목소리는 왁자지껄한 사람들의 목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 다. 나는 사빈을 바라보았다. 사빈이 동그란 모자를 쓰고 있는 뚱뚱한 사 내와 뭔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샘을 넘겨주게. 우리 업소에는 꼭 샘이 필요해." "샘이 물건인가, 넘겨주게? 페라리 사장." 사빈이 뚱보를 노려보면서 말했다. 그러자 사내는 당황하면서 얼른 말 을 고쳤다. "내 말뜻은 그게 아니야. 우리 가게에서 샘이 일한다면 서로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말일세. 그러니까..." "그건 샘이 판단할 문제지. 샘에게 직접 물어보시지. 페라리 사장." 사빈이 말하자 뚱뚱한 사내는 샘의 옆으로 간 다음, 노래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샘에게 물었다. "샘. 우리 가게로 오지 않겠나? 두 배, 아니 세 배를 주지." 공처럼 부풀어오른 배를 쓰다듬으면서 패라리 사장이 말했다. "뭘요?" 샘이 눈을 껌벅이면서 페라리에게 물었다. "페라리 사장. 샘은 나와의 우정 때문에 여기서 일하고 있는 거지 돈 때문에 일하고 있는 게 아니라네." 사빈은 이렇게 말하고는 페라리의 툭 튀어나온 배를 한 번 치고는 이야 기를 마쳤다. 검은 엘프족은 주인의 말에 무조건 복종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던 나로서는 사빈의 말을 전적으로 믿을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샘과 어느 정도 친하다는 것만큼은 이해할 수 있었다. 둘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보면 확실히 보통 이상의 사이라는 것 만큼은 분명했다. "...그래서 나는 카사블랑카가 마법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카사블랑카를 본다'는 표현이 좀 모호해서 카사블랑카가 사람이름인지 지명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마법과 관련이 있는 것 만큼은 분명하다고 자부 하네." "글쎄요. 마법일수도 있고, 환상일 수도 있겠지요." 나는 이렇게 말하고는 피아노 앞에 앉아있는 샘을 바라보았다. 샘은 다 음 곡을 준비하고 있었다. 다들 샘의 이어질 노래를 기대하고 있는 느낌 이었다. 사빈은 손님들을 고개를 돌려 죽 한 번 훑어본 후에, 내가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오버코트 자락이 사빈의 움직임을 따라 멋지게 펄럭였 다. "샘은 사이환 까페의 보배지. 로스안 전체를 통틀어서 샘만큼 많은 곡 을 연주할 수 있고, 또 노래를 잘할 수 있는 가수는 아마 없을 거야. 어 떤 사람은 감정이 없어서 싫다고 하기도 하지만 말이야. 하여간 자네는 운이 좋아, 사빈." 튜니티가 사빈에게 말했다. 사빈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이렇게 튜 니티의 말을 받았다. "잘못 말했어, 튜니티. 샘은 바르도 대륙 전체를 통틀어서 최고의 보배 지. 가수로서건, 친구로서건." 사빈의 대답에서는 전의가 느껴졌다. 튜니티도 그걸 눈치챘는지 긴장된 말투로 말을 받았다. "친구라기 보다는 노예 아닌가? 완전히 질질 끌고 다니는 노예 말일세. 돈 한 푼 받지 못하고 매일 저렇게 노래를 부르니 말이야." "돈보다 더 소중한 게 세상엔 얼마든지 있지. 우정, 정의, 사랑. 모두 돈주고는 살 수 없는 것이야." 사빈의 대답은 맞는 말이긴 했지만 내 귀에는 가식처럼 들렸다. 탐그루 에서 사빈이 사스카치의 가죽을 보며 침을 흘리던 광경이 아직도 눈에 선 했다. "그럼 자네한테 빚진 은화 백 닢은 갚지 않아도 되겠구만." "음. 그건 승부지. 돈 자체보다는 돈에 담긴 의미가 더 소중하니까 받 지 않을 수는 없을 걸세." 둘의 대화가 점점 더 치열해지기 시작하자 사람들이 조금씩 귀를 기울 이는가 싶더니 어느새 까페 안이 조용해 졌다. "그런가? 승부에 담긴 의미라면 나한테 빚진 게 좀 있을 텐데." "아니. 난 빚 같은 거 지고 사는 성미가 되지 못해서 말이야." "그럼 범버쿠 정글에서 내가 목숨을 구해 줬던 일은 어때? 그 잔혹하기 로 소문난 지팡고 사람들한테 둘러 싸였을 때 말이야. 지팡고 사람들이 번쩍이는 칼을 자네 목에 들이댔을 때, 내가 이 단검으로 녀석들을 해치 우지 않았다면 이자리에 서 있을 수도 없었을텐데." "자네는 그게 자네 혼자 힘으로 된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건 내가 재빨리 자네가 단검을 던질 수 있도록 지팡고 사람들의 시선을 유도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네. 그런 식으로 따진다면 나도 할 말이 있지. 작년 로스안에 태풍이 몰아쳤을 때, 나뭇가지에 걸려 바둥대고 있던 자네를 구 해 준 사람이 누군지 기억할려나 몰라." "나는 자네가 날 구해준 게 아니라 내가 자네를 구해 줬던 걸로 기억하 는데. 뭐, 그건 좋다구 좋아. 태풍의 눈 한가운데에서 바라본 하늘이 기 억나는가? 구름 없는 하늘에 맑은 별들이 반짝이고 그 너머로 환한 달빛 이 세상을 압도하고 있었지. 태풍이 언제 있었냐는 듯이 말이야." 튜니티가 조금 몰린다 싶었는데 튜니티는 얼른 화제를 바꿈으로 해서 위기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지만, 내가 보기엔 튜니티도 사빈 못지 않은 허풍쟁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래. 그 날이 기억나네. 그때 함께 마셨던 술과 함께 불렀던 노래, 다 기억하네." "그래. 그 노래 한 번 불러볼까?" "좋지." 기다렸다는 듯이 샘이 연주를 시작했고, 둘은 샘의 반주에 맞추어 노래 를 불렀다. 두 놈이 다 똑같은 놈들이었다. 한 사람이 쿵 하면 또 한사람 이 짝 하는 게 손발이 딱딱 맞았다. 두 사람이 어깨동무를 하고 그윽한 눈빛으로 허공을 바라보면 부른 노래는 '꿈결 같은 세상'이라는 곡이었 다. 사람들이 말하네, 인생은 슬픔이라고 또 누군가는 말하네 세상은 무서운 곳이라고 하지만 난 믿지 않네 그런 세상을 사내라면 한번 살아봐야지 살아가야지 꿈결 같은 세상을, 꿈결 같은 세상을 노래는 짧았지만 우뢰와 같은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둘은 역시 기다 리고 있었다는 듯 허리를 숙여 사람들의 환호성에 답례했다. 전후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사이환 까페에서 미리 준비한 공연이라고 해도 믿 을 지경이었다. "그래. 사내라면 꿈을 가지고 살아야지." "맞아. 그날 봤던 그 별들처럼 말이야. 이봐, 여기 술 한 병 가지고 와." 사빈이 종업원에게 술을 시키자 튜니티가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근무 중에는 술 안 마시는데." "대장이 마시는 건 술이 아니라 원기 회복제지. 안 그런가?" "게다가 사빈 자네는 손님하고는 술 을안마시지 않나?"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사빈은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특별한 날이라는 말은 나한테도 했던 말 인 것 같은데? 다시 샘의 음악이 연주되었고, 사람들의 표정은 노래 가사 그대로 꿈결을 헤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사람들은 사빈이 매일같이 '특별한 날' 운운하면서 술을 마신다는 걸 모르는 걸까? 아니면 튜니티가 했던 무용담이 진짜라고 믿고 있는 걸까. 나는 사람들의 얼굴을 다시 한 번 유심히 살펴보았다. 적어도 믿지 않는 것 같은 얼굴들은 아니었다. 어 쩌면 그저 믿고 싶을 뿐인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종업원이 사빈과 튜니티 앞으로 술 한 병과 작은 잔 두개를 가지고 왔 다. 사빈은 튜니티의 잔에 술을 채워 준 다음 자신의 잔에도 술을 가득 따랐다. 나는 그 술이 무슨 술인지 단박에 알아봤다. 바로 쇠주였다. 둘 은 찰랑찰랑 넘치게 부어진 잔을 숨 쉴 틈도 두지 않고 죽 들이켰다. 우 웩! 나는 쇠주를 마시는 모습만 봐도 토할 것 같은데 어떻게 저렇게 마실 수 있는 거지? 음악소리가 커지고 다시 까페 안에 활기가 넘쳐 흘렀다. 도박을 하고 있던 테이블에서 주사위를 던지던 종업원이 봉투 하나를 가지고 나와 사 빈에게 건네주었다. 그러자 튜니티는 봉투를 잽싸게 받아 품에 집어넣었 다. 그리고는 누가 볼까 싶어 주위를 살피더니 품에서 단검을 꺼내 들었 다. "내가 오늘은 제주 하나를 보여주지. 사빈의 코를 납작하게 해 줄만한 재주 말이야. 자네들. 잘 보게. 저 벽에 붙어있는 동그라미 보이지?" "어디요?" 등뒤에 서있던 호위병이 이렇게 묻자 튜니티는 대답 대신 쇠주를 한 잔 마시고는 단검을 집어던졌다. 단검은 벽면으로 날아가 작은 동그라미 모 양의 장식 한 가운데에 꽂혔다. 사람들이 감탄사를 연발하면서 튜니티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사빈은 굉장히 재미있다는 듯한 미소를 짓고서 튜니 티를 보고 있었다. 어디 한번 할 테면 해 봐라 라는 의미의 미소인 것 같 았다. "저기 말이야. 잘 안보여?" 튜니티는 이렇게 말하고는 술 한 잔을 다시 비우기가 무섭게 또 단검을 집어던졌다. 단검은 처음에 맞았던 곳 바로 옆에 박혔고, 다시 손님들 사 이에서 박수갈채가 쏟아져 나왔다. "오늘은 잘 안되는 날인걸. 이러다가 망신당하지..." 술기운이 오르는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튜니티가 말했다. 그러자 사빈 이 커다란 맥주잔을 하나 들고서는 이렇게 말했다. "튜니티는 단검에 관한한 로스안에서 두말하라면 서러울 정도의 최고의 고수지. 오늘은 어때? 은화 백 닢으로 하자구. 나한테 진 빚은 갚아야 하 지 않겠어?" "자신 없는데. 하지만 좋아. 도전을 피한다면 남자가 아니지. 그리고 하나 덧붙이자면, 로스안 최고가 아니라 바르도 대륙 최고라네." 튜니티는 트림을 참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다들 무슨 내기일까 궁금해 하는 표정이었다. (나를 포함해서 말이다) 어느 정도 손님들이 조용해 졌다 싶어지자, 사빈이 맥주잔을 공중에 던 졌다. 그러자 튜니티의 단검이 번득이면서 허공을 갈랐고, 사빈이 던진 맥주잔은 땅에 떨어지기 전에 산산조각이 났다. 용병단에서 단검을 던져 본 적이 있는 내 경험에 따르면 저렇게 움직이는 물체를 단검으로 맞춘다 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저렇게 할 수 있을까? 튜니티가 바르도 대륙 최고 고수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상당히 뛰 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내가 본 단검과 이어져 있던 가느다란 실은 무엇이었을까? 이정도 실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왜 그런 속임수를 쓰는 걸까? 내 궁금증은 계속됐지만 사빈은 여유를 두지 않고 튜니티에게 쇠주를 한 잔 더 권했다. 그러자 튜니티는 히죽거리면서 쇠주잔을 비웠고, 사빈 은 맥주잔 보다 더 작은 물컵을 허공에 던졌다. 물컵은 또 한 번 공중에 서 산산조각이 났다. 그런데 튜니티는 도대체 몇 개의 단검을 가지고 다 니는 걸까? 벌써 단검이 네 개째인데. "한번 더." 또 한번 트림을 참으면서 튜니티가 말했고, 사빈은 조그마한 쇠주잔을 비우더니 그것을 던질 준비를 했다. 설마 저 작은 잔을 맞추라는 걸까? 다들 숨을 죽이고 사빈과 튜니티의 움직임에 주목했다. 이거 완전히 단검 던지기 공연을 보는 느낌인 걸. 나도 어느 새 사빈과 튜니티의 묘기 대행 진 같은 내기에 흠뻑 빠지고 있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6325/19898 ━━━━━━━━━━━━━━━━━━━━━━━━━━━━━━━━━━━━━━━━ 제 목:[탐그루] 까페 사이환 191 관련자료:없음 19/19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2-22 00:30 조회:2089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사빈은 쇠주 잔을 높게 던졌다. 잔은 빙글빙글 돌면서 날아가 벽에 기 대어 서있던 남자의 어깨 위에 떨어졌다. 그 남자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 얗게 질려버렸다. 쇠주 잔이 깨진 건 바로 다음 일이었다. 단검은 한 치 도 빗나가지 않고 쇠주 잔을 박살냈던 것이다. 이어지는 박수갈채와 환호 성. 이제는 술기운 때문에 얼굴이 완전히 벌겋게 달아오른 튜니티는 웃으 면서 답례했다. "은화 백 개 짜리 잔이야." 사빈은 이렇게 말하면서 박수를 쳤다. 튜니티는 그런 사빈의 행동에 고 개를 살짝 숙여 답례한 다음에 앞에 놓여있던 잔을 비웠다. "근사해, 튜니티. 그 정도 실력이 되려면 어느 정도나 연습을 해야 하 나?" 정말로 부럽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탐그루에서 사빈과 함께 라스폼과 대치했던 일이 떠올랐다. 사빈은 그때 자신은 단검 던지기에는 자신이 없 다고 말 했었다. 아마 지금 사빈이 저토록 부러워하는 데에는 그런 이유 도 있으리라. "비밀. 더도 덜도 말고 딱 은화 백 개 짜리 비밀이지." 튜니티는 이렇게 말하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손님들이 간간이 웃음을 터트렸고 샘의 연주가 다시 이어지자 사이환의 분위기는 보통 때의 분위 기로 돌아갔다. 다시 종업원이 굴리는 주사위 소리와 사람들이 잡담을 나 누는 소리, 종업원을 부르는 소리와 노랫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확 실히 이곳은 활기가 넘친다. 하지만 탐그루에서 보았던 활기와는 분명 다 른 분위기였다. 탐그루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활기에 비해 이곳 사이환의 활기는 어딘가 어둡고 음침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무엇이 다른 걸까? 나는 자리에 앉아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별다른 생각이 떠오르진 않 았다. 사이환의 문이 열리면서 한 무리의 성황청 기사단이 들이닥친 건 다음 순간의 일이었다. 손님들의 시선이 온통 기사단에 집중되었고 술을 마시 고 있던 사빈과 튜니티의 표정이 굳었다. 나도 순간 긴장하기는 했지만 기사들 중에서 아무도 낯익은 사람이 없다는 걸 확인하자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기사들은 하나같이 번쩍이는 갑옷을 입고, 검은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투구는 벗어서 하나같이 왼쪽 손에 들고 있었고, 오른 쪽 허리에 는 색색의 성구를 차고 있었다. 나는 낮에 보았던 세 사람의 기사들을 떠 올려 보았다. 이들을 지휘하는 사람이 베이커 기사단장이라고 했던가? "사빈. 오래간만이군요." 기사들 중에서 콧수염을 기르고 나이가 좀 들어 보이는 기사가 이렇게 말하자 사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트라세 기사님. 어제도 뵈었던 것 같습니다만." 사빈의 얼굴은 긴장으로 굳어있었다. "그랬던가요? 이곳 로스안에서는 하루는 무척 길더군요. 아, 마침 자치 대장님도 계셨군요. 전해드릴 말씀이 있었는데 잘 되었습니다." 스트라세라고 불린 기사는 기분 나쁜 미소를 지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시선을 다른 쪽에 두려고 노력했지만 신경이 온통 성황청 기사들에게 집 중돼 자꾸 그쪽을 흘낏흘낏 보게 되었다. "가만있자. 저하고 술 한 잔 하면서 이야기 하실까요?" "손님하고는 술 마시지 않습니다. 이건 제 원칙입니다." 술에 취해서 달아오른 볼을 한 채 사빈이 말했다. 나는 사빈이 손님과 술을 마시면서도 말로는 마시지 않는다고 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 건 순전히 같이 술마시기 곤란한 사람을 물리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 던 것이다. 나 같으면 사빈이 자신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화부터 냈겠지만, 지금은 사정이 좀 달랐다. 스트라세는 그냥 고개를 끄 덕이고 말았다. "성황청의 사제들이 술을 마시는 줄은 몰랐는데요." "자치대장님. 술을 마시는 건 죄가 아닙니다. 술에 취하는 게 죄지요." "아. 그렇게 깊은 뜻이 있었군요. 미처 몰랐습니다." "하여간 전해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바쁘시더라도 좀 들어주시지요." 스트라세는 콧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이야기를 계속 이었다. "두 가지 소식이 있습니다. 나쁜 소식과 또 나쁜 소식이 있지요. 어떤 걸 먼저 들으시겠습니까?" "그래도 그중 기쁘고 즐거운 소식부터 듣고 싶군요." "자치대장님. 뛰어난 유머감각입니다. 웃기는군요." 경멸하는 듯한 눈초리로 스트라세는 튜니티를 한 번 노려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첫 번째 나쁜 소식입니다. 이곳에도 반란군의 손길이 뻗치고 있다고 하는데, 반란군에 대해서는 알고 계시지요?" "성황청에 반대하고, 국왕에 반대하는 사람들 아닙니까? 물론 저야 별 로 관심이 없습니다만." "사빈. 정치적으로는 중립을 지키신다고 하셨지요? 좋습니다. 제가 드 릴 말씀은 그 반란군들이 어떤 책을 한 권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스트라세는 이렇게 말하고는 지나가던 종업원이 들고 있던 물컵을 집어 들고는 몇 모금을 들이켰다. 아닌게 아니라 나도 목이 바짝 말라 있었다. 음악이 멎어서 그런지 사이환에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그 책은 성황청 소속 기사가 홀리우드에서 잃어버린 책이지요. 반란군 으로부터 빼앗은 책인데 꽤 중요한 정보가 적혀있다고 들었습니다. 사빈. 그 책에 대해서 들어보신 적 있으십니까?" "왜 제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시는지 모르겠군요." "아마 그 책을 빼앗은 사람은 틀림없이 곤란한 지경에 처해 있을 게 분 명하기 때문입니다. 이곳 사람들이 그러더군요. 곤란한 일이 생기면 누구 나 사빈의 사이환 까페를 찾는다고 그런 이야기 들어보셨죠?" "지나친 과장입니다. 전 해결사도 아니고 칼잡이 일에서는 손땐지 오래 입니다. 그저 까페 주인에 불과하지요." "까페 주인치고는 너무 경력이 화려하시더군요. 저도 들은 이야기가 있 습니다. 용사냥꾼에 삼년전쟁의 영웅, 거기다가 탐그루에서는 반란군을 도운 적도 있다지요. 무용담들을 죽 들어보았는데, 이거 아주 무시무시한 경력이시더군요?" 스트라세는 사빈의 허풍을 사실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사빈은 당황함을 감추려고 노력하면서 말했다. "전 정치 이야기는 하지 않습니다." "그렇군요, 중립이라... 하지만 아무리 중립이라고 해도 반란군을 돕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이환 까페의 주인은 아주 훌륭한 시민 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이번에도 저희 성황청을 위해서 헌신해 주시리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튜니티 자치대장님." 스트라세는 이번에는 바로 튜니티에게 질문을 던졌다. 튜니티는 술기운 때문에 늘어져 있던 몸을 바로 하면서 스트라세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또 하나의 나쁜 소식이에요. 오늘 밤 이곳으로 반란군 한 사람이 온다 는 소식입니다. 아마도 그 책을 가지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만약 그 반 란군을 도와준다거나 하면 좋지 않은 꼴을 겪게 될 것입니다. 물론 그 반 란군을 저희에게 넘겨주면 그에 따른 적절한 대우가 있을 겁니다." "스트라세 기사님. 이곳 로스안에는 두 세력이 힘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성황청의 힘이고 다른 하나는 스파일 주둔군의 힘이지 요. 저희 자치대는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습니다. 제 역할은 두 힘이 부 딪치는 걸 조절하는 일입니다. 다른 건 잘 모릅니다." "역시 중립이시다. 흠. 좋군요. 하지만 보다 더 강한 쪽에 몸을 의지하 는 게 더 편하다는 것쯤은 알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스트라세는 이렇게 말하면서 오른쪽 허리에 차고 있는 성구를 만지작거 렸다. 금빛의 화려한 장식이 달려있는 붉은 색 구슬이 연금술사의 빛 아 래 반짝였다. "그 잃어버린 책은 다소 미묘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저희 성황청 으로선 그 책의 내용이 알려지게 되면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됩니다. 당 연히 스파일 주둔군 입장에서는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 되겠죠. 반란군 들이 스파일 주둔군의 검문을 뚫고 이곳까지 올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이 유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만." "저는 무슨 책이든 상관없습니다. 제 임무는 이곳의 치안을 유지하는 것이지 다른 일들은 제 관심 밖입니다." 튜니티는 잔을 만지작거리면서 딱 잘라 말했다. 하지만 튜니티가 책에 관심이 없다고 했다고 해도 나는 관심이 있었다. 도대체 무슨 책인데 기 사단원들이 사이환 까페에 찾아와 자치대장에게 엄포를 놓아가면서까지 찾으려는 건지 궁금했다. "그 반란군을 보면 바로 체포해 주시겠지요? 아무래도 이곳의 치안을 맡고 있는 자치대가 반란군을 체포하는 것이 모양이 좋지 않겠습니까?." "반란군인지 뭔지 전 잘 모릅니다. 제가 아는 건 범법자는 체포해야 한 다는 것뿐이지요." 튜니티가 말하자 스트라세의 얼굴이 씰룩거렸다. 몹시도 심경이 불편한 모양이었다. "두 세력의 힘을 조절하는 게 튜니티, 당신의 일이라고 하셨지요? 제 생각에는 그 책을 저희 성황청에게 돌려주는 것이 균형을 유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일 듯 싶습니다." "반란군이든 뭐든 불법을 저지른 사실이 확인된다면 바로 체포하도록 하겠습니다, 스트라세 기사님." "그 말을 들으니까 조금은 안심이 되는군요. 반란군이 공적 일 호라는 걸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계실 테니까요, 튜니티 자치대장님." "제가 알고 있는 공적 일 호는 술값을 갚지 않는 사람입니다." 튜니티의 말에 손님들이 키득거리면서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성황청 기사들 앞인지라 드러내 놓고 웃지는 못하고 있었다. "뭐, 좋습니다. 반란군이라면 어떤 경우든 불법을 저지르기 마련일 테 니까요." "제가 주게 넘게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사빈이었다. 사빈이 입을 열자 스트라세는 눈썹을 씰룩거리면서 사빈을 바라보았다. "이곳 로스안은 정치적으로는 완전히 중립지역입니다. 만약 이곳이 한 쪽으로 기운다면 이곳은 금새 전쟁터로 변해버릴 겁니다. 그 전쟁은 곧 바르도 대륙 전체로 번져나가게 될 것입니다. 전쟁은 충분히 겪을 만큼 겪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건 오직 하나 입니다. 이곳이 전쟁터 가 되는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막겠다는 것입니다." 사빈은 진지한 표정으로 스트라세에게 말했다. 정말로 전쟁을 겪은 사 람이 아니라면 도저히 지을 수 없는, 그런 표정이었다. 나는 스트라세를 바라보았다. 내가 스트라세 입장이었다면 사빈의 저 표정에 완전히 질려 버렸겠지만, 스트라세는 조금도 당황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이곳이 전쟁터가 되는 걸 막으시겠다. 훌륭하신 생각이군요, 사빈. 내 가 충고 한 마디 하지요. 이곳이 전쟁터가 되는 걸 막으시려면, 그 반란 군의 신병이 저희 성황청에 인도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이건 사실입니다." 스트라세는 기분 나쁜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내가 보기에는 거의 협 박에 가까운 말인 것 같았다. 어떻게 저렇게 진지한 표정 앞에서 이런 식 으로 말할 수 있는지. 나는 스트라세라는 사람에 대해서 거의 질려버리고 있었다. "잠깐만요. 제가 좀 정리를 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럼 지금 그 말 씀은 협박이십니까?" 튜니티의 말에 나는 내가 놀라버리고 말았다. 저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을 줄은 몰랐다. 협박하는 거냐고 대 놓고 물어보다니. 하지만 스트라 세는 여전히 조금도 당황하거나 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협박이라. 아닙니다. 신의 말씀을 전하는 사제가 어떻게 감히 사람에 게 협박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 이렇게 해석할 수 있을까요? 반란군을 넘겨주지 않으면 당장 박 살내 버리겠다!" 책상을 치면서 튜니티가 소리쳤다. 순간 스트라세와 함께 온 기사들의 손이 성구로 향했다. 나도 거의 반사적으로 허리에 찬 나미트의 칼에 손 을 대고 말았다. 물론 나미트 장군을 불러낼 생각은 조금도 없었고, 설혹 불러낸다고 하더라도 이 많은 기사들을 상대로 이길 자신 또한 전혀 없었 다. 다행히도 스트라세가 오른 손을 들자 기사들은 손을 성구에서 떼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등줄기를 타고 땀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었 다. 더위 때문인지 긴장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하하하. 뭔가 오래를 하고 계시는 것 같군요. 저는 반란군이 가지고 있는 책이 성황청에 몹시 해로울 수 있기 때문에 평화를 위해서는 그 책 이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와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반란군의 신병도 이왕 오는 거 함께 오는 게 저희에게 유리하지 않겠습니 까? 왜 훔쳐갔는지, 어떻게 훔쳐갔는지, 또 배후에는 누가 버티고 있는 지... 이런 걸 알게 된다면 평화를 유지하는 데에 도움이 되겠다는 말씀 이었습니다. 튜니티 자치대장님. 너무 지나치게 생각하지 말아주시지요. 그리고 그 반란군의 신병은 책만 넘어온다면 문제 될 것이 없을 것입니 다. 이곳 로스안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게 된다면 말이지요." 스트라세는 여기까지 숨 한 번 쉬지 않고 말을 하고는 잠시 멈추어서 예의 그 야비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가 너의 머리 꼭대기에 있다, 라 는 의미를 담고 있을 게 분명한 자신 만만한 미소였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6326/19898 ━━━━━━━━━━━━━━━━━━━━━━━━━━━━━━━━━━━━━━━━ 제 목:[탐그루] 까페 사이환 192 관련자료:없음 21/21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2-22 00:31 조회:1944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사람은 때와 장소를 가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튜니티. 나도 튜니티의 능력은 잘 알고 있어요. 특히 그 단검 던지는 재주 같은 건 아 주 훌륭하지요. 하지만 그것도 때와 장소에 따라서 얼마든지 단점이 될 수 있겠지요. 예를 들어서 열 명의 기사들이 있는 앞에서 단검 던지는 재 주를 자랑했다가는 당장 통구이가 될지도 모른다는 말입니다." 스트라세의 말에 튜니티는 아무 말도 없었다. 인정한다는 뜻이리라. 사 실 제 아무리 뛰어난 단검술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저 많은 기사들을 상 대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잠시동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지, 어떻게 될 지 모를 상황에서 이런 침묵만이 흐르고 있다는 건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 다. 나는 피가 마르는 것 같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계속해서 앞에 놓인 컵을 잡았다 놓았다 하면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만있자. 그러고 보니 처음 보는 친구로군요. 검사인가요?" 스트라세가 나를 바라보면서 말하고 있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반지를 끼고 있는 왼손을 테이블 밑으로 숨기면 서 스트라세를 바라보았다. "그냥 여행자입니다." 나는 이렇게 천천히 말했다. (당황하고 있다는 기색을 감추기 위해서 말이다) "이름이..." "라이짐. 내 전우입니다. 스트라세. 다른 건 다 이해 할 수 있지만 내 가게에서 내 친구를 모욕하는 건 참을 수 없다는 것만은 분명히 해 두지 요." "라이짐이라.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인 것 같은데. 이봐. 누구 기억 나는 사람 있나?" 스트라세가 묻자 뒤에 서 있던 기사들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뭐 라고 한마디씩 나누었다. 나는 당장이라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하지만 만약에 그렇게 한다면 지도제작이고 모험이고 뭐 고 다 끝나버릴 게 분명했다. "사장님." 그때 사빈의 등뒤에서 종업원이 사빈을 불렀다. 사빈은 종업원을 돌아 보았다. "페라리 사장님께서 찾으십니다." "나 지금 바빠." 사빈은 종업원에게 대신 화풀이라도 하겠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 "급한 일이라고 하시는데요." "급하면 자기가 올 일이지..." 사빈은 뭐라고 더 이야기하려다 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죄송합니다. 잠시 실례하지요. 사업을 하다보면 종종 이런 일을 겪곤 한답니다. 이해해 주시기를." 사빈은 이렇게 말하고는 종업원을 따라 까페 구석에 앉아 있던 페라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빈, 저 분은 아주 훌륭한 분인 것 같아요. 하지만 너무 지나친 면이 있지요. 라이짐이라고 했습니까? 저는 당신을 모욕할 생각이 조금도 없어 요. 그냥 단지 이야기를 좀 하고 싶을 뿐이지요." 나는 스트라세의 얼굴에서 낯익은 미소를 발견 할 수 있었다. 그것은 라스폼이 나를 바라보면서 지었던 미소였다. 마음속에 비수를 하나 숨기 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결코 저런 미소는 짓지 않으리라. "라이짐. 당신한테서 마력이 느껴져요. 본인도 잘 알고 있겠지요? 마법 을 배운 적이 있나봐요?" 스트라세의 눈을 피하면서 나는 천정에 달려있는 연금술사의 등을 바라 보았다. 오색의 찬연한 빛도 지금 이 상황에서는 조금도 아름답게 느껴지 지 않았다. "아닌가요? 그럼 타고난 마법사일 수도 있겠군요. 만약 그렇다면 내가 잘 알고 있는 마법학교가 있는데 소개시켜 줄 수 있어요. 훌륭한 곳이지 요. 아주 가족적인 분위기에요. 예쁜 여 사제들도 많이 있고, 또..." "저는..." 물론 생각이 없다고 점잖게 말하려고 하는 데, 까페 사이환의 출입문이 열리면서 한 사람이 들어왔다. 내가 문 쪽을 바라보면서 말을 멈추었기 때문에 스트라세와 튜니티의 시선이 모두 문 쪽으로 쏠렸다. 루크였다. 루크는 임프 시에서 보았던 평범한 차림이 아니라 까페 사이 환에 딱 맞는 드레스 차림을 하고 있었다. 루크의 검은 피부가 연금술사 의 등 아래예서 신비롭게 보였다. 루크는 조심스럽게 치마를 들고 걸음을 옮겨 까페 중앙으로 향했다. "오호라. 이렇게 만나 뵙게 되는 수도 있었군요. 가만있자. 제가 자리 를 청하는 것 보다는 자치대장님께서 자리를 청하시는 게 더 모양이 좋을 것 같군요." 루크를 바라보면서 스트라세가 말했다. 나는 지금 무슨 대화가 오고가 고 있는지 종을 잡을 수 없었지만 스트라세의 의기 양양한 표정과 사빈과 튜니티의 굳은 얼굴에서 뭔가 단서를 잡을 수는 있었다. 루크의 뒤를 이어서 바리바가 돌아왔다. 나는 어떻게든 이 위기를 알려 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성황청의 기사들이 바리바 를 둘러쌌고, 바리바와 루크의 표정이 낭패의 빛으로 변해버렸다. "이리 와서 앉으시지요, 바리바, 그리고 루크." 스트라세는 정중하게 일어서면서 자리를 권했다. 바리바와 루크에게 선 택의 여지는 없어 보였다. 둘은 기사들에게서 경계를 멈추지 않으면서 조 심스럽게 걸어와 테이블에 앉았다. "자, 오래간 만이로군요. 저를 기억하시겠습니까?" "스트라세 사제... 기억합니다." 바리바는 선원같이 보이지 않는 화려한 레이스가 달려 있는 정장을 입 고 있었다. 아마도 신분을 숨기기 위해서 입은 것일 테지만 이런 상황에 는 조금도 어울리는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런데 바리바가 바로 반란군이었 다니. 게다가 지금 스트라세와 아는 사이였다니. 나는 지금 이 상황이 도 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참. 소개를 시켜드려야겠지요. 이 신사 분은 바리바라고 합니다. 삼 년 전, 갑작스럽게 은퇴하시기 전까진 화려한 경력을 지니고 계셨던 분이 지요. 저희 성황청과 손을 잡고 황금군도에 있는 섬들에서 유물을 찾아다 주셨던 훌륭한 모험가이시자 탐험가, 선원, 그리고 보물사냥꾼이었지요." "기억하고 있군요." "물론이지요. 그리고 이쪽은 이곳 로스안의 자치대장이신 튜니티 님이 시고, 이쪽은 젊은 검사 라이짐입니다." 스트라세가 나를 라이짐이라고 소개하자 바리바는 잠시 머뭇거렸다가 꼭 나를 처음 보는 사람처럼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나도 엉겁결에 인사 를 받기는 했지만 바리바가 지금 저렇게 인사하고 있는 건 틀림없이 내가 무슨 이유가 있어서 이름을 바꾸었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설 명을 하자니 너무 길었고, 특히 사빈이 자리에 돌아온 다음에 어떻게 대 화를 이어가야 할 지 알 수가 없었으므로 나는 그냥 잠자코 있기로 했다. "한때는 저희 성황청과 손을 잡고 훌륭한 뱃사람으로 이름을 날리셨죠. 참. 마지막 항해가 사 년 전이었던가요? 황금군도에서..." 스트라세는 여기서 말을 끊었다. 바리바는 곤혹스럽다는 표정으로 시선 을 허공에 두고 있었고 그건 루크도 마찬가지였다. 어쩐지 스트라세는 일 부러 말을 끊고서 바리바와 루크의 당혹스러워하는 표정을 즐기고 있는 듯이 보였다. 전에 바리바에게서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바리바는 전에 성황청의 의뢰를 받아 황금군도에서 고대의 유물을 가지고 오는 일을 했다고 했었 다. 그리고 마지막 항해에 대한 이야기도 했다. 내 기억력은 꽤 좋은 편 이지만, 그때 바리바가 했던 말만 가지고 바리바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는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내가 기억 할 수 있는 건 바리바가 풍랑을 만났다는 것과 세불장이라는 마을에 표류했다는 것, 그리고 그곳에서 용 을 만나서 도망쳤다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 용이 죽었던 자신의 친구였 다는 말도 했다. 그런데 그게 지금 이 상황과는 어떻게 연결이 되는 걸 까? "...제가 정확하게 사 년 전 일이라는 걸 기억하고 있는 건, 그때 제 친구가 그 배에 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불행한 사고였지요. 풍랑이라는 건 뱃사람이 그림자처럼 달고 다니는 불안과 공포지요" 이렇게 묻는 스트라세의 표정에는 악의가 분명히 드러나 있었다. 나는 스트라세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마치 살얼음이 낀 대청하 위를 걷고 있는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살얼음 이 깨져버릴 것만 같았다. "불안과 공포라는 말보다는 책임과 의무라는 말이 더 맞을 것 같습니 다. 뱃사람에게 위험은 운명일 뿐입니다. 성황청의 사제들이 모시고 있는 신이나 성황님처럼 말이지요." 바리바는 태연하게 보이려고 애쓰면서 스트라세에게 맞섰다. "뭐, 개인적인 원한 같은 건 없습니다. 다만 그 항해에서 제 친구는 참 혹하게 죽었고, 그 시체조차도 찾을 수 없었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은 겁 니다. 그리고 은퇴하셨지요?" "예. 여기저기 떠돌았습니다." 루크가 스트라세의 질문에 대답하는 바리바의 손을 꼭 잡았다. "마지막으로 성황청에 모습을 드러낸 게 삼 년 전 일이로군요. 제 기억 이 맞다면 말이지요. 그때 아마 하잔으로 향하고 있던 저희 기사단을 공 격하셨지요?" "사실과 다릅니다." 바리바는 무뚝뚝한 말투로 토막토막 말을 끊어서 대답했다. "그때 우리는 이렇게 생각했지요. 사실 반란군이라는 조직은 그리 오래 된 조직이 아닙니다만 그 일원으로서 바리바 당신이 우리와 손을 잡고 이 중 첩자 노릇을 한 게 아닐까 하고 요." "그런 상상력이라면 길거리에서 이야기꾼을 하셔도 좋겠습니다." 바리바는 여전히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말하고 있었지만 스트라세 의 질문은 예리하게 계속 이어졌다. "그럼 이건 어떻습니까. 삼년전쟁 때 자나크 군을 위해서 싸우고 있는 모습이 목격되었다는 소문은? 또 악마의 입에서 동타실의 기형아들, 이런 표현을 쓰는 걸 용서하시길, 기형아들을 위해서 싸우는 모습이 목격되었 다는 것은? 그리고 임프시에서 테이르의 날 행사를 알게 모르게 지원하고 있다는 소문은 어떻습니까?" 둘은 마치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듯 팽팽하게 대화를 잇고 있었다. 그 분위기에 압도되어 누구도 감히 끼여들 수가 없었다. "하나같이 입증 된 바 없는 소문입니다. 저는 선원이었고, 은퇴했고, 그리고 임프 시에서 잡일을 하면서 살았던 사람일뿐입니다." "그건 늘 운 좋게 빠져나가셨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이번에는 좀 다를 겁니다." 바로 그 때였다. 루크가 연주를 하고 있는 샘을 바라보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 "자치대장님. 저 분이 웬지 낯이 익네요." "그러신가요? 가만있자. 샘은 제 말도 듣지요. 샘! 이리 좀 와 주겠 나?" 튜니티는 한 참 동안이나 입을 다물고 있었던 게 억울했다는 듯이 아주 큰 소리로 샘을 불렀다. 샘은 건반악기를 끌고 루크의 바로 옆자리까지 왔다. "샘. 오래간 만이에요. 홀리우드에서 사빈하고 함께 보고 처음이로군 요." "사빈이라니요? 전 처음 듣는 이름인데요." "샘. 거짓말도 다 하고. 많이 나아지긴 했군요." 루크는 추억에 젖은 표정으로 샘을 바라보았다. 스트라세는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루크를 바라보고 있었고 튜니티는 지금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하 면 좋을까 궁리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바리바는 조각상처럼 굳은 표정을 지었다. 사빈과 샘은 아마도 오랫동안 함께 다닌 모양이었다. 그 럼 탐그루에 나타났을 때, 그 때는 왜 혼자 나타났던 걸까? "...루크.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어요." 샘은 당황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샘. 그 노래를 들려 줘요." "무, 무슨 노래 말인가요? 아, 그 노래 말씀이시군요...." 샘은 건반을 눌러 연주를 시작했다. 날 달로 보내주세요 별들 사이를 뛰놀며 그곳의 봄은 어떤지 알고 싶어요 다른 세상에서라면 내 손을 잡아주세요 다른 세상에서라면 내게 입 맞춰주세요 날 행복한 노래로 가득 채워주세요 영원히 노래하게 해 주세요 당신은 내가 원하고 바라는 모든 것 다른 세상에서라면 솔직하게 말해 주세요 다른 세상에서라면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하겠어요 "거짓말하는 게 많이 늘었네, 샘." 노래를 듣다 말고 끊으면서 루크가 말했다. 샘이 당황하는 기색이 더욱 역력해 졌다. "샘. 다시 한 번 연주해줘요. 옛날처럼." 루크가 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말했다. 샘은 눈을 피했지만 내가 보기에도 더 이상 루크의 눈을 피하고만 있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샘은 루크의 눈을 바라보았다. 루크는 간절한 눈빛으로 샘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후, 샘은 결심한 듯 숨을 한 번 훅 들이쉬고 나서 천천히 내 뱉으면 서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 노래였다. 세월이 가면. 세월이 가면 알게 되겠지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이라고 입맞춤은 그저 입맞춤일 뿐이고 한숨은 그저 한숨일 뿐이라는 걸 떠나간 내 님은 돌아오지 않고 사랑도 이젠 그저 사랑으로 남게 되려나 세월이 가면 알게 되겠지 루크는 중간중간 따라 부르기도 하면서 노래를 감상했다. 곡이 끝날 때 까지 아무도 말이 없었다. "그 곡은 내가 연주하라고 하기 전에는 연주하지 말라고 했잖아!" 정적을 깬 것은 사빈이었다. 곡이 끝나자마자 사빈이 달려오면서 소리 쳤다. 샘은 검은 엘프 족 특유의 습성으로 길쭉한 귀를 만지작거렸고, 루 크는 사빈을 바라보았다. "사빈. 오래간 만이에요." "루크..." 사빈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 바리바는 여 전히 굳은 얼굴로 사빈을 바라보았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6327/19898 ━━━━━━━━━━━━━━━━━━━━━━━━━━━━━━━━━━━━━━━━ 제 목:[탐그루] 까페 사이환 193 관련자료:없음 19/19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2-22 00:31 조회:2084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이쪽으로." 루크가 사빈에게 자리를 청했다. "루크. 사빈 님은 손님과는 술을 안마십니다." 샘이 말했지만 사빈은 뒤 돌아서서 종업원을 큰 소리로 불렀다. "여기 술 한 병만 가지고 오게." "손님과는 술 안 마신다고 하시지 않았던가요?" "독한 걸로." 스트라세의 말은 완전히 무시하는 사빈이었다. "바리바. 이제 책 이야기를 하지요. 제 친구의 목숨과 맞바꾼 책입니 다. 그 책을 왜 훔쳤지요?" 스트라세가 바리바에게 물었다. "책이라뇨? 책은 보통의 경우 도서관에 있지 않습니까?" 바리바는 왜 그런걸 자신에게 묻느냐는 표정이었다. "흠. 일단 부정하시는군요. 하지만 목격자가 있습니다." "그런 말은 전에도 많이 들었지요." "이번에는 좀 다를 겁니다. 홀리우드 지부의 성황청 기사들이 모조리 당신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으니까요." "글쎄요? 만약에 제가 도둑이라면 얼굴을 가리지 않았을까요?" "복면을 하고 범행을 하셨다고 지금 자백하시는 겁니까?" "농담이 지나치시군요." 바리바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성황청 기사들이 흠ㄳ 놀라면서 성 구에 손을 가지고 갔다. "저는 지금 로스안의 땅 위에 있습니다. 이곳은 이곳 자치대장이 관할 하는 곳입니다." "아, 그렇군요. 그리고 지금 저는 이 땅에 서 있는 바리바의 문제를 말 하고 있는 겁니다. 아무래도 바리바, 당신은 별로 좋지 않은 때에 좋지 않은 장소에 와 있는 것 같군요. 좋아요. 그럼 내일 여기 계시는 튜니티 자치대장님의 자치대 건물에서 볼까요?" "자치대장님. 이곳은 자치대장님의 관할 구역입니다." 바리바는 여전히 선 채로 튜니트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튜니티는 일단 스트라세의 얼굴을 한 번 본 다음에 말했다. "제가 부탁드리는 걸로 하지요, 이곳의 자치대장으로서. 그리고 그 편 이 훨씬 매끄러운 것 같습니다." "바리바. 하지만 이제 시작일 뿐이라는 걸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 고 튜니티 자치대장님께서도 잊지 마시길." 스트라세는 이렇게 말하면서 성황청 기사들을 이끌고 나가버렸다. 나는 튜니티가 어쩔 수 없이 스트라세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생각 이 들었다. "자치대장님. 저희를 성황청에 넘기실 건가요?" 루크가 물었다. 바리바는 성황청 기사들이 완전히 다 나가는 것을 확인 한 다음에 자리에 앉았다. "저는 넘기겠다고 한 적은 없습니다. 제가 하는 일은 이곳의 치안을 유 지하는 일입니다. 분쟁이 생기는 걸 저는 용납할 수 없습니다." 튜니티는 이렇게 말했다. 튜니티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튜니티가 한 말은 성황청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다는 말로 들렸기 때문이었다. "바리바. 여길 온 이유를 듣고 싶군." 사빈이 바리바에게 말했다. 둘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이인 모양이 었다. 나는 그제야 바리바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바리바는 로스안에 가 면 자신이 아는 술집이 있다면서 이곳에 약속을 정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사빈과 바리바는 서로 알고 있는 사이라는 말이 될텐데, 이걸 눈 치채지 못했으니. 나는 정말 나 자신이 얼마나 멍청한지 짐작도 할 수가 없었다. 기억력만 좋으면 뭐하나. 기억한 것을 가지고 추리를 하지 못하 는데. "도움이 필요해, 사빈. 그래서 찾아 온 거야." 루크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이번에는 사빈과 바리바 사이에 긴장이 흘렀다. 오늘 무슨 날인가? 이런 대화들만 계속해서 지켜 봐야 하다니. 나는 당장이라도 돌아버릴 것 같은 심정이 되어버렸다. "무슨 도움? 루크와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 자네에게 도움이 다 필요하 다니 의외로군." 사빈은 이렇게 말하면서 독한 술을 한 잔 들이켰다. 무슨 술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독하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쇠주를 물처럼 들이키던 사빈 이 사래가 들려서 쿨럭거리고 있는 걸 보면 말이다. 대화는 사빈이 물을 한 컵 다 마시고 기침을 멈추고서야 다시 이어졌다. "그건 지나간 일이야. 사빈. 나는 용을 찾고 있어. 자네도 용을 찾고 있지 않았던가? 용사냥꾼이라고 스스로 자처했잖아. 오브라디 교수님을 기억하겠지?" 맞다. 바리바는 오브라디 교수의 강연회 소식을 전할 때 친구 하나가 오브라디 교수의 제자라는 말을 했었다. "용사냥꾼은 이제 폐업이야. 다시는 용을 뒤쫓지 않겠어. 그러기로 하 고 여기에 정착한 거야, 바리바." "자네에게 배가 있다는 걸 알고 있네, 사빈. 난 그 배가 필요해." 바리바는 이렇게 말하고는 사빈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나는 바리 바의 저런 눈을 본 적이 있다. 임프 시에 있었을 때, 바리바가 나에게 도 움을 청하면서 저런 눈을 했었다. 요컨대 누군가에게 도움을 필요로 하는 눈이었다. "다시 황금 군도로 가겠어. 거기에 용에 대한 단서가 있으리라고 나는 확신하고 있네."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지 모르겠군." 사빈은 통 무슨 소리를 하는 지 못 알아듣겠다는 듯이 앞에 놓여진 컵 을 만지작거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난 기억하고 있네. 용이 나타나기 전에, 그 신전에 말이야, 또 한 권 의 책이 놓여 있던 걸 말일세. 거기에 틀림없이 뭔가 단서가 있어. 분명 그 때문에... 나는 용을 보았다고 생각하고 있다네. 그 친구 말일세. 기 억하지?" 바리바가 친구라는 말을 꺼내자, 사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나는 서커 스 들판에서 바리바가 했던 말을 떠올려 보았다. 사빈과 바리바, 그리고 그 죽었다는 친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분명했다. 사빈은 아무 말 도 없이 잔만 계속해서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내가 그 때 가지고 온 책에 무슨 말이 쓰여 있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적어도 이거 하나는 확실하다네. 두 개의 책이 한 쌍이라는 것 말일세. 같은 모양이었던 걸 자네도 혹시 보지 않았나 싶네만... 어찌되었건 이제 오브라디 교수님이 돌아오면 모든 비밀이 풀리게 될 거야. 고대어로 쓰여 진 문서라서 그 내용을 알 수는 없었지만, 이 책을 성황청 녀석들이 애지 중지한 걸 보면..." "잠깐만요. 그럼 당신이 성황청으로부터 책을 훔쳤다는 사실을 인정하 시는 겁니까? 스트라세가 말 한 그대로?" 바리바의 말을 막고서 튜니티가 물었다. 그러자 바리바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당신은 적어도 생명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일 거라고 믿기 때문입 니다. 생명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성황청 기사들이 이곳 에서 싸움을 벌이는 것을 말릴 이유가 없지요." "잠깐만요. 그 책하고 생명을 소중하게 여긴다는 거 하고 무슨 상관이 죠?" "이 책에는 마칸의 강림에 대한 정보가 담겨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자 치대장님." 루크는 이렇게 말했다. 루크의 말에 튜니티는 테이블을 만지작거리면서 생각에 잠긴 듯 했다. 튜니티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튜니티만이 알고 있으리라. "성황청 녀석들이 탐그루를 장악했다는 소식은 들었습니까?" "예. 그저 그런 소문을 좀 들었지요. 제 관심사는 오직 여기 로스안의 치안뿐입니다." 바리바의 질문에 튜니티는 이렇게 대답했다. "녀석들은 용에 대한 정보를 캐고 있습니다. 저는 용이 다음에 나타나 게 될 마물임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황청에서는 그 사실을 이용 해 바르도 대륙 전체를 장악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것도."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서 바리바가 말했다. 하지만 튜니티는 몸을 의자 에 깊숙이 기대면서 별 흥미 없다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그러자 바리바 는 다급한 얼굴이 되어서 튜니티에게 이렇게 말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이곳 로스안이 멀쩡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소문 을 들었습니다. 탐그루가 어떤 꼴이 되었는지. 그리폰이라는 마물들이 나 타나서 탐그루를 완전히 불바다로 만들어버렸답니다. 저는 그것 또한 성 황청의 계략이 틀림없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나는 바리바의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이 온통 새하얗게 변해버리고 말 았다. 탐그루가 잿더미가 되어 버렸다니. 나는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 다. "말씀은 잘 하시는군요. 그렇게 확신하시는 근거가 뭡니까? "아까 저에게 이야기하던 스트라세 기사의 표정입니다. 그거면 충분하 지 않습니까?" 성황청이 탐그루를 장악했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 정도까지일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성황청은 아무 것도 남지 않았을 탐그루에서 도대체 뭘 하려고 하고 있는 것일까. "바리바, 탐그루가 불바다가 되었다니..." "라이짐 님. 그 얘기는 다음에 하지요." 나는 탐그루 소식이 궁금했기 때문에 물은 거였지만, 바리바는 꼭 내가 무슨 실수라도 저질렀다는 듯한 눈을 하고서 이렇게 말했다. 여전히 오해 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긴, 임프 시에서 처음 만났을 때 이름을 얘 기해 주지 않았으니 바리바는 바리바 나름대로 내가 이름을 감추어야 할 이유가 있는가 보다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 다. "사빈. 우리는 당신의 배가 꼭 필요해요." 루크가 사빈에게 물었다. "배? 무슨 배 말인가?" "당신도 샘하고 똑 같군요. 거짓말하는 게 늘었어요. 전 사빈이 허풍은 쳐도 거짓말은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알고 있었는데요." "자. 오늘은 이만 하지." 루크의 말이 끝나자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사빈이 말했다. "좀 피곤하군. 가게는 종업원들에게 맡기고 나는 좀 쉬어야겠어." 사빈은 기지개를 켜면서 종업원을 불렀다. 그러더니 종업원에게 뭐라고 귓속말을 했다. "바리바. 이 친구를 따라가. 좋은 여관으로 안내해 줄 거야.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이 정도일세." "내일 저희 자치대로 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튜니티는 이렇게 말하고는 사빈이 마셨던 독한 술을 따라 마셨다. 바리 바와 루크가 나를 한 번 바라보았다. 따라나갈까 하는 마음으로 나는 자 리에서 일어났지만, 바리바는 손짓으로 앉아 있으라는 시늉을 했다. 그리 고는 신발끈을 고쳐매는 척 하면서 내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내일 이야기하지. 오늘은 일이 있어." 바리바는 이렇게 말하고는 사빈을 바라보았다. "사빈, 하지만..." "샘. 음악을 연주하게. 난 쉬러 갈 테니까." 사빈의 말에 바리바와 루크는 조금 실망한 기색으로 종업원을 따라갔 고, 사빈은 나가는 루크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사이환 까페 의 조그마한 골방에 재워 주고, 바리바와 루크는 여관방을 잡아주다니. 이게 뭐하는 짓이야 도대체? "바리바가 여기서 빠져나가지 못한다는 데 금화 열 닢 걸지. 성황청의 기사들을 상대하기란 쉽지 않아. 자칭 신의 사도를 누가 이길 수 있겠 어?" 튜니티는 물끄러미 자신의 빈 잔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튜니티의 표정 은 허망해 보였다. "성황청의 기사들을 상대할 수 없다는 말은 누구한테 하는 말인가? 내 가 듣기엔 바리바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자네 자신에게 하는 말 같군." 사빈은 이렇게 말하면서 튜니티의 빈 잔에 술을 채워주었다. 튜니티는 사빈의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묵묵히 술잔을 기울일 뿐이었다. PRINTER/CAPTURE를 OFF 하시고 [ENTER] 를 누르십시오.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6375/19898 ━━━━━━━━━━━━━━━━━━━━━━━━━━━━━━━━━━━━━━━━ 제 목:[탐그루] 까페 사이환 194 관련자료:없음 20/20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2-23 00:05 조회:2211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잠자리에 들어도 샘의 연주는 계속됐다. 가끔 다른 곡을 연주하기도 했 지만 대부분은 '세월이 가면'이라는 곡이었다. 아마도 사빈이 연주해 달 라고 부탁하는 모양이었다. 사빈은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있었다. 내가 여기서 잠을 청하고 있다는 걸 모르나? 사실 음악소리가 아니더라도 잠을 잘 오지 않았다. 탐그루가 잿더미가 되어버렸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 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그리폰이라는 마물은 또 뭘까. 바리바가 훔쳐 왔다는 책은 또 뭐고. 나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져서 도대체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자연 나는 자리에서 이리 뒤척이고 저리 뒤척였 고, 덕분에 애꿎은 어깨와 등만 아파올 뿐이었다. 이곳에 처음 왔을 때부터 들은 이야기가 있다. 문제가 생기면 누구나 사이환으로 온다는 말이 그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사이환에 있지만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고 있었다. 하긴, 그러고 보니 사빈도 무슨 문제 가 있는 것 같은데 겨우 음악이나 들으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게 아닌 가 싶었다. 그렇다면 문제가 생기면 사이환으로 간다는 말은 뭐지. 사실 다들 사이 환을 찾는다고는 했지만 그게 반드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라고 만은 할 수 없을 것 같다. 다들 사이환을 찾는다고만 했지 해결하러 온다는 말 은 아무도 하지 않았으니까. 어쩌면 이곳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나 아는 사람과 나누는 잡담, 도박, 뭐 이런 것들로 세상 만사를 잊을 수 있기 때 문에 사이환으로 온다는 말이 아닐까? 모르겠다. 나는 이불을 머리 위까 지 뒤집어 썼다. 하지만 절대로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이런 저런 생각으로 한 참을 고민하고 있느라 어깨가 빠질 정도로 아파 올 무렵, 음악소리가 멈추었다. 그리고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빈." 루크의 목소리가 분명했다. "...바리바는 어쩌고 온 거야?" 사빈의 목소리는 많이 취해있는 듯 들렸다. "바리바는 이곳 사람들을 만나러 갔어." 아마 이곳의 반란군과 만나러 갔다는 말인 모양이었다. 그럼 이곳에 혼 자 왔다는 말일까? "샘. 그 음악을 다시 한 번 연주해 줘요. 옛날처럼." "미안, 루크. 그 음악은 이제 질렸어." 하긴 그렇게 오랫동안 같은 음악을 들었으니 질릴 만도 하지. "나가 있어. 내일 아침에 보지." 이제 연주는 그만이라는 뜻인 모양이었다. 나는 사빈의 말을 듣는 순간 잠시 안심이 되었다. 나도 그 노래에는 질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 사빈 님." 샘은 이렇게 말했고, 이어서 사이환 까페의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 다. 잠깐. 샘이 나가버리면... 그렇다면 지금 이곳에는 루크와 사빈 단 둘 뿐이라는 말이잖아? 나는 마른침을 한 번 꿀꺽 삼켰다. 가슴이 방망이 질 치기 시작했다. 이러면 안 된다, 수르카. 지금 두 사람은 심각한 얘기 를 하려던 참이잖아? 왜 이상한 상상을 하고 그러는 거야. 하지만 내 몸 은 나도 모르게 조심스럽게 덧문을 열고 밖으로 향하고 있었다. 속으로는 '그래, 중요한 얘기니까 꼭 들어야 해. 하지만 방해는 하지 말자.' 이렇 게 중얼거리면서 말이다. 까페에는 흐린 연금술사의 등 하나만이 외롭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 래서 까페 안은 몹시 어두웠는데, 루크와 사빈의 모습은 마치 그림자처럼 보였다. "바리바는 배가 꼭 필요해요, 사빈." "왜?" 사빈은 시큰둥하게 말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사빈의 반응을 엿보았다. 사빈은 허풍을 칠 때와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틀림없이 똥폼을 잡 고 있는 거야. "다시 항해를 떠나야 하니까. 황금군도로." "용... 때문인가." 희미한 연금술사의 빛이 사빈의 얼굴에 깊은 그림자를 만들어 놓고 있 었다. "그래요. 용. 그것 때문이에요." "그 친구 일이라면 잊어버리라고 해. 그건 바리바 녀석의 착각일 뿐이 야." "하지만 그 사람이 죽은 걸 바리바는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걸요." "어쨌든 잊어 버리라구 해." "사빈. 용을 만나 본 적 있나요?" "없어." 사빈은 이렇게 말해버렸다. 허풍은 쳐도 거짓말은 안 한다더니 순 헛소 리인 모양이었다. "내가 만난 건 용이 아니었어. 고양이였어." 취했나? 사빈은 완전히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었다. "고양이 용 이야기는 들어본 적 있어요. 용이 모습을 바꾼다고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용은 모든 걸 담을 수 있다고도 하고요.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지요. 용안에 들어갈 수 있는 것들도 있다고." "그래. 그런지도 모르지. 하지만 난 지금 피곤해. 게다가 용 얘기는 더 이상은 하고 싶지 않아. 말했잖아. 용사냥꾼 일은 그만 뒀다고." "사빈. 용을 뒤쫓게 된 이유를 말했었죠. 오브라디 교수님에게서 용에 대해서 듣고 난 후에..." "대학시절의 추억이지. 난 오브라디 교수님에게서 용에 대한 강의를 들 었어. 오브라디 교수님이 그랬지. 용이 발견 한다면, 용의 정체를 밝힐 수 있다면, 비스토브레 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견을 하게 되는 걸 거 라고. 난 그 말만 믿고 용을 찾아다녔어. 용사냥꾼이라는 이름 하에. 하 지만 이젠 알아. 용은 없어." 이 말을 듣자 난 그제야 또 한 번 잊어버리고 있던 일이 떠올랐다. 바 리바가 우리에게 오브라디 교수의 강연 광고를 하고 있다는 말을 하면서 했던 말이었다. 그건 바로 오브라디 교수의 제자를 친구로 두고 있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 친구가 로스안에서 까페를 하고 있다는 얘기로 이어 졌던 것이다. 완전히 잊고 있었다. 이렇게 중요한 사실을 말이다. 아니, 잊고 있었다기보다는 멍청하게도 연결하지 못하고 있었던 거지. "사빈. 당신이 지금 뭐 같아 보이는 줄 알아요? 겁에 질린 꼬마를 보는 것 같아, 지금. 멍청하게도. 단지 한 번 도전해 보고 그리곤 지금 사빈은 도망치려고 하는 거예요. 무서워서." "그런지도 모르지. 하지만 난 지금의 내가 좋아." 사빈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천천히 자신의 까페를 둘러보았다. "문제가 생기면 사람들은 누구나 여기로 와. 여기에서는 누구나 환상을 가질 수 있으니까. 내가 허풍을 친다고 했지? 맞아. 난 허풍을 쳐. 그리 고 이곳에 찾아오는 사람들은 그걸 좋아하고. 사이환이라는 이름이 어떻 게 해서 나오게 된 건지 알아? 사이환에서 환은 환상을 뜻하는 말이야." "사빈. 그건 이제 사빈의 몫일 뿐이에요." 루크의 말에 사빈이 걸음을 멈추었다. 잠시 정적이 있었다. 둘 사이의 공간에 내려앉아 있는 그림자가 연금술사의 등 빛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래. 난 여기 남았지. 바리바는 떠났고. 어차피 둘 다 이제 배는 못 타. 둘 다 똑 같아. 겁장이야." 사빈은 취기가 오르는지 비틀거리고 있었다. "아니에요. 달라요. 바리바는 다시 배를 타기로 마음먹었어요. 그래서 사빈에게 온 거 잖아요. 다시 배를 타기 위해서. 다시 용을 찾아서." "그런 거 난 몰라. 분명한 건 바리바도 나도 배를 타지 못할 거라는 사 실 뿐이야." "배가 있는 걸 알아. 황금군도로 마지막 항해를 떠났던 그 배 말이야." 루크의 말에 사빈은 잠시동안 가만히 있다가 이렇게 말했다. "바리바는 절대로 그 배를 타지 못해. 왜냐고? 그 배는 빌려주는 배가 아니니까." "심술인가요? 어린애 같이. 사빈은 똑 같아요. 예전이나 지금이나. 내 가 왜 바리바를 택했을 것 같아요? 내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 이것뿐 이에요. 바리바를 더 사랑했기 때문은 아니라는 걸. 그때 바리바는 내게 말했죠. 날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하지만 사빈은 이렇게 말했어요. 내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다 하겠지만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고. 사빈의 말도 물론 멋있었어요. 하지만 난 바리바의 순수한 열정에 점수를 더 주고 싶었어요. 바리바가... 반드시 날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으리라고 믿었던 건 아니지만, 사빈보다는 더 노력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사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루크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그러자 사 빈은 잔뜩 냉소적인 얼굴이 되어서 루크를 쏘아보았다. "그래. 그렇게 해서 떠났으니 됐잖아. 왜 돌아와서 난리야? 날 좀 내버 려 둬. 난 여기서 행복해. 더 이상 바랄 게 없다고. 그래. 어찌되었건 난 그때 패배했어. 그리고 지금도 그 상황은 변한 게 없고. 제발 내 인생에 서 사라져 줘." "아니. 사빈은 잊지 않고 있어요. 그 음악을 아직도 듣고 있잖아. 문밖 에서 들었어요. 세월이 가면." 이렇게 말하는 루크의 얼굴은 추억에 젖어있는 듯 보였다. 나는 대충 바리바와 루크, 그리고 사빈이 어떤 관계였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 고 임프 시에서 보았던 둘의 이상한 모습들, 그러니까 술집 기생을 품었 던 바리바의 행동이나 크라이의 팔에 매달렸던 루크의 행동이 조금은 이 해가 갈 것도 같았다. "좋아요. 더 이상 이해를 바라지는 않겠어요. 그냥 배가 있는 곳만 말 해줘요. 당장 그 배로 떠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용을 추적하다 보면 반드시 배를 타야 해요." "미안해. 난 그냥 패배자로 남겠어. 마지막까지. 그게 사빈다워. 안 그 래, 루크? 루크도 말했잖아. 날 보고 어린애라고. 어린애로 남겠어. 마지 막까지." "미안해요." 나는 루크가 왜 미안하다고 말하는지 잠시 의아해 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왜 루크가 그렇게 말했는지 알 수 있었다. 루크의 손에는 단검이 들 려져 있었던 것이다. "날 찌를 건가?" "배가 주지 않는다면." 나는 루크의 손이 떨리고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래. 찔러 봐." 사빈은 이렇게 말하면서 루크에게 다가갔다. 루크는 오히려 한 걸음 뒤 로 물러섰다. "그날 밤을 기억하나? 별이 많은 밤이었지. 우린 소망을 빌었어. 아름 다운 소망이었지.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 도 그 순간만큼은 행복했어. 난 기억해." 사빈은 루크의 양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루 크의 얼굴에 다가갔다. 나는 다시 한 번 마른침을 삼켰다. 태어나서 이런 광경을 보는 건 처음이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런데 왜 스칼렛의 얼굴이 눈앞에 떠오르는 거지? 하얀 스칼렛의 살결, 아름답게 뻗은 목, 투명한 눈동자, 그리고... "으악!" 그 순간 사빈의 비명소리가 까페에 울려 퍼졌다. 나는 나도 모르게 벌 떡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루크가 나를 바라보았다가 곧 이어서 사빈 을 바라보았다. 사빈의 얼굴은 온통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미, 미안. 나도 모르게..." 허둥거리면서 루크가 말했다. 하지만 루크는 임프 시에서 사비치 다리 가 무너졌을 때 보여주었던 침착함 그대로, 팔 소매를 찢어 사빈의 팔에 감아주었다. 순식간에 천이 검붉게 물들었다. "아, 아파! 살살해!"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사빈의 얼굴은 진짜 어린아이 같았다. 보다 분명 하게 말하자면, 투정을 부리고 있는 갓난아기 같은 표정이었다. 평소에 그렇게 근엄하게 폼 잡고 있던 사빈의 얼굴이 저 모양이라니. 게다가 말 까지 더듬으면서 말이다. 나는 웃음이 절로 나왔다. "뭐해, 수르카. 와서 좀 도와줄 일이지." 루크가 이렇게 말하면서 눈을 흘겼다. 나는 헛기침을 하면서 다른 곳을 바라보는 척 했다. 꼭 물건을 훔치기 직전에 주인과 눈이 마주친 좀도둑 같은 심정이 지금 내 심정과 같으리라. "과, 관둬!" 사빈은 팔에 천이 완전히 다 감기는 것을 기다렸다가 이렇게 소리치면 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배? 우, 웃기는 소리하지마. 그런 거 이, 이제 없어! 아니, 이, 있어 도 없어! 다, 당장 나가! 여, 여긴 내 까페야! 그리고 난 여, 여기서 잘 먹고 자, 잘 살다가 죽을 거야!" 사빈은 정말로 어리광을 부리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루크와 바리바가 있는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사빈. 난 사빈을 알아. 그게 진심이 아니라는 걸. 사실은 사빈도 배를 다시 타고 싶은 거야. 그러니까 지금 투정을 부리고 있는 거라구. 배를 다시 탄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아주길 바라는 거지?" "모, 몰라! 당장 나가!" 사빈은 다치지 않은 오른 손을 높게 치켜들면서 소리쳤다. 그러자 루크 는 한숨을 뱉어내더니 천천히 입구 쪽으로 물러섰다. "나중에 그 말을 번복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말해. 다시 배를 타겠다고. 이렇게만 말하면 돼." "이 사, 사나이 사빈, 명예와 의리 빼면 시체야. 다, 당장 나가!"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6376/19898 ━━━━━━━━━━━━━━━━━━━━━━━━━━━━━━━━━━━━━━━━ 제 목:[탐그루] 까페 사이환 195 관련자료:없음 21/21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2-23 00:06 조회:1973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사빈은 핏대를 세우고 소리쳤지만 명예와 의리하고 지금 이 상황하고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듯 싶었다. 루크는 별 수 없다는 듯이 포기하고 밖으 로 걸음을 옮겼다. "사빈. 팔은?" 나는 사빈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러자 사빈은 심호흡을 하면 서 마음을 진정시킨 다음 이렇게 말했다. "그, 그런데 수르카라니? 너 이름 라이짐 아니었니?" 아직도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는지 사빈은 여전히 말을 더듬고 있었다. "그건 너무 긴 이야기야." 나는 사빈의 평소 말투를 흉내내면서 잔뜩 힘을 주어서 이렇게 말했다. 꼭 마치 깊은 사연이라도 있는 것처럼 말이다. 어차피 까페 사이환은 이 런 곳이라고 사빈이 말했으니까. "그런데 배를 넘겨주지 않는 이유는 뭐야?" "그런 얘기는 나중에 하지. 별로 하고 싶지 않아." 사빈은 이렇게 말하고는 까페 밖으로 나가버렸다. 팔목의 상처를 어루 만지면서. 바리바가 까페 사이환에 온 것은 점심 때였다. 서서히 가게에 손님들이 들어올 시간이었고, 나와 사빈은 식사를 막 마친 즈음이었다. 이번에는 바리바 혼자였다. "사빈. 일이 힘들게 됐어." 바리바는 더위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 땀을 많이 흘리고 있었 다. 바리바는 오른팔로 땀방울들을 닦아내면서 말하고 있었다. "왜? 튜니티가 성황청에 넘기겠다고 하던가?" 식사를 막 마친 뒤여서 입가를 닦으면서 사빈이 말했다. 사빈은 비웃는 것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내가 보기에 그 미소는 자기 가신을 비웃 고 있는 듯 느껴졌다. "아니.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어. 하지만 이곳을 떠날 생각은 하지 말라 고 하더군." 바리바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이렇게도 말했어. 살아서 이곳을 떠나고 싶다면 사빈, 자네에 게 도움을 청하라고." "나? 내가 무슨 힘이 있어서?" "사빈. 그래도 한 때 우리는 한 배를 탔었네. 기억나지 않나?" 바리바는 연신 땀을 닦으면서 말했다. 사빈은 조금 더 비웃는 것 같은 표정이 되어서 입을 열었다. "그랬던가? 하도 많은 사람들과 배를 타서 말이야. 기억이 잘 나지 않 아." "사빈." 바리바의 얼굴에 진지한 빛이 감돌았다. 나는 그것이 무언가 간절히 바 라는 빛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책을 성황청에 넘겨주겠네. 그리고 이곳을 떠나겠어. 그러면 자네도 튜니티도 만족하겠지?" "튜니티는 만족할지 몰라도 난 안 그래. 내가 원하는 건 조용히 이곳에 서 까페를 운영하는 것 뿐이야." 사빈의 말투는 여전히 냉소적이었지만 어쩐지 흔들리고 있는 듯한 기색 이 역력했다. "사빈. 나 혼자 떠나겠다는 말이야." 나는 이 말에 깜짝 놀라면서 바리바를 바라보았다. 혼자 떠나겠다니, 무슨 말일까. "하지만 우리가 하는 일은 계속 되어야 하네. 부탁하네. 배를 넘겨주 게." 바리바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배를 달라고 하는 걸까. 나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알 수가 없었다. "루크..." 사빈은 이렇게 중얼거렸다. 사빈의 목소리에는 그리움, 아니 추억 같은 것이 느껴졌다. "글쎄. 내가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가 있는지 모르겠어." 곧 이어 사빈은 이렇게 말했지만 내가 듣기에는 애써 자신의 감정을 숨 기기 위해서 하는 말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적어도 지금은 배가 있다는 걸 숨기진 않는군." 바리바는 이렇게 말하고는 사빈에게 다가섰다. 바리바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가 숨막힐 정도로 두텁게 얼굴에 와 닿았다. 사빈은 움찔거리 면서 몸을 뒤로 뺐는데, 꼭 열기 때문에 그러는 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왜 하필 내 배인가? 배는 얼마든지 있는데." "자네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자네 배에 황금군도를 뚫고 지나갈 수 있는 마법이 서려 있다는 걸. 그리고 그 배야말로 황금군도를 탐험했던 그 배지. 물론 사람들은 마지막 항해 때 풍랑에 부셔졌다고 알고 있겠지 만." 사빈은 대답이 없었다. 그저 몸을 뒤로 뺀 채로 어정쩡하게 서 있을 뿐 이었다. 그때였다. 문이 열리면서 열 명은 됨직한 성황청의 기사들이 까 페에 들이 닥쳤다. 물론 그 가운데에는 스트라세가 서 있었다. "자치대장님에게 들었습니다. 당분간 이곳에 머무르시겠다고 하셨다고 요?" 자리에 앉지도 앉고 스트라세가 말했다. "결과는 그렇게 되었습니다만 과정은 좀 다르군요." 언제 사빈과 이야기하고 있었냐는 듯한 표정을 짓고서 바리바가 말했 다. 사빈은 뭔가 생각에 잠긴 듯이 보였고 나는 여전히 바리바와 한 마디 도 나누지 못하고 있었다. "내일이면 이곳에 성황청 기사들이 몇 명 도착할 것입니다. 그 기사들 은 우리에게서 책을 훔쳐간 도둑의 얼굴을 알고 있지요." 이렇게 말하는 스트라세의 얼굴에는 야비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제가 분명히 말씀드렸던 것 같습니다만, 그런 도둑이라면 얼굴을 드러 내고 물건을 훔쳤을 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멍청한 짓을 한 사람이 제가 아니라는 것은..." "저도 말씀 드렸지요.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는 것은 복면을 하고 책을 훔쳤다는 자백과 같다고." 스트라세는 이렇게 말하고는 까페의 문을 열었다. "오늘은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내일이 기대되는 군요. 혹시나 해서 드리는 말씀인데 이곳에서 떠날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으실 겁니다. 이곳은 자치대장이 함부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곳이 아니 거든요."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사빈이 발끈해서 말했다. 사빈의 목줄기에 선 핏줄이 눈에 선했다. "이곳은 우리 성황청의 힘과 스파일 주둔군의 힘으로 다스려 지고 있는 곳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일개 자치대장이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이 분명 히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제 말이 틀린가요?" "하, 한 말씀 드리지요. 이 사빈, 명예와 의리 빼면 시체나 다를 바 없 는 사람입니다. 내가 이 날 이때까지 살아오면서 치, 친구를 욕되게 하는 소리를 듣고 참은 적은 없습니다." 사빈의 목소리는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나는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사빈은 흥분을 하면 말을 더듬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 흥 분할 상황이 아닌 것 같은데. 바리바도 조금은 어이가 없는지 사빈의 얼 굴을 이상한 물건 보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아, 말씀들 나누고 계셨군요. 이렇게 함께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사빈의 느닷없는 도발에 스트라세의 표정이 일그러지기가 무섭게 문이 열리면서 튜니티가 사이환 안으로 들어왔다. 어떤 분위기인지 아직 감이 잡히지 않는 모양인지, 튜니티는 약간의 미소마저 머금고 있었다. "먼저 바리바의 거취 문제를 말씀 드려야 하겠습니다. 증인이 도착할 예정이라고 말씀하시니까 바리바 님은 일단 로스안에서 저의 통제하에 놓 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증인이 도착하는 대로 자치대장 직권으로 재판 을 열어..." "튜니티. 이, 이 친구가 자네를 욕했어." 사빈의 목소리가 조금씩 더 떨리고 있었다. 튜니티는 그제야 사태를 직 감했는지 조금 난처하다는 듯한 표정이 되어서 어떻게 하면 사태를 수습 할까 걱정하는 모양이었다. "사빈. 그 얘긴 나중에 하기로 하지." 사빈의 성격을 잘 아는지, 튜니티는 사빈의 팔을 잡아 말리는 듯한 자 세를 취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명예도 좋고 의리도 좋습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좀 더 나은 해 결책을 찾는 편이 나을 것 같군요. 예를 들면 저기 서 있는 바리바가 더 이상 치안에 해가 되지 않는 방법을 찾는다던지요." "이곳 치안에 해가 되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바로 당신, 성황청 사람들 아닙니까?" 바리바가 스트라세를 향해 소리쳤다. 그러자 사이환 안에 앉아 있던 사 람들이 술렁였다. 스트라세는 순간적으로 자신이 불리한 위치에 놓여있다 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위험하다. 나는 직감했다. 스트라세라면 이 순간 얼마든지 무력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을 죽이고 괴롭히고, 그 렇게 해서 겁에 질리게 할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나는 허리에 찬 나미 트의 칼을 쥐어 잡으면서 제발 나미트 장군이 내 안으로 들어오는 일 만 큼은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빌었다. "역시 반란군의 피는 어쩔 수 없군요. 언제나 사람들을 선동하지. 가장 좋은 반란군은 죽은 반란군이라는 말 아는가?" 갑자기 스트라세의 말투가 바뀌었다. 나는 소름이 돋았다. 라스폼은 물 론이고 성황청의 기사들이 저런 식으로 급변하는 것을 자주 봐온 터였다. 저렇게 변한 성황청의 기사들이 무슨 짓을 할지는 뻔했다. 이 상황을 막 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정말 칼을 쓸 수밖에 없는 걸까? "잠깐만, 스트라세." 스트라세의 말투가 바뀌자 바리바의 말투도 바뀐 듯 했다. 하지만 사빈 의 말투와는 달리 바리바의 말투는 도발적으로까지는 들리지 않고 있었 다. "지금 문제가 되는 건 성황청이 잃어버렸다는 책인 것 같은데, 맞습니 까?" 어느새 정중하게 바리바가 물었다. 바리바의 물음에 까페 안이 조용해 졌다. 아무도 감히 입을 열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기 서 스트라세의 말 한마디에 상황이 어떻게 될 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나는 칼자루에 조심스럽게 손을 가지고 갔고, 기사들은 차가운 시선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렇습니다만, 바리바." 스트라세는 사빈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만약 누군가가 공격한다면 사빈 이 먼저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사빈은 여전히 말없이 생각 에 잠겨있었지만 사실 저러다가 칼을 뽑아 기습을 하는 경우도 얼마든지 상상해 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이럴 경우는 어떻습니까. 그 책이 우연히 다시 나타난다면 요? 그리고 제가 이곳을 떠난다면요? 그럼 잘 해결되지 않겠습니까?" 일종의 제안이었다. 바리바는 자신이 책을 훔쳤다는 사실을 거의 시인 하면서까지 사태를 막아보려고 하고 있었다. 스트라세와 튜니티는 각각 어떻게 하는 편이 자신에게 더 이로울까를 생각하고 있는 듯 했고 사빈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짐작이 가지 않았다. 무엇이 명예와 의리를 지키는 길일까를 생각하고 있는건가? "바리바. 너무 세상을 쉽게 보는군요." 스트라세는 회심의 미소를 띄고서 말했다. "먼저 당신에게 있어서 반역은 공기와 같아요. 그래서 반역을 멈추면 죽을 수밖에 없지요.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반란군이기를 포기 할 리가 없다는 걸." 스트라세는 말을 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당신을 죽이거나 하진 않을 겁니다. 그럴려고 마음 먹 었다면 당신이 이렇게 살아서 그런 순진한 제안을 할 수는 없었을 겁니 다. 하지만 전 당신을 죽이지 않습니다. 당신은 이용 가치가 남아있거든 요. 게다가 전 오늘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습니다." 스트라세의 눈은 사빈을 노려보고 있었다. "먼저 부하들에게 사이환을 폐쇄하라고 지시하세요, 튜니티." 말 자체는 튜니티를 존대하는 것처럼 들렸지만 스트라세는 완전히 튜니 티를 아랫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는 듯 했다. 나는 튜니티가 어떻게 할 것 인지 궁금했다. 칼을 뽑아 일전을 벌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튜 니티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부하들에게 짤막하게 스트라세 말대로 할 것 을 지시했을 뿐이었다. 튜니티의 유일한 의무는 로스안의 치안 유지였고, 그렇기 때문에 지금은 우선 타협할 수 있는 지점을 찾아야 한다고 판단했 기 때문일 것 같았다. "튜니티. 사이환을 닫다니. 도대체 무슨 이유러? 아무리 자네의 구역이 라해도 그렇게 막무가내로 해도 되는 건가?" "도박은 로스안에서 불법이야." 튜니티는 말도 하기 싫다는 듯이 이렇게 중얼거렸다. 자치대원들은 조 심스럽게, 하지만 결코 허술하지 않은 움직임으로 까페 안의 손님들을 밖 으로 내 몰았고, 연금술사의 등을 하나 둘 꺼 나갔다. "젠장. 이런 식으로 구실을 갖다 붙이면 어떻게 장사를 해 먹으라는 겁 니까? 자치대장 님. 이게 법입니까? 약자를 지켜주는 게 법이라고 생각했 습니다만." 이렇게 투덜거린 사람은 바로 페라리였다. 물론 불쾌한 심정을 드러내 는 말이기는 했지만 사실은 경쟁상대가 줄어서 기뻐하고 있는지도 몰랐 다. "이게 약자를 지키는 법이오, 페라리." 튜니티는 이렇게 말했다. 그때였다. 생각에 잠겨있던 사빈이 고개를 든 것은. 사빈의 눈동자가 빛나고 있었다. "페라리. 할 얘기가 있습니다." 이렇게 패라리를 불러세운 사빈의 표정은 굳어있었다. 뭔가 결심을 한 게 분명했다. "샘을 원한다고 했지요? 그럼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제가 샘을 넘겨드 리지요. 까페하고 같이 말입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6377/19898 ━━━━━━━━━━━━━━━━━━━━━━━━━━━━━━━━━━━━━━━━ 제 목:[탐그루] 까페 사이환 196 관련자료:없음 27/27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2-23 00:06 조회:2500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페라리는 사빈의 말에 활짝 웃으면서 노골적으로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 냈다. "사빈. 자네가 의리를 중시한다는 거, 잘 알고 있네. 내 샘은 틀림없이 책임지지. 나 페라리, 돈하고 관련된 약속 하나는 잘 지킨다는 거 알지 않나? 하지만 영업 정지 된 까페를 제값에 사고 싶은 생각은 없는데." "좋아요, 페라리. 그 얘긴 저녁 때 더 하기로 하지요." 사빈은 이렇게 말하면서 페라리를 다른 손님들과 함께 밖으로 보냈다. "스트라세. 할 말이 있소." 사빈은 손님들이 다 나가자 이렇게 말했다. 자리에 앉아 웃고 떠드는 손님이 없는 사이환은 갑자기 더 넓어진 느낌이 들었다. 사빈의 목소리가 벽면에 울려 까페 안을 메아리처럼 떠돌았다. "바리바는 일단 여관방으로 보내지요. 제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사빈의 말에 스트라세는 뭔가 생각하는 듯한 표정이 되었다가 바리바를 기사 두 명과 함께 밖으로 내 보냈다. "바리바가 훔쳐간 책, 되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스트라세는 바로 그 말을 예상했다는 듯이 흡족한 웃음을 지으면서 고 개를 끄덕였다. "뭐, 그것도 좋습니다만 꼭 그럴 필요까지야 없지요." "바리바는 죽어도 책을 넘겨주지 않을 겁니다. 단 한 가지 경우를 빼고 선요." 나는 사빈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원래 빛 이 잘 들지 않는 까페 안에 연금술사의 등 마저 꺼져 실내엔 어둠이 차오 르고 있었다. "바리바는 제게서 배를 원하고 있습니다. 전 이럴 생각입니다. 바리바 에게 책을 넘겨받는 조건으로 배를 제공해 주기로. 이 방법이 아니라면 바리바에게서 책을 되찾을 길은 없을 겁니다. 책은 바리바만 아는 곳에 숨겨져 있을 겁니다. 바리바는 바보가 아닙니다." "그럴 법한 이야기로군요." 스트라세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배는 제공해 주지만, 바리바의 신병은 완전히 성황청이 마음먹은 대로 될 겁니다. 저는 배를 제공할 뿐이지 바리바의 자유를 제공하는 게 아니고, 또 제공할 수도 없지요." 사빈의 말을 듣자 나는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허풍 은 이해 할 수도 있고, 또 그것 때문에 나를 핑계 삼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아니, 이해고 뭐고 간에 내가 사빈을 믿은 게 잘못 된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탐그루에 서 알아 봤어야 했다. 그때 알아보고 결코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란 걸 깨달았어야 했다. 바리바가 어떤 운명에 처하게 될지 상상하는 것만으 로도 나는 화가 났다. "사빈! 어떻게 그런 말도 안 되는..." "닥쳐! 이건 내 일이야!" 내 말을 자르면서 사빈이 소리쳤다. 하도 크게 소릴 질러서 까페 안에 있던 탁자며 의자들이 다 들썩였다. "책 생각은 별로 해 보지 않았습니다만 그 말씀을 들으니 제가 중요한 걸 있고 있었던 것 같군요. 좋습니다. 그거야 어렵지 않지요. 하지만 그 런 제안에는 반드시 조건이 따르겠지요? 그것도 아주 값비싼." 흥정이었다. 불쌍한 바리바는 흥정거리가 되어 가고 있었다. 더러운 사 빈 놈. 제길. 하지만 문제는 바리바뿐만이 아니었다. 언제 도착할지 모를 오브라디 교수와 스칼렛, 또 크라이와 그레텔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가 없었다. 이제 어쩌나. 말하자면 내 발등의 불도 끄지 못한 상태였다. "아닙니다. 전 여길 떠날 것입이다." 사빈은 이렇게 말한 다음 숨을 한 번 깊게 들이쉬었다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전 항상 이렇게 생각해 왔습니다. 저 하나 잘 먹고 잘 살면 그만이라 고요. 그런데 어제 우연한 계기로 깨닫게 되었지요. 지금껏 저 하나 감당 하기도 벅차하면서 어리석게도 다른 사람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는 걸요. 부탁드릴 것은 딱 하나 입니다. 제가 페라리에게 제 값을 받고 이 가게를 넘길 수 있도록 약간의 도움만 주시면 됩니다." 사빈의 말에 튜니티가 고개를 숙였다. "좋습니다. 그럼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 해 보지요. 어떻게 하실 겁니 까?" "오늘 밤, 바리바에게 배를 제공해 주는 척 하면서 루크와 바리바를 항 구로 불러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책을 가지고 나올 것을 넌지시 부탁 할 겁니다. 물론 의심받지 않게 음식물을 건네주는 바구니 바닥에 편지를 넣어 놓을 생각입니다. 스트라세 님께서는 바리바가 묶고 있는 여관의 경 비를 될 수 있는 한 의심받지 않도록 허술하게만 해 주시면 됩니다." 사빈의 말을 듣자, 나는 사빈에게 마지막으로 믿어볼 구석이 남아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사빈은 이런 식으로 바리바와 루크를 도망치게 해 주려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 말이다. "좋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듯 하군요. 항구에 우리 기사 단을 배치한다고 해도..." "저희 자치대 병력도 상당 수 나와 있을 겁니다." 튜니티가 스트라세의 비위를 맞춰주려는 듯이 비굴하게 웃으면서 말했 다. "자, 잠깐만요." 나는 대화가 내가 바라지 않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생각에 끼어 들고야 말았다. 말까지 더듬으면서. "책을 건네 준 다음 바리바가 배를 타고 떠나면 안 되는 건 가요? 스트 라세 님. 책만 손에 넣는다면 바리바는 별 필요가 없잖아요?" 나는 스트라세에게 거의 필사적인 심정으로 말했다. 그러자 스트라세가 무릎을 탁 쳤다. "그렇지. 하나 잊고 있었어." 스트라세는 이렇게 말하고는 다시 점잖게 말을 이었다. "먼저, 바리바는 유용한 인물이에요, 젊은 검사. 바리바는 황금군도로 가는 길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경험도 풍부하지요. 게다가 여기서 놓 아준다면 어디서 우리에게 칼을 겨눌지 알 수가 없답니다. 우리로서는 절 대 놓아줄 수가 없지요." 스트라세는 아주 친절하게도 내가 사태를 얼마나 순진하게 받아들이고 있는가를 알려주었다. 그리고는 부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하나 잊고 있었네. 이 젊은 검사를 잊고 있었군. 이 친구가 혹시 라도 바리바에게 우리가 나눈 이야기를 알려주어서는 곤란하지 않겠나?" 스트라세의 말에 기사 둘이 내 쪽으로 달려들었다. 나는 그대로 뚫고 지나갈 수 없음을 알았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스트라세를 베지 않고서는 이 상황을 헤쳐나갈 수 없다는 것도. 나는 최후의 수단이라는 생각으로 나미트의 검을 뽑았다. 그리고 한 번 휘둘러보기도 전에 쓰러지고 말았 다. 사빈이 휘두른 주먹에 목덜미를 얻어맞았기 때문이었다. 사빈의 일격 필살 기술은 맨 주먹이라고 해도 강력했다. 나는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 았다. 나는 사빈과 함께 항구에 서 있었다. 달빛이 파도에 흔들리다가 부서지 고 있었다. 멀리 빛을 잃은 등대의 그림자가 흉물처럼 솟아있었고, 간간 이 근해에 나가 있는 고기잡이 배 들의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망망대해 에 떠 있는 고기잡이 배 들은 하나같이 작고 힘이 없어 보였다. 다만 바 닷바람이 밀려와 좀 시원한 감은 있었다. 몸에 착착 감기는 소금기 섞인 바람이 그다지 익숙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만약 멀리서 지금 이곳을 누가 본다면 사빈과 나, 단 둘이서 오붓한 대 화를 나누고 있구나 싶었겠지만 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미리 준비된 움직이지 않는 가짜 사빈의 배에는 성황청의 기사단이 매복하고 있었고, 바깥쪽 길에는 튜니티의 자치대 병력들이 좍 깔려 있었다. 그리고 결정적 으로 사빈의 긴 오버코트 안에는 나미트의 검이 숨겨져 있었다. "미안. 라이짐. 난 사람을 잘 믿는 편이 못되거든." 사빈이 발을 놀리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일이 끝나면 날 어떻게 할거지?" 나는 될 수 있으면 겁먹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당당한 목소리 로 물었다. 그런데 묻고 보니 내가 죽게 될지 살게 될지를 걱정하는 말 밖에는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기 등대가 보여?" 다행히도 사빈은 말을 다른 쪽으로 돌렸다. 나는 조금은 안도하면서 사 빈이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아무런 빛도 내지 않는 등대가 하나 서 있었다. 달빛을 받은 등대는 바다 한 가운데에 떠 있는 이물질처 럼 전혀 어울리지 않게 느껴졌다. "한 때 먼바다로 나가는 배들에게 빛으로 항구를 인도해 줬던 곳이야. 알지? 연금술사의 등. 노란색 빛으로 배를 평안하게 이끌어 주곤 했지. 하지만 지금은 아무도 돌보지 않아서 저 신세가 되었어." 사빈의 말은 어쩐지 내 신세를 대변해 주는 것만 같았다. 나도 저렇게 쓸모가 없어지면... 세상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존재가 되어 싸늘하게 식 어가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사빈의 앞에 서 있게 된 건 순전 히 사빈이 내가 서 있지 않으면 바리바가 의심을 하고 배까지 가지 않을 거라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배같이 완전히 밀패된 공간이 아니면 바리바를 잡기 힘듭니다. 선원 시절, 바리바 별명이 뭐였는지 아십니까? 버서크였습니다. 미친 놈이라는 뜻이지요. 맨 주먹으로 선상반란을 막았던 녀석입니다." 사빈의 말에 스트라세는 수긍했다. 나에게도 바리바에게도 이제 탈출할 길은 없는 듯 했다. 하지만 나는 지금 상황을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려고 노력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뭔가 좋은 수가 없을까? 나는 혼자 자치대 유치장에 앉아 있는 동안 마법사에게 있다는 직접소 통의 능력을 확인해 볼 수 있었다. (사실 아자닌의 도움이 컸지만) 그러 나 내 노력은 허사로 돌아갔다. 스칼렛에게 몇 번이고 직접소통을 시도해 보았지만 들을 수 있었던 말은 오직 '크라이와 그레텔을 만났어요' 밖에 없었던 것이다. 내가 아무리 마음으로 말을 전달하려고 해도 말은 전해지 지가 않았다. 낭패였다. 이렇게 된 이상, 나는 도대체 어디에 희망을 걸 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크라이 일행과 오브라디 교수 일행이 만나서 오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노파심에 하는 말인데, 바리바가 나타나더라도 아무 말 하지 마." 사빈은 이렇게 말하면서 오바코트 자락을 흔들었다. 나미트의 검. 나는 나미트의 검을 마지막 희망으로 떠올렸다. 나미트 장군을 이용해 사빈을 성황청 기사들과 싸우게 한다면 얼마정도 시간을 벌 수 있을지 생각해 보 았다. 탈출하기에 충분한 시간일까? 과연 성구의 벽을 뚫을 수 있을까? 생각해 보니 만약 이 자리에서 나미트 장군을 불러낸다면 사빈은 저 아래 배 안에 매복해 있는 성황청 기사들과 싸우게 될 것이 아니라 위에 있는 자치대 병력들과 싸우게 될 거였다. 그렇다면 시간은 성황청 기사들이 성 구를 들고 나타날 때까지만 이었다. 나미트 장군을 포기하고 그대로 바리 바와 뛴다면... 얼마 정도는 승산이 있다 싶었다. 나는 내 모든 걸 나미 트 장군의 검에 걸기로 마음먹었다. 시내 쪽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새벽의 고요는 한 남자와 한 여 자의 발걸음 소리를 너무나도 분명하게 전해주고 있었다. 이 소리는 자치 대원들은 물론이고, 내 등 뒤에 있는 작은 오두막에 숨어 상황을 주시하 고 있을 스트라세의 귀에도 분명히 들리겠지. 나는 눈을 감았다. 사비오 영감에게 배웠던 명상을 써먹어야 할 때가 온 것 같았다. 마음을 진정시 켜야 했다. 너무 빨리 나미트 장군을 불러냈다가는 바리바가 위험을 직감 하고 도망칠 시간을 벌 수 없을 거였고, 너무 느리게 불러냈다가는 나미 트의 검에 내 목이 날아갈지 몰랐다. 누구 말 그대로 칼에는 눈이 없는 것이다. "사빈. 편지 잘 받았네. 아슬아슬하게 빠져 나올 수 있었어." 바리바는 사빈을 보자마자 이렇게 말했다. 사빈은 표정 없는 얼굴로 바 리바를 바라보았다. 나는 표정으로 일단 바리바에게 상황을 전해주려고 했다. 하지만 결과는 내가 훌륭한 배우가 되기는 힘들 거라는 사실을 확 인했을 뿐이다. "수르카. 너 어디 아프냐? 왜 땀을 흘리고 있어?" "화장실이 급한 모양이지?" 루크까지. 나는 입을 헤 벌리고서 그저 멍한 표정을 짓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다친 곳은 없고?" "그래. 성황청 녀석들이 성구를 쓰기는 했지만 어깨를 조금 스쳤을 뿐 이야. 괜찮네." 사빈이 바리바를 신경 써 주는 척 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당장이라도 나미트 장군을 불러내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 다. 아직 스트라세가 오두막 안에 있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나미트 장군이라지만 성구의 불길 한 방이면, 게다가 성황청 기사단장이 내 뿜는 불길 한 번이면 그대로 불타 버릴 게 분명했다. 내가 몸을 던져 스트라세를 막는다면 얼마나 시간을 더 벌 수 있을까를 생각해보고 있는 데, 바리바가 아래를 내려다보더니 말했다. "배는 타지 않겠네, 사빈." 의외의 말이었다. 바리바가 눈치를 챈 걸까? 역시 내 표정 연기가 조금 은 쓸모가 있었는가 싶었다. "그럴 줄 알았어. 자네도 나도, 마지막 항해 때 그 배를 탔었으니까." 사빈이 말했다. 사빈은 오버코트의 단추를 풀고 있었다. 지금 나미트 장군을 불러내야 할까? "나도 있었어요, 사빈. 기억 안나?" "그래. 참 근사한 아가씨였지." 사빈의 표정이 달빛을 받아 분명하게 드러났다. 사빈은 그저 웃고 있을 뿐이었지만 내 눈에도 그 웃음은 진솔해 보였다. 그 때였다. 오두막의 문 이 열리면서 스트라세가 천천히 걸어나왔다. 물론 손에는 성구를 들고 있 었고 성구는 바리바를 향하고 있었다. "바리바. 이제 끝이야. 책은 가지고 왔겠지?" 스트라세가 말했다. 이제 상황은 끝난 것 같았다. 스트라세 쪽으로 몸 을 날리려면 뒤로 돌아서야 했지만 돌아선다면 그 사이에 사빈의 칼이 내 몸을 뚫을 게 분명했다. 한 방에 사람을 쓰러뜨리는 사빈의 솜씨는 탐그 루에서 이미 본 적이 있었다. "스트라세. 쥐새끼처럼 숨어있었군." "뭐, 부르고 싶은 대로 불러도 좋아. 살아 생전에 날 그렇게 부를 수 있는 건 마지막일 테니까. 이제 자네 어떻게 될까 궁금하지도 않나?" 스트라세는 이렇게 말하면서 조금씩 바리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내 옆을 지나기만 한다면 몸을 날려 성구를 쥔 손을 잡을 수도 있을 거였다. "별로. 하지만 이 말은 해 주고 싶네. 날 잘 보기는 했다는 걸. 말 그 대로야, 스트라세. 난 싸우지 않으면 죽는 다네." 바리바가 이 말을 하는 순간 스트라세가 내 옆을 지나갔다. 나는 몸을 날려 성구를 쥔 팔을 잡았다. 성구는 바닥에 떨어지지 않았지만 적어도 조금은 시간을 벌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나미트 장군을 부르는 주문을 외우기 위해서 사빈을 바라보았다. 사빈은 이미 칼을 뽑아들고 있었다. "죽이지* 않으면..." 내가 마법의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사빈이 칼을 집어던졌다. 달빛아래 빛나는 칼날을 본 적은 많이 있었지만 이렇게 천둥처럼 순간적으로 번득 이는 칼 빛을 본 적은 없었다. 칼은 바닷바람을 타고 마치 새처럼 날아왔 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주문을 끝까지 외울 시간도 없었다. 가슴에 후끈 달아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맞은 걸까?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나 는 얼굴에 뭔가 흐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 보았다. 감촉보다 냄새가 먼저 전해졌다. 피였다. 내 얼굴에 피가 흐르고 있었다. 차가운 바닥에 누워서 나는 피묻은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달빛을 받은 핏물은 검붉게 빛나고 있었다. "어서 가자. 빨리 떠나야 해." 바리바가 말했다. 그제야 나는 칼날이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 스트라 세의 가슴에 박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사빈은 칼을 뽑아 손가락으로 핏 물을 닦아낸 다음, 칼집에 도로 나미트의 검을 꽂았다. "사빈..." "빨리 가야해. 망할 놈의 페라리 녀석. 결국 제 값을 다 안 줬어." 나에게 칼을 건네주면서 사빈이 투덜거렸다. "단검 던지는 건 못하지 않았어?" "너도 그 동안 칼을 연마했겠지? 나라고 놀았겠어?" 내 물음에 사빈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리고는 "단검 던지기에 있어서는 튜니티가 로스안에서 제일이지만, 긴 칼을 던 지는 건 말이지, 로스안에서 내가 최고야." 이렇게 덧붙였다. "마음이 변하면 언제든지 말하라고 했지? 다시 배를 타겠다고. 이렇게 만 말하면 된다고 했잖아. 맞지?" 사빈이 루크에게 말했다. 루크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튜니티가 부하들과 함께 뮤 몇 필을 끌고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여기 자치대장 일이 마음에 들었는데. 이거 이런 식으로 끝내 버리게 됐어." 튜니티 역시 투덜거리고 있었다. 나는 뮤 중에 스타바가 끼어 있는 것 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뮤-(어서 타, 뭐해?)" 그래. 알았다, 녀석. 나는 잽싸게 뮤에 올랐다. 정박해 있던 배에서 성 황청의 기사들이 눈치를 챘는지 몰려나오고 있었다. 상황은 여전히 급박 했지만 나는 바리바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어, 바리바?" 나는 뮤에 오르고 있는 바리바에게 물었다. "사빈이 편지에 배를 준비해 놓겠다고 썼거든. 그 배, 마지막 항해 때 거의 망가진 걸 뻔히 알고 있는데 말이야." "일종의 암호였건 거지, 뭐. 그리고 참, 하나 말해줄 게 있어, 바리바. 루크가 정말 자네를 사랑하는 모양이야. 밤에 혼자 날 찾아왔더라고. 바 리바에게 배를 구해주겠다는 일념 하나로 말이지. 내가 양보하길 잘했다 는 생각이 들어." 사빈 역시 뮤에 오르면서 말했다. 사빈은 허리에 두 개의 단도를 차고 있었고, 뮤 안장에는 긴 창이 걸려 있었다. 이제 사빈은 용사냥꾼으로 복 귀할 모양이었다. "나도 하나 묻지, 사빈. 이렇게 할거라고는 말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날 믿을 수 있었나." 튜니티였다. "이것이 우리의 새로운 우정의 시작이 될 거라고 믿었던 거네." 사빈이 말했다. 성황청 기사들이 배에서 허둥거리면서 올라오고 있는 사이, 우리는 뮤 를 달리기 시작했다. 주머니에서 노인에게 받은 용 조각이 만져졌다. "걱정* 말거라* 둘은* 꼭*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아무도 이해 못할 웃음을 지었다. 직접소통으로 스칼렛의 마음의 목소리가 전해져 오고 있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6677/19898 ━━━━━━━━━━━━━━━━━━━━━━━━━━━━━━━━━━━━━━━━ 제 목:[탐그루] 영혼의 에뮬레이터 10 197 관련자료:없음 17/17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2-28 00:07 조회:2309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 영혼의 에뮬레이터 10 - 불타야 청춘 "... 이렇게 해서 사빈과 튜니티가 합류한 수르카 일행은 오브라디 일 행을 만나기 위해서 로스안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홀리우드로 향 하게 되었답니다." "홀리우드? 잠깐만. 배를 타고 황금군도로 간다고 하지 않았나?" 세헤라자드가 이야기를 끊자 나는 곧바로 이렇게 말했다. "예, 그랬지요. 하지만 오브라디 교수와 스칼렛 일행이 오리피 신전에 서 찾아낸 것이 새로운 단서를 제공했기 때문에 탐사지가 변경되었어요. 사실 그것 때문에 크라이도 그레텔과 함께 홀리우드로 갔던 거였구요. 앞 으로 두 일행은 전혀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지요. 왜냐하면 그들이 이제 여행하게 될 범버쿠 정글에서는..." "... 쓸데없는 소리하지 마. 이게 어떻게 빌드오더가 된다는 말이야? 이런 식으로 건물 짓다간 아무 것도 못하겠다." "아톰. 지금 단시간에 할 수 있는 빌드오더란 빌드오더는 다 만들어 봤 잖아. 몇 가지나 되는지 알아?" 리파이와 아톰이 다시 의견충돌을 하는 바람에 나는 더 이상 세헤라자 드의 이야기를 들을 수가 없었다. "몇 가지나 되는 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 저 자식이 하늘에서 용을 떨어뜨리는 거 봤지? 공중을 공격할 수 있는 마법사 유닛이 없다면 눈을 감고 전투에 임하는 거나 마찬가지야. 내가 보기엔 하늘에서 공격해오는 적하고 싸운다는 것은 나이트 무버 유정일이라고 해도 불가능한 일이야." 아톰이 엉뚱하게 리파이의 의욕 자체를 꺾어버릴 만한 소리를 했다. 하 지만 리파이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 하지만 난 단념하지 않겠어. 사실 공중에 주둔지를 만든다는 것 자체가 소드앤매직 시스템 안에서는 불가능한 일이긴 하지. 그럼에도 불 구하고 하늘을 나르는 유니트를 가지고 있는 용이 하늘에 기지를 세운 건 어쩌면 프로그램 상에 있는 일종의 버그를 쓰고 있는 건지도 몰라. 하지 만 그렇다고 해도 패배한 자는 할 말이 없는 거야. 하는 데까지 해봐야 지." 리파이는 아톰의 말에 딱 잘라서 대답했다. 그 태도가 얼마나 단호한지 내가 만약 용의 입장이었다면 완전히 기가 죽어버렸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옛날 고전 게임 기록을 찾아보면 이런 글들도 찾아 볼 수 있어. 온라 인 게임 초창기 때에도 프로 의식을 가지고 버그를 이용한 전법을 쓰는 사람을 상대하는 법들을 적어 놓은 글말이야. 이젠 고전이 된 스타크래프 트 같은 경우, 자원을 채취하는 기지를 자원 바로 옆에 붙일 수 있는 버 그도 있었다고 해. 하지만 상대가 그렇게 나온다고 해서 상대하지 않을 수 있어? 프로 게이머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겠어? 내가 생각하기엔 버그 는 마약과 같은 거라서 약효도 오래가지 않고, 정통파한테는 결국 당할 수 없는 거야." 리파이의 말에 아톰도 조금은 수긍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아톰은 아톰 답게 빌드오더를 적어놓은 파일을 가리키면서 말을 돌렸다. "이것 좀 봐, 비류. 이것도 빌드오더라고 할 수 있겠어. 훈련소를 전부 다 업그레이드 시킨 다음에 마법학교를 짓는 법이 어디 있어?" 아톰이 나에게 불쑥 물었다. 화제를 돌리는 건 좋지만 나를 걸고 넘어 질 것까지는 없잖아? 나는 이렇게 생각하면서 리파이의 손을 들어주는 쪽 을 택했다. "글쎄요. 아마 마법 검사를 먼저 만들려면 그런 빌드오더도 충분히 있 을 수 있지 않을까요?" 나는 아톰의 말에 이렇게 대답해 주었던 것이다. "여러 상황을 다 생각해 봐야지." 내 말에 덧붙여서 리파이가 말했고 이로서 대강 준비는 다 끝난 것 같 았다. 용과 싸울 준비 말이다. 아톰이 기분 나쁘다는 듯한 표정을 짓던 말던. "여러 상황 좋지. 빌드오더에 소스 분석에 적 유니트 분석까지. 철저한 건 좋아. 하지만 승리는 그런 곳에서 얻어지는 게 아니라고." 아톰이 말했다. 아톰 말 그대로 내가 세헤라자드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리파이와 아톰이 준비한 것은 꼭 빌드오더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것은 먼저 리파이의 자신 만만한 표정에서도 읽을 수 있었고, 아톰의 여유 있 는 태도에서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걸 다 하지 않고 덤비는 건 내 스타일이 아니야, 아톰." "스타일 너무 좋아하지 마. 그러다가 신세 망친 게이머 많이 봤어. 아 니, 멀리 갈 것도 없지. 부루터스를 봐. 멍청하고 끈기 없고, 겁 많고, 소극적이고. 얼마나 훌륭한 스타일이야? 거기다가 정신병까지." "알았으니까 말싸움은 이쯤 해 두지." 리파이는 아톰의 말에 기분이 상했는지 인상을 쓰면서 아톰에게 툭 던 지듯이 말하고는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하여간 프로 게이머라 그런지는 몰라도 아톰은 지는 건 정말 싫어 한다니까. "어이, 밥. 지금 뭐 하고 있나?" 리파이가 액정화면에 떠 있는 용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자네들이 뭘 하고 있는지 보고 있었지." 용의 말에 리파이는 조금 당황한 모양이었다. NPC라고 무시하고 작전을 수립했지만, 용의 말이 사실이라면 모든 작전이 다 허사로 돌아갈 게 분 명했다. 나는 나이트 무버 유정일의 명언을 떠올려 보았다. '가장 좋지 않은 작전은 적에게 노출된 작전이고 가장 좋은 작전은 나만이 알고 있는 작전이다.' 그러니까 빌드오던든 버그든 결정적인 부분은 절대로 남에게 가르켜주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자신이 노력해서 얻은 것들을 쉽게 남 에게 가르켜주는 행위는 남도 망치고 자신도 망치게 된다. "아톰. 신경 쓰지 마. 우리가 준비한 계획은 충분해. 저 자식이 아무리 우리말을 엿듣고 정보를 분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해도 우리가 준비 한 건 녀석에게 너무 많은 정보가 될 거야. 너무 많은 정보는 정보가 아 니지." 리파이는 이렇게 아톰에게 말했지만 이 말은 아톰에게도 리파이에게도 별로 쓸모 있을 것 같은 말은 아니었다. "당황하지 말고 게임에나 신경 쓰게. 어차피 승부는 실력에서 나오는 것이지 정보에서 나오는 게 아니지 않은가? 자네들이 나를 분석한다면 나 에게도 자네들을 분석할 수 있는 기회가 있는 게 공평할 거라고 나는 생 각하고 있다네." 여유 있게 용이 느릿느릿 말했다. 액정화면 속의 용은 이렇게 말하고는 꼭 하품을 하는 것처럼 입을 쩍 벌리고는 깊은 숨을 토해내었다. 그러자 화면에서 부연 연기가 뿜어져 나오면서 열기가 느껴졌다. 화면으로 표현 되는 열기를 바라보면서 나는 뭔가 머릿속에 떠올랐다가 사라지는 걸 느 낄 수 있었다. 분명히 뭔가 알 것 같았는데.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그게 뭔지 확연히 잡히지 않았다. 무엇이 내 머릿속에 떠오르고 있는지 말이다. 저 열기는 소드앤매직 초창기 버전부터 지원된 모드였다. 처음에 열기가 화면에 표 현되었을 때 게이머들이 받았던 충격은 대단했다. 아마도 최초의 광원효 과나 반사효과를 본 게이머들도 비슷한 충격을 받았으리라. 하지만 내 머 릿속에 떠올랐다 사라진 것은 그런 게 아니었다. 뭔가 다르면서도 이미 알고 있는, 아주 간단한 사실인 것 같았다. 뭘까. 하지만 내 머리 속에서 는 정리되지 않은 생각이 꼭 모래알을 물 컵에 담아 숟가락으로 정신없이 휘저은 것처럼 정신없이 떠돌기만 하고 있었다. "자. 그럼 한 번 해 보지, 밥." 손마디를 꺾으며 리파이가 말했다. "도전인가?" "물론. 대결이지." 용의 목소리는 매우 안정되어 있었다. 나는 어스넷에 떠돌아다녔던 소 문이 생각났다. 상대방의 상태를 알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는 사나이 이야기, 그리고 그 사나이의 닉인 '토요일 밤'과 '밥', 그리고 내 눈앞에 있는 밥이라는 이름의 용. 그것들이 어떻게 연관이 되는 건지는 알 수 없 었지만 분명히 어떤 연결고리가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도무지 정리가 되질 않았다. "침착해." 아톰이었다. 뭘 침착하게 하라는 걸까 생각하면서 모니터를 바라보니 이미 게임은 시작되어 있었다. 리파이는 정신없이 마우스를 움직이며 게 임을 플레이하고 있었고, 아톰은 바로 옆에서 리파이에게 끊임없이 조언 을 던지고 있었다. (리파이의 표정으로 봐서는 조언이라기 보다는 참견이 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 싶었지만) 그러고 보니 두 사람 다 나에게는 한 마디 말도 없었다. 나는 완전히 필요 없는 존재로 여겨지는 모양이었다. 내 실력이 그렇게 쓸모 없는 거 였을까? 하긴, 그러고 보니 내가 소드앤매직 온라인 프로 무대에 데뷰한 이후에 보여준 실력이라고는 다 외교에 관한 것뿐이었다. 이렇게 NPC를 상대로 하는 게임에서는 무시당하는 게 당연한지도 몰랐다. (물론 아무리 이렇게 생각해 봐야 한 번 상한 내 기분이 좋아지지는 않았지만) "서쪽에 지어야지 동쪽에 있는 소로길 옆에 수도원을 지으면 어떻게 하 겠다는 거야? 지형을 봐, 지형을. 거기다 지었다가 배후를 기습당하면 어 떻게 게임을 풀어나가려고 그러는 거야? 게다가 수도원 때문에 길이 완전 히 막혀버릴 수도 있어." "그래. 내가 실수했어. 소로길이 아니라 네 입을 막아버렸어야 하는 건 데." 리파이는 흥분해서 떠들고 있는 아톰과는 달리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듯 이 말했는데, 진짜로 살벌하게 느껴지는 말투였다. 아톰은 그 말투에 겁 먹었는지 잠시 동안 아무 말더 없었다. 리파이는 점점 예전의 냉정했던 손맥 암행어사 팀의 주장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어느 새 화면은 내가 이해하기 힘들만큼 빠르게 변하기 시작했다. 처음 에 두 군데의 화면이 교차되서 나타나는 것처럼 보였을 때는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자 여러 곳에 단축키로 지정된 장소가 거 의 일 초에 하나 꼴로 지나가기 시작하자 화면은 꼭 깜빡이는 것처럼 느 껴질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우스를 쉴 사이 없이 움직이면서 유니트를 움직이는 리파이의 능력도 놀라웠지만 옆에서 역시 잠시도 멈추 지 않고 잔소리를 늘어놓는 아톰의 능력이 나는 더 놀라웠다. 리파이의 뺨을 타고 송글송글 땀방울이 흘렀다. 옆에서 잔소리하고 있는 아톰도 그 건 마찬가지였다. "됐어. 정령술사 완성." 리파이가 보고하는 것처럼 말했다. 아마 말버릇인 모양이었지만 그걸 들은 아톰은 자신에게 한 말인 줄 안 모양이었다. "빨리 정령술사의 직접 소통 능력을 사용해. 녀석을 심리전으로 흔들어 놓을 필요가 있어." 아톰이 말했다. 리파이가 수긍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인공지능을 괴롭히는 것도 한 방법이겠지. 하지만 그것보다는 정보를 얻는 게 더 중요해." 리파이는 정령술사를 클릭 한 후에 컴퓨터 옆에 부착되어 있는 마이크 를 향해 말했다. "하늘에 있다고 해서 너무 거만하게 굴 생각은 하지 마. 이쪽도 다 생 각이 있으니까." "마법 유니트들을 키워 놓은 건 알고 있네. 하지만 그게 실수였다는 걸 곧 알게 될 거야." 리파이가 처음으로 용에게 음성메시지를 보내자마자 용은 이렇게 받아 쳤다. 그리고 화면을 가득 메우는 보병 군단의 모습이 보였다. "저, 저건 보병이잖아!" 누가 봐도 다 알 수 있는 사실이고, 게다가 보병 유니트야 소드앤매직 시리즈에서 가장 흔하게 등장하는 유닛이지만 아톰은 꼭 아주 새로운 사 실을 발견했다는 듯이 큰 소리로 외쳤다. 만약 누군가 바로 이 광경을 보 았다면 아톰과 리파이를 소드앤매직 온라인 초보 게이머 중에서도 진짜 초보 게이머라고 생각했으리라. "보병쯤은 문제가 안돼. 이 빌드오더에는 이런 게 있지." 리파이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나는 리파이의 벌어진 입술 사이로 타고 들어가는 땀방울을 보았다. 입술 끝이 가느다랗게 떨리고 있 었다. 리파이는 흥분상태인 것이다. 전략 게이머는 보통 자신이 예측한 그대로 적이 움직이면 흥분하기 마련이다. 나는 나도 모르게 절로 주먹이 쥐어졌다. 입술이 마르는 것 같은 느낌은 아마 리파이나 아톰도 마찬가지 일 것 같았다. "기다려, 기다려. 방어선이 구축되어 있잖아."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6678/19898 ━━━━━━━━━━━━━━━━━━━━━━━━━━━━━━━━━━━━━━━━ 제 목:[탐그루] 영혼의 에뮬레이터 10 198 관련자료:없음 18/18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2-28 00:07 조회:2006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나도 알아." 리파이가 빠르게 지껄이는 아톰의 말에 침착하게 대답했다. 나는 화면 을 살펴보았다. 공격 마법사들이 횡대로 늘어서 보병과 대치하고 있는 모 습이 보였다. 저 정도의 공격 마법사를 이 시간 안에 만들기 위해서는 분 명 충분한 수의 보병을 만들 시간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리파이는 건 물들을 공격 마법사들의 보호막으로 구축해 놓고 있었다. 즉, 어차피 적 은 하늘에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군대가 나갈 길을 막음으 로서 적이 들어올 길도 봉쇄하는 작전을 쓴 모양이었다. 최선의 방어가 공격이라는 걸 모르는 게이머는 없을 테지만, 이렇게 공중에 있는 유닛과 싸울 때에는 선제 공격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최선의 방어를 통해 적의 자 원을 고갈시키는 작전을 쓰려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지금 내가 알고 있는 정보로는 용이 어떤 자원을 이용해 유닛을 생산해 내고 있는 지를 알 수 가 없었다. 리파이는 소스까지 분석했다고 하니까 분명히 어떤 방법이든 생각해냈겠지만. "됐어, 이제 시간만 조금 끌면 보병들은 저 건물들을 부수려고 하다가 내 마법사들한테 결려서 모조리 다 불타버릴 거야." 리파이의 얼굴에는 쾌감인지 공포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만큼 생경한 미소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진짜 프로 게이머는 흥분 된 순간, 저런 미 소를 짓는 법일까? "유인을 좀 해봐. 마법사 텔레포트로 조금 더 접근해 보던지 말이야. 조금 더 도발을 하면 녀석들이 들이닥칠 거야."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난 이런 방법을 쓰겠어." 리파이는 유니트를 움직이는 대신, 마이크에 대고 이렇게 말했다. "왜? 겁나는 거야, 밥?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 올까봐? 그럼 이 상태 그 대로 하루 종일 대치만 하고 있어볼까? 아까의 자신만만하던 승자가 왜 이렇게 되어 버렸지?" 리파이는 말로 용을 도발하려고 하고 있었다. 한 참 동안 용은 말이 없 었다. 잠시 리파이와 아톰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예식장 광고에나 나올 법한 풍경이었다. (지금 상황과 그렇게 어울리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난 두려움이라는 걸 모른다네." 용이 이렇게 대답하자 다음 순간 보병을 뒤편에 처음 보는 여자 유닛이 나타났다. 아니, 유닛의 형태로는 처음 보는 것이었지만 전에 소드앤매직 온라인에서 사용되지 않는 그래픽 파일을 살펴 볼 때 얼굴은 한 번 보았 던 여자였다. 몸에 부착되어있던 장신구들이 기억났다. "이런 마법의 주문은 들어 본 적이 없을 걸세." 용이 말하자 여자 유닛의 소름 끼칠 만큼 음산한 목소리로 마법의 주문 을 외우기 시작했다. "더 이상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을 때, 청춘은 그 순간 불타오른다." 생소한 마법 주문이었다. (하긴 플레이어가 설정할 수 있는 영역이 있 으니까 생소하지 않은 마법주문이 오히려 더 이상할 지도 모르겠지만) 이 마법 주문은 생소 하면서도 웬지 낯익었다. 분명 언젠가 한 번 쯤은 들어 본 말인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디서 들어본 말이었던가를 생각해볼 겨를도 없이, 마법의 주 문을 받은 보병유닛들의 낯이 붉어지는가 싶더니, 마치 물결처럼 보병들 이 전진해오기 시작했다. "뭐해!" 공격을 빨리 하라는 아톰의 말이었지만 사실 별 소용은 없는 말이었다. 이미 리파이는 단축키로 하나하나 지정해 놓은 마법사 유닛을 이용해 마 법 공격을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세계 최강의 게이머는 세계 최강의 게임 회사에서." 공격마법주문을 듣는 순간 나는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실소를 흘리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마법 주문을 손맥 암행어사 식으로 정해 놓은 리파이의 모습이 재미있어서였다. 어쩌면 이런 모습이 진정한 직업의식인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마법 공격을 받은 유닛들은 조금도 손상을 입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마법 공격을 받으면 받을 수록 더 강해지는 것 같았다. 리파이는 당황한 모양이었다. 계속해서 마우스를 움직이고는 있었지만 움직임이 둔 해져 있었다. 저렇게 둔해진 움직임은 게임을 포기했다는 선언이나 다를 바 없다는 걸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건물들은 보병에 의해 하나 둘 무너져 내려갔고, 다음 순간 건물의 벽 이 무너져 내리자 보병들은 그 틈으로 들어와 마법사들을 공격하기 시작 했다. 마법사들은 물리공격에 약하기 마련이었으므로 너무나도 어이없이 쓰러져갔다. 리파이는 몇 안 되는 자신의 보병 유닛을 이용해서 최후까지 막아보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젠장! 무적 주문이었어!" 리파이가 용을 향해 죽먹을 흔들면서 소리쳤다. "나는 비겁한 짓은 하지 않네. 소스를 봤다면 알겠지만 내가 활용할 수 있는 자원이나 자네가 쓸 수 있는 자원이나 그 양은 똑같아. 그리고 무적 주문도 한계가 있고." 용이 말을 마치자 용의 보병들은 거의 동시에 그대로 쓰러졌다. "가르쳐주지. 이 주문은 시간제한이 있어. 만약에 공격 마법을 쓰지 않 고 정지시키는 마법으로 내 병사들을 멈추어 세웠다면 내 보병들은 전멸 했을 것이고, 그랬다면 방어작전은 성공했을 걸세." 용의 목소리는 제자를 훈계하는 스승처럼 근엄했다. 리파이는 이런 용 의 말투가 참기 어려운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돌아서 버렸다. 이를 악 물고 있는지 리파이의 턱 주변이 꿈틀거렸다. "너무 기분 상해하지 말게. 최후까지 희망을 잃지 않는 그 자세는 칭찬 해 줄만한 태도였으니까." 용의 이 말은 리파이의 화를 결정적으로 터트리는 역할을 했다. 리파이 는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소형 필기도구들을 한 움큼 집어 벽을 향해 집 어던졌다. 적어도 보름치 생활비는 될 필기도구들이 벽으로 날아가 퍽 소 리를 내면서 산산조각으로 흩어졌다. 리파이가 화를 내는 것은 처음 보았 다. 그래서인지 내 가슴이 불안하게 두근거렸다. 그런데 과연 리파이가 화를 내기 때문에 생각이 정리가 되지 않는 것일까? 나는 침착하게 마음 을 가다듬고 심호흡을 해 보았다. 하지만 도무지 생각이 정리가 되질 않 았다. 뭔가 있는데. 틀림없이 뭔가 있는데. "아냐. 넌 내가 모르는 전술을 언제라도 구사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모 양인데, 절대 그럴 수 없어. 모든 상황을 예상할 수는 없어도 어떤 상황 이든 대처할 수는 있어." 리파이는 다시 냉정을 되찾고 이렇게 말했다. 아마 이 말은 용에게 하 는 말이라기 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다짐하는 말인 것 같았다. "리파이. 안 그럴 수도 있어. 저 자식이 부리고 있는 것들이 다 게임에 서 삭제 된 유닛이라는 걸 생각해봐. 절대로 이길 수 없을 거야. 우린 적 을 모르고 있으니까." 리파이의 심정이야 어찌되었건 신경 쓰지 않는 다는 듯이 아톰이 냉소 적인 말투로 이렇게 지껄였다. 만약 아톰이 나한테 그랬다면 분명 나는 화를 냈겠지만 리파이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침착해진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난 마우스를 던지지 않아." 리파이는 이렇게 끝까지 싸우겠다는 의지를 표현했다.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진 게임의 결과는 여전히 참담했다. 리파이가 뭘 준비하고 있는지 용은 다 알고 있는 것처럼 공격을 해 왔다. 리파이는 게 임을 할 때마다 빌드 오더를 바꾸었지만 용의 대응 방법 또한 갈수록 치 밀해졌고, 또 달라졌다. 리파이의 작전은 근본적으로 방어작전일 수밖에 없었다. 공격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자원의 양이 똑 같이 한정되어 있다 는 걸 알게 된 이상 효과적 방어를 통한 공격이 최선의 방법이라는 건 자 명해졌기 때문이었다. 리파이가 마법 유닛으로 방어를 준비하면 여지없이 용은 여자 마법사와 보병 콤비로 밀어닥쳤고, 여자 마법사는 무적 마법을 쓰는 척 하면서 마 법 무효화 주문을 외우기도 했고 (이때의 마법의 말은 '약은 약사에게 진 료는 의사에게'라는 이상한 말이었다) 또 보병 러쉬를 하는 척 하다가 공 중 유닛으로 완전히 초토화 공격을 시도하기도 했다. 한 번은 용이 공중에서 가지고 시작하는 자원이 한정되어 있다는 사실 을 이용해 멀티로 자원을 채춰하려고 시도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용은 그럴 때 소수의 병력으로 바로 러쉬 공격을 들어왔고 결국 리파이는 패배 에 패배를 거듭하고 있었다. 내가 놀란 점은 그러면서도 리파이는 조금도 지친 기색 없이 매 플래이 마다 최후의 순간까지 최선을 다했다는 점이었다. 보통의 플레이어였다면 한 번 쯤은 그냥 포기했을 법도 한데 말이다. 나이트 무버 유정일의 말처 럼 리파이는 최후까지 희망을 잃지 않는 훌륭한 플레이어였다. (다만 용 이 자꾸 그 점을 칭찬한다는 게 마음에 걸리기는 했다) 그런데 이렇게 리파이가 자꾸 패배에 패배를 반복하자 게임은 자연 지 루해졌다. 리파이의 흐트러짐 없는 자세는 시간이 지날 수록 내게는 경이 와 놀라움으로 다가왔고 어쩌면 지금 컴퓨터와 리파이가 싸우고 있는 게 아니라 밥과 컴퓨터가 싸우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이런 리파 이의 자세는 내게 리파이를 프로 게이머로서 다시 한 번 보게 만들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루함까지 가신 것은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자 그렇게 잔 소리를 늘어놓으면서 참견을 하던 아톰마저 아무 말이 없었다. 얼마나 더 플레이를 했을까. 나는 지루함을 참지 못하고 이런 생각 저런 생각에 빠 져들었다가 문득 오토의 행방이 궁금해졌다. 오토가 나중에 찾아오겠다고 말했는데... 여전히 리파이의 군사들은 전멸당하고 있었다. "...단순하게 생각했어야지. 내가 말했지 않았나? 마법사가 꼭 보병하 고 같이 다니지는 않는다고 말이야. 물론 이번에도 최후까지 잘 싸워주기 는 했네." 용의 말에 리파이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게임은 최선을 다해 플 레이 해도 말하기는 지겨워진 모양이었다. "마법사 러시라니. 상상도 못했어." 아톰은 완전히 질려버렸다는 표정으로 모니터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저 자식, 진짜 천재 게이머 같지 않아?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다양한 전술을 계속해서 구사할 수 있는 거지?" "...우리가 작전 짜는 걸 다 들었던 거야. 틀림없어." 힘없는 목소리로 리파이가 말했다. 리파이의 말이 맞는 말인지 틀리는 말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만약 맞는 말이라면 리파이는 '가장 나쁜 작전' 만을 쓰고 있는 셈이 될 것이었다. "잠깐만요. 오토가 도착했을 텐데요." 침울한 분위기였기 때문에 나는 이렇게 약간 사이를 두었다가 말을 이 었다. 내 말에 리파이는 대꾸하기도 싫다는 듯이 자리에 앉아 머리를 양 어깨 사이에 묻었고, 아톰은 그냥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나는 게임룸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오랜 시간동안 게임을 지켜본 탓인지 땅이 흔 들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내가 움직이고 있는 건지, 유닛이 움직이고 있 는 건지 분간이 안됐고, 갈림길에서는 보병처럼 멈추어 선 다음에 길을 찾아 움직이기도 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런 지끈거림은 게임을 처음 시작했을 무렵을 뺀다면 별로 느껴 본적이 없었다. 복도를 걸어나가면서 나는 계속해서 머릿속에 정리되지 않고 떠돌고 있 는 생각들을 정리해 보려고 애썼다. 부루터스. 류와 켄. 알 수 없는 살인 자. 죽은 오소리의 얼굴. 그리고 부루터스가 남긴 아가만히애무, 드래곤 이라는 말. 어스넷의 밥과 지금 리파이와 게임을 하고 있는 밥. 세헤라자 드. 스테아. 아니, 그 최후의 기사라고 자신을 소개했던 젯나이트라는 노 인... 모든 것이 내 머릿속에서는 따로따로 놀고 있었다. 하지만 분명히 이것들이 하나로 이어질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을 것만 같았다. 아버지였다면 분명 뭔가를 찾아냈을 것이다. 아버지는 나에게 정보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여러 정보들이 전혀 상관없는 듯이 보이고, 또 어떤 경우에는 완전히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하지만 어떠한 상황에서도 틀림없이 그 정보를 분석할 수 있는 뭔가가 있기 마련이다. 그 뭔가를 찾아 낼 수 있 는 능력이 진정한 정보를 장악하는 능력이다. 정보의 양이나 질은 그 다 음의 문제다." 물론 지금 상황의 나에게는 능력도 없고, 갖고 있는 정보라는 것도 양 이나 질을 따지기 모호한 수준이었기는 하지만. 그런데 이 말은 세헤라자 드가 들려준 탐그루의 이야기에서도 들은 적이 있는 말이었다. 그런데 아 버지에게서 이 말을 들은 것이 먼저인지, 세헤라자드가 먼저인지 다시 분 간이 되지 않았다. 머리는 여전히 지끈거렸다. 밖으로 나가자 어느새 밤이 찾아와 있었다. 공기는 더없이 맑고 싱그럽 게 내 피부에 와 닿았고, 바람이 흔들어 놓는 나뭇가지 소리가 머리를 맑 게 해 주었다. 하늘에는 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도시에서 그리 멀리 벗어 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어두운 하늘을 볼 수 있다니. 나는 잠 시 다른 차원의 세계에 들어선 느낌이 들었다. 도시에서 볼 수 있는 붉은 빛은 여전히 하늘에 많이 남아 있었지만, 그래도 별이 반짝이는 모습은 신선하기까지 했다. 옛 사람들이 별을 숭상하고 별을 보고 미래를 점쳤다 는 말이 이해가 갈 것 같았다. 내가 지금 별을 바라보고 있는 느낌이 고 대의 천문학자가 별을 바라보면서 느낀 느낌과 비슷할까? 어쩌면 이런 기 분을 느끼고 있으면 진짜로 미래를 점칠 수 있게 되지는 않을까? 이런 저 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후버카의 경적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았다. 오토는 소드앤매직 온라인 코리아 합중국 지 부 바로 정면에 차를 대 놓고 있었다. "비류 씨. 다 끝났습니까?"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6679/19898 ━━━━━━━━━━━━━━━━━━━━━━━━━━━━━━━━━━━━━━━━ 제 목:[탐그루] 영혼의 에뮬레이터 10 199 관련자료:없음 19/19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2-28 00:08 조회:2095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내가 나오자 자리에서 일어난 모양이었다. 운전석은 뒤로 젖혀져 있었 고, 누워있었는지 오토의 곱슬머리가 엉망으로 눌려 있었다. "이렇게 잘 보이는 곳에 차를 둬도 되겠어요? 좀 불안하지 않아요?" 나는 오토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토정도 되는 프로가 이렇게 건물 정면 에 차를 대 놓고 있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별로. 근처에 사람의 흔적은 별로 보이지 않더군요. 게다가 이 근처에 는 차를 숨길만한 곳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잘 보이는 곳에 차를 대는 게 더 낫지요. 누가 본다면 이곳과 관련된 사람인가보다 싶지 않겠 습니까. 게다가 차도 흔치 않은 후버카이고 보면 말이지요." 오토는 눈을 비비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마 경계를 완전히 풀고 누워서 거의 졸았던 모양이었다. 나는 그런 오토가 별로 미덥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 프로라면 밖에서 혹시 있을지 모를 침입자에 대비해서 경계 도 철저히 해야 하는 게 아닐까. 내 생각이 표정으로 드러났는지 오토는 내 얼굴을 보더니 이렇게 덧붙였다. "안에서의 일이 끝나기 전에는 여기서 철수 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비 류 씨. 만약에 누가 온다면 제가 위험을 알려 드려도 이미 늦은 뒤일 겁 니다. 그렇다고 저 혼자 도망칠 수도 없는 일이고요. 그렇다면 좀 쉬는 게 낫습니다. 다음에 어떤 상황이 벌어지게 될 지 알 수 없으니까요."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 해야 하지 않아요?" 나는 오토에게 조금은 빈정거리는 투로 이렇게 말했다. 그것도 나이트 무버 유정일의 말투를 흉내내어서 말이다. "물론입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이게 최선일 겁니다. 비류 씨가 말씀하시는 건 낭비가 될 수 있습니다." 오토는 이렇게 말하면서 후버카에서 내렸다. 밤공기가 차갑게 내려앉고 있었다. 차가운 공기에 솜털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럼 어떻게 하실 생각이시죠? 이렇게 계속 기다리고만 계실 건가요?" 허리를 펴면서 몸을 풀고 있는 오토에게 나는 이렇게 물었다. 오토는 그저 어깨를 한 번 으쓱 해 보이더니 이렇게 말했다. "지금 상황에선 별다른 수가 없군요. 아직은 괜찮지만 언제까지 괜찮을 지는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솔직히 안전을 위해서는 일단 포기하고 철 수하자고 말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제 일은 아톰 씨를 보호하는 일이 우 선이니까요." 일을 소홀히 하고 있다는 내 생각은 잘못된 모양이었다. 오토는 프로답 게 자신이 해야 할 일과 할 수 있는 일들을 잘 구분하여 판단하고 있었 다. 어쩌면 내가 오토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생각 했던 건 순전히 게임 룸 에서 내가 리파이와 아톰으로부터 인정받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때문에 기 분이 상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생각하고 보니 오토에게 공연한 심술을 부렸구나 싶어서 미안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많이 피곤하시겠어요, 이런 일 하시다 보면." 미안한 마음 때문이었는지 나는 엉뚱하게도 오토에게 이렇게 말을 건넸 다. 오토는 심드렁한 표정을 하고서 나를 한 번 바라보더니 "이럴 때는 드링크라도 하나 마시고 싶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드링크요?" "왜 있잖습니까. 힘 들 때 성수 제약 디오니소스 한 병." 오토가 광고 문구를 흉내내어 말했다. 나는 웃음을 지었다. 오토에게 유머감각이 있는 줄은 정말 몰랐다. "약물을 별로 좋아하는 편은 아닙니다만, 가끔은 마십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꼭 넘겨야 하는 순간들이 있기 마련이니까요. 사실 사람이 약물 에 의존하기 시작하면 폐인이 되는 건 금방입니다. 항생제를 보십시오. 하도 많이 들 쓰니까 정작 필요할 때는 쓰지 못하게 되지 않습니까." "어쩌면 그 항생제 때문에 이름도 알 수 없는 바이러스들이 떠돌아다니 는 지도 모르지요." 어스넷에서 주워들은 이야기를 잘도 꿰어 맞춰서 말하는 건 아무래도 내 재주인 것 같다. 지금 상황과 바이러스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데 말 이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바로 그 지점이 정말 중요한 지점이 아닐까 하는. 한계에 부딪치고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다고 느낄 때, 그 때 죽을 힘을 다해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 이것이 진정 인간을 위대하게 하는 힘이 아닐까하고 생각합니다. 절망을 느끼고, 절망 속에서도 움직여 절망 을 이겨 나가는... 이거, 기다리는 동안 너무 지루했나 봅니다. 별 쓸데 없는 얘기만 늘어놓고 있군요." 오토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머릿속에 있는 형광등이 한참 동안 깜박거 리다가 불이 들어오는 바로 그 순간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언제쯤 끝이 나겠습니까? 이거 기다리는 것도 좋고, 쉬는 것 도 좋지만 불안한 건 어쩔 수 없군요." 오토가 말했지만 나는 오토의 질문에 답할 생각이 별로 없었다. "그래요. 성수 제약의 디오니소스. 이제야 알아차리다니, 멍청하게." 나는 이렇게 말하고는 게임룸을 향해 뛰었다. 이제야 머릿속에 정리되 지 않고 떠다니고 있던 모래알 들이 정리된 기분이었다. 멍청하게, 정말 로 멍청하게. 이제야 알아차리다니." "언제나 끝나겠습니까?" 뛰고 있는 내 뒤통수를 향해서 오토가 소리를 질렀다. "곧 끝나게 될 겁니다. 오토 덕분에." 나는 잠시 멈추어 서서 이렇게 오토에게 말해 준 다음 다시 게임룸으로 돌아갔다. 마침 게임은 또 한 번 리파이의 패배로 끝이 나 있었다. 리파 이의 얼굴은 붉은 빛으로 달아올라 있었고 냉정함보다는 흥분이 더 리파 이를 지배하고 있는지 안절부절하고 있는 게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고 있 었다. 나는 말을 꺼내야 할까 잠시동안 망설였지만 곧 리파이에게 이렇게 물었다. "리파이. 내가 한 번 도전해 봐도 될까요?" "아서라, 비류. 나도 잠자코 있는데..." 비웃는 말투로 아톰이 나에게 말했다. 나는 그런 아톰의 말투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아톰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리파이가 밀리는 상 대라면 자신은 게임을 하나 마나 일 거라는 아톰의 말은 분명 사실이었 다. "비류 님. 이제부터 재미있어지려고 하는 참이에요. 이번에는 이길 수 있어요. 아니, 이기지 못해도 또 해 보겠어요. 게임의 세계에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란 건 없어요." 리파이는 숨이 차는지 말을 끊어서 했다. "리파이 말이 맞아. 그말은 게임의 세계에만 적용되는 말은 아니겠지. 게다가 항상 약점까지 가르쳐 주는 자상한 적이니까 이기기가 얼마나 쉽 겠어?" 아톰이 뭐라고 지껄이건 나는 신경을 쓰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우리는 이기는 게 목적이 아니에요, 리파이." 나는 리파이에게 이렇게 말했다. 리파이는 잠시동안 말이 없었다. 뭔가 생각에 잠기는 모습이었다. 리파이의 다음 말에 따라서 내가 게임을 할 수 있을 지 없을지가 판가름 날 거였다. "그래요. 내가 좀 나 답지 못했어요." 한 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리파이가 이렇게 입을 열었다. 게임 플레 이 중 보여주었던 냉정함을 되찾은 모양이었다. "여기 올 때부터 뭔가 이상하다 싶었지요. 냉정하지 못했어요." 리파이는 조금은 부끄럽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 "프로니까요. 그런 걸 프로 근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이렇게 말해놓고 보니 내가 리파이 보다 대단한 사람이나 된 것 같이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류 님은 소드앤매직 온라인 게임에서도 어려울 때 때 항상 돌파구를 마련해 주곤 했지요. 믿어보지요." 리파이는 이렇게 말하면서 나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아톰은 팔짱을 끼 고서 어디 한 번 두고 보자 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둘 다 의도 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나에게 부담감을 주고 있었다. 나는 심호흡을 한 번 한 뒤에 랩탑을 들고 와 용 옆에 놓은 다음에 자리에 앉았다. "사이버 아가씨의 도움을 받을 모양이지?" "전 사이버 아가씨가 아니에요, 아톰." 세헤라자드가 기분 나쁘다는 투로 아톰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뇨. 그저 조언을 구하자는 것 뿐이지요." 사실 그랬다. 세헤라자드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는 세헤라자드 본 인조차도 잘 모르고 있을 거였다. "세헤라자드. 저 친구, 알겠어?" "밥이요? 글쎄요. 직접 만나보기 전에는..." "난 조금은 알 것 같아." 나는 이렇게 말하고는 밥과의 게임을 시작했다. "더 이상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을 때, 청춘은 그 순간 불타오른다." 나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리파이가 내가 말하는 소리를 듣고는 의아하 다는 표정을 지었고, 아톰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부담감이 긴장으로 바뀌 어 내 안에서 울림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 울림은 안에서 퍼져 나와 손 끝까지 이어졌다. 목이 말라붙는 느낌이었다. "무슨 소리하는 거야, 지금?" 잠시 생각해 보더니 아톰이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나는 마우스 를 움직여 일꾼을 움직이느라 아톰의 말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뭐 하는 거야?" 아톰은 내가 대답을 하지 않자 이번에는 내 행동에 대해 관심을 보였 다. 나는 그냥 짤막하게 이렇게 대답했다. "도박." 내 대답은 솔직한 것이었다. 사실 이런 행동이 과연 저 밥이라는 이름 의 용에게 영향을 줄 수 있을 지 없을지는 나 자신도 알지 못했기 때문이 었다. 오직 내가 희망을 걸고 있는 것은 '더 이상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을 때, 청춘은 그순간 불타오른다.' 라는 말뿐이었다. "비류 님. 게임 포기하는 거에요?" 이번에는 리파이가 물었다. 하긴, 게임을 포기하는 것처럼 보일 법도 했다. 일꾼들을 움직여 자신의 건물을 부수고 있다면 누가 보더라도 미쳤 거나 게임을 포기하고 있는 걸로 보일 게 분명했다. "역시 도박이에요." 나는 이렇게만 말해주었다. 아직 확실하지도 않은 사실을 리파이에게 말하고 싶은 마음은 별로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건 도박이 분명했다. 그 것도 주사위 두 개를 던져서 2나 12가 나올 정도의 확률, 아니 어쩌면 주 사위가 모로 설 확률밖에는 없는 도박. 마우스를 움직이는 내 손은 여전 히 떨리고 있었다. 이런 게 도박사의 심정이리라. 이럴 때 표정을 잘 관 리하는 게 진짜 도박사일 테지만, 나는 도박사의 자격은 없는 것 같았다. 내 표정은 엉망으로 긴장을 드러내고 있을 게 분명했다. 건물은 이윽고 다 부수어졌고, 내게는 열 명의 일꾼만이 남았다. 나는 일꾼들에게 서로 죽일 것을 명령했다. 단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말이다. "뭐 하는 거야, 지금? 애써서 양보해 줬더니 기껏 한다는 짓이..." "...설마. 그 게임을 생각하고 있는 거 아니에요?" 리파이는 내가 뭘 하고 있는지 눈치를 챈 모양이었다. 나는 그저 미소 로 리파이의 질문에 대답을 대신했다. 여기서 내가 말로 다 설명해 버린 다면 아무리 봐도 모양새가 좀 우스울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제 올 때가 됐는데..." 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정말로 용의 사자가 나타났다. 사자는 날 개가 달려 있는 마차를 타고 순식간에 화면에 나타났다. 사자는 비늘이 달려있는 가죽 갑옷을 입고 있었고, 갑옷 위에는 화려하게 수놓아진 붉은 용이 그려진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귀국에 알릴 것이 있어 온 사자입니다. 아무 무기도 없이 왔으니 평화 롭게 제 말씀을 들어주시길 간청합니다. NPC다운 말투였다. 지금 내게는 정령술사가 없기 때문에 용과 직접 소 통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뭐, 뭐야, 지금." "다음은 저희 국왕께서 보내신 서한입니다. 검토해 주시기 바랍니다." 화면에 편지가 나타났다. (사람이라면 트랜스 파워를 통해 번역된 말이 적혀있겠지만 용은 틀림없이 프로그램으로 작성했으리라 싶었다. 문장의 양끝이 정확하게 맞추어져서 정렬되어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건물 하나 없는 자네를 공격한다는 건 나에게 낭비라고 여겨질 수밖에 없네. 자네의 생각이 뭔지는 알 수 없지만, 계속 게임을 해 나갈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 알아보고자 이렇게 편지를 보내네. 포기하는 가, 아니면 계속인가. 뜻을 밝혀주게."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6727/19898 ━━━━━━━━━━━━━━━━━━━━━━━━━━━━━━━━━━━━━━━━ 제 목:[탐그루] 영혼의 에뮬레이터 10 200 관련자료:없음 19/19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3-01 00:35 조회:2080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난 끝까지 최선을 다하겠다. 하지만 이길 수 없는 게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이것 뿐이다." 내가 말하자 내 말이 편지로 번역되어 사자에게 전해졌다. "비류 님. 정말로 그 생각으로..." "예. 그래서 도박이라고 말씀드리지 않았던가요." 나는 이렇게 말했다. 내 말에 리파이는 놀랍다는 듯이 감탄사를 연발했 다. "승리에 목적이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 그 말이었군요. 알겠어요." "뭐, 뭐야, 뭔데, 나만 빼고 얘기하는 거지?" 평소의 냉소적인 아톰이라면 '그래, 잘 들 놀아봐라' 뭐 이런 식으로 말하고 말았겠지만 지금의 아톰은 '나만 빼고 무슨 말들을 하고 있는 거 야?' 하면서 투정을 부리는 어린아이 같았다. "어스넷에 있는 과거 게임 자료실에 가 본 적 있어?" "몇 번. 그런데 왜?" "그럼 이 경기 내용을 모른단 말이야?" 리파이가 내 대신 설명 해 주기 시작했다. 나는 잘 됐다고 생각하면서 마우스에서 손을 떼고 세헤라자드를 바라보았다. 세헤라자드도 잘 모르겠 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그냥 잠자코 있기로 했다. "소드앤매직 프로 리그 초창기 때였어. 맞지요, 비류 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헤라자드는 리파이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있었 다. "준준결승전에서 두 게이머가 만났지. 한 명은 이름 있는 지난 대회 준 우승자였고 또 하나는 별다른 수상경력도 없고 플레이도 화려하지 못한 초보 게이머였지. 하지만 무섭도록 상승세를 타고 있는 신인이기도 했어. 그래서 두 사람의 게임은 많은 팬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지. 중계 방송 도 떠오르는 신인과 베테랑의 만남, 뭐 이런 식의 홍보에 초점을 맞추었 던 것 같아. 그런데 그 때 떠오르는 신인이 바로 지금 저런 플레이를 했 어. 건물을 다 부수고, 일꾼 하나만 놔두고 말이야. 정찰을 보낸 베테랑 게이머는 지금처럼 편지를 보냈지. 게임을 포기하는 거냐고. 그때 신인 게이머가 이렇게 말했던 거야. 어차피 이길 수 없는 경기, 포기하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것뿐이다. 이렇게 말이야." "그래서 어떻게 됐어?" 아톰이 고개를 앞으로 죽 빼면서 리파이에게 물었다. "이렇게 됐지." 다음 순간, 용이 게임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자신이 만들어 놓은 모든 유닛과 함께. 용이 앞장을 서고 있었고, 그 뒤로 마차와 여자 마법사와 보병들이 차례로 줄을 서 있었다. (통상적인 진형의 정 반대로구나 싶어 서 나는 웃음을 지었다. 보병이 먼저 서고 그 뒤로 마차 같은 이동 유닛, 마지막 뒷줄에 마법사가 서는 게 정석인데 말이다) "그게 자네의 최선이라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이것일세." 가까운 거리였기 때문에 용이 하는 말이 스피커에서 울려 퍼졌다. (가 까운 곳에 있으면 직접소통은 불가능해도 육성으로 전해진다는 게 소드앤 매직의 기본 설정 중 하나이다) "비류 님. 그럼 비류 님도 그렇게 하실 건가요?" 리파이의 질문에 나는 행동으로 대답했다. "이 경기는 내가 질 게 분명한 경기다. 고로 내가 진다면 아무도 이상 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에 내가 이 경기에서 이긴다면 사람들은 내가 대단한 게이머라고 추켜세울 것이고 당신은 노쇠했다는 소 리밖에 듣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그건 당신에게는 돌이킬 수 없 는 패배일 것이다. 나는 당신을 존경한다. 이게 내가 당신에게 표하는 최 선의 예의다." 잠시동안 용은 말이 없었다. 가슴이 뛰어올라서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을 지경이 되었다. 과연 내가 던진 주사위는 어떻게 되었을까. 리파이 도 그걸 느끼고 있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예의를 고맙게 받겠다. 분명 자네가 이긴다면 사람들은 자네를 높게 평가할 게 분명하다. 하지만 내가 진다고 해서 나를 노쇠했다고 말 할 사람은 없다는 걸 분명히 해 두고 싶다. 그리고 나는 그걸 증명하고 싶다. 이게 내가 싸우는 방식이다." 용의 목소리는 지금까지의 진짜 사람같이 느껴지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기계음이 군데군데 섞여있었고, 그나마 발음도 분명하지 않았다. 성공인 가? "아니. 중요한 건 게임의 승부 아닌가? 이기고 지는 게 가장 중요하다 고, 그래서 최후까지 희망을 버리면 안 된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나는 마지막 주사위를 던졌다. 이제 나올 대답에 따라서 나의 승패가 결정날 거였다. "희망은, 밥, 결코, 밥, 버려서는, 밥, 안 된다, 밥. 그러니까 내 말 은, 밥..." 용의 유니트들이 위아래로 빠르게 진동하고 있었다. 꼭 길 찾기에 실패 해서 막다른 골목에서 어쩔 줄 몰라하는 인공지능 유니트처럼 말이다. 나 는 성공을 확신 할 수 있었다. "밤이 되면 어떨까? 아니, 모니터를 가리면 어떨까?" 성공이 눈앞에 보이자 나는 공연히 심술이 났다. 그래서 이렇게 계속해 서 말을 이었다. "가만히 누워서 게이머를 평가하는 해설자가 있다면, 보이지 않는 곳에 서도 저절로 손을 움직일 수 있는 게 게이머다." "그래? 그럼 게임은 뭘까?" "게임은 게임일 뿐이다. 하지만 내게는 삶의 방식이다." 용의 목소리는 이제 거의 완전히 기계음으로 변해버렸다. "젠장. 이제 알았어. 빌어먹을. 완전히 속은 셈이야. 멍청하게도." "난 그것보다 비류 님이 어떻게 아셨는지가 더 궁금해요." 리파이가 말했다. "잠깐만요. 비류 님. 무슨 말씀들을 하고 계신 거예요? 전 이해가 안가 요." "제가 설명해 줄게요, 세헤라자드." 리파이는 고개를 숙여 랩탑의 모니터 앞에 얼굴을 대고 말을 시작했다. 리파이의 표정은 꼭 어린아이를 가르치는 선생님 같은 표정이었다. "비류 님은 저 밥의 정체를 알아낸 거예요. 저 밥이 NPC냐 아니냐를 두 고 많은 말들이 있었지요? 그리고 밥이 자기를 이기면 부루터스에 대해서 이야기 해 주겠다고 했고요. 그래서 게임에 이기려고 몰두하다 보니 정작 중요한 걸 잊어버리고 있었던 거예요. 저 NPC를 사람이라고 착각하고 이 겨야만 뭔가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해 버리게 된 거지요." 이렇게 말하는 리파이의 얼굴에는 부끄러움이 드러나 있었다. 하긴. 이 모든 사태가 본인의 승부욕 때문에 빚어진 일이니 그럴만도 하다 싶었다. "그런데 저 용의 정체는 뭐죠?" "아, 그걸 말씀 안드렸군요." 리파이는 다시 세헤라자드에게 천천히 설명을 해 주었다. "용은 나이트 무버 유정일과 관계가 있는 프로그램이었어요. 유정일의 말투와 게임 방법, 그리고 몇 가지 인식 패턴을 첨가한 프로그램이었겠지 요. 그러니 그렇게 플레이를 잘 할 수 밖에요." 리파이의 이 말은 자신의 계속된 패배를 조금이라도 변명해보려고 하는 느낌을 주었다. 유정일이라면 몰라도 NPC에게는 안 진다는 일종의 자존심 이라고나 할까? "뭐, 아무래도 좋아. 저게 정체가 드러나 버리니까 완전히 맛이 가 버 렸잖아?" "솔직히 저 정도까지 될 줄은 몰랐어요." 나는 어떻게 할 줄 모르고 왔다갔다하면서 헛소리만 늘어 놓고 있는 용 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용은 계속해서 토막토막 끊어지는 문장을 늘어놓 으면서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근엄한 얼굴을 해 가지고서 계속해서 움직 이는 용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오래된 코메디 프로그램을 보고 있 는 느낌이 들었다. "뭐, 자신이 알고 있던 상황과 흡사한 상황이 벌어지니까 프로그램이 폭주한 모양이지. 아무리 인간 흉내를 내 봐야 프로그램은 프로그램 아니 겠어?" 그냥 흘려들을 수도 있는 아톰의 말이었지만 나는 꼭 세헤라자드 들으 라고 하는 말인 것 같아서 기분이 상했다. 세헤라자드도 그걸 느꼈는지 기분 나쁜 표정으로 아톰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런데 하나 궁금한 게 있어요, 비류 님." 리파이가 말했다. "어떻게 아셨어요? 저 용이 유정일의 행동을 본 뜬 프로그램이라는 걸 요?" "도박이라고 말했잖아요." "싸우는 방식? 글쎄요, 유정일은 용과 날으는 마차 유니트로 싸운 적은 없었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그렇지만 마법사는 두고 있었지요." 나는 내가 저 용이 유정일의 행동을 프로그래밍한 것이라는 것을 어떻 게 추리해 냈는지 설명을 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단서는 이 말 뿐이었어요. 더 이상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을 때, 청 춘은 그 순간 불타오른다." "나도 어디서 많이 들었던 말 같은데... 뭐지?" 아톰이 머리를 긁적이면서 나에게 물었다. 나는 아톰을 좀 비웃어 주고 싶은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밖으로 나가서 오토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오토가 드링크라도 하나 마셔야 겠다고 하더군요. 성수제약의 디오니소스 이야기를 하면서요." 내 말에 리파이는 좀 알겠다는 표정이 되었지만 아톰은 여전히 통 모르 겠는지 여전히 머리를 긁적이고 있었다. 아톰의 어깨 너머로 비듬이 떨어 지는 모습이 보였다. "더 이상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을 때, 청춘은 그 순간 불타오른다. 이 말은 성수제약 디오니소스의 카피 문구였지요. 기억나세요? 나이트무 버 유정일은 이 스폰서 저 스폰서를 떠돌아다니면서 프로 생활을 계속했 어요. 덕분에 미움도 많이 샀고, 그 흔한 게이머 후견인이나 코치, 감독 도 한 번 해 보지 못했지요. 다행히 지금은 해설자 일을 하고 있지만요." "아, 이제 기억이 나네요." 리파이가 안타깝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리면서 탄식처럼 말했다. "기억 나요. 그런데 성수 제약 디오니소스 때는 관계가 좋아서 광고도 몇 편 찍었고, 또 마법의 말도 디오니소스 광고 문구로 했었지요?" "예. 운 좋게 그 사실이 떠오르더라고요. 그래서 한 번 시도해 본 거에 요. 유정일이 게임을 양보했던 일을 떠올리면서요." "정말 그것 뿐이었나요?" "리파이가 했던 말도 조금은 도움이 되었어요. 하늘에 기지를 세우는 게 일종의 버그를 이용한 전법일 수도 있다는 말이요. 예전에 부르터스 한테 들었던 말이 떠오르더라고요. 버그를 이용해서 싸웠던 나이트 무버 의 전법 말이지요. 하지만 확신은 할 수 없었어요." 나는 여기서 잠시 이야기를 끊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건 도박이었고, 순전히 운이 좋았던 거예요." 이게 솔직한 내 심정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게임이라는 것 자체가 도박 과 다를 바는 별로 없지 않겠는가 싶었다. "아니에요. 그건 비류 님 능력인 것 같아요." 리파이가 나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리파이의 눈이 반짝였다. "비류 님은 게임을 하면서 게임 밖을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요. 단순히 게임에만 집중하는 보통의 프로 게이머와는 달라요. 바둑에도 왜 그런 말이 있잖아요? 훈수 두는 사람이 직접 두고 있는 사람보다 다섯 수 는 더 내다 볼 수 있다고." "뭔 소리야, 그게, 리파이?" "비류 님은 한 걸음 떨어져서 게임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말이 지. 한 걸음 떨어지면 그만큼 더 많이 볼 수 있으니까. 바둑판 안에서만 바둑을 보는 사람과 바둑판 밖에서도 바둑을 볼 수 있는 사람의 차이를 말하는 거야, 나는." "아, 승부에 눈이 먼 사람보다 마음을 비운 사람이 더 낫다는 말인가?" 아마 아톰은 리파이의 말을 이해하면서도 이 말을 하기 위해서 한 번 더 물어본 것 같았다. 리파이는 아톰을 흘겨보았고 아톰은 리파이를 화나 게 해서 기쁘다는 듯이 웃음을 지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6728/19898 ━━━━━━━━━━━━━━━━━━━━━━━━━━━━━━━━━━━━━━━━ 제 목:[탐그루] 영혼의 에뮬레이터 10 201 관련자료:없음 19/19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3-01 00:36 조회:1964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자, 그럼 이제 천천히 할 일을 해 보지." 아톰은 컴퓨터 앞으로 걸어간 뒤에 용에게 말을 걸었다. "이봐, 약속한 거 기억나?" "인생을 사는 것은, 밥, 그리 쉽지만은, 밥,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고, 밥, 완전한 전술이라는 것은, 밥, 절대강자가 없다는, 밥..." "게임에서 이기면 부루터스에 대해서 말해 주기로 했잖아. 안 그래?" "내 최고의 해, 밥, 결코 쓰러지지 않는 의지, 밥, 재능 보다는 노력 이, 밥, 위대한 승리보다 최선을 다한 정직한 패배, 밥..." "이거 완전히 맛이 가 버렸군." 아톰은 포기한 모양이었다. "게임 밖에서 게임을 본 건 좋지만 이거, 이 친구도 완전히 게임 밖으 로 나가버린 모양이야. 이럴 때는 어쩌면 좋지?" 그건 아톰의 말에 동감이었다. 어떻게 하다보니 용의 정체가 드러나기 는 했지만, 용은 이제 정상적으로 돌아올 수 없을 것 같았다. "프로그램이 오류가 생겼을 때는 종종 이런 방법이 먹히곤 하지." 리파이는 아톰에게 이렇게 말하고는 스위치 박스가 붙어있는 쪽으로 걸 어갔다. "잠깐. 다시 부팅 하려는 거야?" "그래. 다시 부팅하면 가끔 좋은 결과가 오곤 했어. 뭐, 프로그래머가 할 말은 아니지만, 이렇게 엉뚱한 연산을 계속하는 프로그램에게는 처음 으로 돌려보내는 게 최선 아니겠어?" "리파이. 만약에 다시 부팅하면 처음이랑 똑같이 될 거야. 그럼 이 모 든 과정을 다 겪은 다음에 다시 이 상태로 돌아오게 된다고. 무슨 말인지 알겠어?" 아톰의 말에 리파이는 뭐라고 반박을 하려고 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톰은 리파이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다시 컴퓨터에 다가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봐, 친구. 아니, 밥. 왜 말을 안 하는 거야? 나이트무버 유정일은 약속을 잘 지키지 않던가?" 아톰의 말이 끝나자 용은 행동을 멈추었다. 뭔가 될 것 같은 분위기였 다. 어스넷을 돌아다니다가 렉이 걸린 다음에 한참을 기다리고 있으면 '이제 곧 렉이 풀릴 것 같은 순간'을 느낄 수 있을 때가 있다. 그리고 내 생각엔 지금이 바로 그 분위기인 것 같았다. "이봐. 말 좀 해 봐, 말 좀." '약속'이라는 말을 들은 용은 이제 완전히 움직임을 멈추었다. "다시 부팅하자니까." "잠깐 기다려봐. 뭔가 일어날 것 같지 않아?" "아톰 말이 맞아요. 조금만 기다려 보세요. 틀림없이 무슨 일이 일어날 거에요." "정상으로 돌아오면 내가 좀 협박을 해 봐야겠어. 그럼 뭐라도 말을 하 겠지." 손마디를 꺾으면서 아톰이 말했다. 그때였다. "미안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말하지는 않을 걸세." 굵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모두의 시선이 남자에게 향했다. 어디에서 나 타났는지 남자는 게임룸의 한 쪽 구석에서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아니 꼭 벽을 뚫고 밖에서 들어온 것처럼 말이다. "생각했던 것보다는 훌륭했네, 자네들. 특히 마지막의 그 젊은 친구, 정말 대단하군. 혹시 우리 회사의 프로그램 테스터를 하고 싶은 생각은 없나?" 남자는 중키에 비쩍 마른 몸을 하고 있는 사내였다. 두껍다는 것을 멀 리서도 알 수 있을 만큼 도수가 높은 안경을 끼고 있었고, 다리에 무슨 이상이 있는지 지팡이를 짚고 절둑이며 움직이고 있었다. 거기에 어울리 지 않는 고급 양복과 넥타이를 하고 있었고 나이는 한 사십대 후반이나 오십대 초반쯤 되었을까. 한마디로 병약해 보이는 사내였다. "누, 누구신지요...?" 리파이의 이 질문은 상황이 완전히 뒤바뀐 질문이었다. 누구인지는 몰 라도 저 사람이 이곳의 주인인 것은 틀림없었고, 우리는 아주 좋게 말한 다고 해도 정신나간 무단 침입자였기 때문이다. 누구인지 묻는 것은 당연 히 저 쪽이 먼저일 것이다. "이런. 소개가 늦었군. 나는 스티브 강이라고 하네. MS사에서 인공지능 개발 팀장을 맡고 있지." 하지만 스티브 강이라고 자신을 밝힌 사내는 이렇게 정중하게도 우리에 게 먼저 인사를 했다. 어느 새 우리 바로 앞까지 다가와서 말이다. "이제는 자네들이 소개를 해야 할 것 같은테?" 스티브 강의 목소리에 모두들 입을 굳게 다물어버렸다. (그건 나도 마 찬가지였다) 어떻게 자신을 소개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죄송하지만 지나가던 좀도둑이었습니다, 이렇게 인사를 할 수는 없는 일 이었고, 용의 정체를 밝혀 살인범을 잡겠다는 생각으로 들어온 지나가던 과객입니다, 라고 할 수는 더더욱 없는 일이었다. "이런. 너무 겁을 먹는구만. 경계하지 말게. 여긴 사람이라곤 나 혼자 뿐이니까." 아무리 잘 봐 준다고 해 봐야 꼬마 애 하나 당해내지 못할 것 같은 사 람에게 우리 셋은 완전히 압도당하고 있었다. 그건 스티브 강의 눈빛 때 문이었다. 두꺼운 안경알 너머에서 빛을 내고 있는 눈은, 심중의 깊은 곳 까지 훑어버리겠다는 듯이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저, 저는..." 아무도 말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일단 이렇게 입을 열었다. 어떻게든 이 어색한 분위기를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무슨 설명을 해 도 저 사내의 다음 행동이 경찰이나 어스폴을 부르는 것으로 이어지는 것 을 막을 방법은 없을 것 같았다. "아. 그만 두게. 사실 잘 알고 있으니까. 소드앤매직 온라인 프로 게이 머 비류, 리파이, 아톰 아니신가. 허허허. 미안허이. 나는 장난치는 걸 좋아하거든. 기분이 상했다면 용서하게." 사내는 나를 흘낏 바라보고는 말을 계속했다. "저 친구가 유정일의 행동 패턴을 본 뜬 프로그램이라는 건 잘 짚었네, 비류. 하지만 완전하지는 않아. 만약 그랬다면 왜 본 게임에서는 용이 빠 졌겠는가. 비류. 자네 혹시 알겠나?" 나는 과연 저 스티브 강이라는 사람이 누구기에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 며 또 이렇게 점잖게 행동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묻고 싶었지만 그런 걸 묻기에는 적당한 상황이 아닌 듯 싶었다. 게다가 일단 나는 대답을 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글쎄요. 너무 완벽하게 게임을 잘 풀어나갔기 때문 아닐까요?" "하하하. 몇 번 졌다고 너무 치켜 세워주는 군. 이거, 고마운 걸." 스티브 강은 이렇게 말하고는 허리를 꺽어 우리에게 인사를 했다. 나는 좀 어리둥절했다. "그건 아닐세. 우리가 하려고 했던 건 완전한 인공지능 프로그램이 아 니야. 게임을 할 수 있을 만큼 적당히 발달한 인공지능이었지. 그리고 보 다시피 그 시도는 실패로 끝났네." 완전히 멈추어선 용을 지팡이 끝으로 가리키면서 스티브 강이 말했다. 덕분에 스티브 강은 남은 한 쪽 팔로 몸을 지탱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어리석은 일이었지. 유정일의 패턴을 입력한 프로그램이라... 하하하. 아닐세. 사람의 패턴을 어떻게 데이터베이스화 할 수 있겠나. 그저 그런 수준의 게임엔진을 개발할 수 있을 뿐이지." "하지만 처음에는 진짜인 줄 알았는데." 아톰이 이죽거리면서 말했다. 스티브 강은 잠시 아톰에게 눈길을 주는 가 싶더니 곧 다시 나에게 고개를 돌린 후 말했다. "음. 뭐, 그런 점도 있지. 사람과 흡사한 행동을 한다는 점 말일세. 하 지만 오래 가지 못해. 이렇게 폭주를 해 버리기도 하고, 또 예상치도 못 했던 이상한 행동을 하곤 하니까 말일세." 스티브 강은 학자 같은 손놀림으로 턱을 쓰다듬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진짜 실패했다고 보는 이유는 바로 저걸 세." 스티브 강의 말에 우리는 일제히 용을 바라보았다. 용이 움직이고 있었 다. 그것도 아주 정상적으로 말이다. "결론을 내렸다, 친구들. 이 게임은 비겼어. 이긴 것도 아니고 진 것도 아니라면 비긴 거지. 인간의 자존심이라는 건 이해하기 어렵군." "또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아톰. 자네는 너무 말을 함부로 해. 실력은 쥐뿔도 없으면서. 입 조심 하게. 각별히." "저런 말을 할 수 있게 하는 엔진을 도대체 어떻게 만드셨나요?" 리파이가 스티브 강에게 물었다. 아마도 프로그래머로서 가질 수 있는 호기심이리라. "내가 그걸 말해 줄 것 같은가? 허허허. 그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마법 이라네." "우리라니요?" "정확하게는 우리 팀원이지. 내가 말 안 했던가? 내가 MS사의 인공지능 개발 팀장이라고 말일세." 내 물음에 스티브 강은 이렇게 대답했다. "아냐. 이건 인공지능이 아니야. 프로그램은 스스로 학습 할 수가 없 어. 지금 저건 비겼다는 개념을 몰랐다가 알아낸 것처럼 말하고 있다고. 그렇다면 학습한 것처럼 말하는 프로그램일까? 아니야.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엔진이라면..." "그만 둬 리파이. 저런 이상한 늙은이가 만든 게 뭐 그리 대수겠어." 리파이에게 하는 말을 가장해서 아톰이 스티브 강에게 이렇게 도발적으 로 말했다. 하지만 스티브 강은 완전히 아톰을 무시하고 있었다. "자, 그럼 이제 본론을 말해야겠군. 자네들, 이곳에 온 게 불법이라는 건 알고 있나?" 스티브 강의 말 한마디에 갑자기 분위기는 뒤바뀌었다. 말의 내용도 내 용이었지만 우리를 바라보고 있던 날카로운 눈초리가 더욱더 호전적인 것 으로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본색을 드러내시는 군." 아톰이 손마디를 꺾으면서 말했다. "아까부터 자네는 좀 말을 좀 심하게 하는 구만. 그리고 난 늙은이가 아니야. 지팡이를 짚고 있다 뿐이지 그렇게 나이가 많은 사람은 아니라 네." 스티브 강이 처음으로 아톰에게 관심을 보였다. 그것도 아주 강렬하게 노려보면서 말이다. 아톰은 스티브 강의 눈초리에 잠시 주춤거렸다. "이봐. 나, 이래돼도 싸움질이라면 좀 해 본 사람이야. 당신 같은 사람 이라면 백 명이 덤벼도 안 무서워. 게다가 밖에는 일당백의 경호원이 있 다구." 아톰은 아마 겁을 주고 도망칠 생각으로 한 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스티브 강은 아주 간단하게 아톰의 말을 받았다. "후버 카에 타고 있는 곱슬머리 친구를 말하는 모양이로군. 그 친구는 이렇게 됐네." 스티브 강이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것은 아톰의 머리카락 한 움 큼이었다. 아톰의 지독한 곱슬머리를 잘 알고 있는 우리는 아무 말도 하 지 못했다. 나는 스티브 강의 바로 앞에 있었기 때문에 머리카락을 자세 히 볼 수 있었다. 뿌리까지 달려있는 곱슬머리 한 웅큼이었다. "자. 이제 대화는 이 정도에서 마무리하도록 하지."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등뒤로 건장한 사내들이 목을 좌우로 움직이면 서 우리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하나같이 짙은 색 계열의 양복을 입고, 힘 한 번 주면 옷소매가 터져 나갈 정도로 팔뚝이 굵은 사내들이었다. "여기... 사람은 혼자 뿐이라고 하더니..." 완전히 기가 죽어서 아톰이 말했다. "그래. 아까는 그랬지. 저 친구들은 밖에 있었거든. 귀찮은 친구를 처 리하기 위해서 말일세." 스티브 강은 이렇게 말하고는 미소를 지었는데, 도저히 사람의 미소라 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감정이 없는 미소였다. 꼭 시체의 입술을 손가 락으로 움직여 억지로 만들어낸 미소 같았다. 나는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는 걸 알았다. 그러자 가장 먼저 떠오른 것 이 세헤라자드였다. 나는 세헤라자드가 담겨 있는 랩탑의 케이블을 눈에 뜨이는 아무 케이블에나 이었다. 한 순간 세헤라자드가 날 보는 것 같았 다. 하지만 다음 순간 세헤라자드는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왜? 뭔가 해 보고 싶은 모양이지? 도움이라도 청할 생각인가?" 나는 한숨을 내 쉬었다. "그 랩탑을 주게." 나는 순순히 랩탑을 스티브 강에게 건네주었다. 덩치 좋은 사내들은 우 리를 밖으로 안내했다. 말이 안내지 마치 이빨을 감춘 사냥개가 양을 몰 아 가듯이 우리는 끌고 나갔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6729/19898 ━━━━━━━━━━━━━━━━━━━━━━━━━━━━━━━━━━━━━━━━ 제 목:[탐그루] 영혼의 에뮬레이터 10 202 관련자료:없음 14/14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3-01 00:36 조회:2182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우리가 도착한 곳은 아주 허름하고 낡은 집이었다. 먼지를 뒤집어 쓴 별의 별 잡동사니들이 다 있는 곳이었다. 아마 전에는 누군가 이곳에서 살았던 모양이었다. 우리는 각각 다른 방에 정중하게 내동댕이쳐졌다. 아 톰은 양팔을 잡고 있는 사내에게 뭐라고 지껄였다가 머리부터 바닥에 떨 어지는 운명에 처하고 말았다. 여자라고 봐주지는 않는지 리파이도 집어 던져졌고, 나는 공중에서 한 바퀴 돌아 등부터 바닥에 떨어지는 신세가 되었다. "잠시 이곳에서 좀 쉬고 있게. 나는 좀 일이 있어서." 스티브 강은 이렇게 말하고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정신을 차리는 데 좀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나는 내가 갇힌 방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 었다. (등은 여전히 아팠지만) 방에는 침대가 하나, 박물관에 있으면 어 울릴 법한 옛날 텔레비전이 하나, 전화기가 하나, 그리고 테이블, 의자, 책꽂이와 손을 대기가 싫을 정도로 먼지가 쌓인 책 몇 권이 있었다. 창문 이라고는 하나도 없었고 낡은 형광등 하나만이 겨우 깜박이면서 빛을 제 공해 주고 있었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탈출에 필요한 도구나 무기가 될 만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설마 보인다고 하더라도 덩치 큰 사내를 생각 하면 도망칠 엄두도 내기 어려웠지만) "먹을 것하고 물을 좀 줘. 죽이지는 마. 물론 도망치려고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문 밖으로 스티브 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완전히 자포자기한 심 정으로 침대에 몸을 뉘었다. 그러자 먼지가 구름처럼 일어 숨을 막아버렸 다. 나는 먼지가 내 얼굴에 완전히 다 내려앉기를 기다릴까 하다가 숨이 차서 결국 방구석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함부로 움직이지 마." 문이 열리고 덩치 큰 사내하나가 나에게 이렇게 말하고는 빵 한 조각과 물 한 컵을 내밀었다. 굶어죽지는 말라는 뜻인 모양이었다. 밖에서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 말소리가 두런두런 들려왔다. 아마도 덩치끼 리 뭔가 잡담을 나누는 모양이었다. 도대체 이곳에서 얼마나 있어야 할 지, 이제 앞으로 어떻게 될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먼저 걱정이 되는 것은 세헤라자드의 문제였다. 이제 랩탑도 뺏긴 마당 이니 다시는 세헤라자드를 만날 수 없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 보니 꼭 가슴 한 구석이 잘려나간 것처럼 허전하면서도 저려 왔다. 하지만 아쉬워하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일단 포기할 것은 포기하고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게 중요할 것 같았다. 내가 생각했던 최악의 시나리오는 내가 어스폴 취조실에 끌려가 아버지 에게 도움을 청하는 전화를 거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경우는 그 것보다 배는 안 좋은 상황인 것 같았다. 어스폴이나 경찰에 우리를 넘기 려고 마음먹었다면 이미 오래 전에 그렇게 했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 이 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다는 말이 될 텐데, 나로서는 그 속을 알 길이 없었다. 결국 내가 얻은 결론은 스티브 강이 돌아올 때까지 아무 생각도 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쉬면서 체력이나 비축해 두자. 그리고 다음 일은 다음 에 고민하자. 비류. 나는 프로 게이머다. 프로답게 생각하고 프로답게 행 동하자. 나는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딱딱한 빵조각을 씹으면서 물을 삼켰 다. 빵을 다 먹고 나니 할 일이 없어졌다. 잠이나 자 두는 게 나을까? 나는 이렇게 생각하면서 침대에 몸을 뉘었다. 아까의 경험을 교훈 삼아서 먼지 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말이다. 하지만 그래도 풍기는 먼지냄새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눈을 감고 잠을 청하려고 해 보았다. 그러나 잠 은 오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나는 너무나도 불안한 상태였던 것이다. 세 헤라자드는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스티브 강은 무슨 생각을 가지 고 우리를 가두었을까? 혹시 리파이나 아톰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 은 아닐까? 이런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맴돌기만 하니 정말 미칠 것만 같 았다. 스티브 강이 우리를 셋으로 나누어서 가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작은 잡음이 들려오고 있었다. 나는 처음에는 그게 무슨 소리인가 알 수가 없었다. 호출기에서 나는 소리 같기도 했고, 핸드 컴이나 랩탑의 경고음 같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난 후에 나는 그것 이 작은 전화벨 소리라는 걸 알 수가 있었다. 나는 전화기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누가 건 걸까? 그냥 말로 하면 될 걸 굳이 전화씩이나 걸고. 이렇게 생각하면서 나는 송수화기를 들었다. (구식 전화기라 스피커폰은 달려 있지 않았다) "비류 님? 내 말을 듣기만 해요. 저에요, 세헤라자드." 세헤라자드의 목소리라기 보다는 기계음에 가까운 음성이어서 나는 처 음에 누가 장난을 치고 있지 않은가 생각했다. 하지만 말투로 보아서는 세헤라자드인게 틀림없었다. "지금 전화를 끊고 텔레비전을 켜세요. 볼륨을 아주 낮추고요. 채널은 버튼으로 움직이게 되어 있는데 2번에 맞추세요. 아시겠지요?" 이 말을 끝으로 전화는 끊어졌다. 나는 송수화기를 내려놓고 전화기에 서 들려온 말 그대로 텔레비전을 켜고, 볼륨을 낮추었다. 버튼을 눌러 2 번에 채널을 고정하는 것도 잊지 않았고. 그러자 화면에 세헤라자드가 나 타났다. 꼭 뉴스 앵커처럼 상반신만 보이는 모습이었다. "가능한 전화는 모두 다 걸어봤어요. 겨우 통화가 되었네요. 별 희안한 사람들이 다 받더라고요. 연구실 직원이 받기도 하고, 보안 요원이 받기 도 하고, 사실 조금 더 시도해 보다가 비류 님이 안 받으면 그만 두려고 했어요." 나는 세헤라자드를 보고서 너무나 놀라서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 었다. 한참이 지난다음에야 나는 세헤라자드에게 이렇게 물을 수 있었다. "어떻...게?" "전화선을 타고 움직이는 일, 다시는 안 할 거에요. 꼭 하수도를 지나 다니는 것 같더라구요. 웬 잡음이 그렇게도 많은지. 하여튼 답답하고 숨 막혀 죽는 줄 알았다구요." "넌 인간의 영혼을 캡춰한 롬파일이잖아. 그런데... 어떻게 에뮬레이터 없이 텔레비전에 나타날 수 있지?" "텔레비전 전파 형태로 절 변환하는 법을 배운 거지요." 세헤라자드는 별거 아니라는 투로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그렇게 된 거야?" "그렇게 된 게 아니라 그렇게 하는 방법을 배운 거지요. 사람은 경험을 통해서 뭔가를 배울 수 있잖아요. 안 그래요?" 이번에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한 말투였다. "그래. 그랬구나..." 나는 세헤라자드의 말을 듣자 조금은 석연치 않은 느낌이 들었다. 어딘 가 어긋나 있었다. 아니 아직까진 어긋나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표현하 는 편이 더 나을 것 같다. "비류 님. 어디 편찮으세요?" 내 낌새를 눈치 챘는지 세헤라자드가 물었다. "아냐. 그냥..." 사실 그랬다. 세헤라자드가 텔레비전에 나타나는 걸 이상하다고 생각했 다면 사실 세헤라자드가 소드앤매직 온라인 게임 상에 나타났을 때나, 아 니, 그냥 어스넷에서 정보를 구해오는 것 자체도 이상하게 생각했어야 옳 았을 것 같았다. "세헤라자드, 너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너무 이상하고 신기하고, 가끔씩 은 두렵기도 해서." 결국 나는 솔직하게 내 안에서 어긋나고 있는 생각에 대해서 털어놓았 다. 세헤라자드는 내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드렸잖아요. 저는 인간의 영혼이 에뮬레이트 된 프로그램이라고 요. 최초의 에뮬레이트가 어려웠을 뿐이지 다음은 그저 배우고 성장하는 일만 남아 있을 뿐이지요. 제 춤을 한 번 기억해 보세요. 그건 제가 배운 춤이었어요. 다른 형태의 춤이었지요. 인간의 춤이 아니라." 이렇게 말하는 세헤라자드의 표정은 어두웠다. 나는 더 이상 세헤라자 드의 존재 여부에 대해서 물어보는 건 그만 두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세 헤라자드가 돌아왔다는 사실 만으로 얼마나 기뻐해야 할지 나 자신도 짐 작하기 어려웠으니까 말이다. "왜... 돌아왔어?" 다시는 못 만날 줄 알았는데. 사실 잃어버린 집 열쇠를 찾은 것 보다, 잃어버린 소드앤매직 온라인 어카운트 비밀번호를 기억해 낸 것 보다 지 금이 더 기뻤다. 나는 그냥 이 기쁨을 누리기로 마음먹었다. "당연하지 않아요? 이야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요." 세헤라자드도 내 기분을 눈치 챘는지 이렇게 웃으면서 말했다. "보통, 사람들은 약속을 잘 안 지키지." "어떤 사람은 약속을 우습게 알지만 어떤 사람은 약속을 꼭 지키지요. 자. 우선 심호흡을 하고 마음을 가라앉히세요. 그리고 거기 의자를 놓고 편하게 앉으세요. 여기에 얼마나 있게 될 지도 모르고, 또 어차피 여기 있는 동안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니까요." 나는 세헤라자드의 말처럼 심호흡을 하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담배를 하나 피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까지 얘기했지요?" "...그러니까 수르카 일행이 배를 탄다고 했던가, 홀리우드로 간다고 했던가, 뭐 그런 대목이었어. 아니, 네가 그랬지. 범버쿠 정글로 가게 된 다고 했던가?" "예. 그 전에 먼저 라이짐 이야기를 해야 겠네요. 수르카 일행이 가게 되는 곳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이야기니까 잘 들어주세요." 세헤라자드가 말했다. 하지만 지금 내 심정은 조금도 세헤라자드의 이 야기를 듣고 싶은 심정이 아니었다. 이 이야기가 끝나면 세헤라자드는 영 원히 어디론가 사라져 버릴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어떤 형태로든 바뀔 수 있다면 이제 랩탑 안에 세헤라자드가 갇혀 있어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인간이 집 안에서만 살 필요는 없는 것 처럼 말이 다. "탐그루에서 퇴각한 라이짐과 아케르 용병단은 일단 임프 시에서 재정 비를 하게 되었습니다. 성황청이 바로 기습해 들어오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지요." 내 생각과는 관계없이 세헤라자드는 이야기를 시작했고, 이렇게 해서 나는 다시 탐그루의 세계에 빠져들게 되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6808/19898 ━━━━━━━━━━━━━━━━━━━━━━━━━━━━━━━━━━━━━━━━ 제 목:[탐그루] 신성제국 203 관련자료:없음 18/18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3-02 00:08 조회:2070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 신성제국 프라브리티에 임시로 마련된 주둔지 천막 안에서 자고 있던 라이짐은 긴 악몽에 시달리다가 잠에서 깨어났다. 야전침대에서 상체를 벌떡 일으 켜 세운 라이짐의 이마에는 땀방울들이 맺혀 있었다. 라이짐은 안도의 한 숨을 내쉰 다음 벽에 걸려있는 작은 거울 앞에 섰다. 마음이 안정된 사람에게는 얼굴의 형상이 제대로 나타나지만 흥분했다 던가 화가 나있다던가 할 때에는 그에 맞게 모습이 일그러져 나타나는 거 울이었다. 라이짐은 이 거울 앞에서 마음을 가다듬곤 했다. 어떤 일이 있 어도 이 거울에 비친 얼굴이 흐트러지는 일이 없도록 말이다. 거울 안에 는 헝클어진 하얀 머리카락이 어둠사이에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거울 안 의 라이짐은 마치 화가 난 것처럼 허공을 향해 길게 뻗어 있었다. 라이짐 은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심호흡을 하였다. 거울에 비친 상이 조금씩 정상으로 돌아왔다. 한밤중이었다. 어느덧 불기 시작한 싸늘한 가을바람이 라이짐의 몸에 와 닿았다. 아무도 없는 밤이었다. 취침 시에 켜는 붉은 색 연금술사의 등마저 꺼져 방안은 온통 어둠과 정적뿐이었고 라이짐이 누워 있는 개인 야전침대와 그 옆에 놓여있는 작은 업무용 책상 하나만이 달빛을 받아 희 미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었다. "에이스." 라이짐이 부르자 어둠의 저편에서 에이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 악몽을 꾸었어." 에이스는 라이짐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듣지 못하는 모양이었 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안다고 해도 정확한 의미는 알지 못했다. 검은 엘프 족은 잠을 자는 법이 없기 때문이었다. 기껏해야 눈을 감고 앉 아 있는 게 검은 엘프 족 최대의 휴식이었다. "꿈 말씀이십니까?" 비록 이해하지는 못한다고 해도 에이스는 꿈이 무엇인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래. 꿈 말이야." "잠들었을 때 상상하는 것을 말씀하시는군요." 에이스는 이렇게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 수준으로 이야기했다. 에이스가 생각하기에 꿈이란 상상이었다. 다만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깨어있을 때는 상상을 제어할 수 있지만 자고 있을 때에는 상상을 제어할 수 없다는 점 뿐이라고 에이스는 생각했다. "좋지 않은 상상을 하신 모양입니다." "그럴지도 몰라." 이마에 흐르던 땀방울들이 어느덧 말라 붙어있었다. 가을바람은 여전히 서늘하게만 느껴졌다. 라이짐은 책상 위에 올려놓았던 물 한 잔을 들이켰 다. 시원하다는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 그건 잠깐이었다. "라짐. 라짐을 보았어." "동생 말씀이십니까?" "그래. 내 여동생. 카이사 장군의 첩으로 가 있는 내 동생 말이야. 혹 시 무슨 일이 생기지나 않았나 모르겠어. 이꿈이 예지몽이면 어쩌지." "상상으로 미래를 볼 수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럼 라이짐 님도 예언 자신가요?" "그게 아니라 꿈이 맞는다는 말이 있잖아." "꿈이 맞는다면 상상이 맞는다는 말이니 사태를 예상할 수 있는 능력을 말씀하시는 모양이로군요. 무슨 상상을 하셨습니까?" 가만이나 있으면 그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겠지만 에이스의 말은 가끔 가다 짜증이 날 정도로 상식에서 어긋날 때가 많았다. 물론 인간이 아니 라 검은 엘프 족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라짐이 당하고 있었어. 그 카이사 장군에게 말이야. 그리고 다른 사람 들 얼굴도 보았어. 어머니, 죽은 우보, 그리고 하잔에서 죽은 반란군 들... 이상한 일이지. 나는 그 사람들을 마음에 담아둔 적이 없는데 말이 야." 라이짐은 혼잣말을 하는 것처럼 이렇게 말했다. 에이스는 도무지 이해 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라이짐은 꿈에 에이스의 얼굴 도 보았다. 흉터로 일그러진 에이스의 얼굴은 실제보다 몇 배는 더 과장 되어 나타났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라이짐을 꼭 원망하는 것 같 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라이짐은 꿈에 에이스도 보았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그런 말을 한다고 해서 에이스가 자신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좀 주무시지요, 라이짐 정보 부장님." "정보 부장이라니. 그건 아케르 단장님이 허락한 후에야 쓸 수 있는 칭 호야. 지금 나는 십부장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일 뿐이야." 라이짐은 좀 부끄럽다는 듯한 태도로 이렇게 말했지만 마음 한구석 뿌 듯한 그 무엇이 차 오르는 것만큼은 어쩔 수가 없었다. "예, 알겠습니다. 하지만 이제 곧 라이짐 님은 프라브리티의 영주 프란 스 페르도 앞에서 정보부장의 직위를 하사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날은 아케르 용병단에 있어서 영광된 날이 될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홍보하는 말 그대로구나, 에이스. 다들 그렇게 말하지. 용 병단에게 영광된 날이라고. 아마 순무가 그 말은 가장 많이 했을 거야." 라이짐은 냉소적으로 이렇게 말했다. 분명 그 날이 영광된 날이라고 생 각하는 단원들이 많을 것임에는 틀림이 없을 거였다. 하지만 라이짐이 생 각하기에 그것은 영광이 아니라 굴욕이었다. 수많은 단원들의 목숨과 뒤 바꾼 것이 고작 장군 칭호 하나라니 말이다. 라이짐은 이렇게 생각하면서 자리에 다시 누웠다. "잠깐만. 내 옆에 앉아 줘." 라이짐은 에이스가 어둠 속으로 다시 몸을 숨기려는 것을 말리면서 이 렇게 말했다. 에이스는 검은 엘프 족답게 그저 예, 알겠습니다 하고 대답 하고는 라이짐의 옆에 앉았다. 라이짐은 누워서 에이스를 올려다보았다. 어떻게 보면 괴기하다고 까지 할 만한 에이스의 외모였지만 라이짐의 눈 에 에이스는 오직 죄책감에 대한 하나의 작은 상징일 뿐이었다. 라이짐은 손을 뻗어 에이스의 손을 잡았다. 검은 엘프 족의 손이라고는 하지만 사 람과 마찬가지로 손만은 따뜻했다. 프라브리티에 도착한 이후, 라이짐은 마음의 병을 앓게 되었다. 그것은 혼자서는 잠이 들지 못하게 되는 병이었다. 혼자서 자리에 누워 눈을 감 고 있으면 너무나도 두려웠다. 무엇이 두려운지도 알 수 없었고, 혹은 누 군가가 자신을 해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라이짐에게 드는 것도 아니었는 데 말이다. 자주 지금처럼 악몽을 꾸기도 했다. 라이짐은 에이스를 다른 십부원들처럼 산으로 보내지 않고 자신의 숙소에서 함께 기거하게 하였 다. 에이스가 함께 있으면 그나마 좀 나았기 때문이었다. 에이스의 손을 잡고 누워있자니 라이짐은 부끄러워졌다. 어린아이도 아 닌데 어둠을 두려워하고 엄마 손을 잡는 꼬마처럼 에이스의 손을 잡고 있 는 게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부끄러운 기분이 든다고 해서 에이스를 다른 에이스 자매들처럼 산으로 보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앞 서 언급한 두려움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렇게 악몽을 꾼 날이면, 에이스 가 옆에서 지켜보고 있어야 마음이 편해지곤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 니 모든 것을 떠나서 라이짐은 에이스를 좋아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 똑같이 생긴 에이스 자매들이었지만 라이짐의 눈에 는 에이스가 가장 곱게 보였다. 어쩌면 에이스를 바라보면서 스스로에게 책임을 묻는 일에 쾌감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르지. 라이짐은 이렇게 생각 했다. "에이스. 너 뒤로아 오르테가 본 적 있어?" 난데없이 라이짐이 에이스에게 이렇게 물었다. "가까운 곳에서 본 적은 없지만 먼발치에서는 몇 번 본 적이 있습니 다." "...예쁘지." "저는 그런 말, 잘 모릅니다." 귀를 만지작거리면서 에이스가 말했다.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하는 것 을 부끄럽게 여기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 너야 잘 모르겠지. 신경 쓰지 마. 그렇게 중요한 거 아니야." 라이짐은 이렇게 말하고는 탐그루 배알식 때 본 뒤로아 오르테가의 모 습을 떠올려 보았다. 차가운 인상이기는 하지만 어디 한 군데 나무랄 때 없는 미인데다가 뛰어난 외교수완까지 거느리고 있는 여자, 뒤로아 오르 테가. 그 날 라이짐은 뒤로아 오르테가가 자신의 여자가 될 것이라고 생 각했었다. 그건 예언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몽상이었을까. 예언이든 몽상 이든 중요한 것은 그런 생각이 단지 몽상에 그치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사 실이었다. 라이짐은 자신에게 충분히 그럴 힘이 주어질 것이라고 확신하 고 있었다. 일단 뒤로아 오르테가에 대한 상상을 시작하자 라이짐의 생각이 온통 뒤로아 오르테가에 모아졌다. 뒤로아는 살아있을까. 살아있다면 무엇을 하고 있을까. 라이짐은 이런 생각 때문에 쉽사리 잠이 오지를 않았다. 라 이짐은 잠시 눈을 떠 에이스를 바라보았다. 에이스는 자리에 앉아 무표정 하게 창 밖을 내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라이짐은 손을 뻗어 에이스의 손 을 만지작거렸다. 라이짐의 손놀림을 느낀 에이스는 잠깐 라이짐의 얼굴 을 보는가 싶더니 이내 곧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가 창 밖을 내다보았다. 저 에이스가 탐그루에서 함께 목숨을 걸고 그리폰과 성황청 기사단의 공격을 뚫고 이곳까지 함께 한 에이스였던가. 라이짐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전장에서 단검을 쥐고 빠르게 움직이는 에이스의 모습이 눈에 선 하기는 했지만 멍청하게 입술을 반쯤 벌리고 창문 쪽을 바라보고 있는 에 이스는 정말 그때의 에이스가 맞는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왜 전장에 서는 물살을 가르는 물나그네새처럼 재빠르게 움직이는 에이스가 평소에 는 저런 모습인지 라이짐으로서는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탐그루에서 그리폰의 공습이 뜸해졌을 무렵, 성황청 기사단은 아케르의 예상대로 주둔군들에게 성구를 가지고 공격을 감행했다. 주둔군들은 우왕 좌왕 흩어졌고, 특히 안토니오 장군의 군단은 더더욱 진형을 갖추지 못하 고 갈팡질팡했다. 안토니오 장군이 부상을 당해 전투불능 상태가 되자, 구심점을 잃은 안토니오 군단은 그야말로 오합지졸로 변해 버렸다. 라이 짐은 백부장들에게 아케르의 명령을 전달했고, 잠시 논란이 있기는 했지 만 결국 백부장들은 희생을 무릅쓰고 성황청 기사단과 맞서 싸우며 안토 니오 군단의 퇴각을 도왔다. 일차 퇴각 지점은 하잔이었다. 하잔은 이제 많이 조용해 져서 최소한의 경계 병력만이 남아있는 상태였다. 하잔에 도착했을 때, 아케르 용병단은 백부장 다섯 중 둘이 전사한 상태였고, 십부원들 열 명중 넷이 탐그루에 남았거나 영원히 용병단에 합류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실로 막심 한 피해였다. "병력을 정비하고 행군 준비를 서두르고 있는 성황청 기사들의 움직임 이 포착되었습니다." 하잔에서 머문 첫 날, 에이스는 이렇게 보고했다. 라이짐은 긴급 지휘 관 회의에 참석하여 이 사실을 전달했다. "지금 아케르 용병단의 병력은 평소의 절반 수준입니다." 발렌시아 백부장이 먼저 이렇게 입을 열었다. "백부장 중에서 마사다 백부장과 제이슨 백부장은 전사했습니다. 이 상 태로 나가다가는 남은 병력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머리에 피가 배어 나온 붕대를 두르고 있는 미쥬 백부장이 말했다. "병력 개편이 시급한 문제입니다. 급한 대로 남은 병력들을 모으는 작 업이 진행중입니다만 지휘관을 잃은 십부가 많아서 앞으로 전투가 벌어진 다면 결과는 암담합니다." 이번에는 신다루 백부장이 근심 어린 얼굴로 말했다. 신다루 백부장은 팔이 부러져 있었다. 퇴각 도중에 성구에 맞아 쓰러지는 나무 둥치에 맞 아 부러진 것이었다. "단 한 명이 남아있어도 십부라는 용병단의 전통 그대로 병사들은 백부 도 단 한사람이 남아도 백부라고 주장하고있습니다. 당장 병력 개편은 거 의 불가능입니다." 임시 백부장이 된 가투신이 말했다. 가투신은 제이슨 백부장 밑에서 십 부장 일을 하고 있었지만 제이슨 백부장의 병력 중 살아남은 것은 불과 이십여 명이었다. 제이슨이 이끌었던 백부는 최전선에서 성황청의 기사와 맞서 싸웠기 때문에 피해가 더 극심했다. "루루 백부장. 의견을 좀 말해보시오." 마사다 백부장의 전사로 임시 백부장에 오른 루루 십부장에게 순무가 물었다. 회의를 주제하고 있는 것은 순무였다. 순무는 물자를 모아 하잔 까지 가지고 오는 임무를 거의 기적처럼 성공시켰다. 탐그루가 온통 불바 다가 되어버릴 정도로 극심했던 공격 속에서도 순무가 이끄는 지원부대는 단 한 사람의 피해도 입지 않았고, 물자 손실도 아주 극미한 수준이었다. "저, 전. 그러니까..."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6809/19898 ━━━━━━━━━━━━━━━━━━━━━━━━━━━━━━━━━━━━━━━━ 제 목:[탐그루] 신성제국 204 관련자료:없음 18/18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3-02 00:09 조회:1811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한참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가 루루는 '여러 경험 많은 분들의 의견을 따르겠습니다' 하고는 말았다. 루루의 말에 다들 침울한 분위기가 되어버 렸다. 아케르가 의식불명 상태가 되어버리자 용맹한 아케르 용병단의 단 원들 또한 전투불능 상태가 되어버린 느낌이었기 때문이었다. 한동안 의 견들이 나왔지만 의견이라기 보다는 하나같이 현재 상태의 어려움만을 늘 어놓고 있었다. 라이짐은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탐그루에서 보았던 벌레 들을 떠올렸다. 꿈틀거릴 줄만 알고, 어떠한 계획도 이상도 없는 벌레 같 은 사람들. 아케르가 없는 지금, 백부장이라는 사람들의 모습이 모두 벌 레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좀 나은 것이 발렌시아 백부장과 가투 신 정도였다. 나머지 백부장들과 회의에 참석한 십부장들은 무슨 말을 어 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라이짐. 자네 의견을 좀 말해 보라구. 자네가 단장님의 마지막 명령을 들은 사람이잖아." 한참 동안 의견이 오간 후에 순무가 라이짐에게 물었다. 라이짐은 뭔가 다른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라이짐의 가슴에서 뭔가가 타 오르고 있었다. "단장님께서 내리신 명령은 안토니오 군단의 안전한 퇴각이었습니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 저로서는 짐작할 수 없습니다만 단장님께서 하신 말 씀이 하나 있습니다." 아케르의 이름이 나오자 일순 침묵이 감돌았다. 아케르를 걱정하는 마 음으로 입을 다문 사람도 있었겠지만 뭔가 의견이 나오겠구나 싶었기 때 문일 거였다. 라이짐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라이짐은 앉아 있는 나머지 지휘관들을 내려다보았다. "별다른 수가 없다면 퇴각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말씀이셨습니다." 라이짐은 이렇게 말한 뒤, 자신의 목소리가 회의장에 울려 퍼지는 것을 즐기고 있었다. 자신의 목소리 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 했 고, 자신의 의견 말고는 아무도 의견을 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 이짐은 한동안 침묵을 이끈다음 아주 천천히 의견을 이었다. "제가 얻은 정보에 따르면 지금 탐그루에는 성황을 비롯한 성황청 거의 전 병력이 모여있다는 것도 있었습니다. 왜일까요? 제가 내린 판단으로는 성황청은 자나크 주로 거점을 완전히 옮기고자 마음먹은 것 같습니다." "모르는 소리. 스파일의 실리포니아 일대와 타실의 악마의 입 부근에 성황청 기사들이 아직도 주둔하고 있어. 거점을 옮기다니 그게 무슨 소리 인가?" 발렌시아 백부장이 라이짐의 의견에 제동을 걸었다. 라이짐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발렌시아 백부장의 의견에 토를 달았다. "실리포니아와 악마의 입 외의 병력은 모두 거두어 들였습니다. 그 두 군데 정도는 병력을 남겨두어야 할 어떤 내부적 이유가 있을 거라 여겨집 니다. 그리고 제 말씀의 요점은 그것이 아닙니다. 제 말의 요점은 성황청 의 기사단이 이곳까지 올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이 이상으로 추적해 올 수는 없을 거라는 사실입니다." 라이짐의 말이 끝나자 회의장이 잠시 술렁거렸다. 라이짐은 술렁임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성황청은 바르도 대륙 전체로 확전시켜나갈 생각은 아닌 것 같습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탐그루를 기점으로 자나크를 장 악할 것이 분명합니다. 아마도 더이상의 전투나 확장은 없을 것 같습니 다." "잠깐. 라이짐. 자네 의견은 그러니까 하잔을 떠나자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순무의 물음에 라이짐은 숨 한 번 돌릴 틈도 없이 바로 답했다. 순무는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질문을 계속했다. "성황청의 기사단이 스파일까지 추적해 올 가능성은?" "없습니다." "스파일로 퇴각한다면 어디로 가야 겠는가? 임프? 프라브리티?" "안토니오 군단이 가는 곳으로 갑니다. 안토니오 군단은 탐그루에서 우 리 용병단에게 신세를 졌습니다. 결코 우리를 저버릴 수 없을 것입니다." 라이짐이 말하자 모두들 뭐라고 한마디씩을 하는 바람에 회의장이 소란 스러워졌다. 발렌시아 백부장은 언제부터인지 라이짐을 날카로운 시선으 로 노려보고 있었다. "... 그 수밖에는 없는가?" "단장님이었다면 틀림없이 이렇게 지시하셨을 거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안토니오 군단의 퇴각을 도우라는 지시의 의미일 것입니다. 현 상태로는 아무리 병력이 많다고 해도 성황청의 성구 에 맞설 무기가 없습니다. 일단 프라브리티로 퇴각해 전열을 가다듬는 것 이 급선무입니다." "싸워보지도 않고 퇴각한다고? 그것도 하잔을 버리고? 라이짐. 그것도 의견이라도 내는 건가? 우리 용병단이 싸워보지도 않고 도망쳤다고 한다 면 바르도 대륙 전체가 우리를 비웃을 게 분명하지 않은가!" "목숨보다 비웃음을 받는 게 더 두려우신 모양이로군요. 명예를 중시 여기시는 발렌시아 백부장님다운 의견입니다. 하지만 여기 모인 여러 지 휘관 여러분 중에서 죄의식의 영역을 만들어내는 마법을 쓸 수 있는 사람 은 발렌시아 백부장님 하나 뿐입니다." 라이짐은 발렌시아의 비위를 맞춰주는 척하면서 사람들에게 호소하고 있었다. 이곳을 떠나지 않으면 틀림없이 다들 죽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칼의 힘은 그 무엇보다 강하네. 우리의 칼이 성황청의 성구보다 약하 다고 생각하는 건가, 지금?" 발렌시아 백부장은 계속해서 용병단의 명예와 전통을 중시하자는 의견 을 제시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런 말로서 이곳에 남아 싸우기를 종용하고 싶은 심정인 모양이었다. 거기에 어떤 생각이 숨어있는지 라이짐으로서는 짐작조차 가지 않았지만 라이짐은 일단 이렇게 말하기로 마음먹었다. "마법이 곧 칼입니다." 라이짐의 이 말은 꽤 오랜 훗날까지 두고두고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훗날 일이지만, 그 자리에서 라이짐의 그 말이 없었다면 칼의 전 통을 중시하는 아케르 용병단에 새로운 칼이 보급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생기게 되었고, 라이짐을 괴상한 말로 사람들을 선동한 미 친 사람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생기게 되었다. "이제 결정은 내려졌는가..." 순무는 탄식처럼 이렇게 중얼거렸다. 결국 아케르 용병단은 안토니오 군단과 약간의 협의를 거친 다음 프라브리티로 퇴각했다. 더 이상의 피해 는 없었고, 더 이상의 다툼도 없었다. 다만 라이짐을 시기하는 사람들과 라이짐을 풋내기 주제에 함부로 나선다며 경멸하는 사람들만 늘어났을 뿐 이었다. 프라브리티에 도착한 용병단은 불안한 마음으로 야전에 임시로 마련된 주둔지에서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스파일의 사자가 어떤 의견을 전하느냐에 따라서 과연 라이짐의 의견이 옳았는지 틀렸는지를 알 수 있 게 될 터였다. 하지만 라이짐은 그다지 불안해하지도 않았고 초조해하지 도 않았다. 오히려 이상하리만치 침착해지는 자신을 보면서 라이짐 스스 로 놀라고 있었다. 라이짐은 자신의 개인 천막에서 밖을 내다보았다. 임시로 마련된 주둔 지에 있는 용병단 병사들은 모두들 지치고 피곤해 보였다. 하잔에서 출발 해 근 한 달을 행군해 프라브리티까지 오는 동안 제대로 씻지도 못했고 먹지도 못한 단원들이었다. 라이짐은 그들을 바라보면서 이 모든 고생이 끝나면 좋겠다는 생각을 막연하게 해 보았다. "여어, 라이짐." 하진이었다. 하진은 목발을 짚고 라이짐의 개인 천막 안으로 들어섰다. 하진을 보자 라이짐은 반가워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곧 스파일에서 사자가 온다면서? 이거 궁금해서 참을 수가 있어 야지 말이야." 하진은 하잔에서 퇴각하기 바로 직전에 아케르 용병단에 합류했다. 하 진은 탐그루에서 살아 돌아왔던 것이다. 하진이 살아 돌아온 것을 두고 별의 별 소문이 많았다. 성황청의 기사들을 매수했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성황청 기사들과 어떤 거래가 있지 않았겠느냐는 소문도 있었다. 하지만 어찌되었건 하진의 복귀 사실은 아케르 용병단 단원들에게 희소식이었다. 보통의 단원들은 하진이 없다면 야전에서 술을 구하는 일이나 담배가 떨 어지지 않게 계속해서 보급하는 일, 또한 두렵거나 짜증이 날 때 기분을 풀어주는 알약 같은 것을 구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먼저 내가 알아봐 달라고 한 건?" "응. 여기." 하진은 라이짐에게 종이 한 장을 내 밀었다. 종이 안에는 단원들의 자 세한 세부 동정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이런 걸 알아서 뭐 하려고? 단원들한테 예쁜 여자 동생이라도 있나 살펴보려는 거야?" 하진은 라이짐의 야전 침대에 누우면서 말했다. 라이짐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농담이야, 농담. 내가 잊어버렸을 거 같아? 뭘 알아봐 달라고 하던지 간에 절대로 이유는 묻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 이 하진, 거래에 있어서 만큼은 신용이 가장 중요하다는 걸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 고." 하진은 키득거리면서 말했다. 라이짐은 하진의 오른 발, 아니 정확하게 는 오른 쪽 발이 있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하진의 오른쪽 바지에는 아무 것도 들어 있지 않았다. 다리를 잃은 이후, 하진은 더 이상해진 느낌이었 다. 장사에 애착을 보이는 것도 전보다 더 심했고 무슨 일이든 자조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도 전보다 더 심해졌다. 그럴 때마다 라이짐은 하진을 탐그루에 두고 온 일이 마음에 걸리곤 했다. 물론 그래도 하진이 살아 남 아서 빚을 갚을 수 있게 된 건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라이짐이었다. "이제 곧 스파일에서 사자가 와." "내가 말했잖아. 그래, 어떤 소식을 가지고 올 것 같아?" "그냥 소식이겠지. 중요한 건 그 소식에 어떻게 대처하느냐 아닐까?" "너 답군. 빨리 결정하고 빨리 행동한다. 좋은 원칙이야. 가끔 난 너를 보면 네가 내가 알고 있는 훈련병 동기 라이짐이 맞나 의심스러워지곤 한 다니까." 라이짐은 하진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반지를 만지작거리면서 스파일의 사자가 찾아오기만을 빌 뿐이었다. "그 반지, 타호루에게 받은 것 맞지? 멋있는 반지야. 악마의 저주가 담 겨 있는 반지라면서? 전쟁터에서 결코 죽지 않게 도와준다는." "그냥 정령의 반지일 뿐이야. 그런 소문도 있어?" "하하하. 농담이야, 농담. 라이짐. 널 보면 수명이 다 된 연금술사의 등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니까. 켜도 금방 불이 들어오지 않고 한참동안 껌벅거리다가 불이 들어오는 연금술사의 등 말이야." "하진. 그만해 둬." "알았어, 알았다구. 직속상관 명령이니 따르도록 하지요." 하진의 말은 냉소적이다 못해 기분까지 상할 정도였다. 만약 하진이 아 니라 다른 사람이 라이짐에게 이렇게 말했다면 라이짐은 그런 식으로 말 한 사람을 결코 가만히 두지 않았을 것이다. "라이짐." 천막이 열리면서 순무가 들어왔다. 라이짐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진 은 남아 있는 오른쪽 다리의 밑둥을 어루만지면서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 었다. "지금 막 사자가 다녀갔네." "그렇습니까?" "프라브리티 외곽에 있는 주둔지로 옮기라는 전갈이야. 자네 말이 맞았 어. 안토니오 장군이 우리를 버리지 않은 거야. 단장님도 이제 거의 의식 을 회복하고 계시니까 그곳 주둔지에서 조금만 시간을 보내면 곧 좋은 소 식이 들려올 걸세. 라이짐. 축하하네. 이게 모두 자네 덕분이야." "감사합니다." 라이짐은 가볍게 목례를 하면서 순무의 말에 답했다. 라이짐은 이미 결 과를 알고 있었다. 안토니오 장군이 어떻게 보고했는지까지도. 안토니오 군단에는 고몽 페르도라는 이름의 십부장이 있었다. 라이짐은 그 사실을 아케르에게 보고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잘 알고 있었다. 열 다 섯 나이의 고몽 페르도가 바로 스파일의 영주 프란스 페르도 장군의 아들 이며 십부장의 직위를 맡아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안토니 오 장군은 고몽 페르도의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아케르 용 병단의 도움 때문이었다고 보고하였으며 프란스 페르도는 야전 장군 출신 영주답게 그 사실을 높게 평가했다. 프란스 페르도가 자신의 아들을 군대 로 보낸 것은 순전히 무장으로 키우기 위함이지 죽이려고 보낸 것은 아니 니 당연한 일이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6810/19898 ━━━━━━━━━━━━━━━━━━━━━━━━━━━━━━━━━━━━━━━━ 제 목:[탐그루] 신성제국 205 관련자료:없음 16/16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3-02 00:09 조회:1909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하잔에서 프라브리티로 출발 한 지 이틀째 되는 날, 에이스는 프란스 페르도에 대한 정보를 조금 더 가지고 왔다. 하잔에서 빠져 나오는 일이 나 행군만 해도 보통 사람의 체력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긴 했지만 에이스는 조금도 불평 없이 라이짐의 명령에 따라서 정보를 캐오곤 했다. "영주 프란스 페르도에게는 두 사람의 아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고몽 페르도이고 또 하나는 르노 페르도 입니다. 열 일곱 자손 중 아들은 이렇 게 둘 뿐입니다." "르노 페르도? 처음 듣는 이름인데." 에이스에게 라이짐이 물었다. 고몽 페르도에 대해서는 이미 보고를 듣 고 나름대로 사전 조사까지 마친 상태였지만 르노 페르도에 대해서는 들 은 바가 없었다. "고몽 페르도는 잘 알고 계시겠지만 르노 페르도에 대해서는 잘 모르실 거라고 생각됩니다. 르노 페르도는 프란스 페르도 장군의 장남입니다." "그렇군. 그런데 전에 준 정보에 따르면 고몽 페르도가 다음 스파일의 대를 잇게 된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라이짐은 약간의 의구심을 가지고 에이스에게 물었다. 아들만이, 그것 도 군인 출신의 아들만이 대를 이어야 한다는 전통을 가지고 있는 스파일 국의 전통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장남이 대를 잇는 것이 보통의 경우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였다. "예. 하지만 마리누스 루베 사건과 연루되어 멀리 북쪽으로 귀양을 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마리누스 루베 사건?" "예. 스파일의 수도에 있던 프란스 페르도 저택에 불이 난 사건이지요. 과연 누가 불을 질렀는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정확한 사실이 밝혀지지 않았습니다만 일단 스파일 정부에서는 마리누스 루베에게 누명을 뒤집어 씌우고 타실로 마리누스 루베 일가를 추방 보내는 것으로 일단락 시킨 사 건입니다." 마리누스 루베라는 이름 역시 라이짐으로서는 처음 듣는 이름이었지만, 어디선가 한 번 쯤 들어본 듯 친숙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군. 그렇다면 그 사건으로 누가 가장 많은 이익을 보았지?" 상식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무슨 사건이 일어났을 때 가장 많은 이익을 보는 사람이 그 일을 저질렀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는 생각에서였다. "프란스 페르도 본인입니다." "무슨 소리야?" "사건의 뒷처리를 하는 과정에서 공정하고 지나치지 않는 조사로 시민 들에게 인기가 높아졌고, 특히 피해자라는 점에서 시민들에게 큰 인기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 사건이 없었다면 프란스 페르도 장 군이 영주가 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물론 그가 영 주가 된 결정적인 계기는 삼년전쟁 직후 국경을 넘어 온 바바 족을 막아 낸 것 때문입니다만." "범인으로 잡혔다는 마리누스 루베는 혹시 프란스 페르도 장군의 정적 이 아니었을까?" "정치적으로는 분명 대립관계에 있었던 듯 합니다. 마리누스 루베는 학 자로서 프란스 페르도 장군이 삼년전쟁을 일으키려 하고 있으며 그래서는 안 된다는 내용의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으니까요." 라이짐은 에이스의 말에서 대충의 전모를 짐작해 볼 수 있었다. 틀림없 이 그 방화 사건은 프란스 페르도의 자작극일 거였다. 프란스 패르도를 직접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음모와 술수의 냄새가 맡아졌다. "마음에 드는군." 에이스는 라이짐이 어떤 맥락으로 그런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그저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다만 라이짐은 왜 장남인 르노 페르도를 북쪽으로 유배했을까 하는 것이 궁금하기는 했다. 하지만 르노 페르도는 지금으로서는 아무런 쓸모가 없는 사람이므로 일단 무시하기로 마음먹었다. 프라브리티로 향하는 도중, 야전에 숙영지를 꾸릴 때 가장 먼저 세워지 는 천막은 아케르가 머물 천막이었다. 아케르는 의식이 없었고, 또한 프 라브리티로 도착한다고 해도 의식을 찾을 가능성도 미지수였지만 타호루 의 마법과 강력한 치료석 덕분에 조금씩이나마 매일같이 체력을 회복하고 있었다. "고몽 페르도 십부장 님. 이 분이 아케르 단장님이십니다." 라이짐이 고몽 페르도에게 말했다. 고몽 페르도는 계속되는 강행군에 거의 녹초가 된 상태였지만 라이짐이 안내해 주는 데로 아케르가 누워 있 는 천막을 찾았다. 아무리 피곤하다고 해도 생명의 은인을 만나게 해 주 겠다고 하는 라이짐의 권유를 거절할 수는 없었다. "이 분이 제... 생명의 은인이신 가요?" 고몽 페르도가 말했다. 고몽 페르도는 라이짐보다 한 살이 더 많았지만 어린 아이 같은 외모에 뽀얀 피부를 가지고 있는, 도무지 야전에는 어울 리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었다. 계집아이 같이 생겼군. 하늘거리는 고몽 페르도의 머리카락을 바라보면서 라이짐은 생각했다. "그렇습니다. 기억이 잘 나지 않으실 겁니다. 그때 고몽 페르도 십부장 님께서는 의식을 잃고 있는 상태셨으니까요." 라이짐은 정중하게 말하면서 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사실 고몽 페르 도가 기절한 상태로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했던 것은 에이스 자매 중 셋 째인 자이스였다. 하지만 그가 프란스 패르도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안 라 이짐은 자료를 수집하고 이런저런 계산 끝에 공작을 시작했던 것이다. "성황청 녀석들의 공격 때문이었습니다. 성구에 당하셨지요." "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아케르 단장님께서 고몽 페르도 십부장님을 몸으로 감싸 막지 않으셨 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감히 입에 담기도 어렵습니다." 라이짐의 말에 고몽 페르도는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표정 으로 아케르의 손을 잡았다. "제가 이 은혜를 갚지 못한다면 국경 너머 바바 족에게 제 창자를 모두 내 주어도 좋습니다. 페르도 가문의 명예를 걸고 맹세합니다." 아케르에게 들릴 리는 없었지만 고몽 페르도는 진심 어린 목소리로 이 렇게 말했다. 라이짐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심각한 표정으로 고몽 페르도의 맹세에 경의를 표했다. "이제 곧 프라브리티에 닿게 될 것입니다." "여름이 끝날 무렵이겠지요, 도착할 때가 된다면." "여름은 그리 길지 않습니다." "예. 용기를 주시려고 하는 말씀이신 거,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 금으로서는 살아 돌아간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군요." "꼭 살아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갚아야 할 것이 있는 사람은 결코 죽지 않습니다. 결코." 라이짐은 다짐하는 사람처럼 이렇게 말했다. 라이짐의 머릿속으론 자신 이 갚아야할 빚이 떠올랐다. "그런데, 아까부터 묻는다는 걸 잊고 있었습니다. 귀하의 성함과 직함 은 어떻게 되시는 지요? 감사의 말씀을 드리려고 해도 성함을 알지 못하 니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이름 없는 사람입니다. 아실 필요도 없고요. 하지만 나중에 때가 되면 자연히 알게 되시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라이짐이 말을 끊자 고몽 페르도는 불안한 기색으로 라이짐의 눈치를 살폈다. "저한테 감사하고 싶은 마음이 혹시라도 있으시다면 단장님께서 일어나 시기를 기도해 주십시오." 라이짐은 이렇게 대답했다. 이 일에 있어서 자신은 뒤로 빠져야 한다는 것이 라이짐의 생각이었다. 지금 라이짐이 하고 있는 행동은 사실 단순한 신념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아케르가 프란스 페르도의 신임을 얻는 일은 장기적으로 귀족을 없애나가는 데에 큰 역할을 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고 라이짐은 믿었다. 그리고 이런 일에는 자신과 같이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 를 지향하는 사람의 힘이 분명 필요하다고도 믿고 있었다. 그날 밤, 에이스는 라이짐에게 질문을 던졌다. (에이스는 거의 질문을 하지 않는 습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라이짐으로서는 에이스가 질문을 한다는 사실 자체가 의외였다) "아케르 단장님이 일어나시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에이스의 목소리는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라이짐은 에이스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불쾌한 어떤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평소와 맞지 않는 행동, 거 기다 이상한 목소리까지. 하지만 라이짐은 에이스에게 진 빚이 있다고 생 각하고 있었다. 기분 따위는 별로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에이 스가 이상한 행동을 한다면 그 책임이 자신에게 있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 문이기도 했다) "물론이야." "어떻게 확신하시죠?" 악의가 느껴지는 질문이었다. 검은 엘프 족이 이런 식으로 말한다는 건 상상조차 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단장님이 나한테 그랬거든. 프라브리티에 가면 다시 시작하자고. 살아 야 할 이유가 있는 사람은 죽지 않아. 그렇게 믿어." 라이짐은 대답하기는 했지만 이 말은 스스로도 믿기 어려운 생각이었 고, 라이짐 본인도 그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아케르는 하잔에 가면 다시 시작하자고 말했다. 물론 아케르는 하잔에서 깨어나지 못했고, 그래서 라이짐은 하잔에 가면 다시 시작하자는 말을 프라브리티에 가면 다시 시작하자는 말로 고쳐 대답했다. "살아야 할 이유가 있는 사람만이 살아남는 것은 아닐 겁니다. 죽어야 할 자들이 죽지 않는 것처럼 말이지요." 에이스가 말했다. 라이짐은 에이스의 말이 무슨 잠언처럼 여겨졌다. "... 오늘 좀 이상한데, 에이스?" 라이짐은 행여 에이스의 기분이 상하지나 않을까 조심스럽게 이렇게 말 했다. (검은 엘프 족이 기분 상하기도 한다는 말은 들어 본 적도 없었지 만) "아케르 단장님이 일어날 것을 바라십니까?" "물론. 누구보다도 더." "만약 아케르 단장님이 다시 일어나 용병단을 지휘하게 된다면 그건 아 케르 단장님이 살아야 할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라이짐 님의 그 마음이 단장님을 일으켜 세웠기 때문일 것입니다." 에이스는 이렇게 말하고는 라이짐에게 다가왔다. 명령 없이 다가오는 법이 없는 에이스였다. 라이짐은 몸이 저절로 주춤거렸다. "소원은 이루어질 겁니다." 에이스는 이렇게 말하고는 갑자기 앞으로 쓰러졌다. 라이짐은 황급히 에이스를 부축했다. 에이스는 의식을 잃었지만 아주 짧은 순간, 에이스의 손이 라이짐의 손끝을 스치는 것을 라이짐은 느낄 수 있었다. 언젠가 전 에도 느낀 적이 있는 손길이었다. 하지만 라이짐은 에이스를 자리에 눕히 느라 그 손길과 느낌에 대해서 더 이상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6876/19898 ━━━━━━━━━━━━━━━━━━━━━━━━━━━━━━━━━━━━━━━━ 제 목:[탐그루] 신성제국 206 관련자료:없음 22/22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3-03 00:10 조회:1992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프라브리티에 들어가는 날이 왔다. 하잔에서 행군해 오는 동안 늘 그리 던 프라브리티였다. 프라브리티는 성벽으로 보호되고 있는 성곽도시였다. 달랑 검문소 하나가 도시의 입구임을 말해주고 있는 탐그루와는 당연히 다른 모습이었고, 아케르 용병단의 팜 산맥 주둔지와 비교해도 그 크기나 위용 면에서 압도하는 느낌을 주는 도시였다. 아마도 바바 족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니 만큼 이렇게 시 외곽을 높은 성벽으로 둘러싸는 건 당연한 이치였다. 높다란 성곽 밑으로는 깊게 판 해자에 물이 고여 있었다. "안토니오 장군님이 오셨다!" 망루를 지키던 병사의 목소리가 높게 울려 퍼지고, 이윽고 프라브리티 시의 성문이 열리고 다리가 해자를 가로질러 내려왔다. 선두에 선 안토니 오 장군의 군단이 다리에 첫발을 디딜 때, 라이짐은 가슴이 뛰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길가에 늘어서 있는 시민들이 돌아온 안토니오 장군 일행에게 꽃가루를 뿌리고 있었고, 그 뒤를 이어 행진해 들어오는 아케르 용병단에 도 비록 열렬한 환호는 아니었다고 해도 박수 갈채 정도는 보내주었다. 그렇게 쉽게 환영받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기분 나쁜 일이기는 했 다. 앞장서서 걷고 있는 안토니오 장군의 군단이 살아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 누구 덕인지를 생각해 본다면 말이다. 사실 박수를 치고있다고는 해 도 대부분의 시민들이 그저 안토니오 군단이 지나갈 때 보냈던 환호의 관 성으로 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어떤 경우 싸늘한 시선으로 아케 르 용병단의 병력을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라이짐은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너무나도 오랫동안 이 순간을 기다려왔기 때문이기도 했고, 이제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되었 다는 기대 때문이기도 했다. 물론 상황이 그렇게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 다. 아케르는 여전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고, 프라브리티에 입 성하고서도 아케르 용병단은 야전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땅한 건물 하나를 주어 편히 쉬게 해도 좋으련만 일단 스파일 측으로부터 들을 수 있었던 공식적인 견해는 일단 임시로 마련된 광장에 주둔하고 있으라 는 일방적인 통보뿐이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좋겠소. 곧 좋은 소식이 있을 테니. 스파일 측 의 입장도 생각해 주셔야 하지 않겠소?" 안토니오는 아케르 용병단의 지휘관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면 그렇게 할 수 밖에요." 순무는 이렇게 짤막하게 용병단의 입장을 밝혔다. 순무의 마음은 분명 불편하기 짝이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감정을 그렇게 쉽사리 드러낼 만큼 순무의 용병단 경력이나 인생은 짧지 않았다. 하지만 '조금'이라는 안토 니오의 말은 일주일이 넘게 걸렸다. 라이짐은 불안과 초조 속에서 그 일 주일을 보냈다. 스파일 측에서 식사를 제공하기는 했지만 라이짐은 에이 스에게 혹시 식량에 독이 들어 있지 않은지를 알아보도록 지시할 만큼 신 경이 예민해져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케르를 위한 사전 공작들이 빛 을 발하느냐 발하지 못하냐에 라이짐 본인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해도 과 언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나마도 아케르가 자리에서 일어난다는 가정 하에서였다. "라이짐, 라이짐!" 하진이 소리치면서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하진이 저렇게 소리를 지르 면서 감정을 과장하는 모습을 자주 봐 오기는 했지만 오늘은 다른 때보다 더 정도가 심했다. "놀라운 소식이야! 지금 막 순무한테서 들은 소식이라고!" "뭔데 그래?" "단장님이 이제 장군이 된다고, 장군이!" "그게 무슨 소리야?" 하진은 라이짐에게 그 순간부터 횡설수설하면서 장황하게 설명을 시작 했다. 하지만 라이짐이 결국 정리한 바는 간단했다. 스파일의 영주 프란 스 패르도의 명에 따라 아케르를 스파일의 정식 장군에 봉한다는 것이었 다. 다만 그 시기는 아케르가 병상에 있는 만큼 아케르가 자리에서 일어 나는 때로 한다는 것이 하진이 말한 요지였다. "그렇게 좋아만 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왜? 기쁘지 않아?" "기쁨에 취해야 할 순간이 있고, 또 그 순간에도 냉정하게 생각해야 할 지점들이 있는 법이지. 프란스 패르도의 생각을 나는 잘 모르겠어. 어쩌 면 단장님이 일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혹 시 그런 식으로 안토니오가 프란스 페르도에게 보고 한 것은 아닐까?" "하하하. 그것보다는 이렇게 생각하는 게 어때? 멍청한 프란스 페르도 가 아무 생각 없이 보고서에 결재했다고 말이야." 지금껏 흥분해서 떠버렸던 하진답지 않은 말이었다. 어느 새 하진은 평 소의 아무 생각 없이 냉소적이고 불평만 가득한 하진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런 식으로 말할 거면 왜 그렇게 기뻐했던 거야?" "재미있으니까. 솔직히 요즘 며칠 심심했거든." 하진의 말에 라이짐은 헛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얼마후 순무는 그 소식을 병사들에게 알렸고, 특히 게시판에 커다란 글 자로 아케르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즉시 장군직에 봉해질 것이라는 것을 알렸다. 그리고 그 날이 아케르 용병단에게 있어서 영광된 날이 될 것이 라는 말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쩌면 순무는 아케르의 회복에 너무 많은 것을 걸고 있는지도 몰랐다. 병사들의 사기는 올라갔지만 아케 르가 깨어나지 못하게 된다면, 혹은 너무 늦게 깨어나게 된다면 그로 인 해 생기게 될 반대 급부 또한 상당할 것이 분명했다. 그날 순무는 개인적으로 조용히 라이짐을 불러내었다. 사람들의 눈을 의식한 탓인지 순무는 지원부대의 작업장으로 장소를 택했다. 지원부대의 작업장에는 한창 병력들이 연금술사의 등을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라이짐은 쌓여있는 연금술사의 등을 바라보면서 순무를 찾 았다. 순무는 구석자리에 앉아 연금술사의 검은 돌을 만들고 있었다. "생각보다 일찍 왔군. 거기 대충 자리 잡고 앉게. 지금 하는 일만 마치 고 얘기를 하지." 순무는 조심스럽게 손을 놀려 검은 돌을 만들고 있었다. 바닥에는 고약 한 냄새를 풍기는 질퍽한 까만 흙이 덩어리져 있었다. "혼자 만들고 계시는군요." 기다리기가 지루해진 라이짐이 말했다. "검은 돌을 다루는 일은 위험한 일이거든. 이 일은 항상 나 혼자 한다 네." 순무는 마지막 마무리를 하는지 검은 돌을 들어 살피면서 말했다. "순무님께서는 어디서 연금학을 익히셨습니까?" 정보를 취급하는 일에 익숙해져서였을까. 라이짐은 순무에게 이렇게 물 었다. 단순한 호기심 때문도 있었지만 검은 돌을 보게 되자 탐그루를 빠 져나갈 때 했던 생각이 떠오른 것이 다. 그 때 라이짐은 그리폰들이 떨어 뜨리는 검은 색 물체가 연금술사의 검은 돌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오래 전 일일세." 순무가 말했다. "탐그루를 떠나 방랑하면서 스파일의 동쪽 해안에 닿았을 때 일이었지. 젊은 시절의 일이야. 나는 이 바르도 대륙의 곳곳을 다니면서 많은 것을 보고 배우고 싶었지. 탐그루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람은 정말 많았지만 그 사람들이 어떤 곳에서 살고 또 어떤 일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지 내 눈 으로 확인해 보고 싶었거든. 나는 그곳에서 한 노인을 만났지. 그 노인은 죽어가고 있었네. 나는 그 노인의 임종을 지켜주었지." 항상 일에 관한 이야기만 하던 순무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라이짐은 흥미롭게 순무의 이야기를 들었다. "죽기 전, 노인은 나에게 책을 한 권 건네주었네. 자폰이라는 나라에서 배운 기술을 적은 책이라면서 말이야. 그 책에 연금학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 있었네. 물론 완전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도 아니었고, 또 그리 자 세하지도 않았지만 나는 그 책을 바탕으로 연금학을 배울 수 있었다네." 순무는 여기까지 이야기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는 좀 위험하니까 다른 곳으로 가지. 가끔은 나도 이렇게 사적인 이야기를 좀 하고 싶어진다니까." 이렇게 말하고 웃음을 짓는 순무의 모습은 쓸쓸해 보였다. 순무는 라이짐을 이끌고 작업장 귀퉁이로 향했다. 차출 나온 병력들은 열심히 뭔가를 나르기도 하고, 또 뭔가를 만들기도 하면서 분주히 움직이 고 있었다. "저, 어떤 얘기를 하시려고..." "며칠 전 단장님께서 잠시 의식을 찾으신 적이 있었네. 정보부를 신설 해야겠다는 요지의 말씀을 하시더군." 라이짐이 말을 맺을 여유도 주지 않고 순무가 말했다. "예." "그리고 초대 정보부장에는 자네를 임명해야겠다고도 말씀하셨네. 알겠 나?" "예." "하지만 지금 새로운 부서를 만들고, 또 자네를 그 책임자로 임명하는 건 여러 사정을 미루어 볼 때 모양새가 좋지 않아. 내 말 알겠지?" "예." "단장님께서 자리에서 일어나시고, 정식으로 장군에 봉해지는 날, 그 날을 임명식 날로 정하지. 괜찮겠나?" "예." 공적인 질문을 던지는 사이에 순무는 어느 새 평소의 순무로 돌아가 버 렸다. 라이짐은 순무에게 뭔가 좀 더 물어보려다가 그만두었다. 순무가 자신은 일이 있다면서 다시 작업장으로 돌아갔기 때문이었다. 결국 라이 짐은 예 소리만 몇 번하고 자신의 숙소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돌아오는 길 내내 뭔가 어긋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뭔 가 잘못되어가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너무도 많은 것을 아케 르 단장이 일어나는 일에 맞추어 일이 진행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만에 하나 아케르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게 된다면 사기가 떨어지는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아케르 용병단의 존립 자체가 불투명해질지도 모르겠 다고 라이짐은 생각했다.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단순한 아케르 용병단의 문제가 아니라 아케르 용병단에 모여있는 수 많은 단원들의 꿈과 직결되 는 문제가 될 것이었다. 그리고 많은 단원들과 마찬가지로 라이짐의 귀족 이 없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꿈도 위태로울 수 있었다. 그 날 밤, 라이짐은 꿈을 꾸었다. 사방에서 그리폰의 불벼락이 내리고 있는 꿈이었다. 사람들은 그리폰의 이름은 알고있었지만 그리폰이 땅으로 떨어뜨린 검은 덩어리를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지는 알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누군가가 그것을 불벼락이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그것은 곧 명칭으 로 굳어지게 되었다. 라이짐은 꿈에서 잿더미가 되어버린 탐그루를 보았다. 그리고 그 사이 에서 타들어가고 있는 시체와 연기들을 보았다. 시체들 중에는 라짐도 있 었고, 라이짐의 어머니 이무르도, 하잔에서 보았던 반란군들도 있었다. 라이짐은 그 가운데에서 걸어오고 있는 한 소년을 바라보았다. 소년은 잿 더미가 되어버린 탐그루의 한 복판에 서서 사방을 둘러보고 있었다. 라이 짐은 그 소년이 위험한 인물이라는 생각에 칼을 뽑아들고 소년에게 다가 갔다. 소년이 라이짐을 바라보았고, 라이짐은 칼을 휘둘렀다. 칼이 소년 의 목덜미에 박히는 순간 라이짐은 그 소년이 바로 수르카라는 사실을 깨 달았다. 순간 라이짐은 비명을 지르면서 꿈에서 깨어났다. 이상한 꿈이군. 라이짐은 숨을 헐떡이면서 생각했다. 사방은 역시 어둠 으로 가득했고, 붉은 색 연금술사의 등마저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취침 등으로 쓰는 붉은 색 연금술사의 등이 들어오지 않는 날이면 라이짐은 꼭 악몽을 꾸곤 했다. "에이스. 에이스?" 라이짐은 그림자에 몸을 숨기고 있을 에이스를 불렀다. 에이스는 소리 없이 어둠 속에서 라이짐에게 다가왔다. 라이짐은 에이스의 손을 잡았다. 따스한 손을 잡으니 조금은 위안이 되는 것 같았다. "수르카를 봤어." "수르카 님이 여기에 오셨습니까?" "아니 내 말은..." 라이짐은 뭐라고 이야기하려다가 그만 두었다. 에이스의 대답은 항상 이런 식이었던 것이다. 라이짐은 자신이 머물고 있는 건물 밖을 내다보았 다. 어둠이 짙게 깔려 있는 프라브리티 외곽의 주둔지에는 연금술사의 등 빛 몇 개 뿐,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잔뜩 흐린 날씨였다. 라이 짐은 문득 자신이 혼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나도 외롭고 쓸쓸한 감정 이 들어서 라이짐은 도무지 견디기가 힘들었다. 아마도 조금 전에 꾼 꿈 때문일 것이라고 라이짐은 생각했다. 문득 유혹처럼 타호루의 말이 떠올 랐다. 외롭고 쓸쓸할 때 에질리를 부르라는 타호루의 말이. 타호루는 에 질리가 힘이 되어 줄 것이라고 말했었다. 라이짐은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한동안 에질리를 잊고 있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어쩐지 애질리를 부르면 불길한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에 함 부로 불러내기가 싫었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라이짐은 쓸쓸했고 또한 세상에 혼자 내버려져 있는 기분이 견딜 수 없었다. "승리는* 우리의* 것이다*" 라이짐은 마법의 말을 외웠다. 에이스가 라이짐을 불안한 눈빛으로 바 라보았다 "부르셨습니까, 라이짐 님." 에질리가 말했다. 에질리의 모습은 예전에 보았을 때 보다 오히려 더 불분명해 보였다. 사람의 형상이라는 것도 겨우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 다. "에질리. 네 모습이 잘 안보여." "그저 느낌일 뿐입니다. 라이짐 님께서 절 부르시는 마음은 제게 있어 서 훨씬 더 강렬하게 느껴지고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널 더 자세히 볼 수 있지?" "그런 방법은 없습니다." 에질리의 차가운 말이었다. 방법이 없다니. 얼굴도 똑바로 볼 수 없는 정령을 상대로 무슨 얘기를 나누고 또 위안을 받고 힘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일까. 라이짐은 자신의 처지가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호루의 말 만 믿고 에질리를 불러낸 자신이 조금 우습게 여겨졌다는 말이다. "눈을 보세요, 라이짐 님." "응?" 라이짐은 에질리의 말에 놀라면서 대답했다. "제 눈을 보시라고 했습니다." 라이짐은 에질리의 얼굴이라고 생각되는 곳을 바라보았다. 마치 최면 마법에 이끌리는 사람처럼 라이짐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에질리의 얼굴 (이라고 라이짐이 짐작한 부분) 에는 반짝이는 두 개의 눈동자가 뚜렸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음산하기까지 한 눈이 었다. 라이짐은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그 눈동자를 빤히 바라만 보고 있 었다. "제가 보이십니까?" 에질리의 말에 라이짐은 멍한 눈을 한 상태로 에질리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니, 본다기 보다 그것은 느낀다는 쪽에 가까운 것이었다. 에질 리의 얼굴은 시체처럼 창백한 빛을 하고 있었고, 사람이라기 보다는 조각 상에 가까운 뚜렷한 윤곽의 콧날과 얼굴선을 가지고 있었다. 전체적인 인 상은 차가운 쪽에 가까워서 라이짐은 에질리의 얼굴에서 차갑다는 인상만 을 받을 수 있을 뿐이었다. "라이짐 님. 저는 라이짐 님의 생각을 느낄 수 있습니다. 언제나, 항 상. 저는 반지의 정령이기 때문이지요. 라이짐 님의 손가락에 반지가 끼 어져 있는 이상, 저는 당신의 것입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6877/19898 ━━━━━━━━━━━━━━━━━━━━━━━━━━━━━━━━━━━━━━━━ 제 목:[탐그루] 신성제국 207 관련자료:없음 21/21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3-03 00:10 조회:1855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에질리의 말이 끝나자, 에질리의 눈동자는 사라졌고 라이짐도 제 정신 으로 돌아왔다. 제 정신으로 돌아온 라이짐은 버럭 화부터 내었다.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라이짐은 최면에 걸린 기분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하잔의 시 청 앞에서 발렌시아가 죄의식의 영역을 만드는 마법을 썼을 때, 라이짐은 지금과 비슷한 기분을 느꼈던 것이다. 그때 본 두렵기까지 한 기억의 단 편들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라이짐은 하잔의 일을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불쾌했다. 지금 라이짐이 화를 내는 것도 사실은 그때의 기억 때문이었 다. "라이짐 님께서 생각하셨지 않습니까. 제 모습을 보고 싶다고. 제 모습 을 보지 않고는 어떤 위안도 얻으실 수 없다고요." 라이짐은 에질리의 말을 듣는 순간 과연 내가 정말로 그런 생각을 했던 가 하는 의문부터 들었다. 하지만 잠시 생각을 더듬어 보니 정말로 그런 생각을 했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래. 내가 그런 생각을 했다고 치자.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주인을 그렇게 함부로... 할 수 있는 거야?" 라이짐은 에이스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에이스는 지금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가 궁금해하는 눈초리로 라이짐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는 반지의 정령. 반지의 원칙에 따라서 움직일 뿐입니다." 에질리의 말에 라이짐은 더 이상 그런 걸 가지고 뭐라고 하기가 싫어졌 다. 자신에게 원칙이 있다고 말하는 데 그 원칙을 지키지 말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알았어." 라이짐의 말에는 앞으로 에질리를 대할 때 생각마저도 주의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에질리는 라이짐의 말이 끝나는 순간 약간 의 미소를 머금었지만 뿌연 영상으로 밖에 에질리를 볼 수 없는 라이짐의 눈에는 그 미소가 보이지 않았다. "제가 한 일을 불쾌하게 여기지만은 말아주세요." 에질리가 말했다. "라이짐 님을 위해서라면 저는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라이짐 님의 소원을 이루어 드릴 것입니다." "세 가지만 말이지?" 라이짐이 에질리의 말에 대꾸했다. 여전히 기분나쁘다는 듯한 투였다. "예. 소원은 반드시 세 가지가 이루어 질 것입니다. 그것도 반지의 방 식대로 말이지요." "그럼 지금 네 모습을 볼 수 있게 해 준 것도 소원에 들어가나?" "팜 산맥의 오우거 본거지에서 말씀 드렸던 것으로 기억해요. 저는 반 지의 정령. 제가 지금 한 행동은 반지의 원칙에 따라서 행한 것일 뿐, 소 원이 아닙니다. 소원이라는 것은 반지의 주인이 진심으로 원하는 것이 이 루어지도록 하는 것이 소원이지요." "그래. 알았어." 어찌되었건 타호루의 말은 맞았다. 에질리의 정 떨어지도록 냉정한 말 을 듣고 있자니 외로움이고 쓸쓸함이고 뭐고 다 사라져 버렸으니 말이다. 라이짐은 이렇게 생각하면서 혼자 쓴웃음을 지었다. "됐어. 이제 좀 자야겠어. 에질리. 그냥 가. 더이상 하고 싶은 말은 없 으니까." "알겠습니다." 에질리는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아무런 소리도, 흔적도, 징후도 없 이 사라졌다. 라이짐은 에질리가 있던 허공을 잠시 바라보았다가 자리에 누워 잠자리에 들었다. 에이스는 아무 말도 없이 그런 라이짐의 모습을 글자 그대로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날 라이짐은 자면서 또 한 번 꿈을 꾸 었는데, 그 꿈에선 에질리의 모습이 나왔다. 에질리는 천장에서 라이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라이짐은 이번에는 비명을 지르면서 깨어나거 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에질리의 모습을 바라본다는 사실이 마음 편하 게까지 느껴졌다. 아케르가 자리에서 일어난 것은 그야말로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일 이었다. 아침에 숙소로 달려온 하진의 말을 들었을 때에도 라이짐은 정말 그말이 사실인가 의심스러웠다. 오후에 직접 자신의 두 눈으로 아케르를 볼 때까지도 믿어지지 않았다. "라이짐. 수고 많았네." 아케르는 라이짐의 손을 잡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침대에 걸터 앉아 있 는 아케르는 아직도 가슴에 붕대를 둘둘 감은 모습을 하고 있었고, 등에 는 진물이 베어 나오고 있었지만 그냥 보기에 아케르는 거의 건강을 회복 한 것 같았다. "기적입니다, 아케르 단장님. 어제만 해도 도저히 회복될 기미가 보이 지 않으셨습니다만 지금은 이렇게 건강하시니까요." "자네 덕분이지, 타호루. 아니, 우리 용병단 모두의 덕분일세." 오랫동안 의식이 있었다 없었다를 거듭했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쾌활한 목소리였다. 라이짐이 보기에 아케르의 모습은 그 어떤 때보 다도 더 활기가 넘쳐 보였다. "라이짐. 자네 공이 크네. 자네가 아니었다면 내가 이렇게 목숨을 부지 할 수도 없었을 것이고, 어쩌면 탐그루에서 퇴각하는 일 마저도 힘들었을 지 모르네." 아케르가 말했다. 라이짐은 아케르의 말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전 그저 제 일을 했을 뿐입니다." "앞으로도 자네는 자네의 일을 더 열심히 해 줘야겠어. 앞으로는 아케 르 용병단의 정보부장 직을 맡아서 일을 해야 할 테니까." 라이짐에게 말하면서 아케르는 미소를 지었다. 라이짐은 아케르 단장의 이마에 나 있는 십자 모양의 흉터와 그 미소가 묘하게 어울리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순무. 자네 라이짐이 탐그루에서 한 일에 대해서 알고 있는가?" "단장님을 호휘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 그런 일도 있었지. 하지만 이 친구 월권행위를 했다네. 이 친구 그때 직책이 뭐였는지 아는가? 내 직속 십부의 십부장에 불과했어. 그런 데 이 친구 자기 독단으로 백부장들에게 퇴각 명령을 내렸다네." 라이짐은 아케르의 이 말이 칭찬의 뜻인지 아닌지를 구분해 내지 못하 고 있었다. 내용 자체는 분명 자신을 나무라는 것이었지만 말투는 칭찬하 는 것처럼 들리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 친구를 위해서 정보부장이라는 자리를 마련해 주려고 하는 걸세." "... 예." 순무 역시 라이짐과 마찬가지로 아케르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모양인지 자신 없는 말투로 말했다. "라이짐. 내 말 뜻을 알겠는가? 앞으로 정보부장 일을 하게 되면 마음 껏 월권을 해도 좋다는 말일세. 아니, 마음껏 월권을 해야지. 암. 해야 하고 말고." 아케르는 이렇게 말하고는 소리내어 껄껄 웃었다. 라이짐은 감히 따라 웃지는 못했지만 기분만큼은 그 어느 때 보다 좋았다. "자. 이제 회의를 열어야겠네. 일단 퇴각 후 지금까지 벌어진 일들에 대해서 자세히 들어야겠어." "회의가 시작되기 전에 영주에게 일단 사자를 보내겠습니다." 순무가 말했다. 그리고 그 말이 담고 있는 의미를 몸으로 표현하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순무의 얼굴은 환히 웃고 있었다. 스파일의 수도 프라브리티에 있는 영주의 성안에 화려한 음악이 울려 퍼졌다. 길다란 금빛의 나팔을 문 나팔수들이 일렬로 늘어서 악을 쓰는 것처럼 높은 음을 연주하였고, 그 뒤에 서 있는 타악기를 다루는 궁중악 사들이 정신없이 손을 움직여 장단을 넣고 있었다. 라이짐은 귀청이 떨어 져 나갈 듯한 음악 소리에 정신이 혼란스러울 지경이었지만 이내 곧 익숙 해져서 주위를 살펴 볼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처음에는 음악 소리에 질려 버렸지만 높다란 천장과 벽면의 화려한 장 식들, 그리고 좌우에 늘어선 목 굵고 덩치 좋은 경비병들의 모습이 라이 짐을 압도하고 있었다. 라이짐은 잔뜩 주눅이 들어서 어깨를 늘어뜨렸다. "촌놈처럼 굴지 마, 라이짐." 발렌시아가 머리를 다듬으며 말했다. 발렌시아는 평민 출신이 분명했지 만 이런 환경에 익숙한 듯 보였다. 게다가 행동이나 말에서 풍기는 귀족 적인 냄새하며. 라이짐은 발렌시아는 과연 어떤 과거를 가지고 있을까 궁 금해졌다. 하지만 과거는 묻지 않는다는 용병단의 규칙에 따라서 물어볼 수는 없었다. 누군가 혹시 규칙에 별로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 발렌시아의 과거를 이야기 해 준다면 모를까. "후훗. 좋은 그림이로군." 발렌시아가 벽면에 그려진 그림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벽면에는 붉은 용과 카를로스 장군이 마칸(이라고 생각되는 마물)과 싸우는 모습이 차례 로 그려져 있었다. 영주에게 다가가는 동안 붉은 용과 카를로스가 마칸에 맞서 어떻게 싸우게 되었는지를 시간 순서대로 알 수 있는 그림이었다. 라이짐은 그 그림에 묘사된 마칸의 모습에 주목했다. 마칸은 금속으로 된 몸에 번개를 사용하는 무시무시한 마물로 묘사되어 있었다. 하지만 저게 진짜 마칸인지 아닌지는 과거의 사람들만이 알고 있을 것이었다. 이제는 묻혀 흙으로 돌아갔을 사람들 말이다. 바닥에는 스파일을 상징하는 붉은 용의 문양이 그려진 두터운 천이 깔 려있었다. 라이짐은 처음에 바닥에 깔려 있는 이것을 그냥 밟아도 되는 걸까 고민스러웠다. 한참을 고민한 끝에 내린 결론은 남들이 하는 것을 보고 따라하자는 거였다. "라이짐. 촌놈처럼 굴지 말라니까." 탐그루는 분명 도시임에 틀림없었다. 그것도 아주 번화한. 하지만 발렌 시아는 지금 라이짐의 모습을 보면서 촌놈이라는 말을 두 번이나 사용했 다. 하지만 라이짐은 기분이 별로 상하지 않았다. 자신을 촌놈이라고 생 각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이런 화려한 환경도 익숙하지 않다 뿐이지 시간이 가면 분명 익숙해지리라. 라이짐은 조심스럽게 바닥에 깔린 두꺼 운 천에 발을 딛었다. 사실 이런 사소한 일에 고민을 한다는 것이 라이짐에게는 전혀 어울리 는 일도 아니었고, 또한 별로 해 본적도 없는 일이었지만 지금만은 조금 달랐다. 긴장이 지나쳐서 화장실에 갈 때도 혹시 옷에 오줌이 묻으면 어 쩌나 하는 걱정까지 할 지경이었으니 말이다. 아케르 단장이 먼저 그것을 밟았고 뒤이어 백부장들이 밟자 라이짐도 따라서 밟으면서 앞으로 걸어 나갔다. 영주가 앉아 있는 곳을 향하여. 나 중에 들어서 알게 된 것이었지만 그 두꺼운 천은 융단이라고 불리는 것이 었다. 융단은 스파일 동부의 그리지아 산 일대에서 사는 양들의 털로 만 들어진 탄력 있고 따뜻한 최고급 바닥 장식용 물품이었다. 라이짐은 이렇 게 두꺼운 천을 밟아도 발자국이 남지 않는다는 사실을 신기해하면서 아 케르의 뒤를 따랐다. 영주가 앉아 있는 자리에 다가서자, 양옆으로 늘어서 있는 장관들과 귀 족, 자이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장군을 임명하는 날이니 나오기는 나왔지만 별로 탐탁치 않은 듯 하나같이 지루한 기색이 연연했다. 라이짐 은 그들 하나하나를 눈여겨보아 두었다. 언젠가 다 써먹을 때가 있을 사 람들이었다. 적으로써든 혹은 동지로써든 말이다. "지금으로부터 장군 임명식을 거행하겠습니다." 장관급쯤 되 보이는 사내가 목청을 돋우어 큰소리로 외쳤고 아케르가 먼저 무릎을 꿇고 영주 앞에 앉자 백부장들도 따라서 무릎을 꿇고 앉았 다. 저 젊고 콧수염 기른 친구가 행정장관이 맞다면 에이스에게 들은 그 대로, 저 사람의 이름은 부르도 올리비아이겠지. 라이짐은 이런 생각을 하면서 무릎을 꿇었다. 영주인 프란스 패르도는 당장 칼 한 자루만 쥐어 진다면 현역 장군이라 고 해도 믿을 만큼 체격이 당당한 사내였다. 나이도 그리 많아 보이지 않 아서 기껏해야 쉰이나 넘었을까 싶었다. 열 일곱의 자식을 가지고 있다기 에 노인을 연상했던 라이짐으로서는 조금 의외였다. 아마 첩을 여럿 두고 있는 모양이었다. 호색한이겠군. 라이짐은 영주의 사생활이 어떤 것인지 짐작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프란스 패르도를 그렇게 생각했다. 영주 쯤 되는 사람에게 있어서 자손을 만드는 일이란 쾌락을 얻는 일 이전에 중노 동에 가까운 일이라는 걸 라이짐이 알턱이 없었다. 프란스 페르도의 옆에는 부인으로 보이는 여자가 앉아 있었다. 나이는 프란스 페르도 보다 더 들었으면 더 들었지 어려 보이지는 않았고, 얼굴 에 진 주름과 늘어진 살가죽이 어딘지 불쾌한 인상을 풍기는 여자였다. 영주와 부인이 나란히 앉아 있다니. 아들만이 영주의 자리를 잇는다기 에 스파일에는 남자를 더 귀히 여기는 풍습이 있을 걸로 생각했던 라이짐 에게는 이 사실 또한 역시 의외였다. 어쩌면 영주의 부인이 그만큼의 능 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케르 말고도 평민 출신의 장군이 스파일에는 꽤 있다는 말을 들은 적도 있었던 점을 고려해 볼 때 아무래도 스파일에는 신분보다는 능력을 중시 여기는 분위 기가 분명 있는 것 같다고 라이짐은 생각했다. "지금부터 장군 임명식을 거행하겠습니다. 본 식의 진행은 행정장관인 저 부르도 올리비아가 맡겠습니다. 먼저 절차에 따라 스파일의 영지가(領 地歌) 연주가 있겠습니다." 부르도 올리비아가 말하자 음악이 행진곡 풍의 곡이 울려 퍼졌다. "스파일 국경 수비대의 군가야." 발렌시아가 라이짐에게 설명해 주었다. 라이짐은 고개를 끄덕였다. 군 가를 영지가로 쓰다니. 게다가 국가는 연주하지도 않고 말이다. 들은 그 대로 스파일은 과연 호전적인 사람들이 많은가 보다 싶었다. "다음은 장군으로 임명 될 아케르의 공적 설명이 있겠습니다. 아케르는 탐그루에 주둔하여 스파일 영의 안토니오 군단과 함께 치안 유지 및 마물 퇴치의 명을 수행하던 차에..." "다 아는 얘기야. 넘어가지." 프란스 패르도가 말했다. 굵직한 목소리였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라이 짐은 일순 당황했지만 장관들도 그렇고 사회를 맡고 있는 행정장관 부르 도 올리비아도 전혀 당황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아마도 프란스 패르도 영 주는 이렇게 절차를 무시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 모양이었다. "그럼 간략하게 진행하시겠습니까?" 부르도 올리비아가 말하자 프란스 패르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부르도 올리비아는 프란스 패르도에게 칼을 한 자루 내 밀었다. 라이짐은 저런 모양의 칼을 본 적이 있었다. 붉은 용의 문양이 그려져 있는, 안토 니오 장군이 가지고 있던 칼과 같은 모양이었다. "이 칼의 의미를 아는가?" 프란스 패르도가 아케르에게 물었다. 아케르는 주저하지 않고 알고 있 다고 바로 대답했다. "그럼 됐네. 여기 있는 사람 모두가 증인일세." 프란스 패르도는 이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부인도 따 라서 일어섰고 좌우에 늘어서 있던 높은 사람들은 프란스 패르도에게 고 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그리고, 아케르." 프란스 패르도가 말하자 모두들 조용해졌다. 무슨 말이 나오게 될지 다 들 궁금한 모양이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6878/19898 ━━━━━━━━━━━━━━━━━━━━━━━━━━━━━━━━━━━━━━━━ 제 목:[탐그루] 신성제국 208 관련자료:없음 23/23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3-03 00:11 조회:2156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고맙네." 이 말을 듣자 라이짐은 안도의 한 숨을 내 쉬었다. 자신이 오랫동안 준 비해 왔던 고몽 페르도 작전(이라고 라이짐은 불렀다)이 성공했다는 뜻이 기 때문이었다. 만찬은 장군 임명식에 바로 이어졌다. 장소 또한 같은 곳이었으며 식탁 몇 개 들어오고 음식이 담긴 수레 몇 개가 들어오는 것으로 간단하게 시 작된 만찬이었다. 다만 시끄러운 소리를 내던 금빛의 나팔수들이 물러가 고 보다 보기 편한 정복을 입은 악단이 들어와 귀족적이고 차분한 음악을 연주하는 것만이 조금 눈에 띌 뿐이었다. 라이짐은 탐그루에서도 악단의 연주를 몇 본 들어 본 적이 있었지만 지 금 듣고 있는 것과는 느낌이 사뭇 달랐다. 탐그루에서 들었던 음악이 자 신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바깥 세상의 음악 같았다면 지금의 음악은 마치 자신이 속해 있는 세상의 음악 같았다. 아니, 보다 분명하게 말하자면 지 금의 음악은 앞으로 라이짐이 속하게 될 세상으로의 행진곡이었다. 아케르는 행정장관의 안내를 받아 장군들과 요인들의 소개를 받고 있었 다. 그러니까 이 만찬은 일종의 배알식이 되는 모양이었다. "저 사람은 국방장관 츄바카지. 현역 때 훌륭한 장군이었다고 들었어. 평민 출신의 장군으로 장군들 사이에서 신망이 높다고 하더군. 그리고 그 옆은 내무장관 리콜 샤일록. 은행가를 주름잡던 자이벌 출신이지. 그리고 지금 단장님 옆에 붙어서 소개를 맡고 있는 사람은 부르도 올리비아. 유 명한 귀족 가문인 올리비아 가문의 장남이라고 들었네. 이제 갓 서른이지 만 능력이 높게 평가돼 행정장관직을 맡게 된 모양이야." 친절하게도 발렌시아가 라이짐에게 설명해 주었지만 라이짐은 에이스에 게 보고 받아서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자네는 이제 정보부장이 되지?" 붉은 색의 단 맛이 나는 술잔을 들고서 발렌시아가 물었다. 라이짐은 진이라는 이름의 그 술을 싫어했다. 맛은 달콤했지만 많이 마시면 머리가 아팠기 때문이었다. "예. 그렇다고 하더군요." "그럼 앞으로는 나한테도 정보를 좀 제공해 줄 수 있겠나? 이건 사적으 로 부탁하는 거네." 발렌시아가 능글맞게 웃으면서 라이짐에게 말했다. 라이짐은 그 미소를 바로 눈앞에서 보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역겨웠다. 촌놈이라고 함부로 말 할 때는 언제고 갑자기 친절하게 구는 게 이상하다 싶더니 이런 꿍꿍이가 있었군 싶었다. 이런 부류의 인간들은 언제 배신을 할지 모르는 법이다. "아케르 단장님께 여쭈어 보고 결정하겠습니다." 라이짐은 이렇게 말했다. 이런 친구들에게는 강자의 이름을 들려주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걸 라이짐은 알고 있었다. 과연 발렌시아는 당혹스러 운 표정으로 손에 든 붉은 진이 담긴 잔을 입술에 대었다가 떼었다가 하 다가 슬그머니 다른 백부장들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이런 자리는 딱 질색인데. 사실, 처리해야 할 잡무도 많고 말이야. 내 가 오늘 중으로 해결해야 할 서류가 얼마나 되는지 아는가? 급료에 급식 에 사상자 통지에... 휴우. 하지만 이거 빠질 수도 없고 말이야." 순무였다. 순무는 진을 많이 마셨는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고 말도 횡설수설 하고 있었다. "많이 드신 모양이로군요." "아냐. 딱 두 잔 마셨어. 아니, 세 잔이던가?" 순무는 꼭 잘못을 해 놓고 변명을 늘어놓는 어린아이처럼 중얼거리다가 잔을 비우더니 '그럼 이제 네 잔이야' 하면서 웃음을 지었다. "할 일도 많으시다면서 무슨 술을 그렇게 드세요." 라이짐은 술은 한 방울도 마시지 않고 있었다. 라이짐은 겨우 물 약간 정도만 입술에 대고 있을 뿐이었다. "그냥. 괴로워서." "뭐가 그렇게 괴로우신거죠?" "사는 게." "사는 게 그렇게 괴로우세요? 왜요?" 사실 순무정도라면 어느 정도 안정된 위치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말을 하고 있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긴 왜야. 술을 마시니까 괴롭지. 자네도 한 잔 하게." 혼자만 괴로울 수는 없다는 심산인 모양이었다. 라이짐은 대충 순무의 눈치를 본 다음에 술을 마시는 척하면서 물을 대신 마셨다. 술이라고 하 면 마시는 걸 누구 못지 않게 좋아하는 라이짐이었지만 이런 자리에서까 지 술을 마시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은 주의깊게 집중하고 있어야 할 시 간이라고 라이짐은 생각했다. "연금술을 배우기 시작하신 게 언제라고 하셨지요?" 화제를 술에서 다른 것으로 돌리기 위해서 라이짐이 물었다. "젊었을 때일세. 그런데 왜 자꾸 연금술에 대해서 묻는 건가? 혹시 연 금술사라도 되겠다는 심산은 아니겠지? 자네는 이제 정보부장이 되지 않 는가. 새로 생기는 자리지. 정보부. 말만 들어도 나는 가슴이 다 설레네. 비밀리에 뭔가 한다는 거, 정말 재미있을 것 같거든." 재미라. 라이짐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음지에서 일하는 게 그다지 좋은 일이 아니라는 걸 라이짐은 알고 있었다. "저는 빛을 다루는 게 더 재미있을 것 같아요." "무슨 말씀을 나누고 계셨습니까?" 이번에는 고몽 페르도였다. 라이짐은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고, 순무는 술기운을 감추기 위해서인지 다른 곳을 보면서 음악을 듣는 척 했다. "잡스러운 이야기였습니다. 별 뜻도 의미도 없는 이야기들이지요." "라이짐 말이 맞습니다. 제가 연금술을 좀 합니다만 그건 지체 높으신 분이 만지실 게 아니지요." "그거 재미있게 들리는 군요. 연금술사의 등은 매일 보면서도 신기해 요. 어떻게 빛을 내는 건가요?" "마법이지요." 순무는 이렇게 말하고는 혼자 뭐가 재미있는지 낄낄거리면서 다른 곳으 로 갔다. 자신의 직업이라 말하기 쑥스러운 것인지, 어쩌면 자신이 하는 일을 스스로 천하다고 여기는 열등감에서 나온 행동일지도 모르겠다는 생 각이 들었다. "라이짐 님. 이야기 들었습니다. 아케르 군단의 정보부장 직을 맡게 되 셨다고요. 축하드립니다." 고몽 페르도는 이렇게 말하고는 라이짐에게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라이짐은 약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귀족이 이렇게 쉽게 고개를 숙 이는 것을 본 적이 없는 것이다. "아닙니다. 칼이나 휘두를 줄 아는 용병출신에게 그렇게까지..." "그렇게 말씀하지 마십시오. 저도 분명 군인입니다. 십부장이라는 직책 도 있는 걸요. 칼을 든 사람에 칼로 대하는 일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 입니다." 라이짐은 고몽 페르도의 말투와 태도가 낯익었다. 마치 수르카와도 같 은... 이거, 존대말을 쓴다 뿐이지 수르카 녀석하고 똑 같군. 라이짐은 이런 생각을 하면서 미소를 지었다. 고몽 페르도는 그런 라이짐의 미소를 어떤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맞받아서 이해한다는 의미의 미소를 보냈다. 그 순간 라이짐의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고몽 페르도와 친해 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이용할 수 있을 때 까지 이용해 먹는 거다. 정보통으로. 또한 동지로 말이다. "자네가 라이짐인가?" 라이짐은 목소리를 듣는 순간 흠칫 놀랐다. 굵은 목소리로 자신을 부른 사람은 바로 프란스 패르도 본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아케르 장군에게 들었네. 재주가 많다고 하더군." "과,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물론 프란스 패르도의 눈에 들면 자신이 활동하는 데 더 큰 도움이 될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아직 프란스 패르도는 라이짐에게 벅찬 상대였다. "난 재주 있는 사람을 좋아하지. 자네, 앞으로 이 바르도 대륙의 역사 가 어떻게 진행되리라 생각하는가?" 난데없는 질문이었다. 라이짐은 어떤 대답을 해야 할까 잠시 망설였다. "재주 있는 사람들이 이끌겠지요."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으면서도 프란스 패르도의 마음에 들만한 대답이 라고 라이짐은 생각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라이짐의 마음에 든 것은 이 말이 진심에서 나온 말이라는 거였다. 프란스 패르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 친구들을 보게. 음악을 들으면서 돼지 같이 먹기만 하는 친구들 말 일세. 저 귀족들은 모르지. 무엇이 역사를 이끄는지. 아니 역사가 뭔지도 모르지." 음식이 가득 담겨있는 수레 앞에 멈추어 서서 음식을 먹고 있는 사람들 을 가리키면서 프란스 패르도가 말했다. 라이짐이 보기에도 귀족들은 정 말 벌레처럼 보였다. "미래에도 저 친구들은 똑같을 걸세. 아무런 변화도 없고, 아무런 발전 도 없이 말일세. 지금 바르도 대륙은 위기를 맞고 있네. 똑똑한 친구들은 어디에 숨었는지 나오지 않고 마물들과 마칸이 돌아온다는 소문과 징조만 이 날뛰고 있지. 백성들은 사는 게 고단해 지고, 내가 해야 할 일들은 너 무도 많아. 내가 해야 할 일이 적어야 좋은 세상일 텐데. 나는 자네 같은 젊은이들이 앞으로 이 바르도 대륙을 이끌기를 바라네. 재주 있는 친구들 이 좀 더 많이 모인다면 저 국경 너머 바바 족들을 완전히 응징할 날도 멀지 않겠지." 프란스 패르도는 이렇게 말하고는 라이짐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라이 짐은 숨이 멎을 것 같은 긴장을 느꼈다. "자네 머리, 정말로 희군." "예." 프란스 패르도는 아무 말도 없이 한참 동안 라이짐의 머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라이짐은 프란스 패르도가 과연 무슨 생각으로 그런 행동을 하는 지 알 수가 없었다. "전설을 믿는가?" 그제서야 프란스 패르도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질문을 던지는지 라이짐 은 짐작할 수 있었다. 백발의 영웅 전설을 말하고 있는 것이리라. "저는 재주 있는 사람을 믿습니다." 라이짐의 대답에 프란스 패르도는 웃음을 터트렸다. "좋은 대답이었네." 그 때였다. 얼굴에는 흙먼지가 덕지덕지 붙어있고, 옷에는 진흙이 말라 붙어 거지 꼴을 한 병사 하나가 프란스 패르도 장군에게 달려왔다. 프란 스 패르도의 옆에 서 있던 호위병이 병사를 제지했으나, 프란스 패르도는 오히려 호위병들을 뒤로 물렸다. "자나크 접경에서 온 사바입니다. 긴급한 일이 있어 이렇게 직접 보고 드리려고 찾아 왔습니다." "어떻게 계통을 밟지 않고 바로 왔는가? 위병은 어떻게 통과했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프란스 패르도가 물었다. "영주 님의 명령을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프란스 패르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무슨 일인가?" 프란스 패르도가 남루한 차림의 병사에게 보고를 받기 시작하자 장관들 이 몰려왔다. 다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눈치 챈 모양 이었다. "성황청이 자나크의 영주를 포섭했다는 급보입니다. 성황청은 자나크 주를 폐하고 자나크에 신성제국을 건립한다고 선포했습니다. 성황은 스스 로를 황제로 칭하고 비스토브레 왕국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전령이 가지고 온 소식은 놀라운 소식이었다. 장관들은 하나같이 당황 했고 뭐라고 수근 거리는 사람, 믿을 수 없다고 탄식하는 사람, 다들 무 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들이었다. "대의 명분은?" 프란스 패르도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서 이렇게 말했다. "마칸의 강림을 자신들이 막겠다는 것입니다. 당장이라도 성전을 빙자 하여 스파일이든 타실로든 쳐들어갈 기색입니다." "음악을 멈출까요?" 부르도 올리비아가 프란스 패르도에게 물었다. "음악을 멈추지 말아요. 그 음악은 그 돼지들을 위한 거니까. 돼지는 이런 일에 끼어 들 능력도 없고, 끼어 들어서도 안되지요." 영주의 부인이었다. 영주의 부인이 입을 열자 장관들이 모두 꿀먹은 벙 어리 신세가 됐다. "영주님. 일단 만찬을 끝내지요. 그리고 각료 회의를 소집하도록 하겠 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프란스 패르도가 말했다. 영주의 부인에 대해서는 들어 본 적이 없는 데. 과연 어떤 사람이며 이름은 무엇일가. 라이짐에게는 또 하나의 정보 수집 대상이 생긴 셈이 되었다. 영주의 부인은 이름조차 알려져 있지 않 았지만 틀림없이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 그리고 하나 잊을 뻔했군. 국방 장관. 이 거지 꼴이 다 된 친구를 십부장에 임명하게. 재주 있는 친구야." 프란스 패르도는 말했다. 부인의 말 그대로 만찬은 끝까지 진행되었고 마지막 순간까지 음악은 멈추지 않았다. 라이짐은 통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숙소에서 라이짐은 자리에 누웠다 가 다시 일어섰다가 물을 마셨다가 하고 있었다. 누워서도 몸을 이리 뒤 척 저리 뒤척하며 잠들지 못했다. 성황청이 신성제국을 선포하고 비스토브레 왕국에 반기를 든 이상 한판 싸움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아케르 군단이 이때 큰 공을 세울 수 있는 방 법은 무엇일까. 구체적으로는 어떻게 해야 성황청의 성구에 대항할 수 있 을까를 생각하느라 라이짐은 희게 센 머리카락이 다 빠져버릴 지경이었 다. 연금술사의 붉은 등이 라이짐에게 힘을 북돋아 주고 있었다. 생각하자, 라이짐. 분명 무슨 수가 있을 것이다. "에이스. 자나크로 보낸 자이스하고 나이스는 소식이 없어?" "아직 정보 수집중입니다." "그, 그래. 타실로 보낸 라이스하고 바이스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 그래." "직접소통이 닿는 즉시 알려드리겠습니다." 에이스가 안쓰럽다는 듯이 라이짐에게 말했다. 지금 라이짐은 자신이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의 직책을 맡아 당황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정말 나에게 재주가 있는 걸까. 나에게 정보부장이라는 직책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재주가 있는 걸까. 라이짐은 알 수가 없었다. "좀 주무세요. 잠을 잘 자지 않으면 좋은 생각이 나지 않는 법입니다." 에이스가 말했다. 그러자 라이짐은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 었다. "좋은 꿈을 꾸실 겁니다. 그리고 아침이 되면 틀림없이 좋은 생각이 나 시겠지요." 라이짐은 뭐라고 대답하려고 했지만 결국 잠이 들고 말았다. 에이스는 천천히 라이짐에게 다가갔다. 그 때 라이짐에게 탐그루에서 보았던 그리 폰이 떨어뜨리는 검은 덩어리들이 허공을 떠다니는 환상이 보였다. 에이 스는 손바닥으로 라이짐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승리는 반드시 우리의 것이 될 것입니다." 그 의미를 짐작할 수 없는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에이스가 말했다. PRINTER/CAPTURE를 OFF 하시고 [ENTER] 를 누르십시오.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6975/19898 ━━━━━━━━━━━━━━━━━━━━━━━━━━━━━━━━━━━━━━━━ 제 목:[탐그루]A terrible beauty is born 209 관련자료:없음 18/18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3-04 22:46 조회:2165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 A terrible beauty is born 너무나도 많은 일이 있었다. 짧다면 짧은 이 여름과 가을 사이에 내가 겪은 일은 보통 바르도 대륙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일생동안 겪을 수 있는 일이란 일은 다 모은 것보다도 많을 것이다. 이건 결코 과장이 아니다. 바르도 대륙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대부분은 한 마을에서 태어나 한 마 을에서 자라 한 마을에서 죽는다. 그 마을은 내 아버지가 태어난 곳이고, 내 할아버지가 태어난 곳이고, 또한 내 아들과 손자가 죽을 곳이기도 하 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말 이다. 고향을 떠나는 사람은 내 친한 친구 라이짐처럼 보통 뭔가 목적을 가지고 떠나기 마련이다. 그리고 성공해서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꿈꾼다. 언젠가 나도 탐그루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하지만 거기에는 성공이 라는 단서가 붙는다. 하지만 내게 성공이라는 건 뭘까? 아니, 어떻게든 성공했다고 치자. 그러면 탐그루로 돌아가 탐그루에서 죽을 수 있을까? 이렇게 대륙의 반대편에서 고향을 생각하고 있자니 결코 탐그루로 돌아가 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그저 보통의 사람들처럼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로스안을 떠난 우리 일행은 일단 홀리우드로 향했다. 스칼렛과 마로우, 그리고 오브라디 교수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스칼렛은 내게 직접소통으로 오브라디 교수와 자신이 머무르고 있는 곳을 계속해서 알려주었다. 오브 라디 교수가 이끄는 일행은 길 한가운데에서 야영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 다. 길이 어긋날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그렇다고는 해도 그 장소를 수시로 바꾸지 않으면 안되었다. (물론 가까운 범위 안에서의 일이기는 하지만) 우리 일행은 지금 쫓기고 있는 몸이었기 때문이었다. 길은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이따금 보이는 백년수나 라마같은 동물들도 힘겹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가끔씩 보이는 황금의 샘 역시 반갑기는 했지만 강렬한 태양빛에 지쳐버린 기린들 또한 그리 보기 좋은 모습은 아 니었다. "우정의 시작은 좋았지만 이거 좀 심한 게 아닌가 싶네. 솔직히 말해서 미안하다는 생각도 드는군. 그 좋은 자치 대장 자리도 내 팽개치고 떠날 만큼 절박한 사정이 있었던 건 아니지 않았는가?" 사빈이 튜니티에게 말했다. 튜니티는 뮤를 상당히 조심스럽게 몰고 있 었다. 아마 길이 덜 든 뮤인 모양이었다. 고삐를 느슨하게 쥐지 못하고 있는 튜니티의 모습을 보자니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아마도 급하게 떠 나게 되는 바람에 늘 타던 뮤를 데리고 오지 못하게 된 모양이었다. 그 와중에서도 스타바를 잃지 않게 된 것이 무척 다행스러웠다. "글쎄. 그냥 이렇게 생각하는 게 어떤가? 자네가 없는 사이환 까페를 보는 게 싫어서 그랬다고 말일세. 자네가 없으면 심심하니까 말이야." 튜니티는 그렇게는 조심스럽게 뮤를 몰면서도 여유를 잃지 않고 이렇게 농담을 했다. 참 성격 좋은 사람이다 싶었다. "그나저나 나는 자네가 반란군의 일원이라고는 상상도 해 보지 못했네. 성황청 심부름꾼 역할이나 하던 자네가 말이야." 사빈이 바리바에게 말했다. 사빈의 말은 다분히 도발적인 것이었지만, 다행히도 말투가 농담조여서 바리바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스트라세의 말에 따르면 바리바는 성황청과 반란군 사이의 이중 첩자였다고도 하지 않는가. "용사냥꾼을 꿈꾸던 자네가 까페 주인이 된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 니지." 두 사람이 마주보고 웃었다. 보기 좋은 풍경이었다. 오브라디 교수 일행을 찾아가는 길은 홀리우드와 이어진 길이어서 사람 의 왕래가 적지 않았다. 사냥을 할 필요가 거의 없을 만큼 우리는 마차에 식량을 싣고 이동하는 상인들을 자주 볼 수 있었고, 그들이 들려주는 세 상 돌아가는 이야기는 듣기만 해도 재미있었다. 그 진위여부는 떠나서 말 이다. "성황청이 탐그루에 제국을 세웠다는 말은 들어 본 적 있소?" 말린 고기와 소금에 절인 야채를 싣고 가던 상인에게 식량을 사던 중이 었다. 여위고 나이들어보이는 상인이 우리에게 물었다. 탐그루. 나는 그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 가슴이 뛰었다. 언젠가는 돌아가야 할 곳. 내 고 향. "지나가는 상인들이 온통 그 이야기로 난리더군요. 하긴, 반란군이 여 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는 판국에 성황청 녀석들이 진짜 반란군이 되었으니 이걸 어쩝니까?" 사빈은 바리바를 보면서 키득거리며 상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조금 쑥 스러운지 바리바는 헛기침을 했다. "글쎄요. 이제 이 대륙 전체가 혼란 속으로 빠져들게 된 게 아닌가 싶 군요. 저야 장사만 잘 되면 그만이지만." 상인은 이렇게 말하면서 너털웃음을 지었다. 잿더미가 된 탐그루에 성 황청이 제국을 세웠다. 그렇다면 라이짐은 하잔에서 아케르 용병단의 일 원으로 있으니 분명 성황청과 한 판 대결을 앞두고 있을 것이다. 다들 일 전을 앞두고 긴장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떠버리 하진도, 말더듬이 기 밀도, 차이린과 가투신은 물론이고 같은 십부원이었던 부관인 청강, 청강 의 라이벌 채리, 어깨가 참 넓었던 큰새, 래드와 블루 형제, 엉터리긴 하 지만 종종 음악을 들려주었던 나카 모두 마찬가지로 힘들겠지. 그런데 이렇게 생각을 하고 보니 나는 과연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 것 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은 무엇인가? 나는 오브라디 교수를 찾아가고 있었다. 아니, 그 이전에 용병 생활을 했고, 사람을 죽 였다. 라스폼? 그래. 라스폼이 있었지. 나를 이용하려고 했던 라스폼 말 이다. 라스폼은 지금 살아있는지 죽었는지조차 알지 못하지만 그 빌어먹 을 녀석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된 건지도 모른다. 라이짐의 원수인 루비오 녀석과 그 자식 똘마니 쥬크도 있다. 하나같이 재수 없는 녀석들이다. 하 지만 다시 볼일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나와는 사는 세계가 다른 녀석들 이니까. 그리고 마소드의 검이 있다. 아버지의 검 마소드. 나에게 반응하 였던 바로 그 마소드의 검. 언젠가 그 검을 찾아 입을 맞추면 진정한 어 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물론 그것이 나를 어른으로 만 들어 주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그리 오래지 않아 알게 되었지만. 그리 고 임프 시에서 오브라디 교수를 만났다. 오브라디 교수는 나에게 아모리 카 대륙에 대한 이야기와 마칸의 강림을 막는 일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 었다. 하지만 이렇게 장황하게 생각을 해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한가지 의문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나는 지금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문득 라이짐이 떠올랐다. 라이짐은 용병 단에서 확실한 자신의 목표를 찾은 모양이었다. 라이짐은 복수도 복수지 만 아케르의 깃발 아래에서 아케르의 뜻에 따라 귀족 없는 세상을 꿈꾸고 있으리라. 라이짐은 아마도 지금 자신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분 명하게 알고 있겠지. 하지만 나는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귀족이 미웠고, 성황청이 미웠던 것은 사실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이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목적을 위해 누군가를 죽여야 하는 일은 도저히 할 수 없었다. 과연 누군가를 죽여야만 목적을 이룰 수 있는 것일까? 피 없이 뭔가를 얻는 일은 불가능한 것일까? 사빈의 칼을 맞고 쓰러져 있던 성황 청의 스트라세가 떠올랐다. 비록 그곳에서 죽었지만 스트라세 또한 라이 짐처럼 자신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분명하게 알고 있었으리라. 하지만 나는 도무지 내가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뭘 그렇게 곰곰이 생각하고 있어?" 사빈이 내 옆구리를 쿡 찌르면서 말했다. 사빈은 아직도 내 이름이 라 이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차피 사빈이야 내 이름이 수르카건 라이 짐이건 전혀 상관없겠지만.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 나는 사빈의 질문에 오히려 이렇게 물었다. 물론 사빈은 내 물음의 의 미를 알 턱이 없었다. "무슨 소리야? 여긴 지금 실리포니아잖아. 라이짐. 정신 나간 거 아니 야?" 사빈은 진짜 내 이름이 무엇인지는 전혀 관심도 없는 모양이었다. 로스 안을 떠난 지 며칠이 흘렀고, 또 그 동안 수도 없이 나를 수르카라고 부 르는 걸 들었으면서도 사빈은 여전히 나를 라이짐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관두자. 어차피 내가 뭘 하건 아무런 관심도 없잖아?" 나는 이렇게 말하면서 인상을 팍 썼다. "정말* 모르겠어* 여기가 어디인지* 또*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 는지*" 순간 나의 말은 마법의 말이 되어 마력을 발휘하였다. 문득 오한이 온 몸을 훑고 내려갔고, 당장은 이것이 무슨 마법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 만 나는 아자닌을 불러내어 어떤 마법의 말인지 묻는 짓은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무엇보다도 모든 일이 다 귀찮아 진 것이다. 스칼렛과의 직접소통 덕분으로 우리 일행은 쉽게 오브라디 교수를 찾을 수 있었다. 오브라디 교수와 스칼렛, 크라이와 크레텔은 물론 마로우도 함께 있었다. "크라이는 그레텔과 함께 홀리우드로 찾아왔어요. 붉은 용에 대한 전설 을 뒤따라 온 거지요. 사실 그건 잘 된 일이었지요. 홀리우드의 오리피 신전에서 우리는 그레텔 덕분에 중요한 단서를 찾을 수 있었으니까요." 스칼렛이 나에게 말했다. 여름밤은 한없이 깊어가고 있었고, 달빛을 받 아 기울어지는 숲의 그림자 역시 한없이 깊은 어둠을 바닥에 드리우고 있 었다. "바리바가 구해 온 책과 같은 내용이었다네, 수르카 군. 결론은 범버쿠 정글로 가야 한다는 거였네." 오브라디 교수가 딱 잘라서 말했다. "범버쿠 정글이라뇨? 여기서 한 참 먼 곳 아닙니까?" "그렇지. 남쪽으로 일주일은 넘게 가야 범버쿠 정글에 닿을 수 있지." "그곳에는 온갖 험악한 마물들로 가득한 곳이라고 하던데요, 스승님.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미개하고, 심지어는 사람을 먹으면 서 살아가는 종족들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사빈이 오브라디 교수에게 말했다. 사빈은 오브라디 교수를 꼭 스승님 이라고 불렀다. 예전에 스파일 주립대학을 다니고 있을 때, 사빈은 오브 라디 교수의 강의를 듣고 용사냥꾼이 되기로 결심했다고 했다. 오브라디 교수의 붉은 용에 대한 전설을 듣고 자신이 직접 용을 찾아 그 비밀을 풀 겠다고 했다는 거였다. "글쎄. 나는 그곳을 다녀온 모험가들이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 네. 지팡고라는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는가?" 오브라디 교수가 사빈에게 물었다. 사빈은 잠시 생각을 하는 눈치더니 이내 곧 말을 이었다. "들어 본 적 있고 말고요. 황금으로 가득한, 범버쿠 정글 한 가운데에 있다는 나라 아닙니까? 그곳을 다녀온 모험가들이 그러더군요. 사람들은 전부 비단으로 된 옷을 입고 다니고, 길에는 황금이 깔려있는 곳이라고 요. 하지만 그곳 사람들은 워낙 야만인이어서 함부로 사람의 목을 베는 풍습이 있다고 하던 데요? 길거리에 침을 뱉었다가는 바로 당장에 그곳 무사들에게 목이 베일 정도로 목을 베는 일이 흔하다고들 하더군요." "그런 생각을 뭐라고 부르는 지 아는가? 학술 용어로 '자기 눈으로만 보기'라고 한다네." 오브라디 교수는 꼭 학생에게 핀잔을 주는 스승 같은 어조로 사빈에게 말했다. 내게는 사비오 영감에게 저런 말투를 하도 많이 들었기 때문에 친숙한 말투이긴 했다. "내가 강의 시간에 늘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상대방을 이해할 때에는 상대방의 입장에서 이해하는 것이 기본이고, 이것이 학자가 미지의 세계 에 나설 때 항상 견지해야 할 태도라고 말일세." 오브라디 교수는 이렇게 말하고는 꼭 강의를 이끄는 강사 같은 태도로 일행을 죽 한 번 훑어 본 다음 말을 계속했다. "자네 혹시 스파일의 음악이 더 아름다운지, 타실의 음악이 더 아름다 운지 말할 수 있겠나?" "타실의 음악은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들이 많은 반면에 스파일의 음악 은 행진곡 풍의 강하고 경쾌한 곡들이 많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마로우가 오브라디 교수의 말에 사빈 대신 대답했다. 이건 완전히 교실 이로구만. "그래. 그 두 가지 중 어느 것이 더 좋다 나쁘다를 말한다는 건 본인의 취향을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겠지. 한 번 생각해 보게. 범버쿠 정글에 살고 있을 사람들은 어떠할까? 역시 마찬가지로 나름의 음악을 가지고 있 지 않겠는가? 나는 음악을 예로 들었네만 사실은 문화 전반에 걸쳐서 이 야기를 하고 있는 걸세. 그들의 문화는 그들의 잣대로 생각해야지 어떻게 미개하다고 함부로 말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국경의 바바 족도 나름의 문화를 가지고 있겠습니다." 튜니티가 말했다. 나는 튜니티의 말이 농담이라고 생각하고서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웃고 있는 건 나뿐이었다. "물론이지, 투니티. 바바 족이 왜 바바 족인가? 말끝이 '바바'로 끝나 는 것처럼 들린다는 뜻 아니었나? 그렇다면 바바 족이 우리를 '다다 족' 이나 '까까 족'이라고 부르지 않을 이유라도 있겠는가? 그들이 보기엔 어 쩌면 우리가 훨씬 더 잔인하고 끔찍한 인종일지도 모른다네." 오브라디 교수의 말을 듣자 나는 정말로 바바 족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 르면서 무서워하고 있었구나 싶었다. 바바 족이 우리를 어떻게 부를까 라 는 의문은 가져 본 적이 있었지만 바바 족도 인간이며 하나의 사회를 이 루고 있으리라는 건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건 이론일 뿐입니다." 튜니티는 지고 싶지 않은지 핏대를 올려가면서 말을 시작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6976/19898 ━━━━━━━━━━━━━━━━━━━━━━━━━━━━━━━━━━━━━━━━ 제 목:[탐그루]A terrible beauty is born 210 관련자료:없음 23/23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3-04 22:47 조회:1833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국경에서 바바 족과 전투를 벌인 경험이 있는 저로서는 바바 족이 악 마로밖에 여겨지지 않습니다. 나름의 문화라니요? 그들은 사람의 배에서 창자나 끄집어내는 야만족일 뿐입니다. 저는 보았습니다. 저와 함께 하던 전우가 바바 족에게 붙잡혀 창자를 쏟으면서 죽어 가는 모습을." 튜니티의 눈에 물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용병단 을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튜니티라고 해도 그런 일을 겪었다면 바바 족 을 인간으로 여기기 힘들 것 같았다. "전우를 잃은 일은 슬픈 일이지, 튜니티. 하지만 그것이 슬픈 일이라는 걸 안다면 바바 족의 누군가도 지금 모닥불 앞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슬퍼할 거라는 생각을 해 볼 수 있지 않겠는가?" 오브라디 교수의 말 또한 옳은 말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들도 인간이라 면, 또한 감정이 있다면 틀림없이 우리와 같이 슬퍼하고 기뻐할 것이 분 명했다. "그게 전투를 겪은 사람과 겪지 않은 사람의 차이입니다. 더 이상 이야 기하고 싶지 않군요." 튜니티는 이렇게 말하고는 대화를 잘라버렸다. 나는 두 사람사이에 결 코 넘어설 수 없는 벽이 놓여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잠 시 어색한 침묵이 있었다. "그런데 책에 쓰여 있는 내용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자폰이라고 하셨나 요?" 바리바가 조금이라도 활기를 띄게 하려는 듯이 억지로 웃음까지 지어가 면서 오브라디 교수에게 물었다. "그렇지, 자폰. 기억하고 있었구만. 황금에 눈이 먼 자들은 그곳을 지 팡고라고 부르기도 한다네." 자폰이라는 이름은 나도 기억하고 있었다. 스칼렛의 아버지인 세스타 가문의 오하루가 나에게 주었던 선물이 바로 자폰에서 난다는 비단으로 만들어진 옷이었기 때문이었다. 집 한채 값이나 한다는 데 어떻게 쉽게 잊을 수가 있단 말인가? 물론 지금도 비단 옷은 내 배낭 안에 고이 간직 되어 있었다. (형편없이 구겨져 있을 것이 분명하긴 했지만) "오리피 신전에서 찾아낸 말에도 그런 말이 있었다네. 자폰에도 오리피 신전이 있으며, 그곳에도 용이 있을 것이라고 말일세." "저도 용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 있다는 말만 듣고 무작정 홀리우드로 향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쉽게 만나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 다만." 크라이가 오브라디 교수에게 말했다. "그래. 하여간 그곳에서 단서를 못 찾아 헤매고 있을 때, 마침 크라이 가 나타나 주었다네. 그레텔과 함께 말이지." "예. 저도 꼭 뭔가에 홀린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그저 누군가에게 흘리듯 들은 말이었는 데 그 말 한마디에 수르카를 내버려두고 홀리우드 로 향했으니까요. 게다가 오리피 신전은 정말 쉽게 찾았습니다." "홀리우드에 오리피 신전이라고는 하나 뿐인데 뭐 그렇게 대단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세요. 중요한 건 그레 텔 덕분에 그곳에서 쉽게 단서를 찾을 수 있었다는 것이잖아요?" 스칼렛이 말했다. 나는 스칼렛이 뭔가를 숨기기 위해서 변명을 하고 있 는 어린아이 같은 느낌이 들었다. 스칼렛은 어쩐지 살벌한 마물의 눈빛과 마주친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있었다. 하여간 바리바가 화제를 바꾼 덕분에 분위기는 좀 나아진 것 같았다. 튜니티는 여전히 기분이 상한 듯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루크는 재미없다 는 듯이 하품을 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책에 쓰여 있던 게 그거 하나였습니까? 자폰의 오리피 신전에 용이 있다는 말?" "사실 그 책은 고대의 운동 경기에 대해서 서술해 놓은 책이었다네. 자 네가 고대 문명에 대해서 지식이 없으니까 설명을 좀 해 주자면, 오리피 신전은 일종의 육체에 대한 경배심을 가지고 의식을 치루는 공간이었다는 게 정설이지. 하여간 그 책에 오리피 신전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 있었고, 그 덕분에 용에 대한 걸 알 수 있었던 것이지." 오브라디 교수는 여기서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이어나갔다. "그 책에 따르면 아모리카 대륙을 쓰러뜨렸던 그 최종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에 모든 나라의 사람이 다 모여서 자폰의 오리피 신전에서 의식을 가 졌던 모양일세. 그것도 용을 상징으로 하는 의식을 말일세. 임프 시에서 본 그 유적의 그림도 오리피에 관한 그림이었네. 그 날개 달린 마물의 그 림도 용처럼 의식에 쓰이는 상징인 것 같네." "고대인들은 마물을 좋아했던 모양이로군요." 마로우가 말했다. 마로우의 표정은 탐구심으로 진지하게 빛을 내고 있 었다. "그래서 자폰으로 가시려는 겁니까?" 바리바가 물었다. 사실 만나자 마자 오브라디 교수는 이 내용을 거진 다 외울 수 있을 정도로 몇 번이고 떠들어대었지만 바리바는 여전히 뭔가 풀리지 않는 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교수님. 제 생각에는 범버쿠 정글을 따라서 자폰으로 가는 모 험을 하느니 차라리 사빈의 배를 타고 황금군도로 먼저 가는 편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책에 쓰여있는 말뿐이지 않습니까?" "내가 발견한 유적에도 적혀 있었네. 그리고 내가 말했지 않은가? 용이 우리가 찾는 마칸의 강림을 막는 유일한 단서라고." 오브라디 교수가 바리바의 말에 반박했다. 그러자 바리바는 냉소적인 표정을 지으면서 오브라디 교수에게 말했다. "사실 마칸인지 마칸 족인지 우리는 그게 뭔지도 모르는 상태 아닙니 까? 현재 저희를 적으로 노리고 있는 대상은 바로 성황청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바로 맞서 싸워야 할 적도 성황청이고요. 솔직한 이야기로 반란군 상부에서도 제가 성황청을 조사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만약 성황청을 반란군 스스로의 힘으로 꺾을 수 있다면 자나크 전체를 반란군이 해방시 킬 수도 있으니까요. 제가 황금군도로 가야 한다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하시면 될 것입니다. 성황청이 노렸던 곳이니 만큼 분명 성황청을 이 길 수 있는 단서가 숨겨져 있지 않겠습니까?" 바리바는 이렇게 묻고는 약간 모자란다는 듯이 고개를 몇 번 갸웃거리 더니 이렇게 덧붙였다. "그리고 저는 황금군도로 가는 뱃길을 알고 있는 몇 남지 않은 뱃사람 입니다. 그리고 저는 배를 타는 것 외에는 잘 모릅니다. 사빈. 자네도 뱃 사람 아닌가. 내 의견에 동의하지? " 바리바가 말했다. 하긴. 성황청이 자나크 주에 새로운 나라를 만들고 그곳을 잃어버린 신성 제국이라고 부른다는 소문은 바르도 대륙 전체에 널리 퍼져 있었다. 바리바의 말에서 나는 반란군이 이제 성황청을 공격대 상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 사빈, 뱃사람이기 이전에 용사냥꾼이야. 그리고 나는 용사냥꾼으로 태어나서 용사냥꾼으로 죽을 운명이고. 나는 자폰으로 가는 쪽에 찬성이 야." "사빈. 자네 용사냥꾼은 이제 폐업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튜니티가 기분 나쁘다는 투로 사빈에게 물었다. 사빈은 고개를 끄덕였 다. "다시 개업했어. 스승님과 함께." 사빈은 이렇게 말하고는 칭찬 받고 싶어하는 어린아이 같은 표정으로 오브라디 교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오브라디 교수는 엉뚱한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말하는 용은 말일세, 그러니까 자네가 내 강의에서 들었던 용은 전설에 나오는 불을 뿜으며 하늘을 나는 용이 아니라 어떤 상징을 뜻하는 말이었네. 바리바의 말에서 단서를 하나 더 찾을 수 있었지. 그건 용이 사람과 합쳐져 모습을 드러내곤 한다는 걸세. 이는 과거에 용과 인간이 함께 했다는 말이기도 하지. 물론 아직 풀리지 않은 부분이 더 많다는 것 은 인정하네. 전설에 등장하는 용은 두 얼굴을 가지고 있네. 인간과 함께 인간을 돕는 용과, 인간을 멸하고 세상을 멸망시키는 마칸의 수하인 용. 이 두 가지가 어떻게 다른지 아직 우리는 알지 못하고 있네. 어쩌면 우리 의 탐험이 최종적으로 귀착되는 지점은 바로 이 용의 신비를 푸는 지점이 되지 않을까 나는 생각한다네." 오브라디 교수가 말했다. 나는 사빈의 눈치를 살폈다. 사빈이 팔뚝에 나 있는 흉터 운운하는 걸로 봐서 사빈이 노리고 있는 것은 가죽을 벗겨 자랑 할 수 있는 그런 용이지 학문적 의미의 용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되 었기 때문이다. "교수님. 제가 말하는 용사냥꾼도 하나의 상징입니다." 사빈이 말했다. 그렇게 보이지는 않아도 사빈도 학문에 관심이 있는 걸 까? "이 세상에서 가장 용맹한 전사의 상징! 바르도 대륙에서 가장 강한 남 자의 상징! 저는 그러한 상징으로서 용사냥꾼의 길을 택했던 것입니다." 결연한 표정과 꿈꾸는 듯한 눈빛으로 먼 허공을 바라보면서 사빈이 말 했다. 그러면 그렇지. "내 얘기는 전혀 듣지 않았군. 학생 시절하고 어떻게 하나도 변하지 않 을 수 있는지 원." 오브라디 교수는 포기했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해가 질 무렵 황금의 샘 부근에 야영지를 꾸렸다. 물가에서 야영을 하 는 것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물이 있는 주변에는 틀림없이 많은 짐승 들이 모이기 마련이다. 게다가 우리가 다다른 황금의 샘에는 기린 몇 마 리가 더위로 쓰러져 썩어가고 있었다. 썩은 고기를 노리는 무피들과 독수 리들이 우리에게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면서 기린의 살점을 뜯고 있었다. 그 옆에서 야영을 한다는 것은 그리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죽어 가는 짐승 옆에서 잠을 청해야 한다는 점도 그랬지만 경계의 눈초리를 늦추지 않고 있는 짐승들과의 눈싸움은 피곤하다못해 짜증이 다 날 지경이었다. 붉은 털의 무피들은 기린의 썩은 고기를 뜯으면서도 나에게서 결코 경계 의 눈초리를 떼지 않았다. 줘도 안 먹을 테니 제발 그런 눈으로 보지 말 라고 말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툭 튀어나온 흉측한 눈을 가지고 태어난 건 무피들의 잘못이 아니니까 참을 수밖에. 호기심 많은 새끼 무피 한 마 리가 나에게 어정대며 다가왔다. "불 쬐고 싶니?" 나는 무피에게 이렇게 말해보았지만 무피의 귀에는 '빨리 꺼져' 쯤으로 들렸는지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쪼르륵 네 발로 뛰어 기린이 있는 곳 으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다들 잠들어 있는 밤이었다. 밤하늘에 걸려 있는 소망의 별이 나를 굽어보고 있었다. 나에게 과연 소원이 있을까? 나 는 무엇을 바라고 있는 것일까. 문득 하잔에서 죽은 우보가 떠올랐다. 튜니티는 말했다. 전우가 바바 족에게 죽었기 때문에 결코 바바 족을 용서할 수 없다고. 아니다. 나는 다르다. 우보는 내가 죽였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그 상황은 전투 상황도 아니었다. 그저 광기와 살육의 시간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라이짐 은? 라이짐도 성황청의 사제들에게 거의 죽을 뻔하지 않았던가. 라이짐은 지금 이 시간에도 어쩌면 하잔에서 성황청의 기사단과 목숨을 걸고 싸우 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것일까. 이 렇게 생각하자 다시 한 번 오한이 온몸을 훑고 내려갔다. 끔찍한 기분이 었다. 잠시동안 이빨이 딱딱 부딪칠 만큼 몸도 마음도 추웠다. 틀림없이 내일이면 일행은 갈리게 될 것이었다. 바리바와 루크는 배 때 문에 로스안에 온 거였으니 사빈의 배를 찾아 떠날 것이다. 사빈과 튜니 티도 함께 할지 모른다. 바리바와 루크는 자신들이 말한 그대로 성황청과 의 싸움을 준비할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라이짐은 지 금 위험에 처해 있을지 모른다. 용병단에서 내가 목숨을 걸어도 좋다고 생각했던 친구들도 모두. 그렇다면 도대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결론도 없는 생각들이 불티와 어울려 어지럽게 흩어지고 있었고, 아무 것도 선택하기 싫었고,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함부로 눈물이 라도 쏟아버리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모닥불에 얼굴이 달아올라서 감정 이 덩달아 격해진 거겠지. 누가 볼까봐 조심스럽게 눈가를 닦으면서 나는 생각했다. 백년수의 배설물과 지푸라기, 그리고 말린 장작을 배합한 땔감 이 하나 둘 불꽃으로 날려 춤을 추듯 넘실거렸다. 나는 그 불꽃을 오랫동 안 바라보다가 시간 막대기가 다 타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마로우를 깨웠 다. "벌써 시간이 됐나?" 마로우는 눈을 비비면서 일어났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긴 가장 많이 길을 걸은 것이 마로우이니 그럴만도 했다. 서커스 들판을 지나자마자 오브라디 교수는 마로우에게 난데없이 엉뚱 한 부탁을 했다. 그것은 스파일 주립 대학에 가서 자신의 앞으로 도착한 논문을 몇 개 가지고 오라는 부탁이었다. 마로우는 오브라디 교수가 무슨 생각으로 자신에게 그런 심부름을 보내는 건지 짐작 할 수가 없었다. 하 지만 자신이 존경하는 학자가 '자네 말고는 내 논문을 구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지 않는가?'하고 말하는 데 마로우로서는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나도 왜 오브라디 교수가 그런 심부름을 보냈는지 그때는 알지 못했 지만 로스안에서 크라이의 설명을 듣고야 그 내용을 대강 짐작할 수 있었 다. 오리피 신전을 탐사하러 가는데 마로우가 같이 가지 않는다면 말이 되지 않을 것이고, 그렇다고 돈을 구걸하러 가는 모습을 제자에게 보이고 싶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오브라디 교수는 마로우를 먼저 스파일 쪽 으로 보내 나중에 오리피 신전에서 합류하기로 한 것이었다. "이제 좀 푹 자라. 내일부터 고단한 여행이 시작 될 테니까." 마로우가 말했다. 하지만 나는 당장 내 몸에 닥친 오한이 더 급했고, 여행이고 뭐고 생각하기도 싫어져 있었다. 예상했던 그대로, 다음 날 우리 일행은 갈리게 되었다. 오브라디 교수 는 자신이 오리피 신전에서 탐사한 내용과 바리바가 구해온 책에서 얻은 정보를 근거로 범버쿠 정글의 끝에 있다는 자폰을 찾아가기로 마음먹고 있었고, 마로우는 물론 오브라디 교수의 뒤를 따르기로 했다. "하지만 저는 사빈의 배를 타고 황금군도로 가야만 합니다. 그것이 원 래 저의 계획이었습니다. 제가 임프 시를 떠난 것은 다시 배를 타기 위해 서였습니다." "사빈 군. 어떻게 하겠는가?" 오브라디 교수가 사빈에게 물었다. 사빈은 지난 밤 보여주었던 그윽한 눈길로 허공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용을 찾겠습니다. 용사냥꾼에게 용 이상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 까." "하지만 사빈, 배가 없으면 우리는..." 루크가 뭐라고 더 말을 하려는데 튜니티가 루크의 말을 잘랐다. "나도 그 배가 있는 곳, 알아." 튜니티가 말했다. 튜니티는 사빈과 함께 하고 싶을 거였다. 하지만 지 금 이렇게 말하는 것은 분명 사빈과 다른 길로 가겠다는 뜻처럼 들렸다. "어차피 그 배는 고치려면 한 참이 걸릴 거야. 폭풍지대를 지날 수 있 을 정도의 마법이야 남아있겠지만. 사빈. 내가 바리바와 루크를 이끌고 먼저 그곳으로 가 있겠네. 자네는 그 용인지 뭔지를 잡는 게 소원이라니 까 그렇게 하게. 뭐 나야 어느 쪽이건 상관없어." 튜니티의 말에는 오브라디 교수를 향한 조소가 섞여 있는 것 같았다. 바바 족을 인간으로 볼 수도 있다는 말 한마디에 오브라디 교수를 저렇게 까지 말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싶었지만, 오브라디 교수의 제자는 사빈이 지 튜니티는 아닌 것이다. "자네는 어떻게 하겠는가?" 오브라디 교수는 튜니티는 제쳐두고 크라이와 그레텔 쪽을 향해서 물었 다. "저는 용을 따라 가겠습니다." 크라이는 그게 당연한 일일 거였다. 자신의 과거를 찾아가고 있는 크라 이니까. 그레텔이이야 아무 말도 하지를 않으니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 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지만 일단 크라이 등에 업혀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걸 보니 크라이를 따라가게 될 건 분명했다. (물론 진짜 고개를 끄 덕인 건 아니었고 졸고 있는 거였지만) "라이짐, 너는?" 사빈이 나에게 물었다. 하필이면 사빈이 물어볼 게 뭐람. 다른 사람이 물어본다면 몰라도 사빈이 물어보면 항상 겁부터 났다. 어떤 식으로 내 말을 해석해서 함부로 말할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저는 수르카 님을 따르겠습니다." 내가 대답을 막 하려고 하는데 스칼렛이 먼저 말했다. 스칼렛의 뺨이 불게 물들어 있었다. 나를 따라오겠다니. 아직도 내가 무슨 대단한 마법 사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솔직히 나는 스칼렛의 행동이 부담 되고 있었다. 나에게 보여준 그대로 스칼렛은 나보다 훨씬 더 다양한 마법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 능력도 있으면서 나를 따르겠다니 말이다. 또 한 스칼렛에게는 마법 수행을 한다는 명분도 있었다. 그에 비한다면 나는 오히려 스칼렛을 부러워해야 할 처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인데. "그러고 보니 수르카, 자네만 어디로 갈지 말하지 않았군. 자네는 어디 로 가겠는가?" 오브라디 교수가 물었다. 나는 지난 밤 생각해 둔 대답이 있었다. '지금까지 저는 운명을 따르고 있다고 생각해왔습니다. 임프 시에서 오 브라디 교수님을 만난 것도, 그리고 로스안을 지나 여기까지 온 것도, 모 두 운명이라고 믿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 운명에 충실하려고 합니다. 오브라디 교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마칸의 강림을 막을 방법이 있으 며 그것을 찾는 것이 자신의 소명이라고. 저는 오브라디 교수님에게 미력 한 힘이나마 보탤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이 바르도 대륙을 위해 서 말이지요.'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6977/19898 ━━━━━━━━━━━━━━━━━━━━━━━━━━━━━━━━━━━━━━━━ 제 목:[탐그루]A terrible beauty is born 211 관련자료:없음 17/17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3-04 22:48 조회:1898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나는 이렇게 거창하게 말하려고 했지만 솔직히 내가 정말로 이렇게 생 각하고 있는지는 나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솔직한 심정으로 나는 탐그루로 돌아 가든가, 아니면 아무 곳에나 쓰러져 몇 날이고 며칠이고 아무 것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었던 말은 고작, "자폰으로 가겠습니다." 뿐이었다. 내 대답에는 다들 별로 신경도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저 고개를 한 번 끄덕 하더니 나중에 다시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좋을지, 혹 은 서로 정보를 얻게 되면 어떤 방식으로 나누어야 할지를 토론하기 시작 했다. "떠버리 새가 최고지. 아무리 먼 곳에서도 주인을 찾아오거든." "튜니티. 주인이 아니라 주인이 있는 장소겠지. 게다가 이렇게 이동 중 에는 제대로 주인을 찾아갈 가능성이 별로 없잖아?" "사빈. 나는 스칼렛의 직접 소통이 더 나을 것 같은데." "바리바. 본인이 함께 있겠다는 데 어쩌겠나." 스칼렛은 튜니티의 이 말에 고개를 숙였다. 나는 스칼렛의 그런 모습이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여자한 테 관심이나 두고 있다니. 수르카. 넌 정말로 수준 미달이야. "옛 속담에 뮤가 많으면 마차가 바다로 간다는 말이 있지. 모두들 너무 의견이 많구만. 내가 정리하지. 바리바와 루크, 그리고 튜니티는 배가 있 다는 곳으로 가게. 그곳이 어딘지는 사빈도 알고 있지 않는가? 자폰에서 용을 탐사 한 뒤에 나머지 일행도 그곳으로 갈 수 있을 걸세. 만약 기회 가 닿는다면 말이지." 오브라디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그럼 배가 다 고쳐지면 어떻게 합니까? 그냥 먼저 황금 군도로 떠납니 까?" 바리바가 오브라디 교수에게 물었다. 오브라디 교수는 바리바의 얼굴을 한 번 바라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운명이 부르는대로." 이렇게 해서 우리 일행은 둘로 갈라지게 되었다. 튜니티, 바리바, 루크 는 황금 군도로 가기 위해서 사빈이 배를 숨겨 두었다는 홀리우드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는 해안을 향해 출발하였고, 오브라디 교수와 마로우, 스 칼렛, 사빈, 크라이와 그레텔은 남쪽의 범버쿠 정글로 향하게 되었다. 물 론 나도 오브라디 교수와 함께였다. "헤어지는 순간은 길면 흉하다고들 하지. 어서들 가게." "다시 뵙길 빌겠습니다." "저도요, 오브라디 교수님." 바리바와 루크는 오브라디 교수에게 깍듯하게 인사를 했다. "사빈. 자네와의 우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네." "나도 알고 있어. 튜니티." 사빈과 튜니티는 악수도 없이 서로 이렇게만 말했다. 나는 돌아서 가는 바리바와 루크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세 사람의 머리 위로 펼쳐진 하늘이 눈부셨다. "오늘도 덥겠군." 사빈이 말했다. 그리고 사빈이 말한 그대로 그날은 몹시도 더운 날이 됐다. 범버쿠 정글에 거의 도착할 때쯤 우기가 시작됐다. 매일같이 비가 쏟아 져 내렸다. 잠이 들면 아침에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물을 퍼내는 일이었 다. 불침번을 서면서도 가장 중요한 일은 빗속에서 불을 지키는 일이었 다. 운 좋게 빈 폐가나 동굴을 구하는 날에는 불을 지키기가 수월했지만 그냥 벌판에서 야영을 하게 될 때에는 불을 지키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 다. 아니, 쉽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그냥 밖에서 야영을 하는 날에는 어 김없이 불을 꺼트리곤 했다. 누가 불침번을 서건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아 무도 불침번을 탓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계속해서 찾아들던 오한이 감기로 발전했는지 몸 에 열이 나고 온 몸이 쑤시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별거 아니려니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는 결국은 자리에 눕고 말았다. 범버쿠 정글 초입 에 있는 근처 동굴에서 꼬박 이틀을 머물게 되었다. "수르카 님. 곧 회복되실 거예요." 스칼렛이 정성스럽게 나를 간호하면서 말했다. "감기일 뿐입니다. 금방 괜찮아 질 거예요." 나는 애써 웃음 지으면서 스칼렛에게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몸은 도저 히 내 마음먹은 대로 움직여 주질 않고 있었고, 그 와중에도 스칼렛에게 도움을 받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나도 부담스럽고 미안했다. 크라이는 흠뻑 젖어서 모닥불에 몸을 말리고 있었다. 이곳에 머물고 있 는 동안 사냥은 모두 크라이와 마로우의 몫이 되었던 것이다. 마로우 역 시 젖은 몸으로 크라이 옆에서 몸을 녹이고 있었다. 빗물에 완전히 젖어 있는 두 사람을 보고 있자니 당장이라도 일어나서 도와주고 싶었다. 몸만 따라 준다면 말이다. "마법으로는 치료 할 수 없나요?" 마로우가 조심스럽게 스칼렛에게 물었다. 마로우는 스칼렛에게 말을 거 는 법이 거의 없었고, 꼭 필요하다 싶을 때에도 항상 몸을 약간 웅크리고 서 스칼렛에게 말을 걸곤 했다. 나는 그런 마로우의 모습이 귀엽게만 보 였다. "감기는 마법으로 치료 할 수 있는 병이 아닙니다. 감기는 스스로 이겨 낼 수밖에 없는 병이지요." 스칼렛은 밝게 웃으면서 마로우에게 이렇게 말했다. 마로우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위 아래로 몇 번 움직였는데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는 게 정말 볼만했다. 그러고 보니 임프 시를 떠난 지 꽤 된 모양이었다. 스칼 렛의 짧은 머리가 어느 새 어깨까지 자라 있었다. "스칼렛 양의 말이 맞아요. 감기는 인류의 역사와 맥을 같이 하는 병이 지요. 마로우. 내가 좀 더 설명해 주지. 감기는 몸 안에서 발생하는 병이 라네. 외부에서 온 병이 아니기 때문에 내부에서 스스로 치료할 때까지는 치료되지 않는 법이지." "그렇군요. 그렇다면 감기는 스스로 무의식중에 만들어 낼 수도 있겠습 니다. 아, 물론 본인 스스로는 인식하지 못하겠지만 말이지요." 꼭 나 들으라는 듯이 마로우가 말했다. 나는 마로우의 말에 기분이 상 했지만 마로우의 말도 어느 정도는 일리가 있겠다 싶었다. 나는 '지금 내 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걸까?' 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 이후로 뭘 하든 의욕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였다. 어쩌면 내가 아무렇게나 내 뱉은 말이 스스로 감기를 불러일으키는 마법의 말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죄송합니다." 나는 몽롱한 와중에서도 일행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그러지 않고는 견 디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그러자 오브라디 교수는 내 말에 껄껄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죄송할 게 뭐 있나? 이런 빗속을 뚫고 범버쿠 정글로 가는 것보다는 이렇게 동굴에서 쉬는 편이 낫지. 안 그런가? 범버쿠 정글을 우기 때 탐 험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만약 자네가 감기에 걸리지 않았다면 여기 모 인 친구들에게 이끌려서 억지로 비를 맞으면서 범버쿠 정글 안에 들어가 게 되었을 지도 모르지. 그러니까 난 오히려 자네한테 고맙다고 해야 할 것 같은데?" 나는 오브라디 교수의 말에 미소를 지었다. 아무도 이 비속에서 범버쿠 정글로 가겠다고 말할 사람은 없을 듯 싶었다. 나는 몸을 조금 움직여 동 굴 밖을 바라보았다. 빗물은 누군가가 악의에 찬 장난으로 물을 뿌리고 있는 것처럼 정말 한도 끝도 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가끔씩 울리는 천둥 소리와 번쩍이는 벼락은 자연에 대한 공포심 마저 일으키고 있었다. 세상 모든 일이 비에 맞추어서 돌아가는 것만 같았다. 이틀이 지나자 빗발이 조금씩 수그러들었다. 하지만 내 몸은 조금도 호 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로군. 자네 정도 체력이라면 회복되고도 남았어야 할텐데 말일세. 먹는 것도 잘 먹고 잠도 잘 자고 있는데, 거 참... 이상하네." 알 수 없다는 듯이 오브라디 교수가 말했다. "감기가 아닌 것 아닐까요?" 크라이였다. 크라이는 이렇게 말하고는 내 머리에 손을 짚었다. 크라이 의 표정은 지나치게 진지해서 누가 본다면 크라이가 치료 마법사 정도는 되는 것처럼 보였을 지도 모르겠다. "크라이. 의사였어? 난 몰랐는데." 나는 아픈 와중에도 이렇게 농담을 건네 보았다. 크라이는 내 농담에 피식, 하고 웃더니 이렇게 맞받아 쳤다. "의사가 없을 때는 누구나 다 의사야, 수르카. 기술이 아니라 마음이 병을 고친느 거니까." "... 냉정해 져야 해. 냉정해 져야 해." 크라이가 말을 마치자마자 그레텔이 오래간 만에 입을 열었다. 모두들 그레텔에게 시선이 모아졌다. 나는 아무리 정신이 몽롱하다고는 해도 그 레텔의 목소리를 듣자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았다. 그레텔이 입을 열면 무슨 일이든 꼭 생기곤 했기 때문이었다. 오한이 온 몸에 뻗치는 느낌이 들었다. 크라이는 그레텔의 말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진찰(이라고 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을 계속했고, 마로우는 칼을 뽑아 들고 동굴 입구 쪽을 살폈다. "냉정이라... 고대어로 감기는 코르드라고 하지. 춥다는 뜻도 되지만 냉정하다는 뜻도 되지. 아마 냉정해 져야 이길 수 있는 병이라는 뜻에서 그런 이름을 붙였을 걸세." 하여간 오브라디 교수는 틈만 나면 강의를 하려고 들었다. 크라이는 나 를 진찰하는 일을 그만 두었다. "비가 너무 오래 오는 군. 우기가 이렇게 길었던가..." 크라이는 조금은 아쉽다는 듯이 동굴 밖을 내다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크라이는 뭔가를 숨기고 말하지 않는 듯한 눈치였다. 혹시 내가 죽을병이라도 걸린 건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들었을 때, 나는 그냥 웃어넘기고 말았다. 크라이가 병을 전문적으로 치료하는 의사도 아 닐 뿐더러, 뭔가 숨기고 있다면 자신에게 병을 치료할 능력이 없음을 숨 기는 정도가 고작일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신경 쓰지 말고 좀 주무세요. 빨리 일어나셔야지요." 스칼렛이 어느 사이 내 곁으로 다가와 나에게 말했다. 스칼렛의 얼굴에 는 진심으로 나를 걱정해 주고 있다는 걸 쉽게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안 쓰러움과 절실함이 배어 있었다. 그러나 나는 빨리 일어나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왜 내가 빨리 일어나야 하는가? 도대체 뭐가 급한 일이 있다고?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스칼렛의 말은 무시해 버리 고 그냥 잠이나 자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입구 쪽에서 들려오는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처음에는 그저 단순한 바람소리인가 보다 싶었다. 하지만 그 소리는 아주 규칙적으로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눈을 번쩍 떴다. 아무리 아픈 와중이라고는 해도 위험을 느끼니 당장 살아야겠 다는 생각이 고개를 쳐들었다. 흐린 시야였지만 크라이와 마로우의 모습 이 눈에 들어왔다. 두 사람이 함께 싸운다면 저 마물을 물리칠 수 있을 까. 나는 이렇게 생각하면서 위험을 알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마, 마물..." 나는 간신히 입을 열어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내 말에 두 사람은 꿈쩍 도 하지 않고 있었다. 아니, 꿈쩍도 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내 얼굴을 이상하다는 듯이 똑바로 쳐다보고만 있었다. "두, 둘이야. 녀석들..." 나는 이렇게 겨우겨우 말을 한 다음에 정신을 잃고 말았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7018/19898 ━━━━━━━━━━━━━━━━━━━━━━━━━━━━━━━━━━━━━━━━ 제 목:[탐그루]A terrible beauty is born 212 관련자료:없음 20/20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3-05 20:19 조회:1926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내가 깨어난 곳은 잘 꾸며지지는 않았지만 깨끗한 침대 위였다. 몸이 얼마간은 나아진 느낌이었다. 깨끗한 공기가 코를 통해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주위를 살펴보았다. 꽤 널찍한 통나무로 지어진 집안에 나는 누워있 었다. 집에는 작은 창이 하나 나 있었다. 나는 그 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았 다. 언제 비가 내렸었냐는 듯이 밖으로부터 눈부신 햇살이 넘쳐 방안으로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수르카 님? 일어나셨어요?" 스칼렛이 말했다. 스칼렛은 흰 천으로 만들어진 긴 치마옷을 입고 있었 다. 아무런 장식도 없는 그 긴 치마옷에는 까만 색으로 된 허리띠가 메어 져 있었고 배가 있는 부분에는 커다란 주머니가 달려 있었다. 스칼렛은 양손으로 접시를 들고서 나에게 다가왔다. 접시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 는 쌀죽이 한 그릇 놓여있었다. 익힌 쌀 냄새가 풍겨왔다. 나는 다정하게 스칼렛의 손을 잡았다. 스칼렛의 몸이 멈칫했다. "고마워 여보. 오늘 날씨가 참 좋군. 애들은 잘 크고 있나?" 나는 스칼렛에게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스칼렛은 얼굴이 빨개져서 아 무 대답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뭐야? 일어난 거야?" 그 때였다. 문이 열리면서 마로우가 들어왔다. 마로우는 꽃다발을 한 아름 들고 있었다. "오. 마로우 군. 잘 왔네. 정원 청소는 잘 됐겠지? 장작은 다 해 놓았 고?" 나는 마로우를 보는 순간 이렇게 아무렇게나 지껄였다. 꿈이라면 깨지 않았으면 좋겠군. 이렇게 호사스러운 생활이라니 말이다. 나는 뿌듯한 마 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의식이 돌아오기는 했어요. 하지만 아직 제 정신은 아니신 모양이에 요." 부끄러운 듯, 조심스럽게 내가 잡은 손을 빼면서 스칼렛이 말했다. 그 제야 나는 이것이 꿈이 아니고 생시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이럴 수 가! 나는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 건지, 또 어떻게 된 일인지 생각해 보기 전에 일단 이 사태를 수습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으, 마, 마물이 덮쳐 온다! 으윽, 내 목을 조르고 있어. 오브라디 교 수님! 마법으로 이 마물을 물리쳐 주세요! 크라이! 녀석이다! 단 칼에 베 어버려!" 나는 몸을 비틀면서 이렇게 소리쳤다. 다행히도 내 작전은 먹혀 들어갔 다. 스칼렛은 접시를 잽싸게 치우고는 내 양팔을 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나는 여전히 몸을 비틀면서 괴로운 척을 했다. 그렇지만 코를 파고드는 향기로운 체취만은 어떻게 이겨 낼 수가 없었다. 갑자기 가슴이 뛰었다. 감기 기운인지 정신이 다 아뜩해지고 있었다. "제, 제가 돕겠습니다." 마로우는 이렇게 말하고는 스칼렛을 내게서 밀어낸 다음 대신 내 양팔 을 잡았다. "이런. 열이 아직 남아있군요. 얼굴이 다 벌겋게 달아올랐습니다, 스칼 렛 님." 마로우가 말했다. 나는 눈을 감고서 으으으, 하는 신음소리만을 내며 얌전히 누워있기로 했다. 얼마나 지났을 까. 내 입술에 딱딱한 금속이 와 닿는걸 느낄 수 있었 다. 나는 눈을 떴다. 스칼렛이 나에게 수저로 죽을 떠 먹여 주고 있었다. 나는 가만히 수저에 땀긴 죽을 입에 머금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책상에는 마로우가 스칼렛이 나를 간호해 주고 있는 모습을 부러운 듯한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었다. 책상에는 꽃다발이 놓여있었다. 누구를 주려고 가지고 온 것일까? 내가 쓰러져 앓았던 동굴이 범버쿠 정글로 향하는 길에 있는 마지막 마 을인 유민장 마을 아이들의 놀이터였던 것은 그나마 다행인 일이었다. 아 이들은 빗발이 조금 수그러들기가 무섭게 그 동굴로 놀러 왔고, 덕분에 오브라디 교수는 그 뛰어난 학자적 재능으로 가까운 곳에 마을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모양이었다. 아이들은 마을 사람들을 불러왔고, 나는 들 것에 실려 이곳 유민장 마을까지 오게 되었다고 했다. 이로서 나는 미안 하다는 감을 조금은 덜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쿨럭쿨럭, 떠나시겠다고요." 나는 유민장 장로의 집에 앉아 있었다. 내 옆으로는 마로우와 크라이가 앉아 있었고 그 옆에는 스칼렛이 있었다. 오브라디 교수는 장로의 바로 앞에 앉아 장로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예. 저 친구가 일어났으니 이곳 유민장에 더 이상 머물 이유는 없어졌 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저희는 자폰으로 가는 길이니까요." "그렇군요. 쿨럭쿨럭." 장로는 누가 보기에도 장로라는 것을 알 수 있을 만큼 늙은 영감이었 다. 얼굴에는 검버섯들이 수도 없이 피어있었고, 갈라지는 목소리는 작아 서 알아듣기가 그리 쉽지 않았다. 거기다가 가래 끓는 기침소리는 듣기만 해도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 "그간의 호의는 감사드립니다." "저 친구는, 쿨럭, 일어나기는 했지만, 쿨럭, 아직 긴 여행을 떠날 만 큼 회복 된 것 같지는, 쿨럭쿨럭, 않습니다만." 장로는 이야기하기가 힘든지 여기까지 말을 잇고는 심호흡을 했다. 그 러자 장로의 옆에 앉아 있던 희멀건한 얼굴을 한 청년이 장로의 몸을 바 로 할 수 있도록 붙잡아 주었다. 사실 장로의 말은 옳았다. 몸은 여전히 쑤시고 있었고 열도 많이 내리기는 했지만 화끈거리는 게 느껴질 정도의 열은 몸에 남아 있었다. "예. 그렇지만 젊은 친구니 일단 떠나고 나면 몸이 곧 나아지리라 생각 합니다. 워낙 강한 친구니까요. 그리고 저 나이 때는 가만히 누워 있어서 는 병이 낫지 않는 법입니다." 오브라디 교수는 이렇게 말하고는 나를 한 번 바라보았다. 그런 눈빛으 로 나를 보면 어쩌겠다는 건지. 아무리 그래도 쑤시는 몸이 멀쩡해 지고 열이 사라질 리는 없었다. "저, 친구, 쿨럭쿨럭, 위험한 고비는 넘긴 상태입니다. 지금은 좀 괜찮 아 졌습니다만, 쿨럭, 언제 다시 열이 오르고 증상이 나타날 지, 쿨럭쿨 럭, 모릅니다. 일단, 쿨럭, 그렇게 되고나면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 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장로가 말했다. "다시 열이 오른다니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혹시 호열병이나 폐적증이 라도...?" 오브라디 교수가 장로에게 반문했다. 호열병? 폐적증? 병 이름만 들어 도 온몸이 다 오싹해졌다. "쿨럭. 아닙니다. 그런 병이라면, 쿨럭, 어떻게든 치료나 해 볼 수 있 겠지요. 쿨럭쿨럭. 약이나 뭐 그런 것으로 말이지요. 하지만 이 병은 좀 쿨럭, 다릅니다. 저런 증상을, 쿨럭, 본 적이 있습니다. 저 분, 마법사 맞지요?" 장로가 묻자 오브라디 교수는 뭔가 생각이 날듯 말듯한 표정이 되어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장로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 다. "쿨럭. 레디삐병입니다." "레디삐병!" 오브라디 교수가 소리쳤다. 나는 순간 지금 오브라디 교수가 정말로 내 병명을 말하고 있는 건지 의심이 갔다. 무슨 병인지는 몰라도 내가 그리 쉽게 나을 수 있는 병에 걸린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그렇습니다. 저 분은 레디삐병에 걸리셨습니다. 저희 장로님께서는 오 랜 경험으로 수많은 환자들을 보아오셨습니다. 저 병은 틀림없이 레디삐 병이 맞습니다. 창백한 얼굴과 축 늘어진 어깨, 그리고 힘없이 생각나는 대로 내뱉는 말. 틀림없는 레디삐병입니다." 장로의 옆에 앉아 있던 청년이 말했다. "그렇다면... 점점 의욕을 잃고 서서히 죽어간다는, 마법사가 걸린다는 바로 그 레디삐병이란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이번에도 청년이 대답했다. 내가 그렇게 무시무시한 병에 걸렸다는 말 인가? 나는 도무지 지금 내 얘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렇다면..." "둘 중에 하나입니다. 여기서 죽을 날만을 기다리던가, 아니면 치료법 을 찾아내든가." 청년은 이렇게 말을 맺었다. 숙소로 돌아온 우리 일행은 한 동안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사실 이런 상황이라면 나조차도 뭐라고 말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내가 죽게 된다니. 조금 몸이 좋지 않기는 하지만 이 정도로 죽게 되리라고는 상상 도 하지 못했다. "레디삐병에 걸리다니, 수르카. 정말 이상한 일이로군. 레디삐병은 삶 의 의욕을 잃은 마법사만 걸리는 병인데 말일세. 나는 늙은 마법사나 상 처한 중년의 마법사, 혹은 과부가 된 유부녀 마법사만 걸리는 병인 줄 알 고 있었는데." 한참이 지난 다음에야 오브라디 교수가 이렇게 입을 열었다. "제가, 그 병에 걸렸다고요?" "그래. 장로의 말을 듣고 보니 정말 그래. 수르카. 자네가 의욕이 없이 어깨를 늘어뜨리고 다닐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오브라디 교수는 안쓰러운 눈길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내가 그렇게 무서운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그 병은 마법사가 의욕을 잃거나 세상이 싫어졌을 때 걸리는 병이라고 하더군. 마법이란 뭔가. 바로 말 아닌가? 그런데 이 말이라는 것이 마음 을 담았을 때 마법이 되는 것이지. 그런데 말일세, 마법사가 세상이 싫어 지거나 괴로워진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보통의 사람이라면 술을 마시거나 누구와 싸우거나 수다를 떨거나 하면서 풀겠지. 그런데 마법사라면 조금 경우가 다르네. 