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자료는 http://wndksl.cf.st 의 자료입니다. 다른곳에서 받으신 분들은 위 주소로 다시 접속해 주시기 바랍니다. 쿠베린 이수영 황금가지 9권 (완결) 제 1화 엘프의 구출 KUBERIN.. 내 이름은 쿠베린. 성은 없다. 그리고 인간도 아니다. 1 붉은 불꽃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나는 턱을 괴고 앉아 그 불꽃들을 보고 있다. 검붉은 빛이 오가는가 하면 맑을 정도로 곱고 부드러운 주홍빛이 스치고 지나갔 다.노랑빛이 별빛처럼 찰나에 스쳐가기도 하고 검은 티끌이 그 불꽃위에서 춤을 추기도 한다. 저벅거리고 사람들의 발소리가 바쁘다. 나는 약간 목이 말라왔지만 움직이기 싫어서 그대로 앉아있었다. 뒤에서 마미의 소리가 시끄럽게 들리고 있었다. "여기에 맥주하나 더!" "이 덩치야! 네가 갖다 먹어! 바쁘다구!" "체엣! 단골손님에게 그렇게 해도 되는 거야!" 여기저기서 웃음소리와 궁시렁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그들의 웃음소리와 움직임 을 따라서 발끝으로 흔들림이 밀려온다.장화에 감싼 발가락이 그 진동으로 약간 간지러워졌다. 나는 웃음을 머금고 내 발가락 끝을 바라보았다.이렇게 시끌거리는 마미의 가게 가 좋았다. 손님들은 대부분이 단골들이 많았다. 이 항구도시에 선원들과 한편으로는 산을 넘어오는 여행자들이 주된 고객으로 가끔 드물게는 드워프나 엘프들도 있었다.요즘 한 십여년 사이에 다른 아인족들 도 늘어났다는 이야기도 들었지만 어찌되었든 인간이 대부분이었다. 마미는 내가 꼼짝않고 난로앞에 앉아있자 내 뒤로 저벅거리고 오더니 등짝을 사 납게 후려갈겼다. "쿠베린! 이 느려터진 고양이놈! 타죽고 싶어?!" 난 웃고 있었다. 그녀라면 맞아줄 수도 있지만 다른 놈이라면 용서할 수 없다. "배가 고프면 와서 아양이라도 떨라구!" 그녀는 사납게 말했고 나는 그녀를 미소띈 얼굴로 올려다보았다.마미의 얼굴이 내 웃는 얼굴을 보더니 핏 하고 웃음이 감돌았다. 그녀의 눈빛이 따스해 지고 그리곤 다가와 내 이마에 주저않고 쪽 하고 큰 소리 내며 키스해 주었다. "내 귀여운 고양이.이리와서 뭘좀 먹으렴." 그녀는 내가 웃는 것을 좋아한다.싫어하는 자들이 많지만 그녀는 좋아했다. 나는 그녀에게 안겨서 일어났다. 여기저기서 야유소리가 들렸지만 그녀는 나를 늘어진 바아에 앉히고 내 몫으로 뜨거운 맥주와 김이 펄펄 오르는 스튜를 듬뿍 퍼서 놓았다. "목이 말랐지? 그럴 거 같았어." 내가 홀짝거리고 먹는 동안 그녀는 내 머리를 쓰다듬고는 손님들의 아우성에 일 갈하면서 테이블로 다가갔다. 나는 목이 말랐던 터라 맥주를 주욱 들이키고는 가게안을 돌아보았다. 여전히 사람은 많아서 빈 자리는 없다. 테이블은 약 열개 정도로 사십명정도 들어오면 자리가 없다. 삐걱거리는 나무 탁자와 웅성대는 사람들 사이로 뜨거운 열기가 스쳐가서 밖의 차가운 공기에 비하면 이 안은 뜨거울 정도로 더웠다.그러나 땀을 흘리면서 굵 은 팔뚝을 내보이는 선원들은 웃고 떠드느라 정신들이 없었고 몇몇 여행자들인 양 보이는 사람들은 웃고 떠드는 사람들을 구경하면서 자신들도 나름대로 즐기 고 있었다. 마미는 이 가게를 둘이서 지탱하고 있었다. 사라는 접시를 나르면서 마미의 뒤를 따르고 있었는데 그녀는 마미가 주워온 고 아였다.나이는 열여덟이었는데 고집이 센 주근깨의 계집애로 나와는 그다지 좋 은 사이는 아니다. 그녀가 바삐 접시를 나르는 동안 나는 스튜를 할작거리고 먹어치웠다.마미의 솜 씨는 여전히 좋다. 마미의 사슴집이라고 하는 이 가게는 이 항구에서 가장 오래된 가게중에 하나 로,마미의 남편의 아버지대부터 해왔다고 들었다.마미는 청상과부였는데 남편은 선원으로 바다로 나가 영영 돌아오지않았다.그덕에 그녀는 서른살부터 이 장사 를 시작하고 있었다.맥주와 먹거리를 팔고 위층에는 여관도 겸하고 있다.제법 건실하고 게다가 마미의 성격이 불같아서 그녀의 가게는 평판이 좋았다.이상한 놈들이 얼정거리는 법도 별로 없다.허긴 그런 놈들이 있다면 내가 용서치 않을 것이지만. 마미는 아마도 오십여세가량일 것이다. 그녀는 체구가 커서 왠만한 선원들과 팔뚝을 나란히 해도 지지않을 만큼 힘도 좋고 체구도 컸다.아름답다고는 결코 할 수 없는 모습이지만 난 그녀가 좋았다. 그래서 그녀가 죽어 없어질때까지 그녀에게 붙어 있을 생각이었다. "쿠베린.쿠베린.아이구,내 예쁜 것," 그녀가 내 머리를 안고 키스를 퍼붓고는 내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음.저기 가서 맥주통좀 가져다 줄래?" 난 게으르고 일은 거의 하지않지만 가끔 그녀가 바쁠 때는 도와주는 것을 원칙 으로 하고 있다.게다가 그녀가 큰 손과 몸집으로 날 안고 부비적거리면 특히나 그녀의 말대로 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내가 일어나서 뒤 창고의 문을 열자 사라가 고함을 쳐댔다. "포도주 통도 하나 더!" 그녀의 말은 들을 필요가 없다. 나는 맥주통만 하나 들고 나와서 마미의 앞에 내려놓았다.마미는 귀엽다는 듯이 내 뺨에 키스하고는 맥주통의 뚜껑을 따고 줄지어 놓은 큰 맥주잔에 맥주를 담 았다.어두운 황색액체가 거품을 담고 흘러나왔다. 내가 그것을 넋을 잃고 보는 동안 마미는 무겁지도 않은지 그 큰 잔들을 일곱개 나 지고 나가 술꾼들에게 하나씩 내려주었다. 나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여전히 내 전용 자리에 앉아서 뒹굴거렸다. 사라가 나의 뒤통수를 노려보면서 외쳤다. "뭐야! 포도주도 가지고 오라고 했잖아!" 나는 들은 체도 하지않았다.내가 뒹굴 뒹굴 거리고 있는 동안 마미가 바삐 일하 면서 사라에게 고함을 질렀다. "통 돼지 다 익었나 보고와!" 사라는 궁시렁 거리면서 부엌으로 다시 들어갔다. 나는 마미가 바삐 일하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시 난로앞에 가 앉으려 했다. 그러나 그 자리에는 이미 누군가가 앉아있었다.보지 못한 낯선 모습이었기때문 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상대도 날 주욱 노려보듯 바라보더니 곧 시선을 돌려서 마미를 돌아보았다. 언제 들어왔는지 이상했다. 나는 이 가게안에 있는 모든 녀석들의 움직임을 다 알아채고 있었는데 이 놈은 몰랐었다.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라서 난 다시 내 전용자리로 가서 놈을 관찰하 기로 마음먹었다. 갈색의 로브를 뒤집어 써서 얼굴이 반도 드러나지않은 녀석은 난로앞에 앉은 주 제에 로브도 벗지않고 있었다.곧 더워질 텐데 로브도 벗지않는군 하고 내가 호 기심에 사로잡혀 있는 동안 내 앞으로 한 녀석이 다가와 서서 물었다. "야.너.맥주 한잔 따라봐." 나는 그 놈을 바라보았다. 상당히 취한 놈이었다.그리고 낯선 얼굴로 보아 그놈은 날 모른다. 허긴 이 도시 엘리야에서 날 모르는 놈은 없다.그리고 나에게 감히 이렇게 다가 서는 놈이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그런데 이놈은 감히 다가서서 시비를 걸고 있었다. 내가 히죽 웃자 그놈은 헤에 하고 웃음을 짓고는 들고 있는 잔을 내 코앞으로 밀었다. "이봐.한잔 따르라니까!" 나는 잔을 받아들고는 조용히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이놈은 내가 마미의 말대로 맥주통을 가져왔기때문에 내가 점원내지는 뭐 그런 것으로 알았던 모양이다.그러나 그런 착각도 나에게는 매우 불쾌한 것이었기에 나는 되도록 잔을 멀리 밀어놓았다.잔을 깨면 마미가 화를 낸다. 놈이 내가 잔을 오히려 밀어버리자 눈을 크게뜨면서 악악거렸다. "이게! 따르라니까!" 그놈이 내 멱살을 쥐는 것을 사람들이 오오 하고 즐거운 듯이 돌아보는게 느껴 졌다. 다들 알고 있군 하고 나는 웃으면서 놈이 내 멱살을 잡는 것을 내버려 두고는 말했다. "사라! 창문 열어," 사라는 부루퉁한 얼굴로 날 바라보곤 창문을 환히 열었고 뒤이어서 나는 그녀석 의 허리띠를 꽉 잡았다.놈이 내가 보이는 태도에 약간 당황하고 있었는데 그건 내 알바가 아니었다. 나는 우슨 낯으로 그놈의 허리띠를 만지작 거리면서 그놈의 주머니에서 돈을 꺼 냈다. "자식이..히죽거리고 있어!" 놈은 취해서 멀건히 있다가 내 얼굴로 주먹을 날렸다. 나는 그 주먹을 잡고 공손히 창문가로 그를 끌고 가 다리를 걷어찼다.놈이 앞으 로 고꾸라지자 그 뒤를 이어 나는 그 발목도 잡아 단숨에 치켜 들었다. 내 키가 그다지 크지는 않기때문에 내가 그의 발목을 잡고 거꾸로 들면 그의 머 리통은 바닥에 호되게 부딪치기 마련이지만 키가 작은 것은 내 탓은 아니다. 와지근 하고 그가 머리를 바닥에 곤두박질치는 동안 나는 그의 발목을 잡고 질 질 끌고 창문가에 가서 휘이 휘이 들어서 집어내던졌다. 푹 하고 밖에 쌓인 눈더미 위에 놈이 처박히는 소리가 들려왔고 가게안에 있던 손님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카야! 쿠베린에게 덤비는 놈도 아직 있었어!" 웃음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얼굴색이 변한 몇몇이 밖으로 뛰어나가 동료인듯한 그놈을 부축하여 어디론가 데리고 갔고 나는 그들의 환호에 가벼운 답례를 해 보이면서 내 전용좌석으로 가서 앉았다.내가 돈주머니를 마미에게 건네자 마미 는 쯧쯧 고개를 내젓고는 내 손에서 돈을 받아서 어디론가 치웠다. "그놈 얼만큼 먹었지?" 내가 묻자 마미는 흠 하고는 손가락을 흔들어 보였다. "그놈의 돈주머니만큼 먹어치웠지." 내가 히죽히죽 웃자 마미는 내 얼굴에 또 한번 키스해 주고는 몸을 돌려서 아직 까지 웃고 있는 자들에게 조용하라고 고함을 질러댔다. 문득 난로가에 앉아있던 녀석이 날 바라본다. 내가 그놈에게 시선을 주자 로브를 입은 녀석이 천천히 일어나 나에게 다가왔 다. 그의 턱만 여전히 보였다.매끈하고 흰 턱이다. 냄새가 났다.풀냄새와도 흡사한 싱그러운 냄새였다. 나는 상대가 인간이 아니란 것을 곧 눈치챘다.인간에게선 이런 냄새가 나지않는 다. 로브를 쓴 녀석은 나에게 다가와서 조용히 물었다. "엘리야의 쿠베린이란 당신?" 나는 턱을 괴고 그를 빤히 보았다. 역시 맞다.이녀석은 날 보러 온 것이다. 내가 그를 보면서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후우 하고 안도의 한숨 비슷한 것을 쉬 더니 가게안을 훑어보았다. "어딘가 조용한 곳은 없습니까?" 나는 일어서서 위로 손가락질을 해보였다. 내 방으로 가자는 의미였고 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나의 뒤를 따라왔다. 마미가 내가 그와 함께 계단을 올라가는 것을 흘긋 보았고 사라도 그것을 보았 다.나는 마미에게 키스를 던져 보였고 마미는 조금 얼굴을 찡그려보였다. 로브의 사내는 침묵하고 있었고 내가 내 방문을 열고 그를 안으로 들여보낼 때 까지 여전히 로브를 뒤집어 쓰고 있었다. "음음..뭐냐?" 내가 묻자 그는 내 방안을 훑어보고는 조심스레 의자에 앉았다.나는 침대에 대 굴 하고 주저앉았는데 그에게 그게 불안감내지는 불신감을 준 것인지 불안한 얼 굴을 하고 있었다. "정말 당신이 쿠베린이에요?" 목소리가 가늘다. 역시 인간은 아니구나 하고 내가 생각하면서 그를 관찰할때 그가 주저하듯 물었 다. "아무리 보아도..겨우 십대소년처럼 보이는데.." 나는 히죽 웃었다. "물론,물론.그렇게 보일걸." 나도 잘 알고 있었다. 나의 맞은 편에 앉은 그는 천천히 로브를 벗었다. 짙푸른 초록눈과 청동빛이 도는 갈색머리와 뾰족한 귀,그리고 인간으로는 가질 수없는 부드러운 피부가 드러났다.겉으로 보아선 십오륙세정도이지만 틀림없이 이녀석은 몇백세는 되었겠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자아,엘프 양반.그래,부탁할 것은 무엇이지?" 내가 묻자 엘프는 불안한 얼굴을 하고 날 바라보더니만 입술을 깨물었다. "동생을 찾아요." 엘프의 이름은 카산. 북쪽의 노스엘스턴왕국의 엘프로서 귀족집안인데 어느날 엘프의 왕국에 난입한 인간의 사냥꾼들에게 누이동생을 잃어버렸다..라고 하는 것이 그의 이야기였다. 난 턱을 잡고 그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그거 언제적 이야기야?" 그는 고개를 숙이고 분노를 삭히는 듯 한동안 침묵했다. "반년전." "반년전이라..엘프의 아름다운 아가씨들에게 자식들이 무슨 짓을 했을지 각오하 고 있어?" 내가 냉정하게 말하자 그는 손을 부르르 떨었다. 풀냄새가 나는 부드러운 살결을 보면서 나는 입맛을 다셨다. "흐음..흐음..순진하구만." "그러..그러니까..부모님은 단념하셨죠.그러나 난 찾아야 겠어요." "누이동생이..이 근처의 델리암왕국에서 노예로 팔렸다는 소문을 들었어요.간신 히 숲의 엘프에게 이야길 들어서..여기까지 온 거에요.그러다가 당신 소문을 들 었어요." 그는 고개를 들고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의뢰를 받아주실 거죠?" 나는 팔짱을 끼고 그의 눈앞에 앉은 나의 모습을 다시 생각해 보았다. 나는 호리호리하다. 호리호리뿐 아니라 여자로 오인될 만큼 예쁘장(?)하다. 검은 머리와 녹색눈을 하고 있고 피부는 희다.가끔 나를 놀리려는 자들이 나오 는 것은 그때문.게다가 키도 그다지 크지않다.지금 내 눈앞에 앉은 이 엘프의 소년보다야 약간 크지만 보통 이상은 결코 아니다. "뭘 줄거지?" 내가 묻자 카산은 주섬 주섬하면서 품안 깊숙이 에서 작은 단검을 빼내어 들었 다.그 단검의 자루에는 푸르고 큰 보석이 박혀있었다.물론 이것은 드워프의 물 건으로 굉장한 장식이 되어있었다.청동과 백금을 사용해서 만든 이 장식용단검 의 가치는 물론 엄청나게 비싼 것이겠지만 그보다 이 눈알만한 이 보석은 보통 물건은 아님을 단숨에 알아보았다. "스카이 롬이군.." "네.스카이 롬입니다.제 생일 선물로 부모님께서 해 주신 겁니다." 카산이 조용히 말했다.그는 그것을 내게 들이밀었고 나는 그것을 받았다. 엘프의 가계에서 내려오는 이 스카이 롬은 대개는 탄생석으로 향기를 뿜어낸다. 지금 내가 맡고 있는 이 향긋한 풀향기와 꽃내음을 섞은 이 향기는 이 보석에서 나는 것이었다.이 엘프의 소년은 틀림없이 귀족의 가계였다. 나는 보석에 혹해서 한동안 그 푸른 보석을 바라본 뒤에 품안에 넣었다. 한숨을 삼키고 있던 카산은 날 보더니 진지하고도 불안한 얼굴로 다시 물었다. "도와주실겁니까?" "응.받아들였다.그 소녀를 찾아내마.이름은?" "달리아나." 그가 한숨을 쉬듯 말했다.눈 안에서 눈물이 차오르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의 뺨에 손을 대고는 히죽히죽 웃었다. "찾아주마.그녀의 물건이라도 있나?" 그는 급히 뒤적이면서 작은 거울을 꺼냈다.백금장식이 된 손거울로 꽤나 고급이 었다.그것을 그가 내밀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네가 너무 오래 가지고 있었어.냄새가 전혀 안나." "그...그럼?" "너와 비슷한 냄새가 날까? 그녀?" "아..아,네.저랑 쌍동이니까.." 그가 급히 대답하는 순간 나는 그의 목덜미에 코를 들이박았다. 그가 놀라서 황급히 뒤로 물러서려는 것을 나는 덥석 끌어안고 코를 박아 냄새 를 빨아들였다.맥박이 거세어 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눈을 감고 천천히 그 냄새를 각인했다. 혀를 내밀어서 목덜미를 약간 핥아보았다. 음음..좋은 냄새다.이래서 엘프는 맛있어..먹고싶어.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를 천천히 놓아주었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카산은 당황해서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고 나는 히죽 히죽 웃었다. "맛있는 냄새.인간과는 다른 좋은 냄새다.인간에겐 누린내가 나거든." 내가 콧등을 찌푸리자 그는 황급히 뒤로 물러서더니 외쳤다. "나..날 잡아먹을 건가요?" 그 말을 듣고 나는 내 입안에서 송곳니가 튀어나온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카카카.." 나는 웃음을 터뜨리면서 내 침대위를 대굴거리고 굴렀다.입안에서 튀어나온 송 곳니가 재빨리 사라지자 나는 입술을 만지작 거리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이제 내가 쿠베린이란 것을 기억하나봐." "아..알고 말고요! 엘리야의 쿠베린! 묘인족의 왕!" 그가 창백해서 날 바라보며 외쳤다. KUBERIN... 내 이름은 쿠베린 성은 없다. 그리고 인간도 아니다. 2 엘리야는 항구도시이기 때문에 떠돌이가 많다. 그런 것쯤은 감안해야한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편이 훨씬 재미있다.만약에 이 곳이 한적한 시골마을이었다면 결코 이곳에 엘프따윈 나타나지도 않을 것이고 지금 내가 걸어가고 있는 이 저자거리 에도 드워프따윈 없었을 것이다. "여어..쿠베린." 묵직한 얼굴로 파이프를 물고 있던 드워프 마루투가 나에게 낮게 인사를 건넸 다.그는 대장장이 일을 맡고 있다.그가 만드는 무기는 유명해서 용병들이 그에 게 특별주문을 하러 직접 올 정도다. 그는 오늘은 별로 일이 없는 지 자신의 가게 등받이도 없는 쪽의자에 웅크리고 앉아서 늙어빠진 드워프다운 태도로 파이프를 물고 있다.그의 누런 수염에 빵부 스러기가 달려서 지저분한 드워프의 본질을 잘 말해주고 있었다. 내 뒤에 있던 카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드워프 대장장이를 보았다.카산은 로브를 뒤집어 쓰고 뾰족한 귀를 숨기고 있었는데 나로선 그게 더 편해서 그렇 게 하라고 놔두었다. 길가에는 갖가지 가게들이 늘어서 있다. 아직 정오가 막 지났을 무렵이라 그다지 손님도 통행인들도 없지만 그런데로 북 적대고 있었다.나는 하품을 하고는 몸을 좌악 펴서 기지개를 다시 켰다. 이렇게 일찍 일어나는 것은 내 취향이 절대 아니다. 나는 반드시 오후에 일어나는 것을 철칙으로 하고 있었다. 대저 일찍 일어나서 설쳐대는 것들은 다 천한 것들로 나같은 우수한 종족은 느 긋하게 일어나는 것이 세상을 위해 도움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부지런한 엘프는 나에게 아침일찍 와서 졸라댔다. 의뢰금을 건넸으니 얼른 얼른 일을 해달라는 게 그의 의견이었던 것이다. "일어나세요! 쿠베린!" 그가 쨍알거려서 나는 베개에 얼굴을 쳐박고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해가 중천에 떴다구요! 어서.어서 움직여 주세요! 당신은 내 의뢰를 받아들였 으니 일하란 말이에요!" 그가 어젯밤 놀린 것에 화가 나기라도 한 것인지 떼를 쓰듯이 내 침대가에 와서 고함을 질러댔고 나는 화가 나서 베개를 그에게 집어던졌다.그는 얼굴을 맞고 뒤로 자빠졌지만 곧장 오뚝이같이 일어나 나에게 덤벼들었다. 그리곤 내가 둘둘 말고 있는 이불을 확 제끼더니 외쳤다. "당신! 정말로 일어나지않을 건가요! 당신,그래도 묘인족의 왕이에요? 신의를 지켜요!" 그가 허도 쨍알거려서 나는 그의 뾰족한 귀를 잡아 당겨 그의 귀에 속삭여 주었 다. "너,그렇게 나에게 먹히고 싶은거야? 난 잠을 못자면 ..고기를 먹어야 해..생생 하고 피가 뚝뚝..떨어지는 고길 말야." 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고 그는 입을 똑 다문채 나의 입을 뚫어지도록 바라 보았다.물론 송곳니는 드러나지않은 상태였지만 그는 멍하니 나를 바라보다가 공포에 질린 얼굴로 주춤거리고 뒤로 물러나갔다.그 모습에 나는 한동안 침대 에 얼굴을 파묻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하여 한동안은 조용했는데 저 잔소리쟁이 사라와 작당이 된 엘프녀석은 다 시 내게 도전했다.그는 사라의 뒤에 서서 사라가 날 깨우도록 종용한 것이다.그 의 말을 기꺼이 들은 사라가 나의 옆에 서서 깽깽거리고 고함을 질러댔다. "밥 안줄거야! 일어나!" 무례하고 시끄러운 계집애. 나는 저런 계집애가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어. 그리하여 나는 평소와 달리 이른 낮에 침대에서 나와야 했다.그 덕분에 여전히 몸은 찌뿌드했다.아직 식욕은 없었지만 만약에 먹는다면 마미에게 부탁해서 통 돼지 구이중에서도 피가 뚝뚝 떨어지는 향내나는 부위로 골라달라고 말을 해야 지 하고 나는 식사에 대해 심각하게 결정했다. 내가 식사에 대해 결정을 내릴 무렵 카산은 어리벙벙한 상태로 사방을 돌아보고 있었다.그 같은 깊은 곳에서 지내는 귀족엘프로서는 이런 곳 구경은 당연 했을 리가 없다.나도 그건 잘 알고 있었는데 새삼 녀석이 두리번 거리고 있는 꼴을 보니 골려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아졌다. 허나,나는 프로이니까 일단 의뢰받은 일은 해결해 주는 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 되어 그가 벙벙하니 길가에 늘어선 가게들을 구경하는 것을 내버려 두고 목적한 곳으로 다가갔다. "어마! 이런 대낮에 웬일?" 놀란 어조로 마리아가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하품을 참고 그녀에게 물었다. "군터는 있나?" "있죠.있어요.잘생긴 양반." 마리아가 요염한 웃음을 터뜨리면서 내 목에 팔을 감았다.그녀는 지금 일하는 복장이 아닌 지라 평범한 드레스를 걸치고 있었지만 그나마 양 옆이 주욱 찢어 져 허벅지 안쪽까지 다 들여다 보일 정도로 화사했다.즉 보통의 아가씨보단 요 란스러운 것이다. "화장 ..안했군." 나는 그녀의 목에 코를 박았다.마리아가 간지럽다는 듯이 쿡쿡 웃어댔고 나는 그녀의 목덜미에 진한 키스마크를 남겼다. "맛있는 냄새! 화장하지 말아! 훨씬 섹시해!" 마리아가 깔깔대고 웃어댔다.그녀는 얼굴을 붉히곤 내 입술에 자신의 것을 겹쳤 다.이미 그녀의 긴 다리가 내 허리춤에 와 감기고 있었다. 음..맛있는 냄새때문에 정신을 잃어선 안되지. 나는 그녀의 허리를 안은 채 물었다. "나,군터보러 왔어.이따 밤에 다시 와도 되지?" 마리아가 내게 눈을 흘겼다. 스무살의 이 아름다운 아가씨는 흑발의 근사한 미녀로 이근처에서 최고로 가는 작부아가씨다.그러나 내게는 언제나 맨 살결의 모습을 보여준다.왜냐면 난 화장 품 냄새가 질색이니까. "그래요.쿠브," 그녀는 윙크하고는 내 뒤에 선 카산을 바라보았다. "누구?" "응.의뢰인." 카산은 굳어 선 채 마리아의 화사하고도 매끈한 다리가 내 허리에 와 감겨 있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그의 드러난 턱이 새빨개져 있는 것을 보아 아마 도 전신이 완벽하게 붉어져 있을 것이라고 난 확신했다. 마리아는 깔깔 웃고는 문을 열어 우리들을 들여보내 주었다. 그녀는 목욕이라도 갔다 오는 것인지 머리칼이 젖어있어 더 매력적이었다.시선 이 자꾸 그녀에게 쏠리는 것은 수컷인 이 몸으로선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안에 들어가면 핑크빛으로 좌악 늘어진 융단과 함께 술냄새가 아예 배어버린 테 이블이 곳곳에 놓여져 있었다.그리고 늙어빠진 로비나가 큰 주걱을 들고 점심을 만드는 지 분주하게 부엌에서 움직이는 모습이 언뜻 보인다.계단은 한 중앙에 있어 이 삼층 건물을 더 좁아 보이게 했는데 즉,아래층은 술집이고 위층은 영업 (?)을 하는 방들의 집합소다. "어디있어? 군터는?" 마리아가 나에게 매력적인 웃음을 보이면서 물었다. "이층,내방에 안갈래요? 쿠브?" 나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기 위해서 엄청난 노력을 해야 했다.그녀는 유혹적으 로 내 뺨을 건들고는 윙크해보였고 나는 견디지 못해서 그녀의 허리를 다시 끌 어안고 키스를 퍼부었다. 그녀의 두 다리가 내 허리를 끌어안고 허공으로 떠오를 무렵,즉 내가 그녀의 몸 을 안고 고개숙여 키스를 하는 동안 뒤에서 누군가가 맥주잔을 내게 집어던졌 다. 물론 맞을 나는 아니다. 나는 잽싸게 몸을 피하면서 키스를 마무리했다. 그녀가 기분좋은 얼굴로 내게 답삭 매달렸고 나는 젊은 여자의 맛있는 냄새에서 코를 돌려야 하는 가혹한 운명을 슬퍼하면서 뒤에 선 뚱보를 바라보았다. 낮인데도 술에 취한 뚱보는 계단 머리에 팔을 기대곤 날 바라보면서 훌쩍이고 있었다.이 녀석이 취해있다는 것은 일목요연하다. 취하기만 하면 울기 때문이다. "군터어!" 내가 한숨을 쉬자, 군터는 누구냐고 묻듯이 내 뒤에 선 카산을 가리켰고 그리고 나선 재빨리 흘러내리는 코를 손수건으로 눌렀다. "음.의뢰인이야.물어볼 게 있어 왔다." 나는 마리아에게서 간신히 손을 떼고 군터에게 다가갔다. 마리아는 토라진 채로 내게 혀를 내밀어 보이곤 계단으로 뛰어올라가 버렸다. 여전히 근사한 각선미. 군터는 훌쩍이면서 테이블에 가 앉았다.그는 나이 오십여세가량으로 보이긴 하 지만 실은 서른몇 밖에는 안되었다.그가 늙어보이는 이유는 뚱뚱한 데다가 울상 을 하고 있으며 그런 주제에도 포주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직까지 나와 마리아가 보여준 사랑의 장면으로 넋을 잃고 있는 카산의 뒷덜미 를 잡아서 자리에 앉힌 뒤에 나는 군터의 앞에 가 앉았다. "뭐야? 쿠베린?" 훌쩍이는 군터는 코를 팽 풀었다. 눈이 충혈되어 도저히 이 얼굴이 서른이라고는 믿어지질 않는다. "너.노예상 바바를 알지?" "알지.얼마전에도 몇 팔고 갔어." "바바가 어디있던?" "베델에 있지.베델공작이 새로운 노예를 갖고 싶다고 불렀대." "베델공작이? 그 녀석은 겨우 스물 다섯밖엔 안된 주제에 맨날 노예를 사들여 뭘 한대?" "모르지.뭐.사이좋게 공놀이라도 하는 건지." 그것도 농담이라고 한 것인지 군터는 제가 말한 주제에 저 혼자 히죽히죽 웃었 다. "내가 전에 듣기로 말야,바바가 엘프를 데리고 있다면서? 너 봤나?" 군터는 코를 다시 캥 하고 풀어내곤 더러운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아내었다.그리 곤 그 더러운 손수건을 주머니에 넣고는 기름때가 잔뜩 끼어 이마에 찰싹 붙은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봤어.예쁘더군.너무 비싸 사진 못했고.베델 공작에게 팔겠다고 했어." 카산의 온몸이 긴장으로 팽팽해지는 것이 느껴졌다.그는 주먹을 쥐고는 테이블 을 쾅 하고 내리치고는 크게 외쳤다. "어딥니까! 그 엘프는 어떻게 생겼죠!" 군터는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카산을 바라보았다. 나는 카산의 동요를 모른 척 하고는 다시 군터에게 물었다. "노예상 집합 장소는 어디야?" "아아..그것도 베델공작의 영지인 아글랑이야.아글랑에서 노예시장이 크게 열 려.알잖아? 베델공작은 돈을 물쓰듯 하는 데다가.." 군터는 살벌한 카산의 눈초리를 느끼면서 조금 술이 깨는 듯했다. "엄청난 색골이니까.."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카산이 다시 테이블을 내리쳤다. 쾅 하고 테이블이 박살이 났고 나도 군터도 눈을 크게 뜨고는 두 동강이 난 테 이블을 바라보았다.원목을 깎아 만들어낸 이 테이블은 상당히 두꺼울 뿐더러 무 겁고도 단단하다.이것을 단지 맨손으로 내리쳐 두동강이 났다면..이녀석의 성미 를 앞으로 돋구지않는 편이 현명할 것 같다. 군터의 얼굴이 하얗게 되었고 나는 턱을 고일 장소가 사라져 버렸기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다리를 꼬아 내 다리에 팔꿈치를 얹어 턱을 고였다. "그런데 군터.그 엘프 노예중에서 이런 얼굴을 한 애가 있었나?" 나는 카산에게 아무런 언질도 주지않고 그가 뒤집어 쓴 로브를 홱 벗겼다. 카산이 화들짝 뛰어올랐지만 이미 늦었다. 군터는 카산의 얼굴을 보고 눈을 크게 뜬 다음 으으 하고 입술을 떨었다. "에..엘프였군?" "그래.엘프야.이렇게 생긴 엘프 소녀가 있었어?" "아아..잘 모르겠어.내가 본 건 ..두명뿐이었거든.하지만 바바는 네명의 엘프를 데리고 있다고 했고..또 다른 엘프 노예가 있다고 바바가 말했던 거 같아.바바 의 엉망진창 친구들 중에 엘프를 데리고 있는 자들도 서넛 되었던 거 같아." 갑자기 그의 말투가 또렷해진 것은 카산의 미모에 감명을 받은 것인지 혹은 그 의 엄청난 힘에 감명받은 탓일 것이다.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군터의 어깨를 툭 툭 치며 일어섰고 내 뒤를 따라서 카산도 일어섰다. "그래,그래.그럼 난 간다." "에..그..그래." 카산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던 군터가 급히 돌아선 카산에게 물었다. "저기..여자야? 남자야?" 카산이 쏘아보면서 그 말에 대꾸하듯이 바로 옆에 있던 테이블을 다시 한번 후 려갈겼다. 퍼석 하고 테이블이 먼지를 휘날리면서 박살이 나 주저앉았다. 군터는 창백한 얼굴을 한 채 박살난 테이블을 내려다 바라보았다. "나..남자였군.." "당장 그리로 가는 거죠!" 카산이 급히 물었고 나는 손을 저어보였다. "그래.그래." "거기까진 얼마나 걸려요? 베델의 아그랑이란 곳까지는!" 그가 초조하게 외쳤다. "음,오래 안걸려.한..." 나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루반나절 정도인가.." "어서 출발해요!" 그가 악을 질렀다.나는 거리에서 악을 지르는 그를 바라보면서 조용히 말했다. "밥은 먹고 가야지." "밥이 문젭니까!" 그가 눈이 벌개서 외쳤다.초록빛의 맑은 눈이 엉망으로 충혈되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눈물이 글썽글썽해져 있었다. "카산." 나는 진지하게 그의 손을 잡고 그의 어깨에 내 손을 얹었다. "네 심정 충분히 이해해." "네? 아시면..바로 출발.." 그가 말하려 하자 나는 점잖게 그의 입술에 손가락을 누르고는 그의 손을 잡아 내 입가로 가져갔다. 난데없는 내 행동에 그가 눈을 크게 뜨고 얼굴을 붉히자 나는 진지한 어조로 말 해주었다. "가는 도중에 내가 배고파 지면..네가 내 도시락 해줄거야?" 그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고 나는 그의 손등에 가볍게 키스한 뒤에 그 손을 내려 놓고는 다정하게 어깨를 톡톡 쳐주었다. 그가 얼굴이 새하얗게 변해 멍청히 날 바라보는 동안 나는 그를 놔두고는 다시 나의 집이자 마미의 집인 곳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마미는 나를 보곤 웃는 얼굴로 이미 음식을 듬뿍 퍼주었다. 그녀가 자랑하는 훈제통구이에 구수한 선지맛이 배어나는 스튜가 두그릇 있었 다.내가 허겁거리고 먹어치우는 동안 엘프 카산은 코를 찡그리고는 오도마니 앉 아있었다. 마미가 뜨끈거리는 맥주를 내 앞에 턱 하니 내려놓았고 나는 그것을 좍 들이키 면서 마미의 아름드리 거목과도 같은 허리를 끌어안았다. "마미! 사랑해!" 그녀가 호탕한 소리로 웃고는 내 등짝을 철썩 때렸다. "내 귀여운 쿠베린.오늘 어디갈거야?" "응.일하러." 그녀는 내뺨에 자신의 것을 비비고는 아무것도 먹지않는 카산을 도끼눈으로 바 라보았다. "왜 안먹어? 내 요리가 불만이야?" "아..아니요.그게 아니라.." "먹어!" 그녀가 엄한 눈초리로 강요했다.나는 그녀의 허리에 코를 묻고는 그녀가 언제나 앞치마에 묻혀오는 피냄새와 고기 냄새,그리고 음식냄새를 맡고는 그녀의 손목 에 코를 댔다. "음,오늘은 기분이 나쁘군,마미." 마미의 얼굴이 부드러워지면서 내 머리칼을 사납게 흐뜨러뜨렸다. "내 귀여운 고양이.이번 의뢰인은 참새처럼 먹어대는 구나." 나는 깔깔 웃었다.그녀는 내 등짝을 한번 더 후려갈기고는 저벅거리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나는 내 전용 자리에 앉아서 식어가는 피 냄새 물씬한 스튜그릇을 멍하니 바라 보는 카산에게 물었다. "뭘 다른 거 먹겠어?" "...아뇨.." 그가 고개를 급히 저었다. "저..저어기..쿠베린,다..다 드셨으면 ..이제 출발해요." 그가 울상인 얼굴로 말했다. 음 귀여운 데가 있는 의뢰인이군.이런 애들만 오면 얼마나 돈벌이가 간단하단 말인가. 나는 조용히 머리를 주걱거렸다. "기다려.맥주 한잔 더 마시고." 내가 지나가던 사라에게 한 잔 더 했더니 사라가 당장 도끼눈을 하고 깽깽 소리 를 내질렀다. "대체 당신은 정신이 있어? 쿠베린! 이 늙어빠진 고양이! 이 사람은 지금 동생 을 찾아 애가 탄다는 데 아구 아구 먹어대기나 하고! 이 게을러빠진 작자같으 니!" 나는 하도 시끄러워서 그녀의 얼굴에 뭔가 집어 던질까 생각하다가 이성을 발동 시켰다.그렇게 해선 곤란하지.저 못생긴 소녀가 얼굴에 상처라도 입는다면 후환 이 두렵다. "시끄러우니까 맥주 한잔 가져와!" 내가 잘라 말하자 사라가 이번엔 카산과 같이 울상이 되더니 나를 쏘아보았다. "대체..당신이란 작자는 동정심이란 게 없어?" "없어.난 맥주가 먹고 싶을 뿐." 내가 잘라 말하자 사라가 하 하고 기가 막힌 듯 나를 노려보더니 씩씩 대며 외 쳤다. "네가 갖다 먹어!" 그녀는 홱 돌아서서 가버렸다. 나는 체에 하고 팔짱을 낀 채 맥주가 오기를 기다렸다. 사라는 저렇게 소리를 질러대도 결국은 가져온다. 아닌게 아니라 잠시 기다리니 그녀가 맥주를 가지고 와 사납게 집어던지듯이 테 이블 위에 쾅 하고 내려놓았다. 그녀가 도끼눈을 하고 가버리자 마자 나는 맥주를 좌악 들이키고는 카산이 나를 바라보는 얼굴을 빤히 보고 물었다. "네 거,내가 먹어도 되지?" "네에.." 카산은 자신의 밥그릇을 내게 밀어 놓았고 나는 그것을 받아 아귀아귀 다시 삼 켰다.약간 식긴 했지만 여전히 맛은 좋다. "저..정말 많이 드시는 군요.." 카산이 멍하니 중얼거렸고 나는 깨끗이 다 비운 뒤에 기분좋게 입을 닦으면서 말했다. "그러니까 내가 말했잖아? 배고프면 널 잡아먹을 지도 모른다고." 흐흐 웃자 카산이 억지로 배시시 웃었다. "그거..농담이죠? 당신,난폭하게 말하지만 ..사라나 마미에게 대하는 거 보 면.." 어쭈.날 놀리는 군. 흐흐하고 난 웃어보이곤 카산의 손을 가볍게 잡으려 시도했다.그러나 카산은 재 빨리 피해버렸다. "거봐.무섭지?" 내가 킬킬 거리자 그의 얼굴이 빨개졌다. "묘..묘인족을 안다면 ..당연히.." 그가 중얼거렸고 나는 흐흐 웃고는 뒤에 다가오는 녀석에게 돌아보지도 않고 물 었다. "스카.마차 구했어?" "아아.그래." 스카는 턱에 난 수염을 만지작 거리면서 내 옆에 와 앉았다. 카산이 멍하니 그를 바라보자 스카는 카산을 아래위로 훑어보고는 히죽 웃어보 였다. "너랑 이놈이랑 나란히 앉혀놓으면 장사 잘되겠다.쿠베린." 카산이 그와 나를 번갈아 보았고 나는 일어서서 카산에게 손짓했다. "출발이야." 카산이 급히 일어나면서 물었다. "무슨 장사요?" "뭐겠어? 미소년장사지." 히죽이 스카가 웃어댔다. 스카는 용병이다. 그리고 그는 용병인 주제에 피를 매우 매우 싫어한다.피를 매우매우 좋아하는 나의 성격과는 반대지만 제법 치밀한 면이 없잖아 있다.아주 약간.그는 그럼에 도 불구하고 오래된 용병답게 검도 잘 쓰고 도끼와 창도 제법쓴다.비록 나에게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제법 솜씨가 있다. 이녀석과 내가 아귀가 맞게 된 이유는 이녀석이 용병대에 들어가기 싫어하기 때 문이다.즉 집단이란 것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었다.아무리 솜씨 좋고 머리좋은 녀석이라도 혼자만 일하길 즐긴다면 그 효용가치는 반푼밖에는 안된다.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경호원정도로 그런 일이 언제나 있는 것은 아니다.게다가 그 주제에 또 정의감에 넘쳐 흘러 추악한 부자들의 경호원은 배겨내질 못한다. 이런 녀석이 어찌 잘나가는 용병이 되겠는가. 당연 나의 심부름꾼이나 해야지. "갑자기 왠 마차야? 넌 마차를 타는 걸 싫어하잖아?" 스카가 말을 몰면서 물었고 나는 가능한한 편안한 자세를 취하기 위해 무진장 애를 쓰면서 대꾸했다. "응,나는 어떤 가련한 아가씨를 구해올 참이거든.그 아가씨보고 걸어라 라고는 말할 수 없잖아?" 옆에 있던 카산이 감격에 겨운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그는 내 손을 잡고 싶은 모양이지만 무서워서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 관도를 통해서 내달리는 마차는 4인승으로 두마리의 말이 끌고 있었다.이 마차 를 빌리라고 이미 스카에게 말해두었고 그는 빌려온 것이다. 마차를 타고 달리면 아그랑까지는 겨우 서너시간밖에는 걸리지않으며 물론 걸어 가는 것보다는 빠르다.내가 달려간다면 겨우 삼십여분이 걸리겠지만 스카나 이 엘프 녀석이나 그렇게 빠르진 못하니까 내가 참아야 한다. 나의 도시 엘리야에서 아그랑까지는 곧장 관도가 뚫려있다. 델리암왕국은 상인에게 매우 친절한 자세를 보이고 있어 통상관계나 상업의 발 달에 매우 주력하고 있었다.덕분에 각 자치도시나 영주들의 영지로 통하는 무수 한 관도가 델리암왕국의 전 영토에 거미줄 처럼 깔려있다.이 관도를 따라 달리 면 대개는 경비대도 가끔 보는데 그 덕에 산적이나 야적떼가 적은 편에 속한다. 물론 적을 뿐이지 없다는 것은 아니다.만약 없다면 나의 장사는 상당한 타격을 입을 것임은 확실한 것이니까. 흐흐 웃고 있던 나는 편안한 자세를 유지하려고 애쓰면서 바닥에 모포를 잘 깔 고 마차칸에 앉은 카산의 손을 잡아 끌어당겨 내 앞에 데려다 놓았다.카산이 어 리둥절하는 동안 나는 되도록 편안히 누웠다.그리곤 그의 무릎에 머리를 배고 스카를 향해 외쳤다. "야! 아그랑에 도착하면 깨워라!" 그리곤 아까 못잔 잠을 청하러 눈을 감았다. 마차를 몰던 스카가 흐 하고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게을러 빠진 고양이놈." "너..죽는다.스카." 나는 그렇게 그에게 경고하고는 따스한 살내음이 콧속으로 스미는 것을 기분좋 게 음미하면서 잠에 빠져들었다. KUBERIN.... 내 이름은 쿠베린 성은 없다. 그리고 인간도 아니다. 3 바퀴가 비명을 지르는 소리에 나는 눈을 떴다. 어느새인지 사방은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저자거리로 변해있었고 스카는 묵묵히 마차를 몰고 있었다.내가 고개를 돌려 엘프 녀석을 보니 그녀석은 다리가 저릴 텐데도 내 머리를 아직도 고이 자신의 허벅지에 올려놓고 있었다. 기특한 녀석. 나는 흐음 하고 몸을 일으켜서 일어나 앉았다. 카산이 날 바라보면서 기대에 찬 눈빛을 던지는 동안 나는 스카에게 큰소리로 물었다. "어디서 묵을까?" 스카가 뒤도 돌아보지않고 대꾸대신 손가락질을 해보였다. 그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좁아 터진 골목길. 그 한 모퉁이에 비죽이 고개를 내민 낡아빠진 간판이 보인다. '음유시인의 노래터' "또 저기냐!" 내가 고함을 질렀지만 스카가 모른 척하고는 그리로 마차를 몰았다.이 마차가 아마도 조금만 더 컸다면 결코 드나들 수 없을 그런 골목으로 그는 마차를 몰다 가 세웠다.우리들은 비적거리면서 바닥에 내려섰다. 카산은 주삣대면서 어느새 날이 어둑어둑해진 거리를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 다. 음침한 골목에는 군데 군데 취한들이 쏟아놓은 오물이 바짝 말라 비틀어져 있었다. 나는 카산이 넋을 잃고 바라보는 시장을 바라보았다. 불야성을 이루는 시장터는 갖가지 물건을 파는 장사치로 가득차있었다.이미 해 가 뉘엿뉘엿 지고 있는 터라 여기저기엔 불을 밝히기 위해서 이곳 저곳에 등을 밝혀놓고 있었다.베델 공작은 호색한이긴 하지만 절대로 폭정을 하는 법도,부당 한 이익을 취하는 법도 없어 제법 상인들에게 인기가 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야시장- 밤에 서는 시장이 아니라 낮부터 밤까지 이어지는 시장이다-도 그의 아이디어였다. 멀리 엔도라에서 오는 장사치들은 근사한 엘루아 융단을 내어놓고,멀리서 온 드 워프의 대장장이는 음침한 얼굴로 주억거리면서 기사들에게 팔 검을 내어놓고 있다.어딘가 이름도 모를 곳에서 온 아인족의 비늘이 달린 어떤 장사치가 심각 한 얼굴로 호박색 눈을 번뜩이면서 사람들과 흥정을 하고 있었다.여기저기서 애 들이 뛰어다니다가 어른들에게 야단을 맞고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뚱뚱한 아줌마 들과 턱수염을 지저분하게 기른 사내들이 삿대질을 하고 싸우고 있었다. 번쩍이는 팔찌등 장신구를 파는 떠돌이서부터 오랫동안 이 아글랑에서 장사를 해온 토박이 장사치들까지 이 아글랑의 중심광장은 발 디딜 틈도 없이 붐비고 있었다. 카산이 넋을 잃고 입김이 나오는 추운 날에도 불구하고 난리를 치는 이 장터의 인간들을 보고 있는 동안 나는 전신의 몸을 가볍게 움직여 보았다.역시 추운 날 씨 탓으로 약간 상태가 좋지않았다. 이런 몸에는 뜨거운 맥주와 뜨거운 스튜,그 리고 뜨근한 난로가가 어울릴 것이다. 나는 '음유시인의 노래터'의 간판을 노려보았다. 이 구석에 박힌 낡아빠진 가게를 선호하는 스카는 단지 한가지 이유만으로 이곳 에 무조건 숙박시키고 있었다. 바로 그의 누이동생 잔느가 경영하는 가게란 이유다. 아직도 멀건히 선 카산의 목덜미를 끌고 나는 안으로 들어갔다. 여전히 사람이 없었다.자리도 그다지 좋지않고 가게도 좁다.게다가 맥주맛은 그 저그렇고 뭐 하지만 ..마미만큼은 못하지만 음식 맛은 나쁘진 않다.허긴 스카의 누이가 하는 곳이라 할 지라도 난 음식맛이 나쁘다면 절대로 이 곳에 오지않는 다. 스카가 이미 들어가 바아에서 맥주를 따르고 있는 그의 누이동생에게 키스하고 있었다.그의 누이동생 잔느는 그와 닮은 주먹코와 그를 전혀 닮지않은 덩치와, 그와 전혀 닮지않은 발랄함을 가지고 있다.내가 카산을 데리고 들어가자 상쾌한 웃음소리를 내면서 내게 미소를 던졌다. "어서와요.쿠베린." "응." 나는 간단히 대꾸했다. 아무데나 빈 탁자에-허긴 반 이상이 비어있었다.저녁 때인데도 불구하고-턱 하 니 자리잡고 앉자 그녀가 눈치빠르게 뜨근 뜨근한 맥주를 내왔다.그리곤 따근한 수건을 나와 카산에게 건네주었다. "쿠베린,어쩐 일이에요? 당신은 추운 날씨에 돌아다니는 거 질색일텐데." 그녀는 웃으면서 말했고 나는 그녀의 재빠른 서비스에 미소를 머금으면서 만족 스레 맥주를 들이켰다. "이 게으른 고양이가 여기까지 왔을 땐 일이지,뭐." "아." 그녀는 카산을 보았다. 카산이 깊게 로브를 쓰고 있다가 천천히 로브를 벗자 그녀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러나 잔느는 그다지 위화감을 느끼지도 않는지 조심스레 물었다. "어떤 음식? 쿠베린은 선지가 듬뿍 들어간 스튜와 반쯤 익힌 꼬치구이 바베큐로 할건데." 나는 흐흐 하고 웃었다.만족스런 메뉴다. 당황한 카산은 그녀를 보다가 다시 날 보곤 스카를 보았다.스카가 그의 눈치를 재빨리 보면서 대신 주문시켰다. "담백한 것으로 해.말린 과일을 넣은 요리라면 무난할 거야." "그러죠." 그녀는 생긋 웃으면서 일어서 주방으로 갔다. "맥주 더할건가?" 바아에서 맥주통을 든 사내가 묵직한 어조로 물었다. 그녀와 같이 일하는 절름발이 사내,코스루는 용병이었다가 은퇴한 사내로 얼굴 과 팔뚝에 누구든지 질릴 것같은 흉터가 길게 늘어져 있다.그는 스카의 선배격 이었고 지금은 스카의 누이인 잔느의 남편이었다.오십여세가 되어 보이는 데 잔 느는 겨우 삼십여세로 거의 20년 연하의 결코 어울리지않는 부부다.솔직히 말해 나는 이 가게가 잘 안되는 이유중에 하나는 코스루의 음침하고도 끔찍한 얼굴 탓이라고 믿고 있다. 한 가운데가 벅 그어진 얼굴의 그 흉터와 무언가가 찢어갈긴 듯한 흉터가 고스 란히 남은 그의 팔뚝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무척이나 어지럽히고 있기때문이 다. "베델공작의 노예장터는 언제 서는 거야?" "내일 낮에." 코스루는 무뚝뚝한 어조로 억양없이 대답하고 내 잔에 맥주를 주욱 따라 주었 다.그는 나에게 호감을 전혀 가지고 있지않았고 뭐 그런 면에선 나도 할 말이 없다.나도 그가 전혀 좋지않았으니까. 그의 시선이 잠시 카산을 훑었다. "매우 피곤해 보이는 군.이 엘프." 스카가 코스루의 말을 듣고 카산을 보았다.얼굴이 파리해보였다. "가서 쉬는 게 좋겠다.얼른 음식을 좀 먹고." 카산은 네 네 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일어나세요! 쿠베린!" 그 목소리. 아침에 일어나자 마자 카산이 내 방에 온 것이다. 나는 침대위에서 대굴거리고 스카를 끌어안고 자고 있었고 스카는 코를 골고 있 었다.카산은 내가 그를 끌어안고 자는 것을 보고 약간 경악한 듯 했지만 나에게 다가와 소리쳐서 깨우기 시작했다. "일어나서 저에게.." 나는 대답으로 그의 얼굴을 발바닥으로 조용히 눌러주었다. 우욱하고 그가 뒤로 나자빠지는 동안 내가 경고해 주었다. "노예장은..낮이야.낮.들었겠지이?" 그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 지는 모른다.난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으니까. 내가 잠에서 깬 것은 내 휴대용 난로가 없어서 품안이 서늘했기때문이다. 스카는 아직 정의의 사도로서 피가 끓는 탓인지 인간치고는 따스하다. 여러명의 인간을 시험해 본 결과 그는 내가 아는 인간들 중 가장 따스하다. 눈을 비비고 침대에서 비비적거리고 일어서니 햇빛이 방안에 반쯤 들어와 방안 의 온도를 높여주고 있었다. 오.제법 오늘은 따스한 날씨잖아? 어느정도 풀린 몸을 천천히 기지개를 폈다. 문득 텅 빈 방안을 보고 깨달은 것은 스카녀석, 이 난로가 감히 주인이 깨기도 전에 사라져버린 것에 대한 분노였다. 자식, 방자하군. 옷가지가 걸린 것을 확인하고 적당히 걸친 다음 아래층으로 내려오자,뭐가 그리 도 재미있는지 스카와 카산,그리고 잔느가 낄낄거리고 있는 모습이었다.나는 약 간 심술이 나서 그들의 옆을 지나면서 잔느에게 물었다. "더운 물은 없어?" "없어." 대답한 것은 코스루였다.그는 무뚝뚝한 얼굴로 대신 대꾸하고는 나를 아니꼽다 는 듯이 바라보았다. 흐응,아니꼬운 것은 나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말해주고 어슬렁거리며 밖에 나와보니 어랍쇼,눈이 내려 제법 쌓여있었 다.아글랑의 더러운 길을 깨끗이 덮어버린 눈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제법 상쾌 해졌다.내가 그 눈을 퍽퍽 밟아주면서 우물가로 가보니 몇몇 사람들이 우물에서 물을 긷고 있었다.나는 그들 사이로 끼어들어 물 한 바가지 얻어서 양치겸 세수 를 적당히 마쳤다. 물을 긷던 어떤 예쁜 소녀가 나를 향해 의미심장한 미소를 던지고 있었다. 맛있는 냄새가 나는 계집애로군 하고 내가 마주 미소를 던지자 얼굴이 발개진 그녀가 화들짝 놀란 척을 하면서 물동이를 지고 가버렸다. 호오.,아침부터 기분이 나쁘지않군. 내가 싱글대면서 가게에 다시 들어 오니 잔느가 내가 좋아하는 스튜를 한가득히 끓여 놓고 나를 맞이했다. "이제 장이 설 시간이야." 코스루가 무심히 말했고 카산의 몸이 바르르 떨리며 발딱 일어섰다. 나는 스튜를 먹어대면서 스카에게 명령했다. "바바의 숙소는 알아놨어?" "아,에브라의 푸른 날개 란 여관이야.최고급여관에서 머무는 거 같더군." "그 돼지 말고 다른 녀석들은?" "모두 거기서 머문대,노예상들이 전부 모여서 쓸만한 애들을 골라 베델공작에게 내밀어 볼 건가봐." 카산의 얼굴이 굳어지고 앞니로 하얗게 질린 입술을 꾸욱 누르고 있다.그런 표 정을 보아 하니 매우 다급해 하는 듯 해서 나는 순순히 서둘러 주기로 했다. "그럼 지금 에브라로 가자." "넵." 카산이 뛰어오를 듯 기뻐하는 순간 나는 잔느에게 한 그릇 더 하고 말했다. '에브라의 푸른 날개'는 최고급여관으로 보통 귀족이나 거상들이 머무는 곳이 다.종업원이 약 육십여명 되며 식사시중을 드는 녀석들만 이십여명이 넘는다.당 연 호위하는 놈들도 있고 허드렛일을 하는 놈들도 있었다. 스카와 나,카산은 에브라의 푸른 날개의 거대한 대문을 막 들어서서 식당문을 열어 젖히고 있었다. 이 여관은 다른 곳과 달리 식당만 이층이었다. 일층은 흔히 보통 사람들이 와서 먹는 곳이고 이층은 귀족이나 대상들만이 출입 한다.당연 나는 이층으로 발걸음을 옮겼는데 식사담당인듯한 점원이 우리들을 찌릿 하고 바라보며 은근히 신분을 물어왔다. "나? 나는 쿠베린이다." 그의 얼굴이 조금 굳어졌다. 내가 들어서는 것을 감히 막지 못하는 것을 보아 녀석의 견문이 좁은 건 아닌 듯해서 나는 씩씩하게 이층으로 올라 바바의 거대한 몸집을 찾았다. 바바의 성을 나는 모른다.허긴 내가 그의 성을 알 바도 없고 알고 싶은 생각도 전혀 없다.어찌되었든 이 뚱뚱한 놈을 나는 바바라 부르고 다른 자들도 다 바바 라 부른다. 놈은 옆에 미녀 둘을 거느리고 앉아서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테이블 위는 말 그 대로 부러질 듯한 엄청난 음식이 쌓여있었다. 향기로 보아 틀림없이 비싼 포도주로 절인 듯한 구앙요리와 온갖 향신료를 듬뿍 듬뿍 넣은 거대한 스튜와 이 추운 겨울에도 불구하고 멀리 더운 지방에서 가져 온 지하의 과일들과 넘쳐흐르는 포도주가 꿀병과 나란히 놓여있었다. 나는 갑자기 식욕이 동해서 그에게 다가가 그의 맞은 편에 턱 하니 앉았다.그의 뒤에 서있던 말뚝같은 거인 두명이 날 보고 눈을 부라렸다. "뭐야?" 바바는 구앙의 다리 한쪽을 입에 넣다가 날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쿠베린!" 그의 턱이 약간 굳었다.이중턱도 부족한 사중턱을 가진 이 녀석에겐 목이란 게 존재하지않으며 그 배는 거의 동산을 방불케 한다.겨우 오십세도 안된 놈이 이 렇게 살이 쪄서야 어디 써먹겠는가 하고 난 그 움직이는 비계덩어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안녕." 뒤에선 스카가 자신의 동종업자인 바바의 호위를 향해 윙크 해보이고 있었다.두 사내는 눈쌀을 찌푸린 채 나와 스카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바바의 식탁앞에서 가장 먹음직 스런 통으로 구운 새끼 돼지의 배를 점잖 게 가르면서 그에게 물었다. "잘있었나?" "아아..왠일이죠.쿠베린?" 바바의 안색이 곱지 못하였다.옆에 앉은 두 미녀는 날 보고 흥미진진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나는 그들에게 가볍게 윙크해보였다. "음.조금 물어볼 게 있어서 말이야." 나는 시익 웃으면서 돼지고기를 입안에 넣었다. 생각한 대로 이 새끼돼지 통구이는 배안에 온갖 향신료를 넣고 쌀과 마른 과일 을 넣어 찐 것이다.근사한 냄새가 내 후각을 어지럽혔다. "뭡니까? 저..저는 지금 식사중이고..이미 약속이 되어 있어서." 그가 약간 엉덩이를 뒤로 빼려는 자세를 취했다. "아아..너무 당황하지 마.바바.난 그저 조금 물어보려고 해." "뭘요?" 그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날 보았다. "어릴 때 부터 난 바바를 잘 알고 있어.그지?" 내가 빙글 빙글 웃으며 말하자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포동한 뺨에 흐르는 땀이 그를 더더욱 축축하게 보이게 했다.늘어진 양볼 옆에 는 에메랄드로 만든 듯한 귀고리가 걸려있고 포동한 손가락에는 굵은 아메지스 트가 박힌 금반지가 세개나 끼어져 있었다.입은 옷은 흰 아그라노의 모피에 안 은 비단이다.돈좀 벌었군 하고 내가 새삼 생각하면서 새끼돼지를 먹어치우는 동 안 바바가 급히 다시 물었다. "자자.뭘 물어보실 겁니까? 전 약속이 있어요." "알아.알아.베델과의 약속인 것은." "아시면서..." 그가 우물 우물 거린다. "음,요즘 노예시세에서 말이지,엘프소녀는 얼마나 하나?" "아아..노예시셉니까?" 그의 얼굴이 금방 화색을 띄었다. 옆에 카산이 바르르 떨고 있었지만 바바는 날 보면서 다른 곳은 쳐다보지도 않 고 있었다. "음..요즘은 구천길레정도 합니다.소년은 팔천 길레.그러나 워낙 엘프는 구하기 어렵고.." 그가 턱을 어루만졌다. "게다가 엘프사냥꾼이란 놈들은..그다지 좋은 놈들이 못됩니다.저질인 놈들이 많아서 상품 가치가 있는 엘프는 ..별로 많지않아요." "그 엘프 사냥꾼들이란 놈들은 어떤 놈들야?" 카산이 바르르 떨고 있다.그의 몸전체에서 분노의 기운이 뻗히고 있었다. "말 그대로 쓰레깁니다.원래 노예란 자진해서 몸을 파는 자들을 정법 거래로 하 는 거 잖습니까? 그런데 놈들은 엘프의 마을이나 아인족의 마을을 습격해서 말 도 제대로 못하는 애들을 잡아와선 노예상들에게 파는 겁니다.나중에 그일을 알 게 된 엘프족이나 아인족에서 우리들을 찾아와서 얼마나 행패를 부리는 지!" 그가 한탄하듯 말했다. "저희들은 분명히 노예들에게 묻는 다구요,너 진짜 자진해서 온 거니 하고 말이 죠." 나는 흐 하고 식탁 밑의 그의 발을 걷어 차 주었다. "너 농담하냐! 잡혀온 애들이 아니오 할리가 없잖아!" 음음 하고 일그러진 얼굴이 된 바바는 차인 정강이를 쥐면서 억지 웃음을 띄워 보였다. "어쨌든 놈들 때문에 상당히..우리도 손해를 본다구요." "알았어.알았어.너,엘프 몇이나 데리고 있냐?" "아..세명입니다.모두 적법한 절차를 거둔..애들로.." 그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나는 벌떡 일어나서 그를 바라보았다. "바바,넌 나에게 빚이 있어.그지?" "아..." 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내가 엘프 노예를 하나 구하려는 데 네가 나를 도와준다면 나는 네가 어릴 때 저지른 일들을 조용히 덮어주도록 노력하겠다." 바바의 얼굴이 항의로 일그러졌다. "전에도 그런 말 하고선 아직까지 계속이잖아요! 쿠베린!" 그가 새된 소리를 질렀다. "그러니까 노력하겠다고 했잖아? 앞장서." 내가 잘라 말하자 바바의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뒤에 선 자신의 호위들을 바라본 다.나는 코웃음을 쳤다. "장난하니? 바바? 너 설마하니 나에게 뭔가..대항하려는 거 꿈에도 생각마." 나는 킬킬 웃었다. 호위들이 검자루를 쥐려다가 우움 하고 멈추었다. 그들도 애송이는 아니다.나에 대해선 다들 알고 있었다.나에게 덤벼 들어 살아 난 놈들은 없다. 바바는 한숨을 쉬면서 아리따운 미녀들을 내려놓고는 일어섰다. "정말..정말 한번만이죠? 그죠?" "시끄러,나중에 네가 나에게 도와달라고 하면 내가 널 기꺼이 도와주잖아?" 바바는 날 흘겨 보았다. "그치만..그땐 엄청난 돈을 요구할 거잖아요?" "잔소리가 많다." 스카가 킥킥대면서 긴장하는 카산의 어깨를 잡아주고 있었다. 그는 아마 방을 일곱개 정도 잡아놓았던 모양이었다.여기저기에서 호위들이 우 리들을 보고 긴장된 눈빛을 던지고 있는 동안 나는 바바의 뒤에 느긋하게 서서 그의 뒤뚱거리는 걸음걸이를 참아주고 있었다. 그가 복도를 계속 걸어 드디어 어떤 방앞에 멈추어 섰다.그리곤 호위를 시켜 문 을 열게 했다.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방안은 밝은 햇빛으로 가득차 있었는데 침 대가 세개 있었다. 그리고 그 침대 위에 세명의 소녀들이 앉아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얼굴을 하나 하나 보고는 카산과 닮은 냄새나 얼굴이 하나도 없다 는 것을 확인하고 조금 김이 빠졌다.둘은 금발,하나는 흑발이었다. 카산도 그런지 긴장했던 몸이 흐늘 거리면서 스카의 가슴으로 기대버렸다. "자아..이 애들입니다.이쪽은 숲의 엘프고.이 애는 물의 엘프,이쪽은 땅의 엘프 죠." 바바가 소개했다. 나는 그들을 하나 하나 보고는 공용 엘프어로 물었다. "너희들 중에 노스엘스턴에서 온 엘프를 아는 자가 있냐?" 소녀들은 서로 얼굴을 맞대었다. 그러자 카산이 로브를 확 벗어 재끼고는 간절히 그들에게 외쳐 물었다. "내 누이를 아는 분은 없나요? 에닌을 아시는 분은?" 앗 하고 그들의 얼굴에 놀람이 떠올랐다. 한눈에도 고귀한 얼굴의 엘프인 카산은 노스엘스턴의 귀족엘프라는 것이 한눈에 드러난다.지금 이 자리에 있는 엘프들은 보통 평범한 엘프들로 사람으로 말하면 평민 엘프임은 확실했다. "저희들은 에닌이란 분은 모릅니다." 지저귀는 새 소리를 하고서 검은 머리의 엘프소녀가 대답했다.그녀는 진지한 얼 굴이 되어 나와 카산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검은 눈에 검은 머리칼,이건 드문 검은 까마귀의 엘프로,숲의 엘프중 하나다.변 신술이 있어서 능히 도망갈 수 있을 텐데 여기에 있다니 하고 나는 조금 의외였 다. "넌 누구냐?" 내가 까마귀의 엘프에게 물었다. 검은 머리에 우아한 목을 가지고 있는 소녀는 열댓살 정도로 보였는데 다른 엘 프들보다 월등히 침착했다. "비오나라고 합니다.묘인족의 왕이시여." 그녀가 날 알아보고 있었다. 호오 하고 나는 팔짱을 끼고 그녀를 바라보았다.날 아는 것을 보면 이 애는 상 당히 나이가 든 게로군 하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카산이 머리를 쥐어 뜯으 면서 바바에게 덤벼들었다. "내 동생은 어딨어!" 흥분한 그의 팔뚝이 바바의 거대한 비계를 짓누르면서 단숨에 그를 벽으로 치밀 어 붙였다.펑 하고 바바의 거대한 몸이 가냘픈 엘프의 손에 내동댕이쳐져 벽에 붙어 버리는 순간 그의 호위들이 일제히 검을 빼어들어서 카산의 목을 겨누어갔 다.옆에 서있던 스카가 놀라 카산의 팔뚝을 잡아 챘다. "진정해!" 원래는 잡아 채려 했었겠지만.. 나는 스카에게 카산의 무서운 힘을 알려주지않 았다.스카는 잡아채기는 커녕 거구를 휘청이면서 카산에게 휘말려 비틀거렸고 다른 호위들은 카산에게 검을 겨누기만 하고 고함을 질러댔다. "주인님을 놔드려!" "놔라!" 바바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고 나는 카산이 흥분해서 그를 짓눌러 죽이긴 간단 하겠군 하고 여유롭게 생각했다. "사..살려줘! 내가 어떻게 알아!" 바바가 비명을 올려댔다. 나는 카산의 옆에 가서 바바에게 물었다. "다른 엘프노예들을 가진 놈들은 누구 누구지?" "모..몰라! 다들 내어 놓지를 않는다구! 난,.난..." "베델공작의 앞에서 품평회를 할 거라던데? 사실야?" "그,그..그래! 쿠베린! 살려줘어!" 바바의 얼굴이 자주색으로 변하고 컥컥 거리기 시작했다.그의 목을 누르고 있는 카산은 증오와 이루 말할 수 없는 분노로 당장이라도 바바의 목을 부러뜨릴 듯 짓누르고 있었다. "음,..그럼.우리들도 베델의 성에 가봐야 겠군,그지?" "쿠...쿠,.베.." 바바가 욱욱 대면서 눈물 콧물 다 흘리면서 컥컥거렸다. 더이상 견딜수 없었는지 호위중 하나가 카산에게 검을 찔러왔고 다른 자들도 일 제히 그를 향해 칼을 휘둘러댔다.스카가 그 검을 막아서는 동안 나는 카산의 어 깨를 잡고 완강하게 바바의 목을 조르고 있는 그의 팔뚝을 잡아 끌었다. 그러자 눈에 뵈는 게 없는지 카산이 퍽 하고 감히 내 배를 팔꿈치로 갈겼다. 나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그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주고는 뒤로 집어던 져버렸다. 콰당 하고 카산의 몸이 나동그라 지자 마자 바바가 캑캑 대면서 바닥에 혼절하 듯이 쓰러졌는데 나는 그의 얼굴에 대고 말해주었다. "네 숙소에서 머물 게,바바." 그리고 나선 나는 몸을 카산에게 돌렸다. 카산은 흑흑 거리면서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에게 다가서자 마자 나는 그 녀석의 턱을 걷어차올렸다. 그가 뒤로 나동그라 지자 놀란 스카가 나의 팔을 잡고 외쳤다. "왜,..왜 이래!" "이 건방진 엘프자식! 감히 누구 앞에서 발광하는 거야!" 나는 그의 옆구리를 한 번 더 걷어찼다. 감히 날 치다니! 울화가 치밀어 오르고 있었는데 그 덕에 전신에 살기가 돋쳐올라 나도 모르게 손톱이 길게 솟아 오르고 송곳니가 튀어 나왔다.그것을 보고 스카가 재빨리 뒤 로 물러났고 보고 있던 호위들과 바바도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정면으로 날 본 카산은 겁에 질려 눈이 휘둥그레 져서 비슬 뒤로 기어서 덜덜 떨기 시작하고 있었다. "내가 말했지? 내가 알아서 한다구! 이 얼간이야!감히 누구 앞에서 건방을 떠는 거야!" 내 고함소리가 쩌렁하게 울려퍼져 바로 옆에 있던 방 유리창이 왕창 깨져버렸 다. 귀를 감싸안고 예민한 엘프들이 공포에 질려 울기 시작할 때 카산이 머리를 무 릎에 내리면서 흐느끼기 시작했다. "잘..잘못했어요!" 그가 흐느껴 우는 동안 나는 손톱을 집어 넣고 홱 고개를 돌려서 바바를 바라보 았다.바바의 얼굴도 공포에 질려있다.그는 내가 변신하는 것을 몇번이나 보았기 때문에 더 무서워 할 지도 모른다. "음.,뚱땡이 바바.겁낼 거 없어." 나는 되도록 점잖게 말했다. 송곳니가 아직 나와 있어 시익 웃으면 그대로 드러난다. 스카는 아무것도 못본 척 하고 약삭빠르게 엘프 소녀들을 위로 하고 있다.새파 랗게 질린 바바를 보면서 나는 달래 듯하면서 다가가 천천히 말했다. "이 엘프자식은 널 해치지못할 거야.내가 있으니까." 나는 아주 믿음직 스런 태도로 말했다. "대신에, 알지? 바바?" 난 히죽이 웃었다.아직 몸안에 분노로 인한 살기가 남아있어 송곳니가 수욱하고 입술 사이로 드러난다. "내 성미를 건드리면 네 몸뚱이를 갈기 갈기 찢어 발겨 거리에 갈갈이 흩어놓을 것이란 걸.." 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곤 뒤로 넘어가 버렸다. KUBERIN....... 내이름은 쿠베린 성은 없다 그리고 인간도 아니다 4 "푸하하하..어서오시게나!" "어서와!" "반갑네." 결코 반가울 것 없는 사내들이 반가운 척을 하고 있었다. 베델 공작의 성,대전 안. 둥글고도 높은 천장은 둥근 치즈를 잘라놓은 듯이 보였고 우아한 색조의 벽화와 조각들이 금박과 은박을 입고 번득이고 있었다.바닥에 깔린 녹색이 깃든 청색 카펫은 분명 엘루아 융단이었다.바닥은 흰 대리석을 깔았는데 군데 군데 타일이 보인다.물결무늬를 넣은 타일은 단조로운 바닥석재에 변화를 주고 있어 보기에 영 나쁘지않다. 음,약간 인색했군.상당히 좋다. 이 베델공작은 올해 스물 다섯이라 알려져있다.그의 부친 베델대공은-대공이라 부르는 것만 보아도 보통 인물은 아님을 알수있다- 델리암 왕국이 야만인 팔라 샤족의 습격을 받았을 때 나라를 구한 구국영웅으로 알려져있다. 역시 그의 조부인 베델노공-이쪽도 상당한 사람으로-은 델리암 왕국의 왕권분쟁 때 태자의 호위로서 태자의 생명을 일곱번 구했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었다.어찌 되었든 이 베델 집안은 상당한 전사의 집안으로서 이 일대 베델공작의 영지는 부유함과 명랑함의 대명사를 가지고 있었다.내가 베델의 영지에 속하지 않는 자 유도시 엘리야에서 살긴 해도 그의 영향은 매우 크다.엘리야의 주민이 대부분 어부와 상인,농사꾼 그리고 약간의 용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곳 베델의 주민 대부분은 상인과 농사꾼이 대부분을 이룬다.물론 다른 곳도 마찬가지이긴 하겠 지만 베델의 영지의 상인들은 거의 자유도시에서 누리는 것 정도의 권리를 누리 기때문에 상인들에겐 인기가 좋다. 자유도시는 자유롭긴 하지만 약간 위험 부담이 있기때문이다.즉 치안이 일반 영 지보다 좋지않은 것이다.그런 면에서 본다면 베델영지는 상당히 괜찮은 편이다. 그의 변덕에 좌우된다는 것 이외에는 모든 것이 풍족했다. 머리가 좋았던 그의 조상들은 아무도 돌아보지않던 바위만 그득한 돌산을 채석 장으로 바꾸어 돈을 벌었고 또,그 채석장을 개발하기 위해 난리를 치는 동안 놀 랍게도 구리광산을 발견했다.그 덕분에 베델공작은 대 부호였다.게다가 산이 없 는 평원은 풍부한 토양을 가지고 있어 농사엔 그만이었다. 즉 그리하여 어부만 없고 모든 산업을 가지게 된 이 베델공작은 영지를 쏘다니 며 치안을 살피는 것 이외엔 할일이 거의 없게 된 셈이었다.게다가 지금은 태평 성대다.허긴 나라도 할일이 없어 주색잡기나 하게 될 것이다. 베델의 성은 델리암왕국의 영주들 사이에서도 대단한 평판으로 왕성을 제외하고 는 가장 큰 크기였다.물론 영지가 크니까 별 할말은 없었고 또 호화롭지는 않은 편이어서 그다지 혹평은 없었다.게다가 무엇보다 약 백 이십여명이나 되는 기사 들이 이 성에서 살고 있다.그덕에 이 성이 크다고 해서 뭐라 할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이다. 현재 델리암에서 가장 거대한 권력을 가진 것은 물론 왕의 외숙부인 화이딘스대 공으로 그는 델리암에서 가장 광대한 영지를 가지고 있다.소문에 따르면 왕보다 도 많을 수도 있다는 소문이 도는데 뭐 다다익선이라고 땅은 많으면 많을 수록 좋은 것이기도 할 게다.그 다음이 물론 왕이고 그다음이 이 베델이었다. 베델대공은 50세가 넘어서야-허긴 매일 전쟁터를 뛰어다녔으니 언제 씨를 뿌릴 수가 있었겠나- 겨우 아들을 보았는데 그게 이 베델공작이었다.베델 대공은 이 젊은 베델 공작이 19살때 죽었다. 모두들 19세의 공작이 무슨 짓을 할 지 상당히 걱정했었지만 의외로 이 젊은 공 작은 잘 해나갔다.상인을 육성시킨 것도 그였고 무엇보다 다들 걱정했던 베델대 공이 거느린 대 규모의 기사단-반은 용병이오.반은 가신인-을 진짜 거느릴 수가 있겠느냐 하는 것이었는데 의외로 이 베델기사단은 젊은 19세의 청년에게 충성 을 맹세했다.그 다음 부터는 일사천리로 모든 일이 처리되었다.즉 젊은 베델은 자신의 영지를 영주로서 거느릴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어이.바바.안색이 나쁘군." 제법 걱정하는 척을 하면서 뚱땡이가 바바에게 말을 걸었다. 내가 바바의 옆에 점잖게 서 있는 동안 바바는 식은 땀을 흘리면서 동료에게 고 개를 끄덕였다. 바바의 옆에 선 두사람은 모두 노예상으로 델리암에서는 아마 다섯손가락 안에 꼽히는 대 노예상으로 노예상도 이정도로 대규모라면 아마 작은 영지의 영주부 다 나을 것이다.나는 때때로 노예를 팔아서 돈을 번다면 나도 하고 싶다고 생 각했다.그런데 그 말을 들은 스카가 점잖게 말해주었다. "네가 하면 모든 노예를 다 굶겨 죽이기 알맞지.아님 네가 다 잡아 먹던지." 음..그 말에는 동감을 한다. 어쨌든 바바주변의 뚱땡이들은 모두 유명한 노예상으로 하나는 통칭 부리바,하 나는 티그라고 했다.모두 뚱뚱하다는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인 셈이다. 부리바가 나를 흘긋 보면서 물었다. "누구야? 새 애인?" 나는 멀건히 바바를 대신 바라보았다.바바가 남자를 좋아했었단 말인가? 바바의 얼굴에 식은 땀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나는 그의 조칸데." 내가 생글 생글 웃으면서 말했고 부리바는 내 머리에 감히 손바닥을 올리면서 머리를 쓰다듬으려 했다. 오,이런 건방진 짓을 이 쿠베린님에게? 갈갈이 물어 뜯어주지. 그 솥뚜껑같은 손이 날 잡으려 하는 순간 스카가 잽싸게 그 손을 잡고 말했다. "조심하십쇼,이 애는 뭅니다." 나는 스카를 쏘아보았다. 스카는 빙글 거리고 웃고 있었는데 그 얼굴을 두들기고싶은 충동을 억제하느라 나는 조금 어려움을 겪었다.뒤에 선 카산은 여전히 로브를 뒤집어 쓰고 있었다. "문다고? 하하..예쁜 얼굴에 어울리지않는 버릇이군!" 그가 배를 잡고 웃었다.둥실한 배가 출렁거렸다.거의 선지로 만든 젤리같은 수 준의 배였다. "정말.바바와는 닮지않았군,자네 동생은 어떻게 생겼나?" "미남..이지." 바바가 내 눈치를 보면서 땀을 닦아냈다.그의 이마에선 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 고 안색은 파랬다.그리고 그의 그나마 목이라고 부를 수 있는 부분은 퍼렇게 멍 이 들어있었다.그것을 머플러로 가리긴 했지만 말이다. 그 때 갑자기 웅성거리는 소리가 삽시간에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전 문앞에 서 있던 시종들이 큰 소리를 질러댔다. "공작전하 드십니다!" 문이 열리고 천천히 금발의 청년이 들어섰다.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금발에 약간 느긋한 얼굴을 한 젊은이로,상당히 맛있게 생 겼다.적당히 몸에 붙은 근육이 얇은 비단의 튜닉위로 드러나 있었고 허리에는 가문의 물건인 듯한 보검이 달려있다.생각보다는 우아하지 못한 자세로 들어오 면서 이 금발의 청년은 사방에 늘어선 인물들에게 손을 들어서 인사를 해보였 다.생글 거리는 웃음이 약간 느끼했다. "네가 좋아하는 스타일 아니냐?" 스카가 뒤에서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음..몸과 얼굴만 본다면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지." 나도 동의했다.나는 턱을 쥐고는 이 젊은 공작을 주시했다. 그의 부친인 베델대공은 괜찮은 사내였다.정말 괜찮은 애완동물이었다. 빨리 죽어버린 게 천추의 한이긴 하지만. 인간나이 69세가 적은 것은 아니지만 나의 시점으로 볼때 인간들은 너무 쉽게 죽어버린다.그 펄펄 날던 에너지를 자 랑하던 귀여운 소년이 순식간에 청년이 되고 중년이 되고 노인이 된다..크으.. 가슴 아프다. 저 매끈한 피부가 어느새 주글진 얼굴로 번해 버린단 거지...인간이야말로 너무 나 덧없는 생명체였다. "자..잠깐.너 ..베델대공을 안다고 하지않았었나?" 스카가 다시 등너머로 물었다. 나는 약간 기억을 되살리던 차라 귀찮아 대꾸하지않았다. 베델대공을 만난 건 그의 나이 14세 때.그리고 32세 때.그리고 59세 때.더이상 은 만나지 않았다.그의 노화가 시작되어 쭈굴한 얼굴을 보는 건 고통이니까. 으음.인간에게 깊은 애정을 주는 것도 좋은 건 아니야. 나는 흘긋 스카를 바라보았다. 이 뜨끈한 나의 난로 스카도 이제 40을 바라보고 있다.곧 50이 되고 곧 70이 되 면 이녀석도 죽어버린다.그걸 생각하면 가슴이 지끈거렸다. 카산이 스카의 옷자락을 쥐고 있는 것을 보니 왠지 엘프에게 친근감을 느꼈다. 그래,엘프는 잘 죽지않는다.나처럼. 젊은 베델이 웃음을 지으면서 자리에 앉자 마자 노예상들이 줄지어 그의 앞으로 다가가 정중히 인사를 했다. 베델가문의 상징인 거대한 그리핀이 새겨진 의자 위에 제멋대로 앉은 베델은 자 신의 아버지와는 그다지 닮지않았다.그러나 그 초록색 눈만은 얼추 닮은 것 같 기도 하다. "자아.그럼 오늘 노예시장을 시작합시다." 베델이 큰 소리로 웃음섞인 음성으로 내뱉었다. 호오.목소리도 비슷. 갑자기 사람들이 환호성 비슷한 것을 올리면서 갈라서고 그 사이로 좌악 하고 붉은 비단이 바닥으로 깔렸다. 그리고는 상인인 듯한 젊은이가 앞으로 나서더니 크게 외쳤다. "다비에서 온 고로스입니다! 오늘 제가 데려온 노예는 아인족의 파란색 피부의 미소년입니다." 그 말이 끝나자 챙 하고 징소리가 났다. 놀고 있군 하고 내가 생각할 무렵 아닌 게 아니라 붉은 비단위에 선명한 푸른 피부의 소년 이 걸어나왔다.소년은 은으로 만든 듯한 팔찌를 두 손목에 차고 그 사이를 사슬 로 묶고 있었는데 얼핏 보면 장신구 같지만 실은 포박하기 위한 도구였다. 소년은 푸른 피부에 초록 눈을 하고 있었고 발은 물갈퀴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 다.검은 빛을 띈 머리칼은 역시 초록색이었는데 그 선명하게 잘 생긴 윤곽아래 두 눈은 증오로 떨고 있었다. "와아." 사람들 사이에서 환성이 터져나왔다. 소년의 살결이 다 드러나도록 최소한의 옷을 입혀 놓고 있는데 그 매끄러운 피 부는 거짓말 처럼 완벽해서 티끌하나 없이 푸른 빛이었다.파란색이라고 해서 역 겨울 것 같지만 희미한 하늘빛에 가까와서 결코 역겹지는 않았다.오히려 아름다 와서 넋을 잃을 듯한 외모였다. "근..근사하군,저런 아인족 본적 있나?" 스카가 나에게 물었다.그도 카산도 눈을 부릎뜨고 있었다. "저건 맛없어." 내가 대꾸했다. "남방 에고린의 아인족이야.매우 기품높은 청색아인족이지.인간의 손에 잡히면 혀를 깨물고 죽어버린다는 군." "에.." 카산이 당황해서 날 바라보았다. 푸른 소년은 이를 악물고 있었는데 아마도 그 입안에 재갈을 물린 듯 어딘가 입 매가 이상했다.노예상인들이 개발한 혀깨무는 것을 방지하는 작은 도구가 지금 이순간에 쓰이고 있는 듯했다. 베델이 박수를 쳤고 다른 몇몇이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푸른 색의 아인족은 처음 보는 것이야.어디서 온 것인가?" 베델이 느긋하게 물었고 앞선 교활한 얼굴의 상인이 대꾸했다. "남방 에고린의 유명한 아인족으로서..충성심과 기품이 매우 높습니다.지금 자 갈을 물려놓은 상태입니다만 만약에 그 자갈을 풀어놓으면 즉시 혀를 깨물지도 모릅니다." 놈은 의외로 솔직하게 말했다. 베델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럼 노예로선 쓸수 없잖은가?" "네.어렵죠,.보통 사람이라면 힘들 것입니다.그러나 만약 공작님과같이 인품있 으신 분이 애정으로 감화하시어 이 애를 길들이신다면 그건 평생을 걸쳐 완벽한 충성심을 받으실 수 있다는 의미도 됩니다." 헤에. 나는 혀를 내둘렀다. 자식.상당하잖아? 내가 중얼거리고 있는 동안 공작이 빙그레 웃었다. "그래,얼마인가?" "만오천 길레입니다." 오옷 하고 사람들이 경악했다. "그..그런! 고가라니! 말도 안돼! 몇배나 되는 금액아닌가!" 사람들이 경악하고 있을 때 공작은 흐음 하고 턱을 괴곤 아무말도 하지않았다. "기다려봐.생각해 볼 테니." 공작은 그렇게 말하고 눈하나 깜짝하지않았다. 청색피부의 노예는 그리고선 끌려나갔다. 그 다음으로 줄지어 나온 노예들은 대체적으로 아인족과 엘프들이었다.소녀들 두엇이 나왔지만 아무도 에닌은 아니었다.카산이 점점 긴장으로 지쳐 쓰러질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바바의 세명의 엘프들이 나섰다. 그 중 검은 머리의 비오나가 공손히 앞으로 나서서 붉은 비단 위에 섰는데 그녀 의 눈동자는 똑바로 공작을 향하고 있었다. 공작은 턱을 고이고선 그녀가 자신을 똑바로 응시하자 의외인듯 그녀를 바라보 았다. "숲의 엘프입니다." 바바가 땀을 흘리면서 설명했고 뒤이어서 두명의 엘프들이 소개되었는데 비오 나,숲의 엘프는 비단 위에서 갑자기 천천히 걸어서 공작의 앞으로 걸어나갔다. 모든 사람들이 막 붙잡으려 하는데 공작이 손을 들어서 멈추게 했다. 비오나는 주욱 걸어서 공작앞에 섰다. 그리고는 그의 발 아래 살짝 앉으면서 물었다. "저를 사주시겠어요?" 공작의 눈이 커졌다. 비오나는 손을 뻗어서 그의 손등에 키스했다. "어..어째서?" 공작이 그녀를 바라보며 재미있다는 듯이 물었다.비오나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 다. "그건 제가 당신을 사랑하니까." 아무도 듣지못했겠지만 나는 들었다. 공작은 뚫어질 듯이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녀의 얼굴은 진심이었다. 엘프는 인간과는 다르다.거짓을 모른다. 공작은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빤히 바라보더니 그녀의 머리칼을 어루만졌다. 마치 칠흑처럼 검은 머리칼이 꿈결처럼 부드럽게 그의 손아귀에서 흘러나갔다. "아름답군.." 공작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나를 사주시겠습니까?" 그녀가 다시 물었다. 공작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않고 큰 소리를 질러 바바를 불렀다. "바바! 이애를 사겠다!" 바바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가 곧이어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넵.그애는 일만 길레 되겠습니다!" "알았다." 공작은 더이상 그를 바라보지않고 비오나의 흰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 순간 비오나가 황홀하게 웃음을 지었는데 정말로 만족한 웃음이었다. "대..대체 어떻게 된거지? 엘프는 대개 스스로 팔리길 원할리가 없는 것인데!" 놀라 스카가 내게 물었다. "바보녀석." 나는 그렇게만 말해주곤 고개를 돌렸다. 공작이 비오나를 자신의 무릎위에 앉히고 다시 시선을 돌릴 때 비오나는 그의 목에 팔을 감고는 요염하게 앉아 미소를 던지고 있었다. 보던 사람들 모두가 아연해서 바라보는 동안 다음 노예상이 흠흠 거리면서 소개 했다. "다음은..저는 티급니다.이번에 제가 데려온 아이는 묘인족의 아이와 엘프 소녀 입니다.이 애는 귀족 엘프로.." 그 순간 카산이 몸을 굳혀 앞으로 나서려는 것을 내가 꽉 잡았다.카산은 당장이 라도 흥분하여 날뛸 듯했는데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뭐? 묘인족의 아이라구! 내가 격노하기 직전에 나는 스스로를 억눌렀다.카산이 발광하려는 것과 똑같은 꼴이 아니겠는가 하고 스스로를 달랜다음 생각했다.정말 묘인족의 아이가 있을 리가 없다.묘인족의 가장 어린 녀석은 다름 아닌 내 동생 캐러딘으로 그놈은 지 금 북방에 있다.그러니 누군가가 아이를 낳기 전에는 묘인족의 애가 있을리가 없다.나는 있을리가 없다를 반복하면서 주시했다. 카산이 벌벌 떠는 것이 그의 어깨를 잡고 있는 내 손을 통해 전해져 오고 있었 다. 붉은 비단위를 걸어오는 것은 청동색 머리칼의 소녀와 금갈색 머리칼을 가진 소 년이었다.카산이 당장이라도 날뛰려는 것을 꾸욱 누르면서 나는 그 소녀가 에닌 임을 확신했다. 일단 냄새가 같고 생김새도 같다. 다른 엘프와는 다른 우아한 기품이 전신에 어려있는데다가 다른 자들과 달리 공 포감도 거의 없이 잔잔한 얼굴. 그리고 또한 소년은 금갈색 머리에 고양이눈을 한 갈색피부의 소년이었다.물론 묘인족과 비슷한 느낌이긴 했다.그러나 녀석은 묘인족이 아니라 아인족의 한 명 으로 전혀 우리완 다르다.나는 코웃음을 치고는 비웃음을 던졌다. 여기 있는 자들 중에서 묘인족을 아는 것은 드물어서 스카나 카산정도만이 알고 있었다.물론 비오나도 알고 있다.저 나이든 까마귀의 엘프는 내가 누군지 알고 있는 것이다.그러나 대부분은 묘인족이 대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른다. 바바가 식은땀을 흘리면서 날 흘긋 보았고 내가 히죽이 그를 향해 웃어보이자 흠칫하더니 손을 들어서 외쳤다. "이봐,티그! 그앤 묘인족이 아니다!" 티그란 뚱땡이가 불쾌한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뭐라구?" "묘인족을 잘 모르는 거 같은데..나는 묘인족을 봤어.그앤 묘인족이 아냐." "너,지금 나의 신용을 떨어뜨리려는 거냐!" 티그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고 흥분한 기색이 되었다. 그 말도 틀리진 않았다.만약 인종을 분류하는 데에 전문가인 노예상이 틀렸다고 하면 그건 신용에 대한 문제였다.게다가 지금 이 자리는 공작이 있는 자리였다. 공작은 바바의 말이 떨어지자 마자 시선을 돌려 노예들을 바라보았다. "묘인족이란..고양이를 닮은 종족이 아냐?" 공작이 흥미진진한 듯 물었다. 나는 저녀석의 얼굴을 한대 후려치고 싶은 기분을 억제했다.저 자식은 내가 자 기 아버지랑 숲에서 사냥하고 돌아다닐때 물론 강보에서 기어다니고 있었지. "음..바바! 그렇다면 넌 대체 이 애의 어디가 묘인족이 아니라고 하는 거냐!" 흥분한 티그가 당장이라도 달려들듯이 외칠 때 바바가 헛기침을 하면서 나를 흘 긋 거리고 보며 말했다. "묘인족은..겉모습이 고양이 모습을 하고 있지않아..그들은..변신족이고...겉으 로보기엔 완벽한 인간으로 보인다구,." 모두의 시선이 금갈색 머리칼을 한 소년에게로 쏠렸다. 소년이 캬아 하고 낮게 으르렁거렸다. 체엣 하고 내가 중얼거릴 때 카산이 중얼거렸다. "저,,.에닌이에요! 에닌을,.!" "알았어,기다리라구,.기다려!" 내가 그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동안 티그의 얼굴이 굳어지더니 외쳤다. "그렇다면..증명을 해봐! 묘인족이 아니란 증명을 하라구!" "그건 저애에게 직접 물어보면 알거 아닌가?" 내가 조소하듯이 하며 대꾸하자 티그는 이를 악물며 나를 노려보았다. "거친 놈이야! 당장이라도 결박을 풀면 덤벼들어!" "자갈만 풀어보라구," 바바가 덧붙여 말하자 이를 갈던 티그는 부하를 향해 손짓했다. "엄청난 일이 되어도 난 몰라!" 그가 이를 갈며 외쳤다.그 순간 부하중 한명이 그의 입을 벌리고 혀깨물기 방지 용 자갈을 꺼냈다.그것은 혀를 굳은 돌로 감싸는 것인데 도저히 이빨로는 깰수 없는 물건이다.그것을 꺼내자 마자 아아아아 하고 괴성에 가까운 소리가 소년에 게서 터져나왔다. "더러운 놈들! 개자식들! 이 추악한 인간들!" 그가 욕설을 퍼붓기 시작할 무렵 티그가 크게 외쳐 물었다. "너는 묘인족이냐?" "아니라고 했잖아! 이 멍청한 돼지놈!" 소년이 악을 지르면서 고함을 질러댔다. 바바가 웃음을 터뜨렸고 티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그는 욱 하고 이를 악 물고는 주먹을 쥐었다. "아니.아니.티그.그건 그대의 잘못은 아냐." 공작이 말했다. "여기 있는 누구도 바바이외엔 묘인족을 볼 수가 없었잖아? 묘인족은 깊은 산과 숲에 사는 신비의 종족이라 알려져있어.게다가 그들이 완벽한 사람의 모습을 하 고 있다면 묘인족을 알아본다고 하는 것은..말 그대로 꿈속에서나 가능한 일이 지." 바바가 웃었다. "그리고 일단 묘인족을 잡는다는 것은 불가능이지.묘인족 한 사람이 병사 이백 명은 몰살 시키는 위력을 가지고 있는데 잡을 수가 있을 거 같아?" 공작이 바바를 향해 물었다. "호오,.그대는 묘인족을 보았다고 했지? 어떤가?" "아아..소인이 어릴때에 본 것입니다.자세히 기억은 안나지만 무시무시했으며.. 어떤 자도 잡지 못했습니다." 바바가 날 자꾸 힐긋 거리면서 대답했다. 나는 공작을 바보취급하면서 생각했다. 역시 멍청한 놈.나는 네가 강보에 싸여있을 때 네 아비와 사냥하고 있었다니까. 그런 대화들이 오고갈때 분노한 티그가 부하에게서 채찍을 빼어들어서 금갈색 소년을 향해 후려갈겼다. 차악 하고 채찍소리가 무섭게 울려퍼졌다. 소년은 등을 뒤로 하고는 엘프 에닌을 감싸고 얻어맞았다. 그의 매끈한 갈색피부에서 피가 스며나왔지만 소년은 미동도 하지않고 자신의 옆에 서있던 에닌의 몸을 감싸안고 있었다. 차악 차악 하고 연속해서 세번의 채찍이 가해졌다. 보는 사람들이 옷 하고 비명을 올릴 즈음 공작이 외쳤다. "그만하라!" 티그는 울분이 쌓인 얼굴로 바바를 노려보고는 채찍을 바닥에 집어던져 버렸다. 피가 줄줄 흐르는 몸이 된 금발 소년은 움찔하지도 않은 얼굴로 사납게 그를 노 려보았다.살기가 그의 눈에서 스쳐나가는 동안 티그는 아랑곳 하지도 않고 공작 을 바라보았다. "공작님의 거성을 더럽혀서 죄송합니다.묘인족을 보지도 못했으면서 이런 실수 를 하게 되어 대단히 송구스럽습니다." 뚱보는 고개를 푹 숙이고 공작에게 말했다.놀라울 정도로 분노와 좌절감을 감추 고 있는 얼굴이었다. 공작은 금발머리를 약간 흔들며 못마땅한 기색을 지어 보였다. "여긴 숙녀분들도 계시는 자리인데 감히 피를 보이다니!" 그가 가볍게 분노의 표정을 짓는 동안 재빨리 내가 나서서 말을 했다. "치료를 하는 게 어떨까요?"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 쏠렸다. 나는 빙글 빙글 웃으면서 말했다. "저 다친 소년을 위해 공작님께서 방을 하나 빌려주신다면 이 미천한 몸이 치료 를 하려 합니다만?" 공작은 나를 의아하게 보았고 티그는 나를 매우 못마땅한 듯-실은 죽일 듯이-바 라보았다.사람들이 나의 곱상한 미모에 호감을 느낄 무렵 소년이 외치기 시작했 다. "싫어! 필요없어! 이 더러운 인간들!" 나는 미소를 진하게 머금으면서 바바를 바라보았다. 찔끔한 바바가 급히 말했다. "저..이 분,.아니,이 애는 저의 조카로서 의술을 공부한 아이인데 제 노예들을 그동안 보살펴 왔습니다.그러니까..그러니까.." 그때 공작의 무릎위에 있던 비오나가 한마디 공작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맞습니다.저분은 저를 치료해 주셨습니다." 공작이 호오 하고 날 보았고 나는 의기 양양하고도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어 보 였다. "그럼,내가 방을 하나 주지.,치료하라." 공작이 허락하자 시종하나가 걸어나와서 내 앞에 와 섰다. 나는 소년에게 다가가기 전에 카산이 흥분하지 않도록 카산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꽉 눌러주었다.아픔으로 그의 로브아래 드러난 입가가 바르르 떨었다.아 마 어깨에는 내 손가락 자국이 그대로 날 것이다. "내 말대로해라.멍청아." 카산이 나를 증오로 노려보는 동안 나는 몸을 돌려 경쾌하게 걸었다.붉은 비단 위의 두 소년,소녀는 나를 노려보며 고함을 질러댔다. "싫어! 내 몸에 손대지마!" 나는 방그레 웃음 지었던 사교용 미소를 없애고 위협용 미소로 바꾸었다. "자식..죽어볼래,아님 계속 소리지를래?" 소년의 눈이 커졌다. 과연 고양이 눈이다.그러나 묘인족은 이런 고양이 눈은 가지지않는다. 눈동자가 마름모꼴이라 할수있는 이 날씬한 타원형의 눈동자는 언뜻 보면 섬짓 한 인상을 주기도 하지만 이 소년의 경우는 초록색과 보라색이 얼룩져 마치 살 아있는 보석같았다.이제서야 이 종족이 무슨 종족인지 알것 같았다. 이건 야묘족이라는 놈들이다. 소년의 얼굴이 약간 공포에 찌들었다. "따라와." 나는 그 두개의 어깨에 손을 대었다. 엘프 소녀를 감싸려고 소년이 버둥거리는 것을 나는 낮게 웃으면서 위협했다. "순순히 따라 올래? 아님 죽어볼래?" 욱 하고 소년이 입술을 깨물었다. "허긴..죽여달라고 애원한다면..갈갈이 찢어 이 애 얼굴에 네 살점을 던지는 것 도 좋지만.너같은 하급종족은 나에게 있어 파리 한마리나 마찬가지니까.." 우욱 하고 공포의 표정이 점차 커질 때 나는 사람들 보는 데에선 방글 방글 웃 는 얼굴로 두 소년 소녀의 팔뚝을 잡아 밖으로 걷기 시작했다. "잠깐! 그 앤 다치지않았어!" 티그가 내가 소녀를 데려가려하자 마자 의아한 듯 크게 외쳤다. "오? 그래요? 허나 아까 당신이 처음 채찍질 할때 이미 다쳐버렸소,." 나는 빙글 웃었다. 그리고는 주저하지않고 티크가 안보이는 틈을 타서 소녀의 흰 팔뚝에 손톱을 대 고는 죽 그어버렸다.악 하고 소녀가 낮게 신음했고 소년이 분노로 나를 쳐다보 는 순간 나는 소녀의 피가 흐르는 팔을 들어서 티그에게 보였다. 티그는 움찔 하더니 알았다는 듯이 손을 저어보였다. 그리고 나는 내 뒤를 따르는 스카와 카산을 데리고 그 앞에서 유유히 밖으로 걸 어나갔다. 시종이 복도를 통해서 피를 줄줄 흐르는 소년을 걱정스레 바라보면서 걷는 동안 나는 스카에게 턱짓을 하면서 시종에게 물었다. "그런데 말이오." "넵?" 시종이 날 바라보았다. "매우 좋은 거성이군요." "아아.." 시종이 자랑스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런데 실례지만.." "네?" "잠시 주무시구려." 내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스카가 탓 하고 달려들어 시종의 목줄기를 쳐내렸다. 시종이 축 늘어져 기절하는 순간 우리들은 재빨리 시종의 몸을 잡아 당겨내고는 옷을 벗겨 아무방이나 열고 알몸의 시종을 들여보냈다. "어..어쩔려고?" 카산이 눈을 크게 뜰 무렵 나는 두 소년 소녀를 옆구리에 끼고는 스카에게 말했 다. "넌 카산을 데리고 나와.그리고 빌어먹는 시인의 여관에서 보자구!" 내가 창턱에 발을 디디고 말하자 스카가 가볍게 항의했다. "빌어먹는 시인이라니! 음유시인의 노래터라구!" 그가 항의할 무렵 나는 그에 신경을 쓰지않고 창문에서 뛰어 내렸다. 등 뒤로 카산이 지르는 비명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내 몸은 지금 지상 4층에서 뛰어내린 관계로 돌아볼 여력은 없었다.엘프 소녀가 비명을 삼키는 동안 나는 아래에 적당히 내려설 곳을 물색하면서 몸을 조금 틀었다. 착지 장소로는 여물을 잔뜩 담아놓은 달구지를 택했다. 지키는 사람도 없다.좋았어! 내 발이 퍽 하고 달구지에 처박히는 순간 달구지가 와락 뒤로 뒤틀려 흔들렸고 나는 그 여력을 이용하여 뒤로 튕겨올라 멋지게 착지 했다. "쟌!" 나는 히히 웃고는 소여물을 먹이려고 갈쿠리를 들고 있던 사람들이 멍청히 나를 바라보고 있는 동안 내달리기 시작했다.아무도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지를 모른다.그리고 나로선 그게 더 좋았다. 내 옆구리에 매달린 두 녀석들은 완전히 넋을 잃은 것인지 죽은 듯이 조용하다. 혹시 진짜 죽었는가 싶어 손가락으로 가슴을 더듬거려 보니 심장뛰는 것이 느껴 진다. 흐음,죽지는 않았군. 나는 랄라라 하면서 계속 치달렸다. 나의 괴이한 몰골을 보는 자들이 증언을 하면 곤란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어느샌지 해가 지고 있는 이 아름다운 베델의 아그랑도시의 전경을 바라보기 위 해 담장으로 튀어 올랐다.그리고는 담장에서 다시 다른 집의 지붕으로,그리고 어느 아리따운 아가씨가 옷을 갈아입는 그 삼층방을 유유히 훔쳐보며 다른 집의 지붕으로. 계속해서 지붕 위를 뛰고 있는 가운데 나는 점점 흥에 겨워져서 중얼거렸다. "호오호..내 이름은 쿠베린,.성은 없고 인간도 아니며..나는 묘인족의 왕!" 이 노래는 내가 지은 것이다. 스카는 이 노래를 들으면 뒤로 자빠져 버리지만 의외로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 지 모른다.허긴 인간들 따위가 나의 이 고상한 노래를 어찌 이해하겠는가! 내가 해 지는 붉은 노을 아래 두 소년 소녀를 끼고 마침내 지붕에서 지붕으로 이어진 나의 지름길을 통해 저 빌어먹을 시인집에 도착했을 때는 스카도 이미 준비를 마친 뒤였다. "라라랄!" "제발좀 그 이상한 노래좀 하지마!" 스카가 울상을 하고 외쳤다. 그는 이미 말고삐를 쥐고 있었는데 마차에 타고 갈 준비를 하고 있던 카산이 내 옆구리에 낀 소녀에게 손을 뻗혔다. "에닌!" 소녀가 죽은 듯이 내 옆구리에 끼어 있다가 고개를 팟 하고 쳐들고는 그를 보았 다.카산이 로브를 벗어던지면서 그녀의 몸을 감싸안았다. 에닌이란 이 아름다운 엘프소녀는 멍하니 카산의 얼굴을 보고 있었는데 이미 그 순간 마차는 달리고 있었다. KUBERIN..... 내 이름은 쿠베린 성은 없다. 그리고 인간도 아니다. 5 "보고 싶었다! 에닌!" 카산이 그녀를 끌어안고 울고있을 때 갑자기 그의 옆에서 그를 탁 밀치면서 야 묘족의 소년이 끼어들었다. "당신 뭐야!" 카산은 에닌과 똑같은 얼굴을 들어서 그를 빤히 보았기때문에 소년은 어어 하고 입을 벌렸다.카산이 낮은 목소리로 소녀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에닌,오빠다." 야묘족의 소년이 눈에 띄게 당황하면서 카산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저기..이 아가씨는..." 나는 그들의 모양새를 보다 말고 조금 놀라서 에닌의 어깨를 확 잡아 끌었다. "자갈을 아직 안빼낸 거냐?" "그게 아니고..이 아가씬 말을 못해!" 소년이 대신 말했다. 카산이 놀라서 에닌의 어깨를 흔들었다.그러나 눈물만 주르르 흘릴 뿐 아닌게 아니라 에닌의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카산이 연민과 충격으로 그녀의 몸을 흔 들면서 몇번이고 애타게 물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말을 못하게 된거야?" "뭔지,.뭔지는 모르지만 충격을 받아서 그런 거 같아요.당신,이 아가씨 오빠? 구하러 온 거구나." 야묘족의 소년이 안도한 듯 말했다.그는 나와 카산을 번갈아 보고는 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난 또..이상한 괴물인가 해서 놀랐지 뭐야." 나는 그녀석의 머리통을 사정없이 내리치고는 카산과 에닌을 번갈아 보았다. "어떻게 된 거냐?" "몰라요!" 카산이 에닌을 끌어안고 울음을 터뜨렸고 에닌도 울기 시작했다. 난데 없는 눈물의 바다가 되어 버려서 나는 난처해졌다.말을 몰던 스카가 자꾸 만 물어온다. "왠 눈물이야? 왜 울어?" "몰기나 해!" 나는 약간 김이 빠져서 의자에 걸터앉았다.기분이 잡쳤다. 에닌이란 이 엘프아가씨는 완전히 벙어리가 된 모양이고 그것을 본 카산의 얼굴 은 완전히 죽상이었다.그들이 우는 것을 보고 있자니 왠지 속이 치밀어서 아까 의 상쾌한 기분이 사라져버렸다. 야묘족의 소년은 날 흘긋 흘긋 보면서 자신의 머리통을 문질렀다. "저..당신," "뭐냐? 애송아." "당신은 뭐하는 사람인데 그렇게 기운이 센 거지?" "흥," 나는 체엣 하고는 대굴 누워버렸다. 야묘족의 소년이 무릎걸음으로 기어오더니 에닌과 카산의 눈물의 상봉을 더이상 보기 괴롭다는 듯이 내 옆에 와 앉았다. "당신이 구해주려고 그러는 줄 몰랐어.미안해." 호오,의외로 솔직하구만. "나도 저 아가씨 덕에 같이 구출되었군.감사해야 겠네." "돈이 있다면 내놔." 그가 고개를 저었다. "가진 게 있을리가 있어? 노예로 팔린 주제에?" 흐응 하고 내가 아직도 울고있는 두 남매를 바라보는데 소년이 내 옆에 찰삭 붙 더니 말했다. "내가 서비스 잘 해줄테니 날 데리고 가지 않을래?" "웃기지마라." "나..수명도 길고 쓸만한 놈이야.당신이 날 구해주었으니까 당신이 늙어죽을때 까지는 내가 서비스하지."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놈을 바라보았다. 그는 아몬드빛의 동공을 확대했다가 축소했다가를 반복하면서 혀를 내밀어 내 뺨을 핥았다.내가 얼굴을 찌푸리자 그가 빙긋 웃었다. "내 은인이잖아? 먹을 거 정도는 달라구." "놀고 있네,짜샤! 난 계산이 철저하다구! 내가 왜 널 먹여키우냐? 게다가 야묘 족 놈들은 워낙에 먹어댄다구!" 나는 녀석에게 손가락을 들어서 이마를 쿡쿡 찔렀다. 앞에서 마차를 몰던 스카가 껄껄 대고 웃었다. "그래,그래.생각해 보니 쿠베린이 늙어죽을 때 까지 봉사한다면 넌 앞으로 오륙 백년은 족히 봉사해야 할거다!" 야묘족의 소년은 흐응 하고는 내 앞에 와 도사리고 앉아 날 바라보았다. 묘인족과는 달리 이 야묘족은 몸에 고양이티가 팍팍 난다.녀석은 긴 손톱을 숨 긴 손으로 내 옆구리를 박박 긁듯이 흔들더니 아양떨듯이 말했다. "이 엄동 설한에 내가 어디서 살 수 있을 거 같아? 나,당신에게 반했다구." "아까는 죽일듯이 덤벼들던 주제에! 놀고있네! 난 취미없어!" 녀석의 얼굴이 가볍게 일그러졌다. 앞에서 말을 모는 스카는 계속 웃고 있다가 카산남매가 아직도 울고 있다는 것 을 눈치채고는 입을 다물었다.그리곤 고양이녀석에게 속삭였다. "넌 따뜻하니?" "물론이죠." 녀석이 어리둥절해서 그를 바라보다 대답하자 스카가 웃음을 던지면서 나에게 말했다. "이봐,이봐.들었지? 저 애를 난로로 쓰라구.나도 이제 널 끌어안고 자는 건 그 만두겠어.마치 변태취급받잖아?" "왜? 난 돈안드는 난로가 좋아." 내가 비꼬자 스카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봐,너,내가 말은 안했지만 넌 소녀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게다가 밤만 되면 내 침대에 끼어들어와 내 품안에서 자잖아! 그런 것을 몇번이나 여관에서 들켜 서 내가 얼마나 죽일놈 취급 받았는지 알기나 해!" 나는 흐응 하고 웃었다. 내가 알게 뭐냐? 나는 따스하게 자기만 하면 된다. "이제 내 나이 40이라구! 너만한 아들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아! 그런데 내가 널 밤마다 끌어안고 자야겠냐!" "아들이라고 생각해라.스카." 내가 점잖게 말해주었다. "이 미친고양이놈!" 스카가 날 보면서 욕설을 퍼부어대기 시작했고 나는 라라라 하고 흥얼거리면서 다리를 까닥거렸다.마차는 계속 달리고 있었고 그 와중에 두 남매는 이젠 눈물 을 거두고 서로를 꼭 끌어안고 있었다. 어느샌가 이 야묘족의 소년은 내 옆구리를 파고 들어오더니 웅크리고 자기 시작 했는데 그 감촉이 제법 따스해서 나도 모르게 그만 그를 부둥켜 안고 잠이 들어 버렸다. "이름이 뭐냐?" 스카가 내 몸을 덥석 안아 나르면서 내 옆을 걷는 녀석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나는 스카의 몸안에 팍 파고들어서 깊이 자고 있었다.지금은 오밤중이지만 나는 오늘 지나치게 일찍(?) 일어난 탓에 계속 자고 있었다. "가빈이에요." "가빈.조금 희안한 이름이군,몇살인데?" "69세요." 잠시 스카는 벙벙한 듯 말을 멈추었다. 나는 자면서도 자식 그걸 질문이라고 던지냐 하고 비웃고 있었다.어찌되었든 스 카는 나를 가볍게 안고 걷고 있었다.야묘족의 이 가빈이란 녀석은 끝까지 따라 오고 있다.젠장. "쿠베린은 깊이 잠들었나요?" 카산의 음성이 들렸다.어딘가 김이 빠진,슬픈 음성이었다. 나도 기분이 울적해졌다.일이 이렇게 그다지 좋지않은 결과를 가져오면 나도 기 분이 울적해져 버린다..허긴 어쩐지 일이 너무 쉽더라. "아냐.이녀석은 자면서 들을 건 다 들어." 스카의 음성. "그래요오..그럼 ..우리들은..이대로 떠난다고 전해주세요." "자.잠깐! 이 밤중에 어딜가? 게다가 이런 눈속에서? 몸녹이고 뭐라도 좀 먹 고..그리고 내일 아침에 가라구! 쿠베린의 집안에 있을 때면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니까!" 스카가 당황하여 크게 떠들었고 나는 잠시 갈등을 겪었다. 이 어린 놈들을 여기서 재워 줄 것이냐 말 것이냐.. 그러나 내가 결론을 내기도 전에 당황하고 있는 카산과 에닌을 스카가 끌고 내 집이자 마미의 집으로 끌어들였다. 나는 스카의 품안에서 눈을 뜨고 두 남매를 바라보았다. 모두들 넋이 빠진 얼굴.눈물자국이 그대로 남아있고 눈은 발갛게 부어있었다. "비켜.스카." "어." 스카가 손을 떼자 마자 나는 스카의 어깨를 밟고 기어올라 가볍게 등 뒤로 착지 했다.카산과 에닌이 날 보고 주춤 하는 동안 나는 손짓을 했다. "이리와서 뭔가 먹어라.그리고 불을 쬐." 마미의 사슴집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많았다.그들은 날 보고는 어이 하고 아는 척을 했고 내가 들어오자 마미는 거대한 두 팔을 벌려서 나를 덥석 안아 흔들어 댔다. "내 귀여운 고양이!" 나는 그녀의 품안이 좋아서 한동안 그렇게 하고 있은 뒤에 그녀의 목에 매달려 아양을 떨었다. "밥줘어." "하하하하하..내 귀여운 고양이.얼른 따스한 자리로 와라!" 그녀는 난로가에 앉아있던 턱수염 난 사내들 셋을 우락부락하게 내 쫓고는 내 자리를 만들어주었다.그리고는 말도 하지않았는데 거대한 맥주조끼에 그득히 맥 주를 담고 엄청난 그릇에 역시 대단한 양의 양고기 스튜를 꺼내 놓았다.갓 구운 빵에는 내가 좋아하는 선지젤리를 잔뜩 얹어서 건내주며 그녀는 으하하하 하고 웃어보였다. 내가 아귀거리고 먹는 동안 스카는 쓴 얼굴로 옆에 앉아서 두 남매를에게 앉으 라고 권했고 두 남매는 내 의자의 옆 의자에 다소곳이 앉아서 내가 하는 양을 멀거니 바라보고있었다.가빈이란 녀석은 내 옆에 앉더니 침을 질질 삼킬 거 같 은 얼굴로 내 음식을 쳐다보고있었다.보다 못한 스카가 음식을 더 달라고 했고 사라가 대단히 불친절한 기세로 나에게 턱 하고 그릇을 두고 갔다.가빈은 내 눈 치를 보더니 허겁거리고 먹기시작했다. 가게안은 손님들의 소리와 웃음소리로 가득했고 나는 계속 먹었다. 두 엘프는 아무말도 하지않았고 나는 다 먹고 나서 그들에게 물었다. "노스엘스턴으로 돌아갈 건가?" "네." 카산이 우울하게 말했다. "에닌이 왜 말을 못하게 되었는지 물어봤어?" "네.그러나 너무나 겁에 질려서 말을 못해요." 카산이 에닌의 어깨를 잡고 연민에 가득한 얼굴로 어깨를 토닥였다.나는 에닌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시 가빈을 바라보았다.가빈은 마구 먹다 말고 나의 시선 에 흠칫했다. "이봐.너.가출했지?" 가빈이 우물 했고 나는 잘라 말했다. "가출하다가 노예상에게 잡혔지?" "에.." "그리곤 나에게 들러붙은 뒤에 겨울을 나면 내 물건 가지고 도망갈 심산이지?" "노..농담말아요!" 나는 흐응 하고 중얼거렸다. "스카,넌 모르는 모양인데 야묘족은 대단한 도둑들이야.이름난 도둑중에서 야묘 족이 얼마나 많은 지 순진한 넌 모를거다." 스카가 눈을 부릅뜨자 가빈이 벌떡 일어나더니 고함을 질렀다. "아냐! 난 도둑아냐!" 스카와 카산이 동시에 비난어린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나는 그를 보곤 흥 하고 말했다. "게다가 완전히 거짓말 장이지.잘 알고 있다구." "아니야! 난 거짓말 장이 아냐!" 가빈의 얼굴이 발갛게 변했다.그는 흥분해서 내 테이블 위에 올라가 춤이라도 출 기세였다.나는 흐응 흐응 하고 손을 내저어 보였고 그는 더더욱 화를 냈다. "그렇게 화를 내는 게 더 수상하군." "씨이!" 그가 마지막 수단으로 눈물을 택했는지 눈물을 줄줄 흘린다. 그 때 마미가 등장했다. "이번에 온 애는 왜이렇게 시끄럽니?" 그녀는 울고 있는 가빈을 보면서 눈쌀을 찌푸렸다. "아아.도둑 고양이야." 내가 냉담하게 말하자 마미는 가빈의 목덜미를 잡더니 그를 동그마니 단숨에 들 어올렸다.그리고는 얼이 빠진 듯 그녀를 바라보는 가빈을 보고는 생긋 웃었다. "과연,고양이구나,쿠베린." "넵넵,거짓말장이에 도둑고양이죠." 내가 말하자 적당히 하라고 카산이 외쳤다. "그만 좀 해요! 저 사람도 노예로 고생했잖아요!" "뭘 고생해? 너,거물 노예상에게 잡힌 노예들이 어떻게 되는 지 아냐?" 나는 쯧쯧 혀를 차며 비웃었다. 그러자 순식간에 에닌의 얼굴과 카산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그들은 듣고 싶 지않다는 듯이 입술을 깨물었지만 나는 가차없이 말했다. "아주 엄청나지.엄청난 고생이고 말고." 내가 흐흐 웃어보이자 에닌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대개는 비단 금침에서 잠을 자고 매일 좋은 음식과 시종들까지 나서서 씻기고 시중들어준다구.거물 손님에게 팔리기 까지 다른 자들은 손도 못대게 하고 말이 야.안그래?" 내가 에닌에게 동의를 구하자 에닌은 눈을 크게 뜨고 멍하니 날 바라보았다. "그,.그런가요?" 카산이 멍하니 나에게 물었다. "공작에게 바치려고 생각했을 테니까 분명히 잘 닦이고 입혀서 고이고이 왕자공 주처럼 모셨을 거라고.근데 무슨 고생을 해?" 카산이 멍하니 날 바라보았고 가빈도 날 멍하니 바라보았다. 침묵이 흘렀다. 나는 맥주를 단숨에 다 들이켜 마지막으로 입가심을 했다. 스카는 여전히 싱글 벙글 웃고 있다. "낼 아침에 떠날 거면 떠나.카산.그리고 아침에 떠날 거라면 절대로 절대로 나 를 깨우지 말것." 나는 기묘한 안도의 얼굴이 된 카산을 향해 말했다. "만약 날 깨운다면.." 나는 그의 목줄기에 혀를 대고 핥았다. 카산이 혼비백살 할 무렵 나는 히죽이 웃음을 지어 보였다.약간 효과를 내기 위 해서 송곳니도 드러내 보였다. "그때는 널 먹어버릴 거야." 카산이 소름끼친다는 표정이 되어서 뒤로 물러날 무렵 나는 부른 배를 어루만지 면서 일어났다. "스카.마차 빌린 거 갖다 놔줘." "아아..그래." 스카가 히죽 히죽 웃으면서 대꾸했다. 가빈은 얼렁한 얼굴로 나와 스카를 번갈아 보다가 스카에게 물었다. "저..따라가도 되요?" "저 놈을 따라가.지금은 저래도 잘 때 들러붙으면 절대로 널 품안에서 놓지않을 걸." 그가 하하 웃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못들은 척 해주었다. 뜨끈하고도 뜨끈한 새 난로가 왔다.놈이 내 침대에 기어들어와 두 팔로 내 어깨 를 꼭 끌어안았는데 나보다 체구가 작다.체에..귀찮게 내가 끌어안아야 하나? 나는 그 놈을 푹 끌어안고 자면서 또 푸념같은 소릴 들었다. "...어떻게 알아차렸어요?" 멍청한 자식. "그애..사냥꾼들에게 짓밟혔대요..엉망으로요.." 그 딴 거 알고 싶지않아.멍청아. "그런데 오빠가..찾으러 올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어요..그래서.." 나는 그녀석의 입을 내 입으로 막고는 계속 잠을 청했다. 전에도 그랬지만 나는 내 잠을 방해하는 것을 용서할 수 없다. "감사해요.." 누군가가 말할 리 없는 녀석이 내 옆에서 말하고 있었다. 이건 새벽이었고 나는 절대로 깨어날 수 없는 시간이다.그러나 나의 예민한 귀 는 모든 것을 듣고 있었다. "정말로 감사해요.." 그녀가 그렇게 말하고 내 머리맡에서 사라졌다. ....나는..진짜 알 바 아니라니까! ...체엣! 제 2화 암살자 KUBERIN.... 언젠지 기억도 못할 아득한 옛날 피의 명예를 위해 나는 싸웠었다... 1 그녀는 마치 해질 무렵 아스라히 밀려드는 어둠처럼 등장했다. 검은 눈과 마치 옻칠을 한듯 매끄러운 그 검은 몸으로 등장한 그녀는 우아하게 고갯짓을 하곤 내 침대 머리맡에 내려앉았다. 나는 멀건히 잠이 덜 깬 얼굴로 빈둥거리고 있었고 침대가에는 그녀의 검은 빛 과는 전혀 다른 햇빛이 창문에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뭐냐?" 내가 멍하니 중얼거리자 그녀는 검은 눈으로 나에게 미소를 던졌다. 사실 생각해 보면 새가 웃음을 짓는다는 건 우스운 말인데 지금으로선 그게 우 습지는 않았다.내가 말하자 마자 그녀의 몸이 마치 어떤 여자가 옷을 벗어 자신 의 알몸을 드러내는 듯한 태도로,순식간에 한 명의 여성으로 화했기때문이다. 까마귀 날개죽지와 같은 검고 푸른 빛까지 도는 우아하고 순결한 검은 머리를 한 그녀는 그에 걸맞는 흰 피부와 아름다운 이목구비를 드러낸채 나의 앞에 우 아하게 섰다. "너냐?" 그 모습이 아름답긴 했지만 때때로 나의 시선은 그 몸뚱이 안에 흐르고 있을 피 를 생각하며 피부 속으로 침투해 들어간다.내가 보는 것은 일반 인간들이 보는 그런 것은 아니다.내가 보는 것은 건강한 피와 건강한 살과 뼈였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이 여자는 인간들이 보면 감탄할 아름다움의 소유자일지는 모르나 내게는 어딘가... 양.이.너.무.적.다. "저에요.쿠베린님." 나는 대굴 굴러서 침대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그녀는 나를 빤히 바라보며 미소를 던지고 있었다.아름다운 얼굴이다. "무슨 볼일이야?" "부탁이 있어서 왔어요." "흐응." 내가 코웃음을 치자 엘프는 미소를 던졌다. "마.법.사.이자 엘프인 네가 나에게 부탁을 하겠다? 거절이다." 내가 간단히 말하자 그녀는 내 앞에 사쁜히 걸어와서 부드럽게 말했다. "저에게 빚진 것이 있지않으신가요?" "빚?" "저 엘프아가씨의 탈출 때 말입니다." 나는 손에 턱을 얹고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그녀는 생글거리고 웃고있었다. "그래서?" "게다가 당신께선...빚을 지는 것을 매우 싫어하시죠." 여전히 웃는 얼굴. 나는 히죽이 웃어주었다.송곳니가 드러났다. "천만에.난 빚을 잊어버리길 즐기거든." 난감한 표정이 되려다 말고 그녀는 배시시 웃었다. "그런 분 치고는 저 귀찮은 야묘족의 소년까지 맡으셨잖아요?" "그건 내 난로로 쓰고 있어.난 뜨끈한 녀석은 이뻐하지." 내가 간단히 말하자 그녀가 미소하면서 입을 손으로 가리고 호호 웃었다. 우아한 동작이긴 하지만 어딘가 조롱기가 담겨져있었다. "그러신가요? 그럼 또하나의 뜨근한 아이를 가르쳐 드리죠." "하나면 되는데." "그..푸른 피부의 아일 기억하세요?" "기억해." 내가 대꾸하자 그녀가 진지하게 말했다. "그애가 죽기 직전이랍니다.좀 어떻게 해 주시지않겠어요?" "내가 애보기냐!" 울컥해서 내가 고함을 지르자 그녀는 후후 웃음을 지었다. "야묘족의 아이도 거두셨는데 뭐가 어때서 그래요?" "돈 생기는 일이라면 몰라도 끝이 귀찮은 일은 안해." 나는 그녀를 무시하고 일어났다.그리곤 창문을 바락 열어제치고 햇빛이 따스한 것을 조금 즐겨보았다.길게 기지개를 펴고 돌아서자 그녀가 날 빤히 바라보면서 물었다. "얼마드리면 그 아일 살려주시겠어요?" "..이만길레." 내가 말하자 그녀가 눈을 크게 떴다.약간 화난 표정이 그녀의 얼굴에 떠올랐다. "정말 너무하시군요! 전혀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내가 깃털투성이 엘프따위 알게 뭐냐? 한입거리도 안되는 주제에!" 내가 튕기자 그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나는 흥 하고 방문을 열고 밖으로 걸어나갔다.나가보니 식당안은 비교적 사람들 이 없어 조용했는데 내가 내려오자 마자 가빈이 촐랑거리면서 날 보고 미소를 짓는다. 음. 조금 생각해 보았다. 청색아인족. 그 하늘색 피부의 아름다운 얼굴. 물론 인간보다 수명이 길다.아마..삼백년 정도는 갈거 같았다. 게다가 청색아인족은 칼날 하나만 주면 인간들 백여명정도는 죽여준다. 흠..조수로 쓸만한데. 허긴 저기서 배실거리고 있는 저 가빈녀석에 비하면 열배는 쓸모있는 아이같다. 게다가 충성심도 깊은 편.일단 한번 주인으로 섬기면 일생 주인으로 섬긴다. 음흠.. 나는 마음이 조금 동했다. 허긴 저기서 꼬리를 흔들고 있는 가빈에 비한다면 청색아인족 애가 훨씬 나을 거야.쳇,하필 저 놈이 내 수중에 떨어졌을까.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모르고 배실거리는 가빈이 내 어깨에 와서 얼굴을 비빈다.이 녀석은 비비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사라가 질색을 하곤 하지만 다 행히 나나 마미에게만 비비는 모양이다.점점 볼수록 고양이같아 보였다. 이런 녀석을 묘인족이라고 다들 알고 있었다니! 피가 끓는다! 내가 내려오자 마미가 거대한 엉덩이를 흔들어보이면서 오더니 내게 아침겸 점 심을 주면서 물었다. "먹고 나갈 거지?" "응." "그럼 나가는 길에 저 게을러빠진 드워프에게 우리집 칼은 언제 내놓을거냐고 좀 물어봐줘라.도무지 고집이 세선지 말을 들어먹질 않잖아!" 그녀가 투덜거렸다. 나는 고개를 순순히 끄덕였다. "응. 그영감에게 말해주지." "되도록 난폭하게 물어봐 줘라!" 그녀가 투덜거리면서 나갔고 나는 음식을 먹어치웠다.다 먹어 치우고 나자 다시 내 눈앞에 예의 그 엘프,까마귀의 비오나가 날 빤히 보고 섰다. 내가 그녀를 보자 그녀가 다시 비시시 웃는다. "뭐냐?" "이만 길레 드리겠어요." 오오? "그럼 대신 그애를 구해주시고 하나만 더 일을 해주시지않겠어요?" "난 하나만 일을 받아." 내가 퉁명스레 말하자 그녀가 진지하게 말하면서 내 앞에 앉았다. "공작의 ..친구가 되어주시지않겠어요?" 나는 음하고 입을 다물었다. 기분이 찜찜해졌다. "공작이라면..베델이란 호색한 놈?" "호색한은 아니지만..." 그녀가 쓴웃음을 지었다. "에메스 랄프로 베델공작은 ..아주 좋은 분이에요." "그러니까 한눈에 반해서 자존심 높은 엘프께서 스스로 노예씩이나 되셨겠지." 내가 비꼬자 그녀가 얼굴을 조금 붉혔다.그녀는 입을 손으로 가리고 호호 웃었 다. "잘 아시네요." "알다마다.늙어빠진 까마귀의 엘프 마법사께서 덥석 그놈의 무릎에 앉는 순간 난 알았단 말야." 가빈이 어리둥절해서 꼬리를 흔든채 나와 그녀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엘프의 마법사?" "네,야묘족의 한분.전 비오나라고 해요." 그녀가 가빈에게 가볍게 인사했고 가빈도 얼굴을 붉힌 채 미소를 던졌다. "가빈이에요.쿠베린의 난로에요." 그녀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가빈은 태연히 미소를 지었다.나는 음 식을 다 먹어 치우고 맥주를 들이켰다.그 사이 사라가 테이블을 치우면서 나와 비오나를 흘긋 거리고 쳐다보면서 미심쩍은 표정을 지어보였다. "한 잔 더." 내가 맥주를 시키자 사라는 군말 없이 맥주를 따랐다. 그녀가 막 사라지자 비오나가 나를 보며 미소했다. "저 아가씬 쿠베린을 좋아하는군요." 나는 그녀의 얼굴에 가볍게 맥주를 들이부었다. 비오나는 얼굴에 맥주방울을 뒤집어쓰고는 놀라 벌떡 일어났다.그녀의 얼굴에 노기와 모욕감이 서렸지만 나는 무시했다. "건방떨지 마." 내가 으르렁거리자 그녀의 얼굴이 조금 변하고 다시 침착해졌다. "주제넘게 굴지말라고 했어." "알았습니다." 그녀가 얼굴에 묻은 맥주방울들을 손수건으로 닦아내고 있을 때 가빈은 내가 노 한 것에 당황했는지 주춤거리고 있었다. "그.아인족의 아이를 구해주실거지요?" "알았어." "이만 길레..공작의 성에 오시면 건네드리겠습니다." 나는 그녀를 노려보았고 비오나는 나의 심기를 건드린 것을 눈치채고는 천천히 일어났다. "그럼 오늘밤 와 주십시오.너무 늦으시면 곤란합니다.그애는 죽어가고 있어요."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내 눈앞에서 다시 까마귀로 화했다. 그리곤 활짝 날개를 펴고 열려진 창문으로 날아가 버렸다. 나는 턱을 괴고는 그녀의 말을 조금 음미해보았다.단지 저 앙큼맞은 계집애가 아인족애를 살리려고 나에게 이만길레나 내겠다고 했단 말야? 그건 말도 안된다.공작은 만오천길레를 주고 그 애를 샀다.그리고는 이만길레를 써서 다시 살려? 그런 수지 맞지않는 일을 하는 녀석의 얼굴을 한번 보고싶군. 가빈이 꼬리를 내리고 날 보고 있었다. 가빈의 꼬리는 얼룩무늬로 금색바탕에 검은 무늬가 들어있는데 그 엉덩이 끝에 달린 그 꼬리가 사실 너무나 웃긴다.그 꼬리는 때때로 그의 허리에 감겨있기도 하고 다리사이에 숨겨져있기도 한다.옷을 잘 입고 있을 때면 물론 허리에 감겨 있지만 지금처럼 반 벌거숭이 일때는 꼬리가 살랑거리고 있다.그 꼬리로 가끔 나를 간지럽히는 데 가지고 놀기엔 좋은 장난감이다. 나는 물론 변신해도 꼬리는 없다.이녀석도 전투모드로 전환하면 발톱이 튀어나 오지만 하는 꼴을 봐선 전투력을 그다지 신용할 수는 없을 거 같았다. 달칵 문소리가 나면서 살내음이 내 입안으로 가득 퍼져나갔다. 이번에 들어선 것은 내 사랑스런 마리아였다. 그녀는 목욕을 끝내고 오는 길인지 미소를 지으며 들어서고 있었는데 여전히 화 장을 지운 그 얼굴에 다리가 다 드러나는 깊이 패인 튜닉으로 몸을 감싸고 있었 다. "쿠브!" 그녀가 미소를 지으면서 내 무릎위에 앉았다. 흰 팔이 날 감으면서 내 입술에 그녀의 입술이 다가와 덮였다. "잘있었어?" "그럼.그럼." 나는 그녀의 살 내음에 취해서 눈을 감고 여지껏 생각했던 일을 다 지워 버렸 다.옆에 앉은 가빈이 부러워서 입을 좍 벌리고 침을 흘리고 있다. 혀에 감겨오는 그녀의 감촉을 즐기면서 내가 조용히 물었다. "오늘 노는날?" "그럼." 그녀의 눈이 빛났고 나는 그 목덜미에 코를 박으면서 가볍게 경동맥을 물었다. 살내음과 피내음이 날 미치게 했고 그녀는 그녀대로 다른 방향으로 뜨거워 졌 다. "그럼 놀러가지." "어디로?" 장난기 어린 그녀의 눈이 빛났다. "나랑 장보러 가지않겠어?" "음..뭘 살건데?" "뭐,이것저것,나에게 뭘 사줄거야?" "흐흐..좋아." 나는 그녀의 허리를 잡고 일어섰고 가빈은 따라나가려고 벌떡 일어섰다. "안돼." 내가 가빈에게 잘라 말했다.가빈이 울상이 되는 순간 사라가 고함을 질렀다. "그 고양이 데려가요!" 그녀의 얼굴이 벌겋게 물들어있었다. 내가 보여준 이 키스씬을 그녀도 보았을 것임은 틀림없었다.언제나 내가 하는 짓을 훔쳐보고 있으니까. "안돼,.이 앤 아직 어리고 난 할 일이 아주 많다구." 나는 잘라 말하곤 유유히 마리아의 손을 잡고 밖으로 걸어나갔다.내 등뒤로 사 라가 그릇들을 집어던지며 고함을 질러댔다. "이 바람둥이같으니!" 마리아가 킥킥거렸다. "뭐야?" "그녀는 당신을 좋아해.쿠브." "그래.그럴 걸.나같은 초절세 미남자를 싫어할 여잔 없어." 마리아가 내 옆구리를 꼬집으면서 쿡쿡 웃었다. "하지만 쿠브는 어려보이잖아?" "물론 어려보이지.그러나 어린 건 아니거든." 내가 팔짱을 끼며 그녀에게 말하자 그녀는 내 귀를 잘근거리고 물어뜯어주었다. 엘리야의 저자거리로 가다보면 반드시 지나야 할 몇가지들이 있다. 예를 들자면 드물게 드워프가 경영하는 대장간이라든가 조인족이 경영하는 카펫 전문점,역시 호비트들이 경영하는 주점,그리고 오크들이 경영하는 정육점 등이 다.그들이 어떻게 해서 이 엘리야에서 지내게 되었는지는 잘은 모르지만 어찌되 었든 그들이 이곳에서 지내게 된 것은 꽤나 오래되었다. 그래서 이곳 엘리야의 항구도시에서 지나가는 엘프라든가 혹은 드워프,호비트 기타 등등을 보는 것은 결코 드문 일은 아니란 것이다.물론 얼마전 헤어진 노스 엘프턴의 고상하신 귀족엘프들은 드물지만 말이다. 나는 이 거리가 좋아서 주욱 이곳에서 지내고 있다.이곳 사람들은 자기와 다른 종류들이 거리를 활보하는 것에 전혀 거부반응이 없다.그리고 또 이곳의 인간들 은 어찌된 일인지 다른 종족이 이곳 엘리야에서 잘 지내고 있다는 데에 어떤 자 부심을 가지고 있는지 자신이 이번에 산 검과 마구는 우리동네 드워프가 만든 것이라는 둥 혹은 내가 차고 다니는 가죽주머니는 호비트들이 만들어준 것이라 는 둥 오늘 오크네서 가져온 고기는 신선하다는 둥의 대화를 나누며 즐거워들 한다.그리고 자신 주위에 있는 사람이 전부 인간들이라면 어떤 사회적인 결함이 있는 자라고 비웃음을 받을 정도인 것 같다. 문득 어떤 오크가 지나가면서 나에게 이번에 들어온 배에서 선원을 뽑는 게 사 실이냐고 물어왔다. "내가 어떻게 아냐?" "하지만 가게에 선원들이 많이 들어올 거 아냐?" 거리에서 날 모르는 자는 없다. 오크는 날 빤히 보곤 머리나쁜 놈들 답게 진지하게 물었다. "마미에게나 물어봐.아님 선원길드에 가던가." "체엣." 그가 머리를 흔들며 나를 지나쳤다. 마리아가 웃음을 지으면서 내게 물었다. "얼마전에 이야기 들었어.군터한테 말이야.이번에 거래선을 바꾸었대." "어디로?" 나는 별 관심없지만 예의상 물었다. "호비트들이 이번에 만든 산포도주가 너무 너무 맛있다는 거야.그래서 그걸 손 님에게 내어 보기로 했어." "쳇." 모퉁이를 돌아가자 바닥에 앉아 노래하는 떠돌이 음유시인이 보였다.그의 주변 에 몇몇의 사람들이 모여 구경중이다.마리아도 멈추어 섰기에 나도 나란히 서서 그를 구경했다.낡아빠진 로브를 걸친 음유시인은 인간이지만 구경하고 선 자들 중에는 호비트들 둘이 섞여있다. 아름다운 소녀가 있었네 그 아름다운 소녀에게 말 좀 해주세요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고요 청년이 고백해요 소녀가 대답했어요 나는 모르겠어요 나는 모르겠어요 정말 당신이 날 행복하게 해 줄지를 흔한 사랑타령 노래다. 나는 쳇하고 기분이 상했다. 아까 까마귀 계집애가 떠들고 간 것 때문에 기분이 몹시 상했다. 가슴에 무언가 얹힌 거북한 느낌. 나는 모르겠어요 나는 모르겠어요 정말 당신이 날 행복하게 해 줄지를 웃기고 있군....... KUBERIN........ 언젠지 기억도 못할 아득한 옛날 피의 명예를 위해 나는 싸웠었다... 2 베델의 영지 아그랑에 도착했을 때 나는 가빈과 함께였다. 해는 막 서산으로 넘어간 뒤여서 아직 하늘에는 붉은 기가 남아있었다. 가빈은 스카보다도 잘 달렸다. 당연한 것이겠지만 이 녀석은 스피드만은 확실히 인간이상이어서 내가 데리고 돌아다니기에 어려움이 없었다. 베델의 거성은 여전히 화려함을 자랑하며 검어지는 하늘 아래 있었는데 나는 코 를 들고 가빈에게 물었다. "너,저 성벽을 타고 올라갈수 있겠냐?" 가빈이 멍하니 성벽을 올려다 보면서 내가 제정신이냐는 듯이 다시 돌아보았다. "농담이죠?" "내가 미쳤냐? 비싼 밥 먹고 농담하게?" 나는 진지하게 그에게 성벽을 가리켰다. 무려 15메터 이상인 그 성벽은 수직으로-수평으로 솟아있을 성벽은 물론 없겠지 만- 솟아있었고 말 그대로 깎아 지른 듯했다.그러나 그 성벽을 넘어서면 바로 외원에 이른다.그 외원을 주욱 지나가면 마굿간이 나오고 그리고 나서 그 마굿 간을 지나면 외궁,그리고 연무장이 있고,그 연무장을 깊이 지나면 ...감옥이있 다.내가 가려는 곳은 거기였다. 물론 이 성의 지리는 잘 알고 있었다.전에도 몇번이나 와본 곳이었기에 이곳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가빈은 아직도 심각하게 고민하면서 날 바라보더니 말했다. "쿠베린,전에도 말했지만 난 발톱이 있을 뿐이지,날개가 있는 건 아니에요." 나는 그녀석을 한동안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정말 쓸모없는 놈이군. 몸이 안되면 머리라도 되어야 모름지기 키우는 재미가 있지. 나는 그를 무시하고 손가락을 들어서 천천히 다른 쪽을 가리켰다.가빈은 멍하니 내가 손가락질을 하는 곳을 따라 고개를 돌렸는데 그 자리에는 정문이 보였다. 그리고 물론 그 정문에는 기사들이 몇 진을 치고 있었고 그 일대엔 성병으로 보 이는 녀석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무슨..뜻이죠?" "그럼 정면으로 갈수 밖에 없다고 말하는 거다." 내가 잘라 말하고 정문으로 향했다. 가빈이 뒤에서 투덜거렸다. "그럼 첨부터 정문으로 가면 되었을 거 아닌가요?" 나는 그를 무시하고 정문으로 가서 지키는 문지기 성병을 향해 말했다. "나는 쿠베린,지금 공작을 만나러 왔으니 전갈해줘." 문지기가 하품을 하고 있다가 날 멀건히 바라보았다. 그리곤 다시 날 아래위로 보고 그 다음에는 웃음을 참을수 없다는 듯이 큭큭대 더니 곧이어 중풍환자처럼 몸을 떨며 웃어댄다. "하하하...이 꼬마가 사람 웃기네! 공작님이 아무나 만날 분이냐!" 나는 긴 말하는 것보다는 이녀석의 목을 가볍게 비틀어주는 편이 옳겠다고 판단 했다.그래서 주저없이 막 손을 뻗히려는 순간 안에서 누군가가 튀어나와 말했 다. "저,쿠베린님?" 나선 것은 명백한 시녀차림을 한 소녀였다. 그녀는 성병들을 보고는 급히 나에게로 다가왔다.그리곤 나를 동경하는 눈초리 (?)로 황홀하게 바라보면서 말했다. "쿠베린님이시죠?" "그래." 내가 대꾸하자 그녀는 손을 귀엽게 맞잡고는 수줍게 웃음지었다. "기뻐라..다행이군요,오셔서,자.이리로." 왠지 이상한 느낌이었지만 그녀의 말대로 걸었다.성병들이 입을 벌리곤 힐긋 거 리는 것을 무시하고 가빈이 내 뒤로 따라 붙어걸었다. 소녀는 내 앞을 한 걸음 앞서 걸으면서 자신을 소개했다. "전 비오나님을 시중들고 있는 라나입니다.쿠베린님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흠..엘프계집애,조금 예의는 있군.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가빈이 주책스레 중얼거렸다. "그런데 이곳은 굉장히 낯이 익군요.." 나는 그를 다시 보았다. "기억 안나?" "네? 제가 이런 델 와 본 적이 있었나요?" "..." 야묘족이 눈썰미가 좋다고 한 놈은 다 나가죽어버려라. 내가 할 말을 잊고 있는 동안 우리들은 연무장앞을 지나서 후원으로 가고 있었 다.문득 날 안내하고 있던 라나의 앞에 두명의 기사가 나타났다.아니 정확히 말 하면 그들이 날 미심쩍게 바라보면서 걸음을 멈추어 선 것이다. "이봐,시녀.이 들은 누구지?" 덩치가 산만한 녀석이 거칠게 물었다. 뺨에 흉터가 있는 녀석으로 약 사십여세 되어 보이는 턱수염이 마치 밤송이같이 난 자였다.기사란 듯이 입고 있는 튜닉과 가운에는 문장이 새겨져있긴 하지만 기사라기보다는 아무래도 무슨 산적부스러기 같이 생긴 얼굴이었다.그리고 그옆 에 선 녀석은 기생오라비처럼 생긴 해사한 얼굴을 하고있는 이십대중반의 기사 였다.그역시 같은 문장을 하고 있는데 둘다 검을 차고 있었다. "아..이들은 비오나님의 손님이십니다.기사님." 난 그 기사녀석들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기억나는 얼굴이었다.분명히 그날 노예시장때 있었던 얼굴이었고 그들은 나는 기억하지못해도 가빈을 기억했는지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어..이녀석은 그때 도망간 노예아냐!" 덥수룩한 놈이 솥뚜껑같은 손을 들어서 가빈의 어깨를 잡아오는데 가빈이 쉽게 잡힐 놈도 아니다.홱 몸을 피하면서 미꾸라지 처럼 벗어나갔다. 그리곤 공격적인 자세로 돌변했다. 흔히들 고양이과의 동물들이 몸을 도사리면서 당장이라도 치솟을 뜻 상체와 하 체를 낮추는 그 자세로 바뀐 가빈은 금빛 눈을 반짝이기 시작했다.나는 덥수룩 한 녀석이 그를 덮치려는 것을 재미있게 바라보면서 모처럼 가빈의 진지한 모습 을 즐기려 했다.그러나 그때 급히 라나가 나섰다. "기다려 주세요.기사님.이 분은 지금 공작님의 명령으로 데려가는 길입니다." "뭐?" 덥수룩이가 나와 가빈을 번갈아 본다. 옆에 있던 기생오라비가 체엣 하고는 긴 앞머리를 쓸어올린다.상당히 건방진 포 즈다. "흐응,흐응 주공도 희안한 것을 좋아해서 큰일이라니까." 그들은 그렇게 비웃는 태도를 취했는데 내가 울컥하기 전에 무언가가 내 앞을 스윽 스쳐지나 공중으로 날아올랐다.그리곤 쏜살처럼 덥수룩이에게 와락 덤벼들 었다. "카아아" 그의 손톱이 허공을 긁어냈다. 그 순간 눈을 부릅뜬 덥수룩이의 뺨과 목으로 콰악 피가 튀었다.그리곤 그다음 동작을 취하는 것은 좋았는데 덥수룩이의 주먹이 작열했다. 마치 강아지가 주인의 발길에 채이듯이 탱 하고 가빈의 몸뚱이가 날아갔고 그 뒤를 이어서 열이 뻗힌 덥수룩이가 가빈의 몸을 잡으러 달려갔다.나는 그러면 그렇지 하는 기분으로 녀석의 발을 가볍게 걸어주었고 녀석은 덧없이 대구르 굴 렀다. "이 자식이!" 그놈이 흥분하려는 그 순간 라나가 비명을 올렸다. "캬아아아~!" 덥수룩이와 내가 동시에 놀라는 그 순간 라나가 손가락질을 하면서 고함을 지르 기 시작했다. "피나요! 피!" 정작 피가 흐르는 장본인인 덥수룩이는 목덜미와 뺨에서 피를 줄줄 흘리고도 멀 쩡한데 이 라나의 얼굴은 당장이라도 졸도할 듯이 비틀거리기 시작했다.기생오 라비가 놀란 듯 라나의 허리를 부축하는데 왠지 그 모습이 느끼해서 나는 입가 를 찌그러뜨렸다.나만이 아니고 덥수룩이도 마찬가지인지 마치 당장이라도 토 해낼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가빈이 비틀거리면서 엎어졌던 덤불 속에서 기어나왔다.그리곤 목덜미를 어루만 지면서 나에게 물었다. "뭐에요?" "별거 아냐." 나는 그렇게 말하곤 덥수룩이에게 말을 걸었다. "왠지 엄청 느끼한 기분이 드는 군." "그래." 그의 얼굴도 조금 일그러져 있었다. 기생오라비는 라나의 몸을 가볍게 안아올리면서 얼굴이 붉어진 라나에게 당장이 라도 소름이 돋을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데려다 주지." "아..아니에요!" "아니야.곤란에 처한 여성을 돕는 것은 기사도의 본분이지,자아.너의 방은 어디 지?" 라나가 괜찮다고 하는 데도 녀석은 굳이 그녀를 안고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 자리에 남은 우리들-가빈과 덥수룩이,나는 멀건히 서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그리고 우리들은 동시에 토해냈다. "우엑." 안색이 노래진 가빈이 나에게 물었다. "그런데 저 여자애가 가버렸으니 우릴 누가 안내하죠?" 나는 빤히 덥수룩이를 보았다. 덥수룩이는 줄줄 흐르는 목덜미의 핏줄기를 쑥 훑어내리곤 손바닥에 가득 묻어 난 피를 바닥에 툭툭 내 던지고 있었다.나는 피를 좋아하긴 하지만 저런 덥수룩 이의 목줄기에 흐르는 저 피를 마시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생기지않았다.저런 아까운 피를 하고 생각은 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저런 피를 마신다면 식중독을 일으킬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단념했다. "이봐,덥수룩이." 덥수룩이가 고리눈을 뜨고는 날 노려보았다. "안내해라." "뭐라구? 이 콩알만한 녀석이?" "흥,네가 지금 안내인을 내쫓았으니 네가 안내해야지." 그녀석의 얼굴이 들끓어오르면서 내 멱살을 잡으려 했다.가빈이 방방거리듯 고 함을 질러대며 말했다. "맞다! 이 자식이 우릴 안내해야해!" "이 잘나신 해거드 경께서 널 안내해야 한다구! 이 조막만한 애송이들을! 어디 서 온지도 모르는 떨거지들을!" 놈의 콩알만한 갈색눈이 번뜩이는 동안 내가 조용히 말해주었다. "이 콩알눈깔,네 공작에게로 안내하라고 했지?" 순간 녀석의 동작이 정지했다. "뭐라구? 너 지금.." "콩알눈깔.계속 떠들어 댈래? 아님 주군에 충성하는 기사답게 안내를 할래? 난 시간없는 몸이야." 놈의 동작이 굳어져 정지한 뒤에 곧이어 크아아아 하고는 곰에 필적할 만한 고 함소리와 함께 놈이 나에게 덤벼들었다.곰이 나에게 돌진하는 그 순간을 잡아 나는 가볍게 손목을 잡아채는 것과 동시에 내 등뒤로 놈을 집어 던졌다. 콰앙 하고 놈이 기둥에 직격으로 들이박혔다. 가빈이 멍하니 입을 벌린 순간 나는 되도록 멋진 동작으로 우아하게 손을 털면 서 뒤를 돌아보았다.안돌아봐도 알만한 자세였기에 나는 굳이 녀석을 자세히 살 필 필요성은 못느꼈다. 덥수룩이는 큰 대자로 거꾸로 기둥아래 처박혀 있었다.정통으로 맞은 탓으로 머 리에서 피를 줄줄 흘리면서 기둥에 약간의 흠집을 남겨 놓고 있었다.그리곤 그 작고 작은 콩알같은 눈알은 허옇게 뒤집어져 있었다. "음." 나는 생각했다. "이런 기사들을 백을 거느리면 대체 뭐하냐? 쯧쯧.." 내가 혀를 차고는 우아하게 걷기 시작하자 가빈이 급히 내 뒤를 따르면서 물었 다. "저대로 두어도 괜찮을까요?" "그럼?" "예를 들어서..정원에 묻어놓는다든가..혹은 산에 내버려 짐승에게 준다든가.. 뭐 그런 조치가 있어야 하지않을까요?" 나는 멀건히 녀석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가빈은 진지한 목소리로 묻고 있었는데 나는 이 녀석의 말에 진담인지 농담인지 한동안 헤메었다.그러나 곧이어 무시하기로 마음먹고 계속 걷기 시작했는데 내 등뒤로 가빈이 궁금한 듯이 물었다. "그럼 갈 길을 아세요? 공작의 거처를 아세요?" "알아.." "그럼 왜 저놈에게 안내하라고 하셨죠?" "아아..그냥." 정원을 지나서 우리들은 우리들을 흘금거리고 바라보고 있는 시녀들 사이를 지 났다.그리곤 유유히 대전안으로 들어섰는데 그 동안 우리들을 막는 사람들은 아 무도 없었다.대전안으로 들어가다 말고 나는 문득 생각나는 게 있어서 흰 시트 를 가득 들고 가는 시녀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예쁜 누나." 눈가에 약간은 주름살이 생기기 시작하고 있는 이 아주머니는 내가 누나라 부르 자 눈을 크게 뜨더니 미소를 지었다.약간 붉은 기가 노는 뺨이 건강해 보였다. 물론 목도 허리도 두툼하여 건강미가 돋보이는 몸매다. "궁금해요." "뭘?" "이곳에 청색아인이 갇혀있다고 하였는데 그게 어딨죠?" "왜그러는데?" "이 애를 그 애에게 데려다 주라고 공작님이 그러셔서요." 나는 내 뒤에서 입을 적 벌리고 있는 가빈을 가리키며 말했다. "오?" "그애가 밥을 안먹는다면서요?" 시녀는 호호 하고 웃음을 짓고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착하구나." "네,누나,그애 어딨죠?" "이리로 죽 가면 흰 건물이 보일거야.그 흰건물을 돌아가면 회색건물,그 회색건 물의 아래층이야.아마 거기 망보는 경비가 알려줄거야." "고마워,누나." 나는 그녀의 뺨에 키스했다. 혈색좋은 그녀의 얼굴이 발그레 해졌다. 그녀가 오호호호 하고 웃음을 던지면서 사라질 무렵 나는 씩씩하게 걸음을 옮기 기 시작했다.내 뒤를 급히 따르면서 가빈이 물었다. "이렇게 간단한 건가요?" "간단하고 말고." 나는 걸었다. 가빈이 뒤에서 날 불가사의한 얼굴로 보든 말든 나는 유유히 걸어서 시녀들의 길다란 옷자락 사이와 날 지켜보고 있는 두터운 기둥사이로 대리석 바닥을 지났 다.유치할 정도로 찬란한 빛깔을 가진 스테인드 글라스가 어두운 밤이라 칙칙한 빛을 담고 얼룩져있었다.그 스테인드 글라스로 뒤덮힌 회랑은 지나가는 사람들 의 등불과 벽에 내 걸린 등불로 기기묘묘한 그늘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저벅거리는 발걸음소리를 헤치고 나는 그 회랑을 빠져나왔다. 그리곤 그녀의 말대로 흰 건물을 돌아서서 회색건물- 남들이 감옥이라 부르는 그곳-으로 들어섰다. 그곳을 지키는 경비가 날 의심스런 눈초리로 바라보았는데 나는 점잖게 이 금빛 눈을 한 가빈을 앞세웠다. 그의 금빛눈은 어둠속에서 번적이고 있어 간담이 서늘해지는 위력을 가지고 있 었는데 아닌게 아니라 경비는 그를 보자 헐덕이며 놀라 비명성을 냈다. "악! 너 뭐야!" 그가 창끝을 들이대기 전에 내가 점잖게 말했다. "갇혀있는 청색 아인종있죠? 파란 애 말이에요." "아아.." 그는 내 얼굴을 보고 조금 안도했다. 허긴 어둠속에서 나타난 가빈의 얼굴은 무척 무서울 수도 있었다.물정모르는 사 람이라면 더 무서울 것이고 마치 괴수처럼 보일 수도 있다.금빛눈의 괴수가 어 둠속에서 갑자기 나타났다고 해보라.놀라지않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나. "파란..애?" "네.파란 애요.그 앨 보살펴 주라고 공작이 이 놈을 보냈어요." 경비는 그런가 하고 멀건히 나와 가빈을 보았다. "알았어.일단 연락좀 해보고.아직 이야긴 못들었지만..이 쪽으로 가서 경비대장 에게 말해봐." 그는 손짓했고 나는 그의 옆을 지나서 경비대의 대장이 머문다는 곳으로 들어갔 다.가빈이 자신을 괴물취급한다면서 화를 내고 있을 때 나는 경비초소안으로 들 어갔다.대장이 하품을 하고 있다가 날 보고 눈을 크게 떴다. "파란 애 여기있죠?" "아..넌 누구야?" "파란 애 보러 온 사람이죠.공작이 그애 밥도 안먹고 죽으려 한다고 이 앨 보내 위로하라 했어요." 금빛눈을 꿈벅이는 가빈을 보고 대장은 입을 벌렸다. 대장이라고 이마에 쓰여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녀석은 전형적인 대장다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예를 들자면 배가 툭 튀어 나오고 게으르게 생겼으며 손과 발이 크 고 눈은 풀려있다.만일 이자가 경비라면 경비대장은 분명히 이 놈을 잘랐을 것 이다.그만큼 둔해있었다.그러니 잽쌀 이유가 없기때문에 분명 이 놈은 둔해빠졌 을 것이고 잽쌀 이유가 없는 놈이라면 당연 이 놈이 대장이 아니겠는가. "기다려봐..." 그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미심쩍은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나는 탁자위에 놓인 술병을 보고 그다음은 그 에게 다가갔다. 긴 말이 필요없을 듯했고 나는 그 방심하는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내갈겼다. 퍽 하고 그가 입을 적 벌리고 널부러지자 나는 그의 얼굴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 고 엎어져서 자는 포즈를 만들게 해 놓았다. 그리곤 그의 옆에 술병을 놓아 두었다.이렇게 되면 완벽하군 하고 내 스스로 감 탄하고 있을 때 가빈이 책했다. "그 애가 어디있는 지 알아내고 기절시켰어야죠." 나는 가빈을 노려보고는 낮게 으르렁거렸다. "자식의 냄새는 이미 알아.그러니까 그만 그 안돌아가는 머리는 굴리지말아라." 나는 대장의 허리에서 열쇠를 꺼낸 다음에 유유히 문을 따고는 아래 층으로 내 려갔다. 그러나 저러나 경비가 이렇게 허술하다니.정말 너무하지않은가. 바바의 보물창고 경비도 이렇진 않았다.물론 바바의 보물창고를 지키는 놈들은 프로들중의 프로로 돈받고 일하는 용병들이고 이 놈들은 아무 생각없는 경비병 들이다.뭐 별로 바랄 것은 없지만 새삼 공작이 불쌍하게 생각되었다. 아래 돌계단으로 조금 더 내려가자 감옥의 복도 한가운데서 지키고 있는 경비가 우릴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뭐야?" "아아...대장님이 들여보내주었어요.열쇠까지 받았는데요." 내가 열쇠를 들어보이자 경비는 미심쩍은 얼굴을 했다. "뭐하려 온 건데?" "파란 애를 보러요." "아아..그 애." 경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 안에 있어.아무것도 안먹어." 경비의 얼굴이 연민으로 바뀌었다.그는 조금 안되었다고 생각했는지 날 보면서 안내해 주었다. 감옥안은 생각보단 쾌적했다. 마른 짚이 깔린 바닥은 돌로 만들어져있었는데 하수구가 옆에 있어선지 약간 냄 새가 나긴 했지만 비교적 괜찮았다.여기저기 걸린 횃불들이 안을 환히 보게 해 주었다.네모반듯한 문짝들이 연이어 다닥다닥 붙어있는 그 복도끝으로 가자 경 비가 가리키는 방이 보였다.그 방의 문을 열쇠로 따고 들어가 보니 어두침침한 방안에 누군가가 말뚝같은 것에 매달려있었다. "에..심해." 가빈이 중얼거리자 경비가 딱하다는 듯 말했다. "자꾸만 죽어버리려해서 말이야.이 애,처음에 왔을 땐 머리를 바닥에 찧어버리 지 뭐야.그래서 목에 가죽띠를 매어서 저 말뚝에 아예 묶어 버린 거야.머리를 못 찧게." "저런.." 가빈이 동정어린 어투로 중얼거렸다. 내가 등불을 빌려 그 모습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이미 냄새로 죽음이 가까이 있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 죽음.그 쾨쾨하고 어둑한 냄새가 이미 방안에 퍼져있었고 축 늘어진 생명체의 불꽃이 꺼져가고 있었다. 말뚝은 굵은 통나무를 박아 놓은 것으로 그 말뚝에 가죽끈과 밧줄을 동여매에 매달아 놓은 소년의 모습이 보였다.거의 알몸에 가까왔는데 정말 엉망이었다.매 를 맞은 상처는 없어 매끈했지만 안색은 엉망진창으로 이미 거의 기력을 잃어 의식이 없었다.팔은 몸부림을 하고 해서 엉망으로 긁혀있었고 목주변은 몇번이 나 목을 매달려고 해선지 아니면 몸부림 탓인지 벌겋게 긁혀서 피가 맺혀있었 다.보통 하루 이틀 정도 하는 혀에 직접 물리는 자갈을 내내 입안에 물려놓아 입안이 엉망이 되었을 것은 뻔한 일로 그의 입은 완전히 말라붙어 있었다. 축 늘어진 그 몸이 우리들이 들어서자 긴장하기 시작했다. 내가 다가가 그 턱을 잡고 들어올리자 멍했던 두 눈이 갑자기 빛을 띄우면서 굴 욕감과 분노,살의로 번뜩이기 시작했다. "이 애군." 내가 중얼거리자 경비가 말했다. "정말 안되어서 말이야...아직 어린 애 아냐?" 어린애라도 너보단 삼사십년은 더 먹었어.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뭔가 먹지않았어?" "전혀.아무것도 물도 안먹어.몇번이나 자살하려했는지 몰라." 경비가 우울하게 말하곤 나에게 되물었다. "뭔가..해줄수 있으면 해줘봐.나로서도 안타깝다고 새파랗게 어린 애가..이렇게 말라 죽어가다니.정말 지독한 놈이야." 안본지 겨우 닷새다. 그 날 노예시장이 선 그 날 이후 단 닷새인데 이 애는 이렇게 변해버렸다. 그에 비하면 이 가빈이란 녀석은 근성이 없는 것인지 아무 생각이 없는 건지 낙 천적인 건지.. 내가 혀를 차면서 들여다 보고 있는 동안 가빈이 내게 급히 말했다. "이애..어쩌실 거에요?" "풀어줘야지 뭐." 내가 대꾸하자 가빈이 눈을 크게 떴다. 소년의 눈도 커졌다. 사파이어빛이 그 충혈된 눈안에서 빛나오를 때 나는 가지고 온 주머니에서 포도 주 약간과 물을 꺼내어 소년의 입안에 흘려넣었다.소년은 벌버둥을 쳐서 그 것 을 받아 마시려 하지않았고 나는 그럴줄 알았기에 아무말도 하지않고 입술만 적 셔주었다. 그리곤 손톱을 하나 들어서 소년의 허리에 매어 놓은 가죽끈을 잘라냈다.가빈이 어 했고 소년도 경악으로 눈을 크게떴다. 그리고 뒤이어서 나는 소년의 손목을 묶은 가죽끈을 잘라내고 그다음에는 발목 의 가죽끈을 끊어냈다.그리고 마지막으로 소년의 목에 매인 긴 가죽띠를 잘라냈 다.소년의 몸이 휘청하면서 내 앞으로 쓰러지는 것을 잡아 앉히자 그녀석은 달 아나려는 듯이 발광을 하면서 내게 달려들었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완전히 탈진해있던 주제에 나에게 달려들어 주먹을 쳐들려고 했다. 오오 근성 좋고. 나는 웃으면서 그녀석의 복부를 한대 후려갈겨 주었다. 그가 몸을 기역자 모양으로 꺾으면서 앞으로 몸을 숙이자 그 뒤를 이어서 나는 그녀석의 턱을 한번 걷어차 주었다. 그담엔 녀석이 큰 대자로 뻗어버린다. 가빈이 입을 벌리고 있는 동안 경비가 놀란 얼굴로 달려왔고 나는 축 늘어진 녀 석의 몸을 끌어안았다. 녀석이 고통에 겨운 얼굴로 나를 증오로 쏘아볼 때 내가 조용히 말해주었다. "네가 아무리 건강할 때 나에게 덤벼도 나를 당해내진 못하지." 그녀석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고 나도 그렇게 했다. 사파이어빛,청결한 마치 아무도 손대선 안될 천년설의 색깔을 한 그 눈이 날 망 연히 바라보고 있었다.절망과는 다른 빛,분노와 어딘가 모를 설레임이 있었다. 나는 문득 굉장히 앞으로 귀찮아 질 것임을 깨달았다. 이 녀석은 가빈과 달리 날 무진장 귀찮게 할 지도 모른다.나의 본능은 이놈이 죽게 내버려 두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때때로 나의 몸은 내 말을 따르지않을 때가 있다. 나는 내 입안에 물을 흘려넣고는 녀석의 뒷 목을 잡고 강제로 입술을 겹쳤다.그 녀석이 버둥거리기 시작했다.그는 격렬하게 반항하려 했지만 내 혀는 그녀석의 입안으로 헤엄쳐 들어가서 목안에 물을 흘려넣었다.녀석이 나를 깨물려고 난리 를 쳐주었지만 나는 잽싸게 피해냈다. 입을 떼어내자 그는 경악에 가까운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었고 굴욕과 수치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아니 벌겋게가 아니라 더 파랗게 변해 있었다. 나는 웃고 싶어져서 껄껄 웃었다. "그렇게 노려볼 거 없어.나도 여자에게 키스하는 걸 더 좋아한단 말이야." 그 다음 내가 다시 입을 겹치자 그 다음에는 그의 몸이 의지를 거부했다.목안에 흘러들어오는 물은 그의 몸이 바로 바랬던 것이기에 한번 흘려넣자 버둥거리다 가 멈추고는 그 물을 받아들이고 말았던 것이다. 그 다음 나는 그의 입안에 걸어놓은 자갈을 풀어냈다. 뒤에선 경비가 입을 벌리고 있는 것을 내버려 두고 나는 그 애의 입안에 걸린 자갈을 풀어제껴 내던져 버리고는 아직 굳어버려서 자갈을 벗겨냈는데도 말도 못하고 입안을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는 녀석의 입안에 다시 물을 흘려넣었다.처 음에는 반항하던 녀석도 몇번 반복되니까 두 팔을 벌려 내 목을 끌어안았고 키 스에 열중(?)했다.물론 키스가 아니고 물이었지만 그건 일단 시작이 중요한 것 이다.네 혀가 그의 혀에 안겨서 상처나고 거칠어진 입안을 천천히 만져주는 동 안 그는 가만히 있었다. 내가 입술을 떼어내자 그가 축 늘어진 얼굴로 말했다. "더.." 목이 말라서 말이 더이상 나오지않는 듯 했다. "더 많이 마시면 복통을 일으켜." 나는 다시 한번 녀석의 입안에 물을 흘려넣어주고는 몸을 안고 일어섰다.녀석은 반항하지않았다.당연하지,녀석의 입안에 흘려넣은 물은 마취제를 탄 물이니까. 그러나 사정을 모르는 가빈은 입을 작 벌리고는 나를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벼..변태였어.." 나는 그놈의 얼굴을 멀건히 바라보았다. "가빈,너 죽어볼래?" "아..아뇨!" "그럼 가자." "어딜?" 경비가 멀건히 나와 가빈,그리고 축 늘어진 녀석을 번갈아 보는 동안 나는 간단 히 대꾸했다. "평범한 일이잖아? 이건." "에?" "도망이라고 하는 거지." 나는 경비의 턱을 한 번 더 후려갈겼다. KUBERIN...... 언젠지 기억도 못할 아득한 옛날 피의 명예를 위해 나는 싸웠었다... 3 "여기가 어디죠?" "정원이다." 나는 내가 예전에 베델대공과 노닐었던 그의 정원에 서서 말했다. 그 정원은 14살의 어린 베델이 나에게 알려주었던 곳이었다.금발 머리가 찰랑거 리는 그 얼굴로 내게 말했었다. 쉿,이곳은 아버지와 나만 아는 곳이야.근사하지? 아래를 한단계 낮게 해서 바닥을 깊이 하고 둥근 유리를 뒤집어 씌운 이 정원은 정원이라 부르기엔 조금 작았다.그러나 두껍고도 커다란 유리가 통째로 둥근 돔 을 이루며 뒤덮여 있는 이 정원에는 작은 대신 그 만큼의 혜택이 있었다. 바로 한 겨울에도 볼 수 있는 꽃들과 따스함이다. "와아." 유리담 사이로 기어들어온 가빈은 입을 자악 벌렸다. 더러워진 유리돔 너머로 하늘 위 별들이 빛나고 있다.허옇게 낀 성에들이 시야 를 방해하곤 있지만 이곳 만은 따스했다.바닥은 축축해서 누울 만 했는데 이끼 들이 주욱 덮혀있었고 겨울인데도 불구하고 작고 흰 꽃들이 낮은 관목들 사이로 피어있었다. 풀 냄새와 흙냄새,그리고 꽃냄새가 났다. 가빈이 멍하니 입을 벌리며 말했다. "신기하군요,이런 곳이 있다니." 나는 부드러운 이끼 아래 누워서 기절한 채 잠들고 있는 녀석을 내 옆에 눕히고 는 반듯이 누워서 팔베개를 하고 선 유리창에 희미하게 보이는 별들을 바라보았 다.이곳은 여전히 따스했다.밖에는 아직 눈도 녹지않았는데... 붉은 꽃을 하나 따온 가빈이 입에 물고 킥킥 거렸다. "정말 인간들이란 별 짓을 다해요.마치 엘프의 성처럼 꾸며놓았군요." 나는 눈을 감았다. 온갖 냄새가 다 느껴져온다. 축축한 흙냄새는 이제 삶의 생기를 가지고 누워있었고 가빈은 흥분한 냄새를 피 어올리고 있었다.어느샌지 그녀석의 허리춤에서 꼬리가 기어나와 살랑거리고 있 었다.그리고는 낮은 관목들 사이를 걸어다니면서 꽃향기를 맡고 다녔다. "여긴 한 종류만 있는 게 아닌가봐요.봐요.아랄스 꽃도 있고 마잉꽃.타바나도 있어요.게다가 이 이끼들도.." 가빈이 떠들어대는 소리. 쿠베린,이거 봐,마잉꽃.마잉꽃. 꽃 따위 뭐가 좋으냐? 먹지도 못하는 거. 쿠베린은 언제나 먹을 거 타령이더라.그렇게 매일 배가 고프면 내가 사냥가면 음식을 반드시 남겨줄께. 쳇 하하하..마잉꽃이 바로 우리 집안의 문장이야.보라색 마잉꽃. 웃기네 내가 죽으면 마잉꽃으로 덮혀질거야.우리 할아버지가 그랬듯이 나의 아들이 내 시체위에 마잉꽃을 덮으면서 울어주겠지? 웃기네. 내가 죽으면 우리가문의 보라색 마잉꽃으로..윽,뭐하는 거야? 그렇게 꽃이 좋으면 먹어라 먹어. 왜 화를 내는 거야! 화를 낼 쪽은 나라구! 쳇쳇.새파랗게 어린 주제에 죽으면 죽으면 이라구.죽는다는 게 어떤 건지나 아 냐? ..쿠베린은 내가 죽는 게 싫어? 너따위 알게 뭐냐. ..하지만 죽음을 두려워해선 안돼,나는 기사야.나는 베델공작이야.나의 아버진 황태자의 목숨을 몇번이나 구한 맹장 중에 맹장.나도 그렇게 될거야. 흐응. 냄새. 이 곳엔 그 녀석의 냄새가 난다. 맹랑한 금발머리 꼬마 녀석. 아니..이젠 죽어 땅에 묻힌 늙어빠진 녀석.. 무언가 따스한 것이 다가와서 나는 그것을 끌어안았다.그리곤 그 것을 품에 안 고 잠이 들었다.더이상 기억해내고 싶지도 않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을 때 난 잠 을 잔다. 해가 스며들었다. 나는 눈을 떴다.내가 눈을 뜨고 싶어서가 아니라 내 품안에 있는 것이 벌버둥을 쳐서 하는 수 없이 눈을 뜬 것이다. 푸른 색,마치 물빛에 가까운 희미한 푸른 색의 얼굴이 내 눈앞에 떠올랐다.수치 심을 가진 양 당황한 얼굴이었는데 나는 그 얼굴을 보자 마자 조용히 말했다. "잠좀 자자." 그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붉어졌다 아니 파래졌다. 등도 따스한 것을 보니 등에는 가빈이 달라붙은 모양이다.흐음 자세가 좋군 하 고 내가 다시 눈을 감자 그녀석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가 어디?" "잠 자는 데야." 나는 다시 눈을 감고 녀석의 머리를 잡아 당긴 뒤에 어깨를 꽉 끌어안고 다시 잠이 들었다. 발자국 소리. 제길 이번엔 진짜 일어나야 한단 말인가. 내가 그렇게 생각하면서 눈을 뜰가 말까 망설이고 있는데 내 품안에 있는 녀석 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을 무시하고 나는 희미하게 눈을 뜨고 발자국 소리의 임자를 바라보았다.발 자국 소리의 임자인 녀석은 유리문을 열고 들어와서 나와 내 난로들을 경이에 가까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마치 믿어지지않는 다는 듯이 입을 저억 벌리고 는 바라보더니만 곧이어 흥미진진한,그리고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바뀌었다.그래 서 녀석은 가까이 다가서서 우리들을 내려다 보았다. 내 품안의 파란 녀석은 아직 잠꼬대 같은 것을 하면서 내 팔안에 안겨있었고 가 빈은 반쯤 깬 얼굴로 슬그머니 일어나서 앉았다.그리곤 나와 그녀석을 번갈아보 면서 멍하니 앉아 하품을 해대고 있었다. 녀석은 햇빛에 반짝이는 금발을 하고는 주그리고 앉아 우리들을 들여다보며 물 었다. "어젯밤 도망갔다는 녀석이 겨우 여기였어?" 그 음성엔 웃음기가 담겨져있었다.그리고 한편으로는 낯익은 음성. "킬리언.." 그의 눈이 커졌다. "너..누구야? 아버님을 알아?" 잠이 확 깼다. 제길! 내가 일어나자 푸른 피부의 녀석도 일어났다.그는 눈을 크게 뜨고 화들작 놀라 몸을 움추린다.나는 금발의 녀석을 아래위로 다시 보았다. "너구나,금발 애송이." "내가 너에게 그런 말을 들어야 할 이유는 없는 거 같은데!" 그가 화를 내면서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흐응 하고는 그를 무시하고 일어나 앉아서 파란 피부의 녀석을 잡아 당겨 내 뒤에 서게했다.그는 베델공작을 주시하면서 당장에 그에게 덤벼들 자세를 취 하고 있었다.이젠 마취제의 기력이 다한 모양이다. 가빈도 멀건히 공작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문득 가빈을 보던 그가 날 바라보곤 마뜩잖은 표정을 떠올렸다. "그렇군..너군.비오나가 말하던 쿠베린이라고 하는 해결사가." 나는 다리를 주욱 펴고 기지개를 폈다.그리곤 주섬 주섬 일어났다. "정말로 이 애를 살려냈군." 공작이 말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이 애를 놔줘.그럼 되지." 나는 내 뒤에 선 녀석을 보고 말했다. "넌 자유다.꼬마야." 그가 사파이어빛 눈을 크게 뜨고 날 바라보았다.경계와 의심의 빛은 떠올라있었 지만 살의나 증오는 없었다. "나가도 좋아.어디든 가면 좋을 거다." 내가 말하자 그는 얼굴을 굳히고 망설이는 자세로 서서 그대로 날 바라보고 있 었다.나는 그에게서 시선을 돌려서 공작을 향해 말했다. "일은 간단해.공작." 베델은 날 멀건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 애에게 자유를 주면 이 애는 살아나." 공작은 멍청히 날 바라보더니 미심쩍은 얼굴로 말했다. "다시 말해서 놔주어라 하는 이야긴가?" "그래.죽이고 싶지않다며?" "그러나..넌 이만 길레를 요구했잖아?" "그래.어드바이스료." 공작은 어처구니없어 입을 적 벌렸다. "봤잖아? 살려냈잖아?" 내가 파란 녀석을 가리켜 보였다. "더 이상 뭘 더 바라는 거야?" 공작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이 되더니 허리에 손을 턱 얹고는 날 바라보았다. "정말 어이없어.그런데 넌 어떻게 우리 아버님 이름을 알고 있는 거지?" "알게 뭐야." 내가 손을 내젓자 그는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하면서 말했다. "어떻게 아는 거냐구! 이상해.비오나는 네가 나를 잘 안다고 했어." "내가 널 어떻게 아냐? 난 너 따윈 몰라.이젠 졸려우니 가서 잠이나 자겠어." "이봐,지금은 아침이야.일어날 때라구." "난 잘 때야." 나는 손을 저어보이곤 가빈이 흥미진진한 얼굴로 바라보는 것을 무시하고 그의 귀를 잡아 당겼다.내가 걸음을 옮기자 파란 녀석이 내 뒤를 따라온다.그 만이 아니고 공작도 내 뒤를 따라온다.그는 혼란스런 표정이었다. "뭐야! 내가 어미라도 되는 거야! 왜 줄줄이 따라오는 거야!" 내가 신경질을 내며 밖으로 걸어나오자 공작이 이상해 하고 외치면서 다가섰다. "대체 넌 뭐야? 너같이 어린 애가 대체 아버님에 대해 뭘 아는 거야?" 그가 불만어린,그러면서도 의심이 가득한 얼굴로 캐묻는 동안 누군가가 내 앞으 로 다가왔다. "쿠베린님." 검은 날개의 비오나가 미소짓고 있었다. "어마.진짜 오셨군요." "왔지,2만 길레나 내놔." "네네.그런데 조금 더 이야길 하셔야 겠어요." "할 말없어." "쿠베린님.안으로 들어오실래요? 음식을 차려놓았어요." 음식. 그러고 보니 배가 고프군.다른 건 몰라도 음식을 저버릴 수는 없지. 내가 그녀를 빤히 보자 그녀가 배시시 웃었다. "오늘의 메뉴는 살짝 익힌 비둘기찜과 양고기 스튜,그리고 순대랍니다." 음..이정도 성의라면 조금 이야길 들어주는 것도 괜찮겠지. 그러나 내 뒤로 공작이 계속 떠들어대고 있었다. "대체 이 녀석은 뭘하는 놈이야.비오나? 알고 있으면 말좀 해보라구!" "뭐?" 음식을 먹어치운 다음에 내가 그녀를 노려보자 비오나는 배시시 웃었다. 공작은 내 앞에서 내가 먹어치운 양을 경이로 바라보고 있었고 그가 어떤 표정 을 짓던 말던 상관않는 가빈은 열심히 먹어치우고 있었다.푸른 얼굴의 녀석은 내 뒤에 서있다가 내가 다 먹어치우고 건네주는 빵을 조심스레 받아 먹기 시작 하고 있었다. 그녀는 나를 향해 물었다.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공작님의 경호에요." "농담하냐?" 내가 웃음을 짓지도 않으면서 다그쳐 물었다. 공작도 눈을 크게 뜨고는 미심쩍은 얼굴로 날 바라보고있었다. 나는 손가락으로 굳은 빵을 찢어 스프에 적신다음 스프그릇을 통째로 파란 녀석 에게 건네주었고 그는 열심히 먹기 시작하고 있었다.그의 눈이 이젠 에메랄드빛 과 흡사한 아름다운 빛을 띄우고 있었다. 공작은 그와 나를 번갈아 보면서 그리곤 다시 비오나를 보곤 다그쳐 물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비오나? 이 어린애보고.대체 이 꼬마에게 의뢰한다는 게 말이되나?" 비오나는 부드러운 얼굴로 공작의 손을 잡고는 그의 뺨에 키스했다. "제발 사랑하는 분,제 말을 들어주세요.제가 원하는 건 다들어주신 댔죠?" "하..하지만.." 공작의 얼굴이 발그레 해졌다. 나는 아니꼬와져서 외쳤다. "거절이다! 저런 놈은 10만 길레를 준다해도 안해!" "쿠베린님.공작님을 지켜주시면 제가 아나스톤을 드리겠어요" "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우리들은 지금 공작의 사실에 있었다. 공작의 사실은 넓고 붉은 융단이 깔려 있어 매우 아늑했다. 북쪽벽으로 난 창가 아래는 드물게 잘 닦인 갑주와 장검들이 놓여있고 은빛으로 빛나는 은 병들이 군데 군데 놓여있었다.그리고 보랏빛 마잉꽃이 수놓아진 깃발 이 넓게 한 벽면을 차지하고 있었다. 방안 중앙에는 음식이 가득 담긴 탁자가 있었는데 지금 나는 거기에 앉아서 먹 어대고 있는 중이었다.가빈은 배가 부른 상태로 데굴 데굴거리면서 난로앞에 앉 아있었고 나는 아직 먹으면서 생각에 잠겨있었다.파란 녀석은 내 뒤에 서서 내 가 음식을 다 먹길 기다리고 있었다. 공작은 나를 관찰하면서 푹신한 소파에 앉아 마뜩찮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나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잘 알고 있었다. 나의 생김새는 겨우 17세 가량 되는 소년의 모습이었고 그것도 강인한 소년의 모습이 아닌 호리호리한 미소년의 모습인 것이다.물론 절세 미남자인 모습이기 도 하다. 비오나는 공작의 옆에 찰삭 붙어서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공작도 그녀에게 완전히 빠진 기색이었는데 나는 그런 모습을 보다 말고 문득 벽면에 걸린 저 젠장맞을 마잉꽃 문장을 바라보았다. 벽난로의 위에는 초상화가 걸려있었다. 약 오십세 가량 되는 잘 생긴 사내의 얼굴로 금발은 흰 가닥이 늘어 금발인지 은발인지 알수 없었고 주름살은 굳은 강직한 턱 위로 흐르고 있다.초상화의 화 가는 누구인지 상당히 잘 그린 그림이었다.마잉꽃 문장은 그가 걸친 갑주에도 새겨진 문양으로 남아있다.온화한 눈매,그리고도 사나운 듯한 눈매. 나는 먹다 말고 닭다리를 초상화를 향해 집어던져 버렸다. "너!" 공작이 흥분해서 외쳤다. "감히 아버님 초상화에!" 그가 흥분해서 나서는 것을 물끄러미 보곤 나는 그를 무시했다. "비오나,아나스톤을 네가 가지고 있다구?" "네.아나스톤,무지개의 보석을 제가 간직한 지는 이미 백년이 지났어요.그러나 그 것에 어울리는 검은 아직 찾지못했습니다.쿠베린님은 그 보석을 원하시나 요?" "원해." "그건 흡혈의 저주석이며 동시에 강력한 힘을 가진 것.그것을 진짜 바라시나 요?" "바란다." "어째서죠? 그것을 다스릴 수 있는 자는 전설의 거인족 뿐입니다." "너에게 일일이 설명할 이유는 없다.아나스톤을 줘." "알았습니다.대신 공작님을 지켜주세요." "기간은?"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날 바라보았다. 내가 흔들림없이 그녀를 보자 그녀는 두 손을 모은 채 말했다. "무기한.." "거절이야.무기한으로 저 녀석의 곁에 있을 수는 없어,난 바쁜 몸이야." "그러나.." "이렇게 하지.나는 가볍게 일주일을 저녀석의 주변에서 맴돈다.그리고 나중에 필요하다고 징징대면 와 주도록 하지.그정도 계약으로 해." "네?" "횟수는 세번으로 한다.내가 필요하다고 요청하면 나는 와준다.세번.그 이상은 안돼." 그녀는 두 손을 맞잡고 날 바라보았다. "거래에 있어선 깨끗한 거야.나와 계약하고자 한다면 분명히 해라." 비오나는 망설이곤 공작을 바라보았다.공작은 나와 그녀를 번갈아 보면서 대체 어쩔 작정인가 하고는 묻고 싶은 얼굴이 되어있었다. 그리고는 진짜로 물었다. "비오나,저런 녀석이 지켜주지않아도 난 충분해.그러니까..쓸데 없이 어린애를 부를 필요는 없다구." "모르시는 군요,에메스,이분 쿠베린님은 당신의 아버님의 친구세요,그리고 아버 님을 세번이나 지켜주신 분이에요." 나는 비오나를 노려보았다. 공작은 날 멀건히 바라보았다. "뭐?" "이 분은 당신 아버님의 목숨을 세번 구해주신 그분의 친구분...모르시겠어요?" 그녀석이 날 경악으로 바라본다. 똑같은 눈매 똑같은 이마 똑같은 목소리 저게 싫어.견딜수 없어! 나는 화가 울컥 나서 테이블을 뒤집어 버렸다. 와당탕 "이 건방진 엘프계집애!" 나는 손을 뻗어서 그녀의 목줄기를 틀어쥐어 그녀의 몸을 벽으로 집어던졌다.그 녀의 몸이 벽면에 부딪쳐 호되게 나뒹굴었고 나는 그녀의 팔뚝을 잡아채어 갈기 갈기 찢을 심산으로 손톱을 드러내어 좌악 찢어냈다.검붉은 피가 내 눈앞으로 튀어나왔다. 그녀가 주문을 외우기도 전에 나는 그녀의 턱을 후려갈겨버렸다.그녀의 입안에 서 피가 터지고 흰 팔과 가슴에서 핏줄기가 솟아나 벽면을 물들였다. "건방진 입을 어디서 놀리느냐!" 나의 포효가 방안에 쩌렁하게 울려퍼졌다. 눈앞이 피로 물든다 분노로 물든다 "안돼! 이 나쁜 놈!" 내 옆에서 달려든 공작의 몸을 나는 가볍게 집어던져버렸다. "죽어버려라! 이 건방진 계집년!" 내장을 찢고 심장을 찢고 갈기 갈기 내찢어 버려라! 그 살점으로 사방을 피로 물들이고 그 살점으로 내 분노를 잠재우고 그 살점으 로 죄가를 치러라! "그만해!" 그가 내 손앞으로 몸을 던지듯이 달려들었다. "하아..하아." 내 눈앞에 나선 그 얼굴,피로 물든 그 얼굴. 그 이마.그 눈. 나는 손을 턱 하고 놓고 뒤로 물러섰다. 피 냄새로 머리가 멍해졌다. 그가 나에게 칼을 찔러온다.그 칼을 가볍게 잡고 녀석을 공중으로 집어던져버렸 고 비명소릴 들은 기사들이 경악으로 살기로 몸을 휘감고 밀려들어왔다. 놈들이 뿜어대는 살기의 냄새.피 냄새. 여전히 멍한 기분. "이놈을 죽여!" 공작이 피 끓는 외침으로 고함을 질러댄다. 저 눈으로 날 증오하면서 울부짖고 있다. 내가 낸 상처에서 피가 흘러내리는 저 이마. 화가 치밀어 오르다 꺼져 버렸다. 나는 의자위에 턱 하니 앉아버렸고 공작은 비오나의 상처를 돌보느라 정신이 없 다.그녀는 마치 고장난 인형처럼 널부러져서 바닥에 처참한 상처를 드러내고 있 었다.피가 사방에 튀어서 그녀는 길게 누워 피 속에 누워있었다. 공작이 흐느끼고 있다.그는 아직 죽음을 모른다. 나는 턱을 괴고 앉아있었고 나에게 덤벼드는 기사들은 모른 척했다. 그리고 그 순간 내 뒤에 그림자 처럼 서 있던 청색아인족의 소년이 활동을 개시 했다. 그의 푸른 몸이 마치 흐르는 물처럼 움직였다. 그의 손에는 작은 단도가 쥐어져 있을뿐이었다.그건 고기자르는 칼이었고 그 칼 은 기사들의 검과는 비교도 되지않았다.그러나 소년의 몸이 움직이는 순간 그건 작은 칼이 아니었다.그것은 소년의 일부였고 그 소년의 일부에서 뿜어나오는 힘 이었다. 기사들이 놀란 얼굴로 자신의 장검에 맞서는 푸른 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푸른 눈이 사라지는 찰나 기사들의 목줄기로 단검이 스쳐지나갔다.파 앗 하고 피가 치솟아 허공으로 내뿜어지고 경동맥이 잘려져나간 기사가 자신의 목을 부둥켜 안고 벌벌 전신을 떨어댔다. "크아아악" 그 행동에 놀란 한 기사가 소년을 덮치려는 순간 가녀린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아그라나 오타나파 아르기오나 ...바람을 주관하시는 분이여 멈추소서!" 순간 공간이 정지되었다. 나는 소파에 앉아 일그러진 공간으로 보이는 비오나의 피에 젖은 얼굴을 바라보 았다.그녀의 얼굴에 피눈물이 흘러내린다.겨우 주문을 외운 그 목소리의 마력을 유지시키려고 매우 애쓰면서 그녀가 말하고 있었다. "당신의 마음을 ..희롱한 것에 대해 사죄를 드리겠습니다...당신에게 있어 베델 대공이 중요한 것처럼..저에게는 이 분이 소중하답니다.묘인족의 기품높은 왕이 시여, 제 소원을 들어주세요." 사방이 정지되고 있었다. 나는 손을 내리고 천천히 일어나 초상화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내가 한가롭게 말했다. "암살자가 ..이분을 노리고 있답니다." 공작도 정지해 있었다.그는 비오나를 안타깝게 바라보면서 그녀의 몸을 부축하 려 애쓰는 자세로 굳어져 있었다.청색의 아이는 고기써는 칼을 들고 한 기사의 목을 베어가는 중이었고 피를 뿜는 기사는 자신의 목을 끌어안고 반쯤 쓰러지는 중이었다.가빈은 겁에 질려서 입을 벌린 채 난로앞에 그대로 굳어 서있었다. 움직이는 것은 그녀와 나 단 둘뿐. 그녀의 정지공간에서 우리들은 서로 떠들고 있었다. "너는 ..잘난 척을 너무 하고 있다." "..죄송합니다." "그렇게 굴면 분명히 죽임을 당할 줄 알아라.때로는 모르는 척하는 것이 가장 훌륭한 방편. 안다고 떠벌여 다른 사람의 상처를 헤집는 일을 하는 놈들은 반드 시 뒤끝이 나쁘지." 그녀는 시선을 피했다. "그렇게 생각없이 떠들어 대니 새대가리라 부를 밖에!" 나는 내뱉듯이 말하고 초상화 앞에 서서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난 죽음이 싫다.새대가리계집." 나는 그녀를 쏘아보았다.그녀는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그녀의 상처가 아 물기 시작하는 것은 스스로에게 치유마법을 쓰고 있기때문인 것이다.숲의 엘프 의 치유력은 경악할 만한 것중에 하나다. "너도 맛보게 될 것이다.사랑하는 것이 눈앞에서 늙어가고 죽어가는 것의 고통 을!" 내가 이를 갈며 말하자 그녀는 아무말도 하지않고 눈물을 글썽였다. "그래도..제가 택한 일입니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래도..사랑하는 일을 멈출 수는 없어요.." 그녀는 자신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공작의 얼굴을 바라보았다.그녀의 얼굴에 무 한한 슬픔이 어렸다. "무한자는 유한자를 사랑해 봤자 고통만 오는 거야." "압니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면서 공작의 뺨에 자신의 것을 들이대고는 흐느끼면서 그 얼 굴을 매만졌다.섬세한 손끝이 피에 물들어 검은 색을 남기고 있었다.자신의 피 에 누운 엘프의 상처는 천천히 치유되고 있었지만 피는 그대로 였다.그녀 자신 이 흘린 피는 바닥에 흥건히 고여있었다. "그러나..묘인족의 왕이시여.저는 그를 사랑하여 이 곳에 왔어요.당신께서도 그 렇지않습니까?" 그녀는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나는 대꾸하지않았다.할 필요도 없었다. 몇십년이란 눈깜빡할 사이. 그 동안 잊고 있었던 얼굴을 떠올리는 데는 불과 수초밖에는 걸리지않았다.그와 닮은 애송이가 나에게 말을 걸고 웃고 고함치고 덤벼드는 그 순간에 나는 모든 것을 기억해냈다. 아픔. 저 어린 것이 순식간에 어른이 되어 노인이 되어 죽어간다. 내게 마잉꽃을 내밀던 어린 소년이 지금 죽어서 이미 한 줌의 흙이었다.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 그와 닮은 꼬마가 서서 날 노려보고 있는 중인 것이다. "도와주세요.쿠베린님."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이 분의 아버님을 몇번이나 도와주신 것처럼 이 분도 도와주세요." 제길이다! KUBERIN.... 언젠지 기억도 못할 아득한 옛날 피의 명예를 위해 나는 싸웠었다... 4 마땅치 않다는 얼굴로 날 바라보는 저 녀석. 나는 길게 누워서 대굴거리고 있었다. 금발 머리가 햇빛에 찰랑거리고 있었다.그는 나를 정말로 분해서 못견디겠다는 듯이,혹은 울화가 치민다는 듯이,죽여버리고 싶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무리도 아니지. 난 녀석의 '여자'를 죽일 뻔한 남자니까. 내 등 뒤로 누운 가빈이 따사로운 햇빛이 가르릉 거리고 있었고 내가 누운 침상 아닌 소파아래에 조용히 앉은 것은 파란 피부의 청색아인족의 소년이었다. 나는 지금 공작의 사실- 여러 개다-에 앉아 있었다. 그와는 긴 이야기를 나누라고 비오나가 말했지만 나는 그와 긴 이야길 하고 싶 지않았다.내가 그의 부친을 귀여워 했었다고 해서 저 녀석까지 귀여워하라는 법 은 없다.대저 여자란 나이가 적으나 많으나 여자지만 남자는 나이가 적으면 꼬 마,나이가 많으면 늙은이일 뿐 나에겐 여자에 비해 그 중요도가 월등히 떨어지 는 것이다.예를 굳이 들어 나의 심정을 대변하자면 나이든 여자들은 나에게 있 어 나이든 여자들이지만 나이든 남자들은 내게 있어 나이든 남자가 아니라 단지 '늙은이' 그 자체에 불과하단 이야기다. 가빈이 아까부터 침묵하고 있는 청색아인족의 녀석에게 꼬리로 툭툭 치며 말을 걸었다. "너 이름이 뭐냐?" 청색아인족은 매우 불쾌한 듯이 검푸른 눈썹을 치켜올렸다. 가빈은 그에 지지않고 노려보면서 말하고 있었다. "이름을 대야 할 거 아니냐? 이름.너,벙어리냐?" 그는 대꾸도 않고 무시했다. 청색아인족은 지나치게 긍지가 높아서 대개 도둑이라 불리는 야묘족에게는 말도 걸지않는다고 한다.나는 그 이야길 익히 들었지만 당하는 야묘족 입장에선 여전 히 불쾌한 태도일 뿐이다. 문득 공작이 더이상 견딜 수 없다는 듯이 이를 갈며 나에게 물었다. "그래,이야기좀 듣자.너는 내 아버지를 안다고 했지?" 그가 나에게 말을 걸자 청색아인족이 날 바라보았다.가빈은 긴장하여 나와 그를 번갈아 바라보고있었다. "글쎄." 내가 중얼거리자 그가 미심쩍은 얼굴로 날 보더니 조용히 말했다. "비오나는 네가 내 아버지의 목숨을 구해 주었다고 했어.넌 그럼 지금 모습처럼 아이가 아니지? 그럼..너도 엘프냐?" "엘프라니.나를 모욕하는군." 나는 다리를 흔들거리면서 대꾸했다. "나는 ..쿠베린이다.그걸로 충분해." 나는 문득 생각난 듯 청색아인족의 소년에게 고개를 돌려 물었다. "넌?" "린 에브레인 에고린 더 마스라탈." 귀족이구나. 나는 그 녀석을 빤히 바라보았다. 청색아인족중에서도 귀족이다. "린이라 부르겠다." 녀석은 뜻대로 하란 듯이 고개를 까닥였다. 가빈이 흐흐 하면서 내게 달려들어서 물었다. "이 애는 뭐지요? 난 난로.이 앤?" 나는 공작에게 가빈의 꼬리를 흔들어 보이면서 그 말에 대답해 주었다. "칼이다." 린은 침착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칼?" 가빈이 멍하니 날 바라보고 있는 동안 나는 공작에게 다시 물었다. "뭘로 쫓기고 있는 거지? 무엇때문에 암살자가 있단 거야?" "...알바 아냐!" 그가 뾰로퉁한 태도로 말했기때문에 헹 하고 나도 모른 척했다. "뭐 나도 알바 아냐.그러나 암살자의 레벨정도는 알아두어야 겠는데." 공작은 나를 보고싶지않았는지 벌떡 일어나더니 말했다. "방 하나를 비워두었으니까 거기로 가라!" "무슨 소리? 난 보디가드니까 네 방에 너와 같이 있어야지." 내가 이죽거리자 그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관둬!" "뭐.너와 비오나가 침대에서 뭘 하든 상관하지않아.그런 걸로 흥분하기엔 나는 너무 프로의식이 투철하니까." "젠장!" "흥분할 거 없어.나는 한 구석에서 앉아있을 테니까.난 밤에 널 망보도록 할 거 고.낮에는 잘거야." 나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제 해가 지고 있었다.어스름한 황혼이 사방을 찍어 누르기 시작할 때다.기운 이 새록새록 뻗어오르는 기분이 되어 난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자,그럼 그 엘프계집애 에게 가서 이 귀한 몸이 손수 병문안을 하도록하지." 공작이 길길이 날뛰었지만 나는 모른 척했다.가빈이 기분 나쁘다는 듯 린을 바 라보면서 내 뒤를 따라왔다. 내가 들어간 방에는 그녀 비오나가 누워있었는데 날 보자 창백한 안색을 하고는 일어나 앉았다. 파리하게 질린 얼굴을 보고는 공작은 새삼 나에 대해서 분노가 치밀었는지 주먹 을 들어 보였지만 곧 관두었다.비오나가 나를 처연히 바라보고 있었기때문이었 다.내가 그녀의 침상 옆에 척하니 앉자 그녀는 조용히 날 바라보았다. "좋아.엘프계집애야.날 끌어들였으니 말해." 그녀는 공손히 미소지었지만 그다지 공손한 느낌은 없었다.뭐랄까 의기양양한 얼굴로 보여서 나는 기분이 조금 나빠졌다.하지만 일단 하기로 마음먹었으니 도 와주긴 해야 할 것 같아 나는 그녀를 향해 재촉해서 턱짓을 했다. "네.." 그녀는 부드럽게 공작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건..다른 분의 이야길 듣는 게 좋겠어요.에메스." 그 때 기다렸다는 듯이 두명의 사내가 들어왔다. 기사차림으로 어디로 보나 약해빠진 별 볼일 없는 두명의 사내였지만 제딴에는 상당히 어깨에 힘을 주고 있었다. 한 명은 중년을 막 벗어나 노년기에 이르기 시작하는 사내로 턱수염이 길어지고 있었다.또하나는 아까 본 그 느끼한 녀석으로 기생오라비같이 생긴 녀석이었다. "어?" 그녀석이 날 알아보고 눈알을 굴릴 무렵 에메스가 말했다. "소식은?" "아.네....지금 조사한 결과로는 동방교국의 그림자 훈이라 알려져있습니다." 내가 눈을 그들에게 돌리자 기생오라비가 나를 흘긋 거리면서 주시하면서 말을 이었다. "동방교국에서는 이 일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말을 전했다고 합니다.그림자 훈은 암살자중에서도 최고의 암살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에메스- 공작은 나는 녀석을 이름으로 불러서 친근해지는 것은 싫지만 어찌되었 든 나의 병아리 같던 놈과 구별하기 위해선 이름을 불러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 다-는 눈살을 찌푸리면서 다시 물었다. "그자가 입국했다는 소문이야?" "네.그와 동시에 청부암살자 잉글램이 나타났다는 소문도 있습니다.암살자로서 는 최강의 두 명입니다.잉글램과 그림자의 훈." 에메스가 흐 하고 입가를 비뚤게 하면서 비웃었다. "동부 가키스의 암살자 잉글램인가...골고루군,나에게 정말로 싸움을 거는 거 야?" "무리도 아니죠." 기생오라비가 그렇게 말하다가 입을 다시 다물었다. 나는 팔짱을 끼고 듣고만 있었는데 여지껏 잠자코 있던 턱수염의 노기사가-실은 그래봐야 50세도 채 되지못했을 것이다- 나에게 말을 걸었다. "오랜만입니다,쿠베린님." 나는 그를 흘긋 보았고 기생오라비도 놀란 듯 날 바라보았다. 나는 턱을 손에 얹고는 그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갈색머리,갈색 눈.갈색 수염.그다지 특징없는 얼굴이었다. "저지워드입니다.캐엘 저지워드." 나는 약간 집중해서 그 이름을 캐어보았지만 기억나지않았다. "누군지 몰라." 내가 아무렇게나 말하자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기억을 전혀 못하십니까? 제게 검을 가르쳐 주시고선." 나는 팔짱을 끼고 다리를 주욱 편 다음 다시 그를 주시했다.아래위로 훑어보아 도 기억이 전혀 나지않았다. "난 인간에게..검을 가르쳐 준 기억이 없는데?" "킬리언님께 가르쳐 주시면서..옆에선 제게도 가르쳐 주셨었죠.저..정원에서 요." 그가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우울한 얼굴,그리고도 기쁜 얼굴이었다. 나는 짜증이 나서 손을 저어버렸다. "기억안나." "예전과..정말 똑같은 모습이시군요.다시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가 조용히 고개를 숙여보였다. "나는 기억하지못한다고 했잖아?" "알았습니다.그러나..다시 킬리언님의 아드님이신 주군을 도우러 와 주셨다니 기쁠 따름입니다." "난 도우러 온 건 아니야.난 단지 거래를 하고 있을 뿐이야." 내가 잘라 말하자 그는 그런 내 말투에도 별로 신경쓰지 않고 말했다. "뭐,...어찌되었든 다시 뵈니 반갑습니다.쿠베린님..이 나이가 되고 보면 추억 이 새록 새록 올 때이니까요." "그래..다 늙어가긴 하는군.죽을 날이 머지않았겠지." 내가 중얼거리자 옆에섰던 기생오라비가 발끈했다. "닥쳐!" 그가 막 검을 뽑아들려는 듯이 검자루를 쥐자 옆에 있던 턱수염의 저지워드가 그를 제지했다. "무례해선 안돼.이분은 보통 분이 아냐." 기생오라비가 날 노려보다 말고 하지만 하고 중얼거렸다.그는 나를 노려보면서 주절주절거렸다. "무척..무례하지않습니까? 게다가 로크를 때려 눠혀버렸답니다." 저지워드는 쓴웃음을 짓고는 기생오라비를 내게 소개했다. "이 애는 제 아들입니다.기억하지 못하시겠죠?" "내가 젖비린내나는 애들을 어떻게 일일이 기억하냐? " 내가 퉁퉁거리자 기생오라비의 얼굴은 더 살벌해지면서 일그러졌다.아무리 잘나 가는 기생오라비라도 그런 얼굴로 있으면 여자들이 가까이 오고 싶어지진않을 것이다. "어쨌든 암살자 둘이 온다...게다가 한 놈은 동방교구의 암살자라.." 나는 한숨을 쉬었다. "동방교국주인 그 늙은이는 죽지도 않는군." "아십니까?" "알아.회색의 눈깔을 가진 놈.에에..벌써 그놈도 백이십여세가 되었을 텐데 끈 질기군." 나는 일어서서 에메스를 바라보았다. "동방교국의 암살자라면 어떤 모습을 하고 나타날 지는 그 놈 자신만이 알아.그 림자라고 했지? 자식도 보통 놈은 아니겠지." "쿠베린님조차 어려운 상댑니까?" 저지워드가 약간 긴장하며 묻자 나는 고개를 저었다.기분이 상했다. "이봐라.이 엄청나고 대단하신 쿠베린님을 대항할 자는 물론 없지,그러나 자식 은 암살자야.암살자란.." 나는 약간 가르침을 주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상대의 약점과 방심을 노려서 덮쳐 순간에 살해하는 자다.그러니까 내가 잠시 만 자리를 비워도 끝장이란 말이지." "내가 그렇게 약할 줄 알아!" 에메스가 항의했지만 나는 어린애의 말은 듣지않기로 했다. "게다가 동방교국의 암살술은 매우 발달했어.녀석들은 변신술에도 능하고 변장 이나 은신술도 대단하단 말이다." "저런..그럼?" 비오나가 급히 나를 바라보면서 애원하는 듯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아무도 믿을 수 없고 아무도 믿어선 안되는 상황이 되는 거지.녀석은 비오나로 변장해올수도 있고 여기있는 기생오라비나..혹은 귀여운 아가씨로 변장할 수도 있고..." 내가 말하자 에메스는 조금 불안정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잘난 척을 해댔다. "별거 아니다!" 나는 녀석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렇게 큰 소리치는 녀석치고 진짜 앞뒤 잘 따져서 행하는 녀석은 물론 없다. "난 기생오라비가 아니다!" 차갑게 기생오라비가 내 말에 반응해왔다. 아니라고 말하면 뭘하겠는가.이미 그 얼굴이 그건데. 나는 그를 무시하고 저지워드를 향해 물었다. "이 공작의 실력은 어느정도 되지?" "아.훌륭하신 편입니다." 저지워드가 그다지 주저하지않고 대답했다.나는 미심쩍은 기분으로 녀석을 보았 는데 그녀석은 그게 불만인지 나를 마치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말똥보는 듯한 표 정으로 보고 있었다. "그럼..조금 검을 휘두르는 모습을 좀 보자." 비무를 위해서 비워놓은 연무장은 기사들로 바글거렸다. 물론 기사라고 해봐야 별 대단찮은 놈들이다.나는 그들을 언제나 보지만 그들은 언제나 나를 보고 그 실력을 가늠하질 못한다.그런 자들을 나는 진짜 실력자라 불러줄 마음은 전혀 없다. 나와 젊은 공작이 밖으로 나갔을 때는 기사들이 멋진 근육을 자랑하면서-웃기는 꼴들이다.잘난 척 가슴을 벌리고 있긴하지만 그 고깃덩어리를 대체 무엇에 쓴단 말인가.대저 인간의 힘이라는 건 아무리 애써봐야 한계가 있는 것이다-웃통을 벗어 젖히고 있었다. 나는 팔짱을 끼고 가빈과 린을 양쪽에 두고선 서 있었다. 기사들 중에 내가 집어던진 녀석- 덥수룩이가 날 반가운 듯이(?) 바라보며 달려 왔다.땀을 흘리고 얼굴을 붉힌 몰골을 보아선 나에게 깊이 반한 모양이지만 나 는 그녀석을 상대해 줄 생각은 전혀 없다.맛있게 생기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공 손하지도 않으며 혹은 요리솜씨가 좋지도 못하지않은가. 내가 그런 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녀석은 씩씩대면서 콧구멍에서 김을 뿜어댔 다.그리곤 내게 돌진하려는 그 순간 기생오라비에게 손이 잡혔다. "기다려." "저..저자식이!" 덥수룩이는 나에게 집어던져져서 난 이마의 상처를 가리켜 보였다.붕대로 칭칭 감았는데 피가 상당히 났던 모양이었다.그리고 목과 얼굴에는 가빈이 낸 할퀸 상처가 나 있었다.기생오라비는 킥 하고 웃으면서 그를 경멸의 눈초리로 바라보 았다. "저런 어린애에게 당했다니 해거드 자네도 볼장 다 봤군." 음..녀석을 한번 뭉개주는 게 좋을 거 같다고 나는 진지하게 생각했다.그런 생 각을 덥수룩이도 했는지 얼굴이 벌개져서는 기생오라비의 턱을 향해 주먹을 날 렸다.아니 날리려고 했다.그러나 기생오라비는 재빨리 몸을 돌려 피하곤 시익 웃어보였다. 그 특유의 느끼한 분위기로 나는 액 했고 덥수룩이도 같은 심정인지 일그러진 얼굴이 되었다.그 동안 저지워드가 차갑게 저지했다. "그만들 해라." 그는 나에게 정중한 표정을 하고는 공손히 말했다. "그럼.쿠베린님.주군님을 지도해 주십시오." 나는 지도할 마음은 그다지 없었지만 그가 정중히 그렇게 말하자 조금 지도해 볼까 하는 마음이 되었다.그러나 나의 이런 바다같이 넓고도 고상한 마음을 이 해하지 못한 공작은 길길이 날뛰면서 저지워드에게 항의했다. "저지워드! 지금 내가 이런 놈에게 ..!" "주군!" 저지워드가 엄하게 말했다. 공작은 입을 꽉 다물고는 항의성어린 얼굴로 나와 저지워드를 번갈아 보고는 주 변에 구경하고 있는 기사들에게 말했다. "누가 내 상대좀 해라!" 기사들 중에 한 명이 웃으면서 다가섰다. 얼굴에 칼 흉터가 있는 그런 녀석이었다.나는 그녀석이 나타나자 마자 저지워드 에게 물었다. "누구지?" "구스타프 입니다.3대를 걸쳐서 공작가에 투신한 기사지요." 나는 얼굴에 칼흉터가 있긴 하지만 제법 잘 생길수도 있었을 법한 그 녀석에게 다가갔다.삼십대 중반의 한창 나이인 녀석은 벌어진 어깨를 가지고 있긴했지만 근육덩어리라기 보단 호리호리해서 그다지 먹음직하진 않았다. 그 녀석은 갑자기 다가선 나를 빤히 바라보았는데 그 눈이 푸른 눈을 하고 있었 다.생기 발랄해서 술은 그다지 하지않는 듯하다.음..전신에 탄탄한 기운이 맴돌 아 제법 건강하군. 나는 그녀석의 팔을 잡고 그 목덜미에 코를 들이댔다. "왓~! 뭐야!" 그가 놀라서 나를 밀치려고 했지만 나는 그녀석의 목을 가볍게 코에 대고 냄새 를 각인했다.그녀석이 벌개진 얼굴로 나를 바라볼 무렵 나는 그녀석을 가볍게 밀쳐냈다. "뭐..뭐야! 이놈! 돌았어?" 구스타프란 녀석도 벌개진 얼굴로 간지러운 듯 목을 부여잡는데 나는 손을 들어 보였다. "음.좋아.해봐." "좋아 해봐가 아냐!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거야! 넌,역시 변태냐!" 공작이 악을 지르면서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흐흐 하고 팔짱을 끼었다. "신경쓰지말고 해봐.공작." 공작은 나를 노려보고는 정말 마음에 안들어 하고 중얼거렸다. 가빈이 꼬리를 말고는 내 옆으로 와서 속삭였다. "정말..일을 맡으실 거에요?" "할수 밖에,제법 비싼 거니까." 나는 약간 한 숨을 감추었다. 공작은 그 녀석과 같이 검을 겨루고 있었다. 막상막하. 잘난척하고 공작이 여유를 부리면서 녀석을 공격하고 있었다.구스타프란 녀석은 본디 실력이 그보단 나은 거 같은데 공작을 결코 이기려고는 하지않고 대신 그 의 실력을 다져주려는 듯 급소를 공격하여 위협만 주고있었다. 나는 혀를 쯧즛 찼다. 저런 생각으로 대체 뭘 하겠다는 건가. 저 공작이란 녀석 진심으로 싸워본 적이 몇번이나 있단 말이야? 진심으로 싸워보지않은 자들은 대체적으로 상대의 위압감으로 완전히 몸이 얼어 버리기때문에 강한 상대와 맞부딪치면 고꾸라지는 게 보통이다. 암살자란 자들은 급소만을 찾는 자들로 정정당당내지는 공명정대라는 그런 글자 들과는 거리가 아주 멀고도 먼 그런 자들이다.그런 자들을 저런 안이한 생각으 로 막아낼수가 있단 말인가? 저지워드가 날 흘긋 보았다. 나는 저지워드의 옷깃에 코를 대 보았다. 그의 냄새는 친근한 것이었다.그는 내가 옷깃에 코를 대도 그다지 놀라운 얼굴 을 하지 않고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친근한 이 냄새는 분명히 기억이 났다. 그리운 냄새였다. "기억 나십니까?" 그가 조용히 나에게 물었다.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어딘가 슬픈 기분. "꼬마..케엘.." 그가 미소했다.