만약 그런 경우일 때 자칫 잘못해서 그런 마음이 담긴 말 을 내 뱉으면 그것이 본인에게 병이 되는 마법으로 나타나기도 하지. 그 것을 레디삐병이라고 부른다네." 오브라디 교수는 이런 상황에서까지 강의를 하려고 들었다. 하지만 이 강의는 오래간만에 들어보는 의미 있는 강의였다. 내가 언젠가 생각했던 게 맞았던 것이다. 내가 나 스스로에게 여기가 어디인지, 또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물었을 때, 그 말이 나를 해하는 마법의 말이 되었 던 것이다. 나는 한 참 동안 멍하니 있다가 치료법은 없는지 오브라디 교 수에게 물었다. 나는 죽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알려진 치료법은 없네. 하지만 장로님께서 말씀해 주시더군. 자폰에 가면 치료법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일세. 자폰에는 마 법사들도 많이 있다고 하니까 말이야." 오브라디 교수가 말했다. 죽는다. 죽는다. 죽는다. 나는 이렇게 속으로 되뇌었지만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한 걸음도 걷기 싫은 데 자폰까지 가야한다니. 나는 그냥 쓰러져서 될 수 있는 한 오랫동안 누워 있고만 싶을 뿐이었다. "제가 가면 짐이 될 뿐입니다." 한 참을 생각한 후에 나는 이렇게 말했다. 맥이 주욱 빠지면서 도무지 아무 것도 하고 싶지가 않아졌다. "여기에 남겠다고?" "말도 안돼! 그냥 죽을 날만 기다리겠다는 거잖아, 그 말은!" 오브라디 교수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놀란 표정으로 마로우가 소리 쳤다. "만약 수르카 님께서 남으시겠다면... 제가 간호해 드리겠어요." 마로우의 말에 바로 이어서 스칼렛이 말했다. 나는 스칼렛이 정말로 아 름답다고 생각했다. 내게 쏟는 마음씨도 마음씨였지만 특히 내 눈에는 스 칼렛의 긴 목과 어깨까지 늘어진 머리카락이 정말로 아름답다고 느껴졌 다. "그런 말 말아요, 스칼렛. 안돼, 수르카. 넌 가야 해." 크라이가 말했다. 나는 힘없이 그저 물끄러미 크라이를 바라보았다. 크 라이의 얼굴은 잔뜩 긴장되어 있었다. "나, 그 병에 걸려 죽는 마법사를 본 적이 있어. 그 마법사는 타실에서 꽤 이름을 날리던 마법사였어. 하지만 결국 그 병을 이겨내지 못하고 죽 었어. 레디삐병에 걸리면 처음에는 의욕을 잃어가다가 나중에는 완전히 힘을 잃고 누워만 있다가 죽게 되지. 나는 네가 그 꼴이 되는 걸 보고 있 을 수만은 없어." "내가 가기 싫다고 말한다면?" "억지로라도 끌고 가야지." 이렇게 해서 그날 우리 일행은 범버쿠 정글로 향하게 되었다. 나는 스 타바의 등에 거의 실리다 시피해서 유민장 마을을 떠났다. 스타바의 고삐 는 크라이가 쥐고 있었다. 크라이는 진짜로 나를 끌고 간 것이었다. 범버쿠 정글로 들어섰을 때는 여름도 막바지에 이른 무렵이었다. 지겨 운 더위는 끝날 줄 모르고 있었고, 나는 크라이가 끌고 가지 않았다면 벌 써 몇 번은 쓰러졌을 게 분명했다. 나는 불침번도 설 수 없었고 사냥이나 기타 잡일에서도 모두 제외되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나는 미안하다는 마음보다는 편하다는 생각이 더 들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사실이었다. 나는 정말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정글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오브라디 교수는 수시로 남방벌레와 지도를 번갈아 가면서 확인하고 있었고, 마로우와 크라이는 뮤를 끌면서 긴칼을 휘둘러 울창한 정글에 길을 만들어나가고 있었다. "이거 이렇게 울창해서야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있겠습니까?" 마로우가 투덜거리는 투로 오브라디 교수에게 물었다. 오브라디 교수는 대답 대신 손가락으로 멀리 바라보이는 산을 가리켰다. 이 끝이 없이 넓 은 정글 한 복판에 솟아있는 산은 마치 홀로 하늘을 찌르고 있는 손가락 처럼 보였다. "저 산이 우리의 길을 인도해 줄 걸세." "산 이름이 뭡니까? 오브라디 교수님." 크라이가 긴칼을 휘드르면서 오르라디 교수에게 물었다. "율리에. 범버쿠 정글에 솟아있는 유일한 산이지. 저 산 덕분에 길을 잃을 일은 없을 걸세."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7019/19898 ━━━━━━━━━━━━━━━━━━━━━━━━━━━━━━━━━━━━━━━━ 제 목:[탐그루]A terrible beauty is born 213 관련자료:없음 23/23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3-05 20:19 조회:1778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오브라디 교수가 말했다. 오브라디 교수의 말은 모두에게 힘이 된 모양 이었다. 마로우와 크라이의 긴칼이 더욱 세차게 움직였다. 스칼렛마저도 기운차게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나는 달랐다. 나는 스타바의 등위에 거 의 눕다시피 해서 끌려가고 있었다. 정말로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을 지경이었다. 세상일이 이렇게까지 귀찮아 질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정글 한 복판에서 검은 엘프들을 만났을 때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이곳을 지나가는 여행객인데, 자네는 어떻게 여기에 있는가? 혼자 여행 중인가 보지?" 오브라디 교수는 검은 엘프를 보자마자 이렇게 물었다. 그 검은 엘프는 내가 본 에이스나 나이스와 거의 흡사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검은 엘 프 족은 다 비슷비슷하다더니. 어쩌면 모두 다 똑같이 생긴 건 아닐까 싶 었다. "아닙니다. 저는 이 근처 마을에서 살고 있습니다." "마을에서 살고 있다면... 마을 일을 돕고 있겠구만." 오브라디 교수는 이렇게 말했지만 말뜻은 결국 너는 노예가 아니냐는 말을 돌려서 한 것이었다. "예. 누구나 마을 일을 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군. 그 마을에는 자네와 같은 종족이 얼마나 살고 있지?" 지나가는 말로 오브라디 교수가 물었다. 그런데 검은 엘프 족의 대답은 뜻밖의 것이었다. "저희 마을에는 저희 검은 엘프 족 밖에는 살고 있지 않습니다." 그 검은 엘프 족의 말에 오브라디 교수는 이건 대단한 학술적 의의를 갖는 일이라면서 흥분했고, 마로우도 역사적으로 사라진 줄만 알았던 검 은 엘프 족이 사는 마을을 발견했다는 것에 신이 나 있었다. 스칼렛은 일 단 새로운 곳을 발겼했다는 마음에 들떠있는 것 같았고, 크라이도 그리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기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상한 것은 나와 그레 텔이었다. 나야 아무 것도 하기 싫은 상태로 여기까지 끌려 온 셈이니 기 뻐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레텔은 오히려 기분이 나빠진 모양이었 다. "...이상해." 그래텔은 검은 엘프들이 사는 마을 어귀에서 이렇게 한마디하고는 말았 다. "검은 엘프 족은 원래 타실 남쪽에 살고 있었다네. 비스토브레 왕국의 토벌 계획 때 그 일족은 사방으로 흩어져 노예가 되거나, 혹은 떠돌아다 닌다고만 알려져 있었지만, 이렇게 모여서 살고 있는 곳이 있을 줄은 알 지 못했네." 오브라디 교수가 멀리 바라보이는 마을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교수님. 제가 알기로 검은 엘프 족 대부분은 거의 저항하지 않고 순순 히 항복했다고 들었습니다만." 마로우가 말했다. "그렇다네. 검은 엘프 족의 습성이 대게 그러니까 말일세. 하지만 몇몇 은 끝까지 저항하다가 죽었다고 하더군." 나는 용병단에서 들었던 가투신의 말이 떠올랐다. 가투신은 검은 엘프 족과 싸웠던 치열한 전투 상황을 훈련병들에게 들려 준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호의적일 가능성만 있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크라이가 말했다. 크라이의 말은 정곡을 찌르는 것이었다. 기쁨도 잠 시, 일행은 일순 침묵에 휩싸이고 말았다. 정글의 더위는 무지막지 했다. 틀림없이 우리 일행은 여름의 끝부터 가 을까지 이곳 범버쿠 정글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 같았다. 새로운 것을 찾 아간다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보람과 즐거움을 느낀다. 하지만 이 지긋지 긋한 약모기 때가 몸을 물어뜯을 때의 불쾌함과 사방에서 풍겨오는 역한 썩는 냄새, 그리고 언제 어디서 덤벼들지 모를 야생 동물들의 위협을 생 각해 본다면 결코 기분 좋은 일 만은 아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리 일행을 도와주고 있는 검은 엘프 족은 야생 육식동물들을 쫓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대부분의 야생 육식 동물들은 검은 엘프 족이 들고 다니는 강철 막대를 보면 달아나곤 했다. 오브라디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야생 동물들이 강철 막대를 보고 달아나는 이유는 오래 전 마칸의 일족이 세상 을 다스리고 있을 때, 강철 막대에 의해 죽은 야생동물의 원혼이 대를 이 어 내려갔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무리 야생 동물이라지만 배우는 것이 대를 잇는 경우도 있는 법이니 말이야." "제가 알기로 날 때부터 배우는 것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마로우 군. 그건 날 때부터 배우는 것이 있는지 없는지 모른다는 말이 더 정확한 것일세. 누가 알겠는가? 사람이 날 때부터 생명을 사랑해야 한 다고 배우고 태어났는지 말일세. 혹은 그 반대일 수도 있겠지." 오브라디 교수는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을 손으로 한 번 훔친 다음 다시 말을 이었다. "학문이라는 건 말일세, 모르는 걸 모른다고 선언하는 순간 시작되는 것이네. 모른다고 해서 그런 건 없다, 학문에 어긋난다고 말한다면 새로 운 것을 배우고 익힐 수 있겠는가? 다른 모든 분야와 마찬가지로 학문도 변화하고 발전하지 않으면 도태되고 사라지기 마련일세. 학자는 그걸 명 심해야 하네." 오브라디 교수의 말이 끝나자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나뭇잎들은 뜨거운 햇살 아래 녹아 내릴 듯 힘없이 흔들렸고, 내가 타고 있는 가마도 힘겨운 지 좌우로 흔들리고 있었다. 조금 쉬었다 가자고 해야 하지 않을까? 검은 엘프 족은 지치는 법이 없다고 오브라디 교수가 말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검은 엘프 족은 생각보다 너무 우호적이군요." 볼에 달라붙은 약모기가 떨어져 나가기를 기다리면서 나는 오브라디 교 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약모기는 이상한 습성을 지니고 있는 모기였다. 사람을 한 번 물어 피 를 빤 다음 더듬이를 놀려 문 상처를 치료해 주고는 사라지는 것이다. 만 약 약모기가 피를 빨고 있는 중에 약모기를 죽이거나, 혹은 쫓거나 하면 치료를 받을 수 없으므로 피를 빨고 있는 동안 꼼짝도 하지 말아야 한다. 물론 말로야 그냥 조금 참으면 되는 것 아니겠느냐고 말할 수 있겠지만 아무리 팔을 휘저어도 달려드는 약모기 때에 피를 빨릴 때의 느낌은 뭐랄 까 아프다기 보다는 간지러운 느낌이었다. 당장이라도 긁고 싶어지지만 오브라디 교수에게 들은 그대로 약모기는 그냥 놔 두는 것 말고는 수가 없는 벌레다. 이 더운 와중에 상처가 덧나기라도 한다면 그 책임과 결과 는 온전히 본인에게 돌아올 테니까 말이다. "예. 솔직히 저도 우리에게 이렇게 잘 대해주는 이유를 잘 모르겠네 요." 스칼렛이 말했다. 이상하게도 약모기들은 스칼렛에게 달려들지 않았다. 특별히 스칼렛이 팔을 휘젓거나 아니면 무슨 냄새를 풍기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한 번은 약모기가 피를 빠는 느낌을 참기가 어려워서 스칼렛에게 혹시 마법이 아니냐고 물어 본 적도 있었다. 마법이라면 점잖게 내가 모 르는 마법을 하나 배워 볼 수 있겠느냐고 물어볼 심산이었다. 아무리 의 욕이 없다고는 해도 내 몸에 달라붙는 약모기들은 정말 싫었다. "약모기도 먹고살아야지요." 나는 나름대로 스칼렛이 나를 따른다고 생각했는데. 스칼렛이 막상 이 렇게 말하는 것을 들으니 섭섭하기 그지없었다. 물론 스칼렛은 미안하다 는 표정을 짓기는 했지만 말이다. "음. 학술적으로 볼 때 수르카, 자네의 말은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생각 되는 군. 확실히 검은 엘프 족은 우리에게 호의적이야." 오브라디 교수는 이렇게 당연한 말을 심각하게 학술 운운하면서 하는 경향이 있다니까. "스승님. 예나 지금이나 어떤 사태든 냉정하게 파악하시는 건 변함이 없으시군요." 사빈이 오브라디 교수의 말을 받았다. "그것이 아무래도 학자의 태도 아니겠는가? 그나저나 이거 정말 덥구 만." "교수님. 이걸 한 번 드셔보시지요." 마로우가 오브라디 교수에게 긴 모양의 초록색 채소를 건네면서 말했 다. 오브라디 교수의 표정이 밝아졌다. "이건 오이로구만. 언제 먹어도 차갑고 시원한 맛을 내는데다가 학문적 으로도 물기가 많아서 갈증 해소엔 그만이지." 오브라디 교수는 이렇게 말하면서 오이를 받아 씹어먹기 시작했다. 우 적우적하는 오이 씹는 소리가 듣기만 해도 군침이 넘어갔다. 나도 오이를 좀 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마로우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마로우는 내가 레디삐병에 걸린 이후로 항상 나를 싸늘한 눈초리로 보곤 했던 것이다. 내가 특별히 잘못한 게 있는 것도 아닌데 그 렇다. 그래서 나는 눈을 피하기 위해 고개를 뒤로 돌렸다. 내 뒤쪽으로는 스타바를 비롯한 뮤들을 끌고 있는 검은 엘프들이 나란히 서 있었다. 스 타바도 더운지 뮤소리를 내면서 짜증을 부리고 있었다. 하지만 검은 엘프 들이 뮤 다루는 솜씨가 워낙 좋아서 뮤들은 별다른 말썽을 부리지는 않았 다 (예를 들면 누군가의 턱을 발길질로 부수어 놓는다던지 하는 것 말이 다). "교수님. 제가 보기에는 저희가 너무 하는 것 같습니다." 그레텔에게 연신 부채질을 해 주면서 크라이가 말했다. 크라이의 말이 옳았다. 아무리 검은 엘프 족 관습이 그렇다고는 해도 자폰까지 이렇게 검은 엘프 족이 끄는 가마를 타고 간다는 건 너무 하는 일인지도 몰랐다. 아마 누군가가 우리의 모습을 본다면 검은 엘프 족을 노예로 쓰는 귀족들 로 생각할 것이 분명했다. "크라이. 자네 말은 일리가 있네만 우리가 탐험가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되네. 타실에 가면 타실의 법을 따르고 스파일에 가면 스파일의 법을 따르는 것, 이것이 탐험가가 갖추어야 할 첫 번째 조건일세. 우리는 범버 쿠 정글의 검은 엘프 족 영역을 지나고 있고, 그렇다면 그들의 법도를 따 라야 하지 않겠는가?" 오브라디 교수가 말했다. "그나저나 얼마나 더 가야 도착할 수 있겠어요? 앞장서서 가마를 끌고 있는 검은 엘프에게 내가 물었다. "자폰은 여기서 반나절만 더 가면 됩니다." 이 말은 삼 일 전에도 들었던 말이었다. 아마도 내 앞에서 가마를 끌고 있는 검은 엘프는 반나절이라는 말의 뜻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으면서 계속해서 가마를 끄는 검은 엘프 의 기력은 놀라운 것이었다. 떠날 때 검은 엘프 족의 대표(검은 엘프 족 은 장로나 왕이라는 표현대신 대표라는 표현을 썼다)가 말한 그대로였다. "저희 검은 엘프 족은 누군가에게 봉사하는 것을 자랑과 긍지로 여깁니 다. 이곳에서는 오랫동안 서로가 서로에게 봉사 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 러던 차에 잘 오셨습니다. 저희가 자폰까지 빠르고 편안하게 안내 해 드 리지요." 대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고, 우리는 검은 엘프의 마을에서 이틀 동 안 편히 쉬었다가 다시 자폰을 향해 출발할 수 있었다. "...이상해." 하지만 그레텔은 여전히 이상하다는 말만 되풀이해서 하고 있었다. 사 실 이상하다는 말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은 내가 보기에도 이상한 일이었 다. 그레텔은 하잔에서 검은 엘프 족을 본 적도 있었고, 또 이곳에서 별 다른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건가? 크라이. 자네가 가장 잘 알고 있겠지? 한 번 물어 봐주게." 오브라디 교수가 크라이에게 묻자 그레텔이 크라이에게 귓속말을 했다. 크라이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레텔의 말을 들었고 이윽고 오브라디 교수 에게 이렇게 말했다. "영혼이 없다는군요. 그 말뿐입니다." 결국 우리는 그래텔이 왜 그런 소리만을 계속 반복해서 하는지 알아내 지 못하고 자폰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지팡고..." 사빈이 먼 허공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나는 사빈이 저런 식으로 똥폼을 잡는 것을 여러 번 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별로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 다. 그런데 지금은 경우가 좀 달랐다. 내 앞에서 가마를 끄는 검은 엘프 는 항상 틀린 말만 한 것이 아니었다. 자폰이 바로 눈 앞에 있었던 것이 다. "사빈." 오브라디 교수는 취한 듯 자폰을 바라보고 있는 사빈의 뒤편으로 다가 가 이렇게 말했다. "황금의 도시 지팡고. 이곳은 정말로 사나이의 가슴을 뛰게 하는군요." 오브라디 교수는 이렇게 말하는 사빈의 뒤통수를 냅다 후려갈겼다. 얼 마나 새게 후려쳤는지 딱, 하는 소리가 메아리 칠 지경이었다. "여긴 지팡고가 아니라 자폰일세! 앞으로 어떤 종족과 만나게 될 지 모 르는데 그렇게 함부로 말하지 말게. 잊지 말도록. 우리는 이곳에 용에 대 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 온 것이지 약탈을 하거나 침략을 하러 온 것이 아 니라는 걸 말일세." "전 그런 말 한 적 없는데요?" 사빈이 뒤통수를 만지면서 오브라디 교수에게 말했다. "이곳을 지팡고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약탈이고 침략 행위야. 그리고 사나이의 가슴을 뛰게 만든다는 말, 그 말이 결국 약탈과 침략을 의미하 는 것이 아니겠는가?" 오브라디 교수가 말했다. 사빈은 오브라디 교수의 말에 턱을 쓰다듬으 면서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 약탈과 침략이라는 말에 뭔가 느끼는 바가 있는 모양이었다. 나 역시 그랬다. 용병단에서 들었던 살아남는 법. 그곳 에서 들었던 검은 엘프 족의 이야기는 얼핏 무용담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 르지만 실상은 바로 약탈과 침략을 의미하는 말 이상 아무 것도 아닌 것 이다. "제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사빈이 말했다. "지팡고가 아니라 자폰입니다. 자폰..." 사빈은 이렇게 말하면서 멀리 바라보이는 자폰을 예의 그 그윽한 시선 으로 바라보았다. 단어만 바꾸었다 뿐이지 조금도 변하지 않은 태도로 말 이다. 오브라디 교수는 완전히 포기했다는 듯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자, 그럼 이제 저희는 어떻게 할까요? 저희가 들은 임무는 이곳까지 여러분을 모셔다 드리는 것뿐이었습니다." 내 앞에서 가마를 끌던 검은 엘프가 물었다. 오브라디 교수는 화제를 바꾸겠다는 듯이 그 검은 엘프에게 먼저 이렇게 반문했다. "자폰에는 가 본 적 있소? "없습니다. 자폰 인들은 저희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디 에 있는지는 알고 있습니다만 만나 본 적은 거의 없지요." "... 같이 가서 하루라도 쉬었다 가면 좋을 텐데." "저희로서는 곤란합니다. 저희는 누군가가 싫어하는 일은 결코 하지 않 으니까요." "그렇다면 별 수 없겠네요. 그냥 돌아가라고 하는 수밖에." 스칼렛이 말했다. 스칼렛은 자이벌 출신이라 그런지 검은 엘프 족을 부 리는 데에는 별 거부감을 가지고 있지 않은 듯 보였다. "그럼 여기까지 수고들 했네. 그럼 잘 돌아가기를." 가마에서 내리면서 오브라디 교수가 말했다. 나도 가마에서 내렸지만 열이 좀 나고 있는데다가 오랜 여행으로 많이 쇠약해진 탓에 나는 혼자 가마에서 내리지 못하고 스카이의 힘을 빌어야만 했다. "...가지 말지." 나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것은 진심이었다. 나는 정말로 한 발자국도 내 힘으로 걷기가 싫었던 것이다. 자폰이 눈에 들어오는 언덕에서 검은 엘프 족을 보낸 우리는 뮤를 타고 자폰으로 향했다. 스타바는 이제 기운이 난다는 듯이 힘차게 나를 자폰까 지 이끌고 있었다. 내가 누워서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아도 말이다. 그런 데 자폰에 거의 다 갔을 즈음이었다. 검은 엘프 하나가 우리 앞길을 막아 섰다. "돌아가도 좋다고 했는데, 마음이 바뀌었나?" 검은 엘프를 만나자 마자 마로우가 인사를 건네기는커녕 이렇게 퉁명스 럽게 말했다. 그러자 검은 엘프가 말했다. "수르카 님. 오래간 만이군요."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7020/19898 ━━━━━━━━━━━━━━━━━━━━━━━━━━━━━━━━━━━━━━━━ 제 목:[탐그루]A terrible beauty is born 214 관련자료:없음 16/16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3-05 20:20 조회:1888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검은 엘프가 모두 비슷비슷하기는 하지만 말하는 순간 나는 분명 어디 선가 한 번 보았던 검은 엘프가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오래간만이라 고 말하는 것이 검은 엘프의 보통 인사말일리도 없고 말이다). "어디서 보았던지..." 하지만 기억은 나지 않아서 나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나이스입니다." 그제야 나는 기억이 났다. 하잔의 까마귀 벌판에서 에이스로 착각했던 바로 그 나이스였던 것이다. "무슨 일인가." 이제는 찬에서 모짤트를 거친 크라이가 나이스에게 물었다. 그냥 듣기 에도 냉정한 말투였다. 비록 몸이 좋지 않다고 해도 크라이가 별로 나이 스를 마음에 들어하지는 않는 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범버쿠 정글을 돌아다니던 중이었습니다. 라이짐 님의 명령으로요." "라이짐? 라이짐의 명령이라니요?" 나는 나이스에게 이렇게 물었다. 라이짐이 그렇게 높은 사람이 되었단 말일까? "그 이상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수르카 님." "요컨대 군사 기밀이라는 거로군. 그렇다면 우리하고는 별로 볼일이 없 을 텐데." 크라이가 앞으로 한 발 다가서면서 나이스에게 말했다. 아주 작은 동작 이었지만 그 동작에는 살의가 담겨 있는 듯 했다. 모두들 숨을 죽였고 나 이스는 몸을 뒤로 뺐다. "예. 하지만 인사는 드려야 할 것 같았습니다. 라이짐 님과 수르카 님 이 친구 사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요." 궁색하게 들리는 표현이긴 했지만 검은 엘프 족의 습성을 아는 나로서 는 납득이 가는 말이었다. 크라이도 나이스의 말을 이해했는지 다시 발을 뒤로 뺐다. "안부 전해드리지요, 수르카 님." 나이스는 이렇게 말하고는 한 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울창한 숲 속으로 몸을 숨기는 것은 검은 엘프 족에게는 손바닥을 뒤집는 일 보다 쉬운 일 이다. 나는 한 순간 나이스에게 몇 마디를 더 물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었지만 갑자기 오한이 닥쳐와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었다. "또 시작되는 모양이로군." 내가 이를 딱딱 맞부딪치는 모습을 보고서 오브라디 교수가 말했다. "일단 안정하게. 장로가 말하지 않았나. 자폰에 가면 치료법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말일세. 모든 일이 다 잘 될 걸세. 자. 그럼 스카이는 수르 카를 좀 도와주게. 옮는 병은 아니니까 안심하고." 하지만 내가 기억하기에 유민장 마을의 장로는 자폰에 가면 치료법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고 했지 결코 찾을 것이라고 확언하지는 않았다. 자폰 국에 도착했을 때, 우리가 먼저 보게 된 것은 황금으로 깔려있는 도로도 아니었고, 비단옷을 입고 있는 귀족들도 아니었다. 자폰에서 우리 일행이 처음으로 맞닥뜨린 것은 우리를 보고 놀란 눈을 하고서 어디론가 뛰어간 꼬마아이와 그 꼬마아이가 이끌고 온 한 무리의 무사들이었다. 무사들은 모두 날이 한쪽만 있는 칼로 무장하고 있었다. 갑옷은 입고 있지 않았고, 하나 같이 흔히 볼 수 있는 천으로 만들어진 옷을 입고 있 었다. 외모는 비스토브레에서 자주 봐온 사람들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지 만 특별히 날카로운 눈매와 짙은 피부는 좀 특이하다 싶었다. 무사들이 당장이라도 우리를 벨 듯한 자세로 뭐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내 귀에 그 소리는 꼭 '벡벡벡 벡벡벡벡 벡벡'하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 았고 오브라디 교수는 물론이고 우리 일행 누구도 그 벡벡 거리는 소리에 대꾸하지 못했다. 그 때 사빈이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뭔가 말을 하려는 모양이었다. "한 때 자폰을 다녀온 사람에게 들은 말이 있습니다. 자폰인 들은 무기 를 들고 있지 않은 사람을 공격하지는 않는다고 하더군요." 사빈은 이렇게 말하면서 허리에 찬 두 개의 단검을 땅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무사들은 칼을 거두는 대신 우리 쪽으로 조금 더 다가와 바닥에 떨어진 단검을 살폈다. 그들은 단검을 살펴보더니 갑자기 칼을 높이 들었 다. "이런. 단검의 끝을 저 사람들 쪽으로 하면 어떻게 하나!" 오브라디 교수는 이렇게 말하고는 조심스럽게 그 끝을 우리 쪽으로 향 하게 했다. 그러자 무사들은 서로 뭐라고 벡벡거리면서 이야기를 나누더 니 다시 칼을 낮추었다 (사빈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것은 바로 다음 순간의 일이었다). 자폰 국의 무사들에게 가장 유연하게 대처한 것은 마로우였다. 마로우 는 먼저 두 손을 들어올려 싸울 의사가 없다는 것을 알렸다. 자폰 국의 병사들은 마로우의 행동에 일단 마음이 놓이는지 칼을 거두기는 했지만, 표정에는 여전히 경계의 빛이 드러나 있었다. "오브라디 교수님. 제가 프라브리티에서 가지고 온 논문 중에 외국어에 대한 논문이 있습니다만." "그래? 어서 꺼내 보게." 둘 다 웃는 낯으로 무사들을 바라보면서 말하고 있는 모습은 우스꽝스 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오브라디 교수와 마로우가 대화를 나누자 다시 벡 벡 거리는 소리가 들리면서 무사들의 얼굴에 경계의 빛이 한 층 더 드러 났다. 내가 상상하기에 저 무사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벡벡, 벡벡벡? (저것들, 어디서 온 녀석들이지?)" "벡벡벡벡. 벡벡벡... (알 필요없어. 당장 죽여버리는 편이...)" "벡. 벡벡벡벡벡벡. (가만. 일단 두고 보자)" 그 벡벡 거리는 소리는 상상의 폭을 더욱 불길한 쪽으로 몰고 가기에 충분할 만큼 위협적으로 들렸다. 아마 오브라디 교수와 마로우가 나눈 대 화도 그들에게는 위협적으로 들렸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브라 디 교수가 말했듯이, 저들에게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문화가 있고 전통이 있을 테니 말이다. 나는 크라이를 바라보았다. 크라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가장 먼저 공격 할 태세를 갖추고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더 위험하다는 뜻 도 되겠다). 하지만 크라이는 그레텔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도록 하느라 무사들에게는 거의 신경도 쓰지 못할 지경이었다. 하긴 이런 상황에서 적 과 싸울 생각을 한다는 건 바보나 할 짓이리라. 우리가 이곳에 온 것은 이들로부터 용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였지 결코 정복하기 위해서가 아닌 것이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이들에게 신뢰를 주는 것이 무엇보 다 먼저였다. 칼을 들고 설칠 때가 아니라는 말이다. "벡...베엑...벡벡...벡벡벡." 오브라디 교수가 논문을 바라보면서 더듬더듬 말했다. 그러자 병사들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벡벡벡벡벡벡벡벡벡벡!" 무사 하나가 소리쳤고 그러자 웃음소리는 더욱 높아졌다. 오브라디 교 수는 당황했는지 좌우를 살피면서 이렇게 말했다(하긴, 이렇게나 빨리 말 하는 데 알아들을 수 있을 리가 만무하지 않겠는가?). "저 친구들 뭐라는 거지?" "그걸 교수님이 물으시면 어떻게 해요?" 스칼렛이 말했다. 스칼렛 또한 무사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아까 뭐라고 하신 겁니까?" 크라이가 조심스럽게 오브라디 교수에게 물었다. 크라이는 그레텔을 안 고 그레텔이 말을 하지 못하도록 신경 쓰고 있는 모습이었다. "우리는 친구로 왔다. 부탁이니 우리에게 도움을 달라." 오브라디 교수가 말했다. 무사들은 우리 일행을 그들의 국왕이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물론 그 과정에는 대신(으로 보이는) 몇과 장군(으로 보이는) 몇을 거쳐야 했지만 말도 거의 통하지 않는 상황에서 국왕까지 만날 수 있었으니 그 과정은 꽤 순탄한 편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우리가 머물 수 있는 곳은 정글이 바로 보이는 자폰 국의 변방에 위치 한 작은 오두막과 그 주변으로 한정되었고, 우리는 그 일대를 '주거지역' 이라고 불렀다. 주거지역의 외곽에는 언제나 칼을 찬 무사들이 배치되어 있었고, 그들은 밤낮으로 우리를 감시하고 있는 듯 했다(물론 그들은 우 리를 '보호'하고 있다고 생각할 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해가 지면 이곳 자폰의 밤도 연금술사의 등으로 밝게 빛나곤 했다. 그 런데 그 빛은 내가 비스토브레 왕국에서 흔히 보았던 빛보다 훨씬 밝고도 화려했다. 게다가 그 빛은 내가 알고 있는 네 가지 빛깔보다 훨씬 다양했 으며, 그 효능도 훨씬 많은 모양이었다. 무사들은 해가 지면 자주색 빛을 내는 연금술사의 등에 녹슨 칼날을 들이밀었고, 그러면 칼날은 하룻밤 사 이에 다시 정상으로 돌아오곤 했다. 황금색 연금술사의 등에는 물을 깨끗 하게 하는 효능이 있었다. 황금빛을 내는 연금술사의 등 아래 구정물을 그릇에 담아 놓으면 다음 날이면 마실 수 있는 맑은 물로 변하곤 했다(물 론 그렇다고 마시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마시기에는 조금 찜찜했기 때문 이었다). 그 외에도 연금술사의 등의 종류는 다양하고도 많은 듯 했고, 오브라디 교수는 그 효능을 알게 될 때마다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자세하게 기록하곤 했다. 그러는 사이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레디삐병은 점점 더 깊어만 갔다. 물론 나는 아무에게도 내색하지 않았다. 내 병세는 오직 나만이 알 수 있었다. 상황이 급진전을 보인 것은 한 여자의 등장 때문이었다. 여자는 마르고 큰 키에, 긴 얼굴을 하고 있었고, 미인이라고 말하기는 조금 뭣했지만 선 한 인상을 풍기고는 있었다. 특히 웃을 때에는 눈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 도로 작아지곤 했는데, 그 웃음 덕분에 우리는 일단 안심할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만 조금 이상한 것은 그 여자의 얼굴빛이 다른 자폰 인들과는 달리 조금은 덜 검은빛을 내고 있다는 거였다. "아가테." 여자가 자신을 가리키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러자 오브라디 교수가 자 신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오, 브, 라, 디." 하지만 그뿐이었다. 바로 이어서 여자는 벡벡 거리는 소리를 빠르게 내 뱉었다. 표정은 여전히 선한 그대로였지만 자폰의 언어는 아무리 들어봐 도 과격하게만 느껴졌다. "뭐라는 겁니까?" "글쎄. 이 논문을 정리한 게 꽤 오래 전 일이라서 말이야. 이 논문은 자폰을 탐험하고 온 모험가들에게서 들은 말들을 모은 논문이라네." "비스...토브레?" 아가테라고 자신을 밝힌 여자가 말했다. 아가테의 말에 우리 모두의 시 선이 아가테 쪽을 향했다. "비스토브레!" 오브라디 교수는 이렇게 말하면서 활짝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논문 을 살피더니 이렇게 말했다. "벡...베엑...벡벡...벡벡벡." 자폰 국의 입구에서 무사들을 만났을 때 했던 말이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7089/19898 ━━━━━━━━━━━━━━━━━━━━━━━━━━━━━━━━━━━━━━━━ 제 목:[탐그루]A terrible beauty is born 215 관련자료:없음 19/19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3-06 21:22 조회:1917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오브라디..." 아가테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 웃음은 선한 빛은 그대로였지만 어딘지 더 큰 웃음을 참고 있는 빛이 역력한 웃음이었다. 오브라디 교수는 아가 테에게 다시 뭔가 말하려고 논문을 뒤적였다. 그때 아가테가 이렇게 말했 다. "오브라디. 그 말은 '멀리서 온 사람, 화장실이 가고싶다'입니다." 억양은 조금 이상했지만 분명 우리가 쓰는 말이 맞았다. 아가테의 말에 우리는 모두 약간 멍한 상태가 되었다. 우리가 쓰는 말을 자폰인이 하는 걸 듣게 된 충격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 뜻이 오브라디 교수가 가지고 있 던 의도와 너무 동떨어진 것이라 그렇기도 했다. 오브라디 교수는 헛기침 을 한 번 하더니 "우리는 친구로 왔습니다. 부탁이니 우리에게 도움을 주세요." 하고 또박또박 말을 끊어서 발음하면서 말했다. 그러자 아가테가 고개 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적어도 화장실이 급한 건 아니신 것 같군요." 아가테의 말에 오브라디 교수는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건 여유 있는 웃음이라기보다는 자신이 한 실수를 얼버무리려는 웃음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언제쯤 주거지역을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마로우가 물었다. 그러자 아가테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주거지역이 무 엇인지 우리에게 물었다. 마로우가 그 뜻을 설명해 주자 아가테는 이렇게 대답했다. "필요한 때가 오면 가능할 것입니다." 좀 애매한 대답이기는 했지만, 하여간 이렇게 진행되었던 아가테와의 대화를 시작으로 더 이상 우리에게 다 비슷비슷해 보이는 대신이나 장군 들은 찾아오지 않았다. 우리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는 신하들의 눈초리 도 더 이상 없었다. 우리는 아가테와 주로 이야기했고, 아가테는 대부분 잡담을 나누는 척 하면서 우리가 무엇을 목적으로 이곳에 온 것인지를 물 었다. "교수님이라면 비스토브레의 높은 분과도 많이 친하시겠습니다. 국왕을 아십니까? 아니면 장군? 대신?" 아가테의 물음은 보통 이런 식이었다. 하지만 비록 자폰 국의 말솜씨는 엉망이라고 해도 비스토브레 왕국의 말은 오브라디 교수를 따라갈 사람이 없었다. "교수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나라에서 주는 돈을 받고 나라를 위 해서 일하는 사람과 국민이 주는 돈을 받고 국민을 위해 일하는 교수. 저 는 국민의 세금을 받아 국민을 일하는 쪽에 속하는 사람 입니다. 그리고 제 동료들 또한 저와 뜻을 함께 합니다." 오브라디 교수가 이런 식으로 답하면 아가테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종이 에 뭐라고 적고는 했다. 또 일주일이 지날 즈음이 되자 아가테는 우리와 괘 친해지게 되었다. 이는 물론 아가테가 우리에 대한 경계심을 많이 푼 데에는 그 이유가 있 었지만 그만큼 우리도 아가테에게 좋은 감정을 품게 된 때문이기도 했다. 나는 하루 중에 꼭 필요한 시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누워있었다. 병세가 나아지기는커녕 점점 더 악화되고 있었다. 이제 내 병세는 숨기려고 해 봐야 숨길 수가 없을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이마에서는 땀방울이 늘 흘 러내리고 있었고, 얼굴은 날이 갈수록 수척해졌다. 이러다가 죽는 건 아 닐까. 내게는 매일매일 불안한 날의 연속일 뿐이었다. 오브라디 교수는 더듬거리면서 마로우와 벡벡거리는 말을 연습하는데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크라이와 그레텔은 주로 아무 말 없이 앉아 있거 나, 혹은 크라이가 칼 연습을 하는 것을 크레텔이 지켜보는 식으로 시간 을 보내고 있었다. 사빈은 황금에 대한 미련이 남았는지 거주지역을 둘러 보면서 계속 밖으로 나갈 궁리를 하고 있는 듯이 보였고 (심지어 오브라 디 교수에게 배운 몇 마디 안 되는 벡벡 거리는 소리로 무사들을 매수해 보려고까지 했다. 물론 결과는 웃음거리가 될 뿐이었지만), 스칼렛은 나 의 간호를 도맡아 했다. 가끔씩 마로우가 내 간호를 하기도 했다. 내가 보기에는 순전히 스칼렛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하는 것 같았다. 한 번은 스칼렛과 이야기를 나누느라 이마에 얹어야 할 수건을 내 입에 처넣기도 한 걸 보면 말이다. 하지만 나로서는 어떤 이유 건 별 상관없었다. 내 병 은 점점 더 깊어져서 만사가 다 귀찮아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가 오던 어느 날이었다. 여름의 끝을 알리는 비인 모양이었다. 창 밖 으로 내리고 있는 빗물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치 떨어져 흩 날리는 꽃잎처럼 보였다. "비가 오는 군요." 아가테가 말했다. "참으로 신비하지 않아요? 저 많은 빗방울들이 사방에 떨어지고 있어 요. 어느 한 군데에만 떨어지지 않고요." 아가테는 정말로 신기한지 작은 눈을 반짝이면서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 다. 나는 저 날리는 빗물이 나 자신이 살아가는 모습이 아닐까 싶었다. 어디로 가는지, 어디에서 왔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지면을 향해 추락하는 저 빗물이 바로 내 모습이 아닐까 싶었다. "누구도 모르지요. 저것들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요." 나는 힘없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수르카 님. 아직도 몸이 아프시군요. 그렇게까지 의욕을 잃어버리시다 니요." 아가테가 근심어린 눈으로 나에게 물었다. 아가테는 내가 레디삐병이라 는 것을 알고 있는 듯 했다. 아가테는 내 증상에 대해서 자주 묻곤 했다. 그럴 때 마다 몇 번이고 오브라디 교수가 내 병과 치료법에 대해서 물었 지만 아가테는 대답을 하지 않거나 회피하곤 했다. "여름이 끝나 가는 모양입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이곳의 여름은 길지요. 하지만 저 북쪽 비스토브레는 벌써 가을이 시 작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창 밖을 바라보면서 아가테가 말했다. 아가테의 긴 얼굴이 슬퍼 보였 다. "겨울은 오지 않나요, 이곳 남쪽에는?" "추운 시절은 있기 마련이지요. 하지만 그곳보다는 훨씬 따뜻할 겁니 다." 아가테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렇다면 눈은 내리지 않겠네요." 내 옆에서 수건을 찬물에 담그고 있던 스칼렛이 말했다. 스칼렛의 말투 는 어쩐지 차갑게 들렸다. "예. 아버님께서는 말씀하셨지요. 눈이 보고 싶다고. 하늘에서 내려와 온 세상을 하얗게 만든다면서요, 눈은." 이렇게 말하는 아가테의 목소리는 가느다랗게 떨리고 있었다. 뭔가 추 억에 잠기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버님은 북쪽에도 가 보셨던 모양이지요?" "예. 그곳 출신이셨어요. 모험가이셨지요." 아가테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아가테의 말에서 아가테가 왜 다른 사 람에 비해서 얼굴이 하얀 편이었는지 짐작 할 수 있었다. "모두들 바쁘게 움직이고 있네요." 아가테는 이렇게 말하면서 창가 쪽으로 다가갔다. 아마도 우리에게 슬 픈 표정을 보이기 싫은 모양이었다. 스칼렛도 그것을 눈치 챘는지 더 이 상 캐묻지는 않았다. "뭘 하는 건가요?" 나는 누워있었기 때문에 창밖에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까지는 보이지 않 았지만 그래도 뭘 하고 있는지 궁금하기는 했다. "연금술사의 등이 물에 젖지 않도록 나뭇잎으로 감싸고 있어요. 연금술 사의 등 안에 물이 스미면 그 효능이 절반으로 떨어지거든요." 아가테가 말했다. "지금의 저라면 곧 제 효능이 사라져 버릴지도 모르겠군요. 뭐가 제 효 능이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나는 이렇게 말했다. 딴에는 농담이라고 한 말이었지만 내 말은 스칼렛 의 표정을 어둡게 만들고 말았다. "언제쯤 국왕 폐하를 만나 뵐 수 있을까요?" 스칼렛이 물었다. 절박하기까지 한 느낌을 주는 목소리였다. "이 비가 그치면 아마 만나 뵐 수 있을 겁니다." 아가테가 말했다. 그리고 그 말은 그리 많이 틀리지 않았다. 비가 그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왕궁으로 들어오라는 국왕의 전 갈을 아가테를 통해서 받을 수 있었다. 나는 병중이었지만, 아무리 그렇 다고는 해도 국왕을 만나는 일에 빠질 수는 없었다. 국왕을 만나지 않는 다는 게 이들에게 불신을 줄 우려가 있다고 오브라디 교수가 생각했기 때 문이었다. 물론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누워 있고만 싶을 뿐 이었다. 하지만 마로우와 크라이가 들것을 만들어 나를 움직였고, 나는 어쩔 수 없이 들것에 실려 왕궁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왕궁은 내가 본 보통의 성과 그 규모와 겉모습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없었다. 다만 궁 안에 들어서자 수많은 황금빛을 발하는 연금술사의 등 때문에 마치 내부가 온통 황금으로 장식되어 있는 듯 보였다. 아마 멀리 서 왕궁을 본 모험가라면 이곳이 진짜 황금으로 만들어 진 곳이라고 착각 할 만 했다. "황금빛 연금술사의 등이 이렇게 많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오브라디 교수가 물었다. "영혼을 정화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아가테는 이렇게 말했다. 근 보름을 기다려 만나게 된 국왕은 생각보다 젊은 사람이었다. 기껏해 야 마흔이나 되었을까. 하지만 자폰인의 외모는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외모였기 때문에 확실하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얼굴에 주름살이 없다는 것도 자폰 인의 일반적인 특징 일 뿐 젊다는 증거는 되지 못했다. 국왕은 그리 화려하지 않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 왕관을 쓰고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우리가 본 대신과 그리 다를 것도 없는 옷을 입은 모습이 었다. 그리고 왕관만큼은 진짜 황금으로 된 모양이었다. 국왕은 긴장한 탓인지 좌우로 급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아가테의 통역 덕분으로 우리는 국왕과 꽤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 다. 우리가 자폰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 거의 없는 것에 비해서 자폰 국의 국왕은 비스토브레 왕국에 대해서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스파일과 타실간의 반목은 아직 계속 되고 있는지를 묻고 계십니다." 아가테가 말했다. "표면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습니다만 사람들 마음에는 여전히 남아있다 고 전해주십시오." 아가테가 국왕에게 뭐라고 말하자 국왕이 다시 아가테에게 말했다. "보이는 것보다는 보이지 않는 것이 더욱 무섭고 막기 어려운 법이라고 말씀하시는 군요." "그렇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찾아온 이유도 바로 보이지 않는 그것 때 문입니다." "동료의, 그러니까 수르카 님의 병을 말씀하시는 거냐고 물으십니다." "그것보다는 보이지 않는 이 바르도 대륙의 위기를 말하는 것이지요." "... 보이지 않는 위기라면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인지를 물으십니다. 그곳에서 찾을 수 없는 것은 이곳에서도 찾을 수 없지 않겠냐고도 말씀하 셨습니다." "마칸의 강림에 대해서 알고 계시느냐고 물어주십시오." "... 마칸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사람은 이미 모두 죽었다고 말씀하십 니다. 오래 전 일이니까요. 그리고 그것이 과연 적으로 올 지 동지로 올 지 또한 아무도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방관적인 태도시로군요. 아, 이 말은 통역하지 말아 주십시오. 혼잣말 이니까요. 그보다 이렇게 말씀드려 주십시오. 그렇다면 마칸의 강림을 막 았던 카를로스 카를로스 장군과 대마법사 아킨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 시는 지 말입니다." "... 지나간 일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그들의... 그들이 신념을 따랐다 는 것만큼은 분명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아가테는 통역이 좀 어려운지 말을 더듬었다. 그러자 국왕이 갑자기 비 스토브레 말을 내 뱉었다. "난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 그 멍청한 것들은 자신이 뭘 하는지도 모르 면서 그 일을 했다고 말했지. 그리고 오브라디 교수. 나는 방관자가 아니 오." 국왕이 꽤 유창하게 우리말을 하자 모두들 깜짝 놀랐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7090/19898 ━━━━━━━━━━━━━━━━━━━━━━━━━━━━━━━━━━━━━━━━ 제 목:[탐그루]A terrible beauty is born 216 관련자료:없음 22/22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3-06 21:22 조회:1720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우리말을 할 줄 아시는 군요." 오브라디 교수가 놀랍다는 투로 말했다. "예전에 모험가들로부터 배웠소. 아가테에게 통역을 맡긴 것은 순전히 대신들 때문이지. 그 돌대가리들은 외국의 사절과 말할 때는 무조건 통역 을 써야 내 체면이 산다고 생각하거든. 외국 사람들이 오는 일이 그렇게 흔한 일도 아니구만 말이야." 국왕은 찡그린 얼굴을 하고서 고개를 좌우로 흔들면서 말했다. 국왕이 라기 보다는 건달이나 사업가처럼 보이는 모습이었다. "유창하시군요." 오브라디 교수가 말했다. 오브라디 교수는 약간 질렸다는 표정이었다. "국왕의 아들은 많이 배워야 한다고 선대왕께서는 늘 말씀하셨지. 덕분 에 이곳을 찾은 모험가나 난파선의 선원들, 또 이곳까지 도망온 범죄자나 마법 수행을 온 사람들과 어려서부터 함께 했소." 모험가나 선원, 수배자에게 배운 말투니 저렇게 건달 티가 날 수밖에.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선대왕께서는 내가 비스토브레 왕국과 외교를 벌이기를 원하셨지. 하 지만 나는 반대했소.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고. 이곳은 나의 왕국이오." 국왕은 자신감으로 가득 찬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비스토브레 왕국이 우리 왕국의 열 배는 넘을 거라고들 합디다. 인정 하오. 하지만 넓은 땅덩어리의 왕이냐 좁은 땅덩어리의 왕이냐는 별로 중 요하지 않은 것 같소. 얼마나 백성들을 더 편하게 살게 만드느냐. 그것이 관건이지. 보시오. 우리 국민들을. 누구하나 불만 없이 잘 살고 있다오." 우리는 주거 지역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보통의 평범한 자폰 인을 만날 기회는 없었다. 하지만 국왕의 말하는 태도로 보아 정말 그럴 것만 같았 다. "비스토브레 왕국은 대단히 넓은 곳이더군. 나는 들었소. 수많은 사람 들과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또 살인과 강도, 강간, 폭행, 사기, 공갈, 협박 등의 범죄에 대한 이야기도." 오브라디 교수는 즉각 반론을 제기하려고 했지만 국왕은 오브라디 교수 의 말을 막았다. "그것이 사회의 한 단면이지 전체가 아니라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소, 오브라디 교수. 그리고 내 머리에 들어있는 것은 돌덩이가 아니니까. 그 걸 가지고 비스토브레 왕국을 욕하고 싶은 생각은 아주 조금도 없소." 국왕은 이제 사기꾼 같은 말투로 바뀌어 있었다. 뭔가를 노리고 말을 이끌어나가는 사기꾼 말이다. 나는 들것에 실려왔지만 누워서도 국왕의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모든 사회에는 문제가 있기 마련이오. 사람이 모여 사는 곳에는 항상 싸움과 충돌이 존재하기 마련이지. 우리는 대부분의 일을 연금술사의 등 으로 해결하고 있소. 보면 알겠지만 이곳에서는 모든 일이 연금술사의 등 으로 이루어지고 있소. 아침에 일어나면 황금색 연금술사의 등 아래에서 소독된 물을 마시고, 일 하면서 수시로 기운을 북돋는 붉은 색 연금술사 의 등을 쪼이며, 잠들기 전에 푸른 연금술사의 등으로 하루를 반성하고 심지어 형벌마저도 연금술사의 등을 사용하지." "자폰 만큼 다양하지는 않지만 저희 비스토브레 왕국에도 연금술사는 많이 있습니다." 오브라디 교수와 국왕의 대화 사이에 마로우가 끼어들었다. 국왕은 인 상을 한 번 찌푸리더니 이렇게 말을 이었다. "차이점이 하나 있지. 그건 바로 대량생산이라는 것이오. 많이 만들어 내서 많이 보급하는 것. 비스토브레 왕국 같이 넓은 땅덩어리에서는 불가 능한 일이지. 물론 우리는 인구가 적어서일 뿐만 아니라 뛰어난 기술력으 로 연금술사의 등을 보급하고 있소이다. 나는 나름대로 우리 자폰 국이 이 바르도 대륙에서 가장 뛰어난 연금학 지식을 가지고 있는 국가라고 생 각하고 있다오." 국왕은 이렇게 말하면서 천천히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 아가테는 황송 한지 머리를 숙여 예를 표했지만, 국왕은 자폰 국의 국왕이지 비스토브레 왕국의 국왕이 아니었다 (물론 비스토브레의 국왕을 만난다고 해도 별로 예를 표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나는 자존심 강한 사빈이 어떤 얼굴 을 하고 있는가 살펴보았다. 사빈은 놀랍게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역 시 모험가라 이런 자리의 예의에는 익숙한 탓일까 잠시 생각했지만, 사빈 은 그저 고개를 숙이고 졸고 있을 뿐이었다. 역시 사빈은 사빈이로군. "저희가 온 목적은 두 가지 입니다." 오브라디 교수가 말했다. "하나는 이곳에 있다는 오리피 신전의 탐사이고 또 하나는 저기 누워 있는 수르카 군의 병을 치료하는 일입니다. 수르카 군은 레디삐병에 걸려 있습니다." 오브라디 교수가 레디삐병이라고 말하자 나는 등골을 타고 오싹한 기운 이 내려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국왕은 레디삐병이라는 말에 조금도 동 요하지 않고 있었지만 말이다. "오리피 신전이라. 그곳은 신성한 곳이지. 선대의 숨결이 살아 숨쉬는 곳이라오. 그곳을 탐사하고 싶어한 사람들은 많았지. 그렇다면 하나 묻겠 소, 교수. 그곳에 가고 싶어하는 이유는 무엇이오?" "마칸의 부활을 막기 위해서 입니다. 그곳에 있는 용을 조사해 용이란 무엇인가를 찾아내는 일이지요." "마칸의 부활이라. 마칸 족의 강림이라고도 말하지." 국왕은 잠시 생각하는 빛이 되었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소. 나는 어쩌면 그들의 도래가 우리 인간들에게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국왕의 얼굴에 야비해 보이는 미소가 떠올랐다. "하오나 이미 바르도 대륙의 곳곳에는 마물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는 모두가 마칸의 강림과 관련이 있다고 여겨집니다. 비록 이곳에 아직 마물 이 공격을 하고 있지는 않다고 하지만 언제 들이닥치게 될지 모릅니다. 마칸의 강림을 막기 위해서는 마칸의 정체를 밝혀야 하고, 정체를 밝히기 위해서는 용의 정체에 대한 조사가 필수적입니다." "용의 정체라." 국왕은 생각에 잠겨 한 동안 창 밖을 바라보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이 윽고 국왕이 입을 열었다. "마물의 등장은 우리가 별로 걱정할 일이 아니오. 우리에게는 검은 연 금술사의 돌이 있지." 국왕은 이렇게 말하고는 아가테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아가테는 품에서 주먹만한 검은 색 돌을 꺼냈다. "이것을 우리는 밤브라고 부른다오. 검은 연금술사의 등이지." 나는 그것을 본 기억이 있었다. 용병단의 장례식때 관을 태우는 역할을 했던 검은 돌이었다. "이 주먹만한 것 하나면 이곳에 있는 사람들을 모조리 태워 죽일 수 있 다오. 놀라운 연금술이지." "저런 것을... 대량으로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교수라서 그런지 역시 이해가 빠르군." 국왕은 오브라디 교수를 비웃는 듯이 말했다. "그렇다면... 바르도 대륙 최강의 군대가 되겠군요." 오브라디 교수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오브라 디 교수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저 밤브라는 것 하나면 활과 칼로 무장한 일개 십부 쯤은 순식간에 태워버릴 수 있을 거였다. "그렇소. 하지만 우리는 결코 그것을 사람을 죽이는 데 사용하지 않지. 이것이 자폰의 율법이오." 국왕은 갑자기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우리 자폰 국은 천년 전 최종 전쟁 때 불을 뿜는 밤브로 인해 수없이 많은 국민을 잃었다고 전설은 전하지. 세 번째의 불벼락으로 현재 이곳 전체 인구의 백 배가 되는 사람이 죽었다오." "백 배라고 하셨습니까?" "교수. 내 표현을 이해해 주기를. 비스토브레식 백 배니까 말이오. 어 찌되었건 지금보다는 크고 번창한 국가였다고들 하지. 이곳 자폰 국이." "그렇군요." 오브라디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율법을 소중히 여긴다오. 그리고 외국인에게는 늘 친절하지. 이것이 우리 자폰 국이 가지고 있는 긍지요, 교수." 국왕의 얼굴에 드러나고 있는 빛은 자신에 대한 만족감이었다. 나는 어 쩐지 저 모습이 부러웠다. 나도 저런 마음으로 살 수만 있다면. 이곳에서 내가 무엇을 하며 살지 알 수만 있다면. 아니, 내가 무엇인가를 해 놓았 다는 데에 보람을 느낄 수 있다면. 그렇다면 이 병또한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대들에게 청이 하나 있소. 저기 아무 말도 없이 앉아 있는 아가씨와 누워 있는 소년은 마법사로 보이는 데, 내 말이 맞소?" 국왕이 스칼렛과 나를 번갈아 가면서 바라보면서 물었다. 나는 대답을 할 기력이 남아있지 않았지만 스칼렛은 그렇다고 조그맣게 대답했다. "레디삐병에 걸렸다니 마법사가 틀림 없으리라 생각했소. 물론 저 아가 씨도 마법사라고 했으니 교수는 두 명의 마법사와 함께 있는 셈이 되는 구려." 국왕이 말했다. 국왕의 입가에는 만족했다는 듯한 미소가 흐르고 있었 는데, 내가 보기 그 미소는 꼭 먹이를 눈앞에 둔 야수의 그것과 흡사했 다. 국왕은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천천히 말을 다시 이어갔다. "이곳에 이방인이 온 적이 있소. 그대와 같은 곳에 살지만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었지. 그 사람을 잡기 위해 나는 많은 무사들을 잃 었다오." 갑작스럽게 화제가 바뀌었다. 나는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잘 따라잡 을 수가 없었고, 오브라디 교수도 그건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말하는 목소리는 한 나라의 국왕답게 어조가 크게 변하지 않았지만 아마도 그 이 방인 때문에 국왕은 자존심에 꽤 상처를 입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국왕의 표정이 미묘하게 달라지는 것에서 그것을 감지해 낼 수 있었다.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오브라디 교수가 물었다. 국왕은 다시 건달처럼 고개를 흔들면서 말했 다. "사람을 현혹하고 고통을 주었지. 내 국민들에게, 내 신하에게." 아무리 기력이 다했다고는 해도 나는 그 말이 '나에게 고통을 주었다' 는 말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잡지 못했느냐는 물음이로군. 부끄럽지만 녀석은 환영술사였다오. 그래서 도저히 내 무사들의 칼로는 그를 벨 수 없었지. 아무리 연금학이 발달했다고 해도 할 수 없는 일은 있기 마련이라오." "그 말씀은 무슨 뜻이신지요?" 오브라디 교수가 물었다. 나는 오브라디 교수의 목줄기를 타고 내려오 는 땀방울을 보았다. 그것은 그저 더워서 흘리는 땀방울만은 아닌 것 같 았다. 나도 역시 뭔가 불길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누워 있는 소년과 저 분, 이제 두 분의 마법사가 오셨으니 그 녀석을 잡을 수 있으리라 믿소. 내 부탁을 들어주겠소?" 오브라디 교수는 잠시 동안 할 말을 잃은 것 같았다. 아가테가 보고한 모양이었다. 나와 스칼렛이 마법을 쓸 줄 안다는 사실을. 오브라디 교수 는 멍하니 국왕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가 겨우겨우 이렇게 말할 수 있었 다. "하오나 저기 누워있는 수르카 군은 병자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수르카 군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도 이곳 자폰 국에 온 이유 중 에 하나였습니다." "아, 병 말씀이신가?" 국왕은 이렇게 말하고는 손가락을 퉁겨 소리를 내었다. 그러자 뒤편에 서 하얀 옷을 차려입은 노인이 뭔가를 들고 걸어나왔다. "저 친구는 레디삐병에 걸렸다고 했지요? 이것이면 될 것이오, 교수." 노인에게서 뭔가를 건네 받으면서 국왕이 말했다. 나는 그것이 뭔가 유 심히 살펴보았다. 그것은 연금술사의 등이었다. 연금술사의 등에서는 비 가 내리기 전의 구름과도 같은 잿빛이 나고 있었다. "이것을 쪼이면 바로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을 것이오. 아가테." 국왕은 이렇게 말하고는 뭐라고 벡벡거리면서 아가테에게 연금술사의 등을 내밀었다. 아가테는 떨리는 손으로 연금술사의 등을 받아들었다. 아 무리 국왕에게 받는 것이라고는 해도 너무 긴장된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런데 저 빛을 쪼이기만 하면 병이 낫는다니. 나는 도무지 믿기지가 않 았다. "자. 이제 거래를 합시다." 국왕이 말했다. "거래라면...?" "마법사 두 분께서 그 환영술사를 잡아다 주시면 내 나머지 일행들께 오리피 신전을 공개해 드리도록 하겠소이다. 이만하면 거래가 될 런지? 내가 듣기로 비스토브레 왕국 사람들은 거래를 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들 었소이만." 거래라는 말은 내가 자주 쓰는 말이긴 했지만 국왕의 입에서 나오는 소 리로는 천박하기 짝이 없는 말 같았다. "거래라고 하시니 그렇게 해도 좋겠습니다만 국왕의 무사가 잡지 못한 사람을 어떻게 잡아오라는 말씀이신지요?" "환영술사는 마법사에게 약한 법이지. 그냥 가 주시기만 하면 되오. 녀 석이 있는 곳은 알고 있으니." 국왕의 말은 이상할 것이 없었지만 나는 그 말투에서 분명 사기꾼들이 사람을 속일 때 하는 말에서 느낄 수 있는 무언가를 감지해 낼 수 있었 다. 뭔가 속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나는 말할 기운이 없었다. "하지만 이 두 마법사가 환영술사를 데리고 올 수 있다는 보장은 없지 않습니까?" "그냥 가 주시기만 하면 된다고 하지 않았소. 물론 그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 아가테를 딸려 보내드리리다." 이 말에 아가테의 얼굴이 조각상처럼 굳어졌다. 하지만 오브라디 교수 는 자신의 연구 외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아마 여기 있는 두 마법사 분들께서도 전혀 이의는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오브라디 교수는 환하게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저런 웃음을 짓 는 오브라디 교수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세스타 가문과 강연회를 두 고 거래를 할 때도 오브라디 교수는 저런 얼굴 표정을 지었다. "좋소. 그럼 거래는 성립 된 것이오." 아가테가 나에게 회색 빛을 내는 연금술사의 등을 쪼였다. 연금술사의 등은 한 방향으로만 빛이 나가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아가테는 아주 조심 스럽게 그 등을 다루어 내 몸에만 회색 빛이 닿도록 조절하였다. 몸에서 열이 식어 내려가는 듯한 느낌이 들더니 나는 곧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 었다. "놀랍습니다! 자폰국의 연금학은 과연 바르도 대륙 최고라 할만 하군 요!"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7091/19898 ━━━━━━━━━━━━━━━━━━━━━━━━━━━━━━━━━━━━━━━━ 제 목:[탐그루]A terrible beauty is born 217 관련자료:없음 14/14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3-06 21:23 조회:1882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오브라디 교수가 탄성을 발했다. 국왕도 활짝 웃음을 지으면서 오브라 디 교수의 말에 답했고 졸고 있던 사빈도 깨어나 국왕을 바라보았다. 다 만 아가테는 조금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단지 나의 착각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 옆에 있는 스칼렛이 짓고 있는 놀랍 다는 듯한 표정과 그리 다를 것 없는 표정을 그냥 다르게 받아들인 것이 라고 말이다. 하지만 실제는 내 생각과는 달랐다. "느낌을 믿으세요, 수르카 님?" 환영술사를 잡으러 가는 길에 스칼렛이 나에게 물었다. "가끔씩요." 나는 차분하게 스칼렛에게 대답해 주었다. "전 느낌을 믿어요. 생각보다는 거의 느낌에 의존하는 편이지요. 저는 느낌이 생각보다 더 나을 수 있다고 믿어요." 내 말에 스칼렛은 이렇게 대답했다. 환영술사가 있는 곳은 범버쿠 정글 한 가운데에 솟아있는 율리에 산이 라고 했다. "제 역할은 그곳까지 당신들을 인도하는 일입니다." 아가테가 말했다. 나머지 일행은 오리피 신전으로 가야 했기 때문에 아 가테가 우리의 길 안내를 맡게 된 것이었다. 다만 크라이는 나와 함께 가 고 싶다는 뜻을 내비치기는 했지만 나는 이런 말로 크라이를 설득했다. "환영술사에게는 칼이 통하지 않는 법이야." 물론 크라이는 내가 그런 걸 어떻게 알고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서커 스 들판에서 보았던 니난자를 떠올리면서 말했다. "환영술사는 자신의 몸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거든." "그렇다면 어떻게 상대할 건데?" 나는 이 물음에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즉, 아무 생각 없지만 상관 말라고 했다는 뜻이다). 자폰을 떠나 율리에로 가는 길 내내 아가테의 얼굴은 나에게 잿빛을 내 는 연금술사의 등 빛을 주었을 때의 표정 그대로 걱정이 가득한 얼굴이었 다. "먼 여행이 걱정되는 모양이지요?" 나는 기운찬 목소리로 아가테에게 이렇게 물었다. 아가테는 대답 대신 그저 뭐라고 작게 중얼거릴 뿐이었다. 스칼렛은 그런 아가테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 마음에 걸리는 눈치였다. 스타바도 불편한 기운을 눈치 챘는지 뮤 울음소리를 길게 냈다. "그 환영술사는 어떤 사람인가요?" 스칼렛이 아가테에게 물었다. 스칼렛은 아마도 오랫동안 뮤를 타온 것 같았다. 산길을 가는 데에도 뮤를 모는 데 그다지 힘든 기색을 보이지 않 고 있었다. 물론 뮤야 잘만 몬다면 절벽을 타고 내려 올 수 있을 만큼 강 한 다리를 가지고 있지만 말이다. 하지만 아가테는 뮤를 타는 일이 그리 익숙하지 않은 지, 연신 고삐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이곳에 찾아온 이방인이지요." "무슨 죄를 지었는데요?" "국왕의 심기를 건드리는 말을 했답니다. 들으셨잖아요. 사람을 현혹했 다고." "그 죄의 대가가 사형이란 말인가요?" 나는 사빈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리면서 말했다. 자폰에서는 함부로 목 을 베는 일이 잦다고 하더니만 정말로 그런 모양이다 싶었다. "그럴 수도 있지요.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답니다." "그럼 우리가 그곳으로 가는 이유는..." "조심하세요." 아가테는 대답대신에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앞을 바라보았다. 작은 웅덩 이에 물이 고여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물은 고여 있는 물 같지 않게 맑 고도 투명해 보였다. 나는 타코 가죽으로 만들어진 수통을 꺼내 들고 물 쪽으로 스타바를 몰았다. "저라면 그런 짓은 하지 않을 텐데요." 아가테가 나에게 말했다. "저 물에 독이라도 있나요?" "스칼렛 님. 저 물은 마법의 물이랍니다. 마시면 곧바로 늙어버리지 요." "그렇다면 주변에 짐승의 뼈라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나는 활기찬 목소리로 이렇게 아가테에게 물었다. 가능하다면 푸른 색 의 연금술사 빛을 한 번 더 받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다면 좀 더 힘이 날 것 만 같았다. "근처는 쇠독을 뿌려놓았습니다. 짐승들이 행여 저 물을 마시고 늙어버 리지 않도록요. 그래도 쇠독을 뚫고 저 물을 마시는 짐승들도 있지요. 그 런 짐승들의 생명력을 저 웅덩이는 놓치지 않고 가져간답니다. 그 덕에 저 물은 언제나 저렇게 맑은 빛을 하고 있을 수 있는 거지요." 담담한 어조였다. 쇠독에 대해서는 하잔에서 크라이가 찬이었을 때 들 어서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 묻지는 않았다. 그런데 만약 아가테가 말리 지 않았다면 나는 꼼짝없이 늙어버리는 신세가 되었을 거였다(어쩌면 스 타바가 먼저 늙어 버리는 신세가 되었을지도 모르지만). 레디삐병 다음에 는 늙는 병이라. 나는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한 번 쓸어 내렸다. "그렇다면 왜 말리지 않았어요? 큰일 날 뻔했잖아요?" 스칼렛의 물음에 아가테는 대답하지 않고 묵묵히 걸을 뿐이었다. 잠시 어색함이 감돌았다. 나는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이렇게 물었다. "오리피 신전에는 가본 적이 있나요?" "어렸을 적에 몇 번..." 아가테는 말끝을 흐렸다. "그곳에는 뭐가 있나요?" "스칼렛 님. 그곳에는 신전과 그림뿐이랍니다. 그곳에서 오브라디 교수 님이 무엇을 얻게 될지 저는 짐작도 하지 못하겠어요." 그게 걱정이 되어서 일까. 아가테의 얼굴에는 근심이 여전히 가득했다. "혹시 용의 그림이라도 있나요?" 나는 아가테에게 좀 과장되게 웃으면서 이렇게 물었다. 아가테는 웃는 모습이 선해 보이는 여자였다. 근심 어린 표정을 한 여자와 함께 걷는 다 는 건 아무래도 불편한 일이었다. "예. 눈 덮인 산 위에 서 있는 용의 그림이 있지요." 아가테는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근심어린 표정은 더욱 심해질 뿐이었 다. 몇 날 며칠을 뮤를 몰았지만 멀리 보이는 율리에 산은 가까워 질 줄을 몰랐다. 자폰을 떠난 첫날 밤, 나는 스칼렛에게 공간 이동 마법을 쓰면 안 되느냐고 물어보았다. "안 되요." 스칼렛은 아주 간략하게 대답했다. 자폰 국에서 떠난 여행은 불을 지필 필요가 없어서 좋았다. 붉은 연금술사의 등 하나를 켜 놓는 것으로 모닥 불의 효과를 충분히 누릴 수 있었다. 다만 덩치가 좀 커서 지고 다니기에 는 힘이 들었지만 말이다. 연금학이 발달한 나라답게 정말 크고 실용적인 연금술사의 등이었다. 만약에 이런 걸 만드는 법을 알아 가지고 비스토브 레 왕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돈 깨나 만질 수 있겠다 싶었다 (물론 그 러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지만). "제가 기억하기로 공간이동의 한계는 한 명이라면서요. 그래서 그런가 요? 두 번 쓰면 되지 않나요?" "공간 이동 마법은 제가 확실히 알고 있는 길에서만 쓸 수 있다는 걸 모르시는 건 아니겠죠, 수르카 님." 스칼렛이 대답했다. 스칼렛은 뭔가 의심스럽다는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 면서 말하고 있었다. 나는 부끄러워졌지만 연금술사의 등을 만지는 척 하 면서 대충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아가테의 길 안내가 익숙한 덕분에 우리는 생각보다는 빨리 율리에 산 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무리 걸어도 가까워지지 않던 율리에 산은 어느 순간 바로 눈앞에 당도해 있었다. 영원히 도착할 수 없을 것만 같았는데. "사람이 산 위에 오르는 이유가 뭔지 아세요?" 율리에 산밑에 도착한 날, 아가테는 나와 스칼렛에게 이렇게 물었다. "글쎄요. 산 위에 오르면 멀리까지 볼 수 있기 때문일까요?" 스칼렛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런데 그 질문을 받는 순간 나는 갑자기 머리가 화끈거리면서 열이 오르는 것을 느끼면서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산에 오르는 이유라는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내가 왜 이곳에 와 있는지, 또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떠올랐던 것이다. "결국 이렇게 되고 마는군요." 내가 쓰러지자 아가테는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그러자 스칼렛은 아가테 에게 화를 내면서 물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7161/19898 ━━━━━━━━━━━━━━━━━━━━━━━━━━━━━━━━━━━━━━━━ 제 목:[탐그루]A terrible beauty is born 218 관련자료:없음 18/18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3-07 22:11 조회:1943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지금 뭘 한 거예요? 마법인가요?" "아닙니다. 회색 연금술사의 등 때문이지요." 아가테는 주저앉아 있는 나에게서 눈을 피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회색 연금술사의 등은 사람에게 기운을 북돋아 준답니다." "그래서 수르카 님이 지금 이렇게 걸을 수 있는 것 아니에요." "예. 그렇지요. 하지만 그 대가는 무서운 것이지요. 그건 바로 자신의 생명을 갉아먹는 것이랍니다." "그 말은..." "예. 수르카 님은 곧 죽게 됩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것 같군요." 아가테는 측은한 표정이 되어서 나를 바라보았다. 시선을 피한 것은 이 번에는 내 쪽이었다. 나는 도저히 아가테와 눈을 마주 칠 수가 없었다. "병을 치료해 줄 수 있다고 했잖아요? 그건 다 거짓말이었나요?" "스칼렛 님. 국왕께서는 그저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도록 할 수 있다고 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억지가 어디있어요?" "억지가 아닙니다." "당장 돌아가겠어요." "돌아간다고 해도 수르카 님은 살아날 수 없습니다." 아가테의 말에 스칼렛은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 만약 지금 돌아간다면 동료 분들의 안전은 장담할 수 없습니 다. 만약 무슨 일이 동료분들에게 일어난다면... 저에게는 책임이 없습니 다." "지금 협박하시는 건가요?" "그렇게 해석하신다면 섭섭하긴 하지만 별 수 없지요. 하지만 적어도 이곳까지 온 보람은 있으셔야 할 것 같아서요." 아가테는 시선을 이러 저리 옮기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무래도 말하는 것이 어려운 모양이었다. "스칼렛. 됐어요." 나는 이렇게 스칼렛을 말리면서 억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어지 럽기는 했지만 아직 회색 연금술사의 등에 쪼인 효력이 남아있는지 걸을 만 하기는 했다. "내가 하는 게 다 이렇지. 어쩌면 잘된 일이야. 내가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살고 싶지 않아." 나는 혼잣말처럼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이렇게 스칼렛에게 말했 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도움이나 한 번 되고 죽겠어요. 어쩌면 이게 내가 걸어야 할 운명이었는지도 모르겠네요." 나는 억지로 웃기까지 하면서 스칼렛에게 말했다. 아가테의 말은 맞는 말이었다. 여기서 돌아간다고 해도 내가 레디삐병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알지 못하니 자폰에 남아있는 동료들의 안전을 위해서 산을 오르는 게 내 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스칼렛은 도움이나 한 번 되고 죽겠다는 내 말을 듣고 처음에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이어서 화가 난 얼 굴이 되었고 한 참 동안 어떻게 하면 좋을까 생각하는 얼굴을 하고 있다 가 결국 아가테에게 소리쳤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수르카 님은 당신들에게 아무런 해도 입히 지 않았다고요!" 아무래도 스칼렛은 정말로 화가 난 모양이었다. 아가테는 스칼렛의 말 을 묵묵히 듣고만 있었고, 나는 다시 일어나기 시작한 레디삐병 때문에 정신을 올바로 가다듬을 수가 없었다. 나는 산을 올려다보았다. 아가테는 사람들이 산에 오르는 이유를 내게 물었다. 왜냐고? 나는 산에 오르는 사 람이 왜 산에 오르는가를 생각해 보았다. 산이 좋아서. 산 공기가 좋아 서. 산에 고인 물이 좋아서. 산에 있는 나무가 좋아서. 사냥을 위해. 화 전을 위해. 살기 위해. 수도 없이 많은 이유들이 떠올랐지만 나와 관계가 있어 보이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지금 내가 이곳에 있는 이유는 순전히 이름도 모르는 환영술사를 잡기 위해서 아가테를 따와온 것이다. 그렇다 면 왜 환영술사를 잡아야 하는가? 내가 말한 그대로 오브라디 교수를 돕 기 위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지? 용? 마칸? 왜 나는 이런 생각하고 있 어야 하는 것일까. 한 때는 어른이 되고자 했던 적도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칼을 휘 두른 적도 있었다. 진정한 어른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찾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어느 새 돌아보니 내게 있던 그런 진지한 생각들은 하나 둘 사라 져 버렸고, 나는 그냥 살아지니까 사는 삶을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결 과는 나에게 레디삐병으로 오고 말았다. 빌어먹을. 나는 중얼거렸다. "그건 저나 저희 국왕도 마찬가지입니다." 아가테가 스칼렛에게 말했다. 아가테의 별로 그다지 힘이 들어가 있는 것처럼 들리지는 않았다. "자폰 국에서는 연금술사의 등으로 사람의 생명을 단축시키는 일이 해 가 되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나요?" "아닙니다. 하지만 수르카 님의 경우는 좀 다르지요. 레디삐병에 걸려 어차피 죽을 운명이었습니다. 수르카 님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테의 말은 이치에 맞는 말이었다. 나는 다 시 한 번 산을 올려다보았다. 어쩌면 이곳이 내가 마지막으로 가게 될 곳 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억지에요. 만약 생명이 단축된다는 걸 알았다면 절대로 허락하지 않았 을 거예요. 수르카 님이든. 저든. 아니, 누구라도 말렸을 거예요." "그럴 수도 있지요. 하지만 지나가 버린 일에 대해서 그런 식으로 생각 한다는 건 어리석다고 생각되지 않으시는지요?" 아가테의 목소리는 꼭 애원하는 것처럼 들릴 만큼 간절한 마음이 담겨 있었다. 아가테는 '자신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생각해 줬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왜 저하고 수르카 님이었나요? 수르카 님은 그냥 자폰에 남아 있었어도 됐을 텐데요." "그 환영술사가 두 명의 마법사를 데리고 오지 않으면 모습을 드러내지 않겠다고 했어요. 환영술사는 무엇으로도 변할 수 있기 때문에 모습을 찾 아낸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지요." 아가테의 이 말로 나는 우리가 완전히 속았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국 왕의 그 사기꾼 같은 말투를 들었을 때 눈치 챘어야 했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어버린 뒤였다. "저는 제 일을 할뿐입니다. 이해해 주세요." 아가테가 말했다. 아가테의 말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아가테야 임무 를 수행하는 군인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는 입장이니 어쩔 수 없을 것이 었다. 그런데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왜 화가 나질 않는 걸까. 레디삐병 때문일까.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스칼렛도 화를 내 지는 않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순전히 아가테의 선한 인상 때문인지도 모르지. "... 좋아요. 그럼 이제 어떻게 하면 될까요?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할 것 아닌가요?" 스칼렛이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아가테에게 이렇게 물었다. "방법이라. 아직 포기하지 않으셨군요." 아가테는 부럽다는 듯한 눈을 하고서 스칼렛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연하지요. 저희 아버님께서는 시련은 있어도 포기란 없다고 말씀하 셨어요. 그건..." 스칼렛은 말을 더 계속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자이벌인 자신의 부모를 들먹거리고 싶지 않아서 일 것이라고 나는 짐작했다. "좋은 말이로군요." 아가테는 이렇게 말하면서 산 위를 바라보았다. 나는 아가테의 눈에서 뭔가 방울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대낮의 햇빛이 그 방울에 닿아 빛나고 있었다. 나는 아가테의 뒤로 보이는 산의 푸른빛이 번져 나와 하 늘로 땅으로 퍼지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어쩐지 이 세상이 아닌 것 같은 풍경이었다. "이제 산을 오르시지요. 그 사람을 만날 때가 되었습니다." "수르카 님은...?" 나는 도저히 일어날 기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이대로 두고 가라고 말하 고 싶은 심정이었다. 머리는 지끈거렸고 어깨는 축 늘어져 있었다. 도무 지 기운을 낼 수가 없었다. "이곳에서 죽던가, 산 위에서 죽던가. 그건 순전히 수르카 님에게 달려 있습니다." 아가테의 말에서 나는 아가테가 지금까지 지었던 근심 어린 표정의 의 미를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내가 죽을 것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가겠습니다." 나는 이렇게 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산이 흔들리고 있었다. 머리 가 어지러웠다. 하지만 나는 이를 질끈 물었다. 어차피 죽는다면 여기서 아무 의미없이 죽는 것 보다 무엇인가 하다가 죽는 게 더 나을 것 같았 다. "아직 생명이 남아 있는 모양이로군요. 다행입니다. 모닥불도 꺼지기 직전엔 마지막으로 불꽃을 크게 태운다고 했던가요." 아가테는 안쓰럽다는 듯이 이렇게 말하면서 내 팔을 잡아 부축해 주었 다. 그러자 스칼렛이 아가테의 손을 치우고 내 어깨를 잡아주었다. 나는 스칼렛에게 기대었다. 잠시동안이지만 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르카 님을 아끼시는군요." 아가테가 말했다. "포기하지 말아요, 수르카 님." 스칼렛은 아가테의 말에 대꾸도 않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씁쓸한 것을 씹은 사람이나 지을 법한 미소를 지으면서 간신히 스타바에 오를 수 있었 다. 스칼렛의 말은 고마운 말이기는 했지만 나는 이미 모든 것을 포기한 상태였던 것이다. 뜨거운 햇살이 이글거리며 대지를 달구고 있었고, 나는 수풀의 그늘 아래서 발걸음을 옮겼다. 이것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산을 오르는 길은 힘겹기만 했다. 스칼렛은 땀 범벅이 되어서 스타바를 끌어 주었지만 그탓에 체력이 급속도로 떨어져 우리는 자주 쉬어야만 했 다. "도대체, 그, 환영술사, 이름이 뭔가요?" 숨을 헐떡이면서 스칼렛이 아가테에게 물었다. 아가테는 더운 곳에서 태어난 덕분인지 스칼렛보다는 덜 지쳐 있는 것 같았다. 뮤가 산을 잘 타 는 동물이라는 게 고마웠던 적은 이번이 처음인 것 같았다. 만약 스타바 가 아니었다면 나는 틀림없이 저 산 밑에서 죽었으리라. "모스부르거." 아가테는 이렇게 짤막하게만 대답했다. 무슨 뜻일까. 나는 아가테의 얼 굴을 바라보았다. 아가테는 짧은 말속에서 많은 기억을 건져 올릴 수 있 는 모양이었다. 아가테는 생각에 잠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얼마나 뮤를 몰았을까. 우리는 간신히 해가 지기 전에 산 중턱에 다다 를 수 있었다. "이제 다 왔습니다." 아가테가 말하면서 뮤에서 내렸다. 나는 스타바에게 거의 매달리다시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뮤에서 내릴 엄두도 내지 못했다. 이제 해가 진다면 내 체력으로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할 공산이 컸다. 죽음이 바로 눈앞에 어 른거리고 있었다. 눈앞이 자꾸만 흐려지고 있었다. "결국... 왔군요." 스칼렛은 뮤에서 내린 뒤에 나를 스타바 등에서 끌어내렸다. 나는 힘없 이 떨어져 땅바닥에 벌렁 드러누워 버렸다. 나는 숨을 몰아쉬면서 주변을 살펴보았다. 사방이 나무와 풀들로 우거진 곳이었다. 내가 누운 곳은 다 행히도 그늘이어서 그리 뜨겁지는 않았지만 근처의 이파리들이 모두 말라 붙어 있을 만큼 더운 날씨였다. 이러다가 해가 지면 급속도로 날이 추워 진다는 것을 나는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이제 끝인가. "어디 있나요, 그 환영술사는?" 스칼렛의 물음에 아가테는 대답대신 이렇게 소리쳤다. "모스부르거여, 그대를 찾아 내가 왔습니다." 아가테는 마치 신을 부르는 제사장처럼 엄숙하게 소리쳤고, 그 목소리 는 율리에 산에 메아리가 되어 퍼져나갔다. 신성한 기운이 사방에 감돌았 다. 아가테의 얼굴에서 광채가 뿜어져 나오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들었다 (그야 사실은 햇살 때문이었지만 말이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7162/19898 ━━━━━━━━━━━━━━━━━━━━━━━━━━━━━━━━━━━━━━━━ 제 목:[탐그루]A terrible beauty is born 219 관련자료:없음 15/15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3-07 22:11 조회:1756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그렇게 큰 소리로 부르지 마시길. 큰 소리를 들으면 머리가 아프니까 요." 소리는 누워 있는 내 바로 등뒤에서 들려 왔다. 갑자기 그늘이 사라졌 고, 곧 이어 저녁 햇살이 내 온 몸에 내리 쬐었다. 내가 누워 있던 그늘 이 나무를 타고 오르고 있었다. 놀랄 틈도 없이 그림자는 이내 사람의 형 상으로 바뀌었다. "당신이 말한 그대로 두 명의 마법사를 데리고 왔습니다." 아가테가 말했다. 아가테의 말이 끝나자 그림자는 젖은 풀이 탈 때 나 는 연기처럼 뭉쳐지는가 싶더니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어지럽게 흩어지 고 있는 빛은 빛을 내는 벌래 수 백 마리가 꿈틀거리고 있는 것 같은 느 낌을 주었다. 그 빛은 어느 새 사람의 형상으로 바뀌었다. 그 형상은 바 로 나의 형상이었다. "약속대로 나타났습니다." 나의 형상을 하고 있는 환영술사가 말했다. 나의 형상은 대단히 겸손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평소의 나도 저런 모습일까? "내 예언 솜씨가 어때요? 꼭 맞아 들어가지요?" 환영술사는 나를 바라보면서 웃고 있었다. 나는 내가 저렇게 서서 말하 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 는 이런 일이 완전히 처음 겪는 일은 아닌 셈이었다. 서커스 들판에서 본 동춘의 요정들의 공연 때도 나는 수많은 나의 형상을 보았던 것이다. 아 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말한다고 해 봐야 아무도 믿지 않을테니까) 그러고 보니 그 때 본 니난자도 벌레 수백 마리가 꿈틀 거리는 것 같은 빛을 내곤 했다. 니난자도 자신을 환영술사라고 말했었는 데. "잠깐만요. 당신 이름이 뭐라고 했지요? 모스부르?" 스칼렛은 또 하나의 내 형상을 보고도 조금도 당황하는 눈치가 아니었 다. 아마 저 정도 환영술은 많이 보아 온 모양이었다. "모스부르거 입니다. 기억의 저 편으로 사라져 이제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이름 중 하나지요. 만나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스칼렛 양." 환영술사가 말했다. "그래요. 모스부르거. 우리는 당신을 국왕에게 데리고 가려고 왔어요." "왜 그래야 하지요?" 모스부르거가 스칼렛에게 다가가면서 말했다. "그건 국왕과 당신의 문제예요. 저는 제 일만 하면 됩니다." "모순이로군요. 국왕과 나의 문제에 끼어 들었으면서 나와 국왕에게 모 든 책임을 넘기려고 하는 겁니까?" "책임을 넘기다니요? 저는 그저 제 일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잠시만." 이제 막 달아오를 것 같았던 스칼렛과 모스부르거의 대화는 모스부르거 의 일방적인 휴전 선언으로 중단되었다. 스칼렛은 흥분되는지 손을 가슴 에 얹고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었다. "스칼렛 양. 당신 이야기를 먼저 좀 해 보지요." "속지 말아요!" 아가테가 소리쳤다. 다급한 목소리였다. "아가테. 당신이 끼어들 일이 아니오. 이건 나와 스칼렛 사이의 일이니 까." 모스부르거는 이렇게 말하고는 다시 빛을 발하며 형상을 바꾸기 시작했 다. 벌레 수 백마리가 빛과 함께 다시 한 번 꿈틀거렸고, 저물어 가는 저 녁 햇살 아래 그 빛은 부서져 율리에 산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이윽고 모 스부르거는 스칼렛의 형상이 되었다. "당신은 피 냄새가 나는 군요." 스칼렛의 형상을 한 모스부르거가 말했다. 스칼렛은 당황하고 있는 게 분명했지만 주먹를 꼭 쥐면서 의연한 척하려고 하고 있었다. "자이벌 가문이로군요. 세스타? 가문에 흐르는 피로군요." 꼭 쥔 스칼렛의 주먹이 멀리서도 눈에 뜨일 만큼 떨리기 시작했다. 피. 나는 스칼렛의 말을 듣는 순간 언젠가 스칼렛이 자신의 팔을 자해했던 일 과 그 피를 마셨던 일이 떠올랐다. "너무 부정하지 마시길. 원래 자이벌이니 귀족이니 왕족이니 하는 것 뒤에는 적당히 피 냄새가 배어있기 마련이니까요. 마법도 잘 쓰시는군요.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계시지요? 하지만 많은 부분이 물려받은 것 이로군요. 가문으로부터. 그걸 수치스럽다고 생각하실 필요는 없을 텐데 요." 스칼렛의 형상을 한 모스부르거는 사람의 가슴 속 깊은 곳을 뚫어 볼 수 있을 듯한 눈을 하고 있었다. 그 눈은 음산한 빛 마저 내고 있었다. 스칼렛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스칼렛이 말려들고 있는 게 아닐까 싶 었다. "그만!" 아가테가 소리쳤다. 그러자 모스부르거는 몸을 돌려 아가테를 바라보았 다. "이곳을 떠나서 어디론가 가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이 있나요?" 그러자 아가테는 아무 말도 없이 제자리에 멍하니 멈추어 서 버렸다. 나는 저런 얼굴을 본 적이 있었다. 스칼렛의 최면 마법에 걸린 병사들이 보여주었던 얼굴이었다. "재산도 지위도 마법도 모두 물려받은 것이라서 싫어하는군요. 그래서 혼자 마법 수련을 핑계 삼아서 여기까지 오신 거구요. 그렇지요?" "최면 마법이로군요." 스칼렛이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스칼렛은 모스부르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간파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역부족인 모양이었다. 자 신의 모습을 눈앞에 두고서 자신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 그다지 수월할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최면마법과는 다릅니다. 저는 환영술사지요. 그저 환영을 보여드릴 뿐 입니다. 하지만 간혹 환영도 진실을 담을 수 있답니다. 그리고 자신을 돌 아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기도 하지요." 말하고 있는 모스부르거의 어조는 진심이 담겨있었다. 저것은 사람을 현혹하는 사기꾼의 말투와는 조금 다른 것이었다. "최면 마법 따위는 통하지 않아요. 저는 그 원리를 알고 있으니까요." 스칼렛이 말했다. 하지만 스칼렛의 말투는 자신감이 빠져 있었다. "아.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빠졌군요.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지요. 최면 마법의 원리를 아신다고요? 그거 정말 본인이 알고 계시는 겁니까? 누군 가에게 배우거나 물려받은 것이 아니고요? 물론 제가 지금 드리고 있는 말씀은 최면마법은 아닙니다만." 모스부르거는 여기서 말을 끊었다. 스칼렛은 당황하고 있는 기색이 드 러나고 있었다. 모스부르거는 스칼렛의 내면을 읽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읽어낸 내면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이끌고 있을 뿐이었다. 요컨데 마법을 통해 상대에게 자신의 의지를 강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스칼렛 스스로 뭔가를 끌어내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가만있자. 저기 누워 있는 수르카 님을 따르는 이유도 거기에 있군요. 수르카가 스스로 마법의 말을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에 수르카 님에게서 그 비법을 전수 받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요. 독립심이 강하시군요." "그...그래서요?" 스칼렛은 더듬거리고 있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모스부르거에게 넘어갈 것이 분명했다. 그것이 어떤 형태가 될지 나는 상상도 할 수 없었지만 말 이다. "하지만 수르카 님에게 스스로 마법의 말을 찾아내는 능력을 배운다고 해도 그것은 스칼렛, 당신에게서 온 것은 아닙니다. 역시 물려받은 것이 지요. 가문으로부터 물려받고, 마법 학교 선생들로부터 물려받은 다른 것 들과 마찬가지로요. 안 그런가요?" "그렇지 않아요!" 스칼렛이 소리쳤다. 스칼렛의 목소리는 높았지만 그리 큰 메아리를 만 들어내지는 못하고 있었다. 해는 어느 사이 율리에 산 저편으로 사라져 붉은 빛으로 하늘을 물들이고 있었다. "저는... 스스로 얻으려고 했어요. 그리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고 요! 저는 지금까지 수르카 님에게 마법을 가르쳐 달라고 한 적이 없어 요!" "그럼 훔치려고 한 건가요? 수르카 님을 이용하려고 한 건가요? 그런 건가요?" 모스부르거의 목소리는 아이를 타이르는 부모의 그것처럼 자상하게 들 렸다. 하지만 스칼렛의 귀에는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악몽처럼 들리는 모 양이었다. 스칼렛의 표정이 일그러져 있었다. "나... 나는..." 모스부르거는 이렇게 말하면서 스칼렛의 어깨에 손을 짚었다. 스칼렛은 마치 썩은 나무 둥치가 무너지는 것처럼 힘없이 주저 앉았다. "마법사는 제 취향이지요." 모스부르거는 이렇게 말하면서 약간의 미소를 머금었다. "다음은 당신이로군요, 수르카 님." 모스부르거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두려움 보다 슬픔이 앞서는 걸 느 낄 수 있었다. 이제 이렇게 끝나는 것일까. 나는 최후의 순간 조차 누구 에게도 도움이 되지 못하는 구나. 모든 것이 절망적으로 여겨졌다. 내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나는 이렇게 죽어 가는구나 싶 었다. 모스부르거의 몸에서 다시 한 번 빛이 나는가 싶더니 모스부르거는 또다시 나의 형상으로 바뀌었다. 내가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경험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다. 나는 내 (형상을 하고 있는 모스부르거의) 눈을 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7163/19898 ━━━━━━━━━━━━━━━━━━━━━━━━━━━━━━━━━━━━━━━━ 제 목:[탐그루]A terrible beauty is born 220 관련자료:없음 18/18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3-07 22:12 조회:2693 탐그루 # 칼은 마음이다 - 마음은 마법이다 # 모스부르거는 대뜸 이렇게 물었다. 나는 그 물음에 답할 수 없었다. 모 스부르거는 나의 모든 것을 알고 있을 터였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역시 나는 고개를 가로 저을 수밖에 없었다. "당신은 아무 것도 모르는 군요. 어른이 되겠다고 말하지만 왜 어른이 되어야 하는지 모르고, 마칸의 강림을 막고 마물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 지만 왜 그래야 하는지 모르고 있어요." 모스부르거의 말을 직접 듣자 나는 스칼렛이 어떻게 해서 저렇게 쓰러 지고 말았는지 알 수 있었다. 모스부르거는 내가 가장 생각하고 싶지 않 은 부분을 말하고 있었다. 그것도 세상에서 가장 날카로운 칼끝으로 찌르 는 것처럼.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할 때가 온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의 친구가 보이는군요. 칼을 든 친구에요. 그 친구는 자신이 뭘 하는 지 알고 있어요. 부러운가요? 그런가요?" 나는 모스부르거의 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라이짐이 부러 웠다. 라이짐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어디에 있는 지 알고 있었고 또한 그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도 알고 있었다. "당신은 당신을 싫어하고 있어요. 그렇지요? 당신의 선택을 모두 부정 하고 있어요. 아닌가요?" 모스부르거는 마지막 일격을 가하는 검사처럼 냉혹하게 말했다. 분명 그 말은 내 아픈 구석을 찌르는 말이기는 했다. 그러나 나는 그 칼끝이 내 마음의 가장 깊은 곳은 비켜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라이짐이 옳았는가? 나는 하잔에서 라이짐과 갈라졌다. 그렇다면 내가 그때 선택했던 것을 부정해야 하는 것인가?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 니었다. 나는 결코 그 무엇을 위해서 누군가를 죽일 수 없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었다. 이것만큼은 내 마음에 비추어 보아 결코 틀림이 없었다. 모스부르거는 마지막 일격으로 나를 해치웠다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 었다. 모스부르거는 여유를 부리면서 내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모든 게 다 틀려 버렸어요. 어디서부터 틀렸는지는 아무도 모르지요. 아마 그래서 본인 스스로가 본인을 싫어하게 된 거예요. 그렇지요?" 이렇게 말하는 모스부르거의 모습은 마치 쓰러진 자의 가슴에 칼을 박 아 넣는 검사처럼 보였다. 그러자 나는 문득 내 마음 깊은 곳에 모스부르 거의 칼끝을 비켜간 곳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내 진심이었다. 그리고 그 부분이 바로 내가 마법을 만들어 내는 곳이었다. 나는 그 마음을 담아 모스부르거에게 말했다. "내가 선택한 게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내가 말하자 나(의 형상을 하고 있는 모스부르거)의 눈썹이 꿈틀거렸 다. 이럴 리가 없는 데 하는 표정이었다. "이래서 마법사는 재미가 있다니까. 자신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모스부르거는 혼잣말처럼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 득 한 무리의 바람이 저 편에서 불어와 나뭇잎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흩 날리는 나뭇잎은 마치 얼마 전에 보았던 빗줄기처럼 힘없이 흩어져 여기 저기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그 나뭇잎들을 바라보다가 문득 내가 뭔가를 놓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은 누구인가요?" 나는 모스부르거에게 이렇게 물었다. 순간 모스부르거의 몸이 흠칫했 다. "내가 처음에 이곳으로 왔을 때, 당신은 그림자였어요. 그렇지요?" "잠깐. 나는 지금 당신의 모습으로 당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어." 모스부르거는 갑자기 반말로 말을 바꾸었다. 분명 내가 올바로 짚은 모 양이었다. "그렇다면 당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나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겠지 요." "내가 당신을 얕잡아 보았군." 피식 웃으면서 모스부르거가 말했다. "그래. 그렇다고 해 두지. 하지만 나는 세상의 그 누구로도 바뀔 수 있 어. 그게 환영술사지. 나의 환영은 모두의 환영이고 나의 목소리는 모두 의 목소리야." 나뭇잎은 계속해서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주거지역에 누워 창 밖으로 바라보았던 빗물들아 떠올랐다. 모두 같은 빗방울처럼 내 눈에는 보였지 만 그 빗방울들은 모두가 제각각으로 갈 곳을 찾아가고 있었다. "아니요. 당신은 모두의 그림자일 뿐이에요. 거기에 당신의 모습은 없 지요. 나에게 내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지요? 그렇다면 당신은 누구인가 요?" "나는 환영술사지." "모두의 모습이라면 아무의 모습도 아니에요." 내 말에 모스부르거는 한 참 동안 대답을 하지 못했다. 나와 나 (의 모 습을 한 모스부르거) 사이에는 바람과 나뭇잎만이 흩날리고 있었다. 오랫 동안 정적이었다. "그렇다면 말해보게. 당신이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무엇을 하고 있는 지." 나는 모스부르거의 말이 나의 레디삐병을 일으켰던 마법의 말임을 알 수 있었다. 순간 내 마음의 깊은 한 구석에서 마법의 힘이 꿈틀거렸다. 그것은 내가 이제껏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강렬한 느낌이었다. "나는 여기에서 당신과 이야기를 하고 있지요." "그래.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하고 있는 거지? 그것은 뭘 위한 것인 가?" 나는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알고 있었다. 내 안에서 울려 퍼지는 메아 리는 마법의 말이 되어 목구멍을 통해 치밀어 오르는 것처럼 터져 나왔 다. "내가* 있는* 곳이* 내가* 있어야* 할* 곳이고* 내가* 하는* 일이* 내 가* 해야* 할* 일입니다*" 이 마법의 말이 나오는 순간 나는 내 몸을 누르고 있던 레디삐병이 나 와 나(의 형상을 한 모스부르거) 사이에 흐르고 있는 바람과 함께 날아가 버린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스부르거는 나를 놀 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마법사를 상대한다고 했지요? 그리고 모두를 다 당신의 의도대로 쓰러 뜨렸겠지요. 하지만 그 끝에는 무엇이 있던가요?" "내가 국왕에게 했던 물음이로군." 모스부르거는 쓴웃음을 지었다. 모스부르거의 입술에서 벌레가 기어가 는 듯한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국왕은 자신이 모든 것을 이루었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아마 지금도 마찬가지일 걸세. 그는 자신만의 왕국에서 안주하고 싶어했지. 하지만 그 것이 부질없는 일임을 나는 깨우쳐주려고 했다네. 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 했어. 그건 나 자신을 향한 물음이기도 했건 걸세." 입술에서 흘러나오고 있던 빛은 이제 얼굴 전체를 지나 온 몸으로 퍼져 가고 있었다. "수르카. 고맙군. 국왕을 쓰러뜨릴 수 없었지만 나 자신은 쓰러뜨린 모 양이야." 모스부르거의 목소리는 어느 사이 잦아들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 목 소리가 진심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에 대한 조소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이 일을 해 왔는지 나조차도 모르겠네. 언젠가 는 내가 왕이었던 것 같다는 생각도 해 본 적도 있고 또 언젠가는 내가 세상에 남은 최후의 기사가 아니었던가 싶은 적도 있었다네. 모스부르거 라는 이름은 내 이름이 아니야. 그저 이곳 율리에의 그림자였을 뿐이지." 이제 전신에서 퍼져나오던 모스부르거의 빛은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목소리도 그 빛을 따라 사라져갔고, 어느새 모스부르거의 형상은 그저 빛 의 입자들이 떠도는 모습으로만 비추어지고 있었다.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걸세." "그게 언제 일까요?" 나는 모스부르거에게 다가가면서 말했다. 모스부르거는 사라지면서 마 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다면 결코 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자네는 알 수 있을 걸세. 수르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 때마 다, 자신이 싫어질 때마다 자네의 마음을 들여다 보게. 그곳에 내가 있을 걸세." 모스부르거는 이렇게 말하고는 한 줄기 빛이 되어 사라져 버렸다. 그 빛은 한참 동안 내 눈에 여운을 남겼다. 해는 어느 새 완전히 저물어 있 었다. 차가워진 바람이 머리칼을 흔들며 지나갔고 나뭇잎들은 여전히 자 신이 떨어져야 할 곳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은 스칼렛의 순간이동 마법 덕분으로 간단히 돌아올 수 있 었다. 스칼렛은 한 동안 아무런 말이 없었다. 아마도 자신을 돌아보고 있 는 것이리라. 나 또한 스칼렛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국왕은 아가 테의 보고를 듣고 내가 사악한 환영술사를 퇴치해 주었다면서 나를 추켜 세웠지만 나는 그런 일 따위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눈 덮인 곳에 가면 용을 만날 수 있을 걸세. 탐사 결과 분명히 알 수 있었네. 우리는 보았다네. 눈 덮힌 산 위에 있는 용의 그림을 말일세." 흥분된 목소리로 오브라디 교수가 말했다. "눈 덮인 곳이라면 북쪽의 바바 족 영역 너머를 말하는 거야." 마로우도 덩달아 흥분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가실 겁니까?" "사빈 군. 현실적인 지적이로군. 하지만 우리에게 금화는 넉넉히 있다 네" "하지만 북쪽으로 가는 길은 국경을 지나거나 배를 타는 수밖에 없습니 다. 국경의 바바 족 한 복판을 통과하는 일은 창자를 몸밖으로 쏟아 버리 겠다는 말밖에는 되지 않을 것이고, 배를 타고 가는 일은 빙하 지대 때문 에 불가능 할텐데요. 아무리 금화가 많다고 해도 배를 구할 수 있을까 요?" "사빈 군. 뱃사람이었던 사람이 너무 나약하게 말하는 구만. 왜 빙하지 대를 지날 수 없다고 단언하는가? 게다가 실은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북 쪽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네." "예?" "북쪽으로 가는 법을 물었더니 국왕이 알려 주었다네. 헌다이 가문이 뮤 때를 싣고 바바 족의 영역으로 간다고 말일세." 오브라디 교수는 이렇게 말하고는 웃음을 터트렸다. "이건 하늘이 돕는 거야, 하늘이. 우리는 이제 그 배에 타기만 하면 된 다네." "하지만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나이스라고 했던가? 이곳을 찾아온 검은 엘프 족이 말해주었다고 하더 군." "이거 참. 어떻게 빙하지대를 뚫고 배를 몬다는 거야? 안그래, 라이 짐?" 사빈이 나에게 물었다. 나는 그 물음에 이렇게 답해주었다. "내 이름은 수르카야." 내 목소리에는 모스부르거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 북쪽이 아니라 더 먼 세상의 끝까지라도 갈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낙엽이 지는 가을의 첫 자락에서 나는 내 마음에서 새롭게 태어났던 것이다. 자폰을 떠나던 날, 우리를 배웅 해 준 것은 아가테였다. 아가테는 몇 번이고 나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거듭했다. "수르카 님. 언젠가 다시 만나 뵙고 싶어요." "먼 훗날에 탐그루로 오세요. 언젠가는 제가 돌아갈 곳이니까요." 나는 아가테의 선한 미소에 이렇게 답해 주었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 았다. 탐그루에서 보았던 하늘과 이곳 자폰에서 본 하늘은 그 무엇도 달 라 보이지 않았다. 언젠가 탐그루로 돌아갈 날이 오겠지. 만약 저 하늘이 나에게 그런 기회를 준다면 나는 기꺼이 탐그루에서 살리라. 그리고 탐그 루가 아니어도 좋다. 내가 살곳이 내가 사는 곳이고 그곳이 바로 탐그루 일테니까.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8633/19898 ━━━━━━━━━━━━━━━━━━━━━━━━━━━━━━━━━━━━━━━━ 제 목:[탐그루] 영혼의 에뮬레이터 11 221 관련자료:없음 19/19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4-05 21:23 조회:1935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 영혼의 에뮬레이터 11 - 폐허의 와일드건 "...이렇게 해서 수르카는 레디삐병을 물리치고 오브라디 교수와 함께 북쪽으로 향했습니다. 모든 문제의 해답인 용을 찾아 떠나는 그들의 모험 은 계속되고 있었던 거죠." 세헤라자드는 언제나 그랬듯이 이야기를 한 번 끊었다. 용? 나와 리파이, 아톰이 뒤쫓는 용. 그리고 수르카와 오브라디 교수가 뒤쫓는 용. 어쩌면 세헤라자드는 이런 나의 상황을 빗대어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수르카도 나도 아직 용의 실체에는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다. 세헤라자드가 비추어지고 있는 화면에 벌레가 기어가는 것 같은 모양의 잡상이 조금씩 나타나고 있었다. "왜 이야기를 끊는 거야? 난 이제 갇힌 몸이라구. 더 이야기해도 상관 없어." 나는 잡동사니가 가득 들어차 있는 방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몸을 움직 이자 걸터앉아 있던 낡은 의자가 삐걱거렸다. 그러고 보니 방에는 어느 사이에 햇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낡은 형광등이 햇빛 때문에 초라해 진 푸른빛을 깜박거렸다. "이야기는 끊는 때가 중요하지요. 아무리 재미있는 이야기라고 해도 한 도 끝도 없이 할 수는 없잖아요? 이야기는 힘이라구요. 힘을 함부로 써버 리다간 정작 필요할 때 아무것도 못할 수도 있다구요." 세헤라자드가 빙긋 웃음을 지었다. 그러자 화면에 떠돌던 잡상이 더욱 증폭되었다. 나는 문득 세헤라자드에게 어떤 이상이 온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어쩌면 세헤라자드는 일정 시간 이상 이야기를 할 수 없는지도 모른다. 인간의 체력에 한계가 있는 것처럼 사이버 생명체에 도 어떤 결함이나 문제가 있을 수 있는 것 아닐까? "그래. 그건 알겠어. 그럼 너는 보통 언제 이야기를 마치는 거지?" 지쳤을 때냐고 내가 막 물으려는 순간이었다. 세헤라자드가 문득 생각 이 났다는 듯이 내 질문에 답할 생각도 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벌써 시간이 되었군요. 지금부터 제 말을 잘 들어주세요. 이 텔레비전 을 문이 있는 쪽으로 끌고 가 주세요. 천천히요." 시간이 되었다니? 엉뚱한 소리였다. 갑자기 텔레비전을 문이 있는 쪽으 로 끌고 가 달라니 말이다. "왜? 밖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지 궁금하기라도 한 거야?" "별로 농담할 시간이 없어요. 빨리요." 그리 다급한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나는 세헤라자드의 부탁을 거절 할 수가 없었다. 세헤라자드의 얼굴은 거절할 수 없을 정도로 진지했다. 나 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서 텔레비전을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햇빛사이 로 먼지가 번쩍이며 춤을 추는 모습이 보이자 나는 숨을 막아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게다가 손에 시커먼 먼지가 들러붙었기 때문에 당장이라도 그만두고 싶었다. "자. 이제 물러서서 마음속으로 열 까지 세시면 되요." 나는 의자에 다시 앉으려고 했다. 그런데 막상 앉으려고 보니 의자에 쌓인 먼지들이 햇빛에 적나라하게 보였다. 게다가 내가 앉았던 자리만 얄 밉게도 나무 광택을 내고 있었다. 나는 그래서 앉지 않고 그냥 열까지 세 기로 했다. 열을 세었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문 쪽을 바라보았 다. 세헤라자드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어볼까 했지만 갑작스럽게 피곤이 밀어닥치는 게 느껴졌다. 밤을 꼬박 새웠던 것이다. 나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먼지가 풀풀 피어올라 햇빛사이에서 헤 엄을 치기 시작했다. 나는 하품을 할 기력도 없이 그냥 눈을 감아버렸다. 갑자기 세상이 고요해지면서 내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가고 있었다. 이대 로 잠이 드는가 싶었다. 다음 순간이었다. 폭음과 함께 파편이 내 얼굴로 날아들었고 잠이고 뭐 고 나는 그대로 의자에서 굴러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잠은 확 달아나 버 리고 말았지만 상황 판단이 잘 되질 않았다. 텔레비전은 브라운관이 폭발 했는지 흉칙한 몰골을 하고서 내부를 훤히 드러내고 있었다. 가끔씩 탁, 탁, 소리를 내며 불꽃이 솟는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나는 문쪽을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이미 문이 없었다. 문이 있었던 자리와 박살 난 텔레비전이 한 대 덩그라니 서 있었을 뿐이었다. 뒤로 나자빠져 있는 두 사내의 모습이 보였고(그 중 하나는 나를 이 방으 로 집어 던졌던 사내였다) 곧 이어서 대머리의 사내 하나가 나타나 두 사 람을 그대로 발로 걷어차는 모습이 보였다. 거리가 좀 있었지만 '퍽'하는 둔탁한 소리가 귀에 생생하게 들려왔다. 어디 한 군데 부러졌겠다 싶었 다. "빨리 나와! 뭐 해!" 대머리의 사내가 소리쳤다. 나는 그 소리가 귀에 익은 음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그것이 오토라는 것을 생각해 내기까지는 시간이 좀 필요 했다. 스티브 강이 뽑혀진 오토의 곱슬머리를 보여 준 기억은 있었지만 설마 머리를 밀어버렸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나는 허둥지둥 문이 있던 자리를 통과해서 밖으로 나갔다. 리파이와 아 톰은 벌써 마루에 나와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아톰이 잠이 덜 깬 얼굴로 말했다. "지금 그걸 따질 때가 아닙니다." 오토는 이렇게 말하면서 우리가 들어온 문을 향해서 성큼성큼 걸어갔 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두 사내는 턱뼈가 완전히 으스러진 모양이었다. 뒤집힌 눈을 하고서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두 사내는 한결같이 멍한 표정 으로 입을 헤벌리고 있었다. "물러서." 낮은 목소리로 오토는 말한 뒤 그대로 문을 걷어찼다. 그러자 꼭 기다 리고 있었다는 듯이 문이 안쪽으로 열렸고 오토는 그대로 중심을 잃고 뒤 로 나동그라졌다. 대머리가 된 오토가 중심을 잃고 쓰러지는 모습은 꽤나 우스꽝스러워서 나는 갑자기 터져 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아야만 했다. "이런, 이런. 엉뚱한 짓들을 하셨구만." 마르고 키큰 사내 하나가 들어오면서 말했다. 오토는 황급히 일어나 전 투 태세를 갖추었지만 마른 사내에게 주먹을 날리지는 않았다. 마른 사내 의 손에는 빔핸드건이 들려 있었다. "이 직종에 종사하다보면 이런 저런 일들을 많이 겪게 되지. 하지만 이 런 일은 처음이로군. 풀어주려고 하는 데 탈출을 시도하다니 말이야. 뭐, 유감은 없네. 나나 자네나 어차피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일 테니 말이야. 그래도 그렇지 아직 정신을 덜 차린 모양이로군, 오토." 사내는 아주 즐기고 있다는 듯이 웃으면서 말했다. 오토는 화가 머리끝 까지 난 모양이었지만 빔핸드건 때문에 간신히 화를 참고 있는 듯 했다. 나는 이런 상황에서도 파랗게 깎인 오토의 머리에서 김이 모락모락 오르 는 상상이 들어서 다시 한 번 웃음을 참아야만 했다. "물러서라고 하게, 리퍼." 스티브 강이 이렇게 말하면서 지팡이를 짚고서 한 걸음 한 걸음 안으로 들어왔다. 스티브 강은 손짓으로 우리에게 물러서라고 신호를 보냈다. 날 카로운 눈으로 우리를 주시하는 것을 멈추지 않고서 말이다. "부루터스의 짓이 분명하군. 하긴. 예측하기 힘든 친구니까 말일세." "아마추어라 그렇습니다. 프로라면 예측 할 수 있었겠지요. 프로라면 불필요한 행동은 하지 않습니다." 하찮다는 듯이 가볍게 리퍼가 말했다. 스티브 강은 고개를 깊숙이 한 번 끄덕이더니 우리를 향해 말했다. "자네들은 무단 침입에 절도, 거기다가 폭력에 기물파손까지. 범죄자가 따로 없군." 스티브 강이 느릿느릿 말했다. "쓰레기 몇 개 터진 거 하고 벌레 두 마리 쓰러뜨린 게 죄란 말이로 군." 오토가 차갑게 내 뱉었다. "그래 그건 죄가 아닐지 몰라. 하지만 그렇게 머리를 흉측하게 깎고 사 람들 앞에 나서는 건 아무리 봐도 죄악이야. 혐오스럽지 않나? 그래 자넨 아마 거울을 안보나보지." 리퍼라고 불린 마른 사내는 이렇게 말하고는 키득거렸다. 이를 악물고 있는지 오토의 턱뼈가 움직이고 있었다. "자네들은 이해 못하겠지만, 나는 자네들을 풀어 줄 걸세. 아니, 정확 하게 말해서 저기 서 있는 비류라는 청년과 오토, 이렇게 두 사람을 풀어 주겠다는 말이야. 나머지 둘은 여기 좀 남아 있어 줘야겠어." "인질인가?" 아톰이 주머니에 손을 꽂고 빈정거리면서 물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면 그렇다고 해 두지. 하지만 나는 자네들을 어 스폴에 신고하지도 않았어. 그냥 사사로운 조치정도로 생각해 주면 좋겠 는데." 스티브 강은 이렇게 말하고는 나와 오토를 위해 길을 비켜주었다. "자네를 왜 풀어주는 지 알아? 대머리라 찾기 쉬워서 그래." 리퍼라는 사내가 이렇게 떠벌였지만 오토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자존심이 정말로 많이 상한 모양이었다. 되받아치지 않는 걸 보면 말이 다. "가고 싶은 곳으로 가게. 그리고 부루터스를 만나. 그러면 되네. 여기 남은 두 사람은 그 과정을 순조롭게 하기 위한 보험일세. 위험부담만 안 고서야 어디 장사를 할 수 있겠나." 스티브 강이 나와 오토에게 말했다. "어떻게 부루터스를 만나지요?" 나는 스티브 강에게 물었다. 누군가 물어야 할 질문이었지만 나 말고는 아무도 물어 볼 사람이 없을 것 같아서였다. "그런 걱정은 말게. 부루터스가 자네를 찾을 테니." "한 명이 대머리라 찾기도 쉬울 걸? 얼마나 눈에 잘 띄겠어?" 리퍼는 여전히 키득거리면서 말했다. 오토는 역시 아무 말 없이 집 앞 에 세워진 후버 카 쪽으로 향했다. 나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오토의 뒤를 따랐다. 나는 한 순간 뒤를 돌아보았다. 리파이가 나를 보고 있었다. 리 파이의 눈빛은 뭔가 간절히 원하고 있는 듯 했다. "부루터스는 자네를 정말로 보고 싶어하는 것 같구만." 스티브 강은 폭발해 버린 텔레비전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나는 오토의 뒤를 따라 후버 카에 올랐다. 온 길을 거슬러 가는 길은 지루했다. 풍경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무 엇보다도 아무 하고도 이야기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토는 말이라 도 걸었다가는 그대로 날 씹어 먹어버릴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후 버카의 편안한 승차감도 이럴 때에는 별로 도움이 되어 주지 못했다. 차가 시내에 닿자 뿌연 도시의 안개 너머로 솟아있는 건물의 윤곽이 드 러났다. 이제는 살았구나, 싶은 심정이 되었다. 친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 오자 긴장이 풀어져 온몸에 힘이 다 빠지는 것 같았다. 하늘을 올려다보 았다. 오늘은 비라도 내리려는지 하늘은 온통 어두웠다. 차가 시내 중심가에 다다르자 오토는 후버 카에서 현찰과 시커먼 화약 식 권총 하나를 챙기고는 그대로 차에서 내렸다. 38구경 리벌버인 것 같 았지만 자세히 볼 시간은 없었다. 나는 영문도 모르고 오토를 따라서 차 에서 내렸다. "차는 버립니다." 오토는 이렇게 말하고는 화약식 권총의 탄창을 열어 총알을 확인 한 후 허리 뒤쪽에 꽂았다. 그때 나는 화약식 권총을 자세히 볼 시간을 얻었다. 구형중에 구형, 38구경 리벌버 권총이었다. 스미스엔웨슨쯤 되겠지. 아니 면 브라질리아 공화국 산 모조품이거나. "걸어... 가나요?"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오토는 아무 말도 없이 길가에 있는 편의점으 로 들어가 가발 하나를 주문 한 뒤, 담배도 한 갑 샀다. 오토는 아무 말 없이 포장을 뜯어 나에게 담배 하나를 권했고 나 역시 말없이 그것을 받 아 물었다. 뭔가 말하기에는 조금 어색한 분위기였다. "후버 카는 버립니다. 틀림없이 추적장치가 되어 있을 테니까." 오토는 담배연기를 깊숙이 들이마셨다가 내 뱉었다. 길가는 사람들이 오토를 힐끔힐끔 처다 보고 있었다. 하지만 스킨헤드 족이나 빨갛게 물들 인 닭벼슬 머리를 하고 있는 사람들 마저 오토를 쳐다보고 있는 건 좀 이 상했다. 내가 보기엔 오토보다 그 사람들이 더 이상하게 여겨지는데. 물 론 나도 스킨헤드 족을 자주 보기는 했지만 오토처럼 빡빡 밀어 푸른빛이 나는 사람은 그리 흔하진 않았다. 요즘에는 적어도 푸른빛을 없애주는 애 프터세이브 크림 정도는 바르는 게 보통이니까. "나를 풀어 준 건 순전히 내가 프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 행동을 예측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이건 대단한 자만심이야." 담배 한 대에 조금 안정을 찾았는지 오토는 누가 쳐다보건 말건 신경 쓰지 않으면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누구한테 하는 말 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반드시 후회하게 해 주겠어." 배달 서비스로 가발이 도착하자 신용카드로 계산을 마치며 오토가 중얼 거렸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8634/19898 ━━━━━━━━━━━━━━━━━━━━━━━━━━━━━━━━━━━━━━━━ 제 목:[탐그루] 영혼의 에뮬레이터 11 222 관련자료:없음 20/20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4-05 21:24 조회:1606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어디로... 가는 거죠?" 나는 오토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오토는 아무렇게나 가발을 뒤집어썼 다. 가발은 평범한 생머리 가발이었다. 곱슬머리인 오토의 모습에 익숙한 나는 그런 오토의 모습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우리 편을 찾아서." 오토는 이렇게 말하고는 지나가는 택시를 잡았다. 택시에 오르자 오토 는 기사에게 작은 목소리로 행선지를 말해주었다. "일단 앞쪽으로 갑시다." 행선지를 나는 물론이고 아무에게도 알려주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기사는 그런 손님을 여러번 태웠었는지 알겠다면서 차를 움직였다. 택시 기사의 얼굴은 까무잡잡해서 노란 형광 색 제복이 더욱 빛이 나고 있었 다. 밤에는 얼굴이 잘 보이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택시는 출발했지만 목적지로 가는 길은 꽉 막혀 있었다. 어느 지 방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사투리 억양이 남아있는 말을 쓰는 택시운전 기 사는 차가 막힐 시간이 아닌데, 하면서 라디오를 켰다. "... 소방차 십여 대가 출동했지만 차량 때문에 불길 진압이 어려운 상 황입니다. 여기는 8번 도로 긴급 취재반입니다." 나는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건물너머로 시커먼 연기가 머리를 풀고 하 늘을 향해 올라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차가 막힌다는 데요? 지하철로 가겠수?" 라디오 아나운서의 말이 끝나자 택시 운전기사가 오토에게 말했다. 오 토는 말도 없이 신용카드를 내밀었고 기사는 결재 한 뒤 자동문을 열어주 었다. "미행을 피하기 위한 건가요?" 나는 오토에게 물었다.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자니 너무 답답했기 때 문이었다. 오토는 별 말 없이 그냥 앞장서서 걷기만 했고, 나 역시 묵묵 히 오토의 뒤를 따랐다. 지하철을 몇 번이나 내렸다가 다시 타는 걸 보니 오토는 미행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는 모양이었다. 해질 무렵이 되어서야 나와 오토는 목적지 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오토가 향한 곳은 실버우드와 리파이의 집이었다. "비류 님, 무슨 일이에요?" 실버우드와는 꽤 오래간 만에 만나는 거였지만 다행히도 나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짧은 머리는 그대로였지만 예전에 보았던 노랑머리가 아니 라 이번에는 초록색 머리가 되어 있었다. 오토는 일단 실버우드가 나를 확인하자 허락도 받지 않고 안으로 들어 갔고, 실버우드는 조금 당황한 듯 보이기는 했지만 기분이 상하거나 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저 고개를 한 번 갸웃하면서 오토에게 길을 비켜 주 었던 것이다. 실버우드는 핫팬츠에 민소매 옷을 입고 있었다. 팔다리가 가느다란 편 은 아니었지만 실버우드가 원래 글래머였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꽤 매력적 으로 보이는 차림이었다. 집안으로 들어서자 아무렇게나 널려 있는 쓰레기 봉투와 먹다 남은 배 달 음식 포장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실버우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 고 나와 오토에게 자리를 권했다. 오토 역시 자리는 상관하지 않고 앉았 다. 곧 이어서 실버우드에게 일단 무례를 사과한 다음, 지금까지의 일들 을 이야기했다. "... 그래서 어스폴에 알릴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렇군요." 오토가 조리있게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고 (즉 알아야 할 부분만 이야기 해 주었다는 말이다), 설명을 다 듣자 실버우드는 이렇게 말하면 서 모든 사실을 수긍한 듯 했다 (다만 오토는 자신이 대머리가 되었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았다). "리파이는 안전할까요?" "장담할 수 없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불리해 집니다." 완곡한 표현이기는 했지만 실버우드도 그 말속에 담긴 뜻을 알아차리고 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하실 건가요?" "구출할 겁니다." 오토가 말했다. 오토의 말에는 빔핸드건을 들고 있던 리퍼라는 사내에 대한 증오심이 담겨 있는 게 분명했다. 오토의 말을 듣고 있는 내 가슴이 다 뜨겁게 달아오를 지경이었으니까. "도와주시겠지요." 실버우드는 안경테를 손가락으로 바로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쯤?" 실버우드가 물었다. "빠를수록 좋습니다. 그럼 팀을 나누지요. 비류 씨는 부루터스인지 뭔 지 하는 사람의 연락을 기다리세요. 저와 실버우드 씨는 구출 계획을 세 우지요." 오토가 말했다. 그날 저녁, 우리는 텔레비전을 보면서 실버우드의 집 마루에 누워 휴식 을 취했다. 당장이라도 쉴자리가 생기면 잠이 올 것 같더니 막상 실버우 드의 집에 들어오고 보니 잠이 통 오지 않았다. 그건 오토나 실버우드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긴장이 풀리지 않은 탓이리라. "원래 이런 일을 하시지요?" 뉴스 화면을 바라보면서 실버우드가 물었다. "제 직업이지요." "그런데 저 같은 아마추어하고 함께 일 하실 수 있으시겠어요?" "언제를 먼저 묻는 사람은 믿을 수 있습니다. 왜냐고 묻는 사람은 믿을 수 없지요." 오토는 이렇게 말하고는 텔레비전에서 나오고 있는 뉴스를 지켜보았다. 실버우드의 집에 있는 텔레비전은 프로 게이머나 프로그래머가 쓰기에는 구형인 것 같았지만 브라운관이 커서 시청하기에 그리 불편하지는 않았 다. "...오늘 낮 있었던 MS 지부 연쇄 폭발 사건에 대해서 어스폴은 이나바 머의 소행일 가능성에 대해서 수사력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이나바머에 대해서는 전담반도 이미 구성되어 있는 상태고 오랫동안 수사해 온 부분 이기 때문에 빠른 시일 안에 체포는 문제 없다고 어스폴 측은 밝히고 있 습니다만, 세계 곳곳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발생한 이번 MS 지부 연쇄 폭 발 사건의 규모로 볼 때 대규모의 조직이 분명한 만큼, 그리 수사가 순조 롭지만은 않을 것임을 예감케 합니다. 지금까지 현장에서..." 화면에는 잿더미가 된 MS사의 지부가 계속해서 나오고 있었다. 나는 그 것들 중 하나가 8번 도로임을 알 수 있었다. 수면부족 때문에 멍하니 화 면을 지켜보고 있던 나는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낮에 택시에서 내리게 만든 8번 도로에서 난 불이 바로 MS 지부 폭파와 관계가 있다는 걸 쉽게 추리해 낼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지리에 익숙했기 때문이 아니라 화면에 커다랗게 8번 도로라고 적혀있는 표지판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이나바머. 나는 이진우 수사관의 표정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이진우 수사관이 나에게 준 시한인 일주일도 며칠 남지 않은 상황이 아닌가. 텔레비전의 폭발, 그리고 이어진 MS사의 연쇄 폭발. 세계적으로 동시다 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고 한다면 기자의 추리대로 대규모 조직의 소행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일 것이다. 하지만 어스넷을 이용한 범죄 라면, 혼자서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스티브 강이라는 사람은 왜 나와 부루터스를 만나보라고 한 것일까?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될 것을 알 고있었다는 이야기일까? 이나바머가 노리고 있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나 는 나름대로 추리를 해 보았지만 더 이상 생각에 진전이 오지는 않았다. "피곤하시면 저쪽 방으로 가서 주무세요." 뉴스가 끝나자 실버우드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방으로 가면서 말했 다. 나는 오토를 바라보았다. "좀 자두는 게 좋겠습니다. 얼굴이 피곤해 보이는군요." "오토는...?" "전 괜찮습니다." 텔레비전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였다. 아마도 오토는 뭔가 생각에 잠겨 있는 모양이었다. "오토. 텔레비전이 폭발한 거 기억나요?" 나는 오토에게 물었다. MS사에 있는 그 낡은 집에 갇혀 있었을 때, 텔 레비전이 연쇄적으로 폭발했었다. "대충은 짐작하고 있습니다. 비류 씨도 부루터스가 텔레비전에 나와서 알려 주었지요?" 오토의 말은 의외였다. 부루터스가 텔레비전에 나오다니. "아, 예..." 나는 이렇게 말하고는 리파이의 방 쪽으로 걸어갔다. 부루터스와 세헤 라자드.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일까. 부루터스는 세헤라자드와 알고 있을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세헤라자드는 나에게 시간이 다 되었다면 서 문 쪽으로 텔레비전을 옮기라고 말했다. 곧이어 텔레비전이 폭발했고, 오토는 부루터스를 보았다고 하니까. 그러나 부루터스와 세헤라자드는 만 난 적이 없다. 그렇다면 둘이 어떻게 알고 있는 사이일까. 세헤라자드의 영혼이 에뮬레이션 되기 전에? 아니면 나에게 그 랩탑을 주었던 노인이 먼저 알고 있었던 것일까? 머릿속이 복잡했다. 좀처럼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꼬박 열 두 시간을 잤다. 꿈도 없이 깊은 잠을. "이 분이 비류 씨인가요?" "그렇습니다." "그럼 이제 깨우지요. 열 두 시간이 지났다면서요." "그렇게 하지요. 비류 씨?" 오토가 나를 흔들어 깨웠을 때, 나는 이건 꿈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눈 을 뜨고서 가장 먼저 본 것이 난생 처음 보는 소년이었기 때문이었다. 소 년은 나보다 두 세 살은 어려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여기는 어딘가요? 제페트 할아버지의 집?" "그랬으면 나도 좋겠어요.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곳은 실버우드 씨의 집 이지요." 내 헛소리에 소년이 대꾸했다. 말갛게 하얀 얼굴에 악의라고는 하나도 없어 보이는 미소를 짓고 있는 소년이었다. 하지만 얼굴에는 특징이라고 는 찾아 볼 수 없는 평범함만이 있었다. 만약 이 자리에서 눈을 감은 사 이에 다른 소년으로 바뀐다고 해도 알아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누구시죠?" "건." 소년이 자신을 소개했다. "건? G, U, N?" "아뇨, 비류 씨. 팔괘 중에 하늘을 나타내는 바로 그 건이에요." 소년이 대답했다. 하긴. 요즘 세상에 처음 만나는 사람한테 본명을 말 해 주는 사람이 또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내가 누구냐고 물어 본 건 이 름을 알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마침 오토가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소년 의 소개를 대신 해 주었다. "FHA에서 파견한 분입니다." "파견이랄 건 없고... 그냥 길안내 정도입니다." 수줍은 듯이 소년이 말했다. "전 준비 다 됐어요." 마루 쪽에서 실버우드가 걸어나오면서 말했다. 실버우드는 테가 넓은 선글라스에 가죽옷을 입고 있었고 오른손에는 커다란 가방 하나를 들고 있었다. "무난하군요. 누가 본다고 해도 그 색안경만 기억하겠지요." "그건 제 희망사항이에요. 사실은 가죽옷이 눈에 뜨이길 바랬는데요." "오토 씨, 실버우드 씨. 패션에 대해서는 나중에 토론하기로 하고 우선 이곳을 빨리 떠나는 게 급선무일 것 같군요. 비류 씨. 빨리 준비 해 주세 요." 준비? 준비랄 게 뭐 있을까. "신발만 신으면 됩니다." "뒷머리가 떴어요." 실버우드가 친절하게 지적해 줬고 나는 손으로 대충 뒷머리를 누른 뒤 에 오토에게 물었다. "그런데 어디로 가는 거지요?" "이후의 일정은 저한테 맡겨 주세요. FHA는 조직원을 소중히 여깁니다. 이게 첫 번째 원칙이지요." 건이라고 자신을 밝힌 소년이 말했다. 그런데 팔괘 운운하는 걸 보니 동양철학을 전공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두번째 원칙도 있나요?" "일단 자리를 옮기고 이야기하지요. 밖에 차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건이 말했고 오토와 실버우드는 건의 뒤를 따랐다. 나는 저 소년을 믿 어도 좋을까 잠시 의문이 들었지만 일단 오토가 신뢰하고 있다는 게 분명 한 만큼 건을 따라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건이라는 말은 하늘 을 뜻하는 말이라고 했다. 나는 '지금 우리는 하늘의 뜻을 따르고 있군 요' 하고 농담을 던질까 생각해 보았지만 아무래도 썰렁해질 것 같아서 그만 두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8635/19898 ━━━━━━━━━━━━━━━━━━━━━━━━━━━━━━━━━━━━━━━━ 제 목:[탐그루] 영혼의 에뮬레이터 11 223 관련자료:없음 16/16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4-05 21:25 조회:1665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밖에 세워두었다는 차는 평범한 5인 승 배기가스식 자동차였다. 날씨에 따라서 눈에 잘 뜨이는 색으로 바뀌는 차체는 밝은 노란 색을 띄고 있었 다. 누가 본다면 택시로 오인하기 딱 좋은 색이기는 했지만 비오는 날에 눈에 잘 뜨이는 색이기는 했다. 잠들어 있는 사이에 언제부터인지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리는 집 앞에 서서 잠시 기다려야만 했다. 비옷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실버우드 뿐이었고, 실버우드가 세 벌의 비옷을 사올 때까지 움직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완장을 두른 환경미화원들이 나 무 위에 비막이를 설치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특수 코팅처리 된 비막 이가 없다면 나뭇잎들은 아주 쉽게 구멍이 숭숭 뚫려버릴 터였다. "슬픈 일이에요, 비류 씨." 건이 말했다. "왜요? 비가 내리니 싱숭생숭한가보죠?" "지난 세기에 환경에 조금만 신경을 썼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테니까 요." 건은 내 농담에 반응을 보이지 않고서 이렇게 말했다. 소년이 미성으로 이런 말을 하다니 정말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다면 어스넷은 탄생하지 않았겠지요, 건 씨. 그리고 후버카도, 지 하철도, MS사도, 길거리의 깡패들도 없었을테고요." 오토가 떨어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오토의 말은 냉소적인 투였다. "그렇군요."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건을 소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내 판단은 틀 린 것 같았다. 젊어 보이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성형수술을 통 해서건, 돌연변이를 통해서건. 얼마 지나지 않아 모퉁이를 돌아 실버우드가 뛰어왔다. 실버우드는 빈 손이었다. 뭔가 일이 생겼구나. 하지만 내가 걱정하고 있는 사이에 벌써 오토는 화약식 권총을 숨긴 허리 뒤춤으로 손을 가지고 갔다. 건도 역시 품에 손을 집어넣고 있었다. "저, 비류 씨. 그러니까, 현금 카드가, 아니 카드 인출기가..." 상기된 얼굴로 숨을 몰아쉬면서 실버우드가 말했다. "차근차근 말해 보세요." 나는 품에 귄총은 커녕 만년필도 하나 없었기 때문에 팔짱을 끼고서 실 버우드에게 말했다. 품에 손을 집어넣고 사방을 경계하고 있는 건과 오토 가 상대적으로 멋있게 보였다 (순전히 내 생각이지만). 어찌되었건 실버 우드는 내게 차근차근히 설명해 주었고, 덕분에 실버우드의 현금카드와 비밀번호를 가지고 혼자 편의점으로 가는 신세가 되었다 (실버우드의 비 옷을 입고서 말이다). 스티브 강의 말이 옳았다. 부루터스가 나를 찾아내 었던 것이다. 그것도 아주 간단하게. 편의점으로 가는 길 내내 부루터스가 어떤 방법으로 나를 찾아내었을까 를 생각해 보았다. 아마도 부루터스는 실버우드나 내가 카드를 쓰면 바로 접속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어스넷에 뿌려놓았을 것이 틀림없었 다. 하지만 그렇게 하려면 적어도 이곳 코리아 합중국 내에 있는 모든 현 금 인출기를 제어해야 하고, 그렇게 하려면 은행 메인 컴퓨터를 헤킹하는 일쯤은 간단히 할 수 있어야 할 것이었다. 부루터스가 전직 프로그래머라 는 말은 들었지만 이 정도 실력이 있는 사람일 줄은 몰랐다. 사람들은 저마다 색색의 비옷을 입고 거리를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평 소보다 훨씬 적은 수였다. 길거리에서 싸구려 음식을 파는 천막들은 거의 나오지 않았고 그나마 몇 되지 않는 노점상 주인들은 하늘만큼 인상을 찌 푸리고 있었다. 거리에는 교통경찰들이 평소에 두 배는 되는 수가 늘어 서 있었다. 비가 오는 날은 행인은 없어도 차량은 많기 마련이다. 하긴. 나도 비가 오는 날에는 밖에 나가는 법이 없었으니까 말이다 (평소에도 별로 밖에 나가지 않기는 하지만). 편의점 안에는 손님이 하나도 없었다. 미니스커트를 입고 있는 여자 아 르바이트 생 하나가 하품을 하고 있다가 내가 들어가자 서둘러 입을 닫고 시늉만인 인사를 했다. 상점에서 사람을 쓰는 것은 아무래도 전통과 관계 된 문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 아르바이트생이 이곳에서 하는 일이라고는 손님에게 인사하는 것뿐이다. 실제로 계산이나 청소나 물건 진열이나 심지어는 도난 방지까지도 모두 컴퓨터가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을 쓰는 일에 불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적어 도 미니스커트를 입고 있는 여자의 인사를 받는 일은 누구에게나 즐거운 일일 테니까 말이다. 나는 현금카드를 집어넣고 실버우드가 알려준 여섯 자리 암호 번호를 입력했다. '뒤에 있는 아가씨에게 비키라고 말해주게' 화면에는 이런 글씨가 떴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여자 아르바이트생 이 물건을 살펴보는 척하며 이쪽을 힐끔힐끔 보고 있었다. 나는 부루터스 가 이곳 감시카메라를 통해서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부루터스는 생각보다 용의 주도한 모양이었다. "돈을 뽑을 때 뒤에 서 있는 건 강도 아니면 사기꾼이라지요." 나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꼭 품에 뭐라도 하나 차고 있는 것처럼 가슴을 쭉 내밀면서. 비옷을 입은 게 도움이 되어주었다. 여자는 당황하 면서 얼른 카운터 쪽으로 걸어갔다. '지하철 남산 역에서 내려서 첫 번째로 보이는 공중전화에서 기다릴 것. 반드시 혼자 오는 것 잊지 말고.' 글씨는 곧 사라졌고, 이내 곧 인출기는 정상으로 돌아갔다. 나는 인출 기에서 현금을 있는 대로 빼서 비옷 세 벌을 샀다. 현금거래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오토의 충고대로 앞으로는 카드 추적을 피하려면 그 수 밖에 없었다.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여자는 평소보다 훨씬 과장된 투로 인사를 했다. 나는 대꾸하지 않고 편의점을 나섰다. 어쩌면 저 여자가 나를 기억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나는 도망치고 있는 것이다. 어스폴로부터 건 MS사로부터 건. 누구든지 나를 기억한다는 건 별로 반가운 일이 못되었다. 이럴 때는 건처럼 특징없는 얼굴이 좋을 텐데. 나는 생각했다. 비옷을 나누어주면서 나는 부루터스의 전갈을 말해주었다. "함정 아닐까요?" 실버우드가 상황에 맞지 않는 말을 했다. 부루터스 건 아니건 지금으로 서는 갈 도리밖에 없는데도 말이다. "함정이면 빠지지요, 뭐." 나는 가볍게 실버우드에게 말해주었다. 그제야 실버우드도 자신의 말이 지나친 기우였다는 것을 눈치 챘는지 쑥쓰러운 표정이 되었다. 건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자동차에 먼저 올랐고 실버우드는 조수석에 탔다. 나 와 오토는 뒷좌석에 탔는데, 편한 후버카에 익숙해져 있던 터라 좀 불편 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일단 차안에 들어오자 비 걱정을 덜 해도 된다는 생각에 안심이 되었다. 나는 거추장스러운 비옷을 벗으려고 했지 만 오토는 그러지 말라고 했다. 나는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냥 따르기 로 했다. 시동이 걸렸고 건은 차를 몰기 시작했다. 오토는 종이와 펜을 가지고서 뭔가 열심히 쓰고 있었다. 오토는 비옷을 벗고 있었다. 이게 무슨 경우 람. "아직 따라오고 있지요?" 건이 말했다. "두 대, 아니 셋인가?" 여전히 적으면서 오토가 말했다. 나는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두 대 씩 두 팀이에요. 어쩌면 저 길 건너편의 피자 배달 오토바이도 보조하고 있는지 모르지요."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찌되었건 여기서 우회전하지요." "좀 위험할텐데요. 비류 씨. 운동 잘 합니까?" 건이 나에게 물었다. 나는 모든 상황을 종합해 본 다음에 건에게 이렇 게 물었다. "저, 무슨 상황인지 좀 설명해 주시겠어요?" "간단하게 설명드리지요. 비류 씨는 혼자 부루터스를 만나러 가야하고 우리는 추적자를 따돌려야 합니다. 다음 골목에서 오른 쪽으로 돌면 순간 적으로 사각이 생기지요. 추적자들한테 말이지요." 미성으로 건이 차분히 나에게 상황을 설명해 주자 나는 그제야 내가 얼 마나 위험한 상황에 처했는가를 알 수 있었다. "일단 차에서 뛰어내리면 골목 안으로 들어가서 십 분 정도 서 계시다 가 지하철로 가십시오. 첫 번째로 도착하는 지하철은 타지 말고. 혹시 타 지 않는 사람이 보이면 미행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내게 종이를 내밀면서 오토가 말했다. "뭐죠, 이건?" "다음 접선 장소입니다. 건 씨가 FHA의 안가로 옮기기 전에 일단 이곳 에서 만나는 편이 좋겠다고 하시더군요." "저희도 위험부담을 줄여야 하니까요." 건은 웃으면서 설명해 주었다. 이제 달리는 차에서 뛰어내려 다리가 부 러지게 될지도 모를 운명에 처한 나에게 말이다. "뛰어내리는 타이밍을 놓치시면 안 되요, 비류 씨. 차는 커브 길 외에 는 속도를 줄일 수가 없어요." 너무나도 태연하게 건이 말했다. 나도 뛰어내리는 타이밍을 놓치고 싶 지는 않았다. 발목이 부러지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골목은 이제 얼마 남 지 않았다. "FHA는 사람을 중요시하는 게 첫 번째 원칙이라고 안 했나요?" "비류 씨. 두 번째 원칙도 있지요.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한다." "그리고 제 원칙은 일단 일을 맡으면 성공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토는 말이 끝나자마자 문을 열고는 나를 밖으로 밀어버렸다. 나는 뛰 어난 반사신경으로 몸을 움츠렸고, 덕분에 골목 안으로 들어가는데 성공 할 수 있었다. 완전히 뻗어 하늘을 처다보고 있는 자세가 되어서 말이다. 비닐 너머로 보이는 하늘은 무척이나 곱고 아름다웠다, 고 말하고 싶지만 나는 추적자를 생각하면서 재빠른 동작으로 골목으로 들어갔다 (네 다리 를 써서 움직였으니 추적자가 보았다면 개라고 생각했을 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무릎과 등판이 몹시 아팠기 때문에 나는 십분 동안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인상을 쓰고 있었다. "이보게 젊은이. 자네 저 차에서 뛰어내린 건가?." 내 앞에는 걸인으로 보이는 노인이 쭈그리고 앉아있었다. 나는 인상을 쓰면서 이렇게 말했다. "요금이 없어서요." "요즘 같은 시절에 그러면 안되지. 여기 이거 받게." 노인은 이렇게 말하고는 나에게 동전 몇 닢을 내밀었다. 하지만 노인은 내가 인상을 쓰고 있는 것을 돈이 적다는 뜻으로 생각했는지, 요즘같이 어려운 시절에, 운운하면서 골목 저편으로 사라져 버렸다. 비는 좀처럼 그칠 기세가 아니었다. PRINTER/CAPTURE를 OFF 하시고 [ENTER] 를 누르십시오.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8676/19898 ━━━━━━━━━━━━━━━━━━━━━━━━━━━━━━━━━━━━━━━━ 제 목:[탐그루] 영혼의 에뮬레이터 11 224 관련자료:없음 16/16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4-06 22:01 조회:1651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남산 역에 내리고 나니 공중전화라고는 제일 앞쪽에 있는 것 하나 뿐이 었다. 나는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무도 따라오고 있는 것 같지는 않 았다. 지하철에 오를 때도 나처럼 지하철 한 대를 그냥 보낸 사람은 없었 고, 이곳에서도 내려서 바로 나가지 않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전화 앞 에 도착하자 전화벨이 울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전화를 받았다. "오느라고 고생 좀 한 모양이군. 진창에서 헤엄이라도 쳤나? 꼴이 엉망 인데." 나는 뒤편을 올려다보았다. 이번에는 지하철의 감시 카메라가 눈에 들 어왔다. "어디서 만날까요?" 나는 조금은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라고는 생각하고는 있었지 만, 부루터스는 어찌되었건 류를 죽인 살인범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비도 오고 하니 실내가 좋겠군. 게임방이 어떤가?" 게임방이라니. 나는 뉴스에서 보았던 불결한 게임방의 모습이 떠올랐 다. "전 미성년자인데요." "그래? 그렇다면 자네는 한 번도 성인 사이트에 접속 해 본 적이 없나 보지?"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는 해도 게임방은 가고 싶지 않았는데. 나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루터스의 말 그대로 게임방 주인은 내게 신분증 제시를 요구하지 않 았다. 하긴 이렇게 비도 오고 하는데 대낮부터 손님이 있을 턱이 없었다. "어떤 걸 원하시는지요?" "온라인 춘향전." 나는 부루터스가 말한 게임을 말하기는 했지만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 다. 내가 게임방에서 성인용 온라인 게임을 하게 될 줄은 정말 생각해 보 지 못했다. 뚱보인 게임방 주인은 느릿느릿 움직이면서 게임 시디를 꺼내 나에게 주었다. "15번 방으로 가세요." 그리고는 나한테는 별 관심도 없다는 듯이 텔레비전으로 눈을 옮겼다. 부루터스가 가게는 잘 고른 모양이었다. 이곳이라면 누가 따라오는지도 쉽게 알 수 있을 뿐더러 나중에라도 주인이 나를 기억하는 일 따위는 없 을 게 분명했다. 이런 곳의 주인들은 손님과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자신 을 기억하는 주인에게 찾아가는 손님은 없는 게 이런 가게의 특징이다. 한때는 게임방이 청소년들이 온라인 게임을 즐기는 공간이었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그 소년들은 곧 어른이 되었고, 온라인 게임은 어스넷의 발달과 함께 집에서 즐기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래서 게임방은 점차 성인 용 게임으로 바뀌어 갔고 결국에는 사비어 섹스를 즐기기 위한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 되었던 것이다. 15번 방에 들어가자 어두운 조명 아래 가상 현실 장비가 눈에 들어왔 다. 고글과 옷, 장갑, 그리고 무엇에 쓰는 것인지 쉽게 알 수 있는 여성 용 장비도 있었다. 게임방은 이제 사이버 섹스를 즐기는 사람 중에 이런 것을 구입할 만한 돈이 없는 사람만 오는 곳이 된 것이었다. 나는 아무리 소독이 되어있다는 의미인 붉은 십자가가 그려진 흰 띠가 둘러져 있다고는 해도 저런 것을 착용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나는 조심스럽게 고글만은 뒤집어썼다. 그러자 곧 초기 화면이 떴다. "춘향전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원하시는 서비스 번호를 눌러 주세요." 유명한 손맥사의 춘향이 케릭터가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서 나에게 말했 다. 사이버 섹스 프로그램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장갑을 꼭 껴야 한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나는 기분 나쁜 일이긴 했지만 어쩔 수없이 흰 띠를 끊고 장갑을 꼈다. 누군가가 꼈을 것이 분명한 장갑을 끼는 일은 불쾌하 기까지 했다. 나는 손을 움직여 춘향이의 배꼽에 적혀 있는 8이라는 수자 를 눌렀다. "취향을 골라주세요." 나는 지적인 꼬마를 골라 선택했다. 나는 부루터스의 취향을 의심해 보 지 않을 수 없었다. 로리타 컴플렉스라는 말을 들어는 봤지만 이렇게 직 접 확인하게 될 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다. 장소는 가을의 벌판을 택했다. 어두워지는가 싶더니 이내 곧 넓은 벌판이 눈앞에 펼쳐졌다. "이런 곳으로 불러서 미안하네." 소리가 난 곳은 뒤쪽이었다. 나는 몸을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그곳에 는 류를 닮은 꼬마가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이지 깨물어주고 싶을 만큼 귀엽게 생긴 꼬마 여자아이 였다. 저런 여자아이와 사이버 섹 스를 즐기는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어쩌면 부루터스가 그런 사람 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자 등골이 오싹해 졌다. 부루터스는 류와 켄 을 돌보아 준다는 핑계로 밤늦도록 함께 있곤 했던 것이다. "취향이... 별나시군요." 나는 이렇게 말했다. 달리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오해는 말게. 그저 안전한 장소를 생각해 본 것뿐이니까 말일세." 꼬마애가 어른의 말투로 말하는 것을 듣고 있자니 기분이 묘해졌다. 그 런데 부루터스의 말투는 판이하게 달라져 있었다. 조금은 불안한 듯 하면 서 여유를 부리려고 하는 부루터스의 목소리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고 꼭 마피아 보스가 손을 턱에 괴고 하는 어조가 느껴지고 있었다. "별 수 없지요. MS사도 어스폴도 나를 뒤쫓고 있으니까요." "이해해주니 고맙군. 좀 편하게 앉게. 부탁할 것이 있으니까." 나는 부루터스가 부탁이라는 말을 하자마자 일단 거래를 해야겠다고 생 각했다. 세헤라자드가 들려준 탐그루 이야기에 나오는 수르카처럼 말이 다. 그런데 세헤라자드를 떠올리자 나는 이곳에서 세헤라자드를 만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갑자기 얼굴이 달아오르 면서 가슴이 뛰었다. 나는 세헤라자드 생각을 지우려고 노력하면서 지금 껏 생각해 온 말을 부루터스에게 던졌다. "부루터스. 당신이 이나바머인 줄은 몰랐어요." "미안하군. 하지만 일의 성격상 이야기 해 줄 수는 없었어." 냉소적인 말투였다. 소녀의 네오폴리곤은 거의 완벽하게 냉소적인 웃음 을 재현해 내고 있었다. 과학의 발달이 결국 인간에게 안겨준 것은 이런 정도인 것일까? "MS사 말만 나오면 보여준 그 강박관념은 전부 다 연기였나요?" "그건 아니야, 비류. 오랫동안 나는 정신분열에 시달려 왔다네. 나름대 로는 심리 치료사도 만나봤고, 또 적응을 위한 훈련도 해 보았네만 별 소 용이 없더군." "그랬군요." 나는 자리에 걸터앉으면서 말했다. 만약에 이곳에 비치되어 있는 옷도 입었다면 들판의 감촉도 느껴졌을 거였다. "하지만 한가지 의문은 남아 있어요. 왜 MS사는 나보고 당신과 만나보 라고 한 거지요?" "그야 몇 가지 이유가 있지. 그 친구들, 나한테 공격당하고 있거든." 소녀는 키득거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공격 당하고 있다? 아마도 부루터 스는 오랫동안 MS사를 괴롭혀 온 것이 분명하다고 여겨졌다. 은행과 지하 철의 감시 카메라를 헤킹할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는 부루터스라면 MS 사가 입은 피해도 만만치 않겠다 싶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지. 비류라는 친구가 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나한 테 보내라. 그렇게 해 준다면 당분간 공격을 중지해 주겠다, 뭐 이런 소 리를 했지. 물론 녀석들이야 너를 미끼로 나를 찾으려는 속셈이었겠지만 말이야." "그렇다면 부루터스의 속셈은 다른 데 있다는 건가요?" "굳." 소녀는 풀밭에 앉으면서 말했다. "말했지 않았던가? 내가 부탁 할 것이 있다고 말이야." "그래요. 그랬지요." 나는 순진하게도 이렇게 말했지만 속마음은 어떻게든 거래를 해야겠다 고 생각하고 있었다. 부루터스는 범죄자였다. FHA의 입장은 알 수 없다고 해도 적어도 어스폴이 추적하고 있는 이나바머가 바로 부루터스인 것이 다. 일방적으로 부루터스의 청을 들어주는 것은 빠질 줄 뻔히 알고 있는 진창으로 오른 발을 들이미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내 부탁은 간단해. 세헤라자드를 설득해 주게." 세헤라자드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나는 몸을 움찔했다. 마치 공포영화 에서 다음 장면에 뻔히 악당이 식칼을 들고 튀어나올 거라는 걸 알고 있 으면서도 놀라는 관객처럼. 세헤라자드와 부루터스는 MS사의 그 낡은 집 에서 이미 서로 알고 있는 사이라는 게 분명해졌다. 하지만 이렇게 직접 입으로 듣게 되자 또다시 나는 놀라고 말았던 것이다. "어떻게 세헤라자드를 알지요?" "나는 모르는 게 없어. 적어도 여기서는 말이야." 여기가 어디를 말하는 지는 알 수 없었지만 부루터스는 재미있다는 듯 이 키득거리면서 말했다. 나는 음침한 방구석에서 사이버 섹스용 장비를 몸에 걸치고 키득거리고 있을 부루터스를 생각해 보았다. 방구석에는 거 미줄이 쳐져 있을 것 같았고 바닥에는 휴지조각들이 뒹굴고 있을 것 같았 다. "뭘 설득하라는 거지요?" 태연한 척 나는 이렇게 물었다. 어떻게든 거래를 해야 한다는 생각만이 머리를 떠돌고 있었다. "내 일을 돕도록." 나는 부루터스의 속셈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부루터스가 필요한 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친한 세헤라자드였던 것이다. 나는 대답을 하지 않았 다. 상황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내가 하는 일이 어떤 일인지 알고 있는가?" "테러지요. 어스넷과 연결되어 있는 가전 제품을 박살내는." "그건 하나의 상징적인 행동일 뿐이지.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MS사 에 대한 내 작은 저항의 몸짓이란 말일세. 그래. 내가 테러를 하고있다는 건 인정하겠네. 어떻게 보면 무고한 사람들이 다치고 피해를 입기도 하겠 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내버려두면 어떻게 되버릴지 아는가? 내가 입히는 피해의 몇십배, 아니, 몇억배의 피해가 생길 걸세!" 소녀는 벌떡 일어나면서 나를 향해 외쳤다. 나는 그 기세에 눌려 뒤로 몇 걸음 움직이고 말았다. "난 그런 거 몰라요." 일단 나는 이렇게 말을 시작했다. 거래를 하려면 공평한 상태 - 즉 내 가 원하는 것을 받고 상대가 원하는 것을 줄 수 있는 상태가 되어야 한 다. 어찌되었건 나는 MS사건 FHA건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정보가 공유되 건 독점되건 내게 중요한 것은 게임을 하면서 살아가는 즐거운 인생 뿐이 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8677/19898 ━━━━━━━━━━━━━━━━━━━━━━━━━━━━━━━━━━━━━━━━ 제 목:[탐그루] 영혼의 에뮬레이터 11 225 관련자료:없음 15/15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4-06 22:02 조회:1527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내가 얻게 되는 게 뭐지요?" 나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부루터스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러자 소녀 의 얼굴에 다시 한 번 냉소가 머금어졌다. 섬뜩한 느낌이 훑고 내려갔다. "죽지 않는 거지. 내 말 한마디면 잡혀 있는 리파이도 아톰도, 또 너도 네 동료들도 마찬가지로 죽게 돼. MS사가 어떤 곳인지 아는가? 나를 죽이 려고 살인청부업자를 보내고, 어린아이를 죽이는 녀석들이야!" 부루터스는 흥분하고 있었다. "어떤 곳인데요." 나는 내가 이상하게 여겨질 만큼 침착하게 부루터스에게 물었다. 부루 터스는 내 질문에 기다렸다는 듯이 답을 했다. "용 프로젝트라는 말 들어봤나?" 리파이와 아톰이 갇히게 된 것도 순전히 바로 그 용때문이었다. 나는 용의 비밀을 이제는 알 수 있겠구나 싶어졌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MS사의 서치로봇 계획에 대해서는 알고 있겠지. 리파이와 아톰이 신나 게 떠들었을 테니 말일세. FHA녀석들은 순전히 입만 살아있는 녀석들이 지." 나는 리파이가 설명해 주었던 서치로봇 계획을 떠올리면서 고개를 끄덕 였다(입만 살아있다는 말과는 상관없이 말이다). "용은 내가 개발을 담당했었던 서치로봇일세. 스스로 어스넷을 돌아다 니면서 새로 생긴 서버가 있는지, 혹은 업데이트가 되었는지를 알아내는 프로그램이라는 말이지. 하지만 거기에는 한계가 있었네. 서치로봇 자체 의 인공지능에 문제가 있었던 걸세. 하지만 나는..." 부루터스는 여기까지 이야기 하다가 잠시 말을 끊었다. 뭔가 말하기 곤 란한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내 말의 요점은 말일세, 녀석들이 내가 만들어낸 용을 드래곤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다른 형태로 바꾸어 놓았다는 걸세." 소녀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드래곤이 뭔지 아는가? 내가 목숨을 걸고 알아낸 걸 말해주지. 그건 바로 MS사의 야욕이야! 녀석들은 내가 개발한 용을 진화시켰다네. 어스넷 을 돌아다니면서 모든 정보를 종합할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말일세. 드래 곤의 힘은 막강하네. 어떤 사람이 어느 사이트에서 뭘 하고 있는지를 알 아내는 것쯤은 기본일세. 어스넷의 모든 사이트에 담겨있는 정보를 알아 내는 것도. 진짜로 무서운 것은 드래곤에게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지. 어 떠한 보안 프로그램으로 막아놓아도 사이트에 있는 정보를 마음대로 조작 할 수 있다는 것 말일세. 이 프로그램으로 MS사는 어스넷을 완전히 장악 하게 된다네. 정보의 바다? 자유의 사이버 스페이스? 드래곤이면 어스넷 은 단숨에 정보의 지옥에, 정보의 감옥으로 변하고 말 걸세." 부루터스의 목소리는 조금씩 빨라지고 있었다. 흥분하고 있는 모양이었 다. "내가 왜 여기로 도망쳐야 했는지 알고 있는가? 그건 바로 내가 그 드 래곤 계획의 전모를 담고 있는 정보를 빼냈기 때문이지." 부루터스의 말은 일전에 리파이로부터 FHA에 가입을 권유받았을 때 대 충 들어서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명확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니 부루터스의 존재가 MS사에게 얼마나 큰 부담이 될지는 대충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부루터스는 말을 이었다. 갑자기 부루터스의 목소리가 낮 아졌다. 조금 전까지 키득거리고 있던 표정은 찾아 볼 수 없었다. 조울증 이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녀석들이 죽었어. 하나는 미쳐버렸고. 나는, 나는, 그냥 보고 만 있었다네. 정신없이 도망쳤지. 그래도 자네를 위해 단서는 남겨야겠다 고 생각했다네. 그래서 문자를 남겼던 걸세. 기억하는가? 그래. 그러니까 여기까지 올 수 있었겠지. 나는 힘이 필요해.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 야. FHA? 그 멍청이들은 몰라. 뭘 해야 하는지. 오직 나만이 할 수 있어. MS사에서 일한 경력이 있는 것도 나뿐이고, 거기서 쫓겨난 것도 나뿐이 고, 녀석들과 이야기 할 수 있는 카드를 쥐고 있는 것도 나 뿐이야. 나 뿐이야... 하지만 혼자서는 할 수 없어. 너무 외로워. 류도 켄도 없어. 세헤라자드라면 나에게 도움이 될 거야. 지난번에 그랬어. 자네를 위해서 날 잠시 돕기는 하겠지만 내 뜻에 찬성하지는 않는다고." 부루터스는 거의 정신이 나간 것처럼 보이고 있었다. 이 상태로는 더 이상 거래를 진전시키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는 잠시 생각을 해 보았다. 이럴 때는 시간을 끄 는 게 상책일 것 같았다. "세헤라자드한테 얘기할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세헤라자드가 내 말을 들을지 모르겠어요." 나는 이렇게 한 걸음 물러섰다.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야 했다. "MS사 사람들한테 얘기해 주세요. 조금만 시간을 달라고. 그 동안 저는 세헤라자드에게 말해보지요." 물론 이 말은 거짓말이었다. 세헤라자드에게 부루터스를 도와주라고 말 하고 싶은 마음은 내게 조금도 없었다. 하지만 리파이와 아톰은 구하고 싶었다. 어찌되었건 그들은 나의 동료니까. "일단 이야기 해 보겠다... 좋은 생각이야. 그래. 아주 좋은 생각이 야..." 소녀는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흥분이 가라앉기는 했지만 아직 정상 으로 돌아오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하나만 묻지요. 지금 당신은 어디에 있습니까?" 나는 대화를 정리하기 전에 이렇게 직접적으로 물어보았다. 뭔가 하나 는 가지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였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한 비장의 카드 말이다. 부루터스에게는 정보가 있지만 나에게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게 불 안했다. "왜? 내가 자네를 찾지 못할까봐 두려운가? 걱정 말게. 무슨 일이 있어 도 찾게 될 테니까. 그리고 그건 아마도 세헤라자드 역시 마찬가지일 걸 세." 소녀는 이렇게 말하고는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섬뜩했다. "그게 아니고요. 나도 뭔가 하나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 까?" 이렇게 말을 하고 나서야 나는 내가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을 알 수 있 었다. 어떻게든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도록 몇 가지 질문을 더 던졌어야 했다. 이렇게 순진하게 묻는 게 아니었는데. 아무래도 이건 경험부족이 야.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내가 있는 곳? 글쎄.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 나는 어디에나 있지만 아 무 곳에서도 찾을 수 없을 거라고." 부루터스의 말은 세헤라자드가 들려준 이야기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이 야기에 등장하는 사람 중 누군가가 저런 비슷한 맥락의 말을 했던 기억이 났다. "그렇다면 부루터스는 없는 거겠네요, 아무 곳에도." "그렇지." 내 질문에 부루터스는 너무나도 순순히 이렇게 대답을 했다. 나는 결국 부루터스로부터 아무 것도 알아내지 못하고 말았다. 오직 시간(그것도 얼 마가 될지 모를)만 얻었을 뿐이었다. "그럼 찾아내세요. 다음에 만날 때까지." 나는 이렇게 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네는 내 대의에 뛰어든 걸세." 소녀는 이렇게 말하고는 사라져 버렸다. 나는 부루터스가 남긴 마지막 말이 꼭 '너는 이제 내 진창에 발을 들이밀었네' 하는 소리로 들렸다. 나 는 장비를 정리하고 밖으로 나갔다. 마치 이빨을 닦지 않고 아침에 집을 나서는 것처럼 개운하지 않았다. 그나마 시간을 좀 벌었다는 것을 다행으 로 생각해야 할 것 같았다. 다행스럽게도 비는 멎었지만, 오토가 내게 준 쪽지에 적혀 있는 장소로 가는 내내 나는 리파이와 아톰을 생각하고 있었다. 리파이와 아톰. 아마 도 둘의 목숨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위태로워지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부루터스의 말이 옳다는 전제하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말이다. 오토가 쪽지에 적어놓은 곳은 지하철을 타고 남쪽으로 한참을 가야 나 오는 곳이었다. 이른바 유령 아파트 단지가 밀집된 지역이었다. 한때는 부자 동네가 남쪽으로 내려오는 경향이 있었다고 들은 적이 있다 (정확하 게는 어스넷에 있는 게시판에서 읽은 것이지만). 그래서 이 도시의 곳곳 에 대형 아파트 단지가 밀집된 지역은 점점 남쪽으로 내려갔던 것이다. 코리아 합중국으로 다시 태어나기 전까지. 당시 이 도시의 인구가 대략 천만이었다고 하니까 아파트를 무작정 짓는 일도 꽤나 장사가 되는 일이 었나보다. 아니고서야 지금 이렇게 유령 단지가 생겨날 정도로 지었을리 가 없을 테니 말이다. 하필이면 오토가 적어준 곳은 지하철을 타고 한참을 가야하는 곳이었 다. 지하철의 부랑자들은 사람이 많이 타지 않는 곳일 수록 더 많이 보인 다. 그것은 부랑자의 수가 많아서라기 보다는 정상적인 사람의 수가 상대 적으로 적기 때문일 것이지만 어찌되었건 부랑자들과 사람 없는 지하철에 서 맞닥뜨리는 일은 불쾌함을 넘어서 두렵기까지 한 일이었다. 더러운 옷 을 걸치고 있는 부랑자가 언제 칼을 든 강도로 돌변할지 모른다는 상상은 나만 하고 있는 게 아닐 거였다. 한 때는 부랑자들을 대대적으로 단속한 적도 있었다(도시 미화 차원이 라고 했던가). 하지만 그 계획은 얼마 지나지 않아 흐지부지 되어버렸다. 시가 수용할 수 있는 부랑자의 수는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어딘 가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 유령 아파트 단지가 있고, 또 어딘 가에 는 집 없이 떠도는 부랑자가 있다니 이것이야말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 었다. 어렸을 적에 나는 아버지에게 그렇다면 왜 빈 아파트 단지에 부랑 자를 살게 하지 않느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아버지는 친절하게 내 머리 통을 한 번 쥐어박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 때 지어진 아파트에서 살라고? 아무리 부랑자라지만 발은 뻗고 자 야할 것 아니냐!" 아버지의 말은 한마디로 언제 무너질 지 모르는 건물에서는 아무도 잘 수 없다는 거였다. 그렇다고 철거를 하자니 북쪽의 도시 확장 계획 때문 에 누구도 쉽게 손을 대지 못하고 있었다. 대기업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대단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통일이 되기 전, 분단국가 상 황에서도 북쪽의 땅을 매입하고 투기를 할 장단기 계획을 다 세워놓았다 니 말이다. 그냥 생각해 보는 것이지만 그럴 정신으로 기술 개발에 힘썼 다면 아마도 우리 나라는 대단한 선진국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었다. 지하철에서 내려서 밖으로 나가는 동안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은 벽에 온 통 도배가 되어있는 벽보들이었다. 거의가 사이비 종교집단에서 붙여놓은 것들이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8678/19898 ━━━━━━━━━━━━━━━━━━━━━━━━━━━━━━━━━━━━━━━━ 제 목:[탐그루] 영혼의 에뮬레이터 11 226 관련자료:없음 18/18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4-06 22:02 조회:1668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때가 가까워 왔노라. 미래는 위대한 남궁 장로와 함께.' '기(氣)! 그 신비로 내일을 준비하라!' '인생의 비밀을 알고 싶으십니까? 운석(隕石)교와 함께 하십시오.' '정 도령 납시었다! 도인들은 귀를 기울이라!' 똑같은 인쇄회사에서 인쇄한 것인지 모두가 하나같이 조잡한 인쇄물들 이었다. 나는 인쇄물에 보이는 장로니 교주니 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 서 저렇게 돈을 버느니 차라리 몸을 파는 게 낫겠다 싶었다. 얼마 전 뉴스에서 본 북부지역 지하철 벽면에는 종교 벽보 대신에 구인 벽보가 가득이었다. '월수 200보장''침식 완전 무료 제공''가족적인 분위 기''초보 대환영' 이런 문구 말이다. 이상한 것은 모든 업소들이 여자만 구하고 있다는 거였다. 지난 세기에는 종교 벽보 대신에 그런 벽보가 붙 어있었다고 기자는 말했었다. 확실히 북부지역이 뒤떨어지기는 한 걸까? 어찌되었건 유령 아파트 단지나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싶었다. 이렇게 생각을 하다보니 고속도로로 가면 불과 반나절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인 북부지역이지만 내가 살고 있는 이곳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가 아 닌가 싶었다 (물론 고속도로가 막히지 않는다면 말이지만). 유령 아파트 단지는 세상에 아직도 이런 곳이 남아 있을까 싶을 정도로 황량한 곳이었다. 지하철에서 내려 몇 군데 남아있는 상가(라기보다는 부 랑자들을 위한 선술집이 모여있는 곳이지만)와 작업장(고철장이라는 표현 이 더 정확하겠지)을 지나고 나니 금새 아무도 살지 않는 우뚝 솟은 아파 트단지가 나타났다. 아파트 단지는 마치 게임 속의 보스 케릭터처럼 거대하면서 흉측한 모 습으로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나는 군데군데 칠이 벗겨져 나간데다가 창문에는 깨어진 유리조각들이 그대로 남아있는 아파트 단지의 위세에 완 전히 기가 죽어버렸다. 이런 곳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막상 와서 부딪치고 보니 생각 보다 훨씬 흉물스러운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나 는 쪽지에 적혀 있는 놀이터로 향했다. 놀이터는 바닥에 모래가 깔려 있었고 녹이 슬고 반쯤은 망가진 놀이기 구들(로 보이는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있었다. 한때는 이곳에서 뛰놀던 어린아이도 있었으리라. 그들은 그들의 자손이 이곳에서 더 이상 놀지 못 하게 될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예전에는 산이 있던 곳이에요." 나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면서 고개를 틀었다. 건이 돌을 집어던지면 서 쭈그리고 앉아있었다. 그 옆으로 오토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고, 실버 우드는 기다리기 지겨웠는지 시소(처럼 생겼지만 실제 무엇인지는 알 수 없는)놀이기구에 기대어 졸고 있었다. "어리석은 인간들. 이곳에 아파트를 세우면 돈을 벌 수 있다고 생각했 겠지요. 결국 이꼴로 버려지게 될 거라는 것도 모르고." 건이 집어던진 돌멩이 하나가 미끄럼틀에 명중했다. 놀랍게도 돌멩이는 미끄럼틀을 관통했다. 녹이 슨 탓도 있겠지만 건이 워낙 힘껏 던진 탓인 모양이었다. 미끄럼틀에 바람구멍이 생기는 소리에 놀라면서 실버우드가 잠에서 깨어났다. "이런 외진 곳으로 고르다니. 오토도 꽤나 취향이 이상하군요." 나는 오토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파트를 등지고 있자니 꼭 마물의 왕이 나를 등 뒤에서 노리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결과는 어떻게?" 모든 대화를 생략해 버리고 오토가 나에게 물었다. 잘 다녀왔는지, 미 행은 없었는지, 오토의 관심은 그런 것에는 있지 않은 모양이었다. "좋은 소식은 시간을 벌었다는 거에요." 나도 오토처럼 간략하게 요점을 말했다. 그리고 근 삼 십 분 동안 나쁜 소식을 설명하는 데에 시간을 할애했다. "그랬군." 꼭 다 알고 있었다는 듯이 오토가 말했다. "하나는 분명해 졌군요. MS사의 정보 독점 계획이 사실이라는 것." "그리고 그 증거를 부루터스가 가지고 있다는 것도 있어요, 실버우드." 건은 이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랫동안 앉아 있던 탓에 다 리가 저린지 건은 몇 번 발을 털었다. "변한 건 없습니다. 리파이 씨와 아톰 씨의 목숨은 이제 시간 문제입니 다." 오토는 이렇게 자신의 생각을 정리했다. 그 말에는 모두들 공감하는 모 양이었다. "그럼 이제 장소를 이동하지요. FHA에서 좋은 장소를 마련해 두었습니 다." 건은 이렇게 말하고는 앞장서서 걸었다. 그 뒤를 아톰과 실버우드가 따 랐고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 뒤를 쫓았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요?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요? 소드엔매직 온라인 지부에 리파이가 갈 것을 부루터스가 알고 있었다면, 아니, 스트 브 강도 알고 있었으니 어쩌면 둘은 결탁하고 있는지도 몰라요." "실버우드. 억측이에요. 이나바머와 MS사가 손을 잡는다는 건 북쪽 사 람과 남쪽 사람이 합작사업을 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에요." 건의 농담에 나는 쿡, 하고 웃음을 터트렸지만 그건 실수였던 것 같았 다. 아무도 웃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래서 나는 근엄한 표정으로 계속 걸 을 수밖에 없었다. "잠깐만." 오토가 일행을 정지시켰다. 나는 무슨 일인가 싶어서 오토를 바라보았 다. 오토의 표정은 진지했다. "너무 안일했어요, 우리." 건은 이렇게 말한 후에 품에서 빔핸드건을 뽑아들었다. 오토가 뽑은 것 은 후버카에서 가지고 내렸던 낡은 38구경이었다. 건은 한 쪽 눈썹을 찌 푸리면서 오토의 총을 바라보았다. "통일 전쟁 때의 기억이지요." 오토는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서늘한 미소였다. 나는 시커먼 저 38구 경 권총또한 틀림없이 차디찬 총신을 가지고 있으리라 여겨졌다. 다음 순 간이었다. 등뒤에서 빔 두 발이 날아왔다. 하나는 내 머리 위를 지나가 앞에 있던 놀이기구를 고철더미로 만들어 버렸고, 다른 하나는 일행에게 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 바닥을 뒤집어 놓았다. 아무도 말하지 않 았지만 우리는 각자 몸을 날려 놀이기구 뒤에 몸을 감추었다. 하지만 놀 이기구는 은폐물은 되어줄 수 있을지 몰라도 엄폐물은 되어주질 못할게 분명했다. "지금 건 위협사격이었을 겁니다. 아마 어떻게 된 일인가 궁금해하는 것 같군요." 오토는 이렇게 말하고는 낡은 아파트 단지 쪽에 38구경을 겨누었다. 빔 이 날아온 방향은 분명 단지 쪽이었다. "38구경으로 이 거리에서 맞추겠다는 겁니까, 지금?" 빔핸드건을 겨누고서 건이 물었다. 오토는 대답 대신 방아쇠를 당겼고, 다음 순간 쾅, 하는 화약식 권총의 폭발음과 함께 불꽃이 튀었다. 대단한 소리였다. 귀에 이명이 생길 지경이었다. 하지만 정말 대단한 것은 그 결 과였다. 아파트 단지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가 싶더니 다음 순간 건물은 그대로 아래로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아파트는 마치 거대한 짐승이 외 마디 비명소리를 지르며 쓰러지는 것처럼 무너졌다. 오토는 당황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뛰기 시작했고 나머지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총 한 방에 건물이 무너지다니!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연 기는 어느 새 흐린 날 구름처럼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었고, 건물은 주 저앉듯이 서서히 구름속으로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빔은 더 이상 날아오 지 않았다. "굉장한 위력이군요." 질렸다는 듯이 건이 말했다. 다음 순간 바람을 타고 먼지가 날려와서 우리는 코와 입을 감싸고 지하철 쪽으로 뛰어갔다. "내가 겨눈 곳은 놀이기구 앞이었습니다." 먼지가 좀 가시자 오토가 말했다. 빔과 마찬가지로 역시 위협사격이었 던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건물이 무너진 걸까? 아무리 낡았 다고는 해도 총소리에 저렇게 쉽게 무너질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어찌되었건 철거비용이 줄었겠군요. 시 예산 편성자가 좋아하겠는데 요?" 건은 이렇게 농담을 하면서 지하철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토는 미 심적다는 듯한 표정을 하고서 한 참 동안 건물이 일으키고 있는 먼지 구 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날 밤이 되어서야 우리는 FHA에서 마련해 주었다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곳은 도심 한 복판에 있는 작은 5층 건물이었다. "안가입니다." 건이 조금은 쑥스럽다는 듯이 말했고, 어찌되었건 우리는 서둘러 건물 안으로 향했다. 하루 종일 미행을 따돌리기 위해서 여기 저기 옮겨다녀야 했기 때문에 몹시 피곤한 탓이었다. 건물 2층에는 꽤 넓은 주거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방이 다섯 개나 되 는 데다가 냉장고도 가득 채워져 있었고, 텔레비전과 컴퓨터도 마련되어 있었다. 아마도 이런 일이 일어날 것에 대비해서 준비해 둔 건물인 모양 이었다. "합법적으로 등록된 건물이에요. 어스폴도 MS사도 우리가 이렇게 도심 한 복판에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할 거예요." "그랬으면 좋겠다는 말입니까?" 건의 말에 오토가 토를 달았다. 하지만 건은 별로 신경 쓰지 않고 편히 쉬라고 말한 다음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마도 와일드건인가 뭔가 하는 FHA 두목에게 보고를 하기 위해서인 모양이었다. 실버우드는 피곤하다면 서 방으로 들어갔다. "비류 씨도 좀 쉬십시오. 전 여기 있겠습니다." 오토가 말했다. 오토는 철인인 모양이었다. 언제 어디서 잠을 보충하는 지는 알 수 없었지만 잠자는 모습을 본 기억이 나질 않았다. 방은 침대하나에 전화 하나 뿐으로 아무 장식도 없었지만 깨끗하고 아 늑한 느낌을 주었다. 침대에 몸을 던지자 전화벨이 울렸다. "비류 씨. 아까 말 안 했는데, 통신은 금물입니다." 건이 말했다. 추적 당할 우려가 있다는 거였다. 나는 나를 바보로 아느 냐고 말한 뒤에 전화를 끊었다 (사실 어스넷에 접속해 보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나는 침대에 걸터앉은 그대로 약간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받았다. "전 그냥 잘 생각입니다." "그럼 이야기는 어떻게 하지요?" 세헤라자드였다. 나는 어떻게 찾았느냐고 물어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부루터스의 말이 맞았다. 부루터스 건 세헤라자드 건 마음만 먹으면 나를 찾아 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스폴이나 MS사도 얼마든지 쉽게 우 리를 찾을 수 있다는 게 아닐까 싶었다. "너무 놀라지 마세요. 말했잖아요. 제가 찾을 거라고." 내가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자 세헤라자드가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하 마터면 거기가 어디냐고 물어볼 뻔했다. 세헤라자드가 바로 전화기 안으 로 들어와 있다는 것도 잊은 채 말이다. "부루터스 님을 만나고 온 거 알아요. 머릿속이 복잡하시죠?" "...그래." 나는 간신히 이렇게 대답할 수 있었다. "절 설득하실 건가요?" 세헤라자드가 나에게 물었다. 나는 물론 그럴 마음은 없다고 했다. "비류 씨는 생각이 깊은 분이에요." 세헤라자드가 나를 칭찬했다. 꼭 어린애를 얼르는 보모 같은 목소리였 다. "자. 편하게 자리에 누우세요.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답니다." 세헤라자드가 꿈꾸는 듯한 목소리로 멀고 먼 이상하고 기이한 세계의 이야기를 다시 시작했다. 나는 다시 탐그루의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8679/19898 ━━━━━━━━━━━━━━━━━━━━━━━━━━━━━━━━━━━━━━━━ 제 목:[탐그루] 불의 꿈을 꾸는 자 227 관련자료:없음 15/15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4-06 22:03 조회:1749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 불의 꿈을 꾸는 자 화창한 날이었다. 이제 더위도 서서히 막바지로 치닫고 있다. 오전의 햇살이 싱그럽게 세상을 밝히고 있었고, 사람들은 대단한 축복이라도 내 린 듯 그 햇살 아래의 세상을 찬양하고 있었지만 라이짐은 결투용 긴칼을 손에 들고 그 햇살에 칼날을 비추며 이리 저리 살펴보고 있었다. 난생 처음 해 보는 진짜 결투였다. 첫 결투 상대가 하필이면 장군 출신 인 츄바카라니. 젊어서는 뛰어난 검사였고, 나이가 들어서는 훌륭한 군인 이었고, 이제는 위대한 지휘관을 거쳐 장군의 자리에 오른 자를 베어야 하다니. 라이짐은 묘하게 엉켜있는 인생의 인연들을 생각하면서 차디찬 웃음을 지었다. 누군가가 봤다면 츄바카와의 결투를 우습게 보고 짓는 웃 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 분명했다. 라이짐은 숨을 들이쉬었다. 결투에 앞선 각오를 다진다기 보다는 그저 실수하지 않기 위해 마음을 다잡으려는 것이었다. 라이짐은 모자를 다시 한 번 눌러썼다. 간밤에 사비치가 해 주었던 충고의 말이 떠올랐다. "자네는 매력 있는 남자일세, 라이짐. 하지만 자네의 진정한 매력은 바 로 그 백발에 있다네. 남자는 자신의 매력을 내 비쳐야 할 시기를 잘 알 고 있어야 하지." 누가 들으면 외모에 대한 조언쯤으로 들을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그 속 뜻을 잘 알고 있는 라이짐은 사비치의 말을 단순하게 받아들일 수만은 없 었다. 라이짐은 다시 한 번 거울을 바라보았다. 모자를 제대로 눌러 썼는 가를 확인하기 위해서도 그랬지만 실은 자신의 모습이 일그러져 보이지 않는가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다행히도 제대로 비추어지고 있었 다. 라이짐은 거울 속의 자신에게 굳은 얼굴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웃어. 웃으라구." 거울 속의 라이짐은 입만 간신히 웃어 보였다. 프라브리티의 궁성 앞 결투광장에는 수많은 시민들이 참관(을 빙자한 구경)을 위해 운집해 있었다. 라이짐은 며칠 전 밤에 만난 사비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들이 박수를 치면 구름은 천둥을 터뜨리고, 그들이 함성을 지르면 천둥은 비바람을 몰고 올 걸세." 그날 밤 처음 만나보는 사이였지만 의외로 사비치는 편안한 느낌을 주 는 사람이었다. 웬지 그 편안함이 의심스러운 구석이 다소 있었지만. 그 래도 탐그루에 있을 때 자주 보았던 사비오 영감과는 딴판으로 훨씬 젊은 데다가 세련된 말투를 구사하는 사비치는 라이짐에게 진정한 마법사란 이 런 것이다, 라고 이야기 해 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자네가 그 비바람을 타는 거야. 백발영웅이 북쪽의 눈보라를 타고 나타나는 거지." 사비치는 점잖아 보이는 인상과는 딴판의 말을 아주 손쉽게 꺼냈다. 인 면수심이라고 했던가. 라이짐은 그의 목소리에서 뱀이 꿈틀거리는 것 같 은 느낌을 받았다. 겉보기와는 달리 야심이 크군. 비록 완전히 사비치의 의견에 동의할 수는 없었지만 라이짐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도 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왜 해야 하는지도. 궁중 수비대 병력과 프라 브리티 자치대 병력들이 모여 있는 군중들을 결투광장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다. 라이짐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열기가 사라진 맑은 가을 햇살 이 내리쬐고 있었다. 누군가 그랬지, 살인하기에 좋은 날이라구. 그래 이 렇게 햇살이 청명한 날은 살인하고 살인당하기에 좋은 날이야. 라이짐은 이렇게 속으로 되뇌어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사람을 죽인다는 것이 그리 익숙한 것만은 아니었다. 라이짐이 지금껏 죽인 사람은 모두가 정당한 칼 과 칼의 다툼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좀 달랐다. 라이짐은 광장에 서서 반대편에 있는 츄바카 국방장관을 바라보았다. 털복숭이 장군이라는 별명에 맞게 덥수룩한 수염을 기르고 있는 츄바카 국방장관의 모습은 마치 굶주린 사스카치처럼 보였다. 라이짐은 츄바카가 칼날을 점검하면서 자신을 노려보았을 때 눈을 피하지 않았다. 솔직히 츄 바카를 눈으로 맞대응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어찌됐든 오늘 라이 짐은 츄바카에게 있어서 가해자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츄바카와 라이짐은 천천히 광장 한 가운데로 걸어갔다. 결투 전에 최후 의 예를 표하기 위해서였다. 영주 프란스 페르도는 광장에 마련된 높은 단 위에 부인과 함께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옆으로는 이제는 스파일의 정식 군단장이 된 아케르 장군과 영주의 아들인 고몽 페르도, 그리고 행 정장관인 부르도 올리비아와 내무장관 리콜 샤일록, 그리고 영주의 직속 마법사인 사비치도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모두가 참관인 자격이었지만, 실제로 정식 참관인 자격으로 앉아 있는 것은 둘 뿐이었다. 츄바카 측 참 관인은 내무 장관 리콜 샤일록이었고, 라이짐 측 참관인은 아케르가 아니 라 고몽 페르도였다. 나머지는 츄바카가 워낙 고위층 사람이다 보니 자리 에 무게를 더하기 위해서 참석한 것이었다. 영주인 프란스 페르도의 경우 는 결투 참관을 즐겨하는 성격이라서 참석한 것이 오히려 당연했다. 사실 장관이 결투에 나선다는 것은 어떻게 보아도 모양이 좋은 일은 아니니 말 이다. "이런 정식 결투는 오래간 만이로군. 그러고 보니 행정장관은 이런 자 리가 처음이겠군." 라이짐은 영주 프란스 페르도가 옆에 앉아 있는 부르도 올리비아에게 하는 말을 들었다. 행정장관 부르도 올리비아가 젊고 똑똑한 사람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역시 경험이 부족한 것만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 다. 영주의 느닷없는 질문에 부르도 올리비아는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 다. 프란스 페르도는 그런 반응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빙긋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칼의 물음에는 칼로 답하고, 명예의 부름에도 칼로 답한다. 두 사람은 정당한 물음에 상대의 칼로 해답을 얻기를 원하는가?" 영주 프란스 페르도가 라이짐과 츄바카, 두 사람에게 물었다. 격식대로 라면 양측의 참관인이 번갈아 가면서 해야 할 말이었지만 영주가 참관인 으로 나서다 보니 이 물음을 영주가 하는 것이 모양새가 좋다는 부르도 올리비아의 의견에 따라서 영주가 직접 물었던 것이다. "격식에 어긋나는 일 아닙니까? 신성한 결투에."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한 내무장관 리콜 샤일록은 행정장관 부르도 올리 비아에게 작은 목소리로 이렇게 물었다. 그 물음에 부르도 올리비아는 이 렇게 대답했다. "장관이 결투를 한다는 것 자체가 격식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부르도 올리비아의 재치 있는 대답에 리콜 샤일록은 입을 주먹으로 가 리고 헛기침을 한 번 했다. "저는 이 칼로 해답을 얻기를 원합니다." 결투를 신청한 쪽으로 되어있는 츄바카가 말했다. "저도 이 칼로 해답을 얻기를 원합니다." 라이짐이 말했다. 라이짐의 목소리는 꽤나 높았지만 떨리고 있었다. 아 무리 마음을 다잡으려고 해도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마당에 태연할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그럼 시작하게." 단호한 어조로 영주 프란스 페르도가 말했고 둘을 칼날을 맞대어 서로 에게 예를 표한 뒤 적당한 거리를 두고서 물러섰다. 칼을 먼저 날린 것은 츄바카였다. 실전에서 다져진 실력이니 만큼 츄바 카의 칼솜씨는 겉멋이 들지 않은 진짜 칼솜씨였다. 칼은 단번에 라이짐의 목줄기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라이짐은 간신히 칼날을 비켜냈다. 몇 번의 칼은 쉽게 막아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츄바카의 실력은 예상 밖이었 다. 라이짐은 단 위를 바라보았다. 날카로운 눈매로 사비치가 왜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고 있냐는 듯이 라이짐을 노려보고 있었고, 근심어린 눈초 리로 고몽 페르도는 라이짐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하는 건가, 지금!" 라이짐이 시선을 단 위에 두고 있자 츄바카가 소리쳤다. 라이짐은 그 소리에 놀라 뒤로 조금 물러서고 말았다. 칼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이 본다 면 실수도 이만저만한 실수가 아니었다. 츄바카는 한심하다는 표정을 짓 더니, 이내 곧 다시 근엄한 표정이 되어 라이짐에게 달려들었다. "승리는* 우리의* 것이다*" 더 이상 시간을 끌 수는 없다고 여긴 라이짐은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 것은 꼭 사비치의 눈길 때문만은 아니었다. 츄바카의 칼 솜씨가 예상외로 강했기 때문이었다고 말하는 편이 사실에 더 가까울 것이다. 라이짐의 말이 끝나자 에질리의 그림자가 나타났고, 광장에 모여있던 사람들이 우와, 하는 소리를 질렀다. 츄바카는 의외의 상황에 놀라면서 뒤로 물러섰다. 라이짐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번개처럼 달려들었다. 라이짐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예상 밖의 상황에 처한 츄바카가 반격을 할 수도, 자신의 칼날을 빗겨낼 수도 없을 것이라는 예측이 들어 맞았다. 라이짐의 칼날은 햇살 아래 이를 드러내며 번득였다. 그 빛은 츄바카의 목줄기에 다시는 회복될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한동안 츄바카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라이짐을 바라보았다. 츄바카는 자신의 팔과 다리가 에질리에 의해 이미 마비되었다는 것도, 또한 이러한 결과가 이미 예견된 결과라는 것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잠시동안 아무도 말이 없었다. 다음 순간 라이짐에게 뭘 하고 있느냐고 소리쳤던 츄바카의 목은 바닥 으로 떨어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줄기 핏물이 허공으로 뿜어져 올랐 다. 햇살아래 핏물은 투명하다고 여겨질 만큼 선명한 붉은 빛으로 반짝였 다. 라이짐은 고스란히 그 핏물을 뒤집어 쓰며 서 있었다. "이, 이런!" 프란스 페르도는 깜짝 놀라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명예를 건 결투니 만큼 시간을 끌다가 한 쪽이 패배를 인정하는 정도로 끝날 것으로 예상하 고 있었던 프란스 페르도는 눈앞에서 벌어진 의외의 상황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라이짐은 핏물에 젖은 모자를 벗었다. 그러자 이제는 꽤 많이 자라난 라이짐의 백발이 햇빛 아래 반짝였다. 백발이 드러나자 사람들은 이제 아 까와는 다른 목소리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설마, 저 젊은 친구가..." "맙소사. 전설이 사실이었어!" "믿기나? 지금 저 모습이?" 사람들은 이렇게 제각각으로 떠들어 대고 있었다. 하지만 이 놀랄만한 상황에서 그렇게 떠들어대고 있는 사람 대부분이 사복을 입은 아케르 군 단의 병사들이라는 것을 눈치 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영주님! 저것은 백발 영웅과 그 수호신입니다!" 시비치가 과장된 음성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소리쳤다. 라이짐은 그 런 사비치의 행동이 역겹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정해진 그대로 움직 이는 것이라고 해도 라이짐으로서는 그러한 사비치의 모습이 역겨웠다. "제 칼은 이렇게 해답을 얻었습니다." 라이짐이 영주에게 짤막하게 말했다. 이 역시 상대방 참관인(그러니까 이 경우에는 내무장관 리콜 샤일록)에게 해야 하는 말이었지만 라이짐은 영주를 향해 말했다. 어차피 장관이 결투에 나선 다는 것 자체가 격식에 어긋나는 일이니까.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8680/19898 ━━━━━━━━━━━━━━━━━━━━━━━━━━━━━━━━━━━━━━━━ 제 목:[탐그루] 불의 꿈을 꾸는 자 228 관련자료:없음 24/24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4-06 22:03 조회:1638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그 날 저녁, 라이짐은 고몽 페르도가 접대하는 가운데에 영주의 저택 별관에서 식사를 했다. 전통적으로 결투의 원인이 된 사람이 저녁을 대접 하는 관습에 따른 것이었다. "일이 그렇게 까지 될 줄은 몰랐습니다." 식사가 나오기 전에 고몽 페르도가 라이짐에게 말했다. 라이짐은 웃으 면서 고몽 페르도에게 이렇게 말했다. "식욕이 달아나는 이야기는 식사를 마친 후에 하도록 하지요." 고몽 페르도는 분명 라이짐보다 한 살이 더 많았지만 자리의 주도권은 누가 보더라도 라이짐이 쥐고 있었다. 식사는 순서에 따른 정식 코스 요리였다. 전채로 싱싱한 해산물과 야채 를 곁들인 셀러드가 나왔고, 메인 코스는 구운 고기와 감자무침 그리고 나머지는 평민 출신인 라이짐으로선 처음 보는 음식들이이었다. 라이짐은 그 종류의 다양함에 놀랐지만 그 맛이 용병단 시절 먹었던 식사와 크게 다를 게 없다는 데 또 한 번 놀랐다. 대화는 후식이 나올 때가 되어서야 이어졌다. "라이짐 정보부장님, 결국 제 명예를 지켜주셨군요." 순진한 눈을 하고서 고몽 페르도가 라이짐에게 먼저 이렇게 말을 꺼냈 다. 어떻게 저렇게 사정을 모를 수가 있을까. 어떻게든 설명을 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냥 라이짐이라고 부르십시오." "그러지요, 라이짐 님." "그리고 제가 칼로 지켜낸 것은 제 명예였습니다. 고몽 페르도 십부장 님의 명예가 아닙니다." "고몽." "네?" "친구들은 저를 고몽이라고 불러요." 고몽 페르도가 천진스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 천진한 웃음 속에서 언 뜻 수르카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어쩐지 견디기 어려운 감정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몸부림쳤다. 라이짐은 남아있던 포도주를 단숨에 들이켰 다. "제가 실례라도...?" 고몽 페르도는 라이짐이 술잔을 내려놓자 겁먹은 얼굴로 라이짐에게 물 었다. 라이짐은 당장이라도 소리치고 싶어졌다. 병신 머저리 같은 것. 누 가 너 따위 귀족을 위해서 칼을 든 줄 알아? 난 나 자신을 위해서 칼을 들었어. 츄바카 국방장관은 죽어줘야 했던 거야, 대의를 위해서. 게다가 그 싸움은 내가 이기기로 되어 있던 싸움이었어. 절대로 정당한 결투 따 위가 아니야! 하지만 라이짐은 억지로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실례라니요, 무슨 말씀을. 그저 피를 본 뒤라 기분이 썩 좋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실례는 제가 한 것 같군요." 라이짐의 말을 듣자 고몽 페르도는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나 절 도와주시는 군요, 라이짐 님은. 정말 감사합니다. 저 같은 건..." 고몽 페르도가 말했다. 라이짐은 이 나약해 빠진 소년이 어떻게 스파일 을 짊어질 영주가 될 수 있을까 근심스러웠다. 썩어빠진 귀족들. "그만 둬." 라이짐의 입에서 이런 말이 터져 나왔다. 순간 라이짐은 실수를 했구나 싶었지만 순식간에 다시 말을 이어서 위기를 넘겼다. "그만 두십시오. 저는 그런 말을 들을 위치가 되지 못합니다." 라이짐은 이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죄송합니다. 무례한 일인 줄은 알지만 이만 가 보아야 겠습니다. 오늘 은 몸이 영 좋지 않군요." 라이짐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고몽 페르도도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에요. 안 그래도 라이짐 님을 계속 붙잡아 두고 싶은 마음은 없었 어요. 당연히 피곤하시겠지요." "그럼..." 라이짐이 막 작별의 인사를 하려던 참이었다. 고몽 페르도는 뜻밖의 말 을 라이짐에게 건넸다. "피곤하시겠지만 잠시 본관에 들렀다 가셔야겠습니다. 제 어머님께서 뵙고 가시라고 전해달라고 하셨거든요." 라이짐은 도둑질을 하다가 들킨 사람처럼 당혹스러웠지만 애써 냉정을 찾아 대답하고는 본관 쪽으로 향했다. 소망의 별이 하늘에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하늘에서 일렬로 빛나고 있는 소망의 별들. 내 소망이 이런 것이 었던가. 라이짐은 왼손 약지에 끼어진 반지를 씁쓸한 표정으로 내려다 보 았다. 본관으로 들어서자 하인이 라이짐을 페르도 부인의 방 앞까지 안내해 주었다. 라이짐은 방안으로 들어 선 후, 페르도 부인에게 고개를 숙여 인 사했다. "대담하군요." 하인이 돌아간 후,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라이짐이 페르도 부인에게 말했다. "아들의 명예를 지켜주었으니 그 은인을 어미가 만나 보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겠어요, 라이짐 정보부장." 페르도 부인이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도무지 속내를 짐작하기 어 려운 여자였다. "수고했다는 말을 해 주고 싶었어요, 라이짐." "제가 한 일은 별 것 아니었습니다." "겸손하기도 하지. 하지만 당신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그 짐승 같은 츄 바카를 쓰러뜨릴 수 있었겠어요?" 페르도 부인에게서 라이짐은 자신의 원수, 루비오의 부인이 된 뒤로아 오르테가와 비슷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갑자기 가슴이 뛰었다. "바바 족과의 화친을 반대한다고 해서 짐승 같다고 말할 수는 없는 법 입니다." 라이짐은 감정을 내비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오, 라이짐. 그런 이야기는 함부로 하는 게 아니에요." 페르도 부인은 차가운 미소를 머금고 라이짐에게 말했다. 충고라기보다 는 조롱에 가까운 어조였다. "그럴 때는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아무리 성격이 급하다고 해도 십부 장이 명령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했을 때 그렇게 주먹질을 해서는 안 된다 고. 특히 그 십부장이 영주의 아들이었을 경우에는 말이지요. 그런 장군 이라면 짐승 같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페르도 부인의 결국 결투를 만들기 위한 책략을 설명하고 있었던 것이 다. 라이짐은 그런 페르도 부인의 모습을 가증스럽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명령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게 사실은 계획된 일이었고, 그 자리에 제가 우연히 있게 된 것도 계획된 일이라고 해도 말입니까?" "재치가 없군요, 라이짐은. 이럴 때는 농담으로 넘기는 게 좋을 텐데." 페드로 부인은 여전히 웃음을 잃지 않고 있었다. 라이짐은 이런 말을 입에 담는다는 사실 만으로도 살이 떨리고 있었는데 말이다. "사실 그 계획이라는 것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아요. 일단 상대만 정해 진다면 무슨 방법이든 찾아내서 쓸 수가 있지요. 하지만 츄바카는 감히 바바 족과의 화친을 반대하였습니다. 그것이 대의라는 것을 모르고서 말 이지요. 그거라면 충분히 죽을죄가 되지요." 라이짐은 햇살 아래 흩뿌려졌던 츄바카의 핏물이 떠올랐다. 라이짐은 애써 그 기억을 지우려고 했지만 그럴수록 츄바카가 죽기 전에 지었던 표 정이 쉴새없이 떠올랐다. 왜 페르도 부인은 앉으라고 말하지 않는 걸까? "라이짐. 방법과 시기만 적절하다면 아무리 강한 자라도 벨 수 있답니 다." "좋은 충고의 말씀이시군요. 명심하겠습니다." 라이짐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지만 꾹 참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불편한 자리였다.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대화에도 전혀 집중이 되질 않았다. "나는 오래 전부터 영주님의 명을 받아 바바 족과 대화를 해 왔습니다. 이 역시 베어야 할 대상이었던 것이지요. 없애는 것만이 베는 게 아니라 는 건 잘 알고 계시겠지요? 세상에는 영원한 적이란 없는 법이랍니다. 영 원한 동지가 없는 것처럼." 페르도 부인은 이렇게 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페르도 부인이 자 리에서 일어나자 라이짐에겐 자리에 앉을 기회가 없어졌다는 생각만 들었 다. 잠깐이라도 앉으면 좋겠다 싶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성황청이 새로운 적으로 등장한 이상, 바바 족과 적대관계로 있는 것 은 어리석은 일일 뿐이라는 걸 영주님은 잘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건 저도 마찬가지이고요." 페르도 부인은 이렇게 말하면서 창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제 후임으로는 누가 오게 됩니까?" 라이짐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사실 어느 정도 감은 잡고 있었지만 기회가 난 이상 분명히 다시 한 번 확인해 둘 필요가 있겠다 싶어서였다. "후임으로는 안토니오 장군이 내정되어 있어요. 라이짐. 당신 입장에서 는 아주 유리한 일이지요. 안 그런가요? 제가 알기로 안토니오 장군은 아 케르 장군과 아주 친하다고 하던데."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이제 아케르가 스파일에 미칠 영향력은 이로서 조금 더 커지게 될 것이었다. "혹시 그런 소문이 퍼지지나 않을지 걱정되는 군요." "누구한테요? 주민들 말씀이신가요?" 페르도 부인은 이렇게 말하고는 웃음을 터트렸다. 등골이 다 오싹해 지 리만큼 섬뜩한 웃음이었다. "사람들은 어리석어요. 우리같이 사람들을 이끄는 자리에 있으면 그걸 쉽게 알 수 있지요. 높은 곳에 있으면 굳이 보려하지 않아도 낮은 곳이 보이기 마련이죠. 우리가 말하면 그들은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한마디로 멍청하고 더럽고 어리석은 게 바로 사람이지요. 물론 라이짐, 당신처럼 강한 사람은 예외지만." 페드로 부인의 말을 듣는 순간, 라이짐은 페드로 부인이 얼마나 사람들 을 우습게 여기는 가를 실감할 수 있었다.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장남인 르노 페르도를 귀향 보낸 사람이 바로 페르도 부인 본인이라는 말이 있었 는데, 페르도 부인의 모습을 보니 아마도 그것이 사실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법과 시기만 적절하다면 무엇이든 벨 수 있다고 하셨지요? 저는 기 다릴 뿐입니다. 저는 단지 칼일 뿐이니까요. 때가 되면 휘둘러질." 페르도 부인의 말에 라이짐은 이렇게 대답했다. 언뜻 듣기에 겸손하게 들릴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라이짐의 말에는 독기가 숨어 있었다. 언젠가 때가 오면 칼끝은 바로 귀족들을 향하게 될 것이었다. "칼끝이라고 해서 영원히 칼끝일 수는 없는 법이지요. 이리 가까이 와 요, 라이짐." 페르도 부인이 말했다. 라이짐은 뭔가 긴히 할 얘기가 있는 모양이구나 싶어서 페르도 부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나 페르도 부인은 손을 뻗 어 라이짐의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라이짐은 몸이 굳는 것 같은 느 낌이 들었다. 역한 향수 냄새가 느껴졌다. 머릿속이 하얗게 타오르고 있 었다. "고운 머릿결이야. 이 머릿결로 수많은 사람들을 사로잡겠지, 라이짐 은." "그, 그리고 그 열매는 부인과 영주님의 것이 되겠지요." 라이짐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페르도 부인이 자신을 껴안을 것만 같았다. 아니, 그렇지 않다면 자신이 페르도 부인을 안게 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라이짐은 누가 이 광경을 볼까봐 두려워졌다. "아케르가 부럽군요. 당신 같은 부하가 있다니." "우리는 한 배를 탔다고 말씀하셨던 것은 부인이셨습니다." "그랬던가요?" 시치미를 뚝 떼고서 페르도 부인이 말했다. 모든 계략은 페르도 부인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었다. 라이짐은 분명 히 기억하고 있었다. 바바 족과의 화친을 츄바카가 반대하고 나오자 바로 사람을 모아 계략을 짠 것이 페르도 부인이었다. 그 자리에는 사비치와 아케르, 그리고 자신이 참석하고 있었던 것이다. "강한 사람은 때를 기다리지 않아요. 자신이 등장할 때를 만들어 내는 것이 진정 강한 사람이랍니다." "좋은 충고의 말씀, 기억해 두겠습니다." 페르도 부인이 손을 거두자 라이짐은 이렇게 말하면서 허둥지둥 뒤로 몸을 옮겼다. 페르도 부인은 그런 라이짐의 모습이 귀엽다는 듯이 소리내 서 웃었다. "돌아가서 쉬어요. 좋은 꿈꾸고." 라이짐은 인사를 마치고 서둘러 방을 빠져나갔다. '내 꿈을 꾸게 되는 거 아닌가 몰라'하는 조롱 섞인 페드로 부인의 목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 다. 하지만 정말로 그런 소리를 들었는지는 본인조차 확실하지 않았다. 라이짐은 지나치게 흥분해 있었던 것이다. 라이짐은 맨 정신으로는 도저히 잠이 들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별 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붉은 빛의 진이라는 이름의 술을 큰 병으로 하나 사 가지고 숙소로 돌아갔다. 숙소에 들자마자 라이짐은 잔에 진을 가득 따르고 순식간에 그것을 비웠다. 뜨거운 열기가 목을 타고 뱃속으로 짜르 르 타내려갔다. "멍청한 것들." 라이짐은 누구에게 하는 것인지도 모를 욕설을 이렇게 중얼거리고는 다 시 잔을 채우고 비웠다. 강한 진의 술기운은 거의 순식간에 라이짐의 정 신을 흔들어놓았다. "에이스!" 라이짐이 소리쳤다. 그러자 그림자 뒤에 숨어 있던 에이스가 모습을 드 러냈다. "부르셨습니까." "내가 오면 숨어 있지 말라고 했잖아!" "그런 말씀은 하지 않으셨던 것 같습니다만..." 귀를 만지작거리면서 에이스가 말했다. "지금 말하잖아!" 라이짐은 자신이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에 이스는 그런 라이짐의 심리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에이스는 라이짐과는 너무나도 다른 종족이었기 때문이었다. "여기 앉아." 라이짐은 에이스에게 자리를 권했다. 붉은 연금술사의 등 아래 비추인 에이스의 얼굴은 깊은 어둠의 광채를 내고 있었다. 라이짐은 손을 내밀어 에이스의 얼굴을 만졌다. 에이스는 눈을 깜빡이면서 라이짐의 얼굴을 바 라보고만 있었다. 손끝이 에이스의 안대와 흉터에 닿자, 라이짐은 끝도 없이 솟아나는 죄책감과 분노와 욕망과 슬픔이 뒤범벅이 된 감정 때문에 몸을 제대로 가눌 수가 없어졌다. 숨이 턱 막혀버릴 듯 거칠게 새어 나왔 다. 라이짐은 에이스를 와락 껴안았다. 단내가 풍겨왔다. 따뜻했다. "왜 다들 그러는 거야... 왜 다들 나한테 화내지 않는 거야... 벌레 같 은 사람들... 왜 내가 말하면 다들 믿는 거지... 왜... 병신 같은 것 들... 왜..." 라이짐은 자신도 그 의미를 모르고 있는 말들을 이렇게 두서없이 내뱉 었다. 머릿속에는 피를 뿜으면서 쓰러지던 츄바카의 얼굴과, 또 순진하게 고맙다고 말하던 고몽 페르도의 얼굴과, 그리고 음란한 미소로 자신을 유 혹하던 페르도 부인의 얼굴이 교차되어 떠오르고 있었다. 너무나도 많은 것들이 라이짐을 짓누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을 이겨내기에 라이짐의 어깨는 아직 좁았다. "미안해. 하지만 나 잠시 이러고 있을 게. 괜찮지?" 에이스를 안은 채 라이짐이 말했다. 에이스는 예의 그 감정 없는 목소 리로 대답할 뿐이었다. 라이짐은 에이스의 어깨에 대고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라이짐의 등 뒤에서 서늘한 눈초리로 내려다보고 있는 에질리의 눈길이 있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8735/19898 ━━━━━━━━━━━━━━━━━━━━━━━━━━━━━━━━━━━━━━━━ 제 목:[탐그루] 불의 꿈을 꾸는 자 229 관련자료:없음 23/23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4-07 21:42 조회:1627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이후 며칠간 라이짐은 정신없이 일에 몰두했다. 직접 소통을 통해 수시 로 들어오는 에이스 자매의 보고를 통해 수집된 자료 중 정보가치가 있는 것들을 따로 분류해 정리하는 일 말고도, 정리가 끝나면 아케르에게 보고 하기 위한 보고서를 따로 꾸며야 했다. 그런 후에 아케르의 시간 계획에 맞추어 보고를 하는 식으로 라이짐은 일을 만들어서라도 자신이 여유를 가질 틈을 만들지 않았다. 사실 라이짐의 일이라는 것이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게으름을 피울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라이짐은 조금도 그러 고 싶지 않았고 또한 그럴 수도 없었다. 정신없이 뭔가 다른 일에 몰두하 지 않고 결투 사건의 후유증을 견디기에는 어깨를 누르는 중압갑이 너무 나도 컸던 것이다. 정보를 모으는 일 중 가장 골치 아픈 일은 도무지 종잡을 수 없게 여기 저기 나타나곤 하는 그리폰의 존재였다. 그리폰은 바르도 대륙 전역에서 아무 때고 나타나 검은 색 돌을 떨어뜨려 불바다를 만들어 놓고는 사라지 곤 했다. 라이짐은 그리폰이 나타나는 지역들을 분석하여 그리폰의 본거 지와 그리폰이 출몰하는 규칙을 알아내려고 애썼지만 라이짐으로서는 그 출몰에서 어떤 규칙도 도출해낼 수 없었다. "여어. 일은 좀 쉬면서 하라구." 라이짐이 지도를 보면서 골몰하고 있는데 목발 대신으로 쓰는 가느다란 지팡이를 짚은 하진이 절룩이며 라이짐의 집무실로 들어왔다. 하진은 이 제 의족을 차고 있었다. 스파일에는 오랜 전쟁이 낳은 노련한 장인들이 많이 있었고, 의족과 의수를 만드는 장인도 상당수 있었다. 하진이 지금 하고 있는 의족도 이름 있는 장인의 작품이었다. "그것보다, 하진. 알아봐 달라고 한 건 알아봤어?" 라이짐이 꾸미다만 보고서를 책상 한 켠으로 밀어놓으면서 말했다. 하 진은 의자를 끌어와 앉으면서 라이짐에게 종이뭉치를 하나 내밀었다. "이게 내 일이니까 하긴 했지만 말이야, 좀 그렇지 않아? 왜 자꾸 이런 사람들 뒷조사를 시키는 거야?" 하진이 이상하다는 듯이 라이짐에게 물었다. 라이짐은 대답 없이 보고 서를 훑어보았고, 하진은 의족을 찬 오른발을 책상 위에 올렸다. 하진의 의족은 누가 본다고 해도 진짜 같았다. 하진의 피부색에 맞게 칠을 한 덕 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진짜 사람의 다리와 비슷하게 털까지 재현해 놓은 장인의 공이 컸다. 거기에다 더 놀라운 것은 왼쪽 발의 털에 맞추어 오른 쪽 발에도 털을 재현해 놓기까지 한 것이다. "신기하단 말이야. 가려울 때 긁으면 시원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도 있으니 말이야. 이거 정말이야." 하진은 진짜로 다리를 긁는 시늉을 하면서 말했다. 하지만 라이짐은 보 고서에 정신을 집중하고 있을 뿐이었다. 하진은 조금 시큰둥해져서 오른 쪽 다리를 내려놓았다. 보고서에는 페르도 부인의 동향이 자세히 적혀 있었다. 겉보기에는 아 주 정상적인 영주 부인의 일과였다. 손님 접견, 집사장 주례 보고, 아들 과의 대화 등... 하지만 일정에는 이상한 것들이 끼어있었다. 페드로 부 인이 일 주일에 두 번씩 어떤 사람을 만나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도 페드 로 부인과는 전혀 상관없을 듯한 인물이었다. "발렌시아?" 라이짐이 하진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거 알아내는 데 힘들었어. 발렌시아 백부장 부하들한테 돈 좀 썼 지." 하진은 이렇게 말하면서 혀를 날름거렸다. "재미있긴 하지만 그거 솔직히 좀 불안한 정보야. 이런 일은 성격상 많 이 알면 알수록 다칠 확률이 높단 말이야." 하진의 말은 농담처럼 들리기는 했지만 사실이었다. 만약 라이짐이 생 각하는 데로 발렌시아와 페르도 부인이 정을 통하고 있는 것이라면 어떤 경우, 라이짐에게 유리한 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겠지만, 또 어떤 경우에 는 정 반대로 불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을 거였다. "이건 너하고 나만 알고 있는 게 좋겠다, 당분간은." 라이짐은 이렇게 말하면서 하진의 보고서를 서랍 깊숙이 넣고 자물쇠를 채웠다. 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이 맞아. 만약에 비밀이 새 나간다면 이 하진을 의심하면 돼. 아 무한테도 말하지 않았으니까. 정보를 준 발렌시아 부하 녀석은 자신이 그 런 정보를 줬다는 것도 모르고 있을 거야. 내가 다 손 써놨으니까 걱정하 지 마. 그 부하녀석이 해 준 말은 발랜시아가 막사를 떠나는 시간뿐이었 거든. 미행해서 알아낸 나야. 이 하진, 떠벌이란 소릴 듣기는 해도 해서 는 안될 말은 잘 알고 있다구." 하진의 말에 라이짐은 미소로 응답했다. 현재로서 라이짐이 믿을 수 있 는 동료라고는 하진 하나 뿐이었다. 정보부장이라는 자리 자체가 많은 부 하를 거느리거나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자리도 아니었고, 어떻게 보 면 친한 사람들도 만나기를 꺼리는 자리이기도 했던 것이다. "라이짐. 오늘은 나하고 한 잔 어때?" 하진이 물었다. 라이짐은 책상 위에 쌓인 보고서 뭉치를 바라보았다. 분명 그 일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이기는 했지만 반드시 오늘 해야 할 일은 아니었다. "왜 갑자기 술은." 하진의 말을 듣자 라이짐도 은근히 술 생각이 났다. "일, 일, 일. 쉬지 않고 일만 하는 것도 좋지만 내일을 위해서 좀 노는 것도 도움이 될 때가 있는 법이거든. 그렇게 혼자서 일만 하다간 대머리 될 걸?" 하진이 키득거리면서 말했다. 라이짐은 그런 하진을 보면서 씨익 웃음 을 지었다. 문득 시원한 맥주 생각이 간절했다. 라이짐은 입맛을 한 번 다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오늘은 나도 한 잔 하지." 라이짐은 이렇게 말하면서 목을 뒤로 젖혀보았다. 기름이라도 칠해야 할 판으로 뒷머리가 뻐근했다. 한 동안 지나치게 일에만 몰두한 까닭이었 다. "그런데 술 값은 누가 내는 거야?" "라이짐. 너무 째째하게 굴지 마. 어울리지 않게 술값 걱정은. 이곳 스 파일의 대 영주 프란스 페르도 님이 직접 사는 술이니까 걱정하지 말라 고."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는 투로 하진이 말했다. 갑자기 영주를 들 먹이다니. 라이짐은 하진의 농담이려니 하고 생각했지만 하진의 진짜 속 마음은 종잡을 수가 없었다. 하진이 라이짐을 안내 한 곳은 프라브리티 중심가에 자리잡고 있는 조 그마한 맥주 집이었다. 하진은 벌써 단골이 된 모양인지 자리에 앉자마자 주인이 직접 달려 나와 하진을 맞았다. "오래간만입니다, 하진 님." 콧수염을 기르고 있는 주인이 하진에게 능글맞게 웃음을 보내면서 말했 다. 조금만 칭찬해 준다면 당장이라도 두 손을 비빌 것 같은 분위기였다. "같이 오신 분 분은...?" 주인이 라이짐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라이짐은 모자를 눌러쓰면서 대충 아무렇게나 자신의 신분을 둘러대려고 했다. "모르는 게 좋을 걸. 알면 다치는 분이야. 이곳에 직접 오신 건 순전히 업무 때문이라고." 하진은 거드럼을 피우면서 말했다. 그러자 주인은 아, 그렇습니까, 하 고 말하면서 고개를 조아렸다. 라이짐은 한 순간 주인의 눈빛이 반짝이면 서 자신을 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라이짐은 눈치 채지 못하도록 신경 쓰면서 모자를 눌러썼다. 지난 번 결투 이후로 라이짐의 이름은 '백발영 웅'이라는 별명으로 이곳 프라브리티에 꽤 알려졌던 것이다. "알아서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도대체 뭐라고 허풍을 떨었기에 주인이 이렇게까지 구는지 라이짐은 짐 작조차 할 수 없었다. "술은 어떻게...?" "늘 하던 대로... 하지 말고. 한 단계 좀 높여 봐. 오늘은 중요한 얘 기들을 나누어야 하니까." "아, 그렇습니까? 그럼 안쪽에 조용한 방이 마련되어 있습니다만..." "귀찮으시겠지만 자리를 옮기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부장님." 하진이 진지한 눈빛을 하고는 라이짐에게 물었다. 부장님이라. 라이짐 은 웃음이 나왔지만 고개를 끄덕이면서 좋다는 표시를 했다. 주인을 따라가니 술집 뒤편에 작은 방이 하나 나왔다. 고급스러워 보이 는 탁자 하나에 천장에는 연금술사의 등이 걸려 있었고, 긴 의자 두 개가 탁자를 사이에 두고 길게 뻗어 있었다. 앉으면 허리까지 묻히는 푹신한 의자였다. "저......" "쉿. 많이 알면 다쳐. 주인장은 알아서 상이나 내 오셔." 하진의 말에 라이짐은 고개를 숙이고 웃음을 참았다. 주인은 그 말 한 마디에 그대로 꼬리를 말고 뒤로 물러났다. "뭐라고 했는데 저러는 거야?" "나랏일을 한다고 했지. 신분증을 보여 준 적이 있거든." 라이짐은 자신이 만들어 준 신분증을 떠올려 보았다. 신분증에는 하진 에게 협조할 것을 부탁하는 아케르 단장의 서명과 영주의 직인이 찍혀 있 을 뿐이었다. 그 정도만으로도 이런 힘을 발휘할 수 있다니. 라이짐은 '높은 사람'이라는 말의 뜻을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영주 직인 하나면 이런 술집 하나는 완전히 내 세상이라니까." 하진이 키득거렸다. 라이짐은 하진에게 일을 맡긴 후에 아케르에게 부 탁해 영주의 직인이 찍혀 있는 신분증을 두 개 만들었다. 라이짐은 다만 일을 할 때 편할 것이라는 하진의 충고를 따른 것뿐이었지만 영주의 직인 이 찍힌 신분증 한 장이 이렇게 엉뚱한 힘을 발휘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이거 봐? 신기하지 않아?" 하진이 신분증을 꺼내 연금술사의 등에서 쏟아지는 빛에 비추어 보면서 말했다. 직인은 장인이 만들어낸 특수한 인주를 쓴 것이어서 연금술사의 등 아래에서 보면 정교하게 만들어진 카를로스 장군의 문양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시간대에 따라서 색이 바뀐다구. 오전에는 푸른 빛이 돌지만 저녁 때 가 되면 붉은 빛으로 바뀌지. 노을이 질 때 보면 꽤 근사한 진홍빛이 나 는데... 알고 있었어? 이런 거?" "그런 데 신경 쓸 겨를 있으면 내가 부탁한 일들이나 한 번 더 신경 써 줘." 라이짐은 하진에게 공연히 짜증을 부렸다. 아직도 목이 뻐근한 탓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술 왔습니다." 밖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뭔가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구나 싶 어서인지 주인이 밖에서 한 번 물어보고 들어가라고 시킨 모양이었다. "흠. 들어오게." 하진이 갑자기 점잔을 빼면서 말했다. 그러자 두 명의 여자가 방안으로 들어왔다. 하나는 키가 크고 꽤 풍만한 몸을 한 여자였다. 하진과는 아는 사이인 모양으로 방에 들어오자마자 잽싸게 하진의 옆자리에 가서 앉았 다. 나머지 하나는 술과 안주가 담긴 쟁반을 들고 있었다. "못 보던 아가씬데?" 하진이 옆자리에 앉은 여자를 주무르면서 말했다. 라이짐은 하진 쪽으 로 눈을 두지 않으려고 조심하면서 테이블 위에 올려진 술병만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얘는 오늘아 처음이에요. 새로 오신 분이 계시다기에..." 라이짐은 따라 들어온 여자를 바라보았다. 술집에서 일하는 여자라는 느낌이 조금도 들지 않는 여자였다. 라짐. 라이짐은 속으로 이렇게 중얼 거렸다. 물론 지금 눈 앞에 있는 여자는 라짐과는 조금도 닮지 않은 여자 였다. 키도 라짐보다 훨씬 컸고, 라짐보다는 따뜻하고 귀여워 보이는 여 자였다. 다만 비쩍 마른 몸과 실핏줄이 비쳐보일 만큼 흰 피부가 라짐을 연상케 했을 뿐이었다. "마리라고 합니다." "예." 라이짐은 어색하게 목례로 마리에게 인사를 건넸다. "뭐해, 어서 부장님 모시지 않고?" 하진이 재촉하자 마리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고 라이짐의 옆에 앉 았다. 마리의 목덜미에서 독한 향수 냄새가 풍겨 나왔다. 가슴이 뛰고 얼 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부장님. 일 이야기는 여기서 그만 두지요. 오늘은 좀 쉬자고 부장님께 서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 그랬던가?" 라이짐은 이렇게 말하고는 어색하게 웃었다. 술잔이 몇 번 오갔다. 술은 싸구려 과일주인 진이나, 독하기만 한 쇠주 와는 달리 맛도 그윽하고 적당하게 독한 술이었다. "술 이름이 뭔가요?" 라이짐이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물었다. "마르게르 젤러. 새벽의 눈동자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술이에요." "한 번 마시게 되면 새벽까지 마시게 된다는 뜻인가 보지?" 하진의 농담에 모두들 웃음을 터트렸다. 라이짐은 마리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과연 그래도 되는 건지 알 수가 없 었다. 원래 이런 곳에서 일하는 기생이야 만지라고 있는 거라고 언젠가 하진이 말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라이짐은 도무지 그럴 수가 없었다. "너무 수줍음을 타시네요, 부장님?" 하진의 옆에 앉아 있던 여자가 말했다. "흠. 이런 자리를 좋아하시는 분이 아니라서 말이지. 흐흠. 너무 일에 몰두하시는 성격이시라... 그래서 이렇게 어렵게 자리를..." 하진은 어떻게든 라이짐의 입장을 설명하려고 해 보았지만 분위기만 더 욱 냉랭해질 뿐이었다. "하진. 신경 쓰지 말고 마셔." 라이짐은 이렇게 말하고는 술잔을 비웠다. 어차피 술은 취하라고 마시 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라이짐이었다. 목 뒤에 뻐근한 것이 술기운이 오름 에 따라서 사라지고 있었다. 술자리가 끝나자 하진은 잘해보라는 웃음을 남기고 자신의 술시중을 들 었던 기생과 번화가 쪽으로 사라져버렸다. 라이짐은 마리를 한 번 흘낏 보았다. "주인님께서 끝까지 모시라고..." 고개를 숙이고 마리가 말했다. 라이짐은 마리의 말뜻을 이해할 수 있었 다. 취기와 욕망이 불덩어리처럼 달아올랐다. "돌아가요, 그, 그냥." 라이짐은 이렇게 말했지만 그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냥 돌아가면 저 쫓겨나요. 저 집에 돌봐야 할 동생이 셋이나 있고, 또..." 더 이상 라이짐은 자신의 욕망을 속이지 않기로 했다. 라이짐은 말 대 신 마리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어깨뼈가 손에 꼭 들어왔다. 라이짐은 어 깨를 쥐고 있는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조금 놀라긴 했지만 숨을 한 번 깊게 들이쉬었다 내쉬고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괜찮아, 다 괜찮아." "예?" 마리가 화들짝 놀라면서 라이짐을 바라보았다. 라이짐은 앞만 보고 걸 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차마 마리의 눈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라이짐은 내내 아무 말 없이 주둔지로 향했다. "정지!" 날카로운 경계병의 목소리가 들렸다. 신병인지 군기가 잔뜩 들어간 목 소리였다. 그 목소리에 마리가 라이짐의 가슴 쪽으로 파고 들었다. 라이 짐은 자신의 가슴 뛰는 소리가 혹시 들리지나 않을까 싶어 얼굴이 화끈 붉어졌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8736/19898 ━━━━━━━━━━━━━━━━━━━━━━━━━━━━━━━━━━━━━━━━ 제 목:[탐그루] 불의 꿈을 꾸는 자 230 관련자료:없음 22/22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4-07 21:42 조회:1488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이름과 소속은?" "정보부장이다." "떠나실 때 그대로입니닷!" 경계근무를 서고 있던 병사는 수칙 그대로 라이짐에게 보고했다. "이쪽은... 친구다." 라이짐은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마리를 설명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옛! 알겠습니다!" 불빛 아래 경계병의 모습이 드러났다. 라이짐보다도 어릴 것 같은 소년 병이었다. 아마도 프라브리티에서 착출된 병력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병사." "옛!" "이곳 수칙의 첫 번째가 뭔지는 잘 알고 있겠지?" "보안유지입니다!" "좋아." 라이짐은 이렇게 말하고는 마리와 함께 집무실로 들어갔다. "집무실도 겸하고 있어서 좀 지저분합니다." 라이짐은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는 집무실을 보고는 당혹스러운지 이렇 게 둘러대었다. 마리는 아무 대꾸 없이 라이짐의 침대에 걸터앉았다. 라 이짐은 조심스럽게 마리의 옆에 앉았다. 라이짐은 취기 때문인지, 긴장이 풀어져서인지 마리를 안는 일 말고 다른 일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라이짐이 손을 뻗어 마리의 얼굴에 닿았을 때였다. 마리는 체념한 듯 눈 을 감았다. "라이짐 님, 오셨습니까." 그림자 밖으로 에이스가 걸어나오면서 말했다. 라이짐은 마리의 얼굴에 대었던 손을 거두면서 에이스를 바라보았다. "라이짐 님께서 오시면 숨어있지 말라고 말씀하셔서..." 에이스의 말에 라이짐은 어이가 없었다. "누, 누구..." 마리는 겁먹은 표정이었다. 아마도 검은 엘프를 처음 보는 모양이었다. 아니, 처음 보는 것이 아니라고 해도 안대를 하고 있는데다가 얼굴 반쪽 이 화상으로 일그러져 있는 에이스를 보고 놀라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 한 일이었다. "내 부하에요. 에이스. 인사해. 이쪽은 마리야." "안녕하십니까, 마리 님. 저는 에이스라고 합니다." 에이스는 정중하게 마리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라이짐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일이 진행되었구나 싶어졌다. 잠 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고 마리 역시 어색한지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이 없었다. 라이짐이 에이스에게 나가 있으라고 말할 작정으로 막 입을 열려 는 참이었다. 요란한 굉음과 함께 땅이 흔들렸다. "그리폰입니다." 에이스가 밖을 내다보고는 말했다. 그리폰이라는 말에 라이짐은 술기운 이 확 달아나는 느낌이 들었다. 라이짐은 허둥거리면서 무기를 챙겼다. 그리폰과의 전투가 벌어지면 칼이야 소용이 없겠지만 그래도 전투상황이 되면 무기를 갖추어야 하는 것이 용병단 입단해서부터 이어진 몸에 밴 습 관이었다. 라이짐은 서둘러 아케르가 있는 지휘 본부 쪽으로 뛰어가려다 말고 마 리가 함께 있다는 생각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라이짐은 잠시 주저하는 듯 하더니 마리가 아니라 에이스를 향한 채 말을 꺼냈다. "마리는 아침까지 여기 있다가 가요. 에이스. 마리를 부탁해." 라이짐은 서둘러 지휘 본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폰의 공격이 어떤 규칙을 가지고 일어나고 있는지 아직도 파악하 지 못하고 있단 말인가?" 아케르가 라이짐에게 물었다. 라이짐은 그렇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아케르의 목소리는 그리 꾸짖는 투는 아니었다. 오히려 탄식에 가까운 말투였다. "마물이 출현이 그렇게 쉽게 규칙을 찾아 낼 수 있을 성질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타호루가 조심스럽게 아케르에게 말했다. "프라브리티에 그리폰이 출현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다행히도 그리폰의 불벼락을, 아니 공격에 대비해서 천창을 두껍게 하고 건물을 튼 튼히 짓는 작업이 끝난 직후라 군단의 피해는 거의 없습니다." 순무가 아케르에게 말했다. 아케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우리 군단에 있어서나, 또 스파일에 있어서나 중요한 시점이 네. 바바 족과의 비밀 외교가 진행되고 있고, 이제 곧 그 성과를 거두게 될 거라 여겨지네. 우리 군단은 스파일 최강의 군단으로 거듭나기 위해서 정비에 힘쓰고 있고, 또한 이제 새로운 적으로 떠오른 성황청과의 일전이 눈앞에 있는 처지일세. 이럴 때에 마물들에게 공격을 당하게 된다면 꼴이 어찌되겠는가?" 역시 한탄에 가까운 어조였다. 이번에는 아무도 말이 없었다. "지금까지 그리폰의 공습은 같은 장소에 두번 이상 있었던 적은 없습니 다. 그런 전례로 볼 때 당분간 프라브리티에는 적어도 그리폰의 공습은 없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라이짐이 침묵을 깨고 말했다. 라이짐의 말이 끝나자 아케르의 얼굴이 조금은 환한 빛을 띄었다. "그렇다고 해도 대비책을 소홀히 해서는 안되겠지. 순무는 피해상황을 종합한 후 차후 대비책을 마련해서 내일 중에 보고하도록 하고, 타호루는 성구에 대한 대비책 진전상황을 계속해서 보고하도록." 아케르가 말했다. 타호루는 꽤 오래 전부터 성황청의 성구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 오고 있었다. 하지만 별 뾰족한 대책이 마련되고 있 는 것 같지는 않았다. "자. 그럼 오늘 일은 일단 일단락 되었으니 이제 가서들 쉬게. 그리고 라이짐. 자네는 남고." 라이짐은 이 말을 듣자 눈앞이 다 캄캄해졌다. 혹시 질책이라도 받게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피곤했기 때문이었다. 아케 르는 백부장들과의 회의가 끝난 다음에 타호루, 순무와 함께 라이짐의 보 고를 받았기 때문에 시간은 새벽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거기다 간밤의 술 도 아직 덜 깨어 있었고. "라이짐. 자네에게 임무를 주겠네." 한참 사이를 두었다가 아케르가 말했다. "업무가 많다는 건 잘 알고 있네. 자네의 보고서는 항상 새로운 정보로 가득하더군. 그점은 높게 평가하고 있네." 아케르의 첫마디에 라이짐은 일단 안심이 되었다. 적어도 질책은 아닐 듯 싶었다. "자네, 탐그루에서 반란군 활동에 대해서 얻은 정보가 있지?" "예. 암호표와 반란군 탐그루 지부장에 대해서 보고 드렸습니다." 라이짐은 발음을 되도록이면 명확하게 하려고 단어와 단어 사이를 또박 또박 끊어서 말했다. 남아있는 술기운이 여전히 라이짐의 혀끝을 간지럽 히고 있었다. "그곳 지부장과 접촉을 시도하게." 라이짐은 이렇게 말하는 아케르의 의중을 읽을 수가 없었다. 과연 아케 르가 무슨 생각으로 반란군과의 접촉을 시도하는 것일까. 지금 단계는 스 파일의 귀족들과 관계를 돈독히 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 아닌가. 하지만 지금 아케르의 말은 그 뒤로 뭔가 음모를 꾸민다는 인상을 주고 있었다. 하지만 라이짐은 그런 생각을 입밖에 내지는 않았다. "알겠습니다." 라이짐은 이렇게 대답했다. "너무 많은 정보를 취급하다 보면 중요한 정보를 소홀히 하는 경우가 있지." 아케르는 이렇게 말하고는 라이짐에게 가서 쉬라고 말했다. 아케르의 말은 '자네가 뭔가 놓치고 있는 게 있다네' 라고 말하는 것과 같았다. 라 이짐은 아케르가 자신에게 숙제를 내 준 게 아닌가 생각하면서 숙소로 돌 아왔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라이짐은 침대에 누워 자고 있는 마리의 모 습을 볼 수 있었다. 마리는 턱 밑까지 모포를 끌어당기고서 새우잠을 자 고 있었다. 술이 좀 깬 탓일까. 라이짐은 그제야 마리가 여자가 아니라 어린 소녀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마리의 얼굴에는 솜털도 가시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라이짐은 마리를 안고 싶었던 자신의 모습이 짐승 같다고 여겨졌다. "라이짐 님이 나가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곧바로 잠드셨습니다." 에이스가 보고하는 투로 말했다. "에이스. 야전 침대 하나하고 모포 좀 구해 와." 라이짐은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 동안 쓸 일이 없어서 모아두었던 활동비를 마리의 옷 주머니 안에 넣었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마음이 편해 질 것 같아서였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라이짐은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는 자신의 침대와 그 위에 올려진 편지 한 장을 볼 수 있었다. 편지에는 단 두마디 만이 적 혀 있었다. '죄송합니다. 고맙습니다.' 바바 족과의 물밑 접촉은 아케르의 말 그대로 곧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낳았다. 우기가 시작될 무렵, 바바 족이 스파일이 제공하는 물적 자원을 받아들이기로 합의했다는 것이었다. 하필이면 비가 올 때 들려온 소식인 지라 라이짐은 내심 불안한 마음도 들었다. 비가 온다는 건 아무래도 좋 지 않은 징조 같이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외교는 아무래도 여자를 사귀는 일하고 비슷한 것 같아. 어떤 여자라 도 갑자기 나타나 일단 사귀어 보자 그러면 될턱이 없지. 선물을 주는 게 먼저야. 여자가 만약 선물을 받는다면 여자가 나하고 사귈 마음이 있구 나, 라고 생각할 수 있는 거지, 이 여자가 선물을 거부하면 이건 아니구 나, 하고 다른 방법을 찾는 거지. 아니, 다른 여자를 찾아야지." 킬킬거리면서 하진이 설명했다. 여자의 비유를 들어 설명한 자신이 대 단하다고 느끼는 모양이었다. 라이짐은 하진의 설명을 듣자 마리에게 돈 을 주었던 일이 떠올랐다. 마리는 돈을 받고 고맙다고 말했지. "그리고 다음은 문화 교류지. 왜, 있잖아. 함께 연극을 보러 간다던가, 공연을 보러 가는 거 말이야. 그러다 보면 친해지고 나중에는 살도 섞고 그렇게 되는 거지. 안 그래?" "하진!" 라이짐은 약간 언성을 높여서 하진에게 말했다. 에이스가 듣고 있는데 음담패설에 가까운 말을 하는 것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스파일 영주는 자이벌을 통해서 바바 족에게 경제 원조를 약속했어. 일단 민간 차원의 교류를 통해 그들의 속셈을 파악해 보려는 생각인 거 야." 화제를 다시 바바 족과의 교류 문제로 돌리기 위해서 라이짐이 진지하 게 말했다. 하진도 그런 의도를 눈치챘는지 이렇게 라이짐의 말을 받았 다. "그래, 라이짐. 내가 듣기로는 헌다이 가문 사람이 바다를 통해서 뮤를 백 마리 몰고 간다며?" "응. 아들인 문삼인가 뭔가 하는 사람이 책임자로 가는 모양이야. 뱃길 로 가는 이유는 뭐라더라, 그래, 크리스트 대황야에는 마물도 많고 산적 이나 군소 바바 족들이 많아서 위험하서 그렇다더군." "그래. 맞아. 크리스트 황야는 무시무시한 곳이야. 멋모르고 들어갔다 가는 살아나올 도리가 없는 곳이지. 잘 알겠지만 내가 그곳 출신이니까. 그런데 내가 알기로는 바다로 가는 길에는 빙하 지대가 있어서 항해가 불 가능하다고 하던데?" "마법으로 뚫고 갈 생각인가봐. 사비치가 동행한다는 걸 보면 말이야. 그리고 일단 길을 뚫으면 앞으로는 뱃길을 통해서 무역을 할 모양이야." 이렇게 말을 하기는 했지만 바바 족에 대해서 알고 있는 정보는 너무 적었다. 바바 족이라는 말도 결국 '바바거리는 녀석들'이라는 뜻에 불과 했고, 그들이 어떠한 문화를 가지고 있으며 어떤 방식으로 일을 추진하는 지, 또 믿을 수 있는 상대인지 전혀 알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바 바 족과 오래 전부터 접촉이 있었다는 페르도 부인의 말로 미루어 볼 때 스파일의 높은 사람들은 바바 족에 대해서 꽤 자세히 알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라이짐은 자신이 취급하고 있는 정보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대부분 의 정보는 비스토브레 왕국의 영역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고, 기 껏해야 범버쿠 정글 정도가 라이짐이 파악할 수 있는 정보의 한계였다. 지금으로서 라이짐이 바바 족에 대해서 알고 있는 정보는 어떤 바바 부족 이 있고, 그 부족이 주도권을 가지고 있으며, 그 부족에게 공식적인 원조 를 하려 한다는 것 정도였다. "그런데 바바 족과 오래 전부터 교류가 있었다는 말도 있던데. 그렇다 면 왜 바바 족이 그렇게 큰 위협이 되었을까? 국경지대에 어마어마한 병 력까지 배치해 놓고 말이야." 라이짐이 혼잣말처럼 이렇게 중얼거렸다. "글쎄? 바바 족이야 여러 부족이 모여 있는 형태니, 군소 부족의 공격 까지 외교로 막을 수는 없었겠지. 그리고 정치적으로는 적의 존재가 필요 하기도 하고. 삼년전쟁 때도 그래. 전쟁을 끝내야 할 무렵에 바바 족이 국경을 넘어 쳐들어 왔잖아? 그걸 이렇게 생각하면 어떨까? 전쟁을 끝낼 명분이 필요했다. 그래서 바바 족에게 공격을 부탁했다. 너무 지나친 생 각일까?" "그런 판단은 일단 유보하자구." 라이짐은 음란하기까지 한 페르도 부인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그 여 자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여자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스의 직접소통 보고입니다." 아무 말 없이 서 있기만 하던 에이스가 말했다. 라이짐은 벌떡 일어나 평소의 습관대로 에이스의 말을 받아 적을 생각으로 필기구를 준비했다. "말해봐." "로스안 남쪽에서의 보고입니다. 거리가 멀어서 자이스의 중계소통으로 보고한답니다." "중계소통? 그게 뭐야?" "하진. 나중에 설명해 줄게." 라이짐은 이렇게 말하고는 에이스에게 보고를 계속하라고 했다. "범버쿠 정글입구에 있는 유민장 마을에서 수르카 님 일행을 만났다고 하는군요. 처음 보는 사람들과 함께 있다고 합니다. 여자가 하나, 남자가 넷에 꼬마가 하나라고 하는군요." "수르카? 배신자 찬하고 함께 도망쳤던 수르카 말이야?" 하진의 말에 라이짐이 팔을 내저어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너도 나도 단호한 태도에 하진은 순간 움찔하고 말았다. "... 수르카 님은 아파 보인다고 하는군요. 통나무로 된 집에서 누워서 간병을 받고 있답니다. 그리고 마을에는 뮤가 스물 두 마리 있고 밭이 여 섯 군데가 있다고 합니다. 그 여섯 군데 중 주인이 직접 농사를 짓는 곳 은 두 군데고..." "그런 건 놔두고, 수르카가 아프다고? 좀 더 자세하게 보고해 보라고 해." 라이짐은 에이스 쪽으로 몸을 가져가면서 이렇게 말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8737/19898 ━━━━━━━━━━━━━━━━━━━━━━━━━━━━━━━━━━━━━━━━ 제 목:[탐그루] 불의 꿈을 꾸는 자 231 관련자료:없음 23/23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4-07 21:43 조회:1481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 열병인 것 같답니다. 머리에 물수건을 올리고 있다고 하는 군요. 여자가 옆에서 간호를 하고 있답니다. 이름은... 스칼렛이라고 하는 군 요. 침대에서 스칼렛의 팔을 잡았답니다. 그리고..." 에이스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뭐야? 한 참 재미있어지는 참인데." "하진. 제발." 라이짐이 거의 하진을 노려보다시피 하면서 말했다. 하진은 좀 멋 적은 지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중계 상태에 이상이 온 모양입니다." 에이스가 말했다. 에이스의 직접소통은 다소 이상한 마법이었다. 날씨 가 좋지 않은 날이나 산악지역에서는 잘 연결이 되지 않는 경우가 있었던 것이다. "다시 연결되면 다른 일은 미뤄두고 수르카 일행을 뒤쫓으라고 말해. 명령이니까 분명하게 전달하도록." "예. 알겠습니다." 에이스는 이렇게 대답하고 물러섰다. "왜? 그 배신자 녀석하고 청산해야 할 빚이라고 있는거야?" 하진의 비꼬는 말투를 듣는 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지만 라이짐은 버럭 짜증이 났다. "그만 둬." "뭘? 내가 틀린 말했나?" "내 친구야." 라이짐은 이렇게 말하고는 굳게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떠버리 하진이 철딱서니 없이 굴 때가 있다고는 해도 굳게 입을 다문 라이짐에게 함부로 까불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 라이짐은 창 밖을 내다보았다. 이제 우기 도 막바지인 모양이었다. 하늘도 지쳤는지 빗방울을 힘없이 흩뿌리고 있 었다. "친구는 가려 사귀어야지." "하진." 라이짐이 진지한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자 하진은 지레 겁먹은 얼굴이 되었다. "부탁이 있어." "으, 응. 그래. 말해봐. 이 하진, 사실 라이짐 정보부장을 위해서라면 이 한 몸 바칠 각오가 되어 있는 몸이라구." 라이짐은 하진의 과장된 말투에 쓴웃음을 지었다. 하진마저도 자신을 진심으로는 믿고 있지 않은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반란군과 접촉하려고 하는데 좀 도와줬으면 좋겠어." 라이짐의 말에 하진은 한숨을 돌렸다. 누군가의 친구를 욕했다가 결투 의 이름을 빌어 대낮에 칼 맞아 죽은 사람이 한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단장님께서 부탁하신 거 말이지?" "그래. 그거. 나 혼자는 좀 벅차." "벅찬 게 아니라 불가능하겠지." 하진은 키득거리면서 라이짐에게 말했다. "넌 얼굴이 알려져 있잖아. 그런데 네가 반란군하고 만나? 불가능한 일 이지." "그러는 너는? 기껏 맥주집에서 신분증이나 꺼내 들고 거들먹거리면 서..." "하핫. 내가 보인 건 신분증이 아니라 영주의 직인이었어. 그 사람들 내가 뭐 하는 사람인지도 몰라. 그냥 직인이 찍혀있으니까 알아서 기는 거지. 그리고 접촉하는 일 정도라면 문제없지. 이 하진, 사람 만나는 일 하고, 뒷조사하는 일에는 자신 있다고." 라이짐은 말이 없었다. 어찌되었건 지금 라이짐은 하진에게 위험한 일 을 맡기고 있는 건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조용히 처리해줬으면 좋겠어." 라이짐은 하진에게 떠버리새와 암호로 된 편지 한 통을 건네주었다. "탐그루 지부장 바코쿠로부터 내가 받은 답신이야. 해독은 에이스한테 부탁하면 돼." 라이짐의 말에 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친구를 위해서라면 내 목숨을 걸지." "위험한 일이라는 건 나도 알고 있어." "하핫! 걱정 말라고. 이 하진, 탐그루에서 한 번 죽었던 목숨이야." 라이짐은 하진의 말을 듣는 순간 뭔가가 어깨를 짓누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진을 두고 탐그루를 떠났던 기억 때문이었다. "부담 가지지마, 라이짐. 어차피 너는 할 수 없는 일이야. 그럼 당연히 내가 하는 거지. 안 그래?" "... 고맙다." 라이짐은 진심으로 이렇게 감사의 뜻을 표했다. 라이짐의 목소리가 떨 리고 있었다. "고맙긴. 이런 일 하는 덕에 훈련도 안 하면서 여기 남아 있을 수 있는 건데, 뭐." 하진이 말하자 라이짐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밖에는 아직도 비가 오고 있었지만 라이짐은 집무실에 더 이상 있고 싶지 않았다. "비오는 데 어디 가려고?" "비 맞으러." 라이짐은 이렇게 말하고는 밖으로 나섰다. 순식간에 온 몸이 빗물에 젖 어버렸지만 라이짐은 주머니에 손을 꽂고는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수많 은 생각들로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수르카. 이름만으로도 라이짐은 가 슴 한 구석이 아려왔다. 찬과 수르카. 내가 진 빚. 과연 죽지 않고 그 빚 을 다 갚을 수 있을런지. 그러면서도 목숨을 빚진 하진에게 위험한 임무 를 떠넘길 수밖에 없는 자신. 라이짐은 빗줄기가 마음껏 자신을 두들겨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어두운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하지만 우기 의 끝에 내리는 비는 라이짐을 괴롭히기에는 너무나도 힘이 없었다. 라이짐은 한참을 걷다가 일전에 하진과 함께 왔던 술집 앞을 걷고 있다 는 것을 깨달았다. 정처없이 길을 걸었지만 라이짐의 마음속에는 마리의 그림자가 남아있었던 모양이었다. 라이짐은 술집 앞에 서서 그냥 비를 맞 고 있기로 했다. 마리를 보고 싶다는 마음이 있기는 했지만 감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라이짐은 술집에 불이 꺼질 때까지 비를 맞고 서 있었다. 집무실로 돌아오는 발걸음은 의외로 가벼웠다. 거의 다 돌아왔을 무렵 에는 거의 뛰기까지 했던 것이다. 옷은 이미 빗물에 젖어서 몸에 바짝 달 라붙어 있었다. 하진도 돌아갔는지 집무실에는 에이스 혼자 남아있었다. "에이스. 옷 갈아입게 뒤돌아 서." 라이짐은 이렇게 명령하고는 옷을 벗었다. 옷을 벗는 일이 꼭 껍질을 벗는 것처럼 어색했다. "외로우시군요, 라이짐 님." 돌아서 벽을 바라보면서 에이스가 말했다. 라이짐은 언제부터인가 에이 스가 평소와는 다르게 가끔씩 자신의 생각을 말할 때마다 소름이 돋았다. "전혀. 외롭지 않아." 라이짐은 마른 천으로 천천히 몸의 물기를 닦아내면서 무덤덤한 어조로 말했다. "외로움을 이기는 법을 알려드릴까요?" 에이스의 물음에 라이짐은 대답하지 않았다. "여자를 안아 보세요. 외로움이 사라져 버린답니다." 에이스의 말에 라이짐은 충격을 받았다. 라이짐은 잠시 동안 멍하니 에 이스의 뒷모습만 쳐다보고 있었다. "화상을 입어 얼굴이 엉망이 된 저라도 좋으시다면..." 라이짐은 자신의 심장 뛰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라이짐의 심장은 축제의 북소리처럼 라이짐의 피를 뜨겁게 만들었다. "그, 그런 말하지 마." "왜요? 흉하면 흉하다고 말씀하세요. 하진 님도 그러셨는 걸요. 저는 더 이상 예쁘다는 소리를 듣지 못할 거라고." 라이짐은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에이스와 보낸 시간동안 에이스에 대해서 이런 느낌을 받은 적은 처음이었다. "에이스. 그건 말이지..." 라이짐은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에이스의 어깨가 들썩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검은 엘프 족도 우는 줄은 몰랐어. 라이짐은 생각했 다. 뜨거워진 피는 라이짐의 머리끝으로 몰리고 있었다. "왜 더 말씀 못하세요? 제가 흉하다고 생각하시니까 그런 것 아닌가 요?" "아냐, 난..." 에이스의 말은 라이짐의 가슴을 날카롭게 도려내고 있었다. 도려진 가 슴에서 흘러나온 피가 심장의 박동을 더욱 부추기고 있었다. "아니시라면 절 안아보세요. 지금." 라이짐은 에이스를 등뒤에서 안았다. 에이스의 좁은 어깨는 라이짐의 가슴 안으로 완전히 들어왔다. 에이스의 등은 따뜻했다. 라이짐은 손을 뻗어 에이스의 젖은 눈가를 어루만졌다. 손끝으로 물기가 느껴지자 라이 짐은 자신도 울고 싶은 기분이 되어버렸다. 다음 순간 에이스가 돌아서 라이짐을 바라보았다. 에이스의 눈은 평소의 감정 없는 눈과는 다른 눈이 었다. 어둡고도 깊은, 사람을 빨아들이는 듯한 눈이었다. 에이스는 눈을 감고 라이짐에게 다가왔다. 라이짐도 눈을 감았다. 다음 순간 에이스의 입술이 라이짐의 입술에 닿았다. 뜨거운 것이 에이스의 입 술을 통해 몸으로 흘러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라이짐은 자신도 모르게 에 이스의 양어깨를 잡았다. 에이스의 어깨뼈는 손바닥 안에 꼭 들어왔다. 순간 마리의 얼굴이 떠올랐고 마리에 대해서 품었던 욕망도 함께 떠올랐 다. 그리고 웬지모를 죄의식도. 다음 순간, 라이짐은 황급히 에이스를 밀어 냈다. 이래서는 안될 것 같 았다. 에이스는 자신의 부하였고, 자신 때문에 이런 모습이 된 것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에이스에게 행동한다는 것은 죄악이었다. "역시... 그렇군요." 에이스는 이렇게 말하고는 잠시동안 라이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라 이짐은 그 눈을 보는 순간 자신이 행동을 멈추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 다. 원망에 가득 찬 눈초리는 만약 라이짐이 자신의 욕망을 행동으로 옮 겼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를 생각하게 만들고 있었다. "결정의 순간이 되었을 때, 후회는 소용없는 법입니다." 에이스는 이렇게 말하면서 라이짐 쪽으로 쓰러졌다. 라이짐은 벌거벗은 몸으로 에이스를 다시 한번 안아야 했다. 하지만 라이짐의 머리끝으로 모 였던 핏돌기들은 이미 정상적으로 돌고 있었다. 라이짐은 에이스의 마지 막 말이 그저 정상이 아닌 상태에서 나온 말이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순간 이미 라이짐은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난 것이었다. 후회해도 소용 없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스파일의 대마법사 사비치는 스파일의 동쪽 끝, 시네 항으로 떠나기 전 날 밤, 라이짐을 불렀다. 뭔가 긴히 할 이야기가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하 면서 라이짐은 옷매무새를 바로 했다. 달도 뜨지 않은 무척이나 어두운 밤하늘이 라이짐의 걸음걸음을 힘겹게 하고 있었다. 사비치는 타호루의 천막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라이짐이 천막 안으로 들어섰을 때, 타호루는 막 빈 잔을 치우던 중이었다. "비밀을 나누기에 적당한 밤이로군. 안 그런가?" "구름 저편의 달빛은 비밀을 감싸주고, 보이지 않는 별빛은 침묵의 맹 세를 돕는 법이지요, 사비치 님." 타호루는 이렇게 말하면서 라이짐에게 자리를 권했다. 라이짐은 조금은 긴장된 몸으로 조심스럽게 의자에 앉았다. "자네를 오라고 한 것은 자네에게 의뢰할 것이 있어서 일세." 사비치는 손을 모아 깍지를 끼고 라이짐에게 물었다. 라이짐은 그런 사 비치의 동작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비치가 츄바카 장군을 벌건 대낮에 죽이려는 음모를 꾸밀 때도, 그리고 라이짐에게 에질리를 불러내기만 하 면 츄바카 장군의 팔과 다리는 굳어버릴 것이라는 이야기를 했을 때에도, 저렇게 깍지를 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의뢰라면 전문가에게 맡기시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의례 의뢰라고 하면 살인을 뜻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서 라이짐이 지레 짐작해서 말했다. 그러자 사비치는 웃음을 지었다. "아니. 난 정보부장에게 의뢰하는 걸세. 정식으로 말이지." 사비치의 미소가 라이짐에게는 독사처럼 느껴졌다. "장군님께 말씀드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저는 장군님의 부하입니다." "알고 있네. 하지만 나는 자네에게 의뢰하고 있는 걸세." 사비치의 목소리는 달콤한 껍질을 입혀놓은 독약처럼 섬뜩한 독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타호루는 컵을 제자리에 놓고는 멀뚱히 서서 라이짐을 바라보고 있었다. 감정없는 눈이었다. "왜지요?" 라이짐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함정에 빠지고 만 다. "이건 장군님께 말씀드리기에는 좀 어울리지 않는 거라서 말일세. 그래 서 여기 타호루하고도 의논해 보았네만, 타호루도 역시 자네에게 직접 말 하는 편이 낫겠다고 하더군." "말씀하신 그대로야." 타호루의 말에 라이짐은 일단 무슨 의뢰인지 들어나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습니다. 말씀해 보시지요." "자네, 직접소통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아는가?" "제 부하들이 직접소통을 씁니다." "그러니까 안다는 말이지?" "쓸 줄은 모릅니다." "다행이로군." 사비치는 깍지 낀 손가락을 퉁기면서 이렇게 말했다. 사비치를 바라보 고 있는 타호루의 표정은 여전히 감정이 없었다. 감정 없는 눈빛은 두 가 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정말로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여야 한다는 의지를 의미하는 것이라는 걸. "예전에 내가 알던 제자의 직접소통을 받았네. 그 제자 말이 동타실의 끝자락에 악마의 입이라는 곳이 있다고 하더라고. 아, 알고 있었나? 하 긴. 아케르 군단에는 동타실 출신 부하들도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은 있었 네만. 하여간 그 직접소통 내용이 말일세 악마의 입에 성황청 녀석들의 신전이 있다는 거야. 아주 삼엄한 경비에 뭔가 중요한 것을 감추고 있는 것 같더라는 말이지. 냄새가 나지 않는가?" "별로요. 냄새가 나는 곳이라면 지금도 너무 많이 알고 있습니다." 라이짐은 이렇게 잘라서 말했다. "그런데 이 냄새는 좀 달라. 일 주일에 한 번 씩 마차가 그곳 신전으로 들어가는데 말이야, 그 안에는 어린아이들이 가득 타고 있다고 하더군. 그런데 그 꼬마들이 들어가서는 한 명도 돌아 나오지 않는다는 거야. 단 한 명도."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8738/19898 ━━━━━━━━━━━━━━━━━━━━━━━━━━━━━━━━━━━━━━━━ 제 목:[탐그루] 불의 꿈을 꾸는 자 232 관련자료:없음 20/20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4-07 21:43 조회:1474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그 신전이 어린아이를 돌보는 곳일 수도 있지요. 신전 안에는 보모들 이 가득하고요." 라이짐은 비꼬는 투로 이렇게 말했다. 타호루의 미간이 찌푸려졌지만 사비치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말을 이었다. "처음에는 탐그루 출신 고아들이더니 나중에는 점점 다른 곳의 꼬마들 로 바뀌어 갔다고 하더군. 탐그루가 어떤 곳인가? 삼년 전쟁이 낳은 고아 들이 가장 많은 곳 아닌가?" "성황청이... 고아들을 모으고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라이짐은 사비치의 말을 듣는 순간 탐그루에서 만났던 시하라가 떠올랐 다. 사라진 울찬. 그리고 콧물을 흘리면서 징징거리던 민트. 민트는 울찬 이 성황청의 사제들에게 잡혀갔다는 이야기를 라이짐에게 해 주었고, 시 하라 역시 그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 "그렇지.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싶다네." 라이짐은 사비치의 말을 듣자 자신도 그 이유가 궁금해졌다. 아니, 그 보다는 울찬의 행방이 더 궁금했다. "사비치 님 말씀이, 성황청 녀석들이 뭔가 꾸미고 있는 것 같기는 하지 만 말일세, 장군님께 말씀드릴 성질의 것은 아니라는 거야. 내 생각도 그 렇다네." "자네 지휘계통에 민감한 것 같더군. 하지만 이런 경우는 자네가 독자 적으로 조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사비치님 말씀은 요컨대 '전결' 이라는 거지." 라이짐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의뢰라면 마땅히 대가가 필요합니다." "뻔뻔스럽군. 마음에 들어." 사비치가 이빨을 드러내 웃으면서 말했다. 라이짐의 눈에는 그 웃음이 먹이를 눈 앞에 둔 맹수의 웃음처럼 느껴졌다. "뭘 원하나?" "돈입니다. 그것도 아주 많은 돈." 라이짐은 이렇게 말했다. "돈이라면 쓰레기만큼이나 많이 갖고 있지. 이걸 가지고 가게. 우리 집 에 있는 집사에게 이걸 보여주면 자네가 원하는 만큼 줄 걸세." 사비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그럼 이제 가봐야겠군. 내일이면 먼 길을 떠나야 해서 말이야." "건강하게 다녀오시길 빌겠습니다, 사비치 님." 타호루가 떠나는 사비치에게 인사를 했고 라이짐은 가볍게 고개만 숙였 다. "타호루 님. 무슨 속셈입니까?" 사비치가 사라지자 라이짐이 타호루에게 물었다. "자네도 아주 무디진 않군." "아무리 무딘 사람이라고 해도 액수도 정하지 않고 그렇게 거래를 하는 사람을 보면 수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지요." "결론은 옳았지만 그건 좀 잘못된 생각인 것 같군. 사비치는 돈에는 별 관심이 없는 사람일세. 몇몇 자이벌 가문이 사비치의 추종자거든. 자이벌 가문이 하나도 아니라 몇이 돕는다면 돈이라는 것은 별 의미가 없어지지 않겠나?" 타호루는 이렇게 말하면서 라이짐에게 차를 한 잔 권했다. "차에 대해서 좀 아는가?" "별로 잘 모릅니다." "차에는 두 가지 종류의 차가 있지. 푸른 차와 붉은 차. 어떤 쪽으로 하겠나?" "붉은 쪽으로 하지요." "자네다운 선택이로군." 찻물을 우려내면서 타호루가 말했다. "푸른 차는 단맛이 날수록 상품으로 치고 붉은 차는 떫은맛이 날수록 상품으로 치지. 떫은 맛은 사람을 강인하게 하고 머리를 맑게 한다네. 단 맛은 기운을 북돋고 기분을 좋게 만들지." "사비치의 제안이 떫은 제안이라는 뜻으로 하시는 말씀이십니까?" "아냐. 난 그저 차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걸세."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찻잔을 라이짐에게 건네며 타호루가 말했다. "타호루는 돈에는 별 관심이 없어. 오직 권력에만 관심이 있지." 라이짐은 찻잔을 들여다보았다. 붉은 차라고 했지만 붉은 색이라기 보 다는 갈색에 가까운 빛을 띠고 있었다. "한 잔 마시면 힘이 날걸세." 찻잔에 입술을 대면서 타호루가 말했다. 라이짐도 따라서 마시려고 했 지만 너무 뜨거워서 입술을 데일 뻔했다. "너무 쉽게 본질에 다가서려고 하면 입술을 다치기 쉽지. 라이짐. 사비 치의 꿍꿍이는 사실 나도 잘 모른다네. 하지만 두 가지 정도 사비치의 생 각을 추리해 볼 수 있는 단서는 있어. 먼저 하나는 그 신전이 성황청의 약점일 공산이 크다는 걸세. 사비치는 그 신전을 미끼로 자신의 자리를 공고히 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여겨지네. 그리고 두 번 째는 바로 자네일세." "저라니요?" "자네는 백발영웅 아닌가. 자네도 알지 않나. 지금 이곳에 어떤 소문이 돌고 있는지." 타호루는 미소를 짓고 라이짐에게 물었다. 라이짐은 하진을 통해 사람 들이 자신을 마칸의 강림으로부터 세상을 구원할 전설의 영웅이라고 믿고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제가 전설의 영웅이 아니라는 건 사비치도 알고 있을 텐데요." "자네가 진짜 영웅이건 아니건 그건 별 상관이 없다네. 상관이 있는 것 은 사람들이 자네를 전설의 영웅으로 믿고 있다는 거지." "... 그렇게 만든 것도 사비치였지요." "그렇지." 타호루는 여유롭게 차를 마시면서 말했다. "자네가 돈을 제안한 건 잘한 일이었다고 생각하네. 앞으로도 사비치가 뭔가 요구해 올지 몰라. 그 때마다 돈을 요구하게. 자네가 원하는 게 돈 인 것처럼. 사비치는 자이벌들을 상대하면서 돈으로 살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분할 수 있다고 믿고 있을 걸세." "돈에 팔린 척 하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렇게 믿게 만들라는 거지. 일단은 사비치도 이용가치가 있어. 그의 야심이 무엇이건 간에 말일세." 타호루는 다시 한 모금을 마시고는 천막 밖을 응시하였다. 그의 눈은 몽상에 빠진 것처럼 촛점을 잃고 있었다. "그러다 보면 본질에 다가가겠지. 함정이라는 걸 알고 있다면 함정 안 에 있어도 빠지지 않는 법일세." "... 그러다가 빠지게 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 자네가 반지의 정령에게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것 처럼 말일세. 아, 기분 나쁘게 듣지 말게. 반지의 정령은 자신의 존재에 위협이 되지 않는 한 주인을 지킬테니까." "반지의 정령이 저를 해칠 수도 있습니까?" 라이짐은 조심스럽게 이렇게 물었다. 손에 끼고 있는 반지가 마치 쇳덩 어리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절대로 그럴 일은 없을 걸세. 이런. 차가 식겠군. 어서 들게." 타호루는 이렇게 말하면서 라이짐의 반지를 바라보았다. 라이짐이 차를 마시는 동안 타호루는 자신만이 느낄 수 있을 만큼의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오직 자신만을 위한 것이었다. 길게만 느껴졌던 여름도 우기의 끝과 함께 그 종말을 고하고 있었다. 이제 다음 여름이 올 때까지 세상의 대지는 덥혀지지 않을 것이었고, 그 덥혀진 대지를 빗물이 식히는 일도 없을 것이었다. 라이짐은 모처럼 맑게 개인 햇살을 바라보면서 에이스의 보고를 들었 다. "수르카 님은 자폰으로 출발하신다고 합니다." "몸도 좋지 않다면서." "거의 끌고 가다시피 하는 모양입니다. 거의 뮤에 기대어 계신다고 하 는군요." 라이짐은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수르카의 이동에 대해서 듣고 있자니 마치 자신이 수르카의 운명을 쥐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스에게 그 근처에 마을이 없는가 좀 알아봐." "검은 엘프의 마을이 근처에 있다는 군요." "어떤 쪽인가?" 라이짐은 검은 엘프에 두 종류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람에게 적대적이고 싸움을 좋아하는 검은 엘프와 사람의 말에 순종적이며 사람의 말이라면 무조건 복종하는 검은 엘프. "저와 같은 쪽입니다." 라이짐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그 시간동안 자신이 수르카를 지 배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라이짐이 내린 결정은 단 순한 것이었다. "나이스에게 전해. 그 쪽 검은 엘프에게 수르카 일행에게 해 줄 수 있 는 모든 것을 해 주도록 하라고. 이건 명령이야." 라이짐은 '명령'이라는 말에 특히 힘을 주어 말했다. 라이짐이 알기로 검은 엘프 족은 사람의 명령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수행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분명 그곳 검은 엘프 족은 수르카 일행을 도울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수르카 일행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은 없을 까. 게다가 그곳에는 찬도 있었다. 찬에게는 어느 정도 빚을 갚았다고 생 각할 여지도 있었지만 그래도 뭔가 더 해주어야 할 것만 같았다. "수르카의 병은 낫기 어려운 병인가보지?" "치료법을 찾아 자폰으로 향하고 있는 중인 것 같다고 합니다." 자폰. 라이짐은 이 말을 듣는 순간 수르카에 대한 고민을 까맣게 잊고 말았다. 순무는 자폰에서 온 노인으로부터 연금학에 대한 기술을 전수 받 았다고 했다. "자폰... 자폰." 라이짐은 이렇게 중얼거렸다. 몇 번만 더 삽질을 하면 보물이라도 나올 것 같은 느낌이 라이짐의 머리 속에서 뱅뱅 맴돌았다. "어떻게 할까요?" "일단 계속 수르카 일행을 따라가라고 해." 라이짐은 이렇게 말하고는 책상머리를 손가락으로 두드리기 시작했다. 무엇인가, 무엇인가 있다. 안갯속이었다. 한줄기 벼락 같은 햇살이 금방 이라도 이 안개를 뚫고 내리 비칠 것 같은데. 그러나 아직은 그것이 무엇 인지 명확하게 잡히질 않았다. "정보부장님. 누가 찾아왔습니다." 밖에서 병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병사가 이곳으로 찾아오는 일은 거의 없는 일이었다. 물론 라이짐의 막사야 보안 지역으로 구분되어 있으므로 밤낮으로 교대해 가면서 경계근무를 서는 병사들이 있곤 했지만 이렇게 라이짐에게 직접 말을 거는 일은 거의 없었다. "누군가?" "마리라고 이름을 밝혔습니다." 라이짐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릎이 책상 끄트머리에 부딪쳐 인 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드, 들어오시라고 해." 라이짐은 무릎을 쓸면서 이렇게 말했다. 마리는 곧바로 들어왔다. "저, 아무래도 좋지 않은 때에 온 건 아닌지..."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라이짐에게 마리가 말했다. 라이짐은 손을 흔들 며 아니라고 말했다. "저, 표정이..." "아, 이거요? 운동을 좀 하다가 다쳤습니다. 아무래도 체력은 국력이니 까요." "예?" 마리가 되묻자 라이짐은 여전히 인상을 쓰면서 이렇게 고쳐 말했다. "실은 일어서다가 여기 부딪쳤습니다." 라이짐의 말에 마리는 환한 햇살처럼 밝게 웃었다. 라이짐도 어색하게 따라 웃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8739/19898 ━━━━━━━━━━━━━━━━━━━━━━━━━━━━━━━━━━━━━━━━ 제 목:[탐그루] 불의 꿈을 꾸는 자 233 관련자료:없음 27/27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4-07 21:44 조회:1792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바람이 불고 있었다. 어느덧 텁텁하기만 하던 바람은 조금씩 맑은 기운 을 품고 불어오기 시작했다. 라이짐은 숨을 들이쉬었다. 가슴 속 깊숙한 곳까지 정화되는 느낌이었다. "좋으세요?" 마리가 물었다. 마리는 웃고 있었다. 바람만큼이나 맑은 웃음이었다. "예. 솔직히 이곳에 온 이후에 성밖으로 나온 건 처음이에요." "저도 솔직하게 말씀드릴까요?" "예. 좋지요." "저도 오늘 처음이에요." 라이짐은 마리의 말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가 없어서 웃어야 할지 아니면 근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야 할지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가끔 망루에 올라서 이곳을 보곤 했어요. 여기에 서면 저 먼 그리지아 산까지 보일 것 같았거든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면서 마리가 말했다. 마리의 머릿결은 바람결에 부서질 듯 나부끼고 있었다. 라이짐은 문득 모자를 벗고 바람결에 머리칼 을 맡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생각뿐이었다. 라이짐으로서 는 그럴 만한 용기가 없었다. 라이짐은 앞을 바라보았다. 멀리 펼쳐진 들판에는 숲과 언덕이 보기 좋 게 어우러져 있었고 가끔 씩 그 사이로 뛰노는 짐승들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무엇보다 눈에 뜨이는 것은 멀리보이기는 했지만 기세좋게 우뚝 솟은 산이었다. 그리지아라고 했지. 마치 누군가가 평지를 힘껏 움켜 잡 아 끌어올린 듯, 산은 하늘을 향해 솟아있었다. 기세 등등하게 솟은 산을 바라보고 있자니 절로 기운이 나는 듯 했다. "그리지아. 무슨 뜻이지요?" "글쎄요. 저도 몰라요. 누군가의 이름을 딴 거라고 들은 기억이 있는 데." 마리는 다시 한 번 머리를 쓸어 올렸다. 라이짐은 한번만이라도 좋으니 마리의 머릿결을 만져볼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역시 맑은 바람 같은 마음일 뿐이었다. 한동안 둘 사이에 투명한 바람이 불어 지나갔다. "저,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어요." 마리는 어렵게 말을 꺼냈다. "그날... 왜 돈을 주셨나요?" 마리는 정말 어렵게 어렵게 말을 꺼내고 있었다. 혓바닥에서 바늘을 뽑 아낸다고 해도 이렇게 힘들어 보이진 않을 것 같았다. "동생이 하나 있어요. 예쁜 동생이지요." 라이짐은 먼 그리지아 산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제가... 동생 얘기를 해서..." "아뇨. 동생 생각이 났어요. 마리를 보니까." 라이짐은 이렇게 대답했다. 한동안 다시 아무도 말이 없었다. "저 그 돈... 얼마나 큰돈인지 알고 계세요?" "전... 돈 필요 없어요." 라이짐은 이렇게 마리의 말을 막았다. 마리는 한동안 다시 말이 없었 다. "욕심이 났어요, 돈을 보니까. 그리고 들고 나와버렸어요. 그 돈이면 저희 식구가 얼마나 편하게 살수 있게 될지 생각을 해 보니까 도저히 들 고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아니, 만약 그 방에 저 혼자만 있었다면, 책상 서랍을 뒤져서라도 돈을 가지고 나왔을지 몰라요. 그런 여자예요, 저." "그런가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라이짐이 말했다. 한무리의 새들이 허공을 가르 고 있었다. "저 새 이름이 뭔지 아세요?" 마리는 라이짐이 일부러 화제를 바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럴 때 계속해서 이야기를 한다는 건 본인에게도 상대방에게도 힘든 일이었다. 마리는 일단 오늘은 라이짐의 뜻을 따르기로 마음 먹었다. "상어새라고 해요." "상어새요?" 라이짐은 흥미있다는 표정이었다. 마리는 그 표정을 바라보면서, 기분 좋게 이야기를 이을 수 있었다. "저도 본적은 없지만 상어는 먼 바다에 사는 큰 물고기래요. 억센 턱과 날렵한 몸을 가지고 있는, 누구도 당할 수 없는 강한 물고기지만 죽을 때 까지 헤엄을 쳐야 살 수 있는 물고기라고 해요." 멈추어 설 수 없는 물고기. 라이짐에게 그 말이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어쩐지 맑은 하늘과 어울리지 않는 이름인 것 같았다. 너무 멀리 날고 있 어서 어떤 모양인지 알 수 없다는 점이 아쉬웠다. "저 새도 멈추지 않나요?" "설마. 그렇지야 않겠지요. 하지만 먼 하늘에서 저렇게 끝도 없이 날고 있으니 사람들이 그렇게 이름 붙인 모양이에요. 아마 뱃사람들이 붙인 이 름이겠지요." "그래도 전 저 새가 부럽네요." 라이짐은 까마득히 보이는 상어새 무리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러고 보니 상어새들은 날갯짓도 거의 하지 않으면서 끝도 없이 허공을 떠다니 고 있었다. "저 새라면 동생이 있는 곳으로 갈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제 동생, 먼 곳에 있거든요." "하지만 동생 분을 찾아도 그곳에 머물 수 없으실텐데요." 농담처럼 가벼운 말투로 마리가 말했다. "하지만 멈추어 선다면... 결코 동생이 있는 곳에 닿을 수 없겠지요." 라이짐은 이렇게 말하고는 한쪽 입술을 올려 억지로 미소를 지어보였 다. 어쩐지 저 새를 보고 있자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탐그루를 떠난 후 잃어버리기만 했던 모든 그리운 것들이 저렇게 빈 허공에 정처없이 끝도 없이 떠다니고만 있는 것 같았다. "그리지아. 저 산 이름이 그리지아라고 했지요?" "예." "혹시 무슨 사연으로 붙은 이름인지 알게 되시면 꼭 좀 알려 주세요." "...예."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한무리의 바람이 불어와 둘 사이를 헤집 고 지나갔고, 둘은 그 바람을 사이에 두고 오랫동안 말없이 심연처럼 맑 고 깊은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상어새? 난데없이 상어새는?" 하진이 의아한 눈빛으로 라이짐에게 물었다. "그냥. 어떻게 생긴 새인지 궁금해서." "글쎄. 나도 멀리 날아다니는 모습만 봐서 어떻게 생긴 새인지는 몰라. 정 알고 싶다면 방법이야 있지. 유훈이나 재훈에게 물어보는 건 어때?" 하진이 키득거리면서 충고했다. "차라리 성황청 녀석들한테 뭘 꾸미고 있냐고 물어보겠다." 유훈이나 재훈이라면 이제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를 아케르의 직속 십부원이 된 지 오래인 것이다. "참. 말 나왔으니까 이야긴데, 반란군하고 접촉은 어떻게 돼가고 있 어?" 라이짐은 이렇게 하진에게 지나가는 투로 물었다. 지금껏 하진에게 부 탁한 일은 일일히 보고를 요구해 본 적이 없는 라이짐이었다. 일단 지시 를 내리면 하진은 부지런히 일을 추진해 나갔고, 그러다가 어느 날 정보 가 적혀 있는 종이를 들고 오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좀 달랐다. 지금 하진이 하고 있는 일은 여느 때와 다를 것 없는 정보수집이 아니라 아케르 장군이 직접 명령한 임무인 것이다. "추진 중이야." 하진은 좀 당황했는지 하진답지 않게 짤막하게 대꾸하고 말았다. 라이 짐은 그런 하진의 모습을 보면서 공연히 믿음을 저버린 질문이 아니었나 후회했다. "반란군들, 성황청에 꽤 많이 심어져 있는 모양이야. 성황청 구역에서 조금씩 세력을 넓혀가고 있나봐." 라이짐은 탐그루에서 만났던 바코쿠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바코쿠는 아직 반란군은 세력을 넓혀가고 있는 중이라는 요지의 말을 했었다. "아케르 장군님의 의도를 대충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아." 라이짐은 이렇게 중얼거렸다. 라이짐이 생각하기에 아케르는 자신에게 이제는 성황청의 영역이 되어버린 자나크 지역의 정보를 수집하라는 숙제 를 준 것 같았다. "그래,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해. 장군님께서는 자나크 지역에 대한 정보를 얻기를 원하시는 거야. 그렇지 않아?" 갑작스럽게 하진이 호들갑을 떨면서 말했다. 라이짐은 그런 하진을 물 끄러미 한 번 바라보았다. "알았으니까 나중에 잊지 말고 보고나 해줘." "그래. 그러지. 이 하진, 지금까지 단 한 번이라도 실망시킨 적 있어? 없잖아. 믿어보라고 이 하진. 내가 완벽하게 일 처리한다는 게 뭔지 보여 줄 테니까. 지금 접촉중인 녀석들 몇만 대충 구워삶으면 준비작업은 완전 히 끝나." 하진이 목줄기에 핏줄이 솟을 만큼 흥분해서 떠들었다. 라이짐은 그런 하진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말하는지 짐작해 보았다. "돈이 필요해?" "응?" 하진은 라이짐의 말에 당황하는 눈치였다. 라이짐은 하진의 어깨에 손 을 얹었다. "그런 거 어려워 마. 어찌되었건 이 일에서 상관은 나잖아." "아, 돈 말이야? 있으면 좋지." "얼마나 필요해?" "...금화 몇 닢." 라이짐은 서랍에서 금화가 들어있는 주머니를 하나 내밀었다. 일전에 사비치로부터 의뢰를 받으면서 얻은 금화였다.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해. 어디서 쓸 건지, 어떻게 썼는지 같은 거 보 고 할 필요 없어." "그래. 순무도 이곳 예산은 건드리지 못하니까." 금화가 들어있는 주머니를 손저울질 해보면서 하진이 말했다. 라이짐은 하진에게 뭐든지 해 주고 싶었다. 적어도 돈 문제 때문에 골머리를 썩히 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수르카는 어떻게 됐어?" 하진이 금화를 품에 넣으면서 물었다. 라이짐은 하진의 물음이 돈을 받 고 나니 보상을 해 주어야겠다는 심리에서 나온 것 같아서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요컨데 진심에서 나온 말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말이었다. "글쎄. 나이스가 따라가는 중이야." "그렇구나. 아프다고 했던 것 같은데..." "아직 아프다더군." 라이짐은 인상을 찌푸렸다. 하진은 라이짐이 인상을 쓰자 라이짐의 눈 을 피했다. "에이스. 보고 할 내용 없어?" 라이짐이 그림자에 숨어 있던 에이스에게 물었다. 하진은 이제 모습이 보이지 않는 에이스에게 익숙해졌는지 이상하게 생각하지도, 그렇다고 비 아냥거리지도 않았다. "... 나이스는 지금 자폰에 도착해 있습니다. 수르카 님과 그 일행도 함께 도착한 모양입니다." 라이짐은 깍지를 끼고 생각에 잠겼다. 앞으로 수르카의 운명은 수르카 가 결정할 것이었다. 이제는 어떠한 경우에도 라이짐이나 나이스가 수르 카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건 없을 것이다. 라이짐은 결정을 내려야 했다. 얼마전부터 생각해 왔던 것을 실천에 옮기려면 말이다. "에이스. 나이스에게 이렇게 전해. 수르카 일행을 뒤따르는 건 그만두 라고. 그리고 자폰을 조사하라고 해." 라이짐은 이렇게 말했다. 나이스는 이제 수르카에게 안부를 전할 것이 었다. 그리고 그것은 현재의 라이짐으로서는 수르카를 위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하진. 죽지 않아야 할 사람은 죽지 않는다는 말, 믿어?" "별 엉뚱한 소리 다 듣겠네. 날 봐? 죽지 않아야 할 사람이 죽지 않는 게 아니라 죽지 않은 사람이 죽지 않는 거야. 내가 무슨 이유가 있어서 살아났겠어?" "그야 아무도 모르지. 어쩌면 이유가 있었는지도." 라이짐은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라이짐은 자신이 깍지를 끼고서 생각에 잠겨있다는 걸 알아채고는 황급히 깍지를 풀었다. 사비치의 그림 자가, 또 페르도 부인의 그림자가 자신에게 드리우는 것 같은 기분이었 다. 라이짐은 출정 전날 밤, 황급히 마리를 찾았다. 마리가 일했던 술집에 가서 들을 수 있었던 이야기는 마리가 이제 더 이상 나오지 않는 다는 거 였다. "마리는 빚을 갚고 떠났습니다. 저는 나리께서 주신 돈으로 빚을 갚았 으니 당연히 나리님의 첩으로 들어가지 않았을까 생각했습니다만." 콧수염의 주인이 컵을 닦으며 라이짐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혹시 어디로 떠났는지?" "글쎄요. 가만있자. 여기 일하기 시작할 때 적어놓은 게 있나 모르겠습 니다만..." 주인은 이렇게 말하면서 선반 밑을 뒤적거렸다. 라이짐은 마음이 급해 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아. 여기 있군요. 운이 좋으십니다. 비교적 깨끗하게 적혀있네요. 깨 끗하게 적혀 있는 건 대개가 진짜 주소더라구요." 라이짐은 거의 빼앗듯이 주인이 들고 있는 종이를 들고 술집을 나와 다 시 한 번 마리를 찾기 시작했다. 꼭 마리에게 인사를 하고 떠나야 할 것 만 같았다. 그러지 않고서는 자폰에서의 임무를 도저히 수행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왜 그런지는 라이짐 자신도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라 이짐은 그 감정에 스스로 솔직해 지기로 했다. 종이에 적혀 있는 마리의 주소는 성 외곽의 빈민들이 모여 살고 있는 주택가였다. 종이에 적혀 있는 약도를 따라 미로처럼 엉켜 있는 골목골목을 지나 마 리의 집이 있었다. 마리는 희미하게 흔들리고 있는 연금술사의 등 아래에 서 빨래를 널고 있었다. 마리와 눈이 맞자 라이짐은 환하게 웃었다. 마리 는 깜짝 놀라 빨래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저 내일 떠납니다. 떠나기 전에 꼭 한 번 뵙고 싶었습니다.' 라이짐은 이렇게 말하려고 마음을 먹으면서 마리에게 다가갔다. 마리는 뒷걸음질을 치다가 하마 터라면 쓰러질 뻔했다. "어떻게 아시고 여길...?" 마리는 간신히 이렇게 말을 꺼냈다. 라이짐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쑥스 러운지 얼굴을 붉혔다. 그때였다. 마리의 등 뒤편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마리는 황급히 뒤돌아서 아기울음소리가 난 쪽으로 뛰어갔다. 라이짐은 그제야 자신이 잘못 찾아왔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 다. "실망... 하셨나요?" 잠시후 아기를 잠재워 놓고 나온 마리가 먼저 꺼낸 말이었다. "아닙니다. 말씀드렸잖아요. 전 그저 마리가 보고 싶어서 온 거라고." 마리는 연신 귀 뒤로 머리를 넘기면서 땅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알리고 싶지 않은 것을 알려 버린 기분이 드는 모양이었다. 라이짐은 이런 경우 는 처음이어서 도저히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멀리 가시는 건가요?" "예. 꽤 먼 곳입니다." 라이짐은 이렇게 대충 둘러대었다. 아무리 마리하고 해도 보안사항을 함부로 이야기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기 아빠도... 먼 곳에 있어요." 마리는 이렇게 말했다. 서로 이야기하기 어색한 부분이었다. "언제 돌아올지 몰라요. 솔직히. 그래서 겁나요. 사실, 돌아오지 않을 지도 모르고요. 죽었을지도..." "그런 말은 하지 마세요." 라이짐은 이렇게 마리의 말을 잘랐다. 마리는 라이짐의 얼굴을 바라보 았다. 뭔가 해서는 안될 말을 했다는 듯이 굳어 있는 얼굴이었다. "돌아올 겁니다. 틀림없이." 라이짐은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이 말은 실은 마리에게 자신은 꼭 돌 아오겠다는 의미로 해 주고 싶었던 말이었다. "아기 이름은 뭔가요?" "... 그리지아에요." 마리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렇게 아기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그렇군요. 그리지아." 라이짐이 웃으면서 말했다. "라이짐 님." 마리가 웃고 있는 라이짐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다시 오실 건가요?" 라이짐은 대답 대신 하늘을 바라보았다. 소망의 별이 어두운 밤하늘에 서 마지막 남은 빛인양 반짝이고 있었다. 이대로 그냥 정처없이 떠나 두 번 다시 삶으로 돌아오고 싶지 않다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지아와 함께 그냥 여기 있어요. 이대로 아름답게." 마리는 그 말이 무슨 뜻이지 묻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별빛이 둘 을 비추고 있었다. 자폰으로 떠나기 바로 전날 밤이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8849/19898 ━━━━━━━━━━━━━━━━━━━━━━━━━━━━━━━━━━━━━━━━ 제 목:[탐그루] 불의 꿈을 꾸는 자 234 관련자료:없음 15/15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4-09 23:06 조회:1596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불길이었다. 불길은 바람을 타고 사방으로 번지고 있었다. 어떤 불길은 집안으로 숨 어드는가 싶다가는 다시 뒷문으로 빠져 나오고 있었고, 어떤 불길은 허공 으로 치솟는가 싶다가는 어디로 갔는지 사라져 버리곤 하고 있었다. 라이 짐은 필사적으로 불길을 잡기 위해 이번 작전을 위해 배속 받은 병력들에 게 지시를 내려보았지만 역부족이었다. 라이짐은 불길이 그 어떠한 짐승 보다도 강하고 그 어떠한 마물보다 영리한 적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불길 을 잡는 일은 포기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여기 온 목적을 잊었나, 라이짐 정보부장?" 발렌시아가 라이짐에게 이렇게 물었다. 발렌시아는 뮤를 타고 있었으므 로 라이짐은 발렌시아를 올려다보지 않을 수 없었다. "발렌시아 백부장 님. 이건 애초의 계획과는 다릅니다. 우리는 장인을 확보해야 했고, 그러자면 자폰 국과 평화적으로 이야기를 했어야 합니다. 일단 시작은 말이지요." "자네 말은 원칙적으로는 맞는 말일세. 하지만 말도 통하지 않는 이 친 구들하고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니 이제는 빨리 연금학 기술을 알아낼 수 밖에 없네. 순무행정담당관이 이곳으로 따라 온 이유가 그것 아니었던가?" 라이짐은 더 이상 이야기 해 봐야 시간낭비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발단은 발렌시아 백부장이 함부로 죄의식의 영역을 펼치고 부하들에게 공격을 지시한 것이었다. 비록 무장한 자폰 국의 무사를 만났다고는 해도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는데도 말이다. 발렌시아의 부하들은 정신없이 살육을 시작했고, 자폰 국의 정예 무사들은 삽시간에 핏덩어리로 변해 버 렸다. 라이짐은 이제 어쩔 수가 없었다. 불길이 모든 것을 집어삼키기 전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만한 것들을 챙기는 것 말고는 다른 수가 없었다. "이런! 불타고 있어! 내가 늘 꿈꿔왔던 사람의 기억을 읽어낼 수 있는 연금술사의 등이! 저걸 보게, 라이짐! 저게 뭔지 아는가? 전설인줄만 알 고 있었던 농작물의 성장을 촉진시키는 연금술사의 돌이야!" 순무는 안타까운지 발을 동동 구르면서 라이짐에게 말을 쏟아 붓고 있 었다. 라이짐도 안타깝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라이짐으로서는 순무의 순수한 연금학에 대한 탐구욕을 접게 만들 수밖에 없었다. "순무 님. 일단 검은 돌에 대한 것들부터 챙기시지요. 시간이 없습니 다." "자네라면 그럴 수 있겠는가? 지금 여기에서 인류의 보고가 불타고 있 어! 어떻게든 막아야 하네. 라이짐. 도와주게. 제발!" 라이짐은 칼을 뽑아들었다. 물론 순무를 벨 생각은 조금도 없었지만 번 득이는 칼빛이 순무의 생각을 바꾸어 놓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시간이 없습니다." "... 알겠네." 순무는 이렇게 말하고는 라이짐이 통솔하는 병력의 도움을 받아 불길을 뚫고 검은 돌에 대한 자료가 될만한 것들을 모조리 챙기기 시작했다. 불길은 이제 자폰 국의 전체로 번져가고 있었다. 라이짐은 어쩌면 일부 러 이렇게 자폰 국 전체로 불길이 번져가도록 누군가 조작을 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라이짐은 칼을 뽑아들고 불길을 헤치고 이곳 저곳을 살펴보았다. 막 불길이 붙기 시작한 골목으로 접어들었을 때, 라이짐은 자신의 생각 이 그리 틀리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화려하게 차려입은 한 사내가 불 을 붙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라이짐은 칼을 들고 사내의 등 뒤로 다가 갔다. 사내가 라이짐의 낌새를 눈치채고 뒤돌아섰을 때는 이미 늦어있었 다. 라이짐의 칼은 사내의 목줄기를 겨냥하고 있었다. "... 이곳이 마지막이었네. 이제 자폰 국은 불타 사라질 것이야." 라이짐은 유창한 비스토브레 왕국 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자네는 나를 모를 걸세. 이곳 사람들도 나를 잘 모르지. 아니, 전부 다 안다고 해도 좋겠군. 그러니까 아무도 모르는 거지." 사내는 이렇게 알듯말듯한 말을 중얼거렸다. "이제 자폰 국은 마지막이야. 우리는 늘 이방인에게 우호적이었다네. 그건 먼 미래를 위한 거였네. 선대왕께서는 내게 새로운 세계로 나갈 걸 부탁하셨지.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어. 여기에 안주하려고 한 거 지. 그리고 멈추어 선 순간, 자폰국은 이렇게 허망하게도 무너져 버렸 네." "이곳 국왕이신가?" 라이짐이 물었다. 사내는 미소를 지었다. "아니. 자폰 국은 이제 없어. 국왕도 없지. 우리는 이제 범버쿠 정글의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갈 걸세. 새로운 왕과 새로운 체계가 들어서겠지. 이 게 우리의 운명이었는지도 몰라. 모스부르거. 자네 말을 들었어야 했는지 도 모르겠어..." 사내가 말했지만 라이짐으로서는 사내의 말을 전혀 이해 할 수 없었다. "마지막 부탁이 있네. 내가 이곳을 불태운 이유는 단 하나야. 밤브를 지키기 위해서지." "밤브가 뭔가?" "자네들이 찾아 왔을 그것 말일세. 자네들은 그걸 뭐라고 부르는지는 모르지만." 라이짐은 사내가 검은 돌을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밤브가 세상으로 퍼져나간다면 이제 바르도 대륙은 불바다가 되고 말 걸세. 우리는 밤브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다네. 그것이 얼마나 쉽게 사람 을 해치는 가를. 내 마지막 소원일세. 밤브를 가지고 가지 말게. 나는 세 상이 불바다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아." 라이짐은 사내의 말에 잠시 머뭇거리다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 택을 했다. 라이짐의 칼은 반원을 그리면서 사내의 목을 베었고, 사내는 힘없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불티가 바람을 타고 날아와 라이짐의 주변을 맴돌았다. "바르도 대륙에는 불이 붙은 지 오래야." 라이짐은 이렇게 말하고 천천히 불길 사이를 걸었다. "라이짐! 순무를 말려 주게! 순무가 미쳤어! 불길 안으로 뛰어 들겠다 는 거야!" 멀리서 발렌시아가 라이짐에게 소리쳤다. 라이짐은 그런 말에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았다. 라이짐은 또 한 번 사람을 죽인 것이었다. 라이짐은 잘 알고 있었다. 이곳에서 검은 돌의 기술을 확보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가를. 이제 검은 돌을 보유하게 되면 아케르 군단의 힘은 대 륙 최강이 될 것이고, 아케르 군단이 대륙 최강의 힘을 가지게 된다는 것 은 귀족이 없는 세상을 앞당기는 일이 될 것이었다. 라이짐은 이마에 흐 르는 땀방울을 팔뚝으로 닦아내었다. 하지만 팔뚝에 묻은 것은 땀방울이 아니라 진득한 핏물이었다. 라이짐은 자폰 시에서 혼자 걸어나와 불타는 자폰 국을 바라보았다. 하 나의 국가라고 해도 힘을 비축해 놓지 않으면 이렇게 일개 백부의 힘만으 로도 사라져 버리는 구나. 지금 찬란했던 한 왕조가 무너지고 있었다. 라이짐은 자폰국에서 나온 사람들이 일렬로 어디론가 움직이고 있는 것 을 보았다. 죽은 사내의 말 그대로 다른 곳에서 새로운 자폰 국을 건설할 사람인 모양이었다. 라이짐은 그 행렬이 있는 쪽으로 따라갔다. 다행히도 아직 발렌시아의 병력은 이곳까지는 미치지 않고 있는 모양이었다. 꼬마 하나가 라이짐에게 달려와 라이짐을 노려보았다. 분노와 원망으로 가득 차 있는 듯 했지만 감히 라이짐에게는 덤빌 엄두가 나지 않는 모양 이었다. "정보부장님!" 라이짐은 뒤를 돌아보았다. 몇몇 병사들이 칼을 들고 라이짐이 있는 쪽 으로 달려왔다. "발렌시아 백부장님께서 이 사람들을 끝까지 추적해서 없애라고 말씀하 셨습니다." 라이짐은 병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을음이 잔뜩 낀 얼굴에는 피곤 한 기색이 역력했다. "잠시 대기해. 이건 명령이야." 라이짐은 이렇게 병사들을 막아서고는 칼을 뽑아 아이에게 겨누었다. "꼬마야. 이름이 뭐냐." 그때였다. 여윈 몸을 가진 여자가 달려와 라이짐의 칼날을 막아섰다. "우리는 아무 힘도 없습니다. 자폰의 무사들은 모두 죽었고, 이제 자폰 국은 당신들이 마음대로 할 수 있어요. 우리를 내버려두세요." 라이짐은 여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다른 자폰인과는 달리 좀 덜 검은 피부를 가지고 있는, 눈이 작은 여자였다. "우리 말을 할 줄 아는군." 라이짐은 꼬마에게 겨누었던 칼을 거두지 않고 말했다. 여자의 얼굴은 긴장으로 굳어있었다. "당신 이름은 뭐요?" "아가테." 라이짐의 물음에 여자가 답했다. "아가테. 이 꼬마에게 전해줘요. 강해지라고. 그리고 원수를 갚으라고. 그때까지 기다리고 있겠다고 전해줘요. 절대로 먼저 죽지 않겠다고." 라이짐은 이렇게 말하고는 칼을 거두었다. "라이짐 정보부장님, 하지만..." "퇴각이다! 우리의 임무는 이곳에서 검은 돌을 입수하는 것이지 학살이 아니야. 발렌시아도 그건 알아야 해." 라이짐은 단호하게 말했다. 아가테는 꼬마를 안고 일렬로 피난하고 있 는 행렬쪽으로 달려갔다. 라이짐은 불타고 있는 자폰의 하늘로 시커먼 연 기가 오르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저 연기가 앞으론 바르도 대륙을 뒤덥겠 지. 하나의 세계가 끝나고 새로운 세상이 열리려 하고 있다. 그리고 그 문 을 열고 있는 것은 라이짐이었다. 라이짐은 이제 결코 멈추어 설 수 없을 것이었. 멈추어 선다면 그것이 곧 죽음이라는 것을 라이짐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운명이라 이름 붙은 모든 것들은 원하지 않는 순간에 찾아 오는 것이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8850/19898 ━━━━━━━━━━━━━━━━━━━━━━━━━━━━━━━━━━━━━━━━ 제 목:[탐그루] 강철의 오로라 235 관련자료:없음 21/21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4-09 23:07 조회:1594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 강철의 오로라 항해는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어느덧 바닷바람은 살을 애일 듯 매 서워지고 있었고, 애써 준비한 비단옷도 한낱 장식품으로 전락하기는 했 지만 그래도 항해 자체는 견딜만 했다. "벡벡 벡벡베그 벡벡." 마로우는 이제 점잖은 표정을 하고 이렇게 말하는 데 많이 익숙해진 모 양이었다. 나는 처음에 마로우가 저 말을 연습할 때 얼마나 웃음을 참아 야 했는지 모른다 (만약 웃었다가는 절대로 자폰 국의 대신 역할은 하지 않겠다고 생 때를 쓸 것이 뻔했다). "지금 왕자님께서는 자폰 국과 스파일 주 사이의 앞날이 이렇게 넓은 바다처럼 탁 트여 있는 것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브라디 교수가 그럴 듯하게 문삼에게 설명했다. 나는 어이가 없었지 만 웃음을 참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한 말은 세 마디인데 어떻게 해석 은 수 십 마디가 된담). "역시 학문이 높으신 분은 다릅니다. 저희 헌다이 가문도 이름 있는 가 문이기는 하지만 그 정도의 식견을 갖추신 분은 거의 없지요. 이봐. 이 사실을 낱낱이 기록하도록." 문삼은 턱을 젖히고는 하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러자 하인 중 하나는 열심히 문삼의 말을 적었고 또 다른 하나는 열심히 문삼과 마로우의 모습 을 그렸다. 나는 저 그림과 글이 어떤 용도로 쓰이게 될 지 잘 알고 있었 다. 여전하군. 오브라디 교수는 문삼을 잘도 상대하고 있었다. 오브라디 교수의 또 하나 숨겨진 놀라운 능력이었다. 자폰을 출발한 우리 일행은 출항 전 날, 가까스로 시네 항에 닿을 수 있었다. 가을도 다 끝나갈 무렵의 일이었다. 하지만 배를 탄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처럼 보였다. 일단 안전 때문에 헌다이 가문에서도 장 남을 파견하지 않고 셋째 아들을 파견한 상태였고, 일의 중대함 때문에 선원의 수 또한 극히 제한되고 있었다. 돌파구를 마련한 것은 의외로 크라이였다. 크라이는 배낭 안에 구겨져 있던 비단옷을 보더니 이렇게 의견을 제시했다. "자폰 국의 사절이라면 실어 줄지도 모르겠습니다." "자폰 국의 사절? 그게 무슨 말인가?" "지금 이 사람들은 새로운 곳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곳에 대해서 알 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요." "밀사가 있었다는 소문이던데. 그 사람이 길 안내를 하지 않겠나?" "제가 듣기로는 직접소통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고 들었습니다. 직접 나오지는 않는 모양입니다. 아마 이 배에 탄다는 대마법사와 직접소통을 통해 길 안내를 하겠지요." "그런데 자폰 국의 사절은 무슨 말이야?" 마로우가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크라이에게 물었다. 대답을 한 것은 그 레텔이었다. "자폰 국이 원래 바바 족과 교역을 하고 있었다면요? 그런데 우연히 자 폰 국의 일족이 시네 항에 머물게 된 거라면요?" 스칼렛은 크라이의 말을 가장 먼저 이해했다. 그리고 오브라디 교수가 바로 무릎을 치면서 바로 그거라고 말했고, 마로우도 그제야 고개를 끄덕 였다. 그러자 사빈도 아하, 하고 탄성을 내지르면서 오브라디 교수를 따 라 무릎을 쳤고, 나는 멍청히 그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마지막까지 계획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은 나 혼자 뿐이었다 (그레텔 마저도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말이다). 모든 계획의 시발점이 된 비단옷을 가 지고 있던 게 바로 나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계획은 너무나 단순했다. 얼굴을 시커멓게 칠하고 비단옷을 입은, 벡벡 거리는 이상한 말을 쓰는 사람들이 시네 항에 나타난다. 아무도 그들과 이야기를 못하고 있을 때, 마치 해결사처럼 오브라디 교수가 나타난다. 그리고 놀라운 자폰 어 실력으로 '통역'을 하게 되고, 그 결과 그들이 바 바 족의 영역으로 가던 중에 난파한 자폰 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사실은 곧 문삼에게 전해지고, 잘난 척 하기 좋아하는 문삼은 자폰 인과 의 교역까지 함께 할 수 있다고 생각해 자폰인을 찾는다. 뭐 대충 이런 계획이었던 것이다. 다만 한가지 문제는 임프 시를 떠날 때 오브라디 교 수가 문삼을 비롯한 자이벌 가문과 '과히 좋지 않은 관계'를 맺었다는 것 이었다. "강연 때 생겼던 일은 어떻게 하지요?" 마로우도 역시 신경이 쓰이기는 하는 모양이었다. 말하고 있는 마로우 의 표정은 흙투성이가 된 꼴로 부모에게 진흙으로 만든 인형을 보이는 꼬 마 애의 표정 같았다. "그건 나한테 맡겨두게." 오브라디 교수는 대단한 각오라도 했는지 진지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 다. 이 계획을 가장 마음에 들어한 것은 아무래도 사빈이었던 것 같다. 사빈은 크라이가 계획을 말한 그 순간부터 자신이 자폰 족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느니, 자폰 족과의 대화를 통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느니 하 는 소리를 늘어놓았다. 내가 알고 있기로 사빈이 한 일은 황금이 있는 곳 이나, 빠져나갈 방법을 손짓발짓으로 물어 본 것뿐이었지만. 오브라디 교수가 문삼을 만나러간 사이, 나머지 일행은 각각 비단 옷을 입고 자폰 인 행세를 했다. 마로우는 자폰 국의 왕자 역을 맡았고, 크라 이와 나는 호위무사 역을, 스칼렛과 그레텔은 시종과 그 딸의 역할을 각 각 맡았다. 그리고 사빈은 자폰 국의 국무대신 역할을 맡았는데, 국무대 신이 뭘 하는 사람이 앉는 자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빈은 그 자리에 자 신이 앉지 않으면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 것이라는 협박아닌 협박을 통해서 대신 역을 맡을 수 있었다. 오브라디 교수가 허락했을 때 사빈이 지었던 그 천진한 표정이라니. 어쩌면 사빈은 생각보다 훨씬 순수한 사람 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질 무렵이 되자 오브라디 교수는 반가운 소식을 가지고 돌아왔다. 문 삼이 예상했던 그대로 모든 것을 허락했다는 것이었다. "이로서 아모리카 탐사대의 용을 찾는 여정이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되 었습니다." 감격했다는 듯이 마로우가 말했다. 사빈도 덩달아 흥분하고 있었고, 크 라이도 별 내색을 하지 않는다 뿐이지 기뻐하는 눈치였다. 나 역시 흥분 을 감추기가 쉽지 않았다. 꼭 어렸을 적 짓궂은 장난을 치기 전에 찾아오 곤 했던 흥분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오브라디 교수님. 그런데 어떻게 문삼의 허락을 얻어내셨나요?" 스칼렛이 오브라디 교수에게 물었다. 문삼을 잘 아는 스칼렛인지라 아 마 어떻게 문삼을 설득했는지가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내 말솜씨 덕분이었지. 내가 그러지 않았나. 나에게 맡겨달라고." 오브라디 교수는 이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표정이 그다지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어쩌면 가장 흥분하고 있어야 할 사람이 오브라디 교수인데 말이 다. "그런데 문삼은 스칼렛의 얼굴을 알고 있는데..." 나는 조금 걱정스러워서 이렇게 말을 꺼내 보았다. 그러자 마로우가 바 로 받았다. "그런 거 걱정하지 마. 그건 방법의 문제잖아? 그냥 자폰 국의 여자는 외간 남자의 얼굴을 보면 안 된다고 둘러대고 얼굴을 가리고 다닐 수도 있지. 참, 그러고 보니까 수르카 얼굴도 알고 있을 것 아니야? 그럼 뭐 무사는 싸울 상대 외에는 얼굴을 보이지 않는다고 하면 되겠지. 그것보다 자이벌들은 원래 하인에게는 신경을 쓰지 않잖아?" 마로우의 말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오브라디 교수의 표정에는 그 래도 여전히 침울한 구석이 남아 있었다. 다음 날, 해가 밝자마자 우리는 배 위에 올랐다. 스타바를 비롯한 뮤들 은 바바 족에게 가기로 한 뮤들과 함께 화물칸에 실렸다. 잘 지내야 할텐 데. 하지만 내가 더 이상 스타바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일단 화물칸에 들어간 이상 다시 만나는 일은 하선할 때나 가능했다. 나는 그 저 스타바와 뮤들이 무사하기를 마음으로 바랄 수 밖에 없었다. 배는 뮤를 수송하기 위한 거대한 몸체를 가지고 있었다. 높게 솟은 세 개의 돛대와 그 옆에 붙어있는 보조 돛대가 바람을 안고서 풍만해진 몸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 배에서 우리가 가장 먼저 만난 사람은 문삼과 선장, 그리고 처음 보는 마법사였다. 마법사는 나이가 많아 보였다. 나는 그의 눈빛이 번득이며 우리를 훑어보았을 때 모든 계획이 다 글러버리는 게 아 닌가 싶기도 했다. 다행히도 마법사는 우리를 훑어보기만 했을 뿐 더이상 별 말은 하지 않았다. "일의 중대성을 감안하여 오브라디 교수님께 통역의 중책을 맡긴 것이 니 잘 수행해 주기를 바랍니다." 문삼은 이렇게 말을 꺼냈다. 선장은 턱수염을 잔뜩 기른 사내였는데, 이런 자리가 짜증이 난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것이 그저 선장의 버릇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조금 시간이 흐른 후의 일이었다). 그리고 마법사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뜻하는 바를 모두 이룰 수 있게 되시길 빌겠습니다." 우리는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벡벡 거리는 소리로 '무슨 말을 하는 거 야?'하는 느낌을 전달하려고 노력했지만 마법사는 우리의 일에는 별 관심 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저 이 말만 전하고는 자리를 떠났다. 나는 그때 오브라디 교수의 표정을 보았다. 오브라디 교수는 마치 싸움에서 패배한 검사처럼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교수님, 통역 해 주시지요. 위대한 대마법사 사비치 님의 좋은 말씀 을." 문삼이 정중하게 오브라디 교수에게 말했지만 오브라디 교수는 아무 말 도 없이 나가버렸다. 우리는 당황한 사람처럼 벡벡거리면서 오브라디 교 수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실제로 당황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선실로 돌아오는 길 내내 오브라디 교수는 말이 없었다. 오브라디 교수 가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 우리도 역시 심각한 표정으로 오브라디 교수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기억하고 있는가? 사비사, 마법학교 교장 말일세." 오브라디 교수가 우리에게 물었다. 나는 얼굴에 주름이 가득하고 깡마 른 사비사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아까 그 마법사가 바로 그 스파일의 대마법사 사비치, 그러 니까..." "그래. 사비오의 형, 사비치 다리의 주인공. 바로 그 사비치라네." 오브라디 교수는 내 말을 끊고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인상을 쓰고 계십니까, 오브라디 교수님. 제가 알기 로 오브라디 교수님은 그런 표정, 잘 짓지 않으시잖아요?" 사빈이 희죽거리면서 이렇게 오브라디 교수에게 물었다. 나를 비롯한 나머지 일행은 사빈의 그 행동이 얼마나 분위기 파악을 못하고 하는 행동 인지 뻔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사빈을 노려보았다. "그래. 이 배에 오르기 위해 자폰 운운 한 거, 문삼은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사비치는 속일 수 없었다네." 오브라디 교수의 말에 선실의 분위기는 갑자기 침울해졌다. 지금껏 벡 벡거리는 소리로 이야기 한 것을 사비치는 뻔히 다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수치스럽기도 하고, 자신이 한심하게 여겨지기도 한 탓이었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 그렇다면 사비치는 왜 이일을 묵인했습니까?" 한참 동안의 침묵을 깨고 크라이가 물었다. "과거의 빚 때문이지. 신경 쓰지는 말아주게. 내가 얘기하지 않았던가? 나에게 맡겨달라고." 오브라디 교수는 이렇게 말하고는 벌떡 일어나더니 침대 안으로 몸을 숨겨버렸다. 침대가 삐걱거리면서 신음소리를 냈다. 마치 오브라디 교수 의 심정을 대변하는 듯 했다. 우리들은 멍하니 오브라디 교수가 누워있는 것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당장은 침울해졌을 지 몰라도, 곧 우리는 평상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적어도 이 배에서 우리의 존재를 인정하는 사람이 하나는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마음에 부담을 덜어주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 사람이 우리의 정체를 아는 사람이라고는 하지만). 해가 질 무렵이 되자 우리는 모두 밖으로 나가 갑판 한 구석에 모여 일 몰을 구경했다. 바다를 달리며 바라보는 일몰은 그 감상이 어떤 다른 일 몰과도 달랐다. 푸르던 바닷물은 어느새 붉게 물들어 황금빛으로 일렁였 고, 그 위를 날고 있는 새들은 마치 세상에 어떠한 것도 두려울 것이 없 다는 듯이 유유히 날갯짓을 하고 있었다. 무척이나 바람은 차가워 있었지 만 우리는 아무도 그런 것에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추운 날씨를 불평 하기에는 너무도 아름다운 풍경이었던 것이다. "저 친구, 누구야?" 나는 점점 짙은 붉은 빛으로 변하고 있는 바다에 취해있다가 사빈이 이 렇게 속삭이면서 옆구리를 쿡 찌르는 바람에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우리 옆에는 한 사내가 뭔가를 열심히 적고 있었다. 어디서 구했는지 나무 통 하나를 받침 삼아서 말이다. 내가 사내를 바라보자 사내는 나를 보고 미 소를 지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나도 사내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자폰 친구들. 자네들은 모르겠지. 혀가 있어도 말을 하지 못하고, 글 을 써도 마음을 담아내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그리고 그 사람 이 무엇을 원하는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 말이야." 사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사내의 목소리는 바람을 타고 내 귀로 또렷하게 파고들었다. 나는 갑자기 흥분이 했다. 사내의 목소리에는 울림 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나도 모르게 사내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고 보니 사내의 얼굴은 낯이 익었다. 문삼의 옆을 따라다니면서 문삼의 말을 옮겨 적는 일을 하고 있던 사내라는 걸 알아내기까지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내가 말해도 자네는 모를 테지. 그러니까 어쩐지 마음이 편해지는군. 바다를 좋아하는가?" 대답을 원하는 질문은 아니었다. 사내의 시선은 수평선을 향하고 있었 다. "참. 소개가 늦었군. 나는 오로스크라고 하네. 음. 나, 오로스크. 넌?" 오로스크라고 자신을 밝힌 사내는 나를 손으로 가리키면서 이렇게 말했 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지만 다들 넋을 잃고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통에 나에게는 별 관심이 없었다. "오로스크?" 나는 무심결에 이렇게 되물어 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사내는 씨익 웃으 면서 붓으로 뭔가를 열심히 적으면서 말했다. "오로스크. 그래. 전설 속에 나오는 동물 이름이지. 실은 이거, 내 이 름이 아니야. 오로스크는 필명이야. 시를 적기 위해서 만든." 오로스크는 이렇게 말하고는 종이를 들어 나에게 보여주었다. 햇살을 받은 종이가 붉게 물들어 빛나고 있었다. "오로스크, 숲의 조정자. 산이 없는 곳에 모여 산을 만들고, 울창한 숲 을 평지로 만드는 대식가. 오로스크, 황금의 이름. 늙으면 자신의 금빛 털을 젊은이에게 물려주지. 오로스크, 타오르는 눈동자. 세상의 모든 비 밀을 알고 있는 오로스크여." 오로스크는 여기까지 읽고는 키득거렸다. 나는 그 웃음의 의미는 알 수 없었지만 오로스크의 목소리는 여전히 울림으로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오로스크는 오로스크를 싫어하지. 왜 그런지 아는가?"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8851/19898 ━━━━━━━━━━━━━━━━━━━━━━━━━━━━━━━━━━━━━━━━ 제 목:[탐그루] 강철의 오로라 236 관련자료:없음 27/27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4-09 23:08 조회:1575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나는 오로스크의 눈빛이 자학으로 번득이는 것을 느끼고는 소름이 다 끼쳤다. 하지만 나는 어찌되었건 지금은 자폰인 행세를 하고 있었다. 내 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이상하다는 표정을 짓는 것뿐이었다. "왜냐하면 오로스크는 오로스크이기 때문이야." 오로스크는 이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눈빛은 이제 더 이상 바다를 향하고 있지 않았다. 노을빛이 오로스크의 얼굴을 붉게 보이 게 만들고 있었다. 찬바람이 오로스크의 머릿결을 흔들고 지나갔다. 한 순간 바다내음이 훅 끼쳐 들어왔다. "자네 이름을 알았다면 좋았을 것을." 이렇게 말하고 돌아가려는 오로스크에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 다. 찬바람은 이제 귀 끝을 얼릴 기세로 매섭게 불어닥치고 있었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배의 항적이 마치 촛불같은 모양으로 붉게 빛나고 있었 다. "들어가지. 이거 너무 추운데?" 사빈의 말에 모두 동의하면서 선실로 들어갔다. 다만 사빈에게는 말을 함부로 했다는 따가운 눈초리가 쏟아졌다. 선실 외의 곳에서는 절대로 우 리말을 쓰지 않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그날 밤 나는 선실에 혼자 깨어있었다. 선실은 오브라디 교수의 주장대로 셋을 얻을 수 있었다. 하나는 왕자 (역의 마로우)가 쓸 방이고 나머지 두 방은 오브라디 교수와 대신, 그리 고 시종들이 나누어 쓸 방이라는 것이었다. 다행히도 항해 인원을 생각 보다 적어 빈 선실은 넉넉했다. 나는 선실에 나있는 작은 창을 통해서 밖을 내다보았다. 달빛이 파도의 움직임에 부수어져 가루가 되어 날리고 있었다. 잠이 통 오질 않는 밤이 었다. 내가 가게 될 곳에 대한 불안감과 기대, 그리고 호기심이 흥분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잠이 오지 않는 것은 그것보다 오래간만에 불 침번을 서지 않고 잘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잠에 대한 긴장이 풀린 탓이 더 큰 것 같았다. 사실 대부분의 밤은 잠으로 보내기는 아까울 때가 많기 마련이다. 적어도 밤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라면 꽤 많은 밤을 아깝다는 생각으로 잠을 설친 적이 있으리라 (물론 이런 생각이 드는 건 일 년에 며칠뿐일지도 모르지만). 먼 수평선 너머에 바닷새 몇 마리가 날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무슨 새 일까. 이름을 물어볼 걸. 이런 생각을 하다 나는 낮에 보았던 오로스크라 는 사내를 떠올리게 되었다. 사내의 말은 나에게 울림으로 다가오고 있었 다. 마법의 말 아니었을까? 마음을 울리는 말은 어떻게든 마법의 말로 쓸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바였다. 마법의 말일지도 모른다고 여겨 지자 나는 아자닌을 불러 내 볼까 싶은 마음이 들었다. 서커스 들판을 지 난 이후, 아자닌을 불러낸 적은 몇 번 없었다. 불침번을 서는 날에는 할 일이 너무 많았고(불을 지킨다든지 경계를 한다든지) 혼자 자는 날에는 잠자기 급급한 탓이었다. "내* 마음의* 문을* 여니* 길을* 인도해* 다오*" "예, 부르셨습니까, 수르카 님." 오래간 만에 보는 아자닌이었다. 나는 뭔가에 취해 있는 기분이었다. 늘 보아왔던 아자닌의 얼굴이었지만 나는 아자닌의 모습이 물결처럼 흔들 리고 있다고 느껴졌다. "쓸쓸한 밤이야. 오늘 오로스크라는 사람, 봤지. 그 사람, 꼭 자살이라 도 할 것 같은 분위기였어." "바다에 취한 탓입니다." 아자닌은 단정짓는 말투가 아니라 꼭 시를 읊는 것처럼 좁은 창을 통해 바다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바다에 취해?"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이 하늘에서 왔다고 믿는 사람, 자신이 땅에서 왔다고 믿는 사람, 그리고 자신이 물에서 왔다고 믿 는 사람.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에 따라서 땅과, 하늘과 물을 대하는 태도 가 틀려지기 마련이지요. 제가 보기에 수르카 님이나 오로스크 님은 자신 이 물에서 왔다고 생각하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바다에 취하는 사람은 자신이 물에서 왔다고 생각하기 마련이지요." 아자닌의 말을 듣자 나는 바다를 보았던 일들을 떠올려 보았다. 로스안 에서 처음 보았던 바다, 그리고 배가 출항한 시네 항에서 본 바다... "바다에 취한다는 게 무슨 말이지?" "사람은 보통 생일을 맞았을 때 가장 우울해 집니다. 자신이 태어난 즈 음이 되면 아무래도 자신이 살아 온 삶을 돌아보기 마련이니까요. 자신이 살아온 날을 돌아봤을 때 우울해 지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요?" "... 누구나 후회가 있기 마련이라는 말이야?" "아닙니다." 아자닌은 여전히 물결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삶은 슬픈 거니까요. 아닌가요?" "아자닌. 무슨 할머니 같은 소리야?" 아자닌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정신이 맑아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삶 이 슬픈 곳이라니? 나는 적어도 그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약 그걸 몰랐다면 범버쿠 정글의 깊은 곳에서 아마도 다시는 그 무엇도 슬퍼 할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을 것이다. "수르카 님. 인생에 대해서는 제가 더 많이 알고 있을 겁니다. 저도 한 때는 인간이었다고 말씀드렸지 않나요?" "지금은 정령이야. 그리고 난 지금 내 인생을 살고 있고, 넌 아니야." 나는 이렇게 잘라 말했다. 창 밖으로 보이는 수평선에 구름이 내려앉고 있는 게 보였다. 바다는 어느새 차가운 바람만이 부는 황량한 풍경으로 바뀌어 있었다. "적어도 오로스크 님은 저처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아자닌은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제야 아자닌이 나에게 마법 의 말을 설명해 주기 위해서 이런 말을 했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오로스크라는 사람은 글을 쓰는 사람이었다. 비록 문삼의 행적이나 기 록하고 있긴 하지만, 결국 그가 원하는 것은 진정한 자신의 마음을 담고 있는 한 줄의 글일지도 몰랐다. "오로스크, 그 사람. 어쩌면 그 사람이야말로 진짜 마법사인지도 모르 겠어." 한참 사이를 둔 다음에 나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 그 분 말씀하시는 걸 듣고 마법의 말을 느끼셨지요?" "그래. 어떤 마법의 말인지 이해가 잘 되진 않았지만, 지금은 좀 느낄 수 있을 것 같아." "이제 수르카 님도 마법의 세계를 이해하게 된 것 같습니다." 아자닌이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방금 전까지 나를 시험하려고 들었 던 정령 주제에. 칭찬은 나쁘지 않았지만 나는 기분이 상했다. "수르카 님.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던가요. 사비오 님께서 남기신 반지 와 칼, 이 두 가지의 의미를. 저는 믿었습니다. 수르카 님께서 반드시 저 를 택하실 거라는 걸요. 어쩌면 수르카 님이야말로 진정한 대마법사가 될 수 있을 겁니다." 내 기분이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아자닌이다. 하지만 지금은 들떴는지 내 기분 따위는 전혀 생각도 하지 않고서 떠들고 있었다. 어쩌면 자주 불 러내지 않아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이 배에 대마법사는 한 명이야. 사비치." 나는 이렇게 잘라서 말했다. 좁은 창 밖으로 보이는 바다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을 품고 있었다. 저 곳에도 무엇인가가 살고, 또 살기 위해 죽이고, 어쩌면 죽어가고 있을 것이었다. 이런 세상에서 내가 하고 있는 일의 의미를 과연 찾을 수 있을 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스부르거. 그의 물음에 나는 '내가 있는 곳이 내가 있어야 할 곳이고 내가 하는 일이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그 말의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알 수 있었다. 떨어지는 낙엽처럼, 또 빗물처럼, 나 는 내가 있어야 할 곳에서 내가 할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저 거대한 바다 앞에서 나는 내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실감하기 어려웠다. 지금 눈앞에 펼쳐져 있는 바다처럼, 저 어두운 바다처럼 참담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과연 마법에 대해서 알고는 있는 걸까? 오로스크는 과연 어 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걸까. "아자닌. 마칸의 강림이 임박했다는 말을 들은 지도 꽤 오래됐어. 그리 고 마칸의 강림을 막고자 하는 오브라디 교수의 생각도 오래되었고. 하지 만 솔직히 나, 자신 없어. 내가 한다는 것은 알지만 내가 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하고 싶다는 것과 할 수 있다는 것은 너무 큰 차이가 있는 말이야." "수르카 님은 알고 계십니다. 뭔가 하고 있다는 것은 뭔가 해내었다는 것 보다 중요하다는 걸요. 그게 모스부르거와의 대화에서 얻은 것 아니었 던가요?" "아무리 네가 반지의 정령이라고 해도 나는 내가 가장 잘 알아." 오로스크의 자학으로 가득찬 눈을 떠올리면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저 바다에도 문삼이 살고, 또 문삼의 옆에는 오로스크가 살고 있을 것만 같 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도 역시 칼과 피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겠 지. 허리에 차고 있는 나미트 장군의 칼이 어느 때보다도 더 무거운 존재 감을 주고 있었다. 항해는 계속되었다. 바다는 묵묵하게 우리를 바라보고만 있는 듯, 이상 하리만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날씨는 바르도 대륙 어디에서도 보기 어려울 만큼 맑았고, 바람은 차긴 했지만 거세지는 않았다. 뱃사람 들로부터 흔히 들을 수 있는 태풍이니 높은 파도니 따위는 아무 것도 없 었다. 솔직히 바바 족의 영역을 찾아가는 모험을 하고 있다고 하기 보다 는 진짜 자폰 출신 귀족들이 뱃놀이 하는 기분이 들었다. 날씨는 맑았고, 바람만 아니라면 선상에서 얼마든지 바다를 바라보면서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항해가 계속되자 걱정되는 일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우리가 바바 족의 영역으로 가는 길을 잘 알고 있다고 문삼을 속였기 때문에 배 에 오를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만약에 항해에 문제가 생겨 뱃길 을 잃어버린다던가 하면 우리가 나서서 길을 인도해 줘야 한다는 것이 그 것이었다. 노련한 선원은 당연히 근처의 암초나 해안선의 모양으로 자신이 자주 다니던 길을 알아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정말로 노련한 선원이라면 바닷물의 빛깔이나 냄새, 혹은 그곳에서 잡히는 물고기 등의 정보만 가지 고도 자신이 있는 위치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 있는 사람 중 사빈을 빼면 누구도 항해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다. 솔직한 심정으로 나는 우리 중 아무도 배멀미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렇게 다행스러울 수가 없었다. 상황이 이런데 만약에 무슨 문제가 생기게 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오브라디 교수는 사비치가 우리의 승선사실을 묵인했다는 요지의 말을 하 긴 했지만 정확하게 어떻게 된 일인지는 이야기하지 않고 있었다. 이제는 항해도 많이 익숙해져 있었다. 어쩔 줄 몰라하면서 뭉쳐 다닐 줄만 알았던 처음과는 달리 지금은 혼자 따로 떨어져서 다니기도 하고, 바르도 대륙 말을 익힌 척 하면서 간단한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물론 이 경우는 약간의 모험이 따르긴 했지만 그만큼 재미가 있기도 했다). "여어, 자폰 친구. 다시 만나는 군." 할 일 없이 선상에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데 오로스크가 말을 걸었다. 오로스크는 종이도 붓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문...삼? 오로스크?" 나는 조심스럽게 이렇게 물었다. "문삼 님께서 휴식시간을 주셨지. 나도 이렇게 먼 길을 가는 데 뭔가 이득이 있어야 하지 않겠어? 이렇게 바다를 보면서 마음을 맑게 닦을 시 간 정도는 있어야지, 친구." 오로스크는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면서 말했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면 서 미소를 지었다(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이해한다는 듯이 말이다). "그러고 보니 자네 이름도 모르네. 자폰 인은 이름을 말해주지 않는 게 관습인가? 가만있자... 내 이름을 지어주지. 자네는 무사고, 또 먼 자폰 에서 왔으니까..." 오로스크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하이에나라고 부르지. 아주 평화로운 짐승이야. 너, 는, 하, 이, 에, 나. 알아듣겠어?" 키득거리면서 오로스크가 말했다. 나는 하이에나가 무슨 짐승인지 알지 는 못했지만 뭐라고 부르건 불평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그냥 웃으 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하이에나라. 어감이 좋군. "하이에나. 뮤 구경이나 갈까?" 오로스크는 이렇게 말하더니 내 팔을 거의 잡아끌다시피 하여 어디론가 나를 데리고 갔다. 뮤 구경이라니. 도대체 뭘 하려는 건지는 알 수 없었 지만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오로스크의 마음을 완전히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오로스크의 의도를 나는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혹시 내가 스타바를 걱정하고 있다는 걸 눈치 챈 걸까? 오로스크는 선실 몇 개를 지나 계단과 사다리를 거쳐 배 밑 화물칸까지 인도했다. 가는 내내 오로스크는 뭐라고 중얼거렸는데, 발음이 분명하지 도 않고 목소리도 작아서 거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어쩐지 내가 진짜 자폰인이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윽고 화물칸에 닿았을 때, 나와 오로스크는 화물칸 앞에 앉아 있는 사내를 만날 수 있었다. "오로스크. 또 왔군." 대머리에 불룩 튀어나온 배를 한 덩치 좋은 사내였다. 사내는 여느 선 원에게서도 볼 수 있는 그 흔한 문신하나 하지 않은, 꼭 동네 구멍가게 아저씨 같은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워낙 바쁘다 보니까, 불곰." "내 이름은 미스트야, 미스트. 불곰이 아니라." "아냐. 불곰. 자네는 기쁘지도 않은가? 시인이 지어준 이름인데." 오로스크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불곰이라고 불린 사내는 어깨를 한 번 으쓱 하더니 오로스크를 위해 화물칸의 자물쇠를 열어주었다. "도대체 그 불곰이라는 놈이 뭐하는 놈이야? 그리즐리 사촌 쯤 되나?" "평화로운 짐승이야. 믿어도 되." 오로스크는 문을 열었다. 그러자 고약한 악취가 순식간에 몰려나와 내 코를 찔렀다. 뱃속까지 악취가 스며드는 느낌이었다. 나는 정신이 다 아 뜩해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오로스크는 많이 익숙한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한 표정을 하고서 나를 화물칸 안으로 인도했다. 어두울 줄 알았던 화물칸은 초록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초록색 연금술 사의 등을 보자 나는 어깨가 축 늘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초록색 연금술 사의 등은 만들기도 힘들고 비싸서 거의 구경해 본 적이 없었다. 초록색 은 사람을 잠들게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강력할지는 몰 랐다. 문이 열리는 순간 훅 끼쳐온 뮤 똥 냄새를 맡고 짐작은 했지만, 안에는 뮤로 가득했다. 군데군데 번득이며 강렬한 빛이 별처럼 보이고 있었고, 그것들은 뮤의 눈동자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뮤 백마리의 눈동자치고는 수가 너무 적었다. "이 배에서 가장 평화로운 곳이지. 하이에나. 이곳은 정말로 평화로 워." 뮤 똥 냄새에다가 초록 빛 때문에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 나를 향해서 오로스크는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오로스크의 눈동자는 초록색 연금술사의 등 빛을 받아 야수의 눈동자처럼 반짝이고 있었고, 그 빛은 내 정신이 완전히 흐려지는 것을 거의 강제적으로 막고 있었다. "다들 잠들어 있어. 가끔씩 깨어있는 놈들도 있지만 그건 순전히 빛이 약한 곳으로 재수 없게 몸을 숨겼기 때문이지." "재...수?" 나는 하마터라면 '재수 없다니?' 하고 물어볼 뻔했다. "우리말을 조금 할 줄 알게 된 모양이지? 하하하. 상관없어. 나는 시인 이니까." 오로스크는 이렇게 말하고는 뮤들을 가리키면서 설명을 이었다. "긴 항해동안 뮤같이 신경 예민한 동물들이 견딜 수 있을 것 같나? 천 만의 말씀이야. 쉽게 죽어버리지. 암. 미쳐서라도 금새 죽어버릴 거야. 이곳 공기는 지독하게 나빠. 아마 이런 곳에서 하루만 보낸다면 보통 사 람도 미쳐버리고 말거야. 그래서 하루에 한 번씩 이곳도 환기통을 통해서 환기를 시켜주기는 하지. 하지만 너무 자주 환기는 시켜 줄 수가 없어. 선원들이 미쳐버릴 소지도 크고, 무엇보다도 문삼 님께서는 뮤 똥 냄새를 죽도록 싫어하시거든." 오로스크는 이렇게 말하고는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오로스크는 자신 의 처지를 스스로 자학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치지 않는다면 질식해서 죽어버리게 될 거야. 다행히도 초록색 연금 술사의 등은 비싼 만큼 제 값을 하니까 편안한 마음으로 잠들 수 있게 만 들어 주거든. 그런데 죽는 거라면 차라리 낫지. 만약에 저 뮤들이 날뛴다 고 생각해 보게. 배는 단번에 가라앉아 버릴 걸세. 마법으로 보호되고 있 다고는 하지만 배는 어차피 배일 뿐이야. 나무 판때기로 만들어진 거라 고. 쉽게 부서지지. 암. 쉽게 부서지고 말고. 불도 잘 붙고 말이지. 이 런. 내가 혼자 너무 떠드는군." 오로스크는 뮤를 바라보았다. 꼭 바다를 바라볼 때의 모습 같았다. 오 로스크는 잠들어 있는 뮤들의 모습에 취해 있었다 (어쩌면 나 역시 취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지독한 뮤 똥 냄새에 말이다). 나는 엄청나게 많은 뮤들의 모습을 보는 순간 스타바를 찾아야겠다는 계획은 완전히 포기했 다. "한번은 저 뮤 때들을 다 풀어버리면 어떻게 될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네. 지금 뮤들은 바닥에 묶여있지. 혹시 파도가 거세 지더라도 움직이지 못하게 말이야. 뮤들이 배 한 쪽으로 쏠렸다가는 미쳐 날뛰는 것 보다 너 나쁜 결과가 나오게 될 걸세, 아마. 나는 상상했다네. 이 배가 쪼개지고 문삼이 죽고, 또 내가 죽고, 다들 죽어버리는 상상 말이야." 나는 오로스크의 말을 듣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일전에 선상에서 보았 던 눈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장이라도 자살할 것 같은 눈빛. 지금의 오로스크라면 능히 뮤를 풀어버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높은 파도가 밀어닥치는지 배가 좌우로 약간 흔들렸다. 하지만 나는 작은 흔들 림에도 화들짝 놀라버리고 말았다. "하하하. 꼭 내 말을 알아듣는 것 같군.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잖아? 휴. 그러고 보니 나도 좀 머리가 아프군. 이곳은 평화롭기는 한데 머리를 어지럽게 하는 독이 퍼져 있다니까. 어떤 날에는 칼을 가지고 와서 저 뮤 들을 진짜 풀어주려고 한 적도 있었다네. 물론 실행으로 옮기지는 못했 어."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전혀 생각치도 못했던 곳에서 죽을 뻔했던 것이다. 나도, 또 이 배에 탄 모든 사람들도. 번쩍이는 뮤의 눈동자 몇 개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걱정은 말게. 하지 않은 게 아니라 하지 못한 거니까. 죽을 용기가 없 었거든, 나한테는. 하하하. 하이에나, 자네는 좋은 친구야. 내가 아무리 말해도 뭐라고 하지 않고 또 이런 말을 털어놓는다고 해도 걱정이 없으니 말이야. 자고로 친구의 말을 잘 들어주고 비밀을 지킬 줄 아는 친구가 진 정한 친구지. 자네가 우리말을 모르는 게 정말 다행일세." 나는 이대로 오로스크의 말을 듣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뭐라고 한 마 디 해 줘야겠다 싶었다. 하지만 어떻게? 오로스크는 종잡을 수가 없는 사 내였다. 내가 자폰 인이 아니라는 걸 알게되면 문삼에게 고자질을 할지, 아니면 내 손을 붙잡고 하루 종일 시를 읊을 지 짐작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생각 끝에 이렇게 말했다. "시는... 사람이..."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8896/19898 ━━━━━━━━━━━━━━━━━━━━━━━━━━━━━━━━━━━━━━━━ 제 목:[탐그루] 강철의 오로라 237 관련자료:없음 19/19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4-11 00:00 조회:1513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내가 전하고자 하는 뜻은 간단했다. 오로스크가 사람들과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고 싶었던 것이다. 오로스크는 시인이니 내 말을 들 으면 적어도 시 때문이라도 미친 사람이나 할 법한 행동은 하지 않을 것 같았다. "진정한 시인은 누군가를 위해서 시를 쓰는 게 아니야." 그러나 오로스크의 반응의 예상외였다. 오로스크 얼굴에는 자조적인 미 소마저 사라져이었다. "시는 시인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거지. 우러나온 것이 말이 되고 글 이 되지 않으면 안되네. 왜냐하면 그게 시인의 속에 담겨만 있다가는 시 인은 결코 살아남을 수 없을 걸세. 시에 미쳐서, 아니, 시에 취해서, 아 니, 시에 빠져서 당장 죽어버리고 말 걸세. " 나는 꼼짝없이 묶여있는 뮤들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오로스크의 마음이 바로 이런 풍경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곳을 좋아하는 지도 모르겠다. 오로스크는 진지한 표정으로 한참을 있다가 갑자기 이마 를 치면서 이렇게 말했다. "가만있자... 이런. 자네, 우리말을 생각보다 잘하는 군. 좋은 친구의 조건 중 하나가 사라져 버렸구만. 비밀을 지켜주지 않을지도 모르겠는 걸." 오로스크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허리에 찬 나미트의 칼이 떠올랐다. 하지만 설혹 오로스크가 나에게 공격한다고 해도 함부로 오로스크를 벨 수는 없었다. 그러기에 나는 오로스크를 너무나도 잘 이해하고 있었기 때 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무슨 말인지 못알아 듣겠다는 듯이 희죽거리면서 오로스크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꼭 쥔 주먹에서는 진땀이 배어 나오 고 있었다. "내 계획을 말하지 말아주게. 그저 시인의 상상일 뿐이니까. 나한테 용 기가 있었다면 진작에 실행했을 걸세. 잊지 말게. 나는 죽을 용기가 없어 서 자살도 못하는 사람이라는 걸 말일세. 이제 나가지. 자네 얼굴 표정을 보아하니 조금씩 미치고 있는 것 같으니 말이야." 오로스크는 내 희죽 거리는 표정을 미친 사람의 얼굴이라고 생각한 모 양이었다. 나는 어이가 없었지만 잠자코 오로스크를 따라서 밖으로 나가 기로 했다. 사실 조금만 더 있다가는 나도 미쳐버릴 것 같았다. "불곰. 뮤들 깨어나지 않게 잘 지켜주게. 자네가 이곳을 잘 관리하지 않았다가는 우리 모두 바다 속에서 물고기와 이야기하는 신세가 되어 버 릴 테니 말일세." "오로스크. 걱정말게. 그런데 불곰이 뭐야? 언젠가 이야기 해 준다고 하지 않았나?" "평화로운 짐승이라니까. 게다가 무척 귀엽기도 하지." 키득거리면서 오로스크는 이렇게 대꾸했다. 나는 오로스크가 키득거릴 때마다 어쩐지 광기가 느껴지는 듯 해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게다가 화 물칸까지 와 놓고는 스타바 얼굴 한 번 못 보고 돌아가게 되다니. 다시 선상에 올랐을 때, 맑은 하늘을 바라보며 깊게 숨을 들이쉬자 차 가운 공기가 새삼 고맙게 여겨졌다. 내가 심호흡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 면서 오로스크는 환하게 웃음을 지었다. 마치 어린아이가 웃는 것 같은 웃음이었다. 나 역시 오로스크의 자조적인 웃음을 보지 않게 되어 기분이 좋아졌다 (심호흡 덕분인지도 몰랐지만). 나는 오로스크에게 손까지 흔들 면서 선실로 되돌아갔다. 오로스크는 잠시 나를 한 번 보는 것 같기는 했 는데, 뭔가를 손에 들고서 바다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느라 정신이 팔린 모양이었다. 평화. 나는 오로스크가 서 있는 쪽으로 펼쳐진 바다를 바라 보았다. 바다는 고요히 잠든 듯, 일렁이는 물살뿐이었다. 그 위를 날고 있는 새들과 가끔씩 수면 위로 솟구쳐 올라오는 물고기들의 모습이 그나 마 바다에 생기를 불어 넣어주고 있었다. 어느 새 바람마저도 잠잠해 지 고 있었다. 그 날 저녁, 우리는 오브라디 교수의 부탁으로 마로우의 방에 모여 앞 으로 있을 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창으로 붉은 노을이 스며들어 마치 사방의 벽이 불타오르는 것 같았다. "이렇게 왕자님 방에 모여 회의를 열게 되다니 영광이네." 오브라디 교수는 이렇게 너스레를 떨면서 말문을 열었다. "바바 족의 영역까지는 얼마나 남아있답니까?" "모르겠는데, 마로우 군. 이 해역을 지나는 배는 이 배가 처음일 테니 까." "그래도 대충은 알 수 있지 않겠어요?" "스칼렛 양. 지금 이 정도 규모의 배가 이렇게 먼 거리를 가는 것은 아 마 비스토브레 왕국 사상 처음 있는 일입니다. 보세요. 외교적으로 중요 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귀족은 한 사람도 없고, 그나마 타고 있는 문삼도 자이벌 가문의 셋째아들 아닙니까. 이것이 이 항해가 얼마나 위험한 항해 인지를 말해주고 있지요." 오브라디 교수는 이렇게 끔찍한 사실을 자상한 말투로 스칼렛에게 설명 해 주었다. "이거,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진정한 의미의 모험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니 피가 끓어오르는군요. 미지의 대륙을 찾아가는 사나이의 가슴이 펄 떡펄떡 뛰는군요." 사빈의 말은 물론 모두로부터 무시당했다. 그러나 사빈은 조금도 개의 치 않는 기색이었다. 오히려 특유의 허공을 응시하는 시선을 하고는 '사 나이의 거친 가슴이여' 어쩌구 운운까지 했으니 말이다. 만약에 저 말이 사빈의 마음에서 진정으로 우러나오는 말이라면 저 말도 시인의 말일까? 오로스크의 말 그대로라면 말이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며 혼자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날씨가 점점 더 좋아지고 있습니다. 북쪽으로 항해한다면 점점 더 춥 고 ㄳ어져야 하는 것 아닙니까?" 크라이가 오브라디 교수에게 물었다. "자네, 역시 생각보다 많이 알고 있군. 그래. 그 말이 맞네. 하지만 그 렇게 단순하게만 여길 것은 아니야. 바다는 넓어. 우리가 상상하는 것 보 다 훨씬. 바르도 대륙 전체의 몇 배나 되는 것이 바다라네. 이 넓은 바다 에서 어떤 일이든 원칙대로 일어난다고 하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을까?" 오브라디 교수는 이렇게 물은 다음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다시 말을 이 었다. "이제 멀지 않아 우리는 빙하지대에 다다르게 될 거네. 그것만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지. 아무리 바다가 넓다고 해도 있는 것이 함부로 사라지 거나 하진 않을 테니 말일세. 크라이. 자네의 걱정은 내 이해하지만 사실 걱정이란 건 닥친 뒤에 해도 늦지 않는다네." 오브라디 교수의 말에 크라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내가 오늘 이곳으로 모이라고 한 것도 비슷한 맥락의 일 때문일 세. 자네들, 사비치가 왜 우리의 승선을 말리지 않았는지 알고 있는가?" 오랫동안 궁금했던 일이었다. 사비치는 우리가 가짜라는 것을 뻔히 알 면서 승선을 허락했다. 뭔가 사연이 있을 것 같았다. "사비치는 마법에 능하지. 게다가 지금 바바 족의 영역에 가 있다는 첩 자와 직접소통이 가능한 유일한 사람이고 말일세. 하지만 빙하지대에 대 해서 알고 있는 것은 이 오브라디 교수만 못하다네. 그러니까 이제 빙하 지대에 들어서게 되면 나는 사비치와 함께 빙하지대를 빠져나갈 방법을 찾을 걸세. 사비치의 마법으로 물론 거의 다 해결되겠지만, 말하지 않았 는가. 바다는 넓고 예측할 수 없는 일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고 말일 세." 오브라디 교수는 이렇게 말하고는 표정이 굳었다. 이것도 거래라고 생 각한 것일까? 오브라디 교수는 원조금을 얻기 위해 스칼렛과 함께 프라브 리티에 산다는 스칼렛의 친척을 찾아갈 때도 저런 표정을 지었다. 애당초 배에 오를 때는 과거의 빚 때문에 우리가 배에 오를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으니 분명 다른 사연이 있을 것이다. "그 때가 되면 나를 좀 도와줘야겠네. 이 배에서 우리의 정체를 아는 건 아직 사비치 뿐이지만 언제까지 속일 수만은 없지." "우리의 정체를 밝힐 생각이시라면 선장을 구워삶는 것이 중요하겠습니 다." 사빈이 모처럼 진지하게 자신의 뜻을 밝혔다. "그보다는 비밀이 유지될 수 있도록 조심하는 게 먼저겠지." 오브라디 교수가 말했다. 어느새 붉게 물들어 있던 벽면은 연금술사의 등불로 밝혀져 있었다. 다행히도 우려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선원들도 우리에게 별 거부 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지 않았고, 의심하는 사람은 더더군다나 없는 것 같았다. 긴 항해를 하는 동안 매일 하나씩 사과가 나왔다. 사과를 먹지 않으면 작은 상처에도 피가 멈추지 않는 병에 걸려 죽게 된다는 오브라디 교수의 말이 아니었다고 해도, 나는 과일이 무척이나 먹고 싶었다. 오래된 사과 가 아닌 진짜 과일이나 채소가 그리웠다. 푸른 야채를 통째로 물기를 툭 툭 털어 낸 후에 와작 씹어 먹을 수만 있다면. 먹을 게 그리워지는 걸 보 면 이번 항해는 사빈의 말처럼 위험으로 가득 찬 모험인 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가끔씩 낚시나 그물로 물고기를 잡는 일은 모두들 즐거워하는 일이었 다. 먼바다에서 잡히는 물고기라 그런지 몰라도 잡히는 것들은 하나같이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등에 푸른색이 도는 물고기는 살이 많고 물기도 적당해 먹기에 아주 좋았고, 손가락 만한 갈색 물고기는 통째로 씹어먹어 도 좋을 만큼 맛이 있었다. 탐그루에 있을 때도 바닷 고기는 소금에 절여 져있는 것 말고는 구경도 못해본 나인지라 바다 물고기의 맛은 정말이지 다시 경험하기 힘든 좋은 기억으로 남을 것 같았다. 막 건져 올린 물고기 들은 싱싱한 과일이나 야채에 대한 그리움을 잊게 만들 지경이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거북이를 잡았을 때의 일이었다. 역시 무척이나 맑은 날의 일이었다. 누군가가 배를 따라오고 있던 거북이를 그물을 던져 건져 올린 것이었다. "저건 뭐라는 물고기인가?" 문삼이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거북이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바다의 영물 거북이입니다." 문삼의 질문에 선장이 직접 대답했다. "거북이? 어떤 물고기지? 조개하고 비슷한 건가?" 등껍질 속으로 팔다리와 목을 숨긴 거북이를 바라보면서 문삼이 물었 다. "거북이는 물고기나 조개가 아닙니다. 이렇게 등 껍질 속으로 몸을 숨 겼다 뿐이지 저 안에는 팔다리와 머리가 들어있는, 신비한 바다의 영물이 지요. 듣기로는 백년수보다 오래 살고, 파도와 구름을 다스리는 힘이 있 는 짐승이라고 합니다." "그런가? 맛은 어떻지?" "예?" 선장은 물론이고 선원 전체가 문삼을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건 사빈도 마찬가지였다). "문삼 님. 거북이는 바다의 영물입니다. 뱃사람이 거북이를 먹는 것은 배를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저게 어떤 맛인지 궁금한데." 문삼은 선장의 말에 인상을 찌푸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거북이를 바라보았다. 거북이는 목을 조금 내밀고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궁금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좌우를 살피고는 다시 목을 쏙 집어넣었다. "배에서는 선장이 모든 일을 책임집니다. 여기서는 제가 두목이고 제가 법입니다. 거북이는 먹지 않습니다. 절대로." "그으래애?" 문삼은 선장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갑자기 허리춤에서 칼을 뽑아들었 다. 선장은 몸을 움찔하면서 허리에 찬 단검으로 손을 가지고 갔다. 다음 순간, 누가 말릴 틈도 없이 문삼의 예리한 칼날은 거북의 등 껍질을 파고 들었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상황을 판단할 겨를도 없었다. 선 원들이 탄식을 내뱉었다. 내 귀에는 그 탄식 소리가 거북이의 신음소리처 럼 들렸다. "배에서는 선장이 법인지 몰라도 내가 있는 곳에서는 내가 법이야. 내 가 저걸 죽인 건 그걸 확인시켜주기 위해서일세." 문삼은 거북의 등 껍질에서 칼날을 뽑아 들었다. 칼날에 묻은 피는 마 치 이 세상 것이 아닌 것 같은 짙은 붉은 색이었다. 다음 순간 등껍질에 서 한 줄기 핏물이 솟아 올랐다. 선원들은 깜짝 놀라면서 뒤로 물러섰고, 핏물은 문삼의 옷자락에 묻었다. 문삼은 더러운 것이 묻은 양 인상을 쓰 면서 그제야 뒷걸음질을 쳤다. "그건 거북의 저주요." 선장이 말했다. "다행히 배보다 당신에게 먼저 피가 튀었으니, 배가 침몰하지는 않겠지 만 당신은 틀림없이 죽게 될 것이오." 선장이 단호하게 말하자 선원의 눈동자가 일제히 문삼에게 향했다. 문 삼은 옷자락을 털어내면서 태연히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누구나 죽지. 나라는 사람은 말이야 하고 싶은 것은 다 해야 직성이 풀린다고. 죽기 전에 하고 싶은 것은 다하고 살겠어. 그리고 그 거북, 오늘 저녁에 식탁으로 가지고 와. 매일 똑같은 음식에 질렸어. 저 겁장이 선원들은 요리 못할 테니까 자네들이 만들어 오게." 문삼은 자신이 데리고 온 하인들에게 이렇게 말하고는 선실로 돌아가 버렸다. 바닥에 흐르고 있는 거북이의 피는 문삼의 하인들이 닦아내야 했 다. 선원들은 아무도 그 피에 손을 대고 싶어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두 고보자는 표정을 하고서 선장은 선장실로 돌아갔는데, 그 표정을 보니 어 쩌면 저주 운운한 말도 그저 자존심에서 나온 말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때 한 순간 오로스크의 얼굴을 보았다. 오로스크의 얼굴 은 당장이라도 울 것처럼 일그러져 거북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날 문삼이 정말로 거북이를 저녁으로 먹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 다. 선원들은 틀림없이 먹지 않고 도로 바다에 버렸을 거라고 수근거렸 다. 어찌되었건 그날 밤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8897/19898 ━━━━━━━━━━━━━━━━━━━━━━━━━━━━━━━━━━━━━━━━ 제 목:[탐그루] 강철의 오로라 238 관련자료:없음 22/22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4-11 00:01 조회:1404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피빛처럼 짙은 만월이었다. 달빛은 얼음처럼 차갑게 바다 위에 흐르고 있었고, 드디어 수평선 근처에서는 빙산의 그림자가 고개를 내 밀었다. 이제 빙하지대가 멀지 않았다. 오브라디 교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행동 했지만 여전히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는지 심각한 얼굴로 잠을 이루지 못 했다. 이런 상황인데도 편하게 잠들어 있는 일행들을 보고 있자니 내가 예민한 건지, 아니면 다른 일행이 비정상인 건지. "수르카. 자네와 나 말고는 앞날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는 사람이 없 는 것 같군." "사빈은 좀 그렇지만..." 나는 오브라디 교수의 말을 대충 웃음으로 흘려 넘기려고 이렇게 대답 했다. 하지만 오브라디 교수의 말은 냉정했다. "우리가 이 여행을 떠난 목적이 무엇이었는가를 잊어서는 안되네. 마칸 의 강림은 막아야만 하네. 그것이 우리의 사명인 것이야." 오브라디 교수의 강경한 어조를 듣자 나는 반대로 의문이 떠올랐다. 마 칸이 무엇인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면서 오직 마물들의 잇따른 출현이 마 칸과 관계가 있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마칸의 강림을 막아야 한다니. 마 칸이 무엇인지 알아 내는 것이 먼저 아닐까? 하지만 내 생각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쿵, 쿵하고 뭔가가 배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 문이었다. "뭐, 뭐지?" 나는 깜짝 놀라 이렇게 말했다. 항해가 시작된 후 처음 듣는 소리였다. 쿵쿵거리는 소리는 박자를 타고서 서서히 높아지고 있었다. "놀라지 말게. 저건 상어야." 오브라디 교수가 말했다. "상어가 콧잔등으로 배를 건드리는 것이지. 아마 이 지역이 상어가 사 는 곳인가 보군." "상어가... 뭐죠?" "상어는 바다의 황제지. 바다에서는 상어를 이길 수 있는 자가 없어. 빠른 몸놀림과 억센 이빨, 거기다가 흉폭한 성격까지. 크기는 사람의 다 섯 배이고 몸무게는 여덟 배에 달하지. 이빨 하나의 크기가 아마 어린아 이 손바닥만할 걸세. 그 이빨에 물어 뜯기면 떨어져 나가지 않는 것이 없 지." 오브라디 교수는 어린아이에게 무서운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처럼 과 장된 몸짓을 섞어가면서 말했다. "그런 괴물이 배를 두드리는 데 겁 안 나세요?" 나는 어린아이 취급당하고 있는 게 기분 나쁘긴 했지만 쿵쿵거리는 소 리는 정말 무서웠다. 이런 바다에서 배가 가라앉는다면... 절대로 살아남 을 수 없을테니까. "하하하. 걱정 말게. 이건 공격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영역 밖으로 쫓 아내려는 거니까. 좀 지나면 잠잠해 질 거야." "계속 두드리면 배가 부서지지 않을까요?" "부서지지 않아. 같은 자리를 계속해서 그렇게 두드릴리가 없지. 그리 고 상어는 그렇게 오랫동안 한자리에 있을 수 있는 물고기가 아니거든. 상어는 결코 멈출 수 없어. 내가 알고 있는 바에 따르면 상어는 멈추어 서면 숨을 쉬지 못해서 죽는다고 하더군. 움직이지 않으면 죽는다... 강 함에 따르는 댓가라 할까. 혹은 강자에게만 따르는 숙명이랄까. 어떻게 보면 불쌍한 짐승이지." 오브라디 교수가 이렇게 말해준 덕분에 나는 한 시름 놓았다. 그런데 오브라디 교수는 동물에 대해서 꽤 잘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문득 궁금한 것이 하나 생겼다. "교수님. 하이에나라는 동물이 있나요?" "아, 하이에나. 잘 알고있지. 자네가 동물학에 관심이 있는 줄은 몰랐 는데. 하이에나는 육지의 상어 같은 놈이지. 무식하게 강한 이빨과 턱으 로 뼈 속에 있는 골수까지 마시는 끔찍한 놈이야." 내가 그렇게 무시무시한 녀석이었나? 나는 고개를 갸우뚱해 보았다. 평 화로운 짐승이라고 하더니, 이해가 가질 않았다. "혹시 오로스크라는 짐승에 대해서도 아시나요?" "오로스크? 잘 알고있지. 유명한 오로스크의 노래라는 시가 있지 않은 가. 오로스크, 숲의 조정자. 산이 없는 곳에 모여 산을 만들고, 울창한 숲을 평지로 만드는 대식가. 오로스크, 황금의 이름. 늙으면 자신의 금빛 털을 젊은이에게 물려주지. 오로스크, 타오르는 눈동자. 세상의 모든 비 밀을 알고 있는 오로스크." 예전에 오로스크가 바다를 바라보면서 읊었던 시였다. 본인의 시일 거 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놀랍다는 표정으로 오브라디 교수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오브라디 교수는 내가 자신의 박식함에 놀랐다고 생각하는 모양이 었다. "으흠. 내가 시과 문학에도 좀 소질이 있기는 하지. 하여간 그 오로스 크라는 짐승은 이 시가 전하는 그대로 숲에서 평화롭게 살았던 짐승이었 다네." 오브라디 교수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런데 오로스크는 평화로운 동물은 자신의 이름으로 하고 맹수들의 이름은 다른 사람에게 붙여주는 취미가 있는가 보다 싶었다. "불곰이라는 짐승도 혹시 맹수아닌가요?" "아, 자네. 불곰도 알고 있군. 그렇지. 불곰도 옛날에는 이름깨나 날리 던 맹수였지. 사람의 네 배가 되는 몸집에 몸무게는 여덟 배가 되었다네. 역시 거칠고, 무지막지한 녀석이었다고 하더군. 그런데 자네 어디서 그 동물들 이름을 들었는가?" 그러면 그렇지. 나는 이렇게 생각하면서 그저 오래 전에 길 가던 시인 에게 들었던 동물이름이라고 했다 (아무리 오브라디 교수라고 해도 시인 이 나에게 맹수 이름을 붙여주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놀림 받을 것이 틀림없었으므로). "그렇다면 그 시인은 동물학에 상당한 조예가 있는 시인임이 틀림 없 군." 오브라디 교수의 말에 나는 다시 한 번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희귀한 동물인가보지요?" "아니야. 오로스크도, 하이에나도, 불곰도 이미 오래 전에 멸종된 동물 이거든. 일부 학자들은 전설에만 등장하는 동물이라고도 말하지만 내 조 사 결과에 따르면..." "멸종이 뭔가요?" 멸종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불길한 예감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느 꼈다. 그래서 나는 오브라디 교수의 말을 끊고 물었던 것이다. "간단하게 말해서, 다 죽었다는 말이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아. 이 바 르도 대륙 어디에서도 찾을 수 찾을 수 없지. 아니 혹시 모르지 틀뢴에 가면 아직 남아 있을지도. 틀뢴은 모든 것이 다 있기도 하고, 아무것도 없는 땅이라기도 하니까." 오브라디 교수가 말을 듣고 틀뢴이 뭐냐고 물어보려고 하는데 순간 배 가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오브라디 교수는 파도가 높아졌는가, 하고 중얼거리면서 창밖을 내다보았다. 하지만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지금 배 가 흔들리는 건 화물칸에서 뭔가가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자리 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보게, 수르카. 겁먹지 말게. 지금 바다는 잔잔해. 하늘이 좀 흐린 것 같긴 하지만 말이야. 이 정도 배의 요동도 극복 못하는 선장은 이제껏 아무도 없었다네. 수르카. 수르카 군?" 스타바! 오브라디 교수가 나에게 뭐라고 계속 말을 건냈지만 나에게는 지체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틀림없어. 오로스크야. 나는 흥분으로 숨이 가빠 올랐다. 선상에는 선원들이 돛을 내리고 있었다. 선장은 굳은 얼굴로 선원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바다는 암흑 그 자체였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빌어먹을 안개. 갑자기 이게 무슨 꼴이람." "눈을 가리고 숲을 뛰어가는 편이 낫지. 이건 완전히 아무 것도 보이질 않잖아." "거북이의 저주야. 배를 두드리는 상어 때도 틀림없이 문삼 녀석이 거 북이를 죽여 버렸기 때문이야. 피냄새를 맡았을 거라고." 선원들은 저마다 뭐라고 투덜거리고 있었다. 배를 세울 생각인가. 나는 일단 화물칸으로 내려가는 입구를 찾아보았다. "거기 자폰 무사! 뭐 하고 있는 건가!" 선장이 나에게 다급하게 소리쳤지만 나는 한 마디로 선장의 말을 일축 했다. "벡벡벡벡!" 선장이야 내 등뒤에 감자를 먹였을 지 몰라도 나는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나는 내 기억력이 좋은 것을 천만 다행으로 여기면서 선실 몇 개 를 지나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화물칸 입구에 도착했을 때, 나는 너무 늦지 않았기만을 빌었다. 다행 히 오로스크와 불곰이 격앙된 어조로 다투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나는 일단 달려가 오로스크를 잡아 말렸다. "오로스크. 진정해." 나는 아주 정확하고 또렷한 발음으로 오로스크에게 말했다. 오로스크는 목에 핏줄을 세우고 소리쳤다. 화물칸 안 쪽에서 뮤들의 울음소리가 들려 오고 있었다. "문을 열어야 해!" "나도 그러고 싶다고! 하지만 선장님이 안 된다고 하셨다니까!" 불곰은 억울하다는 듯이 오로스크에게 소리쳤다. 나는 오로스크의 양 어깨에 손을 얹고 말했다. "오로스크. 네 마음은 잘 알아. 하지만 이런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모 두다 죽었으면 좋겠어? 멸종. 그래, 멸종되었으면 좋겠냐고. 그게 네가 생각하는 평화야?" 나는 될 수 있는 한 가장 침착한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하면서 이렇게 또박또박 말했다. 그러자 오로스크의 눈동자가 휘둥그래졌다. "하이에나. 우리말을...?" "어쩌려구 그래? 뮤들을 다 풀어주고 함께 죽자는 건가? 여기 있는 사 람들의 마음은 생각해 봤어? 지금도 선상에서는 선원들이 목숨을 걸고 바 다와 싸우고 있다고!" 물론 목숨을 걸고 싸우고있는 것 같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나는 이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자 풋, 하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면서 오 로스크가 나를 바라보았다. 뮤 울음소리는 어느 사이엔가 더 높아져 있었 다. 뮤들이 몸부림들을 치고 있는지 진동이 느껴졌다. "무슨 소리야? 여기를 환기 시켜야 한다는데." "하지만 선장님이 절대로 이곳 문을 열어서는 안 된다고 하셨어! 배 전 체 균형을 잡는 일이 뮤를 살리는 일 보다 더 중요하다고 하셨단 말이 야!" "전체 균형이라니? 뭘!" "환기통을 열었다가 파도가 높아지는 날이면 끝장이라고! 이 배는!" "파도는 무슨 놈의 파도! 지금 바다는 네 놈 낮잠 잘 때만큼이나 조용 하다고!" 불곰과 오로스크는 나를 완전히 무시하고 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나는 좌우를 살펴본 다음, 오로스크의 어깨에 얹었던 팔을 내려놓았다 (그냥 내려놓기에는 아무래도 어색했다). "난, 몰랐어. 미안." "그만 둬. 자폰 인들은 이렇게 다 음흉한가?" 오로스크가 화를 삭이지 못했는지 나에게로 화살을 돌릴 기세였다. 나 는 어떻게든 화살을 다시 불곰에게 돌려야겠다 싶은 마음에 뭐라고 한 마 디 쏘아주려고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갑자기 배가 좌우로 크게 흔들 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머리 위쪽으로 바쁘게 움직이는 발걸음 소리와 고 함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로스크. 일단 올라가 있자. 무슨 일이 난 모양이야." "그러지. 불곰. 여기서 선장 말이나 잘 들으라고." "그래. 나는 평화로운 사람이니까." 불곰은 숨을 씩씩거리고 있기는 했지만 많이 평정을 되찾은 모습이었 다. 그리고 그건 오로스크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나는 스타바가 걱정 이 되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일단 배 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보는 게 더 중요했다. 스타바. 초록색 연금술사의 등 아래에서 잠들어 있기를. 화물칸 밑바닥에 묶여 있는 스타바의 모습이 눈에 밟혔다. 선상에 오른 우리는 우리는 안개 때문에 바로 눈앞에 있는 상대방도 손 으로 더듬어 찾아야 했다. 화물칸과 복도에는 그나마 연금술사의 등이라 도 켜져 있었지만 선상은 완전히 암흑 그 자체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눈 이 어둠에 익숙해지자 안개너머에서 비추고 있는 희미한 별빛으로 어슴푸 레 선상 위의 풍경이 드러났다. "왜 아무도 없지?" 오로스크가 말했다. 과연 오로스크의 말 그대로 배 위에는 아무도 없었 다. 배는 여전히 좌우로 흔들리고 있었고, 간간이 바닷물이 튀어 올라오 는 걸로 봐서 파도도 있는 모양이었지만 말이다. "글쎄. 그것보다 안개에서 웬 고약한 냄새야?" 나는 코를 쥐어 잡으면서 말했다. 혹시라도 불곰이 환풍구를 열었기 때 문일까 하는 생각이 순간 들었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냄 새가 훨씬 더 지독했기 때문이었다. "오로스크. 그런데 너무 어두운 것 같지 않아? 안개가 이렇게 짙을 리 가 없는데..." "어, 어..." 오로스크는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나는 오로스크를 한 번 처다 보았 다. 그저 멍하니 허공만을 바라보고 있을 뿐, 오로스크의 열린 입에서는 말이 이어지지 않고 있었다. "왜 그래?" 나도 오로스크를 따라 허공을 바라보았지만 내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 지 않았다. 안개 너머로 비치는 두 개의 달빛과 별들을 빼면... 그런데 달이 두 개였나? 나는 눈을 비비고 다시 한 번 허공을 바라보았다. 거대 한 덩어리가 시커먼 몸체를 기울여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저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달이라고 생각한 것은 두 개 의 눈동자였고, 별빛은 그 거대한 무엇의 몸에서 반짝이는 빛이었다. 몸 이 물기로 젖어있구나. 나는 멍하니 거대한 그림자처럼 보이는 그 무엇을 그저 이렇게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다음 순간이었다. "맙소사! 이렇게 쉽게 만나게 되다니! 이건 하늘이 돕는 거야!" 사빈의 목소리였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사빈은 단검을 손에 들고 위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렇다면, 저것이, 지금까지 말로만 들었던, 우리가 그토록 찾았던 용이란 말인가? 나는 그제야 이 고약한 냄새의 정 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마치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안개에 휩싸여 허공만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순간, 누군가 재빠르게 사빈 쪽으로 뛰어갔다. 나는 그게 누구인지도 확인 할 수 없었다. 사빈은 단검을 고쳐 쥐고 전투자세를 취하려는 순간 그 누군가에 의해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아마 사빈의 몸을 덮친 모양 이었다. 나는 사빈이 있는 쪽으로 달려가려고 했다. "쉿!" 흡사 뱀이 혓바닥을 날름거리는 듯한 소리였다. 나는 모든 행동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움직이지 맛!" 이어진 말은 작은 목소리였지만 날카롭게 내 귀를 파고들었다. 나는 소 리가 난 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려보았다. 그곳에는 바닥에 엎드려 있는 선원들의 모습이 보일 듯 말듯 안개 속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PRINTER/CAPTURE를 OFF 하시고 [ENTER] 를 누르십시오.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8898/19898 ━━━━━━━━━━━━━━━━━━━━━━━━━━━━━━━━━━━━━━━━ 제 목:[탐그루] 강철의 오로라 239 관련자료:없음 21/21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4-11 00:02 조회:1550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진짜 용이 나타났구나. 나는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목이 말라왔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이 현기증이 일었다. 죽을 위험을 느껴본 적은 많았지만 이렇게 두려운 적은 없었던 것 같았다. 지금 나는 미지의 존재와 맞서고 있는 것이다. 용은 나를 보고 있을까? 혹시 나를 잡아먹을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것도 아니라면... "사비치! 당신은 스파일 최고의 대마법사 아닙니까? 이 정도 위기도 못 벗어난다는 것이 말이나 될 법한 소리입니까?" 안개 저편에서 문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겁이 없는 건지, 아니면 생 각이 없는 건지. 어떻게 미지의 것을 눈앞에 두고 저렇게 당당하게 소리 칠 수 있는 걸까. 나는 문삼처럼 크게 떠들어야 할지, 아니면 이대로 가 만히 숨을 죽이고 있어야 하는 건지 일순 혼란에 싸였다. 다행스럽게도 나처럼 숨을 죽이고 있는 선원들 덕분에 나는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가 만히 서 있을 수 있는 용기 말이다). 발걸음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어 느 사이 내 옆에는 문삼과 사비치가 자리하고 있었다. 둘은 내 옆에 멈추 어 섰다. "바다의 주인이여,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는가." 사비치가 두 손을 허공을 향해 뻗으며 이렇게 물었다. 근엄한 목소리였 다. 나는 겨우겨우 마음을 달래며 후들거리는 다리를 진정시키고 있었지 만, 아마 문삼이나 사비치는 나에게 신경을 거의 쓰고 있지 않은 듯 했 다. 어둠 때문에 잘 드러나지는 않고 있었지만 아마 두 사람의 표정은 긴 장으로 경직되어 있을 것이 분명했다. "사, 사비치 님. 대, 대답이 없는데요?" 당당하던 목소리로 소리쳤던 문삼은 어느 새 말을 더듬고 있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거대한 그림자를 눈앞에서 마주하게 되니 멀리서 큰소리 칠 때의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모양이었다. "무엇을 원하는가!" 사비치가 목소리를 높여서 다시 한 번 물었다. 하지만 용(인지 아닌지 도 분명하지 않지만)은 여전히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젠장, 뭘 원하는지 알아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 여기 이 용사냥꾼 사 빈이 있다구, 놔! 이거 놔!" 좀 전에 단검을 들고 용과 맞섰던 사빈의 목소리였다. 곧 이어 선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 단검으로 용을 잡으려면 천 년은 걸리겠다. 늙어 죽고 싶지 않으니 까 조용히 하고 있어!" 아무래도 지금 상황과는 별로 맞지 않는 대화인 듯 싶었다. 사비치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사빈 쪽을 한 번 노려보고는 다시 위를 바라보았다. "무엇을 원하는가!" 사비치의 이번 물음에는 확실한 응답이 있었다. 용은 사비치의 물음이 끝나기도 전에 표효 하면서 몸을 꿈틀거렸다. 나는 소리로도 뱃속이 울린 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용의 울음소리는 내 뱃속을 공명시키며 요동치게 만들었다. 나는 뒤로 벌렁 나자빠지고 말았다. 언뜻 양손으로 귀를 틀어 막고 있는 선원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용의 울음소리는 거대한 쇠붙이 끼리 부딪치는 소리 같기도 했고, 넓은 평원 한 가운데에 있는 암반지대 에 운석이라도 한 무리 떨어지는 소리 같기도 했다. 나는 안개 너머로 몸 부림치는 용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또렸하지는 않았지만 그 윤곽은 알 아볼 수 있었다. 용은 두개의 거대한 날개를 가지고 있었고, 날개와 몸에 비해 기형적으로 작아 보이는 앞발을 흔들고 있었다. 용의 표효가 끝나자 갑작스럽게 정적이 찾아왔다. 나는 표효를 듣는 것 이상으로 정적도 괴롭고 견디기 어렵다는 것도 깨달았다. 이명 때문만은 아니었다. 너무도 고요해서 견디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누구라도 뭐라고 말을 꺼내면 좋겠는데. 나는 침묵을 참기가 힘들었다. 그때였다. 화물칸으로 통하는 입구의 문이 거칠게 열리면서 불곰이 튀 어나온 것은. "모, 모두 도망쳐! 이제..." 불곰이 말을 다 끝맺기도 전에 바람이 불어닥쳤다. 나는 내가 오한 때 문에 바람을 지나치게 강하다고 착각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바람은 이내 곧 자리에 서 있기가 힘들 지경으로 강해졌다. 바닷물이 얼굴에 튀 었다. 찝찔한 것이 입안으로 흘러 들어오자, 나는 혹시 이게 피가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들었다. "뮤, 뮤들이... 줄을 끊었어!" 나는 그 와중에도 불곰의 마지막 말만은 확실히 들을 수 있었다. 이제 배가 가라앉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선원들도 그걸 깨달았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선상은 아수라장이 되었 다. "침착해라! 모두 자기 위치로! 돛을 잃어선 안 된다!" 선장이 목이 터져라 소리쳤지만 선원들은 혼란상태였다. 돛이라는 말에 나는 선상에 등을 대고 있는 채로 고개를 들어 돛대를 바라보았다. 돛은 찢어질 듯 팽팽하게 부풀어올라 있었다. 배가 가라앉고 있는 걸까? 하지 만 선원들이 워낙 아우성을 치고 있는 데다가, 너무도 배가 심하게 흔들 리고 있어서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입안에 찝찔하지 않은, 비릿한 물이 들어왔다. 비마저 내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거북이의 저주야! 우린 다 죽어!" "문삼, 저 놈을 물에 쳐 넣어! 그래야 바다가 잠잠해 질 거야!" "구명선 빨리 내려! 물에 빠졌다가는 그대로 상어 밥이야!" 선장은 계속해서 선원들을 향해 고함을 질러대고 있었고, 혼란의 와중 에서도 누군가는 구명선을 내리려고 하고 있었고, 누군가는 몸을 웅크리 고 앉아서 벌벌 떨고 있었고, 또 누군가는 살아야겠다는 일념인지 죽어야 겠다는 일념인지 바닷속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사방에서 파도가 으르렁거 리면서 우리를 집어삼키고 있었고, 이미 몇몇은 저 깊은 바다 속으로 영 원히 사라져 버렸다. "수르카! 수르카!"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좌우를 살폈지만 도저히 어 디에서 들려오는 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때, 다시 한 번 배가 심하 게 흔들리면서 선상으로 파도가 들이닥쳤다. 나는 그 물을 고스란히 다 몸으로 받아내고 말았다. 하마터면 물에 휩쓸려 물고기 밥 신세가 될 뻔 한 다음에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날 부르는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아낼 생각을 하게 되었다. "수르카!" 오브라디 교수가 간신히 내 양어깨에 손을 얹고 몸을 지탱하고서 말했 다. 비 때문인지 파도 때문인지 오브라디 교수 역시 온몸이 흠뻑 젖어 있 었다. "이제 배는 포기해야겠다. 하지만 우리의 모험은 결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우리가 포기한 건 배지 아모리카 탐사가 아니야!" "배를 포기하는 건 좋은데, 무슨 수로 배에서 내릴 거지요?" "지금부터 그 방법을 찾아 볼 참이다." 내 다급한 질문에 오브라디 교수는 너무나도 태연하게 이렇게 대답했 다. 비에 홀딱 젖어버린 오브라디 교수의 모습은 마치 집 없는 부랑자 노 인처럼 보여서 불쌍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바로 저 모습이 지금의 나의 모습과 별반 다를 것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망할. 잡을 수 있었어. 진짜로 잡을 수 있었단 말이야." 사빈이 분한 듯 소리치고 있었고, 그 옆으로 크라이와 마로우의 모습도 보였다. 다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는 듯했다. 그때였다. "이봐, 하이에나! 나하고 함께 화물칸으로 가자! 어떻게든 막아야지! 지금은 배가 움직이고 있으니까 별 일 없지만 속도가 떨어지면 뮤 때문에 배는 침몰하고 말 거야!" 오로스크가 나에게 소리를 질렀다. "알았어! 그것보다 비 맞아서 죽느니 뮤에 걷어 차여서 죽는 게 낫겠 어! 빨리 내려가자구!" 나는 자폰 인 행세를 더 이상 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렇게 태연한 척 말했다. 얼굴에 묻혀 놓았던 검정은 빗물에 완전히 지워 졌을 게 분명했다. 정신없이 화물칸으로 내려갔을 때, 우리는 어떻게 뮤를 잠재워야 할지 막막했다. 뮤들이 날뛰고 있다는 건 문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문은 뮤들 의 발길질 때문에 당장이라도 박살이 나버릴 듯 했다. 이 두꺼운 문이 이 런데 벽면인들 온전할 리가 없었다. "어떻게 뮤들이 밧줄을 풀 수 있었을까?" "용의 영향 때문이겠지, 하이에나." 오로스크의 말은 잘 모르겠다는 말이나 마찬가지 였다. 비록 모습을 드 러냈다고는 하지만 용은 여전히 미지의 존재니까. "수르카 님!"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서 오로스크의 얼굴만 빤히 바라보고 있는데 통로 쪽에서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스칼렛이었다. 스칼렛 역시 흠뻑 젖어있었다. 나는 뺨에 달라붙어 있는 머리카락을 바라보면서 한가닥 희 망을 걸어보았다. "너 이름이 수르카였냐?" "오로스크. 지금 그런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스칼렛. 뮤들을 진정시킬 수 있는 마법을 쓸 수 있어요?" 스칼렛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오로스크는 문의 손잡이를 잡은 뒤 서 로 눈짓으로 신호를 교환했다. 문이 열렸고, 스칼렛은 마법의 말을 외쳤 다. "피는* 불타는* 물*" 예전에 임프 시의 유적지에서 박쥐를 잠재울 때 썼던 마법의 말이었다. 스칼렛이 마법의 말을 외우자 뮤들은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화물칸 안은 완전한 암흑이었다. 초록색 연금술사의 등이 모두 꺼져버린 탓에 뮤들이 깨어난 것인지, 용의 출현에 영향을 받은 뮤들이 깨어나 아우성을 쳐서 연금술사의 등이 꺼진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대단한 걸. 훌륭한 마법의 말이야." 오로스크가 입구에서 뛰쳐나오다가 잠든 뮤를 바라보면서 감탄했다. 뮤 는 서서 잠드는 동물이었지만 내 앞에 잠든 뮤는 쓰러져 있었다. 뮤는 그 특유의 멍청해 보이는 얼굴에 더해 입까지 헤 벌리고 있었다. 나는 잘 알 고 있었다. 뮤가 이런 상태에 있을 때 얼마나 비참한가를. 또한 그런 경 험 후에 정신을 차리고 나면 자존심 강한 뮤가 어떤 행동을 하게 될지를. "스칼렛. 나는 스타바를 찾아야 해요."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여기서요? 그건 불가능해요. 저렇게 어두운데 어떻게..." 하지만 나는 스타바를 찾아야만 했다. 지금껏 이 어둡고 공기 나쁜 곳 에서 버티고 있었을 스타바를 배가 흔들리고 어둡다는 이유만으로 외면할 수는 없었다. "스타바!" 나는 소리쳤다. 하지만 내가 소리친다고 해서 스타바의 귀에 내 목소리 가 들릴 리가 없었다. "스타바! 스타바!" 내가 소리친 게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배가 심하게 요동을 치기 시작했 다. 어찌나 흔들림이 심했는지 나는 양쪽의 벽에 차례로 부딪히곤 했다. "육지에 닿은 모양이에요." "아직은 바람이 있으니 육지를 스쳐가던지 아니면 배가 부서지던지 둘 중에 하나야. 사비치의 마법으로 보호되고 있으니 쉽게 부서지지는 않을 테고 아마 이대로 흔들리면서 지나쳐가겠지. 수르카! 시간이 없어!" "잠깐. 뮤가 배를 부수는 건 마법으로 못 막나?" 나는 스타바를 깨울 방법을 찾다가 이렇게 오로스크에게 물었다. 지푸 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 "막을 수 있으면 뭐하러 뮤들을 잠재웠겠어? 빨리! 육지를 스쳐지나가 기 전에 배에서 내려야 해!" 오로스크는 당장이라도 달려나갈 기세로 이렇게 소리쳤다. "수르카 님. 이분 말씀이 맞아요. 빨리요." 스칼렛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깨달았다. 하지 만...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는 스타바와 함 께 나가야만 한다. 나는 마법의 말을 떠올려 보았다. 스타바를 부를 수 있는 마법의 말을. 하지만 내가 오로스크에게서 들었던 말은 아직 마법의 말로 바꾸지 못한 상태였다. "어서!" 오로스크는 결국 먼저 나가버리고 말았다. 스칼렛은 불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때 다시 한 번 배가 요동을 쳤고, 스칼렛은 쓰 러질 듯 몸을 휘청이다가 내 쪽으로 몸을 맡겨버렸다. 스칼렛의 몸이 내 주머니에 닿았다. 딱딱한 감촉이 느껴졌다. "그래. 용이야!" "수르카 님. 용은 지금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도 않는다고요." "아냐. 내 말은 그게 아니야." 나는 이렇게 스칼렛의 말을 부정한 뒤 마법의 말을 외웠다. "걱정* 말거라* 둘은* 꼭*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스타바*" 로스안에서 배를 몰고 나가던 노인이 했던 마법의 말이었다. 나는 이 마법의 말이 스타바의 마음에 닿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스칼렛의 팔을 잡 았다. "어서 나가요!" 나는 스칼렛과 함께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이것은 일종의 시험인 지도 모른다. 내가 스타바를 아끼는 마음이 스타바에게 닿지 않는다면 그 건 그 자체로 내가 스타바를 위하는 마음이 없다는 말이 될 것이었다. 비는 이제 폭우로 바뀌어 있었다. 나는 팔을 만져 보았다. 추위 때문에 몸에 감각이 남아있지 않았다. 팔이 아니라 딱딱한 무슨 덩어리가 내 몸 에 달라붙어 있는 느낌이었다. 다음 순간 나는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 고, 스칼렛은 내 몸을 방석 삼아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나는 갑판을 바라보았다. 갑판은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살얼음이었다. 어떻게 비가 오는데 얼음이 낄 수 있을까. 그나마 몸을 움직일 수 있는 건 뛰었기 때 문인 것 같았다. "육지야! 수르카! 뛰어!" 마로우가 나에게 소리쳤다. 나는 마로우를 바라보았다. 마로우는 갑판 끄트머리에서 이렇게 소리치고는 그대로 몸을 날려 배 밖으로 뛰어 내렸 다. 스칼렛은 나보다 먼저 일어나 나를 일으켜 세워주었다. 평소의 스칼 렛 같았다면 틀림없이 사과했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그럴 여유가 없었다. 나는 밑을 바라보지 않았다. 밑을 봤다가는 뛰어내릴 엄두가 나지 않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잘못 뛰어내렸다가는 다리 하나쯤 부러질 수 도 있었다. 게다가 몸도 굳어 있으니 다리가 아니더라도 어디 뼈 하나 부 러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빨리 뛰어내 리는 쪽을 택했다. 이대로 배에 있다가 죽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머리 먼저 땅에 떨어지게 된다면 목이 부러질 가능성도 충분히 있 었지만 말이다). 나는 스칼렛에게 이끌려 그대로 배에서 뛰어내렸다. 물론 창피할 정도 로 크게 소리를 질러대면서. 스칼렛과 내가 지면에 떨어지자마자 산이 무 너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쓰러진 채 고개를 돌려보니 배의 측면이 지면 에 부딪혀 크게 부서지면서 난 소리였다. 배는 크게 기우뚱하더니 한쪽으 로 기울고 있었다. 배는 그런 상태에서도 완전히 부서지진 않고 위태롭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침몰하는 건 시간문제일 것 같았다. 저절로 안 도의 한숨이 나왔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8949/19898 ━━━━━━━━━━━━━━━━━━━━━━━━━━━━━━━━━━━━━━━━ 제 목:[탐그루] 강철의 오로라 240 관련자료:없음 21/21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4-12 00:54 조회:1459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마땅히 딱딱한 지면이 몸에 와닿는 충격이 느껴질 줄 알았다. 하지만 내가 느낀 것은 지면보다는 훨씬 부드러운,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편하 다고는 할 수 없는 충격이었다. 처음에 나는 몸이 굳어서 뼈가 부러진 걸 느끼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나는 팔다리를 더듬어 보았다. 뼈가 부러진 것 같지는 않았다. "수르카. 괜찮아?" 사빈의 목소리였다. 나는 눈을 떠보았다. 나는 허공으로 떠오르고 있었 다. 그것도 사빈과 함께. "어떻게 하면 그렇게 등부터 땅에 떨어질 수 있나? 용감한 건지, 무식 한 건지...." 오브라디 교수가 나를 보고 말했다. 나는 어떻게 일이 돌아가고 있는지 좌우를 살펴보았다. 사방이 온통 백색이었다. 나는 허공을 바라보았다. 하늘에서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하늘로 날아가고 있다 는 착각을 했던 것이다. "저, 저것 좀 봐..." 우리와 같은 곳에 떨어진 선원 하나가 배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말 했다. 배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거센 빗줄기가 배를 뒤쫓아가 고 있었다. "저주야... 이건 저주야... " 누군가가 탄식처럼 내뱉었다. 정말 저주일까? 나는 배에만 쏟아지고 있 는 빗줄기와 내가 있는 곳에 내리고 있는 눈송이 사이에서 혼란을 느꼈 다.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저런 일도 간혹 있긴 하다고 하더군. 흔한 일은 아니지만 말일세." "배를 비가 따라가는 일 말인가요?" "아니. 배가 이렇게 어이없이 조난당하는 일 말일세, 마로우 군." 오브라디 교수의 표정을 보아하니 오브라디 교수도 지금 눈앞에서 일어 나는 일을 믿기 어려운 듯했다. "육지인가? 그런데 여기는 왜 다 얼음이지?" 선원 하나가 이렇게 말했다. 순간 쩍하는 소리와 함께 군데군데 땅이 꺼지면서 여기저기가 갈라져 나갔다. "지진... 인가?" 오브라디 교수가 침착해지려고 애쓰며 또박또박 말을 끊어서 했다. "아닙니다." 언제 왔는지 크라이도 주변에 있었다. 크라이는 여전히 그레텔을 안고 있었다. "빙산입니다." 크라이는 그건 당연한 게 아니겠느냐는 투로 말하고 있었다. "빙산이라니?" "북쪽의 빙하지대에서 바다로 밀려나온 얼음 덩어리들을 말하는 거잖 아. 이곳이 바로 빙하지대야." 크라이의 말에 마로우도 마치 알고있었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 그러 고 보니 사방은 온통 바다였다. 마치 바다 한 가운데에 얼음으로 만든 뗏 목을 타고 앉아 있는 듯했다. "그런데 이거 너무 평평하구만. 북쪽의 빙산은 평평한 모양이 많고, 남 쪽의 빙산은 뾰족한 것이 많다고 알고는 있었지만, 이거 눈으로 확인하니 정말 신기하구만. 이게 진짜 살아 있는 생생한 연구라는 거겠지..." 오브라디 교수는 신기한지 여기 저기 걸음을 옮겨보면서 말했다. "하얀 빙하 위의 용... 우리가 본 건 사실이었어." 사빈이 우리가 지나온 쪽을 아쉽다는 듯이 바라보면서 말했다. 단검 하 나로 용에게 달려들려고 했던 사빈이니 그럴만도 하지. 배는 여전히 기울어진 채 몸체를 표류하고 있는 크고 작은 빙산들에 부 딪치면서 서서히 북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바람은 어느새 잔잔해졌다. 배 는 해류를 따라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모양이었다. 배의 머릿 부분이 안 갯 속으로 사라질 즈음이었다. 배 옆에 나있는 환풍구를 통해 몸을 날리 는 뮤 한마리가 있었다. 나는 그 뮤의 이름을 알 수 있었다. "스타바!" 스타바는 바다로 떨어졌다. 나는 황급히 빙산의 끝으로 뛰어 갔다. "스타바! 여기야. 여기라구." "뮤우 - 뮤우 - ." 스타바는 나를 발견했는지 필사적으로 헤엄치면서 내가 있는 빙산 쪽으 로 헤엄쳐왔다. "스타바. 힘내. 조금만, 조금만 더. 자, 그래. 그래. 어서 이리로." "뮤뮤뮤 - 뮤뮤 -." 내가 서 있는 빙산에 가까이 온 스타바가 물 밖으로 목만 내민 채 이렇 게 울음소리를 내었다. 나는 성급하게 스타바의 목을 끌어안고 빙산 위로 끄집어내려고 했지만 내 힘만으로 스타바를 끌어올리기에는 역부족이었 다. "으차." 크라이였다. 크라이는 조심스럽게 스타바의 앞발을 하나 씩 빙산 위에 올려놓은 다음에 목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스타바는 쉽게 몸을 빙산 위로 올릴 수 있었다. 나는 크라이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려고 했지만 크라이 는 스타바가 뒷발을 올려놓는 걸 보자마자 내 팔을 거의 잡아끌듯이 하여 빙산의 중앙으로 향했다. "아까 빙산이 갈라지는 거 봤지? 자칫하다가는 몇 조각으로 더 갈라질 지 몰라." 크라이는 이렇게 말하고는 조심스럽게 자리를 잡아 앉았다. 그렇구나. 그런데 더 갈라지게 된다면...? "오브라디 교수님. 그럼 이 빙산이 한 번 정도 더 갈라지면 완전히 물 속으로 가라앉게 되지 않을까요?" 나는 빙산이 생각했던 것 보다 그다지 넓지 않다는 점에 불안해하면서 말했다 (처음엔 육지라고 생각했으니 좁게 느끼는 것도 당연했다). "보통 빙산은 위에 드러난 곳보다 바다 속에 잠겨 있는 부분이 여덟 배 정도 더 크다네 그러니 걱정하지 말라구. 수르카 군." 오브라디 교수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위를 둘러보니 어두워 서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아마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 대부분이 이 빙산에 올랐을 것 같았다. "이 정도 배가 흔들리는 것도 극복 못하는 선장은 없다면서요." 나는 숨을 돌리게 되자 불평하는 투로 오브라디 교수에게 나는 이렇게 말했다. "하필이면 오늘 그 기록이 깨질게 뭔가?" 멋적다는 듯이 뒷머리를 긁적이면서 오브라디 교수가 말했다. 이제 배 는 완전히 안개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배에 쏟아지던 빗줄기도 눈발로 바뀌고 있었다. 그때였다. 나는 선미에 서서 이곳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 의 그림자를 볼 수 있었다. "아직... 내리지 못한 사람도 있어요." 내 입에서는 신음소리와도 같이 이런 말이 터져 나왔다. "내리지 못한 게 아니야. 내리지 않은 거지." 크라이가 배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바람이 잠들어감에 따라 눈발은 점 점 더 거세어지는 듯 했다. "선장은 배와 운명을 같이 하는 법이라네. 이제 선장은 마지막 항해를 떠나는구만." 오브라디 교수가 배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안개와 눈발 때문에 그리 멀 리 떨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배의 모습은 해가 지는 것만큼이나 빨 리 사라져 가고 있었다. 마지막 항해. 오브라디 교수의 마지막 항해라는 말이 오랫동안 귓가를 맴돌았다. "수르카 님. 몸을 녹여야 해요." 멍하니 사라져 가는 배를 바라보고만 있는데 스칼렛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옷이 살에 거의 달라붙어서 얼어붙고 있었다. 손끝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이런 곳에서 몸이 젖는다는 건 말 그대로 죽음을 뜻하는 거야. 스타바 도 마찬가지고." 크라이는 이렇게 말하면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그러고 보니 크라이의 몸에는 별로 물기가 없어 보였다. 몸이 얼어붙는지 몸을 가누기가 힘이 들었다. "수르카 님. 몸에 힘을 빼세요." 스칼렛이 말했다. 나는 스칼렛의 말대로 몸에 힘을 빼려고 했지만 이빨 이 딱딱 부딪쳐 오고 있는데 힘을 뺀다는 건 무리였다. 스칼렛은 잠시 생 각하는 표정을 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피는* 불*" 스칼렛이 아름다운 몸짓과 함께 마법의 말을 말하자 순간 나는 불덩이 에 휩싸인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온 몸에서 연기가 뿜어져 올랐다. 연기는 이내 안개와 함께 녹아 내 자신이 안개로 변해버린 듯 했다. 갑자기 현기 증이 이는가 싶더니 나는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얼마나 정신을 잃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내가 눈을 떴을 때는 햇 살에 눈이 부셔서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정신을 잃었을 때 날씨가 좋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바다에 나온 후에 날씨가 좋지 않았던 것은 처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나는 옷가지들과 지푸라기 로 만들어진 깔개 위에 누워 있었다. 옷과 머리는 바짝 말라 있었고, 목 이 말라서 죽을 지경이었다. 나는 잡히는 대로 눈덩이를 집에 입에 밀어 넣었다. 마른 입술에 물이 닿자 좀 살것같은 기분이 되었다. "...그러니까 빙산을 녹이는 걸세." "오브라디 교수님. 그러다가 이 빙산을 잃으면 어떻게 합니까?" "마로우 군. 내가 말하지 않았나? 빙산은 보이는 것의 여덟 배가 물 속 에 잠겨있다고? 걱정하지 말게나." "그렇다면 방향은 어떻게 잡습니까? 이 망망대해 어디에 기준을 잡죠? 별이 뜬다면 또 모를까..." 뭔가 토론이 붙은 모양이었다. 나는 몸을 일으켜 세워보았다. 추위에 많이 노출된 것 치고는 움직이는 게 그리 어렵지 않았다 (현기증과 절룩 이는 걸음걸이만 뺀다면). "사빈. 자네는 뱃사람이었으면서 이런 것도 모르나?" 오브라디 교수는 남방벌레를 꺼내 사빈에게 보여주었다. "서쪽으로 가는 거야." "잘 못하면 바바 족의 영역 한 가운데로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여기 얼음 위에서 굶어 죽는 걸 기다리 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 않겠는가, 마로우 군?" 오브라디 교수의 말에 마로우는 수긍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수르카. 정신이 드나 보군." 오로스크였다. 오로스크를 보자 반갑다는 생각이 들어야 했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 옆에 서 있는 문삼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누군가 했더니 마법사 님이셨군요. 자폰 인으로 귀화하신 줄은 몰랐습 니다만. 반갑습니다." 문삼은 정말 재주가 있었다. 반갑다는 말을 저렇게 반갑지 않은 듯한 말투로 말 할 수 있는 재주 말이다. "자네 거의 죽을 뻔했어. 실제로 죽은 사람도 몇 있다네." 오로스크는 이렇게 말하면서 턱으로 빙산의 가장자리를 가리켰다. 눈덩 이가 봉긋 솟아 있는 게 여럿 눈에 띄었다. 아마 바다에 버리면 상어가 ㄳ아올지 몰라 가매장을 한 모양이었다. "스타바는...?" 무덤을 보자 스타바가 걱정됐다. "잘 있으니까 걱정 말게." "이봐. 자네, 그렇게 쓸데없는 잡담 할 시간 있으면 이곳에서의 내 행 적이나 한 줄 더 적는 게 어떤가. 아주 아름답게." 문삼이 거들먹거리면서 말했다. '아름답게'라는 말의 의미를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오로스크는 잠시 문삼을 빤히 바라보더니 별 수 없다는 듯 체념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네.알겠습니다." "잠깐만요. 배는 어떻게 되었나요?" 나는 오로스크에게 이렇게 물었다. "멀리 갔어." 오로스크가 대답했다. 대답하는 오로스크의 표정에서 나는 사람들이 배 가 보이지 않게 된 것이 그저 시야 밖으로 배가 사라진 것이라고 생각하 기로 마음먹었을 뿐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오브라디 교수의 지휘하에 빙산은 항해 아닌 항해를 시작하였다. 살아 남은 선원들이 자포자기한 표정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사비치와 스칼렛이 마법으로 빙산을 녹이는 광경은 볼 만 했다. "말한 그대로 빙산의 동편을 녹이기는 하네만 빙산이 얼마나 방향을 틀 지는 미지수로군." 사비치가 오브라디 교수에게 말했다. 하지만 오브라디 교수는 다 잘 될 거라는 듯이 껄껄 웃기만 할뿐이었다. 나는 오브라디 교수의 웃음이 아무 래도 가식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분명 사비치와 모종의 거래 가 있었을 거라는 걸 짐작은 할 수 있었지만 분명하지는 않았다. 식량이 떨어지자 선원들은 옷가지와 밧줄 몇 개, 그리고 품에 넣어둔 쇳조각 약간으로 낚싯대를 만들어 물고기를 잡았다. 나도 선원들 흉내를 내어 물고기를 잡아보려고 했지만 나는 통 잡히질 않았다. 나머지 사람들 은 빙산 위에 쌓여있는 눈덩이들을 다듬어 집을 만들고 있었다. "눈으로 집을 만들면 의외로 따뜻하지. 눈이 바람을 막아줄 뿐만 아니 라 눈집 안쪽의 더운 기운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거든." "집 하나에 다섯 사람 이상 들어가서는 안됩니다. 다섯 명이 넘어가면 다섯 명이 내쉬는 숨 때문에 눈집이 녹을지도 몰라요." 마로우가 오브라디 교수의 말에 뒤이어 이렇게 말했다. 우리끼리였을 때는 저렇게 말만하면서 일은 안 하는 게 통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마로우는 선원들에게 군밤을 몇 대 얻어맞은 뒤에 눈집 만드는 일을 함께 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8950/19898 ━━━━━━━━━━━━━━━━━━━━━━━━━━━━━━━━━━━━━━━━ 제 목:[탐그루] 강철의 오로라 241 관련자료:없음 19/19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4-12 00:54 조회:1371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빙산 위에서의 항해 아닌 항해는 이렇게 해서 며칠이나 계속되었다. 모 두들 얼마가 걸릴지 모르는 항해에 음식을 조금씩 숨겨두기도 했고, 또 그 사실이 발각되어 몰매를 맞는 사람도 나왔다. 빙산의 한 복판에 지어 진 눈집에서 보내는 밤은 정말 고역이었다. 해가 뜨기만을 바라면서 서로 를 부둥켜안고 있는 일은 서로가 서로를 안쓰럽게 여기게 만들기에 충분 했다. 그리고 몸이 좀 녹을 만 하면 항상 오줌이 마려웠다. 물도 거의 마 시지 않고 있는데 왜 오줌이 마려운지는 알 수 없었다. 하여간 한 밤중에 느끼는 이 기분이야말로 가장 귀찮고 싫은 일이었다. 심지어는 눈집밖으 로 나가는 일이 무섭고 싫어 그냥 오줌을 싸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꼭 좋지 않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한 번은 다른 빙산이 멀리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본 적도 있었다. 그 빙산 위에는 난생처음 보는 시커먼 새 때가 서 있었는데, 꼭 물고기와 새의 중간쯤 되는 동물인 것 같았다. "펭귄이라는 동물이지. 북쪽 빙하지대에서만 사는 동물이야. 날개 대신 지느러미가 있고 서서 알을 품는 이상한 동물이라네. 펭귄이 새냐 물고기 냐를 놓고 말들이 많았네만 결국 새라는 쪽으로 결론이 났던 것으로 기억 되네. 부리가 있다는 게 결정적이었다지, 아마." 빙산 위에 서서 뒤뚱거리면서 움직이는 물고기 같은 새의 모습은 이곳 이 바르도 대륙이 아니라 먼 별천지임을 보여주는 것 같 같았다. 빙산으로 바다 위를 여행하는 우리들에게 가장 견디기 어려운 점은 도 저히 먼 곳을 관측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용이 나타났던 날 밤 우리가 마주쳤던 안개는 이제 북쪽 바다에 들어섰다는 징조였던 것이다. 바르도 대륙사람들은 이쪽 바다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했다. 이곳이 그저 빙하 지대라는 것만을 알고 있었는데, 실은 빙하보다 안개가 항해를 어렵게 만 드는 요소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늘 안개가 끼어있다면 시계는 당연히 줄어들 것이고, 또한 언제 어디서 빙산이 나타날 지 모르기 때문 에 선장으로서는 항해하기 여간 난처하지 않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만 약 오브라디 교수가 준비한 남방벌레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바다 한 복판 에서 길을 잃고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해가 떠도 안개가 사라지지 않는다니, 이상한 일이로구만. 이 상한 일이야." 오브라디 교수는 턱을 쓰다듬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혹시 이 안개는 인위적인 것이 아닐까요?" "마로우 군. 내가 알기로 바다에서의 안개는 따뜻한 물과 찬물이 교차 하는 지역에서 자주 일어나는 것으로 알고 있다네. 물이 끓으면 김이 나 오지 않는가? 마찬가지 이유로 따뜻한 물위에 떠다니던 바람이 찬 물 위 를 지나면 바람은 안개로 변하곤 한다네. 아마 우리가 지나는 길이 그런 두 가지 성질의 물이 교차하는 지역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네만."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오랫동안 안개가 있는 곳을 지난 다는 것이 말 이 됩니까? 저는 아무래도 인위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용이야." 사빈이 말했다. 사빈의 눈동자가 예리하게 번득였다. "이건 용이 만드는 거라고. 젠장! 내가 그때 녀석의 목을 베기만 했어 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이건 인위적인 게 아니라 용위적인 일이야!" 사빈은 흥분해서 떠들어댔지만 이제는 사빈이 뭘 하건 그렇게 신경 쓰 는 사람이 많지는 않은 편이었다. 즉, 다시 말해 사빈이 흥분한다고 해서 걱정하거나 그 사실에 의미를 두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말이다. 시간이 지나자 빙산의 가장자리가 녹아 임시로 묻어두었던 시체가 드러 났다. 선원들은 시체들을 다시 가매장하는 작업을 했고, 오브라디 교수는 그 사실을 이렇게 설명했다. "빙산이 작아지고 있다는 건 육지가 가까워 오기 때문일세. 이제 조금 만 더 버티면 될 걸세." 오브라디 교수의 툭 튀어나온 배는 어느 사이 눈에 띄게 줄어들어 있었 다. 오브라디 교수의 배가 육지가 가까워졌기 때문에 줄어든 게 아닌 것 처럼 빙산이 줄어든 것도 단지 마법이 지속적으로 효과를 내고 있었기 때 문이라는 걸 모를 사람은 없었지만, 아무도 오브라디 교수의 말에 뭐라고 덧붙이지 않았다. 그럴 힘도 없었을 뿐 아니라, 마지막 남은 희망마저 저 버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비치와 문삼은 같은 눈집에서 생활했다. 두 사람은 늘 뭔가를 토론하 고 있었고, 어떨 때는 의견 대립을 보이기도 했지만 대개의 경우 결론은 '기다리자'는 쪽으로 나는 것 같았다. 나중에 오로스크에게 무슨 얘기를 저렇게 나누고있느냐는 질문을 던져 본 적이 있었는데, 오로스크 말이 사 비치는 직접 소통을 통해 바바 족의 영역에 먼저 도착해 있는 사람에게 배가 조난 당했다는 사실을 전하려고 노력 중이라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듣자 마자 오로스크와 함께 눈집으로 돌아와 일행 모두에게 그 소식을 전 했다. "그럼 녀석들에게, 우리가, 구조될 지도 모른다는 거야?" 희망을 가지라고 한 말이었는데 사빈은 영 탐탁지 않은 모양이었다. 인 상을 벅벅 쓰면서 이렇게 거의 화를 내다시피 나에게 말했다.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가?" "오브라디 교수 님. 바바 족 녀석들은 우리의 원수입니다. 우리의 부모 와 우리의 형제를 죽이고 그 창자를 꺼내 줄넘기를 하는 녀석들이라고요. 이 사빈, 얼어죽는 한이 있어도..." "그럼 바바 족 사람들이 왔을 때 그냥 빙산에 남아 있으면 되겠군. 혼잣말처럼 마로우가 말했다. 사빈은 그 말에 당장 대꾸할 듯이 숨을 들이쉬었다가 허공을 바라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숨쉬지마. 집 줄어들어." 크라이의 말에 모두들 웃음을 터트렸다. 크라이는 무슨 말이건 지나치 게 심각하게 말을 해서 꼭 농담처럼 들리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본인은 그걸 재주라고 생각하지는 않는 모양이었지만. "사빈. 부모와 형제가 바바 족에게 죽었다고 했지? 그건 바바 족도 마 찬가지라네. 내가 말하지 않았는가. 입장을 바꾸어서 생각해 봐야 한다 고." 오브라디 교수는 웃으면서 사빈에게 이렇게 말했지만 사빈은 그런 말을 한다는 자체가 마음에 전혀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사빈의 표정은 이제는 아주 흙빛으로 변해있었다. "... 머리로는 그렇게 되도 여기가 따라주지 않는 사람도 있는 법이지 요." 오로스크가 가슴을 손으로 두드리면서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일리가 있 는 말이었다. 튜니티도 바리바, 루크와 함께 떠나던 날, 그런 맥락의 이 야기를 했던 기억이 났다. 실제로 부모와 형제를 잃은 사람은 결코 그 사 실을 잊을 수 없을 것이었다. 아무리 입장을 바꾸어 생각을 해 보고, 바 바 족 수 천 명의 목을 벤다고 해도 그 사실은 지워질 리가 없었다. "교수님. 그렇다면 머리와 가슴은 다른 곳인가요?" 나는 다소 엉뚱하게 들릴 수도 있는 이런 질문을 오브라디 교수에게 던 졌다. 오브라디 교수는 내 질문에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다음 이렇게 말했다. "그래. 그 문제 또한 오랫동안 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되었던 것이지. 같은 사람의 몸인데 머리와 가슴은 자주 일치하지 않거든. 어떤 사람은 머리가 앞서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가슴이 앞서기도 하지. 많은 학자 들이 이 두 가지 중에 어떤 것이 중요한가, 혹은 두 가지 중에 어떤 것을 먼저 생각하면서 살아야 하는가를 가지고 고민했다네." "어떻게 결론이 났나요?" 스칼렛이 눈을 반짝이면서 물었다. 스칼렛은 평소에는 이런 문제에 별 로 관심이 없는 듯 보이다가도 이렇게 가끔씩 흥미를 보이곤 했다. "스칼렛 양. 이런 일에 결론이 나는 일은 극히 드물답니다. 특히 이런 철학적인 문제에서는 말이지요. 결론이 났다고 해도 그건 잠정적으로 동 의하는 수준을 넘어서기 힘들어요.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군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가지고 생각해 본 결과, 지금은 이렇게 생각한 다'는 말을 넘어서기 힘들다. 이해가 가십니까?" 스칼렛이 관심을 가지면 오브라디 교수는 이렇게 친절하고도 자상한 어 조로 스칼렛에게 설명을 해주곤 했다. "그럼 다시 여쭈어 보지요. 지금 학자들이 알고 있는 것을 가지고 생각 해 본 결과,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요?" 스칼렛의 질문에 마로우가 과장된 웃음을 터트렸다. 우습기는 했지만 그렇게 웃을 정도로 재미있는 말은 아니었는데. "이렇게 말하는 학자들이 많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머리가 앞서는 사람 이 있고, 마음이 앞서는 사람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머리가 먼저냐 마음 이 먼저냐 같은 질문은 별로 의미가 없다. 오히려 어떤 상황에서 머리를 먼저 내 세워야 하느냐, 혹은 마음을 먼저 내 세워야 하느냐의 문제에 집 중하는 편이 생산적이지 않겠느냐? 이런 말이었던 것 같네요." "말은 그럴싸하게 들리지만... 허망하군요." 오로스크의 말은 정말로 허망하게 들렸다. 그 말 덕분에 눈집 안에 있 던 사람들 모두가 한숨을 내 쉬었다. 그리고 며칠이 흘렀을까. 날 생선과 얼음 조각을 먹는 일이 지겨워지는 단계를 넘어서, 이제는 날 생선과 얼음 조각도 감지덕지 씹어 삼키는 나 날을 지나 볼 살이 홀쭉해지고 걸어다닐 기력이 없어서 대낮에도 눈집 안 에 누워있는 시간이 길어질 무렵의 어느 날 밤이었다. 나는 여느 때와 같 이 눈집 안에 누워있었다. 눈집을 지을 때 마로우가 했던 말은 거의 사실에 가까운 말이었다. 시 간이 흐르는 동안 눈집들은 대개 많이 줄어들어 있었다. 집 안에 누워있 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 수록 눈집은 조금씩 더 작아지고 있었다. 녹 아서가 아니라 집 안에서 쉰 숨이 얼음이 되어 천장을, 또 벽면을 두껍게 만들고 있었다. 자폰인 행세를 한다는 것 때문에 비단 옷만 준비해 왔다면 아마 얼어죽 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사빈은 탐그루에서 잡은 사스카 치의 털로 만든 두꺼운 털가죽 옷을 준비해 왔고, 오브라디 교수와 마로 우는 출항 전에 산 백년수 털로 만든 겨울옷을 준비해 왔다. 스칼렛은 비 싼 무피의 털로 만든 긴 털옷으로 갈아입었고 (아마 그 옷 한 벌을 위해 무피 백 마리는 죽어야 했을 것이다) 크라이는 그레텔에게 타코 털로 만 든 옷을 입혀주었다. 타코 털로 만들어진 옷은 역시 출항 전에 시네 항 근처 옷가게에서 산 것으로 은빛으로 빛이 나서 예쁘기는 했지만 무지하 게 비쌌다. 크라이와 나는 이름도 모르는 짐승의 털가죽으로 만들어진 옷 을 샀었는데, 크라이는 어떤지 몰라도 나는 조금 더 비싼 털옷을 살 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바람이라도 부는 날이면 얼어죽을지도 모르겠다고 느껴질 만큼 추웠다. 빙산 위에서 보낸 시간 사이에 나에게는 큰 변화가 하나 일어났다. 그 건 내 턱에 수염이 자라기 시작한 것이었다. 사빈은 면도칼 대신 긴 칼로 면도를 해야겠다고 놀려대기는 했지만, 나는 내 턱에 자라기 시작한 수염 이 꽤나 자랑스러웠다. 내가 진정한 어른이건 아니건 간에 이제는 나에게 어른의 징후가 나타난다는 뜻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여간 수염도 많이 자라서 손바닥으로 턱을 쓸면 까칠까칠한 느낌이 들 무렵의 어느 날 밤이었다. 천장과 벽면이 두꺼워 지는 것을 막기 위해 며칠에 한 번 씩 우리는 천장과 벽 면을 깎아내곤 했는데, 나는 칼로 벽 면과 천장의 얼음을 깎아내면서 면도하는 일을 생각하곤 했다. 이렇게 벽 면을 깎아내고, 또 깎아내고. 다시 얼음은 달라붙고 또 달라붙고. 이런 날들은 영원히 계속 될 것만 같았다. 이제 빙산 위의 사람들은 말을 잃어 가고 있었다. 체력을 아끼기 위해서도 그랬지만 그보다는 시간이 지날수 록 육지에 닿게 될 가능성이 점점 희박해 진다고들 생각하고 있었다. 어느 날인가는 단 하루도 말을 하지 않고 보낸 날도 있었다. 끔찍한 기 분이 드는 날이었다. 이런 생활에 가장 잘 적응하고 있는 것은 크라이였 다. 크라이는 원래 말수가 별로 없는 데다가 추운 곳에 있어봤는지 일도 잘하고 먹을 때, 일할 때, 쉴 때를 잘 구분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크 라이는 머리가 먼저 앞서는 사람일까, 마음이 먼저 앞서는 사람일까. 사 실 그런 문제는 본인이 아니라면 알기 어려운 것이리라. 그날도 예외는 아니었다. 크라이는 그레텔을 안고 이제는 상당히 줄어 들어 있는 빙산 곳곳을 돌아보면서 뭔가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다. 물고 기를 잡는 선원들에게 잡히는 물고기의 종류를 물어보기도 했고, 먼 바다 를 바라보면서 해가 솟는 곳과 지는 곳, 또 달이 뜨는 곳과 지는 곳을 비 교해서 현재의 위치를 계산하기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안개는 여전히 짙 게 피어오르고 있었고, 나는 거의 자포자기하다 시피해서 자리에 누워만 있었다. 지금의 나는 머리와 가슴 중 어떤 쪽을 따르고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 을 해 보았다. 누워있는 이유를 누군가가 묻는 다면 아마 나의 머리로 생 각한 대답은 '도무지 육지에 닿을 수 없을 것 같아서'일 것이고 가슴으로 생각한 대답은 '몰라! 다 포기야!'일 것이었다. 사실 어느 쪽이건 별 도 움은 되지 않을 것이 분명했지만. 스타바는 힘없이 얼음집 한 구석에 앉아있었다. 주인된 도리로 생선 뼈 다귀밖에는 먹일 수 없다는 것이 미안하기는 했지만 사실 스타바를 데리 고 간다는 자체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배가 침몰하는 와중에 빙산 으로 옮겨진 뮤는 스타바를 제외하면 불과 몇 마리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 다. 크라이가 일을 마치고 돌아왔다. 나는 크라이를 올려다보았다. 크라이 는 무슨 일인지 잔뜩 흥분해 있었다. "그레텔이 말했어. 그레텔이 말했다고." 크라이는 좀처럼 이렇게 흥분하는 법이 없는 사내였다. 나는 그레텔이 말했다는 소리를 듣자 불길한 예감부터 들었다. "왔어. 왔어." 그레텔이 크라이의 목에 매달려서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왔다니? 뭐가? 나는 일단 자리에서 일어나기로 마음먹었다. 무슨 일이 생기게 될 지 짐작조차 하기 어려웠지만 좋은 일이 건 나쁜 일이건 틀림없이 일어나 리라는 건 그리 어렵지 않게 생각할 수 있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쿵 하는 굉음과 함께 빙산 전체가 흔들렸다. 그래서 애써서 일어난 일은 별 의미가 없어져 버리고 말았다. 엉덩방아를 찧고 인상을 쓰고 있는데 밖에서 누군가의 외침 소리가 들렸다. "육지다! 육지가 나타났다!" 육지라니. 나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머리로도 가슴으로도 완전히 포기 한 상태였는데. 나는 엉덩이가 아픈 것도 잊고 벌떡 일어나 크라이에게 다가갔다. 생각 같아서는 그레텔에게 뽀뽀라도 해 주고 싶었다 (물론 그 레텔이야 그런 일을 좋아하지는 않는 것 같았지만).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8951/19898 ━━━━━━━━━━━━━━━━━━━━━━━━━━━━━━━━━━━━━━━━ 제 목:[탐그루] 강철의 오로라 242 관련자료:없음 18/18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4-12 00:55 조회:1462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늘 그렇듯이 새벽은 안개 너머에서 부옇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새벽은 향기가 있다. 새로운 날을 기뻐하는 신선한 향기가. 나는 깊게 심호흡을 한번 했다. 바다에서 피어오르고 있는 안개와 안개 너머 바라보이는 육 지. 땅이 이렇게 반갑게 보인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았다. 동상에 걸 리는 한이 있더라도 맨 발로 흙을 밟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었다. "얼마나 기다려야 할까요." 선원 중 어려 보이는 친구 하나가 물었다. 누군가에게 묻는다기보다는 그저 혼잣말에 가까워 보이는 말이었다. "한 가지는 분명해. 꽤 오랫동안 기다려야 한다는 거지." 오로스크가 대답했다. 오로스크 역시 그 친구의 물음에 대답한다기보다 는 혼잣말에 가까운 말이었다.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이건 말도 안돼! 사비치! 오브라디 교수! 스파일 최고의 인재라는 분들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거요?" 문삼은 제자리에서 거의 팔짝팔짝 뛰다시피 하면서 이렇게 물었다. 나 는 빙산이 꺼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고는 혼자 웃음을 지었다. "기다려 봅시다. 무슨 수가 나겠지요. 아무리 쉽고 간단한 일이라고 해 도 순리가 있는 법 아닙니까." 마로우가 점잖게 문삼에게 충고했다. 하지만 마로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삼은 마로우에게 거의 대들듯이 소리쳤다. "순리? 뭔 놈의 순리! 그렇게 고생고생해서 육지까지 닿았는데 이렇게 바라만 보고 있어야 하는 게 순리인가! 이런 경우가 어디 있어! 말 좀 해 봐, 말 좀!" 문삼은 거의 정신이 나가기 일보 직전으로 보였다. 하지만 나는 문삼의 처지가 이해가 갔다. 자이벌 가문에서 태어나 일생 동안 좋은 것만 먹고 고생 한번 해본적 없는 문삼이 이렇게 고생고생 해서 바바 족의 땅까지 왔건만 기껏 마주치게 된 현실이 이렇게 가혹하다니 말이다. "운이 없었네. 하필이면 이렇게 수심이 깊은 곳에 닿게 되다니 말이 야." 오브라디 교수가 탄식처럼 내 뱉었다. "그래도 교수님 말씀이 옳다는 건 증명이 되었군요. 보세요. 지금 육지 까지의 거리가 꼭 이 빙산의 넓이 여덟 배가 아닙니까." 사빈의 말에 따가운 눈총이 쏟아졌지만 사빈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나는 이렇게 빙산에 일렬로 서서 육지를 바라보고 있는 우리들을 바라 보았다. 누군가 우리를 본다면 아마 우리가 표류 중에 보았던 펭귄들을 보았을 때 받았던 인상을 받았으리라. 긴 표류 끝에 닿게 된 육지는 하필이면 수심이 깊은 지역이었다. 빙산 은 사비치와 스칼렛의 마법 덕분에 어떻게든 움직여 주어서 육지까지 닿 을 수 있었지만 빙산의 보이지 않는 부분이 육지에 닿는 바람에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이대로 시간이 흘러간다면... 빙산은 녹아 없어질 것이고, 우리는 모 두 죽게 되겠지?" 오로스크가 쓴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오로스크의 말에 아무도 대꾸하 지 않았다. 애써 현실을 외면하고들 싶어하는 모양이었다. "만약에 헤엄을 친다면 어떨까?" "마로우. 많이 배운 친구가 왜 이러나. 이런 추위 속에서 헤엄을 치겠 다고? 여기서 몸이 젖는다는 건 그대로 죽는다는 뜻이야. 코에 달린 고드 름이나 떼고 말하라고." 사빈이 마로우의 말에 이죽거렸다. "사비치 님. 사비치 님은 마법사 아닙니까. 이 정도 거리를 극복할 수 있는 마법하나 쓸 수 없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말씀 좀 해 보세요." 문삼은 계속해서 사비치를 다그쳤다. 타호루도 사람을 공중에 띄우는 마법 정도는 쓸 수 있었으니까 아마 사비치도 틀림없이 그런 종류의 마법 을 쓸 수 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 마법을 사용하는 문제는 이미 결 론이 난 뒤였다. "말하지 않았습니까. 마법을 함부로 썼다가는 바바 족을 자극할 가능성 이 있습니다. 문삼 님. 이곳 총 책임자로서 답답한 마음이실 거,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조금만 더 참고 기다려 주십시오. 지금 제가 직접소통 으로 바바 족 친구들과 연결하고 있는 중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구조 대가 배를 끌고 올 것입니다." 나는 문득 스칼렛의 순간이동 마법으로 단숨에 이동하는 건 어떨까 하 는 생각을 해 보았다. 하지만 스칼렛의 순간이동 마법은 자신이 완전히 알고 있는 길이 아니라면 쓸 수 없는 마법이었다. "못 기다리겠어! 더는 못 기다리겠어! 사비치. 나라도 보내 줘. 내가 혼자 가서 어떻게든 해 볼게. 아니, 내가 여기 책임자야! 내 명령을 들 어, 사비치!" 문삼은 고래고래 소리를 쳤지만 아무도 문삼의 말은 듣고 있지 않았다. 문삼의 권위는 거북이를 선상에서 찔렀을 때 이미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그럼 이제 어쩌지? 어떻게 하면 좋은 걸까." "그냥 기다리는 거야." 마로우의 말에 크라이가 대답했다. 말이 끝나자 눈발이 섞여있는 바람 이 세차게 불어와서 나는 옷깃에 얼굴을 파묻었다. 얼마나 더 기다릴 수 있을지. 이곳에서 빙산이 녹던가, 아니면 굶어죽던가 하기 전에 어떻게든 수를 내야만 했다. "연결 됐습니다." 한참이 지난 후였다. 사비치가 나즈막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던 것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 같던 안개가 조금씩 걷힐 무렵의 일이었다. 눈 발도 조금씩 사라져가고 있었다. 이 말에 모두의 시선이 사비치에게로 모 아졌다. 문삼은 거의 미칠 것 같다는 듯한 얼굴이 되어서 사비치를 바라 보고 있었고, 나머지도 그 정도만 조금 차이가 있었을 뿐이지 다들 잔뜩 긴장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사비치는 눈을 감고서 관자놀이에 손가락을 대고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 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어쩌면 관자놀이가 가렵거나 두통 이 있어서 그러고 있는 건지도 모르지만). 나 역시 긴장이 팽행한 분위기 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사비치의 다음 말 한마디에 우리의 운명이 달 려 있는 거나 다를 바가 없었다. 사비치의 눈이 떠졌다. 모두들 조금 뒤로 물러섰다. 사비치가 말을 자 유롭게 할 수 있도록 하려는 의도인 것 같았다. 뒤로 물러선다고 니쁜 소 식이 좋은 소식으로 바뀐다던가 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겠지만, 그만 큼 다들 사비치의 말에 거는 기대가 큰 것이었다. "... 내부 사정이 있다는군요." 사비치가 이렇게 말을 꺼내자 다들 시무룩한 표정이 되었다. 일단 서두 만 들었다고는 해도 어찌되었건 당장은 빙산에서 빠져나갈 수 없게 되었 다는 말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최선을 다해서 이곳으로 오겠답니다. 다만..." "다, 다만?" 문삼이 사비치에게 거의 애원하는 듯한 어조로 물었다. 꼭 목마른 사람 이 물 한 방울을 구걸하는 듯한 태도였다. "이곳이 어디인지 잘 모르겠다고 하는군요. 제가 이곳 풍경을 직접소통 으로 전달했으니까 곧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사비치는 이렇게 말하고는 눈집 안으로 향했다. 아마 누워서 휴식을 취 하려는 것 같았다. 사비치가 휴식을 취하러 갔다는 사실만으로도 바바 족 사람들이 이쪽으로 빨리 오기는 다 글렀다는 것은 다시 한 번 분명해졌 다. "곧? 곧이 언제야? 난 질렸어!" 문삼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면서 말했다. "따뜻한 불을 쪼이고 싶어! 냄새 나는 저 눈으로 만든 엉터리 집 안에 는 다시 들어가고 싶지 않아! 생선도 질렸어! 뜨끈하게 데워진 스프를 마 시고 싶단 말이야! 곧? 곧? 곧이 언제란 말이야! 내일? 모래? 일 년 후?" 문삼은 주저앉은 그대로 발을 구르면서 이렇게 쫑알거렸다. "생각보다 빠를 수도 있습니다, 문삼 님." "오로스크! 입 닥쳐! 지금 누굴 바보로 아는 거야?" "생각보다 너무 빠른 걸?" 나는 이렇게 말했다. 사실이 그랬다. 언제 올지 모른다던 사람들이 어 떻게 저렇게 빨리 나타날 수 있는지. 안개가 걷히기 시작하자 해안에 서 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선원들은 환호성을 지 르기 시작했고, 문삼은 자신이 바보가 되는 줄도 모르고 기뻐서 펄쩍펄쩍 자리에서 뛰어올랐다. 멍청한 녀석. 나는 코웃음을 치면서 문삼을 바라보 았다. 문삼은 이제 거의 울 듯한 얼굴로 펄쩍펄쩍 뛰고 있었다. 해안에 서 있던 사람들은 우리의 모습을 확인한 후, 어디론가 사라졌다 가 머리에 작은 나무 배를 이고 나타났다. "타십시오." 나무배를 타고 온 사람이 말했다. 아니, 사람이라기 보다는 사람과 비 슷한 생물인 것 같다고 표현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키는 지나치게 컸 고, 덩치 또한 사람이라기 보다는 마물에 가까운 체구였다. 얼굴에는 감 정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 표정만이 떠올라 있었고, 태도는 지나치게 공손 했다. 옷도 털가죽 옷이 아니라 그냥 천 하나 걸쳐놓은 것에 불과한 옷을 입고 있었다. 게다가 가장 결정적으로 사람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느낌 을 준 것은 그의 얼굴이었다. 얼굴에는 상처를 꿰맨 흉터 투성이었는데, 꼭 손재주 없는 사람이 함부로 바느질을 해 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나는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많은 전투를 거친 검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었다. 역시 북쪽 바바 족의 영역도 비스토브레 왕국과 마찬가지로 칼과 죽음이 난무하는 곳이었던가. 멀리까지 펼쳐 있는 하얀 평원이 유난히 쓸 쓸하게 느껴졌다. "바바 족이 보냈소?" 사비치가 조심스럽게 흉터 투성이 남자에게 물었다. 남자의 대답은 이 랬다. "아닙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일행은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지만 아무도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오브라디 교수가 이렇게 말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누가 보냈건 선택의 여지가 있나. 그냥 타라구, 타." 오브라디 교수의 말은 그가 지금껏 해온 그 어떤 말보다도 설득력이 있 었다. 우리는 사람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흉터 투성이 남자가 몰고 온 보트 편으로 몇 차례 왕복을 거친 끝에 육지에 닿을 수 있었다. 문삼은 먼저 보트를 타겠다고 날뛰었고, 그건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문삼을 대 우하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상대하기가 귀찮은 탓이 컸다). 땅을 딛는 순간 나는 '이제는 살았구나'하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끝도 없이 펼쳐진 하얀 땅은 어쩐지 내가 거대한 빙산 위에서 표 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고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보트에서 내렸을 때, 우리는 열 명 남짓한 남자들과 만날 수 있었다. 그 남자들을 보는 순간, 우리 일행은 약간의 공포심마저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모두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아주 많이 닮은 형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좀 무리였다. 남자들은 모두 비슷한 또래였던 것이다. 열 쌍둥이가 있을 리 는 없으니, 도대체 어떤 사람들인지 알 길이 없었다. 혹시 검은 엘프 족 과 비슷한 어떤 다른 종족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 보았지만 지금으로 서는 알 길이 없었다. 남자들은 모두 허리에 긴칼을 하나씩 차고 있었는데, 꼭 군대에서 지급 받은 무기인 듯 문양도 크기도 하나로 통일되어 있었다. 옷도 얼굴도 무 기도 같은 사람들이었지만 얼굴에 나있는 흉터는 조금씩 틀린 것 같았다. 이마에 가로로 길게 꿰맨 자국이 남아있는 사람도 있었고, 볼에 세로로 흉터가 남아 있는 사람도 있었다. "혹시, 저, 뭐라고 불러야 합니까? 그쪽...을 말이지요." 어렵게어렵게 내가 남자에게 물었다. 왼쪽 볼에 길게 흉터가 남아 있는 남자였다. "카버. 그냥 카버이라고 부르십시요." "그럼 카버 님. 나머지는 뭐라고 불러야하지요?" "우리는 모두 카버입니다. 아무렇게나 부르셔도 되니까 신경 쓰지 마십 시오." 카버는 이렇게 말하고는 입을 닫아버렸다. 나도 더 이상 물을 엄두가 나지 않아서 그냥 입을 다물었다. 험상궂은 얼굴의 사내에게 뭔가를 묻는 다는 것 자체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고, 뭐라고 더 묻는다고 해도 대답 을 해줄 것 같지는 않았다. 빙산 위에 있던 마지막 한 명이 보트에서 내리자, 카버이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들은 보트를 다시 머리에 이고 전진하기 시작했다. 따라오라는 말은 없었지만 우리는 일렬로 서서 남자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이런 황량 한 하얀 벌판에 남아서 손가락만 빨고 있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리고 이렇게 사방이 다 똑같아 보이는 곳에서는 아무리 사비치가 직접소 통으로 풍경을 전달한다고 해도 찾아오기 힘들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몇 마리의 뮤를 끌면서 우리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8970/19898 ━━━━━━━━━━━━━━━━━━━━━━━━━━━━━━━━━━━━━━━━ 제 목:[탐그루] 강철의 오로라 243 관련자료:없음 22/22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4-12 20:39 조회:1426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우리들이 도착한 곳은 큰 마을이었다. 얼음으로 만들어진 집들과 사람 들, 그리고 군데군데 피어오르고 있는 연기는 이곳이 사람이 사는 곳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사람의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았고, 사 람이라고 할 수 있는 건 우리뿐인 것 같았다. "여기서 기다리십시오." 카버 중 하나가 우리에게 얼음 집 하나를 보여 준 후에 이렇게 말했다. 무덤 모양으로 생긴, 거대한 얼음집이었다. 얼음 집 가장 높은 곳에는 난 생 처음 보는 깃발이 하나 걸려 있었다. 그 깃발을 보는 순간, 나는 충격 때문에 잠시 멍하니 서있을 수 밖에 없었다. 깃발에는 하얀 색 용이 그려 져 있었던 것이다. 오브라디 교수도, 또 마로우와 사빈도 그 모습에 놀랐 는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하지만 멍하니 서서 깃발을 바라만 보고 있 는다고 해서 용의 비밀을 풀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한참을 바라보기는 했 지만, 결국 우리는 얼음 집 안으로 들어갔다. 다만 크라이는 아주 오랫동 안 그곳에 서서 깃발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만감이 교차하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거대한 얼음집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크게 지을 수 있는지. 그 기술력에 나는 감탄했지만 사실 얼음집의 진짜 특징은 다른 곳에 있었다. 얼음집 안에는 얇은 천 조각 하나, 앉을 깔개 하나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입구를 통해 들어오는 바람은 벽 곳곳에 뚫려있는 창으로 지나갔고, 우리는 밖에 있는지 안에 있는지 모를 정도로 추위를 느꼈다. "제, 젠장... 이, 이게 무, 무슨 꼴이람..." 문삼이 이빨을 딱딱 마주치면서 이렇게 투덜거렸다. 하지만 누구도 문 삼의 말이 틀렸다고는 생각하고 있지 않은 듯 했다. 나부터도 당장 깔개 라도 하나 가지고 빙산에서 내릴걸 하고 후회했던 것이다. 천만 다행으로 카버가 돌아 온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이 흐른 후의 일은 아니었다. 만약 카버가 조금만 더 우리를 그 얼음 바닥에 놓아두었다면 모조리 다 얼어죽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라오십시오." 카버는 아주 간결하고도 정중한, 그래서 사람 같지 않아 보이는 말투만 썼다. 나는 시간이 지날 수록 카버가 틀림없이 사람이 아닌 어떤 다른 종 족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빠른 몸놀림과 놀라운 칼솜씨를 가진 이 나 라의 정예 병사가 아닐까. 그렇다면 이 나라 사람들은 모두 전쟁에 익숙 한 사람일텐데 그렇다면 적은 누구일까. 혹시 바바 족? 만약 그렇다면 우 리는 엉뚱하게도 맹수의 소굴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간 셈이 될 것이었다. 불안감과 추위, 그리고 오랫동안 지속된 피로와 배고픔 때문에 거의 탈진 할 지경이었지만, 이런 긴장감 때문에 나는 긴장을 풀 수가 없었다. 카버가 우리를 인도 한 곳은 작은 건물이었다. 무엇으로 지었는지 반듯 하게 각이 져 있는 작은 건물은 얼음과 눈으로 덮여 있었다. 카버가 안으 로 따라 들어갔고, 우리도 곧 그 뒤를 따랐다. 그런데 이 좁은 건물에 우 리가 전부 다 들어갈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하지만 카버는 여전히 조금 도 감정을 내비치지 않았다. 우리는 속는다는 기분이 들면서도 따라들어 갈 수밖에 없었다. 건물 안에 들어서자, 매끈한 벽면이 드러났다. 선원들은 이런 벽을 처 음 보는 게 신기한지 손으로 만져보기도 하고, 또 유심히 살피기도 했지 만 나는 이런 벽을 본 적이 있었다. 그것은 소리장 마을에서 보았던 오우 거의 소굴이었다. 그 동굴도 이런 매끈한 벽면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 렇다면 이곳은 마칸과 관련이 있는 곳이 아닐까. 나는 무엇보다 두려움이 먼저 앞섰다. "이곳입니다." 카버는 우리에게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는 구멍을 보여주고는 뒤로 물러났다. 아무도 선뜻 먼저 계단에 발을 디디려고 하지 않았다. 나부터 도 당장 그 구멍이 어쩐지 거대한 마물의 아가리처럼 느껴졌다. 먼저 계단에 발을 디딘 것은 크라이였다. 크라이는 별로 두렵지 않은 지, 오히려 당당하다고 느껴질 만큼 성큼 한 발을 내 딛었다. 크라이의 태도는 일행에게 기운을 북돋아준 셈이 되었다. 우리는 계단을 따라서 천 천히 한 걸음 씩 내려갔다.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는 없었 다. 나는 자꾸만 허리에 차고 있는 나미트의 칼에 시선이 갔다. 만약 저들이 우리를 죽일 생각이었다면 구해주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혹은 노예로 쓴다거나 우리에게 해를 끼칠 생각이 있었다면 적어도 우리 의 무장 정도는 해제시켰을 것이다. 하지만 카버들은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고, 또한 그런 행동을 할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원래 뮤가 내리막길을 잘 내려가는 짐승이기는 했지만 스타바는 계단을 매우 빠르게 내려갔다. 뮤는 원래 신경이 예민해서 위험이 눈앞에 있으면 누구보다도 먼저 알아차리곤 하는데 아직 별다른 위험은 없는 모양이었 다.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내려갈 수록 공기는 점점 더 더워지고 있었다. 처음에 나는 내 몸에서 열이 나고 있는 게 아닐까 의심마저 들었다. 하지 만 아니었다. 우리가 내려가면 내려 갈 수록 더운 바람이 보다 더 분명하 게 느껴졌다. 처음에는 무슨 착각이거나 누군가의 숨결이거니 싶었다. 하 지만 착각이라고 여기기에 따뜻한 바람은 너무나도 분명했고, 누군가의 숨결이라고 여기기에는 냄새가 너무 좋았다 (오랫동안 얼음집 생활에 익 숙해 진 탓에 어지간한 냄새에는 익숙해진 탓도 있겠지만). 한참을 내려가자 빛이 보였다. 처음에는 연금술사의 빛이라고 생각했지 만 빛에 가까워 질 수록 나는 그 빛이 자연스럽지 않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연금술사의 불처럼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강제로 무 엇인가가 빛을 쥐어짜고 있는 느낌이었다. "저건..." "쉿. 일단 남의 나라에 왔으니 이 나라의 풍습에 따라야 하지 않겠는 가." 오브라디 교수가 나의 입을 틀어막았다. 나는 분명히 뭔가 이상하다는 요지의 말을 하고 싶었으나 오브라디 교수가 이렇게까지 말했으니 더 이 상 이야기 할 명분이 없었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입술 을 꼭 붙이고 걸음을 옮기는 것뿐이었다. 빛의 근원지는 계단의 끝에 달려 있었다. 연금술사의 등보다 훨씬 작았 고 가까운 곳에서 보니 훨씬 천박한 빛을 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 뜻 연금술사의 등보다 더 환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똑 바로 바라볼 수도 없을 정도로 강한 빛이라 잘못하면 눈을 상하겠다 싶었 다. 우리가 문 앞에 서자 문이 저절로 열렸다.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이렇 게 천박한 빛을 사용하는 사람들이라면 이 안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누군가도 저 빛처럼 천박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를 살려 주었 으니 틀림없이 뭔가를 요구할 것이 분명했다. 전쟁이 있다면 암살이나 용 병일을 부탁할 수도 있었고, 아니면 뭔가 더 크고 거창한 부탁을 해 올지 도 몰랐다. 나는 허리춤의 나미트의 칼에 조심스럽게 손을 가져갔다. 문이 열리자, 나는 저절로 손바닥으로 눈을 가리지 않을 수 없었다. 갑 자기 환한 햇살이 비쳐왔던 것이다. 오랫동안 어두운 계단을 내려온 탓에 눈은 빛을 감당하지 못하고 잠시 동안 제 기능을 상실해버리고 말았다. 더운 열기의 정체는 바로 이 환한 햇살인 모양이었다. 이렇게 깊은 땅속 에 햇살이 비추다니. 나는 계단을 내려왔다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착각이 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계단을 통해서 다른 세상으로 나온 게 아닐까? 눈이 빛에 익숙해지자 풍경이 드러났다. 나는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지르 고 말았다. 눈앞에는 실로 믿어지지 않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오래간 만에 보는 푸른 들판이었다. 나는 내가 잘못보고 있는 게 아닌가 해서 눈 을 몇 번이고 비벼보았다. 하지만 사실이었다. 지하에 이렇게 넓은 들판 이 있을 수 있다니. 게다가 이곳에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보는 나비들이 날고 있었다. 비대한 몸집을 가진, 겨우겨우 허공을 떠돌고 있다는 느낌 을 주는 나비였다. 보통의 나비와는 달리 나비는 사람이 있는 쪽으로 호 기심이 난다는 듯이 날아왔다. 나는 손을 뻗어 나비를 잡아보았다. 나비 는 너무나도 쉽게 잡혔다. 나비는 자신이 내 손에 잡혀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지 둥그런 눈으로 나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 었다. "오래간만의 손님이시군요." 언제 다가왔는지 젊은 여자 하나가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뭘로 만들었 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광택이 나는 옷을 입고 있는 여자었다. 머리는 보 통의 남자처럼 아주 짧았고, 목에는 천으로 만들어진 길다란 모양의 끈을 매고 있었는데, 아마 이곳의 복장인 모양이었다. "우리 말을... 하시는 군요." 오브라디 교수가 경탄의 어조로 먼저 이렇게 말을 건네었다. "그렇지요. 아무래도 이 땅 사람이니까." 빙긋 웃음을 지으면서 여자가 말했다. "어서 오십시오, 이방인이여. 이곳 아타카파 공화국에 오신 것을 진심 으로 환영합니다." 여자는 이렇게 말하고는 고개를 숙여 우리에게 인사했다. 우리 일행은 어정쩡하게 고개를 숙여 여자의 인사를 받았다. 여자의 뒤편으로 드문드문 나무로 만들어진 집들이 눈에 들어왔다. 거 의가 단층으로 된 집이었고, 사람들이 집 앞에 있는 들판에서 농사를 짓 고 있었다. "여기 이름이... 아타카파라고 하셨지요?" "예. 아타카파 공화국입니다. 제 소개를 드리지요. 저는 아타카파 공화 국의 대통령, 와트슨이라고 합니다." "와트슨 님. 반갑습니다. 저는 먼 남쪽에 있는 비스토브레 왕국에서 온 오브라디 교수라고 합니다. 그런데... 공화국이 뭡니까?" 대통령이 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마도 대표라는 뜻인 모양이었다. 그 렇다면 이쪽에서도 대표 격인 문삼이 대화를 진행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었지만 대화의 주도권은 어느 사이 오브라디 교수에게 넘어가 있었다. "대통령은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라는 뜻이지요. 비스토브레 왕국이시 라고요? 스파일 출신 이신가요?" 와트슨의 말에 오브라디 교수는 깜짝 놀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나라를 아십니까? 저희는 이곳 아타카파 공화국에 대해서는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만..." "간혹 그곳에서 오시는 손님들이 계십니다. 당신들처럼 말이지요." 와트슨이 말했다. "그런데 어떻게 스파일에서 이곳 아타카파 공화국에 대한 정보를 하나 도 얻을 수 없었는지...?" "저희가 저희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자. 그 런 사소한 일에는 신경 쓰지 말고 따라오시지요." 나는 와트슨이라는 여자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한 나라 의 왕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젊었다. 내 나이 또래거나, 나보다 한 두 살 정도밖에 많아 보이지 않았으니까. 아니, 어쩌면 그저 젊어 보이는 사 람일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혹시 마법사가 아닐까? 와트슨을 따라가는 길 내내 우리 일행은 마치 꿈을 꾸는 듯한 느낌에 빠져들었다. 따뜻한 날씨도 날씨려니와 작은 집, 논과 밭, 그리고 멀리 보이는 숲의 모습이 꼭 어렸을 적에 들었던 옛날 이야기에 나오는 나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브라디 교수는 와트슨에게 이것 저것을 물어보 곤 했고, 와트슨은 오브라디 교수에게 대답을 하기도 하고 적당히 피하기 도 하고 있었다. 덕분에 나는 이곳 아타카파 공화국에는 귀족도 평민도 없다는 사실을 알 수는 있었지만 왜 하늘에 태양이 보이지 않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곳에는 태양이 없군요. 지하에 만들어진 도시라 그런가요? 그렇다면 어떻게 햇빛과 비슷한 빛이 이렇게 지하까지 들어올 수 있습니 까? 와트슨 대통령?" "오브라디 교수 님. 우리 자세한 이야기는 제 관사에 가서 나누도록 하 지요." 와트슨은 여유 있는 웃음을 지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 웃음은 어딘지 이상했다.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꼭 카버가 짓는 미소 같아 보였던 것이다. 오브라디 교수와 와트슨의 대화를 유심히 듣는 것은 나 정도밖에 없는 것 같았다. 나머지는 이곳 아타파카 공화국의 경치에 취해 대화에는 전혀 신경을 쓰고 있지 않았다. 다만 오로스크는 뭔가 불 만이라는 듯이 이곳 저곳을 살펴보고 있었다. "참으로 아름다운 곳이군요, 아타카파 공화국은." 문삼이 말했다. 문삼의 말에는 외교관이나 쓸 법한 가식적인 어조가 분 명히 드러나 있었다. 대화에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은 나 혼자인 줄 알았더 니. 아마 오브라디 교수만 와트슨 대통령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에 기분이 상한 모양이었다. "상당히 젊으시군요. 젊은 나이에 국왕의 자리, 아니, 대통령이라고 하 셨죠? 대통령의 자리에 오르시다니. 게다가 이렇게 아름다우시다니. 하늘 의 은총이라도 받으신 모양입니다." 문삼이 희죽거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러자 와트슨의 얼굴에 그나마 있던 감정없는 미소마저 사라져 버렸다. "아, 제 말씀은 이곳에 나이 많은 장로들이 틀림없이 있을 텐데 젊은 나이에 대통령이 되신 것은 틀림없이 하늘의 뜻일 거라는 뜻으로 드린 말 씀이었습니다." 문삼은 자신이 말실수를 한 게 아닌가 해서 실수를 만회해 보려는 것이 틀림 없었다. 하지만 문삼의 이 말에 와트슨은 결정적으로 기분이 상한 모양이었다. "제가 이곳에서 가장 머리가 좋고 판단이 빠릅니다. 가장 뛰어난 사람 이 대통령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제가 대통령이 되는 것에 반 대한 국민은 단 한사람도 없었습니다." 길거리에서 세금 공무원이 상인에게 자릿세라도 뜯을 때 하는 협박 같 은 어조였다. 와트슨에게는 확실히 재능이 있는 것 같았다. 와트슨의 이 말 한마디에 문삼은 완전히 입을 닫아버렸으니까 말이다. 와트슨이 우리를 인도한 곳은 꽤 넓어 보이는 집이었다. 다른 집과는 달리 나무로 지어진 것이 아니라 매끈한 벽면으로 만들어진 집이었다. 그 벽면을 보는 순간 나는 소리장 마을에서 보았던 오우거의 울부짖는 모습 과, 또 유리 병 안에 들어있던 오우거들과, 기이한 음성으로 고어를 말하 던 여자의 목소리와, 동굴에서 치솟아오르던 불꽃이 떠올랐다. 마음을 놓 고 있었다. 지금 내가 온 곳이 과연 어떤 곳인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나 는 한 동안 풍경에 취해서 제대로 생각하지 못했구나 싶었다. "이곳이 제 관사입니다. 들어오세요." 와트슨은 이렇게 말하면서 문을 열었다. 문은 와트슨이 손바닥을 가져 가 문 옆에 있는 작은 상자에 대자 간단하게 열렸다. "저거 마법 같은 걸?" 사빈이 히히덕 거리면서 말했지만 나는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들어가 서는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계속해서 들었다. "그쪽으로 앉으십시오." 관사 안에는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굉장히 깨끗하고 깔끔해 보이는 책 상하나와 역시 비슷한 소재로 만들어진 의자가 하나, 그리고 손님들이 앉 을 수 있는 긴 의자 몇 개가 있을 뿐 장식하나 되어 있지 않았다. 우리는 긴 의자에 차례로 앉았다. 사실 나는 의자에 앉는 것을 망설였는데, 의자 에 무슨 장치라도 되어 있을까 해서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이곳 아타카파 공화국은 굉장히 평화로운 곳인 것 같습니다. 이런 낙 원 같은 곳이 있다니, 저는 정말로 감탄했습니다." 의자에 앉자마자 오브라디 교수가 말했다. 와트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을 이 상태 그대로 지키는 것이 제가 하는 일이지요. 귀국에 대해 서는 잘 알고 있습니다. 아직 봉건적인 왕정 제도를 지키고 계시지요, 비 스토브레 왕국은." 봉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라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가는 당장이라도 찬바람이 부는 밖으로 쫓겨날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예. 하지만 지금은 변혁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타실에 있는 국왕 도, 자나크에 새로 들어선 신성제국도, 또 스파일도, 나름의 이유를 가지 고 변혁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렇게까지 훌륭한 국가가 되려면 오 랜 시간이 필요하겠지만요." 오브라디 교수는 겸양의 뜻으로 이렇게 말했다. 사실 이렇게 따뜻하니 훌륭한 국가라는 말도 나올 법은 했지만 말이다. "오브라디 교수님. 오랜 시간이라는 걸 알고 계시니 다행이로군요. 저 희 아타카파 공화국은 귀국의 국민들에게는 전설에 불과한 최종전쟁 때부 터 존재해온 국가입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8971/19898 ━━━━━━━━━━━━━━━━━━━━━━━━━━━━━━━━━━━━━━━━ 제 목:[탐그루] 강철의 오로라 244 관련자료:없음 21/21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4-12 20:39 조회:1303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이제 본론이 나오는구나 싶었다. 혹시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닐까? 최종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너희들은 이제 사형이다! 순순히 죽겠느냐, 아니 면 저항이냐! 뭐 이런 식으로 말이다. 나는 여전히 긴장을 늦출 수가 없 었다. 그때 와트슨이 앉아 있는 의자 뒤편에 있는 문이 열렸다. "카버. 이 분들께 간단하게 마실 것 좀 드리지." "예." 턱과 목에 꿰맨 흉터가 있는 카버이었다. 모두들 카버에게 시선이 쏠리 자 와트슨은 설명을 해야 겠다고 생각했는지 이렇게 말했다. "제 개인 카버 입니다. 여기서 제 일을 돕고 있지요." "그렇군요. 와트슨 대통령 님. 그런데 저 카버들은 어떤 종족입니까?" 학자다운 궁금증인지 오브라디 교수가 물었다. "굳이 말하자면 노예와 같은 종족입니다. 저희의 말은 절대 복종하는. 혹시 어려운 일이 생기시거나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카버에게 부탁하십 시오. 저희도 그렇게 하니까요." "노예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예. 오브라디 교수 님." "검은 엘프 족을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검은 엘프 족? 아. 카슨을 말씀하시는 것 같군요. 귀가 뾰족하고 검은 피부를 가지고 있는 모델을 말씀하시는 거지요?" 와트슨이 말했다. 나는 와트슨의 말이 무슨 말인지 알지 못해서 눈을 껌뻑였지만 우리 일행은 다들 별 반응이 없었다. 나는 슬쩍 뒤를 돌아보 았다. 태반이 자리에 앉아서 졸고 있었고, 깨어있는 사람들도 거의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잠시 대화가 끊겼다. 오브라디 교수도 그렇고 우리 중에는 와트슨의 말 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와트슨은 우리를 한 번 둘러 보았다. 나는 와트슨의 얼굴이 상당히 잘 만들어진 조각같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일부러 저렇게 만든 듯한 하얀 피부, 깎아 놓은 듯한 콧날, 그리 고 자그마한 입술... 하지만 와트슨의 얼굴에는 조금도 빈틈이 보이지 않 았다. 물론 손님을 접대하는 일국의 대표로서 그럴 만도 하지만 와트슨의 얼굴에는 '야무지다'는 말로 다 담을 수 없는 엄격함이 서려 있었다. 와 트슨은 우리를 한 참 둘러보더니 이렇게 말을 이었다. "저분은 사스카치의 가죽으로 만들어진 옷을 입고 계시는 군요." 와트슨이 사빈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순간 사빈은 노련한 용사냥꾼의 감각인지 전혀 졸고 있지 않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와트슨을 바라보았다. 사빈은 무슨 말인지 못 알아 들었다는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심각한 표정 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다. "사스카치는 술 한 병으로 친구가 될 수 있지요. 그렇게 된 사스카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고요. 맞습니까?" "예. 그렇지요. 저도 바르도 대륙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사스카치 친구 몇을 둔 적이 있습니다. 한 번은 스파일의 그리지아 산꼭대기에서..." 사빈의 말이 길어질 것 같은지 와트슨은 사빈의 말을 잘랐다. "그런데 사스카치의 털을 가지고 계시는군요. 배신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저는 의리와 명예를 가장 중요시 여기는 사람입니다. 제게 는 검은 엘프 친구도 있고, 또 사스카치 친구도 있지만 배신은 상상도 해 보지 못했습니다." "하하하. 비난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제 말씀에 반응하시는 걸 보니 역 시 사스카치나 검은 엘프, 그러니까 카슨을 사람으로 대하시는군요. 좋습 니다. 그럴 수도 있지요. 하지만 제가 하나 알려 드리지요. 사스카치는 짐승입니다. 알고 계시겠지요?" "아무리 짐승이라고 해도 영혼이 있습니다. 그리고 영혼이 있는 것은 결코 함부로 대해서는 안됩니다." 오브라디 교수가 꼭 언쟁을 벌이려는 사람처럼 말했다. "교수님. 카버에게는 영혼이 없지요. 카슨, 그러니까 검은 엘프도 마찬 가지입니다." 오브라디 교수는 당장이라도 반박할 기세로 숨을 들이쉬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카버가 큰 쟁반에 찻잔을 가득 가지고 들어왔다. "일단 차나 한 잔씩 하시지요." 김이 오르고 있는 차를 보는 순간, 사람들은 잠에서 깨어났다. 그러고 보니 날생선을 제외한 음식을 먹어본지가 꽤 오래되었다는 생각이 들었 다. "일단 차나 한 잔씩 드시고 마음의 여유를 찾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당장은 아무래도 대화가 어려울 것 같군요. 이야기는 천천히 나누도록 하 지요. 내일이나 모래쯤? 하여간 면담 신청을 해 주세요. 기다리고 있겠습 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그때 가서 하기로 하지요. 카버. 이 분들 차 다 드시면 숙소로 안내해드려. 그리고 음식도 좀 마련해 드리고." 와트슨은 이렇게 말하고는 책상에 서류뭉치를 올려놓았다. 대화를 그만 두려는 모양이었다. "와트슨 대통령 님. 아직 여쭙고 싶은 게 남아 있습니다만..." "오브라디 교수님. 갑자기 모든 걸 말씀드리기에는 서로 어려움이 있다 는 걸 알았습니다. 천천히 하나하나 해 나가도록 하지요." 와트슨은 이렇게 말하고는 한 순간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와트슨과 눈 이 마주치자 당황했지만, 시선을 피하지는 않았다. 내가 뭔가를 숨기고 있거나, 혹은 와트슨에게 빚을 지지 않은 이상 시선을 피할 이유는 없었 다. 와트슨은 나에게서 시선을 떼고는 표정 없이 말을 이었다. "아. 그것보다는 제가 잘 아는 분 하나를 소개시켜 드리는 편이 낫겠습 니다. 카버. 이분들께 한 분 소개시켜 드려. 페르도 님 말이야." 페르도.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이었다. 어디서 들었더라? "그렇게 하지요. 저희도 오랜 여행으로 상당히 피곤한 상태니까요." 오브라디 교수가 수긍했다는 듯이 말했다. 와트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차 드시고 카버를 따라가시면 됩니다. 저는 처리해야 할 일이 있 어서." 와트슨은 이렇게 말하고는 우리에게서 완전히 신경을 끊고는 서류를 넘 기기 시작했다. 찻잔이 오기는 했지만 나는 차를 마시고 싶은 생각이 없 었다. 난생 처음 맡는 이상한 향 때문에도 그랬지만 뭔가 수상한 것이 차 안에 녹아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를 제외한 사람들은 후루룩하고 단숨에 차를 들이켰다. "따라오십시오." 카버가 말했고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찻잔에 입도 대지 않고 내려놓았다. "아 참. 오브라디 교수님." 나가려는 우리 일행에게 와트슨이 말했다. "우리는 여러분들께서 생각하고 계시는 것 보다 훨씬 더 많은 걸 알고 있습니다." 와트슨이 말했다. "그럼 기대하고 있지요." 오브라디 교수는 정중하게 답하고는 카버를 따라서 밖으로 나섰다. 밖 에는 도저히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밝은 햇살이 내 리고 있었다. 정말이지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늘 이렇게 맑은 날씨만 계 속된다면 사람들의 마음도 이 햇살처럼 맑아질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한 순간 들었다. 하지만 이렇게 좋은 환경 뒤에 무엇이 숨어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은 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겨우 매끄러운 벽면만 보고서 하는 생 각이긴 했지만, 그래도 나는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자네도 알았겠지?" 사비치였다. 이곳에 도착한 이후 한 마디도 하고 있지 않았던 사비치가 오브라디 교수에게 이렇게 물었다. 오브라디 교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 였다. "이곳은 흥미 있는 곳이긴 해. 전설을 만난다는 건 누구에게나 관심을 끌 수 있는 거긴 하지. 하지만 좀 아쉽군. 나한테는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말이야." 사비치는 오브라디 교수만 들을 수 있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신경을 온통 곤두세우고 있었기 때문에 겨우 말을 들을 수 는 있었지만 무슨 말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래. 자네는 하루라도 빨리 바바 족의 영역으로 가야 할 테니까. 사 실 뮤를 전달한다는 거는 구실에 불과하다는 거, 잘 알고 있네." 오브라디 교수의 말에 사비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비치는 애시당초 문삼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을 것임이 분명했다. 문삼은 사비치와 오브 라디 교수가 이야기를 나누건 말건 여기저기를 둘러보느라 넋이 빠져 있 었다. 카버가 우리를 안내한 곳은 오두막 몇 개가 모여있는 곳이었다. 카버는 우리를 오두막 앞까지만 안내 한 다음, 그대로 아무 말도 없이 돌아가 버 렸다. 우리 일행은 몇 그룹으로 나뉘어서 오두막으로 들어갔다. 일단 오 두막 안에 들어서자 이불과 침대가 눈에 먼저 들어왔다. 음식이고 뭐고 간에 일단 쓰러져서 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다들 마찬가지 인 모양이었다. 우리는 그대로 침대에 누워 잠이 들었다. 꿈을 꾸었다. 어두운 무엇인가가 나를 뒤쫓고 있었다. 나는 보통의 악몽이 그렇듯이 발이 잘 떨어지지 않았지만 용케 어두운 그 무엇을 피해 달아나고 있었 다. 손에는 아자닌의 반지도 없었고, 허리에는 나미트의 칼도 없었다. 나 는 혼자 그 무엇과 싸워야만 했다. 그때 갑자기 햇살이 쏟아졌고, 나는 햇살아래 멍청하게 몸이 굳어서 정지해 버리고 말았다. 추위도 배고픔도 없는, 시간이 정지된 듯한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결혼을 했다. 신부 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내가 결혼을 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나는 밭에 나가 일을 했고, 신부는 집안 일을 하고 나를 위해 음식을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나는 여덟 명의 아들과 일곱 명의 딸 을 가지게 되었는데, 결국 나는 열 다섯 명의 자식과 예순 네명의 손자가 바라보는 가운데에 침대에 누워 죽음을 맞이했다. 죽음과 동시에 나는 잠 에서 깨어났다. 이상한 꿈이었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내가 본 것은 온통 어둠뿐인 오두막이었다. 작은 연금술사의 등 하나 없는 오두막에서 나는 혼자 잠에서 깨어나 있었다. 조용한 밤이었다. 기이하리만치 벌레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너무나도 어두워서 나는 내 손바닥조차 볼 수가 없었다. "내* 마음에* 문을* 여니* 길을* 인도해* 다오*" 나는 아자닌을 불러내었다. 아자닌은 언제나처럼 내게 인사를 하면서 나타났고, 아자닌의 몸에서 나오는 희미한 불빛 덕분에 오두막 안이 서서 히 모습을 드러냈다. 나와 같은 방에는 오브라디 교수와 마로우, 그리고 사빈과 크라이, 그 레텔이 함께 있었다. 스칼렛은 방구석 자리에서 자고 있었는데, 스칼렛 역시 긴 표류 생활에 지칠대로 지쳤는지 거의 죽은 듯 잠을 자고 있었다. "아자닌. 여기가 어디지, 도대체?" "전설의 나라, 아타카파 공화국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들어 본 적 있어?" "...예." 아자닌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없었다. 하지만 아자닌이 이곳에 대해서 뭔가 알고 있다는 생각이 일단 들자, 나는 아자닌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기 로 마음먹었다. "얘기해봐. 알고 있는 것부터." "이런 전설이 있습니다. 최종전쟁 때, 인간의 문명은 멸망했습니다. 붉 은 용의 등장과 함께 나타난 마칸은 최종전쟁이 끝나고 결국 사라져 버렸 지요. 물론 대마법사 아킨과 카를로스 장군이 다시 나타난 마칸을 봉인하 기는 했지만 말입니다." "그건 나도 알고 있는 거고." 알고 있는 것부터 말하라는 말을 아자닌은 내가 알고 있는 것부터 말하 라는 말로 잘못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살아남은 사람들은 두 개의 국가를 건설했다고 합니다. 하나는 극지의 아타카파 국이었고, 또 하나는 바다의 틀뢴이었습니다. 스 파일의 프라브리티와 타실의 니브리티, 이 두 수도이름은 전설에 나오는 아타카파 국과 틀뢴 국의 이념에서 따왔다고 하지요." "무슨 차이가 있는데?" "고대어이기 때문에 저도 확실히는 알지 못합니다만, 아타카파 국은 인 간의 머리를, 틀뢴 국은 인간의 가슴을 중요시했다고 하지요. " "그럼 여기가 인간의 머리를 중요시했다는 바로 그곳인가?" "아마 그런 것 같습니다. 사비치 님께서 낮에 말씀하셨던 것도 아마 그 런 맥락에서 하신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사비치는 전설을 알고 있었을 것이었다. 오브라디 교수는 학자적 관심 으로 이곳을 탐구해 나갈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사비치는 역시 자신의 임무완수를 우선으로 할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 는 거지. 나는 이곳에 용을 찾아 온 것이고, 그 단서는 이미 조금씩 드러나고 있 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아자닌에게 물었다. "아자닌. 너는 영혼이 있는 건가?" "낮에 와트슨 님께서 하신 말씀 때문이신 모양이로군요." 아자닌이 웃으면서 말했다. "저에게는 영혼뿐입니다. 카버에게 육체뿐인 것처럼." 나는 아자닌의 말에 뭔가가 어긋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머리과 가슴의 문제는 배에 타고 있을 때부터 나를 괴롭혀 온 문제였다. 하지만 나는 어떤 결론을 내리기는 커녕 문제 자체에도 접 근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수르카 님." 아자닌이 말했다. 아자닌의 목소리에는 나를 다 이해하고 있다는 듯한 느낌이 가득차 있었다. 아마도 아자닌은 내 마음을 잘 알고 있는 게 분명 했다. "칼과 마법을 생각해 보세요." 아자닌은 이렇게 말하고는 내가 사라지라는 말도 하지 않았는데 그냥 사라져 버렸다. 나는 아자닌이 있던 허공에 손을 뻗었다. 아자닌이 남기 고 간 빛은 어느 사이 사라져 버렸고, 내 손은 다시 어둠 속에 묻혀버리 고 말았다. 그리고 나는 다시 어둠 속에서 혼자가 되어 버렸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8972/19898 ━━━━━━━━━━━━━━━━━━━━━━━━━━━━━━━━━━━━━━━━ 제 목:[탐그루] 강철의 오로라 245 관련자료:없음 21/21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4-12 20:40 조회:1324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다음 날 해가 떴을 때, 우리는 손님을 맞게 되었다. 손님은 하루 전에 와트슨이 말해주었던 페르도라는 사람이었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우리는 오두막에 차려진 아침상을 보고는 정말 반 가운 얼굴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별히 훌륭한 식사가 마련되어 있었 기 때문에 그랬던 것은 아니다. 그저 우리가 잠든 사이에 이렇게 신경 써 준 것에 대한 고마움의 표현일 뿐이었다. 오래간만에 지붕이 있는 곳 에서 식사를 하게 되다니. 나는 정말 감사해마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도 식사는 카버가 마련해 놓은 것 같았다. 식사는 고기 (와 비슷하게 생긴 덩어리)와 야채 (처럼 보이지만 종류는 알 수 없는), 그리고 짭짤한 맛이 나는 스프였다. 우리는 일단 앞뒤 사정 보지 않고 정신없이 그것들을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배가 고프니 일단 먹 기는 했지만 다들 표정이 좋지 않았다. 적어도 마로우가 먼저 말을 꺼내 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무 생각없이 식사를 마쳤을 것이다. "흠. 오브라디 교수님. 식사를 앞에 두고 할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뭔가 한가지가 빠진 것 같은데요...?" 마로우의 이 말 한 마디에 우리는 식사에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었 다. 적어도 혼자만 느끼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래. 뭔가 하나가 빠졌다 생각했다네, 마로우 군." "맞아. 스프는 좀 괜찮은 것 같은데..." "맛이 없군요." 크라이가 미간을 찌푸리고서 말했다. 크라이의 이 말은 결코 맛이 좋지 않다는 표현이 아니었다. 고기와 야채에서는 그야말로 아무 맛도 나지 않 았던 것이다. 하지만 일단 먹기는 해야했고, 불평이 통할 처지도 아니었 다. 다른 오두막에 묶고 있는 선원들이나 문삼 같은 친구는 어떨지 모르 지만 적어도 우리는 예의는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서로의 미각이 그 리 완전히 엉망이 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한 것만으로 위안을 삼으 며 식사를 마쳤다. 손님이 찾아온 것은 식사가 끝난 후의 일이었다. 오두막의 문이 열리자 우리는 당연히 카버가 들어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반갑습니다, 오브라디 교수님. 예전에 강의하시는 모습을 한 번 뵌 적 은 있었지만 이렇게 뵙게 될 줄은 몰랐군요. 저는 르노 페르도라고 합니 다." 젊은 남자였다. 그 남자는 사빈보다는 어리고 크라이 보다는 나이들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아무 장식도 없는 하얀 옷에 목에는 전 날 보았던 와트슨이 맸던 것과 같은 종류의 끈을 매고 있었다. 르노 페르도 라고 본인을 밝힌 젊은 남자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우리에게 인사를 하 였다. "...페르도라는 성을 듣고 짐작은 했네만..." 오브라디 교수는 말을 잇지 못했다. 반가움이나 놀라움 같은 감정 때문 에 그러는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반가운 사람이 아니어서 그러는 모 양이었다. 나는 순간 마로우의 얼굴이 굳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마 로우에 대해서는 서커스 들판에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마로우의 부모가 억울하게 누명을 써서 스파일에서 추방당했으며, 그 배후에는 스 파일의 영주 프란스 페르도 장군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그것이었다. 그러 니까 지금 우리 앞에 서 있는 르노 페르도는 마로우의 부모를 귀향 보낸 바로 그 프란스 페르도의 장남이 되는 것이었다. "북쪽으로 귀양을 갔다는 이야기는 들었네만, 이곳에 와 있을 줄은 몰 랐네." 아마 르노 페르도도 한 때 오브라디 교수의 제자였던 모양이었다. 오브 라디 교수는 르노 페르도에게 자연스럽게 하대를 하고 있었다. "이곳으로 오게 될 줄은 저 역시 몰랐습니다." "문삼과 사비치는 만나 보았는가?" "예. 두 분 다 재미있는 분이시더군요." 르노 페르도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어제의 긴장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재미있는 분이라고 말하는 르노 페르도의 얼굴에는 도무 지 어떤 생각이 담겨 있는 것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던 것이다. 어쩌면 이미 다른 오두막에 있는 사람들은 당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 다. "자. 이제는 말해 주지 그래." 오브라디 교수가 르노 페르도에게 자리를 권하면서 말했다. 르노 페르 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온 이유 말씀이시로군요." 르노 페르도는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이곳 아타카파 공화국의 대통 령, 와트슨이 지었던 표정과 흡사한 미소였다. 도무지 무슨 의도를 가지 고 웃음을 짓는 것인지 나는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르노 페르도가 말 을 잇지 않고 있는 사이, 마로우가 입을 열었다. "나는 당신을 잘 모릅니다만 당신이 분명 무슨 속셈이 있을 것이라는 점은 확신하고 있습니다." "마로우 군." 오브라디 교수가 말했다. 아마도 말조심하라는 뜻이리라. "아니요. 저는 꼭 들어야겠습니다. 지금 우리를 이곳에 가둔 이유가 무 엇입니까? 아니, 우리에게 바라고 있는 게 뭡니까? 저는 꼭 들어야겠습니 다." 마로우의 말투는 도발적이었다. 나는 마로우가 저렇게 지나치게 행동하 고 있는 점에 대해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스칼렛도 이런 상황은 처 음인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고, 크라이도 헛기침을 한 번 하면서 불편 한 기색을 드러냈다. 당황하지 않고 행동한 쪽을 사빈이었다. 사빈은 마로우에게 다가가 마 로우의 목을 잡고 비틀었던 것이다. "무슨 무례야!" 사빈의 억센 팔에 붙잡힌 마로우는 꼼짝도 하지 못하고 버둥거렸고, 긴 장된 분위기는 어색한 웃음으로 조금 무마되었다. 사빈이야 진지하게 자 신의 의지를 행동으로 표현했겠지만 바둥거리는 마로우의 모습은 우스꽝 스럽기 그지없었다. "뭔가 오해를 하고 계시는 것 같군요. 이방인을 환영하는 것은 저희 아 타카파 국의 전통입니다. 저희가 뭘 바라거나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생각 하시는 모양인데, 그건 사실과 전혀 다릅니다. 제가 온 것은 여러분이 어 떻게 하고 싶으신가를 여쭙기 위해서 입니다. 꿍꿍이가 있다니요. 건너 편 오두막의 문삼 님과 사비치 님도 바바 족의 영역으로 떠나고 싶다고 말씀하셔서 그렇게 조치할 예정입니다. 아마 지리를 잘 아는 카버가 길 안내를 맡을 것입니다." 르노 페르도는 경우에 밝은 사람인 것 같았다. 마로우의 모습을 못본 척 하고는 가벼운 어조로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마로우는 사빈에게 졸렸 던 목이 풀리자 씩씩거리면서 벌게 진 얼굴을 하고서 사빈을 노려보았고 사빈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마로우를 노려보았다. 어쩐지 주먹다짐을 벌인 동네 꼬마들 같은 분위기였다. "그렇지. 문삼이나 사비치나 분명한 목적이 있었으니까..." 오브라디 교수는 입맛을 쩝쩝 다시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오브라디 교수님. 제가 이 곳에 온 이유는 교수님 일행께서는 어떻게 하실 예정이신가를 묻기 위해서입니다. 저희 아타카파 공화국에서는 개인 의 의견을 충분히 존중합니다. 아, 물론 지금 당장 결정하시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분명하게 정하신 방향이 없으시다면 당분간 이곳에서 머무르셔 도 좋습니다. 이미 선원들 중 몇 몇은 이곳에 남고 싶다고 의사를 밝혔습 니다. 물론 당분간이지요." "만약 그런 이유 때문에 당신이 온 거라면 왜 하필이면 당신이 온 건지 알고 싶습니다. 카버에게 시켜도 되는 일 아니었습니까?" 마로우는 여전히 볼멘 얼굴을 하고서 르노 페르도에게 물었다. 마로우 가 사빈의 눈치를 보는 것으로 봐서 사빈의 목조르기가 강하긴 강했나 보 다 싶었다. "그야 제가 스파일 출신이니까요. 저에게라면 훨씬 더 편하게 말씀하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궁금한 것도 훨씬 자유롭게 물어볼 수 있고 요. 이 편이 합리적이지 않습니까? 아타카파 공화국에서는 합리를 무엇보 다 중요시합니다." 당연하다는 듯이 르노 페르도가 말했다. 르노 페르도의 말은 과연 그럴 싸하게 들리기는 했다. 하지만 그 전에 몇 가지를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 긴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듣고 싶은 게 있습니다, 르노 페르도 님." "르노라고 부르세요." 르노 페르도가 나에게 웃으면서 말했다. 지나치리만치 단정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예. 저는 수르카라고 합니다, 르노 님. 저는 르노 님이 어떻게 해서 이곳으로 오시게 된 것인지, 또 왜 이곳에서 살고 계시는 건지가 궁금합 니다." 내 물음에 오브라디 교수는 약간은 당혹스럽다는 표정을 지었고, 사빈 은 당장이라도 내 목을 비틀 기세로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약간 찔끔하 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내 의심을 도로 집어넣을 수는 없었다. 르노 페르 도의 말 그대로, 이 편이 합리적일 테니까 말이다. 내 물음에 르노 페르 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요. 그게 분명하셔야 하겠지요. 수르카 님." 르노 페르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곧바로 말을 이어나가지는 않 았다. 덕분에 잠시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그 침묵 동안 눈에 보이지 않는 긴장감이 거미줄처럼 팽팽하게 느껴졌다. "좋습니다. 말씀드리지요." 나는 작게 한숨을 내 쉬었다. 그것은 내 질문이 합리적이라고 받아들여 졌다는 것에 대한 안도의 한숨이기도 했고, 사빈에게 목을 졸리지 않아도 좋다는 데 대한 안도의 한숨이기도 했다. "처음 바바 족의 영역으로 오게 되었을 때, 저는 제가 볼모로 잡혀왔다 는데 대한 불안감과 두려움, 또한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슬 픔, 뭐 이런 걸로 절망감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 때 저는 한 사람을 만나 게 되었지요. 어린 나이였지만 놀라운 능력으로 이곳 아타카파 공화국에 서는 인정받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들어서 알고 계시겠지만 이곳 아타 카파 공화국에서는 그런 식으로 정보원을 바르도 대륙 곳곳에 파견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도 그런 정보원 중에 하나였지요. 이곳에서 정보원 자 리를 거치는 것은 무슨 자리에 오르더라도 당연한 일입니다." "잠깐. 그럼 아타카파 공화국에서는 그런 식으로 늘 간첩을 보내왔단 말인가?" "간첩이라고 말씀하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냥 이 정도로 생각해 주시 면 안될까요, 오브라디 교수님? 아타카파 공화국에서는 늘 바르도 대륙 전체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쪽으로 말씀이지요." 오브라디 교수는 수긍하는 눈치였고, 르노 페르도는 다시 이야기를 이 어나갔다. "그 친구는 육로를 통해 아타카파 공화국으로 돌아가던 길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를 발견하고는 저에게 잠재되어있는 가치를 인정했습니다. 제가 스파일에 있었을 때 흔히 말하는 고위층이었다는 걸 알아차린 거지요. 예. 그렇게 해서 저는 이곳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간첩, 아니 정보원 얘기 말인데... 그런 얘기 함부로 해 도 괜찮은가? 우리가 스파일로 되돌아갔을 때, 그런 사실을 이야기한다고 하면..." "하하하. 솔직히 오브라디 교수님 같은 분이라면 논문으로 저희 아타카 파 공화국의 정체를 알리는 글을 쓰실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지금과 같 은 시기라면 비스토브레 왕국이 저희와 같이 멀리 떨어진 나라에 대한 관 심을 가지지는 못할 겁니다. 그리고 그런 시기가 온다면 저희 쪽에서 알 리고 싶을 지도 모르니, 그 때는 오히려 교수님의 도움이 필요할지도 모 르지요. 그리고 정보원 문제 말씀입니다만, 아무리 스파일 전체가 정보원 을 찾으려고 해도 결코 찾지 못할 것입니다. 현지인하고 완전히 똑같기 때문이죠. 기껏해야 친절한 여행객 정도로 여기는 게 고작일 겁니다." 르노 페르도는 여기까지 단숨에 이야기를 쏟아내었다. 나는 말하는 태 도나 내용으로 보아 일단 르노 페르도가 거짓말을 하고 있지는 않다고 생 각하기로 했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은 남아 있었다. 르노 페르도는 그걸 눈치 챈 사람처럼 막바로 이어서 내가 궁금해하는 점을 이야기 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왜 이곳을 떠나지 않느냐고 물으셨지요? 답해 드리지요. 저는 이곳이 좋습니다. 이곳이 좋은 곳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이곳은 늘 완벽한 날씨에 식량과 물은 충분히 자급자족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모 든 사람들이 충분한 교육을 받으면서 살고 있고요. 그리고 저는 돌아 갈 수 없는 상태입니다. 제가 처음에 바바 족으로 온 것이 스파일에서 유배 된 것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 수르카 님." 르노 페르도는 이렇게 말하고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 표정이 너무나도 서글퍼 보여서 감히 더 이상 어떻게 물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나도 몇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오브라디 교수님. 여쭤 보시지요. 그런 문제 때문에 제가 이곳으로 온 것이기도 하니까요."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군. 먼저 하나 묻지. 이곳에는 귀족이 없다고 했 는데, 그렇다면 모두 평민인가?" "오브라디 교수님. 모두 평민이냐는 질문보다는 보두 평등하냐는 질문 이 옳을 것 같습니다. 예. 모두 평등합니다." "그래. 자네 말이 맞군. 그럼 이렇게 묻지. 사람은 날 때부터 능력이 다르고 특성이 다르지 않은가. 누군가는 정보를 조작하는 능력이 뛰어나 고 또 누군가는 육체를 능숙하게 단련하기도 하지. 그렇다면 어떻게 평등 할 수 있는가? 누구나 귀족, 그러니까 높은 곳에서 사람에게 지시를 내리 는 일을 하고 싶어하지 농사를 짓거나 사냥을 하고 싶어하지는 않을텐 데." "그런 평등이라면 세상 어디에 가도 이루어지지 못할 것입니다. 역시 교수님은 다르시군요. 실은 그 평등의 문제가 저희 아타카파 공화국의 중 요한 이념 중 하나 입니다. 저희 공화국에는 전설이 있지요. 최종전쟁 때, 살아남은 저희 조상들은 이곳에서 어떤 이념으로 살아가야 할 것인가 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그 결과 이곳의 저희 조상은 두 편 으로 나뉘어 싸우게 되었지요. 하나는 평등을 중요시하는 쪽이었고 또 하 나는 자유를 중요시하는 쪽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무런 의미 없 는 싸움이 아니었나 싶기도 합니다만, 그 때는 그 문제가 아주 중요한 문 제였다고 전설은 전합니다. 두 편으로 나뉜 저희 조상은 결국 하나의 합 의점을 찾아내었습니다. 그것은 평등 안에서의 자유라는 명제로 정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무슨 소리를 하는 지 알 수가 없었다. 자유의 문제와 평등의 문제 라니? 자유니 평등이니 하는 말을 들어 본 적은 있었지만, 그게 어떤 의 미의 말인지는 잘 모른다. 기껏해야 사비오 영감이 자신은 자유주의자라 고 말했던 것 정도가 내가 알고 있는 전부니까. 정치 얘기는 머리 아프다 니까.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 평등을 만족시켰는가? 자유와 평등은 양립할 수 없는 개념으로 알고 있었네만." "기회의 평등, 즉 기회의 균등이라는 원칙으로 만족시켰습니다." 오브라디 교수는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을 지었다. 뭔가 이해가 잘 가 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랬군. 이해가 갈 것도 같네. 하지만 말일세, 내가 생각하기에 기회 의 균등이라는 것은 대단히 추상적인 개념인 것 같은데. 이론이야 물론 가능하겠지만 어떻게 그것을 현실의 생활 속에서 구현할 수 있었는가?"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8973/19898 ━━━━━━━━━━━━━━━━━━━━━━━━━━━━━━━━━━━━━━━━ 제 목:[탐그루] 강철의 오로라 246 관련자료:없음 21/21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4-12 20:40 조회:1314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오브디 교수의 이번 물음은 그야말로 학자적 호기심인 것 같았다. 나도 그렇지만 다른 일행들은 벌써 지겨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네. 물론 현실은 냉정하죠. 저희는 특수한 상황을 만들어 내기로 했습 니다. 이곳 지하는 매우 평화롭고 풍족해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 다. 이곳 지하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은 매우 한정되어 있고, 따라 서 물도 식량도 매년 한정된 양밖에는 생산해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저희 가 선택한 방법은 인구를 늘리지 않는 방법이었습니다." 인구를 늘리지 않는 방법이라니? 인구라는 게 사람의 수를 말하는 것 같기는 한데 늘리지 않는 다는 게 무슨 소리일까. 나는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사람이야 당연히 늘어나기 마련 아닌가? "그렇다면 이곳은 생각보다 좁은 곳이었군. 그 정도의 통제가 가능하다 면."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특수한 상황을 만들어 낸 것이 저희 아 타카파 공화국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었다고 말입니다." "잠깐만요. 그럼 제가 정리해 보지요." 마로우가 끼어 들었다. 사빈은 별 관심이 없는 듯 했고, 스칼렛은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무슨 의도로 나를 보는 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그저 르노 페르도의 얼굴만을 바라보았다. "인구를 조절한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러니까 이곳에서 생산되는 자원에 맞추어 인구를 조절하고 있다는 말씀이시로군요." 마로우의 말은 이해가 될 것도 같았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인구를 조 절'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사람은 그냥 태어나는 것 아니었던가? 그리고 태어난 사람은 조금 더 땅을 개척하고, 그렇게 해서 오늘날의 비스토브레 왕국도 세워진 것이 아니었던가. "그렇지요. 사실 기회의 균등이라는 것도 규모가 커지면 실현 불가능하 다고 저희들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실 식량이나 집 지을 자재가 부족하 면 기회가 균등해 질 수가 없는 법이거든요. 다시 말씀드려서 인구를 조 절하는 것이야말로 이상적인 사회를 유지하는 데에 가장 큰 필요조건이라 고 저희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구를 조절한다는 게 무슨 말인가요?" 나는 도저히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이렇게 물었다. 이번에는 사빈마저 도 내 질문에 눈총을 보내지 않았다. 나는 내심 가슴이 뿌듯해졌다. 내가 올바른 질문을 던졌구나 싶었다. "... 사람의 수를 늘 비슷한 수준으로 유지한다는 것입니다." 르노 페르도가 말했다. 그런데 르노 페르도의 대답에는 어딘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그가 틀린 말을 한 것 같지는 않았지만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결여되어 있었다. "예. 그렇군요. 그럼 어떤 방법으로 그렇게 하는 가요?" "음. 그러니까... 저희는... 흠흠. 두 명의 부부가 두 명의 자손을 낳 으면 인구는 늘어나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서둘러 말을 닫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르노 페르도의 대답 을 들으면서 여전히 석연치 않은 구석이 남아있음을 알 수 있었지만 차마 더 물어볼 수가 없었다. 적어도 나는 남이 난처해하는 모습을 보면 불편 한 마음이 드는 사람이니까. "저희의 방식은 그러니까 비스토브레 왕국 사람이 이해하기 곤란한 것 들이 많이 있습니다. 저도 이곳에 와서 그러한 차이를 깨닫고 또 익히는 데에 시간이 걸렸습니다. 잘 설명해 드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거 생 각보다 너무 어렵군요." 얼굴까지 붉히면서 르노 페르도가 말했다. 물론 나도 어린아이가 아닌 이상 임신을 피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구체적인 부분까지 (예를 들어 타코의 창자를 이용하는 방법이나 신맛이 나는 들꽃 의 꿀을 이용하는 방법, 아니면 흔히 쓰는 날짜 계산법 등) 말이다. 하지 만 그런 정도의 이야기를 하는 걸 가지고 얼굴을 붉히다니. 스칼렛이 있 어서 그러는 걸까? "르노 페르도 님. 저도 하나 여쭈어 봐도 좋을까요." 크라이가 입을 열었다. 늘 냉정하고 침착한 크라이답게 감정이 드러나 지 않는 조심스러운 말투긴 했지만 나는 크라이의 목소리에서 불안감이 묻어나고 있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곳의 정보원이 다른 지역으로 간다고 말씀하셨지요." "예. 그렇습니다." 크라이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는지 신중한 태도를 보이 면서 르노 페르도가 대답했다. "그렇다면 혹시 하얀 용의 문양을 특별한 표식으로 가지고 가지 않습니 까?" 크라이의 물음은 마치 진검 승부에서 한 발을 내딛는 검사처럼 비장한 구석이 있었다. 르노 페르노의 눈이 반짝였다. 뭔가 알아차렸다는 느낌이 었다. "어쩐지 다른 곳 사람 같지 않게 느껴졌습니다. 이름은 묻지 않겠습니 다. 어차피 본래 이름이 아닐테니까요." 로노 페르도가 말했다. 대충은 다 짐작하고있다는 듯한 말투였다. "혹시 모히칸 족의 판즈람이라는 이름을 알고 계십니까?" 결국 크라이도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고야 말았다. 이렇게 말하는 크라 이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크라이의 말을 듣자 르노 페르도는 안도하면서 미소를 머금었다. "다행이로군요. 문서 자료실을 뒤져보지 않아도 좋을 테니까요." "그럼 지금 그 분이 어디 계신지 알고 계십니까?" "예. 물론입니다." "지... 지금 그 분을 볼 수 있을까요?" "네. 그럼요. 따라 오시지요." 크라이가 말을 더듬는 것은 처음 보았다. 르노 페르도가 오두막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 뒤를 황급히 크라이가 뒤따랐고, 나를 포함한 나 머지도 별다른 이유는 없었지만 크라이를 뒤따라갔다. 나는 알고 있었다. 어째서 크라이가 하얀 용의 문양에 집착하는지, 또 지금 이렇게 서둘러 걸어가는지. 크라이는 바다로 떠나 돌아오지 않았던 아버지를 찾아낸 것 이었다. 나는 가슴이 벅차오르고 있었다. 꼭 내가 크라이의 입장이 된 것 처럼 말이다. "여기입니다." 르노 페르도가 안내한 곳은 작은 오두막이 모여있는 마을이었다. 사람 들은 밭일을 하고 있었다. 여자도 남자도 모두 무거운 것을 쉽게 들어올 리고 있었는데, 나는 그 모습에서 보통 사람보다 월등하게 힘이 센 크라 이의 모습이 비춰 보였다. "여기가 모히칸 부족이 모여 사는 곳입니다. 굳이 관심이 있으시다면 아시안이나 유러피안, 멕시칸이 사는 곳도 보여드릴 수 있습니다만..." "아버지, 판즈람은 어디에 계십니까." 크라이의 목소리는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크라이의 물음에 르노 페르 도가 천천히, 그리고 아주 침착하게 말했다. "판즈람은 이 땅에 묻혔습니다. 스파일 정보원 임기를 마치고 돌아온 후였습니다. 사람은 땅으로 돌아가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는 것 이상 축 복 받은 일이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땅에 묻히는 일은 매우 영광스러운 일이지요" 크라이는 망연자실한 얼굴이 되어 밭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바라만 보고 있을 뿐, 르노 페르도의 말은 듣고 있지 않은 듯 했다. 르노 페르도도 그 걸 눈치 챘는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 당신은 판즈람의 아들이었군요. 진작 알아봤어야 했는데." 르노 페르도가 말했다. "이곳에 제 진짜 아버지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판즈람이라는 이름을 말하기가 어색한지 크라이는 그분이라는 표현을 썼다. 크라이의 말에 르노 페르도는 긍정의 빛을 나타냈다. "그렇지요. 이곳의 대지가 사람들의 진짜 아버지니까요. 아까 말씀드렸 듯이 이곳의 땅으로 되돌아 갈 수 있는 사람은 선택받은 사람입니다. 땅 으로 돌아간 사람은 새 생명을 얻어 돌아오게 됩니다. 판즈람의 아들이 다시 판즈람의 아버지가 되는 것이죠. " 그말을 들은 크라이는 망연자실 땅에 무릎을 꿇고 주저 앉았다. 우리 모두는 페르도의 말이 무슨 뜻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페르도는 전혀 시 인처럼 보이지 않았는데 시인들이나 할 법한 말을 학자의 말투로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크라이는 어떤 큰 충격을 받았는지 땅에 머리를 대고 흐 느끼고 있었다. 문삼과 사비치는 다음 날 아침 일찍 아타카파 공화국을 떠났다. 서둘러 서 떠나야 한다는 말을 와트슨 대통령에게 남긴 후의 일이었다. 선원 몇 도 그들을 따라 나섰다. 문삼이 약속한 보수가 생각보다 큰 액수인 모양 이었다. 남아있겠다고 말한 선원 전부가 문삼 일행을 따라가기로 한 걸 보면 말이다 (물론 말이야 고향으로 가려면 이 수밖에 없다고 하기는 했 지만). "이렇게 급하게 떠나야만 하는 건가?" 오브라디 교수가 사비치에게 물었다. "사실 꼭 그렇지는 않아. 하지만 저 친구가 안달이로군." 문삼을 바라보면서 사비치가 말했다. 문삼은 선원들을 모아놓고 일장 연설을 늘어놓고 있었다. 선원들이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짝다리를 짚 고 있는게 눈에 띄었다. "자네는 하던 일을 계속 해야겠지?" "...그래." 오브라디 교수가 힘없이 대답했다. 아무리 꿀리는 구석이 있다고 해도 저렇게 비굴하게 보일 정도로 말할 필요는 없을 텐데. "이제 빚은 사라진 걸로 하지, 오브라디." "빚? 자네가 나한테 빚진 게 있었던가? 그저 난 내 일을 하고 자네는 자네 일을 한 것 뿐 아니었던가?" "그래. 그게 내가 원하는 거지." 둘은 악수도 없이 서로 뒤돌아섰다. 나는 도대체 두 사람이 무슨 대화 를 나누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한가지 만은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사비 치와 문삼은 바바 족의 영역으로, 그리고 우리 일행은 용을 찾아간다는 것이었다. 아마 이 부분을 두고 오브라디 교수는 '난 내 일을 하고 자네 는 자네 일을 하면...' 운운했을 것이었다. 내가 알 수 있었던 것은 적어 도 사비치가 우리의 일을 돕고 싶어하거나, 혹은 우리 일이 잘 되기를 바 라고 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정보로는 그 이상의 일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왜 따라가지 않았어?" 내가 오로스크에게 물었다. 오로스크는 그냥 이곳에 남겠다고 했기 때 문이었다. 문삼이 길길이 날뛰지나 않을까 걱정도 되었지만, 문삼은 순순 히 오로스크에게 마음대로 하라고 말했다. "자네 말고도 글쓰는 사람은 많아." 오로스크는 그 말에 자존심이 상하거나 하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오 로스크는 히죽 웃으면서 문삼에게 이렇게 말했다. "글쓰는 사람은 많지만 시인은 드믈지요." 문삼은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생각해 보려고도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오로스크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고 문삼은 선원들에게 떠날 준비를 지시 하기 시작했다. 지하는 따뜻했지만 지상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상당한 준비가 필요했 다. 문삼은 훗날 갚을 것을 약속하면서 식량과 뮤, 천막, 땔감 등을 제공 받았다. "그럼 성공을 빌겠습니다." 와트슨 대통령은 바빠서 나오지 못했고, 르노 페르도가 대신 나와 문삼 일행을 배웅했다. 문삼과 사비치는 가볍게 목례를 마치고 카버의 인도를 받아 바바 족의 땅으로 떠났다. 두꺼운 아타카파 공화국의 문을 열고 계 단을 오르는 문삼 일행의 뒷모습에는 미련 같은 건 남아있지 않았다. 아 마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겠지. 적어도 저 사람들에게는 해야 할 것들이 남아 있으니까 말이다. "오브라디 교수님. 저 사람들, 뮤도 없이 바바 족의 영역으로 가는 이 유가 도대체 뭡니까?" 문삼 일행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마로우가 오브라디 교수에게 물었다. "자네 칼을 다뤄 본 적 있는가, 마로우 군." 마로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로우는 칼을 차고 있었다). "뮤를 보내 준다는 건 그냥 시늉에 불과한 거라네. 칼을 고쳐 잡고 위 를 노리고 아래를 노리는 그런 시늉 말일세. 진짜는 다른 곳에 있지." "진짜라면 다른 의도가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지. 아마 신성 제국이 대륙 중앙에 자리 한 이상 바바 족과 더 이 상 다툴 필요가 없어졌으니 화친을 맺자는 말을 할 지도 모르고, 아니면 반대로 바바 족에게 신성제국의 공격을 부탁하려는 지도 모르지." 오브라디 교수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나는 그 많은 뮤들이 수장되어 버 렸다는 안타까움이 되살아났다. 배에 남아 마지막 항해를 마쳤던 선장과 함께 말이다. 하지만 저들은 뮤가 희생된 것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자신 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분명 보다 큰 뜻이 있을지도 모르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 판단으로는 그런 것 보다 더 복잡한 의도가 있을 것 같습니다." 사빈이었다. 사빈은 멍한 눈초리를 하고서 문삼 일행이 사라진 쪽을 바 라보고만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사빈에게 쏠렸다. "그런가? 그래. 무슨 뜻이 있는 것 같나?" "그냥... 느낌입니다." 사빈은 이렇게 말하고는 얼른 다른 곳을 바라보면서 콧노래를 흥얼거렸 다. 오브라디 교수는 이제 사빈은 완전히 무시하고 있었다. "르노 페르도 군. 대통령을 뵙고 싶은 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오브라디 교수가 돌아가려는 르노 페르도에게 말했다. "제가 면담 신청을 해 놓지요. 그냥 기다리시면 됩니다. 늦어도 내일이 면 뵐 수 있을 겁니다." 르노 페르도가 말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8974/19898 ━━━━━━━━━━━━━━━━━━━━━━━━━━━━━━━━━━━━━━━━ 제 목:[탐그루] 강철의 오로라 247 관련자료:없음 27/27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4-12 20:41 조회:1496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크라이는 모히칸 족이 모여있는 곳에 도착한 이후, 그곳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대통령을 만나기까지는 특별히 할 일이 없었으므로 모히칸 족의 일을 돕기로 하였다. "... 그러니까 용에 대해서는 잘 모르신다는 겁니까?" 오브라디 교수는 모히칸 족 사람들에게 끈질기게 이것저것을 물었다. 하지만 올바른 대답을 주는 사람은 없었고 특히 용에 관해서는 그게 뭔지 알고 있는 사람조차 하나도 없었다. "왜 이곳에는 노인이 없지요?" "노인이 뭐지요?" "나이 든 사람 말입니다... 저처럼." 오브라디 교수는 노인의 예로 자신을 든다는 게 기분 나쁜지 인상을 쓰 면서 말했다. "나이가 들면 다른 곳으로 갑니다." "어디로 가지요?" "여기는 아니지요." 모히칸 족 사람들은 모두 젊은 사람뿐이었다. 가장 나이든 사람이리고 해 봐야 마흔이 넘어 보이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나는 이곳에 젊은 사 람뿐이라는 게 신기했지만 이 곳 사람들은 오히려 오브라디 교수가 신기 한 듯했다. 어찌되었건 오브라디 교수의 질문에 고의인지 아닌지 대답은 자꾸만 빗나가고 있었다. "이런 곳에서 살면 따분하시겠습니다. 농사 짓는 일 말고 다른 일은 안 하시나요?" 오브라디 교수는 방향을 틀어서 일상 생활에 관련된 질문을 던졌다. 오 브라디 교수의 질문에 사내가 대답했다. "사람이 사는 이유가 뭡니까? 서로를 위해서 사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다른 일이 뭐 필요하겠습니까." 사내는 이렇게 대답했다. 누가 들으면 장로나 시장들이 뻔뻔스럽게 잘 도 내 뱉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를 정도의 말이었지만 사내의 얼굴을 보아하니 정말 진심인 것 같았다. "그럼 농사 짓는 일만 하는 게 나쁘지 않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모히칸 족은 땅에서 나서 땅에서 죽지요. 저 언덕 위에 있는 수우 족 은 바다에 나가 싱싱한 고기를 잡아옵니다. 또 입구 쪽에서 지나쳐 오신 아파치 족은 곰 사냥을 나가고요. 또 우리가 농기구와 사냥 도구를 만드 는 북경 족이나, 옷을 만드는 봄베이 족이나, 뭐 전부다 서로를 위해서 사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사람은 혼자서 살지 못한다고 하지요. 하하 하." 사내는 이렇게 말하면서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을 닦아 내었다. 나는 그 모습이 매우 건강하다고 여겨졌다. "그렇군요. 그런데 이곳은 지하인데 햇빛이 잘 드는군요. 어떻게 드는 지 아십니까?" "모릅니다. 그거야 대통령이 할 일이지 우리가 할 일이 아니지 않습니 까? 우리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답니다. 여기서 일해서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제공하는 것, 뭐 그런 게 훨씬 중요하다고 여기니까요." 흙을 고르면서 모히칸 족 사내가 말했다. 이곳에서 기르는 것은 주로 감자였다. 나는 밭일은 해 본적이 없었지만 나르라는 것을 나르고, 뽑으라는 것을 뽑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우리가 워낙 추운 곳에 있다가 와서 그렇지 사실 이곳은 선선한 편에 가까운 땅 인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감자가 잘 될리가 없으니까 말이다. 우 리가 한 일은 주로 조각이 난 씨감자를 심는 일이었고, 사람들은 조금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으면서 씨감자를 정확하게 줄을 맞추어 심어 나갔다. 점심때가 되니 식사가 나왔고, 잠시 휴식 시간이 있었다. 식사를 들고 온 것은 여자들이었다. "수우 족 여자들이지요." "수우 족은 여자 뿐인가요?" 나는 모히칸 족에 여자가 하나도 없는걸 보고 의아해 하고 있었는데, 마침 기회다 싶어서 사내에게 이렇게 물었다. "예.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여자와 남자가 함께 할 일이 없습니다. 우 리가 농사를 짓는 것처럼 여자들도 따로 할 일이 있지요." "대통령은 여자던데요?" "그야 그렇게 자랐으니까요. 대통령은 대통령으로 키워지고 농꾼은 농 꾼으로 키워지는 게 이곳이지요." 그렇게 자라난다. 어쩌면 마법사의 피도 날 때부터 얻어지는 게 아닌 것처럼, 왕도, 농사꾼도 그렇게 배우고 자라나는지 몰랐다. 음식을 다 먹 고 난 후, 우리 일행은 대충 자리를 잡고 쉬었다. "하늘빛이 이상하지 않아요, 수르카 님?" 스칼렛이 나에게 물었다. 나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니, 이곳은 지하 이니 하늘이라기 보다는 땅이라고 표현하는 편이 낫겠다. 하지만 분명 머 리 위에는 푸른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조금 흐린 날처럼 탁한 빛을 띄고 는 있었지만 푸른빛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전 하늘이 있다는 게 더 이상한데요. 여긴 지하잖아요." "하긴 그렇군요." 스칼렛은 수긍한다는 듯한 얼굴이 되어서 이렇게 말했다. "이곳에 오니 저는 정말 편안한 기분이 들어요. 이런 곳에서 산다면 얼 마나 좋을까요?" 스칼렛의 표정은 꼭 꿈을 꾸고 있는 소녀를 보는 듯 했다. 스칼렛의 머 리는 어느 사이 사라나 어깨를 훨씬 지나 있었다. 나는 나무에 기대어 앉 은 스칼렛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뭐가... 얼굴에 묻었나요?" 스칼렛이 물었다. 나는 친절하게 스칼렛에게 말해주었다. "뺨에 감자 조각이 묻었어요." 스칼렛은 부끄러워하면서 얼굴을 붉히면서 감자 조각을 떼었다. 젊은 여자가 얼굴에 뭘 저렇게 붙이고 다니니 부끄러울 만도 하긴 하겠지만. 햇살은 정말 따사롭게 내리 쪼이고 있었고, 하늘에는 구름 조각이 떠다니 고 있었다. 아타카파 공화국은 완벽한 곳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 다. "자. 오늘 오후는 비가 오니까 안으로 들어가 있지요." 오브라디 교수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사람이 이렇게 말했고, 모히칸 족 은 이런 일에는 익숙하다는 듯이 오두막 안으로 돌아갔다. "비가 오는 걸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오늘은 비가 오는 날이니까요." 당연한 걸 왜 물어보냐는 듯한 대답이었다. 물론 오브라디 교수야 더 묻고 싶은 게 많았겠지만 그냥 참는 눈치였다. 어떻게 비가 오느냐, 혹은 지하인데 어떻게 햇빛이 비치느냐, 혹은 왜 노인이 없느냐는 질문을 해 봤자 올바른 대답을 듣기는 어려웠으니까. 아무래도 이 사람들과는 말이 통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하기사 르노 페르도도 이곳에 적응하는 데에는 시간이 꽤 걸렸다고 하니까 말이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모히칸 족 사내의 말 그대로 비가 내리기 시작했 다. 빗물은 기분 좋게 땅을 적시는 보슬비였다. 방울방울이 땅을 적시며 흩어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내가 얼음뿐인 극지의 지하에 와 있다 는 생각이 들지를 않았다. "오브라디 교수님. 이래서야 어디 용을 잡겠습니까? 이거 팔이 근질근 질해서 못 참겠습니다." 사빈이 오브라디 교수에게 말했다. 하긴, 용사냥꾼의 긍지인가 뭔가 때 문에 여기까지 따라온 사빈이었으니 이렇게 멍하니 시간만 보내는 것이 기분 좋을 리는 없었다. "의욕이 넘치는 자네를 보니 안심이 되기는 하는군. 사빈 군. 그 근질 거리는 팔로 오후에는 좀 더 열심히 일해주는 게 어떤가?" 오브라디 교수가 웃으면서 말했고, 사빈은 당당하게 예, 알겠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나는 그 모습에 웃음이 터질 것 같았지만 꾹 참았다. 이윽고 비가 멈추자 다시 햇살이 내리쪼이기 시작했다. 보통 비가 오고 나면 숨쉬기가 상쾌해 지는 법인데, 그러고 보니 전혀 상쾌한 느낌이 들고 있지 않았다. 하늘도 여전히 약간 탁한 푸른 빛 그대 로였고, 땅만 좀 젖었다 뿐, 별로 달라진 것이 보이지는 않고 있었다. "이상하군. 그렇지 않은가, 수르카?" 오로스크가 나에게 물었다. "뭔가 이상해. 그런데... 뭐가 이상한지 모르겠어." 나는 오로스크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로스크는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나야 문삼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니까 이곳에 남겠다고 했지만, 이거 도무지 참을 수가 없군. 뭔가 이상하다는 것은 틀림이 없는데 뭐가 이상한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고 있단 말이야." 일할 생각이 전혀 없는지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면서 오로스크가 말했 다. 오로스크의 바지가 젖고 있었지만 오로스크의 진지한 표정에 나는 말 릴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스칼렛은 나보다 조금 더 친절 했다. 오로스크가 진지한 표정을 하고 있건 말건 바지가 젖는다고 알려 주었던 것이다. 그러자 오로스크는 웃으면서 이렇게 시를 읊조렸다. "오로스크, 숲의 조정자. 산이 없는 곳에 모여 산을 만들고, 울창한 숲 을 평지로 만드는 대식가. 오로스크, 황금의 이름. 늙으면 자신의 금빛 털을 젊은이에게 물려주지. 오로스크, 타오르는 눈동자. 세상의 모든 비 밀을 알고 있는 오로스크여." 오로스크의 시는 햇살과 어울려 금빛으로 출렁였다. 나는 그 시를 지은 것이 오로스크 본인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의 시에는 마음이 담겨 있어 마법과도 같은 힘이 내 마음에 전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감미로운 향기에 취해 있는 기분이었다. 오브라디 교수도, 마로 우도, 일손을 멈추고 오로스크의 시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모히칸 족은 우리를 한 번 힐끔 보았을 뿐, 그저 이상하다는 표 정으로 계속 일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크라이도 마찬가지였다. 나 는 그리 강하게 느끼지는 못했지만, 어딘지 위화감 같은 것이 이곳에 떠 돌고 있는 것을 감지해 낼 수 있었다. 어쩌면 이렇게 평화로워 보이는 곳 에도 뭔가 위협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버의 얼굴에 나 있던 꿰맨 자국들이 자꾸만 떠오르고 있었다. 대통령과의 면담은 다음 날 오전에 이루어졌다. 카버가 우리 일행을 인 도해 주었고, 우리는 대통령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오로스크는 우리를 따라오지 않았다. 그저 오두막에서 혼자 있고 싶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왜? 혼자 시라도 쓰고 싶은가 보지?" "놀리지 마, 수르카. 나는 글을 쓰지 않으면 가슴이 터져 버린다니까."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는 말투로 오로스크는 나에게 말했다. 하지만 크라이가 우리를 따라오지 않겠다고 말했던 것은 정말로 의외였 다. 크라이는 모히칸 족과 계속해서 이야기를 나누느라 별로 따라오고 싶 지 않은 모양이었다. "꿈을 이루었으니까." 크라이는 이렇게 말했다. 크라이의 진짜 이름은 리빙스턴이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크라이의 이름을 리빙스턴이라고 부르기가 어색했다. 아무래 도 크라이는 크라이인 것만 같았던 것이다. 리빙스턴이라니. 그래서 나는 될 수 있는 한 크라이의 이름을 부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카버를 따라 집무실 앞에 이르렀을 때, 오브라디 교수는 깊게 심호흡을 했다. 오늘이야 말로 뭔가 분명한 질문을 던져 우리의 목적에 다가서겠다 는 의지가 드러나 있는 심호흡이었다. 와트슨 대통령은 전에 보았던 것처럼 단정하게 집무실에 앉아 있었다. 조금도 빈틈이 없는 야무진 표정을 짓고 있는 와트슨 대통령의 모습은 마 치 '기다리고 있었어요'하고 이마에 적혀 있는 것만 같았다. "이제 좀 어떠십니까? 저희 생활이 조금은 익숙해지셨으리라 믿습니 다." 와트슨이 말했다. 감정이 하나도 담겨 있지 않은, 그야말로 사무적인 태도였다. 오브라디 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와서 이곳저곳 많이 둘러보았습니다. 궁금한 게 한 두 가지가 아니더군요." "그러실겁니다. 그곳 비스토브레 왕국과 저희는 많이 다르니까요." 와트슨은 웃음을 지었다. 나는 그 웃음이 너무나도 싸늘하게 느껴져서 등골에 소름이 다 돋을 지경이었다. "페르도와는 많은 말씀 나누셨는지요?" "르노 페르도 군과는 비스토브레왕국에서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습니 다. 옛이야기도 나누고, 꽤나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지요." "그러셨군요." 와트슨은 손가락을 까딱거리면서 대답했다. 의례적인 대답임에 틀림이 없었지만 와트슨의 태도는 무척이나 딱딱하게 느껴졌다. "르노 페르도가 이곳으로 온 이유는 알고 계십니까?" 와트슨이 물었다. 오브라디 교수는 유배되었기 때문이라고 들었다고 대 답했다. 그러자 와트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요. 하지만 왜 유배당하게 되었는지는 알고 계시는 지요?" "글쎄요. 아마 스파일의 수도 프라브리티 방화 사건에 연루되어..." "그건 구실이지요. 진짜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귀족들이 하는 짓이 다 그렇지요. 무슨 이유가 필요하겠습니까?" 마로우였다. 마로우는 아주 기분 나쁘다는 투로 이렇게 말했다. 하긴 아버지와 관련 있는 일이니 그럴 만도 하지 싶었다. "그렇지요. 귀족이 없을 때는 귀족의 일을 정치가들이 했고, 정치가가 부족할 때는 부자들이 했지요. 그건 인간이 무리를 짓고 살 때부터 그랬 습니다. 필요하면 취하고 쓸모 없어지면 버리지요. 영혼이 있건 없건, 피 가 흐르건 흐르지 않건, 인간은 다들 그렇게 살아 왔습니다." 와트슨은 꼭 동지를 만난 사람처럼 기뻐하면서 말했다. "르노 페르도의 경우에는 너무 뛰어난 능력이 그 원인이 되었지요. 멍 청한 둘째 아들에 비해서 르노 페르도의 능력은 눈에 뜨일 정도로 뛰어났 으니까요. 그래서 계모의 눈밖에 놓이게 된 게 원인이었지요." 와트슨은 마리누스 누베 사건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 데 계모라니. 나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이야기였다. "그 분의 친어머니께서 오래 전에 돌아가셨다는 것은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어머님은 계모가 되지요. 야심 있고, 음모와 술 수에 능한, 한 마디로 어느 사회고 늘 있어왔던 사람이지요. 높은 곳에서 아랫사람들을 속이는." "대단히 잘 알고 계시는 군요." 오브라디 교수가 와트슨에게 물었다. "예. 페르도는 제 남편이니까요."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와트슨이 말했다. 나는 잠시동안 놀라서 아 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둘이 부부였다니. 부부라면 늘 같이 있고 '아 름다운...' 운운하는 소름끼치는 말을 나누는 사이 아니었나? 적어도 이 곳 풍습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로구나 싶었다.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오브라디 교수님. 그냥 사실이 그렇지 않느냐고 묻고 있는 겁니다, 저 는 지금." 와트슨이 말했다. "세상은 언제나 그래왔습니다. 지금 제 집무실 지하에는 엄청난 양의 도서가 있습니다. 모두가 이곳 바르도 대륙 위에서 존재했던 사람들의 이 야기이지요. 그중에 역사적 사실들을 기록한 책을 보면 하나같이 음모와 술수, 살인... 범죄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오브라디 교수가 큰기침을 한번 했다. 아마도 다른 나라 사람에게 비스 토브레 왕국의 험담을 듣게 되니 기분이 상한 모양이었다. "그런 사료라면 한 번 보고 싶군요. 제가 모르고 있는 사실도 발견하게 될지 모르니까요. 하지만 역사는 어떤 사람의 주관으로 적혀있느냐가 중 요합니다. 역사라는 것이 역사를 바라보는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 적느냐 에 따라서 그 성격도 가치도 바뀌니까요. 하지만 지금 말씀하신 대로의 기록방식이라면 별로 보고 싶은 생각이 없군요. 세상이 그렇게 나쁜 곳 만은 아니라고 저는 생각하니까요." "이를 테면 필요악이다, 이런 말씀이시로군요." 와트슨의 말은 어쩐지 냉소적으로 들렸다 (사실은 미소는 커녕 아무런 표정도 드러나 있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우리는 그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그것도 아주 합리적인 방법으로 말이 지요." "인구 조절 말씀이신가요? 그건 어떻게 하고 계신지 궁금하군요." "나이가 차면 그 사람은 사라집니다. 다음 사람을 위해서요. 아마 오브 라디 교수님이 이곳에 존재했던 사람 중에 가장 나이가 많지 않을까 싶습 니다." 와트슨의 말에 나는 잠시 충격을 받았다. 사라진다니? 그렇다면 그 말 은 죽인다는 말과 똑같지 않은가? 나는 그제야 르노 페르도가 인구 조절 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 얼굴을 붉혔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게 합리적입니다, 오브라디 교수님. 이곳은 특수한 환경이니까요. 한정된 곳에서 한정된 생활을 하는 것, 이것이 우리의 최대 강점이자 또 한 최대 약점입니다." 오브라디 교수는 헛기침을 했다. 이번에는 아타카파 공화국의 치부가 드러날 차례였지만, 오브라디 교수는 애써 그것을 피해가려고 했다. "제가 몇 가지 묻지요. 먼저, 이곳은 지하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 데 어떻게 햇빛이 들 수 있습니까?" 오브라디 교수의 질문하는 태도는 매우 학구적이면서도 또한 진지했다. 이제는 화제를 바꾸고 싶다는 뜻이리라. 와트슨도 그런 오브라디 교수의 모습을 눈치챘는지 턱 밑으로 두 손을 모아 깍지를 낀 다음 이렇게 말했 다. "말씀드려도 모르실 겁니다. 사실 저희도 모르고요." 오브라디 교수는 의외의 대답을 들었는지 잠시 동안 당황하는 듯 했다. 하지만 오브라디 교수는 얼른 다음 질문을 이었다. "그럼 비가 온다는 것은 어떻게 알고 계십니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나도 오브라디 교수가 던진 질문의 답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고작 이런 대답을 듣게되니 실망이었다. 내가 이러니 오브라디 교수는 실망을 넘어서 화가 나고 있을 것 같았다. "제 질문을 피하시는군요." "피하는 게 아닙니다, 교수님. 저희가 알고 있는 것은 저희의 사명 뿐 입니다." "사...명이라니요?"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9033/19898 ━━━━━━━━━━━━━━━━━━━━━━━━━━━━━━━━━━━━━━━━ 제 목:[탐그루] 강철의 오로라 248 관련자료:없음 21/21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4-13 21:27 조회:1372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오브라디 교수는 이제 의외의 공격을 받은 검사처럼 당황하고 있었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난감한 건 같았다. 어쩐지 오브라디 교수는 휘청이 고 있었다. "저희에게는 내려오는 전설이 있습니다. 어느 정도 눈치채셨겠다 싶습 니다만, 저희는 상당히 긴 역사를 지니고 있는 나라입니다. 그러니까..." "...최종전쟁 때 생긴 나라지요." 나는 나도 모르게 와트슨 대통령의 말 끝에 이렇게 덧붙이고 말았다. 딴에는 작은 소리로 한다고 한 말이었는데, 하도 집무실 안이 조용해서 그만 내 목소리는 꽤 크게 들리고 말았던 것이다. "알고 계셨군요. 이름이 수르카라고 하셨지요? 보고 들어서 알고 있습 니다." 모두들 내 말에 놀라는 눈치였지만 와트슨은 별로 놀랍지 않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 "반지를 보고 저도 예감했지요. 수르카 님이라면 우리의 정체를 파악하 고 있을 것이라고." 물론 나는 아타카파 공화국의 정체 따위는 알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했던 말은 그저 아자닌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라서 덧붙인 것에 지나 지 않았다. 하루 전만 해도햇살을 바라보면서 이런 곳에서 살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던 나였다. "수르카 님 말씀 그대로입니다. 저희 아타카파 공화국은 최종전쟁 때 생겨난 나라이지요. 최종전쟁에 대해서 알고 계십니까?" "바르도 대륙 이전 세계의 마지막 전쟁이었지요. 제가 알고 있는 바로 는 그 때 세상이 바뀌고 마칸의 강림으로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고 하더군 요. 그 때 존재했던 나라 중에 가장 강성했던 나라는 아모리카 대륙에 있 던 나라였고요. 제가 아는 건 이 정도입니다." "저희가 아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군요, 오브라디 교수님." 와트슨은 깍지낀 손가락을 까딱거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최종전쟁 직후, 살아남은 사람들 중 일부가 이곳에 나라를 건설했습니 다. 그들은 최종전쟁이 일어났을 때 세상을 다스리던 사람들이었지요. 그 들은 영리했고, 또한 준비 정신이 투철했습니다. 최종전쟁 전에 많은 전 쟁을 겪었던 그들은 어떤 무기로 공격해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이곳에 이 런 땅을 준비해 두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곳은..." "고대 문명이 남긴 인공적인 땅이라는 말씀이시로군요." 오브라디 교수가 감탄 어린 어조로 말했다. 나는 오브라디 교수 말을 듣는 순간 뭔가 엄청난 비밀이 밝혀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다른 사람 들도 그런 느낌을 받았는지 숨소리조차 죽여가면서 두 사람 사이의 대화 를 주의 깊게 듣고 있었다. "예. 그렇습니다. 이곳을 유지시키는 것도, 햇빛이 있는 것도, 비가 내 리는 것도, 카버들도, 모두가 고대 문명의 발자취입니다. 이곳에 있는 우 리들은... 그러니까 고대 문명의 직계 후손들이지요." "그렇다면 저희가 찾아 온 목적에 한 걸음 더 다가간 느낌이로군요." 오브라디 교수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나 역시 마른침을 한 번 꿀꺽 삼키지 않을 수 없었다. 손에 땀이 베이는 것이 느껴졌다. "저희는 용을 찾아서 이곳으로 왔습니다. 최종전쟁 때 있었다는 용의 등장과 마칸의 강림과의 관계, 또한 이제 곧 닥칠 마칸의 강림과 용의 등 장과의 관계. 이러한 것들을 알고자 저희는 이곳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오브라디 교수는 거의 숨도 제대로 쉬지 않고 이렇게 말을 이었다. 오 브라디 교수의 말에 와트슨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아까 말씀드렸지요? 저희가 이곳에 남아 있었 던 것은 사명이 있어서였다고요." 와트슨이 말했다. 와트슨의 얼굴은 이제 단단하게까지 여겨지고 있었 다. 와트슨은 천천히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와트슨과 눈이 맞자, 나 는 몸이 움찔했다. 저런 표정의 사람이라면 남자나 여자라는 구분은 아무 런 소용도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이곳을 찾은 사람들 중에서 마칸의 봉인을 막기 위해 온 두 번째 비스토브레 왕국 사람이 되겠군요, 여러분들은." 와트슨은 이렇게 말하고는 손의 깍지를 풀었다. "전설을 눈 앞에서 바라본다는 것이 어떤 느낌일까 생각해 본 적이 있 습니다. 오랫동안 전해 내려온 영웅의 전설, 그리고 그것의 실현... 글쎄 요. 이렇게 맞닥뜨리고 보니 생각했던 것처럼 평심하게 있을 수가 없군 요. 이상한 일입니다. 저로서는 늘 냉정을 유지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 왔습니다만... 끔찍한 일이로군요. 이런 일이 벌어진다는 건." 와트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사명이니 전설이니 하는 말을 듣고 있으면서도 와트슨이 무슨 말을 하는지 한동안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오브라디 교수마저도 의외의 말을 들은 탓인지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아. 오해는 하지 말아주십시오. 여러분께서 이곳으로 오신 걸 두고 하 는 말이 아니니까요." 우리 중 아무도 오해고 뭐고 할 지식도 시간도 없었지만, 와트슨은 이 렇게 말했다. "저는 오랫동안 이 순간을 위한 훈련을 받아왔습니다. 제 아버지도, 아 버지의 아버지도, 또 그 분의 아버지도... 아주 오래 전 누군가는 마칸의 강림을 막기 위해 찾아온 누군가와 만났으리라... 뭐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습니다. 논리적으로 그건 진실이지요. 그렇지만 이렇게 제가 그 진실과 만나게 될 줄은, 정말이지, 몰랐습니다. 제가 운이 좋은 건지 나 쁜 건지..." "말씀 도중에 죄송합니다만," 마로우가 와트슨의 말을 잘랐다. "그렇게 혼자만 말씀하시지 말고 저희에게도 좀 말씀을 해 주시지요. 지금 저희는 무척 혼란스럽습니다. 도대체 지금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 고 있는 겁니까?" "죄송합니다. 제가 냉정을 잃었군요. 이런 적은 없었는데요. 정말로 죄 송합니다." 다시 자리에 앉으면서 와트슨이 말했다. 나는 와트슨의 얼굴을 바라보 았다. 와트슨은 핏기 없는 하얀 얼굴에 딱 어울리는 차가운 눈으로 돌아 와 있었다. "먼저 물어보신 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지요. 이것은 제가 아버지로부 터, 또 아버지의 아버지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입니다." 와트슨은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마칸은 인간에게 축복인 동시에 저주입니다. 용 또한 같은 의미로 마 칸에게 축복인 동시에 저주입니다. 사라져버린 것에 대한 그리움과 다시 나타날 것에 대한 동경,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오직 자신의 판단만이 가치의 척도가 될 수 있을 뿐이지요." 정확한 발음으로 또박또박 와트슨이 말했다. 물론 나는 한 단어 한 단 어 새겨들었지만 와트슨의 말이 무슨 말인지는 알 수 없었다. "우리의 선조는 마칸의 강림을 막고자 이곳으로 온 비스토브레 왕국 사 람에게 물었습니다. 마칸의 강림이 인간에게 어떤 것이냐고. 그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자신이 이곳에 온 것은 마칸이 인간에게 해를 끼치기 때문 이라고 말이지요. 이것이 가장 큰 물음이었습니다. 모든 것은 이 물음에 서 시작됩니다. 마칸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마칸은 마물을 이끌고 비스토브레 왕국에 나타났습니다. 아, 지금은 나타나고 있다고 말해야겠 군요. 그런데 이 마물들이 인간을 죽이고 마을을 불태우며, 세상에 해악 을 끼치기 때문에 그들이 여기에 온 것이라면, 그것이 진정으로 마칸의 강림을 막는 일이라면, 한 가지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 니다." 나는 와트슨의 말이 서론인지 본론에 접어들었는지조차 분명하게 알기 힘들었다. 그리고 우리보다 먼저 왔다는 그 사람들이 과연 누구일까도 궁 금했다. "마칸이 최초로 강림했을 때, 그 때의 세상은 끝도 없이 타락해 있었습 니다. 최종전쟁 때, 이곳으로 왔던 각 세계의 지도자들은 이곳에서 원래 살고 있었던, 인간의 세상을 떠나 있었던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두 종류의 사람이 모였으니 다툼이 없을리가 없지요. 두 종류의 사람들은 서로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마칸이 우리에게 온 이유가 무엇이냐. 그것 은 바로 인간의 필요에 의해서 왔다는 것이 지도자들의 대답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마칸이 강림한 이유는? 그것 또한 인간이 필요로 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세상을 떠나 있던 사람이 물었습니다. 다시 말해 마칸이 겉 으로 보기에는 인간을 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것이 인간을 위하는 것이 아니겠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던 것이지요. 저는 이 질문을 이 곳에 찾아온 여러분에게 드리고자 합니다. 마칸이 강림하는 것을 막으려 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질문에는 분명치 않은 부분이 있습니다." 오브라디 교수가 다시 평소의 태도를 되찾아 진지한 얼굴을 하고서 와 트슨에게 되물었다. "마칸을 인간이 만들었는지, 아닌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마 칸이 무엇인지도요. 그러나 마칸이 마물을 불러오며 그 마물이 우리를 해 치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그것이 마칸의 강림을 막아야 할 이유라는 말씀이시지요? 좋습니다. 하지만 이걸 보십시오." 와트슨은 카버를 불렀다. 카버가 나타나자 와트슨은 뭐라고 짤막하게 지시를 내렸고, 카버는 집무실의 불을 껐다. 집무실은 순간 어둠에 휩싸 였다. "지금부터 보시게 될 것은 인간이 하는 행동입니다. 물론 이 행동들은 인간이 해 왔고, 하고 있으며, 또한 앞으로도 계속 하게 될 행동입니다." 갑작스러운 어둠 앞에 우리 일행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어둠 속 에서 정령과도 같은 사람들의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을 때에는 당황을 넘어서 거의 혼란 상태에 이르렀다. "이 사람들을 잘 보십시오." 환영은 먼저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나는 마법과도 같은 일이 눈앞 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마법의 주문도 외우지 않고 이 정도의 마법을 쓸 수 있다니. 이 정도 능력을 가지고 있는 마법사라는 걸 왜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까, 나는? "이 사람들은 최종전쟁 전의 사람입니다." 어느 사이 어두운 방은 황량한 벌판으로 바꾸어 있었다. 나는 나타난 두 사람을 보기보다는 우리 일행을 돌아보았다. 모두가 하나같이 놀라운 지 입을 쩍 벌리고서 환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곳에는 한 때 숲과 개울이 있었지요. 하지만 어리석은 인간들은 이 곳에서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싸움을 벌였습니다. 이유 따위는 중요하지 않지요. 아마도 한 뼘의 땅을 사람의 피로 얻고자 했던 싸움이었을 것입 니다." 황량한 벌판에는 사람들이 서 있었다. 아마도 군복인 듯, 똑같은 종류 의 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눈에는 살기가 번득이고 있었 고, 얼굴에는 땀으로 얼룩진 흙먼지가 가득했다. 바닥은 온통 진창이었 다. 무기로는 시커먼 막대기 끝에 달려 있는 단검이 전부인 듯 했다. 나 는 그 무기를 보자 하잔에서 보았던 나무 막대기 끝에 묶여 있던 단검이 떠올랐다. 그리고 내 다리로 파고들었던 단검의 모습과 그 단검을 들고 있던 소년의 모습도 함께 떠올랐다. "이들은 결국 이곳을 벗어나지 못하고 굶어 죽었습니다. 전에 저 분께 서 귀족들이 하는 일이란 다 똑같다고 하셨지요? 최종전쟁 전에도 그건 마찬가지였습니다." 와트슨의 목소리는 오랫동안 준비한 원고를 외우는 사람처럼 침착하면 서도 막힘이 없었다. 다음 순간이었다. 어디선가 나타난 다른 종류의 군 복을 입고 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단검을 앞세우고 나타나 주변은 순간 백병전이 벌어졌다. 칼날은 목을 지향하면서 상대의 심장을 노리고 있었 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이 꿈틀거리면서 허리에 찬칼로 손이 향하고 말았 다. 이건 환영이다. 침착해, 수르카. 나는 이렇게 중얼거렸지만 환영이라 고 생각하기에 내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광경은 너무도 생생했다. 와트 슨은 마치 우리가 생생한 이 환영에 취하기를 바라는 듯이 아무 말도 하 지 않았다. "꺄악!" 스칼렛이 날카로운 비명을 올렸다. 단검 하나가 누군가의 목줄을 긋고 지나갔고, 목줄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스칼렛 쪽으로 튀었기 때문이었다. 스칼렛은 몸을 움직여 핏물을 피했지만, 핏물은 스칼렛의 몸을 지나 바닥 으로 떨어졌다. 목줄을 찔린 병사는 입에서 시커먼 피를 토하면서 앞으로 쓰러졌고, 목줄을 베었던 병사는 다시 누군가에게 등이 찔렸다. 이번에는 스칼렛도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아니, 우리 중 누구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것이 전쟁이 아니라 단지 살육이라는 걸 모두 느끼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었다. "... 살아남기 위한 싸움은 개미도 벌이는 것입니다. 한 뼘의 땅이라고 해도 어떤 경우에는 매우 소중한 가치일 때가 있지요." "오브라디 교수님은 역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시는군요. 하긴, 그러니 까 이곳 아타카파 공화국까지 오실 수 있으셨겠지요. 그럼 이건 어떻습니 까?" 순간 환영은 완전히 다른 곳으로 바뀌었다. 우리는 높은 하늘에서 숲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난생 처음 보는 넓은 잎을 가지고 있는 나무들이 눈 앞에 펼쳐져 있었다. 잠시 동안이었지만, 나는 마음이 놓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어디선가 새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아름다운 숲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와트슨이 말했다. 나는 와트슨의 말을 듣자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과 연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짐작도 가지 않기는 했지만, 어쩐지 좋지 않은 일 이 생길 것만 같았다. 다음 순간 뭔가가 숲을 향해 떨어져 내려갔고, 그것이 땅에 떨어지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숲은 불바다가 되어버렸다. 무시무시한 불길이었다. 나 는 불길이 다가오는 듯해서 절로 몸을 피하고 말았다. "이것은 한 뼘의 땅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하찮은 자존심 때 문이었지요. 다른 편 세력이 커지는 걸 눈뜨고 못보는 세력이 다른 세력 을 견제하기 위한 행동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럼 이제 땅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한 번 살펴 볼까요?" 와트슨이 말하자 우리는 잿더미가 되어버린 마을 한 복판에 서 있게 되 었다. 그곳에는 시커멓게 그을린 시체들과 완전히 다 타버린 집들로 가득 했다. 어디선가 고기가 타는 냄새가 풍겼다. 나는 코를 감싸쥐었고, 그건 다들 마찬가지였다. 나는 와트슨을 바라보았는데, 와트슨은 냄새가 나지 않는 건지, 아니면 나지 않는 척 하는 건지 태연한 표정을 하고서 집무실 의자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환영은 한 순간 한 모녀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어머니는 아기를 안고 있었지만, 어머니도 아기도 모두 불에 그을려 흉측한 모습으로 죽어 있었 다. 죽은지 얼마 되지 않는지 몸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오르고 있었고, 입 과 코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누런 액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저, 저건 너무했어..." 사빈이 도저히 눈뜨고는 못 보겠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나는 태연한 척 가만히 서 있기는 했지만 당장이라도 속에 것들을 다 게 워내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최종전쟁 전에, 사람들은 저런 무기를 만들었지요. 도저히 인간의 것 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무기들이었지요. 하지만 저 어린 아기나 어머니가 무슨 죄가 있지요? 저 모자는 그저 농사를 지으면서 행복하게 살고 싶었 을 뿐입니다. 하지만 저런 불바다를 만들어내는 무기는 생명을 앗아가지 않더라도 사람들로부터 그런 소박한 꿈 마저 빼앗곤 했지요. 어때요? 볼 만하신가요?" "그런 일은 사실 언제나 있어왔습니다. 물론 눈으로 본다는 게 그리 달 가운 일은 아니지만요." "오브라디 교수님. 본론은 이제부터입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9034/19898 ━━━━━━━━━━━━━━━━━━━━━━━━━━━━━━━━━━━━━━━━ 제 목:[탐그루] 강철의 오로라 249 관련자료:없음 23/23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4-13 21:27 조회:1261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이제 우리는 강물 한 복판에 서있었다. 시커먼 물이 흐르고 있는 강물 이었다. "불바다가 휩쓸고 간 하류의 강물입니다." 와트슨은 여전히 담담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설명을 해 주었다. 강물은 완전히 썩었는지 고약한 냄새가 진동을 하고 있었다. 허옇게 배를 뒤집은 물고기들이 둥둥 떠내려오고 있었다. "불바다가 된 곳에는 언제나 이렇게 죽음의 물이 흘러내렸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뭘 했는지 아십니까?"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했겠지요. 강물이 죽으면 사람이 죽는 것은 너무 나도 당연한 이치 아닙니까?" 마로우가 말했다. 나는 마로우의 목소리에 자신감이 없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하시겠지요. 하지만 이 사람들을 보십시오." 강물에 초록색 칠을 한 거대한 마차 한 대가 다가왔다. 실은 뮤가 끄는 마차는 아니었지만 바퀴가 달려 있는 것이 꼭 마차겠다 싶었다. 마차 앞 에는 두 사람이 타고 있었는데, 이내 곧 두 사람은 마차에서 내렸다. "자. 보세요. 저 사람들이 뭘 하는지." 와트슨이 말해주지 않았어도 우리는 두 사람이 뭘 하는지 지켜보았을 것이었다. 두 사람은 마차에서 내려, 마차의 짐칸을 열더니 마차에 실려 있던 뭔가를 강물에 쏟아 붓기 시작했다. 그게 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충 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고약한 빛깔이나 모양은 나중치더라도 일단 썩는 냄새가 배로 진동했기 때문이었다. "저 사람들은 쓰레기를 버리고 있습니다. 그게 저 사람들 일이니까요. 하지만 땅에 묻거나 태우기가 귀찮으니까 이렇게 강물에 쓰레기를 버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와트슨은 꼭 웃음이라도 터트릴 것 같은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마로우 조차도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일은 세계 곳곳에서 아주 흔하게 일어나곤 했습니다. 그 결과 세 상은 완전히 죽음의 땅이 되어버리고 말았지요." "그렇다면 최종전쟁은 마칸과 인간 사이에서 일어났던 것이 아니었습니 까?" 오브라디 교수는 심호흡을 한 번 한 뒤에 와트슨에게 이렇게 물었다. 와트슨은 오브라디 교수의 질문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바로 말을 이 어나갔다. "맞습니다. 이제 보시죠. 마칸의 강림 이후, 세상의 모습을." 방안이 갑자기 밝아지는가 싶더니 어디선가 한 줄기 햇살이 비추었다. 청명한 바람이 어디선가 불어오는 듯 했고, 다시금 새소리가 멀리서 들려 왔다. 새들은 평화롭게 우짖으며 하늘을 날고 있었다. "마칸이 한 일은 세상을 바꾸는 일이었습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생명체 들이 살고 있지요. 인간은 그것들을 보호하면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 것들과 함께 사는 것이지요. 그런데 최종전쟁 이전의 사람들은 자연을 보 호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누가 누구를 보호한다는 거지요? 그 말에는 벌써 썩어가는 강물에 쓰레기를 던지는 사람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게 느 껴지지 않으십니까?" "와트슨 대통령 님. 잠시만." 오브라디 교수는 와트슨의 말을 끊었다. "마물이 나타나는 건 왜 보여주지 않는 겁니까? 틀림없이 마칸이 강림 하기 전에 마물이 나타나 사람을 해쳤을 텐데요. 그리고 마칸 또한 사람 을 해쳤을 것이 분명하고요. 그 모습을 건너 뛴 것은 분명 의도가 있으리 라 생각됩니다." 오브라디 교수가 이렇게 말하지 않았다면 나는 거의 마칸이 세상을 구 원했다고 생각했을 뻔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오브라디 교수가 중요한 부 분을 지적해 주었다. 와트슨은 고개를 한 번 까딱 하더니 말을 이었다. "예. 의도가 있습니다." 와트슨의 목소리는 여전히 준비된 원고를 외우는 사람처럼 침착했다. "지금 사람들이 하고 있는 일을 둘러보십시오. 그때와 다를 바가 없습 니다. 이제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은 또다시 세상을 더럽힐 것입니다." "시대는 바뀌고 사람도 바뀌었습니다. 그런 건 좀 지나친 유추 해석 아 니겠습니까?" 사빈이었다. 나는 사빈이 '유추'니 '해석'이니 하는 말을 쓰리라고는 상상도 해 보지 못한 터여서 사빈의 그런 말투가 너무나도 생경하게 느껴 지고 있었다. 하지만 사빈은 진지한 학자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그럼 비스토브레 왕국의 국민들을 한 번 보시지 요. 마칸의 강림이 임박했다는 말이 나돌고 있고, 또한 마물의 출현은 계 속해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하는 일은 무엇 입니까? 자나크는 성황청의 신성제국으로 바뀌었고, 타실은 이름뿐인 왕 가를 지키기에 급급하고, 스파일은 바바 족과의 연계를 모색하고 있을 뿐 입니다. 국민들은 어떻습니까? 눈앞에 닥친 마물의 출현도 자신의 마을에 서 조금만 벗어나 있다면 관심이 없고, 마칸의 강림을 막아보겠다던가 하 는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이런 행동이 썩은 강물에 쓰 레기를 버리는 사람들과 뭐가 다르겠습니까." 와트슨이 조목조목 따져가면서 사빈의 말에 반박했다. 덕분에 사빈은 오래간만에 스파일 주립대학을 나왔다는 티를 내보려고 노력한 보람도 없 이 입을 굳게 다물고 말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스칼렛의 반응이었다. 스칼렛은 처음에 단 한 번 비명을 질렀을 뿐, 무덤덤하게 그저 환영들을 지켜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어쩐지 스칼렛은 와트슨의 의견에 동조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지경이었다. "불의 무기는 이제 곧 바르도 대륙 사람들 또한 손에 넣게 될 것입니 다. 마칸의 강림이 임박한 것은 전설이 이루어져서도 아니고, 또한 마칸 이 봉인 된지 천 년이 되어서도 아닙니다. 그건 바로 인간이 불의 무기를 손에 넣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볼 수 있습니다. 불에 그을린 시체들을. 그 시체들이 타는 냄새는 바르도 대륙 전체를 떠돌겠지요. 그리고 머지 않아 썩은 강물이 흐를 것이고 사람들은 매일 밤 고통 없이 죽게 되기만 을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온통 썩어버린 세상에서 말이지요. 생각만 해 도 끔찍한 일입니다." 와트슨은 이렇게 말하고는 우리를 천천히 바라보았다. 집무실은 다시 천천히 어두워졌다가 다시 정상적인 밝기로 되돌아왔다. 나는 한바탕 꿈 이라도 꾸고 난 것처럼 몽롱한 기분에 휩싸였다. "좋은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학술적으로 한번 심도 깊게 연구해 보고 싶은 주제로군요." 오브라디 교수가 말했다. 오브라디 교수의 말은 분명 가시가 돋쳐있는 말투였다. "그것이 사명이었습니까? 우리가 용을 찾아 이곳까지 온 것을 보고 마 칸의 강림을 막으려 한다는 걸 안 이상 우리의 앞길을 막아보겠다는 심산 이신 겁니까?" "글쎄요." 와트슨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와트슨의 그 행동 이 치밀하게 계산된 행동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와트슨의 다른 행동도 마 찬가지였지만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모습은 아무 래도 자신의 본심을 숨기려는 것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한 번 묻지요. 이곳에서 살고 싶지 않으십니까?" 와트슨은 대답 대신에 이렇게 말했다. "저희는 사명을 가지고 이곳에서 살아왔습니다. 그것은 마칸의 강림을 막고자 하는 이들에게 물음을 던지는 것이었습니다. 과연 인간이 마칸의 강림으로부터 구원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가. 그 대답은 여러분에게 달려 있습니다. 아, 물론 지금 당장 답변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와트슨은 이렇게 사이를 둔 다음, 우리에게 잠시 생각할 여유를 준 다 음 다시 말을 이었다. "만약 여러분이 이곳에 머물게 되신다면 나이 든 사람이 사라지는 일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아도 좋을 것입니다. 더 이상 이곳을 완벽하게 유지 하지 않아도 좋을지 모릅니다. 마칸이 강림하면 바르도 대륙은 이제 멸망 입니다. 그렇다면 이곳에서 우리는 전혀 다른 세상을 열어가게 될 것입니 다. 이곳에서 태양과 흙과 얼음만을 가지고 합리적으로 자연과 함께 살아 가는 세상 말이지요. 그리고 그 세상은 바르도 대륙 전체로 퍼져나가게 될 것입니다. 그 세상이 열리고 닫히는 것은 여러분의 손에 달려 있습니 다." 와트슨은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그 웃음 또한 역시 계산된 것 이 아닐까 의심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오브라디 교수가 의도에 관한 이 야기를 한 후로 나는 계속되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 마칸의 강림을 막을 길은 알고 계십니까?" 나는 와트슨에게 이렇게 물었다. 아주 잠시, 와트슨의 냉정한 태도가 흔들리는가 싶었다. 하지만 와트슨은 곧 평소로 돌아가 이렇게 말했다. "대답은 이미 드렸습니다." 무슨 말인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했다. 오늘의 대화는 끝이라는 것이었다. 카버가 나타나 우리를 밖으로 데리고 나갈 준 비를 갖추었다. "하루의 여유를 드리지요. 내일 이 시간, 이곳으로 다시 오세요. 대답 을 기다리겠습니다." 오두막으로 돌아가는 우리에게 와트슨이 던진 말이었다. 다들 착잡한 표정이었다. 몇 안 되는 우리 일행이었지만 의견은 벌서부 터 갈리고 있었다. "대답이라는 건 틀림없이 우리가 어떤 말을 하느냐에 따라서 마칸의 강 림을 막을 방법을 가르쳐주느냐, 가르쳐주지 않느냐를 결정하겠다는 말일 걸세." 오브라디 교수는 침통한 표정이었다. 말로 먹고사는 교수가 비록 일국 의 왕이라고는 하지만 말에서 밀렸다는 사실이 못내 가슴아픈 표정이었 다. "저는 그 사람 말이 옳다고 생각해요." 스칼렛이 말했다. 스칼렛은 환영을 볼 때부터 이런 대답을 할 낌새를 보이고 있었다. 나는 그런 스칼렛의 모습에 약간은 실망을 느꼈다. 우리 가 여기까지 온 이유가 뭔데. 어쩌면 간단한 속임수일지도 모를 환영 약 간을 보고서 생각을 바꾸다니 말이다. "스칼렛 님. 그건 좀 신중하지 못한 말씀인 것 같군요. 그럼 여기서 어 쩌자는 말씀이십니까? 여기서 눌러 살자고요? 다른 사람들이야 죽건 말건 신경도 쓰지 않고?" 마로우가 스칼렛의 말에 즉각 반박하고 나서면서 토론은 열기를 띄기 시작했다. "나는 용을 잡으러 온 거지 여기서 농사짓고 살려고 온 게 아닙니다. 저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대통령으로부터 용을 잡는 법에 대해서 이야기 를 들을 것입니다." 사빈의 입장은 단호했다. 나는 평소 사빈의 단순함을 우습게 생각하곤 했었다. 하지만 지금 사빈의 모습은 왠지 믿음마저 느껴졌다. 하나의 생 각만을 분명히 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고나 할까. "저는 누가 뭐라고 해도 이곳에 남겠습니다." 크라이였다. 오브라디 교수는 크라이에게 뭐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곧 그만 두었다. 그리고 나도 크라이의 생각에는 반대하고 싶은 마음이 조금 도 없었다. 크라이는 이곳을 찾아 그렇게 오랫동안 방황했던 것이다. 이 제 이곳으로 돌아왔으니 크라이로서는 더 이상 여행을 떠날 이유가 없게 된 것이다. 크라이의 말때문에 토론은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지만 오브라디 교 수의 발언을 시작으로 다시 활기를 띄었다. 얼마나 토론이 계속되었을까. 스칼렛이 이렇게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는 대통령의 말이 옳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은 결 국 세상을 망쳐버릴 거예요. 저는 서커스 들판에서 생각했어요. 한때 맹 위를 떨쳤다던 리치들이 힘없이 떠돌아다니는 모습을 보면서요. 비록 마 물이 나타나고 있다고는 해도 이대로 두면 마물들 쯤은 틀림없이 물리치 게 될 거예요. 대통령도 그랬잖아요? 불의 무기를 손에 넣게 될 거라고." "난 그거 아무래도 속임수 같던데. 세상에 그런 무기가 어디 있겠어?" "사빈. 우리 봤잖아요, 자폰에서." 마로우가 말했다. 나는 자폰에서 보았던 밤브라는 무기를 떠올렸다. 연 금술사의 검은 돌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엄청난 위력을 가지고 있었던 바 로 그 무기였다. "그런 무기로 전쟁을 한다면 피해가 엄청날 것은 분명하네. 하지만 마 칸의 강림은 바르도 대륙 전체를 날려버릴 게 틀림없다네." "인간의 멸종이라... 평화로운 세상을 예견하는 말처럼 들리는 군요." 오로스크였다. 오로스크는 어차피 이곳에 남을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 었기 때문에 별로 신경쓰고 있지 않았는데 이렇게 말을 꺼내다니 의외였 다. "한때는 들판을 뛰놀던 오로스크도 이제는 찾아볼 수 없지요. 그래서 산이 없는 곳에 산을 만들고, 숲을 평지로 만드는 일을 하는 건 오로스크 가 아니라 인간이 되었습니다." 오로스크 역시 인간을 미워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 쳤다. "하지만 시인은 노래했습니다. 늙어 금빛 털을 젊은이에게 물려준다고 요. 세상의 모든 비밀을 알고 있기에." "그 구절은 오로스크끼리의 이야기 아니었던가?" "교수님. 저는 시인입니다. 시인은 머리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가슴으 로 느껴야 하는 법이지요." 나는 오로스크의 말에서 다시금 마법의 원리를 떠올려 보았다. 분명 이 론만 따진다면 와트슨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스칼렛이 동조하고 크라이 가 남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어찌되었건 나는 심정 적으로 와트슨의 의견에 도무지 동조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사람도 오로스크처럼 사라져 버릴 수 있겠지요. 어찌되었건 사람도 죽 으니까요. 한 꺼번에 모두 죽어버릴 수도 있겠지요. 그러면 평화로워질지 는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세상에서 시인이 노래한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오로스크는 이렇게 말했다. 저런 것이 시인의 마음인가. 나는 오로스크 를 향해 고개를 몇 번 끄덕여주었다. 해가 지고, 또 한참의 시간이 지나자 오브라디 교수는 다급해진 모양이 었다. "이제 시간이 없네.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녀석에게서 마칸의 강림 을 막아낼 방법과 용의 비밀을 알아내야겠네." 오브라디 교수는 이렇게 비장한 각오를 밝혔다. "우리 그러면 투표를 하지요. 어떻게 내일 답하면 좋을지." 토론은 결론 없이 계속 이어졌고, 한밤중이 되어서 마로우가 이렇게 의 견을 내놓지 않았다면 아마도 토론은 해뜰 때까지 이어졌을지 모른다. 투표는 거수로 이루어졌다. 의외로 반대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만 스칼렛과 크라이가 손을 들지 않았을 뿐이었다. 두 사람에게는 신념이라 는 것이 없었다. 나는 마칸의 강림을 막자는 쪽에 손을 들었다. 물론 나 라고 신념이 있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신념이라기 보다는 그저 마음에 충실한 행동을 보였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곳에서 살고 싶지가 않다는 말이야? 스칼렛 양, 이거 의외인데?" 투표가 끝난 후 오브라디 교수는 스칼렛에게 이렇게 농담처럼 말을 건 넸다. 아마 토론 때 오갔던 불편한 기분을 없애려는 것 같았다. "크라이는 먹을 수 있을 지 몰라도 식사가 맛이 없어서요." 스칼렛이 말했고, 우리는 가볍게 웃음을 지었다. 이제 마지막 대답만이 남아있었다. 시간이 내일까지이니 모두 생각들 해 보라는 말을 남기고 오 브라디 교수는 잠자리에 들었다. 모두들 걱정인 모양이었다. 비록 회의는 있었지만 별다른 뾰족한 수를 얻지는 못한 상태였다. 그저 각자의 입장만 생각나는 대로 말한 상태에 불과하다고나 할까. 나는 통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이곳은 겉으로 보 기에 분명 아름답고 평화로운 곳임에 틀림이 없었다. 사람들은 싸움 없이 평화롭게 자신의 일만 하고 있었고, 그것도 서로를 위한다는 것에 보람을 느끼고 있는 일임에 틀림 없었기 때문에 뭐든 문제가 발생할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뭔가가 부족했다. 아무런 맛도 나지 않는 이곳의 음식처 럼 말이다. "수르카. 잠이 통 안오는가 보지?" 오로스크가 나에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별과 달이 없는 밤 하늘은 이상하기까지 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9035/19898 ━━━━━━━━━━━━━━━━━━━━━━━━━━━━━━━━━━━━━━━━ 제 목:[탐그루] 강철의 오로라 250 관련자료:없음 22/22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4-13 21:28 조회:1481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이런 극지에 오면 오로라를 볼 수 있다고 하던데." 오로스크가 말했다. "오로라?" "하늘에서 빛나는 천이라고 하더군. 어느 시인이 노래한 것을 들은 기 억이 있어. 오로라를 보기 위해 목숨을 걸고 극지까지 배를 몰았던 시인 이라고 하더군. 어떤 것은 하얗고, 또 어떤 것은 붉고, 어떤 것은 녹색으 로 빛을 낸다던데. 연금술사의 등 중에 오로라를 본딴 것도 있다고 하더 군." 오로스크가 막막하리 만치 어두운 하늘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이곳은 오로라가 비추는 땅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밤하늘밖에 볼 수 없 다니, 참 아쉬워. 그렇지 않아?" 한 참 사이를 두었다가 오로스크가 물었다. 나는 오로라를 본 적은 없 었지만 오로스크의 말을 들으니 한번 쯤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서도 오로라는 멸종된 걸까?" 내가 오로스크에게 물었다. 오로스크는 내 물음에 웃음부터 터트렸다. "멸종은 생명체한테 쓰는 말이야. 오로스크나, 하이에나나, 또 불곰이 나, 뭐 그런 것들 말이지." "멸종된 것은 평화롭다면서? 그런데 나 지금 저 하늘을 보니까 멸종 된 게 평화롭다는 거, 거짓말인 것 같아. 하늘을 봐. 쓸쓸해 보이지 않아?" 나는 솔직하게 오로스크에게 내 생각을 말했다. 오로스크는 내 말에 고 개를 끄덕였다. "그래. 솔직히 여긴 너무 쓸쓸해. 살기 나쁘다는 말은 아니지만 시인이 살기에는 적합한 곳이 아니야." 오로스크가 나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가끔 오로스크가 살아 있었을 때의 세상을 상상해 볼 때가 있어. 하늘 은 맑고, 오로스크들은 평지를 거닐면서 한가롭게 풀을 뜯지. 그런 풍경 을 바라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참 근사할 것 같은데." 씨익 웃으면서 오로스크가 말했다. 오로스크의 눈은 허공을 향하고 있 었지만 나는 오로스크의 눈 앞에 정말로 오로스크가 풀을 뜯고 있는 광경 이 펼쳐져 있을 것만 같았다. "세상의 모든 비밀이 거기에 있을 거야. 살아있는 것이 살아 움직이는 것. 난 그런 것 말고는 생각할 수가 없어. 그저 느낄 뿐이지." 우리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사방은 너무나 고요했고, 또한 너무나 적막했다. 마치 세상의 모든 것이 존재하지 않고 있는 것만 같았다. 꼭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는 식사처럼. 다음 날 우리는 와트슨의 관사를 찾아갔다. 비장한 각오를 마치고 싸움 터로 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허리에 찬 나미트의 칼이 내 걸음에 맞추어 흔들리고 있었다. "난 이곳에 남을 테니까 나는 가지 않겠어." 크라이는 이렇게 말했다. 아니, 크라이는 이제 리빙스턴이라는 이름이 마음에 드는 지 그 이름으로만 불러달라고 우리에게 부탁까지 했다. 아마 그레텔도 크라이와 함께 이곳에 남을 모양이었다. "여기서는 나이가 들면 어떻게 되는 지 알고 있으면서 어떻게...?" "오브라디 교수님. 저는 이곳 사람입니다. 땅을 느낄 수 있어요." 이렇게 말하는 크라이의 얼굴은 확신으로 가득 차 있어서 더 이상 어떻 게 말을 꺼내 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교수님 일행이 여기에 남게 되신다면,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죽게 되지는 않겠지요." 의도적으로 부담을 주려고 한 말 같지는 않았지만, 크라이의 말은 우리 일행의 비장한 각오를 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자네는 누구를 위해서 이곳에 남겠다고 하는 건가?" 오브라디 교수가 물었다. "그야 이곳에 있는 저희 동족을 위해서입니다." "우리 역시 바르도 대륙에 살고 있는 우리 동족을 위해서 이 일을 하고 있는 거라네." 오브라디 교수는 이렇게 딱 잘라 말하고는 우리를 이끌고 집무실로 향 했다. 나는 문득 뒤돌아 크라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크라이는 표정 없 는 얼굴로 여전히 확신에 찬 기색을 누그러뜨리지 않고 있었다. 집무실로 함께 간 것은 나와 오브라디 교수, 스칼렛과 사빈, 마로우, 그리고 오로스크도 함께였다. 이곳에 남지 않겠다고 말한 이상 오로스크 도 우리와 행동을 함께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결정은 내리셨습니까?" 와트슨 대통령이 우리에게 물었다. 와트슨 대통령 옆에는 르노 페르도 도 서있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마칸의 강림을 막아야 한다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 습니다." 오브라디 교수는 조금도 망설임 없이 와트슨 대통령에게 이렇게 말했 다. 와트슨 대통령은 오브라디 교수의 말을 듣자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했 다. "이곳의 생활방식이 이상적이라고 생각되지 않으시는 겁니까? 당신들의 결정에 따라 우리 아타파카 국의 미래가 달려 있다는 걸 간과하신 건 아 니시겠지요?" "아닙니다. 저는 이곳 사람들이 자신의 종족을 위해 조금의 의심도 없 이 열심히 일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매우 감명 깊더군요. 그래서 저희는 결정한 것입니다. 저희도 우리 동족을 위해 조금의 의심도 없이 뭔가 해 야 하지 않을까 하고." 오브라디 교수의 대답은 단호했다. 사실 이 말은 조금 전에 크라이에게 했던 말과 맥을 같이 하는 말이었다. 이렇게 나오는 데에야 더 이상 무슨 수가 있을 리가 없었다. "좋습니다. 정 그러시다면." 와트슨은 르노 페르도에게 뭐라고 귓속말을 했다. 그러자 르노 페르도 는 문 옆에 있는 작은 상자를 열고 뭔가 만지작 거렸다. "저는 이 나라의 대통령입니다. 알고 계시겠지만 우리에게는 군사력이 없습니다. 들고 있는 무기라고 해 봐야 사냥할 때 쓰는 것 빼면 별 것 없 지요. 그렇다고 사냥꾼들을 군사력으로 쓸 수는 없습니다. 그들 하나의 생명이 당신들 백 명의 생명보다 소중하니까요." 와트슨의 말에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것은 사빈이었다. 사빈은 늘 몸 에 품고 다니던 두 개의 단검을 뽑아 들었다. "결국 이렇게 되는 군요. 저는 당신들이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으리라 믿었는데요. 아쉽군요. 그렇게 기회를 드렸는데.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저희는 당신들이 마칸의 강림을 막는 것을 더 이상 놓아두고 볼 수만은 없습니다." 이 말에는 마로우도 반응을 보였다. 마로우는 당장이라도 칼을 뽑을 수 있도록 몸을 숙이고 칼자루에 손을 가져갔다. "우리에게 군사력은 없습니다. 하지만 막강한 카버가 있지요." 순간 집무실의 정문과 뒷문이 동시에 열렸고 줄잡아 일, 이개 십부는 될 만한 카버들이 칼을 들고 들어왔다. 나는 카버의 얼굴에 나있는 칼자 국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이곳에서 카버들과 이런 식으로 싸웠던 사람 들이 분명 있었던 것이었다. "그럼, 이제 작별이군요." 말이 떨어지자 카버들은 일제히 칼을 뽑아들었다. 마로우도 바로 칼을 뽑아들었고, 사빈은 조심스럽게 카버의 모습을 살피고 있었다. 아마도 약 점을 찾아 일격필살을 먹이려는 것 같았다. "잠깐. 무슨 수가 있을 걸세. 세상에 대화로 풀리지 않는 문제는 없 어!" 오브라디 교수가 칼을 뽑아든 마로우와 사빈을 향해 소리쳤다. 스칼렛 과 오로스크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는지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나 는 일단 칼자루에 손을 가져갔기는 했지만 뽑을 엄두는 나지 않았다. 무 엇인가 내가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잠깐만! 그만 둬! 우리가 여기 사람을 죽이러 온 건 아니잖아?" 나는 칼을 뽑지 않은 채 이렇게 소리쳤다. 그러자 마로우가 내 말을 바 로 받아쳤다. "저것들은 사람이 아니야! 영혼도 없어! 베어버렷!" 순간 나는 가슴이 뛰어오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숨이 벅차 올랐다. 나미트 장군의 정령이 나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그냥 베어... 베면 그만 이야... 다들 쓰러뜨러... 그리고 당당하게 걸어나가는 거야... 그게 검 사의 길 아닌가, 수르카? 나는 양 어깨를 감싸안았다. 견디기 힘든 욕망 이 안에서부터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칼이 나를 부르고 있었다. "수르카!" 오로스크가 나를 향해 소리쳤다. 나는 순간 눈앞에 하잔의 풍경이 스치 고 지나갔다. 그리고 오로스크가 꿈꾸던 평원이 떠올랐다. 평화롭게 풀을 뜯고있는 오로스크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하지만 오로스크들은 이 제 이 땅에 없다. 멸종된 것이다. 풀을 뜯는 평화로움도 이제 더 이상 존 재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생각했다. 그 어떠한 이유로도 사람을 죽이는 일은 잘못된 것이라고. 그것이 내가 하잔에서 배웠던 것이 아니었던가 하 고. "오로스크* 숲의 조정자* 산이* 없는* 곳에* 모여* 산을 만들고* 울창 한* 숲을* 평지로* 만드는* 대식가* 오로스크* 황금의* 이름* 늙으면* 자 신의* 금빛* 털을* 젊은이에게* 물려주지* 오로스크* 타오르는 눈동자* 세상의 모든 비밀을 알고 있는 오로스크여*" 나는 칼자루에 손을 가져갈 생각도 하지 않고서 이렇게 말했다. 나의 말은 마법이 되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카버들은 움직임을 멈추었고, 칼을 뽑아들었던 사빈과 마로우도 칼을 거두었다. 집무실이 환하게 빛을 발하 는가 싶더니 어느 한 순간 환한 빛에 휩싸이며 우리를 평원의 환영으로 인도했다. 그곳에는 오로스크들이 평화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하지만 환 영은 잠시, 우리는 곧 다시 집무실에 멍하니 서 있는 자신들을 발견 할 수 있었다. "...올바른 대답은 아니었지만 올바른 행동이긴 하군요." 먼저 입을 연 쪽은 와트슨 대통령이었다. 오브라디 교수는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와트슨 대통령을 바라보았다. "완전치 않은 대답을 하셨으니 완전치 않게 약속을 지킬 수밖에 없겠군 요." 와트슨 대통령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와트슨 대통령의 짧은 머리카락이 땀방울에 젖어 반짝이고 있었다. 아마도 와트슨 대통령 또한 긴장하고 있 었던 모양이었다. "전설을 지켜보는 일은 생각보다 흥미로웠습니다. 당신의 반지를 보고 알았지요, 남쪽의 봄바람이여." 와트슨은 나에게 다가와 내게 머리를 숙였다. 나는 어쩔 줄 몰라 하면 서 뒷걸음질을 치다가 하마터면 쓰러져 버릴 뻔했다. "타실로 가세요. 그곳 악마의 입에 가면 마칸의 강림을 풀어줄 열쇠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곳에는 오래된 유적이 하나 남아있지요. 타실 에서는 그곳을 성황청 타실 지부라고 부르는 모양이지만요. 그곳 지하에 가면 마칸의 강림에 대한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당신의 앞날 도." 와트슨이 말했다. 와트슨의 표정에는 이곳을 찾은 후 처음으로 보는 진 실된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자. 이게 전부입니다. 이곳을 떠나세요. 더 이상 해 드릴 말씀도, 드 릴 것도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곳에서 다시 사명을 지키며 살아가겠습 니다." 와트슨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르노 페르도가 와트슨 대통령의 말을 이었다. "밖에 카버들이 뮤와 식량을 준비해 놓았습니다. 이제 떠나세요." "잠깐만요. 그럼 이곳 아타카파 공화국의 이념을 세상에 퍼트리겠다는 말은 어떻게 된 건가요? 또, 이곳의 노인들은 그대로 다른 사람을 위해 죽어가야 하나요?" 내가 와트슨 대통령에게 물었다. 와트슨 대통령은 빙긋 웃으면서 이렇 게 말했다. "첫 번째로 이곳 아타카파 공화국을 찾았던 사람들은 올바른 행동과 올 바른 대답을 했었지요. 저는 그 분들의 이야기를 전설로 전해 들었습니 다. 그런데 이렇게 전설을 목도하게 되었으니 그것으로 족합니다. 이곳의 미래는 우리가 정합니다. 걱정해 주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와트슨은 이렇게 말했다. 카버의 인도를 받아 다시 아타카파 공화국으로 들어왔던 입구에 닿았을 때, 우리는 찬 바람을 다시 느끼고는 몸서리를 쳤다. 이제 우리는 또 한 번 끔찍한 추위 속으로 달려가야만 하는 것이다. 크라이는 먼발치에서 그 레텔을 안고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잘가라는 말을 하기가 쑥스러 운 모양이었다. "첫 번째로 이곳을 찾았다는 사람, 누구인지 알겠나?" 오브라디 교수가 우리에게 물었다. "카버의 얼굴에 나 있던 칼자국, 그건 한 사람의 칼이었습니다." 사빈이 대답했다. "예. 카를로스 장군의 칼 솜씨는 생각보다 대단하더군요." 마로우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많은 카버들이 동시에 공 격했는데도 불구하고 조금도 기세를 늦추지 않고 공격했다는 걸 나 역시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수르카 님. 저, 실은 싸움을 그만두게 하는 최면 마법을 쓰려고 했어 요." 스칼렛이 나에게 말했다. "그런데 수르카 님은 그런 마법을 훨씬 넘어서는 마법을 쓰셨어요. 카 버들이 꼼짝도 하지 않는 걸 보고 느꼈지요. 역시 수르카 님은 진정한 대 마법사세요." 스칼렛이 말했지만 나는 그저 씁쓸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냥... 그, 그곳에 있을 걸, 그, 그랬나봐..." 오로스크가 이빨을 딱딱 부딪치면서 말했다. 나는 웃고 싶었지만 얼굴 이 굳어서 도무지 웃을 수가 않았다. 스타바야 원래 털이 난 동물이니 그 리 추운 줄 모르겠지만, 나머지 일행은 정말 극심한 추위 속에서 떨어야 만 했다. 하얀 평원을 가로질러 불어오는 바람은 눈 조각을 안고 불어와 눈도 제대로 뜰 수 없을 지경이었다. "저...저, 저게 보,보이는가?" 오브라디 교수가 말했다. 나는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에는 붉은 빛 이 커튼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별빛을 받아서인지 반짝이고 있는 빛은 당 장이라고 꿈틀거릴 것 같은 물결 모양을 하고 있었다. "오로로로로로라야..." 여전히 이빨을 딱딱 부딪치면서 오로스크가 말했다. 수많은 별들을 배 경으로 신비로운 빛을 발하며 출렁이고 있는 오로라는 상상했던 것 보다 몇 배는 더 아름다웠다. 인간들의 잘못으로 저런 풍경들이 사라져버릴 수 도 있다니. 사라져버리는 것들이 너무 많다. 지켜야할 것들이 너무 많다. 나는 웬지 눈물이 왈칵 나올 것만 같았다.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 로라는 여전히 신비로운 빛을 밤하늘에 뿌리면서 우리의 앞에 끝도 없이 펼쳐져 있는 빙하를 비추고 있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9072/19898 ━━━━━━━━━━━━━━━━━━━━━━━━━━━━━━━━━━━━━━━━ 제 목:[탐그루] 영혼의 에뮬레이터 12 251 관련자료:없음 26/26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4-14 21:14 조회:1410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 영혼의 에뮬레이터 12 - 언덕의 저편 "... 이렇게 해서 수르카 일행은 타실의 악마의 입으로 다시 한 번 여 행을 떠나게 되었답니다. 그들 일행 앞에 놓인 빙하 벌판은 어쩌면 영원 히 넘을 수 없는 장벽처럼 여겨질 정도로 넓어 험난한 여정의 계속이었지 만, 그 여행이 힘들고 어려울수록 그들의 의지는 더욱 강해져 갔습니다." 수화기 저편에서 들려오는 세헤라자드의 목소리는 꼭 상냥하게 웃고 있 을 것만 같았다. 나는 문득 세헤라자드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뮤." 나는 이렇게 말했다. "예? 뭐라고 말씀하셨어요?" "뮤 말이야. 뮤가 그 추운 곳에서 견딜 수 있을까?" "그럼요. 사람보다는 강하니까요, 거의 대부분의 동물이." 세헤라자드가 친절하게 나에게 설명해 주었다. 하긴. 아버지도 말한 적 이 있다. 꿈을 제외한다면 인간보다 약한 동물은 없을 거라고 말이다. "그래. 꿈만 있다면 사람은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고 누가 그랬지." 나는 이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세헤라자드는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지 통 알아듣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부루터스 님은 만나 보셨다고 했지요." "그래. 만나 봤지. 어둡고 칙칙한 곳에서." 나는 신분증 제시를 요구하지 않았던 뚱보 게임방 주인을 떠올리면서 말했다. "너한테 자기 일을 도와달라고 부탁해달라고 하더군." "그럴줄 알았어요. 그래서 어떻게 하실 건가요?" "난 너한테 그런 말만 전하기로 했어. 그 이상은 몰라. 네가 돕고 싶으 면 돕는 거고, 아니면 마는 거지, 뭐." "그래요? 비류 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 데요?" "몰라. 나야 시간을 벌었다고 생각하고 있을 뿐이야." 나는 버려진 아파트 단지에서 벌어졌던 총격전을 떠올리면서 말했다. 솔직히 그걸로 다 끝났으면 좋겠다 싶기는 했지만 절대로 그런 일은 일어 나지 않을 것이었다. 그들도 바보가 아니고 나도 바보가 아닌 이상 말이 다. 그들은 결코 우리를 추적하는 일을 그만 두지 않을 것이었고, 우리도 리파이와 아톰을 순순히 포기하지만은 않을 것이었다. "역시 비류 님이세요." "뭐가?" 나는 세헤라자드의 말이 꼭 비꼬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에 이렇게 되물 었다. "프로답다구요, 그럴 때만." 꼭 혓바닥이라도 내 밀고서 하는 말같이 들렸다. "관둬, 그런 얘기." 나는 침대에 몸을 뉘이면서 말했다. 피곤이 온몸을 짓누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세헤라자드를 보고 싶었다. 이렇게 이야기만 나누게 되 니, 세헤라자드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느꼈던 기분이 자꾸만 떠오르고 있 었다. "어떻게 날 찾을 수 있었어?" 나는 화제를 바꾸기 위해서 이렇게 말을 돌려 물어보았다. 세헤라자드 는 순순히 내 의도를 따라 주었다. "그야 순전히 저한테 꿈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말장난하지 말고." 나는 심각한 목소리로 이렇게 다시 물어보았다. 나는 세헤라자드가 이 곳 전화번호를 어떻게 찾아내었을까를 알고 싶었다. FHA의 일원인 건이 안가라고 자신 만만하게 말했던 이곳의 전화번호를 세헤라자드가 알아 낼 수 있었다면, 그건 아무나 이곳을 찾아 낼 수 있다는 말이기도 했기 때문 이었다. 거기다가 세헤라자드가 이곳을 찾아낸 방법을 알아낼 수만 있다 면 부루터스가 우리를 찾아낸 방법도 추리해 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 이었다. "칫. 그렇게 무섭게 말하지 말라고요." 세헤라자드는 내 태도에 기분이 상했는지 이렇게 말했다. 조금은 Qy루 퉁한 목소리였다. "하하하. 화났어?" 나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분위기를 바꾸어 보려고 이렇게 물었다. 갑자 기 분위기를 바꾸자니 쑥스럽기까지 했다. "제가 차원에 대해서 말씀 드렸던 거, 기억하세요?" 세헤라자드가 나에게 물었다. 이번에는 세헤라자드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래. 기억하지." "제가 사는 곳과 비류님이 사는 곳이 다르다는 말씀을 드렸던 것도 기 억 나시겠네요?" "응. 기억하고 있어." "그렇다면 설명 드려도 알 수 없을 거라는 거, 모르시겠어요?" "그래도 한 번 설명 해 봐." "... 제가 있는 곳은 시간도 공간도, 비류 님이 계신 곳과 다른 차원을 가지고 있답니다. 제가 살고 있는 곳이 더 차원 높은 곳이라는 뜻으로 드 리는 말씀이 아니에요. 마치 심연에서 살고 있는 물고기가 하늘을 난다는 말이 어떤 것인지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다르다는 이야기이지요."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이라는 건 알겠는데, 사실 세헤라자드가 지금 하고 있는 말도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도대체 다른 차원이라는 말이 무슨 말 일까. 하긴 내가 심연에 살고 있다면 하늘을 난다는 것을 이해 할 수 없 기는 없겠다 싶었다. 우선 하늘이 뭔지를 아무리 설명해 봐야 알아들을 수가 없을 테니 말이다. "그래. 알았어. 포기하지, 내가." 나는 이렇게 말하고는 도로 침대에 드러누워 버렸다. 천장에 걸려 있는 형광등이 푸른빛으로 가느다랗게 떨리고 있었다. 심약한 불빛이로구나. 나는 생각했다. "한분 더 만나보셔야 할 거예요." 한참 침묵이 흐른 다음에 세헤라자드가 말했다. 나는 세헤라자드의 말 을 듣자, 겁부터 더럭 났다. 이번에는 또 누구를 만나봐야 한다는 말일 까. "잠깐만. 한분이라니? 무슨 소리야?" "만나봐야 할 사람이에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꼭이요." "그런 분이라면 누구를 말하는 거지?" "만나봐야 할 이유를 먼저 말씀드릴게요. 먼저, 지금 비류 님은 오토 님과 건 님과 함께 리파이 님과 아톰 님을 구하려고 하고 계셔요. 맞지 요?" "실버우드를 빼지 마." 나는 이렇게 말했다. 비록 별 도움은 되지 않겠지만 실버우드도 틀림없 는 우리와 한 패거리인 것이다 (사실 나도 별 도움은 되지 않을 것이 거 의 분명하긴 하지만). "예. 실버우드 님도요. 그런데 그렇게 구출하고 나면 어떤 일이 남아 있을까요?" "... 이나바머가 남지. 하지만 나는 솔직히 이나바머고 뭐고 별 관심 없어. FHA도 물론이고 말이야." "다시 프로 게이머 일을 하고 싶으신가요?" "그렇겠지, 아마도." "그럼 어스폴을 어쩌시고요?" 젠장. 나는 이진우 수사관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싶었다. 이진우 수사 관이 나를 결코 놓아주지 않으리라는 것도. 나는 아버지가 떠올랐다. 잘 못하면 아버지는 동료들로부터 이런 말을 듣게 될 지도 모른다. '만델라 도 별 수 없는 인간이었어. 멍청한 아들을 둔 덕분에 어스폴 신세를 지게 되었구만'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그래. 그렇다면?" "일단 그렇다면 이나바머를 잡아야겠지요." "하지만 이나바머가 하는 일이 그렇게 나쁜 일인 것 같지는 않아." 사실 FHA나 이나바머가 하고 있는 일은 거대한 MS사에 맞서 싸우는 일 이었다. 어떻게 보면 그들은 소드앤매직에 등장하는 주인공처럼 거대한 마왕에 맞서 싸우는 전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 둘은 나와는 별 인연이 없었다. MS사가 하고 있는 짓거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뭘 하건 나는 별로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만약에 나쁜 일이라면요?" "글쎄. 그렇다고 해도... 솔직히 귀찮아." 나는 세헤라자드에게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이나바머를 잡지 않고는 어스폴에게서 빠져나갈 방법은 없지 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이 너무나도 제한되어 있다는 걸 표내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부루터스는 이제부터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법을 쓸 거예요." "다른 방법이라니?" "소극적인 테러가 아니라 전면적이면서도 규모가 큰 테러를 감행할 거 라는 거지요. 어쩌면 항공기를 통째로 날려버릴 수도 있고, 건물을 무너 뜨릴 수도 있어요. 부루터스가 비류 님을 찾아내는 걸 보셨지요? 그 분은 충분히 그럴만한 능력이 있어요." "그래서 어떻게 하라는 거야, 도대체." "이제 어스폴은 바짝 달아오르게 될 거예요. 이나바머를 빨리 잡기 위 해서 눈이 벌게 지겠지요. 당연히 비류 님에 대한 압박은 더 심해질 거고 요." 나는 입을 다물었다. 세헤라자드의 말은 어찌되었건 옳은 말이었다. 이 나바머 사건이 끝을 보기 전에는 나는 프로 게이머로 활동할 수도 없을 것이고, 지긋지긋한 이진우 수사관으로부터 벗어날 수도 없을 것이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는 거예요. 아버지를 만나보세요." 세헤라자드가 말했다. 나도 그 방법을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여기에 없는 걸." 이리듐으로 연결하면 통화는 할 수 있을 것이고, 이미 메세지는 남겨 놓았으니 아버지는 내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나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을 것이었으므로 만나려고 결심한다면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에게 손을 벌리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아직까지는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부분들이 남아있으니까." "제 말씀은 저희 아버지를 만나 보시라는 거예요." 세헤라자드의 말에 나는 잠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말았다. 젯 나이트. 최후의 기사라고 자신을 밝혔던 노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런. 그러고 보니 완전히 까맣게 잊고 있었군. 젯나이트와의 약속을 말이다. 젯나이트와 나는 약속을 했었다. 그 고물 랩탑을 하나 얻는 대가로 세헤 라자드를 지워준다는 약속이었다. 하지만 고물 랩탑은 스티브 강이라는 이상한 노인네에게 뺏겨버렸고, 세헤라자드는 이미 어스넷은 물론이고 전 화선과 텔레비젼을 왔다갔다 하는 존재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젯나이트, 그 분을?" 나는 세헤라자드의 아버지라는 생각에 존칭을 붙인 것만은 아니었다. 사실,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는 세헤라자드의 아버 지인 젯나이트를 만나기가 두려웠다. 세헤라자드는 내 물음에 그렇다고 말하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아버지가 만나보고 싶어하세요." "...왜?"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는 것 같아요. 무슨 말씀을 하시고 싶어하시는 지는 저도 모르지만." "잠깐만. 그럼 너, 젯나이트, 그 분을 만났다는 건가?"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겠지요. 어찌되었건 아버지를 만나 보세요. 틀 림없이 좋은 수를 내 주실 거예요." "좋은 수라니?" "부루터스 문제 말이에요. 틀림 없이 해결책이 나올 거라고 믿어요." 세헤라자드는 활기찬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자. 저는 이제 그만 가봐야네요. 저도 할 일이 있거든요. 물론 비류 님도 할 일이 있으시겠지만." 나는 창 밖을 내다보았다. 간 유리창 너머로 푸른 새벽 어스름이 안개 처럼 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밖에서 귀대고 엿듣고 계시는 오토 님께 안부나 전해 주세요. 계획이 성공하시길 빈다고도요." "자, 잠깐만. 어떻게 만나지?" 세헤라자드는 내 마지막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나 는 한 참 동안 멍하니 송수화기를 들고 있었다. 그때 문이 열렸고, 오토 가 내가 있던 방안으로 들어왔다. "무례하신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까지이신 줄은 몰랐네요." 나는 오토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토는 피식 웃으면서 이렇게 대꾸했다. "죄송합니다.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직업이 변태 성욕자라는 말씀이 아니었으면 좋겠네요." 내 말에 오토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젯나이트라는 분이 누구입니까." 오토가 물었다. 나는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까 하다가 이런 식으로 말 해 주었다. "그러니까 이나바머, 부루터스를 해치울 수 있는 묘안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자 오토의 표정에 진지한 빛이 떠올랐다. 뭔 가 생각을 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오토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 을 보고 있자니 나는 가발 밑에 숨겨져 있을 대머리가 떠올라서 웃음을 참기가 힘이 들 지경이었다. "우리에게 무기가 될 만한 것이 하나 있었군요." "젯나이트는 진짜 기사가 아니에요. 그냥 닉일 뿐이지. 실제로는 칼자 루도 못 쥘 노인이라고요." 오토의 말에 나는 이렇게 설명해 주었다. 하지만 오토는 고개를 가로저 었다. "부루터스의 시디를 얻는 데에 칼자루가 필요할 것 같지는 않군요." 오토가 말했다. 나는 그제서야 부루터스가 가지고 있다고 말한 시디가 떠올랐다. MS사의 드래곤 프로젝트의 전모가 담겨있다는 시디 말이다. "그걸 공개하겠다고 협박하면...?" "그렇지요, 비류 님. 그럼 대등한 입장에서 협상을 할 수 있을 겁니 다." "하지만 언제 그 시디를 손에 넣을 수 있지요? 말씀하셨잖아요. 시간이 지날수록 불리해 진다고요." 게다가 내가 부루터스를 만난 것을 MS사에서 알고 있을 가능성이 아주 높은 이 시점에서 시간을 더 끈다는 것은 리파이와 아톰의 생존 가능성을 점점 더 떨어뜨릴 일이 분명했다. "회의를 해야 겠군요." 오토는 이렇게 말하고는 내가 있던 방문을 닫고 나갔다. 회의를 한다면 나는 어느 편을 들어야 할까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뾰족한 생각은 나지 않았다. 내가 얻을 수 있었던 결론은 기껏해야 '이야기를 좀 들어봐야 겠 구나' 하는 생각 정도였으니까. 나는 잠 한숨 자지 못하고 회의에 참석해야 했다. 오토는 내 방에 귀를 대고 엿들은 정보를 바탕으로 자신이 떠올린 계획을 늘어놓았다. "... 그러니까 비류 님이 부루터스가 가지고 있는 시디를 손에 넣기만 한다면 우리에게 승산이 있습니다." "그럴싸하게 들리네요. 하지만 오늘 당장 리파이가 감금되어 있는 소드 앤매직 코리아 합중국 지부로 쳐들어가는 편이 리파이와 아톰의 생존 가 능성을 높일 것이라는 건 염두에 두고 하시는 말씀이신가요?" 건이 오토의 말에 의문을 제기했다. 오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곳으로 간다는 건 일종의 도박입니다. 우리 중에서 전투가 가능한 인원은 저와 건, 둘 뿐이기 때문이지요. 거기 에 몇 명이 있는지, 또 어떤 방식으로 방어를 하고 있는지 모르는 이상 말이지요." "그런 거야 가서 정하는 거지요. 계획이 훌륭하다고 해서 성공하는 건 아니잖아요?" "계획이 철저하면 오히려 실패할 확률이 높다는 말씀이시군요, 건. 하 지만 그건 아마추어나 하는 말입니다. 계획은 철저할 수록 성공할 확률이 높아지는 겁니다. 만약 시간과 인원, 장비만 충분하다면 모의 연습을 백 번은 하고 들어가고 싶은 심정입니다." "생각보다 겁이 많으시네요, 오토." 건이 야릇한 미소를 짓고서 말했다. 소년같은 얼굴에서 저런 표정이 나 오다니. 저런 표정은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악마나 지을 법한 미소일텐데. 나는 이제 완전히 건이 소년이 아니라 소년의 얼굴을 하고있는 나이 든 사람이라는 것에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9073/19898 ━━━━━━━━━━━━━━━━━━━━━━━━━━━━━━━━━━━━━━━━ 제 목:[탐그루] 영혼의 에뮬레이터 12 252 관련자료:없음 22/22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4-14 21:15 조회:1197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겁이 많다고 할 수도 있겠지요, 아마추어가 보기엔. 하지만 저는 신중 한 겁니다." 오토는 뭔가를 꾹 억누르고 있는 듯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오 토에게 믿음이 가고 있었다. 왜냐하면 사실 흥분해야 할 쪽은 당연히 오 토였기 때문이었다. MS사에 고용된 리퍼라는 청부업자에게 머리를 깎이는 수모를 당한 오토에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없을 리가 없었다. 만약 내 가 오토라면 당연히 앞뒤 볼 것 없이 당장 쳐들어가자고 말했을지도 몰랐 다. 하지만 오토는 그렇게 하지 않고 있었다. 그건 틀림없이 두려움이라 기 보다는 신중함에 가까운 것이었다. "이건 시간 싸움입니다. 시간을 끌면 불리해 지는 것은 우리 쪽입니 다." "그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제가 프로라는 걸 잊지 않으셨겠지요. 제 임 무는 아톰 씨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프로로서 그 일을 해내고 야 말겠다는 의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무모하게 달려드는 것 만이 좋은 건 아니지요.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다른 가능성이 있으니까 요." "그 시디요? 물론 그 시디도 얻어야 합니다. 그 시디는 저희 FHA에게도 중요한 의미가 있는 시디가 될테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닙니 다. 우선 리파이와 아톰을 구출하는 게 먼저지요. 말씀드리지 않았던가 요? 저희 FHA는 사람을 가장 소중하게 여긴다고." "그 입장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저는 동등한 입장이 되지 않고서는 일 을 성공시키기 어렵다고 냉정하게 판단하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사실 그 런 식으로 무모하게 달려들었다가는 쓸데 없는 희생만을 당하게 될 가능 성이 너무 높습니다." "잠깐만요, 두 분." 이야기의 중간에 실버우드가 끼어들었다. 실버우드는 손가락으로 안경 태를 바로 하면서 두 사람에게 물었다. "어느 쪽이 더 안전한가요? 제 말은, 그러니까 리파이의 안전을 생각한 다면 어느 쪽을 택해야 하느냐는 거예요." 실버우드의 말에 잠시 동안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리파이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것은 현재로서는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가장 안 전한 방법이라고 한다면 다시 소드앤매직 코리아 합중국 지부로 돌아가 부루터스의 말을 전하는 것밖에는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 방법은 당장 의 안전만을 보장할 수 있을 뿐이었다. 청부업자까지 고용한 데다가, 어 린아이까지 무모하게 죽이는 MS사 녀석들이라면 리파이와 아톰의 목숨은 물론이고 우리의 생명마저도 휘험하게 될 것이 거의 분명했다. "지금으로서는 안전에 대해서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지금 오토와 제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도 어떻게 하는 편이 더 안 전할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거니까요. 이렇게 정리하면 어떨까요, 오토. 제 방법이 위험하기는 하지만 리파이를 구출할 가능성이 더 높은 쪽이고, 당신의 방법이 좀 더 분명해 보이기는 하지만 시간을 필요로 한 다는 점에서 리파이는 더 위험해진다고요." "편한 대로 정리하시는 군요." 오토가 말했다. "건. 당신이 모르고 있는 게 하나 있습니다. 그 쪽에 있는 리퍼라는 청 부업자지요. 말이 많은 친구긴 하지만 실력 있는 친구였습니다. 그 친구 와 정면으로 맞선다면 솔직히 전 자신 없습니다. 잘 해봐야 오십 퍼센트 정도의 확률일 겁니다, 정면으로 승부한다면." "시디를 가지고 승부한다면?" "그 친구와 정면 대결을 하게 된다면 확률은 무조건 오십 퍼센트가 됩 니다. 그것도 순전히 그 친구와의 대결만 염두에 두고서 하는 말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있는 방법은 그런 대결 자체를 피해야한다는 말씀입니 다." 오토가 말하자 잠시동안 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마도 생각에 잠긴 모양이었다. "죄송합니다만 저는 이 방면의 프로입니다. 프로가 확률로 승부하는 경 우는 별로 없지요. 아무리 강한 사람도 빔 한 방이면 목이 떨어지니까요. 저는 이길 싸움만 한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길 싸움만 한다... 그럴듯하네요. 그래서 늘 이기셨나요?" "지금까지 살아있습니다." 건의 비꼬는 듯한 질문에 오토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이렇게 대답했 다. "만약 시디를 손에 넣었다고 칩시다. 우리가 그걸 복사하지 않고 순순 히 넘겨준다고 그 친구들이 생각하겠습니까? 원본이라는 걸 증명할 수 있 는 방법은 생각해 두셨나요?" 이제 건은 오토의 의견에 딴죽을 걸고 있었다. 하지만 오토는 담담하게 이렇게 대꾸했다. "이제부터 찾아봐야지요." "이제부터 찾아본다? 그럼 도대체 리파이와 아톰을 구하겠다는 생각이 있는 겁니까, 없는 겁니까? 이거 저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네요." 건은 신경질적인 말투로 말했다. "전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게 뭔지 아십니까?" 오토는 조금도 흐트러짐 없는 자세를 하고서 건에게 이렇게 물었다. 건 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마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르고 있는 모양이 었다.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웰링턴 공작은 이런 말을 했지요. 전투는 언덕 저편에 무엇이 있는가를 알아내는 것에 달려있다. 우리는 지금 언덕 저편 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정보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이로군요. 하지만 이건 전투가 아니라 생명 이 달려 있는 문제고, 또한 승리가 목적이 아니라 리파이와 아톰을 구출 하는 문제입니다." 건은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중요한 얘기를 빼먹었군요. 그 젯나이트라는 사람이 시디를 구 해 줄지 어떻게 안다는 겁니까? 그리고 저기 앉아 계시는 비류 씨께 언제 연락을 하게 될지 어떻게 알 수 있다는 거지요?" "먼저 연락해 올겁니다. 부루터스가 그랬듯이. 어쩌면 지금 텔레비전을 켜면 젯나이트가 나타날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오토의 말에 건이 질렸다는 듯이 어깨를 한 번 으쓱 했다. "이제 어느 정도 서로의 입장은 알았으니 결론을 내려야겠군요. 좋습니 다. 오늘 오전까지는 기다려 보지요. 어차피 지금 당장 소드앤매직 지부 로 달려간다 해도 오토 님 말대로 별 승산이 없을 테니까요. 일단 이곳은 아직 안전하니까 기다려 봅시다. 하지만 오전까지 만입니다." 건은 이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돌아가 버렸다. 실버우 드는 걱정이 되는지 연신 안경태를 치켜올리면서 오토를 바라보았고, 오 토는 텔레비전을 켠 후 뉴스를 보기 시작했다. 나는 무엇보다 졸음이 쏟 아지고 있었다. 천만 다행으로 오전 중에는 기다려보자고 건이 말했으므 로 나는 잠이나 좀 자 두기로 마음먹었다. "전 눈이나 좀 붙여야겠어요. 전 오토처럼 철인이 아니라고요." "저도 철인은 아닙니다." 오토는 웃으면서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대로 발을 질질 끌면서 방으로 돌아가 침대에 쓰러지듯 몸을 묻었다. 하지만 좀처럼 잠이 오질 않았다. 너무 피곤한 탓인 모양이었다. 조금이라도 자야 할텐데. 하지만 눈을 감았다 뿐이지 통 잠이 오질 않았다. 신경을 많이 쓴 탓일까? 아무 리 몸을 뒤척여 봐도 베개는 머리에 맞지 않는 듯 했고, 침대 시트는 등 뼈를 파고드는 듯 하기만 했다. "비류 씨. 잠깐 나와보세요." 어깨가 뻐근해질 즈음이었다. 오토의 목소리가 문 밖에서 들려왔다. 가 뜩이나 잠도 오지 않는데 오라가라 하다니. 오늘따라 오토가 밉게만 여겨 졌다. "왜요? 이나바머라도 잡혔나요?" "그런 뉴스였으면 저도 좋겠습니다." 오토의 말을 듣고서 나는 몸을 일으켜 다시 거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깨에는 쇳덩이가 올려져 있는 기분이었고, 발은 지독하게 무거웠다. 꼭 머리꼭지에 쇳덩이로 만들어진 삼각 추라도 올려놓은 듯했다. "이 뉴스를 한 번 보십시오." 오토는 리모컨을 조작해 뉴스를 선택해서 사건사고 란을 클릭했다. 쌍 방향 텔레비전을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만약에 뉴스를 매일 정해진 시간에밖에 볼 수 없다면 얼마나 불편할까. 만약 그렇다면 중요한 뉴스를 그냥 지나치는 수도 있을 것이고 보고 싶은 뉴스를 다시 시청할 수도 없 을 테니 말이다. 뭐 아직도 정규 뉴스 방송 때 시간 맞추어 뉴스를 시청 하는 사람도 많이 남아 있는 모양이지만 말이다. 오토의 리모컨 조작 실력은 엉망진창이었다. 마우스를 다룬 적이 거의 없는 사람의 솜씨같다고 여겨질 만큼. 사실 프로 게이머라면 손목의 조작 만으로 포인터를 움직이는 게 버튼을 누르는 것과 큰 차이가 없다. 그런 데 오토는 답답하게도 양손으로 리모컨 버튼을 조심스럽게 누르고 있었 다. 저런 식으로 해서 언제 원하는 뉴스를 찾을 수 있을지, 원. "이 뉴스입니다." 내 생각이야 어찌되었건 오토는 뉴스를 찾는데 성공했다. 나는 별 생각 없이 모니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화면은 하얀 색 빌딩을 비추고 있었 다. "오늘 MS사에서 운영하는 중앙 병원에 끔찍한 재앙이 있었습니다." 화면은 들것에 실려 이송되는 환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배가 열 려 창자가 그대로 드러나고 있는 사람의 모습도 보였고, 머리가 꼭 뚜껑 이 열린 주전자인 듯 뇌가 노출되어 있는 사람의 모습도 보였다. 충격적 이고 자극적인 영상은 꽤 많이 보아 왔지만 이렇게 노골적이고 끔찍한 화 면은 드물었다. 나는 멍청하게 화면에 넋을 잃고 말았다. "... 오늘 일어난 이 정전 사고는 MS사 사상 최악의 사건으로 기록 될 전망입니다. 이번 사건의 책임 여부는 평소 전력 관리에 소홀한 전력공공 사업부에 있습니다." 내가 정확하게 알아들을 수 있었던 말은 기자가 마지막에 남긴 사건 코 멘트뿐이었다. 멍하니 있는 나에게 오토가 말을 건넸다. "그렇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이나바머가 새로운 테러를 감행할 것이 라고 세헤라자드로 부터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까지의 범죄를 저 지를 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다. MS사에서 운영하던 병원 전체를 작동불능 으로 만들어 버리다니 말이다. 기자는 정전사고라는 말로 대충 사건을 얼 버무리고 그 책임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있었지만 병원에 임시 발전소 하 나 없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다. "맙소사. 수술 중이었던 환자 전원이 사망했다니..." 나는 침을 삼켰지만 쉽게 목구멍으로 침이 넘어가질 않았다. "이 뉴스도 한 번 보시지요." 오토는 다시 리모컨을 조작했다. 여전히 오토의 조작 솜씨는 엉망이었 다. "... MS 은행에 해커가 난입, 중요 고객의 자료가 뒤바뀌는 사고가 있 었습니다. 사실을 발견한 것은 인도에 사는 비올라 람 핫산 씨. 핫산 씨 는 자신의 계좌에 어마어마한 금액이 입금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신고 를 했습니다. 빠른 신고가 없었다면 MS 은행 시스템은 복구할 수 없는 심 각한 지경에 이르렀을지도 모릅니다. 이 사고는 과거 Y2K 금융 사고 이후 최고 규모의 사고입니다. 신고를 한 핫산 씨의 용기에 사람들은 찬사를 보내고 있습니다. 피혁 공장에서 일하는 핫산 씨에게 천만 달러라는 금액 은 일생동안 저축을 한다고 해도 모을 수 없는 금액이었습니다." 한 젊은 인도인의 인터뷰. 그리고 트렌스 파워를 통한 번역. 이번에도 뉴스의 촛점은 한 사람의 영웅 만들기 쪽으로 빗겨가 있었다. 나는 여전 히 멍하니 모니터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나 더 있습니다." 이번에 오토는 지하철 전산망 중 MS사가 담당하고 있는 중앙 처리 컴퓨 터가 마비되어 일어난 중국 연방국의 대형 탈선 사고 뉴스를 보여주었다. 역시 이번 뉴스도 본질에서 벗어나 중국 철도 사고의 역사 운운하면서 중 국 철도청의 책임 여부에 초점을 맞추었다. 나는 오토에게 말했다. "이게 다 오늘 하루에 일어난 일이라는 거지요?" "그렇습니다. 절대로 우연이 아니지요." 중장비로 들어올린 탈선 된 지하철에서는 시체가 마치 벌레 때처럼 쏟 아져 나오고 있었다. 나는 헛구역질이 날 지경이 되었다. "아직 뉴스에서는 이 일련의 사건들을 본격적으로 다루지 않고 있습니 다. 아마 MS사가 손을 쓴 것이겠지요." "어스폴에서는 어떨까요?" 나는 세헤라자드의 말을 떠올리면서 말했다. 압력... 이런 사건이 조금 만 더 일어난다면 곧 나에게 피부로 느낄 수 있을 만큼의 압력이 다가올 것이었다. 어쩌면 수배자가 되어 공개 수배자 뉴스 ' 바운티, 바운티' 같 은 프로그램에 얼굴이 나오게 될 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여전히 피곤 했지만 잠이 다 달아나 버리고 말았다. 이 상태로는 아무리 누워 있어도 도무지 잠이 올 것 같지가 않았다. "이건 테러에요. 그것도 아주 노골적이고 끔찍한..." "비류 씨. 이나바머는 왜 그런 짓을 할까요? 저로서는 짐작이 가질 않 습니다. 게다가 갑자기 테러의 강도를 몇 배나 높였습니다. 왜지요? 단지 MS사의 만행을 폭로하기 위해서라고는 생각되질 않는군요. 만행을 폭로하 려면 방송국에 시디 사본만 돌려도 그만일 텐데요." "거래를 하고 싶어하는 것 같아요. 저건 일종의 압력이라고 볼 수 있 죠. 거래에서 유리한 위치에 서고자 하는." 나는 나름대로 이렇게 상황을 분석할 수 있었다. 나는 이나바머가 했던 말을 떠올려 보았다. 이나바머, 부루터스는 끔찍하게도 MS사를 미워하고 있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MS사를 없애버리고 싶어하는 구나, 하는 생 각이 들만큼. 하지만 오늘의 테러는 너무나도 잔혹했다. 아무리 테러라고 해도 저렇게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다니. "지금 저 자가 원하는 것은 뭘까요? 저는 감이 잡히질 않습니다." 오토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나에게 물었다. 물론 나 역시 감이 잡히지 는 않고 있었지만 짚이는 구석은 있었다. "시디와 뭔가를 교환하고 싶어하는 거겠지요." "그렇다면 그게 뭘까요?" "젯나이트를 만나서 물어볼 수만 있다면 좋을텐데..." 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하지만 시간은 오늘 오전뿐이었고, 오전 이 지나면 아마 건이 주장한 그대로 소드앤매직 온라인 코리아 합중국 지 부에 구출작전을 펴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 그 작전이 성공할 가능성은 오토의 말 대로라면 최대 50%에 불과했다. 유능한 프로 두 사람과 아마추 어 두 사람으로 구성된 팀이 이 정도 확률을 가지고 있다면 높다고 생각 할 수도 있겠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오토와 리퍼의 정면 대결만을 염두에 둔 확률로, 아마 실제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까울 것이다. "일단 기다려보는 수밖에요. 지금으로서는 다른 대안이 없는 것 같네 요." 나는 이렇게 말하면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정말이지 아무런 대안 도 떠오르지 않고 있었다. 건은 어떻게 저렇게 태연하게 방안에 들어가서 앉아 있을 수 있는지. "음악 좋아하십니까?" 오토가 엉뚱하게도 음악에 대해 물었다. 나야 물론 게임 주제가를 좋아 했지만 그렇게 대답하기에 내 마음은 너무도 무거웠다. "음악 들으실 거면 신나는 걸로 부탁해요." 나는 오토에게 이렇게 부탁했고, 오토는 다시 천천히 리모컨의 버튼을 조작해 뮤직 멀티 네트워크 채널을 맞춘 다음 음악을 선택했다. "테크노가 어떨까요?" "기왕이면 록으로 해 주세요. 그것도 아주 오래된 걸로." 오토는 고개를 끄덕였고, 곧 이어 텔레비전에서는 지난 세기 70년대 후 반의 록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9074/19898 ━━━━━━━━━━━━━━━━━━━━━━━━━━━━━━━━━━━━━━━━ 제 목:[탐그루] 영혼의 에뮬레이터 12 253 관련자료:없음 24/24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4-14 21:15 조회:1299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딥퍼플의 곡이지요. 알고 계십니까?" 물론 나는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지금 나오고 있는 곡은 액션 RPG 하 이웨이스타의 주제곡이기도 했으니까. 하이웨이스타는 한 때 고전 음악에 서 모티프를 얻은 게임들이 한창 유행할 때 나온 게임이었다. 넓게 펼쳐 진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현상금을 쫓는 바운티 헌터의 세계를 다루고 있 는 이 게임은 한 때 바운티 헌터를 지망하는 사람의 수를 폭발적으로 늘 린 게임으로도 유명했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음악을 듣고 있었다. 곡은 딥퍼플에서 블랙사바스 로, 그리고 레인보우와 크림, 계속해서 레드 제플린과 잉베이의 라이징포 스로 이어졌다. 오토의 취향은 고전 록인 모양이었다. 저 때의 음악은 빠 르고 강렬한 템포를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젊은이의 방황이랄까, 반항이 랄까, 하여간 그런 종류의 고독과 슬픔이 느껴지는 곡들이었다. 레인보우 의 '맨 온 더 실버 마운틴'을 지나 건스앤로즈의 시빌워가 흘러나왔다. 나는 왈칵 울음을 쏟아 낼 뻔했다. 신나는 곡을 틀어 달라고 했더니만.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은 점차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전화벨이 울린 것은 메탈리카의 마스터오브퍼펫도 지나고 오리온이 거 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나는 정신이 퍼뜩 들었다. 오토가 받아보라고 말 하기도 전에 나는 이미 송수화기를 집어들고 있었다. "비류입니다." 나는 수화기에 대고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보면 절박하기까지 한 심정 이었다. "오래간만이군." 목소리를 기억할 수 있을까 걱정이었는데, 막상 듣고 보니 금새 떠오르 는 목소리였다. 트렌스 파워로 남긴 일지의 목소리와 크게 다르지 않은 노인의 목소리. 바로 젯나이트였다. "...예." 나는 길게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게 아직 가슴 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남산 타워의 게임센터에 가 본 적이 있나?" 젯나이트가 느릿느릿 물었다.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아마도 젯나이 트는 전화상으로는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곳에 가면 고전 게임 룸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네. 그곳으로 가게." "잠깐만요. 거기서 어떻게 하지요?" "가면 알게 될 걸세." 전화는 끊어졌다. 나에게 화를 내고 있는 건지, 아니면 그냥 도청을 의 식해서 빨리 끊은 것인지 판단을 내릴 수 없을 만큼 짧은 통화였다. "젯나이트로군요." 건이 문을 열고 나오면서 나에게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건. 이곳이 FHA의 안가 맞습니까?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중국 음식점 인줄 알고 배달 전화가 빗발치겠는 걸." "어스폴이 머리만 있다면 찾아 낼 수 있는 번호이긴 하지요. 비류 씨. 지금 출발하실 겁니까?" 오토의 말에 별 것 아니라는 듯이 건이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는 소드앤매직 온라인 코리아 합중국 지부로 저녁 때 출발할 겁니 다. 작전 개시 시간은 새벽 네 시가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거든요." 오토는 이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비류 씨. 당신이 오토 씨가 품고있는 마지막 희 망이니까." 건이 웃으면서 말했다. 건이 이렇게 말하지 않았어도 나는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젯나이트는 나에게도 최후의 희망이었다. 남산 타워에 자리잡고 있는 게임 룸은 한 낮이라 그런지 아무도 없다시 피 했다. 한 때는 이곳이 전망대로 유명했다는 건 누구라도 알고 있는 사 실이었지만 지금이야 할일 없는 노인들이나 가끔 찾는 곳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이제는 노인들을 위한 게임 룸으로밖에 쓸 수 없을 정도로 전망은 사라져 버렸으니까. 남산 타워에서 내려다 볼 수 있는 것은 한 밤의 불빛 정도니까. 남산타워의 창 밖으로는 시커먼 하늘과 자욱한 연기뿐이었다. 이런 풍경에 익숙한 나였지만 아마도 이곳을 찾는 노인들은 한때 이곳에 서 바라보았던 전망을 떠올려 볼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복을 입은 학생 둘이 담배를 입에 물고 오가는 모습과 노인들이 고전 게임을 즐기고 있는 모습이 보이기는 했지만 별로 신경 쓸 정도는 아니었 다. 젯나이트는 부루터스와 실력 대결이라도 펼치고 싶은 걸까? 왜 다들 이렇게 게임과 관련이 있는 곳에서 만나자고 하는 건지 나는 짐작조차 가 지 않았다. 나는 쿠폰을 끊은 다음 고전 게임 룸 쪽으로 걸어갔다. 게임 룸 관리인 이 의아하다는 듯이 나를 힐끗 한 번 보는 것 같기는 했다. 노인들이나 가는 곳으로 들어가고 있으니 그런 모양이었다. 찾을 수 있을 거라고 한 젯나이트의 말은 맞았다. 고전 게임룸에 들어 가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이 젯나이트라고 씌여 있는 게임이었기 때 문이었다. 프로 게이머를 자청하고, 또한 게임 매니아임을 자부하는 나도 처음 보는 게임이었다. 게임룸에는 서로 방해되지 않도록 모두 칸막이가 되어 있었고 방음 시설도 되어있었다. 내가 앉은 젯나이트라는 게임 부스 도 마찬가지 였다. 게임 부스에는 키보드와 마우스, 그리고 조이스틱이 갖추어진 컴퓨터가 놓여 있었다. 무슨 게임일까. 나는 잠시 동안 앉아 있 다가 심호흡을 한 번 한 뒤에 컴퓨터를 켰다. 화면에는 ZSNES라는 에뮬레 이터가 실행되고 있었다. 나는 에뮬레이터의 이름을 보는 순간, 이것이 한창때 젯나이트가 만든 에뮬레이터임을 알 수 있었다. "생각보다 빨리 왔군." 해드폰을 쓰자 마자 젯나이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한참동안 멍 하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온라인 선도 없는 이곳으로 도대체 어떻게 연 결한 건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역시 부루터스와 실력대결이라도 하고 싶은 모양이지 싶었다. "너무 놀라지 말게. 내가 만든 에뮬레이터 후기 버전은 모두 온라인 게 임을 지원했으니까. 이해가 되는가? 온라인 게임이라는 개념 말일세. 구 닥다리 게임 시절에도 온라인 게임은 있었다네." 젯나이트의 목소리는 이어졌다. 나는 화면을 바라보았지만 화면에는 초 기화면만 떠 있을 뿐, 젯나이트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내 인생은 에뮬레이터의 인생과 일치하는 지도 모르겠다네, 비류. 이 렇게 노인이 되니까 내가 만든 에뮬레이터들은 노인들이나 즐기는 프로그 램이 되어 버렸으니 말일세." 나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컴퓨터를 살펴보았다. "내 부탁을 자네는 들어주지 않았지." 나는 가슴이 뜨끔했다. 처음부터 그 얘기부터 할 줄은 전혀 예상치 못 하고 있었다. 온라인 게임을 할 때 쓰는 마이크가 작동한다는 것을 확인 한 다음에야 나는 이렇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솔직히 그 랩탑, 돌려드리고 싶었지만 그것도 불가능해졌 어요." "알고 있네. MS녀석들이 가져가 버렸지." 젯나이트의 목소리는 침울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내가 오늘 자네를 부른 것도 그것 때문일세, 비류." 침울한 목소리는 이어졌다. 하지만 목소리에서 풍기는 분위기는 나를 질책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안타까움을 표현하고 있는 듯 했다. 나는 그런 분위기를 느끼는 순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랩탑을 빼앗겨서요?" "랩탑이라고 하지 말고 영혼의 에뮬레이터라고 불러주게." 젯나이트는 정중한 어조로 나에게 부탁했고, 나는 얼른 말을 정정했다. "영혼의 에뮬레이터를 빼앗겨서요?" "그렇지. 어떻게 보면 자네에겐 다행스러운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네. 적 어도 자네 같이 정상적인 젊은이라면 부루터스가 하는 테러에 대한 책임 감 때문에 돌아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니까." "부루터스를 아시나요?" "그래. 한 때 나와 경쟁하던 에뮬레이터 제작 팀의 일원이었지, 부루터 스는. 직접 만나 본적은 몇 번 없지만, 온라인 상에서는 친하게 지냈던 친구였다네. 내가 남긴 기록을 들어보았을 테니 알고 있겠지만, 에뮬레이 터 제작의 열풍의 끝자락에 결국 돈을 선택한 수 많은 프로그래머 중 한 명이었다네, 부루터스는." 나는 젯나이트가 남긴 음성을 떠올려 보았다. 아마 부루터스도 게임기 에뮬레이터를 만들던 프로그래머들 중에서 MS사 같은 회사에 스카우트되 었다는 프로그래머 중 하나였던 모양이었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보니 나 는 부루터스의 과거를 알 수 있었다. 에뮬레이터 제작자에서 게이머로, 게이머에서 다시 MS사의 프로그래머로 전향한 부루터스의 행적이 대강 머 릿속에 그려졌다. "... 세헤라자드는 만나셨나요?" "그렇다고 해두지. 자네, 혹시 나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아서 미안해하 고 있다면 그런 생각일랑 접어두게. 어찌되었건 결론 적으로 자네가 내린 판단은 나를 위해서나, 또 세헤라자드를 위해서나 도움이 되었으니까 말 일세. 아마 자네가 랩탑을 탐내서 내 약속을 바로 지켰다면, 세헤라자드 는 이 세상에 존재 할 수 없었을 테니까." 젯나이트는 '이 세상'이라는 단어를 유독 강조하여 발음하였다. "물론 그게 문제가 되기는 했어. 부루터스가 저렇게 날뛸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말일세. 아, 말했듯이 죄책감은 접어두게. 나는 그래도 내가 사람 하나는 잘 골랐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말일세. 세헤라자드도 동감 인 것 같더군." 젯나이트는 밝은 음성으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제 마음이 놓이고 있 었다. "부루터스가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일단 대화의 가능성이 열리자마자 나는 젯나이트에게 이렇게 물었다. 어쩌면 성급한 감도 없지는 않았지만 나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부루터스가 이야기 해 주지 않던가?" "아무 말도 해 주지 않았어요. 어디에나 있지만 아무 곳에도 없다는 말 빼고는." "부루터스, 그 친구. 아무래도 자네가 마음에 든 모양이로군. 그렇게 호의적으로 말을 다 해주다니 말일세." 나는 젯나이트의 말이 농담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농담은 아닌 모양 이었다. 이렇게 진지하게 말을 하고 있는 걸 보니 말이다. "자네에게는 부탁하고 싶은 것들이 많이 있다네. 그리고 나는 자네가 내 부탁을 꼭 들어주리라 믿네. 적어도 캡춰된 영혼을 소중히 할 줄 아는 사람이면 진짜 생명도 소중히 할 줄 알겠지. 부루터스와는 다르리라 믿 네." "부탁이라니요?" "차근차근 해 나가기로 하지. 먼저 나는 자네가 랩탑을 찾아주길 바라 네." 젯나이트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최후의 희망이 멀리 달아나는 것을 느 낄 수 있었다.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부루터스의 소재를 알아내 시디를 빼앗고 그것으로 MS사와 동등한 위치에서 거래를 하기 위해서 였다. 그런 데 랩탑을 찾아달라니. "... 소드앤매직 온라인 코리아 합중국지부에서 잃어버렸어요, 그 랩탑 은." 나는 이렇게 중요한 것을 상기시켜주었다 (즉, 내가 랩탑을 찾으려면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는 말이다). "알고 있네. 아마 자네는 그곳에 두고 온 동료를 구출할 계획을 세워 두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갈수록 태산이라더니. 이제 나는 젯나이트를 붙잡고 통사정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잠시 동안 침묵이 있었다. "아무런 대답이 없군. 자네, 걱정하고 있는가?"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렇습니다." 나는 어렵게 어렵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다는 말을 하기가 이렇게 어려운 줄은 몰랐다. "비류. 자네 혹시 부루터스가 원하고 있는 게 뭔 줄 아는가? 왜 테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나?" "뭔가 원하는 게 있겠지만 잘 모르겠습니다." 나는 치부를 드러내는 것처럼 기분이 좋지를 않았다. "부루터스가 원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 랩탑이라네. 그러니까 영혼의 에뮬레이터를 원하고 있다는 말이지." "그렇다면...?" "비류. 자네는 좀 문제를 잘못 파악하고 있었군. 자네의 적은 지금으로 서는 MS사가 아니라 바로 부루터스라네." 나는 잠시 동안 혼란에 빠져버렸다. 젯나이트가 하고 있는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부루터스의 계획을 막아야만 한다네. 그렇지 못한다면..." 젯나이트의 말은 갑자기 여기에서 끊어졌다. 나는 회선이 끊긴 사람처 럼 키보드를 두드려보았지만 잠시 동안 헤드폰에서는 아무런 말도 흘러나 오지 않았다. "빌어먹을. 어스폴이 눈치 챘군. 이제 곧 이곳으로 들이닥칠 거네." 나는 젯나이트의 말에 저절로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덕분에 게임 부스 천장에 머리를 부딪치고 말았지만 아프다고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일단 그곳으로 가서 랩탑을 손에 얻게! 그 다음 일은 나중에 다시 연 락하지. 내가 좀 미숙했나 보네. 이곳은 안전할 줄 알았는데." "하지만..." "두려워하지 말게. 자네가 지난번에 그곳으로 갔을 때 어떻게 경계망을 뚫었는가 한 번 생각해 보게. 아직 녀석들은 자네를 돕는 영혼이 있다는 걸 알지 못해! 자, 이제 시간이 없네. 일단 여길 뜨게!" 나는 젯나이트의 말을 듣자마자 해드폰을 벗어 던지고 게임룸을 빠져나 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길 내내 나는 불안했다. 한때는 전망 용 엘리베이터였을 이곳에서 보이는 풍경은 온통 희뿌연 안개뿐이었다. 처음에는 밖을 볼 수 없도록 설계되었던 이곳을 세기가 바뀌면서 전망용 엘리베이터로 교체한 경비가 아까울 정도로. 나는 아무래도 지금 보이고 있는 이 모습이 내 상황을 그대로 말해주고 있는 것만 같았다. 언제 어스 폴 요원들이 나를 덮칠 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로비까지 가는 동안 나는 어스폴 요원은커녕 남산 타워 보안 요원 하나 보지 못하 였다. 너무 쉬운 걸. "저 쪽!" 누군가의 목소리가 로비에 울려 퍼졌다. 나는 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았 다. 이진우 수사관의 모습이 언뜻 눈에 들어왔다. 나는 자동문을 통해 로 비 밖으로 뛰어갔다. 다 틀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무리 도망치려 고 해 봤자 프로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일 테 니까 말이다. 내가 자동문을 지나가자 문이 닫혔고, 어스폴 요원들이 내 뒤를 ㄳ았 다. 이제 잡히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정말 끝장인 가. 그런데 내 등뒤에서는 의외의 사태가 벌어지고 있었다. 어스폴 요원들 이 자동문을 두드리면서 벌게 진 얼굴을 하고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세헤라자드인가? 어스폴 요원들의 목줄에 핏발이 서고 있는 것이 멀리서 도 보였다. 순간, 요원 하나가 빔핸드건을 뽑아 나에게 겨누려고 했다. 나는 그 모 습을 보는 순간 다리가 굳어버렸다. 빔핸드건의 위력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이진우 수사관이 그 요원의 팔을 눌러 내 렸고, 나는 그제서야 그곳을 빠져나갈 엄두를 낼 수 있었다. 이진우 수사 관의 얼굴에는 두고보자는 빛이 역력했다. 영화나 게임에서 보면 이럴 때 주인공은 멋진 제스처라도 보이면서 도망치던데. 하지만 나는 다음부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로까지 뛰어간 다음 택시를 잡아 탔다. "손님, 급하신 모양이지요?" 숨을 헐떡이는 나를 보고서 택시 운전기사가 농담처럼 말을 건넸다. 나 는 가야 할 곳을 말해주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어스폴 요원한테 ㄳ기고 있거든요." "그래요? 그것 참 우연이군요. 지금 막 범인을 추격하는 어스폴 요원을 내려준 길이었는데." "혹시 그 사람이 저를 ㄳ던 건 아니었나요?" "아뇨. 김 구 선생 암살범이라고 하더라고요." 키득거리면서 택시 운전기사가 말했고, 나는 등받이를 뒤로 젖힌 후,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아직 긴장을 늦출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한 고비 넘긴 것만은 분명했다. PRINTER/CAPTURE를 OFF 하시고 [ENTER] 를 누르십시오.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9119/19898 ━━━━━━━━━━━━━━━━━━━━━━━━━━━━━━━━━━━━━━━━ 제 목:[탐그루] 영혼의 에뮬레이터 12 254 관련자료:없음 24/24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4-15 21:04 조회:1352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차가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나는 옷깃을 여몄지만 추워서라기 보다는 불안해서 한 번 해본 동작에 불과했다. 오토와 건은 적외선 망원경으로 소드앤매직 온라인 코리아 합중국 지부를 살펴보고 있었고, 실버우드 역 시 불안한 표정으로 오토와 건의 시선을 따르고 있었다(물론 적외선 스코 프가 아닌 이상 풍경을 볼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비류 씨 말을 따르는 것 말고는 수가 없다는 현실이 안타깝군요." 적외선 스코프를 내려놓으면서 건이 말했다. "글쎄요. 제가 보기에는 지난번에 버려진 아파트 단지가 무너져 내린 것도 우연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오토는 내 말을 신뢰한다는 표현을 이런 식으로 했다. 분명 세헤라자드 가 우리를 돕고 있다고 믿고 있는 것 같았다. "오토 씨. 오토 씨는 너무 유리한 쪽으로만 생각하시는 것 같네요. 전 문 해커라고 해도 아파트 단지를 날려버릴 만한 실력을 가진 사람은 없거 든요. 해커라는 건 어디까지나 정보를 다루는 사람이잖아요? 요컨대 컴퓨 터 프로그램 상에서만 가능한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거예요. 물리적으로 뭔가를 할 수 있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요." "FHA에 계시는 분이 그런 말을 하다니 의외로군요. 모니터나 프린터를 날려 버리는 바이러스를 만든 사람은 해커 아니었던가요?" "그야... 그건 그렇죠." 건이 희죽 웃으면서 말했다. "실은 저도 비류 씨 말이 옳기만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 면..." "그렇지 않다면요?" 건이 말을 잇지 않자 실버우드가 재촉하듯이 이렇게 물었다. "이 계획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갈 테니까요." 건의 얼굴에는 웃음이 사라져 버렸다. 하긴 이렇게 내 말만 믿고 이곳 으로 온 것 자체가 무리였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달리 방법은 없었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리파이와 아톰의 안전은 불투명해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젯나이트가 '지난번에 그곳으로 갔을 때 어떻게 경계망을 뚫었는 가 한 번 생각해 보게'라고 한 말을 세헤라자드가 우리를 도울 것이라는 말로 해석했고, 이제 그 결과는 눈 앞에 나타날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만약 MS 녀석들이 알고 있다면? 물론 젯나이트야 아직 녀석들이 우리를 돕는 영혼이 있다는 걸 알지 못한다고 하기는 했지만 정말 그럴지는 알 수가 없는 것이었다. "전투는 언덕 저편에 무엇이 있는가를 알아내는 것에 달려있다고 하셨 지요? 이거, 정말 두려워요. 아무래도 녀석들은 언덕 저편에 뭐가 있는지 알고 있지만 우리는 전혀 모르고 있다는 생각만 들거든요." 오토는 대답대신 자신의 구식 스미스앤웨슨 리벌버 권총을 다시 한 번 점검했다. 약실에는 여섯 개의 탄환이 정확하게 들어 있었다. 오토는 예 비 탄창도 점검했다. 물론 자신의 무기를 점검하는 거야 당연한 일이겠지 만 너무 자주 점검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역시 오토도 불안한 모양이었 다. 나는 오토가 점검을 마친 다음에 38구경 탄환하나를 만지작거리는 것을 보았다. 손때 묻어 번들거리고 있는 그 38구경 탄환은 예비 탄환 같지는 않아 보였다. "저, 그게 뭔가요?" 내가 오토에게 물었다. "통일전쟁이 남겨준 거지요." "총 말고 그 한 발짜리 탄환이요. 손때 묻은 거 보니까 오래 된 것 같 은데." "저한테 이 총을 준 사람이 함께 준 것입니다." 오토는 탄환을 만지작거리면서 대답했다. "총알을 한 발만 준 거 보니까 돈을 넉넉하게 지불하지 않으셨던 모양 이지요?" 나는 오토에게 반농담으로 이렇게 물었다. 하지만 오토는 의외의 대답 을 했다. "그 사람이 말하더군요. 이 총알은 어떤 경우에도 쓰지 말라고." "어떤 경우에도 쓰지 않아야 할 총알도 있나요?" "있지요." 오토가 대답하는 순간, 나는 잘못 물어보았다 싶었다. 그 탄환의 용도 가 무엇인지 나는 뒤늦게 알아차릴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상상할 수 있 었다. 얼마나 많은 절망적인 순간이 오토에게 닥쳐왔을지, 또 그 때마다 저 탄환을 만지작거리면서 고민에 빠졌을 지를 말이다. 나는 더 이상 말 을 이을 수가 없었다. "무작정 온 건 딱 내 취향이긴 한데 말이야, 이거 너무 지루하군. 이러 다가 날 새면 어떻게 하지? 시간만 자꾸 가는데, 이거." 건은 초조한지 자꾸만 중얼거리고 있었다. 나는 신경이 거슬렸지만 오 토는 더 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냥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 었다. 나 같은 아마추어는 사실 낄 자리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아직 시간이 있습니다, 건 씨. 조금 더 기다려 보지요." "기다리기 시작한지 다섯 시간이 다 되어 가거든요, 지금? 그런데 조금 더 라면 어느 정도를 말씀하시는 거예요?" 꼭 싸움이라도 거는 사람 같은 말투로 건이 말했다. 나는 그런 건의 태 도가 자칫하면 싸움으로 번지지 않을까 걱정이 될 지경이었다. "건 씨. 전 건 씨를 잘 모르지만요, 프로라면 좀 진득하게 기다리세 요." 실버우드였다. 실버우드는 오토가 뭐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건에게 이렇 게 한 방 날리고 말았다. 건은 스스로도 부끄러워졌는지 잠시 동안 당황 하는 듯 했다. "실버우드 씨. 죄송하지만 이 일의 프로는 접니다, 당신이 아니라." "아마추어의 눈으로 봐도 그런데 프로라면 오죽하겠어요?" "그만 두지요. 이런 쓸데없는 대화는. 그럴 시간 있으면 안이나 한 번 더 둘러보는 게 나을 겁니다." 오토가 말했다. 나는 오토의 냉정하고도 침착한 말투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만약에 내가 오토의 입장이었다면 실버우드가 자신의 편을 들어 준다고 생각하고 조금이라도 마음이 흔들렸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오 토는 그야말로 아무런 감정 없이 상황에 대처하고 있었다. 프로라 그런 걸까? 어쩌면 늘 죽음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일이 어떻게 되든지 전 네 시에 작전을 시작할 거예요. 더 이상 시간 을 끈다는 건..." 건이 말하고 있는데 오토가 불쑥 끼어들었다. "건 씨. 죽는 게 두렵지 않습니까?" 오토의 목소리는 낮게 깔려 있었다. 나는 오토의 목소리에서 음산한 기 운을 느끼고는 오싹 몸이 떨려왔다. 오토같은 사람이라면 죽는 걸 두려워 하지 않는다고 말할 줄 알았는데. "목숨이야 아깝죠, 저도. 하지만 지금 같은 경우에는 선택의 여지가 별 로 없는 것 같네요."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 목숨을 걸겠다. 부럽습니다." 오토의 목소리에서 어느 사이 음산한 기운이 사라져 버렸다. 나는 오토 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오토는 다시 한 번 자신의 리벌버를 점검하고 있 었다. 소리가 멀리 퍼지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회전 탄창을 돌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전 죽는 게 두렵습니다." 오토의 말에 아무도 토를 달지 않았다. 오토의 말이 이제 곧 죽음이 닥 쳐올 것이라는 실감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서로 무기를 들고 다투게 된 이상, 오토가 우리에게 심어준 느낌은 결코 느낌으로 끝날 수 없을 것이 다. 오토와 건은 시간이 지나면서 몸이 굳지 않도록 조금씩 몸을 움직였고, 나와 실버우드도 별 의미 없이 그 동작을 따라하고 있었다. 시간은 이제 새벽 세 시 반을 지나고 있었다. 건이 말한 작전 개시 시간으로부터 삼 십 분밖에 남아있지 않은 시간이었다. 나는 시간이 영영 정지되어 버렸으 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침이 천천히 천천히 움직이다가 서서히 멈 춘다. 그리고 이내 세상은 완전히 정지해 버린다. 처음에는 나 혼자 움직 일 수 있다. 그리고 십 년이 가고, 백 년이 가고, 천 년이 가면 결국 나 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것이 되어 버릴 것이다. 인간이라고도 할 수 없고 생명이라도 할 수도 없는 다른 차원의 존재가. 그리고 나도 결국 스스로 멈추고 만다. 그리 긴 시간이 아니었지만 나는 이런 상상까지 해 볼 수 있었다. 다른 차원. 세헤라자드는 나에게 다른 차원을 이야기 해주었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삼십분이라는 시간은 그렇게 지나갔다. 우리는 결국 아무런 대비책도 마련하지 못한 채, 건이 애초부터 주장했던 '무작정 쳐들어가기' 작전을 쓸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물론 이 일에 대해서는 작전을 주장한 건조차 도 별로 달가워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시간이 되었네요." 건이 말했다. 소년같이 곱기만 한 그의 얼굴이 세상 다 산 노인처럼 딱 딱하게 굳어있었다. 누군가 톡 건드리기만 해도 당장에라도 빔을 날려버 릴 것 같이 긴장된 모습이었다. "건 씨. 몇 명 파악하셨습니까?" "제가 본 건 보초 여덟이었어요. 넷 씩 이 교대인 것 같거든요?" "리퍼는 안에 있는 모양이더군요." "말씀하신 스티브 강이라는 사람은 어디에 있을까요?" "아마 여기에는 없겠지만 일단 저 집 안에 있다고 생각해 두죠. 빔핸드 건을 들고 있다면 노인이고 꼬마고 두려운 존재가 되어 버리니까." 둘은 이렇게 대화를 나누었다. 아마추어는 절대로 따라갈 수 없는 경지 의 대화인 것 같다고 나는 생각했다. 기다리고 있는 동안 나는 지금 이 상황에 아무런 소용도 닿지 않는 쓸데 없는 상상을 하느라 시간을 다 써 버렸는데 말이다. 나는 실버우드의 표정을 바라보았다. 잔뜩 굳어있는 실 버우드의 표정을 보아하니 실버우드도 나와 그다지 다른 상황은 아닌 것 같았다. "탐지기가 곳곳에 있을 겁니다. 제가 확인 한 건 우리가 넘어갈 담과 리파이 씨와 아톰 씨가 있을 낡은 집 주변밖에는 없습니다만." "저도요. 하지만 바닥 전체에 센서를 깔아놓았으면 어쩌지요?" "그렇다면 오히려 다행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기계에 의존하다보면 감각 을 잃게 되거든요." 이제는 점검을 더 할 것도 남아있지 않을 것 같은 리벌버 권총을 집어 들면서 오토가 말했다. 아마도 오토는 주머니에 들어있는 세 개의 예비 탄창보다 그 손때 묻은 한 발의 탄환에 더 신경을 쓰고있는 것 같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아마추어는 그냥 여기서 기다리는 게 어때 요?" 건이 실버우드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나는 건의 말에 안도감이 들었다. 만약 나에게 뭔가 중요한 역할이 있었다면 나는 아마도 책임감과 두려움 때문에 미쳐버렸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여기서 살아 돌 아가게 된다면. 이렇게 생각을 하자 갑자기 아쉬운 점들이 자꾸만 떠올랐 다. 돈을 모으면 영국에 가서 소드앤매직 온라인 상의 부인을 만나겠다고 생각한 계획도, 먹고 싶어했던 아이스크림 종류들도, 그리고 세헤라자드 도 다시 한 번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종류의 일은 아마추어지만 저는 프로 게이머에요. 그리고 리파이 가 잡혀있는 데 그냥 여기서 손놓고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고요." 실버우드는 당연하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 (비록 다리를 심하게 떨고 는 있었지만 말이다). 나는 실버우드의 말을 듣는 순간 나 역시 따라가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로 시간이 멈추어 버린다면 얼마나 좋을까. "... 실버우드 말이 맞습니다." 나는 간신히 오토와 건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미안하지만 손놓고 앉아 있어 주는 것이 우리한테는 도움이 될 텐데 요." 오토가 대답했다. 사실 오토의 말이 맞다는 건 나도 실버우드도 아주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옛날 갱 영화를 봐도 억지부려서 따라간 조연 의 운명이 어떻게 되는지는 뻔했다. 총에 맞아 죽거나, 아니면 주인공의 전투 행위를 방해하거나, 잘해봐야 인질이 되었다가 풀려나는 정도일 테 니까. 그리고 사실 우리도 그 운명에서 그리 자유로울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아뇨. 저는 꼭 따라 가겠어요. 무슨 일이 있어도." 실버우드가 오토의 말이 끝나자마자 이렇게 맞받아 쳤다. "실버우드 씨. 심정은 이해합니다만 그건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습 니다. 저희가 일을 하는 데도 불편하고, 또 일의 성공률 자체를 낮추는 일입니다. 게다가..." "게다가요?" "실버우드 씨. 사람 죽는 모습 본 적 있으십니까?" 오토의 말은 차갑게 밤하늘아래 내려앉듯이 내 귀를 파고들었다. 오토 의 말은 나에게 늘 실감을 전해 주었다.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이고. 나는 그냥 안 따라 간다고 했어야 옳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실버우드 를 말렸어야 옳았다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나는 멍청하게도 실버우드의 말이 옳다고 말해버렸고, 결과는 이렇게 되고 말았다. "예." 실버우드가 대답했다. 오토는 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건은 품에서 두 정의 빔핸드건을 꺼내 나와 실버우드에게 건네주었다. "두 가지만 명심하면 되거든요? 하나는 방아쇠를 당기고 삼 초 이상 있 지 말 것, 그리고 한 번 쏜 다음에는 반드시 마음속으로 셋까지 외우고 다시 쏠 것. 그러면 과열이나 폭발 사고는 없을 겁니다. 그리고 빔핸드건 은 생각보다 약해요. 상대방 머리통을 부수는 건 빔이지 총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요. 아, 오토의 총이라면 다르겠지만." 건은 빔핸드건을 주고 나서 우리에게 간략하게 설명을 해 주었다. 오토 는 건의 얼굴을 빤히 처다보더니 포기했다는 듯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 다. 나는 오토의 표정을 보는 순간 불길한 예감이 스치고 지나가는 걸 느 낄 수 있었다.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고 지나가는 소리가 암울하리 만치 무겁게 들려왔다. "몇 번이나 쏠 수 있습니까?" "열 두 번에서 열 다섯 번. 그리고 나면 빨간 불이 들어와요. 그때 팩 을 갈아주면 되지만 비류 씨하고 실버우드 씨에게는 그것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갈아 끼울 팩이 없다는 거지요. 무슨 말인지 알겠죠?" "비류 씨, 실버우드 씨. 함부로 쏘지 말아요. 그리고 쏠 때 함부로 손 목을 비틀지 말고. 아차 하는 순간에 저나 건 씨의 목을 땅에 떨어뜨릴 수도 있으니까." 건이 묻자, 오토는 대답 할 시간도 주지 않고서 나와 실버우드의 눈을 번갈아 가면서 노려보며 말했다. "명심해요. 함부로 팔목을 비틀면 안됩니다." 오토는 한번 만으로는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다시 한 번 이렇게 강조했 다. 나는 빔핸드건을 손에 꼭 쥐어보았다. 소리도 나지 않고 빔을 뿜어대 는 이것을 나는 굉장히 가벼울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작은데 비해 의외로 무게가 있었다. 게다가 시커먼 색으로 칠해진 표면이 몹시도 신경 이 쓰였다. 겁이 다 날 지경이었다. 실버우드도 나와 비슷한 느낌인지 조 심스럽게 빔핸드건을 이리 저리 돌려보았다. 실버우드는 검지손가락을 방 아쇠울에 걸고 있었는데, 오발을 막기 위해서 방아쇠울에 손가락을 걸치 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조금은놓이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질질 시간만 끌고 있을 거면 그대로 있고, 아니라면 빨리 따라 와요." 건은 이렇게 나즈막히 내뱉듯이 말했고, 오토는 바로 건물을 향해 움직 이기 시작했다. 오토가 생각한 공격 지점은 정문이었다. 정문에는 보초가 둘이 있었지만 일단 둘을 해치우고 나면 정문 수위실을 거점으로 나머지 여섯과 싸울 수도 있고, 운만 좋다면 재빨리 안으로 들키지 않고 잠입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정문에 장치되어 있을 레이더 였다 (물론 내가 생각한 것은 아니다. 다만 건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종합 해서 추리 해본 것이다). "잠깐만요. 들킬 줄 알면서도 간다는 건가요, 지금?" 실버우드가 오토와 건을 따르면서 물었다. "어차피 들키게 되어 있다면 그냥 돌파하는 편이 나아." "우리가 알고 있는 건 적도 알고 있으니까." 오토가 중얼거리자 건이 바로 말을 이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 다. 이제 총격전이 벌어질 것이고 내 손에는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무기가 들려있었다. 정문의 수위실이 시야에 들어오자 오토와 건은 각각 좌우로 흩어져서 뛰기 시작했다. 나는 오토의 뒤를 따랐고, 실버우드는 건의 뒤 를 따랐다. 심장이 터져버릴 것처럼 강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숨이 차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긴장 때문에 그런 것인지 나는 도무지 구분을 할 수 가 없었다. 숨소리가 귀에 분명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9120/19898 ━━━━━━━━━━━━━━━━━━━━━━━━━━━━━━━━━━━━━━━━ 제 목:[탐그루] 영혼의 에뮬레이터 12 255 관련자료:없음 23/23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4-15 21:04 조회:1184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오토는 수위실에 도착하자마자 발로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수위실에는 둘이 있었다. 하나는 책상에 엎드려 자다말고 황급히 일어났고 다른 하나 는 얼른 빔핸드건을 뽑으려고 했지만 뒤따라 들어온 건까지 합세해 네 개 의 총구가 자신들을 겨누어지자, 완전히 포기한 듯 총구를 땅 쪽으로 내 리고 의자에 똑바로 앉았다. 나는 수위실 벽면에 붙어있는 레이더를 보았 다. 어떻게 보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레이더 위에 붙어있는 붉은 색 경고등에 불빛이 들어오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작동하지 않은 것이 틀 림없었다. 세헤라자드로구나! 나는 속으로 탄성을 올렸다. 건은 빔핸드건 을 빼앗아 두 명을 무장 해제시켰다. "자네들 여기서 얼마나 받고 일하나?" 오토가 물었다. 둘은 긴장으로 얼굴이 굳어져 있었을 뿐 감히 대답할 엄두가 나지 않는 듯 했다. "... 어떻게 레이더에 걸리지 않았지?" 하나가 체면이라도 유지해 보겠다는 듯이 이렇게 간신히 물었다. "우리가 입고 있는 옷이 스텔스거든요. 이 아가씨가 마련해 준거죠." 건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농담으로 하는 소리인지 진담으로 하는 소리 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우릴 어떻게 할건가?" "여기서 두 사람만 구해가지고 나가면 돼. 그 둘은 어디있지?" 오토가 묻자 두 사람은 서로의 눈치를 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몇 푼 안 되는 돈 받고 목숨 바쳐서 일하고 싶다면 그렇게 해요." 건이 빔핸드건을 겨누면서 말했다. 그러자 한 쪽이 낡은 헛간 지하에 있다고 간신히 대답했다. "그곳을 연구실로 쓰고 있다." 말하고 있는 쪽의 얼굴은 죽음에 대한 공포와 긴장으로 일그러져 있었 다. 오토는 그 쪽의 눈을 쏘아보았다. "가만히 있기만 하면 목숨은 건질 수 있을 거야. 어차피 안에 있는 녀 석들은 다 죽어 버릴 테니까 변명은 얼마든지 지어서 할 수 있어. 일개 사단 병력이 밀고 들어와서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 이제 두 사람, 엉덩이에 손등이 밑으로 들어가게 양손을 집어넣어." 오토는 이렇게 말하고는 실버우드에게 간단하게 지시했다. "여기서 둘을 지켜요. 그리고 움직이면 쏴버려요. 손바닥을 뒤집어도 쏴버리고, 입을 열어도 쏴버리고. 눈동자만 움직여도 쏴버려요." "그럼 빨리 가지요." 건은 이렇게 말하고는 먼저 수위실을 나섰고, 오토가 바로 그 뒤를 따 랐다. "세헤라자드에요. 도와 준 게 틀림없어요." 나는 수위실을 나서자마자 오토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럼 이제부터 세헤라자드를 믿어 보죠, 뭐." 건은 이렇게 말하고는 헛간 쪽으로 바삐 걸음을 옮겼다. 헛간 밖에는 지키고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방범장치만 믿고 아무런 준비도 하고 있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기계에 의존하다 보면 감각을 잃는다는 오토의 말이 맞았다. 창문을 통해 들여다본 헛간에는 넷이 자고 있었고 둘이 잡 담을 나누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어느 쪽을 먼저 해야 하지?" 건이 오토를 보면서 물었고, 오토는 대답대신 역시 발로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깨어있던 둘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전혀 파악이 안 되는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서 우리를 바라보았다. "사람만 구해 가지고 가면 우리 일은 끝이야. 죽고 싶다면 마음 대로 해." 오토의 말은 확실히 설득력이 있었다. 둘은 순순히 빔핸드건을 건에게 건네주었다. "열쇠." 오토가 말했고, 오른 쪽에 앉아 있던 쪽이 턱으로 벽을 가리켰다. 벽면 에는 열쇠가 걸려 있었다. 오토가 빔핸드건을 겨누고 있는 동안 건은 천 천히 벽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건의 시선이 잠시 열쇠에 모아진 순간, 침대에 누워있던 넷 중 하나가 벌떡 일어섰다. 나는 반응 할 수가 없었 다. 방아쇠를 당기기는커녕 몸조차 숙이지 않았던 것이다. 벌떡 일어났던 사내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오 토의 리벌버가 총성을 울렸고, 사내는 가슴 한 복판을 명중 당했던 것이 다. 그와 거의 동시에 의자에 앉아있던 둘이 오토와 내가 있는 쪽으로 달 려들었고 다시 한 번 리벌버의 폭발음이 실내를 뒤흔들었다. 하나는 오토 의 리벌버가 뿜어낸 뜨거운 탄두를 안고서 뒤로 날아가 버렸고, 다른 하 나는 건의 빔핸드건에 정확하게 목이 잘려 나갔다. 침대에 있던 셋이 양 손을 귀 밑까지 치켜들면서 일어났다. "자네들, 얼마 받고 일하나?" 오토가 물었지만 건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건의 빔핸드건은 그대로 세 명의 목을 베어버렸던 것이다. 여섯 개의 팔목과 세 개의 목이 굴러 떨어 졌고, 핏물이 목에서 뿜어져 나오며 목 없는 시체 셋이 무너지는 것처럼 쓰러졌다. "얼마 받는지 알아서 뭐하게." 건은 이렇게 말하고는 그대로 지하실로 통하는 문을 열고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나는 여전히 멍한 상태로 쓰러져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리벌버를 맞은 사람에게선 피가 마치 수도꼭지를 틀어놓은 것처럼 흘러나 오고 있었다. "미안합니다, 비류 씨." 오토가 말했다. 오토의 표정은 낭패라는 빛이 역력했다. 나는 바닥을 바라보았다. 잘려 나간 목이 눈을 부릅뜨고서 일그러져 있었다. 역한 피 냄새가 풍겼다. 구역질이 밀려왔다. "하지만 아마추어에게 빔핸드건을 맡길 수는 없었어요." 나는 그제서야 내 빔핸드건은 빈총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귀에 서 이명이 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것도 바로 그때였다. 바로 옆에 서 발사된 화약식 권총의 소음은 생각보다 훨씬 컸던 모양이었다. 피냄새 에 화약냄새까지 맡고 나니, 나는 거의 쓰러질 지경이 되어버렸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상황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으악!" 먼저 지하실로 내려갔던 건이 내지르는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오토는 순간 나를 벽 쪽으로 밀치면서 문 옆에 바로 붙었다. 다음 순간 건물에 불이 동시에 꺼졌다. 누군가 차단기를 내린 모양이었다. 순식간에 헛간은 어둠 속에 휩싸여 버렸다. "오토! 오토!" 건의 다급한 목소리가 계단 아래에서 들려왔다. 오토는 문을 박차고는 바로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따라서 뛰어 내려갔다. 나는 숨이 막힐 것 처럼 호흡이 가빠졌다. 당장이라도 질식해서 쓰러질 것 같았다. 오토를 따라가야 하나? 잘린 목과 손목이 뒹굴고 있는 헛간은 아무리 보아도 현 실감이 없었다. 나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오토를 따라가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빈총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나는 도저히 내 손에 들려 있는 빔 핸드건을 내려 놓고 싶지가 않았다. 나는 어둠에 아직 익숙해지지 않은 눈을 깜박이면서 오토가 내려간 지 하로 통하는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때 발이 뭔가가 미끄러지면서 나는 그대로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나는 일어나려고 버둥거렸 지만 손이 자꾸만 미끄러졌다. 핏물이 순식간에 바지에 스며들었다. 누군 가의 목인지 손목인지가 손에 닿자, 나는 그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그 순간 내 쪽으로 한 줄기 섬광이 비추었고, 나는 반사적으로 뒤로 드 러누웠다. 섬광은 내 머리카락을 태우며 벽에 긴 상처를 남겼다. 누군가 가 창 밖에서 쏜 빔이 틀림없었다. 살아야 한다. 살아야 한다. 나는 이 생각 말고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일단 몸을 조심스럽게 비틀어 엎드린 자세를 한 다음, 나는 왼 팔 오른 팔을 교대로 움직여 지하로 통하는 문 쪽으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목과 손목 몇 개가 내 길을 가로막았지만 나는 한 손으로 입을 막고 비명을 참 으면서 결국 지하로 통하는 문 앞에 당도할 수 있었다. 두 번의 화약식 권총 폭발음이 지하에서 울린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오토가 발사한 모양이었다. 나는 계단을 거의 굴러가듯 내려갈 수 있었 다. 그러자 불이 켜졌다. 빛이 갑자기 쏟아지자 나는 눈을 감아버렸다. "빌어먹을. 비류 씨. 당했습니까?" 오토가 나에게 물었다. "아, 아닌 것 같은데요." 나는 이마에 흐르고 있는 것을 팔 소매로 닦아내었다. 눈을 뜨자, 나는 소매에 피가 잔뜩 묻어 있는 것을 발견 할 수 있었다. 쓰러졌을 때 피범 벅이 된 모양이었다. 얼굴에는 계속해서 피인지 땀인지 알 수 없는 것이 흐르고 있었다. "그, 그냥 넘어진 거에요. 안 당했어요, 나." 나는 이렇게 오토에게 대답했다. 오토는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지하실은 생각보다 넓고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차가운 쇠로 되어 있는 벽면에는 '관계자 외 출입 금지'라는 말이 크게 적혀 있었고, 천정 에서 빛나는 형광등이 차가운 푸른 빛을 내리고 있었다. 지하실에는 두 개의 문과 한 개의 의자, 그리고 한 구의 시체가 있었다. 시체는 오토가 쏜 총에 맞고 쓰러진 시체인 모양이었다. 엎드린 시체 등뒤로 탄두가 빠 져나간 자리가 두 군데 눈에 띄었다. "건 씨. 괜찮습니까?" 오토가 물었을 때가 되어서야, 나는 건이 쭈그려 앉은 자세로 바로 내 옆에 있었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건은 대답 대신 고개만 몇 번 끄 덕였다. 이를 악물고 있는 건의 이마에는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었 다. 나는 바닥을 바라보았다. 바닥에는 손목이 하나 뒹굴고 있었다. "일단... 이렇게 도 합시다." 오토는 옷을 찢어 내어 만든 천으로 건의 팔뚝을 먼저 동여매었고, 뒤 이어 손목에도 천을 감았다. 천은 순식간에 원래 붉은 천이었던 것처럼 물들어 버렸다. 나는 바닥에 뒹굴고 있는 건의 오른 손을 바라보았다. 건 의 오른 손은 빔핸드건을 꼭 쥐고 있었다. 나는 너무나도 급작스럽게 다 가온 일들에 아직도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멍하게 건의 잘려나간 오른 손을 보고 있는 사이 오토는 문을 열 고 아톰을 데리고 나왔다. "아, 아톰..." 나는 정신나간 사람처럼 아톰의 이름을 불었다. 아톰은 초점 없는 눈으 로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톰을 부탁합니다." 오토는 이렇게 말하면서 아톰을 나에게 맡겼다. 아톰은 완전히 정신이 나간 상태였다. 풀린 다리로 휘청이 듯 몇 걸음 걸어와 나에게 쓰러지듯 기대었다. "아톰, 아톰?" 나는 몇 번이고 아톰을 불렀지만 아톰의 눈은 여전히 초점이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약물이나 뭐 그런 것에 당한 것 같았다. "오토 씨... 리파이는...?" 건이 비명을 참으면서 가까스로 말을 토해내었다. 오토는 문을 열고 나 오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너무 늦었습니다." 나는 아톰을 부축한 상태로 오토가 서 있는 문 쪽으로 걸어갔다. 방 안 에는 하얀 시트가 깔려 있는 침대 하나가 놓여 있었고, 그 위로 쓰러져 있는 리파이의 모습이 보였다. 리파이의 긴 생머리는 아무렇게나 흐트러 져 있었고, 마치 잠을 자고 있는 것처럼 누워있었다. "리파이?" 나는 이렇게 중얼거리듯 리파이를 불러보았다. 하지만 리파이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토는 리파이에게 다가가 리파이를 들쳐업었다. "둘 다 같은 방법으로 당한 것 같습니다. 무슨 방법인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만... 하여간 이제 여길 빠져나가도록 하지요." 나는 리파이가 쓰러져 있던 자리를 살펴보았다. 그곳에는 눈에 익은 랩 탑이 놓여있었다. 영혼의 에뮬레이터였다. "잠깐만요, 오토." 리파이를 업고 있는 오토에게 내가 말했다. "밖에 누군가 있어요. 빔이 제 머리 쪽으로 날아왔거든요." "리퍼..." 오토의 눈빛이 순간 빛을 발하였다. 오토는 계단 쪽을 바라보았다. "차단기를 내린 것은 이 친구였습니다. 덕분에 빔이 빗나갔군요. 운이 좋았습니다, 비류 씨." 바닥에 엎어진 시체를 턱으로 가리키면서 도무지 감정이라고는 깃들어 있지 않은 목소리로 오토가 말했다. 나는 그런 오토에게 완전히 질려버렸 다. "건 씨. 걸을 수 있습니까?" 오토는 건에게 이렇게 물었고, 건은 여전히 고통스러운지 고개를 끄덕 였다. "서두르지 않으면 수위실의 실버우드도 위험하겠군요." 오토는 리파이를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리파이의 몸은 굳어있지 않았 다. 나는 리파이를 바라보았다. 눈만 감고 있다 뿐이지 숨은 쉬고 있는 것도 같았다. 나는 리파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리파이의 얼굴은 창백했 다. 긴 생머리 몇 가닥을 입에 물고 있는 리파이의 모습은 꼭 익사한 시 체를 연상케했다. 오토는 엎드려 있던 시체를 일으켜 세우더니 부축하는 듯 계단 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오토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 지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비류 씨. 뒤로 물러서세요." 오토는 이렇게 말하고는 계단 쪽으로 시체를 냅다 집어던졌다. 그러자 계단 입구 쪽에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칼날이라도 달려 있던 것처럼 시 체가 두동강이가 나면서 바닥에 떨어졌다. "잘하는군! 넌 지금 네 동료를 네 손으로 죽인 거야!" 오토가 소리쳤다. 내게 빔을 쏘았던 녀석이 계단 위에 서 있는 모양이 었다. "하하핫!" 계단 위에서 소름끼치는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나는 무슨 일이 벌어지 고 있는지 아직도 잘 짐작이 가질 않고 있었다. "이봐, 대머리 친구! 내가 그쯤도 짐작 못할 거라고 생각했나? 보안장 치를 뚫고 들어온 건 훌륭했지만 그건 이미 다 예상하고 있었어! 하하핫! 이제 너희들은 끝장이야!" "예상했다는 녀석들이 이렇게 다 죽어버리나? 지금 이곳에 살아있는 건 너 하나야, 리퍼!" 오토가 소리쳤다. "나 하나면 충분해! 구닥다리 권총이나 쓰는 대머리하고 꼬마 몇 놈쯤 은 말이지." "수위실은 가 보지 않은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아직 실버우드는 안전해 요." 오토가 나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아마 뭔가 위안거리를 주려는 모양이 었지만 나는 그런 말에 위안을 얻을 만큼의 멍청이는 아니었다. "대머리라고 했나, 지금?" "그래, 대머리. 찾기 쉬워서 내 보내 줬잖아! 하하핫! 아마 가발을 뒤 집어 쓰고 있겠지? 생각만 해도 우습군. 하하핫!"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9121/19898 ━━━━━━━━━━━━━━━━━━━━━━━━━━━━━━━━━━━━━━━━ 제 목:[탐그루] 영혼의 에뮬레이터 12 256 관련자료:없음 23/23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4-15 21:05 조회:1633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오토는 웃음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리벌버 권총을 계단 위쪽으로 팔 목만 내밀어 재빨리 두 번 발사하였다. 잠시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들린 것으로 보아 갑작스러운 응사에 뒤로 쓰러진 모양이었다. "최후의 발악인가? 좋아, 좋아. 쉬운 것보다는 나도 이 편이 낫지. 아 무래도 재미가 있거든? 순순히 두 손을 드는 친구는 재미가 없거든." 리퍼가 계단 위에서 중얼거리는 동안 오토는 여섯 발을 재장전 했다. 바닥에 떨어진 탄피가 금속음을 내면서 뒹굴었다. "재 장전인가? 좋지, 좋아. 하지만 예비 탄창을 얼마나 가지고 왔을까? 난 이미 본사에 연락을 취했어! 시간을 끌면 끌 수록 나한테 유리한 싸움 이 될 거라고, 친구!" 리퍼가 소리쳤다. 오토는 권총을 수직으로 세워 이마에 대고는 잠시 생 각에 잠긴 듯 했다. 나는 리퍼의 말이 옳다고 판단되었다. 여기서 시간을 끌다가는 틀림없이 모두 죽어 버리게 될 게 분명했다. 오토는 그 자세로 벽에 등을 지더니 눈을 감고는 천천히 바닥에 주저 앉았다. 포기하는 것 일까? "건 씨." 오토가 말했다. "건 씨는 죽는 게 두렵지 않다고 말씀하셨지요." 건은 대답하기가 힘겨운지 고개만 끄덕였다. 건이 쭈그리고 앉아있는 바닥에는 피가 흥건했고, 건도 조금씩 얼굴이 창백해져 가고 있었다. 더 이상 시간을 끌었다가는 우리 모두가 끝장이었다. "전 죽는 게 두렵습니다." 오토는 이렇게 말하고는 계단 위쪽으로 소리쳤다. "리퍼! 이제 승부다!" "좋아, 좋아. 빔과 화약식 권총의 승부라. 마음에 들어! 나도 전에 이 런 상황을 겪은 적이 있지. 자네가 얼마나..." 리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오토는 다시 한 번 계단 위쪽으로 손목만 내밀어 다섯 번을 연속으로 발사하였다. 총성에 놀란 나는 그만 부축하고 있던 아톰을 쓰러뜨리고 말았다. 아톰은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다섯 번이나 연속해서 울린 총성은 완전히 내 청각을 마비시켰는지 한 동안 이 명 말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하하핫! 네놈이 한다는 짓이 겨우 그 정도지. 멍청한 녀석. 네 놈을 살려둔 건 정말 잘한 일이었어! 오래간만에 재밌는데, 이거!" 오토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탄창을 열어 탄피를 조심스럽게 옷자락 위에 쏟아 내렸다. 그리고 아직 탄두가 남아있는 탄환 하나를 탄창에 집 어넣었다. 그리고는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해진 탄환 하나를 탄창에 꽂아 넣었다. 나는 오토가 뭘 하려고 하는 지 알 수가 없었다. "이제 끝났어! 그런 사격으로는 도저히 날 맞추지 못해! 시간을 끌면 끌수록 나에게 유리하다니까! 포기하지 그래?" 리퍼가 계단 위에서 계속 소리쳤고, 오토는 탄창을 결합했다. "리퍼!" 오토가 소리치면서 계단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나는 오토를 말려야 한 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건도 멍하니 오토를 바 라만 보았을 뿐 말릴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나는 오토 쪽으로 달려갔 다. 오토가 죽을 생각으로 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적어 도 나는 오토가 그냥 이대로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내 동 작은 너무 늦었다. 내가 오토에게 다가서기도 전에 오토는 세 번 연속으로 방아쇠를 당겼 다. 첫 번째 총성이 울리자 두 번 공이가 빈 약실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 다. 