주름진 턱으로 미소가 흘러나갔다. "그렇습니다.공작님의 뒤를 따라다니던 견습이 바로 접니다." "그래." 나는 그의 얼굴에서 고개를 돌렸다. 친근한 냄새.한 번 맡은 냄새는 잊지않는다.잊을 수도 없거니와.. "킬리언의 시동이었지." "넵." 그가 피식 웃었다. "지금은 제 자식놈이 그 자리를 이어받았지만요." 그가 기생오라비를 가리켰다. "제 아들인 오스칼입니다.약간 성격이 급한 편이죠." "귀여운 맛이 전혀 없어." 내가 중얼거리자 그 기생오라비 오스칼이 알아 듣고는 발끈했다. 기생오라비녀석은 금발이 반짝 반짝 빛나는 모습에 짙푸른 녹색눈을 하고 있었 다.대체적으로 여자들이 오 멋져라 노래를 부를 그런 얼굴인데 수컷인 이몸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약간 느끼하고도 약간 역하며 약간 아니꼬우면서도 약간 가 소로운 얼굴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키는 늘씬하면서 주욱 뻗어서 다리가 길 고 몸짓은 대체적으로 우아한 편이었다.저지워드도 생각해 보면 어릴 때 무척 귀여운 얼굴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 녀석은 그다지 저지워드를 닮은 데가 없었다. "오스칼,무례하게 굴지 마라.이분은 지금 어린 소년의 모습이지만 그 실제 나이 는 아무도 몰라.전대 주군께 검을 가르쳐 주셨단 말이다." 저지워드가 점잖게 말했다.그러나 오스칼은 나를 아니꼽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 다.나도 뭐 굳이 그녀석과 친분을 돈독하게 하고 싶은 기분은 전혀 없기에 그놈 을 무시하기로 결정했다.허긴 나처럼 도량이 넓은 분께서 굳이 저런 기생오라비 면상을 한 녀석에게 깊은 관심을 표명할 필요는 없다. 나는 아까부터 질질 끌고 있는 비무광경을 보고는 그만 하고 소리를 질렀다. "에?" 제법 재미있게 그 꼴을 보고 있던 녀석들이 내가 외친 고함에 불만을 터뜨리면 서 대체 저 꼬마는 누구냐 운운하는 말들이 튀어 나올 무렵 공작이 허리에 손을 턱 얹고는 잘난 척 하고 나에게 말했다. "어떠냐?" 음..그걸 지금 실력이라고 나에게 보여주면서 잘난 척을 하다니.. 나는 실로 안타까움을 느껴야만 했다. KUBERIN.... 언젠지 기억도 못할 아득한 옛날 피의 명예를 위해 나는 싸웠었다... 5 "로크 해거드입니다." 저지워드가 덥수룩이를 소개했다. 덥수룩이 해거드는 붕대를 맨 이마를 저질스레 들고는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았 다.나의 눈부신 미모에 감탄을 받은 얼굴은 아니었기에 나는 조금 이 녀석에게 동정심을 느꼈다.아마도 이 녀석은 아리따운 아가씨가 지나가도 감명받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공작 에메스가 불만스레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 검술 실력을 보았으면 너도 보여주어야 할 게 아닌가?" 나는 그 말을 듣고 허 하고 웃었다. 이 가소로운 소리를 오오..겨우 오십년만에 듣는 군 하고 내가 웃고있자 에메스 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날 바라보았다. "설마 검을 못쓰는 게 아닌가?" 나는 흐흐 웃으면서 이 저질스런 농담에 어찌 대처 해야 할지 고민했다.인간이 란 어쩌면 이렇게 저질스런 농담을 농담이라고 지껄이고 있는 것일까. 옆에 있던 저지워드가 한숨을 약간 내어 쉬고는 날 바라보았다. "쿠베린님.이 분들은 쿠베린님을 못봐서 그런 것이니 참으십시오." "그래.맞아.케엘.애들이 뭘 알겠나?" 그 녀석들의 얼굴이 칵 하고 돌변했다. 에메스와 덥수룩이,그리고 오스칼이 그 밴질거리는 얼굴을 똑바로 들고 나에게 주먹을 들어보이면서 고함을 질렀다. "애들 취급하지마!" "대체 이 꼬마에게 왜 내가 굽실거려야 하지!" 그들이 길길이 날뛰고 있을 때 침묵하던 린이 옆에서 조용히 말했다. "이분은 너희들을 굳이 상대하실 필요가 없다." 오오..이것은.. 내가 돌아보자 청색의 린이 팔짱을 턱 끼고 그 귀여운 입술(?)로 점잖게 타이르 고 있었다. 이번에 다시 덥수룩이가 격노했다. "이 예쁘장한 인형이!" 그가 고함을 지르고 덤벼들려고 하는 그 순간 린의 손이 가볍게 움직였다. 어떻게 손을 움직였는가는 아마 아무도 제대로 보지못했을 것이다.인간들의 눈 에는 갑자기 컥 컥 하고 덥수룩이 해거드가 넘어지는 것만을 보였을 테니까.그 러나 나는 물론 보았다. 린이 손등으로 해거드의 턱을 쳤다.그 순간 해거드의 턱이 돌아갔고 그 뒤를 이 어서 린의 자그마한 주먹이 해거드의 복부를 갈겼고 그러자 몸이 꺽인 해거드의 턱을 린의 무릎이 걷어차 올렸다.그리고 해거드는 뻗었다. 물론 이 순간의 동작을 알아낼 수 있는 눈을 가진 나에게있어선 별 게 아니지만 그 린의 동작조차도 보지 못했던 그들로서는 경악의 극치였던지 입을 자악 벌리 고 넋을 잃고 있었다. 침묵이 감돌았다. 에메스가 멍하니 있다가 린을 바라보면서 물었다. "너..대체 어떻게 노예상에게 잡힌 거냐?" 린은 입을 꼭 다문 채 오만한 코를 바짝 들고는 내 뒤로 가서 섰다.지금 생각해 낸 것이지만 저 린에게도 옷을 한벌 사입혀야겠다.지금 걸친 것은 노예들의 몸 을 잘 보이기 위한 옷으로 나플거리는 한 장의 천으로 그저 아랫도리만 가리고 있었다.그런 까닭에 멀리서 보고 있는 시녀들의 얼굴이 벌개지고 있었다.오만한 청색아인족들은 알몸으로도 태연히 지낸다는 족속이지만 나는 그녀석에게 예쁜 옷을 사 입혀야 겠다고 생각하고 혼자 즐거워했다.가빈보다는 훨씬 볼만한 가치 가 있는 녀석이라니까.피부색이 하늘빛이 도는 것 이외에는 완벽히 인간과 같지 만 그는 아인족이지 인간이 아니다. 내가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는 동안 저지워드가 내게 물었다. "뭔가..식사라도 하시겠습니까?" "그래,그래." 나는 즐겁게 웃으면서 받아들였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모든 기사들을 바보 취급하고있다구!" "대체 주군은 왜 저런 놈을 데려오신 거야!" "얄상하게 생긴 저 인형같은 자식에게 우리가 왜 농락당해야 하지!" 그들이 길길이 날뛰고 있는 소리가 생생히 나에게 들려오고 있었지만 나는 아랑 곳하지않고 저지워드가 내어놓은 음식들을 먹어치우고 있었다.공작 에메스는 불 만에 가득찬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문득 그가 궁금한 듯 린을 향해 물었다. "대체 넌 왜 노예가 된거야?" 린은 무표정한 채 대꾸도 하지않았다.나는 이유를 묻지도 않았고 물을 필요도 느끼지 못했기에 그 질문 자체를 무시했다. "이 찜은 ..매우 맛있군!" 내가 말하자 에메스가 자신의 질문이 무시당한 것에 화를 내면서 날 쏘아보았 다. "정말 무례해!" 나는 히죽 웃었다.이렇게 히스테릭한 녀석이라도 지켜주지않으면 안되는 저지워 드에게 약간 동정심을 느꼈다.저지워드는 웃고만 있을 뿐이었다. "저어.쿠베린님." 아직 창백한 안색인 비오나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 비오나는 완전히 에메스를 한 손아귀에 쥔 것인지 그녀가 입만 열면 에메스 의 고개가 팟 돌아가고 만다.그 벙실거리는 얼굴은 아무리 보아도 덜 매력적이 다.이 팔푼이 같은 녀석이 킬리언의 아들이란 말인가 하고 나는 조금 울화가 치 밀었다. "그럼..저는 쿠베린님만 믿고 아나스톤을 가지러 가겠습니다." "그래,그렇게 해." 나는 손을 저어보였고 비오나는 일어서서 창문을 열고는 에메스에게 손을 뻗어 입술을 겹쳤다.에메스가 불안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는 뺨을 어루만지 며 닭살돋는 소리를 했다. "그럼..저는 다녀올 테니 몸조심하세요." "비오나야 말로.." 그는 불안한 듯 그녀의 손을 잡았고 비오나는 애써 그 손을 떨치고 일어서서 창 문가로 다가갔다.그리고는 순식간에 그녀의 몸이 까맣고 윤기가 흐르는 빛깔로 화하더니만 곧 길고 풍성한 깃털이 튀어나오고 그녀의 몸이 작아졌다.그리고는 까마귀가 되어 날아가 버렸다. "오만한 엘프가 어떻게 인간남자의 것이 된 거죠?" 린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멍하니 있던 에메스가 홱 고개를 돌려 린을 쏘아보았다.그는 주먹을 쥐고는 린 을 노려보았는데 나는 린의 어깨를 안으면서 조용히 말했다. "여자의 마음이란 모를 것이지." 그는 고집세게 입을 다문 채 아무말도 하지않았다. 나는 다 먹어치운 테이블을 보고는 활기차게 물었다. "자아! 그럼 뭘하고 노는 건가? 공작?" "놀다니! 어린애 장난인줄 알아! 난 영지 순례를 해야한다구!" 에메스가 발끈하는 그때 갑자기 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급히 들어섰다.들어선 자는 기사의 튜닉대신에 학자들이 입는 듯한 긴 옷자락을 끌며 나타나 에메스의 앞으로 달려왔다. "뭔가? 이닉스공?" 에메스가 묻자 나이 지긋한 늙은이가 급히 말했다. "지금 왕성으로 부터 전문이 왔습니다!" "무슨 내용인데?" 이닉스란 사내가 에메스를 보기보단 고개를 돌려 나이 지긋한 저지워드를 향해 말했다. "왕성에서 열릴 무도회에 참석을 명하는 겁니다." "체엣,무도회잖아? 거절하면 되는 거지." 내가 중얼거리자 저지워드가 대신 설명했다. "아닙니다...지금 열리는 무도회는 왕성의 정기 무도회로서..왕께서 직접 여시 는 겁니다.이 자리에 나가지않는다면 반역의 마음을 갖고 있다고 다들 시끄러워 질겁니다." "그렇게 춤을 추고 싶은가?" 내가 비죽거리자 에메스는 나를 완전히 무시하고는 심각한 얼굴로 두 손을 맞잡 았다.이닉스라 불린 중늙은이는 그 심각한 얼굴의 공작을 유심히 보면서 조용히 말했다. "곧 응답해야 합니다.그리고 무도회는 사흘 뒤이기때문에 참석하시려면 지금부 터 여장을 꾸리시지않으면 안됩니다." 때때로 생각하는 것이지만 이 델리암왕국의 왕은 굉장히 변덕스러운 인간이다. 에메스의 이 아글랑에서 왕성까지 걸리는 시간은 말을 타고 꼬박 달려야 사흘이 걸린다.그런데 무도회는 사흘후라는 것은 모든 일을 다 도외시하고 달려나와야 간신히 시간을 맞춘다는 이야기가 된다. "근데 케엘,암살자를 보내는 자가 누군가?" 내가 묻자 그는 진지하게 날 바라보았다. "아마도..화이딘스 대공이라 생각됩니다." 나는 턱을 잡았다. 내 영민한 두뇌가 기억하기론 그는 왕년 전대인 내 귀여운 애완동물인 킬리언의 보호하에 몸을 보전했던 왕과 마찬가지로 비리비리 말라 비틀어져서 여드름이 숭숭 나있던 애송이였다.그런 그가 지금 킬리언의 아들인 에메스를 노리고있다 는 것은 즉 에메스의 세력이 지나치게 화이딘스를 자극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왜?" 저지워드가 어깨를 으슥했다. "가장 큰 이유는 왕과 에메스님..그러니까 주군과 어릴 적 소꿉친구라는 것때문 에 왕께선 주군을 상당히 의지하시기 때문입니다." "의지? 그건 즉 이용해 먹겠다는 의미로 들리는 군." 저지워드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쿠베린님.왕께선 지금 외숙 화이딘스대공의 힘에 억눌려 왕권행사를 제대로 하 고 있지않으십니다.그래서 주군께서 도와주시길 희망하시죠." "충신을 기대한다?" 흐흐 하고 나는 비웃었다. 놀고 있군.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지않았던가? 내 귀여운 킬리언이 몇번이나 죽을 뻔한 것도 왕국을 구해달라고 하는 왕의 요 청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젠 에메스냐! 내가 격노하는 것을 느끼는지 저지워드의 얼굴이 약간 변했다. "농담하는 거냐! 왕따위에게 또 이용당하는 주제에 그걸 명예라고 말하는 거 냐!" 내가 낮게 외치자 저지워드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인간세상의 일입니다.쿠베린님같은 영원히 사시는 분은 이해하지못하실겁니 다." "이해하고 싶지도 않다! 그런 추잡한 말놀음은! 충성? 놀고 있네!" 그러나 내가 길길이 뛰든 말든 에메스녀석들은 이미 여장을 꾸리기 시작하고 있 었다.왕성에 가서 무도회-말라비틀어지고 썩어 문드러질 무도회따위를 참석하기 위해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왕에게 진상할 모피와 새로운 양탄자,드워프가 만들었다는 명검들과 잘 키운 명 마들을 준비하고 그리고 에메스 자신은 자신의 애마의 손질을 부탁했다.그리곤 자신의 방에서 굳어진 얼굴로 칼과 옷,그리고 시종들을 준비시키고 있었다. 오스칼이 그 역할을 하는 거 같은데 그 기생오라비녀석은 주로 시녀들에게 폼잡 느라 시간을 다 버리고 결국은 동그란 얼굴에 수다를 떠는 듯한 얼굴을 한 시종 꼬마가 일을 다하고 있었다. 나와 가빈,린은 말없이 팔짱끼고 앉아있는 것 이외에 할 일이 없어서 정말 입을 다물고 있었다. "가빈." "네?" "너는 마미에게 가서 한동안 내가 일때문에 못돌아간다고 이야기해라." "에? 하지만.." "그리고 스카에게 일러서 왕성으로 오라고 해." "에?" 가빈이 뭔가 할말이 있는듯 버벅거렸다.그러나 나는 그를 돌아보지않았다. "..오늘 밤엔 어떻게 주무실 건데요?" 그는 대신 이렇게 물었을 뿐이다.난 그 말에 대꾸하지않았다.내가 어떤 놈을 끌 어안고 자든 그건 중요한 일이 아니다.나는 지금 왕성으로 먼 길을 떠나야 하며 분명한 것은 내가 비오나와의 계약을 지키기 위해 저 물정모르는 애송이 에메스 의 뒤를 따라다녀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가빈은 어물쩡거리면서 일어났고 나는 돌아보지않았다.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 에메스는 내내 움직였다.내가 그의 뒤를 말없이 따라다니는 것도 잊고 있는듯 그는 여기저기에 명령을 내리기에 바빴다.그는 성의 업무를 이그닉이란 아까 그 중늙은이와 몇몇 기사들에게 명했다.그리고는 성주대리로서는 저지워드를 지명 하였다.저지워드는 걱정스런 안색이었지만 곧 침착하게 받아들이고는 그를 대신 해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시종들도 그렇고 기사들도 그렇고 모두 이 에메스를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그는 헝클어진 금발머리를 아무렇게나 흐트리고선-오스칼은 절대로 아무렇게나 흐트리는 법이 없다.그게 바로 내가 그놈을 기생오라비라 부르는 이유다-바삐 복도안을 뛰어다녔다. 오스칼은 나를 흘긋 보면서-마땅치않은 눈길로- 쌀쌀맞게 지껄였다. "왠일로 입을 다물고 있네." 나는 그녀석에게 긴 말을 할 필요성을 느끼지못했다.내가 아무말 않자 녀석도 바쁜 듯 내 존재를 곧 잊었다.그러나 난 이번 출행이 매우 골치아파질 것임을 직감하고 있었고 그건 에메스나 다른 기사들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같이 떠나는 기사들은 모두 열명이었다.그들은 각기 중무장한 상태로 따랐는데 나는 덥수룩이의 옆에 선 중늙은이-파란 눈과 검은 머리를 하고 검은 수염을 기 른 흑기사타입의 녀석이 기사대장이란 것을 알고 조금 놀랐다.그녀석은 예리한 눈을 들어서 날 바라보곤 아무말도 하지않았다. "쿠베린?" 그는 내 이름만을 중얼거렸는데 아마도 내 이름을 익히 들은 모양이었다. 그렇겠지,나의 위명은 델리암왕국전체를 커버할 수 있으니까. 흑기사녀석과 다른 녀석들-그다지 기억나지 않는 얼굴들을 하는 놈들이름을 내 가 굳이 외울 필요성은 느끼지못하지만 그놈들의 냄새만은 기억하고있다-은 에 메스의 뒤를 따라 일제히 달려가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선두에선 마잉꽃의 문장을 가진 은빛 갑옷을 입 은 에메스와 바로 뒤에서 달리는 은빛갑옷의 기생오라비,그리고 깃발을 들고 있 는 덥수룩이.그리고 그 뒤를 맹렬히 달리는 흑기사일행을 보고는 감탄성을 날리 겠지만 나는 물론 그딴 짓을 하지않는다.난 린과 함께 말을 달리고 있었는데 - 린은 새옷을 입어 제법 멋진 귀공자처럼 보였다- 말을 타는 것은 수치이지만 이 일행에 끼려면 그게 제일 나았기에 아무말도 하지않았다.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소리가 아그랑의 시가외곽으로 난 관도를 관통했다. 황혼이 지고 있을 무렵 부터 출발해서 밤을 새워 달려야만이 왕성에 시간내에 도착할 것이다.그때문에 이들은 밤낮으로 달릴 각오를 한 모양이었다. 에메스도 다른 기사들도 아무말을 하지않았다. 뒤에서 짐마차에 타고 달리는 시종들은 죽을 고생을 하는 편이지만 기사들과는 달리 마차안에서 잠깐씩이라도 눈을 붙이니까 기분 나쁠 것은 없었을 것이다. 일행은 약 칠십여명에 달했지만 그 속도는 매우 빨랐다.시종들은 모두 마차에 탔고 기사들은 각기 거느린 병사들을 모두 말에 태우고 있었다.모두 기마병인 셈이다. 달이 떠올랐다. 신의 엄지손톱같은 달이 귀신같이 늘어진 숲의 나뭇가지사이에 걸릴 무렵 에메 스가 휴식을 선언했다. 기사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병사들과 시종들이 준비하기 시작한 모닥불주변으로 몰려들었고 지친 말들을 쉬게 했다.사람보다 말이 더 지칠 것은 빤한 이치라 나 도 린도 말에서 내려서 에메스의 곁으로 다가갔다. "공작." 에메스가 먼지를 수건으로 닦아내고 있는 앞으로 내가 다가가자 오스칼이 일그 러진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헤에,아직도 붙어있었네." 에메스는 긴 말을 하고 싶지않은 듯 오스칼이 담아낸 스프그릇에 입을 대고 마 셨다.단려한 얼굴은 여전히 내게 킬리언을 기억나게 했다. 그러게 입만 다물고 있으면 좀 귀여운가...쯧.. 상당히 지친 얼굴이었지만 눈은 빛나고 있었다.온몸에서 땀냄새가 났고 피로의 냄새도 흐르고 있었다. 그는 부하들과 시종들이 건네주는 모포를 바닥에 깔고 피로한 다리를 뻗고 앉았 다.그의 주변으로 기사들 둘이 불침번을 섰고 시종들이 불편한 자세로 그의 옆 에 다리를 뻗고 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모두 모닥불을 중심으로 마치 둥근 원을 그리는 형태로 둥글게 누운 것이다. "여기서 잘건가?" "음..새벽이 오기전에 일어나야 해.잠시 눈만 붙일거니까." 그가 말했고 나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별이 그득했다. 나뭇가지로 잘린 하늘의 조각들 하나 하나 안에 한 가득히 든 별들이 나를 바라 보고 있었다.꽤 늦은 시각이었다. "그럼 자자." 나는 잘라 말했고 목을 이리저리 굴려보았다. 역시 잘 준비를 해야지.음..좀 불편해도 참을 수 밖에. 린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고는 공작이 누운 곳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나 무위로 기어올라갔다.아니 기어올라갔다는 표현은 어울리지않았다.정확한 표현 은 그가 튀어올라갔다는 것이 사실이다. 어찌되었든 이 청색의 린은 나무위로 올랐고 나는 에메스의 옆에 앉았다.그리곤 따스한 온기가 도는 그의 모포로 다리를 집어 넣고 편안한 자세를 취하기 위해 서 파고들어서 슬슬 비벼보았다. 모포를 뒤집어 쓴 에메스가 내가 옆을 파고 들자 놀라 눈을 크게 뜨면서 물었 다. "뭐..뭐야!" "뭐긴.잘 뿐이야." "네가 여기서 왜 자?" "난 원래 혼자 못자." "그..그런걸 내가 알게 뭐야! 넌 날 지키려는 거 아니었어?" "그래..그러니까 나와 한이불안에 있는게 가장 안전하다고 내가 말하고 있는 거 야.기꺼이 너와 같이 자 주지." 그는 벙벙한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지금...너...뭐라 한 거야!" 그가 어처구니없다 못해 기가 막혀서 나의 면상에 이마를 들이대면서 항의했다. 나는 그렇게 흥분하는 녀석의 냄새를 킁킁 맡아보면서 물었다. "근데..너 따뜻하니?" KUBERIN.... 언젠지 기억도 못할 아득한 옛날 피의 명예를 위해 나는 싸웠었다... 6 암살자를 상대하는 것은 매우 피로하다. 게다가 그쪽이 동방의 암살술자일때는 더 피로하다. 그리고 지키는 상대가 안전불감증의 멍청이일 경우는 더더욱 피로하며 같이 지키는 상대랍시고 껍죽대는 녀석들이 있을 경우는 매우 매우 피로하다. 나는 턱을 괴고 앉아서 연못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내가 연못을 왜 들여다 보고 있는가 하면,저 잘나가는 에메스녀석이 무도회에 오자 마자 주욱 차려입고 홀로 나가서 아가씨들을 꼬시기 때문이다.아가씨들은 에메스녀석의 멀쩡한 허우대와 왕국 제 3의 세력가인 것에 매혹되어 아낌없이 몸을 바치고 있었다.그 덕에 그는 왕궁의 정원에서 바람을 쏘이자는 전형적이고 도 확실한 핑곗거리로 아가씨들을 꼬여내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는 자들은 다들 알겠지만 원래 암살자들이란 정원같은 곳이나 화장실 같은 곳에 숨어서 찌르기를 워낙 좋아한다.그래서 역대로 암살당한 자들의 사인 을 살펴보면,흔히들 화장실 변기 위에서 직장파열로 죽은 자가 태반이오,혹은 이유없이 침대 위에서 복상사하는 경우,그리고 정원에서 꽃구경하다 죽은 자가 거의 십중 팔구는 된다. 잠깐,여기서 정원에서의 꽃구경이란 진짜 꽃구경이 아니다. 왕성이나 귀족들의 정원이란 미로와 같이 넓고도 으슥해서 그냥 눈을 감고 걸어 도 발끝에 차이는 것이 여자들의 속옷과 남자들의 바지쪼가리들이다. 즉, 꽃은 꽃이되 진정한 꽃이 아니란 ..결론이 나며,특히 그런 경우 암살자가 덮치기에 매우 알맞은 조건이 형성된다. 조건..조건이고 말고. 일을 치르기 위해선 여자나 남자나 옷을 벗기 마련이고 그 때 나타난 암살자는 대상이 남자라면 바지가 다리에 엉기어 도망가기 어렵다는 맹점을 간단히 찔러 일을 성공시키는데 대상이 여자라 할지라도 일은 간단해진다. 어염집 처자가 암살자의 목표가 되는 일은 드물고 주로 신분높은 여성이 대상이 되므로 그 고결하신 신분높은 귀부인이 차마 암살자가 칼들고 덤빈다고 알몸으 로 뛰쳐나갈 수는 없는 법이기에 그냥 죽임을 당하고 마는 것이다. 따라서 암살자에게 있어 정원과 화장실,그리고 침실의 경우는 매우 매우 완벽한 장소 중에 하나다. 그런데 이 철없는 문둥이 같은 녀석은 나의 이 깊고도 넓은 견식을 피력하자, 코웃음을 치고는 주절거리는 것이다. "그래도 지키는 게 일 아냐? 나는 공작이라구.내가 그냥 숨어다닐 수는 없는 일 이잖아?" 이 덜떨어진 바퀴 부스러기 같은 녀석. 감히 이 고귀하신 쿠베린님께서 걱정해주시는 데 그딴 말을 지껄이다니. 그러나 나같이 프로의식이 투철하신 어른은 어린애의 투정따위는 무시해야 하는 법.그래서 나는 지금 이 연못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앉아있는 것이다. 내 뒤의 풀 숲에선 물론 그 덜떨어진 에메스 녀석이 어딘가의 영양-빨간 머리의 도톰한 입술을 가진 길고도 흰 다리를 가진 매혹적 미모의 아가씨-의 껍질을 벗 기고 있는 중이었다. 껍질이라..음음.조금 저속한 표현.옷자락이라고 하면 너무 노골적일 지도. 어쨌든 그녀가 아름다운 흰 허벅지를 가졌다는 것을 내가 안 것만으로도 그들이 무엇을 내 뒤에서 하는 지는 굳이 말할 필요는 없다.나는 어찌되었든 연못을 뚫 어져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니까. 내가 왜 연못을 바라보고 있는가. 음...아까 했던 소릴 또 하고 있군. 원래 연못이란 암살자들이 즐겨 쓰는 은신장소이다. 정원에서 일어난 암살사건의 십중팔구..아니.십중오륙은 암살자가 연못 속에서 긴 대롱같은 것으로 숨을 참고 있다가 대상자가 가까이 오면 화끈하게 덤벼들어 일격에 죽여버리는 것이다.따라서 지금 내가 들여다 보고 있는 이 연못도 놈이 은신해 있을 가능성이 충분한 것이다.그리하여 이 프로의식이 투철하신 이 몸께 서는 이 연못을 들여다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연못에는 대롱같은 것은 보이지않는다. 이럴리가 없는데.. 내가 들여다 보자 연못의 잉어들이 내가 먹이라도 주는 줄 알고 입을 찢어질 듯 벌리면서 달려들고 있었다.이 좍좍 벌려진 입들을 보면서 나는 이 잉어가 맛있 을까를 생각했다.한 마리 잡아서 시식을 해보면 어떨까 생각했기에 나는 손톱으 로 한마리를 덥석 찍어서 끌어올렸다.놈이 파닥파닥 온 요동을 다 쳐댔지만 감 히 이 쿠베린님에게 어쩔수가 있으리. 어.이 놈 참 크군. 내가 그 놈을 잡아 끌어올리고는 살이 통통하게 오른 그 몸통을 바닥에 내려놓 고 손톱 하나를 꺼내들어 진지한 마음으로 배를 주욱 갈라 내장을 발라냈다.그 리고 살점을 막 뜯어 먹으려는데 아직도 물정모르고 입을 좍좍 벌리고는 먹이를 기다리고 있는 잉어들이 신경이 쓰였다. 허어.너희들도 배가 고프겠지. 나는 어차피 잉어의 대가리나 내장따위는 먹지않기때문에 먹이를 그처럼 원하고 있는 녀석들의 입으로 넣어주었다.그러자 녀석들은 아귀아귀 먹어치운다. 오오.재밌다.이런 재미로 잉어따위를 인간들이 기르는 구나. 나는 재미와 잉어사냥에 대한 증거소멸이란 일거양득의 행위로서 엄숙하게 내장 을 주욱 뽑아내어 잉어들에게 나누어주고 마지막엔 대가리를 던져주었다.그러자 잉어들은 서로 대가리를 먹으려고 난리를 치면서 연못 안이 어지러워졌다. 나는 깨끗이 발라낸 잉어의 살점을 천천히 음미하면서 먹었다. 그다지 맛은 없었지만 간식거리는 되었다.그러고 보니 이렇게 사냥(?)해서 먹는 게 꽤 오래되었군 하고 흐뭇해져 있는데 그 기생오라비의 냄새가 났다. 녀석이 저벅거리며 큰 발자국 소리를 내면서 다가오더니 내가 잉어를 먹고 있는 것을 보고는 신음성을 터뜨렸다.그의 입가가 굳어지면서 더듬거리는 말소리가 튀어나왔다. "대..대체! 뭘 하는 거야? 그..잉어는 금잉어로 왕께서 매우 귀여워하시는..백 년이나 묵은 잉어야!" 나는 그 녀석을 돌아보지도 않고 깨끗이 다 먹어치우고선 나머지 뼈를 아직도 입을 벌리고 있는 녀석들에게 나누어주었다.그리고는 손을 툭툭 털고 진지하게 말해주었다. "음..녀석이 조금 수상해서 몸수색을 했어." 그는 휘청거리면서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도...도저히! 도저히! 너같은..놈을.." 그가 비틀거리는 동안 나는 나의 박식한 지식을 그에게 알려주어야 할 의무감을 느끼고 천천히 말해주었다. "암살의 십중팔구는 이런 연못주변에서 일어나는 것을 몰라? 내가 먹은 놈은 결 백했었지만 이렇게 입 벌리고 있는 잉어놈들 중에는 잉어도 아닌 주제에 잉어의 탈을 쓴 놈이 있을 지도 몰라." "신이여.." 그가 비틀거리는 것을 나는 모른 척하고 계속해서 잉어가 날뛰고 있는 연못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니면 대롱대신에 잉어의 몸통을 이용해서 은신해 있을 지도 모르지." 나는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어서 입벌리고 있는 잉어들을 자세히 쏘아보았다.아 직 물정모르는 잉어들은 혹여 먹이를 더 줄까나 해서 계속 내 주변을 빙빙 돌고 있었다. "기생 오라비." "에?" 오스칼은 어느샌지 모르게 내가 자신을 그렇게 부른다는 것에 매우 익숙해져있 었다.어쩌면 본인도 자신이 기생오라비같이 생겼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는 것일 지도 모른다. "저기 저 잉어가 너무나 수상하다!" 그는 도저히 견딜수 없다는 듯이 고함을 지르려 했지만 그 소리가 터지기도 전 에 나는 홱 몸을 띄워서 연못 한구석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런 그 순간 파앗 하고 연못의 물이 공중으로 치솟았고 내게로는 차가운 칼날 이 덮쳐나왔다.오스칼이 뭔가 소리를 지르려는 그 때 내 몸이 허공에서 가볍게 회전하면서 그 칼날을 피해냈다. "이럴 줄 알았지." 나는 손톱을 다섯개 다 꺼내어 녀석의 목줄기를 화악 그어냈지만 내가 즐기는 살결의 감촉대신에 챙강하는 금속성만 들었을 뿐이었다.이건 상당한 놈인거 같 군하고 생각할 즈음 녀석이 파앗 하고 물줄기를 사방에 튀기면서 튀어 나왔다. "누구냐!" 오스칼이 검을 빼어들고 그놈의 앞으로 튀어나오는 그 때 그 녀석이 재빨리 입 을 뾰족히 하고는 푸앗 하고 무언가를 뿜어냈다.기생오라비는 그것을 검으로 내 치려는 지 홱 휘둘렀지만 그건 검으로 잘려질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나는 그녀 석의 몸을 홱 밀어버리고 그 녀석이 뿜어낸 것을 내 옷깃으로 막아냈다. 푸식 푸식 하고 김,아니 연기가 오르면서 옷깃이 녹아들었다. 과연 내 생각대로 이것은 분명히 연산수였다. "크아아." "대체 뭐야!" 오스칼이 이상한 소리를 질러댔고 나무 밑에서 정사를 즐기고 있던 공작이 고개 를 쳐들었기때문에 나는 그의 머리통을 걷어차며 외쳤다. "엎드려있어!" 내가 걷어찼기때문인지 공작이 민첩했기때문인지 그는 잽사게 바닥에 몸을 눕혔 다.그리고 그 뒤를 이어서 나무 위에 있던 린이 암살자의 머리 위로 뛰어내리면 서 검을 휘둘렀다. 암살자의 몸은 미끌거리는 물이끼로 덮여있었다.그 놈의 머리는 잉어인형같은 것으로 싸여져있어 물론 얼굴은 보이지않는다.대신 온 몸은 검은 것으로 둘둘 싸매고 있어서 어둠 속에 녹아들면 전혀 보이지않을 것이다. "이놈! 넌 누구냐!" 오스칼이 전혀 위엄없는 모습-내가 밀친 덕에 그는 연못속에 빠져서 허우적대며 떠들고 있었다-으로 외쳤다. 그러나 당연 대답할 리가 없었다. 그 놈은 대답대신 린이 재차 덤벼오는 칼날을 피하면서 이리저리 움직였지만 절 대로 그 잉어껍데기는 벗지않고 있었다.대단히 날렵한 몸놀림으로 린의 칼날을 피하고 있었는데 그가 쥔 단검보다는 길고 장검보다는 짧은 검이 린의 칼날을 맞받고 있었다.그건 드문 칼이었다. "넌 누구냐? 동방교국의 암살자냐?" "하하하...그림자의 훈이라고들 흔히 부르지." 녀석은 잘난 척을 했다. 이 놈도 암살자 치고는 정상이 아냐. 이래선 결판이 안나겠다 싶어서 나는 녀석의 앞으로 돌진하면서 손톱을 다 꺼내 어 녀석의 앞섶을 좌악 그어버렸다.암살자는 비명을 올리지도 않고 대신에 뒤로 나자빠졌다.아마도 공격자가 둘이 되자 불리함을 느꼈던지 이번에는 재빨리 허 우적거리는 오스칼에게 돌진해서 그의 몸으로 린의 공격을 막았다. 즉 오스칼의 뒷덜미를 잡아 방패로 삼은 것이다. 온통 물이끼와 수초로 몸이 감겨서 제대로 움직이지못하고 있던 오스칼은 이런 경우를 맞이하여 그 미끈한 얼굴은 전혀 도움이 못되고 있었다.아니 오히려 방 해를 하고 있는 참이었다. 그가 버둥거리면서 어떻게든 암살자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할때 린이 날카롭게 외쳤다. "인질따윈 죽어도 상관없다!" 하면서 그가 칼을 휘두르자 오스칼의 비싸보이는 튜닉이 좌악 찢어지면서 갑주 가 드러났다.그가 왜 연못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지 그 이유가 드러난 순간이었 다.암살자는 갑주를 걸친 방패를 자연스레 휘두르고는 악을 지르는 오스칼의 몸 을 이리저리 흔들면서 대꾸했다. "나도 죽어도 상관없어.시체라도 방패는 되니까." 하고 히죽이 웃더니만 그 잉어머리를 하고는 물속으로 푸욱 들어가버리는 게 아 닌가.린이 웃 하고 칼을 들고 그 뒤를 쫓았지만 이 갑주입은 방패가 버둥거리는 바람에 물속이 온통 진흙과 수초로 범벅이 되어 시계가 전혀 보이지않았다.그 덕에 암살자는 그 연못으로 유유히 사라지고 만 것이었다. 린은 기가 막힌 표정으로 기생오라비를 바라보았고 기생오라비는 수치심에 완전 히 졸도할 것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쿠베린님,어쩔까요?" "뭘 어째? 그 다음은 화장실을 지켜보는 거지." 나는 어깨를 으슥했다. 그러고 보니 생각이 나서 내가 몸을 숨기라고 했던 공작을 돌아보니 수풀 속에 선 반라의 아가씨가 겁에 질려서 벌벌 떨고 있었다.나는 수풀속을 들여다 보았 다. "어이,에메스,이젠 나와도 되는데." 내가 말을 걸자 엎어진 공작은 대꾸가 없었다. 그의 허연 엉덩이가 왕성의 화려한 등불아래 빛을 발하고 있었는데 그는 완전히 의식을 잃고 있었다. "이런,.이런,.무서워 졸도한 거냐?" 내가 중얼거리면서 에메스의 몸을 이리저리 뒤집는 동안 소동소리를 듣고 기사 들이 몰려왔다.조금 늦은 감이 있긴 하지만 사람들은 오긴 왔다. 나는 오스칼이 버둥거리고 있는 것을 도와주는 덥수룩이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 였다. "어이.덥수룩이." "응?" 그가 날 보고 눈을 크게 떴다. "그 기생오라비는 익사할 염려는 없지만 이 졸도한 에메스부터 처리하지않겠 어?" "왜?" 그가 놀라 뒤뚱거리면서 달려왔다. 그는 허연 엉덩이를 드러낸 채 늘어진 에메스를 보고는 으악 하고 소릴 지르면 서 그의 몸을 끌어안았다.그리곤 그의 튜닉을 들어서 그의 알몸을 둘둘 감아서 자신의 어깨위에 올리곤 나에게 물었다. "어찌된거야?" "에메스녀석은 겁에 질려서 기절해버렸나봐." "제길.그럴리가 없는데." 덥수룩이가 미심쩍은 얼굴을 하곤 당황한 병사들이 오스칼을 끌어내는 몰골을 바라보았다.소리를 지르지도 못하고 있는 오스칼은 병사들의 손에 의해서 겨우 겨우 연못을 빠져나오고 있었는데 완전히 스타일을 구긴 셈이었다. 어찌되었든 허연 엉덩이의 공작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줄 순 없는 지라 덥수 룩이는 황급히 그를 끌어안고 달리기 시작했다.그리고는 다른 시종들 사이에 들 어가 공작의 거처로 그를 옮기게 했다. 그 상황을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은 어머나 저런 등등의 의미없는 소리들을 지껄 이면서 중구난방으로 떠들어대고 있었다.화려한 의상을 몸에 감은 귀족들은 이 무도회가 저런 일로 -연못에 빠진 기사따위의 소동으로-흐트러진 것을 매우 가 슴아파했기에 역시 무도회는 계속 진행되었다. 그런 모습을 뒤에서 보고 있던 린이 팔짱을 끼고 나에게 물었다. "이제..어쩔까요?" 나는 아직 떨고 있는 수풀 속의 아름다운 아가씨의 벗은 몸에 옷을 걸쳐주면서 부축했다.아무도 그녀에게 다가와 옷을 건네주고 따스한 말 한 마디 건네지않았 던 것이다. 세상에! 생각해 보라. 어떤 여자가 같이 있던 남자는 졸도하고 자신은 왠 난데없는 칼부림을 목격해야 만 했다면-그것도 알몸으로 도움을 청할 수도 없는 몰골로- 놀라고 겁에 질릴 밖에. 그녀의 얼굴에 조금 안도하는 얼굴이 되자 나는 그녀의 목줄기에 가볍게 키스했 다.나는 그녀를 위로해야 할 책임이 있다! 음.있고 말고! "뭘 어떻게 해? 겁쟁이 에메스녀석을 돌봐야지..." 나는 그녀의 목줄기를 가볍게 핥으면서 아가씨의 입술에 다시 키스했다. 그녀는 당황하다가도 나의 키스에 반응해왔다.떠는 몸이 조금 가라앉았다. "그리고말야..다음번엔..화장실을 지키는 거라니까." 그녀의 흰 몸을 안아 들고 나는 조용히 말해주었다. KUBERIN..... 언젠지 기억도 못할 아득한 옛날 피의 명예를 위해 나는 싸웠었다... 7 "그러니까 나에게 지금 암살자인 잉글램을 알아봐라 그런 이야기야?" 스카가 뻔한 말을 되물어 나를 짜증나게 했다. "그래.그렇게 말했다." 나는 팔짱을 끼고 앉아있었다. 왕성의 한 구석,객실로 대여된 그 방안에 앉아서 나는 그를 마주 보고 있었다. 스카는 그래도 왕성에 온답시고 옷을 잘 입고 있었다.평소에는 입지않는 새로운 튜닉에 망토까지 걸치고 있어 그럴듯한 기사로 보였다.그러나 이딴 놈이 기사일 리는 없다.아니,생각해보면 이 스카가 기사란 애들 보다 못한 것은 하나도 없었 다.오히려 기생오라비나 덥수룩이보다야 한 수 위가 아니겠는가? 왕성의 소란을 들은 스카는 심각한 얼굴을 해 보였다. "알아보지,그러나 역시 그림자의 훈이라든가 잉글램같은 놈들은 최고중에 최고 야,그런놈들을 상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 "그럼,쉬운 일이 아냐,내가 언제나 말하듯 아무 생각없는 녀석을 암살자로부터 호위한다는 건 어렵다니까." 나는 그와 같이 이마를 맞대고 중얼거렸다. 문득 스카는 내 옆에 선 린을 바라보면서 낮게 물었다. "저..애는 어찌된 거야?" "아아.내가 키우기로 했어.린이야." 스카는 나를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곤 린을 향해 안녕하고 말했다. 그러더니 한동안 그는 눈앞에 놓인 구리잔에 담긴 포도주를 바보처럼 바라보고 는 나를 다시 보고 물었다. "어째서지?" "뭐가 어째서야?" "너,..누군가와 같이 지내긴 싫다고 말했었잖아?" "하지만 필요하긴 필요해." "가빈이 있고.." 그는 약간 내 눈치를 살폈다. "역시 인간보다 아인족이 수명이 길기때문인가?" 녀석은 정곡을 찔렀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얼버무렸다. "뭐.그런 것도 있지,너는 나랑 자기 싫다고 했잖아?" "뭐..이젠 익숙해 졌으니 싫을 것 까지는 없지만..." 그가 갈색 눈으로 날 빤히 바라보았다. 마치 버림받은 강아지 같은 눈이어서 나는 약간 연민을 느꼈다. 그래,그동안 내가 난로로 많이 귀여워해 주었는데 가빈으로 바꾸니 저로서도 서 운하겠지.인간족은 원래가 정이 많은 족속이고 속도 좁다.이 스카도 나와 꽤 오 래있었으니 마음에 뭔가 맺힌 것이라도 있을 것이다. "그 이야긴 그만하고..어찌되었든 수소문 해볼께." 스카는 갑자기 화제를 바꾸어 버렸다. "그런데 공작은 어딨어?" "자고 있어." 나는 그에게 약해빠진 공작이 머리가 깨져서 드러누워 있다는 소리는 차마 할 수없었다.인간이란 얼마나 약해빠졌는지 조금 건드리기만 해도 여기가 부러졌 네,여기가 찢어졌네 하고 울부짖기가 일쑤다. "자고 있다구? 지금은 .." 스카는 무심코 창문을 바라보았다.해가 쨍했다. "대낮인데." "그래.대낮이지." 나는 받아 넘기면서 대꾸했다. 밖에서 시끌시끌거리는 사람들의 소리가 방안으로 흘러들어오고 있었다.그 소음 속에서 나는 문득 오히려 드러누워있는 쪽이 훨씬 편하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럼,알아봐라,스카." "어,어딜가?" "공작을 호위하러 가야지." "아.그래.그럼 나는 저녁때 다시 오지,왕성주변에 잉글램이 나타났다면 소문이 날거야." 그는 순순히 일어났다. 그를 배웅하고 나서 나는 린과 함께 공작의 방으로 들어갔다.한시라도 그의 곁 을 비우면 안되길래 내가 스카와 만난 것은 바로 옆방이었다. 린이 발자국소리도 내지않고 내 뒤에 서는 동안 걱정스레 앉아서 누운 공작을 바라보고 있던 오스칼이 벌떡 일어나서 나에게 분노의 시선을 보내왔다. 그 맞은 편의 의자에 앉아서 돼지처럼 과일을 깎아 먹고앉아있던 덥수룩이가 나 에게 작은 과도를 들어보이며 아는 척을 했다. "대체! 얼마나 심하게 상처를 입힌 거냐! " 그가 길길이 날뛸 때 나는 하품을 하면서 길게 기지개를 폈다. 밤부터 지금까지 자지 못했기에 매우 졸렸다.나는 원래 해가 저렇게 낮게 떠있 으면 견딜 수 없는 몸이시고 여타 무식한 인간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고귀한 분 이시라 결코 그들과 나란히 아침을 먹는 일 따위는 있을 수 없다. 기생오라비가 아무리 떠든 들 나는 알 바가 아니었다. 나는 걸치고 있던 웃도리를 가볍게 벗어서 의자에 걸치고 바지를 잘 벗어 린에 게 건네었다.린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도 내가 하는 일에 토따윈 달지않는다. 귀여운 녀석. 기생오라비는 나의 행동에 눈을 크게 뜨고는 뭐라 막 잔소리를 하려 했다.덥수 룩이는 내가 흰 다리를 드러내자 눈을 크게 뜨면서 침을 꿀꺽 삼켰다. 꿀꺽? 왜 내 다리를 보고 긴장하는 거냐? 수컷인 주제에? 나는 덥수룩이에게 한번 주의를 주고는 기생오라비를 밀치고는 공작이 누워 자 고 있는 침대속으로 기어들어갔다.그 넓디 넓은 침대를 혼자 차지하다니 못쓰겠 군 하고 내가 중얼거리면서 히프로 가볍게 공작의 몸을 옆으로 밀자,자리는 넉 넉해졌다.공작은 내가 밀어도 의식이 없다. 흰붕대로 머리를 꽁꽁 싸매고 있는 중인데 지금 대외적으로는 공작이 암살자에 게 부상을 당해서 기식이 엄엄하다 ..라는 식으로 소문을 내어 놓았다.아마도 암살자로서는 확인을 하기 위해서라도 들어오긴 할 것이다. 나는 따스하고 부드러운 린넨의 감촉을 즐겼다. 오오..내 침대보다 훨씬 부드럽군,아마 새로운 짚을 넣고 린넨도 고급이기 때문 이겠지. 내가 적당히 파고 들어가면서 공작과 나란히 누운 모습을 기생오라비와 덥수룩 이는 입을 저억 벌리고 바라보고 있었다.그들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듯이 나를 바라보면서 벙어리 처럼 버버거리고 있었는데 나는 그들에게 다시 나 의 박식함을 나누어 주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한숨을 쉬었다. "어이.내가 또 설명해야 하나?" 기생오라비가 버버거리면서 뭐라 신경질 적으로 소리를 질러댔는데 중요한 소리 는 하나도 없었다.굳이 그가 말한 단어들을 연결한다면 ..공작의 명예운운 무책 임 운운.너무나 괴이하다 운운..뭐 그 정도가 전부였다.그런 단어의 나열을 들 으면서 내가 귀기울여야할 이유는 전혀 없기에 나는 그를 가볍게 무시했다.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내가 공작과 같이 있는 것이 가장 적절한 보호법이 아니 겠냐,그거지.기생오라비,너는 바로 옆에 있었지만 전혀 도움이 되지않았지 않 냐?" 그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매우 수치심을 느끼는 지 그는 이를 악물고 주먹을 들었으며 심지어는 칼까지 뽑을 기세였다.그런 그를 옆에서 덥수룩이가 말리면서 주절거렸다. "흥분하지마.원래 말로 통하는 상대가 아니란 것을 이미 알고있잖아?" 말로 통하지않는 상대라면 그럼 뭘로 상대하겠다는 거냐? 나는 그들을 비웃고 싶었지만 매우 졸렸기에 눈을 감고 이미 잠으로 빠져들어갔 다.그들이 계속 악악거리기에 나는 조용히 한 마디 해주었다. "공작이 깨길 바래? 그가 두통으로 고함과 비명을 지르며 피 토하며 죽길 바 래?" 그들의 입이 딱 다물어졌다. 물론 단순한 두통으로 피 토하며 죽는 사람은 아직 나도 본 적은 없었다.그러나 그들이 계속 떠든다면 나는 일부러라도 공작의 두통을 강렬하게 만들어줄 참이 었다.그럼 아마도 피를 토할 수 있을 지도 몰랐다. 어느 정도 잤을까. 누군가가 침대곁으로 다가섰다. 살기가 느껴진다. 오오 이것은.. 나는 눈을 뜨지않고 기다렸다.그리고 곧 그녀석이 공작의 앞에 와 선 것을 느꼈 다. 그 체취가 풍겨나온다. 공포의 냄새라기 보단 긴장의 냄새. 아찔할 정도로 강렬한 긴장의 냄새. 그리고 무언가가 다가온다. 나는 손을 쭈욱 뻗어서 상대를 잡았다. 눈을 뜨고 보니 상대는 내게 손목을 잡힌 채 부르르 떨고 있었다. 새파란 얼굴,질린 그 얼굴, "뭘 하는 거야!" 기생오라비가 옆에서 외쳤다. 나는 기생오라비가 뭐라 떠드는가 하는 것은 신경쓰지않고 내가 잡은 상대를 바 라보았다.금발의 아리따운 아가씨였다.시녀로 보였다. 창백한 뺨이 새파랗게 질려있었다.그녀의 다른 한 손에는 금빛 쟁반이 들려있었 고 한 손은 내게 잡혀있었는데 그 쟁반 위에는 뜨근해 보이는 스프가 김을 모락 모락 내고 있었다. "저..저기..공작님께 스프를.." 그녀가 어눌한 음성으로 내게 변명하듯 말했다. "먹어봐." 내가 잘라 말하자 그녀의 얼굴이 더 창백해지면서 도움의 눈길을 기생오라비에 게 던졌다.기생오라비는 울화가 치민다는 듯이 외쳤다. "이 애는 자스민이라고! 공작을 어려서 부터 모셔온 애야!" 나는 그 소녀를 빤히 보았다. 열 아홉정도 되는 소녀로 시녀로 보인다.그러나 그 살기는 대체 무언가. "아냐,이 애를 내보내." "에?" 시녀가 어쩔줄 몰라했다. 금발의 자스민은 당황하여 옆의 덥수룩이와 기생오라비를 바라보면서 도움을 청 하는 얼굴이 되었다.이 물정 모르는 놈들은 그녀의 표정에 당황하면서 내게 비 난의 눈길을 던졌다. 나는 그녀의 손목을 휙 던지면서 낮게 말했다. "냄새가 여자가 아닌걸." 그녀의 얼굴이 날 똑바로 바라보았다. "적당히 해둬!" 기생오라비가 나에게 항의어린 목소리를 던지면서 다가왔고 시녀는 덜덜 떨면서 날 바라보고 있었다.그리고 그 다음 순간 공작이 눈을 뜨면서 중얼거렸다. "뭐야?" 모두의 시선이 공작으로 쏠리는 그 순간이었다. 음.여기서 잠시 뭘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나의 지식을 나누어주지. 여자랑 남자랑 냄새가 다르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지만 인간들은 그것 을 잘 모른다.엘프는 거의 냄새가 나지않는다.하지만 일반적인 인간들이라면 냄 새가 나는 게 당연하다. 그리하여 나는 이 소녀에게 의심을 품었고 나는 의심을 일단 품으면 뒤로 물릴 생각이 전혀없었다. 그리하여 이 시녀 같지않은 시녀가 공작을 향해 한 걸음 내딛는 그 순간 나는 손톱을 꺼내어 그녀의 목을 좌악 그어버렸다. 변명이고 위협이고 뭐고 아예 없었다. 암살자에게 틈을 준다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일. 녀석은 나를 바라보았었지만 내가 한 수 빨랐다. 거럼.나 쿠베린님의 손속을 따라잡으려 하다니.구백년은 이르다. "아악!" 공작이 비명을 올렸고 뒤에 있던 기생오라비와 덥수룩이도 비명을 올렸다. 피가 좌악 솟아나 공작 에메스의 전신으로 쏟아져 내렸고 목을 잃은 몸뚱이는 바들 바들 떨더니만 기생오라비의 품안으로 덥석 안겨들어갔다. 그리고 덥수룩이는 입을 저억 벌린 채 피를 뒤집어쓴 공작과 자신의 발 밑을 구 르는 목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크악!" 기생오라비가 놀라서 목이 잘려진 시체를 밀쳐버렸다. 시체가 대구르 구르자 당황한 덥수룩이가 어쩌지 어쩌지를 연발하면서 자신의 발 밑에 구르다 말고 선 머리를 피해 뒤로 물러섰다. 공작은 완전히 피를 뒤집어 쓴 채 침대에 멍하니 앉아있었다. 엄청난 쇼크로 그는 입을 벌리고 있었는데 린은 구석에서 걸어나와서 내가 하기 싫은 일을 대신 해주었다.즉,잘려진 목의 주인인 이 수상쩍은 아가씨의 옷을 더 듬어 벗겨낸 것이었다.그는 얇은 단검으로 그녀의 가슴을 감싼 드레스를 잘라내 고 그 다음에는 아래로 주욱 그어서 알몸을 드러냈다. 기생오라비가 뭐라 화가 나서-실은 너무 놀라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는 듯한 얼굴이었다- 린이 하는 일을 막으려 했지만 린의 손놀림은 너무 빨라서 제지하 고 자시고도 없었다. 순식간에 그녀의 몸은 알몸이 되었다. "이봐! 그만해!" 덥수룩이가 린의 손을 잡아 당기려 하는 순간 린은 재빨리 피해버렸다.그리고는 손을 탁 놓고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그가 몸을 비켰기에 침대 위에 앉아서도 적나라하게 드러난 알몸을 볼 수 있었다. 둥글고 흰 어깨,그리고 풍만한 젖가슴,그리고 그 아래로 우아하게 펼쳐진 동그 란 선을 그리는 배와 계곡.. 뭐,이런 것이 나왔어야 했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입에 올리기도 싫은 몰골이 나왔다. 축 드러난 몸은 물론 남자로선 잘 단련된 몸매이긴 하지만 수컷인 나로서 대체 저 수컷의 알몸을 봐서 무슨 도움이 된단 말인가. 녀석은 좌악 빠진 몸매를 하고 있긴했지만 도무지 도움이 안되므로 나에겐 길게 볼 마음도 없고 그럴 생각도 없었다. 그러나 기생오라비와 덥수룩이는 생각이 다른지,혹은 이 녀석들이 원래 남색가 였는지 이 주욱 빠진 남자의 알몸을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다.덥수룩이의 입 에선 먹다만 과일조가리가 툭 떨어졌고 기생오라비는 아예 턱이 빠졌다.공작도 마찬가지로 입을 헤 벌리고 있었다. 오,비오나,너는 아마도 시집을 잘못 간 게로구나.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들을 다시 돌아보았다. 세 사람은 완전히 동작을 정지한 상태로 그 시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이 녀석들은 뭘 생각하고 있는건지 아무리 주욱 빠졌다고는 하지만 남자의 알몸,그것도 목도 없는 알몸을 뭐하러 그렇게 열심히 보고 있는 것인가. 나는 고개를 내저으면서 피로 물든 침대에서 몸을 빼내었다. 하품을 하고 보니 해가 이미 져서 저녁먹을 때가 되긴 되었다. 내가 기지개를 펼 동안 까지 녀석들은 멀건히 그 시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놈이 누굴까? 잉글램이나 그림자의 훈이란 놈이라면 좋겠는데." 내가 중얼거릴 동안 정신을 차린 기생오라비가 창백한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덥 수룩이도 날 바라보았다. 뭘 그리 보는 건가. 이 선견지명과 탁월하신 판단력을 가진 이 몸에게 감탄하고 싶다면 솔직히 말하 는 게 좋을 텐데. "자스민이..나..남자였어." 덥수룩이가 그런 소릴 했고 기생오라비는 고개를 급히 젓고는 내게 물었다. "암살자인걸 어떻게 알았어?" "아니라고 했잖아? 냄새가 다르다고 했잖아! 넌 귀가 없냐?" 나는 이 호위기사이면서 동시에 가장 공작과 친밀하다는 그들 기사들에게 회의 를 느꼈다.이들이 진짜 그렇게 괜찮은 자들이라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내가 고개를 휘휘 내젓고 있는 동안 그들은 날 멀건히 보다말고 천치같은 표정 이 되어 바닥에 구르고 있는 목과-물론 여자의 모습을 한 목이다-바닥에 피를 계속 쏟아내고 있는 알몸의 사내 몸을 번갈아 보았다. "저,정신없군." 공작이 그렇게 말하곤 머리를 잡고 다시 누워버렸다. 그래,누워 잠이나 자라.네가 할일은 어차피 하나도 없으니까. KUBERIN..... 언젠지 기억도 못할 아득한 옛날 피의 명예를 위해 나는 싸웠었다... 8 "그래,그래서 누가 누군지 모른단 말인가?" 나는 스카를 마뜩찮게 바라보았다. 스카는 발가벗은 시체를 눈앞에 두고 말했다. "알 수 없지.그러나 이 시체를 봐선..아마 서른살 전후이고..변장술에 능하다는 것.그리고 상당히 잘하는 놈이라는 것만 알수 있을 거야." "그러나 동방교국의 놈은 아니지." "아냐.동방교국인은 내 알기로 검은 눈에 검은 머리를 하고 있다고 했는데 이 놈은 금발을 하고 있으니 당연히 아니지.아마 잉글램일 가능성이 커." 우리들은 한쌍의 변태들 처럼 벌거벗은 시체를 이리저리 뒤집으면서 지껄이고 있는 차였다.스카는 턱을 괴고 앉아서 묵묵히 그 시체를 바라보다 말고 슬쩍 물 었다. "공작을 지키는 건 누구야?" "지금은 린이 지키고 있어." "믿을 만 한가?" "청색아인족을 믿지 못하면 믿을 만한 종족이란 이 세상에서 절멸한 거야." "쳇..엘프가 있잖아?" "엘프는 힘이 없어서 이리저리 흔들린다구." 그는 아무래도 질투를 하는 것같다. 덩치에 어울리지않게 머리를 벅벅 긁더니만 나를 슬쩍 바라보았다.그 눈초리가 어쩐지 버려진 강아지 같아서 나는 그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여 주었다. "걱정하지마.스카.언제든 널 휴대용난로로 써줄테니까 그렇게 실망할 것은 없다 구." "우,,.웃기지마!" 그는 얼굴이 벌개져서 날 밀치곤 갑자기 나에게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근데 말이지..넌 왜 남자애들을 난로로 삼는 거야? 여자가 더 좋지않아?" 나는 그 어리석은 질문에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를 불쌍하게 바라보았다. 대체 이 녀석은 머리가 없는 것인가? 혹은 고자가 아닐까? 생각해 보면 이 녀석에게 여자가 있다는 소린 들은 적이 없었다. "이봐,스카.넌 여자를 품에 안고..그것도 밤에.아무렇지도 않게 잘 수 있어?" 내가 말하자 그의 얼굴이 머슥해졌다. "그..글쎄..." "내가 난로로 남자애들을 쓰는 건 당연하잖냐! 여자애를 안고 온기를 느낄 새가 어딨어? 당연 밤을 새고 말지!" 스카는 한동안 내 말을 생각하고 있었다. 나의 심오한 말을 못 알아듣는 건가,이녀석이 순진한 건가? 나이 마흔에 뭐가 그리도 순진한 지 멍하니 날 바라보고 있었다. "저..정말 그 이유야? 단지 그 이유? 여자를 안으면.....를 하기 때문에 남자를 안고 잔다는 거야?" ....를 한다는 게 대체 무슨 의미인지 알고나 떠드는 건가? 나는 그를 아무래도 의심스레 바라보았다. 하여간 지금 현재 우리들은 거의 한 쌍의 변태였다. 텅 빈 방에 침대위엔 벌거벗은 시체 한 구 올려놓고 둘이서 이리저리 시체를 주 무르면서 이딴 이야기나 하고 있다니. 나는 이야기를 멈추고 아직도 여장을 하고 있는 목을 주워들어서 대야에 담겨진 물에 넣고 공손히(?) 닦아냈다.내가 하고 있는 동안 물이 사방으로 튀었고 내가 팔길이가 짧은 탓에 물에 젖자 보다 못한 스카가 내 손에서 목을 빼앗아 들고는 자신이 닦아내기 시작했다. 오오, 이 점이 내가 스카를 좋아하는 점이지. 내가 흐뭇하게 자리에 앉아서 스카가 목을 닦아내고 있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스카는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서 목을 탁자위에 올려놓았다. 목의 얼굴을 보건데 화장을 지워내고도 어느정도는 상당히 잘생긴 얼굴이었다. 금발이 원래 머리칼이고 살결은 희며 눈은 파랗다.눈을 까집어 보고 있는 동안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들어선 것이 기생오라비인 것은 잘 알고 있었다.그와 기사대장인 검은 갑주의 사나이-이때는 물론 갑주는 입고 있지않았다-가 들어왔던 것이다. 그들은 우리들이 벌이고 있는 일을 약간 눈쌀을 찌푸리면서 바라보고 있었는데 기생오라비의 얼굴은 파랗게 변했다. 의외로 순진한 놈일 수도 있다고 나는 관대하게 생각했다. "그래서,이 암살자 놈으로 끝난 거요?" 검은 턱수염의 묵직한 얼굴의 사내가 나에게 물었다. "아냐.이 놈은 동방교국의 그 잉어대가리가 아냐.그러니까 이건 다른 암살자 지." "..잉어대가리?" 턱수염이 턱수염을 만지면서 되풀이했다. 나는 그에게 길게 설명해줄 생각은 없었지만 약간 신경이 쓰였다.그러고 보니 그의 냄새를 기억해 두지않았던 것이다.기생오라비와 그를 번갈아 보다가 나는 그에게 다가갔다. "기생오라비." "에?" 기생오라비가 나를 다시 바라보았다.나는 그의 옷깃을 쥐고 목에 코를 대고 냄 새를 맡았다.이녀석은 향수를 쓰는 지라 확실한 냄새가 나지않았기에 나는 손톱 을 뻗어서 그녀석의 목줄기를 가볍게 쓸었다. "앗" 그가 놀라서-이제야 놀라다니 반응이 느리군-소스라쳤지만 나는 그녀석의 옷자 락을 쥐고 그 목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할작거리면서 맛을 보았다. 의외로 맛이 좋군 "뭐야!" 뒤 늦게 그가 얼굴이 벌개져서 나를 밀쳐냈고 스카는 나의 그런 모습을 처음 본 것이 아니기에 무표정했다.턱수염은 턱이 빠질 정도로 입을 벌리고 그 모습을 보았는데 나는 이번엔 시선을 턱수염으로 돌렸다. "무슨 짓이야!" 기생오라비가 떠들자 내가 점잖게 말해주었다. "전에 말했듯이 말이지.네 냄새를 기억해 두는 것 뿐이다.난 여자를 좋아하니까 남자와 ..하는 취미는 없다구." 기생오라비는 얼굴이 벌건 채 마치 내가 그를 ....한 것처럼 노려보았다.그 얼 굴에 깃든 원망과 기타등등의 감정과 증오 비슷한 감정이 떠오른 그 얼굴을 무 시하고 나는 어깨만 으슥해 보였다. "몇몇은 했는데 몇몇은 아직 못했어." 나는 시선을 턱수염에게 돌렸고 턱수염은 아주 유연한 자세로 나에게 손을 내밀 었다. 나는 그 손등에 가볍게 손톱을 그어서 핏방울을 맛보았다.이 녀석도 맛이 좋은 것을 보니 아주 건강한 것같았다. "이제 된 거요?" 턱수염이 여유있게 말했다. 기생오라비가 갑자기 정색을 하고 나에게 주먹을 쥐어 보였다. "나에게 대체 무슨 감정이라도 있는 거요! 나도 저렇게 손을 했으면 되잖아!" 그가 벌건 얼굴로 떠들어 대자 나는 아 그렇군 하고 뒤늦게 생각했다. "그렇군.하지만 이 턱수염은 키가 너무 커서 내가 발돋음을 해도 목덜미 냄새를 맡을 순 없잖아?" 기생오라비가 바들 바들 떨 무렵 턱수염이 진지한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쿠베린,그럼 어쩔 거요?내 생각으로는 성내의 수상한 자를 좀 살펴볼까 하는 데" "살펴봐도 모를 걸.눈만 부릅뜨고 있다면 뭘 하겠어? 머릴 쓰지도 않는걸." 내가 그렇게 대꾸할 때에 스카가 말했다. "음..그럼 일단 공작옆에 있는게 좋을 거 같은데.나는 동방교국녀석을 좀 알아 볼테니." 그렇게 대꾸하고 나는 턱수염을 보고 히죽 웃었다. "그럼,넌 암호라도 생각하고 있는 게 어때?" 공작의 사실은 내가 스카와 이상한 짓을 하던 방의 윗방이었다.이 그의 사실은 그가 머물때를 대비해서 황성의 한 귀퉁이를 마련해 준 것으로서 화려하고 제법 쓸만했다.시녀들 약 이십명과 하인들 오십여명이 시중을 들고 있었고 공작 자신 이 데려온 하인들과 하녀들이 주변에 포진해 있었다.물론 그가 암살자로부터 위 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의 기사들이 눈을 부릅뜨고 있긴 하지만 일 개 병사들은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의 방문앞에 닿자 경비를 서고있던 병사들이 나와 턱수염,기생오라비를 보고 창날을 비켜 주었다.나는 그들의 태도를 보면서 턱수염에게 점잖게 충고했다. "이봐,턱수염.봤지? 그저 얼굴만 비슷하면 그냥 통과시켜 주잖아? 이래선 안돼 지." "그럼?" "암호를 대도록 하는 게 어떻냐고 아까 말했었잖아?" "그렇게 하지." 턱수염은 무뚝뚝하게 대꾸했다.기생오라비가 뭐라 하려다 입을 도로 닫았다. 내가 방으로 들어서자 공작은 나를 마뜩찮은 표정으로,아니 거의 공포에 가까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내가 곁에 가기만 해도 싫은 것이 확실해 보이는 얼굴이었 다.그는 막 스프를 먹으면서 속을 달래고 있던 차였는데 내가 우아한 태도로 걸 어들어와 그의 침대에 앉은 것을 보고는 매우 무서워했다. 턱수염이 걱정스런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좀 어떠십니까?" "아아.." 공작은 대꾸도 없이 날 노려보고는 자신의 뒤에서 살기를 풀풀 날리고 있는 린 을 가리켜 보였다. "이 퍼런 녀석을 어떻게 멀리 치울 수 없어? 살기를 풀풀날리고 있잖아?" "오.살기라는 것을 알아본다니 기쁘네." 나는 그의 어깨를 툭툭 쳐주었다. 공작이 나를 매섭게 노려보는 것을 나는 미소로 관대히 넘겼다. "자네를 지키기 위해서 내가 얼마나 힘을 쓰고 있는 지 알아주어 기뻐." "제길! 내 머리통을 날린 게 누군데 그렇게 떠들고 있는 거야!" 그가 악을 지르자 옆에 있던 의원이 급히 그의 무릎을 누르곤 진정하라고 말했 다.나는 의원을 보면서 경쾌하게 말해주었다. "이 녀석은 지금 엄살을 피우고 있는 거니 괜찮아." 의원은 쓴웃음을 짓고는 조용히 물러나 앉았다. 아.이 의원에 대해서 잠시 잊고 있었군. 이 의원은 내가 예전에 보았던-왕년 선대 공작의 의사였던- 바로 그 자로 나이 는 오십줄에 들어서 있었다.침착해 보이고 일단 나에게 공손한 태도를 보이고 있기에 나도 호감을 가졌다.그는 나를 알고 있는 모양으로 나를 바라보는 눈길 이 케엘과 닮아있었다. "언제쯤 일어나실 수 있겠소?" 기생오라비가 의원에게 물었다.그의 얼굴에는 애써 나를 무시하려는 표정이 담 겨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를 다시 놀리고 싶어졌지만 참았다.나 같은 우월한 종 족은 때때로 가냘픈 종족에게 동정심을 보여주어야 했다. "아., 움직이시는데 어려움은 없을겁니다.그러니 내일 영지로 출발하셔도.." 그런 말을 하고 있는 동안 갑자기 급히 경비를 서던 기사가 달려들어왔다. 그는 턱수염에게 목례를 하더니 문가에서 고개를 숙이고 급히 외쳤다. "황제폐하께서 납시셨습니다! 병문안이시랍니다!" 예전 부터 난 생각해 왔었다. 우리종족처럼 강한 자가 왕이 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대체 인간세상에는 뭐가 문 제가 있겠는가? 우리들은 어릴때 부터 무수히 전투를 치르고 싸움을 치르며 왕위를 쟁탈한다.그 리고 일단 쟁탈하고 나서는 왕자로서의 위엄을 갖추고 다른 자들에게 존경심을 얻는다.그러나 결코 왕의 자식이 왕이 되는 법이란 정해져 있지도 않고 정해져 있을 법 하지도 않다.왜냐면 강자만이 모든 것을 가질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종족이 인간들 보다 수가 적으니 골치아픈 일도 없다. 하지만 말이다, 대체 인간들은 왜 그리도 애를 많이 낳는 것이냐! 하나만 낳으면 될 거 아닌가.하나만! 황제가 강하면 나라가 평안한 법이다. 황제가 비슬비슬 물먹은 종이마냥 흐느적거리면 되는 일이 없다. 매양 충성 충성을 외치면서 다른 자들-남들보다 의리와 명예욕이 강한 자들을 자극해서 죽게 만든다.그러니 세상엔 선인이 적을 밖에. 선인이 되고자 하는 인간들이란 결국 의리와 명예욕이 강한 자들인 까닭에 전쟁 이든 싸움이든 일어나면 그런 자들이 언제나 먼저 죽어버린다.그리고 세상엔 악 인들과 교활해 빠진 겁쟁이들만이 살아남아 날뛰게 된다. 나의 이런 고견으로 보아서는 분명히 황제란 강력해야 하고 강력하지 못할 바엔 최소한 없어져버리는 게 나은 일이건만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되었는고? 내 눈앞에서 위선적인 미소를 짓고 있는 저 쌍판이라니! "몸은 좀 어떤가?" 황제란 녀석은 몸이 가늘고 희며 아무리 보아도 여자같이 생겼지만 만약 진짜 여자가 듣는 다면 울화가 치밀 듯한 쌍판을 하고 있는 그런 놈이었다.게다가 어 울리지않게 얼굴에는 분칠을 하고 있다.이 나라의 황족은 연약한 게 자랑인지 연약해 보이려고 안간힘을 쓰는 건지 흰 손을 보이기 위해 분칠을 쌍판이나 손 등에 처덕거리고 바르고 있다.그리고는 우아한 척 꽃향기를 뿌리면서 심지어 조 금 심한 녀석들은 가는 걸음걸음마다 꽃잎을 뿌리기도 한다.오호 통재라! 그 녀석을 뒤에서 부축하고 있는 녀석들은 모두 얼굴에 하얀 분칠을 하고 말라 비틀어질 정도로 우아한 척을 하고 있는 긴 장의를 입고 있었다.흰 비단장의는 움직이기도 불편하게 길게 바닥을 끌어 온 성안의 먼지란 먼지는 다 쓸어담고 있는 듯 보였다.손가락에는 짐승 눈알만한-인간의 눈알보다 크다는 의미다-보석 반지를 서너개씩 끼고 목에는 진주,마노,홍옥으로 장식된 목걸이를 주렁주렁 달 았다.그런 거 하나만 있어도 내 예쁜 살결에는 우아하게 어울릴 텐데 저런 놈이 끼고 있으니 보석이 불쌍할 지경이다.차라리 저 홍옥을 우리 린에게 끼워준다면 훨신 어울릴 것이라고 생각하여 내가 린을 돌아보자 린은 무표정한 채로 황제를 묵묵히 쏘아보고 있었다. 저 멋진 얼굴! 좋았어! 과연 나의 린이다! 그러나 다른 놈들은 이 당장에 말라 비틀어져 고꾸라질 것같은 얼굴을 하고 있 는 황제를 황송스러운 듯이,당장에 바닥에 널부러져 발이라도 핥을 듯 감격하고 있었다.내가 아마 말라 비틀어진 오이쪼가리 같은 면상이라고 말했다면 그 자리 에서 얻어맞아 죽을 지도 모른다.그정도로 제법 엄숙한 분위기가 되어있었다. 내가 이렇게 지극히 타당한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공작 에메스는 정중하게 침 대에서 일어나서 부축을 받고 황제의 앞에서 가볍게 고개를 숙여보였다.황제는 말라 비틀어진 작대기 같은 손을 들어서 우아하게 흔들었다.그 손가락 마디마디 에서 보석들이 번쩍 번적 빛을 발했다. "아니.아니.일어나지 마시게." 황제는 그렇게 말하더니 부축하는 두명의 시종을 이끌고 가서 의자에 앉았다.공 작은 황송하게 그 앞에 서있었는데 아직 서 있는 게 무리인듯 얼굴이 창백해지 고 식은 땀이 주르르 흐르기 시작했다.나는 이 안스러운 놈을 침대에 눕히는 게 옳다고 생각했지만 황제란 놈은 아무 생각없는 듯 흥미의 눈길을 린에게 돌렸 다. "아인족인가? 드문데.본 적없는 종족이야.푸른 피부라니." 린의 눈썹이 가볍게 휘어졌다가 우아하게 내려왔다. 에메스는 쓴웃음을 짓고는 조용히 말했다. "저의 호위랍니다." 놀고 있네.저 녀석이 네거냐? 내거지. 내가 발작할 까봐 두려웠는지 기생오라비가 공작의 뒤로 가볍게 다가서면서 내 시야를 막았다.그리고 턱수염은 언제 왔는지 내 옆에 와서 내 옆구리를 쿡쿡 찌 르면서 어서 일어나라고 눈으로 말하고 있었다. 아.그렇지. 나는 그동안 에메스가 누운 침대 위에 반쯤 누운채 기대어 앉아있었다.황제가 나와 린을 흘긋 거리고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그리고 황제보다도 그를 부 축하고 선 두 시종이 나를 노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무례하군!" 공작이 비로소 아직도 내가 누워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사색이 되었다. "쿠베린!" 나는 그에게 가볍게 손을 들어주고는 일어나 앉았다. 그래,마음 넓은 내가 참지.저런 말라비틀어진 오이같은 녀석에게 고개를 그토록 숙이고 싶다면 숙이라고 해.그러나 난 저놈에게 그다지 감정이 좋지않아. 내가 앉자 턱수염이 다시 내 엉덩이를 툭툭 쳤다. 이젠 일어서란 것이겠지. 나는 억지로 일어나 서서 창가로 갔다.그리고는 창가에 걸터앉았는데 그 덕분에 에메스의 얼굴과 기생오라비의 얼굴이 굳어졌다. 황제는 나와 린을 번갈아 보면서 흥미진진한 듯 에메스에게 물었다. "누군가? 자네의 시종으로는 보이지않아." 당연하지.내가 왜 저놈의 시종이란 말인가. 저놈은 내 애완동물의 자식인데. "네..먼 친..친척으로,.그러니까 어머님쪽의 친척으로..약간 버릇이 없습니다. 왜냐면..왜냐면..오랫동안 시골에서 커서 말입니다." 에메스가 땀을 흘리면서 말했다. 나는 창가에 걸터 앉아서 느긋하게 그가 변명하는 것을 바라보았다. "음..그랬군.용서하네." 뭘 용서해? 황제는 시선을 다시 에메스에게로 돌렸다. "이런 일을 당하게 해서 미안하게 되었네.에메스.나는 이렇게 자네가 곤란해 질 줄은 몰랐었네." 놀고 있네. 예상하던 대로가 아닌가. 나는 흐 하고 코웃음을 쳤다. 황제의 시종이 날 노려보았고 기생오라비가 사색이 된 채 나를 다시 돌아보았지 만 나는 허공을 바라보면서 코웃음을 치고 있었다. "음..진정 짐의 주변에는 믿을 만한 자가 없어.자네라면 알수 있을 것이야.자네 의 선친은 정말 나를 귀여워 해주었지.게다가..내 목숨도 몇번이나 구해주었 고." 오이가 먼산 바라보듯이 보고 있어서 나는 점점 심사가 뒤틀리기 시작했다.그러 나 내가 뒤틀리기도 전에 감격한 에메스가 진지한 어투로 말했다. "걱정마십시오.폐하.제가 아버님의 뒤를 이어서 폐하를 충심으로 보필할 것입니 다!" 그 감격한 목소리라니. 눈물이 그렁하게 나올 듯한 그 얼굴. 기생오라비와 턱수염이 그렇게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는 동안 황제가 에메스의 어깨를 잡고 가볍게 토닥였다. "자네만 믿겠네." 그는 한숨을 내 쉬더니 말했다. "이번에 또 후궁을 들이라는 청이 들어왔다네." 나는 그 느물거리는 눈을 보면서 갑자기 깨달았다. 뭐야! 이 황제란 놈! 남색가야! 재수없다! 에메스의 어깨를 은근히 잡고 은근히 주무르고 있으며 은근히 눈길을 던지고 있 었다.눈가가 스스스 붉어지고 있었다. 으윽,메스꺼워! 에메스는 감격한 얼굴로 순진 무구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황제는 으음 하고 기생오라비를 흘긋 본다.그 눈길에도 어딘가 기이한...끈적임.. 기생오라비는 진지한 얼굴로 자기 주인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어이.기생오라비,넌 지금 눈으로 먹혔어! 턱수염이 날 흘긋 보았다. 내가 히죽히죽 웃고 있는 것을 눈치 챈 거 같은데 이 눈치빠른 깜장 기사도 분 위기를 눈치챈 듯하다.그의 미간에도 어딘가 모를 불쾌감이 자리잡아 있었다. "오늘 밤.내 방에 와서 한 잔 하세나." 황제가 드디어 저 말을 내뱉았다. 에메스가 감격해서 막 승락하려는 그 순간 턱수염이 낮게 말했다. "아직 몸이 좋지않으십니다.폐하.황공하옵게도 주군께선 안정을 취해야 하고... 술은 금물이라 의원이 말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그를 흘긋 보자 턱수염은 어느샌지 시선을 의원에게 돌리고 있었다.온화한 의원은 공손한 표정과 함께 고개를 숙이면서 그렇습니다 하고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거짓말을 했다. "머리의 상처에는 술은 절대 금물입니다.안정하셔야 하지요." 에메스가 어리둥절해서 그를 돌아보았다. 아까 까지만 해도 내일 출발해도 된다고 해놓고 왠 절대안정이냐 하고 묻고싶은 얼굴이었지만 턱수염이 진지한 시선을 보내자 입을 다물어 버렸다. "정말 황공합니다." 에메스가 말했다.기생오라비는 걱정스런 기색을 하고는 공작을 돌아보았는데 황 제는 노골적으로 실망한 얼굴을 하더니만 알았다 하고 말했다. "그럼...이번에 궁정에서 열릴 황녀 엘란트라의 약혼식에는 오겠지?" "네.물론입니다." "앞으로 넉달후에 열리니...와주길 바라네.엘란트라는 자네와는 아주 친한 사이 었지..." "네." 엘란트라황녀는 내친왕으로 황제의 누이 동생이었다.올해 17살인데 매우 미인이 라는 설이 파다하지만 내 생각으로는 황제를 닮았다면 결코 미인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같았다. 황제는 그 느끼한 시선을 던지면서 일어섰는데 갑자기 시선을 나와 린에게로 돌 렸다. "이름은 뭔가?" 콱 밟아 줄까.저 자식! "쿠베린입니다." 나는 생글 생글 웃으면서 나의 매력적인 미소를 한껏 보여주었다. 황제가 따라서 웃는다. 삶아 터진 호박같은 놈. "그래.에메스와는 그다지 닮은 데는 없군." "네,그렇지요.아무래도 외가쪽이니까." 놀고있네! 황제는 입맛을 다시는 맹수...라기 보다는 되새김질 하는 소 같은 얼굴을 하고 는 느긋하게 걸었다.그 옷자락이 방안의 먼지를 다 끌어모아 그가 걷는 걸음걸 음마다 방안의 바닥이 깨끗하게 윤기를 드러내고 있었다. "아.쿠베린.잠시 내 말동무나 해주겠나?" 생각난 듯이 황제가 돌아보며 나에게 물었다. 나는 히죽이 웃어보였다. 간이 배 밖으로 튀어 나온 거 아닐까.저 황제 놈. "곤란합니다.에메스의 드문 혈족이니 그의 옆에서 시중을 들어줘야죠." "호오.잠시도 안된단 말인가?" "에메스는 아직 어려서 말을 잘 듣지않거든요.내가 잘 돌봐 주어야죠." 에메스는 황당한 표정이었지만 황제는 그것을 어줍잖게도 애교로 받아 들였는 지 하하 웃고는 나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리고는 정말 나갔다. "대체!" 에메스가 나에게 울화를 터뜨리려는 순간 나는 기생오라비에게 윙크를 던졌다. "기생오라비.너,황제가 매우 마음에 들어하는 거 같더군." "무슨 말?" 생긴 것과 달리 이녀석은 순진한 모양이다 하고 내가 생각하려는 동안 턱수염이 낮게 말했다. "주군께서는 되도록 황제폐하와 단 둘이 있는 것을 피하시는 게 옳을 듯하군 요." "왜? 만약 밀지라도 내려주시면 어쩌라구?" "그때에도 누군가 수행원을 반드시.." 턱수염이 말하기 곤란한 듯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배를 잡고 웃었고 에메스와 기생오라비는 어리둥절한 얼굴,그리고 의원은 온화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턱수염은 곤란한 얼굴로 턱수염을 자꾸만 어루만지 고만 있었다. KUBERIN...... 언젠지 기억도 못할 아득한 옛날 피의 명예를 위해 나는 싸웠었다... 9 피리소리가 들려온다. 구슬픈 피리소리. 나의 예민한 귀에나 들릴 법한 피리소리. 나는 숲의 한 구석을 바라보았다.내옆에 있던 린이 귀를 쫑긋 거렸다. 내가 그를 돌아보자 린이 고개를 살짝 숙여 들린다는 표시를 했다. 우리들은 막 숲을 지나고 있었다. 올때와는 달리 귀향은 천천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공작은 아직도 얼굴이 창백했고 타고 가다가 잠시 쉬거나 마차에 눕거나를 반복 했다.기생오라비는 나를 원망스레 바라보았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가 아팠기에 그를 호위하기는 더 쉬워진 셈이었다.나는 숲을 지나면서 감각을 곤두세우고 있 었다.숲에서 암살자가 튀어나오는 일이 왕왕있었기때문이다. 내 두번째 추측인 화장실은 물론 빗나갔다. 그러나 아직 미지의 암살자가 있는데 안심할 수는 없는 일인지라 나는 아직도 긴장을 늦출수 없다고 고견을 들려주었다.다행히도 턱수염은 내 말을 잘 따라주 었고 다른 놈들도 궁시렁 거리면서도 내 말을 잘들어주었다. 우리들은 일렬로 가고 있었고, 문장의 깃발을 든 기수를 한걸음 뒤로 하고 정찰 을 겸한 선두는 본 일행과 다섯걸음 정도 앞서 있었다.모두 기마이기 때문에 기 동력은 매우 빠른 편이었다. 피리소리가 내 귀에 들려온 것은 그 때였다. 그 우울한 음색으로 숲안의 정령들이 울고 있었다.숲의 공기는 침울하게 가라앉 아있었지만 음침하다기 보단 정화된 듯한 고결한 소리였다. 나는 이 비슷한 음색을 펼쳐내는 녀석을 하나 알고 있었다.그리고 그 놈은 나와 비슷한 직업의 소유자이기때문에 나는 그를 기꺼이 만날 생각을 했다. "린,공작옆에 있어라." "네." 내가 말을 몰고 홱 대열을 이탈하자 턱수염이 놀라 외쳤다. "무슨 일이오?" "아! 잠깐 돌아보고 올테니 계속 전진해!" "우리 일행을 따라 잡을 수가 있겠소?" 옆에서 덥수룩이가 쓸데없는 소리를 하면서 다시 물었고 나는 그 일고의 가치조 차 없는 말을 무시하고 달렸다. 어느 정도 달렸을까. 말발굽 소리를 깨달았는지 피리소리는 멈추어있었다. 나는 청각을 곤두세우고 냄새를 맡기위해 정지했다. 냄새. 내가 잘 아는 그 녀석의 냄새. 슬픔의 냄새. 나는 말에서 내려서 냄새에게로 다가갔다. 그 녀석은 바위 위에 걸터앉아있었다. 그녀석의 발 밑으로는 작은 시내가 흐르고 있었고 약간의 희미한 빛이 느껴지는 약한 정령들이 그의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그의 머리 위로는 푸른 잎사귀에 비추어서 낮의 햇살이 청명하게 흔들리고 있었 고 밝은 그늘,밤색의 그늘이 그 주변의 시냇가를 덮어 온화한 지붕을 만들어주 었다. "쿠베린..?"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낮은 허스키 보이스는 변함이 없다. 그의 은회색머리칼이 허리까지 치렁치렁하게 흔들리고 그 은빛에 햇빛이 반사되 어 희게도 보였다.푸른 빛을 띈 머리칼에 어울리는 금빛에 가까운 갈색눈이 약 간 눈이 부신 듯 나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낡아빠진 가죽 조끼와 한쌍의 장화가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주인의 무심함과 어 울려 멀건히 나를 바라보고 있다.허리춤에는 단검과 여행자들이 흔히 가질 만한 검과 보따리가 있었고 약간 길어서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손가락에는 손으로 만 든 듯한 조악한 피리가 쥐어져 있었다. 나는 그 피리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그 녀석의 얼굴을 다시 보았다. 놀랄 만큼 온화해진 얼굴이었다. 60년전을 생각한다면 이 녀석이 이렇게 온후한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그가 일어서서 나에게 다가와 손을 가볍게 뻗고는 포옹했다. "오랜만이야." "그렇군.너는 많이 나아진 얼굴인데?" 그가 히죽 웃으면서 제법 인간으로는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 보였다. "너는 언제나 애 얼굴을 하고 뭘 할 참이야?" "애 얼굴이 훨씬 움직이기에 편리하거든." 내가 대꾸하자 그는 바위위에 다시 걸터앉았다. "널 여기서 볼 줄은 몰랐는데.빙원으로 갔다는 소식을 얼마전 들은 거 같았는 데." "돌아온 지 얼마 안돼." "그래.이 젠 어디로 갈 참이냐? 별 일없다면 내 집에 가서 놀다 갈려냐?" "아냐,넌 떠들썩 한 것을 좋아하잖아? 나는 싫어." "그렇겠지.우울해서 물에 빠져 죽을 놈." 내가 빈정거리자 그는 피식 웃고는 머리를 치켜 올렸다. "그 보다 간단히 묻자.웨인." "뭘?" "동방교국에 너 간적이 있었다고 했지?" "음..한 17년 쯤 있었던 거 같아." "거기서 암살자 훈이란 놈을 혹여 봤냐?" "아아..암살자 말이군.지금 하는 일이 그거?" "그래.서론 빼고 본론말해." "봤어.그러나 그 놈이 그 놈이 아닐거야.암살자 훈의 가계는 꽤나 길어.그놈들 은 대를 이어서 훈이란 이름으로 계속해서 일을 하기때문에 그 놈이 그놈이 아 닐 수 있거든." "흐음.솜씨는 어때?" "월등하지.인간으로는 믿어지지않을 정도야.한 가지 흠이 있다면 너무 오만하다 는 것이지." "오만?" "그래.놈들은 한 번 실패하면 못견뎌한다고 들었어.몇십년을 걸쳐서 내내 덤빈 다고 하더군,." "그럼 동방교국에 가서 그 일족을 모조리 참살할 수 밖엔 없다는 건가?" 웨인은 날 보고 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이 자식,상당히 웃음이 늘었군. "여전히 대단하게 나가는 군.쿠베린.일족을 참살한다니.너 진심이야?" "난 언제나 진지하다구." 웨인은 날 한동안 바라보더니 턱을 괴고는 생각에 잠겼다. "음..그럼 이렇게 하지." "뭘?" "동방교국의 녀석들은 선금을 받는 일이 없대.그들은 일을 다 끝낸다음에 돈을 받아." "그래서?" "동방교국의 놈들을 죽이는 거 보단 의뢰인을 죽여버리는게 빠르지않아?" 나는 턱을 만졌다. "그렇군." "의뢰인이 누군지 안다면 그 의뢰인을 죽여버려.그게 나아." 나는 생각에 잠겼다.십중 팔구 그 놈,화이딘스 대공이지만 그 놈을 내가 몸소 죽이러 가는 것도 번거롭다.게다가 그놈의 영지는 북쪽으로 상당히 추운 곳이 아닌가.난 추운 곳은 질색이었다. "그건 그렇고 넌 이제 어디로 가냐?" "음..이 숲이 마음에 들어서 며칠 지내다가..." 그는 먼 곳을 바라보았다. "되도록 북쪽으로 가볼까 해." "추운데는 뭐하러?" "그냥.." 그는 피리를 입에 댔다. 웨인이 이런 자세를 취할 때에는 말을 그만하겠다는 의미다. 나는 이 녀석이 약간 불쌍하다는 기분도 가지고 있긴 하지만 동정할 마음은 없 다.울고 다니는 꼴을 보는 것도 하루 이틀이다.이 놈처럼 거의 백년간을 이러고 돌아다니면 동정이고 뭐고 할 마음도 생기지않는다.세상천지에 불행한 놈이 저 밖에 없단 말이냐.이 몸도 먼 과거와 가까운 과거를 주욱 돌이켜 보면 상당히 불행하단 말이다. "잘 있어라.꽁지빠진 들개녀석아." 내가 몸을 돌리자 그가 피식 하고 피리소리를 냈다. 확실히 웃음은 늘었다. 아마 죽어갈 때가 가깝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기분이 차츰 더러워 지기 시작했다. 일행들은 막 노숙을 시작하고 있었다.전과 같은 자세와 모습으로 모닥불을 중심 으로 거의 맴을 도는 풍뎅이 꼭지처럼 원을 그리고 각자 누웠다.에메스는 그 원 안에 잠자리에 누워있었는데 그의 주변으로 세명의 기사가 누웠다.아직 봄이라 해도 밤이 되면 살벌하게 추웠기에 나는 모닥불이 가까이 있는 편을 택하고 있 었다. "쿠베린!" 덥수룩이가 내게 구워진 고깃덩이를 내밀었다. 나는 그 손에서 고기를 받아들고는 에메스의 모포속으로 기어들어갔다.에메스는 짜증섞인 소리를 냈지만 아무말도 하지는 않았다.하면 때려줄 생각이었던 나는 고기를 질겅거리고 씹으면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이 쏟아질 듯한 구름한 점 없는 .... 에? 무언가가 지금 막 움직였다. 그러나 뭐가 움직였는지는 모른다. 그리고 어디서 움직였는지도 모른다. 그저 움직임만이 내 감각에 포착되었을 뿐이었다. 뒤도 아니고 옆도 아니며 위도 아닌데..그렇다면 밑밖에는 없다는 결론이 났다. 나는 에메스와 나란히 누운 모포자락을 걷어보았다.아무런 특징도 없는 흑색의 땅이 거기에 있었다.흙 한줌을 들어서 냄새를 맡아보았다.물 내음이 약간 났다. 땅은 파기 쉬운 재질의 검은 흙이었다.게다가 제법 물기도 있어 굳기도 잘 할 듯 하다.그리고 ..검도 잘 꽂힐 거 같았다. 내가 움직이자 린이 나의 움직임을 주시했다.나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고 린은 에메스의 장검을 나에게 건네주었다.에메스 녀석은 그냥 자고 있었다. 피로한 듯 창백한 뺨이..안스러운..아니지,동정해선 안돼. 나는 에메스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고 장검을 든 다음에 생각했다. 이 장검을 푸욱 땅밑으로 꽂는다면 어느정도나 박혀들 것인가. 이 밑에 거대한 바위가 없다는데에 돈을 걸어도 좋아! 나는 잘 가늠한 다음에 장검의 검자루를 들고 사정없이, 아주 야멸차게 땅에 들 이 꽂았다.퍼억 하고 그다지 큰 소리도 나지않고 검이 땅속으로 찔러들어갔다. 파악 하고 한번 더 깊숙히 자루만 남기고 밀어넣자 무언가 감촉이 왔다. 나는 검자루를 쥐고 좌악 들이뽑았다. 흐음..피 냄새. 검끝에는 피냄새가 묻어있었다. 그럼 확인의 의미에서 한 번 더! 나는 주저않고 다시 검을 땅에 치박았다. 그러자 나의 동작을 주시하고 있던 턱수염과 기생오라비가 내 옆으로 조심스레 다가왔다.나는 그들에게 움직이지말라고 손짓했는데 놈들은 눈치없이 다가오더 니 조용히 물었다. "뭐가 있나요?" "벌레다." 나는 검자루를 한번 다시 뽑아냈다. 이번에도 신선한 피 내음이 났다.턱수염이 내 눈짓을 받고 자신도 검을 들어서 콰악 땅속에 치박았다.녀석은 힘이 조금 모자라는지 반정도 꽂고는 버벅거려서 내가 그 손을 잡고 꾸욱 눌러주었다.검자루까지 땅속으로 들어가자 마자 턱수염 이 놀란 얼굴로 뭔가 촉감이라도 느꼈는지 나에게 물었다. "뭔가..있군요?" "있지." 나는 검자루를 다시 잡고 주욱 빼올렸다. 무언가 검날에 엉겨붙어있었다.흐른 피가 흙덩이와 엉겨서 지저분해져있었는데 그 신선한 피냄새가 화끈하게 풍겨왔다. "상당히 치명상일 거 같은데." "그런데..대체..어떻게..땅을 파고 오다니!" 어처구니가 없어서 턱수염이 중얼거리고 있는 동안 나는 땅을 파라고 시켰다.병 사들 몇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땅을 파기 시작했고 에메스는 그제서야 깨서 벙벙 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넌 잠이나 자!" 나는 그를 무시하고는 땅을 파는 병사들을 독려했다. 병사들이 허벅지 깊이 만큼 파내려갔을 때 그들이 발견한 것은 구덩이속에 피 범벅이 된 흙을 발견했을 뿐이었다. 턱수염이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그 핏범벅이 된 흙을 한줌 쥐고 냄새를 맡았다. 흥분과 살기와,그리고 좌절감과 고통이 묻어있었다. 이 정도 출혈로 살아남을 수 있는 인간은 얼마되지않는다. 이 놈이 동방교국의 그림자 훈이라고 하는데 나는 돈을 걸 수도 있다.왜냐면 동 방교국의 수법이 아니고는 땅을 파고 이정도로 들어오는 암살자란 드물디 드물 다.게다가 이 피냄새는.... "이정도 출혈이면 죽었어." 턱수염이 말했다. "그럴 거 같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체는 보이지않지만 이 놈은 죽었을 확률이 십중 팔구는 되었다.물론 일이나 이 정도의 확률이 남았지만 어차피 한동안 그놈은 운신할 수 없을 것이다.거의 죽을 정도의 중상이니까. 이 쿠베린님이 호위하고 있다는 것을 간과했던 댓가다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갑자기 암살자를 불러 시키고는 뒤에 앉아있는 그 화이딘스대공이라는 놈이 정말 짜증이 나도록 싫어지기 시작했다. [쿠베린 막간극] 월광 KUBERIN........ 때로는 울음이 치밀어 올라도 격심한 분노가 내 몸을 사로잡아도 나는 변하지 않는다 나는 웃을 수 있다. 혼자 있을 때면 벼라별 생각을 다하게 된다. 오래전 내가 무엇을 했었던가,내가 처음 이 곳 엘리야에 왔을 때라든가.혹은 얼 어죽어가는 고양이와 나를 착각한 마미의 일같은 거 말이다. 게다가 이렇게 혼자서 맥주를 홀작이고 있다보면 사방이 다 나를 두고 떠나버리 는 것같은 울적함을 느끼기도 한다.이런 울적함은 아마도 나와 같은 고단계의 일족만이 느끼는 감정일 것이다.그리고 한편으로는 절망감과도 같은... 에라! 관두자! 뭔가 재밌는 일은 없냐? 나는 지금 침대 위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한 편에는 가빈이 또아리를 틀고 내 옆에 비비고 누워있다.그리고 한 쪽 에는 린이 양순하게 고른 숨소리를 내고 자고있었다. 지금은 밤이었다.그리고 보름달이 떠있다. 나는 창가를 멀건히 바라보면서 나도 웨인처럼 울부짖어볼까 하고 생각했다.그 러나 그런 짓은 나와 같은 고단계의 일족,나같은 우아한 존재에게는 전혀 어울 리지않는 태도이다.물론 나는 여러종족의 여러가지 특성에 대해선 나름대로 존 중을 하고 있는 편이지만 저 웨인 녀석의 일족인 늑대인간들은 도저히 봐줄 수 가 없는 일면이 있다. 왜 보름달을 보고 미치는 것인가? 저토록 아름다운 달을 바라보면서 말이다. 아마도 그것은 아름다운 것을 감상할 줄 모르는 꽁지빠진 들개일족의 비애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동안 나는 늑대놈들이 둥근 것만 보면 다 변신하는 게 아닌가 하고 의심도 했 었다.예를 들자면 내가 지금 쥐고 있는 맥주잔의 둥근 잔을 보고 발작을 일으킨 다든가,혹은 아리따운 아가씨의 둥근 엉덩이를 바라보면서 발작한다든가,혹은 깨진 달걀 노른자를 보고 발작한다든가-그 변신과정은 내가 생각하기엔 어디까 지나 발작이지,그건 변신이라 부를 수가 없다-한다고 하면 그 얼마나 비극적인 사항인 것이냐... 물론 그런 일은 없다.아무리 우아함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늑대일족-웨어울프족 속이라 해도 그렇지는 않다고 한다.웨인이란 녀석은 그 늑대족속인 주제에 어줍 잖게 우아함을 추구한답시고 피리를 불면서 떠돌아다닌다.갑자기 그놈 생각이 난 이유는 오늘 밤 이렇게 보름달이 뜰 때면 그 자식이 또 발작을 일으켜 이번 에는 그놈의 별로 든 것도 없는 머리통을 어딘가의 거름통에라도 들이박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군. 며칠 전 웨인녀석의 처량맞은 그 꼬락서니를 보고 나서 그 여파가 이리도 오래 가는군.나도 지나치게 섬세해져 버렸어. 음..고만하자,안그래도 우울한 족속을 내가 뭐하러 이 아름다운 달밤 떠올리고 앉아 있는 것인가. "잠이 안와요?" 갑자기 린이 물었다. 녀석은 묻는 말 이외엔 잘 말도 걸지않는데 이번에는 나에게 말을 걸었다.내가 그를 바라보면서 맥주잔을 들어보이자 그는 그것을 빤히 바라보았다. "마실래?" "아뇨." 녀석은 술을 마시지않는다.언제나 단정한 녀석. 갑자기 에메랄드와 같은 색의 눈동자를 들어서 날 바라본다. "왜?" "왜 인간들 사이에 계시죠?" 갑자기 그것을 물었다. 나는 맥주잔을 바닥에 내려놓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굴욕감에 죽음을 결심하고 감옥에 갇혀있던 그 순간이 떠올랐다. 바보스러운 일이었다.나처럼 오래 살다보면 그정도 치욕따위는 아무 것도 아님 을 알텐데. 나는 린의 파란 얼굴을 빤히 보았다. "그리고 왜..어린애 얼굴을 하고 계시는 거죠?" 나는 그가 궁금히 여기는 사항을 알고 있었다.그렇지만 굳이 알려줄 생각도 없 고 날까지 잡아가며 굳이 설명해 줄 건덕지도 없는 일이다. "좋을 대로 하고 있을 뿐인걸." "그 모습이 ..어울리지않아요." "그럼?" 내가 킥 웃었다. "위엄있는..그런 모습이 더..어울리실 거에요." 나는 턱을 괴고 소년의 몸인 내 몸을 내려다 보았다. 일반적인 십대 소년의 몸. 아직은 어리고 부드러운 선을 가진 이 몸. "글쎄다...이게 더 편한 걸." 린은 나를 미심쩍은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가빈이 코를 고는 소리가 들린다. "잠이나 자라.린." "...바라신다면요." "잠이 안오는 거야? 발정기냐?" "아뇨." 나는 휘영청 밝은 달을 가리켜 보였다. "저렇게 밝은 달이 떠있으니까 가슴이 두근거리는 거 아니냐?" "아닙니다.전..쿠베린님이 깨셔서 같이 깬 거 뿐이에요." 그가 가볍게 대답했다. 그의 시선이 창밖을 향했다. 멀리 꿈꾸는 에메랄드의 눈동자가 고향을 향한다.푸른 달빛이 누구보다도 어울 리는 이 고귀한 일족의 소년이 망향가를 부른다. "좋은 달빛이군요." "잠이 안오면 춤이라도 출까?" 그가 킥 웃었다. 처음 웃는 얼굴이었다.아주 귀엽다. "주무세요.또 공작을 보러가야할지도 모르니까요." "그래." 나는 맥주잔을 다시 잡아 들어 반쯤 남은 맥주를 들여다 보았다. 맑고도 투명한 호박색 액체가 출렁이면서 나를 바라본다. 아직 취기따윈 오르지도 않았다. 달빛에 취하는 것은 늑대일족만이 아니다. 나는 달을 바라보면서 지금 저 달을 바라보고 있을 무수한 존재들을 생각했다. 내가 잃은 자들과 내가 앞으로 잃을 자들.그리고... 나는 맥주잔을 기울여 마지막 한모금까지 모조리 마셨다. 내가 앞으로 얻을 자들을 위하여....건배! 제 3화 색마 엘프 KUBERIN....... 비애... 날아가던 독수리가 그 날개를 피로 물들이며 그 넓은 창공을 버리고, 지상에 떨어질 때처럼...... 1 아름다운 여자들이 옷을 벗을 때면 나는 즐거워 진다. 풍요로운 젖가슴이나 둥근 엉덩이때문이 아니고 어딘가 감추어진 보물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 같아서 즐거워 진다. 또 아름다운 여자가 날 사랑한다고 달콤한 소리를 하면 더더욱 즐거워지는데 한 편으로는 그 한정된 생명의 안타까움때문에 더더욱 즐거워진다. 자,이 순간을 즐거워 하지않으면 어쩔것인가. 나는 마리아의 벗은 몸에 아낌없이 키스를 내주고는 그녀의 방에서 걸어나왔다. 군터가 여전히 궁시렁 궁시렁거리며 구석 탁자에 앉아있었다.나는 그 녀석을 무 시하고 걸어나오면서 한낮의 쨍한 햇빛을 즐겼다. 엘리야에 돌아온 지 오늘로서 이틀째다. 쟁알거리는 그 까마귀의 엘프계집애의 잔소리를 듣다가 얼른 뛰쳐 나와 버린 것 인데 약간 걱정이 되긴했다.그 동방교국의 암살자 녀석은 진짜 죽었는지 혹은 살아나서 대상에 대한 복수로 이를 갈고 있을 지 알수가 없기때문이었다. 내가 우아하고도 가벼운 멋진 걸음걸이로 걸어가고 있을 때 나직히 누군가가 나 를 불렀다.그 누군가가 돌아보지않아도 대장장이라는 것을 금방 알수가 있었다. "쿠베린,기다려 보라니까." "뭐야?" 내가 돌아보자 거기엔 턱수염을 애써서 만지고 있는 듯한 자세를 취한 드워프 늙은이-사실 드워프란 나면서부터 늙은이다-가 날 바라보고 서 있었다. "뭐야,마루투?" "이름만은 기억하구있구만." "헹." 그는 나에게 손을 까딱 거리더니만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부탁이 있어." "뭔데?" "의뢰하겠어!" 그는 엄청난 일을 하려는 듯한 얼굴로,마치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일을 하는 거물인양 선심쓰며 말했다. "헤." 나는 대꾸대신에 홱 돌아섰다. "자..잠깐! 왜 그냥 가는 거야!" "네가 의뢰하는 거야 뻔하지않겠어? 대개는 어느 용병이 돈을 지불하지않았으니 그놈 족을 쳐달라..뭐 그런 거겠지,그런 거라면 스카에게 가보시지." "아냐!" 그가 진지하게 외쳤다. "그럼 뭐냐?" 그는 안그래도 조글한 얼굴을 내게 가까이 하면서 진지하게 외쳤다. "꼭 들어줘야해!" "뭔데 그러냐니까!" "내 딸내미를 데려와 줘!" "너,딸도 있었어?" "그래!" 그는 이를 갈면서 진지하게 말했다.그 진지한 눈초리에 조금 놀란 나는 그의 가 게로 점잖게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어쩐 일이야?" 재미있는 일이라면 기꺼이 맡으리라 생각하면서 내가 묻자 그는 안그래도 그다 지 아름답지도 못한 손을 주물럭거리면서 안절 부절했다.이 늙은 드워프 마루투 가 그런 자세를 취하는 것을 처음 본 나는 조금 진지해질 마음이 생겼다. "드워프 여자를 납치해가거나 하는 미친 놈은 없을 텐데 이야기나 해봐." 내가 발을 까닥거리면서 묻자 그는 입술을 깨물고는 나를 노려보았다. "바로 그거야." "그거라니? 드워프여자의 미색에 홀려서 납치해간 그런 놈이 있다고 하는 거 냐?" "그래!" 그는 이를 갈면서 진지하게 외쳤다. 그 얼굴에 울분과 걱정이 가득해서 나는 약간 뜨금했다. "말해봐.웃기는 놈이거나 미친 놈일 가능성이 매우 크구만." "그놈은...색마야!" "엑?" "색마라구! 게다가 엘프란 말이야! 내가 손 쓰기가 어렵다구!" 나는 한동안 그를 바라보다가 잠시 허공을 바라보고,그 다음에는 이글거리는 대 장간 화로들을 바라본 뒤에 그리고 나서 조용히 일어섰다.그리고는 조용히 걸어 나갔다.마루투가 놀라서 내 뒤를 따라나오면서 외쳤다. "왜 그냥 가!" "너,말이 되는 소릴 해라! 엘프가 색마다,그건 매우 애교어린 말일 수도 있지, 그런데 그 엘프가 드워프처녀의 미색에 홀려서 납치를 했다,그건 너무 지나치지 않냐!" 내가 그의 얼굴에 대고 고함을 지르자 마루투가 움찔하더니만 조금도 지지않는 음성으로 고함을 같이 쳐댔다. "그놈은 치마만 두르면 엘프든 인간이든 노옴이든 드워프든,아니면 호비트라도 삼가지않는 놈이란 말야~!" 나는 잠시 지나가는 오크들을 보았다.오크들은 나와 마루투가 고함을 지르는 것 을 이상하게 여기며 지나가고 있었다. "그럼 오크 여자도 노리냐?" 내가 묻자 얼굴을 찌푸린 마루투가 오크들을 바라보았다. 오크들은 거대한 엉덩이를 흔들면서 우리의 앞을 이미 멀찍히 지나가고 있었다. "그건..모르겠는데." 그가 멍하니 대꾸하다 말고 다시 내 옷자락을 잡아 당기더니 고함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일단 내 말을 듣기나 하라구! 이 고양이놈아!!" "이 늙어빠진 드워프야! 말이 되는 소릴 하랬지!" 내가 마주 고함치자 그는 이를 빠드득 갈면서 나를 끌고 다시 가게로 들어왔다. 나는 의자에 턱 하니 앉고 진지하게 다시 물었다. "좋아,전후 사정을 다시 말해 봐라!" 그는 한숨을 땅이 꺼져라 내 쉬었다. "...그러니까..나에게는 59세 짜리의 아리따운 딸이 있단 말이지." "그래서?" "그 애가 나에게 딸기파이를 만들어주겠다고 얼마전 숲으로 갔어." "그래서?" "숲으로 가더니만 돌아오질 않는거야. 이틀 간이나.. 내가 걱정이 되어 찾아가 봤지.그랬더니 숲안에는 언젠지 모르게 나타난 엘프풍의 저택이 있었어.나는 설 마하니 엘프가 내 딸을 어쩌리라곤 상상하지 못했기때문에 그 저택에 가서 내 딸을 혹시 못봤냐고 물으러 들어갔어." "그런데?" "그런데 저택안에는 왠일인지 엘프 이외에 아리따운 인간여자가 날 마중하더니, 그다음에는 엘프아가씨,그다음에는 노옴아가씨가 나와서 날 대접하는 거야.아무 래도 이상한 기분이 들었어.너도 알다시피 엘프들이 다른 종족과 어울려살기를 좋아하질 않잖아? 걔네들은 너무 너무 패쇄적인 애들이니까." "그렇지." 나는 점점 흥미가 솟아나기 시작했다. "인간이라면 이해하겠지만 노옴까지 나오는 건 이상하지않아?" "그래서?" "그런데 이번엔 드워프인 내 딸내미가 나오더니 아빠 하는 거야." "그래서?" "내가 어처구니가 없어서 왜 여기있는 거냐,얼마나 걱정했는지 알기나 하냐? 집 에 가자 하고 말했더니만 그애가 날 똑바로 바라보면서 말하는 거야." "뭐라구?" "난 사랑에 빠졌어요.여기서 그 사람과 같이 살래요 하는 거야." "헤에." "뭐 십분 양보한다고 해도 나도 사위의 얼굴정도는 봐야 하잖아? 그래서 울화를 억누르고는 딸에게 물었지.대체 내 사위의 얼굴정도는 보여주어야 하는 거 아니 냐 하고 말이야." "그랬더니?" "알았어요 하고 안으로 들어가더니만 하얗기 그지없는 사내놈을 끌고 나왔어." 그의 얼굴이 바르르 떨리고 수염이 허공으로 치솟기 시작했다. "그래서?"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허연 엘프놈이였다구! 허연 엘프놈은 그 매끈한 얼굴을 내 앞에 들이대고는 고개를 숙이고 히죽 히죽 웃으면서 말하는 거야! 장인어른 이라구!" 그의 얼굴이 발갛다 못해 당장이라도 폭팔할 듯 변해 버렸다. "내가 뒤로 넘어가지않게 생겼냐? 게다가 그녀석의 주변에는 여자애들이 바글거 리고 있었어! 그것도 각 종족을 다 망라해서 말이야!" "오크도 있었어?" 마루투는 내 질문에 너무나 화가 났는지 옆에 있던 부지깽이를 내게 집어던졌 다.나는 슬쩍 피하곤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마루투는 벌개진 얼굴로 내 멱살을 잡으면서 물었다. "그지? 말도 안되지? 도저히 있을 수가 없는 일이지? 세상에 하프 드워프.그것 도 엘프와의 사이라니! 생각만 해도 끔찍해!" 나는 그 엘프녀석의 취향은 변태적이라는 것을 확신했다.아무리 여자에 굶주려 있을 때라도 나는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드워프의 여자를 택하진 않을 것이다.십분 양보해서 어떻게든 노옴의 여자와 그랬다고 치자,최소한 수염은 없 으니까.그러나 드워프여자랑은 절대로 ...는 할 수 없다. "음..그래,보통 놈은 아닌 거 같다." "으흑흑..조상님을 어찌보냐!" 그가 땅을 치고 통곡했다. "드워프는 드워프와.나도 그 말에 동의한다.절대로 말이야!" 내가 진지하게 말하자 마루투는 내 얼굴을 보면서 진지하게 눈물 콧물 다 흘려 가면서 중얼거렸다. "유일하게 의견이 일치하는군,쿠베린." "그럼.그럼,자아.그래서 그 색마놈을 내가 어쩌길 바래?" "물론 사정없이 찢어 죽여버렸으면 좋겠다! 그놈에겐 뭔가 미혹술 같은게 있는 거야! 그렇지않고서는 엘프주제에 그렇게 여자들을 꼬실 수가 있을까?" "나는 그렇게 나쁜 놈이라곤 생각지않아.단지 변태일걸.만약 진짜 나쁜 놈이라 면 한 번 ...하고는 여자를 버릴 거 아냐? 근데 같이 살고 있다며? 마루투는 나를 흘겨 보면서 멋지게 이를 갈아보였다. "그딴 건 모를 일이다! 놈이 여자를 무슨...이상한 신에게 재물로 바치고 있다 면?" "여자만 재물로 받는 신이라면 여러종류가 있지만 엘프가 섬길만한 신들은 없을 건데?" "알게 뭐야! 놈은 새로운 신흥종교의 수장일 지도 모르잖아!" 그가 고함을 지를 때 나는 의문을 표시해 주었다. "진짜 엘프 맞아? 혹시 인간아니었어?" "귀 뾰족한 인간 봤냐!" 그는 내 말을 일축했다. "하여간 곧 그놈의 색마를 없애러 가줘! 알겠지?" "뭐..한번 보러가긴 하겠다만..진짜 괴이스런 일이군." "나도 한번 가서 도끼를 휘둘렀는데.." 그가 갑자기 어깨를 늘어뜨리곤 말했다. "당해 버렸어." "당해?" "마법진같은 걸 집 주변에 펼쳐놓았더라구.난 금방 넉아웃 당했어." "저런! 호오,." "호오가 아니라구!" 그가 이를 갈아보였고 나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알아들었어.그래서 네 힘으론 안되어 이 위대하신 쿠베린님의 도움을 요청하시 겠다?" "쳇,잘난 척 하지말아.이 색마놈아,너도 인간만 건드리니까 내가 참고 있을 뿐 너나 그놈이나 오십보 백보인 색마라구." "내가 부녀자 건드려서 인생망친 적 있었냐?" 내가 점잖게 응대하자 그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어찌되었든 ..나는 너에게 내가 만든 물건을 주겠어." "쳇." "쳇이 아냐! 임마!" "내가 검따위를 뭐에 쓴단 말이냐? 과일깎을때?" 내가 비웃자 그의 얼굴이 엄청나게 일그러지면서 발갛게 되더니 마침내 용이 브 레스를 뿜듯 분노했다. "내..내..내..작품을 감히 과일 깎는 데 쓰겠단 말이냐!" 그가 내 멱살을 쥐어 틀때 나는 손을 들어서 내 손톱을 꺼내어 그 다섯개의 자 랑스런 나의 손톱을 보였다.빛나는 나의 손톱.. 오오..멋지다.나의 손톱.어떤 명검도 당해 낼수 없는 무적의 나의 손톱. 그는 내 손톱을 들여다 보고 이를 갈고 있었다가 문득 히죽 웃었다. "그 손톱은 다듬을 수나 있냐?" "다듬을 필요가 없지.나의 손톱은 완벽하니까." "더럽게 잘난 척 하는군.내가 너에게 주려는 것은 검이 아냐.임마." "그럼 뭐냐? 뭔가 멋진 것을 주기 전에는 .." 그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주섬 주섬 무언가를 꺼내어 들었다.아마도 오랫동 안 소중히 간직한 듯 기름종이에 싼 철로 만든 상자였다.그리고 그 상자를 열고 는 한동안 심각하게 바라보더니만 꺼내어서 내게 내밀었다. 그것은 묵직하게 생긴 검은 팔찌였다. "우아!"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상자뚜껑을 열자마자 강렬한 마기가 확 얼굴로 끼쳐들어왔다. 이건 인간의 물건이 아니었다.엘프의 것도 아니고 드워프의 것도 아니었다. "이건..?" "이건..뭔지 모르지만 내가 20년전 우리집 짓다가 땅속에서 파낸 거야.너도 알 다시피 나의 본가는 우르고왕궁의 옛터에서 그다지 멀지않은 곳에 있지? 전설에 의하면 그 별궁 근처에서 마신 에프곤을 모셨던 신전이 있었다고 했지.그 신전 은 지금은 주춧돌만 남았지만 말이야." "그래서 넌 이게 에프곤신전에서 나온 물건이라 여기냐?" "그래.아마 신관의 장신구던가 그 무녀의 장신구가 아닐까 해.들어봐.엄청 무거 워." 나는 그 팔찌를 쥐려 손을 뻗었다. 순간 찌릿 하고 손끝이 자릿 자릿 해져서 조금 놀랐는데 물론 그런 것에 놀랄 나는 아니었다. 나는 덥석 잡아서 손바닥에 놓고 굴려보았다.상당히 묵직했다. "남자용도 여자용도 아닌데.." "여자라면 이렇게 무거운 것을..찰 리가 없지." 그가 중얼거렸고 나도 동감했다.나는 가볍게 허공으로 몇번 던져보고나선 드워 프에게 물었다. "이거..혹여 신관이나 누군가에게 보였나?" "그래.그런데 다들 모른데.너도 알다시피 내가 아는 신관은 우리들의 푸리야신 의 신관인 에프토레밖에 없지,그에게 보였더니 이건 최소한 당대의 신의 것이 아니래." "당대의 신이 아니라면 고대의 신인가?" "그럴거야." 나는 그 묵직한 물건을 이리저리 흔들어 보았다. 아무런 장식도 없고 팔찌 안쪽에 본 적 없는 글자들 만이 줄줄이 쓰여져있어서 조금 불쾌한 기분도 되었지만 호기심이 더 강력했다. "재미있어...그러나 이런 마기는..호감이 전혀 가지않는걸." 그가 뜨악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원래 마기라는 게 호감가지않는 거야." "그런데 넌 이런 마기가 풀풀 날리는 정체모를 애물단지를 나에게 의뢰금으로 주겠다는 거냐?" "하지만 이건 드문 물건이야.어때? 쿠베린? 갖고 싶지?" 나는 흐응 하고 그것을 다시 상자안에 내려놓았다. "이건 뭔가 저주어린 물건일 수도 있어.예를 들면 팔찌를 차면 포악해진다든가 하는 뭐 그런거 말이야." "그래서? 그런 고대의 주술이 겁나는가?" 그가 은근한 눈길로 나를 다시 바라보았다.마치 날 놀리는 듯한 그 얼굴,그러나 그런 간단한 격장지계에 넘어갈 나는 아니다.나는 흐응 하고는 그것을 모른 척 하고 그의 어깨를 툭톡 쳤다. "돈을 주게.돈을." "하지만..내가 무슨 돈이 있겠어?" 그가 아주 처량맞은 표정을 해 보였다. "드워프가 돈이 없다고 하면 아무도 믿지않아,.마루투.자넨 생각보단 딸을 사랑 하지않는 게로군,그럼 허여멀건한 사위를 맞아서 잘 살아보게나." 나는 주저없이 일어났다. 호기심이 생긴 것도 사실이긴 하지만 내가 꼭 돈을 받고 그 색마 엘프를 구경하 러갈수 있는 것은 아니기에 구경만은 언제든 할 수 있었다.그리고 나에겐 언제 나 시시콜콜 돈이 되는 의뢰인이 있지않은가. "제..제길! 그럼,그럼! 좋아! 황금 두덩이를 내지! 내가 잘 제련한 순금으로 말 이야!" "두덩이? 그거 가지고 내가 만족할 거 같은가? 내가 왜 엘리야의 쿠베린이라 불 리겠어? 두덩이가지고는 전혀 내 성미에도 차지않아." 그의 얼굴이 다시 일그러졌고 나는 사쁜히 햇빛이 쨍쨍 빛나는 광장으로 나와 걷기 시작했다. "좋아! 다섯덩이 낸다!" 그가 왁 하고 고함을 질렀다. 마미의 사슴집에 와 보니 왠일인지 벌건 대낮에 다섯명의 손님이 와 있었다.그 들이 먹고 있는 몰골들을 보아 하니 아마도 한 사나흘은 굶은 듯했다. 이 근처의 인물들이 아니었다.그러나 그게 그들의 유일한 특징이었기에 나는 그 들에게 신경을 끄고 몸을 돌렸다. 그때 마미가 큰 소리로 나에게 말을 걸었다. "쿠베린! 손님이 와 있어!" "손님?" "응,네 방에 가 있으라고 했어.전에 왔던 얌전한 애야." "전에 왔던 얌전한 애?" 내가 고개를 갸웃하고 있는 동안 누군가가 계단을 마구 뛰어내려오더니 내 품에 덥석 안겼다.내가 내 품안에 안긴 녀석을 들어서 그 얼굴을 보니 가빈이었다.그 는 빙글 빙글 웃으면서 외쳐 말했다. "저기,저기! 에닌이 왔어요!" "에닌이 누구지?" 내가 눈쌀을 찌푸리자 곧 가빈의 옷깃에서 내가 기억하고 있는 냄새가 느껴졌 다.이건 상쾌한 내음...이건 엘프의 냄새였다. "아아.."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가빈의 목덜미를 잡은 채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마미의 말이 맞다.얌전한 애고 말고. 그런데 오늘은 어쩐지 내내 엘프이야기에서 뱅뱅 도는 것같은 생각이 들었다. KUBERIN........ 비애... 날아가던 독수리가 그 날개를 피로 물들이며 그 넓은 창공을 버리고, 지상에 떨어질 때처럼...... 2 "안녕하셨어요?" 발그레한 얼굴로 그가 웃음을 띄우고 나에게 인사를 했다. 나는 그와 나란히 앉은,아니 마주 노려보고 있던 린을 쳐다보고는 내 침대에 털 썩 앉았다. 카산은 그 때와 그다지 다르지않은 모습이었다.그리고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그의 그 소중한 누이인 달리아나,에닌이 있었다. 대개 엘프의 귀족아가씨들은 두개의 이름을 가진다. 대외적인 이름과 개인적인 이름.에닌은 에닌이라 불리는 개인적인 이름이 있고 달리아나라고 하는 귀족적 이름이 있다.그러나 나로선 그런 거 알바가 아니니까 일단 접어 두고 이 두 엘프 남매를 아래위로 다시 훑어보았다. "와아.여전하시군요." 그가 방글 방글 웃어보였고 나는 왠지 따가운 린의 시선을 받으면서 손짓했다. "뭔 볼일이냐?" "하하..네에,실은 부탁 드릴 일이 있어서요." 카산은 웃으면서 말하려다 나의 트릿한 어투에 조금 우물거렸다.그리고는 린의 살벌한 표정을 흘긋 보고는 조심스레 의자에 앉았다.에닌은 여전히 공손한 모 습으로 앉아있었는데 이 소녀의 얼굴은 조금은 나아져서 발그레한 복숭아빛을 하고 있었다.나는 물론 수컷이니까 카산의 두서없는 말을 듣느니 차라리 에닌의 예뻐진 모습을 감상하는 것이 더 즐겁다.나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면서 저도 모 르게 흐뭇한 웃음을 흘렸다. 에닌은 나의 시선을 받고 배시시 웃음을 지었는데 약간 불안하면서도 왠지 나에 게 감사하는 듯한,혹은 나에게 반한 듯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음..엘프의 애인을 가지는 것도 나쁘진 않지.일단 엘프는 수명이 기니까..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가빈이 내 옆구리를 툭툭 쳤다. "....란 말입니다." 카산은 뭔가 말하고선 입을 다물고 날 바라보았다. 난 카산을 다시 보았다. "뭐라구?" 카산은 나를 보고는 한숨을 가볍게 삼키고는 다시 말했다. "우리 행방불명된 숙부를 찾으러 왔단 말입니다.찾아주시겠죠?" "행방불명된 숙부?" 내가 마뜩찮은 얼굴로 그를 보자 카산이 미소했다.약간 어색한 미소였다. "괴상하게 들린다는 것은 알지만 우리들은 지금 그 숙부를 찾으려고 왔어요." "어떤 숙분데?" "음,,숙부라고 말하면 조금 이상한 느낌이긴 하지만..어찌되었든 우리의 먼 친 척이 되는 분입니다.이분은 노스엘스턴에서는 잘 지내시질 않아요." "그래?" 카산은 린의 찌를 듯한 시선을 은근히 피하면서 말을 이었다. "그분의 이름은 카나리안 셀비에.조금 특이한 이름이죠?" "뭐가 특이한 지는 모르겠지만 이름은 길군." 카산은 훗훗 하고 웃었다. 전과 달리,여유있는 얼굴이었다. "그분은 노스엘스턴을 떠나서 40년간이나 소식이 없어요.그래서 그분을 찾으려 하는 겁니다." "왜 찾아?겨우 40년이라며?" "아.이유가 있습니다." 카산의 얼굴이 다시 굳어지며 그 녀석 특유의 진지한 얼굴이 되었다. "그분은 병에 걸려있습니다.그래서 그래요.그분의 수명은 얼마남지않았기에 대 학자 엘로인 장로님께서 숙부님의 병을 다시 진찰 하려는 겁니다." "엘프의 수명이 어느정돈데 병에 걸려? 엘프도 병에 걸리냐?" 내가 트릿하게 중얼거리자 카산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네,우리들은 병은 거의 걸리지않지요.하지만 이분,카나리안 셀비에님은 틀 립니다.이분은 쿼터엘프에요.즉 그분의 몇대 모친이신 분이 하프엘프였다는 거 지요." "헤에." "그래서 병에 걸리신 모양입니다.게다가 방랑벽이 너무 심해서 가만히 계신 분 이 아니었어요.40여년전 수명이 길지않다는 이야길 듣자 그럼 세상을 구경하며 모험을 즐기며 살겠노라며 나가 버리셨어요." 흐음. 나는 잠시 시선을 천정으로 돌렸다. 엘프의 수명은 매우 길어서 거의 무한대에 가깝다고도 한다.특히 노스엘스턴과 같은 엘프왕국의 엘프들은 고위엘프이기때문에 특히 더 길다. 그런 엘프가 수명 이 짧다고 한다면 어느정도일까. 카산은 린의 찌를 듯한 시선을 어색해 하면서 가빈을 바라보며 눈으로 묻고 있 었다. '저녀석 누구야?' '보면 몰라?' 가빈은 어깨만 으슥해 보였고 카산은 불편한 듯이 으음 하고는 나에게물었다. "저기..저분은 누구시죠? 청색아인족의 ..분?" "맞아,청색아인족의 린이야.내 동료지." 가빈이 욱 하고 불만을 터뜨렸다. "저는 난로고 저 녀석은 동료란 말이죠!" 그가 항의섞인 고함을 터뜨렸지만 나는 무시하고 고개를 돌려서 에닌을 바라보 았다. "여어.이뻐졌구나." 에닌이 호호 웃었다.그 뺨이 발그레 해졌는데 문득 생각난 듯 그녀는 등짐에서 무언가 헝겊으로 둘둘 싼 물건을 꺼냈다. "받으세요." 카산이 미소하면서 재촉했고 나는 사양치 않고 받아 풀러보았다.놀랍게도 투명 한 유리병 안에 가득한 적색의 액체가 보였다. "호오!" "우리 가문의 포도주에요.매우 독할 거에요.팔백사십년전에 저의 어머니께서 아 버지랑 결혼하실 때 담그신 거래요." "호오.호오." "맛있을 거에요.오백년 이상된 술은 얼마전 에닌이 돌아왔을 때 친척들이 모여 다 먹어버렸고.." 그는 방그레 웃었다. 나는 마개를 들여다 보았다.코르크 마개엔 가벼운 동결의 마법이 걸려있었고 그 마법은 누구나 해지가능한 것이었다.즉 마개를 뽑기만 하면 깨진다. 내가 퐁 하고 뽑아내자 방안 전체에 향기로운 술내음이 가득 퍼져나갔다. "주..죽여주는 군!" 내가 호오 하고 침을 삼키면서 손짓했다. "가빈! 가서 잔 가져와!" 가빈이 저도 흥분된 얼굴로 튀어서 밖으로 나갔고 그 때의 잠시 침묵을 기다려 서 카산이 슬쩍 물었다. "난 카산이라고 합니다만..뭔가..제가 거슬리는 거라도?" 그가 주저하면서 린에게 묻자 린은 차게 대꾸했다. "난 엘프가 싫다!" 웃 하고 카산과 에닌이 굳어버렸다. 전과 마찬가지로 이 아름다운 남매는 여전히 부끄러움과 쑥스러움이라는 두 가 지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한 듯 했다.에닌은 그래도 좀 나은 듯 분개한 얼굴을 했지만 카산은 얼굴이 파래졌다. "왜..왜 그런 말을 하는 거죠?" 떨리는 어투로 그가 물었다. 린은 흥 하고 팔짱을 끼더니 가볍게 대꾸했다. "싫으니 싫은 것 뿐." 그 말에 뭘 더 하랴? 나는 술병에 코를 댄 채 흐흐흐 하고 있었고 두 남매는 린과 눈싸움을 거듭하고 있었다. 열려진 문을 통하여 가빈이 침을 삼키며 잔을 가져왔는데 의외로 잔이 네개였 다.나는 그 네개의 잔을 보고 그를 다시 보았다. "왜 네개씩이나 가져와?" "하,,하지만 네명이잖아요? 에닌은 안먹을 테고." 가빈이 그렇게 말했고 나는 그녀석의 손에서 한개의 잔만을 빼내어서 술을 가볍 게 흔들어 잔에 부었다.엄청난 향기가 방안에 가득 퍼져나갔고 호오 호오 하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멋지군." 가빈이 빈 잔을 쥐고 나에게 내밀었지만 나는 모른 척했다. 그리고 다시 한 모금씩 맛보면서 카산을 향해 물었다. "그래,결국은 그 병자인 엘프를 찾아내라 그거냐?" "아..네.그렇습니다." "그의 수명이 얼마나 남았다는 거야?" "구십년요." 가빈과 린이 체엣 했고 난 흐응 했다. "그의 나이가 몇인데?" "백 십여세 정도일 거에요." "쳇,이백년은 사는 군." "네,하지만..그 짧은 수명은.." 후우 하고 그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보수는?" "아,아버님께선 이것을.." 그는 주머니를 내밀었다.주머니를 받아 열어보니 둥글 둥글한 호안석이 열댓개 정도 들어있다.엘프들은 호안석을 그다지 좋아하지않지만 인간들은 무지 좋아한 다.그 때문에 이런 크기의 호안석이라면 상당한 액수인 것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 끄덕 했다. "좋아.좋아." "네,그럼 그 분을 수소문 해주세요.장로님께선 어서 그분을 찾아서 노스엘스턴 으로 돌아오게 하고 싶어하시니까요." "그래.받아들이지." 나는 잔을 들고 호오 하고 숨을 들이켜서 그 향기를 음미했다. 옆에서 침을 꼴깍 삼키고 있던 가빈이 날 바라보며 원망어린 얼굴로 물었다. "설마 한 방울도 안주실 건가요?" "아.이건 너같은 어린애가 먹을 수 없어.너무 독해서 말이야." 나의 목안에서도 서서히 열기가 스며 올라왔다. 점점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방안의 공기는 조금 살벌하다. 린은 여전히 그들 엘프 남매를 꼬나보고 있고 그 불편한 공기 속에서 얼굴이 얇 은 카산은 몸을 뒤틀고 있다.그리고 에닌은 적개심 어린 얼굴로 린을 쏘아보고 가빈은 빈 잔을 쥐고는 나를 원망어린 얼굴로,그리고 탐욕에 가득찬 얼굴로 내 술병을 바라보고 있었다. 핫핫핫..... KUBERIN........ 비애... 날아가던 독수리가 그 날개를 피로 물들이며 그 넓은 창공을 버리고, 지상에 떨어질 때처럼...... 3 "어이." 나는 덜렁 덜렁 흔들리고 있는 가게의 처마밑에 달린 금속성의 작은 물건들을 보면서 말을 걸었다. 그 것들은 연약한 인간들의 도구로서 밭을 갈거나 혹은 물건을 자르거나 하는데 쓰이는 물건들이다.낫,호미,자잘한 손 삽등 여러개가 허공에 매달려있다.그런 물건들 중에서 나는 금속의 구슬이 끼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금색으로 칠해진 그 구슬은 상당히 귀여운 맛이 있었다.게다가 공중에 매달려 딸랑 거리는 그 소리가 의외로 맑아서 듣기가 괜찮았다. "뭐야? 쿠베린?" 얼굴을 내민 드워프가 나에게 부루퉁한 시선으로 물었다. "이 방울 하나 줘라." "맘대로 해라." 그는 별로 관심없는 듯이 말했고 나는 손을 뻗혀 처마밑에 전시해 놓은 방울을 잡아 뜯었다.작은 구슬같이 생긴 이 방울은 흔들면 딸랑 딸랑하고 듣기 좋은 소 리를 낸다. "그건 그렇고 알아봤어?" 그가 물었고 나는 방울을 일단 주머니에 넣고는 대꾸해주었다. "오늘 갈거야.그래서 미리 말해놓는 거지." "아아..빨리 해줘.난 이제 기운도 없어." "기운이 없다구?" 나는 금속의 땅딸한 말뚝같은 드워프를 바라보면서 놀렸다. 그는 내 놀림에도 반응을 하지않고는 천정을 바라보며 후우 하고 한숨을 내 쉬 었다. "무슨 즐거움이 있겠어? 딸내미가 엘프랑 산다니..집안의 수치인걸." "아아..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있어.내가 좀 자세히 알아올테니." 나는 나답지 않은 친절함으로 말했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숙이곤 전형적이고도 고답적인 고뇌하는 아버지의 표상을 보여주면서 마른 모루 위에 털썩 걸터앉았다.낡아빠진 가죽 장화 위에는 그가 튀겨댄 불꽃의 희생을 역력히 보여주는 얼룩들이 남아있다. 마루투는 멍청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고 나는 그 허무함과 그 지긋 지긋한 절망감에 오염될까 무서워 얼른 그 자리를 떴다. "쿠베린!" 다다다하고 가빈 녀석이 뛰어 왔다. 그의 뒤엔 에닌과 카산이 보였다.나는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보이고는 느긋하게 물었다. "아침은 먹었겠지?" "쿠베린~! 지금은 점심이에요." 난처한 듯이 카산이 미소하곤 나에게 물었다. "그런데 정말 알고 있다는 거에요? 정말 숙부님의 위치를 알아냈어요?" "아아.." 나는 아무렇게나 대꾸하고 엘리야의 북쪽 숲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보이지는 않지만 내 등 뒤로 린이 따라오고 있었다. 카산은 느낄지도 모르지만 내색하진 않고 있었고 물론 가빈과 에닌은 모르고 있 었다.그들 두 종족은-야묘족과 엘프는- 오랜만에 만난 절친한 친구처럼 담소하 고 있었다.주로 떠드는 것은 당연히 가빈으로 에닌은 말을 하지않는다. 내가 슬쩍 에닌을 보자 카산이 내시선을 보곤 조용히 말했다. "에닌은..저하고 있을 때만 가끔 입을 열어요.아무와도 말하지않아요.그래서 여 행에 동행한 겁니다." "흠." 나는 시선을 거두었다. 수컷인 나로선 암컷의 아픔은 잘 모른다. 그럼 침묵할 밖에. 엘리야의 북쪽숲은 과일들이 매우 풍부한 곳이다.지금같이 철이 좋을 때는 때때 로 덤불이 온통 붉은 나무 딸기와 앵두로 가득할 때도 있다.그리고 이름은 모르 지만 먹을 만한 것들이 줄줄이 열려 그 시고도 달콤한 향을 사방에 뿌려댄다. 나처럼 예민한 존재는 그 향기에 취해서 며칠 동안 흐흐 하고 미친 놈마냥 웃고 있을 수도 있다.실제로 그런 적도 있었다. 엘리야는 상당히 위치가 좋다.내가 혹해서 이곳으로 거처를 정한 이유도 그것이 다.인간들은 매우 개방적이어서 아무 종족이나 다 맞이하고 킬킬 거리며 항구의 선원들은 제법 떠들썩하게 놀 줄안다.북쪽으로는 거대한 숲을 끼고 남쪽으로는 자유도시 밀레안과 투네리스가 있으며 남동쪽으로는 저 마녀같은 엘프 계집애의 남편이 다스리는 아그랑이있다.그리고 사방은 물론 델리암의 영토였다. 우리들은 그다지 긴 말없이 걸었다. 카산은 그 침묵을 다행으로 여기는 듯 엘프다운 태도로 이 풍요로운 숲을 즐기 고 있었다.나역시 숲에서 헤메는 것을 좋아하는 지라 절로 미소가 새어나왔다. "근데..어디로 가시는 거에요?" 그 침묵을 가빈이 깼다. 내가 그를 돌아보자 카산도 문득 생각난 듯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어디로 가는 거죠?" "아아.." 나는 어깨를 으슥했다. "숲으로 가잖아?" "그런 말 말고요.목적지가 어디냐구요." "색마엘프가 사는 곳." "에?" 카산이 말도 안된다는 얼굴을 하고는 날 바라보았고 그 말에 기절 초풍하듯이 에닌이 날 보았다.그리곤 가빈이 뭔가 잘 못 들은 건가 하는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꼬리를 절레 절레 저었다.참 다양한 표정이 가능한 놈이로군. "그게..지금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얼굴이 벌개진 카산이 격하게 항의했다. "색마 엘프라니! 그런 엘프가 존재할리가 없잖습니까!" 그가 주먹을 쥐고 항의할 때 나는 어깨를 으슥했다. "뭐어..어쨌든 따라와봐." "그 말 취소하세요!이건 엘프전체에 대한 모욕입니다!" 그가 격렬한 소리를 내지를 때 나는 모른 척하며 걸었다.카산이 뭐라 계속 떠드 는 데 갑자기 차갑게 누군가가 일갈했다. "조용히 해! 하찮은 엘프녀석!" 린이였다. 카산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그는 고개를 팟 하고 돌려 나무 위에 선 린을 바라보았다. 린은 차가운 사파이어빛 눈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다가 시선을 홱 돌려버렸는데 그 자세에서 역력하게 무시하는 모습이 드러나 있었다. 카산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군! 그 이유없는 멸시와 조롱! 나,너에게 결투를 신청하 겠어!" 그가 고함을 내지르자 린의 얼굴에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건 살의가 담겨져있었고 나는 비로소 린이 그냥 싫어하는 게 아니라 명백히 증오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곧 깨달았다. 카산이 검을 뽑으려하는 그 순간 나는 카산의 어깨를 탁 잡았다. "말리지 마요! 쿠베린!" 카산이 나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나는 그녀석의 어깨를 꽈악 눌렀다. "웃." 카산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지자 나는 차갑게 말해주었다. "청색아인족과 칼날을 맞대고 살아난 자가 몇이나 될 거 같으냐?" 그의 입가가 일그러졌다. 자존심이 일그러진 얼굴로 그는 나를 쏘아보았다. "녀석은 우리 종족 전체를 매도했어요! 경멸하고 모욕했다구요!" "뭔가 이유가 있으니 그렇겠지.너도 인간족을 싫어하잖아?" 웃 하고 카산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입이 닫히더니 곧 그녀석 특유의 착한(?) 이미지와 같은 포용력이 눈안에 떠올랐다.놀랄 정도로 그 속도가 빨라서 나는 지금 내가 성직자나 천사쯤을 상 대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고 눈을 의심했다. "아..알았어요." 그는 침착한 어조로 손을 내렸다. 나도 그의 어깨에서 손을 내렸고 카산은 검자루에서 손을 뗐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린이 그 답지 않은 태도로 빈정거렸다. "헤에.역시 겁쟁이가 아닌가." 나는 그 녀석을 노려보았다. "린! 닥쳐!" 린의 얼굴이 움찔했다. 그 녀석은 상처받은 얼굴로 고개를 홱 돌려버리곤 다시 나무사이로 숨어버렸다. 안그래도 찾기 힘든데 이런 숲속에선 퍼런 녀석을 찾아내려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상해요." 가빈이 중얼거렸다.그녀석은 내 눈치를 슬슬 보면서 낮게 말했다. "이유없이 저럴 애가 아니잖아요?" 나는 아무말도 하지않았지만 가빈의 말에 조금 놀랐다. 가빈 녀석은 린을 분명히 싫어하고 있었는데 어찌된 일일까. 어쨌든 그렇게 떠드는 사이 나는 내가 목적했던 곳에 다다랐다. 그곳은 겉으로 보기엔 작은 동굴처럼 보였다.그러나 그 동굴의 입구에 걸린 마 법의 실드는 방어마력이며 동시에 현혹의 마력이기도 하다.내가 카산에게 손을 들어보이자 카산이 한 걸음 나섰다. "확실히..이건.." 그는 동의했다. 엘프들이 즐겨쓰는 마법의 양식이라고 했다. 그는 두 손을 들어서 조용히 내밀었는데 그 두 손에서 가벼운 광채가 일어났다 스러졌다. 나는 마법을 모른다.그리고 별로 마법따윈 신용하지않는다. 마법사란 그 마법을 주절대는 입을 한번 정도 후려쳐주면 제 아무리 강력한 마 법사라 할 지라도 끝장 나는 법.별로 대단한 존재는 아니다. 내 기억으로 이 세상에 내가 주의해야할 종류의 마법사는 단 둘이다. 하지만 그 둘 중에 한 놈은 은거해서 조용히 살아가고 있고 한 놈은 암흑의 군 주랍시고 머나먼 섬에서 다크엘프나 사나운 다크오크나 야수족,기타등등같은 놈 들을 키우며 살고 있다.그러니까 마법사는 그놈들을 상회할 마법사가 어디선가 탄생되지않는 한 내 문젯거리는 아니다. 갑자기 생각하는 일이지만 저 두 마법사는 어지간히도 싸우고 있다.30년전 둘이 서 얼마나 피튀기게 싸웠는지 대륙 역사에 길이 길이 남을 정도였다.흐음..물론 이 쿠베린님이 둘 중 하나에게만 기울어졌어도 전쟁은 금방 끝났을 게다.핫핫.. 그러나 이 몸께서 어찌 미천한 인간들 사이의 쌈박질에 참가할 수 있으리.. 그런 생각을 하면서 멀건히 있는 중인데 카산이 손을 거두면서 나를 돌아보았 다. "들어오세요." 내가 안으로 들어가자 뒤를 이어 가빈과 에닌도 들어왔고 내가 고개를 돌리자 린이 묵묵히 내 뒤를 따라 들어섰다. "이 곳은 뭐에요? 엘프의 마법이라니.이곳에..설마 숙부 카나리안이 산다는 건 가요?" 카산이 들떠서 나에게 물어왔다. 나는 대꾸하지않고 걸었다. "이 곳에 색마 엘프가 산다고 했어.드워프녀석이 자기 딸내미를 찾아달라고 나 에게 부탁을 했지." 그 말에 카산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는 불쾌한 듯이 나에게 항의를 했다. "그 말도 안되는 이야길 계속 할 참이에요? 어떻게 그런..말도 안되는 이야길 하세요? 색마라..니! 입에 올리기도 거북한 말입니다!" 그가 길길이 뛰는 것을 모른 척하고 나는 좁은 동굴 길을 걸어서 마침내 내가 목적한 곳에 다다랐다. 드워프가 말하던 그대로였다. 희게 칠한 벽돌로 만들어진 그 집은 한 눈에도 호비트의 솜씨였다.그리고 물론 그 위엔 드워프의 힘이나 노옴의 실험정신도 조금 들어가 있었다.물론 장식된 품은 엘프다운 점도 있었다. 그 흰 집은 제법 컸으며 내가 드나드는 마리아의 여관과 흡사한 크기로 삼층정 도의 저택이었다.그리고 흰 울타리와 흰 돌을 박아놓은 우아한 현관과 저택을 장식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정원들은 매우 매우 곱게 장식되어 있었다. 나 뿐만이 아닌 다른 녀석들도 눈을 크게 뜨고는 매우 호기심어린 표정이 되었 다.나는 그 정리된 현관으로 발을 돌렸다. "누구세요?" 놀란 음성이 튀어 나왔다. 현관으로 가기 직전 정원에서 풀뽑기 같은 것을 하던 여성이 튀어 나와 나의 일 행을 가로막았다.그녀는 길고 긴 금발을 곱게 땋아 늘어뜨린 여자로 이십대 초 반정도로 보였다.커다란 보랏빛 눈이 아주 예쁜데 그녀의 손에는 제비꽃다발이 들려져 있었다. "무,,무슨 일이죠! 누구에요!" 그녀는 우리들 일행의 기괴한 몰골에 놀라서 고함을 질렀고 뒤이어 와장창 하는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두 명의 여성이 더 튀어 나왔다. 한 명은 엘프,한 명은 갈색아인족이었다. "어머나!" 엘프여성이 카산과 에닌을 보고 눈을 크게 떴고 카산은 벙벙한 얼굴이 되었다. "누구죠? 무슨 일이에요?" 갈색아인족의 여인은 당장 휘어진 장궁을 들어서 우리들에게 겨누었다.갈색피부 에 꿈틀거리는 근육질이 이 강건한 종족의 장점을 아낌없이 드러내 보였다. 나는 앞서서 손을 들어보였다. "우린 이곳에 혹여 카나리안이란 엘프가 살고 있지않은가 해서 왔을 뿐이지." 그녀들의 눈이 커졌고 카산과 에닌의 눈도 커졌으며 나 자신도 그들의 반응에 조금 놀랐다. "어..어떻게!" 그녀들이 서로 수군거릴 때 저 사랑스런 마루투의 딸이 튀어 나왔다. 그녀는 악 하고 날 보자 마자 외치더니 뒤로 뒷걸음질 쳤다. "쿠베린! 당신은 아버지의 명령을 받고 왔군요!" 그녀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고 나는 울화가 치밀어 벌겋게 달아올랐다. "누가 네 아비의 명령을 받냐! 말이 되는 소릴해라! 세상천지에 나 쿠베린님에 게 명령을 할 수 있는 종족이 있을 거 같냐!" 내가 빽 외치자 그녀는 겁에 질려 뒤로 나동그라졌다. 여전히 장궁을 겨누고 있는 갈색아인족의 여성은 검은 눈으로 나를 경계하고 있 었고 엘프의 여성은 당황하고 있는 인간여성을 끌어안고 있었다. 그리곤 제일 먼저 침착을 되찾은 엘프여성이 말했다. "카나리안은 왜 찾는 거죠?" "그의 병을 고치자고 장로가 불렀다.넌 그 녀석의 여자냐?" 그녀의 얼굴이 굳었다. 옆에 있던 카산이 내 옆구리를 가볍게 찔렀다. "그런..말을!" 그는 그렇게 날 원망스레 말하곤 조용히 말했다. "저는 노스엘스턴의 카산입니다.카나리안 숙부님을 찾아오라는 장로님의 명령을 받아 이곳에 왔어요.만일 이곳에 카나리안숙부님이 계시다면 꼭 뵈었으면 합니 다만.." 드워프의 딸은 나를 보고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그 때 갑자기 그녀를 천천히 밀치고 한 명의 사내가 나섰다. 금발과 투명한 제비꽃 빛깔의 눈을 가진 사내는 키가 엘프치곤 크고 강건해 보 이는 어깨를 하고 있었다.카산과는 비교되지않을 정도의 키와 몸체인데 마치 인 간족의 잘나가는 바람둥이와도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그는 잘 짜여진 튜닉을 인간처럼 걸치고 엘프다운 태도로 카산을 바라보았다. "너는.." "카나리안 숙부님?" "아아..정말 너구나.이렇게 컸으리라곤 생각지 못했구나!" 그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카산을 향해 팔을 벌렸는데 바로 그 순간 무언가 차 가운 것이 그의 정면으로 튀어나가 그의 목을 노렸다. KUBERIN........ 비애... 날아가던 독수리가 그 날개를 피로 물들이며 그 넓은 창공을 버리고, 지상에 떨어질 때처럼...... 4 나는 그 차가운 검날에 손을 뻗었다.정확히 말하면 손톱이었고 손톱에 닿는 것 을 느끼는 순간 나는 세차게 후려갈겼다. 챙 하고 칼날이 공중으로 돌아 떨어졌으며 공격한 녀석은 그 여파를 이기지 못 하고 뒤로 나뒹굴었다. "숙부님!" "카나리안!" 여자들의 비명과 엘프들의 비명을 들으면서 나는 공격자를 바라보았다. 생각지도 못한 녀석이었다. 꼬리를 살랑이던 그 녀석,가빈이었다. 그 녀석의 금색 눈에는 증오로 가득한 눈물이 고여서 뺨위로 흐르고 있었고 그 눈물에는 슬픔이 아닌 분노가 담겨져있었다. 여자들과 카산이 카나리안을 부축할 때 가빈은 바닥에 널부러져 있었다.내 힘을 이기지 못해 나뒹군 그 녀석은 완전히 무방비 상태로 바닥에 주저앉아서 부러 진 검날과 같이 널부러져 있었다. 시선은 멍하니 카나리안을 향해 있었고 그의 시선은 증오로 가득차 다른 것은 보이지도 않는 듯이 보였다. "가빈!" 카산이 분노로 주먹을 쥐면서 가빈을 향할 때 그의 앞을 린이 턱 하니 막아섰 다.린은 무표정한 얼굴로 카산을 무시하고는 무방비 상태로 널부러진 가빈을 그 의 시선아래서 방패처럼 막아섰다. 카산이 더이상 다가서지 못하고 주먹을 다 잡을 때 나는 가빈을 더이상 보지않 고 카나리안에게 다가갔다. 여자들이 새파랗게 질린 그를 둘러싸고 난리를 치고 있는 동안 나는 그녀석의 앞으로 가서 여자들을 밀쳐냈다. "왜 이래요!" 갈색아인족의 여자가 날 노려보면서 화살을 들이댔지만 나는 그 활을 한번 밀 쳐버리는 것으로 해결을 보았다. 카나리안이라는 이 색마엘프는 이해할 수 없다는 시선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창백하고 미끈한 그 얼굴은 뻔뻔스러울 정도로 순결해 보였다. 나는 그의 멱살을 잡아 일으켜 세웠고 여자들이 다시 난리를 쳐댔다. "이거 놔요!" "난폭한 짓을!" "당신 뭐야!" "이 살인자!" 여자들이 벌떼 처럼 떠들어 대고 있는 동안 나는 고함을 꽥 질렀다. "시꺼!" 여자들이 흠칫 놀랄 때 나는 그녀석의 멱살을 들어 천천히 허공으로 들어올렸 다.숨이 막히는 지 그가 버둥버둥 거리기 시작했다. "너..놔,놔!" "너,저 애에게 무슨 짓했지?" 나는 낮게 물었다. 속이 부글 부글 끓기 시작한다. 카산이 날 홱 돌아보았다. 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고 에닌의 얼굴도 파랗게 질렸다.그녀는 가빈의 옆에 서서 그의 곁을 떠나 카나리안의 곁으로 와야 하는지 아니면 가빈의 편을 들어 야 하는 지 망설이고 있었지만 가빈의 옆에 그대로 서 있었다.그러나 책임감 강 한 카산은 어쩔 줄을 모르고 급히 나에게로 달려들었다. "무슨 짓입니까? 쿠베린!" 그 녀석이 외치거나 말거나 나는 카나리안의 멱살을 잡아 들어 그녀석의 발을 공중으로 띄우고 있었다.점점 녀석의 얼굴이 빨갛게 되었다가 그 다음에는 파랗 게 질리기 시작했다. "놔요!" 여자들이 다시 외쳐대기 시작했고 카산은 나를 떼어 놓기 위해서 내 팔뚝에 매 달려서 안간힘을 썼다. "놓고 이야기 해요! 놓고요!" 카산이 울부짖듯 외칠 때 한 여자가 나에게 칼을 들고 덤벼들었고 나는 그에 응 답하여 그녀의 얼굴을 한 손으로 잡아서 허공으로 가볍게 던져보였다. "아악!" 여자가 나동그라졌고 그 다음에는 두 셋의 여자들이 떼거지로 덤벼들었다.여자 들의 악다구니는 들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정말로 심해서 귓청이 따갑고 모든 인 생에 종말이 온듯 느껴지기 마련이다.나처럼 예민한 사람은 당연히 피로감을 몇 배로 느낀다. "더 떠들면 이 녀석의 목줄기를 따서 너희들에게 뿌려주겠어!" 내가 낮게 말하자 여자들의 동작이 멈추었다. 카산은 내 앞에 서서 그 말을 듣고는 손을 뻗어서 내가 그를 쥐고 있는 팔에 매 달렸다.그리고는 무시 무시(?)한 힘으로 날 밀어붙였다. 약간 흔들렸을 뿐이지만-솔직히 말하자면 약간 흔들렸다. 하지만 나는 그 녀석을 놓은 손을 놓지않았다.나는 그저 쥐고선 카산을 돌아보 았다. "이 녀석에게 이야길 좀 들어야 겠는데." "그,.그상태로 이야길 할 수 있으리라 보세요?" 필사적으로 카산이 외쳤다. 그는 내게 부딪친 오른 어깨를 쥐고서 파란 얼굴로 외치고 있었다.그 파랗게 질 린 얼굴은 마치 린처럼 보일 지경이었는데 정작 청색아인족의 린은 무표정한 채 말 그대로 무감각한 퍼런 돌처럼 가빈 앞에 버티고 서 있었다. 나는 잠시 시선을 돌려 내가 들어올리고 있는 혼절 직전의 그 엘프녀석을 바라 보았다.그 녀석이 늘어지기 전에 나는 손을 놓아버렸고 녀석은 마치 보리자루처 럼 툭 하고 바닥으로 떨어져 쿨럭거렸다. 카산과 여자들이 벌떼 같이 모여들어서 와글 와글 떠들고 있는 동안 나는 팔짱 을 끼고 색마녀석을 주시했다. 점점 화가 나기 시작한다. "비켜.암컷들!" 여자들이 놀라 날 바라보았고 나는 그 시선에는 아랑곳 하지않고 아직도 쿨럭이 고 있는 녀석의 뒷 덜미를 잡아서 집안으로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왜 이래요!" "이 괴물아!" "어서 놔!" "카나리안!" 여자들이 손톱을 세우고 나에게 덤벼드는 동안 나는 그저 그녀석을 질질 끌고 집안으로 들어갔는데 그 와중에도 카산은 내 손을 떼려고 벌버둥을 치면서 여자 들과 같이 소리를 질러댔다. 안은 제법 잘 꾸며놓은 상태였다.녀석이 문지방에 부딪쳐 멍이 들던 말던 나는 상관하지않고 녀석을 질질 끌고 들어와서 벽 한구석에 가볍게 던져두었다. 그리고는 의자-거실로 보이는 이 안쪽에는 곱게 다듬어 만든 원탁과 의자들이 여덟개가 놓여져있었다-를 하나 들어서 그녀석의 정면에 놓은 뒤 천천히 앉았 다. 그 녀석은 퍼런 입술을 하고는 자신의 목을 어루만지면서 비슬 벽에 등을 기대 고 반쯤 누워 있었다.그런 녀석의 주변으로 여자들이 일제히 달려들려 할 때 내 가 보지도 않고 고함을 질렀다. "조용히 해! 아님 이녀석을 갈기 갈기 찢어서 너희들의 아가리에 쳐넣을 테니!" 여자들이 욱 하고 우물거리는 것을 카산이 밀면서 다가섰다. 나의 예민한 귀는 녀석이 주문을 외우려 하는 것을 눈치채었다. "카산! 그 주문이 완성되기 전에 네 아가리가 찢어질 테니 입을 다물어!" 카산이 움찔하는 것이 등 뒤로 느껴졌다. 나는 천천히 다섯개의 손톱을 꺼내어 그 희고도 푸른 손톱들을 찬찬히 바라보았 다.나의 손톱은 보통의 보검보다 단단하고 더 날카로웠다.이 묘인족의 자랑을 이 놈에게 쓴다면 나름대로 이 놈에게도 영광이라 생각될 것이다. "말해." "무..무엇을..." "저 꼬마 야묘족에게 무슨 짓을 했지?" "아..아무것도..! 난 저 애를 모릅니다." 녀석이 두려워 하며 말했다.나는 고개를 홱 돌려서 암컷들을 바라보았다. "너 농담하지 마.인간,드워프,노옴,갈색아인족,엘프,이렇게 너의 콜렉선이 많은 데 그 중에 야묘족이 없다는 게 말이 되나?" 내가 조소하자 여자들이 항의를 내지르면서 얼굴에 핏대를 세웠다. 그러나 나는 그녀들의 모든 말을 무시하고 녀석을 돌아보았다. 대저 이성을 잃고 떠들어 대는 암컷들의 말은 무시할 수도 있는 것이다. "안그러냐? 색마엘프? 엘프사에 길이 길이 남을 만한 콜렉션이구나." 녀석의 얼굴이 분노로 파랗게 질렸다. "노,..농담하지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저들은 전부 나의 소중한 친구다!" "허어..그러셔? 넌 오로지 여자만 친구로 삼는가 부지? 나의 현명하고도 적절한 판단에 따르면 남자녀석이 난 오래 못살아요 하면서 여자들을 꼬시는 것은 상당 한 꿍꿍이 없으면 해낼 수 없는 일이라고 보는데." "무슨 소,,소릴!" 그가 분노로 나에게 덤벼들듯이 벌떡 일어나려는데 카산이 끼어들었다. "잠깐 기다려요.쿠베린.카나리안 숙부님의 말씀을 들어요.일단 무슨 일인가 부 터 알고 화를 내라구요.게다가 당신..의뢰금도 받았으면서..!" 나는 그의 말 중 의뢰...라는 말이 나오자 마자 품안에서 주머니를 꺼내 바닥으 로 내던졌다.탓 하고 주머니안의 호안석들이 튀어 나와 데그르르 돌아서 바닥으 로 산산히 흩어졌다. 카산이 당황해서 그 것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나는 바닥에 뒹구는 호안석을 하 나 꺼내들어서 그 색마녀석의 얼굴에 가볍게 들이댔다. "음..이 거봐." 그 녀석의 눈이 날 향했다.잘생긴 얼굴이 상당히 일그러져있다. "제법 눈알 같이 보이지? 난 이 호안석이 매우 매우 마음에 들어.마치 갓 꺼낸 눈알같지않냐?" 그녀석이 공포로 움찔 할 무렵 나는 다시 재촉했다. "이 쿠베린님은 매우 인내력이 없는 분이다.색마녀석아.확실히 대답해라.야묘족 을 언제 건드렸지?" "거..건드린 적이 없어! 없다고 했잖아? .."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긴 얼굴이 되었고 멍청히 우물거렸다. "내가..야묘족을 만난 건..단지..단지.." "단지 뭐야? 그 잘난 쌍판을 걷어내기 전에 어서 불어!" 내가 다시 녀석의 머리털을 움켜쥐자 녀석이 가느다란 비명을 올렸다. "그만해요!그만! 가빈에게 물으면 될 거 아닙니까!" 카산이 고함을 지르면서 내 앞으로 달려들었고 그와 동시에 갈색아인족의 여자 가 밖으로 튀어나갔다.아마 가빈을 데려오려한 듯 했지만 그녀는 돌아오지않았 다.엘프녀석은 헉헉 거리면서 내 손아귀에서 늘어져 있었고 나는 카산의 말에 동의하여 그녀석을 다시 잡아 끌고 밖으로 질질 나왔다. 왕왕 떠들어 대는 암컷들과 카산은 그의 안위에 안절부절 하면서 다시 내 뒤를 따라 나왔다. 갈색아인족의 여자는 린의 앞에 널부러져 있었다. 아마 상당한 실력행사를 린이 했던 모양이다. 그는 마치 푸른 말뚝 처럼 팔짱을 끼고 가빈의 앞에 턱 하니 서 있었고 가빈은 멍하니 주저앉아서 땅바닥을 바라보고 있었다.그리고 그 옆으로는 에닌이 조용 히 앉아있다.마치 세 개의 움직이지않는 색색가지의 조각상 처럼 보였다. "가빈." 나는 되도록 부드럽게 말하려 애쓰면서 색마녀석을 그의 앞으로 집어던졌다.엘 프녀석은 마치 커다란 인형처럼 앞으로 나뒹굴었다. 가빈은 그를 보자 마자 공허했던 금색 눈에 흉흉한 살기를 띄우곤 이를 드러냈 다.얼굴이 일그러지고 온몸이 바들 바들 떨리기 시작했다.살의가 작은 몸에서 무럭 무럭 일어났다.순간, 인간보다 긴 송곳니가 하얗게 드러나면서 그르릉 거 리는 소리가 그의 목안 깊숙히 부터 튀어 나왔다. "무슨 짓을 했냐? 이 놈이?" 내가 다시 물었지만 그 순간 이미 가빈의 몸은 두웅 뜨면서 엘프의 목줄기를 향 해 덤벼들었다.흰 송곳니가 살의와 함께 빛났고 에닌이 비명을 올렸다. 그리고 나는 급히 가빈의 목덜미를 잡아챘다. 가빈이 거세게 반항하면서 내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이를 드러내며 포효했다. 쿠오오오! 이 녀석의 이는 제법 날카롭게 드러나 전투모드로 바뀌어져 있었다.전신의 털은 -머리털 말이지만- 허공으로 치솟았고 귀와 눈꼬리는 살벌하게 찢어져 세모꼴이 되었으며 이는 좌우로 찢어지면서 하얀 이가 흉칙할 정도로 드러났다.녀석의 손 톱도 제법 나타나 버벅거리고 있었다.그 녀석이 버벅 거려서 내 옷자락이 갈기 갈기 찢어졌다. 나는 그 녀석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목덜미를 쥐고 좌우로 심하게 흔들어주었다. 그가 이리저리 장난감처럼 흔들리는 동안 그 모습에 공포에 질린 여자들이 일제 히 뒤로 물러섰고 엘프녀석은 새파랗게 질려서 굳어있었다. "자아..이제 말하는게 좋을 거야.나에게 갈기갈기 찢길래? 아님 이 녀석에게 널 주어서 목줄기를 물어뜯게 할까?" "내..내가 야묘족을 만난 건 단 한 번 뿐이야!" 엘프가 선언하듯 말했다. 그는 질린 얼굴로 가빈의 변한 모습을 보면서 급히 말했다. "난 야묘족의 어린 남매를 노상에서 만났고,그저 그들에게 친절하게 해주었을뿐 이야." "너무 친절해서 이 애가 이렇게 광분하는 모양이지?" 나는 흐흐 웃었다. "..나와 우리 누나는 ....마을을 떠나 소풍을 가기로 했었지요.그러다가 갑자기 여행하자고 누나가 우겼어요.우리 누나 타리엔은 여행과 영웅담을 아주 부러워 했지요.며칠 간이나 돌아다니는 동안 ..소매치기를 했어요.그리고 그런데로 우 린 괜찮은 콤비였죠.." 가빈은 내 품안에 안긴 상태로 중얼거렸다. 그의 눈은 허공을 바라보고 금색 눈은 촛점을 잃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우린 숲길을 가다가 멋진 피리솜씨를 가진 엘프를 만났어요.여 행하고 있다는 그도 우리에게 친근한 태도를 보였기에 우린 그에게 금방 터놓고 친구가 되었죠.그러나 그가 우릴 그런 식으로 배신할 줄은 몰랐어요." 그의 눈안이 다시 불타오르고 손톱이 튀어나와 살갗을 찔러댔다. "그가 우리에게 잠시 기다리고 있으라고..잠시 자기를 기다리면...기다리면..음 식을 가져다 주겠다고..그렇게 말해서 우린 술집의 뒤 골목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어요.우리 모습이 기이해서 사람들 눈에 띄여봐야 좋을 것 없다고 해서..우 린 그렇게 기다리고 있었죠.." 그는 고개를 내 어깨에 파묻었다.전신이 가늘게 떨렸다. "그런데 기다려도 그는 오지않고..갑자기 골목에 다섯명의 사내가 나타났어요. 그들은 ....술집에서 우리 이야길 들었다면서 엘프녀석이 거짓말 한 건 아니구 나 하고 우리를 조롱했어요.저 죽일 놈은 우릴 판 거에요!" 그가 아앙 하고 울부짖었다. "그 더러운 골목길에서 ! 그 더러운 골목길에서! 우리 누난 몇번이나 놈들에게 짓밟혔어요! 몇번이나! 몇번이나! 그 울부짖는 소릴 들으면서 나는 ..! 나는!" 그가 몸부림을 시작했다.그는 주먹을 쥐고 내 등과 내 어깨와 내 가슴을 후려갈 겼으며 마침내는 내 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 "그..우는 소리! 그 더러운 냄새! 그..지독한 비명소리!.." 그가 엉엉 흐느껴 울었다. "....나하고 누나는 그렇게 곤죽이 되도록 얻어맞은 뒤에 쇠창살이 달린 더러운 우리로 끌려갔어요.돼지나 거위같은 것들이 있었던지 오물이 바닥에 깔려서 숨 도 쉴수 없는 곳이었고.." "...놈들은 우리를 노예상에게 팔아넘겼어요...누난 ..상처가 악화되어서 삼일 만에 시름 시름 앓다가 죽어버렸고..나는 탈출했죠.." "..그리고 한 1,2년간 돌아다니다가 다시 사냥꾼에게 잡혀서 또 노예가 된 거 죠.그리곤..에닌을 만나고..당신을 만나고..." 그는 작게 흐느꼈고 그리고 매달린 채 잠이 들었다. KUBERIN........ 비애... 날아가던 독수리가 그 날개를 피로 물들이며 그 넓은 창공을 버리고, 지상에 떨어질 때처럼...... 5 팔짱을 끼고 선 린은 묵묵히 말이 없었다. 녀석은 언제나 말이 없고 에닌도 언제나 그러하다.아니 원래 그런 편은 아니었 지만 지금은 어쨌거나 말이 없다. 카산은 새파랗게 질린 채 그 자리에 굳어 서 있었고 여자들은 모두 카나리안의 주변에 둥글게 원을 그린 것 처럼 모여 앉아있었다. "나는...북쪽의 도시 흐룬으로 가는 길에 야묘족의 두 남매를 만났습니다.그리 고 그들과 곧 친해졌구요.그리고 같은 곳으로 가길래 동행하기로 했습니다." 그는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한 도시에 들어섰을때 나와 그들은 배가 매우 고파서 여관에 들어가 려다가 거절당했지요.그들의 외양이 드문 야묘족의 것이라 아무래도 꺼름칙하게 여겨졌던 모양입니다.그래서 하는 수 없이 그들에게 밖에서 기다리라고 말했습 니다.음식을 좀 얻어오겠다고 하면서요...중간 일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내가 식당에서 음식을 받아왔을 땐 이미 그들의 모습은 없었습니다.아마 화가 나서 가버렸나 보다 하고 난 생각하고..." "너 술마셨지?" 난 말을 잘라 물었다. "네?"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고갤 저었다. "인간들이 마시는 맥주같은 것은 마시지않기때문에 저는 언제나 가지고 다니는 포도주만 마십니다.그러니까...인간들의 마을에선..술은 마시지않죠." "그럼..왜 지체했지? 금방 음식을 가지고 나오지 않았지?" 그의 얼굴이 가볍게 일그러졌다. "하지만.. 사람이 무척 많았던..걸로 기억합니다.장날의 저녁이었던가요,시장의 한복판이었던가요? 하여간 사람이 무척 많아서 음식이 나오는데 한 참 걸렸습니 다." "음식..누구에게 준다고 하면서 샀어?" "별로...그런 말 따위는 하지않은 거 같은데요?" 그는 고개를 설레 설레 저었다. 나로서도 엘프가 술집에 들어가서 사내들과 어울려 맥주잔을 기울이며 음담패설 을 나누는 장면은 상상하기가 쉽지않다. "그런데 대체 뭐가..어떻게 된 겁니까? 전 아는 야묘족이라곤 그들 남매밖에는 모릅니다.이름도 잘은 기억나지않지만 타리엔..과..뭐 그런 이름이라고 기억합 니다." 그는 억울하다는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나는 팔짱을 끼고 녀석을 빤히 보았다. 녀석의 보랏빛 눈은 거짓말을 하고 있진 않았다.녀석은 단지 자신이 무슨 짓을 초래했는지 모르는 것 뿐이었다. "보세요.쿠베린,카나리안님은 무고하지요." "무고?" 나는 코웃음을 쳤다. 카산은 엄하게 나에게 항의했다. "가빈은 뭔가 착각한 거에요.이 분과 가빈이 뭔가 연관될 리도 없고..엘프가 거 짓말을 할리도 없는 거죠." 나는 다시 의자를 끌어와서 그 색마녀석의 앞에 앉았다. "좋아.거짓말을 하지않았다고 하니 다시 차근 차근 따져볼까?" 약간 김이 빠지는 기분이었지만 나는 녀석의 여자들을 바라보면서 물었다. "이 놈을 어떻게 만났지? 넌?" 내가 제일 먼저 지목한 갈색아인족의 여인은 홱 고개를 돌리면서 모멸에 찬 표 정을 해 보였다.그녀는 팔짱을 끼고 내가 한 말은 깨끗이 무시해 버리겠다는 태 도를 취했고 나역시 그녀를 무시하고 지껄였다. "이 녀석과 길가다 친해졌겠지? 그리고 이 녀석이 스스로 나는 수명이 길지 않 아서 세상의 단맛을 보고싶으니 친구가 되어달라 운운했지?"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여자들이 일제히 나에게 멸시를 보내왔다. "이봐요! 어린 주제에 그런 소릴 하지 말아요!" 인간여자가 큰 소리로 떠들었다.그녀는 날 꾸짖듯이 바라보면서 엄숙하게 말했 다. "난 그를 사랑해요! 그래서 같이 있는 것 뿐이에요!" 나는 흐 하고 코웃음을 쳤다. "사랑? 그래,그 사랑이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져 내렸단 말이야? 아무 행위도 아무 계기도 없이 그냥 척 하니 눈에 불이 붙었다고 말하는 건가?" "조롱하지 말아요! 당신,정말 뭘 알고나 떠들어요?" 여자들이 삿대질을 하면서 흥분했다. 나는 그녀들을 상대하길 단념하고 이번에는 드워프 마루투의 딸을 곧장 지목했 다. "마루투의 딸아." 그녀는 움찔했다. 안그래도 그녀는 이들 미모의 여성들 사이에서 상당히 압박감을 느꼈을 것이다. 종족간에서 오는 외모란 사실 별 열등감을 일으키게 할 이유는 없지만 어찌되었 든 미의 기준이 모두 엘프나 인간에게 맞추어져있는 한 그녀의 열등감은 이들 사이에서 확고히 쌓였을 것이었다. "넌 이 놈을 어떻게 만났지?" "아.." 그녀는 여자들의 암묵적인 반대에 부딪쳤다. 그녀가 망설이고 있을 무렵 내가 천천히 위로하듯이 말했다. "말해라.나는 네가 어릴 적부터 봤어.넌 덜 떨어진 애는 아냐.고집이 세긴 해 도." 그녀는 망설였다. "난..이 분을 사랑해요,쿠베린." "사랑하든 말든 그건 내 알바가 아니고 이 녀석을 어떻게 만난 건가만 이야기 해주면 돼." 그녀는 망설이고 또 망설이다가 엘프를 바라보았다. 카나리안이 부드러운 시선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기에 안심한 표정을 지은 그 녀는 나에게 조용히 말했다. "..딸기를 따고 있는 중인데 갑자기 가시에 찔려서 손을 다쳤어요...그래서 시 냇가에 가서 손을 닦는데 갑자기 시냇물에 사람의 얼굴이 비치더군요.너무 놀라 돌아보니 이 분이었어요." "흐음." 놀고 있군. "그래서..그래서 이 분을 만나게 된 건데..너무 상냥해서 전 .." "사랑에 빠졌다..라고 말하고 싶은 거지?" "네." 그녀는 반항적으로 고개를 들고 날 바라보았다. "뭐 사랑에 빠지려고 발버둥을 친다면 방귀뀌는 것을 보고도 사랑에 빠진대니 별 말은 않겠다.단도직입적으로 물어서 색마,너." "난 색마가 아니라니까!" 그가 항의어린 얼굴로 외쳤다. "솔직히 말해.너 그 당시에 여관이든 술집이든 혹은 빵집이든 여자를 만나서 히 히덕거렸지?" "에?" "여자를 만나서 히히덕 거리느라 늦었지?" "무..무슨..!" "어떤 여자가 스스로 너에게 다가왔다 운운 하지는 말아.네 놈은 여자수집에 취 미가 있는 드문 엘프인거 같으니까." "심한 모욕이요! 난 그런 짓하지않아요! 난 그저 친구들로서 같이 지낼 뿐!" 그가 엄중항의했지만 난 지금 그것을 받아줄 기분이 전혀 아니었다.그래서 녀석 의 턱을 가볍게 차주었다. 그가 떠들다 말고 뒤로 나자빠지자 카산이 나에게 너무 심하다면서 고함을 질러 댔다. "놀고 있네.그럼 네 친구는 다 여자고 남자들은 없냐?" "우웃.." 그는 창백한 얼굴에 한 줄기 피를 흘리면서 나를 증오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런 눈으로 볼 거 없어,네가 그렇게 넋을 잃고 바라보지않아도 난 잘생겼으니 까." 나는 일어서서 카산을 바라보았다. 카산의 눈은 날 증오하듯이 쏘아보고 있었는데 나는 그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노 력할 마음은 전혀 없었다.아니 조금은 있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린은 경멸의 눈으로 카나리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앞으로 구십년 이상이나 살 녀석이 짧게 산다고 버둥버둥 거리면서 여자수집에 열을 올리다니....세상 참 오래 살고 볼일이다." 나는 혼잣말 하듯 중얼거렸고 그 말을 들은 카나리안은 고개를 홱 쳐들었다. 그리고는 여지껏 보지 못한 격렬함으로 나를 향해 고함을 질러댔다. "당신이 고작 구십년밖에 살수 없는 내 심정을 알아! 나는 다른 자들과 달리 언 제나 넌 죽어 넌 곧 죽어 하는 소리를 들으며 살아왔다고! 그 심정을 당신이 알 아?" 그는 주먹을 쥐고 벌떡 일어났다. 그는 격렬한 몸짓으로 말리는 카산을 밀치며 나에게 돌진하듯 달려와 내 멱살을 잡으려는 듯 손을 내밀었다.마치 다른 사람같았다. "다른 엘프들은 이천년은 살아! 천년은 살아! 그런데 난 고작 이백년뿐이야! 나 에겐 이백년이란 시간밖에는 없어! 네가 그 심정을 아나! 그저 친구를 사귀고픈 내가 그리도 잘못했단 말이냐!" 그의 보랏빛 눈이 눈물로 글썽이면서 흔들렸다. 나는 그녀석의 우는 얼굴을 보자 마자 왜 여자들이 녀석에게 금방 혹했는지 깨 달았다. 아름다왔다. 그러나 그건..뭐랄까..불쌍함에 대한 아름다움이었다. 이 녀석은 자신의 불행에 도취되어 사는 놈같이 보였다. 그 불행 속에서 병적인 아름다움을 키우고, 그 아름다움에 안주해서 마치 다른 자들의 연민이란 감정을 양분으로 살아가는 음지식물같은 기분이 든다. "그래,난 모른다." 나는 녀석의 손을 턱 밀쳤다. 그 녀석이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날 빤히 바라보는 동안 나는 그 녀석의 뺨을 가볍게 후려쳤다.그 대신 비명을 질러주는 여자들을 뒤로 하고 나는 가볍게 녀 석에게 말해주었다. "하지만 네 놈이 지금 하고 있는 짓거리는 매우 잘못되었다는 건 알지." "뭐..뭐가!" "자신의 불쌍함을 방패로 내걸고 상품으로 내걸다니,너도 참 어처구니없는 놈이 다." "뭐라구!" "동정해 주세요.동정해 주세요 하고 매달리니 마음넓은 여자들이 당연히 꼬이겠 지.알만하군,색마양반." 나는 그를 아래 위로 훑어보았다. "허긴..엘프중에 정력가가 있다는 말은 못들었으니 색마라고 부른다기 보단 울 보엘프라고 부르는 게 옳을 듯하구만." 그가 다시 나에게 덤벼들려고 할 때 나역시 다시 턱 하니 밀쳐버렸다. 녀석이 데굴 쓰러질 때 나는 돌아보지도 않고 저벅 저벅 걸어나왔다. 기분이 더러웠다. 린이 내 뒤로 소리없이 따라 왔고 약간 소리를 내면서 에닌이 따라왔다. 나는 그들이 내 뒤를 따라오는 것을 모른 척하고 모퉁이를 돌아 가빈이 누워있 는 방으로 돌아갔다. 가빈은 울다지친 얼굴로 동그랗게 말린 이불을 쥐고 웅크리고 자고 있었다. 엘프의 취향으로 만든 방. 침실.모든 침대는 모두 작은 싱글 침대. 갑자기 울컥 뭐가 치밀어 올랐지만 나는 지긋이 억눌렀다. 일단 집에 돌아가는 게 좋았다.모든 게 다 짜증나는 일이다. 나는 팔을 뻗어 가빈의 몸을 안아 올렸고 깨끗한 이불로 녀석의 몸을 돌돌 감았 다.그리고는 녀석을 안고 밖으로 성큼 성큼 걸어나갔다. 린과 에닌은 여전히 말이 없고 어느새 떠오른 달은 휘영청 빛을 발하고 있다. 나는 등뒤로 흐느끼는 카나리안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지나치게 예민한 귀 덕에 카산이 뭐라 추궁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여자들의 한숨 소릴 들으면서 수풀속을 걷기 시작했다. 숨이 막힐 듯한 나무딸기향과 곧 열매를 맺을 무수한 꽃들의 향기 속에 파묻혀 서 나는 걸었다.사박 사박 걸을 때마다 내 발밑에서 나는 그 소리가 너무 크게 느껴져서 조금 신경이 곤두섰다. 린은 하늘을 올려다 보고 달빛을 바라본다.그리고 에닌은 여전히 시선을 가빈에 게 둔 채 걷고 있었다.카산이나 카나리안에게는 신경을 쓰지않고 그녀는 계속 우리들과 함께 걸었다. 딸랑... "그거 뭐에요?" 가빈이 낮게 물었다.녀석의 눈은 퉁퉁 불어있었다. "네 선물이다." "체엣." 녀석이 흐흐 웃으면서 내 손안에서 금빛 방울을 받아들여 들여다 보고 있었다. 한동안 망설이더니 그녀석은 그 것을 귀걸이에 걸었다.그리곤 머리를 절레 절레 흔들어 소리를 내보였다. "저 때문에...보석을 잃었군요." 녀석이 그렇게 주저하듯 말했다. 나는 감상적이 아니지만 그렇게 묻는 녀석의 얼굴을 보니 화를 낼 기분은 없어 진다.분명히 녀석때문에 호안석 한 주머니를 잃었다. 그렇지만 지금 내 눈앞에는 호안색처럼 생긴 두 개의 커다란 금빛 눈이 날 바라 보고 있었다.그 눈은 비록 팔아버릴 수는 없지만 충분히 호안석 만큼은 아름다 웠다. [쿠베린 막간극] 폭풍우 KUBERIN..... 내 이름이라고 남이 불렸던 것은 진실한 이름이 아닌 나의 허울 내 진실의 이름은 나만이 알고 ...오직 그만이 안다. 그날이 왔다는 것을 안다. 나는 조용히 일어서서 창문을 닫았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내가 입은 옷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꺼내 걸친다. 밖에는 사나운 비바람이 불고 있다.나는 그 비바람속을 나아가 내 할일을 하는 것이다. 가빈은 자고 있고 린은 나의 움직임을 숨소리하나 내지않은 채 지켜보고 있다. 그가 지켜보는 것을 알지만 나는 동요하진 않는다. "멋진 밤이군." 린은 나의 얼굴을 바라보고 의아함과 함께 그답지 않은 불안감을 표하면서 몸을 일으켰다.그리곤 나에게 다가오려 했다.나는 손을 내젓고 그에게 앉으라고 명령 했다. "앉아." 그의 움직임이 굳었다. "하지만.." 그가 그답지 않게 항의하려 했다.그리고선 다시 내 눈과 부딪치자 입을 다물어 버린다. 나는 그를 놔두고 짐하나 가지지않은 채 걸어나왔다. 이미 가게문을 닫은 시각이었지만 일층의 가게에는 인기척이 있었다. 누군지는 알고 있다.알고 말고. 마미는 낡았지만 튼튼한 의자에 멀건히 앉아 있다가 날 보곤 불안한,그러면서도 결연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그리곤 내가 먹을 만한 특제 소시지를 한 꾸러미 기 름종이에 싼 것을 건넸다. 내가 받아들자 그녀는 긴 말따윈 하지않고 두 팔을 벌려 나를 끌어안았다. 그 거센,완력이외의 것이 내 몸을 꼭 싸매고는 내 전신을 어루만지듯이 스치고 지나간다. 그녀는 내 이마에 키스하고는 내 검은 머리칼을 흐트러뜨렸다. "쿠베린.." 그녀는 말을 하진 않았다.그렇지만 역시 평소와 다른 애절한,어딘가 불안한 얼 굴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다녀올께,마미." 내가 조용히 한 마디 하는 것을 끝까지 기다리고 있던 마미는 10여년전과 마찬 가지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가슴을 쓸어내렸다.마치 통나무를 연상시킬 것 같은 단단한 허리춤을 가진 그녀는 두 손을 꽉 마주 잡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녀에게서 천천히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거센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가게 문 바로 옆의 나무는 휘어질 듯 꺾여질 듯 휘청이면서 거친 바람에 대해서 항의하고 있었다.나는 그 나무의 나뭇가지가 만들어내는 큰 물방울들을 뒤집어 쓰면서 밖으로 걸어나갔다.그리고 막 달리려는 순간 따각 하고 마차가 가까이 다가와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사실 마차와 나는 별로 관련이있는 게 아닌지라 마차를 흘긋 보기만 했다. 그러나 그 마차의 마부석에 올라탄 녀석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타." 그 목소리는. "비가 많이 와.태워줄려고 왔어." 기름을 먹인 우의를 입긴 했지만 흠뻑 젖은 갈색머리와 수염에서 물이 줄줄 흐 르고 있었다.그는 마부석에서 나에게 턱짓을 했다. "무리하는군." 그의 얼굴이 약간 찡그려졌다.왠지 울고 싶은 듯한 얼굴이었으나 억지로 웃음을 보이고 있었다. "타!" 그가 짧게 나에게 말했고 나는 사양하지않았다. 마차문을 열고 들어서자 마자 말 두마리가 끄는 이 장례용 마차는 달캉거리며 달리기 시작한다. 스카는 불안해 하고 있었다.마미도 마찬가지고. 이 두사람은 내내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10년이 더 된 것같지만 -20 년인가? 어쨌든 이 날이 오면 그들은 불안해했다.내가 어디론가 가버릴 지도 모 른다는 불안감임을 나는 알고 있지만 나는 물론 그들의 곁으로 돌아올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들의 호의를 받아두자. 눈을 감고 마차의 흔들림에 몸을 맡기고 있는 동안 물비린내와 함께 무시무시한 바람소리가 귀청을 찢어댄다.마차에 부딪치는 바람소리는 마치 어떤 난폭한 녀 석이 부는 휘파람 같기도 하며,어떤 미치광이 여자의 울음소리처럼도 들린다.그 리고 이런 날 밤에 마차의 지붕과 차체를 하염없이 때리고 있는 그 빗방울 소리 는 안에 들여보내 달라고 누군가가 두들겨대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아마 내 기분이 이래서 그럴 지도 모른다.하지만 나는 내가 이긴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나는 왕이며 나는 이 땅위에 있는 자들 중에 가장 강력한 자이다. 나를 이길 자는 없고 나에게는 힘이 있다. 나는 몸을 이완시키면서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마차 안에서 허공을 바라보았다. 얼룩진 마차의 벽위로 빗방울이 새고 있었다.그 물방울이 주르르 바닥으로 흘러 내리고 있는 동안 나는 그 물방울의 흐름을 보고 내 호흡을 보며 내 용기를 보 았다.그리고 나는 만족했다. 마차는 하염없이 달려서 엘리야의 외곽을 완벽히 벗어나 수풀속을 달리고 있다. 나는 마차문을 열고 슬쩍 빗방울 사이로 바닥을 내려다 보았다. 땅바닥은 진흙투성이로 노란 속살을 드러낸 채 빗방울의 세례를 받아 흐느적 거 리고 있다.그 진흙에 처박히는 게 난 지 아니면 그 인지는 오늘 밤,아니 어쩌면 며칠 후에 결론이 날 것이다.그도 나도 이런 진흙탕을 싫어한다.하지만 어쩔수 없다.이런 날 비가 오고 폭풍우가 친다는 것도 뭔가 의미심장하지않은가 하고 나는 혼자 히죽이 웃었다. "스카!" 내가 외쳤다. 얼굴에 차가운 빗방울들이 일제히 쏟아져서 앞을 잘 볼수 없었지만 나는 그가 내 부름을 들은 것을 안다.그 증거로 스카는 내 몰던 말들의 고삐를 당겨서 천 천히 멈추고 있었다. 이제 편안한 시간은 그만. 그의 등은 흠뻑 젖어서 고통스러운 인내심을 발휘하느라 흰 김을 뿜어내고 있었 다. "기다리고 있을께!" 그가 외쳤다. 그의 눈은 충혈되어 있었다.빗방울 탓만은 아닐 것이다. 그의 얼굴에서,그 견고하고도 고집센 턱에서 초조와 불안이 동시에 튀어 나왔고 나는 흐 하고 웃어 보였다. "신경쓸거 없어.언제 끝날 지는 나도 모른다.돌아가서 기다려!" "넌..추운 거 싫어하잖아!" 스카가 마치 그것이 유일한 이유인 양 외쳤다. 나도 적당히 속아주어야 겠지.그의 필사적인 얼굴은 어딘가 서글퍼 보였다. 하지만 녀석에겐 여동생도 있고 놈을 사모하는 여자들(?)도 있다.그리고 무엇보 다 이 일에 끼어들 자격도,이유도 없다는 것이다. "돌아가라!" 나는 그에게 말했고 한 발을 떼어 진흙탕 속에 내딛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내 몸을 변화시켰다. 다리는 점점 길어진다.내가 입고 있던 옷은 모두 벗어던지고 나는 알몸이 되었 다.차가운 빗방울이 쏟아지는 가운데 나는 전신에 그동안 싸놓기만 했던 힘을 개방했다. 뜨거운 느낌이 등줄기로 치닫아 퍼져나간다.손이,가슴이,다리가,그리고 머리가 뜨거운 혈관의 팽창으로 아득해진다.나는 눈을 감고 오랜만에 해방감을 맛본 상 태로 천천히 빗속에 서서 후각과 청각과 촉각을 즐겼다. 발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부드러운 진흙의 느낌,그리고 피부위에 떨어지는 차 가운 빗방울,휘날리는 나뭇가지사이로 외쳐대는 바람의 포효. 나쁘지않군.이런 것도.오히려 이런 유혈의 밤에 어울리는 걸. 나는 웃으면서 눈을 떴다. 나를 바라보고 있는 스카의 시선은 공포와 불안과 이루말할 수 없는 감정으로 휘감겨 있었다.그녀석은 날 보고 있었지만 난 이미 그를 보지않았다.지금은 그 를 볼때도 아니고 내 일에 집중할 때이다. 나는 스카가 멍하니 서 있는 동안 몸을 솟구쳤다. 내 몸이 빗줄기를 뚫고 스카의 머리위로 훌쩍 넘어서서 그리고 숲으로 깊숙히 들어갈때 까지 스카는 움직이지않았다.그는 그 자리에 고집스레 서서 내 뒤를 바라보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쿠베린.묘족의 왕." 녀석이 말했다. 그렇게 말하며 다가온 놈들은 벌써 100명이 넘는다. 그리고 그놈들 중 태반은 모두 대지의 여신이 벌려놓은 품안에 누워있다. 자연의 여신들은 우리들 영생의 일족의 육체를 갈갈이 찢어 해체 한 뒤에 그것 을 뭇짐승과 대지에게 바친다.그리고 우리들은 거기에 순응하고 있다. "저의 이름은 세비오,올해 당신에게 도전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녀석은 아직 젊고 아름다왔다. 흉터가 가득한 내 몸과 달리 녀석이 아직 아름답다는 것은 태어나면서부터 강하 단 의미도 된다.형제는 형제를 해하고 누르고 부모는 자식을 누른다.우리들 강 건한 일족에게 있어서 흉터없는 몸을 가진 녀석은 경계의 대상이다. 검푸른 머리칼을 길게 늘어뜨린 녀석은 내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손톱을 꺼내들 어 스스로 자신의 머리털을 덥석 잘랐다.그리고 그 머리털을 바닥에 내려놓고는 내 앞에서 가볍게 무릎을 꿇었다. 태연해 보이지만 이 녀석은 떨고 있다.아니 떨 수밖에 없다. 기억도 나지않는 아득한 과거에 나 역시 이 날 나의 숙부에게 그렇게 달려들었 었다.그리고 숙부를 쓰러뜨리고 내가 왕이 되었다. 나는 녀석에게 손바닥을 내 보이면서 가볍게 손짓했다. "와라.나의 권속.세비오.그대의 도전을 받아 주겠다." [쿠베린 별전1] 스카 이야기 KUBERIN......... 어느 멍청한 용병이야기.. 1 콰앙 하고 나는 난폭하게 문을 열고 튀어 나왔다. 더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진절머리가 난다. "멍청이! 너란 자식은 평생을 두고 거렁뱅이를 벗어나지 못할 걸!" 악을 지르는 녀석들의 소리가 시끄럽게 등 뒤로 들려왔고 빠른 걸음으로 걷는 내 옆으로 동료들이라고 하는 녀석들의 연민과 다소 조소에 가까운 시선들이 와 닿았다. 나는 빠른 걸음으로 걸어 아직은 눈이 쌓인 뒷문으로 향했다.내 등 뒤로 몇몇 하녀들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어서 이 저택을 빠져나가고 싶었다. 이대로 곧장 걸어서 다시 용병길드의 문을 두들겨야했다.그리고 그들은 이번엔 나를 받아 주지않을 지도 모른다.아니면 혹은 .. 나는 한숨을 내어 쉬고는 빨랐던 걸음을 점차 늦추었다.허긴 이렇게 빨리 걸어 봐야 갈 곳은 없었다. 등 뒤에 매달린 검이 무겁게 느껴졌다. 하늘은 차가운 푸른 빛을 띄고 햇빛은 미약하게나마 화사한 빛을 던져주고 있는 이 맑은 겨울날의 아침. 나는 또 한번 의뢰받은 일을 놓쳐버렸다. "적당히 해 두는 게 어떤가? 스카?" 후우 하고 용병길드의 소개인 처크가 말했다.그는 하나 밖에 없는 팔뚝을 흔들 어 보였고 나는 그의 시선을 약간 피했다. 그의 명부에 적힌 일들은 대다수가 상인들의 신변보호였다.그리고 어떤 것은 물 론 공물이나 물건수송같은 것도 있긴 했지만 그것 보다는 대부분 상인 보호가 많았다.이런 평화시대에,특히 안정된 이 세상에서 가장 용병들이 많이하는 일이 란 그것이었다.그렇지만 그것은 반대로 말해서 신변보호를 요청하는 부호란,상 인들이란 당연히 나쁜 짓을 하는 놈들이란 말도 된다. 나는 팔짱을 끼고 묵묵히 그의 시선을 슬쩍 피하고만 있었다. 배가 고팠다.오늘 은 새벽부터 저녁때인 지금까지 아무것도 먹지못했다. 그가 나에게 잘해주는 것은 나도 알고 있다.나는 지금 일곱개의 일을 이런 식으 로 밀쳐버렸다.그 결과는 물론 용병길드에 대한 신뢰감 훼손이라는 결과로 이어 지며 다른 상인들의 항의가 들어오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몇번이나 충고했지만.." 그가 명부를 닫으면서 말했다. "우린 용병이다.스카.용병이란 자신이 의뢰받은 일을 다 해내야 하는 거야,자기 맘에 안맞는다고 내팽겨쳐버린다던가 하는 일을 해선 용병이라 불릴 수가 없어! 넌 기사가 아니라 용병이라구! 용병!" "알고 있다구요!" 내가 그를 쏘아보자 처크는 한숨을 내 쉬었다. "정말 너란 놈은...쓸데없는 정의심만 앞세우지 마라.너,오늘 밥먹을 돈이나 있 는 거냐?" 나는 아무말도 하지않았다. 처크는 주머니를 뒤져서 내 앞으로 몇개의 동전을 꺼내 건냈다. "가서 밥이라도 사먹어라.굶었겠지." 고맙다고 말을 할 수도 없었다.이런 일이 계속 반복되고 있었다. 처크는 내 아버지의 친구였다는 이유로 나에게 잘해주고 있었다.그러나 아무리 나라고 해도 이미 스물이 넘은 지 오래.언제까지 그의 신세를 지고 살수는 없 다. 내가 부시시 일어나자 가게안에 있던 몇몇이 내 등 뒤로 조소를 내던졌다. "또 일을 내팽개쳤군.헤이 헤이." "잘난 척하는 녀석." 나는 할 말이 없었기에 입을 꾸욱 다물고 걸어나왔다. 나오니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이런 식으로 또 어영부영 하루가 가버렸다. 사람들은 저마다 발걸음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다들 할 일이 많다는 것처럼 바쁜 걸음으로 집으로 향하고 있는데 나 혼자만 이렇게 멍청하니 길가에 서 있 다. 이래선 안된다고 생각은 했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저 힘을 쓰는 일,검을 휘두르는 일이라면 훨씬 나을 것인데... 이젠 용병길드에서도 더이상 일을 맡을 수는 없었다.오늘 부로 길드에선 축출되 어 이젠 더이상 조합원도 아니다.처크는 내 앞에서 명부를 닫아버렸다. 나는 한숨을 내 쉬고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보랏빛이 되다가 이젠 남빛이 되어 버린 하늘. 가장 좋은 방법은 이 도시를 뜨는 것 밖엔 없었다. 그렇다면 길드의 조합원도 아닌 이 주제에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고 나는 우 두커니 서서 생각했다.그러나 생각을 더 진행시키기도 전에 너무 배가 고팠기때 문에 하는 수 없이 몇개의 동전을 들고 가서 빵을 사왔다.빵 두덩이와 버터 한 덩이를 사고 나니 돈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아버지의 유품인 검을 팔 수도 없 는 지경이라 나는 한동안 멀거니 도시의 바깥 외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거리는 완전히 어두워 지고 말았다. 나는 빵을 천천히 씹으면서 도시의 외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그리고 이 도시 마르세로는 절대로 돌아오지 않으리라 맹세했다. 저벅 저벅 발 걸음 소리가 처량맞게도 크게 들렸다. "기다리세요.저기,저기.." 갑작스런 부름에 등을 돌려 보니 조그마한 검은 그림자가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가까이 다가가니 둥근 얼굴을 한 주근깨 투성이의 꼬마였다.꼬마는 열살 남짓했는데 나를 빤히 올려다 보고는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냐?" 내가 퉁명스레 묻자 꼬마는 갑자기 손에 들고 있던 보퉁이를 불쑥 내 밀었다. "받으세요!" "뭐야?" 내가 흠칫해서 소리쳐 묻자 질린 안색의 꼬마가 급히 말했다. "저기.저기..누나가 전해드리라고 했어요!" "누나?" "에리누나요." 나는 비로소 이 꼬마가 누군지 알수 있었다. "그런가..." 내가 보퉁이를 받자 제법 미지근한 감촉이 손바닥에 전해져 왔다. "바..받았죠? 아저씨..그죠?" 꼬마는 급히 그렇게 확인하고는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그리고는 홱 돌아서더 니 마치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양 맹렬히 뛰어 도망가버렸다. 나는 멍하니 보퉁이를 든 채 완전히 어두워진 좁은 골목길을 바라보고 있었다. 에리는 내가 지금 막 그만둔 대상 에그녹의 하녀로 나이 스물정도 된 처녀였다. 아니,이젠 처녀라고 부를 수 없을 지도 모른다.그녀는 열살 때부터 에그녹의 부 인네들-한둘이 아니다-의 하녀로 지냈다고 했다.그런 그녀가 에그녹의 눈에 띄 인 것은 그녀가 열 여섯살 때로,그녀는 이리저리 도망다녔지만 결국은 에그녹의 손에 걸려 순결을 잃었다.그리고 그것 만으로도 좋은데 그녀의 동생 셀리가 열 네살어린 나이로 에그녹에게 겁간을 당할 뻔 했다. 그게 바로 어젯밤 일이었다. 어젯밤 나는 그의 방 근처에서 호위를 서고 있었다.나 이외에 세명의 용병들이 더 있었지만 그들이나 나나 모두 에그녹이란 놈을 미워하고 있었다.비록 돈을 받긴해도 놈같은 녀석을 호위한다는 것은 불쾌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꺄아아아.."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내 옆에 선 키리가 나를 향해 낮게 충고했다. "못들은 척 해." "하지만 비명소리야." 내가 가볍게 항의하자 키리가 입가를 일그러뜨리면서 말했다. "우린 들어도 못들은 척해야지." "하지만.." 내가 입을 다무는 그 순간 이번에는 비단찢어지는 듯한 자지러지는 소리가 연이 어 터져나왔다.처절한 비명이었다. "살려주세요! 도와주세요!" 나도 모르게 입가가 일그러졌다. 주먹이 꽈악 쥐어졌다. "스카,이번에도 튀쳐나가면 넌 길드에서 제명이다." 낮게 충고하듯,위협하듯이 키리가 재차 말했다. 나는 참았다.주먹을 쥐고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바로 정면에는 정원에 흐트러지게 피어난 꽃들이 화려함을 자랑하고 있었다.밤 인데도 불구하고 정원안은 환했다.여기저기 등롱들을 펼쳐놓은 까닭에 울긋불긋 피어난 봄꽃들이 아직 잔설이 남은 뒷 담과 어우러져 매혹적인 향내를 풍기고 있었다. "꺄아아아아." "살려주세요! 제발!" 다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너 혼자 모든 것을 다 할 순 없어.네 앞길이나 살펴." 키리가 가만히 있는데도 나에게 충고해 왔다.그는 나이 사십의 베테랑이었다. 나는 못들은 척 하려고 무진장 애쓰고 있었다. 그러나 저런 소리를 듣고 무심할 수 있다는 게 더 놀라운 일 아닌가? 그 때 탁탁하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튀어나왔다.내가 검자루를 잡으려는 찰나 갑자기 우리들의 발밑에 작은 몸집의 소녀가 넘어졌다. "악." 키리와 내가 뒷걸음질 쳐서 소녀를 주시할 때 갑자기 문이 발칵 열리면서 이마 에 핏대를 세우고 있는 뚱뚱한 녀석이 튀어나왔다.녀석은 비단 가운만 달랑 걸 친 채 알몸인 상태였다.개기름이 번지르한 그 얼굴이 헥헥대면서 우리들에게 외 쳤다. "그 애좀 잡아!" 키리와 나는 무의식중에 소녀의 팔뚝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그 순간 나는 소녀와 눈이 마주쳤다. 열 두엇? 많아야 열 서넛으로 보이는 소녀였다.바로 어린 셀리였다. 깡마르고 눈이 커다란 그 애는 이미 눈두덩이와 뺨을 얻어맞아 입가가 다 찢어 져있었다.입안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키리가 침음하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망연한 채 셀리의 몸을 부축해 세웠다.그 리고 그녀의 앙상한 몸매와 채 발달하지도 않은 젖가슴을 멀건히 봐 버리고 말 았다.갈기갈기 찢겨진 옷사이로 드러난 흰 갈비뼈가 드러난 몸매.. 그 가냘픈 몸을 퍽 하고 뚱뚱한 에그녹이 후려갈겼다. 소녀의 가냘픈 몸은 대구르 굴러서 바닥으로 넘어졌다.아작하고 소리가 난 것은 아마도 그녀의 어깨나 팔이 부러지는 소리가 아니었을까 하고 나는 무의식중에 생각하곤 소름이 끼쳤다. "이 년! 이 더러운 년이 어딜 도망가!" 그 놈이 퍽퍽 하고 발길질을 하더니만 그러고도 모자라 셀리의 머리채를 잡고는 질질 끌고 안으로 가기 시작했다. 셀리는 이제 혼절해있었다. 추욱 늘어진 그 몸체를 멍하니 내가 보고 있는 동안 에그녹은 셀리를 끌고 방안 으로 들어갔다.그리고는 찌익 찌익하고 옷자락을 찢는 소리가 소름끼치게 들려 왔다. 나는 무의식중에 발걸음을 옮겨서 방문가로 걸어갔고 키리가 내 옷자락을 급히 잡았지만 나는 뿌리쳤다. 환한 불빛아래 드러난 광경이란 내 이성을 완전히 날릴 만한 일이었다. 그 에그녹이란 놈은 어린애에 불과한 그 애를 발가벗기고 강간하려는 찰나였던 것이다. 빠직 하고 내 머릿속의 무언가가 부서졌고 나는 눈앞이 빨갛게 물드는 것을 느 꼈다. "이 자...식!" 그 다음은 잘은 기억하고 있진 않지만...어쨌든 키리와 다른 용병들이 달려와 나를 에그녹의 몸에서 떼어놓기까지는 상당히 오래 걸렸던 것 같다.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방안은 난장판이었고 소녀는 길게 혼절한 상태로 발가벗겨져서 늘 어져있었다.그리고 나는 벌거벗은 그 놈의 몸을 깔고 앉아서 피떡이 되도록 그 놈을 후려갈기고 있던 차였다. 키리와 다른 용병들이 나의 어깨를 잡아서 끌어내었고 나는 묵묵히 그들의 손에 끌려나왔다.키리가 혀를 찼다. "정말..너.." "상관할 거 없어.참을 수 없다구!" 내가 고함쳤다. "저 애는 겨우 열몇살의 어린애야! 그걸 두고 볼 수 있어어?" 내가 고함을 길게 치는 동안 키리가 나의 복부를 걷어찼다. 내가 격통으로 몸을 숙이고 비틀거리는 동안 키리가 외쳤다. "정의의 사나인 척하는 것도 적당히 해둬! 넌 용병이란 말야! 자식아!" "언제까지 길드에 폐를 끼칠 거냐!" 옆에서 다들 나를 비난하고 있었다.나는 격통으로 몸을 떨고 있다가 비슬 일어 서서 그들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하지만 대체 왜 검을 익혔단 말이지? 저런 어린애를 구타하는 강간 마같은 자식을 보호하려고 검을 익혔어?" 내가 그들을 향해 외치자 키리의 얼굴에 잔물결이 스쳐갔다.다른 자들의 얼굴에 증오와 흡사한 감정이 떠오르고 동시에 나는 턱을 얻어맞고 뒤로 넘어갔다. 덱데굴 구르는 동안 다른 용병이 외쳤다. "너만 훌륭하냐! 이 어처구니 없는 자식!" "그렇게 잘났으면 기사가 되지 왜 용병이냐!" 그들의 조소와 비난이 쏟아질 동안 나는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내가 어처 구니없는 바보녀석인 것은 사실이었다.그리고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나 는 이제 견딜 수 없었다. 비틀 일어나자 마자 나는 문을 밀어 제치고 튀어나왔다. "멍청이! 너란 자식은 평생을 두고 거렁뱅이를 벗어나지 못할 걸!" 그 어린 계집애 셀리의 언니가 에리였다. 나는 멍하니 따스한 느낌이 드는 보퉁이를 들여다 보고 있었다.보퉁이를 열자 거기엔 갓 구운 듯 기름기가 도는 거위가 놓여있었다.나는 멍하니 그 거위를 바 라보았다. 왠지 흐흐흐 웃음이 터져나왔다. 나는 거위를 들고 도시를 빠져나왔다. 휘황한 달빛. 나는 달빛에 드러난 길을 따라 걸었다.발걸음이 날듯이 가벼웠다. 어디로 갈 지는 모르지만 일단 가고 보는 것이었다.이젠 용병길드의 일원이 아 니니 떠돌이 용병에 불과했다.아마 일은 현상금 사냥밖에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그래도 상관없다는 기분이 되어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다. 어쨌거나 나는 내 맘대로 걸었다. 손 안에 남은 거위구이가 꽤 오랫동안 내 손안에 온기를 더해주고 있었다. KUBERIN............ 어느 멍청한 용병이야기.... 2 "아이구야...." 나도 모르게 소리가 새어나왔다. 욱시근 거리는 팔과 다리,허리가 비명을 올려대고 있었다. 내 나이 스물 둘.이제 슬슬 애송이 티는 벗을 때라 나는 믿고 있었지만 다른 사 람들은 인정해 주질 않는다.허긴 나도 내가 멋진 한명의 어른이라곤 생각할 수 없다.아직은. 야숙이 지금 나흘째 되어가고 있었다. 마을을 발견하긴 해도 돈이 없으니 가서 음식을 사 먹거나 잠을 잘 여관을 잡을 수도 없었다.그 때문에 나는 완전히 야숙만의 여행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돈이 없다는 것은 매우 매우 불편한 일로 먹는 것도 힘이 들고 자는 것도 힘이 든다. 허지만 누군가가 말했듯이 돈에 얽매이지 않은 삶은 자유롭다고 했다.물론 그 자유에는 댓가를 치러야 한다는 단서가 붙어있긴 하지만 말이다. 물고기를 잡으려 했지만 이건 웬일인지 잔챙이 밖에 없다.너무 작아서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물고기를 잡을 방법은 내게는 없었다.그물이라도 있기 전에 는 물고기는 먹을 수가 없겠다 싶어서 나는 단념하고 말았다. 날씨는 기가 막히다. 햇빛이 따스하고 이젠 완연한 봄빛을 띄우고 있었다.이젠 시냇물도 그다지 차갑 게 느껴지지는 않는다.풀들도 파란 빛을 띄우고 있고..허긴 겨울에 야숙이란 동 사를 하겠다고 자원하는 것이나 같다.다행히도 요즘은 춥지 않았다. 또 굶어야 하나 하고 생각을 하고 있는 중인데 갑자기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자세히 들어볼 사이도 없이 나는 급히 검을 쥐고 튀어나갔다. 뭔가 일거리가 될 만한 일인지도 모른다.위기에 처한 사람을 구해주면 최소한의 댓가...하다못해 먹을 것이라도 얻을 수 있을 지도! 내가 급히 당도한 곳은 관도 위였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이 관도는 황량했는데 아마도 작아서 사람들이 그다지 이 용하지 않은 때문인 모양이었다.여기저기 잡초가 무성해져서 관도라는 말이 무 색했다. 다섯명의 사내들이 한 명을 둘러싸고 있었다. 모두 병장기를 들고 있는 것을 보아하니 산적이거나 야적일 가능성이 높았다.놈 들은 야비한 표정을 지은 채 중앙에 선 한명을 완전히 둘러싸고는 위협하고 있 었다. 그 한 명. 아직 소년이었다. 검은 윤기가 흐르는 머리칼은 목덜미를 가볍게 덮고 있었지만 장발은 아니었다. 피부는 희고 매끄러워보이는 미소년이었다.아직 나이는 17세..에서 18세 가량.. 아니면 더 어리다면 16세가량으로도 보였다.어쨌든 아직은 사내냄새가 덜 풍기 는 그런 녀석으로 몸이 상당히 가늘었다. 그런데다가 무기는 전혀 가지고 있지않은 듯 보였다.흔히들 사내아이들이 지니 는 단검이라든가 하다못해 쇠붙이 조각마저도 가지고 있지않은 모양이었다.그러 나 녀석은 등에 왠 보석상자같이 생긴 작은 상자를 메고 있었다. 마치 이것은 보석상자에요 라고 씌인 듯이 보이는 그 작은 상자는 검은 빌로드 천에 은으로 테두리를 박은 것으로 부호들이나 혹은 귀족들의 아녀자들이 보석 함으로 쓰는 것이었다.내 눈에도 그렇게 보였으니 소년을 포위한 다섯명의 사내 들도 그렇게 보고 앞을 막은 것이 틀림없었다. "내놔!" 소년은 생글 생긋 웃고 있었다. 아름다운 녹색눈에는 호기심어린 빛깔을 하고는 그는 생글 생글 웃고 있었다. 나는 턱이 빠질 것같은 기분이 되어 입을 벌렸다. 저 애는 자기 상황에 대해서 완전히 무지한 게 아닐까? "이 놈이 제정신이 아닌가봐!" "바보 아닐까!" 다섯 사내가 동시에 말하곤 한 사내가 몽둥이를 들고 한 걸음 나섰다.그리고는 몽둥이를 소년의 앞에서 휘휘 저어보이며 말했다. "꼬마야.내가 말했지? 자아.그것 놔두고 고이 사라져라." 소년의 웃음이 짙어졌다. 그리곤 붉은 입술이 움직이더니 한 마디가 튀어나왔다. "간이 부었구나." 나는 잠시 내가 뭔가 잘못들었는가 하고 생각했다. 저 입에선 분명히 이런 말이 나와야 했다.목숨만은 살려주세요 라든가 이것만은 안돼요 라든가.. 그런데 지금 튀어나온 말은 '간이 부었구나'였다. 