나는 계단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계단 위에는 리퍼가 환한 웃음을 지 으면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하핫! 프로인줄 알았더니 완전히 아마추어였군. 어떻게 총알수도 세 지 않고..." 리퍼의 말은 그게 끝이었다. 오토는 리퍼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리지도 않고 방아쇠를 당겼다. 총성이 울렸고, 리퍼는 고개가 젖혀지면서 그대로 뒤로 쓰러졌다. 오토는 탄창을 열어 두 개의 탄피를 빼내었다. 탄피가 바 닥을 뒹구는 소리가 마치 종소리처럼 들려왔다. "어서 갑시다." 오토는 이렇게 말하고는 리파이를 업었다. 나는 랩탑을 챙긴 다음, 아 톰을 부축하고 계단을 올랐다. 건은 간신히 팔목을 움켜쥐고 우리의 뒤를 따랐다. 계단 위에 올라갔을 때, 나는 이마 한 복판에 구멍이 뚫려있는 리퍼의 시체를 볼 수 있었다. 리퍼는 자신의 죽음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다는 듯 이 웃음을 짓고 있었다. 오토는 리퍼의 시체에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수 위실로 향했다. 수위실에는 두 명의 사내가 이곳을 나갈 때 보았던 모습 그대로 앉아있 었다. 오토는 우리에게 밖에서 기다리라는 말을 하고 혼자 수위실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수위실에 난 창을 통해 안 쪽을 들여다보았다. 실버우드 는 지루하다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다가 우리를 보자 웃음을 지었다. "돌아왔군요! 리파이는요?" 오토는 실버우드의 질문에는 답할 생각도 하지 않고 앉아 있는 사내에 게 물었다. "차, 어디있지?" "후버카라면 저쪽 뒤편 주차장에..." "열쇠는?" 질문을 받은 쪽은 창가 쪽의 선반 위를 가리켰다. 오토는 리파이에게 나가라고 말한 다음 열쇠를 집어들었다. "우리도 그 돈 받고 목숨 걸고 일하고 싶은 마음은 없거든요." 왼쪽에 앉아 있던 쪽이 어깨를 으쓱하면서 말했다. 오토는 리벌버를 그 사내에게 겨누었다. "괜히 일 크게 만들지 말고 그냥 가요. 어차피 여기까지 응원군이 오려 면 한 참이니까." 오토는 숨도 쉬지 않고 바로 방아쇠를 두 번 당겼다. 앉아 있던 사내 둘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피가 내가 바라보고 있던 창문에까지 튀어 올랐다. "일은 벌써 커졌어." 오토는 이렇게 말하고 수위실 밖을 나섰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건이 알고 있다는 병원이었다. "의사 자격증을 취소 당했다 뿐이지 돌팔이는 아니거든요." 건은 억지로 웃음까지 지어 보이면서 핏기 없는 얼굴로 말했다. 시 변 두리 국도를 타고 한 참을 들어가서 찾은 병원은 말이 병원이었지 그냥 허름한 집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안에는 벌써 배에 자상을 입은 환자 하나가 수술을 마치고 마루에 임시로 마련된 침대에 누워있었고, 바닥에 는 피가 고여있었다. 나는 실험실로 쓰고 있다는 헛간에서 보았던 풍경이 떠올라 헛구역질을 했다. "이 번에는 아주 전쟁을 했네. 어디 좀 봐." 수술을 막 마친 의사가 마스크를 벗으면서 건에게 말했다. 나는 의사의 목소리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마스크를 벗자 목소리가 왜 이상했는지 알 수 있었다. 의사는 여자였다. 그것도 아주 젊은 여자였다. 키는 내 목 까지 겨우 올까 싶을 정도로 작았고, 눈동자는 초롱초롱해서 꼭 일본 만 화에 자주 등장하는 여자 같은 인상이었다. "그래도 살아남았어." "장하네." 여자는 건의 팔목과 잘려나간 손을 한 번 씩 훑어보았다. "혹시 혈액형이 A형인 분 있으세요?" 여자가 말하자 오토가 손을 들어 의사에게 표시했다. "서로 인사는 생략하지요. 나중에 서로에게 불리할 수 있으니까. 피를 좀 뽑아야겠어요. 피를 많이 잃은 것 같은데 잘못하면 쇼크가 올 수도 있 거든요." "손을 살릴 수 있겠습니까?" "한 번 해보죠. 하지만 장담은 못해요." 여자는 이렇게 말하고는 건을 침대에 뉘었다. "오늘도 잠은 다 잤네요. 손목 접합 수술은 대 여섯 시간은 걸리니까 요. 저기 두분은 무슨 환자죠?" 리파이와 아톰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알콜중독입니다." 실버우드가 대충 이렇게 둘러댔다. 어차피 이런 병원에서는 치료받을 수 없는 상태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저 쪽 회복실이라고 써있는 방으로 데리고 가서 뉘어요. 나머지 분들 도 좀 쉬세요. 안쪽에 샤워실도 있으니까 씻고 싶으시면 씻으시고" 여자가 건을 실은 침대를 끌고 수술실이라고 적혀있는 방으로 들어가면 서 말했다. 오토는 나에게 눈짓을 한 번 보낸 뒤 의사를 따라 수술실로 들어갔다. 나와 실버우드는 리파이와 아톰을 각각 데리고 의사가 일러준 회복실로 들어갔다. 회복실은 꼭 가정집 안 방 같은 분위기로 꾸며져 있었다. 노란색 커튼 에 초록색 바닥. 병원 분위기를 풍기는 것은 오직 침대 위의 하얀 시트 뿐이었다. 나와 실버우드는 리파이와 아톰을 침대에 눕혔다. "전... 좀 자야 겠어요." 실버우드는 힘없이 이렇게 말했다. 충격이 큰 모양이었다. 사랑하던 사 람이 저 꼴이 되어 쓰러져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으니 말이다. 나는 그러 라고 말하고는 샤워실로 들어가 옷을 벗고 샤워기의 꼭지를 돌렸다. 거울에는 피에 젖은 얼굴이 마치 다른 사람인 것처럼 나를 똑바로 바라 보고 있었다. 나는 샤워기에서 흘러나오는 물로 대충 얼굴을 한 번 씻었 다. 세면기로 내 얼굴의 피가 천천히 녹아서 흘러 내려갔다. 샤워기 물이 따뜻해지자 나는 몸을 물줄기에 맡기었다. 따뜻한 물이 몸 에 닿자 지나간 일들이 모두 꿈결처럼 여겨졌다. 희뿌연 증기가 계속해서 올라오고 있었다. 나는 옷을 다시 입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내 옷은 속옷까지 완전히 피 로 젖어 있었다. 나는 환자용 가운을 하나 집어든 후 대충 걸치고는 샤워 실을 나왔다. "비류 씨. 괜찮습니까?" "덕분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으셨지요?" "뭘 말입니까, 비류 씨." "리퍼 말이에요." 내 말에 오토는 잠시 웃음을 짓더니 이렇게 말해주었다. "녀석이 자신만 언덕의 저편에 있다고 확신하게 만든 거지요. 솔직히 속아 줄 확률은 반반이었습니다." 오토가 말했다. 하긴, 만약 리퍼가 그런 떠버리가 아니라 과묵한 청부 업자였다면 오토의 총이 빈총인 걸 안 순간 방아쇠를 당겼으리라 싶었다. "이제 어쩌지요?" "전 후버카에 가서 좀 자겠습니다. 해야 할 일도 좀 있고요. 비류 씨도 좀 쉬세요. 쉬는 게 쉽지는 않겠습니다만." 오토는 이렇게 말하고는 밖으로 걸어나갔다. 조금 전 살인을 한 사람의 걸음걸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힘 없는 걸음걸이였다. 나는 리파이 가 누워있던 곳에서 챙겨온 랩탑을 꺼내 벽에 있는 전원에 연결하였다. 화면에는 아무 것도 뜨지 않고 있었다. 이제 이곳에 세헤라자드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기다려보기로 했다. 이제는 세헤라자드가 나를 꼭 찾으리 라는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얼마나 걸리게 될지. 나는 거의 막막한 심정 이 되어있었다. 머리 속에는 피와 시체의 영상이 끝도 없이 떠오르고 있 었고, 실제로는 보지도 못했던 살 조각들과 창자가 스물스물 내 머리 속 을 기어다니고 있었다. 나는 생각을 쫓기 위해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 보 았다. 하지만 머리에서 달아난 것은 생각이 아니라 물기 뿐이었다.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세헤라자드가 찾아왔다. 나는 이제 세헤라자드 가 어떻게 나를 찾아내는지 묻지 않기로 했다. 시체와 피의 세계를 직접 맛본 지금, 나는 다른 차원이라는 말이 뭘 의미하는지 분명히 알고 있었 기 때문이었다. "역시 여기가 편해요. 어떻게든 이리로 돌아올 수 있을 줄 알았지요, 전." 세헤라자드가 깜찍하게 웃으면서 나에게 말했다. 하지만 나는 별 반응 을 보일 수가 없었다. 그러기에 나는 너무 지쳐 있었던 것이다. "놀라지 않으시네요?" "너무 놀라서 그렇다고 생각해 둬." 나는 그냥 이렇게 말하고는 말았다. 내가 본 것들을 전부 이야기해 줄 수 있을 만큼 나에게는 여유가 없었다. 뭔가를 털어놓고 싶은 생각이 조 금도 들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무슨 일 있으세요?" "전혀. 그냥 좀 피곤할 뿐이야." 나는 이렇게 말하고는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실버우드는 벌써 잠이 들 었는지 배를 들썩이고 있었고, 아톰과 리파이는 여전히 의식불명이었다. 한동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지금쯤 수르카는 빙하지대에서 고생하고 있겠지..." 나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세헤라자드는 내 얼굴을 유심히 지켜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무슨 일이 있으시군요. 틀림없이."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아셨어요? 이제 다 끝났다는 걸?" "뭐가 끝나?" 나는 이야기가 끝났다는 말인줄 알고 깜짝 놀라면서 물었다. "MS사에서 이 랩탑을 손에 넣었으니까요." "내가 이렇게 가지고 나왔잖아." "이제 이 랩탑은 의미가 없어요. MS사는 이제 영혼의 에뮬레이터를 손 에 넣었다구요. 간단하게 복사해 갔거든요." 세헤라자드의 목소리는 힘이 없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나는 MS사가 영혼의 에뮬레이터를 손에 넣으면 어떤 일이 생기게 될지 궁금했다. "어떻게 되기는요. 자폰의 신무기를 손에 넣은 라이짐과 비슷하게 되는 거죠." 세헤라자드의 의도적인 농담에 나는 웃음을 지어 보여주었다. 세헤라자 드도 내 미소가 반가운지 마주 웃어주었다. "자폰에서 돌아온 라이짐 일행은 신무기를 시험해 볼 수 있는 좋은 기 회를 손에 넣게 됩니다. 그것을 계기로 아케르는 스파일에서 자신의 야망 을 착착 실현시켜 나가게 되구요." 세헤라자드의 이야기는 이렇게 다시 계속됐다. -------------------------------------------------------------------- 잠시 쉬겠습니다. ^^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9740/19898 ━━━━━━━━━━━━━━━━━━━━━━━━━━━━━━━━━━━━━━━━ 제 목:[탐그루] 슬픔이라는 이름의 빛 257 관련자료:없음 15/15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4-27 21:02 조회:1173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 슬픔이라는 이름의 빛 아케르 군단의 사령부는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었다. 전장이 한 눈에 들어오는 곳이다. 게다가 중무장한 병력으로 잘 보호되어 있었다. 그것은 필수적이었다. 더구나 신무기의 실험장이나 다름없는 이곳 크리스트 대 황야에서의 전투라면 말이다. 언덕 위에 있는 사령부에는 아케르와 순무, 그리고 라이짐이 자리하고 있었다. 오랜 시간 전투를 관찰할 수 있도록 편안한 의자와 혹시 비가 올 경우를 대비한 천막, 그리고 표정 없는 억세 보이는 아케르 군단의 병사 들이 이들과 함께 하고 있었다. 하늘이 몹시도 청명한 날이었다. 햇살이 너무나도 투명해서 손을 뻗으면 햇살에 손마디가 녹아 사라져버릴 것 같 은 날이었다. 도무지 전투와는 어울리지 않는 날씨였다. "드디어 자네의 노력이 결실을 보는 순간이로군." 아케르가 순무에게 말했다. 순무는 감정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라이짐은 알고 있었다. 순무가 무엇을 아쉬워하고 있는 가를. 자폰에서 순무는 자신이 늘 꿈꾸어 온 연금학의 정수를 눈앞에 두고도 단지 발전된 형태의 검은 연금술사의 돌만을 챙길 수 있었던 것이다. 라이짐은 그런 순무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고생 많았네." 아케르 역시 그런 순무의 심정을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다. 아케르 의 목소리에는 정감이 어려 있었다. "제가 한 일은 그저 불벼락탄을 발사할 수 있는 장치를 고안해 낸 것뿐 입니다." 순무가 대답했다. 순무의 목소리에는 자괴감이 어려있었다. 마치 자신 을 향해 최후의 칼날을 날리지 못하고 붙잡힌 검사와도 같은 음성이었다. 아케르 군단의 신다루 백부는 바바 족과 대치하고 있었다. 멀리서 보기 에 신다루의 백부는 마치 거대한 상어 때 앞에 놓인 고등어 한 마리처럼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바바 족을 도발하기 위한 치밀한 작 전의 일부였을 뿐이었다. 신다루 백부장은 아케르 용병단 초기부터 함께 했던 노련한 지휘관이었 다. 젊어서는 화공의 달인으로 널리 알려진 지휘관이었지만, 이제는 나이 가 들어 이렇게 새로운 신무기를 시험하는 순간에 단지 미끼로밖에 쓰이 지 못하는 신세가 된 것이었다. 물론 이번 일이 끝나면 신다루의 백부도 신무기로 무장하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이번 전투에 나선 신다루 십부장 의 심기는 불편하기만 했다. "바바 족이 진형을 갖추고 있습니다." 바바 족은 수를 앞세워 서서히 넓게 진을 펴기 시작했다. 마치 입을 벌 리고서 신다루의 백부를 집어삼키려는 듯한 형상이었다. 신다루의 백부는 천천히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너무 늦지는 않겠군." 아케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굳이 아케르가 그렇게 말하지 않더라 도 신다루 백부장은 작전에 의한 퇴각 정도는 쉽게 할 수 있는 지휘관이 었다. 서서히 물러나는가 싶던 신다루의 백부는 어느 순간 급격히 속도를 내며 후퇴했다. 그를 뒤따르던 바바 족의 진형이 길게 늘어졌다. 그리고 그 순간이 바로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길게 늘어진 바바족 진형의 허리를 향하여 멀리서 한 무리의 늑대가 돌진해 들어갔다. 대황야는 순식간에 늑 대들이 달려가며 일으키는 흙먼지와 울부짖는 소리로 가득찼다. 비록 먼 거리였지만 늑대들의 하얀 이빨이 번득이는 광경이 눈에 선하게 보이는 듯 했다. 라이짐은 좀비가 부리는 늑대와 맞서 싸워본 적이 있었다. 신참 시절, 밍밍 십부장 밑에 있었을 때의 일이었다. 사방에서 달려들던 늑대와 타코 와, 또 새들... 그 전투에서 넷이 죽었다. 그리고 라이짐은 살아남았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있었던 하잔 시에서의 특수 임무 때도 라이짐은 살아 남았다. 밍밍 십부장 마저 죽어버렸던 그 전투에서 악귀처럼 달려드는 반 란군의 무리 사이에서도. 라이짐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투명한 햇살 때문에 눈을 가늘게 뜨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날씨에 늑대 때에게 쫓기는 바바 족을 바라보고 있 자니, 마치 환영을 바라보고 있는 듯, 라이짐은 현실감을 느끼기가 어려 웠다. "타호루입니다." 라이짐이 아케르에게 말했다. 아케르도 물론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타 호루는 유훈과 재훈을 지휘해 바바 족을 한 자리로 모는 작전을 진두지휘 하고 있었던 것이다. "유훈의 부대인가?" 아케르가 물었다. 라이짐은 언덕 아래 대기하고 있던 에이스를 손짓으 로 불렀다. 에이스는 민첩한 동작으로 언덕을 타고 올라왔다. 에이스는 천으로 눈만 겨우 드러나도록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맨 얼굴의 에이스는 다른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주기 때문이었다. "유훈의 부대인가?" "맞습니다, 아케르 장군님." 라이짐은 장군이라는 칭호에 힘을 주어 대답했다. "직접소통이 편하긴 하군. 이렇게 쉽게 상황 파악을 할 수 있으니 말일 세. 라이짐 정보부장." 이렇게 말하는 아케르는 기분이 몹시 좋아 보였다. 신무기가 제대로 작 동하지 않을 것에 대한 걱정은 없었다. 아케르는 이미 순무와 함께 여러 차례 불벼락탄의 실험을 마친 상태였던 것이다. 오히려 순무보다도 아케 르가 더욱 자신감에 넘치고 있었다. 라이짐은 굳이 직접소통으로 지시를 하달하는 임무 때문에 이곳으로 오 게 된 것만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은 그 의문은 주둔지를 떠나던 날부터 계속된 것이었다. 왜 굳이 아케르 장군은 나를 이곳까지 동행하도록 명령한 것일까. 라이짐은 아케르의 의도를 짐작 할 수가 없었 다. 허리가 끊긴 바바 족의 진형은 두 개로 나뉘었다. 신다루를 쫓던 쪽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추적을 서둘렀지만 뒤쪽 진형은 늑대 무리의 기세에 눌려 허겁지겁 물러서고 있었다. 누가 지휘관이라고 해도 다른 선택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만약 추적의 기세를 늦춘다면 순식간에 승기가 흐려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둘로 부대가 나뉜 이상 목표를 잃은 허리 뒤쪽에 해당하는 바바 족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바바 족의 짐승을 부린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지만, 이렇게 역으로 짐승 에게 공격당한 일은 처음이었다. "생각보다 더 당황하는군요." "라이짐 정보부장. 검사는 뛰어난 검사를 만났을 때 더욱 당황하고, 지 략가는 뛰어난 지략을 만났을 때 더욱 당황하는 법이라네." "귀족들은 왕족을 만나면 당황하겠군요." "그렇지." 아케르는 이렇게 말하고는 미소를 지었다. 라이짐이 이렇게 농담을 건 넬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상황이 너무나도 순조롭게 흘러간 탓이었다. 사실 언덕 위에서 긴장하고 있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만 순무만이 조금 불쾌한 자괴감에 사로잡혀 있을 뿐이었다. 바바 족을 몰던 늑대가 멈추어 섰다. 예정된 장소에 매복하고 있는 발 렌시아 백부의 사정권 안에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순무는 주먹을 꼭 쥐었 다. 드디어 실전에 불벼락탄이 처음으로 쓰이는 순간이 온 것이다. 아무 리 자괴감에 휩싸여 있다고 하더라도 이런 순간 흥분을 가라앉힐 수는 없 는 것이다. 황야의 녹지에 나뭇잎을 뒤집어쓴 채 위장하고 있던 발렌시아 백부의 병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발렌시아 백부는 모두 불벼락탄을 발사할 수 있는 석궁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아케르의 눈동자가 커지는가 싶더니 빛 을 발했다. 라이짐은 그 빛이 아케르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이 아니 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데에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불벼락탄의 빛은 소 리보다 훨씬 먼저 언덕 위에 닿았다. 굉음이 들려오자 라이짐은 바바 족 이 있던 자리로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여러개의 불기둥이 하늘 을 찌를 듯 솟고 있었다. 곧 이어 시커먼 연기가 청명한 하늘로 자욱히 가리며 피어올랐다. 하늘로 오르고 있는 검은 연기는 너무나도 맑은 하늘 과 어울려 묘한 비현실감을 자아냈다. 그 긴 준비과정과 긴장에 비해, 전투 자체는 너무나도 싱겁게 끝났다. 불기둥에 휩쓸린 바바 족은 마치 바람에 날리는 개미 Ep처럼 사방으로 흩 어져 버렸던 것이다. 준비된 제 이, 제 삼의 공격은 필요도 없었다. 순무 는 그 순간 허탈감에 빠져들었는지 조금은 슬퍼 보이는 표정으로 바뀌었 다. "지금 공격한 것이 첫줄이었는가, 순무?" "예. 첫줄이 공격하고 나면 바로 두 번째 줄이 공격하는 식으로 장전할 시간을 법니다." "총 오열인가?" "예. 연습결과 다섯 줄 이상은 낭비였습니다." "그렇군. 다섯 명씩 다섯 줄이니, 발렌시아 백부는 총 네 개의 십부가 되겠군." "예." 순무의 목소리는 힘이 실려 있지 않았다. 아마도 아케르가 순무에게 답 변하기 쉬운 질문을 던졌던 것은 순전히 순무의 기운을 북돋우기 위한 것 이었다. 하지만 순무는 그런 아케르의 의도를 아는지 모르는지 감정 없는 답변만을 계속하고 있었다. "바바 족도 진형을 바꾸는 군." 신다루의 백부를 뒤쫓던 바바 족의 무리는 천천히 멈추어 선 다음 방진 을 갖추었다. 예상밖의 공격이 이어지자 일단 진을 정비한 것이다. 하지 만 그것이야말로 발렌시아 백부가 노리고 있던 것이었다. 첫 공격의 성공 으로 자신감을 얻은 발렌시아 백부는 모두 위장을 털고 일어나 대형을 갖 추면서 천천히 바바 족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먼 거리에서도 바바족이 당황해하며 진을 흐트러뜨리는 기색이 역력히 보였다. 예상대로라면 바바 족은 동물을 이용한 공격을 했어야 할 것이다. 악명 높은 오르크 무리라 던가, 아니면 들개 몇 마리라도 동원한 공격을 할 것이라 예상했지만 바 바 족은 그대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아주 어리석은 지휘관은 아니로군." 아케르가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케르의 목소 리에는 뭔가 아쉽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바바 족의 진형은 이미 발렌시아 백부의 석궁 사정권 안에 들어와 있었다. 다섯 줄의 병력이 교 대로 마치 활쏘기 연습이라도 하는 것처럼 불벼락탄을 쏘아 날렸다. 불기 둥과 땅을 울리는 굉음이 순식간에 황야를 지옥도로 바꾸어 놓았다. 라이 짐은 멀리 바라보이는 광경 속에서 문득 자폰 국의 최후를 떠올렸다. 불 과 신음소리, 죽어 가던 사람들. 자신을 자폰 국의 왕이라고 밝혔던 사내 와 자신을 분노에 찬 눈으로 바라보던 꼬마. 라이짐은 그런 기억 속에서 멍하니 불길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9741/19898 ━━━━━━━━━━━━━━━━━━━━━━━━━━━━━━━━━━━━━━━━ 제 목:[탐그루] 슬픔이라는 이름의 빛 258 관련자료:없음 25/25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4-27 21:02 조회:955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악취는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고약했다. 시체가 타는 냄새를 맡아 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라이짐은 헛구역질이 나올 것 같아서 참느라 꽤나 애를 써야만 했다. 그것은 아마도 냄새 때문이 아니라 참혹한 모습 의 시체들 때문일 것이었다. 제대로 사지가 붙어있는 시체는 한 구도 없 었고, 하나같이 여기저기가 떨어져 나가서 원래 모양을 짐작하기도 어려 울 지경이었다. 게다가 거의 모든 시체들의 배가 터져나가 있었는데, 때 문에 바닥에는 마치 붉은 색 담요를 깔아 놓은 것 같이 창자가 널려 있었 다. 사람의 창자를 꺼내는 걸 좋아한다는 악명 높은 바바 족이었지만, 이 렇게 쓰러져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도무지 그런 악명이 어울릴 것 같 지 않았다. 쓰러져 있는 시체들 중에 얼굴을 알아볼 수 있는 것들은 하나 같이 손가락으로도 눌러 죽일 수 있는 나약한 벌레처럼 미약하게 꿈틀거 리고 있었다. "사람에게 써 본 건 처음이지?" "예. 그렇습니다. 지금까지는 주로 동물을 대상으로 실험해 왔습니다." 아케르의 질문에 발렌시아 백부장이 대답했다. "하나도 살아 나가지 못했지?" "예. 그렇습니다." "좋아." 아케르는 이렇게 말하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직도 검은 연기는 군 데군데 피어오르고 있었고, 바닥에는 삽으로 떠낸 듯 움푹 패인 곳이 여 기 저기 보였다. "한 점으로 모여있지 않군. 짧은 시간이었는데 잘 훈련해 주었네. 순 무. 발렌시아 백부 전원에게 삼일 간 휴가를 내 주게." 아케르가 말했지만 순무는 즉각 반응하지 못했다. 넋을 잃은 사람처럼 순무는 멍하니 있다가 라이짐이 눈치를 준 다음에야 아케르의 얼굴을 바 라보았다. "이 친구들에게 삼일 간 휴가를 내 주게." 기분 좋게 휴가를 내 주려고 하는 마당에 순무가 찬물이라도 끼얹었다 는 듯이, 아케르는 순무를 노려보면서 말했다. 라이짐은 아케르의 눈길이 자신에게 향하기라도 했던 것처럼 안절부절 하지 못했다. "그리고, 불벼락탄이라고 했던가?" "예. 사람들이 그리폰이 공격할 때 흔히 쓰곤 했던 말이어서 그렇게 이 름을 지었습니다. 그리폰이 공중에서 떨어뜨리는 검은 돌과 위력이 비슷 하니까요." "별로 좋지 않아. 그런 식으로 이름을 붙였다가는 인식도 나빠질 지 모 르고. 좋은 이름이 없겠나?" 아케르가 순무에게 물었다. 평소의 순무 같으면 금새 뭐라고 대답했겠 지만 지금의 순무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라 이짐은 그런 순무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 애가 탈 지경이었다. "우아하고 품위 있는 이름이 어떨까요? 예를 들어서 화이어 스톰이라던 가..." "고대어도 좋지. 하지만 나는 이 무기를 당분간 극비에 붙일 생각이네. 우리끼리만 알 수 있는 암호를 쓰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 아케르의 말에 아무도 말을 잇지 못했다. 저런 식으로 말한 후에는 반 드시 아케르 단장의 결정이 내려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연금술사의 검은 돌에서 출발한 무기이고, 또한 우리가 새로운 세상을 열어 가는 데 큰 도움이 될 무기일세." "뜨거운 열쇠로군요." 라이짐이 김이 모락모락 오르고 있는 시체 쪼가리를 바라보면서 혼잣말 처럼 중얼거렸다. "그래. 새로운 세계를 열어갈 뜨거운 열쇠지. 순무. 당분간 이 신병기 는 뜨거운 열쇠라고 부르기로 하지. 불벼락탄이라는 말은 이제 그만 쓰도 록 하게." 아케르의 이 말로 신병기의 실험은 끝이 났다. 라이짐은 고약한 냄새를 씻어버리기 위해 어서 빨리 숙소로 돌아가 찬물을 뒤집어쓰고 싶은 기분 이었다. 물론 돌아갈 길은 멀기만 했다. 당분간은 야전에 마련된 천막으 로 만족할 수 밖에 없을 것이었다. "그런데 타호루와 유훈, 재훈은 어디에 있는가?" "바로 귀대했습니다." 발렌시아가 말했다. 자폰국에서 신병기를 얻어온 이후, 달라진 것은 순 무만이 아니었다. 타호루 또한 동물을 부리는 일에 관심을 쏟으면서 천막 을 비우는 날이 잦아졌다. 타호루는 단지 신병기에 대한 거부감을 나름대 로 그렇게 표현하고 있을지 몰라도, 라이짐이 보기에 그것은 마법사의 시 대가 끝나감을 예고하는 것만 같았다. 하늘에는 조금씩 먹구름이 찾아들 고 있었다. 긴 행군 끝에 프라브리티의 개인막사로 돌아왔을 때, 라이짐을 반갑게 맞아 준 것은 하진이었다. 하진은 집무실에 마련된 라이짐의 책상 위에 다리를 올려놓고 있었다. 만약 누군가가 본다면 무례도 이만 저만이 아니 라고 생각했겠지만 라이짐은 그런 일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라이짐! 오늘쯤 돌아올 것 같다고 생각은 했는데. 이렇게 살아 오게 되니까 반가운 걸?" "그래." 라이짐은 자신을 반갑게 맞아주는 하진에게 뭔가 고마움의 표시를 더 해주고 싶었지만 도무지 그럴 기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행군을 마치고 정 리 사열을 막 끝낸 뒤라 도무지 기운이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다. "이게 그 동안 쌓인 일들이야. 휴. 네 결제가 없으니 이거 불편한 게 이만 저만이 아니더라고." 하진은 라이짐의 생각은 조금도 하고 있지 않았던 듯 했다. 하진이 내 민 것은 팔뚝하나 길이는 충분히 될 만한 서류뭉치였다. "슬슬 검토해 봐. 적어도 며칠은 걸릴 테니까 말이야." 능글맞게 웃는 하진의 미소는 라이짐의 남아있는 기력마저 앗아가 버렸 다. 라이짐은 털퍼덕 침대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냥 전결하지 그랬어. 내가 그랬잖아. 중요한 거 아니면 전결로 처리 하라고." "물론 그랬지. 하지만 아무리 직접소통으로 너한테 의사를 물었다고 해 도 내가 판단할 수 있는 부분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라고. 너도 그랬잖아? 발렌시아의 뒷얘기 같은 걸 내가 전결로 처리해서 국방장관에게 올릴 수 있겠어? 아케르 장군 결재란에 정보부 요원 하진, 이렇게 서명해서 말이 야. 그래도 내가 놀고만 있었던 건 아니야. 너 없는 동안 내가 처리한 거 보여줄까?" 하진은 라이짐에게 내밀었던 서류뭉치의 두 배는 됨직한 서류를 보여주 면서 말했다. 라이짐은 그 종이더미를 바라보는 순간 완전히 의욕을 상실 해버렸다. "알았어, 알았어." 라이짐은 이렇게 말하면서 침대에 뒤로 누워버렸다. 몸을 씻고 싶었지 만, 온몸의 힘이 쏙 빠져나간 듯 움직일 기력이 없었다. "야전에서 고생 많았다. 냄새가 풀풀 나는 걸 보니 고생깨나 했겠다 싶 네. 하하하. 뭐 나야 여기 앉아서 편하게 자이스가 물어다 주는 정보나 정리하고 있었는데 말이야." 하진이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집무실에 있어야 할 자이스 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라이짐은 에이스를 대동하고 아케르의 신무기 실험 전투에 나서면서 후임으로 자이스를 하진에게 맡겼던 것이다. "아냐. 고생은 네가 많았지. 수고했어. 그런데 자이스는?" "응. 내가 좀 개인적인 일로 심부름 좀 보냈어. 흠흠. 네가 그랬잖아. 필요한 일에 마음껏 사용하라고 말이야." 하진이 머리를 긁적이면서 말했다. 라이짐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라고 판단된 까닭이었다. "묻지 않을 게, 그 개인적인 일 말이야." 라이짐은 틀림없이 여자문제일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말했다. 하진이 술 집에 출입하는 일이나 여자를 만나는 일을 특별히 좋아하는 것만큼은 분 명한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라이짐은 그런 하진의 태도가 다리가 하나 없다는 열등감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특별히 그런 하진의 태도를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어찌되었건 라이짐은 하진 을 탐그루에 버리고 돌아왔었으니까. "고마워, 고마워. 역시 동기가 최고라니까. 너 말고는 이 인간 하진을 이해해 주는 사람이라곤 하나도 없어. 역시 여자한테 인기가 많은 녀석은 다르다니까." "여자한테 인기라니, 무슨 소리야?" "킥. 말 돌리긴. 그 왜 있잖아, 조그많고 귀엽게 생긴.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아, 그래. 마리. 마리 말이야." 하진의 말에 라이짐은 침대에서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마리? 마리가 왔었어?" "응. 세 번인가, 네 번인가 찾아왔었어. 난 이렇게 말했지. '부장님께 서 돌아오시면 뭐라고 전해드릴까요?' 그러니까 그 여자가 그러더군. '괜 찮아요, 다음에 또 오겠습니다.' 이렇게 말이야." 하진은 마리의 음성을 아주 느끼하게 재현하고는 스스로 만족했다는 듯 이 키득거렸다. 라이짐은 남아있는 기력을 모두 모은다는 기분으로 베개 를 집어 하진에게 집어던졌다. 하진은 두 손으로 베개를 가볍게 받았다. "지체 높으신 부장님께서 어인 행동이신가? 이거, 자꾸 이러시면 곤란 한데 말이야." 라이짐은 하진이 뭐라고 말하건 그냥 내버려두기로 마음먹고 눈을 감았 다. 일단 기력을 찾으면 마리를 찾아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데 한가지, 주둔지를 떠나던 날부터 풀리지 않았던 의문은 계속되고 있었 다. 아케르 장군은 왜 나를 굳이 대동했던 것일까. 아케르의 명령은 대개 가 나중에 생각해 보고서야, 아, 그런 의미가 있었구나 싶은 것이 대부분 이었다. 라이짐은 자신이 뭔가 놓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면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죽음처럼 깊은 잠이었다. "돌아온다고 했잖아요." 라이짐이 웃으면서 기쁜 표정을 하고 있는 마리에게 말했다. 떠날 때는 한 밤중이었지만 지금은 대낮이었다. 라이짐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 부신 햇살이 싱싱한 이파리처럼 푸르게 빛을 내고 있었다.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신 보지 못할 줄 알았어요." 마리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라이짐은 부서질 듯 연약해 보 이는 마리를 바라보았다. 마리를 안을 수만 있다면. 이런 생각이 들자 라 이짐은 스스로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여자는 어 린아이에 불과하다. 라이짐은 스스로에게 이렇게 타일렀다. "왜요? 저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봐서요?" "... 그 사람처럼." 라이짐이 거의 농담조로 흘리다시피 한 말에 마리는 이렇게 대꾸했다. 라이짐은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어도 마리의 말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인지 알 수 있었다. "아직 돌아오지 않은 것뿐이에요." 라이짐의 말은 마리에게 용기가 되어주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마리의 기쁜 표정은 한 순간에 어두워지고 말았다. "꼭 돌아오겠다고 했잖아요." 라이짐은 애써 웃음을 지으면서 마리에게 다시 한 번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마리는 이렇게 대답했다. "남자들은 다 똑같지요. 해야 할 일이 먼저라고 말하면서 떠나고, 그리 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아요." 마리는 담담한 어조로 말했지만 라이짐은 그 말에서 마리가 겪었을 일 들을 짐작할 수 있었다. 라이짐은 다시 한 번 마리를 안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라이짐은 마리와 자신의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이라도 놓 여있는 기분이었다. 도무지 마리에게 다가갈 수가 없었다. "저, 이거, 선물이에요." 라이짐은 품에서 작은 조각을 꺼내면서 말했다. 그리지아 산의 모양을 본뜬 작은 돌 조각이었다. 마리는 조각을 보는 순간 실수했다는 듯이 당 황하면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잠시 다른 생각을 했었나봐요. 죄송합니다." 마리는 조각을 받을 생각은 하지도 않고서 이렇게 말했다. 라이짐은 그 런 마리를 보고 더욱더 당황하여 조각을 떨어뜨릴 뻔 하기까지 했다. "아뇨.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더 죄송스럽지요." "아뇨, 제가..." 마리가 말을 잇지 못하자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라이짐은 이런 침묵을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아니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어야 할 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지아는 잘 있죠?" 한 참이 지난 다음에 라이짐이 내 뱉은 말은 고작 이랬다. 마리는 고개 를 끄덕인 다음 라이짐을 집안으로 안내했다. 무너지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로 낡은 집에는 빨랫줄과 옷가지들이 마치 거미줄처럼 얽혀있었다. 그리지아는 잠들어 있었다. 라이짐은 신기한 듯 그리지아의 얼굴을 바 라보았다. "잘 있었어요. 그리지아도, 또 저도." "아름답게 말이지요?" 라이짐이 웃으면서 말했다. 마리도 라이짐을 따라 웃음을 지었다. "어딜 다녀오셨나요?" 마리가 물었다. 라이짐은 머리를 긁적였다. "먼 곳입니다." 아무리 마리라지만 일과 관계된 말은 하고 싶지 않은 라이짐이었다. "나라 일을 하신다고 들었어요." "굳이 말하자면 그렇지요." "높은 분 같아 보이지는 않는데요. 아, 죄송합니다. 제 말뜻은 그러니 까..." "하하하. 제가 하는 일이 그다지 대수로운 일이 아니라서 그럴 겁니 다." 라이짐은 이렇게 말해놓고는 자신이 꽤 노련하게 대처하고 있다는 생각 에 스스로 만족했다. 라이짐은 그리지아 산의 모양을 본 뜬 조각상을 잠 든 그리지아의 머리맡에 두었다. "그리지아 산의 이름이 붙은 내력은 알아 내셨나요?" "... 알게 되면 꼭 알려 드릴게요." 마리는 조금 멋적다는 듯이 말했다. 다시 한 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라이짐은 뭔가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 이 런 질문을 던졌다. "저, 이제 무슨 일을 하십니까?" 마리가 자신이 하는 일을 물었다는 생각 때문에 떠오른 질문이었다. 사 실 이 질문은 일방적인 질문일 수밖에 없었다. 라이짐은 질문을 던지자마 자 후회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술집에 나가요." "예?" 라이짐은 깜짝 놀라면서 이렇게 되물었다. 마리는 웃음을 지었다. "더 이상 술을 따르지는 않아요. 노래를 불러요." "가수... 셨나요?" "라이짐 님께서 제 빚은 갚아 주셨지만, 라이짐 님에게 빚을 진 셈이 니, 어떻게든 갚아야지요." 마리는 이렇게 말하면서 라이짐을 바라보았다. 뭔가를 원하고 있는 듯 한 얼굴이라고 라이짐은 생각했지만, 그런 생각과 동시에 라이짐은 자신 의 욕망이 그런 생각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할 수밖에 없 었다. 라이짐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머리를 식히기 위해서 늘 해오던 일이었다. "그래도 하필이면..." "그곳 사장님은 좋은 분이에요." "일은 힘들지 않아요?" "밤에 나가서 새벽에 돌아오는 일이 좀 힘들긴 하지요. 하지만 수입도 좋은 편이고 손님들도 대부분은 점잖으신 분들이에요." "그렇군요. 하지만 꼭 그렇게 하셔야만 했습니까? 다른 방법도 있었을 텐데요." "제가 노래를 부르는 게 못마땅하세요?" "아, 아닙니다." "꼭 심문하시는 것 같아요." 마리의 말에 라이짐은 멋쩍은 듯 웃음을 지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직업에는 귀한 것도 없고, 천한 것도 없는 법 입니다. 언제 한 번 저도 가서 마리의 노래를 들어보고 싶네요." 허둥거리면서 말을 덧붙이는 라이짐의 얼굴을 보더니 마리는 웃음을 지 었다. 라이짐 역시 머리를 긁적이며 따라 웃었다. 몹시도 맑은 날의 오후 였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9742/19898 ━━━━━━━━━━━━━━━━━━━━━━━━━━━━━━━━━━━━━━━━ 제 목:[탐그루] 슬픔이라는 이름의 빛 259 관련자료:없음 18/18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4-27 21:03 조회:1017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프라브리티 한 복판에 자리하고 있는 영주의 성벽은 여느 때 보다 훨씬 높아 보였다. 완성되기까지 십 삼 년의 세월과 수천 명의 인력이 동원되 었다는 성벽이니 만큼, 영주의 성벽은 바라보는 사람 누구에게나 높고 강 하다는 느낌을 주고 있었다. 아마도 저 성벽에 적군이 공격을 가한 일은 스파일 주가 성립한 이래로 한 번도 없었을 것이었다. 그만큼 성벽은 높 고도 견고해 보였지만, 어찌보면 라이짐에게 그 성벽은 하나의 극복해야 할 대상이었다. 과연 내가 할 수 있을 것인가. 라이짐은 스스로에게 물어 보았다. 하지만 늘 대답은 같았다. 멈추지 않는 것. 그것 밖에는 그 어떠 한 대안도, 방법도 라이짐에게는 없었다. "그건 좀 곤란한 걸." 사비치가 라이짐에게 말했다. 라이짐이 영주인 페르도의 명을 받아 성 으로 소환된 이유는 사실 아케르 장군의 일을 대신하기 위함이었다. 그것 은 신무기에 대한 보고의 형태를 띄고 있었는데, 아케르는 일단 '뜨거운 열쇠'에 대한 언급은 하지 말라는 지시를 라이짐에게 내려놓고 있었다. "아직까지 제가 알아낸 것은 그게 전부입니다." 라이짐이 사비치에게 말했다. 사비치는 깍지를 낀 손가락을 튕기면서 라이짐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비치의 눈동자는 라이짐을 빨아들일 듯 강렬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라이짐은 그런 사비치의 눈동자를 피하 지 않았다. '뜨거운 열쇠'에 관한 정보를 사비치가 읽게 된다면 문제가 생길 수 있겠지만, 지금 사비치가 묻고 있는 것은 사비치가 개인적으로 의뢰했던, 성황청에 관한 정보였던 것이다. 마법사가 생각을 읽을 수 있 는 능력이 있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지만, 널리 알려진 만큼 그 대 응책도 꽤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중 하나가 알리고 싶지 않은 일은 생각 하지 않으면서 다른 일에 집중하는 것이었다. 비교적 간단한 방법이긴 했 지만 그만큼 강력한 방법이기도 했다. 사비치는 뭔가 미심쩍다는 듯한 표 정을 하고서 한 참을 바라보다가 결국 눈을 거두었다. "그래. 마소드의 검이 사라졌다는 것과, 마소드의 검이 사라졌다는 사 실이 내가 원하는 정보와 뭔가 연관이 있는 것 같다... 이 정도로 만족하 라는 건가, 지금?" 사비치의 목소리에서는 얼음 조각이 뚝뚝 끊어지는 듯한 냉기가 흘렀 다. 라이짐은 그런 사비치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뭘 원하는 건가?" 한참 사이를 두었다가 사비치가 라이짐에게 물었다. 라이짐은 지금 사 비치의 이 물음에 바로 라이짐에게 미심쩍은 부분을 일소하고자 하는 욕 망이 서려있음을 알 수 있었다. 라이짐은 돈을 생각했다. 그리고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들을 생각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많을 수록 더 필요해지고, 필요할 수록 더 많이 얻게 되는 게 돈이라고. 라이짐은 높다 란 성채에 잠들어 있는 자신의 모습과, 또한 자신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 는 열 다섯 명의 첩을 상상했다. "그렇군. 자네는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순수한 사람인 것 같네." 라이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하진이나 지을 법 한 느끼한 미소를 지었다. "필요한 만큼 가져다 쓰게." 사비치는 이렇게 말하면서 자신의 서명이 돼 있는 종이 조각을 하나 내 밀었다. 라이짐은 그것을 받아 품에 넣었다. 미소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 하면서. "곧 좋은 소식이 있을 것입니다." 라이짐의 이 말은 진심이었다. 어찌되었건 에이스 자매가 악마의 입 부 근에서 관심을 떼고 있지 않은 이상, 틀림없이 언젠가는 사비치가 원하는 정보가 손에 들어올 것이기 때문이었다. 사비치가 자리를 뜨자, 라이짐은 안도의 한숨보다 구역질이 먼저 올라왔다. 자신이 상상했던 것들이 귀족 들이나 욕망하는 지저분한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 다. 페르도 영주와의 접견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페르도는 임무가 완 수되었는가를 물었고, 또한 얼마나 뒷마무리가 잘 되었는가를 물었을 뿐 이었다. 라이짐이 준비한 답변에서 그리 벗어나는 질문은 없었다. "아케르 장군은 지금도 국경에 있는가?" "예. 일단 당분간은 바바 족의 움직을 예의 주시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이런 식으로 신뢰를 쌓지 않으면 안될 상황이니까 말일세." 페르도는 어쩐지 지쳐 보였다. 쓰러뜨려야 할 대상이라고 라이짐 스스 로가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라이짐은 그런 페르도의 모습이 안 쓰럽다기 보다는 좋은 징조라는 생각이 앞서 들었다. "보고는 다 끝난 것 같고, 하나만 묻겠네. 자네는 재주가 많아. 내가 그런 얘기했던가?" 라이짐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라이짐은 페르도가 처음 만난 자리에서 재주 많은 젊은이들이 새로운 세상을 이끌기를 바란다는 요지의 말을 했 었던 걸 기억했다. "예. 기억하고 있습니다." "재주 있는 사람이 빨리 사라지는 걸 나는 이 자리에 앉아서 많이 보아 왔다네. 대부분 재주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주 때문에 망 하더군. 남용이라고 할까, 아니야. 그것보다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주 밖에 몰라서 라고 하는 편이 낫겠군." 라이짐을 바라보고 있는 페르도의 얼굴은 뭔가 그리워하고 있는 듯 했 다. 젊은 날의 자신의 모습이 보여서일까. 혹은 단순히 어린 나이에 빠른 출세가도를 달리고 있는 내 모습이 부러워서일까. 라이짐은 생각해 보았 지만 지금으로서는 뾰족한 결론을 얻을 수 없었다. 정보가 너무나도 부족 했던 것이다. "자네가 가지고 있는 것을 잘 활용하는 것은 훌륭한 재주이지. 암. 훌 륭한 재주이고 말고.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네. 자네, 전투를 겪 어본 적 있는가?" 라이짐은 그렇다고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실 지금까지 살 아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로 격렬한 전투를 라이짐은 겪었던 것이다. "이곳에선 끊임없이 전투가 벌어지고 있네. 누군가 자네를 노리고 있을 지 모르지. 아니, 어쩌면 자네가 누군가를 노리고 있을지도 모르겠구만. 이 페르도도 누군가 노리고 있을지 모르고 말일세." 페르도는 이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보고를 마쳐야할 시간이 된 것이었지만 라이짐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혹시 자신의 마 음을 페르도가 알아차리지 않았을까 걱정이 된 것이었다. "자네의 재주는 자네가 지켜야 하네." 페르도의 마지막 말은 페르도의 말이 순전히 애정에서 나온 것임을 확 인시켜주는 것이었지만 라이짐은 기분이 영 개운하지를 않았다. 뭔가 들 켜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고, 자신이 쓰러뜨려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상대가 자신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껄끄럽기도 했던 것 이다. 성을 나서려는 라이짐에게 페르도의 개인 비서가 페르도 부인의 전갈을 전했다. 잠시 자신의 방에 들르라는 것이었다. 라이짐은 가고 싶지 않았 지만 거절할 수는 없었다. 어찌되었건 페르도 부인은 스파일의 고위층 중 에서 아케르에게 힘을 보태어주고 있는 가장 중요한 인물임에 틀림없었기 때문이었다. "어서와요, 라이짐 정보 부장." 페르도 부인이 라이짐에게 손짓하면서 말했다. 라이짐에겐 그런 페르도 부인의 모습이 징그럽고 커다란 뱀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페르도 부인." 라이짐은 될 수 있는 한 빈틈을 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정중하게 말했다. "여기까지 왔으면 저를 한 번 보고 갔어야 하지 않나요? 꼭 내가 이렇 게 불러야만 하나?" 라이짐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기에 너무도 곤란한 질문이었다. "농담이에요. 중책을 맡고 계신 분을 사적으로 오라 가라 할만큼 분별 없는 여자는 아니랍니다, 라이짐 정보부장님." 라이짐은 어떻게든 빈틈을 보이려고 하지 않았지만 질문 한 번에 그 의 지는 무너진 모양이었다. 페르도 부인은 이렇게 말하고는 당황하고 있는 라이짐을 바라보며 귀엽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이번에 아케르 장군은 큰 일을 해냈어요. 바바 족의 무리 중 위협이 될만한 군소 부족을 없애달라는 부탁, 사실 완벽하게 처리해 줄 사람이 없었어요. 나이 든 장군들 중에는 말이죠. 다들 오랫동안 실전 경험이 없 는 장군들이라 이럴 때는 쓸모가 없거든." 페르도 부인은 국경의 장군들을 비웃고 있었다. 라이짐은 그런 페르도 부인의 모습에서 두려움마저 느꼈다. "하지만 친서를 전달한 바바 족 부족장에게는 큰 힘이 되었을 겁니다. 만약 국경의 장군들이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한다면 그 결과는 아무도 책 임 질 수 없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지요. 라이짐 정보부장은 역시 정보부장답군요. 칸 족에 대해서 알고 있었나요?" "보고를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라이짐은 짤막하게 대답했다. 실은 바바 족의 영역으로 뮤 때를 끌고 간다는 말이 나왔을 때부터 라이짐은 정보수집에 촉각을 곤두세워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뮤 Ep를 이끌고 바바 족의 영역으로 향한 문삼이나 사 비치가 진짜 뮤 떼를 평화적인 목적으로 끌고 간 것이 아니라, 단지 스파 일 영주의 친서를 전달하기 위해서 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먼저 친해지자고 말을 건네는 건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요. 특히 여자 의 입장에서는." "스파일의 입장이 여자의 입장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금 나는 정치 얘길 한 게 아닌데, 라이짐 정보부장님."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면서 페르도 부인이 말했다. 몸에 미끈 한 뱀가죽이 들러붙는 듯 기분 나쁜 미소였다. "개인적인 일로 절 부른 건 아니라고 말씀하셨던 것 같습니다만." 라이짐의 말에 페르도 부인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말했다. "칸 족은 바바 족의 여러 부족중 가장 강력한 부족이지요. 하지만 바바 족 전체를 감당하기에는 힘이 부족해요. 우리는 힘을 제공해 준거지요." "그리고 그 대가는 화친 이상이었으리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지요. 필요할 때는 힘을 빌릴 수도 있고, 또 공격해 달라고 부탁 할 수도 있거든. 성황청도, 타실도 바바 족의 악명은 두려워하고 있으니 까." 페르도 부인이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저희 군단의 힘을 빌리신 게 아닙니까? 국경의 장군들 에게는 자세한 사정을 설명해 줄 수 없으니까 말입니다." "호호호. 라이짐 님도, 참.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너무 차갑게 느껴지네 요. 세상에는 서로 필요하기 때문에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가 얼마든지 있 지요. 하지만 그렇게 간단하게 서로의 관계만 중요시 할 수는 없는 법이 랍니다." "알겠습니다." 라이짐은 이렇게 대꾸하긴 했지만 실제로 라이짐이 알아들은 내용은 페 르도 부인의 말과는 조금 거리가 있었다. 라이짐의 귀에 페르도 부인의 말은 필요 없으면 언제든지 내 던질 수 있는 것이 지금의 아케르 군단과 자신의 관계라는 말처럼 들렸던 것이다. "중요한 건 힘이에요, 라이짐. 힘이 있는 자는 다른 사람의 힘을 빌릴 수도 있고, 또한 이용할 수도 있지요. 어느 정도의 힘만 갖출 수 있다면 설혹 자신보다 강한 상대라 해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답니다. 자나크를 보세요. 힘이 없으니 성황청 아래 무릎을 꿇지 않았습니까? 오르파 가문 을 보세요. 가이르 오르파는 성황청에 너무나도 간단히 굴복했지요. 물론 그렇게 살아남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말씀하시는 의도가 뭔지 저로서는 잘 알 수가 없습니다." 라이짐은 대화가 점점 꼬여든다는 생각에 이렇게 솔직하게 자신의 심정 을 털어놓았다. 그러자 페르도 부인은 긍정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한 자들에게는 적이 있기 마련이지요. 아케르에게도 적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정적을 의미하는 말이 분명했다. 먼 곳에서 일어나는 일은 어떻게든 에 이스 자매의 힘으로 알아 낼 수 있었지만 이렇게 높은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알아내기 어려운 입장인 라이짐으로서는 귀가 솔깃해지는 이야 기였다. "누구... 입니까?" 라이짐은 대답을 유도하는 대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페르도 부인이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유도심문에 넘어갈 상대가 아닐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렇게 먼저 이야기를 꺼낸 것으로 보아서 페르도 부 인에게 무슨 속셈이 있을 게 틀림없었다. "이리 가까이 오면 말씀해 드리지요." 페르도 부인이 갑자기 정색을 하고 말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9778/19898 ━━━━━━━━━━━━━━━━━━━━━━━━━━━━━━━━━━━━━━━━ 제 목:[탐그루] 슬픔이라는 이름의 빛 260 관련자료:없음 23/23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4-28 21:27 조회:951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라이짐은 뭔가 숨기고 있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페르도 부인의 말을 뿌리칠 수는 없었다. 라이짐은 페르도 부인에게 다가 갔다. 번들거리는 뱀가죽이 눈앞에 놓여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머리를 만져보고 싶어." 페르도 부인은 이렇게 말하고는 손을 뻗었다. 라이짐은 페르도 부인이 손을 뻗자 순간적으로 움찔했지만 태연한 척 페르도 부인에게 고개를 숙 였다. 이윽고 페르도 부인의 손길이 천천히 라이짐의 모자를 벗겨내었다. 페르도 부인의 손가락이 라이짐의 흰 머리카락 사이를 헤집고 지나갔다. "아름다워. 늘 생각하는 거지만 정말로 아름다워." 음란한 음성이었다. 페르도 부인은 만지는 것 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는 지 코를 들이밀고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라이짐은 얼굴에 불길이라도 닿 은 듯 화끈 달아올랐다. "피곤하지 않아요? 좀 쉬고 가는 건 어때?" 페르도 부인의 음란한 속삭임에 라이짐은 고개를 돌려 침대를 바라보았 다. 잘 정돈된 침대였지만, 라이짐은 그 침대 위에서 발렌시아 백부장과 뒹굴고 있을 페르도 부인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 라이짐은 몸을 일 으켜 세워 페르도 부인에게 떨어졌다. "누구입니까." 침착한 목소리로 라이짐이 다시 물었다. 페르도 부인은 아무렇지도 않 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서 머물 곳을 잃은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러 더니 갑자기 라이짐의 손을 꽉 쥐었다. 순간,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라이짐 정보부장님은 결코 쉬운 상대가 아니야. 그래서 좋다니까. 쉽 게 손에 넣을 수 있는 것들은 별로 가치가 없어. 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럴 거라고 생각해요. 솔직히 전설을 가까이 한다는 게 어떤 건 지도 궁금하고." "너무 많은 것을 바라면 틀림없이 괴로울 때가 있을 것입니다." 라이짐이 말했다. 그러자 페르도 부인은 갑작스럽게 웃음을 뱉어내었 다. "나에게 충고의 말씀까지. 이거, 황송해서 어쩌나?" 페르도 부인의 목소리는 라이짐에게 비웃음으로 들렸다. 라이짐은 자존 심이 상했지만 그렇다고 당장 손을 뿌리칠 수도 없었다. 자신을 지키자니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없을 것 같았고, 원하는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어 떤 꼴을 당하게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라이짐은 이런 순간이 다가오면 늘 해야 할 일이 어느 쪽인가를 생각해 왔다. 라이짐이 판단하기에 지금은 자신을 지키는 쪽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이었다. 잠시 마음을 가라앉힐 동안 아무 말도 없었던 라이짐은 결국 페르도 부인의 손을 뿌리쳤다. "당신의 정적이기도 하겠지요, 그 사람은. 그리고 그 사람의 이름을 흘 리는 것으로 나를, 또 장군님을 이용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겠지요." 라이짐은 단호하게 말했다. 스파일의 거물을 눈앞에 두고서 이런 말을 하다니. 라이짐은 스스로의 행동이 두렵게까지 여겨졌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거기다가 강하기까지 하군요." 페르도 부인의 목소리에는 한숨 같은 것이 느껴졌다. "리콜 샤일록. 그 늙은 자이벌이에요. 고인이 되신 츄바카 국방장관과 는 각별한 사이였지요. 서로 못잡아 먹어서 안달인 시절도 있었지만 서로 필요한 관계였거든요. 어쩌면 지금이 호기라고 여기고 있을지도 모르지 요. 새로 안토니오 국방장관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 수 있는 기회라고 여 길지도. 아마 지금 리콜 샤일록은 아케르 장군을 국경에 박아두고 못 돌 아오게 할 음모를 꾸미고 있을 거예요. 어쩌면 벌써 국경으로 자객을 보 냈을지도 모르고요. 그게 그 사람 일하는 방식이니까." 라이짐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페르도 부인의 말을 듣는 순 간 이유야 어찌되었건 자신이 택한 방식이 옳았다는 것이 분명해졌기 때 문이었다. "그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라이짐은 이렇게 말하면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러나 라이짐의 마 음속에는 페르도 부인을 기세로 눌렀다는 자신감이 넘쳐나고 있었다. "아. 이거 바쁜 사람을 제가 너무 오랫동안 붙잡고 있었나 보네요. 죄 송해요. 라이짐 정보부장님." 하지만 페르도는 그런 라이짐의 자신감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는 걸 확연히 느낄 수 있을 만한 도도함이 있었다. 라이짐은 아직 페르도 부인 은 상대하기에 벅찬 상대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해야만했다. "자객에는 자객으로 맞서는 것이 가장 좋을 때가 있지요." 돌아서는 라이짐에게 페르도 부인이 속삭이듯 말했다. 천장에 매달려 있는 연금술사의 등이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불빛 은 바람결에 흩어지는 향기처럼 형체를 갖추지 못하고 연기처럼 사라져가 고 있었다. "낡았죠?" 마리가 라이짐에게 물었다. 라이짐은 잠시 마리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지 알아듣지 못했다. "갈아 끼울 때가 됐는데..." "아, 그렇군요." 라이짐은 그제야 연금술사의 등이 수명이 다 되어가고 있다는 걸 깨달 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름답군요." "사라져 가는 것들은 원래 아름다운 법이지요." 마리가 천장을 올려다보면서 말했다. 라이짐은 그런 마리의 얼굴을 바 라보다가 문득 자신이 하고 있는 일과 해 온 일들을 떠올려 보았다. 피와 불, 그리고 광기와 살육. 라이짐의 기억에는 불행과 고통만이 가득했다. "한 때는 제가 뭘 해야 하는 가를 생각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늘 그랬 지요. 거기에는 의심의 여지가 있을 수 없었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말씀이신가요?" 마리가 물었다. 라이짐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냥... 잘 모르겠네요." 방안에는 탁한 공기만이 가득했다. 나무로 만들어진 낡은 벽면에는 낙 서와 흠집이 가득했고, 바닥에는 한 꺼풀 들추기만 하면 보기 흉한 흙더 미가 나타날 것만 같았다. 라이짐은 손가락으로 바닥을 긁었다. 비좁고 깨끗하지 못한 곳이었지만 라이짐은 유독 이곳에만 오면 마음이 편안했 다. 라이짐은 잠들어 있는 그리지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평온하게 잠들 어 있는 아기의 모습은 세상에 불행이라는 것은 없다고 말하고 있는 듯 했다. 갑자기 피로가 엄습해왔다.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피로감이었 다. 라이짐은 고개를 젖히고 벽면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서늘한 기운이 등골을 타고 내려왔다. "피곤하시면 좀 주무세요. 제가 깨워드릴게요." 마리가 웃으면서 말했다. 순간 라이짐은 페르도 부인에게서 느꼈던 것 같은 섬뜩한 기운을 느끼고는 허리를 곧추세웠다. "아, 아닙니다." 라이짐은 이렇게 말하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마리는 의아하다는 표정을 하고서 라이짐을 올려다보았다. "이만 돌아가야지요. 이제 곧 일 나가셔야 할 시간 아닙니까. 저도 해 야 할 일들이 남아 있고, 또... 하여간 늦은 시간인데 실례 많았습니다." 라이짐의 말에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게 하세요. 나랏일을 하신다니 바쁘시겠지요. 그리고 언제든 찾아오세요.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을 게요." 마리가 라이짐을 따라 일어서면서 말했다. 마리의 목소리는 라이짐에게 평안한 마음을 느끼게 해 주었다. 사실 그대로 쓰러져 이곳에서 잠들 수 만 있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건 상관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라이짐 스스 로가 말했듯 해야 할 일들이 라이짐에게 이곳을 떠나라고 명령하고 있었 다. "다음에 또 찾아와도 될까요?" "지금 그러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여전히 평안함을 주는 웃음이다. 라이짐은 다시 이 곳을 찾을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라이짐은 어색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 하고는 허둥거리면서 마리의 집을 떠났다. 얼굴은 열병에 걸렸을 때처럼 화끈거리고 있었고, 가슴속에서는 뜨거운 것이 방망이질을 치고 있었다. 내가 마리를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라이짐은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페르도 부인을 만난 이후로 도저히 마음에 안정을 찾을 수 없었고, 어딘가에서 술이나 한 잔 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까지, 라이짐은 이곳에 온다는 걸 생각도 해 보지 못했다. 하지만 라이짐의 발걸음은 저절로 마리의 집을 향하고 있었고, 마리의 집 근처라는 걸 알아버렸을 때, 라이짐은 도저히 걸음을 거둘 수가 없었다. 라이짐은 천천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되짚어 보기 시작했다. 그러자 페르도 부인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자객에는 자객으로 맞서는 것이 가장 좋을 때가 있지요.' 라이짐은 용병단 시절, 몸으로 깨달은 것이 하나 있었다. 훌륭한 지휘 관과 그렇지 못한 지휘관의 차이가, 바로 직속상관이 없을 때 빠른 판단 을 내릴 수 있는 지휘관과 그렇지 못한 지휘관의 차이라는 것이 그것이었 다. 실제로 라이짐은 탐그루에서 아케르 대신 철수 명령을 내린 적도 있 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스스로 판단해 움직일 때인가. 라이짐으로서는 판단이 서질 않았다. 무엇보다 페르도 부인의 말을 신 용할 수가 없었고, 또한 고위층을 암살한다는 일이 어떤 결과를 가지고 올지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여어, 라이짐. 일에 너무 열심인 거 아니야? 숙소에는 하진이 있었다.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집무실에 하진이 붙어 있는 것은 몹시 드문 일이었다. "너야말로." 라이짐은 힘 없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고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무슨 일이 그렇게 많아?" "하하하. 별 거 아니야. 그냥 개인적인 일이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좋 아." 하진이 과장된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그러고 보니 하진이 자신이 조 사하고 있는 일들을 보고하지 않은 지도 꽤 된 듯 싶었다. "이제는 좀 보고를 듣고 싶은데." 라이짐은 애서 근엄한 목소리를 지으려 노력하면서 말했다. 하진은 그 런 라이짐의 목소리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는지 역시 정색을 하고 서 대답했다. "자료 수집 중이야. 조금만 더 노력하면 뭔가 알아 낼 수 있을 것 같 아. 너무 재촉하지 말라고, 라이짐. 내가 언제 너 실망시킨 적 있었어? 이 하진, 지금까지 신용 하나로 이날 이때껏 버텨왔다고. 하하하." 하진의 말은 오랜 친구가 갑자기 우정과 돈을 함께 말할 때처럼 어색하 기 그지없었다. "하진. 자이스까지 동원해서 조사하는 일이라면 나한테 조금이야기 해 줘도 좋잖아?"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하진이 라이짐 쪽으로 절룩이면서 다가왔다. "잠깐만. 이게 뭐야?" 하진이 라이짐의 어깨를 유심히 바라보면서 말했다. 라이짐은 뭔가 불 길한 예감 같은 것이 들어서 얼른 어깨를 바라보았지만 조금 늦었다. 하 진이 어깨에서 뭔가를 집어든 것이었다. "머리카락인데?" 하진이 말했다. 라이짐은 허겁지겁 하진이 손에 들고 있는 머리카락을 빼앗으려고 손을 내밀었지만 하진의 손놀림이 훨씬 빨랐다. "아주, 아주 가늘어. 그리고 길고. 킁킁. 이거, 향기까지 나는 걸?" 라이짐은 화가 난다기 보다는 부끄러워서 얼굴이 다 벌게 질 지경이었 다. 그런데 라이짐은 그 와중에도 그 머리카락이 누구의 것인지 궁금했 다. 페르도 부인인가? 아니면 마리? "요즘 너무 바쁘게 돌아다닌다고 했더니 여자가 생기셨군. 이거, 머리 카락을 몸에 붙이고 다니는 건 별로 좋지 않은데 말이야. 너도 알고 있지 않았나? 머리카락 한 올이면 저주 거는데 충분하다는 걸 말이야. 하긴, 네 머리카락이라면 훨씬 쉽게 손에 넣을 수 있긴 하겠네. 구분하기도 쉽 고 말이야." 라이짐은 심호흡을 한 번 한 다음, 이렇게 말했다. "그만둬. 나도 네 개인적인 부분은 안 건드리잖아." 솔직하게 시인하는 편이 낫겠다 싶어서였다. 하진의 표정이 야비한 웃 음으로 바뀌었다. "알았어. 그냥 조심하라고 한 말이야. 머리카락 흘리고 다니지 말라 고." 하진은 입으로 머리카락을 훅 불어서 날려버린 후, 이렇게 이야기를 닫 았다. 머리카락은 어둠 속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라이짐은 안 도하면서 다시 하진에게 질문을 계속했다. "부탁한 반란군에 정보는 아직이야? 말했잖아, 단장님 지시라고." "그래. 기억하고 있어. 너 없을 때 그건 처리했지. 그런데 말이야, 당 분간은 좀 보고하기가 그래." "어느 정도 진척 됐는지도 말 할 수 없나?" "바코쿠라는 친구한테 편지를 전했지. 탐그루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좀 알아야 할 것 같아서. 아마 장군께서 반란군과의 접촉을 지 시하신 것도 그런 맥락인 것 같아. 아무리 검은 엘프의 정보 수집 능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한계가 있으니까." "하진. 그 문제는 중요한 문제야. 만약 반란군이 우리 편이 될 수만 있 다면..." 라이짐은 이렇게 이야기하다가 말을 멈추었다. 반란군을 이용하겠다는 생각이 들자, 꼭 자신의 행동이 페르도 부인같다고 느껴진 탓이었다. "그래. 나도 그 쪽으로 노력 중이야. 아직 별다른 건 없어. 반란군들, 아주 조심스러워. 널 아직 신용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그래서 신용을 얻을 만한 정보를 좀 알려줬지. 아, 우리한테 피해가 될만한 정보는 아니 야. 바바 족과의 충돌, 그리고 그리폰의 공습. 뭐 이런 거지. 하지만 시 작은 원래 조심스러울수록 좋은 법이니까." 하진은 라이짐의 생각이야 어찌되었건 이렇게 할말을 다 늘어놓았다. "자, 그럼 이제 이 몸은 움직여 봐야겠네." 하진은 이렇게 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조심해서 돌아가." "그리고 기운 좀 내. 여자한테 빠져서 그런가? 너무 기운이 없어 보 여." 하진은 마지막으로 좀 진지한 목소리를 낸 다음 라이짐의 집무실을 빠 져나갔다. 하진이 나가버리자 집무실은 순식간에 너무 넓은 공간으로 변 해버렸다. 라이짐은 할 일은 다 내팽개치고 자리에 누워버렸다. 일단은 쉬고 싶었다. 너무도 많은 일들이 라이짐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라이짐이 잠이 들자, 바닥에 떨어져 있던 머리카락이 허공으로 떠올랐 다. 그리고 기괴한 모양으로 뒤틀리는가 싶더니 한 줄기 빛과 함께 사라 져버렸다. 그 때, 라이짐은 반지가 끼워진 손가락 끝이 뜨거워지는 느낌 을 받았지만 그저 몸을 한 번 뒤척였을 뿐이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9779/19898 ━━━━━━━━━━━━━━━━━━━━━━━━━━━━━━━━━━━━━━━━ 제 목:[탐그루] 슬픔이라는 이름의 빛 261 관련자료:없음 21/21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4-28 21:27 조회:841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아케르 장군의 국경 수비 임무가 다시 한 번 연장된 지 얼마 지나지 않 은 어느 날이었다. 날은 서서히 따뜻해져 오고있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곧 더운 계절이 시작될 조짐이 보이고 있었다. 한 계절의 끝과 시작을 알 리기 위해서였을까. 한줄기 시원한 빗물이 세상에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슬픈 날씨로군요."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라이짐에게 에질리가 말했다. 에질리는 가끔씩 이렇게 라이짐이 부르지 않아도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처음에는 라이짐도 놀랐지만, 시간이 지나자 에질리가 불쑥불쑥 나타나는 것도 그 다지 이상한 일은 아니라고 여겨졌다. 게다가 에질리는 늘 혼자 있을 때 에만 나타났고, 누군가 다가오는 눈치만 있어도 사라져 버리곤 했던 것이 다. 라이짐은 집무실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슬픈 날씨라는 에질 리의 말은 라이짐의 가슴에서 아련한 슬픔 같은 것을 피어오르게 만들고 있었다. 라이짐은 이렇게 생각하면서, 말의 힘이라는 것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난 슬프지 않아." "아니오. 라이짐 님은 슬퍼하고 계십니다. 아니라면 지금 떠올리고 계 시는 여자는 누구인가요?" 무뚝뚝하게 라이짐이 내뱉었지만, 에질리는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이 라이짐의 말에 덧붙였다. "함부로 생각을 읽지 말라니까." "어쩔 수 없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저는 반지의 정령이라고." 라이짐은 왼 손을 들어 반지가 끼어진 약지를 바라보았다. 반지를 뽑아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충동으로 라이짐에게 다가왔다. 라이짐은 도 대체 타호루가 무슨 생각으로 라이짐에게 반지를 준 것이었는지 궁금해졌 다. "비를 맞고 싶어하시는 군요." 에질리가 말했다. 라이짐은 비를 맞으면서 마리가 나가던 술집 앞에 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라이짐은 에질리에게 그렇다고도, 아니라고도 말하지 않았다. 에질리는 어차피 다 알고 있을 것이었기 때문 이었다. 라이짐이 무슨 생각을 하건. "그리폰들은 왜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 걸까?" 라이짐은 창밖을 보는 일을 멈추고 이렇게 중얼거렸다. 언제인가부터 그리폰이 나타난다는 이야기는 들리지 않고 있었다. 탐그루는 물론이고 바르도 대륙 전체를 불태울 기세로 날아다니던 그리폰은 어느 한 순간 완 전히 사라져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덕분에 그리폰의 본거지를 찾는 작업 을 하고 있던 에이스 자매들은 할 일을 완전히 잃고 말았다. "불길해." 라이짐이 말했다. "뭔가가 일어날 징조야, 이건." "태풍의 눈에 대해서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에질리가 라이짐에게 물었고, 라이짐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태풍은 회전하는 바람입니다. 세상을 완전히 집어삼킬 듯 바람이 빙빙 돌면서 지나가지요. 비바람이 몰아치고, 천둥번개가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든답니다. 그런데 그 태풍의 눈에 서면 갑자기 세상이 고요해 진 다고 하지요." "바람 한 점 없고, 하늘을 올려다보면 별이 보일 정도라고 하더군." 라이짐이 말했다. "태풍의 눈에 들어서면 누구나 이제는 모든 게 끝났구나, 하고 생각하 기 마련이지요. 하지만 태풍을 따라서 움직인다면 모를까, 그 자리에 멈 추어 서 있다가는 태풍에 휘말려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게 되어 있답니 다." 에질리의 말에는 가시가 박혀 있는 듯 했다. 최근 얼마동안 라이짐은 일을 거의 하고 있지 않았다. 마리를 만나는 일이 잦아졌고, 공금을 유용 해 마리의 집에 연금술사의 등을 새로 달아주기도 했다. 하지만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라이짐의 의욕을 빼앗아 갔던 것은 라이짐 이 과연 지금 아케르 장군의 국경 수비 임무가 자꾸 연장되고 있는 것이 리콜 샤일록의 음모인가, 아닌가를 도무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고, 그것 때문에 리콜 샤일록의 암살을 실행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 가를 결정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라이짐은 거의 매일 밤잠을 설치고 있었다. "만약에 그런 상황이라면 도대체 언제까지 태풍의 눈을 따라서 움직여 야 하는 걸까. 죽기 전까지?" "아니요. 태풍이 끝날 때까지입니다." 에질리가 대답했다. 라이짐은 떨어지는 빗방울들을 주시했다. 저것들은 하늘에서 떨어져 내려오는 동안 언제까지 떨어져야 할까를 생각할지도 모 른다. 그리고 멈추어서는 순간이 빗방울이 더 이상 빗방울이 아닌 순간이 닥쳐오는 것이다. 라이짐은 이럴 때 늘 내려왔던 결정을 내리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해야 할 일이 무엇보다 먼저인 것이다. "에질리. 나,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것 같아." 턱을 쓸면서 라이짐이 말했다. 수염이 어느새 꽤 많이 자라나 손바닥에 까칠한 촉감이 느껴졌다. 라이짐의 말이 끝나자 에질리는 대꾸도 하지 않 고 사라져 버렸다. 마치 언제 에질리가 있었냐는 듯, 라이짐의 앞에는 텅 빈 공간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라이짐의 예상 중 하나는 옳았다. 라이짐이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맥락 이었지만, 그리폰을 대신하는 새로운 마물이 등장했던 것이다. 라이짐은 프라브리티 외곽의 수도 방위대 지휘소에서 수도 방위 지휘관 과 함께 있었다. 멀리서 폭음이 아련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일단 수도 진입은 막아내고 있지만 그리 좋은 상황은 아니오." 수염 투성이의 수도 방위 사령관 오이디프 장군이 라이짐에게 말했다. 전 수도 방위 사령관은 일개급 특진의 영광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오이 디프 장군은 그 후임으로 로스안에서 이곳으로 부임한 장군이었다. 라이 짐이 알고 있는 정보로 오이디프 장군은 성황청이 신성제국을 선포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마자 성구로 무장한 로스안의 성황청 기사단을 싹 쓸어버 린 능력있는 장군이었다. 당시 로스안의 기사단장이었던 스트라세 장군이 사고로 사망한 덕분이었다는 분석도 있기는 했지만 후임으로 마땅히 부를 만한 장군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라이짐은 편재 상 아케르 군단의 정보부장에 불과했다. 하지만 스파일 의 대마법사 사비치의 명을 받은 라이짐은 단순한 일개 군단의 정보부장 이 지니고 있는 권위와 비할 바가 아니었다. 물론 그렇다고는 해도 지휘 관이 직접 맞이해야 할 만큼의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지금 상황은 지금 상대하고 있는 마물이 어떤 마물인지 전혀 알고 있지 못한 처지이니 만큼, 어느 누구의 의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오이디프 장군은 아무리 적은 확률이라고 해도 무시해 버릴 만큼 어리석은 사람은 아니었다. 라이짐은 처음에 이곳 프라브리티의 동편으로 오면서 이러한 점 때문에 자신이 홀대받는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한 번 어떻게 생긴 녀석인지 보고 싶군요." "본다고 해도 큰 도움은 되지 않을 것이오. 기대는 말기를. 완전히 엉 망이 된 녀석 하나뿐이니까." 오이디프 장군이 말했다. "하지만 백부장의 생명과 맞바꾼 것이니, 그만한 가치는 충분히 있을 것입니다." 라이짐은 이렇게 대꾸했다. 라이짐의 말에 오이디푸 장군은 흠칫 놀라 면서 말을 이었다. "놀랍군. 정보 수집 능력이 뛰어난 정보부장이 있다는 말은 들었소만, 이 정도까지일 줄은 정말 몰랐소. 우리한테까지 정보원을 심어두었나?" 라이짐은 대답하지 않았다. 에이스 자매 중 하나인 라이스가 그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말은 해 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에이스 자매의 존 재를 알고 있는 사람은 스파일 전체를 통틀어 다섯도 되지 않았다. "뭐, 어찌되었건 좋소. 그게 당신 일일테니. 나는 여기서 내 일을 하고 있는 것이고." 오이디프 장군의 말에 라이짐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이럴 때 짓는 미 소야말로 자신의 강함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리라고 라이짐은 생각했다. 오이디프 장군은 라이짐을 야전에 마련된 창고로 안내했다. 창고 주변 의 경비는 삼엄했다. 적어도 이 개 십부는 됨직한 완전 무장한 병력이 창 고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오이디프 장군이 다가서자, 병사들은 장군을 위해 문을 열어주었다. 라이짐은 문이 열리자마자 끼쳐오는 악취에 인상 을 찌푸렸다. 시체가 오물과 뒤섞여 썩어가고 있는 듯한 냄새였다. 속 깊 은 곳까지 악취가 파고드는 느낌이었다. 침이라도 한 번 뱉으면 나을 것 같았지만 아무런 표정 없이 창고 안으로 들어가는 오이디프 장군을 봐서 라도 함부로 그런 행동을 취할 수는 없었다. "이거요." 오이디프가 말했다. 라이짐은 자신의 두 배는 됨직한 몸집의 마물을 보 는 순간 몸이 얼어붙는 듯 했다. 비록 두꺼운 쇠사슬로 팔다리와 몸이 묶 여 있었기는 했지만, 당장이라도 움직일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마물은 전체적으로 붉은 색을 띄고 있었다. 육중한 몸은 두꺼운 다리가 지탱하고 있었고, 굵은 팔뚝 끝에는 날카로운 발톱이 달린 손이 힘없이 늘어져 있 었다. 얼굴은 전체적으로 인간이라기 보다는 들짐승에 가까운 얼굴을 하 고 있었는데, 들짐승과 다른 점은 얼굴 한 복판에 눈알이 붙어있었던 자 리라고 여겨지는 큰 구멍이 하나 나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가슴과 목, 배에 걸쳐서 크고 작은 칼자국들이 어지럽게 나 있었다. 바닥에는 초록색 의 핏물이 아직도 조금씩 흘러내리고 있었다. 오우거의 피와 같은 색깔이 었다. "가고일. 사람들이 이걸 가고일이라고 부르더군. 그리폰이 잠잠하다 했 더니 이런 마물이 나타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오." "눈은 어디로 갔습니까?" "성난 내 부하들이 파내 버렸지. 아무리 지휘관을 싫어하는 사병이라고 해도 막상 지휘관이 죽으면 복수심에 불타기 마련 아니겠소." 오이디프 장군이 가고일을 유심히 살펴보면서 말했다. "눈알이 남아있었다면 사비치 님께 좋은 자료가 되었을 텐데요." 라이짐은 사비치라는 이름에 특히 힘을 주어서 말했다. "사람을 조정하는 마력이 눈에서 나온다고 들은 바는 있소. 하지만 죽 어버린 마물의 눈동자를 가지고 뭘 더 알아낼 수 있겠소?" 오이디프가 두 손 다 들었다는 듯한 동작을 하면서 말했다. "마법사의 힘은 그렇게 상식적으로 판단할 수만은 없는 법이지요." 라이짐은 이렇게 말했다. 마물의 머리 위로 뿔처럼 삐죽 솟아있는 두개 의 귀가 잠시 꿈틀거리는 듯 했다. 라이짐은 가고일이 살아나는 것이 아 닌가 해서 깜짝 놀랐다. "아. 신경쓰지 마시오. 계속 이렇게 꿈틀거린다오. 죽은 게 틀림없긴 하니까. 게다가 이렇게 묶여 있는데 뭐 어쩌겠소? 물론 나도 안심은 할 수 없어서 이렇게 경비를 세워두기는 했지만 말이오." 가고일의 눈알을 손에 넣지 못한 것은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 다. 일단 자신이 두 눈으로 본 마물이니, 이제 더 이상 사비치에게 전해 줄 것은 없을 듯 했다. "이 녀석들, 무리하게 이쪽 프라브리티의 동편만 노리고 있다오. 몇마 리 되지 않는 것도 같소만... 다른 곳들도 비슷한 상황이라고 들었소. 도 대체 뭘 노리고 있는거요?" "탐그루..." 라이짐은 오이디프 장군의 물음에 이렇게 입 속에서 웅얼거리듯 답했 다. 오이디프 장군이 무슨 소리냐고 되물었지만 라이짐은 그저 혼잣말이 라고만 말했다. 라이짐이 에이스 자매로부터 얻은 정보에 따르면, 가고일들은 명백히 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좀비의 등장 때도 좀비들은 탐그루로 모여 들고 있었다. 이어 등장한 오우거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리폰들은 탐그루를 불바다로 만들어 버린 후, 화풀이라도 하듯이 바르도 대륙 곳곳 을 괴롭히다가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나타난 가고일들 또한 탐그루로 향 하고 있었다. 왜 탐그루일까? 마물들이 탐그루로 향하고 있는 이유는 도 대체 무엇일까? 라이짐은 도무지 짐작을 할 수가 없었다. "가고일들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마인드 컨트롤이라고 부르는 사람을 본 적이 있소. 우리 부대의 노병이었지. 오래 전에 들은 이야기라고 하더 군. 타인의 마음을 다스린다는 뜻의 고대어라고 하던데." "저도 나름대로는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라이짐은 이렇게 말했다. 마인드 컨트롤이라는 말은 에이스로부터 보고 받아서 알고 있었다. 마인드 컨트롤이 가고일이라는 마물의 능력이고, 그 앞 글자를 합치면 마컨이 된다는 건 단순한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 각이 문득 스치고 지나갔다. "당한 병사들도 있겠지요?" "그렇소. 가고일들을 앞에서 마주친 병사들은 하나같이 미쳐서 우리편 에게 달려들었다오. 눈에 그런 능력이 있을 줄이야. 이 녀석도 등 뒤에서 공격해서 겨우 잡을 수 있었다오." "마인드 컨트롤에 당한 병사 중 살아남은 병사도 있나요?" "그렇소만." "그 병사를 만나보고 싶군요." 라이짐이 말했다. 마인드 컨트롤에 당한 병사를 만난 일은 거의 소득이 없었다. 병사는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서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라이짐은 그런 병사의 행동이 아군을 공격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거짓말 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오랫동안 추궁했으나, 앞 뒤 상황을 맞추어 볼 때 정말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라이짐은 가고일들이 사용하는 마인드 컨트롤이라는 능력이 발렌시아 백부장이 펼치는 죄의식의 영역과 비슷한 것인지를 확인하고자 했지만 결 국 헛수고가 되고 말았다. 만약 발렌시아 백부장의 능력과 같은 것이라면 대비책을 찾기가 훨씬 더 수월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라이짐 은 아쉬움은 일단 접어두고 다시 자신의 숙소로 돌아와야 했다. 돌아오는 길 내내 라이짐은 민심이 크게 동요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 할 수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들른 상점에서는 생필품 값을 터무니없이 올려 받고 있었고, 프라브리티를 떠나 어디로 건 피난가려고 하는 사람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여기저기서 작은 소요가 일어나 치안을 담당하고 있는 자치대 병사나 수도 방위군들이 평상시 보다 열 배는 바쁘게 뛰어다 니고 있었다. "반란군 녀석들,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겠는 걸, 이거. 이런 식으로 계 속 일이 벌어진다면 말이야. 네가 그러지 않았나? 사람들은 단순하다고. 반란군이 노리는 건 사람들이 '여기는 살기 힘든 곳이구나'라고 여길 때 라고 말이야." 집무실로 돌아온 라이짐에게 하진이 이렇게 말했다. 라이짐은 하진의 분석이 옳다고 생각했다. "바코쿠한테서 무슨 전갈이 있었나?" "라이짐. 아무래도 반란군 동태가 수상해. 이번 테이르의 날을 맞아 뭔 가 큰 일을 치를 것 같은 예감이 든단 말이야? 물론 자세하게 언급한 건 아니지만 말이야." 하진의 말에 라이짐은 잠시동안 생각에 잠겼다. 뭔가 해야만 했다. 해 야 할 일이 빨리 결정되어야 행동으로 옮길 수 있을텐데. 오랫동안 생각 한다고 해서 새로운 결론이 나올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결국 라이짐 이 내릴 수 있었던 결론은 하나였다. 아케르가 돌아와야 할 때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9780/19898 ━━━━━━━━━━━━━━━━━━━━━━━━━━━━━━━━━━━━━━━━ 제 목:[탐그루] 슬픔이라는 이름의 빛 262 관련자료:없음 26/26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4-28 21:28 조회:906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프라브리티 시의 골목 구석, 어두운 건물의 그림자 뒤편에서 두 사내가 만나고 있었다. 한 사내는 나무 판자 뒤에 몸을 숨기고 콧노래를 흥얼거 리고 있었고, 다른 한 사내는 그 노랫소리를 들으면서 천천히 걸음을 옮 기고 있었다. "좋은 노래군요. 하지만 가사가 틀렸습니다." 노랫소리를 듣던 사내가 말했다. "콧노래에도 가사가 있었던가?" 판자 저편에서 다른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의도적으로 목소리를 낮춘 듯한 느낌을 주는 목소리였다. "보통의 경우는 없죠. 하지만 이번 경우는 다른 것 같습니다." "좋아. 이 정도면 됐소. 미행은 없었소?" "제가 아는 한 없었습니다. 골목골목으로 돌아왔으니까요." "한 걸음 뒤로 물러서시오." 판자 뒤의 목소리가 명령했다. 사내는 목소리 끝나기가 무섭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판자에 뚫려 있는 구멍으로 반짝이는 눈동자가 보였고, 뒤로 물러선 사내는 인상을 찌푸렸다. "불공평하다고 생각하겠지? 미안하네. 하지만 이게 우리가 일하는 방식 이야." "그렇군요." 적당히 대꾸한다는 느낌으로 인상을 펴면서 사내가 말했다. 판자 뒤의 사내가 확인한 것은 자신을 찾아 온 사내의 머리색이었다. 자신을 찾아온 사내의 머리가 햇빛을 받아 하얗게 반짝이는 것을 확인한 판자 뒤의 사내는 천천히 말을 시작했다. "자네, 평상시에는 모자를 쓰고 다니는가?" "아뇨. 까만색 가발을 쓰고 다닙니다." 흰머리의 사내가 귀찮다는 듯이 가볍게 대꾸했다. "바코쿠의 소개라고 했나? 별로 믿음은 가지 않지만..." "어쩔 수 없지요. 인원이 그리 여유 있는 건 아니란 걸 압니다." 흰머리의 사내가 말했다. "그래. 우리는 수가 적어. 하지만 이 일은 수가 적을수록 유리한 일일 세." "인원이 필요한 순간이 있지 않겠습니까? 이를테면 집회나, 혹은..." "잠깐. 그런 말은 함부로 입에 담는 게 아니네." 판자 뒤의 사내가 흰머리의 사내에게 주의를 주었다. 흰머리의 사내는 입에 집게손가락을 가져간 후 고개를 끄덕였다. "필요한 건 언제냐 하는 것뿐일세. 그 언제는 사람이 모이는 순간이 되 겠지. 결코 인위적으로 사람을 모아서는 안되네. 그건 적에게 빌미를 제 공하는 것 밖에는 되지 않거든." "알겠습니다. 그럼 이제 제가 할 일은 뭡니까?" "자네는 중요한 인물이야. 함부로 움직이게 해선 안되지. 정보수집이나 그런 일, 그만 두게. 우리가 언제 움직여야 할지 말해주지." "그렇군요. 말하자면 인위적으로 절 움직이지 않겠다는 거로군요." "필요한 순간을 제외하고는 그렇지." 판자 뒤의 사내가 미소라도 짓고 있는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내가 먼저 자리를 떠나지. 필요한 순간이 되면 연락하겠네." "좋습니다." 판자 뒤의 사내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판자 저편의 골목길로 사라졌다. 흰머리의 사내는 사내가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 한 후, 스파일에서 가 장 뛰어난 장인이 만들었다는 흰머리 가발을 벗었다. 머리에 땀이 베어 있었다. 사내는 양손으로 눌려진 머리를 흐트러뜨린 후, 가발을 품에 넣 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내가 봐도 진짜 같단 말이야?" 사내는 이렇게 중얼거렸는데, 좀전과는 달리 음습한 목소리였다. 라이짐은 집무실에서 뒷짐을 지고 허리를 숙인 상태로 계속해서 걷고 있었다. 누가 본다면 운동 삼아 걷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을지도 모르지 만, 실은 도저히 집무실에 가만히 앉아만 있을 수가 없어서였다. 불안했 다. 당장이라도 문이 열리면서 누군가가 들이닥칠지 모른다는 생각에 단 검은 이미 품에 넣어 둔 상태였고, 손톱 밑의 굳은 살은 하도 물어뜯어 조금만 더 물어뜯었다가는 피가 날 지경이었다. 라이짐이 결정을 내리기 전, 라이짐에게 용기를 준 것은 칼이었다. 시 드의 귀가 박혀 있는, 오랫동안 손질하지 않아 녹이 슨, 탐그루에서 가지 고 온 바로 그 칼이었다. 라이짐은 그 칼을 한 참 동안 바라본 후에야 자 신이 내린 결정을 실행에 옮길 수 있었다. 그것은 그리 좋지 못한 행동이 었다. 일단 결정이 내려진 다음, 이렇게 시간을 끈 경우는 라이짐에게 있 어서 참으로 드문 일이었다. 라이짐은 이마가 서늘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손바닥으로 쓱 문질러 보니 땀이 묻어 나왔다.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만 은 없다는 생각이 다시금 강하게 들었다. 라이짐은 녹슨 칼을 집어들어 원래 있던 침대 밑에 집어넣고는 심호흡 을 한 번 했다. 뭔가 전부 다 잊어버리고서 몰두할 일이 필요했다. 라이 짐은 어떻게 소용에 닿게 될지 생각도 해 보지 않고서 사비치에게서 받은 돈주머니를 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서둘러 집무실을 빠져나가 마리의 집으로 향했다. 해는 이미 오래 전에 져서, 하늘은 온통 어둠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따 금 보이는 별빛도 거리마다 보이는 연금술사의 등도, 그 어느 것도 라이 짐의 마음을 밝게 만들지는 못하고 있었다. 발걸음은 급하기만 했지만, 길은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고 있었다. 라이짐은 더딘 발걸음을 탓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더 빨리 걷다가, 나중에는 거의 뛰다시피 하게 되었다. 라이짐은 숨이 차 올랐지만 머릿속에 떠오르고 있는 생각은 조금이라도 빨리 마리의 집에 도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바쁜 걸음으로 걷고 있는 라이짐을 사람들이 이상하다는 듯한 눈으로 힐끔거렸지만 라이짐은 그런 시선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모자를 깊게 눌러 쓰고 있는 덕분에 라이짐이 누구인지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래도 이 저녁에 저렇게 급한 일로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해서 의아스럽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서 사 람들은 라이짐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라이짐이 마리의 집이 눈에 뜨이기 시작하자, 라이짐은 걸음을 늦추기 시작했다. 조급했던 마음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고, 마리의 집에 가까워 올 수록 그냥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가슴이 두 근거리고 있었다. 차마 마리의 집에 들어 갈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마리의 집 문 앞에 서서 라이짐은 한 참을 망설였다. 일단 오고 보자는 생각에 집무실을 나서기는 했지만 과연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 던 것이다. 라이짐은 한참동안을 망설인 끝에 문을 두드렸다. 문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라이짐은 또 한 번 머뭇거리다가 이번에는 힘껏 문을 두 드렸다. 그러자 문이 열리며 처음 보는 노파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누구쇼?" 노인 특유의 쉰내를 풍기면서 노파가 말했다. 라이짐은 입이 잘 떨어지 지 않았지만 그래도 용기를 내어서 이렇게 말했다. "저, 마리를 찾아 온 사람입니다." "마리? 마리는 일 나갔는데?" 라이짐은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기껏 용기를 내어 문을 두드렸더 니 일을 나갔다니 말이다. "댁도 마리한테 반한 사람이요? 일 나간지 얼마나 됐다고 이런 놈들이 자꾸 들락거리니... 이거 방을 비우라고 하던가 해야지, 원!" 노파가 의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눈을 하고서 라이짐에게 말했다. 라이짐은 잠시 냉정하게 생각해 본 다음 가장 적절한 대안을 마련해 내었 다. 노인으로부터 신용도 얻고, 또한 마리가 나가는 술집의 정확한 위치 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젊은 양반이 예의도 바르구만. 그곳으로 가면 아주 쉽게 마리를 만날 수 있을 걸세. 그리고 또 와요, 젊은 양반." 금화 한 닢을 받은 노파는 금화를 씹어볼 이빨은 남아있었던 모양이었 다. 라이짐이 건넨 금화가 진짜라는 사실을 알아내자마자 노파는 이렇게 희죽거리면서 라이짐에게 말했다. 라이짐은 노파가 알려준 술집을 그리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프 라브리티의 중앙 광장에서 술집이 모여있는 골목으로 들어가, 가장 화려 한 간판을 한 술집이 바로 마리가 나간다는 술집이었다. '살롱 리노아' 라이짐은 연금술사의 등으로 화려하게 수놓아진 간판의 글씨를 본 후, 안으로 들어갔다. 입구에는 덩치 좋은 사내 둘이 버티고 있었다. "죄송합니다만 이곳은 회원제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둘 중에 목이 더 두꺼운 쪽이 정중하게, 하지만 당장이라도 물어뜯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 라이짐에게 말했다. 라이짐은 아주 천천히, 하지 만 매우 익숙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금화 한 닢을 내 놓았다. "성의는 감사합니다만 저희는 거지가 아닙니다." 이번에는 반대편에 있던 사내가 팔뚝을 걷어붙이면서 이렇게 말했다. 라이짐은 주저하지 않고 간단하게 말했다. "이곳 사장을 좀 나오라고 하게." 정중하게, 그리고 매우 짜증이 난다는 듯한 표정을 만들어 내면서 라이 짐이 말했다. 물론 짜증스러운 표정만이었다면 팔을 걷어 붙인 사내에 의 해 당장 길거리로 내동댕이쳐졌을 것이 거의 분명한 상황이었지만 라이짐 의 손에는 영주의 직인이 찍혀있는 신분증이 들려있었다. 검붉은 빛의 영 주 직인을 확인한 목 두꺼운 사내는 얼른 뒤로 물러섰고, 나머지 하나는 꼭 날씨가 춥다는 듯이 팔을 쓸었다. "죄, 죄송합니다만, 사장님께서는 출장중이십니다만, 지금 있는 사람 중에는, 그러니까..." "알았어. 이제 들어가겠네." 라이짐은 이렇게 말하고는 멀뚱히 서 있는 두 사내 사이를 비집고 들어 갔다. 그리고 금화 한 닢을 던져 주면서 '내가 돈이 없어 보였나?'하고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안은 온통 어둠이었다. 손에 자그마한 연금술사의 등을 들고 있는 훤칠 한 사내가 다가오지 않았다면 라이짐은 멍청하게 가만히 서 있어야만 했 을 것이었다. "손님. 이쪽으로 오시지요." 오랬동안 훈련받았는지 아주 나지막하면서도 정확한 발음으로 사내가 말했고, 라이짐은 그 사내가 비추어주는 연금술사의 등을 좇아 걸음을 옮 겼다. 문이 하나 열리자,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피곤하지 않을 정도의 밝 기로 맞추어진 연금술사의 등 빛이 넓은 실내를 비추고 있었다. 라이짐은 다시 사내를 따라 움직여 빈 테이블에 앉았다. "동행은 있으신지요." "아니." 라이짐은 간략하게 대답하고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꽤나 넓은 실내에는 오십 석 정도 규모의 테이블이 놓여있었고, 테이블에는 척 보기에도 꽤나 지체 높아 보이는 사내들이 앉아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 었다. 사내가 메뉴가 적혀있는 판을 내밀었지만, 라이짐은 메뉴판을 받지 않았다. 메뉴를 고르면서 이곳에 처음 왔다는 표를 내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라이짐은 사내를 바라보면서 집게 손가락을 펴서 보 여주었다. "알겠습니다." 뭘 알겠다는 뜻인지는 몰랐지만 라이짐의 행동은 옳았던 모양이었다. 사내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다른 곳으로 물러났다. 일단 실내에 앉기는 했지만 불편한 마음은 완전히 가시질 않고 있었다. 집무실에서 어떤 결과가 올지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나 은 상태이긴 했지만 아직도 완전히 안정을 찾은 것은 아니었다. 지금쯤 에이스 자매 중 하나인 카이스가 리콜 샤일록의 집에 당도했으 리라. 카이스는 검은 엘프 답게 소리 없이 담을 넘어 리콜 샤일록의 저택 안으로 잠입하는 데 성공했을 것이었다. 어쩌면 한 번 쯤 그곳의 하인과 마주쳤을지도 몰랐다. 만약 그랬다면 그 하인은 순식간에 입이 틀어막혀 진 후, 카이스의 날카로운 단검이 심장을 파고 들어오는 끔찍한 기분을 느꼈을 것이다. 물론 목을 긋는 편이 더 빠를 수도 있지만 카이스는 그렇 게 하지 않는다. 쓸데없는 핏자국을 남기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훤칠한 사내는 술과 안주가 가득 올려져 있는 바퀴가 달린 테이블을 끌 고 다시 나타났다. 라이짐은 술병 중 눈에 익은 술병인 마르게르 젤러 병 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사내는 술병을 집어 든 후, 뚜껑을 딴 다음 라 이짐의 잔에 약간을 채워주었다. 라이짐은 영주의 저택에서 자주 보아서 이런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 지를 잘 알고 있었다. 라이짐은 술잔을 들어 향기를 맡고 입술을 살짝 적신 다음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는 라이짐의 테이블 위에 안주로 새우 튀김과 야채가 그야말로 한 입거리도 되지 않을 접시 하나를 올려놓고는 다시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자리를 떠났다. 라이짐은 마르게르 젤러를 한 잔 마셨다. 새벽의 눈동자라는 뜻을 가진 이 술은 적당히 독하면서 그윽한 향을 풍기고 있었다. 라이짐은 뜨거운 술기운이 뱃속에서 퍼져 가는 것을 느끼면서 천천히 상상을 이어갔다. 카이스는 하인을 끌고 정원의 구석진 자리, 나무 밑에 숨긴 다음 다시 저택 안으로 잠입을 시도할 것이었다. 카이스가 교묘하게 숨긴 시체는 썩 어 흙이 될 때까지도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 갑자기 조명이 어두어졌다. 라이짐의 눈에는 테이블마다 올려져 있는 붉은 연금술사의 등불만이 별빛처럼 들어왔다. 연금술사의 등 중 하나가 좌 우로 흔들리는 것이 보였고, 등이 흔들린 쪽으로 훤칠한 사내 하나가 바삐 걸음을 옮기는 것이 희미하게 눈에 들어왔다. 카이스는 이제 조심스럽게 벽을 타고 저택 안으로 들어가고 있을 것이 다. 그리고는 리콜 샤일록의 방이라고 짐작되는 곳으로 소리없이 발뒤꿈 치를 들어 움직인 다음 문에 귀를 댈 것이다. 첫번째로 귀를 댄 곳이 리 콜 샤일록의 방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아마도 카이스는 숨소리가 들리지 않는 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자 마자 다른 방 문으로 걸음을 옮겼을 것이 다. 순간, 벽면에 한줄기 밝은 연금술사의 등 빛이 내려왔고, 모두의 시선 이 무대에 집중되었다. 무대에는 반짝이는 금박을 입혀놓은 커튼이 흔들 리고 있었다. 이윽고 커튼의 한 복판이 열렸고, 마리가 천천히 무대 중앙 을 향하여 걸어나왔다. 라이짐은 멍하니 마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짙은 화장은 평상시의 마리보다 열 살은 더 나이 들어 보이게 했다. 만약 일부 러 찾아오지 않았다면 라이짐은 마리가 아닐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을지 도 모른다. 하지만 부서질 듯 가느다란 마리의 머릿결은 변함없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마리는 고개를 숙였다. 곧이어 음악이 커튼 뒤편에서 흘러나왔고, 마리는 천천히 고개를 치켜 든 후,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무대 위에서 노래를 부르며 언제나 나는 혼자였죠 아무도 내 노래에 귀기울여 주지 않지만 날 보며 미소짓는 그대가 보여 정말 당신인지 아니면 환상인지 어제는 당신과 함께 그곳에 있었던가요 그랬었나요 이제는 아닌가요 당신은 알고 있나요 내가 당신을 보고 있다는 걸 라이짐은 조명을 받고 있는 마리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완전히 노래에 취해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카이스는 리콜 샤일록의 숨소리를 듣고 있었다. 지금도 당신은 거기에 앉아 있네요 마치 꿈을 꾸고 있는 사람처럼 하지만 내가 손을 내밀어 그대 얼굴을 어루만지면 그대 잠에서 깨어나 고통을 아시겠지요 노래는 마법이 되어 라이짐의 영혼을 빼앗아가 버렸고, 노래에 영혼을 빼앗긴 라이짐은 정말로 꿈속에 잠겨버린 듯 완전히 생각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머릿속은 온통 환한 조명만이 떠돌고 있었고, 라이짐은 자신이 있는 곳도, 가야할 곳도 생각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대 마지막으로 내게 허락해 줘요 당신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을 만큼 다가갈 수 있도록, 속삭일게요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카이스는 입을 벌리고 잠들어 있는 리콜 샤일록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카이스의 눈이 확인하고 있는 것은 리콜 샤일록이 완전히 잠들었는가, 아 닌가 하는 것이었다. 카이스는 리콜 샤일록의 베개를 집어든 다음 그대로 얼굴을 내리 눌렀다. 리콜 샤일록은 반사적으로 잠에서 깨어나 베개를 움 켜쥐고 비명을 지르려고 했지만 입에서 나오는 것은 소리가 아니라 공허 한 침묵뿐이었다. 카이스는 한 참 동안 베개를 누른 손에서 힘을 빼지 않 고, 리콜 샤일록의 숨이 완전히 끊어지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 즈음, 음악은 끝났고 마리는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천천히 커튼 뒤로 사라졌다. 실내에 다시 어슴푸레 연금술사의 빛이 은은하게 퍼 지기 시작했고, 요란스러운 박수소리가 귀따가울 정도로 들려왔다. 하지 만 라이짐은 아무 반응도 보일 수 없었다. 노래에 취해, 사라져 버린 마 리의 여운에 취해, 라이짐은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라이짐은 결국 자신이 원하던 바를 이루었던 것이다. 라이짐은 쓸데없는 걱정도 하지 않 고 결과를 기다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물론 성공적인 것이었다. 적어도 아케르나 페르도 부인에게 있어서는 그렇다. 라이짐은 마르게르 젤러 한 병을 비운 후, 무대 뒤편으로 가서 마리를 만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다만 훤칠한 사내에게 마리가 부른 곡명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았을 뿐이었다. "오래된 노래입니다. '마지막 환상'이라는 곡이지요." 보통 사람들은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한 말투로 사내가 라이짐에게 말해주었다. 라이짐은 고개를 끄덕인 후, 사내에게도 금화 한 닢을 쥐어 주었다. 라이짐은 숙소로 돌아가 기다리고 있던 에이스에게 보고를 들을 수 있었다. "카이스로부터의 전갈입니다. 일은 깨끗하게 마무리되었다고 합니다." 라이짐은 에이스에게 알았다고 말한 뒤 침대에 누워 잠이 들었다. 라이 짐의 꿈은 살인의 기억에서 도망치기 위해 끝없이 긴 여정을 떠났다. 그 러나 다시 태양이 떠오르면 쉽게 돌아오고 말 부질없는 여정이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9835/19898 ━━━━━━━━━━━━━━━━━━━━━━━━━━━━━━━━━━━━━━━━ 제 목:[탐그루] 슬픔이라는 이름의 빛 263 관련자료:없음 20/20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4-29 21:20 조회:930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아케르에게 복귀 명령이 떨어진 것은 내무장관 리콜 샤일록이 심장마비 로 급사했다는 소식이 퍼진 바로 다음 날이었다. 라이짐이 가지고 있는 정보만으로는 그것이 리콜 샤일록의 죽음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인 지, 아닌지 판단을 내리기 힘들었다. 어쩌면 페르도 부인은 자신의 정적 을 제거해 준 보답으로 아케르 장군의 복귀에 힘을 쓴 것인지도 몰랐고, 아니면 그저 우연히 원래 복귀 명령이 내려지기로 예정되었던 날 내무장 관이 죽게 된 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결정을 내리는 일은 힘겨웠고, 일이 진행 되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일 은 불안하고도 고통스러운 일이었지만 결과는 어찌되었건 라이짐이 원하 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런데 라이짐은 아케르의 복귀 명령이 내려졌다 는 말을 들은 바로 그 순간부터, 뭔가 마음속에서 어긋나기 시작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라이짐. 너 요즘 좀 이상해. 그거 알아?" 하진이 인상을 찌푸리고서 라이짐에게 물었다. 라이짐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손가락을 집무실 책상에 퉁기면서 박자를 맞추고 있을 뿐이었다. "뭐, 늦게 배운 도둑질에 밤새는 줄 모른다는 말도 있기는 하지만 말이 야, 이거 좀 해도 너무 한다 싶지 않아? 여자한테 빠지는 건 좋아. 아니, 도박이나 술에 쩔어 사는 것도 뭐라고 하진 않겠어. 나야말로 장사에 미 쳐있는 녀석이라는 거, 나도 잘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건 할 일을 다 한 후의 일이잖아?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라이짐이라는 녀석은 틀림없이 해야 할 일을 무엇보다 먼저 하는 녀석이었다고. 이렇게 멍하게 있는 녀 석이 아니라." 라이짐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촛점 없는 눈으로 책상을 계속 퉁기고 있을 뿐이었다. "반란군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 테이르의 날에 뭔가 꾸미고 있는 게 틀림없다고. 내가 그랬지? 녀석들이 테이르의 날에 무슨 짓을 할 것 같다 고 말이야. 이제 거의 확실해지고 있어. 내가 암호문을 받았다고. 거기에 뭐라고 적혀 있었는지 알아?" "마지막 환상." 라이짐이 말했다. 하진은 그제서야 라이짐이 자신의 말을 전혀 듣고 있 지 않았다는 걸 알아채고는 라이짐의 양어깨에 손을 얹었다. "내 눈을 봐. 라이짐.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란 걸 모르겠어?" "그만. 난 지쳤어. 그냥 이제는 좀 쉬고 싶어." "해야 할 일은 어떻게 하고?" "네가 하면 되잖아." 라이짐의 말에 하진은 완전히 할 말을 잊고 말았다. 도대체 어떠한 방 법을 쓴다고 해도 라이짐을 원래의 라이짐으로 되돌릴 수는 없을 것 같았 다. "넌 지금 뭔가를 잃어버리고 있어. 그게 뭔지 알아?" 라이짐은 대답하지 않았다. 머릿속에 들어 있는 것이라고는 마리에 대 한 생각 뿐이었기 때문이었다. 역시 라이짐은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게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 것은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의 일이었다. 그 날 저녁, 프라브리티의 골목 한 구석에는 예전에 만났던 사내가 다 시 만남을 가지고 있었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판자 뒤의 사내가 불러 낸 것이었지만, 부른 이유는 지난 번과 달랐다. "콧노래에 가사가 있느냐고 묻지 않겠네." 판자 뒤에서 사내가 말했다. "그건 원칙에 어긋나지 않습니까?" 하얀 가발의 사내가 물었다. 그러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판자 뒤에 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어리석은 일이었어. 왜 내가 일하는 곳으로 찾아 왔는가? 내가 거기 없었길래 망정이지 있었다면 당장 자네를 내 쫓았을 거네. 아니, 어쩌면 지금쯤 자네는 대청하의 바닥에 가라앉아 물고기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 을지도 모르지." 사내가 말했다. 하얀 가발을 쓴 사내는 이 말에 그저 가만히 있을 뿐이 었다. "이유를 알고 싶으십니까?" "이유가 있었나?" "그렇다면 절 보십시오." 하얀 가발의 사내가 말하자 판자에 뚫려있는 구멍으로 사내의 눈동자가 보였다. 다음 순간 번득이는 빛과 함께 단검이 허공을 가르면서 날아갔 고, 사내는 비명소리를 삼키면서 이마 한 복판에 단검이 박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하얀 가발을 쓴 사내는 천천히 걸어가 사내의 이마에 박혀 있는 단검을 뽑았다. 사내는 힘없이 바닥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하얀 가발의 사내는 바닥에 엎드려 있는 사내를 발로 뒤집었다. 이마 한 복판에 생긴 흉터가 사내의 죽음을 확인시켜 주고 있었다. 사내의 코 밑에는 애지중지 했을 수염이 자라나 있었다. "라이짐을 탓하라구." 하얀 가발의 사내는 이렇게 말하고는 사내의 품에서 돈이 될 만한 것을 챙긴 후 자리를 떠났다. 어스름이 서서히 밝아오고 있는 새벽이었다. 어두운 빛을 띄고 있는 구 름들은 포복이라도 하는 듯 낮게 깔려 있었고, 아직 남아있는 별들은 위 태롭게 깜박이면서 서서히 사라져 가고 있었다. 늘 그랬듯 햇빛은 참호 속을 먼저 비춘다. 그렇기 때문에 하루가 열리 는 것을 가장 먼저 알아차리는 것은 참호 속의 말단 초병들이다. "언제나 이 시간이면 졸립단 말이야." 푸르게 변해가고 있는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한 초병이 말했다. 초병은 고참인 듯, 전투모를 삐딱하게 쓰고 비어져 나온 머리카락을 함부로 긁적 이고 있었다. "그, 그렇습니까?" 솜털이 채 마르지 않은 맞은 편의 초병이 잔뜩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 다. "빌어먹을 가고일인지 뭔지 하는 녀석들. 당장이라도 나타날 것처럼 굴 다가는 이렇게 잠잠하고... 벌써 며칠째 잠잠하단 말이야, 이거. 위에서 근무 시간을 두 배로 늘리기가 무섭게 말이지. 도대체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모르겠단 말이야? 하긴,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야 더 머리 가 복잡하겠지만." "예, 알겠습니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고참 병사의 말에 신참은 이렇게 대답했다. 고 참은 귀엽다는 듯 피식 웃음을 던졌다. "너 애인있냐?" "예. 그렇습니다." "프라브리티?" "국경의 시스코 출신입니다." "그래. 그 변방에서 수도방위군으로 왔으니 운수 풀렸다 싶었겠네. 애 인은 편지라도 자주 보내냐? 딴 놈팽이 만난 건 아니고?" "...예." 자신 없다는 듯한 목소리였다. 고참병은 신참병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전투모가 신참병의 머리 위에서 아무렇게나 움직여 금새 신참병을 흐트러 진 자세로 만들어 버렸다. 신참병은 다시 바로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대로 있자니 안 될 것 같아서 당혹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딴 놈팽이가 있건 없건 신경 쓰지마. 여기서 살아 돌아가면 만날 수 있을 테니까." 고참병이 웃으면서 신참병에게 말했다. 고참병은 이제 푸른빛이 넓게 퍼져 나가고 있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비라도 내리려는지 멀리 보이고 있는 구름이 서서히 프라브리티를 향하여 몰려오고 있었다. "저, 저기..." "응?" 신참병의 말에 고참병은 참호 밖으로 보이는 지평선 쪽으로 시선을 두 었다. 구름 밑으로 먼지가 일고 있었다. 자욱한, 그래서 마치 안개처럼 보이는 먼지였다. "빌어먹을. 왔어!" 고참병은 이렇게 말하고는 신호용 연금술사의 등을 집어 던졌다. 연금 술사의 등은 깨지면서 푸른 연기를 하늘로 토해내었다. 하지만 고참병의 신호는 꽤 늦은 편이어서 이미 여러 곳에서 푸른 연기는 하늘을 향해 솟 구치고 있었다. "어, 어떻게..." "눈이다. 눈을 쏴. 한 순간 밖에 없어. 훈련 한 그대로만 하면 되, 알 겠지?" 고참병이 석궁을 손에 집어들면서 말했다. 신참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석궁을 장전하였다. 신참은 뒤를 돌아보았다. 참호 후방 진지에서 석궁과 칼, 창으로 완전하게 무장하고 있는 병력들이 일렬로 길게 늘어서 전투 준비를 갖추고 있었고, 이미 예비병력들도 전투 준비를 갖추고 참호 안으 로 뛰어들었다. "밤새 고생 많았어. 이번만 막아내면 녀석들, 당분간 오지 않을 거야." "힘내자고. 이번 방어 끝나면 예비 군단과 교체된다고 하니까 말이야." 참호 안에 들어온 석궁수들이 이런 말로 밤새 경계근무를 선 고참병과 신참병에게 위로의 말을 던졌다. 하지만 멀리 날리고 있는 흙먼지 앞에서 그런 위로의 말은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예비 병력이 참호안에 투입되는 일이 끝날 즈음, 마지막으로 천천히 뮤 에 탄 채 등장한 것은 오이디프 장군이었다. 도저히 자다가 일어났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 단정한 모습이었고, 새벽바람이 장군의 망토를 흔 들어 위엄을 더해주고 있었다. 참호 안에 있던 고참병은 그런 장군의 모 습을 바라보면서 역시 지휘관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섭냐?" 고참병이 신참병에게 물었다. 신참병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 혀 있었다. "아, 아닙니다!" "무서워 할 필요 없어. 배운 대로만 하면 살 수 있을 테니까. 알겠지?" "예, 알겠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고참병의 손도 떨리고 있기는 신참이나 마 찬가지였다. 멀리서부터 먼지와 함께 가고일이 다가오고 있는 광경을 움직이지 않고 바라보고 있는 일은 참으로 강한 인내심을 요하는 일이었다. 멀리서 보았 을 때, 가고일의 수는 얼마 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현재 보이고 있는 가고일의 수는 지금까지 수도 경비군이 마주쳤던 그 어떤 가 고일 무리의 수보다도 많았다. "워, 원래 저렇게 많은가요?" 신참이 물었다. 고참병은 석궁을 들어 조준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냐. 평소보다 훨씬 적어. 걱정하지마." 눈을 겨냥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고참병이 말했지만 석궁을 잡고 있는 손은 조준이 어려울 지경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고참병은 참호 위에 설치 된 지지대에 석궁을 얹고 거의 가볍게 손을 얹다시피 해서 조준을 했다. 가고일들은 점점 더 다가오고 있었다. "공격!" 오이디프 장군이 소리치자 석궁수들로 이루어진 제 일 백부의 백부장이 '제 일렬 발사!'하고 소리쳤고, 참호안에 있던 석궁수들의 석궁에서 일제 히 화살이 발사되었다. 순간 바람을 찢는 듯한 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 졌고, 화살들은 석궁의 사정권으로 들어온 가고일들의 무리에 떨어졌다. 하지만 가고일의 움직임은 둔해지지 않았다. 참호 안에 있던 제 일 석궁수였던 신참병과 고참병은 후열로 물러서 장 전을 시작했다. 석궁은 보통 힘으로 장전이 어려울 만큼 강한 시위를 가 지고 있어서 보통의 병사들은 양발로 석궁을 누르고 팔로 당겨 장전을 하 는 훈련을 평소에 지겨우리만치 해 두어야 했다. 게다가 힘만으로 하다가 는 활시위가 얼마나 날카로울 수 있는가를 배우기 일쑤였다. 팔뚝에서 흘 러나오는 피라는 수업료를 지불하고서 말이다. 그런 이유로 고참병들은 걸핏하면 트집을 잡아 신참들에게 팔굽혀펴기를 시키곤 했다. 그래야 살 아남을 수 있으니까. "제 이열 발사!" 백부장이 소리쳤다. 평소에 부하들에게 틈만 나면 사소한 잔소리를 하 도 많이 해서 할머니 백부장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백부장이었지만 막상 전투 상황이 닥쳐오자 할머니의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우 렁찬 목소리로 부하들을 호령하는 군인이 되었다. 두 번째 석궁수들이 화살을 발사하자 가고일들의 움직임이 둔해졌다는 것이 눈에 뜨일 만큼 드러났다. 아마도 피해를 입기는 한 모양이었다. "제 삼열 발사!" 세 번째 화살이 발사되었을 때도 신참병은 아직 장전을 마치지 못하고 있었다. 고참병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신참병의 석궁을 빼앗아 대신 장 전을 해 주었다. 양 발로 화살을 밟고 힘껏 잡아당기는 동작은 막힘없이 물 흐르듯 흘렀다. "죄, 죄송합..." "눈이다! 눈을 쏴!"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9836/19898 ━━━━━━━━━━━━━━━━━━━━━━━━━━━━━━━━━━━━━━━━ 제 목:[탐그루] 슬픔이라는 이름의 빛 264 관련자료:없음 20/20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4-29 21:21 조회:809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고참병은 신참병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실제로 눈에 석궁을 맞은 가고 일이 휘두르는 발톱에 당한 병사들의 수도 상당 수 있기는 했지만, 고참 병은 지금 신참병에게 마치 눈만 맞추면 모든 일이 다 해결 될 것이라는 투로 말했다. "제 일열 발사!" 다시 한 번 가고일들에게 고참병이 석궁을 발사했을 때, 이미 가고일들 은 숨소리가 들릴 만큼 가까운 거리에 다가와 있었다. 가고일의 모습을 본 적은 몇 번 있었지만,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분명하게 본 것은 처음 이었다. 붉은 몸뚱아리에 화살이 온몸에 박힌 채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가고일의 모습은 끔찍하다 못해 참혹하기까지 했다. 고참병은 가고일의 눈을 겨냥한 후, 석궁을 발사하였다. 고참병은 자신이 조준했던 가고일이 얼굴을 움켜쥐고 허리를 뒤로 꺾는 것을 보았다. "며, 명중이다!" 고참병은 소리치면서 신참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 순간 신참병의 석 궁은 백부장을 향하고 있었다. "뭐, 뭐하는..." 말과 동시에 고참병은 신참병의 석궁을 빼앗으려고 했지만 말도, 행동 도 너무 늦어버린 후였다. 화살은 백부장의 눈에 박혔고, 무시무시한 위 력의 석궁은 백부장을 그대로 뒤로 날려버렸다. 고참병이 뭐라고 더 말해보기도 전에, 신참병은 허리에서 칼을 뽑아들 어 고참병에게 날렸다. 신참병의 눈은 촛점을 잃고 있었고, 입에서는 침 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칸이... 돌아온다..." 신참병은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고참병을 베었다. 고참병은 비명소리 한 번 제대로 지르지 못한 채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그러면서도 고참병은 할머니 백부장, 다시는 잔소리하지 못하겠군,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도저히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라이짐이 마리를 찾은 것은 수도방위군이 거의 궤멸되다시피 한 바로 그날 저녁이었다. 수도방위군은 백부장 셋과 병력의 육 할을 잃고서야 겨 우 가고일들의 공격을 방어해 낼 수 있었다. 살아남은 사 할의 병력 중에 서도 절반은 전투 불능상태가 되어 버렸고, 덕분에 국방장관 츄바카는 밤 새워 영주에게 보고할 보고서를 준비해야만 했다. 에이스를 통해 복귀 중 에 이 소식을 듣게 된 아케르는 행군 속도를 두 배로 높혔고, 수도의 장 정들은 밤새 영문도 모르고 수도 방위군 병력으로 징집되었다. 갑작스러 운 가고일의 공습으로 수도 방위에 구멍이 뚫린 것이나 마찬가지 형국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녀석들이 어마어마한 수로 공격해 들어올 거라고는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을 겁니다. 수도 방위 사령관도 몇 안 되는 가고일 이라면서 별로 신경쓰지 않는 투였거든요." 라이짐은 마리에게 이렇게 대답해주었다. 마리가 라이짐에게 갑자기 수 도에 비상령이 떨어진 까닭을 물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군요. 그럼 수도 사령관은 무사하신가요?" "중상이라고 하더군요. 직접 진두지휘 하다가 가고일의 발톱에 당했다 고 들었어요." 라이짐은 이렇게 태연한 척 대답하고는 있었지만, 실은 몹시 불안한 상 태였다. 오늘 마리를 찾아온 이유가 이런 시시껄렁한 이야기나 하자고 온 게 아닌 까닭이었다. "상당히 잘 알고 계시네요." 마리가 웃으면서 말했다. 라이짐은 마리의 웃음을 자주 보아왔지만 지 금까지의 웃음과는 사뭇 느낌이 다른 미소였다. "아, 예. 아무래도 나라 일을 맡아서 하다 보니까 들리는 이야기가 좀 있지요. 저도 귀는 달려 있답니다." 라이짐은 대충 이렇게 농담으로 얼버무리려고 했지만, 마리의 얼굴은 좀 심하게 굳어있다 싶을 정도로 경직이 되어 있었다. "아무리 나라 일을 하시는 분이라고 해도 수도 사령관이 무슨 생각을 했다, 이런 식으로 말씀하시는 건 좀 이상해요." "그야, 제가 만나 봤으니까...아니, 제 말씀은..." 라이짐은 대화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지만 이 미 때는 늦은 후였다. "역시, 지체 높으신 분은 다르군요." 의미를 짐작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라이짐은 어떻게든 분위기를 수습해 보려고 말을 얼른 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화가 끊겼다가는 어떻게 분위 기가 바뀔 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무슨 말씀을 그렇게... 아닙니다. 저는 탐그루 출신 평민에 불과합니 다. 지체가 높다니요. 그저 군복을 입고 있다 뿐이지 별다른 건 없다고 생각해요. 평민이 귀족과 평등해 질 수 있는 곳은 전장 뿐이니까, 뭐 오 해를 하실 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남자들은 다 똑같아요. 누구든 처음에는 원하는 게 없다면서 절 도와 주려고 하지요. 하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자신이 투자한 게 아깝다고 생 각해요. 그리고 뭐든 얻으려고 하지요. 라이짐 님도... 그런가요?" 마리는 라이짐이 말을 맺을 시간도 주지 않고 이렇게 물어왔다. 라이짐 은 답답했다. 마음을 전하고 싶었을 뿐인데 이렇게 어려운 난관에 부딪치 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해보지 못한 까닭이었다. "아, 아닙니다. 제가 바라는 게 있다니요. 저는 그저..." "아니라면 왜 저를 찾아오시는 거지요? 역시 마찬가지 생각 아니신가 요?" 마리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라이짐은 가슴 한 구석이 얼어붙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당장이라도 무너져 버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라이짐은 이번엔 이야기를 잇지 못했다. 어색한 침묵이 둘 사이에 놓이 고 말았다. "... 죄송해요. 좋지 않은 일이 있었어요." 한 참 사이를 둔 후에 마리가 이렇게 말했다. 라이짐은 그게 무슨 일이 냐고 묻지 않았지만, 나름대로 짐작을 해 볼 수 있었다. "마리. 저는 그런 놈들과는 달라요. 제 동생이 먼 곳에 있다는 말씀, 드린 적이 있지요? 아마 제 동생도 마리같은 상황일거라고 생각했어요. 그 뿐이에요. 바라는 게 있다니요." 라이짐은 먼저 이렇게 털어놓았다. 사실 마리에게 처음 호감을 가지게 된 이유도 거기에 있었으니까. "늘 폐만 끼치는 군요, 라이짐 님께는." 마리는 이렇게 말하면서 책상 서랍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담배 를 피우지 않는 라이짐은 아기가 있는데 담배를 피워도 좋을까 라는 생각 이 들었다. 담배 냄새는 고약하다고 늘 생각해온 라이짐이었다. "사장님이 돌아가셨어요. 강도에게. 돈 몇 푼 때문에 사람을 죽이다 니... 전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담배를 한 모금 빨아들이면서 마리가 말했다. 라이짐은 고개를 끄덕였 다. "아니에요. 거짓말이에요. 저도 돈 몇 푼 때문에 이러고 있는 건지도 모르지요. 말씀드렸지요? 그 날 혼자 집무실에 남게 되었을 때 돈을 가져 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전 그런 사람이에요." "마리..." 마리는 라이짐이 뭔가 말하려고 하자 담배를 손에 든 채로 라이짐에게 안겼다. 라이짐은 너무나도 급작스러운 일인지라 손을 어떻게 해야 좋을 지 몰라 어색하게도 양손으로 바닥을 짚고 말았다. "말해 보세요. 제가 예쁜가요? 그래서인가요?" 라이짐은 전에도 이런 상황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에이스로부터 들은 적 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라이짐은 그때 느꼈던 것 보다 백 배는 더 강렬 한 욕망이 가슴 속에서 끓어 오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마리..." 마리는 바닥을 짚고 있던 왼손을 들어 마리의 머라카락에 가지고 갔다. 마리의 머리카락은 마치 물결처럼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갔다. 정말이지 가느다란 머리카락이었다. 라이짐은 머리카락을 훑고 올라가 마리의 귀에 손을 대었다. 마리의 귓불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고, 라이짐은 귓불이 내고 있는 열기를 손끝으로 감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마리는 라이짐의 가슴을 밀치고 뒤로 물러섰다. "돌아가 주세요." 마리는 단호하게 말했다. 담배 연기는 마리의 손끝에서 천장을 향해 올 라가고 있었고, 라이짐은 그 연기처럼 힘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마치 죽으 라는 명령을 받은 사람처럼 힘없이 밖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라이짐은 한 순간 뒤를 돌아보았다. 마리는 바닥을 바라보면서 천천히 담배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깃털 같은 여자다. 라이짐은 생각했다. 손바닥에 들어올 듯 천천히 허공에서 내려오다가도 잡으려고 하면 다시 하늘로 솟구쳐 오 르는 깃털. 라이짐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발을 질질 끌며 집무실로 돌아 갔다. 돌아가는 길에 라이짐은 상점에 들러 마르게르 젤러를 한 병 샀다. 그러지 않고서는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잠에서 깨어나자 라이짐은 머리가 깨어질 듯 아파왔다. 혼자서 그 독한 마르게르 젤러를 한 병 다 비웠으니 그럴 법도 했다. 라이짐은 문득 구토 가 밀려오는 것을 느꼈고, 황급히 허리를 숙여 토해내려고 하였지만 먹은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목구멍을 넘어 오는 것이라고는 한 모금의 푸 르스름한 액체 밖에는 없었다. "잘 한다, 라이짐." 하진이었다. 하진은 팔짱을 끼고서 라이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언제부터... 있었어?" "너 잠들어 있을 때부터." 하진은 절룩이면서 걸어와 책상에 몸을 기댄 후 말을 이었다. "아케르 장군님이 내일 복귀하신다. 언제까지 이럴 생각이야? 이제 정 신 차릴 때도 되지 않았어? 까짓 여자 하나 때문에..." "여자 때문에 그러는 거 아니야." "그럼 뭐냐? 네가 일하기 싫어서 꾀부릴 사람은 아니고, 그렇다고 세상 을 살아가는 게 너무 힘겨울 나이도 아니야. 여자 말고는 답이 없는데?" "빈정거리지 마." "명령이라면 듣지. 하지만 친구로서 충고하는 데, 내가 아는 라이짐은 이런 사람이 아니었어. 정신을 좀 차리라고, 친구야." "...그래." 라이짐은 몸을 일으키면서 말했다. 하지만 정작 힘겨운 것은 두통도, 숙취도 아니었다. 그것은 가슴 한 구석에서 빠져나간 그 무엇이었다. 라 이짐은 잠시 휘청거렸고, 하진이 움직이기도 전에 에이스가 달려가 라이 짐의 몸을 부축했다. "고마워, 에이스." 라이짐은 몸을 가누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러자 에이스가 라이짐의 말 을 받았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운명을 예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태어나지 요. 라이짐님도 그러신 것 뿐입니다." "어? 에이스가 저런 말도 할 줄 알았네? 이거 의외인걸? 주인이 돌아서 같이 돈 거 아니야?" "하진!" "왜? 한 방 치려고? 좋지. 좋아. 아마 백발영웅의 명성을 아주 드높힐 수 있는 기회가 될걸?" 당장이라도 멱살을 잡을 기세로 달려드는 라이짐에게 하진은 이렇게 빈 정거리면서 말했다. "멈추어 서면 죽는 새가 있는 것처럼 멈추어 서면 죽는 사람이 있지 요." 에이스가 라이짐으로부터 물러서면서 말했다. 하진과 라이짐은 동시에 에이스를 바라보았다. "그래. 라이짐, 저 말은 맞는 말이야. 넌 지금 멈추어 서 있는 거라고. 무슨 말인지 알아? 몸에서 기운이 완전히 빠져버렸어. 칼맞은 뮤처럼 말 이야." "그건 아닙니다, 하진 님. 라이짐 님은 다만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 다는 걸 인정하기 싫으신 겁니다." 에이스의 말에 하진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뜻인지 하진으 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언젠가 말씀 드렸지요. 일단 결정이 내려지면, 후회는 소용없는 법이 라고." 에이스가 라이짐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라이짐은 그런 에이스의 눈빛에 서 몸에서 소름이 돋는 것 같은 끔찍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그런 느낌 이 왜 들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전 알고 있습니다. 라이짐 님께서 자신의 길로 돌아오실 것이 라는 것을." 에이스가 말했고, 라이짐은 침대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에이스. 그런 헛소리 그만 하고 라이짐한테 따뜻한 물이라도 한 잔 가 져다 줘." 하진이 말하자 에이스는 대답 없이 집무실 밖으로 나섰다. 하진은 에이 스가 나가자 이렇게 말을 시작했다. "몰랐어. 검은 엘프 족이 저런 말도 할 수 있다는 건." "영혼이 있는 건 누구라도 말할 수 있는 법이야."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9837/19898 ━━━━━━━━━━━━━━━━━━━━━━━━━━━━━━━━━━━━━━━━ 제 목:[탐그루] 슬픔이라는 이름의 빛 265 관련자료:없음 19/19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4-29 21:21 조회:932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핏. 네가 마법에 관심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정보부장님이 신경쓰셔 야 할 건 따로 있을 텐데. 이거나 받으셔, 정보부장님." 라이짐에게 종이 뭉치를 건네면서 하진이 말했다. "내일 장군님 돌아오시면 네가 보고 드려야 할 문서야. 고맙다는 말은 필요없어. 그런 말 들으려고 한 거 아니니까." 하진은 이렇게 말하면서 집무실 문을 열었다. 아침햇살이 눈부시게 들 어왔다. 라이짐은 하진에게 뭔가 말을 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도 저히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라이짐. 난 어려운 말은 잘 모르지만 에이스 말을 들어보니까 그리 오 래 걸리진 않을 것 같다." "... 나도 장담 못해." "장담하라고 하지 않았어. 그냥 이겨내라고 했지." 하진은 이렇게 말하고는 집무실을 떠났다. 텅 빈 집무실에 홀로 앉아있 는 라이짐에게 빈 공간과 침묵은 견디기 어려울 만큼 무겁게 내려앉고 있 었다. 보고를 마친 라이짐은 이곳 아케르의 집무실이 매우 넓다는 생각이 들 었다. 사실 아케르의 공관 자체가 그리 넓은 곳은 아니었지만, 내부에 장 식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집무용 책상과 책꽂이 하나를 빼면 별다른 가구 하나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오랜 야전 생활 때문일 까. 아케르는 화려한 장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아케르의 옆에는 순 무와 타호루가 자리하고 있었다. 일의 성격상 라이짐은 아케르를 독대 할 경우도 종종 있었지만 대개의 경우에는 라이짐도 아케르를 독대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아케르를 독대할 수 있는 사람은 라이짐과 순무, 그리고 타호루 정도 뿐이었다. "좋았네. 그러니까 사비치는 가고일을 마법으로 이길 방법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는 말이로군." "예, 그렇습니다." 라이짐은 가고일의 시체를 보고 사비치에게 전해주었던 일에 대한 아케 르의 의견에 이렇게 대답했다. "장군님. 내일 영주님께 어떻게 보고드릴 생각이십니까?" 순무가 물었다. 아케르는 순무를 향해 눈살을 찌푸렸다. 굳이 물을 것 도 없지 않느냐는 듯한 태도였다. "타호루. 사비치가 마법으로 가고일들을 물리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가?" "시간만 있다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케르는 순무의 말을 무시하고 타호루에게 물었다. 순무의 얼굴은 별 다른 표정의 변화가 눈에 뜨이지 않았다. 라이짐은 순무가 무엇을 생각하 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순무의 얼굴은 이제 세상 다 산 사람의 그것처럼 허탈하기 그지 없어 보였다. "시간이라. 문제는 시간이로군." 아케르는 이렇게 말하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제 그 예의 '결정'을 내리려는 모양이었다. "자네들, 혹시 카를로스 장군이 했던 말을 알고 있나?" 한 참이 지난 후 아케르는 이렇게 엉뚱한 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아케 르의 물음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의도를 알 수 없는 질문이었기 때 문이었다. "카를로스 장군은 이런 말을 남겼지. 정치건 종교건 마법이건 모두 칼 로 해석될 수 있다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뜨거운 열쇠'도 다음 세상을 열어갈 칼에 지나지 않는다네. 우리는 그저 휘두르기만 하면 되는 걸세." "'뜨거운 열쇠'에 대해서는 스파일 군도 상당부분 알고 있는 것 같습니 다. 하지만 반발이 심하다고 들었습니다." 라이짐이 아케르의 말에 바로 이어서 말했다. 이 부분은 하진이 준 보 고서에 포함되어 있는 부분이었다. 하진은 신무기에 대한 고위층의 태도 에 대해서 자세히 조사해 왔다. 많은 장군들이 칼과 화살로 마물들을 쓰 러뜨렸던 강병의 전통을 깨는 것에 대한 반발심을 가지고 있다는 보고였 다. 새로운 무기의 등장은 지금껏 자신들이 쌓아온 경력을 물거품으로 돌 리는 힘을 가지고 있다. 아마도 장군들은 그렇기 때문에 신무기의 도입을 꺼리는 것이라고 하진은 분석을 덧붙였다. "늙은이들. 늙은이들은 하나같이 어리석어. 그들이야말로 빨리 사라져 버릴수록 역사에 도움이 될 걸세. 나는 달라. 이곳 프라브리티에서 '뜨거 운 열쇠'로 진보의 역사를 열어갈 자신이 있다네." 라이짐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라이짐은 아케르라면 굳이 저런 말하 지 않아도 틀림없이 세상을 바꾸어 갈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굳이 저런 말을 하는 이유는 아마도 자신이 보고하는 태도에서 뭔가 좋지 않은 낌새 를 차렸기 때문일 것이었다. "세상은 변하고 있네. 그리고 역사는 언제나 진보하는 세상에 적응하는 사람을 돕는 법일세." 라이짐은 알겠다고 대답은 했으나 어딘지 아케르의 말이 미심쩍다는 기 분이 드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탐그루에서 중상을 입었다가 살아난 후, 아케르는 어딘지는 알 수 없었지만 틀림없이 변했다고 라이짐은 생각했 다. 말수가 많아졌고, 가식적인 태도를 보일 때도 종종 있었다. 용병단에 서 보았던 순수한 열정으로 불타던 아케르의 모습과는 점점 멀어지고 있 는 듯한 아케르였다. "세상에는 미련을 두어야 할 일과 그렇지 않은 일이 있다네. 사내라면 미련을 두어서는 안될 일을 빨리 포기할 줄 알아야 하지. 라이짐. 자네 용병단 시절에 했던 맹세를 기억하는가?" 라이짐은 훈련병의 마지막 날 아케르가 했던 말을 떠올려 보았다. 아케 르는 모두의 생명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칠 수있는 사람만 이곳 용병단 에 남으라고 말했다. 지금 남아있는 라이짐의 동기라고는 하진 하나였다. 나머지는 모두 죽거나, 운이 좋은 경우에야 목숨만 부지한 채 용병단을 떠났다. 죽은 동기들은 과연 모두의 생명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바친 것일까. 라이짐은 수르카를 생각해 보았다. 수르카는 아무리 반란군이라 고 해도 함부로 생명을 해쳐서는 안 된다고 했고, 더 이상 사람을 베면서 살 수 없다는 말을 남기고 용병단을 떠났다. 지금 수르카는 없다. 수르카 는 나와 생각이 달랐기 때문에 다른 길을 간 것이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자네는 모두의 생명을 위해 지금 이곳에서 싸우고 있다네. 자네는 비 록 작고 의미 없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실제로 자네는 아주 중 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네. 그건 자네도 알고 있을 테지만 말일세." 아케르의 목소리는 용병단 시절 따스하게 자신을 감싸주었던 여러 순간 들을 떠올리게 했다. "돌아가 보게. 내일 바로 출정하겠네." 내일 바로 출정이라는 말에 라이짐은 약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싸 워야할 할 시기와 기다려야 할 시기를 결정하는 데에 탁월한 능력이 있는 아케르의 판단이니 옳기야 하겠지만, 국경에서 이곳까지 행군해 온 병력 을 바로 출정시킨다는 것은 라이짐 생각에도 조금은 무리일 것이라는 생 각이 들었다. "장군님. 긴 행군으로 병력들은 지쳐있는 상태입니다. 제가 생각하기 에..." "순무. 난 자네의 생각을 듣겠다고 말하지 않았는데." "하지만..." "지친것은 병력이지 뜨거운 열쇠가 아니야." 아케르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가득 담겨져 있었다. 평소의 순무같으면 이정도로 그쳤겠지만, 순무는 마치 뭐에 홀리기라도 한 듯 계속 말했다. "하지만 이렇게 서두르실 이유는 없지 않겠습니까? 보급이나 혹은 사기 의 측면에서 본다고 해도 내일 출정은 무리입니다. 아니, 불가능합니다. 단원들, 아니 병력들은 적어도 삼일, 아니 일주일은 쉬어야 전투력을 발 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도 아주 기본적인." "그 정도 시간이 지난다면 사비치가 먼저 나서게 될 거야. 그렇지 않은 가, 타호루?" "예." 타호루가 대답했다. 그 순간 순무의 작은 눈동자가 깜박였다. 라이짐은 순무의 모습이 이렇게 초라하게 보인 적이 없었다. "뿐만 아닐세. 라이짐이 보고하는 걸 듣지 못했는가? 지금 나를 모함하 는 세력이 프라브리티에, 아니 이곳 스파일 전체에 얼마나 늘어나고 있는 지! 그들은 나의 개인적인 약점은 물론이고 아주 사소한 꼬투리라도 잡아 내려고 안달일세. 난 느낄 수 있어." 아케르의 말은 라이짐이 올린 보고서를 읽고 한 말이었다. 차마 구두로 보고하지는 않았지만 아케르의 친형이었던 테이르의 이름을 거론하면서 아케르의 사상적 배경을 의심하고 있는 고위층들의 험담 내용이나 아케르 가 결혼을 하지 않은 이유가 동성연애자이기 때문일 것이라는 억측, 그리 고 아케르의 용병단 시절의 경력을 언급하면서 돈만 준다면 영주도 암살 할 사람이라는 소문까지, 보고서에 담겨있는 내용은 다양했다. "기회야. 내 명예를 되찾고 우리의 꿈을 실현 할 수 있는 기회란 말일 세. 우리에게 지금 영주의 신임을 얻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몰라 서 하는 소리인가, 지금?" 아케르는 숨도 쉬지 않고 거의 소리치듯 말했다. 냉정한 아케르지만 본 인을 험담하는 내용을 듣게 되자 몹시 불쾌한 모양이었다. 잠시 숨을 돌 려 마음을 가라앉힌 다음, 아케르는 천천히 말했다. "순무, 자네 너무 말이 많아졌어. 결정이 내려졌다는 게 뭘 의미하는 지 모르나?" 아케르는 결국 이렇게 굳이 덧붙이지 않아도 될 말을 덧붙여서 가뜩이 나 초라해 보이는 순무의 기를 꺾어버렸다. 순무는 입을 다물었고, 라이 짐은 목례를 한 후 아케르의 집무실을 나왔다. 어느 새 하늘은 온통 캄캄 했다. 라이짐은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구름이 잔뜩 꼈는지 달빛조차 보 이지 않는 밤이었다. 어쩐지 참담한 심정이었다. 라이짐은 머릿속이 온통 혼란해서 좀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정보 부장이라는 이유로 라이짐은 출정하지 말 것을 명령받은 상태였고, 실제 로도 라이짐이 더 이상 가고일 토벌작전에서 해야 할 일은 없었다. 하지 만 순무도 출정하지 말 것을 명령 받은 것은 마음에 걸리는 일이었다. 신 무기를 도입한 장본인이고, 또한 신무기 운용에 있어서 가장 뛰어난 능력 을 가지고있는 순무가 이번 작전에서 제외된 것은 순전히 보고 때 보여준 태도 때문일 것이었다. 라이짐이 한참 뒤척이며 잠 못이루고 있던 중, 부 연 빛이 눈 앞에 아른거리며 에질리가 나타났다. "라이짐 님.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고 계시는군요." "자고 있을 때는 부탁이니까 그렇게 불쑥불쑥 나타나지 마." 라이짐은 화를 겨우 참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무리 반지의 정령이라 지만 이렇게 불쑥불쑥 나타나 자신을 바라보는 것은 그리 기분 좋은 일일 수 없었다. 꼭 감시라도 당하고 있는 것처럼 기분 나쁜 일이었던 것이다. "후회하시나요?" "뭘?" "이곳에 오신 걸. 수르카 님을 부러워하고 계신가요? 그런 건가요?" "아니야. 쓸데없는 소리하지 마." 라이짐은 이렇게 대답하기는 했지만 말의 힘은 무서운 것이어서 라이짐 은 자신이 정말로 수르카를 부러워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 다. 리콜 샤일록 암살을 명령한 순간 라이짐은 사람을 죽이면서 살아간다 는 일이 어떤 것인지 더 명확하게 알게 되었다. 라이짐은 그저 에이스를 통해 카이스에게 리콜 샤일록을 죽이라고 말한 것 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그 결과에 대해서 라이짐은 잘 알고 있었다. 살아 움직이는 사람 하나가 자신의 말에 따라 살해된 것이다. 페르도 부인이 라이짐에게 말했듯 힘이 있는 자는 누군가를 없애야 한다고 결정만 내려지만 언제든 없앨 수 있다 는 걸 라이짐은 이번에 체험할 수 있었다. 문제는 방법의 문제 뿐인 것이 다. 그리고 라이짐은 그런 결정을 내릴 만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리콜 샤 일록의 일을 통해 깨달을 수 있었고, 그런 위치를 감당하기란 어려운 일 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도 리콜 샤일록의 일을 통해서였다. 그날 도저히 참지 못하고 마리를 찾아간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결정의 순간이 다가오면 후회는 소용없다는 말을 아시나요?" "들은적 있어." 라이짐은 이렇게 대꾸했다. 사람을 죽이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 다. 얼굴을 맞대고 칼을 휘두르는 일은 차라리 나은 일이었다. 오히려 이 렇게 말 한마디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이 라이짐을 힘겹게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길을 선택했다는 사실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은 라 이짐이었고, 후회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것 도 라이짐 본인이었다. "미련을 가져도 좋은 일인가요?" 에질리는 라이짐의 마음을 헤아리고 있는 것이 틀림 없었다. 라이짐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은 포기가 빠를 수록 좋은 법입니다." 에질리의 말뜻을 라이짐은 매우 잘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개의 경 우가 그렇듯이, 안다는 것이 문제의 해결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지금 라이짐에게는. "나도 알아." 라이짐은 푸념하듯이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이것도 아시겠군요. 가슴이 명령하는 것이 늘 옳지만은 않다 는 것을. 어쩌면 라이짐 님은 마법에 걸려있는지도 모릅니다." 에질리의 말은 여기까지였다. 라이짐이 마법이라니, 하고 물으려 했지 만 에질리는 라이짐의 명령이 없어도 나타났던 것처럼 자신의 의지로 사 라져버렸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9896/19898 ━━━━━━━━━━━━━━━━━━━━━━━━━━━━━━━━━━━━━━━━ 제 목:[탐그루] 슬픔이라는 이름의 빛 266 관련자료:없음 24/24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5-01 00:08 조회:875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출정식이 끝나고, 아케르가 자리를 비우자 라이짐은 집무실을 하진에게 맡긴 후 또 다시 마리를 찾아갔다. "라이짐. 이제 그만 둘 때도 되지 않았어?" 하진이 말했지만 라이짐은 그저 이렇게 대꾸했을 뿐이었다. "부탁해." 하진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잠시 동안 아무 말도 없다가 마리에게 향하 고 있는 라이짐에게 이렇게 말했다. "젠장. 명령이라고 말했으면 뭐라고 한 마디 해 보겠지만 그렇게 처량 한 얼굴로 말하면 내가 할 말이 없잖아. 빌어먹을." 라이짐은 발걸음을 옮겼다. 하늘은 청명했다. 아마 지금 쯤 프라브리티 수도 방위군과 아케르 군단은 교체 작업을 시작했을 것이었다. 교체할 병 력이라고 해봐야 얼마 남지 않은 수도 방위군이었지만 말이다. 라이짐은 마리의 집으로 가는 길 내내 고민스러웠다. 하지만 어떤 생각 이 떠오르더라도 사실 결론은 이미 나 있는 고민이었다. 이제 다시 마음 을 다잡고 자신이 선택한 일을 해 나가면 그만인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 리 머리가 라이짐에게 사실이 그렇다고 말을 해 주었다고는 해도 라이짐 의 가슴에는 마리의 얼굴뿐이었다. 마리의 집 앞에 당도했을 때, 햇빛은 눈부시게 쏟아지고 있었다. 공연 히 기분이 울적해 질 만큼 맑은 날씨였다. 이 순간 아케르 군단의 병사들 은 목숨을 걸고 가고일들과 맞붙어 싸우고 있을 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 자, 라이짐은 애써 그런 생각을 지워버리려고 노력했다. 자신이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될 일에 대한 걱정이나 후회는 그 어떤 상념보다도 쓸모 없는 일이었다. 라이짐은 마리의 집 문을 두드렸다. "아이고, 오셨구랴, 젊은 양반.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젊은 양반을. 아마 젊은 양반은 상상도 못할 거라. 어여어여 들어오시게." 집주인 노파는 지나칠 정도로 친절하게 라이짐을 맞이했다. 아마 저 친 절은 금화 한 닢어치의 친절일 것이었다. 라이짐은 마리의 집 방문을 두 드리면서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오셨군요."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금은 푸석푸석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서 마리가 라이짐을 맞았다. 라이짐은 마리의 얼굴을 보면서 간밤에 있었을 법한 일을 상상해 보았다. 돈 많은 남자. 땀. 열기. 라이짐은 문득 페르 도 부인의 음란했던 몸짓이 떠올랐다. 하지만 마리를 바라보자 라이짐은 그런 모든 상상이 오직 페르도 부인을 향해서만 쏠리는 것을 느낄 수 있 었다. 이런 것도 마법일까? 사실 마리의 집을 찾는 것이 라이짐 뿐이 아 닐 거라는 것은 노파를 통해 이미 확인 된 사실이었다. 아마도 노파가 금 화 한 닢짜리 친절을 베푸는 것은 라이짐 뿐이 아닐 것이라는 것은 거의 분명한 사실이었다. 라이짐은 마리의 인도를 받아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지아는 깨어나 나무토막 몇 개를 가지고 놀고 있었다. 라이짐은 그리지아의 머리를 쓰다 듬어 주었다. 하지만 그리지아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그저 나무토 막만 계속해서 만지고 있을 뿐이었다. "지난번에는 정말 죄송했어요. 제가 왜 그랬는지. 누군가가 죽는 일이 그리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 가 봐요." 전과 달리 마리는 라이짐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서 이렇게 말했다. 라이짐은 그런 말을 듣기 위해서 여기 온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이곳에 온 것이었다. "마리. 술집에 그만 나가면 안되요?" 라이짐이 물었다. "프라브리티에서 기술도 없고 남편도 없고, 게다가 애까지 딸린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렇게 많지 않답니다." 마리의 음성은 자조적이었다. 라이짐은 당장에라도 그만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라고 스스로 다짐하면서 천천히 말을 이었다. "마리. 나, 지난번에 마리가 한 얘기 곰곰이 생각해 봤어요. 내가 뭘 원하고 있는지." 여기까지 들은 마리는 뭐라고 이야기하려는 듯 숨을 들이쉬었다. 라이 짐은 가슴이 터질 듯이 벅차 오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숨이 턱턱 막혀 왔다. "아, 잠깐만요. 내 말, 끝까지 들어줘요. 누구나 뭔가를 원한다고 했지 요? 저는 그게 뭘까 생각해 봤지요. 그리고 한참을 고민한 끝에 나도 마 리에게 원하는 게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라이짐은 마리의 손을 덥석 잡았다. 마리는 역시 깃털처럼, 라이짐으로 부터 손을 빼었다. 라이짐은 그 순간 뛰던 가슴이 잠잠해지는 걸 알 수 있었다. 라이짐은 좀 더 침착하게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남자들 다 마찬가지라고 했지요? 어쩌면 저도 그럴지 모르겠어요. 사 실, 남자라면 누구라도 마리 같이 아름다운... 그런 여성을 원하는 게 사 실일 테니까요." 라이짐은 아름답다는 표현을 쓰면서 몹시도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본심이 너무나도 쉽게 드러나는 듯 했기 때문이었다. 마리는 아무 런 말이 없었다. 부끄러운 건지, 아니면 그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 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마리. 남편이 어디 있는지 알아요?" 마리는 조금 뜻밖이라는 듯한 얼굴로 라이짐을 바라보았다. 라이짐은 그런 마리의 눈을 피하지 않고 다시 물음을 이었다. "마지막으로 본 게 어디에요? 어디로 간다고 했어요?" "미안해요. 남편에 대한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아요." "그럼 이름이나 어떻게 생긴 사람인가 하는 것도요?" "무슨 뜻으로 하시는 말씀인지 모르겠네요." "왜요? 제가 다른 마음을 품고 하는 말 같아서 그런가요?"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 남편이 있는 곳을 제가 찾아줄 수 있어요. 저한테는 유능한 부 하들이 있거든요. 그 친구들을 통하면 틀림없이 찾을 수 있어요." 라이짐은 절박한 심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라이짐의 말은 진심이었다. 마리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해 주고 싶었던 것이다. "솔직히 말씀드리죠. 그 사람, 아마 틀림없이 죽었을 거예요. 아마도 하잔에서. 반란군 토벌 때 죽었을 거예요, 거의 틀림없어요. 하지만 만약 정말 죽었다면 어쩌죠? 그 사람이 돌아오는 것 만이 제 유일한 희망인데. 만약 정말로 그 사람이 하잔에서 죽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전 견딜 수 없을 거예요." 마리는 거의 울먹이면서 말을 맺었다. 라이짐은 그런 마리의 심정을 십 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가만히 듣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라이짐은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한껏 용기를 내어 하고 싶었던 말을 쏟아 냈다. "만약 그렇다면, 그러니까 정말로 그 분이 돌아가셨다면... 그렇다면 내가 마리를 아름다운 나의 마리라고 불러도 좋을까요?" 라이짐의 말에 마리는 충격을 받은 듯 했다. 무슨 말을 해야 좋을 지 알 수 없는지, 마리는 얼마간 허둥거리고 있었다. 라이짐은 마리가 당황 할 것이라는 걸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리가 말할 때까지 기다 릴 수 있는 여유를 가지고 있었다. "잘 생각해보세요, 라이짐 님." 마리는 이렇게 말을 이었다. "전 사실 라이짐 님이 생각하는 마리가 아닐지도 몰라요. 언젠가 제가 말씀 드렸죠? 저는 별로 좋은 여자가 아니라고." 라이짐은 말없이 마리를 지켜만 보고 있었다. "만약 라이짐 님과 제가 결혼을 하게 된다고 해도 그건 라이짐 님을 사 랑해서가 아닐 지도 몰라요. 라이짐 님의 돈이나, 아니면 다른 걸 원해서 일지도." "그게 전부인가요?" 라이짐은 점점 더 뜨거운 목소리로 간청하듯, 애원하듯 말했다. "그래도 상관없어요. 마리가 어떤 여자 건. 내가 원하는 건 마리 뿐이 에요. 다른 어떤 사람이 아니라. 그리고 원래 마리가 어떻건, 마리가 원 하는 게 어떤 거든, 마리는 마리일 뿐이에요." 라이짐이 말하자 마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뭔가 생각에 잠긴 모양이 었다. 한참이 지난 후에 마리는 결심했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 "오늘, 함께 있고 싶어요." 하진을 내쫓는 일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마리와 라이짐은 집무실에서 함께 있을 수 있었다. "부장 님. 보고서는 준비해 두었습니다. 검토만 해 보시면 될 것입니 다." 하진은 이렇게 말하고 밖으로 나갔다. 평소의 하진 같으면 틀림 없이 뭐라고 쓸데 없는 말을 덧붙였을 테지만 다행히도 눈치 빠른 하진은 라이 짐에게 최대한의 예의를 갖추면서 집무실에서 나갔던 것이다. 라이짐은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에이스도 라이짐의 명령에 따라 '정보 수집'을 위해 집무실을 나섰다. 사실 라이짐이 생각하지 못한 것은 집무실이 생각보다 많이 어질러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라이짐은 어지럽게 흩어져있는 에이스의 보고서를 모 아서 한쪽으로 치웠고, 하진이 정리하다 만 보고서들은 책상 밑에 대충 모아두었다. 허둥거리는 라이짐을 보면서 마리는 웃음을 짓지 않았다. 이 럴 때는 귀엽다는 듯이 적당히 웃어주어도 좋을텐데, 하고 라이짐은 생각 했지만, 마리의 얼굴은 어둡기까지 했다. "저, 죄송합니다. 이렇게 어질러져 있을 줄은..." 마리는 라이짐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마리는 마치 뭐에라 도 쫓기고 있는 사람처럼 달려가 라이짐을 안았다. 라이짐은 당황했으나 그것도 잠시, 라이짐은 태어날 때부터 하늘이 내려준 본능을 쫓아 마리의 행동을 받아들였다. 라이짐은 환영을 보았다. 맑은 하늘이 있었다. 그리고 그곳은 태풍의 눈이었다. 라이짐은 알고 있었다. 이대로 멈추어 서 있다가는 태풍에 휩 쓸려 사라져 버리게 될 것이라는 것을. 라이짐은 허겁지겁 몸을 움직였 고, 곧 태풍이 라이짐의 몸에 닥쳐왔다. 라이짐은 다시 한 번 환영을 보 았다. 시커먼 폭풍우가 북쪽에서 몰려오는 환영이었다. "라이짐 님. 당신이 하는 일을 알고 있었어요." 마리의 부드러운 머릿결을 쓸고 있을 때, 마리가 라이짐에게 말했다. 라이짐은 갑작스러운 마리의 말에 그 말을 누구에게 들었는가 물을 생각 도 하지 못했다. "어떻게 보면 라이짐 님이 그 사람을 죽였는지도 몰라요." 라이짐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대로의 저를 받아들이시겠다고 했지요? 저 역시 이대로의 라이짐 님 을 받아들이겠어요." 마리의 말은 이어졌지만 라이짐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알고 있었다 는 말을 들은 충격에서 헤어나질 못하고 있었다. "알고 있었어요? 저도 라이짐 님을 좋아하고 있었다는 걸." 마리가 말했다. 그제야 라이짐은 다시 마리의 머릿결을 쓸 수 있는 용 기를 얻을 수 있었다. 라이짐은 눈을 감았다. 더 이상 불안감은 찾아오지 않았다. 이대로의 마리가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만으 로 라이짐은 편안하게 잠이 들 수 있었다. 그러나 마리의 부드러운 머릿 결 밑에 놓여진 가느다란 목덜미는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라이짐은 몹시도 머리가 아팠다. 뭐가 잘못된 것인 지 좀처럼 찾아오지 않는 두통이 라이짐을 괴롭히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 서 라이짐은 자신이 혼자 집무실에 누워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기까지 꽤 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에이스. 에이스?" 라이짐이 우선 찾은 것은 에이스였다. 마리가 언제 갔는지 알고 싶었 다. "예, 라이짐 님." 꼭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에이스는 집무실 구석에서 나타났다. "어, 언제부터 있었던 거야?" 꼭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라이짐은 허둥거리면서 에이스에게 물었다. "마리 님이 나가신 후부터 있었습니다." 라이짐은 일단 안도의 한숨을 내 쉰 다음 에이스에게 다시 물었다. "마리는 언제 갔지?" "해 떨어지고 바로 나가셨습니다." 라이짐은 밖을 내다보았다. 그리 깊게 잠든 것 같지도 않았는데 창밖에 는 어둠이 몰려와 있었다. 마치 시간이 지난 밤 이후 흐르지 않았던 것처 럼, 라이짐은 이상한 기분에 빠져 버렸다. 혹시 마리를 만났던 일이 모두 꿈이 아니었을까 의심스럽기까지 했다. "그랬군. 다른 일은?" "먼저 타실의 라이스로부터 보고입니다." 라이짐은 에이스의 보고를 듣는 순간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자, 잠깐만. 그럼 그 개량된 성황청의 성구라는 게..." "그렇습니다. 악마의 입에 있는 성황청 타실 지부에 그 근원을 두고 있 는 것 같습니다." 라이짐은 오래간만에 군인의 피돌기가 가쁘게 줄달음질 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만약 그렇다면 일이 순차적으로 풀릴 수 있는 실마리가 잡힌 셈이었다. 성황청은 일단 성구만 봉쇄된다면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일단 성황청을 쓰러뜨리고 탐그루를 수복한다면 타실과의 외교 에서 중요한 위치를 선점할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곧이어 스파일의 영 주 페르도를 무너뜨리는 일도 가능할 것이었다. 강한 자라면 누군가를 쓰러뜨리는 데 오직 방법만이 문제 될 뿐이니까. 라이짐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우선 순무에게 달려갔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프라브리티 동편에 마련돼 있을 임시 주둔지의 지휘소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가뜩이나 초라해 져 있을 순무를 더욱 초라하게 만들 게 분명했다.. "좋은 소식이로군, 간만에." 순무는 술에 취해 있었다. 취한 정도로 봐서 아마 대낮부터 마시기 시 작한 모양이었다. 순무의 집무실 바닥에 뒹굴고 있는 술병들이 그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단장님은 이제 가고일들을 물리치고 개선하시겠지. 사람의 혼을 빼는 마법? 그 뜨거운 열쇤지 불벼락탄인지 한 방이면 다 끝이야. 흐흐흐. 이 제 마법의 시대는 끝나가고 있는 거라고." 순무와는 더 이상 정상적인 대화가 불가능 할 것 같았다. 라이짐은 그 냥 이대로 지휘소를 찾아갈까 마음먹었다. "저 그럼 이만 장군님께 보고드리러 가겠습니다." "흐흐흐. 하지만 그렇게 쉽게 풀리리라고 생각하지는 말게나, 라이짐. 내가 하나 알려 줄까? 좀비가 나타났을 때, 아케르는 좀비들을 물리칠 수 있었어. 당장에라도 말이야." "장군님이십니다." "그래, 아케르 장군님. 위대한 대 장군님이 되시겠지, 이제. 아냐, 내 친김에 스파일의 영주가 될지도 모르고. 흐흐흐." 라이짐은 이대로 순무의 술주정을 받아들이고 있어야 하는가 고민이 되 었다. 하지만 이왕듣기 시작한 말이었다. "그래서요?" "하지만 아케르는 그렇게 하지 않았지. 알고 있지 않아? 그후 하잔에서 반란이 일어났어. 반란군을 토벌하러 간 덕분에 하잔에 거점을 마련할 수 있었지. 게다가 성황청 녀석들까지 왕창 쓸어버릴 수 있었으니까. 그 야말로 꿩 먹고 알 먹고였지. 암, 그렇고 말고. 그리고 오우거가 나타났 을 때는 어땠는가? 역시 마찬가지였어. 자네가 알아온 정보 덕분에 당장 에라도 오우거를 막을 수 있었지만, 아케르는 시간을 끌었지. 최대의 효 과를 얻기 위해서, 결국 자신의 야망을 위해서." "알고 있었습니다." 라이짐은 한심하다는 듯 순무에게 말했다. 그러자 갑자기 순무가 고개 를 치켜들었다. 도저히 술에 취한 사람 같지 않은 눈을 하고서. "네놈이 알고 있었다고? 그 동안 사람들이 마물에게 죽어갔다는 사실 을? 아케르가 그 망할 놈의 더 높은 이상 운운하는 동안 죽어간 사람들 을? 그 사람들의 부모가 겪었을 고통과 슬픔을? 네 놈이 알고 있었다고?" 라이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순무의 말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 지만 라이짐의 견해는 적어도 이 부분에 있어서 만큼은 아케르의 견해와 일치했다. 뭔가를 이루기 위해서는 희생이 필요한 법이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의 희생은 모두를 위한 것이 틀림없었다. 라이짐이 아무 대답이 없 자 순무는 갑자기 침울해졌다. 순무는 술병을 집어들더니 병채로 몇 모금 을 들이켰다. "하긴, 오우거를 잡기 위해 화전민들을 불태워 죽이고, 게다가 그 망할 놈의 불벼락탄인지 뜨거운 열쇤지를 얻자고 인류의 보고를 잿더미로 만든 녀석이니 모르고 있었을 리가 없겠지. 너도 똑같은 놈이었어."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9897/19898 ━━━━━━━━━━━━━━━━━━━━━━━━━━━━━━━━━━━━━━━━ 제 목:[탐그루] 슬픔이라는 이름의 빛 267 관련자료:없음 23/23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5-01 00:08 조회:741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순무가 말했다. 라이짐은 이렇게 말하는 순무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 었다. 그러나 순무의 말은 라이짐의 마음에 알 수 없는 여운을 전했다. "그만 가보겠습니다." "그러게, 친구. 자네는 아마 훌륭한 군인이 될 수 있을 거야. 누가 알 겠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자네가 장관자리에 떡하니 앉게 될지." 순무는 이렇게 말하고는 흐느끼듯 웃음을 터트렸다. 라이짐은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불벼락탄의 개발 이후 순무의 몸과 마음 모두가 부서져가 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일단 순무를 저 상태 그대로 놓아둘 수밖에 없 었다. 우선 아케르를 찾아가 새로운 사실을 보고하는 일이 더 급했기 때 문이었다. 목숨을 건 싸움이 일어나고 있으리라는 라이짐의 예상과는 달리 수도 동편의 주둔지는 진지 보수 공사가 한창이었다. 공사를 하고 있다는 사실 은 아케르가 비록 단 한 번의 전투를 위해서라고 해도 완벽하게 진지를 마련하고 기다리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ㄳ다. 라이짐의 눈길을 끈 것은 거중기와 마법사를 동원한 토목건설단이 도착 해 있다는 사실이었다. 스파일 내에서도 빠른 속도로 공사를 하는 데 일 가견이 있다는 임프시의 인력들이었다. 임프 시의 토목건설단은 바르도 대륙 최강의 공사 속도로 명성을 날리 고 있는 인력이었다. 비록 부실 공사가 많고, 때문에 빠른 공사 속도로 얻은 명성 못지 않은 악명도 날리는 모양이었지만 지금 상황으로서는 그 다지 탓할 것이 없을 것도 없었다. 마법사들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는 병력들에게 방벽 쌓을 위치를 지정 해주고 있었다. 내벽은 이미 건설단이 제작을 마친 상태였다. 마법사는 매우 신중한 눈빛으로 굵은 통나무를 엮어 만들어진 방벽을 좌로 우로 조 금씩 옮길 것을 지시하고 있었다. 마침내 원하는 각도가 나오자 마법사는 마법의 말을 외웠다. "국민* 화합으로* 국난을* 극복하자*" 마법의 말을 듣는 순간 라이짐은 저절로 웃음이 쿡, 하고 터져 나왔다. 저런 말도 마법의 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라이짐에게는 너무나도 생경 하게 느껴진 까닭이었다. "그렇게 웃고 있을 틈이 있으면 좀 도와주지 그래요?" 누군가 라이짐의 등을 툭, 치면서 말했다. 아마 그 사람은 툭 친다는 느낌으로 라이짐에게 손을 댄 거였겠지만, 라이짐은 그 강한 힘에 허리가 절로 앞으로 꺾어지고 말았다. 라이짐은 뒤를 돌아보았다. "가투신 백부장님?" "그래요, 라이짐 정보부장 님. 정말 오래간 만이네요.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가끔 연락이라도 한 번 주지 그랬어요." 가투신이 시원시원한 목소리로 웃으면서 말했다. 라이짐 역시 웃으면서 가투신에게 인사를 건넸다. "휴. 백부장이 되고 나니 신경쓸 게 훨씬 더 많네요. 우리 병력은 저쪽 좌측 벽면을 담당하고 있어요." 가투신은 라이짐에게 전체적인 상황을 간단하게 설명해 주었다. "토목건설단이 온 이유는 진지공사를 위해서에요." 물론 이것은 라이짐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세 개의 벽을 쌓는 거지요. 가고일들은 늘 같은 곳을 공격해 들어오니 까 말이죠. 기존의 참호로는 부족해요. 더 튼튼하고 높은 벽을 쌓는 거에 요. 그리고 흙을 쌓지요." "인공적으로 언덕을 만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요. 세 개의 언덕이 가고일들에게 세 방향에서 불벼락을 내릴 거 에요." 가투신은 전과 다름없는 항상 웃는 얼굴 그대로 말했다. 통나무로 만들어진 벽은 마법의 말과 함께 서서히 올라가고 있었다. 거 중기들이 옆에서 거들고는 있었지만 마법의 힘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올라 가겠다 싶었다. 거중기들의 역할은 그저 통나무 벽의 위치가 움직이지 않 게 돕는 것 정도였다. 라이짐은 아케르의 신중함을 잘 알고는 있었지만 조금 지나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순무의 말 그대로 가고 일의 마법은 힘을 발해보기도 전에 불과 함께 날아가 버릴 것이 분명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굳이 이렇게 토목건설단까지 동원해서 인공 언덕을 쌓을 필요까지 있을지. 물론 전투에서는 어떤 돌발 상황이 벌어질지 모르 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리라고 라이짐은 생각했지만. "신무기로 무장하고 나서는 첫 번째 전투이지요. 잘 될 거라고 믿어요, 나는." "무운을 빌겠습니다." 라이짐은 스파일의 여느 병사들이 하는 것 같은 인사를 건네고 아케르 가 있을 야전 지휘소 천막으로 향했다. "성황청 성구의 근원이라..." 아케르는 턱을 쓰다듬으면서 중얼거렸다. 뭔가 생각에 잠겨 있다는 증 거였다. "그렇습니다. 에이스의 보고에 따르면 그곳이 파괴될 경우, 성구는 작 동하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게 판단할 수 있는 근거는?" "먼저 성황청에서 잡아들인 어린아이들을 그곳에 집결시키고 있다는 것 이 첫 번째 증거입니다. 이 사실은 제가 탐그루에 있을 때 직접 수집한 정보이므로 확실합니다." 라이짐은 사라져버린 울찬과 정신이 나가버린 민트를 떠올리면서 말했 다. "어린아이, 특히 고아의 영혼과 피는 한과 설움이 서린 강력한 마력을 가지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라이짐의 말에 타호루가 덧붙였다. 라이짐은 타호루에게 눈짓으로 답례 를 표한 후 말을 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곳이 지나치게 엄중하게 보호되고 있다는 사실입 니다. 물론 성황청이 타실의 국왕에게 반기를 든 이상 타실 지부를 포기 하지 않으려면 그곳 경비를 강화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 러나 천연 요새나 다름없이 산 중턱에 기암과 절벽으로 보호되고 있는 그 곳에 성구로 무장한 기사단이, 그것도 강력한 보호 마법의 호위 아래 주 둔하고 있다는 것은 제 추리를 뒷받침하고있다고 생각합니다." 라이짐의 보고를 죽 들은 아케르는 숨 한 번 들이쉴 정도의 사이를 둔 후 이렇게 말했다. "세 번째는 없는가?" 아케르의 말은 라이짐의 힘을 쏙 빼놓기에 충분했다. "없습니다." "그렇다면 계속 조사해 보게. 보다 확실해 질 때까지. 만약 확실해 진 다면 그 때 다시 보고해 주게." 아케르는 이렇게 말하고는 집무에 들어갔다. 라이짐은 아케르에게서 기 대했던 반응이 나오지 않자 조금은 섭섭했다. 라이짐이 보고를 마치고 천 막 밖으로 나가자 타호루가 라이짐을 따라나섰다. "걱정 말게. 내가 잘 말씀드릴 테니. 틀림없이 좋은 소식이 있을 걸세. 지금 전투 준비 중이시라 너무 정신이 없으신 것 뿐이야." 별로 마음에 담아두고 있지 않았었는데, 타호루가 막상 이렇게 나오자 라이짐은 오히려 더 열심히 조사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라이짐은 타 호루를 바라보았다. 용병단 시절부터 이어진 전통에 따라 타호루도 칼과 가죽 갑옷, 투구로 중무장을 하고 있었다. 무장을 하고 있는 마법사의 모 습은 어딘지 어울리지 않았다. "그리고, 이 사실, 아직 사비치에게는 비밀로 해 두게." 라이짐은 타호루가 말하려는 의도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어떻게든 자 신의 공을, 혹은 용병단의 공을 사비치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다는 생각인 것 같았다. 라이짐은 사비치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완전 히 타호루의 편을 들기도 무리인 것 같았다. "지금 당장은 알릴 수도 없을 겁니다. 사비치는 가고일을 마법으로 퇴 치할 방법을 찾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을테니 말이죠. 사비치가 물어온다 면 대답하지 않을 자신은 없습니다." "그래. 그건 알겠네." 타호루는 고개를 끄덕였다. 타호루도 마법사이니 만큼 마법사의 독심술 을 이겨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에 숨기고 있었다는 걸 들키게 되면 저는 사비치의 신용을 잃게 됩니다. 제가 판단하기에, 제가 사비치의 신용을 잃는 일은 사비치에게 공을 빼앗기는 것 보다 훨씬 더 큰 손실일 것 같습니다. 장기적으로 본다 면 말이죠." 라이짐은 이렇게 말하고는 동편의 진지 쪽을 바라보았다. 어느 사이 세 개의 인공 언덕이 만들어져 있었다. 마치 땅에서 갑자기 솟아난 듯한 느 낌이었다. 역시 임프 시의 토목건설단의 명성은 허풍이 아니었다. 라이짐 은 노을을 받아 붉게 물들어가는 인공 언덕을 바라보았다. 인공언덕에는 깊은 참호가 계단식으로 파여 있었고, 그 안에는 뜨거운 열쇠를 가고일에 게 날려보낼 석궁수들이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멀리 움직이고 있는 병사 들은 너무나도 평화스러워 보였다. "라이짐. 차이린을* 만나는* 걸* 잊지* 말게* 차이린은 동쪽 진지에 있 다네." 타호루는 멍하니 진지를 지켜보고 있는 라이짐에게 이렇게 말했다. 생 각해보니 가투신을 만났는데 차이린을 만나지 않고 돌아간다는 건 이상한 일인 것 같았다. 물론 그냥 돌아간다고 해도 별로 문제 될 것은 없었지만 지금 라이짐이 이상하다고 여기고 있는 것은 순전히 타호루의 마법 때문 이었다. 라이짐이 차이린이 있는 동쪽 진지로 발걸음을 옮겼을 때, 타호 루는 중얼거렸다. "승리는 결국 우리의 것이 될 거라네, 친구." 라이짐은 동쪽 진지에 다가서서 병사에게 백부장의 행방을 물었다. 하 지만 병사가 차이린이 있는 곳을 알려주기도 전에 차이린이 먼저 라이짐 을 발견했다. "라이짐!" 차이린은 언덕의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라이짐은 삽으로 흙 을 파서 만들어진 교통호를 따라 언덕 위로 올라갔다. 빠른 시간에 만들 어진 것치고는 훌륭해 보였지만 발걸음을 옮길때마다 느껴지는 통나무의 삐걱거리는 소리가 라이짐의 마음 한 구석을 불안하게 했다. "오래간 만이네. 키가 자란 것 같은데?" "예." 라이짐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차이린과 엇비슷하다 싶었던 키였는데 지금은 차이린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정보부 일은 재미있어?" "더도 덜도 아니고 꼭 백부장 직 만큼 재미있습니다." "말투는 여전하구나." 차이린은 이렇게 말했다. 예전에 차이린은 어딘지 라이짐을 항상 보살 펴 주려는 것 같은 인상을 풍기곤 했지만 오늘 차이린은 전혀 그렇게 보 이지 않았다. "이제 제 자리를 잡은 것 같다는 느낌이 드네." 이렇게 말하면서 라이짐을 바라보는 차이린의 모습은 약간의 경외감마 저 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라이짐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제는 그런 물 음에 대답함으로 해서 자신의 위치를 확인 받고 싶어할 만큼 어리지 않았 기 때문이었다. 라이짐은 대신 이렇게 말했다. "차이린 님도 백부장의 망토가 어울립니다." 백부장 이상이 되면 두르는 망토는 장군용 망토보다 길이가 조금 짧기 는 했지만 그럭저럭 어울리는 듯 했다. 차이린은 마치 망토가 치마나 되 는 것처럼 펄럭이면서 라이짐에게 말했다. "그래? 고맙네." 어쩐지 라이짐은 이제 차이린과 동격이 된 것 같다는 느낌에 기분이 우 쭐해졌다. "그런데 이를 어쩌나... 라이짐. 너 석궁 쏠 줄 아니?" 차이린의 말에 라이짐은 대답을 잠시 머뭇거렸다. 언젠가 한 번 연습은 해 본 기억이 있었지만 한 번도 실전에서 석궁을 사용해 보지 못했기 때 문이었다. "잘 들어, 라이짐." 차이린이 검붉은 빛이 도는 돌을 집어들면서 말했다. 라이짐은 그 돌이 '뜨거운 열쇠'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걸 화살 촉 대신 끼우는 거야. 돌려서. 오른쪽으로 돌리면 들어가고 왼쪽으로 돌리면 빠져. 그리고 이렇게 끝까지 끼우면 찰칵하는 소리가 나 지. 소리가 들리지 않더라도 느낌으로 알 수 있을 거야." 차이린은 이렇게 말하면서 직접 시범을 보여주었다. 그제야 라이짐은 언덕 아래편을 바라보았다. 멀리서 먼지가 일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 다. "찰칵 소리가 난 다음에는 주의해야 해. 이 끝이 충격을 받는 순간, 펑! 알겠지, 무슨 말인지?" 차이린의 말에 라이짐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상황에서 도망을 친다 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고,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서 응원만 하고 있을 수 는 더더욱 없는 일이었다. "공격 깃발이 올랐습니다!" 차이린 십부의 부관이었던 청강의 목소리가 밑에서 들려왔다. 청강은 이제 십부장이 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발사!" 차이린이 소리쳤고, 일제히 화살이 먼지가 피어오르고 있는 동편으로 날아갔다. 라이짐도 차이린이 건내준 석궁을 발사하였다. 석궁의 충격은 생각 이상으로 대단했다. 어깨를 꽉 석궁의 끝과 밀착시키지 않은 덕에 라이짐은 어깨에 멍이 다 드는 느낌이었다. 화살은 포물선을 그리듯 날아가 먼지가 일고 있는 곳에 떨어졌다. 순식 간에 가고일들은 불바다에 휩쓸려 버렸다. 너무 쉬운데. 이건 너무 쉬워. 이제 아마도 전쟁의 양상은 바뀌게 될 것이라고 라이짐은 생각했다. 칼과 활이 주력이 되는 시절은 끝이 날 것이었다. 이 신병기를 얼마나 효과적 으로 그리고 정확하게 빨리 사용하는가에 따라 전투의 승패가 갈릴 것이 기 때문이었다. 라이짐은 전투중이라는 것을 생각하기 어려운 이런 상황 속에서 이제 정말로 마법의 시대는 끝을 고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 다. 아마도 순무의 생각이 옳으리라. 빛보다 조금 늦게 굉음이 울려 퍼졌고, 라이짐은 발 밑이 흔들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흙 부스러기가 여기저기 떨어졌다. "자유 발사!" 일렬도, 이열도 없었다. 일정한 간격없이 자유롭게 발사되는 화살의 모 습은 꼭 바람과 함께 쏟아지는 빗물을 연상시켰다. 빗물은 바닥에 떨어져 불꽃을 피어 올렸고, 가고일들의 모습은 먼지와 연기, 그리고 불꽃에 싸 여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차이린은 석궁을 밟지 않고도 양손으로 능숙하게 장전을 하고 있었다. 빠른 손동작이었다. 역시 용의 눈 십부장 실력은 어떻게 되어도 변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반면에 라이짐은 석궁에 손이 익지 않은지라 양발로 밟 고도 제대로 장전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중앙으로 돌파한다!" 누군가가 소리쳤고, 라이짐은 중앙을 바라보았다. 중앙의 언덕 쪽으로 가고일들이 빠른 속도로 이동하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불길에서 살 아남은 몇 마리인 모양이었다. "젠장. 발렌시아 쪽이잖아!" 차이린이 말했다. 라이짐은 중앙 언덕의 가장 높은 곳에서 전투를 지휘 하고 있는 발렌시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저쪽은 쏘지 마!" 차이린은 이렇게 소리쳤다. 자칫 오인 사격하게 될 것을 우려한 탓이리 라. 백부원들이 공격을 멈춘 것이 확인되자 차이린은 석궁을 중앙에 접근 하고 있는 가고일들에게 겨누었다. 숨막힐 것 같은 긴장이 팽팽하게 이어 졌다. 다음 순간, 차이린의 석궁에 놓여있던 화살은 석궁을 떠났고, 화살 을 보지도 못했는데 가고일들이 불길과 함께 허공으로 날아오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19898/19898 ━━━━━━━━━━━━━━━━━━━━━━━━━━━━━━━━━━━━━━━━ 제 목:[탐그루] 슬픔이라는 이름의 빛 268 관련자료:없음 20/20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5-01 00:09 조회:964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청강! 지원 들어가!" 차이린이 소리쳤고, 청강은 칼로 무장한 십부원들과 함께 중앙으로 다 가갔다. 하지만 청강의 십부가 채 접근하기도 전에 중앙에서 한 발의 석 궁이 좌측 언덕으로 날아갔다. 누군가 가고일에게 당한 모양이었다. "가투신!" 화살은 좌측 언덕의 한 복판에 명중되었고, 언덕은 순식간에 불기둥에 휩싸였다. 차이린은 순간 이성을 잃은 듯 했다. 차이린은 정신없이 언덕 을 뛰어내려갔고, 호위 병력도 없었다. 라이짐은 칼을 뽑아 들고 그대로 차이린을 뒤따르기 시작했다. 사실 전투상황은 차이린이 쏜 마지막 석궁으로 끝이 난 것이나 다름없 었다. 멀리서 다가오고 있던 가고일들은 완전히 날아가 버렸기 때문이었 다. 하지만 중앙에서 날아간 한 발의 석궁은 가투신의 백부 전체를 위기 에 빠뜨리고 말았다. 언덕은 천천히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아마도 중앙의 통나무 벽에 금이 간 모양이었다. 흙이 빠른 속도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망할 놈의 임프 놈들!" 차이린은 소리쳤다. 차이린의 짧은 머리카락이 바람결에 함부로 흩어지 고 있었고, 라이짐은 귀 뒤를 스쳐지나가는 바람을 느낄 수 있었다. 차이 린이 도착했을 때, 청강의 십부는 필사적으로 가투신 백부 병력을 밖으로 빼 내고 있었다. 교통호의 일부가 무너져 내려 있었고, 무너지고 있는 흙 더미에 갇힌 사람도 꽤 되는 듯 했다. 다급한 상황이었지만 라이짐은 그 뒤편에 쓰러져 있는 시커먼 덩어리에 눈이 먼저 갔다. 물론 그것은 한 때 는 가고일이었을 불타버린 살덩이였다. 가고일의 모습은 라이짐이 기억하 는 끔찍했던 눈알 빠진 가고일과는 사뭇 달랐다. 그저 시커먼 고기타는 냄새 풍기는 살덩어리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것이 사람의 시체였다고 해 도 석궁을 쏜 사람은 결코 죄책감을 느낄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렇게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데 과연 살인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을까? "라이짐! 도와줘!" 차이린이 소리쳤고, 라이짐은 그제서야 차이린의 옆으로 달려가 흙무더 기를 치우는 일을 도왔다. 그때였다. 흙 속에 섞인 바위 덩어리 하나가 라이짐이 쓰고 있던 투구에 부딪쳤다. 라이짐의 투구는 벗겨져 바닥에 떨 어졌다. "저, 저것 봐..." "맙소사. 정말이었군." 다들 얼어붙은 얼굴이었다. 라이짐의 백발이 햇빛 아래 드러났다. 햇빛 을 받은 라이짐은 마치 머리 뒤편에 후광이라도 비추고 있는 듯한 모습이 었다. 잠시 동안 라이짐은 왜 병사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지 알아차리 지 못했다. "뭐 하는 거야, 지금!" 차이린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라이짐은 저 목소리가 뜻하는 바 를 알고 있었다. 훈련병 시절 저 목소리에 기겁을 하고 연병장을 뛰어야 했던 기억이 새삼스러웠다. 라이짐은 투구를 다시 머리에 얹을 생각도 하 지 않고 차이린을 도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투신 백부의 병력들은 모 두 구조되었다. 하지만 몇 몇은 불에 타 죽은 후였고, 또 얼마는 흙더미 에 묻혀서 죽기도 했다. "차이린, 고마워요. 덕분에 죽다 살았어요"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 쓴 꼴로 가투신이 차이린에게 말했다. 가투신은 몹시 불쾌한 듯 했다. 차이린도 평소 같았으면 그런 말을 듣고 웃음을 지 었겠지만 차이린의 표정 또한 굳어있었다. "이거 너무 하는 거 아닙니까? 이런 일이 생겼을 경우를 대비해서 우릴 방패로 쓴 거 아닙니까?" 가투신의 부하 하나가 얼굴이 다 벌개져 가지고 이렇게 투덜거렸다. "조용." 가투신은 이렇게만 말하고는 다친 백부원들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차이 린 역시 가투신과 함께 백부원들을 둘러보았다. 라이짐은 병사들의 시선을 의식하고는 투구를 눌러 쓰고 가고일이 나타 났던 동편을 바라보았다. 동편에서는 아직도 시커먼 연기가 오르고 있었 다. 발렌시아 백부 병력 일부가 쓰러져 꿈틀거리고 있는 가고일들을 베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라이짐은 멀리 바라보이는 광경이 너무나도 평화 로운 날의 중간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테이르의 날 행사가 있기 바로 전 날 밤이었다. 프라브리티의 유흥가 한 복판에 자리하고 있는 술집 지하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모두 상점주인이나 술집주인, 혹은 자치대 말단 병사나 초보 연금술사 등 가지 각색의 직업을 가지고 있었지만 모두들 본업은 다른 것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살롱 리노아 사장이 보이지 않는 군요." 과일가게 주인이 말했다. 평소에는 물건 값을 절대로 깎아주지 않는 주 인으로 유명했지만 이곳에서는 중요 연락책 중 하나였다. "아시는 분은 다 아시겠지만 강도는 아닌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프라브리티 남쪽 거리에서 노점상을 하는 사내가 말했다. 이 사내는 사람 좋은 웃음으로 아무에게나 덤을 주는 걸로 유명했지만 실제 로는 선동과 암살의 전문가였다. "최근에 그 사람이 조사하던 일이 뭐였습니까?" 다시 과일가게 주인. "그쪽 줄에 계신 분이 아시겠지요." 제빵 기술자가 말했다. 빵 굽는 솜씨는 형편없었지만 정보 분석에는 일 가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제빵 기술자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한 여자에게 쏠렸다. "... 뭔가 조사중이셨습니다." 여자는 당혹스러운 표정이었다. "우리가 알고 싶은 건 그게 뭔가 입니다." 제빵 기술자가 다시 물었고 여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 분이 조사하시던 겁니다." 여자는 종이를 내밀었다. 프라브리티의 요도가 그려져 있는 종이였다. 버려진 초안인 듯 많이 구겨져 있기는 했지만 알아보는 데에는 지장이 없 을 정도의 종이였다. "자치대 배치도군요. 평소의 배치와는 달라요. 밑에 날짜가 적혀 있군 요." "테이르의 날 행사 때?" "그렇습니다." 제빵 기술자가 말하자 모두들 경탄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아까운 동지를 하나 잃기는 했지만 얻을 수 있는 건 얻었군요. 다행입 니다." 자치대에서는 나이 많은 병졸이라는 이유로 대장으로부터 미움받는 사 내가 이렇게 말했다. 그 말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지만 정작 종이를 꺼 낸 여자는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뭔가를 억누르고 있는 듯한 분위 기였다. "그럼 누가 사장을 죽였는지는 자명하군요." "그 정보부장이겠군요. 우리를 추적하는 임무를 맡았다고 하니까요." "그 정보부장이 자치대 병력을 파악하고 있을 이유가 있습니까?" "정보부가 하는 일이니까요, 그런게." "혹시 역 정보 아닐까요?" "그건 간단하게 확인이 가능합니다. 당장 프라브리티 한 바퀴만 돌면 되니까.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대처하는가에 달려있을 것입니다." "확실한 것 같습니다. 오는 길에 제가 확인한 내용과 상당부분 일치합 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전투에 앞서 적군의 전투요도를 손에 넣은 셈이 로군요." "여러 가능성이 있습니다만 한 가지는 분명히 해 두죠. 테이르의 날에 집에 있는 편이 낫겠어요. 당분간 활동도 하지 말고." 제빵 기술자가 여자에게 말했다.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세부계획으로 들어갑시다." 회의는 시작되었지만 여자는 자신이 왜 굳이 거짓말을 했는지 본인 스 스로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자는 사장이 죽은 건 라이짐과 접 촉 중에 죽은 것이고 그 전투 요도는 자신이 빼온 것이라고 차마 말할 수 는 없었다. 이제 곧 무더위가 시작되려는지, 땅은 뜨거운 한숨을 토해내고 있었다. 현기증이 일고 있다고 착각할 만큼의 열기였다. 차이린이 떠나던 날은 그 렇게도 더운 날이었다. "그동안 고마웠어, 라이짐." 차이린은 억지로 웃음까지 지어 보이면서 라이짐에게 이렇게 말했다. 라이짐은 이런 차이린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테이르의 날 행사 진압에 뜨거운 열쇠를 사용한 것은 대단한 결단이었 다. 일단 스파일의 고위층은 용맹한 스파일 정규군의 전통을 외부인이 무 너뜨리고 있다는 반대를 이겨야 했고, 또한 백부장들과 참모들의 반대를 무릅써야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케르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반란군들은 모인 군중들을 효과적으로 운용하였다. 반란군의 수 자체는 그다지 많지 않았지만 그들은 선동과 지휘에는 꽤나 놀라운 능력을 발휘 하였다. 특히 어떻게 알았는지 자치대의 방어 상황을 알고 이곳 저곳을 헤집고 다니는 능력은 매우 뛰어난 것이었다. 자치대가 곤봉만으로 무장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곤봉보다 길고 효과적인 창을 준비한 것도 놀라운 사실이었다. 만약 자치대 병력만으로 테이르의 날 집회를 막으려고 했다 면 대단히 큰 피해가 있었을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반란군들은 뜨거운 열쇠가 그들의 집회를 막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 분명했다. 단 두 방. 단 두 방의 뜨거운 열쇠는 집회 자체를 무산시켰다. 자치대 원들을 몰아내고 중앙 광장에 운집한 시민들은 단 두 방의 불 세례를 받 고 그대로 혼란 상태에 빠져 버렸다. 선동자의 수는 극소수였고 대부분의 시민들은 그저 선동에 따라 움직일 뿐이었으니 말이다. 그 때를 기다린 아케르의 인내력도 높이 살 만 했지만, 반란군이 일단 이곳 저곳에 운집 한 사람들을 운용하여 자치대원들을 몰아낼 것이라는 것을 예상한 것은 더욱 대단했다. 사실 굳이 뜨거운 열쇠를 사용할 필요까지는 없었던 집회였다. 자치대 원들이 물러가자 시민들은 무기를 버렸고, 무기대신 꽃을 들고 테이르의 죽음을 애도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아케르에게 있어서 테이르는 어쩌면 떨쳐버려야 할 과거의 그림자였는지도 몰랐다. 그렇기 때문에 보다 확실 한 방법으로 확실하게 밟고 넘어서야 했는지도. 아케르는 집회 해산 작전을 성공적으로 마친 결과 영주의 신임을 더하 게 되었다. 그건 명백한 사실이었다. 친형의 죽음을 애도하는 집회를 잔 인한 방법으로 진압한 사람에게 어떻게 더 이상 과거를 추궁할 수 있겠는 가. 라이짐은 안타까운 마음이 들면서 동시에 그런 결단을 내린 아케르를 대단하다고 여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케르가 잃은 것도 있었다. 병력중 상당수가 아케르가 선택한 방법에 회의를 품었던 것이다. "나, 더 이상 이런 일에 맞지 않는 것 같다고 느꼈어. 그 두 발의 석 궁, 실은 내가 쏜 거야." "알고 있었습니다." 라이짐은 매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차이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라면 이해해 줄 거라고 생각했어. 우리 아이들하고는 다를 줄 알았지." 라이짐은 알고 있었다. 차이린이 그 일을 했다는 사실 때문에 상당수의 차이린 백부원들이 차이린에게 어떤 말을 쏟아 부었는지. 하지만 라이짐 으로서는 지금 차이린의 선택을 이해 할 수가 없었다. "정말 떠나셔야만 합니까." "응. 당분간 이곳 저곳을 떠돌 생각이야. 바르도 대륙 어느 구석에선가 는 활 잘 쏘는 사람을 필요로 하는 곳이 있겠지. 짐승이나 잡으면서 살겠 어. 앞으로 뭔가를 죽이는 건 먹기 위해서만 할거야." 라이짐은 차이린이 불에 그을려 고통에 신음하면서 죽어가는 사람을 보 고 구토를 참지 못했다는 소문을 상기했다. 생명이 있는 것은 한 번에 죽 여야 한다고 가르친 차이린이니 만큼 아마 그 순간을 견디기 어려웠을 것 이다. "가투신은요?" 라이짐이 물었다. 차이린은 얕은 한숨을 뱉어내더니 이렇게 말했다. "이제 가투신에게 빚은 없어. 너한테 빚이 없는 것처럼 말이야. 물론 수르카한테는 빚이 남아 있는 셈이지만..." 차이린의 이 말은 차이린이 아케르를 떠나기로 완전히 마음을 굳혔다는 사실을 암시해 주고 있었다. 그러나 라이짐은 또다시 아는 사람을 떠나보 내야 한다는 것이 여전히 마음에 걸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물어보지 않 을 수 없었다. "순무 행정 담당관 님처럼 하면 안됩니까?" 순무는 차이린처럼 군단을 떠나지는 않았지만 참모직에서 물러나 순수 행정 보직을 맡길 원했고, 아케르는 아무런 이의 없이 순무의 의견을 받 아들였다. "그 분은 용기 있는 분이야. 나와는 다르지." 차이린은 이렇게 말하고는 몇몇 병사들과 함께 군단을 떠났다. 차이린 은 마치 땅을 끌면서 걸어 몇 몇 병사들과 함께 서쪽으로 향했다. 라이짐 은 떠나는 차이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저들은 또다시 자신과는 다르 게, 수르카가 찾아 떠난 길을 선택한 것이다. 얼마나 지났을까. 차이린 일행의 모습이 거의 시야에서 사라져 갈 즈음 이 되자 라이짐은 집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해야 할 일이 아직 산적해 있 는 까닭이었다. 지쳐서 멈추었던 상어가 다시 숨을 쉬기 위해 이제 움직 여야 때인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 그리운 얼굴들이 모두 떠나가도 뒤돌아 보지 말고 움 직여야 한다. 컴컴한 어둠 속에서 간신히 보이는 한 점 빛을 향해서 걸어 야 한다. 수르카를 위해서, 모두를 위해서, 이 어둠을 혼자 짊어져야 한 다. 슬프지 않다. 슬프지 않다. PRINTER/CAPTURE를 OFF 하시고 [ENTER] 를 누르십시오.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20249/21893 ━━━━━━━━━━━━━━━━━━━━━━━━━━━━━━━━━━━━━━━━ 제 목:[탐그루] 실낙원 269 관련자료:없음 18/18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5-07 22:04 조회:1707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 실낙원 죽지 않는 사람이라니. 혹시 정령을 사람으로 잘못본 것 아닐까? 아니 면 보통의 인간 보다 훨씬 오래 사는 마법사를 보고 착각한 것은 아닐까?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사실이라네. 죽지 않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전설이 아니야." 훈족의 족장인 고마가 옷매무새를 바로 하면서 이야기했다. 고마는 머 리를 길러 하나로 끌어 모아 머리꼭지에서 묶은 훈족 특유의 머리를 하고 있었다. 훈족의 사람들은 성인이 되면 저렇게 머리를 묶는 모양이었다. 상투라고 했던가? 이곳 사람들은 올려 묶은 머리를 상투라고 불렀다. 물 론 풍습이야 존중되어야 마땅하겠지만 할머니가 머리를 저렇게 올려 묶고 있으니 좀 낯설게 보였다. "전설이 아니라구요...?" "죽지 않는 사람은 존재한다는 말이지. 자네나 내가 이렇게 살아있는 것처럼." 죽지 않는 사람이라는 말에 나는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기는 했지만 바 르도 대륙이 넓은 만큼, 내가가 알 수 없는 일들이 얼마든지 일어 날 수 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나저나 훈족의 족장 고마는 부탁할 것 이 있다고 불러놓고서는 왜 다른 이야기만 하는 거지. 뭘 부탁하려는 건 지 잘모르겠지만 어쩐지 시작이 거창한 것으로 봐서는 내가 들어 줄 수 있는 부탁은 아닐 것 같았다. 훈족의 마을과 마을사람들은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괜찮았다. 용병단 시절, 악마의 입 근처에 사는 사람들이라고 하면 하나같이 모자르고, 기 형에, 박약이라고 들었던 것에 비하면 말이다. 악마의 입은 동편으로는 높은 산과 서편으로는 케텐 호수로 둘러싸여 진, 천혜의 요새나 다를 바 없는 곳이었다. 동편의 산은 얼마나 험난한지 아직도 그 정상을 정복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한다. 케텐 호수는 훈족 에게 있어서 생명 그 자체인 곳이었다. 식량으로 쓸 물고기를 언제든 넉 넉히 건져 올릴 수 있고, 깨끗한 식수를 공급해 줄뿐만 아니라, 훈족의 수호신이 잠들어 있다고 전해지는 곳이기도 했다. 나는 훈족의 족장 고마와 함께 케텐 호수가에 앉아서 평화롭게 이야기 를 나누고 있었다. 하늘은 높고도 푸르렀고, 사방에 펼쳐진 풀밭과 그 위 를 수놓은 들꽃의 행진, 그리고 멀리 보이는 높다란 산줄기가 마음을 탁 트이게 만들고 있었다. 정말이지 이런 평안한 기분을 느껴 본 게 얼마만 인지. "자네 친구 스타바를 좀 보게나." 허허거리는 웃음을 지으면서 족장이 나에게 말했다. 나는 등 뒤를 돌아 보았다. 스타바가 조금 덩치가 작은 뮤와 함께 풀밭에서 뛰놀고 있었다. "자네가 스타바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보고 나는 큰 감명을 받았다 네. 동물과 이야기 할 수 있는 건 우리 훈족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거 든. 아니, 사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동물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지. 다만 마음의 문제이지." 나는 스타바와 이야기를 나누기는 하지만 다른 동물과는 이야기를 해 본 적도 없고 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내가 스타바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 이 특별한 능력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칭찬 아닌 칭찬을 듣게 되자 나는 공연히 우쭐한 기분이 들었다. 스타바는 평소에 볼 수 없었던 행동을 보여주고 있었다. 다리를 높게 쳐들고 함께 있는 아이스라는 이름의 뮤와 장난을 치는가 하면, 아이스의 목덜미과 귀를 살짝 물어뜯기도 하고 있었다. 뮤들은 신경이 예민해 항상 불안하게 고개를 흔들곤 하는데, 저렇게 자유롭게 뛰노는 모습을 보고 있 으니 어쩐지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스타바도 이곳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네요." 나는 족장에게 웃으면서 이렇게 말을 해 주었다. 고마는 끄덕거리면서 여전히 허허거리는 웃음을 지었다. "저 친구 이름이 뭔가요?" "보통 이곳에 사는 동물들은 이름이 없다네. 사람이 쓰는 언어로는 말 일세. 이름이 있는 건 보통 주인이 있기 마련이거든. 하지만 저 뮤는 이 름이 있어. 아이스라고 한다네. 내 아들 아훈이 지은 이름이지." "그럼 아훈의 뮤인가요?" "그렇다고 해야 할까? 솔직히 나는 요새 젊은 친구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가 없다네." "세월은 가고, 시대는 변한다고 하니까요." "어쩐지 이 늙은이 보고 빨리 죽으라는 말 같구먼. 허허허." 족장의 말에는 가시가 돋쳐있었지만 나는 그저 고개만 끄덕여보였다. 어찌되었건 아훈은 우리 일행에게 생명의 은인이니까 말이다. 만약 아훈을 만나지 못했다면, 비스토브레 산맥 한 가운데에서 우리는 틀림없이 굶어죽었던가 얼어죽었을 것이다. 운이 아주 좋았다면 비스토브 레 산맥 한 가운데에서 늙어 죽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말이다. 아타파카 공화국을 떠났을 때, 우리는 지독한 추위와 굶주림, 혹은 눈 쌓인 땅 밑에서 입을 벌리고 있을 함정들이 가장 큰 위험일 것이라고 생 각했다. 하지만 가장 큰 위험은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건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나, 남쪽으로 가야 합니다, 오브라디 교수님. 그래서 일단 스파일의 프라브리티에 들러서 보, 보급을 받고, 이어서 타, 타, 타실로 넘어가야 합니다." 사빈이 핏대를 세우고 오브라디 교수에게 말했다. 사빈이 얼마나 열을 내면서 말하는지 꼭 이마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오브라디 교수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바바, 바바 족의 영역 한 복판으로 들어가자는 소리인가? 그, 그건 자 살행위야." 오브라디 교수의 입에서 튄 침방울이 얼음 덩어리가 되어 내 얼굴에 부 딪쳤다. 평소 같았으면 그 덩어리를 지체없이 떼어 냈겠지만 지금은 도저 히 그럴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너무 추워서 손을 조금이라도 움직였다가 는 손이 똑 하고 떨어져 나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쩌면 지금이 바바, 바바 족의 문명을 탐구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일지도 모릅니다." 마로우가 말했다. 하지만 말하고 있는 마로우의 얼굴 표정은 완전히 굳 어있어서 꼭 얼어붙은 조각상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어, 어떻게 그렇게 떠, 떨지 않으면서 마, 말할 수 있는 거지? 저, 정 말 대, 대단하다, 저, 정말..." 오로스크가 이빨을 딱딱 부딪치면서 말했다. 나역시 오로스크와 비슷한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의견을 내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빨 을 딱딱 부딪치는 소리를 내면서 추운 티를 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 다. "바, 바, 바바 족의 문명을 탐구하는 일이라면 학자인 내가 훠, 훨씬 더 원하는 일이라네. 그, 그렇지 않겠는가? 하지만 생각해 보게. 우, 우 리의 일차적인 목표가 무엇인가? 그것은 용의 정체를 밝혀 마칸의 강림을 막는 일 아니었는가?" 오브라디 교수의 강경한 발언 덕분으로 우리는 따뜻한 남쪽 길이 아닌 대륙의 북쪽 끝, 언제나 눈이 녹지 않고, 무시무시하게 험준한 대비스토 브레 산맥을 따라서 타실까지 가는 길을 택하게 되었다. 행군은 고통이라는 말로도 부족한 고통과 또 고통의 연속이었다. 숨은 항상 차올라 있었고, 머릿속이 멍 해올 만큼 추위는 끊임없이 우리를 괴 롭혔다. 우리 일행 대부분이 고통을 참아가면서 발걸음을 옮기고는 있었 지만, 만약 누구 하나 쓰러지기라도 한다면 그것을 신호로 모두 다 바닥 에 벌렁 누워버릴 형국이었다. 굶주림도 더욱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 들판에서는 사냥을 통해 쉽게 작은 동물들을 잡아 끼니를 때우곤 했지만, 눈밭에서의 사냥은 그리 수월 하지 않았다. 천만 다행으로 사빈이 눈밭에서 사냥하는 일에는 꽤나 재능 을 보여 가끔 사냥에 성공하기는 했지만 먹을 것은 늘 부족했다. 그 와중 에서도 크게 도움이 된 것은 아타카파 공화국에서 대통령 와트슨이 챙겨 준 여러 장비들이었다. 눈밭에서 미끄러지지 않도록 고안된 신발과 방한 용 외투(무슨 가죽으로 만들어졌는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기는 했지만), 그리고 밤에 잠을 청할 수 있는 작은 천막과 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검붉 은 빛을 내는 연금술사의 등. 아마 그 장비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특히 검붉은 연금술사의 등은 그야말로 우리들의 보물 제 일호여서 항 상 애지중지했다. 연금술사의 등은 보통 수명이 일년에서 이년은 되기 때 문에 수명이 다되어서 우리가 얼어죽게 되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겠지만 만에 하나 누군가 실수로 그것을 깨뜨린다면 우리는 이 황량한 눈밭에서 틀림없이 얼어죽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우리는 검붉은 연금술사의 등을 거의 품에 안다시피 교대로 들고 다녔다. 대개의 경우, 검붉은 연금술사의 등의 간수는 스칼렛의 몫이었다. 스칼 렛은 우리 중에서 추위에 대한 저항력이 가장 강한 편이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스칼렛은 별로 말을 하지 않는다 뿐이지 거의 떨지 않는 듯 했고, 지치지 않는 놀라운 체력을 보여주었다. 그 점은 사빈도 매우 놀라워해서 스칼렛에게 혹시 인간이 아니라 인간의 탈을 쓴 사스카치가 아니냐고 농 담을 걸기도 했다 (며칠동안 스칼렛은 사빈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밤이 돼도 추위는 연금술사의 등과 서로의 체온 때문에 그다지 큰 문제 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는 속으로 어서 밤이 찾아오기만을 빌기도 했으니까. 밤이 되면 일단 쉴 수 있는데다가, 따뜻한 곳에서 몸을 녹일 수도 있었다 (다만 고약한 냄새는 어쩔 수 없었지만). 이상하게 몸이 녹으면 고통스러울 정도로 오줌이 마려웠다. 그건 다들 마찬가지였다. 눈치를 본 다음에 한 명씩 순서대로 밖으로 나갔다 들어오 곤 했으니까. 신기하게도 스칼렛은 밤에도 거의 밖에 나가는 일이 없었 다. 정말 여자는 화장실도 가지 않는 건지 막 몸이 녹는 순간 오줌 때문에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사실은 인간이 오줌을 누게 만들어 졌다는 사실을 저주스럽게 느끼게 했다. 이제 막 잠 이 들것 같은 순간에 저 추운 벌판에 나가서 오줌을 누고, 또 그런 후에 다시 처음부터 몸을 녹여야 한다는 건 끔찍한 일이었다. 만약 스칼렛이 우리 중에 없었다거나, 혹은 오브라디 교수의 충고가 없었다면 적어도 나 는 그냥 오줌을 누운 자리에서 쌌을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괴로운 마음은 이해하겠지만 만약 그대로 오줌을 누었다가는 큰 일이야. 밤새 마르지 않을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그랬다가는 당장 동상 에 걸리고 말 걸세." 어느 부위에 동상이 걸리게 될지는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지만 사실 그 건 물으나 마나 한 사실이었다. 한 번은 스칼렛이 밖에 나가 있는데 오줌이 마려운 날이 있었다. 처음 에는 스칼렛이 돌아올 때까지 참으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 도 스칼렛은 돌아오지 않았고, 급기야 잠이 자꾸 쏟아져서 이대로 잠들었 다가는 자면서 오줌을 싸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위기감이 느껴졌다. 나는 결국 마음을 다잡아먹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리 상황이 좋지 않다고 해도 동상에 걸리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던 것이다. 밖에 나가자 차가운 달빛이 눈밭에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주위를 둘러 보았지만 드문드문 솟아있는 이파리가 바늘처럼 솟아있는 나무들과 바위 덩어리, 그리고 달빛을 받아 푸르게 빛나고 있는 눈 외에는 아무 것도 보 이지 않았다. 스칼렛은 어디로 간 것일까? 나는 문득 스칼렛에게 무슨 일 이라도 생긴 게 아닌가 걱정이 됐다. 하지만 볼일이 더 급했으므로 나는 발을 동동 구르면서 가까운 나무 옆에서 일을 보기 시작했다 (발을 동동 구르지 않고서는 도저히 추위를 이기기 힘들었다). 이런 추위 속에서 오줌을 누는 일은 꼭 밧줄을 몸통에 걸고 절벽에 매 달려 있는 것과도 같은 일이다. 보기보다는 안전하고, 사고가 일어날 가 능성도 적지만, 만약 바람이나 그밖에 급작스러운 사태가 발생한다면 어 떤 꼴 (예를 들면 오줌줄기가 발을 적신다던가)을 당하게 될 지 알 수 없 는 일이었다. 등뒤에서 인기척이 들린 것은 그 순간이었다. 나는 오줌 누는 일에 집 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인기척에 소스라치듯 놀라서 오줌 줄기를 흐트러뜨 리고 말았다. 아차하는 사이에 오줌 줄기가 다리에 묻을 뻔했지만 일생 동안 해온 능숙한 노련함으로 나는 가까스로 오줌 줄기가 다리에 묻는 것 은 피할 수 있었다. "스, 스칼렛?" 나는 몸을 돌리면서 말했다 (물론 오줌을 눈 후의 뒤처리는 한 후였 다). "아, 수, 수르카 님." 나는 아타카파 공화국을 떠난 이후 스칼렛이 떠는 것을 처음 보았다. "추, 추, 춥죠?" "아, 예, 그렇네요." 이렇게 대답하는 스칼렛은 춥다기 보다는 당황하고 있는 기색이었다. 나는 혹시 내가 스칼렛이 일을 다 보기 전에 나와서 그런가 보다 생각하 고 얼른 천막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스칼렛은 내가 천막쪽으로 향하자 재빨리 입가를 팔 소매로 문질렀다. 그때만해도 나는 그 동작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나는 추위 때문에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지만 마치 뭔가에 홀리는 듯이 스칼렛 쪽을 바라보았다. 스칼렛은 나 와 눈이 마주치자 당혹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는데, 나는 순간 스칼렛 입가에 묻어 있는 검붉은 것을 보았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 만 팔 소매에도 검붉은 것이 묻어 있는 것으로 보아 스칼렛은 입가에 묻 어있는 그것을 소매로 닦아 낸 것이 틀림없었다. "스, 스칼렛, 어, 어디 아프, 픈 것 아니에요?"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20250/21893 ━━━━━━━━━━━━━━━━━━━━━━━━━━━━━━━━━━━━━━━━ 제 목:[탐그루] 실낙원 270 관련자료:없음 18/18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5-07 22:04 조회:1409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나는 이렇게 물었다가 얼른 입을 다물었다. 나도 나이가 나이니 만큼 알아야 할 것을 상당 부분 알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여자에게는 나름대로 감추고 싶은 비밀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과연 내 생 각이 옳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스칼렛은 우물쭈물하면서 대답하지 않았 고 나는 그 틈을 타서 얼른 천막 안으로 되돌아왔다. 어쩐지 꼭 보아서는 안 될 것은 본 양으로 나는 가슴이 콩딱거렸다. 스칼렛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꼭 그래서만은 아니었지만 나는 스칼렛이 들어오고 나서 도 한 참이 지나서야 잠이 들 수 있었다. 다음 날 나는 공연히 스칼렛을 보는 게 민망스러웠고, 스칼렛도 나와 비슷한 마음인지 나를 자꾸 피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다행 히도 누구 하나 그런 데까지 신경을 쓸 만큼의 여유는 가지고 있지 못했 고, 그 날 밤의 일은 나와 스칼렛만 알고 있는, 하지만 어떤 분명한 계기 가 없이는 결코 입 밖에 나오지 않을 이야기로 묻혀버렸다. 행군이 계속되면서 눈보라의 기세는 점차 수그러들었다. 어차피 산맥을 따라 이동하는 길이니 만큼 눈보라는 추위와 마찬가지로 피할 수 없는 일 이긴 했지만 그래도 눈보라가 많이 적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피부로 느낄 수 있을 정도였고, 그건 꽤나 고무적인 일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제대로 방향을 잡아서 이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기쁜 일도 그다지 오래 가지 못했다. 우선 굶주림이 날마 다 심해지던 어느 날 사빈이 맛도 별로 없고 고기도 얼마 없는 늙은 겨울 라마 한 마리를 잡아보겠다고 설치다가 돌뿌리를 밟은 일이 발단이 되었 다. 사빈은 불쌍하게도 돌뿌리를 밟고 발목을 삐끗하고 말았고, 그날 사 냥은 나와 마로우의 몫이 되었다. 나와 마로우는 사빈 만큼 뛰어난 사냥 꾼이 되지는 못했다. 발목을 삐지는 않았지만 온 몸이 멍과 상처로 엉망 이 된 결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쥐처럼 보이는 허연 색의 네 발 짐승 몇 마리뿐이었다. "뭐, 이 정도면 잘 했어. 내가 없는데도 꽤 잘하는 걸?" 사빈은 우리를 탓하지 않고 오히려 칭찬을 하며 여유를 부렸다. 오로스 크와 스칼렛은 언제나처럼 요리를 할 수 있는 땔감을 구해 왔고, 평소만 큼은 아니었어도 우리는 꽤나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우리의 사냥 솜씨는 늘어나기는커녕 줄어드는 듯 했고, 급기야는 얼어죽은 짐승 한 마리 줍지 못하는 날이 오고야 말았다. 늘 웃으면서 여유를 부리던 사빈이었지만 그 날 만큼은 꽤나 화가 난 모 양이었다. "이러다 굶어 죽겠다!" 사빈은 이렇게 말하고는 뒤로 돌아누워 버렸다. 사실 사빈이 발목을 다 친 이후로 행군 속도도 현저하게 떨어져 있었고, 그건 사빈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스칼렛이 치유 마법으로 사빈의 발목을 매일 보살폈지만 이 상스럽게도 사빈의 발목은 낫지 않았다. "독이 들어간 모양이에요, 아무래도. 추운 곳에서 상처에 독이 들어가 는 일은 드문데." "스칼렛 양. 독이 들어갔다니요? 그렇다면 독을 치유하는 약이라도 먹 지 않는 이상 낫는 건 무리라는 말씀이십니까?" "예. 제가 알고 있는 한은요." 오브라디 교수는 스칼렛의 말에 낭패라는 표정을 지었다. 사실 약이 조 금 있기는 했지만 상처에 들어간 독을 치유하는 약은 없었던 것이다. 그 나마 잘 먹고 잘 쉬면 몸이 가지고 있는 치유력으로 나을 수도 있겠지만 나와 마로우의 사냥솜씨가 향상되지 않는 이상 그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절벽 끝에 서서 산밑을 내려다보았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아득한 안개인지 구름인지 알 수 없는 희뿌연 공기 뿐, 푸른빛이라고는 찾아 볼 수가 없었다. 하늘은 어둑어둑해 지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다시 거센 눈 보라가 칠지 모르겠다는 예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왜 그렇게 불길 한 예감은 잘 들어맞는지, 그 날은 온통 눈보라 때문에 한 걸음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나는 천막에서 고개만 빼어 밖을 내다보았다. 눈보라가 심 해서 한 치 앞도 구분하기 힘들었다. 사방에 눈보라만이 스치고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자니, 꼭 죽은 뒤의 세상에 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문 닫아! 바람 들어와!" 신경이 날카로워진 사빈이 소리쳤고, 나는 얼른 천막안으로 들어온 뒤 입을 다물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 날은 어떻게 넘길 수 있었지만 행운이 계속되지는 않았다. 아니, 이 제껏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으니 이제 고생 좀 해보라는 듯 불행이 이어졌 다고 말하는 편이 낫겠다. 사빈이 발목을 다치자 이제는 오로스크가 몸살 을 앓는 듯 했고, 오브라디 교수도 나이는 못속이는지 제대로 걷지를 못 했다. 그나마 스타바가 추위에 강한 것이 우리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다. 스타바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천막이나 그밖에 유용한 물품을 전부 다 짊 어지고 날라야만 했을 테니 말이다. 스타바는 동그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도대체 뭐가 춥다고 그러냐는 듯이 뮤 울음소리를 내었지만 나는 스타바의 품에 안기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스타바가 여자였다면, 뭐 이런 엉뚱한 생각이나 하고 있을 뿐이었 다 (물론 스타바가 암컷이긴 했지만 말이다). 연금술사의 등이 깨져버리자 불행이 절정에 달했다. 마로우가 연금술사 의 등을 안고 가고 있는데 갑자기 돌풍이 불어닥쳤고, 마로우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쓰러져 버렸던 것이다. 사실 마로우가 운이 나빴다고밖에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냥 눈밭에 쓰러졌더라면 아무 일도 없었을 것을, 마로우가 쓰러진 곳이 하필이면 나무둥치였던 것이다. 나는 마로우가 쓰러지자 마로우에게 다친 곳은 없느냐고 물어볼 생각은 해 보지도 않고 연금술사의 등이 안전한가를 먼저 물었다. "이, 이거..." 마로우는 말을 잇지 못했다. 연금술사의 등은 이미 다시 사용할 수 없 을 만큼 박살이 나 있었다. 다들 한동안 말이 없었다. 허탈했다. 오래달 리기 끝에 결승점을 눈앞에 두고 엎어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행운이라는 행운은 모두 우리를 앞질러 코앞의 결승점으로 줄달음질쳐 사라져버렸다. 다행히도 그날 빰 잠들기 전에는 스칼렛이 마법으로 천막 안을 덥혀 주 었기 때문에 연금술사의 등이 박살나도 며칠간은 그나마 따뜻하게 지낼 수 있었다. "피는* 불*" 나는 스칼렛이 마법을 쓸 줄 안다는 사실이 이렇게까지 고마운 적이 없 었다. 일전에 바다에 빠진 나를 이 마법으로 구해주었을 때도 느끼지 못 했던 고마움이었다. 그런데 스칼렛은 마법을 쓰기 시작한 이후에는 전혀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나는 그 이유가 뭔지 궁금했지만 스칼렛의 소매에 묻어있던 시커먼 것을 떠올리면서 결코 묻지는 않았다. 그러나 분명한 것 은 스칼렛이 마법을 쓰기 시작한 이후 눈에 띄게 약해지고 있다는 사실이 었다. "스칼렛 양. 마법을 쓰면 몸에 무리가 오는 것은 아닌가?" "그래요, 스칼렛. 하루쯤은 쉬어도 되요." 다들 이렇게 스칼렛에게 한 마디씩 던졌지만 말뿐이었다. 스칼렛을 도 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도울 기력도 서서히 사라져 가는 중이 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스칼렛을 도울 수 있는 것은 나뿐이었다. 어찌되 었건 마법을 쓸 줄 아는 것은 스칼렛 말고는 나 하나 뿐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을 해도 나는 '피는 불'이라는 말로 마법을 만들어 낼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그 마법의 말이 무슨 뜻을 가지고 있는지 짐작조 차 가지 않는 까닭이었다. 한 번은 잠들기 전 아자닌을 불러내어 마법을 연습해 본 적도 있었다. "수르카 님. 그 말은 결코 수르카 님의 힘으로는 마법의 말로 쓸 수 없 는 말입니다." "아자닌. 그게 무슨 소리야?" "다시 설명 드리지요. 그러니까..." "아자닌. 그만 둬." 스칼렛이었다. 나는 스칼렛이 저렇게 무서운 눈빛을 하고서 누군가를 바라보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스칼렛이 그만 두라는 말을 하기가 무섭게 아자닌은 사라져 버렸다. "스칼렛, 왜 그러는 거예요?" 나는 조금 화가 섞인 목소리로 스칼렛에게 이렇게 말했다. 스칼렛은 내 말에 엉뚱하게도 이렇게 대답했다. "수르카 님은 할 수 없는 마법입니다. 아무리 대 마법사라고 해도 한계 는 있는 법이에요." 나는 그 말에 자존심이 상하기는 했지만 아무리 해도 마법이 작동하지 않는 것을 어쩔 수는 없었다. 그리고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마법의 말로 그나마 얼마 남아 있지 않은 체력을 낭비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사빈은 발목이 점점 더 부어오르더니 결국 열까지 나기 시작했다. 때를 맞추어 오로스크와 오브라디 교수도 몸을 가누기 어려울 지경이 되고 말 았고, 몸이 성한 것은 나와 마로우 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스칼렛도 눈 에 뜨이게 쇠약해지는가 싶더니 결국 마법조차 쓸 수 없게 되어버렸다. "해결책이 있어." 사빈이 열에 들뜬 목소리를 하고서 나에게 말했다. "스타바야." "스타바?" "그래. 저 멍청한 뮤를 잡아먹는 거야. 그것 말고는 수가 없어." 아무리 사빈이 제 정신이 아니라고 해도 나는 이 말 만큼은 참을 수가 없었다. "사빈. 정신 차리고 생각해봐. 스타바가 없다면 천막은 누가 나르지? 또 땔감과 솥은 누가 나르고?" "당장 죽게 생겼는데 천막이 무슨 소용이고 솥이 무슨 소용이야!" 사빈이 버럭 소리를 쳤다. 나는 더 이상 사빈에게 이성적으로 대응할 수 없음을 알았다. "차라리 날 잡아 먹어라! 스타바는 내 친구야! 너는 친구도 잡아먹냐!" 나역시 지지 않고 사빈에게 이렇게 소리쳤다. 사실 여기서 그쳤어도 좋 았을 것이다. 하지만 마치 내 안에 잠들어 있던 악마가 그 순간 깨어난 모양으로 나는 이렇게 덧붙이고 말았다. "의리와 명예 빼면 시체라면서? 그런데 의리도 명예도 저버리겠다고? 스타바 없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 것 같아? 차라리 발목이 부러져 아무 쓸모가 없는 널 먹어버리는 게 낫겠다." 내 말은 내가 해 놓고도 오싹한 기분이 들 지경이었다. 나는 말이 끝나 자 아차 싶었지만 이미 동료들은 이야기를 다 들은 후였다. 한 동안 아무 도 말이없었고, 우리는 다시 행군을 시작했다. 나는 미안한 마음이 들어 사빈을 슬쩍 바라보았다. 지팡이에 의지하면서 겨우겨우 한 걸음씩 떼고 있던 사빈은 야릇한 미소를 입에 물고 있었다. 나는 그 미소의 의미를 알 수가 없어서 그날 밤 잠들기 전에 나미트 장군의 칼을 꼭 품에 안고 잠들 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내가 그런 행동을 했던 것이 얼마나 수치스럽 던지. 안그래도 우리는 조금씩 미쳐가고 있는 듯 했다. 대화는 거의 오가지 않았고, 바람과 이따금 날리는 살을 에는 눈발만이 우리가 살아있음을 확 인시켜주었다. 게다가 갈수록 시야는 흐려져서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순간이 많아졌다. 결국 우리는 천막을 쳐 놓고 행군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모든 게 끝장이다 싶었다. 몸이 성했던 나와 마로우도 기력이 다했다는 걸 누 구라도 알고 있었고, 스칼렛의 마법도 오브라디 교수의 지혜도, 오로스크 의 시도, 어느 것도 우리에게 도움이 되어주지 못했다. 게다가 사빈의 병 은 날이 갈 수록 악화되고 있어서 거의 절망적이기까지했다. 그날 밤 우리는 절망적으로 서로를 부둥켜안고 밤을 지새웠다. 어찌된 일인지 나는 스칼렛을 안고 있었다. 스칼렛의 입김에서는 단내가 풍겼고, 희미하게 느껴지기는 했지만 여자에게서만 맡을 수 있는 묘한 냄새도 나 고 있었다. 상황이 이쯤 되고 보면 예전에 느꼈던 야릇한 기분이 느껴질 만도 했지만 나도 스칼렛도 그런 기분을 느끼기에는 너무 지쳐 있었다. 이제 죽음이 코앞에 닥친 기분이었다. 가끔씩 천막을 열고 밖을 내다보면 언뜻 보이던 죽음의 그림자가 이제는 현실로 다가오고 있음을 알 수 있었 다. 이제 끝인가. 우리 중 누구도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그 때였다. 사빈이 자리에서 일어난 것은. 나는 사빈을 바라보았지만 사빈이 무엇을 하려는지 도저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드디어 사빈이 미친건가? "잠시 다녀오겠어." 사빈은 이렇게 말하고는 지팡이를 짚고서 천막 밖으로 나갔다. 그 순간 우리 모두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 사빈은 더 이상 우리에게 짐이 되고 싶 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물론이고 모두가 사빈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정말로 우리 모두는 사빈이 짐이 된다고 느끼고 있 었는지도 모른다. 만약에 사빈이 죽게 된다면 모두가 공범이 될 것이었 다. 나는 사빈이 지었던 야릇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리고 내가 사빈에게 내 뱉었던 악의에 찬 말도 떠올랐다. 명예와 의리. 지금 이렇게 가만히 누워서 스칼렛의 체온에 의지한 채로 사빈이 나가건 말건 가만히 있는 내 가 명예와 의리라는 말을 입에 담을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도저히 그대로 있을 수 없었다. "사빈!" 나는 소리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내 말이 무슨 마법의 말 이라도 되는 듯이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20251/21893 ━━━━━━━━━━━━━━━━━━━━━━━━━━━━━━━━━━━━━━━━ 제 목:[탐그루] 실낙원 271 관련자료:없음 21/21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5-07 22:05 조회:1427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사빈을 찾아야겠네." "오브라디 교수님. 이대로 아무 대책도 없이 밖에 나갔다가는 모두 죽 습니다. 한 명씩 방향을 정해서 차례로 다녀오지요. 제가 먼저 다녀오겠 습니다. 저는 동쪽으로 가 보지요." "아냐, 마로우. 내가 먼저 나갈 께." "오로스크 님은 환자에요. 제가 나가겠어요." "우리 중에 제일 몸이 성한 게 접니다.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웅성거리며 실강이를 벌이고 있는데 갑자기 천막 문이 불쑥 열렸다. 사빈이었다. "사... 사빈?" "응. 내가 잠시 다녀온다고 했잖아?" 아픈 것을 잊었는지 얼굴에 미소마저 짓고 있는 사빈을 보는 순간 나는 맥이 탁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참. 그리고 밖으로 좀 나와봐. 놀랄 일이 좀 있어." 사빈이 천막문을 활짝 열어 젖히면서 말했다. 우리는 밖을 내다보았다. 밖에는 수없이 많은 털복숭이 사스카치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었다. 나 는 한 순간 몸이 굳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어둠 속에서 빛나고 있는 사스카치의 눈동자는 무시무시하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당신 입고 있는 게 뭐요?" 사스카치 사이에 서 있던 시커먼 그림자 하나가 사빈에게 물었다. 물음 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빈이 말을 이었다. "예. 예전에 저와 목숨을 함께 했던 바투라는 이름의 사스카치입니다. 성황청의 못된 기사녀석들과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했지요. 여기 가슴에 나 있는 두개의 상처가 보이시지요? 성황청 기사 녀석이 한 짓입니다. 물 론 그 녀석은 내 손으로 죽였지만 불행하게도 바투는 잃었지요. 이 외투 는 그때 바투가 남긴 유언입니다. 영원히 저와 함께 하고 싶다고 했거든 요." 사빈은 아픈 사람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말했다. 시커 먼 그림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스카치 가죽이었군. 반갑소. 그런데 여기서 뭣들 하는 거요?" 사빈은 뭐하러 저렇게 장황하게 변명을 늘어놓았을까? "우리는 타실로 가는 길입니다." 오브라디 교수가 대답했다. "어디서부터 오시는 길이신가?" "얼음이 있는 북쪽입니다." "고생 많으셨겠군요. 갑시다. 좀 고생스럽겠지만 며칠만 가면 우리 부 족이 사는 곳이 있다오. 우리는 우리를 훈족이라고 부르지만 다른 사람들 은 우리는 악마의 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하더군." "그럼 당신은...?" "나는 아훈이라고 하오. 어서 서두르지요. 내 친구들이 당신들을 보살 펴 줄 것이오." 아훈이라고 자신을 밝힌 시커먼 그림자가 말했고, 우리는 사스카치들에 게 업히다시피 해서 이곳 훈족이 살고 있는 악마의 입 근처까지 올 수 있 었다. 스타바는 이제 아주 신이 난 듯 멀리서도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릴 정 도로 즐겁게 아이스라는 이름의 뮤와 함께 뛰놀고 있었다. 두 마리의 뮤 가 푸른 초원에서 뛰노는 모습은 마치 꿈결처럼 여겨지는 풍경이었다. 구 름이 두 마리의 뮤 위를 떠돌고 있었다. 바람은 구름과 대지 사이를 자유 롭게 떠다니고, 저 너머 보이는 숲에는 나뭇가지들이 몸을 흔들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평화롭다는 말로는 부족한, 더할 나위 없이 벅찬 감정이 일었다. 언젠가 용병단 시절에도 이런 느낌을 가졌던 기억이 있다. 이런 세상을 위해서라면 죽어도 좋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건 그저 생각일 뿐이었다. 실제로 나는 그 무엇을 위해서도 죽고 싶지 않았다. 문 득 사빈에게 함부로 굴었던 일이 떠올라서 부끄러워졌다. 맑은 하늘 아래 서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어야 하는 이유가 도대체 뭔가 싶기도 했지만 가 슴속에서 밀려나오는 부끄러움은 어느새 양볼을 물들이고 말았다. "좋은 곳이라고 생각하고 있는가, 이곳이?" "예?" 나는 화들짝 놀라면서 고마 족장의 물음에 답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꼭 모두들 굶고 있는 데 몰래 혼자 먹을 것을 숨겨놓고 있다가 들킨 기분 이었다.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라네." 족장은 이렇게 말하면서 산자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족장의 손가락 끝에는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 지역은 지력이 특히 약하다네. 다른 곳에서 살았던 자네 눈에는 이 곳의 들판이 푸르고 아름답게 보일지 모르지만 실은 그렇지 않지. 여기서 자랄 수 있는 건 질기고 억센 잡풀들뿐이라네. 곡식이 될만한 것들은 거 의 자라지 않는다네." "그럼 저 연기는..." "그래. 우리는 대부분 화전으로 끼니를 이어간다네. 젊은 남자들은 항 상 사냥 아니면 화전에 시달리고 있지. 자네를 구해줬던 아훈 녀석도 그 때 사냥중이었다네." "그렇게 먼 곳까지 사냥을 나오시는군요. 저희에게는 다행이네요. 안 그랬다면 저희는 다 죽었을 거예요, 틀림없이." "원해 그렇게 높고 먼 곳까지는 올라가지 않는다네, 원래. 그리고 사스 카치들을 그렇게 많이 친구로 사귀는 일도 피하고 있었고. 사스카치는 좋 은 녀석들이지. 먹을 수 없는 들꽃 한 송이라도 진심을 담아 선물하면 친 구가 되어 주거든. 일단 친구가 되면 목숨을 걸고라도 친구를 돕지. 죽을 때까지 말이야."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빈이 뒤집어쓰고 있는 가죽의 주인이었 을 사스카치가 문득 떠올랐다. "굉장히 마음이 고운 분인가 보군요, 아훈이라는 분은." 나는 진심으로 선물해 주면 친구가 된다는 말로 미루어 이렇게 짐작했 다. 아훈의 뒤에는 사스카치들이 수도 없이 늘어서 있었으니까. "본래 우리 훈족은 동물을 부리는 능력이 있다네. 그건 순전히 동물의 마음을 이해하기 때문이지. 동물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결코 할 수 없는 능력이라네." "마법과 같군요." "그렇지. 마법이지." 이렇게 말하는 족장의 눈동자에 물기가 어리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 다. 뭔가 좋지 않은 예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아훈이는 좀 다르다네. 내 아들이지만 아훈이에게는 특출한 재 능이있다네." "재능이요?" "마력이지, 그건. 마법이 아니라." 족장은 이렇게 말했다. 족장은 더 이상 설명을 덧붙이지는 않았지만 마 력이라는 말에서 나는 라스폼의 눈빛을 떠올릴 수 있었다. 라스폼 또한 탐그루에서 나와 사비오 영감을 죽이려고 했을 때, 사스카치를 대동하고 왔었다. 그런 라스폼에게 진실한 마음이 있을 것이라는 건 생각할 수 없 었다. 그런 힘을 마력이라고 하는 걸까? "족장 님. 마력이란 무엇입니까?" 나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서 이렇게 물었다. "마력이란, 간단하게 말해서 자신의 마음을 속일 수 있는 능력이라네." 나는 족장의 말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자신의 마음을 속인다는 게 어 떻게 가능한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의 마음을 속일 수 있는 사람은 마법을 조작할 수 있을 뿐만 아니 라 마법사의 독심술도 피할 수 있다네." "그렇다면 그것도 하나의 능력 아닌가요?" "능력? 그렇지. 사람을 베고 숲을 불태우며 짐승들을 재미로 죽일 수 있는 것도 능력이라고 한다면 말일세." 족장의 목소리에는 노기가 어려있었다. 나는 대강 어떤 맥락의 이야기 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아훈이라는 족장의 아들에게는 마력이 있고, 아 마도 족장은 그런 아훈을 못마땅해 하고 있는 듯 했다. 그런데 자신의 마 음을 속일 수 있다는 건 무슨 말일까? 나는 여전히 그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여어! 수르카!" 등 뒤에서 목발을 짚은 사빈이 소리쳤다. 나는 사빈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사빈의 옆에는 스칼렛과 마로우가 함께 서 있었고 그 뒤로 훈족 의 꼬마들이 줄을 지어서 사빈을 따라오고 있었다. "자네 동료들이로군." 사빈은 손에 단검을 들고서 꼬마들에게 단검 돌리는 묘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로스안에 있을 때 튜니티가 보여주었던 기술과 비슷한 것이었다. 하긴. 튜니티가 자신은 로스안 최고의 검사라고 말했지만 어쩌면 사빈은 로스안에서 두 번째 가는 검사일지도 모르는 일이니 저 정도 재주는 있겠 다 싶었다. "말씀은 많이 나누셨습니까?" 어느 사이, 마로우가 내 곁으로 다가와 이렇게 족장에게 물었다. 사실 내가 이곳에서 족장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게 된 것은 족장의 제안 때문이 었다. 족장은 나에게 뭔가 부탁할 것이 있다면서 잠시 이야기를 하자고 했던 것이다. 스칼렛은 마로우 곁에 있었다. 스칼렛도 체력이 많이 회복 되었는지 볼에 발그래한 빛이 돌고 있었다. 건강해 보이는 스칼렛의 모습 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 "오브라디 교수님하고 오로스크는?" "응. 오두막에서 오로스크하고 시에 대한 논쟁을 벌이고 계셔. 아마 '예언의 눈동자' 해석 문제로 다투고 계신 것 같던데? 알지? 사비오 님의 시집 말이야. 오브라디 교수님은 예언의 눈동자를 일종의 예언서로 해석 할 수 있다는 견해를 보이고 계시고, 오로스크는 시는 마음으로 읽는 거 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어서." "솔직히 전 무슨 얘긴지 하나도 모르겠더라구요." 스칼렛이 내 귀에 대고 속삭이듯이 말했다. 나는 귓불에 매달린 솜털들 이 모조리 곤두서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간지러운 듯 했지만 나쁜 기 분은 아니었다. "수르카 한테 뭐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셨는데, 그 말씀은 다 하셨습니 까?" 마로우가 물었고, 스칼렛은 내 옆에 다가와 앉았다. "이제 막 시작일세. 자네들도 듣겠는가?" "좋습니다. 저는 평소 훈족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옛날에 이곳 출신 분 을 뵌 적이 있거든요." "참. 그렇다고 했지. 이름이...?" "유훈과 재훈입니다." 나는 휘파람으로 떠버리새들을 불러내던 유훈과 슬픈 얼굴로 나에게 밍 밍의 십부가 전멸한 것은 자신의 책임이라고 말하던 재훈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그렇군..." 족장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었다. 뭔가 비밀을 간직한 듯한 얼 굴이었다. "내가 이야기를 하나 해 주지." 족장은 이렇게 말하면서 허공을 응시하였다. 아무 것도 없는 빈 공간을 응시하는 족장의 눈은 촛점이 없었다. "먼 옛날 이 땅에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았다네. 그저 동물들과 나무뿐 이었지. 그런데 어느 날 하늘에서 한 신이 땅으로 내려왔다네." 족장의 목소리는 마음에서 울려나오는 소리였다. 나는 그것을 감지 할 수 있었다. 나는 옆에 앉아있는 스칼렛을 바라보았다. 스칼렛도 내가 느 끼는 기운을 감지하고 있는 듯, 눈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신은 영원하지. 결코 죽지 않아. 그러나 신은 그 수가 늘어나지도 않 고 줄어들지도 않지. 왜냐하면 영원한 것에 변함이라는 것이 있을 리가 없지 않겠는가. 그런데 그 신은 생각을 한 것이지. 유한한 삶을 살고 싶 다, 그리고 자손을 보고 싶다... 뭐 이런 거였을 테지. 그래서 땅으로 내 려온 그 신은 세상의 동물들에게 고했다네. 마늘을 가지고 오는 자에게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날 수 있는 기회를 주겠노라." 고마 족장의 목소리는 점점 울림을 더해가고 있었다. 마법의 말을 들을 때면 늘 가슴이 벅차 오른다. 새로운 것을 탐구해 나가는 마로우나 오브 라디 교수도 아마 이런 기분을 알고 있으리라. "마늘이 뭡니까?" 마로우가 물었다. 마로우의 눈은 호기심으로 잔뜩 빛나고 있었다. "마늘은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신비의 치유력을 지녔다는 약초입니 다." 스칼렛은 눈살을 찌푸리고서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스칼렛의 말에서 조금 어색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스칼렛은 치유력을 가지고 있으니 치유 력이 있는 약초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말하고 있는 스칼렛의 태도는 마치 독약이라도 언급하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 던 것이다. 고마 족장은 그런 스칼렛을 마치 딸을 바라보는 어머니처럼 그윽한 눈으로 처다 보았다. "그렇지. 보통 사람들에게도 신비의 약초로 알려진 풀이라네. 냄새가 고약하고, 악한 기운을 몰아내는 힘이 있으며 또한 조금만 먹어도 힘이 솟는다고 하지. 하지만 그 풀은 전체를 먹을 수는 없다네. 독이 있다고 하거든." "열매를 먹나요?" 마로우가 다시 호기심 어린 얼굴을 하고서 물었다. "마늘 풀에는 열매가 열리지 않아. 줄기의 일부가 자라나서 그것을 먹 지. 그런 줄기를 비늘줄기라고 부른다네. 마늘이 건강을 주는 것은 바로 열매를 맺지 않기 때문이야. 열매를 맺을 힘으로 줄기를 자라게 하기 때 문에 사람은 그 비늘줄기를 먹음으로 해서 마늘로부터 그 힘을 빌려오는 것이지." 족장의 말은 여기서 한 번 멈추었다. 족장의 목소리는 어느 사이 마치 오래된 예언을 전승하고 있는 아타파파 공화국의 대통령 와트슨과 비슷한 느낌을 풍기는 목소리로 변해있었다. "하늘에서 내려온 그 신은 세상의 동물들에게 기회를 준 것이었다네. 자신의 형상으로 변할 수 있는 기회를. 동물들은 신의 아름다운 외모에 반해 마늘을 찾아 사방으로 흩어졌지. 하지만 결국 마늘을 찾아온 짐승은 곰과 호랑이 둘 뿐이었다고 하네." "자, 잠깐만요. 마늘을 찾아왔다고 하셨나요, 지금?"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20302/21893 ━━━━━━━━━━━━━━━━━━━━━━━━━━━━━━━━━━━━━━━━ 제 목:[탐그루] 실낙원 272 관련자료:없음 19/19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5-08 21:22 조회:1442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스칼렛이 족장에게 물었다. 족장은 스칼렛을 잠시 한 번 바라보았을 뿐 특별히 대답은 하지 않고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마늘을 찾아 온 호랑이와 곰에게 신은 말했다네. 이것을 먹으면 너희 들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하지만 너희 후손들은 나의 형상으로 살 수 있으리라. 곰과 호랑이는 고민에 빠졌다네. 아무리 신의 형상을 하게 된 다고 한 들 죽으면 무슨 소용이 있으랴 싶었던 것이지. 신은 둘에게 시간 을 주었다네. 저 뒤에 보이는 대비스토브레 산맥의 산줄기에 동굴 하나를 정해주고는 백일의 시간을 줄 터이니 그 시간 안에 결정하라, 신은 이렇 게 말했지. 몇 날이 가고 또 며칠이 흘렀다네. 둘은 결정을 내리지 못하 고 전전긍긍했지. 이 모습 이 대로 동물로 살다 죽을 것인가. 아니면 지 금 여기서 죽어 새로운 형태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날 것인가. 결국 백일 의 시간은 눈깜박할 사이에 흐르고, 호랑이는 결국 동굴을 떠났다네. 곰 만 동굴에 남은 것이지. 그리곤 헌 생명을 버리고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날 준비를 하게 된 것이지." "그런데 왜 하필 곰이었을까요?" 엉뚱하게 마로우가 물었다. 스칼렛이 당장 가볍게 마로우를 흘겨보면서 말했다. "쓸데 없는 소리좀 말아요, 마로우 님." "흠흠. 이건 학자의 호기심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지 요. 신화는 오랜 시간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아닙니까? 그러니까 원래 이 야기가 틀림없이 바뀌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지요. 예를 들어 곰 이름을 가진 부족과 호랑이 이름을 가진 부족이..." "꼭 그렇게 이치를 따져 생각해야만 직성이 풀리겠는가, 학자 양반?" 족장이 마로우에게 물었다. 순간, 내 안을 울려오던 마법의 울림은 전 부 다 사라져 버리고 공허한 목소리만이 허공을 떠돌았다. 마로우는 족장 의 물음에 당황한 듯 입을 다물어 버렸다. 케텐 호수 위로 새들이 뭔가 먹을 것을 발견하기라도 했는지 빙빙 돌며 날고 있었다. "곰은 마늘을 먹었다네. 죽음이 올 것을 알면서. 곰은 이해했던 것이 지. 그것이 진정으로 새로운 생명을 얻는 길이라는 걸 말일세." "하지만 마늘을 먹는다고 죽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말씀하셨지 않습니 까. 마늘은 약초라고." "이야기를 좀 끝까지 들어요, 마로우!" 낮게, 하지만 강한 어조로 스칼렛이 다시 마로우를 나무랐다. 마로우는 이제 정말 아무 말도 하지 못할 사람처럼 우물쭈물거렸다. "그래. 약초지. 곰이야 새로운 생명의 기운을 받았으니 아무 탈이 없었 지. 하지만 신은 달랐다네. 영원한 생명을 이미 지니고 있었으니까. 영원 한 생명에게 생명의 힘은 결국 죽음을 의미하는 거였지. 신은 곰을 사람 의 형상으로 변화시킨 후, 자신도 마늘을 먹었다네. 그리고 신은, 결코 죽지 않는 신은 보통의 생명처럼 죽게 될 운명이 되었다네." 그렇구나. 나는 알 수 있었다. 생명이 있다는 말이 생명이 끝난다는 말 과 같다는 것을. 그 신은 곰을 통해 생명의 힘이란 게 무엇인지 더 자세 히 알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실험은 성공한 것이다. 충분히 불멸하 는 생명의 아름다움을 느꼈던 신은 이제 유한한 생명의 아름다움까지도 획득해 완전해 진 것이다. 그렇다면 죽을 수 있다는 게, 죽는다는 게 오 히려 완전한 생명이라는 뜻인가? 문득 나는 그 신의 피가 족장의 몸에 흐 르고 있는 게 틀림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훈족의 탄생 신화로군요." "그냥 전설이지. 우리가 어떻게 존재하는 가에 대한 물음이라고도 할 수 있고." "그런데 그 이야기를 하신 이유는 뭔가요?" 나는 마로우가 뭐라고 말하건 말건 족장에게 이렇게 물었다. 족장이 나 에게 부탁할 것이 있다고 했으니 틀림없이 이 이야기와 관련이 있으리라 는 생각이 들었다. "죽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했던 거 기억하는가?" "예." "죽지 않는 사람은 지금도 어디엔가 존재한다네. 어떤 사람들은 그 죽 지 않는 사람을 찾아 헤매기도 한다고 하더군. 자신도 영원한 생명을 얻 기 위해서 말일세. 어떤 사람은 남쪽 샨티샨티해의 폭풍지대 너머에 있다 고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이 깊은 대비스토브레 산맥 어디엔가 있다고 도 하지. 하지만 영원한 생명이라는 말은 결국 생명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네." "사람의 헛된 욕망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 같군요." 마로우가 말했다. 나는 마로우가 입을 여는 순간 말려야 하나 하는 생 각을 해 보았지만 족장은 그냥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그렇다네. 사람의 헛된 욕망. 바로 그것이지." 족장은 나의 눈을 바라보았다. 마법의 말로 나의 가슴을 울렸던 족장은 금새 평범한 노인으로 돌아와 있었다. 케텐 호수의 수면은 잠잠했다. 이 따금 일렁이는 물결도 마치 물고기의 비늘처럼 반짝거릴 뿐이었다. "수르카. 나는 바르도대륙 곳곳을 떠돌아다니면서 많은 것을 보고 들었 다네. 사실 나는 훈족의 전통에서 바라본다면 그리 훌륭한 족장은 아니 야. 나는 버려진 아이 출신이라네." 고마 족장이 말에 세 사람이 숨을 죽였다. 버려진 아이라니? "재훈과 유훈이라는 친구, 나는 기억하고 있네. 그 아이들의 이름 역시 내가 지어주었으니까. 이곳에 태어난 아이들 중 능력이 떨어지는 아이는 가차없이 버려진다네. 나이가 서른이 될 때까지는 절대로 마을로 돌아 올 수 없지. 유훈과 재훈도 마찬가지였다네." "버려진다고요? 그럼 부모는 가만히 그걸 눈뜨고 바라보나요?" "마로우. 자네는 아직도 모르는 구만. 이곳은 어머니만이 존재한다네. 아버지는 없어. 어머니도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고 말일세. 나 역시 일생동안 일곱 명의 아들과 다섯명의 딸을 낳았지만 아버지가 누구 인지는 모르고 있다네. 남자들은 늘 밖에서 일을 해야 하지. 사냥이건, 화전이건. 여자들은 아이를 낳고 기른다네. 그것이 이곳의 법일세." 이 말에 나는 고마 족장을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족장이 남달리 비대한 몸을 가지고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열 둘이나 되는 자손을 보았으리라고는 전혀 상상조차 못했다. "우리는 자네들이 흔히 말하는 '자신의 것'이라는 게 없다네. 우리는 모든 것을 함께 쓰고 함께 먹고 함께 일하지. 이것이 우리 훈족의 전통이 라네. 자네들은 땅조차도 사고 판다고 들었네. 난 이해가 안돼네. 도대체 땅이 누구의 것이 될 수 있다는 말인지. 어떻게 햇살과 땅, 바람과 들풀, 짐승들을 사람이 사고 팔 수가 있다는 말인가?" 고마 족장의 말은 나에게 놀라움을 주었다. 나는 그런 세상이 있으리라 고는 생각조차 해 보지 못했다. 모두가 공평하게 나누는 세상. 모두들 행 복하고 아무도 다툼이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젊은 날, 이곳 저곳에서 많은 경험을 해 보았다네. 뛰어난 인재 는 아니었지만 누구보다도 경험은 많다고 자부하지. 대륙의 곳곳을 다니 며 비스토브레 왕국 사람들의 생활 방식을 보고 배웠다네. 그런 나니까 자네들과 이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지. 우리들 중 대부분은 사실 사고 판 다던가, 나의 것을 지키기 위해 누군가와 싸운다는 말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다네." "하지만 이렇게 척박한 곳에서 얻어지는 것으로 마을을 꾸려가기에 어 려움은 없습니까?" 마로우가 고마 족장에게 물었다. "아까 말했듯이 이곳은 척박한 땅이지. 그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 야. 하지만 나는 그게 불운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네. 다행히도 이곳이 척박한 덕에 아무도 우리의 영역을 침범해 들어오지 않으니 말일 세. 덕분에 우리는 우리의 공동체를 유지해 올 수 있었다네. 자, 이제 이 야기 할 수 있는 건 다 이야기했으니 내가 부탁하고 싶은 걸 말할 수 있 겠지?" 이곳 훈족이 사는 방식은 비스토브레 왕국과도 다르고, 또한 아타카파 공화국과도 달랐다. 공동체. 나는 고마 족장이 했던 공동체라는 말을 다 시금 곱씹어 보았다. 이 곳이 정말 누구나 꿈꾸는 그런 이상적인 공동체 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케텐 호수의 물결은 이제 조금씩 일렁 이고 있는 듯 보이고 있었다. 물고기들이 수면에까지 올라와 요동을 치는 모양이었다. 새들이 점점 더 많이 호수 상공 위로 몰려들고 있었다. "수르카. 아이들이 없어지고 있다네." 고마 족장이 어두운 안색으로 말을 꺼냈다. 아이들이 없어지고 있다니? 나는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사빈은 여전히 훈족의 꼬마아이들과 놀고 있 었다. 단검 돌리기는 이제 싫증이 났는지, 사빈은 아이들과 씨름을 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없어지고 있다니요?" "그래. 언제부턴가 아이들이 하나 둘 없어지고 있어. 산으로 놀러간 아 이들이 주로 사라지는 것으로 보아서 산 속에 뭔가 있다고 생각하는 녀석 들도 있는 모양이지만, 나는 다르게 생각하고 있다네. 이건 저주일세, 우 리 훈족에게 내려진 저주야. 나는 얼마 전 신탁을 받았다네. 아이들이 모 두 사라지고, 훈족이 멸망할 위기에 처했다는 신탁이었지. 신이 우리에게 약속했던 생명, 즉 마늘처럼 몸의 일부를 떼어 영원히 존재할 수 있는 길 이 이제는 막히고 있다는 신탁이었다네." "또 그 전설 이야기입니까, 어머니?" 고마 족장이 여기까지 말했을 때, 언제 나타났는지 아훈이 대화에 끼어 들었다. "이제 그런 소리 그만 두세요. 제가 형제들과 함께 지금 산을 수색 중 이니까요. 뭐든지 원인이 있고 또 원인이 있어야 결과가 나오는 게 당연 한 이치 아닙니까?" 아훈 역시 고마 족장처럼 훈족 특유의 올려 묶은 상투 머리를 하고 있 기는 했지만, 다른 훈족과는 달리 짐승의 털가죽으로 만들어진 조끼와 신 발을 신고 있어서 어딘지 특별해 보였다. "전설을 모독하지 마라. 그건 내 어머니와 또 어머니의 어머니, 그리고 그 어머니의 이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신성한 것이다." "바로 그 신성한 게 아이들을 잡아가게 하고 있다고요, 어머니." 아훈의 태도는 단호했다. 가슴을 쭉 펴고 주먹을 꼭 쥐고 있는 모습이 아훈의 의지를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아훈아. 너는 너는 정말 내가 무슨 말을 하는 지를 못 알아듣는 것이 냐? 너를 만들어준 이 대지와 하늘과 호수가 너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되 어주지 못한단 말이냐? 어떻게 신성한 것에 대해서 그렇게 함부로 말 할 수 있느냐." "어머니. 절 낳은 건 대지와 하늘과 호수가 아니라 어머니예요." 아훈은 거의 시비를 거는 불량배처럼 건들거리고 있었다. 나는 이런 분 위기에 익숙치가 않아서 도무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어야 할 지, 무슨 말 을 해야 할 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건 마로우와 스칼렛도 마찬가지 였다. 모자간의 싸움이라니. 나는 아훈의 태도를 이해 할 수가 없었다. 내가 고아이기 때문에 그런 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도무지 아훈이 왜 저 렇게 어머니에게 대드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너를 니브리티에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한참 동안 침묵이 있은 후에, 정말로 후회스럽다는 듯이 고마 족장이 중얼거렸다. 아훈은 그런 고마의 말에 바로 반발했다. "제가 니브리티에 가서 배운 것들을 모두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세상 은 변하고 있어요. 마법만을 최고라고 생각하던 니브리티 마저도 변하고 있었어요. 저는 보았습니다. 군대가 움직이는 모습을. 그리고 그 군대가 어떤 힘을 발휘하는지. 저희도 강해지지 않으면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될 지도 몰라요." "우리 훈족은 군대 같은 것이 없어도 천 연도 넘게 잘 살아왔다. 그건 우리가 잘나서가 아니야. 우리의 등뒤에, 우리가 의지해 살 수 있는 대지 와 하늘과 호수가 있었기 때문이지." 고마 족장의 말에 아훈이 또 한 번 반박하려고 했지만 나는 얼른 고마 족장의 말에 덧붙였다. "제가 볼 때는 비스토브레 왕국이야말로 바로 이곳 훈족의 마을이 살아 가는 방식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내 말은 사실이었다. 정말 모두들 이렇게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진심에서 나온 말이었다. 자신의 것이 없다면, 그리고 모두가 모두를 위 해서 일을 하면서 산다면, 아마 세상에는 군대 같은 것은 물론이고 그 어 떠한 형태의 다툼도, 고통도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 나온 말이었다. 하 지만 아훈은 내 의견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간략하고도 분명한 말로 나의 의견을 바로 묵살한 것을 보면 말이다. "외지인 주제에. 입닥쳐." 나를 똑바로 노려보는 아훈의 눈에서는 살기처럼 섬뜩한 것이 어려 있 었다. 물론 아훈이 이렇게 말하자 고마는 즉시 아훈에게 비슷한 어조로 비슷한 명령을 내렸다. "조용히 하거라!" 나는 내 가슴이 다 철렁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무시무시한 어조. 나 는 순간 이미 다른 세상의 사람이 되어버린 라이짐의 어머니, 이무르 아 주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훈도 역시 엄마 앞에서는 항상 어리기만 한 자식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이렇게 꾸짖는 어머니 앞에서 갑자기 주눅이 드는 걸 보면 말이다. "이 분은 우리 훈족을 구원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분이다. 아훈 네 놈이 잘난 척을 하는 꼴은 볼 수 있어도, 이런 분을 욕되게 하는 꼴은 볼 수가 없다." "구원해주다니요?" 스칼렛이 고마 족장의 말에 이렇게 물어보았다. 고마 족장은 일단 아훈 에게 한번만 더 그런 식으로 입을 놀리면 그 잘난 주둥아리를 찢어버리겠 다는 듯한 어조로 으름장을 놓은 다음 스칼렛의 질문에 답해주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20303/21893 ━━━━━━━━━━━━━━━━━━━━━━━━━━━━━━━━━━━━━━━━ 제 목:[탐그루] 실낙원 273 관련자료:없음 22/22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5-08 21:22 조회:1342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아까 길게 전설을 들려준 데에는 이유가 있다네. 수르카. 당신이야말 로 우리 훈족을 구해 줄 수 있는 사람이야." "제, 제가요?" 나는 솔직히 당혹스러웠다. 이런 종류의 말에 나는 그다지 익숙하지 못 하다. 스칼렛이 대 마법사 운운 할 때 느껴지는 당혹감이 느껴졌다. 내가 특별한 존재라고 하는 말은 꼭 라스폼이 내가 마소드의 검에 반응을 보 였다는 사실 때문에 나를 잡아가려고 했을 때 만큼이나 나를 당혹스럽게 만들곤 했다. "아이들이 없어진다는 건 우리 훈족에게 더 이상 생명의 은총이 내리지 않는 다는 뜻이라오. 그러니 이제 우리는 생명의 은총을 스스로 받아내는 수밖에 없다네." 고마의 목소리는 다시 울림을 주고 있었다. 가슴이 다 두근거릴 지경이 었다. 하지만 나는 고마의 말에 우선 이렇게 물어야 했다. "저, 죄송하지만 잘 이해가 안 가거든요?" 전설도 좋고, 생명의 은총도 좋지만 나는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수르카. 당신이 다시 한 번 우리의 전설을 재현시켜 준다면 우리 훈족 은 다시 한 번 생명의 은총을 이어갈 수 있게 될 것이야." 내 물음에 고마 족장이 자세한 어조로 설명을 해 주었다. 나는 아타카 파 공화국에서 와트슨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전설을 직접 본다는 것은 가슴 떨리는 일이라는 말 말이다. 지금 고마 족장도 그 때의 와트슨처럼 떨리는 목소리를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답답했다. 내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닌 것은 물론이고, 전설을 재현할 수 있는 능력도 없건 만 도대체 왜 나에게 이런 부탁을 하는 지, 나는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 다. "전설을 제가 어떻게 재현 할 수 있다는 말인지 전 잘 모르겠네요. 마 늘이라도 찾아서 먹어야 한다는 건가요?" 그래서 나는 이렇게 솔직하게 고마 족장에게 내 심정을 털어놓았다. "하하하. 이봐. 마늘은 산 속 깊은 곳으로 들어가면 그리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어. 뭐, 외지인이 마늘을 찾기란 보통 동굴에서 금맥을 발견하 는 일처럼 어렵기야 하겠지만 말이야." 내가 한 말은 그저 제발 나를 가볍게 여겨달라는 뜻으로 한 말이었지만 아훈은 이렇게 내 말을 굳이 비꼬았다. 고마 족장은 아훈을 한 번 노려본 다음 (그러니까 잠자코 있지 않으면 어떤 꼴이 될지 다시 한 번 상기 시 켜 준 다음),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운명이 훈족과 함께 한다면 그 방법은 수르카, 당신이 스스로 알게 될 것이오." 나는 난감했다. 이런 종류의 부탁이라면 도저히 내가 들어 줄 수 있는 방법이 없을 듯 했다. 나는 그저 마법이나 조금 쓸 줄 아는 평범한 사람 에 불과하다는 것을 도대체 어떻게 해야 알려 줄 수 있을까. "고마 족장님. 보다시피 저는 키도 작고, 특별한 능력도 없는 평범한 사람이에요. 저한테 그런 부탁을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하하. 어머니의 기대를 저버리시는 군요, 이 친구." "아훈!" 고마 족장은 최후 통첩을 보내는 지휘관 같이 냉혹한 얼굴로 아들을 쏘 아보았다. 아훈은 모든 아들이 그렇겠지만, 어머니가 소리치자 다시 한 번 주눅이 들었다. "그 이유는 당신이 바로 지금 우리에게 왔기 때문이라오." 대답이라기 보다는 강요에 가까운 말이었다. 차라리 반지를 보고 그렇 게 생각했다든지, 아니면 당신은 자세히 보니 비범한 사람이라는 투의 말 이었다면 뭔가 희망을 걸어볼 수도 있었겠지만, 이런 말은 도무지 받아들 이기가 쉽지 않았다. "그리고 아훈. 네가 자꾸만 그렇게 말하니 우리 이렇게 하자꾸나. 만약 에 네가 아이들이 사라지는 것을 막게 된다면 너에게 족장 자리를 물려주 마. 하지만 내가 맞는다면 너는 일생동안 다시는 그따위 소리를 입에 담 아서는 안 된다. 나와 약속할 수 있겠느냐?" "물론입니다. 훈족의 상투를 걸고." 아훈은 이렇게 말했다. "아들이 족장을 승계한 일은 지금껏 단 한 번도 없었다. 너도 알고 있 겠지?" "최조의 아들 족장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요. 최초의 쫓겨난 아이 출신의 족장 어머니의 대를 이어서요." 아훈의 말에는 가시가 돋쳐있는 듯했다. 나는 난감했다. 어쩐지 이 훈족이 계속 이렇게 평화롭게 살아가는 일이 순전히 내 손에 달려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가소롭 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아훈을 보고있자니 아훈의 손에 마을이 들 어갔다가는 결국 평화로운 이곳도 피와 살육으로 얼룩지게 될 것만 같은 끔찍한 생각도 따라 들었다. "그런데 저기 저 연기는 뭡니까?" 마로우가 산등성이에서 올라오고 있는 연기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보통 화전 마을이라면 시커먼 연기가 올라와야 정상이겠으나, 지금 보이고 있 는 연기는 붉은 색을 띄고 있었다. "일훈! 사훈!" 아훈이 큰 소리로 동료를 불렀고, 고마 족장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는 무슨 일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일단 엉거주춤 하면서 자리에서 따라 일어섰다. "혹시 아이들을 찾았다는 신호는 아닌가요?" 스칼렛이 고마 족장에게 물었다. 고마 족장 대신 아훈이 스칼렛의 질문 에 대답했다. "저 연기는 마물들이 나타났다는 신호라오." 웬지 아훈의 목소리는 기대감으로 들떠 있었다. 가고일들의 공격은 처음에는 화전을 하고 있던 마을 남자들에게 닥친 모양이었다. 네 명의 훈족 남자가 죽었고, 아홉 명이 중상을 입었다. 일 곱명 중 창자를 다친 사람이 둘이나 있어서 사망자는 더 늘어나게 될 것 같았다. "일훈은 여기를 조사해봐. 사훈은 어떤 녀석이었는지 물어보고." 아훈이 일훈과 사훈에게 말했다. 일훈은 동그란 얼굴에 털이 많은 사내 였다. 귀밑에서 시작되어 볼을 뒤덮고 턱까지 내려오는 수염을 기른 일훈 은 얼른 보기에 동그란 눈을 하고 있어서 귀엽게 보이기는 했지만 자세히 수염을 바라보면 그 안에 긴 흉터 자국이 남아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사훈은 키가 작은 여자였다. 아훈이 큰 편이기는 했지만 아훈의 가슴께까 지도 겨우 오는 키에 비쩍 마른 몸을 하고 있었다. "물어보라니, 누구한테 물어보라는 말일까?" 마로우가 혼잣말 처럼 중얼거리자 사훈은 대답이라도 하는 듯이 숲으로 다가가 기묘한 울음소리를 내었다. 그러자 백년수들이 사훈의 주변에 모 여들었다. 일훈은 아훈의 명령에 따라 바닥에 나있는 발자국들을 살펴보 고 있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방은 하늘이 반쪽만 보일 만큼 울창한 숲이 었다.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새들은 사훈의 주변을 돌고 있었고, 일훈 이 살펴보고 있는 발자국과 그 근처에 흩뿌려져 있는 핏방울들은 숲과는 어울리지 않아서 마치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 이질감을 주고 있었다. 숲 을 태워 기름지게 만든 땅 위에는 씨뿌리기가 한창이었고, 주변에는 작업 을 위한 움막이 몇 채 지어져 있었다. 고마 족장은 주변을 살펴보고 있었다. 족장의 뒤편으로는 족장을 보호 하기 위해 농기구로 무장한 훈족 몇이 따르고 있긴 했지만 족장은 그들을 귀찮게 느끼고 있는 듯 했다. 틈만 나면 고마 족장은 그들에게 뒤로 물러 서 있을 것을 명하곤 했던 것이다. "발끝이 날렵한 녀석입니다. 몸집이 크고 재빠르게 움직입니다. 발톱으 로 공격하기는 하지만 진짜 믿는 기술은 따로 있는 녀석이군요. 하나가 팔을 휘두르면 나머지 녀석들은 뒤로 조금씩 물러서고 있거든요." 일훈이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발자국을 보면서 추리를 해 내는 일훈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는 꼭 용병단 시절의 차이린을 보는 기분이 들어서 감회가 새로웠다. 잠시 후에는 사훈이 아훈에게 보고했다. "여럿이었다고 하는 군요. 강하고, 흉폭하고, 무섭지만 누군가를 해치 는 것이 첫 번째 목표는 아닌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어디론가 가고 있는 것 같다고..." "됐어. 녀석들이 어디로 가고 있던 알 바 아니야. 일훈. 사훈. 마을로 돌아가서 사람들 모아. 내가 칼을 들겠다고 했다고 해." "잠깐. 일훈, 사훈." 고마 족장이 말하자 세 명의 훈족은 그대로 몸이 굳어버린 듯 멈추어 섰다. "내가 칼을 들라고 이야기 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어머니. 지금 상황을 보고서 하시는 말씀이십니까? 우리 형제가 이렇 게 피를 흘리고 죽어갔습니다. 가만히 앉아 있다가 모두 죽기라도 하자는 말씀이십니까?" "아니. 그렇기 때문에 칼을 들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고마 족장의 얼굴은 진지했다. 나는 고마 족장의 모습에서 자신감과 확 신이 흘러 넘치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어머니의 방법은 낡았습니다. 너무 신중한 것도 문제가 있는 법입니 다." "신중한 게 아니라 최선의 방법을 찾는 것이지. 만약 예전에 좀비들을 그냥 베었다면 어떻게 되었겠느냐? 그 외지인들이 살아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겠느냐? 오우거들은 또 어떠냐. 녀석들이 그저 탐그루로 가고 싶 어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도 다치지 않을 수 있었다." 나는 고마 족장의 말을 듣는 순간 충격을 받았다. 좀비와 오우거들이 이곳에도 나타났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들을 모조 리 죽여버렸던 아케르 용병단의 방식이 옳은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였다. 죽이지 않아도 이렇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줄은 정 말 몰랐다. "그리폰들은 어땠습니까? 녀석들은 마을을 불태웠습니다." "내가 시간을 두고 기다리자고 말했지 않느냐. 그리고 그대로 되었고 말이다. 우리 마을에 떨어진 그리폰의 돌멩이는 단 하나 뿐이었다." "그건 순전히 운이었습니다. 만약 그리폰들이 계속해서 공격을 퍼부었 다면요? 그때에도 시간을 두고 기다리자는 말씀을 하시겠습니까? 어머니. 너무 약해지신 것 아닙니까? 아이들이 사라지고 있는 데 외부인에게 맡기 자는 말씀을 하시지 않나, 이제는 형제가 눈 앞에서 죽어가는 데 그대로 보고 있자니요. 너무 늙으신 것 아닙니까, 어머니?" "내가 늙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판단이 그르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사훈. 백년수들이 뭐라고 하더냐." "형제들을 해친 마물들은 남동쪽으로 향하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냥 가는 길이었다는 말인 것 같던데, 내 말이 맞느냐?" "예." "그렇다면 왜 우리 형제를 해쳤을까?" 고마 족장의 말에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다들 족장의 대답을 기다리 는 모양이었다. "녀석들이 어떻게 생겼다고 했는지 말해보거라, 사훈." "붉은 색의 몸에 거대한 몸집, 그리고 얼굴 한 복판에 커다란 눈이 있 었다고..." "내 짐작이 맞았구나. 녀석들은 가고일이다." 고마 족장은 이렇게 말했다. "내일 밤, 바로 이 자리에서 부족 회의를 연다. 마을 안에 있는 칼과 활을 모두 가지고 온다." 고마 족장은 이렇게 말하고는 마을로 돌아가버렸다. 농기구를 든 사람 들이 허둥지둥 족장의 뒤를 따랐다. "결국 싸우자는 이야기를 할 거면서..." 인상을 잔뜩 쓰고서 아훈은 이렇게 말했고, 곧 이어서 마을을 향해 천 천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수르카. 우리도 가야지." 마로우가 말했다. 나는 마을로 향하면서 가고일이라는 마물에 과연 족 장이 어떤 방법으로 대처할 것인지 생각해 보았다. 지금까지 좀비나 오우 거에게 대처했던 대로 대처할 것인가? 하지만 나는 짐작조차 하기가 어려 웠다. 분명 칼로 맞설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무슨 다른 방법이 있 을 것 같지는 않았다. "수르카. 나는 이곳의 아이들을 보았어." 사빈이 말했다. 나는 사빈을 바라보았다. 사빈은 전에 본 적이 있는 표 정을 짓고 있었다. 먼 허공을 폼나게 응시하고 있는 표정 말이다. "그 어린아이들의 미래를 지켜주기 위해서. 내가 칼을 들지." 사빈이 애써서 말했지만 나는 이렇게 쏘아 주었다. "그 분위기 아니야, 사빈."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물러날 사빈도 아니었다. 사빈은 그저 허허거리 면서 허공을 응시하며 걷다가 결국 지면 위로 튀어나온 나무뿌리에 걸려 앞으로 쓰러져버렸다. 우리들은 훈족이 마련해 준 작은 오두막에서 기거할 수도 있었지만 우 리가 준비한 천막에서 지내겠다고 말했다. 야전 천막이었지만 배수로도 깊게 파고, 나무를 베어 기둥을 덧붙이고 지붕에 건초를 올린 천막은 어 지간한 움막 못지 않았다. 훈족은 우리의 숙소를 보고는 놀랍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당신들이 우리 형제였으면 좋았을텐데요." 훈족 청년 하나가 부럽다는 눈으로 천막을 바라보면서 말한 적이 있었 다. 우리는 그 순간은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지만, 지금은 알 수 있었다. 훈족은 자신의 것이라는 개념이 없고, 형제들 것을 나누어 갖는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훈족 청년의 말 은 우리는 형제가 아니므로 물건을 나눌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표현한 말이었다. "훈족은 상당히 오래된 사상을 실천하고 있는 듯 하네. 모든 것을 함께 나눈다는 그 개념말이야." 오브라디 교수는 천막 안에서 우리들에게 이렇게 설명을 시작했다. "전해져오는 문서에 의하면 고대의 저명한 학자들은 사람이 살아온 단 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네. 즉, 처음에 인간은 자신의 것이 없었 기 때문에 아무런 죄도 문제도 없었다고 말하고 있지. 그리고 그곳을 고 대 종교에서는 낙원이라고 불렀다네. 그리고 최초의 인간들은 옷을 입고 있지 않았던 모양이야. 그런데 그들이 신의, 여기서 말하는 신은 고대 종 교에 등장하는 신이지만, 신의 명령을 거역하고 옷을 입음으로 해서 죄악 이 생겼다고 말하고 있다네." "옷을 입는 게 왜 죄가 됩니까?" 사빈이 오브라디 교수에게 물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20304/21893 ━━━━━━━━━━━━━━━━━━━━━━━━━━━━━━━━━━━━━━━━ 제 목:[탐그루] 실낙원 274 관련자료:없음 18/18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5-08 21:23 조회:1422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내 사견이지만, 신이 인간에게 옷을 주지 않은 것은 주머니가 있기 때 문이 아니었나 생각한다네. 옷이라는 놈이 주머니가 달리기 마련이고, 주 머니가 생기면 뭔가를 집어넣고 싶어하는 법이고, 또한 주머니에 들어있 는 것은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기 마련이니까." "저는 조금 다르게 생각합니다. 오브라디 교수님. 만약 그렇다면 이곳 훈족의 사람들도 옷을 입고 있으니 자신의 것을 가지고 싶어하지 않겠습 니까?" "오로스크. 자네 견해도 일리는 있지만 관찰력이 부족했다는 점을 지적 하지 않을 수 없군. 이곳 사람들의 옷에는 주머니가 달려있지 않다네." 그러고 보니 훈족의 옷에는 주머니가 달려있지 않았던 것이 생각났다. 나는 후다닥 내 주머니 속을 확인해 보았다. 아무 것도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 한 후 내가 죄를 짓지 않았구나 싶어서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 다. "제 생각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가장 이상적인 모습이라는 뜻으로 드 린 말씀이었습니다. 아마도 고대 종교가 전하고자 했던 것은 바로 그런 것 아니었을까요?" 오로스크는 이렇게 말하고는 목소리를 높혀 아름다운 자연이여, 운운하 는 시를 읊었다. 하지만 오브라디 교수는 오로스크의 시 낭송을 완전히 무시하고 설명을 계속 했다 (아무래도 낮에 '예언의 눈동자' 해석을 두고 견해차이를 보였던 일의 영향이 있는 듯 했다). "그리고 죄악이 생겨 최초의 낙원에서 추방된 인간은 처음에는 힘이 강 한 사람이 약한 사람을 부렸다고 하네. 그리고 힘없는 사람이 반발을 하 자 힘있는 사람의 시대는 가고 권력이 있는 사람의 시대가 열렸지. 그리 고 권력을 나누자고 사람들이 말하자 결국 돈으로 사람을 사고 팔았다 네." "그렇게 금방요?" "마로우군. 설명을 간단히 했다 뿐이지 그 과정은 내가 조사한 바로는 몇 천 년 동안 일어난 일이었다네. 순전히 힘으로 사람을 지배했던 시대 에서 돈으로 지배하는 시대가 오기까지만 해도 말일세. 그리고 그런 시대 를 지배했던 힘, 그러니까 순수한 힘이건, 권력이건, 돈이건, 그것을 카 를로스 장군은 칼이라고 불렀다네. 뭐, 나나 대마법사 아킨 같은 사람들 은 그 의견에 반대하기는 하지만 말일세." 칼의 힘. 나는 아케르와 라이짐을 떠올랐다. 그들은 귀족을 없애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역시 또 다른 칼의 힘을 빌어오는 일은 아닐까. 어쩌 면 칼의 시대야 말로 끝나야 할 시대가 아닐까. 나는 이런 생각에 빠져버 렸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후에?" 설명이 조금 더 이어질 듯 했지만 마로우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오브 라디 교수에게 물었다. "그리고 환란이 있었다고 하네. 문헌을 보면 성벽 밖의 사람들이 일으 킨 반란 때문이었다고 말하는 책도 있고, 신의 분노 때문이었다고 말하는 책도 있고, 또한 우리가 잘 알고 있듯히 마칸의 강림 때문이라고 적혀있 는 책도 있네만, 어찌되었건 분명한 것은 환란이 있었다는 사실이겠지. 고대 종교의 예언서에는 환란이 끝나고 새로운 낙원이 열린다고 했지만 그 시절에 대해서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자세한 것은 모두 상상 할 수밖에 없다네. 뭐, 나야 종교에 대해서는 지극히 자유주의적인 입장 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네만, 고대 종교의 예언이 맞았다는 것만큼은 인정 할 수밖에 없군." "교수님 말씀대로라면 이곳이 고대 종교의 예언서에 적혀 있었던 그 낙 원이라는 말씀이십니까?" "하하하. 스칼렛 양. 저는 그런 뜻으로 드린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다 만 학자적 견해로서 이곳이 어떤 곳인가를 뜻한 말이었지요. 고대어로 낙 원을 유토피아라고 한다고 들었습니다. 유토피아라는 말의 원래 뜻은 '이 세상에는 없는 곳'이라고 하지요." 오브라디 교수는 스칼렛에게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럼 세상에는 결코 낙원이 올 수 없다는 말인가요?" 내가 오브라디 교수에게 물었다. 내 질문은 낮에 훈족의 생활하는 모습 을 보는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있었던 의문이었다. 그냥 이렇게 행 복하게 살면 안 되는 것일까. 그냥 다투지 않고 모두가 모두를 위해 일하 면서 살면 안 되는 것일까. 나는 고마 족장이 했던 공동체라는 말을 떠올 려 보았다. 이상적인 공동체. 그것은 결국에는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 아 닐까. 이렇게 행복하게 모여 살 수만 있다면 그곳이 바로 낙원이 아닐까. "글쎄. 나는 잘 모르겠네. 내가 한 말은 그저 고대어에서는 그렇게 뜻 하고 있다는 것뿐이니까. 수르카 군. 혹시 낙원이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된다면 꼭 좀 알려주게." 오브라디 교수는 빙긋 웃으면서 말했다. 잠들기 전까지 우리의 대화는 훈족의 족장이 나에게 한 부탁에 대한 것 으로 이어졌다. 사빈은 자신이 어떠한 어려움을 무릅쓰고서라도 나를 돕 겠다고 말했다 (물론 고맙기는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사빈에게는 별 로 도움 받을 일이 없을 것 같았다). 마로우는 오브라디 교수에게 전설을 해석하는 방법에 대한 토론을 권했고, 오로스크는 시를 읊었다. 그나마 가장 현실적인 제안을 한 사람은 스칼렛이었다. "일단 그 마늘을 찾아보는 건 어때요, 수르카 님? 일단 그 전설에 나오 는 약초를 발견하고 나면 뭔가 좋은 방법이 나타날지도 모르잖아요." "하지만 가고일들을 물리칠 때까지는 숲에 들어 갈 수가 없잖아요? 일 단 고마 족장 님이 가고일들을 물리치기를 기대해 보죠." 나는 스칼렛에게 이렇게 말해주었다. 그런데 스칼렛은 어딘지 좀 아쉽 다는 빛을 띄고 있었다. 나는 그 표정의 의미를 알 수가 없었다. "그래. 말 나온 김에 한 마디 하겠는데, 우리가 이곳에 온 건 순전히 용의 비밀을 벗기기 위해서라는 걸 잊지 말자고. 이 근처에 성황청의 타 실 지부가 있다고 하니까 곧 우리가 뜻하는 바를 성취할 수 있을 것 같기 도 하지만. 성황청 타실 지부에 가 보는 일도 일단은 가고일들을 물리친 다음으로 미루세." 오브라디 교수는 이렇게 의견들을 정리했다. "하지만 교수님. 고마 족장님의 부탁은 어떻게 하지요? 어찌되었건 훈 족 덕분에 저희가 살아 날 수 있게 되었으니 부탁을 들어줄 수밖에 없다 고 생각하는데요, 전." "수르카 군." 오브라디 교수는 내 물음에 진지한 얼굴로 답했다. "자네, 운명을 믿어보는 게 어떻겠는가. 전설이 사실이라면 자네가 거 부하려고 해도 운명은 자네를 이끌 걸세. 한 번 생각해 보게. 사비오의 예언대로 자네를 여기까지 이끈 것도 결국 운명의 힘 아니었는가." 오브라디 교수의 말은 무책임하게 모든 것을 뒷일로 미루자는 말처럼 들렸지만, 나는 오브라디 교수의 말에 일단은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만 약 내가 전설을 재현 할 수 없는 운명이라면, 즉 고마 족장이 사람을 잘 못 본 것이라면,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쳐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게 분명 했기 때문이었다. 다음 날 저녁이 되자 우리는 훈족을 따라 고마 족장이 말한 산 중턱까 지 올라갔다. 나뭇잎 사이로 별빛이 떨어지고 있었다. 사방은 바람소리와 풀벌레 소리뿐, 마물이 나타날 것 같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산 중턱을 오르는 훈족의 행렬은 아무렇게나 질서 없이 이어지는 듯 했지만 앞에서 속도를 조절하고, 뒤에서는 발을 빨리 놀리는 덕분에 허리가 끊어 지는 일은 없었다. 연금술사의 등 하나 없이 이렇게 산길을 타는 것으로 보아 훈족이 얼마나 자주 이 산을 오르락내리락 하는지 충분히 짐작하고 도 남음이 있었다. 훈족은 연금술사의 등을 쓰지 않았다. 사실 우리가 훈족의 부족 회의에 참가할 이유는 없었다. 우리는 발언권 이 없다는 분명한 말을 듣고서야 참관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을 정도였으 니까. 하지만 오브라디 교수와 마로우는 이 훈족의 부족 회의에 학자로서 의 관심을 품고 있었고, 나 역시 학자적 관심은 아닐지라도 고마 족장이 어떻게 일을 풀어갈 것인가 궁금했다. 사빈은 앞장서서 자신이 뭔가 하겠 다면서 우리를 따랐고 (물론 모두가 사빈에게 행동을 자제해 줄 것을 부 탁했지만), 오로스크는 혼자 남기 싫다면서 우리를 따랐다. 하지만 스칼 렛은 뭔가 불안해하는 듯 했다. 아무래도 훈족과 함께 하는 일이 뭔가 마 음에 걸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훈족은 고마 족장의 지시대로 모두 칼과 활을 들고서 고마 족장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고마 족장은 그곳에서 부족 회의를 연다는 말만 했을 뿐,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저, 외지인 분."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소리에 나는 고개를 돌려보았다. 낮에 보았던 사 훈이었다. 어두운 곳에서 본 사훈은 낮에 보았을 때 보다 훨씬 작고 말라 보였다. "수르카라고 불러요." 나는 사훈에게 이렇게 말해주었다. 나를 올려다보는 사훈의 눈동자는 떨어지는 별빛을 받아 몹시도 반짝이고 있었다. "수르카 님. 저, 저희를 도와주실 거지요?" 사훈이 나에게 물었다. 사훈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왜요? 형제분들 중에 사라진 분이 있나보지요?" 사빈이 불쑥 나와 사훈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사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찾아드리지요. 이 사나이 사빈, 의리와 명예를 빼면 시체나 다름 없답니다. 제 명예를 걸고, 의리를 걸고 반드시 형제를 찾아드리지요. 이 름이 뭐지요, 그 형제분?" "유나라고 해요." 사훈이 말했다. "이름에 훈 자가 들어가지 않는군요." "예. 성인이 되기 전에는 이름에 훈 자가 붙지 않아요. 쫓겨난 아이들 에게는 성인이 되기 전에 그냥 훈 자를 붙여주기도 하지만요..." 사훈의 말은 나에게 용병단에서 만났던 재훈과 유훈을 떠올리게 했다. 그들은 이곳에서 ㄳ겨난 사람들이었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늘 따라 소망의 별이 유난히도 밝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소원을 빌어요." 나는 웃으면서 사훈에게 말해주었다. 하지만 사훈은 눈을 껌벅일 뿐 아 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소망의 별이잖아요. 소원을 빌어요." "소원이요?" 이렇게 말하는 사훈의 마음을 나는 순간 느낄 수 있었다. 마법의 힘이 었을까. 사훈의 순진한 눈동자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오직 형제들의 안 전 뿐이었다. 사훈은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었던 것이다. 화전을 일구던 훈족 청년들이 당했던 자리에 도착하자 고마 족장은 무 기를 내려놓을 것을 지시했다. 무기는 고마 족장의 지시대로 바닥에 내려 놓아졌다. 곧 사람들이 모인 중앙에는 무기가 쌓여졌고, 바로 그 옆으로 모닥불이 피워졌다. 연금술사의 등이 없어서 모닥불은 진짜 불이 세상을 밝힌다는 간단한 사실을 실감케 하고 있었다. 탐그루에서 있었던 성인식 도, 아케르 용병단의 입단 의식도, 모두 진짜 불이 있기는 했지만 연금술 사의 등 아래에서 일종의 상징적인 의미로 쓰인 요소가 더 많았다. 하지 만 훈족의 모닥불은 진짜 불인 동시에, 의식을 신성하게 만드는 의미까지 동시에 포함하고 있었다. "자. 이제부터 부족 회의를 시작하겠다. 신성한 모닥불이 우리를 지켜 주리라. 모두 어머니의 말에 귀를 기울이라." 고마 족장이 말하자 모두들 조용히 고마 족장을 바라보았다. "이곳에 출몰하고 있는 마물은 가고일이라고 한다. 이들에 대해서는 내 가 들은 바가 있다. 가고일은 눈으로 사람의 마음을 휘어잡는 능력이 있 다. 그 능력은 우리 형제를 다치게 한 발톱보다 훨씬 강력하지. 하지만 우리 중에는 가고일과 뜻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약한 것이 가고일이다. 우리가 우리의 뜻 을 전하면 가고일들은 우리를 지나쳐 갈 것이다. 물론 아무런 피해도 입 지 않을 것이고." 고마 족장의 말은 대화로 문제를 풀어보자는 의견인 것 같았다. 족장의 말이 끝나자 예상했던 대로 아훈이 반대 의견을 폈다. 모닥불이 불티를 토해내면서 갑작스럽게 크게 타올랐다. "어머니의 아들이자, 여러분의 형제인 아훈이 말합니다. 모두 귀를 기 울여 주십시오. 어머니의 말씀대로 우리는 그냥 가고일을 보낼 수 있을 지 모릅니다. 하지만 위험부담이 너무나도 큽니다. 우리 형제들이 참혹하 게 죽어갔던 모습을 생각해 주십시오. 그들이 대화를 거부하고 우리에게 발톱을 휘두른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기 쌓여있는 것은 칼과 활입 니다. 이것을 손과 발처럼 휘둘러 녀석들과 싸우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 까? "그렇습니다! 녀석들을 베는 것이 받은 것을 돌려주는 훈족의 전통에 맞습니다!" 일훈이 아훈의 의견에 동조하는 말을 소리 높여 외쳤다. 아마도 이곳에 오기 전에 그렇게 할 것을 부탁 받았던 모양이었다. 일훈이 소리치자 사 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불티도 사람들을 따라 어지럽게 허공을 향해 가파르게 타올랐다. PRINTER/CAPTURE를 OFF 하시고 [ENTER] 를 누르십시오.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20375/21893 ━━━━━━━━━━━━━━━━━━━━━━━━━━━━━━━━━━━━━━━━ 제 목:[탐그루] 실낙원 275 관련자료:없음 18/18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5-09 21:31 조회:1473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우리가 받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걸 명심하라, 형제들이어. 우리는 형제를 잃었을 뿐 아무 것도 받지 못했다. 우리가 잃었다고 그들도 잃게 하는 것이 훈족의 전통이라는 말은 난 들어 본 적이 없다." 고마 족장은 술렁임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이렇게 말했다. "죽은 자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저 이곳을 지나려는 가고일이 우리 형제를 공격했던 까닭을 알고 있는가?" 고마 족장의 질문에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하고 있는 것은 나무 터지는 소리를 내며 불타오르고 있는 모닥불뿐이었다. "그것은 우리 형제의 마음이었다. 가고일은 마음을 다스리는 능력을 가 지고 있는 만큼 마음에 민감하다. 우리 형제가 가고일을 보는 순간 가고 일을 해칠 마음을 먹었기 때문에 가고일들은 발톱을 휘둘렀던 것이다. 내 가 무기를 가지고 올라오라고 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만약 우리 중 누군 가가 가고일과 싸우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우리는 결코 가고일과 대화를 할 수 없을 것이다. 대화로 문제를 해결할 마음이 있는 자는 여기 남고, 싸우고 싶은 마음이 있는 자는 무기를 들고 마을로 내려가라. 싸우고 싶 은 형제들이 싸우는 것을 뭐라고 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마음으로 대화하 고자 하는 형제를 방해하지 말라. 이것이 우리 훈족을 위하는 길임을 나 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고마 족장의 말은 모닥불보다 뜨거웠고 별빛처럼 분명했다. 아훈은 망 설이다가 무기를 집어들고 일훈과 함께 마을로 되돌아갔다. 사빈은 (가지 않겠다고 끝까지 우기는 듯 하더니) 결국 일훈의 뒤를 따라서 산 밑으로 내려갔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머니?" 누군가가 고마 족장에게 물었다. 고마 족장은 이렇게 말했다. "모두 두려워하지 말라. 그리고 사훈은 내 옆으로 오거라." 족장의 명에 따라 사훈이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갔다. 사훈의 얼굴에는 두려움의 빛이 가득했다. "사훈. 이제 부르거라." 사훈의 말이 떨어지자 사방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나는 좌우를 둘 러보았다. 붉은 빛의 덩어리가 우리를 조여오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 다. 모닥불도 놀랐는지 불길은 길을 잡지 못하고 함부로 타오르고 있었 다. 훈족 사람들은 모두 고마 족장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모닥불을 받은 고마 족장의 얼굴은 단호함으로 견고한 빛을 내고 있었다. 나는 주변에서 몰려들고 있는 것이 가고일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자 마자 다리가 후들거리 고 있었다. 나미트의 검을 두고 온 것이 순간 후회되었지만 나는 애써서 그 생각을 지우려고 노력했다. 고마 족장의 말 그대로 내가 싸울 마음을 먹는 순간 대화는 끝나게 될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될 수 있으면 두 려움을 떠올리려고 마음먹었다. 차라리 그것이 나을 것 같았다. "가고일이 말합니다. 왜 우리가 당신들을 해치려고 한다고 생각하고 있 느냐고. 왜 지나는 우리에게 불덩이를 쏟아 부었느냐고." 사훈이 말했다. 사훈은 이런 경험이 처음인지 몹시 떨고 있었다. 그런 데 불덩이라니? 훈족의 청년들이 설마 마법으로 가고일들을 공격했다는 말일까? "어머니가 말한다. 사람은 여러 부족이 있다고. 그들이 누구건 훈족과 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잠시 침묵이 있었다. 사훈은 조금씩 익숙해지는지 목소리가 조금씩 커 지고 있기는 했지만 여전히 떨림은 남아있었다. "지금 훈족이 느끼고 있는 마음이 무엇이냐고 묻고 있습니다. 죽어 가 는 사람이 느끼는 것과 비슷한 이 감정이 무엇이냐고 묻고 있습니다." 나는 이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 했다. 정말로 죽음이 내 눈앞에 당도해 있는 느낌이었다. 나는 모닥불에 신경을 집중시키려고 노력했다. 등뒤로 땀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훈족의 어머니가 말한다. 그건 사람이 가지고 있는 공포라고. 사람은 모르는 것을 보면 두려워하기 마련이라고. 우리는 조금도 가고일과 싸울 마음이 없다고." 고마 족장이 말하자 사훈은 눈을 감고 몸을 떨며 뭐라고 중얼거리다가 이렇게 말을 이었다. "가고일들은 우리가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알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대로 길을 내어 준다면 훈족을 건드리지는 않겠다고 합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가고일들은 어느 새 손에 닿을 듯 가까이 다 가와있었다. 가고일의 크르렁거리는 숨소리가 바로 등뒤에서 들려왔고, 고약한 냄새가 어디선가 풍겼다. 사람들은 모두 떨고 있었다. 가고일들의 발톱이 모닥불을 받아 붉게 빛나고 있었다. 만약 가고일들이 팔을 휘두른 다면 우리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죽게 될 것이 분명한 상황이었 다. 당장이라도 가고일이 팔을 뻗어 내 등판에 발톱을 박아넣을 것 같았 다. "그럼 지나가라, 가고일이어. 우리는 싸울 힘도, 싸울 마음도 없다. 그 대들이 우리 형제를 해친 것은 유감이지만 그것은 그대들의 생각과 우리 의 생각이 달랐기 때문에 생긴 일, 더 이상의 피만 없다면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 잠시 침묵이 있었다. 당장이라도 누군가가 비명을 지르면서 쓰러져 버 릴 것 같은 긴장이 흘렀다. 모닥불이 타오르는 소리가 이렇게 크게 들릴 줄은 몰랐다. 내 귀에는 오직 모닥불이 타는 소리만이 들리고 있었다. "이제 끝났다, 형제들이여. 또 한 번 우리는 마물들을 무사히 피했다." 이 말에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느 사이 가고일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나는 생각했다. 비록 내가 느낄 수는 없었지만 이것이 마 법의 힘이리라고. 그리고 이 힘이라면 칼의 시대를 끝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고마 족장이 말해 주었던 마력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몸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두려움을 이용해 가고일 과 싸우고 싶다는 마음을 억누를 수 있었던 것이다. 비록 완전히 내가 내 의지대로 마음을 조정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런 식으로 마음을 조정할 수 있다면 무슨 마법이든 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마법사 의 독심술도 피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가고일들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을 전하라. 사훈." 고마 족장이 말했다. 나는 사훈을 바라보았다. 사훈은 당장이라도 울음 을 터트릴 듯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두려움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고마 족장은 가혹하리만치 냉정한 어조로 사훈에게 다시 말했다. "어서 말해." 냉기 때문에라도 질려버릴 것 같은 말투였다. 사훈은 울음을 꾹 참으면 서 이렇게 말했다. "어린아이의 일은 미안하다고 합니다. 이름이... 우리 식으로 하면... 유나 라고 하는 군요." 사훈은 결국 울음을 참고 끝까지 말했다. 고마 족장은 그런 사훈을 대 견하다는 듯한 얼굴로 안아주었다. "잘 견디어 주었다, 사훈." 사훈은 고마의 품에서 울음을 터트리고야 말았다. "그런데 마물들이 아이들을 잡아가는 줄은 몰랐네. 그렇다면 전설의 재 현이니, 부탁이니 하는 건 이제 물 건너 간걸까?" 오로스크가 나에게 물었다. 나는 고마 족장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는 고마 족장의 얼굴 한 구석에 남아있는 근심의 빛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니야. 그게 아니야. 아이들은 다시 없어질 거야. 틀림없이." 내가 대답했다. 고마 족장의 얼굴은 내 말이 사실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굳어있었다. 소망의 별은 어느 사이 구름 뒤로 숨어버렸고, 모닥불은 조 금씩 그 기운을 잃어가고 있었다. 마을로 돌아갈 즈음이 되어서야 나는 다시 바람 소리와 벌레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평화롭게 들리던 소리였 지만 어느새 불안한 느낌을 주는 소리로 바뀌어 있었다. 스칼렛이 나에게 할 말이 있다고 한 것은 바로 다음 날의 일이었다. 오 브라디 교수는 일단 가고일들이 사라졌으니 성황청의 타실 지부가 이 근 처 어디엔가 있을 것이라면서 마로우와 함께 정신없이 자료를 뒤지고, 사 람들에게 이것저것 묻곤 했다. 사빈은 꼬마들과 놀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 었다 (그게 영웅의 길이라고 했던가 뭐 어쨌던가는 알 수 없었지만). 가 장 눈에 뜨이게 변한 것은 오로스크였다. 시를 쓴다면서 아무렇게나 돌아 다니면서 중얼거리던 오로스크는 가고일을 물리친 그날 부터 훈족을 유심 히 관찰하고, 또 훈족의 말을 귀담아 들으며 훈족의 생활상을 자세히 관 찰하는 데에 시간을 투자하고 있었다. 왜 오로스크가 이렇게 변했는지는 지난 밤, 고마 족장의 말을 들은 오로스크의 말로 설명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저 분은 진짜 시인이야. 말로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마음을 변하게 했 어.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시인이야." 아마도 내가 마법이라고 생각한 부분과 맥락을 같이 하는 말이리라. 하 여간 열심히 돌아다니면서 뭔가 하고 있는 일행의 모습은 어찌되었건 보 기에 좋았다 (좀 이상한 일이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것 은 아이들과 노는 사빈의 모습이었다). 케텐 호수가에는 맑은 햇살이 내리쪼이고 있었다. 수면은 싱싱한 물고 기의 비늘처럼 빛나고 있었고, 수면에 비친 구름은 꼭 물고기 떼 모양으 로 힘이 넘쳐 보였다. 얼마 전까지 대비스토브레 산맥에 갇혀 얼어 죽어 가고 있었던 일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을 만큼 좋은 날씨였다. 수면 위로 는 간혹 물나그네 새가 날개를 휘저으면서 비행을 하고 있었고, 이따금 호수가로 밀려나온 물비늘고기들이 물컹물컹한 몸을 움직여 도로 호수로 돌아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런데 스칼렛. 왜 이곳으로 오자고 했어요?" "... 알고 있었지요?"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는 엉뚱한 말로 스칼렛이 말문을 열었다. 나는 무슨 대답을 해야하나 생각하면서 스칼렛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스칼렛은 나에게 죄라도 진 사람처럼 눈을 피하고 있었다. 나는 영문을 알 수 없었 다. "저, 죄송하지만, 뭘 알고 있었냐는 말씀이신지요?" "족장님이 들려주는 전설을 들으셨잖아요. 또, 그 날 밤, 저를 보셨 고..." 스칼렛은 말끝을 흐렸다. 나는 그제야 이곳 훈족의 마을로 오던 길에 보았던 스칼렛의 피 묻은 입가와 팔 소매를 떠올릴 수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 좋을까. 나는 갑자기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피는 생명이지요. 하하하." 나는 엉뚱하게도 이렇게 말해버리고 말았다. 순간 스칼렛의 표정에 눈 에 뜨일 만큼 굳었고, 나는 큰 실수를 했구나 싶었다. 그런 부분은 사실 그냥 알면서도 모르는 척 넘어가야 했는데. 여자에게는 여자만의 비밀이 있는 것이다. 남자에게 남자만의 비밀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영원한 생명은 생명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지요." 스칼렛이 말했다. 아마 말을 돌리고 싶어하는 것이겠지. 그래서 나도 얼렁뚱땅 대충 받아 넘겼다. "그래서 마늘을 먹었다고 하지요, 고마 족장 님 말씀처럼." 이번에도 또 실수를 한 것일까? 스칼렛은 이제 고개를 숙이고는 내 얼 굴을 처다 보려고도 하지 않고 있었다. 좀 더 깊게 생각하고 이야기를 했 어야 하는데. 마늘이 그렇게 무시무시한 물건이었는지는 몰랐다. 그저 약 초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한 사람의 기분을 이 정도까지 망칠 수 있을 줄 이야. 나는 스칼렛에게 도대체 뭐라고 말을 하면 좋을 지 알 수가 없어서 호수가에서 버둥거리는 물비늘고기 한 마리를 집어 힘껏 집어 던졌다. 투 명해서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물비늘고기의 미끌거리는 감촉이 그다지 좋지는 않았지만 일단은 다른 일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방인들. 여기서 뭘 하고 있나?" 엎친 데 덮친 격이라 더니 아훈이 스칼렛과 내가 서 있던 케텐 호수가 에 나타난 것이 바로 그때였다. 나는 아훈에게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할까 생각해 보았지만 별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자네들은 내가 졌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그렇지 않은가?" 아훈이 비꼬는 듯한 어조로 나를 향해 말했다. "이기고 진다는 게 무슨 말이야? 난 잘 모르겠는 걸?" 나는 어깨를 으쓱 해보이면서 아훈에게 말했다. 아마도 아훈은 간밤에 부족 회의에서 자신의 의견이 먹히지 않은 것에 대해서 불만이 가득한 모 양이었다. "멈추어 섰기 때문이야." 아훈은 이렇게 알아듣지 못할 말을 내뱉고는 호수에 작은 돌멩이 하나 를 집어던졌다. 돌멩이는 수면에 부딪쳐 세 번을 튀어 오른 후에야 가라 앉았다. 수면에 일고 있는 파문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문득 탐그루에 있을 때 대청하에 돌을 집어 던졌던 기억이 떠올랐다. 나도 반질반질한 돌멩이 를 하나 집어들어 몸을 기울여 수면에 집어던졌다. 내가 던진 돌멩이는 다섯 번 수면 위를 튀었다가 가라앉았다. "어렸을 적에는 이렇게 해서 돌멩이를 호수 저편까지 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이가 들면 틀림없이 보낼 수 있을 거야, 이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어." 아훈은 다시 한 번 돌멩이를 집어던졌다. 하지만 이 번에는 집중이 잘 되지 않아서 인지 돌멩이는 한 번도 튀어 오르지 못하고 물 속에 잠겨버 리고 말았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20376/21893 ━━━━━━━━━━━━━━━━━━━━━━━━━━━━━━━━━━━━━━━━ 제 목:[탐그루] 실낙원 276 관련자료:없음 19/19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5-09 21:31 조회:1334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칫. 이렇게 멈추어 서고 말았다고. 영원히 저 편으로는 가지 못하고 말이야." 아훈이 수면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아훈이 남긴 파문이 서서히 호수 저 편까지 퍼져나가 사라져가고 있었다. 나는 스칼렛을 바라보았다. 스칼렛 은 묵묵히 호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쩌면 얼렁뚱땅 잘 넘어갔는지도 모 르겠다 싶었다. "이 호수의 전설을 들어 본 적 있어?" "아니. 나, 여기 처음이야." 아훈은 내 생명의 은인이었기 때문에 꼬박꼬박 경어를 사용해 왔지만 지금은 좀 사정이 달랐다. 아훈이 다짜고짜 반말로 치고 들어오자 나도 오기 같은 것이 일었던 것이다. "오래 전에 이곳에 영주가 살고 있었어. 그 영주 이름이 케텐이었지. 그 사람은 일생동안 자신의 영지를 늘리는 일에 모든 걸 다 바쳐온 가문 의 남자였어. 전쟁, 또 전쟁. 그의 일생은 전쟁과 휴식, 그리고 휴식과 전쟁의 연속이었지. 보통 사람은 결코 그렇게 살 수 없었을 텐데 말이야. 그는 결코 멈추지 않았어. 전쟁은 선조 때부터 내려오던 과업이었으니 결 코 멈출 수가 없었지. 하지만 케텐의 대에 이르러 전쟁은 끝나버리고 말 았어. 허망하게도 말이야. 케텐은 열병을 앓았지." 나는 그 열병이 어떤 병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나 역시 비슷한 이유로 레디삐병을 앓았던 경험이 있었다. "그리고 죽었어. 멈추어 선 순간 끝나버린 거지. 이 돌멩이 처럼 말이 야. 호수 저편에 닿기 위해 끝임 없이 튀어 올랐다면 결코 가라앉지 않았 을 텐데." 아훈의 목소리는 체념에 가까운 것이었다. 아훈은 다시 한 번 돌멩이를 던졌지만 이 번에도 돌멩이는 세 번을 넘기지 못하고 호수에 잠겨버리고 말았다. "빌어먹을. 영원히 저 편에 닿지 못할 거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왜 이 런 멍청한 짓을 멈추지 못하는 걸까?" 아훈의 말투는 충분히 자조적인 것이었다. 나는 아훈이 아무렇지도 않 다는 듯이 말하고 있기는 하지만 얼마나 가슴이 아플지 대강 짐작이 갔 다. "아훈 님. 영원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스칼렛이었다. 스칼렛이 갑자기 대화에 끼어들자 아훈은 적잖이 당황하 는 눈치였다. 아훈은 어색함을 모면해 보려는 듯 얼른 돌을 하나 집어들 어 호수에 집어 던졌다. "생명은* 결코* 마르지* 않으니* 피가* 그대를* 도우리라*" 스칼렛의 말은 마법의 말이었다. 나는 스칼렛을 바라보았다. 스칼렛의 표정에는 슬픔의 빛이 가득 고여 있었다. 마치 손만 대면 무너져 버릴 듯, 스칼렛은 허약한 얼굴을 하고서 호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훈이 집 어던진 돌을 수면을 튀어 올라 몇 번이고 파문을 남기면서 날아가더니 결 국 호수 저편에 떨어지고 말았다. 아훈의 눈이 휘둥그레졌고, 나도 점잖 은 척 하고 있기는 했지만 역시 놀라고 있었다. 스칼렛의 마법은 거의 항 상 나를 놀라게 했다. 도무지 나는 스칼렛이 사용하는 마법의 말이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지 알 수 없었고, 알 수 없는 마법의 말을 아무리 이해 하려고 해 봐야 내 머리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쩌 면 여자만 이해 할 수 있는 마법이 아닐까? "마법사셨군요." 갑자기 점잖은 목소리를 하고서 아훈이 말했다. 스칼렛은 아훈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호수 저편에 돌이 닿는다는 건 아무 의미가 없어요, 아훈 님. 다만 쉬 지 않고 돌을 던지는 것이야말로 의미 있는 것이지요." 스칼렛의 말에 아훈은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아훈은 멍청한 얼굴을 하고서 스칼렛을 계속해서 바라만 보고 있었다. "아마 그 케텐이라는 분은 그걸 모르셨을 거예요. 다만 호수 저 편에 돌이 닿았다고 해서 돌을 던지지 않았을 뿐이지요. 하지만 이건 어떨 까 요." 스칼렛은 허리를 숙여 호수가에서 꿈틀거리고 있던 물비늘고기 한 마리 를 집어들었다. 나와 아훈은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스칼렛이 하고 있는 행동을 바라보았다. 스칼렛은 마법의 말을 외우지 않고 그냥 물비늘고기 를 집어 던졌다. "이렇게 할 수도 있었을 텐데요. 이제 저 물고기는 호수에서 자유롭게 노닐 수 있겠지요." 잠시 동안 나와 아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서 멍하니 서 있을 수 밖 에 없었다. 한참이 지난 후에 먼저 입을 연 것은 아훈이었다. "좋은 가르침, 감사드립니다." 아훈은 이렇게 말하고는 돌아섰다. "스칼렛. 정말이지 너무..." 나는 스칼렛에게 뭐라고 칭찬의 말이라도 하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스칼렛은 그런 내 의도를 알아차렸는지 얼른 내 말을 막았다. 나는 무안 해져서 입가를 손으로 만지면서 호수 저 편을 바라보았다. 맑은 날 바라 보이는 호수 저편의 산은 너무나도 푸르러서 마치 손으로 잡을 수 있을 듯 했다. "다 아시면서, 이제 그만 두세요." 스칼렛은 체념한 투로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가 뭘 알고 있다 는 건지 솔직히 잘 알 수가 없긴 했지만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잘못했다 고 사과를 해야 하나? 하지만 어떻게? 도대체 뭘? 뭘 잘못했는지 모르지 만 틀림없이 뭔가 잘못하기는 했다고 생각되는 상황을 대처하는 일 만큼 곤혹스러운 일은 없다. "리치를 기억하시지요?" 내가 호수 가에 일렁이는 물결을 한 참 동안 바라본 후에 스칼렛이 먼 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스파일의 서커스 들판 부근에서 보았던 사람의 피를 빤다던 리치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콧구멍뿐인 흉측한 모습과 그 리고 사람을 보고서 두려움에 떠는 듯 허위적거리면서 걸어가는 뒷모습 을. "결국 그렇게 사라질 거라고 생각해요. 그것이 무엇이든 어찌 되었든. 중요한 건 살아가는 일이지 죽는 일은 아닐 것 같아요. 그래서... 피는 생명이지만 또한 어떤 이에게는 저주가 되는 것이지요." 나는 스칼렛의 말을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말을 할 수도 없었다. 또 스칼렛의 기분을 상하게 할 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래요. 어쩌면 저는 호수 저편에 닿는 걸 두려워하고 있었는지도 모 르겠어요. 얼마든지 다른 길도 있을 수 있을 텐데 말이지요. 꼭 저 편에 닿기만 하면 모든 게 끝나버릴까봐 두려워했던 거였는지도 몰라요. 그저 그 리치들처럼, 그렇게 사라지는 게 두려웠는지도 모르지요." 스칼렛의 말은 분명 슬픔이 담겨 있었다.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스칼렛 이 분명 나에게 무슨 생각을 전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꽤 나 슬픈 사실일 것이라는 것을. 하지만 나는 스칼렛이 무슨 말을 하고 있 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저 심각한 표정을 짓고서 스칼렛이 하고 있는 말을 잠자코 듣고 있을 수밖에는 없었다. "저는 가야겠어요. 산으로." 내가 아무 대답도 하고 있지 않아서 그랬는지, 스칼렛은 이렇게 말하고 는 무작정 산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깜짝 놀라 스칼렛의 뒤를 정 신 없이 쫓았다. "스칼렛! 스칼렛!" 아마 누가 보았다면 아마도 애절한 구애를 하고 있는 불쌍한 사람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스칼렛이 산 쪽으로 얼마 가지도 못했을 때였다. 스칼렛이 멈추어 섰을 때, 내 눈은 먼저 스칼렛의 길을 막아 선 한 무리 의 사람들에게 쏠렸다. 그들은 하나같이 뮤에 올라있었고, 손에는 칼과 창으로 중무장을 하고 있었다. 나는 눈앞에 나타난 군인들의 낯선 얼굴에 당황하면서 걸음을 멈추었다. "이곳 대표는 어디에 있습니까?" 여전히 뮤에 탄 채 망토를 걸친 사내가 이렇게 말했다. 사내는 떡 벌어 진 어깨에 깨끗하게 면도를 하고 있었다. 하얀 사내의 얼굴은 마치 조각 상처럼 표정을 읽어내기가 힘 들었다. "자, 잠깐! 당신들 누구요!" 아훈이었다. 아훈의 뒤편으로 아훈을 따르는 마을 청년들의 모습이 보 였다. 아마도 이들을 발견하고 이쪽으로 온 모양이었다. "대표자이십니까?" "내가 대표자건 아니건, 남의 부족에 이렇게 군사를 끌고 들어오다니, 이런 법이 어디있소?" 아훈이 목청을 돋우어서 뮤에 탄 사내에 맞섰다. 그러자 뮤에 탔던 사 내는 뮤에서 내려 아훈과 눈 높이를 맞추었다. "이런. 상황이 급박하여 이렇게 되었소이다. 우리는 타실의 수도 니브 리티에서 온 국왕기사단 병력이오. 아무리 이곳, 악마의 입이 외진 곳이 라고는 해도 국왕기사단의 이름은 들어보았을 것이라 믿소만." 국왕기사단이라는 말에 아훈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족장님은 안에 계십니다만, 말씀하시는 분은 누구신지요." 아훈이 격식을 갖추어서 말했다. 나와 스칼렛에게 외지인이라고 불렀던 모습과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이었다. "나는 국왕기사단의 단장 카이사라고 하오." 사내는 이렇게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오브라디 교수의 명성이 타실에까지 알려져 있지 않았다면 우리는 결코 족장과 카이사 장군이 만나는 자리에 낄 수 없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이제 불편을 끼치지 말고 어서 마을을 떠나달라는 정중한 요청을 받았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오브라디 교수의 명성은 카이사 장군의 귀에 도 들어가 있었고, 족장은 그런 오브라디 교수에게 참관인 자격으로 함께 자리해 줄 것을 부탁했던 것이다. 자리는 마을 한 복판에 마련되었다. 족장이 주인의 자리에 앉아 카이사 장군을 맞고 있었고, 그 뒤편으로 주민들이 카이사 장군의 국왕기사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나같이 불편한 얼굴들이었다. 무장한 병력 때문이기 도 하겠지만, 국왕기사단의 얼굴이 하나같이 차갑게 굳어있어서 마치 살 인자들 집단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군대가 이곳에 들어오다니, 이건 아마도 우리 훈족이 이 땅에서 숨을 쉬기 시작한 이래로 처음 있는 일일 것인 것 같소." 고마 족장이 말했다. 고마 족장의 당당한 모습은 국왕기사단 앞에서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있었다. 카이사 장군은 환한 웃음을 지으면서 여유 있게 고마 족장의 말을 듣고 있었다. 부하들과는 완전히 대조적인 모습이 었다. "족장님. 국왕기사단의 단장으로서 제가 설명을 드리지요. 우리는 이곳 훈족의 마을을 지켜드리기 위해서 왔습니다." 카이사 장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고마 족장이 말을 이었다. "무엇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준다는 말이오? 이곳은 우리의 땅이고 이미 오래 전부터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우리를 지켜왔소. 이제 와서 굳이 국 왕기사단이 이곳에 들이닥친 이유가 무엇이오?" 족장의 태도는 단호했다. 하긴 무기를 든 외지인이 자신의 마을 한 복 판에 들어왔는데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가고일이라는 마물에 대해서 들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카이사 장군은 여전히 여유로운 얼굴을 하고서 족장에게 말했다. 나는 카이사 장군을 바라보았다. 장군 망토를 아무렇게나 늘어뜨리고 앉아 있 는 카이사 장군의 모습은 격식이나 체면을 중요시하는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어쩌면 이런 태도는 사람들을 속이기 위한 것은 아닐까? "가고일들은 이미 우리 훈족을 지나쳐 갔소. 좀비가 나타났을 때도, 오 우거가 출몰했을 때도, 그리폰이 이곳을 불바다로 만들었을 때도 눈길 한 번 주지 않던 국왕이 무슨 일로 이곳에 자신의 기사단을 파견했단 말이 오?" 역시 젊었을 적에 대륙의 이곳 저곳을 떠돌았던 사람답게 족장은 훈족 답지 않은 정보력을 과시하면서 단호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나는 자 꾸만 족장의 모습과 이무르 아주머니의 모습이 겹쳐지는 듯 했다. 혹시 고마 족장도 이렇게 카이사 장군을 대하다가 이무르 아주머니와 같은 운 명이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자,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가로 저었다. 비록 카이사 장군이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지으면서 족장을 대하고는 있지만 저 웃음 뒤에 무엇이 감추어져 있는지는 아무도 모를 일 이었다. "여러 마물들을 이겨낸 이곳 훈족 주민들과 족장님의 노고는 백 번 치 하 받아 마땅하리라고 여겨집니다. 다시 한 번 고개 숙여 당시의 노고를 국왕 폐하를 대신해서 치하합니다." 카이사 장군은 실제로 고개를 숙이면서 이렇게 말했다. 족장의 뒤편으 로 앉아있던 아훈을 비롯한 주민들은 오히려 당혹스럽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순박한 이곳 사람들에게 국왕기사단 단장이 고개를 숙였다 는 것은 하나의 사건인 모양이었다. "이곳은 우리의 영지나 다를 바 없고 나는 이곳의 영주와 같은 자격을 가지고 있소. 함부로 말하지 마시오." 하지만 고마 족장은 이렇게 카이사 장군의 말을 되받아 쳤다. 조금도 국왕기사단 병력을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카이사 장군은 그런 고마 족장을 대하면서도 여전히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20377/21893 ━━━━━━━━━━━━━━━━━━━━━━━━━━━━━━━━━━━━━━━━ 제 목:[탐그루] 실낙원 277 관련자료:없음 18/18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5-09 21:32 조회:1427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예를 다하고 있지 않습니까. 제 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곳에 성황청의 손길이 뻗치고 있다는 사실입니 다." 성황청? 나는 이 말을 듣는 순간 불길한 예감에 휩싸여 버리고 말았다. 성황청과는 하나 같이 좋지 못한 기억만이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그 빌어 먹을 라스폼이든, 로스안에서 만났던 스트라세든, 다들 하나같이 두 번 다시 마주대하고 싶지 않은 녀석들이었다. "성황청의 타실 지부가 이 근처에 있다는 사실은 알고 계시지요? 성황 청은 틀림없이 곧 이곳으로 공격해 들어올 것입니다. 성황청이 국왕 폐하 에게 반기를 들고 신성제국을 선포했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계시리라 믿 습니다. 그렇다면 성황청은 이쪽부터 시작해 서서히 저희 타실의 국왕 폐 하를 노리고 쳐들어올 것이 분명합니다." 족장은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뭔가를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결국 그대의 말은 전쟁터를 빌려달라는 말인가?" "그렇게 나쁜 쪽으로만 생각하실 일이 아닙니다. 물론 아무리 국왕폐하 의 기사단이라고 해도 함부로 부족의 영지에 병력을 들일 수 없다는 사실 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족장님. 저는 탐그루에서 성황청을 상대 해 본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성구를 개발해 무시무시한 화력으로 이미 자나크 주 전역을 초토화시킨 상태입니다. 그들이 이곳 악마의 입을 전진기지로 삼기위해 공격할 것은 거의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들도 나름 대로 타실 지부를 방어해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지요." 탐그루라는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카이사 장군을 다시 한 번 보게 되었 다. 성황청이 탐그루를 장악하고 자나크 주를 집어 삼켰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당시에 있었던 장군이 바로 저 카이사 장군이라니. 나는 가슴이 뛰어올랐다. "우리 일은 우리가 해결할 수 있소." "훈족의 능력은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훈족의 능력은 영혼 의 마음과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들었습니다. 칼의 마음과는 다르지 요." "지금 우리를 협박하는 건가?" "아닙니다. 성황청의 성구에는 마음이 없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입 니다." 잠시 동안 침묵이 있었다. 족장은 틀림없이 고민하고 있을 것이었다. 비록 영주의 자격 운운하면서 카이사 장군과 맞서고는 있었지만 카이사 장군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곳에 주둔할 것이 분명한 사실이었다. 다만 족장의 고민은 어떻게 하면 보다 유리한 위치에서 카이사 장군과 앞으로 의 일을 계속 해 나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일 거였다. "오브라디 교수님. 한 말씀 해 주시지요." 카이사 장군이 난데 없이 오브라디 교수에게 질문을 던졌다. 모두의 시 선이 오브라디 교수에게 쏠렸다. 일단 참관인 자격으로 이곳에 자리한 것 은 좋은 일이었지만 오브라디 교수 역시 난처해하고 있었다. 자세한 사정 을 잘 모르고 있는 상태에서 선뜻 어느 쪽 편을 들기가 난감한 모양이었 다. "카이사 장군. 제가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사빈이었다. 사빈의 옆에 있던 마로우의 얼굴에 아차하는 빛이 떠올랐 다. 말렸어야 했다는 후회의 빛이었다. "실례지만 어디의 누구신지요." "저는 로스안에서 온 용사냥꾼 사빈이라고 합니다. 오브라디 교수님에 게서 이미 오래 전 스파일 주립 대학에서 사사 받은 적이 있고, 또한 로 스안에서는 성황청의 기사단과 맞서 싸운 경험이 있는 사람입니다." 사빈은 일단 그럴싸하게 말을 시작했다. 다들 그렇게 말하고 있는 사빈 을 대단하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지만 우리 일행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언제 엉뚱한 소리를 하게 될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성황청 타실 지부의 위치를 알고 계십니까?" "알고는 있습니다만..." "저희 일행에게 정보를 주십시오. 저희가 일단 성황청의 동향을 알아보 겠습니다. 지금 족장님께서는 카이사 장군의 군대가 주둔하는 이유를 납 득하지 못하고 계신 것 같고, 또한 카이사 장군 입장에서도 성황청의 정 보를 얻는 일은 중요하리라 생각합니다. 어떻습니까?" 전혀 뜻밖의 말이었다. 족장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고 카이사 장군은 잠 시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이렇게 말을 이었다. "좋습니다. 오브라디 교수님의 일행께서 그렇게 하신다면 일단 그 때까 지는 마을 밖에 주둔지를 꾸리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만약 성황청의 군 대가 밀려 내려온다면 저희로서는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점만은 분명히 해 두겠습니다." 카이사 장군은 일단 이렇게 타협안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고마 족장은 조금 납득이 가지 않는 결론이 났는지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 이상의 결과를 얻기란 힘이 든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고마 족장은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해서 족장과 카이사 장군은 서로 만족할 만한 결과는 아니었어도 어느 정도의 절충안을 얻었다는 생각으로 이야기를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카이사 장군의 부대가 마을 밖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 오브라디 교수가 사빈에게 물었다. "사빈. 자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해 내었나? 나는 전혀 생각도 못해 본 일이었는데." "일단 아무렇게나 둘러 댄 거지요. 저희의 목표는 용을 잡는 것 아니었 습니까? 저 산맥 어디엔가에 용이 있다고 생각하니 지금도 가슴이 뜁니 다." 사빈은 그저 자신의 목표에 가장 충실한 말을 한 것뿐이라는 이야기였 다. 나는 헛웃음이 피식 터져나왔지만 일단은 결과가 좋았으니까. "그나저나 카이사 장군이 준 이 지도만으로 찾아 갈 수 있을까요?" "마로우. '들키지 않고' 라는 말을 빼먹었어." 오로스크가 말했다. "교수님. 그런데 왜 족장은 이런 결과에 불만이 있는 것 같은 표정을 지었을까요?" 나는 오브라디 교수에게 물었다. "그야 이곳에 카이사 장군의 부대가 온다는 것 자체에 불만이 남아 있 기 때문이지. 생각해 보게. 이곳은 순박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네. 외부 의 문물이 들어왔을 경우, 이곳 사람들이 애써 지켜온 문화가 어떻게 되 겠는지. 안그래도 타실은 음식 문화에 있어서는 상당히 발달한 곳 아니었 던가? 무슨 음식이던지 간에 아마도 이곳 사람들 눈에는 신기하기 그지 없는 새로운 것으로만 보일 걸세."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이 타실의 문명으로 물들지 않았으면 좋겠 는데 싶었다. 족장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일 것이었다. 하지만 족장 역시 마을 밖에 주둔하겠다는 카이사 장군의 절충안을 완전히 철회할 수 없다 는 것 쯤은 알고 있었으리라. "그런데 나는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있네." 오브라디 교수는 턱을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성황청이 이곳으로 공격해 들어온다니 그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단 말이야. 사실 적이 어느 쪽으로 들어올지 예상하고 그곳에 주력을 배치하 는 것만큼 위험한 도박은 없지 않나? 적은 언제나 네 번째 방향으로 오는 법인데 말이야. 어쩌면 그저 이곳에 군대를 주둔시키기 위한 구실인지도 몰라. 하지만 왜? 왜 이곳에 국왕은 자신의 최정예 부대를 보낸 걸까?" 오브라디 교수의 말은 나에게도 일단 의문을 던져 주었다. 하지만 나는 사빈이 생각했던 것처럼 우선 목표를 먼저 생각하기로 했다. "어찌되었건, 결국 가게 되는 군요." 스칼렛이 말했다. 스칼렛의 목소리는 우리 중 누구보다도 기대에 가득 찬 듯한 목소리였다. 국왕기사단이 비록 마을 밖에 주둔했지만, 족장이 우려했던 부분은 당 장 현실로 나타났다. 우리 일행이 성황청 타실 지부에 갈 준비를 하고 있 는 동안 마을 꼬마들과 청년들이 외곽에 있는 국왕기사단을 구경가곤 했 던 것이다. 오브라디 교수가 표현한 그대로 순박한 이곳 젊은이들 눈에는 그저 신기한 구경거리쯤으로 모든 것들이 다가오는 모양이었다. "수르카. 나, 저기 좀 가봐야겠어." 사빈이 말했다. 나는 준비할 것들은 대충 다 정리한 상태였고, 어차피 해질 무렵에 출발하기로 되어 있었으므로 시간은 남아있었다. 나는 좋다 고 말하고 사빈을 따라 외곽의 타실 주둔군이 있는 곳으로 나섰다. 우리가 가장 먼저 만난 타실의 흔적은 냄새였다. 달착지근하면서도 고 소한 냄새가 사빈과 나의 후각을 자극하였다. "무슨 냄새지?" 내가 말하긴 했지만 사실 그 냄새에 가장 먼저 영향을 받은 것은 훈족 의 청년들인 모양이었다. 이미 훈족의 꼬마들과 청년들이 냄새의 근원지 에 몰려들어 있었다. 나는 저런 광경을 탐그루에 있을 적에 본 적이 있 다. 몰려드는 꼬마, 신나는 음악, 신기한 구경거리. 그것이 새로운 탐그 루 시장을 맞이하는 행사가 되었건, 혹은 연금술사 바코쿠가 새로운 연금 술사의 등을 선보이는 자리가 되었건, 아이들은 저렇게 몰려들어 신기한 구경거리를 마음껏 구경하곤 했다. 나는 모여있는 훈족의 아이들을 바라 보면서 향수에 젖어버리고 말았다. "사빈, 우리도 구경 갈래?" 나는 사빈에게 이렇게 물었다. 하지만 사빈은 내 물음에 답하지 않았 다. 나는 사빈을 바라보았다. 사빈의 얼굴을 굳어있었다. 꼭 화가 난 것 처럼 보이는 얼굴이었다. "잠자코 따라와." 사빈은 이렇게 말하고는 성큼성큼 걸음을 모여있는 꼬마들 쪽으로 옮겼 다. 나는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뭔가 잘못 한 게 틀림없다는 생 각이 들었다. 하지만 왜 사빈은 화를 내고 있는 걸까? "아저씨. 그거 하나만 주세요." "아저씨, 저도요." 냄새의 근원지는 바로 취사장이었다. 꼬마들은 취사장의 취사병에게 먹 을 것을 달라고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나는 취사병이 무엇을 만들고 있는가 살펴보았다. 취사병은 사탕을 만 들고 있었다. 사탕은 설탕을 녹여서 진득한 액체로 만든 다음, 타버리기 전에 재빨리 부어서 모양을 굳혀서 만드는 간식이었다. 하지만 설탕은 워 낙 귀한 데다가 약으로도 쓰는 것인지라 사탕을 한 번 먹어보기란 탐그루 에서 손해 보면서 장사하는 사람을 찾기 만큼이나 힘이 드는 일이었다. 사탕은 배가 아플 때 먹으면 효과가 있기 때문에 부모 있는 아이들이 가 끔씩 배가 아프다면서 부모에게 사탕을 사 달라고 조르는 것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만약 그렇게 해서 사탕을 얻어먹을 경우 며칠동안 정신이 다 희미해지는 회충약을 먹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취사병은 국자에 설탕을 한 숟가락 넣고, 약한 불에 설탕을 녹인 다음 도마 위에 들이 부어 굳히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도마 위에는 몇 개의 작은 구멍이 나 있었다. 아마 녹인 설탕이 저 구멍 안으로 들어가 모양을 만들어 내는 모양이었다. "니브리티에 있을 때 말이야, 나도 몇 번 먹어 본 적이 있지. 사탕은 단단하지만 입에 들어가면 조금씩 녹아 내리면서 단물을 내지. 결국에는 다 녹아서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되지만 말이야." 니브리티로 유학 다녀온 경험이 있는 아훈이 꼬마들 앞에서 자랑스럽게 떠버리고 있었다. 바로 그 옆에는 일훈이 침을 삼키면서 사탕을 바라보고 있었고, 꼬마들은 마치 입을 벌리고 지저귀는 어미 새처럼 취사병에게 사 탕을 달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취사병은 한가한 건지, 아니면 원래 이런 일에 소질이 있는 건지 씨익 웃으면서 계속해서 녹인 설탕물을 부어 내고 있었다. 취사병은 꽤 오랫동 안 불을 가까이 했는지 얼굴이 온통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나이는 꽤 된 것 같았지만, 어쩐지 야전 군인이라기 보다는 인심좋은 빵집 주인같은 인 상을 하고 있었다. "자, 자. 조금만 기다려라. 한꺼번에 다 나누어 줄 테니." 취사병이 말하자 일제히 아이들이 탄성을 올렸다. "입 닥쳐!" 사빈이었다. 사빈이 소리치자 아이들은 일 순간에 조용해졌다. 사빈과 논 적이 있는 아이들은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외지인. 지금 도대체..." 