내가 그렇게 헤메고 있을 동안 사내들도 그렇게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그들은 웃하고는 이를 드러냈다. "이 자식이!" "완전히 미친 거로군!" 그 순간 몽둥이가 소년의 머리를 향해 날아갔고 나는 안돼 하고 외치며 튀어나 왔다. 퍽 하고 몽둥이가 소년의 머리를 치려는 순간 내가 사내의 허리춤을 검집으로 후려갈겼다. "억!" "이..이게 뭐야!" 사내들이 당황할때 나는 자신만만하게 검을 뽑아 들며 외쳤다. "자아! 덤벼라!" "이 자식 뭐야!" "죽어라!" 갑자기 소년은 내버려두고 나와 그들의 격전이 벌어졌다. 나는 오랜만의 싸움이라 약간 흥분했고 사내들은 난데 없이 나타난 나에게 약간 주눅이 들었던지 의외로 싸움은 싱거웠다. 나는 덮쳐오는 몽둥이를 든 사내의 사타구니를 걷어차면서 검을 뽑아 창을 들고 덤비는 사내에게 돌진했다. "차아!" 검이 날아오르면서 창대를 부러뜨려버렸기때문에 창을 든 사내의 얼굴이 창백해 졌다.나는 히죽 웃으면서 그의 가슴을 검자루로 후려갈겼다.그리고 내 뒤로 덤 벼드는 다음 녀석에게 집중하면서 검을 휘둘렀다. 핏방울이 파락 하고 땅위로 떨어져내렸다. 덤벼든 녀석이 팔을 부여잡고 뒤로 물러섰고 아직 나와 검도 마주쳐 보지않은 두명의 사내는 우웃 하고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적당히 해라! 어린 꼬마에게 무슨 짓이냐!" 내가 위엄있게 외치자 사내들은 나를 증오로 쏘아보고는 뒤로 물러섰다.그리고 는 숲으로 사라져버렸다. 나는 거칠어진 숨을 다시 내어 쉬고는 자랑스런 기분으로 몸을 돌려 소년을 보 았다.소년은 겁에 질린 것도 아니고 도망가지도 않은 채 팔짱을 끼고선 나를 빤 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초록색 눈에는 나이에 어울리지않는 흥미와 조소가 깃들어져서 나는 조금 놀 랐다. "다친 데는 없니?" 내가 소년에게 다가가 위엄있게 묻자 소년은 나의 아래위를 훑어보았다. "흐음.." "집이 어디니? 데려다 주마." 설마 밥 한 끼 정도는 주겠지 싶어 내가 말하는 데 소년의 입에선 난데없는 소 리가 튀어 나왔다. "요즘 기사도 말하지않는 싸구려대사를 얼간이 용병이 내뱉다니..정말 웃기는 군." 나는 눈을 부릅뜨고 지금 내가 들은 소리가 어떤 소리인가를 다시 생각했다. 내가 지금 들은 이 소리가 이 꼬마의 입에서 튀어나왔단 말인가! "너..너!" "보아하니 몇끼를 굶었군.좋아.밥 한 두끼는 사주지.따라와라." 소년은 그렇게 말하곤 말을 잃고 버버거리고 있는 내 앞으로 성큼 성큼 걷기 시 작했다. "이봐! 너 어떻게 말을 그렇게 하냐! 어린애가 ..! 사람이 구해주었으면 고맙다 고 순순히 말하는 게 어렵단 말이냐!" 내가 고함을 질렀어도 소년은 아랑곳 하지않았다. "따라와라.얼간아." 나는 코와 귀와 입에서 불길이 솟는 감각에 사로잡혀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이 상태로 참아내야 한단 말인가 하고 내가 그에게 돌진하려는 순간 나의 마지막 이성이 '어린애를 상대로 흥분해선 안되지' 하고 외쳤다.나는 식식거리면서 입 을 다물고는 난폭하게 걸어서 소년의 옆에서 걷기 시작했다. 내가 식식거리고 걷는 동안 소년은 단정한 얼굴로 나를 흘긋 바라보더니 피식 웃었다.그 얼굴이 예쁜 소녀같아서 내가 잠시 말을 잊고 있는 즈음 그가 그 얼 굴에 도저히 어울리지않는 어투로 말했다. "넌 타지에서 온 거 같군." "그래.북쪽에서 왔다." 내가 난폭하게 대꾸하자 소년은 검은 눈썹을 가볍게 치켜올리고는 고개를 까닥 했다. "흠..그러니 나 쿠베린을 모르는 것이겠지.엘리야의 용병길드라면 나를 모를리 가 없지." "엘리야..?" "그래.이 관도를 따라서 이틀정도 가면 엘리야라고 하는 항구도시가 나온다.내 집도 거기고 내가 지내는 곳도 거기지." "항구도시라,..난 바다를 본 적이 없는데.." 내가 흥분해서 말하자 그는 날 흘긋 보고는 쯧쯧 혀를 찼다. "촌놈이구만.바다를 본적이 없어?" 내가 발끈하려는 순간 소년이 덧붙여 말했다. "허긴 아직 어리니 못본 곳도 많이 있겠지,별로 수치스러워하지않아도 괜찮아." 수치스러워 할 생각은 없었던 나는 어이가 없어 입을 벌렸다. 관대한 표정을 짓고는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북쪽에서 왔다고 하니..아마도 엘리야의 용병길드에는 가입하지않은 거 같고.. 그럼 어디 길드소속이지?" "난 이제 길드소속이 아냐." 제법 물정에 밝은 녀석인가 하고 내가 생각하며 대꾸하자 소년은 날 아래위로 바라보더니 쯧쯧 또 혀를 찼다. "무슨 뜻이야? 그건?" 내가 그 태도가 너무 불쾌해서 항의하자 소년은 걷는 걸음걸이도,속도도 조금도 늦추지않은 채 앞만 보면서 대꾸했다. "오죽 못났으면 길드에서 축출된거냐?" "내..내가 축출된 게 아니라 난 나온거야! 여..여행을 하기 위해서!" 내가 주먹을 쥐고 항의하자 소년은 길게 말하지도 않고 가볍게 대꾸했다. "넌 거짓말이 서투르구나." 나는 욱 하고 입을 다물어버렸다. 울분이 치솟았다.내가 왜 이런 꼬마랑 말장난을 하면서 자존심을 버려가고 있는 것인가 하고 내가 발길을 막 돌리려는 데 꼬마가 입을 열어 말했다. "뭐,..그런 바보스런 점이 마음에 들긴 하지만." 나는 덜컥 가슴이 내려앉아서 그를 쏘아보았다.지금 날 가지고 노는 게 너무 심 한 게 아니냐고 난 항의하고 싶었다.그렇지만 이 상황에서 또 뭐라고 어린애랑 떠들건가 싶어서 난 다시 입을 다물고 말았다.배가 고프지않다면 이 놈을 따라 갈 이유란 전혀 없었다. 한참을 걸었는데도 이 녀석은 지칠 줄을 몰랐다. 해가 중천에 닿았고 나는 뱃가죽이 등짝에 달라붙어서 헥헥거렸다.그럼에도 불 구하고 이 녀석은 태연한 얼굴이었다.체력이 장난이 아니군 하고 내가 은근히 감탄하고 있을 때 눈앞에 마을이 나타났다. "저기로 가자." 소년이 앞서 말했고 나는 뒤를 따랐다. 내가 왜 뒤를 따라야 하는 거지 하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지만 결국 대답은 하나였다. 혹여 그가 밥을 사줄 지도 모르기때문이었다. 소년은 보석상자를 들고 여관으로 들어섰다.여관에서는 힐긋 힐긋 다들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고 나는 그 시선에 상당히 긴장했다.이 소년이 들고 있는 이 상자 는 분명히 보석상자처럼 보였기때문이었다. 여관안에는 사내들 일곱이 우글거리고 앉아서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시고 있었다. 소년은 들어서자 마자 주인을 향해 말했다. "맥주 두잔,훈제 닭 한마리,빵 네덩이와 점심거리." 나는 두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음식 냄새에 혹했다. 내가 침을 줄줄 흘리고 있을 때 소년은 턱하니 상자를 탁자위에 놓고는 느긋한 자세를 취했다.마치 누구든 집어가려면 집어가 봐라 하는 자세였기에 나는 긴장 했다. "이봐..이거 대체 뭐야?" 뒤에 앉은 녀석이 질문을 던졌다. 아까부터 힐긋 거리고 보고 있는 꼴이 뭔가 기묘한 눈길이어서 나는 긴장했는데 소년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보석이지." 여관안에 자악 하고 소리가 날 정도로 침묵이 깔렸다. 꿀꺽 하고 여관 안에는 침 삼키는 소리가 퍼저나갔다.뒤에 앉은 사내는 은근히 질문을 던졌다. "보여줘 봐.진짜 보석이란 말야?" 소년은 그를 흘긋 돌아보았다. "너 돌았니?" 사내가 그 말에 놀라서 흠칫 하자 소년은 말을 이었다.그의 시선에 한심하다는 듯한 표정이 담겨있었다. "너라면 보석상자를 열어서 안을 보여줄 거 같아? 너 그렇게 머리가 안돌아가 냐?" "으,..으..!" 사내가 벌덕 주먹을 쥐고 일어났고 나는 밥값(?)을 하기 위해 마주 일어섰다. 내가 살기를 띄우면서 눈에 힘을 주고 사내를 노려보자 그 사내는 내 시선을 받 고는 웃 하고 입을 다물고는 퇘엣 하고 바닥에 침을 내뱉고 말았다.그가 시선을 피하고 밖으로 나가버리자 나는 책망의 표정을 소년에게 던졌다. "너,너무 심하잖아!" "하하하하..네가 있으니 아주 편하다!" 그는 내 말을 들은 체도 않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기분이다 하고 혼잣말을 하더니만 손을 들어서 주인을 불렀다. "여기 맥주 두잔과 닭 한마리,그리고 빵 네덩이,그리고 특제 스튜 한그릇 더!" 이윽고 음식이 나왔다. 탁자 한가득히 음식이 나오자 나는 침을 줄줄 흘리고 있는 참인데 녀석은 먹어 보란 소리도 없이 손을 가볍게 털어보이곤 닭다리를 들었다.그리고는 좌악 찢어 먹기 시작하는데...이것은 보통 먹성이 아니었다. 그 호리호리한 몸에 어디로 다 들어가는 지 그는 앉은 자리에서 빵 네 덩이와 닭한마리를 다 먹어치우고 맥주 두 잔을 좌악 들이켜 버렸다.나에게 먹어보란 소리도 하지않다니! 내가 눈물을 흘릴 기분이 될 즈음 추가로 시킨 음식이 나왔다. 주인은 그가 먹어치우는 것을 평소에도 봐온 양 모른 척하고 있었지만 놀란 것 은 분명했다. "먹어." 그가 크윽 하고 트림을 하면서 내게 말했고 허락이 떨어지자 나는 아귀 아귀 하 고 마치 걸신들린 양 먹어대기 시작했다.지금 눈에 보이는 것은 음식 이외엔 없 었다.내가 먹어대고 있는 동안 그녀석은 우아하게 빵을 찢어 먹으면서 말했다. "너,상당히 모자란 녀석인 거 같구나.어떻게 이 험한 세상을 살아왔니? 쯧 쯧,.." 내가 이 밥 한끼에 자존심을 모조리 다 버려야 하는 거냐 하고 고민에 빠져있는 중인데 그는 손가락을 가볍게 튕기면서 입가를 닦아내고 있었다. "이 쿠베린님이 너란 얼간이를 거두어 주도록 하지.이 험난한 세상을 내가 돌보 아 주겠다." "뭐라구?" 내가 어처구니 없어서 스튜를 먹다말고 그를 쏘아보자 그는 고개를 가볍게 저었 다. "그렇게 감사할 것은 없어,넌 이제부터 내 동업자가 되면 되겠구나." "동..업자? 너 아버지가 무슨 일 하시냐?" 내가 벙벙해져서 묻자 그는 내 머리통을 후려갈겼다. 콱 하고 내 코가 스튜에 빠졌다.악 하고 내가 비명을 올릴 찰나 그가 차갑게 말 했다. "그렇게 말했는데도 못 알아듣다니.너 정말 얼간이냐!" 나는 뜨거운 스튜에 코를 박아 버려서 뜨거워서 펄쩍 뛰었다.원래 기름기가 많 은 이 스튜란 매우 매우 뜨거워서 급히 먹다간 입안에 화상을 입기가 일쑤였다. 그런데 난 지금 코를 박았으니 그 고통이란 게 얼마나 심한 지는 말하지않아도 알수 있을 것이다.내가 버둥거리면서 코를 맥주잔에 틀어박으며 식히고 있을 때 갑자기 가게 문이 덜컥 열렸다. "이봐!" 나타난 것은 아까 내가 눈에 힘주어서 내쫓은 사내와 또 하나 내가 아까 물리친 다섯의 사내였다.그리고 그 외에도 세 명정도 일행이 더 불어나 있었다. 나는 코를 잡은 채 아픔의 눈물을 흘리면서도 이 상황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하 나 하고 고민을 시작했다. 살기를 가득 띄운 그들은 이미 아홉명이나 되었다. 그들이 살기등등하게 나타나자 여관안에 있던 자들은 어마 뜨거라 하듯이 어느 샌지 사라지고 남은 것은 소년과 나 였다. 아픔으로 눈물이 줄줄 흐르는 가운데 사내들이 싸늘한 미소를 지으면서 앞으로 다가섰다.나는 코가 아픈게 더 이상 문제가 아닌 지라 검자루을 쥐고 소년의 앞 을 틀어 막았다. "이봐.꼬마야.내가 막는 동안 넌 뒷문으로 나가라." 내가 낮게 속삭였지만 그는 들은 채도 않고 느긋한 자세로 맥주를 들이키고 있 었다.나는 화가 치밀었지만 일단 일을 시작하면 끝장을 보아야하는 것이 내 성 격이므로-게다가 밥도 얻어먹었고-그를 참아내기로 결심했다. "아까 얻어맞은 것으로는 모자랐나?" 내가 싸늘하게 사내들을 향해 외치자 앞선 몽둥이를 든 사내가 하하하 하고 크 게 웃었다. "네 몰골이나 보고 떠들어라! 애송이!" "네가 검을 좀 쓴다고 사람을 우습게 보는 거 같은데! 한번 당해봐라!" 그리고 그들은 우리들을 포위하기 시작했다.나는 긴장으로 등줄기를 땀으로 적 셨다.이 상황은 장난이 아니고 우리들은 매우 위험한 찰나에 있었다. 이 사내들은 지금 우리들을 죽이고 싶은 모양이었고 원한에 가득차 있었다. "상자를 내놔!" 한 명이 달려들어 나에게 몽둥이를 휘두르는 그 순간 나는 검을 들어서 막아냈 다.그리고 뒤에서 누군가가 내 뒤통수를 내갈기려 하는데 갑자기 팟 하고 뜨끈 한 것이 목덜미를 덮었다. "악!"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뜨근한 것은 피였다.피가 끈적하게 내 등뒤로 흘러내리고 있었다.그 감촉에 놀 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순간 시야 가득히 목이 날아간 사내가 사방으로 피를 뿌리며 버둥거리는 게 들 어왔다.그 버둥거리는 시체는 내 앞으로 목도 없는 상태로 걸어와 안겨왔고 나 는 너무 놀라 그 목이 없는 사내의 몸을 놀라 밀쳐버렸다.덕분에 목 없는 사내 는 덜덜 떨리는 사지를 허공으로 한 채 뒤로 넘어져 버렸다. 데구르르르르 무언가가 굴러서 탁자밑으로 들어갔다. 그 몸통에서 피가 사방에 튀어서 시야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으,..으..." 사내들이 주춤 뒤로 물러섰고 나는 소년을 돌아보았다. 그는 팔짱을 끼고는 손가락을 할짝거리고 핥고 있었다.그 손가락에는 피가 약간 묻어있었고 그는 그 피를 핥아먹고 있는 중이었다. 소름이 좌악 끼쳤다. "어..어떻게 한거지?" 내가 버둥거리면서 물을 찰나 한 명이 외쳤다. "엘리야의 쿠베린!" "쿠베린이야!" "으악!" 그리고 그 누가 먼저이냐 할 것도 없이 삽시간에 사내들은 밖으로 튀쳐나갔다. 그들이 비명을 올리면서 튀어나가버리는데 걸리는 시간은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새였다. 가게 안은 피비린내로 가득 찼다. 나는 멍하니 피를 뒤집어 쓴 채 서서 그들이 사라져버린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목을 잃은 사내의 시체는 여전히 그 자리에 누워 피를 흘려내고 있었고 쿠베린 이라 불린 이 소년은 느긋한 자세로 앉아서 손가락에 묻은 피를 정성스레 핥아 내고 있었다. "너..너, 뭐야?" 내가 마침내 더듬으면서 억지로 그에게 물었다. 커다랗고 매혹적인 녹색눈이 날 빤히 바라보았다.조소와 비슷한 감정이 섞여있 는 장난기 어린 눈. 그 눈을 보면 도저히 어린 소년의 눈이라 볼 수가 없었다. 긴장감에 죽을 거 같은 나는 그를 침묵하면서 쏘아보고 있었다.그는 내가 아무 리 쏘아보아도 아무렇지도 않은 눈을 하고는 날 빤히 바라본다.그러더니만 길게 기지개를 펴기 시작했다. "몇시지?" "에?" "점심먹으면 낮잠을 자야지..아함.." 그는 하품을 하더니만 상자를 내 앞으로 밀쳤다. 내가 의아하게 바라보자 그가 말했다. "그걸 들고 날 따라와." "왜 내가 이걸 들고 따라와야 하지?" "내가 널 살려주었으니까." "하..하지만 그건.." 그는 날 빤히 바라보았다. 지금은 그를 보호하다가 위험에 빠진 게 아니었던가 하고 나는 질문을 던지고 싶었지만 그는 내 질문을 묵살했다. "따라와.한숨 자자." 그는 상자를 내 손안에 밀어 놓고는 일어서서 진짜로 이층의 방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여관주인도 도망가고 없는 지금 그는 스윽 스윽 마치 자신의 집인양 걸어올라가고 있었다.나는 그의 뒷 모습을 보고 다시 내 손안의 상자를 보았다. 호기심에 상자뚜껑을 열어보니 그 안에는 금화와 보석이 그득했다.열자마자 그 휘황한 광채에 눈이 멀 거 같았다.내가 멀건히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쿠베 린이 이층에서 외쳤다. "빨랑 와! 얼간아!" "내 ..내 이름은 스카다! 얼간이라니!" 내가 항의하며 외쳤지만 역시 반응은 없었다. 나는 상자를 들어 보았다.왠걸 으악 비명을 올릴 정도로 무거웠다.나는 하마터 면 상자를 쏟아버릴 뻔했다. "아참..말을 하지않았는데 그거 무거워." 마치 모든 것을 보고 있는 양 위 층에서 그 목소리가 들리자 나는 악에 바친 기 분으로 그것을 들어올리고 이층으로 향해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이상한 녀석이었다. 이것을 가지고 내가 도망가면 어쩌려고! 허긴 이렇게 무거워서야 가지고 도망가기도 어려웠다.최소한 마차나 말이 있어 야 날렵하게 가지고 도망갈 수 있을 것이었다.그러나 이 꼬마는 대체 뭐하는 녀 석일까? 이런 보물상자를 태연자약하게 지고 다니질 않나, 나타난 녀석의 목을 댕겅 잘라 버리질 않나! 대체 뭘로 자른 것일까! 시체를 생각하니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나는 아직 살인을 해 본일이 없었다. 게다가 저렇게 참혹한 시체라니..공포가 문득 치밀어 올랐지만 호기심쪽이 더 강했다.나는 입술을 깨물고 이층으로 올라가 그녀석이 누워있는 방안으로 들어 섰다. 녀석은 제법 넓은 방의 침대를 발견하고 그 위에 큰 대자로 누워있었다.그리고 는 하품을 하면서 나에게 말했다. "너도 쉬어라." "하지만 저놈들이.." 나는 나도 모르게 그의 편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우물거리고 말하려 했다.그러나 녀석이 잘라 말했다. "이 쿠베린님의 이름을 듣고 또 덤비려 한다는 거냐?" 나는 눈쌀을 찌푸렸다. "너 대체 뭐하는 놈이지? 아까 놈들이 무서워 도망가는 것을 보니.." "나? 난 엘리야에서 가장 유명한 분이시지.무적의 쿠베린이라고 불리우며 어둠 의 귀공자라고도 불리우지.혹은 .." "그만해둬." 나는 역겨워져서 으윽 해 보였다. 녀석은 체엣 하고 상처받은 듯한 표정을 하더니 나에게 물었다. "몇살이냐? 너?" "스물..둘.그러니까 너는 나에게 그렇게 함부로 해선 안돼!" 내가 연장자의 위엄으로 엄하게 말하자 그는 내 말은 들은 척도 하지않고 천정 을 보면서 누운 채로 중얼거렸다. "흐음..앞으로 이십년은 잘 써먹을 수 있겠군." "뭐야? 너 사람이 말하는데 ..그렇게 건방지게 굴거냐!" 내가 주먹을 쥐고 항의했지만 그는 들은 척도 하지않고는 침대위에 어린애 마냥 뒹굴 뒹굴 하더니 갑자기 생각난 듯 나를 향해 물었다. "그런데..너 따뜻하니?" 제 4화 사인족 KUBERIN.... 제 아무리 강한 놈이라해도 언젠가는 죽어 소멸하는 것 그 소멸의 시각에 애도하는 것은 남은 자의 몫 1 데굴 데굴.. 나는 환한 햇빛속에서 뒹굴고 있었다. 침대위는 햇볕이 들어서 따스했고 온몸은 모처럼의 휴식에 기분좋게 늘어져있었 다.나는 내 눈앞에서 아롱거리는 무지개빛 먼지를 손가락으로 저으며 즐기고 있 었다. "어지간히 게을러!" 사라가 팩 소리를 지르면서 뚜벅거리고 들어섰다.그녀는 내가 누운 침대의 시트 를 확 잡아 빼면서 날카롭게 외쳤다. "그렇게 할일이 없으면 가빈처럼 마미의 일을 도우라구! 원,자기가 자던 시트하 나 햇볕에 말리는 법이 없으니...쯔쯔.." 그녀는 주근깨가 가득한 뺨을 일그러뜨리면서 나를 쏘아보았다. 물론 그녀의 말에 동요할 나도 아니었기에 나는 귓등으로 흘려들었다.기분이 좋 은 이런 날 그녀의 말로 동요할 것은 조금도 없다. 아래층에서 가빈은 마미의 일을 돕고 있는 모양이다. 이 야묘족녀석은 마미에게 아양을 떨면서 그녀의 가게에서 점원을 하고 있다.접 시를 나르거나 하는 일이 그의 일이고 또 그게 나름대로 즐거운지 꼬리를 살랑 이면서 가게안을 휘젓고 다녔다.그런 그가 의외로 인기를 끌어서 마미의 가게안 에는 귀여운 미소년(?)을 보러 놀러오는 자들로 시끌거렸다.물론 원래부터 마미 의 가게는 사람이 많은 편이긴 했어도 괜히 일 없이 와서 맥주를 마셔대면서 수 다를 떠는 인물들은 없었다.그러나 이 가빈은 수다를 떠는데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는 터라 덥수룩한 항구의 선원들은 이 꼬마를 옆에 앉히고 자신의 무 용담(?)을 떠들어대길 즐기는 모양이었다. 오오 그래요 하면서 감탄성을 띄우는 이 천진스런(?) 야묘족의 소년은 선원들 사이에 덥석덥석 무릎에 올라앉기도 했다.그런 그를 마미는 처음엔 마땅찮아했 지만 나중에는 귀염성이 있다고 보았는지 그녀도 웃음으로 넘기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도 가빈이란 녀석은 떠들석한 것을 좋아하니 술집의 점원으로 살아 갈만 한 녀석이었다. 어라? "린." 나는 누운 자세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입을 열었다. 난 침대위에 똑바로 누워 다리는 구부정하니 구부리고 손은 허공을 휘저어대고 있었다.여전히 좋은 햇빛에 아름다운 먼지조가리들이다. 마치 정령들이 춤추는 듯했다. "네." 린은 창가에서 대꾸했다. 그는 창틀에 몸을 기댄 자세로 내 방 한 구석에 앉아있었다.녀석은 내가 움직이 면 저도 움직이고 내가 자면 저도 자며 내가 누워있으면 저는 내 옆에 웅크리고 앉아있다.충실한 녀석이다. "밖에 나가서 두 놈을 데려와." "네?" 린은 눈을 크게 떴다. 나는 손가락을 계속 움직이면서 허공의 빛나는 먼지 쪼가리들을 흐트러뜨렸다. "밖에 두놈이 있을 거야.날 찾아온 놈이." 린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더이상 나에게 묻지않았다.그는 조심스런 태도로 발 끝으로 걸어 방을 나섰다. 천정은 약간 얼룩진 곳이 군데 군데 있다. 나무기와를 얹어서 조금 썩은 곳이 있는 모양이다.스카를 시키던지 혹은 사람을 사서 지붕을 고쳐야 겠다고 나는 생각했다.비가 새지는 않지만 오늘 처럼 밝은 날에 새삼스레 천정을 보니 군데 군데 얼룩지고 곰팡이가 선 곳이 보였다. 멀리서 사람들이 떠들어 대는 소리가 들린다.저마다 웃고 떠들어댄다. 나는 눈을 가만히 감았다. 두 녀석이 가게안에 들어섰고 동시에 그들에게 린이 다가섰을 것이다.그들은 계 단을 통해 올라온다.특유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온다. 린의 발걸음소리는 거의 들리지않지만 이들의 발걸음소리는 거의 기척뿐 삐걱이 는 소리조차 들리지않았다. 문이 열린 상태였기때문에 녀석들은 그대로 들어섰다.앞선 것은 린이었지만 그 의 얼굴은 긴장으로 확실히 굳어있었다. 그는 내 앞에서 조금 비켜서서 몸을 긴장시킨 채 침대옆에 와 섰다. 나는 그들을 보지않았다.그들이 누군지 알고있었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두 녀석이 동시에 가볍게 무릎을 굽혀 보였다. 나는 침대위에 누운 자세로 그들을 흘긋 보았다. 어쩐일인가 하고 묻지않아도 그들은 말할 것이었다.나는 데굴 굴러서 엎드린 자 세로 바꾸어 그들을 내려다 보았다. 금발에 늘신한 허리를 가진 가죽갑옷을 걸친 녀석과 헐렁한 튜닉에 곱상한 외모 를 가진 상아색 머리를 가진 녀석이었다.두 녀석 다 차가운 녹색눈빛을 번뜩이 고 있었다. "넌 누구냐?" 내가 느긋하게 묻자 금발녀석이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알카스의 아들 마리온입니다." "알카스의 아들..인가?" 나는 흐 웃었다. 알카스는 나와 가까운 핏줄이다.그러니 이 녀석도 나와 전혀 상관없는 녀석은 아니었다.단려한 얼굴을 반듯하게 든 마리온은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마 치 내 동작 하나 하나를 전부 기억해 두려는 듯 보였다. "저는 유탄라고 합니다.파울로의 아들입니다." "아아.." 상아색 머리를 한 녀석이 곱상한 얼굴을 들어서 공손히 말했다. 나는 길게 기지개를 펴면서 일어나 앉았다. 린은 긴장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그는 이들이 보통 놈들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채고 있는 것이다. "무슨 일이냐?" "왕께서 납시길 원합니다." 나는 그들을 물끄러미 보았다. "땅의 엘프가 구원을 요청했습니다." 땅의 엘프는 모습을 잘 드러내지않는 자들이었다.난 조금 호기심이 동했다. "무슨 일인데?" "땅의 엘프의 왕 호크엔은 열흘전에 사인족의 공격을 받아 미스릴 광산을 잃고 삼백명의 엘프를 잃었다고 합니다." 사인족!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말없이 재촉했다. 금발의 마리온은 진지한 음성으로 고저없이 고하고 있었다. "사인족은 호크엔에게 한달 안에 미스릴과 황금의 관을 넘겨주지않으면 땅의 엘 프를 몰살시키겠다고 선언했다고 합니다." "황금의 관?" "네,땅의 엘프의 보물 황금의 관입니다." 그 황금의 관은 우리와 약간 관련이 있다. 땅의 엘프는 우리들 묘인족과는 그다지 사이가 나쁜 편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주 친밀한 것은 아니지만 어찌되었든 전설에 따르면 땅의 엘프 가 오크에게 짓밟히려는 순간 묘인족이 지나가다 구해주었다고 했다.그래서 땅 의 엘프가 묘인족을 위해 황금으로 술잔을 만들어 주었다.그 답례로 묘인족의 왕은 땅의 엘프에게 고대 드워프가 만든 황금의 관을 선물로 주었다고 한다.뭐 하러 그런 걸 주고 받았는지 생각해 보면 웃기는 일이지만 그 고대 드워프의 장 인이 만든 황금의 관은 쓰는 사람에게 불사의 힘을 준다는 전설이 있었다.그 말 을 다 믿지는 않지만 그 관을 쓰려고 시도했던 자들은 없었다.왜냐면 강자에겐 불사의 힘을 주지만 약자에겐 그 관은 너무 무거워 쓰기만 해도 목이 부러질 지 경이라고 했으니까.물론 연약한 땅의 엘프따위가 그런 걸 쓸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걸 뭐하러 선물로 주었는지,생각해보면 우리들의 왕도 참으로 어처 구니없는 짓을 한 거 같다.어쩌면 장난이었는지도 모르지. 땅의엘프가 선물 했다는 그 황금 술잔은 지금 내가 가지고 있다.나는 반짝이는 물건을 매우 좋아하고 그게 귀금속이나 보석으로 만들어졌다면 물론 더더욱 좋 아한다. "사인족 놈들이 땅의 엘프의 왕에게 우리들을 부르라고 했대냐?" "아뇨.그러나 이 일은 우리들의 명예와도 관계된 일이라고 생각해서 듀나시님이 엘프의 이야길 듣고 저희들을 이곳에 보내신 겁니다." "듀나시가..." 나의 이복동생인 듀나시는 매우 자존심이 강하고 인내력이 강하다.우리들이 같 은 피를 이었다고는 아무도 믿지않을 정도다.그 녀석이 입을 열었다면 제법 심 각할 수도 있는 일인 듯했다. 사인족. 녀석들은 우리들과 달리 떼로 몰려다닌다.하나 하나는 별 볼일 없는 놈들이지만 일단 녀석들이 몰려서 수십명씩 떼로 몰려덤비면 상대하기 쉬운 것이 아니다. 대체로 태고로 이어져 내려오는 변신족은 세 부류가 있다. 우리들 묘인족과 사인족,그리고 자주 나타나지않는 조인족이다.조인족은 날개를 가진 족속인데 이 족속은 매우 배타적이라서 고고한 척 잘난 체하면서 높은 산 꼭대기 고원에서만 산다.인간들은 아마 보지도 못했을 것이다.그리고 우리들 고 상하고도 우아한 묘인족이 있고 거지떼들 마냥 우르르 몰려다니는 촌스러운 사 인족이 있다.이 사인족 녀석들은 수치심을 모르고 아무하고나 짝짓기를 해서 종 자를 사방에 퍼뜨려 놓았다.이 녀석들은 엘프를 잡으면 남녀 불문하고 범하며 인간이나 아인족을 잡아도 마찬가지다. 하여간 녀석들은 그 짓을 할 수 있으면 종류를 불문하고 덤벼든다. 사인족놈들은 스스로가 별볼일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떼로 몰려다니며 남 에게 피해를 주는데 묘인족의 구역으로 오는 일은 거의 없다.허긴 오면 죽음이 란 사실을 뼈저리게 알고 있을 것이었다. "사인족의 왕 테히르가 20년전 즉위해서 진열을 정비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소 문에 의하면 조인족의 땅도 범했다고 하지요." "어찌되었든 요근래 그들의 수가 무섭게 늘어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럼 즉,이번 사인족의 짓거리가 감힌 나에게 도전하려는 시도로 보인다,그건 가?" 내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묻자 그들은 침묵했다. 건방진 자식들,감히 누구에게 대어드는 건가? 사인족녀석들은 정말로 한주먹거 리도 안되는 가치없는 놈들이다. 그놈들과 더불어 태고종족이라 불리는 것 자체가 수치스러울 정도다.조인족이야 꼴을 안보니 그만이지만 사인족놈들은 안그래도 계속 알짱거려 신경에 거슬렸 다.이곳 대륙의 남쪽인 델리암에는 사인족의 흔적은 보이지않지만 북쪽과 서쪽 으로는 제법 심심찮게 사인족이 나타나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왕께서 직접 나서 주십사고..." 뒷 말을 유탄이 이었다. 나는 천천히 일어나서 햇빛이 들어오는 창가로 다가가 섰다. 눈을 가늘게 뜨고 해를 바라보는 동안 탁탁 소리와 함께 가빈과 에닌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에닌은 이곳에서 머물면서 사라랑 같은 방을 쓰고 있다.아마 노스엘스턴으로 돌아가는 것이 싫은 모양이었다. "에? 쿠베린님,뭐에요?" 방안에 들어선 가빈이 천연덕스레 무릎을 꿇고 앉은 두명의 묘인족을 둘러보면 서 나에게 다가왔다.녀석은 심각한 린의 얼굴에 제풀에 긴장하면서 찢어진 듯 둥근 눈을 나에게 돌렸다. 나는 대꾸하지않고 몸을 돌려서 밖으로 걸어나갔다. 내 뒤를 이어서 린이 재빨리 따랐으며 가빈도 에닌도 얼결에 따라나왔다. "뭐야? 저들은 뭐지?" 가빈이 린에게 쿡쿡 찌르며 물었지만 린은 심각한 얼굴로 대꾸도 않고 내 뒤를 곧장 따라왔다. 가게로 내려오자 마자 나는 부엌에서 거대한 무쇠솥앞에서 땀을 흘리고 있는 마 미에게 다가갔다.마미는 큰 주걱으로 솥안의 스프를 휘휘 내젓다가 날 보곤 놀 란 얼굴로 물었다. "쿠베린?" "아.마미.나 좀 여행을 가야 할 거 같아서." 내가 말하자 그녀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버렸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뒤에 심각한 얼굴로 선 린과 벙벙한 가빈과 에닌을 보고 다시 날 바라보았다.뭔가 심각한 기분이 되었는지 그녀는 주걱을 멈추고 나에게 다가왔다. "..오래 걸리니?" "응.아마.한달 두달 걸릴지도." 그녀의 얼굴이 불안으로 일그러졌다. 그녀는 두툼하고도 굵은 두 팔을 벌려서 내 몸을 끌어안았다.그녀의 몸이 불안 으로 떨리는 것을 느끼고 나는 그녀의 허리를 마주 않고 그녀의 뺨에 키스해주 었다. "걱정마.마미." "걱정하지않아.나의 쿠베린은 천하무적인걸." 그녀가 낮게 웃으면서 말했다.그러나 그 눈동자는 불안으로 떨리고 있었다. "..돌아올거지?" "아아..물론,여행간다고 했지,나간다고는 하지않았어." 내가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자 그녀는 안도의 한숨과 흡사한 숨소리를 길게 내더 니 다시 솥앞으로 다가가 주걱으로 젓기 시작했다. "가빈과 에닌을 두고 갈거야.잘 부탁해." "아아,.." 마미는 억지로 미소지어 보였다. "어디가는데요! 나도 갈거에요! " 가빈이 악을 질렀다.그는 내 옷자락을 잡더니만 급히 린과 나를 번갈아 보았다. "나도! 나도 데려가요! 왜 린만 데려가고 날 데려가지않나요?" "아.넌 마미의 말동무를 해야하니까." 나는 가볍게 말하고 그를 떼어 놓았다. "싫어요! 나는 당신의 난로니까 따라갈레요!" "흐.웃기지마.넌 너무 약해.꼬마야." 내가 말하자 가빈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분노와 증오의 빛이 그의 눈안 에서 아른거렸다. "쿠베린!" "자.떠들지 말고 에닌과 마미를 잘 보살피도록 해,알겠지?" "따라갈레요!" 그가 빽 소리를 쳤고 난 그 말에 간단히 대꾸해주었다. "안돼." "준비..는 뭘 하면 될까요?" "준비할 건 없어.그냥 가면 돼." 나는 길게 기지개를 펴면서 대꾸했다.린은 긴장한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먼 거리인가요?" "아아..온종일 달려서 한 이틀 거리일 뿐이야." 린이 고개를 갸웃했다. "넌 뒤처지면 내가 안고 갈테니 따라와라." "?" KUBERIN.... 제 아무리 강한 놈이라해도 언젠가는 죽어 소멸하는 것 그 소멸의 시각에 애도하는 것은 남은 자의 몫 2 나뭇가지가 순식간에 사라져간다. 발밑으로 느껴지는 풀잎의 연약한 감촉이 제법 촉감이 좋아서 기분이 상쾌해졌 다.머리칼은 달리는 방향과 반대로 휘날리면서 사아 사아 소리를 낸다. 이렇게 달리는 것이 얼마만인가. 나는 기분좋게 달렸다. 내 뒤를 따르는 두명의 녀석들도 내 뒤를 곧잘 따라오고 있다.조금 어려운 것은 린으로 그녀석은 맨 뒤에서 내 달리고 있었다.그 녀석이 허덕이는 소리가 들리 기에 나는 가볍게 몸을 멈추어 그자리에서 회전을 했다.내 뒤를 따르던 두 묘인 족의 아이들이 나를 따라 정지하는 순간 나는 린의 팔뚝을 잡아챘다.그리고 그 녀석의 허리와 다리를 잡아 당겨 끌어안고는 다시 내 달리기 시작했다. 린은 매우 놀라고 지친 상태로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그의 전신에서 땀이 흘러내려 끈적거렸다.그는 푸른 피부를 더 파랗게 하고는 떨어질 세라 팔 을 뻗어 내 목을 끌어안았다. "지..짐이 되는 것 같습니다!" 린이 당황한 음성으로 헉헉거리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내 품안에서 말했다. "아아..난로 하나는 가져와야 하니까." 나는 가볍게 대꾸했다. 나는 가볍게 가시덤불을 제치고 달리며 내 앞에 있던 두명의 묘인족 애들을 다 시 내 뒤로 돌리고 달리기 시작하고 있었다.두 아이들은 내 뒤를 일정한 간격을 두고 달리면서 내가 린을 안고 달리는 것을 기묘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린은 침묵하고 내 목에 팔을 두른 채 가만히 있었다.풀 죽은 얼굴이었다. 나로서도 그게 좋다.린은 말이 없어서 다루기가 편하다. 시야에 시냇물이 들어왔다. 나는 시냇가의 큰 바윗돌을 박차고 허공으로 튀어올랐다. 타닥 타닥 내 움직임에 따라 돌가루가 시냇물로 떨어져 작은 원들을 그려냈다. 파삭거리는 풀잎소리와 함께 내 뒤로 두 애들도 따라 뛰어 오른다. 맞은 편 시냇가에 착지하자 린이 내 목을 꽉 잡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마 무서운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가 무서워 하든 말든 할 일은 할 일,그리고 빨리해결할 일은 빨리 해 결하는 게 옳다.나는 계속 바윗돌 투성인 계곡을 지나 그 다음에는 깎아 지른 듯한 절벽 위에 도달했다. 이번에는 린의 얼굴에 정말로 두려움이 떠올랐다. "설마..." 그의 물음에 일일이 답할 필요는 없고 몸으로 보여주는 게 더 낫다. 나는 주저하지않고 절벽 위에서 뛰어 내렸다. 그의 몸이 열려지지 않은 입대신 비명을 올리며 내 몸안으로 파고 들었다. 귀여운 자식! "끼야호! 야호!" 나는 기분좋은 함성을 내질렀고 내 뒤로 두 개의 파공성과 함께 두 애들 역시 뛰어 내렸다. 화락 화락 하고 찢어질 듯이 펄럭이는 옷자락을 느끼면서, 내 뺨과 내 몸에 부 딪치는 공기를 맛보면서 나는 몸안에 퍼져나가는 짜릿함과 해방감을 함께 즐겼 다. 향기로운 공기,차가우면서도 달콤한 공기,산의 신들이 보내주는 바람이 내 전신 을 휘감아 올리면서 날개도 없는 내 등을 받쳐주었다. 땅의 여신이 나를 불러들이는 그 순간, 내 다리는 그 땅에 내려서고 내 발은 굳 건하면서도 생명이 가득찬 풍요로운 흙더미에 푹 파묻혔다.그 모든 것이 너무나 기분이 좋았다. 흐흐흐흐.. 린은 헉헉 거리면서 내 품안에서 주먹을 쥐고 있다. 내 뒤를 이어 착지한 두 아이들은 나의 뒤를 어디까지나 따라오겠다는 듯이 기 세등등하게 내 등을 노려보고 있었지만 나는 유쾌한 기분에 사로잡혀 다시 미친 놈마냥 달리기 시작했다. 땅 위의 무수한 살아있는 것들이 우리들이 내딛는 발소리와 우리들이 찢어버린 바람 소리를 듣고 놀라서 흩어져 간다. 내가 내는 풀 소리,바람 소리가 너무나 기분좋게 들려서 나는 경쾌한 춤을 추는 기분이 되었다. 지금 이 순간은 태어난 자의 즐거움을 마음껏 누리리라. "엄청난 속도..군요." 린이 중얼거렸다. 나는 웃으면서 그를 바닥에 내려놓았는데 그는 내려서자 균형감각을 잃고 비틀 거렸다.내 뒤에 따라오던 두 아이들은 가볍게 숨을 고르면서 날 지켜보고 있었 다.나는 시냇물에 발을 담그고 얼굴을 가볍게 닦아냈다.이렇게 달리는 것도 오 랜만이라 기분이 정말 상쾌했다. "정말 진심으로 달리시면..어느정도나 되지요?" "몰라." 나는 기지개를 펴고 말했다.하품이 나와 길게 몸을 펴는데 두명의 아이들이 등 짐같은 것에서 무언가를 꺼낸다.무언지는 보지않아도 알만했다.꺼낸 것은 고깃 덩어리였다.약간 훈제로 그을린 것으로 아마 사슴고기같았다. "드시지요." 공손한 어조로 유탄이 권했다.녀석의 반짝 반짝 하는 금발은 보기에 참 좋았다. 이 녀석이 변신하면 어떤 모습일지 새삼 궁금해졌다. 그 고기를 받아들고 우물 우물 먹어대는 데 린은 궁금한 얼굴로 다시 날 바라본 다.두 애들 역시 린의 존재에 궁금함을 느끼는지 지켜보는 중이었다. "얼마나 걸리지요?" 어색한 침묵을 이기지 못하고 린이 조용히 물었다. 나는 다리를 주욱 뻗고 바위위에 누워서 그의 무릎을 베고 짭짤한 육포를 천천 히 우물거렸다. 두 아이들은 린을 흘긋 보고는 내 발치 한구석에 조용히 앉는데 그 모습이 매우 조신해서 마음에 든다.린의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려온다. 불안한 심장소리. 푸른 아인족은 인간 보다 심장이 늦게 뛰며 두개다.우리들은 그 보다 더 늦게 뛰기때문에 때때로 남의 심장소리를 들으면 마치 음악소리와 같아 기묘한 리듬 감을 느낄 수가 있다. "흐음..." 나는 하품을 하고 눈을 감아버렸다. 따스한 햇빛이 전신을 어루만진다. 나를 사랑하는 잔혹한 신이 내 몸위로 열기를 내려준다. 린은 다시 침묵했다. 우리들 모두 침묵이다. 에! 이러니 재미는 없군! 나는 눈을 뜨고 벌떡 일어났다. "꼬마!" 유탄과 마리온이 놀라 나를 바라본다. "지금 땅의 엘프에게 누가 와 있냐?" 급히 유탄이 대답했다. "듀나시 님과 이에르네님.그리고 다크시온님입니다." "이에르네가 와 있어?" 나는 조금 놀랐다.그녀는 잘 나서지 않는 타입인데? "네,그렇게 세분이 가 계시니까 저희와 왕께서 가시면 모두 여섯이 될 것입니 다." 우리들 여섯이면 십만대군은 무리가 있어도 만명정도는 해치우고도 남음이 있 다.그런데 이렇게 우리들이 여섯이나 몰려갈 필요가 있는 것일까? 내가 그런생각을 하는 것을 알 듯이 진지한 어투로 유탄이 말했다. "아직 말씀은 드리지않았습니다만..실은 포렌이 ..부상을 당해서요." 나는 그들을 다시 돌아보았다. "뭐라구?" "포렌이 부상을 당해서...듀나시님이 격노하셨습니다.그래서..." 난 몸을 일으키고 그들을 내려보았다. 무의식중에 주먹이 쥐어져서 손아귀에서 빠득 소리가 났고 뒤이어서 녀석들의 얼굴이 공포로 물들었다. "포렌이 부.상.을 입어?" "아..네에..저어..사인족들에게 갑자기 습격을 받아.." "감히 사인족 따위가 포렌에게 상처를 입혀!" 불덩어리가 뱃속부터 치밀어 올랐다. 전신이 달아오르는 분노가 발끝 손끝 까지 치달아서 부들 부들 떨릴 지경이었 다. 두 아이들은 겁에 질려서 뒷 걸음질을 쳤다. 내 고함소리에 근처에 있던 새들이 일제히 허공으로 치달아 솟아올랐다. "그 말을 왜 이제 하느냐!" 두 아이들은 머리를 조아렸다. 몸이 바들 바들 떨고 있는 것이 눈에 보였지만 분노를 억제하기란 힘이 들었다. 나는 주먹을 쥐고는 허공을 한동안 노려보았다. 린이 공포에 질려서 뒤에서 떨고 있는 게 느껴졌다. "린." "네.네!" "너 혼자 돌아가라." "네?" "따라 오지 말고 돌아가란 말이다!" 린은 내 변덕에 입을 다물었다. 그는 공손히 일어서서 내 등 뒤로 고개를 숙여보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나는 떨고 있는 두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가자." 두 애들은 비슬 일어서서 고개를 들지 못한 채로 내 앞에 섰다.나는 고개를 돌 려 린을 보았다.린은 새파란 얼굴을 한 채로 서서 나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그럼.." 그가 고개를 조심스레 든다.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눈동자는 겁에 질려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덜덜 떠는 주제에 할 말은 하는 군 하고 내가 약간 비웃을 무렵 린의 얼굴에 의 외로 웃음기가 살짝 돌았다.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왠지 화가 풀려버렸다. 나는 손을 뻗어서 그녀석의 머리를 마구 문질러주었고 녀석은 슬쩍 피하듯이 하 곤 수줍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가라!" "네." 나는 몸을 돌려서 내달렸다. 아이들이 내 뒤를 따라 달렸고 린은 그 자리에 못박혀 서있었다. 그가 날 바라보는 것을 안다.내 등뒤로 그의 시선이 못박혀있다는 것을 알수 있 었다. 녀석은 돌아가서 가빈과 마미와 스카의 등쌀에 시달리겠지. 생각해보면 가빈이랑 저 녀석은 다른 데가 많은데 특히 내가 화를 내면 그게 드 러난다.가빈은 내가 화를 내면 달달 떨면서도 시선을 마주치면서 대롱 대롱 매 달리는데 린은 내가 화를 내면 달달 떨면서 내 화가 가라앉기를 기다리고 있다. 핫핫..내가 화를 내면 같이 화를 내는 스카와는 정 반대! 그들을 생각하는 동안 화가 가라앉았다. 그러나 묵직하게 내 뱃속에서 도사린 이 불덩이는 아마 사인족을 멸절시키지않 고서는 풀리지않을 것이다. 밤이 되었을 무렵 나는 애들이 지쳐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묘인족정도 되는 녀석들이 산 서너개 정도 넘었다고 지쳐서 헉헉거리면 그 자격이 없다.이애들은 아마 사십살 전후일 것같은데 대적경험은 그다지 없을 것으로 보인다. 밤이 되면서 부터 몸안의 세포가 깨어나고 있었다.몸안에서 움직이는 그것들은 밤이오면 길길이 날뛰면서 눈을 뜨고 좀더 움직여 좀더 움직여 하고 외쳐대고 있다.나는 그 것들의 부름에 따라 더 속도를 냈고 두 애들은 나와의 간격을 좁 히기 위해 갖은 애를 다 쓰고 있었다. 어느정도 달리는 동안 해가 뜨고 있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그걸 걸음이라 부를 수 있다면 모르지만-그들을 돌아보았 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들을 보고 나는 가볍게 말해주었다. "이제 한 숨 잘까?" 헉헉 거리는 숨소리와 그들의 심장이 비명을 질러대는 소리가 들려오는데 문득 언덕너머로 연기냄새가 났다.마을이 멀지 않은 듯했다. "헤에, 마을이 근처로군.그럼..그리로 갈까?" "저기.." 허덕이면서 유탄이 말했다. "저 산 너머가 ...땅의 엘프의 땅입니다." "그럼 그냥 갈까? 내가 히죽 웃자 그들의 얼굴이 파리하게 질렸다. 핫핫핫... 자식들 질리는 꼴 보게. 마리온은 유탄을 원망스레 바라보고 있다.유탄도 자기가 한 말을 후회하고 있 다. "크크크.." 나는 웃고는 툭툭 털고 일어나서 마을쪽으로 걸어갔다. "가서 뭔가 뜨근 뜨근한 것이라도 먹자,와라.꼬맹이들아." 선술집에 들어가서 간단한 음식을 시키고 나서 새파랗게 지쳐있는 애들을 바라 보았다.그들은 밥먹는 것도 귀찮은 모양이었다. 나는 휘휘 오리구이를 잘라내어 먹으면서 물었다. "자,이제 이야기 해봐.듀나시가 무슨 소릴 하고 날 불러오라 했지?" 그들은 움찔했다. "저어기.." "듀나시가 날 불러오라고 했을 때는 범상한 일이 아니었을 거야.단순히 땅의 엘 프의 왕따위의 일로 날 부르지는 않았을 것이고...포렌의 일인가?" ".." 나는 고길 씹으면서 녀석들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녀석들이 어느정도 아는 지 몰랐기에 자세히 물을 필요성이 있었다. "자아.좋아 처음 부터 묻자.땅의 엘프가 도움을 청한 게 먼저냐,아니면 포렌이 다친게 먼저냐?" "어느 쪽이 먼저인지는,.확실하지 않습니다.포렌은 땅의 엘프의 땅을 지나면서 사인족을 보게 되었고 엘프들은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고 하고.." "그런데 그가 혼자서 사인족과 싸우다가 다쳤다?" "네..아시다 시피 포렌님은..듀나시님의.." "그래,그의 아이니까." 나는 턱을 잡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아 모든것이 지저분해진다. 듀나시의 아이는 내 아이고 포렌은 내 아이다. 속이 빙글 빙글 돈다. KUBERIN.... 제 아무리 강한 놈이라해도 언젠가는 죽어 소멸하는 것 그 소멸의 시각에 애도하는 것은 남은 자의 몫 3 내가 그 땅에 도착한 것은 낮이었다. 별로 먼 거리도 아니었다.하룻거리였지만 어느정도 나에겐 마음의 준비가 필요 했고 이 녀석들에겐 체력이 필요했었다. 내가 도착하자 마자 숲안의 경계가 살벌해지는 것은 역시 몇번이나 공격을 받았 던 탓이리라.땅 위에 배어있는 피 냄새가 나에게 색다른 감흥을 주었다. 그리고 나와 닮은 존재가 서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푸른 나뭇잎이 사삭 거리고 소리를 낸다. 햇빛에 반사되어 무슨 색인지도 알수 없이 빛나는 그 형형색색의 나뭇가지 아래로 상아빛을 한 내 형제가 서서 날 바 라보고 있었다.무표정한 그 얼굴에는 나에 대한 증오도, 애정도 스며있지않다. "듀나시님." 친근한 듯 부르는 마리온의 말투에 울컥 화가 치민 것은 내가 그렇게 부를 수 없는 탓이다. 쳇... 듀나시는 날 바라보고 나의 소년의 몸매를 아래위로 보고는 경멸에 찬 미소를 지었다. "왜 그런 꼴을 하고 있는건가요?" "아아..조금 취향일 뿐이다." "상대에게 방심하게 해서 한 방 먹여줄 참인가보군요." 듀나시는 그렇게 차갑게 말하고 날 내려다 보았다. 그는 여전히 나에게 화를 내고 있고 나를 증오하고 있다.하지만 나는 어쩔 수없 다.내가 그에게 했고 또 내가 포렌에게 한 짓을 그가 영원히 용서할 수 없을 지 라도 나는 또 그렇게 할 참이었다. "오래만입니다.왕이여." 고개를 숙여보이는 다크시온을 발견하고 나는 조금 걸음을 멈추었다.그녀석은 30년전 나에게 도전했던 녀석으로 매우 강하다.그녀석의 얼굴 한가운데를 스치 는 그 흉터는 내가 만들어준 것이고 그녀석이 나에게 만들어놓은 흉터는 내 가 슴에 아로새겨있다. "그렇군.다크시온." 검은 머리와 녹색눈으로 그녀석은 나와 거의 같은 모습이었다.단지 조금 다르다 면 내가 얄상한 외모를 한 것에 비해 녀석은 묵직한 맛을 풍기고 있다는 것이었 다. "왜 그런 모습을 하고 다니시는 지 이해가 안가는 군요." 그 녀석은 미소로 나에게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그 거대한 어깨로 녀석은 듀나 시가 나에게 보내는 눈길을 막으면서 내 옆에 다가와 섰다. "재미있어서야." 나는 가볍게 대꾸하고 듀나시의 시선을 피했다.가슴이 뜨끔거린다. 듀나시는 냉담한 얼굴로 마리온과 같이 걸었고 뒤에 선 유탄은 안도의 한숨 같 은 것을 몰아쉬면서 다크시온의 뒤로 다가서 있었다. "포렌은?" 내가 묻자 다크시온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가서 보시지요." 가슴이 철렁했다. 나는 주먹을 다잡으면서 마을 안으로 들어섰다. 땅의 엘프의 마을은 지하에 위치하고 있다.지하의 마을은 몇번이나 헤메게 만드 는 미로로 만들어져 있고 이들은 이 덕에 사람들 눈에 띄이지않은 상태로 살아 간다.우리들이 들어서자 중간에 섰던 조그마한 녀석이 재빨리 다가와 고개를 숙 인다. "위대한 묘인족의 왕을 감히 뵙습니다." 그녀석은 내 허리를 간신히 넘는 키를 하고 있었다.주글한 얼굴에 비해서 수염 이 없다는 것은 아직은 어리다는 증거였다.뾰죽한 귀가 둥근 빵같이 생긴 모자 에 감싸여져있다.털이 수북한 조그마한 손으로 그는 나를 안내했다. "이쪽으로.." 그녀석의 얼굴에 내가 진짜 묘인족의 왕인가 하고 의심스러워하는 빛이있다는 건 느꼈지만 무시했다.내 자신이 강하다는 것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세상천 지 나랑 붙어봤던 놈이면 다 안다. 한동안 걸어 들어가니 지하광장에 도착했다.지하라고는 해봐야 고개를 들면 햇 빛이 스며드는 둥근 구멍이 보인다.아마 위에서 보면 개미굴같이 보일 거대한 둥지같았다.근사한 위치다. 햇빛은 따스하게 마을의 지붕을 덮고 있다. 어두운 갈색톤의 집들과 달리 엘프들의 옷차림은 모두 밝은 밤색이었다. 우리들이 다가서자 호기심 반 두려움 반에 얼굴을 빛내는 조그마한 것들이 뭉기 작거리면서 내 앞으로 걸어온다. 그중에 가장 앞에 선 자는 황금으로 치장된 목걸이를 거창하게 걸고 있다.그 것 을 보자 마자 그 녀석이 왕이라는 건 확실했다. "위대한 묘인족의 왕께서 친림해주시니 ..영광이올시다." 그가 손을 들어보이면서 에메랄드빛으로 빛나는 지팡이를 나에게 건넸다.제법긴 것인데 끝에 주먹만한 에메랄드가 빛나고 있다.이들 땅의 엘프들은 자신들의 마 을을 방문하는 자들에게 선물을 한다.그게 상당한 횡재수라 모든 여행자들이 기 대를 하지만 이렇게 은밀한 땅의 엘프의 마을을 찾아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고맙소.땅의 엘프의 왕." 나는 가볍게 말하고 지팡이를 들어서 다크시온에게 건넸다.다크시온은 그것을 공손히 받아들었고 엘프의 왕은 나에게 손짓을 했다. "누추하지만 이쪽이 거처입니다." 내가 걷기 시작하자 이 작은 생물들이 좌악 갈라지며 길을 내주었다. 안으로 걸어가다 보니 우리들을 위해 만든 것임이 틀림없는 진흙으로 지은 집이 있었다.진흙으로 짓긴 했지만 그 집은 찬란한 금은이 박혀져 화려무쌍의 집이었 다.아마도 이 엘프들이 날 위해 급조했음이 확실했다. 문짝은 금과 은으로 새겨져있고 문고리는 수정이었다.창문으로 내놓은 구멍은 육각형으로 새겨져서 보랏빛 자수정과 황수정으로 군데 군데 포인트를 주고 있 었다.안으로 들어가보니 점입가경이다. 침대는 황옥과 청옥으로 대를 만든 대형이고 그 청옥위에는 에메랄드와 다이아 를 박아 그림을 그려놓았다.탁자와 의자역시 그런식으로 만들어 호화롭다 못해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이 놈들 내가 반짝이는 걸 좋아한다는 걸 알았나? 침대에 누워있던 녀석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우리들 중 누구도 감히 왕 앞에서 누워있을 수 없고 왕 근처에서 침대에 누울수 없다.나는 침대에 다가가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버둥거리는 녀석의 몸을 잡고 안 아올려 무릎위에 놓은 채 내 자신은 침대위에 걸터앉았다. "앗! 왕!" 녀석은 여전히 버둥거린다. 갈색눈에 상아색머리를 한 녀석이었다. 듀나시와 같은 상아색 머리를 한 녀석은 날 공포와도 같은 동경에 찬 눈으로 본 다. "여전히 조그맣구나.포렌." 녀석은 버둥거리다 말고 축 늘어지듯이 고개를 떨구었다. "죄송합니다.왕이여." 나는 그 녀석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지금 내가 여기와 있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사인족따위 때문도 아닌 바로 이 녀석때문임을 잘 알고 있던 탓이다. "뭔가 드시겠습니까?" 다크시온이 미소하는 얼굴로 나에게 물었고 나는 포렌의 얼굴을 빤히 보다말고 말했다. "뭔가 마실 거를 가져와라.그리고 듀나시." 듀나시가 고개를 돌리다 말고 날 바라보았다. "설명해라." 듀나시는 내 품안에 축 늘어지듯이 안겨있는 창백한 포렌에게 시선을 돌리다가 약간 절룩이는 다리로 다가와서 내 앞에 앉았다.그렇게 앉을 수 있는 지위를 가 진 자는 몇 안되기에 모두 침묵하고 있었다.마리온은 잽싸게 뭔가 마실것을 얻 으러 가버렸다. "다크시온,앉아라." 다크시온이 공손히 앉고 나자 어느정도 좁은 방안이 정리가 되었다. 듀나시는 냉담한 얼굴로 조용히 말했다. "아마 유탄에게서 말씀 들으셨을 겁니다.포렌이 사인족에게 다쳤고 엘프의 왕은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했지요,.그리고 사인족의 왕은 감히 우리에게 정면도전한 거나 다름없이 되어버렸습니다." 나는 침묵했다. 내 시선을 받은 다크시온이 말을 이었다. "그 대롭니다." "포렌은 어떻게 다쳤나?" "앗.죄송!" 파리해진 녀석이 벌떡 내 몸안에서 몸을 일으키려고 버둥거렸지만 나는 녀석을 누른 상태로 재차 물었다. "대답해라." 아아 하고 녀석이 한탄하듯이 바라보았다. "제가..제가 너무 연약했던 것입니다.."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이 아파왔다. 약해서? "엘프들의 말을 듣고 사인족의 뒤를 따라갔다가 그만 함정에 걸리고 말았습니 다.종족의 이름을 더럽히고 ,..그만.." "패해서 도망쳤나?" 나의 목소리가 차가와졌다는 것은 느낀 듀나시의 얼굴이 파래졌다. "도,도,도망친 것은 아닙니다.정신없이 싸우다 보니 ...정신을 잃었는데 그 때 엔 이미 유탄이 곁에 있었습니다..." 포렌의 얼굴이 참혹해졌다. "그럼 타종족에게 구함을 받은 것은 아니란 말인가?" "...윽..네에.." 포렌이 고개를 떨구려고 했지만 내가 반듯하게 안고 있는 탓이라 그렇게는 못하 고 창백한 얼굴을 내게 다 드러낸 채로 우물거렸다. "그럼 좋다." 나는 그의 몸을 끌어당겨서 안았다.가냘픈 몸이다. 아직 어려서 이 몸은 그다지 단단하지도 못하다.그런 이 애를 다치게 했다. 가슴속에 부글 부글 끓기 시작하더니 눈앞이 빨갛게 물드는 기분이 되어버렸다. 포렌은 내가 안자 떨기 시작했다.내가 무서운 것인지 처벌이 무서운것인지 혹 은 그 양쪽 다인지 알수는 없지만 공포에 질려있었다. "감히..널 건드리다니..." 낮게 이가 으득 갈렸다.머리털과 온 몸의 체모가 치솟을 기분에 사로잡혀서 난 잠시동안 내 앞에 있는 자들을 잊었다. "쿠베린형님?" 듀나시는 아직 어렸다. 나는 그 녀석의 발목을 불쑥 잡고 끌어당겼다. "왜..왜 그런 무서운 얼굴을 하시..는 ..." 나는 지금 막 내 형을 죽이고 돌아왔다.내가 가장 사랑하는 자였던 내 형을 죽 이고 그 피로 온몸을 물들이고 돌아왔다. 눈앞이 빨갛게 물들어있었다.아무 것도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다. "형님?..쿠베린 형님?" 듀나시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졌다. "와..왕이여? 왕?.." 나는 그 녀석의 발목을 잡고 노려보며 물었다. "넌 나를 사랑하느냐?" "에..?에에...물론이죠.형님..아니,왕이여." 듀나시의 얼굴이 조금 풀리다가 나와 시선을 피하면서 밖을 바라보았다. "또 폭풍우가...." 그의 눈이 커졌다. "혹시? 또?" 그의 얼굴이 다시 창백해졌다. 나의 젖은 머리칼에서 물이 떨어진다.이마로 뺨으로 턱으로 툭툭 떨어져내렸다. 등줄기에 흐르는 피는 분홍색으로 셔츠를 물들이고 있었다.가슴에서 흘러내리는 피는 검다.내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검다. "크으..큭.." 듀나시의 얼굴이 창백하게 다시 물들었다.그의 작은 손이 내 머리를 잡고 물었 다. "..쿠베린형님?" 나는 그의 손을 난폭하게 뿌리치고 그의 다리를 다시 잡아 챘다.그녀석은 침대 위에 누워있다가 벌러덩 뒤로 넘어져서 나에게 대롱대롱 매달렸다. "으아! 형님!" 그가 공포에 질려서 외쳤다. "나를 사랑하느냐!" "에..에에,..형님.말해주세요! 왜,,.왜!" 나는 그녀석의 아직 자라지않은 발목과 정강이를 잡았다. "그렇다면 나를 용서해라!" 나는 그녀석의 다리를 쥔 손에 힘을 주고 단번에 부러뜨렸다. "으아아아아.." 녀석의 비명소리가 울려퍼졌다. 빠각 하고 몇번을 들어도 소름끼치는 소리가 귓전안에 울려퍼졌다. 그 녀석의 흰 살갗을 뚫고 부러진 흰 뼈가 튀어 올라왔고 희고 붉은 힘줄이 고 통을 호소하면서 다 함께 튀어나왔다.피가 흐르고 흘러서 그의 다리 전체에 퍼 져나갔다. 듀나시가 혼절한 것을 보면서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눈앞이 온통 빨갛게 물들어 아무것도 보이지않는다.보고 싶지도 않다! 그 녀석은 축 늘어져서 바닥을 구르고 있으며 다른 자들은 아무도 듀나시의 비 명을 들어도 달려나오지 않는다.아니 그럴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나는 그 녀석의 몸을 침상 위에 올려놓았다. 녀석은 나를 영원히 증오할 것이고 이 녀석은 다시는 완벽한 몸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헐떡이면서 걸어나왔다. 저 미친듯이 몰아치는 폭풍우,온 숲안이 나무들의 비명소리로 가득했다. 나는 내 손에 내 아버지의 피를 묻혔고 내 친동생의 피를 묻혔으며 그다음에는 내 형의 피를 묻혔고 그 다음에는 내 아내의 피를 묻혔으며 그 다음에는.... "크아아아아아........." "..왕?" 다크시온이 말을 걸었다. 나는 고개를 들고 그 녀석을 쏘아보았고 그는 흠칫하여 나에게 쥔 잔을 내민 상 태로 우물거렸다. "바...받으십시오.." 나는 포렌의 몸을 천천히 풀어놓고 잔을 받아들었다. 내 손이 떨리는 것을 무심히 바라보는 순간 듀나시의 시선과 다시 마주쳤다. 그 녀석은 내 얼굴을 보고 얼른 고개를 돌려버린다. 완벽하지 못한 저 다리....나를 증오할 것이다. "식사를 올릴까요? 아님 쉬시겠습니까?" 다크시온이 잔을 받아 마시는 나에게 물었다. "잔다." "그럼 저희들은..나가보죠." 다크시온이 일어서자 다들 일어났고 포렌도 부시시 일어났다.그런 녀석의 손을 꽉 잡고 낮게 말했다. "너랑 같이 잔다.도로 누워라!" 포렌은 흠칫 하고 파래졌다 빨갛게 된 얼굴로 나와 듀나시를 번갈아 보았다.다 크시온은 핏 하고 웃고는 말했다. "네." 듀나시의 얼굴을 보고 싶지않았다.그리고 그의 얼굴을 보아서 즐거울 것은 조금 도 없기때문에 나는 그를 보지않고 잔을 밀어버린 채 침대에 털썩 누워버렸다. 포렌이 당황한 얼굴로 내 팔안에서 망설였다. "누워 자라!" 포렌은 내가 말하자 얼른 누웠다.굳은 어깨를 느낄 수 있다. "난 원래 혼자서 안잔다,그러니까 까불지 말고 너도 자라." "에..예." 모두가 나가고 난 뒤에 나는 포렌의 목에 얼굴을 박고 생각했다. 이 목안에 흐르는 피는 내 것일까 아님 듀나시의 것일까... 아니 어쩌면 아무래도 좋다.이 몸안에 흐르는 피가 내 것이든 아니면 듀나시의 것이든 상관없다.난 이 녀석을 내가 죽이지않기만 하면 된다. 이 녀석이 날 증오해도 상관없다.단지 내가 이녀석을 죽이지않기만 하면 된 다... "저기.." 포렌이 말을 걸었다. "뭐냐?" "아버지께서..그러시는데.." 포렌이 꼼지락거리면서 말을 우물거렸다. "할말 있으면 해라!" "..제 몸안에는 왕의 피가 흐른다고.." 나는 눈을 뜨고 그 녀석의 갈색눈을 바라보았다.그 눈은 내가 사랑했던 여자의 것이다. 손가락을 뻗어서 머리칼을 만지니 상아색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로 스르르 쏟 아져 내렸다. "그럼..저는,,왕의 아입니까?" 그가 결심한 듯이 물었다. "저..저의 어머니는 왕의 사랑을 받았던 여자..그러니까 ..전 왕의 아이입니 까?" 나는 그 녀석의 이마에 키스해주었다. 녀석이 기뻐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렇게 생각했냐?" "에..에에..잘은 모르지만..아버지께선 ..절 미워하시고.." 가슴이 찢어질 것같은 기분이 되어버린다. "저는 다리 병신이니까..훌륭한 전사도 되지못하고..." 머리 속이 멍해져 왔다. 나는 녀석의 어깨를 끌어안고 가만히 있었다. "넌 듀나시의 아이이고 동시에 내 아이다.네가 날 아버지라 불러도 틀리지않 아!" 포렌은 가만히 있었다.후우 하고 그의 입안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최고의 전사이신 왕의 아이라는 것은..황홀한..일입니다." 녀석이 벌개진 얼굴로 웃었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다 이기적인 것... KUBERIN.... 제 아무리 강한 놈이라해도 언젠가는 죽어 소멸하는 것 그 소멸의 시각에 애도하는 것은 남은 자의 몫 4 "하아,오랜만입니다! 왕이여!" 낭랑한 목소리 였다. 흐 하고 쓴웃음을 짓는데 그녀가 다가와 내 침대맡에 앉더니 내 뺨을 만지작 거 렸다. "호호..왠일로 이런 어린 모습? 포렌보다 어린 모습이네요?" 나는 그녀를 흘긋 보았다. 붉은 찬란한 머리칼에 녹색눈동자,당장이라도 불꽃을 피울 듯한 아름다운 불꽃 의 미녀가 내 얼굴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이에르네.." "키스해도 되지요?" 그녀가 내 입술에 가볍게 왔다 가고 나선 방글 거리고 웃음을 지어 보였다. "진짜 오랜만.나에게 정말 아기를 주지않을 셈?" 나는 길게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 앉았다.이제 해가 져서 어둑한 저녁이었다.여 기저기서 저녁을 준비하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어쩐일이야?" "나는 다크시온과 친하니까요.다크시온은 듀나시와 절친하고 포렌은 듀나시의 아이고....그래서 온거죠." "그래?" 나는 그녀를 흘긋 보았다. "쿠베린왕,무언가 굉장히 당신답지않게 고민한 얼굴이군요?" "고민?" 흐 하고 웃고 일어나려는데 이에르네가 서서는 팔짱을 끼고 물었다. "인간들 사이에 끼어 사는 이유가 뭐여요?" "너도 끼어살고 있잖아?" "당신은 왕이잖아요? 왕이면 왕답게 황야에서 거칠게 포효하며 살아가야죠,옆에 아름다운 미녀 하나 데리고." "하나?" 내가 불만스레 입술을 일그러뜨리자 그녀는 웃음을 터뜨렸다. "하나로는 안되나요? 이 바람둥이!" 포렌이 잠에서 깨어서는 발딱 일어났다.그는 당황한 듯이 엉금거리고 침대에서 기어 나왔는데 그 제서야 녀석이 어디에 상처를 입었는가를 깨달았다.등이었다. 등과 옆구리가 완전히 관통당했고 다리와 팔 여기저기에 관통상을 입었다.그리 고 등과 가슴에 몇군데의 찢겨진 상처가 있었다. 그 것을 보는 순간 와락 살기가 치솟아서 눈앞이 빨갛게 물들었다. "쿠베린!" 이에르네가 급히 나를 부르지않았으면 전투모드로 바뀌어 버릴 뻔했다. "우..." "그렇게 무서운 얼굴 하지 마세요.포렌이 완전히 얼었어요." 이에르네가 날 바라보면서 암컷 특유의 여유로 말을 걸었다.내가 그녀를 흘긋 보자 어딘가 불안정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나는 밖으로 나왔다. 찬공기를 마시자 조금 진정이 되었다. 내가 어찌된 것인지 아무래도 듀나시나 포렌의 일이면 눈앞에 보이는 것이 없 다.벌써 몇백년이나 살아온 주제에 이런 ... "쿠베린." 이에르네가 금방 내 뒤를 따라나왔다. "소문 사실인가요?" 내가 그녀를 보자 그녀가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다. "포렌이 당신 아이라는 거..." "그건 왜?" "듀나시의 아내인 테라는 당신의 애인이었잖아요?" 나는 침묵했다. "듀나시는 포렌을 아주 매몰차게 대해요.그런 점에서...혹여나.." "그런 소문따윈 신경쓸거 없어!" "하지만 그래서 듀나시가 당신에게 방자하다는 소문도 있고.." "신경쓰지 말라고 했어." "하지만.." 나는 그녀를 쏘아보았다.그녀가 조금 움추러들었지만 당당히 다시 물었다. "나 물어 볼 수 있다고 보는데요? 나역시 당신의 애인중에 하나니까." 나는 이를 악물고 그녀를 흘긋 바라보았다. "난 아이 따윈 낳지 않아!" "쿠베린!" "아이를 바란다면 날 단념하는 게 좋아.이에르네." 그녀의 얼굴이 굳어졌다. "건강한 아이를 만들어서..그 애를 또 내가 내 손으로 죽이고, 또 애를 만들어 서 내 손으로 또 죽이고..그 짓을 반복하는 건가?" 내가 비웃자 이에르네는 내 손을 갑자기 꽉 눌러잡았다. "당신..!" 그녀의 눈안에 눈물이 일렁였다. "당신은 왕이에요! 지상위에서 가장 강한 왕!" 나는 입술을 가볍게 일그러뜨렸다. "그래서?" 사인족의 침입은 금새 발각되었다. 발각이고 자시고 없었다.발견한 것은 가장 밖에 나가있던 마리온으로 그는 곧장 나에게 알려왔다. 나는 내 일족들을 이끌고 뛰어나갔다. "뭐야..인간이다." 나는팔짱을 끼고 다가오는 자들을 바라보았다. 수는 약 이백가량이었고 모두 중무장한 인간들이었다.녀석들은 수를 믿고 숨지 도 않은 채 언덕배기를 기어올라오고있다.나는 겁에 질린 얼굴을 한 땅의 엘프 의 왕을 바라보았다. "인간들이 거처를 알다니 어찌된 거요?" "모..모르겠소! 우리들의 거처를 아는 것은 소수의 인간들뿐이었고.." 나는 눈쌀을 찌푸리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이백년간 우리 도시를 인간이 습격한 일은 없었는데." 나는 듀나시를 돌아보았다. "듀나시." "네." "너와 아이들은 마을에 남아있도록 해라.저것들은 나와 다크시온만으로 충분하 니까." "알았습니다." "양동작전일 지도 모른다.경계를 해라.왕,혹여 이곳에 트랩따위는?" "어..없습니다.저희들은 .." "알았소,그럼 지하통로에라도 대피시키시오." "구,.궁수정도는." "그럼 준비 시키시오!" 나는 그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올라오는 녀석들을 바라보았다. 기세등등하게 올라오는 인간들의 얼굴에는 탐욕이 서려있었다.그 얼굴을 보는 동안 갑자기 기분이 기이해 지기 시작했다. "설마 사인족놈들이 인간과 손을 잡은 건.." 다크시온이 그들을 내려다 보며 중얼거렸다. 크 하고 내가 웃었다. "너라면 인간과 손을 잡겠냐?" "아뇨." 그가 날 보며 시익 웃어보였다. "다만 이용할 뿐이죠." "가자!" 나는 몸을 움직였다. 인간들 상대로는 전투모드로 전환할 필요조차 없다.다크시온이 내 뒤에서 포효 하면서 뒤를 따랐다. 쿠오오오오오.... 눈앞에 피가 맺혀있다는 것은 그다지 좋은 기분은 아니다. 하지만 피가 불투명하다는 것은 어쩌면 이유가 있어서 일지도 모른다. 앞을 보지 마라,뒤를 생각하지 마라,그저 네 눈앞에 있는 것을 해치워 버려라.. 등뒤로 날아드는 도끼날을피해서 몸을 젖히면서 나는 손톱을 들어 녀석들의 목 줄기를 해치웠다.내 발끝은 놈들의 투구위,그리고 방패위에서 날고 있다.인간들 이 제아무리 중무장을 해도 나의 손톱아래서 피할 수는없다. 학살이었다. 엄밀히 말한다면 나는 화가 치밀어 올라서 눈에 보이는 것도 없었고 내 몸의 모 든 것이 피를 바랬다.피의 복수. 어쩌면 내자신이 구린 것을 다른 쪽으로 풀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핫핫...점점 침울해지는 군. 다크시온은 나와 쌍벽을 이룰만큼 잔악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그 역시 전투 모드로 할 필요조차 없어서 보통 보다 조금 긴 손톱만으로 싸우고 있는 중이었 다.엄청날 정도로 그의 전신에서는 힘이 솟구쳐 나온다.녀석이 나에게 진 녀석 이라서 다행이었다.아니,한편으로는 그런 식으로 우정을 나눌 놈이라도 있다는 게 어디인가. 하하하하..이제 자기 혐오는 그만! 땅 파면서 킬킬대는 건 내 취향은 아니다. 눈앞의 일이 먼저다. "기묘하군요." 자신이 갈갈이 찢어버린 시체더미 위에서 다크시온이 내게 말했다. "뭐가?" "이렇게 같이 싸워본 것은..처음 아닐까요?" "흐.이게 싸운 거냐? 인간들을 상대로는 싸웠다고는 도저히 말 못해." 내가 손가락에 묻은 피를 할작이면서 말하자 다크시온이 피로 얼룩진 얼굴을 시 익 하고 웃어보였다. "뭐어,어쨌든 왕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움직였다...멋지군요." 나는 다른 말 하지않고 그녀석을 향해 시익 웃어보였다. 이 녀석도 다른 놈들 처럼 나에게 동경심따윌 가지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우리들은 까아아악 하는 소리를 들었다. 나와 다크시온은 주저하지 않고 달려나갔다.그 울음소리와 같은 비명소리는 여 자의 것이었고 여자 것이라면 마을이었기때문이다. 우리들이 도착한 순간 본 것은 사인족의 군단이었다. 그 군단이 마을을 통째로 덮치고 있었다.일부는 싸우고 일부는 학살당하는 가운 데 유별나게 싸우는 녀석들은 물론 나의 일족이었다. 다크시온이 카아아오 하는 소리와 함께 전투 모드로 전환했다.그리고 그 순간 그가 사인족의 무리안으로 달려들어갔다. 사인족은 전투모드로 전환한 약 이백여명으로 군단을 짜고 있었다.선두에 있는 녀석이 제일 컸다.다크시온은 그리로 돌진하고 있었다. 사인족이 가장 경멸스런 이유 중하나는 전투모드로 전환할 수 있는 변신족인 주 제에 인간의 갑옷을 걸친다는것이다.녀석들은 갑옷을 걸치고 마치 인간의 기사 들처럼 말을 타고 돌진한다.그리고 그 막강한-그래봐야 인간에 비해 막강한 정 도지만- 힘으로 상대를 유린한다.그 녀석들이 사인족이라는 것을 알수 있는 단 하나의 증거는 녀석들의 노란 털의 꼬리였다.물론 같은 꼬리라도 야묘족의 꼬리 와는 엄연히 차이가 있긴 하지만 말이다. 포렌과 듀나시가 싸우는 게 보였다. 포렌은 여전히 버벅거리고 있었다.역시 상처를 입은 탓이다.전투모드로 전환해 도 녀석은 여전히 어릿어릿했다.듀나시는 제법 잘 하고 있다.그 다리만 아니었 어도 나랑 쌍벽을 이루지는 못해도 다크시온과 쌍벽을 이루었을 것이다. 이에르네는 잘 싸우고 있다.암컷 특유의 재빠름으로 그녀는 잘하고 있었다. 그녀는 은근히 포렌을 보호하고 있는데 포렌은 그것도 모르고 기세 등등 날뛰고 있는 듯했다. 웃음이 나온다. 내 몸안의 살의를 들어 똑바로 사인족의 한 가운데를 쏘아보았다. 사인족의 한 가운데에서 움직이는 녀석이 나의 시선을 느끼고 나에게 고개를 돌 린다.덩치는 일반 녀석들 보다 두배는 크다.거대한 구릿빛 갑옷이 번득이고 있 었다.녀석은 왕이다.나는 알수 있다. 그 녀석도 내가 왕인 것을 안다. 그 녀석의 눈매가 찌그러지면서 나에게 말을 달려 곧장 다가오기 시작한다.그 녀석의 앞을 가로막는 땅의 엘프의 전사들이 추풍낙엽처럼 흩어져간다. 말은 온통 피투성이를 하고 있다.그 피가 누구의 것인지 새삼 알려고 들 필요는 없으리라. 카오오오오오 녀석이 포효했다. 나는 웃었다. KUBERIN.... 제 아무리 강한 놈이라해도 언젠가는 죽어 소멸하는 것 그 소멸의 시각에 애도하는 것은 남은 자의 몫 5 녀석이 투구를 집어던진다. 녀석이 든 창에 힘이 들어간다. 녀석이 살의를 전신으로 풍기면서 나에게 돌진한다.그의 말이 내 살의와 그의 살의에 겁에 질려 공포에 찬 울음을 터뜨린다. 녀석은 굳어버린 말을 버리고 단숨에 허공을 튀어 올라 내 앞으로 다가섰다. 차랑 하고 그의 몸에 걸친 갑주들의 사슬이 소리를 낸다. 나는 팔짱을 끼고 녀석을 바라본다. "죽어라!" 멋없는 녀석이군. 나는 웃었다. 그의 창날이 내 심장을 노리고 곧장 찔러왔다.일반적인 인간의 검수들과는 속도 가 다르다.창날이 다가온다고 느끼면 어느샌가 찌르고 있고 달려온다 하는 순간 에는 이미 내 앞에 있다. 창날이 내는 차가운 금속성의 바람이 뺨을 스쳐나가더니만 그 다음에는 가슴을 찔러온다.바람에 몸을 맡기면서 슬쩍피해버리는 그 순간을 노리고 그 다음에는 옆구리를 찔러온다.슬쩍 또 한번 피했더니 이젠 목을 꿰뚫으려 다가들었다.그리 고 그 다음 순간은 허벅지를 찔러온다.무지막지한 속도다. 창날을 피했나 하는 순간 녀석이 갑작스레 손톱을 좌악 뻗어 내 목을 할퀴어 온 다.그러나 나는 그 것 조차도 피하고 녀석의 창을 잡아 채어 그 눈앞으로 다가 갔다. 악귀처럼 일그러진 그 푸른 눈은 나에 대한 증오로 떨고있다.산산히 흩어지는 금발의 머리칼은 곤두서서 살아있는 뱀처럼 일렁이고 있다.일그러진 입술 사이 로 송곳니가 드러나 있다.그 녀석의 입이 이번에는 내 목줄기를 노리며 덮쳐들 었다. "카오오!" 그 녀석의 턱에 한 방을 먹였다.터억 하고 충격이 와서 녀석은 뒤로 나자빠지듯 이 비틀거렸다. 그 순간 나의 손톱이 그의 가슴을 찢었다.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녀석의 갑주를 벗겼다.카앙 하고 금속의 갑주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그 순간 사방에서 철궁이 날아들었다. 헛 하고 뒤로 물러서는 순간 철시가 내 몸으로 비처럼 쏟아져들었다. 아무리 나라고 해도 철노로 쏘아진 철시를 몸으로 막고 버틸 힘은 없다.그러나 이 철시를 보는 순간 대체 포렌이 무엇으로 다쳤는지 깨달았다. "이 ...노옴!" 눈앞이 발갛게 물들어온다. 전투모드로 전환하면서 내 몸은 내 앞에서 다시 공격해들어오는 녀석을 향해 돌 진했다.철시가 날아들었지만 나는 그 철시를 손톱으로 휘갈기면서 나의 눈앞에 있는 사인족의 왕의 목을 향해 손톱을 휘갈겼다.그녀석은 내 손톱을 피했지만 완벽하게 피하진 못했다.게다가 갑주는 이미 땅에 떨어져 있었다. 그 녀석이 다시 창을 들어서 나의 몸을 찔러갈 때 갑자기 퍼엇 하고 철시가 사 인족의 왕의 몸을 꿰뚫었다. 녀석의 얼굴이 증오와 배신감으로 일그러졌다.그리고 그 순간 그는 분노의 절규 를 터뜨리고 바닥으로 천천히 쓰러졌다. 나는 그 녀석을 내동댕이 치고 철노로 나를 겨누고 있는 녀석들을 쏘아보았다. 지금 이것은 왕을 노린 자들의 소행이었다. 사인족은 왕이 죽으면 그의 동생이 왕이 된다. 그러나 내가 주욱 훑어보았을 때 왕보다 강한 기운을 뿜는 자는 찾을 수 없었 다. 쿠오오어... 다크시온과 이에르네가 궁수들에게 덮쳐들었다. 그들이 살육을 마구 행하고 있을때 나역시 그 자리에 끼어들었다.철시가 날아드 는 것이 멈추었으므로 나역시 그들에게 달려들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쓰러졌던 사인족의 왕이 피로 물든 입가를 쿨럭이면서 몸을 일 으켰다.그리고 부르르 떨더니 두 번째 전투모드로 전환했다. 그는 나에게 덤벼들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부하들에게로 달려들었으며 그 자신의 부하들의 몸을 갈갈이 찢기 시작했다. 분노의 외침이 그의 몸짓에서 메아리치고 있었다. 배신.배신.배신.. 나는 그를 내버려두었다.그 자신이 부하들에게 배신을 당했던 말던 나는 알바가 아니며 그가 부하들을 죽인다면 나에겐 오히려 이득일 뿐이다. 마음껏 살육을 하던 이에르네가 그 사인족의 왕을 보면서 다가들려 했지만 다크 시온이 말렸다.다크시온은 그의 상태를 보고는 흐 하고 고개를 돌려 나에게 다 가왔다. 사인족의 부대는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왕은 피로 물든 두번째 전투모드를 유지한 채 자신의 부하들에게 다가갔고 그리 고는 앞에서 싸우다 쓰러진 자신의 부하들을 바라보더니 그 다음에는 부하의 말 을 빼앗아 밀어 제치고는 말위에 올라탔다. 그는 돌아보지않았고 우리들은 공격하지않았다. 녀석들이 상당한 타격을 입은 것은 분명했고 또 한동안 녀석들이 못 올것이라는 것도 확실했다. 사인족의 왕은 피로 물든 전신을 굳히고 이 곳을 떠나가고 있었다.그는 곧 죽는 다.그렇지만 아마 배신자를 죽이고 죽을 것이다.그렇게 되면 팽창하던 사인족도 별수 없이 흐느적거리게 될 걸.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전투모드를 풀었다. 고개를 돌리니 포렌이 허덕이면서 바닥에 앉아있다.그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고 상처에선 다시 피가 흐르고 있었다. 듀나시는 그를 부축하지않고 멀뚱히 내버려두고 있었다.냉정한 얼굴속에 감추어 진 그의 기분을 알고 나는 더 이상 보지않았다. "피해는?" 다크시온이 대답했다. "뭐..보기보단 심하지않을 겁니다.엘프들이 몇 다치긴 했지만 아마 삼십명안팍 일걸요." 그가 태연하게 말하는 동안 나는 포렌을 부축할 것인가 하고 망설였다. 그러나 듀나시의 얼굴,엄하고 굳은 얼굴을 보는 순간 억제했다.그도 나름대로 아이를 굳세게 키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내가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하지만 나는 내 일족들을 사랑한다. 내 가족들을 사랑한다. "왕이여.오늘 밤은 어때요?" 이에르네가 내 목을 끌어안고 물었다. "어린애 몸이면 어쩔래?" 내가 웃으며 묻자 그녀가 웃음을 터뜨렸다. "겨우 당신 다운 얼굴이 되었네." "내가 만약에 이런 어린 몸으로 널 안는다면 그거 이상한 느낌 아닐까?" "헤에,걱정말아요.나의 취향은 다양하니까." 그녀가 웃음을 터뜨리면서 깔깔대고 웃었다. 다크시온이 크으 하면서 머리를 긁적였다. "왕,이 자리를 벗어난 뒤에 그런 말을 하는 게 어떻습니까?" 그래.피바다 위에서 이런 소릴 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 그런 걸 보면 확실히 수컷이 암컷보다 예민한 거야... 캬오오오오오 울음소리가 들린다. 나는 침대위에서 일어나서 잠시 창을 통해 드러난 달을 바라보았다. 작은 하늘은 동그랗게 감싸여진 갈색의 기슭사이로 빛나고 있다. 사인족의 왕은 지금 자신을 배신한 자들을 죽이고 있을 것인가. 나와 다른 종족의 왕은 자신을 뒤에서 쏜 자를 어찌할 것인가. 그의 동생을 그가 죽이고 있을까 아니면 그의 동생이 그를 죽이고 있을까. 왠지 그의 얼굴에서 나의 젊은 날의 얼굴을 본다. "쿠베린.." 그녀가 내 어깨를 잡았다. 그녀는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면서 내 허리를 팔로 감았다. 나는 그녀의 머리에 키스해 주었다.그녀의 머리가 내 어깨에서 조금 흔들려 나 를 바라보았다. "이제 돌아오세요." "싫어." 밑도 끝도 없는 그 말에 나도 밑도 끝도 없이 대답했다. 그녀는 쓴웃음을 짓고 날 바라보았다. "일렌을 잊을 수가 없어요? 나는 안돼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녹색눈이 날 바라보았다.한번도 그녀는 나의 시선을 피한 일이 없었다. 그런 면에서 그녀는 다크시온보다도 용감하고 듀나시보다 냉정하며 나 보다도 강한 것일런지도 모른다. "아내는..한 사람.그리고 그 하나는 내가 죽인 걸로 족하지않을까?" 그녀는 내 목에 팔을 감고 조용히 물었다. "그녀를 죽일때 당신의 기분은 어땠어요?" 그런 단도직입적인 질문은 그녀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나는 쓴 웃음을 지었다.오랫동안 하도 그 상처가 헤집어져서 아픈지 혹은 다 아 문 것인지도 알 수 없다. "몰라.내가 죽어가는 기분인..가?" "그만큼 그녀를 사랑했다는 거?" "그렇게 집요하게 물으시는 그대께선 왜 다크시온의 구애를 거절하고 계시나?" 내가 웃으면서 말꼬리를 돌리자 그녀는 눈썹을 치켜 올리곤 간단히 대답했다. "그는 당신이 아니니까." 나는 소리내어 웃고 말았다. 이래서 그녀가 싫고 이래서 그녀가 사랑스럽다. 그리고 이래서 일족이 싫고 이래서 일족을 사랑하고 있다. "다크시온은 당신과 싸워 죽을 일이 이젠 없지.왜냐면 이미 당신과 싸워서 패해 버렸으니까." 그녀는 간단히 말하고 날 똑바로 바라보았다. "나랑 싸울 일도 없지요.나는 이미 당신에게 패했으니까." 나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난 충분히 당신보다 약하기때문에 다리를 부러뜨릴 필요도 없어요." 나는 주먹을 쥐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이에르네는 태연하다. 그녀는 내가 살의를 표출하고 있어도 여전히 내 목에 팔을 감고 있었다. 이게 바로 암컷의 대담함인가 하고 나는 새삼 감탄했다.이 자리에 선 내가 여자 든 남자든 가리지않고 죽인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렇게 대담하다니. "그렇게 정곡을 찔린 얼굴을 하지 말아요.쿠베린,나,알고 있으니까." "어떻게 라고 물으면 바보스러운가?" "별로.당신이 제일 총애하는 동생의 다리가 갑자기 부러지고 그 동생의 아이도 갑자기 다리를 절게 된다면 짐작이 가능한 일이죠." 나는 그녀를 똑바로 보았다. "크흐.." "암컷이 무서워 따위의 말을 하지 말아요.쿠베린.머리가 있는 자라면 누구든 알 수 있으니까.저 도망가 있는 막내만 남았죠? 당신이 다리를 부러뜨리지않은 자 는?" "그앤 선천적으로 피를 싫어했으니 그럴 필요는 없었지." "언젠가 그가 당신에게 도전해 올지도 몰라요.당신의 동생은 완벽한 몸이었으니 까." 그녀는 내가 두려워 하고 있는 사항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곤 다시 내 머리를 감싸더니 가슴에 안았다. "뭐,..당신의 고통따윈 나는 몰라요.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녀가 갑자기 내 입술에 키스하면서 속삭였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꼭 당신의 아내가 되겠다는 거죠." 쿠쿠....잔인한 여자다. [쿠베린 별전2] 다크시온 1 "다크시온.너는 오늘부터 왕의 시종이다." 위대한 왕과 싸워서 다리를 하나 잃은 나의 아버지가 말했다. 왕과 싸워 살아남은 자에겐 영예가 있다.그들은 어떤 자에게도 존경받는다. 나의 아버진 나를 자랑스레 바라보았다. 아직 성년이 되지 않은 자로서 왕의 시종이 되는 것은 세상에 다시 없는 영예이 다.나는 떨리는 손을 꾹 쥐고 아버지의 시선을 받아냈다. 우리들은 오랫동안 이 곳에서 살아왔다. 작은 구릉들이 연이어 있는 양지 바른 콘윌의 샘은 거대한 거석들이 연달아 세 워진 유적들 사이에 있다.우리들은 이 곳에서 약 400여년간 살았다. 사냥을 하기 위해서 가끔 구릉들을 내려가 두개의 산을 넘어 짐승들을 잡아오는 데 그것에 뒤처지는 자는 사정없이 버려진다.물론 뒤처지는 자는 있지도 않지만 가끔 모자란 아이가 나오기도 했다. 나보다 어린 포렌은 그 대표적인 아이였다.그 아이는 장로인 듀나시님의 아이인 데 다리를 절었다.다리를 절지만 않았다면 그 아이가 매우 강인한 아이가 되리 라는 것은 나로서도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지만 불행히도 그앤 다리를 절었다. 완벽한 육체를 가지지 못한 자는 존경받지 못한다. 물론 나의 아버지처럼 왕에게 도전했다가 살아남은 자일 경우는 다르지만 이렇 게 태어나면서 부터 모자란 녀석은 존중받지 못한다. 언제나 완고한 얼굴을 한 듀나시님은 장로이면서 왕의 대리자 역할을 했지만 물 론 왕은 아니다.그는 왕에게 도전할 권한도 없었다.왕의 사촌이라고 들었지만 그 완벽한 육체에 다리를 저는 것은 어쩐지 슬픈 느낌이라고 아버진 말했다. 그 다리가 왕에게 다친 것이란 사실이 알려지면서 모두들 듀나시님에게 경멸을 보내지는 않았지만 어찌되었든 그 일이 듀나시님에겐 엄청난 재앙인 것은 틀림 없는 사실이었다.거기다가 아들인 포렌 마저 다리를 절었다.듀나시 부자는 분명 히 저주 받은 거나 다름이 없었다. 왕은 쿠베린. 그 이름은 묘인족들 사이에서 가장 공포스런 존재로 자리잡고 있었다. 그는 매우 난폭하고 변덕이 심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경받았다.그는 아마 묘인족 사상 최고의 왕일 것이다.그리고 최연장 기록의 왕이었다. 그는 나보다 겨우 열몇살 위인 나이에 자신의 백부를 꺾고 왕위에 올랐고 그 왕 위를 500년간 지켜오고 있었다.그 강인한 육체는 다른 자들의 경외의 대상이고 도전자들에겐 난공불락의 철옹성이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미성년자로서는 최고의 영예인 왕의 시종 자리를 얻어낸 것이 다. "다크시온." 하나인 녀석이 내 등어리를 툭 치면서 아는 척을 했다. 고개를 돌려보니 녀석의 얼굴엔 내가 얼마전 남긴 긴 흉터가 남아있었다.약간 미안하기도 했지만 결투란 신성한 것이다. "축하한다." "고마와." 나는 순순히 그의 축하를 받아들였다. 녀석도 강한 놈이었지만 나보단 약했다. "왕의 시종이 되다니.흐..네가 앞으로 왕이 될 지도 모르겠군." 그는 팔을 길게 뻗으면서 기지개를 폈다.녀석은 바위 위에서 햇볕을 쪼이다가 왔는지 피부가 황금빛으로 잘 그을려 있었다. "너의 숙부가 왕의 시종이었었지?" "아아..그래,대단했었지,왕의 시종이라니.하지만 도전했다가 눈알을 뽑혔잖아?" 하나인이 히죽이 웃어보였다. 그리곤 농담이라곤 할 수 없는 어조로 내 옷깃을 잡아 당기곤 정색하고 말했다. "너도 다른 시종들 처럼 그에게 도전하고 그리고 팔다리를 잃거나 심장을 잃겠 지?" 나는 그 섬뜩한 얼굴을 차분히 바라보았다. 녀석이 나에게 한 말은 악담이 아니란 것을 알고 있지만 지금 그는 확실히 '악 담'을 하고 있었다. 왕의 시종들은 성년이 되어 도전자로 화한다. 그들은 다른 자들에게 도전하고 그 순위를 높히고 그 다음에 맨 마지막으로 왕 에게 도전한다.그리고 그에게 죽임을 당하거나 혹은 왕위를 갖는 것이다. 지금 이 녀석은 내가 도전자가 되라고 하는 소리가 아니라 내가 왕에게 '죽임을 당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인.다음 경기때엔 너에게 도전권을 주지." 나는 낮게 그 얼굴을 똑바로보고 말했다. "그리고 네 심장을 도려내 주겠어." 하나인의 입술이 조금 일그러졌다.그는 입술을 깨물고는 약간 시선을 피했다. 그가 몇년을 노력해도 날 따라잡을 순 없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나에게 도 전하겠다면 나는 그를 죽여 주거나 혹은 불구로 만들어 버릴 수 밖에 없는 것이 다. 하나인 녀석을 밀어 버리고 내가 왕의 거처인 거인석의 동굴로 가는 동안 나는 긴장감으로 온몸에 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왕은 보기만 해도 그 강인함으로 숨이 막힐 지경이라고 알려져있다. 그의 시선을 맞서기만 해도 숨이 턱턱 막혀서 어린 애들은 울음을 터뜨리고 만 다고 나도 아버지에게 들어왔다.소문에 의하면 그의 여자들은 그의 아기를 갖고 싶어하지만 그는 결코 아기를 만들지 않는다고도 했다. 그 자신 보다 강한 자를 만들고 싶지않기때문이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나는 다리가 덜덜 떨렸다. 닷새전 내가 미성년자의 경기에서 모든 자들을 물리치고 이겼을때 왕의 시종이 었던 힐런은 피투성이로 나에게 축하의 키스를 해 주었다. 나는 그를 쓰러뜨리면서 정말 강하다를 몇번이나 되뇌였었다. 힐런은 금발의 잘생긴 소년으로 이미 5번이나 도전자를 받아들여 왕의 시종인 자리를 지켜 왔었다.그리고 이번에 내가 그를 이긴 것이다.그런 강한 자를 이기 리라곤 솔직히 생각지 않았었기에 나는 그를 쓰러뜨린 나 자신에게 매우 놀라고 말았었다. "잘해봐.네가 이젠 왕의 시종인이다." 그는 허탈한 얼굴로 말하고는 나를 날카로운 시선으로 훑어보았다. "그렇지만 다음 해에 나는 다시 도전할 거다.다크시온." "그래.힐런." 그는 나보다 다섯살 연상이었다. 뭐랄까 확실히 나보다 어른스러웠다.감탄스러울 정도였다. 동굴이 앞에 있었다. 왕의 동굴은 공작석과 우아한 백옥석으로 장식되어 있다.원래가 수정굴이었기에 이 곳을 왕의 거처로 삼은 것으로 녹수정들이 사방에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왕의 거처 사방 50메터 안에서는 아무도 누울 수 없다.그 때문에 왕의 시종인은 상당히 힘겨운 일이기도 했다. 나는 주먹을 쥐고 비틀 거리지 않으려고 무진장 노력하면서 안으로 들어섰다.그 리고는 공손히 무릎을 꿇었다.모든 것은 아버지에게서 배운 그대로였다. "다크시온입니다.올해 왕의 시종인이 되었습니다." 안에선 대답이 없었다. 왕이 계시지않은 건가 하고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고 있는데 문득 무언가가 내 머리칼을 매만지는 것을 느끼고 소스라쳐서 뒤로 물러섰다. "헛!" 그 자리에 선 것은 마치 살아있는 거상처럼 단단하고 무한한 힘을 가진 초월자 처럼 냉엄한 눈빛을 가진 자였다.그는 전신에 검은 튜닉을 걸치고 청동빛으로 빛나는 팔과 다리를 굳건히 세운 채 날 바라보고 있었다. 새까만 머리칼은 치렁치렁하게 늘어뜨려져 있었고 녹색의 빛나는 눈은 똑바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깎은 듯한 용모는 그의 옆에서 빛나고 있는 녹수정처럼 단 아했다. "와..왕.." 나는 고개를 떨구고 떨었다. 과연 왕이었다. 그의 기척은 조금도 느낄 수가 없었다. 대체 그가 언제 내 뒤로 와 섰는지 그런 것을 조금도 눈치 챌 수가 없었던 것이 다.내가 떨고 있는 동안 그는 성큼 성큼 안으로 들어갔고 나는 무릎을 꿇은 채 도저히 일어설 수가 없었다. "마실 것을 가져와라." 그는 냉담하게 말했다. 묵직한 음성으로 금속성이 약간 섞여서 듣는 자들이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음성 이었다. 나는 움직이지 않는 다리때문에 두 팔로 바닥을 짚었다. "헉.." 이런 추태가.. 모처럼 왕이 명령을내렸는데 나는 긴장때문에 몸이 굳어져 일어설 수 조차 없 었다.왕이 노해서 내 머리를 당장 날려버려도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나는 버둥거렸다.어떻게 해서든 움직여야 한다고 두 팔로 몸을 지탱하면서 겨우 겨우 일어서려 했지만 다리가 풀려있었다.대체 이런 일이! 다시 비틀 하고는 벽에 등을 기댔다. 어째서지? 머리가 띵하고 울려왔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내가 왜 이렇게 왕의 앞에서 헤메고 있는 걸까? 왕의 시종인이 되기 위해 내가 10년간 얼마나 노력해왔었는데 지금 왕의 앞에서 이런 추태를 보이고 있는 걸까. 나는 이마를 벽에 박으면서 겨우 일어섰다. 너무나 긴 시간이 소요되었다. 나는 차마 왕쪽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왕은 긴 쿠사바의 모피로 덮혀진 그의 의자 위에 앉아 나의 이 몰골을 어처구니 없다고 생각하며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눈물이 핑 돌았다. 너무 수치스러워서 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풋." 갑자기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나는 몸을 굳히고 얼어버렸다. 공포가 등덜미로 사아 하니 덮쳐왔다.이젠 왕이 날 죽일 것이다. 이런 겁장이를 도저히 시종으로는 거느릴 수가 없다고 말할 것이다. 눈앞이 깜깜해 지는데 갑자기 웃음소리가 커졌다. "으하하하하하.." 두려워서 고개도 차마 들지 못하는데 왕이 말했다. "멍청한 녀석,뭘 얼어있는 거냐! 가서 마실 거 가져오란 소리가 그렇게 무섭 냐?" 흐흐하고 낮게 웃는 소리,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안도로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 다음에는 엄청난 수치가 밀려들어와 눈앞이 깜깜해졌다. "갔다오너라.멍청아." 그는 명랑하게 말했고 나는 비틀 거리면서 몇번이나 쓰러질 듯이 비틀거리면서 겨우 동굴 밖으로 걸어나왔다.그리곤 찌를 듯한 햇빛을 보고는 쓰러질뻔 했다. "하아.." 왕을 보고 왜 다들 압도감에 숨이 막힌다고 했는지 이제 이해가 갔다. 가까이 서기만 해도 얼굴을 마주 할 수가 없었다.그 전신에서 몰아치는 강력한 힘이 그의 앞에 설 용기를 앗아가 버렸다. "다크?" 걱정스런 얼굴로 루나가 날 보았다. 그녀는 왕의 식사 담당이다.나는 그녀에게 다가가서 천천히 말했다. "마실 것을..왕께서 마실 것을 명하셨습니다." 그녀는 나의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보고는 미소했다.많은 시종인들이 그렇게 새 파랗게 질려서 다가온 것을 많이 봐 왔기때문일 것이다. 나는 그녀가 권하는 대로 술을 들이키고는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녀는 왕의 애인이었던 여자로 왕의 거처 중 가장 가까운 곳에서 살길 허락받 고 있었다.그녀의 거처는 왕의 동굴에서 약 70메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돌로 만 든 집이었다.그 집에선 왕이 먹는 음식을 마련한다.그녀는 일곱의 아이들을 데 리고 있으며 그 중 네명이 여자아이인데 이들 중 누구도 왕의 아이는 아니었다. 그들이 만드는 왕의 식사는 하루 두 번 만들어진다.그 식사를 가지고 가는 것은 왕의 시종인인 내가 할 일이었다.아무도 왕의 식사에는 손을댈 수가 없다. 나는 정말 잘 할 수 있을지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힐런에게 정말 감복하고 말았다.어떻게 왕과 같이 지낼 수 있었을까? 5년간이 나? 왕과 마주할 수도 없다.그와 시선만 마주쳐도 다리가 풀려버린다. 그런데 그에게 맞서 도전하는 자들은...아버지는 대체 어땠을까? 나는 주먹을 쥐고 마음을 다잡아 먹으려 애썼다.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이 무럭 무럭 일어났다.나의 아버지는 왕에의 도전자였다.나도 그 정도의 용기를 보여야 했다. "괜찮겠니?" 루나가 미소지으면서 나에게 쟁반을 주었다. "네." 나는 심호흡을 하면서 쟁반을 잡았다. 결코 무거울 리가 없는 쟁반이 무거운 것은 기분 탓이다. "왕은 상냥하신 분이다.그렇게 무서워 할 것은 없어." "..네,전 왕의 시종인입니다.겁내선 안되죠." 나는 스스로에게 다짐 하듯 말하곤 일어섰다.아직도 다리가 후들거린다. "그래.잘 해봐." 루나의 뒤에서 킬킬 거리는 여자애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돌아보자 식탁위에 놓인 음식들을 먹으면서 여자애들이 웃고 있었다.그중 도발적인 붉은 머리를 한 여자애는 날 보자 마자 시익 웃어보였다. "겁쟁이." 나는 덜컥 화가 나서 그녀를 노려보았지만 그녀는 생긋 웃기만 했다. 그 얼굴에 나는 심호흡을 다시 하고 참았다.겁쟁이란 최악의 단어다. "이에르네,.그만." 루나가 그녀에게 시선을 돌리곤 책했다.그리고는 문을 열어주면서 나에게 물었 다. "몇살이지? 다크?" "..43세요." "아직 성년이 되려면 15년이나 남았네.게다가 왕의 도전자가 되려면 더더욱 먼 시간이 남았지." 그녀는 잔잔한 웃음을 던지면서 날 바라보았다. "그를 견딜 수 없는 것은 그를 도전자의 눈으로 봐서 그래.,다크." "네?" 나는 놀라서 그녀를 보았다. "그의압박감에 눌리는 것은 그를 도전자의 눈으로 보기때문이야.다크,무슨 말 인지 알겠니?" "모..모르겠어요! 나같은 것이 왕의 도전자일 수는 없죠! 아직 100년은 빠를 걸 요!" 내가 황급히 말하자 루나는 생긋 웃었다. "그래,넌 어린애야.그러니까 왕을 어렵지 않게 대할 수 있을 거야." 나는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왕을 어렵지 않게 대하다니.그건 정말 100년은 지나야 할 법한 일이었다. 나는 그가 두렵고 무섭다.그리고 다가갈 수 조차 없다.얼굴을 보기는 커녕 목소 리를 듣는 것도 두렵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쟁반을 들고 왕의 동굴로 가는 길은 정말 너무나 짧았 다.나는 그 길이 더 계속되길 빌었다.왕과 대면할 시간이 더 짧기를 얼마나 빌 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모든 길은 끝이 있는 법.나는 동굴의 앞에 서고야 말았다. "가..가져왔습니다." 도저히 내 음성이라고는 할 수 없는 음성으로 내가 말하자 안에선 반응이 없었 다. 나는 용기를 내어 걸어들어갔다. 견뎌야지 하고 몇번이나 생각하면서 안으로 들어가 보니 왕은 침대위에 누워있 었다.나는 얼른 무릎을 꿇고 쟁반을 올렸지만 반응이 없었다. 죽을 듯한 기분으로 겨우 쟁반을 들고 있는데 반응이 없다. 겨우 고개를 들고 왕을 훔쳐 보니 그는 침대 위에서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자고 있었다. 나는 안도의 숨을 내 쉬며 침대 옆에 놓인 탁자위에 쟁반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발치에 숨을 죽이며 꿇어앉았다.왕의 시종인은 왕의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대기해야 한다.왕이 여자를 안을 때도.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나는 조금 용기가 생겨서 슬쩍 침대위를 보았다. 왕은 무방비 상태인 듯한 모습으로 자고 있었다. 엎드려 자고 있는 그 모습은 그 무시 무시한 분위기가 아니어서 안도했다.그의 얼굴엔 흉터하나 없었지만 그의 손등과 팔뚝은 흉터투성이였다.무시무시한 기분 이 들어서 나는 등골이 오싹했다.청동빛으로 잘 그을린 근육질의 팔뚝은 가슴이 떨려올 정도로 무시무시한 힘이 느껴졌다. 그의 체구는 나의 두배정도 되는 듯 했다. 대단한 장신은 아니지만 상당한 장신이었다.그리고 그 장신인 몸을 세워 걸으면 그 몸안에서 뿜어나오는 위압감으로 숨이 턱 막혀온다.그리고 그 때문에 그의 몸은 더 커보였다. 이렇게 누운 모습을 보면 아버지랑 비슷한 체구였다. 그러나 그 힘은 압도적으로 다른 거 같다. 멍청하니 내가 그를 바라보고 있는 동안 갑자기 그가 눈을 번쩍 떴다. 내가 헛 하고 무릎을 황급히 꿇자 그는 반쯤 감은 듯한 눈으로 말했다. "물." "네..넵!" 나는 급히 떨리는 손으로 잔에 물을 따라 바쳤다. 그는 그것을 받아 마시고는 빈 잔을 툭 하고 내밀었다.그리고는 다시 고개를 베 개에 파묻고는 다시 잠들어 버렸다. 나는 안도의 한 숨을 내 쉬면서 구석에 쪼그리고 앉았다. 아아 이렇게 한심해서야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첫날 밤이었다. 2 아침이 되었을 때 왕은 벌떡 일어나서 밖으로 걸어나갔다. 나는 그의 뒤를 급히 따라나갔는데 그가 냇물가에 가다말고 문득 멈추어 서는 것을 보았다. 햇빛은 이미 중천에 떠있지만 새벽에 일어날 이유가 전혀 없는 지라 그가 일찍 일어난 게 난 더더욱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그 뒤를 따라 걷는 동안 온 몸이 너무나 아프기 시작했다.처음에는 긴장해서 아픔을 몰랐지만 어제 졸면서 쭈그리고 내내 앉아있던 터라 움직이자 마자 여기 저기 근육과 뼈들이 아우성을 치며 자기 존재를 알려왔다. "꼬마." 왕이 손짓을 했고 나는 화들짝 놀라면서 왕의 앞으로 다가갔다. 왕은 팔짱을 끼고 냇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을을 가로지르는 이 냇물은 제법 깊어서 푸른 빛을 띄고 있었다.상당히 깊은 것을 알고 있었기에 나는 왜 그것을 들여다 보는 것일까 하고 의아히 여겼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갑자기 그의 손이 내 등을 밀어 버렸다. "우악!" 나는 비명을 올리며 꼴사납게 물속으로 곤두박질 쳤다. 뼛속까지 시린 찬 물이 전신의 근육을 조여들어 나는 당황했다.차가운 물이 입 안으로 코안으로 뛰쳐 들어와 나는 숨이 턱턱 막혔다.푸하 하고 물밖으로 고개 를 내미니 그 모습을 왕이 웃으면서 바라보고 있었다. 왕은 여전히 청동으로 빚어낸 조각상처럼 날 바라보더니만 시익 웃었다. 그 얼굴이 믿어지지않을 정도로 장난기가 돌고 있어서 나는 그만 얼어 버렸다. 그 순간 왕역시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는 휘이 휘이 팔을 휘저으면서 헤엄치기 시작했다. 나는 입을 저억 벌린 채 그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지만 곧이어 왕이 시야에서 벗 어나는 것을 보고 놀라 뒤를 따라 헤엄치기 시작했다. 물살은 제법 거셌다. 구릉지대를 통과한 이 냇물은 곧 넓은 강물이 되어서 흘러내려가고 있었다.빠른 유속과 왕의 빠른 움직임으로 나는 그 뒤를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벅차서 허덕일 수 밖에 없었다. 반나절을 헤엄치다니 대체 왕은 무슨 생각인걸까. 이미 마을을 벗어난 지 오래였다. 인간의 마을에 가까와 오는 것을 느끼면서 나는 왕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 알려는 마음을 버리고 그저 헥헥대면서 그 뒤를 쫓기에만 바빴다. 언제까지 어디까지 가는 걸까! 왕은 지치지도 않는 걸까! 팔의 근육은 무거워지고 다리는 이미 감각이 없었다.가슴은 찢어질 것같았고 심 장은 지나친 움직임에 비명을 올리고 있었다. 시야가 흐려지고 점점 물이 입안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완전히 모든 의식이 끊어지려는 그 순간 무언가가 내 허리를 잡아 채는 것을 느꼈다.단단한 그 무엇이 나를 잡고 수면 위로 부상했다. "카하!" 나는 격렬하게 기침을 하고 먹은 것도 없으면서 구토해댔다. 겨우 기슭으로 올라와 미친듯이 헛구역질을 하는 동안 갑자기 번뜩 생각이 나서 고개를 홱 돌려보았다. 따스한 햇빛 아래 왕은 느긋한 태도로 바위위에 걸터앉아서 햇빛을 쪼이고 있었 다.마치 아무일도 없었던 것 처럼 너무나 느긋한 태도였다.그의 몸에 걸친 옷가 지들이 바위위에 널려 있는 것을 보면 말리려는 듯 했다. 나는 왕의 앞에서 토하고 있는 자신을 깨닫고 소스라쳤다. 이렇게 수치스러울 수가.. 그러나 몸은 의지를 계속 배반하고 다리는 움직이려 들지를 않았다. 왕은 휘파람을 불면서 날 흘긋 보았다. 그는 여전히 장난기 어린 얼굴로 싱긋 웃었다. "반나절 헤엄쳤어.쉬어도 좋아." "..죄..죄송..죄송합니다." 내가 고개를 숙이고 사죄하자 그는 흐응 흐응 하고 고개를 저어 보였다. "아니,여기까지 따라온 것은 듀나시 이래로 네가 처음이야." 그는 재미있다는 듯이 쿡쿡 웃고는 벌러덩 드러누웠다. 나는 움직이려들지 않는 몸을 겨우 움직여서 그가 드러누운 바위 가장자리에 비 비고 뭉개서 앉았다.가슴이 너무 아프고 눈앞이 흐릴 정도로 띵했다. 고개를 들어서 우리들이 내려온 곳을 보니 우리들의 마을은 보이지도 않았다.상 당히 먼 거리였다.여길 헤엄쳐서 온 건가 하고 내가 눈앞이 깜깜해 있을때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놀라 보니 왕은 바위 위에서 축 늘어진 채 자고 있었다. 나는 왠지 웃음이 나왔다. '왕도 코를 고는 군.' 조금은 기뻐지는 기분이 되어서 나는 추욱 늘어진 채 고개를 떨구었다. 역시 이렇게 왕을 따라오느라 기를 쓴 탓에 완전히 지쳐버렸다. "어머,쿠베린.여기서..또?" 명랑한 여자의 말투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잠시 잠이 드는 바람에 완전히 모든 것을 까맣게 잊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왕은 바위위에서 편히 앉아 왠 인간의 여자와 담소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담소가 아니었다. 그녀는 왕의 목에 팔을 감고 있었고 왕은 그녀의 허리를 잡아 당겨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려놓고 키스를 퍼붓고 있는 차였다. 나는 시선을 돌릴 데가 어디 있는가를 황급히 찾다가 왕과 시선이 그만 마주쳐 버렸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기분이 되어 안절 부절하자 왕은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마자 윙크 해보였다.그리곤 키스에 열중한다. 아아,.그렇지.모든 것에 ..익숙해야지. 나는 어쩔 줄을 모르다가 한 가지 방법을 택했다. 눈을 감고 자는 척 했다. "쿠베린,배 고파?" "그래.뭐 먹을 거 가지고 왔나?" "우웅..그래.,이거." 그녀는 바구니를 열어 보였다.구수한 냄새가 풍겨나와 나도 모르게 침이 주르르 입안에 넘치는 것을 느꼈다. 왕은 발가락으로 내 어깨를 툭툭 쳤고 나는 놀라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 다.그는 발가락으로 내 뺨을 툭 치더니 킬킬 웃으면서 말했다. "먹어라." 나는 그가 내 배에서 나는 소리를 들었음을 깨달았다.얼굴이 달아오르는데 인간 의 여자가 미소하면서 바구니를 내밀어 보였다. "자아." 안에 든 것은 소시지와 소스를 듬뿍 친 양구이였다.그런 것을 그녀는 가득 담아 가지고 와서 내 놓고 있었다.이미 왕은 먹어치우고 있었다.감히 왕과 마주 앉아 먹을 수 없어 당황하고 있는데 여자가 내 손에 소시지를 쥐어 주었다. 내가 왕을 올려다 보자 그는 고기를 먹다가 묻은 기름을 핥아 먹다 말고 날 보 곤 내 머리에 자신의 손에 묻은 기름을 문질러 닦았다. 너무 황당해서 멍하니 있는데 인간의 여자가 왕의 팔뚝을 소리나도록 탁 하고 후려갈겼다. "바보! 무슨 짓을 하는 거에요!" "뭐가? 어차피 씻으면 될 거 아냐?" 의외의 행동을 하는 왕이다 하고 내가 멍청히 앉아 있는데 인간의 여자는 당황 한 얼굴로 내 머리를 자신의 치맛자락으로 닦아 주었다.왕은 날 보며 미소했다. "먹어라." 나는 안도하고 먹기시작했다. 그녀는 금발을 길게 땋아 늘어뜨리고 있었다.걸친 옷은 약간 흐트러져 있었지만 건강하고 맑은 피부가 돋보였다.좋은 냄새가 나는 여자였다. 갈색빛이 도는 눈을 크게 뜨고 약간 주근깨가 남은 뺨을 주름지도록 크게 웃는 그녀는 왕의 무릎 위에 앉아서 왕의 목에 팔을 감고 있었다. 그 모습이 아주 행복한 듯이 보였다. "쿠베린,오늘 저녁 먹고 갈거죠?" "응."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부드러운 눈으로 여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러운 눈길이어서 나는 왕을 멀건히 바라보기만 했다. "저 앤 누구지요?" 그녀가 날 보며 물었다. "당신아들이라고 해도 믿겠네요.똑같은 검은 머리에 똑같은 녹색눈,아주 예쁜 애인데요?" 그녀는 왕의 무릎에 앉은 채로 발가락을 움직이며 장난을 치고 있었다.신발을 신지않은 맨 발이 하얗지만 고운 것은 아니었다.굳은 살이 있는 것을 보아 맨발 로 돌아다니는 것을 즐기는 여자인 듯했다. "그럼 내 아들이라고 해두지." 왕은 나의 얼굴을 부드럽게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큰 손을 뻗어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커다랗고 강인한 손. 그녀는 나를 바라보면서 눈가에 주름이 지도록 미소했다. "당신아이는 정말 이쁠거에요.쿠베린." "그렇겠지.난 잘생긴 남자니까." 그녀는 쿡쿡 거리면서 왕의 가슴을 때렸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석양이 지는 작은 오두막은 그녀 혼자 살고 있는 듯 사방에는 인기척이 전혀없 었다.그녀는 우리들을 이 아늑한 오두막으로 데리고 왔다. 나는 머뭇대면서 그녀가 가리키는 식탁에 앉았고 왕은 그녀가 기쁜듯이 이런 저 런 음식들을 내어 놓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래서..베리쨈을 만들었어요.맛볼래요?" 그녀는 쨈을 가지고 와서 왕의 옆에 앉아 빵에 발라 그의 입에 밀어넣어주었고 왕은 그것을 쿡쿡 거리면서 먹어치웠다. 그녀와 왕의 웃음소리가 오두막 속에 계속 울러퍼졌다.그녀는 왕의 옷자락을 쥐 고 놓지않으려 하는 듯했고 왕은 그것을 잘 아는 듯 손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내내 안고 있었다. 작은 오두막에는 작은 침대와 작은 탁자와 작은 집기들이 있었다. 그것들은 손수 만든 것 같아 보였는데 그녀가 만든 것 같지는 않았다.설마하니 왕이 만들었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왕이 손가락을 가볍게 튕겨 소리를 냈 다. "다크." 그는 처음으로 내 이름을 불렀고 나는 화들짝 놀라 그를 보았다. "가서 장작좀 패 와라." "어머,어린애에게 그런 일을!" 그녀가 당황한 소리를 내면서 내 옷자락을 잡았지만 나는 벌떡 일어났다.왕이 명령한 두번째의 일이었고 장작패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었기에 나는 밖으로 나 갔다. "저 놈은 강해." 왕이 웃으면서 그녀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얼굴이 달아올랐다. 처음으로 왕에게 칭찬받은 것이었다.정말로 왕은 내가 강하다고 생각하는 것일 까? 이 미천한 어린애가 왕에게 칭찬받을 가치가 있을까? 두근 거리는 기분으로 도끼를 잡아서 장작을 패고 있는데 뒤에서 여자가 계속해 서 감탄성을 내질렀다. "어머! 어쩜! 정말이야! 대단하네!" "내가 미리 말했잖아!" "난 당신이 귀찮아서 저 애에게 시킨다고 생각했어." "그것도 사실이지." 그는 소리내어 웃고는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사방은 어두워져서 물 흐르는 소리와 풀 벌레 우는 소리만이 들린다. 간혹 가다가 뭐가 그토록 재미가 있는 지 왕과 그녀가 웃는 소리가 들린다. 왕은 인간의 여자와 얼마나 같이 지낸 것일까? 그녀는 마치 오랫동안 같이 지냈 던 양 왕을 대하고 있었다.기묘한 기분이었다.마을의 여자는 모두 왕의 것이었 다.그런데 그는 지금 인간의 여자를 상대하고 있는 중이었다. 장작 패기를 그만 두고 바위위에 걸터앉아 생각했다. 왕은 대체 어떤 사람일까. 3 날카로운 손톱이 가슴을 노리고 덮쳐왔다. 나는 몸을 낮추고 그 회심의 기습을 피해냈다. 등줄기에선 아직 피가 흐르고 있었다.아까 받은 도전자에게 입은 상처였다.그리 고 지금은 눈앞의 도전자에게 가슴을 얻어맞고 있었다. "카오옷!" 눈이 벌건 하나인이 뒤를 이어서 발톱으로 내 배를 후벼파듯이 긁어왔다.뒤로 몸을 제끼긴 했지만 뒤이어 오는 공격에겐 무방비상태가 되어버렸다.하나인은 살소를 띄우고 내 배를 손톱으로 후려갈겼다. 피가 내 얼굴과 그의 얼굴까지 튀어올랐다. 몸이 둔해져 있었다.연속되는 도전때문이었다. 그러나 피할 수는 없었다. 고개를 숙이는 것과 동시에 나는 녀석이 공격해 오는 오른 쪽 손톱을 이로 깨물 었다.그의 손톱은 내 목을 잡아뜯으려 버둥거리고 있었고 나는 그 손톱을 이로 물어 당기면서 그녀석이 공격해오는 왼쪽 손목을 쥐어 틀었다.그리고 동시에 팔 꿈치로 그 가슴을 후려갈겼다.퍽 하고 제법 상당한 소리가 났지만 녀석은 굴하 지않았다.나는 그 손톱을 이로 문 상태 그대로 내 손톱으로 녀석의 목줄기를 틀 어잡았다. 피가 튀기고 그가 비명을 올렸다. 입술에선 피가 흘렀지만 상관하지않았다.중요한 것은 순간의 승부인 것이다. "그만!" 심판자가 외쳤다. "다크시온의 승리다.올해의 시중인도 그가 되었다." 냉정한 목소리로 장로가 말했다. 나는 입안에 흘러내리는 피를 바닥에 뱉어냈다.피를 줄줄 흘리고 있는 하나인은 이를 갈면서 바닥에 누운 채로 날 흘겨 보고 있었다. 등과 가슴,배에서 피가 계속 흐르고 있었다.나는 그 상처를 억지로 참고 사람들 사이로 들어섰다. "축하해!" "대단해!" 나는 일곱명의 도전자를 물리쳤다. 전신이 다 후들거렸다.모두 나와 같은 또래,나와 같은 체구,나와 비슷한 체력을 가진 자들이다.그들을 일곱이나 상대하고 나면 당연히 제정신이 아닌 것이다. 살아남은 게 기적이고 이긴 게 기적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눈앞이 빙빙 돌고 악의 반 칭찬반 섞인 농담들을 멀리하고 나는 왕의 동굴로 걸 어갔다.날씨는 제법 추웠다. 입김이 보일 정도였지만 나는 왕의 시중인이었다.상처를 입었던 안입었던 나는 그에게 가서 시중을 들어야 했다.그리고 일단 대강이나마 이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서 나는 루나의 집으로 갔다. "다크시온!" 루나가 날 불렀다. 그녀는 크게 놀란 얼굴로 나의 모습을 보더니 곧 상처를 치료하라면서 붕대와 약을 가지고 왔다. "벼,.별거 아닙니다.금방 나아요." 내가 말하자 그녀는 고개를 젓고 내 몸안에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았다. "이렇게 심할 줄은 몰랐네.일곱명이나 된다고 하더니 사실이었구나." "네." 나는 이가 덜덜 떨리는 고통을 참아 내느라 애썼다. "맙소사..늑골이 부러졌어!" 그녀는 내 가슴을 살피다가 낮게 중얼거렸다. 그런거 일일이 말해주지않아도 충분히 아파요! 내가 속으로 눈물을 삼키고 있을때 문이 열리고 붉은 머리의 이에르네가 들어섰 다.그녀는 오만하게 눈썹을 치켜 올리더니 그 매혹적인 입술로 흐응 하고 비웃 음을 흘렸다. "약골." 나는 욱했다. 루나는 그런 그녀를 비난하듯 노려보았다. "그런 말 하는 게 아니야! 이에르네! 다크시온은 너보다 훨씬 강해! 이 앤 지금 일곱명의 도전자를 물리치고 온 거야!" "흐응..나라면 10명은 문제 없겠다." 그녀는 태연자약하게 그런 소릴 얄밉게 지껄이고는 루나에게 말했다. "어머니,적당히 해두세요.저런 약골은 아픈 맛을 보고 더 강해져야 한다구요." "이에르네,." "뭘요? 왕의 시중인 주제에 맨날 시시덕 거리기나 하는 그를 뭐가 이쁘다고 어 머닌 그렇게 애지중지하세요?" 그녀는 그렇게 나를 비꼬고는 룰루 하고 콧노래를 부르며 나가버렸다. 루나는 어색한 표정을 지으면서 날 바라보았다. "다크시온.저애의 말은 무시하도록 해.응?" "아..뭐..신경쓰지않아요." 죽어버려라! 악다구리 같은 계집애! 나는 속과 다른 소리를 하면서 무거운 몸을 이끌고 밖으로 나왔다. 몸은 아파죽겠지만 나는 견디어야 했다.왕의 시중인이니까 그의 앞에선 아픈 티 를 내선 안된다. "저녁..식사 가지고 왔습니다." 내가 쟁반을 들고 녹수정동굴에 와서 말하니 왕은 침대에서 반쯤 엎드린 채 내 몰골을 흘긋 보았다.상처와 붕대투성이인 것이 너무나 창피해서 고개를 떨굴 때 그는 긴 말도 하지않고 손을 뻗어서 저녁을 먹기 시작했다. 다 먹어 치우고는 그는 대굴 굴러서 침대에 바로 누웠다. "불꺼라." "네." 겨우 익숙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어렵긴 마찬가지다. 그러나 왕이 의외로 상냥한 데가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요번 1년간 생활하 면서 나는 왕이 좋아졌다.힐런이 왕의 시중인 자리를 5년간 하면서 그를 얼마나 존경했는지 새삼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건 그렇고 상처가 너무나 아팠다. 식은 땀이 줄줄 흘러내리고 등이 빳빳했다. 다리는 천근처럼 무겁고 눈앞은 빙빙 돈다. 침대 옆에 쭈그리고 앉아 있을려니 이건 죽을 맛이었다.그렇다고 아픈 소릴 낼 수도 없고 집에 가서 자겠다고 말할 수도 없다. 오늘 처럼 집에가서 눕고 싶은 적이 없었다.눈앞이 말 그대로 깜깜하고 빙빙 돌 았다.춥고 열이 났다.귀에선 멍하니 윙윙 거리는 소리가 난다. 힐런은 5년간 어떻게 견디었지? 이렇게 힘들 줄은 몰랐다. 그저 왕의 침상 옆에 앉아서 대기하고 있는 것 뿐인데 이건 마치 고행하는 기분 이었다.열이 올라서 땀이 줄줄 흐르기 시작하고 가슴이 숨쉴때 마다 아파서 헐 덕이는 소리가 절로 났다. 그러나 신음소리를 삼키려고 발바둥 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왕의 시중인이다.절대로 절대로 약한 소릴 입밖에 내선 안되는 것이다. "다크." 왕이 갑자기 어둠 속에서 말했다. 나는 화들짝 놀랐지만 머리가 띠잉 해서 반응이 느렸다. "네?" "이리 와봐." 나는 간신히 무릎걸음으로 기어서 왕의 앞에 무릎을 꿇고 대기했다. 식은 땀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는데 왕이 내 신음소릴 듣고 깨기라도 한 거라 면 난 아마 자살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리 속에 꽉 차서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 었다. 그런데 불쑥 그의 커다란 손이 내 이마를 만졌다. "핫!" "너.." 나는 덜덜 떨면서 당황했다. 이 상태를 들키면 어떻게 하지? 약해 빠진 놈이라고 날 내치실 건가? 왕은 내 이마를 잡은 뒤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팔을 뻗어서 내 몸을 잡아 끌었다. "에?" 내가 당황하자 그가 말했다. "너 따스하구나." 따스하다 못해 뜨거울 것이다.열이 나고 있으니까. 나는 난데없는 왕의 말에 얼어붙어서 굳었다. 그는 내 몸을 마치 장난감 처럼 다루어 자신의 침상위에 올려놓고는 내 몸을 끌 어안았다.나는 너무 놀라서 굳어있었는데 그의 커다란 손이 내 이마에 와 닿았 다. "내 난로로 써야겠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내 몸을 끌어당겨 안아주었다. 내가 지금 어디에 누워있는 거야! 나는 머리가 빙빙 도는 것을 느꼈다. 그는 내 어깨를 가볍게 끌어안고는 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넌 내 난로가 되도록 해라." 그 말을 들으면서 나는 의식을 잃었다. 내가 눈을 떴을 때에는 밖이 이미 환했다. 녹수정으로 만들어진 동굴안은 녹색과 흰 빛이 오묘하게 빛나서 아름다운 오채 색을 만들어낸다.나는 멍하니 죽은 듯이 누워있었다. 가만.. 누워? 왕의 거처에서 누워? 나는 갑자기 눈을 부릅떴다. "으악!" 내가 갑자기 몸을 일으키려 하는 그 순간 갑자기 격렬한 고통이 밀려와서 나는 비명을 올리고 말았다.그리고 무서운 힘으로 도로 누워버렸다. "쿡쿡.." 웃는 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리니 날 보고 웃고 있는 녹색 눈동자가 보였다. 나의 얼굴에서 혈색이 빠져나갔다. 왕과 감히 마주 누워있다니! 내가 완벽하게 패닉상태에 빠져있는 동안 왕은 손을 뻗어서 내 이마에 대고는 흐음 하고 날 빤히 바라보았다. "열은 내렸군." "아..에.." 내가 뭔가 말하려고 애쓰고 있는 동안 왕이 씨익 웃었다. "너 따스하더군." "네..에..그.." 뭔가 필사적으로 말하려고 애쓰고 있는 동안 왕의 눈이 자상하게 빛나는 것을 발견하고 나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는 손을 뻗어서 내 어깨를 다시 잡아 끌어안아주었다. "앞으로 널 난로로 써야겠다.간밤에는 매우 따스했다." 그는 그렇게 말하곤 내 이마에 키스해주었다.놀랄 만큼 다정한 태도였다. 나는 완전히 얼어있었지만 한 편으로는 그 태도에 안도했는지 그대로 뻗어버렸 다. "왕의 난로.." 내가 묻자 힐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에?" 그는 쓴 웃음을 짓고 내 몰골을 아래위로 보면서 말했다. "많이 다쳤었군?" "아..그래." 나는 미적거렸다. "일곱명이나 상대했으니까 무리도 아니지.왕은 자상한 데가 있으시지?" "아..응,놀랐어." 난 솔직히 그에게 털어놓았다. "그리고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종잡을 수도 없지?" "맞아!" 나는 얼른 동의했다. 나만 그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니었구나 하고 생각하니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좋은 분이라구.약한 녀석에겐 잘해주시지." "약하다구?" 나는 항의하고 싶었지만 힐런은 어깨를 으슥했다. "그럼 네가 왕에 비해서 강하다고 말하려는 거야?" "그..그야 물론 아니지." 힐런은 하하 하고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약한 한 잘해 주실거야.네가 강자가 되는 날까지는 말이야." 왠지 가슴이 뜨금 했다. "약하기 때문에?" "그래.난 그렇게 봐.왕은 어린애들과 여자들에겐 잘해주셔.물론 좀 강한 녀석에 겐 인정사정없으시지만." "하지만..난로라는 건 발상이 왠지.." 나는 머리를 북북 긁었다. "왕의 시중인은 다치거나 병이 나거나 해도 왕의 옆에서 누울 수도 편히 잘 수 도 없어." 힐런은 엄숙하게 말했다. "왕의 사방 50메터안에선 어느 누구도 누울 수 없지.왕과 동침하는 여자 이외 엔." "그래." "하지만 왕의 시중인이 진짜 다치거나 병들어 약해졌을때는 어쩔 거지? 방법이 없잖아.병자는 누워야해." "그래..그래서 난로..라구?" "그래." 힐런은 조금 멋적은 얼굴을 해 보였다. "나도 그랬어." "너도 ..왕과 같은 침상에서 안겨..잤단 거냐?" "그래.뭐..하하.." 그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도전자를 해치우고 부상입고 헐덕일때 눕히고는 재워 주시더군.그리곤 열이 나 면 따스해서 좋았다느니 의식을 잃으면 나긋나긋해서 좋았다느니 하고 말하시 지." 나도 얼굴이 붉어졌다. 어젯밤에 분명히 그랬었지. 그는 머리를 긁적였다.그도 말하기 창피한 모양이었다. "뭐어..부끄럽지만 왕은 강하니까 나같은 어린애는 그렇게 취급하셔도 할 말은 없었지,오히려 그 배려에 감사해야 하는 거지." 나는 조금 심술이 났다. "하지만 자존심은? 난로라니! 말이 심하잖아!" 힐런은 나를 물끄러미 보았다. "자존심? 그건 네가 왕의 도전자가 되고나서 말하는 게 어때?" 할 말이 없다. 4 그녀가 죽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늙어서 죽었다. 나는 그녀를 위해서 물수건을 가지고 와서 왕에게 건네주었고 왕은 수건을 들어 서 그녀의 몸을 닦아 주었다. 대체 인간은 몇살 쯤 되어 죽는 것일까? 그녀는 금새 늙었다. "쿠베린.." 주름진 뺨으로 그녀는 앙상한 손을 들어서 왕의 얼굴을 만졌다. 왕은 슬픈 눈이지만 표정없는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녀의 뺨에는 탄력이라고는 없었다.그녀는 노래진 안색으로 희어지고 바랜 금 발을 베개위에 늘어뜨리고 누워있었다.그런 그녀의 몸을 안고 왕은 몇번이나 몸 을 닦고 시중을 들었다. 왕이 인간여자의 시중을 드는 것은 처음 보았다. 아무런 말도 하지않고 왕은 따스한 물로 그녀의 발을 닦아 주었다.그녀가 간지 러운 듯 약간 미소를 지으면 왕도 마주 웃음을 지어 보였다. "간지러워?" "아아..당신.." 그녀는 훗훗 웃었다. 얼굴이 붉어지는 그 늙은 얼굴을 보면서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슬픔을 느 꼈다. "나..나무딸기가 먹고 싶어." "따 오지." 왕은 그녀의 주름진 이마에 키스하고는 일어서서 나갔다. 나는 그의 뒤를 따라나가려 했지만 왕은 내게 명령했다. "여기 있어." 나는 죽어가는 인간 여인과 같이 있고 싶지않았다. 이상한 냄새가 나고 있었고 그건 불건강한 냄새였다.죽음이 다가오는 그런 불길 한 악취였다. 언제나 싱그러웠던 그녀의 피부에 검버섯이 피어오르기 시작할때부터 나는 두려 웠다.그녀에게서 죽음과 노쇠의 빛깔이 떠오를 때 부터 나는 그녀가 두려워졌 다.왕은 그녀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키스하고 끌어안지만 나는 도무지 견딜수가 없이 무섭고 혐오스러웠다. "다크.." 그녀가 날 불렀다. 내가 침대 가까이 다가가자 그녀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여전히 그와 닮았네..넌 왜 크질 않지?" "아직 성년이 안되었어요.아직 몇년 남았지요." 내가 퉁명스레 대꾸하자 그녀는 씁쓸하게 말하고는 내게 부탁했다. "저기..거울하고 빗을 줘." 그 몰골로 무슨 단장을 한단 말인가. 난 그렇게 투덜거렸지만 그녀에게 빗과 거울을 가져다 주었다.그녀보단 루나가 훨씬,몇 배는 아름다왔고 건강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머리를 다듬기 시작했다.거울을 보고는 그녀는 눈물을 주 르르 흘렸다. "저..정말,.너무나 늙어서.." 그녀는 눈물을 닦지도 않은 채 중얼거렸다.주름진 손으로 그녀는 얼굴을 가리고 는 흐느꼈다. "쿠베린은..여전히 젊고 아름다운데..." 그녀는 계속해서 흐느껴 울었다. 무엇이 슬픈지 잘 모르겠지만 나는 오히려 왕의 태도가 더 슬펐다. 이런 여자에게, 이런 연약한 종족을 사랑해 주는 이유가 대체 뭘까? 그가 손짓 하면 따라올 여자들은 너무나 많았다.부족의 삼분의 일이 여자니까 그녀들 모두 가 왕의 뜻대로 될 터인데. "다크.." 나는 그런 생각을 하다 말고 그녀를 흘긋 보았다. 그녀는 눈물을 닦고 머리를 빗으면서 조용히 말했다. "그렇게 혐오스럽게 바라보지 말아줘.너희들 엘프와 달라 인간은 수명이 짧아." "우린 엘프따위가 아니에요! 대체 무슨..그런 약해 빠진 종족과 우릴 비교하다 니!" 내가 화를 내자 그녀는 미안 하고 금방 사과했다. "늙지않으니까 엘프라고 생각했을 뿐이야..그럼 뭐라고 부르지?" "묘인족이라고 부르죠.지상 최강의 종족이 바로 우리에요." "아아.." 그녀는 알아듣는 것 같지않았지만 그것 만으로도 충분한 듯 미소를 지었다. "쿠베린은..얼마나 오래..살까?" "모르죠." 내가 잘라 말하자 그녀는 내가 자신을 싫어한다는 것을 민감하게 눈치챈 듯 슬 픈 얼굴을 했다.그리고는 낮게 말했다. "내가 내 이야길 했나?" "아뇨." 사실 듣고 싶지도 않았지만 그녀는 스스로 지껄이기 시작했다. "나는 14살때 창기로 팔렸어.그리고 몸을 팔다가 포주를 죽이고 이 산으로 도망 쳤지.그리곤 쿠베린을 여기서 만난거야." 무슨 소린지 알아들을 수도 없었다. 나는 무덤덤하게 그저 듣고 있었는데 그런 나의 반응을 보면서 그녀는 감상에 빠진 듯이 중얼거렸다. "생각해 보면 난 살인자에 창녀에..도망자인 더러운 계집년인데 쿠베린은 언제 나 잘 해주었지." 그녀는 갑자기 멍하니 시선을 들어서 허공을 보았다. "그와 보낸 30년이 내 생애 최고로 행복한 때였어.."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린다. 그 추한 얼굴에서 흐르는 눈물은 이상할 정도로 맑았다. "그가..좋아..그를 사랑하고 있어.." 그녀는 눈물을 주르르 흘리고는 시선을 문쪽으로 돌렸다. "그가 돌아오면 ..말해줘.나..잠깐 잘 테니까.다크." 그녀는 눈을 감았다. 나는 멍하니 그녀를 보다가 문을 바라보았다. 사방이 고요했다. 그리고 갑자기 생각났다. 지금은 초봄이었다.나무딸기가 있을 리가 없다.... 왕은 한 참뒤에 돌아왔다. 그의 손안에 들린 것은 당연하게도 나무딸기가 아닌 꽃들이었다.그는 꽃을 한 아름 따 가지고 왔다.그리고는 마치 예상한 듯이 다시는 눈을 뜨지않는 그녀의 침대 위에 꽃들을 늘어놓았다. 천천히 그가 꽃으로 그녀의 몸을 덮고 그리고 그녀의 이마와 입술에 키스하는 것을 보는 동안 마음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가슴이 울렁거려서 토할 거 같았 다.그녀가 너무 추했고 왕이 너무 아름다왔고 그녀의 시체위에놓인 꽃들이 너 무 선명해서 토해버릴 것 같았다. 왕은 밖으로 나갔다. 나도 뒤따라 나가서 토해버렸다. 내가 토하고 있는 동안 왕은 오두막을 주욱 돌아보고는 불을 질렀다. 마치 그녀가 그 자리에 존재하지않았던 것처럼 그는 불을 지르고 그녀의 오두막 이 모두 타 버리는 것을 지켜 보았다. 나는 반쯤을 울고 반쯤은 토해내면서 그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왕은 팔짱을 낀 채로 내가 본 그대로 청동입상처럼 서서 그 모습을 보고 있었 다.단아한 얼굴은 불빛에 비추어서 붉고 비통하게 보였지만 표정만은 담담해서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 수 없었다. "무섭냐?" 갑자기 왕이 내게 물었다. 나는 눈물을 닦아 내면서 그를 보았다. 왕은 무표정하지만 슬픈 눈을 하고 날 보고 있었다. "아.아니오." "그럼 왜 떠는 거냐?" "아닙니다.다..단지..연기가 매워서!" 나는 애써 변명했고 그는 아무 말도 하지않았다. 죽음은 두렵다. 그렇지만 입 밖에 내어 말할 수는 없었다. 왕은 굳은 어깨를 하고 내내 내게 등을 보이고 서 있었다. 눈물은 보이지않았지만 그가 비통에 젖어있다는 것을 느낄 수는 있었다. 왜 그는 그녀를 사랑했을까. "뭐냐?" 그가 어둠속에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고집세게 떨리는 다리를 누르면서 말했다. "저..저는 난로니까요." "뭐?" 왕은 침대로 파고 들어오는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녹수정동굴은 여전히 서늘했지만 사실 그렇게 추운 것도 아니고 왕은 추위를 그 렇게 타지도 않는다. "흐.." 왕이 웃었다. 그는 웃고는 내 머리를 마구 헝클어 뜨리고는 내 이마를 잡아 당겨 베개에 짓눌 렀다.그리고는 내 배를 쿡쿡 주먹으로 누르면서 물었다. "왜? 춥냐?" "저는 춥지 않지만 왕은 추우실 것 같아서요." 나는 애써 말했고 왕은 푸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추울 까봐 걱정이 되었다구? 핫핫.." 그는 그렇게 소리내어 웃고는 내 머리를 잡아 당겼다.그리고는 내 머리에 키스 해 주고는 토닥여 주었다. "자라.난로." "네." 왕은 울지않는다. 나도 울지않는다. 언젠가 그가 어느 도전자에 패해 죽어갈 지도 모르지만 그는 나의 왕이다. 그는 나의 최강의 왕이다. 제 5화 도전자 KUBERIN...... 바람이 부는 날에는 어린 시절을 생각한다 나보다 더 넓고 큰 남자가 내 눈앞에 서 있었다. 언젠가 나는 그를 밟고 선다 그의 피를 밟고 선다. ..그리고 난 운다. 1 "도전하겠다!" 갑작스레 들린 그 말에 나와 스카는 대굴 대굴 구르는 가빈을 가지고 장난치다 가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날이 무척 좋았기에 우리들은 숲에 놀러온 터였다. 가빈은 풀밭위에 고양이답게 대굴 대굴 구르고 꼬리를 치고 린은 팔짱 끼고 허 공을 노려보고 있었다.그리고 나와 스카는 마미가 만들어준 도시락을 펼쳐놓고 막 먹으려던 차였다. 스카가 날 바라보고 그 다음에는 그 녀석을 다시 보았다. 녀석은 16세 가량의 소년으로 지금 얼굴은 흥분으로 벌개져있었다. 약간 주근깨가 남은 뺨에 제법 넓은 어깨,그리고 턱을 빳빳이 들고 있는 그 주 제에 달달 떨고 있었다.주먹을 불끈 쥐고 한 손에는 검을 쥐고 있었다.아직 새 것인듯한 무릎 보호대가 녀석이 진짜 신출내기임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그 녀석을 무시하고 스카의 앞에 놓인 거대한 샌드위치를 입안에 얼른 집 어넣었다.마미가 싸준 그 빵은 두터운 호밀빵을 반으로 갈라 잘 훈제된 돼지고 기와 소금에 절인 야채를 듬뿍 넣고 향그러운 특제 마일소스를 바른 것이었다. 나는 흐뭇한 얼굴로 그것을 아귀 아귀 먹어댔는데 스카가 그걸 보고 눈을 부릅 뜨면서 내 머리통을 후려갈겼다. "너무해! 내 건데!" 그가 길길이 뛰던 말던 이미 내입안에 들어간 것은 어쩔 수가 없는 법,나는 그 에게 점잖게 충고해 주었다. "스아..이이 내이아에드어이서.(스카, 이미 내 입안에 있어)" "이 자식!" 스카가 분노의 눈물을 흘리는 가운데 린이 천천히 일어서더니 팔짱을 턱 끼고 애송이 앞에 가 섰다. "뭐라고 한 거냐? 너?" 애송이는 린의 찌릿한 눈초리를 받고 그 다음에는 린의 전혀 우람하지않은 그 몸매를 보고 안도한 듯 다시 도전적이고도 도발적인 눈을 했다. "도전하겠다고 했다!" 그가 큰 소리로 말하자 린은 아래위로 그를 보더니 고개를 돌려 가빈을 불렀다. "가빈." "왜?" 가빈은 풀 밭에 잔뜩 핀 노란 가지꽃을 가지고 놀고 있던 차였다.그 녀석은 대 굴 대굴 구르면서 손가락으로 가지꽃을 톡톡 꺾으면서 발장난을 하고 있었다. "너에게 볼일이 있댄다." 가빈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상체를 일으켰다. 호안석을 닮은 금색눈이 그 녀석을 바라보곤 고개를 갸우뚱했다. "난 저런 녀석 모르는데?" "누..누가 저런..덜 떨어진 녀석과 싸우겠다고 했냐!" 애송이가 벌개진 얼굴로 흥분했다.그는 주먹을 쥐고 린을 쏘아 보았으며 린은 흥 하고 가빈을 가리켰다. "이 중에서 네 상대가 될 사람은 오로지 저 녀석뿐이잖아?" 그 말을 듣고는 가빈이 발딱 일어섰다. "이봐! 린,내가 비록 너보다 약하다고는 하지만 말이지..저 앞에 보이는 덜 떨 어진 애송이와 싸워서 질 나로 보여?" 린은 완전히 무시하곤 도로 가서 앉아버렸다. 나는 그 다툼을 즐거운 듯이 보고는 발장난을 하면서 거대한 샌드위치를 야금 야금 먹고 있었다.스카는 술주머니를 꺼내어 마시면서 나에게 물었다. "저 놈 알아?" "내가 알 턱이 있어?" 스카는 흐음 하고 애송이를 다시 보더니만 무시하고 발라당 누웠다.나도 스카의 배에 다리를 얹고 샌드위치를 다 먹어 치운 다음에 벌렁 누웠다. 하늘이 파랗고 구름은 희다. 좋은 날씨였다, "무,,무시하지마!" 녀석이 고함을 쳤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 녀석을 흘긋 보고는 다시 가빈을 바라보았다. "가빈,상대해 줘라." 내가 말하자 가빈은 흥 하고 팔짱을 끼곤 일어섰다.그리고는 애송이 앞에 가서 서더니 말했다. "이봐,잘 들어봐,이 가빈님은 너 같은 애송이를 상대할 시간이 없단 말이다." "누,,.누가 너에게 도전한다고 했어! 내가 도전하는 것은..쿠베린이란 말이다!" 그 녀석이 큰 소리로 외쳤다. 나는 눈을 크게 떴고 그 다음에는 가빈이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으며 스카는 큭 큭 대기 시작했다.그는 갑작스런 말에 사래가 들렸는지 컥컥 대더니 곧이어는 딸국질을 시작했다. "제길..딸국.이게..무슨...봉창 두드리는 소리야? 딸국.." 그가 돌아보자 소년은 필사적인 얼굴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쿠베린에게 도전하는 거다! 알아들었어?" "너 지금 제정신이냐?" 스카가 물었다.그는 벌개진 얼굴로 딸국질을 계속하면서 기가 막혀서 물었다. "너 진짜 제 정신이냐고.엘리야의 쿠베린에게 도전하는 건..10년이래로 없었다 는 걸 아냐?" 소년은 욱 했다. "그래! 그러니까 내가 그 기록을 깨고 도전하겠다는 거야! 난 이긴다!" 그 순간 팟 하고 린의 몸이 날았다. 그리고 녀석의 복부를 걷어찼으며 그 다음에는 그녀석의 턱을 걷어차고 그다음 에는 그의 목줄기를 따려고 단검을 들이댔다. "그만." 나는 비시시 일어나 앉아 린을 제지했다. 린은 날 돌아보면서 낮게 말했다. "무례한 놈입니다." "그렇군." 나는 갑자기 흥미진진한 기분이 되어서 그녀석을 바라보았다. 녀석은 린의 두 다리 사이에 깔린 채 숨을 헐덕이고 있었다.발갛던 얼굴이 순식 간에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놀라운 담력이네." 내가 중얼거렸다. 요 근래 나에게 도전한 녀석은 없었기에 진짜 놀랐다. "물정모르는 애송이를 누가 부추킨 거 아냐?" 스카가 딸국질을 멈추기 위해 블루베리주스를 발칵 발칵 들이키며 말했다. 린은 날 바라보면서 물었다. "이 녀석을 어쩔까요?" "놔줘." 린은 녀석의 몸 위에서 일어났다. 일어서지도 못하고 헥헥거리는 가운데 나는 생각난 김에 말했다. "그 녀석을 저 멀리 버리고 와라.린.시끄러우니까." "네." 린은 늘어진 녀석의 목덜미를 잡고 질질 끌어당겼다.그리고는 축 늘어진 녀석의 몸을 끌고 진짜로 수풀 사이로 사라졌다. 스카는 멍하니 그 모습을 보다가 나에게 물었다. "린이 뒤돌아서 죽여버리는 거 아닐까?" "왜?" "저 꼬마는 너에게 무례한 놈을 가만놔두지않잖아?" "그런데 넌 왜 그냥 두지?" "그야 너와 나는 동격이니까." 나는 스카를 빤히 보았다. 이런 대답을 지금 상당히 재치있다고 느끼면서 하는 걸까? 난 조용히 손을 내밀어서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스카.너 많이 컸구나." "흐응.쿠베린 나으리.난 너의 난로가 아니라구,난 동업자야." 그가 흐 웃자 나는 그의 입안과 입가가 벌겋게 물든 것을 빤히 보면서 그를 위 로해 주었다. "그렇게 그게 서운했냐?" "뭐가 서운해?" "내가 난로 바꾼거 말이다.뭐 그렇게 서운해 하지 마.그래도 난 널 아주 좋은 녀석으로 생각하고 있단다 스카." 스카가 괴이한 소리를 지르면서 내게 바락 바락 대드는 것을 무시하고 나는 다 시 발라당 누웠다.스카는 침을 튀기면서 나의 방탕한 생활과 나의 무신경한 태 도와 나의 불건전한 버릇과 나의 고약한 성격에 대해 일장연설을 늘어놓았다. "결론을 내리면 너,쿠베린은 말 그대로 완전히 변태다 그거다!" 스카가 외쳤고 나는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면서 조용히 되물었다. "그 변태랑 20년간 잔 너는 뭔데?" 윽 하고 스카의 얼굴이 파랗게 변했다. 그는 우우욱 하고 고통스러운 표정이 되더니 아까 먹어댄 블루베리 주스를 토해 냈다. "왓! 나에게 다 튀기잖아!" 내가 고함을 지르자 그는 갑자기 벌건 주스를 입가에 가득 머금은 채로 시익 웃 더니 내 어깨를 콱 잡고 내 가슴에다 토해냈다.퍼억 하고 벌건 베리주스가 내 옷과 몸안에 가득히 쏟아져 내렸다. "이 자식!" 내가 고함을 치자 스카는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꼴 좋다!" 가빈도 배를 잡고 웃는다. 나는 끈끈하고 달콤한 주스를 뒤집어 쓴 채 스카를 노려보았다.스카의 뱃속에 있다가 나온 이 끈끈한 주스는 뜨듯한 기분이 들어 더더욱 끔찍했다. 그렇다고 스카를 맘껏 한 대 두들기면 이 녀석의 뼈가 부러질 것이니 함부로 두 들길 수도 없다.스카녀석은 내가 자신을 거세게 치지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 고 한편으로 말하면 자신은 나를 두들겨도 내가 부러지거나 죽거나 하지않는다 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 자식! 밟아주마!" 나는 스카의 배위로 올라가 박박 밟기 시작했고 스카는 캑캑 거리면서 주스를 입 밖으로 다시 토해내기 시작했다. "대체 얼마나 마셨던 거야!" 내가 기가 막혀 고함을 치는 동안 가빈은 배를 잡고 대굴 대굴 구르고 있었다. "저기." 갑자기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내가 돌아보자 거기엔 단정한 얼굴의 소년이 서 있었다. 아까의 그 애송이가 아닌 정식 기사 복장을 한- 튜닉의 가슴에 새겨진 문장과 허리에 찬 검과 단검.그리고 주욱 빠진 승마용 장화를 신고 있었다- 소년이 서 서 우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말을 몰고 온 듯 말 고삐를 쥔 소년은 스카와 나를 번갈아 보더니 조용히 물었 다. "어느 분이 쿠베린이십니까?" 나는 여전히 스카의 배 위에 올라선 채로 그녀석을 바라보았다. "나다." 그는 놀란 얼굴을 하고는 공손히 고개를 숙여보였다. "저는 공작의 명을 받고 온 라덴 저지워드입니다." "공작?" 스카가 부시시 일어나면서 나를 밀쳐냈다.그의 배는 근육으로 뭉쳐서 단단하므 로 나처럼 호리호리한 녀석이 올라서 춤을 추던 노래를 부르던 그다지 상처입지 도 않는다. "공작이라면 ..역시 하나 밖에 없을 거 같은데?" "베델공작인가? 저 에메스녀석.."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단정하게 서서 날 바라보고 있는 소년을 보았다. 금발에 희고 단정한 얼굴을 한 녀석으로 16,7세 가량 되어 보였다.그 얼굴을 어 디선가 본 거 같은 기분이 되어 고개를 갸우뚱하는데 그 녀석이 입을 먼저 열었 다. "아버님께서 절 보내셨습니다." "네 아버진?" "케엘 저지워드이십니다.전에 뵈었었다고.." "아아..꼬마 케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랬다.이 녀석의 얼굴은 오스칼이라는 그 기생오라비보다 더 제 아비를 닮은 거 같다.내가 30여년전에 보았던 그 얼굴을 하고 있었다.아니,20여년전이 던가? 에라,모르겠다.어찌되었든 예전에 말이다. "뭔 일로?" "공작께서 모시고 오라고 저에게 명하셨습니다.그래서요." 소년은 진지한 얼굴로 반짝 반짝 빛나는 눈을 들어 날 본다. 아악! 난 저런 눈이 싫다! 진지하고 진실하고도 충직한 눈.저런 눈을 가진 녀석은 진짜 싫다! 상대하기가 골치아플 뿐더러 저런 녀석일 수록 매달리고 요구하는 게 많다. 나는 입술을 깨물고 뒤를 돌아보았다. 저런 눈을 한 녀석이 분명히 내게도 한 명 있지. 린이 수풀속에서 걸어나오고있었다. 그는 나타난 소년에게 시선을 보내다 말고 내가 자신을 보자 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에메랄드 빛을 한 진지한 눈동자를 한 녀석,내가 지옥으로 끌고 가도 따라가겠 다고 할 녀석. 골치 아파. 스카는 부스스 일어나더니 나에게 말했다. "공작이 부르는데 가봐야지?" "가기 싫어." "하지만 약속했대며?" 스카는 내가 싫어하자 기분 좋은 얼굴을 하고 이죽거렸다. 나이가 들자 이 녀석은 점점 이죽거린다. 소년 기사는 진지한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다.당장 두 손 모아 기도라도 할 것 같은 진지한 자세다. "아아..가자.가.그 마녀같은 엘프기집애때문에 이게 뭐람..." 나는 투덜거리면서 그 진지한 시선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몸을 돌렸다.린이 나의 몰골을 보면서도 아무 말 없이 내 옆에 선다. 가빈이 킬킬 대면서 물었다. "가서 목욕이나 하고 가야겠죠?" 끈적하고..들쩍지근한 냄새때문에 벌들이 나에게 돌진하고 있었다. 기분 나쁘다! KUBERIN...... 바람이 부는 날에는 어린 시절을 생각한다 나보다 더 넓고 큰 남자가 내 눈앞에 서 있었다. 언젠가 나는 그를 밟고 선다 그의 피를 밟고 선다. ..그리고 난 운다. 2 "헤?" 나는 난데없이 나타난 사나이를 바라보았다. 그는 두 손을 아래로 하고 느긋한 자세를 취한 채 큰 히티나무아래 서 있었다. 그녀석의 새까만 머리칼이 반짝 반짝 빛을 발하는 이유는 햇빛 탓이기도 하지만 나에게는 그의 자신감이 밖으로 돌출된 것인양 보였다. 나는 시냇가에서 옷을 박박 빨면서 스카와 같이 몸을 닦고 있던 중이었다. 내 뒤로는 가빈과 애송이녀석,린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늘은 푸르고 햇빛은 따갑다. 녀석은 그렇게 서서 날 빤히 보면서 히죽 웃어보였다. "너 여기 왠일이냐?" 내가 말을 하기 까지 아무도 그의 출현을 몰랐다. 린은 그게 충격인 듯 뒤늦게 몸을 굳히고 내 앞으로 와 섰는데 그의 등이 긴장 으로 팽팽해지는 게 보였다. "아아.조금 드릴 말씀도 있어서요." "흐음.드문 일이군." 나는 옷을 박박 문질러서 빨면서 대꾸해 주었다. 그는,푸른 눈을 돌려서 린을 아래위로 보았다. 린의 몸이 긴장하기 시작했다.무리도 아니다.저 푸른 눈으로 정시당하고 견딜 수 있을 정도로 굵은 신경을 가진 자는 드물 것이다. "이건 뭡니까?" 다크시온이 린을 턱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내 거야." 나는 끈적거리는 베리주스를 닦아내면서 셔츠를 콱콱 물에 넣고 휘저었다. 가빈은 흥미진진한 얼굴로 그를 보다가 나에게 물었다. "누구에요?" 스카도 궁금한 듯 날 보았다.그의 얼굴이 굳어진 것은 혹여 저 녀석이 '도전자' 일까봐 두려운 것일 게다. "쿠베린?" 스카가 정색한 얼굴로 나에게 물었다. "가빈,네가 와서 빨아." 나는 알몸둥이를 하고는 옷자락을 가빈에게 던졌다.가빈은 낮게 항의의 소리를 내질렀지만 나는 무시하고 린을 아직도 꽉 짓누르고 있는 그 시선의 소유자에게 다가갔다. "옷." 내가 말하자 그녀석은 움찔하더니만 자신이 걸치고 있던 셔츠를 벗어서 나에게 건네었다.따스한 햇빛 탓으로 아마 금방 마를 것 같았다. 린의 다리가 긴장으로 후들거리고 있었다.이 자리에 있는 자들 중에 이 녀석의 힘을 가장 크게 느끼고 있는 때문일 게다. 녀석은 나의 몸뚱아리의 약 2.5배가 되기 때문에 그녀석의 옷을 걸치면 내 몸은 완벽하게 가려진다.나는 그 몰골로 바위 위에 올라앉았다. 녀석은 내 옆에 와 나란히 서더니 린과 스카등을 주욱 훑어보고 물었다. "언제까지 애완동물하고만 지내실 겁니까?" 나는 어깨를 으슥했다. "주물러." 그는 눈썹을 약간 찌푸렸지만 하는 수 없다는 듯이 내 어깨를 주무르면서 말했 다. "그 사인족의 일 때문에 왔습니다." "족장은 죽었나,살았나?" "살았습니다." "헤에." "사인족 내부에서 숙청이 있었던 거 같은데 사인족이 둘로 나뉘어 버렸답니다." "그래?" "그리고 사인족들이 인간세로 내려왔다고 하더군요." 나는 그를 돌아보았다. "뭐야!" 이제 그녀석 다크시온과 내가 적대적이라고 생각하는 녀석은 아무도 없었다.가 빈은 흥미진진한 얼굴로 계속 내 옷을 빨았고 스카는 안도한 듯이 자신의 옷을 나뭇가지에 말리고 있었으며 린은 파란 얼굴로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애송이 기사녀석은 말고삐를 쥔 채 안절 부절하고 있었다. "어디로?" "지금은 일단 코올시나국에 침입했다는 평입니다.사인족 열명이면 자그마한 나 라의 왕성은 풍지박산입니다." 나는 흐음 하고 턱을 잡았다. 그만두라고 말하지않았기때문에 다크시온은 여전히 솥뚜겅 같은 손으로 내 어깨 를 주무르고 있었다. "이봐,네 형이냐?" 갑자기 스카가 물었다.그는 팔짱을 끼고 다크시온과 나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누가 형이라구?" 내가 그를 쏘아보자 스카가 하하 웃어보였다. "마치 형제같이 보이는군.덩치 큰 이 친구는 너의 형같이 보여." 내가 뭐라 하기도 전에 다크시온이 제일 먼저 반응을 보였다. 그의 눈이 파랗게 빛을 발하고 그의 입가가 살기로 일그러졌다.그리고 동시에 텅빈 공간을 찢을 듯한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그의 목안에서 흘러나왔다. "감히! 뭐라고 하는 거냐! 인간주제에!" 스카의 얼굴이 파랗게 질려서 뒤로 물러섰다. 다크시온은 격노한 얼굴로 스카를 노려보았고 린은 재빨리 스카의 앞을 가로막 고 검을 들었다.그의 얼굴에 돋아난 식은 땀이 그가 가진 공포의 깊이를 드러내 고 있었다. 뒤에 섰던 애송이 기사의 말이 공포에 질려서 히히잉 하고 울부짖으면서 발버둥 을 쳐댔다.그러더니 제지하는 소년의 손을 뿌리치고 말은 달아나 버렸다.그와 동시에 화다락 하고 사방에 있던 새들이 날아가 푸드덕 거리면서 사방이 갑자기 시끄러워졌다.새들이 다 날아가고 난 숲속안은 정적에 휩사였다. 완벽하게 벌레우는 소리조차 멈추어 버린 상태. 정지해서 그대로 그 자리에 남아있는 것은 인간들 뿐이었다. 가빈은 완전히 굳어서 빨래를 하다 말고 얼어 붙었다.린은 파랗게 질린 얼굴로 스카의 앞을 막아선 채 굳었고 스카는 입가를 씰룩이며 굳어있었다. 순식간에 팽팽한 긴장상태가 이루어진 것이다. "쿡." 나는 웃었다. 다크시온이 날 바라보았고 나는 그녀석의 안면을 가볍게 후려쳤다. "적당히 해둬." "하지만..저런 무례를!" 다크시온이 항의의 소리를 내질렀다. 겨우 풀어진 인간들은 그 자리에 풀석 주저앉는다. "관둬라.다크시온." 나는 다리를 주욱 펴고 앉아서 스카와 린을 바라보았다. "긴장 풀어." "..와아.오줌쌀 뻔했다.." 스카가 굳은 얼굴을 겨우 풀면서 억지로 큰 소리로 말했다. "이 녀석은 다크시온이야.내 일족의 하나지." "그..는..도전자는 아니지?" 스카의 얼굴에 불안한 빛이 감돌았고 나는 순순히 말해주었다. "한참 전에 도전했었으니까 이젠 아니지." 다크시온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스카들을 바라보다 말고 계속 내 어깨를 주물 렀는데 그 모습이 어딘가 우스꽝 스러웠는지 가빈이 제일 먼저 긴장을 풀었다. "저는 가빈이고요.쿠베린의 난로에요." 그가 생글거리고 웃자 다크시온은 그를 흘긋 보고는 다시 날 바라보았다. 그리곤 불만스러운 표정을 하고 날 쏘아 보았다. "똡니까?" 나는 하하하하 하고 웃고 말았다. "그 장난은 여전하시군요.하지만 인간들 사이에선 그럴 필요는 없잖습니까?" 가빈이 궁금한 듯 내 옷가지를 빨아가지고는 들고 다가왔다. "뭔데요? 뭔데요?" 나는 길게 설명하지 않고 큭큭 웃다가 말을 놓쳐서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는 소 년을 바라보았다. "이제 슬슬 가게로 돌아가야겠군." "그러지." 스카는 불안한 시선으로 다크시온을 보다가 재촉했다. "얼른 가자.마미가 기다리겠다." 사실 늦게 돌아오겠다고 말을 했었기에 마미가 기다리진 않겠지만 마미의 이름 을 꺼낸 것으로 보아 스카녀석이 동요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스카나 마미는 일족이 나타나 도전하는 것을 봐왔기에 언제나 불안하게 여기고 있는 모양이었다.어느날 갑자기 내가 피투성이로 돌아오면 그들은 새파랗게 질 린 얼굴로 두 손 모으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난 이상할 정도로 좋아서 이들의 옆에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다크시온이 따라 일어섰다. "왜? 너도 갈려구?" "네.당분간 왕의 곁에 있겠다고 말해놓았습니다." "누구에게?" "..." "흐.이에르네에게? 크하하하하..또 차였냐?" 다크시온의 얼굴이 굳었다. 네모진 턱이 꽈악 조여지면서 입모양이 일자로 바뀌였다. "놀리지마십시오.연적이시면서." 나는 그의 어깨를 툭툭 치고는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 마미의 집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다.저 애처롭게 바라보는 애송이의 시선을 생각 해서라도. 이에르네와 다크시온의 사이는 하루 이틀 된 게 아니다. 다크시온이 내 난로에서 벗어나면서 부터 시작된 그의 슬픈 짝사랑이다.이에르 네는 물론 잔혹한 면이 있고 다크시온은 대단한 전사지만 사랑에는 약한 슬픈 수컷이다. 가빈이 힐긋 힐긋 다크시온을 보면서 나에게 살짝 물었다. "정말 닮았어요.스카가 말한대로 마치 형제같아요." "흐.그래?" "만약 쿠베린이 커진다면 저런 모습이 될 거 같아요.그죠?" "글쎄." "대단한 위압감이에요.진짜 오줌쌀 뻔했어요!" 가빈의 수다를 모른 척하고 린을 보니 그는 입술을 가볍게 깨물고 정면만 노려 보면서 내 뒤로 한 걸음 정도 뒤쳐져서 따라오고 있다.아마 자부심이 큰 만큼 저 녀석도 상처를 입었을 것임이 틀림없다. 다크시온은 성큼 성큼 걷고 있었다. "마미.돌아왔어." "돌아왔니,내 고양이!" 마미가 넓고도 굵은 팔로 날 덥석 끌어안고 뺨에 키스를 퍼붓는 동안 다크시온 은 거북한 표정으로 그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마미는 그의 존재를 모르고 나를 답삭 답삭 끌어안고는 내 머리칼을 만지고는 물었다. "저런,물장난 한거야? 감기들면 어쩌려고?" "스카 녀석이 내 옷을 더럽혔기때문에 어쩔 수 없었어." 나는 애교어린 음성으로 말하곤 그녀의 품안에 안겨서 미소지었다.그녀는 내 얼 굴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더니 물었다. "배고프니?" "아아..뭐 간단한 거 라도 줘.뜨거운 맥주랑..육포정도면 좋겠는데." "그럼,.그럼.사라야!" 사라는 내가 마미와 그러고 있는 사이 등장한 다크시온을 턱이 빠져라 입을 벌 리고 바라보고있었다.그리고는 급히 마미의 명령대로 맥주창고로 뛰어 갔다. 스카는 그런 나를 보다가 흘긋 흘긋 다크시온을 바라보고있었다.그는 역시 불안 한 기색이었다. 애송이 기사는 우물 우물 서서 나를 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저기..저기..어서 가시지않으면.." "낼 가지 뭐." 나는 가볍게 말했고 애송이는 울상이 되어서 말했다. "저,.저녁 만찬을 준비하고 계십니다....공작께서요.." 호? 저 에메스녀석이? 그 녀석이 언제부터 그렇게 어른을 깎듯하게 모시게 되었나?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스카가 낮게 물었다. "저,..친구는 여기서 머물게 할 거야?" "응?아..어쩔까? " 나는 다크시온을 바라보았다. 다크시온은 뚫어져라 마미의 넓은 등을 노려보고 있었다.자신의 눈을 도저히 믿 을 수 없다는 듯한 태도여서 난 조금 웃음이 터져나왔다. "야,다크,어쩔꺼냐?" 그 녀석은 날 바라보더니 낮게 말했다. "왕의 난로가 될 생각으로 왔습니다만." "그러냐? 허긴." 그러나 그 말이 남긴 파장은 매우 엄청났다. 가빈을 비롯해서 린과 스카,마미와 사라 까지 몸이 굳어버렸다. "노,...농담이지?" 가빈이 멍하니 입을 벌름거렸다. 다크시온은 냉엄한 얼굴로 그를 쏘아보면서 말했다. "왕의 난로가 되는 것은 영광이다.모르는 거냐!" "여..영광?" 가빈이 입을 저억 벌리는 것을 보고 스카가 날 돌아보았다. "여..영광이라고 했냐? 쿠베린? 노,..농담아냐?" "영광이라고 내가 말했잖냐? 스카.내가 몇번이나 누누히 말했냐?" 흥,내가 말할 때는 무시하더니만..쯧쯧. "내 침실은 위 층이다.올라가라." 내가 손짓하자 다크시온은 좌중을 좌악 한번 훑어보더니만 저벅 저벅 계단을 올 라가기 시작했다. 그가 사라지자 남은 것은 기묘한 패닉상태였다. "세상에! 저 소리 들었어! 들었어!" 가빈이 자기 뺨을 부여잡고 소리쳤다. "쿠베린! 난 당신이 소년만 밝히는 줄 알았어요!" "죽어라." 나는 녀석에게 그릇을 하나 집어던지고 마미가 내어주는 맥주를 받았다.마미는 굳은 얼굴로 날 바라보고있었다. "저..사람은 누구냐?" "아,내 졸개." 내가 그렇게 말하자 마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리곤 내 머리를 마구 쓰 다듬더니 내 머리에 키스해주고는 물러섰다. 스카는 팔짱을 끼고 심각하게 물었다. "난 네가 그냥 사람의 온기를 그리워 해서 사람을 부여잡고 자는 줄 알았어,쿠 베린,그럼 저 녀석과도 그런 사이라면 ..그건 혹시 너의 일족의 습관인 거냐?" "아니.그런 습관을 가진 건 일족을 통털어도 나 밖에 없어." 스카가 욱 하는 표정으로 날 쏘아보았다. "뭐야! 그럼 단순한 변태 아니냐!" 나는 한심스러운 기분이 되어 그를 바라보았다. 가엾은 지고.이런 단순한 녀석이니까 내가 그동안 이 녀석을 안고 20년간 잤어 도 나의 은혜를 모르는 거다. 이런 용병생활을 하는 녀석이 적이 좀 많은가.녀석이 잘 때 내가 지켜주었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는 건가? 쯧쯧..이래서 아무리 공을 들여봐야 그 은혜를 알 수 없다니까. 내가 그를 불쌍하다는 눈으로 바라보자 스카는 얼굴이 달아오른 채 날 쏘아보았 다. "왜 그런 눈으로 보냐?" "내가 어떤 눈인데?" "마치..내가 바보라고 말하는 듯한 얼굴이잖아!" 알긴 아는 군. 나는 긴 말을 하지않고 맥주를 들이키면서 린과 가빈에게 말했다. "저 녀석이 있을 때면 내 방안에 들어오지 않는게 좋아." "엑! 저녀석과 뭘 하시려구요?" 가빈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린도 말은 하지않았지만 그런 표정이다. "뭘 하든 말든! 하여간 들어오지 마.들어오면 죽는다." "왜요?지.진짜 이상한 거 하시는 거.." 가빈이 더듬었고 나는 진짜 열받았다. "들어오면 아마 다크녀석이 네 몸과 네 목을 분리시켜 버릴 거야." 그렇게 엄포를 놓자 가빈과 린은 굳은 얼굴이 되었고 나는 긴 이야기 말고 옆에 굳어 석상이 된 소년에게 말을 걸었다. "너." "네?" "낼 아침 떠난다.내가 말하는 아침이란 해가 내 머리위에 뜰 때야." "하..하지만..오늘 저녁까지 모시고 오라고.." "걱정하지마.녀석들도 내가 제때 오리라곤 기대하지않을걸." 나는 그렇게 말해주고는 맥주를 마저 들이켰다.그리곤 나를 주시하고 있는 녀석 들을 주욱 훑어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사라마저 날 도끼눈을 하고 바라보고 있다. "너 진짜 왜 왔어?" 다크시온은 팔을 벌린 채 누워서 내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그냥요." "그냥이 아니겠지.왜 왔냐고 묻잖냐!" "..." "이에르네에게 차인 것도 한 두번도 아닌데 인간을 싫어하는 네가 여기까지 왔 다면 이유가 있을 거 아니냐?" 그의 갈색 피부는 달빛에 빛나서 반질 반질 거리고 있다.나는 시선을 피하고 계 속 천정을 바라보고 있는 다크시온을 보다 못해 발로 걷어찼다. "맞을래?" "..." "아님 천정을고치겠다는 건설적인 생각이라도 하는 거냐?" "..." "자식,고집세네! 일부러 네가 말할 기회를 주는 거야,꼬마!" 다크시온은 고개를 홱 돌려서 날 바라보았다. 그 눈에 담긴 고통에 나는 흠칫 놀랐다.그 눈안에는 눈물까지 스며있었다. "왕.." 나는 녀석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 강인한 녀석이 우는 것은 어릴 때 이외엔 없었다.이 녀석의 눈물을 보자 정 말 놀라서 아연해졌다. "...코린..을.." 뭐? 코린? 나는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 되어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코린을..." 그의 어깨가 가볍게 들썩였다. 나는 팔을 뻗어서 녀석의 어깨를 잡았다.그 넓은 어깨가 들썩이고 있었다. 또냐? "정..정말..끔찍한 기분이었습니다..코린의 심장을 쥐고 내가 서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을때는..." 온 몸의 피가 빠져나가고 전신은 차가와졌겠지. 피를 밟고 서서 자신이 아끼고 사랑했던 자의 몸에 발톱과 이를 박고 그 살과 내장을 갈갈이 찢는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 것인가. "...죽고싶었습니다." 이번의 도전자는 그의 손에 죽었고 그의 가슴을 찢어놓았다. "...자제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왕처럼은 될 수 없어요!" 그가 울부짖었다.그는 침대의 시트를 움켜 쥔 채 절규하듯이 말하곤 고개를 박 아 얼굴을 들지 않았다. 나는 아무말도 하지않고 그냥 일어나 앉은 채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가르쳐 주세요! 제발!" 그가 울었다. 달빛이 하얗기만 하다. KUBERIN...... 바람이 부는 날에는 어린 시절을 생각한다 나보다 더 넓고 큰 남자가 내 눈앞에 서 있었다. 언젠가 나는 그를 밟고 선다 그의 피를 밟고 선다. ..그리고 난 운다. 3 "먹어볼까.." 나는 손톱을 들어서 그 흰 피부에 대었다. "안돼!" 짜랑한 음성을 히스테릭하게 날리면서 기생오라비가 외쳤다.오스칼은 식식대면 서 내 앞을 가로막았고 나는 그런 그를 멀끄러미 바라보면서 그럼 하고 되물어 주었다. "크으으으..너 같은 놈! 부르는 게 아니었다!" 오스칼 저지워드는 이를 갈면서 외쳤다.그의 뒤에 선 그의 충실한 아우인 라덴 저지워드는 내 말에 충격받아 입을 쩌억 벌리고 동굴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우리들은,정확히 세어 말해서 나와 다크시온,그리고 가빈과 린은 베델공작의 성 안에 있었다.베델 공작 에메스는 나를 불러들이더니만 초조하기 이를 데없는 얼 굴로 손톱을 맛있게 뜯어먹고 있는 오스칼을 불렀다. 그리고 오스칼은 손톱 물어 뜯은 것을 여기저기 뿌리면서 나를 신경질적으로 노 려보면서 자신의 부친과 함께 이 방으로 온 것이다. 3층의 햇빛이 잘 들고 우아한 느낌이 들며 상당히 호화로운 이 객실에 말이다. 척 보기만 해도 이 붉은 융단이 깔리고 흰 린넨의 커튼이 깔린 이 방이 여자용 이란 것을 알수 있기에 매우 흥미진진했었지만.. 쳇,나타난 것은 이.것.이었던 것이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게 뭔지는 먹어보지않아도 물론 잘 알고 있다. 둥글 둥글 하고 허연 여자가 누워있다.그녀는 보통 사람과 아주 똑같지만 실은 여자는 아니다.왜냐면 그녀의 등 뒤로는 찢겨졌지만 분명히 날.개.가 있었기때 문이다. "아인족인가요?" 비오나가 묻는다. 물론 모르니 날 데려왔겠지. "날개 달린 아인족은 몰라서 그래요.쿠베린님." 비오나가 오스칼의 흥분을 저지시키면서 나를 바라본다. "아니야.아인족은." 나는 그렇게 말하곤 비오나에게 히죽 웃으며 물어보았다. "그 말에 대답하면 먹어도 되냐?" "쿠베린!" 오스칼이 악을 내질렀다.그는 주먹을 쥐고 당장 내 앞으로 다가섰는데그 꼴을 보고 있던 다크시온이 한 발 내디디더니 삭막한 눈으로 그녀석을 쏘아보았다. 갑자기 찬물이 끼얹은 분위기가 맴돌았다. 원래 다크시온은 덩치가 크기 때문에-그 녀석은 오스칼보다 머리하나는 더 컸다 -그 자리에서 상당한 위압감을 표현해 내고 있었다.나와 달리 녀석의 몸은 그 녀석의 존재를 사방에 강요하듯 알리는 격렬한 뭔가가 있었다. 오스칼과 그의 눈빛이 부딪치자 오스칼은 움찔했다. 그래 움찔하는 게 좋아.아니면 맞을 걸. 나는 침대위의 물건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이 향기,이 좋은 살집,틀림없이 그.것.이었다. 나도 이 녀석을 본 것은 거의 300년 이상전의 일이니까 인간세에 잘 나타나려들 지 않는 존재임은 확실했다. "이거 어디서 줏었어?" "어,사냥갔다가 오스칼이 수풀속에서 발견했어." 에메스 베델이 흥미진진한 얼굴로 나에게 말한다. 이 녀석은 상당한 호색한이니까 이 아.가.씨가 깨어나면 덮칠 가능성이 매우 컸 다.물론 오스칼의 저 불타는 듯한 정열의 불꽃을 에메스가 뚫을 수 있다면 말이 다.그러나 지금 이 것은 내 앞에선 암컷으로는 보이지않는다. "이건 참..맛있는 거야." 내가 말하자 다크시온이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그렇게 맛있습니다?" "음.한 300년전에 먹어보고 먹어본 적이 없지만.." 나는 손톱을 들어서 그 드러난 팔뚝에 들이대고 주욱 그어보았다.피가 나올 정 도는 아니었지만 보고 있던 오스칼과 라덴이 대신 아악 하고 비명을 올렸다. "이 냄새는 기가 막히지.엘프완 틀려." 나는 그 팔뚝을 잡고 냄새를 킁킁 맡았다. 최상급의 과일 같은 냄새였다.달콤하고 산뜻한 향이 피어오르는 듯했다. "그런데 이 날개의 상처는,오스칼 네가 그랬냐?" 오스칼이 고개를 거세게 저었다. "아냐! 내가 봤을 때는 이미 그렇게 되어 있었어.수풀 속에 떨어져있었기에 처 음엔 큰 새인가 했지만 .." 놀라긴 했겠지. 나는 그 금발머리를 치우고 날개를 펴보았다.아픈 듯 으윽 하고 낮은 신음소리 가 나긴 했지만 신경쓰지않고 좌악 폈다.찢겨진 흰 날개는 은빛을 띄운 것으로 굉장히 컸다.이 것을 전부 펼치면 아마 이 녀석 몸체의 세배는 될 것이다. 다크시온이 중얼거렸다. "조인족이군요.." 생각해 보면 놀랄 노자였다. 얼마전 사인족과 난리를 치고 돌아왔더니 이번엔 조인족이냐? 왜 다 튀어 나오는 거지? 3백년이래 없었던 일 아닌가? 그러나 이 날개에 있는 상처를 보면 별로 놀라운 일도 아닌 듯했다. 여기저기 뚫린 구멍은 사인족의 철시일 가능성이 높았고 발목이나 팔목에 남겨 진 상처를 보아도 이건 도망친 것이다. 그럼 결국 사인족이 조인족을 덮친 건가? 내가 다크시온을 돌아보자 다크시온의 얼굴이 차가와 지고 있었다.그도 같은 생 각을 하는 모양이었다. "조인족이란..무엇인가요?" 비오나가 물었다. 그녀는 흥미진진한 듯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태도가 정중해서 다크시온 도 참아주고 있는 듯했다. "조인족이란 ...산꼭대기 깊숙한 곳에 숨어사는 종족이야." 내가 가볍게 설명했다. "그런 종족이 왜 이런 곳에 떨어져있지?" 에메스가 질문하자 나는 갑자기 그 생각에 고개를 들었다. "이 애를 깨워야 그 의문이 풀릴 거 같은데." "의식을 잃은지 벌써 3일째입니다.치료를 계속하고 있긴 하지만요." 비오나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나는 그 향기나는 살결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럼 깨어나면 날 불러." "네.그럼 식사라도 하시겠습니까?" 비오나는 상냥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여자가 그런 웃음을 짓는 것은 매우 수상쩍은 일이라고 나는 생각하면서도 그녀 가 차려놓았을 맛난 음식을 생각하면서 뒤로 접어두었다. "저 자는 누구지?" 에메스가 물었다.그는 다크시온을 흘긋 거리면서 호기심어린 표정이었다. 나를 꽤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나와 마주앉아 식사하는 데에 의외로 익숙한 태 도를 취하고 있다.나는 그의 등 너머로 보이는 그의 부친이자 배델대공의 초상 화를 바라보면서 느긋하게 대꾸했다. "내 아들이야." 에메스가 앞으로 고꾸라질 뻔했고 다른 자들도 헉 하고 큰 소리를 냈다. 나는 베델대공의 초상화를 보다가 다시 시선을 돌렸다.내가 그것을 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케엘 저지워드가 가볍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30여년 전의 일입니다.쿠베린님." "그렇군." 나는 멍청히 중얼거렸다. 이렇게 이 자리에 앉아서 식사를 하다 보면 정말 시간을 잊을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갑자기 어색한 침묵뒤에 에메스가 내게 으음 하고 헛기침을 하고는 물었다. "정말로 아버지...와 친했던 거야?" 나는 그 말에 대꾸하는 대신 고기를 잘라 입안에 넣었다.왠지 거북한 분위기가 된다. "아냐." 난 잘라말했다. "그럼?" "난 네 아비를 몰라." "그럼 케엘이 한 말은 다 뭐지?" 에메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어왔다. 차라리 오만하고 잘난 척하는 꼬마쪽이 상대하기가 나았다.제 아비와 똑같은 얼 굴을 하고는 도와달라고 매달리기라도 하면 나는 아마 매우 귀찮은 일에 빠질 것임이 틀림없었다. 비오나의 웃음섞인 시선이 느껴진다. 속이 바글 바글 끓기 시작한다. "난 네 아비를 몰라.그러니까 묻지마!" 에메스는 머슥한 얼굴을 하고 다시 케엘을 보았다. 케엘은 조금 당황한 얼굴을 하다가 다시 온화한 얼굴이 되었다. 아악! 난 이런 온화한 얼굴이 질색이다! 오스칼은 아까부터 불만에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그는 엉덩이를 들썩이고 있는 것이 뭔가 불안한 기색이었다. 그의 마음속에 들어가 보지않아도 그가 생각하고 있는 게 뭔지는 뻔했다.그는 분명히 자기가 줏어온 그 조인족의 아가씨를 생각하고 있는 게다.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조인족은 자기 이외의 종족은 발가락의 때로도 생각하지 않는다.왕년 내 백부의 시종이었던 어린 시절 왕이었던 백부의 앞에 포로로 끌 려온 조인족의 왕을 보았다. 조인족의 왕은 거만을 떨면서 잘난 척을 했고 그 때문에 내 백부는 그의 흰 날 개를 산산이 찢어주었다.그 덕에 약간 그 고기맛을 보긴 했었다. 조인족이 이런 곳까지 흘러들어왔다는 것은 그다지 조인족의 미래와 현재가 말 짱하지않다는 증거였다.허긴 다른 종족들과 전혀 교류도 하지않고 잘난 척하고 살아왔던 댓가를 치르는 것이다. "성에서 머무시는 동안 라덴이 시중을 들 겁니다.쿠베린님." 난데없는 소리에 나는 고개를 들고 비오나를 보았다. "뭐? 성에서 머물러? 누가 머문데?" 비오나는 눈을 크게 뜨고 즐거운 듯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전에 약속해주셨지않습니까? 부르면 언제라도 와서 도와주시겠다고요." "지금이 위험한 때냐?" "알수 없습니다,몇달전의 그 암살자의 시체는 아직 찾지 못했고 만약에 그가 중 상을 입었다면 지금은 치료가 다 되었을 때가 아닐까요?" 교활한 계집. 나는 그녀를 쏘아보다 말고 포크를 들어 내 앞에 놓인 칠면조에 들이 꽂았다. 침대에 눕자 마자 다크시온이 내 옆에 드러누웠다. 가빈과 린이 불만을 터뜨리고 있을 것은 분명한 일이다.그러나 그들은 다른 방 을 주었다.그 애들을 데려온 것 자체가 사실 조금은 귀찮은 일이었지만. "제가 아들입니까?" 다크시온이 또 뻔한 것을 묻는다. 나는 팔을 뻗어서 그 나보다도 큰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아아.그래." 그는 말없이 순순히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포렌이 ..아들이 아닌가요?" "그애도 내 아들이지." 나는 산만하게 대답했다. 지금 머리 속에서 왔다 갔다 하고 있는 것은 저 에메스의 애비인 녀석이었다.고 집이 세고 외통수인 녀석이라 금새 죽어버렸다.바보자식. "..진짜 자식을 갖지않으실 참입니까?" 다크시온이 낮게 물었다. 나는 갑자기 그를 돌아보았다. 다크시온은 나를 보고 진지하게 물었다. "이에르네는 왕께서 절대로 아이를 갖지않겠다고 하셨기에..." "그만좀 해둬라." 내가 잘라 말하자 그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만약에 왕의 동생인 그 분이 돌아오시면..." "막내가 돌아오면..그앤 나에게 도전하겠지." 나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몇백년동안 있어온 일이고 또 몇 천년간 있어온 일이다. "그리고...그 분을 죽이지않으려 하겠지요?" 그는 날 다시 직시했다.부담스러워져서 난 고개를 돌려 천정을 다시 바라보았 다. "전에 저 처럼 죽이지않고 자제하시겠죠.그럼 ..그만큼 왕의 생명은 위태로와 지지않습니까?" "그래서? 잠이나 자!" 나는 녀석의 머리를 베개에 짓눌렀다. 그가 버둥거리는 것을 무시하고 베개에 짓누르자 그는 한동안 반항하다가 움직 임을 멈추었다.그는 주먹을 쥐고 가만히 얼굴을 베개에 묻은 채 중얼거렸다. "..마십시오." 듣고 싶지않다. "죽지 마십시오.왕..절대로." 시끄러. 임마! 죽고 싶어하는 놈이 어딨냐! "당신만은..내내..제 앞에 서 계십시오..." 나는 그 녀석의 뒤통수를 사납게 내리찍었다.녀석은 당연 기절했다. 더이상 울고 짜는 소리를 듣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안그래도 복잡하고 우울하 다,이렇게 우울한 때에 지금한다는 소리가 징징대면서 죽지말라니! 누가 죽고 싶어 죽냐! 나는 발딱 일어났다. 어젯밤 부터 저 녀석은 징징대며 매달린다. 아아..자식,너는 매달릴 사람이나 있구나.나는 누구에게 매달릴까나.. 나는 팔짱을 끼고 머리를 창틀에 들이박고 한동안 그 자세로 멈추어 서 있었다. 코 끝에 아직 잔향이 남아있다. 여자의 냄새,나를 안는 태연자약한 인간여자의 냄새. 그 굵은 팔과 통나무 통 같은 허리. 오오..여자란 대단하다.여자란 엄청나다. 언젠가 나도 죽어서 대지의 여신의 품안으로 들어간다. 수컷이란 발버둥을 쳐봐야 결국은 암컷의 품안으로 돌아간다.암컷의 자궁속에서 기어나와서 잘난 척하고 돌아다니며 씨를 퍼뜨리지만 결국은 암컷의 품안에서 죽어버린다.그리고 그게 순리라고 나는 알고 있다. 나는 창가에 기대어서 4층 창 높이에 어울리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이 풍경은 물론 많이 바뀌어 있다.인간들은 빨리 죽고 빨리 변하고 빨리 사라지 며 빨리 생성되고 그리고 ... 나는 손가락을 뻗어서 희미한 달빛에 비쳐보았다. 투명한 손가락이지만 자세히 보면 무수한 자잘한 흉터가 새겨져있다.이 흉터속 에 내 세월이 줄지어 잠겨져 있다. 나도 역시 나이를 먹었나... 아이를 갖고 싶지않다고 버팅기고 있긴 하지만 결국 어린 것들에게 눈이 돌아가 는 것은 어쩔 수 없다.나이든 수컷의 발버둥이냐 하고 나는 멍하니 생각했다. 무의식중에 말했다.정말로. 아들이라니.. 악! 관두자! 혼자 땅파고 회색빛으로 사방을 칠하는 것 따윈 나에게 맞지않는 다.그리고 그러고 싶은 생각도 없다. 나는 팔짱을 끼고 생각했다. 역시 이렇게 고독감이 무럭 무럭 밀려드는 이런 밤에는 역시 그거 밖에 나를 위 로해줄 만한 것은 없다. 수컷을 껴안고 자봐야 뭔낙이 있겠나. 나는 으샤 우샤하고 노래를 시작하면서 방문을 열고 나섰다. "호오호오 내 이름은 쿠베린..성도 없고..인간도 아니고,호오호오.." 나처럼 외로운 여자 없나? KUBERIN...... 바람이 부는 날에는 어린 시절을 생각한다 나보다 더 넓고 큰 남자가 내 눈앞에 서 있었다. 언젠가 나는 그를 밟고 선다 그의 피를 밟고 선다. ..그리고 난 운다. 4 "당신에게 도전합니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벌떡 일어났다. 도전이란 말을 들으면 가끔 숨이 멎는 거 같은 기분을 맛볼 때가 있다. "아아..왜요?" 옆에 누운 아가씨가 내 어깨를 잡아당겼다. 아직 이십세가 되지않은 귀여운 그 소녀는 나에게 기꺼이 안겼기에 나는 어제 잘 잘 수가 있었지만 지금 이러고 누워있을 기분이 아니었는지라 나는 그녀의 이마에 키스해 주고는 스리 슬쩍 일어섰다. "왜 그래요?" 그녀가 동그란 파란 눈으로 나에게 물었다. 나는 밖을 가리키며 물었다. "바로 이 밖이 비무장이야?" "네에.바로 아래 에요.제 방은 비무장이 아주 잘 보여요." 그녀는 생긋 웃으면서 내 목에 팔을 감았고 나는 안도해서 그녀의 팔을 잡고 그 까무잡잡한 피부에 키스를 거듭해주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햇빛이 침대까지 밀려왔다. 그녀는 다시 잠들었고 나는 더 잘까 말까 망설이고 있었다.그러나 그도 잠시,저 잘난 척하고 떠들어 대는 소리 때문에 결국 침대에서 일어나기로 하고 비비적 거리고 발을 바닥에 내딛었다.바닥의 한기가 올라와서 결코 내딛고 싶은 생각이 없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해서 그냥 나왔다.적당히 옷을 걸치고 창문 가 로 내려다 보니 저 잘난 척하는 에메스의 기사들이 찧고 까부는 운동장이 잘 보 였다. "진짜 도전할 거냐?" 하고 덥수룩이가 물었다. 덥수룩이..아마도 그 이름이 로크였던 것으로..로크인가 로커인가..하여간 그 녀석이 어울리지도 않는 둔한 체격으로 엄숙한 표정을 날려댄다.그의 상대인 조 그만한 녀석은 심각한 얼굴로 말 그대로 당장 죽어 넘어질 수도 있는 그런 표정 으로 뻣뻣이 서 있다. 가소롭군. 내가 냉철하게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갑자기 문이 발칵 열리면서 다크시온이 들어섰다. 녀석은 침대 위에 누운 아가씨- 밤새 내가 꼬신 시녀 중 한 명-을 흘긋 보더니 내 옆으로 와 섰다. "언제나 처럼 또 이러시는 군요." "내가 널 두들겨서 기절시켰다고 화났냐?" "그런 걸로 화낼 일은 아니지만.." 그는 기분나쁜 듯이 아가씨를 훑어보았다. 이 잠탱이 아가씨는 내가 깨고 다크시온이 들어왔어도 잘 자고 있다.놀라울 정 도로 둔한 신경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밤새 이 아가씨를 괴롭힌 건 나인걸. "인간의 여자와 지내는 건 이제 그만 두셨으면 합니다." "왜?" "그건.." 그는 심각한 얼굴을 하고 날 바라보았다. 그 얼굴에 심각해 봤자지.아무리무게를 잡아도 녀석은 내 앞에선 어린애일뿐.. "이에르네를 생각해서라도..차라리 이에르네가 왕의 아내가 된다면 잊을수 있겠 습니다.그렇게 된다면 전 그녀를 완전히 잊을 수 있습니다." 놀고 있네. 나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입에 올리진 않았다. 대저 수컷이란 모름지기 그렇게 쉽게 포기한다느니 하는 소릴 지껄이는 게 아니 다. 수컷의 입장으로 본다면 수컷에겐 여러가지 의무가 있는데 그 의무와 권리를 무 시하면 나중에 벌을 받게 된다.그 벌이란.. "다른 자라면 몰라도 왕이라면 납득할 수 있으니까요.게다가..그녀는..왕을 오 랫동안 사모했구요.." 다크시온은 지금 상황에 전혀 어울리지않는 말들을 지껄이고 있다. 생각해 보면 지금 이 상황, 내가 자고 난 여자 방에 다크시온이 불쑥 들어와서 이에르네와 되라느니 말라느니 하는 소릴 지껄여 대는 것도 어울리지않는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가 떠들어 대는 소리를 무시하고 있는 동안 창밖에 서 벌어지고 있는 인간 기사들의 짓거리가 점점 가관이 되어 가고 있었다. "기사란 모름지기 주군을 잘 보필해야 하는 법이다.지혜와 덕으로 그를 수행할 수도 있지만 지금 우리가 너에게 바라는 것은 부끄럽지 않을 정도의 검술이다. 그건 잘 알고 있겠지?" "네!" 덥수룩이는 자기 눈앞에 기립자세로 선 애송이에게 말하고 있었다.그 애송이는 겨우 16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애송이로,라덴보다도 어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덥 수룩이의 삼분의 일에 해당하는 체구와 그 정도밖에 안되는 힘을 가지고 있는 듯 보인다.아마도 견습인 듯 긴장한 탓에 어깨는 굳었고 턱은 바르르 떨고 있었 다. "좋아.좋은 기세구만." 그 녀석은 두 손으로 장검을 쥐고는 진지하게 일직선으로 덥수룩이를 보고 있 다.긴장한 얼굴이 푸른 빛을 띄고 있다. "시작하자!" 덥수룩이가 말하는 순간 애숭이가 외쳤다. "갑니다!" 그래 가라 가. 나는 턱을 괴고 창가에서서 그 꼬락서니를 바라보고 있었다. "왕!" 뒤에서 다크시온이 불만을 토하자 나는 그제서야 그가 있었다는 것을 다시끔 깨 닫고 돌아보았다.그가 땅바닥을 파면서 주저리 주저리 늘어놓은 소리따윈 나는 듣지않았다. "들어주실 겁니까?" 그가 절박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난 잘라 말했고 그는 거의 광분하는 표정이 되어 주먹을 다잡아 보였다. "대저 수컷이란 암컷을 유혹해야할 의무와 책임이 있는 거야.네가 부족했으니까 그녀가 너에게 안갔을 거야.그런데 이제 그 의무를 나에게 떠맡긴다는 것은 뭔 가 잘못 되어 있지않냐?" 멍하니 다크시온이 날 바라보았다. 나는 선배로서 그의 왕으로서 그리고 무엇보다 나이든 수컷의 지혜로서 그의 어 깨를 툭툭 쳐 주었다.그가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관대히 바라보면서 나 는 유유히 발코니로 걸어나갔다. 다크시온은 입을 저억 벌린 채 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여어! 덥수룩이." 나는 발코니에서 맨발로 알짱 대면서 말을 걸었다. "캑!" 이상한 소릴 지른 덥수룩이가 날 보고 눈을 크게 떴다. 그 만이 아니고 나를 아는 자들 모르는 자들이 일제히 발코니 위에 선 나를 바 라보고 있었다. 나는 팔짱을 끼고 아침공기를 맡으면서 발코니 난간위에 멋진 자세로 서서 그들 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들 중 애송이가 핫 하고 외쳤다. "위험합니다!" 그가 안색이 변하면서 아래로 달려왔다. 그가 다가오자 마자 나는 그 녀석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새파랗게 질린 그 얼굴이 제법 귀염성이 있었다.내가 히죽 히죽 웃으면서 서 있 자 로크가 심드렁한 얼굴로 외쳤다. "이봐! 방해하지 말아!" "뭘 하고 있기나 했냐?" 내가 킬킬 거리자 덥수룩이는 엄숙한 얼굴로 마주 외쳤다. "우린 지금 수련중이라구! 너의 장난 상대가 되어 줄수 없어!" 무어라? 장난 상대? 흐으.내 장난 상대가 될 자격이나 있더란 말이냐?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아래에선 꼬마는 이리 저리 오락 가락하면서 외쳤다. "조심! 조심하세요! 위험합니다!" 내가 선 난간은 겨우 3층 밖엔 안된다. 소년이 난리를 치고 있을 때 등 뒤에서 다크시온이 다가와서 묵직한 음성으로 말을 걸었다. "왕,지금 제가 또 도전하면 받아주실 겁니까?" 나는 돌아보지도 않고 대꾸했다. "아니." "왜지요?" "네가 도전하는 것을 내가 꼭 받아주어야 할 의무는 없기때문이지." "그러나..전 도전하고 싶습니다!" 다크시온의 음성이 크게 터져나왔다. 그리고 그는 맹렬하게 내 등을 향해 몸을 솟구쳐 덮쳐왔다. 나는 돌아보지않은 상태로 한 걸음 옆으로 몸을 돌렸고 다크시온은 일직선으로 발코니를 벗어나기 직전 발톱으로 발코니 난간을 잡아 채고는 되돌아왔다. 그의 몸이 마치 거대한 부메랑처럼 허공을 가로 지르며 다시 나에게 덮쳐왔다. 그오오 하고 그의 입안에서 울부짖음 소리같은 게 터져나왔다. 나는 몸을 띄워서 다크녀석의 손톱을 피했다. 이 녀석은 지금 진심이었다.그러나 나는 진심이 아니다. 나는 팔짝 뛰어서 아래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내가 뛰어 내릴 때 아래에서 보던 녀석들은 아악하고 비명과도 같은 소리를 내 질러댔고 나는 내 뒤를 이어 뛰어내리는 다크시온의 몸체를 포착했다. 그리고 착지하는 그 반동을 이용해서 나는 다시 공중으로 재도약했다.내 몸이 튀어 오르면서 다크시온의 머리통을 발꿈치로 걷어 차내렸고 녀석은 피하려고 몸을 틀었기에 어깨를 대신 얻어맞았다. 빠각 하고 어깨 뼈가 어긋 나는 소리가 살짝 들려온다.나는 녀석을 친 반동을 이용해서 한번 더 발코니로 튀어 올라섰다. 다크는 아직 바닥에 내려선 채로 날 증오의 눈길로 올려다 보았다. 녀석의 송곳니가 튀어 나오고 분노의 증거로 손톱이 두배길이로 튀어 올라왔다. 전투모드로 전환할 듯한 자세였다. "다크!" 나는 녀석을 향해 외쳤다. 그의 눈이 까맣게 물들고 있었다.녀석은 진심인 것이다.그리고 이 녀석은 자포 자기인 상태였다. "이리와라." 나는 팔을 벌리며 말했다. "나는 도전하겠습니다!" 그가 피 토하듯 외치면서 나를 향해 튀어올라왔다.눈부신 몸놀림이 차가운 공기 를 거슬러 올라왔다. 그리고 손톱이 내 목을 향해 사선으로 길게 내리그어졌다. 나는 그 손톱을 피하지않았다.그리고 한편으로 손을 뻗어서 녀석의 목줄기를 움 켜쥐었다.그러나 그의 목줄기가 빳빳하게 굳어지면서 내 손을 거부했다.매끄럽 게 그 피부가 손가락을 튕겨냈다.그리고 녀석은 내 목줄기에 길게 손톱자국을 그어댔다. 피가 파앗 하고 튕겨 내 얼굴과 녀석의 얼굴에도 튀어올랐다. 화끈한 고통과 함께 분노도 치밀어 올랐다. 자포자기로 덤벼드는 녀석에겐 매운 맛을 한번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이 녀석!" 나는 그 녀석의 팔뚝을 향해 발길질을 해댔다.발톱이 튀어 올라와 녀석의 팔근 육을 갈갈이 찢도록 곤두세웠다.그리고 동시에 녀석이 내 가슴에 손톱을 박아오 는 것을 느끼면서 뒤로 몸을 제꼈다.녀석이 이번엔 내 배에 날카로운 손톱을 박 아왔다.물론 박히면 끝장으로 갈기 갈기 찢겨질 것이다. 순순히 다칠 이유는 더 이상 없기에 나는 뒤로 튕겨 오른 상태 그대로 뒤로 물 러섰다.녀석은 조금의 틈도 없이 돌진해왔다.녀석은 언젠지 전투모드로 전환되 어 있었다. 그 얼굴을 보는 순간 내 몸안의 무언가가 툭 하고 끊어지면서 피가 들끓기 시작했다. "바보 자식!" 송곳니가 튀어 올라오고 그 다음에는 손톱이 재차 전투 모드로 전환된다.작은 내 몸집이 예전처럼 부풀어 오르고 팔꿈치와 무릎에 날카로운 비늘이 돋아나온 다.다크시온이 뿜어내는 심장의 고동소리가 귀안에 선명하게 들려와 아무것도 들리지않게 된다. 몸이 내 뜻 이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가 바라는 순간 내 몸은 이미 움직이고 있고 내 몸과 내 정신은 합체가 되어 있다.어느 것이 먼저인지 어느 것이 우선인지 알수 없는 감각이 소용돌이치면서 어느새인지 나는 다크시온의 심장을 향해 손톱을 세워 뻗고 팔꿈치로 그를 가격 하며 그의 뼈를 바수고 있었다. "허걱" 피가 울컥 치솟아 나오는 순간 나는 숨을 삼켰다. 다크시온이 내 팔안에 쓰러지는 순간 나는 전투모드를 결사적으로 풀었다.머리 에 다크시온의 얼굴을 들이대고 천천히 숨을 나누어 쉬었다.두 손과 두 팔과 전 신이 아직 풀지 못한 피에의 향연에 대하여 항의의 소리를 내뻗었지만 나는 숨 을 멈추었다.바르르 떨리는 손을 들어서 다크시온의 턱을 잡아 올리자 녀석의 창백한 얼굴이 눈에 보였다. 어린 다크,꼬마 다크. 숨을 멈추고 결사적으로 제어했다. 나이는 괜히 먹은 게 아냐!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전신에 항의하는 힘들이 사그러들고 온 몸은 비워버리지 못한 열기로 바들 바들 떨려왔다. 그래 그래..참아.참아.쿠베린.너는 잘나신 몸이니까. 다크의 몸이 내 팔안으로 굴러떨어진다. 피투성이에 난리가 되어 버린 그 몸체,이미 의식을 잃어 전투모드는 풀려 있었 다.이 녀석은 진짜 죽고 싶었던 것이다.그래서 내게 덤볐겠지만 한편으로 말하 면 내가 왜 이 녀석의 자살 상대가 되어 주어야 하는가 생각하니 울화가 치밀어 서 나도 모르게 녀석의 머리통을 걷어차고 말았다. "꺄악!" 잠에서 깬 아가씨가 비명을 질렀다. 내가 돌아보니 그녀는 새파랗게 질려서 침대 위에서 떨고 있었다.침대 위 시트 자락을 꼬옥 잡고는 겁에 질린 채 얼어있었다.아직 알몸일 것이다. 나는 다크시온의 몸을 들어서 아래 층에서 입만 벌리고 있는 녀석들을 향해 집 어던졌다. "왓!" "이런!" 녀석들이 아래서 난리를 치고 있는 동안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방안으로 다시 걸어들어왔다. "다..당신 괜찮아?" 여자가 나에게 걱정스런 눈길을 던졌다. "아아..약간 다쳤어." 나는 목에 묻은 피를 만져보았다.다크녀석이 할퀸 상처였다. 이 아가씨는 나의 전투모드를 보지 못한 모양이다.허긴 반 밖에는 끌어올리지 않았었으니까. "이리와 봐요!" 그녀는 당황한 얼굴로 내 팔을 잡고는 나를 침대에 앉히고는 나체임에도 상관하 지않고 침대에서 뛰어나가선 방 구석 어딘가에서 약과 깨끗한 헝겊을 가지고와 서 내 목을 닦아 내기 시작했다. 여자는 대단해.수컷들이었다면 이 자리에서 날 내쫓고 의심의 눈초리를 던졌을 꺼야.그리고 날 밖으로 집어던졌겠지. 내가 감탄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동안 그녀의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어떻게 해! 상처가 심해!" "괜찮아,괜찮아.찰과상인걸." 내가 히죽 웃자 그녀는 걱정스러운 듯이 내 상처를 들여다 보더니 내 뺨에 키스 해주었다. 이래서 여자가 좋아. 나는 그녀의 몸을 잡아당겼고 그녀는 눈을 크게 뜨면서 얼굴을 붉혔다. "당신..다쳤잖아!" "괜찮아.찰과상이야." KUBERIN...... 바람이 부는 날에는 어린 시절을 생각한다 나보다 더 넓고 큰 남자가 내 눈앞에 서 있었다. 언젠가 나는 그를 밟고 선다 그의 피를 밟고 선다. ..그리고 난 운다. 5 "어떻게 된 일입니까?" 놀란 얼굴을 억누르면서 케엘이 물었다. 나는 목에 붕대를 감은 채-그녀가 해주었다- 루루루 하면서 식탁에 앉아있었다. 내 맞은 편에 앉아있던 린과 가빈이 내가 상처입은 것에 놀라면서 입을 벌리고 있었다.케엘은 내가 걱정스러운 듯한 얼굴이었는데 그의 옆에선 오스칼은 고소 하다는 얼굴이었다. "별거 아냐.다크녀석이 장난을 좀 쳤지." "가..같이 오신 분은..무척 다쳤습니다..어깨도 부러진 거 같고..출혈도 엄청난 데다가.." 케엘은 나를 흘긋 보고 그다음엔 오스칼과 나란히 선 심각한 얼굴의 덥수룩이를 바라보았다.덥수룩이는 나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바라보 고 있었다.허긴 네가 이해할 수 있는게 뭐가 있겠냐? "어떻게 부상자를 창밖으로 밀어낼 수가 있어?" 덥수룩이가 항의했다. "너무나 비겁한 짓이야! 대,.대체! 난 그래도 네가 그렇게 비겁한 놈이라곤 생 각지 못했어!" 나는 어깨를 으슥했다. "그래도 뭔가가 있는 놈이다..그렇게 생각했었다고! 기사도의 기자도 모르는 거 냐! 어떻게 부상자를 3층에서 집어던지냐!" 나는 흥 했다. "그래서 그 녀석이 머리통 깨져 죽기라도 했단 말이냐?" 내가 묻자 바들 바들 떠는 얼굴이 된 덥수룩이가 외쳤다. "그래도 ! 그래도 대체!" "실제로 머리가 깨졌어!" 기생오라비도 가세한다.그는 심각한 얼굴로 날 바라보면서 경멸에 찬 눈초리를 던졌다.아쭈! 그 불손한 눈초리라니. 나는 그들 앞에서 유유히 거위구이 다리를 뜯어서 입안에 넣고 고기맛을 보았 다. "머리가 좀 깨져도 안죽어." 나는 녀석들이 길길이 뛰는 꼴을 보면서 무시하기로 했다. 지금은 배가 고프므로 이 두 놈이 하는 잡소리를 들을 때가 아니었다. 어서 부지런히 먹고 뭔가 다른 일을 해 봐야지.다크녀석은 한동안은 일어나지 못할 거니 조금 조용해지겠지. 쯧쯧..그 귀여운 얼굴을 하고 내게 매달리던 게 엊그제 같은데 반항이라니..끌 끌..녀석이 어릴 때는 얼마나 귀여웠었나..바들 바들 떨며 매달리던 게 엊그제 였는데 이젠 내게 감히 손톱을 내밀고 송곳니를 드러내다니.끌끌.. 내가 멀거니 잘 구어진 꿀 머핀을 뜯어먹으면서 흐뭇한 회상에 잠겨있는데 불쑥 가빈이 내가 먹고 있던 머핀을 빼앗았다. "뭐야?"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 해줘요!" 가빈은 울상이 된 얼굴로 나의 목에 난 상처를 바라보았다. "쿠베린에게 상처를 입혔다면 보통놈은 아니잖아요! 어제는 그 녀석은 쿠베린에 게 절대 충성하는 것 같이 보였었는데.." 그 울상이 된 얼굴을 향해 나는 조용히 말했다. "절대 충성따위란 없는 거다.강자에게 바치는 존경은 있을 지언정 절대 충성따 윈 믿을 것이 못되지." 내가 모처럼 멋진 말을 하면서 녀석의 손에서 먹던 머핀을 빼앗는 순간 린이 심 각하게 입을 열었다. "그럼 그 자도..쿠베린에게 적이란 말입니까?" "적이라는 것은..그렇게 단편적인 게 아냐." 난 머핀을 계속 씹으면서 점잖게 말해주었다. 오오 오늘은 뭔가 무게를 잡게 되는 구나.역시 연륜이란 무서운거야. "웃기네." 뒤에서 기생오라비가 무엄하게도 내 말을 잘랐다. 이런 무엄한 짓을 하는 녀석을 용서해야 할까 하고 내가 돌아보는데 기생오라비 는 기세등등하게 외쳤다. "충성심이란 고귀한 심성을 뭐로 보는 거야! 다 너처럼 시정잡배의 논리를 가지 고 있는 줄 아냐! 고귀한 기사라면 누구든지 다 충성심을 가지는 거다!" 그가 그렇게 기세등등하게 외치고 덥수룩이가 동의의 표정을 보이는 순간 린이 차갑게 외쳤다. "인간의 논리로 말하지 마라! 인간은 가장 표변하는 족속이야!" 핫 하고 다들 입을 다물었다. 린이 처음으로 나서서 말을 했기때문인지 아님 그 살벌한 말투 때문이었는지 모 두 찬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해졌다. 나는 내 앞에 놓인 살구를 씹으면서 기생오라비와 덥수룩이의 안색이 파래졌다 가 다시 빨개지는 것을 지켜 보았다.린은 여전히 푸른 얼굴 그대로였다. "무,.무슨 소릴 하는 거냐!" "인간이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한 건 얼마나 되는가! 인간의 짧은 생명은 겨우 60 여년간이다.그 사이에 지키지 못할 약속은 얼마인가! 그리고 그 60여년간 충성 을 바친다고 해도 명예욕을 자랑하는 찰나일 뿐이야!" 그는그렇게 말하곤 입을 싹 다물어 버렸다. 오오 멋지다. 나는 박수를 쳐주었고 가빈은 덩달아 뭔가 하고 박수를 쳤다. 두 녀석은 입을 적 벌린 채 굳어있었다. 린의 그 시기적절한 어휘선택과 유려한 화법에 감탄하면서 내가 녀석을 바라보 자 린은 멋적은 얼굴이 되어 시선을 떨구었다. "저..저자식이!" "네가 뭘 안다고 그러냐!" 두 녀석이 길길이 날뛰어 봤자 논리로는 당해낼 수 없는 것,내가 은밀한 즐거움 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동안 갑자기 문이 열리면서 비오나가 들어섰 다. "쿠베린님!" "왜?" 내가 마지막 살구를 쥐는 순간 그녀는 흥분한 어조로 말했다. "지금..막 그 조인족의 아가씨가 눈을 떴어요!" 참으로 시기적절하게 두 애송이의 위기를 구해준 장본인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로 침대위에 오도마니 앉아있었다.이미 상처는 거의 아물었지만 날개를 펴진 못 하고 말 그대로 오도마니 길잃은 미아같은 얼굴로 침대위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바라보자 기생오라비의 얼굴이 황홀함으로 뒤덮혔다. 이미 그 자리에는 에메스와 흥미진진한 얼굴을 하고 있는 의원이 서 있었는데 조인족의 아가씨는 비오나를 보자 눈에 띄게 안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선명한 푸른 눈과 백옥같이 매끄러운 살결과 내가 방금 먹어치운 살구와도 같은 도톰한 입술에 대해선 굳이 설명하지않아도 좋았다.하지만 어찌되었든 내 가 너무나 태연자약하게 이 아가씨를 무시한다면 이 아가씨를 보고 넋을 잃은 녀석들이 너무 경박해 질까봐 나는 자세히 관찰해두기로 했다. 과연 과연이었다. 맛있게 생긴 만큼 아름다운 이 아가씨는 비오나의 손을 꼬옥 잡고는 먼 친척을 만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허긴 변신 엘프와 조인족은 어느정도 닮은 점이 있긴 하다. "나는 공작 에메스 베델이라고 하오." 에메스 녀석이 아주 잘난 척을 하면서 아가씨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녀석으로선 제법 미끈하게 생긴 얼굴을 들이밀고 매력을 발산할 심산이었겠지만 조인족의 심미안으로 보면 이 녀석이 그렇게까지 아름다운 모습은 아닐 것이다. 아가씨는 미심쩍은 눈초리로 그녀석을 흘긋 봤을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않았고 뒤이어서 기생오라비가 격렬한 정열을 발산하면서 다가와 열렬히 인사하자 그녀 의 얼굴은 굳어질 뿐이었다. 어느정도 자기 얼굴에 자신감이 넘쳐 흘렀던 두 녀석은 바람빠진 돼지오줌보같 은 얼굴을 하고는 풀이 죽었다.그러나 옆에 섰던 비오나는 의기 양양한 얼굴이 었다. "쿠베린님,이 아가씨에게 말을 좀 걸어보세요." 드디어 그녀의 얼굴이 나를 향했다. 나는 팔짱을 끼고 이 살구같은 아가씨를 바라보고 있다가 먹기위해 쥐고 있던 마지막 살구 한 알을 그녀의 무릎 위에 툭 던져주었다. 그녀는 화들짝 놀랐지만 자신의 무릎위에 놓인 것이 살구라는 것을 발견하자 안 도했다.그리고는 그것을 잡아 들고는 호오 하고 안도하는 듯한 미소를 지어 내 게 던졌다. 음,,그렇군,그녀의 심미안으로 봐서도 이 중에서 내가 가장 멋지다는 의미겠지. 나는 곧 납득하고 그녀의 앞으로 다가서서 그녀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는 데 그녀의 반응이 내게 비교적 호의적이었던 것에 격분하고 광분한 두 사내가 내 등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이 근처에는 조인족의 둥지가 없을텐데." 내가 묻자 그녀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당황한 얼굴이 되어서 무릎을 끌어안고는 날개를 파르르 떨었다. 그 자세가 수컷들의 보호본능을 불러일으켰는지 에메스와 기생오라비,그리고 덥 수룩이까지 동시에 내 앞으로 다가오면서 그녀를 안심시키려는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지금 녀석들의 수컷 행동에 대해 나는 왈가왈부하고 싶지않았다. "소문에 요즘 사인족놈들이 인간계를 습격하고 있다고 들었다.너희들도 사인족 에게 습격당한 거냐?" 그녀의 눈이 커지더니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울긴 왜 울어!대답을 해야 할 거 아냐! 내가 막 광분할 찰나 비오나가 끼어 들었다. "사인족이란..것은 ..무엇입니까?" "흐음..몰랐나? 사인족은 더럽고 추악한 찌꺼기같은 놈들로서 떼를 지어 공격하 는 아주 못된 인간의 습성을 닮은 것들이야.불행히도 녀석들은 인간을 너무 닮 아서 갑주를 입고 무기를 들고 공격하며 또 더더욱 불행히 인간들처럼 영역을 마구 마구 넓혀서 자신과 다른 종족들을 멸살하려는 비뚤어진 망상에 차 있지." 내가 대답하자 처음 멍하니 집중하여 듣고 있던 녀석들은 곧 흥분했다. "무슨 소릴 지껄이는 거야!" 그들이 주먹을 쥐고 항의를 할때 나는 녀석들을 무시하고 곧장 이 조인족 아가 씨를 바라보았다. "그래,맞지? 네 날개를 꿰뚫은 것은 사인족 놈들이 사용하는 철시다.이 철시는 얼마전 내 조카 녀석의 배를 뚫어 놓았었지."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앉아있는 조인족 여자의 날개를 강제로 펴서 구멍이 난 그 상처를 들여다 보았다.여자는 내 행동에 항의하면서 아픈 신음성을 터뜨렸 다. "아파요!" 그녀가 처음 입을 열자 그 자리에 있던 자들이 동시에 오 하고 감탄성을 터뜨렸 다.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마치 노래하는 듯한 우아하고 가느다란 목소리. 비명조차 아름다울 이 목소리를 듣고자 얼마나 많은 놈들이 길길이 뛰었던가 하 고 생각할 즈음인데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더니만 다크녀석이 들어섰다. 그리고는 심각한, 무지무지 심각해서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찌그러질 듯한 무 게 있는 태도로 내 앞에 털석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모두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크는 머리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있고 벗은 상체가 온통 상처투성이인 까닭에 붕대를 온몸에 감고 있어 대단한 중상자로 보였다.녀석은 그 피투성이 붕대를 한 그 모습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이젠 나에게 쏠린다. 나는 팔짱을 끼고 다크 녀석을 보고있다가 한동안 침묵했다. 그리고는 창문가로 가서 창문을 열고 케엘이 차고 있던 단검을 쓰윽 뽑아냈다. 케엘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가 대체 뭘 하나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다크도 시선을 들고 무섭게 진지한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단검을 단단히 쥐고 창문가에 서서 힘껏 내던졌다. 그게 멀리 점이 되어 사라질 즈음 나는 다크에게 명령했다. "가서 주워와!" "옛!" 녀석은 주저하지도 않았다. 녀석은 말 그대로 쏘아진 화살처럼 창문으로 뛰어 내렸고 멍청하니 선 자들은 그가 뛰어내린 지 한 참 되고 나서야 여긴 5층이야 운운하면서 길길이날뛰었 다. 그들이 난리를 치던 말던 나는 다시 조인족 아가씨에게로 다가와서 물었다. "네 이름은?" 그녀는 멍하니 날 바라보고 있다가 창문과 나를 번갈아 보고선 움직이려던 입술 을 닫았다. "지금 그런 ..걸 말할때야!" "대체 저 중상자에게 뭘 시킨거야!" "사냥개취급도 정도가 있어!" "자기가 다치게 해놓고는.." 에메스와 기생오라비와 한마디씩 떠들어 댈 때 그 모든 소동을 귀 뒤로 흘리면 서 나는 그녀의 얼굴을 빤히 보며 물었다. "네 둥지는 이미 몰살당했나?" 그 순간 그녀는 울음을 터뜨렸다. KUBERIN...... 바람이 부는 날에는 어린 시절을 생각한다 나보다 더 넓고 큰 남자가 내 눈앞에 서 있었다. 언젠가 나는 그를 밟고 선다 그의 피를 밟고 선다. ..그리고 난 운다. 6 "마..맙소사.." 뒤에서 기생오라비가 비난 섞인 말투로 나에게 외쳤다. "그렇게 심하게 말하다니!" "이렇게 말하나 저렇게 말하나 마찬가지야." 나는 녀석에게 대꾸해 주고는 여자의 턱을 잡고 조용히 물었다. "언제 습격받았지? 질질 짜고만 있어선 아무것도 해결되지않아." 그녀는 마치 깨끗한 조각상처럼 고운 얼굴을 든 채 눈물을 방울 방울 흘리고 있 었다.그 얼굴을 보고 나는 왠지 굉장히 못할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 얼굴에 혹해서 이리 저리 헤멜 때는 아니다. "말해라.조인족의 여자야." 그녀는 눈을 뜨고 눈물이 가득한 푸른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도와주실 건가요?" 그녀의 목소리는 노랫소리처럼 낭랑하고 아름다왔다. 모두 혹해서 멍해질 때 나는 그녀의 턱을 잡고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아니." 다시 방안이 침묵으로 휩싸였다. 내 뒤에서 사내들의 동작이 머리를 쥐어뜯는 동작으로 화하는 것은 보지않아도 알 수 있었다.비오나 조차 입을 저억 벌리고 있었으니까.조인족의 아가씨도 나 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조인족은 남에게 도움을 받지않는다.넌 모르냐?" 내가 퉁명스레 말하자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는 잠시 망설이듯이 눈물을 닦아냈 다. "네..알아요." "그럼 그따위 말을 함부로 입에 올리지 마라.난 남을 도와주는 일 따윈 하지않 는다." 그녀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뭔가 상당히 멋진 자세가 된 거 같군 하고 내가 으슥할 찰나에 문이 발칵 열리더니 흙투성이가 된 다크녀석이 들어왔다. 녀석은 들어오더니 내 앞에 와서 공손히 내가 집어던진 단검을 바쳤다. 다들 오옷 하고 놀라서 쳐다 볼 때에 나는 그 단검을 받아들고는 다시 창가로 가서 이번엔 다른 방향으로 집어던졌다. "주워와." 어머 하고 비오나가 눈을 크게 떴다. "네." 하고 다크는 대답했고 이번에도 뛰쳐 나갔다. 그가 나갈 때 바닥에 몇방울의 피가 투툭 하고 떨어져 내리는 게 보였다.그 모 습에 비오나가 동정어린 눈빛을 보였지만 나는 그 핏방울을 무시하고 다시 조인 족의 아가씨에게 다가 섰다. 이번엔 그 아가씨가 다른 호기심으로 나에게 물었다. "아까..그분은 무슨 큰 죄를 지었나요?" "그래.녀석은 죽을 죄를 지었다." 나는 그렇게 대꾸해 주고는 다시 물었다. "그건 그렇고 말해.언제 습격당했냐?" 그녀의 말을 종합해 놓도록 하자. 여자들의 말은 두서가 없다는 것이 흠이기도 하고 또 특징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예를 들자면 이 아가씨가 계속해서 말하는 '너무 심했어요'라든 가,'너무 끔찍해서'라든가,아니면 '너무 무서웠어요'라든가 '어쩔 줄을 몰랐어 요'라든가 등등하는 말들 같은 것들이다. 그 말들을 전부 빼고 종합하면 말은 간단하다. 그녀의 이름은 셀레네. 조인족 족장의 조카로 친구들과 노래하러 잠시 마을을 나왔었다고 한다.그녀가 말하는 달의 바위위에서 노래를 한 참 부르고 있는데 왠 난데없는 비명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해서 그녀와 그녀의 친구 2명은 겁에 질려서 둥지로 돌아갔다고 한다.돌아가 보니 이미 사인족들이 습격해서 둥지안은 풍지박산이 나 있었다.그 리고 그녀에게 쏘아대는 철시를 피해서 그녀는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그녀의 가족들과 친지들이 어찌되었는지는 모르고 무조건 그녀는 도망쳐서 일단 그녀의 다른 종족이 산다고 하는 북방의 밀림으로 갈 생각이었다고 했다. "너 바보냐? 여긴 북방이 아니고 서쪽이라구." 내가 말해주자 그녀는 어쩔 줄을 몰라했다. 아마 겁에 질려서 헤멘 모양이었다.게다가 중상으로 한쪽 날개는 거의 풍지박산 으로 다쳐있었다.비오나의 치유술이 아니었다면 아마 앞으론 날지 못할 뻔 했 다. "수는 얼마나 되더냐?" "..모르겠어요.많았어요.무척이나." "사인족 족장놈을 봤냐?" "모.모르겠어요.너무 정신이 없어서." "너희 족장은 죽었냐?" "모,.모르겠어요,흐흑.." 아는 게 아무 것도 없군. "비오나." 나는 울고 있는 그녀를 위로하고 있는 비오나를 불렀다. "네?" "지도 가지고 와봐." "지도요?" "그래." 비오나는 눈짓으로 에메스에게 말했고 에메스는 소리내어서 기생오라비에게 가 지고 오라고 시켰다.기생오라비는 불만에 가득 찬 얼굴로 밖으로 나갔다.아니 나가려는 순간 문을 열고 들어서는 다크와 마주쳤다. 다크는 진흙투성이였다. 녀석은 파리한 입술을 하고선 진흙투성이의 몸을 해가지고 내 앞에 서서 공손히 다시 한번 단검을 바쳤다. "이봐,상처가.." 덥수룩이가 뭐라고 한 마디 했지만 다크는 무시했다. 나는 다크의 손에서 단검을 받아들고는 이리저리 살폈다.진흙투성이인 다크의 손 아래서 그 것만이 깨끗했다. 그러나 손잡이에 약간 진흙이 묻어있었다. "더럽다." 다크는 그 말에 흠칫하더니만 단검을 도로 받아 들고는 핥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다 놀라서굳어있는데 진흙을 핥아낸 다크는 도로 단검을 내게 내밀 었다.나는 그것을 받아들고는 튜닉자락에 휘휘 문대고나서 완전히 굳어버린 얼 굴의 케엘에게 던져주었다. 케엘은 창백해질 정도로 놀란 얼굴로 나와 다크를 번갈아 보더니 허리에 단검을 꽂지도 못하고 멍청히 서 있었다. "지도 가져와!" 내가 굳어선 기생오라비에게 말하자 기생오라비는 나를 증오로 노려보았다. "너무 하는군!" 그는 그 다음에는 다크에게 시선을 던졌다.그의 얼굴에 경멸이 떠올라 있었다. "정말 비굴해! 그렇게까지 비굴할 이유가 있어!" 그가 주먹을 쥐고 나서서 말하는 순간 다크시온의 눈이 싸늘하게 변했다.그는 당장 기생오라비를 어떻게 할 거 같은 표정이었는데 바로 그 순간 그를 대신해 서 누군가가 그의 턱을 후려갈겼다. 퍽 하고 기생오라비가 비틀거릴 때 린이 무표정하게 중얼거렸다. "넌 방금 전 그 입으로 절대충성을 말하지않았었나?" 입가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는 오스칼을 보면서 린은 홱 몸을 돌려서 있던 자 리로 돌아갔다. 기생오라비는 막 그에게 덤비려 했지만 이번에는 케엘이 낮게 호통쳤다. "뭘 우물거리고 있는 거냐!" 기생오라비는 증오에 가득한 얼굴로 린과 나,다크를 바라보더니만 나가면서 외 쳤다. "다 미쳤어! 미쳤다구!" 지도를 펼쳐 놓은 채 나는 팔짱을 끼었다. 셀레네는 그 지도를 멍하니 바라보고있었다.아마 그녀는 지도를 처음 보았을 것 이다. 이 땅의 지도는 오래전부터 주로 이곳 델리암에서 만들어졌다. 왜냐면 델리암의 상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물건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델리암에는 상업전문대도시만 일곱개가 넘는다.자유도시가 그 중 세개이고 나머 지 네개는 각 영주들에게 속해있다.왕령인 상업도시 쾰른을 합하면 8개가 되는 데 이 쾰른은 모든 세금을 왕실에 내므로 상업도시라기 보단 왕령지에 속한다고 본다.어찌되었든 델리암의 모든 상인들이 전 대륙의 지도를 만드는데 소비한 돈 만 해도 상당한 양을 차지하고 있었다.그 덕에 정교한 지도는 모두 델리암 산이 다.델리암은 지도를 잘 만든 거 처럼 관도도 잘 만들었고 제법 지방마다 뚫린 길들도 정갈했다. 이 지도에는 나타나 있지않은 엘프들의 나라와 각 아인족의 나라들이 인간들의 나라 사이 사이에 기가 막히게 끼어있는데 물론 이 중에는 나의 나라도 있다.나 스스로는 내 나라는 이 땅 전체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것에 반발할 인간들이 상 당히 있기때문에 그건 생략. 어찌되었거나 북방엔 엘프의 나라 노스엘스턴이 있고 고왕국이라 불리우는 엘프 의 나라는 서면에 있다.그리고 중앙지대에 점점이 아인족의 나라들이 있고..남 방에도 몇군데.그리고 조인족이 살고 있다고 추정되는 산악지대로서 중부지대와 남부 키아마란산맥줄기,그리고 북방의 오컬닌 산맥줄기 정도였다. 이 아가씨 셀레네가 비행해 온 속도로 짐작하건데 그녀가 살던 곳은 역시 중부 산악줄기인 샤비올산맥이었다. "샤비올..이라.." 샤비올은 여기서 사흘 거리였다.물론 어디에 둥지가 있었느냐라는 차이가 있긴 하지만 그 오차는 크지 않을 것이었다. "그럼..?" 비오나가 날 보고 걱정스런 얼굴을 했다. "사인족이 여기까지 진출했단 이야기야.놀랄 노자로군." 나는 수염도 없는 턱을 만지작 거리면서 힐긋 다크를 보았다. 다크는 반쯤 무릎을 꿇은 부복자세로 앉아있었는데 바닥에 피가 점점이 떨어져 피투성이가 되어있었다.붕대도 갈아야 하고 찢어진 상처가 다시 입을 벌리는 듯 했다. 안절부절하면서 가빈이 저어 저어 하고 나에게 다가왔다. "상처..상처를 치료하는 게 좋지않아요?.." 가빈은 참 이상한게 덜덜 떨면서도 할 말은 다한다는 것이다.녀석은 입술까지 파랗게 질려서 떠는 주제에 나와 다크를 번갈아 보면서 중얼거렸다. 녀석의 꼬리가 추욱 늘어진 상태로 살랑 살랑 흔들리고 있었다.애교어린 눈매가 날 슬그머니 바라보고 있었다. "비오나.이 애좀 봐줘." 비오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 쉬면서 다크에게 다가갔다.그녀가 막 치유술을 펼치 려는 순간 다크가 손을 밀쳐냈다. "괜찮습니다." "그러나.." 비오나가 당황하여 날 바라보았다. "까불지 말고 치료받아." 내가 퉁명스레 말하자 녀석은 고집스레 고개를 내저었다. "감히 도전의식도 제대로 하지않고 규율을 어긴 죄..치료받을 자격이 없습니 다." 비오나가 당황하는데 녀석은 완고하게 피에 젖은 얼굴로 고개를 젓는다. 놀고 있네. 나는 침대에 걸터 앉았다가 일어나서 다크에게 다가갔다. "야." "네?" 다크는 고개를 들고 날 올려다 보았고 나는 그 녀석의 턱을 발로 걷어 찼다. 컥 하고 녀석이 바닥에 쓰러지면서 졸도하자 나는 아연실색해서 굳어진 비오나 에게 손짓했다. "치료해." "그 사인족이란 것들이 그렇게 무서운가?" 에메스가 모처럼 진지하게 나에게 물었다. "그래.인간에겐." 내가 대꾸하면서 빵을 가르자 재빨리 가빈이 꼬리를 흔들면서 나에게 감귤로 만 든 마말레이드를 발라 건네었다.그리곤 재빨리 내게서 조금 먼 돼지갈비찜을 그 릇째 가지고 와 내 앞에 놓는다. 내가 그것을 먹자 약간 핏대가 오른 에메스가 눈썹을 치켜들었다. "이봐." 나는 갈비찜을 먹으면서 녀석을 바라보았다. "너무 하잖아?" 어느새인지 가빈이 부지런히 내 앞에 옮겨놓은 음식들은 모두 나를 향해 전진하 고 있는 형태가 되어 있었다.그 덕에 맞은 편에 앉은 비오나와 에메스의 앞에는 그들 자신의 스프그릇 이외엔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 있다. 비오나는 쓴 웃음을 짓고 있었지만 에메스는 불끈 핏대를 올렸다. "어지간히 해! 먹긴 무지하게 먹는군!" 나는 흐 하고 웃으면서 가빈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칭찬받은 기분이 되었는 지 가빈이 살살 웃으면서 꼬리를 팔랑거렸다. 지금 우리들은 저녁을 먹는 중이었다. 나의 고상한 취향을 잘 알고 있는 비오나가 차린 저녁상은 여전히 풍성하기 이 를 데가 없었다.그녀가 직접 주방장에게 지휘한 이 저녁상에는 에메스와 나,비 오나와 가빈,그리고 린이 앉아있었고 케엘과 그의 버릇없는 아들들은 없었다. 허긴 있어봐야 소화에 도움도 되지않는다. 여전히 그윽한 붉은 등불 아래서, 왕년 내가 귀여워 마지하지않았던 멍청한 베 델대공의 초상화가 내려다 보이는 에메스의 사실 안에서의 식사였다. "근데..조인족이 저렇게 당했다면..쿠베린님.그 사인족이란 자들이 이쪽으로 온 다는 의미입니까?" 비오나가 정색을 하고 물었다. "그래." "막을 방법은..그리고..그들은 얼마나 강합니까?" 나는 손에 든 나이프로 새끼돼지 통구이에 칼집을 넣었다.살점을 베어 앞에 놓 인 겨자소스를 바르면서 입안으로 넣는데 초조한 듯 에메스가 재차 물었다. "말좀 해봐! 그만 좀 먹고!" 이 성안 요리사가 누구인지 이 양고기로 만든 고기 파이는 일품이었다.씹자마자 육즙이 새어나오는 이 맛은 상당히 절묘하게 야채와 어우러져 얄팍한 파이와 조 화를 이루고 있다. "음,.별거 아니야." "하지만 변신족이잖습니까? 조인족은 원래 싸움을 하지않는다고는 하지만..사인 족이란 족속은..보통이 아닌 거지요?" 비오나가 심각한 어조로 말했고 나는 꿀과 생강을 얹은 꿀빵에 두 번째로 손을 내밀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인간들에겐."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사인족이 이리로 침략하길 기다립니까? 아니면..?" "더 알아보는 게 좋겠지." 나는 꿀빵을 한 입 베어 물었다. 진짜 맛있었다. 꿀빵을 좋아하긴 하지만 너무 달아서 자주 먹진 않는다.하지만 이렇게 어쩌다 먹는 맛은 넋을 잃을 정도로 맛있었다.과연 훌륭한 요리사다. "어떻게 더 알아 보지요?" "음,.사람들을 풀어서 아래 마을의 동태를 알아보라고 해.용병길드와 상인길드 에 미리 말해놓고..뭐..그래도 충분할걸." "하지만..사흘거리라고 했잖아요? 놈들이 여기까지 온다면!" "이봐,사흘거리라곤 했지만 사실 저 아가씨가 도착한지 사흘이 넘었으니까 도착 하려면 이미 도착해서 공격하고 있어야 한다구." 비오나는 흠칫했다. "넌 인간이 아니니까 이곳을 훌쩍 뜨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거겠지?" 갑자기 에메스녀석이 어울리지않는 예리함으로 나를 찔렀다. 내가 움찔하자 에메스는 날카롭게 말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지 마라.우린 여기서 살아온 인간들이고 어떤 괴이한 놈들 때문에 이 땅을 뜨는 것은 싫다.침입자를 피해 달아날 수도 없어! 우린 땅을 지 켜야 해." 그는 내가 먹는 꿀빵을 재빨리 낚아 채면서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너 역시 필요한 존재야." KUBERIN...... 바람이 부는 날에는 어린 시절을 생각한다 나보다 더 넓고 큰 남자가 내 눈앞에 서 있었다. 언젠가 나는 그를 밟고 선다 그의 피를 밟고 선다. ..그리고 난 운다. 7 밤 바람이 불고 있다. 우울할 정도로 습한 공기가 지붕위로 치솟아 올라와 곧 비가 내릴 듯한 날씨였 다. 지랄맞은 하늘의 먹구름들이 일제히 모여 넓게 팔다리를 뻗혀대다가는 제 풀에 넘어져 버린다.달은 이제 보이지않게 되었다. 날아다니는 조인족과 철시를 쏘아대는 사인족 사이에서 묘인족은 어떻게 돌아가 는 것인가.새삼 생각하자 짜증과 함께 기대감으로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사인족을 없앤다는 것은 사실은 쉬운 일이 아니다. 녀석들은 수가 많다.그리고 대단히 사나운 데가 있다.인간들이 쓰는 무기에 일 찌감치 눈을 돌려놓은 놈들은 볼때마다 빛이 나는 새로운 무기를 가지고 나타난 다. 나는 턱을 손에 대고 당장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인기척이 났다. 다크녀석은 여전히 기절해 있으니 이 기척은 린의 것이다. "상처는 괜찮으십니까?" 걱정스런 어조였다. 그의 눈앞에서 다친 나를 보는 것이 처음이기때문일 것이다.게다가 그 당시 자 신이 곁에 없었기때문에 더 자책감이 드는 모양이었다. "상처?" 나는 목에 맨 붕대를 추욱 풀러보였다. 린의 녹색눈이 커졌다. 나는 이젠 약간 붉은 선만 가 있는 상처를 갖고 있다. 우리들 묘인족의 상처는 오래가지않는다.고작해야 삼일이면 거의 모든 가벼운 찰과상은 나아 버린다.다크녀석도 기어다니지만 길어야 오일이면 뛰어다닐 것이 다. "..생채기..였나요?" 그의 눈이 의심스러운 듯이 변했다. 나는 그를 보는 시선을 돌려서 다시 성을 내려다 보았다. 성은 고요속에 잠겨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상당히 시끄러웠다.예민한 내 귀로 느껴지는 감각은 여기 저기 보초들이 걸어다니는 소리나 여자들의 소리,그리고 이런 저런 두런거리는 소리들도 포착해내고 있었다.그러나 최소한 중요한 일은 없는 것이다. 어둠속에 쌓인 성은 그 아침과 낮의 활기찬 웅성거림을 모두 잊은 듯 고요했다. 그것들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애완동물의 말이 기억나 온 몸이 근질거리기 시작 했다. '내가 이 곳의 영주인 게 자랑스러워...내가 이곳을 지킨다는 것이 너무나 자랑 스러워..' 나는 머리를 북북 문질렀다. 자랑스러울 거 까지야.. 묘인족의 왕이 된 이래 자랑스러움을 느꼈던 것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않는 다.기억나는 것은 무수한 도전자 뿐.그리고 도전자들의 피 밖에는 기억나지않는 다. 그러나 이 두 손에 피를 묻히고 돌아다닐 때가 행복하다는 것을 나는 안다.이미 죽어서 그 몸을 대지의 여신에게 홀라당 바치고 있을 때는 행복이고 자시고 하 는 것들은 없는 것이다.그러니까 자책감 느끼는 척 해봐야 소용없다는 것이다. 죽인 자는 나이고 그들은 죽었다.그들은 패배해서 죽었으니까 그건 구제 방법은 없다.그러니까 같잖지 않게 자신의 힘을 과신하여 도전하는 놈들은 다 어리석은 놈들이다. 머리에 피가 올라 날뛰는 어리석은 녀석들에게 일일이 마음을 쓸 여력같은 것은 없었다.그 놈들은 명예를 생각한다.그리고 도전 자체를 즐기는 것이다.내가 어 릴때 그랬던 것 처럼. 그러니까 자책감느낀 척 해봐야 바보같은 짓.나는 살아있어서 기쁘다.내가 이 자리에서 모든 멋지고 아름다운 것들을 즐길 수 있기에 기쁘다.죽어 넘어져 피 를 흘리는 시체가 내가 아니어서 기쁘다.그러니까 나에게 자책감을 기대하진 말 라고,이 쿠베린...이몸께선 솔직하거든. 나는 즐겁게 살아왔다.내가 바라는 대로 모든 일이 이루어 지도록 깡깡대며,때 로는 울고 때로는 다치고 남을 울리고,다치게 하고 그렇게 살아왔다. 나는 잘났으니까,잘나도록 무진장 노력해 왔으니까 나에겐 그럴 자격이 있다. 새삼 늙어 쓸모 없어진 인간의 노인네처럼 머리 치박고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 어 봤자 과거는 변하지 않아.앞에는 더 많은 일들이 쌓여서 이 쿠베린님을 부르 곤 하지,그리고 나는 그것에 기꺼이 응해 줄 참이야. 왜 괴로워 하지않냐고? 어리석은 일에 시간을 낭비할 틈이 어디있냐? 난 아직 할 수 있는 일들이 널렸다. 내가 몇백살이고 내가 묘인족의 왕이고 또 내가 고귀하신 묘인족의 한 분이시라 고 해서 왕년 추억이나 되씹으면서 난 멋졌어나 연발하기엔 나는 너무나 잘났 다. 크하하하..그럼 잘나고 말고. 오늘,아니 내일 어떤 막강한 도전자가나타나서 날 쓰러뜨리고 죽여버릴 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지금 이순간은 나는 최강 최고의 존재이다.그러니까 이 상황을 얼마든지 즐기자고. 아직 세상엔 미녀도 많고 아름다운 보물도 널려있으며 날 기다리는 일들도 많이 있다.그러니까 즐기자구. "안 들어가실 참입니까? 비가 올지도.." 린이 말을 걸어 내 상념을 감히 깼다. 나는 턱을 고이고 앉아있던 자세를 어느샌지 모르게 길게 누운 자세로 바꾸고 있던 차였다.이 상황에 잠이 들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린이 공손히 날 바라 보고있었다. 나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시선을 바꾸어서 린을 보았다. 이 자식이 대체 뭔 짓을 하고 종족을 떠나 여기에 있는지 갑자기 궁금해졌다.물 론 그러나 그런 것을 일일이 물어보기엔 나는 나이를 먹었다. 세상엔 무수한 사연이 있고 난 그 깊은 사연을 일일이 알아보고 싶지않다.사연 을 안다는 것은 골치아픈 일이잖아! 게다가 그게 아픈 사연일 경우는 더더욱이 나 사양하고 싶다. 나는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어느샌지 하늘은 별하나 보이지않고 있었다.습한 흙냄새가 후욱 하고 끼쳐온다. 확실히 비가 온다.난 몸을 적시는 것은 질색이니까 슬슬 안으로 들어가기로 마 음먹었다. 성의 지붕위에서 슬그머니 내려오는 동안 린은 내 뒤에서 아무것도 묻지않았다. 아무것도 묻지않는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인내심의 발현이다.특히 이 녀석의 나이로선 말이다.입이 근질 근질 하겠지. "상처가 빨리 아무시네요." 의외로 녀석이 말을 꺼냈다. 나는 발코니 난간을 잡고 대롱 대롱하면서 몸을 기울였다.그리고 동시에 반동으 로 발코니 안으로 들어갔다.린도 나를 따라서 들어왔다. 가빈은 이미 침대에서 자고 있었다.곤히 자고 있는 녀석을 보는 동안 린이 다시 침대 발치에 앉았다.나는 발바닥을 툭툭 털고는 침대안으로 들어섰다. "알고 싶은 게 있습니다." 나는 의외의 말에 린을 돌아보았다. 린은 창문을 닫고 있었다.그는 창 밖을 바라보면서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과 자 신을 얼굴을 노려보듯 주시하고 있는 중이었다. 마치 당장 내게 달려들어서 확답을 들어야 겠다고 결심하는 얼굴이다. "뭐냐?" 난데없는 녀석의 말에 놀라면서도 나는 등불을 껐다. 어두운 방안에서 녀석의 실루엣이 보였다.그런 거 신경쓰지 않을 참으로 나는 길게 누워서 가빈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찬 바람을 막 쏘인 탓에 녀석의 체온이 기분이 좋았다. "묘인족은..도전 의식을 치러서 왕과 결투한 뒤에..왕위를 결정하는 것이지요?" "그래." 나는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폈다. 린은 아직도 창가에 선 상태였다.내가 눈을 감고 있을때 그가 다시 물었다. "다크시온..그 분은 언젠가 쿠베린님의 목숨을 노릴 수도 있는 자입니까?" 갑자기 잠이 깼다. 린의 얼굴을 돌아보자 그녀석의 얼굴이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어쩌면 다크시온을 막아낼 수 없는 자신을 새삼 느끼고 있는 것인지도 모 른다.다크가 나서면 허긴 그녀석을 막아낼 수 있는 게 몇이나 될 것인가. 무시무시하게 긴장된 얼굴로 그는 날 바라보고있었다. "묘인족 중에서도 그분은 강한 자이지요?" "그래,아마.다섯 손가락안에 들걸."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손을 뻗었다. "이리와라." 린은 내 앞으로 얌전히 걸어왔다. "다크는 나에게 다시 도전할 수 없다.왜냐면..처음 그가 왕위도전의식을 치렀을 때 나에게 패했기때문이지." ".." "도전은 단 한번만 허용된다.그러니까 녀석은 이미 자격상실이다." "...도전의식은..상대를 죽이는 거겠지요?" 린은 나를 차분히 바라보고 있었다. 녀석답지않게 말이 왜 이리 많은 거냐 싶어서 나는 귀찮아졌다. "그런데..다크시온,저 분은 살아있군요..." 그가 중얼거렸고 나는 더이상 들을 마음이 사라져서 그녀석의 팔뚝을 잡아당겨 서 침대에 끌어들였다.녀석이 굳어있을 때 나는 녀석의 머리를 베개에 꾹꾹 눌 렀다. "잠좀 자자." 녀석의 호흡이 점점 길어지고 있었다. 자고 있지않다는 것은 안다. 나는 천정을 보았다. 물결무늬가 일고 있었다.창문가를 내다보니 억세게도 많은 양의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숨 소리다. 비의 여신이 내뿜는 달콤한 밀애의 숨소리. 난폭한 바람의 신이 주먹질 하는 소리. 비가 창문을 계속 때리고 있는 동안 나는 두개의 난로를 매달고 잠에 빠져들었 다. 과거를 논하는 것은 질색.. 왜냐구? 앞으로 갈 길이 얼마든지 있으니까.. 난 쓸데없는 일은 잊기로 하고 있다. 내게 도움 되지않는 일들따위는 모조리 잊어버릴 테다... "도전하겠습니다." 라구? 마미의 주점에 막 들어서려는 순간 나를 막아선 소년. 며칠전인가 린에게 두들겨 맞고 쫓겨난 그 꼬마. 그 같잖지도 않은 꼬마가 또 다시 진지한 얼굴로 나에게 주먹을 내밀고 바라보 고 있었다.나는 녀석을 빤히 바라보았다.이 녀석은 지금 덤비는 상대가 누군지 알고나 이러는 걸까. 마미의 집 손님들이 모처럼의 구경으로 와글 와글 웃고 있었다. 그들은 이 작은 도전자를 즐겁게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십대임이 분명한 얼굴과 우울할 정도로 진지한 표정,그 필사적인 표정이 웃을 마음도 사라져버린다. "좋아.받아주지." 뒤에 선 가빈과 린이 눈쌀을 찌푸리고 다크시온이 한 걸음 나설려는 찰나였다. 나는 소년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소년은 긴장해서 쇠꼬챙이를들어올리고 나를 바라본다. 진지한 눈을 하고 있다고 해서 내가 진지해져야 할 이유는 없지만 한 번 쯤이야 받아주어도 좋겠지 하고 생각한 순간,내 눈이 빛을 발했다. 살기가 파아 하고 퍼져나가면서 주변에 있던 구경꾼들중에 조금 한다하는 녀석 들이 한철 메뚜기처럼 일제히 튀어나가면서 뒤로 물러섰다. 녀석을 노려보면서 한 걸음 다가갔다.그 눈을 노려보면서 한 걸음 한걸음 나서 자 녀석의 다리가 덜덜덜 떨리기 시작한다. 저놈의 팔을 잡아 뜯고 그리고 저 놈의 목줄기를 길게 뜯어내 그 치솟는 붉은 피를 본다.뛰어 달아나려는 심장을 한 손에 쥐고 터뜨리면 어떤 기분일까. "으으으으.." 얼어붙은 입가로 녀석의 신음이 터져나오고 다리가 후들 후들 거리며 자세가 흐 트러지는 순간 갑자기 문이 발칵 열리면서 마미가 고개를 들이 내밀었다. "쿠베린! 밥 먹어라!" "오오..마미!" 나는 그녀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그녀는 방그래 웃고는 팔을 내밀어 내 몸을 끌어당겨 키스를 퍼붓고는 나를 잡 고 주점안으로 데리고 들어섰다. 내 등뒤로 땡그랑 하고 녀석이 들고 있던 칼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핫핫.. 자식,역시 진지해지니까 무섭지? 쿠하하하하하... 가빈과 린,다크시온은 어처구니 없다는 듯 내 등 뒤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쿠베린 막간극] 항구의 여인 KUBERIN....... 너그러운 바다에는 뭐든지 묻을 수가 있었다. 나의 이름 나의 아픔 그리고 다른 자의 아픔.. 회색빛 파도가 높이 치솟으며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세찬 비바람이 파도를 잡아채서 허공으로 집어던지고 파도는 그 바람에게 이끌 려 사방으로 육지를 휘갈겼다.때리고 때리고 할퀴고 노려보며 으르렁대는 그 모 습은 성난 야수가 날뛰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늘과 바다의 경계선은 사라진지 오래,어느 새인지 하늘과 바다는 한 덩어리가 되어서 세상을 후려갈기고 두들기고 또는 위협하며 또는 비웃어댄다. 새까맣게 몰려들고 다시 흩어지는 옅은 구름들은 회색빛 파도와 어우러져서 하 얗다기보단 잿빛에 가까운 물보라와 함께 일그러졌다. 새까만 무채색의 바다. 성난 야수의 바다. 무자비한 손을 가진 거대한 어떤 것이 생명을 희롱하는 바다. 여자는 아무도 없는 항구에 서 있었다. 다른 배들은 모두 묶여져서 방파제 너머에 숨어있는 시각에 여자는 방파제 가장 가까운 곳에 늘어진 자세로 서 있었다. 멀리서 굉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우울한 낯빛을 한 하늘이 얼굴을 찡그려대 면서 을러대는 동안 점점 어두워지는 바다색이 노골적인 분노의 기운을 띄우고 있었다. 여자의 옷자락은 이미 푹 젖어서 젖은 것인지 물 속에서 걸어나온 건지 알수 없 는 상황이었지만 여자는 묵묵히 서서 그 자리를 고수하고 있었다.비와 파도에 실린 바다의 타액과 어우러진 젖은방파제는 이미 젖었다기 보단 물 위에서 희 롱당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의 눈은 갈색이었다. 갈색이지만 검게도 보인다. 어두운 저 심연의 바닥까지 떨어져버려 도저히 올라올 마음이 없다는 듯한,절망 적이고도 허망한 색깔. 그녀는 두 주먹을 쥐고 서서 마치 당장이라도 누군가에게 덤빌 듯한 빳빳한 자 세로 서 있었다.적의와 절망이 감도는 눈과 분노에 가득찬 일그러진 입가가 으 드득 하고 이를 가는 중에 계속 옆으로 비뚤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아직 젊었다. 아니,확실히 젊었다. 아직 서른도 채 되지않은,이십대 후반의 젊은 여인은 고집센 표정으로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두 주먹을 쥐고 있었다.가냘픈 인상은 전혀 없는 강 인한 어깨와 팔뚝이 마치 나무둥치처럼 빳빳하게 그녀를 세워놓고 있었다. 그녀의 앞으로 누군가가 걸어왔다. 누군가가 그녀에게 다가왔다기 보단 그 누군가도 그녀의 앞에 와 섰다는 것이 옳은 표현이었다. 그녀가 얼마나 서 있었는지 그는 잘 모른다.그리고 알 바도 아니었다. 그는 갈갈이 찢어진 옷자락을 내버려두고 반쯤은 알몸이나 마찬가지인 몸으로 앞도 잘 보이지않는 상태로 걸어왔다.그리고는 바다를 향한 방파제의 끝에 그녀 와 다름없이 서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발치는 붉었다. 그의 가슴과 그의 어깨와 그의 머리와 혹은 전신에서 흐르는 붉은 액체가 비와 소금기 어린 사나운 바다의 타액과 어우러져서 분홍빛으로 희석되고 있는 중이 었다.그는 그런 상태로 무심히 팔짱을 끼고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나운 바람과 빗줄기가 그의 머리칼을 산산히 흩어놓으면서 그 검은 머리칼을 그의 흰 이마에서 제껴버렸다.그리고는 그 드러난 녹색눈에 얼음같은 빗줄기를 쏟아 부어대고 있었다. 넓은 어깨와 넓은 가슴과 상처난 흉터투성이의 몸체를 하고 사내는 문득 자신 을 향하여 꼼짝않고 선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꼼짝도 않고 마치 석상처럼. 그녀는 기쁨에 가득차 사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자리에 사내가 서 있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다가 갑자기 그가 하늘에서 툭 떨어져 내렸다는 양 그녀는 양 손을 입가에 댄 채로 환희의 눈물을 흘렸다. "당신..돌아왔군요!" 그녀는 팔을 뻗히고 그에게 다가가서 그를 끌어안았다. 그녀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기 시작했다.안도와 환희가 그녀의 몸안 에서 솟구쳐 올랐고 사내는 등뒤에 파도가 튕겨내는 무수한 물보라와 하늘이 쏟 아내는 물화살을 맞으면서 묵묵히 그녀가 하는 대로 서 있었다. 그녀의 앞섬에 그가 흘리는 피가 묻어나오자 그녀는 흠칫 놀라며 웃음을 띈 얼 굴로 속삭였다. "어머..당신,다쳤군요! 얼른 치료해야 겠어요." 그녀는 수선스레 그의 팔을 잡고는 끌어당겼다.그리고는 그를 세차게 몰아치는 폭풍우 속에서 그를 지키기라도 하는 양 팔을 뻗어 그의 허리를 안고 거침없이 거리로 들어섰다. 마을사람들은 그녀가 어떤 사내를 안고 가는 것을 보았다. "우리 남편이 돌아왔어요!" 그녀가 기쁜 양 외쳐대고 있었다. 그녀는 자랑스레 말했다. "우리 남편이 돌아왔어요! 내가 말했죠? 그는 돌아와요! 돌아온다고 했거든요!" 그녀는 미소를 짓고 그를 끌며 집으로 향했다. 마을 사람들은 묵묵히 그 모습을 바라본다. 그들의 얼굴에는 연민과 슬픔이 가득차 그녀의 환희를 지켜볼 여력도 없는 양 했다.체념과도 같은 분노. 그녀의 발밑으로 물 웅덩이가 세차게 파편을 튕기며 흐트러졌다.그녀는 맨발로 거침없이 걸었다.마을사람들의 눈초리에도 아랑곳 하지않고 사내가 묵묵히 그녀 를 따르는 것을 기쁜 마음으로 그녀는 걸었다. 팔짝 팔짝 뛰면서 어린 소녀처럼 그녀는 걸었다. "봐요,당신,나는 알고 있었어요.당신이 돌아온다는 것을.아무도 믿지 않았지만 나는 믿었어요." 그녀는 사랑스런 소녀처럼 사내를 올려다 보며 미소지어 보였다. 빗줄기에 온통 젖어버린 몰골로,별로 숱도 없는 보잘것 없는 갈색 머리칼을 뒤 로 넘긴 채 그녀는 그의 팔뚝에 매달려 재잘거렸다. "이런 비는 아무것도 아니에요.당신,화났군요.내가 이런 빗속에서 기다렸다고!" 그녀는 배를 만져보였다. 아무것도 없는 훌쭉한 배였다. "이 배안에 우리 애가 있어요.아들이면 이름을 뭐라 하면 좋겠어요?당신?" 그녀는 아무 말없는 사내의 팔뚝에 뺨을 기대었다. 그녀의 뺨엔 홍조가 감돌아 갓 시집온 새색시처럼 온화하고도 수줍은 표정이 되 어 있었다. "음..다음 달이면 우리 애가 태어나요..당신,아들을 바라나요? 딸을 바라나요?" 그녀는 나직하게 훗훗훗 웃음을 짓고는 그의 팔뚝을 잡아채서 멀리 보이는 자신 의 집까지 달려갔다. "어서.어서.당신 홀딱 젖었지요? 피로하지요?" 그녀는 문을 열고 그를 들여보냈다. 그리고는 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몸을 들어서 그를 안쪽으로 밀고는 스스로 바삐 움직여 아무 불기도 없는 난로에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불쏘시개를 넣고 장작을 넣고 그리고 재빠르고도 익숙한 태도로 화로에 불을 붙 인다.그녀는 사내가 그저 묵묵히 서서 사방을 돌아보는 것을 지켜보며 미소했 다. "곧 따스한 스튜를 올릴께요.당신 좋아하는 것으로." 그녀는 미소를 지으면서 부엌으로 걸어들어갔다.마치 춤추는 듯한 붕 뜬 듯한 걸음걸이였다. 타닥 타닥 난로불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는 묵묵히 그 난로의 불을 바라보면서 출혈과 차가운 비바람으로 잃어버린 체 온을 천천히 채워나갔다.그리고는 두 손을 뻗어서 불기를 가만히 움켜쥐듯 받아 들였다. 그녀가 그를 들여놓은 방안에는 낡은 먼지투성이의 탁자가 다섯 개,그리고 의자 가 여기 저기 흩어져 있다.여기 저기 살림살이인듯한 나무 그릇이 뒹굴고 마치 어떤 심한 장난 꾸러기가 흩어놓은 듯 이런 저런 물품이 바닥에서 굴러다니고 있었다.어쩌면 며칠이나,혹은 몇달이나 사람 손이 닿지않았는지도 모른다. 사내는 온기를 회복하자 팔짱을 끼고 천천히 비바람이 들이치고 있는 창가에 가 서 섰다. 마을의 사람들은 조그마한 창가에 서서 그가 선 창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 슬픔과 연민이 쌓여있었다.우울한 얼굴들이 그들보다 우울하여 검 어진 하늘과 잘 어울어지고 있었다. 사내는 팔짱을 낀 채 묵묵히 그것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먼지냄새가 축축한 공기와 어우러져서 매캐한 냄새를 피어올리고 있었다. "당신..피곤해요?" 그녀가 화들짝 밝은 음성으로 다가와서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사내는 여전히 무표정했다. 청동빛을 연상시키는 단단해 보이는 얼굴은 표정없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비인간적인 얼굴이었지만 그녀는 상관없다는 듯이 행복한 미소를 퍼올렸다. "쉬세요.당신." 그녀는 그의 팔을 잡아 끌면서 이층으로 올라갔다. 이층 계단으로 올라가면서 그는 타고 있는 음식냄새를 맡았다. 그 냄새는 흡사 가죽을 태우는 것과 비슷했다. 고개를 돌려 내려다 보니 그녀가 무쇠솥안에 넣어 끓이고 있는 가죽장화가 보였 다.가죽장화는 늘러 붙어서 쭈글 쭈글해진 채 솥안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당신 좋아하시는 양고기 스튜에요.좋아하죠?" 그녀는 사랑스런 미소를 짓는다. "나 당신이 돌아와서 행복해요." 그녀는 그의 팔뚝에 얼굴을 묻었다. 아침의 햇살 아래서 그는 눈을 떴다. 아침이라기 보단 낮의 그것은 피로한 눈을 찌르는 듯이 쏘아댔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서 창가로 다가갔다. 어제와는 전혀 다른, 희고도 청명한 날씨가 낡아빠진 방안을 밝게 물들이고 있 었다.밖에선 사람들 소리가 활기차게 들려온다. 창 아래 거리는 바글거리는 사람들 소리,사람들 사이에는 이런 저런 장사치들과 이런 저런 손님들이 어우러져서 시끌벅적한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가 고개를 돌려 침대를 바라보니 거기에는 머리를 산발한 채 늘어진 여인이 누워있었다.무언가가 그리도 불안한 지 그녀는 두 손으로 침대보를 꽈악 붙잡고 는 움켜쥔채 미동도 하지않고 잠들어 있었다. 그는 방안을 돌아보았다. 얼룩진 침대보를 덮어 쓴 낡은 커다란 침대와 여기 저기 늘어진 어린애 장난감 들,손수 깎은 듯이 보인 나무오리나 나무 말등이 비참하게 쓰러져있었다. 어린애 요람도 바닥에 구르고 있다.방안에는 아무 것도 살아있는 것이 없었다. 그는 손을 뻗어서 어린애 요람을 흔들어 보았다.먼지가 묻어난다. 방안 여기 저기가 새고 있었다.아마도 어제의 비 탓인 모양이었다. 그는 아래 층으로 내려갔고 역시 먼지 투성이의,과거 선술집인 듯한 그런 흔적 들을 보았다. 그리고는 난로의 불을 지피고 처음부터 그랬었던 양 그 앞에 의자를 두고 가 앉 았다. 옆 집의 수다스런 여자가 말하고 있었다. "어제,대체 그녀는 누굴 데려온 거지?" "몰라.그러나 불쌍하기도 하지,그녀는 완전히 미쳤어." "저런.." 우울한 탄성.미묘한 연민. 그는 타오르는 불꽃을 보았다. 손을 뻗어서 자신의 손을 한 번 불빛에 비추어 보았다. 손톱이 점점 길어져 마침내 긴 날을 이루었다.다섯개의 길고도 가는 칼날이 그 의 손안에서 튀어 나온 양 보였다. 그는 그 손톱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는 또다른 손을 들어 손톱을 꺼냈다.그리고는 반대편 손톱안에 박혀 말라 비틀어진 살점들과 핏덩이를 제거 하기 시작했다. 축축한 나뭇가지들이 연기를 내며 타오르고 있는 동안 끼익 끼익 나무판자들이 일그러지는 소리와 함께 그녀가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그녀는 멍한 시선으로 허공을 바라보면서 내려오고 있었다.그 갈색눈은 헤메이 면서 아무 것도 없는 허공을 향해 미소짓고 있었다.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눈. 그녀가 내려왔을때 그는 긴 손톱을 핥으면서 손톱소제를 마친 참이었다.그가 어 둠속에서 녹색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는 멍한 시선으로 배시시 웃었다. "안녕, 고양아.." 그도 웃었다. 그는 녹색 눈을 반짝이면서 손톱을 집어 넣었고 그 다음에는 고개를 살짝 숙였 다.그리고 그 순간 그의 몸에서 커다란 넝마와도 같은 찢어진 튜닉이 바닥으로 미끌어져 떨어졌다.그리고 그 자리에 둥근 어깨를 한 흰 피부의 소년이 넝마와 도 같은 자신의 옷자락을 밟은 채로 피식 웃었다. 실 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소년은 손을 앞으로 벌린 채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 다.그는 흰 맨발로 마치 고양이처럼 소리도 없이 걸어서 그녀에게 다가와 그녀 의 허리를 끌어안았다.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미소를 머금은 채로 소년의 알몸 을 두 팔로 끌어 안았다.그녀의 몸안으로 환희의 흔들림이 스쳐지나갔다. "잘 돌아왔어.내 아가...이 엄마는 기다리고 있었지." 그녀는 행복한 미소를 지었고 소년은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응..마미." 제 6화 조인족 KUBERIN........... 바람이 쏟아지는 위험한 벼랑가에 핀 꽃이 가장 아름다운 까닭은 무엇인가 잡을 수 없는 꿈들이 가장 안타까운 이유는 무엇인가 1 꿍시렁 거리는 소리! 박박 거리는 소리! 나에게 감히 대드는 소리! 내가 막 광분하려는 순간 내 대신 가빈이 고함을 질러댔다. "그만 좀 해!" 팔짱을 끼고 선 것은 기생오라비였다.그의 옆에는 덥수룩이가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조금 뒤로 진지 그 일변도의 케엘을 똑같이 닮은 꼬맹이가 서 있었 다. 녀석들은 내가 자고 있는 침대가에 와서 소리를 질러대고 있는 차였다. "좀 일어나라구!" "내가 일어나야 하는 이유를 한 다섯가지만 들어봐라. 돌탱아." 나는 침대의 베개에 얼굴을 박은 채로 조용히 말해주었다. 오스칼이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와 이를 갈면서 외쳤다. "얼마든지 말해주지! 왜냐면 주군이 부르시기때문이다!" "네 주군이지 내 주군이냐? 나 자신이 바로 나의 군주인데?" 나는 그얼굴을 보지도 않고 눈을 감은 채 중얼거렸다. 아침부터 기생오라비를 본다는 것은 그다지 좋은 일이 아니다. 아침의 하루는 어디까지나 아름다운 여인의 상쾌한 미소로 부터 시작되어야 하 는 것이다.기생오라비가 아무리 이쁜 얼굴을 해봐야 내게 이쁠리가 없는 것이고 또 녀석이 나에게 이쁜 얼굴을 해 보일 턱이 없는 것이다. "아지 아치이 거요." 완전히 나와 같은 잠버릇을 가진 가빈이 기지개를 좌악 펴면서 중얼거렸다.하품 을 하며 말하는 터라 발음이 조금 부정확했다. 그런 그를 기생오라비가 좌악 노려보았다. "가야해." "어딜?" 가빈이 내 대신에 물어봐 주었다. "왕궁에." 기생오라비가 진지하게 말하는 순간 나는 발을 뻗어서 녀석의 안면을 밀어버렸 다. "켁!" 기이한 소리를 내면서 녀석이 엉덩방아를 찧었다.그 순간 덥수룩이가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웃지마!" 그 매끈한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오스칼은 주먹을 쥐고 나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도 전에 푸른 색이 일렁이듯이 린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 오스칼은 그를 노려보며 외쳤다. "너..~!" 린은 묵묵 무답. 기생오라비와 덥수룩이가 나에게 온 까닭은 왕궁까지의 호위를 부탁하기위해서 라고 했다.왕궁에는 저 변태 시들은 오이가 있다.그것을 아느냐고 녀석들에게 묻자 이 녀석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변태 시들은 오이가 대체 뭐야?" 덥수룩이가 물었고 나는 스푼을 휘휘 저어보이면서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이 나라 인간들의 왕이지."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가빈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내 앞으로 신선한 양젖을 가지고 와 내려놓으며 물었다. "이 나라 왕이 변태 시들은 오이에요?" "응." "굉장히 이상하게 생긴 모양이네요." 가빈이 대꾸하는 순간 으아아아 하고 두 명의 기사들이 동시에 허공으로 치솟았 다.녀석들은 당장 검을 뽑아들며 곧장 나에게 덮쳐들었고 그 순간 린이 그들의 앞으로 짧은 단검 하나로 버티면서 두 명의 날뛰는 칼잽이들을 막아섰다. "크으..이놈! 이제 끝장내줄 거야!" 오스칼이 길길이 날뛰는 동안 나는 양젖을 훌쩍 들이켰다. "그 변태맛을 봐야 나중에 이 쿠베린님의 선견지명에 감탄하게 될 거다." "죽어라!" 오스칼이 길길이 날뛰는 그 와중에 문이 발칵 열렸다. 그리곤 스카가 저벅 저벅 뛰어 들어왔다. 오늘 손님이 참 많구만.. 마미의 사슴집은 오늘은 손님이 그다지 없었다. 머물고 있는 것은 물론 다크시온밖에 없었지만 녀석은 어제 밤 훌쩍 돌아가버렸 다. 돌아간 이유? 그런 건 나도 묻지않고 놈도 말하지않는다. 단지 녀석은 침울한 얼굴을 조금이나마 벗고 돌아갔다는 것이다. 자식은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게 걸핏하면 나에게 어리광을 부리고 돌아간다. 틀림없이 나에게 좀 맞고 싶었던 기분이었던 모양이었다.그 증거로 나에게 질펀 하게 얻어맞자 돌아가지않았는가. 모처럼 마리아와 함께 회포를 풀면서 즐기고 돌아오니 녀석은 갑니다 하고 달랑 한 줄만 편지를 쓰고 사라져버린 뒤였다. 가빈은 그가 돌아가자 가장 기뻐했다.그리곤 내 방 침대위로 냉큼 올라오면서 한다는 말이 자기가 잤던 방은 침대가 매우 딱딱했다고 투덜거렸다. 날씨도 제법 좋고해서 놀러갈까나 하고 생각할 무렵 이 기생오라비 일행들이 왔 다.생각해보면 내가 왜 이런 멍청이들과 어울리지않으면 안되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 내가 너무나 마음이 넓기때문이 아닐까. 에메스나 비오나나,이 기생오라비나 덥수룩이나,할 것없이 대체 뭐 하나 마음에 드는 놈들은 하나도 없었다.단지 케엘이 조금 마음에 걸릴 뿐이다. 그런데 난 왜 이 놈들을 도와주지않으면 안되지? 암살당하고 싶다고 가슴을 풀어헤치고 달아오른 심장을 들이내밀고 암살자의 앞 으로 뛰어드는 에메스 자식을 왜 내가 보호해 주어야 하지? 그런 심각한 생각을 내가 하는 동안 스카가 내 앞에 와서 진지한 어투로 말하고 있었다. "...란 말이야!" 순식간에 사방이 조용해졌다. 나는 상념에 빠졌다가 스카의 얼굴을 보고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잘되었군." "뭐가 잘돼?" 스카가 날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잘되었다구.그냥." 나는 그의 이야길 듣지않은 것을 조금 찔려하면서 미소해 보였다. 스카는 머리를 벅벅 문지르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암살자가 돌아온게 잘되었다구? 왜? 그녀석을 그렇게 죽이고 싶었던 거야?" "암살자가 돌아와?" 내가 놀라 묻자 스카는 그제서야 날 노려보듯 바라보면서 투덜거렸다. "또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았군.암살자,동방교국의 암살자가 돌아왔단 말이다.놈 은 아마도 너에게 진 빚을 해결하고 싶어하는 거 같아." "어디서 그런 이야길 들었어?" "북쪽의 용병길드에게서 이야길 들었어.오늘 여행자가 지나가면서 우리집에 들 렀는데 그는 은발의 사내에게 부탁을 받았다는군." "은발의 사내?" "응,웨어울프의 웨인이라고 했다는데." 흐음.. "그,.그럼 주군께서.공작께서 위험하잖나?" 옆에서 놀란 덥수룩이가 외쳤다.그러자 기생오라비도 벌떡 일어섰다. "그래 그렇군.가보자." 나는 관대히 그들을 받아주었다. 스카와 나와 린과 가빈이 짐짝처럼 마차안에 꽉 꽉 들어 차 앉아 있는 동안 물 론 덜컹 거리는 마차는 에메스의 영지로 향하고 있었다. 숨쉬기도 불편하도록 마차 안이 그득했는데 기생오라비가 내 앞에 찌푸린 얼굴 로 앉아있기에 더더욱 불편했다.원래 4인승인 마차에 6명이 탔으니 가득차 불편 할 밖에.아,그러고 보니 이 자리에 덥수룩이도 앉아있다. "부..불편하군.." 덥수룩이가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내가 말을 타고 오겠다고 했잖아!" 기생오라비가 화가 난 어투로 외쳐 말했다. 그러고 보니 잊은 것 하나 더. 기생오라비의 무릎위에는 그의 동생이 오도마니 앉아서 진지한 시선을 마차 바 닥으로 뿌리며 부끄러워 하고 있었다.허긴 그런 자세라면 누구든 부끄러울 것이 다.그러고 보니4인승 마차에 무려 7명이나 탄 거잖아! 나와 가빈이 아담한 크기가 아니었다면 고생을 더 할 뻔한 거 아닌가? "좀 큰 거 가지고 오면 잡아먹냐?" 내가 한심스러워서 말하자 기생오라비가 눈을 흘기며 째려보았다. "분명히 너만 가자고 한 거라구!" "놀고 있군,이 몸이 행차하시려면 몸에 익은 베개나 칼,도구 정도는 가지고 다 녀야 한다는 걸 모르냐? 돌탱아." 내 말에 몸에 익은 '도구'인 스카가 약간 미심쩍은 표정으로 날 흘긋 보았고 몸 에 익은 '베개'와 '칼'은 이미 익숙하다는 듯이 무심한 얼굴로 마차바닥이나 천 정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고 보니 나는 갑자기 엄청난 불균형을 느꼈다. 기다려봐. 이 몸께선 어디까지나 수컷이야. 그렇다면 이 자리에 적어도 둘은 암컷이 있어야 하잖아? 왜 냄새나는 수컷들이 일곱이나 되는,아니 여섯이나 되는 이런 찜통속에 내가 앉아있어야 하는 거지? 갑자기 화가 나기 시작하면서 이 엄청난 불균형에 분노를 느꼈다. "왜 여긴 남자만 이렇게 우글거리는 거냐?" 내가 중얼거리자 옆에 있던 스카가 흘긋 보았다. "네놈 탓이지." "뭐라구?" "네 놈이 맨날 여자를 건드리니 정상적인 여자는 네 이름만 듣고도 멀리 도망가 버리는 탓이지." 히죽 하고 스카가 웃어보이길래 그 녀석 면상을 꾹 밀어 주었다.더이상 피할 데 도 없이 밀폐된 마차안에서 그는 마차 벽으로 달라붙었다. 쿡쿡 하고 가빈과 기생오라비가 웃었다. 그러고 보니 생각나는 게 하나 있었다. "이봐,기생오라비야....이건 너무 길군,기생아." "너엇!" 기생오라비가 벌떡 일어서려는 찰나 마차가 덜컹했다. 그 덕에 녀석은 머리를 마차 천정에 스스로 박는 사건을 벌이고는 바닥에 주저 앉았다.쾅 하는 소리를 봐선 상당히 호되게 부딪친 듯했다. "크으.." 킥킥거리고 다들 웃는 동안 나는 점잖게 물었다. "그 조인족의 계집애는 어찌되었냐?" 기생오라비의 눈매가 샐쭉해진다.녀석은 당장이라도 날 잡아먹을 얼굴로 쏘아보 면서 마차 바닥에 앉은 채 낮게 되물었다. "그건 왜 묻지?" "음.잠잠하니 궁금해서.게다가 남자만 들끓는 생활을 청산하고 어떤 예쁜 애라 도 하나 들일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 "크악!" 기생오라비가 내게 팔을 뻗으면서 괴이한 소리를 내질렀다. 녀석은 내 멱살을 잡아 흔들면서 이 작고도 갸날픈 몸을 이리저리 흔들어댔다. 허엇 하고 내가 녀석이 날 뒤흔드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동안 문득 스카 를 비롯한 녀석들 모두가 멀뚱거리며 나를 바라본다는 것을 깨닫고 화가 치밀었 다. "야. 다들 보기만 하고 있는 거냐!" 그러자 가빈이 히죽 웃으면서 대꾸했다. "하지만 이 정도의 기생오라비에게 다칠 쿠베린님이 아니잖아요?" 홱 하고 기생오라비가 시선을 가빈에게 돌렸다. "너도 날 기생오라비라고 불러!" 그가 크아악 하고 브레스를 뿜어대는데 가빈은 그 특유의 동그란 눈으로 되물었 다. "어라? 원래 이름이 기생오라비 아니었던 가요?" KUBERIN........... 바람이 쏟아지는 위험한 벼랑가에 핀 꽃이 가장 아름다운 까닭은 무엇인가 잡을 수 없는 꿈들이 가장 안타까운 이유는 무엇인가 2 나는 생각이 너무 깊다. 그것이 아마 다른 자들처럼 쉽게 수준을 낮출 수 없는 원인일 것이다. 그 까닭에 나는 멍청히 지금 입만 벌리고 있는 수컷들을 양쪽에 거느리고 서 있 는 것이다. 그녀는 두 손을 모으고 흰 공단 드레스를 걸친 채 앉아있었다. 잠깐,공단..공단이 맞나? 어쨌든 그녀는 그렇게 아리따운 모습으로 앉아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주변으로 입을 적적 벌린 사내들이 널려있었다.그녀가 손짓이라 도 하면 당장에 모든 것을 그녀의 발밑에 집어던지고 꼬리를 치려는 듯이. 아,잠깐,인간은 꼬리가 없었지.뭐 그래도 꼬리가 있었다면 이미 치고 있었을 것 이다. 나는 어떻게 그녀를 생각하냐고? 음,음..아름답고 말고.아름다우니까 내가 이렇게 딴 생각을 줄줄이 하면서 묘사 를 하고 있는 것이겠지. 그녀는 한쌍의 흰 날개를 붕대로 감고 마치 상처받은 작은 새-도저히 내 입으로 는 작은 새라 부를 수는 없다.그녀는 인간만한 크기니까 새로 본다면 엄청나게 큰 새일 것이다- 처럼 새초롬히 앉아서 길고 곱상한 속눈썹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녀의 뒤로 조인족의 이 타고난 아름다움을 질시하지 않는 척하는 비오나가 우 아한 미소를 억지로 지으면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쿠베린님." "아아." 나는 아래위로 그녀들을 바라보고는 비오나에게 엄중히 경고할까 하고 망설였 다. 조인족의 여자랑 같이 앉아있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 하지만 그녀가 마음넒은 여주인의 역할을 자랑스레 하고 싶다면 뭐 나도 굳이 그녀에게 충고를 할 필요는 없었다. 에메스의 자랑인 이 인공의 정원은 여전히 둥근 크리스탈 도움으로 덮혀서 사방 에 온갖 종류의 꽃을 피워내고 있었다.그 중에는 마잉꽃밭도 물론 풍성히 피어 있었다.시도 때도 없이 피고 있군 생각하니 왠지 화가 치밀어오른다. 게다가 갑자기 생각나는 녀석이 있어서 보랏빛이 도는 마잉꽃밭에 들어가 사정 없이 짓밞아 주었다. "뭐 하는 거야?" 기생오라비가 나의 발치를 쏘아보면서 물었다. "아,꽃이 있었군." 나는 모른 척하고는 꽃밭에서 걸어나왔다. 조인족의 여자는 나를 불안하게 바라보면서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그래.별로 안녕하진 못해." 퉁명스레 말하곤 나는 내 다리에 달라붙은 마잉꽃물이 얼룩진 꼬락서니를 바라 보았다.바지 자락에 달라붙은 보라색 얼룩들은 지나치리만큼 선명하게 보였다. 괜히 짓밞았다 하는 생각이 들자 내 자신이 너무 바보스러워져서 화가 났다. "옷을 갈아입으시겠어요?" 비오나가 내 바지자락을 보면서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젓고 그냥 그대로 정원 난간에 걸터앉아서 두 여자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기로 했다.별로 손대고 싶지않은 두 사람이지만 이렇게 보고있자니 눈 만 은 충분히 즐거운 데가 있었다. "왜?" "국왕폐하의 내친왕이신 알렉트라 님의 결혼식이 보름 앞으로 다가왔기에 성에 가야 해요.가서 이런 저런 일을 하지않으면 안되는 거지요.에메스는." 비오나는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래서?" "제가 같이 가고 싶지만 이 조인족의 아가씨때문에 갈 수가 없어요.이 아가씨를 진정시켜야 하니까요." "미안해요.정말." 이 조인족 아가씨는 사양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인간에 대한 불신감을 또렷하게 표현하면서 비오나가 없으면 불안해서 견딜수 없다는 듯한 얼굴이었다.그 때문에 비오나가 저 사랑해 마지 않는 빌어 먹을 놈의 에메스 초 바람둥이 돌탱이 자식을 돌볼 수가 없다는 것이겠지. "흐음.." 내가 머리를 긁적이자 그녀는 날 흘긋 보면서 상냥하게 말했다. "하지만 쿠베린님도 계시고 하니 저번 처럼 잘 지켜주시리라 믿어요.암살자가 오더라도 말이에요." 난 갑자기 그 여유있는 얼굴이 미워져서 솔직히 말해주기로 마음먹었다. "이봐,비오나.한가지 충고하겠는데.에메스 그 자식은 바람둥이야." "알아요." 비오나는 의외로 단번에 인정해 버렸다. "헤에,.알고 있나?" "알아요.하지만 사랑하니 방법없죠." "엘프인 네가 사랑해 주는데 그걸 모르고 바람을 피는 것을 용납해준다는 거 냐?" "용납이 아니고 그냥 보고 있을 뿐이에요.나는 인간인 그를 사랑하는 거니까 그 가 사랑하는 방식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해요." 엘프는 정조관념이 고지식한 종자다. 비오나는 엘프중에서도 드물게 변신 엘프이고 변신엘프의 수가 아주 적은 것을 생각한다면 그녀가 에메스 곁에 와 있는다는 것 자체가 아무 파격적인 일인 것 이다. 음,변신엘프가 뭐냐면 변신하는 엘프다. 언뜻 들으면 별 거 아닌 거 같지만 마법의 별다른 힘 없이 스스로 변신하는 존 재란 그다지 흔한 것이 아니다.대표적인 우리들 묘인족이 있지만 변신족에는 사 인족과 조인족,그리고 이 변신 엘프가 있다. 엘프종족중에서 땅의 엘프는 그다지 아름답다고는 볼 수 없는 녀석들로 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뾰족한 귀와 거의 콧등도 없는 코와 넙죽한 입과 짜리몽땅한 체 구를 가지고 살아간다.그 주제에 엘프중에서 가장 힘은 세서 드워프와 엇비슷하 다.이 놈들은 주로 땅을 파거나 동굴에 무리를 지어 사는데 선물 주는 것과 친 구 사귀는 것을 좋아하는,엘프중에서도 이질 적인 놈들이었다. 얼마전 만난 땅의 엘프의 왕은 그렇지도 않았지만 말이다. 그리고 일반적인 개념의 엘프가 있다. 카산이나 그 색마 울보 녀석들이 바로 그런 종류였다. 그들은 왕국을 이루고 인적이 드문 북쪽이나 그린란드 에서 결계를 치고 나름대 로의 왕국을 이루며 살아가고 있다.흔하니까 뭐 그리 희귀할 것도 없는 존재다. 그리고 이도 저도 아니고 인간세와 엘프계를 오락가락 하면서 지내는 것이 변 신엘프이다. 변신엘프는 그 수가 얼마인지 아무도 모른다.새로도 변하고 혹은 야수로도 변하 는데 혼자 지내기를 원래 즐기는 데다가 일반 엘프와 달리 숲에서 살아서 숲의 엘프라고 불리는데 그 강한 마법력으로 엘프중의 마법사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나는 긴 말을 하지않고 턱을 괴고 성벽을 올려다 보았다. 담장이 덩쿨이 줄지어 올라가 파랗게 덮은 누런 빛이 도는 성벽을 보고 있는 동 안 갑자기 그 담장이 덩쿨이 매우 수상한 느낌이 들었다.그렇군 ,몸이 잽싼 놈 이라면 저 담쟁이를 쥐고 벽을 탈 수도 있을 거야. 나는 가빈을 흘긋 보았다.녀석은 내가 매서운 시선을 던지자 긴장했다. 저 놈이라면 아마 기어오를 수 있을 지도... 가빈 자식이 할 수 있다면 저 잘난 척하는 암살자 녀석이 못할 리는 없다.그렇 다면 성 꼭대기에 에메스놈을 가두어 두어도 안전한 것은 아니란 이야긴데...흐 음... 암살자에게서 완벽히 보호한다는 것은 암살자를 먼저 죽이거나 아님 암살자가 죽이려는 대상을 미리 죽여버린다던가 하는 것외에 완벽한 방법란 없다.그러나 지키는 주제에 설마 후자를 택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가? 감옥에 가두어 버리는 것이다. 아니면 내 전용 베개나 난로로 쓰던가. 하,그러고 보니 지금은 여름이다.저런 자식을 끌어안고 자는 취미는 없단 말이 야.녀석은 가빈처럼 아담사이즈도 아니고 스카처럼 내가 잘때까지 기다려 주는 녀석도 아닌 오만 방자한 애교없는 돌탱이 그 자체다. 내가 이렇게 심각한 얼굴을 하면서 생각에 빠져있는데 정작 본인인 에메스가 느 끼한 자세로 다가왔다. "여어.왔나?" 억지 웃음같은 것을 짓고,어떻게 보면 누군가-십중 팔구는 조인족 아가씨 셀레 네이다- 를 의식한 듯한 화려한 차림새에 두 팔에는 노랑 나리꽃을 가득 안고 등장한 에메스는 등장하자 마자 덜쩍지근한 꽃향기를 사방에 풍겼다. 셀레네는 그가 등장하자 약간 우물 했다. 에메스 녀석이 생각하는 바를 그녀도 알고 있으리라.그러나 더러운 인간족과는 몸을 섞으려는 마음은 생기지않았을 것이다. "받아요.셀레네님." 에메스가 나리꽃을 다발 다발 안아 그녀에게 안겨주었다. 이 자식은 여기다 할렘을 차릴 건가! 내가 점점 아니꼽게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일그러지는 오스칼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비오나는 담담한 표정을 오랜 연륜과 암컷다운 품위로 만들어내고 있 었지만 오스칼은 역시 짧은 연륜과 수컷다운 경박함으로 표정은 담담해 질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흐음." 에메스는 느끼한 자세로 금발머리를 뒤로 넘기며 셀레네의 옆에 앉았다.셀레네 는 옆으로 조금 이동했고 그 것을 보는 오스칼의 표정은 착잡했다. 허긴 셀레네란 이 계집애를 줏어온 것은 다름아닌 이 기생오라비가 아닌가. 비오나는 그런 자신의 애인의 행위에도 태연자약했다.그 때문에 이 에메스자식 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느끼한 눈빛을 사방 여자에게 뿌려대는 것이리라. 나는 갑자기 딸 가진 부모 마음을 이해했다. 그럼,.그럼.마루투,이제야 이해가 간다. 너도 색마에게 딸내미를 빼앗기고 눈이 돌아갔던 게지.지금 나도 내 딸내미는 아니지만 이 눈앞에 있는 멍청하고 어리석고 한심스런 엘프계집애때문에 열이 점점 치솟아 오르고 있다. 어떤 빌어먹을 계집이 바람피는 애인을 멀뚱거리며 바라보고만 있단 말인가. 대저 수컷이 바람을 피우면 암컷은 사정없이 짓밟아 주어야 하는 법이다.음,그 렇고 말고.만약 그렇게 하지 못하면 암컷의 매력은 십분의 일,아니 백분의 일로 감소되는 법이다. 나는 이렇게 아비가 된 마음 가짐으로 손을 뻗어서 에메스 자식의 뒷덜미를 잡 아 당겨서 난간에서 끌어내렸다. "아! 뭐하는 거야!" 이 작고도 날렵하며 아름다운 소년시기의 쿠베린님의 몸보다 머리 두개는 큰 에 메스의 덩치를 손가락 두개로 지탱하면서 꽃밭을 한바퀴 횡단하듯이 끌고 다녔 다. "놔아!" 발버둥 쳐봐야 무슨 힘이 있겠나? 뒷덜미를 잡으면 손도 닿지않고 그저 사지를 버둥거릴 수 밖에 없는 것이다.모 든 짐승이 다 그렇고 인간도 예외는 아니다.에메스는 내가 쥔 목덜미의 셔츠를 벗으려고 발버둥을 쳤고 나는 그를 질질 끌어서 꽃 밭 한가운데 던져놓았다. "이 자식! 쿠베린!" 에메스가 악을 지르면서 사지를 버둥거리며 겨우 일어나 앉았다.모처럼 입은 호 화로운 셔츠들이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 것에 화가 난 건지 그는 벌떡 일어났지 만 나에게 덤비는 것 같은 그런 무모한 짓은 감히 하지않았다.단지 부들 부들 떨 뿐이었다.본인도 내가 얼마나 힘이 센지는 잘 알고 있을 테니까. 내가 손을 탈탈 터는데 의외로 기생오라비가 평소와 뒤늦게 격분의 기세를 보였 다. "무슨 짓이냐!" 한 템포 늦은 것을 보아 녀석도 내가 한 행동에 놀라면서도 그다지 화가 나지않 는 모양이었다.허긴,네 주제에 해가 서쪽에서 뜨고 네 엉덩이로 알을 낳아도 절 대로 에메스의 덜미를 나처럼 잡아 끌어 집어던질 수는 없을 게다. "그,..그건 그렇고.." 비오나가 당혹한 목소리로 날 바라보았다. 그녀는 내가 자신을 아비된 마음으로 바라본다는 것을 눈치챈 것인지 볼이 발갛 게 변했다.어쩌면 웃음을 억지로 참는 것일지도 모른다. "저기..그 사인족이란 종족에 대해선 뭔가 아시는 것이라도?" 그 말이 나오자 조인족의 아가씨는 움추러 들었다. "곧 비가 올 거 같습니다." 갑자기 린이 입을 열었다. 아,그래,이 녀석들이 있었군. "이제 안으로 들어가시죠." 비오나가 하늘을 올려다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다들 슬금 슬금 안으로 들어가 려는데 스카가 걸음을 멈추고 팔짱을 끼더니 나에게 말했다. "난 음유시인의 노래터에 가 있겠어.그리로 와라.쿠베린." "빌어벅을 주정뱅이의 노래터?" 스카는 더 이상 내게 말하는 대신 내 머리칼을 한 웅큼 움켜쥐고는 이리저리 흔 들었다. "이 자식이!" 내가 막 화를 낼 즈음 스카는 재빨리 손을 떼고는 휘휘 두 손을 내 저어보이면 서 내게 물었다. "그래,쿠베린,화났냐? 그래서 날 때릴 거냐?" 나는 음산하게 녀석을 꼬나 보았다. 이 스카녀석은 간덩이가 부어 배 밖에 튀어 나왔다. 아무리 20년간 같이 지낸 사이라고는 하지만 나에게 이렇게 하고도 멀쩡한 인종 은 이 녀석과 마미뿐이다.나는 대답대신 녀석에게 한 걸음 다가들어서 녀석의 다리를 잡았다. "어?" 하는 순간 나는 그녀석의 바지를 홀라당 잡아 당겼고 스카는 으악 소리를 내면 서 주저앉으면서 바지끄댕이를 붙잡았다. 동그란 엉덩이와 털이 부숭 부숭난 다리가 송두리채 드러났다. "어마나!" 셀레네와 비오나가 시선을 돌렸고 다른 자들은 피식 피식 웃고만 있다. 스카는 벌개진 얼굴로 원한에 사무쳐서 날 쏘아보더니 흥 하고 바지를 추켜 세 운 뒤에 중얼거렸다. "어린 놈!" "곰탱이!" "변태놈!" "변태 끌어안고 잔 놈!" "변덕이 죽 끓듯하는 잠탱이 고양이!" "길가에 던지면 돌멩인줄 알고 모든 자들이 짓밟는 말똥구리같은 놈!" 가빈과 기생오라비,덥수룩이와 그리고 쪼만한 라덴과 에메스는 배를 잡고 대굴 대굴 구르고 있었다. 스카는 노려보았다. 그리고는 벌개진 얼굴로 입술을 꾸욱 다문 채 점잖게 걸어갔다. 음음..패한 것을 알고 사라져가는 패장의 뒷 모습은 얼마나 비장한가.. KUBERIN........... 바람이 쏟아지는 위험한 벼랑가에 핀 꽃이 가장 아름다운 까닭은 무엇인가 잡을 수 없는 꿈들이 가장 안타까운 이유는 무엇인가 3 나는 희생의식이 투철한 몸이다. 이 가엽고도 어처구니 없는 엘프의 도움이 되기 위해 나는 기꺼이 희생을 치르 기로 마음먹었다. "셀레네,이야기좀 할까?" 셀레네는 눈이 동그래져서 나를 바라보았다.그러나 그녀의 얼굴에는 기생오라비 나 에메스등을 대하던 그런 어색함은 있지않다.그녀도 내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 은 잘 알고 있는 터이다.그러나 내가 묘인족인지 알고 있다고는 볼 수없었다. 아마 알았다면 비명을 올리고 말았겠지만 그녀는 아직 어리니 묘인족을 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기생오라비가 궁금한 듯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안에는 경계의 기색이 완연했다.그렇겠지,나라도 경계할 것이다.나같이 잘난 수컷이 갑자기 다가선다면 당연 수컷으로서 긴장할 밖에,만약 긴장하지않 는다면 그건 수컷으로의 기능이 마비되었다는 증거다. 나는 셀레네에게 손을 뻗었고 그녀는 내 손을 거침없이 잡았다. 아마 그녀의 태도로 보아 나를 엘프..비스끄무리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모양 이었다.내 귀는 뾰족하진 않지만 말이다. "이리로." 나는 그녀를 잡아 당겨 저택안으로 이끌었다. 어리둥절한 녀석들이 일제히 내 뒤를 따라왔고 나는 엄숙히 그들을 돌아보며 말 했다. "이야기좀 할 테니 따라오지 마!" 웃 하고 특히 기생오라비가 정색하고 날 바라보았다. 덥수룩이는 그런가 하는 멍멍한 얼굴이고 가빈과 린은 부루퉁한 기색이었다.비 오나는 얼룩덜룩해진 에메스의 옷자락을 돌봐주느라 날 보면서 의아한 시선을 던졌을 뿐이었다. 셀레네는 내 손을 잡고 방안으로 들어섰다. 얼마전 그녀가 머물던 방이기에 전혀 거리낌 없는 태도였다.그리고 어쩌면 이 아가씨는 세상 물정을 모르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나에게 호기심을 가득 담은 눈동자를 돌리면서 의자에 앉았다. 나는 팔짱을 끼고 그녀를 바라다 보았다. "무슨 일이세요?" 그녀가 물었다. 나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입을 열었다. "궁금한 게 하나 있어서." "네?" "혹여 약혼자가 있나?" "에?" 그녀의 얼굴이 발갛게 변했다. "아..아뇨," "그럼 혹여 인간의 남자와 사귈 마음이 있어?" "에?" 눈이 커진다. 그녀는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입을 손으로 가리고는 비난의 시선을 나에게 던졌다. "무슨 소릴 하는 거에요? 인간의 남자라니!" "그래.알고는 있었어,인간의 남자와 사귈 수는 없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나랑 사귀도록 하자." "네?" 그녀의 얼굴이 달아올랐다.분노와는 조금 다른 기색이라 나는 안도했다. 그녀는 얼굴을 잡으면서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태도로 날 쏘아 보며 물었다. "무슨 뜻이에요?" "말 그대로의 뜻이야."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녀의 맞은 편에 앉아서 나는 진지하고 엄숙한 얼굴을 해 보였다. 물론 이 미소년시기의 나의 얼굴로 진지하고 엄숙한 얼굴을 하긴 어렵지만 이 여자애앞에서 갑자기 어른 모습으로 화한다면 기절할 지도 모르기때문에 자제하 기로 했다. "이 곳에선 여자가 혼자 지내기가 쉬운 일이 아니거든,인간의 남자들은 모두들 여자가 혼자있으면 매달리고 달라붙는다.마치 꿀에 매달리는 벌레들 처럼 말이 야." 그녀는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그럼,.." "그래,내가 보호해주겠다는 의미다." 수컷을 욕하지 마라. 원래 수컷의 의무는 암컷을 유혹하는 것. 난 생긴대로 할 뿐이니까.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진지한 얼굴이 되었다. "그렇군요..인간의 남자는 원래가.." "그렇지." 나는 근엄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앞으로는 내 손을 잡고 다니도록 하는 거다.그리고 다른 남자들이 주절거리고 말을 걸거나 하면 내 옆으로 와 바쩍 서는 거야.그럼 전혀 문제가 되지못하지." "아..그런.." 그녀는 순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진지하게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고 말했다. "어찌되었든 네가 네 종족에게 돌아가는 동안까지는 내가 책임을 지고 지켜주 마.그러니까 인간의 남자에게 조심하도록." "네에."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암컷의 의무는 무엇인가. 수컷이 어설프게 유혹해도 넘어가는 척 할 것. 그게 암컷의 아량이거든. "좋아,그럼 일단 이런 저런 이야길 먼저 하지.에메스란 그 녀석 봤지? 꽃들고 나타난 녀석," "네,인간의 공작이란.." "그래.공작이란 놈인데 비오나의 남편이지." "네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어째서 고귀한 엘프가 인간의 남자와 결혼한 것일까요?" 나도 고개를 저었다. "그게 바로 인간의 남자의 문제지.그저 여자가 있다면 엘프든 조인족이든 드워 프든 가리지않고 유혹하거든." 그녀는 어마 하고 입을 손으로 가리며 날 바라보았다.그녀의 얼굴이 정색이 되 었다. "그럼..그녀도?" "그렇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불행히도 그녀도 유혹에 넘어간 거지." "안되었군요." "일단 유혹에 빠지면 본인은 모르지.옆에서 보면 어리석은 일이라 말하고 싶지 만 알아듣지도 못하고 말이야." 그녀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너 같이 순진한 아가씨는 아주 위험하단 말이야.너의 주변에 있는 남 자들은 몇이나 되는 지 알아?" "아..네에..친절한 오스카님과 ..덥수룩한 로크님과..물론 에메스님도.." "허..그렇지,모두들 이상한 마음이 있기때문에 친절한 거라구,나처럼 아무 생각 이없다면 친절하게 알랑거릴 이유는 없지." 나는 가슴을 펴고 말했다.그녀는 날 똑바로 보면서 주먹만한 눈을 깜박였다. "아..그렇군요." "그러니까 조심하도록 해라.인간의 수컷들은 여자들에겐 그다지 좋은 놈들이 아 니야." "어떤 데요?" "음,.이쁜 여자를 마음대로 하려고 하지,만일 자기 맘대로 안된다면 강간도 한 다." "악!" 그녀는 새파랗게 질려서 뒤로 물러나 앉았다. "설마!" "설마가 아냐.인간의 수컷들은 강간도 한다니까." "믿을 수 없어요! 어떻게 그런 ..짓을!" 그녀는 두 손을 꽈악 쥐고는 바들 바들 떨었다. 충격이 큰 모양인가? "어..어째서 그런 짓을 하죠? 엘프들이나 우리 종족에선 그런 짓을 한다는 이야 긴 들어본 일이 없어요!" "음,하다못해 사인족도 그런 짓은 하지않아.그러나 인간은 하지." 나는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왜죠? 왜 그런 짓을 해요? 인간족은 여자가 모자란가요?" "그런 건 아냐.네가 보기엔 인간의 수컷은 매력이 없기때문인거 같아." "에?" "모든 수컷들은 성공적으로 암컷을 유혹해야 하지,만약 못하면 선택받지 못하거 든." 그녀는 눈이 동그랗게 된 채 나의 강의에 집중하고 있었다. 나도 내 자신의 말에 취하고 있었다. 나는 정말로 말을 잘한단 말야! "그런데 인간의 수컷들은 유혹이 실패하면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 하고 완력을 쓰는 거야.완력을 쓰고 자신이 잘났다고 외치는 거지." "말도 안돼!" 그녀가 분개했다. "물론 말도 안되지.그러니까 인간은 부족하다고 말하는 거야.대저, 암컷을 힘으 로 정복했다고 잘난 척하는 놈들을 수컷이라 부를 수 있냐?" "짐승!" "짐승은 그런 짓하지않아." "그..그럼 뭐라 하죠?" 그녀가 당황했다. "가볍게 말해서 괴물이라 말하지.아니다.괴물이 들으면 화를 내겠다..하여간 그 런 괴이한 놈들이 많아요." 나는 손가락을 흔들어 보였다. 내가 아는 여자만도 이상한 인간 수컷때문에 우는 여자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음 끄덕 끄덕 ... "그럼..조심해야 겠군요." "그래,왠만해선 절대로 인간수컷과 단둘이 있지마.물론 너 혼자 있는 것은 절대 로 금물이다." "그럼 ..?" 그녀가 조심스레 날 바라보았다. "나랑 같이 있거나 그도 안되면 너에게 린을 붙여주마.청색아인족이라면 믿을 수 있겠지?" "네." 눈에 띄게 안도한 얼굴이 된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고 나는 툭툭 쳐 주었다. "그럼 너도 이제부터 고생길에 들어섰다.인간과 어울려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 니니까." 나는 그녀의 이마에 키스해 주었고 그녀는 주먹을불끈 쥔채 의지력이 담긴 눈 으로 날 올려다 보았다. "앞으로 에메스의 뒤를 따라서 우린 황궁으로 간단 말이다.너도 따라올 거냐?" "쿠베린님의 뒤를 따라갈래요." "음,좋은 마음가짐이다.따라오너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 귀찮긴 하지만 이쁜 암컷하나 데리고 다닌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나는 매력적인 미소를 그녀에게 던져보이곤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그녀는 눈 을 동그랗게 떴지만 화를 내는 대신 발갛게 붉어진 얼굴이 되었다. "어찌되었든 내 뒤에 꼭 붙어있도록하고 네 종족을 찾아가는 시간을 줄여보자." "네." 흐흐흐흐.. KUBERIN........... 바람이 쏟아지는 위험한 벼랑가에 핀 꽃이 가장 아름다운 까닭은 무엇인가 잡을 수 없는 꿈들이 가장 안타까운 이유는 무엇인가 4 "전부터 생각하던 일인데." 스카가 말했다. "뭔데?" 나는 맥주를 들이키면서 나에게 맥주를 가져다 주는 귀여운 보조개를 가진 아가 씨에게 윙크를 던졌다. "넌 너무 지나친 바람둥이야." 나는 어깨를 으슥했다. "이 몸이 잘나서 그렇다니까." "죽어라." 스카는 풀 죽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곤 눈앞에 있는 베이컨을 주워 씹었다. 탁탁 소리나면서 불꽃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난로의 불속에는 무쇠솥이 흔들리면서 음식냄새를 사방에 펼쳐내고 있었다.나는 저 '빌어먹을 시인의 악쓰는 터'에서 맥주를 한잔 들이키고 있던 차였다. 여전히 이 가게엔 사람이 없다.허긴 전혀 매력적이지 못한, 인상 더러운 은퇴한 용병과 그의 마누라가 경영하는 이 좁아 터진 가게에 누가 그렇게좋다고 찾아 올 것인가. 나같은 마음 넓은 분이나 스카가 앙앙대고 조르니 올 밖에. 아마 스카도 이 곳에 오고싶진 않았을 것이다. "알아봤어?" 스카가 어느샌지 모르게 다가온 이 집의 인상 더러운 주인장이자 자신의 매부인 코스루였다.그는 앞에 어울리지않게 피묻은 앞치마를 두르고는 거대한 주먹을 허리에 척 얹고 나를 흘긋 거리며 바라보고 있었다. "알아봤다." 코스루는 그렇게 말하곤 내 앞에 털썩 앉았다. "델리암의 남부 성채의 안네아가 무너졌단다." "헤에에...안네아가?" 내가 눈을 크게 뜨자 스카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벌렸다. "상대는 누군지 모른다고 해.안네아의 전 주민 오백칠십여명이 모조리 몰살되어 었고 성채는 불살라졌다.그리고 그 일대에서 더이상 들어온 소식은 없어." "흐음.." 스카가 날 흘긋 보았다. "여행자가 그 곳에 갔다가 발견한 바에 따르면 안네아의 주민들은 몸을 갈기 갈 기 찢겨진 상처투성이라고 했다.그리고 무너진 것은 아마도 하룻밤 사이가 아니 었을까 한다." "으음..하루라니..쿠베린,이건.." "인간이 날고 기어도 그렇게는 못하겠지.." 나는 턱을 괴고 중얼거렸다. 코스루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알고 있는 게 있나? 델리암 용병길드연합은 곧 회합이 있을 거야." "하지만..안네아만이 아닐걸." 내가 중얼거리자 코스루가 날 노려보았다. "안네아 만이 아니라면?" "적어도 안네아 만이 아니라..유슈와 에필도 .." "거기는 인구가 천여명이 넘어.그런 곳이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질 수는 없다. 안네아와는 다르지." "알수 없는 일.녀석들이 만일 이쪽으로 치고 올라오는 중이라면 유슈와 에필이 멀쩡할 리가 없어." 침묵이 퍼졌다. 현역에서 물러나 지금은 정보수집을 전문으로 하고 있는 코스루는 팔짱을 끼고 심각하게 탁자 끝을 바라보고 있었다.그래봐야 탁자는 탁자다. "놈들을 어떻게 하면 막지?" "몰라.인간들의 병단으로 얼마나 막을 수 있을지 나도 모른다." "무책임하다.쿠베린." "그런 그러나 별수 없어.모르는 건 모르는 거다." 스카는 턱을 괴고는 날 바라보았다. "설마하니 그 조인족이 너보다 강한 건 아니지?" "당연히 아니다." 나는 그를 쏘아보았다.이 자식이 언제 내가 제대로 싸우는 것을 보기나 했나? "그럼 너와 비교할 때 조인족은 어느정도야?" "흐음..나라면 조인족을 한번에 한..오십명정도 감당할 수 있어." "헤에.." 스카는 눈에 띄게 안도한 얼굴을 했다.그러나 나는 점잖게 말을 이어주었다. "하지만 나라면 인간을 약 오륙백명 감당할 수 있어." 스카의 얼굴이 다시 창백해졌다.코스루는 나를 쏘아보았고 나는 그의 시선을 마 주 받으면서 어깨를 으슥했다. "인간은 조인족 하나를 상대하려면 아마 백여명 필요할 걸." "너.." 스카가 가볍게 이를 갈았다. "저 조인족 아가씨를 보았지? 생긴건 그렇게 생겼어도 조인족 전사는 사인족전 사와 맞먹는다는 걸 알아야지.그런 조인족이 하룻밤 사이에 몰살당했다면 사인 족 놈들이 뭔가 다른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야 한다구." "으음.." "그런데다가 저 멍한 아가씨는 아무 생각이 없단 말이지.사인족이 어떤 무기를 가졌나 하는 것도 아무것도 몰라.그러니 더더욱 조심해야해." 침묵이 무겁게 흘렀다. "맥주 한잔 더 드려요?" 잔느가 미소를 지으면서 내게 다가왔고 나는 그래 하고 대답했다. 그 때 문을 열고 한 사내가 들어섰다.은발에 먼지투성이의 여행자의 차림새를 한 사내다.키가 훌쩍 커서 한 눈에 그 몰골이 들어왔다. 내가 눈을 크게 뜰 때 그는 비시시 웃더니 내 앞으로 걸어왔다. "오랜만이야.쿠베린." "그렇군.앉아라." 은발의 사내는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그는 생긴 것 답지않은 온후한 손으로 점잖고 자세 바르게 앉았다.잔느는 그를 보자 마자 시키지도 않은 맥주를 그의 앞에 갖다 놓았다. 그의 노란빛이 도는 갈색눈은 여전하다.전보다 조금 안색도 좋아진 거 같지만 이 우울해서 접시물에 코를 박을 웨어 울프는 워낙 감정기복이 심해서 일일이 감당하기란 편하지않다. "그래,알려줘서 고맙긴 한데 너 암살자 소식은 어찌알았냐?" "아.그 녀석을 만났거든." 웨인은 여전히 침착하게 말했다.그는 맥주잔을 들어서 조금 입에 대고는 빙긋 웃어보였다. 아쭈,웃어? "직접 만났다니? 그러고도 놈을 살려줬어?" "무슨 소릴.너랑 원한이 있는 거지 나랑은 없잖아." "....." 내가 녀석을 노려보고 있는 동안 스카가 웨인을 궁금한 듯이 바라보며 물었다. "전에 만났었던가?" "아니.만난 적은 없어." "으음..웨인이라고? 쿠베린의 옛친구?" "응.한 오십여년전쯤에 몇번.." 그는 그렇게 말하곤 얼어있는 스카를 아랑곳하지않고 날 바라보며 물었다. "그건 그렇고 왜 공작을 지키지 않고 여기 있어? 암살자 훈은 꼭 그를 죽이겠다 고 이를 갈던데." "지금은 린이 붙어있어." "음.린이 어떤 놈인데? 인간이야?" "아냐.인간이면 믿을 수 없지.청색아인족이야." "호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곤 나를 향해 물었다. "그 사인족은 어쩔거야?" "어쩔거긴." "죽일거냐 살릴 거냐.갑자기 그렇게 세력을 확장한 건 문제가 크다구,여기저기 수인족들 사이에서도 불만이 튀어 나와." "너희 수인족들은 맨날 숨어사는 주제에 왠 불평불만이 그렇게 많냐!" 그는 쿡 웃었다. 아쭈,이 자식 잘 웃네. "하여간 묘인족의 왕,얼른 사인족을 해결해줘.귀찮단 말이야." "너도 좀 스스로 나서는 게 어떠냐?" "난 혼자인걸." 그 얼굴에 한 방 먹일까 하다 관두었다.왠지 이 녀석은 굉장히 불쌍한 데가 있 어서 손을 댈 마음이 되지않는다. "델리암 왕궁은 조용해?" 문득 내가 묻자 코스루와 웨인 둘다 침묵했다. "지금 베델 공작녀석과 왕궁에 가야해.귀찮아 죽겠지만 약속은 약속이니 별 수 없는데 거긴 뭐 다른 일 없대냐?" "왕녀 엘란트라의 결혼식에 가는 거지?" "그래." "소문에 의하면 엘란트라왕녀는 자기 호위병과 사랑의 탈주를 벌였다가 잡혔 대." "엑!" 내가 맥주를 마시다 말고 웃 하자 코스루는 그 웃기는 사항을 웃지도 않고 지껄 였다. "가보면 알겠지만 결혼식 풍광이 썰렁할 거다.왕녀는 그 결혼을 매우 싫어했다 는군.왕이 강제로 강요한 거란다." "대체 누구와 결혼하는데?" "누구긴,저 화이딘스 대공의 아들인 헤스룬백작이지." "헤에..정략인가.." "응,헤스룬은 지독한 바람둥이에 더러운 놈이라 여자들은 다 싫어한대." 나는 어깨를 으슥했다. "인간이란..끌끌.." 밤공기가 상쾌했다. 약간 더웠었지만 지금은 먼지도 가라앉고 인적도 드물어 사방은 고요했다. 내가 가장 즐기는 일 중에 하나인 이 남의 지붕 걸어다니기 혹은 뛰어다니기는 참으로 매력적인 일이다. 다른 사람이 아무도 없기에 즐겁고,한편으로 말하면 또 탁 트인 경관을 즐길 수 있어서 즐겁다.나는 휘익 휘익 날아오르면서 주변을 훑어보았다. 정말 에메스자식이 자랑할 만큼 번성하는 이 아그랑은 확실히 다른 델리암의 도 시들 보다 활기차고 화사했다.지붕은 다들 단단했고 굴뚝은 연신 연기를 내뿜고 있다.온갖 작자들이 다 모여 있기때문인지 집집마다 색깔이 다르고 색상이 다르 다.멋지다. 그 치솟은 베델공작의 저택을 바라보면서- 가히 성이라 부르고도 남을 이 저택 을 바라보면서 내가 지붕을 처억 넘자 여기저기서 갑자기 누구냐 하고 외쳐대며 화살이 날아든다. 한 개 화살이 귓바퀴를 스치고 지나갔고 한두개는 잡아챘다. 그리고 유유히 성안에 내려서자 악을 지르면서 병사들이 날 포위했다. 이 정도면 나쁜 것은 아닌데 하고 생각할 무렵 갑자기 고함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만!" 그 소리를 지른 것은 병사들의 뒤에서 나타난 녀석이었다. 그녀석은 식식 하고 앞으로 내딛더니 날 쏘아보며 말했다. "왜 문을 놔두고 지붕으로 걸어와서 헷갈리게 하는 건가!" 헤에 하고 녀석을 보니 녀석은 심각하게 얼굴을 구긴 뺨에 흉터를 가진 녀석이 었다.이름따윈 기억나진 않지만 그 냄새는 기억에 있었다.분명 얼마전에 에메스 녀석을 지키는 기사들 중 하나였다. "아아.경비태세를 알아보려고." 내가 시익 웃자 그는 날 쏘아보더니 이를 가볍게 갈았다. "얄미운 소릴 하는 거 보니 네가 맞군! 얼른 들어가!" 병사들은 쳇쳇 하고 나를 쏘아보면서 괜히 소동 쳐서 분한듯이 궁시렁 거리며 제 자리로 돌아갔고 흉터녀석도 제자리로 돌아갔다.병사들의 발걸음이 잽싼 것 을 보니 경비태세도 제법 괜찮고 훈련도도 괜찮은 듯했다. 그래..허긴.. 그러고 보니 델리암내에서 가장 정병을 많이 소유한 베델이 아니던가. 생각해보면 너무 무시해선 안될지도 모른다.아니,무시해서 안될거라기 보단 무 시할 필요는 없을런지도 모른다. 아아..어쨌든 경비는 나쁘지않다. 하지만 머리가 그만큼 돌아가는가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문득 문을 열고 복도로 들어서니까 눈을 번뜩이는 경비가 내 얼굴을 아래위로 쏘아본다.그래.밤에 돌아다니니 수상쩍다 그거겠지. 그러나 으슥한 복도에서 번쩍이는 창을 들고 흰자위가 번득거리면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나는 궁시렁 거리면서 내방으로 정해진 방으로 가려다 마음을 바꾸었 다.가빈이나 린이 주절대긴 하겠지만 뭐가 어떤가. 나는 음험하게 웃으면서 '그녀'의 방으로 들어섰다. 자아..얼결에 하루가 지났다. 내일은 결국 시들어빠진 오이의 여동생,사랑의 대 탈주극을 펼치다 실패한 비련 의 여주인공의 울화 치미는 결혼식을 위해 출발해야지. KUBERIN........... 바람이 쏟아지는 위험한 벼랑가에 핀 꽃이 가장 아름다운 까닭은 무엇인가 잡을 수 없는 꿈들이 가장 안타까운 이유는 무엇인가 5 비오나는 내가 조인족 아가씨를 맡아준 것을 진심으로 기뻐했다. 셀레네는 내 옆에 말 그대로 바짝 붙어있었으며 그 때문에 비오나는 에메스와 함께 왕성으로갈 수 있었던 것이다. "전 쿠베린님이 옆에 계셔야 할 거 같아요.꼭 붙어있겠어요" 하고 귀여운 말을 셀레네가 한 순간 세명의 사내가 고꾸라졌고 한 명의 여인은 기뻐했다.우하하하하.. "하지만 왕궁의 무도회에 참석하게 되면 결국 조금 그럴텐데.." 에메스가 턱을 잡으며 말했다. 그는 지금 비오나의 손에 따라서 의관을 정비하고 있던 차였다.그녀는 꼼곰하게 에메스의 팔뚝에 어울리는 리본을 매어 주고 어깨에는 잘 세공된 목걸이를 걸어 주고 있었다.그는 황금빛이 도는 영주 특유의 가운을 걸치고 그 위에 검은 색의 망토를 걸쳤다.나로 말한다면 녀석이 갑주라도 걸쳐주길 바랬지만 먼 길 가는데 영주가 갑주 걸치고 갈 수는 없는 일인지라 하는 수 없었다. 다른 건 몰라도 에메스녀석은 인복이 확실히 있는 놈이었다. 녀석이 앞장서면 줄줄이 기사들이 도열했다. 전에 봤던 기사단장인 턱수염이 나에게 가볍게 목례했고 뒤이어서 전에 보았던 그 흉터가 나에게 눈을 흘겼다.그리고 그 외에 중장갑으로 무장한 기사들이 줄 지어 말에 올라타 있었다. 성문이 열렸다. 왕녀의 결혼식을 축하하러 가는 것이기에 그들은 당연 보화를 준비했는데 또 보 화를 준비하자면 당연히 산적을 조심해야 했다.허긴 이 정도의 대군을 두려워하 지 않을 산적은 없겠지만 또 어떻게 보면 산적이란 원래 겁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놈들이기도 하다. 일곱개의 밀봉된 상자에 가득히 보화가 실렸다.저 멀리 동방에서 왔다는 갖가지 색깔의 실크와 아름다운 모피들과 잘 장식된 장신구와 보석들이 상자를 채우고 있었다.선물로 내정된 백마 한 필도 있었고 왕녀에게 건네줄 수정으로 만든 조 각상도 있었다.에메스의 어릴적 소꿉친구라서 그런지 몰라도 에메스는 가지 가 지 바리 바리 준비하고 있었다. "대단하군요" 가빈이 놀라서 혀를 내둘렀다. 녀석은 처음 따라 나선 것인지라 흥미진진해 했다. 나는 가빈을 데려올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린을 데리고 왔으니 데리고 올 수 밖 에 없었다.게다가 이 수선스러운 녀석은 셀레네의 말 벗도 된다.어느샌지 비슷 한 정신연령을 가진 셀레네와 가빈은 친한 친구가 되어 있었다. 스카와는 왕성에서 만나기로 했다. "셀레네님!" 비오나가 마차안에서 불렀다.셀레네는 내게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마차안으로 뛰어들어갔다.그녀의 거창한 그 흰 날개를 흰 망토로 가리고 있었는데 사실 불 쑥 튀어오른 그 모습이 어색하고 우스꽝 스럽기는 했다.하지만 어디까지나 이 에메스의 기사들 사이에 박혀있다면 어느 누구도 함부로 말을 걸지는 못할 것이 다. "너도 같이 가라.가빈." "헤에..진짜요?" 가빈이 활짝 웃으면서 꼬리를 흔들었다.녀석은 나에게 미소를 던지고는 신난다 는 듯이 꼬리를 흔들면서 셀레네와 비오나가 같이 탄 마차로 뛰어올라갔다. 저 녀석이 말을 타고 내 뒤를 따라온다는 것을 생각하면 끔찍했다.그 수다와 그 시끄러운 투덜거림을 내가 무슨 수로 다 받아준단 말이냐.저 야묘족의 시끄러운 떠버리는 그저 아가씨들과 노는 게 가장 좋다. "쿠베린." 갑자기 말을 건 녀석때문에 나는 눈썹을 치켜 올렸다. "뭐야." 놀랍게도 그 자리에 선 것은 바바였다. 바바는 뚱뚱한 몸을 두리 두리 흔들면서 나에게 억지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부탁이 있어서." "뭔데?" "나도 이번에 왕성에 가기로 되었거든요. 쿠베린.하하.." 둥글고 살찐 턱에 주르르 땀이 흘러내렸다. 녀석은 노예상으로 치부한 엄청난 거부이다.새삼 말할 필요는 없겠지만 어릴 때 부터 이 녀석과 나는 인연이 있었던 편인지라 적잖은 친근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 녀석도 제법 나를 잘 따르고(?) 있고. 린이 그를 경멸의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동안 바바는 급히 말했다. "베델공작의 일행에 묻어갈 수 있을까 해서 그래요,쿠베린,나도 이번에 오힐데 넨 후작의 주문으로 물건을 가지고 왕성에 가는 길인데 요즘 왕성가는 길목에 무지하게 산적들이 들끓고 있다는 군요." 오,산적도 대목을 맞이했구나. 허긴 요즘 처럼 불경기라면 왕녀의 결혼이라는 호기를 맞이하여 산적들이 한탕 주의에 물드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제겐 상당히 많은 재화가 있고..음,,거느리고 있는 용병들은 엘리야와 아그랑 의 용병길드에서 뽑은 자들이라구요.믿을 수 있지요?" 그가 야릇한 시선을 던지면서 내게 애원했다.그 야릇한 눈길을 여자가 보내주었 다면 얼마나 좋겠는가.나는 고개를 저으면서 그러라고 말했다. "공작에겐 말씀대신 해주세요." "아니,그럴 건 없어.저기 있는 턱수염에게 말해.하지만 미리 말해두겠는데 이쪽 은 무지 속도가 빠르다구,따라올 수나 있냐?" "에에,염려마세요,저도 육두마차를 준비했답니다." 바바는 자신있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런데 준비한 물건이 뭐냐?" 갑자기 호기심이 돌아 묻자 바바가 히죽 히죽 웃었다. "아아..뭐 별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만..나중에 보여드립죠." "또 노예야? 미인이냐?" 바바는 뚱뚱한 배를 흔들면서 여유로운 웃음을 지었다. "음하하하하...나중에 보여드리..켁!" 나는 녀석의 멱살을 잡아당겨서 흔들어 댔다.바바가 얼굴이 보라색으로 변할 즈 음 내가 낮게 손톱하나를 들어올리며 물었다. "이 쿠베린님이 말씀하시면 곧장 대답이 나와야 할 거 아냐?" "아..하하하..저기." 바바는 찡그린 얼굴로 땀을 줄줄 흘리면서 자신이 타고 온 듯한 육두마차를 손 가락질 해보였다.그 육두마차의 뒤에는 커다란 상자가 두개 실려있었다.그리고 그 커다란 상자는 누가 보아도 확실하게 구멍이 뚫려있어서 분명히 살아있는 것 이 들어있는 듯했다. "헤" 내가 막 다가가려는 순간 멀리서 기생오라비가 외쳤다. "출발준비는 다 되었습니다! 주군!" "좋아! 그럼 출발한다!" 에메스가 크게 외치면서 말 위에 올라탔다. "선두! 출발하라!" 턱수염이 외쳤다. 맨 앞의 일곱의 기사가 말 옆구리를 박차고 내달려갔다.은빛의 갑옷과 검은 갑 옷을 번갈아 섞어 입은 기사들은 기세등등하게 말발굽을 올리면서 성문을 제일 먼저 빠져나갔다. 그리고 뒤이어서 턱수염이 이끄는 스물 다섯명의 기사들이 말을 이끌고 달려나 갔다.그리고 그 뒤를 에메스와 마차가 따라나갔다. 이렇게 되면 나도 나가지 않으면 안된다.나를 향해서 이미 마상에 있던 덥수룩 이가 손짓한다. "쿠베린! 뭐 하고 있는 거야!" 나도 재빨리 내 몫으로 준비된 말 위에 올라탔다.린이 내 뒤로 따라 나서는 동 안 바바도 허둥지둥 뚱뚱한 몸을 늘어뜨리며 자신의 마차로 뛰어갔다. 총 인원은 백오십여명이다. 기사가 구십팔명,나머지는 전부 하인과 짐꾼들이었지만 모두들 일반 농민이 아 닌 병사들로 구성되었기에 상당히 빠른 속도로 전진하고 있었다.이들은 빠르고 군말이 없는 자들로 여기저기서 눈을 빛내며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말을 타면 왠지 슬픈 생각이 가끔 든다. 아마도 이렇게 좋은 날씨 탓이겠지만 헉헉거리고 인간과 인간의 짐을 나르고 있 는 말을 볼때마다 느끼는 슬픈 연민은 우리들 일족이 짐승을 부리지않기때문일 것이다.그런 면에서 인간은 참으로 냉혹한 존재인 것이다. "쿠베린!" 불만에 가득찬 음성으로 앞에서 턱수염이 달려왔다. "뒤따르고 있는 녀석들이 노예상 바바의 일행이라던데?" "맞아." "그 일행을 당신이 따라와도 좋다고 명령했다고 하던데?" "맞아." 그는 노한 얼굴로 나를 쏘아보았다. "그런 결정을 당신이 내리다니! 대체 무슨 짓인가! 공작을 암살자가 노리고 있 고 또 이런 위험한 길을 가는데 노예상 따위의 일행과 같이 가겠다고 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잖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는 날 노려보면서 채찍을 쥔 손을 들어보였다. "나는 당신이 어느정도 생각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게 뭐요?" "하지만 바바의 일행은 용병길드의 놈들이라고.내가 체크할테니 그렇게 신경쓸 것은 없어." 말 하고 보니 조금 찔리는 기분이 되었다. "당신이 책임지시오!" 턱수염은 나를 노려보더니 홱 하고 몸을 돌려서 다시 선두로 달려가버렸다. 남은 나는 약간 불안해졌다. "린." "네." "네가 공작옆에 붙어있어라,당분간은 비오나가 있으니 문제는 없겠지만 말이 야." "알겠습니다." 린은 홱 말머리를 당기더니만 곧장 앞으로 쏘아 달려가기 시작했다. 나는 달리는 기사들을 뒤로 하고 바바의 일행들에게로 다가섰다.바바의 일행들 도 나름대로 준비한 녀석들이었다.모두 수가 약 사십여명 되어 보였다.갖가지 무기를 들고 눈초리 살벌하게 모여있긴 했다. 내가 마차가까이로 가자 몇몇 녀석이 나의 앞을 가로막았다.그때문에 나는 바바 를 크게 불렀다. "바바!" "쿠베린!" 바바가 마차 창문으로 투실거리는 얼굴을 내밀었다. "네가 거느린 놈들 몇이야?" 내가 소리쳐 묻자 은근슬쩍 살의를 표명하면서 나에게 시비를 걸고 싶어진다는 얼굴을 한 녀석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그런 놈들을 다 무시하고 말하는동안 바바는 눈알을 대굴 대굴 굴리면서 말했다. "22명인데요." "인부가? 아님 용병이?" "용병이요." 음 하고 난 휘익 그들을 돌아보았다.그리고 그들 하나하나를 새겨 보았다.나에 게 불손한 표정을 짓고 있는 녀석들 중에서 내 얼굴을 아는 놈들이 몇 있었는지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아는 척을 했다.나는 아는 척 하는 놈들 몇을 기억하고 나에게 불만을 토하는 불손한 놈들을 찍어두고는 몸을 돌렸다. "기억해둬! 늦으면 나도 몰라!" "알아요!" 바바가 마주 외쳤다. 그리고 나는 달리기 시작했다.아니 달리려고 했다. 그러나 갑작스런 냄새때문에 말고삐를 홱 돌리고 말았다. "바바!" "네?" 바바가 다시 날 바라보았다. 그 얼굴에 뭔가 미심쩍은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원래 그다지 정직하거나 만족스 런 얼굴은 아니지만 녀석이 이렇게 표정을 표변하고 보니 왠지 더더욱 의심스러 워지는 데가 있었다. "저 상자 안에 뭐가 들었어?" "저기.." 바바의 얼굴이 억지 웃음을 띄고 있었다.녀석은 태연하게 말했다. "별 거 아닙니다.그저.." "그러니까 내놔봐." 나는 몸을 돌려서 마차 뒤에 실린 두꺼운 상자로 다가갔다. 왠걸 이 상자는 상당히 컸다.마치 관처럼 보였다.냄새는 이 상자안에서 나고 있 었다.나는 갑자기 호기심이 돌아서 바바를 돌아보았다. "바바.너 이거 대체 어디서 난 거야?" "저기.." 난처한 웃음을 흘리려는 녀석의 머리통을 슬슬 쓰다듬으면서 나는 말위에 앉은 채로 말해주었다. "바바.넌 어릴 때도 그랬지만 가끔은 진짜 멍청한 짓을 하기도 하는 구나.너 이 거 산거냐? 아님 주운 거냐?" "헤헤.." 그의 얼굴에서 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끌끌 혀를 차고는 상자를 가볍게 두들겨 보았다.반응이 없지만 숨소리와 냄새는 여전했다.이 냄새는 겁에 질린 냄새,증오의 냄새,그리고 고통의 냄새였 다.약에 취한 상태로 이 안에 갇혀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저기,쿠베린.그냥 좀 넘어갈 순 없어요?" 바바가 애원하듯 물었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멍청아.이 걸 넌 선물로 생각했던 거냐? 어리석게 굴지마." "하지만.." "이건 선물이 될 수가 없어.청색아인족보다도 희귀한 만큼 댓가를 치르게 된다 구." "하지만..." 나는 혀를 차고는 바바의 상자에 손톱을 대어 그 자물쇠를 깨뜨렸다.와작 하고 자물쇠를 깨뜨리자 안절부절하고 있던 바바가 나에게 물었다. "이 종족을 알아요?" "알다마다." 나는 상자안에서 바스락 거리는 녀석의 냄새를 맡아보면서 뚜껑을 열었다. KUBERIN........... 바람이 쏟아지는 위험한 벼랑가에 핀 꽃이 가장 아름다운 까닭은 무엇인가 잡을 수 없는 꿈들이 가장 안타까운 이유는 무엇인가 6 상자뚜껑을 열자마자 튀어나온 흰 손은 상처 투성이였다. 그것은 튀어 나오자 마자 곧장 나에게 달려들어 내 목을 조르려 했다.증오와 고 통이 그 전신에서 냄새를 시큼하게 풍겨댔다. 나는 악하고 바바가 외치는 소리를 무시하고 나의 목에 감히 손을 대려는 녀석 의 목을 가볍게 잡아채려 했다.하지만 이 소년시기의 내 몸은 녀석보다 팔이 짧 은 관계로 녀석은 내 목을 덥석 잡아채고 말았다. 그러나 내 고귀한 몸에 손을 대는 놈을 나는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기에 단번에 녀석의 팔뚝을 잡아 뒤로 꺾어 버렸다. "아악!" 녀석이 고통스런 소리를 질러댔다. 희고 흰 날개와 살결은 흰 대리석처럼 뽀얗다. 포동 포동한 살내음은 내 구미를 당기고 당장 이빨을 드러내고 한 입 깨물었으 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다.하지만 이 자리에서 설마 녀석을 물어뜯어 버릴 수 는 없는 일이기에 나는 녀석의 팔뚝을 휙 잡아 꺾은 채로 녀석의 허리를 잡아 바닥에 억눌렀다. "크윽..죽여라!" 녀석이 외쳐댔다. 이 희귀한 종족의 출현에 모두들 놀라서 이 곳을 주시하고 있었다. 아인족이나 엘프등 다른 종족들이 널린 이 델리암에서도 이 종족은 모습을 드러 낸 예가 없었다.이 조인족이란 아니꼬운 종족은 산속 깊숙히 절벽의 꼭대기에서 말라비틀어질 고고함을 자랑하면서 깃털이나 흩뿌리고 살아온 것이다. "저게 대체 뭐야?" "큰 새인가?" "엘프야?" 다들 웅성거릴 때 나는 녀석의 머리를 발로 쿠욱 눌러 고정시켰다. "더러운 인간! 날 차라리 죽여라!" 녀석은 나에게 짓밟힌 주제에 떠들어대고 있었다. 내 발이 녀석의 뽀얀 뺨을 억누르고 있기때문에 발음이 다소 부정확했지만 녀석 은 왼 뺨을 바닥에 들이대고 오른 뺨을 내 발을 견디며 아둥 바둥 거렸다. 금빛의 곱슬머리가 찰랑 찰랑 녀석의 흰 어깨로 흩어져 있었고 내 발가락 사이 에도 이 금빛 머리털이 굴러들어와 기분좋은 감촉을 느끼게 했다. "자식아.너 이 분이 인간따위로 보이냐?" 내가 녀석의 뺨을 질근 질근 밟으며 말하자 녀석은 큰 두 눈을 데굴 굴리며 나 를 바라보았다. 그렇겠지,이 어린 자식은 내가 어떤 분인지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겠지. "쿠베린님.상처내지 마세요!" 바바가 옆에서 안절 부절하며 떠들어 대고 있었다.나는 흥 하고 바바를 무시한 채 다른 상자를 가리켰다. "저 상자안에도 또 다른 애를 가두었냐?" "저기.." 바바가 우물쭈물하고 있는 가운데 나는 녀석의 뺨 위에 놓인 나의 잘생긴 발가 락들을 꿈틀거리면서 물었다. "이봐,조인족의 꼬마야.너도 사인족의 습격으로 도망나온 놈들 중 하나냐?" 흠칫하고 녀석이 몸을 움추렸다. 그것만으로도 반응은 충분했다. 내가 이러고 있는데 뒤에서 녀석들이 웅성웅성 떠들고 있었다. "저게 남자냐.여자냐?" "이쁘다.." "헤에.." 병신같은 자식들. 이 쿠베린님이 여자를 발로 밟을 분이신가. 어디까지나 내가 밟는 것은 수컷이란 말이다! 암컷을 밟고 좋아하는 놈들은 다 덜 떨어진 정신병자들이란 말이야! 나는 녀석에게서 발을 치우고 다른 상자로 가서 자물쇠를 부수었다. 그러자 방금 전과 똑같은 패턴으로 문이 발칵열리고 그 다음에는 악을 지르면 서 여자애가 튀쳐 나왔다.눈물과 공포로,분노로 엉망이 된 얼굴로 나에게 당장 에 손톱을 들이내밀며 덤비는 것을 나는 그 두손을 잡아 채고 외쳤다. "진정해!" 악을 지르며 몸부림 하는 것을 재빨리 뒤에서 끌어안아 멈추게 했다.흑흑거리고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여자애를 안고 내가 속삭여주었다. "걱정하지 마라.괜찮아.구해줄 거다." "흑흑...인간은 믿을 수 없어.." 여자애가 반 착란 상태로 우는 것을 보면서 나는 그 금발에 키스해 주었다. "걱정마.난 인간따위가 아니란다." 여자애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커다란 보랏빛 눈을 보고 난 잠시 혹해서 미소를 지어 보였다.나의 매력이 넘치는 우아하고도 믿음직한 미소를. 아직 어리다. 셀레네보다 서너살은 ,아니 열댓살은 아마 어릴 것이다.어린 티가 그대로 남은 흰 뺨이 포송 포송한 살집을 드러내고는 귀여운 코를 돋보이게 하고 있었다.입 술은 도톰하고 붉으레 해서 정말 이뻤다. "지..진짜요?" 여자애가 날 물끄러미 보며 물었다. "그럼,그럼." 나는 여자애의 이마에 키스하고는 어깨를 토닥거렸다. "쿠베린님.." 일그러진 얼굴의 바바가 날 바라보고 있는 동안 나는 아직 바닥에 멍청히 널부 러져 있는 녀석을 턱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저 꼬마는 네 오빠냐?" "네.." 여자애는 눈에 보일 정도로 떠는 것을 멈추었다. 귀여운 것. 나는 바바에게 다시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어디서 이 애들을 데리고 온 거냐?" "..하아.." 바바가 한 숨을 쉬자 나는 시익 웃어보였다. 나의 자랑 송곳니가 하얗게 드러나 햇빛에 진주처럼 반짝였다. "계속 내가 헛손질 하게 만들 거냐? 아님 순순히 지껄여 볼테냐?" "아..아..마,말씀드릴께요!" 바바는 뒤로 물러서면서 지껄이기 시작했다. "저,.저런!" 셀레네가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면서 눈물을 글썽였다. "이 애들은!" "아는 애들이냐?" "아니오! 하지만..이..런 곳에서 동족을 만날 줄이야!" 셀레네는 넘치는 눈물을 감당하지 못하면서 흐느껴 울었다.나는 그녀의 어깨를 안고는 그녀를 보자 눈에 띄게 안심하는 두 남매를 가리켜 보였다. "이쪽은 샤로네고 이쪽은 지노엔이라는 군.이 애들 역시 한 이십여일전에 둥지 에서 도망쳐 나왔다고 했어." 샤로네는 손을 뻗혀서 셀레네를 끌어안았고 셀레네는 샤로네를 끌어안고 엉엉 울었다.그 것을 보고 있는 지노엔도 흑흑 눈물을 글성이고 있었다. "대체 어찌된 거야?" 공작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갑작스레 나타난 두 조인족 꼬마들을 바라보았다. 왕성으로 가는 길목인 올렝시에서 가장 호화로운 여관에 묵게된 에메스는 여관 을 몽땅 다 빌려놓고 있었다. 그리고 비오나와 자신은 한 방을 쓰면서 셀레네를 멋진 방에 옮겨놓고 있었다. 통째로 빌린 여관의 식당에는 기사들이 도열해 선 가운데 산더미처럼 많은 음식 들을 쌓아 눈앞에 두고 있었다.그랬기에 나는 주저하지 않고 먹기 시작했는데 셀레네가 울자 기생오라비가 그녀의 눈물에 가슴이 아픈 듯 손수건을 내밀었다. 셀레네는 울다가 눈물을 닦아내고는 주저하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에는 나에게 이 손수건을 받아도 되느냐는 그런 의미의 물음표가 담겨있었 다.나는 관대하게 이 기생오라비의 호의를 받아들이라는 표시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어찌된 거냐고 묻잖아!" 에메스가 다시 물었다. 성격도 급하긴. 나는 눈앞의 사과와 함께 구운 새끼돼지 통구이를 점잖게 나이프로 조각내면서 대꾸해주었다. "뭐긴 뭐냐? 이 애들을 노예상이 발견하고 팔아넘기려던 것을 데려온 거지." "바바가? 대체 어디서 이 애들을.." 에메스는 적의어린 시선을 하고 있는 두 남매를 흘긋 보면서 다시 날 바라보았 다.비오나는 두 남매에게 다가가서 그들의 상처는 없는지 혹은 그들이 불편하진 않은 지 확인하는 듯 세심하게 말을 걸고 있었다. "한 이십여일 전에 숲에서 헤메고 있는 것을 노예사냥꾼들이 잡아왔다는군.처음 엔 새인줄 알았고 그 담에는 엘프인줄 알았대,멍청한 녀석들." 옆에 있던 가빈이 명백한 증오의 빛을 띄우고 날 바라보았다. "멍청한 게 아니에요! 그런노예사냥꾼들은 다 죽여버려야 해요!" 그가 그렇게 노골적으로 외치자 두 남매는 가빈을 흘긋 바라보고는 동지를 하나 찾아낸 듯한 표정이 되었다. "그래서 ..바바가 이 애들을 오힐데넨 후작에게 팔러가는 길이었단 거야?" 옆에서 갈비를 뜯고 있던 덥수룩이가 눈쌀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렇대나봐." 내가 대꾸하자 에메스는 심각한 표정을 짓고 비오나를 바라보았다. 비오나는 안쓰러운 표정을 하고는 두 남매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빠인 지노엔은 인간에게 명백한 증오를 보이고 있었다. 허긴 갑자기 사냥꾼들에게 잡히고 상자안에 갇힌 채 노예가 될 뻔한 찰나였으니 까 증오하는 게 당연한 일이다.눈앞에서 누이동생이 시커먼 사내들에게 잡히는 꼴을 보았을 때 그가 느낀 절망과 분노의 색깔이 얼마나 짙은가는 새삼 말할 나 위도 없었다. "일단 셀레네와 함께 내 거처에서 지내도록 해라." 에메스는 깊은 동정심을 보이는 표정으로 그들에게 말했다. 놀고 있네,노예를 사는 것을 즐겼던 바람둥이 주제에 그런 표정은 어울리지도 않아. 내가 그렇게 말하려다 참은 것은 순전히 비오나 때문이었다. 비오나는 마치 물에 흠뻑 적셔진 만개한 꽃처럼 아름다움을 내뿜고 있었다.아마 도 내가 나타나 셀레네에게 달라붙음으로서 에메스가 그녀를 단념하게 만든 덕 분일 것이다.그 때문인지 혹은 기분탓인지는 몰라도 왠지 내 앞의 음식은 상당 히 호화찬란한 것들만 놓여져 있다. "쿠베린님..." 셀레네는 다시 내 어깨에 얼굴을 묻고 속삭이듯 물었다. "어쩌죠?" "뭐가? 에메스말대로 일단은 몸을 추스리고 상태를 봐야지." 나는 치즈 한 조각을 잘라서 셀레네의 입안에 밀어넣었다.셀레네는 울다가 내가 내민 치즈조각을 입술에 받아 먹고는 스스로 얼굴을 붉혔다. 이쁘기도 하지. "사인족들이 세력을 넓히기 시작한 것은 여기저기서 이미 말이 들어오고 있어. 인간들의 성채도 습격받았고 여기저기서 엘프의 마을들도 습격받았으니까." 그 말에 충격받은 듯이 지노엔과 샤로네가 날 바라보았다. 나는 내 팔뚝을 잡고 있는 셀레네의 체취를 음미하면서 음식을 부지런히 집어 먹으며 입을 닫았다. "그럼..역시 황제께 이 일을 알려야 할 거야." 진지하게 에메스가 말했고 나는 그를 흘긋 쳐다보며 물었다. "그래서? 그래서 너도 국난 극복의 대영웅이 되려구?" 에메스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만 좀 해! 너도 날 돕겠다고 했잖아?" "정확히 말해.난 널 돕겠다고 말한 적 없어." 나는 나이프를 들어보이면서 분명히 끊어서 말했다. "난 널 구.해.주.겠.다.고 했지 도와준다고는 하지않았어." 말 그대로 침묵이 흘렀다. 에메스의 얼굴이 일그러졌고 곧 분노와 야릇한 실망감으로 날 쏘아보았다. 너도 내가 언제나 달라붙어서 해달라는 대로 다 해줄 줄 알았냐? 네 아비처럼? 비오나는 한숨을 가볍게 쉬고는 날 바라보았다. "뭐야? 그 엘프답지 않은 한숨은?" 내가 셀레네가 깎아주는 과일을 한 입 씹으며 말하자 비오나는 맞은 편 앉은 의 자에서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그리고는 할 말이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 절레 저어 보였다. 기생오라비는 부러운 듯 질투어린 시선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아름다운 셀레 네는 내 옆에 찰삭 붙어서 내게 과일을 권한다,혹은 술을 권한다 하면서 내 팔 뚝에 달라붙어 있었고 한 쪽 옆에는 샤로네가 궁금한 얼굴로 나와 비오나를 번 갈아 보고 있다.그리고 지노엔은 가빈과 심각한 표정으로 뭔가 떠들기 시작했고 린은 여전히 내 뒤에 팔짱을 낀 채로 서서 묵묵히 사태를 지켜보고 있는 중이었 다. "일단.." 입을 연 것은 턱수염이었다. 녀석은 진지하고도 평탄한 표정으로 무감동하게 말했다. "내일 새벽에 출발합니다.그러니 모두 편히 쉬시길." 편히 쉴 수 있을 리가 없다. 셀레네와 샤로네가 한 방을 쓰고 지노엔이 내 방으로 오게 되었다. 내 방에 녀석이 긴장한 채로 들어서자 여전히 발가벗은 가빈이 촐랑거리면서 꼬 리를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얼른 들어와!" 지노엔은 내가 자신의 얼굴을 흙발로 밟은 것을 아주 새긴 듯이 기억하고 있는 듯 반항적인 시선을 내게 던지고 있었다. 그렇게 날 꼬나 봐야 어쩔거냐? 먼저 덤빈 것은 너지 내가 아니란다.꼬마야. "잠이나 자자." 나는 모든 것에 초연한 마음가짐으로 관대한 표정을 짓고 침대로 들어갔다. 린은 창가에 기대어 앉았고 우물 우물 하고 지노엔은 의자에 앉아있었다. 가빈이 촐랑거리는 태도로 침대로 들어와서 내 가슴에 덥석 안기자 지노엔의 눈 이 부릅떠질 듯이 커졌고 가빈은 익숙한 자세로 내 품안에 파고들어서 눈을 감 았다. 린이 불을 끄자 지노엔은 대체 어떻게해야 되는가 혼란에 빠진 듯이 망설이고 있었다. "뭐야! 얼른 들어와 자!" 내가 고함을 치자 지노엔은 굳은 얼굴로 멈추어서서 나와 가빈을 번갈아 보았 다.나는 짜증스러워져서 그 허여멀건한 녀석을 쏘아보았다. "어린 놈이 답삭 답삭 안기는 맛이 있어야지! 뭘 하는 거냐! 얼른 들어와 자!" "하..하지만.." 지노엔은 억지로 입을 열었다. 과연 조인족이라 사내놈도 목소리가 좋구만. "이..이상해요!" "뭐가 이상해! 네가 계집애도 아닌데 뭐가 이상해! 얼른 자! 아님 바닥에서 자 든가!" 나는 그렇게 쏘아주고는 눈을 감았다. 린은 창가에 주저앉은 상태로 지노엔에게 조용히 말했다. "너도 바닥에서 잘테냐?" 지노엔은 망설이고 있었다. 그는 계속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이곤 의자에 그대로 앉았다.역시 녀석은 의자 에서 졸기로 마음을 먹은 모양이었다. 날씨는 제법 더웠지만 난 그래도 따스한 게 좋다.게다가 혼자서 썰렁한 침대를 대굴 대굴 구르는 취미는 없었다. 달빛이 교교하다. 가슴은 약간 답답했다. 사인족이 이런 식으로 기승을 부리면 역시 우리 일족이 나서야 하나. 허긴 얼마전 녀석들이 내 귀여운 꼬마에게 남긴 상처를 완벽하게 돌려주진 못했 던 거 같다. 내 대에서 사인족과의 전면전을 치르는 것도 별로 나쁘진 않다.오래 왕노릇을 하다 보니 그런 일도 있을 수 있군 하고 생각하고 나자 왠지 몸이 떨리는 흥분 이 느껴졌다. 사인족을 갈갈이 찢고 그 피를 마시고... 한동안 느끼지 못했던 피의 향연을 즐길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 날 보았던 사인족의 왕은 자신을 배반한 녀석들을 어찌 하고 있을까. 눈을 감으면 그때 생각이 난다. 내 일족을 죽이고 혼자 비탄에 잠겨 바닥을 긁느니 차라리 다른 일족과의 전쟁 을 치르는 것도 나쁘지않다.다크녀석도 얼마전 질질 짜고 있었고 우리들 일족도 어느정도는 피에 굶주려 있었다. 그래 그래 나쁘진 않아. 나는 중얼거렸다. KUBERIN........... 바람이 쏟아지는 위험한 벼랑가에 핀 꽃이 가장 아름다운 까닭은 무엇인가 잡을 수 없는 꿈들이 가장 안타까운 이유는 무엇인가 7 바람둥이란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바람을 피우고 싶어서 바람둥이인 경우는 그래도 구제의 방법이 있다.하지만 가 만히 있어도 여자들이 줄줄이 달라붙는 경우엔 그 임자가 되는 암컷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것 이외엔 방법이 없다. 에메스. 저 자식이 바람둥이인 건 나도 잘 알고 있다. 한걸음만 내디뎌도 여기저기서 여자들이 달라붙는다. "어마! 공작님 오셨어요!" "공작님!" 다들 달라붙는 그 모습. 여자들의 흰 손과 흰 손이 튀어나와 그의 앞에서 알짱거린다. 왜 내 주변에는 이런 바람둥이 뿐이냐 하고 한탄을 해 봐야 소용이 없다.여기저 기서 웃고 있는 여자들도 조금 용기만 있다면 아는 척을 하겠지만 모두 수줍은 척 얼굴만 붉히고 있다. 내가 휙 돌아보니 비오나는 평정한 표정을 짓고 있다.왠 평정이냐 하고 그녀를 돌아보니 그녀는 남장을 한 채 유연한 자세로 그 미모를 사방에 드러내고 있었 다. 그렇다.비오나는 남장을 한 채 마치 그의 기사중 한 명인양 하고 있었다. 초록의 튜닉과 짙은 감색의 망토를 둘러멘 그녀는 어디로 보나 잘 생긴 미소년 이었다.그녀의 뒤에 선 기생오라비가 한 풀 꺾일 정도의 미남인 것이었다. 궁중에 들어서는 순간 비오나는 남장을 했다.그녀 나름대로 에메스의 곁에 붙어 있기위한 모습이었지만 에메스의 감시를 위한 변장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에메스의 곁에 붙은 여자들을 보는 눈이 점점 싸늘해지기 시작할 무렵 문득 기 생오라비가 거북한 음성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저기..좀 쉬시는 게..." "아니에요." 그녀는 잘라 말하고 한기 도는 눈초리로 에메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에메스의 등줄기에도 한기가 돌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궁정은 여전히 화려하고 인간들은 나풀거리는 옷차림으로 사방을 메우고 있었 다.무도회가 열릴 것이라는 예정에 맞추어서 여자들은 한껏 성장을 하고 있었기 에 눈요기감은 충분히 되었다. 나는 팔짱을 끼고 발코니 끝에 서 있었다. 아직 그 공주라는 여자도 나오지 않았고 그 약혼자라는 녀석도 나오지 않았고 무엇보다 그 시든 오이도 나오지않았다.아직은 그저 가벼운 연회인 듯한 분위기 였다.그 때문인지 다들 긴장이 풀려있었다. 비오나는 이런 인간들의 연회에 처음 참석하는 것인지 긴장한 얼굴이었지만 그 도 잠시 자신의 남편이자 애인을 감시하는 것으로 모든 주의를 돌리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저 조인족의 아가들이 조금 심심하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중인데 문득 여기 저기서 나직한 탄성이 들리기 시작했 다.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 곳으로 쏠리기 시작했다. 나도 무심결에 돌려보니 사람들을 헤치고 나타난 인물들이 있었다. 기생오라비의 눈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그 눈에는 갑자기 하늘에서 해가 떨어졌다던가 바다가 갈라졌다든가 할 개벽천 지의 광경을 본 듯한 그런 감격이 떠올라있었다. 아닌게 아니라 사실 그러했다. 그들이 등장하자 마자 연회에 참석해 있던 성장한 귀족남녀들은 마치 갈라지는 물결처럼 일제히 몸을 돌려 그들을 바라보았고 그 덕에 그들의 가는 길은 좌악 하고 사람들의 인도로 펼쳐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화사하기 이를 데 없는 진주빛 드레스를 걸친 그 미녀는 옆에 작은 미소녀를 데 리고 있었다.두 소녀는 손을 마주 잡고 불안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아니 미소라 기 보단 그저 그런 불안한 표정에 지나지 않았지만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황홀 경에 빠지게 할 만한 그런 아름다움이었다. 굽이치는 금발을 진주로 장식한 셀레네는 우아한 흰 목을 드러내고 불안한 시선 으로 날 찾듯이 두리번 거리고 있었다.그녀의 옆에 서서 그녀의 손을 잡고 에스 코트 한 것은 그 아름다움에 지지않을 정도로 화사한 지노엔이었다.그리고 그 옆에 싱글 싱글 웃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가빈이었다.샤로네에게 바짝 붙어있 는 야묘족의 소년은 겁도 없이 그녀의 손을 잡고 우아하게(?) 인도하고 있었는 데 그들의 기묘한 어울림에 모두 감탄했다. "오오..아름다운 미녀이시군.." "어느 분의 영양이시지?" 다들 웅성거리고 있는데 에메스가 그들을 보고 미소를 한껏 지은 채 앞으로 나 서서 손을 내밀었다. "어서 와요.모두 잘 어울리는 군." 셀레네는 불안한 얼굴로 그를 보고 다시 나를 찾았다. 내가 손을 가볍게 들어보이자 그녀의 얼굴에 노골적인 안도감이 떠올랐다. 그렇게 된 것이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인족이 날개를 가진 변신족임을 잠시 잊었었다.그런 걸 잊다니 나도 참 늙긴 늙었을지도.날개를 펼칠수도 집어 넣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왜 잊었을까. 지금 이들은 우아하고 아름다운 인간들로 보였다.물론 인간이라기엔 너무 아름 다왔지만 말이다. 지노엔과 샤로네는 불안한 듯 긴장된 턱을 꽉 이빨로 조이고 있었다.그 옆에선 가빈이 태연자약한 척을 해보였지만 그들은 불안해 했다. 조인족은 인간들만이 아니라 다른 종족들 사이에 있어 본 일이 전혀 없으니까. "쿠베린." 불안한 얼굴이 겨우 펴진 셀레네가 나에게 다가와 내 손을 잡았다. 갑자기 화살처럼 나에게 시선이 와 박혔다. 이건 질투의 시선인가 하고 내가 사악 하고 좌중을 훑어보자 그 속에는 기생오 라비를 비롯해서 에메스등등 이 자리에 선 모든 수컷들의 질투로 이글거리는 얼 굴이 있었다. 크흐..기분이 좋은걸. "먼저 나가시면 ..어떻게 해요?" "린이 붙어있잖아." 나는 미소하면서 셀레네의 손등에 키스해 주었다. 여기 저기서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질투의 시선을 보내다가 결국은 질투로 온몸 이 벌겋게 달아오를 수컷들의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아우 아우 아우...늑대의 울부짖음이다. 나는 의기 양양하게 그녀의 허리에 손을 대고 물었다. "무섭진 않아?" "네에..쿠베린님이 있으니까.." 그녀의 얼굴이 가볍게 붉어졌다. 아아..기분 좋다.이 붉은 얼굴과 넘치는 듯한 향내. 이것이야 말로 삶의 보람이 아니겠는가. 샤로네와 지노엔도 내 옆에 은근히 다가와 섰다.내가 지노엔을 놀리듯 바라보자 그녀석은 얼굴을 약간 붉힌 채 날 쏘아보았다.자존심 상한다는 표정이었다. 가빈이 꼬리를 허리에 감고는 마치 공자처럼 옷을 차려입고는 내 앞에서 빙글 돌아보였다. "어때요?" "꼬리만 잘 집어넣으면 괜찮아." "집어넣었잖아요?" "린은?" "밖에 있죠.들어오기 싫대요." 그렇겠지. 나는 어깨를 으슥거리다 말고 갑자기 떠오른 생각이 있어 지노엔을 바라보았다. "지노엔." "왜요?" 퉁명스런 소리로 소년이 물었다. "너 전사를 얼마나 보았냐?" 그의 얼굴이 긴장되었다. "네?" "조인족 전사말이다.제대로 된 전사가 설마하니 사인족에게 몰살당한 것은 아닐 것이고.틀림없이 어딘가에 있을 건데 넌 어디 있을지 짐작하지 못하냐?" 그는 셀레네를 보았다. 셀레네는 어서 대답하라는 듯 그를 재촉했다. "잘은 모르지만.." 그는 망설이며 말했다. "초승달의 계곡에 대 부락이 있다고 들었어요,.바로 초승달의 계곡이 우리들의 조상이 머물렀던 최초의 곳이라고,.." 나는 약간 눈을 가늘게 뜨고 허공을 바라보았다. 잘 알 수 없는 지명이었다. 지들 끼리 모여 사는 종족이니 틀림없이 모든 지명도 다 저희들 맘대로 불렀을 것이다.그 곳이 어딘가는 그들만이 아는 일일 가능성이 컸다. "그곳은 북쪽이냐 남쪽이냐?" "모,.몰라요,듣기론 달이 뜨는 계곡이라고,.." "역시 모르겠군.남쪽일 가능성이 크긴 하지만..조인족은 추운 곳을 좋아하니 또 알 수 없어." 내가 턱을 주물거리고 있을 때 갑자기 시끄러운 음악소리가 싸악 멈추었다.그리 고는 둥둥 북소리가 울려퍼졌다. "델리암의 주군이신 오르프 7세께서 들어오십니다!" 시종이 크게 외쳤다. 놀고 있네 하고 내가 중얼거릴 찰나 모든 인간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숙이지않은 건 역시 나와 조인족들,그리고 가빈 뿐이었다. 나는 지노엔의 어깨를 가볍게 잡으면서 말했다. "커텐 뒤로 가 있어." "에? 왜요?" "저,시든 오이같이 생긴 놈은 변태라서 너같은 이쁘장한 꼬마를 좋아한단다." 내가 그녀석의 코앞에 내 코를 들이 대고 말하는 순간 그 얼굴이 사악 핏기가 가셨다.그는 더이상 말을 하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서 커텐 뒤로 그 이쁘장한 얼 굴을 숨겼다. 가빈이 히죽 웃었다. "그럼 저도 위험한가요?" "설마 아무리 변태라도 널 건드리겠냐?" 내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갑자기 밖에서 급히 두명의 기사들이 들어섰다. "급보이옵니다! 폐하!" 이렇게 굳이 무도회에서 진흙투성이의 기사가 와서 급보라고 외치지않아도 될 터인데 이렇게 까지 하는 것으로 보아 뭔가의 연극이군 하고 나는 혀를 찼다. 아닌게 아니라 그 자리에 서 있는 귀족들 모두의 안색이 굳어서 긴장하고 있었 다.무언가 심각한 것을 느끼는지 기사차림의 사내들은 검자루를 움켜 쥐고 있었 고 귀부인들은 손수건을 잘근 잘근 깨물고 있었다. "남부 3개 성이 정체를 알수 없는 자들에게 초토화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이런..드디어 시작이로군! [쿠베린 별전3] 마잉꽃의 소유자 KUBERIN.. 세상사 뜻대로 되지않을땐 울어야 하나 웃어야 하나 우는 것 보단 웃는 게 그래도 남 보기에 멋진듯 한데 어이! 소리내어 웃을까 ..아니면 차라리 소리내어 울어버릴까. 1 "뭘까!" 놀라서 그는 멈추어 섰다. 뭐가 뭐냐 하고 나는 녀석을 꼬나보고 있었다. 녀석은 살그머니 풀숲을 헤치고 날 들여다 보고 있었다. 나는 막 들고 있던 나무딸기 바구니를 이리저리 흔들면서 녀석을 바라보았다.녀 석은 겁에 질린 얼굴로 날 바라보면서 우물거리고 있다. "저기.." "저기고 여기고 간에 까불지 말고 이리와!" 나는 손가락을 까딱 까딱해보였다. 녀석은 10살 남짓해 보이는 꼬마였다. 녀석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급의 린넨셔츠를 풀즙으로 파랗게 군데 군데 물들 인 채로 서서 날 바라보고 있다.허리엔 어린 꼬마에게 어울릴 만한 쇠꼬챙이를 차고 발은 샌들을 신고 있었다.머리칼은 풀더미를 쑤시고 나온 것인지 이리저리 헝클어지고 여기저기 누런 풀잎이 달라 붙어 있었다. 우물 우물 하던 녀석은 한 걸음 나에게 다가왔다. 허긴 이 아름다운 미모로 나무딸기 바구니를 든 채 우아하게 앉아 있는 나의 이 모습을 보고 어디가 경계할 대상이란 말이냐.자식은 겁장이임에 틀림이 없다. "아..안녕..저기..저,.." "저기고 여기고 간에 이리와서 너도 따라!" 나는 손가락 하나로 명령했다. 그녀석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어고 저고 간에 너,멍청이냐?" "아.아닌데.." "그럼여기서 얼른 따라!" "무,,무얼." "나무딸기!" 나는 풀숲을 가리켜 보였다. 나무딸기 나무는 키가 작기때문에 어린 애들도 따기 쉽다.그러나 한편으로 말하 면 가시가 있으니까 어린애가 다치기 쉬운 것도 사실이었다.그녀석은 우물 우물 다가와서 내가 가리키는 나무를 바라보았다.그리고는 우물 우물 하면서 진짜로 따기 시작했다.그 모습이 너무 굼떠서 나는 화가 치밀었다. "인간 어린애인 주제에 대체 그것도 못따는 거냐!" "아..따..따고 있어!" 급히 서두른 탓인지 녀석의 손등은 여기저기 가시로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나는 바구니를 녀석의 발치에 던지고 보드러운 초록색 이끼가 덮힌 바위위에 느 긋하게 누웠다. 녀석은 얼어붙은 채 나무딸기를 따서 바구니에 부지런히 넣고 있었다. 나는 휘파람을 불면서 하늘을 감상했다. 좋은 날씨였다. 인간여자가 나에게 딸기파이를 구워주겠다고 했었다.그 여자가 나에게 구워주겠 다는 말을 하지않았다면 이 몸께서 딸기따위를 따기위해 이런 곳에 왔을리가 없 었다.아아..암컷들은 너무나 수컷부리는 데에 익숙하다니까. 뺨에 키스해주면서 파이를 구워줄 테니 부탁해요라니. 물론 그녀가 좋다.역시 암컷은 좋아. 하지만 가끔 이렇게 부려짐을 당할 때는 수컷의 비애감을 맛보곤 한다. 인간세상을 어슬렁거리면서 느끼는 것인데 모든 생물의 암컷들은 모두 똑같다는 것이다.그게 오크든 드워프든,심지어는 인간이든 엘프든 말이다. 내가 대굴 대굴 거리고 있는데 나무 딸기를 따던 꼬마가 고개를 돌리고 저어 하 고 말을 걸었다. "다..땄어..저기.." 바구니를 흘긋 보자 얼마 차지도 않았다.아직 멀었다. "다른 데에 가서 딸기를 마저 따와!" "어..저어..난 집에 가야하는데.." "시끄러!" 내가 눈을 부라리자 녀석은 움찔했다.커다란 눈에 눈물이 그만 글썽한다. 카,웃기고 있어.사내자식이라면 눈을 부릅뜨고 덤비는 맛이 있어야지. 이 자식 계집애 아냐? 나는 발딱 일어섰고 나의 쏘는 듯한 안광에 질린 녀석은 화들짝 놀란 채 바구니 를 들고 총총 수풀속으로 기어들어갔다. 까불고 있어. 나는 다시 데굴 데굴 하면서 잠의 세계로 들어갔다. 아름다운 손들이 나에게 다가온다. 아름답고 흰 부드러운 손. 그리고 나를 어루만진다. 야야..좋았어. 이쁜 여자들이 모두 달려들어 나에게 키스를 한다.좋은 그림이군. 멋지다. 한 여자가 나에게 옷을 휘휘 벗으면서 미소를 던진다.그리곤 한 마디를 했다. "..야." 뭐라구? "..라고." 잘 안들린다. 어서 옷이나 벗어라. "..딸기말이야." 딸기라니? 옷이나 얼른 마저 벗으라니까. "딸기 다 땄다고." 딸기? "딸기 다 땄으니까 난 집에 가겠다구!" 갑작스런 소리에 나는 꿈에서 깼다. 내가 눈을 가늘게 뜨고 녀석을 노려보자 녀석은 움찔해서 뒤로 한 걸음 물러섰 다. "이 자식이 어디서 큰소리야!" 내가 확 주먹을 들어올리자 녀석은 주춤 주춤 방패처럼 바구니를 끌어안고는 물 러섰다.나는 몸을 일으키고는 녀석을 꼬나 보았다. 어느새인지 날은 어두워져 있었다.여기저기서 밤새가 울기 시작했다. "나..나 진짜 집에 가야해." "흥,그렇겠지." 나는 녀석이 내민 바구니를 들어보았다. 제법 묵직했다. 울상이 된 녀석이 날 바라보며 물었다. "나..근데 길을 잃었어...너,길 알지?" 흥 하고 난 비웃어 주었다. 이 쿠베린님께서 길을 잃고 헤메이는 꼬마의 길안내를 해야하냐? 내 반응에 기가 질린 꼬마가 다시 울상이 되어 비슬거렸다. "저기.난 완전히 이 숲에서 길을 잃었어.게다가..난 딸기..따주었잖아?" 녀석의 손등은 피투성이였다.손등과 손목이 온통 피투성이고 엉망진창이었다.나 는 딸기 바구니를 내려놓고는 녀석을 아래위로 보며 물었다. "너 집이 어딘데?" "아그랑." "흥,이몸에게 인간세상의 지명따위 말해봐야 알 거 같으냐?" 내가 비웃어 주자 녀석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앗! 그럼 넌 이 곳 지리를 전혀 모르는 거야?" "알 바가 없으니 알 필요가 없지. 이 나에게 인간세의 지리나 지명따위 알아둘 필요가 있으리라고 보냐?" 녀석은 엉엉 울기 시작했다. 나는 녀석이 우는 몰골을 희안하게 바라보았다. 보고 있으려니 배가 고프기 시작해서 딸기를 주워먹기 시작했다. 바구니엔 딸기가 잔뜩있으니 새삼 조금 먹는다고 해서 파이를 못 만들진 않겠 지. 녀석은 진짜 서럽게 울어대더니 갑자기 눈을 크게 뜨고 날 정면으로 보았다. "넌 무섭지 않아?" 하? 무서워?무서움? "그런 거 내 사전에는 존재하지 않아." 나는 엄숙히 말해주었다. "감히 나 쿠베린님에게 그런 단어를 언급하다니,놀라운 배짱이구나.꼬마." 내가 말하자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퉁퉁 부운 눈을 부비며 말했다. "나는 킬리언..킬리언 이야.난 베델공작의 후계자란 말이야." "흥,그래봐야 인간이지.인간이란 날고 뛰고 기어봤자 인간이야." 나는 그렇게 말하곤 녀석을 바라보았다. 녀석은 금발에 푸른 눈이란 조촐한 모습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제법 귀여운 얼굴이긴 하지만 수컷주제에 낑낑대봐야 소용없다고 나는 말하고 싶었다. "..나..집.." "바보 아냐? 집도 못찾냐?" 나는 일어섰다. 일어서서 녀석을 내려다 보니 둥근 머리통이 보인다.손 전체가 피투성이로 긁혀 있었다.이 자식은 무지 단순한 몸이란 사실을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도망도 안가고 내내 딸기를 땄단 것만 보아도 이 녀석이 단순한 놈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다시 녀석이 날 물끄러미 올려다 본다. 얼굴이 울어서 얼룩 얼룩 하다. 나는 쿡쿡 웃었고 그 다음에는 녀석의 몸을 들어 올려 내 어깨위에 올려놔 주었 다.그리고 딸기 바구니를 녀석에게 들게 한 채로 천천히 걸었다. 손이 엉망진창. 나는 그 손을 핥으면서 녀석에게 말해주었다. "너 멍청이지?" "나,,멍청이 아냐!" KUBERIN.. 세상사 뜻대로 되지않을땐 울어야 하나 웃어야 하나 우는 것 보단 웃는 게 그래도 남 보기에 멋진듯 한데 어이! 소리내어 웃을까 ..아니면 차라리 소리내어 울어버릴까. 2 ....첫번째 만남.... "쿠베린!" 녀석은 두 팔을 벌리고 당장에 달려들어 나를 끌어안았다. "쿠베린! 쿠베린!" "좀 무거워 졌는데." "하하하하..기다렸어!" 두 눈에 기쁨을 가득담고 날 바라보아서 나는 조금은 가슴이 두근거렸다.이 녀 석은 진짜로 날 기다렸구나 하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쿠베린을 위해서 음식을 마련했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녀석이 손짓을 하자 한 구석에 서서 커다란 바구니를 들 고 있던 이쁘장한 꼬마가 한 걸음 다가섰다. 덜덜 떠는 듯한 얼굴을 한 녀석은 나를 보자 마자 진지한 시선을 던졌다.마치 내가 부랑아나 뭐 그런 것일까봐 걱정스러운 듯이 보였다.그래봐야 킬리언보다 도 어린 얼굴이었다. "이 애는 내 시종이자 내 친구인 케엘이야.나랑 같이 공부하고 같이 놀아." 킬리언이 생글 생글 웃으면서 소개해 주었다. "흐응." 나는 바구니를 빼앗아 들어 그 안을 들여다 보았다.그 안에는 과연 내가 좋아하 는 음식들이 가득히 들어 있었고 나는 정원에 털썩 앉아 그 음식들을 줄줄이 꺼 내 놓았다. "음,.그런데 쿠베린,아버님을 만나지 않을 거야? 아버님에겐 쿠베린 이야길 했 는데." "뭐하러 만나냐?" 나는 고기파이를 한 입에 털어 넣으면서 손가락을 핥았다. 그런 나의 모습을 의심 가득한 얼굴로 케엘이 주시하고 있었다.이 녀석은 아무 래도 감시자 같다. 킬리언은 바닥에 놓인 돌멩이를 툭툭 차면서 나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음,,.하지만 아버진..내 친구를 보고 싶어하셔." 나는 녀석을 흘긋 보았다. "놀고 있네,친구라니.넌 내 애완동물일 뿐이야." 움찔하던 케엘이 대신 분노에 가득차서 날 쏘아보았다. "무슨 소릴 하는 겁니까! 감히 대공자께!" 녀석은 고함을 지르곤 킬리언의 앞을 막아섰다. "당신같은 부랑자따위와 어울릴 분이 아니란 말입니다! 말을 조심하세요!" 나는 먹던 나무딸기 파이를 쥔 채로 나를 감히 부랑자라 말한 케엘이란 꼬마를 바라보았다.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케엘은 얼굴이 삽시간에 새파랗게 질리더니 그 다음엔 아예 혈색이 사라져 버린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녀석은 킬리언의 앞을 막아선 채 바들 바들 떨었다. "케엘,화내지마.쿠베린은 원래 말을 험하게 해.악의가 있거나 한 건 아니라구." "안,,안됩니다! 이런 부랑자와 같은 자와...!" 케엘이 달달 떨면서 말했고 나는 벌떡 일어서서 케엘의 앞으로 걸어갔다.케엘의 얼굴이 이젠 납빛이 되었다.그렇지만 녀석은 물러서지 않은 채로 달달 떨며 나 의 시선을 받기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다..당신,무..물러..물러서십시오!..고,,공자께는..소..손가락하나도.." 달달 떨리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물끄러미 녀석을 바라보다가 그 녀석의 어깨너머로 킬리언 녀석의 멱살을 쥐어 잡았다. "왓!" 놀란 케엘이 뒤를 돌아보면서 내 팔뚝에 매달리며 어떻게서든 킬리언을 잡은 내 손을 떼어내려고 발버둥을 쳤다. "안돼! 놔라! 공자를 놔라!" 말 그대로 발 버둥이었다. 나는 왠지 유쾌해져서 킬리언을 잡아 올려 내 어깨위에 올려놓은 다음에 케엘이 란 꼬마를 밀어 내며 물었다. "어쩔거야? 내가 이 놈의 손가락하나가 아니라 엉덩이를 만지면?" "이..이런..무례한!" 케엘이 당장에 허리춤에 찬 쇠꼬챙이를 뽑아들고 나에게 돌진했다. 나는 킬킬 웃으면서 어깨위에 킬리언을 올려놓은채 녀석의 엉덩이를 찰싹 때렸 다. "왓!" 킬리언이 소릴 질렀고 케엘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그만해! 놔드리란 말이야!" 케엘이 길길이 날뛰면서 나에게 달려들었다. 나는 이번엔 킬리언을 공중으로 집어던졌다.킬리언이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면서 공중으로 몇 치아르나 솟아 올랐다. "악!" 케엘이 비명을 올릴 찰나에 나는 킬리언을 받아 들었다. "이럼 어쩔 건데?" 이건 재미가 넘친다.역시 애 놀리는 재미는 만만찮아. 킬리언은 킬킬 웃느라 정신이 없다.녀석은 내 목에 찰삭 달라붙어서 쿡쿡 웃어 대고 있었다.나는 킬리언의 몸을 안아 다시 허공으로 집어던졌다. "꺄오!" 케엘의 새파랗게 질린 얼굴과 반대로 킬리언은 킬킬 웃고 있었다. "고만해!" 킬리언이 웃었고 나는 그녀석의 몸을 잡아 챈다음에는 바닥에 대굴 대굴 굴리면 서 간지럼을 태우기 시작했다. 킬리언이 웃으면서 잔디위를 대굴 대굴 굴러다녔다. "고만하라니까!" "꺄하하하하.." 녀석은 다시 내 목에 찰삭 달라붙는다. 따스한 온기. 어린애. 내가 미소를 짓는 동안 케엘은 굳어 선 채로 그대로 우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묘하게 조숙한 얼굴을 한 녀석은 물끄러미 나와 킬리언을 보고 또 보았다. 킬리언은 엉망진창의 몰골로 셔츠는 반이 날아가고 바지는 흙투성이가 된 채로 맨발로 대굴 대굴 구르고 있었고 나는 그런 녀석을 말 그대로 공굴리듯 굴리고 있었다. "배고파." 킬리언이 엉금엉금 기어서 바구니쪽으로 갔고 나는 그런 녀석의 발목을 잡아 당기면서 쓰러뜨렸다. "야,꼬마,네가 가져와." 내가 말하자 케엘은 굳은 얼굴로 날 보다가 묵묵히 걸어가 바구니의 음식들을 다시 꺼내 놓았다. 발라당 누운 킬리언은 내 품안에서 과자부스러기를 사방에 남기면서 케엘을 바 라보았다. "비밀이야.케엘." 뭐가 비밀이란 걸까. 알고 보니 사실은 킬리언이 내 애완동물이었다는 거? 케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석은 기이한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나는 손을 뻗어 부지불식간에 그 조숙한 눈을 한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녀 석이 흠칫하더니 금새 얼굴이 붉어져 부끄러운 얼굴을 했다. "네 아빈?" 케엘이 발끈하기전에 킬리언이 대꾸했다. "나가셨어,바쁘시거든." "흐응." "나라를 위해서 언제나 바쁘셔.." "흐응...웃기는군 .." "우움.." 킬리언은 머리를 내 가슴에 박으면서 문대었고 나는 녀석의 머리통과 등어리를 마구 흔들어 주었다.녀석이 억눌린 음성으로 킬킬거렸다. "쿠베린,나, 칭찬받았다." "뭘?" "나,검술에 소질이 있다고 칭찬받았단 말야." "흥." "흥이 뭐야! 나는 칭찬받았어.나같이 잘하는 재능이 넘치는 검사는 없을거라고 기사단의 말콘경이 말했다구!" "흥." "진짜라니까!" 녀석은 발딱 일어서서 쇠꼬챙이를 다시 들어보였다. "보여주지." 그리고는 맨발로 잔디위를 뛰어다니면서 나에게 그 어줍잖은 실력을 보여준다고 난리를 피우기 시작했다.허리가 팽팽 돌아가는 것을 보니 앞으로 좀 늘긴 하겠 지만 그 정도 실력을 실력이라고 부르긴 우습잖아? 케엘이 진지한 자세로 그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입니다." "뭐가?" "진짜로 기사단장이신 말콘경이 말했어요.우리 공자님은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 고." "그래봐야 인간이야." 나는 턱을 고이고 대굴 대굴 하면서 말했다. 케엘이 발끈한 표정을 짓다가 뾰루퉁한 얼굴이 되어 고개를 팍 돌렸다. "나에게 덤벼봐.쿠베린." 잘난 척하고 녀석이 나에게 쇠꼬챙이를 들어올렸다. "헹." 나는 비웃었고 발끈한 킬리언이 달려들어서 나에게 칼을 휘둘렀다.어린 애에게 어울리는 레이피어였다.나는 그것이 눈앞까지 가까이 오자 손톱하나를 꺼내어 막아주었다. "엑!" 케엘이 내 손톱을 보고 놀라 뒤로 비틀 했다. 그리고 킬리언이 호승심에 가득찬 얼굴로 나에게 달려들었다. "이엽!" 여전히 놀고 있다라고 밖엔 할 수 없는 속도에 실력이다. 나는 이번에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으로 막아냈다.킬리언이 이리저리 칼을 휘두르다가 안되니까 화가 치민듯 외쳤다. "진짜로 해보자니까!" "진짜로 하면 넌 죽어." 난 가볍게 말하곤 녀석을 물끄러미 보았다. 갑자기 킬리언은 칼을 멈추고 날 바라보았다. 그 얼굴에 놀람과 공포가 떠올라있었다.나는 조금 후회했다. 어린 것을 너무 골려주는 것은 별로 좋지않다. "쿠베린.." 갑자기 그가 한숨을 내쉬고 손을 뻗었다.그리곤 들고 있던 칼을 던져 버리고서 내 가슴으로 뛰어들어와 머리를 치박았다. "아..안갈거지?" "어딜?" "우리 어머니처럼 죽어버리지 않을 거지?" "아아.애완동물주제에..말도 많군." 나는 그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키스했다. 어린애,어린애... KUBERIN.. 세상사 뜻대로 되지않을땐 울어야 하나 웃어야 하나 우는 것 보단 웃는 게 그래도 남 보기에 멋진듯 한데 어이! 소리내어 웃을까 ..아니면 차라리 소리내어 울어버릴까. 3 ..... 두번째 만남..... 인간들의 전쟁이란 이상한 것이다. 별로 대단찮은 이유로 싸움을 하면서 엄청난 대의명분을 걸고 있었다. 잃어버린 영토의 회복,그리고 나의 조국과 나의 왕을 위해서? 놀고 있네. 나는 전쟁터를 걷고 있었다.피비린내나는 시체들이 널려있지만 신선한 것은 아 무것도 없이 쇠냄새와 피냄새가 교차하고 까마귀와 맹금들이 몰려와 포식하고 있었다.대지의 여신은 지나친 과식에 화를 내고 있지않은가. 멀리 마잉꽃의 문장이 보였다. 피에 젖은 그 몰골이었다. 사방에 널린 시체더미 위에 홀로 남은 피에 젖은 깃발이 아우성 소리에 밀려 시 끄럽게 울려퍼지고 있었다.기가 막힌 비명소리가 구름한점 없는 깨끗한 가을 하 늘에 울려퍼지고 있다.노래소리처럼,거대한 죽음의 합창처럼 돌진하고 돌진하는 병사들이 보인다. 그 와중에 내 아이가 있었다. 내가 이 손으로 데리고 놀고 예뻐했던 어린 아이가 있었다. 나는 몸을 세우고 그리로 돌진했다. 인간들의 핏속으로 달려가면서 나는 마잉꽃 문장밖에는 보지않았다. 부딪치는 쇠와 쇠. 부딪치는 살과 살. 손톱의 예리한 끝으로 뭉툭한 살덩이들이 떨어져 나갔다.그 위로 나의 얼굴로 몸으로 뜨거운 피들이 쏟아져내린다. 신선한 피,증오하는 피,그리고 죽어가는 자의 원망이 어린 핏줄기. 그 안에 내 어린애가 있었다. 내 어린애. "공작을 지켜!" "공작을 지켜라!" "싸워라!" 고함지르는 기사들이 사방을 메우는 적병들에게 휩싸이면서 소리치고 있었다. "죽여라!" 사방은 새까만 군장을 갖춘 자들로 가득했다.바글거리는 벌레처럼 그 것들이 내 아이에게 덮쳐가고 있었다.내 아이는 그 안에서 무력한 칼을 휘두르면서 또 휘 두르면서 사방에 그 존재를 알리고 있었다. "으아악" "죽여!" "아악" 무익한 피,무익한 죽음. 내 앞을 가로막을 수는 없다.아무도 내 앞을 막을 자격은 없다. 내 아이가 지금 이 나라의 운명을 맡아서 이 손바닥만한 인간들의 이기심에 가 득찬 이 나라의 땅을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었다. 겨우 9백명에 이르는 기사들을 데리고 적병 3천을 맞아 싸우고 있는 것이다.이 피로 물든 골짜기.왕성으로 곧장 나아가는 자그마한 골짜기에서, 이름따윈 기억 도 하지못할 이런 골짜기에서 싸우고 있는 것이다. "조금만 버티면 ..!" "조금만!" 기사들이 독려하고 있었다. 선두에서 싸우는 기사들의 가슴이 터져나가고 적병들의두터운 창날이 그 자리 를 메웠다.쓰러지고 쓰러지는 인간들의 주검속에서 피투성이로 엉망진창이 된 그 아이가 있었다. "죽어!" 한 적병이 창을 찔러갔다. 그의 앞에 있던 기사가 그것을 막아 대신 물리쳤다.피투성이가 된 기사는 파란 입술을 깨물고 적병을 향해 돌진했다. "우와아아.." 무익한 죽음.죽음. 기사의 칼날이 두명의 적병을 베고 그리고 그 자신은 사방 일곱개의 창날에 꽂 혀 피를 뿌리고 쓰러진다.내 아이가 울부짖듯이 살기를 풍기고 있었다. 내 아이가 울부짖고 있다. 내 아이를 건드릴 수는 없다. 내 아이다.내가 사랑한 아이. 나는 돌진하고 있었다. 내앞을 막을 수 있는 놈은 아무도 없다.내 발밑에는 시체만이 놓일 뿐,신선한 피와 아직은 뜨거운 피가 치솟는 시체 위에서 나는 달려가고 있었다. "우오오오.." 절로 가슴 저밑에서 울부짖음이 터져나왔다. 내 앞을 막고 내 아이를 막는 놈은 모조리 죽여버린다.살려두지 않겠다. 다리는 팽팽히 힘을 발하여 공중으로 치솟아 오르고 그 다음엔 두 손에서 다섯 개의 강철의 칼날 보다 강인한 손톱이 튀어 올라 사방을 훑는다. "으으.." "괴물이야!" 모두들 그제서야 나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나는 내가 죽인 백수십의 시체 위에 서서 손톱과 손등을 적시고 있는 피를 핥으 며 서 있었다.놈들은 순식간에 반으로 갈라져 날 위해 길을 내 놓고 있었다. 나는 전투모드로 천천히 전환했다. 녀석들을 상대로 이런 짓을 하는 것도 우습지만 어쩔 수 없었다.시간을 절약하 기 위해선 그게 최고였다. 두 팔이 우두둑 하고 뼈가 갈라지는 소리를 내면서 근육이 자라고 발은 선명하 게 두터운 발톱과 강인한 발목을 자랑했다.전신에서 미끈한 검은 털이 솟아나오 고 그 다음엔 머리칼이 빳빳히 힘을 받는다.팔꿈치와 팔뚝,무릎에선 비늘이 솟 아나와 마침내 전투태세를 갖추었다.손톱은 손끝에 다섯,다시 손등에 다섯개로 늘어나 그 날카로운 태세를 정비했다. "괴..괴물이다!" 놈들이 겁에 질린다. 나는 두 팔을 가슴에 모으고 숨을 들이쉬어 움추린 뒤 그 다음에는 화살을 쏘려 고 버둥거리는 겁에 질린 인간들을 향해 힘을 개방했다. 쌔애애액 사방을 찢어버리는 파공성이 전후사방,아니 삼십육방 이상으로 퍼져나갔다.나의 전신에서 튀어나온 날카로운 비늘이 인간들의 살갗을 산산히 찢어 난도질을 해 버린다.사방이 튀어 나온 피로 물들고 인간들은 전의를 상실한 채 달아나기 시 작했다.나는 달리고 달려서 그 도망가는 자들을 갈갈이 찢어 버렸다. 모처럼 이렇게 전투모드로 바꾸었는데 이 정도에서 끝나면 아쉽지않은가. 목을 찢어 공중으로 내던지고 그 가슴을 움켜 쥐어 심장을 흩뿌렸다. 피,피,피.. 사방의 병사들이 공포에 질려 달아나고 달아나고 달아나고 있었다.큰 무리를 지 어 달아나던 병사들중 몇몇이 용감하게 나에게 말을 타고 달려들었다. 어리석도다. 말이 나를 보자 마자 겁에 질려 주인을 거부했다.말이 몸부림 하는 순간 나는 녀석의 가슴을 후려갈겼고 금속제의 방호구를 단 녀석의 가슴이 세토막으로 갈 라져 몇 치아르나 튕겨져 나동그라진다. "죽어! 괴물!" 몇몇이 일제히 창을 던졌다. 그러나 한낱 인간의 창이 내 몸에 닿는다고 해도 상처를 입진않는다.나는 힘을 모아 다시 한번 방출했다.내 몸에 닿았던 차가운 창날이 도로 튕겨 사방으로 무 력하게 떨어져 내렸다. "크으..크으." "괴물이야!" 달아나기 시작하는 자들을 죽이고 찢어버리다가 나는 전투모드를 환원했다. 잊은 게 있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멍청히 서 있는 내 아이의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피투성이가 되어 얼굴도 알아볼 수 없는 몰골로 나는 사방을 돌아보았다. 사방은 찢어진 시체의 산이었다. 작은 골짜기는 피로 물들어 흐르는 시내조차 붉었다.갈갈이 찢긴 인간의 시체를 순순히 받아들이고 있는 이 순종적인 대지의 여신은 나의 잔악함을 탓할 것인 가. 수백아니 천여명은 넘고도 넘을 시체의 산 위에 나는 알몸으로 서서 아이를 바 라보았다. 아이는 부하들의 보호아래 서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다들 공포에 질린 얼굴. 아이는 아이가 아니었다. 내 기억속에 있는 아이가 아니었다. 그 자리에 선 것은 낯선 사내의 얼굴,공포와 기쁨이 반반이 된 내가 모르는 낯 선 사내의 얼굴이었다.그 피에 젖은 금발과 금빛 수염이 적갈색으로 보이는 것 은 기묘한 경험. "쿠베린!" 녀석이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음성이 아니었다.굵고 나직한,명령하기에 어울리는 음성. "쿠베린! 기다려!" 나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서고 다시 사방을 보았다. 시체는 산을 이루고 나는 그 시체를 밟고 섰다. 우울함. 참을 수 없는 불쾌할 정도로 우울한 기분. "쿠베린이지! 제발 기다려! 제발!" 그가 울부짖듯이 외치고 있었다.그는 기사들의 보호와 제지를 헤치고 나에게로 달려왔다.그는 나에게로 달려오고 싶어서 몸부림을 하듯이 버둥거리면서 나에게 달려오고 있었다. "쿠베린!" 사방은 조용하다. 적병들이 사라진 사방은 조용하다. 나는 몸을 돌려서 돌아갔다. 내 아이는 여기에 없다. ......세 번째 만남..... "누..구?" 나는 나무위에 앉아서 녀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녀석은 아기 요람을 조금 밀치고 일어나서 다시 창가로 다가왔다. 나뭇가지가 파삭 파삭 소리를 내었다. 창문을 밀치는 그 손은 내가 전혀 모르는 손이었다.주름진 사내의 손이었다. "아.." 그가 나무위를 바라보면서 희미하게 빛나는 태양을 바라보았다. 희뿌옇게 흐린 날씨 탓인지 묵지근 하게 더운 날씨라 땀이 흘러내렸다.그는 얇 은 비단으로 만든 조끼를 벗고 흉터투성이의 상체를 드러낸 채 린넨 셔츠를 벗 었다.그리고는 고개를 들어서 이마위의 땀방울을 닦아 냈다. 주름진 이마.흰머리가 드러나는 관자노리를 누르면서 그가 다시 시선을 허공으 로 돌렸다. "대공전하!" 누군가가 방으로 들어와서 말했다. "창가로 너무 다가서지 마십시오,암살자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 맞아,암살자가 있어. 나는 나무위에서 잡은 인간 하나를 잡아서 툭 하고 방안으로 집어던졌다. "앗!" 놀란 그 자가 마구 달려들어서 그의 몸을 막아섰다.그리곤 동시에 칼을 빼들고 방안에 갑자기 떨어진 시체에 당황했다. "대공전하! 뒤로!" "침입자다!" 큰 소리와 더불어서 성안이 금방 긴장상태에 빠져버렸다. 시체의 목은 간신히 붙어있다가 떨어진 충격으로 분리되어 바닥을 대구르르 구 르고 있었다.피가 바닥으로 번져나갔다. "전하! 저의 뒤로!" "수색하라!" 시끄럽게 떠들고 경비들이 총 출동되어 이리저리 쑤시기 시작했다. "아,에메스를!" 제빨리 시녀와 유모인 듯한 여자가 요람위의 아이를 안아 올려 뒤로 물러섰다. 창가에 앉은 나는 그 몰골들을 보지않고도 잘 알수 있었다. "이 시체는?" "암살자야!" 굳이 조사하지않아도 복면을 하고 어깨에 철노를 멘 자라면 뭐하는 자인가는 뻔 한 이야기였다.나는 턱을 괴고 앉아서 그들이 떠드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대체 어느것이 내 아이일까. "샅샅이 조사해라!" 녀석들이 떠들어 대는 동안 내 아이는 한 마디도 하지않았다. 나는 녀석의 음성을 듣고 싶어 왔지만 나의 이런 짓은 웃기는 일이었다.내 아이 는 이미 없어진 것을 왜 여기에 또 왔을까. 후회하는 짓을 하실 이 내가 아니면서. "쿠..베린?" 갑자기 가슴이 철렁했다. 그가 말했다. "쿠베린이야? 여기 와 있는 거야? 날 지켜주러?" 갑자기 웃음이 터져나왔다. 멍청이.예나 지금이나 멍청하긴 마찬가지. 애완동물을 지켜주는 것은 당연하지않냐? 그가 갑자기 창가로 다가와서 몸을 내밀었다.뒤에 섰던 경비들이 위험하다고 외 쳤지만 녀석은 앞으로 몸을 내밀고는 상처 투성이의 주름진 육체를 나에게 보였 다. "쿠베린!" 그가 손을 뻗어 내가 보이지도 않을 텐데도 내 쪽으로 팔을 뻗혔다. "보게 해줘! 나는 30년도 넘게 널 기다렸어!" 그가 외쳤다. "쿠베린! 너지? 너야? 왜 나에게 나타나지 않는거야!" 턱을 고이고 곧 사라질 아이를 바라보았다. 어린애,내 품안에서 놀던 어린애가 어른이 되고 노인이 되었다. 다시는 이곳에 돌아오지않을 거다. 저 놈이 나에게 보여줄 몰골이란 늙어 죽어가는 지루한 몰골밖엔 이젠 남아있지 않으니까. 내 귀여운 꼬마는 이제 끝. 모두 다 잊어버리고 기억해 내지 말아야지. 아아...멋진 여자의 품안에 안겨서 하루 자고 나면 모든 것을 잊는다. 좋은 것만 기억해. 자식의 귀여운 투정이나, 제법 멋지게 성장해서 다른 녀석들이 전하 전하 하고 불러대는 꼬락서니같은 것,그리고 녀석이 아기를 품안에 안고 있던 그런 것 같 은 거.녀석이 늙어 울부짖는 몰골같은 거 기억하기도 싫고 하지도 않겠어. "쿠베린!" 녀석의 울부짖는 소리 같은 거 듣기도 싫어. 자자,그러니까 안녕. 내 귀여운 꼬마. 이제는 안녕. 제 7화 사랑 KUBERIN... 살아있는 모든 존재들에게 때때로 찾아오는 미풍 가슴 저린 일도 즐거운 일도 결국은 지나가는 바람. 1 오랫동안 길게 누워서 놀고 있으려니 등덜미가 빳빳했다. 너무 누워 놀았나 하고 멍하니 생각하는데 갑자기 창문을 활짝 열며 무언 가가 들어섰다. 그 무언가가 어떤 무언가냐고 묻는다면 나는 세상 천지에 많이 널려있으면 서도 날 매혹시키는 그런 것이라고 대답해주겠다. 보석이든 어떤 보물이든 간에 그것들이 사람들을 매혹시키는 이유는 그것 들이 희귀하기 때문이다.길가에 금덩이들이 줄줄이 늘어져 있다면 왜 모든 놈들이 눈이 벌개서 찾아다니겠는가. 결국 그게 산속 깊이 땅속 깊이 감 추어져 찾기도 힘든 물건이기때문이다. 그런 희귀한 물건도 아니면서 나를 감탄시키고 날 매혹시키는 것들은 물론 나의 반대편,나의 반쪽인 암컷이란 존재다. 이 존재는 내가 몇백년을 살든 언제나 나를 매혹시키고 나를 멍청하게 만 들며 때로는 나를 가지고 놀기도 하고 때로는 나를 절망시키기도 한다. 그런 기이하고 희안한 존재를 신이 만들었다는 것은 자연의 신비요,신의 놀라운 재주이며 또 모든 존재에게 고통과 슬픔등 기타등등의 감당하기 힘 든 감정을 만들게 한 신의 저주이기도 하다. 아, 왜 나는 이렇게 생각이 깊은 것일까. 일단 멍청한 생각은 관두고 내 침대로 기어들어온, 아니 정확히 말해서 내 침실로 숨어들어온 존재를 턱을 괴고 빤히 바라보았다. 창문으로 들어온 것은 살금 살금 길게 늘어진 드레스자락을 끌면서 창틀을 넘고 있었다. 드레스,이건 여자들의,그것도 정확히 말해서 인간 여자들의 전유물로서 대 체 왜 그런 치렁하고도 불편한 것을 아름답다고 선호하는 지 나는 그 이유 를 아직도 알수 없는 물건이다.때때로 이 물건을 인간들이 선호하는 것은 매력이라곤 쥐털만큼도,지렁이 털끝만큼도 없는 인간수컷들이 혹여 달아나 려는 현명한 인간암컷들을 막기 위해 발명해낸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고 있다.즉,저 치렁한 드레스 자락은 암컷들의 족쇄이며 멍에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이 암컷 인간이 어려운 자세로 엉거주춤 내 침실로 들 어오는 것을 바라보는데 그 암컷은 내가 보는 줄도 모르는 건지 혹은 고개 를 돌릴 여력이없는 것인지 일단 드레스 자락을 추켜 올리는데에 바빴다. 그리곤 완전히 방안으로 들어오자 마자 헥헥 거리면서 머리칼을 쓸어올렸 다. 헤에. 이런 가벼운 한탄은 나의 미적 감각이 발휘되었다는 뜻이다. 헤에 하면 아름답다, 크으 하면 끔찍하다,흐응 하면 그럴 듯 하군,쯔으 하 면 뭐 저런게 다 있냐 하는 정도라고나 할까. 그 인간 암컷,그 여자는 나를 드디어 발견했다. 내가 그녀를 멀건히 바라보자 그녀도 날 멀건히 바라보았다. 키는 나보다 작고 호리호리했다.아직 풍만하고는 거리가 멀었지만 새초롬 한 몸매에 이목구비가 귀여움성이 있었다.물론 조인족의 아름다움과는 전 혀 거리가 먼 어린애다운 아름다움이었지만 어찌되었든 이쁜 것은 사실이 었다.아직 인간의 나이로 16,7세 남짓해 보였는데 그녀는 날 보자 숨을 삼 키면서 입을 벌리고만 있었다. "창문좀 더 열어주지 않겠어? 난 더운데." 내가 먼저 말해주자 그녀는 허억 하고는 뒤로 주춤 주춤 했다.그리곤 나를 뚫어지듯이 바라보았다. 물론 나야 눈부신 미모의 소유자로서 검은 머리에 매혹적인 바다색을 한 미소년타입이지만 여자들의 취향이란 것은 보편적인 미모와는 의외로 관련 이 없는 경우가 다반사인지라 나는 내 매력이란 것을 믿지 미모를 믿진 않 고 있다. "넌 누구냐?" 소녀가 먼저 물었다. 나는 턱을 괴고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누군지 궁금하면 너의 이름을 먼저 대는 게 어때? 뒤에 가정교사라도 쫓 아오는 거냐?" 내가 턱을 괴고 묻자 그녀는 잠시 당황하더니 곧이어 생긋 미소를 짓고 내 앞으로 왔다. 여자들이 미소를 지을 때, 특히 자신들이 불리해질 때 미소를 짓는다는 것 은 매우 매우 위험하다는 신호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지도 알지 못하는 소녀는 내 옆에 와 털석 앉더니 내 얼굴을 보며 물었다. "넌 누구니? 여기 온 손님? 이름이 뭐야?" "너는 누군데?" 내가 묻자 그녀는 방글 방글 웃고는 대꾸했다. "내 이름은 미트라라라고 해." "그래?" 나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곤 그녀가 뭘 속이려 드는 지 궁금해서 이 어린 인간의 소녀를 주시했다. "난 쿠베린이다." "음,쿠베린,어느 집안에서 왔어? 너 왕족은 아니잖아?" "응,왕족은 아니다.난 그저 왕일 따름이니까." 내가 시큰둥하게 말하자 그녀의 눈이 커졌다. "헤에?" 그녀는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그렇게 살벌하게 웃으면 내가 무척 무안해지잖아.난 사실을 말한 것인데. 지금 내가 누워 있던 이 장소는 다름이 아닌 왕성안이었다. 에메스 자식이 건방지게 감히 황제인지 왕인지 하는 그 시든 오이같은 자 식에게 나라를 제가 지키겠습니다 운운해서 생긴 유예기간 같은 것 때문에 이 곳에 있는 것이다. 그는 연신 신하들과 회의를 한답시고 어딘가에 처박혀 있었다.그런 녀석에 게 지금 비오나가 남장까지 하고 달라붙어 있으니까 내가 끼어들 필요는 없을 것이고 솔직히 말해 녀석과 달라붙어 있기도 싫었다. 망할놈의 자식! 나라를 지켜? 지가 지켜? 건방지기 짝이 없는 녀석. 델리암의 인간들이 몇 명인지 알고나 있는 것인가 저 멍청이는? 인간들이 가진 머리란 한계가 있는 것 같다. 나라를 지킨다는 것은 나라안의 모든 존재들이 총 출동해야 가능한 일이 다.인간 기사따위 혼자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내가 지킬께를 연발해 봐야 지킬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서 있는 손바닥만한 땅덩이밖에 없다. 성하나 를 지키기 위해선 성을 움직이는 인원 모두가 총 출동해서 각자 손톱과 이 빨을 들이내밀며..아니,인간이니까 창칼을 들고 나서야 가능한 일이다.그렇 게 난리를 쳐도 지킬까 말까 한 데 자식은 지가 뭐라고 손발이 천개나 되 나? 아님 몸이 천리를 날기라도 한단 말이냐? 저 자신은 그저 조막만한 인간인 주제에 이 거대한 땅덩이를 지키겠다고 나서다니. 그리고 그것을 들으면서 박수 치고 환호하면서 만세를 지르는 인간들이라 니 머리가 없다는 증거였다. 바보, 멍텅구리에다 발뿌리가 허공에서 돌아다 니는 자기 주제도 모르는 존재란 증거인 것이다. 지 아비랑 다를 것이 하 나도 없는 놈이었다. 멍청한 왕실에의 충성심에 불타서 자신의 주제도 모르고 한계도 모르고 날 뛰는 명예욕에 불타는 한심한 놈. 화가 나서 녀석을 걷어차고 나와버렸다. 그리곤 지금 이렇게 내게 할당된 방에서 대굴 대굴 구르는 중이었다. 린은 조인족의 아가들을 지키는 중이고 가빈은 조인족의 아가들과 수다를 떠는 중이다.그리고 조인족아가들은 방안에 박혀서 인간들의 왕성을 내려 다 보며 분명 수다를 떨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난 길게 누워서 아무것도 하지않고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있던 중 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때에 내 낮잠을 방해한 이 인간의 소녀가 창문으로 기어들 어왔던 것이다. "음,넌 참 재미있는 애구나." 나는 그녀를 뜨악하게 바라보았다. 아무리 내가 굶주려(?)있다고는 하지만 이런 어린 여자에게 손을 댈 마음 은 전혀 없었고 게다가 조인족의 셀레네가 나에게 목을 매고 있는 이 시점 에서 이 꼬마를 내가 새삼 꼬실 필요는 전혀 없었다. "왕이라고 자처하는 애는 처음 봤어.맞아.하긴 뭐 왕이 어떻다고 그래? 넌 왕이라고 해서 두려워 하거나 하진 않지?" "내가 왕인데 뭘 두려워 한다는 거야?" 내가 역시 뜨악하게 대꾸하자 그녀는 생긋 웃더니 말했다. "좋았어! 넌 지금 뭘 하니?" "보면 모르냐? 자고 있었지." "이런 대낮에?" "대낮이니까 낮잠을 자는 거지.너 머리가 상당히 나쁘구나." 웃 하고 여자애가 얼굴을 굳혔다. "알았어.내게 방해받아 기분이 나쁜 거니?" "나쁠 거 까진 없지만 조금 귀찮군." 내가 대꾸하자 그녀는 얼굴을 붉히고 화를 냈다. "감히..!" 감히 좋아하시네. 이래서 인간이 싫다니까. 내가 뜨악하게 다시 베개에 얼굴을 묻자 그녀는 으음 하고 기분을 가라앉 히더니 조용히 말했다. "너,심심하지않아?" "별로." "밖에 나가볼래? 나랑? 놀러가자." "흐응." "흐응이 뭐야? 나랑 놀러가자구. 밖이 궁금하지도 않니?" "궁금할 게 뭐냐? 그저 인간들만 바글 바글한 평범하기 그지 없는 왕성일 따름인데." "어머.." 그녀는 내 옆에 다가와 앉았다. "넌 시가지를 잘 아니?" "알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 나는 뜨악하게 말했다. "길을 잘 알아?" "길거리를 알아 뭘하냐? 뚫린 게 길인데." "난 나가기만 하면 길을 잃어 버려." "바보니까 그렇겠지." "너어..정말!" 이젠 화가 나는 지 내 등을 힘껏 주먹으로 때렸다. 별로 아프진 않지만 그렇게 화를 내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매력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그녀의 얼굴을 정면에서 다시 보니 이건 꽤 귀여운 맛이 있 었다. 역시 성질 내는 인간의 여자는 이쁜 데가 있다. "뭘..뭘봐?" 그녀도 새삼스레 지금 상황을 인지했던 것 같다. 어리다곤 해도 16세면 결혼도 할 나이다. 그런 아가씨가 내 침대위에 나란히 앉아서 드러누운 나의 등을 때리다 말 고 손을 멈추었다.이건 상당히 야릇한 설정이 아닌가 하고 내가 빤히 바라 보자 그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그녀는 주춤 내 침대에서 뒤로 움직여 일어섰고 나는 그런 그녀의 손을 잡 았다.그녀가 핫 하고 놀랐지만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아당겨서 그녀를 나랑 나란히 눕게 했다. 그녀는 비명을 삼키고 파랗게 된 얼굴로 침대위에 쓰러졌다. 아마도 온갖 상상을 다 하고 있을 그 머리를 나는 툭툭 치고 물었다. "어디로 놀러가고 싶어?" 그녀는 고개를 바짝 들고 날 바라보았다. 나도 심심하다. 차라리 어리긴 해도 암컷이니까 밖에 나가서 히죽 히죽 웃어가면서 노는게 수컷들에게 둘러싸여 땀냄새 맡는 것 보단 훨씬 낫다. "여긴 지겨워, 멍청하기 짝이 없는 인간들 투성이에,잘난 척하는 수컷들 투 성이니까 말이야." 내가 말하자 그녀의 눈이 다시 빛나기 시작했다. "진짜야?" "그래,나가자.어딜 갈래?" "이 성에서 나가기만 하면 돼." 그녀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역시 수상한 여자애로구만. KUBERIN..... 살아있는 모든 존재들에게 때때로 찾아오는 미풍 가슴 저린 일도 즐거운 일도 결국은 지나가는 바람. 2 여자를 데리고 길을 나갈때는 물론 여러 가지 상황이 있기야 있겠지만 조 심해야 할 사항이라는 게 분명히 존재하긴 한다. 일단 여자를 데리고 길을 갈 때는 달구지가 지나가는 길목에서 약간 내가 방어하는 자세로 가야한다는 것이다.어쩌면 달구지나 마차가 지나가면서 여자에게 튀길 기타등등 오물로부터 보호하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행동이 굼뜬 인간여자들에겐 반드시 취해야 할 태도이기도 하다. 두 번째는 역시 추한 꼴을 안보이도록 할 것. 예를 들어 어떤 수컷이 길가 다 술주정하면서 벽에 실례하는 몰골 같은 거. 혹은 왈칵 왈칵 토한다던가 여자들을 희롱하는 모습 같은 것을 보이지 말아야 한다. "앗.."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미트라라는 애가 결국 보고야 말았다. 어떤 녀석이 술먹고 벽에대고 실례하는 그 몰골을. 나는 미트라의 팔뚝을 잡아 채서 다른 골목으로 들어섰다. 시장의 사람들은 여전히 바빴다. 먼지가 일어나고 사람들이 소리지르고 아이들이 떠들어 대고 말과 소같은 짐승들이 바쁘다. 어떤 양탄자를 파는 상인이 뭘 먹다 자신의 상품에 흘린 꼬마의 귀바퀴를 움켜쥐고 끌어당기며 욕설을 퍼붓고 있다.그 옆에서 그 어머니 인듯한 여 자가 고함을 지르면서 싸우고 그 옆에선 그 꼬락서니를 멀거니 바라보는 벌거벗은 어린애가 있다. 과자를 파는 장사치들이 꼬마들의 시선을 앗으면서 잘난 척 떠들어 대고 있는 동안 꼬마들은 동전하나 없는 맨 손으로 그 뒤를 하염없이 따르고 있 었다.몇몇 소녀들이 장신구점 앞에서 물건을 고르는 건지 수다를 떠는 건 지 알수 없는 태도로 떠들어 대고 있었다.무거운 짐을 나르는 당나귀가 주 인의 손아래 채찍을 맞고 먼지를 풀썩 풀썩 날린다. 그 모든 광경을 넋을 잃고 바라보던 미트라는 몇번이나 넘어질 뻔했다. 바닥이 고르지 못한 탓이긴 하지만 나는 그녀의 팔을 공손히 잡아주었다. 미트라는 끌리는 드레스 자락을 들어올리고 나에게 물었다. "뭔가..재밌는 거 없을까?" "재미?" "응. 저거 어떤 맛이지?" 나는 침을 주루룩 흘리며 따라 다니는 애들의 넋을 빼고 있는 과자파는 사내를 바라보았다.사내는 자신의 등에 둥근 바구니에 한가득히 이런 저런 모양의 과자를 담은 채 걷고 있었다. 애들의 어머니인 듯한 아낙네가 몇 아이들에게 과자를 사 주었다. "과자맛이지." 내가 말하자 그녀는 나를 홱 노려보곤 입술을 깨물었다. "사줘." "내가? 왜?" 나는 그녀를 뜨악하게 바라보았다. 나의 주의주장은 결코 여자들에게 물건을 사주지 않는 것이다. 흑심이 있기 전에는 결코 사주지 않는다.그리고 내가 바라는 여자가 아니 고는 절대 사주지않는다.그러고 보니 여자에게 물건을 사준 경우는 인간여 자의 경우 마미가 유일하군. 나는 지금 이 계집애의 길 안내를 하고 있기 때문에 그녀에게 돈을 받으면 받았지 결코 무언가를 사줄 마음은 없었다. "네 돈으로 사.설마 그 만큼의 돈은 있겠지?" 내가 말하자 그녀는 욱 하는 얼굴이 되더니 손을 조물락 거렸다.아마도 가 진 돈이 없는 듯했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귀걸이를 흘긋 보며 말했다. "루비군,팔면 돈이 되겠다." "에?" "네 귀걸이 말야." "이..이건.." "돈 없이 뭔 구경을 하겠다는 거야? 밥도 사먹고 옷도 사고 과자도 사고 뭐 그래야 재미가 있지.너 물건 사본 적도 없지?" 내가 묻자 그녀의 얼굴이 멍해졌다. 이런 이런,이 수상쩍은 여자애의 정체는 빤하다. 이건 고귀하신 공녀 내지는 공주쯤 되는 것 같다. 이번에 결혼한다고 난리를 친 공주가 엘란트라고 이 계집애가 미트라니까 아마 트라로 계속되는 그 지위의 계집애인 모양이다. 내가 그렇게 예리하게 파악하고 있을 때 미트라는 약간의 갈등을 느끼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그리곤 나에게 바로 물었다. "어디다 팔아?" "보석상." "보석상이 어딘데?" "물어보면 되지." 나는 옆에 지나가는 신발장수에게 물었다. "이봐,보석상이 어딘가?" 