아훈이 사빈에게 다가가 뭐라고 더 말을 하려고 하는 데 사빈의 오른 손이 휙 하고 움직이는가 싶더니, 철썩 하는 소리와 함께 아훈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이 멍청한 자식! 너 같은 놈이 어떻게 훈족의 미래를 책임지겠다는 거 냐! 너희들이 거지냐?" 사빈은 이렇게 소리쳤다. 사빈의 살기 등등한 기세에 취사병은 어쩔줄 몰라했고, 아이들은 큰 죄라도 지은 사람들 처럼 일제히 고개를 내리 깔 았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20416/21893 ━━━━━━━━━━━━━━━━━━━━━━━━━━━━━━━━━━━━━━━━ 제 목:[탐그루] 실낙원 278 관련자료:없음 19/19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5-10 21:17 조회:1388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이게 너희 어머니에게 배운 거냐? 외지인에게 함부로 손을 벌리라고 말이야. 너희들, 아직도 모르겠어? 이 사람은 너희들 형제가 아니란 말이 야!" 나는 사빈의 말을 듣고 나서야 왜 그렇게 사빈이 화를 버럭 내었는지 알 수 있었다. 사빈은 취사병에게 다가가 멱살을 잡았다. 취사병은 일단 사빈의 팔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사빈의 동작이 워낙 강하고 억세어서 그 대로 멱살을 잡히고 말았다. 그러자 취사병은 뜨겁게 달구어진 국자를 집 어들었다 (국왕기사단의 싸우는 방법이 원래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러 나 사빈의 단검이 훨씬 빨랐다. 사빈의 단검은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빠른 속도로 올라가 취사병의 목줄에 닿았다. "누가 시켰어?" 사빈이 낮게 말했다. 아이들은 완전히 몸이 굳어 버렸고, 아훈과 일훈 은 어쩔 줄 몰라하면서 사빈의 행동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셋만 세지. 하나, 둘!" "자, 잠깐. 저희는 교육받은 대로 할 뿐입니다." 취사병이 다급하게 말했다. "누구한테." "훈련병 시절부터 교육받은 사실입니다. 외진 곳에 갔을 때에는 이렇게 사탕을 만들어서 아이들에게 나누어주라고 배웠다고요. 검사님. 죄송합니 다. 죄송합니다." 가뜩이나 달아오른 얼굴이 멱살을 잡힌 덕분에 더욱 붉어진 취사병은 연신 죄송하다는 말을 하면서 사빈에게 목숨을 구걸했다. 사빈은 잠시 동 안 있다가 멱살을 풀어주면서 취사병을 뒤로 밀어냈다. "아훈. 너희 어머니가 너를 니브리티로 유학 보냈던 게 고작 아이들 앞 에서 자랑이나 하라고 보낸 거였냐? 멍청한 녀석. 너희 어머니의 반만이 라도 좀 닮아봐라!" 사빈은 이렇게 말하고는 휙 돌아서 버렸다. 나는 사빈을 따라 황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볼을 쓰다듬고 있는 아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 훈은 눈물이 다 그렁그렁해져서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르고 있는 모양 이었다. "사빈. 근사한 말도 할 줄 아네?" 나는 사빈에게 이렇게 말했다. 솔직히 아이들이 몰려 있는 모습을 보면 서 탐그루 시절의 추억밖에 떠올리지 못한 나 자신이 부끄러웠기 때문에 일부러 이렇게 태연을 가장하고 싶은 건지도 몰랐다. 하지만 내 물음에 사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만약 평소와 같은 사 빈이었다면 뭐라고 한참을 떠벌였을 텐데 말이다. 나는 어쩌면 훈족을 가 장 마음 속에서부터 염려하고 있는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사빈이 아닐 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 사빈은 갑자기 몸을 휙 돌렸다. 나도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어 몸을 틀었는데,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취사병은 나와 사빈을 향해 석궁 을 겨누고 있었던 것이다. "나도 딱 셋만 세지. 무릎 꿇어! 하나!" 취사병이 소리쳤다. 그러자 사빈은 취사병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손 에는 단검을 들고 있었다. 나는 저렇게 날이 팔 안 쪽으로 향하도록 단검 을 쥐는 것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알고있었다. "잠깐, 사빈! 여기서 카이사 장군의 병사를 죽였다가는..." 내 말은 들은 시늉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서 만약 내가 그대로 사빈 을 말리려고만 들었다면 사빈은 틀림없이 단검을 집어던졌을 것이다. 하 지만 다행스럽게도 사빈은 단검을 던지지 않았는데, 그건 내 충고를 들어 서가 결코 아니었다. "당장 그거 내려 놓지 못해. 등뒤에서 석궁을 뽑아 드는 것이 국왕기사 단의 싸우는 방식이냐!" 소름이 다 돋을 지경으로 날카로운 여자 목소리가 취사장 안쪽에서 들 려왔다. 여자가 소리치자 취사병은 머리를 긁적이면서 석궁을 내려놓았 다. 그러자 사빈도 단검을 도로 허리춤에 꽂은 뒤에 다시 마을 쪽으로 발 걸음을 옮겼다. 어디서 많이 들은 목소리 같은데. 나는 다시 한 번 이무 르 아주머니가 떠올랐다. 고마 족장을 자주 본 탓일까? 이상하게 왜 여자 목소리만 들으면 이무르 아주머니가 떠오르는 건지. 아훈과 일훈, 그리고 꼬마 아이들은 어리둥절해 있다가 결국 아훈을 따 라서 어디론가로 가버렸고, 취사장에는 취사병과 취사병을 꾸짖고 있는 한 여자만이 남았다. 여자는 야전에 어울리지 않는 파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검은 생머리 가 어깨까지 내려오고 있었고, 멀리서도 부연 빛이 느껴질 만큼 하얀 피 부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팔과 다리가 몹시 가늘었는데, 나는 혹시 내 가 아는 누군가가 아닐까 생각하면서 잠깐 멈추어 섰다. "수르카. 따라와. 더 시간 끌 필요 없어." 사빈이 재촉하는 바람에 나는 여자가 누구인지 기억해 내는 데에는 실 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꼭 한 번, 여자가 내 얼굴을 바라보는 것 같기는 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여자의 질책과 취사병의 변명 때문에 그 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나는 스타바를 쓰다듬어 주었다. 뮤를 타고 가면 좋겠지만 산악 지형을 소리 없이 이동해야 할 경우가 많이 생길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나는 어 쩔 수 없이 스타바를 두고 가야만 했다. "스타바. 나 없는 동안 재미있게 놀아?" 나는 반 농담조로 스타바에게 이렇게 말했다. "뮤- 뮤뮤- (내 삶은 내가 사니까 신경쓰지마)" 스타바 녀석. 이렇게 기분 나쁘다는 듯 울음소리를 내긴 했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스타바는 지금 그 어느 때 보다도 기분 좋아하고 있다는 것 을 말이다. 스타바의 옆에는 아리따운 뮤가 한 마리 버티고 서 있었다. 뮤들도 다른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겨울이 끝나고 봄이 오면 새 생명을 잉 태하고 싶어했다. 잘 하면 이곳에서 스타바 2세를 보게 될 지도 모르겠는 걸. 나는 스타바를 쓰다듬어 주면서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어이, 수르카. 얼른 가자고." 오로스크가 베낭을 짊어지며서 말했다. 나는 산등성이를 바라보았다. 어느 사이 해는 산을 넘어가며 붉은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럼 스타바, 힘내서 열심히 해!" 나는 이렇게 농담을 던지고는 얼른 일행과 함께 마을을 떠났다 (만약 스타바가 놀림 당한 걸 알았다가는 당장에 뒷발길질로 내 턱뼈를 부수어 놓을 게 틀림없으니까). 하지만 나만 빼고는 다들 몹시 긴장하고 있었다. "길은 스칼렛 양이 앞장서고 나머지는 조용히 따라오기만 하면 된다. 알겠지?" 오브라디 교수가 우리에게 나지막이 명령했다. 꼭 특수 임무를 띄고 떠 나는 특임부대 지휘관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데 오브라디 교수가 특임부 대 지휘관 같다고 생각하니까 웃음부터 나오는 건 도대체 왜 일까?) "어둠을* 밝히는* 것은* 달과* 별* 그리고* 피*" 스칼렛은 다행스럽게도 어둠 속에서도 사물을 바라볼 줄 아는 마법을 쓸 줄 알고 있었다. 나는 농담 삼아 스칼렛에게 물어보았다. "이런 마법을 쓸 줄 알았으면 진작 좀 가르쳐주지 그랬어요?" 그 결과 나는 아무래도 스칼렛이 나를 미워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스칼렛은 내 말은 완전히 무시하고 길 안내에만 집중했으니까. 그것뿐이라면 나를 미워하고 있다고까지는 생 각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스칼렛은 화난 사람처럼 입을 굳게 다물 고서 나를 한 번 노려보기까지 했던 것이다. 어둠을 볼 수 있는 마법을 쓴 탓인지 스칼렛의 눈동자는 붉게 물들어 있었다. 나는 소름이 다 끼쳐 서 당분간은 스칼렛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정말 여 자는 알 수 없는 존재라니까. 야간 산행은 위험한 요소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언제 덮칠지 모르는 맹 수의 위협, 그리고 성황청의 기사단에게 발견될지 모른다는 위험,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푹 패인 길과 어딘가에 도사리고 있을 절벽에 대한 공 포. 그리고 말을 하면 안될 지점을 지날 때 드는 별의 별 헛된 망상들. 이런 것들이 우리의 걸음을 보다 조심스럽게 만들었다. 사실 오로스크가 우릴 따라올 이유는 별로 없었다. 오브라디 교수야 분 명 가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었고, 스칼렛이야 밤에 볼 수 있는 마법을 쓸줄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는 해도, 오로스크는 굳이 따라와 봐야 짐이 될 게 분명했다. 하지만 오로스크는 마을에 혼자 남아있기 싫다면서 부득부득 따라오겠다고 우겼고, 오브라디 교수는 그럼 비교적 안전한 지대까지 짐을 지고 갔다가, 일행이 돌아올 때까지 짐을 지키는 역할을 하라며 오로스크를 대동했다. 하지만 오로스 크는 자신이 대단한 일이라도 맡은 사람처럼 진지하게 이 탐사에 참여했 던 것이다. 행군을 하면서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산에 오른 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것 같았는데, 벌서 세상은 완전히 잠들어 버린 듯 암흑으로 변해 버 렸고, 별빛마저 어둠에 묻혀 사방은 온통 고요와 침묵, 그리고 어둠뿐이 었다. 조용한 가운에, 나는 엉뚱하게도 칼을 상상해 보았다. 날카롭게 벼려 진, 훅 불었다가는 입술이 베일 것 같은 칼이었다. 칼은 나뭇잎 사이를 떠돌며 예리한 칼날로 다가오는 것은 무엇이든 베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칼은 생각하고 있었다. 이것이 칼의 법칙이라고. 하지만 그때 바람 한줄 기가 나뭇잎을 모아가지고서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어디로 가는 것일까? 나는 도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칼은 더 이상 아무것도 벨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바로 그 순간. "으흠. 흠." 어디선가 인기척이 들려왔다. 일행은 모두 제자리에 멈추어 섰다. 어둠 뿐이던 세상에 갑자기 긴장감이 들어찬 듯 했다. "빌어먹을. 다 썩어가는 걸 이제 와서 버리라니, 이거 말이 되?" 목소리였다. 우리는 일단 천천히 몸을 숙여 바닥에 배를 붙였다. 성황 청 기사단d;었다. "이게 다 아리우스 기사단장님 명이니 어떻게 하겠는가? 이 녀석은 연 구할 게 더 있다고 하시니 말이야." "뭐가 별달라서?" "가고일한테 당했던 녀석이잖아, 이 녀석은. 뭔가 다른 효과가 나올지 모른다고 말씀하셨다고. 너는 못 봤지? 이 녀석 가고일한테 씌워가지고선 우리한테 함부로 덤비기까지 했다고." "그래도 용케 사로잡았네?" "다리 하나를 베어버렸거든." 다리를 베었다는 말을 한 기사는 키득거리면서 웃기까지 했다. 어두운 밤중에 듣는 웃음소리는 소름이 다 끼칠 지경이었다. 하지만 소리 뿐, 어 둠 저편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도무지 알아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굳이 여기까지 와서 버려야 하는 이유가 뭐야?" "근처는 꽉 찼잖아." "자, 자. 이제 그만 들 떠들고 땅이나 파요, 형제들." 앞서서 말하던 두 명의 목소리와는 다른 여자 목소리였다. 나는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눈을 감고 천천히. 어디선가 들었던 것이 분명한 목소 리였다. "예, 라스폼 사제님." 내가 기억해내기도 전에 새로운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았다. 나 는 숨이 턱 막힐 지경으로 가슴이 뛰어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라스 폼. 바로 그 빌어먹을 라스폼이! 까마귀의 집 벌판에서 죽었을 거라고 생 각하고 있었는데. 라스폼이 바로 눈앞에 있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몇 배 는 더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털썩, 하고 무거운 것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시체인 모양 이었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은 이제 가까운 곳에 있는 사물을 식별할 정 도는 되었다. 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움찔거리고 있는 스칼렛의 등이었다. 스칼렛은 떨고 있었다. 나는 스칼렛의 표정을 볼 수는 없었지 만 느낌으로 어느 정도 스칼렛의 심정을 헤아릴 수는 있었다. 스칼렛은 두렵거나 추워서 떨고 있는 게 아니었다. 뭔가 꾹 억누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내가 등을 바라보고 있는 걸 알아챘는지, 스칼렛이 나를 휙 돌아보았다. 붉은 눈동자가 내 눈과 마주치자, 나는 얼른 고개를 돌려 스 칼렛의 시선을 피했다. 마법을 쓸 줄 안다는 건 좋은일인지 몰라도 이렇 게 너무 예민한 건 별로 좋은 게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 그럼 이제 시작하자고. 형제." "그러지 뭐." 두 기사는 이렇게 말하고는 삽으로 흙을 퍼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아 주 한참동안 이곳에서 이렇게 엎드려 있어야 할 것 같았다. 배가 닿아있 는 흙에서 냉기와 물기가 한꺼번에 올라오고 있었다. 기분 나쁜 느낌이었 다. "그런데 이 녀석, 가고일들 찾다가 잡은 녀석이라면서?" "그래. 아리우스 단장님 덕분이지. 아리우스 단장님의 권능은 하잔에서 죽은 리바르도 기사단장 못지 않은 모양이야. 이날 가고일들을 찾아보라 고 말 안 해주셨으면 이 녀석은 못 잡았겠지. 연구도 이어지지 못했을 거 고 말이야." "이름이 뭐라고 했지?" "자, 자. 잡담들 그만하고 어서 빨리 땅이나 파요, 형제들." "그래. 이름이..." "밤새도록 땅만 파고 있을 생각이에요?" 잠시 침묵이 있었다. 나는 설마하는 심정으로 귀를 기울였다. "유나였잖아요. 어서 일이나 해요." 나는 유나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먼저 가고일과 이야기를 나누었던 사 훈이 떠올랐고, 그리고 나서야 기사들이 주절거렸던 대화 내용을 이어서 떠올릴 수 있었다. 다리를 잘랐다는 말이나, 다 썩었다는 말... 그러나 내가 이런 생각을 채 다 마치기도 전에 사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20417/21893 ━━━━━━━━━━━━━━━━━━━━━━━━━━━━━━━━━━━━━━━━ 제 목:[탐그루] 실낙원 279 관련자료:없음 21/21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5-10 21:17 조회:1255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우와아아아아!" 사빈은 이제껏 단 한 번도 들어 본적 없는 무시무시한 고함소리를 지르 면서 성황청 기사들에게 달려들었다. 이제 더이상 생각을 한다는 건 아무 런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마로우 역시 칼을 빼 들고 기사들에게 달려들 었고, 스칼렛은 마법의 말을 외우고 있었다. 나는 일단 자리에서 일어나 기는 했지만 칼자루를 잡고만 있었을 뿐, 도저히 뽑을 수가 없었다. 사람 들 해쳐서는 안 된다고 맹세했던 일이 떠올랐다. 하잔에서 죽어갔던 사람 들, 그리고 죽어갔던 용병단 동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가는 사라졌다. 사빈은 단검 하나를 집어 던졌고, 단검은 땅을 파고 있던 기사의 목줄 기에 정확하게 박혔다. 기사는 꾸르륵 거리는 기묘한 소리를 내면서 바닥 에 쓰러졌다. 마로우는 라스폼에게 칼날을 날렸다. 라스폼은 재빨리 삽자 루를 쥐고있던 나머지 기사의 등 뒤로 피했고, 기사는 삽자루로 마로우의 칼을 막아내었다. 그 순간 사빈은 몸을 비틀면서 왼 손으로 쥐고 있던 단 검으로 기사의 목을 베었다. 기사는 삽자루를 놓음과 동시에 양손으로 목 을 틀어쥐었지만, 손가락 사이에서 이미 핏물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타거라*" 하지만 그 사이 라스폼은 성구를 작동시킬 수 있는 시간을 벌었다. 하 지만 정확하게 조준할 수 있는 시간은 아니었다. 성구는 바닥에 불길을 뿜어냈고, 땅에서는 흙과 함께 불덩이가 솟아올랐다. 아무리 사빈과 마로 우라고 해도 한 순간 몸을 피하지 않을 수 없었고, 잠시 후 연기가 사라 지는가 싶자, 라스폼은 이미 어둠속으로 정신없이 달려간 후가 되었다. "라스폼!" 사빈은 소리치면서 라스폼의 뒤를 ㄳ으려고 했다. 하지만 마로우가 사 빈을 붙잡았다. "사빈 군. 그만 두게. 이 어둠 속에서 추적한다는 건 무리야. 오히려 역습을 당할 수도 있다구." 오브라디 교수가 사빈에게 말했다. 사빈은 숨을 씩씩거리면서 라스폼이 사라진 어둠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눈에서 불꽃이라도 쏟아져 나 올 기세였다. "수르카! 뭘하고 있었어! 나하고 마로우가 나머지 녀석들을 상대하는 동안 네가 얼마든지 라스폼을 벨 수 있었잖아!" 사빈은 여전히 흥분이 가시지 않은 상태인지 나에게 삿대질까지 해대면 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나는 잠자코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사람 을 베지 않은 것을 비겁하다고 생각하게 된 건 용병단을 떠난 이후 처음 인 것 같았다. 머릿속이 온통 어지러웠다. 나는 사빈을 마주 대하기가 민 망해서 나무둥치가 있는 곳에 대강 자리를 잡고 걸터앉아 사빈을 외면했 다. "그나저나 이거 계획은 완전히 틀어져 버렸군요. 이렇게 소란을 다 피 웠으니..." 마로우가 침착하게 주변을 살펴 본 다음 이렇게 말했다. 그 말은 맞는 말이었다. 이제 더 이상 성황청에 몰래 잠입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 되 어 버렸다. 하지만 소득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아이들이 없어지고 있 었던 까닭이 바로 성황청 녀석들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나는 바닥을 살펴보았다. 바닥에는 목에 단검이 박힌 채로 여전히 꾸르 륵하는 소리를 내고 있는 시체가 한 구, 그리고 여전히 피를 목에서 뿜어 내고 있는 시체가 한 구 놓여있었다. 오래간만에 보는, 그리고 다시는 보 고 싶지 않았던 칼의 결과물이었다. 그들도 틀림없이 가족이 있을 것이고 형제가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 이들은 가족이나 친구를 만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이렇게 살덩이가 되어 들짐승의 배나 불려주는 신세가 된 것이다. 나는 일어나 준비해온 가방에서 쇠독을 꺼내 시체의 주변에 뿌려주었 다. "뭐 하는 거야?" 나는 사빈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아무 의미 없는 행동이기는 했지만 성황청의 기사들이 되돌아 왔을 때 짐승에게 뜯긴 시체를 발견하게 되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옆으로 유나의 시체가 있었다. 사 훈의 형제이고 또한 훈족의 딸이었을 유나의 시체였다. 오랫동안 물에 담 겨 있었는지 젖은 몸은 팅팅 불어있었고, 냄새가 고약했다. 나는 유나의 오른 쪽 발이 달려있어야 할 자리에 아무것도 달려 있지 않은 것을 볼 수 가 있었다. "기사단은 사람이고 유나는 사람이 아닌것 같아?" 사빈이 나에게 말했다. 하지만 흥분은 많이 가라앉은 모양이었다. 여전 히 씩씩거리고 있기는 했지만 나에게만 특별히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 다. "그럼 어서 되돌아가도록 하지. 더 이상 여기 있는다는 건 별 의미가 없는 것 같으니 말이야." 오브라디 교수가 말했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되돌아 올 수밖에 없었 다. 사빈은 오는 길 내내 씩씩거리면서 분노를 참지 못하고 있었고, 마로 우와 오브라디 교수는 앞으로의 일을 계속해서 토론하고 있었다. 오로스 크는 나와 함께 유나의 시체를 옮기는 일을 자원했다. 들것을 만들어 시 체를 옮기면서, 나는 유나의 눈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아무리 많이 시체 를 보았다고 해도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은 일은 있었다. 마을로 돌아오는 길 내내 나는 여전히 길 안내를 하고 있는 스칼렛에게 말을 걸 엄두를 내지 못했다. 마을에 돌아온 우리는 먼저 고마 족장을 찾았다. 족장은 새벽잠이 한참 이었지만 조금도 개의치 않고 우리를 맞아주었다. 자는 사람을 깨운 다는 것은 죽은 사람을 다시 불러내는 일 만큼이나 별로 내키지 않는 일이었지 만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도저히 어쩔 수가 없었다. "성황청이?" 오브라디 교수가 말을 마치자 미간을 찌푸리면서 고마 족장은 이렇게 말했다. 고마 족장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해 보였다. 족장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족장님. 상황이 별로 좋지 못합니다. 성황청은 지금 마을에서 아이가 없어지는 이유를 알았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아니, 지금쯤이면 카 이사 장군의 부대가 주둔하기 시작한 것도 알았을지 모릅니다. 어서 대책 을 마련하지 않는다면, 이곳은 당장 성황청과 국왕기사단 간의 전쟁터로 변해버릴 것입니다." 고마 족장은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 때 고마 족장의 다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젊었을 적에는 아름답다던가, 혹은 예쁘다는 이 야기를 들었을지 모를 발목이 바지 밖으로 나와 있었다. 발목은 굵고 강 해 보였다. 어쩌면 저 발목이야말로 고마 족장이 지금껏 살아온 시간에 대한 하나의 상징일런지 몰랐다. "오브라디 교수. 나는 이런 날이 오지 않기만을 바라고 있었다오." 한 참동안 말이 없던 고마 족장은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곳은 척박한 땅이라오. 식량이 될만한 것들이 많지 않다네. 다행히 이곳에서 잘 자라는 풀들이 하나같이 대륙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약초들이어서 그나마 우리 훈족이 별다른 피해 없이 지금까지 우리만의 풍습과 문화를 유지하면서 살 수 있었다오." 오브라디 교수는 잠자코 족장의 말을 듣고 있었다. 고마 족장은 어깨를 늘어뜨리고서 자리에 도로 앉았다. 이제껏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모습이 었다. 저 카랑카랑한 목소리의 고마 족장이 이렇게 힘없이 말할 줄이야. "하지만 선 족장께서는 예견하셨지. 대륙의 역사가 뒤바뀌고, 마물들이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하면, 언젠가 이 땅에도 군대가 닥쳐올 것이고 그 때 자칫하면 이 땅이 전쟁터로 변해버릴지 모른다고 말이오. 내가 족장이 될 수 있었던 것도, 또 아들 중에 똑똑한 녀석을 니브리티같은 곳으로 유 학 보냈던 것도 이러한 일이 생겼을 때 대처하기 위한 것이었다오." 아무도 말이 없었다. 족장의 집에 걸려 있는 작은 등불이 위태롭게 흔 들리고 있었다. 짐승의 기름을 모아 심지를 박아 태우는 진짜 오래된 방 식의 등불이었다. 환하고 뜨겁지만 그을음이 많이 일고 냄새가 고약해서 이제는 거의 쓰이지 않는. 훈족은 연금술사의 등을 쓰지 않았다. 필요한 모든 것을 진짜 불에 의지하고 있었다. "카이사 장군과 이야기를 나눌 때, 사실 나는 떨고 있었다오. 이제 오 랫동안 유지해 온 훈족의 자존심도, 또한 훈족의 독립성도, 이제는 모두 끝나는가 싶어서 말이지. 카이사 장군, 그나마 좀 상식이 통하는 사람인 것 같더군. 그나마 다행이지. 그나마 다행이야..." 말 꼬리를 길게 늘이는 고마 족장의 목소리는 다행이 아니라는 사실을 반증하고 있었다. 그런데 카이사 장군을 만났을 때 떨고 있었다니. 나는 예상 밖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국왕기사단 앞에서 작은 마을의 족장이 영주에 비견 될 수 있다, 운운하면서 맞섰던 사람이 하는 말 같지 않았 다. "두 개의 강한 세력이 있을 때, 가운데 낀 세력은 오직 자신의 땅이 전 쟁터가 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한 쪽에 붙어야 하는 법이라오. 한 쪽이 강 해지면 다른 한 쪽으로, 또 다른 한쪽이 강해지면 한 쪽으로. 그것만이 전쟁을 피할 수 있는 길이지." 족장의 말에서 나는 탐그루와 삼년전쟁을 떠올렸다. 만약 자나크 주의 영주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면. 아마도 그리 쉽사리 탐그루를, 자 나크 주 전체를 삼년전쟁의 격전지로 만드는 우는 범하지 않았을 텐데. "허나 지금은 전쟁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오. 내가 좀더 일찍 손을 썼다면 상황이 이렇게 까지 나빠지지는 않았겠지. 별 수 없는 일이오. 내 가 대륙을 떠돌아다닐 때 배운 것이 하나 있소. 그건 약한 자가 강한 자 에게 잘 붙어서 살아남는 것도 훌륭한 처신이고 재주라는 것이오.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우리가 성황청에 붙을 수는 없겠지.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카이사 장군이 이끄는 국왕기사단이 이길 수 있도 록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라오." "그렇다면..." 오브라디 교수가 말했다. 오브라디 교수의 목소리는 깊게 잠기어 있었 다. "수르카.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전설이 재현된다면 우리 훈족의 생명 은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아직 전설은 시작되지도 않았다네." 고마 족장은 그윽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나는 말없이 고개 를 숙였다. "오브라디 교수. 카이사 장군에게 전해 주시오. 내가 직접 전해야 옳은 일이겠소만 내 마지막 남아있는 자존심이 허락하지를 않는구려. 부디 카 이사 장군에게 전해 주오. 내가 카이사 장군을 돕기로 결정한 이상 이 훈 족은 카이사 장군이 이기라고 응원만 하고 있지는 않을 거라고." 고마 족장의 마지막 말은 이제 정말 이곳이 전장이 되는 일은 도저히 피해 갈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나는 흥분이 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전쟁. 피. 살육. 그리고 슬픔과 고통의 눈보라가 이 평 안한 땅에가지 당도하게 된 것이다. "족장님. 족장님에게는 마법의 힘이 있지 않습니까? 마법의 힘으로 칼 을 막을 수 없단 말입니까?"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고마 족장에게 물었다. 모두의 시선이 나에 게로 쏠렸고, 족장은 여전히 그윽한 눈을 하고서 이렇게 말했다. "그 부분에 있어서는 카이사 장군의 말이 맞아. 성황청의 성구는 칼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네. 그리고 칼의 마음을 나는 알지 못하네." 나는 힘이 주욱 빠지는 것을 느꼈다. 도저히 피해 갈 수 없는 보이지 않는 벽이 놓여있는 기분이었다. 카이사 장군의 집무실까지 가는 동안 우리 일행은 도합 네 번의 몸수색 을 받았다. 야전에서 위병에게 우리의 신분을 밝히고 카이사 장군께서 기 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까지 했건만, 시간이 해뜨기 전인데다가 카 이사 장군의 청음병들이 산에서 들려온 성구의 폭음을 들은 까닭으로 카 이사 장군의 야전 지휘소는 삼엄한 경계태세에 돌입해 있었던 것이다. 처 음에는 나도, 마로우도 오브라디 교수에게 해가 뜬 후에 가는 것이 어떻 겠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오브라디 교수는 물론이고, 사빈마저 그 입장은 단호했다. "언제 성황청의 기사단이 쳐들어올지 모르는 상황일세. 그리고 훈족의 족장도 우리에게 특별히 부탁하지 않았는가." "까짓 거, 당장 붙어 버리는 거야. 성구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이 사 빈의 칼도 못지 않을 걸?" 사빈의 목소리는 흥분으로 들떠있는 듯했다. 어떻게 하면 살육을 눈앞 에 두고도 저런 태연한 말을 할 수 있는 것일까. 네 번의 몸수색 끝에 우 리는 결국 카이사 장군을 만날 수 있었다. "야전에서는 밤에 집무를 보고 낮에 자는 게 습관이 되어서요. 어서 들 어와 앉으시지요. 좀 비좁지만 이야기를 나눌만한 공간은 될 겁니다." 카이사 장군이 웃으면서 말했다. 집무실은 아케르 용병단에서 본 아케르의 집무실에 비견될 만큼 비좁고 아무런 장식도 없었다. 두 개의 칼이 맞붙어 있는 형상을 하고 있는 국왕 기사단의 장식은 약간 비뚤게 천막에 붙어 있었고, 대마법사 아킨의 지팡 이 문양이 새겨진 방패는 책상 위에 엎어져 연금술사의 등 받침으로 쓰이 고 있었다. "자, 그럼 말씀해 주시지요." 정리하고 있던 서류와 지도를 책상 한켠으로 대충 밀어놓으면서 카이사 장군이 말했다. 하얀 카이사 장군의 얼굴에는 어느 사이 수염이 자라나 있었지만, 카이사 장군은 별로 상관하지 않는지 오히려 수염을 쓰다듬으 면서 말했다. "빨리 돌아오신 걸로 봐서 그다지 좋은 소식일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습 니다만, 저는 야전에서 오래 생활한 탓에 나쁜 소식에는 꽤 익숙해져 있 지요." 오브라디 교수는 천천히 이야기를 진행해 나갔다. 카이사 장군은 몇 가 지 끄적이는 것 같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말을 그저 고개만 끄덕이면서 들 었다. "... 그리고 훈족의 족장께서 그러더군요. 만약 성황청과 국왕기사단이 싸우게 된다면 국왕기사단이 이기라고 응원만 하고 있지는 않을 거라고." 오브라디 교수는 이렇게 설명을 마치었다. 말을 끝까지 들은 카이사 장 군은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현명한 분이시로군요, 고마 족장님은. 이거 정말 큰 힘이 되겠습니 다." "현명한 선택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카이사 장군의 손에 달려있습 니다." 오브라디 교수가 말했다. 카이사 장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요. 어차피 전쟁이니까. 아무리 훌륭한 이상과 훌륭한 정책, 그 리고 훌륭한 지휘관을 둔 부대라고 해도 전쟁에서 진다면 아무 소용도 없 겠지요." "하지만 역사는 훌륭한 이상과 정책을 지닌 군대의 편에 서 왔습니다. 전설의 초강대국 아모리카조차도 정의가 수반되지 않는 전쟁을 일으켰기 에 일개 소국인 비에트남과 세브비아도 이길 수 없었지 않습니까?" "역시 교수님이시라 그런지 예를 드시는 것도 고대의 전사(戰史)에서 드시는군요. 그렇지요. 그 두개의 전쟁은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도덕적으 로 우위에 선 국가는 어떠한 경우에도 지지 않는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지 요. 제 생각엔 아무리 강한 자라고 해도 이길 수 없는 전쟁이 있다는 교 훈을 전하기 위해 후대 사람들이 만들어낸 전설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만." "카이사 장군님. 하지만 이기는 자가 결국 도덕적으로 우위에 서는 법 아니겠습니까? 실패한 혁명은 없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마로우가 카이사 장군에게 물었다. "그렇지요. 실패하면 반란일테니까. 하지만 그런 논쟁은 어쩐지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 하는 식으로 별로 의미가 없어 보이는군요." "지금은 좀 다릅니다. 성황청은 강력한 성구를 손에 쥐고 있습니다. 제 가 듣기로는 카이사 장군의 부대도 강력한 성구를 주 화력으로 하는 성황 청에게 탐그루에서 패퇴한 적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사빈이었다. 사빈은 도발적이기까지 한 목소리로 카이사 장군에게 말했 다. 하지만 카이사 장군의 태도에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20418/21893 ━━━━━━━━━━━━━━━━━━━━━━━━━━━━━━━━━━━━━━━━ 제 목:[탐그루] 실낙원 280 관련자료:없음 22/22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5-10 21:18 조회:1391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성황청의 강력한 성구를 염두에 두고 하시는 말씀이시군요. 그러니까 이길 수 있는 대책은 있느냐, 뭐 그런 말씀이신 것 같은데요. 맞습니까?" "그렇습니다." 사빈이 말했다. 비록 흥분에 들떠있다고는 해도 사빈의 몸에 흐르고 있 는 전사의 피는 사빈에게 올바른 판단을 강제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전사를 돌아보면 두 개의 흐름이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 다. 오브라디 교수님께서도 알고 계시겠지요? 대략 그 두개의 힘은 화력 과 기동이라는 말로 표현됩니다. 즉 강한 무기의 개발로 이어지는 힘으로 밀어부치는 식의 전투방식이 우위를 점하는 시기가 있는가 하면, 빠른 기 동과 정보를 통한 특출한 작전의 실행이 전투의 중심이 되는 시기도 있었 지요. 예를 들자면 석궁이 처음 나왔을 때는 그 강력한 힘때문에 석궁 위 주의 전투가 성했고, 뮤를 주력으로 하는 부대가 나왔을 때는 기동이 우 위를 점했습니다." "지금은 그렇다면 화력이 우위를 점하는 시기 아닐까요" 사빈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그 두 개의 시대는 하나의 속성만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화력의 시대에서 기동을 앞세워 전투에서 승리한 경우도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고, 기동의 시대에서 화력을 집중하여 승리를 이끈 경우도 얼마 든지 찾을 수 있지요. 요컨데 지금 우리의 승패 여부는 적의 막강한 화력 을 어떻게 봉쇄하는 가에 달려있다고 보는 게 옳을 것 같습니다." "지금 그 방법을 묻고 있는 겁니다." 사빈이 묻자 카이사 장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뭔가 고민이 되는 모양 이었다. 설마 저러다가 휙 돌아서서 '실은 아무런 대책도 없소'하는 거나 아닐까 하는 걱정이 다 되었다. 카이사 장군의 싱글거리는 웃음을 보고 있자니 솔직히 그런 무책임한 말을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것 같게 여겨졌 다. "오브라디 교수님. 왜 이곳으로 타실의 정예 국왕기사단이 오게 된 것 인지 알고 계십니까? 게다가 이렇게 급작스럽게 지휘관까지 바꾸어 가면 서요." "저도 그것이 궁금했습니다. 왜입니까? 이런 변방까지. 게다가 지휘관 까지 교체되었다고요?" "솔직히 이런 군사 기밀을 여러분에게 말씀드려야한다는 사실 자체가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습니다. 지휘관으로서 말이지요. 저 개인으로서는 여러분들을 충분히 믿습니다만." 카이사 장군의 사람 좋은 미소는 사라져있었다. 나는 어쩐지 공포감마 저 느껴질 지경이 되어 버렸다. 눈앞에 있는 사람이 순식간에 바뀌어 버 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우리가 이곳에 온 이유는 화력의 열세를 기동력으로 상쇄하기 위해서 입니다." "방법이... 있군요?" 오브라디 교수가 말했다. 오브라디 교수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나 역시 불길하다는 생각이 잠시 스치고 지나갔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곳, 성황청의 타실지부에 바로 그 해답이 있습니 다. 저는 적어도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이곳으로 정예 병력이 파견 된 것도, 또한 지휘관으로 제가 임명된 것도 모두 저의 건의에 의해서 진행 된 일입니다." 카이사 장군의 얼굴 근육이 경련을 일으키고 있는 것을 나는 볼 수 있 었다. 카이사 장군의 표정에는 군인 특유의 경직된 태도가 나타나고 있었 다. 아무리 사람 좋은 웃음으로 가리려고 했다고 해도 이렇게 드러나고 마는구나. "솔직히 말씀 드리지요. 이미 저희 특임부대가 오브라디 교수님과 동시 에 다른 방향으로 출발했습니다. 아, 제가 오브라디 교수님 일행을 이용 했다고는 생각하지 말아주십시오. 저는 지휘관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셔도 그런 점은 십분 이해하겠습니다. 하지만 어 떻게 그런 확신을 가지실 수 있으셨는지요? 아니, 도대체 이곳 성황청 타 실 지부에 뭐가 있기 때문에 이렇게 정예병력까지 동원되어야 했단 말입 니까? 저희는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성황청의 기사들 둘 을 베고 돌아온 우리 일행입니다." 오브라디 교수가 물었다. 카이사 장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 성황청 타실 지부에는 성구가 가지고 있는 힘의 근원이 있습니 다. 제가 수집한 정보에 의하면 이곳 성황청 타실 지부에서는 어린아이의 영혼을 이용해 성구가 가지고 있는 힘의 근원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그 과정은 저희 타실의 대마법사 제마 님께서 자문해 주셨습니다. 인간의 몸이 가지고 있는 체질적 특성을 순수한 힘으로 환원한 다음, 그것을 성 구의 힘으로 발현시키는 일은, 비록 고도의 성구 제작능력을 요한다고는 하지만,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이 제마 님의 견해였습니다." "그렇군. 그래서 성황청 성구의 힘이 여러가지로 나타날 수 있었던 거 군..." 오브라디 교수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자세한 것은 나중에 기회가 되면 설명해 드리지요. 이제 곧 저희 특임 부대가 임무를 완수할 것입니다. 제가 깨어 있었던 것은 특임부대의 결과 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오브라디 교수님께서 알려주신 정 보도 저의 생각에 확신을 가지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어린아이의 몸이 젖 어있었고, 그 기사들이 실험 운운했다는 것은 그곳에서 성구에 관한 연구 가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 일행은 이제 카이사 장군의 입장을 이해 할 수 있게 되었다. 카이 사 장군은 전략적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 이곳에 온 것이었다. 물론 거기 에는 훈족의 입장이나 우리의 입장이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다만 카이사 장군은 훈족이나 우리의 입장을 교묘하게 자신의 입장에 끼워 맞춘 것뿐 이었다. "다만 한가지 남는 의문이 있군요. 그런 정보를 얻은 방법말입니다. 성 황청이 역으로 흘린 정보일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지 않습니 까?" "죄송합니다. 정보에 대해서는 아무 말씀도 드릴 수가 없군요." 카이사 장군의 말은 옳았다. 아무리 멍청하고 잘난척하기 좋아하는 장 군이라고 해도 자신이 어떻게 해서 정보를 얻었는지는 이야기할 턱이 없 으니까. 천막이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온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파란 드레스 를 입고 있는 여자였다. 여자의 손에는 쟁반이 들려있었고, 쟁반에는 빵 과 과자, 그리고 마실 것이 올려져 있었다. "좀 쉬었다가 하세요." 여자가 말했다. 나는 여자를 보는 순간 내가 기억력이 좋다고 생각했던 사실을 완전히 부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라짐?" 나는 여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자의 얼굴에 당혹의 빛이 드러났다. "탐그루의 라짐 맞지? 나 수르카야!" 내가 묻자 카이사 장군은 어떻게 된 일이냐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알고 계시지요, 제 부인을?" 카이사 장군이 물었다. 물론 그렇게 수상하다는 듯한 눈초리는 아니었 지만 어쩌면 모른 척 했어야 옳았을 순간에 쓸데없는 말을 했구나 싶었 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모르는 척 할 수도 없는 일이고. 그래서 나는 이 렇게 고쳐 물었다. "혹시 탐그루에서 별빛 주점을 경영하시던 그 라짐이 아니십니까? 아, 기억하시지 못하시나보군요. 저는 몇 번 그곳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나는 용병단에 있을 때 라이짐이 가투신 편으로 받았던 편지에서 읽었 던 사실을 기억해내면서 이렇게 말했다. 카이사 장군이야 탐그루에서 주 둔한 경험이 있다고 하니 설마 라짐이 별빛주점을 운영했었다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아. 아직...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라짐은 이렇게 말하면서 빵과 마실 것을 내려놓았다. 나는 카이사 장군 의 눈치를 살폈는데 다행히도 대충 넘어가자고 생각했는지 굳어있던 표정 은 풀려있는 상태였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야전에 부인과 함께 나오시다니요." 오브라디 교수가 이해가 가질 않는다는 듯이 물었다. "전장에서 제 행운의 여신이지요... 라고 말하면 라짐은 화를 낼 겁니 다. 실은 제 참모 역을 겸하고 있지요." 카이사 장군은 자랑스럽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 나는 라짐을 만난 것 이 반갑기도 했고 또한 기쁘기도 했지만 내 마음을 표현할 길을 찾지 못 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라짐이 편지에 덧붙였던 추신을 기억해 내고는 이렇게 말했다. "라짐. 야전 생활을 하실 때 항상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달 없는 밤에 는 등뒤를 조심하고 길게 자란 수풀을 걸을 때는 발 밑을 조심해야지요." 나는 라짐이 내가 그 편지를 읽었다는 사실을 알아주기만을 바라는 마 음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러자 라짐은 대단히 침착하게 이렇게 말했다. "장군님. 이 분은 제 고향 친구십니다. 이렇게 말씀하시긴 하지만 어린 시절을 같이 보냈던 친구 분이지요." "아, 그렇군요, 라짐. 그럼 어떻게 이야기라도 좀 나누지 그래요?" 카이사 장군은 이렇게 말하고는 오브라디 교수와 전술에 대하여 이야기 를 나누기 시작했다. 나는 라짐을 따라 나섰다. 그런데 스칼렛이 나를 기 분 나쁜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내가 고향 친구를 만난다 는 것까지 기분 나쁘게 여겨질 만큼 스칼렛은 나를 미워하고 있는 걸까? 어쩌면 나는 평생 여자의 마음은 결코 헤아릴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뜻밖이야. 라이짐하고는 언제 마지막으로 만났어요?" 천막 밖으로 나가자 마자 라짐이 나에게 물었다. 여전히 라이짐을 오빠 라고 부르지는 않는구나. 나는 하잔에서 마지막으로 본 후에 다시 만난 일은 없다고 알려주었다. "그래요. 수르카. 정말 오래간만이군요."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라짐은 너무나도 많은 일을 겪었던 모 양이었다.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는 라짐은 예전에 내가 알고 있었던 새 침Ep기 꼬마하고는 너무나도 거리가 있었다. "예. 정말." "많이 변했어요. 키도 훨씬 자랐고. 나만 했던 것 같은데 어느새 이렇 게 컸네요." 그러고 보니 라짐을 나는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참 자랄 때니까요." 나는 이렇게 말해놓고도 스스로 쑥스러워졌다. 성년식을 지낸 지 얼마 나 되었다고 이런 말을 하다니. "성황청이 하는 일은 이번에 처음 알았나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그렇게 생각을 하고 보니 경어를 쓴다는 것 자체가 쑥스러워졌다. "어떻게 그런 잔인한 짓을...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모르겠 네." 나는 꼭 혼잣말을 하는 사람처럼 이렇게 말했다. 잔혹하게 죽어간 유나 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그려졌다. 그러자 라짐이 바로 내 말을 받았다. "사람이니까.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는 죽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사람뿐이야. 해야 할일을 먼저 하는 사람은 누구나 해야 할 일을 위해서 무엇이든 할 수 있어. 성황청도 마찬가지지. 성황청은 어린아이의 생명을 잔인하게 밟으면서까지 뭔가를 이루고 싶어하는 거야. 나도. 또 라이짐도 크게 다를바 없어." 라짐은 이렇게 말하고는 뭔가 생각에 잠긴 듯한 얼굴이 되었다. 나 역 시 라이짐의 얼굴과 또 아케르의 얼굴과 라스폼의 얼굴과 카이사의 얼굴 이 스쳐지나고 있었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워졌다. 나는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고 또한 믿고 있었다. 하지만 나를 죽이려고 덤벼드는 기사 앞에서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던 것은 정말로 내가 비겁했기 때 문이었을까?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정말로 옳은 일이었던가? 나는 스 스로 이렇게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정보, 실은 내가 카이사 장군에게 제공한 거야. 성황청의 존재 또 한 지금 당장으로서는 부담스럽다고 생각했어, 내 뜻을 위해서는." "어떻게... 알아냈지?" 나는 그저 호기심에서 이렇게 물었다. "실은 라이짐을 통해서였어.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해. 우선 이곳에 온 목적이 뭔지 부터 말해줄래?" "글쎄. 성황청의 타실 지부에 뭔가가 있다는 말을 듣고 조사해 보려 고." "그랬구나..." 라짐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그 때였다. 한 무리의 불꽃이 멀리 서 눈에 뜨이는가 싶더니 훈족의 마을에서 불길이 일었다. 그리고 그 뒤 를 이어서 소름끼치는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멀리서 울려 퍼져왔다. 그 리고 뒤이어 날카로운 금속음이 경고의 뜻으로 울려 퍼지기 시작했고, 천 막안에서 카이사 장군과 오브라디 교수가 튀어나왔다. "뭔가!" 카이사 장군이 소리치자 전령 하나가 카이사 장군에게 달려왔다. "성황청의 공격입니다!" 카이사 장군은 허를 찔렸다는 듯한 얼굴을 지었다. "낭패로군..." 아마 카이사 장군이 보낸 특임부대는 임무 완수에 실패한 모양이었다. 카이사 장군이 생각하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매복 일조와 이조를 즉시 출동시키고 나머지는 방어선에 집중시켜! 어 둠속에서는 가까이 다가갈수록 우리가 더 유리하다!" 카이사 장군은 일단 전령에게 이렇게 지시를 내린 후 라짐을 향해 이렇 게 말했다. "일단 안에 들어가 있어요. 나는 일선에서 진두지휘를 해야 하니까." "무운이 함께 하시기를." 라짐은 카이사 장군에게 이렇게 말했다. 뒤이어 나머지 일행이 천막에 서 나왔다. 불꽃은 산맥에서 훈족의 마을을 향하여 무차별로 쏟아지고 있 었다. 굉음과 아이 울음소리가 뒤섞여 나는 귀를 막아버리고 싶은 심정이 었다. "오브라디 교수님. 이제 어쩌지요?" 마로우가 물었다. "나는 저녀석들과 여기서 싸우겠어. 카이사 장군! 나도 당신들과 함께 싸우겠소!" 허리춤의 단검을 뽑아 들면서 사빈이 이렇게 말했다. "나는 훈족의 마을로 가지. 어떻게든 사람들을 돕고 싶어." 오로스크는 이렇게 말했다. "자네, 만약에 내가 지금 성황청의 타실 지부 안으로 잠입하자고 말한 다면 나를 미쳤다고 말할텐가?" 오브라디 교수가 나에게 물었다. 마로우는 대답을 망설이고 있었고, 스 칼렛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20458/21893 ━━━━━━━━━━━━━━━━━━━━━━━━━━━━━━━━━━━━━━━━ 제 목:[탐그루] 실낙원 281 관련자료:없음 19/19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5-11 21:15 조회:1373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아뇨.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 않을 겁니다. 오히려 지금이라면 잠입해 들어가기가 더 수월할지 모르지요." 라짐이었다. 라짐은 이렇게 오브라디 교수에게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 덕였다. 지금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을 듯 했다. 누군가를 베고 싶지도 않았고, 훈족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지도 않았다. "카이사 장군. 우리가 특임부대의 임무를 잇지요, 그럼." 오브라디 교수가 다급하게 카이사 장군에게 말했다. 카이사 장군은 이 렇게 말했다. "지하에 내려가면 아이들이 잡혀 있는 곳이 있습니다. 그곳을 파괴하면 성구는 작동을 멈춥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정보는 여기까지입니 다. 나머지는... 교수님을 믿겠습니다." 카이사 장군은 이렇게 말하고는 투구끈을 고쳐 매고는 일선을 향해 뛰 기 시작했다. 사빈은 바로 그 뒤를 따라서 단검을 뽑아들며 뛰었고, 오로 스크는 나를 한 번 바라보고는 바로 마을 쪽으로 뛰어갔다. "대단하시군요, 오브라디 교수님. 전, 정말이지, 감탄했습니다." 마로우가 말까지 더듬거리면서 오브라디 교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마로 우는 오브라디 교수의 빠른 판단과 행동이 아마 놀라운 모양이었다. 사실 그건 나도 그랬다. 내가 칼과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 동안 오브라 디 교수는 상황과 역할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진짜 군인은 아니지만 나는 역사학자야. 전술책을 썼다는 거 모 르나?" 오브라디 교수는 이렇게 여유까지 부려가면서 농담을 건냈다. 하지만 나는 그 농담에 미소조차도 지을 수가 없었다. 사방을 둘러보았다. 긴장 된 표정으로 무기를 챙겨들고 분주히 뛰어다니는 병사들, 욕설을 고래고 래 질러 대는 지휘관, 겁먹은 신병, 노련한 척하는 고참병, 그리고 멀리 서 들려오는 고통에 찬 비명소리와 죽어가고 있을 사람들. 나는 그것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무엇인가를 위해서 이런 분위기에 휘말릴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또 어떤 사람은 이런 분위기에서 흥분을 느끼기도 하고 이 흥분을 위해서 칼을 쥔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 는 도저히 이런 분위기에 빠져들 수가 없었다. 나는 그저 두려울 뿐이었 다. 내가 오브라디 교수를 따르고 있는 심정에는 그저 싸움을 피하고자 하는 마음뿐이었다. 죽고싶지 않다는 마음, 도망치고 싶다는 마음. 나는 이런 마음으로 오브라디 교수의 뒤를 따라서 뛰었다. 문득 스칼렛의 얼굴 이 눈에 들어왔다. 스칼렛은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뭔가를 참고 있 는 듯 보이기도 했고, 뭔가 다짐한 듯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스칼렛은 알고 있을까. 내가 지금 이렇게 두려워만 하고 있는 겁쟁이라는 사실을. "저것봐!" "마로우 군. 정말 대단하군. 장관이야." 갑자기 오브라디 교수가 멈추어 섰다. 나는 무슨 일인가 멈추어서서 살 펴보았다. 성구에서 뿜어내는 불꽃이 허공을 비추었을 때, 나는 먼지가 하늘을 날고 있는 것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것은 새Ep였던 것이다. 나는 지면을 바라보았다. 숲을 향해 무작정 돌진해 들어가는 백 년수들과 뮤들의 모습이 그림자처럼 어른거리고 있었다. "훈족도 화나면 무섭군. 저 동물들을 다 부리다니..." "어차피 전쟁이라네, 마로우 군. 여기서 지면 모든 게 끝나는 거야. 전 쟁에는 이등이라는 말이 없다네." 오브라디 교수는 마로우의 혼잣말에 이렇게 덧붙였다. "스타바..." 나는 달려들어가는 뮤때들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성구의 불꽃이 작렬하는 순간, 갈갈이 찢겨 허공으로 떠오르는 뮤때의 모습이 보이고 있 었다. "걱정 마. 쉽게 죽을 거라면 대비스토브레 산맥에서 얼어 죽었을 거 야." 마로우가 나를 안심시켜주려는 듯이 이렇게 말했지만 나는 여전히 불안 한 마음을 가눌 수가 없었다. 오브라디 교수는 겉보기와는 달리 정말 빠르게 열심히 잘도 뛰었다. 가 끔씩 헐떡거리기는 했지만, 정말이지 나이가 들수록 강해진다는 말을 몸 으로 실천이라도 하겠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성황청 기사단의 공격이 갑 자기 뜸해졌다. 나는 불꽃이 발사되던 숲을 바라보았다. 불꽃은 마을쪽이 아니라 가까운 숲으로 향하고 있었다. "카이사, 장군이, 말한, 헉헉, 매복조인, 모양이야." 오브라디 교수가 턱까지 차오른 숨을 겨우겨우 다스리면서 말했다. "그렇습니다. 헉, 헉, 오브라디 교수님. 성구는 아무래도 근거리 공격 에는 약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헉, 헉, 게다가 이런 숲 속이라면 더더욱 이요. 헉, 카이사 장군, 보기보단 대단한 사람이네요." "마로우 군. 내가 보기엔 헉헉, 척 봐도 대단한 사람이었어, 헉헉, 그 냥 보기에도 말이지, 헉헉." 이제 보니 두 사람은 이렇게 쓸데 없는 소리를 하면서 숨을 돌리려는 모양이었다. 야간에 산길을 뛰어간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는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그때였다. 스칼렛이 달리기 시작한 것은. 마치 더 이상 시간 끌지 말라 는 듯이 스칼렛은 재빠르게 발을 놀려서 뛰고 있었다. 오브라디 교수는 숨을 한 번 깊게 들이쉬더니 얼른 스칼렛을 따라서 뛰기 시작했고, 마로 우는 그런 스칼렛이 끔찍한지 인상을 쓰고는 뒤따라 뛰었다. 어느새 우리는 숲 한 가운데로 들어온 모양이었다. 여전히 밤하늘은 빛 나고 있었고, 별빛은 나뭇잎 사이로 비추어지고 있었지만, 도저히 그런 것들이 아름답게 여겨지지 않았다. 여기서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뻔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 여기가 어디쯤인지 좀 보고 가야겠군. 지도가 어디 갔지...?" 억지로 숨을 헐떡이는 것을 참으면서 오브라디 교수가 말했다. 또 쉬고 싶은 모양이었다. 아무리 노익장이라지만 한계가 있는 모양이었다. 오브 라디 교수가 달빛에 지도를 비추어보고 있을 때였다. "어둡지 않아? 불빛이 필요하겠는 걸." 나는 앞을 바라보는 순간 몸이 얼어붙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차가 운 북극의 바다에 빠졌을 때 같은 기분이었다. 내 앞에는 세 명의 성황청 기사가 성구를 겨누고 있었다. 어둠 속에 보이는 성복 입은 기사의 모습 은 마치 마물처럼 보였다. "손에 들고 있는 거, 내려 놔." 기사가 말했고, 마로우는 조심스럽게 기사를 응시하면서 칼을 내려놓았 다. "허리에 찬 것도." 기사의 말에 나는 나미트의 칼을 잡았다. 칼을 잡는 순간, 전율이 손끝 을 타고 머리꼭지까지 올라왔다. 나미트 장군이 머릿속에 대고 직접 말을 하고 있었다. 죽여... 죽여... 나는 화들짝 놀라면서 칼에서 손을 떼었 다. "반항인가? 하긴 그 편이 더 재미있지." 키득거리면서 기사가 말했다. 나는 웃고있는 기사의 얼굴을 보는 순간 완전히 겁에 질려 버렸다. 오줌이라도 싸버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 어. 그렇게 굳어 있으면 재미없는데." 본보기를 보여주겠다는 듯이 기사가 나에게 성구를 겨누었다. 이제 끝 인가. 나는 칼을 집어야 했다. 그리고 방패 마법을 쓰면서 몸을 날려 저 기사를 베어야 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여기서 살아날 방법은 없었다. 하 지만 내 몸은 아무런 반응도 보일 수가 없었다. 그저 두려울 뿐이었다. 두 개의 빛줄기가 눈에 들어온 것은 다음 순간의 일이었다. 나는 환영 이라도 본 사람처럼 멍하니 서서 그 다음 일어나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두 명의 기사들이 각각 목과 가슴을 움켜쥐고 천천히 쓰러졌고, 나머지 한 기사가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수풀에서 검은 그림자 하나가 튀어나와 기사의 목을 베었다. 기사의 목은 그대로 몸통과 분리되어 허공으로 솟았고, 곧 이어 핏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사, 사빈!" 우리 중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것은 마로우였다. 나는 사빈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숨을 헐떡이고 있는 모습이 조금은 지쳐있는 것도 같았지 만, 핏물을 뒤집어쓴 사빈의 모습은 꼭 옛이야기에서나 나올 법한 악마같 은 모습이었다. "어떻게 온건가, 여긴?" "젠장. 오브라디 교수님. 그 카이사라는 친구, 생각보다 쫌생이더라구 요. 끼워줄 수 없다니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아니, 타실의 국왕기사단이 자존심이 높은 건 알겠지만 그렇다고 이 사빈을 무시해?" 사빈은 투덜거리면서 기사의 몸에 박혀있는 단검을 뽑아 허리춤에 꽂았 다. "서두르지요. 시간을 끌수록 더 불리해집니다." 사빈은 이렇게 말하고는 이마에 흐르고 있는 핏물을 팔소매로 쓰윽 한 번 닦아내었다. 사빈은 생각 없는 사람에 허풍쟁이인지 몰라도 역시 강했 다. 나는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것일까? 그저 싸움을 피하고 싶다는 생각 뿐이니 말이다. 그저 스스로가 부끄러워질 뿐이었다. 오브라디 교수도, 마로우도, 스칼렛도, 사빈도, 그리고 마을에서 목숨을 걸고 고분분투하고 있을 오로스크까지, 모두들 자신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 었다. 나는 문득 모스부르거가 떠올랐다. 나는 모스부르거에게 내가 있어야 할 곳이 바로 내가 있는 곳이고, 내 가 하고 있는 일이 내가 해야할 일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것은 열병을 물리치는 마법의 말이 되어주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열병에 걸린 것보 다도 더 좋지 못한 상태인지 몰랐다. 도대체 나는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것일까. 어쩐지 모스부르거를 다시 한 번 만나게 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기인 것 같군." 언덕 아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오브라디 교수가 말했다. 멀리 수 풀 사이로 야전 막사와 임시 축사, 지휘소 건물 같은 성황청의 건물들이 눈에 들어왔고, 그 한 가운데에 성황청 타실 지부가 있었다. 오브라디 교수는 성황청의 타실 지부가 눈에 들어오자 더 이상 속도를 내는 일에 집착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부터는 얼마나 천천히, 소리 없 이 들키지 않고 움직이느냐 하는 것이 관건이 되었다. 그래서 우리 일행 은 오브라디 교수의 말을 따라 기어서 이동하기로 했다. 성황청의 타실 지부는 이 층 짜리 건물이었다. 아타카파 공화국의 와트 슨 대통령으로부터 타실지부가 고대의 신전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막상 본 성황청 타실 지부는 사실 대단하다는 느낌이 먼저 들었다. 고작 이 층짜 리 건물이 어떻게 저렇게 두꺼운 돌로 만들어 질 수 있는 것인지. 나는 매끈하게 다듬어져 있는 성황청 타실지부의 벽면이 달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경탄을 금치 못했다. 고대인들의 건축 기술은 놀라운 데가 있었다. 저렇게 큰 돌을 찾아내서 여기까지 옮기고, 또 돌을 깎아 건물을 만들었을테니 아마도 고대인의 돌 다루는 솜씨는 우리 보다 몇 배 는 월등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마법의 힘이었을지도 모른 다. 사람들은 저것이 다 마칸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지 만. "빌어먹을. 생각보다 훨씬 삼엄한데?" 경비가 허술할 것이라는 오브라디 교수의 예상은 빗나갔다. 남은 잔류 병력들은 몇 겹으로 성황청 타실 지부 건물을 에워싸고 경계근무를 서고 있었다. "이거 어쩌죠?" 스칼렛이 손톱을 물어뜯으면서 오브라디 교수에게 말했다. 말수가 유달 리 적어진 스칼렛 마저 저렇게 초조해 하는 모습은 상황이 좋지 못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해주고 있었다. "카이사 장군의 특임부대도 실패한 일입니다, 오브라디 교수님. 뭔가 우리만의 새로운 대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틀림없이 당하게 될 겁니 다." 마로우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럴 때 불길한 말은 삼가는 것이 전장 에서의 원칙 중 하나였지만, 지금 마로우의 발언은 꼭 필요한 발언이었 다. "우리만의 방법이라. 카이사 장군의 부하들은 결코 쓰지 않았을 방법이 고, 또한 우리만 알고 있는 그런게 있을까...?" 오브라디 교수가 엎드린 채, 턱을 쓰다듬으면서 중얼거렸다. 나는 생각 해 보았다. 우리가 카이사 장군의 부하들과 다른 점이 무엇인지. 또한 카 이사 장군의 부하가 쓰지 않았을 방법이 무엇인지. "저곳이 고대의 유적이라는 데에서부터 시작하는 게 어떨까요?" 내가 말하자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로 쏠렸다. "그래. 우리는 고대 유적을 탐사한 적이 벌써 몇 번 있고, 특임부대 사 람들은 없었어. 그게 차이점이야. 수르카 군. 좋은 지적 해 주었네." "하지만 그때 우리는 그냥 갔던 거고 저런 삼엄한 경비는 있지도 않았 잖아요?" 마로우가 이렇게 덧붙이는 바람에 한 순간 치솟았던 우리의 사기는 금 새 꺾이어 버렸다. 사실 우리가 고대 유적을 탐사했다는 사실은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런 방법은 어떨까요? 예를 들어서 아자닌의 도움을 받는다든지 하는 것은요?" "그래. 우리한테는 아자닌이 있지. 수르카 군. 어서 아자닌을..." 오브라디 교수는 말을 계속 잇지 못했다. 등뒤에서 들려온 귀에 익은 목소리 때문이었다. 우리는 일제히 뒤를 돌아보았다. 우리의 등뒤에는 검 은 엘프가 서 있었다. 뾰족한 귀에 시커먼 얼굴. 검은 엘프가 틀림 없었 다. "걱정마세요, 수르카 님. 저, 아자닌이니까." 검은 엘프가 말했다. 순간 나는 판단에 혼란을 일으키고 말았다. "아자닌?" "예. 수르카 님. 저 아자닌 맞아요."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20459/21893 ━━━━━━━━━━━━━━━━━━━━━━━━━━━━━━━━━━━━━━━━ 제 목:[탐그루] 실낙원 282 관련자료:없음 21/21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5-11 21:15 조회:1269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키득거리면서 검은 엘프가 말했다. 요즘 들어 불쑥 불쑥 아자닌이 제 멋대로 나타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나타날 줄은 정말 생각 도 해 보지 못한 일이었다. "제가 육체를 빌린 이 검은 엘프는 자이스에요. 아시죠? 범버쿠 정글에 서 만났던 바로 그 자이스요." "그래, 그렇군..." 마로우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래. 모든 게 다 이해가 가네, 아자닌. 그런데 말일세, 하나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는데... 왜 자네가 자이스의 몸 안에 들어가 있는거지?" "자이스가 여기에 있었거든요, 오브라디 교수님." 자이스의 몸을 빌린 아자닌은 천천히 몸을 움직여 우리 일행 옆에 엎드 렸다. "흠흠. 그렇다면 자이스는 왜 거기에 있었는가?" "임무였어요. 여기서 저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살피라는 임무요. 수르카 님. 하진 님을 기억 하세요?" 아자닌 (인지 자이스 인지 아직 확실하지는 않았지만)이 나에게 물었 다. "응. 기억해." 기억하다 뿐이겠는가. 용병단에 있었으면서 떠버리 하진을 모른다는 것 은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자이스는 하진 님의 명령으로 이곳에 와 있었습니다. 저곳을 감시하라 는 임무 때문이었지요. 라짐 님이 생각한 대로 카이사 장군에게 정보를 전달해 주었는가를 확인하는 임무였습니다." "라짐?" 나는 라짐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스파일에 있는 마리라는 분이 떠버리새를 이용해서 탐그루를 거쳐 전 달한 정보입니다. 이곳이 성황청 성구가 가지고 있는 힘의 근원이라는 정 보이지요." 아자닌이 말하자 나는 마리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전체적인 상 황을 짐작해 볼 수는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아자닌, 네가 그런 것까지 알 수 있는 거야? 아니, 그 것보다 어떻게 자이스 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거지?" 사빈이 휘둥그래진 눈을 하고서 아자닌에게 물었다. 아자닌은 이런 것 쯤이야, 하는 얼굴을 하고서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제가 자이스에게 부탁했거든요. 자이스의 임무는 만약 이곳을 공격하 는 타실 군이 있으면 도우라는 임무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 영혼을 쉽게 받아들였지요. 사실 검은 엘프는 껍데기 뿐인 육체에 영혼 비슷한 것을 갖고 있는 생물이거든요. 참, 그리고 사빈 님. 걱정마세요. 사람의 육체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으니까요." 아자닌이 웃으면서 말했다. 아마도 아자닌은 사빈의 생각을 읽은 모양 이었다. 그런데 나는 아자닌이 쾌활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아자닌. 너, 어디 문제 있는 거 아니야? 평소와 달라 보여." "육체를 가져 본 게 너무 오랜간만이라서요. 조금 적응이 어려워서 그 래요. 신경 쓰지 마세요. 활동하는데는 지장이 없으니까요." 그러고 보니 자이스의 몸은 조금씩 경련을 일으키기도 했고, 팔다리가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는 듯 하기도 했다. "자이스는 보았습니다. 조금 전에 카이사 장군의 특임부대가 어떻게 잠 입하려고 했고, 또 어떻게 당했는지요. 지금 성황청의 기사들은 대단히 삼엄한 경계를 취하고 있는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성황 청은 마법으로 보호되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마법?" 마로우가 물었다. "예. 침입자가 나타나면 경고해주는 마법이 지금 성황청 타실 지부를 감싸고 있습니다. 그 마법은 일종의 성구에서 나오는 것 같습니다." "갈수록 태산이라더니. 이건 완전히 첩첩산중이로구만. 저 기사들의 눈 을 피하는 것도 거의 불가능한 일인데 거기다가 마법이라니, 원." "잠깐, 아자닌. 그건 어떻게 알았지?" "카이사 장군의 부하들이 그 마법에 걸리는 것을 자이스가 보았거든요. 육체를 소유하고 있는 동안, 저는 자이스의 기억도 공유한답니다." "그걸 물은 게 아니야. 그렇다면 피해 갈 수 있는 방법도 아느냐고." 내가 아자닌에게 물었다. 모두의 시선이 아자닌에게 모아졌다. 나는 마 른침을 꿀꺽 삼켰고 스칼렛은 다시 손톱을 물어뜯었다. 하지만 기대에도 불구하고 아자닌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피해 간다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럼 이제 어쩌지?" "어쩌긴. 빨리 돌아가서 녀석들을 한 놈이라도 더 죽여야지." 사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면서 말했다. "하지만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마법을 무력화시킬 수 있거든요." 아자닌이 말했다. 고대의 유적들이 보통 그러하듯, 성황청 타실 지부의 내부도 매끈한 벽 면으로 되어 있었다. 다만 벽면에 가득 써있어야 할 고대 문자 위에 덧씌 워진 성황청의 문양들은 오싹한 느낌마저 주고 있었다. "마법에는 마법이라. 이거 너무 간단한 것 같은데?" 사빈이 뒷짐을 지고 걸음을 옮기면서 중얼거렸다. 사빈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이렇게 간단하게 들어올 수 있으리라고 상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 었을 테니까. "하지만 아자닌 말고는 쓸 수 없는 마법이었습니다, 사빈 님." 스칼렛이 말했다. "그건 순전히 아자닌이 정령이기 때문에 가능한 마법이었지요. 마법구 를 이해하고 그 안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정령뿐이니까요." 스칼렛이 말했다. "그렇지. 자이스의 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도 아자닌이 정령이 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테니까 말일세. 그러니까 자이스의 마음을 이해하 고 자이스에게 부탁한다는 건 아무래도 정령이니까 되는 일일 테지. 물론 나야 그런 사실을 알고는 있었네만 이렇게 눈으로 보는 건 처음일세." 오브라디 교수가 멋적다는 듯이 헛기침을 덧붙이면서 말했다. 성황청을 둘러싸고 있던 마법은 성구에서 발현되는 것이었다. 아자닌은 성구를 읽어내고 성구의 작동을 멈출 수 있었다. 사실 이런 사실들은 자 이스가 이곳 성황청 타실지부를 계속해서 관찰하고 정보를 수집한 덕분에 알게 된 것이었다. 자이스가 없었다면 아마 이곳에 침투하는 일은 불가능 했으리라. 나는 카이사 장군의 특임부대가 마법 영역에 걸려들었다는 사실과, 이 어진 성황청 기사단의 공격으로 전멸했다는 사실을 들어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죽음은 전혀 현실처럼 느껴지질 않았다. 카이사 장군의 특 임부대는 단순한 희생양이었던 것일까. 사람을 죽게 만들고 그 덕에 이렇 게 침투에 성공하고 있으면서도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이 느껴지지 않고 있다니. 나는 나 자신이 도대체 무슨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 다. 결국 나도 라짐이 말했던 것처럼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는 누가 죽어 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던 것일까. 나는 벽면을 바라보았다. 매끈한 벽면에는 친근한 얼굴을 하고 있는 신 이나 정령, 요정의 그림 같은 것은 도무지 찾아볼 수가 없었고, 난생 처 음 보는 희한한 문양과 무늬, 그리고 오싹하게 느껴지는 눈동자만이 우리 일행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동자로군." 오브라디 교수가 말했다. "뭘 상징하는 걸까요?" "마로우 군. 내가 보기에 저것은 마칸의 일족을 상징하는 것 같네." 오브라디 교수가 눈동자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마칸의 일족을 상징한다 는 오브라디 교수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성황청의 기사들이 숭상하는 문 양들은 어지럽게 흩어져 눈동자를 가리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발자국 소리가 복도를 타고서 들려왔다. 우리는 얼른 벽면에 몸을 붙였 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발자국 소리가 사라지자 오브라디 교수가 말 했다. "이제 두 패로 갈라져야 겠네. 하나는 지하로 내려가서 아타카파 공화 국의 와트슨 대통령이 말해준 그 용에 대한 정보를 얻는 일을 하고, 나머 지 하나는 이 층으로 올라가서 성황청 성구가 가지고 있는 힘의 근원을 파괴하는 일을 하지. 그 편이 들킬 염려도 적고, 보다 확실하게 일을 추 진해 나갈 수 있을 것 같네만." 오브라디 교수의 말에 금새 편은 둘로 갈라졌다. 오브라디 교수와 마로 우는 지하로 가기로 했고 사빈과 아자닌은 이 층으로 올라가겠다고 말했 다. 아자닌이 나와 함께 가지 않고 사빈과 함께 이 층으로 가기로 한 것 은 의외였다. "자이스의 몸을 빌렸으니까요. 자이스가 원하는 것을 해야겠지요." 아자닌은 이렇게 말했다. 어디로 갈지 결정을 늦게 내린 것은 나와 스 칼렛이었다. "저는 지하로 가겠습니다." 내가 말했다. 어찌되었건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용의 정체를 밝혀 내고 마칸의 강림을 막는 일이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내 가 행했던 비겁한 행동들을 정당화 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만약 이제 와서 내가 이 층으로 올라간다고 한다면 꼴이 우스워 질 것은 분명한 사 실이었다. 사람을 희생시키면서 까지 내가 용의 비밀을 찾고 있다고, 마 칸의 강림을 막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적어도 나는 나 스 스로 그렇게 믿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럼 스칼렛 양은 사빈과 함께 이 층으로 가게. 일이 끝나면 바로 이 곳에서 만나기로 하지." 오브라디 교수가 말했고, 우리는 금 새 둘로 나뉘어 각각 지하와 이 층 으로 향했다. 스칼렛이 나를 돌아보는 것 같기는 했다. 하지만 너무 잠시 여서 나는 그게 잘못 본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지하로 내려가는 길은 마물의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것 같이 불쾌한 경 험이었다. 사방은 희미한 연금술사의 등 뿐이어서 어두웠고, 벽면에 그려 진 괴상한 문양들은 붉은 빛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나는 될 수 있으면 앞에만 시선을 두려고 노력했다. 붉은 벽면을 바라보는 일은 아무래도 내 키지 않는 일이었다. 계단을 따라 점점 더 밑으로 내려가면서, 나는 눈앞에 놓여 있는 어둠 이 나를 삼키기 위해 다가오는 느낌을 받았다. 이제 우리가 그토록 찾았 던, 아니 내가 이렇게 찾고 있는, 그래서 사람이 죽어가고 있는데도 비겁 하게 그것들을 외면하면서 찾으려고 했던 비밀의 문이 눈앞에 놓여있는 것이다. "여기야." 오브라디 교수가 말했다. 오브라디 교수는 계단의 끝에서 만난 문을 손 바닥으로 만지면서 중얼거렸다. 오브라디 교수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긴 장이 되는 모양이었다. 문을 쓰다듬는 손길이 떨리고 있었다. 마로우는 입술이 마르는지 혓바닥으로 연신 입술을 적시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 다. 그리고 잠시 동안 침묵이 있었다. "이거 어떻게 여는 거지?" 오브라디 교수가 몇 번 문을 밀어 본 다음 말했다. 도무지 문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밀어야 열리는 문은 아닌 듯 했고 문에는 손잡이도 달려 있지 않았던 것이다. 한참 동안 우리는 문을 밀고 당기고 해 보다가 결국에는 포기하고 말았다. 시간을 너무 오랫동안 끌어서도 안 될 상황이었고, 마로우가 좋은 의견을 내었기 때문이었다. "아자닌이라면 어떻게 열 수 있지 않을까요?" 오브라디 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문은 틀림없이 마법으로 열 수 있는 문일 거야. 유적 탐사를 하면 서 이런 문을 본 적이 있어. 정령의 힘으로 이런 문을 열곤 했지... 아주 오래전의 일이지만 말일세. 좋아. 일단은 포기하자고." 오브라디 교수는 이렇게 말하고는 서둘러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나 와 마로우도 재빨리 그 뒤를 따랐다. 오브라디 교수는 두 계단 씩 빠른 걸음으로 올라가다가 결국 중간에 한 번 쉬고 말았다. 아무리 마음이 앞 선다고는 해도 결국 나이는 속이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간신히 간신히 목구멍까지 차 오른 숨을 달래면서 계단 끝까지 다시 오 른 우리 일행은 이 층으로 올라간 사빈 일행과 만나기로 한 지점으로 향 했다. 계단을 떠날 때, 나는 잠시 뒤를 돌아보았는데 지하의 어둠이 마치 나를 비웃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도대체 그곳에는 무엇이 있을까. 과 연 저 어둠의 저편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 내가 선택하지 않은 것들에 대 한 보상이 되어 줄 수 있을까. 사빈 일행을 만나러 가는 길 내내 나는 이 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우리가 만나기로 했던 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직도 이 층에 있는 것 이 분명했다. "올라가야 할까요, 오브라디 교수님?" "그래야 할 것 같군, 마로우 군. 그곳에 가면 성구의 작동을 멈출 수 있다고는 했지만 어쩌면 우리처럼 문 앞에서 어쩔 줄 몰라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오브라디 교수는 이렇게 말하고는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고, 나와 마 로우는 오브라디 교수의 뒤를 따랐다. "어찌되었건 무슨 일이 생긴 것만은 틀림이 없는 것 같군." "나쁜 일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요." 나는 이렇게 오브라디 교수에게 말했다. 아니, 사실 이 말은 나 자신에 게 한 말일런지도 몰랐다. 나쁜 일이라고 한다면, 상상도 하기 싫긴 하지 만, 죽어있는 사빈과 스칼렛을 발견하게 될 지도 모르는 일이고, 어쩌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돌아오는 사빈 일행과 마주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 었다. "수르카 군. 여기로 출발할 때부터 느끼는 거네만, 자네 너무 긴장하고 있는 것 같은데. 무슨 문제라도 있는가?" 오브라디 교수가 느긋한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물었다. 나는 아무 대답 도 하지 않았다. "그래, 수르카. 얼굴에 쓰여 있어. 나는 기분이 나빠. 나는 다 귀찮아. 이렇게 얼굴에 써있다구" 마로우가 내 얼굴을 빤히 처다보면서 말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마로우의 눈을 피했는데, 결과적으로 내 행동은 마로우의 말이 맞다 는 것을 입증시켜 준 셈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수르카 군. 죽는 게 두려운가?"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20460/21893 ━━━━━━━━━━━━━━━━━━━━━━━━━━━━━━━━━━━━━━━━ 제 목:[탐그루] 실낙원 283 관련자료:없음 17/17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5-11 21:16 조회:1362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오르라디 교수가 멈추어 서더니 이렇게 소근거리듯 나에게 물었다. 이 번에는 쉬기 위해 멈추어 선 것 같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나를 비웃는 듯 한 말투도 아니었다. 나는 그렇다는 의미로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사람은 누구나 죽네. 그래서 자손을 남기려고도 하고 뭔가 후대에 남 길 만한 일을 하려고 발버둥을 치기도 하지. 하지만 그런 일에 집착한다 는 것은 사람이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에 집착한 나머지 중요한 걸 잊고서 하는 행동이라네." 오브라디 교수는 내 양어깨를 꼭 잡고서 말했다. "중요한 건 살아 있다는 거야. 그리고 살아있는 동안 자기가 하고자 하 는 일을 하면 그만인 거고. 그게 가장 중요하다네. 나머지는 거기에 뒤따 라붙는 후식 같은 거라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네. 그걸 잊으면 안돼. 사람은 살아있는 시간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이렇게 무언가를 하면서 사는 것이지. 이것이 반드시 무엇인가 남기기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닐지라 도 상관없어. 그저 사는 거네. 지금, 이렇게, 우리는 아직 살아 있잖아." 아마도 오브라디 교수는 나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서 이런 말을 했으리 라. 하지만 내가 느낀 것은 정말 하고자 하는 일을 해야겠다는 마음이 아 니라 마법의 말이었다. 오브라디 교수의 말에는 마법의 말이 섞여 있었 다. 나는 족장이 했던 말을 들으면서 마법의 말을 느꼈던 것을 떠올렸다. 족장이 했던 마법의 말은 신이 새로운 생명을 얻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버렸다는 이야기를 할 때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오브라디 교수가 지금 하고 있는 말과는 정 반대의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둘 다 내 마음에는 마법의 말로 느껴질 수가 있을까? 나는 골치가 다 아 플 지경이었다. "교수님." 마로우가 속삭였다. 시간을 지체할 수 없다는 의미의 말인 것 같았다. 오브라디 교수는 대답대신 발걸음을 바쁘게 움직였고, 나 또한 어느새 오 브라디 교수의 걸음걸이에 맞추어 발을 옮겼다. 이 층에 올랐을 때, 우리는 역시 괴상한 문양이 그려진 벽면과 그 벽면 에 그려진 그림처럼 붙어있는 매끈한 문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고대인의 문명에 감탄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문을 부수고서라도 들어가야만 하는 것이다. "어디부터 찾아야 할까요, 오브라디 교수님." 마로우가 묻자 오브라디 교수는 조용히 하라는 뜻으로 입술에 손을 가 져간 다음 왼쪽에 붙어있는 문 하단을 가리켰다. 나는 문 밑을 바라보았 다. 문 밑의 좁은 틈으로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고, 그림자가 움직이는 것 이 보였다. 우리는 문 양 옆으로 붙었다. 다행히도 문에는 손잡이가 붙어 있었고, 손잡이를 돌리고 밀면 열리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오브라디 교 수는 조심스럽게 손잡이에 손을 올렸고, 마로우와 나에게 공격할 준비를 하라는 시늉을 했다. 마로우는 칼을 뽑아들었다. 오브라디 교수는 고개를 잠시 숙였다가 속으로 하나, 둘, 셋을 외우더 니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었다. 마로우는 칼을 양손으로 잡고 방안으로 뛰쳐 들어갔고, 나는 그 뒤를 따랐다. 비록 칼은 빼 들지 않았지만 칼에 손을 댄 채. 방에는 아자닌과 사빈, 그리고 스칼렛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그 리고 그 앞에는 낯익은 얼굴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랫만이야, 수르카. 또 만났네. 반가워." 마로우는 라스폼을 벨 수 없었다. 단 칼에 베기에는 거리가 떨어져 있 는 데다가 라스폼의 손에는 사빈의 머리를 겨누고 있는 성구가 들려 있었 기 때문이었다. "아, 아. 위험하잖아. 그건 내려놔. 아주 천천히." 라스폼이 마로우를 바라보면서 웃는 낯으로 말했다. 마로우는 분한 듯 했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한 얼굴로 칼을 내려놓았다. "누군가 올 거라는 예감이 있었어. 이만하면 나도 권능이 있는 편이라 고 생각하는데. 호호홋." 라스폼이 성구를 들지 않은 왼손으로 입을 가리고서 웃었다. 나는 라스 폼을 바라보았다. 라스폼은 조금도 변하지 않은 것 같았다. 하잔의 까마 귀 들판에서 마지막으로 보았을때의 모습 그대로, 음산하면서도 가까히 하기 싫은 분위기였다. "수르카. 너한테는 큰 빚이 있지." 라스폼이 말했다. 나는 천천히 방안을 살펴보았다. 방에는 거대한 유리 병들이 수도 없이 벽을 타고 놓여있었고, 병 안에는 액체가 가득 차 있었 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병 안에는 아이들이 벌거벗은 채로 잠겨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것을 바라보는 순간 충격 때문에 멍한 상태가 되고 말았다. 라스폼은 말을 계속했지만 내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 다. "하잔에서 나를 크게 도와주었잖아, 수르카? 기억하지? 덕분에 나는 좌 천당했고 내가 있던 교구에서도 받아주지 않아서 결국 이 외진 곳까지 오 게 되었어. 내 나이에, 내 실력에, 내 미모에 고작 이런 외진 곳이란 말 이야? 다 너 때문이야, 수르카." 라스폼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웃음은 싸늘한 비웃음으로 변했다. 라스 폼의 성구가 천천히 나에게 향해오자,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성구를 막아보려고 했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만약 라스폼이 성구를 작동시킨다 면 내 팔 하나쯤은 간단하게 날아가 버릴 것이었다. 나는 차마 라스폼이 들고 있는 성구를 바라볼 수가 없었다. "한 동안은 너를 죽여버리고 싶었지. 아니, 죽이지 않고 오랫동안 고통 을 줄 수 있는 방법도 생각해 보았어. 팔을 하나 자를까? 아니야. 그건 너무 간단해. 눈을 뽑아버리는 건 어떨까? 흠. 이 편이 좋겠지. 너도 고 통스럽고 나도 즐겁고. 어때? 아주 좋은 결말이잖아?" 나는 사빈을 바라보았다. 사빈은 귓불 끝까지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는 라스폼을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제 아무리 사빈이라고 해도 도 저히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있는 법이었다. 사빈의 그런 모습을 보자 나는 죽음에의 공포가 더 한 층 커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살고 싶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숨이 가빠졌고 심장이 당 장이라도 터져 버릴 것 같이 뛰었다. 병 안에 있는 아이들이 입을 뻐끔거 리고 있었다. 하지만 입에서 나오는 것은 한 덩어리의 물뿐이었다. 눈을 감고 있는 아이의 모습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나는 거울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아이들에게서 시선을 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너를 잡을 경우, 털끝하나 다치지 말고 남겨두라는 지시가 있었거든. 그래서 이거 유감이지만 그런 방법을 쓸 수는 없네. 호 호홋. 하지만 너무 실망하지는 마. 네 친구들이 그런 꼴이 되는 걸 보면 아주 기쁠 테니까. 네 눈을 빼는 것 보다 수르카, 네가 네 눈을 뽑아버리 고 싶도록 만드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안 그래?" 라스폼은 이렇게 말하면서 마로우에게 성구를 겨누었다. 마로우는 태연 한 척 하려고 했지만 움찔거리는 어깨와 떨리는 다리까지 숨길 수는 없었 다. 나는 말려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도저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고, 나는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내 안에서 들려오는 작은 속삭임을 들을 수 있었다. 그것은 안도의 속삭임이 었다. 나는 이제 살아남을 수 있다는, 그리고 죽지 않을 것이라는 속삭임 이었다. 하지만 그런 속삭임은 나에게 조금도 위안이 되어주지 못하고 있 었다. 오히려 나는 차라리 죽는 편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외였 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고 싶다는 나의 마음이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라스폼. 자네, 어쩌다가 이렇게 변했는가?" 오브라디 교수였다. 오브라디 교수가 라스폼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주 잠시, 라스폼의 얼굴에 동요의 빛이 이는 듯 했다. "오브...라디?" "그래. 나 오브라디 교수일세. 나는 자네를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네. 사비오의 수석 제자였지. 어쩌면 저기 앉아있는 아자닌이 자네의 소유가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으니까 말일세." 오브라디 교수가 말하자 라스폼이 들고 있는 성구가 떨리기 시작했다. 나는 작은 희망이 하나 생기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자네는 사비오의 뜻을 저버리고 결국 성황청의 길을 택했지. 흩어져 있는 마법의 말을 모으는 일을 자네의 개인적인 욕망에 바친 거 야, 결국. 하지만 나는 알고 있네. 그게 자네의 본심이 아니었다는 것을. 자네는 좋은 사람이었어. 기억하는가? 자네 동료가 절벽에 매달렸을 때, 자네는..." "그만!" 라스폼이 외치는 순간 성구에서 흰빛이 뿜어져 나왔다. 나는 엉겁결에 몸을 숙였고 잠시 동안 숨소리마저 죽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몸 을 일으켜 세워보았다. 쓰러져 있는 사람은 마로우 하나 뿐이었다. "마로우!" 사빈이 소리쳤지만 라스폼의 성구가 머리에 겨누어지자 사빈은 더 이상 움직이지는 못했다. 사빈의 얼굴에는 오직 분노만이 떠올라 있었다. 나는 마로우를 바라보았다. 마로우는 고통에 신음하면서 몸을 뒹굴고 있었다. 처음에는 마로우 옆에 떨어져 있는 것이 칼인줄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마로우의 오른 팔이었다. 잘려져 나간 팔 끝에서는 붉은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라스폼. 너, 넌..." 사빈이 라스폼을 노려보면서 말했다. 사빈의 말은 더듬거리고 있었고, 눈은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듯이 충혈되어 있었다. "입 닥쳐. 머리통을 날려버리기 전에." 라스폼은 낮게, 하지만 강경하게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사빈은 눈을 거두지 않았다. 라스폼은 성구를 휘둘러 사빈의 머리를 내리 찍었다. 둔 탁한 소리와 함께 사빈은 힘없이 앞으로 쓰러졌다. "오브라디. 세상은 바뀌고 있어. 그걸 모르겠나?" 라스폼이 말했다. 라스폼의 얼굴에는 주름살이 하나 둘 늘어가고 있었 다. "이제 마칸의 강림이 임박해 왔어. 하지만 정치가들은 권력놀음에 여념 이 없고, 생각이 있다는 녀석들은 이 틈을 타서 세상을 뒤집을 궁리만 하 고 있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고 말 이야. 오브라디. 사람들은 혼란의 세상에서 살아왔어. 그건 아주 오래 전 부터의 일이야. 아무런 믿음도 없이, 그저 생명만을 부지하면서 살고 있 는 거지. 사람이 그렇게 살아서야 되겠는가?" 라스폼의 모습은 이제 노인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나는 라스폼의 저 모 습을 본 적이 있었다. 그때 느꼈던 공포와 두려움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성황께서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주고자 하는 게 바로 그거야. 세상은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하며, 그것이 바로 성황청의 교리라는 사실을 말이 야. 마칸의 강림이 그것을 알릴 수 있는 기회지. 이제 사람들은 알게 될 거라네. 자신이 얼마나 불확실한 세상에 던져져 있는가 하는 것을. 저기 쓰러진 친구를 봐. 아마 자신이 왜 저런 꼴이 되었는가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을 거야. 하지만 믿음을 가진다면 다르지. 믿음 없이 세상을 살아간 다는 것은 벌레나 다를 바가 없어!" 라스폼은 이제 거의 자신의 목소리에 도취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 공 허한 울림을 듣는 순간, 내 마음에서 살아야겠다는 욕망은 이제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라스폼." 나는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라스폼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나는 라스폼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차라리 날 죽여. 그걸 원하고 있잖아, 지금?" 내 말이 끝나자 라스폼은 갑자기 발작적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오싹한 기운이 내 등에 내려앉는 것이 느껴졌다. "아직도 이해 못하겠어, 수르카? 넌 우리한테 필요한 존재야. 내가 벌 레같이 살아가는 존재였다면, 네 얼굴은 거기 어깨 위에 달려 있을 수 없 었을 거야. 하지만 나에게는 믿음이 있지. 성황님의 은총으로 가득한 세 상에 대한 믿음이야. 그래서 네가 필요한 거야. 네가 마소드의 검에 반응 하는 순간 나는 알 수 있었어. 네가 그 칼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마칸의 강림을 막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중요한 것은 네가 마칸의 강 림을 막아서는 안된다는 거야. 성황청이 마칸의 강림을 막아야 한다는 거 지." "라스폼. 그게 그렇게는 중요한 거야? 믿음이라는 게? 그게 사람 목숨 보다 중요해? 저기 갇혀있는 아이들의 미래보다 중요해?" "수르카!" 라스폼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이제 그만. 입 열지 마. 또다시 너한테 마법으로 당할 수는 없지. 입 만 열어봐. 저기 앉아있는 여자아이의 가슴에 구멍을 뚫어 줄 테니까."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20495/21893 ━━━━━━━━━━━━━━━━━━━━━━━━━━━━━━━━━━━━━━━━ 제 목:[탐그루] 실낙원 284 관련자료:없음 20/20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5-12 21:43 조회:1342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라스폼은 야비한 웃음을 흘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라스폼은 스칼렛을 바라보았고 스칼렛은 천천히 라스폼에게 시선을 맞추었다. 당장이라도 라 스폼의 성구가 스칼렛을 향해 빛을 뿜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나는 더 이 상 어쩔 수가 없었다. 이제 모두 끝인가. "라스폼. 당신, 죽지않는* 인간의* 가슴에* 드리워진* 피의* 안개에* 대해서* 아나요*" 스칼렛이 라스폼에게 말했다. 순간 스칼렛의 모습이 희미해지는가 싶더 니 검붉은 빛의 안개가 스칼렛의 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아니, 그것은 스 칼렛의 모습이 연기로 변하는 것과도 같았다. 라스폼은 일순간 당황했지 만 곧 이어서 연기가 되고 있는 스칼렛에게 성구를 뿜어대었다. 하지만 성구의 빛은 스칼렛의 몸을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뭐, 뭐야, 이건!" 연기는 순식간에 라스폼의 몸을 감쌌고, 성구가 땅에 떨어지는 순간 사 빈은 자리에서 일어나 라스폼을 잡아 채 쓰러뜨렸다. 사빈의 손에는 단검 이 들려 있었다. "잠깐! 그만 둬, 사빈! 알아내야 할 게 있어, 아직은!" 오브라디 교수가 다급하게 외쳤지만 나는 오브라디 교수가 왜 그런 말 을 했는지, 아니,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도 알아차리지 못할 지경이었다. 사빈의 팔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지만 라스폼을 찌르지는 않았다. 연기는 서서히 걷히더니 하나의 덩어리로 뭉쳐지기 시작했고, 그것은 이내 사람의 형상을 갖추어가고 있었다. 나는 스칼렛을 바라보았다. 스칼 렛의 이 놀라운 마법이 어떤 마법인지 물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칼렛 양. 자이벌 가문이 예전같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소만, 이 건 뜻밖이로군." 검붉은 연기는 곧 사람의 형상이 되었지만, 그 자리에 스칼렛은 없었 다. 스칼렛이 나타날거라고 생각했던 자리에는 사람과 비슷했지만 코가 있어야 할 곳에는 두 개의 구멍뿐이고 피부는 라스폼의 그것처럼 주름이 져 있는데다가 번들거리기까지 하는, 예전에 서커스 들판에서 보았던 리 치와 같은 생명체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개의 눈동자는 붉은 빛으 로 빛나고 있었다. 밤을 밝히는 마법을 썼을 때 보았던 스칼렛의 눈동자 였다. "왜 그렇게 놀라세요, 수르카 님?" 스칼렛은 목소리마저도 변해있었다. 스칼렛의 목소리는 꼭 구멍을 통과 하는 바람처럼 억양도 힘도 없는 소리였다. 나는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 뭇거렸다. "알고 있었잖아요. 제가 피를 마시는 것도 보았잖아요." 나는 스칼렛이 이렇게 말했을 때에야 대비스토브레 산맥의 눈밭에서 보 았던 일의 전모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날 죽일 건가요, 오브라디 교수님? 당신들이 우리에게 늘 그래왔던 것 처럼." 스칼렛이 오브라디 교수에게 물었다. 오브라디 교수는 말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 생명을 가지고 싶었어요. 나도 누군가처럼 사랑을 하고 아이를 낳 고 싶었어요." 스칼렛은 힘없이 이렇게 말했다. 나는 고마 족장이 들려주었던 전설이 떠올랐다. 전설 속의 신이 원했던 것은 고독한 영원이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사는 유한한 삶이었다. "나도 늙었어. 눈치채질 못했으니. 이제 날 죽일 건가?" 라스폼이 사빈을 바라보면서 물었다. 사빈은 뭔가를 꾹 참고 있는 목소 리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장은 아니야." 사빈은 길게 말을 잇지 못했다. 사빈이 억누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떨리고 있는 팔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었다. "먼저 여기 갇혀 있는 아이들을 풀어 줄 방법을 찾아야겠지, 라스폼. 그리고 지하실의 문을 여는 방법도 알아야겠어. 그리고 가능하다면 마로 우를 치료하는 방법도." 오브라디 교수가 말하자 라스폼이 대답했다. "저 아이들의 생명은 이미 성황님의 것이 되었어. 결코 돌아오지 못해. 저렇게 살던가, 아니면 죽던가, 둘 중에 하나지. 그리고 지하실의 문이야 아자닌의 능력이면 열 수 있겠지. 그래. 거기에 마칸을 봉인할 수 있는 방법이 적혀있어.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야, 이제 와서? 마칸을 수르카 가 봉인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게 있을까? 그것은 성황청이 막았을 때에만 의미가 있는 일이야. 그리고 설혹 성황청이 봉인하지 못한다고 해도 그건 성황님께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해. 또다른 마칸과 또다른 봉인은 얼마든 지 있으니까. 아니, 없다고 해도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어!" 라스폼은 거의 소리치듯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사빈이 팔로 라스폼의 목을 누르자 더 이상 말을 잇지는 못하였다. 스칼렛은 마로우에게 다가갔다. 마로우는 고통보다 겁에 질린 얼굴로 스칼렛에게서 피하려고 했지만 스칼렛의 손이 먼저 마로우의 얼굴에 닿았 다. 스칼렛은 마로우의 눈을 가리고는 떨어져 나간 팔을 원래 있던 자리 에 대었다. "피는* 생명이니* 피를* 소중히* 하라*" 스칼렛이 천천히 마법의 말을 외웠고, 마로우의 팔에서 흘러나오던 피 가 멈추었다. 스칼렛은 팔소매를 뜯어내어 마로우의 팔에 감아주었다. "몇 달 동안 움직이지는 못하겠지만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을 거예요." 나는 스칼렛이 말하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 보았다. 전설 속의 신이 영 원히 살기를 포기했던 이유가 먼저 떠올랐다. "마늘을 찾으려고 했던 것도 그 이유 때문이었어요, 수르카 님. 우리 일족에게 마늘은 죽음을 의미한다고 배웠어요. 하지만 전설을 듣게 되자 어쩌면 마늘은 생명을 의미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렇게 되면 저도 보통의 인간처럼 생명을 가지게 되지 않을까 생각했던 거지 요." 영원한 생명이라는 말은 것은 결국 생명이 없다는 말과 같은 말이었다. 그리고 혼자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죽은 것과 다를 바 없는 말이었다. 내 가 살고 싶다고 느꼈던 것도 그저 살고 싶다는 욕망이 아니었다. 나는 마 로우가 공격당하게 되자 살고싶다는 마음이 사라져버린 이유를 알 수 있 었다. "그저 소박한 생각이었을 뿐이에요. 라스폼이 말했던 것처럼 벌레같은 소망이었지요." 스칼렛의 목소리에는 억양이 없었지만 나는 그 목소리가 자조적인 음성 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스칼렛." 나는 입을 열었다. "모두의 생명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물론 그 말도 훌륭한 말이죠. 많은 사람들이 그 말을 믿고 따르고 있으니 까요." 나는 용병단 시절, 아케르가 했던 말들을 떠올려 보았다. 대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라는 아케르의 말을. 하지만 지금 내 생각으로 아케르의 생각 은 라스폼의 생각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었다. 뜨거운 것이 가슴에서 치 솟아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스칼렛의 얼굴에 손을 가져갔다. 스칼 렛은 내 손을 피하려고 했지만 나는 다시 한 번 스칼렛의 얼굴을 두 손으 로 어루만졌다. tm칼렛의 얼굴은 점액으로 미끈거렸다. "하지만 스칼렛. 모두의* 생명이* 소중한* 것과* 마찬가지로* 스칼렛의 * 생명* 또한* 소중해요* 살아요* 스칼렛* 살아* 있는* 동안은* 모두* 함 께* 살아요*" 내가 말하는 순간, 벽면에 세워져있던 유리병들이 요란한 소음과 함께 일제히 터져내리기 시작했다. 병 안에 채워져 있던 물은 삽시간에 흩어져 바닥에 뿌려졌다. "수르카 님..." 스칼렛은 퀭한 눈을 하고서 나를 바라보았다. 붉은 눈동자의 저편에 나 는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마물의 마음도 아니고 굳이 사람 의 마음이라 할 것도 없는, 바로 스칼렛의 마음이었다. 병에서 나온 벌거벗은 아이들은 쿨럭거리면서 물을 토해내고 있었다. 아직은 기력을 되찾지 못했는지 다리가 풀려있었지만, 나쁜 상태는 아닌 것 같았다. "이, 이건 말도 안돼! 성황님의 권위가! 성황청의 마력이!" 라스폼이 발악을 하는 악귀처럼 소리쳤지만 현실은 현실이었다. "지하실의 문은 어떻게 열지?" 병에서 흘러나온 물에 젖어 있는 라스폼에게 사빈이 물었다. 라스폼은 버둥거렸지만 사빈은 억센 팔로 라스폼을 놓아주지 않았다. "마, 말했잖아. 아자닌의 힘으로 열 수 있을 거라고! 그 이상은 나도 몰라!" 라스폼은 여전히 현실을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투로 말하고 있었다. "...날 죽일 건가?" 사빈에게 라스폼이 물었다. 순간 모두의 눈길이 사빈에게 모아졌다. 사 빈은 단도를 높게 쳐들었다. 사빈의 얼굴에는 거부감이 드는 미소가 담겨 있었다. 나는 지금 사빈이 짓고 있는 것과 비슷한 미소를 본 적이 있었 다. 오우거가 출몰하는 마을에서 성황청의 사제를 죽이기 전, 가투신은 저런 표정을 지었다. 사빈의 단검은 라스폼의 볼에 닿았다. 그리고 꼭 멈추는 것처럼 힘을 준 다음, 사빈의 칼은 천천히 라스폼의 턱선을 타고 목까지 내려갔다. 라 스폼은 고통을 참기 위해 주먹을 꼭 쥐고 발을 굴렀지만 결국 헉, 하는 한숨 섞인 비명을 내질렀다. 라스폼의 얼굴에서 흘러내린 피가 바닥에 고 인 물에 섞여 흘렀다. "유나를 기억해, 매일 거울을 볼 때마다." 하지만 사빈은 거기서 행동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라스폼은 볼 을 움켜잡고 조금씩 몸을 일으켜 보려고 하기는 했지만 당장 얼굴에서 피 가 흐르다 보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자, 잠깐! 오, 오지마!" 라스폼이 필사적으로 외쳤다. 스칼렛이 라스폼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물을 튀기지 않도록 조심해서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스칼렛의 모습은 지 금 어떤 형상을 취하고 있다 해도 어린 인간 소녀의 모습 그대로였다. 스칼렛은 스칼렛을 피하려고 몸부림치는 라스폼의 어깨에 손을 얹은 다 음 천천히 마법의 말을 외웠다. "피는* 생명이니* 피를* 소중히* 하라*" 그리고 스칼렛은 남은 한 쪽 팔 소매를 뜯어 라스폼의 얼굴에 대어 주 었다. 라스폼은 뭔가에 홀린 듯한 얼굴을 하고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 다. "어서 나가게. 자네가 여기 더 있어야 할 이유는 없어." 오브라디 교수가 라스폼에게 말했다. 라스폼은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 이 믿기지 않는지 거의 엉금엉금 기다시피 하면서 문 밖으로 향했다. 사 빈은 라스폼이 나가는 것을 확인한 다음에 바닥에 떨어져있던 성구를 무 릎으로 꺾어버렸다. "사빈. 왜... 살려 준거야?" 마로우가 팔을 붙잡고 통증을 참으면서 말했다. "너 수르카가 말하는 거 못 들었어?" 사빈은 성구를 집어던지면서 이렇게 말했다. 사빈의 말에 마로우는 고 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이 아이들은 다 어쩌지?" 사빈은 오브라디 교수가 말을 채 다 끝내기도 전에 부지런히 움직여서 벽면에 붙어있던 커튼을 뜯어내고 아이들의 몸을 닦아내고, 커튼과 바닥 에 깔려 있는 천을 뜯어 대충 몸을 가리게 해주었다. 오브라디 교수는 몇 번 헛기침을 한 다음 이렇게 말했다. "그럼 여기는 사빈 군에게 맡기도록 하지. 사빈 군. 마로우 군을 부탁 하네." 사빈은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사빈은 허풍이 세긴 하지만 역시 믿 을만한 사람이었다. "저는..." 스칼렛이 말했다. 스칼렛은 어쩔 줄을 몰라하는 것 같았다. 아이들이 자신의 모습을 볼 까봐 멀찍히 떨어져서 벽을 바라보고 있는 스칼렛의 모 습은 안쓰러워보이기까지 했다. "스칼렛 양은 우리와 함께 지하로 내려가지요. 여기에 있기는, 아무래 도, 좀..." 오브라디 교수는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스칼렛의 변해버린 외모에 대해서 언급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말을 돌리려는지 오브라디 교수 는 아자닌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자닌. 어서 따라오게. 라스폼의 말을 믿어 볼 수 밖에 없지 않겠는 가, 지금 이 상황에서는." 사빈과 마로우는 일단 이 층에서 기다리기로 했고, 우리는 얼른 지하를 향해 내려가기 시작했다. "성황청의 기사들이 언제 이 층에 들이닥칠지 모르는데..." 스칼렛은 내 뒤를 따르기는 했지만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성구는 힘을 발휘하지 못해요. 사빈 혼자면 충분할 겁니 다." 오브라디 교수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사실 말은 저렇게 해도 오브라디 교수는 자신이 해야 할 일 때문에 사빈과 아이들을 방치해 둔 거나 마찬 가지였다. 아마도 말하고 있는 오브라디 교수 본인이 그 사실은 더 잘 알 고 있을 것이다. 나는 스칼렛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스칼렛에게 물었던 질문들을 스칼렛이 어떻게 여겼을까를 생각해 보니 도 저히 스칼렛의 눈을 똑바로 처다볼 수가 없었다. "수르카 님. 알고 계셨지요?"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20496/21893 ━━━━━━━━━━━━━━━━━━━━━━━━━━━━━━━━━━━━━━━━ 제 목:[탐그루] 실낙원 285 관련자료:없음 20/20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5-12 21:43 조회:1230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스칼렛이 내 등뒤에서 물었다. 나는 앞을 바라보면서 대답했다. "아뇨. 지금 처음 알았어요." 나는 이렇게 솔직하게 대답해 주었다. 잠시 동안 스칼렛은 아무 말이 없었다. "제가... 싫으시죠?" 나는 스칼렛에게 뭐라고 말을 해 줘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스칼렛이 사람의 피를 빨고 자신의 노예로 만들어 버린다는 일족일 줄이야. 그런 이야기는 그저 옛 이야기 속에만 나오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라스폼이 성구를 겨누었을 때, 저는 마법으로 라스폼을 이길 수 있다 는 걸 알았어요. 하지만 마법을 쓸 수가 없었어요. 저의 이런 모습을 보 게 되면 다들 절 멀리 할 게 분명하니까요. 저도 알아요. 제 모습이 어떤 느낌을 주는지..." "그런데 왜 마법을 쓰셨지요, 스칼렛 님?" 아자닌이 스칼렛에게 물었다. "수르카 님을 보는 순간, 저는 마법을 써야겠다고 마음 먹을 수 있었어 요. 어차피 저는......." 스칼렛은 말을 잇지 않았지만, 나는 그 말 뒤에 무슨 말이 이어질지 생 각할 수 있었다. 스칼렛은 나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왜 모습이 변하지 않고 계시죠?" 아자닌이 다시 스칼렛에게 물었다. 나는 당혹스러운 질문만 던지는 아 자닌을 한 번 노려보았다. 하지만 아자닌은 내 얼굴은 본척만척 했다. "신체를 변화시키는 마법은 본래의 모습에서만 가능합니다."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실 수는 없나요?" "시간이 좀 더 지나야 할 것 같아요. 이 마법은 처음 쓰는 것이었어 요." "아자닌. 이제 거의 다 왔어." 나는 스칼렛이 더 이상 대답하기 힘든 질문을 받는 것을 보고 싶지 않 았다. 아자닌은 내 반지의 정령이니 그런 내 마음을 다 알고 있을 것이었 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자꾸 그런 질문을 던지는 건지. 나는 화가 날 것 같았지만 일단은 참기로 했다. 지금은 화를 내는 것 보다 훨 씬 중요한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 다시 지하로 향하는 입구에 섰을 때, 나는 전과 마찬가지로 불안감을 느낄 수 있었다. "어둠에는 제가 익숙합니다." 스칼렛은 이렇게 말하고는 먼저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나는 스칼 렛이 얼굴을 보이기 싫어서 먼저 계단을 내려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 다. 어둠에 익숙한 스칼렛은 계단을 마치 언덕에서 미끄러져 내려가는 것 처럼 내려가고 있었다. 스칼렛의 머리카락이 어둠속에서 깃발처럼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다. 지하실 문 앞에 닿았을 때, 아자닌은 문에 가볍게 손을 대는 것만으로 간단하게 문을 열었다. 문은 밀어야 열리는 문도 아니고 당겨야 열리는 문도 아니었다. 아자닌이 손을 대자마자 문은 요란한 소리와 함께 미닫이 문처럼 벽으로 마치 빨려들어가듯 사라져버렸다. "역시 고대인들은 문 만드는 제주가 있었어. 감탄하지 않을 수 없네." "하지만 뭐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닌 거 같습니다. 뭐하러 이렇게 복잡하 게 만들었는지. 잘못하면 영영 문이 열리지 않게 될 수도 있잖아요." 마로우가 없어서 그랬는지, 오브라디 교수의 말에 나는 저절로 이렇게 말하고 말았다. 스칼렛은 문이 열리자 안으로 먼저 들어갔다. 혹시 있을 위험요소를 먼저 몸으로 막아낼 생각인 모양이었다. 오브라디 교수는 심호흡을 몇 번 한 다음에야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긴장이 되는 모양이었다. 우리가 안으로 들어가자 연금술사의 등이 아닌 알 수 없는 차가운 빛으로 실내는 환했다. 방안에 있는 벽화가 선명하게 보였다. 하지만 벽화 뿐, 방은 텅 비어 있었다. "이 그림을 보게..." 오브라디 교수가 벽화를 손으로 가리키면서 말했다. 벽화는 눈동자를 찌르고 있는 칼과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정령들, 사람들, 마물들이 화려 한 색채로 수놓아져 있었다. 지금까지 성황청 타실지부에 들어와서 보아 온 그림과는 그림 풍도 달랐고, 무엇보다 꽤나 오래된 그림인 것 같았다. 색이 많이 바래있는 것으로 보아 그것은 거의 분명했다. "고대인이 남겼을까요?" "아냐, 그렇게까지 오래 된 그림은 아닌 것 같네, 수르카 군. 색이 바 래긴 했지만 덧칠한 흔적이 없고, 또한 비스토브레 왕국에서 한 때 유행 했던 그림 풍이 분명해. 아마 이곳에 성황청이 타실 지부를 세울 때 그렸 던 그림인 것 같네." "그래요, 잘 알고 계시는군요, 오브라디 교수님." 나는 깜짝 놀라면서 뒤돌아보았다. 입구에는 라스폼이 서 있었다. 우리 는 일순 긴장했지만 라스폼은 양손을 들어 올려 아무 것도 들고 있지 않 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수르카. 난 네가 우리 성황청을 위해서 마칸을 막아주기를 바랬어. 하 지만 너는 내가 생각한 것같은 사람은 아니었나보다." 라스폼이 서서히 다가오면서 말했다. 빛이 라스폼의 얼굴에 닿아 노파 처럼 주름진 피부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라스폼의 볼에 감겨 있던 흰 천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나는 발을 질질 끌면서 다가오는 라스폼의 모습에 약간의 공포감마저 들었지만, 의연하게 라스폼을 바라보기로 마음 먹었다. "여긴 무슨 일이에요?" "수르카. 아자닌. 자네들에게 가르쳐주기 위해서지." 라스폼의 입술은 웃고 있었다. 하지만 잔뜩 일그러져 있는 라스폼의 얼 굴은 웃고 있다는 느낌보다는 고통스러워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오브라디 교수. 오래 전 일이 생각나더군요, 덕분에." 라스폼이 오브라디 교수에게 말했다. 오브라디 교수는 턱에 손을 괴고 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비오와 함께 했던 시절을 말하는 군." 라스폼은 더이상 오브라디 교수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라스폼의 일그러 진 얼굴은 이제 점점 더 힘에 겨워 보이는 듯 했다. 피를 흘려서 그런 모 양이었다. "마법학교 시절... 자네는 훌륭한 학생이었지. 흩어진 마법의 말을 모 으고, 마법으로 일어나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던 자네를 나는 기억하고 있다네. 그래. 성황청 편으로 돌아선 제자는 자네 하나가 아니었지. 나는 자네를 원망하지 않아. 사비오도 자네를 원망하지 않았네." 라스폼은 천천히 벽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매우 힘에 겨워 보이는 모습이었다. "오래 전, 그러니까 천년전의 사람들은 모두 다 말로 마법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고 하지요." 벽화를 손으로 만지면서 라스폼이 말했다. 라스폼의 손이 닿은 곳의 벽 화는 조금씩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마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 만 그것은 마법이 아니라 그저 낡은 물감이 벽에서 떨어져 나갔기 때문이 었다. "하지만 마칸의 힘이, 마칸의 칼이 세상을 지배하기 시작한 이후, 마법 은 사라져 버렸어요. 왜인지 아십니까?" "그야 마법을 노래할 수 있는 마음이 사라졌기 때문이겠지." 오브라디 교수의 목소리도 라스폼을 따라 회한에 젖는 듯 했다. 지하실 에는 잠시 정적이 맴돌았다. "예. 맞습니다. 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하지요. 근본적인 이유는 칼이 할 수 있는 일을 마법은 하지 못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마법의 힘은 마음의 힘이지요. 마음의 힘은 결코 무엇인가를 이룰 수 없습니다. 칼의 힘 없이 는 말이지요. 칼의 힘이 없이는 산을 부술 수도 없고, 사람들을 다스릴 수도 없지요. 그래서 칼의 힘에 마법의 힘은 서서히 밀려나갔던 것입니 다. 진정한 마음의 노래를 외칠 수 있는 사람의 수는 적어져 갔고, 그 자 리를 칼을 휘두르는 용병들이 대신 하게 된 것이지요. 저는 생각했습니 다. 성구야말로 진정한 칼과 마법이 만날 수 있는 지점이 아닐까. 하지만 아니었습니다. 그걸 안지는 꽤 오래 되었지요. 하지만 일단 칼의 마음에 매료된 사람은 켤코 거기에서부터 자유로울 수 없더군요." "라스폼." 오브라디 교수가 말했다. 오브라디 교수의 목소리는 매우 정감있게 들 리고 있었다. "그렇게 애써 자신을 설명하려고 하지 말게. 그러지 않아도 나는 자네 를 이해하고 있어. 사비오도 그건 마찬가지일세." 오브라디 교수는 다른 쪽 벽면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때 멀리서 아련 하게 함성소리와 칼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성구를 사용하지 못 하게 된 성황청의 기사단이 이곳까지 후퇴한 모양이었다. "뭔가 해 보고 싶었어요. 이대로 역사에서 사라져버리고 싶지는 않았어 요. 성황님께 제 믿음을 바쳤던 것도, 그리고 사람들을 해치는 일에 동참 했던 것도, 모두 뭔가를 이루어 보기 위해서였어요." "라스폼. 사람은 누구나 죽기 마련이야. 그렇기 때문에 자네와 같은 고 민은 누구나 하게 된다네." "아뇨. 지금 저는 그런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닙니다." 라스폼이 뒤돌아 섰다. 라스폼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가득했다. "마칸의 강림은 인간에게 축복인 동시에 저주이지요. 마칸의 강림은 분 명 마법의 세상으로 돌려 놓을 수 있을 것입니다. 상당히 오랜 기간 동 안. 그러나 칼을 쥔 인간들은 모두 죽어야만 하겠지요. 그것은 정해진 법 칙입니다." 라스폼이 만지작 거리던 벽화는 이제 다 떨어져 매끈한 벽면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이곳은 오래된 유적이지요. 여기서 고대인들이 무엇을 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있지요. 이곳의 벽화는 성황청의 수많은 사제들이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 끝에 발견한 사실을 그 림으로 옮긴 것입니다. 마칸의 강림은 막을 수 있습니다." 라스폼이 눈알에 박혀있는 칼 그림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말했다. 나는 그 칼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알 수 있었다. 그 칼은 마소드의 검이 었다. "그렇다면 이 벽화들은 자네들이 그린 것이었군. 그렇다면 왜 글로 적 지 않고 그림으로 그렸지?" "글은 말과 마찬가지로 생각을 정확하게 전달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건 그림이 더 정확하게 전달하기 어려운 거 아닌가?" "하지만 글은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처럼 보이거든요. 그림과는 다르 죠." 라스폼은 이렇게 말하면서 씨익 웃음을 지었다. 입술사이로 드러나 보 이는 라스폼의 이빨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어쩐지 누렇게 변색되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대를 위해서인가?" "확신을 가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지요." 라스폼의 웃음은 꼭 아픈 사람이 고통을 참고 있는 것 같은 표정으로 바뀌었다. 오브라디 교수는 라스폼이 말을 잇자 턱 밑에 오른 손을 괴었 다. "우리가 연구한 전설에 따르면 마소드의 검이 본래 위치에 돌아갔을 때, 마칸의 강림은 멈추게 되어 있습니다. 카를로스 장군과 대마법사 아 킨이 했다는 봉인은 그저 이 전설에 따라 행동한 것뿐이었습니다." 나는 아타카파 공화국의 와트슨 대통령이 했던 말을 떠올려 보았다. 하 지만 와트슨은 사실을 이야기 해 주지 않았다. 그저 이곳으로 가라는 이 야기를 했을 뿐이었다. 와트슨 대통령은 알고 있었을까? 우리가 이곳에서 라스폼을 만나게 되리라는 것을, 그리고 이렇게 마칸의 강림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을 듣게 되리라는 것을. "그렇다면 용은 무엇인가? 그렇게 끈질기게 마칸과 함께 등장하는 바로 그 용 말일세." "여기에 있지 않습니까, 용은." 라스폼이 말했다. 라스폼은 마소드의 검에 장식되어 있는 붉은 용을 가 리켰다. "용은 하나의 상징이지요. 마칸이 가지고 있는 두 가지 속성, 즉 축복 과 저주에 대한 상징입니다. 고대인들은 용으로 이 두 가지를 상징한 것 입니다. 또한 용은 징조이지요. 세상에 마칸이 나타난다는, 마칸이 더 이 상 인간의 노예가 아닌, 새로운 힘을 가진 존재로 다시 태어날 것이라는 것에 대한 징조였습니다. 아킨과 카를로스도 이 용을 찾아 떠나던 중에 마소드의 검과 마칸에 대한 것을 알아 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느 사이 멀리서 들려오던 함성소리는 아주 가까운 곳까지 다가와 있 었다. 그리 큰 소리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사람의 비명소리와 칼 부딪치는 소리를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탐그루로 가세요. 마소드의 검은 탐그루 어디엔가에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찾아내지 못했지요. 하지만 수르카는 마소드의 검에 반응할 수 있 는 사람입니다. 틀림없이 찾아 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잔으로 가 세요. 하잔의 까마귀 들판에 마소드의 검이 원래 박혀 있던 곳이 있습니 다. 그곳에 마소드의 검을 다시 꽂으면, 마칸의 강림은 막아낼 수 있습니 다." 라스폼은 이렇게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 왜 알려 주는 거지?" 오브라디 교수가 물었다. 솔직히 나는 라스폼의 말을 완전히 신용할 수 는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브라디 교수의 목소리에는 의심의 빛이 담 겨있지 않았다. "절 살려 주셨으니까요. 사람은 누구나 죽지요. 하지만 저는 아직 죽을 때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걸 알려 주신 분이 오브라디 교수님입니다." 라스폼은 이렇게 말하고는 다시 입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직 제 삶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건 저에게 할 일이 남아있다는 말 이겠지요. 그게 뭐가 되건, 저는 결코 쉽게 죽지 않을 것입니다." 라스폼이 돌아섰다. 어느 사이, 라스폼은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 다. 노파의 모습은 사라지고 내가 아름답다고 느꼈던 라스폼이 우리 앞에 서 있었다. 라스폼은 볼을 싸고 있는 검붉게 물든 천을 손바닥으로 가렸 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20497/21893 ━━━━━━━━━━━━━━━━━━━━━━━━━━━━━━━━━━━━━━━━ 제 목:[탐그루] 실낙원 286 관련자료:없음 23/23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5-12 21:44 조회:1483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이 상처, 영원히 기억하지요. 하지만 복수같은 걸 의미하는 것은 아닙 니다. 어쩌면 성황청의 역사는 여기서 끝날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이 라 스폼의 역사는 결코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자네가 살아있는 동안 살아있다는 것에 보람을 느끼길 빌겠네." 라스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대답대신 공간이동 마법으로 라스폼 은 사라져 버렸다. 마치 꿈을 꾼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내가 마소드 의 검을 처음 본 순간부터 그것이 아버지의 검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것이 마칸의 강림과 관련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해 보지 못했다. 하지 만 어떻게 보면 모든 일은 바로 그 성년식 날, 마소드의 검이 나에게 반 응한 순간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비오 영감도, 오 브라디 교수도, 내가 운명의 길을 따르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 다. 운명. 사실 아직도 내 앞에 무엇이 남아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 저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매 순간마다 내 마음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사실 뿐이다. 우리가 밖으로 나오자 전투는 끝나있었다. 바닥에는 저항 한 번 제대로 해 보지 못하고 쓰러져 있는 성황청 기사들의 시체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 었고, 그 옆으로는 이미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고물이 되어버린 성구들이 부러지고 잘린 채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성황청 기사들의 시체는 나에 게 충격을 주었다. 이렇게까지 죽일 필요는 없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카 이사 장군이 이끄는 국왕기사단은 너무나도 잔혹하게 눈에 뜨이는 최후의 하나까지 도륙했던 것이다. "이제 성황청은 더이상 힘을 쓰지 못하겠군. 전사자 비율이 어느 정도 될까? 아마 우리 기사단 하나가 죽었을 때, 성황청 기사단 쉰 명은 죽었 겠군. 이 모두가 오브라디 교수님의 공입니다." 카이사 장군은 우리를 발견하자 허리를 숙여 예를 표한 후 이렇게 말했 다. 카이사 장군의 장군용 망토는 엉망으로 찢겨 있었고, 칼에는 채 다 닦아내지 못한 피가 흉하게 묻어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니 카이사 장군 은 분명 훌륭한 지휘관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투중에 목숨을 걸고 일선에서 뛰는 장군은 그리 흔치 않다. "이제 어디로 가실 생각이십니까." 카이사 장군이 오브라디 교수에게 물었다. "탐그루. 일단 탐그루로 갈 생각입니다." 오브라디 교수의 눈은 쓰러져 있는 성황청의 기사들에게 향해 있었다. 오브라디 교수의 눈은 슬픔으로 가득차 있었다. "지금은 때가 좋지 못합니다.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여기서 살아남은 잔당들은 틀림없이 탐그루로 집결했을 것입니다. 성황청이 탐그루에 성황 의 성을 세우고 그곳에 요새를 건설했다는 사실은 이미 분명한 정보니까 요. 지금 이대로 아무 준비도 없이 탐그루에 간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같 습니다. 일단 같이 니브리티로 가시지요. 제가 이 공로를 혼자 독차지 한 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게다가 니브리티에 계시는 대마법사 제마 님께서는 오래 전부터 오브라디 교수님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마 한 번 뵙는 것도 좋을 듯 싶습니다만." 카이사 장군은 여전히 정중하게 이렇게 말했다. 그때, 국왕기사단의 호 위를 받으며 사빈과 마로우가 훈족의 아이들과 함께 성황청의 건물에서 나오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한 분이 눈에 띄질 않는 군요. 여자 분도 한 분 계셨던 것 같은데요." 카이사 장군이 물었다.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잠시 망설였다. 스칼렛은 우리와 함께 가지 않겠다고 말하고는 홀로 숲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마늘을 찾겠어요. 사람은 누구나 죽어요. 그리고 저는 그 죽음을 찾아 보겠어요." 스칼렛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스칼렛. 어떤 모습이라도 상관없어요. 우리, 같이 있어요." 스칼렛은 웃으면서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 미소는 결코 아름답다고 말 하기에는 곤란할 지 몰라도, 그 미소는 내 마음에 분명 진심으로 와 닿았 다. "아뇨. 저는 수르카 님과 함께 살고 싶어요. 그리고 그 삶을 위해서, 저도 뭔가를 찾아야 겠지요." "다시... 만날 수 있겠지요?" "탐그루에서 다시 만나요. 꼭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에요." 스칼렛은 이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목소리에는 힘이 없어 보였다. 나는 스칼렛을 잡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상황이 너무나도 좋지 않았다. 우리 일행이야 오랫동안 스칼렛을 알아왔으니 스칼렛을 평소처럼 대할 수 있을지 몰라도 훈족이나, 또 다른 사람들은 어려울 것이 분명했다. "수르카 님.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진심으로." 스칼렛은 이렇게 말하고는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때 오브라디 교수는 사라져가는 스칼렛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자이벌의 업이지. 사람들의 피를 빨아 돈과 권력을 얻은 업이야. 그런 데 그 업을 스칼렛이 져야 한다니." 오브라디 교수의 목소리는 라스폼에게 향했던 것처럼 물기에 젖어 있었 다. "그 여자 분은 어디 계십니까?" 카이사 장군이 다시 한 번 물었다. 나는 카이사 장군에게 이렇게 대답 했다. "스칼렛은 죽었어요." 내 대답에 카이사 장군은 잠시 당황하는 듯한 얼굴이 되었다. "죄, 죄송합니다. 그 여자분의 죽음은 제가 니브리티로 돌아가면 국장 으로 모실 것을 약속드립니다." "아닙니다." 오브라디 교수가 말했다. "스칼렛 양은 죽음으로 생명을 얻는 법을 알았으니까요." 오브라디 교수의 말을 이해하고 있는 것은 나하나 뿐인 듯 했지만, 카 이사 장군도 일단 납득은 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칼의 길을 가 는 자는 영원히 알지 못할 이야기일지 몰랐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카이사 장군이 다른 곳으로 가버리자, 어둠 속에서 자이스가 모습을 드 러내면서 우리에게 말했다. "도와 준 건 자이스잖아요." "저는 제 임무를 충실히 했을 뿐입니다." 자이스의 목소리는 아자닌이 자이스의 육체 안에 들어가 있었을 때와는 판이하게 달라져 있었다. 감정 없는 자이스의 목소리를 듣는 일은 쾌활해 보이는 아자닌의 높은 음성을 듣는 일 만큼이나 생경한 일이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도록 하지요. 도움 주신 일은 다시 한 번 감사드 립니다." 자이스는 이렇게 말하고는 인사를 받을 생각도 하지 않고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스칼렛은?" 사빈이었다. 사빈은 팔에 간신히 붕대를 두른 마로우를 부축하면서 이 렇게 말했다. "갔어." "그렇군..." 사빈의 목소리에는 아쉬움 같은 것이 남아있었다. 마로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팔이 잘렸다가 붙은 충격도 충격이겠지만 아마도 스 칼렛이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에 가장 크게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마로 우의 입술은 새파랗게 질려 있는 데다가 떨리기까지 하고 있었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무척이나 어두운 하늘에 소망의 별들이 외 롭게 걸려 있었다. 반짝이는 별빛을 바라보다가, 나는 작은 소망을 하나 빌기로 마음먹었다. 내 소망을 알아들었다는 듯이 소망의 별은 몹시도 바 쁘게 깜박거렸다. 꼭 밤하늘을 배경으로 즐겁게 뛰어노는 아이들 같았다. 마을로 돌아갔을 때 우리는 우리가 길을 잘못 든 것이 아닌가 하는 착 각에 빠져 버렸다. 훈족의 마을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고, 우리 앞에 펼 쳐진 광경은 화전을 일군 것처럼 완전히 불타버린 잿더미뿐이었다. 한참 을 멍하니 서서 바라본 후에야 우리는 우리가 서 있는 곳이 훈족의 마을 이었다는 것을 증명해 줄만한 집터와 사람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성구가 이렇게까지 무시무시할 줄은 정말이지..." 오브라디 교수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사람이 살던 곳이, 훈족의 터 전이, 이렇게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살 아남은 사람도 있다는 것이었다. 살아남은 몇몇 훈족 사람들이 오로스크 를 불러다 주었다. 다행히 오로스크는 살아있었다. 완전히 시커먼 재를 뒤집어 쓴 꼴을 한 데다가 얼굴에는 핏자국들이 남아있기는 했지만, 오로 스크는 죽지 않고 살아있었다. 오로스크는 우리를 보자 마자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얼굴 이 되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이런 참담한 광경으로 훈족 의 마을이 변해가는 과정을 지켜본 사람에게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 중 아무도 오로스크가 먼저 말하기 전에는 말을 꺼내지 못 했다. "족장님이..." 오로스크는 한참이 지난 후에야 겨우겨우 이렇게 입을 열었다. 고마 족 장이 죽었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에게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그 카랑카랑 한 목소리로 카이사 장군과 맞서던 고마 족장이 죽다니. 게다가 몸이 성 구에 맞아 거의 반토막이 나서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눈을 감아 버리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눈을 감는다고 해서 현실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일이었지만. 하지만 끔찍하게도 고마 족장은 몸이 그 지경이 된 후에도 한 참 동안 살아있었던 모양이었다. 그 와중에도 고마 족장은 후계자로 사훈을 지목 했고, 일훈과 아훈에게 사훈을 도와 훈족을 이끌 것을 당부했다고 했다. "전설은 이루어지는가..." 오로스크가 울먹이면서 말했다. "무슨... 소리야?" "마지막 유언이었어, 고마 족장님의." 오로스크의 여린 감수성으로 받아들이기에 훈족에게 닥친 비극은 정말 감당하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오로스크는 거의 쓰러지다시피 바닥에 주저 앉아 버렸다. 그리고 그 순간 오브라디 교수는 이곳을 떠나기로 마음먹었 다. 그리고 성황청과 카이사 장군을 향하여 저주의 말을 뱉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들의 칼이 그들에게 돌아가리라." 이렇게 말하는 오브라디 교수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훈족의 영역을 떠나 탐그루로 가기로 한 것은 오브라디 교수와 마로우, 그리고 사빈이었다. 물론 나도 포함해서. 하지만 오로스크는 이곳에 남겠 다고 말했다. "저는 이곳이 쓰러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쓰러지는 것을 제가 본 이유 는 이곳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볼 의무가 있다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게 살아남은 사람의 의무 아닐까요." 오로스크의 말은 이해가 갔다. 시를 쓰는 사람의 마음이 저런 것일 줄 은 몰랐는데. 어쩌면 마법의 말을 노래하는 사람의 마음도 그렇지 않을 까. "저... 스타바는?" 나는 조심스럽게 오로스크에게 물었다. 스타바가 보이지 않는 게 계속 해서 마음에 걸렸지만 차마 쉽게 물어볼 수 없어서 망설이다가 겨우 물어 본 것이다. "스타바는 같이 갈 수 없어." 오로스크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순간 눈앞이 아뜩해 지는 것을 느꼈 다. "스타바는 새끼를 가졌어. 긴 여행은 무리일거야." 아이? 나는 한참동안 오로스크가 무슨 말을 하는 지 알아들을 수가 없 었다. "그렇다면..." "그래. 스타바는 임신했다고. 뮤 임신 기간이 보통 석달 달 반이니까 올 여름이면 엄마 뮤가 될 거야." 이렇게 말하는 오로스크의 목소리는 그래도 희망은 남아있다고 나에게 이야기 해 주는 것 같았다. "다시 돌아올게. 그 때까지 스타바를 부탁해, 그럼." 오로스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어디로 가는 겁니까?" "탐그루. 한시라도 빨리 탐그루에 가서 마소드의 검을 찾아야겠네." "하지만 카이사 장군 말이, 탐그루는 위험하다고..." "마칸의 강림을 방치해 두고 있는 게 더 위험해." 오브라디 교수의 목소리는 흥분으로 들떠있는 듯 했다. 아마도 이렇게 비참한 꼴이 되어버린 훈족의 모습이 오브라디 교수를 흥분시킨 모양이었 다. "가기 전에 스타바한테 작별인사라도 하고 싶은데요." "그래. 그렇게 하게. 하지만 서둘러야 할걸세. 카이사 장군이 니브리티 에 가야 한다는 둥 하는 소리를 하면 곤란하니까." 꼭 오브라디 교수가 말하고 있는 것을 듣고 있었던 모양으로 카이사 장 군과 그 일행이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이 바로 그때였다. "오브라디 교수님. 저희는 이제 여기서 퇴각합니다. 한시라도 빨리 국 왕 폐하의 곁으로 돌아가야지요. 그게 국왕기사단 본연의 임무이니까요." 카이사 장군이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하지만 내 눈에 그 웃음은 더 이상 정말로 좋은 사람이 지어 보이는 웃음 같아 보이 지는 않았다. "호의는 감사합니다만 저희는 탐그루로 가겠습니다." 오브라디 교수는 이렇게 잘라 말하고는 짐을 챙겼다. "아, 호의가 아닙니다." 카이사 장군이 말하자 국왕기사단의 병력이 우리를 에워쌌다. 나는 갑 작스러운 일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타실에는 영웅이 필요합니다. 잠시동안이면 됩니다. 그곳에서 영웅 노 릇만 조금 해 주시면 됩니다. 악의는 없습니다." 카이사 장군이 말했다. 오브라디 교수는 근엄한 표정으로 눈을 부라리 면서 카이사 장군에게 말했다. "지금 우리가 하려는 일이 어떤 일인지 알고 있는가? 영웅이라고? 그게 무슨 헛소리인가?" "무슨 일을 하려고 하시는 지 저는 모릅니다. 그리고 알 필요도 없고 요. 단지 저는 교수님은 니브리티까지 모시고 갈 뿐입니다. 그곳에서 교 수님에 대한 표창 수여식이 있을 것입니다. 그 후에 일은 교수님께서 알 아서 하십시오." "우리가 지금 얼마나 다급한 상황에 놓여 있는지 알고 있는가? 마칸의 강림이..." "저는 별로 들을 이유가 없는 것 같군요. 정중하게 모시게." 카이사 장군은 이렇게 말하고는 우리를 병력에게 맡겨 버렸다. 우리는 반 강제로 마차에 올랐고, 푹신한 의자에 앉아 니브리티까지 원하지 않는 여행을 가게 되었다. 스타바에게 작별인사도 하지 못했는데. "다시 만날 수 있어! 그렇지? 꼭 다시 만날거야!" 오로스크가 달려가는 마차를 뒤따르면서 소리쳤다. 나는 마차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자 옆에 앉아 있던 국왕기사단 병사가 내 몸을 꼭 붙들어 주었다. 내 안전을 위해서 그러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오로스크!" "스타바는 내가 잘 보살펴 줄게!" 오로스크는 내가 부탁하려던 말을 먼저 들려 주었다. 마차 바퀴는 흙먼 지를 일으켰고, 먼지 속으로 오로스크의 모습이 사라져버렸다. 타실로 향 한 마차들의 삐걱거리는 소음을 뚫고거센 바람이 한바탕 몰아쳐갔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20620/21893 ━━━━━━━━━━━━━━━━━━━━━━━━━━━━━━━━━━━━━━━━ 제 목:[탐그루] 세이브와 로드의 정원 287 관련자료:없음 18/18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5-14 20:16 조회:1417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 세이브와 로드의 정원 "... 이렇게 해서 수르카는 타실의 수도, 니브리티로 떠나게 되었습니 다." 세헤라자드의 이야기는 언제나처럼 이렇게 한 번 끊어졌다. 창밖에는 어느새 새로운 하루가 빛나고 있었지만, 동료 중 하나는 손목이 잘려나갔 고, 둘은 가사상태에 빠져 있으니 새로운 하루 해가 솟았다해도 나는 기 분이 영 개운하질 않았다. "수르카, 운명도 참 고약하네." 나는 이렇게 중얼거리듯이 내 뱉었다. 별다른 뜻은 없었다. 그냥 내 처 지가 한심해서 해 본 말이었다. 아톰과 리파이는 여전히 죽은 듯이 잠들 어 있었고, 그 옆으로는 실버우드가 잠들어 있었다. 오토는 후버카에서 눈이나 좀 붙이겠다며 밖에 나간 후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오토 역시 꽤 힘들었나 보다. 지금까지 오토가 몇 시간 이상 잠들어 있는 것을 보지 못 했다. "수르카의 운명이 고약하다기 보다는 제가 고약한지도 모르지요." 알듯 말듯한 미소였다. 세헤라자드의 모습이 뿌옇게 보였다. 눈이 몹시 도 아팠다. "너도 사람 몸 속으로 들어 갈 수 있을까? 아자닌처럼 말이야." 희뿌옇게 보이는 세헤라자드에게 말했다. "모르겠어요. 그게 가능할까요? 혹시 모르죠." 세헤라자드는 꽤나 진지하게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잠 좀 자야겠어. 머리가 복잡해." 나는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침대에 누웠다. "그러세요." "너도 자. 잘 수 있다면." 세헤라자드는 대답이 없었다. 나는 랩탑의 전원을 뽑은 후 마치 랩탑이 인형이라도 되는 것처럼 껴안고 눈을 감았다. 세헤라자드는 이미 영혼의 에뮬레이터를 MS사에서 빼앗아간 이상, 이 랩탑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 지만, 나는 그래도 이 랩탑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리석은 생 각이기는 하지만, 내 마음이 편해질 수 있다면 뭐든지 하고 싶었다. 불편 한 마음으로 잠들었다가는 리파이나 아톰처럼 다시는 잠에서 깨어나지 못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꿈을 꾸었다. 무엇인가를 뒤쫓고 있는 꿈이었다. 이런 꿈은 사실 한 달 에도 몇 번씩 꾸는 흔한 꿈이었지만, 지금의 내 심리상태로는 악몽에 가 까운 것이었다. 누구에게 쫓기고 있었는지, 내가 어디로 도망치고 있었는 지는 자세히 기억할 수 없었지만, 꿈에서 깨어나자 온몸이 땀으로 흥건히 젖어있었다. 나는 방을 돌아보았다. 방에는 두터운 블라인드가 내려져 있어서 햇살 이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아마도 내가 잠들자 누군가 블라인드를 내려준 모양이었다. "비류 님. 일어났어요?" 실버우드였다. 실버우드는 잠에서 깨어나 샤워실 앞에서 뭔가 만들고 있었다. "예. 지금 몇 시나 됐어요?" 나는 몸을 일으켜 세우면서 말했다. 돌아누워서 잔 탓에 어깨가 꽤 아 팠다. "오후 세시요." 실버우드는 샌드위치를 몇 개 쟁반에 담아들고 우유도 한 잔 곁들여서 나에게 가져다 주었다. "좀 드셔야지요." 실버우드가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고맙기는 했지만 입맛이 별로 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성의로 만들어다 준 것이니 먹어 두기로 했다. "건은요?" 나는 샌드위치를 한입 베어 물면서 실버우드에게 물었다. 오후 세시라 면 수술이 다 끝났을텐데. 아직 안 끝났건가? 혹시 무슨 일이라도? 실버 우드는 대답 대신 내 옆침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러고 보니 실버우 드가 누워있던 자리에 건이 대신 누워있었다. 건도 아톰과 리파이처럼 죽 은 듯이 잠들어 있었다. 다만 팔에 붙어 있는 포터블 링겔 병과 손에 둘 둘 감겨있는 붕대만이 조금 달랐을 뿐이었다. "수술은 성공적이었데요." "그 여자 의사가 그래요?" "예." "혹시 리파이하고 아톰에 대해서는 뭐라고 안 그래요?" 나는 우유를 마시면서 이렇게 말했다. 진짜 우유를 기대한 것은 아니었 지만 싸구려 중에 싸구려 합성우유인 모양이었다. 미각이 둔한 편에 속하 는 나조차도 소독약 냄새를 맡을 수 있을 정도였으니. "일종의... 가사상태라고 하더라구요." 실버우드의 얼굴이 눈에 뜨일 만큼 어두워졌다. 나는 실버우드에게 뭐 라고 위로의 말을 하려다가 그만 두었다. 내가 위로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고, 나 조차도 위로할 만한 처지는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실 버우드는 안경 태를 손가락으로 밀어 바로 했다. 실버우드의 눈은 리파이 에게 향해 있었다. 한참동안 나는 말없이 샌드위치를 씹으면서 합성우유를 마셨다. 입맛이 하나도 없었는데 일단 먹을 것이 식도를 넘어가자 갑자기 왕성한 식욕이 일었다. 나는 정신없이 빵과 우유를 뱃속에 밀어 넣었다. 실버우드는 우 울한 얼굴을 하고서 누워있는 리파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빵과 우유가 다 없어지자 나 또한 실버우드 못지 않게 우울해졌다. 이 런 상황에서도 식욕을 쫓는 내 자신이 사람이라기 보다는 그저 동물에 가 깝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실버우드는 리파이의 침대에 걸터앉아 창백하게 늘어진 리파이의 손을 잡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실버 우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쟁반을 치워주었다. 나는 얼떨결에 따라 일어나 쟁반 위에 놓여있었던 접시와 컵을 들었다. 실버우드는 내 얼굴을 한 번 바라 보더니 샤워실 앞에 마련된 싱크대에 쟁반과 접시를 밀어 넣었다. "집에 있을 때는 교대로 했던 일이에요." 실버우드가 말했다. 나는 리파이와 아톰이 어쩌다가 저런 신세가 되었 는지 알 수가 없었다. 리파이와 아톰이 저 지경이 된 데에는 분명히 내 책임도 있을 것이다. 아니, 적어도 실버우드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 으리라는 법은 없을 것 같았다. "미안해요." 나는 소독 타월로 몇 번 접시와 쟁반을 문질러 치운 실버우드에게 이렇 게 말했다. 실버우드는 내 말에 고개를 두어 번 갸웃거렸다. 나는 어쩐지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고는 실버우드의 얼굴을 바라볼 수 없을 것만 같 았다. 잠시 후, 실버우드는 내 얼굴을 보더니 미소를 지어 보여주었다. 그 미소의 진짜 의미가 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내게는 용서의 뜻 으로 보였다. "비류 님은 프로 게이머가 꿈이었다고 했지요?" 실버우드가 어디서 구해왔는지 일회용 커피잔 두 개를 들고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마시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실버우드 역시 우울한 분위기가 계속되는 게 싫은 모양이었다. 다행이었다. "예. 아주 오래 전부터요. 누가 뭐라고 해도 게임이 세상에서 가장 재 미있고, 또 나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게 게임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뭐, 게임 좋아하는 사람이야 세상에 얼마든지 있겠지만." "하지만 게임에 애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지요. 프림, 설탕?" 내가 둘 다 넣는다고 말하자 실버우드는 종이컵에 달려있는 줄을 잡아 당겼다. 이제 일 분만 있으면 뜨거운 커피가 완성될 것이었다. 사실 나는 블랙을 더 즐겨마시는 편이었지만 굳이 설탕과 프림을 빼는 수고를 끼치 고 싶지 않아서 그냥 마시겠다고 대답한 것이었다. "실버우드는 언제 게이머가 됐어요?" "리파이와 같아요. 프로에 입문한 지는 육 년. 나이도 리파이하고 같으 니까 진짜 동기라고 할 수 있지요." "참 친하게 지내셨겠군요, 두 분." 나는 실버우드가 누워있는 침대 쪽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나는 아톰의 안가에서 보낸 밤이 떠올랐다. 하트오브화이터즈와 108콤보의 밤. 대전 게임과 같은 레포츠 형 게임들은 물론 게임 매장에 가서 하는 편이 낫지 만, 그래도 그날 밤 우리는 참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었다. 그 날 리파 이가 보여주었던 동체시력과 심리전은 그야말로 굉장한 것이었다 (물론 나야 64연패의 대기록을 세우고 쓰러져 버리긴 했지만 말이다). "리파이는 오랫동안 프로그램 일과 게임 일을 함께 해왔지요. 리파이를 처음 만났을 때가 아직도 기억나요. 합숙소에서 저와 리파이는 최초의 게 임이 무엇이냐를 가지고 논쟁을 벌였었지요. 참 즐거운 밤이었어요." 즐거운 밤이었다니. 최초의 게임이 무엇이냐 하는 논쟁은 아직도 게임 평론가들 사이에서 심심치 않게 터져 나오는 민감한 문제 중의 하나다. 그런데 그런 심각한 문제를 놓고 합숙소에서 친하지도 않은 사람들끼리 논쟁을 벌인 일을 지금 실버우드는 즐거운 일이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실 버우드의 안경 낀 얼굴이 오늘따라 학구적으로 보였다. "그 때 논쟁, 재미있었지요. 저는 최초의 게임을 제비우스라고 했고, 리파이는 동키콩이라고 했었지요." "그런 얘기를 그렇게 재미있게 한다니 부럽네요." 나는 조금은 비꼬는 투로 실버우드에게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실버우 드의 귀에는 내 말이 칭찬의 말로 들린 모양이었다. "게임을 업으로 삼은 사람이라면 그 정도의 생각은 가지고 있어야지 요." 조금은 우쭐거리는 투였다. 나는 실버우드가 잠시 동안 멍하니 침대에 누워있는 리파이를 바라보는 것을 보았다. 실버우드의 눈은 추억에 잠겨 있는 듯 흔들리고 있었다. "어쩌면 리파이가 저렇게 된 것도 결국 다 게임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 어요." 실버우드는 종이컵을 손으로 빙빙 돌리면서 말했다. 그렇게 한다고 해 서 커피가 더 빨리 뜨거워지는 것도 아닐 텐데. "비류 님은 최초의 게임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실버우드가 물었다. 그냥 보통 사람에게 그런 질문을 던진다면 별 의미 가 없을지 모르지만 나는 프로인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소설가에게 최 초의 소설 또는 가장 재미있게 읽은 소설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 문을 던진다면, 그 질문데 대한 답을 통해 우리는 정말 많은 정보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소설가가 생각하는 소설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어떤 소설을 써왔고, 또 어떤 소설을 쓰려고 하는 사람인지, 심지어는 어떤 생 각을 갖고 어떻게 살아갈 사람인지조차 대강은 알 수 있다. 그런 맥락에 서 프로 게이머에게 최초의 게임에 대해 묻는 것은 그 게이머가 어떤 철 학을 가지고 게임을 하고 있는 가를 알 수 있는 질문이었다. "글쎄요. 고대의 제의에서 그 기원을 찾는 사람도 있고, 중국의 오누가 최초의 게임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놀이의 개념을 모두 포괄해서 말씀하시는군요. 하긴, 제 질문이 조금 광범위하긴 했네요. 그럼 최초의 전자 게임은 뭐라고 생각하세요?" 내 애매모호하고 원론적인 대답은 효과를 본 모양이었다. 실버우드의 질문은 아마 별 생각없이 던진 것일지 몰라도 내 대답은 '나는 게임에 대 해서 쉽게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전한 셈이 되었을 테니 말이다. 실버우드는 나에게 덥혀진 커피잔을 건네 주었다. "최초의 전자 게임은 1958년 윌리 히긴보텀이 만든 테니스 게임이라고 게임 연구가들은 말하지만, 글쎄요. 그것보다는 62년 메사추세츠 공과대 학에서 만든 스페이스 워가 처음이라고 보는 게 타당할지도 모르겠어요. 그게 최초의 상업 게임인 컴퓨터 스페이스의 모태가 되었으니까요." 나는 MIT라고 말하면 될 것을 굳이 길게 메사추세츠 massachusetts 공 과대학이라고 말했다. 아무래도 실버우드가 나를 생각해 주는 것은 고마 운 일이었지만 웬지 무시당하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실버우드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내 물음에 반론을 제기했다. "제 생각은 좀 달라요. 비류 님은 조금 보수적인 것 같아요. 최초의 게 임은 보통 아타리Atari의 퐁Pong으로 보는 사람이 많은데요." 아타리의 퐁은 배트로 공을 튀겨내서 받아내는, 그러니까 블록 격파 류 게임의 할아버지 뻘 되는 게임을 말하는 것이었다. "퐁이 최초의 상업적 성공을 거둔 게임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거라 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업적은 높게 평가할 수 있어도 시기적으로 스 페이스워Space war가 먼저라는 건 엄연한 사실이니까요." 말은 이렇게 하긴 했지만 스페이스워든 퐁이든 나는 둘 다 진정한 게임 의 시작이라고 생각하는 입장은 아니었다. 스페이스워같이 구경도 못해본 게임이건, 아니면 단순히 키보드를 움직여 벽에서 튕겨 나오는 공을 배트 로 치는 퐁 같은 게임이건 둘 다 게임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게임은 아니 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퐁의 그 퐁, 하는 효과음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시도였겠지만).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20621/21893 ━━━━━━━━━━━━━━━━━━━━━━━━━━━━━━━━━━━━━━━━ 제 목:[탐그루] 세이브와 로드의 정원 288 관련자료:없음 19/19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5-14 20:16 조회:1174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그럼 역사적인 맥락을 중요시하시는 편이신가보군요, 비류 님은."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 실버우드의 말에 대답했다. "굳이 그렇지는 않습니다. 스페이스워, 퐁, 둘 다 최초라는 명함이 붙 어도 좋을 만큼 오래 전에 만들어진 게임이고, 또 그 발상의 훌륭함도 인 정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최초의 게임이라고 말하기는 곤란한 것 같아요, 만약 그렇다면 최초의 영화는 에디슨이 만든 '걸어가는 에디슨 조수'인가 요?" 내 딴에는 농담이라고 한 말이었다. 에디슨이 착시현상을 이용한 움직 이는 영상을 발명했을 때, 최초로 에디슨의 조수가 걸어가는 모습을 찍었 다는 이야기가 생각나서 꺼낸 말이었다. 하지만 실버우드는 진지하게 고 개를 가로 저었다 (나는 조금 민망해지고 말았지만). "하지만 스페이스 워나 퐁은 '걸어가는 에디슨 조수'라기 보다는 뤼미 에르 형제의 '꽃밭에 물주는 남자'에 더 가깝다고 생각해요." 실버우드가 말했다. '꽃밭에 물주는 남자'나 '역에 도착하는 기차'같은 영화는 그야말로 움직인다는 사실 자체에만 초점을 맞춘 신기한 볼거리로 서의 영화였고, 또한 최초로 돈을 받고 상영한 영화라는 점에서 '걸어가 는 에디슨 조수'와는 의미가 다른 영화였다. 사실 정확한 구분을 따진다 면 이 말이 옳을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시장통의 구경거리가 최초의 영 화라고 말하는 사람은 영화의 예술적 측면을 무시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 각이 들었다. "하지만 최초의 영화로 그리피스Griffith의 '국가의 탄생'을 꼽는 매니 아도 있지 않을까요?" 나는 언젠가 데이비드 그리피스에 대해서 언급한 글을 떠올리며 말했 다. 내가 본 어스넷 사이트에서 데이비드 그리피스는 최초로 영화를 문법 화시킨 사람이라고 서술하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국가의 탄생'은 영 화 문법을 정착시킨 영화면서 동시에 최초로 영화가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준 작품으로 알려져 있었다. 물론 백인우월주의와 비 백인 에 대한 편견으로 가득 담긴 이 영화의 내용은 지금 보면 우습지도 않은 수준의 작품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렇게 보는 사람도 있겠지요. 그러고 보면 영화라는 장르도 성장이 빨랐던 것 같아요. 최초의 움직이는 영상이 문법을 갖춘 예술이 되기까지 걸린 시간이 불과 몇 십년이었으니까요. '걸어가는 에디슨 조수'에서 '국 가의 탄생'까지 말이에요." 실버우드는 가볍게 농담을 건네듯 말했다. 나는 웃음을 지으면서 이렇 게 말했다. "그렇지요. 정말 빨리 성장한 장르지요. 영화는 20세기까지 인류가 이 루어 놓은 예술적 업적들을 과학적 성과들을 집약해 한데 아우른 장르가 되었으니까요." 내 물음에 실버우드는 꼭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처럼 이렇게 답했다. "그렇지요? 마치 게임이 지금까지의 모든 예술 장르와 거기에 더해 영 화가 이루어 놓은 모든 결과물까지 함께 포괄한 것처럼요."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의미심장하게 바라보았다. 어쩐지 동지의식 같은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들고 있던 게 술잔이었다면 한 번 부딪쳤을지 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면 게임이라는 장르가 지금 많은 사람들의 화제로 오르내릴 수 있게 된 것 또한 그 발전속도의 놀라움에 힘입은 지도 모르겠네요. 불 과 몇 십 년 전만 하더라도 게임이라고 하면 어린아이들이나 하는 놀이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았으니까요." 실버우드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면서 나에게 말했다. 나 역시 커피를 마시면서 실버우드의 말에 덧붙였다. "예. 어쩌면 게임의 역사도 영화의 역사와 그 궤적을 함께 하는지도 모 르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말하자면 '퐁'이 '걸어가는 에디슨 조수'에 해 당하겠지요." 나는 일단 말을 해 놓고 보니 그렇다면 '국가의 탄생'에 해당하는 게임 은 과연 어떤 것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초창기의 게임들은 대부 분 끝이 없이 무한히 반복되는 시간을 갖춘, 이야기가 없는 게임이었다. 그렇다면 게임이 예술로서의 가능성을 부여받게 된 게임은, 그 스토리의 완성도를 떠나서 일단 끝이 있는 게임이 될 것이었다. 최초의 스토리를 갖춘 작품으로 제비우스Xevious를 꼽는 사람도 있고, 닌테도nintendo의 동키콩DonkeyKong을 꼽는 사람도 있고(왜냐하면 마리오가 동키콩의 손에 서 공주를 구출하니까), 아이렘Irem의 쿵후마스터Kung-fu master를 꼽는 사람도 있고(비록 끝없이 여자 주인공이 납치되긴 하지만)하니, 사실 이 논쟁은 아직은 시기상조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는 제비우스가 바로 최초의 게임이라고 생각해요. 국가의 탄생에 필 적하는." 내가 신중하게 생각을 유보한 것에 비해서 실버우드는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최초의 게임음악, 최초의 거대보스 출현, 최초의 소설과의 타이업. 알 고 계시죠? 제비우스 게임 제작자가 '파라우트'라는 제비우스의 세계관을 기초로 한 SF소설을 썼다는 거요. 하여간 여러가지 의미로 저는 제비우스 가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의 최초의 게임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물론 실버우드의 견해도 상당수의 게이머들이 동감하는 부분이기는 했 다. 하지만 나는 조금 생각이 달랐다. "그렇지만 생각해 보면 제비우스는 '퐁'의 발전형태에 불과하지 않은 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퐁이 가지고 있던 기본 구도에서 조금 더 발전한 것이 블록 격파 류 게임이라는 건 동감하시겠죠? 그렇다 면 가만히 서 있던 블록이 움직인다는 발상에서 시작한 인베이더Invader 가 오히려 더 최초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되네요. 그리고 또 한가지, 최초 의 대형 보스는 제비우스에서 먼저 등장하지만 최초의 게임음악은 제비우 스가 아니라 겔러거Galaga에요. 제비우는 1983년 작품이지만 겔러거는 1982년 작품이라고요." 내가 따져 묻자 실버우드는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밝혔던 것만큼 자 신의 오류를 쉽게 수긍했다. "예. 그런데 말을 하다보니 어떤 것이 최초인가는 별 의미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최초의 게임이 어떤 것이었건 결국 중요한 것은 그 게임이 어떻게 변해갔는가에 있지 않을까요?" 실버우드는 이런 종류의 토론을 많이 해 본 사람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나 역시 대화방과 계시판을 오가면서 내공을 닦아서 토론에 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지만 말이다). 실버우드의 이 말은 지엽적인 이 야기만을 반복하는 것보다는 생산적인 방향으로 대화를 넓혀가자는 말이 었다. "그렇지요." 나는 일단 실버우드의 견해에 수긍을 한 다음 이렇게 논지를 이어갔다. "영화가 사람들의 시간관에 영향을 끼쳤고, 또한 철학에 영향을 준 것 처럼, 게임 역시 그렇게 사람의 의식 속으로 파고들었지요." 나는 일단 이렇게 말을 해 놓은 다음에 구체적인 예를 들어야 할 필요 성을 느꼈다. 이런 원론적인 말은 구체적인 예가 없이는 자칫 대화를 허 공에 띄울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화가 만들어지기 전에 사람들은 시간이 거꾸로 흐른다는 개념에 대 해서 상상도 해보지 못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최초로 사람들이 시 간이 거꾸로 흐른다는 개념을 손에 잡고 이해하기 시작한 것은 '꽃밭에 물주는 남자'가 호스로 물을 빨아들이는 장면을 본 후라는 이야기이지 요." 이것은 언젠가 어스넷 사이트 중 한곳에서 프랑스의 한 철학자가 적어 놓은 글의 내용이었다. 그런데 읽었을 때는 그냥 그런가보다 했는데 내가 일단 이렇게 말로 하다 보니 뭔가 깨달음이 오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니까 그전에는 사람들은 시간에도 차원이 있을 수 있고, 그 차원 이 동시에 흐를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지요. 아마 그런 개념이 가장 절묘하게 다루어진 경우는 아마 보 르헤스 Borges 소설이었던 것 같은데요." 실버우드가 말했다. "보르헤스요?" "예. 왜 있잖아요.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을 쓴 아르헨티나 소설가요." 나는 잘 모르는 이야기가 나와서 조금은 당혹스러웠다. 사실 이럴 때 잘 모르겠으니 설명해 달라고 말하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나 는 다행스럽게도 이럴 때 솔직하게 모르겠다고 말하는 편이 대화를 나누 는 상대방을 위해서나, 본인을 위해서나 훨씬 나은 결과를 가지고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저, 그 작품 못읽어 봤는데요, 좀 설명해 주시겠어요?" 내 물음에 실버우드는 미소를 지으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저도 그 작품을 자세히 읽어보지는 않아서 잘 모르는데요, 그 작품이 최초로 하이퍼 텍스트 Hypertext 성 을 예측한 작품이라고 알고 있어요." 읽어본 작품이면 어떻고 안 읽어본 작품이면 어떠냐는 듯이 실버우드가 말했다. 이로서 대화가 허공에 뜨게 되는 위기는 모면했지만 하이퍼 텍스 트라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그렇다고 다시 물어보자니 조금 마음에 걸려 서 나는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설명해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니까 하이퍼 텍스트는 기존의 소설이나 영화가 가지고 있는 제약, 즉 시작과 끝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제약을 깨트리기 위한 시도였어요. 물론 게임이 출현하기 이전의 일이지요. 그후 컴퓨터의 사이버 공간이 발 명해낸 확장된 시공간은 하이퍼 텍스트라는 개념을 더욱 정교하게 발전시 켰고, 결국 게임이라는 새로운 예술 장르에서 가장 잘 실현되었죠." 실버우드는 말은 잘 했지만 구체적인 예를 들어야 할 때를 잘 모르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내가 예를 만들어서 실버우드의 말을 정리해 보 기로 했다. "그러니까 제가 게이머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기존의 이야기 구조로 말 한다면 제가 태어나고, 자라고, 게이머가 되는 과정을 일직선으로 그릴 수밖에 없지만, 게임으로 만들어 낸다면 제가 갱단의 두목이 되었다가 개 과천선해서 게이머가 되는 이야기와 혹은 취직시험을 통해 게이머가 되는 이야기, 아니면 게이머가 되는 과정에서 MS사의 음모에 휘말려 들어가는 이야기가 동시에 존재 할 수 있다, 뭐 이런 말씀이신가요? 게이머가 플레 이 하기에 따라서요." "예. 그렇지요. 그리고 그게 아까 비류 님이 말씀하신 다차원 시간관이 지요, 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로 하다 보니 나도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는 데, 다만 내가 그 하이퍼 텍스트라는 개념을을 몰랐던 것뿐이었구나 싶었 다. "죄송합니다만 토론은 이 정도에서 그쳐 주시지요." 오토였다. 생머리 가발을 쓰고 있는 오토는 언제 들어왔는지 이곳 회복 실 샤워실 뒤쪽에서 팔짱을 끼고 서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 들어왔어요?" "에디슨 얘기 나올 때부터요." 지금 상황이 급박한데 무슨 쓸데없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느냐는 듯, 한 심스럽다는 표정으로 오토가 말했다. 나는 공연히 부끄러워져서 헛기침을 한 번 했지만, 실버우드는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렇게 말했다. "토론은 나중에 더 하기로 하지요. 지금은 우선 급한 일이 있으니까 요." 오토는 이렇게 말하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오토의 뒤쪽은 벽에 가려서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나와 실버우드는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 거기에 는 머리는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고, 자다가 막 일어난 듯 얼굴은 푸석푸 석하기 짝이 없는 의사가 서 있었다. "꼭 지금 가야겠어?" 여의사가 눈을 비비면서 말했다. 나는 의사가 오토에게 한 말인줄 알고 오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말한 것은 오토가 아니었다. 누워서 거의 입이나 겨우 가누는 건에게 한 말이었다. "저 친구한테 물어봐." 건이 질렸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서 의사에게 말했다. "이건 자살 행위에요. 혹시 당신의 상식으로는, 대수술을 받은 환자에 게는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들어 있지 않나요?" 의사는 팔짱을 딱 끼고는 오토에게 대들듯이 말했다. 오토는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의사의 말에 이렇게 맞받아 쳤다. "아뇨. 하지만 쫓기는 사람이 한 장소에 스물 네 시간 이상 머무는 건 자살행위라는 건 압니다." 오토의 말에 의사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이곳을 뜨는 게 이 병원 같은 곳이나 누워있는 건을 위해서 좋습니다." "여긴 병원 같은 곳이 아니야, 오토." 어느 사이 오토에게 말을 놓은 건이 말했다. 아마 내가 잠든 사이에 무 슨 대화가 오간 모양이었다. "그래? 난 병원인줄 알았지." 오토의 말에 의사가 키득거렸다. "뭐 돌팔이한테 손목을 맡긴 분이나, 그런 분한테 피를 주신 분이나 다 똑같지요, 뭐." "하긴. 팔을 못 움직이겠어. 전혀." 건이 왼 팔로 오른 팔을 드는 시늉을 해 보이면서 말했다. 나와 실버우 드는 서로 얼굴을 바라보았는데, 실버우드의 얼굴에는 당혹감이 드러나 있었다 (아마 나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미안해, 건. 솔직히 장담 못하겠어. 아무리 의학이 발전했다고 해도 신경이 죽으면 어쩔 수 없다고."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20622/21893 ━━━━━━━━━━━━━━━━━━━━━━━━━━━━━━━━━━━━━━━━ 제 목:[탐그루] 세이브와 로드의 정원 289 관련자료:없음 21/21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5-14 20:17 조회:1250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그렇게 늦지는 않았다면서?" "내가 보기에 그렇다는 거지. 안전한 곳으로 가게 되면 다시 한 번 검 사 받아봐." 사람 손목이 왔다갔다하는데 오토도 그렇고 의사도 그렇고 그리 심각하 다는 듯한 얼굴이 아니었다. 불과 몇 시간 전에 죽어 가는 사람을 본 내 가 보기에도 두 사람의 모습은 정상이 아닌 것처럼 느겨졌다. "걱정 마." 건이 심각한 얼굴을 하고서 말했다. "이번에는 진짜 의사에게 갈 거니까." 이어진 건의 말에 의사는 헛웃음을 터트렸고, 건은 만우절날 사람을 속 인 어린아이처럼 환한 얼굴을 했다. 건의 그런 모습은 자신의 상태에 대 한 걱정을 덜어주기 위한 농담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건 은 정말로 낙천적인 사람이거나, 정말로 죽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거나, 혹은 세상에 아무런 미련이 없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었다. 어쩌면 구제불능의 바보일지도 모르고. "하지만 셋이나 되는 환자를 옮기려면 그리 쉽지만은 않을 거에요." 의사가 오토에게 말했다. 오토는 그저 고개를 한 번 끄덕일 뿐이었다. 나는 후버카를 생각해 보았다. 조수석에 건이 앉고, 뒷좌석에 리파이, 아 톰이 앉고, 그리고 그 양 옆으로 실버우드와 내가 앉으면 딱 맞을 것 같 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뭐가 그리 쉽지만은 않다는 걸까? "그건 저한테 말씀하실 것 없습니다." 오토의 말이 끝나기가 꼭 장례식이라도 방금 다녀온 사람처럼 무섭게 시커먼 양복을 빼입은 어깨 넓은 사내들이 우르르 회복실로 몰려 들어왔 다. "이 친구들한테 말씀하시지요." 의사는 오토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내들에게 '고생들 좀 하세요'하 고 말했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한 말투였다. 물론 나와 실버우드 는 완전히 얼어붙은 듯 조금도 움직이질 못하고 있었다. 얼굴도 완전히 굳어있었던 것은 물론이고. 사내들은 침대 세 개를 나누어 들더니 조심스 럽게 밖으로 나갔다. "이번에는 좀 제대로 된 일을 하는 모양이지?" 의사가 건에게 묻자 건은 사내들에게 실려 나가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냐. 침대 값 영수증도 끊어 줄 수 없는데, 뭐." 의사는 웃으면서 건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아무래도 의사와 건은 꽤 오랫동안 친구사이였던 모양이었다. "오토." 나는 오토에게 일단 말을 붙여보았다. 아무리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 더라도 한가지 만은 알아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비류 씨.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다 잘 될 테니까요." "오토 씨. 지금 비류 님이 물은 건 지금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느냐 는 거에요." 실버우드가 정확하게 내 심정을 짚어서 이야기 해주었다. 마음 같아서 는 실버우드의 팔이라도 잡고서 만세라도 한 번 부르고 싶었다. 하지만 오토의 반응은 별로 신통치 않았다. 오토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일단 나가시지요. 곧 다 알게 될 겁니다." 이렇게 말하는 오토의 얼굴은 무척이나 어두워 보였다. 그 표정 하나로 조금 전까지의 농담이나 던지는 분위기는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실버우 드는 뭐라고 말을 덧붙이려다가 그만 두었고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더 이상 무슨 이야기를 해 봤자 나올 것은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입고 있던 가운을 벗고 원래 입고 있었던 옷으로 갈아입으려고 하 였다. "그냥 그대로 나가시면 됩니다." 나는 혹시 교통경찰이라도 보면 어떻게 하느냐고 말하려고 했지만 그냥 오토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지 못하고 있 었지만 적어도 오토가 아무 생각 없이 말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쯤은 알 고 있다. 나는 랩탑만을 챙겨들고 오토를 따라 회복실 밖을 나섰다. "걱정하지 마세요." 의사가 나에게 말했다. 나는 무슨 소리냐는 듯한 얼굴을 하고서 의사를 바라보았다. 키가 작은 의사는 나를 올려다보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저는 기억력이 나쁘거든요." 그제야 나는 의사가 내 이름을 기억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말했다는 것 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전 시력이 좋지 않아요. 혹시 나중에 우연히 마주치더라도 인사는 없 을 겁니다." 내 말에 의사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병원 (이라기 보다는 그냥 집이라는 표현이 훨씬 잘 어울리지만) 밖을 나섰을 때, 나와 실버우드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시커먼 벤 트 럭이 후버카가 있어야 할 자리에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뭐지요, 저건?" "뒤에 타시면 됩니다." 실버우드의 말에 오토는 이렇게 말하고는 조수석 문을 열고 벤트럭에 올랐다. 나와 실버우드는 멍하니 다시 한 번 서로의 얼굴을 바라본 다음 에야 벤트럭의 짐칸에 오를 수 있었다. 사실 벤트럭의 뒷자리는 짐칸이라 기 보다는 작은 병동을 연상시켰다. 양복을 차려입은 의사로 보이는 사내 둘이 침대 째로 실린 세 명을 돌 보고 있었고, 그 좌우로 시커먼 양복의 사내들이 표정없는 얼굴로 앉아있 었다. 우리가 앉은 곳은 놀랍게도 쇼파였다. 벤트럭이 원래 크다고는 하 지만 이렇게까지 좋은 줄은 생각도 못했다. 트럭은 곧 출발했고, 나와 실 버우드는 검은 양복의 사내들이 내뿜는 기세에 눌려 내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벤트럭이 멈추기까지는 한참을 달려야만 했다. 아마도 환자가 타고 있 기 때문에 일부러 천천히 몰고 있는 모양이었다. 덕분에 나와 실버우드는 모자란 잠을 보충할 수 있었지만 랩탑 안의 세헤라자드는 심심했을 것이 분명했다. 차가 멈추어 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전동음과 함께 벤트럭의 뒷문이 열렸다. 밖에는 노을이 동산 너머로 지고 있었다. 나는 처음에는 이곳이 한적한 야산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만약 그렇다면 이 곳은 시내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이리라. "여기가 어디죠?" 나는 가장 만만해 보이는 의사에게 이렇게 물었다. 하지만 의사는 내 얼굴을 한 번 처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인 다음 벤트럭에서 내렸다. "실버우드. 저건 도대체 무슨 뜻이죠?" "빨리 내리라는 뜻 같은데요?" 나와 실버우드가 벤트럭에서 내리자 사내들은 침대를 들고 옮기기 시작 했다. "오토. 여기가 어딘지 이젠 좀 말해주지 그래요?" 조수석에서 내린 오토를 보자 실버우드가 말했다. 오토는 실버우드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아무 말도 안하겠다는 뜻일까? "저 쪽입니다." 오토가 손으로 벤트럭 앞쪽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그곳에는 이 층 콘크 리트로 만들어진 안전가옥이 서 있었다. "이번에는 누구 안전가옥이지요? FHA? 어스폴?" "비류 씨. 죄송합니다. 이곳은 연지 화장품 안전가옥입니다." 오토가 말했다. "그렇군요." 실버우드는 오토의 말에 다 수긍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나는 도무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저, 오토. 미안하지만 알기 쉽게 설명 좀 해 주시겠습니까?" 내 물음에 오토는 다시 한 번 당황하는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제가 말씀 드릴게요. 비류 님." 실버우드가 말했다. "연지 화장품이 무슨 회사인지 아세요?" "글쎄요. 실버우드 씨가 쓰는 화장품 회사인가?" 나는 농담조로 이렇게 말했다. "아뇨. 아톰 아버지가 운영하는 회사에요." 나는 오토에게 어디로 가고있느냐고 물었을 때 왜 그렇게까지 당황했는 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오토같이 프로라는 자부심으로 살아가는 사람 이 고용주 아버지에게 도움을 요청한다는 건 어쩌면 참기 어려운 일이었 을 거였다. 하지만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 셈이 되었으니 나는 오토의 심정을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밤새도록, 아니, 제가 자는 동안까지 겨우 여기에 연락하고 있었던 거 예요?" 나는 오토에게 이렇게 물었다. 오토는 내 물음에 작은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다. "밤에는 일단 후버카를 버렸습니다. 그리고 근처에서 기다렸지요. 후버 카에 MS녀석들이 추척장치를 해 두었기를 빌면서요. 그리고 빔라이플로 무장한 일개 분대 병력이 후버카를 박살내는 걸 보았습니다." 일개분대? 빔 라이플? 전쟁이라도 치를 생각인가? "저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저와 부상자인 건만으로는 도저 히 맞설 도리가 없었습니다. 말씀 드렸지 않습니까. 저는 죽는 게 두렵다 고." 오토의 목소리는 잔뜩 풀이 죽어있었다. 마침 노을을 타고 불어온 바람 이 오토의 생머리 가발을 흔들고 지나갔다. 물론 가발이 벗겨지거나 하지 는 않았지만, 노을을 받은 오토의 얼굴에는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었 다. "녀석들이 그렇게까지 우리를 추적하고 있다면 아무리 도망쳐봐야 소용 없을 것 같았습니다.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오토는 꼭 내가 고용주라도 되는 것 처럼 정중하게 말했다. "일단 들어가시죠."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 중 하나가 우리에게 말했고, 나와 실버우드, 그 리고 아톰은 그 검은 양복을 따라서 안가로 향했다. 나는 검은 양복의 사 내에게 그건 지급되는 건지 개인 돈으로 산 것인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결 국 그만 두었다. 농담이나 던지기에는 분위기가 너무 내려앉아 있었다. 노을은 언덕의 저편으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우리는 안가의 거실에 앉아서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곱상하게 생긴 사내가 차를 권했고, 나와 실버우드는 커피를, 그리고 오토는 냉수를 한 잔 부탁했다. 곱상하게 생긴 사내가 가져다준 찻잔이 다 빌쯤 해서 아톰 의 아버지가 들어왔다. 아톰의 아버지는 거인이라는 느낌이 들만큼 장대한 기골을 가진 사람이 었다. 키는 오토보다 머리 두 개는 더 컸고, 흰머리가 듬성듬성 섞여있는 머리를 아주 짧게 깎은, 연지 화장품 회장이라는 느낌보다는 야전 사령관 같은 인상의 사람이었다. 만약 정장이 아니라 야전 점퍼같은 것을 입고 있었으면 정말로 군인이라고 생각했을 지도 몰랐다. 아톰의 아버지가 들어오자 오토가 자리에서 일어났고, 나와 실버우드도 자리에서 따라서 일어났다. 아톰의 아버지는 우리에게 앉으라는 말도 하 지 않고 대뜸 이렇게 소리쳤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건가!" 나는 그 우렁찬 목소리에 찔끔하고 놀라고 말았다. 실버우드도 그건 마 찬가지였는데, 나는 그 목소리가 오토를 향한 것이라는 걸 알고 내심 안 심했다. 오토는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회장이라는 사람은 다 저런 걸 까? 그래도 그렇지 아들이 고용한 사람인데 저렇게까지 소리를 지르다니. "아무리 변변치 않은 녀석이라고 해도 내 아들이야! 빌어먹을. 여기 물 이나 한 잔 가져오게. 그리고 앉아. 폭격이라도 해볼테면 해보라 그래. 여긴 까딱 없을테니까." 아톰의 아버지는 이렇게 말하고는 거실 소파에 털썩 주저앉듯이 몸을 묻었다. 소파가 삐걱하고 비명소리를 내질렀다. 나와 실버우드는 아톰의 아버지 눈치를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소파에 앉았다. "당신들은 FHA가 아니지?" 오토의 아버지가 물었다. 나는 최대한 여유를 가장해 예, 하고 대답했 지만 내 목소리는 갈라져 나왔다. 긴장이 되는지 목이 탔다. "뭐 FHA건 아니건 상관은 없지만. 그 건이라는 친구는 병실에 있지?" "예. 그렇습니다." 오토가 대답했다. "빌어먹을. 애시당초 녀석이 프로 게이머 운운 할 때 싹을 잘랐어야 했 어. 이렇게 내버려두는 게 아니었는데..." 회장쯤 되면 이렇게 예의가 없어도 되는 것일까? 오토의 아버지는 자신 의 소개도 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나는 난감한 기분으로 실버 우드를 바라보았는데, 그건 실버우드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자네는 실버우드, 맞지?" 회장이 실버우드에게 말했다. 실버우드는 내 귀에도 간신히 들릴만한 목소리로 그렇다고 말했다. "시시껄렁한 프로 게이머.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는 말 아나? 나, 그 말 일생동안 가슴에 새겨두고 살았네. 하지만 어떤 가문에도 나름대로 가문 의 전통과 명예가 있는 법일세." 무슨 말을 하려는지 회장은 짧은 머리를 한 손으로 넘기면서 말했다. 그때 곱상하게 생긴 사내가 냉수를 가지고 나타났고, 회장은 잔을 단 숨 에 비운 다음 이렇게 말을 이었다. "우리 연지 화장품은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다네. 백년도 넘는 전문 화 장품 회사로서의 자부심이 있지. 그런데 자식놈들 중에 같잖은 프로 게이 머 따위를 하겠다는 놈이 다 나타나다니. 그것 참." PRINTER/CAPTURE를 OFF 하시고 [ENTER] 를 누르십시오.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20666/21893 ━━━━━━━━━━━━━━━━━━━━━━━━━━━━━━━━━━━━━━━━ 제 목:[탐그루] 세이브와 로드의 정원 290 관련자료:없음 19/19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5-15 20:50 조회:1220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찬물을 들이키기는 했어도 흥분이 아직 가라앉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프로 게이머를 하겠다는 놈...이라니? 나는 버럭 화가 치밀어 올 랐다. 어스폴의 이진우 수사관도 저런 식으로 함부로 말한 적이 있었다. 나는 회장의 말이 끊어지기만을 기다렸다. "프로 게이머가 같잖다고 하셨습니까, 지금?" 그런데 의외였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들릴락 말락 하는 목소리로 대답 했던 실버우드였다. 실버우드가 말하자 회장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뭔가. 알량한 프로의 자존심인가? 좋아. 그럼 그건 내 사과하지. 이해 해 주게. 내가 원래 말을 좀 함부로 하는 편이니까. 하지만 자네도 아들 이 저지 경이 되었다고 생각해 보게." 회장은 일단 이렇게 실버우드의 말을 받은 다음 이렇게 말을 이었다. "우리 가문은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는 가문일세. 나는 내 아들 녀석들이 전부 다 우리 임직원이 되어 주기를 아주 오래 전부터 기대해 왔다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내 뜻을 전부 다 저버릴 줄 누가 알았겠는 가. 첫째 놈은 그래도 내 말 대로 했지. 그래서 지금 연지그룹 상무이사 로 있고. 하지만 둘 째 놈은 심해 탐험인지 하는 짓꺼리를 하다가 잠수병 으로 반병신이 되어 버렸네. 세 째 놈은 데모질이나 하다나 경찰 총에 맞 았고. 그리고 이번에는 넷째 놈이 FHA인지 뭔지 하는 짓거리를 하다가 완 전히 혼수상태라니. 내 말은 게이머가 나쁘다는 말이 아니네. 심해 탐험 도 좋고 데모질도 좋아. 하지만 기왕 할려면 잘 할 일이지 꼭 이렇게 내 속을 썩히니 하는 소리 아닌가. 여기 물 한 잔 더 주게." 곱상하게 생긴 사내가 물을 떠다주는 동안 오토는 고개를 숙이고 한 마 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 "내가 아들 녀석을 미워하느냐 하면 절대 그건 아니야. 솔직히 아들 녀 석이 해달라고만 했어도 뭐든 들어줬을 거라네. 하지만 어떻게 된 녀석들 이 나한테는 손 한 번 벌리지 않았으니 말이야. 그래서 나는 나대로 늘 녀석들을 챙겨 줬다네. 넷째도 그 FHA인지 뭔지 한다는 걸 알자마자 오토 를 붙여주었으니까." "저, 제가 듣기로는 오토는 아드님이 직접 어스넷에서 고른 분이었다 고..." 나는 이렇게 회장에게 물었다. 아톰이 했던 말이 기억났던 것이다. "맞아. 아들녀석이 직접 고르긴 골랐지. 하지만 아들이 고용할만한 사 람을 내가 먼저 고용해 놓았던 거야. 이미 차려진 밥상이었다는 말이지. 그렇게 신경을 써서 최고를 구해놓았는데... 자네가 보기엔 어떤지 몰라 도 오토는 이 바닥에서 최고 실력 있는 친구 중 하나야. 통일전쟁 참전용 사에, 무공훈장도 여럿 받았다네. 하지만 결과는 이렇게 되고 말았군." 오토는 숨소리조차 죽이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오토가 가지고 있을 프로로서의 자존심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고 있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 었다. "한 때는 넷째 놈 생각해서 게임 회사도 하나 만들까 하는 생각을 해 본 적도 있었다네. 가문의 전통과 명예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틀림없이 그 렇게 했을 거야. 하지만 게임 산업은 그렇지 않더군. 우리 가문의 전통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물건을 만든다는 것일세. 자네들도 알겠지 만 연지 화장품은 단일 품목으로는 세계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탄탄한 기업일세. 그리고 우리 연지 화장품은 수십억 세계 여성들에게 행복을 주 고 있고. 나는 그런 보람으로 늘 이렇게 살고 있다네." 회장은 이렇게 말하고는 찬물을 들이켰다. 그때 수행비서처럼 보이는 사내가 회장의 뒤편으로 다가와 회장에게 귓속말로 뭐라고 속삭였다. 회 장은 팔목 시계를 한 번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게임시장은 행복을 주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지 않다는 게 내가 내린 판단이었네. 게임 센터를 조사해 보라고 시켰더니 이건 완전히 놀이 동산 하고 다를 바가 없더군. 낚시에 스키에 비행기 운전에 디스코 텍에. 물론 거기 있던 사람들은 행복해 하는 것 같기는 했네. 하지만 그건 거짓 행복 이야. 나 어렸을 적에는 마당에서 친구들과 돌멩이 하나 가지고도 행복하 게 놀 수 있었다네. 그런데 그 돌멩이를 빼앗고 비싼 장난감을 팔아서 돈 을 번다? 내가 보기엔 그건 가짜 행복을 파는 일이었다네. 연지 화장품은 늘 고객을 위한 새로운 화장품을 개발하는 데에 주력하고 있지. 우리는 적어도 거짓 행복은 팔지 않아." 나는 뭔가 항변을 해야 겠다고 느꼈다. 아무래도 궤변인 것 같았다. 게 다가 팔목시계를 자꾸 들여다 보고 있는 회장의 모습을 보고있자니 서둘 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두 번 보고 받은 것만으로는 좀 성급한 판단 아닐까요? 음악을 좋아 하신다고 들었습니다만." 나는 일전에 아톰의 안가에서 들었던 기억을 더듬어서 말했다. 아톰은 클레식이 아버지 취향이라고 말해 준 적이 있었다. "그래. 클레식을 좋아하지. 요즘엔 그나마 많이 듣지도 못하지만." "그러시군요. 그렇다면 게임에 대해서 아드님과 대화 를나누어 보신 적 은 있으십니까?" 내 물음에 회장은 고개를 저었다. "언제부턴지 아들 녀석들은 하나같이 날 미워하더구만. 아무 얘기도 하 지 않고,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고... 난 좋은 아버지가 되고 싶었다네. 하지만 대화가 통하질 않으니 별 수 없더군." 회장은 거실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이렇게 속마음을 비추어 보여주었 다. 나는 기회가 남아있다고 생각했다. "말씀하신 게임 센터 이야기는 레포츠 게임 센터입니다. 음악에도 여러 가지가 있지 않습니까? 좋아하신다는 오래된 클레식이 있는가 하면 록이 나 팝, 그리고 댄스도 있는 거지요. 게임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 회장이 내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지 알아 보고 싶은 의도도 있었지만 조금이라도 내 말에 집중해 주길 바라는 마음 에서였다. "게임이 가정용 게임과 업소용 게임으로 양분 된 것은 지난 세기의 일 입니다. 아무래도 업소용 게임은 레포츠의 성격을 띄고 발전할 수밖에 없 었습니다. 가정용 게임과는 다른 방향이었지요. 말하자면 클래식 콘서트 가 있는 반면에 시끄러운 나이트 클럽도 있는 법이니까요." 회장은 내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내 비유가 마음에 들지 않 는 모양이었다. "내가 잘못 알고 있다는 말인가, 지금?" "하나만 보고 전부를 판단하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어." "나이트 클럽에 가보고 음악에 대해서 다 안다고 할 수는 없는 법이지 요. 시끄러운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는 사람도 있어야, 수준 높고 깊이 있는 음악을 듣는 사람도 있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런 넓은 폭을 갖추고 있어야 음악이 더 풍요해지지 않겠습니까?" 물론 나는 클래식이 수준 높은 음악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회장의 이해를 돕기 위해 굳이 이렇게 비유를 들었다 (가사가 없으면 클래식이라 고 생각하는 내가 클래식이 깊이가 있는지 없는지 알게 뭐람). "자네 말은 클레식에 비유할 만한 게임도 있다는 말처럼 들리는군." "그렇습니다. 그리고 프로로서의 자부심보다는 게임을 사랑하는 사람으 로서의 자부심이 제게는 더 큽니다." 내 말이 끝나자 회장은 잠시 미간을 찌푸리고서 생각에 잠긴 듯 했다. "폭의 문제라, 이거로군. 좋네. 한 번 생각해 보지." 뭘 생각해보겠다는 말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회장은 이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흥미로운 대화였네. 자네는 비류라고 하지? 보고 받은 적 있었네." 수행비서가 회장에게 다가와 또다시 뭐라고 소근거렸다. 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이민구야. 연지 화장품 회장이지. 다음에 다시 만날 수 있길 바 라겠네." 회장은 이렇게 말하고는 선뜻 손을 내밀어 나에게 악수를 청했다. 어쩐 지 게임에서 이긴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오늘 대화는 흥미로웠네. 좀 더 진작 이야기를 들었으면 좋았겠지만 시간이 너무 늦어버렸군. 나머지 대화는 저 친구들과 나누게." "저 친구들이라니요?" "곧 들어올 걸세. 그리고 오토. 자네는 아직 해줘야 할 일이 남아있을 걸세." 회장은 이렇게 말하고는 수행비서와 함께 거실을 나섰다. 오토는 알겠 다고 대답했다. 여전히 힘 없어 보이는 목소리였다. 그런데 저 친구들이 라니? 나는 회장이 나간 곳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낯익은 얼굴 둘이 서 있었다. "반갑군요, 비류 씨. 실버우드." 이진우 수사관이었다. "자네도 오래간 만이야, 오토." 이진우 수사관 옆에 서 있는 것은 유하린 수사관이었다. 여자 같은 이 름에 컴플렉스가 있는 것 같았던. 오토의 얼굴은 그나마 조금 기운을 차 린 듯 싶었다. 오토는 아마 게이머 처럼 적수가 될 만한 사람을 만났을 때만 기운이 나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어스폴 요원들 이 어떻게 여기에 온 건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회장이? 아니면, 설마, 오토가? "도대체 어떻게 여기에..." "비류 씨. 제가 불렀습니다." 오토가 말했다. 나는 잠시 동안 할 말을 잊었다.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 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어제 밤, 저는 MS사가 이대로 순순히 물러서지는 않을 거라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물론 빔무기로 중무장한 일개 분대 병력을 보냈다니 아마 다시 스티브 강의 얼굴을 보게 된다면 우리가 죽던가, 아니면 그쪽이 죽던가 둘 중 하 나일 것이라는 점은 나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도대체 왜 어스폴을..." "비류 씨. 저는 FHA 요원이 아닙니다. 저는 그저 퇴역 군인에, 고용된 경호원일 뿐이지요. 제가 아톰 씨를 지키지 못한 것은 전부 제 책임입니 다. 하지만 그렇게 된 것은 MS사의 불법적인 행동 때문이었습니다. 어찌 되었건 이제 사태는 간단히 개인적인 차원에서 끝낼 수 있는 수준의 문제 는 아닌 것 같다고 판단했습니다." 오토의 말은 맞는 것 같았다. 벌써 죽은 사람만 해도 몇 명인지. 하지 만 만약 어스폴에 알린다면 오토와 건, 특히 건이 어떻게 될지, 나는 걱 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유지 침입에 살인까지. 자칫 잘못하다가는 부패 정치인들과 함께 공개처형 당할 수도 있는 문제겠다 싶었다. "아,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비류 씨." 내 얼굴을 한 번 쓱 살피더니 이진우 수사관이 말했다. 이진우 수사관 의 목소리는 활기가 넘치고 있었다. "회장님과 부수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이야기가 끝난 상태입니다." "비공식적인 견해입니다만, 어떤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가 끝난 상태를 '거래를 마쳤다'고 한다고 들은 기억이 있군요." 이진우 수사관의 말을 유하린 수사관이 받아서 말했다. 나는 어떤 이야 기가 오갔는지 대충은 짐작 할 수 있었다. 오토는 프로답게 자신의 한계 를 인정했을 것이었다. 즉, 자신이 더 이상은 아톰을 지킬 수 없으며 또 한 아톰을 그 지경으로 만든 MS녀석들에게 복수 할 수도 없음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던 것이다. "그럼 이제 당신들이 MS사를 추적할 건가요? 그렇다면 무슨 혐의죠?" "아. 일단 천천히 이야기 하죠, 그런 문제는." 이진우 수사관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보다는 그 동안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비류 씨." 이진우 수사관은 웃음을 얼굴에서 지우지 않고 능글맞게 말하면서 쇼파 에 앉았다. 유하린 수사관도 이진우 수사관을 따라서 자리에 앉았다. "수고... 라니요?" "이나바머 건을 말씀드리고 있는 겁니다. 정말 많은 정보를 얻으셨더군 요. 게다가 남산타워에서 도망친 솜씨, 정말로 칭찬해 드리고 싶습니다." 이진우 수사관의 표정은 그저 웃고 있을 뿐이었다. 포커 페이스라고나 할까? 표정만 보아서는 이를 갈고 있는지 아니면 그저 흘려버렸는지 나로 서는 알 길이 없었다. "아무리 프로라고 해도 그렇게까지 당할 줄은 몰랐습니다. 덕분에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만. 먼저 축하드립니다. 비류 씨에게 남아있던 혐의 는 모두 사라졌습니다. 여기서 공식적으로 알려 드리지요." 이진우 수사관이 이렇게 순순히 나오다니. 나는 이진우 수사관이 뭔가 숨기고 있을 게 틀림없어서 잠자코 숨을 죽이고 있었다. "하지만 좋지 않은 소식도 있습니다. 만델라에 관련된 이야기입니다만. 참. 만델라가 아버지시지요? 들으시겠습니까?" 이진우 수사관이 말했다. 누구 약올릴 일 있나? 뻔히 알고 있는 사실 을, 아니 아버지 때문에 어쩌면 나를 여기에 끌어들였는지도 모를 사람이 저런 소리를 해 대다니. 나는 부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꾹 참았다. 어차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어도 이야기 할 게 뻔하다 싶었다. "그 귀하신 몸께서 직접 입국을 하셨다는 정보가 입수되었습니다." 이진우 수사관의 표정은 내 반응이 어떤가 한 번 보자는 식이었다. 나 는 아버지가 입국했다는 사실을 어스폴이 알고 있다는 사실에 일단 놀라 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는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입국했다가 알리고 싶은 사람에게만 자신의 입국을 알리곤 했던 것이다. 그나저나 이진우 수 사관. 사람을 괴롭히면서 즐거운 표정을 짓다니. 정말 괴팍한 사람이구나 싶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20667/21893 ━━━━━━━━━━━━━━━━━━━━━━━━━━━━━━━━━━━━━━━━ 제 목:[탐그루] 세이브와 로드의 정원 291 관련자료:없음 20/20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5-15 20:51 조회:1115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원래 만델라는 절대 들키지 않을 방법으로 입국했다가는 사라지곤 했 지요. 언제나 그랬습니다만. 이번에는 예외였습니다. 좀 뜻밖이더군요. 뭔가 급박한 일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번에는 유하린 수사관이 희죽거리면서 내 신경을 건드렸다. 아버지에 게 이리듐 폰으로 전화했던 것이 실수였을까. 어쩌면 아버지는 내 문제라 는 생각에 프로답지 못한 행동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 다. 나 때문에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한다면... 나는 머리카 락이 온통 다 곤두서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내가 아버지에게 전화했던 곳은 공중전화였고 내가 전화하는 걸 아는 사람은 FHA, 그 중에서도 리파 이와 아톰 뿐일텐데. 나는 오토의 반응을 살펴보았다. 오토는 유하린 수 사관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둘이 지난 번에 만났을 때 남아있는 승부의 빚을 생각하고 있는 걸까. 오토의 표정도 이진우 수사관 못지 않 은 포커페이스구나 싶었다. "저하고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오토의 표정에서 힘을 얻은 나는 이렇게 말했다. 물론 나야 오토만큼 완벽한 표정관리는 불가능하겠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봐야겠 다는 생각이었다. 이대로 만만하게 당하고 있어서는 안될 것 같았다. "뭐, 좋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실 수도 있지요. 하지만 만델라는 여러 사건에 연루되어서 찾고 있는 인물입니다. 아마 조만간 체포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체포가 어렵다면... 알고 계시겠지만 여러 사건의 중 요 참고인으로 소환할 수야 있겠지요. 어떻습니까?" "도대체 무슨 소리를 듣고 싶으신 겁니까, 이진우 수사관." 오토였다. 한동안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았던 오토는 이렇게 이진우 수사관에게 물었다. 기분 나쁘다는 투는 아니었다. "사실 만델라 건은 제 욕심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그럴 때가 있 습니다. 하나를 파고 들어가다 보면 다른 하나를 만나게 되고, 그러면 그 다른 하나를 추적하기 시작하고, 그러다가 또 하나를 찾아내고... 말하자 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수사 방식이 통할 때가 가끔은 있지요. 물론 상부 에서는 그런 수사 방식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참고로 말씀 드리죠. 지금 저와 유 수사관은 이나바머 사건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만델 라 건과는 거리가 있다는 말씀이지요. 물론 만델라 건을 전문으로 담당하 고 있는 분들도 꽤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비류 씨의 존재 여부도, 또한 여기에 이렇게 불리 한 위치에 있다는 것도 모르지요." "불리한 위치라고 하셨습니까, 지금? 제가 듣기로는 비류 씨는 이제 혐 의를 벗으셨다는 걸로 들었습니다만." 오토가 내 대신 유하린 수사관에게 물었다. 유하린 수사관은 이제 오토 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예. 그렇지요. 하지만 우리가 비류 씨의 존재를 알린다면 어떻게 될까 요? 물론 저희에게는 다른 어스폴 팀의 수사를 도울 의무가 있습니다. 다 시 말해서 양심에 가책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겁니다. 비류 씨의 소재를 알 려주지 않는다면요." 유하린 수사관은 미소를 지었는데, 나는 그 미소가 꼭 쥐를 앞에 둔 고 양이가 짓는 미소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몸서리가 다 쳐질 지경이었다. "지금 절 협박하시는 겁니까?" 나는 또박또박 끊어서 이렇게 말했다. 화를 내고 있지는 않았지만 이만 하면 화가 나 있다는 걸 눈치챌 만도 하다 싶었다. "아닙니다. 상황을 설명해 드린 것뿐입니다." "저희 방식대로요." 나는 그 방식이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고 있었다. "알아요. 사람을 괴롭히는 방식이란는 거." 나는 입술을 비죽 내밀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거, 한 방 맞았군요. 하하하." 이진우 수사관은 가식적이라는 게 뻔히 드러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지 않았다면 비류 씨는 우리를 돕지 않으 실 것 같았습니다. 예. 맞습니다, 직업의식." 가식적인 웃음이었는지는 몰라도 꽤나 솔직한 태도였다. 나는 영 내키 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일단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봐야 겠다 싶었다. "혐의를 벗었다면 그걸로 끝 아닌가요?" "예. 하지만 일단 시작하신 일은 끝까지 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게 프 로답지 않을까요? 일단 개입한 일에는 마무리까지 책임진다." "미안하지만 저는 게임의 프로지 수사의 프로가 아닌데요." "하하하. 그렇군요. 참. 하지만 저는 지난 번 비류 씨와 대화를 나눈 후에 프로 게이머에대해서 많이 공부했습니다. 소드앤매직 온라인은 시나 리오 모드도 재미있더군요." 나는 이진우 수사관의 말에서 프로 수사관이란 어떤 사람인지 대충 감 을 잡을 수 있었다. 진짜로 소드앤매직을 해 보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이진우 수사관은 적어도 자신이 추적하고 있는 사람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가를 철저히 조사하는 사람이었다. "비류 씨. 이나바머가 부루터스라는 사실은 사실 이제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이진우 수사관이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무 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스폴에서 이나바머에게 엄청난 현상금까지 거신 것,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얼마전 이나바머의 수법이 잔혹해진 덕분이지요. 지금껏 해 왔던 테러와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테러였습니다, 이나바머의 수법은." 나는 병원에 정전이 된 일과 금융사고, 화제 등을 떠올려 보았다. "그런데 왜 이나바머가 부루터스라는 사실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거 지요?" 오토는 이미 들은 이야기인지 별다른 표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나 는 실버우드를 슬적 돌아보았다. 실버우드는 별 흥미가 없다는 듯이 손톱 을 만지작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사건의 시작을 돌아보지요. 제가 이 사건에 흥미를 가지게 된 것은 비 류 씨의 게임 친구 오소리 닉을 쓰는 유민철 씨의 살해사건부터였습니다. 그런데 왜 유민철 씨를 죽였을까요, 이나바머는?" 이진우 수사관이 묻는 순간, 나는 머리를 감싸고 있던 고리가 하나 벗 겨져 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계속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도대체 왜 이나바머, 부루터스는 유민철을 살해했던 것인 지 단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건 유민철이 알아서는 안될 것을 추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꽤 많은 정보를 얻어 낼 수 있었지요. 그건 바로 비류 씨, 당신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이진우 수사관이 말했다. 나는 이진우 수사관의 말에 집중하지 않을 수 가 없었다. "그리고 MS사에서 대규모의 병력을 보내 추적하고 있다는 사실도 하나 의 단서가 되어 주었지요. 사실 분대 병력을 구성해서 보내는 일은 도박 에 가깝거든요.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만." 이진우 수사관은 이렇게 말하고는 천천히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모든 일의 공통분모는 바로 비류 씨였습니다. 이나바머도, 그리고 지금의 MS사도 말이지요." 나? 나는 손가락으로 내 얼굴을 가리키면서 얼굴에서 땀방울이라도 떨 어뜨리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물론 나야 만화 주인공이 아니니까 그럴 수는 없었지만). "하나의 가설이 있습니다. 비류 씨가 바로 MS사에서 비밀리에 제작하고 있는 서치로봇과 관련이 있는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을까 하는 가설입니 다." "저는 그런 거 모르는데요. 그리고 가설을 가지고 너무 큰 모험을 하시 는 건 아닌가요?" 나는 이진우 수사관의 말에 뭔가 집히는 게 있기는 했지만 일단 이렇게 시치미를 떼었다. 이진우 수사관의 손에서 놀아날 수만은 없었기 때문이 었다. "지동설도 처음에는 모두가 허황되고 생각했던 가설이었습니다." 이진우 수사관은 일단 이렇게 내 말을 받아내고는 다시 말을 이어나갔 다. "그리고 정보라는 게 그렇습니다. 아주 중요한 정보라고 해도 일부만 가지고 있다면 무슨 정보인지 본인도 모르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지요. 우리는 보통 폭탄의 예를 듭니다. 다이너마이트를 만드는 기술을 MS사에 서 가지고 있다고 가정해 보지요. 그런데 비류 씨가 우연히 모래와 심지 를 만드는 기술을 알아냈다고 합시다. 니트로글리세린 없이 모래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고, 심지도 그저 불장난 할 때 말고는 별 필요가 없지 요. 하지만 MS사 입장에서는 중요한 정보가 흘러나간 셈이 되는 것입니 다." "게다가 니트로글리세린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사람과 언제든지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면 그 위험도는 더욱 높아지지요." 나는 이진우 수사관이 말하는 게 무엇인지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 서치로봇에 대한 정보는 부루터스가 시디로 가지고 있어요." 하지만 나는 이런 식으로 일단 빠져나가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이 상황 에서 세헤라자드의 이야기를 꺼냈다가는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부루터스가 가지고 있는 정보는 바로 니트로글리세린에 해당하 는 건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모래와 심지 없이는 매우 위험한 정보일지도 모르지요. 니트로글리세린은 대단히 불안정한 물질이어서 모래에 섞지 않 으면 작은 충격에도 폭발하니까요." "이진우 수사관님. 그렇다면 제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부루터스를 만나십시오. 그러면 됩니다. 만나기만 하시면 저희가 체포 는 책임지지요." 나는 이 말을 듣는 순간 맥이 탁 풀려버렸다. 그렇게 간단하게 잡을 수 있는 일이라면 진작에 부루터스를 넘겼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저는 부루터스를 만난 적이 없어요. 게다가 지금까지 만난 부 루터스도 전부다 통신상으로 만난 것뿐이라고요." "알고 있습니다." 이진우 수사관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말했다. "여기 유 수사관은 한 때 어스넷에서 헤커들을 추적하는 일을 맡았던 수사관입니다. 그 방면으로는 매우 유능한 수사관이지요." 유하린 수사관은 고개를 까딱해 보였다. 꼭 소개받은 영화배우 같은 모 습이었다. "하지만 추적은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장소에서 밖에 할 수 없는 것 아 닌가요?" "예. 그걸 지금부터 알려드리죠." 이진우 수사관은 이렇게 말하고는 품에서 봉투를 하나 꺼내었다. "거기에 보시면 주소가 적혀있습니다. 부루터스의 약점이 하나 있다는 걸 우리는 알아낼 수 있었지요. 그 주소에 바로 부루터스의 약점이 있습 니다." "설마..." 지금껏 입을 다물고 있었던 실버우드가 입을 열었다. 나는 그 약점이 무엇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켄이로군요." "어려운 게임을 많이 해서 그런지 몰라도 머리가 빨리 돌아가시는 군 요." 비웃는 듯한 얼굴을 하고서 이진우 수사관이 나에게 말했다. 나는 이진 우 수사관의 악취미가 발동하기 전에 얼른 대화를 끝마치는 편이 낫겠다 고 생각했다. "제가 할 일은 뭡니까?" "그곳으로 가서 켄과 함께 기다리세요. 그러면 됩니다." 유하린 수사관이 이진우 수사관 대신 대답을 해주었다. 이진우 수사관 은 이미 밖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던 중이었다. "부루터스는 틀림없이 비류 씨를 찾아낼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 처럼요. 솔직히 부루터스가 어떤 방법으로 비류 씨를 찾아냈는지 우리 는 모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알게 되겠지요." "어쩌면 비류 씨도 모르고 있는 그 심지와 모래때문에 찾아냈는지도 모 르지요. 그것까지 알아낼 수 있다면 좋겠지만요." 이진우 수사관은 돌아서서 키득거리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악취미로군. 진짜 악취미야. 나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그 추리력만큼은 인 정해 줘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헤라자드가 어떤 방법으 로건 부루터스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는 사실은 거의 분명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부루터스가 저를 찾아내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나는 이렇게 물었다. "우리가 알아서 할겁니다. 그리고 만약 돌발상황이 벌어지더라도 걱정 하지 마십시오. 오토가 도울 겁니다. 어떻게든." 오토와 함께 가란 말이로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아, 그리고 한 가지." 밖으로 나가기 전에 이진우 수사관이 말했다. "폭발하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마지막 순간까지 이진우 수사관은 악취미를 드러냈다. 하지만 나는 그 폭발한다는 것이 내가 가지고 있는 모래와 심지인지, 아니면 이나바머의 테러를 뜻하는 말인지도 구분할 수가 없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20668/21893 ━━━━━━━━━━━━━━━━━━━━━━━━━━━━━━━━━━━━━━━━ 제 목:[탐그루] 세이브와 로드의 정원 292 관련자료:없음 21/21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5-15 20:51 조회:1218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이진우 수사관이 넘겨준 종이에 적혀 있는 주소는 남쪽 끝에 있는 작은 고아원이었다. 정부 보조금과 매년 들어오는 불우이웃돕기 성금으로 근근 히 이어가고 있는, 다시 말해서 매를 맞으면서 노동력을 착취당하는 고아 원은 아니었지만, 그 못지 않게 열악한 환경을 가지고 있는 고아원이었다 는 말이다. 이동은 보통 배기 엔진을 가지고 있는 차로 했다. 후버카는 그런 외진 곳에서 너무 눈에 뜨일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운전은 오토가 했고 실버 우드도 함께 따라왔다. 실버우드가 따라온 것은 별다른 의미가 있는 건 아니었다. 단지 일의 결말을 지켜보고 싶다는 실버우드의 의견을 존중해 준 것뿐이었다. 그런데 나는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그것은 왜 오토가 우리와 함 께 동행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아톰의 아버지와 어스폴 사이에 모종 의 거래가 있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지만 그 거래의 내용이 뭔지, 나는 여전히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오토에게 묻지 않기로 했다. 아톰의 아버지, 그러니까 고용주에게 핀잔을 들은 이후로 오토는 말수가 더 적어졌고, 게다가 신경이 날카로워졌기 때문이었다. 함부로 말 을 걸었다가는 턱이 날아가 버릴 위험도 있었고, 어쩌면 내가 그 이유를 알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오토에게 묻지 않는 데 일조했다. 어쩌 면 나는 모래와 심지를 손에 들고서도 이게 뭔지 전혀 모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건 씨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내가 물을 수 있었던 것은 고작 이 정도였다. 내 질문에 오토는 한참동 안 대답을 하지 않아서 꼭 화가 난 사람처럼 보였다. "건은 안전한 곳에 있습니다." 내가 동료를 팔아 넘길 사람 같소, 뭐 이런 말투였다. 고아원에 닿은 것은 이진우 수사관을 만난 다음날 저녁이었다. 원장과 는 이미 이야기가 되어 있었던 듯, 원장은 우리를 보자 마자 이렇게 말했 다. "하여간 도와주시기로 하셨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마음 같아서는 노래 라도 한 곡 불러드리고 싶은 심정이로군요." 원장은 사람 좋아보이는 할아버지였다. 말할 때 마다 생겨나는 눈가의 주름이 잔정이 많은 사람인 것 같다는 생각을 들게 만들었다. 원장은 친 절하게도 우리에게 우리 셋이 묵을 방 세 개와 식당, 그리고 화장실과 욕 실의 위치를 일일이 알려주었다. 아마도 우리를 무슨 재벌 2세 독지가쯤 으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식사는 우리를 위해서 특별히 준비된 것이 나오는 모양이었다. 우리 식 사는 고아들의 식사와 양은 물론이고 질도 완전히 격이 달랐다. 물론 그 렇다고는 해도 식당에서 먹을수 있는 싸구려 밥보다도 못한 식사이긴 했 지만. 켄은 건강해 보였다. 어차피 어디 가도 적응하지 못할 자폐아이기는 했 지만 나름대로 이곳에 적응하는 방식을 배운 모양이었다. 켄은 더 이상 원주율을 입으로 외우고 있지는 않았다. 그저 노트에 숫자를 끊임없이 적 어 내려갈 뿐이었다. 사람도 알아보지 못하고 그런 꼴로 있는 켄이 안쓰 러웠다. 바깥세상과의 유일한 통로였던 소드앤매직 온라인도 하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나마 원래 있던 고아원으로 가지 않고 이곳 국립 고아원으로 온 게 다행이에요." 노트에 숫자를 적어 내려가고 있는 켄을 바라보면서 실버우드가 말했 다. 지난 번 원장은 돈을 더 이상 벌지 못하게 된 것이 확실해지자 켄을 어스폴에게 맡기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했던 모양이었다. 다행히도 그 의 도는 나중에 가서 이진우 수사관의 의도와 맞게 된 셈이 되었지만 말이다 (내가 다행이라고 한 것은 세금이 허비된 것은 아니라는 뜻에서이다). "그럼 이제 어쩌지요?" "비류 씨. 우리는 이곳에 봉사활동을 온 독지가입니다." 오토가 친절하게도 우리의 역할을 말해주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곳에 온 첫날부터 아이들을 돌보아 주었다.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은 물 론이고 머리가 가려우면 벽 모서리에 머리를 비벼대는 아이들이 있는 곳 에서 보낸 봉사활동은 화가 날 정도로 힘이 들었다. 어쩌면 이런 일 조차 도 이진우 수사관의 악취미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내 방은 이진우 수사관이 부탁한 것인지, 아니면 회장이 부탁한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전화기와 텔레비전이 준비되어 있었다. 아마도 부루터스 가 나와 연락을 하기 위해서 이용한 것이라 미리 준비를 한 모양이었다. 나는 처음에 내가 잘 방에 텔레비전과 전화기가 설치되어 있다는 사실이 그렇게 놀라울 수가 없었다. 이 고아원에는 원장실의 전화 한 대와 강당 (이라기 보다는 조금 큰 놀이방 수준이지만)에 있는 텔레비전 외에는 그 흔한 컴퓨터 한 대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날 밤, 나는 방에서 세헤라자드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미안. 답답했지." 나는 랩탑을 켜자마자 진심으로 이렇게 말했다. 어스넷을 자유롭게 돌 아다니던 세헤라자드가 이런 랩탑에 갖혀 있게 되었으니 얼마나 답답할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세헤라자드의 반응은 예상 밖이었다. "아뇨. 아무리 좁은 곳이라고 해도 우주와 닿아있는데 뭐가 답답하겠어 요." 세헤라자드의 목소리는 진심이 분명했다. 말하고 있는 세헤라자드의 목 소리는 밝았다. "너, 철학자 다 되었네." 나는 이렇게 반농담조로 말을 하기는 했지만, 세헤라자드가 변한 건 사 실이었다. 세헤라자드는 처음에 보았던 세헤라자드와 말투도, 하는 행동 도 많이 달라져 있었다. 어차피 에뮬레이션 된 영혼이 변하지 않고 있는 걸 기대하는 게 무리일 수도 있겠지만, 누가 알겠는가. 세헤라자드 말고 나는 에뮬레이션 된 영혼을 만나 본 적이 없으니까 말이다. "글쎄요. 그것보다는 뭔가를 알게 되었다고 말하는 편이 낫겠지요. 제 가 추었던 춤, 기억하세요?" 세헤라자드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날 세헤라자드 가 보여주었던 춤은 세상에 태어나서 단 한번도 보지 못한 춤이었다. "제가 있는 이곳은 또 하나의 세계랍니다. 이 세계와 공존하고 있으면 서 또한 따로 떨어져 있는." "거긴 뭐 다른 냄새라도 나는 모양이지?" 나는 자리에 누우면서 말했다. 온돌에는 오래간 만에 누워보는 것이라 아침에 일어나면 허리가 아플지도 모르겠다는 걱정이 들었다. "그렇지요, 정확한 말씀이세요. 이곳은 다른 냄새가 있어요." 세헤라자드의 들떠있는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나는 소름이 돋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가벼운 전류가 몸을 타고 위에서 아래로 흘러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세헤라자드가 설마 미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만큼 세헤 라자드의 태도는 이상했다. "게임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걸 들었어요. 게임이 발전시킨 사람들의 시 공간 이야기, 저도 읽은 적이 있어요. 사실 그런 이론은 말씀하셨듯이 지 난 세기부터 있어왔던 것이지요. 어쩌면 그런 이론을 내 놓은 사람들은 다른 차원의 세계가 이 세계와 공존할 수 있다는 사실을 꿈에서라도 보았 는지도 모르지요. 꿈 또한 또 하나의 세계니까요." 나는 세헤라자드가 이런 맥락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전에도 들은 적이 있었다. 세헤라자드는 세상의 시간과 공간이 무한하다면 모든 이야기는 실제로 존재할 수 있으며, 만약 그렇다면 그 이야기는 바로 현실과 공존 하는 또 다른 차원일 것이라는 맥락의 이야기를 들려 준 적이 있었다. 하 지만 그 때도 그랬고 지금도 나는 그런 말을 인정하기가 힘이 들었다. "그만 두지. 어쩌면 네 이야기속의 세상이 진짜 세상이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이야기 속의 세상일지도 모른다는 말 같은 건 별로 듣고 싶지 않아." 나는 이불을 끌어당기면서 말했다. 사실 프로게이머가 되고 싶다는 소 박한 꿈을 가지고 살기에도 쉽지 않은 세상이었다. "오해의 소지가 있었나 보네요. 저는 그런 뜻으로만 드린 말씀은 아니 었는데. 실버우드와 게임 이야기 하셨던 거 들었어요. 저는 아주 흥미롭 던걸요. 그 때 비류 님께서도 말씀하셨잖아요. 게임이 가지고 있는 여러 차원의 시간이 동시에 존재 할 수 있다는 개념을요." "그거야 게임이지. 나는 여기에 살고 있어." 나는 세헤라자드에게 간략하게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세헤라자드는 멈 추지 않았다. "영화를 보고 사람들은 시간이 거꾸로 흐른다는 개념을 알게 되었지요. 하지만 누가 알겠어요? 어쩌면 이 순간 정말 시간이 거꾸로 흐르고 있을 지." "그만 둬. 머리 터지겠다." 안그래도 아버지 생각과 이진우 수사관 생각 때문에 머리가 터질 지경 인데 세헤라자드가 나에게 너무한다 싶었다. "아뇨. 저는 상상해요. 떠버리가 아닌 리퍼와 맞서는 오토의 모습을요. 공이가 빈 약실을 두 번 울리고, 리퍼의 빔이 발사되지요. 그리고 이야기 는 거기서 끝나요." "어떻게 알았지?" 세헤라자드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몸을 일으켜 세우면서 말했다. 랩 탑은 분명 거기에 있었지만 세헤라자드는 거기에 없었는데. "저는 다만 선택하지 않은 길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거에요. 기억하시 죠? 실버우드 님이 말한 한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 이 야기요. 어떤 곳에서 비류 님과 저는 친구지만 또 어떤 곳에서는 원수이 지요." "그래. 다른 차원 이야기는 됐어. 내가 묻는 건 어떻게 알았냐는 거잖 아, 지금." "그 자리에 존재하는 사람만 그 자리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고 들을 수 있는 건 비류 님이 살고 있는 세상의 법칙이에요. 제가 살고 있는 이곳과 는 다르지요." 세헤라자드가 말했다. "여기는 모든 시간과 공간이 무한히 존재하는 곳이랍니다. 사람들은 이 곳을 단지 어스넷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지만, 실은 그런 말로 쉽게 표현할 수 있는 곳이 아니지요. 다시 말해서 이곳은 또다른 우주라고요." 세헤라자드의 말은 이해가 잘 가질 않았다. "그럼 도대체 어떤 곳이야, 그곳은?" "저도 처음 영혼이 에물레이션 되어서 이 랩탑 안에서 탄생했을 때, 저 는 그저 전에 살던 세상과 같은 곳이라고만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렇지 않았어요. 처음으로 어스넷을 다녀오고, 또 다른 차원의 세상을 경험하는 순간, 저는 변했지요. 아니, 변했다니 보다는 깨달았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 같네요. 이 세상은 원래 존재하고 있었어요. 다만 제가 모르고 있던 것뿐이었지요." 나는 세헤라자드의 말을 도무지 이해 할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나는 세헤라자드가 느끼고 있는 것이 어떤 것인지 감히 생각도 해 보지 못했 다. 그저 다른 차원의 생각과 느낌일 것이라는 막연한 느낌만 가지고 있 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소름이 돋고 있는 나 자신을 보니 세헤라 자드는 정말로 다른 차원의 존재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 다. 나는 상상해 보았다. 수많은 세헤라자드와 같은 영혼들, 그리고 그들이 부유하고 있는 또 다른 차원의 세상. 적어도 지금 생글거리는 웃음을 짓 고 있는 세헤라자드는 더 이상 내 앞에서 웃고만 있는 미소녀 게임의 한 장면은 아니었다. "비류 님. 왜 아톰의 아버지가 오토를 이곳에 함께 보냈는 줄 아세요? 또 이진우 수사관이 계속 말을 빙빙 돌리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지 아세요?" 잠시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는데 세헤라자드가 나에게 물었다. 나는 아 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세헤라자드의 얼굴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 알고 있었니?" 나는 한참이 지나도록 세헤라자드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이렇게 조심 스럽게 물어보았다. 세헤라자드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예." 예라니? 알면서도 알려주지 않았다는 말인가, 그럼? 하지만 나는 대뜸 화부터 낸다던가 하는 짓은 하지 않았다. "왜, 얘기 해 주지 않았어?" 나로서는 최선을 다한 물음이었다. 성질 급한 사람 같았으면 당장 랩탑 을 집어던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대답해 줄 분이 있어요." 세헤라자드는 이렇게 말하고는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마치 액정 모니 터가 꺼져 버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랩탑의 전원이 빠진 게 아닌가 다시 한 번 확인해 보았다. 하지만 전원은 그대로였다. 나는 그냥 기다리 기로 마음먹었다. 세헤라자드를 믿어볼 수밖에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었다. 지금까지 몇 번이고 돌아왔던 세헤라자드였다. 아무리 변했다고 해 도 그런 부분은 믿을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화면은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내 눈 을 의심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에는 낯익은 얼굴이 나타나 있었던 것이다. "...젯나이트?" 나는 분명히 기억 할 수 있었다. 나에게 랩탑을 건네주었을 때 모습 그 대로, 젯나이트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딘지 쑥스러워 하고 있는 듯 한 얼굴을 하고서. "먼저 영혼의 에뮬레이터를 되찾아 준 것, 잘 했다고 말해줘야 겠군. 비록 조금 늦기는 했지만 말일세." 젯나이트는 세헤라자드가 했던 말과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영혼의 에 뮬레이터는 이제 MS사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젯나이트의 얼굴에서 젯나 이트가 그다지 안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세헤라자드는요?" "세헤라자드는 잠시 자리를 비켜 주었네. 사실 둘 다 나타날 수도 있었 지만 그렇게 되면 자네에게 혼란이 올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아무래도 자 네는 상식적인 사람이니까." 나는 지금 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을 나름대로 해석해 보려고 있 는 머리 없는 머리를 다 굴려 보았다. 다행히도 내 머리의 뉴런들이 제대 로 연결이 되었는지, 그리 오래지 않아서 나는 해답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젯나이트에게 물었다. "언제부터였습니까?" "그러니까 자네가 이 랩탑에 전원을 연결하는 순간이었네. 그때부터 잠 자코 랩탑 구석에서 쉬고 있었지." "아니요. 지금 제가 물어 본 건 도대체 언제부터 에뮬레이션 되었냐는 질문이에요." 내가 이렇게 고쳐서 묻자 젯나이트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나를 물 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래. 자네 말이 맞네. 나는 내 영혼을 에뮬레이션 했네. 결코 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길이었지. 선택의 여지가 있었다면 말이야." "선택의 여지요?"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20706/21893 ━━━━━━━━━━━━━━━━━━━━━━━━━━━━━━━━━━━━━━━━ 제 목:[탐그루] 세이브와 로드의 정원 293 관련자료:없음 15/15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5-16 20:30 조회:1274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그래. 나는 내가 뿌린 씨앗을 다시 거두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네. 다행 히도 내 생각은 옳았어. 아직 그렇게 늦은 건 아니니까 말이야." "잠깐만요. 좀 차근차근히 설명해 주세요." "그래. 그렇게 하지." 젯나이트는 이렇게 말하고는 사이를 둔 다음 말을 이었다. 아마 내게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주려는 모양이다, 하고 나는 생각했다. "내가 영혼의 에뮬레이터를 만들어 낸 후, 그리 오래지 않아서 나는 내 가 너무나도 큰 실수를 저질렀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네. 나는 우연한 기회에 부루터스가 바로 MS사에서 사이버 인공생명체인 용을 만들고 있다 는 걸 알 수 있었네. 부루터스와 연락을 끊고 지내지 않은 덕분이었지." "MS사에서 용을 만든 시기와 영혼의 에뮬레이터가 완성된 시기가 일치 한다는 게 놀랍네요." "놀랍다니! MS사는 어마어마한 자본을 쏟아 붓고, 수도 없는 프로그래 머를 고용했다네. 내가 영혼의 에뮬레이터를 개발한 시간이 훨씬 짧았 지." 프로그래머로서의 자존심일까. 나는 젯나이트의 말을 일단 긍정하기로 했다. "내가 듣기로 용 개발 팀 휴게실에는 골라 먹을 수 있는 아이스크림이 다섯 가지 종류가 준비되어 있었다고 하더군. 그 정도의 돈을 쏟아 부었 단 말이야. 내 말이 이해가 가는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한 자존심이로군 하는 생각을 하면서. "부르터스는 나보다 나중에 에뮬레이션 되었네. 부루터스는 내가 MS사 를 막게 위해서 영혼을 에뮬레이션 했다는 말을 듣고, 자신도 나를 돕겠 다고 말했네. 물론 나는 그런 부루터스의 의견을 고맙게 받아들였고. 하 지만 일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았네. 이 역시 내가 저지른 또 하나의 실 수가 될 줄은 몰랐지만..." 젯나이트는 미간을 엄지손가락으로 누르면서 이렇게 말했다. 뭔가 골똘 히 생각에 잠겨있는 모습이었다. "먼저 말 해주지. 일단 영혼이 캡처 되는 것은 아무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네. 하지만 일단 그 캡처된 영혼이 에뮬레이션 되면, 그 순간 영혼 의 원 주인, 다시 말해 캡처된 영혼과 함께 하고있던 육체는 활동을 정지 한다네." 젯나이트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그렇다면 아톰과 리파이도..." "그렇지. 그 둘은 MS사의 실험 도구가 되었다네. 사실 MS사도 이런 결 과를 가지고 올 줄은 몰랐을 거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네. 만약 이런 문제 가 생길 거라는 걸 예측했다면 실험도구가 되어 줄 인간은 얼마든지 있었 을 테니까 말이야. 길거리의 부랑자나 사형수, 시한부 인생을 사는 사람 같은 사람 말일세." "그렇다면 오토가 이곳에 함께 온 이유가 거기에 있나요?" "그렇지. 회장은 아톰이 어떻게든 다시 돌아올 수 있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네. 그래서 이곳에서 부루터스를 잡게 되면 다시 영혼을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되리라 생각하고서 말일세." "그게 가능 한가요?" "가능 할까... 글쎄. 그건 아무도 모르지. 나 자신도 모르고 있으니까 말일세." 젯나이트의 말은 여기서 잠시 멈추었다. 나는 그제야 창 밖을 한 번 돌 아볼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창 밖으로는 어둠이 밀려들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짐승의 날개가 세상을 덮듯, 어둠은 그렇게 창 밖의 세상에 내려 앉고 있었다. "이진우 수사관은 다 알고 있었겠군요." "물론이지. 아마 어스폴 고위층도 지금쯤은 다 알게 되었을 거라고 생 각하네." 나는 이진우 수사관의 포커 페이스를 떠올려 보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 을 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없게 만드는 바로 그 얼굴에 나는 완전히 놀아 났구나 싶었다. 창 밖의 풍경이 꼭 내 마음을 대변해 주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아톰은? 어디에 있나요?" "아톰의 에뮬레이션 된 영혼이 어디에 있는가는 아톰만이 알고 있지. 그리고 거기서 자신의 위치를 알릴 수 있는 것도, 숨길 수 있는 것도 오 직 아톰 뿐이야. 물론 처음에는 그저 에뮬레이터 안에서만 돌아가는 하나 의 프로그램일 뿐이지. 하지만 그 프로그램이 어스넷, 다시 말해서 또 다 른 우주와 만나는 순간, 에뮬레이션 된 영혼은 새로운 생명체로 다시 태 어나게 된다네." 나는 세헤라자드가 처음으로 어스넷을 다녀온 직후부터 변하기 시작했 다는 점을 떠올려 볼 수 있었다. 그 때, 세헤라자드는 다른 형태의 영혼 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 거였구나 싶었다. "그랬군요. 그래서 세헤라자드도 그렇게..." "아마 지금쯤이면 아톰과 리파이도 새로운 생명체로 다시 태어났을 거 라네." 이렇게 말하는 젯나이트의 표정은 창 밖의 어둠처럼 깊숙이 내려앉아 있었다. 나는 아톰과 리파이라면 어디 게임 넷 같은 곳에서 게임을 즐기 고 있지 않을까 싶었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나니 피식, 하고 웃음이 터 져 나왔지만, 침대에 죽은 듯이 누워있는 아톰과 리파이의 모습이 떠오르 자 나는 웃음을 멈추고 말았다. "그런데 왜 영혼이 에뮬레이션 되면 그 육체는 활동을 중단하는 거지 요?" 나는 젯나이트에게 이렇게 물었다. 젯나이트는 내 질문에 진지한 표정 을 짓고는 잠시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 이유가 실은 내가 이야기하려는 말의 초점일세." 젯나이트는 이렇게 독백을 흘리는 연극배우 같은 말투로 말을 하고는 천천히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건 하나의 생명이 두 개의 세계에 동시에 존재 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생각하고 있다네. 아니, 존재 할 수는 있어도 그 두개의 생 명이 만나는 순간 하나는 죽게 되는 게 아닐까. 그래야 자신이 자신의 정 체성을 유지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가지고 있다네. 아마 후자 쪽 이겠지. 자네, 만약에 또 다른 자네를 보게 된다면 어떨 것 같나? 물론 생각해 보지 않았겠지. 하지만 내 생각에 또 다른 자신을 자신이 보게 된 다면 보다 약한 쪽의 자신은 자신의 활동을 중지시키는 것으로 자신의 생 명을 보존하는 방향으로 가게 되지 않나 싶네. 그리고 그것이 아톰과 리 파이가 활동을 멈춘 이유이고." "영혼의 에뮬레이터... 알고 보니 정말 위험한 물건이었군요." 나는 젯나이트의 말을 듣고 있자니 등골이 다 서늘해지는 느낌이 들어 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또다른 나를 발견하게 되고, 그 결과 지금의 내 가 죽게 된다는 상상이 절로 되었다. "아니야, 그건 일부만 보고서 하는 말이지 전체를 꿰뚫는 말이 아닐세. 영혼의 에뮬레이터가 가지고 있는 진짜 위험은 그게 아니라네. 잘 들어주 게. 어쩌면 자네의 손에 우리 세계 전체의 미래가 걸려 있는지도 모르니 까 말일세." 젯나이트의 말은 나를 한 층 더 대화에 집중하게 만들었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젯나이트를 바라보았다. "MS사 녀석들은 그 위험을 모르고 있네. 아니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 인간들은 돈에 눈이 멀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는 인간들이 니까. 사실 영혼의 에뮬레이터를 개발했던 나 자신도 모르고 있었다네. 영혼의 에뮬레이터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물론 나는 그 때문에 세헤라 자드를, 내 사랑하는 딸을 지워버리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네." "그랬군요..." 나는 점점 내가 이해할 수 없는 형태로 변해 가는 세헤라자드를 떠올리 면서 젯나이트에게 말했다. 젯나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게임 이야기를 하는 것 잘 들었네. 자네의 생각은 깊은 편이더 군. 하지만 이런 말이 있지. 예전에 이제마의 사상의학을 공부할 때 읽었 던 불경에서 읽은 구절이네만. 달을 가리키는 데 왜 손가락만 보느냐.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는가?" 물론 나는 전혀 못 알아 듣겠다는 표정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자네가 알고 있었던 게임의 시간관이 바로 영혼의 에뮬레이터가 가지 고 있는 위험성일세. 자네는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고 있었으면서도 달 은 보지 못했던 거야." 젯나이트는 이렇게 말했다. "영혼의 에뮬레이터는 하나의 작은 시발점일세. 이 세계를 붕괴시킬 수 있는 작은 시발점 말일세. 어스넷의 세계, 그러니까 시간과 공간이 동시 에 무한하게 존재 할 수 있는 공간은 상상 속에서만 가능했던 시절이 있 었네. 하지만 어스넷이 우리의 일상으로 파고들기 시작하면서부터 이미 위험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지. 나는 무시무시한 짓을 하고야만 걸세. 바로 그 두 개의 세계를 이을 수 있는 매개체를 만들어 내었던 것이지. 두개의 생명이 만나는 문제가 개체의 문제인데 반해 두 개의 세계가 만난 다는 것은 우주적인 문제가 되지." "두개의 세계가 만나면 어떻게 되는 데요?" 나는 조금은 심드렁한 목소리로 부루터스에게 물었다. 부루터스는 한심 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이렇게 말했다. "이제 이 세상은 완전히 사라져버릴 위험에 직면하고 말았네. 두 개의 세계가 만나는 순간, 이 세상은 더 이상 이 세상이 아니게 되고, 내가 지 금 있는 이곳도 더 이상 지금 이 세상이 아니게 되지. 세상이 완전히 뒤 바뀌어버린다는 말이야. 자네의 존재도, 이 랩탑이나 나의 존재도 모두 사라지게 되는 거지." 나는 이해가 잘 가지 않아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자 답답 했는지 젯나이트가 나에게 이렇게 이해하기 쉽게 이야기를 해 주었다. "다시 말해서, 세상의 종말이야." 젯나이트의 말은 충분히 이해가 갔다. 적어도 글자 그대로는 말이다. "하지만 세상이 종말이라니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20707/21893 ━━━━━━━━━━━━━━━━━━━━━━━━━━━━━━━━━━━━━━━━ 제 목:[탐그루] 세이브와 로드의 정원 294 관련자료:없음 15/15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5-16 20:31 조회:1098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프로그램은 인간의 이성이 극대화된 형태라고 할 수 있지. 인간의 생 각을 전달하는 언어보다 훨씬 추상적이고, 또한 대단히 논리적이야. 다시 말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것을 상정한 개념의 세계라는 것이지. 하지 만 이 세계는 실제로는 아주 가변적이고 결코 고정될 수 없는 성질을 가 지고 있어. 예를 들어 자네는 우리가 머리 속으로 생각하기에 늘 똑같은 것 같지만 그렇지 않지 않은가. 자네의 머리카락은 지금 이 순간에도 자 라고 있고, 자네의 뇌세포는 조금씩 죽어가고 있지. 이런 두 세계가 만나 혼돈에 빠져버린다면 어떤 결과가 나타나게 될지 아무도 모르지. 아니, 분명한 건 이 두 세계는 더 이상 지금까지 존재했던 방식으로는 존재할 수 없게 된다는 거야." "그런데 왜 지금 세상의 종말이 오지 않았죠? 봐요 멀쩡하잖아요. 지금 저하고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면서도요." 이번에 나는 결코 빈정거리는 투가 아니라 정말로 궁금해서 젯나이트에 게 이렇게 물었다. 젯나이트도 내 마음을 이해했는지 이렇게 설명을 해 주었다. "두 세계가 만나는 일은 이렇게 가능하다네. 마치 두 개의 직선이 만나 는 점처럼, 실은 이곳은 존재하지 않는 거나 다를 바가 없거든. 중간 매 개체를 통하게 되니까 말일세. 하지만 일정수준의 에너지가 확보 된다면,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에뮬레이션 된 영혼의 수가 어떤 임계점에 도달할 만큼 증가한다면, 두 세계는 뒤섞이게 된다네." 나는 조금씩 젯나이트의 말이 이해가 가고 있었다. "내가 자네의 적은 MS사가 아니라 부루터스라고 했던 말을 기억하는가? 하지만 영혼의 에뮬레이터를 MS사가 손에 넣은 이상, 이제는 MS사도 자네 의 적일세." "MS사가 에너지를 모으고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아니. MS녀석들은 대량으로 인공 생명체를 만들어내려고 하고 있다네. 물론 MS사야 어스넷을 독점하기 위한 책략으로 그런 짓거리를 하고 있는 게지만. 바로 그 대량 생산이 세상을 망하게 할 에너지를 만들어 내게 될 걸세. MS사의 용은 대량으로 쏟아져 나와, 어스넷이 아니라 현실 공간을 떠다니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야." 젯나이트의 말이 나는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부루터스는 더 이상 위협이 아니겠군요? MS사가 그렇게 하고 있다면요." 나는 부루투스가 어떻게든 이 위기를 벗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렇 게 말했다. 하지만 내 말을 들은 젯나이트의 반응은 냉소적이었다. "비류. 자네는 너무 순진하게 생각하는군. 만약 그렇다면 왜 지난번에 만났을 때 부루터스를 막아야 한다고 했겠나? 부루터스는 지금 이 순간도 에너지를 모으고 있을 걸세. 기억하고 있겠지. 병원의 정전, 화제, 금융 사고. 이 모든 일들은 부루터스가 하고 있는 일 전체에 비한다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해." "그럼 부루터스가 하고 있는 일이 뭔데요?" "부루터스는 에너지를 모아서 자신의 힘을 키우고 있어. 물론 MS사에서 대량으로 용을 만들어 퍼뜨렸을 때 생기는 위협에 비하면 아직은 미미한 수준이지만, 그래도 부루터스는 대단히 위험한 상태야. 우리 또래 되는 사람들이 한참 활동할 때 유행했던 말로, 폭주 중이기 때문이지. 자네 혹 시 이런 말 알고 있는가? 인간은 의지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말 말일세." "부루터스는 그럼 어떤 의지를 가지고 있는데요?" "세상을 멸망시키고 싶다는 의지, 뭐 그런 거지. 가장 위험한 의지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네만. 부루터스는 류를 잃고 너무나도 깊은 충격에 휩싸 였던 모양이네." "설마 그런 이유 때문에..." "물론 류를 살해했던 그 리퍼라는 녀석은 이미 죽었지. 하지만 그렇다 고 해서 죽은 류가 돌아오는 건 아니야. 다시 말해서 부루터스가 단지 개 인적인 복수심 만으로 그런 일을 저지르려고 하는 건 아닌 것 같아. 그저 이 세상을 증오하는 마음이 부루터스의 끔찍한 상상을 이끌고 있다고 밖 에는 생각되질 않는군." 젯나이트는 이렇게 말했다. "그럼 부루터스가 가지고 있는 시디나 MS사와 벌이고 있는 협상같은 건 모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씀이신가요?" "그 점이 나도 궁금하다네. 그 점이 부루터스에게 아주 조금이나마 기 대를 가져볼 수 있게 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아니면 그저 장난으로 그러고 있는 건지도 모르고 말일세. 기대를 가져 볼 수 있다면... 부루터 스가 아직 인간으로서의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거라네. 만약 그렇다면 설 득도 가능할 것이고, 무엇보다도 대화가 될 테니까." 하지만 말하고 있는 젯나이트의 목소리는 낮고도 힘이 없었다. 나는 어 쩐지 더이상 나갈 수 없는 벽에 부딪친 실험용 생쥐처럼 주눅이 들어버렸 다. 내가 기운 없는 얼굴로 어깨를 늘어뜨리고 있자 젯나이트가 말했다. "시간은 수없이 많은 갈래의 길을 가지고 있지. 우리가 선택의 상황이 되었을 때, 어디에선가 우리는 선택하지 않은 길을 가고 있을 것이고, 다 른 길에 서 있는 우리는 지금 이 길에 서 있는 우리를 부러워하고 있을지 도 몰라. 희망을 가지게." 젯나이트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아마도 위로삼아 해 준 말인 모양이었 지만 그 말도 크게 위로가 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왜 미리 알려주지 않았지요?" 나는 젯나이트에게 이렇게 물었다. 젯나이트는 내 물음에 이렇게 말했 다. "자네가 미리 알았다면 어스폴을 속일 수 없었을 테니까. 자네는 프로 수사관을 속일 수 있을 만큼 냉정한 사람이 되지 못해. 만약 내가 자네에 게 미리 내가 이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면 자네는 틀림없이 그 사실을 이진우 수사관에게 들키고 말았을 걸세. 그리고 그랬다면 이렇게 자네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을 수도 없었을 거고, 어쩌면 영혼의 에뮬레 이터를 어스폴에 빼앗겼을지도 모르네." 창밖에는 이제 별빛이 찾아들고 있었다. 별들은 어둠을 지키기에는 역 부족이라는 듯이 힘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 별빛 사이로 바람이 불고 있었다. 소리 없이 밀려왔다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는 바람이었다. "부루터스는 올까요?" "부루터스는 오지 않아. 그런 얕은 꾀에 넘어갈..." 젯나이트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나는 처음에는 천둥이 친다 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창 밖에 불기둥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폭 음 때문에 창문이 흔들렸고, 나는 얼결에 뒤로 넘어가고 말았다. "무, 무슨...?" 문이 열리면서 오토가 내가 있던 방으로 들어왔다. "비류 씨. 움직이시면 안됩니다." 오토는 낮지만 강한 목소리로 나에게 이렇게 말하고는 품에서 리벌버 권총을 뽑아들었다. 곧 이어 실버우드도 내가 있는 방으로 들어왔다. "MS?" 실버우드는 겁에 실린 얼굴을 하고서 이렇게 말했다. "그럴 수도 있지요. 아마 이 근처에서 매복하고 있던 어스폴과 한 판 벌이는 지도." 오토는 고개를 살짝 내밀어 창 밖을 살펴보았다. "총성은 들리지 않고 있어요. 이리로 접근하는 사람들도 보이질 않고 있고. 하여간 일단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딱 하나 입니다." 오토의 리벌버에 우리 모두의 생명이 모두 달려 있다는 생각 때문인지 몰라도, 오토의 리벌버가 중기관총 만큼이나 커다랗게 보였다. "어스폴을 믿고 기다리는 거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토의 말이 맞을 것이었다. 빔라이플로 무장을 했건, 하지 않았건, 만약 어스폴을 해치울 정도의 실력이 있는 녀석들이 라면 굳이 움직여서 명을 재촉하느니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면서 협상의 여지를 끌어내는 편이 생존 확률이 높을 것이었다. 오토는 계속해서 창 밖을 살피고 있었고, 실버우드는 멍한 얼굴로 손톱 을 뜯고 있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방 안을 살피고 있을 뿐 이었다.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창 밖에서도 처음의 폭음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너무나도 조용했다. 당장이라도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아냐. MS녀석들이 아니야." 젯나이트가 말했다. 순간 실버우드와 오토의 시선이 젯나이트에게 모아 졌다. "어서 나가 봐. 어쩌면 지금이 기회일지도 몰라." "당신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상황에서 밖으로 나간다는 건 총을 든 상대방에게 등을 보여주는 일이나 다를 바 없다는 걸 모르시고 하시는 말씀이십니다." "자네, 이름이 오토였지? 꽤나 실력이 있는 친구인 것 같더군. 자네 말 은 기본적으로는 맞아. 하지만 내 말을 믿어보게. 너무 늦기 전에." 나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젯나이트의 얼굴에서 웃음을 읽어 낼 수 있었 다. 뭔가 다 알고 있으면서도 알려주지 않으려고 하는, 그런 얼굴이었다. "당신 말을 믿는 건 목숨을 거는 일입니다." 오토는 이렇게 말하고는 리벌버의 탄창을 확인한 다음, 자리에서 일어 났다. "여기서 잘 지켜보고 계시다가 저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뒷문으로 도망치세요. 거기에 후버카가 한 대 있을 겁니다. 실버우드. 운전 할 줄 아시죠?" 실버우드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히 신중한 친구로군. 하지만 신중한 게 늘 옳은 건 아니라는 걸 명심하게." 젯나이트가 말했다. "죄송하지만 옳고 그른 건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적어도 저에게는. 중요한 건 어떻게 하는 편이 생존 확률이 높은가 하는 것입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20708/21893 ━━━━━━━━━━━━━━━━━━━━━━━━━━━━━━━━━━━━━━━━ 제 목:[탐그루] 세이브와 로드의 정원 295 관련자료:없음 23/23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5-16 20:31 조회:1586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지금은 밖으로 나가는 편이 생존확률이 높다고 생각하는가?" "아뇨. 여기있으나 밖에 있으나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우리가 공격당한 거라면요. 하지만 가만히 앉아서 당하는 것보다는 먼저 공격해 보고 당하 는 편이 훨씬 낫지요." 오토는 이렇게 젯나이트의 말에 대꾸한 다음 밖으로 나갔다. "프로군." 오토가 밖으로 나가자 젯나이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실버우드와 젯나이트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실버우드는 불안한지 손톱을 물어뜯는 일을 멈추지 않고 있었고, 젯나이트는 만사 귀찮다는 얼 굴을 하고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둘의 판이한 반응에서 지금 도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도무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혼란 스러웠다. 골치가 다 아파 오고 있었다. "실버우드. 창 밖은 내가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 실버우드는 후버 카 열 쇠라도 좀 준비해 두실래요?" 나는 일단 실버우드에게 이렇게 부탁을 했다. 젯나이트는 자신이 오토 가 밖에 나간 것에 대해서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는 사람 같아 보였다. "젯나이트. 지금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줄 알아요?" 나는 창 밖을 내다보면서 말했다. 불기둥이 솟았던 자리에서는 불꽃이 보이고 있었고, 그 주변으로 그림자들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눈으로 봐서 는 어떤 상황인지 도무지 짐작이 가질 않았다. "적어도 총격전이 벌어지고 있지는 않다는 것 정도? 그 정도는 나도 알 고 있다네." "빔은 소리가 나지 않아요." "소리를 듣고 하는 말이 아닐세." "가만히 앉아서 다 보실 수 있는 능력이라도 있는 건가요?" "그런 능력은 없어. 그냥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는 거지." 이성적으로 생각한다. 말이야 그럴싸하게 들리기는 했지만 나는 오토가 걱정이 되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특히 오토가 불이 아직도 나고 있는 곳 으로 이동하는 것이 보였을 때, 그 걱정은 더욱 강해졌다. "실버우드. 차 열쇠 가지고 있어요?" "예." "그럼 젯나이트하고 함께 후버 카에 가서 기다릴래요?" 나는 오토가 불꽃이 일고 있는 곳을 바라본 다음 뛰기 시작하자 이렇게 말했다. 적이 있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오토는 리벌버도 품에 집어넣 은 채 뛰고 있었다. 오토 같은 프로가 뛰고 있는 걸 보니 적은 없는 모양 이었지만, 프로가 아닌 나로서도 생존 확률이 조금이라도 높은 쪽을 택하 고 싶었던 것이다. "실버우드. 만약에 총성이 들리면 바로 저쪽 언덕있는 쪽으로 오세요." 나는 이렇게 말하고 밖으로 나섰다. 오토가 총을 집어넣고 뛰고 있다는 사실이 나에게 어서 빨리 그곳으로 가보라고 강요하고 있는 듯 했다. 가 만히 앉아서 기다리기에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확인하고 싶다는 욕망이 더 강했다. 문 밖으로 나섰을 때 가장 먼저 만난 사람은 이곳의 원장이었다. "무, 무슨 일인가요? 일이 생기면 전화해 달라고 하신 분도 계셨는 데..." 원장은 자다가 막 일어난 탓인지 대단히 당혹스러워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전화요?" "예. 이진우 수사관이라는 분, 그분이 하신 말씀이었는데, 일이 생기면 바로 전화 하라고..." "그럼 빨리 전화하세요." "했지요. 그런데 바, 받지를 않으셔서..." 이런 상황에서라면 이진우 수사관은 24시간 대기 중일게 분명했다. 그 런데 전화를 받지 않는다니. 틀림없이 무슨 일이 생기기는 했구나 싶었 다. 하지만 나는 원장에게 일단 안심을 시켜줘야겠다 싶었다. "제가 그럼 직접 알려 드려야 겠군요. 전화가 고장일 수도 있죠, 뭐." 나는 웃는 얼굴로 원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원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다녀 올 테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밖으로 나오지 마세요." 나는 원장에게 이렇게 말하고 오토가 뛰었던 길을 따라서 뛰어 올라갔 다. 나는 오토가 왜 뛰기 시작했는지 불꽃을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불 타고 있는 것은 커다란 벤트럭이었다. 이동 사무실로 자주 쓰이는 벤 트 럭. 나는 원장이 했던 이야기가 불길한 예감처럼 다가오는 걸 느끼면서 발걸음에 속력을 더했다. 오토는 불타고 있는 벤 트럭 주변을 조사하고 있었다. "MS짓인가요?" "폭발물인 것 같지는 않습니다. 파편이 많이 튀질 않았거든요. 아마 연 료 탱크에 불이 붙은 모양인데. 이거, 전부 불타버려서 알 수가 없군요." 오토는 이렇게 말하면서 불이 옮겨 붙을 만한 것들을 발로 차보냈다. "어스폴, 맞지요?" "예. 어스폴 이동 수사국일 겁니다. 아마 여기서 우리를 감시하고 있었 겠지요." "적어도 사람이 접근해서 한 짓은 아닐 것 같군요." 나는 이렇게 말했다. 벤 트럭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깊이 잠들지 않은 다음에야 이곳까지 소리 없이 접근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었다. 사 방이 온통 수풀로 우거져 있어서 귀를 조금만 기울여도 누가 다가오고 있 는지는 금새 알아차릴 수 있는 곳이었다. "원장이 그러더군요. 이진우 수사관이 전화를 받지 않는다고요." "그럴 겁니다. 여기서 이걸 찾았거든요." 오토는 나에게 선글라스를 보여주었다. 선글라스는 이진우 수사관이 자 주 쓰던 것이었다. 한 때 내가 보급품인지 개인적으로 산 것인지 물었던 바로 그 선글라스였다. 알이 하나가 빠져나가 있었고, 테는 엉망으로 휘 어져 있었지만, 나는 알 수가 있었다. 이진우 수사관이 죽다니. 나는 믿 어지질 않았다. "누구... 짓일까요?" "부루터스일 겁니다. 그 외에는 생각해 볼 수가 없습니다." 오토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진우 수사관은 유하린 수사관의 경력을 들먹이면서 부루터스를 체포하겠다고 큰소리를 쳤지만 결국 이렇 게 끝나버리고 말았다. 나는 이진우 수사관이 죽었다는 사실이 믿어지w; 않았지만, 부루터스의 존재감만큼은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멀리서 사 이렌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소방차거나, 아니면 근처에 있는 경찰서거 나, 혹은 어스폴일 것이었다. 전부 다 동시에 오는 지도 몰랐고. 불길은 이제 서서히 수그러들고 있었지만 젯나이트의 말 그대로 부루터스의 위협 은 이제 막 시작인지도 몰랐다. "저는 계속 하겠습니다." 고아원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오토는 나와 실버우드 앞에서 이렇게 말 했다. "저도요." 실버우드도 이렇게 말했다. 나에게는 이제 선택의 여지가 생겼다. 더 이상 어스폴의 협박에 시달릴 이유도 없었고, 굳이 목숨을 걸고 더 이상 MS사와 싸울 이유가 없었기 때 문이었다. "저도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젯나이트의 부탁했기 때문만은 아니었 다. 굳이 이유같은 것이 있어서 그 이유를 따르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이렇게 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내가 직접 느낀 부루터스 의 존재감은 나에게 계속 이 일을 해야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건도 아직 회복은 되지 않았지만 이곳으로 오겠다고 저에게 연락해왔 습니다." 오토가 말했고 실버우드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리파이 가 생각났기 때문일 것이다. "좋아. 그렇다면 이제 이야기를 해 주지." 젯나이트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을 꺼냈다. "내가 만든 영혼의 에뮬레이터를 MS사가 복사한 게 맞다면, 우리한테는 희망이 있어. 녀석들의 계획을 막을 수 있는 희망 말일세." "어떤 겁니까?" "마스터 패스워드. 나는 모든 내 프로그램에 마스터 패스워드를 입력해 두었다네. 만약에 무슨 일이 생겼을 경우, 패스워드를 통해서 프로그램을 중지시킬 수 있게 해 둔거지." "그렇군요. 그럼 그 패스워드가 뭡니까?" 오토가 젯나이트에게 물었다. "그냥 보통 글자를 입력하는 방식의 패스워드는 아니야. 영혼과 같은 롬파일의 형태로 되어 있는 거지. 그 마스퍼 패스워드가 입력되어 있는 롬파일을 영혼의 에뮬레이터에서 작동시키면 영혼의 에뮬레이터는 작동을 멈추게 되어 있다네." "트로이의 목마 같군요. 일종의 바이러스인가요?" 내가 젯나이트에게 물었다. "바이러스라기 보다는 그냥 프로그램이지. 내가 만든 프로그램이니까 언제 어디서든 내가 통제 할 수 있게 만들어 두고 싶었거든." "그럼 그 롬파일은 어디서 구할 수 있습니까?" 오토가 역시 오토답게 현실적으로 물었다. "지금은 없어." 젯나이트가 말했다. "원래는 이 랩탑 안에 있었는데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어. 하지만 곧 찾 을 수 있을 거야."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하지만 다시 오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네. 해야 할 일이 좀 있거 든. 먼저 그 MS녀석들이 어디에서 에뮬레이터를 작동시키고 있는지 알아 내야 하고, 또 그곳의 보안상태나 뭐 그런 것도 확인 해 두어야 하니까. 일단 내가 올 때까지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게." 젯나이트가 말했고, 우리는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전화선을 좀 이어 주겠나?" 젯나이트가 나에게 부탁했다. 나는 전화선을 이으면서 젯나이트에게 물 었다. "전원으로도 이동할 수 있다고 하시지 않았나요?" "그야 그렇지. 하지만 전화선이 더 편하거든. 자네라면 고속도로를 두 고 시골길로 다니겠나?" 젯나이트는 이렇게 말하고는 내가 전화선을 잇기가 무섭게 사라져버렸 다. "자, 그럼 눈이나 좀 붙여 두십시오. 저도 좀 쉬어야 겠습니다. 아마 내일이면 이곳에 어스폴들이 들이닥칠 겁니다. 잘못하면 중요 참고인으로 불려가게 될 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그 때 일은 그 때 가서 생각하기로 하고, 일단 자 두는 게 내일을 위해서 좋을 겁니다." 오토는 이렇게 말하고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버렸다. 나는 텅 비어버 린 랩탑과 실버우드와 함께 멍하니 방에 앉아 있었다. "저, 솔직히 겁나요." 실버우드가 안경태를 치켜올리면서 말했다. 아마도 실버우드는 이진우 수사관의 죽음 때문에 충격을 받은 상태인 것 같았다. "그건 오토나 저도 마찬가지예요, 실버우드." 나는 이렇게 실버우드에게 말했다. 무엇보다도 실버우드에게는 용기가 필요한 시점인 것 같았다. 실버우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겁이 나도... 갈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실버우드는 내 눈을 피하고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틀림없이 실버우드 는 아직도 리파이를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뭐라고 더 말해주려 고 했지만 더 이상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별 의미가 없는 일인 것 같았 다. 실버우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겁도 좀 나중으로 미루지요, 뭐." 이렇게 말하는 실버우드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서 나에게 보여주고 있었 다. 나는 이렇게 까지 용기를 내려고 하고 있는 실버우드에게 더 이상 어 떤 말도 해 줄 수 없었다. 실버우드가 나가자 나는 자리에 길게 누워 버 렸다. "어른이 선택하는 문제니까요." 세헤라자드였다. 어느새 세헤라자드는 랩탑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래. 선택의 영광도 고통도, 모두 자신의 것이지." 나는 아버지가 했던 말을 떠올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게임에는 세이브와 로드가 있지요. 다시 말해서 선택은 별 의미가 없 을 수 있다는 거에요. 사실 부루터스의 선택이나 아버지의 선택은 좀 의 미가 달라요. 부루터스가 변하고 있는 건 부루터스의 사고 방식이 인간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고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사고지요. 부루터스에게 시간과 공간은 무한하고, 어떤 선택도 의미가 없기 때문에 부루터스는 그 저 자신의 욕망을 따를 뿐이에요. 세상이 망하든 흥하든 그에게는 이제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거지요. 아버지는 여전히 인간의 사고 방식으로 인간 을 위해서 행동하고 있는 거고요." 세헤라자드의 말을 듣자 나는 궁금증이 생겼다. "그럼 세헤라자드는 어떤 쪽이지?" 과연 세헤라자드는 인간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을까? 아니면 새로운 우주에서 살고 있는 생명체답게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저는 그저 선택하지 않은 길에 대해서 알고 있을 뿐이에요." 세헤라자드가 대답했다. 어쩌면 어느 한 쪽으로 변해가고 있는 과정인 지도 모르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래. 가지 않은 길. 그곳에도 나는 존재하고 있겠지? 네가 말한 다른 차원의 우주에서는 말이야." "그렇지만 이야기에는 시작과 끝이 있을 수밖에 없지요. 그리고 시작과 끝은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겠지요." "그럼 탐그루의 끝은 어떻게 되는 거지?" 세헤라자드가 알 듯 모를 듯하 표정으로 방긋 웃었다. "이제 라이짐은 새로운 세상을 열기 위한 열쇠를 손에 쥐었습니다. 그 리고 열쇠를 문에 꽂고 돌렸지요. 하지만 그것이 어떤 결과로 나타나게 될지는 아직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죠." 세헤라자드의 이야기는 이렇게 다시 시작되었다. ------------------------------------------------------------------- 잠시 쉬겠습니다. ^^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21772/21893 ━━━━━━━━━━━━━━━━━━━━━━━━━━━━━━━━━━━━━━━━ 제 목:[탐그루] 혁명과 반역의 차이 296 관련자료:없음 20/20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6-08 20:08 조회:708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 혁명과 반역의 차이 라이짐이 영주의 저택에 도착 한 것은 본대에서 임무를 받고 출발한지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라이짐은 십부 병력과 함께 영주의 저택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운명을 미리 알고 있는 듯 영주의 저택은 어둠 속에 서 그 장대한 위용을 한껏 움츠린 채 숨죽이고 있었다. "걱정하지마, 라이짐. 에이스 자매들은 지금 전부 다 프라브리티에 모 여있거든. 너는 프란스 페르도만 맡아. 그저 확인만 하면 되는 일이야." 본대에서 출발하기 전, 하진은 미리 준비해 둔 명단을 손에 들고 이렇 게 말했다. "어떻게 미리 준비했지?" "나중에 설명해 줄게. 지금 중요한 건 임무를 수행하는 거잖아?" 하진의 말에 라이짐은 일단 수긍했지만 어떻게 하진이 미리 명단을 확 보해 두고 에이스 자매를 불러들였는지는 알 수는 없었다. 어찌되었건 지 금은 임무가 우선이었다. 라이짐은 에이스와 함께 영주 프란스 페르도를 제거하기 위해 출발했다. "생포해도 좋다고 장군께서는 말씀하셨지만, 반항하면 끝내버려." 하진이 떠나는 라이짐에게 한 말이었다. 라이짐은 고개를 끄덕였다. 꼭 하진은 자신이 상관이라도 된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라이짐은 그 런 사소한 문제에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하진이 했던 말 그대로, 무 엇보다 일이 우선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라이짐은 저택의 정문으로 향했다. 두꺼운 쇠창살로 만들어진 정문 앞 에는 두 명의 경계병이 창을 들고 서 있었다. 라이짐은 서두르지 않았다. 그저 천천히 걸어서 그 두 명의 경계병에게 다가갔다. 둘은 라이짐을 보 더니 창을 앞으로 겨누었다. 어둠 속이었지만 라이짐은 하얗게 겁에 질린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멀리서 굉음소리가 들려왔다. "저, 정보부장님! 더 이상 접근하시면 아, 안됩니다!" 경계병 하나가 소리쳤다. 창끝이 눈에 뜨일 만큼 떨리고 있었다. "자네, 이름이 뭔가?" 라이짐은 계속해서 다가가면서 경계병에게 물었다. "바이슨이라고 합니다." "바이슨. 이제 자네는 두 가지 중 한 가지를 선택해야하네. 불가피하게 해야될 일이 있어 당장 자리를 비우던가, 아니면 여기서 죽던가." 라이짐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이렇게 말했다. 두 경계병은 고개를 돌려 서로 눈을 맞추더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대로 달려 어둠 속으로 사 라져갔다. 저택의 구조는 몇 번 와본 덕에 잘 알고 있었다. 라이짐은 에이스와 함 께 성큼성큼 중앙에 있는 저택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저택까지 가는 일이 그리 수월하지 만은 않았다. 저택 곳곳에 있던 프란스 페르도 의 사병들이 라이짐 일행에게 달려들었다. 라이짐은 그들에게도 선택의 기회를 주고 싶었지만, 라이짐과 동행한 사병들의 칼날은 그렇게 순순히 선택할 여지를 주지 않았다. 동행한 십부 병력이 프란스 페르도의 사병들 을 상대하는 동안 라이짐은 프란스 페르도의 침실로 들어갔다. 폭음 소리 에 창틀이 부르르 떨리고, 번쩍이는 불빛들이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 다. 그 위 어두운 하늘 저편에는 여느 때와 다를바없이 달이 교교히 빛났 다. 문을 열자 페르도는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자신의 침대에 걸터 앉아 있었다. "보고를 들어서 알고 있었네." 프란스 페르도는 정장을 갖춘 모습이었다. "자네가 왔군. 나는 아케르가 직접 올 줄 알았는데." "장군님께서 직접 오셨어야 할만큼 그렇게 중요한 일은 아니니까요." 라이짐은 이렇게 말하면서 칼을 뽑았다. 프란스 페르도는 자리에서 일 어났다. 프란스 페르도는 평소의 그 위용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고 키 마저도 줄어 있는 것 같아 보였다. "그런가? 그렇다면 도대체 뭐가 중요한 일일까. 권력? 돈? 명예? 여자? 그 모두를 누렸지만 나는 행복하지 않았네. 나는 지금까지 내 삶을 소홀 히 여겼지. 이제 내 죽음도 마찬가지로 소홀히 여길 생각이라네." 프란스 페르도는 이렇게 말하면서 칼을 뽑아 들었다. 라이짐은 일단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군인으로 살았고, 군인으로 죽을 수 있는 게 내게 주어진 유일한 행복 일지도 모르지. 자네의 임무가 나를 생포하라는 것이건, 죽이라는 것이 건, 나는 자네와 싸우겠네. 자네도 검사이니 내 심정을 이해해 주리라 믿 네." 영주는 이렇게 말하고는 나즈막한 목소리로 결투의 말을 읊조렸다. "칼의 물음에는 칼로 답한다. 그런가? 정말 그런가?" 프란스 페르도는 웬지 슬퍼보이는 눈빛으로 말했다. "격식에 어긋나는군요. 참관인도 없는 결투라." "영주가 결투를 한다는 것 자체가 격식에 어긋나는 일일세." 결투의 말에 라이짐은 칼로 해답을 얻기를 원한다고 대답해야 했다. 그 리고 칼로 상대에게 예를 표해야만 했다. 하지만 라이짐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영주님. 진정한 칼의 힘이 어떤 것인지 아십니까? 라이짐이 물었다. 영주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칼의 힘이란 이런 것입니다." 라이짐이 말하자 칼로 무장한 십부 병력이 프란스 페르도의 침실로 밀 어 닥쳤다. "마지막으로 하나 묻지. 자네는 전설을 믿는가?" 페르도는 힐끗 병력들에게 시선을 던진 후 라이짐에게 물었다. 라이짐 은 전투모를 벗어 던졌다. 하얀 머리가 영주의 방안에 환하게 드러났다. 창 밖에서 들어오는 달빛을 받은 라이짐의 머리는 그 어느 때보다 하얗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에이스." 라이짐이 말하자 에이스의 단도가 빛을 발하며 영주의 가슴으로 날아갔 다. 비록 영주라고는 하지만 젊어서 야전 군인으로 오랜 시간 복무했던 프란스 페르도였다. 프란스 페르도는 칼날을 세워 에이스의 단도를 쳐내 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십부 병력이 프란스 페르도에게 달려들었고, 단 도를 빗겨내기 위해 칼을 들어올린 바로 그 순간, 프란스 페르도의 목은 베어져 땅에 떨어졌다. 라이짐은 피에 젖은 고깃덩어리로 변한 프란스 페르도를 바라보았다. 바닥에 핏물이 흘러 라이짐의 발을 적시고 있었다. 라이짐은 그 피를 바 라보면서 무언가 어긋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분명 오랫동안 기다려 온 순간이었다. 하지만 분명 어딘가가 어긋나고 있었다.이게 아니었다. 이게 아니었다. "정보부장님. 이제 어떻게 할까요?" 병사 하나가 라이짐에게 물었다. "돌아간다." 라이짐은 짤막하게 이렇게 대답했을 뿐이었다. 오랫동안 소망해온 순간 이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라이짐은 허망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 다. 이것이 자신이 생각해온 칼의 힘임에도 불구하고, 또한 정의이며 대 의임에도 불구하고. 라이짐은 두통을 느끼고는 관자놀이를 엄지손가락으 로 꾹 눌렀다. 하지만 두통은 머리에서 시작한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달빛마저 불안한 듯 흔들리고 있는 밤이었다. 구름은 아슬아슬하게 달 빛을 비켜 지나고 있었지만, 당장이라도 하늘을 뒤덮어 버릴 듯 흘러가고 있었다. 게다가 비마저 내리고 있었다. 시원스럽게 땅으로 내리 꽂히는 비라면 기분이라도 좋아지련만, 내리고 있는 비는 달빛은 받아 마치 안개 처럼 힘없이 흩어지고 있을 뿐이었다. 옷은 온통 눅눅해졌고, 기분도 따 라서 우울해지고 있었다. 아케르 군단의 병사들은 침묵하고 있었다. 전투를 눈앞에 둔 상황에서 축제를 준비하듯 시끌벅적 하기를 기대할 수는 없는 법이지만, 그래도 병 사들이 느끼고 있는 긴장감은 그 어느 때 보다 더했다. 이제 곧 아케르 군단은 성황청의 강력한 성구에 맞서 싸워야 할 상황이었다.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전황은 뒤집힐 것이 분명한 전투였고, 그만큼 병사 개개인이 느 끼고 있을 중압감이 여느 때 보다 더 했던 것이다. 대청하의 강물은 달빛 을 받아 은빛으로 흐르고 있었지만, 내리는 안개비는 빛을 흩뜨려 내고 있었다. 라이짐은 지휘본부 부근에 마련된 정보부 천막에서 아케르의 결정을 기 다리고 있었다. 이제 아케르가 어떤 결정을 내리는가에 따라서 아케르 군 단의, 아니 어쩌면 스파일 전체의 운명이 달라질 터였다. 라이짐은 내리 는 빗방울들이 허공을 떠다니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연금술사의 등에 비 친 빗방울들이 향기처럼 사방으로 퍼지고 있었다. 하진은 라이짐처럼 초조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비록 야전 침대 하나 에 집무용 책상과 의자 두 개 뿐인 천막이었지만 하진은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라이짐. 마음 편하게 가져." 하진이 말했다. 하진은 책상에 다리를 올려놓고서 턱을 완전히 젖히고 있었다. "나, 불편하지 않아." "불편하지 않은 녀석이 밖을 내다보면서 그렇게는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냐? 얼굴에 다 써있어. 이거, 어쩌면 좋지? 이제 무슨 일이 생기지?" 하진은 익살맞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라이짐은 피식,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창밖에는 아직도 빗물이 번지고 있었다. 서툰 화가의 붓질 같 은 느낌이었다. 도대체 아케르는 언제 결정을 내릴 것인가. 라이짐은 회 의에 참가하지 않은 걸 후회하고 있었다. 물론 후회한다고 해서 회의에 참석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상황을 총괄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했고, 상황을 총괄할 사람은 동시 소통이 가능한 에이스 자매의 직속상관인 자신 밖에 없었다. 라이짐은 잠시 스파일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려 보았다. 테이르의 날 행 사가 있었고, 차이린이 떠나갔고, 마리, 에이스, 에질리, 순무, 페르도, 그리고 작전 명령 하달... 라이짐의 눈앞에 몇 가지 사건들이 떠올랐다가 사라져갔다. "너무 시간이 빨리 흐른 것 같아. 도대체 언제 여기까지 오게 된 건 지." 라이짐이 말했다. 힘없이 흩뿌려지는 빗물을 바라보고 있자니 세월이 너무나도 빨리 흐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은 참으로 늦게 흐르는 데 세월은 이렇게 빨리 흐르다니. "내가 살았던 국경지방에는 이런 말이 있어." 하진이 말을 이렇게 꺼내었다. "일은 혼자 다니지 않는다. 해야 할 일이건, 하고 싶은 일이건, 일이라 는 녀석은 반드시 친구들하고 함께 다니는 법이거든. 당장 장사만 해 봐 도 그래. 한가할 때는 파리 잡는 일만 하기에도 시간이 남다가 손님이 한 번 들이닥치기 시작하면 이건 완전히 정신이 없거든." 하진의 말에 라이짐은 별빛주점에서 일했을 때의 기억이 떠올라서 미소 를 짓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진이 어떤 의미로 말했는지는 잘 알 수가 없 었지만, 적어도 라이짐이 공감할 수 있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라이짐은 하진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하진은 언뜻 보기에 여유 만만하 게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하진의 표정은 그것보다는 일 이 잘 풀리지 않아 자포자기한 상태의 사람 같다고 라이짐은 느꼈다. 어 쩌면 지금 저런 말을 하고 있는 것도 자신의 처지를 생각해서 나온 말일 지 몰랐다. 회의가 시작된 이후, 라이짐은 에이스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보고도 없이 어디로 가버렸는지. 라이짐은 최근 들어 에이스가 점점 더 이상해지 고 있다는 걸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그때의 폭발 때문이었을까? 얼굴의 상처 때문에 이상이 생긴 걸까. 이번 작전이 끝나고 무사히 돌아가게 된 다면 에이스에게는 힘든 일을 맡기지 않고 잘 보살펴야겠다는 생각이 들 었다. 라이짐은 어찌 되었건 자신의 책임이라고 여겨졌다. "판단을 내리기 곤란할 때에는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라이짐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하진도 굳이 대답을 필요로 하는 말 이라는 것을 알았는지 그저 아무 말없이 라이짐을 바라볼 뿐이었다. 라이 짐은 대청하 도하 작전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이렇게 회의만 하고 있는 아케르 군단의 모습이 안타깝게 여겨졌다. 어차피 홀로 사지에 내 몰린 맹수 신세가 되어버린 아케르 군단이었지만, 그래도 일단 작전에 들어가 면 결코 후회해서는 안 된다고 라이짐은 알고 있었다. 돌이킬 수 없는 일 을 후회하는 것은 시간낭비일 뿐이니까. 라이짐은 이곳까지 떠밀려 오게 된 과정을 차근차근 되짚어 보았다. 군악대의 음악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관악기들은 목구멍이 터질 지경 으로 소리 높여 아케르 군단의 공적을 칭송하고 있었고, 타악기들은 사람 들의 환호성을 뒤덮으며 연주되고 있었다. 길가에 늘어선 프라브리티의 시민들은 분열 행진을 하고 있는 아케르 군단에게 꽃을 집어던졌고, 꽃이 없는 사람들은 종이 쪽지나 모자 같은 것들을 집어던지면서 소리치고 있 었다. 의외의 환영이었다. 아케르는 행렬의 선두에 서 있었다. 좌우로는 타호루와 라이짐이 나란 히 서서 아케르를 보좌하고 있었고, 그 뒤로 백부장들과 병사들이 줄을 맞추어 뒤따르고 있었다. 개선 행진임에 틀림이 없는 상황이었지만 아케 르는 마음이 편치 않은지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누가 준비한 건가?" 아케르가 타호루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타호루도 적잖이 당황하고 있는 듯 했다. 가고일들을 물리친 것이 아케 르 군단임에는 틀림없었지만 통상적인 야외 기동 훈련을 마치고 주둔지로 돌아오는 길에 이런 환영을 받게 될 줄은 짐작조차 하지 못한 까닭이었 다. "정보부장. 조사해 보게." 아케르는 이렇게 말하고는 앞만 바라보면서 뮤를 몰기 시작했다. 가고일 토벌 이후 아케르 용병단의 인기가 올라간 것은 사실이었다. 프 라브리티 시민 중 아케르 용병단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승리한 부대가 대개 그러하듯 아케르 용병단에 대해서도 실제보다 과장된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고, 아케르의 이름은 전쟁의 신이나 카를로스 장군 의 환생한 모습쯤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길가에 늘어서 있는 사람들의 환영은 그런 정도를 훨씬 넘어서고 있는 것이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21773/21893 ━━━━━━━━━━━━━━━━━━━━━━━━━━━━━━━━━━━━━━━━ 제 목:[탐그루] 혁명과 반역의 차이 297 관련자료:없음 23/23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6-08 20:09 조회:549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라이짐은 길가에 서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은 대략 두부류로 나누어져 있는 듯 했다. 하나는 준비된 꽃을 준비된 표정을 하 고서 아케르 군단을 맞이하는 사람들이었고, 또 하나는 음악소리와 구경 거리에 이끌려나와 멋도 모르고 소리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누군가가 사람을 사서 준비한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누가? 또 왜? 이 정도의 사람 을 준비하고 군악대까지 동원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고위층에 있는 사람 이 틀림없었다. 라이짐은 뒤를 돌아보았다. 백부장들이 이끌고 있는 병사들은 군중의 환호성에 당황하고 있는 눈치였다. 손을 흔들며 환호에 답하고 있는 병사 들의 모습도 눈에 띄었지만 그런 병사는 대개 생각 없는 신병들인 것 같 았다. 고참병일수록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파악하느라 정신이 없는 얼굴 이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고민이 드러나 있었다. 지금 손을 흔들면서 환 호에 답해도 좋은 걸까? 아니면 그저 당당하게 발걸음을 맞추어야 하는 걸까? 몇몇 고참들은 금새 결정을 내린 모양이었다. 결정을 내린 고참병 들은 신참의 엉덩이를 걷어차면서 이렇게 소리치고 있었다. "잠자고 발이나 맞춰!" 엉덩이를 걷어 채인 신병들은 시뻘개진 얼굴을 하고서 앞사람의 발뒤꿈 치를 따랐지만 라이짐으로서는 그게 옳은 건지 아닌지 판단을 내리기가 곤란했다. 군중 사이에서 꼬마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예닐곱 살이나 되었을까? 꼬마는 라이짐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뭐라고 떠들어 대고 있었다. 그 러고 보니 라이짐은 전투모를 쓰고 있지 않았다. 아케르를 보좌하는 참모 들은 복귀 시에 전투모를 써서는 안되었기 때문이었지만 라이짐은 흰머리 가 드러난 것이 마치 속살을 드러낸 것처럼 부끄러웠다. 라이짐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던 꼬마의 어머니가 꼬마의 손을 내리고는 머리통을 쥐어박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한 순간 라이짐은 꼬마의 어머 니와 눈이 맞았다. 꼬마의 어머니의 눈에는 공포심이 어려있었다. 꼬마의 어머니는 얼른 눈을 피했고 뒤이어 군중 속으로 꼬마와 함께 몸을 숨겼 다. 라이짐은 꼬마가 사라진 자리에서 한 동안 눈을 떼지 않았다. 선두 쪽으로 스파일의 군복을 입은 전령이 뮤를 타고 다가온 것은 그 순간이었다. 음악소리와 함성소리에 취한 듯, 전령의 얼굴을 붉게 상기되 어 있었다. "아케르 장군님. 중앙 광장으로 행렬을 옮기셔야 하겠습니다." 전령이 아케르 장군에게 말했다. "누구의 지시인가?" 아케르 장군이 물었다. "국방장관의 지시입니다." 전령이 뮤 고삐를 끌어당기면서 말했다. 아마 전령이 타고 있는 뮤도 음악소리와 함성 소리에 신경이 곤두선 모양이었다. "안토니오 장군?" 아케르의 한 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하지만 이내 곧 판단을 내렸는 지 아케르는 전령에게 이렇게 말했다. "알았다. 지금 가겠다고 장관님께 전하도록." 아케르의 대답을 들은 전령은 뮤를 몰아 중앙 광장 쪽으로 달려갔다. 라이짐은 국방장관이라는 말을 들은 순간 모든 의문이 풀리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 버렸다. 안토니오 장군이 이 행렬을 준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때문이었다. 하지만 라이짐은 곧 안토니오 장군의 속셈에 대한 의문을 품게 되었고, 그 의문은 중앙 광장에서 안토니오 장군을 만날 때까지 계 속되었다. 중앙 광장에는 언제 준비했는지 아케르를 위해 준비된 연단이 마련되어 있었고, 그 뒤로는 프라브리티의 유지들이 앉아 있었다. 물론 유지들 중 앙에 앉아 있었던 것은 국방장관 안토니오 장군이었다. 아케르는 중앙 광 장에 들어서자 뮤 고삐를 한 번 끌어당겼다. 뮤는 울음소리를 내면서 앞 발을 들어올렸고, 순간 광장에 운집해 있던 시민들은 탄성을 크게 올렸 다. 라이짐은 아케르가 사람들의 반응을 생각하고 준비된 행동을 한 게 아니라 그저 뮤를 진정시키기 위해서였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 은 아케르의 행동에 크게 술렁였다. "장군님. 어서 오르시지요." 이곳으로 오라고 말을 전해 주었던 전령이었다. 아케르는 헛기침을 한 번 한 다음 뮤에서 내렸다. 라이짐과 타호루도 뮤에서 내렸고, 뒤이어 아 케르를 따라 연단에 올랐다. 군중들의 갈채가 쏟아졌다. 국방장관 안토니 오 장군이 다른 유지들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아케르를 맞았다. 안토니 오 장군은 야전에서 보았을 때와는 딴판으로 깔끔하게 면도된 얼굴에 단 정한 정복 차림이었다. 안토니오 장군은 웃는 얼굴로 아케르에게 악수를 청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국방장관." 무표정한 얼굴로 안토니오 장군의 손을 맞잡으면서 아케르가 짜증난다 는 투로 말했다. "둘이 있을 때 경어는 쓰지 않기로 하지 않았소?" "장관께서 이렇게 장관 티를 내시면 쓰지 않을 수 없지요." 아케르가 악수를 풀면서 말했다. 당장이라도 씹어먹어 버리고 싶다는 얼굴이었다. "미안하오, 아케르 장군. 갑작스럽게 결정된 사항이라. 영주님께서 간 신히 허락해 주신 자리오." 여전히 웃는 낯을 하고서 안토니오 장군이 말했다. "미리 알려 줄 수도 있지 않았소?" 어느새 경어를 풀고 아케르가 말했다. "오늘 아침에 전령을 보내는 걸 잊었소, 아케르 장군." "깜짝 놀라길 바랬던 게로군." 안토니오 장군의 말을 들은 아케르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라이짐은 일단 음모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그럼 연설을." 안토니오 장군은 이렇게 말하고 아케르를 연단으로 떠밀었다. 카를로스 장군을 상징하는 칼 문양이 커다랗게 새겨진 연단은 두껍게 기름칠이 되 어 있었다. 석궁으로 쏜다고 해도 뚫기 어려운 견고하게 제작된 연단이었 다. "연설?" 연단에 떠밀린 아케르가 이렇게 말하면서 안토니오를 돌아보았다. 안토 니오는 웃으면서 박수를 쳤고, 그러자 안토니오 장군 옆으로 서 있던 유 지들과 군중들이 일제히 박수를 쳤다. 사방이 온통 전장과도 같은 소음으 로 가득 찼다. 라이짐은 아케르를 주시했다. 사실 보좌역을 하고는 있었 지만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저기 봐, 저기." 유지 중에 누군가가 라이짐을 가리키면서 수군거렸다. 목소리를 들을 수는 없었지만 입 모양으로 대충 어떤 내용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지 알 수 있었다. "저게 전설의 백발영웅이야?" "칼날도 들어가지 않는 괴물이라며?" "내가 듣기엔 밥 대신에 창날과 화살촉을 씹는다고 하던데?" "쉿. 듣겠어." 라이짐은 유지들을 쏘아보았다. 그러자 유지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태연하게 아케르를 주목했다. 중앙 광장이 순식간에 조용해 졌다. 아케르의 말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라이짐은 불쾌한 기분을 감추어야 만 했다. 아케르의 연설을 앞에 두고 사람들의 이목이 자신에게 집중되어 서는 안되었으니까. "나는 야전 군인입니다." 아케르가 말했다. 아케르의 목소리가 중앙 광장에 울려 퍼졌고, 사람들 은 "군인은 임무에 충실할 뿐입니다. 그것이 시민을 위하는 일이라면." 아케르는 이렇게 말하고는 연단에서 물러섰다. 안토니오 장군은 자리에 서 일어나 과장된 몸짓으로 박수를 쳤고, 유지들이 안토니오 장군을 따라 서 박수를 치는 것을 시작으로 다시 중앙 광장은 환호성과 박수소리고 가 득 찼다. 안토니오 장군은 그 사이를 놓치지 않고 아케르에게 훈장을 수 여했다. 아케르는 무표정한 얼굴로 가슴에 훈장을 달아주고 있는 안토니 오 장군을 바라보았다. "이건 시작일 뿐일세, 아케르 장군." 안토니오 장군은 아주 흡족한 얼굴을 하고서 아케르에게 이렇게 말했 다. 하지만 라이짐이 보기에 그 웃음은 마치 부자가 거지에게 동냥을 주 고는 흡족해 하는 것과 그리 다를 바가 없는 웃음이었다. "끝은 미리 알았으면 좋겠군." 아케르는 이렇게 말하고는 환호하는 군중들에게 답할 생각도 하지 않고 연단에서 내려왔다. "타호루. 백부장들에게 병사들 분열 행진 연습 좀 시키라고 해야겠네." 뮤에 오르면서 아케르는 이렇게 말했다. 라이짐은 오늘 행진이 별로 마 음에 들지 않았나보다 싶었지만, 아케르가 분열 행진을 굳이 강조한 이유 를 알 수는 없었다. 분열 행진을 할 일이 앞으로 있을 것 같다는 뜻이었 을까? 아케르의 의중을 읽는다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라이짐은 생각을 접었다. 햇살 때문에 훈련의 피로가 더해 지는 느낌이었다. "연설은 아주 훌륭했어." 안토니오가 손나팔을 만들어 아케르에게 소리쳤다. 아케르는 안토니오 장군에게 거수 경례를 붙인 다음 서둘러 병력을 이끌고 중앙 광장에서 빠 져나갔다. 라이짐은 중앙 광장을 벗어나자마자 아케르가 가슴에 붙어있는 훈장을 떼어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중앙 광장에 서 멀어지자 긴장이 풀리면서 라이짐은 눕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뜨거 운 물과 목욕이 간절했다. 그 날, 라이짐은 마리를 찾기 전에 중앙 시장을 찾았다. 라이짐은 훈련 이나 작전 때문에 며칠 마리를 보지 못하면 뭔가 사들고 가야 마음이 편 했다. 다음 날 야외 기동훈련의 피로가 채 풀리기도 전에 라이짐은 해가 뜨자마자 집무실을 나섰다. "또 마리야?" 일찍 집무실로 출근한 하진이 모자를 깊게 눌러 쓰는 라이짐에게 말했 지만 라이짐은 그냥 한 번 미소만 지었을 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 았다. 하진은 걱정된다는 얼굴로 라이짐을 바라보았지만 라이짐의 눈에는 맑은 햇살만이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밖은 봄이 한창이었다. 푸른 물이 오르기 시작한 나뭇가지들은 한껏 싱 그러운 향기를 뿜어대고 있었고, 거리를 지나는 아낙의 얼굴에는 반짝이 는 땀방울로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길거리를 뛰어다니는 꼬마의 얼굴 에는 천진한 미소가 가득했다. 상인들이 내지르는 음성은 활기와 보람으 로 가득했다. 라이짐은 숨을 한껏 들이쉬었다. 세상의 모든 생기가 온몸 에 퍼지는 기분이었다. 가고일의 위협에서 벗어난 프라브리티는 세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곳처럼 보였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세상에 귀족도, 평민 도, 전쟁도, 마물도,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푸른 하늘에 몸을 맡기고 허공을 걷고 있는 기분이었다. 라이짐은 거리를 오가는 여자들의 옷차림을 살펴보았다. 하늘거리는 치 마 자락은 마리의 머릿결을 연상시켰고, 반짝이는 장신구들은 마리의 눈 동자를 보는 듯 했다. 라이짐은 한참을 그런 풍경만 바라보다가 가장 먼 저 눈에 뜨이는 커다란 여성용품 상점으로 들어갔다. "자! 어서오세요." 심상치 않은 상점 주인의 목소리였다. 상점 주인은 사십 대 정도 되어 보였는데, 나이에 맞지 않게 뽀얀 피부에 가느다란 목소리를 하고 있었 다. 라이짐은 상점 안을 둘러보았다. 화려한 옷가지들과 장신구들이 어지 러울 지경으로 진열되어 있었다. "뭐가 필요하십니까? 제가 한 번 맞춰 보지요. 가만있자... 애인이시군 요. 맞지요? 그럴 줄 알았다니까요. 손님 같은 미남 분이시라면 틀림없이 애인이겠지요. 이건 어떻습니까? 아름다움을 두 배, 아니, 세 배로 돋보 이게 하는 목걸이입니다. 멀고먼 남쪽의 범버쿠 정글에서 나는 크리스탈 이 박혀 있는 목걸이지요. 한번 만져 보세요. 촉감이 다르지 않습니까? 저런... 표정을 보니 맘에 안 드시는 모양이시로군요. 그럼 이건 어떻습 니까? 마법이 깃들어 있는 전설의 향수입니다. 이건 손님께만 알려드리는 비밀입니다만, 스파일의 영주이신 프란스 패르도 님도 부인을 유혹할 때 이걸 쓰셨다고 하더군요." 상점주인은 라이짐에게 말할 틈을 주지 않고 쉴 사이 없이 떠들었다. "이건 금화 두 닢은 받아야 하는 최고급품입니다만, 제가 손님 얼굴 봐 서 특별히! 금화 한 닢에 넘겨 드리지요. 아, 부담 갖지 마세요. 어떻습 니까, 우리 사이에. 하하하." "여성용품점인 줄 알았더니 잡화점이었군요." 라이짐은 이렇게 말하면서 자신이 상점 주인과 무슨 사이일까 생각해 보았지만 해답이 나오기도 전에 주인은 라이짐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말 했다. "저희 가게에는 없는 게 없지요. 저희 가게 창고를 뒤지면 일개 군단이 무장할 수 있는 무기가 나온다는 말도 있습니다만, 뭐 그 정도까지는 아 니라고 해도... 그럼 이건 어떻습니까. 신비한 바바 족의 주술이 걸려 있 는 구슬입니다. 이걸 애인 분한테 선물해 주세요. 역시 정말 비밀입니다 만, 손님과는 친해졌으니 제가 살짝 알려 드리지요. 이 구슬에는 이성을 완전히 홀려 버리는 마력이 잠들어 있답니다." 상점 주인이 라이짐의 귀에 소근거렸다. 라이짐은 피식, 웃음을 터트리 고 말았다. "바바 족에게 마력 따위는 없소." 라이짐은 크리스트 대 황야에서 보았던 타 들어간 바바 족의 시체를 떠 올리면서 말했다. 이 구슬을 사느니 차라리 하진에게서 부적을 사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깐만요. 손님, 바바 족을 조금 아시는 것 같군요. 제가 한 번 맞춰 보지요. 음... 그러니까... 손님께서는 군인이시군요. 저도 마법에 관련 된 물품을 팔다보니 조금 알지요. 바바 족과 싸워보신 경험도 있으시군 요. 이거, 정말 대단하신 걸요? 알고 보니 역전의 용사셨군요. 하하하." 상점주인의 이 말에 라이짐은 또 한번 피식 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 다. 라이짐이 눌러 쓰고 있는 모자가 휴가병들이 즐겨 쓰는 군용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적어도 프라브리티 상인 중에는 없을 거였기 때문이었 다. "이런 모자를 쓴 사람이라면 저도 그 정도는 알아보지요." 라이짐이 이빨을 드러내면서 이렇게 말했다. 라이짐은 슬슬 짜증이 나 고 있었다. 마리에게 선물할 물건 몇 가지를 사려고 했더니 기껏 한다는 소리들이 그야말로 장사꾼의 말이라니. 좀전의 편안하고 즐거웠던 기분이 다 사라지는 것 같았다. "아! 제가 한 번 맞춰 보지요. 원하시는 게 바로 모자셨군요! 맞지요? 맞지요? 가만있자. 제가 진짜 좋은 물건을 하나 소개해 드리죠. 이건 진 짜 상품 중에 상품입니다. 임신한 타코 열 마리 가죽으로 만들어 진 모자 인데요..." 상점 주인은 이렇게 말하면서 허리를 숙여 진열장 밑을 뒤졌다. 라이짐 은 상점 주인을 바라보면서 문득 짓밟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갑자기 가슴이 뛰었다. 라이짐 스스로는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것 은 이제 라이짐의 피에 흐르게 된 강자의 피였다. "자! 이것입니다." 상점 주인은 모자를 내밀었다. 은빛의 타코 가죽이 빛을 발하고 있었 다. 라이짐은 이런 상점주인도 제대로 된 물건을 간혹 내밀기도 하는 구 나 싶어졌다. 라이짐은 윤기가 흐르는 타코 가죽에 잠시 정신을 팔았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이런 모자는 휴가병한테나 줘 버리세요. 이런 모자 보다는..." 상점 주인은 이렇게 말하면서 라이짐의 모자를 낚아채듯 벗겨버렸다. 깊게 눌러쓴 라이짐의 모자가 벗겨졌고, 환한 햇살 아래 라이짐의 백발이 드러났다. 햇살은 라이짐의 머리에서 부서져 사방으로 은빛을 뿜어내었 고, 그것은 라이짐이 들고 있던 타코가죽으로 만들어진 모자를 다 무색하 게 만들 지경이었다. 라이짐의 핏속에서 순간 공격 본능이 꿈틀거렸다. 아마도 상점 주인이 허리를 숙이고 있었을 때, 가지고 있었던 생각이 몸 으로 표현된 것이리라. 라이짐은 상점 주인의 목을 잡고 벽에 밀어 부쳤 고, 나머지 한 손으로 주인이 들고 있던 모자를 빼앗았다. 상점 주인의 머리통은 나무로 만들어진 벽면에 쿵, 소리를 내면서 부딪쳤고, 벽에 걸 려 있던 장신구며 옷가지들이 화들짝 놀라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라이 짐은 둔탁한 소리를 듣는 순간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몰리는 것을 느 꼈고, 뒤이어 얼른 상점 주인의 목을 풀어준 다음 거칠게 모자를 눌러썼 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21774/21893 ━━━━━━━━━━━━━━━━━━━━━━━━━━━━━━━━━━━━━━━━ 제 목:[탐그루] 혁명과 반역의 차이 298 관련자료:없음 17/17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6-08 20:10 조회:590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상점주인은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 목을 움켜쥐고 콜 록거렸다. 라이짐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시민들을 바라보았다. 시민들 은 하나같이 신기한 물건을 바라보는 듯한 눈을 하고 있었다. 라이짐은 그들의 눈을 하나 하나 노려보았다. 눈이 마주친 시민들은 얼 른 시선을 돌리고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면서 흩어져 갔다. "마, 맙소사. 제, 제가 몰라 뵈었습니다. 저, 전 알고 보면 집에 처자 식이 있는 몸입니다. 저 하나만 믿고 사는 사람들이지요. 제가 여기서 죽 거나 다친다면 제 처자식들은 그냥 거리에 나앉아서 굶어 죽을 겁니다. 제, 제발, 모, 목숨만..." 상점주인은 무릎을 꿇고서 라이짐에게 목숨을 구걸하고 있었다. 벌레 같다. 라이짐은 생각했다. 벌레를 밟아 죽이는 건 간단한 일이다. 그리고 그만큼 의미없는 일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지금 라이짐은 누군가를 다치 게 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한번 맞춰보지 그래? 이제 내가 이제 어떻게 할지." 라이짐은 상점주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상점주인은 완전히 겁에 질린 얼굴을 하고서 말을 잇지 못했다. 라이짐은 허리춤에서 칼을 뽑아들었다. 상점주인은 그 순간 기절이라도 할 듯한 눈을 하고서 라이짐을 바라보았 고, 라이짐의 칼날은 허공에 빛줄기를 만든 후 다시 칼집으로 돌아왔다. 상점 주인은 그대로 오줌을 싸고 말았다. 하지만 상점주인이 생각하고 있 는 것은 젖은 바지가 아니라 자신의 목이 제자리에 온전히 붙어 있는 건 가 하는 것이었다. 물론 상점주인의 목은 그대로 붙어 있었다. 다만 라이 짐에게 내밀었던 구슬은 반 조각으로 베어져 바닥에 뒹굴고 있었지만. 라 이짐은 뒤돌아보지 않고 그냥 마리의 집으로 향했다. 상점주인은 자신의 목을 더듬어 본 다음 자리에서 일어나 상점을 정리 했다. 그리고 라이짐 다음으로 상점을 찾은 손님에게 이렇게 말했다. "제가 지금 무슨 일을 당했는지 아십니까? 손님. 믿어지지 않으시겠지 만 저는 전설의 백발영웅을 보았습니다. 역시 전설 그대로 무시무시한 분 이시더군요. 제가 파는 마법의 구슬에 여자를 홀리는 마칸의 혼령이 깃들 어 있다면서 단칼에 이렇게 베어버리셨습니다. 이 구슬에 마력이 깃들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무시무시한 힘을 가진 물건인줄은 몰랐 지요. 손님. 제가 한 번 맞춰 볼까요? 손님께서도 이 물건에 관심이 있으 시지요? 천만다행으로 제게 이 물건이 하나 더 있습니다만." 마리의 집을 찾아가는 길은 골목골목을 한 참 돌아 들어가야 했다. 라 이짐은 이 골목길을 거슬러 올라 갈 때마다 늘 미로를 헤매는 느낌을 가 지곤 했다. 야트막한 담장,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 낡은 집, 아무렇게나 걸려 있는 빨래줄과 빨래, 그리고 여기저기 피어오르는 연기. 라이짐은 이 미로 안으로 들어가면 아무도 자신을 찾지 않을 것이고 그곳에서 평안 한 안식을 얻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날씨가 좋아서 오늘은 마 리에게 그리지아 산이 보이는 평원으로 가자고 말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 같아서는 마리의 방안에서 한걸음도 움직이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 다. 마리의 집 앞에 다다랐을 때, 라이짐은 늘 보던 대문의 시커먼 때가 묻 은 나뭇결이 마치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눈동자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마리가 자신을 그런 눈으로 보지 않는 것을 라이짐은 다행으로 여 겨야 했다. 물론 이 문을 열어줄 노파 역시 금화 몇 닢으로 완전히 자신 을 귀빈 대우를 해 줄 것이다. "오셨군요." 뜻밖의 일이었다. 늘 라이짐을 맞아주던 노파 대신 마리가 문을 열어주 면서 말했다. 금화 몇 푼으로 사람의 마음을 산다는 것은 불가능할지 몰 라도 친절을 산다는 것은 가능하다는 걸 증명해 주었던 노파의 모습이 보 이지 않자, 라이짐은 불안해졌다. 적어도 자신이 마리를 돈으로 살 수 없 다는 걸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마리의 얼굴은 눈에 뜨일 만큼 수척해져있었다. 눈가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운 모습이 꼭 당장이라도 죽을 병에 걸린 사람 같았다. 라이짐의 마 리의 홀쭉해진 볼과 거칠어진 피부를 보는 순간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무슨 일이 있는 것 아니냐고 묻고 싶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라이짐은 마리를 따라 마리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여러 개의 방이 다 닥다닥 붙어 있는 이곳은 마치 벌집처럼 보였다. 이곳을 바라볼 때마다 라이짐은 이곳이 벌레 소굴이라는 생각을 지우기 위해서 무진 애를 써야 만 했다. 적어도 마리만큼은 라이짐의 머리색에 신경을 쓰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라이짐은 이곳도 역시 이 동네의 다른 집과 마찬가지 로 빨래가 널려있고,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으며, 야트막한 담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굳이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마리는 들어오라는 말도 하지 않고 먼저 문을 열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나무 판자 몇 겹을 대어 만들어진 문은 삐걱거리면서 열렸다. 방안은 창 문을 닫아서 그런지 어두웠다. 라이짐은 방안에서 풍기는 냄새에 잠시 머 리가 어찔해졌다. 담배냄새와 술 냄새가 섞인, 통 정신을 차리기가 어려 운 냄새였다. 그래도 라이짐이 들어와서 그런지 일단 마리는 방안에 연금술사의 등을 켰다. 언젠가 라이짐이 달아주었던 연금술사의 등이었다. 불이 밝아지자 라이짐은 전에 왔을 때 보다 방이 훨씬 더 넓어 보인다는 인상을 받았다. 방구석에 가지런히 개어져 있던 이불은 아무렇게나 널려있었고, 방 한 가 운데 놓인 재떨이와 여기 저기 떨어져 있는 담뱃재에도 불구하고. "안색이 좋지 않네요." 방에 들어가 앉으면서 라이짐이 마리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야외 기 동훈련 동안 마리를 만나지 못한 탓인지, 라이짐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 통 어색하기만 했다. 마리는 라이짐의 말에 대답 대신 담배를 하나 입에 물었다. "좋지 않아서요." 불을 붙이면서 마리가 말했다. 라이짐은 뭐가 좋지 않다는 말인지 알아 들을 수가 없었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가뜩이나 분위기 도 어색한데디 마리가 너무나도 차갑게 느껴진 까닭이었다. 라이짐은 방 안이 차가운 공기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 버렸다. 어떻게 해서든 방안을 다시 훈훈하게 만들고 싶었다. 예전의 마리에게서 느낄 수 있었던 따스함과 포근함을 한번 더 느끼고 싶었다. 라이짐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려고 했다. 일단 환기라도 시키면 조금 나아질 것 같았다. 하지만 마리는 손짓으로 라이짐에게 그냥 앉아 있어달라고 부탁했고, 라이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냥 자리에 도로 앉고 말았다. 무슨 말이건 해야 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이 분위기에서 도 저히 벗어날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라이짐은 다시 한 번 방 안을 둘러 보았다. 그러고 보니 방이 넓어 보이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지아는 어디 있나요?" 그리지아가 보이질 않고 있었다. 아마도 마리가 이렇게 변한 데에는 그 리지아가 보이지 않는 것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주인이 봐 주고 있어요." 주인이라고 하면 아마 라이짐에게 문을 열어주던 노파를 말하는 모양이 었다. 하지만 마리는 대답하는 게 귀찮았는지 짧게 이렇게 대꾸하고는 말 았다. 라이짐은 마리에게 뭔가 더 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라이짐은 마리가 자신에게 화가 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기분이 우울했다. 다시 얼마의 어색한 시간이 흘러갔다. 마리는 길게 담배 연기를 내뿜은 후 한숨 쉬듯이 말을 꺼냈다. "그리지아, 아파요. 그리지아가 골골하니까 주인이 못 봐주겠다고 데리 고 가 버렸어요." 라이짐은 그제야 방구석에 늘어서 있는 빈 술병들을 바라볼 수 있었다. 라이짐은 마리가 왜 이러는 지는 알 수 없었어도 적어도 마리의 얼굴이 왜 이렇게 안되어 보이는지는 알 수 가 있었다. "술, 조금씩만 마셔요. 좋으라고 마시는 술, 너무 과하면..." "한 잔 할래요?" 마리는 불쑥 라이짐의 말을 끊으면서 이렇게 말하고는 품에서 술병을 하나 꺼내었다. 술이 깨고 나면 골이 쪼개질 듯 아파 오는 진이었다. "마리. 무슨 일 있었어요?" "아무 일 없어요." 여전히 차가운 어투였다. 마리는 이렇게 툭, 하고 내뱉듯이 말하고는 독한 진을 병째로 들이켰다. 라이짐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 다. 라이짐은 자신이 마리에게 그 동안 무심하지 않았는가 생각해 보았다. 라이짐은 마리에게 청혼을 한 상태였고, 마리는 아무런 확답도 주지 않고 있었다. 물론 확답을 빨리 들을 수 있는 성질의 질문은 아니었지만, 라이 짐은 자신의 청혼이 마리를 이렇게 만든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라이짐은 마리의 집으로 오는 데 아무 것도 들고 오지 않았다는 게 마음에 다 걸릴 지경이 되어버렸다. 상 점주인이 건네준 엉터리 최음 향수라도 하나 사 들고 오는 거였는데. "한잔 할래요?" 마리가 라이짐에게 다시 물었다. 라이짐은 일단 마리가 술을 더 마시지 못하게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마리가 권하는 술병을 받아 들었다. "오늘 좀 이상해요, 마리." "그런가요?" 마리는 이렇게 말하면서 웃음을 지었다. 한 쪽 입술만 비죽 올라가는, 무척이나 자조적으로 보이는 웃음이었다. "안 마실 거면 병 도로 줘요." 마리가 말했다. 라이짐은 서서히 마음속에 돌멩이가 하나 박히는 것 같 은 느낌이 들었다. 답답했다. 마음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라이짐은 병째로 진을 한 모금 들이켰다. 진은 입에서는 달콤하게 느껴지지만 목구멍을 넘어가는 순간 뜨겁게 변하면서 속을 다 뒤집어 놓는 술이었다. 라이짐은 구역질이 나오는 걸 억지로 참 으면서 술병을 내려놓았다. 마리는 술병을 다시 들고 한 모금 들이킨 뒤 이렇게 라이짐에게 말했다. "오늘 내가 이상한 게 아니라 원래 내가 이런 사람이었는지도 모르지 요. 지금까지 라이짐 님을 만나는 동안이 오히려 이상했는지도. 아니, 일 부러 좋은 사람처럼 보이려고 꾸몄는지도 모르잖아요?" 라이짐의 마리의 목소리가 자학으로 가득 차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마 리는 대체 무엇을 자학하고 있는 것일까? 라이짐은 무슨 말을 해야 좋을 지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라이짐은 마리의 남편을 떠올렸다. 마리는 남편이 하잔에서 죽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어쩌면 라이짐이 마리 의 남편을 죽였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했던 것도 기억할 수 있었다. 어쩌 면 지금 마리는 남편의 원수에게서 청혼을 받았다는 생각 때문에 이렇게 힘들어하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이짐은 술병을 집어든 다음 몇 모금을 들이켰다. 술기운이 순식간에 얼굴까지 치밀어 오르자, 라이짐 은 겨우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얻었다. "마리. 내가 싫어요?" 라이짐이 말했다. 라이짐의 말은 진심이었다. 싫어하지 않는다면 자신 에게 이렇게 대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라이짐은 대답을 기대 했지만, 마리는 대답 대신에 얼굴이 일그러지는가 싶더니 무릎 사이에 얼 굴을 묻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라이짐은 이제 어째야 좋을지 알 수가 없어졌다. 울고있는 여자를 앞에 두고 있는 일이란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이겠지만, 특히 그 여자가 자신 때문에 울고 있다고 생각되면 도저히 참기 어려운 법이다. 라이짐은 마리 의 어깨에 조심스럽게 손을 얹었다. 그러자 마치 발작처럼 마리가 몸을 일으켜 라이짐을 감싸 안았고 라이 짐은 엉겁결에 마리의 등뒤로 양손을 둘렀다. 마리가 기대고 있는 라이짐 의 어깨가 금새 눈물로 뜨겁게 젖었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마리는 중얼거리듯이 이렇게만 되풀이해서 말하고 있었고, 라이짐은 그 저 마리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을 수밖에 없었다. 늘 느끼는 것이었지만, 마리의 머리카락은 너무나도 가늘었다. 손에 닿았는지 닿지 않았는지 알 기 어려운 마리의 부드러운 머릿결을 쓰다듬으면서 라이짐은 한참 동안을 그렇게 있었다. 밖에는 발정기에 이른 고양이가 애처롭게 울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아 마도 해가 저물고 있는 모양이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21841/21893 ━━━━━━━━━━━━━━━━━━━━━━━━━━━━━━━━━━━━━━━━ 제 목:[탐그루] 혁명과 반역의 차이 299 관련자료:없음 21/21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6-09 19:14 조회:529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술, 이제 그만 마실게요." 집무실로 돌아가는 라이짐에게 헝클어진 머리결을 바로 할 생각도 하지 않고서 마리가 말했다. "아름다운 나의 마리." 스스로 쑥스러워 하면서, 라이짐은 대답 대신 마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라이짐은 갑자기 속에서 뭔가가 불타오르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것은 행복이었다. 라이짐은 이렇게 강하게 행복감을 느 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이 감정이 좋은 것이며, 자신에게도, 또 마리에게도 기운을 북돋아 준다 는 사실만큼은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저, 마리만 좋다면..." 웃고있는 마리의 얼굴을 피하면서 어렵게 라이짐은 이렇게 말을 꺼내었 다. 라이짐은 어떻게 말을 이어가야 할 지 한 참을 망설인 끝에야 겨우 말을 맺을 수 있었다. "...늘 이렇게 함께 있고 싶어요." 라이짐이 말하자 마리는 꼭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라이짐의 말에 이 렇게 대답했다. "늘 라이짐 님께서는 저를 보살펴 주셨지요. 앞으로는 제가 보살펴 드 릴 수 있으면 좋겠어요." 마리는 준비하고 있던 대사를 중얼거리는 배우처럼 말했지만 지금의 라 이짐에게는 그런 마리의 말투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을 거예요." 라이짐은 이렇게 말하는 마리에게 입을 맞추었다. "우리 둘 다 성인이니까." "예. 둘 다 성인이니까." 집무실로 돌아오는 길 내내 라이짐은 허공을 딛는 기분이었다. 도무지 걷고 있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을 지경이었다. 라이짐은 살아오면서 이렇 게 기뻤던 기억이 도무지 나지를 않았다. 전장의 피 냄새와 살육의 공기 가 잠시동안 라이짐의 마음에서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아주 잠시 동안이었을 뿐이었다. 비어있을 줄 알았던 집무실에는 하진이 있었다. 하진은 라이짐이 들어 오자 책상에 올려놓았던 다리를 내리고는 벌떡 일어섰다. 의족 때문에 몸 이 기울어 있기는 했지만 최대한도로 몸가짐을 바로 하려는 듯한 모습이 었다. "부하로서 청원을 상신합니다." 하진이 말했다. 라이짐은 하진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왜 그래, 하진?" 적잖이 당황하면서 라이짐이 말했다. 라이짐은 하진을 앉히려고 했지만 하진은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면서 이렇게 말을 이었다. "이제 발 끊어." 라이짐은 찬물을 뒤집어쓰는 느낌이 들었다. 뭐라고 해야 좋을지, 아 니, 지금 왜 하진이 이런 말을 하고 있는지 라이짐은 도무지 이해 할 수 가 없었다. "그만큼 가지고 놀았으면 되잖아. 이제 발 끊어." "무슨 소리야, 그게?" 마리를 두고 하는 말이라는 걸 라이짐이 눈치채지 못할 리는 없었지만, 하진이 이런 말을 한다는 게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 라이짐은 하진에게 이 렇게 되물었다. "그 여자는 그냥 술집 여자야." "마리는 가수야." 라이짐은 이렇게 말하면서 야전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진은 앉을 생각도 하지 않고 라이짐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 늘 말했잖아? 해야 할 일이 먼저라고. 내가 마리를 소개시켜 준 건 기운 차리고 열심히 일하라는 뜻이었지 이렇게 정신 못 차리고 헛짓거 리나 하라는 뜻이 아니었어." "나, 헛짓거리 같은 거 한 적 없어." "도대체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데리고 살기라도 할거야?" 하진의 말에 라이짐은 활칵 치밀어 오르는 화를 꾹 누르면서 이렇게 대 답했다. "나, 마리한테 청혼했어. 곧 결혼할 거야." 라이짐의 말이 끝나자 하진의 표정이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빛으로 바 뀌었다. 라이짐은 그런 하진에게 뭐라고 더 말을 하려고 했지만 하진이 먼저였다. "너,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내가 알던 라이짐하고는 너무 달라. 늘 해야 할 일을 먼저 하고 항상 냉정하게 판단했던 라이짐 말이야." 실은 이렇게 말하는 하진이야 말로 하진 답지 않았다. 평소의 하진이었 다면 틀림없이 뭐라고 비꼬는 투로 한 마디 했을 거였다. 하지만 지금의 하진은 너무나도 진솔하게 라이짐에게 이렇게 말을 하고 있었다. "어쩌면 지금 이게 내 진짜 모습인지도 모르지. 지금까지 내 모습과는 다른 진짜 내 모습 말이야." 하진은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라이짐이 보기에 하진은 무척이나 당황 하고 있는 듯 했다. 라이짐은 하진에게 자신이 진심임을 설명해 주고 싶 었다. 자신이 마리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으며 결혼하겠다는 말이 결코 순 간의 판단에서 나온 말이 아님을 말이다. 하지만 하진은 그런 라이짐의 말을 들을 수 있을 만한 여유가 없었다. "너, 강한 줄 알았더니. 고작 이런 녀석이었어? 여자한테 푹 빠져 가지 고." "그래. 여자한테 빠졌다고 해두자. 그럼 안 되는 거냐? 도대체 왜 나한 테 이렇게 까지..." 라이짐이 항변하려고 했지만 하진이 먼저였다. 하진은 라이짐의 말 허 리를 툭 끊고는 이렇게 말을 이었다. "그래 가지고 네가, 아니, 우리 아케르 군단 전체가 이루고자 하는 일 을 이룰 수 있겠어? 그따위 정신으로 귀족을 무슨 수로 싸워서 이길 거 야?" 하진이 말하자 라이짐은 가슴속으로 차가운 바늘이 박혀 들어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해야할 일과 하고 싶은 일에 대한 라이짐 본인의 생각이 이렇게 비수처럼 되돌아와 박힐 줄은 라이짐은 미처 생각해 보지 못했던 것이다. 라이짐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라이짐. 우리가 무얼 해야 하는 지 잊지 마. 여자도 좋고, 사랑도 좋 지. 아니, 돈이나 권력, 명예, 뭐 이런 것도 다 좋아. 나를 봐. 나만해도 돈 좋아하잖아? 하지만 절대로 도를 지나치는 행동은 하지 않아. 해서도 안 되는 거고 말이야. 라이짐." "나도 마찬가지야. 여자, 아니, 마리라고 해서 다르지 않아. 나도 내가 해야 할 일이 뭔지 정도는 알고 있어. 잊지 않았다고." 하진의 말에 라이짐은 이렇게 항변했다. 하지만 하진은 논박대신 두터 운 종이 뭉치 하나를 책상 위에 탁, 소리가 나도록 올려놓았다. "보고서야. 오늘 장군님 호출이 있었어." 라이짐은 하진의 말에 말문이 턱하고 막혀버렸다. 라이짐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자 하진은 이렇게 말을 이었다. "내가 대신 뵈었다." 라이짐은 천천히 고개를 위 아래로 움직였다. 하진은 한심하다는 눈으 로 라이짐을 한 번 흘겨 본후 말을 이었다. "포로를 잡았어. 이곳에 잡입 했던 성황청 첩자였던 모양이야. 장군님 께서는 조치를 취하길 원하셨어." "심문... 했니?" "아직. 녀석도 좀 쉬어야지 말을 할테지. 내일 함께 가면 돼. 장군님께 는 잘 말씀드려 놨으니까 걱정하지 마." 라이짐은 미안하다든가, 고맙다든가 하는 말조차 입 밖으로 낼 수가 없 었다. "라이짐. 우리가 가는 길은 하늘을 날고 있는 새와 비슷해. 겉보기에 폼나고 근사해 보이지? 하지만 날개 짓을 멈추면 그대로 추락이라고, 추 락. 처음에는 힘도 안들이고 잘 날고 있는 것 같지. 하지만 일단 시간이 지나면 다시 원래 높이로 나는데 몇 배로 힘을 들여야 하는 법이야. 게다 가 땅바닥에 떨어져 버리면 다시는 날아오를 수 없어." 하진은 이렇게 말하고는 의족을 끌고 집무실을 나가버렸다. 라이짐은 하진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하진의 말 은 모두 맞는 말이었다. 라이짐은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서류 뭉치를 바라보았다. 하진에게 고 맙기도 했고 미안했기도 했지만, 사실 라이짐에게 당장 떠오르는 생각은 자신이 하는 일이 과연 어떤 일인가 하는 것이었다. 어쩌면 지금 내가 하 고 있는 일은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을까. 라이짐은 이렇게 생 각하고는 무력감에 빠져들었다. "이제는 인정하셔야 할겁니다." 집무실 구석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이스?"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라이짐은 조금도 놀라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에 이스가 있다는 건 당연한 일이었고, 원래 에이스는 눈에 잘 띄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예. 저 여기 있었습니다." 에이스의 화상으로 일그러진 얼굴이 연금술사의 등 아래에서 드러났다. 라이짐은 에이스의 모습이 흉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친숙한 에 이스의 얼굴이 보이자 마음마저 편해지는 기분이었다. 라이짐은 갑작스럽 게 긴장이 풀린 데다가 무력감까지 겹쳐서 그대로 침대에 쓰러지듯 드러 누웠다. "뭘 인정하라는 거야?" 라이짐은 천장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라이짐은 문득 마리가 담배를 피 우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담배 냄새를 오랫동안 맡아서일까. 라이짐은 담배를 피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돌아올 수 없는 지점을 지났다는 것을요." 에이스의 말은 라이짐에게 다시 한 번 하진의 말을 상기시켜주었다. 멈 추어 서면 추락이라는 말이 귓가에서 맴돌고 있었다. 하지만 라이짐이 생 각하기에 일은 일이었고 마리는 마리였다. 해야 할 일을 먼저 해야 한다 는 원칙은 라이짐 스스로도 깨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다만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고 해서 마리를 포기할 수는 없는 것 아닐까. 라 이짐은 이렇게 생각을 정리했다. 하지만 오늘 아케르가 자신을 부를 줄은 정말로 몰랐었다. 차이린이 떠나는 것을 보고 난 후, 마리를 보지 않고는 도저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것만 같았던 자신의 모습이 부끄럽다는 생 각이 들었다. 오늘 일은 반성하는 거다. 앞으로 더 열심히 하면 되지, 뭐. "에이스. 보고서 좀." 라이짐이 말하자 에이스는 보고서 뭉치를 라이짐에게 전해 주었다. 라 이짐은 제일 첫장부터 천천히 보고서를 읽어 내려갔다. 하진의 일처리 능력은 라이짐이 생각했던 것 이상이었다. 주민들의 동 향, 최근 돌고 있는 소문, 심지어 임프 시 자이벌들이 벌이고 있는 거중 기 제작과 판매에 얽힌 파벌 싸움에 대한 보고까지 정리가 잘 되어 있었 다. 게다가 군데군데 쳐져 있는 밑줄과 옆에 쓰여진 메모는 하진이 정보 를 깊이 있게 파악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에이스 자매의 보고를 토대로 이 정도 수준의 정보를 추려낸다는 것은 보통의 능력 갖고는 어림 도 없는 일이었다. 