신발장수는 나와 미트라를 번갈아 보고는 흥미진진한 얼굴로 대꾸했다. "큰 곳을 찾는다면 저 골목 위로 가서 에르필상회에 가시구려." "좋아." 나는 미트라의 팔을 끌고 그리로 갔다. 왕성은 처음이 아니긴 하지만 여자를 이렇게 끌고 다니는 것도 각별한 재 미다.물론 약간 배가 고파지기 시작해서 뭔가 먹을 만한 식당을 찾아야겠 다는 생각도 떠올랐다. "나 배고파." 미트라가 말했고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귀걸이를 팔고 뭐 먹으러 가자." "뭐가 맛있을까?" "보석상에 가서 최고의 요리집이 어디냐고 물어보면 간단히 해결되지." 내 말에 감탄한 미트라는 팔짝 뛰면서 내 옆에 바짝 붙었다. "그래! 가자!" 난 네 돈으로 먹을 거야. 내 생전 여자에게 절대로 밥은 사주지않거든.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녀를 데리고 골목으로 올라갔다. 붉은 벽돌로 만들어진 2층짜리 가게를 발견하자마자 미트라는 조금 머뭇했 다.내가 그녀를 돌아보자 그녀는 날 바라보면서 우물거렸다. "저기.." 저기고 여기고 간에 나는 그녀가 뭘 보고 그러는 지 곧 눈치챘다. 호화스런 마차가 골목 앞에 서 있고 그 보석가게앞에 사람들이 오가고 있 었다.그 마차에서 내리는 사람들은 보이지않았지만 십중팔구는 틀림없이 가게 안에서 물건이라도 고르고 있음직했다. "아는 사람들이냐?" "아니! 절대로 아니!" 흐응... 그렇게 말하면 절대로 그렇다로 들린다. 나는 미트라의 손을 잡고 아쉬움 없이 그 아랫가게로 들어갔다.미트라는 갑자기 내가 확 잡아 끌자 비틀 비틀 거렸지만 내 등에 얼굴을 묻고 말없 이 서 있었다. 어떤 가문의 마차이길래 이 계집애가 한눈에 알아보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 옆 가게로 들어서자 매끈하게 꾸민 사내 녀석이 우 리들에게 다가와 섰다. "어서 오십쇼!" "아,물건을 좀 팔려고 하는데?" 내가 말하자 그녀석의 얼굴이 조금 일그러졌다. "쓸만한 물건이있다면 살 수도 있고." 나는 미트라의 휘황한 드레스자락을 은근히 보여주며 말했고 청년은 곧 생 긋 웃으면서 안으로 하고 말했다. 붉은 벽돌으로 지어진 그 가게 안은 바닥은 대리석으로 깔았고 유리와 창 석으로 장식된 모습이 상당히 화려했다.바닥에 깔린 붉은 양탄자 덕분에 걸을 때 마다 소리가 나지 않아 귀에 거슬리지않아 좋았다. "이리로,어떤 물건입니까?" 미끈한 녀석말고 약간 늙으수레한 녀석이 다가오며 물었다. 미트라는 내 얼굴을 흘긋 보면서 귀걸이를 빼내었다.그 빼낸 귀걸이를 내 가 먼저 잡아 채서 그 모양새를 살폈다.눈을 가늘게 뜨고 살피자 미트라가 날 흘긋 흘긋 보았다. 노인네는 약간 욕심어린 얼굴로 내 손위의 루비 귀걸이를 바라보았다. "그겁니까?" "응." 아름다운 붉은 빛깔이 떠오르자 그의 얼굴이 탐욕으로 서렸다. "최고급 루비." 흐음 하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손바닥에서 아래로 내려놓자 노인은 그것을 뚫어지도록 바라보면서 물었 다. "이것을 파실 겁니까?" "네." "으음...가격은?" 그가 말하자 미트라가 대뜸 말했다. "가격대로 주세요." 노인은 생긋 웃더니 렌즈를 눈에 대면서 귀걸이를 바라보았다. "한쪽만 파실 거라면...액수는 얼마 안될 거에요." "얼마?" "육천길레 드리지요." 나는 늙은이를 빤히 바라보았다. 미트라는 개념이 없는 지 눈을 동글 동글 뜨고는 나에게 물었다. "육천길레라면 얼마나 되나? 옷을 살수 있어?" 나는 그녀의 얼굴을 빤히 보면서 대꾸해주었다. "이 늙은이는 지금 나에게 장난을 하고 있어.이 루비를 차라리 나에게 팔 아라.미트라." "응?"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건 이만오천길레는 나가는 물건이다.이 세공은 드워프가 한 백은세공이 야.이거 한쌍은 아마도 네 생일 선물이나 기타등등으로 받은 거겠지?" "유스톤후작이 선물로 줬어." 그녀는 순순히 대꾸했다. 노인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렇겠지,후작의 이름을 대는데 얼 수밖에. "하,하지만 겨우 한쪽에 이만 오천길레는 낼 수 없습니다.게다가 이건 흠집 도 있고..." 노인이 그렇게 말할 때 나는 미트라의 손목을 잡고 말했다. "좋아,내가 사 주지. 이걸 나 줘라." "뭐,그래." 미트라는 멀뚱 멀뚱 거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뭔지 잘은 모르지만 노인이 바가지를 씌우려 했다는 것은 눈치챈 모양인지 내 말에 순순히 응했다. 그녀와 내가 막 나가려 할 때 노인이 급히 말했다. "만 오천 길레 이상은 못줍니다!" 나는 홱 돌아보며 말했다. "만 칠천!" "안됩니다." "그럼 관둬." 내가 나가자 쳇 하고 노인이 말했다. "만 육천으로 하죠." 멋진 요리집으로 찾아가자는 내 말에 그녀는 즐겁게 따라왔다.물론 돈주머 니는 내가 챙겼다. 그녀는 남이 돈을 가지고 자신을 사주는데에 너무 익숙 했다.그 때문인지 아무런 생각도 없이 내 뒤만 졸졸 따라왔다. "일단 옷을 갈아입자." "응?" "불편하지 않아?" "불편해,몇번이나 넘어질 뻔했어." "여행하는 여자들이 입는 옷으로 갈아입어." "여행하는 여자들은 어떻게 입는데?" "용병스타일이 있고 단순한 여행자 스타일이 있어.어느쪽으로 할 거냐?" 그녀의 눈이 별빛처럼 빛나기 시작했다. "여자용병스타일! " 그럴 줄 알았다. 나는 그녀와 옷가게에 가서 여자용 가죽갑주를 사고 그 안에 받쳐입을 린 넨셔츠와 짧은 바지를 샀다.그녀는 그것을 입어보고 즐거워 했는데 그녀가 잘생기고 잘 빠졌다는 것은 그런 옷을 입고도 잘 어울린다는 것으로도 증 명되었다. 가게 주인은 그녀가 그렇게 옷을 갈아입고 즐거워 하자 나에게 조용히 윙 크를 하며 말했다. "아주 어울리는 한 쌍이군요." 농담하지마. 난 저런 빈약한 스타일은 좋아하지않아. 모름지기 암컷이라면 나올 데가 다 나와 요염한 맛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저 애는 얼굴은 이쁘지만 아직 몸매는 덜 나와서 말 그대로 아가다. 그러고 보니 조인족의 셀레네는 어떻게 하고 있을까? 그녀를 보러 가기로 약속했던 거 같은데.. "이제 밥먹으러 가자!" 그녀가 내 팔짱을 잡아 끼며 말했다. 뭐,기분은 나쁘지않군. 그녀와 함께 가장 큰 식당을 찾아 가는 도중 나는 익숙한 냄새를 맡았다. 그 냄새는 내가 아는 인간의 냄새였는데 지금 그와 얼굴을 마주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어쨌든 녀석이 이 곳에 도착했다는 것은 확실한 이야기 였으니까. "저기야!" 미트라가 즐거운 지 팔짝 팔짝 뛰면서 삼층짜리의 호화식당을 가리켰다. 이 호화식당은 아마도 왕년 귀족의 저택을 개조해서 만든 모양이다.그 안 으로 들어서자 종업원이 깍듯하게 절을 하면서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요,두 분이십니까?" "응" 미트라는 그렇게 말하고 내 팔짱을 낀 상태로 식당안을 돌아보았다. 눈이 반짝 반짝 빛나고 있었다. "조용한 곳으로 안내해." 내가 말하고 문득 주변을 돌아보니 사람은 별로 없었다. 생각외로 비싼 집이었던 모양이었다. 샹데리아가 천정위에서 빛나고 바닥은 융단으로 깔려있었다.탁자는 전부 흰 백석으로 깎아 만들었고 의자는 자단목이었다.사람들은 제법 우아한 척 을 하면서 고급스런 옷을 끼어 입고 앉아 담소를 하며 식사를 하고 있었 다.모두 해봐야 넓은 홀에 앉은 사람들은 열명이 채 되지않았다. "그럼 이층으로 가시지요." 종업원은 훈련이 잘 되어있는지 단정하게 말하곤 앞장섰다. "음..뭘 먹을까? 뭘 먹으면 좋겠어?" 미트라가 내 팔뚝에 달라 붙어 물었다.호기심 왕성한 표정이었다. "글쎄,일단은 가볍게 시작해서 가장 좋은 것으로만 먹어보자." 계단을 올라가자 익숙한 냄새가 코 앞에서 아른 거렸다. 오호 이것은! KUBERIN....... 살아있는 모든 존재들에게 때때로 찾아오는 미풍 가슴 저린 일도 즐거운 일도 결국은 지나가는 바람. 3 2층의 식당안에 있는 것은 단 한 무리의 일행뿐이었다. 용병 다섯과 하인으로 보이는 두명의 사내,그리고 왠 요염한 두명의 여자, 그리고 그들의 가장 안쪽에서 여자를 끌어안고 산더미 같은 음식을 쌓아놓 고 있는 뚱뚱한 녀석. 어디서 많이 본 모습이라고 나는 생각하며 웃었다. "이쪽으로.." 종업원이 말할 때 나는 손을 들어보였다. "저기 일행이 있어.됐다." 종업원이 의아한 얼굴로 날 바라보는 동안 나는 성큼 성큼 녀석들에게로 다가갔다. 가장 날 먼저 발견한 용병녀석이 홱 나를 돌아보면서 얼굴이 굳었다. "엇!" "이야,여기서 볼 줄은 몰랐다.아니,여기 온다고 하긴 했었지? 너?" 내가 반갑게 멋들어지게 미소를 지어보이자 용병들은 우물 하며 일제히 자 신들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참혹하게 안색이 굳어진 뚱뚱한 그 녀석은 기름기가 흐르는 입술을 툭 하 고 내밀고는 날 쏘아보았다. "...어쩐 일로..." "왕궁음식이 입에 별로 안맞아서 여기 놀러왔지." 내가 웃으며 말하자 참혹한 표정이 된 녀석은 우물 우물 거렸다. 용병 하나가 재빨리 말했다. "쿠베린,전에도 고약하게 바바님의 노예를 훔쳤는데 오늘도 그럴 참인가?" 나는 어깨를 으슥했다. "바보놈,내가 훔친 거냐? 난 바바놈의 생명의 은인이야." 용병이 눈쌀을 찌푸리며 말했다. "말이 되는 소릴해.내가 알기로 얼마나 많은 피해를 바바님에게 입혔지?" "시끄러,너희들은 지금 나에게 감사해야 한단 말이다." 나는 그렇게 잘라 말하곤 바바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선 땀이 흘러내리고 당황한 얼굴이 된 채로 엉거주춤하고 있었 다.당장 일어날까 아님 이 자리에서 날 무시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 듯해 서 나는 그에게 친절히 말해주었다. "바바,너 날 언제까지 세워 둘거냐?" "....." 그는 날 원망스레 바라보았다. "앉아.." 그는 돼지입을 내밀며 말했다. 내가 덥석 앉자 미트라도 옆에 끼어 앉았다.그녀는 나를 흘긋 보며 흥미 진진한 얼굴을 했는데 나는 탁자위의 음식에 천천히 손을 내밀며 가장 앞 에 놓여진 메추리 구이부터 시작했다. "음...사과소스로 구운 메추리라..괜찮군." 미트라는 날 보다가 자신도 앞에 놓인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그녀는 푸딩과 파이에 손을 뻗으면서 물었다. "친구야?" "아니,내가 키우는 애완동물이다." 바바의 얼굴이 더더욱 참혹해졌다. "어마! 재밌다!" 미트라가 까르르 웃었다. 바바의 얼굴은 새빨갛게 변해 이젠 자줏빛으로 화했다.그는 견딜 수 없다 는 듯 나를 노려보면서 물었다. "언제까지 날 놀릴 참이야! 정말, 전의 그 노예건으로 내가 얼마나 곤란했 는지 알기나 해?" 그의 주먹이 부르르 떨었다. 보석반지를 일곱 개나 끼운 주먹이 탁자에 탁 하고 놓여지는 순간 나는 그 를 살짝 노려봐 주었다. "너 반항하는 거냐?" "..." 땀을 줄줄 흘리며 그는 입을 다물었다. "내가 순순히 말해주지,바바.네가 주운 그 남매는 말이지,조인족이라고 하 는 드문 종족이다.그 종족의 전사는 이 자리에 서 있는 용병들 일곱을 해 치우는데 걸리는 시간이 겨우 ..." 나는 손을 들어서 탁자위에 놓인 촛불을 가리켰다. "이 촛불 끄는데 걸리는 시간 정도다." 무슨 의미인지 파악하는 지 한 참 걸리는 모양이었다. 그는 얼굴을 들고 멍하니 날 바라보았다. "별로 안 강해 보였지? 그래서 잡았지?응?" "저...하지만..그들은..뭐..아직, 어리고.." "그게 문제야.조인족이란 놈들은 아주 고고하기가 더럽게도 고고해서 결코 너에게 사정따윈 두지않아.그래서 아마 자기 종족이 노예로 팔렸다 운운하 는 소리를 듣는 순간 너의 목을 자르고 네 내장을 목걸이로 쓸거야." 바바의 얼굴이 이상해졌다. 미트라가 웃 하고 얼굴을 찌푸리고 날 노려보았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물론이지,물론이고 말고.녀석들은 전사급과 일반인 둘로 나뉘여 있어,전사 급은 인간 열댓명을 손도 별로 쓰지않고 죽여버릴 수도 있는 신궁이지." "하지만...하지만..." 바바가 계속 버벅거렸다. 나는 음식을 계속 먹었다. 곧 새끼돼지 구이에 손을 대고 나이프로 주욱 잘라 미트라의 앞에 놔주자 미트라는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난 돼지고기는 안먹어." "그럼 저 오리구이를 먹어." 나는 그녀의 앞에 바바 바로 앞에 놓인 오리 훈제구이를 끌어다 주었다. 바바는 식욕이 완전히 떨어진 모양이었다. 그는 늘어진 채로 날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허긴 감히 나에게 덤빌 수도 없으니 단념할 수밖에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때였다! 갑자기 쐐애액하고 파공성이 일어나더니 그 순간 무언가가 날아들었다. 나는 손을 뻗었고 그 것을 잡았다. "왁!" 바바의 반응이 느렸다. 나는 바바의 바로 코 앞에서 잡은 물건을 노려보았다. 화살이었다.검은 깃이 달린 화살이었다. 그리고 조금의 숨 쉴 여유도 없이 또 날아들었다. 난 첫 번째 화살을 잡은 손으로 두 번째도 잡아 챘다. 역시 바바의 코앞이 었다.바바는 새파랗게 질린 채 뒤로 등을 기대고 의자 손잡이를 꽈악 쥐고 얼어있었다.녀석이 민첩하다면 탁자 밑으로 숨어야 된다고 판단한 나는 녀 석이 앉은 의자의 다리를 발로 차 부러뜨렸다. "깨액!" 바바가 뒤로 벌러덩 넘어져 바닥에 굴렀다. 그 순간 또 다른 화살이 날아들었다. 바로 바바가 나자빠진 그 순간 그의 머리칼을 날리듯 이마위로 스쳐가자 바바는 헉헉 거리며 엉금 엉금 탁자 밑으로 기어들어갔다. 화살이 두 개쯤 날아들자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용병들은 모두 방패를 쥐 어 들고 두명은 화살이 날아온 방향으로 뛰어가고 두 명은 바바의 곁에서 비명을 올리고 있는 여자들을 밀쳐버린 다음 탁자밑에 숨은 바바를 위해서 방패를 들고 준비 태세를 취했다. "어떤 놈이야!" 내가 고함을 지르면서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노려보는데 이번엔 화살이 나 를 향해 날아들었다. 나는 그 화살을 손으로 쳐 떨어뜨려 버리곤 그 화살에 담긴 냄새를 맡기위 해 코에 들이댔다. "조심해!" 얼굴이 새파래진 미트라가 고함을 지르듯이 하며 외쳤다. "탁자 밑에 들어가 있어!" 내가 고함을 지르면서 벌떡 일어서자 그녀는 내 옷자락을 잡았다. "조심.." 그 순간 또 하나의 화살이 날아들었기 때문에 나는 대체 아까 뛰어간 놈들 이 뭘하고 있는 거냐 싶어 울화통이 치밀었다. "이게..진짜!" 아직도 못잡은 거냐 하고 있을 때 미트라가 재빨리 탁자 밑으로 기어들어 갔고 나는 울화가 치밀어서 화살이 날아드는 방향을 향해 뛰어 나갔다. 식당은 이층이었다. 이층 발코니에서 날아든 화살은 건너편 건물임이 틀림없어 보인다. 나는 발코니에서 건너편 건물을 쏘아보았다. 그 건물의 발코니에서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녀석이 보인다. 검은 머리의 사내였다.손에 든 것은 철노였다. "저 놈이!" 내가 주먹을 휘둘러 보이자 녀석은 흥 하고 야비한 미소를 띄우곤 다시 화 살을 재었다.그리고는 화악 잡아 당겨 나에게 날리는 것이었다. 한번에 뛰어 넘긴 너무 멀고 그렇다고 계단을 오르는 것은 성에 차지않는 내가 주먹을 쥐고 녀석이 쏴제낀 화살을 잡아 채고 있는 동안 갑자기 떠오 르는 생각이 있었다. "죽어봐라! 이 자식!" 나는 테이블로 뛰어가 재빨리 탁자위에 놓인 사과 한알을 집어 들었다. 그리곤 다시 화살을 재어 날리는 녀석의 면상을 향해 힘껏 집어던졌다. 콰악 하고 사과가 날아들어 녀석의 면상에 격중했다. 녀석은 캑하는 소리와 함께 뒤로 나자빠졌는데 큰 대자로 널부러진게 이 건너편에서도 잘 보였다. 그 뒤를 이어 이제서야 도착한 용병 둘이 헐덕이 면서 널부러진 녀석을 잡아 발로 차고 패는 것이 보였다. "느려터진 자식들." 나는 손을 털고 다시 탁자로 돌아갔다. 탁자 아래 있던 미트라가 재빨리 기어 나오며 물었다. "어떻게 되었어?" "잡았다." 나는 사과 한알을 들어 입안에 넣으면서 탁자밑으로 약간 드러난 바바의 손등을 톡톡 발로 걷어찼다. "나와라.돼지." "..끄..끝난 건가요?" "이 몸이 계신데 그럼 끝나지 계속될 줄 알았냐?" "헤에.." 바바는 후들 후들 떨며 기어나왔다.그가 기어나오는 것을 보고 나는 탁자 에 앉아서 가슴을 펴고 말해주었다. "이 녀석아,봤지? 이 몸이 없었으면 넌 죽었어." "에에.." 바바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있던 용병들은 약간 부끄러운 지 껄끄러운 표정이었다.그들은 서로 흘 긋 거리면서 바바의 몸을 부축하고 종업원을 불러 발코니의 창문을 닫으라 고 고함을 질러댔다. "음식,더 가져와!" 내가 덧붙여 말해주었고 종업원은 난장판이 된 이층을 돌아보다가 한 숨을 쉬며 고개를 숙여보였다. 미트라는 흥미진진한 듯 내가 잡아챈 화살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정말 대단했어! 화살을 맨 손으로 잡다니! " "흐흐. 그건 별 거 아냐." 내가 자연스레 말해주고 있는 동안 미트라는 감탄에 겨운 눈으로 날 바라 보며 숭배하는 마음을 전신으로 칠채색으로 뿜어내고 있었다. 음, 그렇게 날 숭배한다고 해도 어쩔 수가 없단다. "이렇게 강할 줄은 몰랐어! 음..혹여 기사야?" "흐,기사 따위." 나는 어깨를 으슥해 보였고 옆에서 겨우 제정신을 차린 바바가 얼른 나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덧붙였다. "쿠베린은 보통 사람이 아니지,그를 이길 사람은 아무도 없어." "헤에.." 미트라가 미심쩍다는 표정을 하고 날 바라보았다. 나는 그 표정을 보고 약간 흥분하려다가 말았다. 그래,어린 인간의 계집애가 알긴 뭘 알겠어? 마음 넓은 내가 참아야지. 무식하고 가련한 인간들에 대해서 언제까지 연 연해선 안되는 일. 내가 마음 편히 모른 척하고 있을 때 바바가 나의 기색을 슬쩍 보고 물었 다. "그런데..저기.." "뭐야?" "소문에 의하면 남쪽의 성채가 박살났다고 하던데.... 그게 인간의 짓이 아 니라는 소문이 좌악 퍼졌는데..알고 있는지 궁금해서..." 나는 눈썹을 치켜 올렸다. "남쪽의 상인들은 이미 소문을 듣고 운송료를 바꾼다고 시끄럽고...무너진 성채와 관련된 용병길드와 장인길드에선 그 문제를 좀 알아본다고 시끄러 운 형편인데, 뭐 아는 게 있어?" "너의 목숨을 노린다고 덤빈 놈은 뭐야?" "...몰라." "흐응,허긴,어디 네가 죄 지은 데가 한둘 이냐? 틀림없이 어떤 가련한 여자 를 어디다 팔아넘긴 탓이겠지." 바바의 얼굴이 달아오를 때 미트라가 얼른 물었다. "어? 노예상이야?" "그래." "노예를 어디서 사오는 건데?" 미트라는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사올때도 있고 주워 올때도 있고 납치해 올때도 있지." 나는 새로 내온 스튜에 숟가락을 담그며 말했다. "납..치?" 미트라가 놀라 입을 가리자 나는 겁을 주기 위해서라도 은밀히 미소를 지 어 보였다. "흐,그러니까 말이지. 너같이 혼자 돌아 다니는 계집애들을 잡아다 팔아넘 기는 놈도 있단 말이야." "무,,무슨 소리! 그건 범법이야!" 미트라가 소스라쳐 외쳤다. "하지만 그런게 실제로 있단 말이야.넌 아마 모를 거야." "와..왕법에 따르면 그럴 수는 없는 거야!" KUBERIN....... 살아있는 모든 존재들에게 때때로 찾아오는 미풍 가슴 저린 일도 즐거운 일도 결국은 지나가는 바람. 4 "웬 놈이냐?" 녀석이 잡혀왔다. 고개를 푹 떨구고 있는 것을 보면 기절한 듯했다. 그 얼굴은 이마 한 가운데가 벌겋다.사과와 키스한 자국이었다.그녀석이 이 끌려서 우리들 앞에 무릎을 꿇고 쓰러지자 미트라는 얼굴을 찌푸렸다. 바바는 바들 바들 떨며 바락바락 소리를 질러댔다. "이봐! 말해봐! 넌 뭐냐!" 용병이 주인의 심사를 알아챈 듯 쓰러진 녀석에게 물을 끼얹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한 녀석이 엉기적거리고 있는 동안 나는 천천히 일어섰 다.배가 불러서 더 이상 먹을 수도 없을뿐더러 슬슬 가야 할 곳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쿠베린,일단 이놈이 뭐하는 놈인지 밝혀내고 가요!" 바바가 나를 애처롭게 바라보았지만 나는 어깨만 으슥해 보였다. "뭐하러? 뻔하잖아? 너의 원한상대는 비로 쓸어 푸대 자루에 담아 넣고 곳 간을 채우면 두어 마을을 먹여살릴 정도인데." 쿡 하고 미트라가 웃는 사이에 나는 얼어붙은 바바를 내버려 두고 배를 두 들기면서 나섰다.미트라는 팔랑 팔랑 뛰어 내 팔에 매달렸다. "잘 놀아라." 그렇게 말하고 식당을 나오면서 종업원에게 물었다. "수도 용병길드의 회관은 어디야?" 종업원은 눈을 크게뜨고 날 바라보았다. "수도 용병길드..입니까?" "그래,어디냐고." "동쪽 외곽의 붉은 벽돌로 지어진 3층짜리 건물입니다.큰 사슴집이라 쓰여 있으니 찾기는 쉬우실 겁니다." 내가 용병이라고 생각했는지 녀석은 정중히 말해주었다. 용병길드에 속한 용병은 그래도 어느정도는 볼품이 있었다. 일단 가볍게 설명하자면 델리암에는 수십개의 용병길드가 존재하지만 그중 에서도 최고로 강한 길드의 파워를 행사할 수 있는 것은 5개 도시 길드였 다. 그 중 최고가 이곳이 아닌 엘리야의 용병길드였다. 왜냐구? 그건 간단한 일이다.이 몸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이 몸이 몸을 담 고 있는 곳이 시시껄렁한 상황이라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내가 엘리야에 처음 정착했을 때 당시 용병길드 마스터였던 해리언은 기꺼 이 나를 용병길드의 일원으로 만들려고 했었다.하지만 이 몸께선 용병길드 따위 인간들의 조직에 속할 몸이아니었기에 정중히 거절해 주었고 그 이래 로 해리언은 용병길드에서 하지 못하는 난제를 내게 맡겨오게 되었다. 그래서 이 전설적인 엘리야의 쿠베린님께서 세간에 알려지게 된 것이었다! 그야 어찌되었든 자유도시 엘리야의 용병길드는 원래 당연히 강력하게 이 루어져 있었고 그 다음이 잘나가는 상업도시 쾰른, 북부의 시끌벅적한 장 인들의 도시이다.그런 다음이 수도 용병길드,그리고 그 다음이 산으로 둘러 싸인 산악의 용병마을 엔도기아의 용병길드였다.그 다음은 어딘지 모른다. 기억나지 않는다. 허긴,뭐 인간의 용병길드명따위를 좔좔 외울 필요따윈 나에게 없는 것이다. 어찌되었든 나는 미트라를 이끌고 사람들을 헤치며 걷기 시작했다. 미트라가 궁금한 듯이물었다. "어딜 가는거야?" "볼일 보러." "어딘데?" "볼일보러 가는거야.너 귀가 있었다면 들었겠지? 용병길드에 간다구." "거긴 왜?" 나는 대답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기에 계속 걸었다. 몇번의 골목을 돌아 돌아서 나는 드디어 붉은 벽돌의 3층 건물인 동시에 큰사슴집이라고 쓰여진 술집을 찾아냈다. 예전부터 생각하는 것이지만 대체 왜 술집은 큰 사슴집아니면 암사슴집인 것일까? 왜 큰 뿔사슴집이나 큰 숫사슴집 따위로 이름을 짓는 것일까? 설마하니 사슴이 버티고 서서 손님을 받는 것이 아니라면 굳이 사슴으로 나갈 필요는 없는 것이 아닐까? 큰 소집이나 뿔난 소,혹은 짖어대는 암캐라든가 울어대는 수캐,혹은...뒷발 질하는 말떼..또 굳이 그렇게 짐승으로 이름을 짓고 싶다면 인간의 집 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인간의 집이라... 어울리는 지도 모른다. 안그래도 인간들이 바글 바글 끓고 있는 주제에 사슴집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폐가 있다.만약에 오크들에게 가서 오크의 집이란 이름을 가진 술집이 있다면 그들은 모두 오크의 집이란 그 술집이 오크전용의 술집이라 생각할 것이다.그렇다면 역시 사슴에게 큰사슴집이란 술집에 대해 이야기 해주면 틀림없이 그들은 사슴전용의 술집이라 여길 지도 모른다. 왜 인간은 남의 집을 탐하는 것일까. 역시 인간의 탐욕을 드러내는 작명법이라 하지않을 수 없다. 이런 심각한 생각을 하면서 내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의외로 조용한 실내 가 눈안에 들어왔다. 술냄새가 찌들어 달라 붙어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다.술집이니까. 하지만 사내들의 고린내가 달라붙어 있는 것은 너무 심하지않은가! 그 자리에 앉은 사내들은 모두 해봐야 일곱명 정도였다. 모두들 내가 들어서자 곱지 못한 눈초리로 아래위를 훑어보았다.뭔가 아니 꼬운 눈초리로 아름다운 태도가 아니었다. 음식을 먹다 흘린 듯한 녀석은 수염에 음식찌꺼기를 붙이곤 흘긋 흘긋 미 트라를 보고 있고 눈가가 좌악 찢어져서 살벌한 눈짓을 하고 있는 녀석은 나의 아래위를 계속 훑어보면서 궁금한 듯한 얼굴들을 하고 있다. 어떤 녀석은 힐긋 힐긋 흰자위가 드러나도록 눈을 뱁새처럼 뜨고는 손을 자꾸만 아래로 내려 사타구니를 만지고 있었다.아마 거기에 무기라도 숨 긴 모양이었다.하여간 재수 있게 생긴 놈들은 아무도 없었기에 나는 무시 하고 고개를 홱 돌려서 주인자리에앉아서 멍하니 장부를 펴놓고 앉은 녀석 에게 다가갔다. "너 주인이냐?" "으..일단은 그렇다! 그러나 어린 놈이 방자하군!" 주인이 눈을 도끼눈을 뜨고 날 노려본다. 주인이라고는 하지만 이 놈은 일반 술집의 주인이 아닌 말 그대로 용병생 활하다가 다리라도 잘려서 주저앉은 백전노장이므로 상당히 까탈스럽게 떠 드는 데가 있었다.그 꺼끌거리는 턱을 움찔 움찔 하면서 녀석은 대번에 자 기 다리 옆에 놓여진 큼지막한 전투도끼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나,엘리야의 쿠베린이다.여기 스카가 와 있나?" "...!" 잠시 녀석의 얼굴이 굳었다. 그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고 일시간에 주점 안이 싸악 침묵에 쌓였다.내 이름에 감명받은 놈들이 일제히 입을 저억 저 억 벌린 것이다. "미,..믿을 수 없다.쿠베린은..적어도 내가 어릴 때부터....어릴 때부터 활동하 지않았나? 넌 쿠베린의 아들인가? 아니,손자?" 주인이 버벅거리면서 자신의 수염을 잡아 당겼다. 난 주름과 흉터와 수염,어느것이 나 많은 녀석의 얼굴을 빤히 봐 주면서 점잖게 말해주었다. "멍청아,이 몸께서 쿠베린 본인이시다. 여기 스카가 와 있냐고 묻지 않았 나!" 그 때 뒤에 앉아있던 녀석들이 웅성대면서 모두 일어섰다. 녀석들은 주춤 주춤 다가오더니만 내 주변을 둘러쌌다.미트라가 놀라 내 팔을 꽈악 쥐었는데 그 동작과 달리 얼굴은 재미있는 광경바라보듯이 흥미 진진한 얼굴이었다. "진짜 쿠베린이라면 실력을 보여줘." 수염이 더러운 빨강머리 놈이 그렇게 말하면서 몽둥이를 하나 들어 흔들어 보였다.그리고 그 옆의 녀석이 팔뚝을 가볍게 흔들어 보이면서 히죽 웃었 다. "맞아.진짜 쿠베린이라면 거의 초인중의 초인이지,너같은 꼬마가 쿠베린을 자청하다니 간이 붓다 못해 밖으로 튀어 나왔군." 나는 흐흐흐 하고 웃어보였다. "진짜 나라는 것을 보여달라는 거야? 꼬맹이들?" 나는 수컷상대로 봐주는 일이란 없기 때문에 즐거운 마음으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인간상대로 힘을 쓴다는 것은 정말 우스운 일이긴 하지만 이 자리 에서 조금 힘을 보여 이놈들을 노예부리듯 부리는 것도 나쁘진 않았다. 대저 용병이란 것은 스카란 드문 놈이 있긴 하지만 돈과 실력으로 좌우되 는 무리들이다.내가 용병대장이라든가 용병길드마스터들을 일반 성의 기사 들보다 높게 치는 이유는 그것이다. 지위나 출신과는 관계없이 용병사회는 철저한 실력사회다. "와봐,꼬맹이들아." 그렇게 말하는 순간 울컥한 빨강머리가 빨강머리답게 제일 먼저 돌진해왔 다.녀석은 몽둥이를 휘두르면서 달려들어와 내 머리를 후려갈겼다.그러나 내 손과 닿자마자 몽둥이는 퍽하고 부러져 버렸다. "에?" 그 녀석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그 때 그 다음으로 나는 그 몽둥이의 부러진 자루만 쥐고 있는 녀석의 손목을 들어서 허공으로 내던져 버렸다. "우악!" 던져진 녀석은 말 그대로 원을 그리면서,아니 정확히 말하면 반원을 그리 면서 사슴집 밖으로 나갔다.아니 정확히 말하면 용병집이라고 해야 되나. "웃..대단한 힘!" "미,믿을 수 없어!" 나는 점잖고 우아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모두들 처음엔 그렇게 말하지...쯧,인간이란 직접 보고 눈물을 찍뽑아내기 전에는 도무지 납득하려 들지 않는 종자들이다. "쿠베린! 작작해!" 갑작스레 들린 목소리, 나는 고개를 들어 이층 난간에서 무엄하게도 날 내 려다 보고 있는 오래된 베개를 보았다. 스카는 빙글 빙글 웃더니 말했다. "올라와! 안그래도 찾아 가려 했었어." "그 자리에 누가 있나?" "뭐 이런 저런 사람들.모두 봐야 할 사람들 뿐이다." 스카는 시익 웃고는 벙벙히 입을 벌리고 있는 사내들에게 말했다. "성질 건드리지마.그는 아주 성질이 더러워! 얼굴만 이쁘장할 뿐이라구." 그 말을 듣고 나는 조용히 주인의 장부책을 들어서 이층 난간으로 집어던 졌다. "왁!" 콰당. "제기랄.." "애완동물이면 애완동물답게 입을 다물고 있으라고 했지? 대체 몇십년간이 나 말해 두었지만 제 주제를 모르고 주인에게 달려들면 대체 어쩔 거냐?" 나는 이마를 어루만지고 있는 녀석에게 점잖게 충고했다. 미트라는 생글 생글 웃으면서 여전히 내 팔에 달라붙어 있었다. 모든 광경과 살벌한 녀석들의 얼굴을 보고도 천하무적의 미소를 띄고 있는 이 소녀에게 나는 적잖게 감탄하며 생각했다. 암컷이란 수컷과는 그 근본적인 생리가 다른 법. 어느 구석에서라도 암컷은 그 활로를 찾아내는 것이다.그래서 종족을 보존 시키는 것이겠지. 이런 엄숙한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스카가 뭐라 떠들고 있었다. ".....야." "그래." 스카가 다시 도끼눈을 하고 날 노려보았다. "이 자식! 또 딴 생각하고 있군! " "다 듣고 있어.그렇게 쨍알 거리지 마라." 내가 점잖게 말해주자 스카는 날 쏘아 보며 말했다. "지금 네 눈앞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아냐?" 나는 그 제서야 제대로 내 눈앞에 있는 사람을 보았다. 인간 수컷. 나이가 좀 들었다. 덩치가 조금 크지만 거구는 아니다.흉터가 있는 뺨을 인상쓰고 있는데 이 용하고 있다.아마도 나이는 사십대 중반 정도 되는 듯했다. 시커먼 눈썹과 그을린 갈색 피부에 주름살이 굵게 드러나 있다. "수도용병길드마스터냐?" 스카가 음 하고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네가 소개할 인간이란 뻔하지.수도용병길드 마스터 아니면 델리암 통합 길드마스터 정도겠지." 으음 하고 스카가 신음했다. 그는 머리를 잡고 있다가 내 맞은 편에 앉아 쓴 얼굴을 하고 있는 사내에 게 말했다. "커스터.미안하게 되었어.원래 이 쿠베린이란 녀석은 그런 놈이니까 너무 염두에 두지 말게." "하는 수 없지,무엇보다 우리와는 종족이 다르니까." 그는 쓴웃음을 짓고는 턱을 고이곤 내 옆에 선 미트라를 가리켜 보였다. "애인인가?" 나는 뜨악하게 그 녀석을 보았다. "센스가 없는 놈이로군,내가 어딜 봐서 이런 어린애 체형을 좋아할 거 같 으냐? 난 팔등신의 빠진 글래머 아니면 상대하지않아." 갑자기 찬 기운이 스산하게 돌았다. 스카는 이마를 잠시 잡았고 길드마스터는 멍청히 날 보더니 침묵했다. 그러나 뒤에서 몇몇 녀석이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이 방안에 있는 놈들은 모두 해서 일곱명이였다. 스카와 마주 보고 앉은 길드마스터란 사내와 그를 둘러싸고 앉은 두명의 용병들,그리고 그 뒤에 말없이 앉은 존재감이 확실한 검은 후드를 둘러쓴 두명의 사내들,그리고 작은 체구를 한 회색 후드의 꼬마였다. "이봐,쿠브,말이 되는 소릴 좀 해라,네 얼굴로 어딜 쭈욱 빠진 팔등신 미녀 를 상대하겠다는 거냐? 넌 지금 그대로 15,6세의 어린 미소녀타입이야!" 스카가 말할 때 나는 엄청난 살기를 느끼며 돌아보았다. 미트라가 살기를 풀풀 날리면서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내 머리를 쥐어뜯듯이 잡고 쾅쾅 때려대기 시작했다.나중에는 꼬 집고 할퀴고 난리가 났다. "고만해!" 내가 고함을 질렀지만 미트라는 아랑곳하지않고 나를 때리고 패고 난리를 피웠다. "정말 끔찍한 놈이야! 네가 어디가 잘났다고 그딴 소릴 해서 날 무시하냐!" 미트라가 마구 날 두들기는 동안 나는 하는 수 없이 그녀의 허리를 잡아 거꾸로 치켜 세웠다.으악 하고 그녀가 외쳤지만 내 손아귀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그녀는 버둥거리기만 했다. 하지만 뒤로 뒤집어진 여자의 발버둥이란 그다지 아름답지 못한 것이라서 웃음만 터져나오고 말았다. 마침 바지를 입었기에망정이지 아까 처럼 드레 스차림이었다면 틀림없이 볼쌍사나운 꼬락서니가 연출되었을 것이다. 어쨌든 나는 미트라의 허리띠를 풀어서 그녀를 거꾸로 서까래에 매달아 놓 고 손을 털었다. 용병들은 아연한 얼굴로 입을 좌악 벌리곤 천정에 매달린 미트라를 바라보 고 있었다.미트라는 벌개진 얼굴로 발버둥을 치면서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이 나쁜 놈! 이 납치범!" "이야길 계속하자." 내가 말하자 스카가 손가락으로 미트라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 상태로 대화가 될까?" 나는 미트라의 벌건 얼굴을 바라보았다.그녀는 악을 질러대며 욕을 하고 있었다.그덕에 자리에 앉은 사내들은 어안이 벙벙한 채 입을 벌리고 바보 천치같은 얼굴로 귀를 틀어막고 있었다. 천정에선 미소녀가 매달려 파리처럼 뱅글 뱅글 돌고 있고 의자에 앉은 사 내들은 무언극의배우들 마냥 입을 벌리고 귀를 틀어 막고 있다. 볼만한 구경거리다. "미트라,나에게 계속 떠들래? 아니면 내가 재갈을 물리고 엉덩이를 때려줄 까?" 그녀는 이를 갈며 외쳤다. "죽어버려랏!" 흐, 내게 그렇게 말한 여자가 한둘이 아니었지만 난 아직 살아있잖아? 어찌되었든 그녀는 침묵했다. "나중에 맛있는 거 사줄테니 가만히 참아." "내려주면 참을게!" "거기 그대로 있는게 훨씬 안전해." "어째서?" "이 곳은 위험천만한 사내들로 바글 거리거든." "무슨뜻이야?" 미트라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 자리에 있는 사내들 모두가 널 존중해 줄 정도로 멋지지않다는 거야." 스카는 턱을 잡고 투덜거렸다. "이 중에 누구라도 너보단 저 가엾은 아가씨를 존중해줘." 난 스카놈을 노려보고 입을 닫았다. "자자,이제 조용하니까 이야길 좀 해보자구." "음.." 길드마스터가 막 입을 열려는 순간 나는 가장 끝에 팔짱을 끼고 후드를 눌 러쓴 녀석을 지명했다. "너 말이야." KUBERIN....... 살아있는 모든 존재들에게 때때로 찾아오는 미풍 가슴 저린 일도 즐거운 일도 결국은 지나가는 바람. 5 후드를 둘러싸고 신비에 싸인 인물인양 꾸미고 있던 두 명이 고개를 들었 다.그리고는 천천히 후드를 벗었다. 거기서 드러난 얼굴은 연녹색 눈동자에 꿀빛의 금발을 늘어뜨린 사내였다. 불행히도 사.내.였다.그얼굴이 여자였다면 틀림없이 대단한 미인이었을것 을..안타까운 일이었다. 그 옆에 후드를 벗은 녀석도 마찬가지였다. 이놈은 옅은 갈색 머리에 녹색 눈을 하고 있었다.청동빛으로 흐르는 녹갈색머리가 근사했다. 보고 있던 자들은 우음 하고 다들 입을 다물었고 천정위에 매달린 미트라 는 경탄에 겨운 음성을 터뜨렸다. 나는 잠시 동안 슬픔에 빠졌다. 왜 내 주변에는 미녀대신에 미남자들만 들끓는 것이냐,나에게 취미를 바꾸 라고 누군가가 강요하는 것인가. 왜 바글거리는 것은 순 남자뿐이고 여자 는 나타나지않는 것인가.역시 난 언젠가 떠나버릴 셀레네나 마리아만으로 만족하고 있어야 한단 말인가.. 슬프도다. 저기 연녹색 눈으로 노려보고 있는 녀석이 여자여야 만 했다.분명히 저 몸 으로 보아선 팔등신 미녀가 될 놈이 남자라니! 서러운 마음에 잠시 나는 상념에 빠졌다. "당신은 묘인족의 왕 쿠베린이겠지?" 나는 그녀석을 빤히 보았다. "꼬맹아,네 족장이 나의 앞에 와도 그따위 말투는 쓸 수 없다." 음찔하고 녀석이 입술을 깨물었다. 어디서 많이 본 짓이다. 어디서 봤을까.체향이 낯익은 것을보아서 뭔가 나와 연관이 있긴 한 거 같 은데 내가 사내놈과 뭔 연관이 있을 것인가 싶어 생각하길 관두었다. 스카가 진지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커스터,이 분들은?" 커스터는 음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무너진 성채에서 사람들을 구해 오신 분들일세." 으음 하고 스카가 신음을 터뜨릴 동안 나는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꼬고 앉은 채 녀석들을 바라보았다.녀석들은 나에게 적개심을 드러내고 있었고 나는 그 적개심을 유유히 받아 넘기면서 이 놈들이 여자라면 하는 상상을 계속 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 상상을 알아차렸는지 녀석들의 눈초리가 점점 불순해지기 시작 해서 나는 말을 걸기로 했다. "몇명이나 구했는데?" "오십여명.." 커스터가 대신 대답했다.그는 진지하게 말했다. "그래서 확실히 어떤 놈들이 남부지방을 습격했는지 알게 되었소." "어떤 놈들이래?" "사인족." 짧게 잘라 커스터 대신 연녹색 눈이 말했다. 나는 별로 놀라지 않았기 때문에 뜨악하게 상상을 계속했다. "그럼...사인족이 인간의 마을을 습격하고 성채를 공격했다는 말인가? 사인 족이 무언지 잘은 모르겠지만 ...내 알기로는 조인족도 습격하고 했다던 데.." 날카로운 눈초리가 된 연녹색이 스카를 쏘아보았다. "당신은?" "조인족이 큰 피해를 당했다는 이야길 들었는데 그럼 사인족이란 족속이 영토를 넓히고 있단 말이야? 무차별로 공격하면서?" 스카는 조금 큰 소리로 말했다.그리곤 연녹색눈을 돌아보며 물었다. "당신들은 엘프요?" 조금 반응이 늦었구나 스카. "이 녀석들은 조인족이다.스카." 내가 말해주었다. 그 말에는 커스터도 돌아보았고 스카는 놀란 얼굴이 되었다. "진짜? 하지만 내가 본 바로는 조인족은 연약하고 아름다운..." "전사랑 일반이랑 차이가 아아아아주 큰 종족이야." 나는 뜨악하게 말해주었다. "너희들은 그럼 역시 조인족의 '계곡'에서 온 것이겠지?" 그들의 눈이 번쩍거렸다. 살기와 범상치 않은 위압감이 슬슬 흐르기 시작하자 보고 있던 인간들도 조금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내가 조인족의 아가들 몇을 데리고 있다.인간의 성에 보호중이지." 눈을 가늘게 뜬 연녹색이 낮게 말했다. "인질이냐?" "하?"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멍청한 놈들! 묘인족이 인질따위를 쓰는 것을 본 적있단 말이냐! 이 어리 석은 놈들아! " 화가 나기 시작했다. 슬슬 살기가 치밀어 오르자 스카의 얼굴도 살짝 굳었고 길드마스터의 얼굴 도 굳었다.나는 진짜로 이 놈들을 죽여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어 잠시 동안 침묵에 잠겼다. "사인족이 날뛰고 있는데 지금 여기서 이런 소란을 떨 셈이야?" 갑작스레 침묵을 깬 것은 여지껏 침묵하고 있던 회색 후드의 작은 녀석이 다.그녀석은 홀라당 후드를 벗더니 앞으로 한 발자국 나섰다. "넌 뭐냐?" 내가 뜨악하게 묻자 옆에있던 커스터가 말했다. "수도 도둑길드 마스터인 튜나요." "도..오둑?" 그 말에 반응을 일으킨 것은 다름 아닌 천정에 매달린 미트라였다. 그녀는 흥미진진한 얼굴로 대롱 대롱 매달린 채 작은 체구의 튜나를 바라 보았다.뾰족한 귀와 갈색으로 그을린 건강해 보이는 피부가 조금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이 든 것은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일 것이 다. 그는,아니 그녀는 인간의 나이로 15,6세 가량으로 보이긴 했지만 분명히 순 수한 인간이 아니었다.초록의 짧은 치마를 입고,아니 반바지를 입고 자신만 만하게 절궁을 든 그녀는 허리에 짧고 작은 소엽비도같은 것을 줄지어 벨 트에 매달고 있었다.초록색 눈과 검푸른 머리칼을 가진 그녀는 팔짱을 낀 상태로 나와 조인족들 사이에 당당히 서 있었다. "하프 엘프로군." "그래요.쿠베린. 묘인족의 악명높은 왕." 그녀는 생긋 웃더니 팔짱을 턱 끼고 말했다. "이런 일 귀찮아서 끼지 않으려고 했지만 어쩔 수 없었어.재수없게 시리 땅의 엘프의 왕이 나에게 부탁을 했기 때문이야." "넌 나무엘프냐? 아님 땅의 엘프냐?" 내가 묻자 그녀는 나의 상식을 의심한다는 듯한 얼굴로 쏘아보았다. "농담하는 거야? 이 나의 미모를 보고도 땅의 엘프냐고 묻는 거냐구!" "하는 짓을 봐선 넌 별로 급수 있는 엘프로 안보이는데?" 내가 뜨악하게 대꾸하자 그녀는 흥 하고 말했다. "나는 샘의 엘프야.어두운 샘의 엘프족의 하나이지.시시껍절한 엘프족이 아 니야." 다리를 하나 턱하니 의자위도 아닌 탁자위에 올려놓은 그녀는 생글 생글 웃으면서 말했다. "인간이면서 엘프이면서 동시에 능력이 넘치는 이 길드마스터 튜나님께서 이 자리에 참석하신 것은 이 사인족이란 문제가 단 하나의 종족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야." "능력이 넘치는 도둑길드마스터란 무척이나 잘 훔쳐낸다는 뜻인가?" 내가 트릿하게 스카에게 묻자 스카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진땀을 흘리고 있 었다. "조인족만 해도 골치아픈데 여기에 하프엘프라..거기다 너까지 합세하면 이 건 끔찍한 상황이 벌어지겠다.쿠브." "자아..어쨌든 하고싶은 말은..." 진지하게 그녀가 말했다. "뭔가 힘을 좀 합치란 말이야! 우리들은 큰 문제에 당면해 있다구!" 그녀는 왠지 이 자리의 우두머리마냥 주먹을 쥐고 작은 체구를 흔들며 정 열적으로 말했다. "인간의 성채 일곱 개가 나가떨어졌고 조인족의 부락 세 개가 나갔으며 땅 의 엘프의 부락이 두 개,엘프의 마을이 하나 이렇게 박살났다구! 그러니 까...이건 이제 인간족하나만의 문제도 아니고 조인족만의 문제도 아니며.." "잠깐,인간 성채 일곱 개?" 대롱 대롱 매달린 미트라가 눈을 크게 뜨며 외쳤다. "세개 아니야?" "일곱개야.어제도 두 개 나갔어." 자신의 말을 가로막은 미트라에게 아니꼽다는 시선을 던지면서 튜나가 대 답해 주었다.눈이 커진 미트라는 입을 저억 벌리면서 외쳤다. "그럼 보통 문제가 아니잖아!" "물론 보통 문제가 아니니까 여기 이 몸께서 와 계시는 거잖아!" 튜나가 마주 외치자 머리를 감싸던 스카는 진지하게 나를 보며 말했다. "쿠베린,너 저 아가씨를 아주 잘 데려왔다." 나는 미트라와 튜나라는 기이한 이름을 가진 건방지고도 아니꼬운 하프엘 프의 꼬마에게서 시선을 돌려 창가를 돌아보았다. "인간과 조인족과 엘프만의 문제가 아닌가봐." "에?" "수인족도 와 있어." "에엑!" "잘 뒤지면 아인족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두 창가로 다가와서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창 바로 아래에는 코를 벌름이면서 선 은갈색의 녀석이 보였다. 후드를 눌러쓰긴 했지만 녀석은 생글 생글 웃으면서 조금 인간으로는 긴 손톱을 드러낸 채 창가에 앉아 자길 내려다 보는 나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 고 있었다. 허리에 낀 조잡한 피리를 보고 그리고 그 옆에 선 음침한 안색 의 여자를 보고 나는 흐음 흐음 하고 손가락을 흔들어 보였다. KUBERIN....... 살아있는 모든 존재들에게 때때로 찾아오는 미풍 가슴 저린 일도 즐거운 일도 결국은 지나가는 바람. 6 "어디갔었어?" 에메스가 물었다. 저녁에 어슬렁거리고 들어온 나를 보고 에메스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전에 말해두었지만 말이지...폐하께 그 사인족에 대해서 이야길 좀 해드려.역 시 무엇인지 잘 알아두지 않으면.." "성채 일곱이 무너졌다." 뭐 하고 에메스의 눈이 커졌다. "셋이 아니야,일곱이다.지금 용병길드에 다녀오는 참이야." "용병길드가 정보가 더 빠르다고 하는 거야?" 에메스는 조금 화가 난 얼굴로 되물었다. "당연하지,상인들은 통행로를 바꾼다고 하고 있다.이미 남쪽은 초토화 되었다고 시끄러워. 인간만이 아니고 엘프같은 족속들도 말이 많아." "으음.." 에메스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그럼 역시 간단히 해결될 문제가 아니겠군요." 진지한 음성으로 기생오라비가 말했다. "안되고 말고.사인족이 상대라면 너의 잘난척 하는 기사단도 단 반나절이면 몰 살이다." 욱 하고 기생오라비와 에메스가 발작하려는 순간 비오나가 짧게 말했다. "무도회가 시작됩니다." 생각해 보면 미쳤다. 이 상황에 무슨 놈의 무도회란 말이냐! 그렇다.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은 바로 왕성이었다. 왕성의 가장 큰 홀 안에서 각자 성장한 남녀들이 화려하고 너절하고 한편으로는 치렁하게 옷자락들을 늘이고 내 옷이 멋져 네옷은 별로야를 외치고 있는 무도회 장인 것이다. 휘황한 샹데리아의 불빛이 오색으로 빛나고 온갖 음식들이 널려있고 잘난척 코 를 세우는 남녀들이 오가고 시종들은 땀방울 흘리며 뛰어다닌다.그 모습들이 천 정에 매달린 오색찬란한 샹데리아의 빛과 바닥에 깔린 백옥석의 빛과 어우러져 말 그대로 번쩍 번쩍 빛나고 있었다. 나는 팔짱을 끼고 멋지게 차려입은 상태로 발코니를 등으로 하고 구석에 서 있 었다.점잖으신 체면에 다른 인간남녀처럼 짝짓기 춤을 할 이유가 없었다. 짝짓기 춤은 멋지게 굴러가고 있다.악대들이 푸파 푸파 악기를 연주하면 남녀들 이 서로 어울려서 룰루 랄라 웃고 떠든다. 내가 언젠가 이 짝짓기 춤에 대해서 어떤 인간에게 말했더니 그 인간은 화를 버 럭 내면서 짝짓기 춤이라니 그런 소리 말라고 길길이 뛰었다. 그렇지만 대체 짝짓기 춤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그의 말대로 짝짓기 춤이 아니 라 사교의 일종이라고 한다면 남대 남,여대 여로도 춤을 추어야 할 거 아닌가? 왜 남녀끼리만 춤을 추는 거지? 우리들로 말한다면야 새같은 녀석들을 빼고는 짝짓기 춤따위는 추지않는다.우리 들은 그저 눈이 맞는 순간 나 너 좋아해, 나도 널 좋아해, 진짜지? 그럼 진짜고 말고,넌 멋진 여자야,넌 멋진 남자야 하고 그대로 끝난다. 우습게 저렇게 비비적거리면서 이건 짝짓기가 아니고 사교에요 라고 말해봐야 조금도 설득력이 없다.아닌게 아니라 이대로 쌍쌍이 정원이나 으슥한 그늘로 가 버리지 않는가! 에메스가 어떤 여성과 춤추고 있다.기생오라비도 춤추고 덥수룩이도 추고 있다. 이마에 핏대가 서서히 오르고 있는 비오나는 온화한 안색을 유지하기 위해 몇백 년간 쌓여온 의지력을 모조리 동원하고 있는 중이다. 나는 조용히 내 옆으로 다가온 아리따운 금발의 아가씨 셀레네의 팔을 가볍게 잡고 물었다. "너도 짝짓기 춤을 했냐?" "아직 안해봤어요." 그녀가 얼굴을 붉혔다.그녀는 망설이듯 말했다. "저는 아직 어려서 내년에 할 참이었답니다." "몇명이나 참가하지? 보통은?" "보통..음음..일곱쌍정도가 참석해요." "만약 어긋나면 어떻게 되는데?" "그냥..뭐 하는 수 없다고들 하는데요.저희 언니는 계곡에서 온 전사와 결혼했 는데 어찌되었는지..." "계곡에서 온 전사랑 결혼을 했다구?" "네.언니와는 약 십여년전에 헤어져서 소식을 몰라요.형부되시는 분은 멀리 언 니를 데리고 가버리셨거든요." 조인족은 사인족이나 우리들과 달리 결혼하는 족속이다. 결혼해서 말 그대로 늙어죽을때 까지 같이 산다.그것도 단 하나의 파트너와 함 께 말이다.이 들의 결혼은 진짜 심각해서 전사끼리의 결혼이라면 칼부림이 일어 나 피가 난무한다고 들었다.배반이란 것은 존재할 수 없다는 살벌한 족속인 것 이다.선택은 여자가 하고 남자는 그대로 따른다. 짝짓기의 전통이라는 것은 성년이 된 남녀가 한 자리에 모여 춤을 추는 의식이 다.여기처럼 춤추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식의 춤이 아니고 마음에 드는 남자 에게 여자가 다가가서 춤을 신청하고 춤을 춘다.그리고 몇번이나 파트너가 바뀌 어 춤추는 동안 짝이 결정된다.그리고 그들은 그 자리에서 여자의 부모에게 가 서 통혼을 허락받고 결혼식날짜를 잡는다. 그리곤 내 기억으론..한 한달 뒤에 정식으로 결혼한다. 그때까지 여자가 변심하지 않으면 결혼되는 것이다.그렇게 결혼이 성사되면 말 그대로 몇백년간 늙어 죽을때 까지 한 사람과 같이 산다.우리로선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지만 그렇게 사는 것이다.이런 쪽에서 보면 엘프와 비슷하다. 조인족이란 족속은 진짜로 엘프랑 흡사한 면이 많은 것이다. 갑자기 요란스런 소리가 터져나왔다.그리곤 침묵과 함께 춤추던 남녀들이 반으 로 좌악 갈라지면서 도열해 섰다.에메스도 비오나도 도열해 섰는데 문득 에메스 가 나에게 경고의 시선을 던졌다.눈을 야리는 것으로 보아 분명히 점잖게 왕의 위엄을 보여줘 내지는 너의 우아함을 꼬옥 보여줘 하는 시선이었다. 시종들이 나와서 소리를 질러댄다. "국왕폐하 납십니다!" 시끄러운 음악소리와 함께 정면의 옥좌위에 시든 오이가 나타났다.얼마전 본 것 과 그다지 다르지 않지만 약간 더 마른 것같은 인상이었다.그 덕에 인중은 길어 져서 어딘가 묘하게 멍청한 인상을 준다.시들어 버린 것같은 턱과 노란 안색이 더 우스운 몰골이었다.그 주제에 더덕 더덕 쥔 보석과 장식들은 그 여윈 몸을 지탱하기에 힘이 겨울 정도로 무거워 보인다. 그가 자리에 앉자 뒤를 이어서 시종이 외쳤다. "화이딘스 대공부처 드십니다!" "대공부처의 자제분들 이십니다!" 한쪽에서 두명의 남녀,아니 두명의 남녀와 두명의 사내가 등장했다. 모두 붉은 빌로도로 몸을 감싸고- 이 더위에 놀라운 일이다- 진주와 루비와 사 파이어로 장식된 모자를 쓰고 있었다.그들이 나타나자 마자 사람들은 마치 국왕 에게 하는 양 진지하게 아부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화이딘스대공이란 녀석은 오십대 정도로 보인다.어쩌면 나이가 덜 들었을지도 모르고 더 들었을 지도 모르지만 평균잡아 오십대 초반으로 보였다.강팍하게 눈 꼬리가 치켜 올라간 데다가 코는 매부리 코에 가깝고 입술은 얇았다.약간 주름 살이 있고 콧수염을 기르고 있었지만 그다지 풍성한 것은 아니다.원래 검은 머 리칼이었던 모양이지만 이제 슬슬 회색으로 변하고 있는 듯했다. 이렇게 말하면 매우 못생긴 듯한 것 같지만 객관적으로 보건데 저 시든 오이보 단 백배 낫다.그다지 살찐 덩치도 아니지만 이 녀석은 제법 몸안에 권력에 의한 균형이라고 하는 무게감이 서려있어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위압감을 주게 하는 모양이다. 내가 흘긋 보자 에메스도 주눅이 적잖게 드는 듯했다. 허긴 아무리 보아도 중량이 달라 보인다. 그 옆에 있는 여자도 상당해 보였다. 그다지 대단한 미인은 아니지만 냉정한 푸른 눈을 표정없이 하고 코를 세우고 있었다.흰머리가 이제 슬슬 등장하는 금발머리는 진주와 사파이어로 장식해 틀 어올리고는 도톰한 가슴을 돋보이도록 흰 레이스로 장식한 드레스를 치렁하게 걸치고 있었다.여자의 차림새는 멋졌다. 하지만. 그 뒤에 선 두 놈은 대체 뭔가 싶다. 이 앞선 화이딘스 대공부처의 몸에서 나온게 확실하단 말인가 의심스러울 정도 의 두 녀석이었다. 화려무쌍하기로는 이 자리에서 최고로 옷을 끼어 입었지만 그 취미는 최악이다. 푸른 색과 붉은 색과 거기에 핑크가 섞인 기기묘묘한 차림새에 그 축 늘어진 볼 과 치켜 올라간 눈꼬리,게다가 길게 늘어져 심술덩이처럼 보이는 코.말 그대로 두 부처의 잘못된 점만 닮은 듯한 인상을 한 비쩍 마른 녀석과 살이 퉁퉁하게 쪄서 이건 사람인지 돼지인지 오크인지 알아볼 수 없는 녀석이 같이 였다.지딴 에는 신경을 써서 입은 듯한 검은 셔츠와 가운도 이 상황이라면 방법이 없다.차 라리 엘리야의 선원 오크에게 검은색 빌로도를 입히고 너 왕자해라 해도 이보단 낫겠다 싶은 놈이었다.가장 근본적으로 두 놈이 싫은 것은,아마도 저 생기없고 아무 생각없는 주제에 오만한 몰골이었다. 다시 시선을 에메스에게 돌렸다. '그래,에메스,저 들을 보고 나니 네가 그래도 인물이라는 생각이 드는 구나.' 에메스는 금빛 단정한 금발을 어깨까지 늘어뜨리고 단정한 얼굴생김을 반듯하게 든 채 청색의 셔츠에 짙은 남색의 가운을 걸치고 있었다.달고 있는 것은 영주의 상징인 황금의 장식뿐이었다.허리에 찬 장검이 장식이라면 장식일 수도 있었고 사파이어로 만든 부로치와 가문의 인장인 백금의 문장반지도 있긴 있었지만 이 건 어느 누구나 다 해야 할 기본적인 물건이니 장신구라고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 녀석은 서 있는 것 만으로도 눈이 번쩍 뜨이게 하는 뭔가가 있었다. 아직 미숙하지만 생기가 있고 오만하지만 나름대로 자존심이 있었고 성급하지만 생각하려는 머리도 있었다. 아직 완전히 마음에 들진 않지만 확실히 귀여운 데는 있었다.너무 멍청한 느낌 도 들긴 하지만. "어서 오시오." 시든 오이가 한마디 했다. 화이딘스 대공부처는 단정히 시든 오이에게 한 마디 하고는 물러섰고 황제는 어 떤 아리따운 아가씨에게 다가가서 춤을 청하고는 춤을 추기 시작했다.지위높은 놈이 먼저 춤을 추는 게 예의라고 하더니 그런 모양이었다.그렇게 그 시든 오이 가 춤추고 나자 다른 사람들도 다시 춤을 시작했다. 셀레네가 나에게 살짝 물었다. "저 두 사람이 왕과왕비인가요?" "아니,뭔가의 대공이라는 군." "그럼 중앙의 늘어진 인간은 누구죠?" 나랑 미의식이 같아서 기뻐진 나는 그녀의 손가락에 키스하면서 속삭였다. "응,이나라의 멍청하기 짝이 없는 얼간이 오이야." "그게 이름인가요? 오이가?" 그녀가 눈을 크게 뜨고 나에게 물었다. "응.정확히 말하면 '절이다 만 시든 오이'야." "재미있는 이름이네요.그러나 잘 어울려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그녀의 인식이란 원래 나랑 비슷하게 품격이 조금 있는 모양이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나의 작명실력은 원래상당한 것이었어." 나는 생글 생글 웃었다. "오랜만이군.공작." "아아..그렇군요.대공." 에메스가 미소를 지어보였다. "혼자 참석했나? 소문에 의하면 자네는 천한 여자를 많이 거느리고 있다고 하던 데." 화이딘스 대공이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역시 이런 곳에 데려올 여자가 없었던 모양이군." 에메스의 눈썹이 일그러졌다.그는 그러나 화를 냉정히 억누르고 말했다. "천한 여자라니 어떤 여자말입니까?" "뭐...창부같은 노예계집들이지." 화이딘스대공이 빈정거렸고 그 대공부인이 마아 하고 오만한 미소를 지으며 경 멸의 미소를 던졌다. "뭐,그럴 수도 있겠군요.전 남의 집 부녀자들을 폭행하는 짓 따위는 결코 하지 않으니 말입니다." 에메스는 차갑게 미소하며 대꾸했다. "무슨 소리지요?" 대공부인의 눈이 차가와 졌다.파란 눈이 얼음짱같이 빛난다. "뭐,아닙니다.소문에 의하면 아닌게 아니라 대공저의 후원에는 납치당해 울고 있는 여염집 아녀자들이 들끓는다던가 혹은 항의하는 여자의 남편과 약혼자들의 시체가 매일 뒷문으로 나간다던가하는 소문이 있어서요." 눈이 가늘어 지는 대공의 얼굴이 제법 볼만하다. "소문이란 믿을 게 못되는 법." "그렇지요.역시 소문이란 믿을 것이 못됩니다.그렇지요?" 에메스도 차갑게 웃는다. 기생오라비도, 덥수룩이도,검은 수염도 그 자리에서 비오나와 함께 그들의 공방 을 지켜 보고 있었다.그들의 얼굴에 희미한 희색이 돌고 있었다.말로 지지않은 에메스의 건투에 즐거워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내가 보기엔 마치 두 마리 숫사슴이 뿔을 대보면서 네 뿔이 크냐 내뿔이 크냐 하고 어림잡고 있는 듯한 정경이다.나는 코웃음을 치면서 팔짱을 끼었다. "공작님과 사이가 나쁘군요..." 셀레네가 새삼 낮게 중얼거렸다. "응,저 놈도 말솜씨가 슬슬 느는 지도." "그렇겠지." 옆에서 툭 하니 기생오라비가 끼어들었다.내가 고개를 돌리자 기생오라비는 셀 레네를 황홀한 시선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너같이 엉망진창인 놈과 매일 상대하시니 당연 저런 놈과도 상대할 수 있으신 거야." "그럼 나에게 감사해야 겠군." 뜨악한 표정으로 기생오라비는 나를 바라보다 말고 셀레네에게 확 시선을 돌리 면서 물었다. "춤추시겠어요?" 아마 이 놈의 눈이 등불이고 촛불이었다면 이 빛으로 이 온 궁성을 모조리 밝힐 수 있었을 것을.이 놈이 셀레네에게 빠진 것은 진짜 누가 보아도 확연했다.그러 나 셀레네는 고개를 저었다. "춤을 추지 못해요." "제가 가르쳐 드리지요." "아,저희는 원래 함부로 춤을 추지않습니다." 셀레네가 당혹한 웃음을 지으면서 대답했다. 기생 오라비는 '함부로'란 말에 충격받은 양 입을 저억 벌렸다. "함..부...로...라는 것은?" "아무남자와 춤추지않는다는 것입니다." 셀레네는 그의 가슴에 못을 박고 말뚝을 박고 소금을 뿌린 뒤에 인두로 지졌다. 기생오라비는 순간 평생 회복못한 충격을 받은 얼굴로 굳어 섰는데그 안된 얼 굴에 나는 점잖게 희망을 던져주었다. "하지만 셀레네,이 친구는 널 구해주었어.그러니까 이상한 마음은 품고 있지않 아.내가 보고 있을 테니 춤추고 와." "만약..이상하게 되면..춤같은 거 추면 안되는데요.." 셀레네가 불안한 듯이 날 바라보았다. "괜찮아.여긴 인간의 나라이고 인간의 세상에선 너같이 아름다운 여자가 춤도 안추고 혼자 있으면 오해한다구." "무슨 오해요?" "이상한 여자라든가 아님 모자란 여자라는 오해." 셀레네는 눈을 크게 떴고 기생오라비는 부활했다. "그럼..?" '응,내 앞에서춤추고 있어.그럼 되지." 셀레네는 불안한 듯이 날 바라보았다.기생오라비는 희희낙낙해서 눈물을 흘릴 것같이 감격한 얼굴이 되었다.나에게 감사의 시선을 막 던지면서 춤을 추기 위 해 그녀의 손에 팔을 내밀었다. 셀레네는 망설였고 나는 안심하라는 얼굴을 해 보였다. 그리고 그녀는 기생오라비와 함께 서투르게 나마 춤을 추기 시작했다. 아,나는 너무나 마음이 넓어.이렇게 마음이 넓어선 안되는데. 사실 저 기생오라비가 뭐가 이뻐서 내가 이딴 짓을 한단 말인가. 후회가 가슴을 밀고 올라와서 나는 가슴이 아파졌다.배도 조금 아프다. 역시 이렇게 허전할 때는 뭔가 집어 먹는게 가장 좋은 일이다. 그렇게 뭔가 집어 먹기 위해 몸을 막 돌리는 순간 낯익은 체향이 느껴졌다. "쿠베린." KUBERIN....... 살아있는 모든 존재들에게 때때로 찾아오는 미풍 가슴 저린 일도 즐거운 일도 결국은 지나가는 바람. 7 말을 건 것은 의외의 인물. 분홍빛이 도는 진주빛 드레스를 치렁하게 늘이고 짙은 갈색 머리칼을 금강 석으로 장식한 소녀였다. 빛나는 밤색눈동자는 장난기를 띄우고 반짝 반짝 하고 있다.손에 끼고 있는 팔찌는 루비로 장식된 백금의 세공,목에 건 그 목걸이는 황금과 금강석으로 장식된 가느란 세공.. 아,마치 이렇게 주절거리다 보니 내가 돈에 눈이 뒤집힌 것으로 보이겠지 만 사실 나는 반짝이는 것을 좋아하는 것일 뿐 돈을 좋아하는 게 아니다. 인간들의 돈은 내게 큰 의미는 없다. 그저 반짝이는 보석과 황금등을 좋아 할 뿐이다.물론 은이나 백금도 좋아한다. "쿠베린,너무 놀라 입이 얼었어?" 그녀가 멍청히 살구 샤벳을 들고 선 나에게 다가오더니 다정하게 말을 건 다.나는 살구 샤벳을 떠서 입안에 넣으면서 그녀에게 물었다. "여긴 뭐하러 왔어?" "뭐하러라니? 참가하라고 해서 온 거야." "흐음." 나는 샤벳을 먹어치우고는 뒤이어서 과자를 한 움큼 쥐었다.내가 먹는 것 을 보고 그녀,미트라가 물었다. "맛있어?" "괜찮아,이 꿀과자는 제법 잘 만들었어." 그녀도 몇 개 집어먹고 있는 사이 나는 그녀의 뒤로 다가오는 일행들을 보 고 도로 과자를 뱉고 싶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여기 있었군." 그렇게 말을 걸고 나타난 것은 시든 오이와 화이딘스 대공부처,그리고 저 보기싫은 두 명의 수컷들이었던 것이다. 일제히 이쪽으로 시선이 쏠린다. 나는 시든 오이와는 얼굴도 마주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고 게다가 멀 리서 에메스가 열심히 제발 피해달라고 애원하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기에 점잖게 자리를 비켰다. 그러나 내가 빠져나가려는 찰나 미트라가 내 옷자락을 잡았고 그 다음에는 시든 오이가 보기 싫은 단추구멍같은 눈에 같잖지도 않은 빛을 뿌리면서 나를 아는 척했다. "이여,이건 쿠베린아닌가!" 내 이름을 기억하다니.저 시든 오이가. "어머,오라버니도 쿠베린을 아세요?" 미트라가 말했다. 오라버니,오라버니..오라버니! 제기랄! 나는 입을 사발처럼 내밀고 살구 샤벳사발과 과자 한 조각을 든채 얼어있 었다.이 계집애는 바로 왕녀였던 것이다! 저 시든오이와는 전혀 닮지않은 왕녀! 미트라는 갑자기 친근한 척 내 팔에 자기 팔을 감고는 얼어붙은 날 잡아 끌면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 춤추고 올께요." "어머,엘란트라왕녀님,설마 약혼자를 내버려 두고 첫 춤을 다른 남자와 추 려하시다니..." 화이딘스 대공마누라가 뜨악한 표정을 지으며 날 바라본다.그녀의 눈은 이 미 나를 반쯤 발가벗겨 갈기 갈기 찢은 듯한 태도였다. 시든 오이는 오오 그렇군 하더니 갑자기 내 팔을 잡는다. "그럼 나랑 같이 이야기나 하지,쿠베린. 엘란트라,넌 오릴란과 춤을 추렴." "아니에요,오라버니,전 쿠베린과 춤출래요." 미트라가,아니 엘란트라가 은근히 이마에 핏대를 세우면서 내 팔을 꽉 잡 았고 그 뒤를 이어 호호호 하고 웃는 화이딘스 대공마누라와 마누라의 두 자식 중 오크 녀석이 나에게 살기를 날린다. 이건 대체 뭐하는 짓거리야! 내가 왜 이 시든 오이 오누이 사이에 끼어서 이런 곤경에 처해야 하지? 고 작해야 살구 샤벳트 하나 집어 먹은 게 그리도 커다란 문제였단 말인가! 내가 슬슬 발작하려는 순간 갑자기 사람들을 급히 헤치고 셀레네가 달려왔 다. "쿠베린!" 그녀의 뒤로 기생오라비가 긴장된 시선을 내게 던졌다. 그녀는 시든 오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마치 돌멩이 헤치듯 나에게 다가오더 니 나의 팔을 잡고 안떨어지는 미트라,엘란트라에게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 다. "여기 계시면 어떻게해요! 내가 춤추는 걸 보기로 했잖아요!" 나는 아직도 살구 샤벳을 들고 있었다. 왠지 골치가 아파진다. "응,너에게 샤벳을 가져다 주려고 하다가 잡혔다." 나는 애써 담담히 말하고는 샤벳그릇을 멍청히 셀레네를 바라보고 있는 시 든 오이에게 건네주었다. 시든 오이는 멍청히 내게서 그릇을 받아 들었고 나는 미트라에게 천천히 빠져나오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쿠베린! 이 여자 누구야?" 갑자기 미트라의 눈꼬리가 치켜 올라간다. "이 여자? 이 무례한 여자는 누구지요?" 셀레네의 눈꼬리도 올라간다. 조인족 여자는 선택한 수컷에겐 강압적인 권력을 구사한다는 것을 잊었다. 나는 묵묵히 말했다. "이쪽은 내 셀레네이고 이쪽은 어제 나랑 밥먹은 미트라다." 그렇게 말하자 갑자기 미트라의 얼굴이 얼어붙었다. "오호호호호..그랬군요.그저 밥을 같이 먹었군요." 자신 만만하게 셀레네가 웃음을 터뜨리고는 내 팔을 잡아 팔짱을 끼곤 나 를 끌어당겨 이 곤욕스런 자리에서 끌어내주었다.아니,그러려고 했다. "내...셀레..네? 그게 뭐얏!" 미트라가 고함을 버럭 질렀다. "어머,이상한 여자.왜 소리를 지르는 거지요?" "뭐 이상한 여자?" "그럼 무례한 여자라고 말할까요?" 셀레네가 한 수 위인 듯 싶다. 암컷 싸움에 수컷이 끼어들어선 안되는 법,나는 허공을 바라보면서 모른 척하고 있었다. "저어,셀레네님,이쪽은...엘란트라 왕녀이십니다.." 당황한 기생오라비가 우물거리면서 말했지만 셀레네의 살벌한 눈초리는 사 라지지않고 미트라를 쏘아보았다. "왕녀든 뭐든 무례한 것은 무례한 거에요!" 기생오라비는 날 거의 증오의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이를 갈았다.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할 거냐 하고 그의 눈이 말하고 있었다. "확실히 해! 쿠베린,넌 그 여자가 더 좋아?" 미트라가 외쳤다.벌개진 얼굴이 이건 확실히 어린애였다. 나는 약간 갈등을 느꼈다. 여자에게 충격을 주는 것은 내가 즐겨하는 사항이 아니다.게다가 이 여자 저 여자 다 받아들이는 나로선,아니,오는 여자 막지 않고 가는 여자 잡지않 는 나로선 매우 난감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셀레네와 미트라를 저울질한다면 역시 그래도 셀레네가 아니겠는 가? 미트라는 여전히 어린애라 결코 내취향이라 할 순 없으니까. 오랜 장고 끝에 나는 점잖게 말했다. "미트라,넌 내게 이름조차 밝히지않았어. 그저 밥 한 번 같이 먹은 것 이외 에 무슨 일이 있다고 지금 그렇게 화를 내는 지 모르겠군." 웃 하고 미트라가 머뭇거렸다.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변하더니 갑자기 시든 오이의 팔뚝을 잡고 소리를 질렀다. "나 모욕당했어요! 오라버니!" 어엉하고 울음을 터뜨리는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나는 어깨를 으슥 했다.인기있는 남자는 괴롭다. "이상한 여자야! 대체 왜 울고 뭐가 모욕이야!" 셀레네가 날카롭게 말했다. 셀레네가 달리 보이기 시작하는 군 하고 내가 생각할 때 화이딘스 대공부 인이 끼어들었다. "지금 보아하니 이 난봉꾼이 왕녀님을 유혹한 게 아닌가 싶군요." 나는 왠지 울화가 치밀기 시작했다. "뭐야! 그,그런!" 시든 오이가 벌건 오이가 되었다.그는 주먹을 쥐고 부들 부들 떨면서 나를 노려보았다. "쿠베린! 아무리 너라도 용서할 수 없다!" 그건 대체 무슨 의미냐? 뒤에 선 기생오라비와 에메스등의 얼굴이 소스라치는 공포로 휩싸였다.그 들은 나를 둘러싼 이 공방전에 당황해서 어쩔줄 모르는 태도로 입을 적 적 벌렸다. 미트라는 엉엉 울고 셀레네는 싸늘하고 나는 화가 나고 시든오이는 벌건 오이가 되고 화이딘스 대공부인은 얼음가루를 날렸다. 이때 대공부인 뒤에 섰던 오크의 아들네미 같이 생긴 녀석이 갑자기 셀레 네와 나 사이에 끼어들었다. "미인이네,나랑 춤춥시다." 셀레네는 놀란 얼굴로 갑자기 자신의 손을 잡아오는 오크닮은 녀석을 바라 보았다.그녀는 앗 하고 소리를 쳤다. "오크다!" 장내는 얼어붙었다. "이건 지금 뭐하는 짓이야!" 에메스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외쳤다. 나는 길게 누워서 불만에 가득찬 얼굴로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왕녀님을 건드리다니! 너 제정신이야! 대체 왕께 뭐라 말씀드리냔 말이 야!" "건드리긴 누가 건드려! 내 침대로 뛰어들어온 것도 그 계집애고 내 방으 로 숨어든 것도 그 계집애라구!" 에메스는 더 이상 말하지않고 내 멱살을 쥐어 잡았다. 흥분한 벌건 얼굴에 반대로 창백한 금발이 빛났다. "네가 엘란트라왕녀는 나와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내 동생같은 분이라구! 그런 분을 울려!" "내가 울렸냐? 저 혼자 울었지!" 내가 그를 쏘아보자 에메스는 머리를 쥐어 잡았다. "이걸 어쩌면 좋아." 그가 이리저리 방안을 서성이면서 난리를 치고 있을 때 셀레네는 흑흑 하 고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너무 너무 이상한 인간들이에요.가만히 있는 쿠베린과 나를 왜 이렇게 괴 롭히는 거죠?" 그 말에 에메스는 흠칫했다. 비오나는 한숨을 쉬었고 기생오라비는 처량한 얼굴이 되어 버렸다. 그녀는 내 옆으로 다가와 내 어깨에 고개를 묻고 울기 시작했다. "인간들은 너무 이상하다구요.언제 날 돌려보내 주실 거에요,쿠베린?" 나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곧이야,안그래도 오늘 밤 데리고 나가려던 참이었어." "진짜로요!" "응." 나는 계곡에서 온 조인족전사를 생각하면서 대답했다. 그 말에 놀란 비오나가 나에게 물었다. "무슨 뜻이에요? 설마 셀레네를 어디로?" "조인족 전사가 맞으러 왔어.난 오늘 낮에 그들을 만나고 온걸. 그들 만이 아니고 왠 날뛰는하프엘프와 수도용병길드마스터, 게다가 수인족일행까지. 다양한 인종들을 만나고 왔지." 에메스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그건..?" "남부지방 일곱 개 성이 함락되었다는 건 장난이 아니야,아마 낼이나 오늘 밤쯤 그 연락이 올거다. 엘프도,수인족도,조인족도 모두들 이 번 사인족의 팽창에 긴장하고 있어." 에메스가 진지한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그럼....총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일까?" "델리암의 전 군력을 다 동원해도 아슬 아슬 할 거다." 에메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델리암은 그렇게 약하지않아." "그건 너랑 화이딘스대공이란 매부리코가 합작했을 때 이야기지." 에메스의 얼굴이 굳었다.그는 주먹을 쥐고 나에게 물었다. "그게 가능하리라고 보나?" "아니." "그럼? 어떻게 그와 합작을 한단 말이야?" "내가 가장 좋은 생각을 말하자면 저 시든 오이를 내치고 화이딘스 대공을 왕위로 올리는 거야. 그리고 넌 저 대공녀석과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조성 하는 거지." "마.말도 안돼! 그건 반역이다!" 에메스가 길길이 뛰며 나의 멱살을 또 잡으려 해서 나는 그 얼굴을 발로 걷어 차 주어야 했다. "이..이 말도 안되는 놈!" 그가 길길이 뛰는 것을 보고 나는 물었다. "그럼 더 좋은 방법이 있나?" "있어! 대공을 없애고 왕위를 확립하는 거다!" "그럴려면 네가 왕이되는 게 낫지." "시끄러! 몇대에 걸친 충성을 뭘로 아는 거냐!" 에메스가 벌건 얼굴로 외쳤다. 나는 고개를 절레 절레 저었다. "어리석은 놈.그러니까 역대 왕에게 계속 이용당하는 거다." "충성이 왜 이용이지? 넌 그런 고귀한 심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거냐! 너야 말로 천박한 짐승이니까..." 퍽 하고 나는 그 얼굴을 한 대 쳤다. 에메스의 몸은 데굴 굴러서 방 한 구석으로 쳐박혔다. 보고있던 비오나가 비명을 올렸고 기생오라비가 창백해져서 곧장 에메스에게 달려갔다. 에메스는 머리가 깨진 채 피를 흘리며 비오나의 부축을 받고 날 노려보았 다. 그 눈을 마주 보면서 나는 일어섰다. "잘 있어라.얼간아.나는 더 이상 네 뒷처리는 해 주고 싶지않다." 비오나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쿠베린님!" "가.가라구! 너같은 거...!" 이마에서 흐르는 피를 쥐고 에메스는 날 쏘아보았다.이글거리는 눈이 화를 내고 있었다. "그만하세요! 쿠베린님! 진정하시고 노여움을 푸세요!" 비오나가 급히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새파란 얼굴을 모른 척하고 나는 냉담하게 고개를 돌리고 외쳤다. "린!" 창밖에서 린이 뛰어들어왔다. 그는 피를 흘리는 에메스와 칼을 뽑아든 기생오라비들을 모른 척하고 나의 앞에 반듯하게 섰다. "조인족의 아이들을 데리고 와라.지금 여길 뜨겠다." "네!" 린이 재빨리 나갈 즈음 나는 셀레네의 허리를 잡으면서 그녀를 일으켜 세 웠다.기생오라비는 당황한 채 에메스를 안고만 있었는데 비오나는 재빨리 내 앞으로 다가와서 고개를 숙였다. "지금 말은 잊어주십시오! 쿠베린님.에메스는 그저 화가나서..." "나도 더 이상 인간의 일에 참견하고 싶지않다.너도 그만 두는 게 좋다.인 간이란 사리가 통하는 자들이 아냐." 비오나가 고개를 떨구었고 나는 셀레네가 창백한 얼굴로 날 바라보는 것을 모른 척하고 그녀의 허리를 안은 채로 창밖으로 뛰어 내렸다. 기분 더럽다! KUBERIN....... 살아있는 모든 존재들에게 때때로 찾아오는 미풍 가슴 저린 일도 즐거운 일도 결국은 지나가는 바람. 8 스카가 입을 벌렸다. "어쩐 일이야?" "나왔다.나 이젠 인간들의 일에 일일이 참견하지않기로 했어,특히 그 에메 스꼬마 일에는!" "너 하지만 공작을 좋아하잖아!" "누가 그 얼간이를 좋아해!" 내가 소리를 지르자 스카는 입을 다물었다. 가빈이 꼬리를 내리고 슬쩍 슬쩍 린을 돌아보았다.린은 입을 다문채 무표 정했다.그는 팔짱을 낀 상태로 여전히 말뚝 처럼 서 있었다. "흐음..알았어...일단 잠이나 자자." "배고파!" "알았어..알았어.식사를 청하지." 스카는 한숨을 푹푹 내 쉬면서 밖으로 나갔다. 스카가 머물고 있는 이 사슴집은 방이 여러개여서 우리들이 갑자기 와서 머문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갑작스런 등장에 스카는 놀 란 모양이었다. 나는 울화를 억누르면서 점원이 가져온 음식을 먹어치웠다.가빈과 린은 아 무 말없이 날 흘긋 거리고 보기만 하고 있었는데 그 표정이 너무 조용해서 또 화가 치밀었다. 지노엔이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의 뒤에 조인족의 전사 두명이 서 있었다. 무표정한 연녹색의 눈을 한 녀석이 가볍게 내 앞에서 고개를 숙여보였다.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동족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까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나는 족발을 뜯다가 그들의 인사를 받았다. 연녹색의 눈을 한 놈은 프루엘, 청동빛 머리칼을 한 녀석은 엘레라고 했다. 아무리 들어도 역시 조인족은 이름조차 엘프를 닮았다. 왠지 그 무섭게도 진지한 얼굴을 보고있자니 기분이 풀렸다. "됐어.그래,너희 왕은 잘 있나?" "네." "너의 왕은 이번 일에 어떻게 할 거라고 하더냐? "계곡에선 저와 엘레만이 나왔지만 마레의 계곡에서도 전사가 파견될 것이 라고 합니다." "그런가...이번 피해는 조인족이 가장 컸을지도 모른다." "그렇습니다.세개 부락이 거의 몰살지경에 처했습니다.지금도 위험에 처한 부락이 있을 것입니다." 아까의 오만한 빛을 버리고 단정한 얼굴을 한 프루엘이 말했다. 낮에 있었던 일은 완전히 잊은 거 같아 조금 아니꼬왔지만 그걸 들먹이는 것도 쪼잔하고 귀찮아서 내버려 두었다. "엘프들은 뭐라더냐?" "하프 엘프 튜나의 말에 따르면 궁사대를 파견한다는 것 같습니다.인간들 과 연합을 할 것인가 아닌가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습니다.인간의 왕은 믿 을 수 없다는 말이 지배적이었기에 차라리 용병길드로 온 것이지요." 나는 족발을 계속 뜯으면서 침묵했다. 그 말이 옳을 지도 모른다. 인간의 왕이란 모든 것을 인간의 척도로 재는데다가 그들 자신의 종족도 배반하는 자들이다.사인족을 믿을 수 없어 하는 것은 그들이 인간과 닮았 기때문이다.배반을 자유자재로 하는 종족을 믿을 수는 없으니까. 어떤 계약을 맺어도 인간을 제외한 종족과 계약을 맺으면 길게는 천년,최 소 오백년은 간다. 하지만 인간은 단 10년도 기약할 수가 없다. 10년이 아 니라 1년도 미심쩍은 것이다. "곧 회의를 시작할 것입니다.왕." "알았다." 나는 다 뜯어버린 족발을 그릇에 남기고 손을 털었다.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수도용병길드의 마스터 커스터,그리고 하프엘프 도 둑길드의 마스터 튜나,그리고 수인족의 대표인 듯한 붉은 눈의 여자와 조 인족의프루엘,엘레등이었다. 내가 가서 자리에 앉자 스카도 앉았고 린과 가빈은 내 뒤에 팔짱을 끼고 섰다. 엄숙한 분위기에 어울릴 태도로 사내 하나가 들어서더니 우리들 앞에 음료 를 가져다 놓았다.포도주와 맥주와 엘프들을 위한 과일즙이었다. 셀레네가 슬쩍 들어서서 구석에 지노엔과 같이 앉았다. "음...그럼 사인족이 지금 올라오고 있는 지역부터 말하겠소." 커스터가 일어서서 지도를 펼쳤다. "일곱개의 성채를 무너뜨리고 녀석들은 지금 북상중인데 이 오스의 숲과 기아네의 계곡에서 잠시 지체하고 있소이다.이 곳에서 살고 있는 부족은 내 알기로 그레이트 오크족과 룬 아크 더 팰리어스의 거처요. 그곳에 있는 길드원의 보고에 따르면 룬 아크 더 팰리어스의 보호하에 있는 마을에는 강력한 마법결계로 인해서 놈들이 들어서질 못하고 그 마을을 돌아갔다는 거요.그리고 그레이트 오크족은 지금 전투를 벌이고 있는데 상당히 고전하 는 것 같소. 그들을 지원하기 위해서 블루 오크족의 전사들 이백이 출전했 소." "룬 아크 더 팰리어스가 누구에요?" 듣고 있던 튜나가 물었다. "전설의 대 마법사." 그렇게 대답한 것은 수인족의 여자였다.그녀는 붉은 손톱과 붉은 눈을 하 고 약간 얼룩덜룩한 손등을 드러낸 채 풍만한 가슴을 반쯤이나 드러내고 가죽옷을 입고 있었다. "그를 불러서 좀 도움을 얻어보죠.그의 마법이 그렇게 대단하다면." 튜나가 그녀를 보며 말하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냉담하고 무표정한 눈은 인간의 눈이 아니라 마름모꼴의 눈동자를 가지고 있다. "그 마법사는 지금 사라진지가 이미 이백년이나 되었어." "인간이 아닌가?" 튜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몰라, 그 마법사의 이름을 들은 것은 거의 오백년 동안 계속이니 그가 인 간인지 엘프인지 수인족인지 아인족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런데 어떻게 그가 펼친 마을의 결계가 아직까지 작동을 하지요?" "그가 바로 룬 아크 더 팰리어스이기 때문이야." 썰렁한 말이다. 그렇게 말한 것은 조인족의 엘레였다.그는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룬 아크 더 팰리어스- 이름 그 자체가 마법사 중의 마법사,최고 경지의 마법사란 뜻이야.백마법과 흑마법,거기에 회색마법과 정령법까지 마스터한 자이지.그가 펼친 결계는 그 자신이 풀기 전에는 절대 풀리지않아.천재지변 이 일어나서 화산이 터지거나 땅이 꺼지기 전에는." "헤에.대단하네." 튜나가 중얼거리는 동안 엘레가 날 바라보았다. "그 분을 아실텐데요,묘인족의 왕?" 시선이 다시 일제히 나에게 쏠렸다. 나는 맥주를 발칵 발칵 들이키고 있다가 그 시선을 받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알아.그 놈." "그가 어딜 갔는지 아십니까?" 엘레가 집요하게 물었다. "몰라. 어디서 또 소꿉장난 하고 있을지. 그놈의 라이벌인 암흑의 룬 킬트 더 마이오스와 어디선가 불장난 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룬 킬트 더 마이오스? 그건 또 누구에요?" "그런 자가 있어.둘이서 몇백년간 못잡아먹어서 안달인 두 놈이지." "그라면 사인족을 막을 수 있겠네요! 그럼 그는 어디있죠?" "암흑마도." 웃 하고 다들 입을 다물었다. "암흑..마도입니까?" "응.거기 황제야." 모두 침묵했다. "그러니까 없는 마법사는 잊어버리라구,중요한 것은 오크와 사인족놈들이 싸우고 있다는 것이고...곧 그놈들은 오크 마을을 휘젓고 북상할 것이란 것 이야." 나는 맥주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아,마법길드에 협조를 요청했소." 생각난 듯이 커스터가 말했다. "마법길드에선 이쪽으로 다섯명의 일류 마법사를 보내주겠다고 하더군요." 험 하고 다들 고개를 끄덕였을뿐 반응은 없었다. "묘인족..에선 얼마나 참가할 겁니까?" 수인족의 여자가 붉은 눈을 나에게 돌리며 물었다. 나는 내 앞의 맥주를 다 마시고 옆에 앉은 스카의 것 까지 마시고 있던 차 였다. "생각중이야." "만약 묘인족이 참가한다면 상당히 큰 전력이 될 텐데요." "지금 사인족이 건드리지않은 곳은 묘인족뿐이지요?" 왠지 상당히 꼬인 음성으로 엘레가 말했다. 나는 맥주를 다 들이키고 말했다. "낼 몇 불러 볼 참이야." 오라는 말만 해도 다들 벌떼 같이 달려들 것이다.요즘 들어 싸움이 그다지 없었으니 살육과 피에 굶주려 있을 것은 뻔한 이치,나도 부글 부글 끓는데 젊은 녀석들이야 말할 나위도 없다. 나는 히죽 히죽 흐뭇하게 웃고 말았다. 그때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나를 향해 우물 말을 걸었다. "저어,쿠베린,누가 찾아왔는데요." 누군가했더니 아까 낮에 나에게 얻어맞은 빨간 머리다.턱에 상처가 난 얼 굴로 날 흘긋 흘긋 보고 있었다. "누군데?" 나는 세 컵째의 맥주를 스리슬쩍 마시던 차였다.내 옆에 앉아있던 커스터 가 불만스런 표정으로 자기 앞에 놓인 맥주잔에 얹혀있는 내 손을 노려보 고 있었다. "아까 왔던 그 아가씨." "에?" 나는 눈을 크게 떴고 셀레네의 얼굴은 셀쭉해졌다. "어떤 아가씨? 비쩍 마른 꼬마?" "뭐..내가 보기엔 이쁘기만 하던데,아직 어리긴 하지만.." 빨간머리가 약간 항의했다. "헤에." 나는 부시시 일어났다. 일어서면서 맥주도 잊지않았기에 커스터는 내 뒤를 째려보았다. 내려가 보니 아닌게아니라 그 곳에 서서 눈을 부릅뜨고 있는 것은 미트라, 아니 엘란트라였다.그녀는 두손을 허리에 탁 얹고 날 노려보고 있었다. 왠 봇짐이 등에 매달려있고 신은 것은 낮과 달리 승마용장화다. 이 아가씨가 전에도 호위기사랑 눈이맞아서 도망갔다 잡혀온 그 엘란트라 왕녀로군 하고 새삼 생각하고 있는데 그녀가 진지하게 말했다. "당신은 왕을 두려워하지않지?" "내가 왕인데?" 내가 뜨악하게 말하자 그녀가 진지하게 덧붙였다. "날 도망치게 해줘." "왜?" "그 오크를 봤지?" 오크...그렇군. 이 아가씨는 그때 보았던 그 오크와 결혼하는 것이다. 나라도 도망을 치겠다는 생각이 들어 새삼 납득이 갔다. "절대로 절대로 그 놈과는 결혼 못해! 왕의 명령이 아니라 왕 할애비라도 못해!" 그녀가 결사적으로 외쳤다.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용병들이 일제히 날 바라본다. 날 격려하듯이,아니 미트라를 격려 하듯이 날 바라보았다. "오라비니까 잘 설득해봐." "몇번이나 내가 설득했는 줄 알아? 그랬더니 한단 소리가 왕녀로서 태어난 책임을 지라나!" 그녀가 소리를 꽥 질렀다. 나는 흠 하고 팔짱을 끼었다. "그래서 도망쳤다가 잡혀오기를 몇번이나 반복했어! 저 에메스에게 편지해 서 어떻게든 도와달랬더니 저 멍청이같은 게 하는 말이 뭐 왕에게 충성하 는게 신하된 도리라는 거야!" 흐음 흐음.. "날 보곤 맨날 자기 친동생같다느니 어쩌고 하더니,자기 친동생이 저런 빌 어먹을 오크같은 거랑 결혼해도 참을 건가! 이 놈이나 저놈이나 결국은 왕 의 권력이 두렵다는 거 아냐! " 그녀가 악을 질렀다. "난 못해! 죽어도 못해!" 그녀는 왁 울음을 터뜨렸다. 모든 그 자리에 있는 사내들이 깊은 공감을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뭐니 뭐니 해도 용병으로 뼈가 굵은 자들이 새삼 왕에게 깊은 충성심을 가 지고 있을 리가 없는 터인지라 그들도 별 반감없이 그녀의 말에 공감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쿠베린,날 데리고 도망가줘!" 그녀가 애원하듯 말했다. 나는 팔짱을 끼고 조용히 말해주었다. "미트라,한가지 말해두겠는데.." "응?" "그 놈을 오크라고 말하면 오크들이 화낸다.." KUBERIN....... 살아있는 모든 존재들에게 때때로 찾아오는 미풍 가슴 저린 일도 즐거운 일도 결국은 지나가는 바람. 9 아름다운 흰 깃털이 툭툭 떨어진다. 백옥을 빚은 것 같은 그 흰 깃털을 바라보면서 나는 손을 뻗어 그 날개를 만져 보았다.날개는 햇빛을 받아 허공에 오색으로 반짝이는 먼지조각들과 함께 빛나고 있다. 포근하고 부드러운, 깃털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는 단단 한 날개. "그렇게 신기해요?" 셀레네가 날 보며 웃었다. 나는 그 날개를 보면서 옆에 선 엘레를 보았다. 엘레는 셀레네의 언니의 남편의 동생이란다.형제가 나란히 전사인 것이다. 따지고 보면 아주 남도 아니라고 해서 엘레는 스스로 셀레네의 안전을 책 임지려 나선 듯했다.그렇지만 역시 엘레라는 녀석은 어딘가 린을 연상시키 는 데가 있다.무표정한 얼굴과 어딘가 나는 성실해요 라고 쓰인 듯한 얼굴 이 사람들에게 함부로 할 수 없는 진지함과 냉담함을 함께 보여준다. 실제로 이녀석은 상당히 좋은 놈일지도. 옆에서 어느새 하프엘프라는 튜나와 발장난을 하면서 이야길 하고 있던 미 트라는 말뚱 말뚱 그 휘황한 날개를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다. 튜나는 손뼉을 치면서 웃었다. "근사해요! 이봐요,무표정한 오빠! 당신도 날개를 펼쳐보라구요!" 튜나가 옆에서 채근해도 엘레의 얼굴은 무표정하다.지노엔은 약간 불안한 듯 힐긋 거리고 있다. 그 얼굴에는 선망의 빛이 완연한데 물정모르는 샤로네는 가빈과 장난을 치고 앉아있다. "뭐야,인간이 아닌거야?" 미트라가 다소 안심했다는 건지 어처구니 없다는 건지 경멸스럽다는 건지 애매한 표정으로 말했다. 셀레네의 날개를 살펴보겠다고 말한 엘레는 무심히 그녀의 상처를 들여다 보고 있었다.그 옆에선 프루엘의 얼굴이 굳어진다. "날 수 있겠어?" 내가 묻자 엘레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뼈가 어긋났습니다." 셀레네의 얼굴이 슬픔으로 물들었다.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한동 안 침묵했다. "일곱개의 뼈가 어긋나 아물어서 이 대로는 날 수 없습니다." "수술할 수는 없나?" "...안될겁니다." 그는 잘라 말했다. 셀레네의 얼굴에선 눈물이 흘러나왔고 지노엔은 그런 그녀의 팔을 잡고 위 로하듯이 그 몸을 잡았다.나는 음 하고 그녀를 보았는데 셀레네가 와락 내 품으로 안겨 울기시작했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토닥 토닥 하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그녀는 욱 욱 하고 울었다.하늘을 날 수 없는 것은 조인족에게 어떤 의미일까..살육을 하 지 못하고 다시는 뛸 수 없는 묘인족과 흡사한 것일까, 욱욱 하고 그녀의 억눌린 울음소리만 방안에 퍼져나가는 동안 문득 튜나가 흠흠 하고 말하면서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아까 생각했지만 인간들이야 오크를 좋아하지않고 하니 암말 안하고 넘어갔는데..." 눈이 동그라진 미트라가 나는 인간인데 하고 끼어들려는 찰나 튜나가 말했 다. "그레이트 오크와 블루오크가 지금 놈들과 싸운다고 하니 도와 주러 가는 게 어떨까 하고." 에엑 하고 가빈이 놀라는 소리를 내질렀다. "농담이겠지! 그냥 그레이오크도 아니고 그레이트 오크잖아! 그레이트 오 크를 도와주러 가다니! 있을 수 없다구~" "뭐야.오크도 종류가 다양한 건가?" 미트라가 물색모르고 끼어든다. 나는 셀레네를 내 무릎에 앉힌 채 지껄였다. "엘리야에서 선원일하고 있는 평범한 오크가 그레이 오크, 인간을 습격하 고 뜯어먹길 즐기는 게 그레이트 오크, 숲속에서 산적질 하는게 블루오크 야." 미트라의 눈이 댕그랗게 변했다. 가빈이 발딱 일어나 내 앞으로 달려와 항의하듯 물었다. "진짜로 그레이트 오크를 구하려 갈거에요?" 나는 턱을 잡고 잠시 생각했다. "뭐 내쪽에서 본다면야 그레이트 오크나 인간이나 별 다를 바는 없지.엘프들이 오크를 돕겠다고 나설 정도라면야." 그렇다. 오크와 엘프의 사이는 극도로 나빴다.나는 솔직히 엘프의 한 사람인 튜나가 그 런 소릴 한다는 게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우리도 나도 오크는 싫어.하지만 만약에 오크놈들을 조금 빚을 지운다면 그간 의 사이가 다소 나아질 수도 있지.흐으,그 못생기고 지저분한 놈들을 우리가 구 해준다면 자식들 감격해서 울지도." 튜나가 제멋대로 말하면서 허리에 손을 얹고 호호호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가빈은 그녀의 말을 듣고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바라보면서 쯧쯧 고개를 저었 다. "오크들이 잘도 고마와 하겠다." "그렇지만 어찌되었든 오크의 마을에서 놈들이 이리로 오는 것은 정해진 사실이 고 보면...역시 도우러 가는 편이 좋겠지요." 프루엘이 한 마디 거들었다.그는 진지하게 튜나를 보고 말했다. "우린 가겠소." 튜나는 호호호 하고 웃으면서 프루엘의 얼굴을 황홀한 듯이 바라보며 미소했다. "역시 조인족은 다르다니까!" 나는 쳇 하고 낮게 내뱉었다.조인족과 엘프의 상생은 본디 좋은 것이니 별 다를 바는 없었지만 튜나라는 이 조막만한 계집애가 날뛰는 것도 약간 보기 역겹다. "쿠베린도 갈 거에요?" 가빈이 다급히 물었고 일제히 시선이 이리로 쏟아졌다. 나는 멀뚱 멀뚱 셀레네를 바라보았다. 셀레네는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눈물에 젖은 얼굴이 한떨기....꽃같 아 보였다.아아 넋을 잃게 이쁜 것! 셀레네는 눈물을 닦으면서 나에게 물었다. "가실 거에요?" "....엉,으응." 아아..그런 얼굴로 보지 마라. 난 여자에게 약해.아니,암컷에게 강한 수컷이란 변태밖엔 없을 것..쳇! 내가 거북한 대답을 하자 가빈이 쳇 하고 말했고 셀레네는 슬픈 얼굴로 날 바라 보았다. "그럼 ..전 어떻게 하죠? 절 데려가 주실 건가요?" "...으음..그럼 널 계곡까지 내가 데려다 줄까?" 나는 옳다구나 하고 말했다. "그래,그게 좋겠다.조인족과 쪼가리 엘프계집애는 오크의 마을로 가고 나는 여 기서 셀레네와 지노엔,샤로네를 계곡까지 데려다 주는 거야.그럼 되겠군." 내가 허허 웃으면서 셀레네의 어깨를 툭툭 칠 무렵 프루엘이 끼어들었다. "그럼 차라리 제가 계곡에 세 분을 모셔다 놓지요,어차피 계곡으로 가는 길도 모르실 거요." 저 자식이! 내가 그를 쏘아보는 동안 미트라가 하 하고 나섰다. "그래! 쿠베린,그게 좋겠군! 난 너랑 같이 갈래!" "나,너랑 그다지 가고 싶은 생각없다." 나는 잘라 말하곤 프루엘을 노려보았다.프루엘은 모른 척하는 얼굴로 무심한 표 정을 유지하고 있는데 미트라가 길길이 뛰었다. "이봐! 그건 대체 무슨뜻이지? 나랑 같이 가고 싶지않다니!" "오크의 마을에 네가 왜 가냐?" 내가 쏘아보고 나자 킥킥 웃으면서 튜나가 말했다. "이야,이야.묘인족의 왕께선 여자를 밝힌다고 하더니 진짜네,진짜." "너같은 쪼가리 엘프의 계집애에겐 취미 없으니 신경꺼라." 나는 그렇게 말하곤 쳇 쳇 하고 일어섰다.그리고 셀레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 고는 샤로네와 지노엔에게 말했다. "그럼 너희들은 계곡으로 곧장 가.어차피 이 자리에서 이별 할 수 밖에 없을 거 같다." "에! 진짜로?" 샤로네가 놀라 날 바라보았다.그리곤 재빨리 가빈을 본다.가빈은 당황한 얼굴로 그녀를 보다가 날 바라보았다. "벌써 헤어져요?" "당연하지.결론 내렸으면 어서 끝장 본다.얼른 얼른 이별의 흉내라도 내고 갈 길 가는 거야!" 나는 그렇게말하면서 셀레네를 바라보았다. "셀레네.잘 가라." "저.정말로 그,그냥 이대로 끝인가요?" 셀레네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나는 그녀의 허리를 잡아 당겼다.그리고는 단숨에 입술을 겹쳤다. 옆에서 미트라와 튜나가비명을 올리고 조인족들이 입을 적적 벌리는 동안 그녀 와 나는 진한 키스신을 연출했다. 이 부드러운 감촉,이 향긋한 냄새. 아아 이대로 그냥 떠나 보내다니.이건 정말 슬픔이다! 슬픔! 하지만 생각해보면 조인족의 여자랑 이루어 지려면 역시 결혼이다! 결혼이라니! 묘인족 사상 없었던 일이고 나 역시 한 여자로 안주(?)해서 살아갈 자신은 도저 히 없다.어디까지나 수컷은 나비요 암컷은 꽃이니까. 유혹과 도전은 나의 삶의 근간이 되며 이 우아한 독신으로서의 사냥꾼의 기질을 한 여자로 인해 망치고 싶지 않은 것. 그래,셀레네,나를 잊어다오. 나도 널 잊지..는 않겠지만 어찌되었든 너랑 결혼은 할 수 없단 말이다! "우와아아.." 입을 떼자 마자 가빈이 입을 저억 벌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조인족의 남자들 둘이 불편한 얼굴을 하고 날 쏘아보고 있다.조금만 더하면 불 쾌한 얼굴이 되고 곧이어 살기에 찬 얼굴이 될 것 같았다. 나는 셀레네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녀는 진지하게 내 얼굴을 매만지면서 물었다. "결혼..하실건가요?" "묘인족 사상 결혼은 없다." 나는 엄숙히 말했고 셀레네의 눈빛은 말 그대로 쏘아질 듯 강렬하고 매섭게 빛 났다.설마 이 아가씨 전사 타입아냐? "그럼 전통을 깨요!" 오옷..외유내강! 이 아가씨는 정녕 외유내강의 굴강한 타입이었던 건가? "그럴 수 없어." "왜요?" "나는 한 여자랑 같이 수백년을 살기엔 지나치게 강한 남자거든." "진짜 강한 남자는 하나로 만족하는 법이에요." "그건 조인족 논리지." "그래서,당신은 나를 버릴 건가요?" "버리다니! 당신을 애인으로 하고 싶지만 그럴 순 없단말야.청순한 조인족 아가 씨가 결혼도 하지않고 묘인족의 바람둥이와 놀아나게 만들 수는 없거든." "....." 그녀는 날 빤히 보았다. "내가 좋아요?" 물론 좋지.싫은 여자를 끌어안고 키스하는 미친 놈 봤냐? "물론." "당신은 애인이 몇이에요?" "...몰라." "그냥 여자라면 다 좋은 거 아네요?" "...아냐.저기 있는 쪼가리 엘프계집애나 옆에서 소리지르는 저 말라깽이 계집 애는 취미없어." 셀레네는 묵묵히 날 바라보더니 짧게 말했다. "일으켜 세워줘요." 그렇군. 나는 그녀의 허리를 잡은 채 반쯤 그녀를 뒤로 밀어 올려 내 맘대로 키스를 퍼 부었던 것이다.그리고는 다른 사람들에게 들리지않는 작은 소리로 우리들끼리 지껄이고 있었다.그녀의 허리를 바로 세우자 그녀는 당장 내 옆에 처억 하니 서 더니 심각한 얼굴로 날 쏘아보았다. "절대 안돼요?" "안돼." "포기 못해요?" "못해." 그녀는 말 없이 손을 들어서 내 뺨을 좌악 갈겼다. 윽. 그녀는 그렇게 하곤 나를 후려갈긴 뺨에 가볍게 키스했다. 벌주고 약주냐? 때리고 키스하다니. "이상한 남자! 바람둥이 같으니!" 그녀는 그렇게 말하곤 홱 고개를 돌려 흥미진진하다 못해 눈이 빠져라 바라보고 있는 조인족들과 기타등등들에게로 걸어가 버렸다. 튜나는 흐흐흐 하고 웃으면서 날 바라보았는데 나는 그 시선을 무시했다. 미트라는 쌤통이다 하는 표정과 기괴한 표정이 섞여 있었고 가빈은 입을 저억 벌리면서,린은 여전히 무표정한 채로 바라보고 있었다. 지노엔과 샤로네는 저런 저런 하는 얼굴로 바라보고 있기에 나는 그들에 짧게 인사를 건넸다. "잘가." "에에...그동안 고마왔습니다." 지노엔이 드물게 예의바른 태세로 인사했고 샤로네도 고개를 푹 숙였다. "고마와요." "나중에 이 은혜를 꼭 갚겠습니다.쿠베린,묘인족의 왕." 지노엔이 꾹 주먹을 다지면서 말했다. "음,이쁜 여자라도 골라놔라." 나는 자조적으로 그렇게 말했고 셀레네는 나에게 눈을 흘겼다. "진심이야?" 그녀들이 떠난 직후 미트라가 방안까지 들어와 물었다. "뭐가 진심이냐?" 나는 그녀에게 트릿하게 되물었다. "진짜 그녀가 좋아?" "난 원래 암컷들에겐 진지해." 나는 그렇게 말하고 허전한 가슴을 어루만졌다. 아아 허전해.하지만 나는 원래 혼자인 것,그리고 결혼이란 불가능한 물건임을 잘 안다.일단 한가지에 충실한다고 하는 것은 묘인족에겐 불가능한 것이다. 우리들은 서로 영역을 넓히고 우리들이 가질 수 있는 것과 우리들이장악할 수 있는 영역을 손에 쥔다.그리고 다른 강자들을 찾아 떠도는 것이다. 묘인족의 마을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여자들과 어린애들이 있 는 묘인족의 마을은 커지고 작아지길 반복한다.수컷들이 떠나가고 여자들은 어 린애들을 키운다.어린애들이 자라면 그 어린애들은 또 다른 강자를 향해 발을 내딛고 여자와 만나 아이를 갖기 전에는 마을에 들어오는 법이란 없다. 그래서 묘인족이란 얼마나 냉혹한 자들이고 혹독한 자들인가를 몇번이나 몇번이 나 다른 종족들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내 자신 묘인족이 몇명인지도 모른다. 내가 아는 것은 묘인족의 강자가 어느날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나 도전을 한다는 것이다. 강자에게 경배를,약자에게 죽음을. 지난 몇백년,몇천년간 이어온 진리다. 셀레네들이 프루엘과 떠나버리고 나자 나에게 문제는 단 하나가 남았다. "어이,넌 어쩔거냐?" 내가 미트라에게 묻자 그녀는 날 바라본다. "뭘 어째? 너랑 같이 갈거야." "웃기지마.걸리적 거리는 여자는 데리고 갈 수 없어." "저 반쪽엘프계집애도 있잖아!" 미트라가 튜나를 잡고 늘어졌고 튜나는 그 소릴 듣더니 불같이 화를 냈다. "아니,이 인간계집애가! 간덩이가 부었나! 이 튜나님에게 뭐라 지껄이는 거야!" "시끄러워! 저 애도 가는데 내가 못갈 이유가 어딨어?" 나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간단히 알려주지,저앤 강하고 넌 약해.그게 이유야." 미트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말도 안돼! 저런 조막만한 계집애를 내가 이기지 못한다구? 나,강해!" 나는 트릿하게 그녀를 바라보고 짧게 말했다. "가빈!" "에에?" "너 이 계집애를 데리고 바바에게 가서 있어." "노,농담마세요! 내가 왜 이런 계집애를 데리고 바바같은 놈에게 간단 말인가 요! 차라리 마미에게 가겠어요!" 가빈이 항의했다. "마미에게 가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만 마미는 이 계집앨 데리고 가면 오해한단 말이다." "무슨 오해?" "이 애에게 임신이라도 시켜서 데리고 온거라고 착각하면 나는 어쩌냐?"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튜나는 입을 저억 벌렸고 미트라의 얼굴은 노랬고 가빈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이래서 이놈이 좋다니까. "자,잠깐! 그게 뭐,되지도 못하는 시시껍절한 농담이야! 난 이 놈에게 단지 날 도망치게 해달라고 말했을뿐이라구!" 정신 차린 미트라가 끼어들었고 나는 미트라를 냉정히 보며 말했다. "너,혼자서 먹고 살아갈 재주라도 있냐?" "뭐?" "나에게 비비지않고 잘 살아갈 재주라도 있냐구.왕녀주제에 설마 빌어먹지는 못 할 테니까 확실히 하자." "뭐,뭐가!" "괜찮은 부호랑 결혼해서 살아가는 것 이외에 너에게 무슨 방법이 있냐구?" "이...죽일 놈!" 미트라는 대답대신에 내 얼굴에 접시를 집어던졌다. 잽싸게 피하긴 했지만 대체 어디서 갑자기 접시가 등장해서 날 치냐? "죽어버려라! 이 나쁜 놈!" 그녀는 식식거리고 밖으로 나갔고 뒤 이어서 비난의 기색이완연한 튜나가 쏘아 보며 말했다. "너무 심했어! 나빠!" 그리곤 그녀는 급히 미트라의 뒤를 따라나간다. 기분이 더러워진 나는 팔짱을 끼고 입을 다물었는데 엘레가 슬쩍 물었다. "오크에겐 언제?" "지금 가야지.다 떨구었으니." 나는 짧게 말했다. "그녀는 당신을 좋아해." 팔짱을 낀 튜나가 잠시 후 들어와 말했다. "나도 알아." "그런데 그런 말을 해?" "그래야 돌아가겠지." "이상한 남자랑 결혼하기 싫다잖아?" 나는 짐을 챙기는 엘레를 흘긋 보면서 말했다. "쟤 어때?" 튜나의 얼굴이 가볍게 달아올랐다. "농담하지마.멋진 남자이긴 하지만 나도 바쁜 몸이야." "뭐,,하는 수 없지.하지만 저 앤 왕녀다.인간의 왕녀는 인간의 왕자보다도 쓸모 가 없다구." "꽤 심하게 말하잖아? 하지만 왕녀로 태어난 건 저 애의 죄는 아니지." 나는 순순히 인정했다. "자자.이제 잡담 그만.가자구." 내가 밖으로 나서려는 순간 갑자기 미트라가 나섰다. 그녀는 무시무시하게 진지한 얼굴을 하더니만 갑자기 길고 아름다운 머리칼을 덥석 쥐고 내 앞에서 잘라버렸다. 내가 놀란 눈을 크게 뜨는 순간 그녀가 무시무시한 박력으로 내 앞에 다가오더 니 말했다. "이제 나,너 따라가겠어!" "죽어도?" "네가 지켜주겠지." "내가 왜 널 지켜줘야 되는데?" "남자란 반한 여자를 지켜주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어!" 그녀의 얼굴이 무지막지한 박력을 담고 날 쏘아보았다. "난 너에게 안 반했는데?" "내가 반했어.그러니까 가자구!" 멱살을 쥔 그녀가 살벌하게 말했다. "농담하지마.난 너랑 놀 여유 없어." 내가 말하자 그녀는 진짜 살벌하게 아직 자기 머리칼을 잘라낸 단검을 들고 나 에게 들이댔다. "나도 노는 거 아냐! 왕성을 빠져나왔을땐 그만한 각오정도는 되어 있어!" 나는 그 박력에 눌려서 입을 버금 거리고 있었다. 이 애가 돌았나? "너 왕을 뭐라 생각해?" 갑자기 엉뚱한 질문을 그녀가 던졌기에 나는 무심결에 대꾸했다. "시든 오이." "대공을 뭐라 생각해?" "새침떼기." "공작을 뭐라 생각해?" "애완동물." "나는?" "버릇없는 말라깽이." 갑자기 그녀가 킥 하고 웃었다. 멱살을 쥔 그녀가 킬킬 하고 왕녀답지 못하게 웃더니 자기 단검을 장화속에 끼 어 넣었다.그리고는 내 멱살을 쥔 손을 살짝 놓았다. "그게 바로 네게 반한 이유야." 머리가 띵하다! [쿠베린 막간극] 이름 KUBERIN..... 이름을 대라! 네 이름을 대라! 비겁하게 물러서지 말고 네 이름을 대라! 너의 이름은 너의 자랑 너의 이름은 너의 명예 이름을 대라! 비겁하게 이름을 숨기지 말고 네 이름을 대고 가슴을 펴라! 나는 백부를 죽였다. 백부의 시체는 산중 바닥에 널려 있었다. 내가 물어뜯은 팔은 바위 곁에 떨어져 있었고 내장은 내 발밑에 구르고 있다.나 는 그 찢어진 뱃가죽에서 새어나오는 악취도 느끼지 못한 채 멍하니 서서 바람 을 기다리고 있었다. 먼 이름 모를 계곡과 산과 바다에서 다가오는 그 바람은 살육의 냄새를 씻어내 고 내 몸안에 쌓인 분노와 슬픔을 다 몰아낼 수 있을 것이다. 내 아버질 죽인 백부를 내가 죽이고 나면 모든 것이 다 시원해질 것이라 여긴 것은 내 스스로를 속인 비겁한 마음. 나는 백부를 좋아했었다. 나의 왕,나의 백부. 위대한 왕 키사는 내 발밑 아래 쓰러져 있다. 이제 그 굵은 목소리도 거친 손등도 볼 수 없다.다른 자들을 비웃을 만큼 강력 한 힘도 다른 자들을 넋을 잃게 만들었던 그 쩌렁한 음성도 사라지고 없다. 나는 왕을 죽여 왕이 된 것이다. 바위에 걸터앉아서 내가 죽인 자를 바라본다. 내가 죽인 자의 목은 조금 멀리 떨어져 있다. 내 상처를 내려다 본다. 내 상처는 갈기 갈기 찢어진 등과 옆구리,뼈가 드러난 가슴위에 있다.피가 흐른 다.내 피와 왕의 피가 얼룩지고 어우러져 나에게 감격을 맛보게 한다. 이제 왕의 피가 내게도 흐른다. 손을 내밀어 내 손을 본다. 피로 얼룩진 손.이 손이 바로 백부의 심장을 쥐어 짜고 그 늘어진 시체에서 목 을 잘라냈다.그 목숨이 내 몸안에서 흐른다. 고개를 들어 허공을 바라본다. 새파랗게 맑은 하늘이 날 바라본다. 나는 살아있고 백부는 죽었으며 나는 왕이 되었고 백부는 시체가 되었다. 일어서서 비틀 비틀 걸었다. 그리고는 바위위에 올라서서 가슴의 찢어지는 듯한 통증을 참으면서 두 손을 움 켜 쥐었다.그리곤 입을 열었다. "쿠오오오오오오.............." "우오오오오오오.............." 나는 왕이다! 이제 나는 묘인족의 왕. 이 모든 슬픔을 다 버리고 나는 영광의 자리에 서있음을 다른 자들에게 알려야 한다. 내 사랑하는 백부에게 내 자랑스런 왕에게 작별을 하고 나는 외친다. 나는 왕이다! 나는 이제 묘인족의 왕. 이 지상 최고의 강자인 것을 알리겠다. "쿠오오오오오오오......" 들어라. 나는 정당한 도전과 결투로 왕을 쓰러뜨리고 왕이 된 자다. 나는 당당히 이 자리와 영광을 내 손으로 얻었다. 나를 쓰러뜨리는 자는 역대 왕들을 쓰러뜨리는 것과 같은 영광을 가질 것이다. 그러니까 나에게 도전할 자는 도전하라. 나는 강하다.그러니까 나에게 도전할 자는 죽음을 각오하고 덤벼라. "쿠오오오오오오....." 지상위의 모든 묘인족이여 들어라! 새 왕이 탄생했노라. 나 쿠베린, 이제 왕이다.묘인족이여 들어라! 나는 새 왕 쿠베린,나를 이기고 싶은 자는 기량을 길러 도전하라! 그리고 도전할 자신이 없는 자들은 나를 경배하라! "쿠오오오오오오오...." 내 발밑에 쓰러진 백부가 날 바라보고 있다. 멀리 떨어진 머리가 날 바라보고 있다. 증오인지 고통인지 알수 없는 그런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다. 나는 두 손을 치켜 세워 하늘을 향했다. 내 사랑하는 왕에게 경배를! 왕의 모든 영예와 영광,그 모든 이름을 내 몸위에 걸머지고 내 자신의 강함을 자랑하여 내게 쓰러진 역대왕들의 이름을 더럽히지않겠다. 내 손톱에 잘리워 바닥에 쓰러진 왕의 목에게 맹세하나니 나는 내 목숨과 이름 을 걸고 그대의 강함을 알리겠노라. 나는 가장 강한 자,나는 왕. 내 이름은 쿠베린..... 제 8화 싸움 KUBERIN...... THE NIGHT HAS A THOUSAND EYES AND THE DAY HAS BUT ONE; YET THE LIGHT OF THE BRIGHT WORLD DIES WITH THE DYING SUN. ..... BY 버어딜런 1 하늘을 난다... 기분이 좋았다.다리가 허공을 누빈다는 것은 절벽같은데서 뛰어내리는 것 보다 기분이 좋다.비록 내 날개가 아닌 다른 녀석의 날개로 날고 있는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뺨을 스치는 바람도 좋고 차가운 골짜기에서 내팽개치는 음습한 바람도 좋다.풍 요로운 대지위에서 나오는 구릿구릿한 냄새도 뭐 그다지 불쾌하진 않다.모든 흙 냄새는 약간은 구리다.하지만 그런 것에 우리들은 불쾌감을 표시할 자격이 없기 때문에 구수하다고 상쾌하다고 약간은 거짓말을 해주는 것이겠지. 대지의 여신은 오늘 기분이 괜찮은 모양이다. 초록색의 다양한 빛깔이 대지 전반에 흩어져 있고 여기저기서 움터오는 연두색 의 빗깔들이 날 쳐다보며 손을 흔들고 있다.네모진 인간들의 밭과 대지의 여신 이 되는 대로 가꾼 천연의 숲들이 번갈아서 내 발밑을 간지럽힌다. 앗!공기의 여신이 내 뺨을 다소 쌀쌀맞게 내길기는 것은 아무래도 매양 하늘 아 래 기어다니던 나같은 녀석이 하늘을 날고 있다는 것에 대한 반응이겠지.뭐 좋 아 좋아,이 쿠베린님은 그 정도의 앙탈은 용서할 수 있다고.여신님. "너무 높은 것 아닙니까?" 녀석이 말했다. "야,기분깨지마." 나는 내 머리위에서 들리는 음성에 기분이 깨져서 약간 불쾌해졌다. "호오,.높은 곳을 좋아하시는가 보군요." "좋아하다 마다." "보통 땅에서 사는 자들은 하늘 높은 곳을 두려워 합니다." "난 두려운 것 없다." 엘레는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게 불쾌했지만 방법이 없다. 녀석은 내 허리를 잡고 있고 나는 녀석의 허리에 매단 끈에 매달린 채 하늘을 날고 있는 것이니까. 바람에 머리칼이 나부끼는 녀석은 이게 여자라면 바랄 것이 없겠다고 생각하는 내 머리위로 날고 있다.녀석의 날개는 일반적인 조인족의 셀레네처럼 희고 휘황 한 것이 아닌 단단하고 약간 회색이 섞인 갈색의 날개였다.그 날개는 별로 퍼덕 이는 것도없이 유연히 좌악 펴진채 창공을 날고 있었다. 보는 사람이 감탄할 정도로 일직선인 그 날개는 셀레네의 것 보다 컸고 그 자신 의 머리칼과도 흡사한 청동빛을 띄고 있었다. "너,나중에 내리면 네 날개털 몇개 다오." "...." 녀석의 얼굴이 기묘하게 변했다. "뭘 하시게요?" "음,모자에 꽂게." "...." 녀석은 내게 말걸기를 포기하고 나는 데에 열중했다. 나도 그녀석과 말하길 단념하고 바닥을 구경하는데에 시선을 집중했다. 머리가 약간 어질 어질 한 것은 높은 곳에 올라왔기때문일 것이다. 헌데 녀석이 갑자기 날개를 비뚤게 하더니만 급하강을 시작했다. 어라! 녀석은 날 마구 굴리듯이 휙 휙 날고 겁에 질리라고 기원하듯 숲가까이에 다가 갔다가 그 다음에는 계곡의 자락에 닿을 듯이 아래로 하강했다가 급상승했다가 를 반복했다. "야!" "..네?" "너랑 나랑 자리를 바꾸자." "설마 날 수 있으신 겁니까?" "아니.이러다간 바닥에 긁힐 거 같으니까 내가 네 허리위에 올라앉겠다는 거 다." 겁주고 싶은 기분은 알겠지만 자식,이런 걸로 잘난 척하면 그 놈의 날개를 박박 뜯어 주겠다.원래 내가 못하는 것을 네 까짓것이 하는것이 매우 불쾌한데 거기 다가 내게 감히 유세를 떨다니! 더 용서 할 수 없다! "당신이 내 등에 타면 날개를 펼수 없습니다." 쌀쌀맞은 대답이다. "그래? 그럼 할 수 없군.나는 네가 내가 너무 무거워서 휘청이는 줄 알았거든." "사실은 무겁습니다." "그래? 저런,저런.이 아담한 크기의 나도 달고 나르지 못하다니.생각보다 조인 족은 힘이 없군,그러니까 사인족 따위에게 당하는 거겠지?" "..." 녀석이 화가 난 것을 곧 느낄 수 있었다. 녀석이 이를 갈던 말던 나는 히히 웃었다. "오오.바람이 상쾌하군,너 알고 있나? " ",...뭘요?" "나의 노래 말이야.나 쿠베린님의 애창곡이 있다." "모릅니다...당신의 애창곡따위는!" "모른다면 들려주지...하하하하..내 이름은 쿠베린..오호 오호 ..성은 없고 인 간도 아니다 오호 오호.." 내가 팔다리를 휘적이면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자 녀석이 휘청 했다.날고 있던 날개가 잠시 균형을 잃는 것을 보며 내가 물었다. "감명받았나?" "...." "좋아,좋아.그렇다면 또 한 번 부르지." 나는 팔다리를 휘적 휘적 하면서 노래를 시작했다.큰 소리로 좌악 좌악 부르고 나자 기분이 좋아진다.스카자식이 매양 내 노래를 듣고 경기를 일으켰는데 그 놈이 옆에 없으니 기분은 더더욱 상쾌하다. "나나나나...오호 오호.." "...그만 해두시지않겠습니까?" "듣기 싫냐?" ".....곧 도착할 겁니다." "도착할 거라니 더더욱..마저 불러야 하지않겠나?" "...사인족에게나 들려주십시오." "음,.그런 놈들에게 나의 섬세한 감성이 이해가 될까?" 내가 생각에 잠기는 척 하자 녀석은 침묵했다. "충분히 이해할 것입니다." 자식,생각보다 재치가 있네. 그 말을 듣고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녀석은 나를 숲 위로 나르면서 균형을 유지했다.아까같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짓은 하지않았다.아,뛰는게 아니고 나는 중이었다.이리 저리 나는 짓거리는 삼 갔다.나도 노래를 삼갔고. "그런데 대체 묘인족은 몇이나 될까요? 이번 일에 묘인족을 끌어들이지 않을실 겁니까?" 한 참 날고 있는 중에 녀석이 다시 물었다. "음.그렇군.몇정도 불러 볼까?" "묘인족의 마을은 어딥니까? 그리로 가실 겁니까?" "아니." "그럼? 연락방법이 따로 있는 겁니까?" "있기야 있어." 나는 녀석을 흘긋 올려다 보았다. "너 귀를 막는게 어떠냐?" "네?" "녀석들을 부르려면 한가지 방법 밖에는 없다." "어떻게요?" "말 그대로 부르는 거지." 녀석은 잠시 침묵했다.단려한 이마가 찡그려졌다. "부른다는 것은..소리지른다는 의미입니까?" "응.그렇다." "여기서요?" "그래." 그는 잠시 침묵하고는 신중하게 말했다. "여기서 소리치시면 몇이나 부르실 수 있습니까?" "몰라." "....그럼 대체 묘인족은 모이는 일이 가능합니까?" "거의 없어." "...그럼 묘인족의 마을이란?" "우린 마을이 없어.거의." "어..어째서?" "어린 것들만 잠시 암컷들과 같이 살 뿐이야.그리고선 다시 뿔뿔이." "...한데 모여사는 일이 없는 겁니까?" "없어.너 한꺼번에 모여 있는 묘인족 본일있냐?" "..없습니다.그리고..묘인족을 보는 것도 이번이 처음입니다." "호오,그렇군,하긴. 어리니까." 나는 팔짱을 끼었다. 잠시 하늘을 보았다. 우리들이 모여 산 것은 언제 였던가.기억도 잘 나지않는다. 내가 왕이되었을때 나는 여자들의 마을을 이끌고 살았었다.약 삼백여년간 그렇 게 했었다.보통은 왕은 여자들을 데리고 살아간다.여자들과 아이들을 데리고. 그러나 내가 마을을 떠나고 나면 제 이인자 정도 되는 녀석이 여자들을 데리고 살기 마련인데 그게 지금 누구인지는 기억력이 가물 가물 하다.아마 듀나시정도 되지않을까 한다.발정기에 모인 수컷들은 각기 약 석달가량의 시간이지나면 뿔 뿔이 다시 흩어져 버린다.발정기가 지나면 암컷들은 아이들을 낳고 그 아이들을 키우는 것이다.마을이 형성되는 것은 그 때인데 그것도 아주 잠시.왕이 없는 마 을은 형성되지않는다.암컷들역시 마을에 머무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기때문에 자기가 낳은 아이들을 데리고 뿔뿔이 흩어져 버린다. 암컷들의 아이들은 각자 커지면 강자를 정하기 위해 사방에 흩어진 제 족속들을 냄새로 찾아내고 싸운다.싸우다 죽기도 하고 이기기도 하고 드물게는 무승부가 되기도 하지만 대개는 상대를 죽이게 된다.왕의 입회하에 벌어지는 싸움이 아니 라면 대개는 죽이고 죽는다. 그러니 숫자를 내가 알 턱이 있나... 이렇게 하니 묘인족은 수도 적고 만날 일도 적다. 아직 나에게 도전하는 놈들이 없는 것을 보면 지들끼리 치고 박는 것은 여전한 모양이다. "귀 막아라." "에..엣!" 녀석이 당황하여 나를 잡은 손을 놓는 그 찰나에 나는 입을 열고 몸안에 공기를 받아 들였다. "쿠오오오오오오오..........." "쿠오오오오오오오........" 오랫만에 나의 소리가 공기중에 퍼져나간다. 이 소리에 한동안의 모든 것을 쓸어담았다. 나는 왕,그리고 나는 너희들을 부른다.싸움이 있다.모여라... 입을 닫고 녀석을 올려다 보자 녀석의 얼굴이 창백해져있었다. 귀가 멍멍하겠지 하고 녀석을 보자 녀석의 눈에 눈물이 찔금거린다.그런 얼굴을 보니 왠지 기분이 좋아지며 통쾌해진다.잘난 척 하는 녀석을 쿡쿡 찔러주는 것 에는 이런 즐거움이 있다. "야,들리냐?" ".....지독하군요." "..귀 막으라고 했잖아?" "......막았었습니다." "뭐,그정도면 양호하군.자자,우는 얼굴 그만하고 속도를 높혀라." "..." "뭐라고 투덜거리는 거냐!" "..아닙니다." "이렇게 느려서야 어디 가기나 하겠냐? 얼른 가! 오크들이 멸족하기 전에!" 녀석이 휘익 하고 하강을 시작했다. 날개가 좁혀지며 동시에 좌악 속도가 붙는다.뺨에 닿는 바람이 칼날처럼 와닿고 옷자락이 온통 피부에 달라 붙는다.헤에 헤에..숨쉬기가 힘들어지는 것을 보니 이 자식 화가 났군.하지만 참을 수 밖에. 녀석이 화가 났어도 나는 넓은 마음으로 참아 줄 수 밖에 없는 것이다.나같이 마음넓으신 드문 묘인족께서 참고 이 좁은 조인족놈을 이해해 주어야지. 녀석은 고운 목소리는 있어도 박력있는 목소리는 없는 것이다. 가지고 있지 못한 자가 가진 자를 질투하는 것은 당연한 일로 그정도도 이해못 한다면 나는 묘인족의 왕일 수 없는 것이다.그렇고 말고... 우우..숨막혀.. KUBERIN...... THE NIGHT HAS A THOUSAND EYES AND THE DAY HAS BUT ONE; YET THE LIGHT OF THE BRIGHT WORLD DIES WITH THE DYING SUN. ..... BY 버어딜런 2 수풀속에 떨어지자 마자 나는 약간의 다리운동을 했다. 움직이지 않은 다리를 주욱 뻗어 주무르고 나자 날개를 접은 녀석이 사방을 돌 아보며 물었다. "냄새..느껴지십니까?" "당연하지." 나는 목을 이리저리 돌려 보며 말했다. "근사한 날씨다..." 나는 고개를 들어서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푸른 하늘을 바라보았다. "지독한 냄새군요." "원래 피냄새는 다 그런거야." 그렇게 경험자다운 말을 해 준 다음 나는 걷기 시작했다. 멋진 풍경은 결코 아니다. 새파랗게 드러난 하늘 아래 초록 풀숲 아래 늘어진 그 모습은 결코 아름답지 않 다.날씨가 이렇게 좋은데 죽어넘어진 자들의 모습은 더 서글픈 생각이 든다. 시체가 이렇게 널려있다면 우중충한 날이 좋다. 데구르르 구르는 목주변으로 날아드는 게 파리떼나 송장벌레떼가 아니라 회색빛 의 장대비였다면 더더욱 좋았을 것을.무기를 잡고 죽어넘어진 시체더미 위로 창 공의 여신이 흘리는 비가 더 어울릴 것을 무참히도 대지의 여신은 자신의 청소 부들을 먼저 보냈다. 우리들이 다가서도 도망가지 않는 굶주린 들개떼들과 아작거리는 오그라들과 개 미떼,송장벌레떼들,각종 파리들은 떼아닌 잔치를 흥미진진하게 받아들이고 있 다. 엘레가 왝 왝 거릴 얼굴을 하는 동안 나는 앞으로 나가서 시체 하나에 꽂힌 철 시를 좌악 뽑아냈다. 검붉은 피는 이제 솟구치지않고 조용히 바닥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그 새로운 상처에 또 금새 파리떼가 달려든다. "역시..그겁니까?" 엘레가 창백한 얼굴로 내 등뒤에서 물었다. 썩은 냄새가 진동하고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죽음의 냄새 한 가운데 서서 무익한 죽음을 본다.아니,어느 것이나 무익한 죽음따위는 있을 법 하지않다.대개 나는 인간들이나 무익한 죽음을 하는 것들이라 믿지만 서도. 오크들의 시신은 적어도 수십.죽어넘어진 것이 이빨이 부수수 하게 솟아난 그레 이트오크였기에 어느쪽이패배했는가는 그다지 오랫 동안 보지않아도 되었다. 그 시체들을 들쑤시자 뒤에 선 엘레가 물었다. "뭘 찾으시는 겁니까?" "시체." 나는 겹겹히 쌓이고 찢겨진 살점들을 발로 걷어 치우면서 시체를 찾았다. 지독한 냄새.오물과 썩어가는 냄새와 고릿고릿한 살내음,오크 자신의 구릿한 냄 새는 그 고약한 시체썩는 냄새에 가려 느껴지지도 않는다.그렇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시체 썩는 냄새는 어느 종족이나 다 마찬가지인 것이다. 한 참을 뒤져서야 겨우 찾아냈다. 그것은 널부러져 복부에 굵직한 창날을 들이박고 있는 시체였다. 오크와 달리 단정한 외모를 가진 그것은 새파란 얼굴이 되어 굳어있었다.입가에 흐르는 피와 손톱사이에 찢겨진 살갗이 박혀서 굳어있다. 엘레가 옆에서 보면서 혀를 찼다. 그것은 인간처럼 갑주를 입고 허리엔 칼을 차고 있었다.그러나 그 칼을 사용한 것 같지도 않았다.내가 들여다 보는 순간 엘레가 말했다. "오크 수십에 단 하나라...엄청나군요." "아냐.정확히 말하면 이 자식은 병신이어서 당한 거야." "에?" "사인족은 변신족이야.이 놈은 변신하지도 않고 당한거야.아마 방심하다가 한대 맞은 거 겠지." "그럼..?" "이 놈이 죽은 다음엔 녀석들은 다 변신했을 거야.그리고 갈갈이 다 찢어 죽여 버린거야." 나는 사방을 돌아보았다. 철시를 맞은 것은 댓명정도,나머지는 다 맨손에 당한 것이다.목이 잘려졌건 심 장이 통째로 도려졌건 간에 놈들은 다 그렇게 당했다. "사인족의 변신은..어느정도입니까?" 조인족의 엘레가 진지하게 물었다. "이 꼴을 보아 하니....한 오크 오십은 한 놈이 당해낼 거 같군." "더 강해진 거 아닙니까?" "사인족 내부에 대체 무슨 일이일어난 건지 알수가 없군,사인족놈들과 얼마전에 맞부딪쳤지만 이렇게 강하진 않았어." 약간 가슴이 무거워 졌다. 땅의 엘프의 마을에서 본 놈들은 이렇게 강하지 않았었다.대체 무슨 일이 일어 난 것일까. 그 배신당한 사인족의 왕이 거느린 자들과 반역도가 거느린 자들이 반으로 갈라 졌다는 이야긴 듣고 있었지만 그 들중 어느 놈들이 이런 짓을 벌이는지는 알 수 없었다.게다가 아무리 강해봐야 이 땅 전체를 다 녀석들이 다스릴 수는 없다.그 런 걸 아는 자들이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지? 영토 넓히기라고 한다면 이건 너무 어리석은 일이었다. 한 녀석이, 한 종족이 존재하기 위해서 땅을 넓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건 지나 치게 넓히고 있는 것이었다.이런 짓은 인간 이외엔 하지않는다. 사인족이 인간들에게 받아들인 것이 무기이외에도 또 있었던 것일까... "이런..짓을 갑자기 시작한 의도를 알 수 없습니다." 엘레가 말했다. 나는 몸을 일으켜서 코를 허공으로 내돌렸다. 강한 시체썩은 냄새가 이 곳 이외 에도 숲안 곳 곳에 존재했다.무언가 살아 있는 냄새는 없나 하고 집중하고 있을 때 엘레가 연이어 말했다. "이런 짓을 하는 건 인간뿐인데 어쩌자고..." 오래된 현명한 종족은 이런 짓을 하지않는다. 우리들 묘인족,사인족,조인족은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종족들이다.우리보다 오 래된 거인족과 용족과 석인들은 사라지고 우리들만이 남았다.우리들이 이땅의 짐승들과 남아있는 이 시대에 새삼 수인족들이나 아인족들도 하지않는 이런 짓 을 다름 아닌 사인족이 하다니. 영토 넓히기라... "가자." 나는 성큼 앞으로 내딛었다. 숲안으로 뛰어들어 곧장 냄새가 남아있는 곳으로 향하는 동안 낯익은 피 비린내 를 느끼며 나는 솟아오르는 혈관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쩔 수 없는 일.살육을 즐기는 우리들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 흐흐.하지만 그걸 자제하는 나도 엄청난 존재 아닌가! "크아악" "키약.." 비명소리가 요란한 그 때 나는 뛰어들었다. 날카로운 손톱을 앞세운 놈들이 오크들을 베어가고 있었다.오크들은 제법 거대 했지만 자신들 보다 머리하나가 작은 놈들을 앞에 두고 말 그대로 도륙당하고 있었다.목이 날고 팔 다리가 날고 있었다.비릿하고도 구린 오크의 피냄새가 숲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나는 나서자 마자 내 앞 가장 가까이 있는 작달막한 녀석의 머리통을 잡고 단숨 에 목을 갈랐다. 퍼엇 하고 피가 공중으로 치솟았고 뒤이어서 날 발견한 놈들이 일제히 돌아본 다. "묘인족!" 놈들은 날 알아본다. 나는 대답대신 녀석들을 향해 시익 웃어주었다. 순간 나를 향해서 날아드는 철시를 느끼면서 나는 손톱 열개를 다 꺼내들었다. 부채살처럼 손톱을 휘두르며 그 철시를 막아내자 녀석들이 악악 하고 소리를 내 지르면서 덤벼오기 시작했다. "죽어라!" 녀석들의 손톱과 이빨이 나를 덮쳤다.나는 몸을 튕겨 공중으로 치솟았다.그리고 는 녀석들이 뭉쳐 선 한 가운데 서서 녀석들의 뒤에 섰다.가장 가까운곳에 선 녀석의 등덜미를 좌악 찢자 마자 갑주를 입은 채로 놈의 몸통이 잘려져 나가 피 를 뿌렸다.놀란 놈들이 일제히 뒤를 돌아보았고 나는 인정 사정없이 녀석들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피가 솟구친다.그들의 피와 내 피가 동시에 솟구쳐서 눈앞을 붉게 물들인다. 어떤 녀석이 나를 향해 창날을 들이댄다.나에게 접근할 수 없는 놈들이 일제히 뒤로 물러서서 철시를 잰다.그러나 그 순간 그들의 뒤에서 나타난 엘레가 살벌 하게 찢어진 눈매로 녀석들의 뒷목을 잡아 찢었다. 조인족의 전투모드는 오랜만에 보는 것이다.엘레의 손톱은 내 것과 달리 끝이 구부러져 살갗을 쥐어 뜯어 발기는 갈쿠리 모양을 하고 있었다.녀석의 손톱이 앞선 사인족의 목을 찢는 순간 옆에 있던 녀석이 엘레에게 달려든다.그러자 마 자 엘레의 날개가 방패처럼 펴지면서 그 날개에 달린 뾰족한 무엇인가가 녀석의 얼굴을 사정없이 찢는다. 뭘까 하고 생각할 동안 내 눈앞에 있던 사인족 놈들 세명이 전투 모드로 바꾸었 다.그리고는 나에게 내달려든다. 사인족의 전투모드는 나의 피를 들끓게 만들었다. 나는 팔뚝을 곧추 세우고는 전투모드의 사인족 살결을 찢을 수 있나 없나 시험 해 보았다.탕 하고 손톱이 튕겨나온다.녀석들은 의기 양양해서 나에게 달려들었 다.녀석들의 발톱과 이빨이 내 몸에 닿으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갑자기 퍼퍽 거리고 여기저기서 창날이 날아들었다. 돌아보니 오크들이 입과 코에서 김을 내 뿜으며 우리들쪽으로 창과 화살을 날리 고 있었다.이 자식들이 죽으려고 환장을 했나? 이 몸에게 감히 무기를 들이대다 니 하고 화를 낼 무렵 갑자기 차앙 하는 소리와 함께 화살이 날아들어서 내 바 로 옆에 있던 녀석의 입에 꽂혔다. 그 화살의 여력으로 전투모드였던 녀석의 몸뚱이가 홱 하고 고꾸라지면서 쓰러 진다.화살은 정통으로 녀석에게 꽂혀있었고 나는 깜짝 놀랐다.이런 짓을 할 오 크란 없을 텐데 하고 고개를 돌리자 나무위에 선 어떤 녀석이 보였다. "여어." 손을 슬슬 흔들어 보이는 여유를 가진 그 녀석은 다름아닌 하프 엘프인 말라빠 진 계집애- 튜나-였다.허긴 이정도 정교한 활솜씨를 가진 것은 엘프밖에 없다. 엘프는 살육을 혐오하지만 녀석은 하프엘프니까 뭐 주저할 것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동안인데 한 녀석이 다시 나에게 내질러왔다. 나는 손톱을 들어 녀석의 목을 가르는 동시에 녀석의 갑주 사이 맨살을 찔러갔 다.탱 하고 녀석의 피부에 닿은 손톱이 거부의 소리를 알려왔지만 그건 그렇고 이건 이거란 소리를 중얼거리면서 나는 녀석의 몸체를 들어올려 바닥에 팽개쳤 다. 카앙 하고 바닥의 바위가 울리는 소리를 냈고 나는 녀석의 배를 힘껏 밟아주었 다.손톱이 안들어가는 단단한 피부라고 한다면 터뜨려 죽이면 될거다.속안의 내 장까지 단단한 것은 아닐 테니까. "크아아아아" 비명소리가 시끄러워지는 순간 나는 기쁨을 만끽했다. 오랜만에 맘껏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 "끔찍해." 팔짱을 끼고 튜나가 말했다.계집애는 열심히 고기를 뜯고 있는 내 앞에서 투덜 거리고 있었다. 말없이 날개를 다듬고 있던 엘레는 음식을 먹고 있지않았다.그의 몸안에 남은 살기의 여파로 흥분되었는지 먹지 않고 있다. 칼날을 다듬고 있는 린이 날 흘긋 바라보고 있었고 미트라는 웅크린 모습 그대로 내게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튜나는 그 덩치에 어울리지않는 강궁을 등에 멘 채 발 장난을 하고 있었다. 고집스런 얼굴을 한 수인족의 여인도 역시 침묵하고 있었다. "이봐,쿠베린.당신은 진짜 끔찍해." 옆에서 다시 튜나가 아무도 맞장구를 쳐주지않자 덧붙여 말했다. 나는 먹다 말고 그녀를 빤히 보았다. "뭔 소리야?" 오크들은 시체를 내버려 두고 우리들을 마을로 초대했다.마을이라고 하지만 임 시 거처인지 잠잘 곳도 마땅찮고 그저 그런 짚더미 위에 늘어진 꼴이었다. 숲의 깊숙한 곳은- 제법 머릴 썼는지 사방에 엄폐물이 없는 돌산 한 구석탱이에 있는 오크들의 거처는- 밖에서는 잘 보이지도 않았다. 음식이라곤 오크들이 잡아다 놓은 사슴뒷다리 같은 것으로 당연한 일이겠지만 향신료따위도 없었다.우리들은 일단 구하러 온 손님들이니 손님을 반기지않는 그레이트 오크들로서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듯했다.그러나 저러나 그래도 이 대 접은 내 성에 차지않는다. "세상에 터뜨려 죽이다니..나 그런 꼴 처음 봤어...발로 밟아서 내장을 터뜨리 다니.그런 짓을 차마 어떻게 하는 거야?" 튜나가 계속해서 떠들어댔다. "그만해." 미트라가 속이 안좋은 지 입을 막으면서 튜나를 흘겨 보았다. 그녀는 기여코 따라온 것이다.허긴 인간을 누가 막으랴. 튜나는그녀를 데려온 주제에 미트라의 얼굴을 찌익 노려보고는 대꾸도 해주지 않고 나를 계속 갈구었다. "그건 그레이트 오크라도 하지않을 거야!" "하지 않는게 아니라 못해서 그런 거야." 나는 점잖게 대꾸해 주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일어섰다. "어디가?" 튜나가 날 쏘아보다가 물었다.미트라는 슬금 일어나 내 뒤를 따라오려 했다. "오줌누러 간다." "에?" 미트라와 튜나의 얼굴이 벌개졌다. "그,그런 말을 여자 앞에서 할 거냐!" 튜나가 주먹을 쥐어 보이자 나는 점잖게 대꾸해 주었다. "이 자리에 여자가 어딨냐?" "그럼 여기 있는 미트라와 난 여자가 아님 뭐란 말야!" "그래! 그래!" 미트라가 튜나와 함께 합창으로 소리를 질렀다. "어린애지,여자냐? 쳇.." 나는 고개를 젓고 슬금 슬금 어둠 속으로 갔다. 오줌을 누면서 생각에 잠겼다. 나무들 위 하늘에는 별이 반짝이고 있다. 검은 밤의 여신의 옷자락에는 보석들이 빛나고 있다.그 별 보석들은 언제나 우 리들을 내려다 보고 공평한 빛을 뿌려주고 있다. 이런 날은 역시 맥주를 마시며 노래를 해야 어울리는 법. 그러나 불행히도 이곳엔 맥주도 없고 여자도 없고 노래도 없다. 그러고 보니 조인족이 하나 있으니 노래나 시켜 볼까.나의 풍치에 어울리는 노 래를 녀석이 알고 있을 지는 모르지만 어찌되었든 노래를 저 오크에게 시키는 것 보다는 현명할 것이다. 바스락 바스락 여기저기서 밤벌레가 운다.여기저기서 밤짐승들이 움직이고 있 다. 나는 오줌을 사방에 질질 흘려놓았다. 뭐 특별히 내가 몸이 부실해서가 아니라 내가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서다.내 냄새를 사방에 묻혀놓는 것은 때때로 즐겁다.오크들이 여기서 산다고 해도 내 냄새를 지우진 못한다.인간들과 같이 살면서 이런 짓은 한동안 하지 않 았었는데 역시 오랜만에 하니 이렇게 즐거울 수가. 나의 땅이라고 새기는 것은 역시 즐거워.이 땅도 내 땅 저 땅도 내 땅. 내 땅위엔 나보다 강한 놈은 없다. 내 냄새를 맡고 녀석들은 가늠해야 한다. 이 작자가 자신보다 강한지 약한지.그리고 결론이 끝나서 내가 강하다 싶으면 이 곳을 뜨는 것이고 내가 약하다 싶으면 나에게 도전하면 된다.이 얼마나 멋진 논리란 말이냐! 새삼스레 머리 굴리면서 약해 빠진 다람쥐같은 것을 공격할 필 요도 없이 그저 나를 찾아 오면 되는 것이다. 나는 히죽 히죽 웃으면서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하늘도 내 것이라 하고 싶지만 어쩔수 없다. 저 하늘에다 오줌을 내갈길 수도 없는 일이니까. 그래서 하늘은 공평한 것. 누구의 것도 아니니까. "오래도 쌌다." 튜나가 비꼬았다. "응.싸는 김에 푹 싸서 그렇다." 내가 그렇게 대꾸하고 자리에 앉자 미트라가 쳇 하고 중얼거렸다. "점잖치 못하게..." "이런 곳에서 설마하니 내가 꽃따러 간다고 해야 되냐?" 미트라가 훗 하고 웃었다. "그래도 괜찮겠네.나에게 꽃 따줘." 나는 그녀를 물끄러미 보았다. "잠이나 자." KUBERIN..... THE NIGHT HAS A THOUSAND EYES AND THE DAY HAS BUT ONE; YET THE LIGHT OF THE BRIGHT WORLD DIES WITH THE DYING SUN. ..... BY 버어딜런 3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눈을 감은 채 손을 비비적거렸고 웃 하는 소리와 함께 날 밀치는 손길도 느낄수 있었다. 어라? 꼬리가 없다.가빈이 아닌가? "이거.." 누군가가 감히 내 손을 탁 친다. 쳇 하고 손을 뻗어서 허리를 잡아당기자 그 상대가 내 가슴을 밀쳐냈다. "가빈! 난로노릇을 하는 주제에 반항이냐?" 내가 나직히 중얼거리자 그 상대가 내 손가락을 들어올리면서 낮게 말했다. "모른 척하지 마시고 이 손좀 떼시죠." 나는 한쪽 눈만 치켜 떴다. 내 눈앞에 있는 것은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해진 엘레였다.그는 나를 쏘아보면서 나와 마주 누워있다. "너 왜 내 잠자리에 누워있는 거냐?" 내가 묻자 그의 얼굴이 약간 일그러졌다. "농담하는 겁니까? 자던 저를 끌고 온 게 누군데요!" "나는 가빈을 끌었는데." 내가 히죽 히죽 웃으며 말하자 그는 나를 탁 밀치고 일어나 앉았다. "전 여기있어요!" 가빈이 손을 흔들며 모닥불 근처에서 웃음소릴 냈다. 언제 저길 갔냐? 나는 킬킬 거리고 일어나 앉았다.미트라와 나란히 앉은 가빈이 나에게 구운 고 기를 커다란 나뭇잎에 싸서 한덩이 들고 왔다. 화사한 햇빛이 우리들을 비추고 있었다. 엘레는 높은 바위위에 앉아서 사방을 돌아보고 있고 나무위엔 린이 앉아있아 있 었다.튜나가 피운 불앞에서 가빈과 미트라가 막 고기를 굽고 있는 참인데 부스 럭거리면서 수인족의 여자가 다가왔다. 나는 손가락으로 세수하면서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그녀의 얼굴이 상당히 냉 혹한 울림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여자다. 게다가 몸매도 멋지다. 그녀는 내 눈을 흘긋 보더니 고개를 홱 돌려 자리에 앉았다. 쳇, 쌀쌀맞긴. 길게 길게 기지개를 펴면서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반드시 할 일을 하기 위해 풀 숲으로 걸어갔다. 킁킁 냄새를 맡아보니 다들 아침행사를 치른 듯 싶다. 조금 멀리 가 볼까 하고 풀숲을 헤치다 보니 커다란 나무가 보였다.이거라면 마 음에 든다 싶어서 그 앞에서 주섬 주섬 할일을 하기 시작했다. 음음..부르르르.. 어디선가 손을 닦아야 할까 하고 귀를 기울이니 멀리 시냇물 소리가 들려왔다. 오크들의 우물을 쓴다는 것은 바보짓이므로 흐르는 물이 안전하다 싶어 그 쪽으 로 천천히 걸어가는데 갑자기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살기가 인다. 나는 몸을 돌려 가던 길을 그대로 돌아갔다.나뭇가지들이 사정없이 날 환영하면 서 나를 후려갈겼지만 힘을 주는 피부에는 그 충격이 닿지않는다. 내가 막 오던 곳에 당도한 순간 나는 발견했다. "쿠베린!" 가빈과 미트라가 동시에 나에게 화들짝 달려와서 내 팔에 매달렸다. 내 눈에 보인 것은 두명의 드잡이질이었다. 한 명은 물론 엘레였고 그 엘레를 공격하는 것은 어떤 녀석이었다.그 녀석은 마 치 날아오르는 유연하고도 엄청난 속도로 가늘고 약한 나뭇가지를 밟아 오르며 도약하고 있었다.그리고 그 손에는 날카로운 다섯개의 손톱이 튀어 나와 엘레의 몸을 위협하고 있었다. 엘레는 어느샌지 날개를 돋쳐올리고 있었지만 다 펴진 않고 있었다.반쯤 접은 날개가 팽 팽 하고 소리를 내며 공중으로 날아오르다가 마치 추락하는 돌덩이처 럼 날카로운 새매처럼 일직선으로 아래로 내리꽂혀서 상대를 공격해간다. 그의 손톱은 갈쿠리처럼 구부러진 흉기로 상대의 일직선으로 뻗은 손톱과 다르 지만 어느면에서는 엘레가 날 수 있기때문에 굉장히 유리한 듯 보였다. 나는 쳇 하고 가빈이 매달리는 것을 무시하고 화롯불 가까이에 와서 구워진 고 기를 뜯기 시작했다. "쿠베린,괜찮을까? 저 자가 갑자기 공격했는데! 그게 바로 그 사인족이란 괴물 아닌가?" 미트라가 쉴새없이 물었다. "저 엘레는 괜찮아요? 도와주어야 하지않을까요? 린은 그가 무시 무시하다고 말 했어요,.도와 주어야 하지않을까요!" 가빈도 쉴새없이 묻는다. 나는 턱을 괴고 멀뚱거리는 튜나와 같이 앉아서 고기를 뜯었다. 린은 어느샌지 모르게 나무에서 내려와 내 옆에 와 섰다. "이대로 놔두어도 괜찮아요?" "괜찮아." 나는 고기를 쥔 채 이 구경꺼리를 즐겁게 감상하기로 했다. 콰악 하고 나무가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엘레의 발톱이 나무둥치를 가격하자 터엉 하는 소리와 함께 나무가 뒤흔들려서 사방으로 나뭇잎이 눈송이처럼 흩날렸다.그리고 그 와중에 왕성한 여름답게 벌 레들도 후두두둑 떨어져내렸다. "끼아아아아악!" "꺄악!" 미트라와 튜나가 길길이 뛰고 있는 동안 나는 머리위에 떨어진 벌레를 털어내면 서 나머지 고기를 뜯어먹었다. 튜나는 열이 받은 나머지 단궁을 뽑아들더니 외쳤다. "그만 싸워!제기랄!" 그러나 그들이 그정도 가지고 그만둘 리가 없다. 그녀는 갑자기 단궁에 화살을 먹이더니 좌악 유연한 자세로 활을 잡아당겨 만월 로 만들었다.그러더니만 단숨에 화살을 발사했다. 나도 엘프들이 화살을 쏘는 것을 보긴 했지만 이정도로 힘있게 날아가는 것은 처음 보았다.게다가 이 하프엘프 계집애의 것은 단궁이다.그 단궁에 이정도의 힘이 있으리라곤 상상할 수 없었다. 바람을 가르는 화살이 그들의 사이로 끼어들더니 퍼억 하고 그 한가운데에 꽂혔 다.눈 좋은 엘프가 아니고선 흉내낼 수도 없는 대단한 장난질이었다. 엘레의 옷자락과 상대의 옷자락이 정면으로 화살에 꽂혀 동시에 둘다 정지해 버 렸다. "호오." 나는 여자에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주는 주의기에 그녀에게 박수를 보냈다. "근사하군,." 튜나는 눈썹을 치켜 올리더니 고개를 까딱하고는 고함을 질러댔다. "이 바보자식들! 벌레를 떨어뜨리고 아침을 방해하고! 나의 아침식사를 방해하 는 건 그 누구라도 용서 못해!" 쩌렁 쩌렁한 울림이었다. 미트라와 가빈은 얼이 빠진 얼굴로 멍청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들 잠에서 깬 그레이트 오크들 서너명이 이 난장판을 바라보며 입을 벌린 채 뭐라 주절거리고 있었다. "쳇!" 그러나 정작 그 대상인 엘레와 어떤 녀석은 화살을 쭉 뽑아놓고는 거대한 나무 위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서 풀숲에서 파삭 하는 소리와 함께 두명의 녀석이 걸어나 왔다.튜나가 긴장해서 단궁을 먹이고 린이 검을 뽑아드는 동안 녀석들은 일제히 내 앞으로 걸어오더니 털썩 무릎을 꿇었다. "왕을 배알합니다!" 엘레랑 싸우던 녀석은 내 앞으로 오면서 히죽 히죽 웃더니 무릎을 꿇어보였다. "왕을 배알합니다." 나는 녀석들의 뒤통수를 멀뚱거리고 바라보다가 막 뭐라 말을 하려하는데 그 대 신 튜나가 고함을 질렀다. "쿠베린! 당신의 부하들이었어? 이 자식들이! 내 아침을 망친 놈들이 바로 이놈 이란 말이지!" 엘레의 눈초리도 사납다.이녀석은 전투모드가 되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사나운 눈초리를 하고 긴장상태에 있었다. 나는 바위에 엉덩이를 붙인 채 나에게 무릎꿇은 녀석들을 바라보았다. "뭐야,어린애들 아닌가." "코르센이라 합니다." 검은 머리의 녀석이 말했다.그리고 그 옆에 있던 비슷한 또래의 갈색머리가 빙 글 빙글 웃으면서 대답했다.이 놈이 엘레와 드잡이질을 한 놈이었다. "오르건입니다." "수운이라 합니다." 단정한 금발머리가 말했다. 나는 그녀석들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녀석들은 아직 어린 놈들이었다.아마 성년식을 치른지 한 10년정도 될까 말까 한 놈들이었다.이런 어린애들을 데리고 쌈박질을 하러 가야 한단 말인가 하고 내가 한탄하고 있을 즈음 갑자기 푸스럭 거리는 소리와 함께 어떤 놈이 또 나타 났다. 청동빛을 가진 갈색머리에 짙푸른 녹색눈,그리고 잘생긴 얼굴을 한 녀석이었다. 나랑 똑같이 생긴 듯한 절세적인 용모가 확실히 이 자식이 누군지 알수 있게 만 들었다. "킥..이런,이런..." 녀석이 생글 생글 웃었다. 어린애들이 굳어 있는 동안 그는 주욱 내 앞으로 걸어오더니 나를 향해 고개를 까딱 까딱했다. "이건 무슨 농담이야? 이런 어린애 몰골을 하고 장난질을 하는건가?" 나는 반가움과 당혹과 반쯤은 낭패감을 가지고 녀석을 바라보았다. 녀석은 다크시온보다 약간 작은 체격이었지만 다크시온보다 강했다.어깨는 넓고 허리는 가늘다.길게 뻗은 다리와 팔뚝에는 어떠한 장식이나 무기도 지니고 있지 않은 초록의 튜닉차림새였다.겉으로 보기에는 인간의 모습으로 약 20세 가량으 로 보인다.녹색으로 빛나는 눈은 나랑 똑같아서 그 생김새만으로는 나와 똑같다 고 말들했었다. "...휴런.."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게 뭐야? 쿠브,그 정도 밖에는 반가운 표현이 안돼?" 녀석이 팔을 치켜 올린채 이죽거렸다. 나는 하는 수 없이 팔을 들어올리고 나보다 큰 키의 녀석을 끌어안았다. "헤에,나보다 작은 쿠브라니 실감나지 않는군,왜 그런 모양이지? 저 여자애를 꼬시려고?" 녀석이 웃으면서 미트라를 가리켜보였다. "취미가 그렇게 나빠진 거야?" 나는 녀석의 발을 밟아주었다. "멍청아,나의 취미가 그것밖에 안될 줄 아냐?" "하지만 뭐야? 나보다 작은 형이라니.이거 실망인걸." "시끄러워." 오크들이 시끄럽게 떠들고 있는 동안 우리들은 다시 모닥불 주변에 앉아서 먹다 만 고기를 뜯기 시작했다.휴런을 제외한 다른 묘인족들이 다 뒤에서서 일제히 나의 뒷 배경이 되고 있는 동안 미트라가 궁금한 듯 물었다. "당신이 정말 쿠베린의 동생이에요?" "그래." 휴런이 히죽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나이가 더 들어보여." 미트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아.그건 이 쿠브가 지금 모습을 변형했으니까 그렇지." 휴런은 아무렇지도 않게 가빈의 손에서 고기를 빼앗아 들면서 말했다. 가빈은 황당한 표정으로 휴런을 바라보았다.린은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 였고 엘 레는 불쾌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내 뒤에 선 자신을 공격한 묘인족들을 쏘아 보고 있었다. "어떻게 온거지?" "어떻게 오다니?" 휴런이 눈을 크게 떴다. "오라고 소리지르고 사방에 오줌 갈겨댄 게 누군데 그런 소릴해?" "꺄아" 미트라와 튜나가 동시에 얼굴을 가리면서 날 쏘아보았다. 쳇,저희들은 오줌을 안눈단 말이냐? "그래서 왔단 말야?" "응.마침 이 근처를 지나고 있었다...라고 하면 거짓말이 되겠지만 실은 이 근 처에 나의 여자가 살고 있어서 말야." 휴런녀석은 껄껄 웃었다. "어떤 여잔데?" "우후후후..쫘악 빠진 미녀지,근데 형은 여기서 이런 어린 여자들과 노는 게 재 밌는 거야? 나같으면 좌악 빠진 미녀를 찾아 그냥 가겠다." 휴런은 자연스레 엘레앞에 놓인 고기를 잡아 채면서 말했다.엘레는 아직 눈싸움 중이었는데 그런 그를 무시하고 휴런은 고기를 뜯기 시작했다. 묘인족의 꼬마들은 감히 앉지 못하고 뒤에 일렬로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미트라는 가빈에게 슬쩍 묻고 있다. "이봐,아무래도 쿠베린과 너무 똑같지 않나?" "그러게 말야...쳇..진짜 똑같은데." 고기를 좍좍 뜯던 휴런이 나를 흘긋 보았다. 그 녹색눈에 깃든 위협적인 살의를 보고 나는 어쩐지 고기가 맛없어져서 휙 가 빈에게 던져버리고 말았다.가빈이 뼈다귀를 들고 멍청히 날 바라보는 동안 나는 휴런을 돌아보았다. "..하겠다는 거냐?" "뭐어..내가 형을 만난 이상 할 수도 있구..." 가슴이 무겁게 내려앉았다.휴런은 시익 웃음을 지어 보였다. 우리 형제중 살아남은 것은 그와 나 단 둘이었다. 사촌인 듀나시를 뺀다면 살아남아 있는 것은 우리 두 사람. 우리들은 서로 눈을 마주하면서 상대를 가늠하고 있었다. 햇빛은 이제 화살처럼 나뭇잎을 뚫고 우리들을 비추고 있다. 상쾌한 초록색이 흔들리면서 우리들 사이로 끼어 들고 바람은 우리들이 내뿜는 긴장의 분위기를 스치며 날아올라간다. 사방이 정적을 유지하면서 압박감을 내려주는 동안 나도 녀석도 마주하면서 서 로 닮은 초록색의 눈동자를 주시하고 있었다. 나의 피를 가진 녀석과 마주 하면서 살의와 어딘가 슬픈 울림을 예감하면서 우 리들은 그렇게 마주 보고 침묵했다. KUBERIN...... THE NIGHT HAS A THOUSAND EYES AND THE DAY HAS BUT ONE; YET THE LIGHT OF THE BRIGHT WORLD DIES WITH THE DYING SUN. ..... BY 버어딜런 4 새삼스레 슬플 것도 없지만 기쁠 것도 아니었다. 이 녀석과 싸워서 전투모드의 광기를 얼만큼 제어 할 수 있을 지 자신이 별로 없었다.나는 손을 뻗어 녀석의 뺨을 만졌다. 나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않던 휴런이 내가 자신의 뺨을 만지자 흠칫하고 반응했 다.그러나 그도 잠시,그것이 부끄러웠던지 입을 다문 채 웃어 보였다. "쿠베린..." 긴장된 음성으로 튜나가 입을 열었다.미트라의 얼굴은 창백했다. 엘레는 팔짱을 낀 채로 조금 뒤에 물러서서 우리들을 주시하고 있었다.그의 얼 굴에 서린 긴장이 휴런과 나 사이에 일고 있는 긴장감을 눈치채고 있다는 증거 였다.린은 당장에 칼을 뽑은 듯한 일촉즉발의 자세로,수인족의 여자는 뒤로 물 러선 자세로,그리고 묘인족의 아이들은 긴장한 얼굴로 뒤로 한 걸음 씩 다 물러 서 있었다. 오크들은 우리들을 주시하고 있었지만 다가오지는 않고 있었다.묘인족의 꼬마들 이 풍기는 살기를 보면서 녀석들은 차마 다가오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묘인족이 다른 종족에게 풍기는 압박감은 그 종족이 하등할 수록 거대하다. 오크같은 종족들은 살기띈 묘인족과는 얼굴도 마주하지 못한다. "목욕..하고 오지." 나는 일어섰다. 휴런이 히죽 긴장된 웃음을 짓더니 나에게 갑자기 보퉁이를 내밀었다. "옷." 나는 그것을 받아들였다.휴런이 히죽 긴장된 표정을 짓는 것을 보고 나는 왠지 우스워져서 녀석의 목덜미를 잡아서 일으켜 세웠다. "뭐야?" "같이 가자." "싫어! 또 날 빠뜨릴려고!" 휴런이 외치는 소리에 긴장감이 깨졌다. 녀석이 웃는 소리는 여전히 어린애의 음성같이 들린다. 그러나 녀석도 어린애는 이미 아니다.녀석은 강력한 전사로 자라났고 나는 그것 을 뼈아프게 자각했다.그리고 언젠가 녀석이 도전할 것이다.그리고 나는.... "저도 가요!" 가빈이 팔랑 팔랑 날뛰면서 끼어들었다. 일제히 시선이 가빈에게 쏠렸다.가빈은 천연덕 스레 말하다가 일제히 자신에게 시선이 오자 머슥한 표정을 짓다 말고 머리를 긁적였다. "저도..목욕할려는 데요?" 그 대담함에 놀랐다는 듯한 묘인족의 애들은 가빈을 새삼 스레 다시 아래위로 훑어보았다.가빈의 얼굴이 달아오르는 순간 나는 손을 뻗어주었다. "와라." 가빈이 히죽 웃고는 꼬리를 흔들면서 달려와서 내 등어리에 달라붙었다. 나는 녀석을 데리고 걷기 시작했고 린도 내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묘인족 애들이 살벌한 표정을 지은 채로 린과 가빈을 바라본다.그들은 아직 얼 어붙은 듯이 나와 휴런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아직 그들은 왕의 도전의식을 본 일이 없을 것이다.그래서 혹시 지금 이루어지 는 것은 아닐까 해서 긴장감으로 바라보고 있는 듯했다. 아까 점찍어둔 시냇가로 가면서 가빈이 물었다. "진짜 형제에요?" "그래.이 야묘족 꼬마는 어디서 주웠어?" 휴런이 나에게 물었다. 그는 손을 뻗어 가빈의 뒷덜미를 잡아 이리저리 흔들어 보면서 히죽 히죽 웃었 다.가빈은 그렇게 대롱 거리는 것이 불만인듯 캬아 하고 송곳니를 드러내었지만 휴런은 아랑곳하지 않고 흔들어 대다가 뒤에 선 푸른 린을 바라보았다. "저녀석은 또 뭐야?" "둘다 애완동물이야." 나는 짧게 대답해 주었다. 휴런은 흐응 하고 말하더니 나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이죽거렸다. "설마 아직까지 그 버릇이 남아있는 건가?" 가빈이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그 버릇이 뭐죠?" "약하고 어린 놈들을 데려와 다 클때까지 키운 뒤에 잡아 먹는것." 가빈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않았고 휴런은 히죽 히죽 웃고 있었다. 그의 팔은 여전히 내 목을 감고 있었다.왠지 어릴 때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긴 하지만 역시 휴런은 어린애는 아니다. "거짓말!" 가빈이 빼액 소리를 질렀다. "거짓말 아냐.언젠가 쿠브가 어느 정도 크면 잡아먹고 말걸." "거짓말! 거짓말! 스카는 20년동안 안잡아 먹었는걸!" 가빈이 기를 쓰고 대들었다.얼굴이 파랗게 질려서 주먹을 불끈 쥐고 떠드는 데 휴런이 아니라도 놀리고 싶어지는 얼굴이다. "흐,우리의 20년은 짧고도 짧은 세월이잖아." 어깨를 으슥하는 휴런은 히죽 웃으면서 가빈을 보며 입술을 혀로 핥았다.송곳니 가 드러나도록 웃는 그 얼굴에 가빈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제법 맛있게 생겼군!" "에엑! 나 맛없어!" 가빈이 놀라서 린의 뒤로 황급히 달려가 숨었다. "놀리지 마라." 나는 휴런의 뺨을 가볍게 물어주었다. 휴런도 내 귀를 물어뜯었다.송곳니가 제법 아프다. "쳇,나를 맨날 놀리던 게 누구였는데 그딴 소릴 해?" 녀석이 이번에는 목을 깨물었다.피가 약간 새어 나오자 할작 할작 핥았다.녀석 의 송곳니는 확실히 성년의 그것,그리고 녀석은 몸 전체로 살기를 가지고 있었 다.능숙한 전사의 살기였다. 시냇가는 별로 더럽지 않았다. 오크들은 이곳까지 오지않는 모양이었다. "사인족들은 괜찮아요? 오지 않을 까요?" "안와." 나는 짧게 말했다. "정상적인 놈들이라면 묘인족이 이렇게 바글거리는데 알고도 오진 않아." 가빈의 질문을 일축하고 나는 시냇물에 들어가서 몸을 씻었다. 도전의식이란 것을 치르기 위해 온 것일까 하고 나는 한동안 생각했다. 휴런은 나를 주시하면서 느긋하게 헤엄을 치고 있었다. 녀석이 저렇게 자라나서 나를 위협하게 될 줄은 나도 상상하지 않았었다.어쩌면 상상하고 싶지않았을 지도 모른다. 가빈이 물장구를 치다가 내 등을 밀어주면서 물었다. "저 사람은 진짜 ...이상해요!" "뭐가?" "으음..닮은 것 같긴 한데 ..쳇.." 나는 나무 둥치 아래 선 린을 바라보았다. 린의 얼굴은 긴장되어 있고 그는 어깨를 팽팽히 하고는 휴런이 공격하면 당장 나설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그렇지만 그가 앞으로 나서는 순간 린의 몸은 갈기 갈기 찢겨 공중에 흩어질 것이다.푸른 아인족은 아인족 중에서 가장 강하지만 묘인족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묘인족의 꼬마들은 나와 휴런을 조심스레 살피고 있었다. 혹여 도전의식이 치러진다면 녀석들은 그것을 보고 가서 두고 두고 자신의 경험 으로서 소중히 기억할 것이다.그리고 언젠가 자신이 그만큼 강해졌을때 왕에의 도전의식을 치르러 올 것이다. "쿠브!" 와락 휴런이 나에게 물벼락을 씌웠다. "어릴 때 하고 똑같잖아? 그지?" 킬킬 거리면서 녀석이 물장구를 쳐댔다.나는 쓴웃음 짓다 말고 몸을 흔들었다. 출렁 하고 내 몸안의 근육과 내 몸안의 힘들이 천천히 개방되었다. 가늘던 팔뚝은 굵게 변한다.내 발가락사이로 들어오는 자갈들이 늘어난다.목을 주욱 펴고 허리를 주욱 폈다.우둑 우둑 하는 소리가 전신에서 일어났다. 손을 내뻗고 주먹을 쥐자 우둑 우둑 소리와 함께 굵어진 손마디가 내 눈앞에 드 러났다. 등을 밀던 가빈이 놀라서 뒤로 나자빠졌다. 휴런의 눈이 가늘어 졌다.그리고는 굳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헤에..이제야 쿠브 답군." 나는 녀석을 빤히 보다 물었다. "너랑 나랑 사이즈를 맞추어야 할 거 아니냐?" "쳇,그럼 내가 작게 해서 작은 쿠브랑 맞추라구?" 나는 손을 뻗어서 휴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녀석은 이제 나의 눈아래 있다. 그 머리통을 쓰다듬다가 나는 꾸욱 힘을 주었다. "왁!" 휴런의 몸이 앞으로 곤두박질 쳤다.아둥 바둥 거리는 놈의 몸을 꽉 쥐고 휴런의 머리통을 물속에 처박은 상태로 나는 녀석의 허리위에 올라앉았다. 아푸 아푸 하고 휴런이 발버둥을 치는 동안 나는 키득 거리면서 녀석의 목을 잡 아 일으켰다. 푸웃 하고 물을 내뿜으면서 휴런이 벌개진 얼굴로 소리질렀다. "이럴 줄알았어! 맨날 이래!" 나는 녀석을 안고 껄껄 웃었다. 삼백년 만이다. "커...졌군.." 입을 저억 저억 벌리고 있던 튜나가 한 마디 했다.미트라는 얼굴을 가린채 나의 알몸을 회피하고 있었다.그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것을 나는 약간 심술궂게 바라보았다. 나는 몸을 말리면서 휴런이 내놓은 옷가지를 걸쳤다.휴런의 옷은 나에게 조금 작았기때문에 끼었지만 바지는 입지 않았기때문에 그런대로 괜찮았다. "사인족은 어떻게 할까요?" 오크들이 멀리서 우물 우물 하는 것이 보였다. "오지 않을거야.일단은 이곳을 떠났을 걸.우리들도 북상하지 않으면 안되겠지." 나는 몸을 길게 하고 휴런의 무릎에 머리를 베고 누웠다. "북상하면 안되겠지라고 말하면서 왜 드러눕는 거죠?" "당연하잖아." 나는 짧게 말해주었다. "낮잠 자야지." 튜나는 아무말 하지않고 조용히 들고 있던 뼈다귀를 나에게 집어 던졌다. ............... "어머니가 걱정하셨어." 형 루아스가 말했다. 형은 나보다 키가 약간 크지만 곧 내가 따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강해지고 싶다.루아스는 회색의 눈을 부드럽게 하고는 내 머리를 쓰다듬었 다. "말썽장이,얼른 가봐." 휴런과 데로스가 데굴 데굴 구르면서 풀밭에서 놀고 있다가 날 바라보고 손을 흔든다.나는 녀석들의 엉덩이를 한 번 씩 차주고는 집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어머니!" 어머니는 긴 검은 머리를 늘어뜨리고 날 쏘아보았다. "바보녀석! 대체 언제까지 밖에서 놀고 있을 거냐!" "나,왕의 시중인으로 결정났다구요!" "에?" 어머니가 놀라 날 바라보았다. "푸하하하하..나 왕의 시중인이 되었어요.어머니,다섯놈을 쓰러뜨렸지만 내가 입은 상처라곤 바로 이것 뿐." 나는 팔뚝에 입은 길게 찢어진 상처를 내 보였다. 어머니는 저런 저런 하고 고개를 젓더니 내 팔뚝을 잡아 당겨 붕대를 감기 시작 했다. "네가 기여코..." "흐흐..나,강해질 거니까.난 강해요." 어머니는 날 녹색눈으로 바라본다. 걱정스런 표정이 그 아름다운 얼굴에 배어 있었다. "이제 집을 떠나겠구나." "네.이제부터 왕의 거처로 갑니다. 나 다른 녀석들과 달리 왕은 무섭지 않아 요."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왕은 내 백부니까. 뭐 어찌되었든 무섭진 않아요." 어머니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형제들 중 네가 제일 먼저 떠나가는 구나." "응,그야 당연하지,난 제일 강하니까." ....................... 눈을 뜨고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을 본다. 햇빛에 반짝이는 초록 나뭇잎,나무가지가 잘라버린 푸른 하늘 조각이 그 자리에 있었다.언제나 같은 모양 그대로 내 기억속의 어머니와 형제들은 여전히 그대로 뇌리 속에 남아있다. 휴런이 손을 뻗어 내 콧구멍을 틀어막았다. "풋! 자식!" 내가 그 손을 탁 치자 휴런이 쳇 하고 내 귓바퀴를 잡아당겼다. "재미없어,깨어 있었잖아!" 나는 녀석의 손등을 꽉 물었다.피가 살짝 새어 나온다. "아파! 대체 뭔 짓하는 거야!" "네가 먼저 물었잖아!" "대체 성년이 된지 몇백년이나 지난 주제에 어릴 때 하던 짓 그대로 하는 거 얏!" "네가 잘 여물었나 확인하는 거다." "시꺼! 쿠브형은 언제나 이 모양이야!왕이 되면 좀 달라지나 했더니 .쳇!" 나는 녀석의 다리를 잡아 당겨 녀석을 쓰러뜨렸다.대굴 대굴 녀석과 같이 누워 있던 곳을 굴러다녔다.녀석이 날 깨물었고 나도 녀석을 깨물고 할퀴었다. "캬오!" 녀석이 내 등어리를 할퀴면서 난폭하게 날 걷어찼다. "자식이!" 나도 녀석을 잡아 당겨 귀를 물어 뜯었고 그 답례로 녀석은 내 목을 물어 뜯었 다.머리칼을 휘어 잡아 집어던지려는 순간 녀석이 내 가슴을 화악 할퀴었고 그 때문에 나는 열을 받아 녀석을 걷어차 버렸다. "켁!" 녀석이 대굴 구르면서 이를 뿌드득 갈았다. "날 찼어?" "네가 할퀸 이 자국을 봐라!" 나는 가슴을 가리켜 보였다.다섯줄기 선명한 핏자국이 보였다. 우리들이 쏘아보고 있는 동안 튜나가 한마디 했다. "잘들 하시는군.묘인족의 두 분.이거야 어디 고귀하신 묘인족이라 할 수 있나.. 이건 산고양이 드잡이질이지." KUBERIN...... THE NIGHT HAS A THOUSAND EYES AND THE DAY HAS BUT ONE; YET THE LIGHT OF THE BRIGHT WORLD DIES WITH THE DYING SUN. ..... BY 버어딜런 5 사인족들이 남긴 냄새를 맡으면서 우리들은 내달렸다. 우리들이 있는 그레이트 오크의 둥지를 비껴 나간 놈들은 곧장 북상하고 있었 다.이대로 간다면 당장에 인간들의 성 랜달브리거에 도착한다. 우리들만 뺀다면 그레이트 오크따위는 사인족의 상대가 되지않는다.사인족은 떼 거리를 지어 몰려다니는 놈들인 만큼 싸움에는 어느정도 집단성을 부여하고 있 었다.불필요한 부분은 놔두고 곧장 전진한다. 가장 이상한 것은 그런 놈들이 왜 조인족의 둥지를 공격하고서도 지체했는가 하 는 것이었다.에메스의 영지 아그랑까지 사흘이면 도착했을 텐데 녀석들은 우회 해서 다른 영지를 쳤다.왜 그랬을까. 아그랑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 엘리야에 내가 있다는 것을 알아냈기때문일까? 그럴리는 없었다. 녀석들은 어느 면에선 머리가 발달하지않았다.내가 있다는 것 따위의 정보력 따 위 녀석들에게 있을리가 없었다.사인족의 놈들은 인간들과 어울려 살거나 하지 않기때문에 정보력이 없다. 여기서 모순이 발생한다. 나의 광대하고도 무변하고도 훌륭한 견해에 따르면 녀석들은 인간들의 무구를 사용한다.그렇다면 녀석들은 인간들과 교류하고 있다는 이야기다.그런데 사인족 은 인간들과 교류하는 것은 질색한다.그런데 녀석들은 인간의 무구를 쓴다.사인 족이 대장간에 들어가 뚱땅거리며 드워프처럼 물건을 만드는 광경을 나는 상상 할 수 없다.그런데 놈들은 쓴다...그 물건 다 주워서 쓰는 것이라고 해도 이상 하지 않은가! "뭘 생각해?" 미트라가 우물거리며 나에게 물었다. 나는 미트라를 업은 채 달리고 있었다.그녀는 커진 나를 다소 기묘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휙휙 내딛는 속도때문에 그녀는 눈을 내내 감고 있었는데 곧 익숙해진 것인지 암컷다운 자포자기적인 대담함때문인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바라보고 있었다. "사인족 생각." 나는 짧게 말했다. "으음...목소리도 조금 변했어,쿠베린." "음." 나는 눈앞에 보이는 커다란 바위에 발바닥을 붙이고 도약했다. 그 순간 화락 하고 하늘이 눈앞에 다가왔다가 다시 땅이 다가온다.미트라가 웃 하고 눈을 감는 게 느껴진다. 탁 하고 착지하면서 내달리는데 뒤에서 휴런이 투덜거리는 게 느껴졌다. "불만이야! 불만!" "뭐가?" 내가 돌아보지도 않고 묻자 휴런은 달리면서 나에게 투덜거렸다. "왜 쿠브는 여자를 안고 달리고 난 야묘족 꼬마를 안고 달려야 하지?" 그의 팔에 대롱 대롱 매달린 가빈이 움추린 채 눈치를 보며 눈알을 굴리고 있었 다. "그야 간단하지!" 미트라가 소리지르며 대꾸했다. "나는 쿠베린의 아내가 될 몸이니까!" 그 말에 나는 앞으로 고꾸라질 뻔했고 휴런은 에엑 하고 이상한 소릴 냈다. "농담이겠지! 이야.쿠브형! 대단하군! 결혼이라! 결혼!" "시꺼!" 나는 침묵하면서 내달렸다. 암컷이란 무서워.무서워. "묘인족 사상 최초의 결혼이 되겠다! 인간의 여자랑 결혼하다니 과연 형다운 발 상이야.그렇지,그래.한 오십년 살다 보면 다시 또 결혼할 수 있을걸." 미트라가 홱 나를 쏘아보았다.그녀의 손톱이 내 살을 쥐어뜯었다. "뭐라고 말하는 거야!" 나는 모른 척했다. 암컷이 생각에 잠겨있고 고집을 피우고 있을 때는 침묵하라. 그건 진리다. 암컷의 생각을 감히 수컷은 알지 못한다.암컷의 생각은 상상을 초월하고 광대무 변하며 수컷의 상식으로서는 이해 불가능한 불가사의의 바다다. "하지만 나라면 저기 날고 있는 녀석,조인족의 여자를 아내로 삼겠어! 조인족이 란 근사한 미인들이 있을 것이 틀림없거든! 저봐,저 수컷놈도 근사한 미모잖아! 수컷도 저런데 암컷들은 오죽하겠어!" 휴런은 쉴새없이 입을 놀렸다. 왠지 이 놈은 어릴 때와 그다지 큰 차이가 없는 지도. 그말을 들은 미트라가 악을 썼다. "저런 놈이 쿠베린의 동생이라니! 쿠베린! 거짓말이라고 해! 저자식,,.!" 나는 모른척했다. 나는 몰라.나는 몰라.난 귀가 안들려. 엘레는 린을 안은 채 날고 있다. 린은 틀림없이 팔짱 낀 무표정한 얼굴로 날고 있을 것이고 엘레는 그런 그를 역 시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하,생각해보면 무표정한 두 녀석이 나란히 서 있는 꼴도 우습긴 하다. "이봐! 쉬어가자!" 헥헥대면서 튜나가 외쳤다. 그렇군,아무리 하프엘프라고 해도 엘프는 엘프다.체력으로 딸리는 것은 당연지 사.내가 돌아보자 헥헥 거리면서 혀를 내밀고 있는 튜나가 걸음을 멈추고 있었 다. "조..조금만 더 가면...헥헥...래,,랜달 브리거지...그지?" 그녀는 손으로 부채질을 해대면서 다리를 주욱 펴고 주저앉았다. 미트라를 바닥에 내려놓고 나는 바위위에 앉았다. 엘레가 위에서 우리들이 멈춘 상태를 보고는 천천히 하강하기 시작했다. "아아..나도 날수 있으면 좋겠다." "왜? 저 조인쪽꼬마랑 나란히 날고 공중에서 노닐게?" 휴런이 이죽거렸다. 튜나는 자악 그를 노려보면서 말했다. "당신은 쿠베린보다 더 저급하잖아?" "오오.무슨 소리,난 솔직할 뿐이야." 킥킥 하고 그가 웃는 동안 나는 바위위에 길게 누웠다. "가빈!" 가빈이 엉금 엉금 기어서 내 옆으로 다가왔고 나는 녀석의 다리를 잡아 당겨 머 리에 베고 낮잠을 청했다.휴런이 다가오더니 내 다리를 베고 드러누웠다.아무리 형제라도 그 자세는 매우 오만방자한 것이어서 뒤에 서있던 묘인족꼬마들이 숨 을 삼켰다. 왕의 주변에서 누울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약간 긴장된 공기가 흘렀지만 나는 아무말 하지않고 휴런의 머리를 잡아 당겨서 내 팔을 베도록 자세를 바꾸었다. "이봐,이봐,뭘 하는 거야?" 튜나가 땀을 닦으면서 물어보았다. "뭐긴 뭐야.자는 거지." 나는 그렇게 말하고 낮잠을 즐겼다.휴런녀석도 내 팔을 베고 잠에 들었다. ............... "도전하겠습니다.왕." 나는 그 얼굴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나의 형 루아스는 나와 비슷한 체구,나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다른 것은 회색의 눈동자 뿐. 그런 그가 나의 앞에서 전투모드로 바뀌었다. 도전의식을 치르는 그 와중에 그가 외쳤다. "나는 이긴다!" ................. "점심 드세요." 가빈이 고기냄새를 풍기면서 말했다. 나는 눈을 뜨고 끌어안은 휴런의 몸체를 가슴으로 잡아 당기면서 눈을 떴다. 휴런은 음냐 음냐를 계속하고 있다.가빈이 다리가 저리다면서 투덜거렸다. "전보다 더 저려요.아마 커졌기때문이겠죠." 나는 누군가가 잡았는지 알순 없지만 린과 가빈이 정중하게 잘라놓은 고기덩이 를 잡아 입안에 넣고 씹었다.우물거리고 먹는 동안 입안에 향기가 퍼져 기분이 좋아진다. 휴런이 꼼지락 거리면서 기어나와 고기덩이에 손을 댔다. "근데 말이죠." 가빈이 물었다. "원래 쿠베린님앞에선 아무도 못 눕는 거 아니에요?" 휴런의 몸이 살짝 굳었다. 나는 휴런의 등을 밟고 일어서면서 대꾸해주었다. "맞아." "아프잖아!" 휴런이 날 쏘아 볼 때 나는 그 녀석의 다리를 걷어차면서 린이 건네는 구워진 고기를 또 받아들었다. "이 놈은 난로야." "어,난로는 난데?" 가빈이 자길 가리켜 보이자 나는 어깨를 으슥했다. "넌 베개였잖아,지금은." 고기를 뜯던 튜나가 고개를 저으면서 미트라에게 말했다. "아아..난 다신 묘인족과 같이 있고 싶지않아." 랜달브리거에 도착하자 마자 튜나가 격하게 명령했다. "옷 사!" 으음..그렇군 이 아름다운 몸매를 이렇게 드러내는 것은 죄악이야. 나는 지금 걸친 것이라곤 짧은 튜닉밖엔 아무것도 없었다.다리는 맨다리요,당연 속옷따위 입었을리가 없다.물론 발은 맨발. 지나가던 자들이 모두 멍하니 날 바라보고 넋을 잃고 있었다. 나의 아름다움에 취해 있는 것을 나는 관대히 봐 주고는 성안으로 들어가 옷사 오라고 묘인족 애들에게 시켰다. "어딜 갈꺼야?" "아아..길드의 모임장소." 튜나가 거침없이 좁은 골목길을 헤치면서 걸었다. 랜달 브리거에 온 것은 처음이었다. 랜달브리거는 평범하고 평범한 작은 성채로 아주 조용한 지역이었다.그 덕에 아 인족을 별로 본 적이 없어서인지 린과 가빈을 보고 모두들 수군덕 거리고 있었 다.수인족 여자가 중간에 빠지지않았다면 아마 시선을 더 받았겠지. 그녀는 묘인족애들이 오고 나서 곧장 자기 종족에게로 돌아가버렸다.그녀의 종 족은 좀더 서쪽에 있는 듯했다. 대체 그렇게 가려면 뭐하러 온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나는 암컷에게 추궁하지않 는 관대함을 가진 터라 내버려 두었다.물론 튜나는 그녀에게 뭐라 말하려다 말 고 입을 다물어버렸고 미트라는 무관심했다. "야아.이제 좀 사람 사는 거 같아." 미트라는 기분 좋은 듯이 거리를 쏘다녔다. "과자사줘!" 미트라가 내 팔에 대롱 대롱 매달릴때 튜나가 짧게 말했다. "이근처 여관에서 묵고 있어.나는 가보고 올테니." "그래.저기서 머문다." 나는 제일 앞에 있는 여관을 가리켰다. 튜나는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사람들 사이로 사라져버렸다. 여관으로 들어서자 마자 주인은 나를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나의 반쯤 벌거벗은 몰골과 왠 여자애를 대롱 대롱 매달고 푸른 아인족과 꼬리 달린 야묘족의 꼬마를 매달고 나랑 비슷한 덩치의 녀석 둘을 거느린 나를 기묘 하게 바라 봤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그의 상식으로 이런 이상한 일행을 처음 보았겠지. "방." "몇..개요?" 주인은 어물쩡거리면서 뒤에 선 일행들을 보고 그 다음에는 이런 여관에는 흔히 있기 마련인 덩치들과 슬쩍 시선을 마주했다.덩치들은 근육아닌 살덩이를 꿈틀 거리면서 살집을 과시했다.그들 이외에도 우리들의 등장을 입벌리고 바라보는 자들이 여럿 있었다.하여간 여관안에 있던 모든 밥먹던 인간들 모두가 입을 저 억 벌리고 바라보고 있었다. "음...두개면 되겠지." "두개?" 그는 멍하니 우리들을 바라보았다. "이 많은 인원이 단 두개?" 주인이 말하자 나는 점잖게 말해주었다. "대신 침대는 큰 것으로." 주인은 이상한 상상을 한 것임에 틀림없었다.미트라는 내 팔뚝에 매달려있고 가 빈은 눈을 대굴 대굴 굴리고 린은 무표정하게 침묵하고 있으며 엘레는 팔짱끼고 침묵.그런 그를 히죽거리고 휴런이 바라보고 있었다. "...2인 1실인데...요." 주인이 약간 겁먹은 어투로 말했고 나는 잘라 말했다. "필요없어.두개면 돼." 베개 하나,난로하나,칼 하나,그리고 강아지 둘.여자애 둘,날 새 하나.그런데 뭐 하려 방을 몇개씩 예약한단 말인가. "어..어쨌든 이리로." 주인은 이층으로 우리들을 안내했다. 미트라가 궁금한 듯 물었다. "으음..저기,나랑 쿠베린이 같은 방 쓰는 건 설마 아니겠지?" "나,여자랑은 같은 데서 못자." 나는 잘라 말했다. 미트라가 얼굴을 붉히고 날 쏘아보며 외쳤다. "그런 말 하지마! 천박하게 ..." "뭘 상상한 거야? 상상한 쪽이 훨씬 더 천박하다." 나는 그녀를 무시하고 방으로 들어갔다.과연 침대는 제법 크다. 린이 재빨리 방안을 정리하려는 듯 사방을 돌아보면서 창문을 여는 순간 가빈이 신나서 침대에서 대굴 대굴 굴렀다. "이야! 침대다!" "먹을거 갖다 줘." 나는 짧게 말했고 주인은 나를 계속 흘긋 거리면서 밖으로 나갔다. 휴런이 팔짱 끼고 나에게 물었다. "인간세상에 아주 익숙하네.역시 인간애인이 많았던 탓인가?" "음,한 둘이 아니었으니까.아아..여자가 필요한데..쳇,,.나는 왜 주변에 남자만 바글 거리는 거냐." 내가 기지개를 펴고 있는 동안 미트라가 토라진 얼굴로 외쳤다. "이봐! 난 여자가 아니란 말야?" "너야 여자가 아닌 애잖아.내가 말하는 여자는 암컷특유의 매혹적인 선을 가진 진짜 여자란 말이다." 미트라가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날 쏘아보고는 치열한 눈초리로 말했다. "내가 한 이년만 지나면 멋진 여자가 될거라고는 생각하지않아?" 앗. 그 생각을 미처... 나는 심각하게 미트라를 아래위로 바라보았다. 과연 과연 이 애가 앞으로 한 1,2년만 지나면 멋진 여자가 될 것은 틀림없는 사 실이다.그렇다고 2년간 이 애를 데리고 다닌다는 건 너무 .... "하지만 눈앞의 여자가 더 중요하지않아? 형?" 휴런이 팔짱끼고 말했다. "2년이나 어떻게 기다려? 그런 걸 요구하는 건 무리야.인간족이란 의외로 인내 심이 깊군." "그렇군." 나는 내가 할 말을 녀석이 하자 왠지 착잡한 기분이 되었다. 이 녀석 이렇게 나와 닮아있었단 말인가. 어쩐지 못 볼 꼴을 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다... KUBERIN...... THE NIGHT HAS A THOUSAND EYES AND THE DAY HAS BUT ONE; YET THE LIGHT OF THE BRIGHT WORLD DIES WITH THE DYING SUN. ..... BY 버어딜런 6 엄청나게 쌓아놓고 음식을 한 창 먹는 중이었다. 나와 휴런,그리고 묘인족 애들 셋.이렇게 다섯이서 먹어대는 양은 인간의 상상 을 초월한다. 이미 새끼 통구이 일곱마리를 끝내고 오리 다섯 마리를 먹어치웠다. 거기에 합세한 엘레도 못지않아서 녀석도 앉은 자리에서 양구이를 하나 통째로 먹어치웠다.주인은 넋을 잃고 앉아있고 손님들은 먹던 것을 중단하고 모두 우 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맥주 하나 더!" 내가 빈잔을 흔들어 보이자 주인은 질린 얼굴로 맥주통을 하나 더 가지고 왔 다.휴런이 맥주통을 통째로 기울이면서 말했다. "여기 맥주맛이 괜찮네." "너 맥주를 마시냐?" "아아,.드워프네 가서 조금 얻어 먹었었지,인간의 맥주를 마신 건 처음인데." 휴런이 발칵 발칵 들이키는 동안 검은 머리의 꼬맹이가 생글 생글 웃으면서 나 에게 물었다. "하나..더 먹어도 되요?" "먹어." 나는 짧게 말하고 눈앞에 놓인 족발을 끝냈다. "여기 훈제 돼지 하나 더!" 검은 머리 애송이가 기세 좋게 외쳤다. 엘레가 고상한 척 입을 닦으며 말했다. "전,그만." "그만 좋아하시네,네가 먹은 거 테이블 밑에 놓지마,걸려넘어져!" 내가 말하자 엘레는 고개를 저어 보이곤 입을 다문다. 녀석이 먹어치운 것들은 모두 바닥에 쌓여있다.허연 뼈들이 한수북히 되는 것 만해도 녀석이 얼마나 먹었는지는 알수 있지만 녀석이 고상한 척 입가를 닦 은 채 고요히 앉은 것만 보면 전혀 먹지않은 것 처럼 보인다. 미트라는 빵 한 덩이 안은 채 우리들이 먹어치우는 것을 경이로 바라보고 있었 다. "진짜 많이 먹네," "아아.." 나는 주인을 향해 주문했다. "여기 돼지고기 감자스튜 한 냄비." "아아..저기..지금 고기가 떨어졌는데요." 주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벌써?" 휴런이 흠흠 하고 주인을 돌아보았다. "그럼 오리는 되냐?" "닭은 몇마리 있습니다만..." "이봐,닭은 요기가 되냐!요기가! 최소한 오리여야지.으음..입맛만 버린 거 같 아." 휴런이 잔소리를 하더니 맥주를 마저 발칵 발칵 들이켰다. 세명의 애송이들이 날 바라보며 물었다. "근데 왕,그 놈들과는 언제 만나죠?" "글쎄.엘프쪼가리 기집애가 뭔가 정보를 물고 오면 좋겠는데." "진행 방향으로 봐선 여기가 맞습니다." 엘레가 한 마디 거들었다. 가빈은 내 옆에서 맥주를 따르다가 거들었다. "그 보단 차라리 엘리야로 돌아가요,그래서 그곳으로 놈들이 오면 그때 끝장내 도 되잖아요?" 나는 멀건히 가빈을 보았다. 가빈은 눈을 동글 동글 굴리면서 되물었다. "여기서 있는 거 보단 전 마미의 침대가 좋아요.거기서 대굴 대굴 하고 싶은 데..어차피 쿠베린님도 마미랑 있는 게 좋죠?" 이 녀석이 이렇게 말을 많이 하다니,그 것도 사리에 맞게. 나는 한동안 충격에 빠졌다. "마미가 누군데? 애인이냐?" 휴런이 히죽 히죽 웃으면서 말하자 가빈이 대꾸했다. "마미는 애인이 아니고 사슴집 주인이에요.쿠베린님의 애인은 앞 골목의 마리아 아가씨이죠." 미트라가 발딱 일어섰다. 그리고는 팔다리를 부들 부들 떨며 나를 향해 소리 질렀다. "거짓말 장이! 거짓말 장이!" 나는 너무나 섬세한 청력을 가지고 있기때문에 암컷이 지르는 소리에 상처를 입 는다.머리를 쥐고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는 상을 뒤집어 엎으려고 기를 쓰고 있었다.본의는 아마 나에게 상을 뒤집어 엎으려 했던 거 같은데 상안에 쌓인 음식과 그 찌꺼기가 너무많아서 그럴 순 없고 그저 버둥거리기만 하고 있었다. "여자랑 결혼하지않는다며! 없다며!" "무슨 소리야? 난 애인 많아." 내가 대꾸하자 그녀의 손바닥이 내 앞으로 날아들어왔다.잽사게 피하자 이번에 는 육탄공세로 내 무릎위로 뛰어올라오더니 나를 발로 차고 그 다음에는 할퀴 고 무릎으로 올려차고 찍고를 연발했다. "죽어버려! 죽어버려! 이 쿠베린 따위! 이 바람둥이 자식아!" 그녀가 버둥거릴 때 나는 그녀의 발을 잡고 간신히 멈추었다. 그 허리를 잡아 채서 고정시키자 그녀가 아앙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내가 이 고생하면서 따라오는 게 무엇때문인데! 나에게 이럴 수가 있어? 여자 가 없다고 말해놓고 여자가 있었다니! 이럴 수가! 이럴 수가 있어? 날 이렇게 농락할 수가 있냐고! 죽어버려! 이 바람둥이 자식! 나를 유혹할때는 언제고 날 이렇게 만들다니! 내가 누군줄 알고 이러는 거냐! 내가 그렇게 만만한 여자로 보이냐!" 나는 귀를 막으면서 휴런을 보았다. 휴런은 어깨를 으슥했다. 암컷의 생각을 짐작할 수 없다. 과연 과연..내가 언제 이 애보고 따라오라고 했지? 내가 언제 유혹했더라? 내가 언제 여자가 없다고 말했지? 내가 이 애에게 뭘 했더라?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그래..역시 옛말 틀린 것은 없다. 옛말에 이르기를 암컷의 사고를 따라가려면 수컷은 아직 천년은 빠르다 했다.암 컷의 무한정한 그 엄청난 사고의 탄력성을 따라갈 수 있는 수컷은 이미 수컷이 아니라 했다. 이렇게 떠들고 있는 와중인데 갑자기 저벅거리는 갑옷입은 금속성의 발자국 소 리와 함께 나타난 놈들이 있었다. 바닥이 나무니까 무너질 지도 모른다 하고 내가 빤히 나타난 녀석들을 바라보 고 있는 중인데 그 중 한 명이 날 쏘아보며 물었다. "너희들은 누구냐? 어디서 왔냐?" "그건 왜?" 내가 되 묻자 눈이 일그러진 사내가 갑주를 달각거리면서 날 쏘아보았다. "우리들은 경비대다! 이곳에 나타나는 불온한 놈들이나 수상쩍은 놈들을 감시혹 은 구금할 권리가 있단 말이다!" 이렇게 유창한 말을 변방의 일개 경비대원이 하다니 하고 나는 경이에 차서 상 대의 녀석을 쏘아보았다. 녀석은 낡아빠진 갑주를 입고 옆에는 칼을 차고 서 있었다.갈색수염을 기른 사십 대의 사내다.어딘가 스카랑 비슷했다. 그 뒤로 서넛의 녀석들이 낡아빠진 갑주를 입고 따르고 있다.눈짓을 주인과 서 로 보내는 것을 보니 주인이 신고라도 했는 모양이었다. 묘인족의 꼬마들이 슬슬 일어나려는 순간 나는 손을 뻗어 제지시켰다. "이봐,수상쩍은 놈들이 아냐,이렇게 태연자약하고 잘 생긴 수상쩍은 일행을 봤 나?" 경비대 녀석이 움찔했다. 녀석의 갈색수염이 바르르 떨렸다. "어디의 누군가를 밝혀! 그 태도만으로도 충분히 괴상해! 게다가 저 아인족들은 뭐냐!" 그는 린과 가빈을 가리켰다.가빈은 자신이 지적당하자 꼬리를 살랑 살랑 저어 보였다.그런 긴장감 없는 모습에 휴런이 되물었다. "이봐,저 모습을 보고도 수상쩍어?" 경비대는 가빈의 꼬리치는 모습을 멀건히 바라보았다. "저거,.대체 뭐야?" 그가 아연해서 말할 즈음 갑자기 문이 발칵 열리면서 몇몇의 사내들이 걸어들어 왔다.그리고 그들은 곧 경비대를 밀어 제치고 내 앞에 섰다. 가빈이 앗 하고 소리를 질렀고 내 무릎에 있던 미트라도 앗 했다. "당신들 뭐요?" 경비대가 나타난 사내들을 쏘아 보며 말하자 기사의 문장이 선명한 고급갑옷을 입고 있는 녀석이 가슴을 좌악 펴고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번쩍 거리는 갑주와 근사한 장검,그리고 그것을 입은 녀석은 눈부시게 빛나는 금발을 늘어뜨리고 말 그대로 꿈속의 미끈한 왕자님 같은 포즈를 취하고 있었 다. "쿠베린은 어디있는 거야?" 주욱 사방을 돌아보며 녀석이 말했고 녀석이 그렇게 말하는 순간 나는 녀석의 정강이를 걷어차며 말해주었다. "여기 있잖아.기생오라비녀석!" "...그게 본래 모습이야?" 기생오라비 녀석은 아연한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그 뒤에 선 덥수룩이도 마찬가지였다.그들은 넋을 잃고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나의 우아한 자태와 위엄있는 모습에 모두 경악한 듯 했다. "그래.뭔 볼일 이지?" "...너야 말로 여기 왜 와 있는 거야? 푸른 아인족을 발견했다는 이야길 듣고 너라고 우린 판단했었지만.." "나는 이런 저런 일이 있어 왔어." 내 발밑에 공손히 앉은 세 명의 묘인족 애들은 살기로 번쩍 거리는 눈으로 그들 을 바라보고 있는 중이었다.아직 튜나는 오지 않았고 엘레는 팔짱을 끼고 창가 에 기대 서 있었다. 린과 가빈역시 마찬가지 자세,휴런은 흥미진진한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아 바라 보고 있었다. 미트라는 우물 우물 하면서 의자에 앉아 흘긋 거리고 이들을 바라보고 있다. "엘란트라 왕녀님이시지요? 저희들,머리를 잘라버리셔서 ..못알아 봤습니다." 오스카가 특유의 그 느끼한 어조로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인사하자 덥수룩이도 어울리지않게 진지한 얼굴로 미트라에게 인사했다. "저 무례한 쿠베린이 왕녀님께 무슨 무례라도 하지않았는가 모르겠군요." 걱정스레 오스카가 말하자 미트라는 갑자기 왁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 울음 소리에 짜증이 난 나는 손을 휘휘 저어보였다. "자자.저 말괄량이는 제발 좀 데려가달라고.이봐,기생오라비,너의 특기를 되살 려 저 기집애를 어떻게든 꼬셔줘." 순간,기생오라비,미트라,덥수룩이,가빈,심지어는 엘레의 눈까지 도끼날이 되어 날 쏘아보았다. "너무 심해요! 쿠베린님~!" 가빈이 발딱 일어서서 외쳤다. "어..어떻게 그런 심한 말을 할수 있지!" 기생오라비가 입술까지 바들 바들 떨어가면서 외쳤다. "결투를 신청하겠다!" 그 순간 갑자기 가빈이 기생오라비앞에 타악 마주서면서 잠깐 하고 외쳤다. 기생오라비도 그렇고 나도 가빈이 나설 줄은 몰랐기때문에 벙벙해졌다. "기생오라비,돌았어요? 쿠베린님과 결투하다니! 당신은 머리가 어찌되었어요?" 가빈이 필사적으로 외쳤다. "뭐야!" "쿠베린님이 진짜로 한대만 쳐도 당신 목은 홰액 날라가 버린다구요! 그럼 공작 가와는 말 그대로 원수 사이가 될 텐데 그래도 좋아요?" 가빈이 필사적으로 주먹을 쥐고 물었다. 그 압도적인 박력에 놀란 기생오라비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진땀을 흘려가면서 가빈이 외쳤다. "그리고 공작가와 완전히 원수 사이가 되면 공작도 지켜주지않을 거고 그 예쁜 엘프의 부탁도 들어주지 않을 거고..또 흥분해서 공작이 당신의 복수를 하겠다 고 달려들게 되면 ..또...또...공작의 목이 날아가고.,그렇게 되면 엘프아가씨는 과부가 되고,,.그러니까..음,." 머리가 안따라가는 녀석이 이 정도 말했으면 최고로 잘한 거다. "헤에,헤에,됐다.고만해라." 내가 손을 내젓자 기생오라비는 어리 벙벙한 얼굴로 가빈을 바라보고 있다가 고 개를 갸웃했다. "뭔지 굉장히 복잡한 이야기 같군..." 옆에서 휴런이 고개를 갸웃했다. 미트라가 중얼거렸다. "으음...그런가..." "하,하여간 공주님,그만 성으로 돌아가십시오.지금 공작께선 이 옆의 요새 헨 디에머그에 계시니까요.그리로 가서 일단 ..." "안갈래." 미트라의 말에 기생오라비가 눈을 크게 떴다. "공주님!" "...쿠베린옆에 있을거야." "네? 그,그런,,!" 미트라는 입을 주욱 내밀고 살벌한 시선을 내게 던졌다. "날 떼어 놓으려 하지만 절대 안될걸,나는 높은 성의 공주님이 아니란 말야!" 그녀는 주먹을 들어보이면서 말했다. "푼수처럼 꺄꺄 소리내면서 지켜 주세요를 연발하는 그런 공주님이 아니라고!" 다들 멍청히 있는 상태에서 휴런이 재미있다는 듯이 물었다. "그럼 뭔데?" "마음에 드는 남자는 쟁취하는 거야! 그게 바로 멋진 여자라구!" 그녀가 주먹을 불끈 쥐며 외쳤다. 헤이,헤이..그런 매력적인 발언을 하면 곤란하잖아. KUBERIN...... THE NIGHT HAS A THOUSAND EYES AND THE DAY HAS BUT ONE; YET THE LIGHT OF THE BRIGHT WORLD DIES WITH THE DYING SUN. ..... BY 버어딜런 7 "끼아아아아악" "으아아아..." 모든 것은 비명소리와 함께 시작되었다. 나는 문을 열고 이층의 여관에서 비명소리가 들린 방향을 바라보았다. 랜달브리거요새는 나무로 방책을 두른 허술한 것만은 아닌 제법 그럴 듯한 모습 을 하고 있었다.그리고 그 주변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요새 안쪽으로 만들어진 시가지는 엘리야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작았지만 사람들의 숫자 는 적지않았다. 이유는 간단히 말해,바로 저 구국의 영웅이시자 대대로 이 델리암 왕국을 지켜 오신 수호신이며 황제의 기둥이고 저 화이딘스 대공의 빌어먹을 정적인 동시에 나의 버릇없는 애완동물이기도 한 녀석이 잘난 척하고 군대를 몰고 왔기 때문이 었다.그들은 모두 성채 바깥과 안으로 골고루 나뉘어 주둔하고 있었는데 지금 비명소리가 들리는 것은 바로 그 밖이다. 맨처음 인간들이 이 랜달브리거를 만들게 된 이유는 바로 산적들이 난리를 치고 오크들이 떼지어 습격을 하고 시시때때로 야적떼도 지나가던 길목이기에 그 연 약하고도 애처러운 목숨을 이어보고자 농민들이 모여든 것이 시초가 되었다고 한다.말을 길게 하면 길지만 어찌되었든 이 손바닥만한 빈한한 도시가 생기게 된 이유는 그랬다. 그렇다면 다시 말해 이근처는 산적이나 오크나 야적이나 기타 등등이 바글 바글 거리는 지역이고 왠만한 농민들도 곡괭이 하나쯤은 휘두를 줄 알아야 할 터인데 이들 일반 농민이라 불리우는 비굴한 인간의 족속들은 떼지어 우왕좌왕 하고만 있었다.하지만 그게 어디 농민이라 불리는 족속들 뿐이랴. 원래 인간이란 자기 코앞에 죽음이 닥쳐와 혀를 낼름 거리며 당장 삼키겠다고 난리를 치기 전에는 남의 죽음은 모른척하는 것이 다반사,겁장이와 용감한 자의 경계는 어딜까. "드디어 시작된 거야!" 갑자기 문을 발칵 열고 들어선 튜나가 외쳤다. 그녀는 허리에 화살통을 주렁 주렁 매고 성큼 성큼 걸어와 창문가에 서서 내게 손짓했다. "저기 주둔한 군대가 바로 베델공작의 정예부대라고 하더군,그의 부대이외에도 오마르후작의 군대도 와 있어." 그녀는 흘긋 긴장한 채 칼을 쥐고 있는 기생오라비와 덥수룩이를 보았다. "이들은?" "베델공작 휘하의 오스카 저지워드요.그대는?" 기생오라비가 한 걸음 나서며 진지하게 말했다. 그녀는 흐응 하고 그를 아래위로 보다 말고 문가에 선 음침해 보이는 사내들 몇 에게 손짓해보였다. "들어와라!" 사내들 세명은 모두 삼십대에서 사십대정도로 음침하다는 것 이외에는 특징을 찾을 수 없는 그런 모습의 사내들이었다.그들은 나를 보고 특히 기생오라비와 덥수룩이가 자신들을 미심쩍게 바라보는 것을 보며 음침하고 또한 음침한 미소 를 흘리고 있었다. "뭐냐?" 내가 그녀를 보자 그녀는 손짓했다. "베델공작과 이곳 랜달브리거의 시장이 같이 있어.그들은 지금 성채의 가장 높 은 거처에 있다고 해.그들의 병력은 약 이천 가량 되는 것 같아." 그녀는 놀라는 얼굴의 기생오라비를 흘긋 보았다. "그 이천의 병력이 지금 반은 밖에서 이미 시작하고 있고 나머지 반은 안에 들 어와 있어.그렇지만 이천이라고 해도 보급대까지 포함한다면 실전투인원은 약 천여명정도밖에 안될걸." "꼬맹이 녀석의 병력은 얼마나 돼?" 내가 묻자 기생오라비는 튜나를 의심스런 표정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당신은 대체.." 나는 녀석에게 긴 말하지않고 튜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지금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야해.우리들은 뭐니 뭐니 해도 수배상태이니까 직 접 나설 수는 없지.그래서 말인데 당신이 경비대를 좀 꾸욱 눌러주었으면 해 서." "이봐!" 기생오라비가 급히 앞으로 나서서 외쳤다. "당신의 정체를 .." 그때 재빨리 가빈이 대신 말해주었다. "도둑길드마스터인 튜나에요." "도...도..둑!" 기생오라비가 기가 막혀 입을 저억 벌렸다.그는 옆에선 사내들을 돌아보며 외쳤 다. "그럼 이들이 다 도둑이란 말이야?" "이런 자들이 내부에 있어선 싸움할 수 없다!" 덥수룩이가 외치며 칼을 빼들려는 찰나에 미트라가 꽤액 소리를 질렀다. "그만해!" "와..왕녀님?" "바보들! 지금 그게 문제가 아냐! 튜나는 이 사태를 막기위해서 모였단 말이야! 그들은 용병과 연합해서 이 살벌한 ...살벌한...전투에 참가하려고 오랫동안 여 행했어!" 그녀는 짜랑짜랑하게 말하면서 그들을 쏘아보았고 그녀의 말에 기생오라비와 덥 수룩이는 흠칫하고 칼자루 쥔 자세에서 멈추었다. "이봐,린,가빈.너희들은 미트라를 데리고 꼬맹이에게 가있어라." "에?" 가빈이 눈을 크게 떴다. "기생오라비,너는 미트라를 데리고 꼬맹이에게 가서 보호해라!" 기생오라비가 눈을 크게 떴다. 나는 창가를 바라보면서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다.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살육의 냄새가 바햐흐로 시작된다. 옆에 서 있던 휴런과 세 꼬마들의 시선이 핏빛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가서 싸울거야?" 미트라가 급히 외쳐 물으며 내 팔뚝을 잡았다. 나는 그녀를 돌아보지않고 감각을 집중했다. 온다.온다.온다..한둘이 아니었다. 그러나 감각도 모두 제각각,사인족 치고는 느리다.그렇지만 녀석들은 착실히 오 고 있었다.인간의 속도는 아니지만 사인족치고는 느렸다. "왕녀님.." 기생오라비가 미트라의 옆에 와 그녀를 재촉했다. "모처럼 지금 쿠베린이 옳은 소릴 했습니다.어서 가시죠.저희 기사단이 보호하 겠습니다." 미트라는 우물 하다가 내 팔을 놓았다. 여기서 왠 비극의 히로인 처럼 징징 짜면서 나는 그대 곁에 머물께요 운운하면 팍 한대 후려칠 마음으로 그녀의 우물거림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녀는 나와 시 선이 마주치자 갑자기 입술을 깨물더니 말했다. "여기 있음 방해되지? 나 악착같이 도망가고 살아날 테니 걱정마." 그녀의 말에 기생오라비들이 아연해 졌다. 인간의 공주가 할 말은 비록 아니지만 어찌되었든 내 마음에 드는 대답이었다. 나는 미소하고 그녀의 콧등에 키스해 주었다. "가빈,린!" 가빈과 린이 약간 주저하다가 나와 시선을 마주하고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그 들은 미트라가 앞서 걷는 것을 뒤이어 따라 나섰고 기생오라비는 그들의 앞으로 나서 날 일별하다가 문을 열었다.그는 약간 우물 하다가 밖에서 일어나는 소란 이 커지기 시작하자 급히 발걸음을 옮겨 달리기 시작했다. "어서!" "야! 덥수룩이." 갑자기 생각난 게 있었다. "뭔데?" 덥수룩이가 가다 말고 날 돌아보았다. "너,수비대인지 경비대 인지 하는 곳으로 우릴 안내해." 방책 높은 곳에서 바라보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금방 알수 있다. 사방에 밝혀놓은 불들이 하나둘씩 꺼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대개 주둔하는 군대는 사방에 불을 밝혀서 약간은 배짱을 부리거나 혹은 경계태 세를 갖추기 마련이다.게다가 지금 이들은 요새안에 자신들의 사령관이 있는 터 이고 이 도시같지도 않은 쪼만한 곳을 지키러 온 놈들이다.그때문에 모두들 사 방에 불을 피우고 경계하고 있었을 터였다. 그러나 무언가가 어둠 속에서 덮쳐 들어왔다. 그리고 그것들이 공격해 들어 오자 마자 사방을 밝히고 있었던 불꽃들이 하나 둘 씩 꺼지기 시작하고 있었다.어둠이 사방을 덮으며 들리는 것은 오로지 비명 소리뿐이었다. 공격받는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분명히 공포였다. "아아.." "저럴수가.." "전멸한 걸까?" 띵하고 멍한 경비대 놈들이 방책 위에서 망보면서,몇몇은 활에 화살을 먹인 채 로 그렇게 긴장과 공포로 바들 바들 떨고 있었다. "성문을 닫아라!" "성문을 닫아!" 여기저기서 고함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우리들이 간 곳은 경비대 대장이 서 있는 위치였다. 어느새인지 에메스녀석이 올라와 있었다.녀석은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덥수룩이 를 보면서 가볍게 눈쌀을 찌푸렸다. "어떻게 된 거냐?" "아,네,쿠베린을 찾았습니다." 덥수룩이가 나를 가리켰고 에메스는 눈을 크게 부릅떴다.그는 한동안 혼란에 빠 져서 나를 멍청히 보다 말고 되물었다. "너..쿠베린 맞아?" "멍청아,까불지 말고 전면을 봐라." 나는 그렇게 잘라 말해주었다. "앞을 볼 수가 없군." 막 에메스가 발작하려는 순간 방책에 처억 하니 발 하나 올려놓은 튜나가 앞을 쏘아보며 말했다.에메스가 희안한 표정을 지으면서 외쳐물었다. "저 여자앤 뭐야! 이봐! 로크! 너,지금 누굴 데려온 거냐!" 덥수룩이가 우물 우물 하고 있을때 튜나가 날카롭게 말했다. "지금 앞으로 새까맣게 몰려오는데 공격하지 않을 셈이야?" "뭐라구?" 아무것도 보이지않는 어둠을 바라보며 에메스가 되묻자 반쪼가리 엘프계집애는 어깨를 들썩하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이봐.쿠베린.이제 슬슬 나의 본 모습을 보여주지." "호오.보여봐라." 내가 흥미진진해서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는 갑자기 단궁에 화살 하나를 빼어 재 었다.그리고는 에메스를 비롯한 병사들이 일제히 바라보는 가운데 큰 소리로 외 쳤다. "나의 친구,모든 더러운 것을 정화하는 불의 마력이여,깨끗함을 숭상하는 천연 의 마력이여,이제 내 화살에 내리어 그대의 힘을 보여라!" 그녀의 활이 팽팽하게 만월을 그렸다. 그리고 순간 화살은 퍼엉 하고 불꽃으로 휘감겨 올랐고 동시에 발사되었다. 그녀의 화살은 아래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그 화살은 공중으로 치솟았고 여자의 힘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멀리 날아갔다. 그리고 작은 불꽃으로 시작된 그 화살의 불빛은 점차 강렬해서 점점 커다란 광 원이 되더니 곧이어는 튜나의 외침에 따라 작은 태양처럼 밝아졌다. 모두 경악으로 입을 저억 벌리고 있는 동안 곧이어 튜나의 단궁이 살 없이 휘어 져 활시위 소리를 패앵 하고 냈다. "자아.나의 친구,바람의 정이여,공기의 용사여,이제 와서 내 빛을 쪼이라! 내 빛을 사방으로 퍼뜨려라!" 그녀의 자그마한 전신에서 쏴아아아아 하고 파공성이 들리는 순간 주변에 있던 모두는 일제히 뒤로 물러섰다.보이지않는 무언가가 그녀의 몸을 한바퀴 돌고 그 리고는 그녀의 활시위에 담기어 공중으로 쏘아졌다. 그리고 그 바람은 화살이 만들어낸 광원으로 날아들어갔고 동시에 그 작은 광원 들은 산산이 쪼개었다.퍼억 하고 거짓말처럼 하늘에 불빛이 퍼져나갔다. 작은 횃불들이 허공에 떠서 별빛처럼 반짝이는 장관을 이루는 가운데 어두워서 아무 것도 보이지않았던 아래의 모습이 드디어 드러났다. "아앗!" "뭐냐!" 경비들과 에메스들이 신음을 터뜨릴 때 어떤 것이 연속해서 공중으로 치솟아 오 르고 있다.그것은 요란하게 빛나고 있는 하늘의 불꽃에 어리어 선명하게 그 정 체를 드러냈다.둥근 인간의 목이 검은 액체를 공중에 반윈을 그리며 치솟아 올 르고 있었다.선명하게 드러난 그 불꽃으로 눈이 좋은 나와 녀석들,그리고 엘프 의 계집애는 그 표정마저 볼 수 있었다. 공포에 가득찬 얼굴,고통 따위는 찾아 볼 수 없는 경이의 표정들이 그 얼굴에 아로새겨진 채 연속해서 허공으로 치솟고 있었다. "우아아악" 비명소리와 더불어 병사들이,기사들이,인간들이 쓰러지고 있었다. 시체의 바다,시체의 더미를 이루고 있는 가운데 아직까지도 계속해서 싸우는 자 들이 있었다.그들은 애써서 싸우고 있었지만 상대가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상대는 모두 갑주를 입은 약 사십여명에서 오십여명으로 보이는 자들이었다.소 수의 그들은 날듯이 튀어 움직이고 있었고 다수의 인간들은 바닥에서 기듯이 꿈 틀거리는 것 처럼 보였다.그들의 손이 움직일때 마다 어김없이 검붉은 액체를 뿌리며 인간들이 쓰러지고 있었다. 이미 죽어넘어진 자들의 수는 어림잡아도 약 이백여명..살아서 도망친 자들을 빼더라도 참혹한 죽음이었다. "어,어떻게 저렇게 된 거지?" "마..맙소사.." 에메스가 외쳤다. "화,화살을 쏘아 그들을 지원하라!" 여기저기서 경비대들이 화살을 쏘기 시작했다. 그러나 화살은 그 오십여명에게는 닿지도 않았고 닿는다 할 지라도 무력할 것이 었다. 으음 하고 튜나가 다시 화살을 재고 나를 흘긋 보았다. "사인족,맞지?" "맞아." 나는 팔짱을 낀채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개를 끄덕인 튜나가 화살을 날리자 쐐애애액 하는 공기를 찢는 소리와 함께 어떤 기사를 공격하던 녀석의 목에 들어가 박혔다.퍼억 하고 살찢는 소리까지 나는 들을 수 있었다.그 녀석이 나뒹굴자 목숨을 구함 받은 기사는 고개를 돌리 고 이쪽 요새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공포에 질린 표정 그대로 이쪽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 만이 아니었다. 피로 범벅이 된 병사들이 일제히 이쪽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아까는 빛이 없었 기에 이쪽으로 올 여력이 없었던 지도 모른다.하지만 지금은 사방이 낮처럼 환 했다.그들은 필사적으로 넘어지고 쓰러지면서 이리로 달려오고 있었다. "저들을 엄호해라!" 에메스가 방책의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가면서 외쳤다.그가 막 고함을 치면서 칼을 뽑아들려는 순간 나는 그녀석의 허리띠를 홱 잡아 당겨 녀석을 쓰러뜨렸 다. "앗! 뭐냐!" 에메스가 막 나에게 항의하려는 순간 쐐애애액 하고 공기를 찢으면서 날아들어 온 것이 있었다.나는 오른 손을 내밀어 그것을 잡아 챘다.멍청한 에메스가 그대 로 서 있었다면 여지없이 관통되었을 것이었다. 푸르르 하고 잡힌 놈의 꼬리가 내 손안에서 떨고 있었다. 에메스는 창백한 시선으로 그것을 멍청히 바라보았다. 철시였다. 튜나의 눈이 가늘어지고 엘레의 눈이 살기를 띄었다. 엘레로선 자신의 동족마을을 학살한 증거인 이 철시를 그대로 좌시 할 수 없었 을 것이다. "꼬맹아." 에메스에게 내가 이죽거리면서 말을 걸었다. 에메스는 이제 자신보다 덩치가 더 큰 나를 보고 뭐라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나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해봐라." "뭐!" "이대로 가면 여긴 몰살이야.나에게 부탁해 봐라." "쿠베린!" "부탁해봐." 내가 히죽 웃자 에메스는 나를 내버려두고 급히 아래를 내려다 보려 했다.그러 나 그 뒤를 이어 날아든 철시때문에 그는 다시 아래로 몸을 숙여야 했다.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나무로 만들어진 방책을 뚫고 사수용으로 만들어진 작은 구멍 으로 여지없이 철시가 날아들었다. "크억!" "욱!" 사수들이 철시에 꿰뚫려서 나뒹굴었다. 나무로 만든 방책은 안전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그 나무로 만든 방책을 꿰뚫는 괴력을 보며 튜나가 혀를 내둘렀다. "과연! 인간이 아냐!" "공격합시다!" 엘레가 날개를 펼치며 외쳤고 나는 흘긋 에메스를 보았다. 에메스는 나를 쏘아본 채로 단호하게 외쳤다. "도와줘!" 푸른 눈. 제 아비와 똑같은 푸른 눈. 지금 이 상태로 절박하게 외치는 목소리도,그 눈매도 똑같아 나에게 순간 시간 의 흐름을 잊게 만들었다. 헤에 헤에 이래서 인간이 때로는 좋다니까. 그 인간이 다른 인간을 낳고 그 다른 인간은 또다른 인간을 낳는다.그래도 어딘 가 몇십년,몇백년을 이어 내려와도 그 인간은 전대,전전대의 어딘가를 닮아 후 대에 전한다.그것이 치졸하고 연약할 지라도 그 피는 이어지는 것이다. 푸아앗 하고 갑작스레 그 방책을 디디고 무언가가 밑에서 부터 올라왔다.검은 그림자는 통째로 이쪽을 향해 덤벼들었고 사람들이 비명을 올리는 가운데 나는 손톱을 뻗었다. 퍼억 하고 녀석의 목이 뎅강 허공으로 치솟았다. 에메스가 털썩 하고 떨어진 시체를 멍청히 바라보는 동안 나는 내 뒤에서 흥분 과 살기로 몸을 덜덜 떨고 있는 내 동족들을 바라보았다. "이봐,이제 드디어 파티시간이다!" KUBERIN...... THE NIGHT HAS A THOUSAND EYES AND THE DAY HAS BUT ONE; YET THE LIGHT OF THE BRIGHT WORLD DIES WITH THE DYING SUN. ..... BY 버어딜런 8 녀석들은 날듯이 뛰어 오르고 있었다. 처음 날아온 것은 철시,철시가 그들이 날아 오르기 직전 먼저 날아들어와 자신 들의 앞을막을 자들을 쓰러뜨리고 나면 그 뒤는 몸과 몸이 부딪치는 싸움인 것 이다.녀석들 모두가 얄팍한 철판으로 이루어진 갑주를 입고 있었다.그정도의 무 게로도 녀석들을 지상에 붙잡을 수가 없다.사인족은 우리들 보다 가죽이 얇다. 그래서 저렇게 갑주를 선호하는 지도 모르지. 나는 긴 생각을 집어 치웠다. "쿠오오오오오.." "꺄오오오오." 어린애들이 흥분하고 있었다. 어린애들은 일제히 앞으로 도약했다. 그들은 닥쳐드는 그 녀석들이 날아오르자 마자 손톱을 들어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들의 몸이 부풀어 올라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전투모드로 돌아간 놈들은 이제 살맛 났다는 듯이 날뛰기 시작하고 있었다. 엘레는 어느샌지 사라지고 없었다.그는 날개를 짧게 편 채로 공중에 솟아 올라 날카로운 육식조가 먹이를 채듯이 공격을 거듭하고 있다. 나는 아직 전투모드로 들어가지않은 채 에메스의 옆에 서서 주변을 돌아보고 있 었다. 경비병들이 죽어넘어지고 혹은 겁에 질려 구석에 쳐박히고 있는 가운데 그들 말 고 다른 자들이 외치는 비명소리가 들리자 에메스는 급히 몸을 돌려 안으로 뛰 어들어갔다.그의 뒤를 급히 방패로 막으며 덥수룩이가 따랐다. "안쪽으로! 쿠베린! 이 놈들이 벌써 마을로 들어왔다!" 에메스가 찢어져라 고함을 지르면서 달려나갔다. 그들이 내 시야에서 사라진 뒤로도 나는 여전히 방책 위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지금 아래 보이는 자들은 아무도 없다.있는 것은 시체 뿐이었다.이 미 사인족 놈들은 튀어 올라와 이 요새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제 살육은 피할 수 없다. 나는 고개를 돌려 살기를 자제한 채로 내 발밑에 쓰러져 있는 녀석의 시체를 발 길로 슬슬 걷어 차 뒤집었다.목이 없었기때문에 잘알 수 없었지만 갑주를 손톱 으로 벗겨내자 짧은 털로 감싸여진 몸이 나타났다.그러나 이 놈은 전투 모드로 전환한 것도 아닌 일반적인 몸이었다.그렇지만 전투모드가 아닌 것 치고는 너무 털이 많다. 나는 손을 들어 녀석의 갑주를 다 벗겨내고 주시했다. 이제 슬슬 의문이 풀리기 시작했다. 방책 안쪽에서 들리는 비명소리는 아녀자들의 비명 소리였다. 놈들은 시가지 안의 민가를 덮치기 시작한 것이다. 희미한 불빛아래 비명을 올리며 사인족의 손톱아래 죽임을 당하는 인간들의 모 습이 곳곳에서 드러나 있었다. 어둠이란 무서운 것,인간들에게 있어 최고의 공포인 그것은 여기서도 예외는 아 니었다.누가 공격하는 지 잘은 모르면서도 인간들은 공격받고 죽어가고 있었다. 방책 밖에서 병사들이 죽은 것처럼 방책 안에서도 인간들은 죽어가고 있다. 어느 여자가 사인족의 손톱에 얼굴이 찢기어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지고 있었 다.그녀의 옆에서 소리치는 사내가 뒤이어 등줄기를 찢기우고 목을 찢기워 검은 피를 흘리며 쓰러진다.어린애가 울고 도망가고 얼어붙다가 얻어 맞은 채 살덩이 가 되어 널부러진다.고함지르고 달려드는 창을 든 사내가 뒤이어서 날아오른 사 인족의 살기어린 미소 아래서 배를 찢기워 내장을 떨구고 있다. 그리고 그 사인족의 뒤로 희미한 미소를 짓고 흥분한 나머지 온 몸을 떨고 있는 검은 머리의 꼬마가 다가가 그 목을 자른다. 사인족은 그의 돌연한 등장에 놀라 앞으로 고꾸라지며 그 손을 피하려 하지만 날아오르는 몸은 그 녀석보다 훨씬 빠르고 후려치는 힘은 훨씬 강하다.열개의 손톱이 솟아나오는 묘인족의 꼬마는 길길이 날뛰며 눈앞에 쓰러진 사인족의 시 체를 갈가리 찢어 발기면서 다른 놈은 없는가 눈을 부릅뜨고 있다.이미 전투 모 드로 전환한 그 붉은 눈에는 살기로 충만해서 번쩍번쩍 빛난다.붉게 피로 물든 입술사이로 송곳니가 하얗게 드러난다. 아마도 다른 사인족을 발견한 듯 그의 몸이 공중을 격해 맞은 편의 벽돌담을 밟고 도약했다. 그리고 녀석은 달빛도 없는 어둠속에서 송곳니를 드러낸 채 또하나의 희생자를 향해 차갑게 웃는다. 막 어떤 인간의 심장을 꿰뚫은 사인족이 그의 살의를 느끼고 몸을 굳히고는 손 톱을 들어 꼬맹이를 바라본다.꼬맹이는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리고 쾌감에 젖어 서 달려들었다.그리고 난자한 살갗과 살덩이는 그의 입안에,그리고 그의 몸안으 로 들어가 그의 기쁨이되고 살이 된다. 사인족이 인간들을 몇이나 학살하든 꼬맹이에겐 당연 관심이 없다.그의 몸안에 담긴 강한 놈을 찾는 알수 없는 인력이 스스로 인간보다는 훨씬 강한 사인족을 찾아 헤메이는 것이다. 그래...어느샌가 꽤 굶주려 있었군... 나도 어느새 웃음을 짓고 있었다. 몸이 지끈 지끈 쑤셔댔지만 이 몸께서 친히 나설 정도로 강하지도 못하고 애송 이들의 즐거움을 빼앗는 것도 어른 된 도리는 아니기에 참고 있었다. 이 훌륭하신 쿠베린님께서 나서려면 어느정도의 상대여야 하거늘... 고래 고래 고함을 지르고 있는 튜나의 주변은 형형색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녀는 방책의 가장 높은 전망대에 올라가 있었다.그리고 그녀의 부하들인 듯한 녀석들도 놀랍게도 그 곳에 꼬물거리며 달라붙어 있었다.그녀의 사방에 선 그 음침한 놈들은 각기 마력석 내지는 증폭석으로 보이는 돌덩이 하나씩을 들고 그 녀의 주변에 서 있었고 튜나는 그 마법석을 든 세명의 사내들 한 가운데 서서 화살을 날리고 있었다. 가장 높은 곳에 서서 가장 멀리 보며 가장 강력한 살상무기를 가지고 그녀는 가 장 많이 죽이고 있다고 할 수 있었다.엘프치고 이런 녀석은 나도 첨 봤다.단궁 을 날리며 정령을 부리면서 살육하는 엘프라..허긴 색마 엘프에 울보 엘프에 천 하장사 엘프까지 있는데 뭐는 없겠는가.나도 워낙 관대하신 분이니 저 쪼가리 계집애가 다소 엘프 답지않다고 해도 충분히 인정해 줄 수 있다. 무엇보다 일반 엘프보다 훨씬 도움이 되지않는가. 쪼가리 엘프 계집애가 화살을 날리며 열심히 사인족을 죽이려고 노력하고는 있 었지만 이미 사방으로 흩어진 놈들을 끌어 모은다는 것은 불가능한 이야기인지 라 그녀의 화살에 맞을 놈들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찾아라! 제길! 젠장! 우라질!" 목표를 놓친 그녀가 욕설을 퍼부우면서 발을 굴렀다. 그녀가 바람의 정인지 공기의 정인지 혹은 그외의 것인지 알수 없는 것들을 사 방에 풀어놓는 동안 나는 팔짱을 끼고 방책 아래,그리고 그 너머를 바라보았다. 웃..나도 제길이다.... "쿠베린! 뭘 하는 거야!" 튜나가 땀을 닦으면서 창백한 얼굴을 한 주제에 나를 쏘아보며 외쳤다. "놈들이 시가지를 덮치고 있다구! 얼른 그 놈들을 해결해야 하잖아!" "지금 애들이 이미 가 있어." 나는 짧게 대꾸하고는 엘프계집애에게 방책 너머를 가리켜 보였다. "저기에 있는 것이 보이냐?" 튜나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내가 가리키는 방향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얼굴이 창백해 졌다. "세상에 맙소사!" 나와 눈 좋은 엘프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건너편 평원을 메운 검은 무리들이었 다.그들은 각기 병장기를 갖추고 전열을 가다듬고 있었다.앞선 자들은 랜스인듯 한 것을 앞세운 기마대 그리고 그 뒤는 창병이었다.창병들이 보여주는 음산한 금속성의 빛깔이 튜나가 피워 올린 다 꺼져가는 어스름한 불꽃에 비추어 붉게 보였다. "저건..저건?" "인간들이다." "믿을 수 없어! 정말..사인족이 인간들과 같이 움직인다는 게 말이되는 거야!" 튜나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괜히 나에게 항의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면서 내가 목을 잘라버린 녀석의 몸체를 발끝으로 툭툭 건드려 보였다. "뭘로 보여?" "사인족 아냐?" "사인족이 아니다.이놈은 순수한 사인족이 아냐." "뭐라구?" "진짜 사인족은 전투모드일때는 이 보다 크고 평시에는 이보다 작아." "그럼 이건 대체 뭐야? 이게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 거야?" "이건 인간과 사인족의 혼혈이야." "마,말도 안돼!" 튜나가 외칠때 나는 심각한 기분이 되어 평원을 노려보았다. 일은 생각보다 훨씬 더 심각했다. "에메스를 데려와." 내가 튜나에게 말하자 튜나는 얼굴을 찌푸리더니 갑자기 손을 둥글 둥글하게 흔 들고는 자그마한 몸체의 기괴한 물건하나를 만들어냈다.그 동그란 물건이 고개 를 들고 튜나를 빤히 보며 아는 척을 하자 그녀는 뭐라 뭐라 떠들어대며 그것을 날려보냈다.녀석은 비틀 비틀 하면서도 곧장 어둠 속으로 날아갔다. "그거 편리하군." 내가 흥미진진하게 바라보자 그녀는 눈을 흘기면서 어깨를 늘어뜨렸다. "사인족 수십이 아니라 인간 수백..천을 상대하는 건가? 골치아프군." "골치 아플 이유는 없어.오히려 인간을 상대하는 게 쉬워." "어째서?" "겁을 주면 놈들은 동요하니까." "에?" 튜나가 고개를 갸웃 하는 순간 나는 엘레의 모습을 찾았다. 엘레는 내 시야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지 보이지않고 있었고 이미 성안을 쑥밭으 로 만들고 있는 녀석들 사이에서 뛰고 있었다.녀석도 아마 사인족을 찾아 죽이 느라 눈이 벌개 아무것도 보고 있지않을 것이다. 녀석의 눈과 날개로 저 인간들을 좀 살폈으면 좋겠는데..생긴 거 답잖게 과격한 놈이란 말야.. 시가지안은 온통 수라장이었다. 울부짖는 애들과 여자들의 비명소리와 고함소리로 가득했고 그 뒤를 이어서 경 비병사들과 주둔해 있는 병사들 사이에서도 시끄럽기만 했다. 지친 정령술사이자 내가 이제 부터 인정해 주는 명궁이 된 쪼가리 엘프계집애는 휴식을 취하느라 길게 바닥에 다리를 뻗고 주저앉아 있었다.그녀의 옆으로 그 음침한 세 녀석이 정령석을 들고선 단검과 장검을 골고루 든 채 그녀를 보위하 고 있었다.생긴 거 답잖게 제법 성실한 도둑들이군하고 내가 생각하고 있을 때 였다. "쿠브형!" 휴런이 멀쩡한 모습으로 나에게 휘익 달려왔다.녀석도 몇 죽였는지 기분 좋은 표정을 하고는 내게 와서 히죽거렸다. "너무 간단한데,애송이들 아냐? 몇명 되지도 않아." 길게 나온 손톱에선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그런 것을 할짝 할짝 핥으면서 휴런은 얼굴을 찌푸린 튜나에게 치근덕 거렸다. "시시했어.나,열 정도 해치웠는데 너무 쉬워서 사인족이 이거 밖엔 안되나 싶어 서 실망했어." 나는 녀석이 한 번도 사인족을 본적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뭐어.넌 한번도 본적 없었겠군." "음,음.하지만 놈들은 왜 전투모드로 화하지 않지? 그럴 새도 없었던 건가? 나 몇번이나 녀석에게 기회를 주고 변해 봐라 했는데 녀석들은 변하지않더라구." "그렇겠지,놈들은 전투모드로 화할 줄 모르니까." "엑!" 휴런이 잘못 들었나 하는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여전히 아이들은 신나게 날뛰고 있었다. 다 죽일 때까지 흥에 겨워 멈출 생각은 전혀 없을 것이다.원래 전투모드에 있을 때엔 자기 이외에 서있는 자라면 모두 적이다.그 적을 쓰러뜨리기 전까지는 계 속해서 죽이고 공격하는 것이다.그게 아직 어리고 경험미숙한 놈들이라면 당연 히 제어가 불가능하다.아이들을 슬슬 거두어야 할 때다. 처음 보는 피와 살육의 잔치에는 자제력이 요구된다.아니라면 여기 인간들까지 모두 죽이고서야 겨우 안정될 것이다. 나는 숨을 몰아쉬고 외쳤다. "쿠오오오오오...." 휴런이 귀를 막고 튜나가 충격으로 고개를 싸쥐고 주저앉을 때까지 나는 계속했 다. 성안이 아니어서 마침 잘되었다.만약 돌로 이루어진 성곽이었다면 우르르 울려 서 내 소리는 더 증폭되었을 것이다. "쿠아아아아.." "카아아아..." 여기저기서 고통의 소리가 터져나왔다. 휴런이 귀를 싸매고 날 노려볼 동안 나는 시가지를 향해 외쳤다. "돌아와라!" "뭐 하는 거야?" 휴런이 난폭하게 내 가슴을 후려갈기려고 손을 내밀다가 시선이 마주치자 흠칫 했다.나는 녀석을 싸늘하게 바라보고는 밖을 가리켜 보였다.방책너머 무수히 도 열한 그 음산한 대군을 보고 휴런은 입을 다물었다. "뭐야! 저건!" "아이들에게 첫번째 전투모드를 풀고 이리오라고 해라,휴런." 휴런은 뭐라 막 나에게 말하려다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왕." 그가 휘익 하고 다시 시가지로 뛰어 내려갈때 튜나는 휘청이면서 나를 바라보았 다. "대체 뭘 한거야? 왜 소릴 질러?" 그녀의 눈안에 눈물이 가득 고여있었다.지나치게 예민한 엘프의 피를 가진 그녀 에겐 상당히 큰 타격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일일이 설명할 기분도 아니어서 나는 발밑에 널부러진 사인족,아니 혼 혈의 시체를 묵묵히 바라보았다. 우울하고 슬프고 거북한 기분이 저 밑에서 부터 올라왔다. 저 땅의 엘프 사건때 눈치챘어야 할 지도 모른다.인간용병과 더불어 공격해오던 사인족들은 혼혈은 아니었다.하지만 인간과 같이 싸운다는 것 자체, 그리고 인 간이 만든 물건들을 가지고 녀석들이 나타났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문제를 가지 고 있는 것이다. 나는 왕,나는 묘인족의 왕. 비록 더럽고 저열하다고는 하지만 사인족의 왕이 인간과의 혼혈을 용납했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놀라왔다.그리고 인간들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이 전투모드가 불가능한 혼혈녀석도 믿어지지 않았다. 이런 아이가 생길리가 없을 텐데. 이런 혼혈아가 있다는 것은 여기에 뭔가 비열하고 추잡한 일이 관련되었다는 이 야기 였다.사인족은 가끔 타부족의 여자를 범해 아이를 낳는다.하지만 이렇게 완벽한 혼혈이 되지않는다.사인족의 애들은 사인족이 될뿐이다. 그런데...이건 .... "대체 무슨..일이야! " 그는 피투성이의 칼을 쥔 채 몇몇 기사들과 헐덕이며 달려왔다.시가지가 아직 정리가 안된것인가 하고 내가 흘긋 돌아보자 에메스가 헐덕이며 말했다. "어느 정도 해결되었어,네가 데려온 그 괴물들이 거의 다 죽여버렸지.하지만 그 괴물들이 우리 병사도 죽였다구!" 나는 그가 외치는 말을 모른 척하고 손을 들어서 저 너머를 가리켜 보였다. 에메스는 고개를 갸웃하고 들판을 바라보았다.그러나 어두워서 아무것도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않을 것이다. 인간의 시력을 거부하는 밤의 어둠 속에 숨을 쉬는 그 정체불명의 자들은 오만 무쌍하게도 사인족을 이용했다.그들을 사용했다. 방책 아래,그리고 인간들의 시체가 널린 평원 위에 인간의 군대가 도열해 있었 다. "이제 인간의 싸움이다.꼬마야." 나는 조용히 말했다. KUBERIN...... THE NIGHT HAS A THOUSAND EYES AND THE DAY HAS BUT ONE; YET THE LIGHT OF THE BRIGHT WORLD DIES WITH THE DYING SUN. ..... BY 버어딜런 9 새벽의 여신이 밀어올린 태양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아리땁고도 수줍은 새벽의 여신은 뜨겁고 건방지지만 결국은 근사한 태양을밀 어내느라 매우 바쁜 듯하다.태양은 그 위력과 위엄을 사방에 떨치면서 난리가 났던 이 방책안의 조막만한 거리,랜달브리거에 그 빛을 나누어 주고 있었다. 나는 이 조막만한 도시에서 가장 크고도 높은 저택안에 있었다.저택의 주인은 당연 왜소한 인간사내 랜달브리거의 시장이었다. 그는 손가락 굵기만한 수염을 기르고 약간 추적 추적하는 느릿한 어투를 가진 사내인데 사십세정도로 보인다.길죽한 옷자락을 걸친 대신 짧은 튜닉에 바지를 입어서 그 왜소한 체구와 전혀 위엄이라곤 없는 그 몰골때문에 하인배처럼 보였 다.하지만 이 몸께선 인간의 옷차림에는 냉정한 지라 이 작자가 제법 유능할 지 도 모른다는 판단을 내리고있었다. 왜냐면 우리들이 들어서기도 전에 피비린내나는 모든 사태를 무릅쓰고 이 사내 는 한 상 걸죽하게 차려놓고 있었던 것이다. "식사를!" 사내가 우리들을 보고,정확히 말하면 에메스를 보고 말했다. 에메스는 밥먹을 시간이 없다고 판단했었는지 고개를 젓다가 갑자기 생각난 듯 나를 돌아보았다.나는 당연 에메스를 무시하고 식탁앞에 앉았고 휴런은 히죽 히 죽 웃으면서 앉아서 이미 고기를 뜯고 있었다.그만이 아니라 튜나도 그랬고 그 녀가 거느리는 음침트리오도 역시 식사를 시작하였다. 내 세명의 아이들은 내가 뭐라 말하기 전에는 움직이지않을 듯이 내 뒤에 와 섰 다. 에메스는 이미 먹기 시작한 우리들을 보다가 고개를 젓고 진지한 얼굴로 시장을 바라보았다. 시장은 우리들이 무슨 용병나부랑이로 착각한 것인지 입을 다물고 에메스의 명 령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는 진지하게 두 손 모은 채로 에메스에게 물었다. "사태는 안정된 듯 싶습니다만?" 에메스는 고개를 저었다.참혹한 얼굴이었다. "성내에 침투한 놈들은 끝났습니다,하지만 그놈들은 척후대이자 돌격대이고 본 진은 지금 밖에서 대기 하고 있습니다.약 5000메타 밖에서 진을 치고 놈들이 이 곳을 노리고 있는 중입니다." "몇이나 되는 건가요? 공작님?" 시장이 신중하게 물었다. "약...이천에서 삼천.." 그는 슬쩍 고개를 돌려 우리들을 보았다. 그렇지만 나는 그 말에 대답해줄 생각도 없고 관심도 없어 내 눈앞에 놓인 사과 를 문 새끼돼지에 탐닉했다.튜나는 저억 저억 오리를 찢어서 열심히 먹어대고 있다.그러고 보니 육식을 즐기는 엘프도 난 처음 보았다.아무래도 인간의 피가 너무 강한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판단하고 있는데 휴런이 물었다. "어쩔꺼야?" "뭐가?" "저 사인족이란..놈들은...인간과 연합했다.그럼 그건 보통 일은 아니야.그렇게 판단하지 않아?" "판단하고 있어." "말 장난 하지 말고 빨랑 말해줘.놈들을 쳐부수러 갈거야? 나,아직 몸이 덜 풀 렸어." 휴런이 살기로 충만한 눈빛을 나에게 보내며 물었다. 나는 돼지고기를 구운 사과와 함께 먹으면서 어깨만 으슥해 보였고 튜나는 씹으 면서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근데 엘레는 어디있어요?" "뭐 어디선가 도사리고 앉아있겠지." "그도 배가 고프지않을 까요?" "진짜 배고프면 시체라도 뜯고 있겠지." 튜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쏘아보았다.그러나 곧이어 말하는 것을 단념한 듯 다시 먹기에 열중했다. 에메스는 시장과 마주 서서 이야기 하고 있었다. "어느 나라 놈들인지 알수 없소이다.지금 일단 소강상태처럼 놈들이 버티고만 있는데 내 판단으로는 돌격대인 저 사인족이란 놈들이 한바탕 휩쓸고 학살하고 지나가면 뒤이어서 녀석들이 정리하는 형식으로 사방을 아우르는 거 같소." 시장이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돌격대인 저 놈들을 다 죽였으니 그쪽에서도 다소 당황하는 지도 모르겠 소.그래서 대기 상태로 기다리고 있는 지도." "그럼..? 앞으로 어쩌면 될까요?" "우리도 기다릴 수 밖에 없소.그리고 무엇보다 파발을 띄워 이곳 사정을 수도에 알리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지원군이 오기전에는 우리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 소." 에메스는 침통하게 말했다. "우리의 병력은 잘해야 천명도 되지않는데 저쪽은 이삼천이오.그리고 돌격대이 던 그놈들..이 아직도 몇 남아있다면 놈들의 야습에 우린 속수무책으로 당할 겁 니다." 그는 우리들을 흘긋 보았다. "지금도 우리들은 몇십명에 불과한 놈들에게 수백이 학살당했소.만약 저 들이 없었다면 우리들은 모두 전멸한 다른 성채와 같은 처지가 되었을 거외다." 에메스의 시선에 따라 시장은 우리들을 바라보았다. 에메스는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진지하게 다가왔다. "쿠베린." 나는 포도주 잔을 놓고 녀석을 마주했다. "부탁이다.확실히 해줘." "뭘?" "나랑 싸워 줄거지?" "싫어." "어.어째서? 도와준다고 했잖아!" "난 인간들의 싸움엔 끼기 싫다." "쿠베린!" 에메스가 재촉해서 외쳤다. 나는 그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고 잘라 말해주었다. "몇년전인지 잘 기억도 나지않지만 네 아비가 네 나이일때 나는 뭔지 이름도 모 를 계곡에서 네 놈 아비의 적을 맞이해서 꽤 많은 숫자를 죽여주었었다.무력한 인간들을 학살하고 또 죽이고 네 놈 아비를 위해서 그렇게했었지." 에메스의 얼굴도 굳고 그 자리에 있던 자들이 모두 굳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 다. "네 아비는 나에게는 아들과 같은 녀석이었다.녀석이 자라는 것은 나에겐 자랑 이었다.그렇지만...그 놈도 저 빌어먹을 비틀어진 왕실을 위해 싸운 것이지 본 인 자신을 위해 싸우는 것은 아니다.차라리 나를 위해 싸워달라고 애원한다면 몰라,인간의 왕을 위해,그 한푼 가치도 없는 놈들을 위해 싸우라니,그건 우스운 일이지. 진짜 싸움은 자기 자신을 위해 싸우는 것이야.타인을 위해 싸운다고 말 하는 것은 거짓말에 지나지 않아.신용할 수 없어." 에메스는 뭐라 막 입을 열려고 했다. 고기를 찢어서 그것을 입안에 넣으면서 나는 담담히 말했다. 빌어먹을 마잉꽃,그 깃발아래 죽어간 자들은 대체 무엇인가. "나는 인간의 사고는 이해 할 수 없다.그러니까 인간은 인간과 싸워라." 뭐가 뭔지도 모르고 죽어넘어가는 빌어먹을 것들을 어떻게 신용하는가.그리고 그런 것들을 태연자약하게 나라를 위해서 죽어라 라고 하고 사지로 밀어넣는 자 들을 어떻게 신용한단 말인가. "인간은 인간과 싸우는 것이다.인간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이 싸운다.그리고 인 간이 판정내리고 인간이 결판짓는 거다." 나는 포도주를 마저 마셨다. 그 순간 에메스는 무서운 속도로 와서 탁자를 쾅 하고 내리쳤다. "기다려!" 음식물들이 와장창 흔들리고 몇개는 떨어져 내렸다. 에메스는 탁자에 두 손을 댄채 나를 쏘아보았다.나도 그를 마주 쏘아보았고 녀 석도 날 쏘아 보았다. "야,너 그 손 아프지 않냐?" 내가 녀석의 손을 손톱끝으로 톡톡 치는 순간 에메스는 웃 하더니 고함을 질렀 다. "내 말 들어봐!" "듣고 있어.앙앙 소리치지 않아도." "네가..네가 날 어린애 취급하는 것도 알아! 네가 우리 아버질 구해주었다는 것 도 믿어! 그렇지만 분명히 들어! 아버진..아버진..구국의 영웅이었어! 그리고 내 자랑이고 이 나라의 자랑이라구!" "그래서?" "..분명히 네가 도와주지않았다면 영웅은 될 수 없었을 지도 몰라! 그러나 분명 한 것은..네가 그렇게 도와주게 만든 것은 아버지의 힘이란 거야!" 나는 잠시 눈쌀을 찌푸렸다. 지금 이거 논리가 맞게 흐르고 있는 거야? "우리 아버질 좋아했잖아! 우리 아버질 사랑했잖아! 그러니까 도와주었지!" 나는 계속해서 얼굴을 찌푸렸다. 사랑이라니,그런 간지럽고 근질거리면서 느물거리는 단어를 주절거리다니. "그러니까 나에게 불만이 있으면서도 여지껏 나를 도와준 거잖아!" 에메스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외쳤다. "나역시 아버지에게 불만이 많아! 아버진 나에게 얼굴을 보여준 적도 별로 없 어! 언제나 바빴어! 영지를 돌거나,매양 왕성에 가고! 나와 놀아준 적 따위는 거의 없었단 말이야!" 그의 손이 내 멱살을 쥐어 잡았다. "그러니까 내 앞에서는 내 아버지 이야기 따위는 하지마! 나역시 아버질 몰라! 그러니까 내 아버질 핑계로 날 도와주지않겠다는 둥 인간의 일에 참견하지 말겠 다는 둥 하는 소린 집어쳐!" 나는 갑자기 에메스의 눈에서 물기를 보았다. 내가 멀뚱 멀뚱 바라보고 있는데 에메스는 흥분을 이기지 못한 채로 시근덕 거 리더니 식탁위에 발라당 올라 앉아 내 멱살을 쥔 채로 그대로 날 노려보고 있었 다. "결국은.." 내가 고개를 저으면서 물었다. "너,나에게 도와주세요 하고 빌고 있는 거냐?" 에메스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시끄러! 시끄러! 그 따위 소리 집어 쳐!" 나는 고개를 돌려서 휴런을 보았다. "그런 소리로 들리지않았냐? 휴런?" 휴런은 족발을 뜯다가 날 흘긋 보면서 어깨를 으슥했다. "난 못들었어.먹는 데 바빠!" 나는 그녀석과 이야기 하길 단념하고 튜나를 바라보았다. 튜나역시 어깨를 으슥해 보였다. "넌 들었냐?" "듣긴 했지만 너무 시끄러워 뭔 소린 지 몰라.엘프의귀는 예민하거든" 그녀는 시익 웃어보였다. "....제길!" 에메스가 식탁위에서 벌떡 일어섰고 나는 그 녀석의 발목을 턱 하니 잡았다.그 덕에 녀석은 휴런의 앞으로 발라당 넘어졌고 면상에 돼지 족발이 작열했다.스프 그릇을 엎어버린 그의 손탓에 휴런은 스프를 뒤집어 썼다. "쿠베린!" 휴런이 고함을 질렀고 나는 발목을 질질 잡아 당겨 바둥거리는 에메스의 몸체를 끌어들여 다시 내 앞에 놓았다. "다시 말해봐." "뭘!" 에메스가 아픈 턱을 쥐고 날 쏘아보았다. "부탁해봐." "뭘 부탁해!" "몰라서 묻는 것은 아니겠지?" "...몰라!" "진짜 몰라? 이 트위스푸딩을 네 셔츠속에 넣는다.그래도 모를까?" "미..미치광이 자식!" 나는 푸딩그릇을 잡아 녀석의 셔츠를 벌려 그 안에 밀어넣으려 했다.그러나 그 순간 튜나가 재빨리 잡아챘다. "무슨 짓이야! 이 푸딩은 내가 좋아하는 것이야!" 에메스는 식탁위에 길게 엎드린 채 날 쏘아보고 있었다.먹어대는 휴런과 튜나 일행은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보듯이 우리들을 보고 있었는데 나는 갑자기 유쾌 해져서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너.미치광이야! 나 묘인족 따위 진짜 질색이다!" 에메스가 외칠 때 튜나가 옆에서 말했다. "맞아,맞아,난 진짜 묘인족이 싫어요.묘인족은 이상한 놈들 뿐이거든." 휴런이 흘긋 그녀를 보았다. "진짜?" "음,얼굴들은 멀쩡해 가지고..끌끌..바람둥이 일족이라 부르는 게 맞을 지도." 튜나는 어깨를 으슥했다. "시끄러! 하여간 절대 부탁하지않을 테다! 쿠베린! 너도 꺼져 버려! " 에메스가 고래 고래 고함을 질렀다. 그때 문이 열리고 미트라와 비오나,그리고 린과 가빈이 들어섰다. "이게 왠 난장판이에요? 쿠베린.설마 공작을 먹어치우려는 거에요?" 가빈이 팔랑 팔랑 뛰어와 내 옆에 섰다.그리고는 음식물로 뒤범벅이 된 그를 보 고 고개를 갸우뚱하며 꼬리를 흔들었다. 비오나는 어머나 하고는 에메스를 부축했다.에메스는 식탁에서 겨우 벗어나 부 축하는 비오나와 함께 씩씩대며 사라져 버렸다. 미트라가 눈이 휘둥그레 져서 날 바라보았다. "뭐야? 쿠베린?" 그녀는 내 옆에 와서 엉망진창인 식탁을 바라보며 슬픈 얼굴을 했다. "아아..나도 배가 고팠는데.." 그러자 옆에 섰던 시장이 그 온후하다 못해 긴장감이 전혀 없는 느긋한 어조로 말했다. "걱정마십시오,식사는 또 준비해 두었습니다." 멋진 시장이다. KUBERIN...... THE NIGHT HAS A THOUSAND EYES AND THE DAY HAS BUT ONE; YET THE LIGHT OF THE BRIGHT WORLD DIES WITH THE DYING SUN. ..... BY 버어딜런 10 "챠아!" 멀리서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동시에 약 오백의 기마대가 돌진을 시작했다.그 지축을 울리는 듯한 거 대한소리는 나무로 만든 방책의 전체를 뒤흔들면서 돌진해 왔다. 밝은 대낮에 그들이 공격한 것은 틀림없이 그들의 숫자를 이 방책안의 인간들에 게 알려주겠다는 의도일 것이다.그들은 그렇게 돌진해 왔고 그리고 잠시 이 앞 에서 멈추더니 창병들을 기다렸다.창병들은 말 그대로 대지를 메꿀만한 숫자로 다가와 그 빽빽한 길다란 창을 공중에 치켜 세운 채 대기하고 있었다.그리고 그 들 사이로 무언가가 다가왔다. "공성기!" "투석기다!" "농,농담이겠지!" 에메스가 고함을 질렀다.그의 뒤에 있던 기사들이 경악성을 올리는 동안 적은 천천히 거대한 나무를 휘게 하고 가죽끈으로 동인 거대한 스프 스푼같이 생긴 물건을 준비하고 있었다.일곱마리의 숫소가 그 길다린 나무주걱에 묶여진 긴 가 죽끈을 끌고 전진해 팽팽히 휘게 만든다.그리고 나선 그 팽팽하게 휜 나무주걱 위에 거대한 바위돌...은 아니고 약간 두툼해 보이는 돌을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그 팽팽하게 당겨진 가죽끈을 대기하고 있던 검수가 척하니 베어버린 다. 그리고 쏴아아 공기를 찢는 소리를 내며 그 돌덩이가, 돌덩이가 이리로 날아드 는 것이다. "우아아아악!" 멍청이들! 저게 공성기라는 것을 알았다면 재빨리 피하든가 막던가 했어야 할 거 아니야! 비명소리와 함께 바글바글한 인간들이 뿔뿔이 흩어지며 달아났다. 와장창 하고 나무 방책이 말 그대로 박살이 나서 나무파편이 산산히 흩어져 공 중으로 떠올랐다.너무 뿔뿔이 날려 나무 먼지를 잔뜩 뒤집어 쓴 에메스가 고함 을 질러댔다. "공격하라!" 미친듯이 사수들이 화살을 쏘아 대는데 적들은 예리하게도 투석기를 조작하는 자들에게 거대한 방패를 쥐게 하고 있었다.게다가 화살은 투석기를 조작하는 녀 석들에게는 닿지도 않았다.방패를 잔뜩 꼬나쥐고 있는 보병들과 창병들이 그들 의 앞을 막아선 채 있었던 것이다. 즉 창병,보병은 모두 방패를 들고 화살을 쏴대면 당장에 방패를 약간 허공으로 들어올려 방어한다.마치 거대한 거북이가 껍질을 이리저리 흔들며 바늘을 피하 는 것처럼 보인다. "자,하는 수 없지,이 몸께서 도움을 주실 밖에!" 의기양양한 목소리가 들리고 돌아보니 튜나가 자신 만만한 자세로 서 있다.그녀 의 어깨는 날개를 편 엘레와 연결되어 있었는데 모두 멍청히 보는 가운데 튜나 가 엘레와 함께 공중으로날아올랐다. "끼얏호!" 튜나가 고함을 질러댔다. 그리고는 엘레와 함께 수직으로 공중으로 상승했다.엘레의 날개는 좁고 단단히 퍼덕이고 있었고 튜나는 단궁에 화살을 먹인 채 준비하고 있었다.아마도 공중에 서 쏴재낄 생각인 모양이었다. 그녀는 공중을 향해 화살을 쏴대는 적들을 무시하고- 무시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이미 사정거리 밖에 있는 그들이다-단궁을 잡은 채 아래를 향해 수직으로 화살 을 발사했다. "바람의 정이여,나의 벗이여! 자아! 일어나라! 일어나서 나의 적에 힘을 보여 라!" 튜나의 목소리가 쩌렁 쩌렁하게 울려퍼졌다. 그리고 순간 그녀가 날린 화살 한 개는 거대한 힘으로 증폭되어 보일리 없는 바 람이 새하얀 색깔의 물줄기처럼 보였다.그리고 그 거대한 힘이 콰앙 하고 말 그 대로 대지를 두들겼다. 펑이라고 해야 할까 쾅이라고 해야 할까. 어찌되었든 거대한 주먹이 적병들의 한 가운데를 후려갈긴 꼴이었다. 사방으로 수십의 적병들이 날아 나동그라지고 창날이 꺾이고 허공으로 시체들이 내동댕이 쳐졌다.그 거대한 바람의 여력으로 병사들은 별 상처를 입지않고도 나 뒹굴었으며 그 덕에 공포에 질린 비명들을 올려댔다. 그 소음의 한 가운데에 거대한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을 보고 모두들 환호를 올렸 다. "대단하다!" "멋지다!" 모두 박수를 치고 난리를 치는 그 가운데 두번째의 공격으로 튜나는 화살을 잡 은 채 중얼거렸다. "나의 친구,사악한 자를 태우는 불의 넋이여! 불의 힘이여! 내 곁에 와서 나의 적을 불태우라!" 화살이 한 대 더 발사 되었다. 그리고 그 화살은 거대한 뱀의 형태로 화하여 갑자기 꿈틀거리더니 일대의 공기 와 모든 것은 잡아 삼킬 듯한 거대한 화마로 돌변했다.그리고 콰아악하고 그들 의 중심에 있는 투석기를 날려버렸다.그 투석기가 날아가며 근처에 있던 적병들 도 부지기수로 타올라 나동그라졌으며 그 화염에 직접 쐬인 자는 순식간에 불타 올랐다.그렇게 만들고도 부족한 지 화마는 이빨을 드러내면서 으르렁거렸다.그 리고는 자신의 작고도 위협적인 자식들을 사방으로 퍼뜨렸다. 그 덕에 불꽃을 뒤집어 쓴 병사들이 비명을 올리며 뿔뿔이 흩어졌다. 말 그대로 적진을 엉망진창으로 박살을 낸 것이다. "멋지다!" "우와아아..!" "보았느냐! 우리에겐 마법사가 계시다!" 랜달브리거의 경비들은 의기양양해서 고함을 질러댔다. 에메스도 흥분으로 두 손을 맞잡은 채 옆에 선 비오나를 향해 말했다. "그녀는 잘 하는데! 대단해!" 비오나의 얼굴은 찌푸려져있었다.정확히 표현하자면 창백하고도 파리했다. 엘프가 저런 대량 살상극을 벌리고 기뻐 날뛴다면 그건 미친 엘프인 것이다.내 가 보기에 튜나는 정상은 결코 아니었다.엘프들이 왜 그녀를 이리로 보냈는지 가히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 있었다. "마력은 비오나쪽이 더 강대해." 나는 잘라 말했고 에메스는 흘긋 비오나를 보며 놀란 듯 바라보았다. "진짜야? 비오나?" "...." "당연하지,비오나는 마법엘프라 불리는 변신 엘프다.저 반쪼가리 엘프 계집애보 다 마력으로 말하면 수배는 강하다." "그런데 왜 공격을.." "너 멍청이 아니냐? 정상적인 엘프라면 저런 살상극을 일으키고 기분좋아할 리 가 없지." 나는 에메스의 이마를 툭 쳐주고는 비오나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비오나가 날 바라보자 나는 그녀의 이마에 키스해주고 속삭였다. "괜찮아.비오나.넌 안해도 된다." "...하지만." "엘프족의 대가리들도 자기 손을 더럽히기 싫어 저 쪼가리 계집애를 보낸 거다. 그러니까 넌 그저 치유술이나 행하면 된다." 비오나는 촉촉한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나는 그녀의 얼굴에 키스하고 그녀의 몸을 품안에 안은 채 잠시 즐겼다. 예전의 아담한 소년형의 몸매라면 이 여자를 이렇게 안을 수는 없었을 것인데 역시 큰 몸이라 편하긴 하군... "아앗!" 빌어 먹을 휴런이 고함을 질렀기에 나도 고개를 들었다. 엘레는 튜나를 안은 채 막 돌아오려는 찰나였다.그리고 튜나의 몸은 약간 피로 한 듯 늘어져 있었다.무리도 아니지,그런 술법을 연속해서 쓰고 힘이 남아돈다 면 그게 이상하지. 그리고 다른 자들은 잘 안보였겠지만 그 만신창이가 된 적진 한 가운데 홀로 선 사내가 있었다.사내는 검은 후드를 쓰고 검은 로브를 걸친 채 지팡이를 들고 있 었다.이렇게 보기만 해도 마법사라는 것은 분명히 드러나는 사실인데 그 녀석은 공중에 뜬 휴나를 향해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이는 분명히 마법을 거는 동작.... "휴런!" 나는 휴런의 허리를 잡아 채어 재빨리 그 녀석의 몸체를 들어올렸다.휴런이 앗 하는 사이에 나는 그놈을 힘껏 쥐어 성 아래로 집어던졌다. "우앗!" 휴런이 외치는 소리와 다른 자들이 외치는 소리가시끄러울 때 휴런의 몸은 팽 하고 날아 성채 아래 그 마법사가 있는 곳 까지 날아갔다- 물론 바로 앞까지는 아니었다.하지만 휴런녀석도 눈치 챈 것인지 몸을 구부려 탄력을 만들고는 착지 하자 마자 크게 도약했다. 그의 몸이 도약으로 팽팽해지는 순간 녀석은 전투모드로 돌변했다.새까맣게 번 들거리는 몸매가 내 눈앞에서 보이는데 그녀석의 손톱이 바로 앞 마법사의 가슴 을 꿰뚫어갔다. "우웃!" 마법사로서도 낭패한 것인지 뒤로 튕겨갔다.그러나 이미 휴런의 발톱은 그의 가 슴을 관통했다.휴런은 의기 양양해서 그의 몸을 갈가리 찢으려 달려들었다. "쿠오오오오..." 그러나 휴런도 늦기는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번쩍하고 푸른 빛이 튜나와 엘레의 몸에 작열했다. "저건 ...키라에네오!" 비오나가 발딱 일어서면서 외쳤다. "쿠베린! 도와주세요!" 순간 그녀의 옷자락이 팽팽해졌고 그녀의 등에서 검은 날개가 튀어 올랐다. 엘레와 튜나의 몸은 맥없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만약 그대로 떨어진다면 박살 날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나는 막 날아오르려는 비오나의 몸을 잡아서 그들을 향해 공중으로 집어던졌다. 에메스가 웃 하는 사이 이미 그녀의 몸이 공중을 찢고 날아올랐다. 쏜살같이 날아간 그녀는 이미 주문을 걸고 있었고 떨어지는 그들의 앞에 도착했 을 때에는 이미 주문은 발동되고 있었다. 푸르고 노란 빛의 원이 그들사이로 동그랗게 둘러 쳐졌다.엘레와 튜나의 몸이 그 공의 안에서 정지할 때 나는 내 뒤에 도열한 애들을 향해 외쳤다. "와라!" "넵!" 아이들이 내 뒤를 따라 방책에서 몸을 날렸다. 바람이 찢어지면서 내 귓가에서 비명을 올린다.발바닥이 땅위에 닿는 감촉이 선 명하게 느껴지는 순간 나는 탄력을 주어 그 자리에서 도약했다. 몸이 뜨고 그 다음에는 허공으로 달려 다시 한번 도약했다.다른 애들이 다 내 뒤를 따라 그렇게 도약하는 동안 나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적병들은 엉망진창이 되어있었지만 마법사의 등장으로 조금 정신을 차린 듯 창 을 들고 칼을 빼어들고 우리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무지 막지한 우리들의 도약력을 보고도 다가 든다는 것은 이 놈들이 범상치 않은 놈들이라는 증거였 다.그러나 그도 잠시 세명의 아이들이 그 적병들 사이로 피를 튀기면서 뛰어들 자 마자 보통 인간들 처럼 비명이 속출하기시작했다. 비오나가 그들을 아우르고 세명의 아이들이 싸우는 동안 나는 휴런과 그 마법 사의 싸움을 돌아보았다.내 생각에는 아주 간단히 해결할 수 있으리라 믿었지만 예상외의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마법사의 가슴은 분명히 관통되어있었건만 피는 전혀 보이지않았다.휴런은 그 손톱으로 마법사의 로브를 갈가리 찢었지만 그를 어떻게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제길!" 마법사의 주변에 둘러싸여진 둥근 반원의 실드는 휴런의 공격을 막고 있었는데 마법사역시 휴런을 공격하지 못하는 것 이외엔 이쪽의 마음대로 되는 것은 하나 도 없었다. "쿠베린님! 이들을 성안으로 옮겨 주세요!" 비오나가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나는 그녀가 바닥에 내려놓은 엘레와 튜나를 바라보았다.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 "심장이 멎은 거잖아?" "네.그러나 곧 손쓰면 살릴 수 있습니다.키라에네오를 쓰다니 저쪽 마법사 보통 인간이 아닙니다." "키라에네오가 뭐야?" "전광소환입니다.이것은 말 그대로 전격소환이기때문에..." 비오나는 입술을 깨물었다.초조한 얼굴이었다. "직격으로 맞으면 인간의 성따위는 말 그대로 산산조각이 납니다." "그런데 이애들은?" "튜나가 정령술사이기때문에 공기의 정들이 입자를 분산시켜 주었습니다.그렇지 만 그 충격은 엄청날 것입니다." 비오나가 말할 때 나는 엘레와 튜나를 한쪽씩 집어 들고 집어던지려다 말았다. 성안에서 이 들을 받아 들 놈들이 하나도 없는 터라 내가 이 자리에서 집어던지 면 성안에 도착해서 나를 맞이하는 것을 오로지 한 줌의 핏덩이뿐일 것이다. "저 마법사를 좀 알아봐.저런 놈은...드물지 않나?" 비오나는 정색한 얼굴로 휴런이 길길이 날뛰며 이를 벅벅 갈면서 공격하려 애쓰 고 있는 실드안의 마법사를 바라보았다. "...다크 엘더입니다." "그게 뭐야?" "흑마법사의 길드이지요.흑마법사들이 모인 길드가 있습니다." "뭐라?" "그 길드의 상위자중 한 명이 틀림없습니다." "잡아놔!" 나는 짧게 말했고 비오나는 나를 흘긋 보더니 미소했다. "네." KUBERIN...... THE NIGHT HAS A THOUSAND EYES AND THE DAY HAS BUT ONE; YET THE LIGHT OF THE BRIGHT WORLD DIES WITH THE DYING SUN. ..... BY 버어딜런 11 "다크엘더의 마법사여." 비오나가 두 손을 마주 들며 휴런의 뒤에서 말했다. 마법사는 실드안에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잘 얼굴도 드러나지 않는 검은 로 브는 그의 모습을 더 크게 보이게 하고 있었다. 휴런이 흥미진진한 듯 그녀를 돌아보자 비오나는 두 손을 허공으로 뿌렸다. 그 순간 그녀의 손끝에서 마치 그물처럼 생긴 투명한 막이 펼쳐지면서 그 막은 그대로 마법사의 실드로 떨어져 내렸다. "실드 해소의 장!" 그녀가 낮게 중얼거리는 동안 마법사는 벌떡 일어서서 오른 손을 허공으로 내뻗 더니 그 다음에는 일렁이는 푸른 빛덩이를 공중에서 꺼내어 들었다. "청뇌광강림!" 그의 손 안에서 터져나온 푸른 빛덩이는 비오나를 향해 쏘아졌다.그것은 마치 수십개의 발을 가진푸른 빛의 거미처럼 일렁이면서 비오나의 전신에 작열했다. "에엑! 아가씨!" 휴런이 뒤로 물러서며 놀라 외쳤다. 그러나 이 깜찍한 엘프 처녀는 삼각형을 두 손으로 그리면서 그 공격을 받고도 태연자약하게 외치고 있었다. "반역장 발동!" 그녀의 두 손에서 만들어진 삼각형은 곧이어 그녀의 전신을 덮었다.그리고 전신 을 덮는가 싶더니 곧장 공격해오는 푸른 거미를 짓눌러 죽여버리듯 무게감을 가 지고 퍼져나갔다.그 삼각형의 광채를 보고 있던 마법사는 해연히 놀라 뒤로 휙 하고 물러섰다.아니 물러서려 했다. 하지만 내 아우인 휴런은 솔직히 말해 이 마법사에게 열 받아 있었고 또 이 마 법사에게 놀림 당한 것이 수치라고 생각했는지,혹은 이 마법사를 그대로 비오나 가 놓칠지도 모른다고 판단한 것인지,아니면 에누리없이 휴런 이녀석이 비겁한 놈이어서 그랬는지, 단숨에 두 손을 뻗어 도망가려는 마법사의 가슴을 꿰뚫어 버린 것이다. "크억!" 마법사의 가슴에서 이번엔 검붉은 피가 튀어 나왔다. 휴런의 긴 손톱은 마법사의 가슴을 꿰뚫고 반대편으로 가슴뼈를 헤치고 인정사 정없이 튀어 나와 있었다.그리고 그의 희고 푸른 손톱끝으로 피가 방울 방울 맺 혀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아앗! 무슨,무슨 짓입니까!" 비오나가 외쳤다. 그녀는 난폭하게 휴런이 손톱을 빼어들어선 그대로 마법사를 패대기 치듯 땅바 닥에 떨구는 것을 보면서 급히 흰 빛을 두 손에 가득 담고 치유의 술을 펼쳐냈 다.그러나,마법사의 몸은 거의 죽어가고 있었다. 휴런이 옆에서 할작 할작 핥고 있는 것은 바로 그 마법사의 심장의 피였던 것이 다.휴런의 손톱은 실수 할 리가 없어서 단숨에 그 팔딱거리는 심장을 꿰뚫어 버 리고는 그 생명을 끊어버린 것이다. "아아.." 비오나가 애통한 외침을 터뜨리면서 휴런을 쏘아볼 때 휴런은 흠 하고는 태연히 말하고 있었다. "뭐,빨리 끝내는 게 좋잖아?" "나는 이 자를 제압할 자신이 있었어요!" "그래도 빨리 끝내는 게 좋다니까.주변을 보란 말이다.엘프의 처녀." 휴런도 나 못지 않게 고집장이로 그녀의 비통함은 모른 척한 채 주변을 손가락 으로 가리켰다.가리키는 그 손가락 끝으로 아직 핏기가 남아 얼룩 덜룩 했다. 불행히도 그의 말대로 어느 새인가 적병들은 무너진 진열을 다시 세우고 본격적 으로 방책을,그리고 이 랜달 브리거를 공격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와아아아아아..." "이야아아" 기여코 성문이 열리고 이제야 인간들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방책은 반쯤 부서져 있었기에 그 방책너머로 적병들은 별 어려움도 없이 돌진해 온다.앞에서 선두를 지휘하는 기사들이 그 돌진하는 적병들을 막기위해 손을 휘 저으며 몇번이고 공격을 명하는 것이 보인다.그러나 그 손짓에 따를 여유만만한 자들은 그다지 많지 않은 지 기사들은 일곱 여덟의 병사만을 가지고 공격하고 있었다. 끊임없이 달려들고 몰려드는 적병들은 번쩍 번쩍한 장창을 앞세우고 돌진하다가 그 장창을 든 자들 사이로 칼을 휘두르는 병사들이 모습을 드러낸다.그리고는 곧장 칼과 창으로 싸우는 싸움이 시작되는 것이다.아니,시작된다기 보다는 계속 한다고 하는 것이 옳을 지도 모른다. 달려드는 자들은 수백에 이르고 막는 자들도 수백에 이른다.그러나 한 쪽은 돌 멩이,몽둥이를 든 성민들이고 한쪽은 제대로 무장한 인간의 병사들이었다. 왠지 싸울 때는 온통 모두 시간이 정지한 듯 느껴지고 시간동결마법의 마법사가 지팡이를 휘둘러 버린 기분이 된다. 귓속에는 온통 나 자신의 심장박동 소리와 상대의 심장박동 소리 이외엔 들리지않는다. 아직 나를 흥분시키는 것은 없다.그러나 일렁이는 피냄새가 사방에 풍겨나오자 나의 어린애들은 다시 흥분하기 시작했다.연신 마른 입술을 혀로 핥아대는 어린 애들을 흘긋 힐긋 보면서 나는 잠깐 생각했다. 이 아이들은 '자제'라고 하는 것을 아직 몰랐다.이들은 첫번째 전투모드만으로 도 의식의 끈을 놓아버린 채 앞으로 달려나가 그저 자신들 앞에 선 상대를 죽여 버리기만 할 것이다.적아의 구분따윈 이들에겐 없을 것이기에 놈들을 나는 애송 이라 부른다. 처음 인간들의 전투가 제대로 시작된 것은 튜나와 엘레를 비오나가 치료하고 있 는 와중이었다.그녀는 진지한 얼굴로 몇번이고 치유술을 쓰고 있었지만 튜나는 눈을 뜨지 않았고 여전히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엘레역시 마찬가지여서 적잖게 걱정이 된 듯 미트라가 옆에서 자꾸만 물었다. "괜찮을까요?" "...오래 걸릴 것 같군요." 비오나가 창백해진 얼굴로 말하면서 힐긋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팔짱을 낀 상태로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린과 가빈이 밖을 내다 보며 불 안한 듯 눈알을 굴리고 있었다.아인족인 두 녀석은 약간은 불안한 시선을 내게 던지면서 내가 어떻게 할 것인가를 주의깊게 바라보고 있었다. 저택의 창밖으로 보이는 밖은 이미 시끄러워지고 있었다. 함성을 지르면서 달려드는 적병들의 숫자는 이미 지나치게 많아져 있었고 에메 스는 긴장으로 파래진 얼굴로 부하들을 이끌고 나가 있었다. 시장은 그 어울리 지도 않는 체구에 갑주를 입고 몽둥이를 하나 든 채 밖으로 나가 있어 집안에 남은 것은 우리들과 부녀자들 뿐이었다. 콰르릉 하고 천둥 번개가 쳤다. 대지의 여신이 한탄하고 울부짖는 뇌명이 세상을 울리고 있었다. 덧없는 싸움,먹이를 위해서도 아니고 사랑을 위해서도 아닌,혹은 그저 강함을 겨루기 위해서도 아닌 멋없고 덧없는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세상에 가장 멋없는 싸움은 상대를 알지도 못한 채 그저 막기만 하는 싸움,인간 들은 제멋대로 전쟁이라고 크게 말하고 싶어하지만 실은 이것은 아무것도 모른 채 앞에서 죽어가는 싸움도 모르는 인간들의 울림,땅을 흔들고 허공을 시체들의 울부짖음으로 아무리 채워도 그것은 덧없는 싸움. 비가 내리기 시작하고 있었다.그 빗속을 고함과 비명으로 얼룩진 채 인간들이 싸움을 펼치고 있었다. 나는 그 진흙투성이의 싸움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갑작스런살기를 느꼈다. "저기,에메스님을 돌아보러 가 주시지 않겠어요?" 비오나가 약간 미안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내 안중에는 없었다.비오나는 내 바로 앞에 서 있었지만 그 녀의 존재는 나보다 훨씬 먼 곳에 있다. 내 가까이 있는 것은 살기를 날리는 상대,그 상대 만이 보였다. "쿠베린님?" 어리둥절한 비오나가 물을 때 나는 천천히 몸을 굳히면서 조용히 말했다. "린." "네?" "에메스를 부탁한다." "네!" 린이 재빨리 대답했다. 그는 내 뒤에 서 있다가 비오나와 미트라,그리고 가빈에게 일별을 던지고 조용 히 밖으로 걸어나갔다.그애는 내 말을 잘 따르는 내 손안의 칼과 같은 존재였 다.가빈이 멀뚱 멀뚱 거리고 비오나가 약간 눈쌀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에메스님에게 린님이 간 것으로는..." "인간들의 싸움에 낄 수는 없어." 나는 잘라 말하고 린이 사라진 문을 노려보았다. 온 몸이 저릿 저릿한 것은 내가 바로 이 순간 살아있다는 증거,그리고 내 뒤에 자신의 강함을 자랑하는 자가 서서 자신을 어필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가빈이 커다란 눈을 멍하니 뜨고 굴릴 때 나는 천천히 다가서는 비오나의 몸을 밀치고 방 문을 열었다. 내 예감이 맞다면 이것은 멀리 볼 것도 없고 깊이 생각할 것도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문간에 서 있던 세명의 어린 애송이들이 내 얼굴을 보고 긴장된 눈빛을 던지더니 곧 공포에 질린 듯한 얼굴로 뒷 걸음질을 쳤다. 문을 천천히 열자 문 앞에는 한 명의 사내가 무릎을 꿇은 채 앉아있었다. 그 사내의 굴강한 어깨위로 일렁이는 횃불의 불빛이 제멋대로의 일그러진 그림 자를 만들어내고 있었다.그는 무릎을 꿇은 채 단정한 얼굴을 똑바로 들어 자신 의 강함을 드러내 보였다. "일족의 왕 쿠베린의 아우 휴런, 위대한 왕에게 도전을 청합니다." 난폭한 하늘이 고함을 질러댄다. 울부짖는 여자의 비명소리가 찢어질 듯 귀청을 떨어울렸다.순간 번쩍 하고 방안 에 흰 빛이 스쳐지나갔다. 나는 그 얼굴을 보고 그 강함을 보고 그리고 어둠만이 가득한 내 주변을 보았 다.그리고 살짝 눈을 감았다가 떴다. 어려운 일일수록 눈을 감고 피해선 안되는 법이다. "일족의 아들,휴런,도전을 받아들인다." KUBERIN...... THE NIGHT HAS A THOUSAND EYES AND THE DAY HAS BUT ONE; YET THE LIGHT OF THE BRIGHT WORLD DIES WITH THE DYING SUN. ..... BY 버어딜런 12 바람이 핏기를 머금고 일고 있었다. 뭔가가 내 귓가에서 바글 와글 떠들어 대고 있다. 나와 휴런사이에서 떠들고 있는 것은 예전부터 몇 백년이고몇 천년이고 혹은 몇 만년간 이어내려온 피와 피들이 떠들어대는 외침이다. 지금 그와 내가 서로 마주보고 있는 이 순간 수 천년간 변함이 없는 것은 그 는 도전자이고 나는 그의 대전 상대인 왕이라는 것, 그것은 변함이 없었다. 강한 자를 보면 가슴이 끓어오르는 것,그리고 상대를 죽이는 것, 때로는 바보스 럽다고 생각하지만 그것만이 때로는 삶의 보람인 것을 느낀다. "지,지금 어디로 가시는 건가요!" 비오나가 급히 내 뒤로 다가오며 숨을 삼켰다. 나는 애송이들이 얼이 빠진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음을 느꼈다.그들은 지 금 태어나서 처음으로 왕의 도전의식을 보고 있는 것이었다.그들의 전신에 떠오 르는 기운만으로도 나는 그들이 얼마나 흥분했는지 곧 깨달았다. 비오나는 두 손을 꽈악 쥐고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녀가 내 등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전신에 넘쳐 흐를 것같은 내 피의 흥분에 취해 잠시 눈을 감고 있었다. 이런 흥분을 맛본 것도 꽤 오랜만..아니,몇 번 있었던가 했다. 내 눈앞에 있는 녀석이 내 친아우라는 것도 안다. 그리고 이 녀석을 내가 놓쳐 버린 것도 알고 있다.이 놈은 내가 이백년 전에 놓친 놈이었다. 강하게 자랄 것을 가히 예감할 수 있었던 녀석, 그 녀석이 돌아와 지금 나의 앞에서 도전하고 있다. "비오나, 가빈을 데리고 있어라." "쿠베린님! 하필 이럴 때에!" 나는 웃음을 지었다. 마음 속에서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참지 못했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이럴 때..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이때 싸우지 않고 있다 는 것이 더 이상하지 않나?" "하지만..에메스를 지켜 주신다고 약속해 주셨잖아요!" "물론,그러니까 린이 갔지않냐? 나는 지금 내 일족의 일을 하지 않으면 안돼. 후후후후후..." 나는 웃음을 터뜨리고는 걸었다. "어딜 가는 거야! 여긴,여긴 지켜주지않는 거야?" 미트라가 고래 고래 고함을 질렀지만 나는 내 피에 도취된 채로 걸었다. 내 뒤로 나와 비슷한 상태인 휴런이 걸어가며 말하고 있었다. "이 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왕." "아아..나도 그럴 지도." 우리들의 뒤로 아이들 셋이 따라 걸어온다. 우리들은 인간들의 싸움에 섞이지 않고 그 흥분의 냄새를 맡기위해 잠시 정신 없는 인간들의 드잡이질을 바라보았다. "인적없는 곳으로..." "네!" 우리들은 걸음을 빨리 했다. 이 인간의 저택을 벗어나자 마자 미친 듯이 퍼붓는 폭우가 우리들의 전신을 때 려왔다. 왜 도전의 날에는 비가 오는 것일까, 왜 비바람이 이는 것일까. 우리들의 피가 폭풍우에 따라 끓는 것일까,아니면 우리들의 피가 폭풍우를 부 르는 것일까. 나는 질척한 진흙을 밟기 싫어 도약했다. 얼굴로 차가운 빗물이 소리내며 부딪쳐댄다. 나는 그 빗속을 뚫고 저택의 지 붕위로 올라섰다.저택의 지붕 위에서 바라보는 주변은 온통 고함소리와 피와 축축한 비의 물비린내로 가득해 어디로 고개를 돌려도 짙은 생명의 냄새로 고 동치고 있었다. 비는 대지의 여신을 위해 흐르고 인간의 피와 육신은 대지의 여신을 위해 노래 한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그렇게 외치고 울부짖으면서 그 생명을 소진시 키는 것을 바라보며 나는 큰 소리로 웃었다. "하하하하하..." 그 웃음은 곧 길게 길게 이어져 노래로 화했다. 원래 내 노래를 좋아하는 품격높은 인간은 없었지만 나는 내가 노래하는 이 순 간 다른 자들이 내 노래를 듣고 기쁨을 표하길 바랬다.나의 기쁨을 어떻게 인 간들 따위가 이해할 수 있는가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쿠오오오오오...." "우오오오오오오..." 휴런이 답했다. 휴런의 눈빛은 이미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온통 젖어 버린 검은 머리칼은 그 목덜미에 바짝 붙었고 전신에 걸친 옷은 비 에 젖어 달라붙어 있었다.그는 그런 옷가지를 덥석 벗어서 허공으로 던져버리 고는 태고적 모습으로 돌아갔다. 도전적인 그 모습에 나는 가볍게 연장자로서의 여유를 보여주었다. 녀석이 벗었다고 해서 나까지 벗을 이유는 없기 때문에 나는 그저 시익 웃어 주었을 뿐이었다. "오너라!" 내가 허공으로 다시 도약하자 휴런이 뒤를 따라 날 듯이 뛰어 올랐다. 바람과 비가 전신을 사정없이 때리는 것을 즐기면서 나는내 달렸다.인간의 냄새가 풍기지 않는 그런 곳으로 아득한 우리들의 피가 부르는 적막한 곳을 찾아서 내달렸다. 몇번의 도약을 연이어 하면서 애송이들이 따라오는 기척을 희미하게 느꼈다. 그러나 애송이들이 이런 것을 볼 때는 아직 아니다.녀석들은 한 번의 변신모 드만으로도 정신을 잃어버리는 애송이들이고 나는 그런 애송이들이 감히 도전 의식을 관전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랬기에 전신에 힘을 끌어올렸다. 곧 온 몸의 근육이 팽팽히 올라가는 소리가 들린다.심장이 격하게 뛰기 시작 하고 새로운 피가 용솟음 친다. 몸안의 세포 하나 하나가 격렬하게 노래하고 있다. 내 뿜는 숨결이 새로운 힘을 느끼고 즐거움에 떨리고 있었다. 나의 몸은 훌륭하다. 나의 몸은 지금 강한 자극을 바라고 있었다. 나는 웃음을 억누르고 노래를 억누르고 앞으로 내달렸다. 속도가 붙자 마자 빗줄기들이 내 가슴을 치며 사방으로 흩어진다. 물안개처럼 희뿌연 무수한 물줄기들이 시야를 방해하지만 그 사소한 장애는 또 새로운 쾌감을 불러일으킨다. 몇 개의 숲을 넘었다. 숲의 나무들이 내 귓속에서 들리는 심장의 고동소리를 듣고 미친 듯이 가지들 을 흔들고 있었다.미친 여자의 괴성과도 같은 비바람소리가 그 나뭇가지 사이 로 찢어질 듯 높아만 간다. 어느샌가 사라진 샌들 대신 내 발바닥이 대지의 기운을 느끼면서 도약하고 있다.걸쳤던 튜닉은 매듭이 흩어져 내 몸에서 흘러떨어진다.나는 어느새인지 벌 거벗은 채 달리고 있다. 전보다 몸은 더더욱 커졌다. 내 귓가의 웃음소리는 점점 커진다.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내 달렸다. 내 뒤로 달려드는 그 내 그림자도 같은 녀석은 나와 같은 머리칼,나와 같은 눈에 나와 같은 몸체를 한 나의 도전자,그리고 나의 적,나의 라이벌, 그리고 나의 아우인 것이다. 녀석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빗줄기를 느끼면서 발을 멈추었다. 헐떡이지도 않는 우리들은 서로를 마주 보며 섰다. 이제 나를 후려갈기던 빗줄기의 방향은 수직선으로 바뀌었다.그 것들은 이제 내 얼굴을 때리는 게 아니고 내 머리를 때리고 내 눈앞에서 진흙으로 변한 대지 를 때리고 있다. 녀석은 마치 흰 휘광을 쓴 듯이 그 빗줄기를 받으면서 버티고 서 있었다. 비로 만든 그 흰 휘광은 녀석의 단단한 신체를 조이면서 그 위압감을 자랑하고 있었다. 굵은 팔뚝은 당장이라도 심줄을 번뜩이며 날 칠 듯하고 천천히 새어나 오고 있는 긴 손톱은 곧 나의 심장을 꿰뚫을 듯 하다.젖어 버린 검은 머리칼 속 에서 나를 노려보고 있는 그 붉어진 두 눈은 살의와 들끓는 흥분으로 이미 제 빛깔을 잃고 있었다. 당장에 도약할 듯한 그 다리와 발은 공격을 위해 벌어져 있었다. 녀석은 끔찍할 정도로 그 자신의 존재감을 자랑하면서 나를 도발하고 있었다. 나는 녀석을 마주 하면서 천천히 녀석이 변신모드로 전환할 때를 기다렸다. "그럼..." 녀석이 발음도 불확실한 뭔가를 우물거리더니 온몸을 꿈틀거렸다.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드는 그 짧은 순간 그 녀석의 몸은 검은 색으로 물들었 다. 손톱은 길게 길어져 나오며 스무개의 손톱을 이루어 냈다. 팔꿈치에 솟아난 날카로운 돌기들과 가슴을 덮은 짙고도 단단한 검은 털이 등줄 기를 덮어가기 시작했다. 자세는 약간 구부정하게 바뀌었다. 팔과 다리에 검은 털이 덮혀가는 그 순간 그 맨발에도 발톱이 솟아 나왔다. 입가가 천천히 바뀐 다. 송곳니가 드러나는 살의의 순간 녀석이 쿠오오오 하고 기합성을 올리며 나 에게 돌진했다. 내 손안에서 튀어 나온 손톱이 그녀석의 몸을 막아갔다. 내 몸안에서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는 듯이 비집고 올라온 힘과 힘들이 요동하 기 시작한다.내 살결을 뚫고 첫 번째 변신모드가 행해지고 있었다. 단단하고 질 긴 검은 털이 솟아나고 팔꿈치의 돌기들이 피를 바라며 팽팽히 솟아 올랐다. 발가락 사이로 느껴지는 진흙의 부드러움이 나를 미치게 만든다. 그리고 나는 지금 이 순간 들끓는 피를 바랬다. 녀석의 손톱이 내 살갗을 찢는 순간 나는 몸을 돌려 주먹으로 녀석의 머리를 휘갈겼다.터엉 하는 소리와 함께 녀석이 튕겨나가고 그에 따라 녀석이 사방으로 튀기는 진흙탕이 내 몸에도 튀었다. 그 사소한 것에도 전신을 누비는 쾌감은 더 큰 자극을 바라고 있다.내 가슴에 길게 찢어진 녀석이 낸 상처에 따라 흐르는 피가 나를 미치게 한다. 쓰러진 녀석의 몸을 발길로 짓밟는다. 녀석의 뼈가 부서지고 깨지길 바라는 열 망에 들떠서 녀석의 몸을 짓밟고 발톱이 솟아난 그 끝으로 녀석의 살과 근육을 찢어발기길 바랬다.그러나 녀석은 나의 열망에 부응하지 않는다. 녀석의 온 몸에서도 삶에의 지독한 요구가 솟아나와 나의 발을 잡아 채며 내 옆구리에 조금의 빈틈도주지않고 날카로운 열 개의 손톱을 박아간다. 내 옆구 리는 뜨거운 고통을 호소하면서 피를 내뿜었다. 나는 녀석의 머리를 잡는다.녀석이 헤집으며 내 옆구리를 파고 들어가 내 내장 을 찢어 발기기 전에 녀석의 머리를 잡아서 그 머리 밑,아직은 첫 번째 변신모 드로 연약한 그 목줄기를, 숨통을 끊기위해 목줄기를 틀어 잡고 내 옆구리를 찢고 있는 그 손을 후려갈긴다. 퍼억 하고 몇번이나 몇번이나 내 발톱과 녀석의 발톱이 격돌한다.내 발톱이 녀 석의 정강이를 찢으면 녀석의 발톱은 내 발톱을 막느라 버둥거린다.몇번이고 몇번이고 피와 살이 튀긴다. "쿠우우우..." 녀석의 신음소리가 커질 때 나는 녀석의 뒷목을 잡아 내 옆구리에 살점을 찢 고 있는 녀석의 팔을 잡아 뒤로 꺾는다. 끼긱거리는 내 피를 들끓게 하는 소음 이 내 귓가로 들리면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이 환희로 떤다. 녀석은 버둥거린다. 녀석은 약하지 않다. 그래서 나의 공격을 순순히 받고만 있지는 않는다. 몸을 굽히고 진흙탕에 머리 를 박은 녀석의 등이 바르르 떨면서 강철과도 같은 강력한 단단함을 가진 돌기 가 내 뺨을 후려갈긴다. 내 턱이 충격으로 돌아가고 나면 뒤이어 녀석이 부러진 팔뚝에 힘을 주며 강침을 날린다. 녀석의 등에서 튀어 나오는 강침이 순간 시 야를 완전히 가려 버린다. 그 힘을 이기지 못한 빗줄기는 흰 빛을 남기며 사방으로 흩어져 버린다. 타타타타하고 날카로운 파공성을 내면서 내 전신에 강침이 박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온몸으로 싸늘하고도 화끈한 고통이 치밀어 오른다. 전신에 박힌 강침은 최소한 수십은 되는 것 같다. 나는 두 팔을 들어올려 강침의 공격으로부터 얼굴을 막아냈다. 그리고 그 일순간 녀석의 공격이 다시 시작되었다. 내려 붓는 빗줄기를 헤치고 녀석의 발이 날아들었다. 그 발 끝에 매달린 핏덩이가 엉긴 발톱이 내 목을 노려 휘둘러진다.나는 몇번 이고 맴을 돌아 그 것을 피하면서 손톱을 열 개 꺼낸 오른 손으로 휘갈겨 그 부러진 팔을 집중적으로 공격하려 했다.그러나 녀석의 몸이 바르르 떨리며 두두 둑 하고 소리가 터져나왔다. 두 번째 변신모드. 녀석의 두 번째 변신모드가 시작되었다. 녀석의 몸이 두배로 부풀어 오른다. 이젠 녀석의 몸은 내 몸보다 더 커졌다.나는 뒤로 물러서면서 무시 무시한 속 도로 공격해 들어오는 녀석의 몸을 피해냈다. 녀석이 후려갈기는 주먹이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내가 서 있던 바위를 내갈겼다. 넙적한 바위가 불꽃을 튀 기면서 부서져 내렸다. 나는 두 번째 변신모드로 일그러지고 웅크려진 날카로운 송곳니가 솟아오른 얼 굴을 본다. 녀석의 얼굴은 간 곳이 없이 변하고 있다. 그 벌어진 입술사이로 솟아 오른 네 개의 송곳니가 살의를 가지고 나를 향하고 있다. 그 머릿속에서 생각하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다.녀석은 나의 살점을 찢어 발 기고 내 심장을 씹기를 바라는 것이다. 나역시 그러하니까. 강한 녀석의 심장 을 찢는 것 이상의 즐거움은 없다. 공중에 떠 있는 나를 향해 녀석이 쳐들어 온다. 녀석의 몸은 내려 꽂히는 그 빗줄기를 부수며 치밀어 올라온다. 일직선으로 치밀어 오르는 그 몸을 나는 공 중에서 맞이 해 주었다. 녀석과 내 몸이 교차했다. 녀석의 손톱 하나는 나의 목줄기를 찔러오고 하나는 내 심장을 찔러온다. 그 것을 피하며 나는 몸을 꼿꼿이 오히려 펼쳤다. 그리고 동시에 나의 두변째 변신모드가 시작되었다. 내 가슴의 강침을 녀석의 전신에 퍼부어댄다. 나를 향해 곧장 내달려오는 녀석 의 얼굴에, 그 유일하게 약한 두 눈을 노리고 쏘아냈다. 그러나 녀석도 강침을 두 팔로 막아 내었다.그리고 그 때 바로 녀석의 배가 그대로 비었다.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몸안의 균형을 흐트렸다. 내 몸이 아래로 내려꽂히면서 녀석의 배를 찔러갔다. "아우욱.." 날카로운 손톱이 푸욱 하고 살갗으로 파고 들아가는 느낌이 선명하게 느껴졌 다. 살과 뜨거운 피가 닿는 느낌, 내 팔뚝으로 그 피가 따라 흘러 떨어진다. 차가운 빗물과 녀석의 뜨거운 피가 동시에 온 몸으로 쏟아져 내린다. "쿠오오오오오.." 나는 승리의 외침을 터뜨렸다. 내 손은 녀석의 뚫린 뱃속을 헤집으면서 심장을 찾아 움직였다. 그러나 그 순간 녀석의 손톱이 내 얼굴을 후려갈겼다. 고통에 휩싸인 녀석의 몸 이 뒤로 휘어지듯 움직이면서 내 얼굴을 연속적으로 후려갈겼다. 몇번이고 파고든 그 손톱으로 얼굴이 찢어져 나가는 것이 느껴진다.입안에 피 가 넘쳐나고 콧등이 찢어지고 녀석의 손톱이 내 광대뼈에까지 와 닿는 화끈한 아픔이 머릿속으로 파고 들어왔다. 그리고 동시에 녀석의 세번째 변신모드가 시작되었다. 녀석은 내 손을 밀치고 내 몸을 발로 걷어차며 뒤로 튕겨 내려섰다.내가 주먹 만큼 찢어발긴 뱃가죽 사이로 검붉은 피가 쏟아져 내렸다.비는 이제 녀석의 발치 아래서 붉은 색깔을 가지고 번져나가고 있었다. 붉은 진흙 위에 떨어지는 검붉은 녀석의 피가 빗물로 희석되어 분홍빛으로 흘러 간다. 녀석은 세번째 변 신모드로 헐덕이고 있었다. 흐르는 피와 함께 쏟아질 것같은 내장덩어리를 부 여잡고 녀석은 변신모드로 견디고 있었다. 아직 녀석의 심장을 꺼내지 못했다. 아직 그 심장을 터뜨리지 못했다. 녀석과 나는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녀석은 몸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나는기쁨에 겨워 녀석을 쫓는다. 몇번이고 몇번이고 녀석이 자신의 뱃속에서 튀어 나오려는 내장덩이를 안고 미 친듯이 달리고 있는 것을 쫓는 즐거움으로 나는 몸을 떨고 있다. 쫓는 자의 즐거움, 쫓기는 자의 공포가 콧속으로 밀려들어온다. 내 얼굴에서, 내 몸에서 흐르는 피는 이미 즐거움때문에 느끼지 못하고 있었 다. 내 몸위로 흘러떨어지는 것이 빗물인지 핏물인지 이미 나는 느끼지 못한다. 그저 들뜨고 흥분한 그 뜨거움에 취해 거죽의 고통따위는 느끼지 못했다. 즐겁다. 즐겁다. 얼마만의 일인가. 콰르릉하고 무서운 굉음과 함께 빛줄기가 내 바로 앞에서 내리 꽂혔다. 뜨겁고도 차가운 빛깔을 가진 뇌락이 내 눈앞의 아름드리 나무를 직격했다.내 나이와 비슷할 그 거목은 비명을 올리면서 양갈래로 찢어진다.그 맹렬한 폭우에 도 불구하고 무서운 화염이 일어나 그 거목을 휩싸고 돌았다. 빗줄기는 여전히 시야를 방해한다. 내 뒤로 그리고 내 앞으로 그 화염으로 인한 물안개가 일어나 순식간에 주변이 희뿌옇게 변해 버렸다.나는 그 자리에 멈추어 서서 잠시 그 거목의 최후를 음미 하면서 자제하려고 노력했다. 내가 누군가,나는 쿠베린,나는강한 자,그러니까 자제할 수 있다고 몇번이나 되 뇌였다. 세번째 변신모드는 아직도 내 뇌리에 박힌 피에의 향기를 잊지 못하게 만들어 놓고 있었다.온통 머릿속은 뜨거운 갈구로 가득차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다. 나는 몇번이나 자제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것도 금방 잊혀지고 희뿌옇게 일어나는 수증기를 뚫고 나는 내 적수가 남긴 피냄새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쿠오오오오오..." 나는 아직 심장을 갖지 못했다. KUBERIN...... THE NIGHT HAS A THOUSAND EYES AND THE DAY HAS BUT ONE; YET THE LIGHT OF THE BRIGHT WORLD DIES WITH THE DYING SUN. ..... BY 버어딜런 13 비바람은 여전히 숲 안을 후려갈기고 있었다. 귀청이 멍멍할 정도의 천둥이 공기중의 정령들을 다 죽여버릴 듯 얼러대고 있 다. 발 바닥에 닿는 진흙의 느낌은 다른 때 보다도 선명하다. 비바람에 젖어버린 신체는 상처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어느 때 보다도 열렬히 상 대를 바라고 있다.이것은 몇년 만의 일인가. 코를 들어서 냄새를 맡으려고 해 본다. 숲안 깊숙히 숨어버린 녀석의 존재는 희미한 살내음과 피 내음을 남기고 종적을 감추어 버렸다.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사방을 돌아보았다. 콰르릉 하고 또 한번의 천둥이 숲을 떨어울렸다. 작은 짐승들은 하나도 보이지않는다. 이런 폭풍우의 밤에는 모두 다 둥지를 벗 어나려고 하지않을 것이다.나같은 녀석만이 상대를 찾아 헤메이고 있는 것이다. 비에 흠뻑 젖은 나뭇가지들은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휘청이면서 주먹만한 빗 줄기에 계속 흐느적 거리고 있다. 냄새,냄새. 피와 살의 내음. 갑자기 엄청난 식욕을 느꼈다.배가 고프다. 나는 고개를 들고 어딘가에 있을 음식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지금은 상대를 찾는 것이 우선이다. 나는 잠시 망설였다. 이대로 녀석을 찾아 헤멜 것인가,아니면 음식을 찾아 숲을 떠돌 것인가. "카오오오오오..." 내 망설임에 대답하듯 멀리서 녀석의 표효가 들려온다. 나는 몸을 돌려 망설이지 않고 내 달렸다. 언덕을 건너 숲을 곧장 꿰뚫고 그리로 달려갔다. 그러면그렇지,녀석을 놓치다니 안될 말씀! 그러나 내가 녀석을 발견했을 때 녀석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를 둘러싼 세 녀석들은 검은 복장을 하고 두 손에 마법력을 띄운 채 일곱명이 서 동시에 공격하고 있는 휴런의 주변을 둘러 싸고 있었다. 휴런은 흘러내리는 내장을 부어잡은채,아니 당장이라도 쏟아질 듯한 내장을 쥐 고서 녀석들과 싸우고 있었다.녀석을 공격하는 일곱의 녀석들은 제법 빠른 태도 로 공격하고 있었다.녀석들은 옷을 입고는 있지만 전신에 누런 털이 나있다.그 털은 지금 비에 젖어 검게 보였다. 머리가 식어갔다. 이 장면은 무엇이지? 쿠베린? 나는 큰 소리로 내 자신에게 물었다. 빗속에 서서,수풀 속에 서서 나는 달려들려는 자신을 억제하기 위해 주먹을 쥐 어 손톱으로 손바닥에 상처를 주었다. 따끔 따끔한 아픔이 번져나간다. 나는 누구지? 지상최고 강자인 쿠베린님이지. 지금 눈앞에 있는 건 무엇이지? 감히 묘인족을 공격하는 하루살이 개떼들의 몸부림. 나는 누구지? 나는 쿠베린,묘인족의 왕. 휴런의 어깨를 누런 털의 녀석이 힘껏 휘갈겼다.녀석이 지닌 날카로운 발톱이 상처를 입히지 못하자 그 옆에서 동시에 그를 찔러가는녀석이 쇠꼬챙이를 들어 서 그의 팔뚝을 베어간다. 휴런의 손톱이 녀석의 머리통을 후려갈기자 녀석의 머리통이 대굴 대굴 잘려져 나뒹굴었다.그 피가 화악 내 후각을 자극했다. "우웃!" "어서 잡아라!" 둘러싼 마법사인 듯한 녀석들이 마법력을 두 손에 담고 손을 들어 보였다. "천둥울림을 가진 이여 지금 내 부름에 답하여.." 녀석이 막 주문을 외우는 순간 나는 녀석의 머리통을 후려갈겼다.녀석은 비명도 없이 진흙탕으로 고꾸라졌다. "크억!" 비명소리를 지른 것은 옆에 있던 마법사 녀석이었다. 나는 다음 녀석이 주문을 외우기전에 그 다음 녀석에게로 달려들어 녀석의 면상 을 걷어찼다.나의 자랑스런 발톱이 녀석의 얼굴에 정면으로 꽂혀 눈알이 대롱대 롱 발톱에 걸렸다.피가 발끝에 닿는 순간 나는 내 뒤를 공격해 오는 누런 털의 녀석의 목줄기를 틀어쥐었다. "케에엑" 녀석이 비명을 올리거나 말거나 나는 그 목을 쥐고 그대로 가슴에 손톱을 들이 박았다.기분좋은 찢어지는 살의 감촉이 나를 웃음짓게 했다.녀석의 가슴에서 손 을 뽑아 들면서 그 시체를 들어 주문을 외우고 있는 마법사 녀석에게 집어 던지 기 까지는 그다지 오래걸리지 않았다. 나는 마법사에게 달려들었다. 마법사는 지팡이를 들어올리며 나의 가슴을 마법으로 공격하려는 그 찰나였다. 내 발끝이 마법사의 턱을 걷어 찼다.버억 하고 턱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선명 히 내 귀에 잡혔다.녀석이 주문도 걸지 못하고 큰 대자로 널부러졌다. 그럼 그럼. 마법사를 공격하는 것은 매우 매우 간단하여서 나는 이 방법을 애용하고 있다. 주문을 외우지 못하는 것은 마법사에겐 치명적이어서 안그래도 허약하기 짝이 없는 마법사들에겐 이 방법이 최고이다. 그러나 다른 녀석들은 달리 생각하는 지 순간 파공성과 함께 아직 이성이 덜 발 달한 내 등으로 무언가가 와 박혔다. 어억 이번에는 충격이 제법 강렬했다. 무언가가 어깨뼈를 바수고 가슴으로 튀어 나왔다. 숨이 막힐 만큼 엄청난 충격이 등줄기를 타고 지나갔다. 제길! 제길! 빗줄기를 타고 내 피가 그 놈의 물건에게서 씻겨내려간다.그리고 그 순간 또 한 번 날아드는 것을 나는 몸을 돌려서 잡아 챘다. 손아귀에 차르르 충격이 왔다. 철시였다. 미끈하고 시커먼 지긋 지긋한 철시. 나는 그 것을 날린 녀석을 향해 철시를 되돌려주었다. 철시를 날리던 철궁을 든 녀석은 이를 드러내면서 내가 내던진 철시를 감히 피 해내고는 다시 한번 살을 먹였다.그러나 그도 한 순간 미친듯이 분노하고 있는 휴런 녀석이 그 놈의 머리통을 휘갈겼다. 또 한 마리가 나에게 달려든다.아직도 살아있는 두 마리는 휴런에게 달려들고 있다. 이 어리석고 가련한 개떼 같으니. 나는 아픔과 분노로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낀다. 나의 몸에 상처를 이딴 식으로 내다니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 건방지고도 건방지게 감히 이 쿠베린님의 옥체에 인간의 쇠붙이로 상처를 낸다 는 것은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다. 정면으로 달려들고 있는 녀석은 이를 하얗게 드러내고 정면으로 도약해 왔다.녀 석의 발톱이 빗물로 시야가 가려진 내 얼굴로 와 닿았다.차악하고 녀석 나름대 로는 공격해오지만 나는 그 발목을 잡아채서 인정사정없이 바위 더미로 내동댕 이쳤다.몇번이고 몇번이고 감히 내게 상처를 낸 이 어리석은 놈의 발목을 쥐고 바위위로 후려갈긴다. 피가 튀고 머리가 깨지고 뼈가 부서지는 소리를 낸 연후에야, 그 누런 털이 너 덜 너덜 해지고 그 몸뚱아리가 흐느적 해질 무렵에야 나는 녀석을 집어 던져 주 었다. "허..억.허억.." 휴런의 쪽은 그다지간단하지가 않았던 모양이다. 녀석의 몸은 지나친 출혈로 상당히 심했다. 어느새인지 머리가 식은 뒤에 보니 녀석의 허벅지와 배에도 철시가 박혀있었다. 만약 전투모드가 아닌 상태에서 다쳤다면 당장이라도 나자빠졌을 상처였다. 그러나 그 녀석의 앞에 놓여진 누런 털의 녀석들은 살아 있지 않았다.휴런이 내 갈긴 그 공격으로 놈들은 배가 터진 채 내장을 밖에 드러내고 진흙탕 위에 나뒹 굴고 있다. 휴런의 눈은 아직 붉은 빛을 띄우고 있었지만 점차 전투 모드가 풀리고 있는 것 은 확실했다.녀석은 이 상태에서 전투 모드가 풀리면 죽는다. 녀석의 배를 찢어 내장을 터뜨린 것은 나요,팔뚝을 부러뜨린 것도 나인데 녀석 을 지치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이 누런 털의 보잘것 없는 사인족 놈들이었다. 이 누런 털은 녀석들이 전투모드로 휴런을 공격했다는 증거다. 무엇보다 휴런을 지치게 한 것은 연속적인 세번의 전투모드와 지나친 출혈이었 다.나는 내 가슴에 박힌 철시를 천천히 쥐고 힘을 주었다. 쿠우 하고 이놈의 재수없는 물건이 내 천금같은 피를 뿜어내면서 빠져나온다. 살점을 찢고 내 근육을 찢으면서 기어나오는 이 저주받을 놈을 끄집어 내면서 나는 연신 욕을 퍼부어댔다. 아프다. 제길! 아프단 말이다! 최후로 남은 나의 굴강한 이성을 잡고 철시를 뽑아내 바닥으로 내던졌다.너무 아파 숨이 턱턱 막혔다.눈앞이 아찔하고 머리가 띵했다.어쩌면 독이 묻혀졌는지 도 모른다. 고개를 들고 휴런을 보자 녀석은 비틀 비틀 하더니 지가 죽여버린 시체위에 털 썩 주저 앉았다.나는 녀석을 마주 보고 바위위에 걸터앉았다.아픔으로 정신이 아득했지만 녀석이 전투모드가 풀려 죽기전에 지혈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망설였다. 녀석은 나의 라이벌,나의 적수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내 아우이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녀석을 죽이려고 쫓아다니던 차였다. 푸하하하하하.... 웃음이 터져나왔다. 나는 천천히 일어서서 아직도 천공의 여신이 쏟아 부어대는 빗줄기를 맞으면서 늘어진 휴런을 바라보았다.휴런은 파리한 얼굴을 하고 이미 첫번째 전투모드로 돌아가 있었다.그 전투모드마저 풀리면 녀석은 죽는다. 손을 뻗어 녀석의 몸을 끌어안았다. 녀석의 몸을 끌어안고 제일 먼저 엉망진창인 복부의 상처를 잡았다.이 상처를 잡아 묶고 내장을 도로 집어 넣었다.철시를 뽑아내자 녀석은 의식을 잃은 주제 에 덜렁 덜렁 몸을 흔들며 괴로워 했다. 빗물과 내 피로 인해 시야가 흐렸지만 나는 묵묵히 녀석의 뱃가죽을 잘 잡아 꿰 매기 시작했다.손톱끝으로 상처를 부여 매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그리고 천천히 핥아주었다. 타액에는 지혈의 효과가 있다. 이 놈의 상처를 핥아주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라고 생각하면서 천천히 녀석을 핥 았다.늘어진 녀석의 몸이 조금씩 고통으로 진동하는 것을 느끼면서 나는 녀석을 천천히 안아 올렸다. 어딘가 비를 피하고 녀석을 눕히는 것이 좋겠다. 푸욱 갑자기 기괴한 소리가 터져나왔다. 나는 녀석을 안아 든 채로 정지했다. 고개를 떨구니 내 발 아래로 하염없이 흐르는 붉은 피가 보인다. 내 가슴에서 새어나오는 붉은 액체다. 내 가슴에 손을 대고 있는 것은 휴런의 손,그리고 그 손은 이미 길고 긴 손톱을 내 가슴에 박은 차였다. 고통보다는 충격으로 나는 휘청였다. 그 손톱이 내 등밖으로 튀어나왔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나는 비틀거렸다. 녀석의 손톱이 내 심장을 찢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눈앞이 아득해졌다. 아,왕이여.나의 왕이여. 이런 느낌이었나. 나의 형.. 이런 느낌이었어? 나는 비틀비틀 다리가 풀리는 것을 느끼면서 녀석의 몸체를 바닥으로 떨구었 다.내 가슴에 손을 박은 녀석은 바닥에 떨어져서 비틀 비틀 거리는 나를 망연히 바라본다. 그 눈에 남은 붉은 빛을 보고 그 얼굴에 남은 살의를 보고 나는 내가 너무나 어 리석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이 위대하신 쿠베린님 이외엔 전투모드 상태로 이성을 유지할 수 있는 자란 없 다는 것을...나는 잊고 있었던 모양이다. 쿡쿡 웃음이 나온다. 전통적인 도전의 결투도 아니고,그렇다고 등 뒤에서 찔린 배신도 아니고.. 푸하하하하하하하................ 이건 완전히 어리석기짝이 없는 개죽음이 아닌가. 나의 다리는 풀려있다. 나의 가슴에는 피가 솟아나고 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올리고 바위에 등을 기댄다.차가운 느낌이 전신을 떠돌고 나 는 하늘을 바라본다. "후흐흐흐흐흐흐흐....쿠하하하하하하..." 허탈한 웃음이 터져나온다. "쿠브!" 비통한 소리가 내 귓전을 울렸다. 비명과도 같은 절규가 내 귓전을 찢어댔다. 나는 아득한 나락으로 떨어지면서 미친듯이 울부짖는 비통한 외침을 들었다. 그것은 과거에 내가 몇번이고 터뜨렸던 울부짖음 이었다. [쿠베린 막간극] 독주 KUBERIN..... 술이란 잔인한 것. 아무도 모르게 밑바닥에 감추어둔 추악한 비밀을 꺼내 냉혹하게 표면으로 끄집어낸다. 술이란 뜨거운 미혹의 마법. "술 한잔 더 할까?" 스카가 물었다. 나는 녀석의 손에서 맥주잔을 받아들다가 고개를 돌려 가게를 정리하는 사 라에게 물었다. "독한 건?" "갖다 먹어! 하지만 너에게 줄 건없단 말이야!" 사라가 표독스레 외쳤다. 스카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왠 독한 것? 잘 취하지도 않는 주제에?" "아아..그냥 먹고 싶은데." "만약 원한다면 무레주가 있어.아주 독한 놈이야..." "이름이 그게 뭐냐? 무레주?" 내가 미심쩍어 바라보자 스카가 취한 얼굴로 킬킬 웃어댔다. "소문에 따르면 그 술은 주정뱅이가 오줌 싼 걸로 만든 술이래." "죽여주는군." 내가 기가 막혀서 고개를 젓자 스카는 킬킬 거리면서 그 것을 가지러 일어 섰다. 비슬 비슬 몇번이나 쓰러질 듯하면서 녀석은 어디론가 나가더니만 돌아오지 않는다. 기다리고 앉아있는 나에게 사라가 흘긋 물었다. "이제 안 자? 술은 그만 하지?" "아아...한 잔 더. 한동이만 더 줘." "미쳤어? 장사해야지! 그만 좀 먹어! 무슨 술을 동이로 퍼먹어?" 그녀는 팽 돌아지는 소리를 내지르고는 쾅쾅 소리를 내면서 부엌으로 가 버렸다. 혼자 남은 나는 허공을 바라보았다. 진짜 오랜만에 혼자가 아닌가. 사방은 고요했다. 멀리서 개짖는 소리가 들리고 마을 전체는 잠에 빠진 듯 침묵에 잠겨있다. 나는 눈을 감고 몇번이나 몇번이나 잠이나 잘까 하고 생각했지만 머리는 너무나 맑고 뚜렷해서 기기묘묘하게도 옛생각이 자꾸만 났다. 갈색의 청동빛의, 그리고 오만한..그녀. .................. 눈을 감고 그대로 손을 뻗으면 그녀의 부드러운 가슴이 만져진다. 그리고 살짝 눈을 뜨면 나를 바라보는 매혹적인 눈동자가 몇번이나 봐도 질리지 않는 황홀한 빛깔로 미소하고 있었다. 가끔은 타오를 듯이, 가끔은 어린애 같이, 가끔은 우스꽝스럽게, 몇번씩이 나 변하는 그녀의 표정을 보고 있노라면 나는 내가 그녀를 얼마나 사랑하 는 지 깨닫게 되곤 했다. 그녀는 나의 가장 사랑하는 여자였다. 그렇지만 그녀는 나의 도전자였다. 순종적이고도 나를 사랑해마지않는 그런 여자들을 놔두고 그렇게 격렬한 아름다 움을 가진 그녀를 사랑할 때 부터 모든 일은 정해져 있었다. 그녀는 흘러내리는 녹색빛을 띄운 갈색머리칼을 휘광처럼 온 몸에 휘감고 자신 과 비슷한 여자들과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남자들을 거리낌 없이 쳐부수었다. "오호호호호호호...." 그녀의 격렬함, 그녀의 강인함, 그리고 요염할 정도로 매력적인 몸과 눈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를 사로잡은 상대를 똑바로 보는 도발적이고도 도전 적인 눈매가 나를 미치게 했다. 나는 그녀에게 미쳤다. "여자인 주제에 언제까지 도전할 샘이지?" "왕에게 도전할 때까지이지. 물론." 그녀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만약에 내가 당신에게 지고도 살아남는다면 나는 당신을 이길 만큼 강한 아이를 낳을 거야. " "내 아이로 나를 꺾겠다구?" 나는 그녀를 안은 채 비웃었다.그리고 그녀의 호기를 자랑스러워 했다. 아아, 나도 그때는 젊었다. 나는 그녀의 말을 우스개 소리로 들었다. 나는 강했고 나는 자만했고 나는 오만했다. 그녀의 몸을 안고 그녀의 마음을 가졌다고 자만했다. "너같은 여자는 세상에 없어." "당연하지,나는 최고니까." 그녀는 그렇게 대꾸하면서 갑자기 내 팔뚝을 손톱으로 가볍게 긁었다. 살점이 찢어지도록 세차게 긁고 흐르는 피를 핥으며 그녀는 말했다. "아직 강해. 당신은 너무 강해,쿠베린." "당연한 소릴 하지 마라. 나는 왕이야." "나는 강한 자가 좋아. 강한 자를 쓰러뜨리는 게 나의 즐거움이야." "나도 그래." 그녀는 선명한 푸른 눈을 들어서 날 쏘아보았다. "언제나 언제나 당신은 내 눈앞에 있어. 왜 나는 남자로 태어나지 않았을 까?" "그건 네가 내 아내가 되기 위해서야." "흥!" 그녀는 발딱 일어서서 내 침상으로 부터 걸어나갔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평소처럼 웃어 넘겼다. ................ 문득 왼 팔을 들어서 지금은 아무 자취도 없는 흰 팔을 쓸어보았다. 이 팔뚝에는 그녀가 남긴 흉터가 있다.성체로 돌아가면 선명히 피부위에 남을 상처가 이 자리에 있다. 어느 누구보다도 가장 강력했던 도전자 중 한 명이 내 심장에 보이지 않는 손톱을 박고 이 팔뚝에 절대로 지워지지않을 흉터를 남기고 사라졌었다. 지금 보이는 아나스톤 처럼 현란한 빛깔을 가진 그녀의 눈이 아나스톤보다도 더한 마력을 가지고 나의 심장을 쥐어 뜯었다. ........................ "일족의 딸 일렌, 위대한 왕 쿠베린에게 도전합니다." 그녀가 부락 한 가운데에 서서 그렇게 말했을때 나는 그녀에게 심한 배신 감을 느끼고 있었다. 어째서 그녀를 이렇게 사랑하는데도 알아주지 않는 것일까. 오로지 내가 아이를 주고 싶은 여자는 그녀뿐이라는 것을 왜 알아주지않지? 왜 여자인 그녀가 이토록 강함을 추구한단 말인가. 그녀가 강한 것은 내 아내로서도 충분히 강하지않은가. 그녀가 바란다면 나는 몇번이고 몇번이고 어떤 놈이든 죽여줄 수 있는데.그녀가 바라기만 한다면 이 세상 전체를 다 뒤집어 엎어도 상관하지 않는데! 그녀를 위 해서라면 모든 것을 다 줄 수 있는데 그녀는 왜 나를 이런 식으로 배신하는 것 인가! 나는 증오와 배신감으로 온 몸을 떨었다. 역대 왕의 도전자 중에서도 물론 여자가 있었다. 왕이 여자인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그건 드문 경우고 왕이란 언제나 사내가 하는 것이다. 강한 사내가 왕이 되어 일족을 거느리는 것이다.그런데 왜 이렇게 된 거지? 왜 이렇게 강한 여자가 나와 동시대에 태어났고 왜 내가 사랑하는 여자가 나의 도전자가 되어 선 것이지? 나는 증오로 불타는 눈을 들어서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녀는 어떤 도전자보다도 당당하고 단호한 태도로 나를 마주보고 서 있었 다. 여자는 남자보다 대담하다. 그들은 죽음의 순간에도 정신을 흐트리지 않는다. "일렌, 그 도전을 받아들이겠다." 나는 증오로 어두어진 눈으로 그녀를 쏘아 보며 대답해 주었다. ................... "술...더 줘?" 갑작스레 계단 위에서 사라가 말했다. 그녀는 나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던 듯 약간 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되었어." "뭔가 기분이 좋지않은거 같네. 흐응, 여자를 꼬시다 실패했어?" 나는 웃었다. ............. 찢겨진 살과 부러진 뼈를 가지고 바닥에 누운 그녀를 보면서 내 전신에 박힌 그 녀의 부러진 손톱을 뽑아내면서 나는 내 손에 쥐어진 그녀의 심장을 씹었다. 나를 배신한 그녀, 미쳐버릴 만큼 미웠다. 피로 젖어버린 그 머리털을 바라보면서 그 심장을 씹었다. 절대로 아이를 갖지 않으리라. 내가 아이를 갖게 하고 싶은 여자는 나를 배신하고 나를 버렸다. 나를 이길 아이따윈 누구도 낳지 못할 것이다. 뜨거운 광기, 증오,배신감,이루 말할 수 없는 처절한 분노. 그녀는 내 심장을 꿰뚫는데 성공했다. .............. "어쩔 거야? 안자?" "넌 가서 자라." "스카를 기다린다면 이미 늦었어. 그는 아마 취해서 바닥에 널부러져 있을 걸." 사라가 재촉했지만 나는 계속 앉아있었다. 그녀는 들어가지 않고 몸을 반쯤 일으킨 채 나를 바라보고 우물거렸다. 그 때 갑자기 저벅 거리는 발자국 소리와 함께 덜컹 거리면서 문을 열고 누군 가가 들어섰다. 스카다. "어이,어이, 술이 이것 밖엔 없어." 비틀 비틀 스카가 내 앞으로 걸어들어왔다. 그리고는 풀린 눈으로 내 앞에 술병을 내려놓았다. 그는 털썩 자리에 앉더니 술 병의 뚜껑을 열었다. "야, 마셔." "냄새가 지독하군, 뭘로 만든 거야?" 내가 얼굴을 찌푸리자 스카는 히죽 히죽 웃었다. "알게 뭐야? 취하면 되는 거지 뭘 그렇게 따지냐?" 그 말이 맞다. 나는 술을 마셨다. 그게 뭘로 만들어졌던 그건 술이다. 아무리 여자라고 해도 그건 강자였다. 도전자였다. 영원히 아물것 같지 않은 상처를 남긴 그 여자를 내가 영영 잊을 수 없는 것은 그녀를 내가 죽였든 그녀의 심장을 내가 씹어 삼켰든 그녀를 사랑했 기 때문이다. 이 생명 전체를 다 태워 버릴 정도로. .................... 그 심장을 씹어 삼킨 뒤 나는 심장이 사라진 그녀의 시체를 끌어 안고 울 었다. 미친 듯이 울부짖고 광기에 사로잡혀 나는 그 순간 죽었다. 내 몸의 일부분이 죽어 떨어져 나갔다. 비늘이 나간 것인지 아니면 사지가 나간 것인지 혹은 심장의 일부분이 떨어져 나간 것인지 알수는 없었지만 나는 그녀의 피투성이 시신을 부여잡은 채 하염없 이 그 자리에 널부러져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듀나시가 와 주지않았다면 그 자리에서 어떻게 되었을지 나로선 짐작도 가지않 았다. .................... 세월이 이렇게 흘러서 나는 때때로 생각한다. 그녀는 정말 나를 사랑했을까. 단지 나를 도전의 상대로, 왕으로 바라본 것 뿐이 아닐까.나는 그녀를 사랑했을 뿐 사랑받지 못한 거 아닌가.그녀가 날 진정 사랑했다면 도전했을리가 없을 것 인데.그녀는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었던 건가. 백여년간 나는 그 일로 고통스러웠다. 결국 어떤 수컷도 사랑받고 싶어서 버둥거리는 짐승, 이렇게나 오랜 세월이 지 나고 그녀를 이 손으로 죽인 주제에 나는 바라는 것이다. 그녀가 나를 사랑했기를. 그녀의 마음속에 내가 있었기를. 이제 그녀는 죽어서 나는 알아 낼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녀 의 휘날리는 갈색 머리칼 속에 도사린 강렬한 도전의 눈동자, 죽음을 향해 서라도 몇번이고 뛰어 오를 그 강인함, 그리고 그 오만한 기품, 그것은 사 랑하지도 않는 남자에게 안길 여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만이 남은 남자의 상처받은 자존심을 쓰다듬는 위로거리다. 그리고 배신감에 눈이 먼 멍청한 수컷의 신세 한탄인 것이다. "야, 뭘해? 술이나 마셔. 네가 가져오라고 했잖아?" 스카가 꼬부라진 어투로 나를 다그친다. 뭐어, 이것도 좋군. 이것도 좋아. 때로는 여자가 없는 사내끼리의 우정도 좋다니까. 제 9화 죽음 KUBERIN....... 외로움이 아닌 고독 속에서 침묵을 지켜라 그리하면 그대 삶 속에 버티고 있던 죽은 자들의 영혼이 다시끔 죽음 속에서 그대를 둘러쌀 지니 그리고 그들의 의지는 그대를 지킬지니 그대, 그대로 있으라. BY E.A.POE 1 무슨 일이 벌어진 거냐고 나에게 물어도 지금 당장은 말할 수가 없을 것 같다. 난 아무것도 모르니까. 나는 죽은 게 아니었던가. 하지만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벌건 저 등불은 대체 뭐냐? 설마하니 이 생명을 받아간 대지의 여신의 신전 한 구석에선 여신이란 위명에 어울리지않게 인간들 처럼 기름등잔불을 쓴단 말이냐? 내가 그런 합리적인 생각을 하고 누워있는 동안 누군가가 척척 하니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 발자국 소리는 인간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사방에 놓여진 물건들은 분명히 인간의 것들로 내가 누워있는 침상 에서는 인간의 살 냄새가 풀풀 난다. 약간은 축축한 습한 내음은 얼마전에 내린 비와도 무관한 것은 아니겠지.그리고 지금 내 몸과 사방에서 나는 약초내음같은 것도 분명 나의 상태와 무관한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 방은 정말 음침하기 짝이 없어 나의 취향이라곤 도저히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장식이라곤 바닥에 깔린 낡아빠진 양탄자가 전부다.그리고 군데 군데 짐승 가죽들이 널려있는 꼴을 보니 이 곳이 사냥꾼의 거처라고 하는데 나는 내 손톱하나를 걸어도 좋다. 그러나 저러나 이 곳은 분명히 사냥꾼의 거처같긴 한데 내가 느끼는 냄새와 기 억은 사냥꾼이라고 하는 것과는 거리가 상당히 멀다고 외치고 있다. 이건 약간은 재수없으면서도 약간은 반갑기도 한,기기묘묘한 기분인데 이 기억 을 에누리 없이 되살리고 본다면 역시 녀석의 팔 한쪽 정도는 콰악 깨물어 버리 고픈 심정을 억제할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발자국 소리와 함께 녀석이 다가와서 날 들여다 본다. 내가 헤에 헤에 하고 깊은 한 숨과 함께 눈을 뜨자 나를 바라보는 얼굴이 보였 다. "헤이,헤이,잘나신 묘인족의 임금님." 녀석이 흰 이를 드러내며 시익 웃었다. 룬 아크 더 팰리어스 룬 킬트 더 마이오스 내가 아는 단 두명의 마법사 이름이다. 아니,내가 기억하는 단 두명의 마법사 이름이다. 이름도 더럽게 길었다.게다가 서로 양식이 비슷해서 기억하는 거지 내가 놈들 이름을 줄줄 외워줄 이유는 사실 없지. 빛의 최고위마법사 아크, 혹은 지상에 존재하는 가장 위대한 마법사 아크, 어둠 의 최고위마법사 킬트, 혹은 지상에 존재하는 가장 강대한 마법사 킬트 라는 의 미를 가진 이 가증스런 놈들은 인간의 수명을 이미 건너뛰었다. 하늘을 가르고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내고 이계에서 마물을 소환하고 땅을 가르 고 성을 부수고 수천을 일격에 죽여버리고 인간 도시 하나를 손가락 하나로 전 멸시키고 심심풀이로 산 하나를 없애는 놈들이다. 둘 다 재수없긴 마찬가지지만 특히 더 재수없는 녀석은 룬 아크 더 팰리어스. 이 자식은 한쪽은 백의의 구원자,한쪽은 홍의의 파괴자란 두개의 얼굴을 가진 놈이다.나로 말한다면 홍의의 파괴자쪽이 내 취향이다. 어느 날 그 이야길 해주었더니 녀석이 한다는 소리가... "어머,싫다.당신 쿠베린,너무 여자를 좋아하네.하지만 나는 이미 정해진 임자가 있는데?" "누군데?" "룬 아크 더 팰리어스." "...." 놈은 이중인격에다가 이중 육체를 가진 놈으로 홍의 쪽은 여자,백의 쪽은 남자 다.게다가 그 양쪽이 서로를 죽고 못살 정도로 좋아한단다.이 정도 되면 이놈은 그 끔찍스러운 자기애(自己愛)와 자아도취만으로도 충분히 이 세상 인간들 중 최악에 속할 수 있다. 물론 다행히도 그 두 놈은 절대로 서로 만날 수 없다는 점이 있긴 하지만. 그러나 알수 없다. 그 엄청난 마력을 가진 녀석이 어떤 이상한 짓을 해서 자기 몸과 영혼을 분리해 낼 지 그건 나도 장담할 수 없다. 룬 킬트 마이오스가 어떤 놈이냐..하면...암흑마도의 왕이다. 이 자식은 마법사주제에 검도 능숙한 마법검사로서 십대인 그 시절 부터 태연자 약하게 떠들어대곤 했었다. "나는 왕이 될 거야.나는 원래 인간들만이 아닌 모든 종족의 왕이 되기 위해 태 어난 불굴 무쌍의 위대한 존재야." 그 놈의 성격을 한마디로 요약해주지. "쿠베린,당신이 죽으면 나 당신의 그 엄청나게 강한 몸을 기꺼이 언데드로 만들 어주겠어.그리고 그 엄청난 힘을 나를 위해 봉사해주길 바래." ...이런 대사를 열 댓살때 한 놈이다. .....쳇.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놈이 누구냐구? 룬 킬트 마이오스. 그 잘난 척하기로 말한다면 땅을 떨어 울리고 하늘을 가르고 바다를 뒤엎을..아 니 말이 바뀌었다. 잘난 척하기로 말한다면 하늘을 울리고 바다를 가르고 땅을 뒤엎을 놈이다. "너 여기 왜 있어?" 내가 놈을 보고 묻자 녀석은 삼백살이 가까운 주제에 새파랗게 젊은 청년의 얼 굴로 시익 웃어보였다.새까만 검은 머리와 새까만 눈동자를 한 이 놈은 역시 검 은 망토와 검은 튜닉과 검은 장화와 검은 검과 검은 검집과 검은 말과 검은 흑 진주를 귀걸이로 하고 있었다. 어느 날인가 내가 물었다. "너 대체 왜 그렇게 검은 색에 집착하는 거냐?" "내가 흑마법사니까." "....." 각설하고, 지금은 이 녀석에 대해 일일이 회상씬을 벌일 새는 없다. "너 여기 왜 있냐고 물었잖아?" "너야 말로 왜 여기 널부러져 있었어?" "음,당했어." "졌냐?" "졌다고 보긴 조금 이상하긴 하지만 어쨌든 죽기 직전이었던 모양이군.넌 날 어 떻게 살렸지?"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녀석의 얼굴에 음침한 미소가 퍼져나왔다. 아악! 괜히 물었다. "훗훗훗....나의 마력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예정되어 있는 것이지.나는 전 지 상의 종족들의 왕이 되기 위해 태어난 몸.너 하나따위 살리지 못할 내가 아니라 고 생각하지않냐?" 묻는 내가 바보였다. "그건 그렇고 쿠베린,네 시체 주변에 굴러다니는 그 괴이쩍은 시체들은 네가 죽 인거냐?" "그래." "그 시체들에게 당한 건 설마 아니겠지?" "아냐.너 그런 것들에게 내가 당하리라고 생각했냐?" "흠,그건 아냐,무엇보다도 너의 시체에서 이렇게 길고 긴 손톱을 발견했으니 까." 킬트는 나에게 검붉은 얼룩이 그대로 남아있는 세개의 손톱을 건네주었다. 이 손톱은..분명히 휴런 녀석의 것이었다.휴런 녀석은 나를 해친 그 순간 이성 이 돌아와서 발광했던 모양이다. 그 때문에 자신의 손톱을 자기 손으로 잘라 내던지고 사라진 듯 했다. "주변에 다른 놈은 없었냐?" "없었어.내가 왔을때는 다 죽어 허옇게 물에 팅팅 불은 네 시체만이 있었어." "농담하지마.심장을 완전히 찢기지 않았기때문에 살아난 거잖아." "그야 그럴수도 있지,그러나 아무리 네가 저 전설의 황금의 관의 소유자라 해도 나의 이 엄청나고도 훌륭한 암흑마력이 없었다면 이렇게 금방 펄펄 뛰며 살아났 을 것 같은가?" 나보다 말은 몇배나 많은 이 녀석을 대체 누가 암흑마도의 암흑대제라 불렀단 말인가.제기랄. 나는 욕설을 퍼부우면서 비슬 일어나 앉았다. 우악! 아프다. 눈물이 찔금거릴 정도로 아팠다. 머리가 지끈 지끈한 상태로 고개를 드니 새까만 눈을 반짝이는 킬트가 물었다. "그건 그렇고 말인데 너 혹시 흑마법사 길드라는 놈들 아냐?" "...들어 본 거 같은데." "네가 죽여 널어 놓은 놈들이 아무래도 그 놈들 같아.난 그놈들을 쫓아 오다가 널 발견한 거야." "그 흑마법사 길드..다크..뭐라는 놈들 말야?" "그래." 킬트가 기묘한 미소를 짓고 내 앞에 앉았다.녀석은 흥미진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하면서 나에게 물었다. "놈들에 대해서 아는 게 얼마나 있지?" "별로 없어.그러나 비오나라면 조금 알겠지." 나는 비오나가 했던 말을 다시 되새겼다. "비오나가 누구야?" 아차! 그러고 보니 그 놈의 인간들의 쌈박질이 어떻게 되었을까! 그 곳에는 에메스와 비오나와 튜나와 린과 엘레와 가빈과 미트라가 있는데! "이곳에서 내가 정신잃고 있던 게 얼마나 되었지?" 내가 급히 묻자 킬트는 흐음 하고 가볍게 대꾸했다. "사흘." "에엑!" 나는 벌떡 일어섰다. 오두막의 한 구석에 킬트녀석이 한 구석에 돌덩이로 만들어 놓은 불쌍한 사냥꾼 이 보였다. 사냥꾼은 석화마법으로 굳어진 채 입을 저억 벌리고 회색빛이 된 혓바닥을 구부 린 채 무언가 필사적으로 말하려는 표정으로 일그러져 있었다.그 모습을 지나쳐 서 밖으로 나오자 햇빛이 쨍 했다. 역시 그 무지 막지한 폭풍우가 끝나고 해가 나온 것이다. 사방은 고요했다.아니 고요하다는 표현이 맞는 것은 아닐 것이다.숲안 전체에 울려대는 풀벌레 소리,새 소리가 시끄럽게 떠들어 대고 있었다.단지 내 귀에는 나를 위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지않을 뿐이다. 나는 코를 들고 냄새를 맡아보았다. 멀리서 피내음이 난다. 역시나 멀리오긴 온 모양이다. 그러나 대체 그때 공격하던 사인족 놈들은 우리들을 어떻게 찾아냈던 것일까.아 니면 우리들을 쫓아왔던 것일까. 그렇다면 몹시 거슬린다.게다가 그 마법사놈들 은 더 마음에 걸린다. 나의 예리한 판단력과 기억력에 의하면 희뿌연 전투모드에서의 기억이긴 하지만 분명 녀석들은 휴런을 둘러싸고 생포하려 하고 있었던 듯 했다. 아,이렇게 생각만 할 때가 아니지.어서 가는 게 좋겠다. "쿠베린." "아?" 킬트가 나를 보고 물었다. "어느쪽으로 갈건가?" "랜달 브리거." "랜달 브리거? 함락되었잖아?" "벌써?" "벌써가 뭐냐? 이 일대 다 알고 있는 사항이지." "제길...그럼 거기서 살아남은 애들이 어디 있을 지 혹여 아니?" 킬트는 눈을 크게 뜨고 날 바라보았다. "너 인간이랑 같이 산다는 소문을 들었지만...그것 사실이었나?" "그래.인간이랑 같이 산다." 나는 팔짱을 끼고 초조함을 삼키면서 되물었다. "너,혹여 그 애들의 행방을 알 수 있어?" "이 위대하신 흑마법사의 왕에게 그런 말을 하면 내가 얼마나 불쾌할 지 생각이 나 해 봤어?" "...." 킬트와 내가 만난 것은 삼백여년전이다. 녀석은 그때 애송이 마법사였다.그 마법사가 이렇게 커서 잘난 척을 하고 있는 데 그 때만 해도 녀석은 나를 쿠베린님이라고 불렀었다. 아아..길게 이야기 하지 말자.전에 꽁지 빠진 늑대녀석이 뭐라 했더라. 절대 절대 아크나 킬트와 마주치고 싶지않다고 했었다.아크는 그렇다 치고 킬트 는 강한 종족에 대해선 지나친 집착심을 가지고 있었다. 묘인족이 조금만 더 수가 많았어도 이 녀석은 틀림없이 양산형 묘인족을 만들자 고 했을 것이다. 아,잠깐! 양산형 묘인족? 아니 양산형 사인족! "이봐! 얼간아!" "다크 샤이닝!" 갑자기 퍼어억 하고 시꺼먼 불길이 내 눈앞에서 터졌기때문에 나는 뒤로 튕겨 피해냈다.허헉 하고 내가 가슴을 쓸어내리는 순간 음침한 얼굴을 한 킬트가 나 에게 말했다. "이 점잖고도 위대하신 흑마법사의 대왕께 그따위 소릴 하면 어떻게 하겠다는 건가?" "진짜..일일이 수식어를 남발하는군.이봐,그렇다고 막 회복한 나에게 그딴 짓을 하는 거냐!" 내가 화가 나 외치자 킬트는 어깨를 으슥해 보였다. "묘인족은 단단해서 다크 샤이닝 정도로 죽을리가 없잖아." "좋아,어찌되었든 하나 묻자! 사인족과 인간의 혼혈을 만들어낸 게 너냐!" 그 말에 킬트의 검은 눈이 가늘어졌다. KUBERIN....... 외로움이 아닌 고독 속에서 침묵을 지켜라 그리하면 그대 삶 속에 버티고 있던 죽은 자들의 영혼이 다시끔 죽음 속에서 그대를 둘러쌀 지니 그리고 그들의 의지는 그대를 지킬지니 그대, 그대로 있으라. BY E.A.POE 2 "혼혈..? 사인족과의?" "네 짓 아냐? 그 정도의 수법을 쓸 놈은 많지않을 거 아냐? 우리 종족들은 혼혈 이 안된단 말이다.묘인족은 절대 혼혈이 불가하고 사인족놈들은 여자를 건드리 면 사인족이 나오지 혼혈은 안나와.그런데 얼마전 얼치기로 섞인 놈들을 봤단 말야!" 킬트는 팔짱을 끼고 검은 옷자락을 펄럭이면서 심사숙고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가..흥미진진하군..." "흥미진진같은 소리마.어떻게 된 건지 아나?" "지금 이 대륙 전역을 쓸고 있는 괴이쩍은 사인족들이 그럼 그런 혼혈이란 거 냐?" "너도 알고 있었어?" 내가 놀라 킬트를 보자 킬트는 고개를 끄덕 끄덕해보였다.저 밉상맞은 면상을 한 대 후려갈겼으면 좋겠지만 그럴 새가 없으니 일단 참는다. "나,암흑마도의 대제께서 이곳에 손수 온 이유는 반도를 잡기 위해서다." "반도?" "내 제자중 한명이 튀었어." "에?" "내 실험도구를 가지고 튀었단 말이다." 그는 안그래도 음침한 얼굴에 더더욱 음침한 그늘을 드리우며 낮게 말했다. "그럼?" "그 놈이 감히 흑마법사의 길드장을 자처하면서 세력을 넓히고 있다는 이야길 들었다.그래서 놈을 없애버리기 위해 이 내가 손수 온 거지." "호오,다크 엘더라고 하는 그 흑마법사집단이 네 제자가 만든거야?" 킬트의 눈에서 검은 빛이 번쩍였다. "다크 엘더?" "비오나에게 잠깐 들었지.그러나 그건 그렇고 그 놈이 사인족 혼혈을 만들 수 있단 말인가?" "글쎄다.녀석이 자기 제자들 일곱을 데리고 도망갔다.내가 이렇게 손수 오시리 라곤 생각지 못하고 있을 테니까 분명히 잘난 척하고 있을 게야." 그는 분노를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부르르 떨더니 말했다. "어찌되었든 그 비오나라는 계집을 만나서 자세한 것을 물어보면 되겠군.쿠베 린." "헤에.비오나가 여자란 것을 어떻게 알았어?" 내가 놀라 묻자 흐 하고 킬트가 음흉하게 웃었다. "네가 이름을 기억한다면 그건 여자지.네가 남자이름따윌 기억할 리가 없잖아?" "....." 석화가 된 사냥꾼을 두들겨서 랜달브리거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을 알아낸 녀석 과 나는 출발하기로 했다. 내가 막 뛰어나가려는 순간 갑자기 킬트가 큰 소리로 불러 세웠다. "쿠베린!" "뭐야?" "너와 내가 가야 하는데 너, 나를 업고 가라." "미쳤냐? 사내자식을 내가 왜 업냐? 게다가 너라고 하는 괴물단지를?" 내가 기가 차서 외치자 킬트의 얼굴이 음산해졌다. 아,이 녀석 얼굴이 음산해지면 내가 괴로워진다. "내가 이런 하찮은 일로 마법력을 써야 한단 말이냐? 너는 나 하나 업고 뛰어도 땀 한방울 흘리지않잖아!" "네 마법력으로 가쁜하게 날면 될 거 아니냐? 너 비행술법을 알잖아?" "흐.내가 소환수를 불러 타고 간다고 쳐도 마을 근처에선 내려야 하지않나? 게 다가 소환수를 본 자들이 배반자이기라도 하면 더 시끄러워 진다." 나는 한동안 음산한 녀석의 얼굴을 바라보며 침묵했다. "차라리 너, 솔직하게 내게 업히고 싶어서 그렇다고 말하는 게 어떠냐?" "다크 샤이닝!" 녀석을 업고 내달리면서 나는 어느샌가 세월의 무게를 맛보았다. 이 녀석은 자 기 자신의 몸에 시간 정지의 술을 걸어놓았다.이 녀석의 마법력이 한계에 달할 때 이 녀석의 몸은 한 줌 흙으로 돌아가 버릴 것이다. 인간들의 수명에의 집착은 놀라울 정도이지만 생각해 보면 인간들의 수명은 고 작해야 60년에서 70년 선이다.그 나이라면 우리는 겨우 성년에 이르를 때이고 엘프라면 아직도 어린애일 때이다. 빨리 늙고 빨리 죽어가는 인간들이 더 욕심이 많은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일런지 도 모른다.죽기전에 빨리 빨리 무언가를 이루고 싶어서 몸부림 치는 인간들의 심정은 이해할 수 있으니까. "너 세계정복한다고 하더니 어찌된 거냐?" 내가 문득 생각나 물었다. 녀석은 내 목에 고개를 파묻고 휙휙 지나치는 바람으로 숨이 막히는 지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다.내가 묻자 억지로 웅얼거리듯 녀석이 말했다. "엄청 빠르군." "말해봐,작은 소리로 말해도 이 몸께선 알아들으시니까." 내가 그렇게 말하면서 절벽에서 도약했다. 녀석의 숨이 컥 하고 막히는 순간 나는 공중을 유영하듯이 다리를 움직여 건너 편 절벽끝에 착지했다.물론 떨어져도 죽는 건 녀석이지 내가 아니니까 나야 느 긋하다.사실 떨어지는 순간 녀석은 비행술을 쓸테니까 죽진 않을 것이다. 착지하자 녀석이 안도의 한 숨을 푸욱 내 쉬었고 나는 재촉했다. "말해보라니까." ".....너,엘프나 용족이 세계를 지배하겠다고 나서는 거 봤냐?" "아니." 나는 짧게 말하면서 눈 앞에 놓인 시냇물을 뛰어 넘었다. 덜컥 하고 착지했기때문에 등에 업힌 이 녀석은 혀를 깨물었는지 잠시 버벅거리 면서 낮게 욕설을 퍼부었다. 수풀사이로 다시 진입했다.바삭 바삭하고 나뭇잎 들이 뺨과 다리를 스쳐간다.고 개를 떨구고 내 등에 파묻은 녀석은 자신을 후려갈기는 나뭇가지들을 피하느라 한동안 몸을 사렸다. 나는 약간 그런 놈이 얄미워져서 일부러 조금 거칠게 움직였지만 녀석은 돌덩이 처럼 내 등어리에 매달린 채 꼼짝도 하지않았다. "계속해." "...뛰든지 말하든지 한가지만 해." "뛰는 게 나지,너냐? 넌 지껄이기만 하면 되잖아? 내 등에서 편안히 가는 주제 에." "...이걸 편안히라고 말하는 거냐?" "후회되면 소환수라도 부르렴." "징그러운 놈." 덜컥 덜컥 흔들리는 녀석을 매달고 다시 나는 산기슭을 달렸다. 아래로 내달려가기때문에 녀석은 계속해서 턱을 덜그럭 거리면서 내 팔뚝을 움 켜 쥐고 있었다.앙상하게 마른 손가락과 긴 손톱이 내 살갗을 찔렀다.아프진 않 지만 신경 거슬린다. 대체 왜 마법사들은 다들 손톱을 기르는 거냐? 무기로 쓰는 것도 아닌 주제에. "....나이 200세가 되어서 세계정복하겠다고 나서는 놈이 있다면 ...그 놈은 어린애라고 본다." "뭔 소리야?" "인간의 수명은 80년이라 쳐도 나이 70먹은 노인네가 갑자기 흐흐흐 웃으면서 나는 세계를 정복하겠다고 나서진 않는단 말이다." 녀석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즉 네 말에 따르면 넌 나이가 들어서 세계정복은그만 두었다는 거냐?" 내가 희안해서 중얼거리자 그는 낮게 자조하듯 웃었다. "나이가 젊어야 세계를 정복하여 자기 발밑에 두고 싶은 거다.다 늙어서 세계를 발밑에 두겠다고 새삼 나서는 놈은 없어." "왜? 있을 법 한데? 70살이 뭐가 그렇게 늙었냐?" "그건 네 생각이지? 묘인족의 수명은 아무도 모르지않나? 수백년씩 가니까 인간 수명 70년은 우스울 테지." "갑자기 도통한 인간처럼 구는군." "후...." 묘인족의 수명이라... 그러고 보니 생각해 본 일이 없었다. 묘인족들이 명대로 늙어죽은 경우가 없기때문일까. 다들 도전과결투로 죽었기때문에 늙어 죽는 경우는 불구가 된 경우를 빼면 거 의 없다.사지가 멀쩡하면 싸우고 또 싸우고 또 싸운다.쓰러져 죽을 때 까지 싸 우는 것이다.내가 지금 몇살에 달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최소 5,600세는 넘었 다.나보다 더 늙은 녀석은 묘인족중에 몇이나 되는 지 그것도 모르겠다. "세상 모든 정복자들은 다 젊었단 말이야." "진짜냐?" "그래.세상의 모든 정복자들은 젊은이들이다." "그래서 넌 늙어서 관두었어?" "늙었기때문에 정복따위 그다지 대단한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단 말이지." 그가 웃었다. "그런주제에 지상최고의 마법사니 운운하는 그 간지러운 수식어를 나에게 남발 하는 이유는 뭐지?" "재미지." "....." 갑자기 녀석은 길바닥에다 패대기를 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지만 참았다.지금 은 그런 짓을 할 때가 아니다.이 놈의 마법력이라면 꽤 쓸만한 것이니까 저 사 인족의 괴이쩍은 비밀을 밝혀낼수가 있을 테니까. 문득 이 놈도 나이가 드니 성격이 많이 바뀌었구나 하고 생각되었다.전에는 음 산할 뿐더러 오만하기 짝이 없어서 나에게 대어들거나 혹은 나를 실험재료로 쓰 고 싶다거나 하는 말들을 지껄여 댔지만 지금은 그렇진 않았다.무언가 상당히 여유로운 기색 이었다. 나이가 들었기때문일까. "아크 자식은 소식 들었어?" "못들었어." "흐음.." "너에겐 연락하고 있지않았나?" "아니.할 리가 없지." 킬트는 무심히 말했다. "그래도 너희들은 라이벌이 아니던가? 그 괴이쩍은 길다란 이름을 운율에 맞추 어서까지 지을 정도잖아?" "쳇!" 녀석은 침묵했고 나도 침묵했다. 그리고 우리들은 두개의 산을 넘어서서 드디어 랜달브리거에서 가장 가깝다는 소도시 에녹카든에 도착했다. 에녹카든은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랜달브리거의 일이알려진 탓인지 에녹카든의 경비들의 눈은 시퍼렇게 빛나고 있다.지나가는 행인들은 거의 없고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방책을 높히 세운 채 창병들은 창날을 앞으로 하고 있었다.게다가 문지기들의 얼굴은 살기가 돌고 긴장의 기색이 지나치게 완연해서 공포에 젖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우리들이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날카로운 눈매를 한 경비가 흘긋 우리들을 보았 다. "어디서 왔나?" "랜달 브리거." 내가 말하자 녀석은 갑자기 탓 하고 창날을 들이대고는 쏘아 보았다. "넌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순간 사방에서 경비들일곱이 우르르 몰려들더니 우리들에게 창날을 들이댄 채 완전히 포위했다.킬트의 눈이 점점 음산해지는 순간 내가 점잖게 말해주었다. "나는 엘리야의 쿠베린이다." "그게 누구냐!" 경비 하나가 말하는 찰나 갑자기 그 옆에 있던 또 다른 견문 넓은 경비가 급히 물었다. "당신이 진짜 엘리야의 쿠베린이오?" "그래. 엘리야의 쿠베린은 세상 천지 나 하나다." 경비들은 나의 위명을 듣고 서로 수군덕거리면서 웅성거렸다.나는 조금 짜증이 나서 큰 소리로 말했다. "이봐! 나 하나 들어가는데 이렇게 오래 기다려야 한단 말이냐!난 랜달브리거 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나 알아보러 온 거란 말이다!" "기다려!" 경비 하나가 건방지게 그 따위로 지껄이자 화가 치밀어서 나는 창날을 잡아 치 우고 제일 가까이 선 경비의 멱살을 쥐어 잡았다. "엣!" 경비가 내게 멱살을 쥐어 잡혀 버둥 버둥하는 동안 나는 점잖게 다시 물어 주었 다. "랜달브리거에 있던 공작 일행들은 어찌되었지?" "...에에..공작? 아아아..베델공작전하..?" 경비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숨이 막히는 지 켁켁 거렸고 뒤에 있던 경비 들은 나에게 창날을 들이댄 채 고함만 치고 있었다. "그만해라! 그만!" 물론 그만하라고 소리를 지른다고 해서 그만 둘 나는 아니기에 나는 여전히 경 비의 멱살을 쥐고 있었다. "그래! 그 애는 어찌되었지?" 내가 점잖게 물으면서 멱살을 이리저리 흔들어 대는 동안 갑자기 낯익은 목소 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쿠베린?" 경비의 멱살을 휘익 집어 던지고 보니 그 자리에 약간은 초췌한 얼굴의 기생오 라비가 있었다.그리고 그의 옆에는 흑수염이 서 있었다. "어,살아 있었군.그 날 이후 못 봐서 말이야!" 내가 핫핫 웃자 기생오라비는 어색한 표정을 지으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응,그렇군.무사했었군. 갑자기 당신 부하들이 우르르 가버려서 우리들은 놀랐 어." "비오나는? 화났나?" 내가 웃으면서 묻자 기생오라비는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냐." "에메스는 어떠냐?" "자..잘 계시지." "미트라는?" "..잘 계셔." 나는 흐음 하고 턱을 잡았다. "그럼 이럴 것이 아니라 녀석들을 좀 보러 가야겠군." 내가 앞으로 걸음을 내딛자 기생오라비는 으응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어쩐지 이 상한 얼굴이다.평소같았으면 길길이 뛰고 난리를 칠 그였건만 왠지 태도가 어색 한 것이 묘한 느낌이 들었다. "진짜 인간들과 친해진 모양이군." 킬트가 검은 후드를 눌러쓴 채 중얼거리듯 말했다. 나와 킬트는 기생오라비에 의해 안내되고 있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않은 채 불길한 등을 내게 보이면서 걸었다. 그를 따라 에녹카든의 성채 내로 들어서자 길거리에 사람들이 웅성이는 것이 보 였다.사람사는 게 어디나 그렇듯 위험이 다가와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는 사람 들도 모두들 먹고 마시고 떠들고 있었다. 아이들 몇이 우르르 모여 들어 흙장난을 하고 있다가 우리들이 지나가자 수근거 리면서 들여다 본다. 아낙네들 몇이 오가면서 수다를 떨고 있다. "피난 가지 않아도 될까?" "가면 어디로 가겠어?" "여기보다도 큰 랜달 브리거가 모두 죽었다는데..." "이게 왠 난리람.." 인간들 떠드는 소리는 뻔했다. 도망치자는 자들과 싸우자는 자들과 단념한 자들이 얽히고 섞여 어디나 이런 불 온한 분위기를 조성한다.싸움이란 것은 두 세력이 맞부딪쳐서 끝장을 보는 것이 다.어느 한 개인이 아무리 잘난 듯 그 개인에게 고무되는 집단이 강력해지지않 는한 싸움,전쟁이란 이길 수가 없는 것이다.그러니까 인간들이 말하는 기백이라 는 둥,배짱이라는 둥,근성이라는 등등의 이야긴 어디까지나 일 대 일의 쌈박질 에서나 써먹는 이야기다. 집안 하나 지키는데 소요되는 인원은 생각보다 많다. 가장이 지키자고 주먹을 뒤흔들더라도 꼬맹이 하나가 심심풀이 삼아 창문이라도 벌컥 열어 제끼면 그 걸로 끝장이다. 그러니까 어린 꼬맹이 에메스여, 내 충고하건대 세상을 지키는 것도,나라를 지 키는 것도, 집안을 지키는 것도 혼자서는 절대로 할 수있는 게 아니란 말이다. 너는 그저 네 몸 하나나 제대로 지켜라. 그게 바로 이 위대하시고도 현명하신 쿠베린님의 고견이시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걷는 동안 나와 녀석들은 조금 큰 저택의 안 쪽으로 들어서 고 있었다.안쪽에 들어서자 군마들과 여기저기 휴식을 취하고 있는 병사들이 보 였고 그들 사이로 흑수염의 부하들인 기사들 몇이 얼굴을 보였다.아는 냄새들이 조금씩 쿡쿡 나기 시작했다. "어,쿠베린이다." "쿠베린 아냐?" 다들 한 마디씩 던지길래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말해주었다. "이봐,꼬맹이들아.내 이름을 함부로 그렇게 불러대다니 겁이 없구나." 그들이 낮은 목소리로 웃음지었다. 그러나 왠지 그들의 얼굴이 밝지 않았다.허긴 꼴들을 보아 하니 랜달 브리거도 지키지 못한 패잔병의 몰골이다.그래, 이걸로 에메스자식이 좀 열이 식었으면 좋으련만. 아까 킬트의 말대로 인간이란 젊어야 세계정복도 꿈꾸고 젊어야 세계구원도 꿈 꾸는 것이다.에메스 녀석은 아직 너무 젊어서 국난 극복의 구국영웅이 되고 싶 어 안달하고 있는 것일게다.아마 녀석이 60세쯤 되면 뭔가 느긋해져서 나의 말 을 이해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옆에 있는 킬트녀석은 그렇게 깨닫는 데에 꽤 나 오래 걸렸지만 말이다. ..흠,그러고 보니 하나 깨달음을 얻었군 그래. 복도를 막 거치자 마자 몇몇 부상자들을 치료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던 시녀들 이 나를 흘긋 흘긋 보고 기생오라비를 흘긋 흘긋 보며 스쳐지나간다. 그래,나같은 미남을 보니 마음이 혹하겠지. 그 마음은 이해하지만 난 왠지 점점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하고 있으니 지금은 여자에게 눈길 돌릴 때가 아닌 듯해. 방안에 들어서자 마자 나는 벌떡 일어서는 비오나와 가빈을 볼 수 있었다. 그녀의 바로 옆 장의자에 반쯤 누운 에메스의 창백한 얼굴이 보였다.가슴에 붕 대를 감고 있는 것을 보아 상당히 다친 모양이었다.그러나 비오나가 붙어 있으 니 뭐 큰일은 없을 것이라고 나는 내 멋대로 생각했다. 가빈은 날 보자 마자 눈이 휘둥그레 졌으며 동시에 와락 나에게 달려들었다. "쿠베린!" 뒤이어 문을 열고 튜나와 엘레가 튀어 들어왔다. 그리고 비오나와 가빈이 눈물을 가득 담고 마치 비 오듯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 다. "뭐야? 왜그래?" 그 불길한 기분을 참고 나는 큰 소리로 외쳐 물었다. KUBERIN....... 외로움이 아닌 고독 속에서 침묵을 지켜라 그리하면 그대 삶 속에 버티고 있던 죽은 자들의 영혼이 다시끔 죽음 속에서 그대를 둘러쌀 지니 그리고 그들의 의지는 그대를 지킬지니 그대, 그대로 있으라. BY E.A.POE 3 "앞으로 돌진하라!" "뚫어라!" "도망가지 마라!" 맹렬하게 외치던 와중에 에메스가 앞으로 튀어 나갔다. 그의 옆을 방어하면서 달려드는 적병을 막아서던 오스칼이 가느다란 레이피어로 상대를 꿰뚫었다.피가 튀고 자랑거리인 금발이 검붉게 물들어 있었다.방패를 들 어올린 그는 에메스를 돌아보지도 못한 채 크게 외쳤다. "수가 너무 많습니다! 일단 후퇴를!" "좋아! 지금은 어쩔 수 없다! 몇이나 남은 거냐!" 에메스도 엉망진창의 검붉은 피투성이를 하고 있었다.그는 결사적으로 앞에서 전투용 도끼를 휘두르는 로크 해거드를 돌아보았다. 그는 언젠지 부터 방패를 잃어버렸다.장검은 부러진 지 오래였고 들고 있는 것 은 양날 도끼 두 자루였다.그의 바로 옆에서 칼을 휘두르고 있는 것은 아직 십 대를 벗어나지 못한 애송이 기사지망생이었다.로크가 귀여워 해서 데리고 다니 는 아직 17세 밖에는 안되는 소년이었다.그 소년은 이제 겁에 질린 것을 잊고 악에 받친 듯 칼날을 휘두르고 있었다.이것이 소년의 첫 전투라면 너무 심하다 고 생각하면서 로크는 움직이고 있었다. 로크 해거드는 이미 여기저기에 화살을 박은 채 움직이고 있었다.화살을 뽑지않 은 것은 출혈을 막기 위해서 였지만 보는 쪽에서 보면 참혹한 형상이었다. "로크! 길을 뚫어라!" 에메스가 뒤를 덮치는 적병의 창날을 후려갈기며 소리높혀 외쳤다. 로크는 와아 하고 고함을 지르면서 에메스의 앞으로 도끼를 휘두르면서 전진했 다.그러나 그도 한 순간 병사들만 가득하던 주변으로 기마가 나타나자 상태는 뒤바뀌었다. "우아아아아.." 로크는 자신의 정면으로 랜스를 들어 올린 채 돌진해 오는 기사를 보았다. 기사 의 눈에서 흐르는 잔인한 빛깔이 로크의 뇌리를 꿰뚫는가 했다.그 순간 로크의 바로 옆에서 움직이고 있던 어린 소년의 몸이 참혹한 소리를 내면서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말 그대로 기수의 거대한 랜스는 어린 소년의 몸을 들어올리다 시피 했고 소년 의 가슴은 박살이 나서 몇 치아르나 튀어 올라 흙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페퍼!" 로크는 악을 질렀다. 그는 도끼를 다 잡은 상태로 앞으로 튀어 나갔다. 정면에서 기사가 기수를 돌려 로크에게로 돌진해오고 있었다.로크는 그 기사의 투구를 향해 이를 악물고 오른 손에 들고 있던 도끼를 집어던졌다. 기사는 로크의 가슴을 후려갈겼고 로크는 뒤로 나자빠졌다.그의 갈비뼈가 그의 폐를 사정없이 찢고 틀어박혔다. 그러나 기사도 무사하지는 못했다. 그의 도끼가 미간 정면에 꽂혀 그의 몸은 뒤로 넘어가 있었다. 기수의 죽음을 깨달은 사나운 군마는 미친듯이 늘어진 주인의 시체를 바닥에 끌 고서 돌아다녔다.기사의 발치에 얽힌 박차와 등자는 계속해서 듣기싫은 소리를 내면서 악착같이 주인의 몸체를 군마에게서 떼지 않고 있었다. 로크는 피를 토했다. 그는 가슴이 박살난 채로 죽어 넘어진 소년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에겐 두 눈을 부릅뜬 가련한 시체를 보고 눈물을 흘릴 새도 없었다.쉴 새없이 들이 닥치는 적병이 그에게 다가들었고 로크는 가슴을 부여잡은 채로 적 병의 가슴을 도끼로 후려갈겼다.적병이 비틀거리자 그 뒤에 서 있던 또다른 자 가 다가들어서 로크의 왼팔을 가차없이 후려갈겼다. 파앗 하고 로크의 왼팔이 잘려져 나가면서 핏줄기가 허공으로 솟아 올랐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몸주변으로 서넛의 적병이 더 달려들었다. "로크!" 오스칼은 그 광경을 보면서도 나아갈 수가 없었다. "제기랄! 제기랄!"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로크는 그와 가장 친한 친우였다.그는 몇번이고 적병을 뚫고 로크에게로 다가가 려 했다.그러나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몸을 덮쳐오는 적병의 칼날 아래 서 자기 몸을 지키는 것 뿐이었다. 에메스는 말발굽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적의 기사라면 당해낼 수가 없었기에 그는 급박한 심정으로 주변을 돌아볼 사이 도 없이 그저 적의 칼을 막아내고만 있었다. 그렇게 많은 부하들이 있었건만 지금 그의 주변에 있는 것은 오로지 몇몇의 기 사들과 병사들 뿐이었다.적이 아군보다 많았다. '끝장인가!'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그들이 서 있던 자리에 파앗 하고 흰 빛이 튀어올라왔다. 모두 놀라 고개를 일제히 쳐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허공에 뜬 아름다운 소환수 잉글리마를 볼 수 있었다. 잉글리마는 세개의 머리와 일곱개의 다리를 가지고 아홉개의 날개를 가진 짐승 으로 이계의 것이었다.이 잉글리마는 지금 소환자의 명에 따라 움직일 태세를 갖추고 지상의 것들을 향해 하강하고 있었다. 끼에에에엑 공기을 찢는 듯한 소리가 터져나오는가 싶더니 에메스의 주변에 있던 적병들이 일제히 뒤로 나자빠졌다.에메스가 몸을 숙이는 순간 잉글리마는 일곱개의 다리 중 웅크린 세개의 다리를 펼쳤다. 그 순간 검은 날개를 가진 비오나가 튀어 나왔다. "에메스!" 에메스는 놀란 나머지 입을 벌리고 비오나를 바라보았다. 죽음에서 막 건저나온 듯한 기분에 그는 안도의 한 숨을 내 쉬었다. 잉글리마는 세 개중 두 개의 입을 열어 흰 냉기를 뿜어내었다. 그러자 그 순간 에메스들에게로 달려오던 세 기의 기마가 그 냉기에 휩싸여 순 식간에 얼어붙었다.비오나는 에메스의 옆에 다가서서 손짓했다. 그러자 잉글리마는 날개를 펼쳐 올리면서 기이한 목소리로 울더니 사방으로 냉 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사방이 희게 얼어붙었다. "어서 오너라! 퇴각한다!" 에메스가 목청이 찢어져라 외쳤다. 그리고 살아남은 자들이 맹목적으로 후퇴하는 동안 잉글리마는 몇번이고 공중을 순회하면서 이들이 후퇴할 시간을 벌어주었다. "주군!" 에메스가 비오나의 부축을 받으면서 뛰어 나올 때 갑자기 말발굽소리와 함께 흑 기사 휴렛경이 달려나왔다.그의 뒤로 일곱기의 기사들이 있었으며 그들 옆으로 튜나와 린과 가빈이 활을 쥐고 따르고 있었다. 이미 피투성이인 휴렛경이 급히 에메스의 몸을 잡아 말위로 올리자 뒤에 따르던 기사들 중에 한 명이 오스칼의 몸을 부축해 마상으로 끌어올렸다.다른 몇몇도 말위로 끌어올려졌기에 말이 부족하게 되자 마상에 있던 엘레가 날개를 폈다. 비오나는 휘파람을 불듯 긴 소리를 내며 공중으로 치솟아 올랐고 그 뒤를 이어 엘레의 긴 날개가 좁게 펼쳐지면서 솟구쳤다. "엘레님! 미트라님을 부탁해요!" 비오나가 급히 외치는 소리를 들으며 엘레는 묵묵히 허공으로 치솟기만 했다. 그는 미트라를 안고 있었는데 그녀는 이미 엘레가 날아오르는 순간 각오를 했는 지 입술을 깨물고 두 주먹을 쥐고 있었다. 말을 확보하고 내달렸지만 적병은 정말로 많았다. 어느새인가 아군은 전혀 없이 오로지 적병으로만 세상이 채워진 것 같았다. "제길! 아직 몸이 덜 나았지만 하는 수 없어!" 앞을 막아선 무수한 적병들 한가운데로 나선 튜나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외쳤 다. "나의 친구여! 나의 바람이여! 오소서! 나의 힘 미약하니 내 힘이 되어주소서!" 그녀의 단궁이 쌕색거리는 바람의 소리를 머금고 팽팽히 원을 그렸다. 그리고 그 순간 인간이 쏜 무엇보다도 맹렬한 소리를 내지르면서 그녀의 화살이 날았다. 파공음과 함께 그녀의 화살이 갑자기 홰액 곡선으로 휘더니 곧이어 그 화살은 뱀처럼 꼬이고 살아있는 뱀처럼 의지를 가진 양 움직이기 시작했다.그 바람의 뱀은 적병들 한가운데를 후려갈기고 터뜨려댔다. 콰앙 콰앙 하고 연속적인 폭팔음이 터지는 가운데 엘레가 외쳤다. "어서 가라!" 그는 미트라를 안은 채 높이 상승하면서 아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아래를 내려다 보니 온통 적병뿐 아군이라곤 보이지도 않았기에 그만큼 심각한 상황임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미트라는 오돌 오돌 떨고 있었지만 비명 한마 디 지르지 않고 꼼짝도 하지않았다.엘레는 그런 그녀의 허리에 감은 팔에 힘을 주면서 비오나쪽을 바라보았다. 맹렬하게 내달리는 튜나와 에메스들을 바라보면서 비오나는 잉글리마로 뒤쫓는 자들을 막고 있었다.그러나 그도 잠깐이었다.잉글리마의 앞에 또다른 소환수가 튀어 나와 그 목줄기를 물어뜯었다. "와앗!" 비오나는 비명을 올리면서 몸부림치는 잉글리마의 옆에서 날고 있다가 그 여파 로 비틀거렸다. 갑자기 나타난 비늘을 달고 있는 거대한 뱀의 몸체와 늑대의 머리를 가진 수마 이레가 덥석 잉글리마의 세 개의 머리중 하나를 물어뜯었던 것이다.잉글리마는 비명을 올리면서 허공에서 떨어져내렸다. 그러자 그 몸체를 휘휘 감은 수마이레는 길고도 날카로운 두개로 갈라진 꼬리로 대지를 후려갈겼다.콰앙 하는 그 소리로 말들이 놀라 날뛰었다. "뇌전이여 노래하라! 강력한 그대의 힘을 노래하라!" 비오나의 손가락이 허공을 향하고 뒤이어서 수마이레의 몸체를 향해 내 쏘아지 는 순간 하늘에서 그대로 눈부신 뇌전이 쏟아지며 수마이레를 직격했다.수마이 레가 비명을 올리면서 비틀거리는 순간 잉글리마의 다른 머리가 냉기를 수마이 레의 얼굴에 내쏘며 저항하기 시작했다. 비오나가 안도로 돌아볼 즈음 갑자기 그녀의 등줄기를 공격하는 자가 있었다. "무나 키리에 키리에! 화염옥!" 비오나는 날개를 펄럭이면서 겨우 공중으로 치솟아 피해냈다. 공격한 상대는 검은 로브를 둘러 쓴 마법사였다.마법사는 음침한 턱만을 보인 채 깊숙히 후드를 눌러쓰고 있었다.그가 쥔 나무지팡이가 빛을 발하는 수정을 흔들며 마법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마법엘프! 드물디 드문 마법엘프가 여기 있었군!" 비오나는 그 음산한 목소리를 들으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의 두 손이 모여지는 순간 치직 치직 하고 방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공기의 정이여 도와주소서,광염옥!" 그녀의 두 손안에서 펼쳐진 창백한 빛덩이가 마법사를 향해 날아갔다.그러나 마 법사가 지팡이를 들어올리는 순간 지익 하고 그 빛은 소멸되었다. "대전실드?" 비오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잉글리마와 수마이레의 싸움은 소환자들의 역량에 달려있는 것이었다.그렇기에 이 싸움에서 비오나가 이기면 수마이레는 사라질 것이다. "어디 해봐라! 변신엘프여!" 지팡이가 한바퀴 도는 듯 했다. 그리고 갑작스런 회오리가 지팡이에서 튀어 나와 곧장 비오나의 몸체를 덮쳐갔 다.칼날같은 회오리바람이 비오나의 주변의 흙과 자잘한 것들을 함께 쓸어올렸 고 그 힘에 못이긴 시체들까지도 공중으로 치솟았다. "정지!" 갑작스런 침묵. 사방이 정지했다.마법사의 마법도,마법사 자신도 얼어붙듯 정지했다. 비오나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그녀의 사방을 덮은 원구가 마법사의 몸을 뒤덮은 채로 흰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들을 덮은 원구를 제외한 모든 것은 정상적으로 움직이고 있었지만 마법사만 은 얼어붙은 듯 그대로 굳어있었다. 비오나는 상대를 노려보았다. 조금이라도 주의력이 흩어진다면 시간 정지의 마법은 풀려버린다.게다가 지금 이 위치는 밀폐된 공간이 아니었다.그 때문에 그녀가 펼친 시간정지의 마법은 너무도 미약했다.조금의 자극이라도 있으면 그대로 풀려버릴 것이었다. 그녀는 뒤에서 아직도 싸우고 있는 잉글리마와 수마이레를 돌아보았다.수마이레 는 정지한 자신의 소환자를 보면서 움직임을 멈추고는 잉글리마의 맹렬한 공격 을 받으면서 주춤 주춤 물러서고 있었다. "에메스.." 그녀는 황급히 날개를 펄럭여 돌덩이처럼 굳어있는 마법사의 옆을 떠나 내달리 고 있는 에메스들에게로 다가갔다.그녀의 몸은 이미 지나친 마법의 소비로 지칠 만큼 지쳐있었고 날고 있는 이것 마저도 너무나 벅찼다. 에메스는 참혹한 피투성이 얼굴을 한 채로 달리고 있었다.피로한 나머지 엉망인 그 얼굴을 보면서 비오나는 급박함을 느끼면서 사방을 훑어보았다. '쿠베린님이 있었다면! 그렇다면 이렇게 힘들지는 않을 텐데!' 그녀는 새삼 쿠베린을 원망했다. 흑기사 휴렛경이 외쳤다. "저 숲으로! 숲을 지나면 조금이라도 나을 겁니다!" "매복이 있다면 어쩌지?" "그래도 방법이 없다!" 그들은 숲을 향해 달렸다. 뒤로 당장 쫓는 적병들은 없었다.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모르고 그저 앞으로 내 달리기만 했다.뒤를 쫓는 자들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은 오로지 비오나와 엘레뿐이었지만 그들은 그런 말을 해줄 여력따윈 조금도 없었다. "기,기다려! 나무의 정들이 위험을 경고하고 있어!" 달리던 튜나가 갑자기 말고삐를 당기며 다급히 외쳤지만 이미 늦었다. 일행들은 숲안 깊숙히 내달려 들어갔으며 가장 앞에 선 휴렛의 말이 갑자기 앞 다리를 꺾으면서 앞으로 고꾸라졌다. "우엇!" 휴렛은 앞으로 나동그라졌지만 다행히 다친 곳은 없었다.그는 노련한 전사답게 나동그라지는 순간 장검을 앞으로 하고 앞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의 그런 방비도 무참히 갑자기 파공성과 함께 그의 허벅지로 무언가가 날아들었다. 막고 자시고 할 틈도 없었다.그는 불로 지지는 듯한 고통을 그 자리에서 굳어버 렸다. 그의 허벅지를 뚫은 것은 쇠로 만든 화살이었다. 그 화살은 그대로 그의 허벅지를 꿰뚫고 바닥에 닿아있었다.그는 비명을 흘리면 서 비틀 비틀 그대로 넘어졌다. 뒤이어 그의 뒤에 있던 말들이 차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말의 목줄기에 깊숙히 박힌 검은 화살들을 보며 비명과 혼란이 일행 들을 뒤덮는 순간 갑자기 린이 외쳤다. "조심해! 말에서 내려라!" 튜나가 재빨리 놀라 화살을 먹였다. 그러나 뒤이어서 그녀의 앞으로 철시가 날아들자 그녀는 뒤로 몸을 눕혀 간신히 피했을 뿐 화살을 쏠 기회를 놓쳐버렸다. 에메스는 쓰러진 말의 시체를 방패로 해서 고함을 질러 물었다. "누구냐?" 그러나 그는 눈앞에서 흔들리는 철시를 보는 순간 곧 깨달았다. 사인족. 무표정한 비인간적인 얼굴을 한 사내들이 불쑥 불쑥 수풀속에서 튀어 나왔다.튜 나가 입을 벌린 채 중얼거렸다. "산너머 산이다." 오스칼이 에메스를 돌아보며 외쳤다. "주군! 무사하십니까?" "아아,무사해!" 그는 고개를 들어서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이 위치에선 하늘은 조금도 보이지않았다.무성한 나뭇가지가 완전히 하늘을 덮 고 있었다.완전히 숲안에 갇혀버린 셈이었다.앞에는 사인족이 있고 이젠 말도 잃었다.살아날 가망성은 조금도 없는 듯했다.게다가 사인족과 싸울만한 유일한 자들인 비오나와 엘레는 지금 하늘 위에 숲안의 일도 모른 채 날고 있을 것이었 다. 자포자기한 오스칼이 제일 먼저 일어서서 에메스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는 어차피 죽을 바에야 에메스를 위해 죽을 셈이었다.그가 나서서 다가서는 사인족을 막아서려는 순간 갑자기 퍼엇 하고 붉은 피가 솟아올랐다. "우욱!" 철시 하나가 깊숙히 오스칼의 가슴에 파고들었다.그는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휘청거리며 나동그라졌다.그 몸을 에메스가 재빨리 잡고 부축할 찰나 또하 나의 철시가 날아들었다. "우웃!" 에메스는 그 것을 장검으로 막아냈다.그러나 막아내는 순간 채앵 하며 그 검이 반토막이 나버렸다. 그의 얼굴이 파랗게 질리자 옆에서 보고 있던 튜나가 외쳤다. "어서 몸을 숙여!" 그리고 그 때 거대한 흰 날개가 숲안을 밀어 제끼면서 하강을 시작했다. 와직 콰지직 하고 나뭇가지들이 비명을 올렸다. 일행들이 고개를 들어 보니 거대한 흰 잉글리마가 나뭇가지를 뚫고 하강하고 있 었다.그리고 사인족이 있을 곳을 향해 사정없이 냉기를 뿜어대기 시작했다. "에메스! 무사해요?" 비오나가 고함을 지르면서 등장했다. 그녀는 잉글리마가 나타나자 마자 갑자기 한 줄기 바람처럼 흩어지는 사인족을 향해 얼굴을 찡그렸다. 이들 사인족들은 너무 빨라 일격에 해치우는 것이 곤란했던 것이다. "와아!" 기사들이 환호성을 내질렀지만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사인족은 인간들이 아니었다. 사방을 냉기로 채워도 재빠른 자들은 그자리를 얼른 피해버렸다.그리고 그렇게 피하면서 그들은 날카롭게 솟아오른 손톱을 내세우고 곧장 일행의 한가운데로 파고들었다. "크악!" "아아악!" 기사들과 병사들이 비명과 함께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에메스는 급히 떨어진 검을 주워들려고 손을 뻗었다.그리고 그 순간 자신에게 파공성과 함께 다가드는 무언가를 느꼈다.그는 검을 들어 막으려 했지만 검이 없었고 팔을 들어 막으려 해지만 그의 팔안에는 의식을 반쯤 잃고 있는 오스칼이 있었다. 그는 눈을 감았다. 퍼억 하고 뜨거운 액체가 그의 얼굴에 튀었다. 그는 눈을 뜨고 정면을 바라보았다.파란 액체가 그의 주변에 흩어져 있었다. 에메스는 눈을 부릅떴다. 그의 바로 앞 자신을 막고 선 것은 푸른 피부의 린이었다. 린은 그의 앞을 막아 선 채 자신의 가슴을 찌른 사인족의 가슴을 마주 찌르고 있었다.그의 몸체에서 푸른 피가 뚝뚝 떨어졌다. 그의 정면을 마주 대하고 있는 누런 털의 사인족의 가슴에서도 붉은 피가 툭툭 떨어져 내렸다.그 비인간적인 무표정한 얼굴이 경악에 차 있었다. 푸른 피는 푸른 피부를 타고 떨어져 내리고있었다. 린은 무표정한 얼굴을 한 채 사인족의 가슴에서 자신의 칼을 뽑아 냈다. 퍼엇 하고 핏줄기가 뿜어져 나왔다.린의 가슴과 배에 꽂힌 날카로운 손톱이 긴 상처를 남기면서 떨어져 나갔고 린은 천천히 자신의 배와 가슴을 부여잡고 정면 을 노려보았다. 갑자기 침묵이 감돌았다. 사인족들은 처음으로 자신의 동족을 해한 이 푸른 아인족을 노려보았다. 린의 복부는 꿰뚫리고 가슴은 찢어져있었지만 그는 서 있었다.그의 상처에서 푸 른 피가 솟아 나와 에메스의 얼굴과 몸으로 떨어져 내렸다. "리,..린?" "...명령하셨다." 린이 중얼거렸다. 고저 없는 음성이었다. "쿠베린님은 공작을 지키라 명령하셨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 에메스의 앞을 막아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 사인족은 그의 앞으로 천천히 모여들기 시작했다.그리고 린을 중심에 두고 원형 으로 둘러쌌다. 비오나는 그들을 막고 공격하려 손을 치켜 들었으나 너무 가까이에 에메스와 린 이 서 있어서 공격할 방법을 잃었다.그녀는 입을 벌린 채 그리로 다가갈 수도 없어 손을 뻗은 채 굳어버렸다. "도망가! 린! 도망가!" 가빈이 울듯이 외쳤다. 그는 자신이 타고 있던 말의 피를 뒤집어 쓴 채 울부짖고 있었다.겁에 질려 울 고 있는 그를 무표정하게 바라보던 린은 살의와 복수심으로 불타고 있는 사인족 들 한 가운데 서서 조용히 말했다. "쿠베린님은 공작을 지키라 명령하셨다.푸른 아인족은 허언을 하지않는다." 그리고 그는 공격을 시작했다. 그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사인족의 손톱이 정면으로 달려드는 그의 가슴을 찢었다.왼 팔이 왼쪽에 서있던 사인족의 손톱에 날아갔다. 날카로운 송곳니가 푸른 피부를 짖이기듯 물어뜯었 다.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참혹하게 들렸다. 푸른 피가 그의 몸을 덮고 그의 뒤에 주저앉아 있는 에메스의 몸에 튀었다. 그를 찢고 있는 살육에 미친 사인족의 누런 몸뚱이에도 튀었고 초록의 풀숲에도 푸른 피가 튀었다. "키오오오오오오.." "카오오오오오오.." 사인족들은 날뛰고 있었다. 그들은 괴성을 올리고 있었고 가학에의 즐거움으로 눈이 붉어져 푸른 피가 흩날 리는 광경을 즐기고 있었다. 린은 서 있었다.공격하고 있었다. 그의 왼팔이 찢기듯이 떨어져 나갔고 그의 오른 팔은 칼을 쥔 채 앞에 선 사인 족의 배를 찢고 있었다.뒤에서 선 사인족의 손톱에 그의 목이 떨어져 나가는 그 순간에야 비로소 서 있던 린의 몸은 바닥으로 쓰러졌다. "린!" 가빈이 찢어질 듯 비명을 올렸고 그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가 발버둥을 치면서 앞으로 튀어나가려는 것을 옆에 있던 튜나가 잡았다. 그리고 그 순간 멀리서 표효성이 터져 나왔다. 일행들은 눈을 크게 떴다. 흥분해 있던 사인족들이 고개를 들고 일제히 전방을 바라보았다.경계의 빛이 그 들의 얼굴에 일렁이는 순간 수풀속에서 새빨간 무언가가 튀어 나왔다. 촤악하고 가죽 북 터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수풀위로 어떤 둥그런 것이 떠올랐다 순식간에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검붉은 액체가 튀어나온 것은 그 이후였다. 사인족들이 공포에 질려 뒤로 비틀 비틀 물러섰다. 그 자리에 선 것은 엉망진창의 피투성이를 한 휴런이었다. 휴런은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는데 그 자신의 모습은 참혹할 지경이었다.살갗 은 쉴새없이 찢겨져 나가고 온 몸 여기저기에 철시가 박혀있었으며 핏덩이와 살 덩이가 엉겨있는 사이로 흰 뼈가 드러날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등장한 순간 사인족들의 얼굴에는 공포가 떠올랐다. "휴런?" 튜나가 멍하니 되뇌이는 순간 휴런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그는 굳어선 사인족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뭐 길게 말할 여지도 피할 여지도 전혀 없었다. 휴런의 손톱이 피하려는 사인족의 얼굴을 그대로 휘갈겼다.눈알이 튀어 올라 살 점과 함께 터져나갔다.빠각 하고 뼈가 긁히는 소리와 함께 바로 옆에 있던 사인 족이 휴런의 주먹에 배가 꿰뚫린 채 퍼득거렸다. 두 명이 순식간에 쓰러지자 남은 두 명이 바들 바들 떨더니 그대로 달아나려 몸 을 돌렸다.그러나 휴런은 마치 맹수가 사냥하듯 그런 녀석들의 등 뒤로 펄쩍 뛰 어 오르더니 한 녀석의 어깨 위로 덥석 올라섰다.그리고는 뒷목을 그대로 물어 뜯었다.살점과 함께 촤악 하고 피가 솟아나오자 보고 있던 자들이 일제히 토악 질을 했다. 휴런은 허겁지겁 그 목줄기를 송곳니로 물어뜯어 내고는 아직도 살아서 퍼덕이 고 있는 그 시체에 깊숙히 이를 박았다. 아드득 아드득 사인족의 목줄기를 뜯고 그 뼈를 씹는 소리에 그 자리에 있던 자 들 모두가 얼어붙었다.휴런은 한동안 그렇게 뇌수를 먹어치운 다음 고개를 들어 사방을 주욱 훑어보았다. 그의 얼굴은 벌겋게 잔뜩 피로 물들어있었다.그리고 그는 천천히 일어서서 나머 지 한 명의 사인족이 달아난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는 그쪽을 향해내달리기 시작했다.일행들은 이 엄청난 모습에 완전히 얼이 빠져서 넋을 잃고 서 있었다. "대..대체..." "린..." 가빈이 울면서 에메스의 앞에 쓰러진 린의 시체로 다가들었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일행들이 일제히 린의 시체 앞으로 서서 멍청히 그 푸른 사체를 들여다 보았다. 수풀 속에 떨어진 린의 목을 잡아서 튜나가 그 몸뚱이 옆에 놓았다. 바닥에 널부러져있던 에메스를 비오나가 비틀거리면서 부축하는 동안 에메스는 새파랗게 질린 채 자신의 얼굴에 묻은 푸른 피를 손바닥으로 닦아냈다. "...아아.." "린...아앙..리인..린..." 가빈이 바닥에 엎어진 채 울부짖고 있었다. 비오나는 할 말을 잊은 채 멍청히 그 자리에 굳어 있었고 기사들도 쓰러진 휴렛 과 오스칼을 부축하며 그 자리에서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일단은..이 자리를 피합시다." 냉정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튜나였다. KUBERIN....... 외로움이 아닌 고독 속에서 침묵을 지켜라 그리하면 그대 삶 속에 버티고 있던 죽은 자들의 영혼이 다시끔 죽음 속에서 그대를 둘러쌀 지니 그리고 그들의 의지는 그대를 지킬지니 그대, 그대로 있으라. BY E.A.POE 4 나는 비오나의 이야길 가빈을 안은 채 듣고 있었다. 내 뒤에 선 기생오라비는 입술을 깨물고 가만히 서 있었다.가빈은 엉엉 우느라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고 나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튜나는 나의 시선 을 따라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에메스는 아직 의식을 잃은 채 움직이지않고 방 안에는 모두의 숨소리만 들리고 있었다. 기억하고 있지않았었다. "에메스는 네가 지켜라." 나는 내 입으로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그리고 린은 그렇게 했다. 저 에메랄드 빛의 눈동자를 보는 그 때부터 나는 이 순간을 예감하고 있었던것 일까. 울고 있는 가빈을 휙 밀친 다음 비오나에게 물었다. "시체는?" "...그 곳에 두고 왔습니다." "어디 숲이라구?" "랜달 브리거의....어디쯤인지 모릅니다만...이런 여름 날씨에...게다가 벌써 이틀 전입니다..." 비오나가 길게 말하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에메스는 아직 누워서 의식없는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그 가슴에 묶은 붕 대를 흘긋 보고 나는 몸을 돌렸다. "쿠베린! 어딜가요?" 가빈이 눈을 계속 닦으면서 물었다. 나는 대꾸하지않고 밖으로 나갔다. 달리고 달리고 달린다. 가느다란 풀잎과 나뭇가지들이 내가 달리는 여력을 이기지 못하고 부러지고 짓 밟힌다.나는 바위를 밟고 튀어 올라 자잘한 돌멩이가 박힌 땅위로 내려서고 그 다음에는 도약한다.누렇고 푸른 수풀들이 우거진 여름의 숲속으로 나는 달리고 있다.뺨으로 스치는 음습한 공기는 아직 비 냄새를 간직하고 있었다. 매캐하고 누릿한 흙냄새가 콧속으로 스며올라와 여름의 부패한 냄새를 가지고 빙빙 돌고 있다. 나는 나는 듯이 달리고 있다. 아무 생각도 하지않고 그저 달린다. 뺨과 머리칼과 아직 흉터가 아물지 않은 뺨과 콧날과 팔뚝과 가슴과 다리와 전 신의 모든 상처에 걸고 나는 달리고 있다. 코를 공중으로 쳐들고 냄새를 찾는다. 피비린내를 찾는다.시체가 썩는 냄새를 찾는다.고기가 썩는 시체를 찾는다. 부패된 대지의 여신에의 제물을 찾는다. 나는 코를 바닥에 내리고 나는 네 발로 기었다. 대지의 여신에게 어리광을 아무리 피워도 그녀는 언제나 잔혹하다.그녀는 해야 할 일을 멈추지않는다. 공손한 마음으로 나는 대지에 입맞추었다. 아름다운 나의 여신, 잔혹하고도 자애로운 대지의 여신에게 몇번이고 애원한다. 시체를 돌려 주세요.몸뚱이를 돌려 주세요. 나의 아들의 피를 돌려 주세요. 아직 채 태어나지도 않은 내 아들을 돌려주세요. 숲은 아직도 살아서 숨쉬고 있다.멀리서 가까이서 벌레들의 파스락거리는 소리 들과 울고 웃는 새들의 소리가 들려온다. 무심한 개미 몇마리가 내 발치로 기어 지나간다. 나는 그 무심한 개미들이 운반하는 자잘한 벌레들을 본다. 죽은 시체는 다른 것들의 먹이가 되고 그 것들은 모든 것들에게 결국은 돌아간 다.그런 것 모두 다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바라고 있었다. 대지의 여신에게 무릎꿇고 빌고 있었다. 내 아들을 돌려주십시오. 이미 썩어가는 피내음을 맡으며 나는 수풀사이를 헤치고 지나갔다. 여기저기 널린 뼛조각을 보며 넋을 잃고 헤메이는 유령들을 지나 나는 새파랗게 빛나고 있는 하늘 아래 부서진 숲으로 들어갔다.숲은 꺾어진 나뭇가지들로 몸살 을 앓고 있다가 나를 보고 경계의 눈초리를 던진다. 지독한 숲,안타까운 숲,수풀들과 나무들이 나에게 말을 건다. 이봐 이봐 이봐, 왜 울고 있나? 이봐 이봐 이봐,무엇을 찾고 있나? 푸른 피부를 한 가엾은 꼬마인가? 그애는 이미 죽어 우리에게 그 몸을 넘겼다네. 단념하고 돌아가게나. 이봐 이봐 이봐...... 나는 아무 말도 하지않고 걸어서 검붉게 변한 땅을 바라본다.그리고 검푸르게 변한 땅과 흙을,그리고 바위와 돌멩이들을 바라본다. 시체들은 송장벌레와 개미,그리고 파리들에게 뒤덮혀서 이미 이글거리고 바쁘 다.수많은 그 자잘한 것들이 달려들어 시체를 파먹느라 바쁘다.이미 눈알같은 것은 무심한 새가 파갔는지 보이지도 않고 콧구멍이고 귓구멍이고 구멍이란 구 멍마다 벌레들이 오가고 있다. 그 시체조각들을 헤치고 나는 내 아이를 찾아냈다. 그 아이는 검푸르게 변한 땅위에 누워있었다. 머리는 엉겨붙은 검푸른,오히려 보랏빛에 가까운 빛으로 변해서 땅위를 구르고 있다.다행히도 눈알은 아직 그대로 있다.나는 벌레들이 엉겨붙은 것을 떼내어 머리를 잡아 들었다.그러나 그 몸뚱아리는 내장이 이미 썩는 냄새를 풍기고 있 다.새들이 와서 분탕질을 쳐 놓은 것인지 이리저리 흩어져있고 개미들과 파리들 이 자리잡았다는 듯이 신경질을 부리며 왱왱 소리를 내질렀다. 나는 그 몸이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것을 확인했다.비오나의 말대로 린은 열심 히 싸웠다.그 애의 힘에 부치는 상대를 둘이나 맞이해서 없앴던 것이다.나는 그 머리를 쓰다듬고 칭찬해주었다. "잘했다.린." 비통한 표정도 없이 단호하고 단정한 그 얼굴은 죽은 시체가 되어서도, 벌레가 엉겨붙은 처참한 시체임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아름다왔다.나는 그 머리를 안고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환수가 부수어 버렸다는 그 숲속에 뻥 뚫려 버린 창공을 바라다 보면서 나는 린의 피부색만큼 푸른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푸른 아인족은 가혹한 족속이다.그들은 냉혹한 족속이며 사랑스러운 족속이고 끔찍한 족속이다. 내 아들... 죽어버린 내 아들... 눈물이 나오지 않는다. 하늘은 맑고, 대지는 잔혹하다. KUBERIN....... 외로움이 아닌 고독 속에서 침묵을 지켜라 그리하면 그대 삶 속에 버티고 있던 죽은 자들의 영혼이 다시끔 죽음 속에서 그대를 둘러쌀 지니 그리고 그들의 의지는 그대를 지킬지니 그대, 그대로 있으라. BY E.A.POE 5 "무슨 볼일이야?" 나는 땅바닥에 앉은 상태로 물었다. 내 뒤를 따라온 킬트가 내 머리 위 허공에 뜬 채로 날 내려다 보고 있었다. 나는 다른 자가 나를 내려다 보는 것이 가장 싫다.건방지기짝이 없는 그 태도는 여자라면 모를까 남자라면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는 태도다. "....너,아직까지 그 목을 끌어안고 있는거냐?" 나는 그 녀석의 시선을 따라서 내 두 손을 바라보았다. 나는 바위위에 걸터앉아서 린의 머리를 끌어안고 있는 중이었다. 내 손안에 있는 린의 머리는 생각보다도 작아서 마치 자그마한 공 같았다.그러 고 보니 나는 지금 본래의 몸이었고 이 녀석을 처음 만났을때는 작았을 때의 몸 이었던 것이다.감각이 다른 것도 당연했다. 킬트가 무심히 소환수 쿠리마를 데리고 하강했다. 쿠리마는 제 주인처럼 무심하고 쭈욱 찢어진 눈으로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나는 성질이 나서 그 소환수를 갈기 갈기 찢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녀석 도 그런 나의 기분을 느꼈는지 어쩐지 눈초리가 점점 찢어져서 나중에는 한 줄 기 선이 되어 버렸다. 흑마법사들이 흔히 많이 부리는 소환수 키메라와 함께 흔하디 흔한 놈으로 불리 는 이 쿠리마는 내가 진심이 되면 찢어 죽일 수도 있다.녀석이 나의 살기를 느 끼고 흠칫 흠칫 하는 것을 은근히 즐기면서 나는 시익 웃어보였다. "멍청이." 갑자기 킬트가 내 앞에 툭 내려서서 말했다. 내가 긴장감을 제멋대로 깨어버린 킬트를 노려보자 킬트는 나의 몰골을 바라보 면서 턱으로 가리켰다. "그 목, 어쩔거냐?" "뭐가?" "끌어안고 고이 고이 모셔둘 거냐? 아님 평소의 네 식대로 버려둘거냐?" 나는 목을 들어서 묵묵히 바라보았다. 린의 목은 푸르고 창백했다. 녀석의 여린 듯한 입술이 마치 인형같은 느낌이 들었다. "...수정구슬안이라도 넣어둘까." "....변태." 킬트가 차갑게 말하곤 나를 빈정거리듯 바라보았다. "너는 언제나 대지의 여신에게 바친다고 했었잖아? 그대로 해야지." "물론,이 녀석의 몸은 대지의 여신에게 바쳤어.이미." 나는 린의 아직도 냉정하게 쏘아보는 듯한 눈매에 손가락을 대어 감겼다.냄새가 나기 시작하고 있었지만 왠지 이대로 손을 놓고 싶진 않았다. "네가 나에게 빈다면..." 킬트가 싸늘하게 미소하며 갑자기 입을 열었다. "녀석을 살려주지." "네놈의 자랑인 언데드의 소환마법으로? 관둬라." "뭐가? 그 이쁜 얼굴을 그대로 해서 돌려주겠다는 거야,새살이 돋고 멀쩡한 모 습으로 돌려주겠다는데 불만이냐?" "불만이야." 나는 잘라 말했다. 그 말에 마음이 동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지만 나는 그런 짓을 하기에는 너무나 평범한 묘인족이다. "이 애는 대지의 여신의 것이다.슬퍼서 가슴이 찢어져도 방법이 없어.그런 짓을 한다면 이 애는 영원히 걸어다니는 인형이야." "헤에,시인처럼 말하지 마라.살인귀 주제에." "말을 똑바로 해라,이 할아범." 내가 되쏘아 주자 뭔가 빠직 했다. "다크 크래쉬!" 콰콰쾅 하고 내가 섰던 자리에 엄청나게 큰 구멍이 파였다. 먼지가 무럭 무럭 일어나는 가운데 나는 녀석이 타고 온 소환수 쿠리마의 머리 위에 간신히 올라앉은 채 고함을 질렀다. "야,이 자식아! 누굴 죽일래!" 쿠리마는 한 참 후에야 내가 자기 머리위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이리저리 목을 흔들기 시작했다. 음산한 얼굴을 한 킬트는 낮게 뭔가를 옹알거리고 있었다.그 검은 눈이 이글 이 글 광기로 타오르고 있었다. 오오, 자식 뭔가 하겠다는 거야? 이 쿠베린님을 상대로? ...이렇게 옹알거리는 얼굴을 본다면 이 다음에는 뭐 길게 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탈출이다! 나는 쿠리마의 머리통을 도약대로 해서 훌쩍 뛰어 올랐다.반원을 그리면서 나뭇 가지를 밟고 다시 도약했다.말 그대로 머리털이 휘날리도록 뛰었다. 저 킬트자식의 마법을 정면으로 받으면 절대로 한동안은 일어나지도 못한다. 제길! 그럼 지가 젊은이란 말이야? 300살 먹은 젊은이 봤어? 그러나 길게 생각할 여유도 없이 갑자기 내 뒤로 무언가 싸늘한 것이 와락 달려 들었다. "다크 크라잉!" 나의 놀라운 민첩한 몸은 재빨리 바닥에 엎드렸고 바로 내 머리털 한줌이 무언 가에 의해 바락 날라가 버렸다. 싸늘한 냉기가 무럭 무럭 등 덜미에서일어나는 가 했더니 그 순간 엄청난 파공성과 함께 내 머리위를 짓눌러 온다. "아이스 크래쉬!" "우앗!" 나의 멋지고도 훌륭한 건각은 그 뭔가를 피해 결사적, 아니 여유있게 옆으로 튀 었다.나는 대굴 구르면서도 평형감각을 잊지않았다.그러나 그렇게 튀는 것은 좋 았는데 바로 옆에 있던 바위에 정면으로 부딪쳐 버려 빠각 하고 어깨를 부딪쳐 버렸다. 우욱..아파. 고개를 막 돌려 그게 대체 뭐냐 하고 돌아볼 찰나인데 이건 길게 생각하고 자시 고도 없었다. 연속적으로 파파파파팍 하고 땅바닥이 기어올라오더니 갑작스레 내 다리를 덥석 감아치는 게 아닌가! "제기랄! 이건 제대로 된 싸움이 아냐!" 나는 손톱을 뽑아내어 내 다리를 잡아 챈 놈을 후려갈겨 베어냈다. 그리고는 1차 전투모드로 화했다. 이 까짓것들을 가지고 변신모드를 하는 것은 약간 수치스럽지만 지금 기분이 더 러우니 기분전환해 보는 것도 나쁘진 않지. 꿈틀거리는 촉수 수십개가 땅바닥에서 솟아오르더니 곧장 나의 몸을 향해 달려 들었다.그 덕에 다다다다 소리를 내면서 땅바닥이 두둘 두둘 패어나갔다. 이빨이 촘촘히 달린 그 촉수의 끝은 흐물거리고 일렁 일렁하며 능글능글하기도 하고 지저분하기도 하며 끔찍스럽기도 했다. 흐, 그러나 킬트. 너무 구태의연한 괴물 아니냐? 너 대체 뭘 소환한 거냐? 이 시커무리죽죽한 늙은이! "이 껌댕아!" 한마디를 꼭 잊지않고 녀석에게 던져주고는 나의 전신을 향해 날아오는 촉수들 을 멋진 동작으로 베어내면서 이번에는 정면으로 달려들었다.정면에 있는 녀석 은 마치 거대한 나무둥치 같이 생긴 눈깔이 약 수십여개...내지는 다닥다닥 붙 은 누리끼리한 녀석이었다.이름이야 알거 없고 나는 곧장 달려들면서 전신의 강 침을 발사했다. 파파파파 하고 멋진 파공성이 내 귓전을 울려댔다. 아, 나는 무적이다. 역시 싸울때는 피가 끓어! 끓고 넘쳐 이 몸이 얼마나 강하고 멋진 분이신지 새 삼 온 몸으로 느낄 수가 있는 것이다. 강침이 박힌 녀석의 눈깔을 길고도 아름다운 나의 손톱으로 푸욱 찌르자 녀석 은 미친듯이 비명을 올리면서 수십개,어쩌면 수백개가 될지도 모르는 길고도 징 글 맞은 촉수들을 사방으로 뻗쳐 올리면서 흥분했다. 흐,흥분해 봤자 네 놈은 나의 한 주먹거리다. 녀석의 촉수가 이글 이글 바각 바각 소리를 내면서 내 등줄기를 파고 들려고 했 지만 나의 이 멋진 몸을 감히 그까짓 이빨로 어쩌겠다는 거냐? "크크크크크..." 웃음이 진짜 나오는 군. "죽어봐라!" 푸욱 하고 두 팔로 녀석의 굵직한 몸체를 좌악 찢었다. 체액이 와락 사방으로 쏟아져 나오면서 녀석이 몸부림을 한다.땅바닥이 들썩 들 썩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것, 내 알바 아니다.숲이 조금 더러워져도 하는 수없다.원래 모든 것은 다 소화가 되는 법, 이놈도 죽고 나면 결국 대지의 여신 은 소화해 낼 것이다. 그리고 지금 열받아 있는 상황이니까 이것 저것 가릴 때도 아니다.눈이 벌겋게 달아올라있는 이 쿠베린님의 상대를 하겠다고 어슬렁 어슬렁 나타난 네가 나빴 다! 쿨럭 쿨럭 하고 길고도 굵직한 촉수가 몸체를 휘감고 때려왔다. "장난하는 거냐!" 나는 고함을 지르면서 그 촉수들을 팔뚝으로 끊어버렸다. 오랜 만에 힘을 쓰니-오랜 만은 아니었던가? 휴런과의 일이 있었으니- 기분이 상쾌했다.나는 크하하하하 웃음을 터뜨리면서 내 힘을 이기지 못하는 촉수를 터 뜨리고 발로 짓밟았다.발톱에 걸려 갈갈이 찢어지는 놈을 보면서 정말 기뻤다. 녀석이 갈갈이 찢겨서 쓰러지고 나자 나는 우하하하 웃음을 지었다.아니 지으려 고 했다. 그러나 그 순간 등 덜미가 서늘해지더니 갑자기 무언가가 세차게 날 후려갈겼 다. "우와앗!" 나는 대굴 대굴 굴러 아름드리 나무 서너그루를 단숨에 부러뜨리면서 나가떨어 졌다.제,제법 아프잖아! 고개를 돌려 날 후려갈긴 녀석을 보니 오만 방자하게도 그레이트 키메라가 날 바라보고 있었다. 조..조금 심하지않냐? 그레이트 키메라라니. 이건 최소한 이 숲전체를 다 태워 먹을 놈이었다. 길다란 부리와 찢어진 눈매와 오색으로 찬란할 정도의 거대한 일곱쌍의 날개와 일곱개의 머리,그리고 모든 것을 찢어 발길 정도의 거대한 발톱을 가진 일곱개 의 다리가 허공에 떠 있었다.나를 후려갈긴 것은 다섯조각으로 길게 찢어진 그 꼬리였다. 그레이트 키메라는 정확히 말해 키메라가 아니다.일반 키메라와 그레이트 키메 라는 거의 도마뱀과 용족정도의 차이가 난다. "키,킬트 이놈,아주 날 죽이려고 작정한 거 아냐?" 등덜미가 서늘해지면서 동시에 밑 바닥서부터 뜨끈한 투쟁욕이 치밀어 오른다. 싸우고 또 싸우고 강한 자를 보고 도전하고 절대로 약한 꼴을 보이지않는 것,그 것이 바로 묘인족의 생리,나야 말로 묘인족 중의 묘인족이 아니던가! 그래,그레이트 키메라면 어떻고 그레이트 히라이트면 어떠냐? 와봐라! 설마 세번째 전투 모드 라면 해치우지 못하겠냐? 내가 막 그렇게 마음을 굳히고 있는 찰나 갑자기 그레이트 키메라의 앞으로 한 녀석이 걸어왔다. "이제 기분이 풀렸냐? 멍청아." "뭐냐? 까망아?" 흐 하고 내가 비웃자, 녀석의 미간에 약간의 핏대가 오른다. 녀석은 검정색이 세상에서 가장 세련되고 우아하고 멋진 색깔로 주장하고 있다. 녹색을 좋아하는 나와는 도무지 취향이 다른 녀석이다. 원래 모든 물건들은 울긋불긋 갖가지 색깔로 치장되어야 멋진 법이다.그런데이 자식은 맨날 시커먼 색 일색이다.아무리 지가 흑마법사라고는 하지만 조금 심하 지않냔 말이다. "...이 자식...넌 어째 200년전과 조금도 달라진 구석이 없는 거냐!" 큰 소리로 킬트가 고함을 질렀다. "아무리 울고 짜고 있다가도 싸움만 하면 불끈 불끈 일어서는 거냐!" 나는 녀석을 흘긋 보았다. 그럼 이녀석이 나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소환수를 끌어내놨단 말인가? 흥,설마 저 구태의연하고 시커무리 둥둥한 녀석이 그런 깊은 소갈머리를 가질 리가 없다.언제 저 녀석이 나에게 좋은 짓 한 적이 한번이라도 있던가? 내가 미심쩍은 표정을 짓고 있자 녀석의 미간에 핏대가 한 번 더 올랐다. "이제 슬픔따윈 다 잊었지? 이 단세포 녀석!" 그가 외쳤다. 나는 전투모드를 풀고 후우 후우 하고는 가슴을 가라앉혔다. 가만있자,내가 린의 머리를 어쨌더라? 아까 흥분해서 잊어버렸다. 내가 몸을 주섬 주섬 뒤지는 동안 킬트는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날 바라보고 있 었다.그 얼굴에 왠지 슬픔과도 같은 분노가 어려 있어 예전과 조금 달라 보였 다. 그럼 그렇지,여기 있었군. 나는 셔츠 속에서 린의 머리를 도로 꺼냈다. 그러고 보니 조금 고민이 되는 군. 이 머리를 어쩌면 좋을까. 대지의 여신이 아무리 아양을 떨어도 이 머리를 두고 가긴 싫었다.그렇다고 이 렇게 썩기 시작할 머리를 들고 다닌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가 있다.먹어 치울 수도 없고 그렇다고 킬트 놈에게 실험재료로 건네주기도 싫었다. 내가 한동안 그 머리를 바라보며 고민하고 있는 동안 그레이트 키메라는 날 공 격할까 말까 망설이고 있었다.녀석도 이 내가 대단한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인지 공격하고 싶어 좀이 쑤시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소환자가 저렇게 떡 하니 버티고 서 있는데 감히 제멋대로 움직일 소환 수는 없다. "..야." "....야!" 응? "그걸 가지고 갈거냐고 묻잖아!" 킬트가 고함을 빽 질렀다. 나는 다시 시선을 떨구고 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창백한 보랏빛,이 얼굴을 나는 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차라리 먹어버렸으면 좋 았을 것을 하고 나는 후회했다. 이왕에 먹으려면 산채로 먹어야 경건하다.이렇게 상한 것을 날로 먹는다면 틀림 없이 배앓이를 하겠지. "후우..." "그 머리 내놔!" 킬트가 앞으로 나서서 손을 죽 내밀었다. "왜? 네가 자꾸 나서? 넌 이 애도 모르잖아!" "뻔하지! 이 멍청한 놈! 넌 이 애가 네 아들인 줄 착각하고 있잖아! 이 색마 야!" 내가 할 말을 잃고 있는 동안 킬트가 뚫어지도록 날 쏘아보며 외쳤다. "너랑 나랑 같이 지낸게 벌써 몇년이라고 하는 거냐! 네 놈 속을 내가 모를 줄 알아? 네 놈은 걸어다니는 애들만 보면 다 자기 자식인 줄 착각하는 놈이야!" 나는 입을 다물고 녀석을 멍청히 바라보았다. "무리도 아니지,달라붙는 여자들을 다 떨구고서 하필이면 아이를 낳지도 못하는 종족의 여자들이랑 놀아나는 네 놈을 내가 모를 거 같냐! 아이를 안낳고 버티려 는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만! 이건 대체 뭐냐!" 킬트가 갑자기 고함을 질렀다. "인간은 네 장난감이 아니란 말이다!" 갑자기 정적이 감돌았다. 그레이트 키메라가 녀석의 머리위에서 날 야리고 있다. 어쩐지 심각한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소환수인 이 거대한 놈은 여전히 날 노 리면서 킬트가 한 마디 하길 기대하며 대기상태로 몸을 움추리고 있었다. 이런 긴장과 살기 속에서 녀석은 나에게 지금 설교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은 편하긴 하구만. 이런 살기를 전혀 모른단 말이냐? 등줄기로 땀이 흐르는 일촉즉발의 분위기인데 킬트는 잔소리를 멈추지 않고 있 었다. "내가 말했었지? 애를 팍팍 낳으라구! 낳아서 묘인족을 번성시켜 보라고 했었 지? 외로우면 솔직하게 애 새끼 낳고 살란 말이다!" 이 자식도 잔소리가 엄청늘었다. 예전에는 빠릿 빠릿했었는데 이게 어쩐 일이람. 이 자식 진짜 늙은이가 다 되었군. "...늙은이." "뭐라!" 녀석의 핏대가 솟아오르자 소환자의 분노를 느낀 그레이크 키메라라고하는 이 머리 여럿 달린 놈이 흥분한 소리를 나직히 내질렀다. 그 눈이, 아니 눈들이 번쩍 번쩍 빛나고 있는 일곱개의 머리를 정면으로 바라보 자 나는 약간 질렸다. 녀석이 갈기를 공중으로 뻗혀올리고 내 몸통만한 손톱을 슬금 슬금 쳐들어 올린 다.녀석의 콧김으로 근처의 나무들이 나뭇가지와 나뭇잎들을 후득 후둑 떨어뜨 린다. "쿠베린! 야,이 색마 놈아!" "..잔소리쟁이 까망늙은이!" 팟 하고 킬트의 눈이 음산하게 빛났다. "키메라! 죽여라!" 원, 성질 머리하고는. 지가 나이가 몇인데 늙은이 소린 듣기 싫은가 보지? 쿠오오오오오.... 끄아아아아아아 콰콰콰쾅! 으악. KUBERIN....... 외로움이 아닌 고독 속에서 침묵을 지켜라 그리하면 그대 삶 속에 버티고 있던 죽은 자들의 영혼이 다시끔 죽음 속에서 그대를 둘러쌀 지니 그리고 그들의 의지는 그대를 지킬지니 그대, 그대로 있으라. BY E.A.POE 6 "미친 새끼!" 나는 킬트에게 욕설을 퍼부어댔다. 킬트는 널부러진 키메라의 시체를 바라보면서 팔짱을 끼고 눈썹을 하나 치켜 올 리고 있었다. 나는 바닥에 두 다리 좌악 뻗은 채 그다지 우아하지못한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 순간 우습다는 생각이 들어 껄껄 웃고 말았다. 숲은 엉망 진창 풍지 박산이 나 있었다. 아마 에메스가 있는 그 조그마한 도시까지 이 난리가 보였을 것이다.이 거대무 쌍한 그레이트 키메라가 구성지게 울어대는 소리를 못들었을 리가 없지. "후우,..야, 색마야." 킬트가 낮게 한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너는 생각보다 더 미친 놈이야." 키메라의 입안에 뛰어들어가 숨을 멈추고 그 혓바닥을 뽑아버렸다.독액이 전신 의 털을 다 녹여버릴 듯했지만 참고 그 혓바닥을 뽑고 그 입안을 짓이겼다.일곱 개의 머리 중 두개를 그렇게 해 놓으니까 녀석도 비틀거렸다.그리고나선 그나마 여린 비늘 사이의 살점을 찢고 그 목줄기를 손톱으로 짖이겨 뜯고 공중에서 난 리를 치는 녀석의 날개에 손톱을 박아 찢었다. 솔직히 말해 내가 숨통을 끊었다기 보단 녀석이 추락사했다는 것이 분명한 사실 이지만 녀석을 추락사하게 만든 내가 더 대단한 게 아닐까? 물론 나도 추락해서 두 발이 다 박살 난 것 같다. 그렇지만 이것은 세번째 전투모드에서 다친 것이니 잠시 쉬면 나을 것이다. 여기저기 부러진 것은 확실했지만 곧 나의 멋진 몸이 힘차게 일어날 것은 확실 했다. 그렇지만 킬트는 내 앞에 와 서서 흑마법사인 주제에 치유의 술을 펼쳐주었다. 흑마법사인 주제에 이런 것도 할 줄 알다니 약간 정내미가 떨어지는 기분이지만 하는 수 없다.이 놈은 일반적인 흑마법사도 아니니까. 내가 헐떡 거리고 있는 동안 녀석은 내가 쥐고 있던 린의 머리를 받아 들고 한 동안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이 기묘한 슬픔으로 물드는가 싶더니 곧 불길이 그의 손아귀에서 뿜어 져나와 린의 얼굴을 태웠다. 욱시근 하고 가슴이 아팠다. 불길 속에 타오르는 린의 얼굴을 보면서 숨이 컥 하고 막혔다. 