국경지대에서 간부 하나가 실종된 것과 바바 족이 국 경 쪽으로 병력을 전진 배치했다는 정보를 페르도 부인의 현재 동향과 연 결해 분석한 정보는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 라이짐은 보고서를 정신없이 훑어 내려가면서 문득 자신이 일을 즐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이렇게 살면 안 되는 것일까. 어떤 일이든 하면서 마리와 함께 조용히 살 수 있지 않을까. 라이짐은 이렇게 생각하 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켜 세웠다. 어쩐지 자 신이 수르카 녀석과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 다. 라이짐은 두 손을 들어 양 뺨을 힘껏 때렸다. 정신이 좀 드는 것 같 았다. "무슨 특별한 보고라도 있습니까?" 에이스가 라이짐에게 물었다. 라이짐은 에이스를 바라보았다. 거의 표 정 없는 검은 엘프 족이었지만 간혹 가다가 에이스는 저렇게 사람을 놀리 고 있는 듯한 표정을 지을 때가 있었다. 라이짐은 보고서 제일 겉장에 쓰 여져 있는 말을 발견하고는 대충 이렇게 말했다. "나이스가 타실에 가 있군. 하진 녀석, 나이스를 개인적인 일에 쓰겠다 고 하더니, 무슨 일로 타실에 보낸 거지?" "성황청의 타실 지부에 있는 성구의 힘의 근원 주변을 정찰하는 임무를 맡고 있습니다." 에이스가 친절한 상점 아주머니 같은 말투로 라이짐에게 설명해 주었 다. 라이짐은 에이스의 말을 듣는 순간 자신이 얼마나 안일한 태도로 일 에 임하고 있었나를 깨달을 수 있었다. 성구의 힘의 근원이 성황청 타실 지부에 있다고 들뜬 마음으로 보고했던 것은 바로 자신이었다. 그런데 그 일을 라이짐이 생각없이 방치해 두고 있었던 사이에 하진이 마무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라이짐은 하진이 화를 내는 것이 당연하겠구나 싶었다. 이래서는 안되겠다. 라이짐은 스스로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아야 할 때 라고 느꼈다. "나이스에게 정찰로만 그치지 말라고 해.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판단해서 조치하라고 해. 판단이 어려우면 바로 보고하라고 하고. 무슨 말인지 알겠지?" "예. 알겠습니다." 라이짐이 보고서를 다 읽을 즈음 에이스가 라이짐에게 물었다. "라이짐 님. 왜 이 일을 하고 계시는 거지요?" 보고서에 집중하고 있었던 터라, 라이짐은 에이스의 질문에 얼른 대답 을 하지 못했다. "일?" "예. 정보를 모으고, 정리하고, 보고하는 일이요." "그야 물론..." "귀족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인가요?" 라이짐이 대답을 정리해서 대답하기도 전에, 에이스가 라이짐에게 이렇 게 말했다. 라이짐은 고개를 끄덕여 에이스에게 그렇다고 답을 해주었다. "인간은 보통 의지만 있으면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다고들 하지요." 에이스가 창 밖을 내다보면서 말했다. 창밖에는 너무 짙어 끈적해 보이 는 어둠이 사방에 가득 차 있었다. 에이스의 눈동자가 초점없이 흐려져 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21842/21893 ━━━━━━━━━━━━━━━━━━━━━━━━━━━━━━━━━━━━━━━━ 제 목:[탐그루] 혁명과 반역의 차이 300 관련자료:없음 20/20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6-09 19:15 조회:468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그래서?" "라이짐 님의 의지는 거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돌아 올 수 없는 지점입니다." 라이짐은 알아듣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지만 보고서의 내용 이 머리를 떠나지 않고 있어서 에이스의 말뜻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아 들을 수는 없었다. 라이짐이 보고서의 마지막 단락을 읽고 있는 사이, 에 이스는 머리카락 한 올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몹시도 가느다란, 그래서 당장이라도 끊어질듯 보이는 머리카락이었다. 에이스는 그 머리카락을 조 심스럽게 어루만지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두 번째 소원은 이제 곧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리 멀지 않은 시간 안 에." 하지만 라이짐은 보고서에 정신이 팔려서 에이스가 무슨 말을 했는지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있었다. 하진이 라이짐을 안내한 곳은 주둔지 막사 중에서 창고로 쓰이는 건물 지하였다. 창고로 쓰이는 건물인지라 병참병 둘이 경계 근무를 서고 있었 을 뿐, 별다른 보안조치는 없었다. 하지만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이 중으 로 되어있는 철문이 눈에 들어왔고, 이곳에 잡혀 들어온 사람이라면 누구 라도 위압감을 느낄 만한 시커먼 칠이 되어 있는 벽면을 보니 준비 해 둔 지 꽤 오래된 곳이겠구나 싶었다. "성황청 녀석이야. 성황청 녀석들은 독종이 많이 있지." 하진이 계단을 앞장서서 내려가면서 말했다. "전에도 심문 해본 적 있어?" "너 없을 때 몇 번." 하진의 대답에서 아마 이곳은 라이짐이 크리스트 대황야에서 아케르와 함께 뜨거운 열쇠를 시험하고 있을 때 준비된 곳이겠구나 싶었다. "그런데 왜 얘기 안 해줬어?" "라이짐. 지금 나한테 불평하는 거야?" 누가 본다면 상관과 부하가 뒤바뀌었다고 생각했을 상황이었다. 하지만 라이짐 입장에서는 직무 태만을 범한 것이 틀림없었으므로 하진의 말에 뭐라고 반박할 수가 없었다. "네가 붙어만 있었어도 다 알 수 있는 일이잖아, 이런 건. 그리고 네가 돌아온 후에는 이곳을 쓸 일이 없었어." 하진이 말을 막 마쳤을 때, 계단은 끝이 났다. 라이짐은 계단 밑으로 이어진 어두운 복도를 바라보았다. 라이짐은 눈앞에 놓인 어둠 속으로 빨 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그 느낌은 벽에 달려 있던 연금술사 의 등을 켜자 사라져 버렸다. 하진이 앞장서서 걷자 라이짐은 그 뒤를 따랐다. 발이 바닥에 닿을 때 마다 삐걱이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이곳에 갇혀 있었을 사람에게는 이 소리가 공포로 다가왔으리라. 라이짐은 벽면을 바라보았다. 누군가 손에 서 피까지 흘려가면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에 저항을 했는지, 벽면에는 길 다란 핏자국이 얼룩져 있었다. "여기야." 하진은 이렇게 말하고는 육중한 철문을 열쇠를 돌려 열었다. 문이 열리 자 안에는 온통 어둠이었다. "이곳에는 초록색 연금술사의 등을 가져다 놓았지." 이렇게 말하는 하진의 얼굴에는 뭔가를 즐기고 있는 듯한 표정이 스치 고 지나갔다. "불을 켜면 발을 부지런히 놀려. 가만히 서 있으면 금방 잠들어 버리니 까 주의해." 초록색 연금술사의 등 아래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으면 금새 잠이 든다 는 사실은 라이짐도 알고 있었다. 하진이 어둠 속을 더듬어 뭔가를 건드 리자 이내 곧 방안에는 초록색 연금술사의 등이 켜졌고, 의자에 앉아 있 는 한 사내와 책상 하나, 그리고 심문관들이 앉을 수 있는 의자 두 개가 눈에 들어왔다. 벽면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저 초록색 연금술사의 빛 을 받은 벽면만이 단조로운 빛을 발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 벽 한 쪽 면 에는 높은 미닫이 장이 하나 놓여 있었다. 라이짐은 그 장의 용도를 대충 은 짐작 할 수 있었다. 사내는 의자에 묶여 있었다. 두 손은 뒤로 묶여 있었고, 양다리도 모아 서 묶여져 있는 데다가, 눈에는 안대까지 되어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견 딜만한지 잠들어 있었다. "이 새끼가 아직도 자고 있네." 하진은 이렇게 말하고는 미닫이 장을 열었다. 그 안에는 커다란 물통이 하나 있었고, 뭐에 쓰는 건지 알 수 없는 꼬챙이들과 칼날들이 가지런히 선반 위에 올려져 있었다. "일어낫!" 하진을 이렇게 소리치면서 물통에 담겨 있던 물 한 바가지를 앉아 있던 사내의 얼굴에 뿌렸다. 사내의 몸이 꿈틀 했다. "어, 어디지? 누, 누구냐?" 애써 의연한 척 하려고 하고 있었지만 사내는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여긴 네 최악의 상황이야. 그리고 난 그 상황의 주인이고." 하진은 이렇게 말하면서 사내의 안대를 풀어주었다. 초췌한 얼굴을 한 사내였다. 나이는 기껏해야 스무 살이나 되었을까. 별다른 특징을 찾아 볼 수 없는 얼굴과 그리 마르지도 뚱뚱하지도 않은 평범한 몸을 가지고 있었고, 그건 첩자로서 적당한 외모였다. 사내는 퀭 한 눈을 껌벅이면서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마치 자신은 완벽하게 결백하다 는 듯한 얼굴을 하고서 라이짐을 바라보았다. "도, 도대체 네놈들은 뭐하는 녀석들이냐? 나, 난 그냥 여행자일 뿐이 다. 스파일 오지, 비스토브레 산맥에서 살던 나무꾼이었다." "알아, 알아. 어제도 그렇게 말했다면서?" 하진은 이렇게 말하면서 사내의 뒤쪽으로 돌아갔다. 사내는 하진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려고 고개를 뒤로 돌렸지만, 묶인 몸으로 몸을 돌리는 건 한계가 있었다. 다음 순간, 하진은 사내의 손목을 잡아 비틀었다. 사내의 입에서 으, 하는 신음소리가 흘러 나왔다. "그런데 난 못 믿겠어. 나뭇꾼의 손이 이렇게 굳은살 하나 박혀있지 않 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어서 말이야." 이제 심문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모양이었다. 라이짐은 잠들지 않기 위 해서 발을 부지런히 놀리고 있었다. 익숙해 보이는 걸. 라이짐은 이렇게 생각했다. "졸립지? 초록색 연금술사의 등 아래서 이렇게 묶여있으면 아주 졸릴 거야. 이 상태에서는 거짓말을 못하지. 아, 아. 알고 있을 거라는 거 다 알아. 아마 한 마디도 하지 말라고 배웠겠지. 하지만 나는 네 입을 열게 할 수 있는 방법 백 한 가지를 알고 있어. 그런데 말이야, 나는 여기서 그 방법을 열 가지 이상 써 본적이 없어." 하진은 이렇게 말하고는 사내의 얼굴에 바짝 다가간 후 이렇게 나즈막 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전에 다 죽어버렸거든." 하진 녀석. 허풍은. 라이짐은 웃음이 나오는 걸 간신히 참으면서 말했 다. "먼저 그런 말은 필요 없어. 빵집 주인이 다 불었다구. 네가 반란군에 잠입하려고 했었다는 사실을 말이야. 꽤나 호의적으로 굴었다면서?" 빵집주인에 대해서는 간밤에 보고서를 읽어 둔 덕분에 알고 있었다. 빵 집주인은 스파일에 퍼져있는 반란군 중에서 프라브리티 조직원 중 한 사 람의 이름이었다. 보고서에는 체포되었다는 말은 적혀 있지 않았던 것으 로 보아서 아마 하진은 또 한 번 허풍을 치고 있는 모양이었다. 보고서의 끝자락에는 단 번에 반란군의 뿌리를 뽑기 위해서 추적중이라는 말이 적 혀 있었다. 사내의 이마에서 물방울이 흘러내렸다. 라이짐은 그것이 하진 이 뿌린 물인지, 아니면 땀방울인지 분간 할 수가 없었다. "아마 거짓말이라고 말하고 싶겠지. 조금 전에 했던 것 같은 거짓말 말 이야. 하지만 이제 너무 늦었어. 눈이 감기고 있지? 난 네 놈 눈빛만 봐 도 다 알아. 이제 넌 거짓말을 할 수가 없어." 사내는 이를 악물고 묶여있는 발을 앞뒤로 움직였다. 하지만 아무 소용 없는 일이었다. 라이짐은 지금 하진이 연금술사의 등이 가지고 있는 효력 을 극대화시키기 위해서 암시를 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저런 녀석에게 심문 당하게 된다면 정말 끔찍하겠는걸. 라이짐은 이렇게 생각 하면서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먼저 이름부터 시작해 보지. 네 놈 이름은 뭐야?" 사내는 입을 다물었다. "현명한 선택이 아니야, 그건." 하진은 이렇게 말하고는 미닫이 장에서 손바닥만한 쇠붙이를 집어들었 다. 라이짐은 그것을 보는 순간 고문 도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성황청과 언제 전투가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정보를 얻는 일은 일개 군단 병력의 생명이 달린 일 이상일 수 있다는 걸 라이짐도 잘 알고 있었 다. 하지만 고문을 통해서 알아낸다는 건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수 도 없이 시체와 신음하는 병사들을 보아온 라이짐으로서도 말이다. "성황청 녀석들은 의지가 강하다고 들었어. 아마 쉽게는 입을 열지 않 겠지. 저기 있는 입을 열게 만드는 다른 방법들은 아마 소용이 없을 거라 는 거, 잘 알고 있어. 하지만 그냥 내 기분이 상하면 언제든지 저기에 손 이 갈 거라는 걸 일단 명심해 둬. 나는 내가 기분 나뿐 게 제일 불쾌한단 말이야." 하진은 이렇게 말하고는 사내의 이마에 철판을 대었다. "말하지* 않는* 것은* 손해다*" 하진의 목소리가 심문실 안에 울려 퍼졌다. 라이짐은 그 말이 전에 들 어본 적이 있는 방식으로 울리고 있다는 걸 눈치 챌 수 있었다. 그 말은 마법의 말이었다. 하진이 마법을 쓸 줄 알고 있을 줄은 정말 몰랐는데. 타호루에게 배운 것일까? 라이짐은 이렇게 생각했다. "비틀러. 내 이름은 비틀러." 사내가 말했다. 고통을 참고 있는 듯이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지만 말을 하지 않을 수는 없게 만드는 마법인 모양이었다. "비틀러. 만나서 반가워. 먼저 이제는 솔직하게 말해보지. 눈알을 하나 뽑기 전에 말이야. 괜히 저항해 봐야 너나 나나 다 손해야. 성황청 첩자, 맞지?" 하진의 말은 라이짐이 듣기에도 오싹할 지경이었다. 라이짐은 부지런히 발을 놀리면서 잠들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만 하려고 노력했다. "이곳 동정을 파악하기 위해서 온 건 사실이다." 사내는 한 참 동안 몸을 비틀면서 저항했지만, 결국 입을 열고 말았다. "저항해 봐야 너나 나나 다 손해라니까." 하진은 이렇게 말하고는 이마에 댄 철판을 가볍게 문질렀다. 그러자 치 익, 하는 소리와 함께 사내의 이마에서 김이 올라왔고, 방안에는 금새 고 기 타는 냄새가 풍겼다. 사내는 이를 악물고서 하진을 노려보았다. "미안. 열을 내는 물건이라서, 이건. 여기 계시는 훌륭한 마법사님께서 만드신 거지." "도대체 뭘 원하는 거냐!" 사내가 소리쳤다. 사내의 눈가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고통을 참 느라 나오는 눈물인 모양이었다. "몇 가지 정보." 하진은 비열하게까지 보이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사내는 곧 하진이 묻는 말에 순순히 대답했다. 일단 알아낸 것은 성황 청 타실 지부가 강력한 마법으로 보호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곳에는 마법 장이 퍼져있어서 침입자가 있을 경우 즉각 알아낼 수가 있다는 거였 다. "그렇다면 어딘가에 성구가 있을 테지? 어디에 붙어있어?" 사내는 말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면서도 결국 입을 열고 말았다. "정확한 위치는 나도 모른다. 하지만 알 수 있는 방법은... 있다." 사내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것은 결코 땀방울이 아니었다. "좀 친절하게 말해 봐." "누군가 그곳 마법장에 걸려드는 걸 보게 되면 성구가 있는 위치에서 붉은 색 기운이 퍼져 나오게 된다." 사내가 말했다. 하진은 낭패라는 듯이 쓴웃음을 지었다. "결국 누군가 거기 걸려들기 전까지는 알 수가 없다는 말이로군. 젠장. 나이스한테 말해 둬야겠어." 하진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라이짐은 하진이 지금 심문하고 있는 목적을 알 수 있었다. 하진은 녀석으로부터 우선 성황청 타실 지부에 보 내놓은 나이스가 그곳에 침투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내려고 하고 있었던 것이다. "좋아. 그건 됐고. 스파일 동정이나 좀 듣지. 거기 시민들 반응은 좀 어때?" "성황님을 따르고 있다." 이번 대답은 그리 어렵지 않게 나왔다. 사실 이 부분은 미리 읽어둔 에 이스 자매의 보고를 담은 보고서를 통해서 라이짐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부분이었다. 탐그루를 포함한 자나크 주민들은 성황청의 포교활동에 상당 수 넘어가 있는 상태였다. 성황청은 마칸의 강림이 임박했으며, 마칸이 강림했을 때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성황을 믿고 따르는 방법 밖에는 없다는 식 으로 시민들을 포섭하고 있다고 했다. "성황이 그렇게 대단한 사람인가? 마칸의 강림으로부터 사람을 구할 수 있을 만큼?" 하진이 비틀러에게 물었다. 비틀러는 하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물론. 성황께서는 이 세상을 구원해 주실 유일한 인물이시다. 전지전 능하신 권능과 하해와 같은 성은으로 세상을 축복하시는. 너같은 녀석에 게도 성황님의 은총이 내리시기를." 말하는 비틀러의 눈에서는 광채가 빛나고 있었다. 아마 이 말은 하진이 쓴 마법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말인 것 같다고 라이짐은 생각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21843/21893 ━━━━━━━━━━━━━━━━━━━━━━━━━━━━━━━━━━━━━━━━ 제 목:[탐그루] 혁명과 반역의 차이 301 관련자료:없음 23/23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6-09 19:16 조회:523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좋아, 좋아. 그렇다고 해 두지. 나야 성황이던 정황이건 아무런 상관 없으니까 말이야. 내가 궁금한 건 하나야." 하진은 비틀러의 얼굴에 코를 들이밀고 말을 이었다. "그 성황이라는 녀석은 뭐 하는 녀석이냐는 거지." 하진은 몇 번을 반복해서 비틀러에게 성황에 대한 정보를 캐내려고 애 를 썼다. 하지만 비틀러에게서 들을 수 있었던 말은 처음에 했던 것처럼 모호하고 의미를 짐작하기 어려운 찬양뿐이었다. 몇 번을 반복해서 듣는 사이, 하진은 결국 하품을 하고 말았다. 초록색 연금술사의 등 때문만은 아니었으리라. "너, 혹시 성황이라는 친구,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것 아니야?" 하진은 피곤하다는 듯이 물었지만, 비틀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하진도 더 이상 물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우스운 일이군.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을 위해서 이 고생을 하다니 말이야. 후광 효과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어. 어느 한 사람에 대해서 좋은 생각을 가지게 되면 그 사람 뒤에서 빛이 나오는 것처럼 보인다는 말이지. 그래서 실제 그 사람이 할 수 있는 일 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도 해 낼 수 있을 것처럼 착각하기도 한다더군. 아마 이 녀석도 그런 후광 효과 때문에 성황을 믿는 걸 거야." 꼭 비틀러에게 들으라는 투였다. 하지만 비틀러의 비웃고 있는 듯한 표 정을 보니 하진의 말은 씨알도 먹히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라이짐은 후광이라는 말에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탐그루에 성황청의 기사단이 몰아 닥쳤을 때, 선상에서 진두 지휘하던 사람의 기억이었다. 어두운 빛 을 발하고 있는 사내의 뒤편으로 잔잔한 빛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빛은 배 전체를 은은하게 감싸고 있었다. 물론 하진이 한 말은 상징적인 의미의 후광이었고, 라이짐이 본 것은 진짜 빛이었지만, 라이짐은 후광이 라는 단어에서 자신이 보았던 배 위에 있던 사내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 었다. "하나 묻지. 성황청이 운하를 통해서 탐그루를 공격했을 때, 그 작전을 지휘했던 것이 누구였지?" "성황님께서 직접 진두 지휘했었다." 라이짐은 자신의 짐작이 옳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가 바로 성황이 었구나. "우습군. 나도 본 성황의 모습을 네가 보지 못했다니." "네가 본 건 성황님이 아니다." 비틀러가 말했다. "그건 성력일 뿐이었다. 성황님의 모습은 그리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역시 마법이었군. 아마도 자신의 모습이 배 위에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환영 마법이었으리라. "겁장이..." 라이짐은 이렇게 중얼거렸고, 하진은 라이짐을 한 번 바라보더니 어깨 를 한 번 으쓱하고는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좋아. 이제 구체적인 걸 좀 물어보지. 너는 성황청 어디 소속이냐?" "나는 성황청 첩보성 소속 사제다." 이후로 이어진 하진의 질문에 비틀러는 크게 저항하지 않고 대답을 이 어나갔다. 비틀러의 말에 따르면 성황청은 예상밖으로 웬만한 국가에 버 금가는 조직체계를 갖고 있었다. 성황의 휘하에는 우선 영주의 직할대와 같은 성격의 직속성이 여러 개 조직되어 있었다. "우리는 직속성을 그냥 성황 직할대라고 부른다. 직할대의 권한은 거의 무한이지. 죽이는 것도, 살리는 것도, 그저 성황님의 구두지시 만으로 모 든 것이 가능한 곳이 직속성이다." "영주 직할대하고 별로 다를 바 없군." 하진이 턱을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라이짐은 비틀러를 찬찬히 살펴보았 다. 비록 육체적인 고통으로 많이 흐려져 있기는 했지만 비틀러는 여전히 맑고 또렷한, 신념으로 가득찬 눈을 하고 있었다. 거울에서 가끔 발견할 수 있는 눈이었다. 라이짐은 그런 비틀러의 모습이 조금씩 친숙하게 느껴 지고 있었다. 이어진 비틀러의 말에 따르면 성황청의 휘하에는 일개 국가 조직에 비 견할 만한 하부 조직이 갖추어져 있다고 했다. 영주가 부처와 장관을 거 느리고 있는 것처럼, 성황도 비슷한 것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들은 성장 (省長)이라는 호칭으로 불리우는 사람들과 건설성, 방위성, 자치성, 상무 성, 문무성, 기술성 등이었다. 아마도 성(省)이라는 말은 중앙 행정기관 을 뜻하는 말인 것 같았다. 건설성은 건설부에 해당하고, 방위성은 국방 부에 해당하는 식으로, 성황청의 조직은 스파일의 조직과 유사한 점이 있 었다. 아마도 방위성 밑에 성황청 기사단이 속해 있으리라. 라이짐은 성 황청이라는 거대한 조직이 조금씩 구체적으로 다가오는 걸 느낄 수 있었 다. 그런데 왜 다 성이라는 잘 쓰지 않는 말을 붙인 것일까? 아마도 조직 의 장 이 성황이라서 '성'이라는 글자 붙이기를 좋아하는 모양이라고 라 이짐은 생각해 보고는 재미없는 농담밖에 안되겠구나 라는 생각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비틀러가 말한 성에는 이해가 잘 가는 성도 있었지만 쓸데없어 보이는 성들도 꽤 있었다. 문화창달성이니 유통성이니, 상거래질서확립성이라는 것까지 있었으니 말이다. 라이짐은 마법의 힘이 얼마나 강한가 하는 생각 을 해 보았다. 마법의 힘이 아니었다면 아마 비틀러조차도 그런 성이 있 었는지 기억하기 힘들었으리라. 답변을 하고 있는 비틀러의 얼굴에도 믿 기지 않는다는 듯한 빛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최고 의결기구는 장로성이다." 성황청도 역시 나이 많은 사람들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 모양이었다. "할아버지들이 마지막으로 결정한다는 건가?" "오랫동안 성황을 모신 분들께 그만한 자격은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다들 그렇게 목숨걸고 성황청을 위해서 일하고 있군. 나이 들 어서 마지막으로 결정하기 위해서 말이지." 하진의 말에 라이짐은 웃음을 지었다. 하진은 웃고 있는 라이짐을 한 번 바라본 다음 다시 말을 이었다. "하여간 꼴에 이름들은 다 그럴싸하게 지었구만. 뭐 그리 대단한 짓거 리를 한다고." 하지만 라이짐이 비꼬아도 비틀러의 모습에서는 어떤 동요도 찾아 볼 수 없었다. "너희하고 다를 바 없다는 걸 인정하기 싫은 모양이로군." 비틀러가 이죽거렸다. 아마도 여유를 되찾고 있는 모양이었다. 비틀러 의 얼굴에는 미소마저 떠오르고 있었다. 비틀러의 설명은 이어졌다. 보통의 조직이 가지고 있는 것과 비슷한 역할을 하는 성과는 달리 낯선 용어들로 이루어진 성들도 몇 개 있었다. 포교성, 교리성, 규율성 등이 그것이었는데 아마도 그들이 믿는 종교와 관련이 있는 하부조직인 모양이 었다. "그러니까 포교성에서 종교를 퍼트리고, 교리성에서 퍼트릴 때 할 말을 만들고, 규율성에서 너희들이 지켜야 할 법을 만들고, 잘 지켜지는가 확 인한다, 뭐, 이런 말이지?" "그렇다." "그럼 가장 중요한 게 뭐야?" "물론 모든 성의 중심에는 성황이 계시다. 나머지 성들은 그저 성황님 의 권능이 효율적으로 발현될 수 있도록 도울 뿐이다." "알았어, 알았어. 그 이름도 모르고 뭐하는 녀석인지도 모르겠는 성황 얘기는 이제 그만 두라고. 피곤해지니까 말이야." 하진은 이렇게 말하고는 라이짐에게 이렇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나이스에게 나중에 자세히 들을 수 있을 거야. 지금 타실에는 자이스 도 파견되어 있다고." 하진의 말은 필요한 정보는 여러 경로로 알아보고 있다는 말이었다. 라 이짐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진이 자신의 업무를 생각 이상으로 잘 파악하 고 있구나 싶은 순간이었다. 물론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의 일이니 뭐 라 할 말은 없었지만, 라이짐으로서는 하진이 너무 많은 부분을 장악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라이짐은 하 진이 다시 심문을 이어가기 전에 질문을 하나 던졌다. "아마 너희는 종교 집단이니까 종교에 관련된 걸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 하겠지. 하지만 그것도 성황청이 있은 후에 일이야. 그렇다면 성황청을 유지시키기 위한 성 중에서 어떤 성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라이짐의 질문에 비틀러는 마치 그런 질문이 날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 다는 듯이 이렇게 대답했다. "당연히 첩보성이다." "참. 네가 첩보성이라고 했지. 그건 어디에 속한 거지?" "......" 비틀러는 미간을 찌푸리면서 아무 말도 못했다. 아마 꽤 말하기 곤란한 질문인 모양이었다. 라이짐은 다시 철판을 집어들어 비틀러의 이마에 대 었다. 순식간에 방안은 고기 타는 냄새로 뒤덮혀 버렸고, 비틀러는 고통 을 참기 위해서 몸을 꼬았다. 하지만 마법의 힘을 이겨낼 수는 없는 모양 이었다. "첩보성은 성황님의 직속이다." "역시. 정보가 가장 중요하다는 걸 녀석들도 알고 있다는 말이 되겠군. 그렇지 않아, 라이짐?" "이런 데에서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을 보게 될 줄은 몰랐네." 라이짐은 신기하다는 눈을 하고서 비틀러를 다시 보게 되었다. 하지만 비틀러는 뭔가 계속해서 마음에 걸리는지 고통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 다. 이어진 질문과 대답에서 하진이 알 수 있었던 것은 구체적인 것들이었 다. 예를 들어 각각의 성에는 성장이 성을 총괄하여 움직이고 있다는 말 이나 그 밑으로 과장사제니 부장사제니 하는 식으로 이름이 붙어있다는 말에서 성황청 조직의 규모와 조직망을 확인 할 수 있었고, 첩보성에서 스파일에 파견된 정보원은 자신 하나라고 했다. "절대 잡히지 않을 줄 알았다. 반란군 녀석들이 배신할 줄은 몰랐다." 탄식같은 어투였다. 라이짐은 비틀러의 초라한 모습이 어쩐지 측은하게 여겨지고 있었다. "아냐. 반란군이 배신한 게 아니야. 우리가 잘 조사한 거지." 하진은 이렇게 말하면서 미닫이 장 속에 있던 물을 몇 모금 들이켰다.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비틀러가 군침을 삼켰지만, 하진은 물은커녕 오줌 한 방울 흘려 줄 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 반란군에 가담한 이유는 뭐야?" 하진이 비틀러에게 물었다. "이용할 수 있을 줄 알았지. 적의 적은 동지라는 말에 따른 거지. 결과 는 이렇게 되었지만..." "적의 적은 동지가 아니야. 적의 적일 뿐이지. 네가 실수한 거야." 라이짐이 날카롭게 비틀러에게 쏘아 붙였다. "게다가 이제는 이렇게 잡히기까지 했으니, 이거 실수도 이만 저만이 아니야. 이제 슬슬 후회되지 않아? 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죽게 될 거야. 그것도 처참한 방법으로 사형을 당하게 되겠지. 스파일이 어떤 곳인지 알 아? 첩자에게 아주 냉정한 곳이 바로 이곳 스파일이야. 허리를 작두로 자 를 거야, 아마. 한 나절은 고통 속에서 신음하다가 죽게 될 걸." 하진은 소름끼치는 미소를 짓고 비틀러에게 말했다. 라이짐은 짐짓 태 연한 척 하고는 있었지만 자신이라도 저런 말을 듣게 된다면 동요하지 않 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마음만은 편치가 않았다. 하지만 비틀러는 달랐다. "후회는 없다." 비틀러는 이렇게 단호하게 말하고는 말을 이었다. "나에게는 믿음이 있다. 성황님과 또 성황청에 대한 믿음이. 이것은 내 안에서 스스로 나온 것이고, 또한 내 스스로 판단한 고귀한 것이다. 나는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 나의 믿음 아래에서 죽을 수 있다는 것, 나는 그것만으로 족하다. 그걸 우리는 순교라고 부른다." "미친놈. 다들 미쳤군." 하진이 침을 뱉으면서 말했다. 아마 심문은 여기서 그칠 모양이었다. 그 때였다. 비틀러가 라이짐을 바라보면서 말을 시작했다. "그건 너희들도 마찬가지야." 비틀러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넘치고 있었다. 라이짐은 잠시 그 자신감 에 눌려 뒤로 움찔 물러서고 말았다. "너희들도 믿음이 있고, 그 믿음에 따라서 움직이고 있다. 나하고 같 지. 그러니까 그걸 가지고 날 비난할 수는 없다." 비틀러의 말을 들은 라이짐은 장사꾼에게 속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미안하지만 사람을 현혹시키는 믿음과 평등한 사회를 향한 믿음은 달 라." 라이짐이 차갑게 사내에게 내뱉었다. 그러자 사내는 빙그레 웃음을 지 었다. "내가 보기에는 네놈들의 믿음이야말로 사람들을 현혹하고 있는 것 같 은데? 우리의 믿음이 더 순순한 것 같은데." 라이짐은 사내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고 있지만은 않았다. "그래. 그렇다고 해 두지. 하지만 믿음끼리 충돌했을 때는 강한 쪽이 이기기 마련이야. 그리고 이긴 쪽이 더 옳은 믿음이었다는 게 드러나는 법이지." "우리는 지지 않는다, 절대로." "그건 두고 보도록 하지. 그렇게 묶여 있는 사람이 그런 말을 하다니, 별로 믿음이 가지 않긴 하지만." 라이짐은 이렇게 말했다. 라이짐에게는 자신이 있었다. 그것은 자신이 하는 일이 성황청을 꺾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너도 그렇게 자신하나? 너희가 더 강하다는 믿음이 있는가?" 비틀러는 하진에게 이렇게 물었다. 하진은 미닫이 장을 닫으면서 이렇 게 대답했다. "난 신경 안 써." 라이짐이 문 밖으로 나가자 하진은 연금술사의 등을 끈 후, 육중한 철 문을 닫고 열쇠로 잠궜다. 안에서 사내가 뭐라고 소리치고 있었지만 라이 짐도, 하진도 그 소리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었다. 성황청의 첩자로부터 정보를 얻어낸 후, 일은 순탄하게 진행되는 것만 같았다. 에이스 자매의 정보량은 점점 더 늘어만 갔고, 성황청에 대한 정 보들도 차근차근 쌓이기 시작했다. 비록 종교에 대해서 라이짐과 하진이 잘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교리와 율법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 지만, 그저 멀리만 느껴지던 성황청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기 시작 한 것은 큰 수확이었다. 그리고 가장 큰 수확이라고 한다면 성황청도 다 만 강력한 성구를 가지고 있다 뿐이지 조직의 측면에서나 하고있는 일의 측면에서나 보통의 조직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전혀 실마리를 잡을 수 없는 부분도 하나 있었다. 그것은 성황 이라는 존재였다. "마법으로 눈 먼 자를 눈뜨게 하고 앉은뱅이를 걷게 한다고 합니다." "삼년전쟁을 예견하여 미리 성황청 교민들의 안전을 확보했다고 합니 다." "타실에서 태어났다는 말도 있고, 스파일에서 태어났다는 말도 있습니 다만 성황청에서는 공식적으로 '하늘이 내려준'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 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마법으로만 나타나며 결코 실체를 드러낸 적이 없습 니다." "세 살 때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 다섯 살 때부터 교단을 정비했다고 합 니다만, 그게 백년도 더 전의 이야기라고 합니다." 이런 정보로는 성황의 성격이나 특징을 알아내기는커녕 나이도 짐작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적과 싸우기 위해서 적의 우두머리가 어떤 사람인가 를 알아내는 것은 중요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도저히 어떤 사람인가를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는 성황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지 조차 의심스러울 지경이 되었 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21891/21893 ━━━━━━━━━━━━━━━━━━━━━━━━━━━━━━━━━━━━━━━━ 제 목:[탐그루] 혁명과 반역의 차이 302 관련자료:없음 23/23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6-10 20:16 조회:316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아케르에게 스파일의 영주 직할대 중 하나인 내사반의 조사가 시작된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회색 구름이 두텁게 내려앉던 날이었다. 어깨가 무거워 지고 발걸음이 늘어지는, 그래서 과히 좋지 않은 기분으로 집무실에서 일을 하던 라이짐 과 하진은 창 밖으로 보이는 낯선 사내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저 검은 옷 입는 녀석들, 누구야?" 먼저 발견한 것은 하진이었다. 하진은 부대 주둔지로 들어오고 있는 다 섯 명의 사내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글쎄. 누구인지 좀 알아봐야 겠는데." 라이짐은 이렇게 말하고는 집무실을 나서서 몇 군데 들러 낯선 얼굴의 정체를 알아내었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라이짐은 아케르 당번병 과 백부장 두엇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 그들이 누구인지, 또 무엇을 위해 왔는지를 알아낼 수 있었다. "내사반?" "그래요. 내사반이에요." 가투신이 말했다. "그런데 정보부장보다 내가 먼저 알고 있는 정보가 있다니, 이것 좀 우 스운 데요?" 가투신은 이렇게 말하고는 대략적인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내사반이라고 하면 뇌물 수수나 권력남용 등 고위층이 저지르기 쉬운 범죄를 조사하는 일을 전담하고 있는, 그래서 항간에는 장관이나 장군들 도 고함 한 번으로 오금을 저리게 만든다는 소문이 돌만큼 무시무시한 곳 이라고 했다. 그런 내사반이 아케르 용병단에 찾아 온 것은 아케르의 조 사를 위해서였고, 조사 명목은 다름 아닌 공금 횡령 혐의였다. 사건의 전 말을 알게 된 라이짐은 집무실로 돌아와 대뜸 분통부터 터트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야. 하진. 장군님 집무실 가 봤지? 거기에 뭐 하나 제대로 된 장식품이라도 있었어? 솔직히 타실 정규군의 백부장 만도 못한 집무실 아니야. 그런데 그런 아케르 장군이 공금 횡령이라니? 그게 말이 나 되는 소리야?" 라이짐이 하진에게 거의 화를 내는 투로 말했다. 하진은 라이짐의 말에 일단 수긍하기는 하는 것 같은 눈치였다. "그야 그렇지. 하지만 가장 높이 자란 나뭇가지가 가장 먼저 흔들리는 건 당연한 이치야. 장군님의 승승장구를 시기하는 무리야 얼마든지 있겠 지. 그날 봤지? 국방 장관이 훈장을 수여하던 날 말이야. 유지들이 다 나 온 자리였지만, 국방장관 말고 귀족이나 장관 하나라도 봤어? 그게 세상 돌아가는 이치라고." 하진이 말했다. "세상 돌아가는 이치 건 뭐건 간에, 이건 그대로 두고 볼 수만은 없는 일이야. 하진. 이대로 가만히 앉아만 있을 거야? 넌 화도 안 나?" 라이짐은 흥분을 억누르지 못하고 하진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도 화가 나. 하지만 두고 보지 않으면 어떻게 할 건데? 라이짐. 일 단 화 가라앉히고 우리, 일단 해야할 일 처리부터 하는 게 어때?" 보고서로 꾸며야할 백지를 부채 삼아 몇 번 부치면서 하진이 말했다. 종이는 톱니바퀴가 돌아가는 것처럼 일정한 소리를 내면서 바람을 만들어 내었다. 라이짐은 하진의 태도가 못마땅했다. 물론 라이짐이 먼저 저런 말을 꺼내는 게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하진이 먼저 말을 꺼내 자 라이짐은 은근히 하진에게 화가 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어쩐지 자신 을 깔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라이짐은 잠시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좋은 수가 날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진. 훌륭한 지휘관이라면 부하에게 어떤 걸 바랄까?" 라이짐은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떨리는 목소리로 하진에게 이렇 게 물었다. "그야 맡은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부하겠지. 쓸데없는 일에 화부터 내고 보는 부하는 아닐걸, 아마." 하진은 보고서를 훑어보면서 라이짐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라이짐은 우 선 고개부터 내 저은 다음에 이렇게 말을 이었다. "그래. 임무에 충실한 것도 중요하지. 하지만 이런 일이 생겼을 때 어 떻게 된 일인지 알아서 조사하는 게 우리 일 아니야?" "하지만 그런 동향보고는 없었는걸. 솔직히 이건 스파일에서도 아주 높 은 곳에서 일어나는 일이야. 우리 정보력으로는 무리라고. 장군님도 그건 알고 계실걸?" 하진은 여전히 보고서를 보면서 건성으로 라이짐에게 대답했다. 라이짐 은 하진의 말에 목소리를 높여서 이렇게 말했다. "실전이라면 십부장이라고 해도 독단을 내릴 수 있어야 해. 다시 말해 서 능력 있는 지휘관이라면 적극적으로 판단해서 행동하는 부하를 원한다 는 거지. 지금은 실전이야, 하진. 누군가가 우리에게 공격을 감행하고 있 는 거라고. 이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뭘까?" 라이짐이 목청껏 말한 덕분에 하진의 고개가 보고서에서 라이짐 쪽으로 돌아왔다. "우리의 경우라면 이럴 때 정보를 캐내고 더 나아가서 공작까지 펼칠 수 있어야 하는 거야." 라이짐이 말하자 하진은 냉소적인 얼굴을 하고서 라이짐에게 이렇게 말 했다. "의욕을 보이는 건 좋은 데, 라이짐.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뭘 어떻게 하겠어? 일단 높은 곳에서 일어나는 일은 높은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맡 기자고. 국방장관인 안토니오 장군이 있잖아. 장군님이 우리 병력을 희생 시켜가면서 까지 탐그루에서 빼내온 안토니오 장군이야. 어떻게든 손을 쓰겠지. 자. 이제 그만 하고 그 보고서나 한 번 더 훑어 봐." 하진은 꼭 나이 어린 동생을 타이르는 듯한 말투로 라이짐에게 이렇게 말했다. 라이짐은 하진의 말에 동요하지 않고 바로 이렇게 말했다. "안토니오 장군이 은혜를 갚을 사람이라는 건 알아. 하지만 안토니오 장군을 믿을 수는 없지. 지금은 실전이야. 은혜를 입었다고 해서 다 갚으 라는 법은 없어. 예를 들어서 네가 감자를 먹지 않는다고 해서 감자들이 네가 감자밭을 지날 때마다 길을 비켜줄 리는 없잖아? 우리가 해야 해, 하진." "여자 때문에 정신 못 차릴 때가 엊그제야, 라이짐. 그런데 벌써 기운 을 차렸구나. 말은 잘하는 걸 보니까 그런 것 같네. 하지만 어떻게 정보 를 얻을 거야? 에이스를 영주 첩으로라도 줄 거야? 또, 정보를 얻었다고 쳐. 그리고 나서 뭘 어떻게 할 건데?" 짜증난다는 투였다. 그러자 라이짐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서랍 안에 쓸 만 한 게 있지." 열쇠를 주머니에서 꺼내 라이짐은 책상 서랍을 열었다. 거기에는 보고 하지 않은, 아니, 보고 될 수 없는 사항들이 적혀있는 종이가 쌓여있었 다. "발렌시아...?" 라이짐이 들고있는 종이를 보고 난 후 하진이 말했다. "그래. 발렌시아야. 너하고 나만 알고 있는 게 있잖아." 라이짐은 여전히 얼굴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라이짐은 잘 만 하면 그 뱀같은 페르도 부인에게 한 방 먹일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 진도 라이짐의 말을 듣는 순간 라이짐의 생각을 알았는지 일단 보고서를 내려놓았다. "그래. 그걸 이용 할 수가 있겠구나. 좋아, 좋아. 그럼 내가 뭘 하면 되지?" 하진이 라이짐에게 물었다. 라이짐은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여유 있 게 이렇게 하진에게 말했다. "이 일은 내가 처리할게. 넌 내가 이 일을 하는 동안 두 배로 일해 주 기만 하면 되." 라이짐의 말에 하진의 인상이 눈에 보일 만큼 찌푸려졌다. "내가 그런 명령 들어야 하나?" "아니." 라이짐이 대답했다. "이건 내 부탁이야." 하진은 졌다는 표정을 짓고 어깨를 한 번 으쓱 했다. 라이짐의 머릿속 에는 다음 일에 대한 생각들이 차근차근 정리되고 있었다. 발렌시아 백부장이 이끄는 백부는 활쏘기 훈련에 한창이었다. 밀집대형 으로 늘어서 있는 발렌시아 백부의 부하들은 부지런히 활을 쏘아 날리면 서 정확한 사격을 위한 연습을 하고 있었다. "미련한 것들! 너희들같이 멍청한 녀석들은 처음 봤다! 아마 너희들보 다는 기생들이 백 번은 더 낫겠다. 엉망도 이런 엉망이 없군. 폼으로 활 시위를 당기나!" 조교들의 목소리가 연병장에 울려 퍼지고 있었고, 병사들은 그 소리에 맞추어 몸을 움츠리기도 하고, 또한 벌떡 일어나기도 하면서 훈련에 임하 고 있었다. 라이짐은 훈련병들의 몸짓을 바라보면서 웃음을 지었다. 자신 의 훈련병 시절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연병장에는 발렌시아 백부의 병사들뿐이었다. 프라브리티에 주둔하기 시작한 이후, 아케르 군단은 군단의 이름에 걸맞는 대우를 받고 있었다. 그 실례 중 하나가 바로 백부 단위로 주어진 훈련용 연병장이었고, 또 하 나가 백부장에게 주어지는 관사였다. 라이짐은 발렌시아 백부의 관사를 바라보았다. 연병장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도록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언덕 위에 세워진 관사는 딱딱하고 기능 중심적인 모양의 전형적인 군인 건물 이었지만, 발렌시아 백부장의 취향인지 건물에는 뱀의 문양이 그려져 있 었다. 엉켜있는 두 마리의 뱀은 물론 발렌시아 백부장이 좋아하는 승리와 아름다움의 상징일지 모르겠지만 라이짐이 생각하기에는 발렌시아와 페르 도 부인을 상징하는 것만 같았다. 관사 입구를 지키고 있는 초병이 라이짐에게 거수 경례를 했고, 라이짐 은 건성으로 경례를 받은 다음 관사 안으로 들어갔다. 관사는 먼저 당번실을 거친 다음 집무실로 들어가게 되어 있었고, 집무 실을 지나야 발렌시아 백부장이 생활하는 집이 나오도록 설계되어 있었 다. 당번실에 들어갔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뜨인 것은 벽에 붙어있는 짐승 의 털가죽과 화려한 문양이 수놓아져 있는 책상과 집무기기들이었다. 돈 깨나 들였겠는걸. 라이짐은 생각했다. "어떤 일로 오셨습니까." 신병인 것이 분명한 당번병이 뻣뻣한 동작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라 이짐에게 물었다. 라이짐은 보나마나 근방 귀족의 자제거니 싶었다. "백부장님 뵈러." "실례지만 약속은 하셨습니까?" "아니. 하지만 금방 끝난다." 라이짐은 이렇게 말하고는 당번실에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의자는 푹 신하게 몸이 파묻힐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라이짐은 의자에 몸을 묻으면서 이런 의자에 앉아 있다가는 허리가 배겨나지 못하겠다 싶었지만 일단은 그냥 앉아 있기로 했다. 당번병에게 우습게 보이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절도 있게 하려는 동작이기는 했지만, 몸에 익지 않은 탓인지 라이짐 눈에는 영 어색하게만 보이는 동작으로 당번병은 집무실에 노크를 하고 들어갔다. 라이짐은 천장을 바라보았다. 천장에는 척 보기에도 비싸 보이 는 연금술사의 등이 설치되어 있었다. 강병 밑에 약졸 없다는 전장의 옛 격언은 아마도 글자 그대로 해석해야 하는 말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라이짐의 머리에 떠올랐다. 지휘관이 검소하고 소박하게 지낸다고 해서, 그 부하들도 그렇게 하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당번병이 집무실에서 나왔다. "너무 오랫동안 말씀하실 수는 없으실 것 같습니다. 곧 손님이 오시기 로 약속이 되어 있습니다." 당번병이 말했다. "오래 걸리지 않아." 라이짐은 고개를 이렇게 말하고는 집무실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 다. 발렌시아 백부장은 집무실 의자에 앉아서 라이짐을 맞이했다. 육중하고 두꺼운 집무실 책상이 먼저 보였고, 그 뒤로 달려 있는 화려한 장식의 칼 과 방패, 그리고 벽면에 매달려 있는 그림이 차례로 눈에 들어왔다. "어서오게. 바쁘신 분이 몸소 이곳까지 어쩐 일이신가? 미리 연락을 줬 으면 대접할 거라도 준비했을 텐데." 발렌시아 백부장은 서류철을 덮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어디 가나 지휘 관은 서류에 치여 사는 군. 발렌시아 백부장 마저 저러니 말이다. 라이짐 은 벽에 걸려 있는 그림을 살펴보았다. 그림에는 새들이 날고 있는 바닷 가 풍경이 묘사되어 있었다. 라이짐은 사람 하나 없는 해변가에 날고 있 는 새의 모습이 어쩐지 외롭다고 느껴졌다. "그림이 좋군요." 라이짐은 이렇게 말을 꺼내었다. "스파일에는 훌륭한 장인들이 많이 있지. 아마 이 그림을 그린 장인도 그 중 하나일 걸세. 나는 그림을 좋아하지. 이 그림을 구하는 데 고생 좀 했다네." 그림을 바라보면서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발렌시아 백부장이 말했다. "아름다운 것은 좋죠. 저도 볼 줄은 모릅니다만 예쁜 그림 보는 걸 싫 어하지는 않습니다." "정보부장에게 그런 취미가 있었군. 미처 몰랐는 걸? 미리 알았다면 그 림이라도 선물로 하나 준비했을 텐데." 발렌시아 백부장이 말했다. 그러자 노크 소리가 들렸고, 곧이어 당번병 이 차를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라이짐은 딱딱한 자세로 목례를 하는 당 번병의 모습을 보고는 격식이라는 말을 떠올렸다. 어차피 발렌시아 백부 장에게 이야기 할 것은 간단하고도 명료한 것이었다. 그런데 쓸데없는 그 림 이야기나 하고 있어야 한다니. 어쩌면 지금 자신의 모습이 바로 저 당 번병과 다를 바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그림, 의미가 뭡니까?" 라이짐이 물었다. 쓸쓸해 보이는 해변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지만, 라 이짐으로서는 그 이상을 느낄 감수성도, 생각할 언어도 갖고 있지 못했 다. 당번병이 차를 내려놓았다. 붉은 차였다. 일전에 타호루에게서 차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새로웠다. "의미라. 어려운 말이로군. 미학적 견지에서 말한다면 인간 내면 풍경 을 해변으로 치환하여 표현한, 그런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지. 인간의 실 존적 번뇌와 존재 양상에 대한 화가의 상상력이랄까? 아마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네." 발렌시아 백부장의 말은 라이짐에게 통역이 필요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라이짐은 알아듣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붉은 차의 맛은 유난히 떫 었다. "저는 그런 말 잘 모릅니다. 제가 분명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 건 군인 의 일과는 별 상관이 없다는 것 정도로군요." 라이짐은 약간 도발적인 태도로 말했다. 어차피 매끄럽게 처리할 수 있 는 용건을 가지고 온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발렌시아도 그것을 눈치 챘 는지 이렇게 라이짐의 말을 받아쳤다. "아니지. 이 내면의 풍경이 정서를 순화시키고, 또한 사람을 머릿속을 맑게 해 줄 수 있다네. 그렇다면 이 그림은 나의 판단력에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이고, 그건 궁극적으로는 전투력에 영향을 주겠지." "이 그림에는 결국 그런 원대한 의미가 담겨 있었군요." 라이짐이 말했다. 이번에는 비꼬는 듯한 어감이 담겨 있었다. 발렌시아 는 슬슬 불쾌해 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무슨 일인가? 그림 얘기나 하자고 여기까지 온 건 아닐텐데." "물론 아니죠. 그냥 뭘 좀 보여드리려는 것뿐입니다." 라이짐은 이렇게 말하고는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었다. "본론을 말씀 드리죠. 장군께서 모함을 받으신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아, 그거. 나도 들은 적이 있네. 아마 조사는 금방 끝날 거야. 장군님 이야 워낙에 청렴하신 분이니까. 모두 알고 있는 사실 아닌가." 발렌시아는 왜 그 얘기를 자신에게 하느냐는 듯한 말투였다. 라이짐은 이제 기회가 왔다고 느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21892/21893 ━━━━━━━━━━━━━━━━━━━━━━━━━━━━━━━━━━━━━━━━ 제 목:[탐그루] 혁명과 반역의 차이 303 관련자료:없음 25/25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6-10 20:17 조회:266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이걸 한 번 읽어보시지요." 라이짐은 발렌시아 백부장의 책상 위에 종이를 올려놓았다. 발렌시아 백부장은 처음에는 심드렁한 얼굴로 종이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내 곧 얼굴이 굳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라이짐을 화난 얼굴로 바라보았다.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책장을 내리치면서 발렌시아 백부장이 말했다. 하지만 라이짐은 눈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인간 관계도 때로는 도움이 되지요. 녀석들이 노리는 건 공금횡령죄로 장군님을 가두려는 것이 아닙니다. 일을 부풀려서 사람들로부터 신뢰도를 떨어뜨리려는 것이지요. 서둘러 막지 않으면 위험한 상황입니다." "그, 그래서?" 발렌시아 백부장은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라이짐은 때를 놓치지 않았 다. "인간 관계를 통해서 아버지를 닮은 아기를 만들어 내는 것도 좋겠지만 상대가 고위층이라면 더 좋은 결과를 얻어 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라이짐의 말에 발렌시아는 분기를 다스릴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자네,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아는가?" 라이짐은 발렌시아 백부장의 손이 떨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일단은 성공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전투력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라이짐은 이렇게 말하고는 집무실 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가 생각났다는 듯이 몸을 돌려 이렇게 말을 남겼다. "참. 그건 사본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방향으로 일이 진행되지 않으면, 그걸 읽어 볼 사람이 꽤 될 겁니다. 아마 그 때는 다른 방향으로 전투력 에 도움이 되리라 확신하고 있습니다만." 라이짐은 당황해하고 있는 발렌시아 백부장을 뒤로하고 집무실을 나섰 다. 입만 댄 붉은 차에서는 김이 아직도 오르고 있었다. 결과는 만족할 만한 것이었다. 라이짐이 집무실에 도착하기도 전에 발 렌시아의 당번병이 그림을 가지고 왔던 것이다. "이렇게 소중한 그림을. 이것 참 고마운 일이로구만. 벽에 걸어 놓아야 겠는데, 이거 집무실이 좁아서..." 라이짐은 이렇게 말하면서 그림을 바라보았다. 라이짐은 그림이 의미하 는 바를 알 수 있었다. "아닙니다. 그림은 알아서 처분해 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전투력에 도 움이 되는 방향이라면 어떤 쪽도 좋다고 전해 달라는 말과 함께요." 당번병은 이렇게 말하고는 라이짐의 집무실을 나섰다. 라이짐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된 일이야?" 당번병이 나가자 하진이 라이짐에게 물었다. "들었잖아. 너, 혹시 이거 살 만한 사람 알고 있냐?" 라이짐은 이렇게 말했다. 공연은 여느 때와 같이 저녁 늦게 시작되어 한 밤중에 끝이 났다. 마리 의 무대는 모두 네 번이었다. 늘 같은 시간에 늘 정해진 순서대로 등장해 노래를 부르고 무대 뒤로 사라지는 마리였지만 라이짐은 그런 마리의 모 습을 언제나 아름답다고 느끼고 있었다. 간만에 찾은 까페 리노아였다. 붉은 연금술사의 등, 빛을 받아 화려하 게 빛나는 의상과 커튼, 즐겁게 떠들고 웃고 있는 손님, 그리고 여기저기 서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유혹의 향과 광기의 술. 라이짐은 이 분위기 가 마음에 들었다. 이 분위기에 취해 있노라면 세상의 모든 일에서부터 벗어나 있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마리의 순서가 끝이 나고, 세 곡의 노래가 더 이어지면 마리는 퇴근이 었다. 라이짐은 마리의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단맛이 나는 음료수만을 마 셨다. 술을 마셨다가는 다음 날 일에도 지장이 있을 뿐만 아니라, 마리를 만나서 좋은 시간을 보내기도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라이짐은 까페 리노아를 찾는 날이라고 해서 특별히 술에 취하거 나 하지는 않았다. "그래, 나 한 번 죽여봐라!" 굵직한 남자의 음성이었다. 또 술에 취한 녀석이로군. 라이짐은 이렇게 생각하면서 고개를 뒤로 돌렸다. 술을 마시지 않다 보니 분위기를 즐기는 법을 터득한 라이짐이었기에 술에 취해 저렇게 행패를 부리는 사람을 보 면 경멸감이 들곤 했다.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본 곳에는 한 사내가 일어나 행패를 부리고 있었고, 건장한 체격의 기도 둘이 사내를 붙잡고 말리고 있었다. 이어지는 병 깨지는 소리와 여종업원의 비명소리. 라이짐은 눈살 을 찌푸렸다. "그래. 그렇게 잘났으면 네가 한 번 해 보지 그래? 네가 연금술에 대해 서 알아? 네가 연금술이 고작 귀족들 장식품에 불과하다고 말할 자격이 있어?" 라이짐은 귀에 익은 목소리를 듣는 순간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술 에 취해 주정을 하고 있는 쪽은 바로 순무였던 것이다. 행정직으로 밀려 난 다음 얼굴을 볼 기회가 거의 없어서 차차 잊혀져 간다 싶었는데 이런 곳에서 이렇게 만나게 되다니. 라이짐은 의자 몇 개를 밀치고 순무 쪽으 로 달려갔다. "이보쇼. 나는 저 등이 예쁘다는 말만 했을 뿐이오. 거, 말씀이 너무 지나치시지 않소?" 순무가 행패를 부리고 있는 쪽은 말끔하게 차려입은 사내였다. 아마 어 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생각 없는 귀족의 전형이었다. "그 말이 그 말 아니야! 너같은 녀석은 그런 말 할 자격 없어!" "아니 이 자식이..." 귀족으로 보이는 사내가 달려들 기세를 하자 옆에 서 있던 종업원 하나 가 사내의 허리를 붙들고 말렸다. 라이짐이 보기에도 지금 상황은 순무가 억지를 부리고 있었다. "그만 두십시오, 손님. 저 분은 그냥 취하신 분입니다. 잊어버리시지 요." "야. 너 왜 저렇게 저 사람을 감싸고도는 거야? "손님. 저 분은 아케르 용병단 사람입니다. 굳이 문제를 만들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이곳 사장이 강도를 만나 죽은 이후로 까페 리노아에는 못 보던 얼굴들 이 많이 고용된 것 같았다. 아무리 정보 감각이 탁월한 라이짐이지만 그 게 뭘 의미하는 것인지까지는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 나 취했다! 그리고 아케르 믿고 이렇게 발광하고 있는거다! 그 래서, 그래서 어쩔 건데!" 순무는 거의 이성을 잃은 듯 했다. 머리는 아무렇게나 흐트러져 있었고 이마에는 땀방울이 흐르고 있었다. 라이짐이 다가서자 기도 하나가 막아 섰다. 라이짐은 지배인만큼이나 일을 크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 고 있었다. "순무 님." 라이짐은 길을 막아 선 기도의 어깨 너머로 조용히 말했다. 순간 순무 의 눈이 라이짐에게 향했고, 순무는 그 순간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래, 자네까지 날 무시하는 군. 아니, 자네 정도라면 날 무시할 만 하지. 자네야 아케르 용병단의 승승장구하는 간부고, 나는 뒤로 물러난 늙은이에 불과하니까..." 이렇게 말하고 있는 순무의 눈가에는 물기가 어려 있었다. 라이짐은 고 개를 숙이는 순무의 모습을 보면서 사람이 늙는 것이 얼마나 순식간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순무의 탄식은 엉뚱한 결과를 낳았다. 아케르 용병단의 간부라는 말이 나오자 길을 막아서고 있던 기도는 황급히 자리를 비켜주었고, 순무의 말 을 들은 사람들의 눈길이 라이짐에게 쏠렸다. 라이짐은 모자를 다시 한 번 깊게 눌러 썼다. "아는 분이십니까?" 기도가 물었다. 라이짐은 마리가 나올 시간이 거의 다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순무를 함부로 할 수는 없었다. 적어도 여 기서 이렇게 아케르 용병단의 위신이 깎이도록 놓아두고만 있을 수는 없 겠다는 생각이었다. "제 선배 되십니다." 라이짐은 이렇게 말했다.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 했지만 이대로 두었다가는 나중에 어떤 큰 일이 생기게 될지 모르는 까닭 이었다. "순무 님. 일단 나가시죠." 라이짐이 말했고, 순무는 아무 말도 없이 그대로 주저 앉아 있었다. "자네," 라이짐이 덩치 큰 기도 하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말했다. "손 좀 빌리지." "예?" 손을 잘라가겠다는 말로 들었는지 손을 등뒤로 감추면서 기도가 말했 다. "좀 일으켜 세우라고!" 라이짐은 큰 목소리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강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그제야 기도는 아, 예, 하면서 순무를 일으켜 세웠다. 라이짐은 일어난 순무를 부축하고 밖으로 나가면서 기도에게 이렇게 말했다. "마리에게 좀 전해주겠나?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기도는 알았다고 대답하고는 허둥거리면서 무대 뒤편으로 달려갔다. 라 이짐은 기도가 무대 뒤편으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 본 다음 순무와 함께 밖으로 나섰다. 봄날이라고는 하지만 해가 진 후의 거리는 쌀쌀했다. 라이짐은 다시 한 번 모자를 눌러쓰고 옷깃을 여민 다음 앞을 바라보았다. 유흥가의 불빛은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수많은 이름 없는 사람들이 이름 없는 사람들 사 이에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한 편에서는 싸움이 일어나고 있 었고, 또 한 편에서는 하룻밤의 풋사랑이 막 일어나는 참이었다. 누군가 는 이 밤, 주린 배를 움켜쥐고 괴로워하겠지만 누군가는 담벼락에 기대어 하루 종일 먹은 것을 토해내고 있었다. 라이짐은 연금술사의 등 아래 비 치고 있는 그런 모습들을 심드렁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자, 잠시만..." 순무는 이렇게 말하고는 술집 옆에 주저앉았다. 순무의 옆으로 취객들 이 일렬로 주저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취객들은 하나같이 허름한 옷에 벌겋게 달아올라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멍청한 것들. 저들은 누군가가 이끌어 주지 않으면 안 된다. 저들은 그냥 놓아두 면 저렇게 아무 쓸모 없는 인간이 되어 아무 쓸모 없는 짓거리를 하면서 아무 쓸모 없이 사라져 갈 것이었다. 거리를 지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그 때였다. 순무가 허리를 심하게 숙이는가 싶더니 토악질을 해대기 시작했 다. "우우우우웨엑!" 순무는 거의 비명을 지르듯 속에 것을 게워내었다. 라이짐은 자리에서 일어나 순무의 등을 두르렸다. 기도 하나가 인상을 쓰고 달려 나왔다. 아 마 청소 때문에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라이짐이 한 번 쏘아보 자 기도는 달려 나온 길 그대로 되돌아 들어갔다. "끄으웨엑!" 순무는 몇 번이고 더 구토를 했다. 순무가 이렇게 변하다니. 늘 냉정하 게 일 처리를 했고, 한 순간도 빈틈을 보이지 않던 순무가. 라이짐은 이 런 순무의 모습이 측은하게만 여겨졌다. 멀리서 취객의 노랫소리가 들려 왔고, 누군가 여자 이름을 외치며 울먹이는 소리도 들려 왔다. 어쩌면 나 도 운명의 어느 순간에 길을 잘못들어 이렇게 될지도 모르지. 라이짐은 순무의 등을 두드리면서 생각했다. "오래 기다리셨어요?" 마리였다. 마리가 어느새 라이짐의 등뒤로 다가와 이렇게 말했다. 라이 짐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어쩌면 좋을 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다. 조명 때문에 잘 드러나지는 않고 있었지만 화장을 막 지운 마리의 얼굴은 조금 부어있는 듯 했다. "아는 분이세요?" "응. 같이 일하는 선배 분이셔." 라이짐은 마리와 일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끔 마리는 라이짐이 하는 일에 흥미가 생기는지 몇 번 물어 본 적이 있 긴 했지만 라이짐은 일 얘기는 하지 말자고 늘 말했었다. 그리고 지금은 더욱 일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만 둬! 다 그만 둬!" 갑자기 팔을 휘저으면서 순무가 소리쳤다. 라이짐은 얼른 마리를 뒤로 밀어 안전한 곳으로 보낸 다음 순무의 양 팔을 감싸 안았다. "이제 그만 하세요. 도대체 이게 무슨 꼴입니까? 아까 보니가 아케르 군단의 이름도 파셨더군요. 순무 님. 이러셔서야 되겠습니까?" "아케르 군단?" 순무가 라이짐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순무의 입술 양옆으로는 토사물이 묻어있었고, 술 냄새에 위액 냄새가 섞인 고약한 냄새가 풍겼다. 라이짐 은 코를 감싸 쥐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면서 순무에게 말했다. "예. 우리 군단 말입니다. 설마 모른다고는 하지는 않으시겠지요?" 순간 순무의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눈에 금방 물기가 차오르기 시작했 다. 라이짐은 난감한 기분이 되었다. 자폰 국에서의 일이 순무에게 견디 기 힘든 일이었으리라는 생각을 해 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순무가 이 렇게까지 망가지리라고는 상상조차 해 보지 못한 까닭이었다. 순무는 아 마 기억이 없는 상태일 것이 분명했다. 저러다가 보안사항이라도 누설하 는 날에는, 그리고 그 보안 사항이 적의 귀에라도 들어가는 날에는 그야 말로 큰일이 벌어지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그래. 나는 위대한 아케르 군단의 행정담당관이지. 그래. 잘나가던 일 급참모였던 시절을 회상하는 늙은이이기도 하지만 말이야.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고? 알아. 잘 알고 있어, 아케르 군단. 내가 바로 아케르 군단 소 속이지. 암, 그렇고 말고. 아케르가 누군지 알아? 나, 이래봬도 아케르 장군이 처음 용병단 일 시작했을 때부터 같이 있었어. 아케르? 내 말 한 마디면 껌뻑 죽어. 내가 왕년에..." 순무는 횡설수설하면서 아케르 이야기를 계속 했다. 라이짐은 이제 순 무를 경멸하는 듯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껏 술을 먹으면서 이 사람이 도대체 얼마나 이런 소리를 지껄여 대었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 다. "뜨거운 열쇠? 크윽. 것 참 우습군. 그게 뭔지 알아? 그건 연금학의 아 주 비열한 형태일 뿐이야. 실제로 연금학이 할 수 있는 범위가 얼마나 넓 은지 알아? 내 장담하는 데, 연금학으로 마칸의 강림을 막고 인류를 구원 할 수도 있어!" 라이짐이 걱정했던 그대로, 순무는 기밀에 가까운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라이짐은 순무를 한 방 갈기고 싶은 것을 꾹 참으면서 마리를 돌아다보았다. "마리. 미안하지만 사람 좀 불러 줄래요?" 마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술집 안으로 되돌아 들어갔다. 라이짐은 계 속해서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순무를 부축해서 일으켜 세웠다. 순무가 토해놓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라이짐은 그 구토물이 바로 순무의 지금 상황을 이야기 해 주는 것만 같았다. 잠시 후 마리가 기도 하나를 데리고 나왔다. "이 분, 아케르 군단 위병소까지 모셔다 드려." 라이짐이 사내에게 말했다. 사내는 잠시 곤란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 고 라이짐은 그 표정을 미소로 바꿀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쓰도록 해." 라이짐이 금화 한 닢을 내 밀자, 사내는 이빨을 드러내고 웃음을 지었 다. "최대한 빨리 모시지요." 라이짐이 순무를 사내의 어깨로 넘겨주었을 때, 순무는 이렇게 중얼거 렸다. "이, 순무. 우습게 보지 마. 나, 일생 일대의 대작을 만들 거야. 아무 도 넘보지 못할 대작 말이야. 세상이 온통 환해질 거야, 그 날은. 암. 환 해지고 말고. 이 순무의 열정과 정열이 모두 담겨있는 작품일 테니." 라이짐은 눈을 감고서 팔을 휘젓고 있는 순무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순 무는 이제 거의 기절하기 일보 직전인 것 같았다. "이 분, 예술가신가 보지요?" 마리가 말했다. "그렇다고 할 수도 있지." 라이짐은 사내의 등에 업히는 순무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어쩌면 순무 는 진짜 예술가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예술가와 같은 삶을 살고 싶었는지 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생 새로운 것을 찾아 고민하고 끊임없이 창조하는 일생을 살고 싶어했으리라. 열정적으로 뭔가를 찾아 탐구하고 스스로를 닦아나가는 삶을 살고 싶어했으리라. 하지만 이제는 평생 완성 하지 못할 작품에 대한 이야기만 하는 예술가가 되어 버렸지만. "두고 봐! 내가 일생 일대의 대작을 만들고야 말 테니!" 순무는 이렇게 말하면서 사내의 등에 업힌 채로 어둠 저편으로 사라져 갔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21893/21893 ━━━━━━━━━━━━━━━━━━━━━━━━━━━━━━━━━━━━━━━━ 제 목:[탐그루] 혁명과 반역의 차이 304 관련자료:없음 20/20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6-10 20:18 조회:283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안됐어요. 어쩌다가 저렇게 되었지요?" 마리가 라이짐에게 물었다. 마리의 질문은 그저 가벼운 호기심에서 나 온 말이었겠지만 라이짐은 마리의 질문을 진지하게 다시 한 번 자기 자신 에게 던져보았다. 대답은 간단했다. 순무는 멈추어 섰기 때문이었다. 제 자리에 멈추어 주저앉아 버린 순간, 순무의 모습은 저렇게 변해 버린 것 이었다. "마리.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어요." 라이짐은 순무가 사라져 버린 어둠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어둠 저편에 는 여전히 술 취한 사람과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이 뒤엉켜 있었 다. "자기가 가는 길이 어디를 향해 있는지 알고 그 길을 가는 사람과 멈추 어 선 사람." 마리는 라이짐이 무슨 말을 하는 지 잘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한 얼굴 이 되었고, 라이짐은 그런 마리에게 그저 슬쩍 미소를 지어 보였을 뿐이 었다. "이제 돌아가요. 내일을 위해서 좀 자두어야죠." "자는 건 멈추어선 건가요, 아니면 길을 가는 건가요?" 라이짐의 팔짱을 끼면서 마리가 말했다. "하하하. 그야 길을 가기 위해 쉬고 있는 거지요." 라이짐은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지만, 혹시 지금의 자신이 멈추어 서 있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을 지울 수는 없었다. "마리. 이제 까페 리노아는 그만 나가요." 마리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라이짐이 말했다. 길가는 사람들은 그저 자신의 길을 가고 있을 뿐이었지만 라이짐은 그들이 자신을 부러움에 가 득 찬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이짐 님. 그 얘기는 오래 전에 끝난 걸로 아는데요." "아이까지 딸린 혼자 사는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이 얼마 없다는 건 잘 알아요." 라이짐은 가슴이 뛰어올랐다. 이제는 분명하게 자신의 의사를 밝혀야 할 순간이 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나, 아는 것도 별로 없고, 하는 일도 그리 편안하고 안전한 일은 아니 에요." 그렇지만 마리와 함께 살고 싶다, 라이짐은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했 다. 이제 말을 해야 한다. 라이짐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싸움 잘해요?" "예?" 하지만 라이짐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마리의 갑작스러운 질문 때문 이었다. "저 사람들요." 라이짐은 앞을 바라보았다. 마리의 집으로 들어가는 골목길 어귀에 험 상궂은 사내 여럿이 서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마리와 라이짐을 노려보 고 있었다. 라이짐의 속에서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벌레 같은 것들이. "싸움, 잘 못해요." 라이짐은 이렇게 말하면서 한 쪽 어깨 뒤편으로 마리를 보호하며 사내 들에게 다가갔다. "어이, 이렇게 늦은 시간에 집으로들 돌아가시는 모양이지?" 술 먹은 다른 동네에서 온 청년들인 모양이었다. 라이짐이 그동안 이 골목을 다니면서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부대로 복귀하는 중이다." 라이짐이 허리를 돌려 칼집을 슬쩍 보이면서 말했다. 사내들은 칼끝에 달려 있는 장식을 보더니 뒤로 움찔 물러섰다. 군용 칼이라는 걸 알아본 모양이었다. 사내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른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 다. "싸움 잘하시네요." 마리가 웃으면서 라이짐을 바라보았다. "아뇨. 그냥 제가 사랑하는 여자 하나 지킬 정도 밖에는 되지 않아요." 라이짐은 이렇게 말하고는 멋쩍은 듯 웃음을 지었다. 어둠 때문에 분명 하게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마리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원래 저렇게 얕은 주먹을 쓰는 친구들이 진짜 힘의 무서움을 누구보다 잘 아는 법이지요. 자기가 이길 수 있는 상대와 이길 수 없는 상대를 금 방 구분하거든요." 라이짐은 사내들이 도망치는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어느 사이 마리의 집 앞이었다. 라이짐은 하다 못한 이야기를 마쳐야겠 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이야기를 시작하기가 쉬운 말은 아니었다. 하 지만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더 이상 시간을 끌고 싶지 않았다. "마리. 나, 마리와 헤어지고 싶지 않아요." "내일 다시 볼 텐데요, 뭐." "아뇨. 난 마리하고 늘 함께 있고 싶어요." 라이짐은 마리의 두 손을 맞잡으면서 말했다. 말하기 어려울 거라고 생 각했는데, 막상 입을 열자 마치 준비된 것처럼 말이 이어져 나왔다. "마리. 더 이상 이렇게 살지 말아요, 우리. 늘 함께 있을 수 있어요. 나도 알고, 또 마리도 알고 있잖아요?" 라이짐이 말하자 마리의 얼굴이 눈에 뜨일 만큼 굳었다. 라이짐은 순간 자신이 실수했구나 싶은 느낌이 들었다. 술술 나오던 말도 딱 멎었고, 자 신이 한 말 중에 혹시 마리의 심기를 건드릴 만한 말이 있었나 돌아보게 되었다. "그럼 말해 줄 수 있어요? 아까 그 분이 진짜 예술가였는지?" "예?" 라이짐은 마리의 엉뚱한 말에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무슨 말 을 어떤 의미로 하고 있는 건지 라이짐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분이 만들고 있었던 게 뭔지 말해 줄 수 있어요? 그리고 마 지막으로 만든다던 대작이 뭔지도요?" 마리는 거의 분노를 토해내는 사람처럼 라이짐에게 소리쳤다. 라이짐은 어쩔 줄을 몰라하면서 얼굴을 한 번 쓸어 내렸다. 주먹으로 얻어맞은 듯, 눈앞이 부옇게 빛났다. 마리는 잠시 라이짐의 얼굴을 노려보다가 휙 돌아 서서 집으로 달려들어갔다. 라이짐은 마리를 붙잡으려고 손을 내밀었지만 마리는 이미 라이짐의 손길에서 벗어나 있었다. 라이짐은 몸을 돌리는 마 리의 얼굴에서 눈물방울을 언뜻 본 것 같기는 했지만 분명하지는 않았다. 라이짐은 마리를 따라 들어갈까 생각해 보았지만, 지금은 시기가 좋지 못 한 것 같았다. 라이짐은 그저 마리가 닫고 들어간 문만을 멍하니 바라보 다가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무실을 향할 수밖에 없었다. 골목을 나섰을 때, 라이짐은 아까 그 사내들이 모여 희희덕 거리고 있 는 모습을 보았다. 라이짐은 사내들에게 달려들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꾹 참았다. 이런 식으로 분노하는 건 귀족들이나 하는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내들 중 하나가 라이짐을 발견했고, 사내들은 조심스럽게 라이 짐의 시야에서 멀어져 갔다. 운이 좋군, 녀석들. 라이짐은 이런 식이라면 충동적으로 살인을 저지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집무실 야전 침대가 이렇게 불편하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라이짐은 잠 들기 전 천장을 바라보면서 이리 몸을 뒤척이고 저리 몸을 뒤척여 보았지 만 어떻게 해도 편안한 자세를 취할 수가 없었다. 가슴은 여전히 뛰고 있 었고, 시간이 갈수록 머릿속은 복잡하기만 했다. 도무지 잠이 오지를 않 았던 것이다. 결국 라이짐은 잠을 포기하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술이라도 한병 사들고 오는 건데. 라이짐은 양손으로 머리를 긁적여 보았지만 나오 는 것이라고는 비듬 한 줄기와 머리카락 몇 개뿐이었다. "나이스로부터의 전갈입니다." 에이스가 조용조용히 말했다. 라이짐은 에이스를 바라보았다. 늘 보아 왔기 때문에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에이스의 얼굴마저 낯설게 느껴졌다. "뭐야." 낮은 목소리로 라이짐이 말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보고를 들었다가는 머릿속이 더 복잡해질 게 분명했고, 그건 곧바로 한 숨도 자지 못하게 되 리라는 걸 의미한다는 걸 라이짐도 알고 있었지만, 어찌되었건 보고를 미 루고 싶지는 않았다. 에이스는 라이짐이 화가 났다고 생각했는지 아무 말 없이 라이짐의 눈치만 살필 뿐이었다. "말해봐." 라이짐이 이렇게 말한 데에는 아무리 개인적인 일이 풀리지 않는다고 해도, 공적인 일을 미루었다가 결국 순무처럼 되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 감도 한 몫했다. "나이스로부터의 전갈입니다." "그건 알아." 하진이 타실에 보냈다는 나이스였다. 알아서 판단하라고 말해두기는 했 지만, 검은 엘프 족에게 그런 부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인 모양이었 다. "수르카 님 일행이 나이스가 있는 지역에 도착했습니다." 라이짐은 허리를 곧추 세우고 에이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에이스는 그런 라이짐의 태도에 놀랐는지 몸을 움찔했다. "지금?" "예. 수르카 일행은 악마의 입 주변에 있는 작은 마을에 머물고 있는 모양입니다. 훈 족이라고 하는 군요." 수르카 녀석. 지난번에는 범버쿠 정글이더니 이번에는 악마의 입이로 군. "몸은 좀 어떻다고 해?" "건강해 보인다고 합니다." 에이스가 말했다. 라이짐은 수르카의 안부를 듣자 그나마 안심이 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아마 지금 이 세상에서 진심으로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친구는 어쩌면 수르카 단 하나 뿐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스에게 전해. 거기 머물면서 수르카 녀석, 잘 살피라고. 혹시 수 르카가 뭔가 부탁하면, 아니 수르카 일행이 부탁하더라도, 다 들어주라고 해." 라이짐은 이렇게 말했고, 에이스는 직접소통으로 나이스에게 라이짐의 말 그대로를 전달했다. 에이스의 보고가 끝나자 라이짐은 다시 침대에 몸을 눕혔다. 눈을 감자 망상이 이어졌다. 수르카. 살아있다면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겠지. 아 니, 어쩌면 둘 다 멋지 모습으로 다시 탐그루에서 만날지도 몰라.. 그것 도 웃는 얼굴로. 그리고 귀족 없는 세상에서 함께 살 수 있다면 좋으련 만. 라이짐은 마리와 라짐, 그리고 수르카와 함께 탐그루에서 사는 상상 을 해 보았다. 하지만 상상은 상상일 뿐이었고, 잠은 여전히 오지 않고 있었다. 주둔지 사령부 연병장에는 직할대 병력들의 분열 연습이 한창이었다. 라이짐은 집무실 밖으로 보이는 분열 연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케르가 훈장 수여식 때, 타호루에게 분열 연습을 시키라고 지시했던 그대로, 병 력들은 분열에 열중하고 있었다. 분열이라고 하면 부대가 줄을 맞추어서 걷는 것에 불과했고, 또한 사열 때 병사들을 가장 괴롭히는 일이기도 했다. 라이짐은 간격이 틀렸다고 지 휘관에게 있는 욕, 없는 욕 다 들어먹으면서 연병장을 구르기 시작하는 병력들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저게 전투력에 무슨 도움이 될까?" "하하하. 라이짐. 너 분열을 왜 하는 지 몰라서 묻는 거야?" 서류를 검토하다 말고 하진이 말했다. "그야 줄 맞춰서 걷는 거 잖아." "그건 분열의 겉모습이지. 진짜 분열은 적의 도시를 점령한 후에 의미 가 있는 거야. 적의 도시에 들어가서 줄을 맞추어 걷는 건 적 도시에 살 고 있는 주민들에게 효과적으로 전투력을 과시할 수 있는 방법이지. 장군 님이 그날 그렇게 지시한 걸 보면, 아마 조만 간에 적 도시를 점령할 일 이 있다고 생각한 걸 거야." 하진은 이렇게 말하면서 웃음을 지었다. 라이짐은 듣고 보니 그럴싸하 다 싶기는 했지만 과연 정말로 그런 의미가 있을까 다시 한 번 생각해 보 게 되었다. 점령한다. 라이짐은 하잔의 반란군과 맞서 싸웠던 일을 떠올 려 보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성황청, 그리고 탐그루가 될 지 몰랐다. 탐 그루에 우리가 들어서게 된다면. 연병장 한 구석에 흙먼지가 피어오르기 시작했고, 군화소리가 병사들이 분열연습을 다시 시작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군화 소리는 일정하게, 마 치 심장이 뛰는 것처럼 울려 퍼지고 있었다. "저거야. 바로 저 소리. 척척 울려 퍼지는 저 소리가 바로 사람들을 공 포에 휩싸이게 하는 소리거든. 알아? 저 소리를 사람들이 들으면 어떤 꼴 이 되고 마는지 말이야." 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라이짐은 병사들이 가까워오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은 라이짐 본인의 심장 박동이 가빠오고 있었기 때문이었 다. "벌레야." "응?" "딱정벌레 앞에서 쿵, 하고 발을 울리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벌레는 죽은 척을 하고 조금도 움직이지 않지. 그렇게 되는 거라고." 하진이 말을 끝맺기가 무섭게 급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라 이짐은 화들짝 놀라면서 문을 바라보았다. "장군님 호출입니다." 전령은 허락도 받지 않고 문을 열었다. 급하게 뛰어 왔는지 숨을 헐떡 이고 있는 모습이었다. "긴급 회의입니다." 전령이 말했다. PRINTER/CAPTURE를 OFF 하시고 [ENTER] 를 누르십시오.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21944/22303 ━━━━━━━━━━━━━━━━━━━━━━━━━━━━━━━━━━━━━━━━ 제 목:[탐그루] 혁명과 반역의 차이 305 관련자료:없음 25/25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6-11 21:18 조회:1122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회의는 군단 사령부 회의실에서 있었다. 사령부 회의실도 아케르의 취향 그대로 아무런 장식도 되어 있지 않은, 창고보다 조금 나을 정도의 방이었다. 회의실 앞에는 무장한 병력이 경계 근무를 서고 있었고, 지휘관들은 무기를 경비병에게 맡긴 후 회의실로 들 어가야 했다. 라이짐이 도착했을 때, 회의에 참석해야 할 인원들은 전부 다 도착한 상태였다. 라이짐은 칼집을 벗어 경계병에게 넘겨 준 다음 회 의실로 들어갔다. 대낮이라 회의실에는 햇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환하게 빛나는 햇살 아래 무장하지 않고 있는 아케르 군단의 지휘관들은 그저 평 범한 사람 같은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하지만 라이짐은 그들이 전투시에 어떻게 변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지휘관으로 참석한 사람은 다섯이었다. 발렌시아 제 일 백부장과 신다 루 제 오 백부장은 용병단 시절부터 잘 알고 지내온 사람이었고, 이번에 백부장으로 진급한 가투신과 차이린의 뒤를 이어 백부장이 된 청강의 모 습도 보였다. 그리고 탐그루에서 퇴각할 때 살아남은 유일한 백부장인 미 쥬 백부장의 얼굴도 알아볼 수 있었다. 미쥬 백부장은 탐그루에서 입은 상처의 흉터가 이마에 남아있었다. 발렌시아 백부장은 기다리기가 지루한지 머리를 넘기며 천장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가투신 백부장과 미쥬 백부장은 농담을 주고받고 있었다. 참석한 백부장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신다루 백부장은 고개를 숙이고 책상 을 긁적이고 있었는데, 라이짐의 눈에는 이제 한 물 간 늙은이로 밖에 보 이지 않았다. 청강 백부장은 참석한 지휘관 중에서 가장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바짝 긴장한 듯 가만히 앉아만 있을 뿐이었다. 타호루는 라이짐과 마찬가지로 아케르의 부관 자격으로 참석하고 있었 다. 타호루 역시 무슨 일로 회의가 소집되었는지 알지 못하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군단 사람은 아니었지만 라이짐 에게 낯이 익은 얼굴도 하나 보였다. "이 분은 국방부 장관이신 안토니오 장관의 전갈을 가지고 온 분입니 다. 다들 알고 계시겠지만, 고몽 페르도님 이십니다." 모두 자리에 착석하자 타호루가 고몽 페르도를 소개했고, 고몽 페르도 는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다들 그가 영주 프란스 페르도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국방부로 자리를 옮겼는 줄은 알지 못하고 있었 다. 고몽 페르도와 식사도 함께 했고, 또한 대신 결투까지 치른 적이 있 는 라이짐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라이짐에게 고몽 페르도는 더 이상 효용 가치가 없는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국방부 연락 장교를 맡고 있는 고몽 페르도입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장군님께서 도착하시면 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몽 페르도는 이렇게 말하고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모두들 고몽 페르 도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몽 페르도의 얼굴은 굳어있었다. 뭔가 중요한 말을 전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온 모양이었다. "장군님께서 오십니다." 회의실 문 밖에 서 있던 병사가 알려주었고, 라이짐을 비롯한 회의실 안의 전 인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라이짐은 굳어있는 고몽 페르도의 얼 굴을 바라보았다. 비록 친분을 계속 유지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고몽 페르도는 자신이 대신 결투를 치루어 주었던 일을 잊지 않고 있을 것이었 다. 라이짐이 생각하는 것은 오직 한 가지였다. 어떻게 하면 저 녀석을 이용할 수 있을까. 아케르가 회의실로 들어왔다. 긴급 소집했다고는 해도 정식 회의인 만 큼, 전투복에 장군용 망토까지 걸친 모습이었다. 그리고 회의실의 지휘관 답게 혼자 허리에 칼을 차고 있었는데, 꼭 그래서만은 아니겠지만 아케르 의 모습은 남달라 보였다. 아케르의 이마에 나 있는 십자 모양의 흉터가 햇빛을 받아 붉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지휘관들이 거수 경례를 하자 아 케르는 고개를 한 번 끄덕 하더니 회의장 책상 상석에 앉았다. "자. 자리에들 앉고. 절차는 생략하지. 연락 장교. 설명해 주게." 아케르는 대뜸 고몽 페르도에게 이렇게 말했다. 보통 지휘관이라면 고 몽 페르도를 대하기가 저렇게 쉽지만은 않을 것이었다. 아무리 군대 라지 만 영주의 아들이나까. 심호흡을 한 번 깊게 한 고몽 페르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 먼저 이 사항은 일급기밀사항이라는 것을 먼저 말씀드립니다." 말하는 고몽 페르도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작전 명령입니다. 작전 명은 반란군 토벌 작전입니다. 출정일은 최대 한 빨리, 목적은 자나크 주를 장악하고 있는 성황청 세력의 완전 토벌입 니다." 고몽 페르도는 앉아 있던 동안 이 말을 몇 번 연습한 모양이었다. 굳어 있는 표정과는 달리 입에서 나오는 말은 막힘이 없었다. 라이짐은 물론이 고 회의장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의 표정이 경악으로 바뀌었다. 아케르만 제외하고서 말이다. "자, 잠깐. 영주님의 명령인가?" 가장 먼저 연락장교에게 질문을 던진 것은 미쥬 백부장이었다. 미쥬 백 부장의 얼굴에는 믿지 못하겠다는 빛이 역력했다. "예. 오늘 아침에 국방장관 보고 시간에 결정하신 사항입니다." 고몽 페르도는 또박또박 이렇게 답변했다. "반란군 토벌이라고? 그렇다면 국왕의 허락을 얻은 형식인가?" 이번에는 신다루 백부장이었다. 나이에 걸맞게 원칙을 확인하려는 질 문이었다. "...영주님의 자의적 판단권을 통해 판단한 사항입니다." 고몽 페르도는 대답을 잠시 망설였다. 라이짐은 그 이유를 생각해 보았 다. "자의적 판단권을 행사했다면, 국왕의 명에 따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인 가?" 신다루 백부장의 질문이 이어졌다. "그렇습니다." 이번 질문에 고몽 페르도는 망설이지 않았다. 이미 한 번 망설였기 때 문에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영주가 친정을 나서야 하는 게 관례일 텐데요. 그렇지 않은 가요?" 가투신 백부장이 누구에게 하는 것인지 모호하게 이렇게 질문했다. "영주님께서는 국경의 바바 족 때문에 영지를 벗어나실 수 없습니다." 고몽 페르도의 대답을 듣는 순간, 라이짐은 고몽 페르도가 자의적 판단 권을 사용했다는 답변을 망설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영주는 지금 아케 르 군단을 이용하려는 것이라고 라이짐은 판단되었다. 성황청을 공격하는 것은 지금이 아니어도 좋고, 또한 국왕의 허락을 받은 뒤에도 가능한 일 이다. 지금 아케르 군단에게, 그것도 친정도 아닌 상태로 공격 명령을 내 린다는 것은 아케르 군단을 이용하려는 의도 외의 것이 있다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하지만 왜? 무슨 이득이 있어서? "잠깐만요. 나는 납득할 수가 없어요. 분명한 대의나 명분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국왕의 허락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어째서 지금 출정해 야 한다는 거죠?" 가투신이 팔짱을 끼고서 고몽 페르도에게 물었다. 고몽 페르도는 아마 이런 질문을 받았을 때를 대비해서 대답도 준비해 둔 모양이었다. "저는 연락 장교일 뿐입니다." 고몽 페르도의 말에 가투신은 실소를 터트렸다. "이건 말도 안됩니다, 장군님."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타호루가 말했다. "만약에 패전할 경우, 그 책임은 고스란히 장군님께 돌아갑니다. 만약 승전한다면 그 공은 자의적 판단권을 행사한 영주님께..." "타호루. 그만 두게. 그런 이야기는 함부로 할 게 아니야. 그리고 일개 연락장교가 뭘 알겠는가." 아케르의 얼굴은 회의장에 들어왔을 때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하나 묻지. 친정을 나서지 않는다면 내가 영주권을 전장에서 쓸 수 있 게 되는 건가?" 아케르가 고몽 페르도에게 물었다. "아닙니다. 친정의 경우, 영주 본인이 나서지 못한다면, 국방장관과 영 주의 친족 한 명이 함께 동행하여 영주권을 행사하게 됩니다. 물론 작전 권과는 별개의 권리입니다." 라이짐은 보다 명확하게 영주의 의도가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국방장관은 바로 안토니오 장군이었다. 만약 이번 작전이 실패한다면 아 케르는 국방장관의 지지를 잃게 될 것이었다. 그것은 작전 실패를 이유삼 아 안토니오 장군을 실각시킬 것이 거의 확실했다. 그렇다고 안토니오 장 군이 함께 하는 이상 함부로 병력을 움직일 수도 없을 것이었다. 안토니 오 장군은 야전 군인 출신답게 정치적인 목적에 움직일 사람이 아니었다. "친족 한 명은 누가 되는가?" 아케르가 다시 물었다. 고몽 페르도는 다시 한 번 대답을 망설였다. 모 두의 시선이 고몽 페르도에게 완전히 모아진 다음에야 천천히 고몽 페르 도는 입을 열었다. "관례상... 제가 동행하게 됩니다." "그렇군." 아무도 말을 잇지 못하고 있는데 아케르가 말했다. "장군님. 이건 부당한 명령입니다. 저희에게 유리한 것은 하나도 없습 니다." 미쥬 백부장이 말했다. "장군. 명령을 철회해 달라고 요청할 것을 건의하는 바입니다." 이번에는 신다루 백부장이 말했다. "재청합니다." 청강도 틀림없이 불만이 있었겠지만 자신이 함부로 나설 자리가 아니라 고 판단했는지, 청강은 이렇게 신다루 백부장의 말 뒤에 자신의 의견을 덧붙였다. 잠시 침묵이 있었다. 늘 그랬듯, 아케르의 '결정'이 내려지기를 기다리 는 시간이었다. 라이짐은 고몽 페르도를 바라보았다. 고몽 페르도의 이마 에는 땀이 흐르고 있었다. 이런 중요한 사항을 통보하는 데에 연락 장교 하나 보낸 것은 아케르 군단을 무시하는 행위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그 연락장교는 바로 다름 아닌 영주 프란스 페르도의 아들인 것이다. 아 케르는 과연 어떤 결정을 내릴 것인가. 모두들 숨을 죽이고서 아케르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우리는 군인이다." 아케르의 첫마디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유리한 작전에만 나가는 것은 군인이 아니다. 그리고 명령은 명령이 다." 아케르는 이렇게 말했다. 백부장들이 당장 반박에 나섰지만 아케르는 자리에서 일어나 이렇게 자신의 의견을 마무리했다. "회의를 마친다. 출정은 내일이다. 타호루는 출정에 따른 제반사항을 점검하도록." 아케르는 이렇게 말하고는 먼저 회의실을 떠나 버렸다. 백부장들은 한 참동안 뭐라고 의견을 나누었지만 아케르가 회의실을 나가버린 이상 뭐라 고 의견을 내건, 그것은 별다른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라이짐은 슬쩍 회의실을 빠져나가려고 하는 고몽 페르도에게 물었다. 고몽 페르도는 당혹스러운 얼굴을 하고서 라이짐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제가 누구의 아들인가를 따지기 이전에 저 역시 군인입니다. 명령대로 할 뿐 어떻게 된 건지는 알 수도 없고, 알 의무도 없습니다." 말이야 막힘이 없었지만 고몽 페르도의 얼굴은 자기 자신이 더 당혹스 럽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고몽 페르도를 어떻게든 이용해 보겠다는 라이짐의 계획은 완전히 틀려 버렸다. 하지만 라이짐은 하진과 대화를 나누면서 보다 분명한 정황을 파 악할 수 있었다. 하진은 단검을 벼리면서 라이짐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된 건지는 여러 원인이 있을 수 있어." "예를 들자면?" "먼저 페르도 부인의 모략일 가능성이 있어. 발렌시아는 회의 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 하진의 말을 듣고 보니, 발렌시아는 그저 지루하다는 표정만 짓고 있었 을 뿐, 아무런 발언도 하지 않았던 기억이 났다. "발렌시아가 회의 내내 아무 말 하지 않았던 것으로 미루어 짐작컨데 발렌시아는 미리 알고 있었을 거야. 그렇다면 페르도 부인이 뒤에서 조정 한 결과일 수 있지. 또 이럴 수도 있어. 아케르 장군을 견제하는 귀족 세 력이 압력을 넣었을 가능성 말이야. 네가 발렌시아를 이용해 페르도 부인 에게 한 공작, 오히려 역효과였는지도 모르겠는 걸. 페르도 영주가 전방 시찰 운운하면서 아케르 장군을 피하는 걸 보면 그럴 가능성이 더욱 높아 지지." 라이짐은 하진의 이 말에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물론 순전 히 자신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지만 개운하지 못한 것만큼 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아니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뜨거운 열쇠 때문일지도 몰라. 스파일의 다른 군단장들은 뜨거운 열쇠를 사용하는 것이 칼과 활로 싸우는 스파일 정예군의 전통에 위배되는 일이라고 말해왔으니까 말이야." 라이짐은 하진의 말에 이렇게 덧붙였다. 그러자 하진은 고개를 끄덕였 다. "그래. 거기다가 아케르 장군의 유일한 지지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안 토니오 장군을 함께 보낸 것도 비슷한 이유일 거야. 불리한 작전에서 어 떻게 되기를 바라고 있겠지. 전사하거나, 혹은 문책할 수 있게 되거나." 하진의 분석은 대체적으로 정확한 것 같았다.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여지가 별로 없는 상황이었다. 라이짐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미간을 찌 푸렸다. "라이짐. 너 때문에 이렇게 된 건 절대 아니니까 그런 표정 하지 마. 이 모든 것들이 동시에 이루어졌겠지. 누가 시작했건, 누가 선동했건, 이 건 중요 한 게 아니야. 아케르 장군이 눈에 걸리적거리는 사람이 어디 한 둘이었겠어? 이건 한 사람의 힘으로 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어떻게 보 면 필연적이라고 할 수도 있지." "결국, 우리는 소모품으로 선택된 것 같군." 라이짐은 아랫입술을 깨물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런데 하나 의문이 남는단 말씀이야?" 하진이 한 쪽 눈썹을 치켜세우면서 말했다. "무슨 의문?" "아케르 장군, 회의 마지막에 결정은 내려졌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면 서?" "그래. 아마 기분이 나빴으니까 그랬겠지." "기분 문제가 아니야, 라이짐." 하진은 이렇게 말하면서 턱을 쓰다듬었다. "뭔가 더 있을 거야. 어쩌면 백부장들을 소집한 것도, 또 고몽 페르도 앞에서 자신이 군인이라는 걸 강조한 것도, 뭔가 생각이 있을 거야. 너도 잘 알잖아, 아케르 장군이 평소에 어떻게 하는 지. 부하에게 명령을 일단 내리고 나중에야 그 의미를 짐작하게 하는 거 말야." 라이짐은 일단 하진의 말에 희망을 걸어 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아케르는 단 한번도 쉬지 않고 여기까지 달려 왔다. 귀족 없는 세상, 누구나 행복하게 사는 세상을 위하여. 라이짐도 물론 알고 있었다. 그것을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렸는가를. 그리고 얼마나 많은 것들이 희생되어야 했는가를. 만약 여기서 멈추어 선 다면 지금까지 아케 르를 따랐던 사람들은 물론이고, 지금까지 희생된 수많은 이들 또한 아무 런 의미가 없어질 것이었다. 여기서 아케르가 멈추어 서게 되는 것은 아 닐까. 라이짐의 심경은 착잡하기만 했다. "그나저나 내일이 바로 출정이라니. 이거, 준비도 제대로 못 하겠는 걸." 하지만 하진은 별로 걱정이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마치 봄놀이 나가는 귀족 같은 말투로 말하면서 짐을 챙길 뿐이었다. 라이짐은 하진에게 걱정 되지 않느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하진이 어떤 대답을 할지는 라이 짐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탐그루에 주둔하고 있었을 때, 라이짐은 지금 던지고 싶은 질문과 비슷한 맥락의 질문을 하진에게 한 적이 있었 다. 하진은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했다. 해야 할 일을 먼저 하는 사람과 하는 일을 그저 하는 사람. 라이짐은 하진의 말이 어떤 의미 인지 잘 알고 있었다. "우리가 지금 해야 하는 일은 성황청을 이기는 걸까?" 라이짐이 연병장을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하지만 하진의 대답은 엉뚱 한 것이었다. "라이짐. 우리가 지금 해야 하는 일은 짐을 싸는 거야." 키득거리는 하진이었지만, 결국 그 대답은 하진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를 분명히 해 주는 것이었다. 그래. 하진과 나는 다르지. 세상에는 하진 같이 그저 살아가는 사람들 뿐이야. 여기에 아케르 같은 사람이, 또 나 같은 사람이 희생을 무릎 쓰고 그들을 이끌어주지 않는다면 세상은 조 금도 나아질 수 없어. 라이짐은 이렇게 다시 한 번 다짐하고는 하진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래. 우리라도 결정을 내리자구." 하진은 라이짐의 말에 키득거렸지만, 라이짐의 말에는 다른 뜻도 포함 되어 있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21945/22303 ━━━━━━━━━━━━━━━━━━━━━━━━━━━━━━━━━━━━━━━━ 제 목:[탐그루] 혁명과 반역의 차이 306 관련자료:없음 23/23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6-11 21:18 조회:1031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사실 군단의 병력들은 이번 출정 소식이 전해지자 사기가 떨어지고 말 았다. 아케르의 의견에 반대하는 병사들도 눈에 띄었고, 일단 아케르를 믿어보자는 병사도 있었고, 성황청에 분노하는 병사도 적은 수지만 있었 고, 또한 도대체 왜 우리가 자나크로 출정을 가야 하는 지 알 수 없다고 투덜거리는 병사도 있었다. 들리는 말에 따르면 이런 병력들에게 되지도 않는 사정을 그럴싸하게 설명하느라 백부장들이 고생 깨나 하고 있는 모 양이었다. 어쩌면 아케르가 명령을 받은 바로 다음날을 출정일로 잡은 것 도 그 때문인지 몰랐다. 이러한 병사들의 생각은 막상 전투가 벌어지면 수그러들기 마련이니까. 라이짐은 짐을 챙긴 후, 마리에게 편지를 썼다. 부대 전체가 출동 명령 때문에 외출 외박이 금지된 상황이었다. 물론 정보부장이라는 직책을 이 용해서 얼마든지 부대 밖으로 빠져나갈 수도 있었지만, 라이짐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해야 할 일이 먼저라는 생각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렇게 헤 어진 이후, 다시 얼굴을 본다는 게 어색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리를 찾아가는 대신에 라이짐은 편지를 한 통 썼다. 긴 편지는 아니 었다. 편지에 라이짐은 이렇게 적었을 뿐이었다. "마리. 내가 실수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대답, 기다리겠어요." 라이짐은 에이스 편에 편지를 전하기로 했다. 출정을 앞둔 탓이었을까. 라이짐은 이제 다시는 마리를 볼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여버렸다. 물론 라이짐은 애써 그런 생각을 지우려고 노력했다. 하지 만 그날 밤, 라이짐은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출정식은 간소하게, 그리고 급작스럽게 치러졌다. 새벽 동트기 전에 치 러진 출정식에는 작전에 참가하는 사람 외에는 단 한 명도 참석하지 않았 다. 영주와 지역 유지는 물론이고, 의례적으로 참석하기 마련인 내무장관 이나 자이벌, 귀족, 심지어는 시민도 참석하지 않았다. 라이짐은 출정식을 위해 도열해 있는 병력을 아케르의 부관 자격으로 사열대 앞에서 바라보고 있자니, 용병단 시절 출정식이 떠올랐다. 새벽의 어스름이 병사들 머리 위에 내리 깔려 있었고, 반짝이는 눈동자 너머 들 고양이 같은 음습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텅 비어 있는 귀빈석이 새벽 공 기 속에서 서늘하게 느껴졌다. 비록 용병단 시절 가졌던 그 어떤 출정식 보다 분위기는 가라앉아 있었 고, 병사들의 사기도 어느 때보다 떨어져 있었지만, 그래도 라이짐은 용 병단 시절을 생각하려고 노력하면서 스스로 활기를 얻으려고 했다. 지금 나에게는 뜻이 있다. 그 끝이 무엇이건, 나는 그 뜻을 따를 수밖에는 없 는 것이다. 라이짐은 몇 번이고 이렇게 되뇌었다. 아케르가 연단에 올라갔다. 출정 연설을 하려는 것이다. 반짝이는 병사 들의 눈동자가 일제히 아케르에게 향했다. 아케르가 과연 무슨 말로 자신 들을 이끌 것인가. 병사들은 몹시 궁금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실 아무 리 좋게 상황을 생각하려고 해도 아케르가 어떤 말을 할지에 기대가 모아 지기는 라이짐도 마찬가지였다. 라이짐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폈다 쥐 었다 하는 것을 반복하고 있었다. "출정한다. 영주 대행으로 고몽 페르도 님이 함께 하시고, 국방 장관도 우리와 함께 한다. 작전 지휘관은 본관이 한다." 아케르의 연설은 이것뿐이었다. 병사들에게 용기를 준다거나 병사들의 가슴을 뜨겁게 할 만한 말은 단 한마디도 없었다. 용병단 시절 수도 없이 들었던 그 흔한 '죽지 말라'거나 '죽음으로 살아라'같은 말도 없었다. 다음으로 국방장관의 연설이 있었다. 안토니오는 아케르에게 가볍게 목 례를 해서 예를 표한 다음 연단에 올랐다. "제군들. 이제 제군들은 역사적인 출정에 나서게 된다." 안토니오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장군 다운 커다란 음성이 었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갈 곳을 찾지 못하고 허공을 떠도는 기분이었 다. 안토니오도 그걸 느꼈는지 잠시 말을 끊어 병사들을 살펴 본 다음 말 을 이었다. "우리는 군인이다." 안토니오의 이 말은 그나마 병사들에게 먹혀 들어가는 모양이었다. 안 토니오는 병사들의 반응을 놓치지 않고 얼른 말을 이었다. "군인이 뭔가? 세상에서 가장 쓸모 없는 것이 군인이다. 툭하면 사고나 치고, 평시에는 돈 잡아먹는 괴물이지. 하지만, 전투가 벌어지면, 군인은 세상 그 어떤 존재보다도 빛을 발한다. 알고 있는가, 제군들? 이제 전투 가 벌어질 것이라는 걸. 그리고 제군들의 역할이 지금까지 그 어느 때 보 다도 중요해질 것이라는 것을." 안토니오 장군은 몸짓을 섞어가며 이렇게 말했다. "제군들. 이제 우리는 잔악한 성황청의 무리를 토벌하러 출정해야만 한 다. 우리가 아니라면 다른 누군가가 할 일이다. 자랑스럽지 않은가? 그 역할을 우리가 하게 된다는 것이. 우리가 우리의 손으로 악의 무리를 응 징하는 것이다." 안토니오의 말에 병사들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하는 걸 라이짐은 느낄 수 있었다. 안토니오는 이런 말로 연설을 맺었다. "귀관은 국방을 책임지고 있는 장관으로서, 제군들에게 약속한다. 전투 가 벌어지면, 나는 제 일선에 있을 것이다. 결코 제군들에게 책임을 미루 고 뒤로 물러서 있지 않을 것이다. 제군들. 나와 함께, 이 역사적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주길 바란다." 안토니오는 이렇게 말하고는 연단에서 내려왔다. 연설이 끝나자 새벽 어스름은 금새 푸른 빛으로 밝아 버렸고, 병사들의 반짝이던 눈동자도 금 새 빛을 잃었다. 병사들의 군화 소리가 무겁게, 마치 질질 끄는 듯한 소리를 내면서 행 군은 시작되었다. 라이짐은 아케르를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국방장관 안토니오가 뭐라고 아케르에게 속삭이고 있었지만, 아케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듣고만 있었다. 그 모습을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는 사람은 라이짐과 고몽 페르도뿐인 것 같았다. 안개비는 여전히 그칠 줄 모르고 있었다. 이제 대청하만 건너면 자나크 주다. 여기를 건너면 이제 전투와 살육, 그리고 피와 불의 시간이 시작될 것이었다. 라이짐은 안개비가 멈출 줄 모르는 밤하늘에 떠 있는 달을 바 라보면서, 어쩌면 다시 살아서 프라브리티 땅을 밟지 못하게 될지도 모르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좋다고 생각해야만 한다. 그리고 후회해서 는 안 된다. 후회하는 순간, 멈추어 서는 순간, 그것이 바로 죽음이다. 라이짐은 토악질을 해대던 순무의 모습을 떠올려 보면서 이렇게 생각했 다. 여기까지 떠밀려 오기는 했지만, 안토니오의 출정 연설 그대로, 이제 전투는 피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어차피 치루하야하는 전투라면, 그리 고 그것을 수행해야 하는 것이 우리 부대라면, 반드시 이겨야 하지 않겠 는가. 라이짐은 생각했다. "에이스입니다." 야전 천막 너머에서 에이스가 라이짐에게 말했다. 라이짐은 에이스에게 들어오라고 말했고, 에이스는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안대를 하고 있는 에이스는 빗물에 젖어 마치 무덤에서 방금 일어난 좀비 같은 느낌을 주었 다. 하진은 그런 에이스에게서 시선을 돌렸지만, 라이짐은 에이스에게 수 건을 한 장 내밀었다. "급한 보고입니다." "먼저 좀 닦아." "하지만 아주 급한 보고입니다." "먼저 닦아. 명령이야." 에이스는 라이짐의 말 그대로 수건으로 머리를 닦아내었다. 하진은 입 김으로 남은 물기도 말려 주라고 비아냥거렸지만 라이짐은 이제 그런 말 쯤 이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게 되었다. "이제 말해 봐. 무슨 일이야?" 라이짐은 천막에 내 놓은 창으로 시선을 둔 채로 말했다. 보나마나 별 쓸모없는 정보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스로부터의 전갈입니다. 성황청 타실 지부가 공격당했습니다." "뭐라고?" 하진이 말하면서 벌떡 일어났다. 라이짐도 황급히 나이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누가 공격했는데?" "하진.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성황청은 타실 지부에서 철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진 님. 먼저 공 격한 것은 타실의 국왕 기사단이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공격은 수르 카 님 일행이었습니다." "수르카..." 라이짐은 탄식처럼 중얼거렸다. 가슴 깊은 곳에서 생살이 드러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잠깐. 그럼 이제 성황청 성구는..." 하진이 에이스에게 물었고, 에이스는 하진의 말이 채 다 끝나기도 전에 이렇게 대답했다. "더 이상 작동하지 않습니다. 수르카 님은 성황청 성구가 가지고 있는 힘의 근원을 완전히 파괴했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라이짐은 더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한 시가 급했다. "하진. 상황좀 봐줘. 에이스. 여기서 하진을 보좌해." 라이짐은 이렇게 말하고는 지휘본부를 향해 급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 결정이 내려질 수 있는 중요한 순간이 온 것이었다. 성황청의 기사 단이 막강했던 것은 오직 강력한 성구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 성구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이것은 전략상의 매우 유리한 위치를 아케르 군단이 차지하게 되었다는 것을 뜻했다. 라이짐은 안개비 속을 정신없이 뛰어갔다. 분명 뛰고는 있는데, 자신이 정말로 움직이고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다 들고 있었다. 어쩐지 라이 짐은 미궁 속에서 길을 잃은 느낌이 들었다. 라이짐은 하늘을 올려다보았 다. 안개비에 달빛이 은색으로 반사되고 있었다.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휘 본부 천막에 닿았을 때, 경계병이 라이짐을 막아서면서 이렇게 말 했다. "정보 부장의 급한 연락이다. 아주 급한 연락이라고 전해 드려." 라이짐이 경계병에게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경계병은 라이짐의 말에 망설였다. "서두르라고, 이 돌대가리야! 책임은 내가 진다!" 라이짐은 우물쭈물 하고 있는 경계병에게 고함을 쳤고, 경계병은 허둥 거리면서 지휘본부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안개비는 어느 사이 라이짐의 속옷까지 적시고 있었다. 전투복이 점점 더 무거워 고 있었다. "들어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얼마나 지났을까. 라이짐이 젖은 몸 때문에 몸을 떨 즈음이 되어서야 경계병은 돌아왔고, 들어와도 좋다고 아케르의 말을 전했다. 라이짐은 경 계병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고 지휘 본부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평시라 면 무장을 해제하고 들어가는 것이 관례였겠지만, 실전이니 만큼 경계병 은 라이짐에게 무장 해제를 요구하지는 않았다. 천막 안에 들어서자 안개 비 때문에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한 땀 냄새가 풍겼다. 오랫동안 맡아온 전장의 냄새 중 하나였지만, 오늘 따라 이 냄새 가 라이짐의 가슴을 더욱 뛰게 만들고 있었다. 천막 안은 어두컴컴했다. 아마 연금술사의 등을 갈 때가 된 모양이었다. 천막 안에는 아케르와 안토니오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그 뒤편으 로 고몽 페르도가 영주의 화려한 무늬가 수놓아진 옷을 입고 둘의 이야기 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아마도 오랫동안 토론이 계속되었던 듯, 고몽 페르도의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드러나 있었다. "아케르 장군. 장군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오만, 장군 말 그대로 우리는 군인일 뿐 아니겠소. 설혹 잘못된 명령이라고 하더라도 일 단 수행한 후에야 뭐라고 말을 할 수 있는 게 군인이오." "다시 대화가 원점으로 돌아왔소, 안토니오 장군." 아케르가 한숨을 내 쉬면서 말했다. 라이짐은 빨리 보고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아케르는 라이짐에게 잠시 기다리라는 손짓을 한 다음, 안토 니오에게 이렇게 말했다. "군이 하나로 뭉쳐 있지 않으면 부대를 움직여서는 안되고, 진영이 단 합되어 있지 않으면 나아가 싸우게 해서는 안되며, 전투에서 일사불란하 지 않으면 결전을 벌여서는 안 되는 법이오. 지금 우리의 상황을 모르시 겠소? 우리 군단 병사들의 사기는 지금 땅에 떨어져 있소. 의견은 백부장 참모 할 것 없이 제각각이고, 이런 상태로는 승리는커녕 나와 장관의 목 숨마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오." "내 말을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는 거요, 아케르 장군? 나는 장관이오. 이 나라의 국방을 책임지고 있는 장관이란 말이오! 이제 와서 이렇게 망 설인다는 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오? 아무래도 내가 아케르를 잘못 본 모양이오." 안토니오가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라이짐은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아케르에게 보고를 했다. "장군님. 에이스로부터 긴급한 전갈입니다." "그 내용은 알고 있네. 라이짐. 자네 무장하고 있나?" "예? 물론 무장은 하고는 있습니다만..." 라이짐이 보고를 하기도 전에 아케르는 이렇게 말했다. 알고 있었다니? 지금 오가는 대화 내용으로 보아서는 전혀 납득이 가질 않는 이야기였다. "전갈이라니. 무슨 내용이오, 아케르 장군?" "라이짐. 무장하고 있다니 다행이군. 고몽 페르도 님을 잘 모시게." 라이짐은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쉽게 판단이 서질 않았다. 하지만 안토니오 장군의 다음 태도를 보게 되는 순간, 라이짐은 아케르가 무슨 생각으로 여기까지 왔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케르 장군!" 안토니오가 칼을 뽑아들면서 말했다. 라이짐은 고몽 페르도를 바라보았 다. 다행히도 고몽 페르도는 칼을 뽑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모양 이었다. 라이짐은 안토니오의 등뒤에 서 있었다. 만에 하나 안토니오가 칼을 휘두를 기미가 보인다면 라이짐은 그대로 안토니오를 베어야 한다. 라이짐은 칼을 뽑아 들어 고몽 페르도의 목줄에 대었다. "한 영지에 두 개의 태양이 있을 수는 없소. 하지만 프란스 페르도는 스스로 두 개의 태양을 만들어 내었소. 이 아케르, 그렇게 순순히 당하고 만 있을 인물은 아니오." "맙소사." 안토니오 장군은 한숨처럼 이렇게 내 뱉었다. "칼을 버리시오, 안토니오 장군." 안토니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마도 두 명을 어떻게 하면 한꺼번에 벨 수 있을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안토니오 장군이 한 순간 고몽 페르도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고몽 페르도는 겁에 질려 자리에서 일어날 수조차 없 을 것 같았다. "장관. 영주가 죽는 걸 보고 싶소?" 아케르가 말했다. 안토니오는 망설이다가 칼끝을 내렸다. 그러자 아케 르가 칼을 뽑아 들었다. 아케르는 위대한 복수자 검객이라는 별명을 얻었 던 사람이었다. 이런 상황을 놓칠 리가 없었던 것이다. 아케르는 칼을 뽑 아 들어 안토니오의 목에 대었다. 하지만 고몽 페르도는 무슨 일이 일어 나고 있는지 아직도 감을 잡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고몽 페르도는 그저 공포에 질린 표정을 하고서 라이짐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라이짐. 장관께 보고 드리게. 무슨 정보인지." 안토니오 장군의 목에 칼날을 들이민 상태로 아케르가 말했다. 아케르 의 표정은 담담했지만 라이짐은 그렇지 못했다. 칼자루를 쥐고 있는 손에 서 땀이 베어 나왔다. "성황청 타실 지부가 타실 병력에 의해 장악되었습니다. 이로서 성황청 의 성구는 더 이상 힘을 발휘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말하는 라이짐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라이짐은 목이 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면 화력 면에서 앞서고 있는 우리에게 승산이 있다는 말 아니 오?" "승산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틀림없이 이길 것이오, 안토니오 장 군. 하지만 그 공은 누가 차지하게 되겠소? 바로 프란스 페르도 하나 뿐 이오. 아마 이 작전이 끝나면 아마 나는 저 국경지대에 배치될 것이오. 아니면 쥐도 새도 모르게 암살 당하거나. 안토니오. 이건 내 운명만은 아 니오. 나와 가까운 당신도 같은 길을 걷게 될 것이오." "지금 반란을 하겠다는 것이오, 아케르?" 이렇게 말하는 안토니오는 절망적인 목소리였다. 아케르는 고개를 천천 히 가로 저었다. "아니오. 반란이라는 건 실패한 자들에게나 붙는 말이지. 예를 들어 하 잔의 사람들에게나 붙는 명칭이오. 지금 같은 경우는 사람들이 보통 혁명 이라고 말하지."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21946/22303 ━━━━━━━━━━━━━━━━━━━━━━━━━━━━━━━━━━━━━━━━ 제 목:[탐그루] 혁명과 반역의 차이 307 관련자료:없음 21/21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6-11 21:19 조회:1194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아케르는 승리를 확신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라이짐은 고몽 페르도 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반란이라는 말을 들은 고몽 페르도의 얼굴은 하얗 게 질려 있었다. 칼을 쥐고 있는 라이짐의 팔이 조금씩 저려오고 있었다. "안토니오. 지금이야말로 돌아설 수 없는 길에 들어선 것이오, 우리는. 지금까지 나는 귀중한 시간을 낭비해서까지 당신에게 나와 같이 할 이유 에 대해서 설명했소. 그리고 프란스 페르도의 속셈도, 우리가 가지고 있 는 원대한 꿈도. 이제는 짐작하고 있으리라 믿소. 안토니오 장군. 마지막 으로 묻겠소. 우리와 함께 살겠소, 아니면 여기서 개죽음하겠소?" 라이짐은 안토니오 장군을 바라보았다. 안토니오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갑작스럽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케르의 무표정한 얼굴이 찌푸려졌 다. "아케르. 여기서 날 죽이겠다니. 이거 너무 농담이 지나친 게 아니오? 그리고 일개 군단 병력으로 프라브리티에 입성했다고 칩시다. 국경의 군 단들이 순순히 따를 것 같소? 또 귀족들과 기득권 세력들이 당신을 지지 할 것 같소? 아케르. 칼을 거두시오. 우리 일단 대화로 이 사태를 풀어 갑시다." 안토니오의 목소리는 조금도 떨리지 않고 있었다. 야전군인 다운 모습 이었다. 죽음의 순간을 수없이 경험한 자만이 이런 상황에서 저렇게 태연 할 수 있으리라. 고몽 페르도의 얼굴에 아주 약간 안도의 빛이 떠올랐다. "미안하오, 안토니오." 아케르는 이렇게 말하고는 칼날을 뒤로 잡아 빼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안토니오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두 손으로 목을 감싸 쥐었 다. 순식간에 검붉은 피가 손가락 사이로 뿜어져 나왔다. 라이짐은 그 순 간 몸을 움찔하고 말았다. 위대한 복수자 검객이 칼도 뽑지 않은 상대를 저렇게 죽이리라고는 상상도 해보지 못한 까닭이었다. "나는 귀족의 지지가 필요 없소." 이렇게 말하는 아케르를 안토니오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얼굴 을 하고서 바라보고 있었다. 안토니오는 어떻게 하려는 것인지 한 쪽 손 을 목에서 떼어 아케르에게 겨누었다. "아, 아케르, 다, 당신은..." 하지만 칼날이 기도를 건드렸는지, 안토니오의 입에서는 더 이상 말이 이어지지 못했고, 안토니오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다만 한 웅큼의 핏덩이 뿐이었다. 안토니오는 피를 토하며 앞으로 쓰러졌다. 라이짐은 이제 거의 공포심에 이성을 잃어버린 듯 보이는 고몽 페르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고몽 페르도는 눈에 뜨일 정도로 이빨을 딱딱 부딪치고 있었다. 오한이라 도 느끼고 있는 모양이었다. 라이짐은 어느 사이 자신의 몸에도 오한이 닥치고 있는 느낌에 빠져들고 말았다. "라이짐 정보부장. 정보부장은 보안의 중요성에 대해서 잘 알고 있겠 지?" "예. 그렇습니다." "보안에 극히 유의해서, 지금부터 출정식을 준비하는 일을 돕게. 타호 루의 천막에 가면 타호루가 어떻게 해야할지 알려줄 걸세." 아케르는 이렇게 말하면서 고몽 페르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안토니 오가 마지막 기력인지 팔을 뻗어 아케르의 발목에 손을 대었다. 하지만 아케르는 그대로 안토니오의 손을 짓밟았다. 라이짐은 뭔가 어긋나고 있 다는 느낌을 받았다. 좀처럼 느껴보지 못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라이짐은 이렇게 되뇌고 있었다. 아케르가 결정했다. 이제 우리는 이긴다. 오랜 꿈 이, 우리 모두가 꾸었던 바로 그 꿈이 실현되는 순간인 것이다. 라이짐의 팔이 떨려왔고, 덕분에 칼날 끝이 조금 고몽 페르도의 목에 박혀 들어갔 다. 고몽 페르도는 칼날을 바라보면서 어쩔 줄을 몰라하고 있었다. 당장 비명이라도 지를 듯한 모습이었다. "나, 나도 죽일 건가요?" "아니. 당분간은 죽이지 않는다. 아직 필요하니까." 아케르는 이렇게 말하면서 고몽 페르도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고몽 페 르도는 눈을 질끈 감았다. 순간 고몽 페르도의 바지가 젖는가 싶더니 바 짓가랑이 사이로 오줌물이 떨어졌다. "이 친구는 이제 경계병에게 인도하지. 라이짐. 부탁하네." 라이짐은 칼을 거두었다. 저항할 의사도 없는 사람에게 칼을 겨누는 일 은 도무지 라이짐의 적성에는 맞지 않는 일이었다. "백부장들에게 말해서 회의를 소집할까요?" 라이짐이 말했다. 이제 결전의 순간이 다가왔다. 언젠가 한 번은 오리 라고 여겼던 순간이다. 지금 내가 놀라고 있는 것은 단지 그 시기가 조금 앞당겨졌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기는 거다. 우리가 이기는 거다. 라이짐 은 이렇게 수도 없이 중얼거렸다. "아니. 회의는 필요 없어. 그냥 전 병력을 집결시키라고만 하면 되네. 타호루가 지시할 걸세." 아케르는 이렇게 말하면서 고몽 페르도에게 칼끝을 움직여 엎으려 있을 것을 지시했다. 라이짐은 알겠다고 대답한 뒤 서둘러 천막을 빠져나가려 고 했다. 쓰러져 있는 안토니오 장군의 얼굴이 자꾸만 눈앞에 떠오르고 있었다. "잠깐, 라이짐." 라이짐은 발이 땅에 붙은 것처럼 그 자리에 멈추어 서고 말았다. 라이 짐은 서서히 몸을 아케르 쪽으로 돌렸다. "안토니오 장군의 죽음은 이야기하지 말게. 안토니오는 영웅으로 죽어 야 하니까." 라이짐은 아케르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짐작 할 수 있었다. 자신 이 죽였다고 말하기에 안토니오 장군과 아케르는 너무 가까운 사이였다. 게다가 반란을 일으킨다고 하면 필연적으로 영웅은 필요하기 마련이었다. 라이짐은 죽어 가는 안토니오를 잊으려고 했다. 오줌을 싼 고몽 페르도도 잊으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의 손으로 목을 벤 츄바카 장군도, 또한 하잔 의 시민들도, 오우거를 막기 위해 불에 타 숨진 화전민들도 떠올리지 않 으려고 했다. 결코 아케르를 의심하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천막을 빠 져나가는 순간 깊은 어둠 속에서 간신히 빠져 나온 듯한 느낌이 드는 것 마저 막을 수는 없었다. 전 병력이 집결하는 데에 든 시간은 안토니오의 시체를 창고 구석에 처 박는 시간보다 조금 더 걸렸을 뿐이었다. 평소 훈련으로 단련된 아케르 군단의 휘하 병력은 당겨졌다가 손을 놓은 활시위처럼 순식간에 집결했 다. 아케르가 지시한 장소는 대청하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이었다. 아케르 군 단의 작전 계획대로라면 지금쯤 성공적으로 도하를 마치고 하잔으로 향하 는 길로 공격해 들어가고 있어야 했을 것이었다. 대청하는 달빛과 안개비 때문에 마치 꿈틀거리며 남쪽으로 흘러가는 구 렁이처럼 보이고 있었다. 물 흐르는 소리가 마치 마물의 울음소리처럼 음 산하게 들려왔다. "제군들." 아케르가 말했다. 높은 억양의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배에서 울려나오는 아케르의 음성은 힘차고 우렁차게 들리고 있었다. "이제 우리는 진짜 출정식을 가지려고 한다." 아케르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는 것은 라이짐과 타호루 정도였다. 병력들은 아마 이제 도하를 하려는 모양인가보다 짐작만 하고 있을 것이 었다. 라이짐은 부관의 자격으로 아케르의 옆에 서 있었다. 안개비 때문 에 병력의 모습을 정확하게 볼 수 없다는 게 조금 아쉬웠다. "제군들. 우리는 대청하를 건너지 않는다. 지금부터 아케르 군단은 프 라브리티로 진군한다." 순간 병력들이 술렁이는 게 느껴졌다. 앞줄에 서 있던 백부장들이 놀라 는 표정이 분명하게 라이짐의 눈에 들어왔다. "오랫동안 기다렸다, 제군들. 이제 우리는 스파일을 해방시킬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작은 시작에 불과하다. 다음은 자나크이고 그 다음은 타실 이다. 우리는 바르도 대륙 전체를 향해 진군해 나갈 것이다." 발렌시아는 당황하고 있는 게 분명했고, 가투신과 미쥬, 그리고 신다루 의 얼굴은 질문을 하고싶어서 안달이 난 것 같았다. 가장 담담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은 청강이었다. 청강은 그야말로 아케르가 무엇을 하건 상관 없이 따르겠다는 마음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제군들이 의문을 가질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오랫동안 우리가 계획해 온 일이다. 이 자리에서 약속한다. 나를 따라준다면, 우리의 꿈은 이루어질 것이다. 적은 우리가 돌아간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따라서 전혀 대비가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적이 가지고 있지 않은 강력한 무 기도 있다. 게다가 우리에게는 인질도 있다. 우리는 고몽 페르도를 포로 로 잡아두었다." 술렁임은 어느사이 환호성으로 바뀌었다. 누군가 소리를 질렀고, 그 소 리는 물결처럼 병력 사이를 퍼져나갔다. 라이짐은 아케르를 바라보았다. 라이짐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 온 것은 아케르의 발에 아직도 묻어 있는 피였다. 라이짐은 어이없이 죽어가던 안토니오 장군의 모습을 떠올려 보 았다. 피투성이가 된 얼굴과 마지막으로 뭔가 말하려고 하던 모습이. 라 이짐은 애써 그 모습을 지워버리려고 했다. "제군들! 혁명과 반역의 차이를 아는가? 그것은 바로 힘의 차이다. 우 리에겐 반역을 넘어서 혁명을 이룰 수 있는 힘이 있다. 안개비가 내린다. 하늘도 우리를 돕는다. 제군들. 이제 결정은 내려졌다." 라이짐은 가슴 벅차오름을 느낄 수 있었다. 자나크를 공격하라는 명령 이 떨어진 이후 계속해서 아껴온 아케르의 '이제 결정은 내려졌다'는 말 이었다. 병사들은 다시 한 번 환호성을 올렸고, 발렌시아를 제외한 백부 장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제군들. 내 말을 기억하는가. 이제 자신의 생명으로 모두의 생명을 살 려야 할 때가 왔다. 이제 제군들은 제군들의 죽음을 죽여야 하는 것이 다." 환호 속에 출정식은 끝이 났다. 다만 라이짐은 용병단 시절 늘 들어왔 던 죽지 말라는 인사를 나누지 않은 것이 조금 서운했을 뿐, 조금도 불만 이 없었다. 한 잠도 자지 못했으므로 졸릴 만도 했지만, 라이짐은 자신이 졸린지 어떤지 조차도 잘 알 수가 없었다. 이제 오랜 인내의 시간은 다 지나간 느낌이었다. 라이짐은 프라브리티의 성벽을 떠올려 보았다. 프라 브리티에 처음 입성하던 날, 그렇게 높고 견고하게만 여겨졌던 프라브리 티의 성벽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 성벽은 무너질 것이었다. 라이짐은 여 전히 벅찬 가슴을 하고서 숨을 헐떡였다. 이제 곧 행군이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 행군의 끝에 아케르 군단은 프라브리티에 입성하게 될 것이었 다. "라이짐.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네." 타호루가 라이짐에게 말했다. "자네가 지금 가장 원하는 것이 뭔가?" 타호루의 질문에 라이짐은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이렇게 대답하였다. "승리입니다. 귀족을 꺾고 스파일로부터 우리의 시작을 알리는 것입니 다." 라이짐의 목소리는 들떠있었다. 타호루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아. 승리는 우리의 것이 될 것이야." 병력이 행군할 준비를 하는 동안 라이짐도 행군을 준비해야 했다. "예. 승리는 우리의 것이 될 것입니다." 라이짐은 이렇게 기쁜 낯을 하고서 말하고는 자신의 천막으로 뛰어갔 다. 타호루는 뛰어가는 라이짐을 바라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타호 루의 미소는 그저 호의에서 나온 미소만은 아니었다. 프라브리티로 향하는 동안 두 번의 교전이 있었다. 하지만 저항은 미미 한 것이었고, 그나마의 저항도 뜨거운 열쇠 몇 방으로 완전히 괴멸되었 다. 실전으로 다져진 뜨거운 열쇠 부대는 스파일의 수비군을 완전히 전투 불능 상태로 만들어 버렸다. 임프 시 같은 경우, 아케르 군단이 돌아가는 것을 보고도 연락을 한다거나, 혹은 막아 설 생각조차 하질 않았다. 돌아 가는 동안, 땅에 떨어졌던 아케르 군단의 사기는 하늘 높이 치솟았고, 그 사기는 프라브리티의 견고한 성벽 앞에서 절정에 다다랐다. "장군님. 영주가 보낸 사자입니다." 타호루가 아케르에게 보고했다. 사자는 영주의 친서를 가지고 아케르 군단의 진영에 들어왔다. 아마도 화친이나 대화를 요구하는 친서였을 것 이었다. 하지만 그 친서의 내용을 확인할 길은 없었다. 아케르는 짧게, 하지만 분명하게 이렇게 지시했던 것이다. "목을 베어 창끝에 꽂아 내 걸어라." 그리고 그 날 밤, 총 공격이 있었다. 뜨거운 열쇠는 프라브리티의 견고 한 성벽으로 날아갔고, 하늘을 가르며 날아간 뜨거운 열쇠는 견고하게 닫 혀있던 프라브리티의 문을 완전히 열어버렸다. 견고하게만 보였던, 어쩌면 결코 무너지지 않을 줄로만 알았던 프라브 리티의 성벽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성벽 위에서 석궁이 몇 발 날아오 는 것 같기는 했다. 하지만 저항은 극히 미미한 수준이었다. "저항이 너무 없는 거 아니야?" 라이짐이 성벽을 바라보면서 하진에게 말했다. 하진은 라이짐의 말에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수도 군단은 지난 번 가고일에게 후 덕분에 전투력이 약화된 상태잖 아. 당연한 거지, 그야." "군인들은 어떻게 될까?" 라이짐이 중얼거렸다. 야전에 마련된 지휘소에서 바라보는 프라브리티 는 어둠속에 갇혀 있는 듯 보이고 있었다. "그야 모두 포로로 잡겠지. 하나도 죽이지 않을 거야. 귀족의 지지는 필요하지 않아도 군인의 지지는 필요한 시점이니까 말이야." 하진이 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부분의 병력들은 항복했고, 항복하지 않은 수도 방 위군은 전투불능 상태에 빠져 버렸다. 라이짐은 포로로 잡힌 병력들을 살 펴 볼 기회가 있었다. 하나같이 솜털도 채 마르지 않은 어린 신병들이었 다. 그들은 하나같이 공포에 떨고 있었다. 하진의 말 그대로 그들은 죽지 않을 것이었다. 귀족의 자제만 아니라면 말이다. 뜨거운 열쇠를 주력무기로 도입하는 것에 반대했던 장군들 중 몇은 그 날 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새로운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 렇게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져갔던 것이다. "그럼 이제 우리 임무를 수행해 볼까?" 하진이 말했다. 라이짐은 고개를 끄덕였다. 라이짐이 아케르의 지휘부 천막으로 걸음을 옮겼을 때, 에이스는 안대 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에이스의 손에는 무척이나 가볍고 가느다란 머 리카락이 하나 들려 있었다. 머리카락은 환한 빛을 내는가 싶더니 한 순 간에 불타버렸다. 밤의 한 가운데를 타고 아케르 군단은 불타고 있는 성벽을 뚫고 프라브 리티로 입성했다. 분열행진을 하는 아케르 군단의 군화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일사불란한 군화소리는 라이짐의 심장을 뛰게 만들고 있었다. 아 마도 저 소리를 듣는 시민들은 아케르 군단에 대한 끝도 없는 위압감과 공포심으로 밤이 새도록 내내 잠들지 못하리라. 태양을 쫓던 아케르는 이 이제 스파일의 태양이 되었다. 살아 있는 것은 모두 불태워버릴 기세로 맹렬히 타오르는 태양이 스파일의 하늘에 떠올랐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21979/22303 ━━━━━━━━━━━━━━━━━━━━━━━━━━━━━━━━━━━━━━━━ 제 목:[탐그루] 박물관장 제마 308 관련자료:없음 26/26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6-12 20:02 조회:1138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 박물관장 제마 우리 일행이 타실의 수도 니브리티에 닿은 것은 여름의 시작 무렵이었 다. 이제 막 더위가 시작되려는지 한낮의 태양은 하루가 다르게 열기를 뿜어대고 있었다. 한낮의 태양아래 바라본 타실의 풍경은 우선 대단히 정 돈된 느낌을 주었다. 거리를 걷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비슷한 회색 계열의 수수한 복장을 하고 있었고, 걸음걸이도 매우 차분해 보였다. 분 주하게 호객행위를 하고, 장사치들이 돌아다니는 탐그루에 비한다면 타실 의 모습은 귀족의 거대한 저택을 보는 느낌이었다. "생각보다 많이 변하지 않았군, 타실은. 지도 제작 때문에 이곳에 왔을 때만 해도, 이렇지 않았는데 말일세." 오브라디 교수가 마차에 나 있는 작은 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면서 말했 다. "교수님. 어쨌건 잘된 거 아닙니까? 여기까지 오게 된 거 말입니다. 여 기서 이제 훈장도 받는다고 하고, 또 영웅 대접도 받는다고 하니, 저는 사나이로서 자랑스럽습니다." 태연스럽게도 사빈은 이렇게 말했다. 강제로 끌려왔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사빈. 억지로 훈장 받는 게 그렇게도 마음에 들어?" "수르카. 평생을 살면서 국왕을 만나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 것 같아? 우리는 그 기회를 맞은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라구." 사빈은 이빨을 드러내고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국왕 만나서 좋겠네. 잘 보여봐. 혹시 알아 기사단에 넣어 줄지." "수르카. 좀 긍정적으로 생각해봐. 내가 가지 않으려고 마음만 먹었다 면 우리 일행은 충분히 가지 않을 수 있었어. 내 솜씨를 몰라서 그러는 건 아니지? 하지만 난 그러지 않았어. 왜냐하면 바로 명예와 관련된 일이 기 때문에 그런 거라고. 내가 명예와 의리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여 기서 다시 한 번 말해 줄까?" 하여간 저 허풍하고는. 나는 마음 같아서는 사빈의 엉덩이라도 한 번 걷어차 주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꾹 참았다. 사빈의 말이 허풍인 건 틀림없었지만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비록 강제로 끌려 온 것이었지만 우리는 니브리티에 도착하자 마자 귀빈 대접 을 받았다. 마차에서 내린 곳은 니브리티의 영빈관이었는데, 마차에서 내 리자마자 우리를 맞은 것은 바닥에 길게 깔린 붉은 양탄자였다. 나는 양 탄자를 보는 순간 신발을 벗어야 할지 잠시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사빈 이 먼저 당당하게 양탄자를 밟았고, 나는 조용히 그 뒤를 따를 수밖에 없 었다. "영변관에 계시는 동안 모실 집사입니다. 모티사라고 불러 주십시오."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노인이 우리에게 고개를 숙이면서 말했다. "오브라디 교수님. 훈장 수여식은 내일 오후에 있을 겁니다." 카이사 장군이었다. 비록 우리를 강제로 끌고 오긴 했지만 미워할 수가 없었다. 하얀 얼굴의 미남자가 저렇게 격의 없이 웃으면서 말하는 데 어 떻게 화를 낼 수 있을까. "국왕 폐하의 일정에 맞추어야 해서 오늘 당장 자리를 마련하지는 못했 습니다. 그럼 그 때까지 이 주변을 돌아보면서 시간을 보내십시오. 하지 만 이 주변뿐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말은 조금 기분 상하긴 했지만 말이다. 나는 카이사 장 군에게 라짐을 만나 볼 수 있겠느냐고 물어보려고 했다. 하지만 쓸데없는 오해를 살까봐 그만 두었다. 아무리 영웅이고 훈장이고 다 해봐야 이곳에 갇힌 신세라는 데에는 변함이 없으니까. 영빈관에서 우선 눈에 들어오는 것은 잘 가꾸어진 정원이었다. 정원사 가 몇이나 있는지 몰라도 나무들은 하나같이 잘 다듬어져 있었다. 바닥에 깔려 있는 잔디도 매일 깎아 주는 지 일정한 양만큼 똑바로 자라나 있었 다. 담장은 화려한 파도 문양으로 조각되어 있어서 무척 아름답게 보였지 만, 내 허리에 올 정도 밖에는 되지 않아서 무척이나 낮게 느껴졌다 (따 라서 담장으로서의 실용성은 별로 없을 듯 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담을 넘을 수는 없었다. 우리의 바로 뒤에는 칼로 무장한 병사 다섯이 지키고 있었고, 아마 저 담 너머에도 여러 명의 병사들이 혹시라도 국왕의 일정 을 어긋나게 하려는 우리의 기도를 미연에 방지하고 있을 게 분명했기 때 문이었다. "참 아름다운 곳이군요. 모티사. 이곳은 얼마나 된 곳인가요?" 마로우가 모티사에게 물었다. 아마 학자적인 호기심에서 나온 물음인 모양이었다. 마로우는 팔짱을 끼고 있었는데, 스칼렛이 묶어 놓은 붕대가 여전히 팔에 그대로 감겨 있는 모습이었다. 팔을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 이제 거의 다 나은 모양이었다. 마법의 힘이란. "백 년도 넘은 곳입니다. 참고로 여러분이 묶게 되실 곳은 과거에 대마 법사 아킨과 카를로스 카를로스 장군이 묵었던 방입니다." 나는 모티사의 말이 허풍처럼 느껴지질 않았다. 영빈관은 단층 건물이 었는데, 멀리서 보기에도 대단히 오래된 것처럼 보이는 돌로 만들어진 건 물이었기 때문이었다. 역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을 뿐 아니라, 그 앞에 는 조각상이 수도 없이 늘어서 있었다. "저 조각들, 혹시 이곳을 찾은 영웅들의 조각상 아닙니까?" "예. 그렇습니다. 여러분의 조각상도 이곳에 전시될 예정입니다. 오브 라디 교수님, 검사 사빈 님, 검사 마로우 님, 그리고 마법사 수르카 님." 모티사가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주름진 얼굴은 친숙하게 느껴졌지만 내 조각상이 저기에 서게 된다니 영 찜찜한 기분이었다. 거기다가 마법사 라니. 이건 꼭 자이벌들이 하는 짓거리하고 다를 바가 없잖아. "잠깐만. 나, 저 조각상좀 둘러 봐야 겠어." 마로우가 이렇게 말하고는 조각상이 있는 곳으로 뛰어 갔다. 우리 일행 은 천천히 그 뒤를 따랐다. "저 분은 검사 님이신 줄 알았는데, 혹시 예술가이신 모양이지요?" 모티사가 나에게 물었다. "아뇨. 그냥 학문적인 호기심이 동해서 그러는 모양이에요." 나는 모티사에게 이렇게 답변해 주었다. 조각상들은 진짜 사람과 거의 다를 바 없이 정교하게 조각돼 있었다. 마로우는 조각상을 하나하나 살펴보고 있었고, 오브라디 교수도 그 뒤를 이어서 조각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수르카 군. 이게 누구의 조각상인지 아는가?" "글쎄요. 제가 보기엔 바바 족을 막은 스트리트 장군의 조각상인 것 같 은데요?" "아니, 자네 어떻게 알았는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면서 오브라디 교수가 나에게 물었다. 나는 오브라 디 교수에게 거드름을 피우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 조각상의 체격을 보면 무관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지요. 그리고 칼 을 오른 쪽에 차고 있는 걸로 봐서 왼손잡이라는 것도 알 수 있구요. 거 기다가 당장이라도 뛰어나갈 듯이 한 쪽 발을 앞으로 내 딛고 있으니 다 혈질적인 성격이라는 것도 짐작했지요." 내가 말하자 오브라디 교수는 놀랍다는 듯한 얼굴로 계속해서 물었다. "과연 그렇군. 하지만 이름은 어떻게 알았는가?" 아직도 눈치를 못 챘단 말인가? 나는 웃으면서 오브라디 교수에게 이렇 게 말했다. "결정적인 단서는 여기 있었어요. 여기 이름하고 자세한 약력이 써 있 잖아요?" 나는 손가락으로 조각상 밑을 가리켰다. 내 말에 오브라디 교수는 민망 한지 시선을 다른 조각상으로 옮기면서 화제를 바꾸었다. "이건 마법사 미리내로군. 아름다운 여인이었지. 하지만 거미같이 가느 다란 팔다리로 역사의 뒤에서 숱한 장군들을 유혹했던 악녀라는 평도 있 지만. 가만있자. 이건 누군가. 마물 사냥꾼 베베 아닌가. 수없이 많은 마 물들을 잡아 죽여 엄청난 부자가 됐다고 하지. 그런데 결국 리치한테 물 려서 비참하게 마물이 돼서 죽었다고 하더니 이렇게 근사한 모습으로 여 기 있었군. 이 분은 죽은지 그리 오래 된 분은 아닌데. 국왕 기사단의 일 급 참모였던 준한이로군. 천민 출신으로 고위 관직까지 올랐지만, 뇌물 사건으로 관직에서 결국 물러났다고 하던데. 그런데 왜 꼭 뇌물로는 사스 카치의 털옷이 쓰이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그게 그렇게 좋은가." 아무리 말을 돌리려고 한 소리라지만 어떻게 저렇게 험담을 할 수 있는 지. 내가 들었던 미리내는 아름다운 여성으로 숱한 검사들의 사랑을 받으 며 자신의 마법사 인생을 살아간 위대한 마법사로 알고 있었고, 마물 사 냥꾼 베베는 시골 작은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마물들에게 당할 위기에 처 해있는 사람들을 도왔던 훌륭한 사람으로 알고 있는데. 물론 한 인물의 일생을 보는 기준이야 사람마다 다르기야 하겠지만. "오브라디 교수 님. 제가 알기로 국왕 기사단의 준한 참모는 억울한 누 명을 썼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명예의 복권을 위해서 이곳에 조각까지 마련된 게 아닐까요?" 마로우가 오브라디 교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브라디 교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보기에는 어차피 대충 생각나는 데로 한 말 이니 별로 언급할 가치가 없다는 식이었다. 마로우와 오브라디 교수가 조각상을 둘러보는 동안, 나는 조각상을 보 기보다는 사람들을 살피는 게 더 재미있었다.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조각 상을 살피는 마로우와 오브라디 교수의 표정이나, 뭔가 생각에 잠긴 듯 눈을 찡그리고 조각을 보고 있는 사빈이나, 보기만해도 즐거운 사람들이 었다. 사실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조각을 보는 일이 뭐가 그 렇게 중요한 건지 말이다. 조각이라는 건 어차피 사람의 겉모습을 본 뜬 것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닐까. 거기에는 마음이 담겨있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흠. 그럼 이제 모험을 마친 영웅답게 좀 쉬어볼까? 이보슈. 당신들도 좀 쉬어요. 우리 야 나가봤자 어디 갈 데도 없으니까." 조각 구경을 마쳤는지, 사빈이 우리 뒤에 서 있는 병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락부락한 얼굴을 한 병사들은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서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사빈의 말을 알아들은 것 같기는 했다. "그래요. 어차피 이곳까지 오게 된 거, 여기서 좀 쉬는 것도 나쁘지 않 겠죠." 마로우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자 오브라디 교수가 바로 마로우의 말 에 뒤이어서 이렇게 덧붙였다. "마로우 말이 옳아. 기왕 이렇게 된 거, 좀 즐기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 지. 이럴 기회가 어디 흔하겠는가? 이렇게 훌륭한 조각상도 감상하고 말 일세." 마칸의 강림을 막는 일이 얼마나 시급한 일인데 저렇게 태연한 소릴하 다니. "그렇습니다, 오브라디 교수님. 정말 이곳은 탐구욕을 불러일으키는군 요." 마로우가 말했다. 그러자 오브라디 교수는 고개를 끄덕인 다음 모티사 에게 이렇게 물었다. "모티사. 혹시 이곳에서 타실의 명물인 회를 먹어 볼 수 있나요? 그것 도 연겨자 소스를 곁들인 걸로." "물론입니다." 믿고 있던 오브라디 교수마저 저렇게 태연하다니. 나는 한숨을 내쉬었 다. 돌로 만들어진 영빈관 내부는 그 자체가 하나의 조각이고, 또한 장식품 이었다. 돌로 조각 된 의자는 바닥에 붙어 있는 것처럼 보였고, 탁자와 벽난로도 건물에서 솟아 나온 듯 보였다. 마치 하나의 거대한 바위를 깎 아 만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거, 정말 놀랍군. 대단한 솜씨야." 오브라디 교수는 턱을 쓰다듬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마도 오브라디 교수 역시 놀라고 있는 것 같았다. "예. 정말 아름다운 조각이군요. 이 창을 좀 보세요." 사빈이 벽을 깎아 만든 창 모양의 조각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창은 뾰 족하고 긴 끝을 가지고 있었는데, 손잡이 쪽에 거대한 깃발이 달려 있어 서 마치 깃대처럼 보였다. "아름다운 조각이라는 말이 아닐세, 사빈. 내 말은 이 건물의 전체적인 구조에 대한 말일세. 누가 보더라도 이곳은 거대한 바위를 깎아서 만든 곳 같이 보이지 않는가? 아마도 이 건물을 만든 사람은 뛰어난 마법사였 을 것이 틀림없다네. 아마 이렇게 거대한 바위를 찾는 일 또한 그리 쉽지 만은 않았을 테지만 그보다는 역시 바위 안을 파고 깎은 노력이 훨씬 어 려웠겠지." "역시 그렇군요." 나는 감탄하면서 말했다. 아마 이렇게 바위 하나를 통째로 깎아 만든 건물이니 아킨과 카를로스가 이곳에 오기 훨씬 전부터, 그러니까 천년을 버틸 수 있지 않았을까 싶었다. "아마 이곳에 있는 조각들은 세월이 흐르면서 하나 둘 깎아서 덧붙인 모양이야. 이걸 좀 보게. 이건 초기 비스토브레 왕국의 조각형태일세. 하 지만 이 옆에 있는 천사상은 요즘 것이고, 또 이 뒤에 있는 여인의 얼굴 은 백 년 전 유행하던 인물화의 형식을...." "이 깃발에 그려진 그림은 뭐죠?" 사빈은 오브라디 교수의 말에는 조금도 귀기울이지 않고 이렇게 물었. 오브라디 교수는 창에 달려 있는 깃발을 바라보았다. "이건 카를로스 장군이 즐겨 사용했다는 용의 문양인데." "예, 그렇습니다. 아마도 카를로스 장군과 동시대에 조각된 것 같은데 요?" 마로우가 붕대를 감은 쪽 손으로 창을 더듬으면서 말했다. "오브라디 교수님. 여기에는 지팡이 그림이 그려져 있어요." 나는 창이 조각되어있는 벽면의 맞은 편 벽면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벽 면에는 나무 지팡이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었다. 지팡이는 벽 한 면을 다 채울만한 크기로 조각이 되어 있었고, 끝이 구부러져 있고 두꺼워서 꼭 원을 끊어 풀어놓은 것 같은 모양으로 되어 있었다. 지팡이 치고는 무척 굵어 보였다. "그렇군. 그렇다면 이건 아킨과 카를로스가 방문한 기념으로 만들어진 게 아닌가 싶은데..." 오브라디 교수가 지팡이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맞습니다, 오브라디 교수님." 나는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았다. 이렇게 말한 사람은 모티사 였다. 모티사 옆에는 한 사내가 서 있었다. 키가 크고 깡마른, 어딘지 병 약해 보이는 인상을 주는 흰 얼굴을 한 사내였다. "그 조각은 대마법사 아킨과 카를로스 장군이 이곳에 방문한 기념으로 조각된 것입니다. 꽤나 유서 깊은 조각이지요." "저분은 누구신가?" 오브라디 교수가 깡마른 사내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소개가 늦었군요. 저는 쥬리라고 합니다." "이곳에서 활동하시는 마법사시지요." 쥬리라고 자신을 밝힌 사내가 고개를 숙여 우리에게 인사하자 모티사가 쥬리의 신분을 우리에게 확인시켜 주었다. "쥬리 님은 이곳에 묶는 손님들의 조각을 담당하는 예술 마법사이십니 다." 정원에 서 있던 조각상을 조각하는 사람이라는 말인 모양이었다. 조각 같은 거 맘에 안드는 데. 나는 쥬리가 나를 보고 있는 모습이 별로 마음 에 들지 않았다. "쥬리 님은 마법으로 여러분의 모습을 기록할 것입니다. 그리고 내일 훈장 수여식이 있은 후, 바로 조각상을 이곳에 비치하시겠지요. 훈장 수 여식 다음에는 며칠 이곳에 묵으시다가 자유롭게 떠나시면 됩니다." "며칠 묵어야 한다는 건 무슨 말인가요, 모티사?" 내가 모티사에게 물었다. 모티사는 친절하게도 우리가 이곳에 머물러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이곳에서 만나셔야 할 분들이 몇 분계십니다, 마법사 수르카 님." "그 말은 우리가 사람을 만나고 여기서 며칠 영웅 노릇을 해야 한다는 소리가 맞습니까, 모티사?" 오브라디 교수가 화를 꾹 참는 듯한 말투로 모티사에게 말했다. "거칠게 표현한다면 그렇습니다만, 그저 훈장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오브라디 교수님." 모티사는 조금도 흐트러짐 없는 얼굴을 하고서 이렇게 대답했다. "카이사 장군 짓이 분명하네, 수르카 군." 오브라디 교수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훌륭한 곳에서 며칠 보낼 수 있다는 걸로 충분히 만족할 수 있겠다 싶었다. 게다 가 그렇게 이야기 한 사람은 다름아닌 오브라디 교수 본인이었던 것이다. "정말 아름답군요, 모티사. 가져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예요." 사빈은 여전히 창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서 말했다. 나는 사빈의 얼굴에 어린아이들이나 가질 법한 순수한 욕망이 가득 차 있었다. "가져가려면 힘깨나 들겠는걸?" 나는 이렇게 사빈을 놀려주었다. 벽에서 저 창을 떼어내려고 낑낑거리 는 사빈의 모습을 상상해보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사빈 님. 그 창은 진품으로도 있습니다. 이곳 영빈관 박물관에 있지 요." 모티사가 말했다. 나는 진품이 있다는 말에 조금 놀라지 않을 수 없었 다. 천년전의 창이 아직도 남아 있을 수가 있단 말일까? "참. 그러고 보니 니브리티의 비스토브레 왕국 박물관이 있다는 걸 잊 었군. 내가 알기로 그곳의 박물관장이..." "예. 이곳 타실의 대마법사 제마 님이십니다." 쥬리가 말했다. 쥬리는 이렇게 말하면서 사빈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아 마도 마법으로 모습을 담아두고 있는 모양이었다. 쥬리의 눈빛이 예사롭 지 않은 빛을 발하고 있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21980/22303 ━━━━━━━━━━━━━━━━━━━━━━━━━━━━━━━━━━━━━━━━ 제 목:[탐그루] 박물관장 제마 309 관련자료:없음 22/22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6-12 20:03 조회:1025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그래. 제마. 젊었을 적에 몇 번 만난 적이 있지. 그때는 훌륭한 사람 이었는데..." 오브라디 교수는 이렇게 말하면서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진품이 있다고요, 모티사? 그럼 지금 볼 수 있나요?" 사빈이 모티사에게 물었다. 그러자 모티사는 빙긋 미소를 지으면서 이 렇게 대답했다. "내일 제마님을 뵙게 되어 있으니 그 때 박물관을 찾아가시면 됩니다." "지금 볼 수는 없나요?" 사빈은 어리광을 피우는 꼬마 같은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 "즐거움은 아껴 두시는 편이 낫지요. 그리고 아무리 가져가고 싶어도 진짜로 가져가시면 안됩니다." 모티사는 이렇게 농담을 던졌고, 사빈은 웃음을 터트렸다. "내일이 기대되는군요, 오브라디 교수님. 이곳 박물관에는 각종 진기한 물품들이 많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마로우가 말했다. 오브라디 교수는 마로우의 말에 이렇게 대답했다. "진기한 물품도 좋지. 하지만 진짜로 중요한 건 말일세, 그것을 바라보 는 사람의 마음이라네." 알 듯 모를 듯한 말이었다. 오브라디 교수가 저렇게 말하는 걸 보면 분 명히 뭔가 의도가 있는 것 같기는 한데. 나는 도무지 무슨 생각으로 저런 말을 하고 있는 지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저는 다 끝났습니다." 쥬리가 말했다. 마법으로 모습을 담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닌 모 양이었다. 네 사람의 모습을 이렇게 바라보는 것만으로 금방 끝낸걸 보면 말이다. 과연 어떻게 조각을 할까? 예술 마법사라고 했으니까 마법으로 할 게 틀림없었지만. 과연 어떤 마법을 쓸지 나는 궁금했다. "그럼 푹 쉬십시오. 저희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모티사는 이렇게 말하고는 쥬리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나가면서 쥬리 는 나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일 뵙지요." 아마 조각을 하러 내일 오겠다는 말인 것 같았지만, 나는 쥬리의 눈빛 에서 섬뜩함을 느꼈다. 혼자만의 착각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쥬리는 꼭 나 를 잡아먹을 듯한 눈을 하고서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저 사람 왜저래?" 나는 쥬리가 나가지 이렇게 내뱉었다. "글쎄. 네가 못마땅한 모양이지." "마로우 군. 내가 보기엔 못 마땅하다기 보다는 조각하기 싫다는 눈빛 처럼 보였네만." "오브라디 교수님. 마법사가 마법사를 조각하는 게 자존심 상한 건 아 닐까요?" 사빈은 능청맞게 웃으면서 나에게 말했다. 나는 대답대신 사빈에게 이 렇게 쏘아주었다. "벽에 붙어 있는 저 창이나 떼시지 그래?" 내 말에 사빈은 진지한 표정으로 한 번 고려해 봐야겠다고 대답했다. 덕분에 오브라디 교수는 사빈이 창을 떼어내지 못하도록 끌과 망치를 다 치워놓으라고 나에게 말했다. 오브라디 교수는 사빈의 태도로 봐서 사빈 의 말이 농담이 아니라 진담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라짐이 영빈관을 찾은 것은 저녁식사가 끝난 뒤였다. 저녁은 오브라디 교수가 부탁한 그대로 회라는 음식과 연겨자 소스가 나왔다. "이건 생선회라는 음식이지. 산채로 생선의 살을 떠내어 이렇게 먹는 거라네." 오브라디 교수는 회를 소스에 찍어서 입에 넣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저도 들어 본 적은 있어요." 나는 입술을 비죽 내밀고 오브라디 교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회가 도무지 입맛에 맞질 않아서 먹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산 생선을 먹다니, 이게 무슨 짓이람. "수르카. 너 이거 못먹는구나?" 사빈이 희죽거리면서 나한테 말했다. 물론 나는 못먹는다는 말은 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아냐. 그냥 난 소금에 절인 게 더 좋아서 그럴 뿐이야." "그 말이 그 말이지. 하긴, 탐그루 출신이라 네가 본 물고기라는 게 다 소금에 절인 것 뿐일테니까. 하하하." 마로우까지 나를 놀리면서 이렇게 말했고, 덕분에 저녁식사는 완전히 기분 상하는 시간이 되고 말았다. 나는 그나마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섞여 나온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는 수 밖에는 없었다. "너, 그게 뭔지 알고 먹는 거야?" "이것도 모를까봐. 이건 그냥 삶은 고기잖아." 마로우는 나를 계속 놀리려고 작정한 모양이었다. "그건 물고기 혓바닥 요리라고." "그래. 네가 먹고 있는 건 물고기 창자다." 하여간 저녁 식사는 무사히 끝마칠 수 있었고, 제아무리 영빈관에 나오 는 최고급 요리라고 해도 결국 입에 맞지 않으면 아무짝에도 쓸 수 없다 는 교훈을 얻은 채로 저녁 식사는 끝이 났다. 라짐이 우리를 찾은 것은 후식으로 나오는 과자와 차를 들고 있을 때였 다. 라짐은 흰 드레스 차림이 아니라, 가죽옷과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아마 이게 평상복인 모양이었다. "카이사 장군 부인 아니십니까? 어서 들어오시지요." 모티사가 라짐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면서 말했다. 라짐은 도도한 얼굴 로 모티사에게 가볍게 목례를 올렸다. "이거 뜻밖의 손님이군요. 하긴, 카이사 부인 같은 미인이라면 언제든 환영입니다만." 오브라디 교수는 여전히 여자에게 친절했다. 저런 모습 절반 만큼이라 도 우리 일행한테 잘 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수르카를 좀 보려고 왔습니다." 라짐이 말했다. 그런데 나를? 나는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고, 사빈과 마로우는 환성을 올렸다. "여어. 인기 많은 데, 수르카. 고향 친구가 좋긴 좋구만." "이봐, 수르카. 조심하라구. 카이사 장군 칼에 맞지나 말고." 나는 대꾸도 하지 않고 라짐과 함께 영빈관의 정원으로 나갔다. 밤하늘에는 별들이 박혀 있었고, 정원에는 연금술사의 등에 비추인 조 각상들과 나뭇잎이 빛을 내고 있었다. 한적한 밤이었다. 차가운 밤 공기 가 조금 쌀쌀하게 느껴지기는 했지만, 라짐과 단 둘이 있는 기분은 정말 이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고 말했으면 좋겠지만, 실은 다섯 명의 수 행원이 멀리서 나와 라짐을 지켜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라짐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있을 수 밖에 없었다. 함께 팔짱이라도 끼고 걸으면 좋으련만. 나는 혼자서 아쉬운 마음에 혀를 끌끌 찼다. "할 말이 있어서 왔어, 수르카." 그래. 그건 나도 알고 있다구, 라짐. 여전히 나를 오빠라고 부르지는 않는군. 그런데 라짐은 나에게 반말을 하고 있었다. 물론 어색하게 경어 를 쓰는 것 보다 편하기는 했지만 별로 썩 기분 좋은 대화는 아니었다. 다섯 명의 사내가 보고 있지만 않았어도 좀 달랐을 텐데. "무슨 할 말?" 그래서 나는 라짐에게 일부러 가볍게 보이는 동작을 섞어 가면서 반말 을 던졌다. 멀리서 보고 있는 사내들이 보고 쓸데없는 오해를 하게 만들 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쥬리, 만나 봤지?" "응." "우리 사람이야, 그 사람." 라짐은 목소리를 죽여가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우리 사람이라니? 나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우리 사람이라는 게 무슨 말이야?" "그 사람, 원래 성황청에 있었던 사람이야. 이곳으로 온지 얼마 안 돼. 더 이상 거기 있다가는 신분이 노출될 위험이 있었거든. 이해하겠지, 내 말?" "글쎄."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신분이 노출된다니, 그게 무 슨 소리일까? 나는 찬찬히 생각을 해 보았다. 혹시 쥬리는 성황청에서 성 구를 쓰는 것을 반대했던 성직자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마법사인 거고 말 이다. 그래서 그냥 마법사라는 신분이 노출될까봐 이곳으로 도망쳤다는 말일까? "그래. 이해 못해도 좋아.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하여간 쥬리는 여 기서 좋은 직장도 얻은 셈이고, 또 그 편이 우리를 위해서 안전하니까." "너, 혹시 바람 피냐?" 나는 라짐에게 이렇게 물었다. 라짐은 내 말에 놀라는 얼굴이 되었다. "어떻게 알았어, 바람이라는 거?" 내가 제대로 짚은 모양이었다. 그렇게 병약해 보이는 사람과 바람이라 니. 나는 라짐의 취향이 참 이상하구나 싶었지만 어차피 사생활이니까 나 는 더 이상 건드리지 않기로 했다. "그냥 넘겨짚었지, 뭐." "탐그루 최강 미성년 검사다운 걸. 난 수르카가 능력있는 사람일거라고 생각했어." 라짐은 이렇게 말하면서 허공을 바라보았다. 밤하늘에는 소망의 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수르카. 만약 너라면 지금 무슨 소원을 빌 거야?" "내 등뒤에 있는 저 다섯 명이 사라지는 소원." 내 말에 라짐은 쿡, 하고 웃음을 지었다. "그래. 우리 일이 원래 좀 낙천적인 사람을 필요로 하지." 이렇게 말하는 라짐의 얼굴에는 씁쓸함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하긴, 남편을 두고 그렇게 병약해 보이는 사람을 만나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싶었다. 그런데 도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건지 궁금했다. "라짐. 너 혹시 쥬리한테 무슨 약점이라도 잡힌 건 아니지?" "우리 하는 일이 그렇지만 일단 우리끼리는 절대적으로 믿지 않으면 안 돼. 이번에 일으키려고 하는 바람도 마찬가지고." 라짐은 밤하늘을 응시하면서 조용히 이렇게 말했다. 나는 카이사 장군 같이 듬직한 남편을 놔두고 다른 남자를 만나는 라짐의 마음을 이해할 수 는 없었지만, 그래도 소원을 한 번 빌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칸의 강림이야." 나는 이렇게 나즈막하게 말했다. 돌아보면 용을 찾아 여기까지 흘러온 여정이었다. 과연 우리는 용의 비밀을 완전히 풀 수 있을 것인가? 마칸의 강림을 과연 막아낼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의문이 일었다. 도무지 무엇인 지 실체를 알 수 없는 마칸의 강림을 막아보겠다는 일 자체가 뜬구름을 잡는 것처럼 막연하게만 여겨진 까닭이었다. "마칸의 강림에 대해서도 알고 있구나." 라짐이 말했다. 라짐의 목소리는 쓸쓸하게 들렸다. "그래. 오브라디 교수님과 여기까지 오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마칸의 강림을 막으려고 하는 거니까. 사비오 영감 기억하지? 사비오 영감이 그 랬어. 운명을 따르라고. 그 운명의 끝에 뭐가 있는지는 잘 모르지만, 나 는 운명을 따라서 여기까지 온 거야. 솔직히 우리가 마칸의 강림을 막을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 만약 저 소원의 별이 소원을 들어준다면, 마칸의 강림을 막을 수 있도록 소원을 빌어볼텐데." 나는 라짐에게 이렇게 말하면서 별들을 향해 손을 뻗어 보았다. 잡힐리 없는 별빛이 내 손등에서 부서져 사라졌다. "그랬구나..." 라짐은 잠시 생각에 빠진 듯 했다. 라짐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나는 실 수한 게 아닌가 싶었다. 오래간만에 만나서 이렇게 암울한 이야기나 하는 게 아니었는데. 나는 웃으면서 라짐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니, 꼭 그렇지만은 않아. 기왕 비는 김에 너 하는 일도 잘 되길 빌 어줄게." 나는 농담조로 이렇게 말했지만 라짐은 정색을 하고서 이렇게 대꾸했 다. "수르카. 내가 그런 얘기 들으려고 여기까지 온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 겠지." 나는 일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너, 설마, 나보고, 바람을...?" "그래. 도와달라고 말하려고 왔어." 도움도 좋고 다른 것도 다 좋지만 이건 좀 심하다 싶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나를, 오빠의 친구를? "라짐. 도대체 뭘 원하는 거야, 나한테." "수르카. 우리 일이 위험하고 어려운 일이라는 건 알아. 하지만 위험하 고 어려운 순간이 닥친다고 해서 포기 할 수는 없는 일이야." 나는 라짐의 이 말을 듣는 순간 내가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지 않았나 싶어졌다. 라짐의 얼굴은 바람이나 피우는 여자의 얼굴이 아니었다. 라짐 의 신념으로 빛나는 눈은 라이짐의 그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게 느껴졌 다. 그렇다면 라짐은 뭔가 다른 일을 말하려는 것인가? "내일이야, 수르카." 하지만 그게 뭔지 이제 와서 물어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라짐의 얼굴 은 너무나도 진지하게 나에게 애원의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그래. 내가 뭘 하면 좋지? 구체적으로 말해 줘." 그냥 나는 솔직하게 이렇게 묻기로 했다. 내 판단은 옳은 것 같았다. 라짐은 고개를 끄덕였던 것이다. "내일 박물관에 가면 시선을 끌어주기만 하면 돼. 나머지는 나하고 쥬 리가 알아서 할테니까." 시선을 끄는 일이야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나는 어떤 일인 지는 몰라도 그렇게 위험한 일을 하는 데 내용도 몰라서는 안될 것 같다 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21981/22303 ━━━━━━━━━━━━━━━━━━━━━━━━━━━━━━━━━━━━━━━━ 제 목:[탐그루] 박물관장 제마 310 관련자료:없음 28/28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6-12 20:03 조회:1121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도대체 그 바람이라는 게 뭐야?" 나는 이렇게 물었다. 그러자 라짐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을 줄 알았어. 하지만 안돼, 수르카. 그렇게 쉽게 이야기 해 줄 수 있는 성질의 게 아니야. 알잖아. 우리 일. 만약 네가 잡히게 된다면, 혹 시 고문이라도 당하게 된다면, 모르고 있는 편이 나나 우리 전체를 위해 서 좋은 일이야." 라짐은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고문이라니? 나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 다. 뭔가 일이 꼬여도 단단히 꼬였구나 싶었다. "너, 네가 하는 일, 카이사 장군도 알아?" 내가 묻자 라짐은 어이없다는 듯한 헛웃음을 지었다. "수르카. 내가 바본줄 알아?" 그래. 바보는 나다.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달리 할 말이 없었던 것이 다. "너는 마칸의 강림을 막으려고 한다고 했지?" "그래. 마칸의 강림을 막는 게 우리 일이지." 나도 라짐처럼 '우리'라는 표현을 쓰면서 말했다. 그런데 내 말에 라짐 은 인상을 찌푸렸다. "지난번에 했던 얘기가 생각나네." 라짐은 인상을 찌푸린 채로 이렇게 이야기했다. "해야 할 일을 먼저 하는 사람은 해야 할 일을 위해서 어떤 희생도 치 를 준비가 되어 있다고 했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세상을 바꾸는 거야. 마칸의 강림을 막는다거나, 혹은 성황청과 타실 사이를 갈라놓는 일 같은 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야. 그저 수단일 뿐이지." 라짐은 이렇게 말하고는 한 참 동안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는 쑥스 러워져서 눈을 내리깔았다. "카를로스 장군의 격언을 생각해 봐, 수르카. 진정한 칼이 무엇인가를. 어쩌면 그게 칼의 마음인지도 모르니까." 라짐은 이렇게 말하고는 이야기를 끝냈다. 나는 뭐라고 라짐에게 더 이 야기를 해 보려다가 그만 두었다. 일단 내일 박물관에서 시선을 끄는 일 을 도와주고, 그 다음에 무슨 말이든 해야겠다 싶었다. 아마 내일이면 그 바람이라는 게 뭔지도 알게 되리라. 나는 전혀 엉뚱한 일에 휘말리고 있 는 게 아닌가 싶어서 불안해졌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라이짐의 동생인 라짐의 부탁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래. 나머지는 내일 이야기하자." "그래.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라짐은 이렇게 말하고는 영빈관을 떠났다. 불안한 상념이 머릿속을 헤 집어 놓고 있었다. 화려한 궁중 음악이 성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스파일에 있을 때 들었 던 군악과는 다른 종류의 음악이었다. 스파일의 음악이 타악기와 관악기 를 이용한 힘찬 음악이었다면, 타실의 음악은 현악기를 주로 사용하는 부 드러운 음악이었다. 나는 음악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주위를 살펴보았 다. 좌우로 대신들이 일렬로 도열해 있었고, 우리 일행은 그 중앙에 서서 왕좌를 마주하고 있었다. 국왕이 나올 때까지 이곳에서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만히 서 있으라고 모티사가 주의를 주었던 것이 떠올랐다. "장식 한 번 요란하구만. 타실 사람들의 미적 감각은 아무래도 보통사 람들과는 다른 것 같아. 저것 좀 봐. 천장에다가 저렇게 끈을 연결해서 화려한 빛깔의 깃발을 달 이유가 있나?" "일 하느라고 힘들었겠네요, 오브라디 교수님." 마로우가 조용조용히 말했다. 나는 웃음을 지었지만, 바로 그 순간 대 신들이 우리를 노려보았기 때문에 나는 얼른 웃음을 지웠다. 이런 상황에 서도 비평을 아끼지 않다니. 하여간 오브라디 교수는 알아줘야 한다니까. "저는 다릅니다. 이거, 피가 끓어오르는 군요. 음악과 화려한 장식. 거 기에다 훈장까지, 그것도 국왕으로부터 직접 받게 된다니, 이거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사빈." 나는 입술만 살짝 움직여서 사빈에게 주의를 주었다. 대신들이 여전히 노려보고 있는데 함부로 말을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사빈은 내 말에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수르카. 너는 이해해 주는구나. 나는 일생동안 명예를 찾아 떠돌았어. 이제 그 결실을 보게 되는 순간이야, 수르카. 어떻게 이보다 기쁠 수 있 을까?" 사빈의 말을 듣자, 나는 이보다 난처할 수는 없겠다 싶었다. 만약 그 때 국왕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우리 일행은 대신들의 무시무시한 눈총을 계속해서 받을 수밖에 없었으리라. "국왕 폐하께서 나오십니다." 우측 앞쪽, 국왕의 왕좌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서 있던 대신이 외쳤고, 우리는 모티사에게 배운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생각해 보면 우리 일행은 지금까지 한 나라를 대표하는 사람을 만나 본 적이 두 번 있다. 먼저 자폰의 국왕을 만나 본 적이 있었고, 극지의 아타 카파 공화국 대통령도 만나 본 적이 있었던 것이다. 물론 우리가 비스토 브레 사람이니까 비스토브레 왕국의 국왕을 만나는 일은 조금 의미가 다 를지 몰라도 어찌되었건 사람은 한 번 경험 한 일에 대해서는 익숙해지기 마련인 것이다. 아마도 국왕을 만나는 일에 이렇게 긴장이 되질 않는 것 도 그런 이유가 아닐까 싶었다. 국왕은 젊은 남자의 부축을 받아 겨우겨우 왕좌까지 오를 수 있었다. 나는 국왕을 바라보았다. 백발이 성성한 국왕의 얼굴에는 주름살과 검버 섯이 잔뜩 자리하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왕이라기 보다는 살아 움직이 는 송장같은 느낌이었다. 만약 빛나는 왕관과 화려한 복장이 아니었다면, 저 사람을 도저히 왕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었다. "훈장 수여식이 있겠습니다. 일행은 앞으로." 대신이 말했고,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국왕 앞으로 걸어갔다. 국왕의 눈은 촛점이 맞지 않고 있었다. 아마도 지금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 모르 고 있는 모양이었다. "누, 누구지?" 국왕이 옆에 서 있던 젊은 남자에게 말했다. 젊은 남자는 국왕의 귀에 대고 큰 소리로 말했다. "성황청의 위협으로부터 타실을 구원한 영웅입니다." "아, 영웅. 영웅이라고 했지. 그래, 그래." 국왕은 이렇게 말하면서 손짓으로 우리를 불렀다. 나는 난처한 기분이 들었다. 도대체 뭘 어째야 좋은 건지 제대로 판단이 서질 않았다. 모티사 의 말로는 그냥 국왕 앞에 서 있으면 국왕이 알아서 훈장을 달아주고, 치 하의 말을 몇 마디 하면 행사는 끝이 난다고 했지만 이런 식이라면 도저 히 어떻게 해볼 길이 없을 것 같았다. 국왕의 손짓에 일단 우리는 국왕에게 다가갔다. 노인 특유의 역한 냄새 가 풍겨왔다. "영웅. 위대한 영웅... 그래, 그래. 그리폰을 맨손으로 잡은 영웅이지? 카이사 장군이던가? 맞지? 그렇지?" 국왕은 우리를 불러놓고는 옆에 서 있는 젊은 남자에게 이렇게 중얼거 렸다. 하지만 젊은 남자는 이런 일을 자주 겪었던 듯 태연하게 이렇게 말 했다. "폐하. 이 자들은 성황청의 위협으로부터 타실을 구원한 영웅입니다. 훈장을 수여해 주시면 됩니다." "그래, 훈장이야, 훈장. 내가 젊었을 때 말이야, 깊은 산 속에서 활을 쏜 적이 있었지. 암. 화살이 날아가서 나무에 박혔는데 말이야, 아버지께 서 그러셨어. 날 보고 활을 잘 쏜다고 말이야." 오브라디 교수는 헛기침을 한 번 했고, 사빈은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 다. 마로우는 담담하게 있는 듯 보였는데, 아마도 다른 생각을 하면서 표 정을 관리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야 물론 시선을 엉뚱한 곳에다 두고 될 수 있으면 국왕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국왕께서 용맹을 치하하셨습니다." 젊은 남자는 이 일을 한지 오래 된 모양이었다. 엉뚱한 활 이야기를 우 리에게 이렇게 태연하게 끌어들이는 걸 보면 말이다. "폐하. 이제 훈장을 달아 주시면 됩니다." "이제 좀 쉬어야겠어. 너무 피곤해. 잠이 오는 것 같아. 점심으로 뭘 먹지?" "오늘은 야채와 우유입니다, 폐하." "난 야채가 싫어. 그것 맛도 없고, 그리고, 그리고 그건 고기도 아니잖 아." "폐하. 이 자들에게 훈장을 달아 주면 됩니다. 그러면 쉬실 수 있어 요." "나는 야채가 싫다니까." 만약 음악이 흐르고 있지 않았다면 이 순간이 얼마나 어색했을까. 젊은 남자는 마치 어린아이 다루듯이 국왕의 손에 훈장을 쥐어 주었고, 그리고 국왕의 팔목을 잡고 이끌어 우리의 가슴에 훈장을 달아주었다. 국왕은 훈 장을 달아 주는 내내 젊은 남자의 얼굴을 애원하는 듯한 얼굴을 하고 바 라보고 있었다. "고기 먹을 수 있지?" 훈장을 다 달아 준 다음에 국왕이 젊은 남자에게 한 말이었다. 젊은 남 자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폐하의 은총이 늘 가득하시길 빕니다." 음악은 조금 빨라지는가 싶더니 국왕이 젊은 남자의 부축을 받아 나감 과 동시에 끝이 났다. 나는 문득 차이린이 떠올랐다. 용병단에 있었을 시 절, 차이린은 국왕에 대해서 몇가지 이야기를 나에게 해 주었다. 권력에 눈이 멀어 마칸의 강림에는 아무런 신경도 쓰고 있지 않다고 했다. 국민 들이 어떻게 사는 지는 관심도 없고 오직 자신의 권력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나는 국왕이 악인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당당한 사람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라이짐처럼. 아니면 아케르처럼. 하지만 내가 본 국왕은 그저 거동도 제대로 못하는 늙은이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도대 체 무엇이 이 왕국을 이끌고 있다는 말일까. 나는 영빈관으로 돌아오는 내내 생각해 보았지만 답이 없었다. 아마 사빈은 나보다 훨씬 더 실망한 모양이었다. 오는 길 내내 아무 말 도 없었으니까 말이다. 실은 오브라디 교수가 마차 밖으로 보이는 풍경에 대한 언급을 한 번 하고 마로우가 그 말을 받은 것 외에는 아무도 말이 없었다. 이제 막 시작되고 있는 여름의 한가로운 햇살이 세상을 비추고 있었다. 햇살 아래 불고 있는 바람은 평화롭다 못해 적적하게까지 느껴졌 다. "그 남자, 누구였을까?" 영빈관에 돌아왔을 때, 마로우가 이렇게 나에게 물었다. "유모 같던데, 내가 보기엔." 나는 이렇게 농담처럼 내뱉었다. 그러자 오브라디 교수가 껄껄거리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유모라. 수르카 군. 자네는 정말 대단한 사람인 것 같아. 일국의 왕자 를 유모로 여길 정도라면 말이지." 오브라디 교수가 말했다. 오브라디 교수의 목소리에는 냉소가 가득했 다. "왕자요?" "그렇지. 국왕의 열 세 왕자와 열 다섯 공주 중 스무 번째 자식이고, 열 한 번째 왕자라네." 오브라디 교수는 여전히 냉소를 입에 물고서 이렇게 말했다. "다음 국왕은 누가 되는 건가요?" 사빈이 오브라디 교수에게 물었다. 오브라디 교수는 돌로 만들어진 의 자에 몸을 기대면서 이렇게 말했다. "사빈 군. 자네, 왕의 권리는 하늘이 내려주었다는 말을 아는가?" "예. 왕권은 하늘이 준거라고들 하지요." "그게 왕국의 법이니까요." 마로우가 손가락을 까딱거리면서 말했다. "사빈 군. 다음 왕은 국왕이 임종 직전에 손가락으로 가리키게 되어 있 다네. 그 전까지는 왕위 승계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을 꺼낼 수 없 지. 그런 말을 꺼내는 것은 왕의 죽음을 바라는 자라고 해서 대낮에 사지 를 찢어 죽이게 되어 있거든." 오브라디 교수는 여전히 웃으면서 말했지만, 나는 소름이 다 끼쳤다. 저렇게 끔찍한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다니. "그럼 아무도 왕위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안하겠군요." "수르카 군. 그렇지는 않지. 법이 그렇다 뿐이지 권력과 관계된 일에 어떻게 아무도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오브라디 교수가 내 말에 이렇게 설명을 이어갔다. "타실은 동타실과 서타실로 나누어져 있지. 지금의 국왕은 동타실에서 태어난 왕자였고, 다음 국왕은 서타실에서 나오길 다들 바라고 있을 걸 세. 비록 성문화 된 건 아니지만 지역 형평에 맞게 동쪽에서 태어난 왕자 가 한 번 왕이 되면, 다음에는 서쪽에서 태어난 왕자가 왕이 되는 것이 전통으로 인정되고 있지." "그런데 왕이 누구를 손가락으로 가리킬지 어떻게 알고요?" "그걸 위한 제도적인 장치가 바로 오늘 본 왕자라네. 동타실에서 태어 난 왕자가 지금의 왕이 되었으니 왕을 보살피는 왕자는 서타실에서 태어 난 왕자가 맡게 되는 것이지. 물론 그렇다고는 해도 그저 보완책일 뿐이 지 완전한 건 아니야." "그런데 동타실 출신, 서타실 출신 그게 무슨 상관이 있는 거죠?" 나는 오브라디 교수에게 이렇게 물었다. 솔직히 도대체 누가 왕이 되 건, 그 왕이 어디 출신이건, 그게 무슨 상관이 있을까 싶었기 때문이었 다. "국민이야 아무 관심이 없지. 관심이 있다면 동타실 출신의 관료나 서 타실 출신 장관, 뭐 이런 사람들 아닐까? 그 사람들은 자기가 지지하는 왕자에게 붙어서 어떻게든 다음 권력을 이어가려고 노력하고 있다네." 오브라디 교수의 목소리는 냉소적이었다. "그렇게도 권력을 가지고 싶을까요?" 나는 이렇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장관이 국왕도 아니고 왕자에게 붙어서 이러쿵저러쿵 비위를 맞추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건 별로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권력이라는 건 한 번 잡으면 결코 놓고 싶어지지 않는다고 들었습니 다." "마로우 군. 나도 그런 얘기는 들어 본 적 있네. 하지만 내가 그 자리 에 서보지 않았으니 그게 뭔지 낸들 어디 알 수 있겠는가." 오브라디 교수는 이렇게 말하고는 왕자 이야기를 계속했다. "서타실 출신 아들 중에서 스무 번째 아들을 국왕이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네. 아마 젊었을 때의 자신과 외모가 가장 흡사하기 때문일 거라는 말도 있지만, 실은 스무 번째 아들이 가장 머리가 좋기 때문일 걸세. 어 려서부터 영악해서 국왕의 마음에 드는 이야기만 하고, 국왕의 환심을 사 는 기술이 뛰어났다고 하거든. 아마 스무 번 째 아들이 국왕이 되기에 가 장 유리한 위치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걸세.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그렇 다고 해서 서타실 사람들을 위해서 국왕이 스무 번 째 아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죽는다는 법은 없지." 오브라디 교수의 말에 마로우가 결론을 맺었다. "그게 하늘이 내려준 권리라는 거군요." "그렇지. 하늘이 내려준 권리지. 왜냐? 하늘 말고는 국왕이 죽을 때 누 구를 가리키고 죽을 지 아무도 모르니까 말일세." 오브라디 교수는 스스로 말해놓고 만족스러웠는지 웃음을 지었다. "저래 봬도 젊었을 때는 사자 왕이라고 불렸던 폭군이었다네. 왕비만 일곱에 첩은 스물 여섯 명을 두었으니까 말일세. 그런 편에 비한다면 자 식의 수는 적다고도 할 수 있겠지. 국왕이 젊었을 때, 워낙 정치적으로 불안정했던 시기였다고들 하니 그럴 만도 하지. 원래 국정이 바쁘면 집안 일은 소홀하기 마련이니까 말이야. 하하하. 하여간 국왕은 정치적으로 불 안정한 가운데에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 친위대를 창설했다네." "국왕 친위대 말씀이시군요." 사빈이 말했다. "그래. 국왕 친위대라고 하면 철저하게 국왕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들 이 자랑스럽게 말하는 어용 단체였다네. 왕이 쓰는 단체니 어용 단체라는 표현이 적절하지. 물론 하는 일이라고는 정적의 비리를 조사하고, 약점을 잡고, 그것도 아니면 암살하는 게 일이었다고들 하지만 말일세. 어떤 사 람은 삼년전쟁도 이 친위대의 작품이었다고 말하기도 한다네. 물론 이건 소문일 뿐이네만." 오브라디 교수는 이렇게 말하고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권력이라는 건 신비해. 젊은 날, 나는 국왕이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어느날 이렇게 바라보니까 국왕이 가지고 있던 권력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질 않게 되었어. 그 힘은 과연 어디로 사라져 버린 걸 까?" 오브라디 교수의 말에 모두들 말이 없었다. 저렇게 늙고 추한 모습이 되어서도 붙잡고 있고 싶어하는, 고기 한 조각을 먹기 위해 아들에게 빌 어야 하는 게 권력이라니. 나는 어쩐지 세상이 과연 어떻게 돌아가고 있 는 건지, 불가사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이 나라를 움직이고, 누가 다스리고 있는 걸까. 어쩌면 그 힘이야말로 하늘이 내려준 건 아닐까. 하 지만 그리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있는 문제는 아닐 것 같았다. 하지만 분 명한 것은 국왕이 죽고 나면 그 권력이란 것 때문에 꽤나 시끄러울 것이 라는 사실이었다. 영빈관을 가장 먼저 찾은 것은 예술 마법사 쥬리였다. 쥬리는 조각을 하기 위해서 마차에 큰 바위덩어리를 하나 싣고 왔다. "조각하는 모습을 보시겠습니까?" 모티사가 웃는 얼굴로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브라디 교수와 마로 우는 당연히 지켜보겠다고 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고, 나도 어떤 마법 인지 궁금해서 쥬리가 조각을 하는 것을 보기로 했다. "저는 혼자 좀 있고 싶습니다." 사빈은 이렇게 말하고는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돌로 만들어진 문을 닫 고 들어가는 사빈의 뒷모습은 어쩐지 쓸쓸해 보였다. 쥬리는 마차에 타고 온 인부들에게 조각상들이 늘어 서 있는 곳 끝에 바위를 내려놓으라고 말했다. 인부들은 조심스럽게 바위를 바닥에 내려놓 았다. "마법으로 옮기질 않네요?" 마로우가 조용히 오브라디 교수에게 물었다. 그런데 쥬리는 생각보다 대단한 마법사인 것 같았다. 귀가 상당히 밝은 걸 보면 말이다. "저는 예술 마법사입니다. 그 외의 마법은 쓰질 않지요." 쥬리는 이렇게 말하면서 잔기침을 두 어번 뱉어 내었다. 마로우도 머쓱 한지 공연히 헛기침을 뱉었다. 잠시 후 바위가 바닥에 내려져 자리를 잡 자 쥬리는 조용히 마법의 말을 읊었다. "바위* 안에* 담긴* 형상을* 찾아내는* 것이* 조각*" 나는 저런 식으로 말이 끝나는 마법의 말을 들은 기억이 있었다. 그것 은 바로 성황청의 사제들이 성구를 작동시킬 때 쓰는 마법의 말이었다. 라짐이 미리 쥬리의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더라면, 쥬리를 성황청의 첩자 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22041/22303 ━━━━━━━━━━━━━━━━━━━━━━━━━━━━━━━━━━━━━━━━ 제 목:[탐그루] 박물관장 제마 311 관련자료:없음 24/24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6-13 22:21 조회:1058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쥬리의 마법의 말이 끝나자 바위는 겉이 떨어져 나가며 조금씩 다른 모 양으로 변해갔다. 처음에는 엉켜있는 덤불인가 싶더니, 시간이 지나자 바 위는 네 사람의 모습으로 바뀌어 갔다. 바위 속에서 드러난 우리 네 사람 의 모습은 분명 우리의 모습이었지만 우리의 모습이 아니었다. 오브라디 교수는 덩치 좋고 당당해 보이기는 했지만 허공을 응시하고 있어서 더욱 위엄을 갖추고 있는 듯 했고, 사빈과 마로우가 들고 있는 칼날은 너무도 예리해 보여서 그들이 강한 투지로 적과 맞서고 있는 느낌을 주고 있었으 며, 부끄럽지만, 두 팔을 하늘을 향해 벌리고 있는 내 모습은 정말이지 진짜 마법사처럼 보였다. 나는 내 모습을 보는 순간 고개를 돌려버리고 말았다. 무엇보다 부끄러웠던 것이다. "놀랍습니다. 예술 마법사가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정말이지 이렇게 대단한 작업을 하시는 줄은 몰랐습니다. 어떻게 저렇게 하실 수 있는 겁 니까?" 오브라디 교수가 정말로 감탄했다는 말투로 쥬리에게 이렇게 물었다. 쥬리는 무표정한 얼굴로 이렇게 대답했다. "제가 읊은 마법의 말 그대로 입니다. 예술이라는 건 별 게 아니지요. 그저 바위와 마음을 나누고, 바위 안에 감추어진 것을 마법으로 드러나게 하는 것뿐입니다." 그렇구나. 나는 정말로 내가 다다를 수 없는 하나의 경지를 발견한 기 분이었다. 나는 바위와 교감을 나누기는커녕 저런 사람의 모습을 상상해 내는 것조차도 불가능할 것 같았다. 그런 내가 저런 마법사의 모습을 하 고 있다니. 나는 부끄러워져서 숙인 고개를 다시 들 수가 없었다. "성황청에 계셨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쥬리 님." 오브라디 교수가 쥬리에게 묻자, 나는 가슴이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예. 그건 유명한 일이지요. 덕분에 친위대 신세도 많이 졌습니다만." 쥬리는 이렇게 말하고는 쿨럭거리면서 기침을 몇 번했다. 친위대라는 말이 어떤 건지 정확하게 와 닿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멀쩡한 사람을 저 렇게 만들 수는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친위대 신세라고 말한다면, 혹시 라짐이 말했던 어떤 비밀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었다. 만약 라짐에게 물을 수 없다면 쥬리한테서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쥬리 님. 잠시 저하고 이야기좀 나눌 수 있을까요?" 내가 조심스럽게 묻자 쥬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걷지요." 쥬리는 이렇게 말하고는 나와 함께 정원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쥬리 님. 여기서 함께 말씀 하셔도..." "아닙니다. 마법사들끼리의 이야기입니다." 마로우의 말에 쥬리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다시 한 번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물을 건 그런 게 아닌데. 얼마간 걸은 후에, 주변에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싶어지자 나는 이렇게 말을 꺼내었다. 물론 다섯 명의 병사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겠지만, 이야기 내용이 들릴 만한 거리는 아니었다. "아까 그 말씀, 잘 들었습니다. 예술이라는 건 그렇게 심오한 거였군 요." 내가 말하자 쥬리는 어이없다는 얼굴이 되었다. "천만에요. 그건 그냥 거짓말입니다. 그렇게 말해야 제가 진짜 예술가 라고 믿을 테니까요. 제가 하는 일은 그저 제가 생각하는 것을 바위에 옮 기는 것뿐입니다." 쥬리는 이렇게 말하고는 내가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먼저 말을 이었다. "라짐에게서 들었지요? 오늘 박물관 이야기?" 먼저 이렇게 이야기를 꺼낼 줄은 알지 못했다. 나는 바람에 대해서 알 고 있다고만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제마. 문제는 제마입니다." 제마라면 박물관장을 하고 있다는 마법사 이름일텐데. 나는 쥬리의 얼 굴을 빤히 쳐다 보았다. "마법을 쓰는 걸 눈치 못 채게만 해 주시면 됩니다. 나머지는 제가 알 아서 할 겁니다." "알아서 어떻게 한다는 말씀이시죠?" "말씀드렸듯이 저는 제가 생각하는 것을 바위에 옮길 수 있을 뿐입니 다." 쥬리의 말은 라짐의 말보다 훨씬 더 난해했다. "성황청에 계속 남아 있지 못한 것도 그것 때문이었지요. 성황청에서 저는 첩보성에 있었습니다." 첩보성이라. 첩보를 하는 높은 성을 말하는 걸까? 나는 알아듣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성황이 하는 일도, 국왕이 하는 일도 모두 똑 같지요. 그저 자신이 상 상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시키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실은 자신이 상상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거든요. 마치 제가 마법사나 검사를 상상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에요, 그건. 누구나 그 자리에 서 상상할 수 있는 거라는 말입니다." "... 그게 권력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나는 고기가 먹고 싶다고 투정부리던 국왕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말했 다. "그게 권력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걸 혼자 가지고 있을 수 는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지요." 쥬리는 이렇게 말하고는 걸음을 멈추었다. "제가 라짐과 함께 하게 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습니다. 누구도 권력 을 혼자 가지고 있을 수는 없지요. 누구나 상상할 수 있다면, 누구도 그 위치에 갈 수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쥬리는 이렇게 말했다.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적어도 지금은 그렇게 믿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우리와 함께 하는 것 도 그런 뜻이리라는 것도요." 쥬리는 이렇게 말을 맺었고, 그래서 나는 또 한번 바람이 뭔지 알아차 릴 수 있는 기회를 놓쳐 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박물관에 가서 도대체 날 보고 뭘 어쩌라는 걸까? 나는 어쩌면 너무 위험한 일에 너무 깊게 관여하 게 된 게 아닐까 걱정이 다 되었다. 쥬리가 돌아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박물관에서 우리에게 마차를 보내 왔다. 이제 제마를 만나러 가게 되는 것이었다. "모티사. 며칠이나 이곳에 있게 됩니까?" "제마 님하고 상의하시면 될 겁니다. 제마 님은 타실의 대마법사이자, 타실 박물관의 박물관장이시자, 영빈관 관리 위원회 위원장이시자, 영빈 시간 관리담당관이시기도 하니까요." "...그렇게 직함이 많습니까?" "몇 개 더 있습니다만 저도 기억이 잘 안나는 군요. 궁금하시면 직접 여쭈어 보시면 될 겁니다." 모티사가 내 질문에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지만, 나는 절대로 제마에게 그런 걸 묻고 싶지는 않았다. 사빈은 마차를 타고 박물관으로 가는 내내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나 는 사빈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왜? 조각이 맘에 안드나 보지?" 물론 나는 농담으로 한 말이었지만 사빈의 대답은 내 말을 농담으로 듣 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내가 왜 마로우 하고 똑같이 생긴 칼을 들고 있는 거야? 나는 용사냥 꾼이란 말이야, 용사냥꾼!" 불만에 가득 찬 목소리였다. 하지만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박물관에 마차가 도착했을 때, 해는 이제 서서히 산 저편으로 사라져 가는 중이었다. 훈장 수여식이 오전에 있기는 했지만 국왕이 너무 늦게 나온 관계로 점심때가 다 되어서야 끝이 난 데다가, 조각을 마치고 박물 관에서 오는 마차가 너무 늦게 왔기 때문이기도 했다. 덕분에 나는 조각 구경을 하면서 오브라디 교수와 마로우가 번갈아 가면서 하는 비스토브레 왕국 위인전을 지겹도록 들어야 했다. 게다가 계속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사빈을 대하고 있기란 정말 괴로운 일이기도 했다. 마차가 먼지를 일으키 면서 영빈관 입구 쪽에서 다가올 때의 기분이란, 마치 마물들에게 포위 당해 있을 때 달려오는 구원군을 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마차를 타고 가 는 내내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사빈의 모습을 보는 일도 그다지 쉬운 일 만은 아니었다. 마차에서 내렸을 때, 우리를 맞은 것은 박물관 관리직원과 박물관장인 제마였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들 많으셨소. 나는 제마라고 하오." 제마는 국왕만큼은 아니었지만 꽤나 나이 든 노인이었다. 제마는 키도 크고 옷매무새도 단정해서, 젊었을 적에는 아마 여자한테 인기 깨나 있었 겠다 싶은 사람이었는데, 크고 우렁찬 노인답지 않은 목소리를 들으니 어 쩌면 지금도 여자한테 인기가 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하고는 구면이지, 제마?" 오브라디 교수가 웃으면서 제마에게 말했다. 그런데 오브라디 교수의 웃는 모습이 이상했다. 가식적인 것 같은 느낌도 있었고, 뭔가 꾹 억누르 고 있다는 기분이 드는 웃음이었던 것이다. 그런 웃음을 짓기는 제마도 마찬가지여서, 둘 사이에 묘한 긴장감 같은 것이 흐르고 있었다. "자네는 여전히 태양인이로군. 머리가 좋고 지도력이 있지. 욕심도 많 은 편이고 유명해 지지 않으면 자기 능력을 발휘할 수 없어. 하지만 자네 는 허리를 조심해야 해. 허리가 상하면 다시 일어나기 어려우니까 말일 세." 제마는 오브라디 교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태양인이라니? 나는 무슨 소 리인가 생각해 보았지만 처음 듣는 생소한 어휘인지라 무슨 뜻인지 쉽게 짐작이 가질 않았다. "자네는 여전히 사상의학이로군. 도대체 언제까지 그 연구를 계속 할텐 가?" 오브라디 교수는 여전히 뭔가 참고 있는 듯한 웃음을 지으면서 제마에 게 이렇게 말했다. 제마는 바로 오브라디 교수의 말을 받았다. "사상 의학이라고 말하지 말고 사상학이라고 해 주게. 그리고 내가 사 상학을 공부하는 건 내가 죽는 날까지 계속 될걸세." "사상학인지 사상 박물학인지는 잘 모르겠네만, 자네가 믿고 있는 게 전부라고 생각하는 태도는 좀 버렸으면 좋겠는데." "허허허. 나는 단 한 번도 내 생각을 고집해 본 적이 없다네. 오히려 태양인인 자네가 그런 데에 더 관심이 있는 것 같은데." 나는 두 삶의 대화 내용을 알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두 사람의 사이에 튀고 있는 불꽃은 감지해 낼 수 있었다. 둘 다 웃는 얼굴이기는 했지만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상황이라고 판단이 되었다. 이거, 잘못하면 쥬리하 고 라짐이 뭐라고 말했건 간에 오브라디 교수가 흥분하는 걸 막느라 아무 것도 못하겠다 싶었다. "관장님. 일단 박물관 구경을 좀 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먼 스파일에 서 와서 이곳 타실의 박물관을 말로만 들었지 실제로 구경하는 것은 처음 이거든요." 마로우가 말했다. 마로우가 내 마음과 같았는지, 아니면 정말로 박물관 을 빨리 보고 싶은 마음에서 나온 말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마로우의 말 은 일단 두 사람의 논쟁이 번지는 것을 막아 주었다. "아, 그러시군. 가만있자. 자네는 머리가 둥글고 유순해 보이는군. 피 부도 고운 편이고 화술이 능해. 앞에 나서기보다는 뒤에서 일하기를 좋아 하겠군. 자네는 소음인이야." 제마가 마로우에게 말했다. 제마가 말하는 순간, 마로우는 멍한 얼굴이 되었다. 소음인이 무슨 말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일단 제마가 그렇게 말했으므로 이제 마로우는 소음인으로 평생을 살아야 할지 모르는 것이다, 고 하면 조금 과장이지만, 적어도 마로우는 제마의 말에 충격을 받기는 한 모양이었다. "소, 소음인이 뭡니까?" "알고자 하는 욕구가 있군. 내가 아는 누구하고는 달라." 제마가 오브라디 교수를 한 번 처다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오브라디 교 수는 이빨을 드러내면서 웃었는데, 옆에 있던 내 귀에 들릴 정도로 꽉 이 를 갈았다. 나는 소름이 다 끼쳤다. "소음인이란 지라가 크고 콩팥이 작은 사람을 말한다네. 자세히 설명하 지면 조금 길지만, 그건 천천히 들어가서 이야기하도록 하지." 제마는 이렇게 말하면서 우리를 박물관으로 안내했다. 박물관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무척이나 넓은 돌계단이었다. 돌에 끼여있 는 이끼로 보아 만들어 진지 적어도 백년은 됨직해 보이는 계단이었다. 계단을 막상 다 오르고 보니 일층짜리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도시에서 높은 건물들과 그곳에 모여사는 수많은 사람들만 보아온 탓인지 야트막한 건물은 어쩐지 낡은 것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물론 낡았다는 게 나쁘다는 뜻만 가지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낮은 것은 낮은 것 대로 의미와 품격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 된 건물 같군요." 마로우의 말에 제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 박물관 자체가 하나의 역사적 유물이라고 할 수 있다네. 이곳 은 일찍이 대마법사 아킨이 만든 곳이고, 또한 초대 박물관장을 지냈던 곳이지. 그러기에 대대로 이곳 박물관장은 타실의 대마법사가 이어왔다 네. 자랑은 아니네만, 이곳은 영웅들과 지체 높은 귀족, 그리고 다른 주 나 국가에서 온 사람들만이 올 수 있는 곳이지. 그만한 격식과 위엄을 갖 추고 있다는 뜻이 될 것일세." 제마가 말하자 나는 어깨가 으쓱해졌다. 그렇게 대단한 사람들만 갈 수 있는 장소에 내가 왔다는 사실 자체가 믿어지지 않을 지경이었다. "우습군, 제마. 이곳을 유지하는 데 얼마나 많은 세금이 들어가겠는가? 그렇다면 이곳을 유지시키기 위해서 세금을 내는 시민들이 이곳을 와보지 못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오브라디 교수가 단박에 제마의 말에 반론을 폈다. "시민? 시민들이 이걸 봐서 뭐하겠는가. 세금? 세금은 원래 시민이 내 는 것인데 그 세금을 낸다고 해서 무슨 권리가 주어지겠는가? 자네, 예나 지금이나 아주 위험한 사상을 가지고 있구만. 그거, 자칫하면 귀족 모독 죄에 해당할 수도 있는 말일세. 물론 여기서야 훈장을 단 영웅이니 내가 자네를 고발하지는 않겠지만." 비웃는 듯한 투로 제마가 말했다. 제마의 말에 오브라디 교수는 또 한 번 당장 반론을 폈다. "자네 말이 틀리다고 하지는 않겠네. 하지만 진리일수록 간단한 법이 고, 진실일수록 명백한 법일세. 보통 이러쿵저러쿵 어려운 말 늘어놓는 사람은 사기꾼이기 십상이지." 오브라디 교수는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으면서 모호하게 논점을 흐렸 다. 아마도 논쟁을 자제하고있는 모양이었다. 오브라디 교수가 자신의 말 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건, 나는 오브라디 교수의 말에 공감했다. 세금을 내는 사람이 자신의 돈으로 만들어진 곳에 가지 못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싶었기 때문이었다. 잠시동안이었지만 우쭐한 기분이 들었던 나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이 들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비록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는 있었지만 풍경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 았다. 도대체 이런 곳이 왜 만들어졌는가 싶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하지 만 뒤를 돌아 본 일에 소득이 하나 있었다. 늘 우리 뒤를 따르는 다섯 명 의 사내들이 여전히 뒤를 따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 챈 것이었다. 도대 체 왜 우리 뒤를 따르는 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하여간 감시 당하고 있다는 건 그다지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그럼 이제 박물관에 있는 전시물들을 돌아보도록 하지. 내 될 수 있는 한 간단하고 명백하게 설명해 주겠네. 아마 조금만 어려워져도 이해하기 가 어려울테니까. 특히 나이를 헛되이 먹은 사람이라면 더더욱 이해하기 어렵지." 오브라디 교수가 참고 있다는 것을 제마도 느꼈는지 제마는 이렇게 말 했다. 그러면서도 오브라디 교수의 속을 박박 긁는 말을 남기는 것을 잊 지 않는 것을 보면, 제마도 역시 오브라디 교수를 꽤나 싫어하는구나 싶 었다. 우리는 입구를 통해 박물관 내부로 들어갔다. 입구에는 문이 없었다. 그저 돌로 만들어진 기둥이 두 개 세워져 있을 뿐이었다. 박물관 안에는 연금술사의 등이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어서 장식품들을 더욱 돋보이게 하 고 있었는데, 가장 먼저 눈에 들어 온 것이 바로 아킨의 지팡이였다. "이것이 아킨의 지팡이라네. 이 박물관에 있는 것 중 가장 소중한 물건 이자, 이 박물관이 존재하고 있는 이유기도 하지." 제마는 지팡이를 손으로 가리키면서 말했다. 연금술사의 등 아래 지팡 이는 탁한 회색빛을 하고 있었다. 회색으로 보이는 낡은 지팡이는 벽면을 가득 채웠던 조각과는 달리 내 팔뚝보다도 짧은 길이여서 도무지 지팡이 의 본래 용도로는 쓰이지 않았을 듯 했다. 아마도 마법을 걸때 손에 들고 정신을 집중하는 용도나, 누군가의 뒤통수를 때리는 용도로 쓰이지 않았 을까 싶었다. "뭘로 만들어 진 건가요?" 마로우가 눈을 반짝이면서 물었다. "나무로 만들어 진 것이지. 이것이 이렇게 오랫동안 보존될 수 있다는 것만 가지고도 우리는 이것이 진짜 아킨의 지팡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 어." 어느 사이 아랫사람을 대하듯 제마의 말투는 낮추어져 있었다. 물론 그 에 질세라 바로 오브라디 교수의 말이 이어졌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22042/22303 ━━━━━━━━━━━━━━━━━━━━━━━━━━━━━━━━━━━━━━━━ 제 목:[탐그루] 박물관장 제마 312 관련자료:없음 25/25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6-13 22:22 조회:983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그렇지만 이게 아킨의 지팡이라는 게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역시 태양인이로군." 제마가 경멸에 가까운 미소를 하고서 말했다. 나는 위험한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어떻게든 막아야 할 텐데. 오브라디 교수 가 여기서 말썽을 피웠다가는 우리 뒤를 따르고 있는 다섯 사내에게 끌려 가 쥬리가 말했던 '친위대'의 공포를 맛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었다. "태양인은 나서지 않으면 도저히 견디질 못하지. 사실 태양인은 그리 흔치 않다네. 스무 명에 한 명이나 될까. 워낙 강한 사람들이라 뛰어난 사람이 아니면 무능력자가 되고 만다네." "지금 내가 무능력자라고 말하고 싶은 건가?" 제마의 말에 오브라디 교수의 인내심도 슬슬 바닥을 드러내는 모양이었 다. 도대체 두 사람 사이에 얽혀 있는 은원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는 몰라 도, 여기서 이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그런데 내 머리 한 편에서는 쥬리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쥬리는 제마의 시선을 끌어 주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 그렇다면 내가 잠자코 있 는 게 쥬리를, 또 라짐을 돕는 일이 될 테지만 나는 쉽사리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사상학이 무엇인지부터 설명해 주시지요." 다행히도 마로우의 질문이 다시 한 번 과열될 위기를 맞은 두 사람 사 이를 식혀주었다. 오브라디 교수는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헛기침을 했 고, 제마는 마로우에게 설명을 해주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늘 따 라다니던 다섯 사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그들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사상학의 근원은 고대문자로 된 문헌이라네. 고대문자로 된 책이나 문 서가 출토되는 일은 흔하게 있지만, 사실 가장 어려운 부분은 해독이지." "고대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다만. 로스안이나 홀리우 드 출신 사람들은 대강 뜻은 알아듣는 모양인 것 같았습니다." 마로우가 말했다. 그러자 갑자기 제마는 흥이 난다는 듯 설명을 이어갔 다. "내가 말하는 고대 문자는 그쪽 지역에서 출토되는 것과는 또 다른 형 태의 고대문자를 말하네. 아마도 최종전쟁 이전에는 이렇게 두 문자를 사 용하는 두 종족이 나누어져 있었던 것 같네만. 내가 연구하고 있는 고대 문자는 타실 지역에서 주로 출토되는 것들이지. 이 문자를 썼던 사람들은 세상은 밝음과 어둠으로 이루어져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듯 하네. 그런데 이 밝음과 어둠이라는 두 개의 대립항은 세상의 모든 일에 통용되 지. 해와 달, 남자와 여자, 하늘과 땅, 이런 대립항들이 모두 이 밝음과 어둠이라는 문자로 포괄할 수 있는 개념이지. 이걸 고대인들은 음과 양이 라고 불렀다네." 흥에 겨워 설명을 하는 제마의 모습은 오브라디 교수와 별로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그게 사상학과는 어떻게 연관이 되는 겁니까?" "사상학이라는 것은 사람의 속성이 큰 속성인가, 작은 속성인가를 먼저 나누고, 다음으로 그 사람이 밝은가 어두운가를 말하는 것이라네." "그렇다면 '태'라는 말은 크다는 말이고 '소'라는 말은 작다는 말, 그 리고 '양'이라는 말은 밝다는 말, '음'이라는 말은 어둡다는 말이로군 요." 마로우가 말했다. 역시 마로우는 이런 새로운 언어나 개념을 해석하는 능력에 있어서는 나와는 비교 할 수 없는 경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브 라디 교수는 그런 마로우가 못마땅한지 마로우를 계속해서 흘겨보고 있었 다. 지금 오브라디 교수는 질투를 하고 있는 걸까? "그렇다면 저는 어떤 사람입니까?" 오래간만에 찌푸렸던 인상을 펴고 사빈이 물었다. 사빈에게서는 그저 순수한 호기심만이 드러나고 있었다. 제마도 그게 재미있게 느껴졌는지 비웃음이나 속을 알 수 없는 웃음이 아닌 진짜 웃음을 지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자네는 소양인이로군" "소양인? 그럼 작고 밝은 사람이라는 뜻인가요?" "그렇지. 자네 같은 사람은 지기를 싫어하고 모험심이 넘치지. 명예심 과 책임감이 강하고, 성격이 열정적이야. 자네 같은 소양인이 사회에서 성공한 경우를 나는 많이 보아왔다네. 다만 뽐내는 걸 좋아하는 건 경계 해야겠지만." "대, 대단하군요!" 사빈은 이렇게 소리쳤다. 제마라는 사람, 정말 대마법사는 대마법사인 가 보다 싶었다. 처음 만난 사람을 척 보고 어떤 사람인지 알아 맞추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런데 왜 오브라디 교수님께서는 사상의학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마로우가 제마에게 물었다. 오브라디 교수도 이 질문에는 흥미를 느꼈 는지 제마의 대답을 기다리는 눈치였다(물론 눈은 지팡이쪽을 향하고 있 는 척 했지만). "이러한 인간학이 의학에 적용될 수 있다고 고대인은 생각했던 것 같 네. 사람에 따라서 약도 다르게 쓰고 먹는 것도 달라야 한다는 거지. 예 를 들어 오브라디 교수 같은 사람은 잉어나 북어같은 것을 먹으면 좋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아. 여기 이 똑똑한 젊은 친구는 소화에 각별히 유의해야 한다네. 그리고 지금 질문한 검사는 구토를 하거나 코피를 쏟게 되면 아주 위험한 상태라는 말이 되지." "그렇게 연결될 수 있는 근거는 뭡니까?" "잠시 이야기했지만, 태양인은 폐가 크고 간이 작은 사람이라네. 소양 인은 지라가 크고 콩팥이 작은 사람이지. 태음인은 간이 크고 폐가 작은 사람이고, 소음인은 콩팥이 크고 지라가 작은 사람을 말하네. 사람의 몸 이 이와 같이 다르니 사람마다 성격이 다르고 먹으면 좋고 나쁜 것이 다 르고 걸리는 병도 다르지 않겠는가? 태양인은 간장병이나 소화질환같은 병에 걸리기 쉽고, 태음인은 폐렴이나 기관지염에 걸리기 쉽지. 소양인은 신장염이나 방광염에 걸리기 쉽고, 소음인은 위산과다증이나 복통을 앓기 쉽다네. 이렇게 말하니까 꼭 사상학이 의학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상학은 포괄적인 인간학이지만 이렇게 의학에도 이용될 수 있기 때문에 사상의학이라고도 불리우는 것이지. 하지만 그건 사상학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하네." 제마의 설명은 단 한 번도 막히지 않고 계속 되었고, 나는 제마의 말솜 씨에 정말이지 감탄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사람일까 하는 의문 이 들었다. 하지만 오브라디 교수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고 있자니 차마 물어볼 수가 없었다. "태음인." 제마가 말했다. 제마는 내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말했다. "자네도 궁금했지? 자네는 태음인일세." 마법사는 역시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모양이었다. 물론 나도 마법을 전혀 모르지는 않으니까 사람의 마음을 간혹 느낄 수 있지만, 이렇게 확연하게 알 수는 없었다. 나는 제마의 설명이 이어지기 를 기다렸다 (오브라디 교수가 나를 노려보지 않기만을 바라면서 말이 다). "자네는 태음인이야. 말없이 실천하고 침묵을 지키고, 어떠한 곤란이 있어도 꿋꿋이 뚫고 나가지. 속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아서 음흉하다는 말 을 듣기도 하지만, 남이 못하는 일을 묵묵히 해나가는 사람이지. 자네의 경우는 간이 강하고 폐가 약해. 그래서 간을 강하게 하는 음식을 먹으면 안되고 폐에 도움이 되는 음식을 먹어야 하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마의 말이 맞는 것도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간을 강하게 하는 음식을 먹으면 안 좋다는 게 무슨 말입니까? 이 친구는 간이 강하다면서요." 사빈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물었다. 제마는 사빈의 말에 호통을 치듯 이 이렇게 말했다. "약한 것이 병이고 강한 것이 건강하다고 말하는 건 잘못된 생각일세, 검사." "용사냥꾼이라니까요." 사빈이 말했지만 제마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간이 강한 사람은 간에 좋은 것을 먹으면 오히려 해가 되기 마련일세. 간이 너무 활동을 왕성하게 해서 몸을 해친다는 거지." 제마의 말은 귀가 솔깃해지는 말이었다. 정말 사람이 이렇게 네 종류로 나뉘고, 또한 각각의 특성에 맞는 병과 음식이 있다면, 또 성격이 있다 면, 그걸 밝혀 내는 것이 사람을 알게 되는 일 아닐까 싶었다. "그런데 어떤 음식이 간에 좋고 어떤 음식이 폐에 좋지요?" 나는 제마에게 이렇게 묻고 말았다. 묻는 순간 오브라디 교수의 다가운 시선이 생각나 아차, 싶기도 했지만, 일단 물어 본 거 답이나 들어야겠다 싶어졌다. "흠. 태음인은 말일세, 그러니까 마황탕이나 계마각반탕, 조위승기탕, 혹은 대시호탕을 먹는 게 좋다네. 자네는 만약 병이 걸리면 흑노환을 먹 는 게 좋을 걸세. 흑노환은 마황, 대황, 황금, 부저매, 망초, 조돌묵, 양 상진, 소맥노를 각 한 냥씩 해서 만드는 약인데 자네가 만약 죽어가고 있 다고 해도 이 약 한번이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날 거네." 제마의 말이 끝나자 우리 일행은 일순 침묵에 휩싸이고 말았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데 제마의 표정을 보아하니 제마도 분명하게 알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 다. "자네, 자네가 해석한 문장을 그대로 외우고 있구만." 오브라디 교수였다. 한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던 오브라디 교수는 이렇 게 말문을 열었다. 어쩐지 수세가 공세로 전환되는 느낌이었다. "자네가 말한 대목, 나도 젊었을 때 외웠던 대목이지. 거기 끝에 이런 말도 있지 않은가? 이 약방문은 다시 상고해 보니 망초를 마땅히 빼야할 것 같다." 오브라디 교수의 말에 제마는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쉽사리 포기 하지는 않았다. "흠. 그게, 그러니까 이제부터 연구해야 할 과제지. 아, 자네 뭘 찾고 있는가?" 제마는 화제를 돌리려고 사빈에게 이렇게 물었다. 사빈은 두리번거리면 서 뭔가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예. 카를로스 장군의 창을 찾고 있었습니다." 사빈이 말하자 제마는 친절하게도 사빈을 따라가면서 이렇게 말했다. "카를로스 장군의 창은 저 쪽 맞은 편에 있다네. 자, 따라오게. 내가 안내해 주지." 사빈을 이끌고 제마는 박물관 저편으로 걸음을 옮겼지만, 오브라디 교 수는 오랫동안 당했다고 생각해서인지 끈질기게 제마를 뒤따르면서 말했 다. "스파일에 데리데라는 대마법사가 있었지. 데리데가 말하길, 말이라는 건 그저 사람의 마음이 남기는 흔적이라고 했다네. 그리고 우리가 흔적만 을 이해하는 한, 결코 마음을 알 수는 없을 것이라고 했지. 그런데 그 대 마법사의 뜻을 이었다는 스파일 주립 마술학교에서는 그 말을 어떻게 가 르치고 있는지 아는가? 그 말이 적혀 있는 책을 달달 외우게 하고 있다 네. 데리데의 뜻과는 완전히 정 반대로 가르치고 있는 것이지." 아마도 이 논쟁은 오랫동안 오브라디 교수와 제마 사이에서 벌어졌던 논쟁인 모양이었다. 제마는 오브라디 교수를 자꾸 피하려고만 하고 있었 고, 얼굴에는 당혹과 짜증이 베어나오고 있었다. "이게 카를로스 장군의 창이라네. 용의 심장을 단번에 찔러 잡았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지. 저 창날에 묻어 있는 시커먼 것이 용의 피라고들 말하지." "제마. 말을 피하지 말게." 오브라디 교수는 이렇게 말하고 제마에게 다그쳐 묻기 시작했다. "자네는 스파일 주립 마법학교가 저지르고 있는 오류를 그대로 범하고 있는 거라네. 자네가 말한 고대 문헌, 나도 젊은 날에 읽었고, 또한 외웠 던 것이지. 하지만 그 의미를 모르고서 어떻게 사상의학이다, 사상학이다 이야기 할 수 있겠나? 글을 읽는다는 것은 글을 쓴 이의 마음에 다가가는 일일세. 그렇게 글자 몇 자 외운 것 가지고 아는 척 떠들어대는 자네가 나는 정말로 싫네." 이 말은 결국 제마를 흥분시키고 말았다. "지나간 것을 알아서 새것을 익힌다는 말이 있네. 자네 말이 맞는 부분 도 있어. 하지만 자신이 알고 있고, 또한 이해하고 있는 것을 자꾸 쓰지 않는다면 글을 읽고 연구하는 데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자네는 그저 젊은 날에 한 번 읽고 때려 치웠는지는 몰라도 나에게 사상학은 일생을 바친 학문이야! 그렇게 함부로 말하지 말게." "자네가 일생을 바쳤건 어쨌건 아닌 건 아닌 거야. 그런 학문이라면 무 슨 소용이 있겠는가? 가뜩이나 어지러운 세상에 복잡한 말이나 몇 마디 더 보태는 것 외에는 말일세." "복잡한 말이라고 또 말하는 군. 자네는 예전부터 그랬어. 뭐 진실은 쉽고 진리는 명백하다고? 그렇다면 학자들이 하는 일이 뭐가 있는가? 새 로운 말을 찾고 새로운 해석을 하는 작업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가만히 듣고만 있을 사람이 아니다 싶기는 했지만 오브라디 교수와는 다르게 정말로 화를 참지 못하는 제마의 모습은 꼭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사빈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어 보였다. 오브라디 교수도 논쟁에 점점 열 이 오르기 시작하는지 한 마디도 지지 않으려는 듯 맞서기 시작했다. "그런데 자네는 개념을 함부로 끌어오고 있는 게 문제란 말일세. 태양 인? 태음인? 물론 옛 현인이 생각해 낸 뛰어난 개념인 것은 사실이지. 하 지만 데리데의 말 그대로 소양인이니 소음인이니 하는 말은 그저 말일 뿐 이야. 인간 그 자체가 아니라는 말이지. 자네, 크다 작다, 밝다 어둡다는 말을 했지? 그런데 세상에 그냥 큰게 어디있고 그냥 밝은 게 어디 있겠는 가? 더 큰 것 앞에서는 항상 작은 것이고 더 밝은 것 앞에서는 어두운 것 아니겠는가?" "그걸 연구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는가, 지금!" "그걸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하지 않는가 지금!" 둘의 논쟁은 까딱했으면 주먹다짐으로까지 번질 뻔했지만 박물관 직원 들과 마로우, 그리고 내가 합세한 덕분에 가까스로 말릴 수 있었다. "저 자식들 당장 내보내!" 흥분한 제마가 이렇게 외쳤고 우리는 박물관에서 그대로 쫓겨나는 신세 가 되었다. "흠. 이거 흥미롭군. 아주 흥미로워." 오브라디 교수가 박물관을 올려다보면서 말했다. "아마 우리가 처음으로 박물관에서 쫓겨난 영웅이 아닌가 싶은데. 어떤 가. 근사하지 않은가?" 오브라디 교수는 이렇게 말하고는 껄껄거리면서 웃었다. 아마도 제마가 우리를 쫓아낸 것을 두고 오브라디 교수는 논쟁에서 이겼다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사빈은 어디 갔지?" 마로우가 나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사빈이 보이질 않았다. 싸움을 뜯어 말릴 때 아마 어디로 샌 모양이었다. "혹시 아직 박물관에 남아있는 건 아니겠지?" "제마 교수한테 강의를 듣고 있는 지도 모르지." 마로우는 이렇게 말하고는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제마가 완전히 이성을 잃은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얼마 지 나지 않아서 박물관 관리원 하나가 나와서 우리에게 제마의 말을 전했다. "관장님께서는 오늘 사태에 대해서 유감을 표시하셨습니다. 오늘 일은 단순한 오해에서 발생한 일이니 만큼 다음 기회에 들러 주신다면 다시 한 번 모시겠다고 말했습니다." "그건 공식적인 견해일 테지. 비공식적인 견해는 어떤가?" 오브라디 교수가 물었다. "아마 오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관리원의 말에 우리는 대충 어떤 상황인가 익히 짐작을 할 수 있었다. 관리원은 우리에게 마차를 불러다 주고는 박물관으로 돌아갔다. 결국 이 렇게 해서 박물관을 둘러보는 일은 엉망으로 끝나버리고 만 것이다. 나는 어쩐지 한바탕 꿈을 꾼 듯 한 기분이 들었다. 아킨의 지팡이도, 카를로스 장군의 창도, 그저 한바탕의 꿈이 아니었나 싶었다. "잠시만." 마차를 타려는데 누군가가 우리를 불렀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시커 먼 옷에 복면을 두른 사내 다섯이 서 있었다. 그 모습에 나는 깜짝 놀라 서 만약 정중한 태도가 아니었다면 하마터라면 칼을 뽑았을 뻔 했다. "국왕 친위대입니다. 마로우 님 되십니까?" 복면을 해서 누가 목소리를 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하여간 그 다섯 중 하나인 것 만은 분명했다. "예. 제가 마로우라고 하는데요." "잠시 따라와 주셔야 겠습니다." 국왕 친위대라는 말에 마로우는 물론이고 나와 오브라디 교수도 어떻게 대처를 해야할지 몰랐다. 이들은 말 그대로 국왕의 명령을 받는 자들 아 닌가. 함부로 항의를 할 수도, 그렇다고 싸울 수도 없는 일이었다. 두 명 의 사내가 마로우를 어깨로 감쌌고, 나머지 중 하나가 손짓을 하자 마차 하나가 잽싸게 마로우 앞에 섰다. "아주 잠시면 됩니다. 나머지 분들은 영빈관으로 돌아가십시오." 마침 그 때 박물관 마차가 우리 앞에 섰다. 마차의 문이 열리자 사빈의 모습이 드러났다. "뭐, 뭐야, 이 친구들?" 사빈이 인상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마로우는 애처로운 눈빛으로 사빈을 한 번 바라보았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22043/22303 ━━━━━━━━━━━━━━━━━━━━━━━━━━━━━━━━━━━━━━━━ 제 목:[탐그루] 박물관장 제마 313 관련자료:없음 22/22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6-13 22:23 조회:1061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국왕 친위대입니다. 나머지 분들과는 관계 없는 일입니다." 사내 중 하나가 이렇게 말하고는 마차에 올랐고, 마차는 어떻게 대응을 해 보기도 전에 사라져 버렸다. 평소 사빈 같았으면 마차에서 내려 적어 도 허풍이라도 한 번 쳤을 테지만, 사빈은 꼭 죄지은 사람처럼 시선을 피 하고는 마차 안에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친위대라는 말이 그렇게 두려운 걸까? "오브라디 교수님. 어떻게 하죠, 이거?" 오브라디 교수는 내 물음에 잠시 생각을 해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카이사 장군의 부인 있지 않은가. 자네 고향 친구 말일세, 수르카 군. 부인에게 일단 알아봐 달라고 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 오브라디 교수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사빈은 여전히 우 리의 시선도 피하고 있었다. 아마 명예와 의리로 사는 사람이 명예와 의 리를 저버렸다고 생각하는 모양인가보다 싶었다. "죄책감 느끼지 마, 사빈." 어깨를 두드리면서 나는 사빈에게 이렇게 말했다. 마로우를 녀석들이 데리고 간 것은 기분나쁜 일이었지만, 일단 알아볼 방법도 있을 뿐 아니 라 죄책감을 느낀다고 해서 해결 될 일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겠지?" 사빈이 눈을 치뜨면서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저 미소로 답해주 었을 뿐이었다. 일단 국왕 친위대라는 녀석들과 함부로 맞설 수는 없을 테니까 말이다. 영빈관에 도착하자 우리를 맞은 것은 모티사였다. 모티사는 우리에게 손님을 만나는 모든 일정이 취소되었다고 말했다. "다시 말씀드려서, 내일 당장이라도 떠날 수 있게 준비해 두었다는 말 씀입니다." 말이야 웃는 얼굴로 점잖게 하기는 했지만, 모티사의 말은 당장 떠나달 라는 말과 별반 다를바가 없이 들렸다. 오브라디 교수는 헛웃음을 쳤다. 틀림없이 앙심을 품은 제마가 뒤에서 꾸민 일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식사는 회는 아니었지만, 역시 호화로운 식단이었다. 생전 처음보 는 물고기가 올라오는 가 하면, 라마의 혓바닥이나 곰의 눈알같은, 보기 에는 역겨워도 맛은 기가막힌 음식들이 식탁에 올랐다. 물론 오늘이 마지 막이 될 거라는 걸 암시라도 하는 것 같아서 맘편히 먹기는 좀 그랬지만, 어찌되었건 우리는 우리의 길을 떠나면 그만이었으니 특별히 손해 볼 것 은 없었다. 다만 친위대에 끌려간 마로우 걱정에 우리는 모두 말없이 먹 기만 했다. 라짐이 찾아 온 것은 역시 저녁식사를 마친 후였다. 라짐에게 와달라고 전갈을 보내지는 않았지만 라짐은 쥬리와 함께 영빈관을 찾아왔다. 물론 오리라고 상상은 하고 있었지만, 덕분에 초조한 시간을 보내야 했던 것만 큼은 사실이었다. "마로우님은 친위대가 보호하고 있습니다." 라짐이 말했다. "그건 알고 있네. 그게 보호건, 감금이건 간에 말이야. 우리가 알고자 하는 건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친위대가 마로우를 끌고 갔는가 하는 점이 네. 목적이 뭔가, 대체?" 오브라디 교수가 라짐에게 물었다. "혹시 마리누스 루베라는 이름을 알고 계십니까?" 라짐이 묻자, 나는 서커스 들판에서 들었던 마로우의 과거가 떠올랐다. "그래. 프라브리티 방화 사건으로 사형당했던 사람이지. 마로우의 아버 지이기도 하고." "그렇다면 루베 가문이 삼년전쟁이 끝날 무렵 볼모로 이곳 니브리티에 강제 이주되었다는 사실도 알고 계시겠군요, 오브라디 교수님." "그렇다고 알고 있네만." "그 루베 가문의 여자, 그러니까 루베 부인이 되겠지요, 하이디 루베가 한 일입니다. 하이디 루베는 볼모로 잡혀 온 다음 전향해서 스파일의 고 급 정보를 넘겨주는 것을 시작으로 친위대에서 근무하게 되었지요. 지금 은 친위대의 부관자리에까지 오른 고위 관료입니다." 라짐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그 하이디 루베라는 여자가 누구인지 알 수가 있었다. "그렇다면..." "예. 하이디 루베는 마로우의 어머니입니다." 그렇다면 마로우는 늘 그리던 어머니를 찾아 간 셈이 되는 것이었다. 나는 멍한 기분이 들었다. 친위대가 끌고 갔다고 해서 도대체 어떤 일이 마로우에게 벌어졌는가 했더니. 어쩌면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 싶기까지 했다. 나와 비슷한 생각인지 오브라디 교수도, 사빈도 아무 말도 하지 않 았다. 잠시 침묵이 있었다. "그럼 저희는 잠시 수르카 군과 이야기를 좀 나누겠습니다." 라짐이 예의바른 목소리로 오브라디 교수와 사빈에게 말했다. "이야기는 좋지. 하지만 여기서 하게." 오브라디 교수가 뜻밖의 반응을 보였다. 나는 영빈관 정원으로 나가려 다 말고 우뚝 멈추어 섰다. "하지만 긴밀하게 할 이야기가 좀..." "긴밀하게 해야 할 이야기라는 건 짐작하고 있네. 하지만 그렇다고 해 서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겠어." 오브라디 교수는 이렇게 말하고는 앉아 있던 돌의자에서 벌떡 일어났 다. 벽난로에서 지펴지고 있는 불기운을 받은 오브라디 교수의 얼굴이 붉 게 빛나고 있었다. 이제 곧 여름이었지만 해가 지면 날씨가 급격하게 추 워지곤 해서 영빈관에는 해가 지면 항상 이렇게 벽난로를 지폈다. "오늘 박물관에서 당신을 봤소, 쥬리." 오브라디 교수가 쥬리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쥬리는 어쩔줄 몰라하면서 라짐의 눈치를 살폈고, 라짐도 적잖이 당황하는 눈치였다. 물론 나야 무 슨 이야기가 오가고 있는지 감을 잡지 못해서 어리둥절해 있었고. "오늘 들었는데 그 박물관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은 지체 높은 귀족이나 영빈관에 묶고 있는 영웅, 아니면 다른 국가에서 온 손님이라고 하더군. 그런데 자네가 어떻게 들어 올 수 있었나? 물론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몰래 들어온 거, 잘 알고 있네." 잠시 동안 침묵이 있었다. 사빈은 자리에 앉아 손장난을 하고 있었는 데, 사빈의 손장난 때문에 나는 꽤 오랫동안 시간이 흐른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마법이었습니다." 한 참만에 침묵을 깨고 쥬리가 말했다. "그걸 물은 게 아니란 걸 알지 않는가? 왜 박물관에 왔지? 그리고 도대 체 뭘 원하는 거지?" "좋습니다, 오브라디 교수님. 알고 계신다면 어차피 교수님도, 또 일행 분도 저희와 이제 공범이라고 할 수 있으니 말씀드리지요." 라짐이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공범이라니? 마리하고 쥬리가 범죄라도 지었단 말인가? 물론 바람직한 일을 하고 있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공범이라는 말에 내가 당황한 것 은 그 다음 이야기를 듣고 나자 아무렇지도 않을 지경이 되어버렸다. "저와 쥬리, 그리고 수르카는 반란군의 일원입니다." 나는 농담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기분으로 라짐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라짐의 표정은 이제 어쩔 수 없게 되었다는, 꼭 나에게 미안하다 고 말하는 것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라짐의 말이 끝나자 사빈이 폭소를 터트렸다. "크핫. 수르카가 반란군이라구? 저 꼬마가? 이거봐요, 라짐. 농담하지 말아요." "그래. 라짐. 농담하는 거지? 내가 반란군이라니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나는 라짐에게 웃으면서 이렇게 물었다. 그러자 쥬리가 라짐 대신 대꾸 했다. "수르카. 이제는 속여도 소용없게 되었습니다." "속이다니, 누굴 속여요?" 나는 꼭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 쓴 사람 같은 마음으로 쥬리에게 되물었 다. "자꾸 그러지 마, 수르카. 이젠 다 알아버렸으니까." 라짐은 내 질문에 답할 생각도 하지 않고 이렇게 말을 이어갔다. "맞습니다, 오브라디 교수님. 우리는 반란군이에요. 그리고 그곳에서 아킨의 지팡이를 훔쳤지요. 저희가 부탁했어요, 수르카에게. 그곳에서 제 마의 신경을 분산시켜 달라고요. 박물관에서 마법을 눈치 챌 수 있는 사 람은 제마 뿐이었으니까요." "아니지." 오브라디 교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나도 있었다네. 비록 마법사는 아니지만 마법이 어떤 거라는 건 알지. 쥬리, 자네는 그곳에서 아킨의 지팡이를 훔치고 대신 조각을 그 자리에 가져다 놓았지?" "예. 맞습니다." 별일 아니라는 투로 쥬리는 대답했다. 이거 이대로 놓아 두었다가는 대 화 방향이 전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을 것 같았다. "잠깐만, 라짐. 내 말에 먼저 대답 좀 해봐!" 나는 라짐에게 소리를 질렀다. 라짐은 내가 소리를 지르자 내 얼굴을 빤히 처다보았다. 도대체 왜 그러냐는 듯한 얼굴이었다. "반란군은 뭐고 도둑질은 또 뭐야? 그리고 아킨의 지팡이니 공범이니 하는 건 또 무슨 말이고? 설명을 해 줘야 할거 아니야?" 나는 목소리를 가라앉히려고 노력하면서 라짐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제 서야 라짐은 내가 말하고 있는 걸 진지하게 받아들일 생각을 한 모양이었 다. "수르카, 그럼, 설마..." "그래. 난 반란군이 아니야. 도둑질은 안 했고 공범도 아니야. 무슨 일 인지 먼저 설명해 줘." 내가 차근차근 말하자 라짐은 이마에 손을 얹고 고민에 빠졌고, 쥬리는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알 수가 없다는 얼굴이 되었다. 그러자 오브라디 교수가 설명을 대신 했다. "가만있자. 내가 보니 사정은 이렇게 된 거였구만. 라짐 양과 쥬리는 반란군이 맞아. 그렇지? 그런데 라짐이 수르카 군을 반란군으로 잘못 알 고 뭔가 부탁을 한 거고 그리고 나서 이렇게 찾아와서 앞으로의 일을 의 논하려고 했군. 내 말이 맞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브라디 교수의 말을 듣고 보니 앞뒤가 맞아 들어갔다. "도대체 왜 날 반란군이라고 생각한 거야?" 나는 라짐에게 이렇게 물었다. "악마의 입, 그러니까 훈 족이 사는 마을에서 만났을 때 네가 말했잖 아. 반란군이라고." "나는 그런 말 한 기억 없는데." "만나자마자 야전 생활을 할 때 항상 조심하라고 했잖아. 달 없는 밤에 는 등뒤를 조심하고 길게 자란 수풀을 걸을 때는 발 밑을 조심하라고." "그야 네가 편지에 그렇게 썼으니까 그렇지." "그 말이 우리 반란군이 쓰는 암호란 말이야." 라짐의 대답은 전혀 예측하지 못한 것이었다. 나는 그저 라짐에게 편지 를 받은 적이 있다는 의미로 한 말이었는데, 그 말이 설마 반란군의 암호 였으리라고는, 아니 라짐이 반란군이라는 것도 나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 다. "그런 말을 편지 뒤에다가 쓰는 사람이 어디있어?" 나는 이렇게 라짐에게 쏘아 주었다. "그런 말을 오래간만에 만나자마자 하는 사람이 어디있어?" 라짐은 이렇게 말하면서 입술을 이죽였는데, 비록 옷도 다르고 모습도 많이 바뀐 라짐이었지만 탐그루에서 늘 보아온 라짐과 하나도 다를 게 없 다는 생각이 들어서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도대체 그 바람이라는 건 뭐였어, 그럼?" "당연히 아킨의 지팡이를 훔치는 일을 말한 거지. 어쩐지 네가 그 말을 알고 있는 게 이상하다 싶었어. 그럼 도대체 바람이라는 말을 뭐라고 생 각한 거야?" 나는 난처한 질문을 받는 바람에 아무 말도 못하고 어떻게 변명을 해야 하나 고심했다. 그런데 천만 다행으로 오브라디 교수가 나를 위기에서 구 출해 주었다. "내가 묻고 싶은 것은 말일세, 그 지팡이를 훔쳐서 뭐에 쓰려고 했냐는 걸세." 오브라디 교수가 물었다. 사빈은 오브라디 교수가 묻자 꼭 자기가 난처 한 질문을 받은 것처럼 헛기침을 크게 했다. 그러나 정작 쥬리는 태연하 게 오브라디 교수의 질문에 답했다. "아킨의 지팡이에 얽힌 전설 때문이지요." 쥬리가 말했다. "그렇다면, 지팡이의 주인이 세상을 구원한다는 그 전설 때문에 그랬다 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쥬리가 말하자 라짐이 바로 쥬리의 말에 덧붙였다. "예로부터 아킨의 지팡이를 가진 자가 세상을 구원한다는 전설이 있다 는 건 다 아시겠지요. 마칸이 다시 강림해 올 때, 그 지팡이를 가지고 있 는 자가 세상을 구원한다는 전설 말이에요. 지팡이는 아킨의 생가에 보관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팡이를 보관하기 위해서 박물관으로 꾸민 거 지요. 그리고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박물관에는 믿을 수 있는 높은 사람 만 들어갈 수 있게 한 거고, 박물관장을 대마법사로 정한 것도 국왕 입장 에서 믿을 수 있는 사람 손에 항상 아킨의 지팡이가 들어가도록 하기 위 해서였지요." 라짐이 말했다. "아니야. 제마가 그러는데 초대 박물관장은 아킨이었다고 하던데?" "그건 박물관장이 늘 지팡이를 가지고 있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거 짓말을 한 거지요. 그런 식으로 말해야 지팡이를 박물관에 보관해 두는 것도, 또한 대마법사가 박물관장을 하는 것도 정당성을 부여받을 수 있으 니까요." "그랬군." 오브라디 교수가 턱을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생각에 잠긴 표정인 것 같 았지만, 오브라디 교수는 별다른 생각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그런데 왜 그 지팡이를 훔친 거야?" 나는 라짐에게 이렇게 물어보았다. 그러자 사빈이 대신 대답했다. PRINTER/CAPTURE를 OFF 하시고 [ENTER] 를 누르십시오.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22097/22303 ━━━━━━━━━━━━━━━━━━━━━━━━━━━━━━━━━━━━━━━━ 제 목:[탐그루] 박물관장 제마 314 관련자료:없음 26/26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6-14 23:32 조회:951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그야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겠지. 앞으로 닥칠 마칸의 강림에 대비해 서. 아닌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사실, 만약 지팡이를 얻은 자가 세상을 구원한다 는 전설이 사실이라면 지팡이야 어떻게든 주인을 찾아가게 되겠지요. 우 리가 지팡이를 훔친 것은 순전히 정치적인 이유에서였습니다." "정치적 이유?" 오브라디 교수의 질문에 쥬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성황청이 가지고 있는 성구의 힘의 근원지가 타실 지부에 있다는 정보 를 카이사 장군에게 흘려 준 건 바로 저였습니다. 탐그루에 있는 우리 조 직원이 알려준 정보였지요. 우리는 일단 그 정보를 카이사 장군에게 넘겨 줌으로 해서 성황청에 신경을 집중시키도록 만든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계획을 진전시키기 위해서 였지요." "반란군에게 무엇인가 계획이 있었군, 그러고 보니." "그렇습니다, 오브라디 교수님." 쥬리가 말했다. "우리의 계획은 국왕의 죽음과 동시에 실행될 것입니다. 국왕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귀족들도 그것을 알고 있지요. 이제 곧 자신의 권 력에 대한 야심을 드러낼 것입니다. 아니, 벌써부터 드러내고 있습니다. 동타실과 서타실간의 정치적인 반목은 이제 곧 표면화 될 것입니다. 누가 국왕이 되건 간에요. 그렇다면 왕위 계승 문제는 정치적인 혼란으로 이어 질 것이고, 혼란은 곧 민생고로 이어질 게 분명합니다." "백성들이 고통받게 된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오브라디 교수님." 쥬리가 말했다. "마칸의 강림에 대해서 두려워하는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서 대비하고 움직이고 있는 건 역시 성황청 뿐이지요. 그러나 성황청의 길은 우리의 길과는 너무도 다릅니다. 우리는 타실이 정 치적으로 혼란한 틈을 타서 자나크를 거점으로 새로운 형태의 국가를 만 들고자 하는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일단 성황청 의 힘을 제거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계획은 성공했군." 라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과정이야 어찌 되었건, 성구를 잃은 성황 청의 힘이 예전같지는 않을 거라는 건 자명한 이치였다. "그런데 그 때까지 성황청이 자나크를 장악하고 있으리라는 보장이 어 디있는가? 당장 스파일이든 타실이든 자나크를 해방시킨다는 명목으로 얼 마든지 자나크를 침공해 들어가지 않겠는가?" "교수님. 지금까지 자나크 주의 역할은 스파일과 타실간의 힘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었습니다. 그 균형이 깨어지면 삼년전쟁과 같은 전쟁이 다시 일어나게 될 것은 분명한 이치니까요. 성황청이 자나크에 세력을 잡은 것 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그 어느 쪽도 타실이건, 스파일이건 상대방을 완 전히 누를 수 있는 힘을 가지지 못한 이상 함부로 자나크를 침공해 들어 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쥬리가 말했다. "그런 사실만 가지고 자나크에서 새로운 형태의 국가를 만든다는 게 가 능하리라고 생각하는가?" "어차피 우리가 하는 일은 확실한 가능성을 가지고 하는 일이 아닙니 다. 누군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지요." 쥬리의 목소리는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자나크에서 새로운 국가를 세우려고 한다면, 그건 틀림없는 무장봉기 겠군."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혁명이라고 부르지요." 쥬리가 말했다. 혁명. 나는 혁명이라는 말이 어쩐지 무서운 말처럼만 느껴졌다. 문득 하잔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혁명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 하는 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나는 그 말속에 피와 살육과 죽음의 냄새가 깊게 배어있다는 걸 알 수는 있었다. "자나크에 있는 우리 동지들이 이미 거사는 준비해 놓고 있습니다. 언 제든 때만 오면 자나크 주에서 봉기할 것입니다." "반란군의 세력이 그렇게 거대하단 말인가, 지금?" "그렇지는 않습니다. 만약 언제든 봉기가 가능할 정도의 세력을 우리가 확보하고 있다면 굳이 타실이 분열될 때를 기다리지 않았겠지요. 그래서 우리는 그 지팡이가 필요한 겁니다." "정치적인 이유라는 건 그런 말이었군." 오브라디 교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나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잠깐만. 지팡이를 가진 자가 세상을 구원한다면서요? 그런데 그게 정 치적인 이유하고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지요?" 사빈이 쥬리와 라짐에게 물었다. "제가 말씀드리죠." 라짐이 말했다. "무장봉기는 실제적으로 불가능해요. 병력도 없고, 무장할 돈도 없어 요, 우리에게는. 우리가 믿는 건 단지 사람의 힘일 뿐입니다. 자나크의 시민들이 가지고 있는 힘 말이지요." 나는 그제야 라짐이 하고 있는 말의 의미를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가 슴이 뛰어오르고 숨이 가빠왔다. 반란군이 갖고 있는 생각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잠깐만. 하잔에서 일어난 일을 알고 하는 소리야, 지금." "물론 하잔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고 있어, 수르카. 우리가 귀 족을 증오하는 이유가 바로 그런 귀족의 속성때문이기도 하니까." "지금 반란군이 하려는 짓이 어떤 짓인지 알고나 있어? 그건 하잔을 다 시 재현하겠다는 거잖아?" "하잔은 약했어. 맞서 싸울 기세만 가지고 맞서 싸울 수는 없었던 거 야. 하잔에서 반란군에 가담한 사람의 수가 많기는 했지만 결국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대로 귀족에게 투항했지." 나는 라짐의 말에 화가 났다. 도무지 그곳에서 있었던 일을 정말로 알 고서 저런 말을 하는 것 같지가 않았던 것이다. 아니, 안다면 저런 이야 기를 도저히 할 수가 없으리라 싶었다. "칼 앞에서 목숨을 아까워하는 건 당연한 일 아니야?" "우리가 필요한 건 칼 앞에서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는 사람이야. 그리 고 아킨의 지팡이는 그래서 필요한 거고. 마칸의 강림이 왔을 때, 아킨의 지팡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봉기를 일으킨다면? 사람들은 틀림없이 따 를 거야." "믿을 것이 있다면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지요. 그래서 정치적인 이유라고 말씀 드렸던 겁니다." 쥬리가 말했다. 나는 라짐과 쥬리의 모습이 사람이 아니라 차가운 어떤 덩어리처럼 느껴졌다. 그런 끔찍한 말을 어떻게 저렇게 태연하게 할 수가 있는지. 나는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럼 마칸의 강림은 무슨 수로 막으려는 거야?" 하지만 화를 낸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나는 침착하게, 또 박또박 이렇게 라짐에게 물었다. "그건 다음 문제야, 수르카. 마칸의 강림이 뭔지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어. 그리고 뭔지도 모르는 것에 우리가 희생을 감수할 수는 없어. 마칸 의 강림이야 막을 사람이 막겠지. 만약 막을 수 없다면, 그건 어쩔 수 없 는 거고. 우리는 우리가 당장 해야 할 일에 충실해야 하는 거야." "지금 네가 뭐라고 말했는지 알아?" 나는 여전히 흥분을 억누르면서 라짐에게 물었다. "지금 너는 이렇게 말했어. 사람이 죽건 말건, 나는 내 뜻만 이루면 된 다고. 사람 목숨보다 자신들의 뜻이 중요하다고 말이야. 도대체 어떻 게..." "모든 일에는 희생이 필요한 법입니다." 쥬리가 내 말을 끊었다. 희생? 희생이라고? 나는 쥬리의 얼굴을 바라보 았다. 저 병약한 얼굴이 사람이 죽어 가는 모습을 보고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피흘리는 사람과 팔다리를 잃은 사람, 잘 려 뒹구는 목과 길거리에 쏟아진 창자, 그리고 부모잃은 아이와 자식 잃 은 부모를 보고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래. 그 이야기는 그 정도만 해 두게. 정치적인 이야기는 어차피 견 해가 다를 수밖에 없으니까. 일단 사정을 알게 되었으니 그걸로 됐네." "오브라디 교수님. 우리가 여기까지 이야기 한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 다." 쥬리가 말했다. "하이디 루베는 마로우의 어머니이기도 하지만 반란군을 추적하는 일을 맡고 있기도 하지요. 사실 하이디 루베는 우리 사이에서 독거미라고 부르 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게 무슨 이유가 있다는 건가?" "아킨의 지팡이를 조각으로 바꿔치기 한 건 그리 오래가지 못할 것입니 다. 제마도 마법사입니다. 늦어도 내일이면 알아차리겠지요. 하이디 루베 는 틀림없이 우리를 의심할 것이고, 우리의 뒤를 추적할 것입니다." "그래서 또 뭘 부탁하겠다는 건가?" "그래요, 오브라디 교수님." 라짐이 말했다. "여러분은 훈장을 받은 영웅입니다. 손님들을 만나기로 한 일은 오늘 제마와 싸운 일 때문에 모두 취소 되었다는 건 아시지요. 아마 내일 마차 로 여기를 떠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영웅이니 수색 같은 건 하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오브라디 교수님. 그 지팡이는 타실에 있어서는 곤란합니다. 그 지팡 이는 탐그루로 가야만 해요. 교수님 일행이시라면 다른 곳에 있는 우리 동지에게 그것을 전해 주실 수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라짐이 말했다. "동지?" 사빈이 라짐에게 물었다. "저희가 암호와 접선 방법을 알려드리지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대단히 안전한 방법이 될 것입니다." "뭐라고?" 지금까지 이야기를 종합한 결과, 나는 대뜸 이렇게 라짐에게 되묻지 않 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내가 한 말, 못 들었어? 그런데 지팡이를 전해 달라고? 그게 말이 되는 소리야?" 나는 이렇게 말했다. 억눌렀던 흥분이 자꾸만 치솟아 올라서 나는 표정 을 제대로 관리할 수가 없었다. 아마도 내 얼굴은 상당히 일그러져 있었 으리라. "수르카 군. 그렇게 흥분하지 말게." 오브라디 교수가 말했다. "일단 이야기를 해 보는 게 어떻겠는가. 나는 솔직히 그 전설에 흥미가 가. 도대체 어떤 마력이 그 지팡이 안에 잠들어 있는가도 궁금하고. 수르 카 군. 자네 감정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조금만 더 생 각해 보면 우리가 하는 일에 도움이 될 수도 있어. 아니, 어쩌면 이건 전 설처럼 예견된 일일지도 모르네." "교수님!" 나는 이렇게 소리치면서 오브라디 교수를 바라보았다. 오브라디 교수도 똑같은 사람이구나 싶었다. 나는 더 이상 이 자리에 서 있을 수가 없었 다. 당장이라도 머리가 쪼개질 것만 같이 아파왔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영빈관의 정원에는 어 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빛이 나를 조롱하는 듯 뭐가 그리 신이 나는지 춤을 추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성이 나서 별 빛을 향해 주먹질을 해 보았지만 하나도 속이 시원해 지지 않았다. 문득 차가운 바람 한줄기가 내 몸을 스쳐지나갔다. 나는 옷깃을 여미면서 중얼 거렸다. "도대체 무슨 생각들을 하고 있는 거야? 도대체 뭘? 아니, 나를 뭘로 보는 거지? 나는 도대체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냐구. 나는 도저히 못 견 디겠어, 아니, 이제 안 견딜 거야. 다 때려 치겠어. 생각하기 싫어, 아무 것도!" 아마 내가 이렇게 횡설수설하는 것을 누군가 보았다면 아마 내가 미친 사람이 아닐까 했을 것이었다. 나는 한참을 더 지껄인 다음에야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어떤 일을 해야 할지 생각해 볼 수가 있었다. 나는 주변을 살펴보았다. 늘 우리를 지키고 있던 다섯 명의 사내들은 보이질 않았다. 아마도 이제 더 이상 우리를 지키고 있을 이유가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칫. 나는 어쩐지 세상 모든 사람으로부터 경시 당하 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어깨가 무거워왔다. "내* 마음의* 문을* 여니* 길을* 인도해* 다오*" 나는 일단 아자닌을 불러내기로 마음먹었다. 아자닌이라면 내 마음을 알아주리라 싶었기 때문이었다. "예. 부르셨습니까, 수르카 님." "아킨의 지팡이에 대해서 알고 있는 거 있어?" 나는 아자닌에게 이렇게 물었다. "아킨이 살았을 때 썼던 지팡이라고 합니다." 아자닌이 말했다. 도대체 어떻게 백번 물으면 백번 다 뻔한 대답만 하 는 건지. "나는 그런 게 있다는 얘기를 전에는 들어 본 적이 없는데." 나는 한숨처럼 이렇게 말했다. 만약 아킨이 자신이 썼던 지팡이가 이렇 게 후대에 정치적이고 개인적인 목적으로 쓰이게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 다면 아킨이 과연 어떤 말을 했을까 궁금했다. 만약에 내가 쓰는 물건이 후대에 이렇게 이용된다는 걸 알고 있다면 나는 아마 내가 쓰는 물건을 모조리 태워버렸으리라. "도대체 그 지팡이가 무슨 물건이라는 거야? 그걸 들고 마법을 걸면 마 법이 더 잘 걸리기라도 하는 모양이지?" "아킨이 성구를 사용하는 것을 일생동안 반대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합니 다. 그런 아킨이 마법이 남아 있는 지팡이를 남겼을 리가 없지요. 다만 아킨은 이런 예언을 남겼다고는 합니다. 자신이 사용한 지팡이를 사용하 는 자가 세상을 구원하리라." 내 비꼬는 듯한 말에 아자닌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아자닌의 말투가 어쩐지 가식적으로 느껴졌다. "세상을 구원한다니? 그 지팡이에는 마법도 없다면서?" "수르카 님. 그것은 예언일 뿐입니다." 아자닌이 말했다. "수르카 님이 여기까지 오시게 된 것을 돌이켜 보면 하나의 운명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그 운명들이 모여 수르카 님의 삶을 채워나가고 있습니다. 수르카 님. 그 지팡이 또한 수르카 님이 가지고 있는 운명의 일부일지 모릅니다." 아자닌이 말했다. 아자닌의 말에 동의한 것은 아니었지만 운명이라는 말을 듣자, 나는 다 른 생각이 떠올랐다. 예언이건, 운명이건, 그것에 대해서 내가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예언도, 운명도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내가 있는 자리에서 한다면 그것이 바로 내가 무엇인가 를 하고 있다는 말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어쩌면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운명이고 예언이 아닐까. 나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차가운 밤공기가 내 몸속에 차 들어오면서 가슴이 진정되는 걸 느낄 수가 있었다. "일부라는 말, 듣기 좋았어." 나는 아자닌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차근차근 정리해 보았다. 먼저 떠오른 것들은 막연한 것이었지만, 나는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되짚어 가다가 결국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아자닌. 들어가." 나는 이렇게 말하고는 다시 영빈관으로 들어갔다. 내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모두들 떫떠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오브라디 교수마저도 내가 먼저 입을 열 때까지 내 눈치를 살폈 다. "결정했어요. 아킨의 지팡이를 가지고 가겠어요." 내가 말하자 다들 뜻밖이라는 표정이 되었다. 예상했던 결과였다. "하지만 조건이 있어요. 그 지팡이는 내가 가지고 가야 해요." 내 말에 다들 어리둥절해 하는 것 같았다. "왜? 전설의 주인공이 되겠다는 거야?" "수르카 군. 어떤 생각으로 그렇게 판단한 건가?" 사빈과 오브라디 교수가 물었지만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런 건 때가 되면 말씀 드리죠." 나는 이렇게 말하고는 라짐과의 이야기에 마무리를 지었다. "라짐. 지팡이를 전해 주겠어, 내가. 그러니 이제 그만 돌아가." 나는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눌 생각도 하지 않고 내 방으로 들어가 문을 굳게 걸어 잠궜다. 해야 할 일이 뭔지 같은 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내 가 뭘 해야 하는지 내가 어떻게 판단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무엇을 해 야 한다, 혹은 무엇을 이루어야 한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항상 하는 짓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해야 할 일이 천천히 구 체적으로 머릿속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22098/22303 ━━━━━━━━━━━━━━━━━━━━━━━━━━━━━━━━━━━━━━━━ 제 목:[탐그루] 박물관장 제마 315 관련자료:없음 27/27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6-14 23:33 조회:856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이튿날, 간단하게 우유 한잔과 빵 몇 쪽 씩 먹은 우리 일행은 영빈관을 떠날 준비를 시작했다. 어차피 더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고, 이왕 떠나기 로 한 거, 조금이라도 빨리 떠나는 편이 낫겠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었 다. 사실 짐이라고 해 봐야 챙길 것도 몇 가지 없었다. 나는 배낭에 몇 가 지 물품을 챙기는 것으로 짐 정리를 마쳤다. 그런데 오랫동안 허리에 차 고 다닌 사비오 영감의 금화가 마음에 걸렸다. 늘 차고 다니던 것이라 무 겁다는 생각을 해 보지 못했는데, 짐을 챙기다 보니 허리에 찬 금화의 무 게가 느껴졌다. 사실 내 몸이 지탱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거웠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다만 금화를 남기고 간 사비오 영감이 나에게 금화를 통해 무언가 이야기하려고 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수르카 군, 사빈 군 못 봤는가? 오브라디 교수도 간단하게 짐 정리를 마친 모양이었다. 나는 못 보았다 고 오브라디 교수에게 말했다. "거 참 이상한 일이로군. 꽤 먼 곳까지 가야 하니 마차를 좀 알아보라 고 했는 데, 아직까지 오질 않고 있다니 말이야." 오브라디 교수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말했다. 영빈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난 것은 바로 다음 일이었다. "저,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모티사였다. 모티사는 주름잡힌 얼굴로 웃으면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 다. 빨리 가라고 말할 때는 언제고 또 이렇게 친절하게 대하다니.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사는 사람인지 모르겠단 말이야. 나는 모티사의 웃음이 담 고 있는 의미를 정확하게 알 수가 없었다. "손님이라고 했소? 손님을 만나는 계획은 모두 취소되었다면서?" "특별한 손님입니다, 오브라디 교수님." 모티사는 이렇게 말하고는 우리에게 허락도 받지 않고 영빈관 문을 열 었다. 우리를 찾아온 사람은 물론 특별한 사람이기는 했다. "마로우!" 나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시는 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찾아 올 줄은 정말로 몰랐던 것이다. 마로우를 보게 되니 기쁜 일 이기는 했지만 반드시 그랬던 것 만은 아니다. 마로우의 뒤편으로 서 있 는 다섯 명의 사내가 눈에 들어왔다. "이렇게 불쑥 찾아 뵙게 되어서 죄송합니다. 저는 리온이라고 합니다. 국왕 친위대의 수사과에서 일하고 있지요." 사내 중 하나가 복면을 벗고 우리에게 자기 소개를 했다. 나는 국왕 친 위대라는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아킨의 지팡이는 오늘 밤 니브리티 시 외곽에서 건네 받기로 했고, 우리 가 반란군과 접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었기 때 문에 굳이 가슴 조마조마해 할 필요는 없었지만, 그래도 상대는 국왕 친 위대인 것이다. "리온. 그냥 작별 인사 차 온 거잖아요?" 마로우가 말했지만 리온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오늘 떠나신다고 들었습니다. 국왕 폐하의 영예로운 훈장을 가슴에 달 고 돌아가시게 되었으니, 정말 기쁘시겠습니다." "예. 무척 기쁘군요. 가슴이 다 무거울 지경입니다." 리온의 말에 오브라디 교수는 이렇게 불쾌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리온 의 태도는 조금도 굽혀지지 않았다. "수르카. 내 소식은 알고 있지?" 마로우가 재빨리 나에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마로우의 팔 을 바라보았다. 마로우의 팔에 감겨 있던 붕대는 어느 사이 없어져 있었 다. 옷 밖으로 드러난 마로우의 팔에는 실을 감아 놓은 것 같은 작은 흉 터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나도 함께 가고는 싶어, 하지만..." 마로우는 말끝을 흐렸다. 나는 마로우를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만약 여행을 가다가 부모를 만났다면, 나 역시 여행 따위 집어치웠을 지 모르 기 때문이었다. 물론 나야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오래 전부터 부모님은 없었지만, 그래서 나는 더 마로우를 이해할 수 있었다. "아냐. 넌 그냥 여기서 살아. 네가 서커스 들판에서 했던 말, 나 기억 해. 어머니하고 가족이 여기 살잖아. 그거면 됐지, 뭐." 나는 이렇게 마로우에게 웃으면서 말해 주었다. 마로우는 고개를 숙이 고는 뭐라고 중얼거렸는데, 그 목소리는 리온의 목소리 때문에 묻혀버리 고 말았다. "오브라디 교수님. 제가 이곳을 찾은 건 마로우 님의 작별인사를 전하 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실은 제 업무 때문도 있습니다. 어제 박물관에서 아킨의 지팡이와 카를로스의 창이 도난당한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아니, 그게 사실이오?" 오브라디 교수는 뻔뻔스럽게도 놀랍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서 리온의 질 문에 대답했다. "범인은 마법을 쓰는 녀석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교한 가 짜 조각을 대신 그 자리에 놓아둔 걸 보면 말이죠. 그런데 풀리지 않는 의문도 있습니다. 왜 카를로스 장군의 창은 가짜 조각을 만들어 두지 않 았을까 하는 점입니다." "시간이 없었나 보지요, 뭐. 그런데 조각 마술을 쓸 줄 아는 사람이라 면 용의자의 범위가 매우 축소되지 않겠습니까?" "예. 이미 몇 명이 용의 선상에 올라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곳 영빈관 에서 조각을 하는 마법사인 쥬리 같은 경우도 이미 일차 조사가 끝난 상 태이지요." "그렇군요. 그런데 왜 그 이야기를 저희에게 물으시는 거지요?" 오브라디 교수가 리온에게 물었다. 리온은 아주 편안해 보이는 웃음을 지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당시에 그곳에 계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브라디 교수님, 저희 직 업이 의심하는 게 직업이다 보니 몇 가지 더 여쭐게 있군요. 오해 마시 길. 우선 수르카 님. 마법을 쓸 줄 아시죠?" 갑자기 리온의 질문이 나에게 날아오자 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마로우 와의 작별에만 신경을 쓰고 있었는데. 나는 작은 목소리고 그렇다고 대답 했다. "한 번 본 마법은 다 쓰실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제가 그렇게 대단한 마법사인줄은 저도 몰랐는데요."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러자 별로 우습지도 않은 내 말에 리온이 폭 소를 터트렸다. "그렇군요. 오브라디 교수님께도 여쭙지요. 먼저, 그날 박물관장이신 제마 님과 다투신 사실이 있지요?" "그렇소. 사소한 견해차이라고 생각하고 있소만." "그리고 교수님께서는 만약 그 지팡이가 없어질 경우 책임이 제마 님께 돌아간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겠지요? 그리고 제마 님 말에 따르면 오브라 디 교수님은 제마 님과 오래 전부터 앙숙이었다고 들었습니다. 상당히 깊 은 반목의 관계를 유지해 온 셈입니다. 맞습니까?"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오브라디 교수가 성난 말투로 말했다. 나는 오브라디 교수가 진짜로 화 가 나서 저렇게 말하는 건지, 아니면 자신에게 혐의가 돌아오는 것을 막 기 위해서 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우리를 의심할 줄은 정말 상 상도 해 보지 못했다. 그렇다면 라짐과 쥬리가 우리에게 지팡이를 맡기기 로 한 것은 완전한 오판이었는지 모르겠다 싶었다. "문제는 시기입니다. 오브라디 교수님과 제마 님이 다투신 직후에 문제 의 물건이 도난당한 것 같다는 사실이지요. 제마 님의 설명을 따르자면, 만약 그때 다투고 있지만 않았어도 누군가 마법을 쓰거나 침입하는 걸 알 수 있었을 거라고 말씀하셨거든요. 그래서 저는 이런 가설을 세워 봤습니 다. 오브라디 교수님은 이미 오래 전부터 어떤 마법사와 짜고 범행을 모 의했다. 뭐, 아는 마법사를 고용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여기 계신 수르 카 님에게 마법을 가르치셨을 수도 있지요. 그렇게 하다가..." "지금 당신, 국왕의 훈장을 받은 사람을 의심하는 거요, 지금?" 오브라디 교수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리온에게 다그쳤다. 그러자 리온 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씨익 웃음을 지었다. 마치 먹이의 헛점을 발 견한 맹수 같은 느낌의 미소였다. 그러자 오브라디 교수는 자신의 지나친 반응이 혐의를 더욱 증폭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침착하게 이렇게 말을 이었다. "리온. 그건 당신의 오해요. 뭐든지 설명할 수 있소. 합리적으로." 오브라디 교수가 이렇게 말하는 순간, 영빈관의 문이 열리면서 사빈이 돌아왔다. "아, 사빈 군. 저희 일행인 사빈 군입니다. 이곳을 떠날 마차를 구하러 다녀오는 길..." 오브라디 교수는 말을 더 이상 잇지 못했다. 사빈의 손에는 길다란 창 이 하나 들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창의 손잡이 부분에는 거대한 깃발이 달려 있어서 누가 보더라도 그 창이 영빈관 벽면에 조각되어 있는 카를로 스 장군의 창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거였다. "저건 어떻게 합리적으로 설명하실 겁니까?" 리온이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말했다. "사빈!" 순간 마로우가 소리쳤고, 사빈은 상황을 반사적으로 파악한 모양이었 다. 사빈의 창이 공중에서 두어 번 회전하는 가 싶더니, 복면을 한 사내 셋이 그대로 고꾸라 졌다. 그제야 나머지 하나는 칼을 뽑아 들었는데, 사 빈의 창이 깃발을 펄럭이며 회전을 하자 사내는 공격할 순간을 놓치고 말 았다. 사빈의 창끝이 거꾸로 회전해 들어가면서 사내의 배에 박혀들어갔 고, 사내는 고개를 숙이면서 앞으로 쓰러졌다. "당신들을 체포하겠소. 죄목은..." 리온이 사빈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말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마로우가 허리에 차고있던 칼끝으로 리온의 뒤통수를 내리쳤기 때문이었 다. "사빈!" 나는 사빈에게 소리쳤다. "걱정마, 수르카. 창날로 찌른 게 아니니까. 나도 그냥 절도범하고 살 인범하고 어떻게 다른지 정도는 알고 있다구." 사빈은 이렇게 말하면서 제 딴에는 멋있게 보이고 싶었는지 창날을 몇 번 공중에서 회전시켰다. "사빈, 내가 지금 그런 얘길 하는 게 아니잖아!" "그래. 수르카 군 말이 맞네. 아니 도대체 그 창은 언제 훔친 건가? 그 리고 왜 우리한테 말 안 했지?" "지금 말씀드리려던 참이었다구요, 오브라디 교수님. 그리고 수르카. 죄책감 가지지 말라고 그래 놓고는 왜 이제 와서 화를 내고 그래?" "뭐? 내가 언제?" 라고 나는 바로 대꾸했지만 이렇게 말하는 순간, 나는 내가 사빈에게 죄책감을 가지지 말라고 말했던 걸 기억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죄 책감을 가지지 말라고 한 것은 마차에 미리 올라 있던 사빈이 마로우를 지키지 못했다는 것에 대해서 죄책감을 가지지 말라는 뜻이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군. 마로우 군. 함께 도망쳐야겠네." "아닙니다, 오브라디 교수님." 마로우는 오브라디 교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마로우의 얼굴을 바 라보았다. 쓰러져 있는 리온을 바라보고 있는 마로우의 얼굴에는 결심이 서 있는 것 같았다. "저는 여기 남겠습니다. 그게 교수님 일행을 위해서도 좋고, 또한 저를 위해서도 좋습니다." "하지만 여기 남아있다가는..." "수르카. 내가 한 말 기억하고 있다고 했지? 내 꿈은 아버지의 누명을 벗기고 프란스 페르도가 단지 반란을 통해 영주 자리에 올랐다는 걸 증명 하는 일이라고 했잖아. 이제 여기서 그 꿈을 이루어 볼 작정이야. 더 바 랄 건 없어." "하지만 마로우 군." "교수님. 어제 어머님과 함께 이곳에 남아있는 역사 자료들을 살펴보았 습니다. 그 자료는 여기서 밖에 구할 수 없는 것이지요. 교수님. 그리고 이 사건을 진두지휘하고 계시는 건 제 어머님이십니다." 마로우가 웃으면서 말했다. 잠시 동안 아무도 말이 없었다. 나는 다시 마로우의 팔로 눈길이 돌아갔다. 마로우의 팔에 남아있는 가느다란 흉터 는 마치 햇살아래 옷에 눌린 자국처럼 보였다. 비록 여기서 헤어지게 되 더라도, 마로우는 우리와의 일을 저 흉터처럼이라도 기억해 주겠지. 나는 생각했다. "서두르지요, 오브라디 교수님. 마차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알겠네. 그럼, 마로우 군." 오브라디 교수는 마로우의 손을 한 번 잡은 후에 사빈을 뒤따라 나갔 다. "마로우..." "이해해줘서 고마워." 마로우는 이렇게 말하고는 내 손을 한 번 잡았다. 그리고 그것이 마지 막이었다. 나는 사빈과 함께 마차에 올랐다. "그런데 창은 왜 훔친 거야?" 마차가 출발하기 전에 나는 사빈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야 이제 본격적인 용 사냥을 하게 될 거니까 그랬지. 용 사냥꾼의 생명은 용의 심장을 한 번에 뚫을 수 있는 창이라고. 하하하. 걱정하지 마. 용만 잡고 나면 이 창, 제자리에 가져다 놓을 테니까. 그러고 나면 사람들은 나를 도둑놈이라고 하기 전에 위대한 용사냥꾼이라고 부르게 될 걸?" 차라리 얘기를 꺼내지 말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간 대답하고 는. 사빈이 막 뮤 고삐를 당기려는 순간이었다. 언제 나왔는지 모티사가 우리의 앞길을 막아서고 있었다. 나는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사빈 이 창으로 저 노인을 때린다면 잘못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 다. "그 동안 편히 잘 묵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모티사는 고개를 숙이면서 이렇게 인사한 후에 길을 비켜섰다. 나는 안 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모티사.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었습니다." 오브라디 교수가 말했다. "마지막까지 정말 친절하시군요." 오브라디 교수의 말에 모티사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이렇게 대답했다. "뭘요. 제 일인걸요." 그리고 사빈은 고삐를 잡아당겼고, 마차는 황급히 영빈관의 정문을 떠 났다. 우리가 라짐과 쥬리를 만나기로 한 것은 줄루 산맥의 끝자락이었다. 프 라브리티를 서둘러 빠져 나온 후 우리는 해가 질 때까지 줄루 산맥의 울 창한 숲에서 몸을 숨겼다. 산에서의 밤은 땅보다 훨씬 일찍 찾아온다. 차가운 바람도 평지보다 몇 배는 더 차갑고 매서웠고, 하늘에 보이는 별빛과 달빛도 평지와는 달리 또렷하고 차갑게 느껴지곤 했다. 약속한 시간은 달이 중천에 머물 즈음이 었다. 별들이 이제 제 자리를 잡은 듯 깜박일 즈음이 되자되자, 라짐이 약속 장소에 모습을 드러냈다. 약속장소를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유달리 눈에 뜨이는 커다란 나무와 그 밑에 있는 돌은 아무리 한밤중이라고는 해 도 알아보기가 쉬웠다. 그런데 동행한 사람은 쥬리가 아니라 처음 보는 낯선 얼굴이었다. "쥬리는 친위대에게 추적 당하고 있어서 다른 동지하고 함께 온 거야. 안심해." 라짐이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서로 인사는 하지 말기로 합시다. 어차피 오늘 하루만 보게 될 테니 까." 낯선 얼굴의 사내는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고개를 끄덕 였다. "먼저 이건 통행증이야. 피안까지 가는 동안 검문이 있으면 이걸 사용 하면 될 거야. 국왕의 직인이 찍혀 있는 통행증이거든." "피안?" "그래. 피안. 남쪽에 있는 작은 항구도시지. 거기서 우리 사람을 만나 게 될 거야." 라짐이 말했다. "그럼, 이제 작별이로군, 라짐 양." 오브라디 교수가 통행증을 받아들면서 말했다. "예. 하지만 살아 있는 한 다시 만나게 될 거라 믿습니다." 라짐은 이렇게 말하면서 허리를 숙였다. "이곳 줄루 산맥은 타실을 동타실과 서타실로 나누는 반목의 장이었지. 이 돌에 보니 그런 내용이 적혀 있더군. 여기서부터는 동타실이고 저기서 부터는 서타실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참 우스운 일이야. 다 같은 타실 사람 아닌가? 그 이전에 비스토브레 왕국 사람이고, 또 그 이전에 바르도 대륙 사람이고 그리고 무엇보다 다 같은 사람일텐데 말이야." "저희가 없애려고 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사람이 그저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세상. 그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그리고 그 세상은 말씀 하신 지역간의 반목과 다툼이 없는 세상이기도 할 테고요." 낯선 얼굴의 사내는 이렇게 말하면서 품에서 뭔가를 꺼넸다. "아킨의 지팡이입니다." 아킨의 지팡이였다. 아킨의 지팡이는 오래된 데다가 크기도 작아서 당 장이라도 힘을 주면 부서질 듯 보였다. 사내는 행여 떨어뜨릴까 조심스럽 게 지팡이를 나에게 건네주었다. "이걸 가지고 피안으로 가십시오. 거기에 도착하면 피안 시에 있는 중 앙 시장으로 가십시오. 거기에 가면 '파도 주점'이라는 술집이 있습니다. 주점에 들어가면 우리 사람들이 당신을 알아보고 접근해 올 겁니다. 만약 그 사람이 '올 여름에는 날씨가 좋지 않아서 배가 뜨지 못한다고 하더군 요'라고 말한다면 지팡이를 가지고 그냥 다른 곳으로 가십시오. 상황이 나쁘다는 암호니까요. '혹시 하잔에서 오신 분들 아니십니까?'이렇게 물 으시면 그렇다고 대답하시고 그 분을 뒤따라가시면 됩니다. 나머지는 그 곳에 있는 우리 동지들이 알아서 할 것입니다" 나는 지팡이를 품에 집어넣었다. 지팡이는 내 품에 꼭 들어갔다. "그런데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어떻게 알아보지요?" 사빈이 사내에게 물었다. 사내는 이렇게만 대답했다. "만나면 알게 되실 겁니다. 너무 늦지만 않는다면." 그리고 우리는 줄루 산맥을 마차 편으로 떠났다. 나는 마지막으로 라짐 에게 뭐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해야 할 말이 너무도 많이 남아있는 듯 했 다. 라이짐의 이야기나 또는 탐그루 소식 이야기, 또 그 동안 살아온 이 야기와 앞으로 살아갈 이야기들...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지팡이만을 받아 들고서 떠날 수밖에 없었다. 라짐도 나와 비슷한 마음이 들어서였을까. 꼭 한 번 뒤를 돌아보는 것 같기는 했다. 하지만 그 순간은 너무나도 짧았고, 나는 라짐에게 손 한 번 흔들어 주지 못하였 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22099/22303 ━━━━━━━━━━━━━━━━━━━━━━━━━━━━━━━━━━━━━━━━ 제 목:[탐그루] 박물관장 제마 316 관련자료:없음 27/27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6-14 23:33 조회:941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피안에 대해서는 이미 오래 전에 들어서 알고 있었다. 고기를 잡는 바 다마을. 작은 항구가 있어서 가까운 항구도시들 사이로 운항을 하기도 하 고, 인심이 좋고 아름다운 물고기들이 많이 잡히는 곳. 물론 백 번을 들 어봤자 단 한 번 직접 가보는 것만 못하다는 건 당연한 사실이었고, 이렇 게 마차 안에 앉아서 피안 시를 바라보고 있자니 가슴이 탁 트이는 느낌 이 들었다. 피안 시 입구에 도착했을 때, 마차를 몰던 사빈은 잠시 마차를 세웠다. "여기가 피안 시야." 사빈은 이렇게 말하면서 어깨를 주욱 폈다. 통행증이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만약에 있을 검문이나 수색을 피하기 위해 주로 밤에만 이동을 해 온 탓에, 새벽에 도착한 피안 시의 모습 앞에 일종의 경탄심이 이는 모양 이었다. 나는 마차에서 내려 피안시를 바라보았다. 새벽에 도착한지라 피안 시는 안개에 휩싸인 듯, 새벽의 으스름 아래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었다. 꼭 꿈에 나오는 도시처럼 보였다. "수르카. 어서 타. 서두르지 않으면 늦을 지도 몰라." 사빈이 말했다. 나는 마차에 앉아 있는 오브라디 교수를 바라보았다. "서두를 필요는 없지만 게을러져서야 안되지. 피곤한 걸 내가 모르는 건 아니네만, 부지런히 가는 게 어떻겠나?" 오브라디 교수가 이렇게 말하면서 우리 일행을 재촉했다. "잠시만요, 오브라디 교수님." 나는 이렇게 말하고는 우리가 지나온 북쪽을 바라보았다. 멀리 보이는 산맥의 모습이 내가 과연 저곳을 지나왔는가 의심스럽게 만들 지경으로 생경해 보였다. 어찌되었건 우리는 니브리티를 떠났다. 그리고 라짐을 다 시 만날 수는 없을 것이었다. 피안 시의 모습은 여전히 안개에 휩싸여 있 는 듯 보였다. 또 한 번, 나는 누군가를 만나 새로운 결심을 보여주어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서 내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뭐해, 수르카. 서두르지 않으면 늦을 지도 모른다니까." 사빈이 말했다. 나는 사빈을 보면서 고개를 살짝 끄덕인 다음, 마차에 다시 올랐다. "뭘 그렇게 생각하는 건데?" "네가 훔친 창, 어떻게 해야 안 들킬까 생각하고 있었다, 왜." 나는 이렇게 사빈에게 쏘아주었다. "걱정하지 마. 아무도 못알아 볼 테니까. 카를로스 장군이 살아 돌아와 서 본다고 해도 절대 모를 걸?" "카를로스 장군이 오지 않기만 빌게, 그럼." 사빈은 내 말에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껄껄거리면서 웃음을 터트렸지 만, 나는 마차 옆에 종이에 싸 달아 놓은 창이 자꾸만 불안했다. 깃발을 둘둘 감아 부피를 줄이기는 했지만 만약에 비가 온다던가, 혹은 어딘가에 부딪친다던가 하는 일이 생긴다면, 얼마든지 창이 밖으로 튀어나올 가능 성도 있었다. 나는 솔직히 불안했다. 가슴에 꼭 품고 있는 아킨의 지팡이 도 덩달아 신경이 쓰였다. "그런데, 수르카 군." 오브라디 교수가 나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왜 아킨의 지팡이를 운반해 주는 일을 하겠다고 했는지, 나는 여전히 잘 모르겠네. 또 자네가 직접 옮기기로 한 조건도 잘 이해가 가질 않고 말일세." 오브라디 교수는 이렇게 나에게 물었다. 나는 내 마음을 그대로 밝히기 에는 아직 이르다는 생각을 했다. "오브라디 교수님. 저는 그저 운명에 충실해야 겠다고 생각한 것 뿐입 니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는 그만 두었다. "이것 참, 난처하게 하는 군, 수르카 군. 도대체 자네 속을 읽을 수가 없어. 자네 성격에 세상을 구원하는 영웅이 되겠다는 생각 같은 걸 하는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사빈처럼 근사한 지팡이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는 생각도 아닌 것 같고..." "교수님. 저는 근사한 창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 없습니다. 그저 용을 잡기 위해서라니까요. 용만 잡으면 카를로스 장군의 창, 바로 돌려주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귀도 밝지. 마차를 몰면서도 사빈은 어떻게 오브라디 교수의 말을 듣고 는 이렇게 말했다. "알았어, 알았어. 그만 두지, 그 얘기는." 오브라디 교수는 이렇게 말하고는 작은 한숨을 뱉어내었다. 저런 사빈 의 모습을 오랫동안 보아왔으니 오브라디 교수가 사빈에 대해 어떤 마음 을 가지고 있을지 나는 짐작이 가서 혼자 창 밖을 보며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었다. 피안 시 중앙 시장을 찾는 일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피안시가 그리 큰 시가 아닌데다가 중앙 시장이라고 했으니 시 중심부에 있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시에 들어섰을 때 커다란 간판이 피안 시 중앙시장으로 가는 길을 알려주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중앙 시 장에서 파도 주점을 찾는 일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주점이 몇 군데 눈에 뜨이기는 했지만 상점들 사이사이에 드문드문 있었고, 사람들 에게 물어보아도 다들 바쁜지 성의 있게 대답해 주기는커녕 귀찮아했기 때문이었다. 시장 입구에 들어서자 더이상 마차를 타고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표지 판이 서 있는 게 눈에 띄었다. 우리는 마차에서 내려 뮤를 중앙 시장 앞 에 마련된 광장에 메어놓고 중앙시장으로 걸어 들어갔다. 피안 시 중앙시장은 아마도 피안시의 하루를 여는 곳인 것 같았다. 막 잡아 올린 물고기며 옷가지며 할 것 없이 중앙 시장에 모인 상인들은 오 늘 하루 팔 물건을 사기 위해서 정신없이 서로 아웅다웅하고 있었다. 물 론 소리치고 인상쓰는 상인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물건을 쌓아 놓은 상인이 다른 상인들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다른 상인 들은 그저 물건을 쌓아놓은 상인에게 손짓만 정신없이 보낼 뿐이었다. "교수님. 저 사람들 뭐 하는 건가요?" "경매라는 거지. 저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물건을 파는 상인이고, 서있 는 상인들이 물건을 살 상인들이야. 지금 손짓을 보내지 않는가? 저게 물 건의 가격을 말하는 거지." 나는 상인들의 손짓을 잘 살펴보았다. 손가락을 폈다가 주먹을 쥐었다 가, 또 코를 만졌다가, 귀를 만졌다가... 내가 보기에는 물건 가격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 같은 동작들이었다. "저런 식으로 가격을 결정하나요? 혹시 잘못 알면 어쩌죠?" "저게 직업이니까 그럴 일은 없어. 수르카 군. 자네도 조심하게. 머리 한 번 잘못 긁적였다가 생선 한 상자를 금화 두 닢에 사게 될 수도 있으 니까." 오브라디 교수가 농담조로 말했다. 나는 상인들의 바쁜 손짓과 오가는 물건들을 바라보면서 생기가 넘치고 있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피안 시는 이렇게 살아가는 구나. "외지 분들 같군요." 우리가 시장 귀퉁이를 돌아가고 있는데 누군가가 이렇게 물었다. 사빈 은 바짝 긴장을 하고서 뒤를 돌아보았고,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뒤에서 우리를 부른 사내는 상인처럼 보이는 옷차림에 말쑥해 보이는 젊은이였다. "혹시 하잔에서 오신 분들 아니십니까?" 사내가 우리에게 이렇게 물었다. 어떻게 우리를 알아 볼 수 있었을까? 나는 혹시 내가 아는 누군가가 근처에 있지 않을까 주변을 두리번거렸지 만 이렇게 복잡한 곳에서는 설사 내가 아는 얼굴이 있다고 해도 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렇습니다만." "그럼 따라오시지요. 제가 소개시켜드릴 분이 있습니다." 사내는 이렇게 말하고는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오브라디 교수는 긴 장이 되는지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고 사내를 뒤따르기 시작했다. 골목 몇 개를 돌자 중앙시장에서 벗어난 한적한 곳이 나타났다. 사람이 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고, 조금 전까지 북적거리던 시장통에 있었다 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지경이었다. "죄송합니다." 사내가 말했다. 나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허리에 차고 있는 나미트 장군의 칼로 손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이 칼을 뽑을 일이 없기만을 바 라는 마음이었다. 사내가 말하자 골목 어귀에서 건장한 사내 몇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마 도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파도주점으로 가는 게 아닌가?" 오브라디 교수가 사내에게 물었다. 사빈은 몸을 웅크리고 여차하면 단 검을 뽑으려는 듯이 손을 허리춤으로 가지고 갔다. "파도주점은 없어졌습니다. 지금부터 갈 곳은 저희 일과는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곳이기 때문에 외부인을 함부로 데리고 갈 수는 없지요." 건장한 사내들은 다가와 우리를 에워쌌다. 사내들이 시커먼 두건을 들 고 있는 게 눈에 띄었다. "죄송하지만 여기서부터는 이걸 좀 쓰셔야 겠습니다." 사내가 말했다. "자네들을 어떻게 믿지?" "만약에 해칠 마음이 있었다면 벌써 해쳤을 겁니다." 사빈의 물음에 사내는 이렇게 대답하고는 두건을 사내들로부터 건네 받 았다. "쓰십시오. 강제로 하지 않겠습니다." 사내는 웃는 얼굴로 말했다. 불쾌하기는 했지만 사내의 말에 따르지 않 을 수는 없었다. 그냥 지팡이만 받아 가지고 가면 될 걸 이렇게까지 하는 걸 보니 믿음이 완전히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런 두건을 뒤집어쓴다는 게 그리 내키는 일은 아니었다. 두건을 가장 먼저 쓴 것은 오브라디 교수였다. 내가 그 뒤를 따랐고, 아마 사빈도 바로 이어서 두건을 쓴 모양이었다. "잠깐만. 중앙 시장 앞에 마차를 세워 두었는데..." "걱정 마십시오. 저희 쪽 사람이 잘 챙길 겁니다." 사빈의 말에 사내가 대답했다. 우리는 얼마를 걸어간 다음에 마차에 올랐고, 또 한 참을 마차로 이동 한 다음에 다시 한 참을 걸어갔다. 아마 그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 이지만 우리가 가려는 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도록 빙빙 돌아가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여간 이렇게 한참을 걸은 다음에 우리는 건물 안에 들어갈 수 있었다. 건물은 지하와 지상으로 나누어져 있는 모양이었다. 건물 문 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우리는 사내의 팔에 이끌려 계단으로 내려갔 다. "잠시." 사내는 이렇게 말하고는 내 허리에서 나미트의 칼을 벗겨내었다. 소리 로 보아 사빈도 단검을 빼앗기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제 됐습니다. 무기는 나가시는 길에 돌려 드리지요. 고생하셨습니 다. 이제는 그걸 벗으셔도 좋습니다." 사내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조금 떨리는 마음으로 두건을 벗었다. 과 연 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누구를 만나게 될지 궁금했기 때문이었 다. 무장을 해제시킨걸 보면 틀림 없이 평범한 인물은 아닐것이리라 생각 되었다. 두건을 벗고 난 후에 나는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두건을 쓰니 답답해 서 눈을 감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오랫동안 눈을 감고 있어서 눈이 부실 거라고 생각했지만, 내 눈앞에 펼쳐진 것은 어두운 지하실과 약한 연금술 사의 등이었다. 창고로 쓰던 곳이었는지 군데군데 나무상자들이 놓여 있 었고, 그 옆으로 거미줄이 쳐져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오래간 만이군, 수르카."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나는 연금술사의 등 아래 서 있는 사내를 바라 보았다. 덩치가 크고, 입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수염을 기르고 있는 사내 가 눈앞에 보였다. "지다문 십부장님?" "아니. 이제는 그냥 지다문일세." 지다문이 대답했다. 지다문이 하얀 여우 미하엘과 함께 탈출했다는 이 야기는 언뜻 들은 적이 있었지만 정말로 이렇게 반란군이 되어 내 눈앞에 나타날 줄은 몰랐다. "어떻게 절 기억하시지요?" "하잔에 있을 때, 성황청 사제가 찾아와서 자네를 넘겨달라고 했던 일, 기억 하지? 그때 눈여겨 보고 있었네." 지다문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냥 지팡이만 받아 올 수도 있었다는 건 알고 있겠지?" "예. 하지만 제가 직접 지팡이를 들고 오겠다고 말하면 뵐 수 있을 거 라고 짐작했습니다." 나는 지다문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지팡이를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용하 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면 틀림없이 나와 누군가 이야기를 하게 될 거 라고 나는 믿었다. 그리고 내 생각은 그리 틀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다만 그것이 지다문일 줄은 몰랐지만. "왜 그렇게 생각했지?" "지팡이를 훔쳐서 정치적인 목적으로 사용하려고 생각하는 사람이 반란 군에 있다면, 제가 어떤 역할을 하게 될지에 대해서도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말씀하신 그대로, 지다문 님이 반란군에 계실 거라고 짐작은 하고 있었습니다. 꼭 지다문 님이 아니더라도 성황청의 사 제들이 저를 필요로 했던 이유를 기억하는 사람이 하나쯤은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거지요. 만약에 제가 직접 이 지팡이를 들고 가겠다고 말한다 면, 지다문 님이건, 혹은 누구건 저를 꼭 만나려고 할거라고 생각했습니 다." 나는 오는 동안 생각해 두었던 말을 지다문에게 전했다. 나는 성황청 사제들이 나를 필요로 하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 중에 지다문도 있을 것이 라고 생각했지만, 설마 지다문과 이렇게 직접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럴 듯한 생각이로군." 지다문은 이렇게 말하고는 우리를 데리고 왔던 사내들에게 나가있으라 는 손짓을 보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지다문은 뭔가 고민하고 있는 얼 굴이었다. 나는 지다문이 말하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오브라디 교수와 사 빈의 시선이 느껴졌다. 나와 지다문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몸으로 느껴 졌다. "맞아, 수르카. 내가 자네를 이렇게 위험을 무릅쓰고 데리고 온 것은 그런 이유가 있었다네." 결국 지다문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내 생각이 맞았다는 것을 확인 한 동시에, 지다문이 나에게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알 수가 있었다. "자네가 그렇게 까지 말하는 걸 보니, 따로 부탁하지 않아도 좋을 것 같군. 수르카 군. 우리가 원하는 건 아킨의 지팡이와 전설의 주인공일 세." 지다문이 말했다. "잠깐만. 하나 묻겠소." 오브라디 교수가 지다문의 말을 막아섰다. "당신들이 원하는 것은 마칸의 강림을 막는 일이오?" 오브라디 교수의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오브라디 교수로서는 내가 지 다문의 의견에 동조하고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고, 아마 오브라디 교수가 이렇게 물은 이유는 반란군이 진심으로 나를 도울 생각이 있는 가를 알고 자 함이었을 것이다. "죄송하지만, 오브라디 교수님. 그건 아니오." 지다문이 말했다. 나는 알고 있었다. 지다문이든 누구건 진정 마칸의 강림을 막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제가 대신 말씀드려볼까요?" 나는 이렇게 대화에 불쑥 끼어 들었다. "반란군이 원하는 건 자나크 주 시민의 봉기와 그로부터 출발하는 자나 크 주의 독립 아닙니까? 마칸의 강림에 대해서는 아는 것도 없고, 알고 싶어하지도 않지요. 다만 시민들이 마칸의 강림에 대해서 두려워하고, 마 물의 출현을 겁내는 걸 이용할 뿐이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내 말투가 공격적으로 들렸는지, 지다문의 턱수염이 꿈틀거렸다. 나는 지다문의 대답을 기다렸다. "솔직하게 말하지. 그렇다네." 지다문은 깨끗하게 자신의 생각을 인정했다. 나는 지다문이 남자다운 사람이라는 것을, 그리고 자신의 목숨처럼 부하의 목숨을 아끼고 적군의 목숨 또한 아끼는 사람이라는 것을 용병단 시절을 통해 알고 있었다. 나 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가 내쉬었다. 침착해야 했다. 쓸데없이 흥분했다 가는 일을 그르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그전에 먼저 하고 싶은 말이 있군요, 저도." 불쑥 사빈이 대화에 끼어 들었다. 사빈은 아무 말 하지 않을 줄 알았는 데, 의외였다. "뭡니까." "그 뒤편에 계신 분도 앞으로 나오라고 하시지요. 저는 직업이 용사냥 꾼이다 보니까 제 시야에 벗어난 곳에서 누군가 저를 지켜보는 걸 좋아하 지 않습니다." 사빈이 말했다. 나는 사빈의 말을 듣고서야 지다문의 뒤편, 어두운 곳 에 시커먼 그림자가 하나 도사리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지다문 은 그쪽을 돌아보았고, 그러자 그림자가 천천히 움직였다. "어차피 나도 이야기해야겠다 싶었소." 그림자는 이렇게 말하면서 연금술사의 등 앞으로 나섰다. 나는 그의 얼 굴을 보는 순간, 그가 누구인지는 알 수 있었다. 하잔에서 본 적이 있었 기 때문이었다. 그는 바로 하얀 여우 미하엘이었다. "내가 나서야 할 자리인지 아닌지 판단이 잘 서질 않았기 때문이었소. 이해하시길." 미하엘은 이렇게 말하면서 우리를 바라보았다. 하얀 백발의 머리가 연 금술사의 등 아래에서 노랗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말씀 잘 들었소. 아마도 라짐 동지나 쥬리 동지에게서 들은 모양인 것 같더군. 뭐, 어찌되었건 좋소. 거래라고 생각하면 어떻소? 당신들이 마칸 의 강림을 막기 위해서 하고 있다는 일에 대해서는 알고 있소. 마소드의 검을 찾아 탐그루로 향하고 있다는 것도, 그리고 그 검을 찾아 하잔의 까 마귀 벌판에 있는 바위에 꽂으려고 하고 있다는 것도. 그럼 거래를 합시 다. 우리는 당신들에게 탐그루로 갈 수 있는 배편을 마련해 주겠소." 미하일이 말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22142/22303 ━━━━━━━━━━━━━━━━━━━━━━━━━━━━━━━━━━━━━━━━ 제 목:[탐그루] 박물관장 제마 317 관련자료:없음 20/20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6-15 18:54 조회:1004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배편? 육로가 있지 않소." 오브라디 교수가 물었다. 그러자 미하엘이 껄껄 거리면서 웃음을 터트 렸다. "육로? 지금 성황청이 장악한 자나크는 전쟁 상태나 다를 바 없소. 그 런데 전쟁중인 국경을 육로로 넘을 수 있을 것 같소?" 그 사실은 알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가 어 려웠다. 배편을 제공해 준다는 건 일단 좋은 조건이었다. "배는 우리도 마련할 수 있소." "아니. 지금은 어려울 거요, 오브라디 교수. 참. 모르고 있었나 보군. 당신들이 니브리티를 떠나 이곳으로 오는 동안 스파일에서 무슨 일이 있 었는지." 미하엘은 자신이 이야기하려는 것에 무게를 주기 위해서 잠시 이야기를 멈추었다가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자나크는 지금 아케르의 손에 넘어갔소. 반란이었지. 아니, 이제 성공 했으니 혁명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소만." 미하엘이 말했다. 나는 미하엘의 말을 듣는 순간 충격을 받았다. 스파 일에서 라이짐이 성황청과 맞서 싸우고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미 하엘의 말은 뜻밖이었기 때문이었다. "자나크 주가 타실과 스파일 사이에서 힘의 완충지 역할을 해 왔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을 것이오. 그런데 스파일이 영주권을 자의로 발동하여 자나크를 치려고 했다는 사실이 타실에까지 알려졌소. 그런데 명령을 받은 아케르는 대청하에서 군대를 돌려 스파일을 장악해 버렸지. 이미 프라브리티는 장악한 상태고, 군인들도 대부분 아케르의 편으로 돌 아섰다오. 이게 뭘 뜻하는 지 아시오?" "힘의 균형이 무너질지 모른다는 것이로군요." 나는 이렇게 말했다. 아케르가 스파일을 장악했다면 일단 스파일이 안 정되면 곧장 자나크로, 타실로 밀고 들어올 것이 분명했다. "아케르의 생각은 이럴 거요. 일단 반란에 성공했으니 뭔가 사람들의 마음을 끌 것이 필요하겠지. 내부의 불만을 가장 쉽게 해소시킬 수 있는 방법이 뭔지 아시오?" 미하엘이 말했다. "전쟁이지. 내부의 불만을 외부로 돌릴 수 있으니까." 이렇게 말하는 오브라디 교수의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 "그렇소. 이제 머지 않아 아케르는 자타크로 침공해 들어갈 것이오. 그 렇게 된다면 성황청은 어떤 수를 둘 것인가? 타실 입장에서도 전전긍긍하 지 않을 수 없지. 일단 지금은 국경에 병력을 보강하고 경계태세를 강화 하고 여행을 통제하는 정도지만 경각심은 고조된 상태라오. 그런데 배가 뜰 수가 있겠소? 어림없는 소리지." 미하엘이 말했다. "그렇게 까지 민감하게 반응할 만한 일인가요, 그게?" 나는 미하엘에게 이렇게 물었다. 미하엘의 대답은 명료했다. "그렇소. 우리가 아케르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처럼 타실 관료들도 아 케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지. 그가 야심가라는 사실, 이번 일로 증명 된 거라고 할 수 있으니. 타실에도 바보만 살고 있지는 않다오." 우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도무지 무엇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 가 없었던 것이다. "오브라디 교수. 수르카. 우리는 배를 마련할 수 있소. 물론 안전하다 고는 할 수 없지만 지금 상황에서 탐그루로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 것 이오. 성황청은 운하는 장악하고 있지만 바다는 손을 놓고 있거든. 아시 다시피 바르도 대륙에는 바다에서 싸우는 전통이 없다오. 다만 고기잡이 배 뿐이지." "좋소. 당신들이 배를 구할 수 있다고 합시다. 그럼 거래라고 했는데, 당신들이 원하는 게 있을 게 틀림 없구려. 그럼 도대체 원하는 게 뭐요?" 오브라디 교수가 미하엘에게 물었다. 미하엘은 내쪽으로 천천히 시선을 돌린 다음 이렇게 말했다. "수르카. 당신은 지팡이를 가지고 탐그루로 가면 되오. 거기서 우리 동 지를 만나면 동지가 해야 할 일을 알려 줄 것이오." "반란에 앞장서라는 거군." 사빈이 내뱉었다. 기분 나쁘다는 듯한 음성이었다. "나쁘게만 생각할 일은 아니오. 수르카. 아케르가 스파일을 장악할 수 있었던 이유가 뭔지 아시오? 사람들은 그가 강력한 무기를 만들고 그것으 로 새로운 전술을 구사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소. 그렇지만 그건 일 부만 보고 전체는 보지 못하는 행동이지. 아케르가 반란에 성공할 수 있 었던 건 시민의 지지를 얻었기 때문이지." 나는 미하엘의 이 말에서 반란군이 진정으로 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 지 알 수가 있었다. "그러니까 나를 이용해서 민심을 얻겠다는 거군요, 지금." "그렇네, 수르카. 민심 없이 아케르는 성공하지 못해. 아케르도 그걸 알고." 이번에는 지다문이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더 이상 듣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도저히 미하엘이 생각하는 바를, 반란군이 생각하는 바를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지금 하잔의 일을 다시 반복하겠다는 겁니까?" 나는 이렇게 말했다. 가슴이 뛰어오르고 있었다. 내가 지팡이를 가지고 여기까지 오려고 한 것에는 이런 이유가 있었다. 반란군의 누군가에게 이 런 말을 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이건 희생은 필요한 법이야." 지다문이 말했다. 라짐이 했던 말과 같은 말이었다. "변했군요. 그곳에서 시민들과 함께 싸우던 미하엘과 시민을 죽인 것 때문에 괴로워하던 지다문은 어디로 가버렸습니까?" 나는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여기까지 온 거였다. 내가 말하자 미하 엘과 지다문의 얼굴에 당혹의 빛이 뚜렷하게 드러났다. "나는 당신이 법정에서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미하엘. 당신은 귀족을 공격했지요. 하지만 지금 당신의 모습을 보세요. 지금 당신과 당 신이 비난했던 귀족과 무엇이 다릅니까?" 내가 말하자 지다문과 미하엘은 굳게 입을 다문 그대로 가만히 서 있었 다. 얼마나 지났을까. 지다문이 입을 열었다. "이런 이야기가 나올 줄 알았어. 그래서 동지들을 내보냈지. 하지만 수 르카. 세상은 변한다네. 그리고 자네처럼 단순하게 생각할 수만은 없는 게 세상사는 이치야." 지다문의 이 말은 사실상의 논쟁을 포기하겠다는 말과 같은 말이었다. "결국 당신들이 지금 하는 일이 무엇인가를 알면서도 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군요." "그래. 하지만 우리를 믿고 따르는 동지들이 있어. 우리는 그걸 배신할 수 없네." "의리. 그거 좋지요. 하지만 그게 사람의 목숨보다 소중한가요?" 나는 이렇게 물었다. 물론 두 사람은 대답이 없었다. 나는 천천히 말을 계속했다.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조각가는 바위 속에 숨어 있던 조각을 찾아내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어쩌면 마법사는 사람의 마음에 숨어 있는 능력을 끄집어내는 능력을 가진 사람인지 몰라요." 나는 품에 품고 있었던 지팡이를 꺼내었다. "이 지팡이에는 아킨의 마음이 들어있어요. 아킨이 성구의 사용을 반대 했다는 건 유명한 이야기죠. 아킨이 경계했던 것은 마법이 자칫 이런 지 팡이와 혼동되는 것을 막으려고 했던 거에요." 나는 이렇게 말하고는 지팡이를 힘껏 바닥에 내 던졌다. 내 행동에 오 브라디 교수는 물론이고 사빈과 미하엘, 그리고 지다문도 깜짝 놀랐다. 낡은 지팡이는 바닥에서 산산히 부서졌다. "아까 민심이라는 이야기를 하셨지요? 사람의 마음은 진실한 마음으로 만 움직일 수 있어요. 이런 지팡이가 아니라. 그리고 당신들이 진정으로 사람들을 위한다면 그런 짓은 하지 않을 거예요, 결코." 나는 이렇게 말하고는 사빈과 오브라디 교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가요, 우리." "하지만..." 사빈이 뭐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나는 무시하고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오브라디 교수가 내 뒤를 따랐고 사빈도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뒤를 따라나섰다. 나는 뒤돌아보지 않았지만 힘없이 지하실 입구에 서 있을 지 다문과 미하엘의 모습이 보이는 듯 했다. 지하실 입구에 올라서자 사내들이 우리를 나가려는 우리를 막아섰다. "보내드리게." 등뒤에서 미하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내 하나가 우리에게 인상을 썼지만, 미하엘의 목소리에 결국 무기를 내주었다. 사내의 얼굴에 불만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결국 사내들은 우리에게 길을 비켜주었다. 그래서 우 리는 얼굴에 두건을 쓰지도 않고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런데 탐그루로는 어떻게 가지? 그곳에서 마소드의 검을 얻지 못하면 마칸의 강림을 막을 방법이 없지 않는가?" 무기를 돌려 받고 중앙 시장으로 가는 길에 오브라디 교수가 나에게 물 었다. "일단 마차에 타죠. 그리고 나서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요?" 나는 오브라디 교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수르카. 그런데 나, 걱정되는 게 있어." 사빈이 나에게 말했다. "마차에 달아둔 카를로스 장군의 창, 녀석들이 가져갔으면 어쩌지?" 사빈은 내 말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뭐라고 말해주려고 했지만 그만 두었다. 사빈 같은 사람은 결코 이해하지 못할 말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사빈은 그런 마 음을 굳이 갖고 살지 않아도 좋을 사람일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시장을 지나고 있었을 때, 바쁘게 움직였던 시장은 이제 천천히 보통의 시장같은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는 듯 했다. 물건을 파는 상인과 조금이라 도 더 싸게 물건을 사려는 사람들 사이의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는 모습은 친숙하게 까지 느껴졌다. 손짓으로만 물건 값을 정하는 경매에 비한다면, 지금 시장의 모습이 오히려 생기가 넘치고 있었다. "다들 열심히 사는 모양이로군." 오브라디 교수가 생선 한 마리를 사 들고 가는 아낙의 모습을 바라보면 서 말했다. 아마도 생각보다 싸게 물건을 샀는지, 아낙의 얼굴에는 웃음 이 가득했다. 예술 마법사 쥬리는 조각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구현해 내는 사람이었 다. 그리고 비록 거짓말이라고 하기는 했지만, 조각이란 바위 속에 숨어 있는 것을 찾아내는 능력이라는 말을 했다. 나는 아킨의 지팡이 속에서 무엇을 찾아 낸 것일까. 물론 그건 내가 말한 그대로 아마도 아킨의 마음 이 아니었을까.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시장 앞의 공터에 닿았을 때, 우리는 우리를 데리고 갔던 사내가 마차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사내는 우리를 발견하고는 물끄러미 우리 일행을 바라 보았다. 잠시 불길한 예감이 들기는 했지만, 나는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겨 사내에게 다가갔다. "뭔가요. 아직 용건이 남았나요?" 나는 사내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하엘 님께서 전해 달라고 하신 게 있었습니다." 사내는 종이를 내밀었다. "오늘 밤 자정에 배가 떠납니다. 이 배에 타시면 됩니다. 배에 탈 때 이 종이를 보이면 될 겁니다." 종이에는 항구의 위치와 미하엘의 서명이 적혀있었다. "잠깐. 거래는 하지 않겠다고 말했는데..." "진실된 마음이라고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사내가 말했다. "그리고 이 말도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당신이라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고요." 사내는 이렇게 말하고는 자리를 떠났다. 나는 사내의 뒷모습을 바라보 았다. 사내의 뒷모습에서 나는 미하엘과 지다문을 느낄 수 있었다. "저 친구들, 생각보다는 괜찮은 녀석들인걸." 사빈이 말했다. "그렇군. 배까지 내 주다니..." "아뇨. 창을 안 훔쳐 갔어요." 사빈이 마차 옆에 붙어 있는 종이로 싼 카를로스의 창을 손으로 툭툭 치면서 말했다. 나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수르카 군. 자네는 아무래도 미하엘과 지다문의 마음을 움직인 모양이 로군. 도대체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된 걸까." 오브라디 교수가 이렇게 물었다. 아마 나에게 묻는 질문은 아니었을 것 이다. "아마도 마법일 겁니다." 하지만 나는 오브라디 교수의 질문에 웃음을 지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하늘은 높고도 맑았다. 아무래도 항해는 순조로울 것 같았다. 탐그루다. 이제 탐그루로 돌아가는 거다. 지금까지 어떤 여행에서도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 나를 감싸왔다. 설레임, 두려움, 그리움 그리고 뭐라고 더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들이 물밀 듯이 밀려 들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22143/22303 ━━━━━━━━━━━━━━━━━━━━━━━━━━━━━━━━━━━━━━━━ 제 목:[탐그루] 자유의 용 318 관련자료:없음 21/21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6-15 18:55 조회:1056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 자유의 용 "...이렇게 해서 수르카는 미하엘이 마련해 준 탐그루로 가는 배에 오 르게 되었습니다. 자신도 뭐라 이름 붙일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을 지닌 채 탐그루로 돌아가게 된 것이죠. 하지만 그것이 진정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 이 될지는 아직 아무도 모르는 일이죠." 세헤라자드는 여기까지 말하고 이야기를 끊었다. 나는 별다른 말을 하 지 않았다. 고향? 내게도 고향이라는 것이 있을까? 내 고향은 혹시 소드 엔매직 온라인의 세계가 아닐까? 실없는 생각이었다. "아톰과 리파이가 다시 살아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걸까." 나는 세헤라자드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사실 질문은 아 니었다. 그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것뿐이었다. 언젠가는 세헤라자드의 이야기도 끝나게 될테고, 나는 어쩌면 다시는 프로 게이머 일을 하지 못 하게 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톰과 리파이도 어쩌면 다시는 깨어나지 못할 것이었다. 다른 차원의 세계에서라면 또 모르겠지만. "아톰과 리파이가 죽었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세헤라자드가 나에게 물었다. "깨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나는 창이 나 있는 벽 쪽에 등을 기대면서 말했다. 벽의 냉기가 몸에 스며 들었다. 창을 통해서 어느 새 환해진 한 낮의 햇살이 비추고 있었 다. 벽에 비친 햇살은 마치 밝은 모니터 화면처럼 빛나고 있었다. "아톰과 리파이가 게이머로 살 수 없을지는 모르지만요, 비류 님. 하지 만 다른 생명체로 다르게 살아갈 수는 있지 않을까 싶네요." 나는 세헤라자드에게 이렇게 물었다. "다른 생명체로 다르게 살아간다면 그건 죽은 거나 다를 바 없잖아." 나는 이렇게 말하면서 눈을 감았다. 이제 리파이와 아톰을 다시 만날 수 없게 된 걸까. 문득 우울한 기분이 들고 말아서, 나는 심호흡을 몇 번 해야만 했다. 가슴이 자꾸 뛰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결국 다시 만난다고 하더군요." 세헤라자드는 이렇게 말하고는 뭐라고 나에게 설명을 했던 것 같았지 만, 나는 그냥 쓰러져서 잠이 들어버리고 말았다. 지독한 꿈이 덮쳐올 것 같은 잠이었다. "비류 씨." 오토의 목소리에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꽤 오래 잠든 것 같다고 느꼈 지만 시간은 얼마 지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꿈까지 꾸었던 것 같은데 어 떤 꿈이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저 불쾌한 어떤 느낌과 뭔가 가 내 몸을 누르고 있는 것 같은 압박감 정도가 느껴졌을 뿐이었다. "잘 주무셨습니까?" 잠을 깨워 놓고는 저런 말이 나올까?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 가 가려워서 손을 머리 쪽으로 가지고 갔더니 머리가 엉망으로 떠 있는 게 손으로도 느껴졌다. "젯나이트라도 돌아왔나요?" 나는 오토에게 이렇게 물었다. 사실 내 말투는 불만을 드러내고 있었는 데, 오토는 내가 잠에서 깬 걸 기분 나빠한다는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 한 모양이었다. "아닙니다. 하지만 돌아온 분이 있지요." 나는 오토의 말에 아톰과 리파이를 떠올랐다. 설마. "누구...죠?" 나는 조심스럽게 이렇게 물었다. 아톰과 리파이가 돌아 왔다면 좋을 텐 데. 그리고 다시 프로 게이머 일을 다시 하게 된다면 좋을 텐데. 하지만 그럴 리는 없었다. "건입니다. 치료가 끝난 모양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오토의 표정은 밝게 웃고 있었다. 좀처럼 표정을 드러내 지 않는 오토가 이렇게 웃는 모습을 보는 건 정말 드문 일이었다. 아마도 지난 번 총격전 이후로 건에 대해서 좋은 감정을 가지게 된 모양이었다. "저는 좀 씻어야겠어요." 나는 이렇게 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랩탑은 켜져 있었지만 세헤 라자드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전화선을 이어 놓았으니 아마도 돌 아오고 싶을 때 돌아오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세헤라자드가 돌아 오건 돌아오지 않건 별로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아마도 이제 곧 세헤라 자드가 나를 떠나리라는 생각 때문이리라. 나는 세면장으로 갔다. 고아원에 갖추어진 세면장은 구식이었다. 자동 온도 조절장치 같은 건 물론이고 흔한 수압 유지기나 물 높이 센서 같은 것도 없는 아주 구형 수도꼭지 몇 개뿐이었다. 하지만 일단 물은 나왔으 므로 나는 머리를 물살에 들이밀고 머리를 감았다. 물이 차가워서 그런지 아주 개운한 기분이었다. 나는 대충 머리를 감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몸 이 개운해진 탓인지 배가 고파왔다. 고아들과 함께 먹자니 식사시간은 지 나있었고, 식사 시간도 아닌데 밥을 달라고 하기에는 미안했다. "비류 씨. 반갑습니다. 건강해 보이는군요." 세면장 밖으로 나섰을 때 건이 나에게 이렇게 말을 건네었다. 손목에 붕대를 감고 있는 건의 모습은 수척해 보였다. 아마 수술 후에 체력을 잃 은 탓이리라. 붕대는 손목에 칭칭 감겨 있었는데, 움직이기에는 그리 큰 불편이 따르지 않는 것 같아 보였다. "팔은 좀 괜찮으세요?" "피아노를 칠 수는 없겠지만 총은 만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동안의 건은 붕대를 감은 팔을 위 아래로 움직이면서 이렇게 말했다. "피아노를 배운 적이 없다는 말씀이시군요." "아, 알고 계셨습니까, 이 농담?" 건은 이렇게 말하고는 대단히 재미있다는 듯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지만 나는 별로 우습지 않았다. 무엇보다 웃을 기분도 아니었지만 이렇게 불쑥 건이 돌아 온 것이 하나도 반갑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왜 그랬을까. 아마 도 그 집인지 병원인지 분간이 안가는 곳에서 의사인지 아닌지 알 수 없 는 여자의 치료를 받은 사람 중 일어난 게 건뿐이어서가 아닐까. 물론 그 건 건의 잘못도 아니고 건이 책임 질 일도 아니었지만 나는 누군가에게 화를 내고 싶은 기분이었다. "팔은 좀 어때요?" 하지만 나는 투정이나 부릴 나이도 아니었다. 나는 이렇게 안부를 물었 다. 그렇게 해서 나 자신에게 더 나은 기분이 들기를 바라는 심정이었다. "뭐, 손가락이 잘 움직이니까 기분 좋군요. 돌팔이는 아니었던 모양이 에요, 그 친구." 의사같아 보이는 여자를 말하는 모양이었다. "그 의사 분하고 친하신가요?" 나는 건에게 이렇게 물었다. "오랜 친구죠. 한 십 년은 됐을 겁니다." 이렇게 말하는 건의 눈동자에는 추억이 잠겨있었다. 아마도 건은 이런 종류의 위험한 일을 오랫동안 한 게 틀림없었다. 비록 얼굴은 꼬마처럼 보이기는 해도 나는 건이 경력 있는 베테랑으로 느껴졌다. 하긴 FHA에서 일하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지만. "좀 걸을까요?" 건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뭔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모양이다 싶었다. 나는 건을 따라서 고아원의 운동장으로 나갔다. 그야말로 손바닥만한 운동장이었다. 이런 운동장이라면 조금 뛰어 보기 도 전에 끝에 닿을 것이었고, 놀이기구라곤 녹이 슬 대로 슬 철봉 몇 개 와 싸구려 재생 타이어로 만든 게 분명한 그네 두 개 말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이런 곳에서 어린 시절의 추억을 만들어야 한다니. 놀고 있는 꼬 마들이 어쩐지 측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토 씨에게 대충 사정은 들었습니다. 젯나이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 고 있다는 걸 압니다. 초조한 기분이겠지요. 이해합니다." 건은 나를 위로해 주려는 모양이었다. 나는 건의 말을 듣자 건에게 아 무 이유없이 화를 냈던 일이 부끄럽게 여겨졌다. "기다리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죠, 뭐." 나는 이렇게 궁색한 대답을 지어내고는 뒷짐을 지고 걷기 시작했다. 건 은 그런 나를 보고는 꼭 대견하다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이런 취급을 당 하는 일이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건은 우리 동료였다.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잠시동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건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기보다는 그저 놀고 있는 고아들을 바라보 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먼저 무슨 이야기를 꺼내야 할 것 같았 다. "그 의사 분하고 오랫동안 알고 지내셨지요?" 나는 건에게 이렇게 물었다. 좀 전에 하던 대화고 하니 대화를 나누기 에 무난한 소재다 싶어서였다. "오랫동안 알고 지냈지만 직접 치료받은 건 이번이 처음이에요. 하긴 동지들 목숨 여럿을 그 친구가 살려 줬으니 고마운 친구죠. 믿을 만 하다 는 걸 이번에 깨닫게 된 것 같네요." "그렇군요." "친구란 소중하지요, 대개의 경우." 건의 얼굴을 보자, 나는 건이 아톰과 리파이를 걱정하고 있다는 걸 느 낄 수 있었다. 건의 얼굴은 조금 전 나에게 농담을 던졌을 때하고는 아주 딴판이었다. 건의 눈동자에는 물기가 어리기 시작했고, 입술이 떨리고 있 었다. 아마 건은 나보다 몇 배는 더 아톰과 리파이를 걱정하고 있을 게 틀림없었다. FHA가 동료를 소중하게 여긴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솔직히 이런 표정을 지을 만큼 걱정하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저는 세상에서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건이 말했다. "이 놀고 있는 아이들, 그리고 하늘, 뭐 이런 거지요. 별로 대단한 건 아닙니다. 하지만 이 별거 아닌 걸 지키기 위해서는 많은 희생이 따릅니 다. FHA가 자유 해커 동맹의 약자라는 건 알고 계시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스넷이라는 공간은 새로운 세상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곳에서 구현되는 세상은 지금까지 세상에 존재했던 어떤 세상과도 다르지요. 어 쩌면 어스넷이야 말로 가장 민주적이고 이상적인 공간이 될 수 있는 가능 성을 안고 있는지 모릅니다. 제가 FHA일을 시작하게 된 것도 다 그런 이 유지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키고 싶었거든요, 어스넷 세상을. 누군가 의 손에 넘어가 통제되지 않도록 말입니다." 건이 말했다. 나는 FHA의 이념이나 활동에 대해서는 아톰과 리파이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자유Free라는 말은 마음에 들었는지 몰라 도 해커Hacker라는 말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해커의 원 뜻이야 그 저 컴퓨터 매니아쯤 되겠지만, 보통의 사람들은 해커라고 하면 정보를 파 괴하고 남의 시스템에 침투하고 컴퓨터 바이러스를 만드는 사람으로 인식 하고 있으니 말이다. "해커라는 게 자랑스러우신가 보죠?" "자랑스럽지요. 저는 해커라는 말에서 저항이라는 어감이 느껴지거든 요." 건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건이 적어도 어느 정도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하긴. 건도 자신 을 프로라고 말했으니까 그럴 만도 하겠구나 싶었다. 좁은 운동장인지라 얼마 걷지도 않아서 우리는 한 구석까지 걸어가 버 렸다. 되돌아 오기 위해 몸을 돌리는 데 그네 밑에서 켄과 놀아주고 있는 실버우드의 모습이 보였다 (놀아준다고는 했지만 리파이는 그저 켄이 하 고 있는 걸 방해하지 않으면서 옆에 있어준 게 전부였다). 켄은 공책에 원주율을 계속해서 적어내리고 있었다. 실버우드는 공책에 숫자를 적어내려가고 있는 켄의 모습을 지루한지 그냥 멍하니 지켜만 보 고 있었다. 켄의 공책은 두 권째로 넘어가 있었다. 나는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켄의 옆으로 다가가 다 쓴 공책을 집어들어 보았다. 공책은 3.14로 시작하지 않았다. 이곳에서 공책을 쓰기 시작한 지도 꽤 되는 모양이었다. 류를 잃은 켄은 지금 과연 무엇을 생각 하면서 원주율을 적고 있을까. 아무 말도 없고, 아무 표정도 없는 켄을 바라보면서 그것을 추리해 내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처럼 여겨졌 다. "실버우드. 켄하고 노는 일은 잘 돼 가요?" "보시는대로." 실버우드는 눈살을 장난스럽게 찌푸리면서 말했다. 사실 우리가 이곳에 온 이유는 켄을 이용해서 부루터스를 데리고 오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부 루터스는 오지 않았고 오히려 잠복하고 있던 어스폴만 당한 꼴이 되었다. 나는 켄의 공책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이나바머, 그러니까 부루터스는 오지 않았군요." 건이 말했다. 실버우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제 여기에 더 있는다는 건 별 의미가 없는 일 같아요. 그냥 시 간떼우기죠, 뭐." "어쩌면 어스폴을 공격한 게 부루터스일지도 모르지요." 건이 켄을 이상하다는 듯한 눈초리로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런데 그런 사고가 났는데 뉴스에는 나지 않았더군요. 게다가 동네 경찰에서라도 조사할 법한 사건인데도 조사가 전혀 없고요. 이야기를 들 어보니 어스폴에서 직접 이곳에서 요원들을 보내서 현장 잔해를 완전히 수거해 갔다고 하더군요. 이 동네 경찰은 구경도 못해본 모양이었습니 다." 건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어스폴에서도 연락이 없었다. 나는 이제야 뭔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오토 씨가 연락하지 않았을까요?" 나는 건에게 이렇게 물었다. 건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오토 씨도 연락은 못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렇군요." 나는 그렇다고 대답은 했지만 전혀 상황이 납득이 가질 않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젯나이트의 연락도 없고, 세헤 라자드도 보이지 않고, 그렇다고 어스폴의 연락도 없으니 말이다. 한참동 안 우리는 켄이 공책에 숫자를 적어내려가는 것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런데 공책 한 장을 다 채운 켄이 공책을 넘기지 않고 나를 올려다보았 다. 아무런 생각도 없어 보이는 퀭한 눈초리가 내 눈에 와 닿자, 나는 섬 뜩한 기분이 들었다. "아저씨." 켄이 이렇게 말했을 때 나는 너무도 놀라서 몸이 완전히 굳어버리고 말 았다. 물론 나를 보고 켄이 아저씨라고 말했기 때문에 놀란 건 아니었다. 켄이 입을 열었다는 사실 자체가 나는 너무나도 놀라웠던 것이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22144/22303 ━━━━━━━━━━━━━━━━━━━━━━━━━━━━━━━━━━━━━━━━ 제 목:[탐그루] 자유의 용 319 관련자료:없음 18/18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6-15 18:56 조회:1004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부루터스 아저씨는 안 와?" 켄이 나에게 물었다. 하필이면 왜 나한테 묻는 걸까. 같이 오랫동안 있 었던 실버우드도 있고, 또 귀엽게 생긴 건도 있는데. 나는 두 사람에게 구원의 눈초리를 보내면서 도움을 요청했지만 둘 다 놀랐는지 그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와." 나는 이렇게 한 마디 하고 말았다. 대답을 하지 않을 수도 없고, 그렇 다고 설명을 하자니 켄이 알아들을 수 있을까도 의문이 되었던 것이다. "켄. 너, 지금.....?" 놀란 마음을 가장 먼저 추스린 건 실버우드인 모양이었다. 실버우드는 켄에게 이렇게 아주 조심스럽게 말했던 것이다. 꼭 잘못 말하면 켄이 다 시 원주율을 적게 될까봐 두렵다는 듯이. 켄은 고개를 끄덕였다. "부루터스 아저씨는 안 와?" "곧, 오실 거야." 실버우드가 억지로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켄의 말 한 마디에 순식간 에 운동장은 긴장으로 꽉 차 언제 폭발할지 모를 것 같은 상태가 되어버 리고 말았다. "왜 지금 안 와?" "그건..." "켄." 건이었다. 건은 무릎을 꿇고 켄과 눈을 맞춘 다음 켄의 양어깨에 손을 올려놓았다. "네 얘기는 많이 들었다. 똑똑한 녀석이라고들 하더구나." 이렇게 말하는 건의 모습은 아무리 보아도 꼬마 같은 외모에서 나오는 목소리라고는 믿어지질 않았다. 켄도 나와 비슷하게 느끼고 있는지 놀란 얼굴을 하고서 건을 바라보고 있었다. "부루터스 아저씨는 안 온다. 절대로." 건은 매정하게도 이렇게 말했다. 나는 또 한 번 놀라고 말았다. 도대체 건이 언제 켄을 봤다고 저런 소리를 하는지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 었다. "절대로?" "그래. 넌 이제 혼자야." 건이 말했다. "그러니까 이제 원주율 쓰는 건 그만 둬. 친구도 사귀고 다른 공부도 해야 해. 혼자 살고 싶지 않으면." 건의 목소리는 내가 듣기에도 무서울 정도로 냉정했다. 물론 켄은 건의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켄은 이렇게 대꾸해했다. "끝나면 그만 둘 거야." 