불길은 파랗게 일어나 그 살갗을 태우고 곧이어 머리뼈만 남은 그것 마저도 태 우고 있었다. 일반적인 불이라면 그렇게 태울 수는 없었지만 술법으로 일으킨 정화의 화염이라는 것은 나도 알수 있었다. 순식간에 내 눈앞에서 린의 머리가 사라져버렸다. 타닥거리는 불꽃 속에서 차츰 소진되어 가는 뼛가루를 멍청히 바라보면서 나는 처음으로 린의 죽음을 실감했다. "린...." 가여운 내 아들... 눈물이 이제서야 흘러내린다. 줄줄줄 눈앞이 아무것도 보이지않을 정도로 흘러내린다.이런 것이 언제 내 몸안 에 있었는지 믿어지지않을 정도로 넘쳐 흘러 엄청난 양으로 내 턱아래로 쏟아져 내렸다.마치 폭포수 같아 내 꼴을 상상해 보니 엄청 웃길 듯했다.막 웃으려다 말고 그 웃음을 삼키고 꺼이 꺼이 울고 말았다. 나는 얼굴을 손바닥으로 눌렀다.이마를 누르고 깨질 것같은 두통을 억지로 참았 다.얼마나 오랫동안 울고 싶었는지 모른다. 내가 인간세상에서 살아온 나날 동안 울어본 것은 지금이 처음이었다. 도저히 눈물이 그칠 것 같지않았다. "꼴 좋다." 킬트가 차갑게 말했다. 그렇지만 녀석은 더이상 아무말도 하지않았다. 나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등을 바위에 기대고 누웠다.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린을 잃었고 다시 돌려받을 수는 없었다. 예전에 아주 예전에 다른 자들을 잃었던 것 처럼. 어느새인지 저무는 해가 새빨갛게 물들어 엉망 진창이 된 숲안에 그림자를 길게 길게 내뻗고 있었다.킬트는 내 맞은 편 바위 위에 단정하게 앉아서 눈을 감고 있었다.자는 것인지 아니면 눈만 감고 있는 지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런대로 좋았다. 실로 오랜만에 울었으니까. "우는 것이 창피하지않냐?" "뭐가 창피하냐? 울때 우는 건데." "묘인족의 왕이 그렇게 엉엉 거리고 울다니,흐." 녀석이 입꼬리를 비틀며 비웃었다. "울고 웃는 것은 별로 창피한 일은 아니다.공포에 질려우는 것도 아니고 그저 슬퍼 우는 것 뿐 아니냐?" "흐." 나와 키메라의 싸움으로 엉망진창이 된 숲을 바라보면서 문득 킬트가 물었다. "그 어린 꼬마를 지켜주는 이유는?" "내 애완동물이니까." "미친 놈." 그가 낮게 욕설을 퍼부었다. "넌 욕구불만이다.묘인족이란 족속은 애새끼를 줄줄 낳아야 하는데 네가 안낳았 기때문에 그러는 거야.나이는 있는 대로 들어서는 아일 안낳고 있으니 그렇게 제정신이 아닌게지." 아까 했던 소리 아닌가? "...." "당장 네 동족에게 돌아가서 애를 줄줄 낳아! 네 애가 널 이기고 널 죽일거란 생각따윈 하지마! 최소한 네 애가 커서 너에게 도전하려면 1,200년은 걸릴 텐데 그 동안이면 너는 새파랗게 젊은 녀석에게 패해서 바닥에 엎어져 있을거라구!" 제법 이치에 맞는데...? "...늙은 껌둥이같으니..." "시끄러! 이 색마놈아! 비생산적인 짓거리는 그만하고 얼른 네 동족여자나 거느 리란 말이야!" "내가 죽었을 즈음이면 내 아이가 커지겠군...허긴." 나는 새빨갛게 달아오른 하늘을 바라보았다. 멀리 몇마리 새가 둥지로 돌아가고 있었다.허긴 이 일대 짐승들은 모조리 겁에 질려 나오지도 않고 있었다.그 난리를 쳐 댔으니 짐승들이 도망안가고 버틸리가 없다. "내가 죽고 내 아이는 살아간다...그래,그건 그래." "뭘 새삼 스레 감탄하고 있는 거야? 이 얼간아! 잘난 척하고 떠들어 대지만 네 놈은 결국어린애야! 싸움밖엔 모르는 어린애!" 울컥. 왠지 이 녀석 슬슬 정도가 지나친데. "자기가 왕이라고 잘난 척하기나 했지,솔직히 한 게 뭐있어? 자기 혈족 죽이기 싫다고 동생 다리를 댕강 댕강 부러뜨린 녀석이." 자식이 긁어? "그래서 넌 자식이 있다는 거냐? 늙.은.이?" 내가 되묻자 녀석이 침묵했다. 어라? "나이 300살이 된 늙은 것이 애가 있단 말이야? 설마? 어떤 정신나간 여자가 너 같은 놈을..? 설마 네 놈 강제로?" "다크 세이런!" 쿠앗! KUBERIN....... 외로움이 아닌 고독 속에서 침묵을 지켜라 그리하면 그대 삶 속에 버티고 있던 죽은 자들의 영혼이 다시끔 죽음 속에서 그대를 둘러쌀 지니 그리고 그들의 의지는 그대를 지킬지니 그대, 그대로 있으라. BY E.A.POE 7 "그래서 대체 묘인족들이 믿는 신은 뭐야?" 새삼 이 녀석이 자꾸 나에게 말을 건다. 킬트답지 않은 태도였다.내 생각이지만 역시 녀석은 왠 애라도 하나 낳고 있는 모양이다.그래서 그 애를 찾으러 그 지저분한 암흑마도에서 기어 나 온 게 아닐까. "애 낳았으면 말해 보라니까! 왜 말을 자꾸 피하냐?" 내가 그렇게 추궁하자 녀석이 그 길죽한 주둥아리를 꿈틀 꿈틀 거린다.아 무래도 이 자식 옹알거리는 품이 꼭 주문을 외우는 듯해서 섬 했는데 나 도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어서 주먹을 들어보였다. "자식아, 계속해봐. 너 계속 나에게 마법을 걸면 그놈의 턱주가리를 한대 쳐 줄테니까." 킬트는 차가운 눈초리로 날 쏘아보았다. 그래, 네가 쏘아 봤자지, 그렇게 쏘아 본다고 해서 내가 겁을 먹을 거 같으 냐? 이 몸께서는 본디 마법사따위와는 싸우지 않는다. 왜냐구? 마법사란 주둥이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족속이고 나같이 온 몸으 로 일을 해결하는 진솔한 분과는 거리가 있기때문이다. "...." "솔직히 말해,너 애 찾으러 나온 거 아냐? " "...아이가 있긴 있다." 으와! 나는 놀라서 녀석을 뚫어지도록 바라보았다.킬트녀석은 팔짱을 척하니 끼 고 애써 무심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고 있었다. "대,대체 언제 낳은 거야?" "....110년전에." "농담하지 마! 자식아! 110년전에 낳았다면....인간이라면 도저히 있을 수 없 는 일이잖아!" 녀석의 얼굴이 조금 어색해졌다. 나는 미심쩍은 듯이 녀석을 보고는 슬쩍물었다. "인간이 아닌거야?" "......" 녀석은 묵묵히 허공을 쏘아보더니 그 시커무리 둥둥한 로브를 휘익 뒤로 넘기며 말했다. "엘프여자였어." "에에에에에엑?" 내가 너무 놀라서 뒤로 자빠질뻔 하는 순간 킬트는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으면서 팔짱을 낀다. 나는 이 엉뚱한 사태에 잠시 머리를 식히기 위해서 이마를 짚고 나름대로 우아한 자세를 유지했다. 쿠리마를 타고 날아가고 있는 우리들은 머리칼을 사정없이 바람에 휘날리 며 쿠리마의 목덜미에 앉아있었다. 쿠리마는 나를 태우고 가는 것이 겁나 는 건지 거슬리는 것인지 아까부터 머리를 슬금 슬금 흔들고 있었다.아마 재수좋게 내가 떨어지기라도 하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몸께서 떨어질 이유란 엘프의 터럭 만큼도 없는 일로서 쿠리마 의 시커먼 털을 움켜 쥐고 앉은 나는 두 다리로 꽈악 그 목줄기를 조이고 당당하게 앉아있었다. 멀리서 보면 앙상하고 음침한 이 놈 킬트가 주인이 아니라 당당하고 근사 한 내가 주인인 듯 보일 것이다. 녀석의 새까만 머리칼이 바람에 날려 희고 창백한 이마가 드러났다.굉장히 마음넓은 엘프인 모양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보통 인간 여자라도 이런 놈 에게 마음이 넘어갈 리가 없지않는가. 잘생긴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상냥한 것도 아니다.어느 쪽인가 하면 무척이나 제 멋대로이고 엉망진창인 냉혹무비한 놈이다.나처럼 여자에게 잘해주거나 하는 데는 전혀 없다. 그런 이 놈에게 반했다는 여자는 대체 어떤 여자일까? 게다가 엘프라니 전혀 상상도 가지않았다. "...그 여자가 아들을 낳았다고 얼마전에 들었어." "누구에게?" "....노스엘스턴의 장로에게." "에에에엑?" 킬트는 시커먼 눈으로 날 찌익 노려보았다. "그 이상한 소리좀 그만 낼 수 없냐?" "아니.아니. 잠깐만. 그냥 길가던 엘프여자가 아니고 노스엘스턴의 엘프여 자란 말이야?" "....그래." "어떻게 하다가 그렇게 된거야?" "말 하자면 길다." "난 시간 많다." 내가 잘라 묻자 킬트는 흘긋 날 보고는 한숨을 내 쉬었다. "너에게 말하다니 내가 미쳤지." "이봐, 여자 문제는 내가 너 보다 백배 천배는 낫다.어서 이 형님에게,아니 이 스승에게 묻고 그 고견을 구하는 게 어떠냐?" "....이 자식..." 핏대가 오르는 것을 무시하고 나는 재차 물었다. "그 여자를 몇번이나 만났냐? 그녀는 아직도 널 좋아한대? 아님 혹시 널 증오라도 하는 거야?" "그만 좀 물어!" "노스엘스턴의 엘프여자가 너같은 인간과 맺어졌다는 것은 엄청난 사건이 야. 지고무상의 신비란 말이다." "...." 답답한 놈. 녀석은 입을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들은 어쩔 수 없이 쿠리마를 탄 채 그대로 날아서 처음 왔던 에녹카든 에 도착했다.우리들이 도착하자 쿠리마의 엄청난 모습에 얼이 빠진 자들이 악악 소리를 내지르면서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아래서 내려다 보니 마치 겁에 질린 쥐떼들 같아서 나는 키가 크거나 아님 날 수 있는 종족들이 왜 그렇게 잘난 척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하늘 위에서 내려다 보면 땅바닥을 박박 기는 하등한 물건들 처럼 보이는 것이다.그게 아마도 조인족이 그렇게도 잘난 척을 하면서 코를 높이고 있 는 이유중 하나일 것이다. 땅을 기는 무리들은 아무리 기를 써도 그렇 게 오만무쌍하고 자신 만만하긴 어렵다. 나같이 잘난 분이야 그렇다 치지 만 이 정도 높이라면 나도 공격하기란 마땅치 않았다. 물론 바닥에서 돌덩이 하나 잡아 집어 던진다면 맞출 자신은 있다. ...그렇지만 그레이트 키메라 같은 물건을 돌멩이 던져서 떨굴 수야 없잖 아? "와아! 괴물이다!" "저건 뭘까?" "공격태세를 갖추어라!" "아악!" "꺄악!" 다들 떠드는 동안 나는 앙상하고 시커먼, 늙은 주제에 늙은이 소리를 절대 로 듣지 않으려는 고집불통이면서 냉혹무비한 흑마법사를 와락 끌어안았 다. "으앗!" 놀란 킬트가 비명성을 삼키는 동안 나는 그 소리를 즐겁게 들으며 정확히 에메스놈이 머물고 있는 저택의 안뜰을 조준하여 키메라에서 뛰어 내렸다. 바람이 눈알을 후려갈겨대서 약간 아팠지만 왠지 즐거운 기분이 되어서 나 는 소리를 내지르면서 안뜰의 화단을 조준하며 몸무게를 최대한 가볍게 했 다. 킬트녀석은 내 허리에 답삭 달라 붙은 채 뭐라고 욕을 터뜨리고 있었 지만 주문을 외우진 않았다. 결국은 내가 붙어 있는한 추락사 할 리는 없다는 것을 녀석도 알고 있는 것이었 다. 몸이 아래 저택의 정원 한가운데로 떨어지는 순간 바닥이 콰아앙 하고 큰 소리 를 내면서 주저앉았다.덕분에 가운데 선 나와 킬트는 당장에 노랗게 흙먼지를 뒤집어 썼다.제길... 내 사방으로 둥글게 함몰해 버린 블록을 저걱거리면서 기어 나오자 먼지를 뒤집 어 쓴 경비들과 사람들이 입을 저억 벌린 채로 순간 석상이 되어 우리들을 바라 보고 있었다. 나는 그런 인간들의 모습을 무심히 보아 넘기면서 킬트녀석을 땅바닥에 패대기 쳤다.그러나 녀석도 그것을 눈치챘는지 재빨리 착지 형태로 몸을 돌렸다.그러 나...하하..평상시 몸을 단련하지 않는 마법사들이 제대로 착지할 리가 있나. 녀석은 호되게 엉덩방아를 찧고는 이를 갈며 나를 쏘아 보았다. 솔직히 말해 몸을 평소에 단련하는 마법사들을 나는 본 적이 없다.그런 주제에 길게 길게 수명을 누리는 것은 틀림없이 음흉하게도 마법의 힘을 빌린 탓이다. 그래서 내가 마법사가 싫다는 거다. 머리만 대굴 대굴 굴려서 우로 굴리고 좌로 굴려서 얻어낸 마법의 힘으로 쇠약해 빠진 그 몸뚱아리를 불사로 만들어 놓다 니. 이건 뭔가 불공평한 일이 아닌가 싶다. 인간 중에서도 제법 튼튼한 스카같은 녀석도 몸단련을 절대로 빼놓지 않건만 녀 석은 앞으로 30년 정도면 노쇠해서 바닥을 박박 길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저 허약해 빠진 마법사 녀석이 300살이 넘었고 앞으로 200년은 살아갈 것이라 생각하니 왠지 기분이 찝찝했다. "쿠베린!" 가빈이 제일 먼저 달려오며 나에게 물었다. "린은요?" "몸은 대지의 여신에게.머리는 창공의 여신에게 바쳤다." 나는 그렇게 말하곤 멀뚱거리며 날 바라보고 있는 녀석들을 돌아 보았다. 가빈과 미트라,그리고 어느샌가 엘레와 튜나가 멍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그 들을 보고 있다가 나는 손을 휘휘 내저으면서 말했다. "배 고프다." 거북한 얼굴이 되어 있는 기생오라비가 내가 우걱거리고 먹고 있는 모습을 바라 보고 있었다. 내 옆에 앉은 킬트는 아직도 그 어두운 몰골을 하고 앉아 우물거 리고 음식을 먹고 있었고 가빈은 내 옆에 바짝 달라 붙어서 침묵하고 있었다. 문득 튜나가 물었다. "랜달브리거를 공격해온 인간놈들은 대체 어디서 온 건지 알아냈나요?" 그녀는 팔짱을 끼고 그녀의 세명의 음산한 표정을 한 도둑들과 한곳에 뭉쳐서 기생오라비를 도발적으로 바라보고 있었고 킬트는 무심한 얼굴로 튜나를 바라보 고 있었다.그녀가 하프엘프라는 것을 깨닫자 마자 왠지 아까 부터 튜나를 흘긋 흘긋 보고 있는 품이 범상치가 않았다. 설마 튜나가 킬트의 아들인가? 아니, 잠시만. 튜나는 여자잖아? 그럼 튜나는 본디 남자애인데 변장하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여자가 남장하는 경우는 있어도 남자가 여장하는 경우는 드물지 않은가? 족발을 들고 나는 잠시 멍청히 튜나를 바라보았다. 기생오라비는 고개를 저었다. "모릅니다." 그는 침통하게 말했고 부끄러운 듯이 잠시 입을 다물더니만 고개를 돌려 아까부 터 침묵을 지키고 있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 사내는 낯선 얼굴이었다. 흑수염처럼 단단해 보이는 얼굴도 아니었고 기생오라비처럼 반반한 얼굴도 아니 었으며 킬트처럼 음침한 얼굴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이 몸처럼 멋진 얼굴도 아니며 가빈처럼 귀여운 얼굴도 아니었다. 한 마디로 말해 평범한 얼굴이었다. "이분은 이곳 에녹카든의 시장이신 엘 브리엄공이십니다." 사내는 사십여세 정도 되어 보였다. 내가 그를 보자 그도 날 바라보았다. 그 창백한 푸른 색 눈을 보고 나는 이 놈 이 범상한 놈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조금 놀랐다. 이 난리를 치르고 있는 주제에 그의 눈은 침착해 보였던 것이다.허긴 랜달브리 거의 시장도 범상한 사내는 아니었다.죽었는지 살았는지는 모르지만. 공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아 하니 이 사내는 드물게도 귀족인 모양이었다. 이런 작은 소도시엔 대개 평민의 시장이 자치단체를 이끌고 있는 경우가많은데 이 사내는 영주이며 동시에 시장인 모양이었다.그러나 옷차림은 평범한 초록색 튜 닉을 걸치고 있을뿐 귀족이란 냄새는 거의 나지 않았다. "랜달 브리거의 시장인 형님이 당신들 이야길 해주었습니다." 해애 해애 하고 내가 놀랄 찰나에 그가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이 에녹카든에는 용병 이천이 모여 있습니다.이 병력으로 어떻게든 놈들을 막 아야죠. 그건 그렇고 지금 용병대장 몇명이 와서 기다리고 있으니까 전 이만 실 례하겠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천천히 일어서서 기생오라비가 무안할 정도로 당당히 밖 으로 나가버렸다. 식당안에 남은 우리들은 멍청히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멋지군...." 튜나가 중얼거렸다.그녀는 두 눈에 별을 반짝이듯 하면서 말했다. "멋진 시장님 아닌가요? 난 알고 있다구요. 엘 브리거공은 용병대장으로 시작해 서 귀족작위를 받은 유명한 용병귀족이지요." "그래?" 내가 멀뚱 멀뚱 그녀를 바라보면서 스프를 들이키자 튜나는 지긋이 기생오라비 를 바라보며 말했다. "음,맞아. 이 허약해 빠진 왕국에서 귀족이 되는 길은 단 두가지니까. 첫째는 거부이거나 둘째는 병력이 크거나지." 그 말에 불만을 토하는 기생오라비가 말했다. "심한 말씀이군요." 튜나는 기생오라비를 돌아보며 차갑게 말했다. "뭐가? 평민 귀족이라서 뻣뻣하게 고개를 쳐들고 있잖아요? 당신!" 기생오라비는 흠칫해서 튜나의 손가락질을 받고 몸을 굳혔다. "그런데요..그건 그렇고 쿠베린, 지금 옆에 계신 분은 누구죠?" 가빈이 내 옆에서 물을 따르다가 킬트를 보며 물었다. 일제히 시선이 이리로 쏠렸다. 킬트는 시선을 받고도 태연자약했다.당연하게도 이 녀석은 보통 늙은 게 아니니 뻔뻔할 수 밖에. "응,킬트라고 내가 옛날 부터 알던 마법사다." "아아..안녕하세요." 가빈이 새삼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말했다.킬트는 그를 차가운 눈으로 흘긋 보 더니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말했다. "야묘족이라.. 꽤 드문 종족아닌가?" "드물지." 나는 마지막 한 점의 살코기를 베어 입안으로 삼키며 대꾸했다. "난 튜나에요.당신도 상당한 마법사 같은데?" 튜나가 끼어 들며 말하자 킬트는 그녀석 치고는 믿을 수없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튜나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음." "쿠베린은 소개해 줄 사람이 아니니 제가 소개하죠, 이쪽은 가빈이라고 쿠베린 의 침대인지 베개인지 그렇고요, 저쪽은 기생오라비-아니, 오스칼이라고 하는 애메스 베델공작의 기사지요, 그리고 이쪽은 .." "조인족이군." 킬트가 엘레를 보며 흥미진진한 시선을 던지자 엘레는 흠칫했다. 그 싸늘함과 인간같지 않은 냉엄함에 그는 불쾌감을 느끼는 듯,아니 두려움을 느끼는 듯 했다.무리도 아니었다. 킬트자식은 희귀한 종족들은 수집하는 취미를 가지고 있었으니 드물디 드문 조 인족을 보고 즐거워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지도 모른다. 킬트는 무심히 다시 고개를 돌리고 나를 보았다. "매우 재미있는 애완동물이 많이 있군 그래?" "아아...너 만큼 재밌는 놈은 드물지." 내가 그렇게 대꾸한 순간 녀석의 손이 시커멓게 변하더니만 날 그대로 후려갈겼 다.물론 나도 한두번 겪은 일이 아니기에 재빨리 옆으로 피했고 그 덕에 내가 앉아 있던 자리가 퍼엉 하는 소리와 함께 터져나갔다. 파편과 먼지와 타는 냄새가 사방으로 가득 차는 가운데 튜나가 먼지를 뒤집어 쓰고 고함을 질러댔다. "뭐하는 짓들이야!" KUBERIN....... 외로움이 아닌 고독 속에서 침묵을 지켜라 그리하면 그대 삶 속에 버티고 있던 죽은 자들의 영혼이 다시끔 죽음 속에서 그대를 둘러쌀 지니 그리고 그들의 의지는 그대를 지킬지니 그대, 그대로 있으라. BY E.A.POE 8 지금까지의 일을 종합해 본다. 첫째, 이 근사하고도 아름다운 몸에 상처를 낸 휴런 녀석은 지금 행방 불명, 꼬 락서니를 보아선 아마도 반쯤 발광해서 나돌아다니고 있는 듯 하고. 둘째, 가끔 돌연변이같이 반쪼가리 사인족과 멀쩡한 사인족이 번갈아 가며 나오 고 있다는 것, 그리고 반드시 그 사이에는 인간 마법사가 섞여서 별 음모같지도 않은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것, 세째, 그리고 지금 나와 이 인간들의 모임은 이 쥐털만한 도시 에녹카든을 지키 기 위해서 모여있다는 것 등이다. 네째, 그리고 나는 내 사랑스런 조막만한 파란 귀염둥이를 볼 수 없다는 것이 다. 다섯째, 그리고 지금 내 곁에 왠 방자하고 건방지고 늙어빠진 음흉한 마법사 하 나가 잘난 척 코를 들어 올린 채 버티고 있다는 것이다. 여섯째, 잘은 모르지만 이 음흉한 마법사의 제자중 누군가가 건방지게도,아니 담대하게도 반란을 일으켜서 밖으로 나갔고,그 밖이 지금 여기란 사실. 일곱째,튜나와 엘레의 사이에서 알수 없는 무언가가 지금 시작되고 있다는 사 실.하프엘프하고 조인족사이에 뭔가가 생기면 뭐가 될까? 여덟째, 그것을 보고 미트라가 내 옆에 달라 붙어서 내 옆구리를 팍팍 찌르고 있다는 사실...큰 눈이 쏟아져 내릴 듯이 나를 올려다 보며 반짝반짝 빛을 발하 고 있는 그 모습은 차마 나 혼자 보기 아까울 정도다. 아홉째, 나는 배가 고픈데 지금은 밥을 먹을 때가 아니라고 밥을 안주고 있다는 사실............. "지금 포고령이 내렸다합니다!" "포고령?" 에메스가 창백한 얼굴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에메스와 그 일당들은 시청의 건물인 듯한,혹은 그 튜나가 멋지다고 연발한 영 주의 저택의..뭔가 복잡하군. 하여간 그 대전에 있었다.보고를 기다리는 듯했던 그 잘난 영주는-나도 이름을 알고 있는 자였는데 기억이 잘 안난다.흐응, 사내 자식들 이름을 내가 뭐하러 기억하나?- 굳은 얼굴로 무릎을 꿇고 반쯤 쓰러질 듯 비틀거리는 전령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령은 고개를 들고 긴장한 눈매로 보고했다. "전 국토에 비상령이 내렸습니다.신흥공국 룬드바르공국이 십만 대군을 이끌고 공격하겠다고 델리암왕국에 선전포고를 했다고 합니다!" "뭐라구!" 에메스는 부지 불식간에 부축하고 있는 비오나의 팔을 꽉 쥐면서 옆에 선 냉정 한 얼굴을 한 영주이자 시장이라는 이중 지위를 가진 사내를 바라보았다. "농담이 아니다! 지금 델리암 남부를 이정도로 엉망진창을 남겨놓고 이제서야 선전포고를 해?" 에메스의 눈이 날 바라보았다. "델리암 남부를 강타한 그 군대는 벌써 한달은 이 근처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놓 고 있었잖아! 그런데 지금에 와서 선전포고?" 그가 흥분할 무렵 옆에 앉아있던 팔짱을 낀 영주=시장이 점잖게 말했다. "그렇다면 그들은 오랫동안 준비를 해 놨다는 말이겠군요." 모두의 시선이 그를 바라볼때 생각 난 듯이 영주이자 시장이 고개를 돌려서 짧 게 말했다. "잠시 나갔다 오겠습니다.공작,룬드바르공국에 대해 좀더 알아보는 게 좋겠습니 다.혹시 그들에 대해 더 아시는 것이 있습니까?" "아는 것은 별로 없소이다. 지나가는 상인들에 의하면 그 쪽 상권이 갑자기 엄 해졌다는 이야기만을 들었소.룬드바르 공국의 영주는 틀림없이.....하인라인 에 노트 룬드바르라고 했던 거 같소." "....젊은 자였던 것 같군요. 젊은 애송이라서 별로 신경쓰고 있지않았습니다." 상념에 잠긴 듯한 얼굴로 그가 중얼거렸다. 그래,역시 젊은 놈이 위험하다니까. 내가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는 동안 그 시장=영주는 일어서서 밖으로 나갔다.뭔 가를 알아보려고 그러는 모양이었다. 그가 나가자 약간 어색한 분위기가 돌았다.에메스는 나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시선을 모른 척하고 나는 팔짱을 끼고 옆에서 왠지 아까부터 만년빙하라도 녹일듯한 표정으로 엘레를 바라보고 있는 튜나를 바라보았다.튜나와 나란히 선 엘레는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어딘가 전과는 달리 뭔가가 하나 빠진 얼굴이었다. 살벌함이랄까 그 조인족 특유의 잘난 척 하는 느끼한 그 모습이 빠져있는 것이 다.게다가 둘이서 시선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뭔가 발그레한 분홍빛 발광물체가 그들 앞에서 알짱 알짱하고 빛을 발하고 있다. 내가 그들을 흘긋 흘긋 보고 있는 사이에 미트라가 내 옆에 와서 팔뚝에 손을 대고는 살짝 물었다. "둘이 잘 어울리지?" "...반쪼가리 엘프와 조인족이라...." 나는 깊은 감회에 사로잡혀 말했다. 속이 쓰리지않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조막만한 계집애는 나의 취향이 결코 아닌 것이다.그러나 물론 내 앞에서 어떤 남녀가 이렇게 애정을 과시하면 불숙 불쑥 뭔가가 치솟기는 했다. 내가 뭔가 한 마디하려는 순간 옆에 있던 가빈이 천연덕스레 뒤를 돌아보며 한 마디 했다. "응,린,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그 자리에 있던 자들은 모두 얼어붙었고 무의식중에 뒤를 돌아보며 말했던 가빈 자신도 새파랗게 얼굴이 질려버렸다. 차가운 것이 등골을 스쳐지나갔다. 아니 정확히 말한다면 머리통을 두들겨 맞았는데 누군가가 거대한 발로 꾸욱 꾸 욱 밟고 지나가는 듯한 느낌이랄까,혹은 누군가가 기나긴 손톱으로 내 가슴을 쿠욱 찌르고는 한바퀴 돌린 뒤에 그도 모자란 듯 발등을 꾹꾹 밟는 느낌...끔찍 한 여자가 내 입술에 키스하곤 할작 할작 거리면서 나를 쓰러뜨릴 때의 느낌.. "으으,,으아아아앙" 왈칵 가빈이 울음을 터뜨렸다. 그는 어어어어엉하고 울기 시작하더니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그 놈의 눈물로 이 자리에 있던 모든 자들이 동시에 빨래를 하고 술을 담구어 먹고 목욕을 해도 남을 정도였다.조금,.과장이었나. 갑자기 가빈이 내 가슴팍을 잡아 당기더니 엉엉 거리며 울더니 나에게 소리를 질러댔다. "린을 살려줘요! 린을 살려달라구요! 린을 돌려줘요!" 그렇게 울면 나도 울고 싶어지잖아. 지금 자꾸만 다른 생각을 해서 안 울려고 버티는 중인데 지금 여기서 또 울어버 려야 한단 말이냐? 가빈이 내 가슴을 후려갈겼다. "내가 강했으면! 내가 강했으면 린은 안죽었어요! 왜 그때 없었던 거에요! 왜 그때 없었던 거에요! 그깟놈들 쿠베린의 한 주먹거리면 다 없앨수 있었는데! 왜 그때 없었어요!" 그렇게 엉엉 울고 있는 동안 나는 문득 시선을 에메스에게 돌렸다. 에메스의 창백한 뺨이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다시 내 시선을 피하고 바닥을 내려다 보았다.나는 시선을 거두고 가빈을 진짜 고양이답게 끌어당겨 안아올렸다. "가자." "싫어! 린을 데려와 줘요!...뭐든지 다 할 수 있다며? 린을 데려와줘요!아으으 으으윽..." 내가 막 안아 올려 나가려는 차였다. "진짜 데려와 주랴?" 냉혹한 음성이었다. 나는 움찔했고 가빈도 울다가 멈칫했다. 내 어깨 너머로 가빈은 그 냉혹무비한 음성의 주인공을 바라보았다. 새까만 옷을 걸친 킬트녀석이 유혹하듯이 가빈을 바라보고 있었다. "닥쳐!" 내가 외치자 킬트는 재미있다는 듯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 "너처럼 저 녀석은 죽음이 익숙하지 않은 거야.쿠베린. 대개 살아있는 존재 모 두가 죽음에 익숙하지가 않지." "시끄러!" 내가 싸늘하게 외치자 킬트는 나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가빈에게 물었다. "원한다면 도로 데려오겠다.정말 원하니?" "네!" 가빈이 갑자기 고집세게 내 팔을 밀어 붙이곤 킬트에게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 녀석의 눈은 한껏 커져서 동공이 더 가늘어지고 있었다. "진짜 데려올 수 있나요?" "물론,나는 할 수 없는 일은 말하지 않아." "몸뚱이만을 데려오길 바라는 거야?" 내가 차갑게 가빈에게 말했다. 가빈은 녀석답지 않은 대담함으로 날 쏘아보았다. "난 린을 좋아해요! 린이 돌아올 수만 있다면 뭐든 좋아요!" "린이 죽어버린 자기 몸뚱이를 네가 휘두르는 것을 좋아할 거란 말이냐?" 나는 차갑게 말했다. 가빈이 반항적으로 턱을 치켜 들었다. "뭐든 좋아요! 쿠베린은 린을 살려내지 못했잖아요!" 나는 녀석을 집어 던졌다. 바닥에 나동그라진 녀석은 빙글 맴을 돌더니 고양이 처럼 착지하고는 나를 반항 적으로 쏘아보았다.울어서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이 기묘하게도 고집세게 보였 다. "린을 죽게 한 건 쿠베린이야! 저 바보덩어리 에메스따위 지킬 필요가 뭐가 있 단 말이야! " 나는 그를 냉정하게 바라보았다. 속으로 뭔가가 자악 찢어져서 스물 스물 올라온다. 그 자리에 있던 자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킬트는 여전히 킬킬 거리면서 여유작작한 얼굴이었다. "나 이제 쿠베린의 난로하지않을래!" "맘대로 해라." 나는 잘라 말했다. 갑자기 초라해 지는 것은 이 때겠지. 하지만 적어도 저 야묘족의 금빛 눈을 잃는 것은 아니니 나로선 관계없어.내 옆 에 없다해도 죽어버리는 것 보다는 백배는 나아. "원하는 대로 해라.어차피 넌 묘인족이 아니니 난로일 필요는 없다." 나는 그렇게 잘라 말하고 킬트를 바라보았다. "너,내놔." "뭘?" 킬트는 내가 몰리는 것을 즐겁게 바라보고 있었다.그 눈에 잔인한 기쁨이 서리 는 것을 보면서 나는 손을 내밀었다. "그 애의 머리칼이나 혹은 이빨 같은 걸 가진 거겠지? 내놔." "무슨 소릴 하는 거냐?" 킬트가 히죽 웃었고 그 순간 나는 그의 앞으로 한 걸음 내딛으며 그의 얼굴을 손등으로 후려갈겼다. 퍼억 하고 킬트의 몸이 바닥으로 굴렀다. 비오나와 미트라가 숨을 삼키는 소리를 냈다. 킬트의 얼굴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헤롱거렸다.그 멱살을 잡아 쥐고 나는 나 직히 말해주었다. "쓸데없는 흑마법사,너 하나 죽여버리는 것은 내가 간단하다고 몇백년전부터 말 했지? 내놔." "웃기..지마!" 그의 얼굴에서 분노가 치밀어 오르며 뭔가 말하기 전에 나는 한대 더 후려갈겼 다.그가 제정신을 차리면 무척 위험해진다.그는 절정의 마법사기때문에 짧은 마 법어를 지껄이는 것만으로도 상대에게 치명상을 입힌다. 인간의 속도를 초월해서 한 대 먹여버리는 것이 최고의 수법인 것이다. 그의 입안에서 핏줄기가 터져나왔다. "쿠웃,.." "오랜 만에 만난 네가 이상하게 자상해서 그동안 까먹었다.푸른 아인족의 표본 을 얻기란 쉬운 것이 아니었겠지! 어서 내놔!" 나는 노성을 내질렀다. 녀석이 버둥거리는 것을 마구 흔들었다. "네가 내놓지 않는다면 네 몸을 벌거벗겨 개미굴에 던져넣겠다! 내가 한다면 하 는 사람인 줄 너도 알지!" 그의눈에 촛점이 없는 동안 나는 그의 로브자락을 재빨리 뒤졌다. 별 희안한 것들이 잔뜩 있었지만 그것들을 다 무시하고 그 중에서 푸른 빛깔을 띈,정확히 말하면 녹색의 머리카락 서너개를 넣은 유리 병을 발견했다. "이럴줄 알았어,이 더러운 흑마법사!" 나는 녀석의 허리를 걷어 차고는 단숨에 녀석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커억 하고 녀석의 턱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났다.이 정도면 잠시간은 시간을 벌 수 있겠다. "쿠,쿠베린,너무 심한 것.." 옆에서 누군가가 뭐라고 말하려 한 사이에 나는 유리병을 깨트리고 그 머리칼을 쥐고 밖으로 걸어나갔다. 가빈이 멍하니 서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밖으로 걸어나가다 문득 생각해 보니 굳이 불에 태울 것 까지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손을 뻗어서 바람에 맡겼다. 녹색의 머리칼이 날아갔다.아무런 장애도 없는 양, 무심하게, 살아있는 자들의 마음따윈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하고 날아간다. 그 머리칼의 행방을 눈으로 쫓다 보니 자연스레 하늘로 시선이 옮아갔다. 회색의 하늘은 뭔가 또 올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끔찍하게 덥다.속은 부글 부글 끓고 있다. 대기도 끓고 있다. 아래를 내려다 보니 지나가는 자들의 얼굴에도 치밀어 오르는 열기와 분노를 이 기지 못해 바글 바글 끓고 있는 듯한 감정들이 스며 있다.바람은 후덥지근 하 고 일하는 자들의 옷들은 다 땀으로 젖어있다. 모두 더위에 지쳐 있는 듯 보인다. 내가 내려다 보는 창문턱도 오랜 동안의 비와 더운 날씨로 비틀어져 군데 군데 갈라져 틈을 보이고 있었다.본디는 갈색이었던 그 창틀은 비틀어지고 바래서 이 젠 누런 색으로 보인다.그 누런 창틀 틈 사이로 몇마리 작은 거미들이 바삐 지 나갔다. 흐,그러고 보니 거미집 작은 게 몇개 보이는 군. 복도 끝 천정에 약간 회색빛이 도는 거미줄이 먼지에 덮힌 채 그대로 남아있다. 바삐 일하는 인간들이 짜증을 참고 움직이고 있었다.그 모습이 게을러 빠진 커 다란 개미처럼 보인다.그들은 물건을 나르고 싣고 만들고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 다.이 주먹만한 도시는 그들의 땀으로 그들의 움직임으로 살아서 이 곳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사는 것은 무엇이고 죽는 건 뭐냐? 잘난 척 하는 철학자들의 혀끝에서만 맴도는 그런 말따위 내가 지껄일 줄은 몰 랐다.아니 나로서도 웃기는 일이다. 겨우 몇개월,어쩌면 1년쯤 될까 말까한 파란 꼬맹이와의 사별이 슬퍼서 엉엉 울 어버린 나자신이 너무 바보같다고 생각한다. 벌써 죽어 넘어간 게 일단 한 둘이 아니잖아? 이젠 슬슬 익숙해질 때도 되었잖 아? 하늘은 회색빛으로 여전히 어둡다. 죽은 자는 대지의 여신에게, 창공의 여신에게. 아아...알고 있단 말이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마음은 여전히 아프단 말이다.죽음에 아무리 익숙해져도 아 픈 것은 사실이란 말이다. 살아있는 것은 내내 살아있고 죽은 것은 죽은 것. 살아있는 것은 먹고 싸고 사랑하고 엎어져 자고 떠들고 웃고 지껄여댄다.죽은 것은 벌레나 들짐승에게 파먹혀 자신을 잊어가는 자들에 둘러싸여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사랑하는 자의 죽음은 내가 덜 사랑하는 자의 죽음보다 더 아프 다.나는 다른 자들을 죽이지만 다른 자들이 내 것을 죽이면 아프다. 이기적이라고 떠들어대도 할 수 없다. 나는 내 것이기에 내가 사랑하고 마음을 주는 것이기에 죽으면 가슴이 아프다. 가슴이 찢어진다. 제기랄... 잊어라,잊어라.죽은 자는 잊어라. 주문처럼 외워도 끝이 없는 말. 제기랄! 계집애처럼 지껄이고 앉아있군.그만 하자! 그만해! 죽음은 아름답지 않아. 그러나 죽은 자의 기억은 아름다운 것. 그래,그래 파랗고 어여쁜 내 꼬맹이. 안녕. 제 10화 마법사 KUBERIN........ 나는 하늘을 향해 이를 드러내고 주먹질을 하며 눈을 흘기고 피를 흘린다. 수없이 반복해도 운명은 바뀌지않는다. 오,무모한 행동. ..그러나 나는 무모함을 사랑한다. 1 햇살이,별로 바라지도 않는 햇살이 창문 틈 사이로 길게 다리를 뻗히고 있다. 이쁘지도 않은 주제에 꼬리가 왜 이리 길어? 더워 죽겠네! 내가 투덜거리면서 창문을 열까 말까 망설이면서 침대에서 대굴 대굴 거리는 동 안 배가 고파졌다. 한숨 자고 일어나니까 역시 배가 고프다. 일어나 가빈하고 무의식중에 부르려다가 옆에 녀석이 없다는 것을 떠올리고 단 념했다. 제기랄... 당장 없으니 아쉽군. 어쩐지 간밤에는 허전했어.아참,그,그게 아닌가? 옆에는 아리따운 금발아가씨가 누워있었다.그녀의 알몸에 키스해 주고 비슬 비 슬 일어나 뭔가 주워 먹을 거 없나 하고 문앞으로 다가갔다.그러고 보니 여기가 어디더라? 주섬 주섬 옷을 주워 입고 문을 열었다. 빠곰히 문을 여니 마침 한 사내가 내 옆으로 급한 발걸음으로 스쳐지나간다.아 니 지나가려 했다.그는 막 방문앞을 지나가다가 우뚝 발걸음을 멈추고 갑자기 살벌한 얼굴로 날 홱 돌아보았다. 네모진 얼굴에 강직해 보이는 그 사내는 날 보더니 고함을 질렀다. "당신! 거기서 뭘했지?" "뭐?" 난 그를 물끄러미 보다 말고 잠시 내가 뭘 했던가 생각했다. "내 누이방에서 왜 네가 나오는 거야!" 그가 주먹을 바르르 떨더니 내 아름다운 얼굴로 주먹을 휘날렸다.그러나 내가 한낱 인간따위에게 맞을 인물이 아니다 보니 슬쩍 피했고 사내는 주먹의 방향을 재빨리 틀어 인간답지 않은 날렵함을 보이더니면 어느새인가 허리춤에서 칼을 꺼내어 내게 휘둘러댔다. "죽어라!" 그 레이피어를 보면서 나는 슬쩍 슬쩍 고개를 돌려 피해냈다. "진심이야?" "이 자식!" 그는 진심인 모양이다. 벌겋게 달아오른 그 얼굴과 일그러진 그 입매만 보아도 나름대로 살기에 넘쳐있 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몸은 너무나 배가 고파서 견딜 수 없는 중이라 인내력이 바닥을 기고 있었으며 지금 이순간 차마 녀석을 깨물어 먹기도 그렇고 하니 슬쩍 밀쳐 주었 다.게다가 음식을 많이 주는 이곳 영주=시장의 체면을 봐서라도 함부로 굴 수 없는 터라 살짜기 살짜기 피해주었다. "안녕..." 녀석의 발을 턱 하니 걸자 녀석이 앞으로 고꾸라진다. 녀석의 몸이 앞으로 쏠리는 찰나에 그 뒤통수를 가볍게 갈겨주었다.녀석이 억 하고 엎드린 자세 그대로 복도에 널부러진다. 기절이겠지. 나는 발걸음도 가볍게 복도안을 걸었다. 어디선가 맛있는 냄새가 나온다. 재수좋으면 주방을 발견하는 것이다. 약간 낡고 약간 작지만 나는 이 저택이 참으로 마음에 들었다. 저택 안을 휘휘 돌고 주방에서 새끼돼지 한 마리를 줄기차게 먹어치운 뒤에 나 는 주방 아주머니들에게 키스를 바쳤다.그녀들이 꺄꺄 하며 웃음을 터뜨리는 동 안 나는 사과하나 물고 저걱 거리면서 밖으로 걸어나왔다.주방에서 걸어나오면 안뜰,그리고 안뜰을 거쳐 나가면 물론 뒤로 가면 여성들이 머무는 후원이 있겠 지만 나는 지금 후원으로 갈 생각은 그다지 없고-지금 후원에서 나왔으니까- 앞 으로 곧장 기사들이나 병사들이 날뛰고 있을 앞뜰로 간다. 허긴 빈말로라도 그걸 뜰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 거 같다.어제 봤지만 그 앞... 광장이라고 부를 만한 그곳은 정원수는 전혀 없이 삭막했고 그 자리엔 오로지 지쳐 빠진 인간 병사들만이 즐비했으니까. 역시 이 저택은 보통의 귀족저택과는 다른 구조인 것이다. 하늘은 여전히 희뿌옇게 보인다. 사람들이 땀을 흘리며 왔다 갔다 했던 뒤쪽으로 가려는데 문득 사방이 지나치게 조용해서 기묘한 생각이 들었다. 이 저택안은 분명히 이런 저런 인간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고 그 인간들이 움직 이는 소리는 언제나 웅성 웅성한다.그런데 지금은 조용했다. 기분나쁜 적막감,슬픔이 녹아 있는 대기. 나는 코를 공중에 들이내밀고 킁킁 냄새를 맡다가 고개를 저었다.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일단 궁금증이 먼저라서 그 사람들의 냄새를 따라 걸었 다. 시궁창이 가까와서인지 역시 썩은 냄새가 진동한다. 인간들은 한 곳에 몰려 사니까 오물도 보통이 아닌데다가 일단 숫자가 많고 먹 고 싸는 자들이 바글 바글 하니 주변이 더러운 것은 방법이 없을 것이다. 질척 질척한 땅을 밟으면서 기분이 나빠졌지만 그냥 걸었다. 먹던 사과를 휙 던져 시궁창안에 넣고 나는 움직이는 사람이 거의없는 안뜰을 바라보았다.요리사와 하녀들이 언제나 식사거리를 마련하고 있던 그 안뜰은 건 초더미로 조금 어지러워져 있었다.비가 오면 이 건초를 못쓰게 될 텐데 왜 이렇 게 놔두고 있는 거냐 하고 내가 투덜거릴 즈음 낮은 흐느낌 소리가 들렸다. 하아. 녀석들이 몰려있었다. 모여 있는 자들은 모두 에메스의 부하들과 성민등 여러가지 인간들이다. 에메스의 부하들은 기사들과 병사들이 모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자세로 모여 있었다.그들의 반짝 반짝 윤이 나는 은빛 갑옷들이 희미한 태양빛 아래 음울하 게 빛나고 있었다.검은 턱수염도 창백한 얼굴로 묵념에 든 듯 고개를 숙이고 있 다.그의 부하들 전부가 고개를 숙이고 있다.그들의 앞에는 거대한 향로에 이 더 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장작불을 활 활 태우고 있었다. 그 향로안에 돌아가며 병사들 몇이 작은 물건들을 집어 넣고 태우고 있었다.어 쩌면 그 작은 물건들- 손수건이라든가 작은 수술같은 것,나무로 만든 조각상같 은 것들-은 죽은 자들의 유품인 지도. 그 중에 기생오라비가 보인다. 그는 심각한 얼굴로 눈물에 젖은 눈으로 손에 갈색의 헝겊조각을 들고 있다.그 헝겊조각을 불속에 집어 넣으면서 그는 낮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로크...." 로크가 누구더라. 로크...그렇군. 덥수룩이가 보이지않았었다.죽었던가? 나는 나름대로의 사연을 가지고 인간들이 죽은 자들을 애도하는 광경을 바라보 았다. 죽은 자들은 죽은 자들대로 산 자는 산 자 대로. 병사들 몇이 흐느꼈다. 병신들,너희들은 지금 울 때가 아니라 싸울 때인 거다. 여기서 징징 짜봐야별수 없어,획기적으로 싸우기전에는 너희들도 그 뒤를 따를 뿐인 것이다. 가슴이 답답해지는 광경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갑자기 휴런 생각이 났다. 그 자식 또 이상한 마법사에게 걸려서 이상한 실험당하는 거 아닐까? 그리고 곧 이어 양산형 묘인족같은 게 나와서 와르르 덤벼든다면? 소름이 짜악 끼쳤다. 이럴 때가 아니다 싶어서 막 고개를 돌려 가려는 순간 갑자기 엄청난 기운이 나 에게 몰려드는 것을 느꼈다. 콰콰콰쾅! 내가 섰던 자리에 엄청난 구멍이 생겼다.그리고 그 자리가 자아악 금이 가더니 주욱 갈라졌다.멀찍이서 애도식을 하고 있던 병사들과 인간들이 놀라서 뿔뿔이 흩어지는데 그 목표물이었던 나는 얼마나 놀랐겠는가! "무슨 일이냐?" "공격이냐?" "적이다!" 다들 뿔뿔이 흩어지면서 병장기들을 부여잡고 난리가 났다. 왠 뿔고동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나오며 살벌한 긴장감을 더하는 순간! 음산하고도 음흉하며 살벌하고도 잔인한 웃음을 지은 히멀건한 얼굴의 킬트가 그 히멀건한 얼굴에 푸른 빛까지 돌면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녀석의 몸은 비행술법으로 둥둥 공중에 떠있었다. 녀석의 몸이 실드로 칭칭 감겨져 있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가슴이 뜨끔했다. "이노오오오오옴! 쿠베린!" 그가 이를 갈며 길죽한 손톱을 들어 나에게 뭔가를 뿌리쳤다. "어이,어이,그렇게 흥분하지 말라구." 순간 내 앞으로 쏟아지는 마법력을 피해 나는 잽싸게 피했다. 공중으로 도약하면서 나는 옆에 세워진 말등을 차고 다시 도약해서 성벽,아니 정확히 말하면 방책위로 올라섰다.그러자 나에게 쏘아진 그것이 맹렬한 빛을 머 금고-그 음산해 보이는 마법력을 빛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나의 뒤를 따라오는 게 아닌가? "이런,이런!" 나는 다시 맹렬히 방책을 달리기 시작했다.그 마법력이 눈이라도 달린 것인지 맹렬하게 나를 따라오는 것을 나는 미친 듯이 달려서 방책을 이번엔 꺼꾸로 달 려내려갔다.약 70메타쯤 되는 방책을 거꾸로 뛰어내려가는 동안 다시 힘차게 도 약해서 이번에는 녀석의 실드 코앞까지 진출했다. "자식아! 가져가라!" 퍼엉 아닌게 아니라 녀석의 실드에 적중된 그 마법력이 소멸했다. 내가 안도하기도 전에 녀석의 아무것도 없는 창백한 손이 나를 향해 다시 흩뿌 려졌다. "죽엇!" "저 자식을 아까 죽여버리는 건데!" 나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내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이 내 속도를 이기지 못하 고 뒤로 뿔뿔이 흩어진다. 나의 아름답고도 늠름한 다리여! 너를 찬양한단다! 그런데 그때였다. 콰쾅하고 엄청난 굉음이 터졌다. "에엥!" 나는 입을 저억 벌렸다. 기적과도 같이 백광이 갑자기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더니 실드안의 킬트를 직격 했던 것이다. 킬트녀석은 비틀 했고 그 녀석의 실드가 찢겨지면서 녀석의 몸이 하강하기 시작 했다.아마도 녀석은 의식을 잃었나 보다.그렇다고 떨어지게 놔두면 최소한 중상 이고 조금 심하면 사망이다. 나동그라지는 그 순간 마음 넓으신 내가 킬트녀석의 옷자락을 잡아채 바닥에 던 져두었다.의식이 가물 가물한 건지 킬트자식은 내가 시궁창에 던져놔도 아무런 생각이 없어 보인다. 뭐, 좋겠지,너 좋아하는 검은 색이다. 그놈의 그 섬광은 근데 어디서 온 거냐 하고 내가 눈을 부릅뜨고 있는데 갑자기 창공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오히오!" KUBERIN............ 나는 하늘을 향해 이를 드러내고 주먹질을 하며 눈을 흘기고 피를 흘린다. 수없이 반복해도 운명은 바뀌지않는다. 오,무모한 행동. ..그러나 나는 무모함을 사랑한다. 2 "저게 뭐냐?" 다들 병사들이 와르르달려와 하늘을 가리켜 보인다. 나도 멍하니 바라보았다. 하늘에 뭔가가 보이긴 보인다.희고도 밝은 빛을 띄운 것.그리고 그 가운데 있는 것은 한껏 미소짓고 있는 어떤 놈의 얼굴... 농담이 아니다.농담이 아니야. 몇몇 병사들은 바닥에 구르고 있는 킬트를 빠르게 포박하고 있었다. 시궁창에 누워있던 킬트는 아직 정신이 돌아오지 않은 듯 했다.만약 돌아온다면 더 복잡할 것 같아 나는 얼른 다가가 녀석의 머리통을 한대 더 걷어 차 주었다. "위험한 놈이야?" "끔찍한 마법사야,몇대 더 쳐둬." 나에게 묻는 병사에게 그렇게 말해놓고 나는 다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 하늘에는 휘황한 빛을 뿌리며 나타나는 한 명의 호화찬란한 백의의 인물이 있었으니.... 그 엄청난 빛을 뿌리면서- 병사들은 눈이 부셔서 모두 손으로 눈을 가려야만 했 다-녀석은 우아한 척 아래로 하강하고 있었다. 언뜻 보면 흰 깃털이 떨어져 내리는 듯 사쁜 사쁜한 모습이었지만 그 진상을 아 는 나로선 그저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녀석은 유유히 창날을 들이댄 병사들 앞에 섰다. "아,걱정하지 마십시오,전 저 사악한 흑마법사를 없앤 사람입니다." 그의 백색 로브를 보고 병사들은 호 하고 안도했다. 그는 상냥한 미소를 지으면서 길고도 아름다운 은발을 쓸어올리면서 보석으로 잔뜩 장식한 손을 들어 보였다.말 그대로 호화 찬란한 몸짓으로 오늘 날이 흐렸 기에 망정이지 만약 날이 좋아서 그때 햇빛이라도 있었더라면 다들 눈이 멀었을 것이다. "저,그런데 당신은 누구시오?" 병사들 중 한명이 물었다. "아,저는 아크라고 합니다." 그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공손히 말했다. 백옥같은 피부에 은발,그리고 새파란 물빛 눈동자,녀석이 여자가 아니라도 누구 든 혹해서 긴장이 풀어질 만한 모습이었다. "아크...? 라면?" 어떤 녀석이 조금 더 캐물었다. 당연히 미심쩍다는 얼굴이었다. 누구나 의심한다.왠 녀석이 하늘에서 갑자기 내려왔는데 의심하지 않는다면 그 거야 말로 이상한 노릇이니까. 그러자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이 녀석은 더더욱 활짝 웃는다. 분홍빛 입술에 하얀 치아가 반짝 반짝 빛을 발하고 은발이 찰랑 찰랑 흔들린다. "저는 룬 아크 더 팰리어스라고 부르지요.미천한 백마법사랍니다." "오오오오옷!" "아앗!" "저,.전설의 백마법사!" "아앗!" "룬 아크 더 마스터!" "빛의 최강마법사!" "와아아아!" 엄청난 환호성이 퍼져나갔다. 이상하게 인간들 중에는 킬트보다 아크를 더 잘 알고 있다.뭐 무리도 아니겠지, 킬트는 암흑마도에 박혀있고 아크놈은 떠돌아다니며 스스로 전설을 만들기를 즐 기는 놈이니까. 녀석은 그런 환호성을 즐기듯하면서 미소를 한 껏 지어 보였다. 그때 급히 기생오라비가 다가서서 물었다. "그러시면,..저희들을 도와주시려 오신 겁니까?" 기생오라비가 정색하고 진지하게 말하는 그 순간 아크놈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 졌다.그 상냥한 척 하던 얼굴이 가볍게 이그러지더니 냉정하게 말했다. "네에,뭐 일단은 그렇습니다.이곳 영주님을 뵙고 싶은데요." 그 냉정함에 조금 기생오라비가 당황하는 찰나 턱수염이 진지하게 말했다. "저어,이쪽으로..." 아크가 고개를 돌리다가 나와 시선이 따악 마주쳤다. 나는 팔짱을 끼고 한 발로 킬트를 밟고 있는 형상 그대로 였다. 아크녀석이 시익 웃어 보였다. "오오,쿠베린 아닌가?" "아아.변태,안녕." 나는 가볍게 대꾸해 주었다. 아크의 상냥한 얼굴이 가볍게 일그러졌다. "내가 방금 구해준 것을 잊지는 않았겠지? 그 널부러진 놈은 누구야?" 약간 어조가 거칠어진다. "아아,.킬트야." "에?" 아크의 눈이 커졌다. "킬트라구?" "응,킬트야." "왜,여기에 킬트가 있는 거얏!" 갑자기 그 잘난 가면이 팍 깨지고 히스테릭한 얼굴이 나타났다. 그 새된 소리에 놀란 병사들이 뒤로 주춤 할 때 아크는 자신의 추태를 의식했는 지 은근슬쩍 이마에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올리는 아니꼬운 동작으로 얼버무렸 다. "크..킬트가 왜 여기서 그런 자세로 널부러져 있는거야?" 낮은 목소리로 가볍게 이를 갈고 있다. "네가 지금 막 전광으로 후려갈긴 게 바로 킬트라구." "엑?" "너 킬트가 깨어나면 각오해야 할껄." "쿠베린.....너 그 발에 힘을 주고 몇번 밟아." 아크녀석은 내가 킬트의 배를 밟고 있는 한 발을 가리키면서 재빨리 뒤로 물러 섰다. 흐흐흐 하고 웃으며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몰라,난. 네가 후려갈겼지? 아마 킬트는 기억할걸." "제기랄! 제기랄!" 그가 크게 외쳤다.그리곤 날 잡아 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왜 하필 킬트냐!" "상대도 확인하지 않고 내 갈긴 네가 나쁘지." "하지만..널 공격하길래 난 틀림없이 왠 떨거지라고 생각했단 말이다! 젠장할! 누가 이 죽다만 시커먼 놈이라고 상상했겠어!" 그는 가면을 집어던지고 머리칼을 쥐어 뜯으면서 외쳤다. "저어,.저기...쿠베린,이분이 마스터이시라면,...안으로,..." 왠지 끼어들수 없는 기이한 분위기임을 느낀 기생오라비가 말을 거는 순간 아크 가 홱 고개를 돌리며 빽 소리를 질렀다. "입닥치고 찌그러져 있어! 이 기생오라비자식!" 사악 하고 다시 침묵이 감돌았다. 아크녀석은 난폭하게 머리를 쓸어올리더니 널부러진 킬트를 바라보면서 재빨리 말했다. "그놈 정신 차릴려면 얼마나 걸릴까?" "몰라." 나는 태연하게 녀석이 가면을 벗었다 말았다 하는 것을 보고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이봐! 안으로 안내해!" 녀석은 휘적 휘적 흰 로브를 들어올리면서 걷기 시작했다.그 뒤를 황급히 이상 하다는 듯이 턱수염이 따르고 있었고 가련한 기생오라비는 말 그대로 얼어 붙어 있었다. 나는 병사들 중 한명을 바라보면서 조용히 말했다. "여기 널부러진 이 녀석을 어딘가에 버리고 와." "위험한 녀석이라며? 감옥에 가두면 어때?" "......더 큰일 나니까 어딘가에 버리고 와." 난 아직도 얼어붙어 있는 기생오라비에게 다가갔다.녀석은 날 멍청히 바라보며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내가,...그,그렇게 간사하게 생긴 얼굴인가?" "뭐,아크 자식에 비하면 새발의 피지." "그,.그런데 왜 나에게?" "이유는 간단해.네가 미끈하게 생겼기때문이지." "에?" "아크 자식은 자기 보다 미끈한 얼굴을 보면 발작하거든." 아크녀석은 위선자다. 정확히 말한다면 녀석은 위선자라기 보다는 엄청난 질투장이다. 마법사가 되게 된 이유는 정확히 말해서 '남보다 더 잘나고 싶어서'라고 한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자신이 엄청난 재능의 소유자라는 것을 깨닫고 말아서 그 길로 마스터가 되고 말았다는 이야기다. 그런 까닭에 이 세계는 엄청나게 끔찍한 한 백마법사를 만나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그건 그렇고 왜 이 자리에 아크까지 등장하는 거야? 이건 너무 이상하잖아? "아직 래픽은 오지 않았나?" "네,아직.." "분명히 급히 오라고 전언을 전했을텐데 어디서 뭘하는 건가! 대체!" 영주=시장이 말하다 말고 들어서는 아크를 바라보았다. 아크는 온후한 얼굴을 바짝 들고 더럽게 품위가 넘치는 모습으로 걸어들어오고 있었다.그 앞에 시종이 급히 의아한 자신의 주인에게 알렸다. "룬 아크 더 팰리어스님 이십니다! 전설의 백마법사이신.." "어엇!" 옆에 있던 튜나가 입을 저억 벌렸고 그 뒤를 이어 비오나가 놀라 숨을 삼켰다. 물론 아크 녀석은 그 모습을 즐기면서 한 걸음 다가와 공손한 척 고개를 숙였 다. "아크라고 합니다." "이,이런! 아니,이런 결례가!" 영주=시장이 달려와 그 인사를 막았고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당황하고 있는 찰 나 아직 누군지 모르는 에메스는 눈을 말똥거리면서 턱수염에게 낮게 물어보는 것이다. "누군데?" "전설의 백마법사입니다." "아아..." 에메스 녀석은 무식이 강력한 지라 태연한 얼굴을 하고 아크를 바라보았다.그런 그에게 비오나가 재빨리 귓속말로 속삭였다. "어마 어마한 힘을 가지신 분이에요,일반 마법사랑은 비교도 안되요." "그래?" 왠지 미심쩍은 듯한 에메스의 시선이 아크에게 도달했다. 그러나 에메스가 아크를 어떻게 보든 그는 이미 에메스를 발견했고 그리고 엘레 를 발견했던 것이다. 에메스과 엘레를 보는 순간 그의 푸른 눈에서 말 그대로 섬광이 뿜어져 나왔 다. 말 그대로 살벌한 살광이었다. 그 눈빛은 엘레를 보는 순간 더더욱 광채를 띄었고 알 지도 못하는 마법사에게서 그런 살기에 찬 눈빛을 받은 엘레는 조인 족 전사다운 냉혹한 표정으로 맞받아 쳤다. 그들 사이의 눈싸움에는 누군가가 끼이기라도 했다간 뇌수가 산산히 터져나가고 온몸에 구멍이 뚫릴 듯한 강력한 힘이 맴돌고 있었다. 그런 상황을 알아채는 것은 오로지 나와 기생오라비 뿐이었다.나와 기생오라비 는 손에 땀(?)을 쥐고 그 광경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헤에,..수백살 먹은 할아버지로는 안보이네." 튜나가 간단히 아크를 침몰시켰다. KUBERIN............ 나는 하늘을 향해 이를 드러내고 주먹질을 하며 눈을 흘기고 피를 흘린다. 수없이 반복해도 운명은 바뀌지않는다. 오,무모한 행동. ..그러나 나는 무모함을 사랑한다. 3 이름을 가지고 장난하는 것은 내가 즐겨 하는 일이다.그렇지만 인간에는 당해낼 수가 없었다.내가 짓는 이름이야 뭐 간단히 애송이,검둥이,흰둥이,귀염둥이,덥 수룩이,기생오라비,예쁜이,멍청이,바보등등 말 그대로 정곡을 찌르는 진실한 이 름이지만 인간들의 거창하고도 멍청한 이름들은 전혀 진실미를 가지고 있지않은 것이다. 물론 이름이란 성스러운 것, 마법사들이 이리 조물락 저리 조물락해도 결국은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는 명명백백한 아름다운 진실이 바닥에 남아있는 법이지만 인간들은 그것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저 룬 아크 더 팰리어스란 인간들의 고어로 '빛의 대 마법사 아크' 라든가 혹은 '빛의 최고봉 아크','커다란 빛의 소유자 아크'등등이란 뜻이지만 본질은 결국 백마법사로 잘나가는 아크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이름 속에는 본질-사실은 '고약한 성질머리를 가진 아크'라든가,'지독하게 잘난 척하 는 밥맛없는 녀석 아크'라든가 하는 뜻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즉,진실의 이름이란 아주 아주 드물다는 의미다. "정말로 이렇게 당신을 뵐 수 있을지는 몰랐습니다!" 흥분한 어투로 말하는 비오나를 멍청히 바라보던 에메스는 나를 흘긋 보면서 슬 그머니 다가왔다.그런 에메스를 길가의 돌멩이 내지는 썩어 굴러더니는 감자덩 이로 여기고 있음이 분명한 냉담한 시선의 아크가 쫓는다. 저런 저런,쪼잔한 녀석. 저 자식 나를 처음 본 그 때도 그렇더니. 에메스는 나에게 슬쩍 다가와서 물었다. "저.....아까 그 흑마법사는 어떻게 된거야? 아까 펑 펑 거리는 소리가 그건 가?" "응." "너의 친구라고 했던 그 흑마법사와 저 백마법사....사이가 좋지않은 거 아냐?" "어떻게 알았어?" 내가 희안해서 바라보자 에메스는 아크의 찢어질 듯한 시선을 의식하며 대꾸했 다. "왠지 그럴 거 같아서.그건 그렇고 저 백마법사는...나에게 무슨 원한이라도 있 는 건가?" "별로 없어." "그럼 저기 서 있는 오스칼과 나,그리고 엘레에겐 왜 저리 살벌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거지?" "간단히 말해서 엘레가 잘생겼기때문이야." 에메스는 멀거니 날 바라보았다. "쿠베린? 농담하는 거지? 그런 단순한 이유로 사람을 저렇게 죽일듯이 노려본다 는 게 가능한 일이야?" "저 놈에겐 가능해." 에메스는 입을 멍청히 벌리고 애써 이성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콰아아아앙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노력을 무위로 만들 어 버리면서 저택 벽면이 통째로 터져나갔다. 그리고 그 위기의 순간, 둥글고 흰 실드가 멋지게 그 벽면의 파편을 맞이하여 마치 쏟아지는 우박을 막아내는 어미새의 길고 우아한(?) 날개짓처럼 새끼들(?) 을 보호해 내었던 것이다.물론 그 실드의 날개를 편 어미새는 다름 아닌 저 위 대한 백마법사 룬 아크 더 팰리어스라고 하는 분이었다. 또한 그 무서운 공격을 펼친, 먼지가 가라앉기도 전에 뚫린 벽으로 악을 지르면 서 나타나는 악마와도 같은 시커먼 녀석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저 유명하고도 두려운 이름의 소유자 룬 킬트 더 마이오스였던 것이었다. "이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낮게 음산하게 깔리는 목소리,저 지옥불에서 들끓는 악마와 나란히 앉아 악수를 주고 받을 수 있을 정도로 음산하게 울리는 듣기싫은 목소리는 그 자리에서 떨 고 있는 새끼들(?)의 혼을 빼놓을 정도로 괴기스러웠던 것이었다. 아아..이 가련한 인간들의 목숨을 구할 자는 없더란 말인가! 드디어 공포스런 목소리로 주변을 제압한 시커먼 흑마법사는 두 손을 아래로 늘 어뜨린 채 허옇게 빛을 발하고 있는 실드를 노려보며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에그노로나스카 마이라아쿠스카 유오리야마사카!" 그 순간 그의 양손이 방전되기 시작했다. 그 괴기스러운 음성에 따라 그의 손아귀에서 쏟아져 나오는 무시 무시한 기운은 그 자리에 있던 모두의 가슴을 내려앉게 만들었고 그의 입에서 튀어 나오는 그 증오의 불길은 그 자리에 있던 연약한 미녀들의 얼굴을 공포로 질리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었었다! ...라고 인간들의 음유시인들은 말하겠지만 나처럼 인간사를 굽어보고 있는 현 자는 저 싸움이 단지 너 잘났느냐 나는 더 잘났다의 저열한 싸움이외는 아무것 도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저택의 천정 위 대들보 위에 에메스를 쥐어 틀고 올라가 앉아 미친 두 놈 이 벌이는 드잡이질을 지켜 보고 있었다. "이 놈! 나를 공격하다니! 이 자식을 갈아 먹어버리겠다아!" "모르고 그랬단 말이다! 내가 넌 줄 어떻게 아냐!" 대들보 위에 앉은 에메스는 내 옆에서 그 것을 내려다 보며 물었다. "저 둘은...어떤 사이인 거야? 친구야? 적이야?" "그런 거...한 이백년간 굴러보면 스리 슬쩍 그 구분이 묘해지기 마련이다." "에?" 에메스가 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저 앞에 있는 흰둥이 아크놈은 어릴 때 부터 잘난 척 하길 좋아해서 백마법사 가 된 거고 저기 있는 검둥이 킬트는 어릴 때 부터의 꿈이 세계정복이어서 흑마 법사가 되었다는 군." "...." 에메스는 할 말을 잃고 침묵했다. "그런데 그게 어째....서로 힘을 얻기 위해 한 백여년간 노력하다 보니까 그 경 계가 애매모호 해지기 시작한 거 같아.그리고 나서 이백년이 넘어버리니까 왠지 녀석들 스스로가 잘난척 하는 것이 왠지 거북해지고 세계정복이 시시해져 버렸 다는 거지." "그래서 친구가 되었단 거야?" 에메스가 제법 감동받은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저게 친구가 된 걸로 보이냐?" "크아아아아..죽어랏!" "이 죽지도 않는 괴물 놈아! 죽어버렷!" 폭음과 전광과 빛과 음기와 양기와 불꽃과 광풍과 우박과 여러 기타등등이 이 저택안에서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비오나와 튜나가 둘러 친 보호막 안에서 멍청히 이 광경을 지켜 보고 있었으며 어느 새인지 이 저택의 사방은 다 뚫려져 나갔다. 굉음으로 귀가 따갑고 눈은 먼지로 덮힌 까닭에 사방을 돌아보기도 힘겹다. 에메스는 내 옷자락을 쥔 채 한숨을 내 쉬었다. "이런..이런." 그런데 어느 순간 킬트의 금속성이 섞인 기괴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메테오..." 노,농담도 아니다! "미쳤어!" 아크의 비명섞인 소리가 터지는 그 순간 나는 황급히 아래로 튀어 내렸다. 그리고 내려서자 마자 멋지게 킬트 녀석의 앞으로 달려나가며 그 녀석의 턱을 후려갈겼다. 빠각하고 녀석의 턱뼈를 부수는 그 순간 하늘이 울렁 울렁 하는 소 리를 내다 멈추었다. 등골이 서늘했다. 여기다 유성소환을 하겠다는 거야? 이 조만한 소도시 박살내고 이 자리에 있던 사람 다 죽어버리자구? 식은 땀이 흘러내리는데 옆에 있던 아크 녀석이 잘난 척 허리에 손을 턱 하니 얹고 하하하 소리도 명랑하게 웃기 시작했다. "꼴좋다.킬트놈." 나는 킬트를 돌아보았다. 킬트는 큰 대 자로 뻗어있었고 녀석은 너덜 너덜 한 검은 로브를 걸친 채 하수 구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거기에 앞에 선 아크 놈은 흰 로브를 번쩍 번쩍 자랑 하면서 잘난 척 웃고 있었다. 모든 일에는 공평성을 가져야 해. 나는 웃고 있는 아크 녀석의 턱뼈도 같이 으깨 주었다. 사태가 정리된 것은 한 참 뒤였다. 나도 약간은 동정심을 느꼈다. 이 난장판의 마법사 두 명이 와서 난리를 치는 바람에 이 근처는 쑥대밭이었다. 진지한 얼굴로 에메스와 시장=영주는 나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뭘, 천만에." 나는 그들의 인사를 점잖게 받아들이고 그 보답으로 한 상을 얻어 먹기로 약속 받았다.그리고 에메스와 그의 부하들과 시장=영주의 부하들은 작은 대전으로 자 리를 옮기고 다시 회의를 개시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그 마법사들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궁금한 듯이 문득 비오나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그 두분 모두가 저로선 상대할 수 없는 분들인데 그 두분이 ...계속해서 싸우 신다면." "걱정마.곧 밤이다.그럼 조용해 질거야." "에?" 나는 해가 지길 기다리고 있었다. 해가 지면 아름다운 한 여인이 꿈결같이 등장해 나의 마음을 헤집어 놓고 말 그 대로 미치광이처럼 만든 후에 유유히 사라져 버릴 것이다. 하인들이 내가 앉은 탁자위로 식사를 가지고 와 줄줄이 늘어놓는 사이에 가빈 이 주삣 주삣 다가섰다.녀석은 커다란 금빛 눈에 물을 담고 날 바라보더니 그 물을 줄줄 흘리기 시작했다.그 물로 내가 세수를 하고 목욕을 하고 수영을 하라 는 것인지,아니면 빠져 죽으라는 것인지 녀석은 그 눈으로 눈물을 줄줄흘리기 시작했다. "쿠베린...." "뭐냐? 먹을 걸 달라고 해도 줄 수 없어.이건 양이 너무 작다." 나는 내 앞에 놓인 스프그릇을 쥔 채로 점잖게 말해 주었다. 가빈은 녀석 특유의 멍청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 보더니 눈물을 질질 흘리면서 말했다. "미안해요.그렇게 말해서.날 버리지 말아주세요." 자.잠깐. 여기서 왠지 이상한 어감이 발생 된다고 느껴진다. '날 버리지 말아주세요..'라는 것은 내가 사랑한 무수한 여인들 중 소수가-당연 한 일이지만 내겐 결코 여인을 버리는 일이란 있을 수 없다.여인들이 날 버리지 않는 이상나는 여인을 버리지 않는다- 왠지 기분이 꼴꼴하고 더러운 날 나에게 쏘아붙이며 히스테릭한 소리로 하소연할 때 쓰는 말이었다. 가빈이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은 왠지 기묘한 .... "난 난로가 이제 더 필요없다." 나는 족발을 뜯으면서 말했다. 내 앞에 가장 가까이 놓인 족발은 훈제로 잘 구워내고 향초로 맛을 냈으며 후추 로 간을 했다.약간 지나치게 물러진 감이 있긴 했지만 쫄깃한 맛은 여전했기에 나는 그 것을 집요하게 뜯고 있었다. "에에...나..나를 버리는 거에요?" 가빈이 잉잉 거리고 울기 시작했다.녀석이 우는 동안 비오나와 기생오라비가 다 가와서 조용히 거들었다. "용서해 주세요.가빈은 린을 좋아했기때문에....." 나는 족발을 계속 뜯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냐,나도 이제 난로는 필요없어." "아아아앙." 가빈이 윽윽 우는 동안 옆에선 튜나가 외쳤다. "이봐! 왕씩이나 되어 가지고 너무 쪼잔하게 굴지마! 받아 주라구!" 나는 족발을 다 먹어 치우고 오른 쪽에 있는 오리를 잡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난 난로가 필요없어.일단 징징 울어대는 난로는 물이 나와서 싫어." 가빈이 날 바라보면서 얼른 눈을 비볐다. 튜나는 진지하게 내 앞으로 걸어와 내 식탁위에서 가장 큰 매혹적인 고기파이를 집어 들더니 엘레에게 건넸다. "자아,.엘레...입에 아..." 엘레는 후 하고 웃더니 입을 벌리고 그것을 받아 먹었다. 받아 먹었던 것이었다. 받아 먹고야 말았던 것이었다. 받아 먹는 것이 아닌가! "이것 도 맛있어 보여." 튜나는 엘레에게 내가 쥐고 있던 오리의 한 쪽 다리를 주욱 뜯어서 엘레에게 권 했고 엘레는 그 것을 받아 들어 먹기 시작했다.튜나는 그것을 즐거운 듯이 눈에 별빛을 담아 바라보는 것이었다. "...." 가빈과 오스칼과 에메스와 시장=영주와 그 외의 부하들이 모두 일제히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두 연인은 미소를 지으면서 내 음식을 맛있게 해치웠다. "먹을 만 하네,그지?" "그렇군." "이것도." "음,괜찮아." "이것도." "으음," 나는 한동안 튜나의 손이 닿는 접시를 바라보다가 잘라 말했다. "그만 먹어." "어머,쿠베린,쪼잔해." "....튜나,넌 그런 여자 였냐?" "뭐가?" "그런...그런...비음이 섞인 말로 떠들어대는 여자였던 거냐?" "어머,호호호호호호....여자는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변하는 법이야." ...차라리 피에 주린 듯 광소를 터뜨리던 그 광경이 더욱 멋졌다. 나는 단념하고 음식을 마저 먹어치웠지만 역시 식욕이 떨어졌다. 가빈은 커다란 금빛 눈을 반짝이며 꼬리를 살랑이고 있었고 두 연인은 내 앞에 서 간지러운 짓을 연발하고 있으니 식욕이 떨어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오로지 위안이라면 아름다운 비오나가 내 앞으로 아직 음식이 남은 그릇을 내 밀어 주고 있는 것 뿐이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주군!" 급히 안으로 들어오는 사내가 있었다. 그의 뒤로 몇몇 기사들이 달려 들어왔다. 그들의 복장으로 짐작하건데 그들은 용병기사인 모양으로 흔히 귀족기사들이 걸 치는 문장이 쓰여진 갑주는 걸치고 있지않고 미늘 갑옷위에 물들인 튜닉을 걸치 고 있었다. 막 들어오던 사내는 시장=영주 앞에 이르자 고개를 숙이며 혹이 난 이마를 버릇 처럼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래픽,어떻게 된 일인가! 오늘 아침에 괴한에게 습격을 당했다구!" "아,주군,정말로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아침에 수상한 자를 복도에서 만났습니 다만 불시에 당했기에 정체도 모른 채..." 그는 고개를 저으면서 한숨을 토했다. "크게 다치지 않아 다행이야.자넬 아까 부터 부른 것은 현재 이 나라를 침공하 고 있는,룬드바르 공국의 하인라인 에노트 룬드바르라는 젊은 군주에 대해 알아 보기 위함이다." "룬드바르 공국의 ....군주인 하인라인 에노트 대공에 대해서 말이군요." 진지하게 래픽이라 불린 네모진 얼굴의 사내가 고개를 들고 옆에 있는 에메스를 바라보았다.에메스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에 대해선 그다지 아는 것이 없기때문이야.일단 룬드바르 공국은 그렇게 큰 곳이 아니지않은가?" 에메스가 말하자 래픽이 고개를 급히 저었다. "아닙니다.공작전하,룬드바르 공국은 오래된 군사강국이랍니다." "뭐라구?" "룬드바르 공국은 해군력이 대륙 제일일 것입니다.그들의 배는 전투선으로만 수 백척에 이른다는 보고가 들어와 있습니다." "...배? 전투선이라고? 지금 해적선 이야길 하는 것인가!" 에메스가 놀라 입을 벌렸다. "그렇습니다.그들 룬드바르인들이 해적들이 세운 나라라는 것은 알고 계시지 요?" "그건 들은 것 같네,하지만 일단 델리암과는 먼 곳에 위치한 남쪽의 나라기때문 에 그동안 크게 신경쓰지 않은 것 같아." 에메스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래픽은 팔짱을 낀 채로 네모진 얼굴을 끄덕여 보였다. "대부분이 다 그렇습니다.공작 전하.제가 대륙 용병길드연합 소속이 아니었다면 저도 잘 몰랐을 겁니다." "대륙 용병길드연합?" 에메스가 멍청한 얼굴을 해 보이자 시장=영주가 재빨리 말했다. "래픽은 용병기사로 널리 알려진 기사입니다.그는 한동안 서북용병길드마스터 자리에도 있었지요." "아,.." 에메스녀석은 새삼스러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현재 대륙용병길드는 총 회원 삼만칠천명이 넘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소소한 용병길드가 모르는 자유용병들이 있긴 합니다만 제법 솜씨있다고 인가가 있는 용병들은 다 길드소속은 아니더라도 길드의 정보망에 걸려 있는 것입니다." 래픽이 그렇게 말하고는 에메스의 무지를 깨우쳐 주었다. "대단하군,난 용병들이 그렇게 치밀한 조직을 가지고 있다고는 생각지 못했소." "치밀한 조직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조직자체가 정보에 민감하기때문에 여러 가지를 알고 있을 뿐입니다.사실 조직이라고 하기에도 뭐할 정도로 힘이 없는 조직입니다.용병길드라는 것은." 쓴 웃음을 짓던 래픽은 옆에 서 있는 튜나를 흘긋 보고 놀란 얼굴이 되었다. 그와 얼굴이 마주친 튜나는 생긋 웃으면서 그의 앞으로 다가섰다. "안녕하세요.래픽경." "아아...놀랍군요.전 대륙길드마스터 튜나 센드양." "오호호호호호..기억하고 계시는군요." "아아,.설마 마법을 쓰는 하프 엘프가 한 명 있다고는 했지만 설마 그대라고는 생각지 못했소.공작전하와 같이 싸웠다는 것이 사실인가보군." "그래요,엘프들과 델리암 수도 용병길드마스터가 날 급히 불러 도와달라고 말했 지요." 그녀는 어깨를 으슥해 보였다. "정확히 말하면 이번 일에 한 몫을 받을 계획이지만요." "후후..그렇군.부하들은 몇이나 데려온 거요?" "셋,그 정도면 충분하죠,그리고 뭐어 여기 저기 발을 뻗혀두고 있긴 하지만 말 이에요." 그녀가 으슥 으슥 하고 있는 동안 에메스는 새삼 경악에 찬 얼굴로 그녀를 바라 보고 있었다.물론 그녀가 놀라운 솜씨를 보여주는 것을 보긴 했지만 그녀가 진 짜 거물이란 것을 실감하고 있지 않았었기때문이다. 이 꼬맹이 놈은 그 동안 영웅놀이에만 집착해, 귀족영주로서 아그랑에 쳐박혀 시든 오이의 시든 손가락만 바라보고 있었으니 무지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는 마지막의 소시지를 끝내고 조용히 손을 핥고 있었다.옆에서 보고 있던 가 빈이 얼른 내게 수건을 건냈고 나는 그것을 받아 얼굴도 닦았다. 그들이 뭔가 열심히 떠드는 것을 무시한 채로 나는 밖을 바라보았다. 벌써 해가 지고 밤이 오고 있었다. 그럼 슬슬 가 볼까. "꼬맹아." 에메스가 고개를 돌려 날 바라보았다. 녀석은 눈썹을 찌푸리더니 나에게 뭐라고 한 마디 하려 했다.그러나 그 순간 래 픽이라는 네모돌이 녀석이 갑자기 이를 갈면서 고함을 질렀다. "너! 이 놈!" "왜,왜 그러나?" 에메스가 놀라 래픽을 바라보는 순간 래픽은 들고 있던 장검을 빼어들고 나에게 돌진했다.그리고는 악을 쓰면서 달려들려고 했다. 재빨리 에메스가 뒤에서 그의 양 팔을 잡고 그의 몸을 끌어안아 막았다. "기다려요! 기다리라구!" "이거 놓으십시오! 전하! 저 자식은 바로 아침의 그 괴한!" 생각났다. 저 네모돌이는 바로.....내가 이른 아침에 복도에서 가볍게 밀쳐 주었던 그 녀 석이었던 것이다. KUBERIN............ 나는 하늘을 향해 이를 드러내고 주먹질을 하며 눈을 흘기고 피를 흘린다. 수없이 반복해도 운명은 바뀌지않는다. 오,무모한 행동. ..그러나 나는 무모함을 사랑한다. 4 길길이 뛰는 래픽의 몸을 억누른 그는 나에게 조용히 물었었다. "래픽의 누이 래일라와 무슨 ...?" "아,아름다운 여인이었기에 나와 가벼운 대화를.." 하는 순간 래픽이 내 얼굴에 장갑을 던졌다. 사실 그게 내 얼굴에 맞거나 내가 집어들거나 하면 정식 결투가 되었을 것- 이 라고 에메스가 뒤에 말했다-이지만 공교로운 것인지 아니면 나의 날렵한 몸놀림 으로 바람이 일었던 탓인지 녀석이 던진 장갑은 창문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순간 어처구니 없어진 네모돌이는 이를 박박 갈면서 당장이라도 달려들 황소의 되새김질같은 얼굴로 콧구멍의넓이와 크기를 넓히면서 나를 잡아먹을 듯이 보 았다. "이 더러운 놈!" 내가 이런 모욕을 듣고 참을 리가 없는 것이다.나의 이 우아한 주먹이 녀석에게 다가서려는 그 순간 번개처럼 그녀가 등장하였으니 그녀가 바로 네모돌이의 누 이인 래일라였던 것이었다. 그녀는 싸늘한 눈으로 자신의 오빠를 바라보더니 어깨를 으슥하고 말했다. "정말 소란을 떠는 것도 정도껏 하는 게 어때요? 나는 이 사람과 마음이 맞아서 이야길 좀 했어요.오라버니는 너무 심하지않아요? 나는 바보도 아니고 어린 소 녀도 아니라구요!" 네모돌이는 그 순간 석상이 되었고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아 가볍게 키스해 보였 다.그녀는 나에게 매혹적인 눈빛을 던지면서 말했다. "신경쓰지 말아요,우리 오빠는 언제나 그러니까요." "물론 나는 신경을 쓰지 않아." 나는 마주 미소해 보였고 그 순간 그녀와 나는 둘이서 손을 잡고 다정히 그 자 리를 빠져나왔다. 그 다음에는 물론 뜨거운 그녀와 가벼운 대화와 무거운 대화를 반복했을 뿐이었 다. 달빛에 어린 아름다운 붉은 머리칼은 마법을 뿌리고 있었다. 현혹의 마법,인간들이 흔히 말하는 유혹적인 내음을 가지고 있는 그 것은 어떤 수컷에게나 적용이 되는 근사한 마법이다.암컷이나 가지고 있는 그 마법을 유려 하게 뿌리고 있는 그녀는 오늘도 넋을 잃을 만큼 아름다운 길고 우아하며 희고 도 매끄러운 다리를 내 앞에 좌악 펴고,역시 그 모습에 넋을 잃고 있는 또 하나 의 수컷 킬트에게 미소를 던지고 있었다. "미안해요,정말." 그녀가 말하자 킬트는 입을 다물었다. "저도 정말 몰랐지 뭐에요.쿠베린을 공격하는 마법사가 있길래 그냥 마구 공격 해 버린 거에요." "..." 킬트는 말이 없었다. 아크,아키나는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면서 나에게 고개를 돌리곤 유혹의 가루를 스리 슬쩍 뿌렸다. "정말 오랜만이에요.쿠베린,당신은 진짜 여전하군요." "아아...너역시.수백살 먹은 인간여자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않는군." 그녀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지고 약간 핏대가 올랐다. "오호호호호...당신 답지않게 무례해 졌군요! 여자에게 그런 말을 하다니!" "아름답다는 이야기지.그건 그렇고 대체 여기에 왜 너희들까지 왔는지 이야길 좀 해주는 게 어때?" 그녀는 흘긋 날 보더니 길고 흰 손가락을 들어 내 뺨에 살짝 대고는 팔을 주욱 뻗어서 내 목을 끌어안았다.길게 묘사를 하기는 했지만 역시 간단히 말하자면 그녀가 날 끌어안았다는 이야기 였다. "나아..부탁받았기때문이지요." 이 홍의의 마법사는 보랏빛에 가까운 푸른 눈을 기묘하게 빛내면서 나의 입술에 키스했다.나는 원래 여자의 체면을 생각해서 언제나 여자의 키스는 받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누구에게?" "어라? 안넘어가네." "네 매력이 줄었거든." "어머,오호호호호호.....당신의 취향이 변한 게 아니구요?" "내 취향은 건재해." "그럼 저기서 저렇게 도끼눈이 되어서 나와 당신을 쏘아보면서 원독의 눈빛을 흘리는 계집애는 누구죠?" 누군지 안돌아보아도 원독의 눈빛을 흘릴 여자가 누군지는 알고 있다. 미트라는 창틀을 쥐고 창틀을 갉아 먹을 듯이 이를 갈며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나와 그녀를 쏘아보고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들이 있는 곳은 다름아닌 영주=시장의 객실 중 하나로, 그는 이 끔찍 한 마법사들을 상대해 달라고 애원했던 것이었다. 객실안에는 물론 당연하겠지만 커다란 침대 하나,탁자 하나,의자가 네 개가 놓 여있고 지금 미트라가 갉아먹을 것같은 창문과 똑같이 생긴 창문이 두개가 있었 다.한 가지 신비는 미트라가 허공 중에 동동 떠서 이 방안에 앉아있는 우리들을 지켜 보고 있다는 것이다. 당연하지만 이 객실은 3층이었다. 이 3층방의 창문을 엿보려면 나처럼 재주가 있던가 혹은 유령이던가 그도 아니 면 비행술등의 술법자여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신비도 곧 풀렸다.미트라 뒤에 무표정한 얼굴의 엘레가 우리들을 지 켜보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기때문이었다. "어마! 조인족?" 놀란 아키나가 벌떡 일어나 창문에 미트라가 매달려있다는 것도 무시하고 문을 발칵 열었다.그 덕에 미트라의 얼굴은 유리창을 들이받았지만 아키나는 그녀답 게 미트라의 일그러진 얼굴은 무시하고 엘레의 무표정한 얼굴을 주시했다. 엘레의 등에는 그 예의 갈색빛이 도는 날렵한 두 개의 날개가 떠올라 있었다. 등 뒤로 달이 떠 있고 그는 날개를 펼치고 있었다.검은 밤하늘과 어우러져 달빛 에 어리는 상아빛으로 매끈한 엘레녀석의 히멀건한 얼굴이 진짜 여자가 아니라 는 것이 아쉬울 정도로 빛나고 있었다.어줍잖은 엘프보다 훨씬 아름다왔다.그 모습을 넋을 잃고 아키나가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는 무심한 눈빛으로 아키나를 무시하고는 곧 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보는 것 만으로도 아찔했는지 아키나가 아하 하고 기묘한 탄식을 흘렸다. "조인족이 아름답다는 이야긴 들었지만...정말..." "쿠베린." 엘레가 그녀를 무시하고 날 향해 말했다. "뭐야?" "가빈이 울고 있습니다." "그런데?" "미트라도 울고 있지요." "아닌데." "..." 미안하게도 나도 눈이 달렸으니 지금 미트라가 울고 있지않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미트라는 지금 아픈 이마를 부여잡고 아키나를 쏘아보고 당장 머리채를 부 여잡고 싸울 듯이 노려보고 있는 중이다.결코 우는 얼굴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일단 안으로 들어오는 게 어때요?" 아키나가 웃으면서 말했기때문에 엘레는 그녀를 흘긋 보고는 날렵하게 날개를 접고 미트라의 허리를 안은 팔을 뻗어 방안에 들여놓았다.미트라는 척척척 걸어 가 아키나를 향해 낮게 으르렁거렸다. "저 쿠베린과는 무슨 사이지?" "오호,오호.그와 난 오래된 연인사이지요." 그녀는 재미있다는 듯 그렇게 말했고 나는 그녀들을 무시했다. 엘레는 미트라와 그녀가 싸우는 것을 보다 말고 나에게로 시선을 돌려 짧게 말 했다. "당신,셀레네도 있지않습니까?" 화난 어조였지만 나는 무심하게 말했다. "안그래도 너에게 부탁할 일이 있었다." 엘레의 눈썹이 약간 치켜 올라갔다. "저 가빈을 네가 좀 보살펴 주는 게 어떤가 해서 말이다." 그 말에 싸우고 있던 미트라가 홱 돌아보았다.엘레는 단정한 얼굴을 살짝 찌푸 리고 날 바라보면서 나직히 물었다. "어째섭니까?" "여기에 지금 두 명의 거대한 마법사들이 있다.하나도 아닌 둘이나 여기서 진을 치고 있어.난 여기서 에메스를 보호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거대한 마법사가 둘? 한 명 백마법사는 어딜 가고?" 미트라가 주변을 두리번 거리면서 말했다.나는 그녀의 턱을 잡아서 아키나에게 돌려주었다. "저게 바로 그 잘난 척하던 흰둥이 백마법사 아크야." "에? 하지만 ,..저건 여자잖아!" 미트라와 엘레가 눈을 크게 뜰 무렵 나는 잘라 말해주었다. "내가 전에 말했다시피....저 자식은 변태야." 엘레와 미트라는 동시에 아키나에게서 한 발자국씩 물러섰다.아키나는 나를 쏘 아 보면서 크게 외쳤다. "노,농담하지마! 변태라니! 나는 그저 이중의 인격을 가진 사람이라구! 나의 형 제이자 나의 연인인 아크를 그런 식으로 말하지마!" 그 순간 엘레와 미트라는 더 큰 보폭으로 뒤로 물러섰다. 나는 내 생전 아크만큼 멍청이를 본 적이 없다.물론 아키나도 마찬가지지만 여 자에겐 멍청이라고 하지않으니까 참는다.세상에 자기 분신을 사랑하는 놈이 어 디있단 말인가? 이건 근친상간이라고 할 수도 없다.그렇다고 이 기묘한 상황을 뭐라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인격분리? 유체이탈? 변신?분신? 어찌되었든 녀석은 정상은 아니다. 나는 녀석을 무시하고 킬트를 바라보며 말했다. "여기 있는 인간들을 좀 보호해줘." "뭐라고?" 옆에서 침묵하던 킬트가 말했다. "내가 네 애완동물을 뭐하러 보호한단 말이냐?" "네 아이를 찾는 일에 일조하지.어때? 킬트?" 킬트는 입을 다물고 날 바라보았다.그의 얼굴에 스치는 초조감때문에 나는 조금 은 놀랐다. "아이?" 아키나가 놀라 숨을 삼키면서 다가왔다. "킬트에게 아이가?" "있었다고 하는군,그 애를 찾으러 왔다고 했어." "저런..놀랄 노자로군.그애가 몇 살이야? 당신은 암흑마도에서 최소한 백여년 이 상을 처박혀 있었는데." 아키나가 놀란 듯 말하자 킬트는 침묵했다. "어차피 네가 찾는다는 기괴하고도 방자한 놈들은 바로 바로 이 곳에 있다보면 덮쳐올 테니 그놈들은 네가 맡아,난 다른 일을 하도록 할거야." 나는 아키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호기심에가득차서 침묵하는 킬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키나,너하고 아크가 온 이유가 누구에게 부탁받은 일인지 알아맞추어 볼까?" "알아?" "알아.너에게 부탁할 자는 저 노스엘스턴왕국의 왕 에라엘 다니에르 겠지." "어마나! 잘도 아네." 잘도 아네가 아니다. 뻔할 뻔자 아니겠나. 저 사악하고 교활한 에라엘이란 엘프놈은 자기들 엘프가 살육이나 다툼을 하지 않고 하기 싫어하는 까닭에 이 시끄러운 마법사를 구슬려 이쪽으로 보낸 것이 뻔했다.그러니까 그는 저 튜나를 보내고 나서 뒤이어 이 녀석을 보냈다는 것이 겠지.원래 아크나 아키나는 엘프들을 무척 싫어한다. 이유? 당연하고도 합당치 못한,그저 자기보다 잘생겼다는 이유다. 그런데 그들이 좋아하는 단 하나의 엘프가 있다.바로 자기들을 어려서 부터 키 웠던 엘프의 왕 에라엘인 것이다. 다들 엘프가 아름답고 우아하며 멋진 종족일 것이라 오해하는 자들이 있지만-특 히 인간들이 그러하다- 내가 단언하건데 엘프처럼 게으르고 칠칠맞고 굼뜬 종족 은 세상에 다시 없다.엘프에게 일을 시켜서 그 일이 완수되길 기다린다는 것은 수명을 하늘에 맡기고 사는 자들이 할 짓이 아니다.요컨대 녀석들의 시간개념이 전혀 없는 것이다. 녀석들에게 뭘 해달라고 부탁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전 생애 를 걸어야 그 완결을 볼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일이 진척되는데 최소한 이삼십년 은 각오해야 하며 그것이 다 되었느냐고 묻는 것 자체도 싫어하는 주제에 빨리 하라고 서둘면 그런 야만적이고도 무례한 말투로 말하는 것은 정말 싫다라면서 말의 핵심을 절묘하게 비끼어 나간다. 생김새가 아름답다는 것 이외에 대체 이 놈들이 무슨 도움이 될 것인가? 무익하기로 말한다면 인간과 막상 막하의 존재이면서 가늘고 긴 그 생명줄은 질 기기도 질기다.흐느적 흐느적 이래도 좋아 저래도 좋아 이리 슬쩍 저리 슬쩍 넘 어가는 엘프들의 행동은 이미 오래된 종족들 사이에서 언급을 회피하는 화제중 에 하나다. 엘프들과 토론따위를 할 수 있는 종족은 드워프정도다.드워프는 엘프들이 떠드 는 소리를 듣다가 더이상 견딜 수 없을 때엔 망치를 들어 그들이 마주 앉은 토 론의 테이블을 부수어 버리기 때문이다. 나도 그 방법은 종종 썼다.그러나 일단 그 종족과는 얼굴을 마주하지않는게 가장 좋다.특히 귀족 엘프라는 것들-노스엘 스턴 귀족 평의회라든가,엘프의 왕족들이라든가,기타 등등 하는 것들-은 정도가 더 심한 것이다. 노스엘스턴의 엘프따위 보다는 땅의 엘프쪽이 훨씬더 쓸모있는 종족이다.최소한 땅에서 반짝이고 아름다운 것들을 파내지 않는가.그러나 노스엘스턴의 엘프들이 하는 일이라곤 그 반반한 얼굴에 아름다운 것들을 걸치는 것 이외엔 하는 게 없 다. 나의 고견에 따르자면 이 게을러 빠진, 엉덩이 무거워 축축 늘어질 엘프의 왕은 네 아이가 여기 있으니 와봐 라면서 킬트를 꼬셔내고, 너의 도움이 필요한 거야 운운하면서 아크를 꾀어낸 게 분명하다. 이 정도로 엘프의 왕이 신경쓴 일은 드 물기때문에 나는 보통 일은 아니라고 판단 내릴 수 밖에 없었다. "어찌되었든 나는 내 일을 좀 처리하러 이 자리를 떠야 겠다." "에?" 미트라가 눈을 크게 뜨고 내 팔뚝을 잡았다. "일이라니?" "가빈을 엘레가 좀 맡아줘라.미리 말해두겠지만 이 두 사람의 마법사에게 피라 든가 머리칼 같은 거 빼앗기지 않도록 조심해.이 두녀석은 진짜 겉가죽만 인간 이지 결코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사악한 심장의 소유자들이니까." 엘레가 눈을 꿈벅이고 있는 동안 아키나가 펄쩍 뛰었다. "무슨 소릴 해! 킬트야 그렇겠지만 나는 아니라구!" 그 말을 무시하고 나는 잘라 말했다. "나는 갈 데가 있어." "어딜 가려는 거야,나도 데려가!" 미트라가 크게 외치며 내 팔뚝에 손톱을 세웠다. "그럴 수 없어." 나는 잘라 말했다.왠지 이 여자애의 눈을 보자니 마음이 약간 흔들린다. "나는 지금부터 애를 낳으러 갈거거든." 이건 진심이다. [쿠베린 별전4] 명예 KUBERIN......... 때로는 손가락사이로 미끌어져 나가 다시는 주워 담을 수 없는 것이 있다.... 그리하여 절망한다 "로손 에브소핀 에고린 더 케타라니." 그는 고개를 들어서 정면을 보았다. 그 정면에 서 있는 것은 그의 아우인 린 에브레인 에고린 더 마스라탈이었다. 단정하고 조용한 눈매는 표정을 잘 알수 없었지만 부드러웠다. 약간 두려워하는 것 처럼도 보였다.그의 작은 어깨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조 금은 가늘었다.본디 푸른 아인족들은 체구가 큰 편은 아니지만 에브레인은 그 중에서도 작은 편에 속했다. 아직 나이가 어린 탓이겠지만 그 나이때에 에브소핀이 덩치가 컸던 것을 생각한 다면 역시 그의 모친을 닮은 것이라고 밖엔 말할 수가 없었다. 에브소핀은 전신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상태로 역시 자신과 같이 벌거벗은 상 태인 어린 동생을 바라보았다.동생은 긴장하고 있지만 범상한 솜씨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그리고 그 솜씨는 그가 가르쳐 준 것이었다. 그는 긴장한 동생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기 에 표정을 무표정하게 굳혔다. 에브레인은 얌전한 성품이어서 이 어린 아우에 대해서 에브소핀은 언제나 사랑 스러움을 가지고 있었다.에브레인은 본래 아버지 루달리칸 아스모닌이 데려온 세번째 부인에게서 나온 아이였지만 친 형제인가는 아직도 의심스러웠다.하지만 사랑스럽다.이 어린 동생이 자신의 손을 잡고 처음 걷기 시작할 때를 그는 아직 도 감동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물론 지금은 그런 회상을 하고 있을 때는 아니었다. 그들을 둘러싼 부족의 장로들은 지금 그들이 벌일 대결에 대해서 고대하고 있었 다.일족의 후계자를 결정하는 이 자리는 장난이 아닌 것이다. 아버지 루달리칸 아스모닌이 반쯤 누운 채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달이 떠서 푸르고 창백한 빛을 사방에 뿌리고 있는 광야를 바라보며 긴장한 두 형제는 그렇게 마주 보고 서 있었다. 무기라고 받은 것은 단 하나의 단검이었다. 둘 중 하나가 이기면 후계자는 결정되는 것이긴 하지만 사실상 후계자는 에브소 핀으로 결정되어 있었다. 에브소핀은 올해 43세였다.부족의 이름으로 결정된 달에 따르면 그의 나이는 이 제 붉은 달에 접어 들고 있었다.그가 붉은 달의 나이가 되었다고 결정된 날 부 터 그는 아내를 맞이할 수 있게 되고 일족의 주인이 될 자격권을 얻는다.여태까 지의 모든 관문과 시련의 결과 그는 일족의 주인이 되기에 적합하다는 판정을 받고 있었다. 그러니까 아직 어리고 붉은 달에 접어들지도 못한 에브레인은 그의 적수가 아니 었다.하지만 율법은 율법이었다.에브레인과 에브소핀은 아버지의 단 둘 밖에 없 는 아들로서 결투하여 그 우위를 결정지어야 했다. 에브레인의 손이 떨리는 게 보였다. 에브소핀은 미소해 보여주었다. 에브레인이 조금 안도한 눈빛이 되었지만 여전히 그는 두려워 하고 있었다. 뭐가 두려운 것일까 하고 에브소핀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것은 의례적인 결투일 뿐이었다.그러니까 그가 그렇게 두려워 할 필요는 없었 다.그저 결투를 하다가 에브소핀이 이기면 그것으로 그만이고 에브레인이 붉은 달에 접어 들면 그의 아우로서 새로운 일족의 주인이 되면 되는 것이다.그런데 왜 저렇게 긴장하는 것일까 하고 잠시 동안 에브소핀은 생각해 보았다. "자,에고린가의 후계를 결정하는 신성한 대결이오.일족의 여러분 주목해 주시 오." 마침내 부족장이자 일족의 장로인 슬라인 에브와니가 일어서서 말했다. 그는 에고린가의 먼 친척이기도 하기때문에 이 승부에 빠져선 안될 존재였다.그 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린 에브레인 에고린 더 마스라탈,그대는 이 일족의 율법에 따라서 신성한 대결 에 응할 것인가?" "네." 에브레인이 답했다. "로손 에브소핀 에고린 더 케타라니.그대는 이 일족의 율법에 따라서 신성한 대 결에 응할 것인가?" "네." "좋아...그럼 우리들 아므네 일족이 결정한 사항에 대해서 말해 주겠다. 아므네 아스로논 테라이논,우리들의 아버지께서 이 땅위에 처음 서시는 날 달은 빛나고 우리들의 피부는 푸르게 물들었다.우리들은 푸른 숲에서 살도록 예정되 었으며 그 푸른 숲의 가장 자리에 위치한 케노인 수랄의 딸 라스모라와 아므네 아스로 테라이논께서 혼약의 인을 맺으셨도다.라스모라의 첫 아이는 쌍둥이였으 며 그 쌍둥이는 태어나 우리들의 형제 자매를 만들게 되었노라. 쌍둥이로 자라나 어느쪽이 테라이논의 후계가 되는가를 결정한 것은 황야의 신 성한 원의 대결, 테라이온이 주신 이 검으로 그들의 기량과 그들의 힘을 정하는 것이니, 그 중 첫째인 오라이온 에노브라께서 대결에서 이기시고 후계가 되었고 그리하여 붉은 달의 주인이 된 오라이온 에노브라는 사촌인 케노인 사이놀의 딸 바릿사와 혼인하여 이 일족을 다스렸노라.대결에 진 동생 호스란 비오니는 새로 운 일족의 주인이 되어 또다른 땅의 주인이 되었다.그리하여 이 대결은 일족의 후계와 가문의 후계를 정하는 엄숙하고도 성스러운 혈족의 중대사 이니....." 그들의 아버지인 루달리칸 아스모닌이 병색 가득한 얼굴로 주먹을 쥐고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그의 나이는 이제 백오십여세가 넘었다.슬슬 은퇴할 나이에 접 어들고 있긴 했지만 아직은 정정해야 할 나이였다.병마가 그를 덮치지않았다면 그는 이백오십여세까지 건강한 모습을 갖추었어야 했다.그러나 그는 이제 병이 들었고 두 아들은 후계자결정식을 거쳐야 하는 것이다. 일족들은 모두 침묵한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약 삼십여명이 이쪽을 주시하 면서 눈빛을 빛내고 있었다.그들의 일족,에고린 가의 차기가주를 결정하는 자리 이므로 그들 자신도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에브소핀은 숨을 내 쉬었다. 의식은 오래 걸리는 것은아니지만 이런 식으로 피를 말리는 점이 없지 않아 있 었다.그들의 형제인 에프란과 사오닌,다이스란,아다모나 등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자신들의 약혼자를 데리고 앉아 있는 그 모습 속에 긴장감이 감돌고 있 었다.그녀들은 모두들 에브레인을 좋아하지 않았다. 누군지도 모를 녀석이 후계 자의 대결장에 나온다는 것은 너무하는 일이라고 사오닌과 에프란이 차라리 자 신들의 약혼자를 세워 달라고 아버지에게 외치는 것을 들은 바 있었다. "바보같아! 어째서 저녀석이 대결장에 서는 거지!" "저 자식은 아버지의 친자식이아닐 지도 몰라!" "그런데 왜 저 자식이 대결장에 선단 말이야? 차라리 내 약혼자 오닌이 더 적합 하다구! 신성한 대결장에서 피도 이어지지 않은 애와 싸운다는 것은 말도 안 돼!" 하지만 에브소핀은 불만이 없었다. 어린 두 눈으로 그의 손을 꼭 잡고 일어서던 그 어린 꼬마가 지금 자신의 앞에 늠름하게 서 있었다.그것만으로도 그는 기뻤다. 그들의 달은 그들의 몸뚱이를 비치며 그들의 긴장된 피를 들끓게 하고 있었다. 사방이 뚫린 이 황야의 원의 대결장에 선 다른 일족보다도 강인한 이 부족의 명 예를 위해서 두 형제는 마주하고 있었다. "자아...그럼 시작하라!" 북소리가 울려퍼졌다. 에브소핀은 긴장한 에브레인이 공포에 가까운 눈빛으로 단검을 고쳐 들고 그를 바라보는 것을 보았다.아직은 여유가 있는 에브소핀은 단검의 날을 살짝 확인하 면서 앞으로 한 걸음 내딛었다. 푸른 몸뚱이가 긴장해서 튀어 올라 그의 눈앞으로 쇄도해왔다.몸을 굽히면서 에 브소핀의 몸이 그 아우의 검을 피해냈다.그리고 달빛에 반사되어 푸르게 빛나는 단검이 그들 사이에서 반원을 그렸다. "핫,.." 여기저기서 긴장된 감탄사가 터져나왔다. 에브소핀은 아우의 날렵함에 감명받았다. 에브레인은 결사적인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그의 슬픔에 가득찬 눈,두 려움에 가득찬 눈이 달빛에 반사되어 은빛으로 빛났다. '뭐가 그리 슬픈거지?' 에브소핀이 생각할 찰나에 에브레인의 단검이 날아들어서 에브소핀의 가슴을 찔 러왔다.에브소핀은 몸을 뒤로 튕겨내면서 그것을 피해냈지만 일직선으로 찔러온 그 속도에 못이겨 가슴에 상처가 나 핏방울이 흘렀다. 따끔한 아픔에 에브소핀은 조금 놀랐지만 한 편으로는 분노가 솟아 올랐다. 어린 동생이 이 정도 실력을 가지고 있으리라곤 생각지 못했고 이렇게 살의마저 가지고 달려들 줄은 생각지 못한 탓이었다. '이 녀석이!' 에브소핀은 얕보는 마음을 버리고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하여 이 두 형제 사이에 살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바람이 죽어있는 황야에는 긴장감만이 맴돌았다. 푸른 몸뚱이가 움직일 때마다 달빛에 어린 알몸이 빛을 발했다.그들의 푸른 몸 과 푸른 검날이 같이 빛을 발하면서 한 바탕 검무를 추고 있었다.그러나 그들이 춤추고 있는 원안은 보는 자들의 얼굴이 굳어질 것같은 혈전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좌악 하고 다시 한번 에브소핀의 검날이 에브레인의 팔뚝을 그었다.핏줄기가 일 어나 그의 얼굴에 튀었고 그 와중에 에브소핀은 그를 걷어 찼다. 뒤로 나뒹군 에브레인의 얼굴을 보면서 살기에 찬 에브소핀이 그에게 달려들었 다.바닥에 뒹군 에브레인의 손안에서 단검이 튀어 나가 바닥으로 작은 원을 그 리며 떨어져 나갔다. 에브소핀은 그 단검의 날을 맨발로 밟아 아우를 무력화 시키고 뒤를 이어서 단 검의 날을 들어 올리려 했다.그리고 칼을 들어올려 찔러야 할 순간에 그는 공포 에 질린 아우의 얼굴을 보고 머뭇거렸다. 그리고 그 때 그의 시야로 누런 것이 달려들었다. 그는 눈알에 들어간 이물질로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따가움으로 눈안에서 눈물이 튀어나왔다.앞이 보이지 않았다. "우웃,.." 그가 단검을 쥔 채로 뒤로 주춤 주춤 물러나서 자신의 얼굴을 덮은 그 이물질을 닦아내려고 애쓸 때 차가운 검날이 배에 느껴졌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크게 외쳤다. "에브레인! 네가!" 칼날은 반쯤 들어오다가 멈추었다. 그는 흙먼지를 손바닥으로 간신히 헤쳐내고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자신의 배 를 내려다 보았다.그의 배를 반쯤 찌른 단검을 쥔 소유자는 멍하니 두 눈을 뜨 고 자신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흙먼지로 범벅이 된 얼굴을 닦으면서 에브소핀은 슬픈 어조로 물었다. "왜..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냐?" 단검을 손에서 떨어뜨린 어린 아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의 눈에서 공포가 떨어졌다.그의 눈에서 슬픔이 떨어져 내려 흙바닥으로 떨어 지고 에브소핀의 발등으로,그의 상처입은 복부로 흘러내렸다. "...무서웠으니까..." 떨리는 입술로 아우가 말했다. "무엇이? 에브레인? 무엇이 두려웠던 거냐?" 에브소핀은 무한한 슬픔으로 되물었다. "...형이 날 죽일 거란 것에. 형이 날 버릴 것이란 것에..." 그의 얼굴에서 넘쳐나는 눈물을 보면서 에브소핀은 그의 얼굴을 피와 먼지로 얼 룩진 손으로 어루만졌다. "너는 새로운 일족의 주인이 될 뿐 나는 널 죽일리가 없어." "거짓말..그러나..누나들은 형이 날..." 그의 어깨가 무너져 내렸다. 그의 단검이 에브소핀의 발 밑에 떨어져서 울고 있었다. 에브소핀은 고개를 떨구고 자신의 발밑에서 울고 있는 아우를 보았다.누구의 핏 줄인가는 오로지 아버지만이 알고 있는 이 어린 아우는 그보다 열다섯살이나 어 린 아이였다.그가 걸을 때 자신이 옆에서 손을 잡아 주었고 첫 사냥도 첫 몽정 도 그가 가르쳤다.싸움도 노래도 모두 그가 가르쳐낸 어린 아우였다. "에고린 가의 불명예요." 장로가 말했다. 달빛아래서 푸른 몸으로 울고 있는 어린 아우를 바라보고 있는 에브소핀을 향해 장로들이 말하고 있었다. "후계대결에서 암수를 쓴 것은 있을 수 없는 불명예." "에고린 가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수치중의 수치." "흙을 뿌리다니,있을 수가 없는 일이야." 에브소핀은 고개를 들어서 달빛을 바라보고 그 다음에는 창백한 얼굴로 비탄에 빠진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의기양양한 얼굴의 일그러진 누이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분노를 느끼고 어린 아우를 내려다 보았다. "에브레인..." 에브소핀은 절망한 어투로 물었다. "너는 나를 믿지 못했느냐?" 울고 있는 아우는 말을 잇지 못하고 형의 발치에서 작은 몸을 구부리고 울고 있 었다. "너는 나를 왜 믿지 못했느냐?" "나는 너에게 날 믿으라고 말했다." "나는 너의 형이다." "너는 왜 날 믿지 못했느냐...." 작은 몸뚱이를 채찍처럼 휘갈기면서 에브소핀은 그렇게 물었다. 노예상인이 왔다. 희미한 빛이 스며드는 토굴안을 가리키면서 장료들은 노예상인에게 그를 인도했 다.토굴안에 짐승처럼 웅크리고 있는 소년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않았다. "추방입니까?" 노예상인이 고개를 깊숙히 숙이며 물었다. 장로들은 고개를 끄덕여 이방인에 대한 예를 다했다.일족은 이방인을 멀리하며 경멸하고 이방인을 가까이 하지 않았지만 이 노예상인은 예외였다. 그는 어릴 때 일족의 손에 의해 키워진 사내였다.일족은 이 사내가 성인이 될때 까지 일족의 여인의 젖을 먹여 키우고 그를 내보냈다.그가 다시 돌아왔을때 일 족은 그에게 처형인의 지위를 주었다. 그는 눈빛을 번뜩이면서 늘어진 소년을 바라보았다. 어제까지는 지위가 높았던 소년은 울고있지도 비통에 빠져 있지도 않았다.그는 그저 그 자리에 굳어서 꼼짝도 하지않았다. "아직 붉은 달에 다다르지 못했군요." 노예상인이 고개를 숙인 채로 고귀한 장로들을 향해 조용히 물었다. 장로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 죄인은 사악한 죄를 범했군요." 장로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그는 죄의 댓가를 받아야 하는군요." 장로들은 고개를 끄덕였고 노예상인은 소년에게 다가가 그 매끄러운 푸른 피부 의 턱을 잡고 그의 입을 벌려 자신의 도구를 끼워 넣었다.소년은 전혀 반항하지 도 반응하지도 않았다. 족쇄를 채운 노예상인은 장로들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아주 멀리,멀리 데리고 가겠습니다.다시는 일족에게 돌아오지 못할 것입니다." 장로들은 고개를 끄덕였고 소년은 일어섰다. 그리고 소년은 노예상인의 손에 이끌려 비틀거리면서 밖으로 걸어나왔다. 빛나는 태양아래서 그는 모멸감과 분노에 섞인 시선을 받았다. "비겁자!" "형을 배반한 비겁자!" "암습한 비겁자!" 어린 아이들은 그에게 돌을 던졌고 여자들은 침을 뱉었다.그리고 그는 아무 것 도 하지 않고 그 길을 묵묵히 걸었다. 노예상인은 아무말도 하지않았다. 소년은 결투 때 그대로의 알몸에 맨발인 상태로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하고 그저 경멸만 안고서 그 자리를 떠났다. 일족은 그를 용서하지않았다. 그를 경멸하고 그를 조롱하면서 그의 연약한 마음을 응징했다. 마지막 순간 그는 형을 배신하고 죽음을 두려워 했으며 도망쳤다. 마을 밖으로 나오자 노예상인이 물었다. "배가 고픈가?" "......" "대답할 수 없겠지.너는 다시는 여기에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 햇빛은 빛나고 있다. 무참한 뜨거운 돌맹이들이 그의 맨발을 공격했다.그래도 무심히 소년은 걸었다. 피가 맺혀도 그는 아무런 신음도 반응도 보이지않았다. 그 모습을 보던 노예상인은 자신이 들고 있던 보따리에서 가죽신발을 꺼내 그에 게 신겼다.그리고 그의 아랫도리를 천으로 둘러주었다. "새로운 삶이 시작되든 혹은 네 앞에 죽음이 기다리고 있든, 그것은 너의 선택 이다." 노예상인이 말했다. "그리고 지금 내가 할 것은 상품인 네가 더이상 상처입어 값이 떨어지지 않도록 보살피는 것이지." 소년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렇지만 아직 그는 자신을 후려갈긴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왜 나를 믿지 못했느냐..." 그는 공허한 녹색 눈을 들어서 잠시 멈춘 뒤 다시 걷기 시작했다. 명예를 잃은 것은 이름을 잃은 것. 이름을 잃은 것은 죽음을 잃은 것과 같은 것. 죽음을 잃은 것은 삶을 잃어버린 것과 같은 것. 삶을 잃어버린 자 앞에 놓여진 것은 검은 절망 뿐. 떨그럭 떨그럭 걸을 때 마다 그의 발에 채워진 족쇄가 소리를 냈다. 제 11화 생명 KUBERIN.......... 나는 안다. 굴속에서 고뇌하는 인간의 창백한 배가 신들의 맹목에 대하여 짐승들의 무거운 울음 소리를 내는 것을... S.J. PERSE 1 "쿠오오오오오오오오오......." "우오오오오오오오오오......." 크게 소리를 지르면서 나는 구애의 소리를 높였다. 사랑하고파요 아리따운 아가씨들.나는 진짜 마음이 되어있다구요. 사랑스런 아가씨 내 맘을 알아주세요.나는 건강하고 잘난 놈입니다. 이 잘난 놈이 아가씨들을 울부짖으며 찾고 있는게 가련하지도 않으세요? 오세 요,오세요,저는 잘난 놈입니다.아가씨들에게 잘난 씨를 뿌려 잘난 아기를 만들 어 드릴 테니,오세요,오세요,저 같이 잘난 놈 세상천지에 드문 줄 아십니까? 숫놈으로 태어나 때때로 서글픈 건 이 때라고 어느 놈이 말했었다. 누가 그랬는지 기억이 날 게 뭐냐? 하여간 여자들을 꼬시는 것은 나도 오랜만이 었다.새파랗게 젊었을때 왕의 거처 근처에서 노닐고 있던 내 또래 여자들을 꼬 셨던 이래로 실제로 이렇게 아무도 없는데 나 홀로 노래를 부르며 혼자서 몸을 배배 꼬면서 여자를 부르다니,숫놈으로 태어나 창피할 때는 바로 바로 이 때란 말이다. 이렇게 숲에 앉아서 소리를 지르고 있는 것도 벌써 사흘째였다. 왜 움직이지 않는가 하면, 나의 이 넓고도 먼 마음속에 깊이 새겨진 불쌍하고 가련한 저 휴런 자식과 결판을 내야 하기 때문이다.녀석이 즉위식도 하지않고 사라져 버린 관계로 내가 지금 나는 왕이라 불러야 하는지 혹은 아니라고 해야 하는지 나혼자 비비 꼬며 스스로 고통스러워 하고 있었다. 원래 일이란 것은 나름대로 후딱 후딱 결론을 지어 버려야 하는 것이다.그런데 이렇게 배배 거리고 있으려니 나같이 호탕하신 분께서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는 가. 이렇게 앉아서 나처럼 비비 꼬인 기생목들과 이리 저리 꼬이 덩굴들과 파란 잎 새들이 서로 내 속마냥 엉겨있는 숲속에 내 속같이 지지부진한 개미떼들이 비비 적거리며 지나간다.느려터진 그것들때문에 속이 들끓어서 콱 눌러 몇마리를 죽 여버렸다. 오오,개미들아,너희들은 나중에 대지의 여신에게 이 잘나신 몸께서 친히 죽여주 셨다고 알려드려라. 허긴 너희들 먼저 간다고 해도 너희들의 느려터진 걸음걸이 로서야 앞으로 몇백년쯤 후에야 죽을 내가 먼저 도착할 지도 모르겠구나. 어이 어이,그렇다고 삐치면 곤란해. 허기야 개미가 삐쳐봐야 나에게 어쩌겠냐? 너희들 개미가 떼거리로 달려들어서 내 다리를 문다고 해도 나같이 빠르신 분은 너희들 개미 몇마리가 나에게 달라 붙어 이빨로 깨무는 그 순간 나는 이미 이미 저 멀리 사라져 있을 텐데. 그래,대지의 여신이여. 그대가 말하고자 하는 게 그런 거라면 그만 나에게 설교해두길 빌어요. 나는 이미 그대에게 대항하길 포기한 현명하고도 나약해 빠진 일개 묘인족일뿐 이니까. 그대가 내 조막만한 파란 귀염둥이를 죽여버렸다고 해서 그대를 원망하 지는 않아.그저 그저 쪼금 아주 조금 정도는 눈을 흘길 뿐이야. 지금 내가 개미새끼 몇마리 눌러죽인 것처럼 여신이 파란 놈을 쿠욱 눌러 죽인 것에 불과하겠지,혹은 내가 걷다가 개미 보다 큰 벌레를 몇 마리 밟아 죽인 것 처럼 그대도 지나가다 그대의 우아하고도 엄청나게 큰 그 발 아래 툭 하고 린이 깔려 죽어버린 거겠지? 아아,잡소리 그만 두자고. 당신의 가슴에 그 애 몸뚱이를 묻었고 그대의 자매 창공의 여신에게 그 애의 머 리를 바쳤어. 나는 그 애를 생각하면 얼굴이 먼저 떠오르니까 그대의 자매를 이 렇게 불손하게 꼿꼿이 노려보자면 그애의 푸른 얼굴이 아롱 아롱해. 몇 놈이 떠들어대도 그 놈의 죽음에 대해서 가슴아픈 건 나와 가빈 뿐이지 뭐 야.그녀석과 몸 부비고 지낸 건 나와 가빈 뿐이니까. 아아,관두자. 이런 식으로 몇번의 죽음이 나를 지나갔지만 대체 나에게 남은 것들은 무엇이 야?세상 가득한 추억? 그런 추억같은 것은 망태기로 둘러싸 담아 집어던져 무저 갱의 바닥에 처넣어 버리라고 해! 나의 삶에 방해되는 것은 모조리 다 집어 치 워 버려! 아귀 아귀 손을 뻗어 몇 번이나 텅 빈 추억을 쥐어도 죽은 자들은 죽 은 자들,살아있는 이몸의 고통따위는 허허 웃어버릴 자들일 뿐이야! 문득 이렇게 혼자서 비비꼬인 몸을 해가지고 비비 꼬이고 제제 비틀어진 마음가 짐으로 여자를 꼬시면 될리가 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원래 여자를 꼬시려면 마음을 비우고 자신을 낮추고 상냥하고도 매력적인 모습 을 잃지 말아야 하는 법,꼬인 놈에게는 꼬인 여자도 다가오지 않는 법이다. 나는 몸을일으켜서 몸을 좌악 펴고 이 잘나신 몸을 과시하기 위해 한 번 펄쩍 뛰었다가 내려섰다. 몇번이나 죽음의 고비를 넘나 들었던 이 몸의 근육들은 오늘 이 자리에서도 만 족스레 움직이는 것 같았다. 파스락 하고 소리가 들렸다. 인기척이 느껴진다.이것은 멋지고 멋진 소리,나에게 다가오는 여자의 발 소리, 이 여자는 내가 있는 곳으로 곧장 다가온다.엄청난 속도인 것을 보아 멋진 묘인 족의 멋진 여성임이 확실한 것 같구나. 이제 보름 뒤면 여자들의 발정기가 다가온다. 이 때가 되면 멋진 여성들이 매혹적인 숨결을 내뿜으며 수컷들을 미치게 만들 시기가 오는 것이다. 바로 그 때를 대비하여 나는 여자들을 꼬시고 있는 중이 다.내가 가만히 있고 여자들이 다가오게 한다는 나의 이 전략은 사실은 왠만큼 잘난 수컷이 아니면 흉내낼 수 없는 일이다.그러니까 못난 놈이 아무리 목이 터 져라 외쳐 봐야 그 음성에 담긴 힘을 느끼는 암컷들은 흥 하고 고개를 돌리고 만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설마하니 다가오는 여자가 나에게 살기를 가질 줄은 몰랐다. 설마하니 내가 아는 여성인가? 그녀를 내가 희롱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그럴리가 없지,나는 여성에게 나쁜짓은 결코 하지않아. 했다면 틀림없이 수컷에 게나 했겠지. 오오,수컷들이여 나는 나쁜 놈이야,충분히 인정하지. 나같이 멋진 놈이 너희들 앞에 버티고 있어서 정말 미안해.정말 미안하다고. 내가 그렇게 속으로 외치고 있는 순간 파앗 하는 파공성과 함께 내 머리위로 무 언가가 날아들었다. 나는 뒤로 물러서면서 내 머리위로 날아간 그것을 바라보았다. "크르르르르르..." 전투 모드 첫번째 단계인 녀석이 으르렁 거리고 있었다. 입안에서 넘쳐나온 침이 고여 바닥으로 떨어진다. 눈은 광기에 가득차서 번들거리고 있고 최초의 충격을 주었던 그 손톱은 세개는 길고 일곱개는 짧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물끄러미 녀석 을 바라보았다. 검은 털이 뒤덮힌 녀석의 몸체는 더러워질대로 더러워져서 엉망인 몸을 하고 있 었다.얼마나 뒹굴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녀석의 몸체 전신에서 파리들이 잉잉 거리는 오물냄새가 났다. 그건 광기의 냄새, 죽은 자의 냄새,산 자에게선 나선 안되는 냄새였다. "병신같은 새끼!" 나는 몸을 돋쳐 올리면서 이 반병신같은 녀석의 머리통을 후려 갈겼다.빠각하고 녀석의 몸이 한 바퀴를 돌면서바닥에 나뒹굴었으나 그 순간 녀석도 땅을 후려 갈기며 튀어 올라와 그 무서운 속도로 나를 휘갈겼다. 나는 뒤로 튕겨지면서 기생목이 비비꼬여 있는 거목에 가 처박혔다. 와작 와작 하고 충격이 전신의 뼈를 노곤 노곤하게 만들어주는 순간 나는 첫번 째 변신모드로 화했다. 저 자식을 후려갈겨 주기 전에는 아무것도 결판이 나지 않는다! 발톱을 치켜 올려 나의 어깨를 물어뜯으려 달려오는 녀석의 면상을 걷어찼다.퍼 엇 하고 핏줄기가 공중으로 치솟았다.내 발톱에 박힌 녀석의 턱 밑의 살갗이 금 방 너덜 너덜해지면서 피가 솟는다.녀석의 목에 난 털들이 분노와 고통으로 순 식간에 일어나 목 주변이 살아있는 털들의 대장벽을 이루었다. 손톱이 팟팟하고 튀어 나오면서 나는 돌진했다. 이 병신같은 자식이 피를 줄줄 흘리면서 달려드는 것을 모두 무시하고 정면으로 어깨를 치박아 버렸다.녀석의 가슴은 내 어깨에 부딪치자 퍼걱 하는 괴이쩍은 소리를 냈다.그리고 녀석의 몸은 공중으로 투웅 떠서 풀숲으로 나동그라졌다. 나는 나동그라져서 으르렁거리기만 하는 녀석의 몸을 마구 짓밟아주었다. 녀석은 피를 토하고 또 토하고 나를 향해 으르렁거리다가 나의 포효성에 겁을 먹다가를 반복했다. 이윽고 나는 변신 모드를 푼 채로 녀석을 몇번이고 걷어 찬 뒤에 바짝 들어올려 서 바위 투성이의 냇물 속으로 집어던져 버렸다. 펑 하고 물줄기가 치솟았다. 파란 공중으로 튀어오른 하얀 물줄기 속으로 붉은 물감이 번져나가듯 녀석의 몸 안에서 피가 솟아나 주변을 더럽혔다. 나는 팔짱을 끼고 녀석이 엉망 진창이 된 채로 천천히 전투모드를 풀어가는 것 을 바라보았다. 세상엔 여러가지 놈들이 있다. 태어날 때 부터 약해서 서러운 놈들은 대개는 자신의 성격에 문제가 있는 경우 가 많다.대부분 약한 놈들은 나는 약하고 넌 강해,그러니까 날 건드리지 마라고 애원해서 그 자리를 피해나간다.그러나 물론 진짜 강한 놈들은 경멸하고 스쳐갈 지 모르나 그 약한 놈보다 겨우 조금 더 강한 놈들은 약한 놈들을 괴롭힌다.그 리고 모든 것은 서로 맞물려서 약한 놈은 강한 놈에게 억눌리고 강한 놈이라고 자처하는 놈들은 더 강한 놈들에게 억눌리기 마련이다. 그러나 나는 강한 놈들이라고 스스로 자처하는 놈들 치고 진짜 강한 놈은 드물 다는 것을 안다.강자라고 하는 것은 몸과 마음이 모두 다 강한 자들로 그런 자 들은 약자를 보호하려는 마음을 갖지 괴롭히려는 마음을 갖지는 않는다.그건 미 약하고 어린 것들을 바라보는 강자의 마음일뿐 동정도 아니고 정의감은 더더욱 이나 아니다. 인간들이 흔히 말하는 정의를 위하여란 같잖치도 않은 소리는 결 국은 자신은 강하고 싶다,그리고 너희들도 강하고 싶지? 그러니까 나에게 동의 해 줘 라고 말하는 자기와 비슷한 놈들을 끌어 들이려는 일종의 술수다. 진짜 강한 놈들은 혼자이고 약한 자들은 언제나 무리를 이룬다. 강한 놈들이 오래 살아남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가 강하니까 자기 기준으로 모든 것을 생각 해서 마음을 다치기때문이다.그러니까 강자를 죽이는 것은 결국은 자 기 자신의 슬픔,자기 자신에의 연민인 것이다. 나는 강하다. 나는 강하지만 여자에겐 약하다. 나는 강하지만 어린 것들에겐 약하다. 그리고 나는 언제나 나다. 나는 더 강하지고 싶다.나는 내 자신의 슬픔에 녹아들어 미쳐버리고 싶지 않다. 나는 살아있고 나의 옆에 있는 자들도 언제나 살아있기를 바란다.내가 사랑하는 자들이 언제나 살아 내 옆에서 숨쉬기를 바란다. 나는 혼자서도 강하고 여럿이 있을 때도 강하다.그것이 내가 살아가는 보람이 다.그 보람이 나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더라도 나는 살아남지 않으면 안된다.내 가 강하기 위해서 죽인 수많은 것들을 위해서라도 잘 살아남아야 한다. 내가 먹는 것은 나에게 먹히기 위해 죽었고 내가 살아나기 위해 죽은 자들은 나 에게 그 생명을 바쳤다.그러니까 그들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선 나는 끊임없이 살아가며 끊임없이 내가 강하다는 것을 보여 주지않으면 안된다.내가 죽인 자들 을 모욕하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잠깐,나는 지금 땅을 파거나 고개를 땅에 처박기 위해서 이 자리에 있는 게 아 니다.다시 진취적인 생각으로 돌아가야지,나는 여기에 여자를 꼬시기 위해서 내 아이를 낳기위해서 서 있는 것이다. 그럼 다시 냇물에 코 박고 자빠져 있는 녀석을 건져 올리는 작업부터 끝마쳐야 겠다. 나는 텀벙 거리면서 녀석을 냇가로 끌어올렸다. 녀석이 큰 대자로 뻗어 있는 사이에 다시 배가 고파져서 내가 녀석을 던져냈을 때의 충격으로 기절한 물고기들을 건져 올려 구워 먹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 바스락 소리와 함께 내가 바라던 아가씨가 나타난 것이었다! "저기..." 그녀는 길고도 매끄러운 금발을 늘어뜨린 채 날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오호 이럴 수가! 이 아가씨는 너무나 젊었다! 녹색눈이 매력적인 이 금발 아가씨가 나에게 길고도 아름다운 흰 다리를 드러내 며 걸어왔을때 나는 눈이 돌아갈 뻔했다.그러나 나는 엄청난 의지로 돌아가려는 내 눈동자를 잡고 능숙하게 일어나서 여인에게 물었다. "내가 불렀습니다.내 소리를 들으셨나요?" "아,...네에..." 그녀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묘인족 여성치고 이렇게 얌전한 여성은 없었다. 이것은 틀림없이 나의 멋진 모습에 반한 여인의 수줍음이 틀림없었다. 나는 황홀경에 젖어서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아 들고는 가볍게 키스했 다. "나는 쿠베린.아가씨의 이름은? " "..로오나..." KUBERIN........ 나는 안다. 굴속에서 고뇌하는 인간의 창백한 배가 신들의 맹목에 대하여 짐승들의 무거운 울음 소리를 내는 것을... S.J. PERSE 2 "아직 어려보이는군. 이제 막 성년이 된 건가?" "..네에.처음이에요." 어린 그녀의 말투에 내 가슴이 곧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의 가슴에서 심장이 요란한 소리를 내지르며 나의 입은 곧 귓가로 찢어지기 일보직전을 이루고 있었다.이래선 안되지,나는 연장자로서의 위엄을 보이지않으 면 안되는 것이다. 나는 침착한 어투로 미소를 지었다. "처음이라니,아직 아무것도 모르는군." "네에.전 아직...아무것도 모릅니다.왕이여.감히 왕의 음성을 들었을때에는 꿈 인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녀가 가볍게 무릎을 굽혀 보였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안으면서 속삭였다. "후...아니야.나는 이제 아이를 낳고 싶어졌기때문에 나의 상대가 될 여성을 구 하고 있는 거야." "와,왕의 아이!" 그녀의 눈이 커졌다. 얼굴이 빨개진 그녀는 당황한 듯이 물었다. "제가..감히 그럴 수가 있을까요?" "물론이지." 내가 그렇게 말하려는 그 순간이었다. "잠깐!" 물론 나의 예민한 귀는 그녀의 등장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순진해 보이는 녹색눈을 바라보다가 모든 것을 잊은 뒤였던 것이다. 이게 바로 나의 약점인 것이다.제길. 그녀는 팔짱을 끼고 우리들 앞에 서 있었다. 그녀의 길고 아름다운 검은 머리칼은 무릎까지 달해 있었고 그녀의 약간 치켜 올라간 듯한 밤색의 눈은 말할 수도 없이 농염했다.풍만한 가슴과 충실한 엉덩 이와 매끄러운 피부는 윤기있게 반짝이고 있었고 검은 가죽으로 온 몸을 감싼 터라 그 아름다운 육체는 그대로 내 눈앞에 드러나고 있었다. "이 나를 두고 그런 애송이를 택한다는 것은 너무 어리석은 일이라 생각지 않나 요? 왕이여?" 그녀가 살짝 한 걸음 다가서면서 말했다. 나는 가슴이 두근 거리는 것을 억누르면서 그녀를 한동안 멍청히 바라보다가 옆 에선 로오나가 내 옆구리를 찌르는 바람에 정신을 차렸다.이 미태로운 검은 머 리 미녀를 앞에두고 나는 한동안 심각하게 고민했다. "아름다운 그대의 이름은?" "호호호호호호,..저는 케이링이라고 해요." 그녀는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웃었다.그녀가 웃을 때 마다 아름다운 가슴이 흔 들렸고 나는 수컷다운 태도로서 그 곳으로 시선이 모아졌다. 로오나가 재빨리 청순한 얼굴을 바짝 들고 나의 팔을 잡아 당기지 않았더라면 나는 당장에 그 가슴에 얼굴을 묻었을 것이다. "음..케이링이라..." "오호호호호...전 저런 애송이에게 왕을 빼앗길 멍청한 여자는 아니에요.절 택 하시는 게 훨씬 현명한 태도라고 생각하는데요,왕이여?" 그녀가 어느샌가 다가와 내 팔을 움켜 쥐었다. 내가 그 향기로 숨을 멈추고 긴장하고 있는 그 순간 으으응 하고 자빠졌던 휴런 이 물을 입가로 분수처럼 내뿜으면서 정신을 차렸다. "이봐,멍청아." 내가 여자 둘을 내버려 두고 녀석의 엉덩이를 걷어차자 피투성이인 휴런이 고개 를 들고 날 바라보았다. "에에?" 눈을 뜨고 버벅거리는 녀석을 내려다 보면서 나는 팔짱을 낀 채 물었다. "정신 차렸냐?" "쿠,쿠,,쿠베린!" 그가 벌떡 일어섰다.아니 서려고 했다.그리고 그 순간 다시 고꾸라졌다. "크윽..아파!" "당연하지,멍청아," 한동안 헥헥 거리던 녀석이 바닥을 기는 자세로 비슬 고개를 들고 날 바라본다. "죽은 줄 알았어,쿠브형." "나도 그런 줄알았다만 나 같이 강한 분이 그렇게 쉽게 죽진 않지.이 멍청아." "형의 가슴에 내가 손톱을 박는 순간에 ...난 내가 미쳐버렸다고 생각했어." 버벅거리는 놈을 한대 걷어차주고는 나는 되물었다. "왜 왕의 즉위식을 하지않았어?" "미쳤어! 형! 그런 비겁한 짓을 하고 어떻게 그런 짓을 한단 말이야! 나는 형을 암습해서 죽였어.그리고 나서 뭘 잘했다고 즉위식을 한다고! 형의 심장을 찌른 감촉때문에 난 소름이 끼쳐서 손톱을 잘라버리고 말았다구!" 녀석이 머리를 감싸쥐고 대굴 대굴 구르면서 비통한 소리를 터뜨렸다. 나는 녀석이 우는 것을 팔짱끼고 바라보고 있었다. 이 녀석이 이런 소릴 하는 것을 봐서 나는 철혈한이고 냉혈한이고 괴물단지다. 녀석은 나의 심장을 찌른 충격으로 돌아버릴 지경이라고 말하는데 나는 녀석만 이 아니고 다른 놈들의 심장을 몇번이고 찔러 터뜨리고도 살아남지 않았는가. "날 용서해 줘." 녀석이 고개를 조아리고 비는 것을 힘껏 걷어 차주었다. 녀석이 나뒹굴자 나는 조용히 말해주었다. "이제 다시는 넌 즉위도전을 할 수 없다.동의하는가? "네.왕이여." 눈물을 뚝뚝흘리고 피를 뚝뚝 흘리며 휴런이 대답했다. "나는...그렇게 심한 기분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꼬마 휴런이 그렇게 말했고 나는 그 말에 더 상처 받았다. 녀석은 나를 그렇게 올려다 보면서 비틀 일어섰고 난 부축해 주지않았다. "난 이제 여자들을 거느리러 간다.아이를 낳으러. 너는 어쩔 거냐?" "...." 휴런은 잠시 복잡한 얼굴로 우리들을 주시하고 있는 여자들을 바라보았다. "쉬고...나중에 형 옆에 붙어있겠어." "뭐라고?" "이제 나도 형도 서로 죽이려 싸울 필요는 더 이상 없으니까. 나는 형에게 철저 하게 패했어,형은 강해.누구보다도 강해." 그 복잡한 표정을 나는 냉엄하게 바라보았다. 휴런은 복잡한 얼굴로 날 바라보다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나중에 봐,형.그리고 언젠가 형을 쓰러뜨릴 도전자를 기다리겠어." "....." 녀석이 사라진 뒤에 나는 팔짱을 끼고 한 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나는 냉혈한,나는 철혈한,그리고 나는 .... 잠깐! 여기서 흔들려선 안돼! 나는 지금 린의 죽음때문에 극도로 마음이 약해져 있는 상태다.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생각하다가 주저해선 안돼. 나는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고 있는 여자들을 돌아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두 여인은 빙긋 웃었다. 나도 웃었다. "그럼 마을로 가자." "마을은 어디에 있을까요?" 로오나가 조심스레 묻는 것을 오호호호호호 하는 웃음을 터뜨리는 케이링이 그 녀의 머리통을 한대 후려갈겼다. "바보! 여자들의 마을은 옛부터 내려오는 자수정 동굴 근처에 생기는 법이다!" "에에?" 로오나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나는 쓴 웃음을 지으면서 왕년의 나의 집이었던 곳을 떠올렸다. 케이링이 손을 뻗어서 내 팔을 잡았다. "왕이여.왕께서 바라는 곳으로 가시지요.저는 당신의 아이를 낳기위해서 모든 준비를 다 갖추고 있답니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가라앉았던 기분이 다시 좋아지기 시작했다. "좋은 이야기군." "저도요!" 로오나가 팟 하고 끼어들어 케이링이 잡은 내 팔의 반대편 팔을 잡으며 말했다. "저도 만반의 준비를 다하고 있어요! 나도 왕을 뺏길 순 없다구요!" "이 애송이가!" "당신은 몇번이나 애를 낳았잖아요! 당신이야 말로 처음인 날 위해 양보하면 어 때요?" "시끄러워! 여러 번 낳은 것 자체가 내가 더 훌륭하다는 증거야!" 나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파란 하늘,파란 얼굴. 오오,,이래서 삶이란 살아갈 보람이 있는 거야. 몇번을 손을 뻗어 휘저어 보아도 세월은 칼 같이 지나가 잡을 수도 없는 것,지 금 이 순간 땅에 발을 디디고 나는 살아있다. 맛있는 음식과 아름다운 여자들에 휩싸여서 나는 강함을 자랑하고 나는 싸우고 나는 미워하고 질투하고 사랑하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바닥을 긁고 땅을 파고 고개를 땅에 처박는 일 따위 나에겐 어울리지않아! KUBERIN........ 나는 안다. 굴속에서 고뇌하는 인간의 창백한 배가 신들의 맹목에 대하여 짐승들의 무거운 울음 소리를 내는 것을... S.J. PERSE 3 여자들의 마을이 형성되는 것은 여자들의 발정기를 전후해서 생기는 것이다. 이 마을이 생겨나면 남자들이 모여든다.물론 내 거처를 사방으로 해서 10치아르 안에는 아무도 들어올 수 없지만 어찌되었든 이 때가 우리들의 파란 만장한 러 브스토리가 전개되는 시점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나는 인간과 오래 산 덕에 상당히 간지러운 말이나 짓거리로 여자들을 유혹할 수도 있지만 묘인족이란 사실 강한 것을 지나치게 사랑하는 종족이어서 강하기 만 하면 가만히 있어도 여자들이 모여든다. 나의 전의 연인이었던 수많은(?) 여자들 중에서 단 한명도 내 아이를 낳은 사람 은 없다.내가 발정기를 피했기 때문이다. 여자라... 나의 일생에서 싸움을 빼면 남는 것은 여자와 먹을 것 뿐이다. 아니,뭔가 다른 것도 있기는 하겠지만 공정히 말해보건대 그 정도이다.나는 물 론 아이를 낳지 않았기때문에 아이를 낳는 것에 대해서 무척이나 여러가지 생각 을 하고 있었다.그건 분명한 일일 것이다. 백부를 죽이고 난 뒤에 내가 생각한 첫번째는 내가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는 언 젠가 나를 죽이러 달려올 것이란 것이고 내가 형을 죽이고 생각한 것은 내 아이 들끼리 싸움을 하고 죽일 것이란 사실이었다.그리고 내가 일렌을 죽이며 생각한 것은 일렌이외의 다른 여자에게는 내 아이를 낳게 하고 싶지 않다는 사실이었 다. 나는 멍청이 일런지도 모른다. 냉정히 생각해 보면 그건 다 아이들의 선택,내가 여기서 노심초사 머리털 쥐어 뜯어도 결론나지 않는 뻔하고도 당연한 사실인 것을 나는 오랫동안 허덕여 왔었 다.내가 지켜 주고 싶어도 아이는 죽는다.내가 지키고자 눈물을 흘려도 이를 갈 아도 아이는 죽는다. 하나를 잃으면 나는 두개를 얻어야 한다.두개를 잃으면 나는 세개를 찾으려 한 다. 나는 이기적이고 나는 탐욕스러우며 나는 멍청하면서도 끈질긴 놈이니까. 이렇게 주저리 주저리 늘어놓고 앉아 궁시렁 거리는 것을 보면 나도 꽤나 오랫 동안 시달리고 있는 듯하다.이렇게 주저리 주저리 떠드는 것이 얼마나 멍청한 지 잘 알면서도 이러고 있는 것을 보면. 그러나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그 와중에도 나는 바지를 입지않은 로오나의 희 고 매끈한 다리를 은근히 어루만지고 있으며 그녀의 튜닉자락사이로 손가락을 집어 넣고 있었다. "아이.." 로오나가 말하는 동안 나는 그녀의 입술을 겹쳤다. 매끈한 여자들의 피부를 찬양할 지어다! 그녀의 허리가 한 팔안에 다 들어온다. 내가 그녀를 막 눕히고 키스에 열중하려는 순간 내 허리로 감겨오는 또 하나의 아름다운 물건이있었다. "호호호호,..날 잊을 셈이에요?" 내 허리를 감은 것은 케이링의 탄력적인 다리였다.그 다리가 내게 감겨오는 순 간 으음 하고 나는 심각한 갈등을 맛보았다. 어느 쪽이 먼저냐? 그녀의 팔이 내 목을 뒤에서 끌아안고 내 목에 키스하더니 내 귓가를 잘근 잘근 깨물었다. 나는 지금 현재 앞으로 로오나를 안고 뒤로는 케이링에게 안겨있는 형상을 이루 고 있었다.행복하다면 행복하고 약간 당황스럽다고 하면 당황스럽다. 이 상황이라면 계속 로오나를 안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홱 돌아서서 케이 링의 풍만한 가슴에 고개를 파묻을 수도 없다.이럴 경우 어찌해야 현명하다는 소리를 들을 것인가? 한꺼번에 둘을 끌어안고 뒹굴어 봐? 지금 우리들은 자수정동굴로 가는 길목의 여관방안에 있었다. 즉,인간들의 여관방이란 말이다. 인간들의 가장 훌륭한 물건은 아마도 침대가 아닐까 한다.마르고 향긋한 짚을 잔뜩 깔고 그 위에 고급 린넨을 깔면 맨살에 닿는 그 감촉이 범상치 않다. 그래서 여관방을 빌려 하룻밤은 자고 다음날 부터 마을을 찾아 가기로 마음을 먹은 것인데 방은 물론 하나만 빌렸다.나는 원래 혼자서 자는 습관이 형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지만 여관주인은 양쪽에 여자를 끼고 선 나를 어찌 보았는지 질투와 형연할 수없는 동경감에 가득한 눈길로 날 바라보면서 이층입니다 라고 말해주었었다. 여관 1층은 언제나 그렇듯이 주점을 겸하고 있다. 그 주점안의 사내들의 그 화살과 같은 증오의 시선과 그들의 찢어질 듯한 눈꼬 리에 맺힌 통한의 눈물을 나는 만족스레 바라보면서 흐뭇하게 그녀들의 허리를 안고 여관방안으로 올라왔던 것이었다. "이리와." 나는 로오나의 옷을 벗기면서 사락 사락 소리나는 옷자락들에 감동받으면서 그 녀를 침대에 눕히고 미소했다.내 뒤에선 케이링이 내 옷자락을 벗기면서 나름대 로 감동하고 있는 듯 했다. 케이링의 손이 내 목을 끌어안기에 나는 그 손등을 가볍게 깨물어 주고는 그녀 의 몸도 잡아 당겨 이미 알몸이 된 그녀를 로오나와 나란히 눕혔다. 발그레한 로오나는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왔고 백옥빛으로 선명한 케이링의 그 모습은 말할 수도 없이 유혹적이었다. 나는 양손에 떡,아니 꽃을 쥐고 황홀경에 젖어서 조용히 말해주었다. "나의 아이를 낳아주겠나?" 두 여인이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물론이죠." "네." 해가 완벽히 떠 있었다. 이 여름에 끈적일 정도로 지겨운 저 뜨끈한 태양, 저 놈이 빼꼼히 얼굴을 내밀 면서 여관방 안으로 발을 슬쩍 들이밀고 있었다. 나는 잠에서 깨자 마자 재빨리 나의 얼굴을 핥고 있는 저 끈적한 태양을 피해서 고개를 돌렸다.고개를 돌리자 내 등위에서 달콤한 숨결을 토해내던 케이링이 눈 을 반쯤 뜨고 나른하게 웃어 보였다. 이 여자는 미소할 때 보면 수컷의 애간장을 녹여버릴 여자야. "배가 고프지않아?" "고파요." "그럼 내려가서 먹자." 로오나는 나의 시선을 받으면 아직도 얼굴이 붉어진다. 어젯밤 우리가 뭘했지? 로오나? 그녀의 이마에 키스하면서 나는 물었다. "어때? 아이를 가졌을 것 같아?" "모,모르겠는데요." "배고프지?" "네." "그럼 가서 먹자." "이리로 음식을 가져오라고 하면 안돼요?" 케이링이 사악 웃으면서 물었다.그녀는 여전히 내 팔뚝을 잡고 잘근 잘근 깨물 면서 즐기고 있는 차였다.나는 그녀의 목덜미를 가볍게 깨물면서 말했다. "아니,안될 건 없지만 우리들이 먹어치울 분량이 주인이 들고오기엔 문제가 있 을 거 같아서 말이야." "아아..그것도 그래요,.오호호호호호호..." 일어서서 옷을 끼어 입고 나니 로오나와 케이링이 서로 눈싸움을 하는 것이 등 뒤에서 느껴진다. 이건 그저 질투가 아니라 살기다 살기. 그것을 모른 척하고 나는 말했다. "둘이 같이 아래로 내려와." "네에." "네."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주점안을 휘휘 둘러보았다. 빈 자리에 턱하니 앉자 주인이 다가섰다. "어떤 걸로?" "통돼지 두마리,오리 다섯마리,맥주 세잔,돼지창자 스튜 한 솥만." 잠시 동안 주인은 침묵했다 그리고 자신이 잘못들은 것인가를 확인하며 되물었다. "뭐라구요?" "통돼지 두마리,오리 다섯마리,맥주 세잔,돼지 창자 스튜 한 솥." "....혼자서요?" "아니.셋이서 먹어.구질 구질 묻지 말고 빨리 가져와!" 그는 나의 덩치를 아래 위로 한번 보고는 고개를 절레 절레 내 저으면서 주방으 로 들어갔다. 주점안에는 서너명의 사나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들 지친 기색의 사냥꾼들로 보였고 그들 이외엔 본디 마을의 자경단 인 듯이 보이는 청년 둘이 허리에 검을 매고 문간에서서 수다를 떨고 있었다. 마을은 조용했다. 이 낡아빠진 여관은 아마도 칠십여가구가 사는 이 단촐한 마을의 유일한 여관인 듯 했다.나는 턱을 괴고 앉아서 이글거리는 밖을 내다 보았다.어느새인지 해는 쨍쨍 빛을 내면서 하늘위에서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턱턱 숨이 막히도록 더운 터라 사방에 창문을 열어 놓았지만 덥긴 마찬가지였 다.여기저기서 파리가 잉잉 거리면서 나돌아 다닌다. 걸을 때 마다 삐걱 거리는 낡은 계단을 울리면서 두 여인이 내려왔다. 그녀들이 나오자 마자 주점안의 모든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 그녀들 주변으로 뭔가 휘황하고도 거창하면서 찬란한 빛이 일렁이는 듯했다.그 녀들을 바라보는 모든 사내들의 시선을 느끼면서 나는 흐뭇함과 자랑스러움으로 미소를 지었다. 케이링은 나에게 사쁜사쁜 걸어오자 마자 내 목에 팔을 감고 입술에 키스했다. "으웅.덥단 말이야.쿠베린,더워요.우리 어디선가에서 목욕이라도 하고올까요?" "그렇군." 나는 그녀의 엉덩이 감촉을 느끼면서 그녀를 내 옆에 앉게 했다.로오나가 약간 새초롬한 얼굴로 내 옆에 와 앉더니 바짝 엉덩이를 붙이고 내 옆에 끼어 앉는 다. 나는 양쪽 여인에게 끼어 앉아 상당한 체온의 급상승을 느끼고 있었다. "음식은 시키신 거에요?" 로오나가 상냥하게 흰 손을 들어서 내 앞에 놓인 물잔에 물을 담았다.나는 그것 을 기꺼이 마시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응,내 마음대로 시켰어. 못먹는 건 없겠지?" "아아..네에,단 것 빼면 나는 다 잘먹어요." 케이링이 대신 대답했다.그녀는 불만스러운 듯 자신의 몸을 내려다 보면서 내게 말했다. "나는 말이죠,이 팔다리가 너무 마음에 안들어요.이게 뭐야? 색깔도 마음에 안 들고..." 옆에서 잽싸게 로오나가 받아넘겼다. "맞아요,그리고 좀 뚱뚱하지 않아요?" "뚱뚱?" 케이링의 눈이 도끼눈이 되어 로오나를 쏘아본다. 나는 그 와중에 케이링의 팔뚝을 잡아 당겨 키스해 주었다. "넌 멋져,머리 부터 발끝 까지 완벽해." "마아..진짜?" 케이링의 눈빛이 야릇해지는 것을 느끼는 순간 로오나가 갑자기 고개를 떨구었 다. "그래요,난 빈약해요,흑..." "무슨 소리야! 넌 아주 청순하고 멋진 걸,넌 매혹적이야!" 내가 급히 말하자 로오나는 흑 하고는 고개를 저어보인다. "아니에요,난 케이링에 비하면 빈약하기 짝이 없는 꼬맹이인걸요.쿠베린님도 저 같은 여자는 싫어할 거야." 나는 그녀의 어깨를 잡고 달래주면서 갑자기 천정을 바라보았다. 이게 뭐하는 짓이야? 한 번에 여럿의 여자를 사귀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까먹었군,게다가 여자의 속 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아무리 내가 나이먹어도 어려운 것,두 여자를 데리고서 이렇게 힘들다니 앞으로 자수정굴에 돌아가서 얼마나 복잡한 상황을 겪어야 할 지는 뻔할 뻔자로군. "정말 눈꼴시어서 못봐주겠군." "여자 둘 끼어 안고 뭘 하는 짓인지..끌끌.." "백주에 뭔 짓거리야?" 드디어 이럴 때 언제나 등장하는 못난 놈들이 있었으니 아까부터 나를 야리고 있던 서너명의 사냥꾼 녀석들이었다. 녀석들의 개입이 없었다면 나는 영영 여자들의 세력다툼에 희생될 뻔했었기때문 에 나는 그들의 개입이 반가왔다. 그래서 미소마저 띄우고 응해주었다. "뭐라고?못난이들아?" 그 순간 한 녀석의 얼굴이 울그락 푸르락해지더니 곧장 나에게 달려들었다.주먹 이 난무하려는 그 순간 휘익 하고 녀석이 밖으로 나뒹굴었다.그리고 뒤이어 달 려든 녀석을 퍽퍽 하는 소리와 함께 해치워 버린 사람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로오나였다. "질줄 알고!" 케이링이 내가 나서기도 전에 놀란 얼굴을 하고 선 다른 놈을 잡아 채서 발로 짓밟고 창밖으로 던져버렸다. "오호호호호호호.,..감히 누구에게 무례한 짓을." "쿠베린님에게 무례한 짓을 하다니!" 두 명의 여전사가 허리에 손을 탁 하니 얹고 떠들어 대는 장면은 잠시 내가 잊 었던 묘인족들의 생리를 떠올리게 하는데에 충분한 모습이었다. 나는 그저 멍하니 앉아있기만했을 뿐인데 두 명의 여인들은 주점안을 싸악 훑어 보면서 선언했다. "쿠베린님을 이길 남자따위는 세상천지에 없어!" "건방지게 못난 것들이 질투씩이나 하고 덤비지 말란 말이다!" 째앵 하고 울리는 그 목소리를 들으면서 사람들이 모두 기가 죽었다.그리고 그 녀들은 자랑스레 나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식사를 하죠!" "이봐! 어서 식사 가져와!" 누가 나보고 만족스런 얼굴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면 그건 아니라고 변명하고 싶 다.어디까지나 어.쩔.수. 없.이. 나는 두 명의 여자 사이에 끼어앉아서 음식을 먹고 있었다. 여자들이 교태를 부리는 것에 익숙한 나이긴 하지만 먹을때 까지 이렇게 된다면 차라리 사내를 끼고 앉아 밥을 먹는게 더 나을 수도 있다. 그러나 별수 없다. 아이를 갖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고 이 여자들도 아이를 배면 나를 버리고 흥 하고 사라져 버릴 것은 분명한 것이니까 참도록 하자. 이왕에 결심한 일을 여기 서 흔들리면 곤란했다. 훗훗훗...흔들리지 마라,쿠베린. 나는 낳을 수 있을 만큼 아이를 낳기로 이미 결심한 것이다! "아 하세요,쿠베린님." "응,이거 맛있는데..내가 먹여드릴까요?" 바로 그때 였다. "멋진 모습이군." 그렇게 말하며 등장한 것은 다름아닌 아리따운 늘씬한 미녀였다. 그녀는 백금발의 황홀한 빛을 사방으로 뿌리면서 도도하게 흰 튜닉자락을 흩날 리면서 서 있었다.그녀의 허리엔 빛나는 아크론의 보석이 박힌 보검이 꽂혀있었 지만 나는 단언해도 좋았다.그 보검은 단 한번도 피를 본 적은 없었을 것이었 다.왜냐면 보검보다 좋은 무기를 가진 그녀였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사파이어빛을 가진 눈빛을 반짝이면서 나의 앞으로 다가왔다. "당신이시군요,쿠베린 왕." "그런데?" 나는 무심히 그녀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면서 말했다. 모든 묘인족 여성들은 발정기가 되면 최고의 아름다움을 자랑한다.그 아름다움 에 눈멀어 수컷들이 죽어버리든 말든 그녀들은 아름다움을 맘껏 자랑하는 것이 다. "과연 명불허전이십니다.쿠베린 왕이시여.." 그녀가 생긋 웃었다. 웃, 가슴에 통증이 온다.이,이것은... "당신의 아이를 내가 낳게 해 주세요.저는 미하라 라고 합니다." KUBERIN........ 나는 안다. 굴속에서 고뇌하는 인간의 창백한 배가 신들의 맹목에 대하여 짐승들의 무거운 울음 소리를 내는 것을... S.J. PERSE 4 날 부럽다고 할 수컷들에게 미리 한 마디 해주겠다. 나는 사실 엄청나게 강하다. 나에겐 수십명의 여자를 거느렸던 경력이 있고 -몇백년전 일이긴 하지만-그리고 여자들에 대해선 전혀 아쉬움따위는 느껴 본 일이 없는 나이긴 하지만 그런 나 로서도 발정기의 여인들에 대해선 다소 무지했었다. 발정기의 여인들은 무적이 된다. 그녀들은 최고의 남자를 얻기 위해서라면 목숨을 걸고 미모를 걸고 도박을 하고 싸움을 한다.현재 내가 알기로 최고는 이에르네인데 그 이에르네에게 도전하려 고 이를 박박 갈고 있는 것이 내 옆에서 눈빛을 화려하게 폭팔시키고 있는 케이 링과 미하라인 것 같다.케이링은 그저 묘인족들 사이에서도 소문난 여인인 듯한 데 미하라는 수련-싸움의 수련이겠지만-을 위해서 동서 남북 모든 대륙을 돌아 다니며 강인한 종족과 싸움을 해온 모양이었다. 둘이 나이는 비슷하지만 이 두 명의 여인들이 이에르네에게 도전을 청한다면 아무리 이에르네일 지라도 보통 어려운 건 아닐 것이다.이 두 사람은 왕년의 일렌에 비한다면 모자르지만 제법 강했기때문이었다. "오호호호호호호...이 나를 제치고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나!" "발정기가 지나야 싸울 수 있겠지만 오호호호호호.,..내가 널 이기지 못하리라 고 보는 것인가?" "오호호호호호호...무슨 소릴 하는 것이야? 바로 이 나를 쿠베린님께선 사랑해 주고 게신단 말이다! 뒤늦게 끼어들어서 뭔 소릴 하는 것이냐!" "너 따위가 뭘 안단 말이야? 최고의 남성에겐 최고의 여성이 어울리는 법이다! 너따위는 길가에 내다 버려도 아무도 주워가지 않아! 나의 이 황홀한 미모와 지 성과 이 힘을 보란 말이다!" 미하라가 팔을 들어 보여 사사사삭 하고 손톱을 꺼내 보이자 마자 케이링의 눈 빛이 야릇해지더니 푸르게 빛났다. "해보겠다는거냐? 이 허여 멀건한 계집아!" "뭐라고! 이 시커먼 계집이 두려움을 모르고!" 둘이 싸움을 하는 것을 바라보던 로오나가 내 목에 팔을 감고는 교태롭게 속삭 였다. "으음..쿠베린님,두 사람은 내버려두고 우리들 출발하는 게 어떨까요?" "그것도 나쁘지 않지." 내가 말하며 일어서자 두 명의 여자들이 홱 고개를 돌리며 외쳤다. "기다려요! 그런 여우같은 계집애를 데리고 뭘 어쩌실 거에요!" "맞아! 그런 약해 빠진 계집애 따위를..." 로오나가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감히 발정기에 싸움을 하려는 무지한 여인들을 상대하실 여유는 쿠베린님께선 없을 거라고 봐요." "뭐,뭐라구!" "뭐야!" 나는 굉장히 피로한 기분이 되어서 말했다. "그래,이제 음식이 다 식었다.난 먹고 떠나려 한다.너희들도 따라오려면 따라오 너라." 그 다음,우리들은 음식을 먹었다. "자,다들 들어라,난 시끄러운 것이 싫다.두 사람,알아 들었나?" 미하라와 케이링이 눈싸움을 하면서 나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 둘 사이에서 퍼져나가는 싸움의 불꽃과 질시의 불꽃을 바라보면서 나는 팔짱 을 끼고 선언했다. "발정기에는 어떤 여성도 싸움을 해선 안된다! 알아들었나! 이건 일족의 율법이 다!" "네.왕." "네." 두 명이 고개를 숙였을때 나는 고개를 돌리고 마을이 형성되었을 곳을 향해 코 를 들어올려 냄새를 맡았다. 동북쪽,그 쪽에 자수정 동굴이 있고 여자들의 마을이 있을 것이었다.바람에 실 려 냄새가 풍겨나온다.그 냄새는 일족의 냄새,피의 냄새,그리고 수컷들을 자극 시키는 냄새였다. "가자." 몸을 띄어서 달려나가면서 미하라가 소근 거렸다. "왕...이번에는 굉장하겠군요.왕께서 발정기의 마을을 방문하시는 것은 처음이 아닌가요? 몇백년만의 일이니 여자들이 대 소란을 피울거에요!" "그렇군.." 바삭 바삭 발바닥 밑에서 나뭇가지들이 밟혀서 부서지는 소리를 낸다. 몸안의 모든 것이 여자를 향해 열려있다. 아이를 가진다는 것은 황홀한 경험인 것을 나는 알고는 있었다.모든 인간들이 바라는 그 아이들이 태어나는 순간에 그 아비되는 수컷들은 흥분에 겨워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한다.암컷들은 탄생의 아픔으로 울기도 하지만 결국은 가장 기꺼이 아이들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가장 강한 자를 원하는 것은 가장 강한 아이를 바라는 것과 같은 것,암컷들은 그 아이에 대한 기대감으로 아이를 갖지만 수컷들은 자신들의 강함에 대한 댓가 로서,혹은 자신들의 피를 남기는 후계로서 아이를 갖는다.그렇지만 지금에 와서 나는 후계로서 아이를바라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내가 사랑할 상대를 바라는 것이었다. 내가 잃은 것들에 대해서 내가 죽인 자들에 대해서 나는 사랑할 자를 바란다. 내가 부비고 사랑해줄 그런 것들을 바라고 있다.내가 떳떳하게 사랑해줄 아이를 바라는 것이었다. "내 아이를 낳는다면,너희들은 당분간 내 곁에 있어야 한다." 내가 미하라와 케이링과 로오나에게 말하자 미하라는 약간 미심쩍은 듯 눈쌀을 찌푸렸다. "아이를 죽이려는 것은 아니시겠지요?" "아니.난 내 아이들이 자라나는 것을 보고 싶을 뿐이다." "아이들은 여자가 키우게 되어 있습니다.왕이여,다른 것은 다 양보해도 아이들 의 생명을 남자에게 내 보이는 것 처럼 위험은 없다고 봅니다만." 케이링이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팔짱을 끼고 그녀들을 바라보았다. "내가 다른 젊은 수컷들 처럼 아이들을 죽이려고 할 것같은가? 이 나이에 접어 든 내가?" 그녀들은 침묵했다. "내가 아이들을 죽이려고 생각했다면 여지껏 아이를 낳지 않으려고 한 보람이 없지않나?" 나는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나는 내 아이를 낳고 싶어한다. 내 아이가 나의 자리를 위협하기 전에 나는 죽 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녀들은 침묵했다. "내 나이는 너희들의 배가 된다.너희들의 어머니들과 나는 사랑을 나눈 적도 있 을 것이다.그러니까...나는 너희들의 아이들,나의 아이들을 죽일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자수정 동굴이 가까와 지는 동안에 우리들은 침묵했다. 그녀들은 여자다운 직감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여자들이 아이를 갖자 마자 흩어져 버리는 것은, 왕이라고 하는 가장 강한 자가 곁에 있지않는 한,수컷이 나타나 강해질 아이들을 죽이려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 가 있다.아이들은 커지면 강자를 찾아내어 도전하고 죽고 죽인다.그것을 막기위 해 수컷들은 언제나 암컷이 가진 어린애를 죽이려고 한다. 내가 거느린 여자들이 낳은 아이들은 내 옆에서 잘 컸다.그리고 그 애들을 건드 리려고 한 수컷들은 감히 없었다.그렇지만 이 몇백년 간 나는 동굴을 떠나있었 고 그 사이에 여자들이 남자들에게 습격받아 아이를 잃는 사건이 있었을 것이 다.특별한 일이 없는 한 여자들은 아이를 낳은 다음에는 수컷을 보길 돌같이 보 니까. 이에르네는 아이를 낳았을까. 다크시온이 그렇게도 애원했는데 그녀는 그의 아이를 낳아주었을까. 여자들의 냄새가 났다. 나는 구릉사이에 이어진 자그마한 둔덕사이에 지어진 집들을 보았다.그 집을 지 은 것은 여자들이고 그 여자들은 지금 모여서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그녀들에 게 달라 붙어 있는 몇몇 남자들이 보였다. 젊고 건강한 남자들이 손이 발이 되도록 빌면서 여자들에게 매달려 있고 여자들 은 모른 척 교태로운 미소만 짓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끈적한 태양은 이미 서쪽으로 지고 있었다.우리들의 그림자들은 길죽하고 껑중 한 모습으로 우스꽝 스레 우리들 앞으로 먼저 내달려간다. 푸른 풀숲위에 모여있는 동족의 냄새,나는 그 냄새를 맡으면서 몇백년만에 집으 로 돌아왔다. 아이를 갖기 위하여. 웅성거림이 점점 퍼져나갔다. 모여있는 여자들의 수는 약 삼십가량 되었다. 그녀들은 눈을 크게 뜨고 날 바라보고 있었다.나는 케이링과 로오나와 미하라와 함께 그들 사이를 뚫고 자주색동굴로 향해 걷기 시작했다. 앉아 있던 모든 녀석들이 일제히 일어섰다.그들이 일제히 일어서서 뒤로 물러서 는 것은 등 뒤로 느끼면서 나는 천천히 걸었다. 자수정동굴은 내가 사라진 이 삼백여년간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었다. 굳이 있다고 한다면 약간 깨끗해 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쓰던 침상은 전과 달리 새로운 가죽이 덮혀있었다.백옥처럼 흰 마하틸의 가죽은 여전히 그 사나운 머리를 들어 날 바라보고 있었다. 자수정들은 나를 향해 빛을 발하고 있고 동굴의 틈새로 희미하게 들어오는 햇빛 은 자수정들을 호화롭게 색색가지로 빛나게 해 주었다. "아..아름답군요!" 놀란 어투로 미하라가 중얼거렸다. "응." 나는 침상위에 앉았다. 두 손을 깍지끼고 나는 그녀들을 바라보았다. 기묘한 감회가 가슴속으로 치밀어 올라와 내가 보낸 모든 세월들이 다 거짓인양 느껴지게 만들고 있었다.이 곳을 떠나던 그때, 나는 일렌을 죽이고 있었다. 듀나시의 다리를 분질러 버리고 나는 그렇게 떠나 버렸었다. 어느 것이 먼저인지는 나로서도 기억나지 않는다. 로오나가 흰 팔을 들어서 내 허리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뭔가 슬프신 듯한 얼굴입니다.왕이여." "그런가." 나는 무심히 대꾸했다. 미하라가 내 얼굴을 보고 다가와 살짝 무릎을 꿇고 내 입술에 키스했다.그녀의 달콤한 입술이 내 얼굴을 덮고 있는 동안 나는 과거를 잊었다. "자아..오랜만에 집에 돌아오셨으니 쉬시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케이링이 미소를 한껏 지으면서 내 발에 신겨진 신발을 벗겼다. 나는 내 침상위에 3백여년만에 누웠고 그녀들의 내 옆에 혹은 내 위로 누웠다. 로오나가 킥킥 소리내면서 말했다. "그 여자들 얼굴 봤어요?" "아아..그래요.쿠베린님,그 여자들 우리들을 부러워 하고 있었어요." "왕께서 이 자리에 나타나실 줄은 아무도 몰랐걸요." 미하라가 킥킥 웃으면서 내 아랫도리로 손을 가져가면서 말했다. "이곳에 돌아오신게 얼마만의 일인지 우리들은 몰라요,아직 어리니까,그런데 왕 께선 기억하시나요?" 웃으면서 나는 그녀들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몰라." 진짜 기억하지 못한다.그리고 기억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리고 지금은 그런 기억을 할 때가 아니다.나는 여자들에게 충성하는 남자이니 까 먼 과거의 일따위를 회상해서 이 분위기를 망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 갑작스런 소리때문에 나는 눈을 떴다. 내 몸에는 세 여자의 몸이 휘감겨서 기기묘묘한 자세를 이루고 있었는데 로오나 의 다리는 내 허리 밑에, 케이링의 팔은 내 어깨위에 미하라의 몸은 말 그대로 내 위에 있었다.다리 여덟개가 이리 저리 얽혀있는 모습은 아무래도 상당히 복 잡한 광경을 이루어 내고 있었지만 이 커다란나의 침대나 나의 무한하고도 멋 진 이 몸은 그런 것쯤은 다 감당해 낼 수 있었다. "이게 뭐에요! 이게 뭐야!" 고함을 지르는 것은 다름아닌 붉은 머리칼을 번뜩이며 황홀한 몸매를 잔뜩 드러 낸 기가 막힌 미녀였다. 이에르네는 눈빛을 번뜩이면서 살기에 차서 가장 가까운 곳에서 눈을 비비고 있 는 케이링의 머리칼을 쥐어 잡더니 내동댕이쳤다.케이링이 까악 하고 뒤로 나자 빠지자 곧이어 이에르네는 옆에 있던 미하라의 발목을 잡아 채서 말 그대로 집 어던졌다. 로오나가 꺄아 하면서 내 목에 매달릴 즈음에야 나는 정신을 차리고 소리쳤다. "무슨 짓이야! 이에르네!" "무슨 짓! 무슨 짓! 무슨 짓이냐고 나에게 지금 말한 거에요? 쿠브!" 그녀는 이글거리는 상태로 다가와 내 목을 움켜 쥐었다. "내가 몇번이나 말했었지요! 이따위 여자들에게 고개돌리지 말고 나에게 돌아오 라고!" "하지만..이에르네." 나는 말을 조금 더듬었다. "시끄러워요! 내가 몇번이나 말했었지! 이상하고 덜떨어진 계집애따위에게 신경 쓰지 말고 내게 곧장 돌아와 나에게 아이를 달라고! 몇번이나 그렇게 말하고 저 번에는 나에게 꼭 아이를 주겠다고 약속해 놓고는 여기서 나 아닌다른 여자와 교접을 하다니! 당신, 여자들을 다 죽이고 싶은 거얏!" 말을 할 사이가 없었다. 이에르네의 그 폭팔적인 고함으로 나는 할 말을 찾기도 전에 뒤이어서 케이링과 미하라의 살기어린 포효성이 터져나왔다. "우오오오오!" "용서 못해!" "이게 뭐야!" 그녀들이 1차 변신모드로 들어가며 이에르네를 덮쳐가자 이에르네는 이를 빠득 갈더니 홱 돌아보면서 손톱을 꺼내들었다.살기에 찬 그녀의 눈을 보고 나는 완 전히 넋을 잃어버렸는데 그 순간 이에르네의 몸이 휙 공중을 치달아 날으면서 손톱을 휘둘렀다. "이 어리석은 애송이들이 감히!" 파악 하고 손톱과 발톱이 난무하기 시작했다. 나는 턱을 괴고 그녀들의 싸움을 바라보았다. 하필이면 왜 내 집에서 싸우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다가 갑자기 왕으로서 위 엄을 세우지 않으면 끝이 없겠다고 모처럼 왕다운 결심을 했다. "이에르네!" 고함을 지르자 콰르릉 하고 동굴이 울렸다. 어린 여자들이 이성을 못차리고 공격하는 와중이었지만 변신모드이면서도 이에 르네는 알아들었다.그녀가 홱 나를 돌아보았다. 그때 여자들이 그녀를 공격해 오는 것을 능란하게 피하면서 나는 이에르네의 허 리를 잡아 채면서 공격하는 여자들을 발로 걷어찼다. 케이링과 미하라가 쓰러지자 마자 나는 엄숙하게 외쳤다. "발정기의 여자들이 싸우는 것은 금기다!" 짜랑하게 울리는 소리에 두 여자가 침묵했다.걷어채인 충격으로 그녀들이 변신 을 멈추는 동안 나는 이에르네의 허리를 잡아 채고 밖으로 급히 걸어나갔다. "멍청한 짓은 그만 둬라!" "누가 이런 짓을 하고 싶어서 하는 줄 알아요? 당신은 내가 몇번이나,몇백년이 나 기다렸다는 것을 알면서 이러는 거에요!" 이에르네의 얼굴에 노기와 슬픔이 일렁였다. "미안해.하지만 나는 이번에겨우 결심했어.아이들을 만들겠다고." "인간세상과는 이제 인연을 끊을 건가요?" "끊을 지 안끊을 지는 아직도 몰라.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나는 아이를 가지고 싶 어." "엄청난 변화군요,뭔가 계기라도 있었던 건가요? 겁장이!" 그녀가 이를 드러내며 나에게 욕했다. 나는 슬픈 기분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약간 창피한 기분도 들었다. "있긴 하지만 뭐라고 설명할 수는 없어." "알았어요!" "이에르네는 언제나 나에게 특별했으니까 새삼스레 말할 것은 없어,하지만 넌 다크시온의 아이를 가지지않았나?" "아니오." 그녀는 단호하게말했다. "나는 한다면 해요.다크시온은 대단한 남자지만 당신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니 까." "꽤나 가혹한 말을 하는군.이에르네." "그와 되려고 마음 먹었다면 벌써 몇백년전에 그의 아이를 가졌을 거에요.나는 당신의 아이 아니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어째서?" "멍청이 같으니.당신을 사랑하니까." "넌 네 어머니가 나때문에 마음 고생한 것을 알면서도 그러는 거냐?" "물론,하지만 당신은 내 어머니에게 아이를 주지 않았었죠.어머닌 그걸 고통스 러워 했고,하지만 일생 당신을 사랑했어요.당신은 냉혹한 남자니까 제멋대로이 지만." 그녀는 태연하게 말했다. "그러나 내가 당신을 사랑하기 시작한 것은 다크시온이 당신의 시중인으로 결정 된 그 날 부터에요.난 그날 부터 당신의 아이를 낳고야 말겠다고 결심했어요." "그건 고집이야.이에르네." "고집이라구요? 멋대로 생각해요.뭐 어찌되었든 좋겠지요.당신의 일렌이 없는 지금 묘인족의 여자중에선 내가 가장 강해요! 나는 다크시온조차 함부로 할 수 없는 여자니까요!" 그녀는 가슴을 내밀면서 말했다. 이상하게도 나는 여자들과 있으면 여자들에게 눌려사는 것이다. 아니,나 만이 아니고모든 수컷들이 다 그럴지도.여자에게 이기고 사는 사내란 대체 어떤 사내지? "가장 강한 여자가 가장 강한 사내를 얻는 건 당연지사지요! 당신, 발정기에 여 기에 온 이상 내 것이에요!" 이에르네가 선언했고 나는 얼어붙었다. "그게 아니고 여기 저기 여자를 집적일 거라면 나에게 직접 말해요! 내가 알아 서 해결해줄 거니까!" 그 살기에 찬 눈빛을 보면서 나는 어색한 웃음을 머금었다. 해결해준다니. 그건 대체 어떤 의미냐? 빌어먹을 달이 치솟아 올라오더니 덩실 덩실 거리면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구릉 위 이에르네와 마주 서서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데 달이란 놈은 헤실 거리면서 나를 비웃듯이 푸르죽죽한 빛을 내려 보낸다. 이에르네의 붉은 머리칼은 넘실 넘실 내 눈앞에서 일렁이고 나는 불끈 불끈 거 리는 나의 수컷다움을 주체하기 힘이 든다. 이래서 발정기엔 슬픈거야. 나는 이에르네를 덮치면서 중얼거렸다. 그녀의 옷을 하나씩 벗기면서 텅 빈 수풀 속에서 나는 중얼거렸다. 아아 수컷은 불쌍해. 여자들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 처럼 이리 저리 움직이고 그녀들의 눈초리에 가슴 을 조이고 바들 바들 떨고 마는 수컷은 불쌍해. 그녀가 낮게 날 위협한다. "바보! 남이 보잖아요!" "보면 어때? 네 말대로 이 근처에서 어슬렁 거릴 숫놈은 없어." "다른 여자들이 보면..." 그러면서 사르르 얼굴을 붉히는 그녀에게 키스하면서 나는 중얼거렸다. "네가 무서워서 가까이 오기나 하겠어?" KUBERIN........ 나는 안다. 굴속에서 고뇌하는 인간의 창백한 배가 신들의 맹목에 대하여 짐승들의 무거운 울음 소리를 내는 것을... S.J. PERSE 5 "당신은 아이를 낳으면 그 애를 사랑하겠지?" 갑자기 이에르네가 물었다. 나는,아니 우리는 풀 냄새가 물씬 풍기는 구릉의 언덕위에서 벌거벗은 채 앉아 있었다. 불타는 것같은 석양이 하늘 전체를 덮고 그 아래로 아이들의 마을이 보인다. 여자들은 그 안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가엾은 사내들은 여자들에게 구애하느라 정신이 없이 매달려 그녀들의 시선을 끌어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그리고 그 안에 생명이 움직인다.아이들이 움직인 다.우리들 자신이 움직이는 것이다. 이에르네의 팔이 내 목을 감고 속삭였다. "사랑해 주겠지?" "그래." 나는 짧게 대답하고 나를 위해 몇백년만에 모여든 여자들과 마을을 바라보았다. "어린애들은 그동안 얼마나 태어났지?" "글쎄에." "내가 기억하는 것은....불행히도 휴런,내 막내가 태어난 이래로 끊겨있어." "당신이 떠난지 한 참 되었으니까.당신은 내가 어릴 때에 떠났잖아." "남자들이 아이들을 죽였나?" "왕이 없으면 ...그렇게 되지.아무래도." 나는 침묵했다. "내가 있어서 큰 일은 없었다고 봐. 덤벼드는 놈들은 내가 몇 반쯤 죽여주었으 니까." 이에르네에게 덤비는 남자는 몇 안될 것이다.그녀 자신도 강하지만 그녀 뒤에 다크시온이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을 테니까. "다크는?" "안왔어.아직,올해 올지 안올지는 몰라." 그녀가 내 등에 대고 있는 가슴으로 심장박동 소리가 들려온다. 그 소리는 자근 자근 부드럽고 섬세하게 들려서 나는 그 소리에 열중했다.그리 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쿠베린?" 사랑스런 여인. 바보스런 여자. 나는 정말로 못되먹은 남자인 것을 몇년이고 그녀는 기다렸다. 남자란 것은 아무것도 줄 수 없는 어린애. 여자에게 줄 수 있는 것이라곤 오로 지 아이 밖에 없는 한심한 어린애.싸움에 지쳐서 쓰러지면 끌어안아 주는 여자 는 이 아무것도 줄수 없는 난폭한 어린애를 어째서 끊임없이 바라봐 주는 것일 까. 나의 어머니는 이제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나의 어머니가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른다.휴런을 낳고 어머닌 어떻게 했는 지도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아이를 낳는 여자들은 대체 무엇일까. 나는 그녀의 심장소리를 들으면서 잠이 들었다. "바보..." 잠결에 그녀가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다. 아아,나는 진짜 바보인 지도.... "잘 들어라! 왕은 이번에 아이를 낳기 위해 온 것이다!" 이에르네가 외치고 있었다. 나는 약간 부끄러워져서 그녀가 소리지르는 것을 동굴가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이에르네는 팔짱을 낀 채 약 삼십여명의 여자들을 둘러 보며 말하고 있었다.그 녀들주변으로 여기 저기 남자들이 내 쪽을 바라보면서 어물쩡거리고 있다.불쌍 한 자식들, 나 때문에 가까이 오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억울하면 너희도 나에게 도전해 왕이 되어 보란 말이다! 나는 그런 소리를 중얼거리면서 마을의 여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때 문득 한 여인이 이에르네에게 뭐라고 말했다.그 순간 이에르네는 나를 휙 돌아보았고 나는 뭔가 하고 일어서서 그 쪽으로 다가갔다. 여자들은 나를 동경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었다. 나이든 여자,아직 어린 여자,무르익은 여자등 여럿의 여자들이 모여있었고 그 나름대로 눈이 돌아갈 만큼 아름다왔다.나는 여자들의 농염한 냄새를 즐기면서 이에르네의 옆으로 다가가 내 앞에 가볍게 고개를 숙인 여자를 바라보았다. "뭐냐?" "왕의 시중인 문제입니다." 아아..그런가 하고 내가 고개를 끄덕일 무렵 한 명의 소년이 내 앞으로 걸어나 왔다. 소년은 아직 어렸다.아직 성인의 반열에 오를 수는 없는 나이,섬세하고 호리호 리한 허리가 눈에 띄였고 여기 저기 약간의 흉터가 보였다.붉은 빛을 띈 금발을 한 꼬마는 내 앞으로 다가서자 마자 덜덜 떨리는 다리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 아렸다. "이름은?" 내가 묻자 소년이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앗시아입니다." "앗시아...너의 아들인가?" 내가 고개를 숙인 여자에게 묻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그럼 여기 있는 아이들은 모두 몇이나 되지?" 내가 돌아보자 여자들은 망설이며 웅성거렸다. 공포가 그들 사이로 퍼져나가는 것을 나는 침묵을 지키면서 바라보았다. 이에르네가 재빨리 말했다. "나와도 좋아! 왕은 아이들을 해치지 않으신다!" 그들이 각자 만든 조촐한 집안에서 꾸물거리면서 아이들이 기어나왔다. 나의 일족의 아이들, 어느 일족보다도 엄하고 사나운환경에서 자라는 나의 아 이들은 주섬 거리고 기어 나와 내 앞으로 몰려서 섰다. 겨우 기기 시작한 아이도 있고 늠름한 척 가슴을 펴고 있는 아이도 있었다.여자 아이 남자아이 할 것 없이 모두 겁에 질려서 그 어미가 된 여자들 뒤에 숨어 있 었다. 약 수로는 열두엇 정도 였다.그 어린 애들을 바라보면서 나는 침묵했다. "열 세명인가?" 내가 묻자 여자들이 웅성거렸고 그 뒤를 이어서 이에르네가 대답했다. "그렇습니다.왕." "들어라!" 나는 외쳤다. 쩌렁하게 내 목소리가 사방으로 울려퍼져나가 이쪽으로 몰려드는 수컷들을 향해 달려간다.나는 가슴 속 깊은 곳에서 터져나오는 기분으로 외쳤다. "여기 열 세명의 아이가 있다! 이 열 세명의 아이들 중 누구 하나가 죽임을 당 하게 된다면 그 심장을 짖이길 것이다! 지금 이 자리는 왕의 보호하에 있다! 어 느 누구도 감히 내 아이를 건드릴 수 없다!" 바삭 바삭 말라 비틀어진 풀잎조각들이 날아올라가 허공으로 맴돌다가 어디론가 사라져버린다. 나는 그렇게 외치고 내 영토를 선언했다. "불만이 있다면 도전을 치러라! 여기는 나의 땅,여기 있는 여자들은 나의 여자! 여기 있는 아이들은 나의 아이들이다!" 아이들은 덜덜 떨면서 어미의 품안으로 파고 들었다. 여자들은 안도의 한 숨을 내쉬면서 아이들을 끌어안는다. 나는 사방을 쏘아보았다. 시야에 들어오지는 않지만 사방에 적어도 십수명의 사내들이 있었다.그들은 이 를 갈면서,혹은 겁에 질려서 혹은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나는 힘을 개방하여 그들에게 내 힘을 과시하고 내 위력을 보여주어야 했다.고 개를 들고 천천히 힘을 개방하자 여자들이 천천히 내 주변에서 물러서서 원을 그리고 섰다. 힘을 느끼는 자들,살의를 느끼는 자들이 점차 물러서는 것을 느끼면서 나는 눈 을 감았다.몸안 깊숙한 곳에서 새어나오는 원초적인 그 어떤 것이 내 몸안을 휘 감아 돌아서 내 나이와 내 생명과 내가 죽인 자들의 명예를 가지고 퍼져나갔다. 나는 이 자리에 서서 내가 왕인 것을,그리고 무수한 자들을 죽인 학살자임을 그 들에게 명심시키고 선언했다. 그리고 이 곳 자수정 동굴의 마을은 다시끔 왕의 마을이 된 것이었다.그리고 이 사방 어느 곳에서도 수컷은 등을 붙이고 잘 수 없으며 함부로 여자를 건드릴 수 도 없을 것이다. 자수정 동굴로 돌아오자 앗시아가 쟁반에 음식을 담아 가지고 왔다. 나는 녀석이 무릎꿇고 내미는 음식을 받아 들고 먹으면서 식욕이 가시는 것을 느꼈다.슬픔이 치밀어 오르는 것은 왠일일까. 내가 인간세상에서 살면서 잊었던 모든 것들이 다 밀려오는 것을 이곳에선 언제 까지 감당해야 하는 것일까. 정말 어처구니 없는 인간들을 바라보며 안좋은 일들은 모두 잊어버렸었는데.. 기척과 함께 이에르네가 들어섰다. 그녀는 뒤에 두 여자를 데리고 오고 있었다. 그녀들은 아직 어린, 이제 겨우 성년이 된 듯한 소녀들이었다.로오나와 비슷한 나이로 보인다.아름다운 보랏빛 눈을 반짝이고 있는 이 두 소녀는내 앞에 다다 르자 마자 재빨리 무릎을 살짝 굽혀 미태를 보였다. "뭐야?" 이에르네를 보자 이에르네는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말 그대로에요. 쿠베린.내게 맡기라고 했죠?" "무슨 소린데?" 내가 황당해서 바라보자 그녀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이 두 아이는 아직 한번도 아이를 낳지 않았어요.그러니까 당연 딸린 자식도 없지요.이 애들에게 당신 애를 낳게 해요." "이에르네!" 내가 입을 벌리자 그녀가 피식 웃었다. "싫어요? 내가 말한대로 해요,쿠베린. 아이를 가진 여자들이나 어린 애를 가진 여자들을 건드릴 생각은 어차피 당신도 없잖아요.안그래요?" "그건 그렇지만..." 원래 내가 꼬셔야 되는 것 아닌가 하고 나는 버벅거렸다. 이에르네는 내가 감상에 빠질 겨를을 주지 않는 가혹한 여자다.아무리 자기가 여자들의 우두머리라지만 남자인 나에게 여자들을 꼬실 여가도 안주고 이런 식 으로 갖다 안긴다는 것은 너무 하지않은가? "마음에 안들어요?" "아니,안 들리는 없지만서도..." 내가 힐긋 그녀들을 보자 자매인듯한 소녀들은 꺄아 하면서 얼굴을 붉혔다. "이 애들은 유티아와 쇼나라고 해요.같은 배에서 난 자매들에요. 이쁘죠?" "아아..." 물론 안 예쁜 것은 아니다.하지만 내 기억이 틀리지않다면 밖에서 떠들어 대고 있는 것은 물론 로오나와 미하라와 케이링이라고 생각된다. 그녀들의 으르렁거림과 사나운 고함소리가 여기저기서 쩌렁 쩌렁 울려댄다. "당신이 여기를 왕의 거처로 선포한 이상 여자들은 이번 발정기에는 당신 애이 외의 애는 낳지 못하잖아요? 그러니까 많은 수의 애를 낳으면 좋지요.물론 나의 애처럼 강한 애는 낳을 수 없지만 말이지요." 이에르네는 냉철하게 말했다. "이에르네,하지만.." "당신은 애를 낳고 싶어서 온 거지요? 그럼 애를 낳아요." 그녀는 똑바로 날 바라보았다. "하지만 나는 당신의 연인이에요.'아내'에요.인정하겠어요?" "....." 멍청해져서 내가 그녀를 보자 이에르네는 깊은 슬픔을 담은 얼굴로 날 주시했 다. 아내라니... "나의 아이는 당신에게 특별하겠지요? 당신의 아이들은 당신이 고민한 만큼 사 랑받겠지요." 그녀는 눈물어린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애들과 달리 그 '아버지'에게 애들은 보호받을 수 있을 거에요." "나는 이런 것 정말 용납할 수 없어!" 케이링이 외쳤다. "나는 왕의 여자라구! 내가 먼저야! 왕은 나를 안았어! 그러니까 내게 우선권이 있단 말이야! 나는 강해! 아름답다구!" "시끄러워! 너 보다는 내가 몇배는 나아!" 미하라가 마주 외치는 사이에 팔짱을 낀 이에르네가 외쳤다. "시끄러워! 어린 것들! 어린 것들이 뭐가 먼저냐고 소리를 질러대는 거야! 먼저 왕과 잔게 문제가 아니고 누가 여자중에 최고 이냐가 관건이 아니냐!" "내가 강하니까 왕은 날 택한 거라구! 만약 아무 여자나 왕에게 안긴다면 내 체 면은 뭐가 되는 거얏!" 케이링은 으르렁거리면서 이에르네에게 대들었다. "저기요...싸움은 안되는 것 아닌가요?" 로오나가 끼어든다. 귀엽기도 하지,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구나,로오나. 그녀는 작은 체구를 살짝 틀면서 이에르네의 옆에 답삭 붙으며 말했다.금발머리 가 귀엽게 땋아 내려서 고혹적인 데가 있다.아아,나는 역시 사근 사근한 여자가 좋아. "원래..왕께서 금지하신 바가 있구..또,원래가 안되는 거고.." "시끄럿!" 옆에서 미하라가 소리를 내질렀다. "너 따위 애송이가 감히 끼어들 자리가 아냐! 감히 내가 누군줄 알고 그러는 거 냐! 발정기가 아니었다면 네 까짓 계집애는 감히 내 앞에서 얼굴을 들지도 못했 어!" 그 말이 끝나자 마자 케이링이 소리를 질렀다. "맞아! 발정기가 아니었다면 저런 애송이 계집애따위랑 왕을 공유할 일이란 없 었을 거야! 당장에 결투다!" "결투하면 네가 이길 것 같으냐!" 이를 박박 갈면서 미하라가 그녀를 쏘아 볼 때 이에르네가 그녀들을 비웃었다. "시끄럽게 떠들지마.아이를 많이 낳는 게 가장 우선이다.요즘은 왕의 부재탓으 로 오랫동안 아이들이 제대로 태어나질 못했었어." 찔린다.... 이에르네는 숨을 몰아 들이키면서 내 쪽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 서린 기묘한 슬픔에 나는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그래,그래,내가 없 어서아이들이 제대로 태어나지 못했다는 것은 인정한다구. 내 애를 안낳더라도 내가 여자들과 같이 있으면 다른 놈들이 아이들을 죽이려고 하지는 못하지.그건 인정할 수 밖에. 나는 동굴 입구에 반쯤 기대어서 서서 그녀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 뒤로 두 자매,유티아와 쇼나가 단정히 무릎을 꿇고 날 올려다 보고 있었다. 그녀들은 기대감에 찬 눈으로 날 바라보면서 날 울렁거리게 하고 있었다. 참 이상도 하지,내가 직접 꼬시질 않으니 어째 영 기분이 내키질 않네. 나는 유티아의 턱을 잡아 올려 가볍게 키스해 주었다.소녀의 몸이 내게 감겨온 다.쇼나가 덜덜 떨면서 날 바라보고 있는 것을 그녀의 팔을 잡아 침상으로 이끌 었다.어차피 나는 옷을 다 벗고 있었고 그녀들은 걸친 것이라곤 단순한 튜닉뿐, 손끝을 대자 마자 그 튜닉조각들은 스르르 발밑으로 흘러내렸다. 나는 그녀들의 어깨를 안고 품안에 끌어안았다. KUBERIN........ 나는 안다. 굴속에서 고뇌하는 인간의 창백한 배가 신들의 맹목에 대하여 짐승들의 무거운 울음 소리를 내는 것을... S.J. PERSE 6 아이를 낳는데 걸리는 시간은 약 6개월에서 9개월이다. 나는 배가 약간 부른 여자들과 배가 조금 더 부른 여자들,그리고 배가 많이 부 른 여자들과 더불어서냇가에 뒹굴 거리고 있었다.앗시아는 좋은 포도주를 반짝 이는 금식기에 담아 내오고 있었다.금식기는 반짝 반짝해서 내가 좋아하는 것이 다.가장 배가 많이 부른 케이링이 노래를 부르면서 기분 좋은 얼굴을 하고 있었 고 길게 누운 내 머리칼을 천천히 이에르네가 쓰다듬고 있었다.다리를 주무르고 있는 것은 로오나, 나에게 줄 과일을 깎고 있는 것은 유티아와 쇼나였고 미하라 는 냇가에서 발을 담그고 찰랑이고 있었다. 햇빛은 기분좋을 만큼만 따스하다.쨍쨍한 그 날카로운 이빨을 집어 치우고 모처 럼 기분좋은 초가을의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모든 것을 잊고 이런 식으로 노닥 거리는 것은 행복한 일이었다. 흰 구름이 창공의 여신의 발치에서 이리 저리 굴러다닌다. 발정기가 지나가는 냄새,여름이 지나가는 냄새, 내 생애에서 나름대로 치열했던 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푸른 얼굴의 꼬맹이가 죽고 덥수룩이가 죽고 에메스가 울고,갑작스레 백여년만에 두 미치광이 마법사가 튀어 나오고 사인족이 튀고 조 인족이 날아다녔던 것이 모두 거짓말 처럼 조용했다. "아아아앙..." "안돼! 그리로 가면!" 갑작스런 소리에 눈을 돌려서 옆을 바라보았다. 내가 누운 바로 옆으로 왠 꼬맹이 하나가 뛰어 가다 말고 멈추어 섰다. 나와 시선이 마주친 꼬맹이가 얼어붙었다. 이제 겨우 달리는 듯한 꼬맹이는 나와 시선이 부딪치자 덜덜덜 떨기 시작하더니 오줌을 지리고 울기 시작했다. "어허,,어허엉.." 나는 턱을 고이고 그 놈을 멀건히 바라보았고 그 애의 어미인 듯한 여자가 다가 와 내 앞에서 급히 고개를 떨구었다. "죄송합니다.왕.휴식을 방해했습니다." 나는 나른한 기분이 되어서 손을 내밀었다. 여자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슬금 슬금 도망가려는 꼬마에게 낮게 명령했다. "이리와." 꼬마는 아직 내 팔뚝 만하다.그렇게 작은 몸에 모든 것이 달려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로 작았다.검은 머리,푸른 눈을 한 꼬맹이는 주저 주저하면서 다가왔다.오 줌을 지린 주제에 발걸음은 제법 당당했다. "용서해 주세요! 왕이여!" 여자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는 동안 나는 손을 뻗어 꼬맹이의 머리를 만 졌다.작고 따스했다.눈물로 엉망이 된 지저분한 얼굴을 빤히 보고 그 코와 눈과 귀를 살금 만져보았다. "몇살이냐?" "....열살입니다." "아직도 멀었군." 나는 꼬맹이의 땀투성이 머리칼을 잡아 당겨 들여다 보았다. 냄새는 여자의 젖냄새가 난다.살내음은 부드러워 깨물면 향기로운 즙이 스며나 올 것 같다.아이들에게 새삼 기묘한 감정이 나도 모르게 스며들어 이렇게 괴이 쩍은 작은 게 내 여자들 몸에서 튀어 나오는가 싶어서 궁금해졌다. 달달 떨고 있는 꼬마에게 유티아가 썰어놓은 과일조각을 건네주었다. 더러운 손으로 받은 꼬맹이는 왠지 심술난 것 같은 얼굴로 내 옆에서 주춤 주춤 물러섰다. "야." "에에?" 급히 꼬맹이가 주춤거렸다. "받았으면 인사를 해야지,인사를!" 내가 다그치자 녀석은 다시 눈물을 머금고 에에 하고 중얼거렸다. "감사합니다...에엥,.." 눈물이 뚝둑 떨어진다. "뭐야.이거 계집애야?" 내가 투덜거리기가 무섭게, "왕! 그건 지금 여자를 우습게 아는 말이에요! 대체 어디서 그런 소릴 배우신 거죠! 묘인족의 여자중에 질질 짜는 여잔 없다구요!" 옆에서 미하라가 소리를 빽 질렀다. "알았어,알았어,이건 인간에게나 통용되는 말이니까. 그건 그렇고 이 놈 사내 야? 계집애야?" 내가 우는 어린 꼬맹이의 튜닉자락을 헤치자 제법 사내다운 물건이 보인다.작긴 해도 이건 분명히 사내다. "헤에,이렇게 작은 놈인데 사내는 사내네." 내가 웃자 옆에서 이에르네가 책했다. "어린애를 울리지 마세요.무서워 하잖아요?" "아아아아아.알았어.알았어." 내가 손을 휘휘 젓자 꼬맹이는 뒤로 주춤 주춤 물러서더니 제 어미의 품안으로 팍 끌어안겼다.그러자 안도의 한 숨을 내 쉰 여자가 내 앞에 고개를 푹 숙여 보 인다. "이봐,여자." "네." 흠칫 여자가 날 바라보았다. "발정기에 다른 남자를 맞이했나?" "아니요.아직 애가 어립니다만.." 겁에 질린 얼굴을 한 여자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알았어,알았어.난 겁에 질린 여자는 질색이다.가 봐라." 그녀는 안도의 숨을 역력히 숨기고 뒤로 물러나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잘했어요." 이에르네가 중얼거렸다. "뭘 잘해?" "아이를...죽이려는 줄 알았어요." 이에르네가 낮게 중얼거렸다.그녀의 얼굴에 약간 그늘이 떠올랐다. "왜 죽여?" "저애..나이라면..우리 애가 자라서 저 애보다 약할 때 저 애에게 죽임을 당할 수도 있겠지요." 가슴이 다시 끔찍해진다. "시끄러,이에르네." "알아요,알아.멍청한 소리라는 것은." 그녀는 그렇게 한 숨을 내 쉬었다. "강한 여자와 강한 남자가 만나면 강한 아이가 나와요." 케이링이 담담하게 말했다. "언젠가 우리 아이들이 서로싸우게 되겠지요.우리 애들 사이에서 왕이 나올지 도 몰라요." 그녀는 빙긋 웃었다. "하지만,그건 아직 먼 미래의 일이고 또 그건 아이들의 선택이잖아요.지금에 와 서 미리 미리 떠들어 대봤자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모처럼 근사한 말이네." 미하라가 케이링을 보며 비꼬았다. "시끄러! 허여멀건한 계집같으니라구!" "뭐야? 이 시커먼 계집애가!" 나는 웃었다. 먼 먼 미래의 일. 아이들의 선택. 우리들의 미래,아이들의 미래. 생명은 살기위해 태어나는 것이니까 그건 그대로 좋았다. 죽기위해 태어나는 생명은 아무데도없다.그러니까 나는 이대로 여자안에서 즐 기면 된다.수컷이 할 줄 아는 일을 하면서 이렇게 뭉개면 되는 것이다. 나는 다시 유티나의 무릎에 고개를 파묻으면서 그녀의 허벅지를 어루만졌다.유 티나의 얼굴이 발그레 해졌다.매끄러운 촉감,그녀가 간지러운듯 킥킥 웃었다.옆 에서 쇼나가 내 옆구리를 쿡 찌르곤 제 풀에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나는 여자가 좋은 거지." 쿠쿠 웃음이 터져나온다. "꺄아아악" "무슨 일이얏!" 나는 벌떡 일어서서 돌아보았다. 이에르네가 부푼 배를 끌어안고 튀어 나왔다. "케이링이 아이를 낳나 봐요!" "에엑!" 내가 눈을 부릅뜰 무렵 이미 케이링은 비명을 올리고 있었다. "아악,아악!" "당신 나가있어요!" 이에르네가 소리를 질렀고 뒤를 이어서 어떻게 알았는지 애 가진 여자들이 허겁 허겁 달려들어온다.그리고 순식간에 나의 조용하고도 아름다운 자수정동굴은 고 함을 질러대는 여자들로 가득차고 나는 쫓겨났다.내가 멍한 상태로 내 굴의 입 구를 바라보고 있는 동안에도 여기 저기서 비명소리와 시끄러운 고함소리가 터 져나왔다. "아파! 아파!" 케이링의 소리가 천정을 쩌렁 쩌렁 울린다. 나는 안절 부절 하지 못하면서 동굴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어쩌지? 어떻게 하면 되지? 애가 태어난다.애가 태어난다.그리고 그녀는 지금 애를 낳느라 정신이 없다.애 는 어떻게 태어나는 지 분명히 알고 있다.그렇지만 그렇게 아프다면.. 눈이 깜깜해졌다. 대지의 여신이여, 창공의 여신이여, 풍만한 자연의 여신이여, 이리로 와서 내 여자를 도와 주세요.내가 아무리 바람둥이에 못되먹은 숫놈인 것은 사실이지만 당신들에게 내가 불손했던 것은 물론 인정합니다.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 내가 부를 게 당신들 말고 또 누구겠어요? 저 여자가 아픈 것을 설마하니 내가 대신 아플 수는 없잖습니까? 쌈박질을 아무리 한 강인한 여자라도 저거는 무지 하게 아프다는데 어쩌나? "으아아아악" 저 비명은 소름이 쫘악 쫘악 끼쳐. 아버지,날 낳을때 어떠셨나요? 어머니,날 낳을때 어떠셨나요? 아악,아악,나도 아무 것도 기억이 나지않아.내가 나올때 어땠지? 아니지,아니지, 당연한 일이잖아.날 낳을 때의 기억을 내가 어떻게 가지고 있 어? 아픈 쪽은 내가 아니고 내 어머니였을 건데,가만 있자,휴런을 낳을때 어머 닌 어땠었지? 아아,기억나지 않아. 난 그때 진흙장난을 하고 있었단 말이야! 그 러니까 내가 알게 뭐냐구! 내가 진흙장난을 하는 동안 나에게 시비를 건 놈들을 죄다 두들겨 패주고 집에 돌아와 보니 이미 내 어머닌 휴런녀석을 품안에 안고 있었다구. 난 아이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줄 알았었지,아니, 어머니가 젖가슴 에서 나온다고 나에게 말했었어.생각해 보니 나도 순진했었군.아니,지금 그걸 생각할 때가 아니야. 애가 뒤집혔으면 어쩌지? 애가 이상하게 다리가 세개쯤 달 려있으면 어떻게 되는 거냐? 아아,어머니 나를 용서해 주세요! 저렇게 아팠나? 저렇게 끔찍하게 아팠던 건가? "으으아아아악." 내가 머리를 바위에 치박고 있을 때 갑자기 우아아아아앙 하는 어린애 울음소리 가 터져나왔다.안도의 한숨이 터져나와 내 심장까지 입밖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나는 급히 뛰어서 동굴안으로 들어갔다. "태어났어? 태어난 거지? 그지?" 내가 막 들어가려고 하자 여자들이 살벌한 표정으로 나에게 손을 휘저으면서 손 톱을 꺼내어 보인다. "나가 있어요!" "내 애인데!" "시끄러워요!" 나는 손톱을 꺼내든 여자들의 군단에 쫓기어 한탄을 거듭하면서 뒤로 물러섰다. 왜 애를 안보여주는 거지? 설마하니 애가 손이 네댓개라도 달린 건 아닐까? 아 니면 머리가 두개 달린거야? 그래서 안보여 주는 거야? 아아 돌겠군! 나는 이를 박박 갈고 바위에 머리를 치박으면서 동굴 앞 바위위에 쭈그리고 앉 았다.그리고 그 순간 갑자기 비명이 또 터져나왔다. "아아아악." 