켄은 이렇게 말하고는 다시 공책에 숫자를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켄? 켄?" 실버우드가 몇 번인가 더 켄을 불렀지만 켄은 대답이 없었다. 나는 화 가 버럭 치밀었다. "건. 그렇게 하는 게 소중한 걸 지키는 일인가요? 아이들과 하늘을 지 키는 게 그런 거에요?" 나는 건에게 이렇게 쏘아붙였다. 당장이라도 건의 멱살을 잡고 쓰러뜨 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런데 건은 오히려 차가운 눈으로 나를 쏘아보더 니 이렇게 대답했다. "난 자폐아나 병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세상에 대해서는 좀 알지요. 이렇게 평화롭고 자유로운 세상을 지키기 위해서는 희생이 필요 하다고 말씀드렸지요? 그건 누군가가 죽어야 한다는 의미나 누군가가 고 통받아야 한다는 의미로 드렸던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그건 바로 자유입 니다." 건이 말했다. "어떤 사람들은 자율이라고 그걸 다르게 부르기도 하자요. 사람들이 자 기 일에 책임을 가지고 자기 스스로 자기 일을 다 하면서 사는 것. 저는 그걸 자유라고 부르지요. FHA에서 F가 의미하는 게 바로 그겁니다. 제가 MS사를 증오하는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그건 통제입니다. 어스넷을 자신 들이 통제하려고 하기 때문에 저는 MS사를 증오하는 거지요." 건은 약간 흥분한 눈치였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건의 목소리는 조금씩 높아지고 있었다. "비류 씨. 사람들을 모두 잘 살게 만들어 주는 제도 같은 건 세상에 없 습니다. 누구든 스스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으면 누구나 꿈꾸는 세상은 오지 않습니다." 건의 말에 나는 대꾸할 말을 잊고 말았다. 나는 건의 말에 대답을 할 수도 없었고, 건의 말에 이의를 제기할 수도 없었다. 사실 나는 그저 켄 을 불쌍하다고만 생각하고 있었지 단 한번도 진지하게 켄을 생각해 본 적 이 없었던 것이다. 건 처럼이라도 말이다. 얼마간의 침묵이 있었다. 실버우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불만스 럽다는 표정만 짓고 있을 뿐이었고, 나 역시 별다른 말을 꺼낼 수가 없었 다. "배가 고프군요." 다행스럽게도 건이 먼저 이렇게 말을 꺼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배가 몹시 고팠던 것이다. "식당이 어디 있습니까?" "저 아직 식사시간이 아니라..." 건의 말에 실버우드는 이렇게 말하며 끝을 얼버무렸는데 건은 손을 내 저으면서 상관 없다는 듯이 말했다. "뭐 남은 밥 대충 먹으면 되겠지요. 비류 씨. 같이 가실까요?" 건은 쾌활한 목소리로 돌아와서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과연 켄에게 냉 혹하게 대했던 건의 모습이 진짜 건의 모습일까, 아니면 지금 이 모습이 건의 진짜 모습일까? 나는 판단을 내리기가 쉽지 않았다. 식사는 생각보다 맛이 있었다. 남은 밥이라고는 했지만 보온이 된 쌀밥 에 인스턴트 식 스프, 거기다가 가공 김치 몇 쪽과 우유 한 잔 뿐이었지 만 맛있었다 (아마 잘 차려졌기 때문에 잘 먹었다기보다는 나와 건, 둘 다 배가 고팠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만 텅 빈 식당에서 단 둘이 식사 를 한다는 게 조금 마음에 걸리기는 했다. 말 한마디를 하고 식판을 조금 옮길 때마다 메아리가 다 들릴 지경이었다. 식사를 하는 내내 건은 농담을 던졌다. 아마 감정이 남아 있는 건 아니 라는 뜻으로 그러는 모양이었다. "오토 그 친구는 다 좋은데 가발을 가끔씩 비뚜로 쓰지요. 그게 보기 흉하다는 걸 잘 모르는 모양이에요." 건은 이렇게 말하고는 혼자서 웃음을 지었다. 나는 마지막 남은 우유를 한 모금 넘기고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무래도 건을 대하기가 쉽지 않 은 탓이었다. "저런. 세상에는 자기 말하는 걸 못 참는 사람이 있지요. 대화방에서도 자기 닉이 불리면 얼른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던데." 건은 이렇게 말하면서 손을 흔들었다. 나는 건이 보고 있는 쪽으로 고 개를 돌려 보았다. 오토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오토는 햇빛을 뒤로 받 으면서 우리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오토의 얼굴에는 역광 때문에 그림 자가 깊게 드리워져 있었다. "별로 좋지 않은 소식인가?" 건이 오토에게 물었다. 오토는 어깨를 한 번 으쓱 해 보이곤 이렇게 대 답했다. "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오토가 대답했다. "어스폴에서 사람이 왔어." "그래? 결국 오긴 왔군. 별로 이상할 건 없지 않아?" 건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오토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상할 거야 없지. 그런데 유하린 수사관이 왔거든. 만나 보면 알거 야." 오토가 말했다. 유하린 수사관은 거실 의자에 앉아 검은 양복을 입고 있었다. 검정 넥 타이에 검정 선글라스까지 끼고 있었고, 표정마저 어두웠다. 그도 그럴 것이 상사였던 이진우 수사관이 죽었기 때문이었다. 사건은 유하린 수사 관이 보고를 위해 어스폴 지국으로 간 사이에 일어났다고 했다. 물론 유 하린 수사관은 담담하게 이야기했지만, 나는 유하린 수사관이 느끼고 있 을 분노와 비애를 충분히 감지할 수 있었다. 사실 이진우 수사관이 죽었다고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유하린 수사관을 직접 만나기 전까지, 나는 이진우 수사관의 죽음을 실감하지 못 하고 있었다. 오토도, 건도, 실버우드도, 침통해 있는 유하린 수사관 앞 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공식적인 나쁜 소식과 비공식적인 나쁜 소식이 있습니다. 어느 쪽을 먼저 들으시겠습니까?" 우리가 자리에 앉은 후에도 한 참을 기다렸다가 유하린 수사관이 말했 다. "뭐가 그렇게 나쁜 소식인지는 몰라도, 유 수사관. 그냥 공식적인 나쁜 소식부터 듣겠소." 오토가 말했다. 오토는 굳이 유하린 수사관이라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 다. 유하린 수사관이 이름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 었다. "공식적인 나쁜 소식입니다. 어스폴의 수사는 여기서 끝입니다." 유하린 수사관이 말했다. 우리는 순간 유하린 수사관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수사가 끝이라니? 어스폴 수사관들이 살해당했고, 게다가 누구의 소행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수사를 종결하겠 다니? 나는 멍한 눈을 하고서 유하린 수사관을 바라보았다. "상부의 명령입니다. 제가 오늘 여기에 온 것은 수사가 종결되었음을 알리고 모두들 각자 생업으로 돌아가실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지금까지 수사가 진행되는 동안 보고 들으신 모든 사항들은 일급기밀입니 다. 절대 외부로 발설하시거나 기고하시거나, 혹은 친구나 부인에게도 이 야기해서는 안됩니다." "마누라가 화내겠는 걸." 건이 인상을 쓰면서 이렇게 말했지만 오토가 건을 말렸다. "공식적으로는 그게 끝입니까?" "몇 가지가 더 있지요. 수사가 중단된 공식적인 이유는 이제 부루터스 의 신병을 통합정부에서 관리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외압인가?" 오토가 바로 물었다. 유하린 수사관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런 사항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공식적으로 그 부분과 관련 된 사항들은 모두 기밀이니까요." 그럼 고개를 끄덕인 이유는 뭐지? 나는 유하린 수사관의 표정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유하린 수사관의 얼굴에는 차가운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그럼 이제 비공식적인 견해를 좀 듣고 싶은데요." "오토 씨. 비공식적인 견해라기 보다는 비공식적인 나쁜 소식이라고 해 두고 싶군요." "어떻게 이 이상 더 나쁜 소식이 있을 수 있단 말이지? 어스폴이 손떼 면 끝났다는 이야기 아닌가?" 건이 다시 한 번 비꼬는 말을 했다. 오토는 이번에는 그저 건을 한 번 흘겨보기만 했을 뿐, 유하린 수사관의 말이 이어질 때까지 아무 말도 하 지 않았다. 유하린 수사관은 동요하지 않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22197/22303 ━━━━━━━━━━━━━━━━━━━━━━━━━━━━━━━━━━━━━━━━ 제 목:[탐그루] 자유의 용 320 관련자료:없음 23/23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6-16 20:25 조회:1031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저는 휴가를 신청했습니다. 어스폴 요원에게는 일 년에 보름간 휴가가 주어지지요. 많다고 하시는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만, 대부분 이 휴가는 사용하지 않습니다. 업무가 바쁘다보니까 말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휴가 를 신청하는 경우는 대부분 비공식적인 업무를 보기 위해서입니다." 유하린 수사관의 설명을 듣자, 나는 유하린 수사관이 우리를 찾은 용무 를 알 수 있었다. "예를 들자면 중단된 어스폴 요원 살해사건 수사 같은 건가요?" "맞습니다, 비류 씨." 유하린 수사관이 말했다. "정말 더 나쁜 소식이군요." 이를 갈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유하린 수사관을 바라보면서 오토가 말 했다. "잠깐만요. 저는 잘 이해가 안가네요." 실버우드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말했다. "지금 유 수사관 님이 우리하고 함께 일하겠다고 말씀하신 거 아닌가 요? 그런데 뭐가 나쁜 소식이라는 거죠?" 실버우드가 정말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러자 건이 대답했다. "지금 저 사람이 한 말은 자신은 수사를 계속하겠다는 말입니다. 절대 로 우리가 하는 일을 돕겠다는 말이 아니죠. 안 그렇습니까?" 건이 여전히 비꼬는 투로 말했다. 하지만 유하린 수사관은 여전히 동요 하지 않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어떻게 보면 저는 사사로운 복수심 때문에 지금 여기에 와 있다고 할 수도 있으니까요." "대체적으로, 복수에 눈이 먼 사람은 위험한 법이지." 건이 빈정거리듯 중얼거렸다. 오토가 건을 다시 한 번 쏘아보았지만 건 은 장난기어린 미소마저 짓고 있었다. "게다가 이 경우에는 적군인지 아군인지 도무지 분간을 하기가 어렵거 든." 건이 다시 말했다. "그저 용병이라고 생각해 주시면 안될까요." 유하린 수사관이 말하자 오토는 웃음을 지었다. 오토가 웃는 모습을 하 루에 두 번이나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용병이라. 그 말은 원하는 게 돈이란 말로 보통은 쓰입니다만, 지금 같은 경우에는 아닐텐데요." "제 목적은 MS사입니다." "MS? 어떻게 하다가 MS사가 유 수사관 같은 무시무시한 수사관을 원수 로 삼게 됐죠?" "건 씨. 통합정부에 압력을 넣은 단체가 바로 MS입니다." 유하린 수사관이 말했다. 나는 유하린 수사관의 말을 종합해 보았다. 어스폴이 부루터스를 추적한다. 그러다가 불의의 급습을 받아 수사관이 죽는 일이 발생한다. 그리고 MS사가 통합정부에 압력을 넣고, 통합정부는 어스폴에 외압을 넣어 수사를 중지시킨다. 그렇다면 가능성은 일단 몇 개 로 압축이 되었다. "제가 의견을 한 번 말해보죠." 나는 일단 이렇게 말했다. 내가 말하자 다들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바 라 보았다. 물론 부담감 같은 건 느끼지 않기로 했다. 어찌되었건 나 역 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사건에 처음부터 함께 했던 사람이니까. "제가 생각하기에 이건 거래가 있었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어요. 그렇 지 않고서야 수사관이 살해당했는데 함부로 압력을 넣거나 할 수는 없겠 죠." "그야 그렇겠지." 오토가 혼잣말처럼 이렇게 말했다 (오토가 함부로 반말을 쓰는 사람은 아니지만 이런 식으로 가끔 반말 비슷하게 말하는 경우는 종종 있었다. 솔직히 그럴 때마다 기분은 나쁘지만). "부루터스가 MS사와 손을 잡았을 가능성이 먼저 하나 있습니다. 아마도 모종의 거래가 이루어 졌겠지요. 부루터스가 MS사의 용 프로젝트가 담겨 있는 시디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다 알고 계실 테니까 그 내용을 짐작 하기는 어렵지 않죠. 그리고 다음으로 꼽을 수 있는 게 부루터스와 WCC와 의 거래입니다." "WCC?" 유하린 수사관이 나에게 이렇게 되물었다. "예. 세계 사이버 공동체요. 통합정부와는 껄끄러운 관계니까요." "비류 씨. 그건 아닐 겁니다. WCC라고 하면 MS사가 대부분 권력을 장악 하고 있지 않습니까. 말하자면 구 시대의 UN같은 단체지요." "유 수사관 님. 하지만 MS사에 반대하는 세력들과 손을 잡았을 가능성 도 배제할 수는 없지요." "일단 그렇다고 합니다. 문제는 어찌 되었건 이 문제의 핵심은 부루터 스로군요. 어떤 경우에도 부루터스가 거래를 했다고 밖에 보여지지 않는 데요." 오토가 턱을 쓰다듬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뭔가 잘 잡히지 않는다는 듯 한 얼굴을 하고서. "일단 그렇다고 가정한다면 부루터스는 어떤 걸 가지고 거래를 했을까 요?" 유하린 수사관이 말했다. "그 용 프로젝트 내용이겠지요." 나는 이렇게 말했다. 조금 전에 말한 내용인데 아직도 이해가 가질 않 고 있단 말인지. 다시 말한다는 게 조금 싫기는 했지만, 일단 내가 생각 하고 있는 걸 이해는 시켜야겠다 싶어서 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해주었 다. "용 프로젝트에 대해서는 저도 알고 있습니다." 유하린이 내 말에 이렇게 대꾸했다. "MS가 그 내용이 유출되는 것에 대해서 민감하게 반응하는 건 알겠습니 다. 그야 당연한 일이지요. 어쩌면 MS는 용을 이용해서 어스넷과 WCC를 완전히 장악하게 될 수도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이해가 가질 않는 것은 통합정부의 입장입니다. MS사가 어떻게 통합정부에 압력을 넣을 수가 있 지요?" 유하린 수사관의 질문에 아무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유하린 수사관의 지적은 옳았다. 아무리 거대 기업이라고 해도 통합 정부를 움직이려면 틀 림없이 뭔가 거대한 음모라도 있어야 했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해서 MS사가 통합정부를 통해서 어스폴에 압력을 가할 수 있었을까? "정치자금이라던가, 뭐 그런 게 있지 않을까요?" 실버우드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 말에 유하린 수사관이 금새 반박을 나섰다. "돈이라면 통합정부만큼 넉넉한 집단도 드물 겁니다. 전 세계 금융과 무역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데, 뭐가 문제가 되겠습니까. MS가 아무리 돈 이 많다고 해도 그런 식으로는 아닐 겁니다." "MS사로부터 돈을 받았다면 개인일텐데, 어떤 개인도 어스폴에 압력을 가할 정도의 힘은 가지고 있지 못하지요. 아시잖습니까. 부패 정치인은 그대로 공개 처형이라는 걸." 유하린 수사관이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공개 처형당하는 정치인들은 대개가 힘없는 정치인이거나 권력 투쟁에서 밀려난 정치인입니다. 물론 그렇지 않았던 시절은 없었겠지만." 유하린 수사관의 말에 건이 반박했다. 이거, 대화가 점점 정치 이야기 쪽으로 번져가는 느낌이 들어서 나는 얼른 화재를 돌리려고 했다. "돈이 아니라면 뭘까요?" 나는 이렇게 큰 소리로 말했다. 내 말에는 효과가 있었다. 돈이 아니면 무엇인가 하는 내 질문을 듣자 다들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사실 그랬다. 돈이 아니라면 과연 무엇이 통합정부라는 거대한 단체에 이익을 가져다 줄 수 있을까. 하지만 별달리 뾰족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잠깐만요." 가장 먼저 이야기를 꺼낸 건 실버우드였다. 실버우드는 원래 별로 좋은 의견을 내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들 조금은 무시하는 듯한 분위기도 있었는데, 막상 실버우드가 이야기를 꺼내자 다들 조용해졌다. "지금 하고들 계신 생각에는 좀 이상한 점이 하나 있어요. 범인이 왜 부루터스라고 단정하고 계시는 거지요?" 실버우드의 지적은 날카로웠다 (고 적어도 나는 생각했다). 유하린 수 사관이 이야기를 꺼냈을 때부터 부루터스가 범인일 거라는 생각은 그저 당연하다는 듯이 다들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 부루터스가 범인일까 하는 것은 아무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음... 그야..." 유하린 수사관 마저 이렇게 말을 끄는 걸 보면 말이다. "다른 사람이라면 도대체 이유가 없지 않나요? 살해당한 어스폴 요원들 은 부루터스를 ㄳ고 있었다구요." 나는 실버우드에게 이렇게 내 생각을 말했다. 하지만 내 말은 그대로 무시되었다. "잠깐. 실버우드 씨 말이 맞습니다." 오토였다. "사실 이나바머의 소행이라고 보기에는 좀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이나 바머는 테러리스트입니다. 게다가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체포도 불가능한 상태죠. 그런데 굳이 살해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 싶기도 합니다만. 그 냥 단순하게 MS사에서 부루터스를 추적하지 못하게 막았다고 생각하면 어 떻습니까? 그렇다면 MS사가 압력을 가한 이유도 설명이 됩니다." "그렇다면 꼭 부루터스를 막았다고만 이야기 할 수는 없겠죠. 다른 이 유도 있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예를 들어서 MS사 부사장이 차기 통합정 부 수장에 출마하려고 한다는 정보를 어스폴에서 가지고 있었다던가요." 건이 반 농담조로 이렇게 말했는데, 나는 잠시동안 건의 말이 진짜인 줄 알았다. 아무래도 내 의견이 무시당한 것에 대한 충격이 있었던 모양 이었다. "농담은 그만 두고, 한 번 현실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잠복 중이던 어 스폴의 차량을 폭파 할 수 있는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요?" 유하린 수사관이 이렇게 의견을 제시하자 곧장 건이 말했다. "부루터스. 아니라면 빔라이플로 무장한 일개 분대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 정도의 힘을 가진 집단." 결국 부루터스 아니면 MS사라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했 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정보량이 너무나도 부족했고, 정보량에 비해서 너 무나도 가능성의 폭이 넓었다. 일단 돈 문제는 아닐 것이라는 막연한 추 측 외에 다른 생각이 떠오르질 않고 있었다. 이 상태로는 더 이상 뭔가를 추리해 낸다는 것 자체가 무리인 것 같았다. "좋습니다. 여기까지만 하지요. 일단 좀 쉽시다. 어차피 이제 곧 떠나 야 할 테니까요." 오토가 이렇게 자리를 정리했다. "잠깐. 쉬다니 무슨 말입니까. 제 휴가는 보름입니다. 그 안에 사건을 종결짓지 않으면..." "유 수사관. 나하고 잠시 이야기 좀 하지요." 오토는 이렇게 말하고는 유하린 수사관을 데리고 고아원 건물 밖으로 나갔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걸까요?" 내가 건에게 물었다. "아마 우리가 MS사에 잠입할 계획이 있다는 걸 이야기 할 겁니다. 하지 만 적정한 수준을 지키겠지요. 그러니까 아마 밖으로 나간 것 아니겠습니 까?" "그런데 저 사람, 믿을 수 있을까요?" 걱정이 되는지 실버우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용병이라고 했으니까요. 적어도 MS사를 조사하는 일까지는 같이 하겠 지요." 나는 이렇게 대답하기는 했지만 솔직히 이렇게 말하는 나 자신도 별로 자신이 없었다. 솔직히 믿음이 가질 않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 찌되었건 유하린 수사관은 어스폴이었다. FHA와 사이가 좋을 리가 없는 데다가, 나를 체포하기 위해서 추적했던 적도 있었고, 게다가 언제나 사 람을 의심하고 기분 상하게 해 놓고는 직업이 이러니 이해해 달라는 둥... 그런데 자꾸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하다 보니 정말로 유하린 수사관 이라는 사람에게 믿음이 가질 않게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쩌면 유하 린 수사관이 이진우 수사관의 죽음에 대해서 슬퍼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 어야 할까 하는 의문마저 들었다. 나중에 이 모든 게 어스폴의 어떤 음모 였다면? 그때 가서 유하린 수사관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이렇게 말할 지 모른다. '죄송합니다만 이게 우리 직업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유하린 수사관의 얼굴을 상상해 보니 등골을 타고 얼음 덩어리가 미끄러지는 기분이 다 들었다. "분명히 무슨 속셈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보긴 했습니다, 저도." 건이었다. 건은 이렇게 말하면서 유하린 수사관이 오토와 걸어나간 복 도 쪽을 바라보았다. "어스폴의 정보력은 대단합니다. 아마도 그 정도는 다들 알고 있을 겁 니다. 어스폴 형사들 중에는 정의를 실현한다면서 범인을 재판 없이 처형 하는 사람들도 꽤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아주 그런 일만 전문으로 하 는 부서도 있다고 하더군요. 뭐, 소문이기는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건은 인생 다 산 사람 같은 말투가 배어있었다. 내가 알 고 있던 건이라는 사람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데 휴가를 얻어서 사적인 일을 처리하겠다고 말했다면, 어떻게 받 아들여야 옳은 걸까요. 어쩌면 유하린 수사관은 그런 부서에서 일하는 사 람이 아닐까요?" "건 씨. 어쩌면 정말로 자신이 원해서 그러는지도 몰라요." 맨 처음 의심을 표현했던 실버우드였지만, 실버우드는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재판도 없이 범인을 죽인다니. 자기가 정의의 사도라도 된다고 생 각하는 걸까? 건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유하린 수사관의 냉혹해 보이는 웃음이 떠올라서 소름이 다 끼쳤다. "사실 그걸 떠보려고 아까 유하린 수사관에게 몇 번 기분 나쁜 농담을 했었죠. 하지만 유하린 수사관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습니다. 제 생각이 옳다면 유하린 수사관은 스스로 감정을 숨기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의 심할 가치가 충분히 있지요." 건이 말했다. 나는 건의 말에 동감할 수 있었다. 오토가 돌아온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유하린 수사관과 함께가 아니었다. "유하린은?" "경찰서로 갔습니다. 필요한 게 있다고 하더군요. 아마 돌발 상황이 벌 어질 경우를 대비해서 협조를 얻어 두려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런 경 우 지역 경찰과 마찰을 빚지 않는 게 어스폴의 원칙이라고 하더군요." 건은 고개를 끄덕이는가 싶더니 오토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런데 오토 씨. 오토 씨는 그 사람, 믿습니까?" "전 믿는다는 말, 잘 안씁니다." "솔직히 저는 믿지 못하겠습니다. 언제 등에 총구를 들이밀지 몰라서 요." 건이 오토에게 말했다. 오토는 긍정한다는 듯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 다. 하지만 다음에 이어진 오토의 말은 의외의 것이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22198/22303 ━━━━━━━━━━━━━━━━━━━━━━━━━━━━━━━━━━━━━━━━ 제 목:[탐그루] 자유의 용 321 관련자료:없음 21/21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6-16 20:25 조회:889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하지만 유하린 씨가 흥미로운 말을 하더군요. 건, 아니 와일드 건이라 고 해야 할까요?" 오토의 말에 건의 얼굴이 굳었다. 와일드 건이라고 하면 리파이가 말했 던 FHA의 중간 보스라는 사람의 이름이었다. 리파이와 아톰이 와일드 건 에게 보고해야 한다고 말했던 기억이 났다. "저는 지금 알았습니다만, 유하린 씨는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던 모양 이었습니다. 증거가 없어서 못 잡았을 뿐이라는 말도 함께요. 건 씨도 대 단한 분이시더군요. 어스폴에 신분이 노출된 상태로 이렇게 행동하고 계 시다니 말입니다." "그 얘길 유하린 수사관이 했습니까?" 오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기를 의심해서 떠보려고 하는 것 같은데, 이렇게만 전해달라 고 했습니다. MS사를 수사할 때까지는 용병으로 생각해 달라고요. 그리고 건 씨는 보지 못한 걸로 해 두겠다고 했습니다." 잠시 동안 건은 말이 없었다. 하지만 결국 이렇게 말함으로 해서 일단 유하린 수사관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좋습니다. 한 걸음 물러서죠. 하지만 믿지는 않을 겁니다, 절대로. 도 대체 왜 오토 씨가 유하린 씨 편을 드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유하린 씨 편 든 적 없습니다. 다만 유하린 씨하고는 승부가 남 아있을 뿐이지요." 오토가 말했다. "그리고 어스폴 수사관을 무슨 수로 따돌리겠습니까." 오토의 말은 맞았다. 사실 유하린을 받아들일 수밖에는 없는 상황이었 다. 유하린 수사관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나중에 어떤 형태의 보복이 있 을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상대는 어스폴 수사관이니까. 그리 고 믿지 않겠다는 건의 말에 대해서 오토는 이렇게 답했다. "그리고 믿지 않는 건 저도 마찬가집니다." 유하린 수사관을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다고 해도 일단 우리와 함께 행 동을 하게 된 이상, 젯나이트를 기다리고 있는 이유를 설명해 주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런데 내가 놀란 것은 유하린 수사관이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의 대부분을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새로운 형태의 생명체의 출현에 대해서는 저도 상당부분 들은 바가 있 습니다. 뭐, 그리 고급 정보는 아닙니다만, 어스폴에서 들은 이야기죠." 유하린 수사관이 말했다. "일급 비밀 아닌가요, 그런 거라면?" 건이 꼭 비웃는 듯이 말했다. 여전히 건은 유하린 수사관에 대해서 적 의를 감추지 않고 있는 모양이었다. "공식적으로는요. 지금 저야 비공식적으로 수사를 하고 있으니까요." 유하린 수사관은 건의 말에 이렇게 맞받아 쳤다. "그러다가 옷 벗으시겠군요." 건이 다시 한 번 유하린 수사관에게 말했다. 유하린 수사관은 건의 말 에 피식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그럴 수도 있지요." "그 얘긴 그만하지요. 지금 상황에서 도움이 될만한 이야기를 하는 편 이 나을 것 같습니다." 오토가 말했다. 우리는 랩탑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고아원 거실에 앉아 있었다. 고아들 은 낮잠을 자고 있는 시간이었다. "한가로운 오후로군요." 유하린 수사관은 이렇게 말하면서 랩탑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무표정 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는 있었지만, 나는 유하린 수사관의 얼굴에서 초조 한 빛을 느낄 수가 있었다. 아마도 젯나이트가 오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눈치였다. 그래야 뭔가 일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 다. 하긴 휴가까지 내고 수사를 하는 중이라고 하니 그럴 만도 하겠다 싶 었다. 어쩌면 오후의 햇살에 취한 표정인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분명 어디선가는 전쟁이 일어나고 있겠지요." 오토가 말했다. 오토의 눈은 거실로 새어 들어오는 햇살에 향해 있었 다. 오토가 한 순간 손을 뻗어 햇살에 손바닥을 대었다. 오토 역시 유하 린 수사관처럼 한가로운 오후에 취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다만 초조한 것인지 잘 구분이 가질 않았다. "비류 씨. 만델라 씨 소식, 혹시 들으신 것 있습니까?" 전쟁이라는 말 때문이었을까. 유하린이 불쑥 나에게 물었다. 나는 어떤 대답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기 이전에 우선 당혹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갑 자기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묻다니. 나는 일단 경계심이 먼저 들었다. 혹시 유하린 수사관은 아버지를 체포하기 위해서 나에게 접근한 게 아닐 까 싶기도 했다. "전혀 없어요. 그리고 제가 알기로 아버지 소식은 당신들이 더 많이 알 고 있는 걸로 아는데요." 나는 경계심을 드러내면서 유하린 수사관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 저는 다른 뜻으로 드린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궁금해하실 것 같아 서 드린 말씀이었지요." 유하린 수사관은 나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나는 유하린 수사관의 눈을 들여다보았는데, 눈빛만 가지고는 과연 그가 무슨 의도를 갖고 말하고 있 는지는 알기 어려웠다. 유하린 수사관은 거짓말과 속임수에는 프로라고 스스로 밝힌 어스폴 요원이니까. "뭐가 궁금한데요?" "만델라 씨는 입국 이후 잠적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어스폴의 정보망에 서 빠져나갔다는 이야기지요." 어렸을 적에는 물론 알지 못했지만 아버지는 내가 상상하던 것 이상으 로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아프리카에서는 로마코 독립 전쟁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얻게 만든 드라하이 공군기지 폭격 작전의 실 질적인 정보 책임자였고, 동유럽에서는 마토메니아 왕조를 무너뜨린 혁명 군의 게릴라전을 주도한 적도 있었다. 물론 그 와중에 벌인 테러와 약탈, 살인 혐의로 어스폴은 물론이고 여러 나라에서 지명 수배를 받고 있는 실 정이기는 했지만. 하지만 아버지가 나에게 단 한 번의 접촉도 해오지 않 았다는 사실 때문에 나의 존재는 별로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아버지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도 그 때문이었지만. 어찌되 었건 아버지가 내 문제로 입국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빠져나갔다는 말인가요?" 오토가 유하린 수사관에게 물었다. 유하린 수사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되었건 만델라 씨야 전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몇 안 되는 테러리스 트니까요. 이런 표현은 용서해 주시길. 적절한 다른 말이 떠오르질 않는 군요." 유하린 수사관이 예의바른 태도로, 하지만 기분 나쁜 말을 나에게 전했 다. 나는 그저 묵묵히 랩탑의 모니터만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버 지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유하린 수사 관은 나를 놓아두질 않았다. "만델라 씨는 최근에 유럽 한복판에 있는 군수 공장을 폭파한 걸로 알 려지고 있습니다. 사실 그것 때문에 유럽 지역에는 머물 수가 없게 되어 서 이곳으로 입국했다는 정보도 있습니다." 나는 아버지가 브라질리아 공화국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의외의 말이었다. 하지만 어쩌면 유하린 수사관의 유도심문인지 모른다고 생각했 기 때문에 함부로 말을 하지는 않았다. "유럽의 군수공장? 그곳은 왜죠?" 흥미를 느꼈는지 건이 유하린에게 물었다. 아니, 어쩌면 건은 아직도 유하린에 대한 의심을 확인해 보기 위해서 질문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미확인 정보라 말씀드리기 곤란하군요." "혹시 동유럽 동맹의 브라쇼브 군수공장 아니었습니까? 최근에 폭발사 고가 있었다고 하던데요." 건이 집요하게 유하린에게 물었다. 유하린은 잠시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결국 대답을 하기는 했다. "그렇습니다." 아마 모른 척 하거나 이야기 할 수 없다고 말했다면 틀림없이 의심만 더 사게 될거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나는 유하린 수사관의 표정을 자세 히 살펴보았다. 유하린 수사관은 뭔가 망설이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 다. 나는 유하린 수사관이 뭔가를 이야기할까 말까 망설이고 있다는 인상 을 받았다. "건 씨. 그렇다면 아마 알고 계시겠군요. 왜 그곳을 폭파했는지도." 이윽고 결심했다는 듯, 유하린 수사관은 건에게 이렇게 물었다. 건은 과장된 몸짓으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글쎄요?" 아마도 건은 뭔가 확인받고 싶어하는 모양이었다. "그곳에는 생체병기 공장이 있다고 들은 적이 있습니다. 차세대 무기가 될 인공 지능을 장착한 미래형 병기라고 하더군요." "아. 그렇군요. 그런데 왜 그곳을 폭파했을까요?" 건은 여전히 과장된 음성으로 유하린에게 이렇게 물었다. 이미 결심을 굳힌 후여서 그랬는지 유하린 수사관은 편안한 음성으로 이렇게 말을 이 어갔다. "핵을 사용한 전면전이 어떤 결과를 가지고 오는지 알게 되자 인류는 전쟁으로부터 해방될 거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국지전의 수는 늘어났고, 그 결과 혼란스러운 사회와 그렇지 않은 사회로 국가들이 양분되는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습니다." "그 생체병기가 국지전에서 탁월한 성능을 발휘한다는 말씀이시겠군 요." "그렇습니다." 건의 말에 유하린 수사관이 대답했다. "우수한 인공지능을 장착한 생체 병기는 아군의 희생 없이 국지전을 수 행할 수 있게 될거라는 전망도 있지요. 그러니까 이차세계대전 이후 소수 정예의 병력과 첨단 기술을 도입한 기계화라는 흐름으로 볼 때, 당연한 귀결이 아닌가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동유럽입니까?" 오토가 유하린에게 물었다. 통일전쟁 참전 용사라는 말 그대로, 오토는 동유럽에 관심이 있는 모양이었다. 어쩌면 통일전쟁때 동유럽 전선에서 싸웠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필 동유럽이 아니라 하필 브라쇼브냐는 말이 맞을 거예요." 건이 말했다. "브라쇼브에는 오래 전부터 MS사의 비밀 무기 공장이 있었거든요. 이건 정확한 정보입니다. 제가 MS사 회장 컴퓨터에서 직접 빼 낸 이야기니까 요. 이런. 저도 들켜버렸군요. 어스폴 수사관 앞에서 해킹을 한 사실을 말하다니. 이거, 저도 비공식적으로 이야기 한 걸로 하면 안될까요? 하하 하." 건은 이렇게 말하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유하린 수사관은 약간은 곤혹 스러운지 눈살을 찌푸리기는 했지만 그렇게까지 기분이 상하지는 않은 모 양이었다. 내가 보기에 건은 이 대화를 통해서 어느 정도 유하린 수사관 에게 믿음을 가지게 된 것 같았다. 오토의 말 그대로 '믿지는' 않겠지만. 그리고 한 이 지났다. 고아들 낮잠시간이 끝나고, 고아들이 저녁을 먹 을 때 같이 먹고 (식사하는 사이에 혹시 젯나이트가 올지 몰랐기 때문에 식사도 교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고아들의 텔레비전 시청 시간이 지나 고, 잠자리에 다시 들 때 까지 랩탑에는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렇게 기다릴 수밖에 없나요?" 실버우드가 말했다. "그렇죠. 지금 단계에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군요." 자신도 유감이라는 듯이 건이 이렇게 말했다. 건은 기분이 좋지 않은지 인상을 쓰고 있었는데, 내가 보기에는 꼭 먹을 것을 빼앗긴 어린아이 같 아 보였다. "언제까지 기다릴 겁니까?" 유하린 수사관이 물었고, 대답은 오토가 했다. "젯나이트가 돌아올 때까지." 오토의 목소리도 짜증이 난다는 식이었다. 하긴, 이렇게 기약없이 기다 리는 일이 기분 좋을 리가 없었다. "제 말은 젯나이트가 과연 돌아올 것인가, 만약 돌아오지 않는다면 우 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는 것인가, 또 돌아온다고 가정한다면 언제까지 올 것으로 예상하고 기다리고 있어야 할 것인가, 이런 이야기입니다." 유하린 수사관이 말했다. "유 수사관. 유 수사관이 MS사를 조사하고 싶어하는 마음은 잘 알고 있 습니다. 하지만 MS사가 보유하고 있는 영혼의 에뮬레이터가 작동하는 걸 멈추려면, 방법은 오직 부루터스가 만들어 놓았다는 마스터 패스워드뿐입 니다." 오토가 말했다. "솔직히 다른 이야기는 저도 알고 있는 부분이니까 이해는 갑니다. 그 렇지만 어느 정도 이상의 에너지가 모여서 차원이 붕괴된다느니 하는 소 리는 잘 믿어지질 않는군요." 유하린 수사관이 말했다. "나도 당신을 신뢰하고 있는 건 아니니까 그걸 믿으라고 말하지는 않겠 습니다, 유 수사관. 하지만 일단 함께 하기로 한 이상, 믿느니 안 믿느니 하는 이야기는 별로 의미가 없을 것 같군요." "아닙니다, 오토 씨. 그 말이 사실이라면 어찌되었건 MS를 막는 일이 바로 세상을 구하는 일 아닙니까?" 유하린 수사관은 예의바른 태도로 말하기는 했지만 듣고 있는 내 입장 에서는 화가 치미는 말이었다. "그 말은 우리 말을 절대로 안 믿겠다는 말처럼 들리는 군요." 건이 말했다. 겨우겨우 쌓은 건의 신뢰가 흔들리는 소리가 귓가에 들리 는 듯 했다. "아닙니다, 건 씨. 오히려 믿는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한 번 설명을 해 보시죠, 유하린 수사관." 건이 말했다. 이름을 들은 순간 유하린 수사관의 눈썹이 꿈틀거렸고, 나는 당장이라도 큰 싸움이 나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에 걱정이 다 되었 다. 하지만 싸움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니, 싸움이나 하고 있기에는 상황 이 급박해졌으니까. "언제까지 토론이나 하고 있을 건가?" 젯나이트의 목소리였다. 나는 랩탑을 바라보았다. 젯나이트가 팔짱을 끼고 우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22199/22303 ━━━━━━━━━━━━━━━━━━━━━━━━━━━━━━━━━━━━━━━━ 제 목:[탐그루] 자유의 용 322 관련자료:없음 22/22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6-16 20:26 조회:1012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돌아오셨군요." 내가 젯나이트에게 말했다. 그러자 랩탑 주변으로 오토와 건, 유하린과 실버우드가 우르르 몰려들었다. 건과 유하린은 젯나이트를 처음 보았기 때문에 신기하다는 듯한 눈을 하고서 랩탑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마스터 패스워드는 찾으셨습니까?" 오토가 물었다. "찾았어. 하지만 내 힘으로는 빼낼 수가 없구만. 그런데 서둘러야 겠 어. MS녀석들이 생각 밖으로 너무 빨리 움직이고 있었어. 한 시가 급하 네." "무슨 말씀이시죠?" 오토가 급하다는 말 때문인지 재빠르게 젯나이트에게 물었다. 젯나이트 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시간이 없네. 가면서 설명해 주지. 차는 준비 돼 있겠지?" "후버 카가 한 대 있습니다." 오토가 말했다. "그런데 어디로 가야 하지요?" 건이 오토의 말에 조심스럽게 젯나이트에게 이렇게 물었다. 젯나이트가 생명을 가진 사람이라는 게 여전히 실감이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일단 소드앤매직 코리아 합중국 지부로 가야겠어. 패스워드가 그곳에 있었어. 그리고 하나 더. 켄도 데리고 가야 하네. 소드앤매직 코리아 합 중국 지부에서 바로 MS본사로 갈 테니까, 켄이 꼭 필요해." 젯나이트가 말했다. "일단 설명을 해 주셔야..." "시간이 없다는 내 말, 그냥 농담으로 들리나?" 젯나이트가 화를 내면서 말했다. 그러자 오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실버우드 씨. 켄을 데리고 오세요. 그리고 건 씨와 유 수사관은 후버 카로 먼저 가시고. 비류 씨는 랩탑을 부탁합니다." 오토는 마치 자신이 대장이라도 된 것 같이 이렇게 지시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유하린 수사관만이 여전히 젯나이트의 존재를 믿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직접 보기는 처음이로군." 유하린 수사관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밖에는 어둠이 가득했다. 붉게 물들어 있는 밤하늘은 마치 피라도 흘리 고 있는 듯 보였고, 후버카가 질주하는 도로의 양편으로 보이는 밝은 불 빛들은 방향을 잃고 그저 우리의 뒤편으로만 달려가는 듯한 인상이었다. 나는 조수석에 앉아있었다. 어스폴 요원의 후버카는 역시 달랐다. 내 앞 에는 위성과 연결된 도로 상황판 액정이 달려 있었고, 그 옆으로는 시커 먼 이리듐 폰도 하나 있었다. 어쩌면 운전석 밑에 달려있는 버튼을 누르 면 차 앞에서 빔라이플이 튀어나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리어 미러를 통해 뒷좌석을 바라보았다. 후버카 정도 되는 차였으 니까 망정이지 요즘 유행하는 태양열을 쓰는 좁은 소형차였다면 아마도 이 인원이 모두 편하게 탄다는 것 자체가 어려웠을 것이었다. 운전은 오 토가 했고, 조수석에는 내가 랩탑을 무릎에 올려놓고 앉았으며, 뒤에는 실버우드가 건과 유하린 수사관 가운데 앉아 무릎 위에 켄을 올려놓고 있 었다. 사실 건이 운전을 하고 싶어하는 눈치였지만, 오토는 건이 팔목이 완쾌되지 않았다면서 운전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도대체 왜 소드앤메직 온라인 코리아 합중국 지부입니까?" 차를 몰면서 오토가 물었다. "내가 만든 마스터 패스워드는 내가 랩탑 안에 보관을 해 두었다네. 만 에 하나 영혼의 에뮬레이터에 문제가 생길 경우에 대비해서 말이야. 패스 워드가 어디로 가겠나 싶어 간단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 그런데 찾 아보니 패스워드를 누군가 흡수해버렸다네. 그래서 찾는 데 오래 걸렸던 거지." "흡수요?" "그래. 프로그램이 프로그램 안으로 들어가는 것 말일세. 물론 실제 프 로그램이 그렇게 엉킨다면 두 프로그램 다 작동하지 않게 되겠지." "스테아군요." 나는 젯나이트의 말에 이렇게 말했다. "그래. 스테아가 맞다네. 하여간 내 딸이지만 세헤라자드는 뭘 그렇게 주워오는 걸 좋아하는 지 모르겠단 말이야. 하고 많은 사이버 생명체 중 에서 프로그램을 잡아먹는 녀석이나 데리고 오고. 하여간 스테아의 행방 을 찾는 것도 한참이 걸렸다네." 나는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마지막으로 스테아를 보았던 것은... 바로 소드앤매직 온라인 코리아 합중국 지부의 보안 장치를 먹는 일에 스테아 를 사용했다는 게 기억에 떠올랐다. 그럼 지금까지 스테아는 그곳에서 보 안 장치가 내보내는 서치로봇을 먹은 후 정상적인 서치로봇으로 바꾸는 일을 하고 있는 건가? "스테아가 있는 곳은 제가 알아요." "이보게, 젊은 친구. 소드앤매직 온라인 지부에 있다는 건 나도 금새 알아냈어. 그런데 세헤라자드 녀석 말이 스테아가 보안장치에 있을 거라 고 했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없더군. 내가 그것때문에 얼마나 고생을 했는 지 아는가?" "그때 분명히 스테아는..." "그래. 보안장치에 붙여 놓았지. 하지만 스테아는 고양이지 프로그램이 아니지 않은가? 지루하니까 다른 곳으로 움직였던 모양이야." "그럼 지금은 어디에 있습니까?" 오토가 핸들을 꺾으면서 물었다. "하필이면 소드앤매직 게임 본체에 들어가 버렸다네. 그래서 자네들의 도움이 필요하게 된 걸세. 본체는 전원도 뽑혀 있고, 외부와는 전혀 연결 이 되어 있지 않거든." "잠깐만요. 그럼 스테아는 그 안으로 어떻게 들어갔지요?" 내가 젯나이트에게 물었다. 젯나이트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걸 알아내느라고 시간만 허비했다네. 분명 들어갔으니 데리고 나올 방법도 있겠다 싶었거든. 그런데 아무리 찾아봐도 들어갈 길은 없었다 네." "그럼 어떻게 된 거죠?" 건이 젯나이트에게 물었다. "잠시 동안 누군가 본체에 전원을 연결해서 썼던 모양이야. 하필 그 때 스테아가 본체 안으로 들어가 버린 거고. 한 마디로 운이 없었다고 할 수 있겠지. 나는 그것도 모르고 스테아가 어디로 갔는지 얼마나 찾아다녔는 지 아는가? 아무리 빛의 속도로 움직인다고 해도 그 넓은 어스넷을 직접 뒤진다는 건 서치엔진에다가 '스테아'하고 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 라네." 젯나이트는 이렇게 말하면서 한숨을 뱉어냈다. "그런데 켄은 왜요?" 실버우드가 무릎 위의 켄을 달래면서 말했다 (물론 가만히 앉아서 원주 율을 쓰고 있는 꼬마를 달랠 필요는 조금도 없었지만). "참. 다른 이야기를 하느라 잊었군. 그 이갸기는 좀 있다가 들려 주지. 오토. 더 빨리 달릴 수 없겠나? 지금 한 시가 급하다네." 젯나이트가 당장이라도 랩탑 밖으로 뛰쳐나갈 기세로 오토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토는 대답 대신 엑셀을 힘껏 밟았고, 미끄러지듯 나아가는 후 버카의 기세에 나는 몸이 조금 흔들리는 느낌을 받았다 (후버카에서 흔들 리는 걸 느껴 본 건 총격전 이후 처음이었다). "저, 소개를 드릴 시간이 없었군요. 저는 어스폴의 유하린 수사관이라 고 합니다. 시간이 없다고 자꾸 말씀하시는 데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유하린 수사관이 젯나이트에게 물었다. 젯나이트는 상대가 누구건 별로 신경쓰지 않는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 "내가 MS사에 정보를 찾으러 갔을 때, MS사에서는 대규모의 생체 실험 을 준비하고 있었다네. 지금 어스넷에서 활동하고 있는 생명체의 수와 그 생체 실험에서 나오게 될 생명의 수를 합치면 부루터스 녀석이 원하고 있 는 임계점을 곧 넘어서게 될 걸세." "그렇게 되면 어떤 일이 생깁니까?" "확실하게는 모르지, 어스폴 수사관." 젯나이트는 이렇게 말했다가 잠시 사이를 둔 후에 이렇게 덧붙였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이 세계는 이제 끝장이라는 거야. 차원이 뒤섞인 일 은 적어도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대의 인류는 겪어보지 못한 재앙일세. 어떤 끔찍한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몰라. 겪고 난 후에야 알게 되겠지." "좋은 일이 생길 가능성은 없습니까?" 유하린 수사관이 물었다. "뭐가 좋은 일이고 뭐가 나쁜 일인지는 내가 모르지만, 더 이상 어스폴 이라는 집단도 의미가 없어질 것이고, MS라는 집단도 없어질 거라는 건 거의 분명하게 말해 줄 수 있을 것 같군." 젯나이트의 말에 아무도 말을 잇지 못했다. 질문을 했던 유하린 수사관 도 생각에 잠긴 듯, 젯나이트의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의견을 낸다는 건 어리석은 일이기 십상일 거라는 생각 때문인 것 같았다. "그런데 어떻게 침투하지요?" 오토가 젯나이트에게 물었다. "보안 장치는 내가 다 손 봤어. 걱정하지 마." 젯나이트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러자 잠자코 있던 유하린 수사 관이 이렇게 말했다. "젯나이트 씨. 애쓰지 않으셔도 좋았을 걸 그랬습니다." 사람이 죽어 나간 소드앤매직 온라인 코리아 합중국 지부는 유령의 집 이나 폐가를 연상시켰다. 조명은 모두 꺼져 있었고, 사방에 쳐져 있는 어 스폴 라인은 이곳에서 대규모의 수사가 한 번 있었다는 걸 시사하고 있었 다. 후버카는 유하린 수사관의 말 그대로 정문 쪽으로 움직여 나아갔다. 물론 정문은 차단기가 가로 막고 있었고, 나이 든 경비원이 우리에게 후 레쉬 빛을 비추었다. "누구... 십니까?" 졸다가 깬 듯, 눈을 비비면서 수위가 물었다. 유하린 수사관은 신분증 을 제시했다. "어스폴입니다." 유 수사관이 간단하게 말했다. 이런 수가 생기리라고는 생각도 해보지 못했다. 어스폴 수사관이라면 이곳에 자주 들락날락 했을 테니, 수위가 누구라도 우리 일행을 의심 없이 지나가게 해 주겠다 싶었다. "그런데 저 꼬마는..." 수위가 켄을 바라보면서 의아한지 이렇게 물었다. 나는 아차 싶었다. 켄을 숨기는 건데. "초능력자야. 더 이상은 기밀사항이라 이야기 해줄 수 없네." 유하린 수사관은 재치있게 이렇게 말했다. 그러자 수위는 고개를 끄덕 이고는 차단기를 올렸다. 후버카가 안전하게 소드앤매직 온라인 코리아 합중국 지부 앞에 도착했 을 때, 나는 유하린 수사관에게 이렇게 물었다. "휴가 중이시라면서요? 그래도 신분증은 통하는 모양이죠?" 농담에 가까운 말이었지만, 유하린 수사관은 쑥스럽다는 듯이 이렇게 대답했다. "이해하십시오. 이런 게 우리 직업이니까요." 나는 그말에 빙그레 웃고 말았다. 노란 비닐로 만들어진 어스폴 라인이 쳐져 있는 소드앤매직 온라인 코 리아 합중국 지부는 마치 폐가를 연상시켰다. 불이 켜져 있기는 했지만, 작동하는 전등이 몇 개 없어서 사방은 어두웠고, 청소 머신 작동이 멈추 었는지 바닥에는 먼지와 쓰레기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어스폴 수사관들, 가공 쇠고기로 만든 햄버거도 먹나요?" 건이 햄버거 봉지를 들고서 이렇게 말했다.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먹나 보죠, 뭐." 나는 이렇게 건의 말에 유하린 수사관 대신 말 해주었다. 지난번에 왔을 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첫 번째 이곳에 왔을 때 는 용과 게임을 한 판을 했고, 두 번째 왔을 때는 MS사 녀석들과 총격전 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세 번째. 사실 긴장이 되어야 정상일 것이었 다. 하지만 나는 별로 긴장이 되지 않고 있었다.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도 몰랐고, 아무 말도 없이 실버우드의 품에 안겨있는 켄의 얼굴에 아무런 불안이나 공포의 빛이 나타나 있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설혹 이곳에 무장한 일개 분대 병력이 지키고 있다고 해도 켄의 표정을 바꿀 수는 없 겠지만). 사실 무엇보다 내가 두렵지 않았던 이유는 실감이 잘 나지 않기 때문인지 몰랐다. "어디입니까?" 복도를 따라 걷다가 뒤를 돌아보면서 유하린이 나에게 물었다. 나는 유 하린에게 이렇게 말해주었다. "오른 쪽으로 돌면 되요. 글씨가 작으니까 잘 봐야 할 걸요." 나는 유하린에게 짓궂게도 이렇게 말했다. 유하린은 내 말이 진짜인줄 알았는지 실눈까지 뜨고서 복도 끝에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내게 이 렇게 말했다. "비류 씨는 유머 감각이 뛰어나군요." 역시 어스폴 수사관답게 칭찬일 수 있는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아주 불 쾌하게 들을 수 있도록 어투를 조절하는 능력이 있었다. 소드앤매직 온라 인 글자가 아주 크게 적혀있는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안은 온통 어둠이 었다. "불을 켜야겠는데요." 유하린 수사관이 말함과 거의 동시에 내가 불을 켰다. 지난번에 왔을 때 전원을 찾느라 여기 저기 돌아본 덕분에 전원 스위치가 있는 곳을 확 실히 알고 있는 덕분이었다. 나는 게임룸에 들어오자 마자 인터폰 옆에 붙어 있는 전원을 올렸고,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스위치를 눌렀던 것이다. 게임 룸의 불은 아주 환하게 잘 들어왔다. 깨끗했던 바닥은 어느 사이 더럽혀져 있었고, 각종 기자재들은 회색이 눈에 확연히 들어올 정도로 먼 지가 쌓여있었다. 나는 어쩐지 밝은 빛 아래 난장판이 된 게임 룸의 모습 이 그대로 적나라하게 들어오는 것 같아서 그리 좋지 않은 기분이 되고 말았다. 한 때는 이곳에서 수많은 게이머들이 접속해 울고 웃었을 것이 틀림없는 이곳이 이제는 버려졌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럼 이제 뭘 하죠?" 켄을 고쳐 안으면서 실버우드가 나에게 물었다. 물론 나는 대답 대신에 내가 들고 있던 랩탑을 바라보았다. "빨리 스테아를 데리고 가야지." 뭘 기다리고 있느냐는 듯한 얼굴을 하고서 젯나이트가 말했다. 나는 컴 퓨터와 연결되어 있는 전원을 이은 뒤, 스위치를 올렸다. 그런데 내가 한 가지 잊은 것이 있었다. 그건 전원을 켜면 소드앤매직 온라인의 오프닝 곡이 거대한 소리를 내면서 울려 퍼진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그걸 잊고 있었던 덕분에 건과 유하린 수사관은 귀를 막았고, 나는 잠시 동안 내가 얼마나 멍청한가를 탓하면서 멍하니 서 있어야 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22238/22303 ━━━━━━━━━━━━━━━━━━━━━━━━━━━━━━━━━━━━━━━━ 제 목:[탐그루] 자유의 용 323 관련자료:없음 30/30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6-17 22:23 조회:903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빌어먹을. 귀가 다 멍멍하네." 건이 엠프에 달려 있는 볼륨을 줄이면서 내뱉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지난 번에 우리가 다녀간 이후에 누군가 이곳을 작동시켰겠구나 싶었다. 게임 본체의 전원 선은 뽑혀 있었지만, 엠프의 볼륨은 터질 지경으로 올 라가 있는 걸 보면 말이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거였을까? "찾은 건가요?" 유하린 수사관이 벽면의 액정 모니터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벽면의 액 정 모니터에는 엎드려 있는 용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었다. 붉은 피부와 기칠게 돋은 비늘을 가지고 있는 용은, 액정 화면이 켜지자 귀찮다는 듯 이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용의 눈을 바라보면서 혹시 저 용 이 나를 기다리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 왔는가?" 용이 말했다. "저것도 에뮬레이션 된 생명입니까?" 유하린 형사가 물었다. "아뇨. 저건 그냥 프로그램이에요." 나는 용이 듣건 말건 신경 쓰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일단 폭주한 모습 을 한 번 보아서 그런지 나는 용을 바라보는 게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 다. "오래간 만이군. 자네 이름이 비류, 였던가?" 용이 커다란 입을 꿈틀거리면서 말했다. "신경 쓰지 말아요. 그냥 프로그램이니까." 나는 이렇게 말하면서 액정 모니터를 살펴보았다. 일단 스테아를 찾아 야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 눈에는 스테아의 모습은커녕 용 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질 않고 있었다. "잠깐. 내가 보기에는 용에게 물어보면 될 것 같은데." 젯나이트는 이렇게 말했다. 그렇군. 용한테 물어보면 될 걸. "이봐요. 혹시 고양이 한 마리 못 보았나요?" 실버우드가 나보다 앞서서 용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러자 용이 엎드린 그대로 눈만 치뜨면서 실버우드를 바라보았다. "프로그램에게 그런걸 물어 봐야 무슨 소용인가." 아무래도 용은 화가 난 모양이었다. 유하린 수사관과 건이 거의 동시에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멋쩍 졌지만 우선은 스테아를 찾는 게 먼저였다. "이봐. 그러지 말고 좀 가르쳐 줘. 우린 한시가 급한 사람이라고." "급한건 당신들이지 나는 아닌 것 같은데." 건의 말에 용이 이렇게 대꾸했다. 건은 당혹스럽다는 듯한 얼굴이 되어 서 유하린 수사관을 바라보았다. 유하린이라면 뭔가 알아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찌되었건 유하린 수사관은 어스폴 수사관이니까. "고양이를 본 적은 있지?" 유하린 수사관이 물었다. 하지만 냉정하게 심문을 하고 있다는 느낌보 다는 구걸하는 듯한 느낌이 더 강했다. 아무리 어스폴 수사관이라고는 해 도 사람과는 전혀 다른 것에게는 심문을 하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글쎄." 용은 심드렁한 태도로 이렇게만 말했다. "거기 있는 동안 아무 것도 못봤단 말인가?" "글쎄." "좋아. 그럼 뭐라고 널 부르면 되지?" "글쎄." "도대체 그럼 아는 게 뭔가?" "글쎄." 용은 연이은 유하린 수사관의 질문에 글쎄, 로 일관했고, 나는 어이가 없어서 그 모습을 멍청하게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럼 도대체 거기에 왜 있는거야?" "그야 인간인 너희들만 알고 있는 일이지. 나는 살아있어. 수많은 다른 생명체들과 마찬가지로. 하지만 누군가가 나를 이곳에 가두었고, 이제 자 네들이 전원을 이어주었으니, 나는 나가겠네." 용은 이렇게 말하고는 당장이라도 날아갈 듯, 날개를 펄럭였다. 이건 정말 예상치 못한 경우였다. 스테아를 찾으려고 했더니 스테아는 보이지 않고, 유일하게 희망을 걸어 볼 수 있는 용은 저렇게 비협조적일 줄이야. 나는 난감한 기분이 들었다. 전원 박스 옆에 달려 있는 인터폰이 울린 게 바로 그 때였다. "뭐야, 저건?" 건이 신경질 적으로 말했다. "수위일 겁니다. 제가 받죠." 유하린 수사관은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를 생각해 보다가 하나의 가능성을 찾아 낼 수 있었다. "밥?" 나는 용에게 이렇게 말했다. 용에게 이름을 물었을 때, 용이 밥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름을 부르는 걸로 용 이 도움을 주리라고 생각하는 건 동전을 던져서 옆면이 나오는 데 거는 것과 마찬가지긴 했지만, 그래도 지금으로서는 희망을 걸 수 있는 모든 가능성에 다 걸어 보아야 했다. "그래. 나를 밥이라고 불러달라고 했지." 용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면서 말했다. 나는 그 모습에 질려서 더 말 을 할 엄두를 내지를 못했다. 용은 꼭 노인네나 지을 것 같은 표정을 하 고서 눈을 껌벅이고 있었던 것이다. 간단하게 말해서, 완전히 나는 무시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비류 씨." 유하린 수사관이 나를 불렀다. "비류 씨를 찾습니다." 나를? 나는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면서 유하린 수사관을 바라보았다. 유하린 수사관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찾을 사람이 있을까? 나 는 일단 용을 뒤로 하고 인터폰으로 향했다. "비류 님? 저에요. 세헤라자드." 인터폰의 목소리는 의외의 것이었다. "거기서 뭐해?" 나는 대뜸 세헤라자드에게 이렇게 물었다. 보통 송수화기를 들면 시선은 다른 곳에 두기 마련이다. 송수화기는 그 야말로 먼 곳에 있는 상대와 송수화를 하기 위해서 있는 거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세헤라자드가 인터폰 안에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나는 세헤라자드가 인터폰 안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상상을 해 보 았지만 도통 상상이 가질 않았다. 세헤라자드는 지금 어떤 형태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비류 님을 돕고 있잖아요." 세헤라자드가 내 물음에 기분이 상했는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지금 우리는 용을 설득하는 일을 하고 있어." "알아요." "그런데?" "그런데 용을 만날 수가 없어요." "없다니? 거기서 전원을 타고 컴퓨터 안으로 들어가는 게 힘든가?" "컴퓨터 전원은 발전소하고 연결 되어 있거든요. 여기서는 갈 수가 없 어요. 비류 님. 인터폰 밑에 보면 단자가 하나 있을 거예요. 그걸 컴퓨터 입력 단자 아무 곳하고나 좀 이어 주세요." 세헤라자드가 말했다. 나는 세헤라자드의 다른 능력은 잘 몰라도 교섭 능력 하나만큼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소드앤매직을 플래이 할 때 나를 도와주었던 능력을 기억하고 있다는 말이다. 나는 알겠으니 기다리라고 말하고는 적당한 선을 찾아보았다. "뭐 하는 거죠, 비류 씨?" 유하린 수사관이 물었다. 나는 유하린 수사관에게 이렇게 말해 주었다. "드레곤 슬레이어를 출동시키려고요." 나는 이렇게 말하면서 책상 밑에 아무렇게나 널려 있던 선을 찾아 대충 인터폰과 컴퓨터 마우스 단자를 연결했다. 다른 단자를 놓아두고 굳이 마 우스 단자와 연결한 이유는 그저 고양이를 찾고 있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 같았다 (나 자신도 별로 인식하지 못한 걸 보면 그렇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자. 연결했어." 나는 인터폰의 송수화기를 들고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대답은 스피커 쪽이었다. "저, 들어왔어요." 세헤라자드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액정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맵 비슷 한 것도 없는 시커먼 공간에 용이 엎드려 있고, 그 옆에 마치 고양이 앞 에 서 있는 생쥐처럼 보이는 세헤라자드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액정화면에 집중되었다. "말해봐요, 밥. 밥은 예전에 제가 본 모습과 다른 모습이에요." 세헤라자드가 이렇게 말하면서 용을 다독거렸다. 용의 얼굴이 금새 난 처하다는 듯한 빛으로 바뀌었다. "내 딸이지만 너무 영리하단 말이야." 젯나이트가 대견한 듯한 눈을 하고서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을 나는 들 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했다고 영리하다고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밥. 누가 당신을 달라지게 했지요?" "사람들. 사람들이 여길 왔어. 그리고 나를 캡춰해서 조작했지.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이야." 용이 말했다. 그랬구나. 뭔가 달라진 것 같다 싶기는 했지만 설마 MS직 원들이 이곳에서 저 용을 조작했을 줄은 알지 못했다. "어스넷을 알아요?" 세헤라자드가 용에게 물었다. 용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용의 목근육이 움직이는 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생생하게 전해졌다. 건도 유하 린도 다들 목을 움직여보고 있었다. "어스넷은 이곳과는 같으면서도 다른 세상이에요. 당신은 더 넓은 세상 으로 나가고 싶지 않나요? 더 넓은 세상에서 다른 용을, 다른 생명을 만 나고 싶지 않나요?" "세헤라자드!" 세헤라자드가 말하자 젯나이트가 소리쳤다. 나는 소리를 칠 생각까지는 없었지만 적어도 세헤라자드가 무슨 생각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있었다. "그럼 우리 서로 도와줘요. 저는 밥, 당신을 더 넓은 세상으로 보내드 릴 수 있어요. 그리고 당신은 제가 필요한 게 어디 있는지 알고요." 용은 날개를 들썩였다. 그 날개짓에 다들 숨이 막히는 듯한 얼굴을 하 고서 액정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고양이는 내 안에 있어요." 용이 말했다. 전혀 용 같지 않은, 꼭 애완동물이 말을 한다면 쓸것 같 은 말투였다. "우리가 필요한 건 스테아가 아니에요. 스테아가 아닌 게 함께 있죠? 그게 필요해요." 세헤라자드는 이제 용을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그러자 용의 목구멍에서 가래가 들끓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저 소리가 무슨 소리인지 나는 알 수 있었다. 고양이가 기분이 좋으면 내는 소리였던 것이다. "잠깐만요." 용은 이렇게 말하고는 눈을 감았다. 용의 몸이 꿈틀거리는가 싶더니 용 의 입에서 두 개의 구슬이 나와 바닥에 떨어졌다. 하나는 금빛으로 반짝 이는 구슬이었고, 또 하나는 투명한 젤리같아 보이는 구슬이었다. "구슬이 두 개군." 유하린 수사관이 턱에 손을 괴고서 말했다. "뭔지 알겠어요?" "이제 두고 보면 알겠지." 유하린 수사관은 이런 식으로 저 구슬이 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하나는 제가 예전에 스테아에게 주었던 목걸이에요. 또 하나는 바로 아버지의 마스터 패스워드고요." 세헤라자드가 구슬을 집어들면서 말했다. "저는 동양의 용을 모티브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드린 겁니 다." "알아요, 밥." 용을 쓰다듬으면서 세헤라자드가 이렇게 말했다. "자. 이제는 다 됐어요. 비류 님?" 세헤라자드가 나를 돌아 보면서 말했다. 나는 세헤라자드가 뭘 원하는 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젯나이트가 세헤라자드를 말리려고 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는 순간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용 보고 나가라고 해." 이렇게 말한 것은 바로 건이었다. 건은 랜 선을 끌어다가 컴퓨터에 이 어놓았다. "잠깐. 세헤라자드! 지금 네가 뭘 하고 있는지 알기나 해?" 젯나이트가 소리쳤다. "알아요. 분명하게." 젯나이트의 말에 용이 움찔하면서 목을 움츠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겉 만 용이지 완전히 고양이와 다를 바 없는 행동이었다. "그 용이 밖으로 나가면 부루터스가 원하는 세상이 가까워진다는 걸 모 르니? 만약에 어스넷에 떠돌아 다니는 생명의 수가 불어나면..." "알아요, 아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용이 누려야 할 자유를 누리 지 못하게 할 수는 없어요." 세헤라자드도 나름대로 단호해 보였다. "젯나이트." 건이 말했다. "자유는 누구나 누릴 수 있습니다. 스스로 책임을 질 수만 있다면요. 만약 자신의 목적과 맞지 않는다고 해서 누군가의 자유를 제한한다면, 그 건 자유라 부를 수 없을 겁니다." "자네, 말은 그럴싸하게 하는군. 하지만 세상에 얼마나 많은 생명체들 이, 또 생명체의 가능성이 있는 것들이 갇혀 있는지 당신은 알고 있나? 그 많은 생명체 중에 하나를 풀어주고, 또 풀어주지 않는다고 해서 무슨 상관이 있지?" 젯나이트가 건에게 말했다. 건은 피식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저 용에게는 상관이 있지요." 건이 말했고 용은 날개를 퍼덕이면서 몸을 일으켰다. "잠깐만요, 밥." 세헤라자드는 이렇게 말하고는 금빛 구슬을 양 손에 쥐었다. 그러자 구 슬에서 빛이 나는 가 싶더니 금빛의 링으로 변하였다. "이걸 가지고 가요. 다시 만날 수 있게." 세헤라자드는 이렇게 말하면서 용의 날개 끝에 링을 끼워주었다. 링은 마치 녹아 들어가는 듯이 날개에 박혀 들어갔고, 용은 다시 한 번 가래끓 는 소리를 내었다. "다시 만날 수 있어요?" 세헤라자드는 밥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용은 날개를 한 껏 뻗어 용의 표효를 허공에 내 지른 후, 화면에서 사라져버렸다. "안그래도 시간이 없는데. 세헤라자드!" 젯나이트는 이렇게 소리쳤다. "하여간 이제 그 마스터 패스워드를 구했으니 어서 빨리 이곳을 떠나 죠. 더 이상 있을 필요는 없으니까." "그럽시다. 저 용까지 어스넷으로 나갔으니 시간은 더 촉박해졌을 것 아닙니까?" 건이 웃으면서 말했다. 건은 아무래도 사태의 심각성을 나만큼도 인식 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 일단 벌어진 일이니까요. 자. 그럼 이제 어디로 가는 겁니까? 유하린 수사관 역시 이제 본격적인 일이 시작된다는 말투로 말했다. 유 하린 수사관이야 MS사를 조사하는 게 목적이었으니, 여기서 마스터 패스 워드를 찾건, 혹은 용을 풀어주건 아무 상관도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아 무 불평하지 않고 꾹 참은 걸 보면 역시 수사관은 수사관이구나 싶었다. "시내 한 복판." 젯나이트가 말했다. "설마 MS사 본사가 있는 곳으로 가자는 건 아니겠죠?" "자네 말이 맞아." "맙소사. MS본사라고요? 거긴 영장이 있어도 함부로 못 들어가는 곳입 니다." 유하린 수사관이 말했다. 유하린 수사관은 어이가 없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알아. 하지만 방법이 없네. 시간이 너무 없어." 젯나이트가 단호하게 말했다. 유하린 수사관은 젯나이트의 말에 고개를 설래설래 저었다. "불가능합니다. 일단 고아원으로 돌아간 다음에..." "시간이 없다고 하지 않았나. 그리고 들어가는 건 너무 걱정 말게. 나 하고 세헤라자드가 있으니까." 젯나이트는 이렇게 말하고는 오토에게 어서 출발하자는 뜻으로 이렇게 말했다. "후버카는 자네가 몰겠지?" 젯나이트의 말에 오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헤라자드가 돕겠다면요." 오토가 말했다. 오토는 되었건 젯나이트와 세헤라자드의 능력을 지난 번 이곳에서 벌어진 총격전 때에 몸으로 체험한 사람이었다. 나는 오토의 표정을 바라보았다. 아무런 감정도 없어 보이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사태 를 가장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건 역시 오토인 것 같았다. "영혼의 에뮬레이터는 MS본사 이사장 실에 설치되어 있다네. 이사장실 은 98층이지." "99층 짜리 건물 98층요?" "그래. 99층은 연구실이니까." "오토. 갈 겁니까?" 유하린은 여전히 어이가 없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서 오토에게 물었다. 오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가지 않겠다면 남아도 좋습니다." 오토가 말하자 유하린이 이렇게 받았다. "빌어먹을. 승부를 포기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결국 유하린도 이렇게 해서 우리와 함께 MS본사로 출발하게 되었다. 후버카는 도로를 질주하고 있었다. 다시 정문을 통과할 때, 수위가 초 능력자라면 잃어버린 열쇠도 찾아 줄 수 있느냐고 물었던 바람에 시간이 조금 지체되기는 했지만 그 외에는 별 문제가 없었다. 세헤라자드는 랩탑 말고 따로 출발하겠다고 했다. 나는 어쩐지 세헤라 자드 역시 용처럼 언젠가는 떠나야 한다는 게 실감이 나고 있었다. "그런데요, 켄은 왜 데리고 가는 거지요?" 실버우드가 뒷좌석에서 켄을 다시 고쳐 안으면서 물었다. "참. 이야기를 해준다고 해놓고 안 했군. 그야 부루터스를 만나게 될 것 같아서였네. 부루터스가 아무리 더 이상 인간의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해도 켄을 본다면 생각을 고쳐먹을 것 같아서." "말하자면 지푸라기로군요." 건이 말했다. "그래. 하지만 지푸라기 때문에 물에서 살아날 수도 있는 법이야. 오 토. 자네 조금만 더 빨리 몰 수 없겠나? 시간이 너무 없어." 젯나이트가 말했다. 후버카에 장착되어 있는 이리듐 폰이 울렸다. "저 주십시오." 유하린 수사관이 말했다. 나는 위성과 연결된 도로 상황판을 건드리지 않고 조심스럽게 이리듐 폰을 집어 유하린 수사관에게 주었다. "유하린입니다. 예. 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유하린은 이렇게 말하고는 이리듐 폰을 나에게 넘겨 주었다. "비류 씨는 인기가 많군요." 기분나쁘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나는 전화를 건게 누구인지 알 수 있었 다. "따로 간다고 하더니, 이리듐 폰으로 가려고?" "어차피 저야 후버카보다 빨리 갈 수 있으니까요." 세헤라자드가 말했다. "그런데 이번엔 무슨 일이야?" "탐그루 이야기 때문에요." 세헤라자드는 당연하지 않느냐는 듯한 어조였다. "꼭 지금 해야 해? MS사 일 끝나고 해도 되지 않아?" "이제 함께 있을 시간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서요." 세헤라자드가 말했고 나는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창 밖 으로 보이는 풍경들이 더욱 어둡게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이야기가 모두 끝나면 세헤라자드는 나를 떠나갈 것이다. 나는 이리듐 폰이 내 체온을 빼앗아 가고 있는 듯 느껴졌다. "탐그루로 향하던 수르카 일행은 시련을 겪게 됩니다. 그 시련이란 것 은 하나의 세상이 끝나는 지점이자 하나의 세상이 시작되는 지점인 틀뢴 에 가게된 것입니다......" 내가 뭐라고 말할 틈도 주지 않고, 세헤라자드의 이야기는 이렇게 다시 시작되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22239/22303 ━━━━━━━━━━━━━━━━━━━━━━━━━━━━━━━━━━━━━━━━ 제 목:[탐그루] 죽지 않는 사람들 324 관련자료:없음 23/23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6-17 22:24 조회:904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 죽지 않는 사람들 배가 태풍 지대 쪽으로 다가가고 있다는 걸 알았을 때, 나는 가장 먼저 사빈의 항해 실력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정이 되어 피안 시의 항구에 도착했을 때 만난 반란군은 나에게 이렇 게 말했다. "배는 있지만 선원은 없습니다. 선원을 모집하려면 며칠은 이곳에 머물 러야 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자 반란군에게 사빈은 자신이 선원중의 선원이고 황금군도도 항해 해 본 경험이 있다고 큰소리를 쳤다. 물론 나야 그렇게 자신있게 말하는 사빈의 모습에서 조금 불안감을 느끼긴 했지만, 그 불안감이 이렇게 현실 로 나타나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배야 탐그루에서 자주 보았던 작은 규모의 화물선이었다. 화물선이야 원래 다섯 명의 선원만 있어도 충분히 움직일 수 있다고 하니까, 셋이서 도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았다. 처음에는 순조로운 항해가 되겠구나 싶었 다. 하지만 그건 큰 착각이었다. 출항을 했을 때는 수평선에 걸쳐있는 것처럼 보이는 태풍지대의 모습은 그저 낮게 내리 깔린 구름 덩어리과, 간혹 구름 위에서 간간히 울리는 천 둥소리, 뭐 이 정도의 인상 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일은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건가?" 오브라디 교수가 인상을 쓰면서 사빈에게 물었다. 출항한지 불과 이틀 도 지나지 않아서 생긴 일이었다. "키가 말을 듣지 않습니다. 바람도 남쪽으로만 불고요. 이건 제 잘못이 아니라고요!" 사빈이 오히려 오브라디 교수에게 이렇게 소리쳤다. "아니, 무슨 말인가, 그게? 키가 말을 듣지 않는다니? 뮤를 탄 검사가 '뮤가 말을 듣지 않습니다' 이렇게 말 할 수 있는 건가?" 오브라디 교수는 거의 불길을 토해내는 것 같은 말투로 사빈을 윽박질 렀다. "직접 잡아보세요." 키를 오브라디 교수에게 넘기면서 사빈이 말했다. 오브라디 교수는 키 를 잡았다. "맙소사. 배가 고장인가?" 오브라디 교수가 말했다. 키는 손가락 하나로도 돌아갈 만큼 쉽게 돌아 가고 있었다. 키는 배의 방향을 바꾸는 데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언제부터 이랬나?" "어제 밤이요. 저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고요. 하지만 이건 고장이 아니에요. 태풍지대가 우리를 부르고 있는 거라고요!" 사빈이 소리쳤다. 나는 태풍지대를 바라보았다. 멀리서 보았을 때는 그 저 먹구름 정도로만 보였던 태풍지대였지만 천천히 태풍지대에 다가갈 수 록 태풍지대의 모습은 거대한 악귀에 가까워졌다. 이따금 들려오는 천둥 소리와 번득이는 번개 빛은 그대로 악귀의 울음소리였다. "수가 없나?" 오브라디 교수가 사빈에게 물었다. 사빈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저 기다릴 밖에요." 사빈이 말했다. 나는 태풍지대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의 속도로 본다 면 한 반나절만 있으면 우리가 탄 배는 태풍지대에 빨려 들어갈 것이 분 명했다. "이 배로 태풍을 견딜 수 있을까, 사빈?" 나는 사빈에게 물었다. "차라리 나뭇잎을 타고 대청하를 건널 수 있냐고 물어보지 그래." 사빈의 얼굴에는 절망이 드러나 있었다. 나는 사빈이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쾌활하고 허풍만 떨던 사빈의 모습은 어디 로 가 버렸는지. "혹시 마법은 없는가, 수르카 군?" 오브라디 교수가 나에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마법을 내가 알고 있었다면 배가 엉뚱한 곳으로 가는 일도 없었을 것이었다. 이 런 판국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허탈했다. "별 수 없군." 오브라디 교수는 이렇게 말하고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나 는 당황해서 오브라디 교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오브라디 교수님. 그냥 이대로 죽기만을 기다릴 겁니까?" 사빈이 말했다. 어느 사이 빗방울들이 하나 둘 갑판 위에 떨어지고 있 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얼굴에도 한 방울이 떨어졌고, 배는 점점 더 빨리 태풍지대로 들어가고 있었다. "빌어먹을!" 사빈이 소리치면서 카를로스 장군의 창을 꺼내 들었다. "이거 한 번 써먹어 보지도 못하고 이렇게 죽다니!" 사빈은 창을 갑판에 꽂았다. 나는 놀라지 않았지만 오브라디 교수는 눈 을 휘둥그렇게 뜨고서 사빈을 바라보았다. "선원이 갑판에 창을 꽂다니. 자네 제 정신인가?" "아닙니다. 이대로는 못 죽겠다는 뜻입니다." 사빈은 이렇게 말했다. 카를로스 장군의 창은 바람에 깃발을 펄럭이고 있었다. 오른 손을 창을 굳게 잡고 있는 사빈의 팔 근육이 당장이라도 튀어나갈 듯 긴장돼 있었 다. "배를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저는 바다하고 싸우겠습니다." "선원이 배를 버리고 뭘로 바다하고 싸우겠다는 말인가?" "이 창으로요." 사빈이 말했다. 빗줄기는 한 방울 한 방울 점점 더 굵어져갔고, 어느 사이 빗물은 소나기가 되어서 내리고 있었다. 사방에서 으르렁거리는 마 물의 소리와도 같은 천둥소리가 울려왔다. 이번에는 정말로 죽는 걸까. 나는 사빈의 옆에 섰다. "사빈. 나도 함께 싸워." 나는 이렇게 말했다. 뭐 하나에라도 희망을 걸어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오브라디 교수는 여전히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나는 깃발에 그려진 용의 문양을 살펴보았다. 붉은 색 용의 문양은 바람결에 흔들리면서 마치 살아있는 듯 보이고 있었 다. 구름 안으로 들어갔는지, 배는 순식간에 어둠 속에 갇혀 버렸고, 이 제 곧 당장이라도 폭풍우가 몰아칠 기미였다. 언제 이 바람이 태풍으로 변해 이 배를 날려 버릴지 알 수 없었다. 배의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요동치고 있었다. 천둥소리와 번개는 더욱 심해졌다. 오브라디 교수는 앉은 채 다리 사이에 머리를 묻었고, 나는 사 빈을 바라보았다. "덤벼라! 용사냥꾼 사빈이 간다!" 사빈은 이렇게 소리치면서 창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때마침 그 순간 어마어마한 천둥소리가 바로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 을 움츠렸지만 사빈은 눈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으아아아아아!" 사빈은 목이 터져 나갈 정도로 소리치면서 창을 바다를 향해 겨누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눈을 감았다. 죽기 전에는 인생을 돌아보게 된다던 데, 나는 그런 생각 따위는 해보지도 못했다. 그저 아무 생각도 없이 두 려움에 눈을 감았을 뿐이었다. 빗줄기가 멈추었다. 얼굴에 떨어지던 빗방 울이 멎었다. "태풍의 눈인가?" 오브라디 교수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나는 눈을 떴다. "태풍의 눈은 아닌 것 같습니다." 사빈이 사방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사방은 언제 어두웠냐는 듯이 온통 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햇빛과는 다른 빛이었다. 오로라의 빛과도 같은 붉은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우리 중 아무도 먼저 말을 꺼낼 생각도 못하 고 있는 사이, 배는 마치 노련한 항해사에 의해 인도되는 것처럼 스르르 미끄러져 갔다. 나는 앞을 바라보았다. 붉은 빛에 휩싸인 해안선에 마치 얼음처럼 빛을 반사하고 있는 항구가 눈에 들어왔다. "아..." 사빈은 탄식과도 같은 신음을 내 뱉었다. 물론 그거야 사빈이 감탄했다 는 뜻이었지만 내가 듣기에는 전혀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감탄사였다. 사 빈은 마치 이국의 공주라도 본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태풍이 사라졌다는 사실은 일단 놀라운 일이었지만, 무엇보다 놀라운 건 배가 항구를 향해서 저절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건 마법이야." 오브라디 교수가 항구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오브라디 교수의 모습도 붉은 빛에 휩싸여 항구처럼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사빈도 붉은 빛에 휩싸여 있었다. 나는 오른 손을 들어 바라보았다. 내 손도 빛 에 휘감겨 투명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배가 인도되고 있다네. 못 느끼겠는가?" 오브라디 교수가 말했다. 배는 마치 항구가 끌어당기고 있기라도 한 듯, 곧바로 항구를 향해 가고 있었다. "교수님.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요." 사빈은 여전히 뭔가에 홀린 듯한 눈을 하고서 항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인가는 곧 알게 될 것 같네. 누군가가 우리를 부르고 있 다면, 저기 닿은 후 저절로 알게 되겠지." 오브라디 교수의 말이 끝나자, 붉은 빛은 서서히 사라져 갔다. 빛에 휘 감겨 있었던 사빈과 오브라디 교수의 모습도 정상으로 돌아왔고, 내 몸도 빛이 사라져 평상시과 다를 바 없게 되었다. 나는 항구를 바라보았다. 항 구는 강철로 만들어져 있었다. 강철로 만들어진 항구는 본 적이 없는데. 아니, 철로 저렇게 항구를 만들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 아닌 가? 저렇게 큰 항구를 강철로 만들려면 얼마나 많은 철이 필요하겠는가. 게다가 바닷가에 있으니 녹이 슬 건 뻔한 이치고. 나는 칼날처럼 번쩍이 고 있는 항구를 바라보면서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배는 어느덧 항구에 닿았다. 오브라디 교수가 먼저 항구에 발을 올렸 고, 망설이다가 사빈과 나도 항구에 발을 올렸다. 텅, 하고 철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오브라디 교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누군가 있을 거야, 틀림없이." 오브라디 교수가 굳이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아도, 나 또한 누군가 우리 를 맞아주러 온 사람이 있을 것 같았다. 마법으로 이곳까지 인도되었다는 오브라디 교수의 말도 있었지만 나에게도 예감이라는 것이 있었다 (물론 이렇게 잘 꾸며진 항구에 아무도 없다면 그게 더 이상할 노릇이겠지만). "사람이 있는데." 사빈이 창을 고쳐 잡으면서 말했다. 물론 창끝이 땅을 향하게 하고는 있었지만 사빈은 양 손으로 언제라도 공격할 수 있도록 창을 잡고 있었 다. 사빈이 가리킨 쪽에는 가죽옷을 입은 사내가 서 있었다. 짙은 갈색의 머리는 길게 어깨까지 늘어져 있었고, 얼굴에도 갈색의 수염이 뒤덮여 있 는 사내였다. 사내는 허리에 요란한 장식이 달려 있는 칼을 차고 있었고, 등에는 원형의 방패를 짊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차림새에 비해서 몸은 가 늘고 마른 데다가 피부는 희고 고와서 그다지 험악한 인상을 풍기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를 부른 게, 당신인가?" 오브라디 교수가 사내에게 물었다. 사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 소개를 먼저 하지요. 저는 스트라이더라고 합니다. 이곳에서는 칼 을 쓰는 잡다한 일을 하는 사람이지요. 여러분들을 이곳으로 부른 것은 이곳의 대마법사 겐돌프 님입니다." "겐돌프라." 눈을 껌벅이면서 오브라디 교수가 말했다. 나는 대마법사라는 말에 제 마를 떠올려 보고는 혼자 피식 웃었다. 어쩐지 별 실력 없는 마법사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럼 이곳은 어디입니까?" 사빈이 정중하게, 하지만 경계를 늦추지 않으면서 물었다. "남쪽의 섬나라, 틀뢴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스트라이더라고 자신을 밝힌 사내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면서 말했다. 그런데 틀뢴이라면 나는 어디선가 한 번 들은 기억이 있었다. "오브라디 교수 님. 틀뢴이라면..." "그렇지. 극지의 아타카파 공화국과 바다의 틀뢴. 이곳이 바로 그 틀뢴 이로군. 전설의 땅 틀뢴. 모든것이 존재하지만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는, 바로 그 틀뢴이야." 언젠가 오브라디 교수가 극지로 향하는 배에서 했던 말이었다. "우리를 부른 이유를 먼저 말해 줄수 있겠소? 우리는 지금 상당히 바쁜 걸음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 "알고 있습니다, 사빈 님. 당신들이 탐그루로 향하고 있으며, 또한 당 신들 말로 마칸의 강림을 막으려고 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저 교수 님 이름이 오브라디이며, 저기 마법을 쓰는 분 이름이 수르카라는 것도." 스트라이더는 이렇게 말하면서 웃음을 지었다. 나는 스트라이더가 짓고 있는 웃음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려고 했으나 차가운 스트 라이더의 표정에서 읽어 낼 수 있는 것은 감정을 숨기고 있다는 것 밖에 는 없었다. "따라 오시지요. 당신들을 대마법사 겐돌프 님께 모시고 가는 것이 제 임무입니다." 스트라이더는 이렇게 말하고는 우리를 길가로 안내했다. 길에는 마차가 한 대 서 있었다. 네 사람이 넉넉히 탈 수 있을 만한 넓은 마차였다. 스 트라이더의 칼에 새겨진 것처럼 강철로 만들어진 화려한 문양이 마차에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마차의 차체 자체는 무게 때문인지 몰라도 강철로 만들어져 있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하나 있었다. 말에 매여 있 는 것은 뮤가 아니었던 것이다. "잠깐. 이 짐승은 뭡니까?" 사빈이 마차를 끌고 있는 두 마리의 짐승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짐승은 크기는 전체적으로 뮤와 비슷했지만 완전히 달랐다. 털이 짧은 뮤 보다 훨씬 짧은 털에, 근육도 훨씬 더 발달되어 있었다. 걷는 모습은 꼭 굳어 있는 것처럼 부자연스럽게 보였지만, 다리의 근육으로 보아 대단히 빨리 달릴 수 있을 것 같았고, 우리를 보고 전혀 경계를 하고 있지 않은 것으 로 보아 뮤만큼 예민한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다만 긴 얼굴과 선해 보이는 눈동자는 뮤와 비슷했다. "말이라고 합니다. 이곳에서는 이런 걸 타고 다니지요. 그쪽에선 뮤를 타고 다니셨지요?" 스트라이더가 말했다. "바르도 대륙에 와 보신 적이 있군요." 내가 스트라이더에게 물었다. 스트라이더는 웃으면서 고개를 가로 저었 다. "아뇨. 저는 틀뢴에서 자라 통카 산의 그늘이 비치는 땅을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자. 어서 타시지요. 당신들이 시간이 없는 만큼, 우리도 시간 이 없습니다." 스트라이더가 말했다. 마차는 뮤가 끄는 것보다는 조금 느린 듯 했지만 묵직한 안정감이 느껴 졌다. 스트라이더가 말이라고 불리는 동물을 잘 다루기 때문인지도 몰랐 고, 어쩌면 마차가 무거워서 일 수도 있었지만, 나는 지금껏 마차를 타면 서 느꼈던 것과는 다른 지금 승차감에 익숙하지 않아서 당장이라도 멀미 를 할 것만 같았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22240/22303 ━━━━━━━━━━━━━━━━━━━━━━━━━━━━━━━━━━━━━━━━ 제 목:[탐그루] 죽지 않는 사람들 325 관련자료:없음 28/28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6-17 22:24 조회:896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창 밖을 좀 보게, 수르카 군." 오브라디 교수가 내가 멀미를 할 것 같다는 걸 알아냈는지 이렇게 말했 다. 나는 창 밖을 내다보았다. 창 밖에는 한가로운 농촌의 풍경이 이어지 고 있었다. 섬나라인 것 같은데 농사를 짓고 있었다. 젊은 아낙 하나가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스트라이더! 손님인가?" "베류 부인, 안녕하십니까?" 스트라이더가 소리치는 게 들렸다. 아마도 급하게 마차를 모느라 제대 로 인사를 하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수르카 군. 뭔가 이상하다는 거, 못 느끼겠는가?" 오브라디 교수가 물었다. 나는 바깥 풍경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사람들 은 벼를 베고 있었다. 이미 어느 정도 모인 볏단이 여기 저기 쌓여 있는 게 눈에 들어왔고, 간혹 새들이 먼저 쪼아 먹기 전에 떨어진 낱알들을 줍 고 있는 꼬마의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이따금 이마에 송글송글 맺혀 있 는 땀을 닦아내는 건장한 사내의 모습, 그리고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사 내의 땀을 닦아주는 여인네. 내가 보기에는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는 풍 경이었다. "정말 이상하군요." 사빈이 말했다. 사빈은 긴장했는지 마른 침 마저 삼키고 있었다. 오브 라디 교수가 사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또 엉뚱한 소리할려고 그러지?" 오브라디 교수가 사빈에게 말했다. 사빈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닙니다. 저도 알겠습니다, 오브라디 교수 님 말씀. 저도 한 때 교수 님의 애제자 아니었습니까? 지금도 그렇지만요." 사빈의 눈빛은 진지했다. 나는 오브라디 교수와 사빈을 번갈아 가면서 살펴보았지만 도무지 뭐가 이상하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뭔데요, 도대체?" 내가 물었지만 사빈은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아직 일러. 마차가 도착한 후에 이야기해도 늦지 않을 것 같아." 사빈이 말했고, 오브라디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정말로 놀랄만한 일이 벌어질 지도 모르니 수르카 군. 마음 단단히 먹고 있게." 오브라디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마차를 타고 가는 내내, 나는 멀미와 싸워가며 도대체 무엇이 이상한가 눈을 부릅뜨고 살펴보았지만, 무엇이 이상한지는 끝내 알아내지 못했다. 마차가 멈추어 선 곳은 높은 산이 시작되는 곳이었다. 마차에서 내리자 하늘을 절반 쯤 가리고 있는 거대한 산이 하나 눈에 들어왔다. "저 산이 아까 말한 통카라는 산인가, 스트라이더?" 오브라디 교수가 스트라이더에게 물었다. 묻고 있는 오브라디 교수의 눈썹이 꿈틀거리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예. 맞습니다. 대마법사 겐돌프 님이 계신 곳입니다." 스트라이더가 머리를 뒤로하면서 말했다. 오브라디 교수는 고개를 끄덕 였고, 사빈은 창을 편하게 어깨에 올려 놓았다. "그럼 가지. 그곳이 어디인지는 몰라도." "바로 저깁니다." 스트라이더는 산 중턱에 나 있는 동굴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동굴의 입 구에는 인공적으로 만든 것이 분명한 장식이 되어 있었고, 그 앞으로는 천막이 하나 있었다. "따라오시죠. 산길이 좀 험악합니다." 스트라이더는 이렇게 말하고는 산길을 따라서 먼저 걸음을 옮겼고, 우 리 일행은 그 뒤를 따랐다. 울창한 숲이었다. 나무들은 하나같이 아름드리로 자라 있었고, 잎들은 햇빛 아래에서 생기를 잃지 않고 윤기를 내고 있었다. 이따금씩 울어 제 끼는 새소리와 벌레 소리가 들려왔고, 간혹 주먹만한 동물들이 재빠르게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여기도 이상한가요?" 내가 작은 목소리로 오브라디 교수에게 물었다. 그러자 오브라디 교수 는 그저 입술에 집게손가락을 대고 쉿, 하는 소리만 냈을 뿐이었다. 산길 을 오르는 일은 생각보다 그리 수월하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결국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산밑에서 바라보았던 중턱의 동굴 입구까지 올라 올 수는 있었다 (다리는 후들거리고 목은 타서 죽을 지경이 되기는 했지만). "겐돌프 님!" 스트라이더가 동굴 앞에 있는 천막에 대고 소리쳤다. 그러자 길다란 망 토를 두른 사내가 천막 안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망토는 두꺼운데다가, 머리에는 두건까지 뒤집어쓰고 있어서, 나는 겐돌프라고 불린 사람이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소. 내가 당신들을 이곳까지 소환한 겐돌프요." 굵직한 남자 목소리가 두건 안에서 울려 퍼졌다. 나는 마법사의 얼굴을 보기 위해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보았지만 두건 안에는 시커먼 어둠뿐이었 다. "틀뢴에 관해서는 여러 문서를 통해서 읽어 알고 있었습니다만, 이렇게 직접 온 것은 처음입니다. 전설의 땅으로 알고 있었습니다만,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르군요."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생각하는 것과 실제는 다른 법이지요." 겐돌프가 말했다. 크고 굵은 사내의 음성이기는 했지만, 얼굴이 보이지 않아서 그런지 나는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서 보이기 위해서 농사 일 하는 사람을 준비해 놓는 일 같은 것 말이지요. 지금은 추수할 계절이 아니지요. 추수를 할 날씨도 아니고." "거기다가 먹이를 쫓는 것도 아니면서 그저 땅바닥과 하늘을 반복해서 계속 똑같은 궤적으로 오가는 새를 준비해 두고요." 오브라디 교수의 말에 사빈이 덧붙였다. 나는 무슨 이야기가 오가고 있 는 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사 빈과 오브라디 교수를 번갈아 가면서 보는 일 뿐이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당신들이 보기에는 그저 평범한 사람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저 분은 이곳 틀뢴의 대마법사 겐돌프 님입니다. 겐돌프 님을 더 이상 모욕하신다면 이 스트라이더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그래? 그럼 한 번 찔러보지 그래. 그 허리에 찬 묵직한 칼로 말이야." 사빈이 도발적으로 말하면서 스트라이더에게 다가갔다. 나는 사빈이 공 격태세를 갖추고 있지 않은 것을 발견하고는 스트라이더의 측면으로 돌아 섰다.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공격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정말 칼을 뽑아 공격하지는 않을 테지만, 적어도 내가 측면에 서 있다는 걸 알 면 함부로 칼을 휘두르지는 못할 거라는 계산에서였다. "수르카 군." 하지만 오브라디 교수는 이렇게 말하면서 내 어깨에 손을 얹어 나를 뒤 로 물러서게 했다. 나는 아직까지도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그 때였다. 괴이한 짐승의 울음소리가 바로 내 등뒤에서 들려왔다. 나 는 얼른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거대한 곰이 서 있었다. 사빈은 곰을 바라보고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고, 스트라이더는 칼을 뽑아 그대로 곰 에게 달려들었다. 언제 곰이 나타났을까? 나는 전혀 기척을 느끼지 못했 는데. 설마하니 곰이 고양이처럼 소리 하나 내지 않고 사람에게 다가올 리는 없는데. "뒤로 물러서!" 스트라이더가 칼을 머리 위로 치들고 곰에게 달려 들었다. 나는 사빈과 오브라디 교수를 바라보았다. 오브라디 교수는 바로 옆에서 곰이 나타났 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팔짱을 끼고 곰을 바라보고 있었고, 사빈도 처음에 곰이 나타났을 때는 놀란 것 같았지만 지금은 창을 거꾸로 들고서 편안한 자세로 스트라이더와 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만 두지, 이제." 오브라디 교수가 말했다. 바로 그 순간 곰은 앞발을 쳐들고 그대로 스 트라이더에게 달려들었고, 나는 앗 하는 비명 한 번 지를 틈도 없이 곰에 게 깔리는 스트라이더의 모습을 보았다. 나는 순간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 다. 차마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내 얼굴과 몸에 스트라 이더의 피가 튀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러나 내 앞에 보이는 것은 태풍이 사라질 때 보았던 붉은 빛과 흡사한 빛에 휩싸 인 곰과 스트라이더의 모습이었다. "준비한다고 했는데 이렇게 빨리 알아 낼 줄은 몰랐소." 겐돌프가 말했다. "틀뢴에 대해서는 공부한 적이 있습니다. 영원히 죽지 않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땅. 그리고 한 때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이상향으로 묘사되기도 했던 땅. 물론 전설이라 완전히 믿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이렇 게 실제로 체험하게 되었군요." 오브라디 교수는 예의바른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겐돌프는 두건 속 이긴 했지만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이방인이 이곳에 들어오는 경우는 몹시 드물지요. 우리도 나름대로 우 리를 지키기 위한 방편을 쓰고는 있습니다. 보셨겠지만 태풍지대 같은 경 우도 우리가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리고 이곳의 풀과 동물들, 사람들. 실 은 모두 존재하지 않지요." "동시에 존재하기도 하구요." "그렇습니다. 오브라디 교수님." 이렇게 말하면서 겐돌프는 두건을 벗었다. 나는 두건 아래 감추어져 있 던 겐돌프의 얼굴을 보는 순간 깜짝 놀라고 말았다. 겐돌프의 얼굴은 바 로 나의 얼굴이었기 때문이었다. "이곳은 같은 땅에 속하지만 속하지 않기도 하는 곳이지요. 또한 같은 하늘 아래 있지만 같은 하늘 아래 존재하지 않는 곳이기도 하고요. 하늘 아래 새로운 건 없다고 하던가요? 그런 말이 사실이라면 이곳은 다른 하 늘 아래에 속해 있는 곳일 겁니다." 겐돌프는 이렇게 말하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오래간만입니다, 수르카. 지금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까?" 나는 나의 모습을 하고서 나에게 저런 질문을 던졌던 사람을 알고 있었 다. "모스부르거?" "그렇습니다. 기억하고 있었군요." 모스부르거는 이렇게 말하면서 망토를 벗어 던졌다. 망토는 허공에서 붉은 빛에 휩싸이더니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나는 범버쿠 정글의 율리에 산에서 만났던 모스부르거의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내가 알기로 모스부 르거는 사람을 현혹하는 환영술사였다. 물론 나에게 깨달음을 준 사람이 기도 했지만 말이다. "답답했지요. 이런 걸 입고 있느라고요." 모스부르거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스트라이더와 곰이 있던 자리를 살 펴보았다. 곰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있었고, 스트라이더는 머리를 긁적이면서 우리 일행을 바라보고 있었다. "환영술사? 사빈이 모스부르거에게 물었다. "아닙니다. 아니, 그렇다고도 할 수 있겠죠. 당신들이 보기에는 환영술 사일 수도 있지요. 어차피 나는 세상의 모든 사람인 동시에 아무도 아니 니까요. 지금은 수르카, 당신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여기 있는 사람들이 모두 그렇다고 할 수 있겠죠." 스트라이더가 모스부르거의 말에 이렇게 덧붙였다. "나는 환영술이라는 게 상대의 마음을 비추는 마법이라고 알고 있었습 니다만."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지요." 모스부르거는 이렇게 말하고는 설명을 이어갔다. "우리에게는 규칙이 하나 있습니다. 다른 땅에, 그러니까 다른 하늘 아 래 살고 있는 사람이 이곳에 찾아오면 그가 누구건 일단 그들이 알고 있 는 가장 친숙한 모습으로 다가서는 것. 그것이 규칙입니다. 그래야 그 사 람들이 미쳐버리거나 우리를 겁내지 않을 테니까요." 말하고 있는 동안에도 천막은 흐릿하게 사라지는가 싶더니 이내 난생 처음 보는 희한한 구조물로 변해 버렸다. 그 구조물은 동그라미를 잘라서 만든 것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지붕에 바닥과 이어지는 가느다란 기둥이 하나 있었고, 그 기둥은 책상 한 가운데를 지나고 있었다. 책상 옆에는 의자가 두 개 놓여 있었는데 뭘로 만들어 졌는지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이상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지붕은 붉은 색에 하얀 줄이 쳐져 있 었고 의자는 초록색이었다. "그럼 겐돌프라는 이름은 뭡니까?" 오브라디 교수가 모스부르거에게 물었다. "옛 이야기에 나오는 유명한 마법사의 이름이지요. 지금은 기억의 저편 으로 사라져 버렸을 이름, 모스부르거와 마찬가지지요." 모스부르거는 이렇게 말하면서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모스부르거의 옷 은 붉고 푸른 꽃 그림이 가득한 옷으로 바뀌었고, 책상에는 노란빛이 도 는 음료수가 유리병에 담겨있는 채로 놓여졌다. "이해가 가질 않는군요, 저는. 도대체 이곳은 어디입니까? 그리고 우리 는 왜 부른 거지요?" 나는 모스부르거에게 따져 묻듯이 이렇게 말했다. 모스부르거는 노란빛 이 도는 음료수를 한 모금 마시더니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천천히. 하나씩 합시다. 한꺼번에 다 이야기 할 수도 없는 법이고, 저 도 여러분만큼이나 급한 사람입니다." 모스부르거가 말했다. "먼저 내 이름이 사빈이라는 건 어떻게 알았습니까?" 사빈이 모스부르거에게 물었다. 모스부르거는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 였다 (내 얼굴을 하고서 저런 행동을 하다니).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지요. 사실 그 방법과 이제부터 여러분이 해야 할 일과 관계가 있습니다만." "그러니까 그게 뭐냐는 겁니다, 지금." "먼저 이렇게 대답을 하도록 하지요. 영혼, 그러니까 당신들 말로 반지 의 정령을 가지고 있지요, 수르카?" 사빈의 질문에 모스부르거는 대답대신에 이렇게 나에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불러냅시다. 답답할 테니까요, 그 안에서는." 모스부르거는 꼭 장난치는 사람처럼 가벼운 말투로 나에게 이렇게 말했 다. 아자닌? 나는 모스부르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꼭 거울을 보는 기분 이 들기는 했지만 모스부르거의 표정은 장난치고 있는 것 같지만은 않았 다. "아자닌을요?" "예. 지금부터 도움이 될 겁니다." "잠깐만요. 도움이라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또 해야 할 일이라는 건 뭡니까?" 사빈이 의아하다는 듯이 모스부르거에게 물었다. "여러분. 저는 여러분들을 이곳으로 모시고 왔습니다. 마지만 목마른 말을 물가까지 끌고 갈 수는 있어도 물을 억지로 먹일 수는 없는 법이지 요." 모스부르거가 말했다. "말은 뭐고 물은 또 뭡니까? 일단 설명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만." 오브라디 교수가 모스부르거에게 물었다. 모스부르거는 자리에서 일어 났다. 그러자 모스부르거가 앉아있던 책상과 의자는 길다란 나무 의자로 바뀌었고, 지붕이었던 붉고 흰빛의 반원은 나무 덩쿨과 울타리로 바뀌었 다. "알렙이라는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이렇게 물어보고 있는 모스부르거의 옷은 또 한 번 바뀌어 있었다. 모 스부르거는 무릎이 드러나는 바지에 이번에는 팔뚝이 다 드러나는 파란 색 옷을 입고 있었다. "흠흠. 잘 모릅니다. 그런데, 꼭 그렇게 모습을 자주 바꾸어야겠습니 까?" 오브라디 교수가 모스부르거에게 말했다. 모스부르거는 아차 싶은 얼굴 을 하고서 오브라디 교수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아, 죄송합니다. 이곳에서는 이런 일이 흔하거든요." 모스부르거는 말하면서 산 아래를 가리켰다. 나는 산아래 풍경을 바라 보았다. 산 아래에는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고 생각했지만 어느 한 순 간 땅에서 무시무시한 속도로 탑이 솟아올랐다. 수많은 창문이 달려있는 각 진 탑이었다. 여기저기서 솟아오르기 시작한 탑들은 어느 사이 들판을 가득 메웠고, 그 밑으로 시끄러운 소음과 함께 자그마한 마차들이 믿어지 지 않을만큼 빠른 속도로 탑 사이를 헤집으며 다니고 있었다. "흔하다기 보다는 이렇게 바뀌면서 유지된다고 할 수 있지요. 어떤 사 람은 이런 현상을 문명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파괴라고 부 르기도 합니다만, 사실은 그저 다양한 인간의 가능한 여러 풍경 중 한 국 면에 불과하지요." "설명은 그만하고, 알렙이 뭔지부터 이야기 해주시지요." 오브라디 교수가 모스부르거의 말을 끊고 이렇게 말했다. 말이 잘린 모 스부르거는 쑥스럽다는 듯한 얼굴을 했는데, 나는 그 모습이 너무나도 보 기 흉해서 앞으로 다시는 쑥스러운 표정을 짓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다 하게 되었다. "당신들이 하고 있는 마칸의 강림을 막는 일은 사실 이곳에 살고 있는 우리도 원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모스부르거는 알렙에 대한 질문은 못들었다는 듯이 이야기를 계 속했다. "마칸의 강림, 이라고 여러분들은 표현하십니다만, 저희는 마칸의 강림 을 차원의 붕괴라는 말로 표현하지요." 모스부르거가 말했다. "차원의 붕괴?" "예. 그렇습니다. 두 개의 세계가 뒤섞이게 되는 일을 말합니다. 두 개 의 세계가 뒤섞인다는 것은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닌, 이상하고 무한한 우주가 되는 결과를 가져올게 될 겁니다. 우주가 뒤섞이는 것은 결국 이 세계의 끝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모스부르거는 이렇게 설명하면서 긴 나무의자에 걸터 앉았다. 울타리에 둘러져 있는 나무덩쿨이 햇살아래 푸르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최종전쟁의 전설을 알고 계시겠지요? 인간과 마칸의 전쟁. 인간과 마 칸이 부리는 마물의 전쟁. 아마도 여러분은 그렇게 알고 계실 겁니다. 예. 인간과 마물이 싸운 건 사실입니다. 당대의 최신 무기였던 불을 토하 는 쇳덩어리들이 세상을 뒤덮었지요. 하지만 최종전쟁의 본질은 그게 아 니었습니다. 인간과 마물의 싸움은 그저 일부였을 뿐이지요. 진정한 최종 전쟁은 바로 이 두 개의 세계가 뒤섞이는 일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모스부르거가 말하는 동안, 들판에 높게 솟았던 탑은 갑자기 사라져 버 렸고 들판은 모래뿐인 사막으로 변하였다. 그리고 그 사막 위에는 삼각형 모양의 거대한 구조물이 올라섰고, 그 옆으로 인간의 얼굴을 한 네발 짐 승같아 보이는 거대한 조각상이 섰다. 그리고 그 옆으로는 등에 혹이 달 린 말도 아니고 뮤도 아닌 짐승이 걸어다니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 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22301/22303 ━━━━━━━━━━━━━━━━━━━━━━━━━━━━━━━━━━━━━━━━ 제 목:[탐그루] 죽지 않는 사람들 326 관련자료:없음 23/23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6-18 23:19 조회:908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그런데 이 두 개의 세계가 뒤섞이는 지점이 있습니다. 그 지점을 우리 는 알렙이라고 부릅니다." 모스부르거가 말했다. "알렙은 세상의 모든 곳이지요. 동시에 세상 어느 곳도 아니고요. 그곳 에서는 전 우주를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아까 오브라디 교수님께서 환 영에 대해서 좋은 설명을 해 주셨습니다. 환영이라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투영하여 그 마음을 반영해 재창조하는 마법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당신 들이 처음에 보았던 칼을 차고 농민들이 살고 있는 세상은 당신들의 세계 에서 비롯된 환영이었다고 할 수도 있지요. 이제부터 당신들이 보게 될 환영도 당신들 내부의 세계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은 아닐 겁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마음이라는 건 사람이 마음대로 조작하기 어려운 것이지요. 어떤 곳에서는 마음을 마음대로 움직이는 힘을 마력이라고 부르는 곳도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모스부르거는 이렇게 말하고 잠시 이야기를 끊었다. 오브라디 교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모스부르거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 알렙이라는 장소를 통해서 우리의 행동을 알았다고 말하는 거요, 지금?" "그렇습니다." 모스부르거는 이렇게 말하면서 품에서 유리로 만들어진 것을 꺼내 눈에 썼다. 유리가 뭔지도 모를 만큼 내가 촌놈은 아니었지만 저렇게 얼굴에 써서 눈을 가릴 수 있는 검은 유리는 본 적이 없었다. 눈을 보이기 싫다 는 걸까? 나는 모스부르거를 뚫어지게 바라보았으나 검은 유리를 얼굴에 쓴 모스부르거의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알렙을 통하여 우리는 당신들이 마칸의 강림을 막으려고 하고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사실 당신들을 이곳으로 부른 것도 그 때문이지요." 모스부르거의 목소리는 낮게 내려앉아 있었다. 누가 들으면 꼭 목이 잠 겨서 그런가보다 싶은 목소리였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저 감정을 읽기 어 렵게 일부러 목소리를 깔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칸의 강림을 막는 일에 대해서는 다 알고 있습니다. 마소드의 검을 탐그루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도, 그리고 그것을 하잔의 까마귀 벌판에 꽂 아야 한다는 것도." 오브라디 교수도 모스부르거의 표정을 읽지 못하는 게 답답한 모양이었 다. 오브라디 교수는 눈을 가늘게 뜨고서 유심히 모스부르거의 표정을 살 피면서 말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두 가지 문제가 있지요. 먼저 당신들 말로 마소드 의 검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어디에 있 는지도 모르면서 찾는다면 그건 어불성설이겠지요. 그리고 다음으로는 하 잔의 까마귀 벌판에 칼을 꽂는 일입니다. 당신들도 마법에 대해선 알고 있지요. 하잔의 까마귀 벌판에 칼을 꽂는 건 맞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꽂 을 겁니까? 잘?" 모스부르거는 마치 놀리는 듯한 말투로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브 라디 교수는 잠시 동안 말이 없었고, 나 역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 다는 표정을 하고서 모스부르거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중요한 건 마음입니다. 마음이 없이는 마소드의 검, 그렇지요, 당신들 의 언어로 마소드의 검이라고 불리우는 것이 제대로 작동할 리가 없지요. 그래서 아까부터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이 동굴 안으로 들어가서 알렙 을 찾아보아야 한다고요." 모스부르거는 고개를 쳐들고서 이렇게 말했다. 표정을 읽기도 어려운 것은 물론이었고, 누구를 보며 이야기하는 지도 알 수가 없었다. 혹시 눈 을 감고 있는 게 아닐까? 나는 이런 생각을 해 보았다. 하지만 모스부르 거의 말에, 나는 공감할 수 있었다. 마음이 담겨 있지 않은 아킨의 지팡 이가 그저 낡은 나무토막에 불과한 것처럼 말이다. "결국 동굴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말이군요." 사빈이 창을 손이 하얗게 긴장될 정도로 꼭 쥐면서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는 건 뭡니까?" 오브라디 교수가 모스부르거에게 물었다. "알렙에 닿으면 알게 될 겁니다. 그리고 아자닌을 불러내세요. 틀림없 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모스부르거는 이렇게 말하고는 허공을 응시하는가 싶더니 붉은 빛과 함 께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 주변에는 사빈 과 오브라디 교수 뿐, 모스부르거도, 스트라이더도, 또 자꾸 모습을 바꾸 었던 책상과 의자도 온데 간데 없었다. 그저 동굴 입구만이 처음처럼 입 을 쩍 벌리고서 우리가 들어가기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내* 마음의* 문을* 여니* 길을* 인도해* 다오*" 나는 아자닌을 불러내었다. 그런데 여느 때 아자닌을 불러낼 때와는 사 뭇 다른 기분이었다. 마법의 말을 외울 때 몸에서 불기운이 확 뻗치는 기 분이 들었다. 게다가 아자닌도 앞에서 나타나지 않았다. 아자닌은 내 옆 에 서 있었던 것이다. 나는 생각 없이 아지닌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 고 놀랍게도 '어깨를' 부딪쳤던 것이다. "아, 아자닌?" 나는 아자닌을 바라보았다. 아자닌의 모습은 내가 평소에 아자닌을 불 러낼 때와 다르다고 느낀 것 이상으로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우선 아 자닌의 얼굴이었다. 평소보다 이목구비가 훨씬 뚜렷한 윤곽을 가지고 있 었던 데다가, 옷도 평소의 하얗고 긴 옷이 아니라 화려한 붉은 빛의 옷이 었다. 아자닌의 긴 머리카락이 바람결에 흔들리고 있는 것도 평소와는 다 른 모습이었다. "길게 설명 드리고 싶지만 시간이 없네요. 일단 동굴로 들어가지요." 아자닌이 말했다. "잠깐만. 아무리 시간이 없어도 그렇지 이런 식으로..." "그냥 이곳에서는 저도 다른 사람들처럼 육체를 가질 수 있다는 정도만 알아주세요. 서둘러야 해요. 어서요!" 아자닌은 이렇게 말하고는 나의 팔을 거의 잡아 끌다시피 해서 동굴 안 으로 들어갔다. 그 뒤를 사빈과 오브라디 교수가 따랐다. "꼭 이 동굴 안으로 들어가야만 해?" 나는 동굴 입구에서 잠시 망설이면서 말했다. 저 어두컴컴한 곳에 들어 가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나에게는 공포였다. 무엇이 있을지, 어떤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말이다. "수르카 군. 일단 들어가 보지 않으면 두 가지 사실은 확실해진다네. 먼저 이 섬을 결코 빠져나갈 수 없을 거라는 게 첫 번째고 두 번째는 마 소드의 검이 있는 곳을 알 수가 없을 거라는 게 두 번째일세." 오브라디 교수가 나에게 말했다. 나는 더 이상 망설이고 있을 수가 없 다는 걸 알았다. 비록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걱정 마, 수르카." 사빈이 말했다. "내가 다 해치워 줄 테니까." 사빈이 창을 쥐면서 말했다. 물론 사빈의 창 솜씨는 니브리티를 빠져 나올 때 국왕 친위대를 쓰러뜨리는 걸 본 것으로 충분히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환영과도 같은 것들과 싸울 때도 도움이 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사빈이 창을 휘두르자 창에 붙어있는 용문양이 그려진 깃 발이 펄럭였다. 걱정 말라는 뜻으로 휘둘렀겠지만 여전히 나는 불안한 마 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일단 동굴 안으로 들어서자, 동굴 안은 연금술사의 등도, 하다 못해 횃 불 하나도 없었지만 바깥보다 훨씬 더 밝았다. 동굴 전체가 오로라를 연 상시키는 빛에 휘감겨 있는 듯 했다. 잠시 현란한 빛에 집중력을 잃기는 했지만, 다시 한 번 자세히 보니 길을 알아 볼 수가 없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마치 무한하게 넓은 빛의 벌판에 내던져져 있는 것 같은 기 분이 들었다. "수르카 님. 제가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은 수르카 님의 선택을 돕는 일 뿐입니다." 아자닌이 나에게 말했다. "선택을 돕는다고?" 아자닌은 내 말에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이렇게 말을 이었다. "저는 죽지 않습니다. 아니, 죽을 수가 없지요. 죽는다는 건 살아있다 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죽음은 삶에 속해 있는 거니까요." "아자닌. 자네는 생명이 없다고 지금 말하고 있는 건가?" 오브라디 교수가 아자닌에게 물었다. "그렇습니다. 저에게는 육체도, 그리고 육체와 함께 존재하는 사랑도 미움도 고통도 기쁨도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저 흉내낼 수 있을 뿐이지 요. 죽지 않는 사람은 살수도 없습니다." 아자닌이 말했다. 죽지 않는 사람은 살수도 없다. 나는 이 말을 한 번 되뇌었다. 어쩐지 아자닌의 이 말은 슬프게 들렸다. "알렙은 저 끝에 있습니다." 아자닌이 눈앞에 펼쳐진 한도 끝도 없어 보이는 빛의 한 구석을 가리키 면서 말했다. "도대체 얼마를 가야 하는 거야, 그럼?" "사빈 님. 그건 마음에 달려 있지요. 이곳에서 중요한 것은 가슴입니 다. 머리가 아니죠. 머리로는 여기서부터 알렙까지의 거리를 무한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사빈 님이 원하신다면 그곳은 바로 눈앞에 나타날 것입니다." 사빈이 투덜거렸고, 아자닌은 사빈에게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럼 자신이 마음으로 원하면 바로 눈앞에 나타날 수도 있단 말이야, 지금?" "예." 아자닌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순간 아자닌의 향취가 느껴졌다. 물론 아자닌의 냄새를 맡으려고 코를 킁킁 거렸다거나 한 건 아니었지만 육체 가 있는 아자닌에게서는 평소 아자닌에게서 느낄 수 있었던 것과는 거리 가 멀었다. 이상하게도 나는 가슴이 콩딱거리고 있었다. 나는 내 시선이 자꾸 아자닌의 잘록한 허리로 향하고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괴상한 일이 었다. 왜 내가 정령에게 이렇게 마음이 끌리는 걸까? "위험해!" 나는 누가 소리를 쳤는가를 알기 위해서 고개를 돌려보았다. 하지만 소 리를 친 것은 오브라디 교수도, 사빈도 아니었다. 소리 치고 있는 것은 난생 처음 보는 낯선 얼굴을 한 사내였다. "누구지, 저 사람?" 나는 아자닌에게 물었다. 소리 친 사내는 머리에는 우스꽝스러워 보이 는 강철로 만들어진 둥근 모자를 쓰고 있었고, 양손으로는 길다란 창을 들고 있었다. 아니, 창이라고는 했지만 강철로 만들어진 작대기에 끝에는 칼이 하나 달려 있을 뿐이었다. "엎드려!" 사내는 이렇게 말하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순간 사방에서 굉음이 울려 퍼졌고, 우리 일행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사내의 옆쪽으로 몸을 날려 엎드렸다. 그제야 나는 사방이 완전히 바뀌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사방 은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조금전까지 보았던 오로라를 연상시키는 빛은 찾아볼래야 찾아 볼 수가 없었고, 내가 볼 수 있는 건 굉음과 함께 하늘 로 솟고 있는 불기둥과 칼이 달려 있는 작대기의 끝에서 역시 굉음과 함 께 튀어나가는 불꽃뿐이었다. "민간인들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건가?" 사내가 우리에게 소리쳤다. 다시 이어지는 굉음과 함께 여기저기서 땅 이 솟아올랐다. 나는 도무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당신들 뭐야? 비무장으로 여기 이렇게 멍청하게 서서 뭐하는 거야? 저 기서 대충 총 찾아 들고 빨리 숨어!" 사내가 아래쪽을 손으로 가리키면서 말했다. 나는 사내가 가리킨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시체가 쌓여 있었다. 아마도 사내는 시체 옆에 놓 여있는 창으로 무장을 하고 함께 싸우자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미안하오만 우리는 중요한 일이 있소. 여기를 떠나야 합니다, 우린." 오브라디 교수가 말하자 사내가 내 쪽으로 돌아섰다. 그리고 뭔가 말을 하려고 하는데, 눈앞이 캄캄해지는가 싶더니 요란한 굉음이 바로 앞에서 울렸다. 나는 거의 허공으로 날아가다시피 해서 뒤로 쓰러졌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흙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나는 몸을 더듬어 보았지만 어디가 부러지거나 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오브라디 교수님? 사빈? 아자닌?" 나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내가 이름을 부른 사람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 다. 내 눈앞에 보이는 것은 하반신이 날아가 버린 아까의 사내뿐이었다. "빌어먹을. 결국... 당했어." 사내가 이를 악물고 신음을 참으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나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제길... 당신 뭐하는 거야? 세상을 구원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사내가 나에게 물었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흥. 내 목숨 하나 지켜주지 못하면서 세상을 구원하겠다는 건가, 지 금? 목숨 하나도 구제하지 못하면서..." 사내는 이렇게 냉소적으로 나에게 말했다. 나는 사내의 말에 죽어갔던 사람들의 얼굴이 차례로 떠올랐다. 이무르 아주머니의 얼굴, 하잔에서 죽 어갔던 시체들, 내 앞을 뒹굴던 머리들, 나에게 칼을 겨누었던 소년... 나는 모스부르거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는 내가 하고 있는 일과 내 가 있는 곳에 대해서 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렇게 죽어가고 있는 사 람 앞에서 나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나는 도대체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가? 결국 나는 이 의문을 다시 떠올리고 말았다. 내가 대답했던 말은 결국 나 자신 을 속이기 위해서 했던 말이었단 말인가? 나는 사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사내는 나를 비웃으면서 서서히 죽어 가고 있었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오는 듯 서늘한 기운이 내 몸을 스치 고 지나갔다. "오브라디 교수님! 사빈! 아자닌!" 나는 목청껏 사방에 대고 소리쳤다. 하지만 대답 대신 들려 오는 것은 웃음소리였다. 귀에 익은, 내 웃음소리처럼 들리는 웃음소리였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사내를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왜 이곳으로 왔는지 알겠나?" 사내가 말했다. 사내의 얼굴은 나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반신이 잘 려 나간 내 모습을 바라보는 일은 가장 무시무시한 악몽보다도 더 끔찍했 다. 나는 사내에게 이렇게 말했다. "모스부르거?" "그럴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어차피 나는 네가 아니고, 너 또한 내가 아니니까. 하지만 나는 그 누구도 될 수 있고, 동시에 아무도 아니 야. 내 말, 들리나?" 모스부르거라고 생각되는, 내 얼굴을 한 사내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 앉히고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세상을 구하려고 하는 게 아니야. 내가 있는 자리에서 내 일을 하는 것 뿐이지." "여전히 말은 잘 하는 군." 모스부르거가 말했다. "내가 알고 싶은 건 네 마음이야. 네 마력이 아니라." 모스부르거의 말에 나는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내가 진정 으로 원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정말로 내가 있어야 할 곳에 있는 걸까? 하지만 나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었다. "내 마음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나 자신도 내 마음을 잘 모르는 데 어떻게 네가 내 마음을 알 수 있겠어?" "그러니까 확인하려고 하는 거지." "미안하지만 그건 불가능해. 마음이* 무엇이라고* 말하는* 순간* 마음 은*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야*" 내가 이렇게 말하자 사방이 온통 붉은 빛으로 물드는 가 싶더니, 내 앞 에 아자닌의 얼굴이 나타났다. "알렙이었습니다." 아자닌에 나에게 말하자 나는 몸을 일으켜 사방을 둘러보았다. 나는 동 굴 바닥에 쓰러져 아자닌의 무릎을 베고 있었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22302/22303 ━━━━━━━━━━━━━━━━━━━━━━━━━━━━━━━━━━━━━━━━ 제 목:[탐그루] 죽지 않는 사람들 327 관련자료:없음 19/19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6-18 23:20 조회:773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내가 본건, 그저 환영이었나?" "아닙니다. 알렙입니다." 아자닌이 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졸음이 쏟아졌다. 당장이라 도 잠들어 버릴 것 같았다. 내가 겪은 일은, 비록 너무나 생생할 지라도 그저 환영일 뿐이었다. 그냥 이렇게 잠들면 안 되는 걸까. 그냥 이렇게 여기에 누워 영원히 아자닌의 무릎을 베고 있으면 좋을 텐데. 싸움도 없 고, 고통도 없고, 죽음도 없는 이 틀뢴에서, 나는 그저 이렇게 살아만 있 어서는 안 되는 것일까. 나는 생각하면서 아자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자닌은 나를 내려다보 고 있었다. "알렙은 모든 우주가 모인 지점이자 동시에 다른 우주와 통하는 통로입 니다. 수르카 님께서 보신 것은 다른 우주의 모습이었지요. 어쩌면 다른 우주에서 실제로 수르카 님은 그렇게 죽어갔는지도 모릅니다." "그럼 그 우스꽝스러운 복장은 뭐야? 그 이상한 무기는 또 뭐고." 나는 눈을 살짝 감으면서 아자닌에게 물었다. 내 머리를 쓰다듬는 아자 닌의 손길이 부드러웠다. "이 우주에 존재하는 것은 다른 우주에서는 다른 것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름도 달라지고 그 모습도 달라지기 마련이지요. 이 세계 의 영혼이 다른 세계의 육체가 되고 혹은 칼이 되고 구름이 되고 나비가 되는 것입니다." 나는 눈을 감고 있었다.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오브라디 교수 도, 사빈도, 나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저 이렇게 영원히 누워 있고 만 싶을 뿐이었다. "그렇게 영원히 살 수 있다네, 수르카." 나의 목소리였다. 나는 눈을 떴다. 나의 얼굴을 하고 있는 모스부르거 가 아자닌 뒤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저 눈을 감으면 되네. 여기서 영원히. 자네가 원하는 평화로운 세상 을 살 수 있어." 모스부르거가 말했다. 모스부르거의 말은 세상 그 무엇 보다도 달콤하 게 들렸다. 그냥 이렇게 있으면 그만 아닐까. 모스부르거가 말했듯이, 나 는 세상을 구원한다던가 위대한 영웅이 되는 일 따위는 관심도 없고, 눈 앞에서 죽어 가는 사람 하나 구원할 수 없는 사람인 것이다. "눈을... 감기만 하면 된다고?" "그래. 눈을 감아. 그러면 돼. 느꼈잖아. 눈을 감기만 하면 모든 일은 끝나." 나는 모든 일이 끝난다는 말에서 두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서 싸우기 시 작하는 걸 알 수 있었다. 하나는 이곳에서 아무 고통도 불행도 없는 세상 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었고, 또 하나는 아자닌이 했던 말이었다. 죽지 않는 사람은 살수도 없다는 말. "오른손을 보세요." 아자닌이 나에게 말했다. 나는 내 오른 손을 들어 바라보았다. 내 오른 손은 주름이 잔뜩 잡혀 있었다. 나는 놀라면서 아자닌의 눈동자를 바라보 았다. 아자닌의 눈동자에는 내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머리는 다 빠지고 주름 투성이 얼굴을 하고 있는 내 모습이 아자닌의 눈동자에 비치고 있었 다. 나는 혀를 입안에서 굴려 보았다. 이빨도 어디로 갔는지 전부 빠져나 가서 혓바닥으로 더듬을 수 있는 건 오직 잇몸 뿐이었다. "왜? 죽는 게 무서운가? 눈을 감기만 하면 영원히 살 수 있을 텐데, 거 기서." 모스부르거가 질려 있는 내 얼굴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나는 대답했다. "나는 죽는 게 무서운 게 아니야. 살고 싶을 뿐이지." 이렇게 말하면서 나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자 다시 한 번 붉은 빛 이 눈부실정도로 사방을 둘러쌌고, 나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오브라디 교수님? 사빈? 아자닌?" 나는 이렇게 외쳐보았다. "수르카 군. 나는 여기 있네." 오브라디 교수가 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브라디 교수는 엉망으 로 구겨진 인상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저는 여기에 있습니다." 아자닌이 말했을 때가 되어서야, 나는 내가 누워 있는 곳이 동굴의 바 닥이며 빛도, 그림자도 없는 어둠 속에 쓰러져 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 다. "사빈, 사빈은?" 나는 이렇게 말했다. "먼저 갔습니다, 알렙으로. 자. 따라오시지요." 아자닌은 이렇게 말하면서 빛도 없는 동굴 안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와 오브라디 교수는 그 뒤를 따랐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를 겪은 것 같았지만 통 기억이 나질 않았다. 기억을 더듬으려고 하니 두려움과 평안함이, 죽음과 삶이, 피곤과 활력이 동시에 머리 속에 서 부딪히며 뒤섞였다. "수르카 군. 알렙은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와는 다른 곳이라네." 오브라디 교수가 관자놀이를 엄지로 누르면서 말했다. 오브라디 교수도 두통을 느끼고 있는 모양이었다. "다 와간다는 증거 같은데, 이 두통은." 오브라디 교수는 이렇게 말하면서 애써 웃음을 지었다. 아자닌이 오른 쪽 동굴 통로로 돌아 들어가자, 우리는 그 뒤를 따랐다. 오른 쪽으로 돌 아섰을 때, 나는 거대한 기둥을 발견할 수 있었다. 울퉁불퉁한 동굴의 기 둥과는 다른, 완전히 매끄러운 형태의 기둥이었다. "알렙입니다. 이 기둥은 다른 우주에서는 집이기도 하고, 또 다른 우주 에서는 조각상이기도 하지요. 이 구멍을 들여다보시면, 알렙을 보실 수 있습니다." 아자닌이 말했다. 나는 아자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자닌의 얼굴에 는 땀방울이 ㄳ혀 있었다. 아자닌이 땀을 흘리고 있다니. 나는 너무도 생 경한 기분이 들어서 아자닌의 얼굴에 손을 대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아자 닌은 내 얼굴을 바라보면서 잠자코 있었다. 내 손은 아자닌의 얼굴에 닿 았고, 손바닥으로 땀이 끈적끈적하게 달라붙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왔군, 수르카." 사빈이었다. 사빈은 창을 들고 기둥 뒤편에 서 있었다. "나는 가기로 했어." 사빈이 말했다. "교수님. 저는 용을 사냥하기 위해서 이날 이때까지 살아왔습니다. 그 리고 제 꿈을 이룰 수 있는 순간이 바로 눈앞에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 목표를 위해 살아야 하고 또 죽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사빈, 명예와 의리 하나로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명예도 의리도, 결국 에는 그저 저 자신을 위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사빈은 단 한번도 쉬지 않고 이렇게 오브라디 교수에게 말했다. "그래서 뭘 어쩌겠다는 건가?" 오브라디 교수가 묻자, 사빈의 앞에 공간이 뒤틀리며 전혀 다른 공간이 끼어 들었다. 각이 진 건물과 무수히 많은 창문들, 그리고 그 사이를 날 고 있는 괴상한 비행체들과 말도 뮤도 없는 마차들이 정신없이 그 공간에 서 교차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용이 있었다. 붉은 색을 띄고 있는 용은 날개를 퍼덕이며 건물 사이를 날고 있었다. "안녕히 계십시오. 거기 서!" 사빈은 말릴 사이도 없이 이렇게 말하고는 뒤틀린 공간 안으로 몸을 날 렸다. 사빈이 공간에 섞여 들어간다고 느끼는 순간, 한 줄기 섬광이 사방 으로 뻗었고, 그 빛줄기 사이에서 잠시 눈을 감은 사이 사빈도, 뒤틀린 공간도 사라져 버렸다. "사빈..." 오브라디 교수가 탄식하듯 뒤틀린 공간이 있던 자리에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허공 뿐이었다. "사빈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찾아서 떠났습니다." 내 얼굴을 한 모스부르거였다. 오브라디 교수는 내 얼굴을 한 번 힐끔 본 다음 모스부르거를 바라보았다. "교수님께도 기회가 있습니다. 교수님이 늘 꿈꾸어 왔던 게 눈 앞에 있 습니다." 모스부르거가 말하자 오브라디 교수의 눈앞에 뒤틀린 공간이 나타났다. 그 공간에는 아까 보았던 사빈의 앞에 펼쳐져 있던 공간과 비슷해 보이 는, 그렇지만 전혀 다른 공간이 있었다. 거대한 사막, 울퉁불퉁한 바위, 그리고 오면서 본 말을 타고 있는 사내들, 긴치마의 아낙, 말이 끄는 마 차, 분주하게 짐승 때를 몰고 있는 사람들. "뭡니까, 이게?" 오브라디 교수가 뒤로 주춤거리면서 모스부르거에게 물었다. 오브라디 교수의 눈은 휘둥그렇게 떠져서 거의 정신을 차리고 있지 못했다. "오브라디 교수님께서 젊었을 시절에 그렇게도 탐구하고 싶어하셨던 고 대문명의 발상지 중 한 곳입니다. 고대어도 공부하셨지 않습니까. 그건 아마도 지금 이 순간을 위해 오브라디 교수님께서 운명적으로 준비하신 것일 겁니다." "사빈은 이 공간을 통해 어디로 간 건가?" "사빈은 용을 찾아서 갔습니다. 이제 곧 오브라디 교수님께서 고대 문 명으로 떠나시게 될 것처럼요." 모스부르거가 웃으면서 말했다. 오브라디 교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사빈... 창은 두고 갔어야지..." 하지만 오브라디 교수에게 사빈을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는 것 같았다. "이곳으로 가면 다시 돌아 올 수는 없는가?" "예. 없습니다. 그곳에서 알렙을 찾아내기 전 까지는요. 하지만 교수님 같이 훌륭한 분이시라면 그곳에서도 알렙을 찾아내게 되실지도 모르지 요." 모스부르거의 말에 오브라디 교수는 망설이는 것 같았다. "이곳에서...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오브라디 교수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나는 오브라디 교수에게 아무 말 도 하지 않기로 했다. 이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해서 오브라디 교수의 판단 을 그르치고 싶지는 않았다. 사빈이 용을 찾아 떠난 것처럼, 오브라디 교 수도 고대문명을 찾아 떠날 자유가 얼마든지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 다. "망설이실 이유가 없습니다. 이곳은 교수님 같은 훌륭한 분들을 기다리 고 있는 모험과 도전의 시대입니다. 그리고 보고 계신 이 세상은 교수님 같은 학자 분들이 우대 받을 수 있는 세상이지요." 오브라디 교수가 나를 한 번 흘낏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내 눈치를 살 피는 것 같았다. 무슨 말이든 하기는 해야 할 텐데. 나는 나를 바라보고 있는 오브라디 교수의 눈을 피하지는 않았다. "후회하실 겁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오브라디 교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정말로 원하는 일을 택하지 않으신다면, 오브라디 교수님께서는 일생 동안 후회하시게 될 거예요." 차분한 목소리로 오브라디 교수에게 나는 이렇게 말했다. 오브라디 교 수는 내 말에 고개를 숙였다. "수르카 군. 나는 일생동안 학자로 살아왔네. 그리고 내 연구의 중심에 는 항상 고대 문명이 서 있었지. 자네도 내 강연을 들어서 알고 있지 않 은가? 나는 그 전설의 시간을 늘 동경해 왔다네. 비록 초기에는 범죄자들 과 부랑아로 가득찬 오월화호였지만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문명을 일궈내 는 그 과정을 나는 늘..." "교수님." 나는 오브라디 교수에게 다시 한 번 말했다. 더 이상 무슨 말을 덧붙이 지는 않았다. 판단을 내리는 것은 어차피 오브라디 교수니까. "미안...하네." 오브라디 교수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오브라디 교수님. 왜 저한테 미안해하세요. 오브라디 교수 님께서 어떤 판단을 내리시건 저는 결코 오브라디 교수님을 탓하지도 않 을 것이고 탓할 수도 없어요." 내 말에 오브라디 교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공간으로 뛰어들었다. 한 순간 뒤를 돌아보는 것 같기는 했다. 하지만 그건 혼자만의 생각인지도 몰랐다. "자, 결국 다시 둘이 만났군." 모스부르거가 이렇게 말하면서 나에게 돌아섰다. 계속하겠습니까?(Y/n)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22303/22303 ━━━━━━━━━━━━━━━━━━━━━━━━━━━━━━━━━━━━━━━━ 제 목:[탐그루] 죽지 않는 사람들 328 관련자료:없음 26/26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6-18 23:21 조회:1057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랬지." 나는 모스부르거가 등뒤에 비수라도 품고 있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걸 보았다. 뭔가를 숨기고 있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은 결코 유 쾌한 일일 수 없었다. 아니, 어쩌면 나는 꼭 적을 눈 앞에 두고 있다고 느끼고 있는지 몰랐다. 하지만 범버쿠 정글에서도 느꼈던 것이지만, 모스 부르거는 결코 나의 적이 아니었다. "마칸의 강림이 뭐라고 생각하지, 수르카, 당신." 모스부르거가 이렇게 말했다. 몇 번을 본 광경이지만 내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이 내 이름을 부르는 걸 보는 건 아무리 익숙해지려고 해도 결 코 익숙해질 수 없는 광경이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내 뒤에 서 있 는 아자닌 쪽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아자닌은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서 두 손을 앞으로 단정히 모으고 있었다. 나는 아자닌의 눈을 올려다 보아 야 한다는 사실이 낯설었다. 아자닌이 나보다 키가 크다는 걸 인식한 것 은 이번이 처음인 것 같았다. "마칸의 강림은 별 게 아니야. 그저 마칸의 우주와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가 뒤섞이는 걸 말하는 거지. 내가 이야기 했듯이 말이야. 그런데 그 것을 막아야 하는 이유가 뭔가?" 모스부르거가 나에게 물었다.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었다. 게다가 지 금은 사빈도, 오브라디 교수도 내 주변에 없었다. "...살아야 하니까." 나는 이렇게 생각나는 대로 내 뱉었다. 모호한 대답이기는 했지만 그래 도 내 마음을 담고 있는 대답이라고 나는 스스로 생각했다. "마칸이 강림한다고 해서 살지 못하는 건 아니야. 아니, 어쩌면 더 나 은 삶을 살게 될지도 모르지. 그렇지 않은가? 수르카. 왜 이 세상을 지키 려고 하지? 이 세상이 당신에게 뭘 안겨 주었지? 따뜻한 가족? 풍족한 생 활? 아니, 하다 못해 행복한 추억이라도 하나 남겨주었는가?" 역시 범버쿠 정글에서도 느낀 거였지만, 모스부르거는 사람을 괴롭히는 말을 상당히 많이 알고 있었다. 내 마음을 읽어내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모스부르거가 하는 말들은 항상 내 가슴을 바늘로 쑤시는 것 같았다. 모스부르거의 말은 과연 나에게 행복했던 기억이 있었던가를 되짚어 보 게 만들었다. 호객꾼 일을 하던 시절, 사비오 영감의 제자 노릇을 하던 시절, 용병단 시절, 그리고 오브라디 교수와의 탐험을 하던 시절... 지나 간 일들이 한 순간에 덧없는 바람인듯 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정말 행복했던 시간이 있었나? 오브라디 교수도, 사빈도, 또 다른 동 료들도, 모두 자신이 해야 할일을 위해 수르카, 당신을 떠났어. 그렇다면 뭐가 수르카, 당신을 지탱해 주고 있지? 당신은 지금 지금 어디에서 누구 를 위해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거지?" 모스부르거는 집요하게 나에게 물음을 던졌다. 나는 내 기억에 남아있 는 동료들을 떠올려 보았다. 사비오 영감, 라이짐, 용병단의 전우들, 스 칼렛, 마로우, 루크와 바리바, 튜니티, 크라이와 그레텔, 그리고 오브라 디 교수와 사빈. 그러고 보면 그들은 모두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찾아 자 신이 원하는 곳을 향해 떠났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모스부르 거에게 대답할 말이 있었다. "추억은 있어." 나는 이렇게 말했다. "무슨 추억이지?" "서커스 들판." 나는 서커스 들판에서 보았던 공연을 떠올리면서 말했다. 그 공연은 단 한 번 뿐이었고, 아마 남은 일생동안 다시는 볼 수 없을지 몰라도, 그래 도 내게 그 기억은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있었다. "그 얼치기 동춘의 요정들이 열었던 공연이 그렇게 기억에 남는다는 말 인가?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모스부르거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나를 위한 친구들의 공연이었으니까." "그렇다면 수르카,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건 뭐지? 도대체 무엇이 마칸 의 강림을 막기 위해 당신의 목숨을 걸게 만들고, 당신을 바르도 대륙의 여기저기를 떠돌게 만들었지?" 모스부르거가 이렇게 말하자 내 눈앞에 공간이 떠올랐다. 오브라디 교 수와 사빈 앞에 나타났던 것과 비슷한 비틀어진 공간이었다. "보이나?" 모스부르거가 말했다. 나는 비틀어진 공간 안을 살펴보았다. 공간 안에 보이고 있는 것은 탐그루였다. 눈에 익은 중앙광장의 거리와 바삐 움직이 는 상인들, 그리고 뛰놀고 있는 꼬마들이 눈에 들어왔다. "고아는 없다네, 탐그루에는." 모스부르거가 말했다. "삼년전쟁 전의 탐그루야. 싸움도, 기아도, 질병도 없지. 그리고 보이 는가?" 나는 비틀어진 공간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공간의 한 가운데에 기골이 장대한 군복을 입고 있는 남자가 서 있었고, 그 옆으로 아름다운 여인이 함께 서 있었다. 나는 그들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남자의 옆구리에는 붉은 용의 문양이 새겨져 있는 마소드의 검이 매달려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 내 입에서 신음소리와도 같은 슬픈 음성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 순간 은 아주 짧았다. 나는 분명 저 장대한 사내가 아버지라는 걸, 또한 그 옆 에 서 있는 여자가 어머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어쩐지 부모를 바라보는 일이 그다지 슬픈 일도 감격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왜 이걸 나한테 보여 주는 거지?" 나는 모스부르거에게 물었다. 모스부르거는 양손바닥을 나에게 보여 준 다음 이렇게 말을 이었다. "이제 곧 삼년전쟁이 일어날 거야. 수르카, 당신이라면 막을 수 있어." 모스부르거가 말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서로 얼굴을 바라보면서 즐겁 게 웃고 있었다. "이제 결정하게. 수르카, 당신이 오브라디 교수에게 말했듯이, 선택은 당신이 하는 거야. 아무도 수르카, 당신을 강제하지 않을 것이고 아무도 수르카, 당신을 비난하지 않아. 비난 할 수도 없고." 모스부르거의 말은 얄밉도록 내 마음에 꼭 들어와 박혔다. 나는 아자닌 을 바라보았다. 눈치를 살피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저 좀전부터 아 자닌의 낌새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아자닌?" 나는 아자닌에게 말했다. 내가 아자닌에게 말을 건 것은 조금 전에 오 브라디 교수가 내 눈치를 살폈던 것과는 다른 이유에서였다. 아자닌은, 뭐랄까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 다. "지금은 수르카, 당신과 나의 대화야. 아자닌, 그러니까 정령은 참견할 이유가 없을 것 같은데." 모스부르거가 말했다. 모스부르거의 말 때문에 나는 더욱더 아자닌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듣고 싶어졌다. 뭔가 감추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자닌. 말 좀 해봐. 어디 불편해?" 아자닌은 말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울 것 같은 표정이라기 보다는 뭔 가 복받쳐 오르는 듯한 얼굴이었다. 아자닌이 이렇게 감정을 드러내는 모 습을 본 적이 있었던가. 나는 아자닌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빛이 통과했 던 아자닌의 예전 모습과는 달리, 아자닌의 지금 모습은 따뜻해 보였다. 저 하얀 피부 밑에도 나와 같은 피가 통하고 있을 것이다. "아닙니다, 수르카 님." 아자닌이 말했다. 아자닌의 목소리 끝은 떨리고 있었다. 나는 아자닌이 신경이 쓰이기는 했지만 결국 모스부르거에게 집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르카, 당신은 부모를 지키고 싶지 않은가? 선택은 지금 한 순간 뿐 이야." 모스부르거가 말했다. 모스부르거의 말은 분명 가슴에 와 닿는 말이기 는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는 모스부르거의 말을 그대로 따를 수 는 없었다. 아자닌 때문은 아니었다. 물론 사빈이나 오브라디 교수, 혹은 다른 동료들 때문도 아니었다. 나는 왜 부모님의 모습을 보고도 별로 마 음이 움직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머릿속이 복잡하기는 했지 만 대답은 금새 나왔다. "내가 지키고 싶은 건 내 소중한 기억이야." 나는 모스부르거에게 이렇게 말했다. "수르카, 당신과 함께 했던 동료들은 다들 떠나갔어. 그래도?" 모스부르거가 물었다. 나는 모스부르거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다들 떠나갔어도, 기억은, 추억이 된 기억은 남아. 이 기억을 지키고 싶어. 그 뿐이야." 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내 말은 결국 내가 있는 곳에서 내가 하는 일을 한다는 말과 다른 말이 아니었다. "기억. 결국 기억에 대해서 말했군." 모스부르거는 이렇게 말하면서 내 쪽으로 한 걸음 다가왔다. 그러자 비 틀려져 있던 공간은 어디로 갔는지 사라져 버렸고, 모스부르거의 모습도 더 이상 나의 모습이 아니었다. 모스부르거는 내가 처음에 아자닌을 불러 냈을 때처럼 희미한 덩어리가 되어 있었고, 내 주변에는 다시 오로라 같 은 붉은 빛이 밝아 왔다. "여기가 알렙일세." 모스부르거가 말했다. "수르카, 당신은 아버지를 본 게 아니라, 마소드의 검을 보았지. 마소 드의 검은 이곳 알렙을 통해 다른 우주에서 이곳으로 넘어온 물건이야. 내가 말했던가? 저 세계의 칼은 이 세계의 방패가 될 수도 있고, 우물이 될 수도 있고, 바람이 될 수도 있다고." 모스부르거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고, 내 눈앞에 마소드의 검이 잡힐 듯 이 가깝게 떠올라 있었다. 나는 손을 뻗었지만, 마소드의 검은 잡히지 않 았다. 그저 환영인 모양이었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소중하지. 하지만 기억에 없는 아버지라면 그저 의무감일 수도 있어. 알고 있었나? 그건 그저 환영이었다는 걸?" 모스부르거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 하지만 진짜 부모였다고 해도 별로 가슴 아프진 않았을 것 같은 데." 내 말에 모스부르거는 웃음을 지었다. "다른 차원에서 수르카, 당신은 다른 사람이었는지도 몰라. 거기서도 고아로 자랐고, 또한 거기서도 소중한 사람을 잃었는지도. 아니, 어쩌면 다른 차원의 우주에서 수르카, 당신은 마소드의 검과 함께 짝으로 넘어온 존재였는지도 모르지." 모스부르거는 이렇게 말했다. "자. 여기가 마소드의 검이 넘어 왔던 차원이라네." 모스부르거가 말했다. 그러자 내 눈앞에 수많은 창문이 달려 있는 거대 한 각진 집과 그 사이를 질주하는 뮤가 끌지 않는 마차, 그리고 어떤 도 시에서 본 것보다도 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어지럽게 펼쳐졌다. "수르카, 당신의 아버지도, 마소드의 검도, 모두 이곳에서 존재했던 것 이지. 사실 나는 그 모든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왜냐하면 모 든 것이 실은 다른 차원의 우주에도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야." 모스부르거가 말했다. 나는 솔직히 모스부르거가 말하고 있는 내용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내 눈앞에 떠있는 마소드의 검이 내 마음 에 따라서 구름으로 보이고 나비로 보이고, 또한 방패와 우물로도 보이는 것을 보고 있는 동안에도 느낄 수는 있었다. 나는 조각마법사 쥬리가 했 던 말이 떠올랐다. 쥬리는 그저 해 본 소리라고 말했는지 몰라도, 바위 속에 감추어진 것을 찾아내는 일이 조각가가 하는 일이라고 나에게 말했 었다. 그것은 조각에만 해당되는 일은 아닌 것 같았다. 내가 마소드의 검 에서 아버지를 찾을 수 있고, 탐그루를 찾을 수 있는 걸 보면 말이다. "그래서 지금을 지키고 기억을 지키는 일이 중요하다는 말이군요." 나는 모스부르거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렇지. 지금의 기억이 없다면 수르카, 당신은 수르카 당신이 아닐 테 니까." 모스부르거의 목소리가 바뀌었다. 붉은 빛으로 빛나고 있는 이 공간에 서는 소리가 울리기 때문인지 모스부르거의 목소리는 현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같지 않았다. "마소드의 검은 진정으로 자신을 위하는 마음 없이는 작동하지 않아. 그것이 이 세계의 법칙이지. 마법이 진정으로 이해한 마음에서만 발현되 는 것처럼." 모스부르거의 목소리는 한 순간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졌다. "수르카, 나는 당신의 존재를 알고 범버쿠 정글에서 기다리고 있었지. 하지만 당신이 진정으로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존재인지 알기 위해서 굳 이 이곳으로 불러야 했어. 당신의 대답은 옳은 것이었어. 하지만 그것만 으로는 부족해. 당신이 있는 곳이 당신이 있어야 할 곳이고, 당신이 하는 일이 당신이 해야 할 일이라는 말, 그 말은 일견 옳았지만, 그리고 그 말 이 당신을 이곳으로 이끈 힘이라는 것도 사실이지만, 나는 수르카, 당신 의 마음을 알고 싶었던 것이오. 진정으로 수르카 당신이, 당신의 생명과 추억과 마음을 위해 살고 있는 것인가를." 모스부르거가 말했다. 나는 알렙의 한 복판에 서 있었다. 영상은 흔들 리다가 낯익은 사람의 모습을 비추었다. 무기 상인 시하라의 얼굴이었다. "마소드의 검이 있는 곳은 저 사람이 알고 있다네. 그리 쉽게 찾을 수 는 없겠지. 하지만 저 사람을 만난다면 분명 찾을 수는 있을 것이오. 그 리고 내가 말했듯이, 중요한 건 마소드의 검이 아니라, 수르카, 당신의 마음이니까." 갑자기 정중해진 모스부르거의 말이 끝나자 누군가가 나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환영도 아니고 실체도 아닌 아 자닌이 서 있었다. "아자닌?" 아자닌은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수르카 님. 제가 칼의 길과 마법의 길에 대해서 말씀드렸던 것을 기억 하실 겁니다. 그리고 수르카 님이 마법의 길을 선택하실 거라고 했던 말 씀도요." 아자닌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르카 님은 마법의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수르카 님의 마법의 말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수르카 님께서는 마음의 문을 여셨 고, 저는 길을 인도해드렸습니다. 그리고 이제 다 이루어진 지금, 저는 떠나야합니다." 떠난다니? 나는 내 어깨에 올려진 아자닌의 손을 잡아보았다. 그러나 내 어깨에 올려져 있는 아자닌의 손은 잡히질 않았다. "수르카 님께서 선택하신 마법의 길, 이제 저는 더 이상 인도해 드릴 수 없습니다. 저는 반지의 정령이니까요." 아자닌이 말했다. 나는 아자닌에게 뭔가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 아니, 뭔가 이야기를 해야만 했다. 하지만 입은 떨어지질 않았고, 그저 안타까 운 마음만이 입 속에서 맴돌았다. "...그럼 이 칼은?" 고작 내가 물은 것은 허리에 찬 나미트 장군의 칼을 가리키면서 이렇게 물은 것뿐이었다. 아자닌은 이렇게 말했다. "적당한 운명의 주인이 있을 것입니다, 틀림없이." 아자닌은 이렇게 말하면서 사라져갔다. 나는 손을 휘저어 아자닌을 붙 잡으려고 해보았지만 내 손에 잡히는 것은 힘없는 붉은 빛줄기뿐이었다. "아, 아자닌. 다시 볼 수는 없는 거야?" "언젠가는, 어쩌면... 다른 주인을 만나서라도... 수르카 님을 다시 뵐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아자닌은 이렇게 말하고는 완전히 빛 속에 동화되어 더이상 보이지 않 게 되었다. "수르카. 이곳을 왔던 사람들은 이곳의 기억을 잃게 된다네. 그렇지 않 으면 자신이 존재한다는 걸 믿을 수가 없을 테니까. 하지만 이곳에서의 기억 중에서 반드시 남아 있는 게 있을 걸세. 너무 서운해하지 말게. 자 네의 기억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모스부르거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고, 나는 붉은 빛 사이에서 내 몸마저 빛에 동화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따사로운 햇살이 솜으로 만들어진 바늘 같은 느낌으로 내 얼굴을 찌르 고 있었다. 몸에는 달구어진 모래알이 스며 들어오는 듯 했다. 포근한 기 분이었다. 나는 한참을 누워 있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온몸에 붙어 있던 모래 알갱이들이 햇살과 함께 내 몸에서 부서져 바닥으로 떨어져 내 렸다. 나는 이곳이 어디인가 둘러보았다. 어느 해변인 모양이었다. 사방 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고 있었고, 내 눈에 들어오는 거라고는 난파된 배 뿐이었다. 사빈도, 오브라디 교수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반지를 살펴보 았다. 반지는 돌로 변해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게 웬지 당연하다고 느껴 졌다. 오브라디 교수가 보이지 않는 것도, 사빈이 카를로스 장군의 창과 함께 사라진 것도. 멀리 비스토브레 산맥이 눈에 들어왔다. 비록 까마득히 멀리 꿈결처럼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산세만은 분명하게 알아 볼 수 있었다. 나는 그 밑 으로 펼쳐져 있을 대청하가 눈에 선했다. 그리고 그 너머에는 탐그루가 있을 것이다. 이제 탐그루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면서 숨을 깊게 들이켰다. 어쩐지 새로운 희망이 가슴속에 차오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는 통 기억을 할 수가 없었다. 분명하게 기억이 나는 것은 태풍과 태풍 에 맞선 사빈의 모습뿐이었다. 그리고 무슨 일인가가 있었는데. 그러나 나는 더 이상 기억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 이제 혼자라는 것, 그리고 탐 그루로 가서 무기 상인 시하라를 만나야 한다는 것은 알 수 있었지만. 나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문득 파도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와 뒤를 돌아보았다. 멀리 아지랭이처럼 태풍지대의 모습이 흔들리고 있는 게 보 이자 기억의 파편이 한 조각 떠올랐다. 애잔한 감정을 남기고 사라진 잡 힐 듯 잡히지 않는 어떤 모습들. 하지만 잠시였다. 죽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슬프고 아련한 기억만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사라지며 가슴을 흔들었 다. -------------------------------------------------------------------- 잠시 쉬겠습니다. ^^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24132/24386 ━━━━━━━━━━━━━━━━━━━━━━━━━━━━━━━━━━━━━━━━ 제 목:[탐그루] 우리 언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 관련자료:없음 30/30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7-22 18:13 조회:745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 우리 언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까. "...그렇게 수르카는 탐그루로 향했습니다. 탐그루를 떠날 때는 라이짐 과 아자닌이 함께 있었지만, 이제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아무도 없었습니 다." 송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던 세헤라자드의 목소리가 갑자기 끊어졌다. "세헤라자드?" 이리듐폰의 송수화기에서 들려 오는 소리라고는 그저 전화기의 신호음 뿐이었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끝낸 적은 없었는데. 고전적이지만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이리듐폰의 수리를 시도해 보았다. 송수화기를 몇 번 머리에 두들겨 보았지만 아무리 두드려 봐도 내 머리만 아팠을 뿐, 송수 화기에는 여전히 웬지 모를 불안감을 주는 단속적인 신호음만이 흐르고 있었다. "세헤라자드, 세헤라자드?" "비류 씨." 내가 세헤라자드를 애타게 부르자, 차를 몰던 오토가 내 말을 끊으면서 세헤라자드 대신 대답했다. 나는 이리듐폰의 송수화기를 귀에 붙이고 오 토를 쳐다보았다. 후버카의 속도가 서서히 줄더니 길 한 켠에 멈추어 섰 다. 나는 오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오토는 멍하니 차창 밖을 바라보면서 뭔가에 질려버린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건도, 실버우드도, 유하린 수사관도, 모두 하나같이 질려버린 얼굴이었다. "...오토 씨. 일단 라디오라도 좀 켜 보지요." 유하린 수사관이 마른침을 한 번 꿀꺽 삼키더니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앞을 바라보았다. 소드앤매직 온라인 코리아 합중국 지부를 출발했을 때 는 밤이었는데, 지금 내 눈앞에는 벌건 대낮이 펼쳐져 있었다. 게다가 대 낮의 빌딩들은 하나같이 지금까지 전혀 보지 못했던 야릇한 기하학적인 모습으로 뒤바꾸이어 있었다. 마치 거미줄 같은 형태로 변한 건물도 있었 고, 바둑판을 비스듬하게 세워 놓은 것처럼 보이는 건물도 있었다. "어, 언제부터 저렇게 되었지요?" 내가 말하고 있는 동안에도 상자처럼 솟아있는 건물 하나가 뒤틀린 타 원형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냥 타원이라면 럭비 타운이라고 생각할 법도 했지만, 저렇게 뒤틀린 건물은 본 적이 없었다. 혹시 그럼 세헤라자드의 이야기가 갑자기 끊어져 버린 것도? 세헤라자 드와 연락이 끊어진 것과 건물이 저렇게 변하고 있는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지 않을까 싶었다. "너무 늦었어..." 랩탑에서 젯 나이트가 말했다. "차원이 뒤섞이기 시작했어. 보이는가?" 그런데 젯나이트가 이렇게 말하는 순간, 잠시 바깥 풍겨이 깜박거렸다. 그 아차 하는 사이에 세상은 다시 어둠에 휩싸였고, 빌딩들도 정상으로 돌아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서 있었다. 순식간에 뒤틀리고 꼬인 기괴 한 형태의 건물들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지금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젯나이트. 당신은 알고 있지요?" 유하린 수사관이 목청을 돋우어 젯나이트에게 물었다. "나라고 해서 이 모든 사태를 다 알고 있는 건 아니야. 그렇다면 이렇 게 다급하게 MS사로 달려가고 있지도 않을 걸세." 젯나이트는 유하린 수사관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라디오는요?" 실버우드가 오토에게 물었다. 오토는 디지털 판넬을 이리저리 조작하면 서 주파수를 잡으려고 했지만, 스피커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전파 장애인 모양입니다." "빌어먹을. 도대체 어떻게 된거야." 건이 내뱉듯이 중얼거렸다. 그 바로 다음 순간, 스피커에서 흘러간 옛 팝송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비틀즈의 곡인 걸 보니 아마도 클래식 채널 인가 보다 싶었다. "뭡니까, 오토 씨. 지금 비틀즈라니." "잠깐만." 오토는 이렇게 말하면서 조용히 하라는 듯 손짓을 했다. "...잠시 방송이 중단 된 점 사과드립니다. 이어지는 소식입니다. 정부 는 최근 급증하고 있는 정보 통신 법 개정에 대한 정당간의 견해 차이가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에 유감을 표명하고, 야당은 즉각 국회로 돌아 와..." 귀에 익은 아나운서가 뉴스를 말해주고 있었다. 24시간 뉴스 방송인 RNN(Real News Network)이었다. "뉴스 채널이군요. 오토 씨. 방송 중단을 키워드로 한 번 입력해 보시 죠." 유하린 수사관이 오토에게 물었고, 오토는 즉시 버튼을 누르고 '방송 중단'이라고 또박또박 발음했다. 오토가 입력한 키워드를 찾는 잡음이 들려왔다. "알려드립니다. 태양의 흑점 활동으로 인하여 잠시 동안 방송이 중단되 었습니다. 24시간 뉴스 채널인 저희 RNN방송에서는 언제나 청취자 여러분 들에게 최신의 정보를 정확하고 빠르게 전달해 드리는 일에 최선을 다하 고 있습니다." 검색어를 통해 찾아낸 뉴스는 이게 다였다. "그런데 흑점 활동이 밤을 낮으로 바꿀 수도 있나?" 여전히 투덜거리는 투로 건이 말했다. "적어도 누군가 흑점 탓으로 돌리고 싶어 하는 게 틀림없어." "젯나이트의 테러도 숨겼던 녀석들이니까." "지금 뭣하고 있는 건가?" 오토와 유하린 수사관이 한 마디 씩 주고 받는 사이, 젯나이트가 소리 쳤다. 나는 깜짝 놀라 몸을 움찔했다. "시간이 없어. 차원이 붕괴되기 시작했다고. 당장 MS녀석들을 막아야 해!" 젯나이트가 다시 소리쳤다. 오토는 대답 대신 후버카에 시동을 넣고 달 리기 시작했다. 가로등의 불빛이 마치 빛의 담장처럼 보일 만큼 후버카는 빠른 속도로 질주해갔다. "MS녀석들, RNN에 압력을 넣은 게 분명합니다. 태양의 흑점 활동이라니 말도 안되는 코메디입니다." "맞아요. 지금은 최악입니다." 유하린 수사관의 말에 오토가 핸들을 조작하면서 말했다. "그럼 이젠 너무 늦었다는 말인가요?" 실버우드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시간이 임박했다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빨리 붕괴가 시작될 줄은 몰랐 네. 어쩌면 세헤라자드가 용을 풀어 준 게 결정적이었는지 몰라." 젯나이트가 중얼거리듯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젯나이트의 말을 듣는 순간,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나는 패널의 버튼을 누르고 이렇게 또박 또박 발음해서 검색어를 입력했다. "유정일, 나이트무버." "뭐 하는 거죠, 비류 씨?" 유하린 수사관이 물었지만, 대답은 스피커에서 들려 왔다. "...나이트무버라는 별명으로 잘 알려진 프로 게이머 유정일 씨가 심장 마비로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의식 불명 상태입니다. 유정일 씨는 현역 시절 각종 게임 리그에서 우승을 차지한 경력이 있고, 제 5대, 8대, 14대 그랜드 마스터로 뽑혔던 게이머였습니다. 최근에는 중계 방송 해설 자로도 활약했으며 부인과 이혼 후 혼자 살아왔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 다." 유정일의 뉴스는 이게 전부였다. "비류 씨. 그 뉴스는..." "용입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밥이라는 이름의 용이 지능을 가지게 된 것과 유 정일과 관계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할 수 있었지만, 막상 이렇게 직접 뉴 스를 듣고 보니 내 추측이 옳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MS녀석들이 유정일의 영혼을 밥인지 뭔지 하는 용에게 심은 게 틀림없 어." 젯나이트가 단정하듯이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무슨 수로? 유정일 정도의 공인이라면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 습니다." 유하린 수사관이 수사관답게 젯나이트의 말에 이의를 달았다. 나는 유 하린의 말에 당장 이렇게 답변했다. "게임에서 MS사의 영향력을 감안해본다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겠죠. 새로운 게임을 개발중인데 조언이 필요하다. 또는 게임 기획자가 필요하 다. 이 정도면 나이트 무버를 유인하는데 충분했을 거에요." "그렇다면 왜 유정일 같이 유명한 공인을 실험 대상으로 썼을까요? 거 리에는 부랑자나 거지들이 널려있는 있습니다." 유하린 수사관은 여전히 의문점이 남는다는 듯이 이렇게 물었다. 오토 가 후버카를 몰면서 대답했다. "그야 몰랐을 겁니다. 캡처 된 영혼이 활동하는 순간, 실제 영혼은 활 동을 멈춘다는 사실을." "그리고 지금도 모르고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건이 말했다. 나는 건이 말하면서 차창 밖을 당혹스러운 눈으로 바라보 고 있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창 밖을 바라보았다. 창 밖에는 다시 벌건 대낮과 이번에는 아치형으로 부풀어 오른 건물들의 모습이 펼쳐지고 있었 다. "빌어먹을. 이게 흑점 활동 때문이라구?" 건이 중얼거렸다. "정말이지 나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으면 좋겠군." 젯나이트가 나즈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만약 어스넷을 떠도는 생명체의 수가 이미 임계점을 지났다면 어떻게 되는 거죠, 젯나이트? 아니면 이미 임계점을 넘어버린 건가요?" 나는 조심스럽게 젯나이트에게 물었다. 그 사이 건물 사이로 야자수들 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아니, 솟아올랐다기 보다는 빈 공간에 나타났다고 말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걸 낸들 어떻게 알겠나? 인류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차원의 붕괴라 는 걸 겪어본 적이 없다네. 그러니 누가 알겠어. 사실 차원의 붕괴 같은 현상, 그저 이론으로 그러려니 싶은 부분이 더 많다네. 나한테도 말이지. 지금 이렇게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어쩐지 도무지 믿기 질 않는군." 젯나이트의 목소리는 어쩐지 체념해 있는 듯 했다. "그런 불평할 시간 있으면 어떻게 하면 저 이상한 현상을 막을 수 있을 까 생각해 보십시오." 오토가 후버카를 몰면서 말했다. "솔직히, 이제는 너무 늦은 것 같군. 이미 임계점을 넘어섰다면,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있겠나?" 지금까지 시간이 없다는 둥, 한시라도 빨리 막아야 한다는 둥, 일행을 재촉했던 젯나이트가 이렇게 말하자 다들 맥이 빠져버린 듯 말이 없었다. "지금와서 그런 행동이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오토는 더욱 거칠게 후버카를 몰면서 말했다. 그나마 오토가 이렇게 열 의를 보이고 있다는 게 천만 다행이었다. 아마 오토마저 주저앉았다면 우 리는 여기서 한 걸음도 더 나아가기 힘들었을 것이다. 아마도 오토는 리파이와 아톰을, 특히 아톰을 다시 정상으로 돌려놓아 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진짜 프로였다. 한 번 맡은 일은 절대 포기하지 않는. "사실 나는 많이 혼란스럽다네." 젯나이트가 말했다. "왜 차원의 붕괴를 막아야 하는 거지. 붕괴라고 표현하기는 했지만 그 저 다른 세상이 열리는 것뿐인데 말이야. 나는 어쩌면 새로운 세상에 어 울리도록 어떤 필연에 의해 출현한 새로운 인간일지도 몰라. 세헤라자드 도 그렇고, 아톰과 리파이도 그렇고..." 젯나이트가 말하자 오토가 당장 이렇게 말했다. "당신도 부루터스와 같군요. 당신을 믿다니, 나도 돌았지." 조용조용한 어조였기는 했지만, 감정을 억누르고 있다는 게 확연히 느 껴지는 말투였다. 나는 이렇게 말하는 오토를 바라보면서 혼란을 느꼈다. 무엇이 젯나이트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어쩌면 젯나이트의 말 그대로 너 무 늦었기 때문에 포기해야 겠다고 젯나이트는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니면 언젠가 세헤라자드가 말했듯이, 이 세계를 살아가는 인 간은 이 세계를 지키고 싶어할지 몰라도, 다른 차원의 인간은 이 세상을 지킬 이유가 전혀 없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젯나이트도 인간이라기 보다는 다른 차원의, 새로운 세상의 인간으로 변해가고 있는 지도. 나는 머리를 세차게 한 번 흔들었다. 하지만 머리 속은 정리되기는 커녕 갈수록 점점 더 복잡해져만 가고 있었다. "오토. 이제 어떻게 할거요?" 유하린 수사관이 오토에게 물었다. 유하린 수사관도 젯나이트에게 전염 이 되었는지 맥빠진 목소리로 물었다. "사람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끝까지 그걸 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살아 왔습니다. 그리고 그게 프로로서의 저를 이끌었습니다. 저는 갈 겁니다, 끝까지." 오토는 이렇게 말하고는 후버카를 급회전 시켰다. 어느새 MS사의 100층 빌딩 앞에 후버카는 당도해 있었다. 하지만 100층 빌딩은 환한 햇살 아래 마치 요새와도 같은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창문은 모조리 회색의 두터운 벽면으로 바뀌어 있었고, 그 안에는 저격수들이라도 지키고 있을 듯 했 다. "망할. 도대체 여길 어떻게 뚫고 들어간단 말이지? 게다가 100층까지 올라가야 한다면서?" 건이 MS사의 건물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포기하고 싶으면 후버카에 남아 계십시오, 건 씨." 오토는 이렇게 말하고는 품에서 구형 화약식 리벌버를 꺼내 탄창을 확 인 한 후 이렇게 덧붙였다. "와일드 건이라는 이름이 아깝군요. 그리고 100층이 아니라 99층입니 다. " "잠깐. 누가 안 간다고 했나? 나는 좀 힘들겠다고 한 것뿐입니다. 이 거, 사람 우습게 보지 마세요." 건이 농담조로 오토의 말을 받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오토. 너무 흥분한 거 아닙니까?" 유하린 수사관은 이렇게 말하면서 품에서 빔핸드건을 뽑아 들고 에너지 베터리를 확인했다. "더 할 말 있는 사람 있습니까?" 오토가 물었다. 그러자 젯나이트가 말했다. "미안하네. 내가 약한 소리를 했군. 나이 탓인가?" 젯나이트는 이렇게 말하면서 너털웃음을 지었다. 나는 젯나이트의 얼굴 에 여전히 씁쓸한 미소가 남아있는 걸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해해 주게. 어차피 나는 이제 다른 차원의 사람이니까. 결코 다시 예전의 인간으로 돌아갈 수는 없을 테니. 하지만 내가 지금 이 일을 하는 건 내가 내 영혼을 스스로 에뮬레이션 했을 때와 같은 이유라네. 내 가 뿌린 씨앗을 내가 거두겠다는 생각 말일세. 내 마음을 이해해 주었으 면 좋겠군." 젯나이트는 이렇게 말하면서 심호흡을 했다. 에뮬레이션 된 영혼이 심 호흡을 한다고 해서 뇌에 산소가 충분히 공급될 턱이 없기는 했지만, 적 어도 심리적으로 안정을 찾을 수는 있었던 모양이었다. 젯나이트의 표정 이 많이 다소 밝아졌다. "갑니다." 오토는 이렇게 말하고 후버카의 문을 열기 위해 손잡이를 잡았다. 그리 고 그 순간, 갑자기 다시 세상이 어두워지는가 싶더니 빈공간을 채우고 있던 야자수들이 어디로 갔는지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오토. 가기 전에 뉴스를 좀 들어보지요." "유하린 수사관 말이 맞습니다. 여전히 흑점활동이라고 말하는지 궁금 한데요?" 건이 웃으면서 말했다. 아무래도 건은 낙천적인 성격이 가장 큰 장점이 아닐까 싶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웃으면서 이야기 할 수 있다니 말이다. 세상은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다시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붉게 빛나고 있는 밤하늘도, 도시를 밝히고 있는 화려한 전광판의 불빛 도, 그리고 MS사를 밝히고 있는 전등빛도, 모두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방송 중단." 오토는 검색어 버튼을 누른 다음 이렇게 말했다. 그러자 스피커에서 접 속을 시도하는 기계음이 울려 나왔다. "시스템 과부하입니다. 잠시 후 다시 시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기계음이 멈추자, 건조한 여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오토는 다시 한 번 검색어 버튼을 누른다음 방송 중단에 관한 뉴스를 입력했다. "자료를 읽어 오는 데 실패했습니다. 잠시 후 다시 시도하여 주시기 바 랍니다." "빌어먹을. 잠시후라고? 항상 잠시 후. 잠시 후. 세상이 끝난 후에나 시도해 보라는 말인가!" 건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 전체가 아주 못마땅한 것 같았다. "갑시다. 여기선 소용없어요. 직접 가봅시다." "안으로 들어가보면 알겠죠.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유하린 수사관이 말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건이 후버카의 문을 거칠게 열었다. MS사의 정문에는 정복을 입고 있는 서 있었다. 아마도 MS사에도 특별 경계령이 내린 듯, 정복을 입은 수위는 무장을 하고 있었다. "어스폴입니다." 신분증을 꺼내면서 유하린 수사관이 말했다. "긴급 조사권으로 MS사를 수색해야 겠습니다. 협조해 주십시오." 유하린 수사관은 그야말로 어스폴 수사관 다운 말투로 수위에게 이렇게 말했다. "영장은 가지고 오셨수?" 수위가 어스폴 수사관이 무슨 개뼉다귀냐는 듯한 얼굴을 하고서 이렇게 물었다. "긴급 조사권을 발동했다고 말하지 않았소?" 유하린 수사관의 말투는 바빠 죽겠는데 뭐 하는 짓이냐는 듯한 말투였 다. 그러자 수위는 실실 웃으면서 켄을 안고 있는 실버우드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요즘 어스폴은 임산부도 받아주는 모양이지? 허, 참. 내가 어스폴에 있었을 때는 그런 일은 상상도 할 수 없었지. 그런데 긴급 조사권이라는 게 뭐요? 내가 십 년동안 어스폴에서 일했지만 나는 그런 게 있다는 얘기 는 들어 본 적이 없는데." 수위가 말이 끝나자마자 유하린 수사관은 조용히 수위의 얼굴에 오른쪽 주먹을 날렸다. 퍽, 하고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나면서 수위는 그대로 뒤 로 쓰러졌다. "이게 긴급 조사권이야." 유하린 수사관은 이렇게 말하면서 수위를 질질 끌고 가 수위실에 처박 았다. "그런데 문제가 좀 있군요." 오토가 손가락으로 정문 위쪽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오토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는 카메라가 설치 되어 있었다. "아마 우리를 봤을 겁니다." "빌어먹을." 오토의 말에 건이 인상을 찌푸렸지만, 유하린 수사관은 아무렇지도 않 은 모양이었다.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24133/24386 ━━━━━━━━━━━━━━━━━━━━━━━━━━━━━━━━━━━━━━━━ 제 목:[탐그루] 우리 언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 관련자료:없음 31/31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7-22 18:14 조회:586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요즘 감시 카메라 없는 건물이 어디 있습니까? 일단 들어가는 게 우선 입니다." 유하린 수사관은 이렇게 말하면서 빔핸드건을 뽑아들었다. 비장한 각오 를 한 무사같은 얼굴이었다. "MS사라면 빔라이플로 무장한 분대 병력을 사병으로 거느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오토가 유하린 수사관에게 충고했다. 빔핸드건 쯤 뽑아 봐야 아무런 소 용없다는 이야기였으리라. "그렇다고 그냥 순순히 죽어 줄 수야 없지." 유하린 수사관은 빔핸드건을 거두지 않고 정문으로 들어갔다. 유하린 수사관은 믿어지지 않을 만큼 당당한 걸음걸이로 앞장섰다. 수사가 시작 되니 의욕이 솟는 모양이었다. 하긴, 유하린 수사관의 직업이 바로 이런 거니까. "잠깐 좀 기다리라고 해 주겠나?" 젯나이트가 나에게 물었다. 물론 나는 유하린 수사관을 불러 세우려고 했지만, 유하린 수사관은 이미 회전문을 통과한 다음이었다. 나는 허겁지 겁 유하린 수사관의 뒤를 따랐다. 1층 로비는 회사 건물이라기 보다는 고급 호텔 로비같은 느낌이 드는 곳이었다. 천장에는 화려한 샹들리에가 걸려 있었고, 바닥에는 최고급일 것이 분명한 대리석 위에 붉은 양탄자가 깔려 있었다. 여기 저기 거의 숲 을 연상시킬 만한 거대한 화분들이 놓여 있는게 눈에 띄었고, 게다가 2층 으로 오르는 계단은 나선형으로 틀어져 있는데다가 갖가지 장식으로 화려 하게 꾸며져 있었다. "취향도 이상한 녀석들이라니까. 여기가 무슨 궁전인 줄 아나." "건 씨. 돈 있는 녀석들이 하는 짓은 다 비슷합니다. 돈은 있지만 상상 력은 없죠." 오토가 말했다. 나는 서둘러 걸음을 옮긴 다음 유하린 수사관을 불러 세우려고 했다. 하지만 나보다 번저 유하린 수사관의 걸음을 멈추게 한 사람이 있었다. "손들어!" 유하린 수사관이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고 하는데 계단 위쪽 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역시 정복을 입은 나 이가 어려 보이는 수위 하나가 유하린 수사관에게 빔핸드건을 겨누고 있 었다. 유하린 수사관은 아주 천천히 돌아서서 수위를 올려다보면서 이렇 게 말했다. "그래서? 손을 들지 않으면 현역 어스폴 수사관을 쏠 텐가?" 여유 있는 태도였다. 유하린 수사관이 말하자 수위는 멀리서도 눈에 뜨 일 만큼 손을 떨었다. "그 총 버려. 어스폴 수사관 살인 미수죄로 10년 감옥에서 썩고 싶지 않으면. 운이 좋으면 1년 지하감옥으로 끝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영원히 앞을 볼 수 없게 될 걸? 지하 감옥이 어떤 곳인지는 알고 있지?" 유하린 수사관이 수위에게 말했다. 수위는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빔핸드 건을 거두고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다, 당신들 뭐하는 사람들이오? 이곳은 아무나 함부로 들어 올 수 있 는 곳이 아닙니다." 반말도 아니고 존댓말도 아닌 이상한 말투였다. 유하린 수사관은 일단 수위에게 신분증을 보여 준 다음 이렇게 말했다. "아무나 함부로 못들어 오지. 하지만 긴급 조사권을 발동한 어스폴 요 원은 들어 올 수 있다네." 유하린 수사관이 이렇게 말하자 이번에는 오토의 주먹이 허공을 갈랐 다. 수위는 관자놀이에 정통으로 오토의 주먹을 맞았고, 이어지는 오토의 발길질에 허리를 숙였다가 턱을 올려치는 오토의 마무리 주먹에 그대로 뻗어 버렸다. "이게 긴급조사권이었지 아마. 월권 좀 했소. 이해해 주길." 오토는 이렇게 말하고는 수위를 끌고 간 후 화분 뒤에 수위를 아무렇게 나 집어 던졌다. "비디오 카메라에 다 찍힌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닌 것 같군." 오토가 손을 털면서 말했다. "세헤라자드가 보안 장치를 손보고 있는 중이라네." 젯나이트가 말했다. "도대체 뭐가 그렇게 급한 건가? 아주 멋진 긴급조사권이군 그래. 내가 이곳 보안장치는 다 확인했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침투 방법도 다 연구해 두었다고." 젯나이트가 기분 나쁘다는 투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랩탑 안에서 이렇 게 말하고 있는 젯나이트가 꼭 칭얼거리는 어린아이 같다는 생각이 들었 다. "아까 그 꼬마 수위는 뭐였습니까, 그럼?" 오토가 젯나이트에게 물었다. "우연히 지나가던 사람이었겠지, 뭐." "무슨 계획이건 우연히 끼어 들 수 있는 사람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됩 니다." 오토가 젯나이트에게 충고하듯이 말했다. 젯나이트는 부끄러운지 얼굴 이 다 붉어지는 것 같았다. "하여간 계획을 세웠다는데, 어떤 계획인가요?" 건이 젯나이트에게 물었다. "여기서 48층까지는 화물 엘리베이터로 가고, 그 다음 두 층은 걸어서 가고, 99층까지는 간부용 엘리베이터로 가는 게 내 계획이라네. 그게 사 람을 마주칠 확률도 가장 적고, 또 보안 장치를 확실하게 피해 갈 수 있 는 구역이거든." 젯나이트가 말했다. "좋습니다. 그럼 일단 화물 엘리베이터로 가지요." 유하린 수사관이 이렇게 말하면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왜 하필 화물용 엘리베이터지?" 건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물론 젯나이트에게 들으라고 하는 소리였 으리라. "화물용 엘리베이터는 밤중에 작동되어도 경보 장치가 울리지 않으니 까. 물론 48층까지지만." 젯나이트가 대답을 하기는 했지만 내 귀에 겨우 들릴 정도의 음성이어 서 건은 아마 듣지 못했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세헤라자드가 여기 경보 장치는 모두 손볼 거라고 하지 않았나 요?" 내가 젯나이트에게 물었다. "아무리 세헤라자드라고 해도 한꺼번에 전부는 불가능해. 세헤라자드는 사람이지 신이 아니니까." 젯나이트는 그것도 모르냐는 듯한 투로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꼭 비난받은 사람처럼 무안해져서 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화물용 엘리베이터가 다른 엘리베이터와 다른 점이라고는 그저 엘레베 이터 입구에 '화물용'이라고 쓰여 있는 것과 조금 더 내부 공간이 넓다는 것 뿐이었다. 3층에 서 있던 화물용 엘리베이터는 금새 내려왔고, 우리는 일제히 화 물용 엘리베이터 안에 들어갔다. "48층까지라고 하셨습니까?" 유하린 수사관이 젯나이트에게 물었다. "아무 말도 하지 말게." 젯나이트가 유하린 수사관에게 충고했다. 엘리베이터는 음성 인식 센서 가 부착되어 있었다. 하지만 음성인식 기능에 개인 식별 기능이 붙어 있 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화물용 엘리베이터에도 그런 쓸데없는 기능 을 추가할 만큼 돈이 남아돌지는 모를 일이었으나, 어찌되었건 여기는 MS 본사였으니까). "세헤라자드가 알아서 할 테니까." 젯나이트가 말하기를 기다렸는지, 엘리베이터는 젯나이트의 말이 끝나 기가 무섭게 48층까지 단숨에 올라갔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화물용 엘 리베이터 다운 속도감이었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올라간 엘리베이터는 불과 몇 초 지나지 않아 우리를 48층에 내려놓았다. 빠른 이동 속도는 마 음에 쏙 들었지만, 너무 빠른 속도 때문에 멀미를 느꼈다. 켄도 눈을 동 그랗게 뜨고서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 "여기서부터 두 층은 계단으로 올라가야 하네. 계단은 오른 쪽으로 나 있는 비상구를 통해서 간단하게 올라 갈 수 있어." 젯나이트가 말했다. "재미있군요. 꼭 퀵서비스 나온 기분인데?" 건이 농담조로 말했지만 웃는 사람은 없었다. 어찌되었건 급박한 와중 이었고, 언제 어디서 무장한 경비원과 마주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빔핸드건의 위력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겠지만, 빔에는 눈이 달려 있지 않다. 목이건, 팔이건, 빔은 구분을 하지 않고 단숨에 베 어 버린다. 계단을 오르는 일행의 걸음을 뛰는 정도로 빠르지는 않았지만, 다들 두 계단을 한 번에 오를 정도로 속도를 붙이고 있었다. "4와 9라면 별로 좋은 패는 아닌데." 49층에 이르렀을 때, 건이 이렇게 농담을 했다. 아마 무슨 도박에 관계 된 말인 모양이었는데, 오토와 유하린 수사관은 쿡, 하고 웃음을 참았다. 물론 나는 무슨 농담인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일단 미소라도 지으면 서 꼭 알아들은 척을 했다. "4하고 9가 뭔데요?" 나에 비해서 실버우드는 용기가 있었다. 실버우드는 이렇게 건에게 직 접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았던 것이다. "섯다라는 옛 게임에서 4하고 9는 판을 무르고 다시 한 게임 한다는 뜻 입니다." 오토가 점잖은 목소리로 실버우드에게 설명해 주었다. 실버우드는 아 하,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야!" 49층을 막 지날 때, 비상구가 벌컥 열리면서 정복을 한 수위 하나가 우 리에게 소리쳤다. 일행은 걸음을 멈추어 서기는 했지만, 일단 두 번의 경 험이 있는지라 그리 당황하지는 않았다. "어스폴 수사관입니다." 유하린 수사관이 신분증을 품에서 꺼내려고 손을 가져가면서 말했다. 바로 그 순간 정복을 입은 수위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빠른 속도로 빔핸 드건을 뽑아 들었다. "죄송합니다. 오늘부터 경계 강화령이 내려서 말이지요. 아주 천천히, 제가 볼 수 있도록 신분증을 제시해 주십시오." 수위는 매우 사무적인 태도로 유하린 수사관에게 이렇게 말하면서 매서 운 눈초리로 우리 일행을 견제했다. 오토와 건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만 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자. 됐소?" 유하린 수사관은 양복 저고리를 펼쳐서 수위에게 보여준 다음, 천천히 신분증을 꺼내 수위에게 보여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유하린 수사 관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없었다. 이런 말로 순순히 물러 설 거라고는 유하린 수사관 본인도 생각하지 않고 있는 모양이었다. "영장을 보여 주시죠." 수위가 말했다. "긴급 조사권 발동 중이오."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긴급 경계령이라고 해 두죠. 오늘부터 49 층 이상은 전면 통제되었습니다." "더 수상해지는 걸?" 건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이렇게 말하자, 수위의 빔핸드건이 조준하고 있는 방향이 건 쪽으로 옮겨졌다. "수상하다고 여기실 수 밖에요. 49층 이상은 대외비입니다. 경찰이건, 어스폴이건, 저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미안하지만 이대로 물러 설 수는 없는 상황이오." 오토가 말하면서 수위에게 다가섰다. 수위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면서 오토에게 빔핸드건을 겨누었다. "왜? 어스폴 수사관을 여기서 살해라도 할 생각인가보지?" "당신도 어스폴?" 수위가 오토에게 물었다. 오토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아주 짧 은 순간이었지만 수위의 얼굴이 긴장으로 굳어졌고, 나머지 일행은 숨을 죽였다. 오토의 주머니에서 나온 것은 손수건이었다. 오토는 땀을 닦은 다음 이 렇게 말했다. "당신 일이 우리를 올라가지 못하게 하는 거라면, 우리 일은 올라가는 겁니다." 오토가 말하자 수위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지어졌다. "그럼 내 입장을 이해하겠군요." 수위가 말했다. "하지만 유 수사관, 그냥 이렇게 돌아 갈 수는 없지 않겠어?" 다시 한 번 얼굴의 땀을 닦으면서 오토가 말했다. 나는 오토와 유하린 수사관 사이에 알 수 없는 신호가 오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빔핸드건은 아주 위험한 무기지." 유하린 수사관이 이렇게 말하면서 몸을 비스듬하게 언제라도 빔핸드건 을 뽑을 준비를 하자 천천히 수위의 총구가 유하린 수사관 쪽으로 움직였 다. 그 순간 오토는 주머니에 손수건을 집어넣었다, 고 나는 생각했고 그 건 그 순간 수위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오토는 손수건을 집 어넣은 것이 아니라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낸 것이었다. 오토는 주머니에 서 스프레이를 꺼내 수위의 얼굴에 뿌렸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수 위는 그대로 얼굴을 감싸 안았고, 다음 순간 수위는 빔핸드건을 빼앗긴 다음 바닥에 드러누워 기절한 신세가 되었다. "구닥다리 무기는 다 들고 다니는 군요, 오토 씨는." 유하린 수사관이 반농담조로 오토에게 말했다. "오래된 무기는 대부분 단순하고 효율적이죠." 오토가 수위를 구석으로 치우면서 말했다. "이제 별 문제 될 건 없겠죠?" 건이 오토에게 말했다. 오토는 대답대신 어깨를 한 번 으쓱 하고는 말 았고, 비상구의 문을 잠그기 위해 손을 뻗다가 멈추었다. "빨리 올라갑시다." 오토는 이렇게 말하고는 먼저 계단을 뛰어 올랐고, 나머지는 그 뒤를 따를 수 밖에 없었다. 나는 비상구를 지나치다가 문 밖에서 정신없이 뛰 어올라오고 있는 한 무리의 사내들을 볼 수 있었다. 하나 같이 빔라이플 로 무장한 일개 분대는 됨직한 병력이었다. "저 사람들은 뭐죠, 젯나이트?" 나는 젯나이트에게 이렇게 물으면서 계단을 뛰어 올랐다. "그냥 우연이야. 운이 별로 없군. 우연으로 두 번이나 마주치다니." "운도 실력일 때가 있지요." 유하린 수사관은 이렇게 말하면서 정신없이 계단을 뛰어 올랐다. 무장한 병력은 우리의 존재를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 다. 분대는 둘로 나뉘어 하나는 우리 뒤를 쫓았고, 하나는 50층에서 기다 리고 있었다. 물론 내가 분석한 건 아니었지만, 오토의 말에 따르면 녀석 들은 싸구려 총잡이들이 아니라 충분히 훈련받은 사병들인 모양이었다. "50층부터는 계단으로 움직일 수 없습니까?" 오토가 비상구 문을 열었다가 황급히 닫으며 젯나이트에게 다급한 목소 리로 물었다. 나는 잠시 열렸던 문틈을 통해서 무장하고 있는 몇몇 병사 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불행하게도 우리가 가야 할 곳은 여기 있는 간부 엘리베이터 말고는 이동할 수단이 없어." 젯나이트가 말했다. 사실 분대가 둘로 나뉘었을 때, 우리가 먼저 50층 에 올라갔다면 운 좋게 간부용 엘리베이터에 먼저 오를 수도 있었을 거였 다. 하지만 켄을 안고 뛰는 실버우드의 속도는 너무 느렸다. 물론 그렇다 고 해서 실버우드를 책망할 상황은 아니었다. "여기까지 올라오느라 수고들 많이 하셨네." 사내방송이 울려 퍼졌다. 나는 사내 방송을 하고 있는 것이 누구의 목 소리인지 알 수가 있었다. 거칠게 갈라지는, 스티브 강의 목소리였다. "같은 실수를 두 번이나 할거라고 생각했다면 그건 큰 오산이지. 인공 생명체에 대한 경계를 우리가 전혀 하고 있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나?" "완전히 실패했군요, 우리는." 오토가 품에서 리벌버를 뽑아들면서 말했다. 물론 빔라이플로 무장한 분대 병력과 우리가 맞서서 이길 가능성은 전혀 없었지만, 오토는 오토 나름대로 포기할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아마 젯나이트와 함께 있겠지. 세헤라자드는 우리가 잡아 두었으니까 말이야. 이제 그만 저항하고 항복하는 게 어때? " 스티브 강이 다시 사내 방송을 통해 말했다. 우리 일행은 거의 동시에 젯나이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랩탑의 액정 화면에 떠 있는 젯나이트는 당혹스러운 얼굴을 하고서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세헤라자드를 잡아 둔 모양입니다." "걱정 말아요, 유 수사관. 인질극은 벌일 수 없을 테니까." 건이 농담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투로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우리가 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을까요?" 나는 오토에게 이렇게 물었다. 오토는 긴장된 얼굴을 하고 있을 뿐 대 답이 없었고, 유하린 수사관이 오토 대신 이렇게 말했다. "글쎄. 그저 대비해 둔 거라고 생각하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녀석 들도 바보는 아닐 테니까요." "여기 저기 다 준비해 두고 있었겠지요. 일단 한 번 당했다고 분석을 했을 테니까요. 그런데 어떤 방법으로 세헤라자드를 가두었을까요?" 유하린 수사관의 말에 건이 덧붙였다. "용을 가둔 것처럼, 그렇게 했겠지. 선이 없으면 빠져나갈 수 없을 테 니까. 아마 보안 장치 중 한 군데에 그런 덫을 쳐 두지 않았을까 싶은데. 세헤라자드가 들어오면 끊어지게 되어있는 덫 말이야." 유하린 수사관이 이렇게 의견을 피력하는 사이, 계단 밑에서 누군가 조 심스럽게 올라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포위망을 좁히고 있군요." 오토가 말했다. 일단 둘로 나누어진 일개 분대 병력을 우리가 상대한다 는 것도 무리였지만, 이렇게 포위망까지 좁혀오고 있으니 녀석들에게 잡 히지 않을 방법은 전혀 없을 것 같았다. "부루터스도 함께 있겠지? 어떤가 이제 포기하는 게." 스티브 강이 말했다. "부루터스와 우리가 함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데요?" 유하린 수사관이 갑자기 흥분된 얼굴을 하고서 이렇게 말했다. "부루터스와 MS사가 한 패일 거라는 생각은 틀린 모양이야. 어쩌면 녀 석들은 부루터스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는걸." "그렇습니다, 오토.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추리 중에서 부루터스와 MS사 가 공모했을 거라는 일단 틀렸다고 할 수 있겠군요." "지금 어스폴을 공격한 게 누구인가에 대한 추리 말하는 겁니까?" 건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유하린에게 물었고, 유하린은 고개를 끄덕였 다. "미안하지만 유 수사관, 지금 이 상황에서는 설사 저 친구들이 어스폴 을 공격했다고 해도 체포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걸 모르겠습니까?" 오토가 건 대신이라는 듯이 유하린 수사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몰 아 부쳤다. 계단 밑에서는 조심스럽게 전진해 올라오고 있는 MS사병들의 발소리가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물론 내가 신분증을 보여준다고 해서 순순히 굴복하지 않을 거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유하린 수사관은 이렇게 말하면서 빔핸드건을 뽑았다. 오토는 유하린 수사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는 두 사람의 눈빛이 심상치 않다고 느꼈 다. 유하린 수사관의 입술 한 쪽이 가볍게 올라갔다. "우리, 아직 승부가 남아있다는 거 기억하고 있지요?" 유하린 수사관이 오토에게 물었다. 오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승부하고 싶은 모양이군요, 유 수사관." 오토가 말하자 유하린 수사관은 계단 아래쪽을 내려다보면서 빔핸드건 을 조준했다.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24134/24386 ━━━━━━━━━━━━━━━━━━━━━━━━━━━━━━━━━━━━━━━━ 제 목:[탐그루] 우리 언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 관련자료:없음 30/30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7-22 18:14 조회:710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그 때 내가 졌다는 거, 인정했던가요?" "지금 나를 체포하겠다는 의미로 하는 말이라면 대답하기 싫은 데." 오토가 리벌버를 겨누면서 말했다. "오토 씨. 저 친구들이라면 몇 명쯤 상대할 수 있겠습니까?" 유하린 수사관은 오토의 말에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우리 일행을 번갈 아 가면서 바라보았다. 건은 당혹스러운 눈초리를 하고서 유하린 수사관 과 오토를 번갈아 가면서 바라보았고, 젯나이트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 다. 켄을 안고 있는 실버우드는 뭔가 이야기를 하고 싶은 얼굴을 하고 있 었다. "둘. 운이 좋다면 셋." "내가 셋 맡지요. 그럼 밑에 있는 다섯은 가능할 겁니다." "유하린 씨. 지금 우리는 아이하고 함께 있어요." 실버우드였다. 실버우드는 화가 단단히 났는지 눈을 부릅뜨고서 유하린 수사관에게 말했다. 실버우드는 보란 듯이 안고 있던 켄을 고쳐 안았다. "여기서 다 죽고 싶다면 말리진 않겠어요. 하지만 쓸데없는 호승심 때 문에 죽고 싶지는 않아요. 켄도 틀림없이 그럴 거고요." 실버우드의 말은 단호했다. 그리고 사실 나도 말을 안하고 있었다 뿐이 지 실버우드가 하고 있는 말에 전적으로 동감이었다. "실버우드 씨. 우리는 프로입니다. 그리고 프로가 셋이나 있는데 고작 열 명을 상대 못하고 항복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아뇨." 실버우드가 말했다. "정확하게는 두 명이에요. 건은 손을 쓸 수가 없으니까요." 나는 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건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가락을 움 직이고만 있었다. 나는 조금 전 건이 지었던 당혹스러운 표정의 의미를 이제야 알 수가 있었다. "계단 위쪽에 올라가 있어요." 건은 이렇게 말하면서 품에서 빔핸드건을 뽑아 들었다. 건은 왼손으로 빔핸드건을 옮겨 들었다. "왼손을 쓰셨던가요?" "맞출 수는 있습니다." 건이 말했다. 순간 세 사람이 거의 동시에 우울한 얼굴이 되었다. 아마 도 승산이 별로 없는 싸움이라는 생각 때문인 모양이었다. "그냥 포기하는 게 어떤가, 친구들. 나는 더 이상 피를 보고 싶지 않다 네." 스티브 강의 방송이 다시 이어졌다. 스피커 탓인지 스티브 강의 음성은 내가 알고 있는 것 보다 몇 배는 더 갈라져서, 꼭 사람의 음성 같지 않게 느껴졌다. "어서." 건은 이렇게 말하면서 실버우드에게 계단 위 쪽으로 피해 있을 것을 재 촉했다. 실버우드는 잠시 동안 망설이는가 싶더니 계단 위쪽으로 올라갔 다. 실버우드가 발소리를 울리자 밑에서 빔라이플이 몇 번 발사되었다. 빔이 눈에 보일리도 없었고, 소리가 들릴 리도 없었다. 계단의 난간이 순 식간에 끊어져 나갔다. 실버우드는 침착하게 켄을 안고 계단 위쪽으로 뛰 어 올랐고, 세 명의 프로가 동시에 계단 아래쪽으로 사격을 시작했다. 오 토의 리벌버 총성이 고막을 터트려 버릴 듯이 크게 울려 퍼졌다. "몇 잡았습니까?" 유하린 수사관이 오토에게 물었지만 오토는 고개만 가로 저었다. "보이질 않았습니다. 위협 사격이었어요." 건은 이렇게 말했다. 사격이 시작되었을 때, 사실 나는 닫혀 있는 비상 구 옆에 바짝 달라 붙어있었는데, 거의 배를 땅에 대고 쓰러져 있다시피 한 상태였다. 솔직히 나도 총에 맞아 목이 떨어져 나간 시체가 되고 싶지 는 않았다. "좋아, 좋아. 역시 프로다워. 최후까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보기 좋 군." 비꼬는 건지 진심인지 도무지 분간 할 수가 없는 말투로 스티브 강이 말했다. "차라리 그냥 죽어버리라고 말하지 그래!" 오토가 소리쳤다. 오토의 목소리가 계단과 복도로 우렁차게 울려 퍼졌 다. "유 수사관." 건이 유하린 수사관에게 물었다. "이럴 때 영화 같은 데서 보면, 너를 체포한다는 둥, 네 권리를 말해 주겠다는 둥, 그런 소리를 하던데, 혹시 유 수사관은 그런 말 안해요?" 건이 애써 웃음까지 지어 보이면서 유하린 수사관에게 말했다. 유하린 수사관은 건의 말에 피식 웃었다. "영화를 믿으시는 건 설마 아니겠지요? 우리는 그런 식으로 일하지 않 습니다. 그렇게 일했다가는 목숨이 열 개라도 부족합니다." "그럼 체포할 때는 뭐라고 하죠?" "꼼짝마. 움직이면 쏜다. 이건 비밀인데요, 이렇게 말하고는 바로 쏴 버립니다." 유하린 수사관의 말에 오토가 작게 소리내며 웃었다. 이 사람들, 도대 체 이런 상황에서 웃음이 나오나? 내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데 세 사람 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져 버렸다. 계단 밑에서 사격이 시작됨과 거의 동시에 문 쪽도 구멍이 뚫려나갔다. 동시에 공격해 들어오는 모양이었다. 유하린 수사관은 정신없이 계단 밑을 향해 조준도 하지 않고 방아쇠를 당 겼고, 건과 오토는 문 쪽을 향해서 사격을 시작했다. 나는 랩탑을 배 밑 에 깔고 그대로 엎드려 버렸다. 물론 양손으로는 두 귀를 막고서 말이다. 오토의 총소리는 견디기 어려울 만큼 컸다. "빌어먹을!" 건이 뭐라고 더 소리 쳤고 오토는 탄창을 한 번 교환했다. 오토가 사격 을 멈추었을 때, 신기하게도 녀석들의 사격도 중지되었다. "이 번에도 위협 사격이었을까요?" 총성이 멎자, 건이 조심스럽게 이렇게 말했다. 유하린 수사관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발걸음 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때문에 녀석들이 어디서 어떻게 이동을 하고 있는 건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한동안 정적이 이어 졌다. 몇 번의 총격전을 경험해 본 적이 있는 나였지만, 지금 이 상황이 가장 절망적이었다. 나는 엎드린 채로 계단 위쪽에 실버우드와 함께 있는 켄을 올려다보았다. 아무 말도 없는 켄이야 말로 이 상황에 가장 잘 적응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실버우드는 켄을 꼭 껴안고서 켄의 머리를 쓰다 듬어 주고 있었다. 상황이야 실버우드가 켄을 보호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내가 보기엔 켄보다 실버우드가 켄에게 훨씬 더 많이 의지하고 있는 듯 했다. "부루터스 아저씨?" 처음에 켄이 입을 열었을 때, 나는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었다. 내가 켄을 봐서 갑자기 켄이 말을 한 것일까? 내가 켄을 본 게 실수가 아 니었을까? 나는 이런 생각을 하느라고 정작 켄이 부루터스를 부르고 있다 는 건 생각조차 해 보지 못했다. "뭐지, 이건?" 젯나이트가 말했다. "뭐가요?" "여기 말이야." 나는 젯나이트의 말을 듣고서 주위를 둘러보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러 기 전에 이미 내 주변은 완전히 변해 있었다. 환한 빛. 오는 길에 보았던 환한 빛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었고, 벽면과 내가 엎드려 있는 바닥은 어 느 순간 초록색 잔디로 변해 있었다. 나는 건과 오토, 그리고 유하린 수 사관을 바라보았다. 셋이 손에 들고 있던 무기는 짤막한 나무토막으로 변 해 있었다. 셋의 표정을 보아하니 당혹스러워 하는 건 나 뿐만은 아닌 것 같았다. 다시 차원의 붕괴가 이루어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너무 늦은 건가요?" 나는 일단 마음을 가라앉히고 침착하게 젯나이트에게 물었다. 젯나이트 역시 당황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당황이라기 보다는 발을 동동 구르 고 있는 듯한 얼굴이었지만. "스티브 강인지 뭔지 하는 녀석..." 젯나이트가 참다못해 결국 이렇게 화를 내기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다 시 한 번 밝은 빛이 이곳을 둘러싸는가 싶더니, 잔디로 변했던 이곳이 다 시 한 번 변하기 시작했다. 나는 처음에는 환상이라고 보고 있는 게 아닌 가 싶었다. 틀림없이 49층이 분명한 이곳이 넓은 평원으로 바뀌는가 싶더 니 계단은 언덕으로 바뀌었고, 비상구는 동굴의 입구로 변해버렸다. 내가 입고 있던 옷도 번쩍이는 갑옷으로 변해있었다. "지금!" 오토는 이렇게 말하면서 계단, 아니 이제는 언덕 아래로 뛰어 내려갔 다. 오토의 손에는 한 손으로는 도저히 들기 어려울 것 같은 커다란 칼이 들려 있었다. 오토가 뛰자, 건과 유하린도 프로답게 재빨리 행동했다. 지 금 상황이 어떤 것이든, 예를 들어 갑작스러운 핵폭풍으로 땅위에 서 있 는 것들은 모조리 다 죽어가는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저들은 저렇게 움직 였을 것이었다. 나는 반드시 저들이 무엇을 어떻게 하는 지 알아야 한다는 의무라도 있 는 사람처럼 무의식적으로 오토의 뒤를 따랐다. 아니, 의무라기 보다는 책임감에 더 가까운 것이 나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오토는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건 건과 유하린 수사관도 같았다. 번쩍이는 갑옷을 입고서 다 섯 명의 병사와 싸우고 있는 그들의 모습은 마치 게임속에서 튀어나온 전 사와 같은 모습이었다. 유하린의 검이 눈을 번득이며 허공을 가르자 MS병사 하나의 팔이 끊어 졌고, 오토의 칼이 허공을 가르며 휘파람 소리를 남기자 다른 녀석 한 녀 석의 목이 날아갔다. 둘이 이렇게 당해 버리자 안 그래도 당황하고 있던 녀석들은 칼을 버리고 그대로 언덕 아래 편으로 도망쳐 버렸다. 언덕 아 래로 녀석들이 도망치기 시작하자,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만약 MS의 열 명이 한 군데 뭉쳐 있었다면, 아니면 둘로 나누어진 녀석들이 한 꺼번에 몰려왔다면, 이렇게 쉽게 녀석들을 이길 수는 없었을 것이었다. "나머지는요, 오토?" 나는 오토에게 이렇게 물었다. 오토가 서 있는 잔디밭에는 피가 흥건하 게 고여 있었고, 목 잃은 시신 옆에는 팔을 붙잡고 뒹굴고 있는 한 사내 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머지는 밑으로 도망쳤어."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건이 말했다. 건의 손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무리 수술을 받고 회복중이라고는 해도 칼을 잡고 휘두르기에는 무리가 있는 모양이었다. "아뇨, 내 말은 위쪽에 남은 다섯이요." 나는 이렇게 고쳐서 다시 물었다. "이제부터 어떻게 할까 생각해 봐야지요." 유하린 수사관이 칼끝을 바닥에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젯나이트. 이제 차원이 붕괴된 겁니까?" 오토가 젯나이트에게 물었다. 하지만 젯나이트가 대답하기도 전에 이번 에는 사방이 어두워지는가 싶더니 잔디가 나 있는 언덕은 어느 사이 계단 으로 돌아와 있었다. 일행이 들고 있던 무기들도 빔핸드건으로 돌아와 있 었고, 바닥에 떨어져 있던 칼도 마찬가지로 빔핸드건이 되어 버렸다. 오 토와 유하린 수사관은 꼭 바닥에 현금 뭉치라도 떨어져 있는 걸 발견한 사람 모양으로 재빠른 손놀림으로 그것들을 집어들었다. "내가 보기에는 어스넷 생명체의 수가 임계점에 거의 도달한 모양이야. 그래서 부분적으로 붕괴가 이루어지는 거겠지." 젯나이트가 이렇게 말했다. "젯나이트. 그럼 어스넷 생명체의 수가 조금이라도 더 늘어나면 완전한 붕괴가 일어나는 겁니까?" "그럼 어스넷 생명체의 수가 줄어들면 붕괴는 일어나지 않나요?" 유하린 수사관과 건이 꼭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연이어 물었다. "정확히 어떤 일이 벌어지고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 아는 사람은 한 명 도 없을 거야." 젯나이트는 결국 이렇게 대답하고는 말았다. 나는 한숨이 나왔다. "부루터스!" 사내 방송을 통해 스티브 강의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지금 이게 무슨 짓인가! 세상을 온통 뒤집어 놓을 생각인가?" 스티브 강은 우리와 부루터스가 함께 있다고 여전히 생각하고 있는 모 양이었다. "세상을 뒤집어 놓는다고 했습니다, 지금." 오토가 이렇게 말했다. "그럼 MS사도 역시 차원의 붕괴에 대해서 알고 있었던 걸까요?" 유하린 수사관의 의문에 마치 대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스티브 강의 말 이 이어졌다. "부루터스! 이런 눈속임으로 우리를 아무리 혼란스럽게 해도 소용없 어!" 스티브 강의 이 말은 MS사가 차원의 붕괴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 준거나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면 그렇지. 다른 녀석들도 아니고 MS녀석들이 세상이 망하는 꼴을 그냥 보고 있을 턱이 없잖아?" 건이 피식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건의 손에는 빔핸드건이 들려 있었 는데, 나는 건의 손목이 아직도 떨리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어스폴 수사는 더 이상 없을 거야! 네 녀석이 아무리 그 시디를 어스 폴에 넘겨주려고 해도 소용없어. 언론? 우리 MS가 바로 언론이야! " 스티브 강이 이어서 말했다. "그렇군요. 녀석들은 부루터스가 가지고 있다는 용 계획과 관련된 시디 가 밖으로 새어나가는 걸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MS사의 비밀이 담겨 있겠지, 영혼의 에뮬레이터에 관해서도." 오토의 말에 유하린 수사관이 이렇게 덧붙였다. "비류 씨." 나즈막한 목소리로 건이 나에게 말했다. "실버우드와 켄은 어떤가요?" 아차. 켄과 실버우드. 나는 그 두 사람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렇게 하세요. 우리는 어떻게든 저 문을 통과할 방법을 찾아 볼 테니 까." 유하린 수사관이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아까 언덕 밑으로 내려간 녀석들, 지금 뭘 하고 있을까요?" "건 씨. 아마 다시 올라올지 모릅니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빨리 저 문 을 통과해서 엘리베이터에 오를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다시 차원의 붕괴가 일어나기 전에." "예. 너무 늦으면 소용없지요."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는 계단 위쪽으로 발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조심스럽게 올라갔다. 계단 위쪽에는 실버우드와 켄이 서로를 거의 부둥켜안다시피한 자셰로 앉아 있었다. "실버우드, 안 다쳤어요?" 나는 먼저 실버우드에게 이렇게 물었다. 실버우드는 고개를 천천히 끄 덕였다. "그런데, 켄. 아까 부루터스 아저씨냐고 물었지?" 나는 켄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했다. 켄은 내 물음에 고개를 끄 덕였다. 켄이 바로 반응을 보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꼭 내 눈앞에서 차원이 붕괴되고 있는 걸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왜 부루터스 아저씨냐고 생각했어?" 하지만 이번 물음에 켄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니에요, 비류 님." 실버우드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켄은 '왜'를 물어보면 대답하지 않아요. 이렇게 물어야죠." 실버우드는 나에게 이렇게 설명한 다음, 켄에게 이렇게 다시 물었다. "켄. 부루터스 아저씨가 나타나면 어떻게 되지?" "부루터스 아저씨가 그랬어." 켄이 말했다. 나는 실버우드의 얼굴을 한 번 바라보았다. 실버우드는 스스로도 만족하고 있는지 얼굴에 웃음을 띠고 있었다. "다시 돌아온다고. 그리고 다시 돌아오면 이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 모 른다고." "아까 전에 세상이 어떻게 변했는데?" 실버우드의 질문에 켄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 어떻게 변한 게 아니야." 켄은 이렇게 말하고는 허공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 쪽에 부루터스 아저씨가 있었어." 켄이 말했다. 나와 실버우드는 거의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았다. 켄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는 사내 방송이 나오는 스피커 선이 이어져 있었 기 때문이었다. "켄은 부루터스가 나타나는 걸 느낄 수 있는 걸까요?" "지금으로서는..." 실버우드는 이렇게 말하면서 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켄은 눈을 껌벅 이면서 실버우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다고 봐야 겠지요." 이렇게 말을 맺는 실버우드의 얼굴은 당장이라도 한숨을 내뱉을 것 같 이 굳어 있었다. 계단 밑에서 조심스러운 발소리가 그 때 들려왔고, 나는 계단 아래쪽을 살펴보았다. 오토와 건, 그리고 유하린 수사관이 조심스럽 게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오토가 나를 올려다 보더니 입술에 검지 손 가락을 대며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오토가 문을 열 수 있는 위치에 서자, 건과 유하린 수사관이 문을 박차 고 나갈 준비를 했다. 아마 단숨에 돌파할 계획인 모양이었다. 나는 움직 일 수가 없었다. 만약에 당장이라도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녀석들이 사격을 시작한다면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싶었지만, 그렇 다고 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상황이기도 했던 것이었다. 나는 젯나이트를 바라보았다. 젯나이트도 초조한지 이제는 아 주 손톱을 다 물어 뜯고 있었다. 어스넷 생명체에게도 손톱이 있는 걸까, 손톱이 부러지면 그 손톱은 프로그램이 되어 버리는 걸까, 뭐 이런 아주 쓰잘데 없는 의문들이 떠올랐다. 오토는 뭔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 오토는 신중하게 움직임을 멈추고 있 었다. 아마도 뭔가를 신호로 정한 모양이었다. 건과 유하린 수사관도 역 시 조심스럽게 오토의 움직임을 주시하면서 참을성 있게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좋아. 부루터스. 요구 조건을 말해 보게. 이제 더 이상 이런 수수께끼 놀이는 하지 않겠어. 우리, 정직하게 서로가 원하는 걸..." 오토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사내 방송이었다는 건 바로 이 순간 드러 났다. 오토는 스피커에서 스티브 강의 목소리가 들려나오자 곧 문을 열어 젖혔고, 그 사이 건과 유하린 수사관이 빔핸드건을 쏘면서 문을 향해 달 려들었다. 그리고 곧이어 오토의 총성이 한 번 울렸다. 실버우드는 반사 적으로 켄의 귀를 막았다. 오토의 총소리에 적응이 되지 않은 나였지만,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굳이 달려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건 아니 었지만 이대로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갑시다." 얼마 후, 오토가 문에서 나와 우리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실버우 드와 함께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참, 실버우드 씨." 오토가 다시 문에서 나오면서 말했다. "켄의 눈을 가려줘요." 오토가 말했다. 실버우드는 고개를 끄덕인 다음 켄의 눈을 한 손으로 가렸다. 나는 어떤 광경이 펼쳐져 있을지 대강 짐작 할 수 있었다. 49층은 완전히 유리로 된 층이었다. 비록 매연과 스모그 때문에 부옇게 보이고는 있었지만, 나는 이곳에서 도시의 전경이 거의 한 눈에 들어오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어두운 붉은 색 하늘 아래로 반짝이는 도시의 불빛이 아름답게 일렁이고 있었다. 그리고 건물 바닥에는 전등 빛을 받은 핏물이 고여 있었다. 그리고 시신들. 빔에 맞아 절단 된 시신 몇 구가 눈 에 들어왔고, 머리 한 복판에 구멍이 뚫려 있는 시신도 한 구 있었다. 아 마도 오토가 쏜 한 방에 맞은 희생자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비치 는 유리로 만들어진 건물은 한 세기 전에나 유행했던 방식인 걸로 알고 있었는데. 나는 혹시 이곳이 무너져 내리지나 않을까 걱정됐다.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24237/24386 ━━━━━━━━━━━━━━━━━━━━━━━━━━━━━━━━━━━━━━━━ 제 목:[탐그루] 우리 언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 관련자료:없음 29/29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7-24 00:10 조회:556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덥지 않습니까?" 철문 앞에 당도하자 체력의 한계에 다다랐는지, 건은 그대로 바닥에 주 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나는 건이 주저앉는 걸 본 다음에 바로 뒤이어 쓰 러지듯 주저 앉아버렸다. 무엇보다 너무나도 피곤했던 것이다. "예. 이상하게 덥군요." 오토가 가죽옷의 앞섶을 풀어헤치면서 말했다. "이제 어쩌죠?" 실버우드가 젯나이트에게 물었다. 젯나이트는 문을 손으로 더듬어서 만 지고 있었다. "열 방법을 찾아 봐야지." 젯나이트는 이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본인 스스로도 열 방법이 전혀 없 다는 걸 모르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문은 완전한 평면으로 보였다. 세로로 금이 가 있기는 했지만 그것이 문이 열린다는 증거로 보기에는 손잡이도 보이지 않았고, 그렇다고 키카 드를 꽂는 곳이나, 음성인식 센서 같은 게 붙어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아마 안에서만 열 수 있는 문인 것 같습니다." 오토가 문을 손으로 더듬으면서 말했다. "그런 문도 있나요?" "예. 늘 안에 한 명이 있으면 되지요. 보통 보안을 요하는 곳의 문 중 에 그런 문이 설치되는 경우도 간혹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오토는 이렇게 말하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결국 안에서 열 때까지는 열 수 없다는 말이군요." 나는 이렇게 말하면서 한숨을 뱉어내었다. 여기 까지 어떻게 오기는 했 지만 결국 이렇게 꽉 막혀 버렸구나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어떻게 하죠, 이제?" 건이 오토에게 물었다. 오토는 그걸 나한테 물어보면 어쩌냐는 듯한 얼 굴을 하고서 건을 바라보았고, 유하린 수사관도 공감한다는 얼굴이었다. 건은 답답한지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손바닥으로 닦아 내면서 다른 한 손으 로는 갑옷의 가슴 부분을 두드렸다. 탁한 금속음이 동굴 안에서 울려 퍼 졌다가 금새 사라져갔다. 침묵이 이어졌다. 나는 답답했다. 어찌나 답답 했던지 솔직히 스티브 강의 사내 방송이라도 이어졌으면 좋겠다 싶을 지 경이었다. "부루터스 아저씨야." 누군가 침묵을 깨리라는 것은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켄일 거라고 는 전혀 상상도 해 보지 못한 나였다. 켄은 손가락으로 문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부루터스?" 나는 이렇게 말하면서 켄을 바라보았다. 켄은 늘 하고 있던 초점 없는 멍청한 눈이 아니라 또렷한 눈을 하고서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문을 가리키면서 부루터스라고 말하다니? 혹시 부루터스가 영혼의 형태로 이곳에 와 있는 건 아닐까? "부루터스가 여기 무슨 일이지?" "적어도 우리를 돕지는 않을 거라는 것 정도는 알겠군요." 오토가 말했다. 그 때였다. 유하린 수사관이 거의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빠르기로 뒤로 돌아서면서 칼집에서 칼을 뽑아 겨눈 것은. 나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내가 본 곳에는 두 손을 머리 높이 까지 올 리고 당황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사내였다. 사내는 난생 처음 보는 얼굴 이었다. 나이는 한 사십이나 되었을까? 히끗히끗한 머리가 군데군데 나 있는 사내였다. 사내는 키가 작고 외소해 보였지만, 눈만은 아주 반짝이 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내는 흑인이었던 것이다. "비류 씨. 절 직접 보는 건 처음이죠?" 사내가 말했다. "누구야." 낮게, 하지만 강한 어조로 유하린 수사관이 말했다. 유하린 수사관의 검지 손가락은 하얗게 긴장되어 당장이라도 칼을 사내에게 휘두를 것 같 았다. "너무 늦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저는 만델라 님의 대리인입니다. 통화 는 몇 번 한 적이 있었지요?" 사내가 말했다. "만델라?" 건이 사내에게 말했다. "예. 바로 그 만델라 님의 대리인입니다. 보통 때는 브라질리아 공화국 에서 만델라 님을 대신해서 사무를 보는 일을 하지요. 이번에는 좀 특별 한 경우여서 제가 직접 왔습니다. 우선 그 칼이나 좀 치우시지요." 사내는 이렇게 말하면서 한 걸음 다가왔다. 유하린 수사관은 내 얼굴을 처다보았고,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마지못해 칼을 치웠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비류 씨. 아버님께서 보내셨습니다." "아버지께서요?" 나는 의아하다는 듯이 사내에게 되물었다.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비류 씨는 잘 모르셨겠지만 저는 비류 씨를 몇 번 본 적이 있었습 니다. 크레디트 카드를 잃어버리셨을 때도, 또 어스폴이 비류 씨를 조사 할 때에도, 이번 일이 시작되었을 때도 말이죠. 아버님은 주도 면밀하신 분입니다. 아들을 아무렇게나 방치해 두시지는 않지요." 사내가 말했다. 사내의 말에서 나는 사내가 적어도 거짓말을 하고 있지 는 않다는 걸 알 수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믿기에는 지금 이 상황 이 너무나 중요한 상황이었다.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된다면 여러 명의 목 숨이 왔다갔다할 지도 모를 일이었다. 게다가 실버우드의 말 그대로 우리 일행 중에는 아이도 있는 것이다. "저, 확인을 위해서 하나 묻지요. 비류입니다. 아버지를 찾습니다." 나는 천천히, 하지만 또렷한 음색으로 사내에게 이렇게 물었다. 사내는 히죽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만델라님은 지금 외부에 계십니다. 뭐라고 전해드릴까요." 이것으로 사내가 진짜 아버지의 대리인이라는 사실은 확인이 된 셈이었 다. 이 암호를 알고 있는 것은 나와 아버지, 그리고 아버지의 대리인뿐이 니까 말이다. "뭐라고 불러야 합니까? 그냥 대리인?" 오토가 사내에게 물었다. 물론 본명을 대라는 뜻은 아닐 거였다. "편한 대로 부르셔도 좋습니다만, 지금은 일단 기술자라고 불러 주십시 오. 기술자 양반이라고 불러도 좋고." 사내는 이렇게 말하면서 문 쪽으로 다가갔다. 오토도, 유하린도, 건도, 더 이상 사내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어찌 되었건 사내가 속해 있는 바 닥에서는 이름을 드러내는 게 금기시 되어 있다는 걸 모르지 않기 때문이 었다. "이걸 먼저 열어야겠지요? 너무 늦기 전에 말이죠." 기술자라고 불러 달라던 사내는 문을 손으로 더듬은 다음 품에서 뭔가 를 꺼내었다. 나는 사내가 품에서 꺼낸 것을 보는 순간 비명을 참기 위해 손으로 입을 막아야 했다. 기술자 사내가 들고 있는 것은 아직 피도 마르 지 않은 손이었기 때문이었다. "오른 손이군요." 아무렇지도 않은지 오토는 사내에게 이렇게 물었다. 사내는 오토를 바 라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간부의 손이지요. 유하린 수사관. 저를 체포할 겁니까?" 사내는 웃으면서 유하린 수사관에게 이렇게 말했다. "무슨 죄목으로요? 나는 당신을 보지도 못 했는데. 게다가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어스폴 수사관을 살해한 자를 개인적으로 찾고 있는 거지 알지도 못하는 MS사 간부 살인사건을 추적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런 사건 이 일어났는지도 나는 모르고요." 유하린 수사관은 이렇게 대답함으로서 사내가 편하게 작업을 계속 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사내는 손바닥을 문에 대었고, 그러자 문은 유압 기가 조절되는 소리와 함께 서서히 열렸다. "이제 들어가시면 됩니다." 사내가 이렇게 말하면서 마치 우리를 안내하는 양 손으로 길을 인도했 다. 우리 일행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유하린 수사관과 오토, 그리고 건이 먼저 걸음을 옮겼고, 다음은 젯나이트와 실버우드였다. 나는 세헤라 자드와 함께 가장 늦게 걸음을 옮겼다. "당신, 그러니까 기술자, 당신은?" 오토가 기술자에게 물었다. 기술자는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이렇게 말했 다. "죄송합니다. 저는 여기까지입니다. 제가 잘 하는 건 이런 일이지 결투 가 아니거든요." 기술자 사내는 아주 뒷짐까지 지고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리고 비류 씨." 나는 사내를 돌아보았다. 사내는 엷은 미소를 띤 얼굴로 나를 바라보면 서 이렇게 말했다. "몸조심하시라고 말델라 님께서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사내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잠시 사내에게 뭐라고 한 마디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지만 결국 그만 두고 말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 고는 이제 앞으로 벌어질 일을 지켜보는 수준일게 틀림없었으니까 말이 다. 그건 간단한 거였다. 나는 무기조차 들고 있지 않았던 것이었다. "안에 아무도 없소?" 젯나이트가 소리쳤다. 방안은 완전 어둠이었다. 나는 벽면을 더듬어 불 을 켤 수 있는 스위치를 찾아보려고 했지만 손에 걸리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아니, 걸린 게 하나 있기는 했다. 나는 어둠속이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건 바로 세헤라자드의 손이었다. "아, 전등을 찾는 거죠?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어둠 속에서, 그것도 보이지 않는 상대에게 이렇게 말한다는 건 상당히 우스운 일이라고 생각이 되긴 했지만 그건 말을 꺼내고 나서도 한 참이 지난 다음의 일이었다. 내가 조금만 더 노련한 사람이었다면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했을 것이고, 혹시 뭔가 마음에 걸리기라도 한다면 '손이 참 곱 네요' 운운하면서 농담을 건넸을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지금 나로서는 그 런 행동을 할 만한 여유도 없었고 용기도 없었고, 또한 경험도 없었다. 나는 괜히 말했다 싶은 마음으로 그저 달아오르고 있는 양 볼을 손으로 만져 볼 수밖에 없었다. "스티브 강. 거기 있는 거 안다. 불이나 좀 키지 그래." 오토는 이렇게 말하면서 어둠 속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오토는 일 단 칼을 빼 들고 있었다. 스티브 강이 빔핸드건을 들고 있다면 칼이고 뭐 고 아무런 소용없는 일이겠지만, 일단 프로라면 최후의 순간까지 저항할 마음이 있을 테니까 말이다. "불을 켜기 전에 먼저 이야기하지." 낮고 굵은 음성이 어둠 저편에서 들려 왔다. 나는 어둠을 응시하였다. 자세히 보니 두개의 붉은 빛이 우리 쪽을 향해 있었다. 두 개의 빛은 마 치 눈동자처럼 우리를 향해 있었다. 나는 마치 괴물이라도 나를 향해 있 는 것처럼 공포심이 들었다. "문을 열어주려고 했는데, 먼저 문을 열고 들어 올 줄은 몰랐군." "기술자가 있어서." 오토가 어둠 저편에 대고 말했다. 그러자 웃음소리 같은, 꼭 고장난 모 터가 털털거리면서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군. 기술자가 있었군." 나는 소름이 다 끼쳐 오르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끔찍한 기분이었 다. "먼저 이곳으로 온 이유를 묻지, 젯나이트." 어둠 저편에서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문을 통해 빛이 들어오고 는 있었지만, 목소리가 들리는 쪽까지는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이곳으로 온 이유라. 글쎄. 내가 만든 영혼의 에뮬레이터를 훔쳐갔으 니 돌려 받으러 왔다고 말해 두지. 훔쳐갔다는 걸 부정하지는 않겠지? 나 중에 돈으로 때우겠다는 소리는 하지 말아. 나는 돈 따위 필요 없으니 까." 젯나이트는 단호하게 말했다. "훔쳐간 건 내가 아니라 스티브 강이야." 어둠 저편에서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루터스?" "그래. 목소리는 다르겠지만." 어둠 저편의 목소리는 더욱더 낮은 음성이 되어서 이렇게 말했다. 부루 터스였군. 나는 켄이 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어 떻게 알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찌되었건 켄은 문 저편에 있는 부루 터스를 가리키고 있었던 것이었다. "다시 묻지. 왜 여기 왔나? 정말로 영혼의 에뮬레이터를 되찾기 위해 서?" "아니." 젯나이트는 일단 이렇게 부루터스의 말을 부정한 다음 말을 이었다.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내가 내 육신을 포기하면서까지 내 영혼을 에 뮬레이션 한 이유 말일세. 나는 세상이 이 꼴로 뒤집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네." 젯나이트가 말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시선이 세헤라자드 쪽으로 향했 다. 세헤라자드는 어둠 속에 있었기 때문에 표정을 살필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세헤라자드가 멈칫거리고 있다는 걸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천천히 세헤라자드의 옆에 섰다. 내 키는 세헤라자드보다 별로 크지 않았 다. 세헤라자드의 눈 높이 보다 조금 더 위 쪽에 내 눈 높이가 위치하고 있었으니까. 문득 향기가 느껴졌다. 아마도 세헤라자드의 향기일 것이었 다. 이런 상황에서 여자 냄새나 맡고 있다니. 나는 내 자신이 변태가 아 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해 보았다. 물론 그 정도 가지고 변태라고 말하 기는 곤란하다. "좋아. 그럼 이제 불을 켜지. 놀라지 말도록." 다음 순간 불이 켜졌다. 그리고 불이 켜지는 순간, 나는 다시 한 번 비 명을 참기 위해 입을 손으로 막아야만 했다. 방안은 조금 호화스럽기는 했지만 보통의 집무실과 크게 다를 바가 없 었다. 집무용 책상이나 전화기, 책꽃이, 화병, 그림... 모든 것이 보통의 집무실에서 볼 수 있는 것이었다. 단 하나 다른 점이 있다면 구석에 놓여 있는 작은 바위덩이 하나였다. 바위덩이는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놀란 것은 빛나는 바위 덩어리를 봐서가 아니었다. 우선, 가슴 부분이 갈기갈기 찢겨있는 시체 때문이었다. 스티브 강은 죽어있었 다. 피를 얼마나 흘렸는지, 바닥이 온통 비범벅이었다. 나는 내 발 밑까 지 미쳐 있는 핏물을 바라보면서 왜 냄새를 맡지 못했을까 의아스러웠다. 피를 보자 정신이 아뜩해지면서 피 냄새가 밀려오는 듯 했다. 하지만 정 신을 가다듬고 보니 피 냄새는 전혀 나지 않았다. "스티브 강을 살해했군, 자네." 유하린 수사관이 칼을 뽑아 들면서 말했다. 하지만 유하린 수사관의 목 소리는 몹시 떨리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부루터스의 모습은 부루터 스가 스스로 부루터스라고 밝혔기 때문에 겨우 부르터스라고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래. 내가 죽였어. 하지만 정당 방위였네, 그건. 녀석이 나를 먼저 가두려고 했거든. 세헤라자드를 가둔 것처럼 말이야. 하지만 내가 더 빨 랐어. 나는 세헤라자드도 풀어줬고, 동시에 이렇게 변해서 녀석도 해치웠 지." 부루터스는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지 않았다. 먼저 머리에는 두 개의 커다란 뿔이 달려 있었고, 등에는 한 쌍의 거대한 날개도 달려 있었다. 눈은 마치 불타오르는 것 같은 붉은 빛을 하고 있었고, 피부 역시 붉은 빛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마치 뱀과 같은 비늘이 피부에 무수히 박혀 있는 모습이었다. "원초적 공포에 대해서 알고 있는가?" 부루터스가 물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우리 일행 중 누구도 부 루터스의 질문에 대답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들고 있는 무기는 하나같이 힘없이 떨리고 있었고, 표정들도 하나같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아무도 대답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는 사이 부루터스가 말을 이었다. "나는 나 자신을 스스로 공포의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일세." 부루터스는 이렇게 말하면서 천천히 집무용 책상에 걸터앉았다. 그러고 보니 부루터스의 등뒤에는 기다란 꼬리 마저 달려 있었다.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은 다른 차원의 공간이라네. 보다 분명하게 말한 다면 두 개의 세계가 만나는 지점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 부루터스는 책상에 기대어 앉아 다리를 천천히 흔들면서 이렇게 말했 다. "차원이 붕괴된 곳이 아니라?" 건이 부루터스에게 물었다. 부루터스는 날개를 천천히 퍼덕였다. "차원이 완전히 무너지기에는 영혼이 부족했어. 그래서 이렇게 일부만 무너져 두 개의 세계가 만나고 있는 거지. 여기를 보게. 여기는 원래 이 방과 전혀 다를 바 없는 공간이야.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고. 아마도 이곳 이 에너지의 공급처여서 그런 게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지금으로서 확인 할 방법은 없네." "덕분에 이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겠죠." 뒤를 돌아보면서 건이 말했다. 부루터스는 건의 말에는 전혀 신경을 쓰 지 않고 이렇게 말을 이었다. "하나의 세계는 다른 세계와 결코 만날 수 없지. 만나는 순간, 그 두개 의 세계는 사라지고 전혀 다른 하나의 세계가 나타날 거라고 나는 생각 했다네. 그런데, 이렇게 결과를 놓고 보니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야. 나는 두 개의 우주가 존재한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지금 보니 우주는 무한하더 군. 무한한 차원의 우주가 존재했고,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세계와 내가 살았던 세계는 그 중 일부에 불과했어. 결국 두 우주가 만났다고 해도 만 난 것만으로는 붕괴가 이루어지지 않아. 계속적으로 에너지가 공급되지 않는다면 말이지." "많이 연구했군, 부루터스." 젯나이트가 비웃는 듯한 말투로 부루터스에게 말했다. 부루터스는 웃으 면서 젯나이트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나도 프로그래머였다는 걸 잊었나? 그것도 연구하는 프로그래머 말일 세. 우리 팀이 자네에게 영혼을 캡처하는 프로그램 소스를 넘겨주지 않았 다면, 자네는 결코 영혼의 에뮬레이터를 개발할 수 없었을 걸세." 부루터스가 말했다. "두 개의 세계가 만나는 지점이라 그런 모습을 하고 있는 건가?" 오토가 부루터스에게 물었다. 부루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조금 전에 알게 된 일이지만 이 공간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서 사 물이 변형되는 것 같더군. 아마도 나는 나 자신을 원초적 공포의 대상이 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야. 이런 흉측한 꼴로 변하고 만 것을 보니 말일세. 내가 이렇게 변했듯이 자네들도 변해 있어. 어디 한 번 볼까?" 부루터스는 이렇게 말하고는 천천히 우리 일행을 살펴 본 다음 이렇게 말했다. "먼저 자네들 중에 옷이 바뀐 사람이 있군. 입고 있는 옷을 보면 무엇 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가 있지. 먼저 건, 자네는 갑옷을 입고 있군. 방어적이고, 뒤에 숨고 싶어하는 자네의 생각이 드러나 있지. 자네가 FHA 를 이끌고 있다고는 하지만, 자네는 항상 자네 자신을 숨겨 왔어. 그렇지 않은가?" 건은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부루터스는 그런 건을 바라보더니 흡 족한 미소를 짓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오토. 자네는 자네 스스로 사냥꾼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야. 사냥꾼의 복장을 하고 있는 걸 보니까 말이야. 용병 일을 하면서 스스로를 사람 사 냥꾼이라고 생각했었지? 이렇게 이 곳에서는 자신의 생각이 완전히 드러 나게 되어 있다네. 참. 그리고 유하린 자네는 정복이 어울리는 사람이로 군. 꼭 맞는 공무원 타입이야." 부루터스는 이렇게 말하고는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그 웃음소 리는 마치 고장난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 데 만약에 지금 복장이 자신의 평소 생각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면, 전통 의상을 입고 있는 나는 뭘까? 나는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결국 결론을 찾 을 수 있었다. 내 옷은 손맥 소프트의 '춘향전' 시리즈에 나오는 이도령 의 복장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재미있게 플레이 했던 게임이기는 했지만 고작 이도령이라니. 결국 나는 나 자신을 아무 존재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싶었다. "그럼 자네는 뭐지?" 오토가 침착하게 부루터스에게 물었다. 나는 웃음소리에, 그리고 부루 터스의 외모에 완전히 질려 버려서 아무 말도 잇지 못하고 있었는데 말이 다.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24238/24386 ━━━━━━━━━━━━━━━━━━━━━━━━━━━━━━━━━━━━━━━━ 제 목:[탐그루] 우리 언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 관련자료:없음 29/29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7-24 00:11 조회:613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글쎄. 아마도 이 세상의 끝이라고 생각했나 보네. 내가 재미있게 읽었 던 소설 중에 '유년의 종말'이라는 소설이 있지. 그 소설에 보면 악마가 나오지. 하지만 악마가 아니야 그저 외계인일 뿐이지. 그러나 그들은 악 마야. 오랜시간 인간들이 악마라고 생각해온 형상을 하고 있기 때문이야. 그 책에 보면 악마가 나오면 세상이 망한다는 걸 인간이 무의식 적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더욱 악마처럼 보인다라는 말이 나와. 아 마도 내게는 그 말이 인상적이었던 모양이야.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 걸 보면 말이야. 나는 이제부터 나 자신을 아나크라고 부르겠네. 세상의 종말, 세상의 끝을 꿈꾸는 자에게 어울리는 이름 같지 않나?" 부루터스는 이렇게 말하고는 턱을 젖히고 크게 웃었다. 나는 다시 한 번 소름이 끼쳤지만 젯나이트 한마디 말 덕분에 다시 안정을 찾을 수 있 었다. "완전히 미쳤군." "미쳤다고 했나, 지금?" 부루터스가 집무실 책상에서 내려와 두 다리를 바닥에 대면서 말했다. 부루터스의 몸은 우리가 눈으로 보고 있는 것 이상으로 무거운 모양이었 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충격이 발바닥에까지 전해질 지경이었다. "나는 미친 게 아니야.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을 뿐이 지." 부루터스가 우리 쪽으로 한 걸음 다가서자 칼을 들고 있던 유하린 수사 관과 오토가 칼날을 세웠다. 당장이라도 부루터스와 싸울 기세였다. "하나의 세계가 끝나는 건 하나의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는 말일세. 그 리고 이제는 막 새로운 세계가 열릴 참이야. 몇 명의 영혼만 더 에뮬레이 션 되면 이제 완전히 새로운 세계가 열릴 걸세." 부루터스는 꼭 독백을 읊조리는 배우처럼 허공을 응시하면서 이렇게 말 했다. 나는 몸에 다시 한 번 오한이 스쳐 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은 부 루터스의 웃음소리 때문에 느꼈던 것과는 다른 성질의 것이었다. 부루터 스가 정말로 미친 게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오래 전부터 이 빌어먹을 세상을 저주해 왔다네. 내가 깨닫지 못 했을 뿐이지. 솔직히 말하지. MS녀석들이 나를 쫓아냈을 때도, 그리고 프 로 게이머 생활을 하면서 엉망친창 인생을 살아가면서도, 사실 그걸 확실 히 깨닫지는 못하고 있었다네. 이 세상이 지옥 같다는 걸 깨닫게 된 건 류가 죽었을 때였어." 부루터스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비록 완전히 바뀐 음 성이기는 했지만 부루터스가 비애에 젖어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 때 확실히 알았지. 이 세상은 여기서 끝나야 한다는 걸. 더 이상 존재할 가치가 없다는 걸. 그리고 내 영혼이 에뮬레이션 된 후 이 세상을 끝장 낼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되었지. 젯나이트. 자네는 내 생각에 동의 할 수 없겠지." 부루터스는 잠시 우리 일행을 노려보았다가 다시 말했다. "왜 나를 막으려고 하지? 새로운 세상이 열릴 거라는 걸 모르나? 존재 하고 있는 사람들이 죽는 것도 아니야. 고통받는 건 더더욱 아니지. 그저 새로운 세상이 열리게 될 뿐이야. 내가 분명히 말하겠는데, 자네들은 새 로운 세상이 열리게 되면 나에게 감사하게 될 걸세. 이제 낡은 세상은 사 라지고 새 세상이 다가올 거야. 새로운 세상에서 새로운 행복을 찾게 되 면 그때 내게 감사해야 될 거야." "감사고 뭐고, 그래서 어쩔 생각이죠?" 건이 퉁명스럽게 부루터스에게 물었다. 나는 건을 바라보았다. 건은 두 손을 등 뒤로 숨기고 있었다. "내가 원하는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약간의 영혼만 더 있으면 된다네. 내가 이제부터 할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야. 이제부터 자네들의 영혼을 모 두 에뮬레이션 해주지.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틀림없이 나에게 감사하게 될 거라고." 부루터스가 말했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부루터스의 입에서 혓바닥이 날름거리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지만, 아무래도 그건 내 혼자만의 환상인 것 같았다. "부루터스. 나 기억해요?" 실버우드였다. 실버우드는 한 참 동안 부루터스의 말을 듣고만 있었는 데, 아마도 그건 지금 할 말을 생각하느라 그런 모양이었다. "실버우드. 물론 기억하고 말고. 오랫동안 한 팀이었는데 내가 잊었을 리가 없지." 부루터스는 흐뭇하다는 듯한 어조로 이렇게 말하면서 우리 쪽으로 다시 한 걸음 다가왔다. 부루터스의 키는 보통 사람의 두 배는 됨직 했다. 걸 음을 옮길 때마다 육중한 발걸음 소리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 "켄도 기억하세요?" 실버우드가 부루터스에게 다시 물었다. 부루터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왜요? 기억난다고 하기 겁나나요?" 한 참동안 부루터스가 아무 대답도 없자, 실버우드가 부루터스에게 이 렇게 물었다. 부루터스는 망설이다가 겨우 이렇게 대답했다. "켄도 나에게 감사하게 될 거야, 틀림없이."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부루터스는 이제껏 보았던 당당하고 자신 있는 말투와는 거리가 멀었다. 지금의 부루터스는 자신의 실정을 인정하지 않 고 언론과 국민만을 욕하는 전직 대통령만큼이나 멍청해 보였다. "그건 당신 생각일 뿐이에요, 부루터스." 실버우드가 말했다. "켄은 여기서 살아가야 해요. 그게 켄의 인생이니까요. 당신이 무슨 권 리로 켄의 인생을 뒤바꾸겠다는 거지요? 부루터스. 류와 켄을 오랫동안 돌보아 주었죠? 그 때 부루터스, 당신이 뭐라고 류하고 켄에게 말했는지 는 몰라도 지금 당신이 하려는 행동과는 다른 게 분명해요. 그렇지 않은 가요, 부루터스?" "아냐. 나는 최선을 다했어. 아니야..." 실버우드의 말은 틀림 없이 효과를 거두고 있었다. 부루터스는 당황하 는 정도를 넘어서서 뭘 어떻게 해야 좋을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부루터스는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고, 제대로 논리 를 전개시키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래.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다 하지 못 했는지도 몰라, 아니, 류와 켄은 틀림없이 나에게 감사하게 될 거야, 아니,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 은 말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은..." 부루터스는 이렇게 헛소리를 계속 늘어놓았다. 나는 젯나이트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오토과 유하린 수사관, 그리고 건 역시 실버우드를 대단하다는 듯한 눈을 하고서 바라보고 있었다. 다만 세헤라자드 만은 뭔가 생각에 잠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세헤라자드 에게 무슨 생각을 하느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세헤라자드에게 차 마 물어 볼 수는 없었다. 내가 세헤라자드를 보고 있는 데, 한 순간 세헤 라자드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나는 얼른 고개를 돌려버리고 말았다. 한참 동안 횡설수설하던 부루터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결론은 세상은 끝나야 한다는 거야." 부루터스는 이렇게 말하고는 날개를 공중을 향해 펼쳐 올렸다. 순간 퍼 덕이는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고, 나는 그 호전적인 소리에 공포심을 느꼈다. 그리고 그건 우리 일행 전부가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무기가 없는 우리 일행은 뒤로 한 걸음 물러섰고, 무기가 있는 일행은 칼을 높이 쳐들었다. "이제 시간이 별로 없어. 지금 두 세계가 만나고 있기는 하지만 완전한 에너지의 순환이 이루어지기에는 에너지의 양이 너무 부족해. 이러다가는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고 말 거야. 스티브 강 녀석의 영혼을 에뮬레이션 하기는 했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너무 부족해." "스티브 강은 네 녀석이 죽이지 않았나?" 유하린 수사관이 물었다. 유하린 수사관의 얼굴은 긴장으로 경직되어 있었다. "아니. 죽인 것이기는 하지만 꼭 죽였다고는 할 수 없어. 어차피 우주 는 무한하고, 영혼은 사라지지 않아." 부루터스는 이렇게 말하고는 천장을 향해 뛰어 올랐다. 모두의 시선이 허공으로 향했다. 나는 순간 엄청난 공포를 느꼈다. 부루터스의 두 손은 마치 갈퀴처럼 무시무시한 발톱을 세우고 있었고, 부루터스의 눈은 먹이 를 눈 앞에 둔 야수의 그것처럼 빛을 발하고 있었다. "오토. 자네는 마지막에 죽여주지. 류의 복수를 해 주었으니 그 보답이 라고 생각해도 좋아." 부루터스는 이렇게 말하고는 유하린 수사관에게 달려 들었다. 유하린 수사관은 침착하게 물러서지 않고 부루터스가 내려오기를 기다렸다가 부 루터스의 발톱이 유하린 수사관을 할퀴기 전에 칼을 휘둘렀다. 순간 핏물 이 솟아올랐고, 내 얼굴에 핏방울이 튀었다. 나는 내 얼굴에 튄 것이 누 구의 핏방울인지 살펴보았다. 하지만 누구의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유 하린 수사관의 목과 부루터스의 배에서 거의 동시에 피가 솟았기 때문이 었다. 부루터스는 몸을 돌려 다시 천장으로 날아 올랐다. "그만!" 세헤라자드가 소리쳤다. 순간 모두의 동작이 마치 최면에라도 걸린 듯 멈추었고, 부루터스도 천장에서 천천히 땅으로 내려왔다. "부루터스. 할 말이 있어요." 세헤라자드가 말했다. 나는 세헤라자드의 얼굴에 비장함이 흐르고 있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었다. 부루터스의 거친 숨소리가 방 안을 채우고 있었 다. 아마도 고통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나는 처음에 병에 걸렸을 때 다시 태어나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생각한 적이 있었어요. 아마도 아버지는 내 그런 마음을 알고 제 영혼을 캡처했 겠지요." 세헤라자드는 이렇게 말하면서 부루터스에게 다가갔다. 나는 세헤라자 드를 말리려고 했지만 마치 몸이 돌로 변해버린 사람처럼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영혼의 에뮬레이터를 통해 다시 태어났을 때, 저는 이렇게 생각했어 요. 이곳을 벗어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된다면 새로운 생명을 가 진 기분일텐데. 그래서 여기를 벗어나고 싶어 했지요. 그래서 결국 어스 넷에 들어가게 되었죠." 세헤라자드는 이렇게 말하고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부루 터스의 숨소리는 점점 잦아들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어스넷을 다녀왔을 때, 저는 이제 더 이상 제게 예전 의 육체가 없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그건 저주처럼 느껴지기도 했지요. 그래서 저는 다시 육체를 가지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지요. 그런 데..." 세헤라자드는 이렇게 말하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세헤라자드와 눈 이 마주치자 고개를 돌려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이 번에는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세헤라자드의 눈빛은 마치 나에게 뭔가를 갈구하고 있는 듯 했다. 하지만 나는 아무 것도 세헤라자드에게 해 줄 수 없었다. "그런데, 육체를 가지게 된 지금, 저는 알게 되었어요. 부루터스. 제가 원하던 것, 제가 하고 싶던 것, 모든 게 다 허상이었어요. 중요한 건 제 가 존재한다는 사실이었어요. 그곳이 어디이던 간에." 부루터스는 힘에 겨운지 비틀거렸다. 아무도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방 안에는 차가운 정적만이 긴장을 더해주고 있었다. "부루터스. 여기서 행복하지 못하면 어디서도 행복할 수 없어요. 여기 서 찾지 못하는 건 어디서도 찾을 수 없고요. 그리고 아마도 그게 우주가 무한한 까닭일 거예요. 어디라는 것은 중요한 게 아니에요. 이 세상이든 저 세상이든 그것이 어스넷이든." 세헤라자드는 이렇게 말하고는 부루터스에게 다가갔다. 부루터스는 고 개를 떨구었다. 나는 그것이 힘이 부쳐서인지, 아니면 세헤라자드의 말에 공감했기 때문인지 분간을 할 수가 없었다. 바로 그 때였다. 유하린 수사 관이 세헤라자드의 어깨를 잡아 채면서 부루터스에게 달려간 것은. 부루터스는 고개를 들어 유하린 수사관을 바라보았다. 유하린 수사관의 칼날은 순식간에 부루터스의 가슴을 파고 들어갔고, 부루터스는 거의 반 사적으로 유하린 수사관의 가슴을 밀쳐내었다. 유하린 수사관의 가슴에서 한 줄기 핏물이 솟아올랐고, 유하린 수사관은 뒤로 쓰러졌다. 하지만 유 하린 수사관의 칼은 부루터스의 가슴에 그대로 박혀 있었다. 오토가 유하 린 수사관에게 달려가 입고 있던 가죽옷을 찢어 유하린 수사관의 가슴에 둘렀다. 하지만 지혈을 하기에 상처는 너무 깊은 모양이었다. "하나 물어도 될까." 부루터스가 자신의 가슴에 박혀 있는 칼날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목숨까지 버려가면서 나를 죽인 이유가 뭔지 궁금한데." 부루터스의 목소리는 서서히 작아지고 있었다. 유하린 수사관은 쓰러져 있는 그대로 이렇게 말했다. "이진우 수사관의 복수다. 죽어간 어스폴 요원에 대한 복수고. 그게 내 가 여기 온 이유지." "무슨 소리를 하는 지 모르겠군. 나는 그런 적이 없는데." 부루터스는 이렇게 말하고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너무도 급작스럽게 일 어난 일인지라 아무도 말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기만 할뿐이었다. "유 수사관. 죽으면 안돼. 아직 승부가 나지 않았잖아." 오토는 유하린 수사관의 가슴 언저리를 누르면서 말했다. "자네가 이겼어." 유하린 수사관은 이렇게 말하고는 눈을 감았다. 오토는 유하린 수사관 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부루터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부루터스의 붉은 눈빛은 검게 변해가고 있었다. "젯나이트." 부루터스가 말했다. "세헤라자드의 말도 일리는 있어. 우주는 무한하다네. 지금 여기 있는 나는 죽을지 몰라도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걸세. 어떤 모습이 될 지, 언 제가 될지 모를 뿐이지." 부루터스는 이렇게 말하고는 켄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힘에 부치는지 한참을 숨을 고른 다음에야 부루터스는 말을 이을 수가 있었다. "켄. 언젠가 다시 만나자." 이렇게 말하고 난 부루터스의 눈빛은 완전히 검은 색으로 변해버렸다. 나는 부루터스의 부릅뜬 눈을 바라보면서 한 참동안 부루터스가 죽지 않 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하지만 부루터스는 그렇게 눈을 뜬 채로 죽어가고 있었다. "오토." 건이 오토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오토는 마치 용수철처럼 자리에서 일 어났다. "압니다, 건. 저도 전쟁을 겪은 사람입니다. 유 수사관은 죽었습니다. 이제 뭘 해야 할지는 저도 압니다." 오토는 이렇게 말하고는 빛을 발하고 있는 사무실 구석자리에 놓인 바 위로 다가갔다. "여기 있는 물건 중에서 영혼의 에뮬레이터로 보이는 건 이것뿐이군 요." 오토는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해야 작동을 멈출 수 있을까요?" 오토가 젯나이트에게 물었다. 젯나이트는 바위를 살펴 본 다음 이렇게 말했다. "여기 구멍이 있어. 여기에 세헤라자드가 가지고 있는 걸 고정시킬 수 만 있으면 될 것 같은데..." "여기 좋은 게 있군요." 오토는 이렇게 말하고는 부루터스의 어깨를 발로 밟으면서 힘을 주어 가슴에 박혀있는 칼을 뽑았다. 실버우드는 황급히 켄의 두눈을 가렸지만, 오토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칼날을 발로 밟아 부러뜨렸다. "세헤라자드. 이걸 거기 꽂아 보세요." 오토가 말하자 세헤라자드는 오토로 부터 칼날을 건네 받은 다음, 들고 있던 손잡이에 칼날을 심어 넣었다. 부러진 칼날은 마치 이 순간을 위해 만들어 진 것처럼 손잡이에 빨려 들어갔다. 세헤라자드는 피 묻은 칼날을 바라보더니 나에게 칼을 내밀었다. "저는 차마 못하겠어요." 세헤라자드는 이렇게 말하고는 내 눈을 바라보았다. 나는 별 것 아닐 지라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일 지라도, 세헤라자드를 위해서 할 수 있 는 일이었기 때문에, 칼날을 바위의 틈에 꽂았다. "이제 끝났군. 시간이 지나면 에너지가 임계점 이하로 내려 올 거고, 그렇게 되면 세상은 정상으로 돌아올 거야." 젯나이트는 이렇게 말하면서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젯나이트의 말이 마치 신호라도 된 것처럼, 부루터스의 시체가 밝은 빛에 휩싸여 서서히 사라져가기 시작했다. 나는 문 밖을 돌아보았다. 동굴이었던 그곳도 밝은 빛에 휩싸여 서서히 복도로 변해가고 있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원상태로 돌아오게 될 줄은 몰랐군." 오토가 엉망으로 변해 있는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하지만 오토 와 건의 복장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젯나이트. 왜 오토와 건은 이대로인 거죠?" 나는 젯나이트에게 물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나는 내가 허공에 대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버지는 사라지셨어요." 세헤라자드가 말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곳도 완 전히 정상으로 되돌아 온 것은 아니었다. 부루터스가 사라졌고, 동굴은 복도로 돌아가 있었지만 영혼의 에뮬레이터는 칼이 꽂혀 있는 바위 덩어 리의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 "사라지다니? 어디로 사라졌단 말이야?" 나는 세헤라자드에게 물었다. "여기가 아닌 곳, 지금이 아닌 시간으로요." 세헤라자드는 이렇게 말하면서 물끄러미 허공을 바라보았다. 나는 허공 을 바라보고 있는 세헤라자드의 시선이 텅 비어있다고 느껴졌다. "어서 나갑시다." "이제 곧 정상으로 되돌아온다고 했으니, MS녀석들이건 어스폴이건 지 역경찰이건 이곳으로 몰려 올 것입니다. 더 이상 머물러 있을 이유가 없 지요." 오토의 말에 건이 보충했다. 나는 문 밖으로 나서기 전에 뒤를 한 번 돌아보았다. 쓰러져 있는 스티브 강의 모습과 그 뒤로 보이는 영혼의 에 뮬레이터가 잠시 내 시선을 끌었다. 하지만 잠시였을 뿐, 나는 서둘러 세 헤라자드의 뒤를 따랐다. 우리는 MS 지사 건물을 아버지가 보냈다는 바로 그 기술자와 함께 빠져 나갔다. 나가는 길에 보안 장치가 몇 개 있기는 했지만 기술자 덕분에 큰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다. 세헤라자드는 보안 장치를 해제하는 기술자의 모습을 경탄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저라도 저렇게 하지는 못했을 거예요." 세헤라자드는 나에게 이렇게 속삭였다. 나는 반말로 대답을 해야 할지, 존대말을 써야 할지 여전히 알 수가 없어서 그냥 고개만 끄덕이고는 말았 다. MS사 건물 밖에 나섰을 때, 세상은 아직도 한 밤중이었다. 빛이 솟아오 를 기미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고, 그저 어둠만이 세상에 두텁게 깔려 있 었다. 게다가 차원의 붕괴 때 무슨 사고라도 났는지, 거리의 전등은 모조 리 다 꺼져있었다. 일부 켜져 있는 전등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완전히 원 상태로 복귀할 때까지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어떤 건물은 원래 상태로 돌아오기도 했지만, 어떤 건물은 아직도 동굴 과 성의 형태에서 머물러 있는 것도 있었다. 또 길을 다니는 차들도 마차 의 모습으로 달려가고 있는 것도 있었고, 하늘을 날고 있던 괴상한 생명 체들도 그대로 날고 있었다. 문득 요정 하나가 내 머리위에서 날개짓을 하며 잠시 머물러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달빛을 받은 요정의 날개에서는 은가루가 반짝였다. 나는 요정의 모습을을 취한 듯이 바라보았다. 요정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나 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건 씨. 타지 않으실 겁니까?" 후버카에 타지 않고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건에게 오토가 물었 다. "예. 타지 않을 겁니다." 건은 이렇게 대답했다. "어디로 가시려고요?" 나는 건에게 이렇게 물었다. 건은 내 얼굴을 바라보면서 피식 웃었다.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24264/24386 ━━━━━━━━━━━━━━━━━━━━━━━━━━━━━━━━━━━━━━━━ 제 목:[탐그루] 우리 언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 관련자료:없음 29/29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7-24 10:09 조회:528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간부용 엘리베이터에는 '간부용'이라는 글자가 크게 쓰여져 있었다. 역 시 일부러 놓치고 싶다고 해도 놓치기 어려워 보이는 엘리베이터였다. 이 렇게 엘리베이터에 크게 적어놓은 이유는 혹시 누군가에게 심부름을 시켰 을 때 엘리베이터를 못 찾았다는 변명의 여지를 없애기 위해서가 아니었 을까. 우리가 들어오기 전에 누군가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른 모양이었다. 간부용 엘리베이터는 나와 실버우드가 도착하자마자 문이 열렸다. 간부용 엘리베이터는 전망용 엘리베이터였다. 유리로 되어 있는 벽면을 통해 도 시의 야경이 드러나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젯나이트. 이제 어쩌죠?" 건이 젯나이트에게 물었다. "뭘 어쩌자는 말인가?" "세헤라자드가 없지 않습니까. 그냥 층수를 입력할까요?" 오토가 물었다. 젯나이트는 대답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녀석들은 세헤 라자드를 인질로 잡고 있었다. 그냥 올라가도 상관없는 걸까? 게다가 영 혼의 에뮬레이터가 작동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마스터 패스워드는 세헤 라자드가 가지고 있는데. "아뇨. 제가 움직일게요." 엘리베이터에 붙어 있는 스피커에서 세헤라자드의 음성이 들려 왔다. "세헤라자드?" 나는 황급하게 세헤라자드에게 이렇게 물었다. 세헤라자드는 대답 대신 엘리베이터를 작동시켰다. "어떻게 빠져 나왔어?" 내가 다시 물었다. "아까 차원이 붕괴 됐을 때 선이 연결되었거든요. 덕분에 쉽게 빠져 나 올 수 있었어요. 하마 터라면 마스터 패스워드를 두고 나올 뻔하긴 했지 만 다행히 별 탈 없이 나올 수 있었어요." 세헤라자드의 목소리를 들으니, 나는 일단 안심이 놓였다. 이제부터는 어떻게 되던지 간에 일이 잘 풀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젯나이트 를 바라보았다. 젯나이트의 얼굴에도 활기가 돌고 있었다. "참. 비류 님. 부루터스도 있어요. 바로 이곳에." "이곳에 온 목적은?" 오토가 엘리베이터의 천장을 바라보면서 물었다. "그건 저도 몰라요. 아직 이야기는 못 나누어 보았으니까요." 세헤라자드가 말했다. "녀석이 이곳에 왔다면 목적을 알아야 합니다. 어쩌면 MS녀석들과 거래 를 하기 위해서 왔을 수도 있고, 또 어쩌면..." "우리의 계획을 알고 막으려고 왔을지도 모르지." 유하린 수사관의 말을 젯나이트가 이렇게 끝맺었다. 나는 부루터스를 떠올려 보았다. 음침한 게임방의 구석에서 만났던 부루터스의 모습이 떠 올랐다. 그때만 해도 부루터스는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목적을 위해 세헤 라자드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던, 그저 망상에 찬 테러리 스트에 불과하다고 나는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세상이 엉망으 로 돌아가는 꼴을 보고 있자니, 그리고 이 모두가 부루터스 때문이라고 생각 해보면 두 사람의 부루터스가 완전히 다른 사람인 것처럼 느껴졌다. 게임방에서 만났던 부루터스는 틀림 없는 인간이었지만, 지금 우리 근처 에 머물고 있을 게 분명한 부루터스는 인간이라기 보다는 전혀 다른 형태 의 생명체, 아니, 전혀 다른 형태의 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생 각을 하고 보니 게이머 시절의 부루터스는 그저 하나의 가면에 불과한 게 아니었을까 라는 의혹이 들었다. "또 오는 군." 이제는 담담한 어조로 오토가 중얼거렸다. 나는 유리창 너머로 고개를 돌리기 전에 이미 세상에 다시 한 번 차원의 붕괴가 찾아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환한 빛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다음 순간 세상은 대낮처럼 환 한 빛에 휩싸였다. 아니, 그냥 대낮으로 시간대가 바뀐 것 처럼 느껴졌다 고 말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발아래 펼쳐진 세상은 맑게 개어 있었 다. 단 한 번 도 직접 본적은 없는 장관이 아래 세상에서 펼쳐지고 있었 다. 무너진 건물이 있던 자리에서 은회색의 피라미드가 솟아오르자, 모두들 탄성을 올렸다. 하늘 저편에서는 유유히 떠가고 있던 구름 한 조각이 거 대한 비행선으로 변하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비행선은 시커먼 빛을 하고 있었는데, 앞에는 거대한 포문이 달려 있어서 마치 전함처럼 보였 다. 불과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한 조각 구름에 불과했던 것이었는데. 또 저편에서는 바람을 타고 은빛의 가루가 날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 다. 나는 자세히 살펴보았지만 그것이 엘리베이터에 가까이 다가올 때까 지는 그것이 뭔지 알 수가 없었다. 그것은 날개를 달고 있는 조그마한 요 정이었다. 요정 하나가 신기하다는 듯한 눈을 하고서 내 바로 앞에서 날 개를 부지런히 파닥이면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요정 에게 손을 뻗었다. 요정은 내 손가락 끝을 유심히 살피다가 생긋 웃으며 다시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이곳도 변하고 있을까요?" 건이 창 밖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런 것 같습니다." 오토가 바닥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우리는 거대한 은빛 거북의 등에 올 라 있었다. 거북은 천천히 등딱지 옆에 나 있는 날개를 움직여 계속해서 위로 올라갔고, 유리는 어디로 갔는지 사라지고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높은 곳에 그대로 몸이 드러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람은 조금도 느껴지 지 않았다. "저, 저쪽!" 실버우드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우리는 실버우드가 가리킨 방향을 바라 보았다. 그곳에는 용이, 붉은 용이 날개를 퍼덕이면서 날고 있었다. 요정 이 날아다니고, 구름이 비행선이 되어 버리는 중에 용 한 마리가 뭐 대수 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실버우드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용은 남다른 점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날개에 달려 있는 금빛의 링 때문이었다. 금빛 의 링은 용, 그러니까 밥이 날개짓을 할 때마다 번쩍이고 있었다. 나는 용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한 순간 용의 시선이 우리를 향하는 것 같았다. 나는 용이 꼭 나를 노려보고 있는 것만 같아서 몸을 움찔했고, 하마터면 거북의 등위에서 떨어져 버릴 뻔했다. "저건 뭐지요?" 유하린 수사관이 눈썹을 꿈틀거리면서 용의 뒤편으로 보이는 것을 가리 켰다. 용의 뒤편에는 얼마나 커다란지 이곳에서도 눈에 들어올 만큼 거대 한 깃발을 휘날리면서 용을 뒤쫓고 있는 사람이 보이고 있었다. 아니, 분 명하게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지만, 적어도 깃발을 저렇게 휘두르면서 용 을 뒤쫓고 있는 게 사람이라는 건 짐작 할 수 있었다고 말하는 편이 낫겠 다. "용을 뒤쫓고 있는 게 맞겠지요?" 건이 말했다. "아마 그럴 겁니다. 꼭 우리 같군요." 오토가 말했다. 나는 오토의 말에 공감했다. 저렇게 거대한 용을 깃발 을 휘날리면서 혼자 쫓고 있는 모습은 마치 어리석게도 MS본사로 이렇게 쳐들어가고 있는 우리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젯나이트. 어떻게 저 용이 밖에서 날 수 있지요?" 실버우드가 랩탑에 대고 물었다. 실버우드가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나는 전혀 그런 의심을 가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도대체 어스넷 생명체가 어떻게 바깥 세상의 하늘에서 날아다닐 수 있게 된 거지? 어쩌 면 조금 전에 본 요정이나, 지금 저 앞을 날고 있는 비행선도 실은 어스 넷을 떠돌던 물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젯나이트?" 젯나이트는 대답이 없었다. 나는 랩탑을 들여다보았다. 랩탑 안에는 시 커먼 화면만이 떠오르고 있을 뿐, 젯나이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 때 거북이 날개짓을 멈추었고, 우리는 문 앞에 서 있는 우리 자신의 모습 을 발견할 수 있었다. "손으로 열어야 하나?" 건이 우리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오토는 대답대신에 손으로 힘을 써서 문을 열었고, 문이 열리자 우리는 동굴의 입구에 서 있었다. 우리를 태우 고 올라온 거북의 모습은 그저 단단한 바위덩이 하나로 바뀌어져 있었고, 뒤를 돌아보았을 때, 하늘에는 수도 없이 많은 서로 다른 종류의 비행선 들이 날고 있었다. 저렇게 많은 비행선이 허공을 떠돌고 있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어떤 것은 택시에 날개가 달려 있는 모양을 하고 있었고, 또 어떠한 비행선은 제트 엔진을 점화하면서 공중으로 치솟고 있었다. 하 나같이 전혀 다른 방법으로 비행을 하고 있었지만, 단 한대도 서로 충돌 하지는 않았다. 만약에 아무런 마음의 준비 없이 이런 광경을 바라보았다 면, 아마도 미쳐 버렸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보이는 광경은 하나도 놀라울 것이 없었다. 우리 앞에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서 있는 젯나이트의 모습에 비한다면 말이다. "젯나이트?" 내가 놀란 목소리로 묻자 젯나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된 거죠, 이게?" 오토가 젯나이트에게 물었다. 젯나이트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면서 대 답 대신에 이렇게 말했다. "일단 이쪽으로 오지 그러나. 그렇게 서 있는 건 위험해. 특히 99층에 서는 말일세." 젯나이트가 말했고, 우리는 한 걸음 씩 건물 안으로 옮겨 들어갔다. "어스넷의 생명체가 지금 세상 밖으로 나온 겁니까?" 유하린 수사관이 젯나이트에게 물었다. 젯나이트는 고개를 갸웃거리면 서 이렇게 말했다. "글쎄. 그런 것 같지는 않아. 이곳의 모습도 변했고, 어스넷의 모습도 평상시와는 달라. 자네들은 지금까지 자네 세상에서 살면서 어스넷의 세 상과 자네들이 살고 있는 세상을 오가는 생명체들만 보아오지 않았던가? 나는 두 차원의 세계를 동시에 보아 왔지. 지금 이곳은 자네들이 살고 있 는 세상도 아니고, 내가 있는 어스넷의 세상도 아니야." "그렇다면 도대체 지금 여기는 어디입니까?" 건이 젯나이트에게 물었다. 젯나이트는 건에게 이렇게 대답해 주었다. "아마도 두 개의 차원이 만나는 지점인 모양이야." 두 개의 차원이 만나는 지점이라. "그렇다면 지금 세상은 붕괴된 건가요?" "아니, 그런 것 같지는 않아. 그저 두 차원의 세계가 만난 것뿐일세. 자네와 내가 이렇게 다시 만나고 있는 것처럼 말이야." 젯나이트가 말했다. 젯나이트가 서 있는 곳은 거대한 동굴이 시작되는 지점처럼 보이고 있 었다. 벽면은 바위인지, 아니면 바위 모양으로 정교하게 조각 한 건지 울 퉁불퉁한 돌로 되어 있었고, 벽에 붙어 있는 횃불은 어지럽게 흔들리면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젯나이트는 동굴 안에서 코난 더 바바리안 같은 고 전 영화에나 나올 법한 가죽옷을 입고 있었다. "패션이 근사하군요." 건이 젯나이트의 어깨를 툭 치면서 말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고 있는 건은 조금 전 언덕(인지 계단인지 모를 장소)에서 벌어졌던 전투에서 입 었던 번쩍이는 갑옷과 별다를 바가 없는 갑옷을 입고 있었다. 다만 그렇 게 번쩍이지 않는 탁한 빛의 갑옷이라는 점만 조금 전과 달랐다. 나는 오 토와 유하린 수사관을 번갈아 가면서 보았다. 유하린 수사관은 군복처럼 보이는 천으로 만들어진 옷에 허리에는 긴 장검을 차고 있었고, 오토는 가죽으로 만들어진 옷에 너구리 털로 만든 것 같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복장이기는 했지만 아마 본인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듯 해서 나는 웃음을 참느라 애써야 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옷이 바뀌는 거지요?" 건이 갑옷의 가슴 부분을 팡팡 두드려 보면서 말했다. "글쎄. 이 차원의 존재가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면서 바뀌는 게 아닐까 싶은데." "그렇다면 사람은 왜 안 바뀌는 거지요? 그리고 실버우드와 켄은 옷이 바뀌지 않았지 않습니까?" 유하린 수사관이 젯나이트에게 물었다. 젯나이트는 잠시 당혹스럽다는 듯한 얼굴이 되었다가 이내 침착하게 이렇게 유하린 수사관에게 답변하였 다. "아마 바뀌는 건 어떤 규칙에 따르는 게 아니라 아무렇게나 바뀌고 있 는 것 같은 느낌이 드네." 결국 젯나이트의 말은 모르겠다는 말을 빙빙 돌려서 한 것에 지나지 않 았다. "중요 한 건 그게 아니고, 일단 이곳이 원래 99층이었으니, 이곳 어딘 가에 영혼의 에뮬레이터가 있다는 게 되겠군요." 오토가 말하자 젯나이트는 살았다는 듯한 얼굴이 되어서는 이렇게 말했 다. "그래. 역시 자네가 사리 판단을 잘 하는구만. 내가 본 사람 중에 머리 가 가장 빨리 돌아가는 것 같아." "예. 가발이 금새 모자로 바뀐 걸 보면 말이지요." 키득거리면서 건이 말했다. 그러자 오토의 표정이 눈에 뜨일 만큼 굳었 다. 건도 농담을 잘못했다 싶었는지 얼른 뭐라고 덧붙이려고 했는데, 이 미 때는 늦어버렸다. 오토가 가발, 아니 너구리털 모자 같이 생긴 걸 그 대로 벗어서 던져버린 것이었다. "신경쓰이게 했다면 죄송합니다." 오토는 정색을 하고는 이렇게 말했다. 오토의 머리에는 듬성듬성 자라 다 만 머리가 솟아 있어서, 누가 보더라도 오토의 모습은 막 탈옥한 범죄 자나 혹은 수감중인 죄수를 연상시켰다. "오토 씨. 너무 과민 반응 보이실 필요는..." "기분 상하지 않았으니 어서 일이나 진행시키지요." 오토는 이런 식으로 자신의 기분이 상했다는 사실을 한 번 더 건에게 강조한 다음 젯나이트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제 어떻게 하면 됩니까?" 오토의 말에 젯나이트는 이렇게 대답했다. "우선 동굴을 따라가 봐야지. 그리고 자네." 젯나이트가 나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나는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저질 렀나 해서 주눅이 든 상태로 젯나이트에게 무슨 일인가를 물었다. "옷고름이나 바로 하게." 나는 젯나이트의 말에 내 모습을 바라보았다. 나는 색동 저고리를 입고 있었는데, 웃저고리의 고름이 다 풀어져서 꼭 가슴에 털 난걸 자랑하는 건달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내 모습을 보고는 얼른 고름에 매듭을 지었 다(물론 털도 없지만). 동굴을 따라 들어가는 길은 복도와는 판이하게 다른, 이리저리 꼬인 모 양을 하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불평을 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갈림길이 나오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이다 싶었으니까 말이다. "원래 이곳은 어떤 곳이었을까요?" "건 씨. 저는 그런 것보다는 저 횃불이 뭐였을까 하는 게 더 궁금한데 요." 유하린 수사관이 길을 인도하고 있는 젯나이트가 들고 있는 횃불을 바 라보면서 말했다. "글쎄요. 아마도 가발이었을지도 모르죠." 오토가 차갑게 내뱉었다. 건은 오토의 말에 어쩔 줄을 몰라했고, 나는 절대로 오토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일을 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는 실버우드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실버우드와 켄은 올 때와 마찬가 지로 간소한 차림 그대로여서 내 눈에는 완전히 차림새가 변한 나머지 보 다 훨씬 더 동굴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꼈다. 게다가 잔뜩 긴장을 하고 서 아무 말도 없는 실버우드의 모습은 안쓰러웠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모퉁이를 돌아섰을 때였다. 세헤라자드가 우리 앞에 나타나서는 이렇게 말을 했다. 세헤라자드는 무릎 바로 아래까지 내려오는 하얀 색 긴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세헤라자드가 예쁘다는 생각을 해 보기는 했지만, 이렇게 막상 만나고 보니 내가 생각했던, 아니, 모니터 상으로 보았던 것 보다 훨씬 예쁜 얼굴이었다. 하얀 얼굴과 뚜렷한 이목구비가 흰 원피스와 어울려 세 헤라자드의 아름다움을 더욱 강조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잠시 동안 멍하니 세헤라자드를 바라보았다. 게다가 세헤라자드의 머리카락은 내가 모니터 상에서 보았던 것 보다 훨씬 더 길었다. "머리모양이 좀 이상하지요?" 세헤라자드는 이렇게 말하면서 쑥스러운지 내 눈을 피했다. 나는 아주 잠시 동안이라도 좋으니 세헤라자드의 팔짱을 끼고 걸었으면 좋겠다는 엉 뚱한 생각을 해 보았다. 하지만 생각뿐이었다. 나 역시 세헤라자드의 눈 을 피하고는 그저 아니야, 하고 중얼거릴 수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사실 이렇게 직접 세헤라자드를 만나게 되니 나하고 동갑이나 다를 바 없는, 아니 어쩌면 나보다 훨씬 더 나이가 많을지도 모를 세헤라자드에게 지금 까지 너무 함부로 대한 게 아닌가 싶어졌다. 그러고 보니 어떻게 세헤라 자드를 대하면 좋을지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세헤라자드는 아버지와 함께 있는데 말이다. "세헤라자드. 마스터 패스워드는 어디 있니?" 젯나이트가 세헤라자드에게 물었다. 세헤라자드는 손에 들고 있던 것을 꺼내어 젯나이트에게 보여주었다. "이거예요." 세헤라자드가 들고 있었던 것은 구슬이었던 걸로 나는 기억하고 있었 다. 하지만 지금 세헤라자드가 들고 있는 것은 구슬이 아니라 화려한 용 의 문양이 그려져 있는 칼 손잡이였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뭐라고 말하지 않는 것 같았다. 하긴, 엘리베이터가 거북이 되고, 멀쩡하 던 가발이 너구리털 모자가 되는 걸 본 다음인데 구슬이 칼집이 아니라 칼날이 되었다고 해도 이상하게 생각할 건 하나도 없을 것 같았다. "이렇게 되면 영혼의 에뮬레이터도 어떤 모양으로 변해 있을지 알 수가 없게 되었군요." 나는 세헤라자드가 들고 있는 손잡이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젯나이트도 내 의견에 공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물러 설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유하린 수사관은 이렇게 말하고는 군복처럼 생긴 옷깃을 한 번 여민 후, 먼저 동굴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유 수사관. 아무도 물러선다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어렵겠다 고 이야기 한 거지요." "오토의 말이 맞아요." 건이 너무 잘난 척 하지 말하는 조로 유하린 수사관에게 말했다. 하지 만 유하린 수사관은 조금도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오토. 아직 승부는 끝나지 않았어요." 유하린 수사관은 이렇게 말하고는 진짜 군인처럼 보폭을 크게 해서 걸 음을 이어갔다. 나는 젯나이트에게 다른 차원으로 옮기면 성격도 변하느 냐고 묻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오토도 유하린 수사관의 태도가 이상한 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엉망으로 헝클어져있는 오토의 머리는 정말로 보 기 흉했다. 동굴은 이곳이 원래 MS사의 건물이었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 길게 이어졌다. 아무리 걸어도 끝이 보일 기미는 없었다. 이 모퉁이를 돌면 뭔 가 나오겠지, 하면 또 다시 길이 이어졌고, 또 한 번 모퉁이를 돌면 끝이 나오겠지 하면 다시 모퉁이가 나오는 식이었다. "젯나이트. 얼마나 걷고 있는 거죠, 우리?" "언젠간 끝이 나오겠죠." 내가 젯나이트에게 묻자 실버우드가 대신 대답했다. 나는 숨이 차오르 고 있었다. 얼굴에는 땀방울이 흐르고 있었고, 저고리를 벗어 던지고 그 대로 쓰러져서 잠시 동안이라도 쉬고 싶다는 생각 뿐이었다. 오토의 얼굴 에도 땀방울이 가득이었고, 건과 유하린 수사관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젯 나이트는 우리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을 게 틀림없었지만 지친 기색도 없 이 걸음만을 옮기고 있었고, 세헤라자드는 조금 지친 기색을 보이기는 했 지만 그래도 땀 한 방울 흘리고 있지 않았다. 아무래도 원래 사람과 에뮬 레이트 된 사람은 차이가 있는 모양이구나 싶었다. 하지만 켄을 안고 걸 으면서도 조금도 힘든 기색을 보이지 않는 실버우드의 모습에서 나는 어 쩌면 이건 그런 차이가 아니라 단순한 의지의 차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실버우드는 거칠게 숨을 몰아 쉬고는 있었지만 힘든 내색은 조금 도 하고 있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한 참을 걸어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던 동굴의 끝에 당도 할 수가 있었다. 동굴의 끝에는 동굴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강철로 만들 어진 단단한 문이 우리의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사실 그냥 철문만 놓여 있었다면 그저 동굴의 끝, 정도로 여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철문 에는 다른 MS사의 문에 쓰여져 있는 것처럼 커다란 글씨로 '제한 구역'이 라고 쓰여져 있었다. -------------------------------------------------------------------- 죄송합니다. 332편 다시 올립니다. ^^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24299/24386 ━━━━━━━━━━━━━━━━━━━━━━━━━━━━━━━━━━━━━━━━ 제 목:[탐그루] 우리 언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 관련자료:없음 31/31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7-24 19:09 조회:430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며칠 쉴 겁니다. 어스폴도, MS도 없는 곳에서요. 그리고 다음에 할 일 을 생각해 보죠. 조직도 새로 정비해야 할테고." "그럼 이게 마지막이 되겠군요." 오토는 후버카의 문을 열면서 말했다. "아마 그럴 것 같네요." "악수는 하지 않겠습니다. 가능하다면 이 주소로 연락이나 한 번 주십 시오." 오토는 건에게 명함을 한 장 내밀었다. "금방 연락이 되지는 않겠지만, 어찌되었건 제가 연락을 받을 때가 있 을 겁니다." "연락하죠. 용병이 필요하다면." 건은 이렇게 말하고는 그대로 뒤돌아서 거리의 저편으로 걸음을 옮겼 다. "또 가실 분 있으십니까?" 오토는 이렇게 물었고 그 질문에는 아무도 답하지 않았다. 그래서 후버 카에는 오토와 실버우드, 켄, 기술자, 그리고 나와 세헤라자드가 타게 되 었다. 후버 카는 사람들을 태우자 마자 도로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MS사는 무기를 생산할 계획이었던 모양입니다." 후버카 안에서 오토가 MS사가 영혼의 에뮬레이터를 통해 무엇을 하려고 했느냐고 묻자, 기술자는 우리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서클 프로젝트는 알고 계시지요? MS사가 위성으로 지구를 둘렀지 않았 습니까. 바로 그 위성을 이용해서 송신할 수 있는, 인공지능을 갖춘 무기 를 생산하는 것이 MS사의 목표였을 겁니다." 운전을 하고 있는 오토에게 기술자는 이렇게 말해주었다. "이제 어디로 갈 거에요, 오토?" 나는 오토에게 이렇게 물어보았다. "저는 여러분들 다 모셔다 드리고 고용인에게 돌아갈 겁니다. 어찌되었 건 제 임무는 완수하지 못했으니, 책임을 져야겠죠. 실버우드 씨는 어디 로 가실 겁니까?" "저는 고아원으로 돌아갈 거예요. 가능하다면, 켄을 입양하고 싶어요." 실버우드가 말했다. "비류 씨는?" "저는 집으로 가야죠." 나는 이렇게 대답하면서 세헤라자드의 눈치를 살폈다. 세헤라자드는 아 무 말도 없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헤라자드도 같이 갈 건가요?" 오토는 이렇게 나에게 물었다. 아무래도 세헤라자드에게 직접 묻지 않 은 걸로 봐서 여전히 세헤라자드가 사람 같이 느껴지지는 않는 모양이었 다. "예. 저도 같이 갈 거에요." 세헤라자드는 당연하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 나는 공연히 얼굴이 화 끈 달아오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저도 같이 갈 겁니다." 기술자가 오토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세헤라자드를 바라보았다. 세헤라자드는 창 밖의 풍경에 거의 넋 을 잃은 듯 했다. 창밖으로 스치는 빌딩과 성. 그리고 피라밋과 스핑크 스, 만리장성, 자유의 여신상, 개선문, 모아이 상... 낯설고 생경하며 또 한 신비한 풍경이었다. 후버카는 빛이 흐르고 있는 빌딩 사이와 어두운 정글의 한 구석을 멈추지 않고 질주해 나가고 있었다. 과연 이렇게 수 많은 우주가 어떻게 존재하고 있었을까. 아니, 그 보다 두 개의 우주가 동시에 만나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혼란이 었다. 아무것도 진짜라고 말할 수 없고, 그 무엇도 사실이라고 말할 수 없는 지금 창 밖에 스쳐지나가고 있는 풍경들은 어쩌면 누군가의 상상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인지 알 수 없다면 세상에는 완전히 상상만이 존재할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 면 지금까지 그래왔는지도.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검은 얼굴의 기술자는 나에게 뭔가 할 이야기가 남아 있다는 듯이 나와 함께 가겠다고 말하기는 했지만, 나는 기술자가 나를 따라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하나 풀리지 않는 게 있습니다, 기술자." 오토가 기술자에게 물었다. 기술자는 편하게 물어보라고 오토에게 말했 다. "부루터스는 자기가 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럼 어스폴 요원은 누가 살해한 걸까요?" 기술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왜 오토가 그런 질문을 기술자에게 했 을까 생각해 보았지만 지금은 머릿속이 너무나도 복잡해서 도무지 그 이 유를 생각해 낼 수가 없었다. 나는 아무 화면도 떠오르지 않고 있는 랩탑 과 리어미러를 통해 보이는 세헤라자드의 얼굴을 번갈아 가면서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대답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유하린 수사관도 그걸 모르고 죽은 편이 나았을 것 같군요." 오토는 이렇게 말하면서 후버카를 몰았다. MS사에서 출발해서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내가 살고 있는 곳이었다. 오토는 나를 차에서 내려주었다.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오토가 기술자에게 물었다. "다음에는 웃는 얼굴로 보게 되면 좋겠군요." 기술자는 이렇게 오토의 말에 대답하면서 나와 함께 후버카에서 내렸 다. "다시 볼일은 없겠지요?" 나는 프로의 말투를 흉내내어 오토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럴 겁니다. 용병이 필요할 일은 없으실 테니까요." "저는 필요할지도 모르는데요." 기술자가 오토에게 말했다. "여기로 연락 주십시오. 바로는 연락 못 드려도 분명히 답신은 있을 겁 니다." "일손이 딸리면 연락 드리지요." "저하고도 악수는 하지 않으실 건가요?" 내 말에 오토는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연락 한 번 주세요. 고아원 번호는 어스넷으로 아실 수 있을 거예요. 한 번 아톰하고 리파이 문병이라도 가야지요." 실버우드가 나에게 말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과연 연락을 할 수 있을까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켄도 안녕." 나는 켄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원주율을 끝까지 외우길 빌어줄게." "아뇨. 이제는 더 이상 원주율을 외우지 않아요." 내 말에 켄이 대답했다. 나는 차가운 켄의 말에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왜? 싫증이라도 났니?" 나는 조심스럽게 켄에게 이렇게 물었다. 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뭐든지 한 가지 일에만 집중하면 된다는 걸 알았거든요. 굳이 원주율 이 아니더라도요." 켄은 웃으면서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켄의 웃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나는 켄이 이제 더 이상 꼬마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구나. 그럼 특별한 계획이라도 있니?" "프로그래머가 되고 싶어요." 켄은 나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부루터스가 마지막 으로 남기고 간 말이 떠올랐다. 언제가 될지, 어디서가 될 지는 알 수 없 어도 다시 만나게 될 거라는 부루터스의 말은 어쩌면 차원의 붕괴가 완전 히 끝난 게 아니라는 말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막기는 했지만, 언제 다시 영혼의 에뮬레이터가 작동해서 세상을 뒤바꿔 놓을지 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작별인사는 이만 하지요. 누가 보면 헤어지는 가족 같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오토가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농담처럼 이렇게 말했다. 실버우드는 나 를 바라보았다. "꼭 연락주셔야 해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지만 과연 연락을 하게 될 지는 나 자신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 후버카는 소리 없이 어둠 속으로 달려가기 시작했 다. 막 후버카가 출발했을 때, 나는 실버우드가 뒤돌아보면서 나에게 뭔 가 말하려는 걸 본 것 같기도 했지만, 워낙 어두웠는데다가 워낙 짧은 시 간이어서 분명하게 알아 볼 수는 없었다. 후버카는 곧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긴장이 풀려서일까. 갑자기 피 로가 어깨를 짓누르는 게 느껴졌다. "이 근처 발전소에 문제가 생긴 모양입니다. 세상이 온통 암흑천지군 요." 기술자가 주위를 둘러보면서 말했다. "예. 근처에 있는 등이란 등은 다 꺼졌군요. 그런데 왜 이렇게 밝죠?" 나는 기술자에게 물었다. 기술자는 허공을 가리키면서 이렇게 말했다. "달입니다. 달빛이 강해서 그렇죠. 아주 오랜 옛날에는 달빛만 가지고 책도 읽을 수 있었다고 하더군요." 기술자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허공에 떠있는 달과 별들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멀쩡하던 빌딩이 사라지는 것 보다 저렇게 별과 달이 반짝이는 밤 하늘이 더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고 있었다. "좀 쉬고 싶어요." 나는 남은 기운을 짜내어 기술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세헤라자드 를 돌아 보았다. 세헤라자드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헤라자드의 표 정은 달빛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댁까지 모셔드리죠." "아버지께서 부탁하신 건가요?" "예. 댁까지 모셔다 드리라고요. 댁은 눈감고도 찾을 수 있으니 걱정하 지 마세요." 기술자가 웃으면서 나에게 말했다. 나는 다시 세헤라자드를 바라보았 다. "저, 세헤라자드..." 나는 분명하게 세헤라자드에게 묻고 싶었다. 나와 함께 가자고. 하지만 소리는 입 속에서만 빙빙 맴돌 뿐 입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저도 같이 갈 거에요." 세헤라자드는 내 얼굴을 바라보면서 말했다가 얼른 시선을 돌렸다. 나 와 세헤라자드 사이에 어색한 공기가 감돌고 있는 기분이었다. 나역시 세 헤라자드의 시선을 피해 다시 한 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둠속에 휩싸 인 세상 위로 별들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어스넷 광고판에서 읽은 기억 이 있는, 정부와 WCC가 그렇게도 되찾자고 말하고 있는 바로 그 검은 하 늘이었다. 검은 하늘에는 특히 일렬로 빛나고 있는 별이 도드라져 보였 다. "서클입니다." 기술자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MS사의 서클이지요. 이렇게 별이 보이는 밤은 저도 오래간만이군요." 오토가 우리를 내려놓은 곳에서 내가 사는 곳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내가 자주 갔던 편의점과 문을 닫은 구멍가게를 지나 내가 사는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나는 기술자에게 말했다. 지금 묻지 않는다면 영원히 묻지 못할 것 같 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세헤라자드는 내가 묻고자 하는 게 뭔지 궁금한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지는 영혼의 에뮬레이터에 대해서 알고 계셨나요?" "예. 어느 정도는요. MS사의 새로운 무기 개발 프로젝트의 핵심적 역할 을 담당하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파악하고 계셨습니다." 기술자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걸음을 멈추어 선 다음, 기술자에게 다 시 물었다. "아버지가 지금 하시는 일이 MS사의 인공 지능을 탑재한 무기 생산을 막는 일이죠?" "그렇다고 할 수 있죠. 그 일 뿐은 아닙니다만." 기술자는 이렇게 말하면서 내가 묻고 있는 의도를 파악하려는지 내 눈 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제가 추리한 게 있어서요." 나는 이렇게 말을 시작했다. "우리 일행이 영혼의 에뮬레이터가 작동되는 것을 막으러 가게된 것은 유하린 수사관의 도움이 컸고, 유하린 수사관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영혼 의 에뮬레이터가 작동되는 걸 막지 못했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어스폴은 외압에 의해 수사가 중단된 상태였고요. 만약 어스폴 수사관이 살해되지 않았다면 외압때문에 어스폴은 유하린 수사관이건 누구건 우리 를 돕지 않았을 겁니다. 그 사건 때문에 비공식적인 수사를 즐기는 어스 폴 요원 중 유하린 수사관이 아니라 그 누구라도 수사를 계속 했을 거라 고 생각할 수 있겠죠. 그리고 그 덕에 우리가 MS사에 침투하는 일이 쉬워 졌겠죠. 물론 유하린 수사관이 우리를 돕는 게 가장 빠르고 적당했을 거 라고 생각합니다만." 내가 말하자 기술자의 표정이 대단히 흥미롭다는 듯이 변했다. 아마도 내가 하고 있는 말이 담고 있는 의도를 알아 차린 것 같아 보였다. "지금 비류 씨는 만델라 님이 어스폴 수사관을 살해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을 하고 있는 건가요?" 기술자는 솔직하게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나에게 말했다. "솔직히 기술자, 뭐라고 불러야 할지 잘 모르겠네요, 하여간 기술자 아 저씨가 찾아 왔을 때, 우리가 MS사 99층에 들어갈 방법을 알아 가지고 왔 다는 것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겁니다." "그렇군요." 기술자는 이렇게 말하면서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이야기를 마치고 싶 다는 뜻이었으리라. "오토가 한 말을 생각해 보세요." 느릿느릿 한 걸음씩을 옮기면서 기술자가 말했다. 나는 기술자의 얼굴 을 바라보았다. 기술자는 앞을 바라보면서 이야기를 이었다. "오토는 유하린 수사관이 진상을 모르고 죽은 게 다행일지 모른다는 말 을 했죠." 이 말은 내 추리가 맞다는 말인 동시에 오토는 MS사를 빠져나갈 때 이 미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추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비류 씨가 알고 계셔야 할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더 이상은 곤란하다는 뜻이리라. 나는 집 앞까지 가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왔군요." 집앞에 당도했을 때, 기술자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 덕였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알아주시니 고맙군요. 저도 악수는 하지 않도록 하죠. 다시 뵙게 될 겁니다. 멀지 않아서." 기술자는 이렇게 말하고는 계단 밑으로 내려갔다. 나는 오래간만에 보 는 내 방 문을 바라보았다. 나는 이렇게 다들 자신이 있던 자리로 되돌아 가는구나 싶었다. "세헤라자드." 나는 기술자가 돌아가자 이렇게 세헤라자드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세헤 라자드는 내가 이름을 부르자 화들짝 놀라면서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 는 내가 무슨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처럼 당황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저, 그러니까, 들어갈래...요?" 나는 세헤라자드에게 이렇게 말했다. 단 둘이 남게 되자 뭐라고 이야기 를 해야 좋을지 나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던 거였다. 세헤라자드는 내가 이렇게 당황하고 있는 게 재미있는지 웃음을 지면서 이렇게 말했다. "왜 갑자기 그렇게 말씀하세요? 다른 때처럼 편하게 말해요." 세헤라자드는 이렇게 말하고는 내 반응을 살피는 눈치였다. 내가 그렇 게 이상하게 행동하고 있는 걸까? 나는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갔다. 아직 내 방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스위치를 올렸지만 불은 들어 오지 않았다. 어두우면 더 어색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그보다는 엉망으로 헝클어져 있을 내 방을 보이는 게 더 부끄럽다는 생각 이 들기도 했다. "일단 좀 앉아야겠네." 나는 이렇게 꼭 혼잣말처럼 말하고는 의자에 앉았다. 아무리 엉망으로 헝클어진 내 방이라고 해도 의자가 어디 있는지 쯤은 알 수 있었다. 나는 세헤라자드가 가만히 서 있는 걸 보다가 결국 이렇게 말했다. "거기, 앉아." 이 말이 나오기가 왜 이렇게는 힘들었는지. 내가 말하자 세헤라자드는 침대에 걸터 앉았다. 나는 들고 있던 랩탑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 고 책상위에 랩탑을 내려놓는 소리가 무슨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침묵이 이어졌다. 한참 동안 우리는 아무 말이 없었다. 솔직히 나는 세헤라자드가 왜 나 를 따라왔는지도 알 수가 없었고, 젯나이트가 어디로 사라졌는지도 알 수 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세헤라자드에게 아무것도 함부로 물어 볼 수가 없었다. 어둠 속에 그림자만 보이고 있는 세헤라자드에게 뭐라고 물었다 가는 이제는 가야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거나 아니면 어디론가 세헤라자 드가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던 것이다. "어둡네요." 침묵을 깬 건 세헤라자드였다. 나는 세헤라자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세헤라자드가 침대에서 일어나 어디론가 걸어가는 소리가 들 렸다. 나는 세헤라자드의 움직임을 관찰하려고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 았지만 잘 보이질 않았다. 곧이어 커튼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방안에 달빛이 들어왔다. 환한 달빛을 받은 방은 이내 빛으로 충만하게 되었다. 나는 달빛을 받은 세헤라자드의 머리카락을 바라보았다. 달빛을 받아 세 헤라자드의 머리카락이 신비롭게 반짝였다. "이제 좀 낫지요?" 세헤라자드는 이렇게 말하면서 다시 침대에 걸터앉았다. 여기 저기 양 말과 시디 같은 잡동사니들이 널려있는 내 방이 달빛 때문인지 그리 지저 분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세헤라자드도 그렇게 생각해 준다면 좋을 텐데. 나는 생각하면서 세헤라자드를 바라보았다. 달빛이 세헤라자드의 얼굴에 닿아 세헤라자드의 하얀 얼굴이 푸르게 보ㄳ다. 나는 순간 세헤라자드의 얼굴에 손을 대보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물론 충동을 느꼈다고 해서 그걸 실천으로 옮길 만큼 나는 대범하거나 충동적인 사람은 아니다. "별이 보여요. 달도 보이고." 창문을 바라보면서 세헤라자드가 말했다. 나는 의자에 붙어있는 바퀴를 이용해서 창가 쪽으로 움직였다. 밤하늘은 검은 빛이었고, 거기에는 별과 달이 빛나고 있었다. "잠시 동안이겠지." 나는 이렇게 말했다. 차원이 붕괴된 덕분에 이렇게 별과 달이 보이는 게 틀림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순간, 나는 세헤라자 드가 이렇게 있는 것도 잠시 동안 일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다시 말을 이 을 수가 없었다. "옛 사람들은 저렇게 밝은 달이나 별을 보면서 소망을 빌면 이루어진다 고 생각했데요." 세헤라자드가 말했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혹시라도 세헤라자드가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게 될까 다 두려울 지경이었다. 지금 이 순간 내 소망은 세헤라자드와 함께 있을 수 있다면 하는 것이었다. 밤하 늘에 일렬로 빛나고 있는 별은 마치 내 소망의 빛을 담고 있는 것만 같았 다. "저 별, 서클이라고 했지?" 내 말에 세헤라자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름답죠?" "정말 그래. 서클이 뭐 건, 용이 뭐 건 간에 말이야." 그 뒤에 무엇이 감추어져 있건 아름다운 건 아름다운 것이다. "맞아요. 여기서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 건 어디서도 아름다워 보이지 않겠지요." 세헤라자드가 말했다. "그래도 더 나은 곳이 있지 않을까?" 나는 이렇게 창밖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세헤라자드와 함께 이렇게 영 원히 있을 수 있는 곳은 없는걸까. 나는 이렇게 생각하면서 씁쓸한 표정 을 지었다.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24300/24386 ━━━━━━━━━━━━━━━━━━━━━━━━━━━━━━━━━━━━━━━━ 제 목:[탐그루] 우리 언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 관련자료:없음 12/12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7-24 19:10 조회:412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말했잖아요. 여기서 얻을 수 없는 건 아무데서도 얻을 수 없다고. 여 기서 행복할 수 없으면 어디서도 행복할 수 없다고요." 세헤라자드가 말했다. 그래. 세헤라자드는 그렇게 부루터스에게 말했 지. 나는 죽어가던 부루터스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하지만 여기서 부루터스를 다시 만날 수는 없겠지." 나는 이렇게 내 생각을 돌려서 말했다. 그 순간, 나는 세헤라자드가 나 를 떠날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고, 세헤라자드도 나를 만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달빛을 받아서였을까. 나는 그 순간 틀림없이 우리 둘 사이에 흐르고 있는 생각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비류 님. 차원은 무한해요. 그리고 차원이 무한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 가 있겠지요." 세헤라자드 역시 자신의 생각을 돌려서 말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세헤라자드를 돌아보았다.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세헤라자드의 얼굴은 어 둠 속에서 여전히 꿈결같이 파란 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손을... 잡아보고 싶어." 나는 세헤라자드에게 이렇게 말했다. 말하는 순간, 나는 내가 이런 말 을 했다는 사실에 나 스스로 놀라고 말았다. 내가 말하자 세헤라자드는 침대를 손으로 툭툭 쳤다. "이 쪽으로, 앉으세요." 세헤라자드는 나에게 이렇게 말해주었다. 나는 꼭 무언가에 홀린 사람 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세헤라자드의 옆에 앉았다. 그러자 온 몸으로 피로 가 엄습해 왔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이 어깨가 무거워졌다. "잠깐만." 나는 이렇게 말하고는 세헤라자드의 어깨에 기대었다. 나는 세헤라자드 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세헤라자드의 숨소리는 고르게 들려왔다. 나는 손을 더듬어 세헤라자드의 손을 찾아 잡았다. 다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꿈일까?" 나는 이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세헤라자드에게 물은 것도, 대답을 바란 것도 아니었다. 그저 정말 이게 꿈이 아닐까 싶었을 뿐이었다. "지금 이 순간이 꿈이라면, 비류 님은 저를 만나는 꿈을 꾸시는 거겠 죠." "꿈이라면 영원히 꾸고 싶은데." 나는 애써 웃음까지 지어 보이면서 세헤라자드에게 이렇게 말했지만, 실은 말하는 나조차도 하나도 재미가 없는 말이었다. "저도요." 세헤라자드가 말했다. "하지만 이제 그리 오래지 않아서 세상이 정상으로 돌아올 거예요. 아 니, 세상이 꿈에서 깨어난다고 말할 수도 있겠죠. 그리고 그렇게 되 면..." 세헤라자드는 말을 맺지 못했다. 나는 세헤라자드의 어깨에 기댄 머리 가 점점 무거워지는 걸 알 수 있었다. 무슨 말이건 해야 하는데. 무슨 말 이건 해야만 하는데. 하지만 내 혀는 마치 마법에라도 걸린 듯 마비된 기 분이었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세헤라자드의 손을 만 지작거릴 수 있을 뿐이었다. "비류 님. 우리,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예요. 무엇으로, 언제 다 시 만나게 될 지는 모르지만." 이렇게 말하는 세헤라자드의 모습은 너무나도 투명해서 잘 보이지도 않 았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세헤라자드의 얼굴에 대었다. 세헤라 자드는 눈을 감으며 얼굴에 닿은 내 손에 볼을 살며시 댔다. 달빛은 계속 해서 방안을 채우고 있었고, 방안을 떠도는 푸른 공기에 취해서인지, 나 는 이대로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세헤라자드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세헤라자드의 눈 안에는 내가 없었다. 그저 텅 빈 공 간이 세헤라자드의 눈 안에는 자리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공간은 무한한 우주의 한 점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세헤라자드의 무릎에 머리를 묻었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하는데. 정말 아무 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하 지만 나는 역시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오직 피로만이 내게 엄습해 오고 있을 뿐이었다. 눈을 떴을 때, 나는 혼자 침대에 누워 있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부질없는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주위를 둘러보았 다. 물론 방안에는 아무도 없었고, 아무 화면도 떠오르지 않고 있는 텅빈 랩탑의 화면만이 있을 뿐이었다. 나는 창 밖을 내다보았다. 놀랍도록 눈 부신 파란 하늘이 창밖에는 펼쳐져 있었다. 아직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았 구나. 나는 랩탑을 들고 정신없이 밖으로 뛰쳐나갔다. 아직 못 다한 이야 기가 너무나도 많은데. 뭐라고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면서 방을 박차고 나와 발 닿는 곳으로 뛰어갔다. 거리에는 사람들로 꽉 차있었다. 사람들도 맑고 푸른 하늘이 신기한 모 양이었다.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사람들은 별별 희한한 복장을 하고 있 었다. 중세 풍의 드레스를 걸친 여인도 눈에 들어왔고, 머리에 터번을 두 른 사내도 있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는 어느 사이 공원에 와 있었다. 하늘은 여 전히 맑고 푸르게 빛을 발하고 있었고, 호수도 푸른빛을 받아 잔잔한 수 면을 가지고 있었다. 내 옆으로 기병대의 복장을 하고 있는 사내 하나가 말을 타고 지나고 있었고, 호수 앞으로는 밀림에서나 어울릴 법한 가죽을 몸에 두른 사내 몇이 뭐라고 저마다 떠들어 대고 있었다. 나는 호수 주변에 아무 곳에나 자리를 잡고 앉았다. 무엇을 해야 좋을 지,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뭐라고 떠들어 대면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헤라자드가 말했듯이 아직 세상은 꿈 에서 깨어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랩탑을 열고 안을 검색해 보았다. 거기에는 내가 예상했던 대로 트랜스 파워 7.0버전으로 기록된 음성 파일이 남아있었다. 바로 세헤라자 드가 남긴 탐그루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이었다. "끝까지 이야기 해드리겠다고 한 약속을 이런 식으로라도 지키는 걸 이 해해 주세요. 어차피 저는 이곳에 머물 수 없어요. 사라지는 모습을 보여 드리느니 이렇게 가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어요. 비류 님. 혹시라도 이 게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지는 말아 주세요. 틀림없이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을 테니까요." 무엇으로 언제 다시 만나건 말이지. 그래. 우리는 반드시 다시 만나게 될 거야. 꼭 그렇게 될 거야. "용을 봤나?"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내 등 뒤에는 용이 그려진 커다란 깃대를 들고 있는 사내 하나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깡마르고 키가 아주 큰 사내 였다. "그런데 자네는 내가 아는 누구와 많이 닮았군." 사내가 다시 말했다. "어떤 이야기도 결코 끝나지 않습니다." 세헤라자드의 말은 계속됐다. "상자가 말을 하네! 이건 무슨 마법이지? 마법이라면 내가 또 일가견 이......" "철없던 아이는 어른이 되고, 사랑이라는 사랑은 다 이루어지는 마법이 에요. 같이 들어 보실래요?" "하나의 이야기가 끝난다는 건 또 다른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뜻이니까 요." 세헤라자드의 이야기는 이렇게 다시 시작되었다. 나는 호수를 바라보았 다. 맑은 햇살은 호수 위에서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나는 돌을 하나 집 어 호수에 던졌다. 잔잔한 물결이 일어 내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수많은 세상이, 그리고 수많은 말들이 내 몸을 감싸왔다. 햇살은 너무도 따스했 다.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24301/24386 ━━━━━━━━━━━━━━━━━━━━━━━━━━━━━━━━━━━━━━━━ 제 목:[탐그루] 무엇이 우리를 평화에 들게 하는 관련자료:없음 26/26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7-24 19:10 조회:519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 무엇이 우리를 평화에 들게 하는가 끝이 아니었다. 프라브리티의 성벽이 무너지고, 영주 페르도가 죽고, 환호하는 군중들과 함께 아케르가 입성했을 때, 라이짐은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었다. 중앙 광장에 모인 사 람 중 그 누구도 이것이 끝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제 끝이라고 생 각하고 있는 건 오직 라이짐 한 사람 뿐이었다. 몹시도 화창한 날이었다. 길고 지루하게 느껴졌던 우기도 이제 끝나고, 여름은 이제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 더운 날씨이긴 했지만 중앙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조금도 더운 기색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라이짐은 연단에 서서 중앙광장에 운집한 군중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 여있는 군중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희망과 기대로 잔뜩 흥분한 기색이 역 력하게 드러나 있었다. "저 사람들을 좀 봐, 라이짐." 하진이 웃는 얼굴을 하고서 라이짐에게 말했다. 라이짐은 하진의 말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저 잔뜩 들뜬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모르고 있을 것이었다. 오늘이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는가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야 했고,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아야 했으며 얼마나 많은 인내와 치욕의 시간이 필요했는지. 저 사람들은 모르 고 있었다. 막상 모든 것이 바뀌고나자 저렇게들 웃고 즐거워하는 꼴이라 니. 라이짐이 생각하기에 저들은 너무나도 단순한 족속이었다. 무엇이건 자 신에게 좋은 일이 생기기만 하면 희죽거리고 나쁜 일이 생기기만 하면 불 쾌해하는. 자신에게 닥친 일의 본질이나 과정 따위는 전혀 생각하지도 않 고, 또한 생각할 능력도 없는, 마치 벌레와 같은 족속이라고 라이짐은 생 각했다. 연단 위에 모인 사람은 국경에서 바바 족과 대치하고 있는 몇몇 군단장 을 제외한 스파일의 최고 지도층이었다. 시민들은 아무도 모르고 있겠지 만 지금 이 자리에는 적어도 일 개 군단 규모의 경호원이 배치되어 있었 다. 무장한 병력은 시민들의 눈을 의식해서 최소화 하기는 했지만 품에 단검을 소지하고 있는 병력들은 군중 사이사이에 들어가 있었다. 혹시 생 길지 모를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이들은 행사 내 내 진행을 원활하게 하는 일도 맡고 있었다. 물론 시민들은 이런 일을 알 수도, 또한 알 필요도 없었다. 시민들이 알아야 할 것은 오직 새로운 왕 과 새로운 정부가 이제 새로운 세상을 열어갈 것이라는 점 뿐이었다. 라이짐의 옆으로는 아케르 용병단의 백부장들이 일렬로 앉아 있었고, 그 옆으로 아케르 군단이 입성했을 때, 아케르의 편으로 돌아섰던 군단장 들이 역시 일렬로 앉아있었다. 화려한 휘장과 훈장으로 치장한 장군과, 실전으로 다져진 실력을 가지고 있음을 증명하는 낡은 전투복을 입고 있 는 백부장들이 이렇게 동등하게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앉아있다는 사실 자 체가 이제부터 스파일이 어떠한 정책으로 나라를 이끌어 갈 것인가 하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라이짐은 발렌시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발렌시 아의 표정은 그리 밝지 만은 않아서 다른 장군이나 백부장과는 확연히 구 분이 되고 있었다. 페르도 부인 때문이었을까. 라이짐은 발렌시아의 어두 운 얼굴에서 뭔가를 읽어 낼 수 있을까 기대했지만 확실한 것은 알 수 없 었다. 아케르가 회군했을 때, 아케르의 편을 들었던 것은 모두 평민 출신 장 군이었다. 평민 출신 각료나 장군이 그리 많지 않은 게 바르도 대륙의 비 스토브레 왕국에서는 보편적인 일이었지만, 그래도 이곳 스파일에서 만큼 은 평민 출신 장군이 그리 드물지 않았다. 우선 스파일이 군사를 키우는 데에 많은 투자를 아끼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군대 만큼은 출신보 다는 능력을 따지는 스파일 고유의 전통 덕이 컸다. 그렇다고는 해도 평 민 출신의 장군이 오를 수 있는 지위는 한정되어 있었다. 야전에서 죽거 나, 아니면 퇴역해서 연금으로 살아가는 것 외에, 평민 출신 장군이 각료 가 되거나 사령관 직에 오르는 일은 불가능했다. 아케르가 회군했을 때, 이미 포섭이 되어있던 평민 출신 장군들은 귀족 출신 장군이 이끄는 군단에게 이제는 세상이 바뀌었음을 통보했다. 그 결 과 귀족 출신 장군은 저항하다가 죽거나 스스로 상황을 판단하고 항복했 다. 그리고 그 결과 오늘 이 자리가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왜 이렇게 울상이야? 아침에 오다가 똥이라도 밟았어?" 하진이 의아하다는 듯이 라이짐에게 물었다. 라이짐은 하진을 바라보았 다. 하기사 하진이라면 라이짐이 이런 얼굴을 하고 있는 이유를 전혀 알 수도 없을 것이었고, 짐작 할 수도 없을 것이었다. 하진은 라이짐이 마리 에게 빠져 있는 사이, 평민 출신 장군들에게 포섭과 회유 공작을 한 장본 인이 바로 하진이었던 것이다. 그런 큰 일을 했으니 이제 그 공로를 인정 받을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고, 이런 경사스러운 날 하진은 자신의 앞에 놓인 황금빛 인생만을 그리고 있을 뿐, 라이짐의 속을 헤아릴 마음이 조 금도 없었다. "기쁘지 않아? 저 사람들 얼굴을 봐도?" 라이짐은 고개를 가로젓지는 않았다. 어찌되었건 오늘은 경사스러운 날 인 것이었다. 오늘은 바로 아케르가 군단을 이끌고 입성한 이후 처음으로 중앙 광장에서 귀족과 평민이 없는, 새로운 정치 제도를 선포하는 날이었 다. 라이짐은 결국 아케르 용병단에 들어온 이후, 오랫동안 소망했던 날 을 맞이하고야 말았다. 라이짐은 기뻐야 했다. 사실 이 날이 오기까지 아 케르와 삶과 죽음은 물론이고 고통과 기쁨도 함께 했던 나날들을 보냈던 라이짐이었다. 하지만 라이짐은 자신이 그다지 기뻐하고 있지 않다는 사 실에 불쾌하다는 기분마저 들고 있었다. 마지막이라는 생각 때문일까. 라이짐은 자신이 그리 기뻐하지 않는 이유를 거기서 찾아보려고 했다. 하지만 라이짐은 끝이라면 오히려 더욱 더 기뻐야 할 게 아닌가 하고 스 스로 반문해 보았다. 게다가 보통 일이 끝났을 때 느껴지는 성취감이나 허탈감 같은 것도 라이짐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라이짐. 이제부터는 바빠질 거야. 하진이 라이짐에게 말했다. 라이짐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라이짐 은 이제부터 정보부가 얼마나 바빠질 것인가를 잘 알고 있었다. 치안을 유지하는 일은 자치대가 하겠지만 자치대를 움직이기 위한 뒷일은 모조리 정보부의 몫이었다. 말이 좋아 치안 유지지 정보부가 할 일이라는 것은 뻔했다. 불만 세력을 파악하고, 이적행위나 반정부 활동을 꽤하는 사람들 의 명단을 파악하고, 필요하다면 비공식적인 사형마저 집행해야 하는 것 이 정보부장의 일이었던 것이다. "아케르 장군께서 나오십니다." 임시로 총리 대신의 자리에 앉아 있는 타호루가 자리에서 일어나 큰 목 소리로 아케르의 등장을 알렸다. 이제부터 타호루는 분명히 아케르 다음 가는 스파일의 제 이인자가 될 것이었다. 때문인지 타호루의 얼굴에는 환 한 희색이 돌고 있었지만, 지금의 라이짐은 그런 타호루의 모습도 못마땅 하게만 여겨졌다. 분명 이 순간을 기다려 왔고, 이 순간을 위해 여기까지 달려 왔건만, 라이짐은 조금도 편안한 마음을 가질 수가 없었다. 도대체 자신이 지금 여기 연단 위에 앉아 무엇을 하고 있는지, 또한 앞으로는 무 엇을 해야 좋을지 라이짐으로서는 조금도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머릿속 은 뭔가가 빠져 나간듯 텅 빈 느낌이었고, 차근차근히 뭔가를 생각할 수 도 없었다. "일어나야지, 라이짐." 하진이 이렇게 말했을 때야 라이짐은 자신이 얼마나 멍하니 앉아 있는 가 하는 걸 깨닫고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군악대의 흥겨운 행진곡이 연주되었고, 음악 소리에 맞추어 아케르는 연단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지금까지 보았던 그 어떠한 아케르의 모습보 다도 지금 아케르의 모습은 크고 장대해 보였다. 늘 보아왔던 아케르였지 만, 지금의 아케르는 스파일 전체에서 가장 크고 환한 빛을 등뒤에 지고 있는 듯 했다. 아케르의 환한 망토 때문일 수도 있었고, 오늘을 위해 장 인의 손에서 특별히 제작된 옷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아케르가 저렇게 보이고 있는 건 순전히 이제부터 자신의 의지로 스 파일을 이끌어 갈 사람이라는 위치 때문이었다. "먼저 임명식이 있겠습니다." 음악이 멎자, 타호루는 이렇게 말했다. 장군들과 백부장들은 순서대로 일어나 아케르 앞으로 하나씩 걸어 나갔다. 그러면 아케르는 자신의 앞에 선 사람과 악수를 나누고, 타호루가 준비한 임명장을 건네주는 것으로 임 명식은 치루어졌다. 라이짐은 처음 들어보는 관직과 그리고 그 관직을 받 는 사람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무슨 무슨 대신, 무슨 무슨 장관, 무슨 무슨 실장, 무슨 무슨 부장... 라이짐은 임명하는 사람이나 임명받는 사 람이나 똑 같이 이렇게 맑은 햇살 아래서 그저 바람이 흐르는 것처럼 의 미 없이 움직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라이짐은 발렌시아 백부장과 가투신 이 이제는 군단장으로 진급하는 모습도, 그리고 그 자리에 차이린이 없다 는 사실에도 그다지 감정이 일어나지 않았다. 아니, 감정이 일어나지 않 았다기 보다는 그저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을 뿐이었다. 새롭게 임명되는 자리에 예전의 각료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했던가. "라이짐." 하진이 라이짐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라이짐은 반사적으로 타호루를 바라보았고, 타호루는 정신을 어디다가 빼 놓고 있느냐는 듯한 얼굴을 하 고서 라이짐을 바라보고 있었다. 라이짐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군 중이 술렁이는 소리가 라이짐의 귀에까지 들려 왔다. 거리가 멀어서 정확 하게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 내용이 어떤 것인지는 충분히 알 수가 있었다. '저 자식이 백발 영웅이야?' '칼날도 들어가지 않는다는 괴물?' '저 괴물이 나타날 때 세상이 바뀐다며?' '생각보다 훨씬 어린데? 아주 애송이야.' 라이짐은 이런 말들을 들으며 아케르 앞으로 다가갔다. 아케르는 서둘 러 라이짐과 악수를 했다. 아케르의 눈은 라이짐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다 가 타호루에게 옮겨갔다. 타호루는 아케르의 눈빛을 받자 이렇게 큰 소리 로 말했다. "지금 임명되고 있는 라이짐은 마칸의 강림을 막고 새로운 세상을 열어 갈 때 등장한다는 바로 그 백발 영웅입니다. 백발영웅 라이짐은 역적 츄 바카 국방장관을 정령의 가호를 받아 처단한 사실도 있습니다." 역적? 라이짐은 타호루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 들을 수가 없었 다. 츄바카 국방장관이 역적이라는 건 라이짐 스스로도 모르고 있는 일이 었다. 라이짐은 아케르가 내미는 임명장을 받아들고 천천히 자리로 돌아 갔다. 임명장에는 자치대 감찰 부장이라는 처음 들어보는 직함이 적혀 있 었다. 이 사실은 라이짐도 알고 있었다. 새로운 정부에 정보부장이라는 자리는 없었다.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말이다. 이어서 군중들을 지루하게 하지 않으려는 배려로 다시 행진곡이 연주되 었고, 밝고 힘찬 연주가 이어지는 가운데 훈장이 수여되었다. 공로 훈장, 무공 훈장, 보국 훈장, 건국 훈장, 명예 훈장... 라이짐에게는 공로 훈장 이 수여되었는데, 라이짐은 그것을 가슴에 달면서도 모든 게 지루하게만 느껴졌다. 공로 훈장을 아케르가 가슴에 달아 줄 때도, 라이짐은 기쁘지 않았다. 그저 사람들이 수근거리는 소리와 음악소리가 라이짐의 머릿속을 혼란하게 만들고 있을 뿐이었다. "라이짐. 나야." 하진이 라이짐을 바라보면서 희죽 거리면서 이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케르 앞으로 걸어갔다. 하진에게는 무공 훈장이 수여되었다. 라 이짐은 훈장을 가슴에 단 것이 마치 날개를 단 것처럼 가벼운 발걸음으로 돌아오는 하진을 바라보았다. 군악대의 음악소리는 이어지고 있었고, 사 람들은 훈장의 의미를 생각하기보다는 그저 이 음악과 분위기에 취해 흥 겨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 "축하해." 라이짐이 하진에게 말했다. 하진은 과장된 동작으로 라이짐에게 답례하 면서 고개를 숙였다. "오늘 너무 말이 없네. 긴장한 거 아니야?" 하진이 라이짐에게 물었다. 라이짐은 피식, 헛웃음을 토해내었다. 긴장 이라니. 라이짐은 연단을 둘러 보았다. "그러고 보니 사비치가 보이질 않네?" "그야 당연하지." 라이짐의 말에 하진이 대꾸했다. 이 자리에 사비치는 없었다. 어찌보면 구 스파일의 인사 중 아케르를 도왔던 인사 중 하나였지만 이 자리에는 물론이고 앞으로도 구 세력의 인 사는 발을 붙일 수 없을 것이었다. 이것이 아케르가 정한 원칙이었다. 새 부대에는 새 술을. 구 세대 인물들은 모조리 감옥에 쳐 넣어졌거나 아니 면 한직으로 밀려갔다. 다만 사비치 만큼은 그 마법을 쓰는 능력을 인정 받아 중요한 실무를 보게 될 것이었다. 임명식과 훈장 수여식이 끝나자 아케르는 연단에 서서 타호루에게 손가 락으로 신호를 보냈다. 이제 곧 연설을 시작하겠다는 신호였다. 타호루는 손짓으로 군악대의 연주를 멈추게 한 후, 아케르에게 목례를 보낸 뒤에 이렇게 말했다. "모두 자리에 앉아 주십시오. 지금부터 장군께서 스파일의 전 국민에게 말씀하시겠습니다." 타호루는 이렇게 말했고, 곧 이어 장군들과 백부장들이 자리에 앉았다. 라이짐은 다시 한 번 군중을 돌아보았다. 기대와 희망. 사람들은 모두 숨 을 죽이고서 아케르의 모습에 집중하고 있었다. 사실 저들이 바라고 있는 것은 조금이라도 더 적은 세금과 조금이라도 더 많은 이익뿐일 것이라고 라이짐은 생각했다. 대의? 명분? 사실 그런 것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을 거라고 라이짐은 생각했다. 단순한 사람들에게는 이익만 돌아간다면 그야 말로 개가 다스리건 뮤가 다스리건 아무 상관하지 않고 그것을 대의고 명 분이라고 생각할 것이었다. 아케르는 연단에 올라 선 뒤 군중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순간 군중들은 아케르의 눈빛에 제압당한 듯 아무 말도 없이 숨마저 죽이고 있었다. 라 이짐 역시 아케르의 침묵에 긴장하고 있었다. 맑은 햇살은 마치 깨어지기 쉬운 유리 벽 처럼 여겨지고 있었고, 연단 위의 장군들은 얇은 유리벽에 기대어 있는 듯 조심스럽게 아케르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민 여러분." 아케르는 이렇게 연설을 시작했다. 시민 여러분이라니? 라이짐은 아케 르의 말을 듣는 순간 뭔가가 어긋난 듯 여겨졌다. "여러분은 오랫동안 귀족들의 독재와 압정에 시달려 오셨습니다. 제가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여러분께서 그 사실은 가장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 니다." 아케르의 목소리는 부드럽고도 온화한 음성이었다. 아마도 연단에 오르 기 전, 타호루가 마법으로 목소리에 힘을 불어넣어 주었을 것이다. 그것 도 특별히 부드럽고 온화한 음성이 날 수 있도록. "...이 날이 올 때까지, 우리는 수많은 희생을 치렀습니다. 얼마나 많 은 젊은이들이 피를 흘려야 했는지, 그리고 또한 얼마나 많은 시민들이 고통의 밤을 지새워야 했는지, 저보다 여러분들이 훨씬 더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희생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이 날 을 쟁취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희생이었으며 우리 모 두의 노력이었습니다. 이날이 오기까지..." 아케르의 연설은 지금껏 들었던 그 어떤 연설과도 달랐다. 언제나 핵심 만 간략하게 말하고 연단에서 내려왔던 아케르가 아니었다. 아케르는 지 금 시민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다고 라이짐은 느꼈다. 물론 아 케르가 하고 있는 말이 사실과 다른 것은 아니었다. 다만 라이짐은 지금 까지 보아온 아케르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이 너무나도 달랐기 때문에 그 렇게 느끼고 있는 것뿐이었다. "...우리는 귀족에게 짓밟혔지만 우리의 후손은 귀족에게 짓밟히지 않 을 것입니다. 우리는 억울해도 하소연 할 때가 없었지만 우리의 후손은 억울하면 하소연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니 억울할 일이 아예 없을 것입 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지독한 세금에 시달렸지만 우리의 후손은 더 이상 세금에 시달리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만약 탐그루에서의 성년식이었다면 라이짐은 '그러니까 아직 희생을 더 치러야 한다는 말이군'하고 비꼬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라이짐은 그 런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저 행사가 빨리 끝나고 좀 쉬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 이에 우리는 말끔히 구 세대를 청산할 것을 시민 여러분께 말씀드 리는 바입니다. 먼저 귀족들은 모조리 처단하겠습니다. 어떤 이는 말할 것입니다.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느냐, 너무하는 것 아니냐. 아닙니다. 결코 너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말씀드리지 않아도 너무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지금껏 그들이 해 온 일이라는 걸 여러분들께서 더 잘알고 계실 것입니다. 여러분. 새 부대에는 새 술을 담아야 하는 법입니다." 아케르가 이렇게 말하자 군중 사이에서 환호성이 울려 퍼졌고, 그 틈을 타서 하진이 라이짐에게 말했다. "나왔군, 새 부대에는 새 술을." 하진은 웃으면서 라이짐에게 말했다. 지금 이 광경, 어디선가 본 광경 인 것 같다고 라이짐은 생각했다. 하지만 어디서 본 광경이었는지 라이짐 은 떠올릴 수가 없었다. 라이짐은 귀족들을 처단하겠다는 아케르의 말이 어쩐지 실감이 나질 않았다. 이렇게 된 마당에 굳이 귀족들을 전부 다 처 벌할 이유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던 것이다. 귀족들도 결국 아무 생각 없는 벌레와 같은 족속이다. 이용할 수 있다면 이용하는 편이 오히려 더 실리를 추구하는 쪽에 가까울 것 같다고 라이짐은 생각했다. "... 이제 우리의 세상은 우리의 손으로 열어 갈 것입니다. 저의 역할 은 이제 우리에게 다가올 새로운 세상을 위하여 잠시 그 과정을 진행하는 역할을 맡는 것뿐입니다..." 아케르의 이 말은 거짓말이었다. 아니, 거짓말이라고 단정해서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었지만, 아케르가 결국 새로운 제국을 선포하고 제국의 초 대 황제 자리에 앉게 될 것이라는 걸 알고 있는 라이짐으로서는 아케르의 이 말이 정치가들의 입발린 거짓말과 별로 다를 바가 없게 여겨졌다. "...시민 여러분. 저를 도와 우리 새로운 세상을 열어갑시다. 저를 믿 고 저를 따라주신다면 저는 결코 시민 여러분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새 로운 세상을 열어갈 것을 지금 이자리에서 약속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아케르의 연설이 끝나자 군중들의 환호성과 동시에 군악대의 연주가 이 어졌다. 아케르는 환호하는 군중에 답하면서 이제는 장관이 되고 실장이 되고 부장이 된 장군들과 악수를 나누며 연단에서 내려갔다. 이제 얼마간 은 스파일의 곳곳에서 비슷한 연설이 이어질 것이다. 프라브리티는 그 시 작일 뿐이었다. 라이짐은 군중의 환호성에 손을 흔드는 아케르를 바라보 았다. 더이상 아케르에게서는 군인의 기상을 찾아 볼 수 없었다. 이제 아 케르는 정치가로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연단에서 내려간 아케르의 뒷모 습을 바라보면서, 라이짐은 자신이 왜 계속해서 우울한 기분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끝이 아니었구나. 라이짐은 생각했다. 그야말로 이제 시대는 더욱 바쁘고 더욱 할 일 많 은 세상으로 변해 가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라이짐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이제까지와는 또 다른 고통들이었다. 라이짐은 회군을 마친 후 마리를 찾기 위해 무척이나 많은 시간을 투자 해야 했다. 마리가 자신을 왜 피하고 있는가 하는 이유는 알 수 없었지 만, 적어도 자신을 피하고 있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일단 마리는 가수 일을 그만두었고, 연락처도 남기지 않고 어디론가 집을 옮겨 버렸다. "글쎄, 어디로 갔는지는 나도 모르겠다우. 나한테 이야기 해 주지 않았 으니 별 수 있나. 군인 양반도 마리 애인이었나?" 마리의 집을 찾아갔을 때, 마지막 금화 한 닢 짜리 친절로 주인은 라이 짐에게 이렇게 말해 주었다. 주름 가득한 얼굴로 웃음을 지으면서 노인은 이렇게 말했다. "군인 양반. 젊었을 적에는 그런 고민을 많이 하곤 하지. 하지만 시간 지나고 늙으면 다 부질 없는 짓이었다고 느끼게 된다우. 나두 우리 영감 젊었을 적에 그랬으니까. 포기하시구려. 이 넓은 바르도 대륙 어디로 사 라졌는지 누가 알겠수?" 이제는 더 이상 금화를 얻을 수 없게 된 것이 아쉽다는 듯이 노인은 이 렇게 말했다. 라이짐은 이제 마리를 찾을 수 없게 되는 것은 아닐까 걱정 도 되었지만 공식적이건 비공식적이건 간에 라이짐은 스파일의 정보부장 이었다. 많은 시간이 투자되기는 했지만, 결국 마리를찾는 일은 노인이 말한 것처럼 그렇게까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은 아니었다. 먼저 마리가 가 수였다는 점이 마리를 찾는 일을 수월하게 할 것이다. 조명 아래서 하얗 게 빛나는 마리의 독특한 외모를 기억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무엇보다 마 리의 노래를 기억하는 사람의 수가 생각보다 많았던 것이다.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24384/24386 ━━━━━━━━━━━━━━━━━━━━━━━━━━━━━━━━━━━━━━━━ 제 목:[탐그루] 무엇이 우리를 평화에 들게 하는 관련자료:없음 30/30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7-25 20:55 조회:269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라이짐은 프라브리티 외곽에 있는 작은 까페를 찾았다. 프라브리티와 임프 시 중간에 있는, 여행자들을 위한 까페였다. 까페는 그야말로 허허 벌판의 한 복판에 자리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만약 수많은 상인과 군인들 의 발자국이 만들어놓은 길이 없었더라면 라이짐이 이곳을 찾는 일은 거 의 불가능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라이짐이 뮤에서 내렸을 때, 마침 바 람이 불어와 흙먼지가 날리고 있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라이짐의 눈에 는 까페가 대단히 초라하게 느껴졌다. 라이짐은 뮤를 까페 밖에 메어 두 고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손님들은 주로 군인과 상인이었지만, 이곳에서도 마리의 인기는 예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라이짐이 까페를 찾았을 때, 마리는 막 노래를 마치고 무대 뒤로 내려오고 있었다. 라이짐은 무대 뒤로 찾아갔다. 라이짐과 눈 이 마주쳤지만, 마리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대답을 기다리겠다고 했지요? 그 대답, 아직 듣지 못했어요." 라이짐이 마리에게 말했을 때, 마리는 그리 놀라는 기색이 아니었다. "오셨군요." 담담한 어조로 마리는 이렇게 말하고는 라이짐을 분장실로 안내했다. 분장실은 비좁고 허름한 곳이었다. 의자 몇 개와 책상 몇 개, 그리고 손거울 몇 개 말고는 손님을 위한 의자 하나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았 다. 분장실에 있던 가수와 광대 몇이 라이짐의 얼굴을 보더니 힐끔거리면 서 서둘러 분장실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라이짐은 그런 일에 굳이 신경쓰 지 않았다. 이런 일을 당하는 것이 그리 드문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지금 상황이 그런 일에 신경을 쓰게 할만큼 만만한 상황도 아니었 다. "찾아내실 줄 알았어요. 그게 직업이라고 하셨으니까요." 마리가 말했다. 라이짐은 그 말이 사실이라는 걸 굳이 긍정하지도 부정 하지도 않았다. 다만 먼 길을 오느라 꽃다발 하나 챙기지 못한 자신이 조 금 부끄러웠을 뿐이었다. "바쁘실텐데, 먼 걸음 하셨네요." 분장실에서 화장을 지우면서 마리가 말했다. "그렇게까지 바쁘지는 않아요. 그리고 아무리 바쁘더라도 사랑하는 여 자를 찾아오지 못할 만큼 바쁜 일도 아니고요." 라이짐은 이렇게 마리에게 말했다.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긍정인지 부정인지, 라이짐은 화장을 지우고 있는 마리의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 다. "대답을 기다리신다고 했지요?" 화장을 다 지운 맨얼굴로 마리가 라이짐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막 화장 을 지운 마리의 얼굴은 약간 부은 듯 하기도 했고, 푸석해 보이기도 해서 라이짐의 눈에는 낯설게 느껴졌다. "실수하신 거 없어요. 실수라면 저를 만난 게 실수였을까." 마리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마지막 말은 꼭 중얼거리는 듯한 말투였 다. "대답은 이거에요. 이제는 어떻게 하실 건가요?" 마리가 물었다. 라이짐은 대답할 말을 준비해 오기는 했지만 막상 말을 하려니 입이 잘 떨어지질 않았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라이짐은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돌아가요. 프라브리티로." 마리의 얼굴이 눈에 뜨일 만큼 굳었다. 라이짐은 그런 마리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이 혹시 말 실수를 한 건 아닐까 걱정이 되었지만 그래도 이 렇게 말하길 잘 했다 싶었다. 만약 지금 이렇게 이야기하지 못 했다면 틀 림없이 두고두고 후회했을 것이 틀림 없었다. "...꼭 그래야 하나요?" 망설이는 듯이 말을 끌면서 마리가 라이짐에게 물었다. 라이짐은 마리 의 태도가 누그러졌다고 느꼈다. 이제는 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꼭 그래야 해요." 라이짐이 말했을 때, 마리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스치고 지나갔다. 라이짐은 그 의미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그 어두운 기색 이 거절을 뜻하는 것은 아닐 것이라고 짐작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어요." 마리가 말했다. 라이짐은 잔뜩 긴장해서 마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여기 지불해야 할 돈도 있고, 또 그리지아 문제도 있어요. 게다가 돌 아가면 살 곳도 없고요, 이제는. 결정적으로 어떻게 돌아가나요? 걸어 서?" 마리가 꼭 거짓말을 하는 사람처럼 재빠르게 말했다. 라이짐은 마리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던 어두운 빛이 이런 문제는 아닐 거라고 생각은 되 었지만 그게 무엇이었건 마리가 지금 대답한 말이 자신의 요구에 대한 긍 정적 답변이라는 걸 알아차릴 수는 있었다. "돈은 제가 있어요. 그리고 돌아가는 편은, 그러니까, 제 공무수행 능 력을 믿어 주세요." 라이짐은 환히 웃으면서 말했고, 두 사람과 그리지아는 그날 저녁 프라 브리티로 출발했다. 라이짐도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하진이야 원래부터 마리를 만 나는 걸 극구 반대하곤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까지 강경하게 나 올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라이짐이었다. "너 미쳤어?" 하진은 라이짐이 집무실로 들어서자마자 이렇게 소리쳤다. 이제 정보부는 아케르 군단의 한 복판에 자리하고 있지 않았다. 프라브 리티의 중심부에 있는 시청 일 층에 떳떳하게 '치안 유지 본부'라는 간판 을 달게 된 것이었다. 하루에도 수 십 명의 사람들이 이 앞을 지나곤 했 고, 또한 간판을 보면서 아, 이곳이 치안을 유지하는 사람들이 일하는 본 부구나 하고 생각하는 사람도 간혹 있기는 했지만 정작 진짜로 이곳에서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게다가 중요한 자료는 이곳 에 두지 않고 시청 지하실 은밀한 구석에 보초 두 명이 지키는 곳 뒤에 놓아두고 있었다. "아니. 미쳤더라면 네 모가지를 비틀었을 걸." 라이짐도 지지 않고 하진에게 대뜸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하진은 조금 도 물러서지 않았다. "술집 여자한테 돈을 쏟아 붓는 게 그럼 미친 짓이 아니라는 말이야? 집에, 하인에, 양육비에, 빚까지 갚아 줬다면서? 시민들이 내는 세금은 그런 데 허비하라고 있는 게 아니야. 그리고 도대체 어디서 뭘 했는지도 모를 그런 여자한테 관사를 맡기고 이렇게 출근을 한단 말이야? 내가 알 고 있는 상식으로는 그건 미친 짓이야." 하진이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라이짐에게 소리쳤다. "내가 알고 있는 상식으로는 네가 허비한 세금이 훨씬 더 많은 걸로 아 는데." 늘 하진이 하는 말을 가만히 듣기만 했던 라이짐이었지만, 라이짐의 인 내심은 이제 거의 한계에 다다른 것 같았다. "나는 세금 낭비 한 적 없어." 하진은 라이짐에게 딱 잘라 말했다. "뭘 사두면 돈이 된다는 정보를 얻었는데, 가만히 있는다면 그게 더 바 보겠지." 하진은 분에 못 이겨 씩씩거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덕분에 누군가는 큰 손해를 보겠지. 그건 어떻게 보면 세금 도둑놈보 다 훨씬 나쁜 일이야." 라이짐은 이렇게 말했다. 라이짐은 말하면서 어쩐지 자신이 하진을 학 대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마도 지금껏 단 한번도 하진이 장 사를 하는 것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일 거였다. "게다가 세금 도둑놈은 나 뿐만이 아니라는 거 잘 알잖아?" 라이짐은 이렇게 말하면서 집무실 책상에 걸터앉았다. 라이짐이 걸터앉 으면서 몸을 앞 뒤로 흔들자 책상은 삐걱였고, 라이짐 뒤편으로 '자치대 감찰 부장 라이짐'이라고 적혀있는 명패가 위태롭게 흔들렸다. 하진은 심 호흡을 한 번 하고는 이렇게 말을 이었다. "좋아. 내가 논점을 벗어났다는 건 인정하지. 사실 네가 세금을 유용하 건, 기생 들을 만나고 다니건 내가 알 바 아니니까. 하지만 라이짐, 네가 하는 일은... 위험한 일이야." 하진은 단어를 한 참동안 고르다가 라이짐에게 '위험한 일'이라는 표현 을 썼다. "왜? 마리가 정보라도 빼 내갈까봐?" 라이짐은 여전히 책상에 걸터앉아 몸을 앞뒤로 움직이면서 말했다. "라이짐." 하진이 라이짐쪽으로 기어가면서 말했다. 하진의 의족이 바닥에 부딪쳐 나는 소리가 집무실 안을 떠돌았다. 라이짐 몸을 흔드는 일을 멈추었다. 하진이 저렇게 진지한 얼굴을 하고서 자신의 이름을 부른 기억은 그리 많 지 않았다. "우리가 하는 일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야. 네가 요즘 업무에 많이 충실하지 못한 건 너도 인정하겠지. 너는 그것 때문에 지금 감각을 잃고 있어. 무엇이 중요한 일이고 무엇이 중요하지 않은 일인지 말이야." "또 그 얘기라면 그만 둬." 라이짐은 인상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라이짐. 내가 한 마디만 하지. 하늘을 날던 새가 날개짓을 그만 두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용병단 시절부터 함께 해 온 친구의 충고를 무시하 지는 않겠지." 하진이 또박또박 라이짐에게 말했다. 라이짐은 하진의 말을 가만히 듣 고 있다가 하진의 말에 이렇게 맞받아 쳤다. "나도 한 마디만 하지. 오늘 할 일은 뭐야? 출장에서 복귀한 상관을 위 해 그 정도는 말해 줄 수 있겠지. " 하진은 라이짐의 말에 한숨을 토해내었다. 그리고는 뭔가 이야기하려는 사람처럼 고개를 처들어 라이짐에게 뭐라 이야기하려고 했다가는 그만 두 었다. 아마 포기한 모양이라고 라이짐은 생각했다. "나는 분명히 말했어." 하진은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책상위에 올려져 있던 서류 뭉치 하나를 라이짐에게 건네었다. "이건 뭐야?" 라이짐은 서류를 훑어보면서 말했다. 서류에는 사람 이름이 잔뜩 적혀 있었다. 뭔가 분류를 해 놓은 듯, 이름 옆에는 하진의 글씨로 '1급' '2 급' '3급' '급외' 라고 쓰여져 있었다. "라이짐 정보부장 님. 서류를 볼 때는 겉장부터 보시지요." 하진은 힘없이 이렇게 말하면서 무너지는 것처럼 자신의 의자에 앉았 다. 하진의 책상에는 '자치대 행정 위원장'이라는 명패가 놓여있었다. 돌 을 깎아 만든 명패는 결코 부서지지 않을 듯 견고해 보이는 까만 색이어 서 흰 칠이 되어 있는 집무실과 대조가 되었다. "맙소사..." 라이짐은 하진의 충고대로 서류의 겉장을 훑어보다가 이렇게 탄식을 토 해내었다. 서류의 겉장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던 것이다. "반혁명분자 명단이라니, 하진, 이거 설마..." "그래. 맞아. 거기 적혀 있는 사람 중에 1급은 사형, 2급은 지하 감옥 에 무기한 수감, 그리고 3급은 추방이야." "이 많은 사람을 다?"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마, 라이짐. 반혁명분자야. 예전에는 귀족이었 고." 하진은 이렇게 말하면서 깍지를 껴 턱을 받쳤다. "그리고 급외로 분류된 사람은 등용하게 될 거야. 타호루나 순무처럼 실무에만 종사하는 직종에 말이지. 참고로 귀족들의 재산은 모조건 몰수 야. 예외는 없어." 라이짐이 멍청한 얼굴을 하고서 서류를 바라보고 있는 동안 하진은 이 렇게 설명을 덧붙였다. 마리를 찾아다닌 며칠 동안 이렇게 일이 급진전 될 줄은 짐작하지 못한 라이짐이었다. "...이걸 네가 혼자 다 한 거야?" 라이짐은 우선 하진에게 이렇게 물었다. 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도와준 친구들이 있기는 했지." 이렇게 말하고 있는 하진의 얼굴에는 차가운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라 이짐은 그런 하진에게 뭐라고 한 마디 상관으로서 해 주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는 무슨 말도 쉽게 나오질 않았다. "기준이 뭐야, 도대체." 라이짐은 한 참을 망설인 끝에 겨우 이렇게 물을 수 있을 뿐이었다. "별거 없어. 관직에 앉아 있거나 앉았던 사람의 친족은 1급, 지나치게 재산을 많이 모은 자들은 2급, 그리고 귀족들 중 특별히 추궁할 거리가 보이지 않는 녀석들은 3급 때렸어. 3급 대상자 중에 특별한 기술이 있는 녀석들은 급외로 돌렸고." 하진은 막힘 없이 라이짐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럼 자이벌 들은?" "자이벌들은 그냥 놔두게 될 거야. 차차 정리하는 편이 낫겠지. 어찌되 었건 스파일의 경제는 자이벌들 손에 달려 있으니까 말이야. 이건 내가 정한 기준이 아니야. 제국의 황제께서 직접 내리신 판단이지." 하진의 얼굴에서는 차가운 미소가 떠날 줄을 모르고 있었다. "아직은 아니야. 제국의 황제라니." 라이짐은 이렇게 말하면서 다시 한 번 서류를 훑어보았다. 아무리 멍청 하고 벌레나 다를 바 없는 귀족들이라고는 하지만 굳이 이렇게 다 죽일 필요는 없을 텐데. 지하감옥에 수감되면 일 년을 못버티고 죽는 사람이 태반이라는 것과, 스파일에서 추방당한 귀족이 어디에서도 살아남기 힘들 거라는 걸 잘 알고 있는 라이짐으로서는 이름이 적혀있는 자들의 운명을 두 손에 쥐고 흔들고 있다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결국 이런 것이었 던가. 라이짐은 한숨을 토해내었다. 지금 이 순간이 오랫동안 라이짐이 꿈꾸어 왔던 순간이라는 건 라이짐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귀족 없는 세상. 누구나 평등하게 사는 세 상. 그리고 그 세상에서 사람들을 이끌 수 있는 사람. 이것이 바로 라이 짐이 생각한 라이짐의 밝은 미래였다. 하지만 이렇게 그 결과물을 손에 들고 있자니 자꾸만 자신의 손이 까맣게 물들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라이짐은 지울 수가 없었다. "한 번 검토하고 마지막에 비워둔 결재 란에 결재나 해." 하진이 말했다. 꼭 아랫사람에게 말하는 것같은 말투였다. "네가 다 한 일인데 내 결재가 무슨 소용 있어?" 라이짐은 서류뭉치를 덮으면서 하진에게 이렇게 말했다. "소용이 있지. 네가 바로 자치대 감찰 부장이니까. 사람들이 너를 어떻 게 생각하는 지 알고 있잖아? 네가 추진하는 일이라고 하면 누구나 다 긍 정할 거야. 전설의 백발영웅이 구시대의 수구세력을 청산한다. 누가 들어 도 그럴싸하게 들리지 않겠어?" 하진은 이렇게 비아냥거리는 투로 말했고, 라이짐은 하진의 말에 뭐라 반박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라이짐은 고작 하진을 노려보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만둬, 그런 소리." 몹시 기분이 상했다는 듯, 라이짐이 말했다. 하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 았고 잠시동안 침묵이 집무실에 이어졌다. 창 밖에서는 밝은 햇살이 밀려 들어오고 있었다. 과연 여기서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인가. 라이짐은 생각 했다. 분명 지금껏 자신이 꿈꾸어왔던 일이 이루어지는 순간임에는 틀림 없었지만, 이런 방식으로 이 순간이 다가올 줄은 몰랐는데. 라이짐은 걸 터앉았던 책상에서 내려왔다. "라이짐. 아케르 장군, 그러니까 황제의 결정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봐. 그냥 펴고만 있어도 날 수 있는데 굳이 날개를 꺾지는 않겠지." 하진이 이렇게 말했다. 라이짐은 하진의 이 말에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 보았다. 과연 나는 날고 있는가. 그러나 라이짐의 눈앞에 보이는 것 은 하얗게 칠해진 매마른 벽뿐이었다. 발렌시아가 집무실로 찾아 온 것은 점심시간이 조금 지났을 무렵이었 다. 라이짐은 에이스 자매가 알아온 정보를 정리하는 일을 하고 있던 중 이었다. 발렌시아의 얼굴은 불과 며칠만에 보는 것이었지만 눈에 뜨일 만큼 수 척해져 있었다. 눈 밑에는 검은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고, 볼은 쏙 들어가서 예전같은 외모가 드러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금발도 어느 사 이 푸석해진 느낌이었다. "아, 발렌시아 장군. 오래간 만이군요. 미리 연락이라도 좀 주시지 그 랬습니까. 그랬으면 식사라도 준비했을 텐데." 서류철을 덮으면서 라이짐이 발렌시아에게 말했다. 라이짐의 말에는 발 렌시아를 경멸하는 의미가 담겨 있었지만 발렌시아는 라이짐의 말에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거 재미 없는 걸. 라이짐은 생각했다. "금방 끝납니다, 라이짐 정보부장." 발렌시아는 이렇게 짤막하게 대답했을 뿐이었다. "이제 정보부장이라는 자리는 없습니다. 그저 자치대 치안 유지 본부가 있을 뿐이죠." 라이짐은 이렇게 말하면서 발렌시아에게 자리를 권한 후, 직접 차를 타 가지고 왔다. "좋은 향이군요." 발렌시아가 말했다. 싸구려 차를 보면서 좋은 향이라니. 이 친구, 이젠 돌아버린 걸까? 라이짐은 그저 씨익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뒷골목에서 파는 은화 한 닢 짜리 차입니다만. 그래 무슨 일로?" 발렌시아는 천천히 찻잔을 들어 입술을 대었다. 뜨거웠는지 싸구려 차 라서 그런지는 알 수 없었지만 발렌시아의 미간이 찌푸려지는 게 눈에 들 어왔다. "벽이 허전해 보이는군요. 그림이라도 한 점 걸려 있으면 훨씬 보기 좋 을 텐데요." 발렌시아는 라이짐의 질문에 엉뚱하게도 이렇게 말했다. "글쎄요. 저는 별로. 그냥 깨끗한 곳에서 일하는 게 좋을 것 같군요." 라이짐이 말하자 하진이 집무실 책상에서 키득거렸다. 이만 하면 놀림 당하고 있다는 걸 눈치 챌 만도 한데, 발렌시아는 여전히 차를 마시면서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까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눈치였다. 들리는 말에 따르면 발렌시아는 문화부 장관 자리를 원했다고 들었다. 죄의식의 영역을 펼치는 마법을 가지고 있는 발렌시아 장군이었지만, 아 마 진짜 하고 싶었던 일은 장인을 관리하는 일이었던 모양이라고 라이짐 은 생각했다. 귀한 미술품이라도 공짜로 얻고 싶은 것일까. "좋은 그림 몇 점을 알고 있는데, 필요하십니까?" 발렌시아는 이렇게 말하면서 비굴해 보이기까지 하는 미소를 지었다. 라이짐은 이 친구가 계속 왜 이럴까 생각을 해 보았지만 도무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라이짐이 보기에 발렌시아는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 다. "그림보다는 일손이 더 있었으면 좋겠군요. 저희는 업무가 많이 밀려서 요." 라이짐이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다는 뜻을 돌려서 차갑게 내뱉자, 발렌 시아는 라이짐이 무엇을 원하는 가를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그럼 본론부터 말하지요." 발렌시아는 찻잔을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찻잔을 쥔 발렌시아의 손이 떨리고 있는 것을 라이짐은 분명하게 볼 수 있었다. "페르도 부인을 살려 주십시오." 발렌시아가 입을 열었다. 라이짐은 금시초문이라는 듯한 얼굴을 하고서 하진과 발렌시아를 번갈아 가면서 바라보았다. "페르도 부인에게는 능력이 있습니다. 일단 바바 족 관련 업무를 맡기 셔도 좋고, 또 정보부 하위 관리라도 좋을 것입니다." 페르도 부인의 이름이 명단에 있었던가? 라이짐은 기억이 나질 않았다. 하지만 어찌되었건 지금 정보부에서 하고 있는 일은 비밀리에 진행되는 일이었다. "글쎄요. 어디서 무슨 말씀을 들으셨는지는 몰라도 우리는 사람을 죽이 고 살릴 수 있는 그런 대단한 일을 하지 않..." 라이짐은 대충 이렇게 얼버무리고 대화를 마무리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라이짐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하진이 라이짐의 말을 끊고 이렇게 말했 다. "우린 그런 능력 필요 없습니다." 하진이 말하자 발렌시아의 얼굴이 눈에 뜨일 만큼 굳었다. "뭐?" 발렌시아의 인내력도 한계인 모양이었다. 이렇게 말하는 발렌시아의 얼 굴에는 분노와 절망의 감정이 동시에 스쳐지나가 꼭 좋지 않은 냄새라도 맡은 천식 환자 같아 보이는 얼굴처럼 보였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 은 얼굴이었지만 발렌시아는 몇 번 깊게 심호흡을 한 뒤에 다시 이야기를 이었다.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24385/24386 ━━━━━━━━━━━━━━━━━━━━━━━━━━━━━━━━━━━━━━━━ 제 목:[탐그루] 무엇이 우리를 평화에 들게 하는 관련자료:없음 28/28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7-25 20:56 조회:231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내가 언젠가 이야기 한 것 같습니다만, 라이짐 정보부장. 아주 작은 힘이라도 필요하다면 취하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무슨 일이건 전투력 을 보존하는 방향으로 추진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최후까지 자신의 뜻을 굽히지는 않는 발렌시아 백부장이었다. 그런 발렌시아 백부장에게 마지막 답변을 한 쪽은 하진이었다. "미안하지만 페르도 부인의 힘은 우리에게 위협적입니다. 전투력을 보 존하는 방향이라면 당연히 우리가 선택한 쪽이 옳겠지요." 하진은 이렇게 말하고는 다시 서류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라이짐은 이 제 대화를 끝내야 겠다고 생각했다. "좋은 의견 잘 들었습니다. 안녕히 돌아가십시오." 라이짐은 이렇게 말하면서 일어나 집무실의 문을 열어주었다. 발렌시아 는 큰 낭패를 보았다는 듯이 고개를 푹 숙였다가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 다. 문을 나서기 전, 발렌시아는 뒤를 돌아보면서 하진을 바라보았다. "당신이었군..." 발렌시아의 얼굴에 억지 미소가 떠올랐다. "사람들이 정보부의 실세라고 하더군. 이번 일도 자네가 전부 추진했다 는 말 들었지. 이름이 하진이었던가? 용병단에서 말단 병사였다고 들었는 데." 문을 나서기 전에 발렌시아 백부장은 이렇게 말했다. "안녕히 가십시오. 다시 뵐 수 있으면 좋겠군요." 하진은 이렇게 말하고는 눈을 서류 쪽으로 돌려 버렸다. 발렌시아도 결 국 포기했는지 이번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무실을 나섰다. "하진. 패르도 부인도 1급이었어?" 라이짐이 하진에게 물었다. "그래. 1급이었어. 말한 그대로야. 페르도 부인 같은 경우, 언제 어디 서 장군들을 규합해서 나쁜 짓을 꾸밀지 모르는 여자야. 해치우는 편이 좋아." 하진의 말은 단정적이었다. 라이짐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용할 수 있다 면 이용하는 것이 좋겠지만 하진의 말은 옳은 말이었다. 이런 식으로 수 많은 귀족들의 목이 땅에 떨어지겠구나. 라이짐은 생각하면서 자신의 의 자에 몸을 묻었다. 불쌍한 페르도 부인. 이제 더 이상 나에게 손을 대지 못하게 되겠지. 순무는 아케르의 명을 받아 사형에 쓸 도구를 만들고 있었다. 효과적으 로 여럿을 단숨에 죽일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아케르의 주문이 었다. 순무는 그 주문에 꼭 맞는 사형 도구를 만들기 위해서 며칠 밤 동 안 자신의 작업실에서 나가질 않고 있었다. 순무의 작업실은 순무가 얻은 관사의 지하에 자리하고 있었다. 공기는 통하지 않아 한 번만 들이쉬면 나쁜 병에 걸릴 것 같은 더러운 공기가 지 하실에는 떠돌고 있었고, 쥐와 벌레들 만이 순무가 작업과 함께하고 있었 다. 바닥에는 습기가 고여 썩은 내가 진동을 하고 있었고, 그 옆으로는 빈 술병과 가득 찬 술병들이 아무 구분 없이 뒹굴고 있었지만, 순무는 조 금도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순무는 나무를 뚫어 구멍을 만들고 그 안에 뭔가를 열심히 채워 넣고 있었다. 순무의 눈에는 광기가 번득이고 있었다. "단 한 번 뿐이야. 이런 작품은 일생에 단 한 번 뿐이야."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는 순무에게는 이제 광기 외에는 아무 것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어둡고 습한 순무의 관사 지하실에서 이렇게 순무의 대 작이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 아케르에게 새로운 정보를 보고하기 위해 라이짐은 아케르의 집무실을 찾았다. 아케르는 전보다 적어도 열 배는 더 바빠진 것 같았다. 아케르의 결재를 기다리는 장관과 각료들이 아케르의 집무실 앞에 줄을 지어 있었 다. 아케르의 집무실은 프라브리티의 성 이 층, 한 때 영주 집무실이었던 곳을 고쳐서 사용하고 있었다. 라이짐은 기다리는 동안 앉아 있을 수 있 게 되어 있는 의자에 걸터앉아 차례를 기다려야 했다. 이 일만 끝나면 마 리가 기다리는 관사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었다. 라이짐은 하품이 나오는 것을 참으면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낯선 얼굴들을 살펴보았다. 퇴역이 가까운 나이 든 평민 출신 군단장들은 이제 장관의 자리에 앉았 고, 그들의 빈 자리는 아케르 군단 출신의 백부장들이 채웠다. 전방에 배 치 된 것은 주로 평민 출신 장군들이었고, 용병단 시절부터 아케르와 함 께 했던 백부장들은 프라브리티 부근에서 수도 방위군의 군단장 자리에 앉았다. 어떻게 보면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자신이 믿을 수 있는 측근을 옆에 두고 싶어하는 게 당연한 사람의 심리이기도 했을 뿐 아니라, 만약 의 경우를 생각한다면 믿을 수 있는 사람을 가까운 곳에 두어야 한다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원칙일 수도 있었다. 사실 수도 방위군은 언제라도 마음만 먹는다면 프라브리티로 진격해 들어 올 수 있는 위치였으니 말이 다. 회군을 통해 권력을 장악한 아케르이니 만큼 그런 점에는 누구보다 더 신경을 쓰고 있을 게 틀림없었다. "라이짐 치안 본부장님, 들어오십시오." 난생 처음 보는 여자가 집무실에서 빼꼼이 얼굴을 내밀어 라이짐을 불 렀다. 아마도 잡무를 보는 부관인 모양이었는데, 여자를 부관으로 쓰는 일은 보통 군인의 아들이나 하급 장교를 부관으로 쓰는 관례와는 거리가 멀었다. 어쩌면 아케르는 자신이 다른 사람 눈에 어떻게 비칠 것인가 하 는 점에 상당히 신경을 쓰고 있는 모양이었다. "정보부장. 오래간만이야." 아케르가 집무실 책상에 앉아 이렇게 말했다. 라이짐은 군대식으로 거 수 경례를 붙였지만 아케르는 라이짐의 경례를 대충 손을 흔들어 받았다. "일, 일, 일." 아케르는 이렇게 말하면서 짜증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몸이 꼭 두개만 있었으면 좋겠네. 하나는 자고 먹기만 하고 또 하나는 일만하게 말이야." 아케르가 어울리지 않는 농담을 건네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케르의 옆 에는 총리대신으로 임명된 타호루가 아무 말도 없이 서 있었다. 아마도 어떤 장관도 아케르를 독대하는 일이 없도록 늘 아케르를 보좌하는 일을 타호루가 맡은 모양이라고 라이짐은 생각했다. 라이짐은 집무실을 둘러보았다. 천장에는 화려한 샹들리에가 달려 있었 고 벽면은 온통 그림 천지였다. 벽에 붙어 있는 장식 중에 고급스러워 보 이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었고, 바닥에는 두꺼운 양탄자가 깔려 있었다. 심지어 재떨이마저도 장인의 손에서 만들어 진 것인 듯 고급스러워 보였 다. 아마도 죽은 영주 페르도가 쓰던 걸 그대로 쓰고 있는 모양이라고 라 이짐은 생각했다. "성황청의 일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가?" 타호루가 라이짐에게 물었다. 라이짐은 아케르의 책상에 서류를 올려 놓으면서 말했다. "검토해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제 성황청은 그리 위협적인 존재가 되지 않습니다. 성구를 잃은 지금, 성황청은 탐그루에 전 병력을 집결시켜 성 황이 있는 탐그루 시청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라이짐이 보고하자 아케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곧 최후라는 걸 직감하고 있는 모양이로군." 아케르가 말하자 라이짐은 다시 보고를 이었다. "그래도 남은 병력으로 최대한 전투력을 높이기 위해 군사훈련에 열심 이라고 합니다. 편재도 몇 개 군단 규모에 가까운 거대한 일개 군단으로 바꾸고 있고, 주력은 성력을 사용하는 성직자들과 아직 작동하는 성구들 입니다." "먼저 공격하는 쪽이 자나크를 장악하겠군. 타실 쪽은 어떤가?" 아케르가 서류를 대강 훑어보면서 라이짐에게 물었다. "노쇠한 국왕이 지병으로 쓰러지자 이제는 다음 권력을 놓고 다툼이 심 하게 일고 있는 모양입니다. 게다가 타실에 오랫동안 보관 되어온 아킨의 지팡이와 카를로스 장군의 창이 도난당했다는 소문 때문에 민심도 흉흉합 니다. 물론 타실 정부는 부인하고 있습니다만, 저희가 수집한 정보로 볼 때 사실로 판단됩니다." "하늘도 타실을 버리는 군." 라이짐의 말에 아케르는 이렇게 말했다. "성황청의 편재와 방어 상태는 충실하게 조사 했겠지?" 타호루가 라이짐에게 물었고, 라이짐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수고 많았네. 라이짐." 아케르는 일단 라이짐에게 이렇게 칭찬의 말을 한 뒤 다시 말을 이었 다. "한 나라를 만드는 데 얼마나 많은 공이 들어가는 지 알고 있는가?" 갑작스러운 질문에 라이짐은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법을 정리하고 관세를 정비하고 군대를 개편하고, 그러면서도 균형을 맞춰야 한단 말이야. 생각해야 할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지." 아케르는 이렇게 말하면서 타호루를 바라보았다. "바쁘시긴 하시지만 서류는 충분히 검토해 보실 걸세." 타호루는 이렇게 라이짐에게 보고 시간이 지났음을 알려 주었다. 라이 짐은 아케르에게 다시 거수 경례를 붙이고 집무실을 나섰다. 하지만 라이 짐은 어쩐지 꼭 쫓겨나는 것만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하늘은 맑고 햇살은 따스했다. 사람들은 옷차림도 발걸음도 가벼워 보 였고, 그 사람들이 웃고 있는 순간만을 주시한다면 세상에는 아무 고통도 슬픔도 없을 것 같아 보이는 날이었다. 라이짐은 시청에 마련된 집무실 창밖을 바라보면서 오늘은 정말로 어울리지 않는 날이구나 싶었다. "덥지, 라이짐?" 하진이 라이짐에게 물었다. 라이짐은 그냥 그래, 하고 대답하고 말았을 뿐이었다. 아무래도 기분이 좋아질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이제 결실을 보는 날이잖아, 오늘은." 하진은 이렇게 말하면서 라이짐의 어깨를 툭 쳤다. 기운 내라는 뜻이겠 지만, 라이짐은 도무지 기운이 나질 않고 있었다. "꼭 내가 배석해야 하는 거야?" 라이짐은 하진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러자 하진의 표정이 의아스럽다는 듯한 얼굴로 바뀌었다. "네가 추진한 일이잖아. 왜 그런 약한 소리를 해?" 하진이 라이짐에게 이렇게 되물었고, 라이짐은 그 말에 이렇게 대답했 다. "추진한 건 내가 아니야. 나는 서명만 했을 뿐이라고." "또 약한 소리한다. 라이짐. 너 답지 않아. 그리고 서명한 게 결국 추 진한 거 라는 거, 몰라?" 하진은 다시 한번 라이짐에게 이렇게 되물었다. 만약 하진이 친구가 아 니었다면 이런 불평을 늘어놓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라이짐은 심호흡을 했다. 어차피 누군가 해야 할 일이다. 그리고 그 일을 내가 맡게 될 거라 는 걸 내가 모르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라이짐은 이렇게 생각하면서 스 스로에게 기운을 북돋았다. 하지만 맑은 햇살은 자꾸만 라이짐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고 있었다. "라이짐. 무슨 문제 있어? 그래서 그러는 거야? 혹시 보복이라도 당할 까봐 겁먹는 건 아니겠지?" 하진이 라이짐에게 반 농담조를 하고서 물었다. "그럴리가 있나. 내 경호를 맡고 있는 게 넌데." 라이짐이 말했다. 하진은 완전 무장한 일개 십부 병력을 수도 군단에서 인수받아 일이 진행 되는 동안 라이짐의 개인 경호를 맡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냥 날씨가 너무 좋아서 그래." 라이짐은 하진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그러자 하진은 웃음을 터트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래, 그래. 공개 처형을 집행하기에는 너무 좋은 날씨지." 하진의 말에 라이짐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하지만 어차피 밟고 넘 어야 할 산이야. 라이짐은 생각하면서 창가에서 일어섰다. "가야지." "어딜?" "내가 있어야 할 곳으로." 라이짐은 이렇게 말하면서 정복의 단추를 잠갔다. 어깨에 힘이 들어가 고 있는 것만 같았다. 중앙 광장에는 생각보다 많은 인원이 자리하고 있었다. 라이짐은 연단 에 마련된 가장 상석에 앉아 중앙 광장에 모인 시민들을 내려다보고 있었 다. 오늘 처형은 라이짐이 책임을 맡은 행사였다. 아케르나 그 밖의 고관 들은 보이지 않고 있었으며, 고관중에는 평민 출신으로 법무장관의 자리 에 오른 주몽이라는 이름을 가진 장군이 형식적으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 을 뿐이었다. 이마에는 주름이 가득하고 머리는 거의 다 벗어진 주몽을 바라보면서, 라이짐은 오늘 행사가 진정으로 담고 있는 뜻을 저 사람이 알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자치대 감찰 부장. 고생 많았습니다. 허허허." 법무장관이 너털웃음을 지으면서 라이짐에게 말했다. 라이짐은 그저 고 개를 한 번 까딱 하는 것으로 법무장관의 인사를 받았다. 라이짐은 별로 이야기하고 싶은 기분도 아니었고, 이야기를 할 이유도 없었던 것이다. "그나저나 사람이 많이 모였군요." 하진이 그런 라이짐의 심정을 눈치챘는지 주몽에게 이렇게 의례적인 말 을 건네었다. 주몽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난 후, 이렇게 말했다. "불경죄를 저지른 사람들의 친인척이겠지요." "아, 그렇군요. 역시 원한의 힘은 무서운 것인가 봅니다." 하진은 자신도 다 알고 있었던 일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과장된 어투 를 써가면서 법무장관의 비위를 맞추어 주려고 했다. 어쩌면 저런 것도 타고난 재능의 힘인지 모른다고 라이짐은 생각했다. 사형장으로 바뀐 중앙 광장 한 복판에 선 사형틀은 순무가 오랫동안 준 비한 곳이었다. 신속하게, 고통 없이, 그리고 여럿을 한꺼번에 처형할 수 있는 곳을 만들라는 것이 아케르의 지시였고, 순무는 아케르의 명을 받들 어 오늘 중앙 광장에 공개된 사형틀을 만들어내었다. 하지만 순무의 솜씨 라고 보기에 사형틀은 너무 특색이 없었고 아케르의 지시에 충실하게 만 들어 진 것 같지도 않았다. 사형틀은 나무로 만들어져 있었다. 우선 넓은 단이 어지간한 집 몇 채 만큼의 넓이로 바닥에 깔렸고, 그 위에 두 개의 거대한 기둥이 세워져 있 었다. 그리고 그 기둥 사이사이로 몇 개의 기둥이 놓여졌고, 기둥에는 각 각 올가미가 걸려 있었다. 라이짐은 사형틀을 바라보면서 과연 어떻게 동 시에 처형을 시킬 것인가 궁금해졌다. 저 정도 넓이라면 백명의 사람을 수용할 수는 있겠지만 어떻게 그 사람들을 동시에 저기에 메달 수 있는 걸까? 처형될 귀족의 수가 백 명이 넘는 걸 감안한다면 이런 의문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일 수 있었다. 아케르 역시 라이짐과 같은 의문을 품은 모 양이었다. "어떻게 동시에 처형을 하는지 설명해 보게." 며칠 전, 아케르가 처형틀을 보고 이렇게 묻자 순무는 이렇게 대답했다 고 한다. "제 일생 일대의 대작입니다. 믿어주십시오." 순무의 말에 아케르는 흔쾌히 좋아, 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고 했다. 물론 전하는 사람마다 조금씩 달라서, 자네를 믿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일 세, 하고 말했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자네는 역시 대단한 장인일세, 하 고 말했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라이짐은 처음에 아케르가 신속하게, 고통 없이 라고 지시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목을 베는 기구를 만들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목을 베는 일이 가장 빠르고 고통 없는 일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였다. 하지만 순무가 지금 마련한 것은 교수형을 집행할 수 있는 교수대였고, 그것도 말이 교수대이지 기둥 몇 개에 단순한 올가미 몇 개 달아놓은 것에 불과 한 것이었다. 라이짐은 사형틀 옆에 기대어 간신히 몸을 지탱하고 있는 순무를 바라보았다. 순무는 이제 완전히 술에 쪄들은 사람이라는 것이 멀 리서도 알아볼 수 있을 지경이었다. 순무의 눈동자는 초점을 잃고 흐릿하 게 보이고 있었고, 몇 걸음만 가까이가도 술냄새를 맡을 수 있을 지경으 로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예술가들이 최후의 걸작, 대작 운운하기 시작하면 그때는 이미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시기가 지났다고 하던가. 순무는 이렇게 엉망인 작품을 끝 으로 서서히 사라져 가겠구나. 라이짐은 이렇게 생각하면서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지금부터 사형을 집행한다. 미도 가문의 포르텐, 아다시몬, 에이 지..." 하진이 짤막한 말로 사형집행 의식을 시작했다. 그러자 중앙 광장에 모 인 사람들은 순간 조용해졌다. 어린아이를 데리고 나오지 말 것을 권유하 기는 했지만 아들을 업고 나온 부인도 보이고 있었고, 딸아이의 손을 잡 고 나온 아버지의 모습도 보이고 있었다. 라이짐은 그들의 얼굴을 바라보 았다. 그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증오와 저주, 분노가 불타고 있었다. 라 이짐은 짐작할 수 있었다. 세금을 내지 못해 귀족에게 죽은 이, 귀족의 앞길을 막았다가 목을 베였을 아낙, 아들을 때리는 귀족에게 반항했다가 아들 앞에서 죽었을 아버지... 그들은 모두 죽었으나 결국 죽지 않고 이 렇게 살아나 여기서 분노의 눈길을 불태우고 있었다. 이것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힘이라는 것일까. 사람들은 자신 앞에 작 은 이익에만 연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 앞에 놓인 불이익과 불공정 에 분노한다. 그리고 대의가 무엇이건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저 사 사로운 복수심만이 있을 뿐. 라이짐은 이렇게 생각한 순간 라이짐 자신의 이야기가 떠올라 더이상 생각을 잇지 못했다. 죽어가던 어머니의 모습과 탐그루에서 나올 때 지니고 있었던 시드의 귀가 박힌 칼이 떠올랐다. "... 이어서 페르도 가문의 아그리파, 고몽..." 라이짐은 하진의 말에 정신이 버쩍 드는 기분이 되었다. 아는 이름이 불려졌기 때문이었다. 라이짐은 페르도 부인과 고몽의 얼굴을 번갈아 가 면서 바라보았다. 호명된 귀족들은 사형틀에 오르기 전에 먼저 일렬로 연단 앞에 서서 라 이짐의 확인을 거친 후에 사형틀에 오르도록 되어 있었다. 라이짐은 자신 이 앉아 있는 연단의 아래쪽에 일렬로 서 있는 귀족들의 얼굴을 죽 바라 보았다. 명단에 적혀 있는 이름이 본인과 일치함을 최종적으로 확인하는 것은 라이짐의 일이었지만, 실은 그 일은 이미 하진이 아침 일찍 마친 뒤 였고, 라이짐이 확인한다는 것은 그저 형식적인 일일뿐이었다. 라이짐은 귀족들의 얼굴 사이에서 페르도 부인의 얼굴과 그 옆에 서 있는 고몽 페 르도와 눈이 마주쳤다. 물론 라이짐은 눈을 피하지는 않았다. 페르도 부인은 라이짐이 기억하고 있는 페르도 부인과는 거리가 멀었 다. 엉망으로 헝클어진 머리과 더러운 때가 잔뜩 달라 붙어있는 옷 때문 만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페르도 부인의 얼굴에는 잔주름이 가득했던 것 이었다. 두꺼운 화장으로 가리고서 라이짐을 본 탓도 있었겠지만, 양 팔 을 뒤로 묶인 초라한 죄수 신세가 된 페르도 부인의 잔주름은 패르도 부 인의 처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라이짐은 페르도 부인에게 미소를 보여주 려고 했다. 페르도 부인이 라이짐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면서 지었던 바 로 그 차가운 미소를. 하지만 고몽 페르도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라이짐 의 얼굴은 완전히 굳어버렸다. 고몽 페르도는 라이짐을 비굴한 표정을 하고서 바라보고 있었다. 라이 짐은 저 표정이 어떤 표정인가를 알고 있었다. 저 표정은 전장에서 목숨 을 구걸하는 장군이 짓는 표정이기도 했고, 길거리에서 몰매를 맞고 난 개가 짓는 표정이기도 했다. 고몽 페르도의 두 다리는 떨리고 있었다. "라, 라이짐!" 고몽 페르도가 소리쳤다. 그러자 연단 좌우에서 대기하고 있던 십부 병 력중 하나가 달려나와 고몽 페르도의 배를 걷어찼다. 고몽 페르도는 헉, 하는 비명과 함께 조용해졌다. 라이짐은 고몽 페르도에게서 시선을 뗄 수 가 없었다. 떨고 있던 고몽 페르도의 다리 가랑이가 금새 축축하게 젖는 게 눈에 들어왔다. 다시 고몽 페르도가 고개를 처들었을 때, 고몽 페르도 의 얼굴에는 눈물과 콧물, 그리고 침이 범벅이 되어있었다. 고몽 페르도 는 배를 걷어차인 고통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움찔거리 고 있는 고몽 페르도의 입술에서는 살려달라는 소리가 맴돌고 있는 게 라 이짐의 눈에 들어왔다. "저는 아무 것도 아, 아닙니다. 저는, 주, 죽을 이유가 없습니다. 아, 아니, 저, 저 같은 걸 죽여 봐야 무, 무슨 소용이..." 고통을 참으면서 고몽 페르도가 말했지만 이번에 배로 날아든 병사의 발길질은 고몽 페르도가 다시는 입을 열지 못할 만큼 강력했다. 고몽 페 르도는 그대로 바닥에 엎어졌다. PRINTER/CAPTURE를 OFF 하시고 [ENTER] 를 누르십시오.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24386/24688 ━━━━━━━━━━━━━━━━━━━━━━━━━━━━━━━━━━━━━━━━ 제 목:[탐그루] 무엇이 우리를 평화에 들게 하는 관련자료:없음 29/29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7-25 20:57 조회:798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 이상의 자들을 사형에 처한다. 스파일 임시 계엄 사령관, 아케르. 그리고 시민의 이름으로." 하진이 이렇게 말을 마치자 중앙 광장에 운집해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환호성이 울렸다. 물론 자발적인 환성도 있었겠지만 역시 군중에 섞여 들 어가 있는 병력들이 주도한 덕분에 올려진 환호성이었다. 라이짐은 그 군 중들 사이에서 아무 말도 없이 분노의 눈빛만 보내는 시민의 얼굴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아마도 그들이 진정으로 분노한 자일 거라고 라이짐은 생 각했다. "사형틀로." 라이짐이 지시하자 귀족들은 일렬로 힘없이 사형틀 위로 걸어 올라갔 다. 느릿한 귀족들의 걸음걸이는 바닥에 발을 끄는 듯 보이고 있었고, 개 중에는 고몽 페르도 처럼 실신하여 병사가 억지로 끌고 올라가는 귀족의 모습도 보였다. 사형틀로 끌려 올라가는 귀족들을 향해 욕설과 돌멩이가 날아들었지만 병사들은 말리지 않았다. 이들은 어차피 죽을 자들인 것이 었다. "집행 준비는?" 라이짐이 큰 소리로 순무에게 물었다. 아무래도 술에 취한 것이 분명한 순무가 미덥지는 않았지만, 순무는 활짝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 만 어떻게 저 많은 올가미에 귀족들을 동시에 목매달 수 있을까? 라이짐 은 순무의 표정으로 봐서는 그저 장난을 치고 있는 건 아니겠구나 싶었 다. 순무는 비록 취해있었지만 그 눈빛만큼은 매우 진지했다. "모두, 무릎을 꿇게 하고 내려오게." 순무가 귀족들을 데리고 올라간 병사들에게 말했고, 병사들은 순무의 지시 그대로 귀족들을 무릎 꿇게 한 후, 사형틀에서 내려 왔다. 라이짐은 무릎을 꿇은 귀족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공포에 질린 얼굴을 하고서 라이짐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어차피 죽어야 할 사람들이 다. 라이짐은 생각하면서 귀족들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고몽 페르도는 정신을 차리고는 최후의 자비를 라이짐에게 호소하는 눈이 되어서 라이짐 을 바라보고 있었다. 라이짐은 그 눈을 보는 순간 연단에서 뛰어 내려가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이 자리를 피하고 싶 기만 할뿐이었다. "아케르." 순무는 이렇게 말하면서 사형틀의 단 아래에서 뭔가를 집어들었다. 페 르도 부인은 끝까지 당당하고 싶어하는 모양이었다. 페르도 부인의 얼굴 에는 고고한 자존심만이 어려 있었다. 라이짐은 페르도 부인의 그런 얼굴 을 바라보면서 조소를 지었다. 페르도 부인은 시기와 장소가 문제가 될 뿐, 힘이 있는 자는 언제든 원하는 사람을 없앨 수 있다고 이야기 한 적 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힘이 있는 자는 아케르였고, 또 라이짐이었다. "아케르에게 전해 주게, 라이짐. 신속하게, 고통 없이, 한꺼번에 했다 고." 순무는 이렇게 말하면서 사형틀 위로 올라갔다. 순무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이 무엇인지 라이짐은 알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뜨거운 열쇠, 그러니까 실전에서 사용한 적이 있는 바로 그 뜨거운 열쇠였던 것이다. 순무는 뜨거운 열쇠를 손으로 돌렸고, 라이짐은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위대한 아케르 장군. 당신이 좋아하는 그대로 해주었다고. 이게 순무 의 마지막 일생일대의 대작이라고. 이 망할 놈의 세상..." 순무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하진이 지휘하고 있는 십부원 중 하 나가 화살을 날렸기 때문이었다. 화살은 순무의 가슴에 날아가 박혔다. 하지만 순무가 뜨거운 열쇠를 사형틀 위에 집어던진 것이 더 빨랐다. 굉음이 중앙 광장에 울렸고, 나무로 만들어진 사형틀은 순식간에 불기 둥에 휩싸였다. 그리고 곧 이어 사람의 것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비명 소리가 중앙 광장에 울려 퍼졌고, 그리고 어떻게 일이 돌아가고 있 는지 영문도 모르는 시민들은 환호성을 올리기 시작했다. 불기둥에 휩싸 인 사형틀에서 불꽃이 하늘을 향해 치솟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불꽃은 색 색의 위용을 자랑하며 하늘로 치솟아 올랐고, 중앙 광장은 금새 죽음의 축제장으로 바뀌었다. 불티는 계속해서 허공으로 솟아오르고 있었고, 비 명소리는 불길에 잡아먹히기라도 한 듯이 사라져 버렸다. 라이짐은 뜨겁 게 다가오는 열기와 불꽃 때문에 연단에서 뒷걸음질을 쳤고, 중앙광장에 는 사람들의 환호성이 계속해서 울리고 있었다. "놀랍군요, 감찰 부장." 법무장관 주몽이 웃으면서 라이짐에게 말했다. "사형 집행을 축제로 바꾸어 버리다니 말입니다. 솔직히 감탄했습니 다." 주몽은 이렇게 말하면서 희죽 웃음을 지었는데, 라이짐은 열기 때문에 피어오르는 아지랭이에 취했는지 주몽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 다. 하늘을 향해 미친듯이 솟아오르고 있는 검은 연기와 열기를 따라서 귀족들의 생명도 사라져 갔고, 라이짐은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풍경 한가운데에서 넋을 잃고 서 있었다. 눈 앞의 끔찍한 풍경과는 달리 여전 히 무척이나 맑고 따스한 하늘이었다. 라이짐은 관사의 출입구를 두드리고 있었다. 맑은 하늘은 그대로 이어 져 라이짐이 서 있는 자리에 별빛을 뿌려주고 있었지만, 라이짐은 술에 취해 문에 기대어 주먹으로 문을 두드리고 있을 뿐이었다. 문 양 옆에 서 있는 초병들이 라이짐을 부축하려고 했지만 라이짐은 팔을 휘둘러 초병을 막았다. "취하셨네요." 마리가 관사에서 나와 라이짐에게 말했다. 마리의 말은 글자 그대로였 다. 라이짐은 완전히 취해 있었다. 마리는 문을 열었고, 당장이라도 쓰러 질 듯 비틀거리면서 라이짐은 문 안으로 들어갔다. 라이짐은 휘청거렸고, 마리가 라이짐을 부축했다. 관사는 혁명 전에 이름 높은 귀족 가문 중 하나가 사용하던 집을 약간 수리 한 것이었다. 아케르가 영주 페르도의 집무실을 그대로 썼듯이, 라 이짐도 귀족이 사용하던 저택을 관사로 이용하고 있었다. 둘이 살기에는 너무나도 넓은 집이었다. 라이짐은 여전히 휘청거리면서 마리에게 이끌려 정원을 지나 관사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빌어먹을. 다 빌어먹을 녀석들이야." 라이짐은 계속해서 이렇게 중얼거렸고, 마리는 라이짐에게 무슨 일이냐 고 묻지 않았다. 오늘 중앙 광장에서 있었던 처형식에 관한 이야기를 마 리도 건네 들은 바가 있었던 것이다. "좀 쉬세요." 마리는 이렇게 말하면서 라이짐을 침대에 뉘였다. "가지 마." 라이짐은 당장이라도 화를 낼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 마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취하셨어요." "가지 마, 제발." 라이짐은 마리의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 마리는 한숨을 토해내면서 라 이짐의 옆에 누웠다. 라이짐은 그런 마리의 어깨에 기대었다. "다 죽여버릴 거야. 다 죽일 거라고." "누굴요?" 마리가 라이짐에게 물었다. "귀족들, 녀석들, 다 죽여버릴 거라고." 라이짐은 이렇게 횡설수설하면서도 꼭 잡은 마리의 손을 놓지는 않고 있었다. "오늘 있었던 일, 저도 들어서 알고 있어요." "그게 끝이 아니야." 라이짐은 마리를 와락 껴안으면서 말했다. 하지만 껴안고 있는 라이짐 의 손길에는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반란군들, 이제는 반란군 차례야." "예?" 마리는 깜짝 놀라며 라이짐에게 되물었다. 마리는 깜짝 놀라며 이야기 한 후에 아차 싶다는 듯한 얼굴이 되었지만, 라이짐은 술에 취해 그런 일 에는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반란군들을 더 이상 두고 볼 리가 없다 싶기는 했지만, 그건 안 되는 일이야. 암. 안되고 말고. 어찌보면 공동의 적, 그래, 공동의 적을 두고 함께 싸웠던 전우 아니야? 마리.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겠어?" 마리는 소리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들은 평민이라고. 무슨 말인지 알아?" 라이짐은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뭔가를 붙잡으려는 듯 허공에 팔을 휘저 었다. 하지만 팔에 걸리는 것은 그저 한 웅큼의 공기뿐이었다. "언제부터 일이 진행 될까요?" "내일 당장부터 잡아들일 거야. 하진 녀석이 그랬어. 어차피 나야 하진 이 일 하면 서명만 하면 그만인 걸. 젠장. 오늘도 마찬가지였어. 그 사람 들, 귀족들의 눈은 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고. 하나같이 원망으로 가득 찬 눈이었지. 빌어먹을. 그 눈길을 왜 나 혼자 다 받아야 하지? 나는 죄 가 없어. 나는 해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고..." 라이짐은 계속해서 한참을 중얼거리다가 결국 제 풀에 못이겨 잠이 들 고 말았다. 마리는 라이짐이 잠 든 것을 확인한 후에 대충 옷을 걸치고는 허둥거리면서 관사를 빠져나갔다. "약을 좀 사와야 겠어요." 어딜 가느냐고 묻는 초병에게 마리는 이렇게 대답했다. "저희를 시키셔도 됩니다만." "아뇨. 제가 직접 가야 해요. 제가 가야 좋은 약을 내주거든요." 마리는 이렇게 말하면서 초병 사이를 헤집고 나가려고 했다. "그러면 제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초병이 말하자 마리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계시죠? 여기를 지키시는 일이 훨씬 더 중요한 일입니다." 마리의 말에 초병은 알았다고 대답하고는 마리에게 길을 내 주었다. 마 리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마리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초병 하나가 뒤를 돌아 손짓을 보내었다. 그러자 손짓을 받은 사내는 소리 없이 걸음을 옮겨 마리를 뒤쫓기 시작했 다. 해가 밝았을 때, 라이짐은 심한 갈증을 느꼈다. 지독한 갈증이 라이짐 을 괴롭혔다. 혀와 입천장은 갈라져 당장이라도 말라 부스러질 것 같았 다. 라이짐은 멍한 머리를 감싸고 침대에서 일어나 부엌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진 녀석과 간밤에 잔뜩 마셨던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와서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기억 나지 않 았다. "일어나셨네요. 가서 조금 더 누워 계셔요. 제가 술 깨는 약을 좀 만들 었거든요." 부엌에서 마리가 아침을 준비하면서 라이짐에게 말했다. 라이짐은 손을 내저으면서 마리에게 그저 물이나 한 잔 달라고 말했다. 마리는 누워 계 시라니까요, 하고 말하면서 라이짐에게 물을 따라 주었고, 라이짐은 숨 한 번 쉬지 않고 물 한 잔을 들이켰다. 물은 마치 생명수라도 되는 것처 럼 차갑게 라이짐의 몸에 스며들었다. "어제 별일 없었지요?" 라이짐이 묻자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일도요. 오늘도 일 나가셔야지요?" 마리는 뜨거운 스프와 생달걀, 그리고 몇 가지 야채를 곁들인 아침상을 보면서 말했다. 감자나 빵이 나왔다면 아마 한 입도 먹지 못하고 다 토해 버렸을지도 몰라. 라이짐은 생각했다. "마리. 요즘 지내기 좋아요?" 스프를 떠먹으며 라이짐이 마리에게 물었다. 마리는 대답 대신 웃음을 보냈고, 물은 라이짐은 물어 놓고도 부끄러운지 말을 잇지 못했다. "고마워요, 늘. 그리고 행복하고요." "그런... 가요." 마리는 말끝을 흐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뭔가 좋지 않은 낌새를 챈 라 이짐은 마리에게 이렇게 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 혹시 그리지아가..." "아뇨. 아무일도요. 그리지아는 늘 잘 있어요. 아버지 얼굴을 보지 못 하는 게 불쌍하긴 하지만." 마리는 이렇게 말하고는 라이짐의 옆 의자에 앉아 이렇게 말을 이었다. "행복이라는 거, 좋기는 하죠. 하지만 행복도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영원할 수 없어요. 그래서 이게 행복인가보다, 하고 붙잡고 있다가도 뒤 돌아보면 어느 사이 이게 아니었는데, 하고 생각하게 되기 마련이지요." 마리는 이렇게 말을 늘어놓았다. 라이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그래서 멈추어 서면 안돼요. 멈추어 있다고 해서 행복도 늘 곁에 있어주는 건 아니거든요." 라이짐의 말에 마리의 어깨가 흠칫 놀라는 것을 라이짐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왜요? 행복이 날아가 버릴 까봐 무서운가요?" 라이짐의 질문에 마리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뇨. 그저 궁금할 뿐이에요. 왜 행복은 늘 그대로 있을 수 없는지. 왜 사람은 늘 달려가야 하는지. 그냥 여기서 행복하게 살수는 없는 걸까 요?" 마리가 말하자 라이짐은 마리의 손을 쥐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마리." 라이짐이 말하자 마리는 라이짐을 바라보았다. 둘 사이로 아침 햇살이 흘러 들어와 반짝이고 있었다. 햇빛을 받은 스프가 당장이라도 끓어 넘쳐 버릴 듯 김을 토해내고 있었다. "행복은 사라지지 않아요. 저는 계속 달려 갈 거니까요." 마리는 라이짐의 말에 그게 바로 제 고민이에요, 하고 말하려고 했지만 마리의 입에서 나온 것은 그저 천천히 드시고 일 나가셔야죠, 하는 말뿐 이었다. 라이짐이 식사를 마쳤을 때, 관사 밖에는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 는 듯한 환한 햇살이 비치고 있었다. 여전히 맑은 날이었다. 어제의 사형 도, 끔찍한 비명소리도, 허공으로 오르던 시커먼 연기도, 모두 다 언제 있었냐는 듯한 날씨였다. 라이짐은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었다. 그래 잊어버리는 거야. 다시 시작하는 거지. 멈추면 죽는 새처럼, 끝없 이 날개를 움직이면 되는 거야. 라이짐은 이렇게 생각하면서 관사를 나섰다. 라이짐이 가투신을 찾았을 때, 가투신은 야전 집무실 의자에 앉아 정신 없이 서류를 살펴보고 있었다. "라이짐! 오래간 만이에요. 반가워요. 이거,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어 도 식사나 한 번 같이 하면 좋은 텐데." 가투신은 이렇게 말하면서 라이짐에게 눈길도 제대로 한 번 보내지 않 았다. 가투신의 옆에는 청강이 앉아 있었다. 청강은 살짝 웃음을 보여주 면서 라이짐에게 인사했다. 많은 용병단 출신 백부장들이 장군으로 진급 했고, 청강도 그 중에 하나였다. 물론 가장 나이 어린 장군이라는 점은 다른 장군들과 크게 비교되는 부분이기는 했지만. "여기까지 온 목적은 잘 알고 있어요. 앞으로도 많이 도와 줬으면 좋겠 네요. 부관." 가투신은 이렇게 말하면서 부관에게 두툼한 서류뭉치를 내밀었다. 서류 에는 가투신 군단의 명단과 그들의 출신지, 가족 환경, 성장과정 따위가 적혀 있을 것이었다. 말하자면 신원 조회를 위한 기초자료인 셈이었다. 사실 이런 잡무 만이라면 라이짐이 직접 이곳으로 올 이유도 없었을 것 이었다. 어차피 서류를 검토하고 조사하는 것은 라이짐의 정보부에 배속 되어 있는 요원들이 할 일이었지 라이짐이 할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 지만 라이짐이 이렇게 직접 온 것은 앞으로의 업무 협조를 위해 상호 신 뢰를 얻으려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물론 가투신과 청강이라면 굳이 그렇 게 까지 나설 필요는 없었지만, 라이짐은 오래간 만에 용병단 시절의 전 우들 얼굴을 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가투신 군단은 청강 군단과 야전 쌍방 기동훈련 중이었다. 게다가 다음 주 중에 아케르의 사열이 있을 예정이어서 군단은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 가고 있었다. 지금 집무를 보고 있는 이곳도 당연히 프라브리티에서 벗어 난 야전 기동 훈련장이었고, 청강과 가투신은 사열을 위한 준비 때문에 이렇게 함께 앉아 있는 것이었다. 라이짐은 부관이 내민 서류 뭉치를 받아들었다. 겉장에는 비밀 문건, 취급 주의, 같은 말들이 큰 글자로 적혀 있었고, 라이짐은 그것들을 별 감흥 없이 바라보았다. "오는 길에 보니 길을 닦는 작업이 한창이더군요." "예. 새우 고개를 말하는 군요. 그곳에서 교전이 있을 예정이거든요. 사열이 있는데 그냥 고개에서 할 수는 없죠. 모든 측면에서 깔끔하게 준 비를 해두어야죠." 가투신이 말했다. 라이짐은 가투신의 말에서 가투신이 의도적으로 아케 르에 대한 호칭을 생략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긴. 아직 황제의 자 리에 등극한 것도 아니고, 게다가 장군이나 공식적인 호칭인 '계엄 사령 관'이라는 호칭은 시민들이 사용하면 모를까, 아케르의 측근이 사용하기 에는 적당하지 않은 호칭이었다. 깡패 집단이라면 두목이나 어르신 같은 호칭을 사용하겠지만, 가투신은 장군이지 동네 불량배가 아니었다. "오는 길에 시민들에게 들으니 시민들을 사역에 동원하고 있다고요." "그거 당연한 거 아니에요?" 가투신은 라이짐의 이어지는 말에 짜증이 난다는 투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지금까지 한 게 있는데요. 그 많은 세금과 부역에서 이제 해방 되게 되었는데, 그 정도 편의를 봐 줄 수 없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요? 그런 쓸데없는 이야기는 그만 두죠, 우리." 라이짐이 한 말은 꼭 한마디뿐이었지만, 가투신의 대답은 길고도 구구 절절 사설이 길었다. 라이짐은 가투신에게 뭐라고 한 마디 해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결국 그만 두었다. 서류를 정리하다 말고 라이짐을 바라 보는 가투신의 시선은 명예와 권리 운운하면서 평민을 괴롭히는 귀족의 그것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었다. 혁명? 갑자기 라이짐의 머리에는 냉소적인 생각이 떠올랐다. 만약 이런 일이 계속된다면, 과연 새로운 세상과 이전의 세상이 다를 게 뭔가 싶었 던 것이다. 지금 가투신이 하고 있는 말도 귀족의 말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다고 라이짐은 느꼈다. "예. 그만 두죠. 업무는 곧 끝날 겁니다." 라이짐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가요." 전혀 성의 없는 형식적인 인사였다. "예. 사열 잘 받으시길 빌죠." 라이짐은 이렇게 말하고는 야전에 마련된 가투신의 집무실을 빠져 나왔 다. 사실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은 게 라이짐의 진짜 심정이었지만, 관 계를 좋게 만들기 위해서 온 자리에서 관계를 악화시킬 수는 없었던 것이 다. 라이짐은 무엇보다 실망의 감정이 먼저 이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가 투신이라고 해서 언제나 군인답고 늘 사람들을 아끼는 모습으로 있으라는 법은 없겠지. "라이짐 정보부장!" 라이짐이 집무실로 쓰고 있는 천막을 나섰을 때, 청강이 라이짐을 불러 세웠다. 라이짐은 천천히 청강을 뒤돌아보았다. 청강은 장군용 망토를 휘 날리면서 야전에 서 있었다. 한 무리의 모래바람이 청장의 옆을 스치고 지나갔고, 그 뒤로 기동 훈련 준비중인 군단 병력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 이고 있었다. "라이짐 정보부장." "정보부장이라는 자리는 없습니다. 자치대 감찰대장이 있을 뿐이죠." 라이짐은 잔뜩 비꼬아서 청강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실 이 말은 하지 않는 편이 더 나은 말이었다. 라이짐의 말에 청강의 얼굴이 굳는 것이 눈 에 보이게 드러났다. "라이짐 정보부장 하고는 별로 친하게 지내지 않았지만, 차이린 백부장 한테 이야기 들어서 알고 있어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내가 짐작하 는 바가 아마 맞을 거라고 믿어요." 청강은 최대한도로 예의를 갖추어서 라이짐에게 이렇게 말했다. 라이짐 은 청강의 말에 굳이 반대의 뜻을 보이지는 않았다. 이렇게 자신을 따라 나온 것만 해도 청강이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으리라는 건 대 충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24456/24688 ━━━━━━━━━━━━━━━━━━━━━━━━━━━━━━━━━━━━━━━━ 제 목:[탐그루] 무엇이 우리를 평화에 들게 하는 관련자료:없음 28/28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7-26 18:19 조회:658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이건 과도기의 일일뿐이에요. 누구나 새로운 세상이 하루아침에 오리 라고 생각하지는 않는 거잖아요? 그 사이에 이런 일도 있을 수 있고, 저 런 일도 있을 수 있는 거지요." 청강은 그러니 좋게 좋게 생각하라는 뜻으로 라이짐에게 말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라이짐은 본심과는 달리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경우야 말로 좋게 좋게 논쟁 없이 넘어가는 편이 낫겠다 싶었다. "하나만 물어보죠, 청강 장군." 라이짐이 말하자 청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차이린이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라이짐이 묻자 청강은 잠시 생각을 해 보는 듯 하더니 이렇게 대답했 다. "아마 장군이 되었겠지요." 청강의 이 대답에 라이짐은 더 이상 이야기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 였다. "그렇군요. 제가 잘못 생각한 모양입니다." 라이짐은 이렇게 말하고는 뮤에 올랐다. 청강이 라이짐에게 뭐라고 인 사말을 건넸지만 라이짐은 뒤돌아보지 않고 뮤를 달렸다. 그리고는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프라브리티를 향해 달렸다. 꼭 멈추어 서면 당장이라도 죽어 버릴 사람처럼. 라이짐은 굳이 집무실을 들르지 않고 바로 관사로 돌아왔다. 오늘은 업 무를 볼 기분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꼭 라이짐이 있어야 할 업무라 는 건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라이짐이 해방감을 느낄 수 있는 곳은 오직 관사에서 마리와 함께 시간을 보낼 때뿐이었다. 초병이 라이짐을 알아보고는 경례를 붙였지만, 라이짐은 경례도 받지 않고 관사 안으로 들어서려고 했다. "...정보부장님." 초병 중 하나가 라이짐에게 말했다. 초병의 얼굴에는 망설이고 있는 빛 이 역력했다. 라이짐은 문득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무슨 일인가?" 하지만 라이짐은 시간 없으니 귀찮게 말라는 투로 초병에게 말했다. 어 쩌면 오늘은 쉬고 싶다든지 하는 헛소리를 늘어놓을지도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초병은 잠시 머뭇거리고 난 후에야 라이짐에게 이렇게 말하 였다.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실 이 친구하고 저하고 말씀을 미리 드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한참동안 고민했습니다만, 결국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 편이 더 낫겠다고 생각해서, 그래서..." "알았으니까 말해 봐." 라이짐이 초병에게 말했다. 초병은 잠시 더 머뭇거렸다. 라이짐이 짜증 을 느끼기 직전까지 갔을 때에야 이렇게 말했다. "부인, 그러니까 말입니다, 마리 님 있지 않습니까? 그 분께서 말입니 다..." 라이짐은 결국 이제는 더 이상 못 참겠다 싶은 지경까지 이르렀다. "그래서? 뭐가 어떻게 됐다는 말이야?" "체포되셨습니다." 옆에서 보다 못한 초병이 라이짐에게 말했다. 라이짐은 말을 듣는 순간 초병이 무슨 말을 했는지 다시 한 번 되물으려고 했다. 하지만 금새 상황 은 판단이 되었고, 라이짐은 당장 뮤에 올라 시청으로 뛰어 갔다. 집무실에 돌아갔을 때, 이미 업무시간이 지나있었지만 하진은 집무실에 있었다. 그것도 처음 보는 얼굴들과 함께. 하진은 라이짐이 달려 들어오 자 뜻밖이라는 듯한 투로 이렇게 말했다. "어쩐 일이십니까, 감찰부장 님. 바로 집으로 가실 줄 알았는데요." 하진의 말은 어쩐지 비꼬는 투였다. 집무실을 밝히고 있는 연금술사의 등이 흐린 빛을 발하고 있었다. "내가 왜 왔는지 몰라서 그러는 건 아닐 테지." 라이짐은 흥분한 어조로 하진에게 이렇게 말했다. 하진은 라이짐의 심 정, 다 이해한다는 얼굴을 하고서 차분하게 이렇게 말했다. "일단 흥분이나 가라앉혀." 하진이 말했다. 라이짐은 집무실 책상에 앉아 있는 하진의 앞에 서 있는 사내들을 바라 보았다. 하나같이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다. 키가 큰 친구도 있었고, 작은 친구도 있었고, 체격이 좋은 친구도 있었고 마른 친구, 뚱뚱한 친구도 있 었다. 라이짐은 그들의 수가 여섯 이라는 걸 확인 한 다음, 일단 흥분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하진에게 물었다. "하진. 그 사람들 누구야?" "내 정보원." 하진은 이렇게 말하고는 사내들에게 나가 있으라는 손짓을 했다. 사내 들은 아무 말도 없이 라이짐을 스쳐지나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꼭 라이 짐이 거기 있는지 조차 모르겠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서 말이다. 꼭 한사 람, 라이짐에게 눈길을 보낸 사내가 있기는 했다. 사내의 눈빛은 마치 라 이짐을 비웃는 듯했다. "정보부에 내가 모르는 사람들이 오가나? 아니, 내가 관사에 돌아간 다 음에는 늘 그랬나 본데. 언제부터 그랬어?" 라이짐은 흥분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하면서 하진에게 물었다. 하진은 계 속해서 차분한 태도를 유지하면서 라이짐에게 자리를 권했다. 라이짐은 일단 하진의 앞에 의자를 끌어다 놓고는 앉았다. "네가 관사로 퇴근하면서부터." 하진은 손을 모으고 천천히 라이짐의 눈을 응시했다. 라이짐은 하진의 눈이 어쩐지 먹이를 노리는 야수의 그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나한테 비밀로 했지?" 라이짐은 하진에게 이렇게 물었다. 하지만 이렇게 묻는 순간에도 라이 짐의 인내심은 서서히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건 네가 알아야 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야, 라이짐." 하진이 말했다. 그러자 라이짐은 참아왔던 분노와 흥분이 한 순간에 되 살아 나는 느낌이 들었다. "정보부에 내가 알아야 할 필요가 없는 일이 있단 말이야?" 라이짐의 인내심은 여기까지였다. 라이짐은 이렇게 말하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끌어다 놓았던 의자가 비명을 지르면서 뒤로 밀려났다. "있어. 너도 알텐데. 네가 얼마나 일을 소홀히 하고 있었는가를." 하진의 눈빛은 더욱더 음험한 빛으로 바뀌어 갔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저런 눈빛에 질려 버릴 만도 했지만 라이짐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좋아. 그렇다고 해 두지. 그럼 그것 때문에 마리를 잡아가게 내버려뒀 나? 아니, 마리 일도 내가 알 필요 없는 일이야?" 라이짐은 흥분을 참지 못하고 하진이 앉아 있는 책상을 주먹으로 때리 면서 말했다. 그런데 라이짐은 흥분해서 실수를 한 셈이 되었다는 건 생 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라이짐의 말은 자신이 정보부에서 밀려나고 있다는 상황을 인정한 꼴이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 으로는 라이짐은 도저히 어떻게 다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흥분과 분노 가 어떻게든 하진을 공격하라고 속삭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이제는 알아야지. 일단 자리에 앉아. " 라이짐은 책상을 뛰어 넘어 하진에게 한 방 날리고 싶은 생각이 드는 걸 간신히 참으면서 의자를 끌어당겨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의자는 이번에 도 삐걱이며 비명을 질렀고, 라이짐은 의자를 하진에게 집어던져버리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내가 모르고 있는 게 또 있나?" 라이짐의 말에 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어. 아니, 생각하지 않았 어도 나는 알고 있었지. 이런 날이 오리라는 걸." 하진은 이렇게 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라이짐은 하진을 바라보았 다. 하진은 천천히 다리를 끌면서 라이짐의 곁으로 의자를 끌고 와서 앉 았다. "먼저, 나로서는 최선을 다했다는 걸 먼저 말해주고 싶어." 하진이 말했다. 라이짐은 이런 식으로 말하는 하진을 본 기억이 별로 없다는 걸 생각했다. 지금 하진은 평소의 하진에 비해 지나치게 진지했 고, 지나치게 냉정했다. 낮에 낯설게 변한 가투신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 이었을까. 라이짐은 어쩐지 주변에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이 전부 다 변해 가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건 들어보고 판단하지." 라이짐은 권위를 갖추고 싶은 듯, 낮고 굵은 음성으로 잘라 말했다. 하 지만 하진의 표정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먼저 라짐에 대해서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 하진의 말은 의외의 부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아무리 마리가 잡혀갔다 는 사실 때문에 흥분해 있는 라이짐이라고 해도, 라짐이라는 말에 조금도 동요하지 않을 정도로 흥분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라짐?" "그래. 라짐 말이야. 라짐은 지금 타실의 카이사 장군 첩으로 가 있 지." "그건 나도 알고 있어. 반란군 일을 하고 있다는 것도." 라이짐은 불쾌하다는 듯한 얼굴로 하진에게 이렇게 말했다. 문득 탐그 루에서 먼 발치에서 한 번 보았던 라짐의 모습과, 그 사실을 말해 주던 연금술사 바코쿠의 대머리가 떠올랐다. 하진은 고개를 한 번 까딱하더니 말을 이었다. "그래 타실에서 라짐은 반란군 일을 하고 있지. 먼저 말 해 둘 건 미하 엘과 지다문이라는 이름이야. 두 사람에 대해서는 알고 있지?" 하진이 라이짐에게 물었다. 라이짐은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라짐은 지금 미하엘과 지다문이 이끄는 반란군의 첩자 일을 하고 있 어. 그리고 그 덕분에 성황청의 성구는 더 이상 힘을 발휘할 수 없게 된 거고." 라이짐은 하진의 말에 이해가 가지 않는 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우리는 네가 바코쿠에게서 얻어온 떠버리 새를 통해 라짐에게 성황청 성구의 비밀에 대한 정보를 알려 주었지. 그리고 그걸 통해 타실의 라짐, 그리고 너는 모르는 이름이겠지만, 미쥬라는 반란군에게 그 정보를 넘겨 줄 수 있었어." 하진은 이렇게 말하면서 '우리'라는 표현을 썼고 그 '우리'안에 라이짐 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라이짐의 관심은 지금 그런 것이 아니 었다. "라짐을 이용했다는 말이야, 지금?" 라이짐의 목소리는 달아오를 때로 달아올라 있었다. "아니. 라짐은 라짐의 일을 한 거고 나는 내 일을 한 거지." 하진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리고 라이짐이 더 생각을 해 보기도 전에 이렇게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어. 상대는 반란군이었다고. 분명히 믿을 수 있는 제 이, 제 삼의 경로가 필요했었던 거야. 그래야 반란군들이 사 실을 믿었을 테니까." 라이짐은 지금 하진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 다. 불쑥 튀어나온 라짐의 이야기도 그랬지만, 미하엘과 지다문이 반란군 에 가담했다는 사실이나 또 라짐이 미하엘 지다문과 함께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왜 지금 하진이 이야기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리가 필요했던 건 그런 점에서였어." 하진이 마리라는 이름을 말했을 때, 라이짐은 무거운 것으로 머리를 두 드려 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라이짐은 지금까지 느꼈던 흥분과는 다른 종류의 흥분이 몸을 타고 내려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물론 꼭 그런 부분에서만 필요했던 건 아니야. 테이르의 날 진압계획 문서를 흘려줘서 반란군들이 집회를 미리 준비된 방향으로 흘러가게 만든 다던가, 혹은 우리의 상황을 반란군 녀석들이 읽고 있다고 느끼게 한다던 가, 뭐 이런 이점도 생각해 볼 수 있는 부분이기는 했지." "하진... 너... 지금..." 라이짐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라이짐이 아무리 흥분을 하고 아무 리 이성을 잃었다고 해도 정보를 오랫동안 다뤄 온 것만큼은 틀림없었다. 그런 라이짐이 여기까지 이야기를 듣고 하진이 진짜로 말하고자 하는 바 를 알아차리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그래. 네 생각이 맞아, 라이짐. 다시 정리해서 분명하게 말해주지. 라 이짐. 마리는 반란군의 첩자였어. 내가 몇 번을 충고했잖아. 마리에게서 떨어지라고. 솔직히 네가 마리에게 그 정도까지 빠지게 될 줄은 몰랐다. 그 점은 정말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덕분에 반란군 조직원들을 완전히 파악할 수도 있기는 했지만... 라이짐. 마리는 이제 잊어. 마리가 너한테 접근했던 이유는 오직 네가 정보부장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어." 하진은 이렇게 말하면서 라이짐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라이짐은 거칠 게 하진의 팔을 뿌리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어디로 가야겠다 는 생각도, 무엇을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고 있었다. 그저 이야기를 듣고 있기가 괴로웠을 뿐이었다. 라이짐은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마리는 반란군이었고 자신을 통해 얻 은 정보를 반란군에게 넘겨주고 있었다. 그리고 하진은 그런 상황을 완전 히 파악하고 있었다. 라이짐도 모르고 있던 상황을 말이다. 라이짐은 마 리를 처음 만나게 된 일을 떠올려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라이짐은 하진이 자신을 술집에 데리고 갔던 걸 기억해 냈다. "그렇다면, 하진, 넌 일부러 나하고 마리를 만나게 한 건가?" 라이짐이 벽을 바라보면서 물었다. 벽면에는 연금술사의 등 빛이 비치 고 있었다. 위태로워 보이는 뿌연 빛이었다. "고의는 아니었어. 절반쯤은 의도된 행동이었지만 솔직히 말해서 사장 이 그렇게까지 나올 줄은 몰랐어. 그곳 사장은 네가 이중간첩이라고 생각 하고 있었을 거야, 적어도 처음에는. 바코쿠가 너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알려 주었다고 했으니까 말이야." 하진이 말했다. "사장이 강도를 만나서 죽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 라이짐은 여전히 벽면을 바라보면서 하진에게 말했다. "그래. 강도라면 강도지." "너였나?" "그랬을 수도 있고, 내 친구일 수도 있지. 그건 중요한 게 아내야, 라 이짐. 이제는 좀 냉정하게 생각해 봐. 너는 속은 거라고. 그러니 더 이상 마리에게 미련을 가지지 마. 그건 멍청한 짓이야. 일단 결정이 내려진 후 에 후회하는 것 보다 멍청한 일이 없다는 건 잘 알고 있겠지?" 하진의 말에 라이짐은 자신이 지금까지 도대체 무엇을 한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마리와 보냈던 시간들, 나누었던 이야기들. 그것들은 전 부 다 거짓이었다는 말일까? 하진의 말을 들었을 때, 라이짐은 마리에 대 한 이야기들을 모조리 부인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냉정하게 돌이켜 생각해 보니, 역시 하진의 말은 부정할 수 없는 말임에 틀림 없었 다. 속았다는 느낌, 배신감... 라이짐이 집무실에 들어올 때 가지고 있었 던 분노와 흥분은 이제 방향을 바꾸어 가고 있었다. "마리를 만날 수 있을까?" 라이짐은 이렇게 말했다. 아무리 마리에게 속았다고 해도, 그리고 그것 을 어떤 방법으로든 부정할 수 없다고 해도, 라이짐은 마리를 직접 만나 확인해 보고 싶었다. 그러지 않고서는 뜨겁게 달아올라 있는 자신의 가슴 을 식힐 방법이 없었던 것이었다. "내일 오전에 만나 봐. 오후에는 이 세상에 없을 테니까." 하진이 말했다. 마리가 죽는 다니. 라이짐은 하진의 입에서 나온 말을 다시 한 번 되뇌 어 보았지만 도무지 현실감이 느껴지질 않았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배신 당하고, 또 배신한 자가 사라지게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해 보지 못한 까 닭이었다. 라이짐은 천천히 걸음을 창가로 옮기면서 생각을 해 보았다. 지금 상황 과 앞으로 해야 할 일들에 대한 생각이었다. 라이짐은 하늘 한 복판에서 홀로 빛을 발하고 있는 달을 바라보았다. 달빛은 외롭게 별들과 이 땅을 비추고 있었다. 라이짐에게 먼저 떠오른 것은 자신이 정보부에서 맡고 있는 위치였다. 라이짐이 이 위치에 오게 된 것은 오직 빠른 판단과 행동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위치도 아니고 행동을 할 수도 없는 위치라 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무엇인가? 라이짐은 멍하니 달 빛을 바라보다가 하진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는 내가 반란군에게 넘어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나한테 말 해주지 않았어. 그리고 그것도 처음부터 말이지." 라이짐은 이렇게 말하면서 천천히 하진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나도 모르는 사람들을 고용해서 정보를 얻어왔고, 내가 한 일 이라고는 네가 만든 문서에 서명하는 일 뿐이었어." 하진은 라이짐의 말을 끊었다. "라이짐. 그렇게 까지 자신을 깎아 내릴 필요는 없어. 아무도 네가 이 제는 필요 없다고 말하지는 않는다고. 라이짐. 너는 백발영웅이야. 그걸 잊은 건 아니겠지? 왜 네가 사람들 앞에서 감찰부장의 자리에 오르고, 또 사형 집행을 주관해서 했는지 말이야. 사람들에게는 늘 전설이 필요해. 그리고 영웅도 필요하고. 그런 걸 믿으면서 살아가는 거야, 사람들은. 그 래야 윗사람 말을 믿고 따르지. 그건 너도 잘 알고 있잖아? 그 전설이 사 실이건 아니건, 그 영웅이 진짜건 아니건 말이야." 하진은 이렇게 말함으로 해서 라이짐이 정말로 이제는 정보부에 필요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라이짐은 지금까지 쌓여왔던 분노와 흥분이 한 순간에 허탈감으로 바뀌는 것을 느끼고는 휘청이며 다시 의자 에 쓰러지듯 앉았다. "아케르 장군도 알고 있었나?" 라이짐이 마지막으로 하진에게 물었다. 하진은 라이짐이 말 한 '장군' 이라는 호칭에 신경이 쓰이는지 잠시 미간을 찌푸렸지만, 곧 별 수 없지, 하는 얼굴이 되어서 라이짐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라이짐. 이제 곧 황제의 대관식이 있을 거라는 거, 알고 있겠지? 그렇 다면 더 이상 그런 걸 물어서는 안된다는 걸 알아야지. 어찌되었건 너도 이제 곧 제국의 시민이 될 테니까 말이야." 하진은 분명하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라이짐은 하진의 태도에서 아케르 가 모든 일을 지시했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니, 지시하지는 않았더라도 적어도 알고는 있었을 것이었다. 이렇게 일단 생각을 하고 보 니 라이짐은 우선 이중, 삼중의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마리, 하진, 아케르... 낮에 본 가투신은 물론이고 사형식을 불바다로 만들어 버린 순무, 제국의 이인자가 될 것이 분명한 타호루... 모두가 라이짐의 눈에는 자신을 배신한 사람으로 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라이짐. 너는 계속 날아야 하는 새야. 멈추어 서서는 안돼. 네가 지금 힘들거라는 거, 잘 알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멈추면 어떻게 되는지 알 아? 그건 바로 추락이야. 라이짐. 언제나 그렇지만, 추락은 한 순간이 야." 하진이 말했다. 추락. 라이짐은 추락이라는 단어에 집중했다. 땅으로 떨어지는 순간. 그리고 사라지고 끝나는 순간. 라이짐은 힘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는 더 이상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내일 마리, 만나봐. 내가 손 써 줄게." 하진은 대단한 인심이라도 쓴다는 듯한 말투로 라이짐에게 말했고, 라 이짐은 그렇게 말하는 하진에게 화를 낼 수도, 그렇다고 고마워 할 수도 없다는 걸 깨닫고는 그저 말 없이 집무실을 나설 수 밖에 없었다. 라이짐은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밤하늘이 밝은 것은 달이 빛을 내고 있 기 때문이었고, 그 달은 언제나 혼자라고 라이짐은 생각했다. 여름에 부 는 밤바람이 서늘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24457/24688 ━━━━━━━━━━━━━━━━━━━━━━━━━━━━━━━━━━━━━━━━ 제 목:[탐그루] 무엇이 우리를 평화에 들게 하는 관련자료:없음 30/30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7-26 18:21 조회:606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라이짐은 관사로 돌아와 침대에 쓰러지듯 몸을 던졌다. 피로도 아니었 고, 고통도 아니었다. 라이짐은 그저 서 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침대에 몸을 묻은 것이었다. 라이짐은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 썼다. 문득 이불 에서 마리의 냄새가 풍기는 것을 느끼고는 라이짐은 거칠게 이불을 집어 치웠다. 라이짐은 침대에 걸터 앉았다. 창밖에는 여전히 달이 빛나고 있었고, 연금술사의 등을 켜지 않은 방으로 달빛은 환하게 비추어 오고 있었다. 타호루가 했던 말이 떠오른 것은 그때였다. 타호루는 라이짐에게 외로울 때, 세상에 혼자 밖에 없다고 느꼈을 때, 반지의 정령을 부르라고 말했었 다. 라이짐은 왜 타호루가 자신에게 반지를 주었을까 생각해 보았다. 설 마 이렇게 되리라는 걸 알고 이 때 위로 받으라고 반지를 주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유는 뭐였을까? 라이짐은 침대에 걸터 앉아 한 참 을 생각했다. 라이짐은 먼저 에질리를 떠올렸다. 그러자 참을 수 없을 만큼의 분노가 한 순간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잠시 뿐이었다. 라이짐은 한숨을 토해내 면서 자리에 앉았다. "승리는 우리의 것이다." 라이짐이 말했다. 그러나 에질리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것으로 라이짐 은 한 가지를 더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 에질리가 나타난다면 이야기 할 수 있는 상대라도 있으련만. "라이짐 님." 등 뒤에서 에이스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라이짐은 깜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는 것은 에이스가 맞았다. 불에 그 을린 흉터, 한 쪽눈에 한 안대. 누가 한 밤 중에 보았다면 놀라 기절했을 지도 모를 외모를 보면서 라이짐은 안도의 한숨을 뱉어내었다. "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여기는." "그건 마리 님 때문이셨잖습니까. 이제 마리 님은 없습니다." 에이스가 말했다. 라이짐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에이스 앞으로 성큼 성큼 걸음을 옮기더니 에이스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에이스는 물 러 서지 않고 라이짐의 얼굴을 마주보고 있었다. "검은 엘프 족은 절대로 사람의 말을 거역하지 않지. 내가 왜 이제야 알았을까. 그 동굴에서 에이스가 이 꼴이 된 날 알았어야 했는데." 그리고 라이짐은 불현듯 생각이 났다는 듯이 이렇게 소리쳤다. "에질리, 나와!" 라이짐의 말은 마법의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라이짐의 말에 에이스는 에질리의 목소리로 대답했다. "부르셨습니까, 주인님." 에질리였다. 에질리가 몸속으로 들어가 있는 에이스의 모습은 푸른 달 빛을 받아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마치 청동으로 만들어진 조각상같은 모 습이었다. "왜 지금까지 속였지?" 라이짐은 에질리에게 이렇게 물었다. 에이스의 몸에 들어간 에질리는 이렇게 대답했다. "속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반지의 원칙대로 행동했을 뿐이었습니다." 라이짐의 에질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포기 했다는 듯한 태도라기 보다는 모든 걸 이해할 수 있다는 듯한 태도였다. "에질리. 승리는 우리의 것이다, 이게 마법의 말이었을까?" 라이짐은 에질리에게 이렇게 물었다. 라이짐이 이렇게 묻는 의도를 에 질리는 라이짐 다음으로 잘 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에질리는 반지 의 정령이었던 것이다. "진심을 담은 말은 마법의 말입니다." 에질리는 이렇게 말했고, 라이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제 그 말에는 진심이 담겨 있지 않아." 라이짐의 눈은 달빛을 따라서 흔들리고 있었다. "너를 탓해야 한다고 생각했어. 마리가 그 꼴이 된 것도, 내가 이 지경 이 된 것도 모두 네탓이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생각해 보니 나는 사람이 고 너는 반지의 정령이더군. 무엇이든 정령의 원칙에 따르는 반지의 정령 말이야." 라이짐의 목소리는 힘이 없었다. "모든 것이 에질리 탓이라고 생각했던 건, 순전히 반지의 소원에 대한 생각 때문이었어. 내 소원은 다 이루어졌지. 아케르 장군이 죽지 않는 소 원도, 그리고 돌아와 이곳을 장악하고 귀족 없는 세상을 만드리라는 소원 도. 그리고 소원은 반지의 원칙에 따라 이루어졌고, 덕분에 나는 이 꼴이 되고 말았어." 라이짐은 에질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라이짐의 눈은 달을 향해 있었고, 라이짐의 목소리는 자신을 향해 있는 것만 같았다.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던가요? 되돌아 올 수 없는 지점을 이미 지나셨 다고." 에질리는 마치 라이짐을 조롱하듯이 이렇게 말했다. 라이짐은 에질리의 말에 눈길을 돌리지 않았고, 그저 이렇게 말을 이어갔다. "그래. 승리는 우리의 것이라는 마법의 말, 한 때는 그게 내 마법의 말 이었지. 하지만 승리는 이루어졌고, 나는 그 대가를 치루고 있는 건지도 몰라.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에질리. 너를 탓하지 않아. 어차피 네가 아 니었다면 내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르니." 라이짐은 이렇게 말했다. 라이짐이 에질리에게 화를 내지 않은 것은 오 직 하나 뿐이었다. 모두가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된 순간, 자신의 곁에 있 을 수 있는 건 에질리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알아주시니 고맙군요." 에질리는 라이짐에게 감정없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하나만 말해줘, 에질리." 라이짐은 에질리의 감정없는 목소리에 신경쓰지 않고 이렇게 물었다. "승리는 우리의 것이라는 말, 그 마법의 말을 타호루가 가르쳐 준 건, 순전히 타호루의 욕심 때문이었을까? 그래서 나를 이용하기 위해서 그렇 게 한 거였을까? 너는 알고 있을거라고 믿어, 에질리." "제가 제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고, 라이짐 님이 라이짐 님의 방식대로 살아가고 계신 것 처럼, 타호루 님도 타호루 님의 방식대로 살아가셨을 뿐입니다." 에질리는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말했다. 라이짐은 에질리의 말에 조금도 게의치 않았다. "그래. 그랬겠지. 그랬을 거야." 라이짐은 이렇게 말하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냉정을 찾고 계시군요. 이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계신 겁니다, 라이짐 님. 멈추지 않고 목표를 향해 달려가시는 모습으로." 에질리는 라이짐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니. 이제 내 날개는 부러졌어." 라이짐은 이렇게 말하면서 옷장을 열었다. 그리고 옷장 밑바닥에 깔려 있는 상자를 집어 들었다. "시드의 귀군요." 에질리가 말했고, 라이짐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상자 안에서 잔뜩 녹이 슬어 있는 칼을 집어 들었다. 시드의 귀가 박혀있는, 한 때 복수의 뜻을 담고 있었던, 탐그루를 나설 때부터 몸에 지니고 있었던, 바로 그 칼이었 다. "이제 내게 남은 건 이것 뿐인지도 몰라." 라이짐은 이렇게 말하면서 칼을 달빛에 비추어 보았다. 하지만 잔뜩 녹 이 슨 칼날은 그저 탁한 빛을 발할 뿐이었다. 에질리는 라이짐의 그 모습 을 한참 동안 바라만 보고 있었다. 달이 무척이나 밝던 밤이었다. 라이짐이 마리를 찾아 시청 지하에 임시로 마련된 지하감옥으로 찾아간 것은 다음날 해가 뜨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어차피 시청에 들러야 했기 때문에 라이짐은 먼저 집무실을 찾았다. 사 실 굳이 하진의 얼굴을 보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지난 밤에 하진이 말 했듯이 하진의 도움 없이 처형 직전의 죄수를 면담한다는 건 어려울 것 같기 때문이었다. 사실 라이짐이 겨우 죄수 하나 만나는 일 때문에 하진 을 보고 가려고 마음먹고 있는 것만 봐도, 라이짐은 스스로 자신감을 많 이 잃고 있는 것이었다. 아무리 비공식적인 위치라고는 해도 라이짐은 제 국의 정보부장인데도 말이다. "간수한테 말해 놨어. 가보면 될거야." 하진이 라이짐에게 말했다. "하진.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언제는 말하고 물어봤나? 그냥 물어봐." 하진은 희죽 거리면서 라이짐에게 말했다. 보통 때 같았으면 하진의 저 웃음도 그냥 넘겨버릴 수 있었겠지만, 지금의 라이짐은 하진의 웃음이 꼭 자신을 비웃고 있는 것만 같았다. "언제부터였어?" "뭐가?" 라이짐은 하진이 되묻자 이렇게 고쳐서 정확하게 물었다. "그렇게 살기로 한 거 말이야. 난 네가 이런 사람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 없는데." 그래도 라이짐이었다. 라이짐은 하진에게 이렇게 물음으로 해서 자신의 자존심을 회복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과연 하진은 이 질문에 매우 난처해 하는 눈치였다. "글쎄. 나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하진답지 않은 솔직한 대답이긴 했지만, 그저 라이짐의 말꼬리를 잡는 정도에 머무르는 대답이었다. 라이짐은 그런 하진을 뒤로하고 집무실을 빠져 나왔다. 이제 결단을 내려야겠다는 생각이 더욱 확고해졌다. 라이짐은 용병단에서 자신의 꿈을 이루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일을 떠 올려보았다. 그것은 밍밍 십부장과 좀비가 부리는 늑대의 공격을 받았을 때와, 하잔에서 밍밍 십부장이 자신을 구하려다 죽는 것을 본 순간이었 다. 그 때 라이짐은 자신이 믿을 수 있는 것은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뿐이 라고 생각했었다. 그랬기에 누가 물었어도 라이짐은 약해져서는 안 된다 는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믿을 수 있는 사람 도,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것도, 라이짐에게는 남아있지 않았다. 지하로 통하는 계단을 밟으면서 문득 라이짐은 쓴웃음을 지었다. 분노 도 증오도 흥분도, 라이짐은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내가 원한 것이 이런 것이었던가. 마법의 말을 만들어 내었을 만큼 내게 절박했던 것이 이런 거였단 말인가. 라이짐은 허탈한 기분에 두 다리가 자꾸만 흔들리는 기분 을 느끼고 있었다. 모든 게 감흥 없이 느껴지고 있었다. 지하에 나 있는 복도에 걸려 있는 연금술사의 등도, 바닥에 고여있는 핏자국도, 벽면에 남아있는 누군가의 손자국 같은 고통의 흔적도, 라이짐에게 어떤 감흥도 주지 못하고 있었다. "비켜." 라이짐은 임시로 마련된 감방을 지키고 있던 간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간수는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났고, 라이짐은 감방 안으로 들어갔다. 감방 안에 앉아 있던 것은 나이 들어 보이는 사내였다. 고문을 당했는 지 이마에는 불로 지진 자국이 선명했고, 입술과 볼에는 터져 나왔다가 말라붙은 핏자국이 분명하게 보였다. 사내는 라이짐을 보자마자 몸을 뒤 로 빼면서 필사적으로 라이짐을 피하려고 했다. 라이짐은 사내의 눈을 볼 수 있었다. 사내의 눈에는 오직 공포와 살고자 하는 욕망 외에는 아무 것 도 남아있지 않은 듯 했다. 라이짐은 사내를 보자 마리도 이런 꼴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아무 감흥도 느끼지 못했던 라이짐 의 가슴 한 켠이 마치 예리한 칼날이 스치고 지나가는 듯 저려왔다. 아직 감정이 남아 있었던가. 라이짐은 이렇게 생각하면서 사내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자치대원이었습니다. 반란군으로 밝혀졌지요." 간수가 라이짐에게 말했다. "마리의 뒤를 밟아서 잡은 건가?" "예, 그렇습니다." 라이짐은 나이 든 자치대원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감방에서 나 왔다. "마리가 있는 곳은?" "이쪽입니다." 라이짐은 간수의 인도를 받아 복도 끝 쪽으로 걸어갔다. 마리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라이짐은 불안감부터 들었다. "반란군 윗대가리들은 참 다양도 하더군요. 노점상 주인에 과일가게 주 인, 전에는 술집 사장에 제빵기술자도 있었답니다. 그나저나 그렇게 한 자리에 모이다니. 참 멍청하기도 하죠." 간수는 라이짐을 인도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라이짐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마침내 마리가 갇혀 있는 감방 문이 열리는 순간이 왔다. 문이 열리자 라이짐은 손짓으로 간수에게 물러서 있으라고 말한 후 천천히 감방 안으 로 걸음을 옮겼다. 햇빛이 들어오지 않는 지하감방이었지만, 벽면에는 연금술사의 등이 설 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마리는 집에 있을 때와 별로 다르지 않은 모습이 었다. 씻지 못해 머리와 얼굴이 좀 지저분하다 뿐이지 고문을 당하거나 하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마리는 라이짐을 보자 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날 보는 게 무서운가요?" 라이짐이 말했다. 하긴. 이렇게 말을 하고 있는 라이짐의 목소리도 심 하게 떨리고 있었다. 라이짐은 자신도 마리를 보기가 이렇게 겁이 날 지 경인데 마리는 오죽할까 싶었다. 마리는 아무 대답도 없었다. "듣고 싶은 게 있어서 찾아 왔어요." 라이짐의 목소리는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가요? 나중까지도?" 라이짐은 마리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러자 마리는 벽쪽으로 고개를 돌 린 채 이렇게 말했다.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소용 있겠어요." 한숨처럼 힘없는 말투였다. 라이짐은 그런 마리를 보면서 뭐라고 더 이 야기를 해보려고 했지만 입이 잘 떨어지질 않았다. 어쩐지 마리가 돌아보 고 있는 벽보다 더 두껍고 묵직한 벽이 마리와 자신 사이에 놓여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요. 저는 문서를 훔쳤어요. 그리고 정보를 반란군에게 전해 주었 고요. 돈을 훔치는 건 어떻게 참을 수 있었지만, 정보를 빼 오는 일은 어 쩔 수 없었어요. 말씀드리지 않았던가요. 원래 이런 여자라고." 마리의 목소리는 다분히 자조적이었다. 라이짐은 마리의 그런 목소리가 듣기 싫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라이짐은 아니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자 신과 함께 했던 시간들은 그래도 진심이 아니었느냐고 말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말들은 라이짐의 입 속에서 맴돌기만 할 뿐이었다. "저는 여기서 죽을 거예요. 그리고 그게 제가 치러야 할 대가에요." 마리는 낮은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라이짐은 마리의 어깨가 조금 씩 흔들리고 있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대가라. 그렇다면 마리는 뭘 얻었지요?" 라이짐이 마리에게 물었다. 마리의 어깨가 몇 번 들썩이는가 싶었지만, 마리는 심호흡을 몇 번 한 뒤에 다시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다. "제가 해야 할 일. 그 뿐이었어요." "말해줘요, 마리." 라이짐이 마리에게 다가가면서 말했다. 라이짐의 발소리는 지하 감방 안에 메아리처럼 울렸고, 소리를 들은 마리는 깜짝 놀라면서 벽 쪽으로 물러섰다. "마, 말할 테니 가까이 오지 말아요." 마리는 라이짐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번에는 겁에 질린 듯한 말투였다. "마리. 나는 강제로 묻고 있는 게 아니에요. 그저, 진심을 알고 싶을 뿐이지요." 라이짐은 아주 천천히 마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마리는 천천히 이렇게 대답했다. "미안해요. 그리고 고마워요." 언젠가 라이짐에게 했던 말이었다. 비록 라이짐이 받아들일 수 있는 그 의미는 달랐지만 말이다. "그 일을 해서 해야 할 일을 얻었다고 했지요." 라이짐은 마리에게 이렇게 물었다. 마리는 여전히 돌아선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하고 싶었던 일은 뭔가요?" 라이짐이 묻자 마리는 참았던 울음을 한 번에 터트리고 말았다. 서러운 듯한 울음이었다. 라이짐은 당황하며 마리에게 다가가려고 했다. 하지만 라이짐의 발소리가 들리자 마리는 울음을 그치고는 날카롭게 소리쳤다. "오지 말아요! 제발!" 마리의 목소리는 절박하게 들렸다. 라이짐은 이유를 짐작할 수는 없었 지만, 그냥 마리에게서 떨어져 있기로 마음먹었다.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제가 얼굴을 보이고 싶어하지 않는 건 이해해 주세요. 그냥 이렇게 생 각해 주시면 어떨까요? 씻지 않은 얼굴 보이고 싶지 않아서 라고." 마리는 라이짐에게 이렇게 말했고, 라이짐은 그 말에서 마리가 진심으 로 하고 싶었던 게 무엇인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너무 늦어버린 후였다. 그 무엇으로도 마리는 살릴 수 없을 것이었다. "그리지아는 정보부 사람들이 데리고 갔어요." 마리가 라이짐에게 말했다. 라이짐은 마리가 보지 못할 거라는 것도 잊 은 듯, 마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요." 마리가 말했다. "그리지아를 보살펴주세요. 그리고 절 기억해 주세요." 라이짐은 술집에서 '최후의 환상'이라는 곡을 불렀던 마리를 떠올려 보 았다. 아마도 라이짐의 기억에서 마리는 언제나 그 때의 모습으로 기억에 남을 것만 같았다. "약속할게요." 라이짐은 목구멍이 좁아진 느낌이 들었다. 침을 삼키기가 다 어려울 지 경이었다. "돌아가세요 이제, 제발." 마리는 라이짐에게 이렇게 말하고는 그대로 침묵을 지켰다. 라이짐은 뭔가를 정리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로 마리를 만나러 온 것이었다. 하지 만 라이짐이 얻은 것은 정리된 생각이 아니라 그저 혼돈과 향할 곳 없는 분노, 그리고 슬픔뿐이었다. 라이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감방을 나 섰다. 감방에서 나오자 간수가 라이짐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무슨 일 있느냐는 듯한 얼굴을 했다. 라이짐은 아무 말도 없이 다시 하진의 집무실로 돌아 왔다. "보고 왔어?" 하진은 꼭 식사는 했고? 하고 묻는 듯이 라이짐에게 물었다. 라이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너무 미워하지 마, 그 여자. 다른 녀석한테 들은 건데 말이야, 그 술집 사장이 죽었을 때, 마리는 그게 네 짓이라고 생각했었다고 하더 라고. 하지만 반란군에게는 이야기하지 않았어. 나름대로는 너를 생각해 서 한 일이었을 거야." 하진의 말은 라이짐의 마음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나온 말이 분명했다. 라이짐은 하진의 이야기를 듣자 다시 한 번 예리한 칼날이 가슴을 베고 지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이제는 다 끝난 일이야. 용서하고 잊어버려." 하진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말했다. "...고문했나?" 라이짐이 하진에게 물었다. 분노라기보다는 그저 슬픔을 억누르면서. 하진은 라이짐의 질문에 키득거리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아주 약간." 하진은 손가락을 들어서 조금이라는 표시를 하면서 말했다. 라이짐은 나이 든 자치대장의 이마에 나 있던 불에 데인 흉터를 떠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왜 마리가 얼굴을 보이고 싶어하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 "오늘 사형은 누가 주관하지?" "내가 할거야. 라이짐. 너는 집에 가서 쉬어. 더 필요한 건 없으니까. 너는 어차피 대외적인 행사만 주관해 주면 되잖아? 여기." 하진은 금화가 가득 담겨 있는 돈주머니를 라이짐에게 내밀면서 말했 다.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24458/24688 ━━━━━━━━━━━━━━━━━━━━━━━━━━━━━━━━━━━━━━━━ 제 목:[탐그루] 무엇이 우리를 평화에 들게 하는 관련자료:없음 29/29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7-26 18:22 조회:744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이걸로 며칠 쉬어. 여자한테 얻은 상처는 여자로 푸는 게 제일이지. 아니면 술이나 진탕 먹어도 좋고. 한 가지 충고하겠는데 말이야, 저축은 하지 마." 하진은 이렇게 말하면서 다시 한 번 키득거렸다. 라이짐은 하진의 키득 거리는 웃음이 이렇게 까지 소름끼치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고 생각했다. "부탁이 있어." 라이짐은 울음 섞인 목소리를 감추기 위해 낮게 하진에게 이렇게 말했 다. 뱃속부터 뜨거운 기운이 올라와 당장이라도 눈으로 몰려 쏟아질 것만 같았다. "목을 벨 거지?" "그게 빠르고 깨끗하니까." 하진의 말에 라이짐은 이렇게 부탁했다. "그럼 두건을 씌워 줄 수 있겠나?" 하진은 의아하다는 표정이 되었다가 라이짐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그래. 뭐 어려울 건 없지. 그런데 왜?" 라이짐은 하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관사로 돌아갔다. 물론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금화 주머니에는 손도 대 지 않았다. 하진은 그렇게 돌아서는 라이짐에게 뭐라고 말했지만 라이짐 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라이짐은 관사로 바로 돌아온 후,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모아둔 금화 몇 닢을 먼저 챙겼고, 그 다음으로 여행용 가방을 챙겼다. 가방에는 치료 석과 야전에서 쓸 천막, 그리고 야전 모포 한 장이 전부였다. 라이짐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리가 없는 관사는 이제 자신의 관사라 는 생각이 들지 않았고,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낯설게만 느껴졌다. 라이 짐은 마리의 죽음을 생각했다. 집행인의 칼날이 번득이고, 마리의 목이 베어져 땅에 구르고, 핏줄기가 치솟고... 하지만 라이짐의 상상 속에서 마리의 얼굴에는 두건이 씌워져 있었다. "떠나실 건가요?" 에이스였다. 어느새 나타난 에이스는 라이짐을 바라보고 있었다.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야." 라이짐의 말에 에이스의 불에 그을린 흉터로 일그러진 얼굴이 웃음을 지었다. "상관할 일이 아닐 수가 없지요. 저는 라이짐 님의 반지의 정령인 걸 요." 에이스는 이렇게 말했다. 라이짐은 그런 에이스를 바라보면서 뭐라고 한 마디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그리고 뭐라고 말하는 대신 옷장 안에서 상자를 꺼내 집어들었다. 상자 안에는 시드의 귀가 박혀있는 녹슨 칼이 들어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제 이것 뿐인 것 같아." 라이짐은 혼잣말처럼 이렇게 말하면서 칼을 집어들었다. 칼날은 형편없 이 녹슬어 있었고, 칼자루에 박혀있는 시드의 귀도 이제는 제 색깔을 잊 고 있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하지만 라이짐은 멈추 어 설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비록 날개가 부러졌다고 해도 라이짐은 계속해서 날아야만 했다. 그러지 않는다면 라이짐에게 남은 것은 추락뿐 일 것이었다. 그것도 권력의 자리에서의 추락이 아닌, 생명을 잃는 추락 일 것이었다. "저는 반지의 정령입니다. 라이짐 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게 뭔지 저 는 알지요." "이루어질까?" 라이짐은 녹슨 칼날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이루어 질 것입니다, 반지의 방식대로." 에이스의 몸을 입은 에질리가 말하자 라이짐은 조금은 안심이 되는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어찌되었건 자신이 원하는 바는 이루어 질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그것이 반지의 방식대로 라고 하더라도. 라이짐은 두렵 지 않았다. 그 대가가 설혹 자신의 목숨일 지라도 말이다. 라이짐은 아무에게도 행선지를 알리지 않고 프라브리티를 떠났다. 타고 있는 뮤도 시장에서 산 것이었고, 행선지를 물을 만큼 어리석은 상인에게 산 것은 아니었기에, 라이짐은 그야말로 조용히 프라브리티를 떠날 수 있 었다. 프라브리티의 성곽을 벗어났을 때, 라이짐은 한 번 뒤를 돌아보았 다. 푸른 하늘 아래 펼쳐져 있는 프라브리티의 모습 너머로 안개에 휩싸 인 듯 신비롭게 보이는 그리지아 산이 보이고 있었다. 그리지아. 라이짐은 그리지아를 두고 가야 한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마도 고아원에 가게 되겠지. 어쩌면 입양될 수도 있 을테고, 그렇게 된다면 오히려 자신과 함께 하는 것 보다 훨씬 나은 생활 을 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돌이켜 보면 늘 목표를 향해 달려가기만 했던 라이짐의 삶이었다. 이 목표 뒤에는 무엇이 있을까. 라이짐은 그것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어 쩌면 이 다음은 아무 것도 없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두려움으로 바뀌는 것 을 경계한 까닭이었다. 라이짐은 프라브리티에서 탐그루로 향하는 최단거 리를 생각해 보았다. 먼저 임프시를 지나 사비치 다리로 대청하를 건너고 팜 산맥을 타고 내려가 하잔을 지나서 탐그루로 가는 길을 택하기로 라이 짐은 마음 먹었다. 그것이 성황청의 사제들을 만날 확률을 최소화하는 길 이면서 최단거리 길이라고 라이짐이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라이짐은 뮤를 달리기 시작했다. 뒤를 돌아볼 생각 같은 것은 조금도 해 보지 않았다. 프라브리티를 벗어나 첫 번째 야영의 밤이 되었을 때였다. 라이짐은 적당한 나무 아래에 백년수의 배설물을 모아 모닥불을 피워놓 고 깜빡 잠이 들었다. 라이짐이 한 밤중에 깨어난 것은 땅을 통해서 들려 오는 뮤 발굽소리 때문이었다. 야전에서 쌓은 라이짐의 본능은 위험을 알 렸고, 그것은 아무리 깊은 잠이라고 해도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라이짐은 뮤 발굽소리가 가까워 오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 녹슨 칼을 뽑아 들고 나무 위에 올랐다. 라이짐은 나무 위에서 추적자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물론 추적자라는 것은 라이짐의 본능이 말해 준 것일 뿐, 특별 히 그렇게 생각할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그냥 이곳을 지나 치는 여행자였으면 좋으련만. 라이짐은 이렇게 생각하면서 밤하늘을 바라 보았다. 달빛이 모닥불의 연기에 일그러지고 있었다.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유령이라도 지나가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라이짐은 이제는 기울 고 있는 달빛을 바라보면서 추적자건, 여행자건, 어서 빨리 나타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뮤 발굽소리가 귀에 확실하게 들려오기 시작하자 멀 리 뮤를 탄 사내들의 모습이 달빛 아래 드러났다. 라이짐의 손에 들려 있 는 것은 오직 녹슨 칼 한 자루뿐이었다. 복수도 하기 전에 죽어서는 안 된다. 라이짐은 이런 생각에 온 몸이 굳어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모두 다섯이었다. 다섯 마리의 뮤에 올라타고 있는 다섯 사내를 나무 위에서 바라보면서 라이짐은 저 중에 누가 두목일까 생각해 보았다. 아무 래도 두목을 인질로 잡는 편이 훨씬 수월할 것 같았다. "보이지 않습니다." "조금 전까지 있었던 것 같은데요." "주변을 살펴봐!" 아주 짧은 시간 오간 대화였지만, 라이짐은 두 가지 귀중한 정보를 얻 을 수 있었다. 하나는 그들이 추적자가 분명하다는 사실이었고, 또 하나 는 그들중 두목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었다. 라이짐은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움직인 다음, 두목 격인 사내가 타고 있는 뮤가 바로 발 밑까 지 오기를 끈기 있게 기다렸다. 그리고 운이 닿았는지 마침내 두목격의 사내가 라이짐이 서 있던 나뭇가지 밑에 섰고, 라이짐은 한 순간에 뮤에 뛰어 내려 두목의 뒷자리에 떨어졌다. 그러자 신경이 예민한 뮤가 갑작스러운 라이짐의 등장에 놀라면서 앞발 을 치켜들며 울부짖었고, 라이짐과 두목 격인 사내는 동시에 땅에 떨어졌 다. 하지만 두목 격인 사내는 전혀 예상치 못하고 있었던 공격이었고, 라 이짐의 경우는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자세를 바로 잡은 것 도, 그리고 칼을 먼저 목에 들이 밀 수 있었던 것도 라이짐이었다. 라이 짐은 두목 격의 사내 뒤편으로 돌아가 왼 팔로는 상대의 한 팔을 꺾고 오 른 팔로는 목줄에 칼을 들이밀었다. "무기를 버리라고 해." 라이짐은 짧고 강하게 사내에게 명령했다. 그러자 뜻밖의 대답이 흘러 나왔다. "라이짐! 나야, 나. 하진!" 하진이라는 말에, 라이짐은 일단 잡고 있는 사내의 다리를 살펴보았다. 사내의 다리는 의족이 분명했다. 라이짐은 팔을 풀고 목줄에 대었던 칼을 내렸다. 하지만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하진을 칼이 닿을 수 있는 곳에 두는 것을 잊지는 않았다. 나머지 네 사내들이 라이짐을 순식간에 에워쌌 다. 하지만 하진은 손을 들어 그들을 제지했다. "라이짐. 아무 말도 없이 이렇게 떠나버리면 어쩌라는 거야?" 하진이 인상을 쓰면서 말했다. 라이짐은 하진이 자신을 따라왔다는 사 실에 쓴웃음을 지었다. 완전히 필요 없는 존재는 아니라 이건가. 라이짐 은 하진에게 천천히 이렇게 물어보았다. "높으신 몸께서 몸소 오셨군. 애들 시키지 그랬어?" 라이짐의 말에 하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뱉은 후 이렇게 대꾸했다. "정보부장을 찾아 나서는 일을 아무에게나 시킬 수는 없는 일이지." "왜? 꼭 내가 결재해야 하는 일이라도 있었던 거야?" 라이짐의 말에 하진은 불쾌하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네 명의 사내 는 모두 뮤에서 내려 하진의 뒤쪽으로 섰다. 라이짐은 그들이 허리에 찬 칼을 언제라도 뽑을 수 있도록 손을 가져가는 것을 바라보면서 긴장을 늦 추지 않았다. 달빛을 받은 하진의 칼이 푸른 이빨을 드러내고 번득였다. "이거 참 의외로군. 에이스 자매가 뒤따라 왔던가? 나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는데." 라이짐은 이렇게 말하면서 칼을 거두었다. 어차피 칼을 뽑게 된다면 라 이짐의 실력으로 다섯을 벤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라이짐이 지 금 선택할 수 있는 거라고는 오직 배짱으로 하진을 상대하는 것뿐이었다. "시침떼지마, 라이짐." 하진은 라이짐에게 이렇게 말했다. "시치미? 무슨 소리지?" 라이짐은 네 명의 사내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하진에게 이렇게 되물었다. 바람결에 흔들리는 모닥불 때문에 하진의 얼굴은 어두 워졌다 밝아졌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에이스 자매 말이야. 네가 데리고 갔잖아." "에이스 자매? 나는 그런 적 없는데." "그럼 에이스 자매가 모두 어디로 사라져 버린 거야?" 라이짐은 하진이 뭔가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에이스 자매가 사라져?" 라이짐은 하진에게 이렇게 물었다. 다음 순간, 하진의 눈빛이 한 순간 달빛보다 푸르게 빛나는 걸 라이짐은 느낄 수 있었다. "젠장. 너도 모르고 있구나." 하진은 이렇게 말하면서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뒤에 서 있던 네 명 의 사내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지 알 수 없다는 듯이 당혹스러운 얼 굴이 되었다. "앉아들. 서 있지 말고. 훈련소에서 배우지 않았나? 자세를 낮추지 않 으면 적들의 표적이 되기 십상이라는 거 말이야." 하진은 이렇게 농담처럼 앉으라고 부하들에게 명령했지만, 부하들은 엉 거주춤 자리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것도 뮤 옆에 바짝 붙어서 말이다. 누 군가가 자신들을 노리고 있다고 하진이 경고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어? 내가 이리로 갈 거라는 걸?" 라이짐은 모닥불 가에 앉으면서 하진에게 물었다. "네가 갈 곳이 어디 있겠나 싶었지. 보나마나 탐그루로 돌아 갈 게 분 명하고, 그렇다면 여길 지나겠다 싶었지. 오늘 밤, 늦으면 내일 밤 만나 게 될 거라고 생각했어. 우리는 밤에도 쉬지 않고 추적할 생각이었으니 까." 하진의 설명에 라이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용건은 끝난 건가? 에이스 자매가 걱정이 되어서 따라온 모 양인데." 라이짐은 차갑게 하진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에이스 자매가 없어 졌다니 무슨 일일까. 누군가가 떠나라고 명령을 내리지는 않았을 테고. 어쩌면 에질리가 무슨 수를 쓴 게 아닐까? 라이짐은 에질리가 했던 '반지 의 방식대로'라는 말이 어쩐지 불길한 예감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말하면 섭섭하지. 정보부장을 찾아 온 데는 그런 이유만 있는 건 아니었어. 여기. 이거 받아." 하진은 이렇게 말하면서 품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집어들었다. 라이짐 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여비라면 나도 넉넉해." "아냐, 이건. 이건 휴가증이야." 하진은 라이짐에게 이렇게 말했다. "언제든 정보부장 자리로 돌아오라는 뜻이야. 여기에는 아케르 황제 폐 하의 뜻이 담겨 있어." 하진이 말했다. "대관식은 언제지?" 황제 폐하라는 호칭을 들은 라이짐이 하진에게 이렇게 물었다. "내일." 하진은 이렇게 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가 뭘 하러 가는지 대충은 짐작하겠어. 우리 애들 딸려 줄까?" 하진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의족 때문에 중심을 잡지 못한 하진이 한 차례 휘청이자, 네 사내가 동시에 달려들어 하진을 부축 했다. 하진은 네 사내의 손길을 뿌리쳤다. 라이짐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줄 알았어. 개인 적인 일이고, 또 남의 손을 빌려서는 안 되는 일일 테니 말이야." 하진은 이렇게 말했다. 넘겨짚은 것만은 아닐 것이었다. 언젠가 탐그루 에서 있었던 일을 하진에게 들려준 기억이 있었으니까. 라이짐은 '너, 나 를 이해해 주고 있구나. 눈물이 다 날 지경인걸'하고 비꼬아 주려다가 그 만 두었다. 만약에 수가 틀려 버리면 불리한 건 라이짐 자신이지 결코 하 진이 아니라는 걸 라이짐은 잘 알고 있었다. "죽지 마라, 라이짐." 하진이 뮤에 오르면서 말했다. 오래간 만에 듣는 용병단 식 인사였다. 라이짐도 웃는 얼굴로 하진에게 인사했다. "그래. 너도 죽지 마라, 하진." 하진은 몇 걸음 뮤를 뒷걸음치게 몬 다음 뮤의 머리를 돌려 프라브리티 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라이짐은 한 참 동안 하진이 건네준 휴가증을 바 라보았다. 언젠가 소용이 닿게 될지도 모를 물건이었지만 라이짐은 그것 을 모닥불 한 가운데에 집어던져 버렸다. 휴가증은 순식간에 시커먼 재로 변해버렸다. 종이가 탈 때 튀어 오르는 불티와 열기를 바라보면서, 라이 짐은 순무를 떠올렸다. 떠날 수도 있었을 텐데 굳이 그런 방법을 택해야 만 했던 순무의 심정이, 타오르고 있는 불꽃을 바라보자 이해가 될 것도 같았다. 라이짐은 불과 비명소리, 그리고 굉음의 기억이 떠올라 밤새 나쁜 꿈에 시달려야 했다. 탐그루로 향하는 동안 라이짐은 말이 없었다. 특별히 말을 걸어오는 사 람도 없었을 뿐 아니라 라이짐이 거의 의도적으로 피하기까지 했기 때문 이었다. 하잔 시를 지날 때에는 아예 시 외곽에서 야영을 해 가면서 사람 들을 피하기까지 했다. 마음을 약하게 먹어서는 안 된다. 결코 뒤돌아 서서도 안 된다. 라이짐 은 이렇게 생각하면서 쉬지 않고 탐그루로 뮤를 몰았다. 라이짐의 모습은 마치 자기 자신에게 채찍질을 가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잔을 지나 사비치 다리를 건너 팜 산맥을 타고 탐그루로 향하면서, 라이짐은 언제부터인가 속도를 줄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서둘러서 탐그루에 가야 할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어쩌면 라이짐 자신이 복 수를 한다는 사실을 두려워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라이짐은 다 시 한 번 속도를 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음을 다잡아먹어야 한다. 멈추 어 서서도, 후회해서도 안 되는 길. 라이짐은 이렇게 생각하면서 끊임없 이 뮤를 재촉했다. 팜 산맥의 한 복판에 다다랐을 때, 라이짐은 눈에 익은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용병단이 있던 자리 근처였다. 산세는 물론이고 나무 하나, 바위 하나하나가 눈에 익었다. 햇빛을 받은 나뭇잎들은 예전처럼 반짝이고 있 었다. 라이짐은 이곳에서 보냈던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을 떠올려 보고는 혼자 쓴웃음을 지었다. 이곳에서 칼을 잡고 사람을 죽이는 법을 배웠지. 그리고 왜 사람을 죽 여야 하는 가도. 하지만 지금 나는 그 때 배운 것과는 전혀 다른 이유를 가지고 다시 이곳을 지나고 있다. 그렇다면 그 때 배운 것들은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라이짐은 이렇게 생각을 계속하다가는 더 이상 길을 가기 힘들 것 같았다. 라이짐은 그냥 옛 기억이나 떠올리면서 이곳을 지 나기로 마음먹었다. 추억은 그림자처럼 나무 하나, 연못 하나, 구름 한 점마다 달라붙어 있었다. 이 나무를 지나고 있노라면 함께 했던 단원들의 얼굴이 떠올랐고, 저 연못을 지나다 보면 칼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 오는 듯 했다. 라이짐은 잠시 쉬어 갈까 하는 생각에 만만한 바위에 걸터앉았다. 저 멀리 용병단이 있던 자리가 보였다. 그러고 보니 하잔으로 반란군을 토벌 하러 나갔던 이후로 돌아오지 않았구나. 저렇게 주둔지가 보이지 않는 걸 보니 말이야. 라이짐은 생각했다. 하잔을 떠날 때 보이지 않도록 마법으로 보호한 용병단의 주둔지는 아 직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어떤 마법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타호루의 마 법은 보이지 않게 할 뿐 만 아니라 실제로 그곳에 아무 것도 없게 만들 수가 있다고 했다. 어디론가 보이지 않는 곳으로 주둔지를 옮겼다가 다시 나타나게 하는 것일까? 라이짐은 생각하면서 손에 잡히는 돌을 하나 집어 연못에 집어 던졌다. 파문은 수면 위에 일어 서서히 번져갔다. 그 때였다. 라이짐은 등뒤에서 인기척을 느끼고는 마치 산짐승처럼 재 빠르게 바위 밑으로 몸을 날렸다. 칼을 뽑아 들기는 했지만 이렇게 녹슨 칼을 보면 대번에 얕잡아 볼 게 틀림없었다. 만약을 대비해서 단검도 몇 개 배낭 안에 챙기기는 했지만, 단검으로는 해결 할 수 없는 상대일지도 몰랐다. 기습밖에는 방법이 없는데. 어떻게 해야 녀석을 단칼에 해치울 수 있을까. 라이짐은 인기척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면서 인기척이 들려오 는 바위 반대편으로 천천히 기어서 움직였다. "이거, 들짐승인가 했네." 라이짐은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슬그머니 고개를 처 들었다. 앞 에 낯익은 얼굴이 라이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차이린?" 라이짐은 기어가는 자세 그대로 이렇게 말했다. "그래. 나야, 차이린. 그렇게 기어가고 있으니 짐승인지 알았지 뭐야? 까딱 잘못 했으면 내 화살에 고슴도치가 될 뻔한 줄이나 알아." 차이린은 손에 들고 있던 활을 내리면서 웃음을 지었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요." 라이짐은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에 붙어 있는 풀잎을 떼어내면서 말했 다. 이런 곳에서 차이린을 보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차이린을 다시 보 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해 보지 않았는데. 라이짐은 차이린이 고향으로 가지 않고 이곳에 있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나야 여기서 사냥이나 하면서 살고 있어. 곧 떠날 생각이지만. 그나저 나 소문이 사실은 사실인가 보네. 정보부장이 이렇게 직접 온 걸 보니 말 이야." 차이린은 이렇게 말하면서 라이짐이 몸을 숨겼던 바위에 걸터앉았다. 차이린의 눈은 라이짐이 들고 있던 녹슨 칼을 바라보고 있었다. 라이짐은 얼른 칼을 배낭 안에 집어넣었다. 그런데 소문이라니 무슨 소문을 말하는 걸까? 라이짐은 차이린에게 뭐라고 되물어야 할까 생각하다가 이렇게 말 했다. "저는 이제 정보부장이 아니에요. 다 때려치웠어요." 라이짐이 말했다. "그래? 그럼 여긴 무슨 일이야?" "갈 곳이 있어서요. 그런데 무슨 소문이요?" 라이짐은 자신의 행선지를 밝히지 않으려고 대답은 짧게 하면서 얼른 차이린에게 이렇게 물었다. 차이린은 대충 짐작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 덕 하고는 라이짐의 말에 이렇게 말했다.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24540/24688 ━━━━━━━━━━━━━━━━━━━━━━━━━━━━━━━━━━━━━━━━ 제 목:[탐그루] 무엇이 우리를 평화에 들게 하는 관련자료:없음 29/29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7-27 20:12 조회:596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먼저 하나 물어보고. 정보부장 때려쳤다는 거, 정말이야?" 차이린의 물음은 어쩐지 미덥지 않다는 듯한 목소리였다. 라이짐은 얕 은 한숨을 뱉어내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차이린이 백부장 직을 그만둔 게 정말인 것처럼요." 라이짐이 이렇게 말했을 때야 차이린은 아하, 하면서 알아들었다는 얼 굴을 하였다. "그래서 모르고 있구나. 떠난 지 꽤 된 모양이네, 그럼?" 차이린이 라이짐에게 묻자, 라이짐은 고개를 끄덕였다. "도대체 무슨 소문인데요?" "내가 여기에 온 건 완전히 마음을 정리 할 수 없어서였어." 차이린이 말했다. 라이짐은 듣고 싶은 소문 대신에 엉뚱한 소리를 하는 구나 싶긴 했지만 일단 끝까지 들어보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쫓겨난 고향, 돌아가 봐야 뭘 하겠어. 원수? 복수? 그런 게 무 슨 의미가 있겠어.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차이린은 이렇게 말하면서 바위에 걸터앉은 채로 다리를 흔들었다. 차 이린의 발목에 걸려 있는 해골 모양의 고리가 흔들리면서 소리를 내었다. 라이짐은 기억하고 있었다. 차이린이 왜 고향을 떠나 왔는가를. 차이린의 아버지가 어떻게 해서 죽게 되었는가를 말이다. "살아 돌아오지 않으니까 필요한 거겠죠." 하지만 라이짐은 차이린의 말에 이렇게 대답했다. 이렇게 라도 말하지 않으면 애써 다잡은 마음이 흔들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라 이짐의 말에 차이린은 피식하고 웃음을 지었다. "탐그루로 가는구나." 차이린이 말했다. 라이짐은 자신이 한 말 때문에 자신의 행선지는 물론 이고 목적까지 들켜버렸다는 생각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명 색이 정보를 다루는 부서에서 근무했다는 사람이 유도심문에 걸려든 셈이 되었으니 말이다. 라이짐은 아무 말도 없이 차이린의 눈을 피했다. 문득 바람이 불어와 나뭇잎들을 뒤흔들고 지나갔다. 햇살이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로 흩어져 눈이 다 부셨다. 평화로운 오후의 한 때였다. "나는 너하고는 다르게 생각했어. 원래 사냥꾼이었으니 그냥 사냥이나 하면서 사는 게 낫겠다 싶었지. 솔직히 용병단 시절이 좋았어. 프라브리 티에서 보낸 시간들, 생각해 보면 끔찍해." 라이짐은 차이린이 이렇게 이야기하는 이유를 대충은 짐작 할 수 있었 다. 반란군에게 화살 몇 발 쏘았다고 이겨내지 못하고 프라브리티를 떠난 차이린이었다. 라이짐은 그런 차이린을 이해는 할 수 있었지만 역시 차이 린은 약했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그래서 어디로 갈까 하다가 용병단 생활을 했던 이곳 주둔지로 돌아온 거야. 여기라면 지형도 잘 알고 잡히는 동물들도 잘 알고 어디다 팔아야 할 지도 잘 아니까. 여기서 오랫동안 사냥하면서 살고 싶었는데... 이제 는 틀려 버렸어." 라이짐은 차이린이 이렇게 말하자 다시 한 번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는데요? 무슨 소문이 들린다고 했는데..." "아케르 단장이 황제 대관식을 가진 건 알지?" "제가 떠나기 전에 곧 한다고 했으니까요." "그래. 대관식 날 아케르 단장은 성황청이 있는 자나크를 토벌하겠다고 공언했어. 이제 이곳이 불바다가 될 날도 멀지 않았다는 말이지. 아무래 도 이곳에 주둔지를 마련하지 않겠어? 잘 알고 있는 지역인 데다가 이곳 에서 공격해 들어가는 편이 여러 모로 유리하겠지. 다른 곳에서 공격해 들어간다고 해도 일단 이곳에서 한 번은 집결할 거야. 그럼 이곳에서 사 냥하던 시절은 끝이지." 차이린은 이렇게 말하면서 허공을 바라보았다. 차이린이 바라보고 있는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텅 비어 있었다. 라이짐은 생각해 보았다. 이곳 으로 몰려들 아케르가 이끄는 몇 개의 군단을. 그리고 군단 병력이 쏟아 부을 뜨거운 열쇠를. 아마도 연금학 신병기는 이곳 팜 산맥은 물론이고 탐그루까지 완전히 불바다로 만들어 버릴 게 틀림없었다. 라이짐은 아케 르 군단의 군화 소리를 떠올려 보았다. 분열 행진의 군화소리였다. 발을 맞추어 진군해 들어오는 병력과 겁에 질린 탐그루 시민의 얼굴이 눈에 선 하게 보이는 듯 했다. "... 그럼 이제 어떻게 할건가요?" 라이짐이 차이린에게 물었다. 한 때 차이린에 대해서 열등감을 가지고 인정받고 싶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불쑥 떠올랐다. 하지만 이제 같은 처지 가 되고 나니 라이짐은 그 때 도대체 왜 그랬던가 싶을 지경이었다. 라이짐의 질문에 차이린은 이렇게 대답했다. "다른 곳으로 가 봐야지. 당분간은 전쟁이 없을 곳으로 말이야." "그렇다면...?" "타실 쪽. 악마의 입 근처가 좋을 것 같아. 거기라면 짐승도 잘 잡히고 당분간은 전쟁도 없을 것 같아." 라이짐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만나자마자 헤어지는구나. 물론 같 이 있을 이유도, 같이 있을 방법도 없었지만, 이제 헤어지면 다시 만날 기약이 없었다. 라이짐의 표정에 그런 생각이 드러났는지, 차이린은 라이 짐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장은 가지 않을 거야. 일단 가야 할 곳이 있거든." 차이린의 말에 라이짐은 차이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차이린의 얼굴에 는 흡족한 빛이 흐르고 있었다. "탐그루에서 뭘 좀 구해야겠어. 떠나기 전에 말이야." 차이린은 웃으면서 말했다. 차이린이 라이짐에게 이렇게 제의 한 것이 대단한 호의에서 나온 말이 라는 걸 라이짐은 금새 알아차리지 못했다. 차이린이 이렇게 설명을 해 주기 전까지는. "성황이 있다는 탐그루는 물론이고 탐그루 주변은 경계가 삼엄해. 나도 겨우 들어갔다가 나올 정도라고. 물론 탐그루에 뭘 내다 파는 일은 드물 지만 그래도 연금술사의 등이나 좋은 화살촉을 사려면 탐그루에 가야 하 거든." 차이린은 한 쪽 눈을 깜빡 하면서 라이짐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 차 이린의 이 말은 사실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라이짐은 탐그루까지 인도해 주겠다는 말과 같은 말이었다. 그러나 라이짐은 그런 차이린의 말을 그대 로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정보부에서 근무한 탓이었을까. 라이짐은 일단 의심을 하고 그 의심을 벗길만한 이유를 찾아내는 데에 익숙해져 있 었다. "왜 돕는 거죠?" 라이짐은 차이린에게 이렇게 물었다. 차이린은 라이짐이 미안해서 그러 는가보다 싶었는지 자상하게 이렇게 설명해 주었다. "내가 여기 있었으니까." 차이린은 이렇게 말하고는 라이짐의 어깨를 툭 치면서 크게 웃었다. 라 이짐은 차이린의 갑작스러운 과장된 행동에 당혹감을 느꼈지만 차이린의 얼굴을 보니 뭔가 숨기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라이짐. 아무리 직업이라지만 이런 경우에는 의심하지 않아도 좋지 않 겠어? 내가 널 속여서 얻을 게 뭐 있다고. 그리고 내가 널 위해서 너무 많은 걸 해 준다고 생각할 필요 없어. 어차피 탐그루에는 한 번 갈 생각 이었거든." 해야 할 일이라는 말에 잠시동안 라이짐의 얼굴이 침울해졌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떠오른 까닭이었다. 차이린은 그런 라이짐의 표정을 슬픈 얼굴로 읽은 모양이었다. "미안하게 생각하지 말고 고맙다고 생각해 주면 좋겠는데." 차이린은 이렇게 말하고는 바위에서 내려왔다. "그럼 이제부터 계획을 좀 세워 보자고." 차이린은 이렇게 말하며 팜 산맥의 깊숙한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팜 산맥에 험준한 길이 그렇게도 많은지 라이짐은 미처 알지 못했다. 여기저기 도사리고 있는 험준한 산세는 라이짐의 발걸음을 마치 빨아들이 는 듯, 라이짐은 걸음걸음이 힘겨웠다. 어떻게 이런 곳만 찾아서 걸어가 는지. 라이짐은 차이린의 체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낮에는 뜨거운 햇살이 바람에 흔들리며 나뭇가지들을 흔들었고, 해가 지면 바람은 차가운 냉기로 돌변하여 모닥불 옆에 붙어있어도 등살이 다 시려울 지경이 되고 있었다. 덕분에 라이짐은 생전 처음 보는 동굴과 깨 끗한 냇물과, 그리고 그것들 위에 쏟아지는 밝은 햇살을 단 한 차례도 즐 겨보지 못하였다. 차이린과 탐그루로 향하는 길은 꼬박 나흘이 걸렸다. 산길이어서 험하 다는 점과 차이린이 여기 저기 도사리고 있는 성황청의 척후병을 피하기 위해 이리 저리 길을 돌아갔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상당히 짧은 시간이었 다. 차이린은 누군가가 뒤쫓고 있는 경우나 암벽을 오르는 길을 제외하고 는 거의 대부분의 경우 느리지도 않고 빠르지도 않은 속도를 유지하였고, 라이짐은 그런 차이린을 따라가기에도 벅찼다. "나한테 훈련받은 용병 맞아?" 헐떡거리는 라이짐에게 차이린은 가끔씩 이런 말로 뒤쳐지지 말 것을 부탁하곤 했다. 친절한 누나의 말투와는 거리가 먼 말이었지만, 그래도 훈련 조교라고 생각한다면 아주 부드럽고 매끄러운 말이긴 했다. 그 말이 라이짐의 자존심을 건드려 라이짐의 발을 가볍게 하기도 했고. 그래도 차이린을 따라서 여행을 하는 길이 힘들고 고되기만 한 것은 아 니었다. 무엇보다 차이린이 구해오는 먹을거리들은 라이짐의 힘으로는 잡 을 수도, 요리할 수도 없는 것들이었다. 특히 맛이 있었던 것은 사람 팔 뚝만한 도마뱀 요리였다. 원래 식용으로 길렀다는 도마뱀은 보기에는 징 그러웠지만 맛은 있었다. 사실 시커멓게 반짝이는 도마뱀의 피부와 붉게 번득이는 커다란 눈동자를 본다면 식욕이 날 리는 없었지만 말이다. 라이짐이 도마뱀 요리에 맛을 들인 것은 세 째 날, 해가 진 후였다. 처 음 먹어보는 것이기는 했지만 산을 타면서 먹을 것을 가릴 만큼 라이짐이 나약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아니었다. 밤바람은 유달리 차게 흐르고 있었 고, 라이짐은 그 바람과 모닥불 사이에서 지친 다리를 쉬고 있었다. 높다 란 나무 때문인지, 날씨 때문인지 무척이나 어두운 밤이었다. "내가 먹을 수 없는 건 죽이는 게 아니라고 말한 적이 있던가?" 차이린은 잘 익은 도마뱀 꼬리를 뜯으면서 라이짐에게 말했다. "이렇게 한낱 도마뱀의 생명이라고 해도 사냥꾼들은 소중하게 여기지. 살아있는 것을 함부로 하는 자는 자신의 생명도 함부로 하기 마련이거 든." 라이짐은 차이린이 무슨 의도를 가지고 이런 말을 하는지 생각해 보았 으나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꼭 복수를 포기할 걸 종용하는 듯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먹는 것 보다 중요한 것도 있겠지요." 덜 구워진 배 부분을 백년수 배설물을 태워 만든 모닥불에 그을리면서 라이짐이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사람마다 그건 다를 테니까. 하지만 사냥꾼 사이에 는 이런 말이 전해져 내려와. 불사신도 뱀의 머리를 밟으면 죽는다. 생명 을 가볍게 여기는 자는 자신의 생명도 가볍게 취급당한다는 말이겠지." "하지만 그 반대편에는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도 있겠지요. 생명을 가 볍게 여기지 않고는 뭔가를 이룰 수 없다는 생각이요. 자신의 생명을 내 던지지 않고는 이룰 수 없는 일도 있으니까요." 차이린의 말에 라이짐은 이렇게 대답했다. 이 말은 라이짐이 가지고 있 는 복수심에 불을 지르는 말이기도 했다. "그래. 그게 나와 너의 차이점이겠지. 그런데 나는 이렇게 생각해. 그 렇게 생명을 내 던지면서까지 해야 할 일이 과연 정말로 있을까? 생명보 다 소중한 게 정말로 있을까? 뭐 이런 생각이야." 라이짐은 대답하지는 않았지만, 라이짐은 생명보다 소중한 것이 틀림없 이 있을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답했다. 만약 없다면, 지금 자신이 하고 있 는 여행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백년수의 배설물은 마치 달구어진 쇳덩이처럼 꾸준히 열을 내고 있었 고, 도마뱀의 껍질이 지직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타들어 가고 있었다. "너무 오래 익히면 안돼." "한 번 속까지 익혀보려고요." 이렇게해서 오래간 만에 이루어진 차이린과의 심각한 대화는 싱겁게 결 론없이 끝났다. 라이짐은 어쩌면 차이린과 함께 한 시간들이 준 가장 큰 선물이 바로 이런 요리는 아닐 것 같다고 생각했다. 사실 라이짐은 낮동안의 빠른 이 동속도 때문에 얻은 피로 덕분에 밤에는 잡념 없이 잠들 수 있었던 것이 다. 그래서 라이짐은 그간의 괴로운 일에 마음 아파할 새도 없이 팜 산맥 과 탐그루를 잇는 곳까지 올 수 있었다. 멀리 탐그루의 불빛이 눈에 들어오자 라이짐은 가슴이 뛰어 올랐다. 수 르카와 함께 이곳을 지나 용병단을 찾아 떠났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었 다. 드디어 탐그루로구나. 라이짐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이제부터가 어려워." 차이린이 낮고 빠르게 라이짐에게 말하였다. "여기서부터는 성황청 병력이 지키고 있거든. 사제들이 순찰도 자주 다 니고. 솔직히 여기 이렇게 엎드려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도 생각보다 훨씬 위험한 일이라는 걸 알아야 해." "하지만 탐그루에서 살 게 있다고 하셨잖아요?" 라이짐은 차이린에게 이렇게 물었다. 차이린은 라이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말했다. "먼저 그림자부터 처리하자. 이제는 다 왔으니까." 차이린은 이렇게 말하고는 앉아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만 따라오고 좀 나오지 그래?" 라이짐은 차이린의 말을 듣고서야 여기까지 오는 길 내내 추적자가 있 었음을 알 수 있었다. 혹시 하진이나 하진의 부하들일까? 만약 그렇다면 차이린은 자신이 정보부장 직을 때려 쳤다는 말이 거짓이었다고 판단할 수도 있겠다 싶어졌다. 차이린의 말이 끝나자 숲의 어둠 저편에서 그림자가 천천히 드러났다. 라이짐은 그림자의 움직임이 눈에 익은 움직임이라는 걸 알고는 일단 안 도했다. "왜 그렇게 고양이처럼 따라 붙었지? 솔직히 불안했단 말이야." 차이린이 인상을 찌푸리면서 그림자에 대고 말했다. "방해하지 않으려고 그랬을 뿐입니다." 그림자는 에이스였다. 그것도 에질리의 목소리를 내는. 어둠 덕분에 에 이스의 일그러진 얼굴은 드러나지 않았지만, 안대를 하고 있는 한 쪽 눈 만은 분명히 드러나고 있었다. 라이짐은 일단 추적자가 예상했던 것보다 는 낫다는 생각에 역시 다행이다 싶기는 했지만 에질리가 자신을 따라오 고 있었다고 생각하자 왠지 소름이 끼쳤다. "그래. 어찌되었건 다 왔으니까. 라이짐. 정보부장 때려친 거 맞아?" 차이린이 라이짐에게 물었다. "왜 따라온 거야?" 라이짐은 차이린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이렇게 에질리에게 되물었다. 에질리는 라이짐의 말에 이렇게 대답했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라이짐은 에질리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자 신 모르게 따라왔다는 생각에 불쾌감을 감추기 어려웠다. "약속? 무슨 약속?" 차이린이 이번에는 에질리에게 물었다. 라이짐은 에질리가 쓸 데 없는 이야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었지만, 에질리는 무난하게 차이린의 질문에 답했다. "라이짐 님이 정보부장 직을 그만두면서까지 이루려고 하신 게 있었습 니다. 라이짐 님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진심으로 원하고 있던 것이지 요. 그걸 지켜보겠다고 저는 약속했었습니다." 에질리는 미소를 띤 얼굴로 라이짐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그래. 이왕 왔으니 어떻게 탐그루로 들어갈 지 같이 한 번 생각해 보 자고." 차이린이 말했다. "탐그루에 물건도 사고 팔고 했었다면서요. 그 때 쓴 방법을 쓰면 되지 않을까요?" 라이짐은 차이린에게 이렇게 물었다. "나야 쉽게 지나갔지. 보초들도 나는 다 알고 있었거든. 타코 털가죽 몇 개와 술 몇 병으로 친해진 보초들이 있어서 말이야. 여자라서 그랬을 까? 하여간 쉽게 믿어주더라고, 지금은 좀 어렵지 않겠어?" 차이린은 라이짐의 머리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그 머리 때문에 말이야. 그런 머리를 하고서 성황청 본거지로 들어간 다는 건 자살 행위나 다를 바 없어. 성황청에도 정보부가 있다고. 네 얼 굴을 아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을지 몰라도 백발영웅이 아케르의 부하 라는 건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야." 차이린이 말하자 라이짐은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이렇게 걸림돌이 될 줄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밤에 가면 못 알아보지 않을까요?" 라이짐은 조심스럽게 차이린에게 이렇게 한 번 더 물었다. 차이린은 고 개를 가로 저었다. "너무 위험해. 완전한 방법이 있다고 해도 모험인데, 그렇게 큰 위험부 담을 안을 수는 없어. 밤에 지나가면 더 의심받지 않겠어?" 차이린이 라이짐에게 말했다. 라이짐은 과연 어떻게 하면 좋을까 생각 해 보았지만 별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탐그루 시내로 들어가는 길이야 라이짐이 차이린보다 더 잘 알고 있을 터였지만, 골목골목 몸을 숨기고 있을 성황청의 사제들을 떠올려 보니, 도무지 혼자 몰래 잠입한다 는 건 불가능할 것 같았다. "불가능 한 건 없어요, 차이린. 다만 방법이 문제일 뿐이지." 라이짐은 차이린에게 이렇게 말했다. 차이린은 공감은 해도 '하지만 어 떻게?'하고 말하는 듯한 얼굴로 라이짐을 바라보았다. 탐그루로 들어갈 수 있는 여러 통로 중, 골목과 이어져 있는 서편의 길 을 지키고 있는 두 명의 사제는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달빛도 어두워 풍 경도 잘 보이지 않으니 경계를 더 강화해야 할 때였지만, 두 명의 사제가 하고 있는 태도로 보아 그리 긴장을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지겨워, 지겨워. 언제까지 이렇게 비상이 계속 될까, 형제?" "글세. 자네 권능으로 한 번 알아보지 그러나. 성황의 결정과 빗물이 튈 방향은 아무도 모른다고 하던데." "하하하. 그보다 나는 한 번 싸워보고 죽었으면 좋겠네." "하긴. 죽어서 성황께서 인도해 주시는 새로운 세상으로 가는 편이 낫 겠어. 이렇게 지겨운 시간만 보내고 있으려면 말이야." "성구도 없으니 이제 어떻게 한다? 마법이라도 배워둘 걸 그랬어. 마법 을 배운 사제들은 마법으로 성구를 작동하던데 말이야." "아케르인지 뭔지 하는 녀석이 쳐들어 왔을 때, 하나도 못 해치우고 죽 는 건 아닌지 몰라." 사제들이 이렇게 떠들고 있을 때, 얼굴에 두건을 두른 세 명이 그들 앞 에 나타났다. "누구ㄳ!" 지금까지 농담을 나누고 있던 사람들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 빠 르고 강한 어조였다. 손에는 어느 사이 창도 들려 있었다. 성구가 봉쇄된 마당이어서 그런지 성구를 착용하고 있지는 않았다. 셋 중 하나가 두건을 벗었다. "나요, 사냥꾼 차이린." 차이린이 웃으면서 사제에게 말했다. 사제는 창을 쥔 손을 늦추지 않으 면서 다시 차이린에게 물었다. "그 둘은?" "한 번 보시죠." 차이린이 말했고, 사제는 조심스럽게 두건을 쓴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남은 사제 하나는 창을 들고서 다가가고 있는 사제를 엄호하고 있었다. 사제가 다가오자 둘 중에 하나가 두건을 벗었다. 에질리였다. "나를* 봐요*" 에질리가 말하자 사제의 눈동자에 초점이 흐려졌다.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24541/24688 ━━━━━━━━━━━━━━━━━━━━━━━━━━━━━━━━━━━━━━━━ 제 목:[탐그루] 무엇이 우리를 평화에 들게 하는 관련자료:없음 20/20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7-27 20:13 조회:537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무, 무슨 일 있어?" 남은 사제가 창을 들어올리면서 말했다. "오라고* 해요*" 에질리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자 사제는 멍한 눈을 하고서 에질리의 말을 따랐다. 남아있던 사제가 에질리에게 다가왔고, 에질리는 사내에게 자신을 보라고 말한 후, 이렇게 말을 이었다. "우리는* 여기를* 지나갑니다* 그리고* 우리가* 여기를* 지나가면* 하 던* 이야기를* 계속* 하고* 우리가* 지나갔다는* 사실은* 완전히* 잊습니 다*" 에질리가 말하자 두 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해서 라이짐 일행 은 아주 순조롭게 탐그루 안으로 잠입할 수 있었다. "최면... 마법이었어?" 탐그루에 들어서자 차이린이 에질리에게 물었다. "그저 암시를 준 것뿐이죠." 에질리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차이린에게 이렇게 말했다. 라이짐은 에질리가 자신을 도왔다는 사실이 고맙기도 했지만, 한 편으 로는 불쾌하기도 했다. 왜냐하면 에질리가 아무리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서라고 해도 자신의 복수에 힘을 보태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 이었다. 복수는 혼자 힘으로 하고 싶었는데. 하지만 라이짐은 이렇게 생 각하기로 했다. 중요한 것은 목표를 이루는 것이지 그 방법이 아니라고. 라이짐은 차이린과 에질리를 탐그루의 골목 한 구석, 어두운 곳으로 인도 했다. 한 때 라이짐이 여기서 소매치기 두목 노릇을 하고 있을 때, 자치 대원들을 피해서 자주 왔던 곳이었다. "이제 어떻게 할거야?" 차이린이 라이짐에게 물었다. "저는 여기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라이짐의 목소리는 진지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래, 그럼 나는 여기까지야." 차이린이 말했다. "이제 나는 여기서 몇 가지 물건들을 산 후 타실로 갈 거야. 하고자 하 는 일, 잘 되길 빌어." 라이짐은 차이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제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될지 도 모르겠다는 예감이 라이짐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고마워요, 차이린." 라이짐은 차이린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이 말에는 지금까지 도와줘서 고맙다는 뜻도 담겨있었지만, 복수에 대해 다르게 생각하고 있는 자신의 일을 인정해 줘서 고맙다는 뜻이 더욱 컸다. 차이린도 그런 라이짐의 마 음을 알았는지 이렇게 말했다. "목숨을 걸고 하는 일이라면 그만한 가치가 있는지 잘 생각해 봐." 차이린이 말하자 라이짐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겠다고 짤막하게 대답 했다. 사실 라이짐은 다시 생각하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만약에 다시 생각했다가는 마음이 약해질 지 모르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럼, 라이짐. 죽지 마라." 차이린은 이렇게 용병단 식으로 라이짐에게 인사했다. "차이린도요." 라이짐도 용병단 식으로 인사를 받았다. 둘은 거수 경례를 나누지도, 그렇다고 악수를 하지도 않았지만 서로 이 정도면 충분히 인사가 되었다 고 느꼈다. "에질리." 차이린이 탐그루 시내 쪽으로 사라지자 라이짐이 에질리에게 말했다. "그런데 에이스 자매는 왜 다 사라진거지?" 라이짐은 에질리에게 이렇게 물었다. 하진에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가장 먼저 의심이 간 것은 물론 에질리였다. 그 이유는 짐작도 할 수 없 었지만. "그야 소원을 위해서입니다." 에질리가 대답했다. 라이짐은 혹시 에이스 자매들이 루비오를 죽여버리 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라이짐은 분명 맹세했었다. 시드의 귀 가 박혀 있는 자신의 칼을 루비오의 가슴에 박을 것을 말이다. "에질리. 도와준 건 고맙지만 여기까지야. 이 복수는 내 손으로 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어." 라이짐은 이렇게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자 에질리는 웃음을 터트 렸다. 마치 못들을 말이라도 들었다는 듯한 웃음이었다. 라이짐은 에질리 의 웃음에 놀라며 에질리를 바라보았다. 에질리는 라이짐을 의아하다는 듯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제가 손을 빌려드릴 거라고 생각하셨나요? 라이짐 님. 소원은 반드시 이루어 질 것입니다. 다만 반지의 방식대로 이루어 질 뿐이지요." 에질리는 이렇게 말하면서 안대를 만지작거렸다. "제가 있는 게 아무래도 불편하신 모양이군요. 불편하시다면 사라져 드 리지요." 에질리는 이렇게 말하고는 산 속을 누비는 한 마리의 야수 같은 동작으 로 숲 속으로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라이짐은 에질리가 틀림없 이 어디선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편치가 않았 다. 라이짐은 에질리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우선 바코쿠의 연금술사의 집으로 향했다. 이곳에서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루비오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다만 스파일의 반란군들이 모조리 잡혀갔다는 사실을 바코쿠가 알고 있다 면 자신이 이렇게 살아서 탐그루에 왔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지가 걱정이었다. 만약 자신이 반란군이 아니며 스파일의 정보부장이라는 사실 을 알고 있다면 어떻게 나올 것인가. 만약 공격해 온다면 바코쿠를 해치 우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겠지만, 루비오에 대한 정보를 얻기가 골치 아 파 질 것이 거의 틀림없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라이짐은 배낭 안에 서 단검을 꺼내 품에 품은 뒤, 연금술사의 집으로 향했다. 라이짐은 연금술사의 집 뒤로 돌아가 창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들 어가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반란군의 집답지 않게 별다른 잠금 장 치나 도난 방지 장치는 되어 있지 않았다.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였을까? 라이짐은 생각하면서 조심스럽게 바코쿠의 방을 찾았다. 바코쿠의 방을 찾는 일은 어둠 속이었지만 쉽게 할 수 있었다. 바코쿠 의 코고는 소리가 집 전체에 울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라이짐은 방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라이짐의 첫 걸음이 방에 들어서는 순간, 코고는 소리가 멎었고, 문 뒤에서 억센 팔뚝이 라이 짐의 목을 휘감았다. 라이짐은 양 손으로 팔뚝을 잡았고, 다음 순간 예 리한 단검이 라이짐의 목줄에 닿았다. "누구냐." 바코쿠의 목소리는 잔뜩 예민해진 뮤 만큼이나 신경이 곤두서 있는 듯 했다. 라이짐은 눈 앞에 죽음의 예감이 스치고 지나가는 걸 느꼈다. "다, 달 없는 밤에는 등뒤를 조심하고..." "라이짐이로군." 바코쿠는 억센 팔뚝을 치우면서 이렇게 말했다. 라이짐은 목줄을 만지 면서 앞으로 몇 걸음 휘청이며 걸어갔다. 이어서 연금술사의 등이 켜졌 고, 바코쿠의 모습이 어둠 속에 드러났다. "달 없는 밤에는..." 침대에 걸터 앉으면서 라이짐이 말했지만 바코쿠는 라이짐의 말을 잘랐 다. "그런 거 집어 치워." 바코쿠의 대머리가 연금술사의 등을 받아 반짝거렸다. 라이짐은 그것이 머리에 ㄳ혀 있는 땀방울 때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잔뜩 긴장하고 있 는 모습이었다. "어떻게 살아 왔나?" 바코쿠가 라이짐에게 물었다. 바코쿠의 목소리는 여전히 신경이 곤두선 듯 했다. 라이짐은 바코쿠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인지 눈 주위는 쑤욱 들 어가 있었고, 볼은 말라붙어 있었다. 눈에 띄게 여윈 모습이었다. "운이 좋아서요. 여기 말고는 찾아 올 곳이 없었어요." 라이짐은 이렇게 준비한 말을 바코쿠에게 늘어놓았다. 바코쿠에게 졸린 목 탓인지 말이 다 갈라져서 나왔다. "그랬군." 바코쿠는 이렇게 말하면서 방안에 놓여 있던 책상 의자에 앉았다. 피곤 한 기색이 역력해 보이는 보습이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떠버리새 편으로 보낸 전갈은 못 받았겠군. 당분간 활동을 중단한다고 전갈을 보냈는데." 바코쿠가 말했다. 라이짐은 바코쿠가 유도심문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고 생각했다. 그래서 라이짐은 그저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얼마동 안 바코쿠는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라이짐은 눈 을 휘둥그래 뜨고 바코쿠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바코쿠가 왜 그러는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누가 찾아오면 이렇게 말하라고 지시 받았지. 암. 그렇고 말고. 그런데 자네가 이렇게 나타났다는 게 뭘 뜻하는지 아나?" 바코쿠의 눈빛이 번득였다. 바코쿠의 대머리가 이렇게 두렵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아마도 목을 한 번 졸린 탓이리라. "스파일의 우리 조직은 완전히 와해되었다는 걸 뜻해. 아직까지 전갈이 하나도 안 왔는데 사람이 먼저 도착했으니 말이야. 떠버리새로 연락을 보 냈지만 돌아온 녀석 중에서 답신을 발목에 달고 온 녀석은 하나도 없었 어." 바코쿠는 무척이나 흥분해 있는 듯 했다. 라이짐은 바코쿠가 뭐라 말하 건 그냥 들으면서 때를 기다리기로 했다. 이런 심리상태인 바코쿠에게 물 어봐야 제대로 된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 이제 어떻게 할 셈인가." 한 참이 지난 다음에 바코쿠가 라이짐에게 물었다. 라이짐은 속으로 하 나, 둘, 셋을 센 다음에 천천히 이렇게 물었다. "루비오라는 이름, 아십니까?" "모를 리가 있나. 이곳 치안을 담당하고 있는 녀석인데." 바코쿠는 당연하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 라이짐은 이제 본론으로 들 어가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루비오의 정보가 필요합니다. 사는 곳, 자주 가는 곳이나 같이 움직이 는 녀석, 아니면 친하게 지내는 사람, 어느 것이든 좋습니다." 라이짐이 말하자 바코쿠는 느릿느릿 라이짐의 말에 이렇게 물었다. "암살인가?" 라이짐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를 위해 필요한 일인가?" 바코쿠가 다시 물었다. 라이짐은 이럴 때 어떻게 대답하는 게 좋은지 잘 알고 있었다. 적과 상대하고 있을지라도 이런 종류의 물음에는 솔직하 게 대답하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는 것을. 라이짐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개인적인 복수로군. 귀족 모독죄로 부모라도 잃었나?" 바코쿠는 이렇게 말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찬장에서 술 한 병을 꺼내 었다. 투명한 색깔로 보아 쇠주인 것 같았다. 바코쿠는 라이짐에게 한 잔 하겠느냐고 물었지만 라이짐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상부에서 내려온 지시는 사실이라네. 당분간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서 떠오르지 말라는 지시말이야. 흔히들 이렇게 표현하는 말이지. 전투력 보 존." 바코쿠는 이렇게 말하고는 쇠주를 병 채로 들이켰다. "루비오는 대단한 녀석이야. 아니, 루비오가 대단하다기 보다는 그 부 인 뒤로아 오르테가가 훌륭한 여자겠지. 이곳을 두고 스파일과 타실이 대 치하고 있었을 때는 둘 사이를 오가면서 균형을 잡더니, 성황청이 밀고 들어오니까 바로 성황청에 줄을 대었어. 말하자면 현지 임용된 셈이지. 대단한 능력이야." 바코쿠는 이렇게 말하고는 쇠주를 다시 한 모금을 들이켰다. 라이짐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라이짐. 세상에는 보통 두 가지 원칙이 있는 것 같아. 하나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 원칙과, 또 하나는 때에 따라 뜻을 바꿀 수 있다는 원 칙 말일세. 아, 물론 누구도 둘 중 하나만 가지고는 살기 힘들겠지. 어떤 때는 뜻을 굽히지 않아야 일을 진행할 수 있을 것이고, 또 어떤 때는 뜻 을 바꾸지 않으면 부러지겠지." "루비오는 뜻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하시는 말씀인가요?" 바코쿠는 라이짐이 말하자 껄껄거리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맞아. 루비오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녀석이지. 그래서 지금 도 살아남았고, 앞으로 일이 어떻게 뒤틀린다고 해도 살아남을 녀석이야. 자네와는 다르지." 바코쿠는 아마도 이 마지막 말을 하기 위해서 말을 꺼낸 모양이었다. "지금은 사람이 아까운 시점일세. 전투력 보존이라는 말이 결코 틀린 말은 아니야." 라이짐은 바코쿠의 말에 절로 허리가 곧추 세워졌다. 당장이라도 그만 두라고 말하면서 자신을 잡아 두려고 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자네 같이 한 뜻을 굽히지 않고 사는 사람은 살아 남기 힘든 시점인지 도 몰라. 하지만 말일세, 나는 자네 같은 사람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 각하네. 반란군? 반란군이 세상을 뒤집을 수 있을까? 반란군은 영원히 반 란군일 뿐이야.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뭘까. 그것은 뜻을 굽 히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고 후세에 전하는 일이겠지." 바코쿠의 혀는 어느 사이 조금씩 둔해지고 있었다. 발음은 불명확해지 고, 눈의 초점도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24542/24688 ━━━━━━━━━━━━━━━━━━━━━━━━━━━━━━━━━━━━━━━━ 제 목:[탐그루] 무엇이 우리를 평화에 들게 하는 관련자료:없음 18/18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7-27 20:13 조회:727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녀석은 시청 한 복판에 살고 있어. 호위가 삼엄하지. 뚫고 들어가기는 곤란해. 밖에서 기다리는 게 좋을 거야. 시청 앞에 빈 공관이 하나있어. 아케르의 제국이 공격해 온다는 첩보 때문에 대부분의 병력이 탐그루 동 편으로 이동해 있어서 비어 있는 곳이 좀 있거든. 거의 밖에 나가지 않지 만 다니는 곳이 있기는 할 거야. 거기서 때를 기다리게." 바코쿠는 이렇게 라이짐이 듣고 싶어한 이야기를 술술 늘어놓았다. 라 이짐은 심장이 터질 듯이 뛰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당장이라도 터져 버 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결국 내가 하는 일은 후세에 뜻을 굽히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는 걸 남기기 위해서 일까? 사사로운 복수를 위해 사람을 죽이는 내가? 라이짐은 문득 차이린의 말이 떠올랐다. 그건 생명에 대한 이야기였다. 라이짐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여기까지 와서 약해 질 수는 없었다. "그리고 호위 무사가 하나 있어. 솜씨가 좋은 녀석이라고 하던데. 이름 이..." "쥬크?" "그래, 맞아. 쥬크라고하더군." 바코쿠는 라이짐의 말에 이렇게 대답하고는 한참 동안 라이짐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자네, 정말로 할 생각이로군..." 라이짐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바코쿠는 또 다시 쇠주를 병 채 들이키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래. 자신에게든 타인에게든 약속한 것이 있다면 지켜야겠지." 바코쿠는 이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좀 눈을 붙여야겠어. 자네도 좀 자 두게. 내일 밤에 떠나도 시간 은 충분할 테니까 말이야." 바코쿠는 이렇게 말하고는 침대에 기어 들어갔다. "어디 뒤져보면 덮을 만한 게 나올거야. 대강 덮고 자." 바코쿠는 이렇게 말하고는 이 번에는 진짜로 코를 골며 잠이 들었다. 라이짐은 바코쿠가 완전히 잠든 것을 확인 한 후에 연금술사의 집을 떠났 다. 며칠이나 지났을까. 라이짐은 시청 앞에 있는 버려진 공관에서 루비오가 나오기만을 기다리 고 있었다. 공관은 이 층짜리 건물이었고, 시청 정문이 한 눈에 내려다보 이는 곳이었다. 멀리 중앙 광장의 모습도 보였다. 라이짐이 몸을 숨긴 공 관 옆으로도 몇 개의 공관이 더 있었지만 하나같이 비어있었다. 바코쿠의 말 그대로, 사제들은 전투 준비에 여념이 없는 듯 했다. 공관에서 라이짐은 무장한 성황청의 사제들이 시청 앞을 오가는 모습은 자주 볼 수 있었지만, 루비오의 모습은 단 한 번도 볼 수가 없었다. 아마 도 시청 안에 마련된 관사에 틀어박혀서 절대로 나오지 않을 기세인 모양 이었다. 라이짐은 그런 루비오를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준비한 말린 고기는 금새 다 떨어졌고, 라이짐은 밤바다 상점에 들러 도둑질을 해야 했다. 금화는 넉넉하게 가지고 있었지만, 대낮에 돌아다닌 다는 것은 아무래도 위험 천만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라이짐은 낮 시간 동안에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자주 살필 수 있었다. 모두들 하나같이 주눅이 들어있는 듯, 어깨는 내려앉아 있었고, 고개를 떨구어져 있었다. 아마도 이제 곧 일어날 전쟁을 예견하고 있는 듯 했다. 사실 그건 시청과 외곽을 오가는 무장한 성황청의 사제들도 마 찬가지였다. 어떤 때는 전투에 대한 기대인지 흥분된 얼굴로 이동하는 모 습을 볼 수 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 시민과 그리 다를 바 없는 풀 죽은 모습들이었다. 라이짐은 그런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이제는 끝이 멀지 않았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것이 자신의 운명이건, 루비오의 운명이 건, 성황청의 운명이건 간에. 라이짐은 새벽녘에 잠시 잠들어 있다가 요란한 소리에 잠에서 깨었다. 누군가가 공관에 들어온 것 일까하는 생각에 라이짐은 허둥거리면서 자리 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창 밖을 내다보았을 때, 라이짐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무장한 사제들이 잔뜩 긴장한 얼굴 을 하고서 중앙 광장에 집결한 다음, 바로 동편으로 이동하고 있었던 것 이었다. 틀림없이 훈련상황은 아닌 듯 했다. 뮤를 타고 있는 꽤 고급 지 휘관으로 보이는 녀석들도 하나같이 잔뜩 긴장하고 있는 게 멀리서도 느 껴졌기 때문이었다. 아케르다. 라이짐은 이렇게 생각했다. 아케르가 공격을 감행한 것이 틀림없었다. 라이짐은 자리에서 일어나 시청 쪽을 주시하였다. 바코쿠가 했던 말이 떠 올랐다. 루비오라면, 아니 뒤로아 오르테가라면 이번 싸움에서 성황청에 게 승산은 없으며, 성황청이 패한다면 자신의 목숨도 끝이라는 걸 알고 있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루비오의 선택은? 틀림없이 루비오는 이곳을 떠 나 도망칠 것이 틀림없었다. 어쩌면 타실로 도망칠지도 몰라. 라이짐은 생각했다. 라이짐은 거리로 뛰쳐나오고 있는 사람들과 성황청 사제들 사이에서 그 들의 모습을 발견했다. 고개를 숙이고 정문을 통해 재빨리 서쪽으로 빠져 나가고 있는 세 사람의 모습이었다. 거리가 멀어서 두 사람의 얼굴은 알 아 볼 수 없었지만, 라이짐은 남은 한 사람의 얼굴을 알아 볼 수 있었다. 잠시 고개를 든 그 사람은 바로 뒤로아 오르테가였다. 한 번 보면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얼굴이라는 소문이었지만, 라이짐에게는 다른 이 유에서 절대 잊을 수 없는 창백한 얼굴에 차가운 인상을 하고 있는 여자 였다. 라이짐은 한때나마 저 여자를 가지겠다고 마음먹었던 사실을 떠올 리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 생각을 가졌던 것은 혹시 복수를 피하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두려움 때문은 아니었을까. 라이짐은 이렇게 생각 하면서 배낭을 둘러메고 서둘러 공관을 빠져나갔다. 거리에 나섰을 때, 라이짐은 루비오 일행을 놓칠 뻔했다. 갑작스럽게 거리로 쏟아져 나온 사람들 때문이었다. 굉음이 탐그루 시 여기저기서 들 려 오고 있었다. 아케르가 연금학 병기를 마구 발사하고 있는 게 틀림없 었다. 시 곳곳에서 시커먼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고, 사람들은 공포로 일그러진 얼굴을 한 채 아무 방향으로나 뛰어가고 있었다. 라이짐은 그리 폰들의 공격으로 엉망이 되었던 탐그루가 떠올랐다. "집! 내 집이 불타고 있어!" "물! 물이 필요해!" "엄마! 엄마!" "빌어먹을! 이제 끝이야! 성황의 말이 맞았어! 세상의 종말이 온 거 야!" 사람들은 저마다 뭐라고 이렇게 소리치고 있었다. 라이짐은 그 와중에 서도 사람들을 밀치며 루비오 일행을 찾아낼 수 있었다. 루비오 일행은 서쪽으로 정신없이 뛰어가고 있었다. 아마 그 쪽에 마차라도 준비를 해 두었을 게 틀림없었다. 만약에 마차에 오르게 된다면 큰 낭패였다. 라이 짐은 정신없이 사람들을 헤치면서 루비오가 향하고 있는 쪽으로 달려갔 다. 만약에 여기서 루비오를 놓친다면 다시는 루비오를 만날 기회조차 없 을 것이다. 마침내 시 서쪽까지 닿았을 때, 라이짐은 루비오 일행이 멈추어 서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연금학 병기가 세 사람이 지나고 있는 길목 바로 옆 에 떨어진 것이다. 굉음과 함께 불기둥이 솟아올랐고, 루비오 일행은 허 둥거리면서 북쪽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라이짐은 정신없이 다시 그들을 쫓기 시작했다. 거리로 뛰어 나온 사람들은 공황에 빠져 사방으로 마구 뛰어다니고 있었다. 피흘리는 사람, 불에 그을린 사람, 부모를 잃은 아 이, 아이를 잃은 부모로 거리는 온통 지옥이었다. 여기저기서 신음소리가 들려왔고, 사람들은 고통의 신음소리를 올렸다. 아케르는 도대체 왜 이런 무차별 공격을 감행하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라이짐은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공포심이었다. 아케르는 탐그루 시민들에게 공포심을 주입하려고 있는 것이었다. 무자 비한 귀족에 대한 사형도, 그리고 지금의 이 무차별 공격도 결국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이었다. 이런 공격을 통해서 아케르는 탐그루는 물론이고 바 르도 대륙 전체에 자신에 대한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려는 것이다. 항복 외 에는 죽음뿐이라는 교훈을 남기려고 하는 것이었다. 라이짐의 귓가에 아 케르 군단이 분열 행진을 해 들어오는 군화 소리가 들리고 있는 듯 했다. 북쪽으로는 도저히 지나갈 수 없는 지경이었다. 사람도 사람이지만 길 목이 완전히 불바다가 되어 있었다. 라이짐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동편 이외의 통로는 모두 불길에 휩싸인 것 같았다. 병력을 한 곳에 모으고 있구나. 라이짐은 생각했다. 아마도 성황청의 군대를 한 곳으로 모은 다음, 연금학 병기로 한 번에 날려버리려는 속셈이 틀림 없었다. 아 마도 시에 연금학 병기를 날린 병사의 수는 극소수일 것이었다. 아케르의 주력은 틀림없이 시 동편에 집결해 있을 것이었다. 동편에는 하잔과 통하 는 평원이 펼쳐져 있는 곳이었다. 거기에서 아케르는 성황청의 역사에 종 지부를 찍을 일전을 벌이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루비오 일행을 따르고 있는 자신도 시의 동편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마도 루비오 일행은 방향감 각을 상실한 채, 그저 길이 막히자 다른 곳으로 이동하고 있는 모양이었 다. "루비오!" 시 동편 출구에 도착했을 때, 라이짐은 이렇게 큰소리로 루비오를 불렀 다. 그러자 세 사람은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성황청의 사제들이 동편의 평원으로 정렬해서 달려나가고 있었고, 그 뒤로 방향을 잃고 허둥대고 있 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라이짐은 사람들을 뚫고 지나가 세 사람 앞 까지 달려 갔다. "루비오!" 라이짐은 이렇게 말하면서 베낭에서 칼을 꺼낸 뒤, 배낭을 떨어뜨렸다. 루비오와 쥬크, 그리고 뒤로아 오르테가가 라이짐을 바라보았다. "누, 누구냐, 저 녀석!" 루비오가 입술을 파르르 떨면서 이렇게 소리쳤다. 뒤로아 오르테가는 무표정한 얼굴로 라이짐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로군." 쥬크는 이렇게 말하면서 허리에서 칼을 뽑아 들었다. 쥬크는 라이짐의 어머니 이무르 아주머니를 베었을 때 보다 훨씬 더 커 보였고, 언제 길렀 는지 수염도 덥수룩하게 자라나 있었다. 전과 같이, 아니 전보다 훨씬 더 이기기 어려운 상대 같이 느껴졌다. "기억하는가?" 라이짐은 이렇게 말하면서 녹슨 칼을 쥬크에게 겨누었다. "너, 그러고 보니, 스파일의 바로 그 머리 하얀 녀석!" 루비오가 라이짐에게 이렇게 소리쳤다. 아마도 루비오는 정말로 자신을 기억하고 있지 못한 모양이었다. 라이짐은 일단 루비오는 무시하고 쥬크 를 겨누고 있는 칼 끝을 세우면서 천천히 왼쪽으로 돌았다. 멀리서 연금 학 병기의 굉음과 시민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래. 기억하고 말고. 멍청한 평민 꼬마라고 생각했는데, 여기까지 잘 도 찾아 왔구나." "쥬, 쥬크! 해치워!" 루비오는 이렇게 말하면서 뒤로아 오르테가와 함께 쥬크의 뒤편으로 돌 아 움직였다. 칼을 들고 있는 라이짐은 이상하리만치 평온안 감정에 휩쌓 였다. 너무나 오랫동안 이 순간을 꿈꾸어왔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이길 수 있다는 막연한 믿음이 있기 때문이었을까. 하지만 쥬크가 먼저 칼날을 날렸을 때, 라이짐은 쥬크가 여전히 자신과는 차원이 다른 칼솜씨를 가지 고 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정확하게 라이짐의 목을 노리고 날아든 쥬크의 칼날은 라이짐이 빗겨내기가 무섭게 다시 라이짐의 어깨를 향해서 날아왔다. 라이짐은 쓰러지다 시피 몸을 숙여 간신히 그 칼을 피했다. 만 약 그 때, 뒤편에서 성황청의 사제들이 소리를 치면서 지나가지 않았다면 쥬크는 한 번 더 칼을 날려 중심을 잃은 라이짐의 목을 베었을지 몰랐다. 정말이지 무서운 속도였다. "운이 좋군, 꼬마." 쥬크는 이렇게 말하면서 천천히 라이짐에게 다가섰다. 라이짐은 일단 뒷걸음질을 치면서 어떻게 해야 저 녀석을 쓰러뜨릴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당장은 아무 생각도 없었다. 아니, 어쩌면 지금의 라이짐 으로서는 쥬크를 쓰러뜨릴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라이짐 은 팔뚝으로 이마에 흐르고 있는 땀방울을 닦아내었다. "그 알량한 복수를 하기 위해 목숨을 내 던지는 것 보다는, 다 잊고 행 복하게 사는 걸 네 어미는 더 바랬을 텐데." 쥬크가 말했다. 도발하려는 게 틀림없었다. 라이짐은 분노를 느꼈지만 강제로 그것을 억누르면서 오직 쥬크의 칼끝에만 신경을 집중하려고 애썼 다. "여기까지다, 꼬마." 쥬크의 칼은 다시 반원을 그리면서 라이짐의 목에 날아들었다. 라이짐 은 혼신의 힘을 다해 칼을 휘둘러 목을 노리고 날아드는 쥬크의 칼을 막 아갔다. 왜였을까. 라이짐은 칼날을 막아내면서 차이린과 바코쿠를 떠올렸다. 목숨을 걸 때에는 과연 목숨을 걸만한 일인가 생각해 보라는 차이린의 말 이, 그리고 하나의 원칙으로 소신을 지키는 순간을 강조한 바코쿠의 말이 차례로 떠올랐다. 에질리의 모습과 에이스의 모습도 교차되어서 눈앞을 스쳐갔다. 순간 라이짐의 녹슨 칼이 부러졌다. 날카로운 금속음이 폭발음과 비명 소리의 아비규환을 찢어 가르며 새처럼 창공으로 뻗어 나갔다. 그리고 그 소리의 여운은 아이들의 아침을 깨우는 종소리처럼 부드럽게 울려퍼지며 사그라들었다.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24649/24688 ━━━━━━━━━━━━━━━━━━━━━━━━━━━━━━━━━━━━━━━━ 제 목:[탐그루] 마음의 칼, 마음의 마법 347 관련자료:없음 27/27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7-28 23:32 조회:563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 마음의 칼, 마음의 마법 해안을 벗어나 대청하까지 가는 길은 지루했다는 점을 제외하면 별 다 른 문제가 없었다. 해안을 출발하기 전에 바닷가 마을에 들러 여행자들 에게 필수적인 연금술사의 등과 먹을 것, 그리고 야영도구 몇 가지를 구 입했다. 이제는 여행에도 이골이 나 무엇이 정말 필요하고, 무엇이 쓸데 없이 무게만 나가는 지 잘 알고 있었다. 어려울 건 아무것도 없었다. 다 만 복잡하고 번거롭고 또한 어려웠던 일은 내 마음을 다스리는 일이었다. 태풍지대에서 조난을 당하고, 사빈과 오브라디 교수를 잃고도 그 때 상 황이 분명하게 기억이 나질 않는다는 사실은 계속해서 나를 괴롭혔다. 이 제는 아자닌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아자닌이 왜 다시 돌아오지 않고 영영 떠나버렸는지 기억할 수 없다는 사실도 역시 나 를 힘들게 했다. 그저 사빈과 오브라디 교수는 사라져버렸고, 아자닌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만 인식하고 있을 뿐,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됐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기억이 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왜 혼자 남게 되었 는지 궁금해 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죄책감마저 일으켰다. 그리고 왜 머릿속에는 죽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기억만이 남아 있는지 도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악마의 입에서 훈 족의 족장 고마에게 들었던 죽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떠올려 보았다. 고마가 나에게 들려 준 이야기는 아마도 이런 식으로 조난을 당한 사람들의 머리 속에 남겨진 죽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 입에 입을 거치면서 전해진 것이리라. 바닷가에 이름조차 없는, 마을이라고 하기도 뭣한 일곱 가구가 모여 사 는 곳에서 나는 처음으로 처음으로 사비오 영감이 남기고 갔던 금화에 손 을 대었다. 조난 당한 덕분에 가지고 있던 것들은 모두 잃어버렸고, 주머 니에 먼지 외에는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기 탓에 나는 어쩔 수가 없었 다. 그나마 허리에 두르고 있던 사비오 영감의 금화와 허리에 차고 있던 나미트 장군의 칼, 그리고 이제는 빛을 잃은 돌멩이에 지나지 않는 아자 닌의 반지를 잃어버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도보로 대청하까지 가는 길은 마소드의 검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만 없 었다면 관광이나 다를 바가 없었을 것이다. 산새들은 내 발걸음에 맞추어 행진곡을 불러주었고,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은 내 머리 결을 간지럽히면 서 지나갔다. 눈앞에는 푸른 벌판과 솟아오른 산봉우리들이 펼쳐져 있었 고, 그 너머로는 하늘과 맞닿은 땅이 나를 부르고 있었다. 나는 일곱 가구가 살고 있는 바닷가 마을을 떠나 대청하까지 펼쳐져 있 는 평원을 지나면서 일단 머릿속에 있는 생각들을 하나하나 정리해 나갔 다. 우선 탐그루에 도착하자마자 무기상점 주인 시하라를 찾아 마소드의 검이 있는 곳을 알아내야 한다. 그리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마소드의 검 을 찾아 하잔의 까마귀 벌판에 있는 마소드의 검이 원래 위치하고 있던 곳에 꽂기만 하면 모든 일은 끝나는 거였다. 하지만 일단 이렇게 해야할 일들을 정리하고 나니 자꾸 뭔가 허전했다. 결국 이런 거였던가. 마칸의 강림을 막고 세상을 구원한다. 과연 내가 하고 있는 일은 옳은 것일까. 아니, 옳고 그른 것을 떠나서 꼭 내가 해야 만 하는 일일까. 내가 마칸의 강림을 막는다고 해서 누가 알아줄까. 아 니, 알아주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아타카파 공화국의 와트슨 대통령 말 그대로, 세상을 구원하는 게 꼭 마칸의 강림을 막는 것 말고는 수가 없는 것인가. 마칸의 강림이 정말 세상을 멸망시킬 것인가. 어쩌면 더 나은 방 향으로 세상을 바꾸는 것일지도 모르지 않는가. 차라리 이대로 두는 게 세상을 위하는 일은 아닐까. 혼자서 하는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빙빙 맴돌거나 혹은 엉뚱한 방 향으로 커지기 쉬운 법이다. 이렇게까지 엉망으로 내 머릿속이 뒤엉켜 버 릴 줄은 미처 몰랐다. 이미 오래 전에 결론을 내린 생각을 나는 별다른 이유없이 다시 떠올리고 있었다. 꼭 자학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심정이었 다. 나는 아무리 걸어도 제자리를 걷고 있는 것만 같았고, 야영의 밤에 불 빛을 보고 찾아드는 다람쥐들을 바라보아도 아무런 감흥을 느낄 수가 없 었다. 말린 고기를 좀 적게 사고 감자를 많이 살걸, 하고 후회를 한 것은 그로부터 한 참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감자를 많이 샀더라면 짐이 무거 워져서 많이 힘들었을 테고, 그랬다면 이런저런 생각들에 시달리지 않고 여행을 하게 되었을 텐데. 하지만 나는 돈도 넉넉하고 여행 자체를 편하 게 하고 싶다는 욕심에 감자보다 말린 고기를 훨씬 많이 샀던 것이다. 결 국 몸은 편했는지 몰라도 머릿속은 뒤죽박죽으로 복잡해져버렸고, 배는 불렀는지 몰라도 머릿속은 허전하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그런 내 상태는 대청하에 닿을 때까지 지속되었다. 대청하의 도도한 물결을 바라보고 있자니 지금까지 머릿속에서 복잡하 게 엉켜 있던 모든 생각들이 한 순간에 날아가버린 것 같았다. 물론 그런 기분이 되었다는 것뿐이지 정말로 생각들이 날아가 버린 건 아니었지만. 시원하게 흐르는 물살과 그 위로 펼쳐진 하늘, 그리고 멀리 보이는 비스 토브레 산맥의 웅장한 모습. 무엇보다 그 아래, 마치 손에 잡힐 듯 가깝 게 다가오고 있는 탐그루의 모습. 나는 그 광경만으로도 가슴이 뛰었다. 내가 살던 예언의 눈동자는 그대로 있는지. 함께 지냈던 친구들은, 연 금술사 바코쿠는 잘 있는지. 시하라의 무기상점에는 아직도 내가 좋아하 던 칼들이 진열되어 있을지. 비록 먼발치에서 보이는 탐그루의 모습이었 지만 나는 거리의 풍경을 손에 잡을 수 있을 듯 그릴 수 있었다. 그런데 대청하에 닿자 나는 지금까지의 쓸데없는 생각은 물론이고, 한 창 기분 좋아졌던 감정마저 모조리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도무지 이놈의 대청하를 건널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강 건너 멀리 탐그루 정박장이 보 이고는 있었지만, 날개가 없으니 날아갈 수도, 물살이 거세니 헤엄을 칠 수도 없었다. 그리고 간간히 보이는 성황청 사제들로 추측되는 무장한 사 람들의 모습도 상당히 부담이 되었다. 나는 한참 동안이나 이제 어떻게 해야 탐그루에 들어 갈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멍하니 서 있을 수밖에 없 었다. 대청하를 오가던 유람선을 떠올린 것은 점심을 먹고 난 후였으니 아주 한참이 지난 후였다. 비록 이곳에 있는 동안 유람선이 오가는 걸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전에 오갔던 유람선이니 지금은 다른 모습이 되었 다고 해도 분명 어디선가 오가고 있을 게 틀림없었다. 나는 일단 강 상류 를 타고 올라가 보기로 했다. 가는 길에 운이 좋다면 유람선이나 유람선 을 위한 정박장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었고, 그게 여의치 않더라도 강을 건널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아낼 수도 있겠다 싶어서였다 (이것저것 다 실패한다면 해가 진 후에 헤엄으로 강을 한 번 건너볼 생각도 있었다. 물 살에 떠내려 갈 것을 예상해서 강 상류 쪽에서 말이다). 그리 오래 걷지 않아서, 나는 정박장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정박장은 나 무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냥 유람선이 멈추어 섰을 때, 이곳에 배를 대고 관광객들을 내렸다가 다시 태우는 곳에 지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무로 만들어진 관리 막사 하나와 배를 댈 수 있게 된 곳 말고는 아무 것도 없 었다. 뗏목이라도 하나 보였다면 희망이 있었겠지만 그마저도 없다니 조 금은 난감한 기분이 되었다. 결국 헤엄쳐서 건널 수밖에는 없는 건가? 나는 강 건너 탐그루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곳은 예전에 그 네나무가 걸려 있던 장소의 맞은 편 기슭이었다. 저 강 너머에는 아직도 그네가 걸려 있을 것이었고, 그 옆에는 이무르 아주머니의 무덤이 있을 것이었다. 라이짐이 혹시 라짐과 함께 옮겨 묻었다면 또 모를까. "저, 계십니까?" 나는 나무로 만들어진 낡은 문을 두드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사실 이렇 게 말하는 게 무난하기는 했지만 '점검이다, 나와!' 라든가 '축하합니다, 당첨되셨습니다!' 같은 말이 안에 있는 사람을 마음대로 하기에는 더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상대를 위압할 만한 무기를 들고 있 는 것도 아니었고 (허리에 찬 나미트의 칼은 절대 뽑을 생각이 없으니 까), 어리숙한 관리원을 속일 만한 생각도 없었다. 게다가 나는 지금 도 움을 청해야 할 입장 아닌가. 그래서 나는 이렇게 아주 무난하게 물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안에서 나온 대답은 내 생각과는 어긋난 대답이었다. "높은 분이면 더 가져갈 것 없고, 잡상인이면 살 돈이 없다네." 안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풀이 죽은 목소리였다. 나는 무난하게 말한 걸 천만다행으로 여기면서 다시 한 번 물었다. "길가는 여행객입니다. 탐그루에 가려고 하는데요." "탐그루에?" 힘없는 목소리는 곧이어 바람 채운 돼지 오줌통에서 바람 빠져나가는 소리 같은 웃음 소리로 바뀌었다. "이름을 얻고 싶어하는 수행 무사라면 스파일이나 타실로 가는 게 좋을 거요. 거기에는 아직 칼잡이들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을 테니까. 장 사꾼이라고 해도 마찬가지. 거기에는 뭔가 살 사람들이 줄을 섰을 거요. 세금도 낮을 테고. 여행자라면 더더욱 말리고 싶군. 탐그루에는 볼 게 아 무 것도 남아있지 않으니까." 힘없는 목소리는 느릿느릿 이렇게 늘어놓기만 할 뿐 문을 열 생각은 하 지 않고 있었다. "저는 수행 무사도 아니고 장사꾼도 아니고, 관광객은 더더욱 아닙니 다. 탐그루에서 꼭 해야 할 일이 있거든요." "복수? 아니면 만나야 할 사람이라도? 아니, 어쩌면 보물이라도 묻어놓 고 찾아가려고 하는 모양이로군." 다시 한 번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유일한 희망이었던 이곳에 있는 사람이 이렇게 비협조적으로 나올 줄이야. 나는 한참 동안 뭐라고 말을 해야 좋을까 생각하다가 역시 말보다는 행동이다 싶은 생각 이 들었다. 이렇게 시간만 허비하고 있을 수는 없다 싶었던 것이다. "일단 얼굴을 보면서 이야기나 좀 나누지요." 나는 이렇게 말하면서 문을 열었다. 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아니, 자세 히 보니 문에는 잠금 장치도 달려 있지 않았다. 햇빛이 막사 안으로 쏟아 져 들어가자 안에 있던 사내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제길. 무례한 친구로군." 말투와는 달리 내 태도에 별로 문제를 삼는 것 같은 눈치는 아니었다. 나는 사내에게 이렇게 대꾸해 주었다. "무례를 용서해 주세요. 급한 일이 있거든요." 나는 이렇게 말하면서 허락도 얻지 않고 막사 안에 있는 의자에 걸터 앉았다. 막사 안에는 낡은 침대 하나와 책상 하나, 그리고 내가 앉아 있는 의자 가 전부였다. 창문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아무 것도 없었고 (나는 너무 깨끗하게 닦은 유리가 아닐까 한 번 만져보기까지 했다), 벽면에는 흔한 그림 한 점 걸려 있지 않았다. "높은 사람이 다 쓸어간 모양이군요." 나는 사내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내는 침대에 등을 기대고 누워 있었다. 힘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축 늘어진 모습이었다. 사내는 이윽고 빛에 익숙해졌는지 얼굴을 가리고 있 던 손을 내려놓았다. 드러난 얼굴은 한 사오십 쯤 되었을까? 면도를 하지 않은 얼굴에 생전 물이라고는 가까이 한 적도 없는 듯 땟국물이 잔뜩 끼 어 있는 얼굴이었다. "타지에서 온 사람인 게로군. 이곳 사정도 모르고 있는 걸 보면 말이 야." 사내는 이렇게 말하면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타지에서 오긴 했습니다만, 저 강 건너 편이 제 고향입니다. 제 이름 은 수르카라고 합니다." 나는 사내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내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는 여기 정박장을 관리하는 관리인이야. 사람들은 나를 르소 라고 부르지. 자네도 날 그렇게 부르게. 탐그루가 고향이라. 그랬군. 하 지만 이제 탐그루는 예전의 탐그루가 아니라네. 망할 그리폰 녀석들이 여 기다가 한바탕 불벼락을 쏟아 붓더니 이제는 성황청 녀석들이 들어와서 제멋대로 설치고 다니고 있다네." "좀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어요?" 이 르소라는 사내는 틀림없이 탐그루에 주둔하고 있는 성황청 녀석들에 게 반감을 가지고 있을 게 틀림없었다. 이렇게 물으면 일단 사내의 말문 을 열 수는 있으리라 생각되었다. 물론 탐그루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궁금한 마음이 있기도 했지만. "성황청 녀석들, 이곳에 와서 먼저 자치대원들과 귀족들부터 포교를 했 지." "포교라니요?" "자기들이 믿는 신을 믿으라는 거지. 정말로 몰라서 묻는 건가?" 르소는 그렇게 당연한 것도 모르냐는 투로 나에게 말했다. 나는 그냥 그러려니 하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르소에게 이렇게 말했다. "뭐라고 포교하던가요?" 물론 포교 내용이 궁금한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 물어야 사내가 계속 이야기를 할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나야 무식하니 잘 모르지만 하여간 성황만 따르면 뭐든지 다 된다는 거였어. 믿음에서 힘이 나온다나 어쩐다나? 하여간 성황만 믿으면 만사 끝이니까 성황만 따르라는 거였어, 녀석들 말은." 나는 그 말에 피식하고 웃음이 나왔다. 그런 말은 누구나 하는 말이었 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국왕을 믿는 사람이 있던가? 아니면 귀족을 따 르는 사람이 있던가. 나는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러니까 제일 먼저 성황청 녀석들에게 붙은 것도 귀족들과 자치대원 들이었지. 아주 쉽게 성황청 녀석들의 손을 들어주더군. 아니, 그놈들이 더 앞장서서 사람들에게 포교를 하고 다녔지." 이 말이 담고 있는 내용을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귀족 녀석들이야 누 가 다스리건 자신의 위치만 흔들리지 않으면 그만일 것이었다. 그러니까 틀림없이 나서서 성황청 녀석들의 편을 들었으리라. 만약 아케르가 들이 닥쳤거나, 혹은 국왕의 기사단이 들이닥쳐서 자신들을 믿으라고 말했어도 귀족 녀석들은 틀림없이 그 말을 따랐을 것이다. 나는 그 빌어먹을 루비 오 녀석과 쥬크, 그리고 재수 없는 여자 뒤로아 오르테가 생각났다. 그들 도 틀림없이 성황청의 편을 들면서 편하게 지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그런데 그렇게 쉽게 귀족들이 성황청 녀석들 편을 들어 준 데는 이유 가 있었다, 이 말이야." 르소는 내 쪽으로 고개를 숙이면서 말했다. 며칠을 씻지 않았는지 퀴퀴 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스파일에 제국이 들어선 사실은 알고 있지?" "예." 나는 타실을 떠날 때 미하엘과 지다문이 들려준 이야기를 통해 아케르 가 군사를 돌려 스파일을 장악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벌써 제국을 만들었다니. 어쩌면 아케르는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훨씬 대 단한 인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얼마 전에 황제 대관식까지 했다더군. 그런데 말이야, 새 제국이 들어 서자 가장 먼저 한 일이 뭔지 아는가? 바로 귀족들을 처단한 일이야. 싸 그리 다 죽여버렸어. 옛 스파일 관료들을 말이야. 성황청의 방식과는 아 주 다르지." 르소는 점점 열변으로 말투가 바뀌어 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르 소라는 사내는 정치 이야기만 나오면 입에 거품을 물고 떠들어대는 종류 의 사람인 모양이었다. 나는 이런 사람을 여럿 본 적이 있다. 주로 맥주 집에서였지만. "제국이 만들어 내는 것은 공포야. 공포를 만들어 내고 있다구. 그걸로 사람들을 장악하려고 하고 있지. 어떻게 보면 그게 새로운 나라를 만드는 데 필요한 일일 수도 있어. 어찌되었건 불만 세력은 당분간 나오지 않을 테니 말이야. 어쨌든 지금 제국이 곧 탐그루를 칠거라는 소문이 돌고 있 다네." "탐그루를요?" 나는 이렇게 르소에게 물었다. 물론 탐그루의 성황청을 치기 위한 군사 를 돌려 정권을 장악한 사람이니 언젠가 이곳을 치기는 하겠다 싶기는 했 지만, 이렇게 변두리에서 정박장 관리를 하는 사람 입에서 그런 사실을 듣게 되다니 나는 솔직히 조금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 혹시라도 생겨날지 모르는 불만세력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서 말이야. 뻔한 수작이지. 하지만 전략적으로 훌륭한 선택인것도 사실이야. 새로운 연금학 병기로 무장한 아케르의 무기가 성황청보다 앞서고 있는 게 사실이니까." 르소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제국이 이곳을 친다는 소문은 위에서부터 내려온 게 아니라 아래 에서부터 흘러나온 거라네. 윗사람들이야 그런 소문이 돌지 않게 쉬쉬했 지만, 사람들이 바보인줄 아는가? 천만의 말씀이야! 보통 시민들이야말로 가장 민감하게 정치가들이 하는 일에 반응하지." 완전히 정치 평론가로군. 하지만 역시나 이런 사람은 어디 가나 흔하게 볼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곳 귀족들이 그렇게 앞장서서 성황청에 투신했는지도 모를 일일세. 생각해 보게. 자기 목숨이 걸렸는데 어떻게든 살 궁리를 하지 않 겠는가? 공포를 앞세운 일은 새로운 나라의 초석을 다지는 데에는 도움이 되었을지 몰라도 결국 절대 마음을 바꾸지 않는 적을 만든 꼴이 된 셈이 라네." 르소는 이렇게 말하고는 목이 마른지 물통을 찾았다. 하지만 그의 물통 은 비어 있었고, 나는 내 물통을 르소에게 내밀었다. 르소는 고맙다고 말 하고는 얼른 물을 받아 마셨다. 어쩐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대화가 순 조롭게 흘러가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 제국 이름은 뭔가요?" 나는 르소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아케르가 스파일에 세웠다는 제국 의 이름을 들어 본 기억이 없었다. 과연 어떤 이름을 가지고 있을까? "이름 없는 제국 제국이라네." "예?" "새로 들어선 제국에는 이름이 없단 말이지." 르소는 이렇게 말했다. "생각해 보게. 비스토브레 제국? 구 세력을 죽이고 일어선 제국이 옛 왕국의 이름을 따겠는가? 같은 이유로 스파일 제국이라고 할 수도 없었겠 지. 그렇다고 아케르 제국이니 하고 이름을 세웠다가는 너무 속보이는 일 일테고, 사람들로부터 정통성을 인정받을 수도 없겠지. 비스토브레 왕국 에서는 자신이 바르도 대륙의 유일한 국가라고 우길 것이고, 스파일에 무 슨 제국이 들어서건 이단이고 반역이라고 몰아 세울 것이 아닌가. 그래서 그냥 제국이라고 한 거지. 원조 감자탕 집, 진짜 원조 감자탕 집이 줄줄 이 늘어설 때, 앞에 아무 것도 안 붙인 감자탕 집처럼 말이야." 르소의 비유에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하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런데 이거 재미는 있었지만 쓸데없는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었는걸. 슬 쩍 물 한 모금을 더 권하면서 이렇게 물었다. "저는 아케르의 제국이 쳐들어오기 전에 탐그루로 건너가야만 해요. 무 슨 수를 써서라도요." 나는 진지한 얼굴로 르소에게 이렇게 말했다. 물론 왜 건너가야 하는지 그 이유는 이야기 하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실컷 떠들고 물까지 얻어 마셨 는데 그것쯤 이야기 해 주지 않을리는 없겠다 싶었다. "예전에 유람선이 여길 지나다녔던 걸 봤어요. 그런데 강 건너편에도, 이 쪽에도 보이질 않더군요. 지금은 어디에 있나요?" 나는 르소에게 이렇게 물었다. 이렇게 물으면 보다 구체적인 방법에 다 가갈 수 있으리라 싶었기 때문이었다. "성황청 녀석들이 징발해 갔네." 르소는 담담하게 이렇게 말했다. "무기를 만든다나, 뭐 어쩐다나. 쇠붙이란 쇠붙이는 다 긁어 갔네. 저 기 있던 창틀도 다 빼갔어." 어쩐지 문고리도 없더라니. 그런데 르소의 말을 듣고 나니 한 가지가 궁금해졌다. "만약 제국이 쳐들어 온다면 성문을 굳게 닫고 지키는 편이 낫지 않을 까요?" 무기를 만들어 싸울 준비를 하느니 장기전으로 버티는 게 낫지 않겠는 가 하는 생각에서 물은 질문이었다. 내 질문에 르소는 손을 내저었다. "농성을 하겠다고? 성황만 믿으면 다 잘 될거라고 해 놓고 성문을 굳게 닫아? 이보게. 지금 이 상황에서는 민심 잃으면 끝장이라네. 내가 말하지 않았는가. 사람들이 가장 예민하게 정치에 반응한다고. 제국이 쳐들어 왔 을 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성황의 힘을 보여주지 않으면 성황청 녀석들 은 완전히 무너지고 말 걸세. 아마 귀족 놈들이 앞장서서 몰래 성문을 열 어 줄 걸?" 물론 그렇게 까지 되지는 않겠지만 어차피 성구를 잃은 성황청이니 더 이상 무슨 수를 낼 수는 없겠다 싶었다.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24650/24688 ━━━━━━━━━━━━━━━━━━━━━━━━━━━━━━━━━━━━━━━━ 제 목:[탐그루] 마음의 칼, 마음의 마법 348 관련자료:없음 28/28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7-28 23:33 조회:488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그럼 강을 건너갈 방법은..." "전혀 없다네. 내가 알고 있는 바로는." 르소는 단정적으로 말했다. "그래도 이쪽으로 누군가 건너오긴 할 거 아닌가요?" "물론. 여기 와서 뭘 가져가기도 했으니까. 그런데 여기 있는 배들은 모조리 대청하 상류에 띄워 두었다네. 그리고 몇 척은 남아서 여기 경비 정으로 쓰고 있지. 여기서는 뗏목 하나도 탐그루로 건너가는 건 불가능하 다네." 여기까지 와서 눈에 훤히 들여다보이는 탐그루로 들어가질 못한단 말인 가. 일단 수영으로 건너가야겠다는 생각은 집어 치워야겠다 싶었다. "그런데 배들을 상류에 띄워 둔 이유는 뭐죠?" 나는 혹시 그 쪽으로 갈 방법이 없을까 해서 르소에게 이렇게 물어보았 다. "당연히 배로 공격해 들어오는 걸 막기 위해서지. 상류에 배들은 움직 이지 못하게 무거운 닻을 내리고 쇠사슬로 묶어 기름을 가득 채워 놓았다 네." 나는 상류를 통해서 탐그루로 들어가는 것도 역시 포기해야겠다 싶었 다. "그럼 어떻게 여기서 탐그루로 들어갈 수 있나요? 그래도 무슨 방법이 있을 것 아니에요." 내 물음에 르소는 이렇게 말했다. "나도 여기서 사냥해서 먹고 산다네. 샘이 저 숲 안쪽으로 들어가면 있 으니까 그렇게 살기 불편하지는 않아. 사람이 없어서 좀 적적하기는 하지 만 가끔씩 짐승들이 찾아와서 말벗이 되어주곤 한다네." 르소의 말에 나는 르소가 쉬지 않고 이야기를 늘어놓는 까닭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도 여기서 르소와 함께 사냥이나 하면서 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무슨 방법이 있을 거예요, 틀림없이." 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자 르소는 나를 비웃는 듯한 표정을 하고서, 지금까지 한 말 중에서 가장 쓸모 있는 말을 했다. 물론 의도한 것은 아 니었지만. "자네가 마법사라도 되면 모를까. 어림없다네." 나는 강가에 앉아 대청하를 바라보면서 해가 질 때까지 마법에 대한 생 각을 했다. 어떤 마법을 써야 할 지는 알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스칼렛 이 몇 번 쓴 적 있는 순간이동 마법인지 공간이동 마법인지 하는 마법이 었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건 도무지 의미를 짐작 할 수 없는 '안개가 자욱한 밤은 피와 생명을 나누는 시간'이라는 마법의 말과, 자신이 한 번 다녀간 길에서만 사용할 수 있다는 스칼렛의 말뿐이었다. 이럴 때에 아자 닌이라도 있었다면 마법의 말을 쓰는 법을 가르쳐 주지는 않더라도 도움 이 될텐데. 하지만 이제 아자닌은 내 곁에 없었다. 나는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보면 나는 지금까지 저 강물처 럼 흘러만 왔는지도 모른다. 내 의지대로 무언가를 이루었다기 보다는 그 저 강물처럼, 위에서 아래로, 그저 그렇게 흘러왔는지도 모른다. 물론 나 는 알고 있었다. 내가 있는 곳과 내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 이 내가 사는 전부라는 것도. 강물은 저렇게 잘도 흐르고,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하나. 고개를 들어보니 탐그루의 서편으로 붉은 햇살이 흐르고 있었 다. "이봐. 이제 해가 지는데 나무할 거리라도 구해와야 하지 않겠나?" 르소가 내 등뒤에서 나에게 소리쳤다. "미안하지만 나는 오늘 여길 건너 갈 겁니다." 나는 르소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래? 그거 잘 됐군. 잠자리가 좁을 걸 걱정했는데." 르소는 이렇게 말하고는 땔감을 찾는지 숲으로 걸어 들어갔다. 나는 르 소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다시 강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 제 붉게 물든 탐그루의 모습은 서서히 내려앉는 어둠 속에 잠겨들고 있었 다. 바람은 심술궂게도 나뭇가지를 흔들어 나뭇잎들을 바닥에 떨어뜨렸 다. 나뭇잎들은 저마자 자신이 떨어져야 할 곳을 찾아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내가 먼저 그린 것은 시하라의 무기상점이었다. 그곳에서 시하라가 몇 번이고 칼을 줄테니 일을 배워보지 않겠느냐고 했던 권유와, 내가 마음에 들어 했던 칼들이 눈에 선하게 그려졌다. 언젠가 위대한 검사가 되어 세 상을 떠도는 영웅이 되겠다고 생각했던 시절이 떠올랐다. 그리고 나는 지 금 다시 탐그루로 돌아가고 있다. 칼은 찼지만 검사는 아니고, 마법은 알 지만 강 하나 건너갈 수준도 못된다. 나는 탐그루로 돌아가고 있다. 사비오 영감이 남겨 준 반지는 이미 돌 덩이로 변해 버렸고, 사비오 영감이 남겨 준 칼은 다시는 뽑을 일 없이 허리에 고스란히 매달려 있을 뿐이다. 남은 것이라고는 허리에 차고 있는 금화 뿐. 나는 시하라의 무기 상점이 있는 곳을 떠올렸다. 그 골목과, 그 곳에서 뛰놀던 아이들과, 담벼락과, 길을 지나는 개 한 마리까지 나는 떠 올려 볼 수가 있었다. 나는 눈을 떴다. 이제는 돌아가기 위해서였다. "어이. 아직도 건너가지 않았나?" 등뒤에서 르소의 비꼬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르소를 바라보 면서 조용히 말했다. "저는* 집으로* 돌아갑니다* 제가* 있어야* 할* 곳으로*" 다음 순간 세상이 온통 어두워지는가 싶더니 이내 밝은 빛이 내 몸을 휩싸 안았다. 내 몸은 빛에 휩싸이더니 곧 빛과 하나가 되었고, 세상의 빛과 어둠을 수도 없이 지나쳐, 나는 결국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다른 곳에 서 있었다. 내가 있는 곳은 먼지투 성이의 책상과 의자가 아무렇게나 흐트러져 있는 곳이었다. 여기가 어디 일까 나는 몇 번을 둘러보았다. 연금술사의 등은 없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아직 남아 있는 해는 내가 있는 곳을 비추어주고 있었다. 마법은 성공한 모양이었다. 이제는 조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마법의 말이라는 것은 그저 마음을 인도하는 방법일 뿐이며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이라는 것을. 나는 비꼬는 투로 나를 놀렸던 르소의 놀라는 표정을 보지 못한 게 조금 아쉬웠다. 나는 이곳이 어디인지 곧 알아낼 수 있었다. 자세히 보니 길다란 탁자 뒤편으로 빈 술병이 나뒹굴고 있는 모습과, 한 때는 맥주를 담아두었을 통을 볼 수 있었다. "나는 왜 돌아오는 순간까지 이 모양일까?" 누구 들으라는 듯이 나는 이렇게 투덜거렸다. 나는 분명히 시하라의 무 기 상점을 떠올렸는데, 내가 도착한 곳은 엉뚱하게도 별빛주점이었기 때 문이었다. 별빛주점은 완전히 닫혀 있었다. 문은 밖에서 못질을 해 두었는지 움직 일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고, 창에는 나무로 아무렇게나 덧댄 판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창으로 밖을 내다 볼 수는 있었지만 마땅하게 나갈 방법 을 찾기가 어려웠다. 물론 부수고 나가려면 그렇게 어렵지 않게 밖으로 나갈 수야 있겠지만, 거리 어디를 지나고 있을지 모를 성황청의 사제들을 떠올려 보면 그랬다가는 몇 걸음이나 탐그루 거리를 내 의지대로 걸을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물론 다시 마법을 시도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아까의 경험으로 비추어 보아서 절대로 시하라의 상점까지 안전하게 도착한다는 보장이 없었다. 그러다가 성황청 사제 앞에 뚝 떨어져 버리면 어떻게 한 단 말인가. 나는 그래서 조금 위험하기는 하지만 마법을 쓰는 것보다는 나은 방법을 찾기로 하였다. 그것은 바로 별빛주점 옥상을 통해 밖으로 나가는 방법이었다. 이 근처에 있는 건물들은 다닥다닥 붙어 있는 데다가 높이도 낮아서 잘 만 하면 건물들의 옥상을 통해서 시하라의 무기상점 옥상까지 닿을 수 있 을 것이었다. 나는 일단 옥상에 올라가 보기로 했다. 옥상에서 바라본 탐그루는 이제 완전히 어둠 속에 내려앉아 있었다. 가 끔 지나는 성황청의 사제들의 모습이 보이기도 했지만, 일단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으니 그렇게 쉽게 내 모습이 드러날 것 같지는 않았다. 그 런데 문제는 뛰어서 건너기가 너무 겁이 난다는 사실이었다. 얼마나 망설였는지 모른다. 한 걸음이면 건너 갈 수 있는 거리였지만, 여기는 바닥이 아니라 옥상인 것이다. 바닥이 내려다보이지 않을 지경인 어둠 속에서 다른 건물로 건너뛴다는 건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무모한 일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나는 반대편 건물을 바라보았다. 분명히 한 걸 음이면 갈 수 있는 거리였다 (물론 도움닫기를 해서 있는 힘껏 뛰었을 때 의 한 걸음이었지만). 나는 숨을 몇 번 고른 다음 뒤로 물러섰다가 반대 편 건물을 향해서 힘껏 달렸다. 그리고 별빛 주점의 옥상 끝에서 딱 멈추 어 섰다. 도무지 건너갈 엄두가 나질 않았다. 마법을 써 볼까? 당장 건너 갈 수 있는 마법을 지금 생각해 내기는 쉽지 않을 듯 했다. 아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이지 마법의 말은 아닐 것이었다. 나는 적당 한 마법을 생각해 보다가 타호루가 예전에 나를 공중에 띄웠던 마법이 떠 올랐다. 용병단 훈련병 시절에 나를 공중에 매달아 놓고 수도 없이 빙빙 돌렸던 마법. 그리고 하잔에서 타호루의 마법으로 언덕 위에서 들판으로 내려앉던 뮤를 탄 아케르의 부하들 모습도 떠올랐다. 그때 마법의 말은 '모든 일을 다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였다. 나는 눈을 감고 천천히 마음 을 집중해 보았다. 타호루가 했던 마법의 말이 담고 있는 의미와 그리고 지금의 내 생각이 하나 둘 정돈 되기 시작했다. "눈* 감아* 외면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다*" 그러자 내 몸은 꼭 날개라도 단 것처럼 하늘로 솟아올랐다...면 좋겠지 만 내가 떠오른 높이는 고작 손가락 하나 들어갈까 말까할 정도의 높이였 다. 그래도 그게 어디인가.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을 정도면 되지. 그렇지 만 나는 이내 곧 공중에서 이동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 수 있 었다. 아무리 팔을 휘젓고 다리를 움직여 보아도 내 몸은 내가 원하는 방 향으로 ㄳ게 움직여 주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허리를 숙여 거의 엎드리 다시피 한 다음, 별빛주점 옥상의 끝을 잡고 힘껏 밀어서 건너편 건물로 옮겨 갈 수 있었다. 누가 본다면 위험 한 건 둘째 치고 망신스러운 일이 다 싶었다. 그냥 뛰어서 건널 수 있는 거리를 기어서 움직인 셈이었으니 까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둠 속에서 건물을 뛰어넘고 싶은 마 음은 조금도 없었다. 나는 결국 공중에서 기어서 시하라의 무기 상점까지 닿을 수 있었다. 시하라의 무기 상점(정확하게는 옥상)에 도착했을 때, 나는 또 한 번 난감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에는 옥상과 통하는 문이 잠겨 있 었던 것이다. 마법으로 문을 열어 볼까 하고 생각도 해 보았지만, 결국 나는 가장 고전적이면서 효과적인 방법을 택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것은 바로 그냥 내려가는 것이었다. 시하라의 무기상점은 그리 높지도 않았고, 상점 네 귀퉁이에 기둥이 달려 있어서 내려가기가 그리 어려울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기둥을 붙잡고 조심스럽게 발을 벽면에 대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기둥을 타고 바닥으로 추락해 버렸다. 엉덩이가 조금 아프기는 했지 만 필사적으로 발로 벽을 지탱하려고 한 덕분에 크게 다친 것 같지는 않 았다. 나는 아픈 엉덩이를 감싸 쥐고서 혹시 순찰을 도는 성황청의 사제 가 근처에 없나 살펴 본 다음 시하라의 무기 상점 뒷문을 두르렸다 (다시 말해 기어가는 자세로 무기상점 뒷문까지 갔다는 말이다). "시하라! 시하라!" 나는 낮지만 강한 목소리를 문틈에 밀어 넣었다. 하지만 안에서는 아무 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귀를 문틈에 들이밀고 무 슨 소리가 들리지 않나 유심히 귀를 기울였다. 한 사람의 것이 아닌, 여 러 사람의 숨소리가 문틈으로 새어 나오고 있었다. 여기서 이렇게 많이들 자고 있을 이유가 있을까? 나는 생각하면서 다시 한 번 시하라를 불렀다. "아저씨도 검사야?" 나는 등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다가 문에 머리를 부딪치고 말았다. 내 뒤에서 나에게 말을 건 것은 꼬마였다. 다행히도 내 기억력은 꼬마의 이름을 나에게 말해주고 있었다. 꼬마는 민트였다. 언젠 가 내가 목도로 싸우다가 팔이 부러졌을 때 내 시중을 들어주었던 꼬마였 다. 그래서 나는 머리가 아팠지만 조금도 아프지 않은 척 하면서 민트에 게 말했다. "나야, 나. 수르카. 너 여기서 뭐하냐?" "아, 수르카. 두목 친구. 알아, 누군지." 민트는 꼭 자랑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민트 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사실은 혹이 났나 확인해 봐야 하는 건 내 머리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흠흠. 그래서 말인데, 너 여기서 뭐하냐니까?" 나는 순찰을 돌고 있는 성황청 사제들이 근처에 없나 살피면서 민트에 게 말했다. "오줌누고 왔어." "그렇구나. 그런데 여기는 무슨 일이냐니까?" 나는 같은 질문을 세 번이나 해야 한다는 사실에 짜증을 내면서 민트에 게 물었다. 민트는 이렇게 나에게 대답했다. "여기는 우리 집이야. 수르카는 무슨 일이야?" "나, 나는..." 뭐라고 말을 할까 망설이다가 나는 민트에게 그냥 솔직하게 사실을 말 해주기로 했다. "시하라 아저씨 알지? 아저씨를 만나러 왔어." 나는 민트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아버지요?" 민트는 나에게 이렇게 되물었다. 시하라를 보고 아버지라고 하는 걸 보 니, 아마도 시하라는 이곳에서 고아들을 입양해서 기르고 있는 모양이구 나 싶었다. "그래. 아버지. 아버지를 보러 왔어." 나는 이렇게 민트에게 말했고, 민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육중 해 보이는 무기 상점 뒷문을 가볍게 당겨서 열었다. 애초부터 잠겨있지도 않은 문이었던 모양이다. 내가 무기 상점 안에 들어섰을 때, 고약한 냄새가 코를 뚫고 들어와 가 슴까지 파고 들었다. 정말이지 온갖 악취를 다 뒤섞어 놓은 듯한 냄새였 다. 땀냄새와 음식 썩는 냄새, 그리고 거기다가 사람 살냄새까지 섞인 듯 한, 용병단 막사 안의 땀냄새와도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고약한 냄새였 다. "시, 시하라는?" 나는 될 수 있으면 코로 숨을 쉬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민트에게 물었 다. 민트는 손가락을 가리켜 구석에 누워 있는 시하라를 가리켰다. 시하 라는 누워있었다. 나는 처음에는 시하라가 죽지나 않았을까 생각될 정도 로 깊이 잠든 모습이었다. 다행히도 가슴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고 있는 걸 보니 숨을 쉬기는 쉬고 있는 모양이구나 싶었다. 나는 시하라를 깨워야 할까 잠시 고민해 보았다. 그러나 곤히 잠든 시 하라를 보니 도무지 깨울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런 악취 속에 서는 도무지 잠을 잘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알았어. 민트." "아버지는 자요." "알아, 알아. 내일 아침에 다시 올게." 나는 민트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다음 계단을 통해 옥상으로 올라갔다. 옥상으로 올라가는 문은 안에서 잠겨 있었다. 뒷문도 열어 두었으면서 옥 상으로 통하는 문은 잠가 둘게 뭐람. 엉덩이를 다시 아파왔다. 옥상에 올라서니 밤하늘에 별이 빛나고 있었다. 예전에 이곳을 떠날 때 보았던 바로 그 하늘이었다. 하늘은 그대로인데 그 아래는 너무나도 많이 변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베낭 안에 챙겨 두었던 모포를 바닥 에 깔고 누워 잠들었다. 어쩐지 울적한 기분이 드는 밤이었다. 다음 날 날이 밝자 나는 시하라가 혹시 놀라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계단 을 통해 시하라의 무기 상점으로 내려갔다. 내가 내려갔을 때, 시하라는 여전히 누워 있었고, 그 옆으로는 꼬마들이 앉아 시하라를 돌보고 있었 다. 저런 공기 속에서 살고 있었으니. 역시 병이 든 모양이었다. 그래도 밤보다 공기는 많이 나아진 것 같아 보였다. 아마도 시하라가 창문이라도 좀 열어 놓으라고 시킨 모양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시하라 의 옆자리로 다가갔다. 내가 다가가자 꼬마들이 잠시 경계의 눈초리로 나 를 바라보는가 싶더니, 이내 곧 시하라가 눈을 뜨자 수그러들었다. "수, 수르카로구나..." 시하라가 입을 열었다. 병색이 짙은 갈라진 음성이었다. 나는 그렇다고 말하면서 시하라의 옆에 앉았다. "어떻게 된 일이에요?" 나는 시하라에게 물었다. 시하라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둘렀다. "이젠 다 끝난 일이다, 수르카." 시하라가 말했다. "무기는 다 압수 당했단다, 꽤 오래 전에. 그리고 여기 있는 꼬마들은 내가 데려다가 기르고 있었지. 얼마 안 남은 돈이었지만 그래도 내 딴에 는 최선을 다했단다. 그런데 이제는 이렇게 내가 이 녀석들에게 의지를 하면서 살아가는 부끄러운 꼴이 되고 말았구나." 시하라는 이렇게 말하고는 기침을 심하게 했다. 눈알이 빠져나갈 것 같 은 정도의 기침이었다. 나는 시하라가 혹시 피라도 토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지만 다행히도 그 정도까지는 아닌 모양이었다. "살아 있으니 그래도 얼굴은 보게 되는구나. 라이짐도 여길 다녀갔었 지." 시하라의 눈은 물기에 젖어 있었다. 그런데 라이짐이 여길 다녀갔다니? 나는 시하라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보았지만 시하라는 이렇게만 대답 했다. "너희 둘이 친구라는 걸 아니까 이야기 해줄 수 없구나. 어쩌면 둘이 적으로 만나게 될지도 모를 일 아니냐." 시하라의 말은 옳았다. 라이짐과 내가 뜻을 달리하고 있다면 여기에 라 이짐이 왜 왔는가를 내가 아느냐 모르느냐에 큰 차이가 생길 수 있었다. 물론 그런 일은 없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나는 시하라의 말에 공연히 울 적한 기분이 되었다. "그런데 여기는 무슨 일이냐?" 참. 정말 중요한 걸 잊고 있었군. 나는 라이짐에 대해서 생각을 하고 있느라 만약 시하라가 이렇게 묻지 않았다면 한도 끝도 없이 생각에 잠겨 있을 뻔했다.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어서요. 마소드의 검을 찾고 있습니다." 나는 시하라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러자 시하라기 멍한 눈동자를 크게 치뜨며 나를 바라보았다. "마소드의 검을 찾고 있단 말인가?" 나는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지만 시하라가 왜 저렇게 놀라고 있는지는 잘 알 수가 없었다. "맙소사. 수르카. 네가 그걸 찾고 있을 줄은 정말 몰랐어......" 시하라는 몸을 일으키면서 말했다. 옆에 앉아 있던 꼬마들이 시하라의 몸을 부축해 주었다. "왜요?" 나는 일단 시하라가 마소드의 검의 행방을 알고는 있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시하라 얼굴에 드러난 저 죄책감은 뭘까? 나는 도무 지 짐작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시하라의 표정을 바라보면서 어쩐지 내 가 뭔가 잘못한 것 같은 생각에 검의 행방을 제대로 물을 수가 없었다. "네가 명검을 좋아하는 줄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마소드의 검을 찾을 줄은 알지 못했다. 미안하구나." "설마, 그 칼, 없어져 버린 건 아니겠죠?" 나는 조심스럽게 시하라에게 물었다. 나는 시하라가 마소드의 검의 행 방을 알고 있을거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설마 칼이 없어졌으리라고 는 상상도 해 보지 못하였다. 만약 그렇다면 내가 여기까지 온 것은 완전 헛걸음이었다는 말이 되는 걸까? 나는 마른침을 한 번 삼켰다. "그리폰들이 이 곳을 덮쳤을 때, 시청의 상당 부분이 파손되고, 여기는 완전히 생지옥으로 돌변해 버렸단다. 사람들이 수도 없이 죽거나 다쳤고, 여기저기서 약탈과 도둑질이 횡행했지. 그 와중에 마소드의 검이 사라졌 다는 소문이 돌았지. 그런데 말이다, 그 칼, 실은 내가 가지고 있었단 다." 시하라의 말에 이번에는 내 눈이 휘둥그래졌다. 시하라가 마소드의 검 의 행방을 알고는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설마 마소드의 검을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기도 했고, 그리고 가지고 있었다는 말은 이제는 가지고 있지 않다는 말과 같은 뜻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24651/24688 ━━━━━━━━━━━━━━━━━━━━━━━━━━━━━━━━━━━━━━━━ 제 목:[탐그루] 마음의 칼, 마음의 마법 349 관련자료:없음 29/29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7-28 23:34 조회:599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우리 아이들이 어느 날 들고 왔더구나. 어디서 어떻게 구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야. 내가 무기 상인 노릇을 하면서 칼이란 칼은 수도 없 이 보아왔다만, 정말이지 그렇게 좋은 칼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 칼을 네가 찾을 줄은 정말 몰랐구나. 알았다면, 정말 이렇 게 될 줄은 몰랐다..." 시하라는 말끝을 흐리면서 고개를 숙였다. 나는 시하라가 무슨 잘못을 한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어서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그런데 지금은 누가 가지고 있나요?" "...나도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는 몸이 아팠어. 의사는 부 르지 못해도 약이라도 제대로 먹지 않았다가는 죽을 게 틀림없었다. 그래 서 별 수 없었지. 나는 팔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그 칼이 좋은 칼이라는 걸 아는 사람에게 말이다. 나라고 마음이 편했던 건 아니다. 그렇게 좋은 칼은 무기 상인인 내가 보아도 탐이 나는 물건이었고, 그걸 귀족에게 넘 기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면 설마...?" 나는 불길한 예감을 느끼면서 시하라에게 물었다. 시하라는 몹시도 부 끄러워하면서 이렇게 말을 이었다. "그래. 나는 그 칼을 귀족에게 팔았다. 너도 잘 아는 녀석일 게다. 루 비오 녀석에게 팔았으니 말이다." 나는 루비오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왜 그렇게 시하라가 미안해하는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 알 수가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루비오가 라 이짐의 어머니 이무르 아주머니를 죽였다는 사실을 시하라도 잘 알고 있 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시하라가 굳이 미안해해야 할 이유를 알 수 가 없었다. 시하라는 그 돈으로 틀림없이 자신의 약과 아이들 먹을 것을 샀을 거였다. 나는 결코 이런 시하라를 비난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또 내게는 그런 시하라를 비난할 자격도 없었다. "미안하다. 네가 그 칼을 찾을 줄 알았더라면..." "이제 있는 곳을 알았으니 됐어요." 나는 웃으면서 시하라에게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시하라는 여전히 부 끄러운지 나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 오늘은 청소나 도와 드리죠. 해가 져야지 움직일 수 있을 테니 까." 나는 간밤보다는 공중에 뜨는 마법이 조금 더 나아지기를 바라면서 이 렇게 말했다. "그럼 칼은..." "되찾아 와야죠. 좋은 방법이 있을 거에요." 나는 특별히 훔친다거나 하는 표현은 쓰지 않았다. 혹시라도 다른 사람 손에 넘어가 있거나 관공서에 숨겨져 있었다면 마소드의 검을 훔치는 일 이 쉽지 않았겠지만, 루비오가 그렇게 개인적으로 소유하고 있다면 그나 마 훔치는 일이 수월할 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과연 생각처럼 쉬울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그런데, 수르카. 너 루비오가 있는 곳은 아니?" 꼬마들과 함께 시하라의 무기 상점 청소를 하려고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시하라가 나에게 이렇게 중요한 사항을 물었다. 이크. 나는 뒷머리를 긁 적였다. "루비오는 시청 한 복판에 있는 관사에 있다. 아마 마소드의 검도 거기 에 있을 게다." 시하라가 말했다. 나는 순간이동마법으로 시청 안에 들어갈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지만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았다.. "시청 안에 들어가는 방법이 문제겠지. 그건 바코쿠에게 물어 보거라. 바코쿠라면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물론이고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도 말 해 줄 거다. 그리고..." 나는 시하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병 때문에 지친 기색은 있었지만, 그래도 마소드의 검을 루비오에게 팔았다는 사실을 나에게 털어놓은 덕분 인지 표정은 조금 밝아 보였다. "청소 도구는 옥상에 있다." 시하라가 말했다. 나는 웃으면서 꼬마들과 옥상으로 올라갔고, 하루에 한 끼씩 먹는다는 꼬마들은 청소가 끝나자 시하라가 나누어주는 시커멓고 딱딱한 빵 한 덩이씩을 받아 들었다. 물론 나에게도 빵 한 덩이 가 돌아왔다. 나는 사양하려고 했지만 시하라는 청소까지 도와주었으니 우리 식구라면서 극구 먹을 것을 권했고, 그래서 나는 배낭에 남아있는 말린 고기는 꺼낼 생각도 하지 못하고 결국 돌처럼 딱딱한 검은 빵을 먹 게 되었다. 빵 맛은 뭐랄까. 소가죽을 입에 넣었다가 불려서 먹는 기분이었다. 이 렇게 맛없는 빵을 걸신들린 듯이 씹고있는 꼬마들을 보고 있자니 나는 그 저 부끄러울 뿐이었다. 아이들의 눈은 하나같이 퀭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고, 이상할 정도로 하나같이 시커먼 피부에 콧물은 줄줄 흘리고 있었 다. 팔소매와 코밑에는 콧물이 말라붙은 자리로 번들거렸고, 소매 밖으로 나와 있는 팔목은 나뭇가지처럼 가늘었다. 시하라는 누운 채 말라서 당장 이라도 부러져 버릴 것 같은 빵을 씹으면서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시하라가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굳이 마 법의 힘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라이짐이 꿈꾸었던 세상이 오면 이 꼬마들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나는 빵을 씹으면서 생각해 보았다. 적어도 이렇게 굶주리고 못 배우고 주눅들린 모습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후에는 시하라의 병간호를 하면서 나름대로 해야 할 일들을 정리해 보았다. 시하라가 예전에 즐겨 들려 주었던 용병단 시절의 무용담을 다시 듣기도 했고, 지금 탐그루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해서도 들었다. 그런데 용병단 시절 무용담은 여기 꼬마들도 신물이 날 지경으로 들었던 모양이었다. 시하라가 용병단 시절 이야기를 꺼내자 아이들의 표정이 지 루해 죽겠다는 식으로 변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내가 여기 있는 꼬마들을 거두어 기르게 된 거라네. 성황청 녀석들도 포기한 녀석들이야, 이 꼬마들은." 시하라는 옆에 앉아 있는 꼬마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말했다. 나는 시하라가 한 이야기 중에 성황청 사제들이 고아들을 어디론가 데리고 갔 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악마의 입에서 보았던 꼬마들이 떠올랐다. 아 마도 그 꼬마들 중에 상당수가 이곳 탐그루 출신 꼬마들일 것이었다. 나 는 시하라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줄까 하다가 그만 두었다. 대신 나는 이 렇게 말했다. "언젠가 전쟁이 끝나고, 이 아이들에게도 좋은 시절이 올까요?" 이렇게 말하는 내 목소리는 내가 듣기에도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슬픈 기분이었다. 아무래도 그런 시절은 오지 않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글쎄. 올 수도 있고 오지 않을 수도 있겠지." 시하라는 뜻밖으로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별 감정이 담겨 있지 않은 목소리였다. "중요한 건 그냥 여기서 내가 뭘 할 수 있는가가 아닐까 싶네. 수르카. 세상에는 수도 없이 많은 고아들이 있고, 또 더 많은 수의 굶주리는 아이 들이 있어. 내가 이렇게 몇 명 거두어 기른다고 해서 세상이 바뀔까? 천 만의 말씀이야." 시하라의 목소리는 어떻게 들으면 냉소적으로까지 들렸다. 시하라가 이 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던 나는 의외라는 생각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럼 왜 아이들을 거두어 기른 거죠?" 내가 묻자 시하라는 껄껄거리면서 웃었다. 간만에 들어보는 건강한 웃 음이었다. "세상은 변하지 않아도 이 녀석한테는 상관이 있거든." 시하라는 이렇게 말하면서 바로 옆에 앉아 있던 꼬마의 머리를 쓰다듬 었다. 나는 악마의 입에서 스칼렛이 했던 말을 떠올려 보았다. 스칼렛도 비슷한 맥락의 이야기를 했었다. 호수가에서 말라죽어 가는 물비늘고기를 던지면서 스칼렛은 말했다. 호수 저 편에 닿기 위해 돌을 던지는 것이 아 니라 그저 돌을 던지는 것일 뿐이라고. 그리고 말라 죽어가는 물비늘고기 를 전부 다 살릴 수는 없지만 자신이 지금 던진 물비늘고기는 물 속에서 자유롭게 헤엄치면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내가 있는 곳이 내가 있어야 할 곳이고, 내가 하는 일이 내가 해야 할 일이라는 말은 결국 이런 말일 거였다. 나는 어쩐지 동지를 만난 느낌에 가슴이 따뜻해져 왔다.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다. "이제 가는 거야?" 민트였다. 민트가 내 얼굴을 올려다 보면서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 였다. "다시 돌아 올 거야?" 나하고 있던 시간이 그렇게 좋지만은 않았을 텐데. 아무래도 애정에 굶 주린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슬픈 눈을 하고서 민트가 나에게 물었다. 하 지만 민트의 물음은 솔직히 나도 확신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야 말로 다시 돌아올 수 있기를 바라고 있는지도 몰랐다. "응. 꼭." 나는 나 자신에게 말하는 것처럼 민트에게 이렇게 말했다. "몸조심하게. 그리고, 마소드의 검을 왜 찾는지는 모르겠지만, 반드시 찾게 되길 빌겠네." 나는 배낭을 다시 짊어지면서 알겠다고 시하라에게 대답했다. 내가 옥상으로 올라가려고 하자 아이들이 모두 나를 올려다보았다. 저 아이들이 다 자랐을 때에는 살기 좋은 탐그루가 되어 있어야 할 텐데. 하 지만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있는 곳에서 내가 하는 일 뿐이라 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나는 이제 알았다. 나는 배낭에서 말린 고기를 꺼내 시하라에게 내밀었다. 얼마 되지 않는 분량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며칠은 버틸 수 있는 분량일 거였다. "그리고 이거..." 나는 탐그루를 떠날 때부터 허리에 차고 있던 금화를 꺼내 시하라에게 내밀었다. 시하라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이, 이게... 뭔가?" "제 게 아니에요. 사비오 선생님 거죠." 내가 말하자 시하라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금화를 받 아 들었다. "만약에 제가 돌아오지 못하게 되면 제 대신 사비오 영감에게 건네주세 요." 나는 이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사비오 영감이라면 이 금화를 받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시하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사비오 선생님께 빌린 다고 생각하시고 조금은 쓰셔도 될 거예 요. 하지만 지금은 시국이 혼란하니까 좀 안정된 다음에 쓰시는 편이 나 을 거예요." 이렇게 말하고 보니 내가 꼭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길을 가게 되는 것 만 같아서, 나는 울적해졌다. 내 말을 들은 시하라는 고개를 가로 저었 다. "아니." 시하라가 말했다. "반드시 돌아와서 네가 직접 전해드리거라. 성년의 신 마소드가 너의 가는 길에 은총을 내려 주실 게다." 시하라가 나에게 말했다. 나는 웃음을 지었다. "꼭 돌아와." 민트가 나에게 말했다. 나는 민트에게 이렇게 말해 주었다. "밤하늘에 보면 일렬로 반짝이는 별이 있단다. 그걸 사람들은 소망의 별이라고 하지." "나도 알아." 민트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소망의 별에 빌면 이루어진단다, 무슨 소원이건. 진심으로 빌기만 한 다면 말이야." 내 말에 민트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내가 무슨 말을 하는 지 알아듣지 못했다. 나는 그 순간 민트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민트는 그 무엇도 바라는 게 없었던 것이다. 나는 라이짐과 아케르와, 또 훈 족의 아훈과 반란군과, 그리고 무엇인가를 바라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 다. 그리고 나조차도. 그 누구도 민트의 마음처럼 투명하지는 않을 것이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소망의 별 이야기를 꺼낸 나 자신에 대해서 부 끄럽다는 생각을 하면서 계단을 올라갔다. 바코쿠의 연금술사의 집으로 가는 길은 지난 밤 만큼이나 어려웠다. 나 는 세 번 바닥에 떨어질 뻔하고, 대여섯 번쯤 성황청 사제에게 들킬 뻔했 으며, 세지도 못할 만큼 엉뚱한 방향으로 기어갔다가 겨우겨우 방향을 잡 아서 바코쿠의 연금술사의 집에 닿을 수 있었다. 다 도착하고 나서 보니 그리 쉽지도 않은 일이었을 뿐만 아니라 너무나도 위험했던 일이었구나 싶었다. 계속 기어가느라 무릎은 다 까졌고, 팔 다리로 몸을 움직이느라 관절관절이 다 뻐근했다. 무엇보다 위험했던 건 물론 성황청 사제들의 순 찰이었다. 여기 성황청의 사제들이 돌아다니고 있다면 라스폼 같이 내 얼 굴을 알고 있는 사제도 충분히 있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코쿠의 연금술사의 집은 여기저기 연금술사의 등과 깨어진 유리병과, 무엇에 쓰는지 알 수 없는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가루가 여기저기 어질러 져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어지러웠어도 바코쿠가 있는 방을 찾아내는 일 은 어렵지 않았다. 그것은 바로 바코쿠의 코고는 소리 때문이었다. 나는 코고는 소리가 들리는 방으로 걸어갔다. 가까이 다가설 수록 바코 쿠의 코고는 소리는 일정하게 들려왔다. 좋지 않은 기운을 느낀 것은 문 고리에 손을 가져가기 바로 직전이었다. 나는 불길한 예감이 머리를 지나 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일단 눈을 감았다. 마음으로 뭔가 알 수 있 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두려움을 느꼈다. 그것은 내가 느끼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코쿠가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거기에는 가벼운 흥분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약간의 살의도. 나는 천천히 문을 돌려 열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바코쿠. 나예요, 나. 수르카." 내가 말하자 문 뒤에서 바코쿠가 걸어나왔다. 어두움 속에서도 바코쿠 는 쉽게 알아 볼 수 있었다. 번쩍이는 대머리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 커 다란 덩치만으로도 알아 볼 수 있었다. 바코쿠는 내가 말하자 안도의 한 숨을 내쉬었다. "너였구나. 나는 도둑놈이나 성황청 사제, 아니면 라이짐일거라고 생각 했어." 바코쿠는 이렇게 말하면서 나를 방안으로 인도했다. 방안은 술병과 씻지 않은 컵, 그릇으로 엉망친창이었다. 앉을 수 있는 곳이라고는 침대 하나와 의자뿐인 것 같았다. "떠날 때 내가 말했지,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 말이야." 바코쿠는 애써 웃음을 지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바코쿠는 나에게 침대 에 앉으라고 자리를 권한 후, 자신은 의자에 앉은 다음에 술병을 꺼내어 입에 물었다. "한 잔 할 텐가?" 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가만 보니 쇠주인 것 같은데, 나는 저 술을 한 모금 마셨다가 그대로 세상 하직할 뻔한 기억이 있었다. 나는 술 마실 기분 아니라는 듯이,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바코쿠에게 고개를 저어 보였 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 지 모르는 지 바코쿠는 고개를 한 번 끄덕하더 니 단숨에 병째로 몇 모금을 들이켰다. 나는 바코쿠가 술을 마시는 모습 만 보고도 헛구역질이 날 것만 같았다. 뭐가 그렇게 괴로운 일이 있다고 저렇게 술을 마시는 걸까? 아니, 괴로운 일이 있어도 그렇지. "너도 반란군이냐?" 바코쿠는 술병을 내려놓은 다음 대뜸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나는 바코 쿠가 무슨 질문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어서 그냥 가만히 있었다. 그러 자 바코쿠가 말을 이었다. "라이짐이 다녀갔었어." 내가 라이짐이라는 이름에 별 반응을 보이지 않자, 바코쿠는 의아하다 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희 둘 친구 아니었니?" 바코쿠가 말했다. 몇 모금에 바코쿠의 혀는 완전히 꼬여 있었다. 아니, 거의 매일 술에 쪄들어 살았던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이렇게 몇 모금에도 완전히 취해 버릴만큼 몸이 쇠약해져 있는 거겠지. "들었어요, 라이짐이 다녀갔다는 이야기." 나는 그냥 이렇게 간략하게만 말했다. 그러자 바코쿠는 고개를 끄덕였 다. "녀석. 여기저기 떠들고 다녔던 게로군. 조심해야 할텐데..." 바코쿠는 말을 제대로 맺지 않고 이렇게만 말한 다음, 술병을 들어 다 시 몇 모금을 들이켰다. 나는 바코쿠의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 었다. "그런데 여기는 무슨 일로 왔니? 내 도움이 필요한 일인가?" 바코쿠가 나에게 물었다. 나는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야 할까 잠시 생각 한 다음에 이렇게 바코쿠에게 말하였다. "시청에 들어갈 방법이 필요합니다." 꼭 무슨 칼잡이가 사람 죽이러 가겠다는 투였다. 별로 이렇게 하고 싶 지는 않았지만 일단 진지하게 물어야 방법이 있겠다 싶어서였다. 그런데 내가 물으니 바코쿠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내가 말을 너무 심각하게 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나는 얼른 뒤에 한 마디를 덧붙였다. "물론 사람 죽이러 가는 건 아니에요." "그건 다행이로군." 바코쿠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수르카. 너 복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니?" 바코쿠는 잠시 뭔가 생각하는 듯한 눈치더니 여전히 취한 목소리로 이 렇게 나에게 물었다. 나는 갑자기 바코쿠가 복수에 대해서 묻는 이유를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라이짐 녀석은 여기에 복수 때문에 왔던 모양이 었다. "복수한다고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오지는 않지요." 나는 이렇게 말했다. "복수라는 게 그럼 그저 허망하기만 한 걸까?" 바코쿠가 나에게 물었고, 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저는 허망하다는 말하지 않았어요." 복수가 허망한 것이라면 세상에 그 어떤 것도 허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설마 허망할 지라도 복수가 필요한 순간이 있을 수 있고, 또한 필요한 사람이 있지 않을까요." 나는 바코쿠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바코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서 나도 라이짐 녀석을 말리지 않았다." 나는 바코쿠의 이 말을 듣는 순간 라이짐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 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 시하라에게 굳이 더 묻지 는 않았지만, 혹시 라이짐이 무슨 좋지 않은 일을 당했다는 말이 아닐까 해서였다. 시하라는 오래 전 일처럼 나에게 말했는데, 그렇다면... "지금 라이짐 녀석, 루비오를 노리고 있다." 나는 바코쿠의 말에 약간의 충격을 받았다. 시하라는 꽤 오래전에 다녀 갔다고 말했는데, 지금 이곳 탐그루에 나와 같이 있다니. 나는 바코쿠의 말이 이어지기만을 기다렸다. "먼저 말해 줘. 시청에 들어가야 하는 이유를." 바코쿠의 목소리는 취해있었지만, 정신만은 말짱한 모양이었다. 나에게 이렇게 묻는 바코쿠의 눈빛은 어딜 봐서도 결코 취한 사람 같지 않게 느 껴졌다. "루비오가 가지고 있는 마소드의 검을 가지고 오려고요." 나는 바코쿠에게 이렇게 말했다. 바코쿠는 내 말에 이렇게 다시 물었 다. "마소드의 검? 그것뿐인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칸의 강림이니 뭐니 하는 소리를 죽 늘어놓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만약에 바코쿠가 묻는다면 이야기 해 줄 수밖에 없겠다 싶었다. 내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날 완전히 미친 사람 취급할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지만 말이다. "라이짐의 복수 만큼이나요." 나는 이렇게만 바코쿠에게 말했다. 내 대답은 일단 옳은 선택인것 같았 다. 바코쿠는 내 말을 듣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복수가 허망하지 않다고 말하는 녀석이 고작 돈 때문에 마소드 의 검을 훔치는 건 아닐테니까 말이야." 바코쿠는 이렇게 말하고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한참 동안 바코쿠의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지만 바코쿠의 입은 굳게 닫힌 그 대로, 아무 말도 흘러나오지 않고 있었다.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24681/24688 ━━━━━━━━━━━━━━━━━━━━━━━━━━━━━━━━━━━━━━━━ 제 목:[탐그루] 마음의 칼, 마음의 마법 350 관련자료:없음 29/29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7-29 20:11 조회:377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누군가한테 들었어요. 바코쿠라면 시청에 들어갈 방법을 알고 있다고 요." 내 말에 바코쿠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내 눈을 바라보았다. 뭔가 중요 한 이야기를 할 것 처럼 말이다. 나는 숨을 죽이고 바코쿠의 말이 이어지 기를 기다렸다. "미안하지만 그건 불가능해." 바코쿠가 말했다. "완전히 불가능 한가요?" 나는 일단 실망하지 않고 바코쿠에게 다시 물었다. 바코쿠의 마음 한 구석에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완전히 불가능 한 건 아니지. 세상에 완전히 불가능 한 일이란 없으니까." "그렇다면 방법이 있기는 하다는 말이군요." 바코쿠는 고개를 끄덕한 다음 이렇게 말을 이었다. "내일 저녁에 연금술사의 등을 납품하러 마차를 끌고 시청에 들어갈 거 야. 그리고 마차 짐칸에는 연금술사의 등이 실릴 거지만 사람 하나 더 탈 수 있을만한 공간은 있어." 바코쿠의 말이 끝나자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생각보다 시청에 잠 입하는 일이 훨씬 쉬울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런데 네게 세 가지 말할 것이 있다. 먼저 하나는 들어갈 때 짐칸을 녀석들이 뒤진다는 거야. 그건 네가 알아서 해야 해. 내겐 막을 방법이 없으니까. 그리고 두 번째는 나올 방법이 없다는 거야. 라이짐 녀석에게 이 방법을 권하지 않았던 게 이런 이유 때문이었어. 하지만 사람을 죽이 는 일도 아니고 물건을 훔치는 일이니 잘만 하면 들키지 않고 빠져 나올 수도 있겠지. 이 방법도 네가 찾아 봐라." 바코쿠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세 가지라면서요?" "그래. 세 번째가 있다." 바코쿠는 내가 헛구역질을 하는 걸보고 싶어서 그랬는지, 술을 한 모금 마신 다음에 이렇게 말했다. "라이짐의 복수를 말리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복수는 라이짐의 몫으로 남기겠다고 약속한다면 태워 주마. 이게 세 번째다" 나는 바코쿠의 말에서 바코쿠가 라이짐이 복수 할 수 있도록 뭔가 준비 를 해 주었다는 것을 감지해 낼 수 있었다. 물론 나는 라이짐의 복수를 방해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고, 더군다나 라이짐의 복수를 대신 할 생각도 없었다. "물론입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럼 이제 다 된 거로구나, 수르카." 바코쿠는 마치 무슨 큰 거래라도 마친 사람처럼 술병을 높게 쳐들었다 가 내리고는 다시 들이켰다. 그후 바코쿠는 마치 죽은 사람처럼 잠만 잤다. 나는 바코쿠의 옆 자리 에 쓰레기 더미를 치워내고 누울 자리를 만든 다음 대충 누워서 잠도 자 고 생각도 하면서 바코쿠가 깨어나기를 기다렸다. 바코쿠를 기다리는 도 중에 배가 고팠는데, 생각해 보니 말린 고기를 하나도 남김없이 다 시하 라에게 주고 왔기 때문에 나는 손가락을 빠는 것 보다 더 좋은 식사거리 를 찾기 위해 시하라의 쓰레기 더미를 뒤지고 다녀야만 했다. 그렇게해서 온 몸에 쓰레기 냄새가 벨 즈음이 되어서야 내가 발견한 것은 과연 먹을 수 있는 것일까 의문이 가는 말라비틀어지고 괴상한 냄새가 나는 빵 한쪽 뿐이었다. 나는 그 빵 냄새를 한 번 맡아보고는 책상 위에 던져두었다. 그나마 실험을 위해서 지하수를 끌어 다 놓은 덕분에 물을 마실 수 있 었던 건 다행이었다. 나는 주린 배를 꼭 쥐고서 바코쿠가 일어나기만을 기다렸다. 바코쿠도 일어나면 배가 고플 테니 뭐라도 먹지 않겠는가 싶어 서였다. 결국 바코쿠는 저녁 시간이 다 되어서야 일어났다. 나는 바코쿠가 일어 나자 먼저 배가 고프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래. 배가 좀 고프군. 뭐라도 좀 먹어야 움직이겠는 걸, 이거?" 술에서 막 깨어나 머리가 아픈지 관자놀이를 두 손으로 꾹 누르면서 바 코쿠가 말했다. 바코쿠는 일단 물을 몇 모금 마시고는 쓰레기 더미를 손 으로 뒤적거렸다. 배가 고프기는 했지만 저렇게 뒤지고 있는 꼴을 보고 있자니 속이 다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어디 갔지? 남겨 놓은 게 있었는데..." 바코쿠는 이렇게 말하다가 책상 위에 내가 버려 놓은 빵 조각을 발견하 고는 씨익 웃었다. "좀 먹을래?" 바코쿠가 말했고, 나는 굶느냐 아니면 저 냄새나는 괴상한 물체를 뱃속 에 집어넣느냐 고민하다가 그냥 이렇게 말하고 말았다. "바코쿠 많이 먹어요. 배고프다면서요." 기왕 안 먹을 거 인심이라도 쓰는 게 낫겠지. 바코쿠는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마차를 몰아 시청으로 향했다. 물론 뒤 에는 내가 타고 있었다. 연금술사의 등이 실려 있는 상자 사이에 몸을 비 집은 채로. 바코쿠는 내가 몸을 숨긴 곳에 누군가를 몇 번 숨겨준 적이 있는 모양이었다. 위에 천이 덮여 있어서 좀 답답하다는 점만 빼면 아주 훌륭한 은신처였다. 그리고 마차 바닥과 앞부분에 구멍을 뚫어놓아 숨도 편하게 쉴 수 있었고, 밖을 몰래 관찰 할 수도 있었다. "바코쿠. 만약 들키면 어떻게 하지요?" 나는 마차 앞 쪽으로 나 있는 구멍을 통하여 바코쿠에게 이렇게 물어보 았다. 그러자 바코쿠는 나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글쎄. 나는 무조건 모른다고 대답할 거야. 너도 그래 줬으면 좋겠다." 호의를 베푼 사람치고는 지나치게 매정한 말이다 싶기는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만약 검문에 걸리게 되면 일단 바코쿠에게 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바코쿠를 인질로 잡고 빠져나가는 방법이 가장 좋을 것 같다 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저렇게 덩치 좋은 사내가 내 위협에 벌벌 떨면 서 마차를 모는 모습을 생각해 보니 그건 좀 아니다 싶었다. 게다가 성황 청 사제들이 바코쿠를 인질로 잡는다고 해서 눈 하나 깜짝 할 것 같지도 않았고 말이다. 뭔가 다른 수를 생각해 내기도 전에 마차는 벌써 시청 앞 에 닿았다. 눈에 선하게 그려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언젠가 여기 위병에게 따귀를 얻어맞은 기억도 있는 곳이었고, 이 앞에 있는 중앙 광장은 나와 라이짐 의 훌륭한 놀이터요, 또한 멋진 직장이었다. 나는 가슴이 뛰어 올랐다. 그리고 불안하기도 했다. 어떻게 하면 루비오가 가지고 있는 마소드의 검 을 빼 낼 수 있을까. 마차는 곧 멈추어 섰다. 나는 숨을 죽이고 구멍 밖으로 바코쿠를 바라보았다. 바코쿠는 고개를 쳐들어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꼭 누군가를 찾고 있는 것 같은 눈치였다. 뭘 찾고 있는 걸까? 하지만 나는 알 수가 없었 다. "납품일인가, 벌써?" 위병근무를 서고 있던 사제 하나가 바코쿠에게 물었다. 바코쿠는 그렇 다고 말했다. "시간 참 빠르지, 형제?" 나는 바코쿠가 억지 웃음을 웃으면서 위병 근무를 서는 사제에게 말하 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게다가 형제라니. 아마도 바코쿠는 성황청 신자 노릇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짐 칸 좀 살펴보지. 요즘 워낙 험한 일이 많이 나서 말이야. 이해 좀 해주게, 형제." 사제가 말하자 나는 가슴속에 철판이 하나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망 할 놈. 설마 여기까지 뒤지지는 않겠지. 잠시 후 쿵, 하는 사제가 마차 짐칸에 발을 올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곧이어 여기저기를 뒤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일단 숨을 죽이고 저 사제 녀석이 뭘 하는지에 신경을 집중 했다. 사제는 연금술사의 등이 담겨 있는 나무 상자를 이리 저리 움직여 보고 있었다. 상자 안에 숨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다. 만약 내가 상자 안에 숨 어 있었다면 사제는 내가 숨어있는 상자를 한 번 움직여 보는 것만으로 안에 들어있는 내용물이 연금술사의 등인지, 아니면 몸을 웅크리고 있는 사람인지를 알아챌 수 있었을 것이다. 사제는 위를 덮은 천을 벗겨낸 후, 상자 뒤편과 아래편까지 꼼꼼하게 살펴보고 있었다. 나는 목이 말라왔다. 입술을 바짝바짝 말라들었고, 한 모금의 물이라도 마실 수 있다면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은 기분마저 들었다. 나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들킬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지금 당장 무슨 수라도 내야만 했다. 일어나 사제를 해치운다면? 당장 다른 사제들이 달려 들어올 것이고, 마소드의 검이고 뭐고 다 날아가 버릴 것이었다. 뇌물을 권한다면? 하지 만 뭘로? 연금술사의 등이 가득담긴 상자로? 사비오 영감의 금화를 가지 고 있었다면 또 모를까 그것도 좋은 방법은 아니었다. 나는 강을 건너기 전, 정박장 관리인인 르소가 나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말은 이렇게 나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자네가 마법사라도 되면 모를까. 어림 없다네.'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오래 전 타호루가 했던 마법의 말을 떠올 려 보았다. "움직이는* 모든* 것들은* 사라지고* 사라진* 모든* 것들은* 움직일* 것이다*" 나는 마법의 말을 중얼거렸다. 마법의 말이 막 끝나자, 내 머리 위에 덮혀져 있던 천이 훌썩하고 치워졌다. 나는 위를 바라보았다. 성황청의 검은 사제복을 입은 사제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오 른 손을 내밀어 얼굴 앞에 가져와 보았다. 내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 았다. 성공이구나. 하지만 기쁨도 잠시, 사제는 안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 하려는지 손을 내밀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썩은 우유를 마 시는 것 같은 불쾌감이 온 몸을 감쌌다. 나는 눈을 떠보았다. 사제의 손 은 내 속을 헤집고 다니고 있었다. 나는 타호루의 마법이 주둔지를 보이 지 않게 할뿐만 아니라 실제로 주둔지를 사라지게 한다는 말이 떠올랐다. 나는 정말로 사라져 있었던 것이다. 다만 마법의 지속시간은 그리 길지 않아서 사제가 마차에서 내려가자 내 오른 손은 금새 정상으로 돌아왔다. 나는 손을 뻗어 상자를 만져보았 다. 다행히도 상자가 만져졌고,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차는 시청 안으로 들어갔다. 높은 성곽 안에 자리하고 있는 시청은 세 개의 거대한 동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 한 가운데에 관사 하나가 눈 에 들어왔다. 아마도 저곳이 루비오가 있는 관사이고, 저 세 동의 건물 중 하나가 성황이 있는 건물이겠다 싶었다. 마차는 천천히 움직여 들어가 건물 앞에 섰다. 살짝 고개를 들어 밖을 보니 아마 창고인 모양이었다. "여기까지야, 수르카." 바코쿠가 짐칸에 오르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는 아무도 없으니 여기서 내려. 하지만 다음부터 어떻게 해야 할 지는..." "알아요. 제가 알아서 하죠." 나는 바코쿠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그러자 바코쿠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주위를 살핀 후 막 마차 짐칸에서 내려가려고 했을 때, 바코쿠가 나에게 물었다. "그런데, 아까 검문 어떻게 통과한 거야?" 바코쿠의 말에 나는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하였다. "저만의 마법이지요." 내 말에 바코쿠는 양어깨를 한 번 으쓱 하고는 상자를 내리기 시작했 다. 짐을 내리는 동안 나는 마차 안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내가 돕겠다 고 했지만 바코쿠는 이렇게 말했다. "수르카. 너 여기 숨어 들어온 사람 맞아?" 그래서 나는 불편한 마음을 감내하면서 마차 한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이럴 수밖에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서 있 기도 불편했고, 그렇다고 편하게 앉아 있기도 뭣했기 때문이었다. "자. 그럼 나는 네 행운을 빌어주는 수밖에는 없을 것 같군." "그냥 죽지 말라고 말해줘요." 나는 바코쿠에게 부탁했다. 바코쿠는 대단한 인심이나 쓴다는 듯이 말 했다. "그래 그럼 죽지 말아라." "바코쿠도요." "그럼 살아서 다시 만나자." 마차는 꼭 큰 짐 덜었다는 듯이 시원스럽게 먼지를 풀풀 풍기면서 성을 빠져나갔다. 바코쿠가 마차를 타고 사라지자, 나는 또다시 혼자가 되었 다. 나는 먼저 루비오가 있을 관사에 잠입할 방법을 생각해 보았다. 보이 지 않게 하는 마법으로 잠입해 볼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그 방법은 너무 위험했다. 내 마법이 또 다시 제대로 작동한다는 보장도 없었지만, 무엇 보다 지속시간이 어느 정도나 될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다 른 방법을 찾기로 했다. 내가 서 있는 곳은 창고였다. 그리고 다행히도 창고에는 연금술사의 등 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가지 잡동사니들이 널려 있었다. 물론 검은 색 사 제복도. 조금 전에 위병 근무를 서고 있던 사제가 옷을 어떻게 입고 있었 는지를 기억해 둔 것은 천만 다행이었다. 나는 사제복을 입고, 사제들이 흔히 하듯이 얼굴까지 두건을 눌러썼다. 나는 해가 질 때까지 혼자 창고에 남아있었다. 창고에는 언젠가는 성구 로 쓰였을지 모를 빛을 잃은 지팡이들과 먼지 뒤집어 쓴 기사단의 제복, 그리고 책이 가득이었다. 책 제목은 대강 이랬다. '성황 어록' '성황청 교리 : 문답편' '성황님께 다가가는 법' '성황 어록2' 등등. 나는 책제목 만 대충 훑어보았다. 별로 펴보고 싶은 마음이 나질 않았다. 하지만 해가 질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으므로 나는 그냥 성황 어록이나 한 번 보자 싶 은 심정으로 책을 펼쳤다. "성황께서는 말씀 하셨다. 오직 믿음만이 너희에게 구원을 내리리라. 더 나은 세상, 더 나은 삶에 대한 의문은 당연한 것이다. 나를 믿고 따르 라. 그러면 너희에게는 구원과 영생이 함께 하리라." 나는 조그맣게 성황 어록을 읽어보았다. 성황이 직접 쓴 건 아니고, 아 마 누군가가 성황의 말을 듣고 구술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 성황이라는 친구, 우습군. 자기만 믿고 따르면 다 된다고 말하는 게 꼭 정치가 같잖 아. 이렇게 웃음을 짓고 있는데 누군가가 소리쳤다. "이봐, 형제! 거기서 뭐하고 있는 건가?"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지만 일단 사제 행세를 하기로 마음먹 은 상태였다. 이제 와서 들켰다고 피할 방법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어록 을 들고 이렇게 대꾸했다. "책을 구하러 왔습니다, 형제." 나는 될 수 있는한 목소리를 굵게 내려고 노력하면서 말했다. "그래? 그럼 '성황청의 역사' 한 권만 집어다 주게, 형제." 나는 목소리를 따라서 책을 찾아보았다. 다행히도 그리 깊지 않은 곳에 목소리가 말한 책이 놓여 있었다. 나는 천천히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걸 어갔다. 그곳에는 사제 하나가 지루한지 하품을 하면서 짝다리를 짚고 서 있었다. 나는 책을 내밀었다. "고맙네, 형제." 사제는 이렇게 말하고는 내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나는 혹시 낯선 얼굴이라 의심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형제는 악마의 입에서 온 사제인가 보지?" 사제의 말에 나는 성황청 타실지부에 있는 성직자들이 라스폼과 함께 이곳으로 도망쳐 왔을 것이라는 걸 상기했다. "라스폼 사제와 함께요, 형제." 나는 말했다. 그러자 사제는 이렇게 말했다. "역전의 용사로군." 사제는 이렇게 말하고는 내 어깨를 툭 치고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어느 사이 시청 안에는 어둠이 내려 앉아 있었다. 건물들은 시커먼 어둠 이 몰려와 삼켜버린 후였고, 내 눈에는 유독 루비오가 있을 관사만이 눈 에 들어왔다. 나는 천천히 관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손에는 어록을 들 고서. 관사는 삼 층짜리 건물이었는데, 아마 이곳에는 루비오는 물론이고 지 체 높은 자나크의 귀족이나 성황청의 높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모양이었 다. 입구에는 두 명의 사제가 나란히 서서 지키고 있었다. 나는 일단 두 사제가 있는 것을 눈으로 확인 한 뒤 한 바퀴 돌면서 생각해 보았다. 어 떻게 하면 들어갈 수 있을까를 말이다. 그러고 보니 사제들은 저마다 뭐 가 그리 바쁜지 여기서 저기로 이동하고 있었다. 손에는 책을 든 사제도 있었고, 또 무장을 하고서 줄을 맞추어 움직이고 있는 사제, 그리고 뭐라 고 중얼 거리면서 땅만 보고 걸어가고 있는 사제도 있었다. 관사를 한 바퀴 도는 동안, 나는 내려앉은 어둠과 지나는 사제들의 모 습에 힘을 얻어, 그냥 들어가기로 마음먹었다. 만약에 누구냐고 묻는다 면? 무슨 수가 나겠지 싶었다 (사실 힘을 얻었다기 보다는 뒤쪽이나 옆쪽 으로는 들어 갈 방법이 전혀 없었던 게 가장 큰 이유였다). 나는 어깨를 죽 펴고 얼굴도 가리지 않은 채 그대로 걸어서 관사 입구 를 지키고 있는 두명의 사제 사이를 걸어 들어갔다. 사제들이 나를 보고 뭐라고 말을 하지 않을까 겁이 났지만, 그냥 자연스럽게 보이면 되겠지 싶었다. 나는 한 걸음 한 걸음 입구를 지키고 있는 사제 옆을 지나쳤다. "형제." 막 지나쳤다고 생각한 순간 사제 하나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나는 제 자리에 멈추어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혹시 오늘 해 떨어지고 나서 있다는 포교성 사람들 모임, 어떻게 되었 는지 들었는가?" 사제는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어떻게 대답을 하는 게 가장 좋을까. 모 르는 사실을 아는 척 해야 하나? 만약에 모른다고 대답한다면 어떻게 나 올까? 결국 그 사제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모르겠는데, 형제." 그러자 사제는 나에게 다시 한 번 물었다. "2층에 가는 건가?" 나는 대답 대신 집게손가락을 입술에 대어서 보여주었다.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는 물론 나도 모른다. 그렇지만 사제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 덕였다.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관사 안으로 들어갔다. 관사 안은 대단히 호화롭게 꾸며져 있었다. 어디서 구해왔는지 벽면과 바닥이 온통 새하얀 돌로 만들어져 있었고, 천장에는 내가 지금까지 본 어떤 연금술사의 등보다도 크고 화려한 연금술사의 등이 걸려 있었다. 벽 면에 걸려 있는 그림과 여기저기 놓여 있는 조각상들은 타실의 왕궁과 영 빈관에서 본 것 보다 훨씬 크고 화려했다. 그림과 조각상들은 하나같이 성황을 찬양하는 것인 모양이었다. 그림은 빛으로 둘러싸여 얼굴을 알아 볼 수 없는 사람의 그림 뿐이었고, 조각들 은 광채와 불에 둘러싸인 사람을 형상화 한 것들이었다. 크고 화려하기는 했지만, 얼굴을 알아 볼 수가 없으니 이거 도대체 뭐라고 말해야 할지. 나는 이층으로 향하는 계단 앞에서 잠시 멈추어 섰다. 그런데 어디가 루비오가 있는 곳인지, 또 어디가 마소드의 검이 있는 곳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살짝 뒤를 돌아보았다. 현관을 지키고 있 던 두 명의 사제가 나에게 웃으면서 어서 올라가 보라고 손짓했다. 나는 억지로 웃으면서 계단을 올라갔다. 에라 모르겠다 싶은 심정으로 나는 계 단을 밟았다. 이 층에 올라가자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소리가 나는 쪽을 조심스럽게 살펴보았다. 그곳에는 사제들이 모여 있었다. 나는 사제들이 있는 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사제들은 방 입구에 모여서 방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방 입구 쪽에서는 환한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 다. "이봐, 뭐해?" 누군가가 내 등을 툭 치면서 말했다. "어서와. 곧 시작이라구."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사제 하나가 나에게 왜 가만히 있느냐는 듯한 얼굴을 하고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고 있는 나에게 사제가 말했다. "타실에서 온 친구 아닌가?" 친구? 나는 형제라고 부르지 않는 사제는 처음 보았다. 내가 이상하다 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자, 사제의 얼굴빛이 변했다. "이, 이거 실례했소, 형제." 사제는 이렇게 말하고는 얼른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뛰어 갔다. 나는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가 뛰어간 사제의 뒤를 따랐다. 뭔가 내가 모 르고 있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24682/24688 ━━━━━━━━━━━━━━━━━━━━━━━━━━━━━━━━━━━━━━━━ 제 목:[탐그루] 마음의 칼, 마음의 마법 351 관련자료:없음 28/28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7-29 20:12 조회:352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방안에는 예상했던 것처럼 내가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나이 많은 사제들이 원을 그리고 둘러앉아 빛을 만들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중앙에 있는 빛은 어디서 많이 본 모습을 하고 있었 다. 눈에 익은데... "성황, 님 모습은 잘 보이질 않는데?" "조용히 해. 보일 것도 같은데." "입 다물어. 무슨 말씀을 하실 것 같아." 이렇게 떠들어 대고 있는 사제들은 '형제'라는 호칭을 쓰지 않고 있었 다. 나는 이렇게 떠들고 있는 사제 중에서 낯익은 사제를 하나 발견할 수 있었다. 예전에 시청 앞에서 경비를 서던 자치대원이었다. 어쩐지 '형제' 라는 말을 쓰지 않는 게 이상하다 했더니 여기 모여있는 사람들은 다들 사이비 신자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사이비 신자들을 모아놓고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걸까? 나는 정박장 관리인인 르소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마 도 성황의 힘을 과시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런데 다들 이렇게 정신없이 떠들고 있는 걸 보자 나는 여기서 의외의 소득을 얻을 수도 있겠다 싶었 다. 나는 사제복을 입고 있는 사람 중에서 가장 말이 많아 보이는 사람 옆으로 다가간 뒤 기회를 보았다. 턱이 좁고 입술이 얇은 사내였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새 시대가 열린다고들 하지 않는가? 어찌되었건 일단 언덕을 보고 엉덩이를 비볐으면 끝까지 가야 하는 거라구." 말이 끝나는 찰나였다. 나는 말 많은 사내에게 이렇게 물었다. "루비오라는 사람도 아는가?" 사내는 내 쪽은 바라보지도 않고 얇은 입술을 움직여 이렇게 말했다. "루비오 치안 담당관? 그럼, 알지. 알고 말고. 그 분도 우리와 같은 생 각이시지. 여기 삼층에 사시잖는가? 그 분, 대단한 분이지. 부인도 상당 한 미인이고 말이야. 말이 나왔으니까 말인데, 뒤로아 오르테가, 그 분은 자나크 주, 아니 신성제국 전체를 통틀어 최고 미인이라고 하더라고. 나 는 아주 가까운 곳에서 한 번 본 적도 있는데 말야..." 나는 사내의 얇은 입술이 닫히기 전에 얼른 자리를 빠져 나왔다. 삼층 이라고 했지? 그냥 올라갔어도 좋을 뻔했군. 삼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는 커다란 문이 가로막혀있었다. 결국 다시 한 번 마법을 쓰지 않을 수 없는 순간이 된 것이었다. 루비오가 안에 없기만을 빌면서 나는 마법의 말을 외웠다. "움직이는* 모든* 것들은* 사라지고* 사라진* 모든* 것들은* 움직일* 것이다*" 나는 내 손이 투명해진 것을 확인한 다음 문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딛었 다. 한 순간이면 된다. 이렇게 생각하기는 했지만 문이 내 몸을 통과하는 기분은 손이 뱃속을 헤집는 기분보다 훨씬 좋지 않았다. 나는 문을 지나 언제 마법의 효력이 끝날지 모른다는 생각에 아주 재빨리 계단을 올라갔 다. 아니, 올라 갔다기 보다는 떠올랐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어차 피 나는 보이지 않는 존재였으니까. 삼층은 아마도 루비오가 혼자 쓰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뒤로아 오르 테가의 능력에 새삼 감탄을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이 미 지나간 세력인 귀족이면서 관사를 얻은 것도 대단한데 한 층을 완전히 혼자 쓰고 있으니 말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면서 계단을 허위허위 올라 갔다. 한 층을 완전히 튼 관사이니 만큼 넓이나 장식은 일층과 비교했을 때도 별로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정말로 마음에 든 게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거실에 마소드의 검을 아주 잘 보이게 진열해 놓아다는 점이다. 하 지만 루비오가 안에 있는지, 없는지. 없다면 언제 들어올지, 있다면 언제 거실로 나올지 알 수 없으니 당장 칼을 훔쳐 가지고 나갈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일단 나는 넓은 거실에 있는 옷장 속으로 얼른 들어갔다. 어차피 장식용으로 걸어놓은 칼이니 만큼 당장 꺼내 쓴다던가 하는 일은 없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일단 등이라도 기대고 조금 쉴까 하는데 어디선가 달착지근한 냄새가 풍겨왔다. 나는 뱃속이 경련을 일으키는 것을 느끼면서 냄새의 진원지를 찾아보았다. 옷장 구석에 줄에 꿰여 있는 말린 고기가 잔뜩 놓여있는 것 을 발견하고는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아무리 좋은 관 사라지만 굶주린 침입자를 위해서 저런 것도 준비해 두었단 말인가? 나는 앞 뒤 볼 것 없이 줄에서 말린 고기 몇 덩어리를 뜯어내어 입에 쳐 넣었 다. 아침부터 아무 것도 먹지 못한 나였다. 나는 냄새나는 빵을 입에 넣 지 않았던 내 판단에 스스로 축복을 내리면서 말린 고기를 씹었다. 짭짤 하면서도 고소한 맛의 말린 고기는 입에서 살살 녹았다. 일단 배가 부르자 갑자기 긴장이 풀렸다. 나는 배도 부른 김에 눈이나 좀 붙이자는 심정이 되었다. 잠시 동안만 쉬자. 그동안 무슨 일 있겠어. 나는 등을 기대서 옷장 안에 앉은 뒤, 혹시 몰라서 길다란 옷가지로 몸을 숨기고 잠시 눈을 붙이기로 하였다. 침입하고 나서 불과 얼마 지나지 않 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아주 잠시 쉬는 건 상관 없겠다 싶었다. 어차피 마소드의 검을 가지고 나가면 하잔까지 꽤 먼 거리를 가야 했으니까 말이 다.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나는 어느덧 잠이 들고 말았다. 꿈을 꾸었다. 오래간 만의 꿈이었다. 나는 평화로운 숲 속의 넓직하고 편안해 보이는 바위 덩이 위에 앉아 있었다. 내 옆에는 오브라디 교수도 함께 앉아 있었다. '수르카. 마칸의 강림은 끝났는가?' 오브라디 교수가 나에게 물었다. 나는 오브라디 교수에게 그런 것은 잘 모른다고 말했다. '그럼 라이짐의 복수는 이루어졌는가?' 나는 역시 잘 모른다고 대답했다. '너는 어른이 되었는가?' 나는 또 한 번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오브라디 교수는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그렇다면 네 악몽은 끝나지 않았다.' 이렇게 말하는 오브라디 교수의 손은 어느 사이 내 심장 부근을 헤집고 다니고 있었다. 꿈 속이었지만 너무나도 불쾌한 기분이었고, 난생 처음 써본 종류의 마법인지라 휴유증이 있는 건가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런데 왜 악몽이라고 말하는 걸까? 그 때 갑자기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땅이 울리는 것을 느끼면서 잠에서 깨어났다. "자, 잠깐만, 쥬크! 챙길 건 챙겨 가야지!" 나는 어디선가 한 번 들은 듯한 목소리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 는 옷장 문틈을 통해 밖을 내다보았다. 밖에는 루비오 녀석이 뒤로아 오 르테가와 함께 서 있었다. "그 정도 금화면 됩니다." 이번에는 쥬크였다. 나는 쥬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수염을 덥수룩하 게 기른 쥬크는 전 보다 훨씬 더 무시무시하게 보였다. "쥬크. 이 정도면 갖고는 아무 것도 못해. 집 한 채도 못산다고. 고작 가게나 하나 빌릴 수 있을까." "지금 빠져나가지 않으시면 가게도 못 빌리고 죽습니다." 쥬크가 말하자 루비오는 멈칫거리면서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그런 데 죽는다니?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나는 다음 순간 다시 한 번 굉음을 들을 수 있었다. 그리폰이라도 다시 공격해 온 걸까? "가요, 루비오." 뒤로아 오르테가였다. 뒤로아는 바늘 끝도 들어가지 않을 것 같은 표정 을 하고서 루비오의 팔을 잡아 당겼다. "시 서편에 마차가 준비되어있습니다." 쥬크가 말했다. 그러자 결국 루비오는 포기한 듯, 뒤로아 오르테가의 뒤를 따라 나섰다. 그들의 등이 보인 시간은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 는 루비오와 쥬크를 한 칼에 베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굳이 바 코쿠가 말하지 않았어도 복수가 라이짐의 몫이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나는 벽면에 걸려 있는 마소드의 검 앞에 섰다. 성년식 날 보았던 바로 그 마소드의 검이었다. 가까운 곳에서 보니 칼자루에 새겨져 있는 용문양 이 훨씬 더 보기 좋았다. 나는 두 손을 뻗어 마소드의 검을 집어들었다. 그러자 마소드의 검은 성년식날 그랬던 것처럼 나에게 반응하면서 빛이 나고 있었다. 쪼그리고 앉아서 잠든 덕분인지 몸이 좀 뻐근하기는 했지 만,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밀려들어오는 흥분을 진정하기가 어려웠다. 이제 까마귀의 벌판으로 가기만 하면 된다. 나는 생각하면서 루비오가 지나갔을 문을 통과해 관사 밖으로 향했다. 천만 다행으로 밖은 완전한 아수라장이었다.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온 사제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상황이 이렇다면 빠져나가는 건 시간문제다 싶었 다. 나는 어쩐지 운이 따르고 있는 것만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관사 밖은 아직 어두었지만 조금씩 밝아오는 햇빛에 어둠은 푸른 속살 을 조금씩 내비치고 있었다. 건물의 모습이 또렷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전체적인 윤곽은 보일 정도였다. "이봐, 형제!" 내 웃음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하였다. 사제 하나가 내 옷을 잡아 끌면서 이렇게 소리쳤던 것이다. "당황하지 마! 아케르가 온다는 걸 예상하지 못했던 건 아니잖아! 어서 정렬해!" 나이 들어 보이는 사제가 나에게 이렇게 말했고, 나는 그제야 멀리서 들려오고 있는 굉음이 바로 아케르가 공격해 오고 있는 소리라는 것을 알 아차릴 수 있었다. 저 소리가 바로 연금학 신병기의 소리로구나. 소리를 듣고 있는 나는 가슴이 뛰어 올랐다. "일렬 전진!" 나이 들어 보이는 사제가 말했고, 어느 사이 나는 나도 모르게 사제들 과 발을 맞추어 탐그루 동편으로 향하고 있었다. "카, 칼 써 본 적 이, 있어?" 내 옆에 선 사제가 나에게 물었다. 내 또래로 보이는 친구였다. 그런데 이렇게 겁을 먹고 있다니. 나는 처음에는 누구나 그런 거라고 그 친구에 게 말해주었다. 탐그루 곳곳에서는 시커먼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고, 거리는 쏟아져 나온 시민들로 엉망진창의 혼란이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사제들과 발 맞 춰 뛰어가면서 시민들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성황을 찾는 이, 성황을 욕하는 이, 그리고 오직 살고 싶다는 욕망으로 일그러진 표정들. 나는 이 곳에서 다시 하잔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아마도 성황청은 르소가 말했던 바로 그 최후의 일전을 위해 탐그루 동 편으로 향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넓은 벌판에서 성황의 힘을 과시할 생각 인가? 그러나 나는 그건 매우 무모한 일일 거라고 생각했다. 성황에게 아 무도 몰랐던 엄청난 마법이라도 있다면 또 모르겠지만. 그런데 나이 많은 사제에게 둘러싸여 빛을 발하는 성황의 모습은 어딘지 믿음이 가질 않았 다. 진정 마법을 쓸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과시 따위는 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어느 사이, 나는 탐그루를 빠져 나와 시 동편에 이어져 있는 평원에 닿 을 수 있었다. 멀리 밀집대형으로 집결해 있는 병사들의 모습이 눈에 들 어왔다. 나는 그들 한 가운데 깃발 아래서 망토를 휘날리고 있는 사내를 볼 수 있었다. 거리는 멀었지만, 아케르의 위압감은 여기까지 전해졌다.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 그저 휘날리는 깃발 아래 서 있을 뿐이었는데, 먼 발치에서 바라보는 아케르의 모습은 대단히 당당하고 흔들림 없어 보 였다. 밀집 대형에서는 아무 공격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아마도 소수의 병력을 시 각 방향으로 보내 탐그루에는 그저 혼란만 줄 생각인 모양이었 다. 정말 아케르는 그저 공포심을 불러 일으키려고 탐그루를 불태우고 있 는 걸까. 나는 아케르를 향한 분노가 가슴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것을 느 꼈다. "마, 맙소사. 저, 저기들 모, 모여있어." 아까의 내 또래 친구가 다시 말했다. 성황청의 부대도 이제 곧 집결할 모양이었다. "서, 성황님께서는 어디 계시지? 성황님, 성황님!" 그 친구는 거의 실성한 사람같은 얼굴을 하고서 여기 저기를 둘러보며 소리쳤다. 나는 그 모습에서 바코쿠가 시청에 잠입하기 전, 시청 주변을 둘러보던 일이 떠올랐다. 맞다. 라이짐. 라이짐을 잊고 있었다. 라이짐은 분명 복수를 위해 시청 주변 어딘가에서 루비오를 기다리고 있었을 거였 다. 라이짐과도 쥬크와도 칼을 맞대본 나였다. 여럿이라면 모를까 라이짐 혼자서라면 쥬크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수르카, 이 돌탱이 같으니라고. 그 생각을 이제야 하다니. 라이짐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어디로? 나는 쥬크가 시 서편에 마차를 준비해 놓았다고 말했던 것을 기억했다. 라이짐 은 틀림없이 그 주변에 있을 거였다. 나는 방향을 바꿔 시 서편으로 뛰어 가려고 했다. "어, 어디가?" 내 또래 친구가 나에게 물었다. "찾을 사람이 있어." 나는 이렇게 말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정렬하고 있는 성황청 사제 들의 무리에서 빠져 나왔다. 저렇게 제대로 훈련받지 못한 병사들이 첫 전투에서 어떤 꼴이 되는지,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전투가 벌어지면 내 또래의 그 친구는 아마 살아남기 어려울 것이다. 빌어먹을 성황. 빌어먹 을 아케르.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탐그루 쪽으로 뛰어갔다. 조금이라도 빨리 탐그루의 서편에 닿아야만 했다. "그 알량한 복수를 하기 위해 목숨을 내 던지는 것 보다는, 다 잊고 행 복하게 사는 걸 네 어미는 더 바랬을 텐데." 막 시 서편에 들어서려고 하는데, 나는 쥬크의 목소리에 걸음을 딱 멈 추어 섰다. 바로 여기에 있었구나! 나는 목소리가 들려 오는 쪽으로 고개 를 돌렸다. 쥬크와 라이짐이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 라이짐은 하얀 머리 를 바람결에 휘날리면서 칼을 들고 있었고, 쥬크는 그런 라이짐을 가소롭 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시민들과 사제들이 정신없이 혼란스러운 얼 굴을 한 채 그 주변을 뛰어다니고 있었고, 간간이 연금학 신병기의 굉음 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여기까지다, 꼬마!" 쥬크가 칼을 날렸고, 칼날은 라이짐이 들고 있던 칼을 그대로 부러뜨렸 다. 순간 라이짐이 넋을 잃은 듯 가만히 멈추어 섰다. 라이짐 지금 뭐하 는 거야! 나는 다급한 마음에 일단 소리를 질렀다. "라이짐!" 나는 급한 김에 허리에 차고 있던 나미트의 칼을 빼들었다. 나미트의 칼을 쥐는 순간, 나는 예기치 못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나미 트의 칼이 나에게 전한 울림이었다. 자신의 주인은 따로 있다고 나미트의 칼은 나에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라이짐을 향해 있는 힘을 다해 나미트의 칼을 던졌다. 제발. 나미 트의 칼은 허공에 궤적을 그리며 날아올라 라이짐의 발치에 떨어졌다. 쥬 크는 여전히 여유만만한 웃음을 지으면서 수염을 만지작거렸다. "호오. 흥미진진하군." 쥬크는 이렇게 말하면서 이번에는 내 쪽으로 칼을 겨누었다. 나는 쥬 크가 두 명을 상대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이 아니었다는 걸 생각했다. 나 와 탐그루의 강가에서 대결했을 때, 쥬크는 어찌되었건 나를 한 칼에 베 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 때, 라이짐이 나미트의 칼을 천천히 집어 들었다. 나미트의 칼을 집 어 든 라이짐의 모습에서 나는 전율을 느끼고는 제자리에 멈추어 섰다. 새벽의 어스름을 받은 라이짐의 백발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처럼 빛나 고 있었고, 칼을 겨누는 라이짐의 자세는 마치 험한 산세처럼 강해 보였 다. 하지만 내가 전율 한 것은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라이짐은 지금, 나미 트 장군의 정령과 닿아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나미 트 장군에게서 느꼈던 것 보다 몇 배는 더 강렬한 느낌이었다. "아니야, 쥬크." 라이짐이 천천히 쥬크에게 말하였다. 쥬크도 그런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는지 나를 향했던 칼날을 서둘러 거두어 라이짐에게 향했다. "네가 죽인 내 어머니는 늘 말씀하셨지. 어떤 경우라도 해도 해야 할 일이 먼저라고." 라이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쥬크는 라이짐에게 칼을 날렸다. 아마 도 단번에 해치울 심산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라이짐의 칼끝은 쥬크의 칼 날을 여지없이 빗겨내었고, 이어서 라이짐의 칼끝은 쥬크의 목을 향하였 다. 그야 말로 한 순간의 일이었다. 목에 칼날이 닿은 쥬크는 어쩔 줄 몰 라하면서 라이짐을 바라보았다. "이, 이봐..." 그러나 쥬크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라이짐의 칼끝이 예리 하게 한 번 번득이는가 싶더니 쥬크의 목을 긋고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다음 순간 쥬크는 칼을 떨어뜨리고 피를 막아보겠다는 듯이 양손으로 목 을 쥐었다. 하지만 손가락 사이로 비어져 나오는 핏줄기는 손으로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쥬크는 신음소리를 내려고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목에서 나오는 소리는 거품이 일었다가 사라지는 소리에 불과했다. 다음 순간, 쥬크의 목에서는 한 줄기 핏물이 솟아올랐고, 핏물은 라이짐의 몸 에 분수처럼 떨어져 내렸다. "라이짐!" 나는 라이짐에게 다가가서 소리쳤다. 라이짐의 백발에 핏물이 쏟아져내 려, 라이짐은 마치 지옥에서 막 올라온 악마처럼 보였다. 라이짐은 천천 히 루비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는 기억하고 있다. 루비오." 라이짐이 말했다. 루비오는 완전히 겁에 질린 얼굴을 하고서 뒤로아 오 르테가를 꼭 붙들고 있었다. 뒤로아 오르테가는 예전에 강가에서 보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아무런 표정도 없이 라이짐을 바라보고 있었다. "언젠가 나에게 염색약이 필요할 거라고 말했었지. 여기 회의실에서였 던가? 좋은 염색약을 구해줘서 고맙군." 아직도 얼굴에 흘러 내리는 핏줄기를 손등으로 닦아내면서 라이짐이 말 했다. "잠깐만, 잠깐만. 내 얘기 좀 들어주세요, 라이짐 장군. 아니, 선생 님." 루비오는 손을 내저으며 뒷걸음질치면서 말했다. "라이짐. 잠깐만." "수르카. 비켜." 라이짐은 수르카 너라도 나를 막으면 베어 버리겠다는 기세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라이짐이 내 뿜는 기세에 눌려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루비오는 무릎을 꿇고 있었다.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전혀 기억 하고 있지 못한 모습이었다. 그 뒤에 서 있는 뒤로아 오르테가도 차가운 미소로 루비오를 내려다 보았다. 비웃는 듯한 미소였다. 루비오는 계속해 서 라이짐에게 뭐라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라이짐은 그저 루비오를 바 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라이짐의 칼날이 루비오의 목줄에 닿았다. 루비오는 완전히 실성한 사 람처럼 이제는 뭐라고 큰소리로 소리를 치고 있었다. 입에서는 침이 줄줄 흘러나왔고, 눈과 코에서도 물이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기억도 나지 않는 모양이군. 귀족으로서의 자부심도 없나?" 라이짐이 말했다. 나는 라이짐의 목소리에서 라이짐이 애써 냉정을 가 장하려고 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라이짐의 말끝이 가늘게 떨렸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라이짐 님. 제발 목 숨만, 제발..." 라이짐은 결심한 듯 눈을 부릅떴다. 그러자 루비오는 죽음을 예감했는 지 큰 소리로 울음을 터트렸다. 때마침 가까운 곳에서 연금학 병기가 터 져 오르는 소리가 울려 퍼져 루비오의 울음소리를 삼켜버렸다. 새벽은 어 느 사이 환하게 밝아와 루비오의 흉측하게 일그러진 얼굴을 적나라하게 비추고 있었다. 복수가 필요한 때가 있다고 말했던 사람은 나였다. 하지만 지금 이 순 간은 아니었다. 저렇게 생명을 구걸하고 있는 사람을 베는 게 과연 복수 일까? 그것이 과연 라이짐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 수 있을까? 나는 라이짐 을 말리고 싶었다. 아니, 말려야 했다. 이건 라이짐이 원하는 복수의 방 식이 아니었다. 이제 루비오는 라이짐의 칼끝에 완전히 이성을 잃고 오줌을 싸고 있었 다. 무릎을 꿇고 있는 두 다리 사이가 축축하게 젖었다. 라이짐도 내가 느끼고 있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을까? 그 모습을 보자 잠시 주춤거리는 듯 했다. "베어버려요." 나는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들어 바라보았다. 그 자리에는 차가운 얼굴의 뒤로아가 서 있었다. 뒤로아를 바라보고 있는 라이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젠장. 젠장." 라이짐은 이렇게 중얼거렸다. 나는 라이짐이 무슨 소리를 하는 지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라이짐이 무척 혼란스러워하고 있다는 것 만큼 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라이짐의 칼끝이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칼끝이 목줄을 간지럽히자 루비오는 완전히 경기를 일으켰다.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24683/24688 ━━━━━━━━━━━━━━━━━━━━━━━━━━━━━━━━━━━━━━━━ 제 목:[탐그루] 마음의 칼, 마음의 마법 352 관련자료:없음 26/26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7-29 20:13 조회:451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빌어먹을. 이게 내 마지막 소원이었단 말인가." 라이짐은 이렇게 말하면서 입술을 꽉 깨물었다. 나는 라이짐에게 뭐라 고 말하려고 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바로 등 뒤에서 폭음이 연달아 들려왔고,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치솟아 오르는 불기둥과 불기 둥에 휩쌓여 허공으로 치솟는 사제들의 모습이 보였다.대열을 갖추어가고 있던 성황청의 사제들은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었다. 쓰러져서 신음하고 있는 사제가 있었고, 다리를 잃고 고통의 신음을 내지르는 사제도 눈에 띄었다. 여기저기서 시커먼 연기가 피어올랐다. 고기타는 냄새가 사방에 진동을 하고 있었다. 성황청의 공격은 거의 무위로 돌아간 모양이었다. 나는 연기 저편으로 다가오고 있는 아케르의 병사들이 진형을 갖추고 있 는 모습을 놓치지 않고 발견할 수 있었다. 마지막 발악이었을까. 나는 무너진 성황청의 전열 한 가운데에서 밝게 빛나고 있는 빛을 볼 수 있었다. 성황인 모양이었다. 빛 주변은 나이든 성황청의 사제들이 빙둘러싸고 있었다. 멀리서 들려오던 병사들의 발걸음 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발을 맞 추어 걷고 있는 병사들의 군화 소리는 위압감을 느끼게 했다. 나는 라이 짐을 바라보았다. 라이짐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ㄳ혀 있었다. 라이짐은 팔 소매로 이마의 땀방울을 닦아내었다. 팔소매는 땀과 피가 얼룩져 있었다. "베어 버리라니까요, 어서." 뒤로아 오르테가가 말했다. "그리고 날 가져요. 지금 당장. 저는 강한 자의 것. 이제 저는 라이짐 님의 것이에요." 뒤로아 오르테가의 말은 마법의 말은 아니었지만 마력을 지니고 있었 다. "군화소리." 라이짐이 중얼거렸다. 나는 라이짐을 바라보았다. "빌어먹을. 군화 소리 때문이야." 라이짐은 이렇게 말하고는 칼을 거두었다. 그리고는 평원을 향해 등을 돌리더니 갑자기 달리기 시작했다. 나도 라이짐의 뒤를 따라서 뛰었다. 평원에는 적어도 다섯 개 군단은 됨직한 아케르의 병사들이 진열을 맞추 어 탐그루로 향해 진격해 들어오고 있었고, 그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쓰러져 있는 성황청의 사제들과 빛을 발하고 있는 성황청의 나이든 사제 들뿐이었다. 라이짐은 아케르의 병사들을 향해서 뛰고 있었다. 나는 라이짐의 마음 을 읽을 수 있었다. 거친 흥분과 분노, 그리고 두려움. 라이짐은 아케르 에게 달려가고 있었다. 어느 사이 아케르 군단은 탐그루의 입구에 정렬해 있었다. 그들 앞에는 이제 성황청의 나이든 사제들과 성황, 그리고 라이짐뿐이었다. 나는 라이 짐이 있는 곳으로 재빠르게 뛰어갔다. 아케르는 망토를 휘날리면서 뮤에 올라 있었다. 그리고 그 옆으로는 낯 익은 얼굴들이 일렬로 늘어 서 있었다. 가투신, 발렌시아, 청강. 그리고 뒤편으로 타호루와 하진의 얼굴도 보였다. 아케르는 손짓으로 부하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러자 십부 병력이 성 황청의 나이 든 사제들을 포위했다. 나는 볼 수 있었다. 사제들의 일그러 진 얼굴을. 병사들이 사제들을 일으켜 세우자, 빛은 사라졌다. 나는 성황 의 모습을 볼 수 있겠구나 싶었다. 그러나 빛이 있던 자리에 있던 것은 빈 공간뿐이었다. "이제 끝났다, 성황. 어서 나와!" 가투신이 우렁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러자 사제 중 하나가 웃음을 터 트렸다. 고요한 바람만이 흐르고 있는 평원의 새벽에 갑작스러운 사제의 날카로운 웃음소리는 소름이 다 끼칠 지경이었다.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라네." 사제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순간 주름진 얼굴의 주름이 활짝 펴지는 가 싶더니 이내 낯익은 얼굴로 돌아왔다. 라스폼이었다. "이제 다 끝났군. 성황은 애초부터 없었어. 그냥 우리의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진 거지. 하지만 꼭 필요한 존재였다고 나는 믿고 있네. 아케르. 하나 묻지." 라스폼이 말했다. "자네들이 마칸의 강림을 막을 수 있는가?" 라스폼이 묻자 대답한 것은 가투신의 화살이었다. 가투신의 화살은 그 대로 라스폼의 무릎에 박혔다. 라스폼은 비명을 지르면서 무릎을 꿇고 쓰 러졌다. "무엄하다! 황제 폐하 앞에서!" 황제 폐하...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아케르가 예전에 내가 알던 아케 르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진격할까요?" 가투신은 당장이라도 탐그루로 들이닥칠 기세로 아케르에게 물었다. 바 로 그 순간이었다. "아케르 장군님, 아니 폐하. 더 이상은 못갑니다." 라이짐이 말했다. 새벽의 빛을 받은 아케르 이마에 나 있는 십자 모양 의 흉터가 꿈틀거렸다. "저를 밟고 가십시오, 부디." 라이짐은 이렇게 말하고는 두 손으로 칼을 높이 들었다. 나는 라이짐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스파일에서 제국이 성립하는 과정에서 겪었을 살육 과 공포. 라이짐은 그 모든 것을 탐그루에선 재현시키지 않겠다는 결의에 차 있었다. 나는 천천히 라이짐의 옆에 가서 섰다. 나는 라이짐의 얼굴을 보았다. 라이짐도 나를 돌아 보았다. 우리는 서 로 마주 보고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라이짐의 칼과 나의 마법은 이제 이곳에 서 끝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후회는 없다. "하나는 북쪽의 눈보라처럼 오고, 또 하나는 남쪽의 봄바람처럼 오리 라..." 타호루였다. 타호루가 마치 탄식과도 같이 중얼거렸다. 아케르 옆에 도 열해 있던 장군들의 얼굴에 동요가 일었다. 장군들의 동요가 병사들 전체 로 퍼져 나갔다. 그 때 문득 시원한 새벽바람 한 무리가 나와 라이짐의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바람은 라이짐의 머리카락을 흔들어 놓고는 저 멀 리로 사라져 버렸다. 나와 라이짐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고개를 돌 려 바람이 사라진 쪽을 바라보았다. 멀리 북쪽 평원에서부터 흙먼지가 피 어오르고 있었다. "폐하!" 청강이 남쪽을 바라보면서 소리쳤다. 나는 왼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곳에서도 흙먼지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케르의 뒤편으로도 흙먼지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누군가가 이곳으로 오고 있었다. 장군들의 동요는 한층 더 심해졌다. 신경이 예민한 뮤들도 그걸 감지했는지 앞발을 들어올리면서 소리 높여 울기 시작했다. "장군들!" 아케르가 소리쳤다. 동요하지 말하는 뜻이리라. 흙먼지는 조금씩 가라 앉기 시작했고, 사람들의 윤곽이 서서히 드러났다. 가장 먼저 알아 볼 수 있었던 것은 북쪽에서 오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찬! 아니, 모짤트! 아니, 크라이!" 크라이였다. 크라이는 아타카파 공화국의 사람들과 함께 우리가 있는 쪽으로 오고 있었다. 크라이 옆에 낯익은 와트슨 대통령의 얼굴이 보였 다. 다음으로 알아 볼 수 있었던 것은 남쪽에서 오고 있는 사람들이었 다. "바리바! 루크! 튜니티!" 그 뒤편으로도 낯선 얼굴의 사람들이 따르고 있었다. 탐그루 쪽에서 나오는 사람도 있었다. 마로우를 앞세운 한 무리의 사람 들이었다. 아케르의 뒤편으로 오고 있던 사람들의 모습도 보였다. 나는 아가테의 얼굴을 알아 볼 수 있었다. 범버쿠 정글의 자폰인들이었다. 북쪽에서 다가오고 있던 크라이의 뒤편으로는 아훈의 모습도 보였다. 아훈은 오로스크와 함께 훈족을 이끌고 오고 있었다. 나는 그들 중에서 가장 반가운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스타바!" 스타바의 옆에는 작은 새끼 뮤가 한 마리 딸려 있었다. "폐하. 결정을 내려 주십시오!" 가투신이 요동을 치는 뮤 고삐를 이리 저리 흔들면서 소리쳤다. 하지만 아케르는 쉽게 결정을 내리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폐하." 라이짐이 두 손을 내리면서 말했다. "우리를 다 밟고 가실 겁니까?" 라이짐은 이렇게 말하고는 뒤돌아 섰다. "이 여자를 죽이실 겁니까? 그리고 이 꼬마를 죽이실 겁니까? 타실에서 그렇게 하셨던 것 처럼. 그러실 겁니까?" 라이짐이 소리쳤다. 나는 청강과 발렌시아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하는 걸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아케르의 굳게 다물어진 입술은 벌어질 줄 몰랐 다. "청강! 말해봐. 지금 이 모습이 용병단 시절부터 이어온 더 나은 세상 의 꿈인가? 가투신! 대답해 보십시오. 이게 대의입니까? 발렌시아! 이게 희생인가요? 누군가를 죽이고 그 죽음으로 얻을 수 있는 게 고작 이런 것 이었습니까? 하진! 멈추어 서지 않는다는 게 이런 걸 말하는 건가?" 라이짐은 아케르 쪽을 향해 이렇게 소리쳤다. 내 옆으로 크라이가 와서 섰다. 크라이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내 옆으로 계속해서 바리바와 루크, 그리고 튜니티가 팔을 걸면서 섰다. 그 옆으로는 아훈을 비롯한 훈족 사람들이 섰고, 라이짐 쪽으로는 와트슨과 아타카파 공화국 사람들이, 그리고 아가테와 자폰인들이 일렬로 서고 있 었다. 그 뒤로는 바리바와 루크, 튜니티가 우리의 팔을 이어갔다. 마로우 는 바로 내 등 뒤에 서 있었다. 어느 사이 탐그루에 있던 시민들도 우리가 서 있는 평원으로 와서 모였 다. 나는 시민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시민들은 하나같이 비장한 눈빛으 로 아케르를 쏘아보고 있었다. 나는그들을 이끌고 나온 것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바코쿠의 대머리는 새벽의 햇살 아래 무척이나 번쩍이고 있었 다. "동요하지 마라!" 아케르가 이렇게 소리치자 평원에는 아케르의 메아리만이 바람과 함께 어우러져 흘러갔다. 우리는 물론이고 아케르 쪽도 완전한 침묵 속에 빠져 들었다. "결정은 내려졌다. 타호루!" 아케르가 말하자 타호루가 뮤를 이끌고 아케르의 옆에 와서 섰다. "병사들에게 전하라. 반란의 무리는 진압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북쪽의 바바 족을 치러 간다." 아케르가 말하자 탐그루 시민들이 환호성을 올렸다. "그리고, 하나 더." 아케르가 입을 열자 다시 한 번 침묵이 찾아 들었다. 기뻐하기엔 아직 이른 걸까. 나는 아케르를 주목했다. "제국을 도와 반란의 무리를 물리친 이들에게 표창을 내리도록." 아케르는 이렇게 말하고는 장군들에게 지시했다. "전 병력 퇴각한다! 프라브리티를 향해서. 앞으로 갓," 아케르가 말하자 장군들은 우렁찬 목소리로 아케르의 명령을 복창했다. 다시 한 번 탐그루의 시민들은 환성을 올렸고, 이번에는 다른 사람들도 함께 했다. 하진이 뒤돌아서서 우리를 향해 거수 경례를 붙였다. 하진의 경례는 라이짐을 향하고 있었다. 라이짐은 하진의 경례를 받지 않았다. 그저 미소를 지으며 하진을 바라볼 뿐이었다. 하진도 빙그레 웃고는 뒤돌 아 대열의 후미를 ㄳ아 뮤를 몰았다. "라이짐 님." 누군가 라이짐에게 말했다. "에질리?" 나는 라이짐에게 말을 건 사람을 바라보았다. 한 쪽 눈에는 안대를 하 고 있고, 얼굴은 흉터로 일그러진 에이스였다. 에이스는 어린 아이를 안 고 있었다. "그리지아..." 라이짐이 말했다. 에질리는 아기를 라이짐에게 건네주었다. 사람들의 환호성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지만 나는 라이짐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어떻게 된 거지?" 라이짐이 에이스에게 물었다. "당신이 진심으로 원했던 것이니까요." 에이스는 이렇게 대답했지만 나는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제 소원은 모두 이루어졌습니다." "그랬군..." 라이짐이 말하자 에이스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 "승리는* 우리의* 것입니다*" 에이스는 이렇게 말하더니 라이짐 쪽으로 쓰러졌다. 라이짐은 아기를 안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에이스를 부축해야만 했다. 라이짐은 왼 손을 들어 바라보았다. 나는 라이짐의 왼 손에 끼어진 반지가 내 반지처럼 돌 로 변해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어떻게 온 거야?" 나는 크라이에게 물어보았다. "탐그루로 가야 한다고 검은 엘프 하나가 말해 주더군." 크라이는 그레텔을 안고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도 검은 엘프를 만났는데?" 바리바가 신기하다는 듯이 크라이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누구야?" 나는 바리바에게 물었다. "황금 군도에서 만난 사람들이야." 루크가 희죽거리면서 말했다. "너도 검은 엘프를 만났어?" 나는 마로우에게 물었다. 마로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차피 오래는 못 있을 곳이었어. 자이스라고 했던가? 하여간 그 검은 엘프 덕에 가족들과 함께 빠져 나올 수 있었어." 마로우가 말했다. "우리를 필요로 할거라는 말에 나도 왔소." 아훈이었다. 아훈의 옆에는 오로스크와 스칼렛이 서 있었다. 스칼렛은 벰파이어의 모습을 하고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를 바라보는 게 부끄러 운지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스칼렛." "네. 저도 돌아왔어요." "스칼렛. 정말, 나는 정말 스칼렛을..." "이봐, 이봐, 뭐하는 거야. 남사스럽게시리." 오로스크였다. "약속대로 스타바는 무사하다구. 스타바의 새끼야. 어때, 귀엽지?" "아... 이 작고 귀여운 뮤가? 이름은 뭐죠?" "이름은 아직 안 정했어. 뭐라고 부를까?" "글쎄. 사비오 영감이 어떨까요?" 나는 이렇게 농담을 던졌다. 그러자 따악! 나는 아주 오래간 만에 뒤통 수를 맞았다. 이 느낌은 아주 익숙한데.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놀 랍게도 사비오 영감이 서 있었다. "사비오 선생님!" 사비오 영감은 조금도 변하지 않은 모습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늘 앉아 있던 기억으로만 남아있던 사비오 영감이 이렇게 서서 나 를 보고 있으니 좀 이상했다. "수르카." 사비오 영감이 말했다. 나는 혹시 한 대 더 맞을까 싶어서 몸을 움츠렸 다. "잘했다." 사비오 영감은 이렇게 말하고는 아직도 무릎을 꿇고 있는 라스폼에게 다가갔다. 사비오 영감은 라스폼의 무릎에 박힌 화살을 뽑고는 치료석을 대어 주었다. "라스폼." 라스폼은 사비오 영감을 차마 바라보지 못하고 있었다. "마법 학교를 다시 열 생각이네. 돌아와도 좋아." 사비오 영감은 이렇게 말하고는 스타바의 등위로 가볍게 뛰어 올랐다. 앉은뱅이였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가벼운 동작이었다. 스타바는 그저 사비오 영감을 한 번 올려다 보고는 새끼 뮤를 열심히 핥았다. "여러분! 이제 탐그루로 돌아갑시다!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이 아주 많을 테니까." 사비오 영감이 말했다. 모두들 어깨를 걸고, 혹은 다친 사람들 부축하며 탐그루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스칼렛의 손을 잡았다. "우리 함께 걸어요." 어느덧 새벽의 미명이 지나고, 가장 먼저 일어난 새들의 지저귐이 사방 에서 들려왔다. 마치 축복처럼 푸른 햇살이 탐그루에 내리고 있었다. 무 척이나 맑은 날이 오랫동안 이어질 것 같았다.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24684/24688 ━━━━━━━━━━━━━━━━━━━━━━━━━━━━━━━━━━━━━━━━ 제 목:[탐그루] 에필로그 관련자료:없음 6/6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7-29 20:13 조회:582 탐그루 # Songs of Innocence - Songs of Experience # * 에필로그 글쎄요. 사람들은 이제 평화가 왔다고 말하지만 라이짐 두목과 수르카 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아요. 탐그루에서 제국의 군대가 물러 간 그 날, 수르카는 혼자 어딜 좀 다녀 오겠다면서 탐그루를 떠났어요. 그런데 갈 때는 가지고 갔던 칼이 올 때 는 없더라구요. 어디 흘린 게 아닐까 싶어요.. 참. 제 소개를 해야죠. 저는 민트에요. 사람들은 코흘리게 민트라고 부 르지만, 저는 코를 흘리지 않아요. 흐르기 전에 팔소매로 다 닦아 내니까 요. 사비오 선생님은 사람들을 이끌고 불에 탄 탐그루를 새롭게 뜯어 고치 고 있어요. 낯선 사람들이 우리를 도와주고 있어요. 그 사람들은 훈족이 라나 뭐 그런 사람도 있고 황금 군도에서 왔다는 사람도 있고, 멀리 북쪽 에 아카 뭐라나 하는 곳에서 온 사람도 있었요. 라이짐 두목에게는 아이가 생겼어요. 아, 저를 우습게 보지 마세요. 저 도 아기를 낳는 것은 남자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아요. 아마 그 아이는 스 칼렛이 낳았을 거예요. 스칼렛이 가장 자주 돌보거든요. 뒤로아인가 뭔가 하는 여자도 아이를 돌보겠다고 했는데 라이짐 두목은 못하게 했어요. 참. 그 아이 이름은 그리지아에요. 제가 말했던가요? 언젠가 라이짐 두목이 수르카한테 말했는데요, 평화는 오래 가지 못할 거라고 했어요. 이제 곧 제국의 군대가 돌아올 거라고요. 그런데 수르카 도 그렇고, 사람들은 상관하지 않는다고 하더라구요. 저도 별로 신경 안 써요. 그냥 여기서 제 할 일만 하면 그만이죠, 뭐. 참. 저희 고아들도 사 비오 선생님을 따라서 얼마나 많은 일을 하는지 몰라요. 거리에 떨어져 있는 쓰레기를 줍기도 하고, 이렇게 멀리서 온 여행객들에게 우리 이야기 를 해 주기도 하고요. 그런데 라이짐 두목은 떠나겠데요. 라짐을 만나야 겠데요. 라이짐 두목 의 여동생이요. 그리고 같이 일을 해야 한다나 뭐 어쩐다나요. 저는 라이 짐 두목이 여기서 우리와 함께 있었으면 좋겠는데 라이짐 두목은 그게 싫 은가봐요. 라이짐 두목은 허리에 근사한 칼을 차고 있어요. 옛날에 유명 했던 무슨 장군의 칼이라는 데 저도 언젠가 크면 그런 칼을 찬 라이짐 두 목 같이 멋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라이짐 두목은 다 좋은데 맨날 모를 소리만 해요. 반지의 방식대로? 뭐 하여간 이런 말이었어요. 무슨 말인지 알면 나도 따라서 할 텐데. 근사하 게 들리거든요. 무슨 뜻인지는 정말 모르니까 물어보지 마세요. 수르카는 돌로 된 반지를 끼고 있는데, 언젠가 그리지아가 다 자라면 반지를 물려주겠다고 했어요. 돌로 된 반지를 줘서 뭘하나 싶네요, 저는. 참. 아가테라는 사람도 있었어요. 그 사람은 꼬마애를 하나 데리고 있 었는데 그 꼬마애는 라이짐 두목한테 용서한다는 말을 했어요. 아니, 우 리 라이짐 두목을 뭘로 보고 그런 소리를 하는지. 그런데 이상한 건 라이 짐 두목이더라고요. 자긴 용서받을 수 없데요. 참 나 원. 소매치기 몇 번 한 게 그렇게 큰 죄인가요? 이런, 제 정신 좀 봐요. 길을 물으셨지요? 전 어서 가 봐야 해요. 지 금 고아들이 모여서 쓰레기 주우러 갈 시간이거든요. 그냥 이 길을 따라 서 곧장 가시면 돼요. 이제는 마물도 나오지 않는다고 하니까 그리 어려 운 여행길은 아닐 거예요. 다시 탐그루에 오시게 되면 꼭 저 민트를 찾아 주세요. 어쩌면 라이짐 두목처럼 근사한 사람이 되어 있을지 모르니까요. 얘기 끝났냐구요? 더 듣고 싶은 게 있나요? HiTEL───────────────────────────────────── 창작연재 (SERIAL) LI:손서호 #24688/24688 ━━━━━━━━━━━━━━━━━━━━━━━━━━━━━━━━━━━━━━━━ 제 목:[탐그루] 감사드립니다. 관련자료:없음 3/3 보낸이:김상현 (손서호 ) 1999-07-29 20:49 조회:540 * 통신 후기 이렇게 세상에 내놓은 제 첫 번째 이야기는 끝났습니다. 처음 탐그루를 시작했을 때, 과연 제가 끝을 맺을 수 있을 지 확신 할 수 없었고 이야기의 끝은 너무나도 멀고 아득하게만 여겨졌습니다. 그렇 지만 결국 이렇게 마무리 할 날이 오고 말았군요. 제가 끝까지 써내리라 믿고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여러분께서 올려 주신 글들은 모두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잘 읽어보았 고, 보내주신 격려와 질책의 편지들 역시 기쁜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제 글을 읽어 주신 모든 분들의 관심이 없었다면 저는 이야기를 끝맺지 못했 을 지도 모릅니다. 저는 이야기꾼은 이야기로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저는 탐그루에 대해 서는 별로 할 말이 없습니다. 적어도 이런 후기의 형식을 빌어서는 말입 니다. 제가 이 글을 읽어 주신 분들께 할 수 있는 건 아마도 작은 다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저는 계속해서 이야기를 쓸 생각입니다. 그 모양과 빛깔은 바뀌어 가겠 지만 저는 이야기를 쓰는 일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의 시 간이 걸리건 다시 이야기를 들고서 여러분을 찾아 뵙겠습니다. 제 글이 누군가에게 작은 재미라도 전해 줄 수 있다면 좋을 것이고 혹시 열린 마 음을 가진 이를 만나 그 이상의 무엇을 전할 수 있다면 저는 더 이상 바 랄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다음 번에는 더 좋은 이야기로 찾아 뵙지요.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께* 건강과* 행복이* 함께* 하시길* 빕니 다*" 잠시 쉬겠습니다. ^^; PRINTER/CAPTURE를 OFF 하시고 [ENTER] 를 누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