이건 또 뭐야! 내가 놀라 달려가려는 순간 이에르네가 소릴 내 질렀다. "나가 있으라구 했죠!" "지금은 대체 뭐야! 무슨 소리야? 왜 비명이 터져나오는 거야!" 내가 다급하게 묻자 이에르네가 눈을 흘겼다.그녀의 뺨에 핏방울이 몇개 매달려 있었다. "지금은 로오나에요!" "아앗!" 나는 뒤로 휘청했다. 하룻밤 사이에 두 여자가 해산한다는 건가! 정신이 없다. 아아,겨우 안정했는데, 다시 시작인가? "끼아아아아아악.." 이번엔 케이링보다 더 심하다. 로오나는 죽을 듯이 비명을 올리고 있었다.그렇구나,그녀는 초산이란 말이다.그 녀가 제정신일 리가 없다. 나는 방방 뛰면서 다시 바위에 머리를 치박기 시작했다. 어린 데다가 초산이다.그럼 이건 실패의 확률이 매우 커지지않나 하고 나는 머 리를 미친듯이 굴리기 시작했다. 왜 내가 애를 낳겠다고 결심한 거지? 난 미친 놈이야! 그저 이쁜 여자나 끌어안고 히히덕 거리며 살았어야 했어! 왜 내가 아이를 낳겠다고 결심해서 이런 고통을! 아아아아...신이여! 차라리 팔 다리가 하나 쯤 끊어지는 게 낫겠다! "아아악,아악..아악.." 이젠 비명소리가 규칙적이다. 나는 머리를 쥐어 뜯다가 말고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빌어먹을 달이 날 빤히 쳐다보며 조롱하고 있었다. 달 빛아래서 나는 주먹을 쳐들고 달을 향해서 욕설을 퍼부었다. 지금 네가 거기서 요요히 달빛을 뿌릴 때냐? 너 지금 넌 안낳는다고 자랑하는 거지? 너 지금 날 놀리냐? 내가 지금 얼마나 초조한데 거기서 잘난 척이냐? 이 리 못내려와? 거의 발광상태로 내가 주먹을 불끈 쥐고 있는 동안 멀리서 여자들이 내가 하는 짓거리를 빤히 바라보며 웃고 있다.그러나 그 여자들이 웃고 있는 것을 내가 신 경쓸 때가 아니었다.나는 화가 났고 불안하고 억울하고 후회되고 겁이 난다. "아악,아아아아아..아파.차라리 죽을래!" 로오나가 비명을 올린다. 아아,날 죽여라,날 차라리 죽여라! 난 더이상 참지 못하고 몸을 둥 띄워서 아래로 내달리기 시작했다.그러나 내가 막 내달리기 시작한 순간 뒤에서 누가 소리를 질러 멈추게 했다. "어딜 가요!" 그렇게 외친 사람이다름 아닌 케이링이었기에 나는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보았 다.그녀는 땀에 지친 얼굴로 무언가 보퉁이를 안고 나와 있었다. 아파서 죽겠다더니 걸어서 나오다니,과연 그녀는 인간 여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땀을 스윽 닦으면서 날 향해 물었다. "뭘 그렇게 주춤 주춤 거리고 있어요? 쿠베린?" "아아..그거..그거 애야?" 내가 그 보퉁이에 시선을 두면서 주춤 주춤 뭐 마려운 놈처럼 다가서자 그녀가 배를 잡고 웃었다. "물론이죠.이 애는 아들이에요.당신의 첫아들,내가 낳았어요." 그녀의 얼굴은 자랑스러움으로 가득했다. "아아..." 나는 비질 비질 땀을 흘리면서 그녀가 내 보이는 보퉁이를 들여다 보았다. 보퉁이안에는 쭈글 쭈글한 괴이쩍은 물건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게 뭐야? 시커먼데." 머리칼이 까만 것이 날 닮았는 모양이었다.그 꼬물거리는 것은 주굴 주굴 한 주 제에 코도 있고 눈도 있고 귀도 있었다.내가 손가락을 들어서 그 입에 대보니 자식의 입안에 이빨도 있다. "헤에.." 나는 감동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이쁘죠? 그죠?" 솔직히 까놓고 이야기해서 결코 이쁘다고는 할 수 없다. 쭈글 쭈글한 이 정체 불명의 물건을 놓고 어떻게 나의 미의식으로 이쁘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예의상 애를 낳느라 애쓴 그녀에게 그런 충격적인 말을 할 수는 없어서 그저 부드럽게 미소만 지어 보였다. "수고했어,아팠어?" "무척이나." 그녀가 나른한 표정으로 나에게 말했고 나는 그녀의 몸을 꽉 끌어안아주었다.그 리고 이 정체 불명의 나의 첫 아들을 향해 중얼거렸다. "이름을 까망이라고 지을까봐....." KUBERIN........ 나는 안다. 굴속에서 고뇌하는 인간의 창백한 배가 신들의 맹목에 대하여 짐승들의 무거운 울음 소리를 내는 것을... S.J. PERSE 7 첫째 까망이가 태어난 뒤에 로오나가 쌍둥이 여자애들을 낳았다.둘 다 금발머리 에 이쁘기 그지없는 얼굴로 태어나 아장 아장 걸어다녔다.그들이 태어난지열흘 쯤 지나자 이번에는 미하라와 이에르네가 낳았다.둘 다 아들을 낳았는데 미하라 의 아이는 백금발의 화려한 미모를 가지고 태어났으며 이에르네의 아이는 새까 만 머리에 이에르네를 닮은 이목구비를 하고 있었다.그리고 나자 곧이어 유티아 가 여자 애를,그리고 또 곧 뒤이어서 쇼나가 아들을 낳았다. 순식간에 딸 4남 3녀로 아이들이 바글 바글 들끓기 시작했다. 정신이 없다. 애들이 울고 떠들고 까르르 거린다. 본디 묘인족의 애들은 태어나자 마자 뛰고 달리는 것은 보통이지만 일단은 이 애들이 울부짖을 때가 가장 큰 일이다. 애들은 별로 두려움이 없었다. 내가 뒹굴 거리고 있으면 미하라의 아이가 대뚱 대뚱 걸어오더니 내 배위로 풀 쩍 기어 올라오더니 채 자라지도 않은 손톱으로 벅벅 문질러댄다.내가 배에 힘 을 주면 녀석은 내 발을 쿡쿡 짓누르면서 까르르르 웃음을 터뜨렸다.뒤이어서 내 머리칼을 쥐고 유티아의 딸이 죽죽 빤다.그다음에는 다리에 매달린 쇼나의 아들과 케이링의 아들이 발가락을 가지고 노느라 정신이 없다. 바글 바글 하는 애들 사이에서 하루 반나절만 있어보면 아이를 가지고 싶은 기 분이 싹 가신다. 가엾은나의 시중인 앗시아는 나를 시중 드는 것인지 내 애를 시중드는 것인지 헷갈려했다.녀석은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아이들를 단도리하는 여자들의 명령 을 들어야 했다. "이름을 지어야지요!" 케이링이 나에게 슬쩍 물었다. "내가 지을까요?" "뭐,맘대로 해." 내가 뒹굴거리며 말하자 케이링이 까망이를 안은 채 자랑스레 말했다. "당신이 지어 주세요,왕. 멋진 이름으로." "까망이." 내 말에 케이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건 뭔 소리에요! 지금 애 이름을 짓는 거에요!인간이름따윌 짓는 게 아니라 구요!" "하지만 까맣잖아? 까망이가 어때서 그래?" "시끄러워요! 내가 짓겠어요! 당신은 그럼 저 미하라의 아이는 흰둥이라고 지을 것인가요!" 케이링이 분개하자 미하라가 자신의 아이를 안은 채 날 쏘아본다. "정말 그래요? 쿠베린?" "아아...그렇군,흰둥이...나쁘지 않은데?" 내가 웃자 이에르네가 소리를 빽 질렀다. "무슨 소리여요! 애 이름 짓는데 장난해요?" "그럼 너희들이 지어." 나는 한 숨을 내 쉬었다. "나 흰둥이는 왕이 될 것을 선포하노라,나 흰둥이가 너를 이겼으니,나 흰둥이는 당신에게 도전합니다...운운을 할 것을 생각해 봐욧!" 미하라가 소리를 빽 지르더니 나를 쏘아 보았다. 그건 그렇군. 까망이는 당신에게 도전을 청합니다 운운하는 소리를 하는 순간 아마 상대는 뒤 집어 질 것이다.흰둥이나 노랑이나 얼룩이나 귀염둥이라고 이름을 지으면 틀림 없이 웃기는 기분이 될 것이라 생각된다. 나는 머릿속에선 이미 유티아의 딸은 이쁜이,쇼나의 아들은 포동이,미하라의 아 이는 하양이,로오나의 딸들은 노랑이와 귀염둥이,케이링의 아이는 까망이,이에 르네의 아이는 털털이라고 지어 놓은 터라 별로 저항감이 없었지만 이 애들이 커서 성장했을때 털털이라고 만일 남이 부른다면 이건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 다.이름 짓는 것도 보통 일은 아니군 하고 멍청히 생각하고 있는데 미하라가 잘 난 척 가슴을 펴며 말했다. "전 애 이름을 에이리라고 지었어요!" "호오,흰둥이가 에이리?" 내가 되뇌이자 그녀는 확 나를 쏘아보았다.뒤를 이어서 질 수 없다는 듯이 로오 나가 말했다. "내 딸들은 큰 애가 플라티나,둘째가 아소미나 라고 해요." 어느 쪽이 큰 쪽이고 어느 쪽이 작은 애인지 구별이 가진 않지만 어찌되었든 그 렇다고 치자,로오나. 쌍둥이란 것은 골치아프다. "내 애는 야히르에요,왕." 포동이의 어미인 쇼나가 잘라 말했다. "알았어,포동이는 야히르." 유티아가 눈쌀을 찌푸렸다. "그런 괴이한 이름으로 우리 애들을 부르고 있었던 거에요? 저의 아이는...라비 니아라고 해요." "이쁜이는 라비니아라고." 쿡쿡 아이들이 뭔지도 모르고웃으면서 내 무릎으로 기어오더니 내 머리위로 기 어 올라가기 시작한다.내 머리가 정복해야 할 산꼭대기로 생각되는 지 녀석들은 나를 깨물고 핥고 하면서 내 어깨에서 머리로 올라가는 놈들이 둘이나 나왔다. 나는 한 녀석의 목덜미를 물어 주면서 물었다. "이 놈 이름 뭐로 할 꺼야?" 털털이의 어미인 이에르네가 눈썹을 치켜 올리면서 말했다. "당신은 애 이름을 전혀 생각지 않았군요." "털털이라고 일단은 지어 놓았지만 그 이름을 써먹을 꺼야?" "털털이가 뭐에요!" 이에르네가 소리를 지르는데 털털이는 어미의 분노에도 아랑곳하지않고 내 목에 팔을 두르더니 엉금 엉금 다시 내 목위로 기어올라가려고 버둥거렸다.나는 그 털털이를 내 어깨위에 앉히고 무릎에서 잘난 척 뛰어다니는(?) 두 딸을 잡아서 엉덩이를 깨물어주고 뺨을 깨물었다. 꺄꺄 거리면서 제 어미에게 안겨있던 나머지 애들이 와르르 달려들어서 내 팔뚝 에 매달리는데 귀찮기 짝이 없다.악마구리 같은 놈들이 와락 매달려서 깨물고 핥고 매달리고 난리 법석을 떠는 동안 어미들은 팔짱을 끼고 심사 숙고하는 표 정이 되었다. "제 아이는 케논이에요." 이에르네가 말했다. "털털이가 케논?" 이에르네가 소리를 치기 바로 전에 나는 털털이를 목에서 떼어내서 그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네가 케논이란 말이지." 케논이란 이름을 가진 털털이가 꺄꺄 웃으면서 귀여운 송곳니로 내 손목을 깨물 어댄다.바둥 바둥 거리는 녀석을 침대에 휙 던지자 꺄꺄 거리면서 다른 놈들도 와르르 내 침대에 기어올라가 법석을 떨기 시작하는 것이다.나는 그 녀석들을 등 뒤에 놔두고 머리를 굴렸다. "자아,정리하자구. 이에르네의 애가 케논,쇼나의 애가 야히르,미하라의 애가 에 이리,유티아의 애가 라비니아,로오나의 애가 플라티나와 아소미나,케이링의 애 는 뭐라고 지을 거야?" 케이링은 날 쏘아보더니 조용히 말했다. "드레인." "드레인.좋아,그렇게 하자.이제 정리가 되는 군,솔직히 말해서 플라티나와 아소 미나는 어느 쪽인지 구별이 가지 않지만...둘은 냄새도 비슷하니 알아 볼 수가 있냐?" 여자들이 까르르 웃었다. 애들도 까르르 웃는다. 동굴 입구에서 급히 앗시아가 말했다. "왕,지금 막 식사준비를 마쳤는데요!" "아아.가서 먹는다.이봐,여자들, 아이에게 젖이나 물리라구." 나는 그렇게 그녀들에게 말하고 밖으로 걸어나왔다. 앗시아가 바글거리는 애들을 보면서 쿡쿡 웃었다. 갑자기 나는 앗시아를 죽여버리고픈 충동을 느끼고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앞으로 멀지 않았다. 이삼백년 뒤에 앗시아는 특별한 일이 없다면 최강자로 떠오를 것이다.그리고 이 애는 내 아이들을 죽일 지도 모른다.지금 여기서 이렇게 웃고 있지만 앗시아는 내 아이들을 죽이고 왕이 될지도 모르고 심지어는 날 죽이고 왕이 될지도 모른 다.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가슴이 아파지고 치졸해 지는 것은 역시 애가 생겼기 때문일까. 바람이 부드럽게 머리칼을 쓸어올리고 스쳐지나간다. 바람의 여신은 나에게 무엇을 바라는 것일까,나에게 무엇을 바라고 이 부드러운 손길을 베푸는 것일까.내가 잘생겨서 그러는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갑자기 나는 마음이 가벼워 졌다. 모든 것은 미래의 여신에게 맡기고 난 먹기나 하면 된다.쓸데없는 것으로 고민 하면서 앞으로의일을 고민해 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백부가 날 어릴 때 죽 였다면 나는 이 자리에 없었을 것이고 저 애들도 이 자리에 없었다.백부도 아마 나와 같은 충동을 느꼈을 것이다.그러고 보니 백부의 아이들은 다 어디에 있을 까,나에게 도전해서 다 죽어버렸나? 식사를 하면서 나는 내 마을을 바라본다. 진짜의 평화는 없다.언제나 그 속에는 불길을 담아 놓고 허덕일 뿐,모든 것은 살얼음과도 같은 기묘한 한 풀의 막에 덮혀 불안감도 슬픔도 모두 덮어 잊어버 리고 있는 것이다.그 한 장을 들치면 안에서 소용돌이 치며 아귀아귀 덤벼드는 진흙탕같은 감정이 입을 자악 벌리고 있겠지만 때때로 살아가는데에는 그 안을 잊고 웃으면서 살아가는 게 필요한 법이다. 날씨는 좋고,배는 부르며,음식은 맛있고 아이들은 귀엽고 여자들은 아름답다. 그러면 충분하지 않은가. 나는 아이들을 지켜 줄 정도로 강하고 내 이 엉망진창의 무지막지한 일족들을 아끼고 자랑스러워 하고 있다.언젠가 내가 이들의 손에 죽을 것은 정해진 이치 이겠지만 지금은 웃고 떠들고 데굴 데굴 구른다. 나는 아직은 살아있고 하늘은 맑다. 앗시아가 가져온 음식을 다 먹어 치우고 나는 데굴 몸을 눕혔다. 까슬 까슬한 풀잎들이 내 얼굴을 간지럽힌다. 그리고 나는 눈을 감고 풀내음과 가을의 여신이 고하는 작별 인사를 듣는다. 제 12화 슬픔 KUBERIN...... 종족의 아픔에 눈을 돌린 자 그 고대의 성망을 알고 있는 자 보시오,우리들의 미래를 저물어 가는 석양은 핏빛으로 물든 것을 1 "그만 좀 해! 이 흰둥이 자식!" "내 이름은 에이리에요!" 나는 아들을 쏘아보았다. 백금발을 찰랑이는 녀석은 나를 쏘아본다.녀석의 찬란할 정도로 아름답게 빛나 오르는 보석같은 눈동자를 멍청히 보다가 나는 녀석을 와락 끌어안고 어깨를 깨 물고 콧등을 깨물었다. "앗!" "이 자식! 이쁘기도 하지! 누구 자식인데 이렇게 이쁘냐." "싫어! 아빠!" 녀석이 버둥거리는 것을 이리 저리 던지다가 옆에서 어처구니 없는 표정을 짓고 있는 이에르네에게 넘겨 주었다.이에르네는 내가 던진 에이리를 잡고는 혀를 찼 다. "하여간 바보가 따로 없어." 두 딸은 내 옆에서 앉아서 왠 꽃을 따서 목걸이를 만든다 어쩐다 바쁘다.잘 움 직이지도 않는 두 손가락을 꼬물거리는데 그렇게 작은 손은 내 생전 처음보고 그렇게 이쁜 손은 내 생전 처음 본다.플라티나와 아소미나는 내게 꽃으로 만든 목걸이,반지,팔찌,심지어는 발찌까지 만들어서 이어 붙이고는 깔깔거렸다. 냇가에서 뭔가를 잡고있던 까망이-케논과 야히르,라비니아가 뭔가를 들고 파닥 파닥 달려왔다. "아빠! 아빠!" 녀석들은 잡아 놓은 물고기를 흥미진진을 넘어서서 사악할 정도로 빛나는 눈으 로 바라보며 내게 내밀었다. "이 물고기 내가 잡았다!" "이 건 라비니아가 잡았어!" "잘했어,잘했어." 사냥을 한답시고 난리를 치는 애들을 보다가 나는 길게 누운 자세를 바꾸어 이 에르네의 허벅지를 은근히 만졌다.이에르네는 싫지도 않은 주제에 흥 하고 내 손등을 후려갈겼다. 너무해,역시 여자는 애만 낳으면 남자를 버리는 거야. "이거 먹자! 아빠!" "너희나 먹어라,그거 먹고 어디 배가 차겠냐?" 내가 말하자 옆에 있던 야히르가 내 배를 걷어 찬다. "아빤 너무해! 우리가 잡은 건데!" "우리가 잡은 거잖아!" 애들이 난리를 치길래 하는 수 없이 녀석들이 잡아 놓은 손바닥만한 물고기의 배를 갈라 먹기 시작했다.헤,고소한 맛이 있기는 하군. 녀석들은 내가 맛있다를 연발하기를 바라는 것인지 흥미진진한 얼굴로 날 바라 보고 있다.그 쏟아질 듯한 눈빛에 져서 나는 맛있다고 말해주었다. "그래,맛있다." "그지? 그지?" "그래,너희도 한 조각씩 먹어라." "와아! 와아!" 떠들어 대는 애들을 내버려두고 스리 슬쩍 일어서려는 순간 이에르네가 낮게 물 었다. "어디 가요?" 살벌한 눈초리가 스윽 살기와 함께 번져나간다. "으음.음." 나는 나도 모르게 헛기침을 했다. "당신,어떤 여자에게 가는 지 모르겠지만 나 보다 강한 여자에게 가길 바래요. 아님 그 여자 목줄기를 뜯어버릴 거니까." "그런 살벌한 말을 하면 안되지,이에르네. 아이가 듣고 있잖아?" 내가 등줄기에 땀을 느끼면서 말하자 이에르네는 눈썹을 치켜 올린 채 조용히 말했다. "발정기가 지났으니 얼마든지 싸움은 가능하지요,그렇지요? 왕?" 으음음... 눈치가 빠르기는... 어느새 발정기가 끝난 지 5개월이 흘렀다. 애들은 쑥쑥 자라고 있으니 내가 여자를 좀 안아도 뭐 나쁜 것은 없지않은가 하 고 생각하고 있는 중인데 이에르네의 눈초리는 점점 살벌해진다.발정기가 끝나 고 나면 여자들도 싸움이 가능하다.그녀들은 싸우고 죽이고 떠들어 대며 자기 소유를 남자들처럼 주장하는데 자칫 이럴 경우에 서열이 바뀌는 경우가 빈번하 게 발생한다. 현재 최고는 이에르네,그러나 그 아성에 케이링과 미하라가 맹렬하게 추격중이 다.내가 없었다면 틀림없이 이 셋이서 뒤집어 지게 싸워 서열을 세웠겠지만 애 도 낳았고 내가 와중에 있으니 싸움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만간에 케이링이나 미하라 둘 중 하나가 이에르네에게 도전을 할 것이 다. 일단 정식 도전이 되면 나도 어쩔 수가 없다.이건 여자들의 문제니까. "바람둥이 아빠!" 누가 먼저 말했는지 야히르 녀석이 그렇게 떠들었다. 쇼나가 대체 뭐라고 가르쳤길레 저 자식이 저런 소릴 지껄이는가 싶어서 나는 쇼나의 거처로 걸어갔다. 이에르네는 쇼나나 유티아에겐 관대하다.아마도 그들이 어리고 그녀에게 감히 도전할 힘이 없기 때문인 모양이다.그러나 케이링이나 미하라에겐 처절하게 눈 을 빛내고 있었다.그 때문에 나는 조금 조마 조마했다. 쇼나가 옷을 만들고 있다가 날 보고 반색했다. "어마! 쿠베린." "아아,왔다.너 야히르녀석에게 뭐라고 가르쳤길래 나만 보면 바람둥이라고 하는 거냐?" 내가 허리에 손을 턱 얹고 말하자 쇼나의 얼굴이 파래졌다. "어마,야히르가 그런 소릴?" "그래! 지금도 등 뒤에 대고 소리 소리 지르더군." "화...나셨어요?" 그녀가 손을 얼굴에 대고 망설이듯 말했다. "그래! 애비에게 그게 뭐냐?" 내가 불쾌한 듯 말하자 그녀는 안절 부절 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왕...저기..." 나는 그녀가 숙인 목덜미를 의미심장하게 침을 흘리며 바라보았다. 약간 풍만한 그녀의 몸매는 언제나 날 즐겁게 했다.고개를 숙이자 흰 목과 젖가 슴이 슬쩍 보였다.나는 그녀의 어깨를 잡으면서 낮게 분위기를 깔며 말했다. "앞으로 말 조심해." "네에.." 그녀는 그렇게 말했고 나는 그런 그녀의 몸을 답삭안아 들어서 그녀의집으로 들어갔다.내 목을 슬쩍 감겨오는 팔은 두려움과 비슷한 뭔가로 떨고 있었다. 흐.이거야 말로 이에르네에겐 없는 점이지. 자아,사락 사락 벗깁니다. 옷자락을 벗겨요 껍질을 벗겨요. 여자옷을 벗기면 마음이 즐겁고 심장은 두근 두근 헤헤헤. 막 그녀의 흰 허벅지가 딱 드러나려는 그 순간 문이 열리면서 어마 하는 소리가 터져나왔다. 고개 안돌려도 유티아인줄은 뻔했다. "어마,어마..." 그녀는 가지도 않고 어머 어머만 계속한다. 그래,그래..유티아,이리 오라구,어머 어머 하지 말고. "이리 와." 내가 낮게 분위기 깔며말하자 유티아는 으음 하고 허리를 살짝 꼬더니 망설이 면서 발개진 얼굴로 다가왔다.나는 그녀의 팔을 잡아 침대에 쇼나와 나란히 눕 히고 히죽이 웃었다. "지금 쇼나가 벌을 받는 중이었어. 그지?" "네에." 쇼나가 살짝 웃었다.유티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쇼나와 나를 번갈아 보고는 물었다. "무슨 일인데요?" "이런 일이지." "꺄앗." 셋이서 대굴 대굴 구르다가 슬그머니 낮잠을 자려던 참인데 갑자기 지나치게 예 민한 내 귀로 뭔가가 잡혔다. 그 뭔가가 곧장 나를 부르고 있었다.소리내어 부르진 않지만 그 존재 자체가 나 에게 뭔가를 느끼게 하고 있었다.한동안 잊었던 뭔가가 기억이 나면서 왠지 상 당히 귀찮아질 듯한 기분이 스물 스물 기어 올라온다. 고개를 들고 턱을 괴자 쇼나가 내 허리에 팔을 감은 채로 물었다. "왜 그러세요?" "아아...뭔가 귀찮은 게 왔군." "에? 설마! 이에르네 님이?" 벌떡 일어나려는 알몸의 쇼나를 누르고 그 젖가슴에 키스했다. "그건 아니야." 유티아가 꼬박 꼬박 졸다가 잠에서 깨어나 내 다리를 휘감았다. "뭐에요?" ".....귀찮은 일." 천천히 일어나서 나는 적당히 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햇빛은 곧 다가올 겨울을 말하는 듯이 희미한 열기를 가지고 내 몸을 핥았다. 아아 추운 건 싫어.그러고 보니 이런 추운 날씨엔 마미의 뜨거운 맥주와 스튜가 죽여주었지,그녀는 어찌 지내나? 한 번 가봐야 할 텐데. 천천히 걸어서 내 동굴로 가보니 그 자리에 여자들이 살기 등등하게 서 있는 게 보인다.여자만이 아니고 몇몇 남자들도 어느새인가 다가와 살기와 흡사한 분위 기를 풍기고 있었다.발정기가 끝나자 마자 사내들이 몇 몰려와 자연스레 마을이 형성된 것은 역시 이 나라고 하는 왕이 있기때문일 것이다.내가 있으면 모든 일 이 해결되므로 안심하고 모이는 것이겠지. "왕!" 사내들 중에 낯익은 나의 다크가 잽싸게 말을 걸었다. 녀석은 이에르네를 단념한 것인지 아니면 이에르네의 집착이 커서인지 혹은 취 향을 바꾸어 딴 여자를 꼬시고 있는 것인지 알수는 없지만 이 자리에 있었다. "너 오랜만이군." "네." 다크시온은 쓴웃음을 짓고 나에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그 옆에 있는 것은 듀나시였다.낯익은 몇몇 사내놈들이 그 자리에 있었지만 나는 관심없으니 이름따윈 기억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물론 가장 큰 압권은 다크나 듀나시가 아니고 그 자리에 나란히선 휴런 도 아닌 묘인족들에게 둘러싸인 세 남자였다. 그 세 남자는 팔짱을 끼고 서 있었는데 아무리 보아도 묘인족이라는 이 무시 무 시한 일족에게 둘러싸인 상태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태연자약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그 얼굴을 빤히 보면서 내가 물었다. "뭐냐?" "오랜만입니다.쿠베린님." 고개를 숙인 놈은 다름 아닌 엘레와 프루엘이란 조인족 전사놈들,그리고 그 옆 에서 자신있게 선 놈은 놀랍게도 색마엘프였다. KUBERIN...... 종족의 아픔에 눈을 돌린 자 그 고대의 성망을 알고 있는 자 보시오,우리들의 미래를 저물어 가는 석양은 핏빛으로 물든 것을 2 여자들은 팔짱을 낀 채 나를 둘러싸고 사나운 시선을 이 이종족에게 보내고 남 자들은 나의 앞에서 감히 왕앞에 무례한 이종족의 놈들에게 시선을 보낸다. 지금은 발정기가 끝난 시기,여자들은 단호하고 당당하며 멋진 자세와 몸매를 갖 추고 상대를 노려보고 남자들은 남자들대로 사나운 모습을 자랑하듯 가슴을 펴 고 있다.이 것이야 말로 우리들의 모습,약자는 하나도 없다는 묘인족의 자랑인 것이다..인데.. "아빠!" 달랑 분위기를 깨면서 내 다리를 타고 기어 오르는 것은 케이링의 아들네미인 까망이 드레인이었다.이 드레인 녀석은 살벌한 분위기를 가차없이 깨면서 내 다 리를 타고 기어오르더니 잠시 후 내 어깨위로 매달렸다.나는 하는 수 없이 녀석 의 엉덩이를 잡고 한 팔로 잡아 챘다.그러자 마자 뒤이어서 질 수 없다는 양 녀 석들을 헤치면서 맹렬하게 달려드는 놈이 있었다.에이리와 드레인은 이상한 곳 에서 경쟁을 한다.에이리는 맹렬하게 달려와 내 다리에 턱 하고 부딪치더니 가 차 없이 손톱을 세워 올려 내 다리를 타고 내 팔뚝으로 타고 기어올라와 기여코 내 한 팔을 봉쇄했다. 이 정도 되면 아무리 위엄과 분위기를 잡으려고 해도 되지 않는 법이다. 에이리 자식이 어울리지도 않게 아빠 아빠 하면서 목에 매달렸기때문에 나는 울 화가 치밀었지만 나도 모르게 왜 왜 하면서 녀석의 목덜미를 깨물어 주었다. "나두! 나두!" 드레인이 맹렬한 질투심을 보여주면서 내 목을 물고 늘어졌기때문에 하는 수 없 이 나는 두 놈을 어깨위로 올려놓고 다시 방문자들을 돌아보았다. 경악에 가득찬 이 방문자들은 날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다. "아.,..아이..? 아이가 어느새?" 더듬으면서 엘레가 중얼거리는 동안 나는 담담히 말해주었다. "아,내 아들들이다.그런데 뭔 볼일이냐? 감히 여기에 날아들어오다니 죽음을 각 오한 거냐?" 내가 싸늘하게 웃으면서 말해주자 그는 흠칫했다. 그러자 매끄러운 태도로 고개를 숙이며 한 걸음 나서는 녀석이 있었으니 그게 어울리지도 않게 이 색마엘프놈이었다. "묘인족의 왕이시지요? 저는 ..." "넌 뭔 볼일이냐? 색마?" 내가 뜨악하게 잘라 말하자 그의 눈이 커졌다.그리고는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 이 되더니만 안절 부절 못하는 얼굴로 설마 설마 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그렇다.바로 그게 나다." "쿠,..쿠베린님이라고 해서...아아....설마 설마 했습니다." 그는 붉어졌다 파래졌다 혹은 이런 저런 얼룩 덜룩한 색깔을 번갈아 보였다.도 무지 일반적인 엘프답지 않은 태도였다.이건 마치 변신엘프같다.이렇게 자연스 레 피부색이 변하는 엘프란 정말 드문 종자다.피부색이 변하는 것으로 말하면 역시 도마뱀밖에는 없는 것인데 말이다. "...그..야묘족의 꼬마는?" "아아.잘 있을걸,그지? 엘레?" 엘레는 눈썹을 치켜 올리더니 정중하게 말했다. "네,아마도요." "왜 아마도냐? 너에게 맡겼는데?" "저는 그 아이를 셀레네에게 맡겼습니다." "헤에,그럼 가빈이 조인족구역에 가 있는 거야?" "그렇습니다.그리고 지금 뭔가 부탁 드릴 말씀이 있어 왔습니다." "부탁 드리겠다 하면 나에게 뭔가 바쳐야지,빈 손으로 오냐?" 엘레와 프루엘의 얼굴이 뜨악해졌고 그 뒤를 이어 파래진 색마엘프가 더듬어 말 했다. "저는 엘프의 왕이신...노스엘스턴왕국의 왕 에라엘 다니에르님의 명에 따라 왔 습니다." "그래? 나에게 바치는 예물은?" 웃 하고 엘레들이 입을 벌리는 순간 색마놈이 손을 뒤적이면서 작은 꾸러미를 두 손으로 공손히 건네었다. 나는 그것을 받아서 열었다. 그러자 휘황한 광채가 좌악 퍼져나가는 것이 아닌가. 모두 우우 하고 놀라는 소리를 내지르는 순간 나는 그것이 엘프들이 수공한 에 나테리움이란 것을 알았다.에나테리움은 정확히 말해서 보석이라기 보단 용족의 눈물이라 불리우는 희귀한 물건이다.용의 눈물이라고 말하는 이 에나테리움은 용의 피,혹은 용의 심장이라고도 불리우며 가장 사악한 자의 눈이라고 불리우는 흡혈의 저주석 아나스톤과 반대되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두개째인가..." 나는 중얼거렸다. 에나테리움을 이렇게 간단히 손에 넣을 줄은 몰랐었다. 아나스톤과 더불어 거인족의 2대 보물이라 불리는 이 물건을. 색채는 소름끼칠 정도로 선명한 핏빛이었다.나는 그것을 품안에 넣고 잠시동안 색마녀석을 바라보다가 아이들을 케이링과 이에르네에게 돌려주었다. "이야기를 듣자.그 엉덩이 무거운 놈이 이런 물건을 보냈을때에는 범상치 않다 는 의미겠지?" 이 색마놈은 막 뭐라고 하려다 말고 나의 지당한 말씀에 어찌 못하다가 억지로 고개를 숙이고 말을 이었다. "네....지금 사인족이 조인족 2개 마을을 손아귀에 넣고...협상을 요구했습니 다." "뭐라?" 내가 놀라 엘레와 프루엘을 보자 그들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조인족 2개 마을이라면 그 숫자가...?" "총합 전사급 빼고 39명입니다." 엘레가 조용히 말했다. "그 중에는 셀레네들도 끼어 있습니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냉정하게 생각하려고 애를 썼다. 지금 말이 조금 이상한여운을 남기고 있었다. 사인족이 협상을 요구해? 서른 아홉이나 되는 포로를 쥐고 협상을 요구한다? 그 게 지금 말이 되는 소리인가? 내가 그를 다시 보자 프루엘이 말했다. "네,지금 사인족의 왕은 우리에게 공동전선을 펼 것을 주장했습니다." "무슨 소리야?" "인간에 대해 복수를 하자는 이야깁니다." 지금 이게 미쳤나 라고 밖에는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발치에서 대굴거리는 아이들을 나가 있으라고 해 놓고-쇼나와 유티아,로오나가 급히 아이들을 데리고 나갔다-다크시온,듀나시등이 진지한 얼굴로 모여 있었다. 그들은 지금 눈앞에 있는 조인족이 신기한 듯한 얼굴로 모여있었는데 그것은 당 연한 일이었다.그들은 조인족을 본 것은 지금이 처음이었던 탓이다. "내가 들은 것이 확실하다면 말이지...사인족의 꼬맹이가 인간과 쌈박질을 하고 있다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그럼 대체...." 갑자기 퍼득 생각이 난다. 그렇다면 지금 쌈박질을 하고 있는 사인족의 변종같이 생긴 기괴한 물건들은 사 인족이 아니고 사인족의 왕은 반대하고 있다는 의미가 아닌가? "사인족은....설마하니 두 패로 갈린거야?" "그런 것 같습니다." 진지한 얼굴로 엘레가 말했다. 내가 느끼는 이상한 안도감은 아마도 조인족의 왕도 느끼는 것일 것이다. 그 괴이한 사인족의 변종같은 것들을 보고 느낀 내 기분은 정말 한 마디로 더러 울 정도로 좋지않았었다.그것이 그들의 본의가 아니라고 한다면.. 잠깐.하지만 사인족 놈들이 싫은 것은 역시 변하지 않는다. 그 떼거리로 몰려다니는 놈들이 어쩐 일로 자신들이 형편없다는 것을 인정한 것 일까? 멍청하기로 말하면 오크와 인간들을 합성해 놓은 것 같고 게으르고 고리 타분하기로 말한다면 엘프의 엉덩이를 씹을 놈들이.협상? 이 몸을 불러서 뭔 이 야기를하겠다는 것일까? 그 때 지긋지긋하게 단정하고 이가 갈리도록 정도로 섬세한 얼굴을 가진 프루엘 이 말했다. "그래서 지금 엘프의 왕과 조인족의 왕이 모이신 겁니다.그리고 쿠베린 왕께서 도 참석해 주시길 바라는 거지요." "대 회의인가..." 나는 턱을 어루만졌다. 듀나시가 얼굴을 찌푸려 보인다.내가 그를 흘긋 보자 그도 내 시선을 받은 뒤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이야길 들었습니다.왕." "흐음." "..땅의 엘프의 왕에게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그때 분명히 우리들은 인간 용 병들과 함께 땅의 엘프를 공격하는 사인족의 왕을 발견했었지요?" "그래.그들은 분명히 순수한 사인족이었다." "지금 이야기가 정확하다면 그때까진 사인족으로선 인간들과 사이가 좋았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렇군." "그럼 대체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기때문에 사인족은 인간과 싸우자고 말하 는 거지요?" "변종 사인족을 봤었다." 내가 짧게 듀나시에게 말해주자 듀나시는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아이..입니까?" "그래,결국은." 나는 엘레와 프루엘을 바라보다 말고 색마놈을 돌아보았다. "그 엉덩이 무거운 놈은 뭘 바란다고 하는 거지?" "..왕께선 이번 일에 왕의 힘을 필요로 한다고 말하셨습니다." "필요로 한다구?" "네,사인족의 왕이 말하는 것을 ....들어줄 자격이 있는 것은 역시 묘인족과 조 인족의 왕들 뿐이라고.." 당연한 이야기이겠지 하고 납득은 하면서도 뭔가 뭔가 굉장히 머리속에 걸리는 것이 많았다.인간들과 싸우자고 지저분한 사인족의 왕이 이야기해서 진짜 몇백 년만에 고대족속들이 모인다...그건 있을 수 있다고 치자,그렇지만 대체 인간족 과 가장 사이가 좋았던(?) 사인족이 새삼스레 이런 일이 되는 것일까? 역시 마 법사들과 관련이 있는 것일까? "듀나시" "네." "같이 갈 놈 일곱만 뽑아봐라." "네!" 듀나시가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가자 마자 나는 팔짱을 끼고 두 조인족을 보았 다. 조인족은 아까부터 동굴 밖에 앉아있을 내 족속들을 생각하는지 내 등너머를 보 고 있었다.문득 엘레가 말했다. "이쁜 아이로군요." "아아..내 아이니까 당연하지." 그렇게 뻔한 이야기를 무시하고 난 색마엘프를 보았다. "이봐,색마.그런데 왜 네가 사자로 뽑힌 거냐? 엉덩이 무거운 너의 왕은 대체 뭔 생각을 하고 ...?" 나는 턱을 잡고 녀석을 빤히 보았다. 색마녀석은 벌개진 얼굴로 더듬으며 말했다. "아아,제가 다른 종족들에게 사자로 가는 일은 자주 있습니다.엘프들은 대부분 이 다른 종족과 어울리는 것을 싫어하기때문에 사자로 보내지는 일들도..즐기지 않지요." 쿼터엘프는 그렇게 말하고는 나의 시선을 슬쩍 피했다. "그렇지,엘프자식들은 모두 엉덩이가 무겁고 얼굴에는 금칠을 했으며 두 발에는 금강석을 박아서 천보도 집에서 튀어 나오는 것을 싫어하지." 쿡 하고 엘레가 웃었지만 프루엘은 난처한 미소를 지었고 의외로 이 놈의 색마 녀석은 시익 웃는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헤에,자식 꽤나 능숙하잖아. 이 자식은 외교사절로만 움직이는 놈인가? "그래,네 병은?" "아...저의 병은 확실히 결정되지않았답니다.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새로운 치 료법이 나올지도 모르니까 기다려라 하고 얼마전에 장로님에게서 이야길 들었습 니다." 그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앙앙 거리고 울고 매달리던 그 얼굴을 생각해내자 또 울리고 싶은 충동이 일어 났지만 참았다.지금은 이 녀석 데리고 놀 때가 아니다. "엘레,인간들의 싸움은 어찌되었어?" "아....델리암은..지금 극도로 밀리고 있는 중입니다." 심각한 얼굴이 되어서 엘레가 대답했다. "그래?" 가슴이 뜨금 뜨금 했다. 엘리야는 어찌되었을까? 스카는? 마미는? 사라는? 마리아는? 에메스 자식이야 옆에 변신엘프가 붙어있으니까 그렇다치고 다른 놈들은? 내 생각을 아는 지 엘레가 조용히 말했다. "지금 공작은 수도에 들어가 있습니다.왕의 궁을 지키고 있고..델리암은 그 때 문에 거의 황폐화된 것 같습니다." "엘리야는?" "엘리야는 자유도시니까요.일단은 항구도시라 전쟁을 비껴나간 것 같습니다 만.." "하긴 서쪽으로 치우쳐 있으니까 굳이 군대를 동원할 필요는 없을거야.." 그렇지만 활기에 찬 도시일 수는 없겠지.전쟁물자가 달리면 결국은 황폐된다.그 리고 잘난 척 군대가 들어오면 엘리야도 별 수 없다. 인간들의 전쟁은 언제나 싫다. 죽는 것,싸움에 지는 자존심의 고통만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그 후유증은 지겨 울 만치 오래간다.인간들이 싸움에 지지않으려고 애쓰는 것은 역시 그 때문일 것이다.허긴 싸움은 누구나가 다 싫다.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는데 문득 생각이 난다. "이봐,하지만 미치광이 마법사가 둘이나 붙어 있는데 밀리고 있단 말이냐?" "아,그것 말입니까?" 쓴 얼굴을 한 엘레가 말했다. "처음에는 눈부신 활약이 있었습니다.백마법사인 아크 님은 진실로 눈부신 활약 을 보여주셨기때문에 그 곳,소도시 에녹카든의 엘 브리거경과 있을때는 분명히 사정없이 그들을 물리쳤습니다만..." "만?" "중간에 킬트님과 둘이서 충돌을 일으켰는데다가...." "데다가?" 엘레는 조금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프루엘이 도착하자 마자 화를 내면서 돌아가버렸습니다." "...." 프루엘이 무심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아크자식 답다. 이 자식의 무수한 전설을 남기게 된 이유는 자식이 말도 없이 사라지기 때문.그 리고 별 특별한 이유도 없이 사라지기 때문인 것이다.그 허여멀건한 얼굴이 잘 생겼으면 얼마나 잘생겼으며 그 잘난 척 떠들어 대는 그 면상이 잘났으면 얼마 나 잘났단 말인가.세상에는 새털같이 많은,아니 구름처럼,아니 아리따운 여자 들만큼이나 잘생긴 면상을 한 미끈한 사내놈들도 들끓고 있는 것이다.굳이 멀리 서 찾을 거 없이 우리 묘인족중에서도 잘 생기고 미끈한 사내들은 널려있다.바 로 나만 해도 아크자식이 보자 마자 억울하다고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지않는가. "그래서...킬트는?" "아아,킬트님은 그런대로 우리들에게 붙어 계셨습니다만 중간 중간 무슨 볼일이 있으시다면서 때때로 사라져 버리셔서...그 분이 사라지고 잠시 없는 동안 대 습격을 받아서 에녹카든은 단숨에 점령당해 버렸습니다." 할 말이 없다. "그래서 결국 에녹카든이 점령당하고 나자 마자 그 잔여병력을 이끌고 공작과 엘 브리거경이 수도로 직행했습니다만, 인간의 왕은 뭔가...사이가 좋지않은듯 했습니다." "시든 오이가 뭘?" "엘 브리거경은 왕과 다툰 끝에 수도를 나가버렸고 지금 수도를 지키고 있는 것 은 몇 안되는 병력인 거 같습니다." "내가 잠시 자리 비운 사이 뭔가 파란만장했군." "그런 셈이지요." 엘레가 인정했다. "그러니까....쿠베린님이 자리를 비우신지..거의 10여개월 정도 된 것 같습니 다." "헤에...결국은 그 멍청이가 또 충신흉내를 내겠다고 수도에서 그 시든오이를 푹 끌어안고 자빠져있다는 이야기겠군." "그런 셈입니다." "그리고 그 와중에 갑자기 조인족을 습격한 사인족이 족속들을 모아 회의하자고 떠들어 댔고?" "그렇습니다." 가보면 알겠지.그러나 파란 만장한 일이 될 거 같다. 내 나이가 500살인지 600살인지 모르는 것 처럼 뭔가 복잡한 일이 터질 것 같기 도 하다. KUBERIN...... 종족의 아픔에 눈을 돌린 자 그 고대의 성망을 알고 있는 자 보시오,우리들의 미래를 저물어 가는 석양은 핏빛으로 물든 것을 3 "안된다고 말하지 그랬냐?" "말해서 들을 여자들이 아니지요." 듀나시가 무심하게 말했다. 나는 턱을 괴고 내 어깨에 달라 붙어서 귀와 목과 머리칼을 잘근 잘근 물고 있 는 드레인과 에이리를 무시하고 내 앞에서 생글 거리는 미하라와 케이링과 이에 르네를 보고 있었다. 이에르네의 아들 케논은 새까만 머리칼과 나를 똑같이 닮 은-왕년의 휴런과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이 놈이 비교적 점잖아서 자기 형 제들 앞에서 상당히 잘난 척을 하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그거야 어쨌든 지금 놀러가는 것도 아닌데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이지? "뭐하는 짓이야? 지금 놀러 나가는 게 아니잖아?" "네,하지만 우리들은 당신의 족속이면서 동시에...." 이에르네는 케논을 안아 올리며 냉정히 말했다. "애인이기도 해요." "그런데?" "틀림없이 당신,가기만 하면 돌아오지 않겠지요.여자들에게 둘러싸여서 틀림없 이 히히덕거리면서 돌아오지 않고.인간여자든 엘프여자든 혹은 조인족의 여자들 에게 둘러싸여 있을 것이 뻔한 일에요." 나는 굳었다. 나는 돌이 되었다. 여자들이란! 이 위급한 상황에 생각하는 게 그런 거란 말이냐! 내가 격분해서 뭐라 막 말하려는 그 순간 냉정하게 미하라가 덧붙였다. "그게 아니면 우리처럼 강한 전사를 달리 또 뽑아 보시지요?" "하지만 애는!" 케이링이 눈썹을 치켜 올리며,그리고 냉담하게 날 바라보며 물었다. "어머.왕께서 아이하나 지키지 못하실 분이던가요?" 나는 단념했다. 어찌되었든 우리들은 출발했다. 다크시온,듀나시,데인,바스티앙이라는 네 명의 사내녀석과 이에르네,케이링,미 하라,그리고 나,그리고 애들 에이리와 케논,드레인이었다. 이 집단을 보고 흘긋 색마녀석이 에이리가 이쁜지 손을 내밀었다. "정말 귀엽군요." 그 순간 에이리가 덥석 녀석의 손을 물었다. "왓!" 색마가 비명을 올리는 순간 손가락에서 흐르는 피를 할작거리고 마신 에이리가 갑자기 눈을 크게 뜨고 외쳤다. "맛있어!" 그러자 두 놈-드레인과 케논이 눈을 빛내면서 조그마한 송곳니를 드러내면서 색 마에게 달려들었다.색마는 새파랗게 질려서 뒤로 주춤 주춤 물러서는데 케이링 이 두 아이를 잡아 채면서 미소해보였다. "안돼,안돼.이 엘프를 먹어선 안된단다." "하지만! 맛있대!" 케논이 큰 소리로 외쳤다.눈이 동그래진 내 아들들은 색마놈을 말 그대로 먹음 직스러운 먹이보듯이 두눈을 반짝이면서 감탄과 탐욕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 다. "하지만 조인족이 더 맛있단다." 내가 말하자 마자 이번엔 뒤도 볼 것없이 케논이 곧장 날아가 프루엘의 어깨를 덥석 물었다.프루엘의 눈이 커지는 순간 짭짭하고 케논이 혀를 핥았다. "마,맛있어!" "진짜! 진짜!" 코를 킁킁 거리면서 애들이 순식간에 프루엘에게 달라붙는다.프루엘의 얼굴이 파랗게 질리는 순간 듀나시가 점잖게 말했다. "아무리 맛있어도 참을 줄 알아야지!" "하지만 맛있어! 이렇게 맛있는 것 처음이야." 케논이 눈을 부릅뜨며 항의했다. 먹을 것을 빼앗긴 분노에 치를 떠는 듯이 손을 바르르 떠는 애들의 뒷덜미를 쥐 고 나는 잡아 채어 내 어깨위에 올려놓았다. "안돼,안돼.이 둘은 내 애완동물이다." "아빠! 아빠!" 애들이 항의하는 것을 떼어 놓고는 나는 색마에게 말했다. "응,아이들은 송곳니가 자랄 때라서 이가 간지러운지 때때로 물어뜯으니까 그런 가 보다 해라." "물어뜯어요?" 파랗게 질린 그 얼굴을 보고 난 히죽 웃어보였다.옆에 있던 프루엘은 물린 어깨 를 슥슥 문지르고 있던 차였다.약간 이빨 자국이 났다.그는 약간 어처구니없다 는 듯한 시선으로 애들을 보다가 날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묘인족의 애들은 사납군요." "응,사납지 않으면 이상한 거지." 옆에서 다크시온이 쿡쿡 웃었다. "어서 노스엘스턴에 가자구." 내가 재촉하자 앞서 걷던 엘프가 말했다. "소환수를 부르겠습니다.아니면 시간이 너무 걸리니까요." "너 마법을 잘 하냐?" "아,조금 하지요,다른 엘프들 보다는 마법력이 우수한 편입니다." 그는 쓴웃음을 짓고는 두 손을 벌렸다. 소환수를 부른다는 것은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니다. 마법사로서 어느정도의 경지에 있지않으면 소환수를 부를 수 없다.그가 그렇게 소환수를 부르고 있는 동안 나는 생각 나서 엘레에게 물었다. "튜나는?" "아,노스엘스턴에 있습니다." 엘레의 표정이 조금 부드러워 진다. "튜나가 누구죠?" 재빨리 케이링이 끼어 들어 물었고 당당한 나는 가슴을 펴고 말해주었다. "저 엘레의 애인이야." "호오,그래요?" 케이링은 불신의 표정을 살짝 짓고는 엘레에게 말했다. "쿠베린에게 손을 대지 않게 해줘요." "....튜나는 내 연인입니다." 차가운 표정으로 답한 엘레를 무시하고 케이링은 호호호호호하고 웃음을 터뜨렸 다. "쿠베린님은 여자에겐 워낙 손이 빨라서 말이지요.오호호호호호...." "그만해." 나는 쓴 것을 삼키는 기분이 되어서 케이링을 쏘아봐 주었다. "저거봐!" "저거봐라!" "이야아!" 아이들이 고함을 질러대면서 들뜬 소리를 질렀다. "큰 새다!" "아냐! 저건 괴물이야!" 저희들도 따져보면 괴물인 주제에 애들은 신나게 떠들어댄다.팔짝 팔짝 뛰어서 하도 시끄러워 툭툭 떼내어 어미들에게 던져주고는 색마엘프가 불러낸 소환수 키메라를 쏘아보았다.색마 녀석은 커다란 덩치의 푸른 빛이 도는 블루 키메라를 불러냈던 것이다.그 키메라는 커다란 덩치를 어줍잖게 공중에 띄우고는 네 장의 날개를 퍼득이고 있었다.키메라 중에서 가장 덩치가 큰 블루 키메라는 비늘로 뒤덮힌 긴 목과 얼굴을 우리 쪽으로 들이대고 있었다.발과 얼굴만 빼면 녀석의 전신은 검푸른 털로 뒤덮혀 있다.가늘고 찢어진 듯한 그 눈이 우리들을 아래위 로 보다가 조금 움찔 움찔하는 것을 보자 우리들 묘인족들은 동시에 히죽 만족 의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얌전한 편인 듀나시조차 키메라를 보고 살의를 슬쩍 띄우고는 그 꿈틀 꿈틀 당황하는 것을 즐긴다.아아,우리들은 분명히 상대를 겁 주는 것을 즐기는 지도. 그건 그렇고 엘프가 키메라를 소환하는 것을 난 난생처음 보았다. 쿠리마와 더불어 키메라는 암흑의 속성을 가진 물건이다.엘프가 소환한다기엔 어울리지않았다.백색의 성수 에롤네니나 혹은 하오마같은 것이라면 모르지만 흑 마법사처럼 왠 키메라냐 싶어서 내가 지켜 보고 있는 중인데 애들은 겁도 없이 떠들어 댔다. "저거 봐! 머리가 세개!" "꼬리봐! 꼬리가 꿈틀거려!" "꺄꺄.." 복잡한 표정이 된 색마가 날 보면서 말했다. "타시지요." "우리들이 타면 발광하는 거 아냐?" "설마요." "지금 저게 꿈틀 꿈틀 반항의 기질을 보이고 있잖아?" 내가 말하자 색마는 얼굴을 찌푸리고는 말했다. "잘 제어 하겠습니다.일단 올라 주세요." "와아!" 제일 먼저 애들이 튀어 올라가 키메라의 긴 날개자락을 잡더니 그 위로 기어 올 라가기 시작했다.그리고 그 뒤를 이어서 여자들이 재미있다는 듯이 기어 올라가 고 사내들은 내가 오르기를 기다리고있다.내가 슥슥 걸어가서 키메라의 목위로 올라가자 키메라는 부르르 떨었다.다크들이 키메라의 몸위에 올라타자 엘레와 프루엘은 날개를 펴서 우리들의 뒤쪽으로 달라붙었다. 색마는 키메라의 머리위에 단정히 앉더니 우리들을 돌아보았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해라.해!" 케논이 건방지게 두 손을 치켜 올리면서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그 순간 키메라가 열받았다는 듯이 순식간에 급상승을 시작했던 것이다. 삐이이이 하고 파공성이 귓가로 울리는 그 순간 아이들이 고함을 질러댔다. "이야! 멋져!" "신난다!" "끼얏호!" 색마가 피로한 얼굴로 우리쪽을 돌아보았다.애들은 건방지게도 그 무시 무시하 게 불어대는 바람을 무시하고 공중에 떠서 날아가고 있는 키메라의 털 많은 등 위에서 이리 뛰고 저리뛰고 있었다. "떠,떨어지면 어쩌려구요!" 색마가 고함을 지르는 순간 아닌 게 아니라 에이리가 균형을 잃더니 갑자기 휘 익 공중으로 떠올랐다.녀석을 지탱하고 있던 키메라의 털이 뽑혀진 모양이었다. 그 순간에 팔을 쭈욱 뻗어서 프루엘이 재빨리 녀석을 잡아 챘다.그리고는 품안 에 안고 날 향해 소리를 질렀다. "날개가 붙어 있지않은 이상은 조심을 해야 할 거 아닙니까!" 나는 손을 흔들었고 프루엘의 품안에 안겨있는 에이리가 히죽 웃으면서 손을 흔 들어보였다. "너랑 엘레가 주변에서 날고 있으니까 괜찮아." 프루엘이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그 순간 나를 퍽 하고 미하라가 주먹으로 내리치더니 고함을 질렀다. "그 애를 이리로 좀 던져줘요!" "아아..." 프루엘이 한 숨을 쉬면서 날개를 기울여 이쪽으로 날아오려는 순간 에이리가 외 쳤다. "엄마! 나 이 조인족이랑 날고 싶어!" 프루엘은 얼굴이 굳어졌고 나는 히죽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 보였다. "여어,에이리,그쪽이 더 재밌냐?" "으응.아빠! 이쪽이 더 재밌어!" 발버둥을 치는 녀석을 꽈악 잡고 프루엘은 나에게 원한에 가득찬 눈빛을 보냈 다. "농담하지마십시오! 어린애를,이렇게 난리를 치는 어린애를..." "야! 어린애란 원래 난리를 치는 거야,얌전한 어린애 봤냐!" 프루엘은 입술을 잘근 잘근 깨물었다.에이리는 어느새 답삭 프루엘에게 매달려 서 떨어질 줄을 모른다.어느새인가 프루엘의 허리를 두 팔로 감더니 그 다음에 는 녀석의 목으로 바둥 바둥 기어올라가는 게 아닌가! 내 아이지만 진짜 대담하다. 이렇게 바람이 윙윙 부는 공중에서 그것도 아래가 까마득해서 지나다니는 모든 동물들이 개미만큼 보이는 이 와중에, 저렇게 버둥 버둥 프루엘의 몸을 잡고 애 벌레가 나무를 기어오르듯 꿈틀거리면서 프루엘의 어깨까지 기어올라가다니. 녀석은 다 올라가자 마자 이젠 짧은 두 다리로 프루엘의 목을 척하니 조이고는 두 팔은 그대로 허공에 올려서 구름을 잡으려는 듯이 허위적 거렸다. "멋져! 구름을 잡을 수 있을 거 같아!" 그 놈이 그런 소릴 지껄이면서 두 팔로 허위적거리자 나머지 두 애들이 기를 쓰 고 고함을 질러댔다. "나두!" "나두!" 그 모습이 꽤나 멋졌는지 애들이 기를 쓰고 소리를 질러댄다. 기가 막힌 프루엘은 얼른 재빨리 키메라의 위로 상승해서 애들의 시야에서 벗어 나 버렸다.저렇게 급상승해 버리면 숨이 막힐 텐데 하고 걱정하는 순간 갑자기 이젠 프루엘이 급강하하는 게 보였다. "키에에에엑" 에이리가 비명을 올리고 있다. "어마!" 그 소리를 들은 미하라가 벌떡 일어서는 순간 날던 프루엘의 몸이 비틀 했다.괴 로운 에이리가 녀석의 목을 조인 모양이다.한참 비틀 비틀 하면서 날더니 프루 엘은 한 참뒤에야 평형을 되찾았다. 에이리는 우리들에게 웃는 얼굴로 마치 인간들이 야생마를 길들일때나 보일 듯 한 포즈로 잘난 척을 하고 있다. 문득 프루엘이 불쌍하게 생각되었지만 어린애를 다치게 하는 것은 어느 종족에 게나 금기사항이다.여자들에의해 모든 것이 좌지우지되는 조인족에서는 더더욱 이나 금기다. 프루엘은 일그러진 얼굴로 날고 있었다.나는 큭큭 웃으면서 자기도 그렇게 하고 싶다고 졸라대는 어린 것들의 머리통을 발바닥으로 누르고는 키메라의 등 위에 느긋하게 눕는다. 햇빛은 맑고 하늘을 푸르렀다. 그리고 난 굳이 두 다리로 뛸 것 없이 누워서 날고 있다. KUBERIN...... 종족의 아픔에 눈을 돌린 자 그 고대의 성망을 알고 있는 자 보시오,우리들의 미래를 저물어 가는 석양은 핏빛으로 물든 것을 4 노스엘스턴은 이름에서도 나타나듯이 엘프들의 북쪽 마을이란 명칭이다. 엘프들은 본디 잘난 척을 엄청나게 하는 종족이다 보니까 다른 종족과의 교류도 적지 않은 편인데 또 한 편으로 말하면 체력은 그다지 강하지 않으면서도 그 아 름다움은 인간에 비할 바가 아니고,그리고 자존심은 높은 주제에 약속에 대해선 꼬장 꼬장하며,수명이 기니까 거의 인간의 수준에서 본다면 불노 불사의 존재 다.게다가 보통 종족과 달리 자연에의 친화력이라는 게 있어서 나무의 엘프들이 있으면 나무가 잘 자라고-물론 자기들도 건강하다-,샘의 엘프가 있는 곳에는 샘 이 마르지 않고,땅의 엘프가 있는 곳에는 광맥이 풍부하다. 즉,이렇게 말하면 신비할 것같지만 오랫동안 내가 판단해 본 결과 엘프들은 결 국은 노예나 장난감으로 쓰기에 딱 적절한 종족인 것이다. 완력이 약하니까 쇠사슬같은 것으로 묶어 놔두면 꼼짝을 못하고, 땅의 엘프같은 것을 이끌고 다니면 광산을 찾아낼 수 있으니 아주 쓸모있으며 나무의 엘프라든 가 샘의 엘프들을 거느리고 있으면 가뭄났을때 수맥을 찾는데 아주 쓸모가 있 다.그러고 보니 진짜 쓸모가 넘치는 종족이군... 그래서 인간들은 가끔 엘프들의 자잘한 마을을 습격해서 어린 엘프들을 잡아오 곤 하는데 완력이 없는 고로 이 엘프들은 당하는 일이 자주 있다.노예시장같은 데에 가 보면 가장 고가로 팔리는 것이 엘프들이고,그 중에서 제일 고가로 치는 것이 샘의 엘프- 그것도 여자다. 왜 그러냐고? 당연한 일이겠지만 샘의 엘프의 아름다움은 나무 엘프 이상이다.샘의 엘프는 푸 른 머리칼을 가지고 있고 눈은 새파란 물빛,그야말로 엄청난 미모를 가지고 있 어서 여자나 남자나 모두 인기가 있지만 남자엘프는 조금 성깔이 있어서 잘못하 면 홍수가 날 수도 있지만 이상하게도 이 샘의 엘프의 여성은 굉장히 수동적이 다.우리들 묘인족의 입장에서 보면 이해가 안가는 일이긴 하지만 이 샘의 엘프 의 여성은 왠만하면 강요하는 대로 명령하는 대로 다 따른다. 나도 샘의 엘프의 여자를 애인으로 삼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침을 질질 흘리면서 왕년에 바바의 콜렉션에 고개를 내밀었었지만 단호하게도 바바에게 거절당했다.쳇... 지금 내가 왜 이런 이야길 하는가 하면... 막 노스엘스턴의 엘프의 땅에 도달한 키메라에서 뛰어 내린 우리들을 맞이하러 온 것이 다름아닌 샘의 엘프의 여성이었기때문이었다. "어서 오세요." 그녀는 고개를 숙여 나에게 인사했다. 그녀는 새파란 물빛의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고 피부는 말할 수도 없이 영롱한 진주빛,그리고 매끈하고 풍만한 몸체에는 물빛의 하늘 하늘한 옷감으로 지어진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길고 가는 손목이 섬세하게 움직여서 나는 그 손끝을 넋 을 잃고 바라보았다.길고 아름다운 푸른 빛 머리칼이 무릎까지 찰랑이고 있어서 곁에 다가가면 찰랑 찰랑 소리가 들릴 것 같았다. 오오..아름다와라.. 내가 다가가서 이 아가씨의 손을 잡으려는 그 순간! "쿠베린." 낮게 으르렁거리는 여자들의 목소리가 있었다. 나는 정지 상태로 잠시 허공에 내민 손을 무안하게 들고 있다가 그 손을 자연스 레 내 머리로 올려 흘러내리는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색마 녀석은쿡쿡 웃으면서 키메라를 돌려보내고 나선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려서 이 아름다운 물빛의 아가씨의 뺨에 잘난 척 키스를 해보였다. "잘 있었어?" "어서 오세요.카나리안." 그녀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헤에,헤에...이런 이런! 감히 아름다운 아가씨를 내 앞에서 꼬시다니! 이건 용납할 수 없다! 내가 부글 부글 끓고 있는 동안 피로한 얼굴의 프루엘이 에이리를 내려놓았다. 그런데 에이리 녀석은 프루엘의 옷자락을 놓지 않고 답삭 붙어 있다. "아빠.엄마!" "왜?" "나,이 맛있는 조인족이 좋아." "그러냐?" 내가 심드렁하게 대꾸하자 녀석이 생긋 웃는다. "게다가 이쁘잖아.그지?" 프루엘의 얼굴이 사색이 된다.그가 주춤 뒤로 물러서려는 것을 사정없이 옷자락 을 잡아챈 에이리는 시익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작은 송곳니를 드러내 보였 다. 음... 나는 팔짱을 끼고 이 은발이 찰랑 거리는 하얀 내 아들내미를 바라보았다. 그렇군,녀석은 생각보다 더 나를 닮은 모양이군. "이쪽으로 오십시오." 웃는 낯으로 색마녀석이 우리들을 안내했다. 엘레는 잔뜩 찌그러진 프루엘과 달리 쿡쿡 웃고 있었다. 노스엘스턴의 왕궁은 일반적인 인간들의 왕궁과 달리 벽돌로 이루어진 곳이 아 니다.이들의 왕궁은 미스릴과 살아있는 나무로 이루어져 있으며 밀랍과 호박,혹 은 수정같은 것으로 장식되어 있다. 이 왕궁을 지을 때 드워프의 장인 일흔 한 명이 동원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게 틀린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곳곳에 엘프취향이라기 보단 드워프 취향인 듯 한 문짝이 버젓이 세워져 있으니 말이다. 회오리 모양으로 일그러진 바오밥나무와 구세 나무,그리고 두런나무로 만들어진 이 왕궁은 끝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굉장히 '길었다'. 약 살아있는 나무 칠십 여그루를 그대로 활용해서 만들어 놓은 이 왕궁은 사실 왕궁이라기 보다는 길다 란 통로의 연속처럼 보인다.높은 곳을 좋아하는 엘프들은 곳곳의 나뭇가지 위에 올라가 자기들 만의 방을 만들긴 하지만 이 거대 규모의 왕궁은 1층밖에는 없 다.나무에게 부담을 주지않기 위해서 절대로 이층 이상을 쌓지않았던 것이다. 주변에 있는 나무들은 보통 두아름에서 세 아름은 될 것 같은 거대한 거목들,수 령이 최소한 천년은 되고도 남을 그 거대한 나무들인데 그 나무들이 죽어 고목 이 되면 비로서 엘프들은 그것을 가구로 쓴다.살아있는 나무를 베어 가구로 만 드는 법은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내 생각에 그것은 그들이 게을러서라고 본다. 나무를 조금 잘라내서 물건 만들수도 있는데 굳이 고목을 주워 쓴다는 것은 아 무래도 이들이 나무를 베기 귀찮아서 어슬렁 어슬렁 숲속을 거닐고 있다가 고목 을 발견하면 주워 오는 것으로 밖에는 생각되지않는 것이다. 그건 그렇고 우리들이 도착해서 걷는 동안 무수한 엘프-실은 수십정도 밖에는 안되었지만 -들이 우리들을 열광적으로 환영했다. "오오,묘인족이다." "헤에.." "거칠게 보이는군. 역시." 그들의 환영에 답하면서 우리가 앞으로 걷는 동안 색마가 우리들을 왕궁안으로 안내했다.안으로 들어가자 마자 길고 좁은 회랑들이 연속해서 미로처럼 얽혀있 어서 나는 역시 엘프들과는 상종못할 것들이라고 다시끔 생각했다. 미로. 미로.미로란 말이지. 미로를 꾸미는 놈들 치고 제대로 된 놈들이 없다. 미로를 꾸미는 놈들 치고 강한 놈 못 봤다. 미로란 약한 놈들이 이리 꼬고 저리 꼬아 만든 지긋지긋한 흙장난이며 흔히 전 설의 고향,전설의 용사,전설의 왕자가 반드시 겪어야할 난관 3가지 중에서 하나 로 반드시 튀어 나오는 중심 장소인 것이다. 왜 모든 함정과 비밀의 장소는 미로여야만 하는가! 그야 당연하다! 미로로 이야기를 비비 꼬지 않는다면 재미가 없기 때문인 것이다! 미로를 만들기 위해 얼마만한 물자가 소요될 것인가! 얼마의 시간이 걸릴 것이 며 그 미로를 만들려고 설계한 놈들은 얼마나 머리가 빠개질 것인가! 그리고 그 미로를 빠져나오려고 버둥거리는 놈들은 얼마나 속이 터질 것인가! 아무리 보물찾기와 전설의 용자가 되기 위해서 미로라고 하는 필수적인 코스를 거쳐야 한다고는 하지만 대체 왜 미로라는 것이 세상에 나타나게 되었단 말인 가! 이것이야 말로 세상에 의외로 변태가 많다는 증거인 것이다. 내 넓고도 깊은 지식을 동원해 이 미로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끝도 한도 없 다.이는 즉, 미로를 즐기는 놈들은 하나 둘이 아니고 과거에도 현재에도 물론 미래에도 반드시 있을 것이란 증거도 된다. 강하다면 정면에서 부딪치면 되는 것이다. 너 죽어라 나는 너랑 싸우겠다 하고 말하고 두 주먹 불끈 쥐고 돌진하면 간단한 것을 굳이 이리 저리 비비 꼬는 이 비건전한 건축물을 만드는 것은 십중팔구는 변태다. 대표적인 예로,왕년 이 따위 미로를 즐긴 놈이 하나 있었다. 그 놈이 바로 킬트 놈의 스승격이 되는 미치광이 흑마법사인데 이 놈은 미로를 만들어 놓고 그 안에서 이상한 것을 몇 마리 키웠다. 키운 것까지는 이해한다. 저도 오래 살다 보니 애완동물이 필요했겠지.그리고 그 애완동물의 집을 지어주 려고 한 것도 이해할 수 있다.우리란 큰 것이 좋은 법이니까. 그러나! 그 몇마리들에게 사냥감각을 익히게 해주겠다고 밖에서 인간같은 것을 조금 잡아와 미로안에 풀어놓는 그 짓거리는,인간이 아니면 생각할 수 없는 변 태적인 행동이 아닌가.자기도 인간인 주제에 인간이 이리 뛰고 저리뛰고 하면 서 피 줄줄 흘리며 죽어가는 모습이 그렇게 재미있었던가? 나로 말한다면 약해빠진 존재가 피 줄줄 흘리며 죽어가는 것은 기분이 나쁘다. 녀석이 한 짓은,잡혀온 인간들이 그 미로안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도망을 가 고 그의 애완동물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면서 쫓아가는 놀이같은 것이다. 그런 놀이를 하다보면 반드시 그 때마다 운 좋게 빠져나온 인간들이 몇 나오기 마련이다. 그러면 놔주면 될 텐데 이 마법사 놈은 노옴과 인간 노예들을 시켜서 미로를 조금 더 조금 더 하고 증축시키곤 했었다.그러다보니 이 놈의 미로가 보통 넓이가 아닌 것이 되어버려 본인도 그 안에 들어가면 이리 저리 헤메게 되 었던 모양이다. 뭐 그정도라고 한다면 그 빌어먹을 놈이 만든 미로가 구부러졌던 찌부러졌던 알 바가 아니다.그러나 어느날 내가 이뻐하는 아리따운 여자 모험가가 이 미로에 빠졌다.그녀를 구하려고 내가 갔을 때는 그녀는 그 미로에서 헤멘지 사흘이나 되었을 때여서 그녀는 피골이 상접해서 추욱 늘어진 채 마수의 밥이 될 찰나였 다.급해 죽겠는데 미로를 헤매야 했던 터라 나는 아주 울화가 치밀어서 견딜 수 가 없었다.그리하여 열 받은 나머지 두 주먹을 들고 사방을 부수면서 전진했다. 미로라고 생각되는 그 길들을 일직선으로 부수면서 통과했던 것이다. 가끔 마수들의 둥지를 찾아 박살 내고 녀석들을 주욱 주욱 찢어 먹기도 하면서 나는 시커먼 미로속에서 하루 온 종일 보냈다.그리고 마침내 녀석의 미로를 반 쯤 부수고 입구로 나간 게 아니라 녀석의 연구실로 뚫고 나왔던 것이다. 그렇게 하루 온 종일 미로속에서 벽에 구멍을 뚫으면서 지내본다면 결코 미로라 는 것을 좋아하게 될 수 없을 것이다.아니,미로를 만들어 놨다고 하는 것 자체 가 내 눈에는 변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보여진다. "변태놈들." 또 미로에는 이런 단점이 있다. 안내자가 안내하지 않으면 도저히 앞뒤를 구분할 수 없는 것이다.그리고 도착했 는지 아님 도착하는 중인지 아니면 이미 지나쳤는지 도저히 구분이 안가지 않는 가! 그런 의미에서 나는 녀석들을 헤치고 앞 섬을 주섬거리고 모퉁이를 돌자마자 약 간의 오줌을 누었다. "끄아악!" "무,무슨 짓입니까!" 앞서 안내하던 색마놈이 기겁을 하고 소리를 질러댔다. "응,'표시'다." 나는 그렇게 말하고 손을 뻗어 옆에 선 프루엘의 옷자락에 부욱 부욱 문질렀다. 사색이 된 프루엘을 보면서 엘레는 입을 벌린 채 웃기 시작했고 내가 눈 오줌자 국을 바라보면서 색마녀석은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어..어떻게 이런 짓을... 화장실은 저쪽에 있습니다!" "아니,'표시'야." 나는 어깨를 으슥했다. 내 뒤에 있던 묘인족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물론 지나가던 엘프들은 모두 사색이 되었지만 나는 아랑곳 하지않고 색마를 재촉했다. 색마녀석은 창백한 얼굴이 된 채로 비틀 거리며 걷기 시작했다. 막 모퉁이를 돌자 마자 나는 스윽 또 한 번 '표시'를 했고 색마녀석은 울고 싶 은 표정으로 얼굴이 완전히 일그러져 있었다.조인족들은 단념한 얼굴이었지만 내가 문지를까봐 프루엘은 내게서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서 있었다.별수 없이 나 는 바로 몸을 돌리고 있는 색마 녀석의 옷에 스윽 문질렀다. "도..도착했습니다." 녀석이 말한 것은 내가 표시를 약 일곱번 정도 한 뒤의 일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좌악 넓어진 둥근 광장처럼 큰 대전이 나왔다.하늘이 곧장 보이는 게 아니라 고개를 들면 푸른 나뭇가지들이 줄지어 보이는,그런 청량한 냄새가 풍겨온다.그리고 바닥에 깔린 것은 꼼꼼하게 밀랍으로 만든 타일이었다. 그 위로 무언가의 털로 만든 융단이 깔려 있었는데 그 융단은 푸른 색조를 중심 으로 하는 녹색이라 매우 마음에 들었다. 정면에 앉아있던 녀석이 내가 들어서자 마자 벌떡 일어섰고 주변에 있던 녀석들 도 주섬 주섬 일어나 나를 맞이했다. "어서오십시오! 묘인족의 왕!" 은색의 실 처럼 매끈한 은발을 길게 늘어뜨리고 미스릴과 황수정으로 장식된 왕 관을 쓴 엘프는 미소를 한껏 짓고 있었다.그를 본 지 어언 200여년 가까이 된 것 같은데 여전한 모습이었다.입은 것은 엘프의 왕답게 길고 긴 가운을 걸친 초록색 튜닉차림이지만 가슴에는 엘프들이 가장 고가로 치는 검푸른 호박을 매 달고 있었다.보통은 호박은 노란 색이지만 드물게 검푸른 색을 뿜어내는 것이 있다.그것이 나오는 것은 몇백년에 한 두 개정도 땅의 엘프가 캐낸다고 한다.나 도 그 호박을 구경도 못해 봤는데 바로 이 녀석이 걸고 있는 것이다. "잘 있었나 보군,엉덩이 무거운 자식." 내가 내뱉자 마자 엘프들의 안색이 바뀌었지만 이 능글맞은 녀석은 전혀 변하는 얼굴이 아니다.여전히 시익 웃으며 기생오라비를 몇개는 삶아먹은 듯한 미끈한 얼굴로 접대성 미소를 보였다. "이리로." 그에게 한걸음 다가가자 마자 향긋한 냄새가 났다. 고개를 돌려 보니 그 옆 자리에는 백의를 걸친 금발의 아리따운 여인이 서 있었 다.마치 홍옥을 통째로 갈아 만든 것 처럼 아름다운 붉은 날개를 등에 지고 매 의 날개깃 같은 날카로움과 부드러움을 겸비한 것같은 눈매를 가진, 말 그대로 눈이 돌아갈 것같은 미인이었다.그녀의 옆으로는 두 명의 사내가 서 있었다. "...조인족의 왕?" 내가 묻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인족의 왕 아브란 셀 님이시오,쿠베린 왕." "아아...굉장한 미인!" 나는 감격했다. 그리고 그 순간 뒤에서 살기를 느끼고 자세를 경직시켰다. "이번에 동족에게 도움을 주셨다고 들었소,감사하고 있소.쿠베린왕." 그녀가 조용히 말하자 나는 한 숨을 내 쉬었다. 이야 이야,이건 보통 미인에 미성이 아니군. 나는 아래 위로 다시 이 조인족의 왕을 보고 옆으로 살짝 보고 몇걸음 뒤로 물 러서서 잠시 보았다.그리고 그 순간 뭐라고 할 참이었는데 귀신같이 누군가가 튀어 나가 그 조인족의 왕의 앞에 가 섰다. "아빠! 이 거 너무 이뻐! 내 거 하고 싶어!" 돌연 튀어 나가 서 외친 것은 다름 아닌 드레인, 이 녀석은 말 그대로 침을 흘 릴 것 같은 표정으로 이 조인족의 왕의 옷자락을 쥐고는 나를 향해 외쳤다. 순간 모두 아연했다. 나도 아연했고 조인족의 왕과 그녀의 측근들도 너무 아연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런데 그 뒤를 이어서 에이리와 케논도 쏜살같이 튀어 나가더니 이 아 가씨의 옷자락을 쥐고 외쳐댔다. "아빠! 아빠! 안돼! 나 줘!" "아냐! 아빠! 나 줘!" 세 아이가 빽빽 거리고 외쳐대는 동안 나는 심각하게 고려했다. "이봐,에이리.넌 안돼." "왜!" 에이리가 빽 분노의 눈길을 쏟으면서 외쳤다. "넌 '저 거' 가졌잖아?" 나는 뒤에 입을 벌리고 선 프루엘을 가리켰다. 에이리의 입이 일그러졌다.프루엘은 나에게 분노에 가득찬 눈길을 던졌지만 차 마 뭐라 말을 하지 못하고 버금 거리고 있다. "에잉..." "그래! 에이리! 넌 가! " 드레인이 사정없이 에이리의 엉덩이를 걷어찼다.어깨를 늘어뜨린 에이리가 프루 엘의 옆에 가 서자 그 뒤를 이어 케논이 엄숙하게 선언했다 "내 꺼야." "말도 안돼! 내가 먼저 봤어!" "시끄러!" 그러더니 이 드레인 녀석이 갑자기 조인족의 왕의 손을 덥석 잡더니 꽉 물었다. "앗!" 그녀가 당황해서 소리를 칠 때 드레인이 큰 소리로 외쳤다. "내가 먼저 물었어! " "안돼!새치기 하다니!" 음..과연...피를 속일 수는 없구나. 과연 과연 내 아들들이다. 이런 감회에 내가 빠져 있는 동안 내 뒤에서 엘레가 다급히 외쳤다. "쿠베린님!" 그 말을 듣고 생각했다.역시 이 자리를 수습할 수 있는 것은 나뿐이다.그리하여 나는 두 팔을 뻗어서 두 녀석의 뒷덜미를 잡아 당겨 들어올렸다. "무례해선 안된다!" 내 말이 떨어지자 두 놈이 두 발을 아둥 바둥 거리면서 날 쏘아본다.그 쏘아보 는 버릇없는 눈초리를 마주 쏘아봐 주자 두 놈이 울먹 울먹했다. "자,조용히 있어!" "에엥.." "으응.." 드레인이 그 와중에도 징징거리는 케논의 엉덩이를 연신 걷어 찬다. 난 두 놈의 뒷덜미를 잡아 채서 제 어미들에게 던져주었다.어미들은 킬킬 웃느 라 정신이 없는데 그제서야 조인족의 왕의 옆에 있던 측근들이 뭐라 화를 냈다. "이 무슨 무례한 일이오!" 난 한 걸음 다가가서 드레인에게 물린 조인족의 왕의 손목을 잡아 끌었다. 이 아름다운 아가씨의 손에 녀석들이 이빨 자국을 냈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 인가? 아아,감촉도 좋고 향기도 좋고,과연 조인족의 살결은 다른 족속들과 비교 할 것이 아니로다. 안타까움에 젖어서 나는 그녀의 물린 손등을 가볍게 잡고 핥아 주면서 예의바르 게 말했다. "사과하겠소.이 아름다운 손에 상처가 생겼군요." "아,네에.아직 어린 애들이니까요." 그녀가 미소를 지으면서 내 사과를 받아들이는 순간 내 뒤에서는 으르렁거리는 소리와 함께 무서운 살기의 기운이 넘쳐났다. 흐,그러나 안들려.안들린다구. 그런 것에 굴할 내가 아니지. "저,이야길 하려고 한 건 나인데..." 라고 누군가가 중얼거리는 것을 들은 듯했지만 역시 등 뒤로 흘려 뒷발로 걷어 치워버렸다. 나는 싱긋 웃으면서 그녀의 손을 잡고 중앙으로 이끌었다. "그럼 이야기를 들어볼까요? 아름다운 조인족의 왕이여?" KUBERIN...... 종족의 아픔에 눈을 돌린 자 그 고대의 성망을 알고 있는 자 보시오,우리들의 미래를 저물어 가는 석양은 핏빛으로 물든 것을 5 지금 이 상황은 몇백년 이래,아니 내가 듣도 보도 못한 희안한 상황이다. 그 옛날 지긋지긋하게 굴던 전설의 거인족을 물리치기 위해서, 드워프,엘프,조 인족,묘인족,수인족들이 총 출동해서 으싸 으싸 하며 연합을 맺은 이래 이런 일 은 없었던 것 같다. 지금 내 옆에서 우아한 표정을 지으며 되도록이면 모든 자들에게 자신의 영향력 과 관대함과 아니꼬움을 보여주려고 애쓰고 있는 엘프의 왕 엉덩이는 옆에서 드 워프의 왕 맥주를 사랑하는 넙적한 녀석의 비위를 맞추고 있었다.드워프의 왕을 본 것은 이게 얼마만인가 싶다.그리고 그 내 옆에는 아리따운 조인족의 왕이 진 지한 얼굴로 정면에 앉은 엘프의 왕을 주시하고 있었다. 자,이 자리에 빠진 것은 수인족이긴 하지만 본디 수인족이라는 족속들은 다 모 이기란 하늘의 별따기로 어렵다.매양 돌아다니는 꽁지빠진 늑대 녀석은 본디 헤 메고 돌아다니느라 정신 없어서 만난다는 것은 땅의 여신의 농간이며 운명의 여 신의 삿대질이다.게다가 수인족 자체가 하나의 종족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잘난 척 하는 뱀의 일족과 거미일족,인어,날개달린 새의 족속-조인족과는 거리 가 먼 족속-,거기다가 푸른 점박이의 일족등 워낙에 종류가 많아서 우리들은 그 저 수인족 일당들 이라고 뭉떵거려 말할 수 밖에는 없다.수인족이 다발로 모여 지낸다는 이야길 그다지 들은 바가 없으니 전에 뱀의일족의 여인을 본 것만 해 도 그런대로 상당한 성과라 할 수 있다. 대개 수인족은 인간들 사이에 끼어서 살다가 가끔 본색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으 니 떼로 집단을 이루어 사는 족속과는 차이가 있다. 그야 어쨌든 이 모래알갱이 흩어지듯이 후루룩 사라지는 수인족 족속들을 빼고 는 이 자리에 왠만큼 잘나간다는 족속들은 다 모였다.오크가 없긴 하지만 오크 에게 머리를 쓰길 기대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니 별 수 없는 일이다.게다가 오 크와 나란히 앉은 엘프는 도무지 상상이 가지않으니 잊기로 했다. 문득 엘프의 왕이 흘긋 흘긋 내 아이들을 훑어보았다. "아이들을 낳았군요,쿠베린왕." "아아.낳았어." "당신은 아이를 안낳는다고 맹세했다고 하던데?" "맹세란 깨지기 위해 있는 거다." ".....그럼 누가 대체 맹세를 믿는단 말이오?" "배신당하고 싶은 녀석들이." 한동안 엘프의 왕은 한 숨을 내쉬면서 날 바라보았다.그리고는 동의를 구하듯이 드워프의 왕을 바라보았다.넙죽이는 회색의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날 바라보며 불쑥 물었다. "사인족의 왕을 본 것은 당신뿐이오?" "아.그런가?"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긴장한 얼굴의 조인족의 왕이 말했다. "사인족은 지금 우리들을 불러 이야길 하자고 하고 있어요." "이야기? 뭔 이야기를 하자는 거지?" "그건 가 봐야 알겠지만 지금 사방을 휩슬고 있는 사인족의 무리들과 인간의 병 사들이 벌이는 살육은 엄청난 것입니다." "사인족은 인간에게 복수하고 싶다고 하더군." "일단은 가벼운 식사를 하고 .." 모두 한 마디씩 떠드는 가운데 엘프의 왕이 손을 들자 조신한 엘프 처녀들이 다 가와서 음식을 둥근 탁자위에 줄줄이 늘어놓았다. 햇빛이 청명하게 비치는 오후,음식냄새는 근사하게 나는 듯했다. 그러나! "이봐,이게 뭐냐?" 내가 식탁위를 바라보며 물었다. 엘프처녀가 푸른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물었다. "네?" "이걸 음식이라고 가져온 거냐?" 나온 음식이라고 하는 것은 꿀 빵,오렌지 꿀에 절인 살구와 딸기,나무딸기를 듬 뿍 써서 만든 듯한 파이,커다란 광주리에는 가득 들어있는 흰빵과 나뭇잎에 쌓 인 튀긴 고구마와 향료를 넣어 끓인 오트밀이었다. "저어..."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는 순간 나는 단호하게 말해주었다. "지금 묘인족에게 이런 식사를 하라고 말한 거야?" "아아...." 막 그녀가 당황하려는 순간 엘프의 왕이 두 손을 내밀며 미소해 보였다. "하지만 우리들은 육식을 하지 않습니다.알고 있잖소?" "그러나 우린 먹어야 해! 구운 돼지! 구운 토끼! 그도 안된다면 그을린 새새끼 라도 가져오라구!" 그렇게 막 외치는 순간 엘프들의 얼굴이 못 들을 것을 들었다는 듯이 찌푸렸다. "그렇게 잘난 척할 거 없어! 고구마도! 열매도! 낱알갱이도 결국은 죽어서 식탁 에 오르는 거잖아!" "하지만..우린 그런 거친 것을.." 막 뭐라 하는 순간 나는 차갑게 말했다. "그것들을 희생시키기 싫다면 네 팔 하나만 떼줄래?" 우웃 하고 험악한 표정이 되는 엘프들과 나 사이에 침묵이 감돌았다. "마,말이 심하군!" 드워프가 옆에서 한 마디 했다. 그는 눈쌀을 있는 대로 찌푸리면서 나에게 말했다. "어차피 초대받은 입장이잖아! 적당히 하시오!" "초대 받았는데 지금 우리가 여기서 풀쪼가리를 뜯으란 말이냐?" 내가 열받아 말하자 다시 침묵이 흘렀다. 엘프의 왕은 나를 보고 조용히 목소리를 깔았다. "그만좀 해 두시오.쿠베린왕.이런 억지를 부리지 마시오.당신도 알고 있잖소?" 엄숙해진 표정으로 말한다고 해서 내가 흔들릴 것 같은가. "그러나 정확히 말해두지,우리들은 육식을 하는 종족이야. 너희들이 고기를 주 지 않으니까 내 종족들이 배가 고프다고 이 숲에서 사냥한다고 해서 그대들이 뭐라 할 수는 없는 일이라구." "..." 그가 맹렬하게 쏘아보고 있는 순간 나는 탁자를 가볍게 내치며 말했다. "만약 그게 싫다면 한 식경이 끝나기 전에 볼일을 말하는 거야! 엘프의 엉덩 이!" 엘프의 왕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그만하시오! 이렇게 무례하다니! 나는 당신에게 할 만큼 예의를 다하고 있지않 소!" "진짜 예의를 말할 정도라면 그럼 내 종족들이 배고파서 엘프들을 잡아 먹기 전 에 어서 할 말을 하란 말이야!" 드워프가 눈을 조금 크게 뜨더니 얼른 동의했다. 그래,당신도 이 놈의 엘프가 언제까지 주절거리는 것을 봐 주기 힘들겠지? "아,그러는 게 좋겠소.어서 말하고 묘인족들을 이 숲에서 내보내는 게 현명할 거 같소." 엘프의 왕은 끓어오르는 화를 억누르면서 조용히 말했다. "지독하군,쿠베린왕." "시끄러.난 성질이 급해." "간단히 말하면......" 그는 눈을 감으면서 회상에 잠기듯이 조용히 읊어 가는 듯한 어구로 말하기 시 작했다. "얼마전의 일이오,다섯 개의 엘프의 마을이 습격당한 이후 나는 튜나와 몇몇 엘 프들을 시켜서 사인족의 동태를 조사하고 있었소.그런데 그들의 동태가 매우 불 안정하다는 것을 깨달았소." 조금만 더하면 졸겠다. "그 얼마가 언젠데?" ".......22개월 전이오." 그게 얼마전이냐? 거의 2년전 이야기잖아? 내가 묻고 싶었지만 그는 날 흘긋 보더니 그 천천히 읊어가는 듯한 어조 그대로 다시 떠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이어 사인족의 동태가 여전히 이상하다는 이야기가 들려왔소.처음에 는 땅의 엘프를 공격한다는 이야기가 있더니, 그 다음에는 인간의 용병들과 같 이 움직인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던 것이오." "그 것이 언젠데?" "....말을 막지 마시오,쿠베린,그건.....18개월전이오." 죽갔군,이래서 엘프가 싫다. 이 놈의 엘프들은 영원히 산답시고 느려터져서 남이야 속이 뒤집어지든 말든 상 관없이 자기 식대로 밀고 나간다.이 엘프들에게서 무슨 사정이야기 한번 들으려 고 한다면 해가 지고 달이 뜨고 다시 해가 뜨고 그리고 다시 달이 뜨고를 수없 이 반복해야만이 겨우 본론이 들어간다. 자기들이야 급한 일이라는 게 아예 존 재하지를 않으니 남이 속 뒤집어지는 것은 아랑곳하지않으며 자신들의 이야기를 두 손 모아서 시시껍절한 이야기까지 주저리 주저리 떠들어댄다.게다가 속 답답 해 뒤집어 엎어버리면 토라져서 그 상태가 잘하면 몇백년이나 갈 수도 있다.엘 프와 원수지면 절대로 당대에는 풀지 못한다는 게 틀린 말이 아니다. 다른 자들이야 아쉬워서 참아낸다고 하지만 이 몸이 대체 뭐가 아쉬워서 저 주 절거리는 엘프의 수다를 들어준단 말인가? 쓸데없이 당시에 해가 어찌 뜨고 달 빛은 무슨 빛깔이었으며 그 때 바로 옆에 무슨 꽃이 피어 있었는가까지 주저리 주저리 늘어놓는 엘프의 수다는 들어보지 않으면 실감할 수 없다. 생각해 보면 엘프중에서 그런 대로 말이 통하는 것은 역시 저 색마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저 자식은 인간들 사이에 끼어 앉아 인간여자를 꼬시고 아 인족 여자,드워프 여자 골고루 섞어서 꼬셨다.아마 기회가 닿았다면 오크여자도 꼬셨을 것이다. 여자를 꼬신다는 것은 의외로 엄청난 테크닉이 소요된다.게다가 같이 어울려 살 정도라면 보통 테크닉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이다. 본디 여자란 다사다난한 존재이기 때문에 한 명의 남자를 여러명의 여자가 갈라 서 가진다는 데에는 문제가 발생한다.나 같이 잘 나신 분도 골치를 썩고 있는데 색마녀석이 네댓의 여자를 한꺼번에 거느리고 있었다면 이건 보통의 솜씨가 아 닌 것이다. 흠....다시 보이는 군. 고개를 돌리니 색마와 눈이 마주쳤다. 녀석은 약간 어색한 미소를 지으면서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는데 그게 또 엘프 답지않게 제법 표정이 있다.그러고 보니 그 옆에 서 있는 것은 오랜만에 보는 먹음직한 장사 엘프가 아닌가? 녀석은 날 보더니 얼굴을 조금 굳혔지만 색마 옆 에 바짝 붙더니 그나마 예의 바르게 눈인사를 보내온다. 흐으음...엘프 답지 않은 놈이 하나 더 있었군. 저 카산이란 놈은 엘프답지 않게 주먹을 휘두를 줄 아는-아니 어쩌면 휘두를 줄 은 모르고 그저 힘만 쓸지도 모른다- 녀석이었다.게다가 내 기억으로 엘프에게 '빨리요,빨리'라는 단어를 들어 본 것은 처음이 아닌가 싶다. 오오,그렇군,저 카산이란 녀석은 힘 없고 굼뜨기 그지 없는 엘프족의 희망인 것 이다.그래,그래,그 동안 너를 평범하게 봐 주어서 미안하다.어쩌다가 이렇게 굼 뜨기 이를 데가 없는 종족에게서 너 같이 비범한 녀석이 나왔단 말이냐? 너 진짜 엘프 맞냐? "...인 것이오." 뒤에서 이에르네가 내 등을 꾹 찔렀다. 내가 고개를 드니 얼굴이 일그러진 엘프의 왕이 날 주시하고 있었다. 그 고상한 척하는 얼굴이 일그러져서 입가에 잔뜩 잔 물결무늬가 흔들리고 미간 에는 어느새 샘물이 생길 정도로 깊게 흠이 패여지고 있다.그리고 부들 부들 떨 리는 두 손이 어느 새 탁자를 꾸욱 꾸욱 누르고 있는 상태였다. "언제?" 내가 다시 묻자 녀석은 이를 갈면서 말했다. "두 달 전에." "흐음,두 달전에?" 아직 이야기가 진전되려면 멀었군 싶어서 드워프를 바라보자 드워프는 그런가 보다 하는 단념한 표정을 짓고 있다.드워프의 왕 넙죽이. 킬라이 에뮬라트 케로 오니 라고 하는 엄청난 이름을 가진 회색 수염의 드워프는 드워프답게 나이를 알수 없는 그런 얼굴을 하고 또 드워프 답게 툭 튀어 나온 배를 둘둘 가죽 띠로 두르고는 점잖게 앉아있었다.그 회색 수염에는 엘프들이 내온 파이를 집어 먹느 라 딸기쨈이 잔뜩 묻어 있었는지라 그는 그 딸기쨈을 떼어내느라 바빴다. "....인 것이었소." "이봐,빨리 해! 빨리! 난 배 고프단 말이다!" 내가 이를 드러내자 엘프의 왕이 일그러진 입가를 바르를 떨면서 날 쏘아 보았 다.내 말을 서툴게 듣는 것 같아서 난 옆에 빈 그릇을 치우고 있는 엘프의 팔을 잡고 덥석 물었다. "꺄아!" 피가 줄줄 흐른다..는 물론 아니다.시늉만 했을 뿐이니까! 그러나 보는 엘프들이 새파랗게 질렸고 내 뒤의 내 종족들은 놀란 눈을 동그랗 게 떴다.하지만 그 들 역시 내 뒤에 바짝 붙으며 손톱을 스윽 하고 꺼내버렸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엘프의 왕의 입을 저억 벌려지더니 외쳤다. "뭔 짓이야!" "얼른 말해! 그래야 난 사냥을 간단 말이다!" 내가 광포하게 외치자 엘프의 왕의 입가가 씰룩 씰룩하더니 내가 놓아준 엘프의 안전을 확인하고는 나에게 원망의 시선을 보냈다. "정말 지독한 작자로군! 예의라는 것은.." 또 시작하려는 듯 하기에 나는 벌떡일어나서 외쳤다. "다른 놈을 물어뜯어 볼까!" "아! 말해! 말한다구!" 갑자기 그의 어투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 보름전에 사인족이 조인족 마을 두개를 점령하면서 그 포 로로 여자와 아이를 인질로 잡고 우리들과의 면담을 요청했단 거요!" 결국은 그 한 마디만 하면 되는 것이었잖아? 뭘 길게 떠들고 몇년 전 이야기까 지 주저리 주저리 떠드는 거야? 나는 주먹을 쥐고 조인족의 왕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안도의 한 숨을 내 쉬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바로 그겁니다.드워프,묘인족,조인족,엘프의 왕들을 만나자고 했던 거에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앞으로 이틀 뒤에 인간의 도시 랜달 브리거에서." 나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그럼 우리가 가면 그들을 풀어주겠다는 건가?" "그렇지..그러니까.." 엘프의 왕이 막 뭐라하는 것을 무시하고 나는 드워프에게 물었다. "왜 불러 모은다는 이야긴 하지않았고?" "인간에게 복수하겠다고만 말했지." 딸기쨈을 포기하고 드워프가 간단히 대꾸했다. "그리고 그 안에 가빈과 셀레네가 있다고 하는 것이지?" "네." 조인족의 왕 뒤에 있던 엘레가 짧게 말했다.그리고 그의 얼굴이 조금 괴로운 듯 일그러졌다. "그리고 그 안에 튜나도 있답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듀나시가 짧게 말했다. "함정일 지도 모릅니다." "인간의 군대,마법사와 짜고서 뭔가 꾀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전에 우 리들과 싸울 때 그들은 인간의 용병과 같이 공격해 들어왔었지요." 다크시온이 덧붙였다.이에르네가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은 미심쩍은 말이라고 생각되요.그때 사인족이 사용하던 무기는 철시에 요.그런 철시를 만들 수 있는 종족이란 단 둘 뿐이에요,드워프와 인간." "게다가 마법사." 내가 덧붙이자 듀나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땅의 엘프를 공격하던 이유도 결국은 그들의 보석과 황금때문이겠지요.그렇다 면 그것을 바라는 것은 인간,인간에게 무기를 사온다던가 하기 위해선 황금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렇지." "사인족이 인간의 무기와 인간의 용병을 이용해서 뭔가를 꾀하고 있다...라고 저는 생각됩니다만." 다크시온이 말하는 순간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리고 뭔가가 더 있어." 고개를 돌려 보니 그 자리에 나타난 것은 다름 아닌 저 잘난 척하는 흰둥이 변 태 마법사 아크였다.그는 여전히 잘난 척 흰 옷자락을 펄럭이면서 들어서더니 조인족들에게 사나운 표정을,그리고 드워프에겐 상냥한 표정을 마치 두개의 얼 굴을 가진 양면 괴물처럼 보여주더니만 엘프의 왕 옆에 가 섰다. "내 생각에는 인간들에게 사인족이 배신당한 것이라고 생각돼." "배신?" 그 자리에 있던 자들이 모두 해연히 놀랐다. KUBERIN...... 종족의 아픔에 눈을 돌린 자 그 고대의 성망을 알고 있는 자 보시오,우리들의 미래를 저물어 가는 석양은 핏빛으로 물든 것을 6 그때 조용히 조인족의 여왕이 물었다. "배신이라고 한다면...사인족이 인간을 믿었다는 것인가요?" 그 말에 일제히 모든 자들이 여왕을 돌아보았다. 여왕은 조용히 말했다. "참으로 묘한 이야기입니다.그럼 사인족은 인간들과 같이 어울려 살았다는 것입 니까?" 아크는 그 답지 않은 고요함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슨의미 입니까? 조인족의 여왕님?" 여왕은 고요한 태도로 자신의 손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그리고는 그 말에 답하 지 않은 채 나를 바라보았다. "프루엘과 엘레의 이야기를 들으니 묘인족의 왕께선 인간들을 많이 아시는 것 같군요." "안다고 할 수 있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사인족의 왕이 인간들을 어찌 생각했는지 이야기 해 주세요." 아크가 막 입을 열려고 할 때 나는 턱을 괴고 조용히 말해주었다. "간단한 이야기지,노예들의 반란같은 거요." "노예?" 이번에는 아크가 소리를 질렀다. "사인족은 우리들 묘인족처럼 압도적인 살상능력을 가지고 있지도, 조인족 처럼 날 수도 없소,그래서 그들은 인간들의 무구를 생각해냈지,그리고 그 것을 인간 들에게 약탈 혹은 생산하도록 거래를 했을 거야." 나는 나를 주시하는 드워프와 엘프를 바라보았다. "사인족이 배신당했단 말은 말이 되지 않아.흰둥이 마법사. 그건 인간에게나 생 각하는 거지.배신은 동등한 자가 신뢰를 가졌던 자에게 당하는 것이고...이 경 우는 배신이라기 보단 분노에 가깝겠지." 나는 아크를 돌아보며 물었다. "너,킬트에게서 마법사 이야길 들었겠지? 흑마법사의 상당한 놈들이 사인족의 개조에 참가했다고...그렇게 들었을 거야." "아,그래." "사인족은 대체 왜 흑마법사의 개조에 동의한 것일까? 아니면 동의하지 않았는 데도 참가한 것인가?" 내가 중얼거리자 갑자기 조인족의 여왕이 말했다. "자세한 이야길 해 주세요." 내가 이야기를 마치자 그녀는 놀란 얼굴을 했다. 다른 종족들 모두가 어이없는 표정을 짓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게 말이나 될까? 어떻게 사인족과 인간을 섞어서 ....사인족도 아니고 인간 도 아닌 것을 만들어 낼 수 있지?" 드워프가 중얼거리는 동안 아크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킬트 녀석이 어떤 실험을 하고 있었느냐에 따라 다르겠지." 제기랄,인간의 아들네미 다운 말이로군. 생명에 대한 경외감도 없는 슬픈 저 어투는 지식욕에 불타는 인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엘프의 왕은 자신이 키워 거의 반엘프라고 불릴 수 있는 대마 법사를 슬프게 바라보았다.저 엉덩이 무거운 녀석은 눈치를 챈 모양이군. "이제 슬슬 출발해." 내가 말하자 엘프의 왕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벌써? 일단은 아름다운 태양이 고개를 숙인 황혼에 맞추어 조금 쉬었다 가는 것이?" "시꺼. 할 일 있으면 얼른 얼른 엉덩이 올려." "오오오오오오오!" 튜나가 달려나왔다. 그녀는 답삭 엘레를 끌어안고 키스를 거듭하다가 그 다음에는 나에게로 시선을 돌리더니 오오오오오오 하는 그 기괴한 소리를 터뜨리면서 내 옆에선 내 아들들 을 바라보았다. "꺄아! 너무 이쁘다!" 그녀는 마구 마구 달려들어 아이들의 몸을 끌어안고 비비적 거렸다.엘레가 쓴 웃음을 짓고 있는 동안 그녀는 반짝 거리는 눈으로 케논과 에이리와 드레인을 부둥켜 안고 비명같은 소리를 질러댔다. "쿠베린! 정말 당신 애야?" "그럼 이렇게 이쁜 애들이 누구애들이라고 생각하고 있는거냐?" "뻐기긴! 혼자 이렇게 이쁜 애들을 낳을 수 있어? 여자가 있었겠지!" 그녀는 눈을 크게 뜨면서 떨떠름한 표정의 이에르네들을 돌아보았다. "정말 기가 막힌 미인들이네! 당연히 애가 이쁠 수 밖에 없겠다." 그녀가 에이리를 부둥켜 안고 중얼거리는 동안 에이리가 품안에서 날 불렀다. "아빠." 녀석은 어느새인가 튜나의 목을 꼭 끌어안고 목에 코를 박고 있었다.그리고는 슬금 슬금 그녀의 뺨에 입을 대고 있다. "왜?" "이건 먹어도 돼?" 나는 잠시 생각했고 튜나는 놀라 허겁 뒤로 물러섰다. "으음...저건 먹어도 될거야." "진짜?" 세 아이가 동시에 눈을 빛내면서 튜나를 바라본다. 튜나의 얼굴이 질리면서 그녀는 헤죽 해죽 웃었다. "농담하는 거지?" "먹을 것 가지고 장난 하면 못쓴다.에이리." 나는 점잖게 말해 주었다. 튜나가 차마 옮기지도 못할 말들을 길게 길게 아주 길고도 길게 늘어놓는 동안 나는 고개를 돌려서 엘프의 왕 엉덩이가 뭐라고 엘프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는 광경을 지켜 보고 있었다.그리고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는 카산에게 물었다. "에닌은?" "에닌은 지금 집에 있어요.근데 가빈과 린은 어딨어요?" "린은 죽었고 가빈은 지금 조인족의 마을에 같이 있다는 군." 카산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푸른 아인족과 같은 색깔이 되었다. "리..린이 주,죽었어요?" "응,머리는 창공의 여신에게, 몸은 대지의 여신이 거두어 갔다." 카산의 얼굴이 충격으로 물들어서 더듬거리는 것을 나는 희안하게 바라보았다. 엘프중에서 이렇게 표정이 풍부한 놈은 진짜 이 놈과 색마 뿐이라니까.에닌 조 차도 이놈 처럼 풍부한 표정을 가지고있지 못하다. 아크가 나에게 다가와서 묻는다. "킬트 봤어?" "내가 봤을리가 있냐?" "쳇." 아크가 머리를 긁적였다.그리고는 생각에 잠긴 듯 물었다. "그 사인족을 만들어냈다는 흑마법사들은 어떤 놈들인지 알고 있어?" "몰라." "킬트의 제자라며?" "몰라,킬트나 알겠지." "...어떤 식으로 만들어냈을까?" 그런 소릴 지껄이는 놈의 머리통을 한대 후려갈기고 나는 엘프들이 불러내고 있 는 소환수들을 지켜 보았다. 드워프들은- 드워프의 왕 넙죽이와 그의 비슷 비슷한 얼굴들의 넙죽이들은 모두 일곱명이었다.각기 똑같은 복장에 똑같은 띠를 두르고 바지인지 치마인지 차마 부르기도 거북한 옷자락을 한 채 거대한 도끼를 등뒤에 매달고 서 있었다.아니 서있는지 앉아있는 지 그것도 확실치 않지만 나와 비슷한 심정인지 드워프들은 땅바닥을 북북 긁으면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이봐." 내가 부르자 넙죽이들 일곱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넙죽이들의 왕이 뒤뚱 뒤뚱 걸어와 내 앞으로 왔다. "왜?" "저 엘프 놔두고 가자." "...동감이긴 하지만 우리 다리로 줄줄이 거기 까지 걸어가기엔 무리가 있다고 보는데." 연기를 푹푹 날리면서 드워프가 말했다. "옆에 하나씩 끼고 달려줄께." 내가 마음넓게 호의적으로 말해도 드워프의 왕은 머리를 긁적이면서 고개를 저 었다. "이왕이면 조인족의 아름다운 품안에 안겨서 날아가겠다." 그 말에 아크가 카카카 하고 웃을 때 나는 조인족의 여왕을 돌아보았다. 여왕은 쓴웃음을 짓고 서 있었다. 묘인족이나 조인족이나 드워프나 준비되었다면 그 즉시 출발할 수 있는데 왜 엘 프는 그렇게 하질 못하는 것일까? 대체 뭔 이유로 저렇게 엉덩이들이 무겁단 말인가? "엘프는 몇명이나 데리고 갈건가?" 내가 큰 소리로 엘프의 왕에게 묻자 엘프의 왕이 생각에 잠겨서- 세상에 아직까 지도 그것을 결정하지 않았더란 말인가!- 한동안 대답을 하지 않더니 천천히 대 답했다. "아아..아마도 열 명정도를 데리고 갈까 생각 중이요." 차라리 내가 한대 후려갈겨서 질질 끌고 가는 편이 빠르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엘프들은 지금 소환수를 부르고 짐을 챙기고 여기저기에 자잘한 명령을 내리고 오락 가락 떠들어 대고 인사한답시고 고개를 들고 잡담을 나누고 입술을 달싹이 느라 도무지 움직일 생각이 없다.그러는 새에 벌써 해가 지고 별이 떴다.그러자 왕이 고개를 돌리며물었다. "자고 내일 아침에 출발하면.." "시끄러! 당장 출발이다!" 내가 고함을 지르자 엘프의 왕이 눈쌀을 찌푸렸다. "하지만 해가 졌지않소? 이런 밤이면 원래 휴식을 취하도록 되어 있는 거요." "당장 출발이다! 밤이라서 출발 못하겠다고 하는 놈있으면 나와봐!" 내가 싸악 사방을 훑어보자 사방이 조용해진 채 아무도 튀어 나오지 않는다. 음,모두 동의했군. 소환수 에달라이마와 블루 키메라, 엔델로아나를 타고서 드워프와 묘인족과 엘 프들이 날고 있다.그리고 그 사방으로 조인족이 날개를 펴고 날고 있었다. 별들이 우리들을 내려다 보면서 히죽 히죽 웃고 있는 이 달 밤에 이건 제법 운 치가 있다. 푸른 구름이 낮게 우리들의 발치로 굴러가고 차가운 바람이 뼛속까지 치밀어 오 르지만 어쨌든 간에 아름다운 날씨다.달은 희멀건한 얼굴을 내보이면서 반쯤 찡 그린 반달모양을 하고는 우리들에게 흰 빛을 내보내고 있었다. 엘프들은 모두 열 명, 그 중에는 색마 엘프가 당연 끼어 있었지만 카산은 끼어 있지않았다.이번에 참가한 엘프들은 모두 나이가 있는 침착하고, 아니 지나치게 침착하고 지나치게 점잖은 엘프들인 것 같았다.물론 그 중에는 아크도 끼어 있 었다.우리들 일행중 유일한 인간이다. 나는 색마가 몰고 있는 블루 키메라 위에서 내 여자들과 내 아이들과 내 사내들 을 데리고 길게 누워 있었다.그리고 약간 불편한 얼굴로 드워프 둘이 앉아서 입 을 앙다물고 고집스레 앉아있다. "꺄아 꺄아.." 드레인이 또 키메라 위를 뛰어다니기 시작한다. 그 불안한 모습을 보고 있는 엘 레가 우리들 위에서 날면서 물었다. "괜찮겠어요?" 이를 갈면서 그 옆에서 날고 있는 프루엘- 이미 에이리의 애완동물이 되어버린 -이 낮게 중얼거렸다. "떨어지더라도 절대 잡지 마라.엘레." "풋." 엘레가 웃었다. 에이리는 프루엘의 품안에 안겨 날고 있는 주제에 고개를 들어서 프루엘을 바라 보았다. "그거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야?" "...." 어린 주제에 에이리는 이미 애완동물 다루는 법을 알고 있다. 과연 과연 내 아들. 키메라는 날고 있고 나는 이미 반쯤 누워서 이에르네의 무릎위에 머리를 기대고 케이링의 안마를 받으면서 미하라의 향기를 맡고 있다. 이것도 꽤 기분이 괜찮군, 하늘을 날면서 바람을 느끼면서 여자들을 안고 있는 것도. 뭔가 해 보려고 슬금 슬금 손가락을 내뻗어서 제일 가까이에 있는 이에르 네를 만지려 한 순간 철썩 하고 손가락을 후려쳤다. 아아,무서운 내 이에르네. 하는 수 없이 단념하고 다른 쪽 손을 슬금 슬금 미하라의 다리로 뻗히자 기다렸 다는 듯이 또 한번 이에르네의 손이 날아들어 내 손등을 후려갈긴다.철썩. 미하라의 눈이 치켜 올라갔다. "자기가 싫으면 그뿐이지 왜 방해해?" 이에르네의 눈도 올라간다. "지금 이 자리가 어딘데 그런 수작이야?" "뭐가 어때? 왕은 어디서든 하고 싶으면 하게 되어 있는 거야!" "네가 하고 싶은 거겠지!" "왕이 하고 싶다고 했어! 그럼 나도 한다!" 미하라와 이에르네의 눈이 파랗게 빛나고 무시 무시한 살기와 엄청난 분노의 오 라가 빛나오르고 있을 때 드워프가 음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따라 붙어 있는 듀나시와 다크시온, 그리고 데인과 바스티앙은 모른 척 괜히 희멀건한 달만 바 라보고 있다.애들은 흥미진진한 얼굴로 자기 엄마를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프 루엘의 품안에 안겨있던 에이리가 소리쳤다. "엄마 이겨라!" 그 말에 발끈한 드레인이 발딱 일어서더니 에이리를 주먹으로 가리키면서 도발 적인 자세-턱을 치켜 올리고 가슴과 배를 내어 미는 잘난 척하는 자세-를 취해 보였다. "까불면 죽여주겠다!" 그 말에 발끈한 에이리가 프루엘의 품안에서 바둥바둥 거릴 무렵 지치고 귀찮아 진 프루엘은 방향을 휘익 틀어 버렸다. 멀리서 깍깍 거리는 에이리의 분노에 찬 외침이 들려올 무렵 드레인이 눈을 번 쩍 번쩍 빛내면서 자기 엄마에게 지껄였다. "엄마! 지면 안돼!" 이에르네는 자식의 응원을 들으면서 미하라와 눈빛을 빛내고 있었다.미하라는 자기 아들네미 에이리의 빛나는 응원을 들으며 힘찬 어깨짓을 하고선 이에르네 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나 교활한 케이링의 아들내미 케논은 그 와중에 내 손 을 잡아서 자기 엄마 손과 겹쳐주고 있었다. "아빠.역시 우리 엄마가 제일 낫지?" 나는 할 말을 잃고 케이링의 손을 잡은 채 케논을 빤히 바라보았다. 케이링은 오호호호호 웃음을 날리면서 내 품안에 어느새 안겨있다. 놀라운 아들네미를 두었구나, 케이링. 어찌되었든 밤새 날아 거의 새벽 햇살이 동쪽에 고개를 내밀고 혀를 내밀어 여 기저기 슬금 슬금 빛을 뿌릴 무렵 나는 아래를 내려다 보고 벌써 델리암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오오오오!" "왜요? 쿠베린?" 케이링이 내 벌거벗은 어깨에 매달리며 물었다. "아래는 바로 엘리야야!" "어머,당신이 지냈다는 인간 마을?" "응." 나는 야야 하고 소리를 질렀다. "이봐! 색마~! 아래에 내려가자!" "아,하지만 일행에게 말씀을 드려야 할텐데요!" "내가 가자면 다들 말없이 따를 거다.아래로 내려가!" "그,.그건.." "내려가라면 내려가!" 내가 소리 지르자 하는 수없다는 듯이 색마는 블루 키메라를 아래쪽으로 향하게 했다.아래로 회전하면서 강하하기 시작하자 우리 뒤를 따르던 두 마리의 소환수 들은 당황해서 우리 뒤를 쫓아 강하하기 시작했다. "거봐,따르잖아?" 내가 말하자 색마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면서 아래로 보이는 작은 항구도시를 바라보았다. 항구도시에는 배가 가득 가득했다.이런 이런, 배가 저렇게 가득 가득하다니.뭔 가 이상하군.장사가 안되는 거 아냐? 푸른 바다와 대비될 정도로 황토빛과 갖가지 붉은 색으로 치장한 엘리야의 도 시풍경이 다가오는 동안 나는 항구 아래로 내려서라고 지시했다.아래에서 이쪽 을 올려다 보는 선원들은 으아 으아 하고 소리를 지르며 난리가 났다. "에? 드워프? 에? 오크도 있잖아?" 옆에 있는 녀석들이 놀란 소리를 내 지를 무렵 나는 몸을 한번 뒤흔들었다.그리 고 왕년의 그 날렵하고 매력적인 미소년의 모습으로 몸을 돌렸다.이렇게 되니 알몸인 지라 큼지막한 내 옷을 아래로 둘둘 둘렀다. 내가 그 모습이 되자 여자들은 깔깔 웃고 드워프들은 기가 막혀 입을 저억 벌렸 고 아이들은 재미있어 죽으려는 표정을 짓고 자기들보다 약간 큰 내 체구에 매 달려서 떠들어 댄다. "아빠! 작아서 이쁘다!" "아빠! 나도 작게 될 수 있어?" 시끄럽게 떠드는 애들을 여자들에게 맡겨놓고 나는 항구에 도착하자 마자 입을 사발내지는 솥뚜껑처럼 내어 벌리고 오라 벌레들이여를 외치고 있는 선원들과 일꾼들을 돌아보며 블루 키메라에서 내려섰다. "쿠,쿠베린이잖아!" "에에! 놀랐다! 쿠베린일행이었어?" 선원들과 일꾼들 중 내 얼굴을 아는 놈들이 안도의 소리를 냈다.그리고 내 여자 들과 애들이 주르르 내리고 다른 놈들이 바글 바글 내려서자 선원들은 두리번 거리면서 내 옆으로 다가와 섰다. "아아, 마미가 무척 걱정하고 있었어.어딜 갔었던 거야?" "스카는 왔냐?" "응,지금 마미의 가게에 있어." 둘러싼 선원들을 모른 척하고 내가 일행들을 돌아 보자 여자들이 호오 하고 나 와 인간들,그리고 오크들-선원들 중에는 오크가 많았다-을 돌아보면서 물었다. "이상한 도시네,오크들과 같이 있는 인간들이라." 드워프들도 눈을 휘둥그레 뜨며 도끼자루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오크들을 노려보는 그 눈초리는 그들이 오크들에게 그다지 좋지않은 기분을 표 시하고 있는 것이지만 오크들은 별로 신경쓰지 않는 눈치였다. 뒤를 이어 사방에 먼지와 바람과 지저분한 쓰레기조각들을 휘날리면서 우리들의 얼굴을 찌푸리게 만들면서 엘프의 왕과 드워프의 왕이 도착했다. "대체! 여긴 왜 내려선 거야!" 신경질 적인 아크의 고함이 들려오는 순간 나는 마주 외쳤다. "밥 먹고 가자!" KUBERIN...... 종족의 아픔에 눈을 돌린 자 그 고대의 성망을 알고 있는 자 보시오,우리들의 미래를 저물어 가는 석양은 핏빛으로 물든 것을 7 "꺄아아아아아..쿠베린!" "어이! 쿠베린!" "쿠베린이잖아!" "어어,쿠베린,오랜만이 아닌가!" "어디갔었던 거야?" 사방 여기저기서 반가워 하는 목소리가 터져나왔다.나는 일행들을 이끌고 저자 거리를 좌악 횡단하고 있었다.애들은 내 옆을 팔랑거리면서 대장간앞에 앉아있 는 드워프들과 빵을 파는 아인족들과 장난감 가게를 하고 있는 호비트들과 힘쓰 는 일을 하는 오크들을 돌아보면서 낄낄 거리고 있었다. 드워프의 왕은 눈을 크게 뜨고 대장간 드워프들을 보았고 대장간 드워프들은 왕 이라는 것을 알자 마자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소리를 사방에 내지르고 있었다. "어이! 어이! 빨랑 와라! 왕이 오셨어!" "세상에! 왕이다!" "왕이라니! 이런 일이!" "왕이라니! 이건 백오십년만의 일이잖아!" 사방을 시끄럽게 하면서 작달막하고 두리뭉실하며 빵빵한 드워프들이 내달려 오 는 동안 드워프의 왕은 약간은 어처구니 없는 표정을 지으면서 십수명의 드워프 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작은 드워프, 큰 드워프, 노리끼리한 드워프,드워프 여 자, 드워프 꼬마..기타 등등 기타 등등. 엘프의 왕은 기가 막히다는 얼굴로 내 옆에 와서 자꾸 옆구리를 찔러댔다. "여기가 어디야?" "내가 놀던 곳이야." "희안한 도시잖아? 오크와,,,에엑! 트롤도 있잖아!" "있어." "어떻게 오크와 트롤이 인간과 같이 있는 거야?" "돌연변이 오크도 있고 돌연변이 트롤도 있는 거지 뭐." "하지만 그들은 살육의 즐거움을 아는 자들이야.그런 자들이..." "온후한 트롤도 있고 온순한 오크도 있을 수 있는 법이다. 피에 굶주린 엘프도 있을 수 있고 손재주 없어서 버벅거리는 드워프도 있을 수 있고..수줍어 하는 호비트도 있을 수 있는 법이지." 내가 그렇게 점잖게 말해주는 순간 드워프의 왕과 엘프의 왕이 동시에 말도 안 돼 하고 크게 외쳤다. 그러나 튜나는 낄낄거리고 엘레와 찰삭 붙은 채 요염을 떨고 있고 드워프들은 흥미진진해서 사방을 돌아보고 있으며 어느새인지 잡화점의 호비트들이 달려나 와 물건을 사라고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엘프들은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뜨고 사방을 두리번 거리고 있었는데 엘프 답게 이 일행 중 가장 촌스러운 자들이었다. 사슴집에 도착하자 마자 문이 발칵 열리더니 사라가 튀어 나왔다. "쿠베린!" 그리고는 나를 덥석 안고 부비 부비 하는데 이 기집애의 풍만한 감촉이 느껴진 다.오오,거의 일년만이니까 이 말라깽이 계집애도 조금은 성숙했구나. 그렇게 감촉을 즐기고 있는 동안인데 뒤에서 살기가 풍겨 나오길 시작한다.사라 는 뒤에서서 살기를 풀풀 날리고 있는 내 세 애인들을 바라보면서 나에게물었 다. "누구?" "내 애인." 그렇게 대답하고 나는 그녀의 이마에 키스해 주었다.벙벙한 표정이 된 사라의 손을 잡고 가게 안으로 들아가 보자 부루퉁퉁한 얼굴을 한 마미가 두툼한 허리 에 손을 턱하니 얹고는 날 쏘아보고 있었다. "마미!" 반가와서 내가 달려가 그녀에게 덥석 안기자 그녀는 나를 와락 부둥켜 안았다. 그리고는 갑자기 나를 뒤집어 놓고 엉덩이를 철썩 철썩 때리기 시작했다. "어디서 뭘했어! 대체 이게 얼마만의 일이야!" 그녀는 화를 바락 바락 내면서 나를 안고 이리저리 휘둘러댔다. 그 바람에 훌러덩 내 옷이 벗겨져 알몸이 하얗게 드러났다. 어이구,마미,삐쳤구나. 사라가 꺄악하고 물러섰지만 마미는 나를 더러운 앞치마로 둘둘 감더니 책하는 어투로 말했다. "옷은 또 왜 이 모양이야?" 그리고는 내 뒤에 줄줄이 경악과 놀람과 분노로 패닉상태에 빠져있는 내 일행들 을 돌아보고는 불만스러운 듯이 말했다. "뭐야? 이 일행들은?" "응,내 부하들이야,.밥먹고 갈거야." 나는 마미의 목에 매달려 키스해 주면서 말했다. "밥먹고? 또 어딜 가는데?" "아아.이상한 애들이 날 좀 보자고 해서 가는 길이야." "센 놈들이야?" "아니,별로,강아지 같은 놈들이니까 신경 쓸 거 없어." 내 말에 안도한 마미는 나를 탁자에 앉히고는 입을 적적 벌리고 있는 손님들에 게 손을 휘둘러댔다. "자자! 앉아! 다들 앉을 수 있을 정도로 넒으니까! 그렇게 벼락맞은 얼굴들 하 지 말고 앉으라구!" 떨떠름한 표정으로 다들 앉고 있는 동안 내 앞으로 스카가 다가왔다. 스카는 날 보고 날 덥석 안더니 내 목을 졸라대기 시작했다. "이 죽일놈! 어디서 대체 뭘 한거야! 소식도 없이이이이이이!" 그래봐야 숨도 막히지 않았기에 난 녀석의 허리띠를 잡고 이리 저리 흔들어 준 다음 내 옆에 줄줄이 앉아 호기심으로 눈이 타오를 듯 빛나고 있는 세 아이들을 가리켜 보였다. "애 만들었어." 그 순간 정적이 흘렀다. 스카의 입이 바닥까지 떨어졌으며 실제로 사라는 그릇을 떨어뜨렸고 마미는 그 자리에서 굳었다. "어떻게 만들었는데?" 스카가 벙벙한 녀석 특유의 모자란 얼굴을 하고 물었다. "어떻게 만들었을 거 같아?" "........네가 사라진건...겨,겨우....11개월...정도 라고 생각하는데?" 스카가 두 여인을 대변해서 더듬 더듬 물었다. "응,그러니까 그 사이에 애들을 만들었다구." ".....이 애들은 적어도 열살은 넘은 것 처럼 ..보이는데?" 얼 띤 목소리가 더듬 더듬 사라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녀의 몸매는 확실히 풍만해져 있었고 주근깨는 적어져 뽀얀 얼굴을 하고 있었 다.오오 매력적이 되었군,잠시 안 본 사이에. "그렇지만 이제 아직 한 살도 안되었는데."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애 셋을 마미와 스카 앞으로 내밀었다. 에이리가 눈을 크게 뜨면서 날 돌아보았다. "아빠,인간들인데 이 커다란 인간 여자는 강한 모양이네,아빠를 철석 철썩 때리 고." "아아,물론이지." 내가 말하자 애들은 존경의 눈빛으로 마미를 바라본다. 마미는 멍청히있다가 날 향해 물었다. "애들 엄마는?" "뒤에 서 있잖아? 이쪽은 미하라,이에르네,케이링이야. 나머지 셋은 다른 데 두 고 왔어." "......" 마미와 스카가 벙벙한 표정을 짓고 있는 동안 나의 묘인족들은 오로지 다크시온 만 빼고는 기가 막혀서 당장 그자리에서 쓰러져 죽을 것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 다.다크시온의 얼굴을 본 스카가 당장에 더듬으며 인사를 건넸다. "오,오랜만이오,다크시온." "아아.." 다크시온은 자신의 동족들의 경악을 깊은 동감과 이해로 주시하면서 스카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애들 이름은 뭐냐?" 마미가 침착성을 되찾고 나에게 말했고 나는 드레인,케논, 에이리를 차례로 소 개해 주었다.그녀는 애들머리를 쓰다듬고는 먹고 싶은 것은 하고 물었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살코기!" "나도!" "나도! 엘프들은 고기를 안먹어!" "편식하는 거 나빠!" "맞아 맞아!" 마미는 애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넋을 잃고 있는 사라에게 턱짓을 했 다.사라는 네에 네에 하면서 비틀 비틀 부엌으로 걸어갔다. "...과연 네 애들이군.." 스카는 그제서야 납득한 표정을 지으며 털썩 내 앞에 앉았다. "아,저희들은 원래 육식을 하지 않습니다.가능하시다면 물과 빵이면..아니면 우 유라든가.." 그렇게 여유있게 색마가 말하자 사라는 사라락 얼굴을 붉히면서 우유와 갓 구운 빵을 내놓았다.색마는 여전히 색마답게 미소를 지으면서 감사해요,아가씨 하고 말하고 있었다.그 옆에서 드워프들은 맥주를 더 더 하고 소리를 질러대며 먹어 대고 나의 동족과 조인족들은 서로 누가 많이 먹나 경쟁하듯이 와구 와구 먹어 대고 있었다. "대체 얼마나 굶은 거야?" 스카는 내게 반말하는 자신을 뚫어져라 찌릿 찌릿 바라보는 내 일족들을 스리슬 쩍 보면서 은근히 물었다. "아아.꽤 되었어,엘프의 손님 접대는 워낙에 볼품이 없어서." "이봐! 쿠베린! 너무하는데! 할 만큼 했지만 당신이 입이 너무 짧아서 그런거잖 아!" 튜나가 뒤에서 엘프의 왕을 대신해서 외쳤다. "내가 입이 짧으면 엘프의 입은 아예 없는 거겠군." 나는 먹어대면서 말했다. 나의 식성을 아는 마미는 통돼지 구이와 오리구이를 산더미처럼 내왔고 스튜는 아예 솥째로 두 솥이 나왔다.조인족과 묘인족은 마치 경쟁하듯이 먹어댔다.게다 가 어느쪽이나 모두 거구가 아닌 터라 보는 사람은 다들 넋을 잃고 있었다.드워 프도 못지않게 먹어대고 있었지만 이 고대의 먹보일족들에겐 당해낼 수 없는 것 이다.그들은 먹어대느라 바쁜데 문득 스카가 생각난 듯이 물었다. "근데 린과 가빈은 대체 어디있어?" "린은 죽었고 가빈은 잡혀갔다." 그 순간 스카가 굳었다. "에...?" 음식을 나르던 사라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그릇을 쥔 채로 멍청히 날 바라보았 고 맥주잔을 드워프들에게 주던 마미도 날 돌아보았다. 정적이 감돌았다. "린은 창공의 여신과 대지의 여신에게 돌아가고, 가빈은 지금 부터 구출하러 가 는 길이야." "뭐..뭐야!" 스카가 벌떡 일어섰고 사라가 그 옆으로 와서 따지듯이 소리를 질렀다.히스테릭 한 목소리였다. "거짓말! 거짓말! 린이 죽다니! 그앤 강한 애라구요!" 눈물이 그녀의 눈에서 샘솟듯이 새어나오며 나의 앞에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 다.마미도 완전히 경직된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었고 스카의 얼굴은 아예 잿빛 이었다. "누,누가 푸른 아인족을 죽일 수 있단 말이야?" 더듬 더듬 그가 묻는 동안 튜나가 뒤에서 소리쳤다. "대강 해둬! 쿠베린도 괴롭단 말이야!" 스카가 그녀를 돌아보자 튜나가 닭다리를 휘저으며 엘프답지 않은 태도로 말했 다. "그 사인족이란 것들이 해쳤어,린은 베델공작을 보호하다 죽었다구." "......" 스카는 멍청히 입을 벌리고 있었다.사라는 엉엉 스카의 등에 고개를 파묻고 울 기 시작했다. "너희들이 괴로워 해봐야, 쿠베린만큼 괴롭진 않을 테니까 그렇게 떠들지도 말 고 울지도 말라구!" 튜나는 그렇게 말하고 화난 듯한 얼굴로 고개를 홱 돌려서 사나흘 굶은 듯한 태 도로 닭다리를 계속 뜯기 시작했다.그 닭다리 뜯는 그 모습이 뭐가 이쁜지 엘레 가 그녀의 뺨에 키스했다. 침묵이 흐르는 동안 나는 배를 채웠다. 스카도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않았고 마미도 아무말도 하지않았으며 사라는 부 엌으로 달려가 버렸다. 흐느끼는 소리가 내 지나치게 예민한 귀에 모두다 들려왔다. "아빠! 아빠!" "재밌어!" "까르르르르..." 애들이 있어 다행일지도. 마미는 떠들어 대는 아이들을 온후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아이들은 밖으로 뛰어나가 놀고 있었다.골목에는 쿠베린이 애를 낳았대며를 연발하면서 튀어나오 는 사람들로 그득해서 바글거렸다. 구경꾼들은 모두 맥주잔 하나 씩 들고는 그 애들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저렇게 이쁜 애들은 첨봤네." "와아,이쁘다." "그런데 대체 애들이 왜 저렇게 커?" "지 애비 만하잖아?" "저 애들도 힘이 셀까?" "오오,,잘도 웃네.." 그들이 떠들어 대는 동안 나는 스카와 마주 앉아 있었다. "그럼....사인족의 왕이란 놈들을 만나러 가는 거야?" "응." "그럼 그들과 이야기를 잘 해서 델리암을 더이상 공격하지 못하게 할 수 있는 것인가?" "그건 몰라." "하지만 그들은 분명히 델리암을 공격하고 있고..." 스카가 뒤 이으려고 하는 순간 듀나시가 차갑게 말했다. "인간들의 일이 문제가 아니다." "에?" "인간들끼리 싸우는 것은 우리들의 문제가 아니야.본래 인간들끼리의 싸움이었 으니까." "하지만 인간들 사이에 사인족이라고 하는 막강한 종족이 없었다면 델리암도 이 렇게까지 밀리진 않았을 거야!" 스카가 막 반발하는 동안 나는 그것을 무시하고 말했다. "요즘 엘리야는 어때? 배가 모두 항구에 있던데?"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는 우울한 얼굴로 대꾸했다. "...항구는 거의 봉쇄 되었어." "전쟁으로?" "그렇다고 할 수 있지.우리들의 앞으로 적함선이 지나가는데 우리들은 멀건히 있을 수 밖에 없거든. 앞으로 나아갔다간 대포에 맞아 즉사야." "대포?" "응,화약을 이용한 거라는 데 엄청나게 큰 불덩이가 튀어나오는 무기야.그런 무 기는 처음 보았어.두달전에 그 놈들이 거대한 함선에 대포를 싣고 와서 이곳 엘 리야의 항구를 향해서 쏴갈겼어. 그러자 방파제 중에 반이 무너져 버렸다구.그 엄청난 위력에 모두 질려서 싸울 기력 같은 건 버렸지." "불덩이? 화이어볼 같은 건가?" 슬쩍 끼어든 아크가 자상한 백마법사의 얼굴을 하고 그다지 아름답진 않은 스카 의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비슷하긴 한대...뭐라 표현할 수는 없겠소,나도 그런 것을 본 것은 처음이니 까.하여간 내 보기엔 공성기로 만들어진 모양인지 그런 것이 성을 쏴 대면 성벽 이 와르르 무너져 버립디다." "에에? 그런 엄청난 무기가?" "마법무기란 말인가?" "몰라요,어쨌든간에 그게 거대한 배에 실려서 델리암의 항구도시들을 펑펑 쏴제 끼고 있는 중이니 나갈수도 없고...." 아크가 벌떡 일어서며 물었다. "항구에 그 것을 쏜 흔적이 있다면 내게 좀 보여주지 않겠소?" "....에? 그 흔적?" 스카는 날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뭐.그러지요..." 나는 깨어진 도시의 활력을 본다. 항구도시다운 활달함이 가셔버린 엘리야는 그저 우울한 도시가 되어 있었다.전 쟁은 질색이다.인간들의 전쟁은 즐거움을 앗아가 버린다. 왜 인간들은 전쟁을 하는 것일까? 그저 센 놈 몇몇이 나서서 끝장을 보고 서로 끝내버리면 왜 안되는 것일까. 선원들은 일거리가 없어서 거리를 오락 가락한다. 식식대는 숨소리를 내면서 거리를 활보하던 오크들은 더이상 일거리가 없는 지 구석에 오락 가락 모여들어서 수다를 떨고 있다.호비트들은 그다지 팔리지도 않 는 장난감들을 만지작 거리고 있고 드워프들은 무뚝뚝한 얼굴로 수염에 붙은 먼 지와 빵쪼가리들을 떼어낸다.인간들은 그저 그런 무심한 얼굴로 바다를 돌아보 고 한숨을 쉬며 또는 빵 값이 올랐다고 우울하게 중얼거리고 있다. 생선가게에는 신선한 생선 보단 말린 생선이 더 많다.생선가게 주인은 입을 내 밀고는 불쾌한 얼굴을 하곤 하늘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매양 들끓던 행상들이 적어진 거리는 꽤나 한산하다. 그 한산한 거리를 나는 아크와 같이 스카와 더불어서, 그리고 드워프들과 같이 걷고 있었다. "이건...마법이 아니야." 아크가 중얼거렸다.드워프들은 부서져 버린 방파제의 바위들을 주워다가 냄새를 맡는다 어쩐다 주물거리고 있었다. "화약을 넣은 ...." 드워프가 말했다. "이건 기계야." "금속의 힘이지." "제기랄...." 아크가 중얼거렸고 드워프는 흥미진진한 얼굴을 했다. "그 대포란 거 보고 싶어, 한두개 훔쳐올 수는 없는 건가?" "무지하게 무거운 놈이라는데.." 스카가 쓴 웃음을 지으면서 말하는 동안 철석 철석 파도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새파란 바다를 바라보았다. 반쯤 부서져 내린 방파제는 무참히 일그러져 있었다.마치 누군가가 두들겨 버린 거인의 거성처럼 그 흔적이 명료하게 그대로 남아 바다가 후려갈기는 것은 그대 로 맞고 있었다.다행히 날씨가 좋기때문에 파도는 높지 않았다. 그 덕에 아크는 공중으로 동동 떠다니면서 이리 저리 들여다 보고 있는 중이었 다.그 괴이한 모습에 항구에 사람들이 몰려나와 구경하고 있었다. 왠지 세상은 너무나 변해가는 듯 하다. KUBERIN...... 종족의 아픔에 눈을 돌린 자 그 고대의 성망을 알고 있는 자 보시오,우리들의 미래를 저물어 가는 석양은 핏빛으로 물든 것을 8 눈을 감고 손을 들고 천천히 상대를 잡아 당기고 그 다음에는 두 팔을 구부려 손아귀에 힘을 주어 끌어안는다.그리고는 머리를 약간 옆으로 틀어 입을 벌리고 상대의 것을 찾는다.그리고 나선 천천히 각자의 취향대로 움직이는 것이다.이때 손은 절대로 가만히 있어선 안된다.물론 그것도 취향 나름이겠지만 힘을 주던지 혹은 아래로 혹은 위로 스리 슬쩍 움직이는 게 좋다고 본다.그 다음에는 천천히 입을 벌려 숨은 내어 쉰다.그리고는 다시 시도해서 두번 정도 거듭한 뒤에 이미 준비해둔 두 손으로 상대의 껍질을 벗기는 것이다. "오랜만이야." "으으으으으응...." 마리아가 말했다. 나는 그녀의 침대위에서 사방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나의 여자들이 당장이라도 저 창문,혹은 지붕,혹은 문으로 닥쳐들지나 않을까 노심초사 하고 있었다.나의 신경은 팽팽하게 긴장되어 나의 왕년 무수했던 도전자들을 대항하던 그 때처럼, 혹은 그 때 이상으로 전신의 신경이 쏠려서 상대 여자들의 기척을 찾고 있다. "아아아아이.쿠베린." 마리아가 키스하면서 나에게 두 다리를 감았다. 난 다리에 키스하면서 귀로 신경을 쏟으면서 놀라운 능력으로 여자의 다리에 전 념했다.이건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다년간에 단련된 무수한 전투경험과 쌓 이고 쌓인 여자에의 깊은 관심과 기술에 기대지 않으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게다가 생각해 보라, 상대는 무시 무시하고 끔찍하고 살벌하며 가차없고 잔인하며 육식을 즐기는 사나운 손톱의 여인들, 그런 그녀들을 상대하면서 어찌 잠시도 긴장을 늦출 수 있단 말인가. 스릴 만점의 한 때가 바로 이때. 나는 원래 스릴을 즐기는 남자다. 원래 남자라면 모두 다 스릴을 즐기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스릴과 모험과 격 렬한 사랑이 바로 남자의 의무이자 권리이며 반드시 지나가야만 하는 통과의례 인 것, 장애가 있다고 멈추면 남자가 아닌 것이다! 그래, 아들들아,너희들은 종족 보전을 위하여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멋진 남자임을 증명하기 위해선 끊임없이 단련하고 수련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 이다! 내가 이렇게 불타고 있을 때 마리아도 물론 같이 나와 다른 방향으로 불타고 있 었다.문득 우리의 영웅적이고도 스릴넘치는 통과의례가 지나간 뒤에 마리아가 고개를 들고 나에게 물었다. "아이가 있대며?" "응.일곱." "와아아아아! 굉장해!" 그녀는 눈을 빛냈다. "모두 이뻐?" "무지 이쁘지." "하지만 애 엄마들은 ..? 엄청한 미인이라며?" "음 미인이고 말고." "그런데 나랑 이래도 되는 거야? 부인에게 돌아가야 하는 거 아닌가?" 나는 그녀의 손등을 잡아서 키스했다. "마리아,나는 본디 순간에 충실한 남자야." 그 말에 마리아가 눈을 껌벅거리더니 웃 하고 그 다음엔 파 하더니 그 다음에는 우화하하하하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정말! 엘리야의 쿠베린은 엄청난 남자야!" "음,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나는 겸손하게 말했다. "언제 돌아와? 또 떠날 거라며?" "응,떠나.하지만 이번에 일을 처리하면 곧 돌아올까나 하고 생각해. 내가 사는 곳에 대포같은 게 어슬렁 걸어다니면서 항구를 폐쇄한다는 것은 나에 대한 도전 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고 있거든." 그녀가 눈을 반짝 반짝 빛냈다. "그럼 저 대포를 처리할 수 있어?" "내가 못하는 것 봤냐?" "하나 있지." 그녀가 웃었다.갑자기 그녀의 얼굴에 그늘이 스쳐 갔다. "내게 아이를 줄 수는 없잖아." 나는 그 말을 듣고 멍청해졌다. 왕년 어떤 인간 여자가 나와 20년정도 같이 산 다음에 그런 말을 했었지.그건 나로서도 어쩔수 없는 일이다.묘인족의 아이는 묘인족사이에서만 나온다. 내가 멍청히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는 내 턱을 만지며 말했다. 쓸쓸한 얼굴이었다. "내가 가게차리면 도와준댔지?" "응." "옷가게를 할까 하고 생각해,쿠베린의 애인이라는 소문이 이미 퍼져있으니까 이 동네 사람들은 나에게 잘 대해 주지." 그녀의 팔이 내 목을 휘감았다. "당신에게 도움을 받은 사람들 모두가 당신을 알고 당신을 좋아해...잊지 말아 줘. 당신이 이 곳을 떠나도 사람들은 당신을 기억할 테니." 기묘한 울림이 있었다. "당신은 이곳에서 삼십년가까이 지냈다고 들었어. 내 나이 보다도 더 오래 오 래..보통의 인간의 남자보다도 상냥하게..." 이별하는 대사 아닐까? 이거.. 그녀의 입술이 내 것을 덮고 그리고 뺨으로 이마로 움직였다. 축축한 느낌이 뺨에 와 닿는다.우는 것인가? "떠나면....당신은 떠나면 우리와 달리 몇십년도 잠깐일 지도 몰라.그리고 그 때쯤이면 나는 보기 흉한 할머니가 되거나 뚱뚱한 아줌마가 되어 있을 지도 모 르지...." 그녀는 내 입을 손바닥으로 가리고 날 바라본다. 항구의 아가씨 답지 않게 희고 매끄러운, 건강한 냄새의 여자가 울었다. "그치만...당신은 내가 어찌되든 오래 오래 기억하겠지?" 그녀가 내 어깨로 머리를 기댔다. "나랑 전혀 어울리지 않게 되었어도 당신의 애인 중에 마리아라는 여자가 있었 다는 것을....수십년 수백년이 지나도 기억해 주겠지?" 축축한 수분이 어깨로 와 닿았다.무언가가 주루룩 흘러 내 가슴으로 떨어져 내 린다. "내가 14살때 창녀로 이 곳에 발을 디딘 이후로 ...당신이 내 애인이 되어 주지 않았다면 틀림없이...다른 곳의 창녀들처럼 쓰레기가 되었겠지." "그만해." 난 그녀의 어깨를 힘 주어 안았다. "마미를 보살펴 준 것처럼....나도 일생 보살펴 줄 순 없어? 여기서 살면서? 응?" 그녀가 날 빤히 바라보았다. "돌아온다고 했잖아." 나는 낮게 타일렀다. "내가 여행한 것이 이번이 처음도 아니고.." "하지만 당신은 달라 졌어! 쿠베린!" 내가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보자 인간의 여자는 내 팔뚝을 꽈악 쥐고 외치듯 말했다. "당신은 엘리야의 쿠베린같지 않아! 내가 몇년간 봐왔던 쿠베린 같지 않아!" 나는 한숨을 쉬었다. 여자란 왜이리 예민한 것인지. "꼬옥 돌아올 거라 약속해!" "아아,반년안에 돌아오지,걱정 붙들어 매라." "진짜?" "아아...걱정마라,걱정마." 나는 토닥 토닥 여자를 위로하면서 다시 그녀의 몸을 안았다.그리고 천천히 다 시 신경을 막 곤두세우려는 순간 쿵쾅거리는 소리가 아래층에서 들리더니만 갑 자기 왈칵 하고 문이 열렸다. 아앗! 아뿔싸! 나타난 것은 세 아들네미였다. "아빠! 이건 인간애인?" "아빠,아빠,엄마가 찾고 있어." "아빠 이런 곳에 있었네?" 마리아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는 동안 나는 아들들에게 수컷 특유의 동질성을 강조하며 말했다. "아빠가 여기있다는 걸 엄마도 아냐?" "엄만 몰라,우리들이 물어본 아저씨는 절대로 엄마들에겐 말해선 안된다고 했거 든." 굉장히 예리한 녀석...아니 왠지 동료애를 느끼게 하는 녀석이었군. 케논이 슬쩍 슬쩍 걸어오더니 마리아를 아래 위로 품평하듯 바라본다. "아빠,아빠는 여자라면 다 좋은 거야?" 나는 녀석의 머리통을 발바닥으로 누르고 옷가지를 챙겼다. 침대위에서 부시시 일어나오는 나를 보면서 아들들이 우르르 달려와 마리아의 앞에 눈을 반짝이면서 관찰하고 있었다. 누가 자식이 애물단지라고 했던가.명언이다. 인간의 말은 때때로 어처구니없게도 정곡을 찌르고 정론을 말하며 과녁을 꿰뚫 는 뭔가가 있을 때도 있다.그 엄청나게 많은 그럴 듯한 말에 비해 인간들이 너 무나도 형편없다는 것은 물론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나도 알며 기어다니는 벌 레들도 알고 있지만 말이다. 나는 마리아에게 키스하면서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는 아들들에게 말했다. "내가 전에 뭐라고 했지? 여자에 대해서?" "응,절대 한 여자를 사귀면서 다른 여자를 사귀고 있음을 알리지 말라고 했어." 에이리가 힘차게 외쳤다. 어쩐지 이 녀석은 나보다 더할 것 같다. "다른 수컷들은 아버지를 빼곤 다 말살 해야할 적이다!" 케논이 외친다. "아버지에게 경배하는 놈들은 그 놈이 수컷이라도 용납할 수 있지만 아버지에게 대드는 놈은 용서하지 말아라!" 좋아 좋아.드레인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나는 마리아에게 말했다. "아아,나중에 오지.그리고 가게 갖고 싶으면 마미에게 말해둬,아니면 스카에게 나. 알았지?" "아아...알고 있어." 그녀는 턱을 괸 채 종알대는 내 아들들을 바라보고 있다. 그 눈에 비치는 것은 내가 이제껏 보지 못했던 여자의 얼굴이 아닌 어미의 얼 굴,슬픈 듯한 부드러움을 가진 아름다운 얼굴. 나는 그녀의 입술에 아주 천천히 키스했다.그녀는 나를 바라보며 발랄한 여느때 의 얼굴로 손을 흔들어 보였다. "당신 아들들은 엄청난 미남자들이 될 거 같아." "흐,아비가 잘났는걸." 나는 두 아들을 옆구리에 끼고 깔깔 거리는 한 아들을 목마를 태운 채 밖으로 나왔다.사람들이 우리들을 보고 킬킬 웃는다. 무리도 아니지, 나의 이 조그마한 미소년형의 몸체에 열살은 되었음직한 애들 셋을 끼고 얹고 걷고 있으니 우스울 수 밖에. 하지만 화는 나지 않았다. 내 아이들은 지금 이 자리에서 뛰고 있고 내 아이를 가지지 못한 마리아는 이 거리에서 내 애인이라는 명칭을 가지고 살아갈 것이다. 인간의 여자는 자유롭지 못하니까 그것이 언제나 슬프다. "어디서 뭘했어요!" 악을 지르면서 얼굴이 일그러진 미하라가 골목 저 끝서 부터 달려온다. 두두두두 하고 소리를 내며 달려오더니 내 손에서 재빨리 애들을 빼내는데 옆에 서 아들 내미가 기특한 소릴 한다. "아빠는 우리랑 놀았어." "바닷가에서." "아냐, 산이었어." "아냐,그건 방파제야." "아니야,바닷가라니까!" "시끄러! 내 말을 들어!" "이 털털이 자식이 뭐라고 하는 거야!" "이 흰둥이 자식!" 세 아이가 순식간에 얽히는 동안 나는 어깨를 으슥해 보였다. 미하라는 애들과 놀았다구 하는 얼굴로 입을 다무는데 그 얼굴이 천진해 보여 나는 그녀의 허리를 안고 천천히 걸음을 재촉했다.제기랄...키가 안맞아. 그러나 별수 없지. "이봐,미하라." "네?" "넌 묘인족의 여자로 태어난 걸 감사히 여기라구." "오호호호호호호호호....물론이죠! 지상최강의 묘인족의 여자가 바로 나에요! 오호호호호호......" "....." 황혼은 아름답다. 쥐어짜는 석양의 여신에 손에 잣는 붉은 실이 하염없이 서편 하늘로 퍼져나가 곧이어 붉은 옷감이 완성된다.그리고 아리따운 검은 머리의 밤의 여신이 검푸른 머리칼을 드리우면 곧이어 그녀의 보석함이 열려 수백 수천의 별들이 빛을 발할 것이다. 인간은 죽고 엘프는 울고 드워프가 징징거리고 오크가 큭큭 거리고 묘인족이 깔 깔거리고 조인족이 쳇쳇 거리고 사인족이 으르렁대도.... 아름다운여신들이 관장하는 이 모든 세상은 매혹적으로, 그리고 잔혹하게도 굴 러갈 것이다.그게 자연의 여신이 내 놓은 가장 냉정하고도 엄정한 약속. KUBERIN...... 종족의 아픔에 눈을 돌린 자 그 고대의 성망을 알고 있는 자 보시오,우리들의 미래를 저물어 가는 석양은 핏빛으로 물든 것을 9 "이봐, 왜 묘인족은 모든 신들을 여신이라고 하는 거야?" 갑자기 드워프가 물었다. 드워프의 왕 넙죽이는 엘프의 왕과 같이 타고 가는 엄청나고도 끔찍한 실수를 교정하고는 나와 같이 에달라이마를 타고 있었다. 바람이 상쾌한 오후, 나는 대굴 대굴 에달라이마의 오색 찬란한 깃털을 가지고 장난하고 그 색색의 깃털을 아이들에게 붙여 주고 있었다. 갑자기 이렇게 노란 색을 많이 붙이고 보니 왠지 병아리 같군. 아이들은 블루키메라의 검푸른 털에 질렸다고 오색 찬란한 에달라이마에 타겠다 고 졸랐다.나도 뭐 블루키메라에게 엄청난 애착이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에달라 이마에 타고 있던 엘프 녀석의 엉덩이를 밀치고 이리로 올라탔다.그러자 여지껏 엘프의 왕과 같이 타고 가던 드워프의 왕이 갑자기 황급한 자세로 내 뒤로 올라 탔던 것이다.그가 짝달막한 다리를 허겁 허겁 휘두르면서 재빨리 내 뒤에 올라 탄 그를 보면서 엘프들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지만 뭐 손님은 왕이니 굳이 내가 블루 키메라에 타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한 지라 그대로 출발했던 것이다. 조정하고 있는 엘프는 나를 불안하게 힐긋 힐긋 뭐 마려운 놈처럼 바라보고 있 었다. "어서 잘 날아봐." 나는 느긋하게 길게 누워 말했고 내 앞으로 드워프도 그 짧은 다리를 주욱 펴고 느긋하게 앉았다.그리고는 후우 하고 안도의 한 숨같은 것을 내 쉬었다. 그의 주변에 있는 그와 비슷한 두리뭉실 동글 동글한 그의 일족들도 안도의 표 정 비스끄무리한 것을 지어 보인다. 대체 뭐야? 애들이 다다다다 뛰어다니면서 노는 것을 허허허 하고 드워프의 왕이 미소해 보 인다. "아주 활달해서 좋군." "맞아,그러네요.정말." 드워프의 왕과 드워프의 장로가 동시에 뭐라 중얼거리고 있다.수염을 매만지고 있는 품이 여전히 그 두리 뭉실이라 냄새가 아니면 구분하기도 힘들겠군 하고 하품을 하고 있는데 드워프의 왕이 재촉했다. "이봐,이봐,쿠베린왕, 분명히 물었잖아! 대답해." "뭐라고 물었는데?" "왜 모든 묘인족의 신들은 모조리 다 여신이냐고." 나는 그 질문을 멀건히 바라보았다. "누가 묘인족의 신들이 다 여신이래?" "당신 입으로 그렇게 말하잖소?" 드워프왕이 평소에는 보이지않는 예의로 묻고 있다. 나는 옆에 앉아 머리를 다듬고 있는 케이링의 허리를 발끝으로 툭툭 쳤다. "이봐,케이링,묘인족의 신들이 모두 여신이냐고 묻는데?" 케이링이 씨익 웃으면서 그 아름다운 머리칼을 휘날려 보인다.드워프들은 그 아 름다운 미모를 멍하니 넋을 잃고 바라보고 말았다. "모든 신들은 다 남신이에요! 무슨 소릴 하시는 거에요? 태양의 신,대지의 신, 그 넓은 가슴으로 우리를 맞이해 주시는 창공의 신, 자연의 아버지,바람의 신, 폭풍우의 신, 다 남신이라구요!" 드워프들이 벙벙한 표정으로 날 바라본다. 나는 트릿한 표정으로 드워프들에게 대꾸해 주었다. "나에겐 여신뿐이야." "....." 드워프 왕이 드워프다운 집요한 시선, 왕방울 눈에 두툼한 주먹코에 그리고도 굵직한 수염오라기를 내 얼굴에 들이대면서 조용히 물었다. "다시 말해서 묘인족 남자들은 모조리 여신이라고 하고 묘인족 여자들은 모조리 남신이라고 하는 거란 말인가?" "그렇게 되지." "........" 드워프는 침묵했다. 그들은 그 간단한 진리를 이해 하지 못했던 모양이군. 세상은 암컷과 수컷으로 이루어져 있지않은가. 내가 남자니까 남신에게 비는 것 보다야 당연 여신에게 비는 것이 더더욱 친근 하다는 사실을 왜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모든 상생의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을 어이 하리. 본디 드워프는 짧기 때문에 멀고먼 곳을 볼 수 없는 것이다.그러나 묘인족은 잘 뛰고 키가 크니까 당연 멀리 볼 수 있다.물론 조인족처럼 볼 수는 없겠지만 허 약해 빠진 조인족의 좁쌀만한 도량보다 우리 쪽이 훨씬 넓고도 굵은 시야를 가 졌다고 나는 자신할 수 있다. 드워프의 왕이 등짝에 짊어멘 보따리를 주섬 주섬 풀더니 갑자기 터억 하니 왠 항아리를 내 놓고는 그것의 뚜껑을 열어 발칵 발칵 마시기 시작한다.그 향기에 이끌려 나도 모르게 엎드린 자세로 그의 몸 가까이로 전진했다. 두 눈이 마주치자 내가 시익 웃었다. 드워프도 씨익 웃는다. "마셔." 드워프의 왕이 한 동아리를 내게 건내주었고 나는 그 향기로운 드워프제 머루주 를 들이켰다. 오오오오오 정말 맛있다. "저도 한 모금..." 옆에서 비슬 비슬 여자들이 내 몸에 엉기면서 입을 내밀기에 하는 수 없이 내 주었다.그녀들은 휘휘 돌려 마시더니만 뒤에 줄지어 침을 줄줄 흘리고 있는 내 동족들에게 손짓했다. "다크! 듀나시! 바스티앙! 데인!" 녀석들도 슬금 슬금 전진해 드워프 앞까지 다가온다. 그리고는 그들을 쏘아보기 시작했다. 항아리를 안고 마시던 드워프왕의 동료 네 명은 그들의 엄청난 살의의 시선을 받으면서 머루주를 목안까지 흘러내리질 못하고 우물 우물 거렸다. "역시 드워프는 엘프보다 훨씬 낫다니까!" 내가 으하하하 웃으면서 항아리를 내려 놓자 드워프왕이 히죽 웃었다. "아아,살았다.아까 부터 마시고 싶었는데 말이지...엘프의 왕이 좀 까탈스러워 야 말이지. 항아리를 열려고 하기만 하면 도끼눈을 하고 날 쏘아보는데...엘프 와 원수지면 어디 당대에 해결이 되어야 말이지...으하하하하하하.." "맞아,맞아,어디서 마땅한 안주라도 먹었으면 좋겠는데." "있어요." 미하라가 왠 보따리를 풀더니 그 안에서 훈제햄덩어리를 꺼내 놓았다.돼지 한 마리를 통째로 만든 듯한 훈제 햄과 소시지를 보고 내가 눈을 크게 뜨자 옆에서 이에르네가 미소해 보였다. "그 마미라는 인간 여자가 당신을 위해 싸주었어요." "오오,..과연 마미야!" 나는 신나게 소시지를 꺼내놓고 손톱을 하나 꺼내어 토막을 쳤다. 드워프의 왕은 내 손톱을 보자 눈을 빛내면서 만져봐도 되냐고 난리를 친다. "오오! 그게 소문의 그 묘인족의 손톱이야? 만져보자구! 이런 거 하나 나도 있 었으면 바랄 게 없겠다!" "흐, 아무나 갖는 게 아니지." 나와 드워프의 왕이 소시지를 입에 물고 술을 퍼마시고 있는 동안 내 일족들과 드워프들 간의 눈싸움은 거의 처절할 지경이 되어 있었다. 드워프들의 시커먼 얼굴은 파래지고 있었고 내 일족 사내들은 모두 눈이 옆으로 찢어져 살기를 풀풀 날리고 있었다. 그 꼴을 보고 있던 드워프 왕이 한숨을 내 쉬며 조용히 말했다. "이봐, 나눠 줘라. 잘못하면 잡아 먹히겠다." 그 말이 들리자 드워프들은 한숨을 내쉬면서 자기들의 술항아리를 내 일족들에 게 건네주었다.내 일족들은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술항아리를 받아들여 발칵 발 칵 마시기 시작했는데 그 다음에서야 비로소 모든 살의는 사라지고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술을 마시면 또 노래가 빠질 수 없지. 드워프의 왕이 자기 배를 두들기면서 노래를 시작했다. 내 이름은 킬라이 에뮬라트 케로오니 멋진 드워프 우오 우오 우오 우오 세상에서 최고가는 멋장이 드워프 킬라이 킬라이 이 이름 영원하라 나의 멋진 이 수염 나의 멋진 이 솜씨 나의 도끼에는 상흔이 수백개 나의 손끝에는 불꽃이 차오른다 우오 우오 우오 우오 "멋지군!" 나의 감탄과 달리 다른 드워프들은 무척 괴로워하고 있었다. 내 일족들도 못지 않게 괴로워 하고 있다.소환수를 몰던 엘프들은 새파랗게 질려서 딸꾹질을 시작 한다. 멋진 반응이다. 나는 그 보답으로 내 노래를 들려주었다. 호오호오 내 이름은 쿠베린 성은 없다 그리고 인간도 아니다 그런 종족으로 오해하면 정말 슬프다 나는 멋진 묘인족 지상 최고 최강의 멋진 분 나는 쿠베린 묘인족의 왕 호오 호오 "멋지다!" 드워프의 왕은 무릎을 쳤다. 그는 눈물을 글성이면서 내 손을 붙잡고 말했다. "그 간결함이야 말로 진짜 사내다움 강건함이 있어! 그거야 말로 진짜지!" "물론이지, 이 강건하고 간결한 노래야 말로 노래 중의 노래라고 할 수 있어!" 나는 드워프의 왕에게서 진한 우정을 느꼈다. 옆에서 술마시던 놈들이 토하든 뒤집어 지든 심지어는 소환수를 몰던 엘프가 딸 꾹질을 시작하던 알 바가 아니다. 이 몇백년만에 느끼는 진한 우정이란 말인가! 이렇게 진한 우정을 느끼면서 엘프들의 눈총을 받으면서 그리고 술에 취한 주정 뱅이들의 소릴 들어가면서 결국 우리들은 랜달 브리거에 도착했다. 랜달 브리거의 잿더미가 된 성벽과 인간들의 집들이 눈앞에 드러나자 마자 소환 수는 아래로 내려 섰다. 몇번이나 비와 바람에 흘려가버린 잿더미의 인간의 도시는 원래 무엇이 있었는 지 알수 없을 정도로 이미 대지의 일부분이 되어 있었다. 지나간 여름의 왕성함이 그 무너진 방책사이로 꽃과 풀을 피워 올리고 그늘진 음지에서는 버섯들이 솟아나온다.시체가 있었던 자리에도 시뻘겋게 녹이 슬어버 린 칼날들 사이에도 무성한 풀들이 솟아나 제멋대로 차가운 바람에 맞추어 누렇 게 변해가고 있었다. 내가 코를 킁킁거리고 조인족들이 휘휘 공중을 내 돌면서 주변을 확인하는 동안 팔짱을 낀 튜나가 물었다. "왠 술을 그렇게 마셨어요? 지금이 얼마나 중요한 때인데!" 조인족의 여왕은 나와 드워프왕을 돌아보며 쓴 웃음을 지었지만 그 긴장된 얼굴 에서 인질로 잡혀있는 일족들을 걱정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물론 걱정되겠지,조 인족은 수도 그다지 많지않고 게다가 전사족속도 아닌 자들이 잡혀있을 경우는 더더욱이 걱정될 것이다. 게다가 상대는 사납기 짝이 없는 사인족 패거리인 것이다. "왕." 사방을 수색하고 있던 바스티앙이 긴장한 엘프들의 무리를 헤치고 나에게 다가 왔다. "웬 녀석이 다가옵니다." 데인이 재빨리 손톱을 꺼내들고 우왕좌왕하는 엘프들을 밀치고 전진했다.그 뒤 를 이어서 미하라가 뒤따른 순간 듀나시가 짧게 물었다. "오는 놈은?" "처음 보는 족속,그러나 사인족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의 긴장과 달리 낯익은 냄새를 느끼고 나는 미소했다. "물러서 봐라." 그 말에 다크 시온이 앞 장서서 활을 재고 있는 엘프들의 앞을 막아섰다. 그러자 착착 하고 걸어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수풀사이를 주섬 주섬 헤치 고 누군가가 나타났다. 노랗고 커다란 눈동자,약간 튀어 나온 송곳니, 갈색 피부. 왜소한 소년의 모습 이 그 자리에 나타나자 모두 순간적으로 침묵했다. 그러나 그 순간 나타난 놈은 갑자기 다크를 보고 그 다음에는 휘휘 고개를 젓더 니 내 얼굴을 발견했다.그리고는 커다랗고 주욱 찢어진 호안석 같은 눈에 물을 퍼올리더니 뺨아래로 흘려보내기 시작했다. "으으으으어어어어어어어엉" 그 괴기한 소리가 숲안으로 퍼져나가는 순간 녀석은 내 앞으로 곧장 돌진했다. "쿠베에에에리이이이인!" 몇몇 녀석들이 막으려고 했지만 다크가 제지했다.녀석은 바위위에 걸터앉은 내 앞으로 돌진하자 마자 내 품안에 몸을 던졌다. 퍼억..으음..조금 소리가 크게 났군. "아으아으아으아으..." 뭔 소리인지 알수 없는 소리를 녀석이 마구 마구 지르는 순간 나는 녀석의 뒷덜 미를 잡아서 그 얼굴을 마주 들었다. "어이,가빈,셀레네는?" "아우아우아우.." 설마 혀라도 잘렸나 싶어서 녀석의 입안을 들여다 보려는 그 순간 뭔가 이상한 것이 눈에 띄였다. 나는 손가락을 멈추고 녀석의 머리통을 잡았다.녀석의 눈물이 아래로 줄줄 흘러 내려서 내 허벅지를 완전히 물바다로 만들고 있는 동안 나는 뭐가 이상한지 알 아냈다. 녀석의 쫑긋했던 두 귀가 없어져 있었다. "이건 뭐냐?" 나도 모르게 낮게 으르렁거렸다. 내 옆에 있던 튜나가 재빨리 뒤로 물러서서 가빈의 모습을 보았다.그리고 내 옆 에 있던 드워프들이 주춤 주춤 뒤로 물러선다. "이게 뭐야?" 나는 녀석의 머리통을 잡고 외쳤다. 온몸을 관통하는 분노가 치밀어 올라 불덩이가 뱃속서 부터 튀어 나올 것 같았 다.녀석의 머리칼은 피로 엉겨 있었고 녀석의 귀가 있던 자리엔 구멍만이 남아 있다.이대로라면 잘 들리지도 않을 것이다. 물론 머리칼이 자라 덮으면 그만이겠지만 이런 짓을 감히 해? "어떤 자식이 이런 짓을 했어?" 가빈은 내 얼굴을 보고 공포에 질렸다.나는 녀석의 머리통을 잡은 채 외쳤다. "어떤 자식이 이 따위 짓을 했어!" 일족들도 드워프들도 조인족들도 엘프들도 모두 뒤로 물러섰다.내 주위로 마치 원이 생겨난 것 처럼 모두 물러서자 사방이 고요해 졌다.풀벌레 소리도 바람부 는 소리 조차 줄어들어버린 것같은 침묵이 주위로 내려앉았다. "으...으어어...놈들이...놈들이 나...내가 이상하게 생겼다고..." "지들은 잘생겼다고 하데! 더럽고 추한 누렁털뭉치 같은 것들이 잘생겼다는 거 냐!" 나는 황급히 가빈의 엉덩이를 만져보았다. 다행히 추욱 늘어진 꼬리는 그대로 붙어 있다. "또 어딜 잘렸어?" ".....손톱이요." 뭉툭해진 손톱을 가빈이 보이자 마자 나는 빠득 이를 갈았다. "또?" ".....없어요.귀는 두 개 다 잘렸는걸요..."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는 녀석을 쥐고 나는 그 애를 옆에 선 다크에게 집어던졌 다. "귀 하나에 사인족 스무명! 손톱하나에 사인족 열명! 기억해 둬라!" 내가 악을 쓰자 마자 일행들이 일제히 귀를 붙잡았다.숲안의 공기가 일렁이고 출렁였다. 내가 벌떡 일어서자 당황한 일족들이 일제히 나를 주시했다. "우오오오오오오오오오........" 내가 살기에 찬 외침을 터뜨리자 그 살의와 분노에 이끌려 피가 끓는 일족들이 일제히 내 뒤를 따라서 소리쳤다. "우오오오오오오오오오......." "우오오오오오오오오오..." "들어라! 사인족의 왕! 묘인족의 심기를 어지럽히면 종족의 멸망으로 간다는 것 을 여기서 보여주겠다! 나 묘인족 왕의 이름으로 말이다!" 살기와 솟구치는 분노가 전신을 휘감고 돌았다. 눈앞이 붉게 핏빛으로 달아오른다.전신의 털이 솟구치면서 살기로 온몸의 근육 들이 고함을 내지른다. 손톱이 튀어 나와 허공을 찌르고 있다. 포렌이 다쳤다. 린이 죽었다. 가빈은 귀가 잘렸다. 이 모든 짓을 한 것은 사인족이었다. 사인족이 멸망하지 않으면 이 분노는 풀리 지않는다.감히 수백년 이래 이 땅위에서 가장 강한 자라 불리는 나에게 도전한 죄는 절대로 용납치 않는다.묘인족이 이 땅위에 생겨난 이래 우리에게 감히 도 전한 일족은 단 하나 거인족 뿐이었다.그리고 그 거인족은 멸망했다. 지금 사인족이 지상위에서 멸망할 것이다! 바로 이 손 아래서! KUBERIN...... 종족의 아픔에 눈을 돌린 자 그 고대의 성망을 알고 있는 자 보시오,우리들의 미래를 저물어 가는 석양은 핏빛으로 물든 것을 10 우는 아이를 달래는 법을 몰라서 절절 매는 나에게 언젠가 나의 형이 말했다. "쿠베린, 너는 참 서툴구나." 화를 내다 못해 난리를 치고 있을 때 어머니가 말했다. "쿠베린, 너는 참 어리석구나." 잡은 짐승의 가죽을 벗기고 있을 때 아버지가 말했다. "쿠베린,너는 참 솜씨도 없구나." 그러나 그들 모두가 몰랐을 것이다. 내가 왕이 되어 그런 일을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는 것을 말이다. 울다 지쳐 잠이 든 가빈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동안 아크가 무심히 중얼거렸 다. "우린 회의를 하러 왔다는 것을 잊은 게 아닌가?" "닥쳐.이 얼굴만 희여멀건한 늙은이!" "억! 그런 심한 말을!" 아크가 뒤돌아서서 나에게 저주를 걸든 아니면 바닥을 긁으며 괴로워 하든 혹은 엘프의 왕에게 달려가 울며 그 무릎에 몸을 던지든 알 바가 아니다. 나는 엉덩이를 차디찬 바위에 얹고 있어 기분이 몹시 나빴고 내가 입은 튜닉자 락이 가빈의 눈물에 젖어서 더더욱 기분이 나빴으며 화풀이 할 놈들을 아직 찾 지 못해서 더더욱 기분이 나빴다.게다가 내가 기분이 나쁜 것을 보곤 애들이 겁 에 질려있었기때문에 더더욱 기분이 나빴다. 날씨는 을시년스레 바람이 줄줄 불고 숲의 여신은 앙탈 부리는 계집처럼 종알거 리고 있다.기분나쁘게 두툼하게 생긴 반달도 아닌 것이 그렇다고 보름달도 아닌 것이 떠서 내 머리위에 오락 가락하며 창백하고 희여멀건한 빛을 뿌리고 있는데 그것도 기분이 나쁘다. 게다가 드워프들이 피운 모닥불은 그다지 화력이 강하지 못해서 기분 나쁘고 옆에서 떠들어대는 엘프들의 주절거리는 소리가 기분 나빴 으며 아까 먹다남은 소시지를 모조리 먹어버린 드워프들과 내 일족들에게 화가 났다. "어서 어서..." 내가 화를 내고 있는 것을 보면서 이에르네가 재빨리 식사를 서두르라고 명령했 을 때에는 이미 데인과 바스티앙이 잔뜩 사슴을 잡아다가 내장을 쏟아내고 가장 맛있을 부위를 골라 굽고 있는 중이었다. "드세요." 미하라가 교태를 떨면서 내 옆에 와서 고기 구운 것을 내밀었다. 나는 한 손으로 구운 사슴넙적다리를 잡아 우적 우적 씹으면서 안도한 나머지 쓰러진 듯 자고 있는 가빈의 몸통을 들어서 옆에서 우거지상을 하고 있는 아크 에게 던졌다. "이 애 치료해." "쓸모없는 흰둥이 늙은이 마법사에게 뭘 부탁하냐?" 아크가 그렇게 말할 때 나는 그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손가락을 그녀석의 눈 앞에 들이대고는 그 자리에서 가운데 손가락의 손톱을 꺼내보였다. 탓 하고 손톱이 튀어나오는 순간 아크의 앞 머리칼 몇개가 주르르 잘려져 흘러 내렸다. "....할께...귀도 새로 붙일까?" "붙일 수 있다면 붙여." "흐...붙일 수 있다면이라니? 날 무시하는 거....억!" 그가 그렇게 말하는 그 찰나 갑자기 그의 몸이 화악 빛에 휘감겼다. 그리고 그의 몸은 바들 바들 떨리며 뭘 잘못먹고 경기 일으킨 애 마냥 푸들 푸 들 떨기 시작했다.그리고는 사지가 비비 꼬이더니만 한 참 동안 그렇게 떨고 있 던 그의 몸안 깊숙히 부터 붉은 빛이 퍼져나가기 시작한다. 모두다 놀라서- 드워프들만이- 막 그에게 달려들때 그의 온 몸을 휘감았던 빛이 화락 사그라들더니 그 자리에는 흰 로브를 걸친 아름답고 요염한 한 명의 아가 씨가 등장해 있었다. "오호호호호호호...오랜만이야! 쿠베린!" "시끄러,그 애나 고쳐." 피곤하니 그 쟁쟁거리는 목소리도 듣기 싫다. 내가 아무리 여자를 좋아해도 아 키나는 좋아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지 오래다. 제정신이고 정상적인 아리따운 아 가씨들이 널렸는데 이런 밤에만 나타나는 괴이쩍은 아가씨를 내가 뭐하러 원한 단 말이냐? "퉁명스럽긴,화가 났구나? 오호호호호.. 백마법사인 아크는 너무나 훌륭하고 아 름다운 수법으로 이 아이를 깨끗하게 고쳐줄 거야,그러니까 걱정하지마.쿠브는 상냥하기도 하지..." 그녀의 긴 손이 내 목에 휘감기려는 그 순간 이에르네가 소리를 빽 질렀다. "대체 저 요물은 뭐야!" 그녀만이 아니고 미하라와 케이링도 눈을 부릅뜨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아아,그렇군, 처음 보았겠지. 드워프들의 눈도 한껏 커져있다.드워프의 왕은 듣긴 했지만 실제로 변한 것을 본 것은 처음이었는지 눈을 휘둥그레 하고는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이쪽을 주시 하고 있다.조인족들도 흥미진진한 눈초리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태연자약한 것은 오로지 엘프들 뿐인데 엘프의 왕은 한 숨을 쉬면서 조용히 말했다. "아직도 그 모양인가...." 그가 탄식하는 동안 오호호호 하고 웃음을 터뜨리는 아크-아키나는 손을 흔들어 보이면서 말했다. "어쩔 수 없어요.그게 바로 우리의 숙명인 걸요,자아,일단은 이 쿠베린의 아이 부터 치료를 시작하겠어요." 아크가 낮,아키나는 밤이다. 오늘은 왠지 아크가 오래 있었다.아마 엘프의 왕옆 에 있다보니 기분이 좋아서 오래 남아있었는지도 모르지,흥.변태 자식. 그녀가 가빈의 앞에 단정하게 앉는 동안 나는 내 아이들이 둥글 둥글한 눈으로 아키나를 바라보는 것을 손짓해서 불렀다.그들 모두가 이 신기하기 이를 데가 없는 변태를 멀건히 관찰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케논은 드레인과 함께 그녀의 등을 쿡쿡 나뭇가지로 찔러보기라도 하 고 있다. 마법을 엎어진 가빈에게 걸려던 아키나는 이를 바득 바득 갈면서 외쳤다. "애들 좀 데려가요!" 미하라와 케이링이 손짓하면서 두 애들을 이끌고 나와 이에르네에게로 데려왔지 만 애들의 호기심 어린 눈은 그녀의 몸에서 떠나질 않고 있었다. 호기심은 영리하단 뜻이지,그럼...역시 내 애들은 영리한 모양이군. 이에르네는 혀를 내 두르며 나에게 다가오며 물었다. "정말...이상한 인간이군요." "응...원래 인간이란 정상적인 물건이 아니거든." 아이들을 안아올리고 있는 동안 나는 천천히 몸을 부풀렸다. 곧 전투가 있을 지도 모르고 한 편으로 말하면 당분간은 아이 모습을 할 필요도 없다.사인족의 아가씨를 꼬실 계획은 없으니까 차라리 큰 체구가 운신하기 편하 기 때문이다.내가 커지자 급히 다크가 달려들어와 옷가지를 건넸다.소년용의 옷 을 집어 던지고 다시 큰 옷을 걸치는 동안 다크는 나이와 지위에 어울리지 않게 내 시중을 들었다. 한 번 시중인을 했을 뿐인데 다크는 이상할 정도로 나에게 정중했다.물론 나에게정중하지 않은 놈은 가만 놔 둘 수 없긴 하지만 말이다. 키가 커지면 땅의 냄새가 덜 난다.그리고 허공의 냄새가 코끝에 다가와 살랑이 면서 나를 건드리고 지나간다. 위와 아래,키가 크고 적음에 따라 세상이 달라 보인다.그러니까 드워프와 우리 들도 세상이 다른 것 이겠지,조인족과 우리가 다른 것처럼 다른 세상을 바라보 고 있는 것이다. 부스럭 소리가 들려온다. 일족들이 스리 슬쩍 수풀을 경계하면서 좌우로 흩어졌고 엘프들은 큰 귀를 펄럭 이듯 치켜 올리며 활에 화살을 재고 있다.조인족들은 공중으로 날아올랐고 드워 프들은 도끼를 들쳐 메었다. 사각 사각 소리가 들리자 마자 수풀속에서 두 명의 사내가 나타났다. 제멋대로의 갈색머리에 노란 눈,그리고 키가 큰 두 명의 사내는 두 손을 늘어뜨 린 채 곧장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죽여라." 내가 잘라 말하는 순간 그들을 향해 바스티앙과 데인이 덮쳐갔다. 엘프의 왕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그들의 눈에 공포와 놀람이 명확히 떠오르기 도 전에 그들의 목이 그들의 어깨위에서 사라져 피를 뿌렸다.그들의 머리통이 바닥으로 데굴 데굴 굴러떨어졌다. "무슨 짓이야!" 비명처럼 엘프의 왕이 소리를 질렀다. "이게 무슨짓이야! 사인족인지 아닌지도 확인하지도 않고!" "사인족의 피냄새야." 난 잘라 말하고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데인과 바스티앙은 손톱에 묻은 피를 할작 할작 핥으며 살의를 드러내고 웃고 있는 것을 비롯해서 긴장한 드워프들을 모른 체 하고 나는 말했다. "나와라." 침묵이 흘러내렸다. "지독하군,사자를 죽이다니."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대꾸했다. "내가 말한 것을 무시하고 걸어들어온 놈이 미친 놈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팔짱을 낀 채 말하자 천천히 어둠이 움직였다.어둠속에서 노랗고 날카로운 빛을 띈 광구가 다가와 우리들의 시야로 나타났다. 나타난 것은 그 때의 그 녀석, 사인족의 왕이었다.그의 얼굴에는 예전에는 없었 던 길고 긴 흉터가 자리잡아 있었고 눈은 애꾸가 되어 있었다.키는 나보다 약간 작은 정도지만 사인족 특유의 구부정한 자세가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었다. 무기는 예년과 달리 없었다. 빈손을 아래로 늘어뜨리고 야만스레 빛나는 한 개의 눈을 들어 날 똑바로 바라 보고 있었다. "우리 일족들을 놔주시오!" 조인족의 여왕이 말했다. 처음으로 사인족의 왕의 시선이 조인족의 여왕에게 닿았다.여왕은 날카로운 목 소리로 외쳤다. "일족들을 해친 당신은 용서받지 못할거요!" "용서? 사인족이 조인족 따위를 죽였다고 해서 용서 따위를 누구에게 받는단 말인가? 나는 사인족의 왕이다! " 그가 차갑게 말하는 순간 나는 조용히 말했다. "용서해 줄 생각은 조금도 없다." 내 말에 이 시건방진 노란 애꾸눈이 대꾸했다. "묘인족이 용서란 말을 아는 종족이란 말야?" "너 말잘했다!" 내가 막 나서려는 순간 갑자지 조인족의 여왕이 튀어 나왔다. "기다려요! 먼저 우리 종족들에 대해 말해주세요! 우리 일족들은 어디있지요?" "....알고 싶다면 따라와라." 노랑 밤탱이 같은 외눈박이 놈이 그렇게 빈정거렸다.뚫린 입이라고 그렇게 지껄 여대는 저 놈의 남은 한 눈을 쿡 찔러 터뜨려 주고 싶은 기분이 무럭 무럭 내 속에서 자라나와 밖으로 튀어 올라올 것같다. 그러나 내 기색을 눈치 챈 조인족의 여왕이 아름다운 흰 손을 들어서 내 팔을 잡았다. "부탁합니다." 그 아름다운 여자의 눈을 보고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허긴, 잠시 동안 살려두는 것도 나쁘진 않아.사인족놈들이 뛰어야 벼룩이고 날 뛰어 봐야 날파리다. 저 놈들을 없애기로 마음 먹은 이상 서두를 것은 없다. "음하하하하..갑시다." 내가 그녀에게 그렇게 말하는 순간 놀란 듯 화난 듯 쳐다보는 내 여자들을 무시 하고 나는 주욱 걷기 시작했다.그리고 뒤로 한 걸음 물러선 사인족의 애꾸눈에 게 상냥하게 말해주었다. "이 아름다운 아가씨가 네 놈의 더러운 엉덩이를 보고 싶어하시는 군." "뭐야?" "말귀를 못알아듣는군, 어서 안내하란 말이다!" 그 말에 녀석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리고는 죽어라 하는 소리와 함께 막 튀어 오르려고 했다.그러나 그 때 뒤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터졌다. "기다려요!" 등장한 것은 작은 키에 파란 머리칼을 가진 여자였다. 그녀는 작은 단검을 허리에 차고 있었는데 고양이처럼 작은 덩치에 비해서 몸안 에서 풍겨나오는 기운이 범상치 않다.몸은 고양인데 기운은 오우거다. 그 오우거 아가씨가 파란 단발머리를 흩날리면서 날 바라보았다.눈은 놀랍게도 금빛,아인족도 이런 모습의 아인족은 없다. 게다가 짧긴 하지만 마법사의 로브를 걸치고 있지 않은가. "인간들과 싸우자고 하더니 인간과 같이 있다니!" 뒤에서 드워프가 외쳤다. 그러자 파랑 머리 여자애가 말했다. "내가 인간으로 보여요?" 흥 하고 그녀가 미소해 보이는 순간 나는 그녀의 가느다란 두 팔뚝에서 일렬로 보이는 비늘을 발견했다.푸른 비늘이 두 줄 그녀의 손등까지 이어져 있다.마치 문신을 한 듯 보이는 그 비늘은 용의 것 처럼 보였지만 그 크기는 용의 것이라 기 보단 마치 잉어나 뭐 그런 물고기의 것 처럼 보인다. "노랑둥이 애꾸 사인족에 퍼렁이 물고기 아가씬가.." 내가 중얼거리자 그녀는 날 홱 돌아보고는 송곳니가 돋보이는 입술로 미소해 보 였다. "당신이 쿠베린이군요,소문을 듣긴 했어요.묘인족의 바람둥이 임금님." "호오." "넌 뭐냐? 너의 말 한마디로 몸을 멈추는 것을 보니 아마도 네가 사인족의 왕인 모양이지?" 그 말에 갑자기 소녀가 홱 금빛 눈을 번뜩이며 외쳤다. "그만해요! 그런 소린! 나의 왕을 모독하지 말아요!" 나의 왕? 헤에 헤에 사인족의 왕의 취미는 이렇게 괴이하게 생긴 여자애였단 말인가? 아 인족들 중에서도 유래가 없는 파란머리에 금빛 눈이라니,게다가 물고기 비늘까지 있는 저런 모습은 나도 보다 보다 첨 본다.게다가 조그맣고 왠지 드세 보이는 이 모습은 내가 결코 좋아할 수 없는 타입일 가능성이 크다. 사인족의 애꾸는 약간 수줍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거부하는 태도는 커녕 자신 의 손을 이 조막만한 여자애의 어깨에 놓고 자신의 손이 얼마나 큰가를 자랑하 고 있었다.그 모습을 보던 나는 왠지 죄악감을 느끼며 말해주었다. "이봐,노랑 애꾸눈아. 넌 그렇게 어린 애를 애인 삼고 부끄럽지도 않냐?" 그렇게 내가 말하면서 이 조그만 아이를 돌아보니 꼬마계집애는 불쾌한 얼굴로 날 쏘아본다. "내가 뭐라고 생각하는 거에요! 난 꼬마 계집애가 아니에요!" "그럼 너같이 조그마한 아인족이 있나 부지?" 내가 그렇게 응수할 무렵 뒤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쿠베린! 그 애는 아인족이 아냐!" 돌아보니 아키나가 흥미진진하다 못해 하늘에 떠있는 엉거주춤한 달보다도 빛나 는 광채를 번쩍 번쩍 뿜어내는 두 눈을 하고는 다가와 있었다. "이 앤 바로..킬트의 아이라구!" KUBERIN...... 종족의 아픔에 눈을 돌린 자 그 고대의 성망을 알고 있는 자 보시오,우리들의 미래를 저물어 가는 석양은 핏빛으로 물든 것을 11 나는 그 꼬마 소녀를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금빛눈에 파란 머리,다소 귀엽다고 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매우 매우 매 력적이라고는 할 수 없는 모습. 팔짱을 끼고 다시 아래 위로 훑어보고 있는 동안 아키나가 그 꼬맹이 계집애에 게 다가온다. "정말 묘하네." "킬트님을 아는 거야? 당신..누구?" 불안한 표정을 지으면서 계집애가 말했다.아키나가 후후 웃고는 잘난 척 허리에 손을 얹고 말했다. "킬트가 나에 대해 말하지 않았어? 나는 저 위대한 백마법사 룬 아크더 팰리어 스의 누이야." 놀고 있네. "아....변태마법사..." 이제야 납득했다는 듯 여자애가 고개를 끄덕이자 갑자기 그녀는 웃 하고 화가 난 듯 꼬맹이를 노려보았다. "뭐라구!" "사실인데 뭘그래? 그런데 난 지금 이렇게 잡담할 새가 없어.이 놈의 계집애가 킬트의 딸내미든 손녀든 간에 어서 어서 내 아리따운 셀레네를 봐야 겠다구." 내가 그렇게 말하자 감격한 얼굴로 조인족의 여왕이 날 바라본다.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자 어쩔 거야 하고 사인족의 왕을 쏘아보았다. 노랑둥이 애꾸는 날 흐 하고 조소하듯 바라보는데 그 면상을 콱 부셔줄까 하다 참았다.나는 관대하고도 넓은 마음으로 일단 녀석에게 점잖게 명령해 주었다. "어서 가자.노랑둥아." "여기서 이야길 하는 거다." 그러나 녀석은 나의 이 엄청나게 관대한 호의를 모른 척하고 이를 갈며 그딴 소 릴 지껄였다. 이건 용서할 수 없어 하고 콱 녀석을 후려갈기려는데 여왕이 내 팔뚝을 꽉 잡았다.그리고는 낮은 목소리로 사인족의 노랑둥이에게 말했다. "일단은..일단은 우리 일족이 무사한가를 확인해야 겠어요.당신들은 쿠베린님의 어린 시동에게 몹쓸 짓을 했으니 분명 우리 일족들에게도 못할 짓을 한 게 틀림 없을 테니까요." 그녀가 당당히 노려보자 노랑둥이는 조소 띈 얼굴로 냉담하게 대꾸했다. "확인해서 뭐가 달라지나?" "뭐가 달라지냐고? 만약 내 일족들에게 더러운 짓을 했다면 당장에 교섭이고 뭐 고 없어요! 조인족의 전사가 얼마나 무서운지 보여줄 테니까!" 그녀의 소리는 높은 음을 내는 듯 찌잉 찌잉 귀를 울렸다. 그 소리를 듣자 조인족들의 몸이 약간씩 꿈틀거린다.전투성을 느끼게 하는 공기 를 찢는 듯한 차가운 소리. 그녀의 눈빛은 차갑고 새까맣게 물들었고 눈매가 좌우로 날카롭게 벌어졌다.그 리고는 그 아름답기만한 전신에서 위압감과 함께 살기가 돋쳐 흘러나오기 시작 했다. 오오 멋지다. 엘프들과 드워프들이 놀란 얼굴을 하고 있는 동안 조인족의 여왕은 조소를 머금 듯이 차가운 미소를 지으면서 냉담하게 말했다. "정중히 대해 주면 감사할 줄을 알아야 합니다.고대의 전투 일족으로 사인족은 조인족에 비해 살상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스스로 자각해야 하지않습니까? 지금 이 자리에는 나를 비롯한 조인족 전사 열 명이 와 있습니다.그리고 이 자리엔 묘인족의 왕과 그의 전사들 여섯명이 와 있지요,이 정도면 사인족 오륙십명은 도륙하고도 남는다는 것을 기억해 두시오!" 나는 팔짱을 끼고 이 조인족의 여왕님이 풍기는 위압감과 살기를 즐겼다. 내 뒤로 선 나의 일족들은 그 이야길 들으면서 호오 호오 하며 덩달아 기세를 높히고 있었고 고요한 조인족의 전사들은 묵묵히 허공에서 그 사태를 지켜 보고 있었다.그러나 그들 중 태반이 이미 살기를 피어 올리고 있어 이 자리의 모든 생명체들은 숨을 죽였다. 풀벌레 소리 따윈 사라진 지 오래다.밤 새소리도 없어진 지 오래. 이렇게 조용히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그 정적을 깬 것은 킬트의 딸이 라는 조그마한 계집애였다. "...사인족이 조인족이나 묘인족보다 약하다구요? 천만의 말씀이에요." 그녀는 금빛 눈을 빛내면서 사악하게 웃었다. "나는 나의 왕을 위해서 뭐든지 할 것이고 나의 마력은 킬트님 못지않게 파괴력 이 강합니다.이 자리에서 당신들을 불러 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우리가 강하 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란 것을 모르시나요?" "애송이 마법사여." 조용히 엘프의 왕이 말했다. "너의 말도 일리는 있겠지만 너는 어리석은 소리를 하고 있다.우리들은 엘프들 이다.우리들 중 마법을 쓰지 못하는 자는 하나도 없고 이 자리에는 흑마법의 룬 킬트 더 마이오스와 쌍벽을 이루는 룬 아크 더 팰리어스가 있다.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말이다..." 그는 한 걸음 나서서 그녀를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런 위협은 조인족이나 묘인족에게는 먹히지 않아요.왜냐면 조인족이나 묘인 족은 사인족보다 빨라서 마법사의 주문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마법사의 목을 날 려버릴 수가 있단다." 그녀의 눈이 약간 가늘어졌다. 그 눈을 보니 마치 가빈 처럼 고양이 눈을 한 것 같이 보인다.그렇지만 풀이 죽 은 얼굴은 아니었다.어라? 뭔가 조금 이상해. "그런 가요? 하지만 이미 늦었어요." 그녀는 피식 웃었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 바로 직전 나는 몸을 솟구쳐 단숨에 그녀의 가슴팍을 쥐어 갔다.바람이 뺨을 스치는 그 찰나에 나의 공격을 본 사인족의 왕이 황망히 소녀 의 앞을 막아섰지만 이미 늦었다.나는 그녀의 가슴팍을 잡아 채서 공중으로 던 져버렸다. "허엇!" 사인족의 왕이 소리를 지르며 떨어지는 그녀의 몸을 잡아 채려는 순간 나는 그 녀의 등줄기를 손톱으로 찔러갔다. 이상한 것은 미연에 방지하는 게 좋아! 그런 내 손톱에 사인족의 왕이 마주 손톱을 내밀어 막아버린다. 이 자식,아낌없이 죽여주마! 그 녀석의 손톱이 나의 가슴으로 치고 올라온다. 이게 한 눈가지고는 모자랐군 하고 되뇌이면서 발톱으로 녀석의 겨드랑이를 쳐올리는 순간 녀석이 뒤로 튕기 듯이 피해 버리고 나는 녀석과 춤을 추듯이 앞으로 몇걸음 도약해서 녀석의 목 줄기를 그어버렸다.핏줄기가 살짝 치솟아 올랐지만 아직 얕다. 녀석의 핏줄기를 끊지는 못했다.그러자 이 녀석이 사인족 다운 웅크린 자세로 목을 숙이더니 내 앞에서 카앗 하고 변신모드를 시작했다. 녀석의 온몸에서 누렁 털이 치솟아 오른다. 그러나 변신 다할 때 까지 기다린다는 것은 바보 짓이다. 나는 발끝에 채이는 큼직한 돌덩이를 걷어차 녀석의 면상에 작열시켰다.퍼억 하 고 녀석이 휘청한다.그 때를 놓치지않고 달려가 녀석의 옆구리에 손톱을 깊숙히 박았다. 어라? 이 녀석은 그래도 아랑곳하지않고 변신을 거듭했다.그렇다면 나도 변신해주지. 나의 몸안에서 우득 우득 하고 변신이 일어나자 내 손톱이 더 치솟아 올라 녀석 의 뱃속을 더 휘젓기 시작한다.손톱에 걸리는 살덩이의 감촉이 그럴 듯하다. 그리고 순간 녀석이 고개를 쳐들더니 변신하고 있는 나의 턱을 그대로 물어뜯었 다. "크아아악" 변신한 녀석의 송곳니는 장난이 아니다. 그러나 나도 장난이 아닌지라 잔뜩 목에 힘을 주어 뚫고 들어오는 녀석의 송곳 니를 막기위해 힘을 주었다.으으,방심했다.이 몸이 이런 실수를 하다니! 털이 주삣 치솟는다.목의 살갗은 녀석의 송곳니를 이기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깊숙히 깊숙히 녀석의 송곳니가 곧장 다가들어 바뜩 바뜩 소리를 내고 내 몸안 으로 침입해 들어오고 있다.제기랄! 그리고 이단계 변신을 거행해 버렸다.그리고는 동시에 녀석의 옆구리를 찌른 손 톱을 사정없이 들이 뽑았다.그러자 녀석의 갈라진 내장이 팟 하고 내 손톱을 따 라서 튀어나온다. "크어어어어어억.." 고통에 겨운 소리가 녀석의 입에서 터져나오고 녀석의 입에서 내 목이 해방되었 다.이 자식에게 목이 물리다니 수치중에 수치다 싶어서 녀석의 가슴팍을 잔뜩 독이오른 발톱으로 사정없이 찍어버렸다. 녀석이 뒤로 튕겨나가 엎어졌지만 녀석도 이단계변신을 시작한다. 으르릉 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우리 둘은 마주 보며 살기를 퍼부어 대고 있었 다.목에서 흐르는 피는 상당하다.녀석은 내 핏줄을 건드려 놓았다. 녀석의 옆구리는 찢어져 피와 함께 내장이 다 드러나 있다. 이건 분명히 내 승리다.하지만 이런 자식에게 상처를 입다니! 실수 중에 실수! 수치 중에 수치다! 이젠 이 자식을 없애버리는 것 이외엔 이 수치를 지울 방법이 없도다 하고 막 녀석에게 다가드는 그 순간 갑자기 뒤에서 화악 하고 빛이 치솟아 올랐다. "에엑?" 뒤를 돌아보자 마자 갑자기 일행들이 빛에 휘감겨 있는 것이 보인다. 앞에 서 있는 것은 조인족의 여왕,그녀는 막 나서려다 말고 빛의 장막에 휩싸여 그대로 정지할 수 밖에 없었다.그녀만이 아니라 당황한 엘프들과 드워프들,그리 고 나의 일족들이 놀라 손을 들어서 그 빛의 장막을 찌르고 있었다.그러나 뚫리 지 않는다. "뭐야? 어두운 밤 하늘로 희뿌연 창백한 빛이 소용돌이 치면서 퍼져나간다. 거대한 원,거대한 장막이 일어나 일행들 전체를 덮고 일행들이 서 있는 땅 전체 를 휘감아 올리더니 거대한 회오리와도 같은 기운이 일행들의 머리위를 빙빙 돌 고 있었다.그리고 그 빛을 받으면서 두 팔을 치켜 올리고 있는 것은 그 조막만 한 계집아이였다.그 계집아이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땀을 줄줄 흘리면서 뭐라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아무 매개체도 없는 그 쥐톨만한 손바닥에서 창백한 빛이 올라가고 그 것에 응하듯 숲 여기 저기에서 튀어 오른 거대한 빛줄기가 일행들 이 선 곳을 중심으로 휘휘 내돌고 있었다.꼬마 계집애가 뿜어 올린 그 빛줄기는 세 방향에서 호응을 받으면서 거대한 사각형을 만들어내고 그 빛의 사각형은 일 행들 전체를 덮으면서 회오리 모양으로 원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지금은 사라져 버린 랜달 브리거를 완전히 둘러싸버린 빛의 장막. 아무리 내가 마법을 몰라도 이건 명명백백하다. 마법진이다. 길게 볼 것도 없이 나는 꼬마계집애에게 돌진했다. 뒤에서 내 등을 감히 노랑개털이 날 긁어온다.이 자식이 간덩이가 부었군. 아낌없이 털을 쏘아서 녀석의 면상을 휘갈겨 주면서 그 계집애의 등줄기를 후려 갈겼다.그러나 파앗 하고 계집애의 몸에 닿는 순간 튕겨나가버린다. 앗,나의 무적의 손톱이? 다시 한번 시도해 계집애를 후려갈겼다.그러나 이번에도 실패다.실드다! 마법으로 자신의 몸을 휘휘 감은 계집애는 피로로 새파랗게 지친 얼굴로 날 돌 아본다. "어,어때요? 묘인족의 왕? 당신이 아무리 강해도....아무리 빨라도...이미 마법 진안에 들어가 마법이 발동 되어 있을 경우는 끝장이에요." "그렇군." 나는 날 무서워 하지도 않는 킬트의 조막막한 꼬마를 향해서가 아니고 뒤에서 날 향해 돌진하고 있는 사인족의 왕을 향해 몸을 틀었다.그리고는 녀석이 나에 게 달려와 공격해 들어오는 것을 향해 3단계로 변신했다. "쿠오오오오오..." 녀석의 몸보다 이제 나는 거의 두배 가량 커졌다.그리고 사정없이 녀석의 몸통 을 휘어 갈겼다.퍼억 하는 소리와 함께 내 주먹을 맞고 사인족의 왕이 뒤로 몇 치아르나 내동댕이 쳐졌다. "쿠아아악." "아앗!" 꼬마 계집애가 입을 저억 벌리는 순간 나는 가차 없이 달려들어가 사인족의 왕 의 배를 짓밟았다.내장이 터져 나오고 그 목줄기와 나에게 감히 반항하는 그 손 톱을 쥐어 뜯었다. "멈춰어!" 당황한 계집애가 나를 향해서 마법을 날렸다. 기다리던 바이다. 나는 몸을 튕겨서 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쥐어 들었다.그리곤 마법을 나에 게 펼치는 계집애를 향해 돌덩이를 집어던졌다. 파아아아 하고 파공성이 퍼져나가면서 돌맹이는 계집애에게 격중되었다. 퍽 하고 핏줄기가 치솟으면서 계집애가 뒤로 튕겨 올라가 나동그라졌다. 가슴뼈가 으스러졌을 것이다. 어리석은 계집애. 실드를 펼치고 있는 와중에 무슨 공격이냐? 누굴 바보 멍청이로 알아? 난 애송이가 아니란 말이다. 나는 걸레처럼 널부러진 사인족의 왕을 한대 걷어 차고 가슴에 돌덩이를 박고 피를 부글 부글 뿜어올리고 있는 계집애에게 다가갔다. 계집애의 금빛 눈은 다 돌아가 흰 자위만 남아있고 입안에선 끊임없이 검은 피 를 토해내고 있었다.그런 계집애의 몸통을 걷어차고 장막 안에 있는 아키나를 향해 외쳤다. "야! 아키나! 뭔가 해 봐." "그,그 근처에 매개체가 있을 거야. 이 진은 매우 강해.킬트의 고유마법이 틀림 없어.저 녀석이 이렇게 강한 마법결계를 쓸 줄은 몰랐어." 아키나가 더듬 더듬 외친다. 꼭 새장에 갇힌 병아리들 같군. 나는 고개를 들어서 사방에서 바스락 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사인족이었다.내 몸안에서 살기가 피어올라 온 몸을 완전히 덥히기 시작한다.사 인족의 왕은 반죽음으로 죽어 넘어져 있다.그러는 와중에 다가선 이 놈들을 죽 이고 싶어 온 몸이 비명을 올린다. 아냐,아냐,참아야 해! 지금 여기서 죽이는데 열을 올리면 안되고 말고! 안돼! 아니,저것들이 감히 내 앞에서 살기를 피워 올려? 이거 죽이라고 아예 빌고 있 구나.저것들을 산산히 찢고 그 달콤한 피냄새를 맡고 싶어, 이 놈들은 내 포렌 과 린과 가빈을 상처낸 놈들,어차피 죽일 놈들. 갈기갈기 찢어서 창공의 여신에 게 바치자. 자비로운 대지의 여신은 이놈들을 죽이는 내 마음을 잘 알고 있을 테지,죽여 버려,죽여버려! 사인족이 어느새 내 앞으로 십 수명 다가오고 있었다.그 누릿 누릿한 털이 바짝 세워진 채 나에게 감히 나에게 살기를 보내고 있다.흐,가소로운 강아지들.나에 게 덤벼 봐야 죽음인 걸 알고나 있냐? 이 불쌍한 녀석들은 철궁에 철시를 매긴 채 나를 살기띈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 다.그에 응해서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녀석들에게 살기를 퍼부우면서 한 걸음 다가섰다. 죽이고 싶다.미칠 것같이 부수고 싶다.이 놈들을 갈기 갈기 찢어서 그 살갗과 피를 맛보고 싶다.미칠 것처럼 피를 원한다.미칠 것같이 부수길 바란다. 감히 내 앞을 막아선 이 것들을 갈갈이 찢어버리고 그 앞에서 그 내장과 살과 피를 맛보길 바란다.내 몸안의 살육의 여신이 날 바라보며 유혹한다.내 혈통과 내 근 육과 내 몸안에 잠자고 있는 고대로부터의 힘이 치밀어 올라와 나를 유혹한다. 죽이고 싶어! 죽여! 내 앞에 감히 서있는 놈들을 용서하지마! 내 얼굴을 보고있던 녀석들이 한 두 걸음 물러선다.자식들,무서운 건 알아서. 그러나 그도 잠시 물러선 녀석들에게서 철시가 날아들기 시작했다. 이것들이 정말 골고루 하네! "쿠베린! 조심해! 조심!" "왕! 조심!" 나는 두 팔로 얼굴을 가리고 튀어 올랐다.내가 철시를 피하듯 위로 치솟자 기세 가 오른 녀석들이 핑핑 철시를 쏘아대기 시작했고 나는 몇번의 도약을 거듭하여 재빨리 나무에서 나무로 건너 뛰었다. 어서 어서! 그 빌어먹을 매개체란 놈을 찾아서 파괴하지않으면 저 우리속의 병 아리들이 시끄럽겠지! 아아..나는 왜 이리 강하고 현명한 것일까? 이 와중에 저 런 병아리를 위해 달려가는 이 나의 모습...이런 생각을 하고 있지않으면 나도 이성을 잃기가 쉽다.변신모드에서 이성을 잃지않기란 무지 무지 어려우니까 결 사적으로 생각한다. 나는 잘났어,난 너무 너무 잘나고 현명해서 다른 놈들과는 다르고 말고,달라, 암,다르지.카악! 저 자식들 죽여버리고 싶어! 아니야, 이게 더 급해! 이게 더 급하다구! 매개체를 빨리 부시고 나서 놈들을 죽이자.아아,죽이고 싶어서 몸이 근질 근질해,내가 왜 달리고 있지? 내가 죽일 놈들은 뒤에 있잖아? 아니야 아니 야.살육의 여신이여! 날 유혹하지마! 나도 그대가 달콤하다는 것은 알고 있다 구! 하지만 나는 지금 할 일이 있어! 목표를 찾아내기 위해서 재빨리 바닥으로 내려섰다.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퍼엇 하고 철시 하나가 허벅지에 박혔다. 으악! 아파! 그러나 아파 할 새가 없다.나는 수풀을 헤치고 맹렬하게 달려나가면서 철시를 뽑아 내었다.피와 살이 퍼퍽 하고 눈앞으로 튀어간다.아아,변신이 풀리면 꽤 아 프겠군. 달리는 와중에 나는 빛나는 마법원의 끄트머리에 위치한 괴이쩍게 빛나고 있는 수정을 발견했다.이거다. 이거. 이게 매개체가 아니면 대체 뭐란 말이냐? 설마 하니 어떤 인간이 심심해서 돌바닥에 주먹만한 수정을 박아 둔건 아니겠지? 나는 아낌없이 그 수정을 향해 뽑아낸 철시를 들이 찔렀다. 파앗 하고 빛을 가지고 있던 수정이 깨어지면서 사방으로 산산히 튀어 오른다. 빛줄기가 눈을 꿰뚫을 듯이 터져나와 주춤 했다. 덕분에 놀라서 2단계 모드로 전환되었다. 내가 조금 뒤로 주춤 거리는 그 순간 카앗 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달려들었다. 허공에서 갇혀있던 조인족의 전사 한명이 내 바로 옆에 있던 사인족의 향해 달 려들었다.그의 얼굴은 이미 전투모드였고 살기로 눈과 입매가 찢어져 평소의 단 정한 외모를 짐작할 수 없게 만들어 놓고 있었다.갈쿠리와도 같은 그 발톱이 사 인족의 등줄기를 그대로 꿰뚫더니 길게 볼것도 없이 마치 장난감을 가진 매 처 럼 허공으로 급상승했다.그리고는 길게 볼 것도 없이 그 높은 곳에서 버둥거리 는 사인족의 가슴을 손톱으로 찢어 발기고 심장을 쥐어 터뜨린다.그리고는 길게 볼 것도 없다는 듯이 그 높은 곳에서 사인족을 내팽개쳤다. 아아..더 구경할 것도 없다. 땅에 떨어진 그것이 와작 하는 소리를 냈을 뿐이다. 멋지군. 자,그럼 이제 부터 파티 시작이란 말이지! 오호! 오호! 호오! KUBERIN...... 종족의 아픔에 눈을 돌린 자 그 고대의 성망을 알고 있는 자 보시오,우리들의 미래를 저물어 가는 석양은 핏빛으로 물든 것을 12 광란이었다. 솔직히 말하지만 엘프들은 멀건히 서 있었고 드워프들도 멀건히 서 있었다. 피에 미쳐 날뛴 것은 나의 일족과 조인족들이었다. 마지막 서 있는 놈들이 하나도 없어질 즈음에서야 나는 손을 멈추라고 소릴 질 렀다. "그만!" 내 일족들은 일제히 날 돌아보며 자세를 멈추었다. 그들의 눈이 살기로 번들 번들 한 것을 보면서 나는 손을 가볍게 털어 보이면서 전투 모드를 완전히 풀어 버렸다.조인족들은 허공을 날면서 아직 살아있는 게 있는가 뒤지고 있었는데 내가 손을 멈추자 조인족의 여왕도 날카로운 듯한 높은 소리를 내서 멈추게 했다. 그녀는 피로 얼룩진 흰 드레스를 휘익 걷어버리고는 마치 갑주처럼 단단히 온 몸을 감싼 짧은 가죽옷 차림이 되었다.그러자 비로소 그 연약한 듯한 아름다움 과 달리 불처럼 뜨겁고 위험한 조인족의 여전사 다운 모습이 엿보인다. 주변은 엉망진창이었다. 사인족의 시신 중에 멀쩡한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거의 없다. 본디 엄청나게 회 복력이 강해서 왠만큼 숨결이 실끝만큼이라도 남아있으면 이들은 되살아난다.최 소한 목을 잘라내고 심장을 뽑아내야 확실히 죽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그 러다 보니 팔다리 잘려져 나간 것은 예사고 목이 대굴 대굴 굴러다니는 것도 돌 멩이 구르듯 흔한 일이며 심장이 여기저기 구르고 있는 것도 당연한 일인 것이 다.피와 피비린내로 완전히 사방이 어지러울 즈음 엘프의 왕이 한숨을 내 쉬었 다.엘프들 중 몇몇은 토악질을 하고 있었다.그리고 실제로 살육에 참가한 튜나 만이 으음 음하고 턱을 쥐고 엘레의 얼굴에 묻은 핏자국을 지워 주고 있다. 아니꼬운 놈들,이 와중에 그런 분위기를 연출해도 되는 거야? 내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이 케이링이 다가와 내 뺨에 묻은 핏줄기를 할작 할작 핥아 주었기때문에 조금 기분이 나아진다.아아,역시 여자란 좋은 것이야. 그러나 곧이어 또 다시 이에르네와 미하라가 도끼눈이 되어 달려와 내 얼굴을 경쟁하듯이 핥기 시작해서 안하느니만 못하게되었다. "쿠베린.." 아키나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뭐야?" "너,킬트의 아이...봤어?" "뭘?" 내가 아키나가 들여다 보고 있는 곳으로 다가가보니 내가 아까 돌맹이를 던져서 가슴을 박살낸 꼬맹이의 시체가 널부러져 있다.수풀사이에 가슴이 박살 난 채로 돌맹이를 가슴에 박고 있는 것을 아키나가 조심스레 그 돌맹이를 치워 냈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 박살난 가슴뼈 사이로, 검붉게 움직이는 심장이 보인다. "허엇?" 가슴뼈가 박살나면서 분명히 그 심장을 찔렀다. 고대의 종족도 아니고 엘프도 아니라면 이 정도면 분명히 즉사다.그런데 이 뼈 조각에 찔린 심장은 내 눈앞에서 뼈조각을 밀어내더니 천천히 천천히 박동을 시 작하고 있었다. 두근 두근 하고 심장이 뛰는 것을 보면서 아키나가 날 올려다 보았다. "말했었지? 이 애,인간이 아냐." "그럼 뭐지?" "킬트의 아이,킬트가 만들어낸 애야." "..만들어?" "응.그 녀석 용의 피를 조금 가지고 있었어.거기에 엘프의 피와 인간의 피를 섞 어서 만들어낸 게 틀림없어.이 무서운 회복력은 용의 것이야." ".....맙소사." 나는 기가 막혀서 순식간에 재생되기 시작하는 꼬맹이의 몸을 바라보았다. 꼬맹이의 심장에서 피가 멈추자 그 다음에는 상처가 아물고 그 다음에는 천천히 천천히 뼈가 자라나기 시작한다.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 이건 도무 지...인간은 둘째 치고 살아있는 물건이라곤 할 수가 없어! 나는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아키나는 호기심과 황홀경에 겨운 얼굴로 두 손에서 회복마법을 걸어 이 꼬맹이의 회복을 돕고 있었다. 재생이라니.재생이라니,이런 저주받을! "아빠..그게 뭐야?" 갑자기 내가 불쾌해 하고 있는 가운데 케논이 바닥에 널려 있는 사인족을 가리 키며 물었다. "사인족." "그게 뭔데?" "나중에 네 엄마에게 물어봐!" 내가 퉁명스레 외치자 케논은 앗 하고 풀이 죽은 얼굴이 된다.그런 와중에 문득 조인족의 여왕이 다가오더니 나에게 말을 걸었다. "우리 일족들을 찾아내야 겠지요." "응.냄새로 찾을 수 있을 거야.곧." 데인과 바스티앙이 이미 앞서 나갔다.녀석들이 정찰하러 간 사이에 나는 바위 위에 걸터앉아 뜨고 있는 해를 바라보면서 이에르네에게 말했다. "나,잔다." "아? 네에." 드워프와 엘프들이 나에게 불만스런 표정을 지었지만 밤새 벌인 살육을 보고 말 을 자연스레 걸 수 있을 정도의 배짱은 없을 게다.난 길게 누워서 이에르네의 무릎에 머리를 놓고 난로삼아 버둥거리는 케논의 몸통을 잡아 당겨 진짜 잠들었 다. 그래,기분 나쁠 땐 자는 게 최고다. 일어난 이유는 물론 음식냄새 때문이었다. 구수한 냄새가 사방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아니 정확히 말하면 사방으로 퍼져 나가든 알 바는 아니지만 일단 내 콧속으로는 확실히 들어왔다. 사방이 피비린내로 자욱해 있었지만 어찌되었든 나는 하품을 주욱 해대면서 일 어났다.엘프들은 조각난 사인족의 시체를 한 곳에 모아 치워버렸고 드워프들은 드워프 답게 어느샌지 거대한 가마솥을 놓고 음식을 만들고 있다. "뭘 만들어?" 내가 드워프 하나에게 묻자 넙적하기로 말한다면 넙적하고 턱수염이 부성거리는 그 몰골로 구분이 불가능한 드워프가 드워프다운 굵직한 어조로 대꾸했다. "아아..고기 스튜." "아아아아..맛있겠군." "조인족들이 사냥해 왔어요." "음,먹음직스럽다." 엘프들은 전혀 먹을 얼굴들이 아니었기에 난 안도했다. 이 정도 양 가지고는 조인족과 우리들이 먹기에도 부족할 테니까. 이에르네가 사냥해온 사슴 한마리를 주욱 주욱 찢어서 굽고 있었고 케이링은 다 크시온과 함께 새 털을 뽑고 있었다. "진흙 구이로 해라." 나는 하품을 하면서 지시했고 투덜거리면서 케이링은 기꺼이 그렇게 했다. 아이들은 재미있다는 듯이 드워프들과 뛰어다니고 있었다.귀엽기도 하지. 그런데 돌아보니 아크-어느새 아크가 되어 있는 이상한 놈-가 그 조막만한 계집 애랑 같이 앉아있었다. 내가 다가가자 그 금빛눈의 계집애는 자기로서는 최고의 원독어린 표정을 지어 보이고 있었다.그러나 어디 내가 한두번 원한을 사 봤겠는가? 이 조막만한 계집 애에 비해 무지막지하고 무시무시하며 사나운 놈들을 한 두놈 상대해 봤겠는가? 난 태연자약하게 그리로 다가가서 그 계집애와 마주 앉아있는 아크에게 물었다. "이 애 진짜 살아났군." "아아.그렇지? 정말 신기해.킬트는 완전히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킨 거야." 나는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럼 전에 킬트가 자신의 배반한 제자를 찾으러 돌아다닌다고 했던 그거가 바 로 이건가?" "아냐!" 그녀가 소릴 빽 질렀다. "이쁘지도 않은 게 소린 왜 질러? " 나는 그 계집애의 정강이를 가볍게 걷어찼다. "악!" 그녀가 자기 정강이를 끌어안고 날 쏘아볼 때 쓴 웃음을 지으며 아크가 말했다. "이 아가씨-아헬의 이야길 들으니까 말이지..." "뭔데?" "실제로 킬트의 부하들 중에 몇몇이 킬트의 마법서를 가지고 탈출했다는 군." "뭐야?" 내가 입을 벌리자 그녀가 툭 쏘아보며 말했다. "난 킬트님의 명령을 따라서 여기서 그저 그 마법사들의 뒤를 캐고 있을 뿐이었 어!" "근데 왜 사인족과 함께 어울려다니는 건데?" 내가 묻자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 "그건....사인족의 왕도 사인족들도 바로 그 킬트님을 거역한 배반자들에 의해 피해를 입었기때문이야!" KUBERIN...... 종족의 아픔에 눈을 돌린 자 그 고대의 성망을 알고 있는 자 보시오,우리들의 미래를 저물어 가는 석양은 핏빛으로 물든 것을 13 자아,이제부터 생각을 긍정적으로 다시해본다. 나는 본디 긍정적이고 아주 관대한 성품의 인물로서 부정적이며 덜떨어진 그런 말 같은 것은 신용하지 않고 있다.그리고 신용할 마음도 거의 없다.그리고내가 신용할 가치가 없는 말이라면 그건 들을 가치가 없는 말인 것이다. 그러니까 들어도 그만, 안들어도 그만이다. 그런데 지금 사태가 어째 심상치 않다. 널부러진 사인족의 왕을 치유하고 있는 아크와 아헬이란 이상한 계집애는 땀을 줄줄 흘리고 있고 조인족은 그런 모습을 싸늘하게 바라보고 있다. 놈이 정신을 차리기 전에 우리들은 아헬의 인도로 조인족들을 찾아낼 수 있었 다. 그들은 매우 지쳐 있었다. 조인족들은 잘 먹고 침묵하는 족속이다.그들이 주저앉아 있는 모습은 왠지 서글 플 정도다. 몇몇은 날개가 찢겼고 여자들은 폭행을 당했으며 남자들은 심한 부 상상태다.이런 짓을 해놓고 조인족들에게 도우라는 둥 혹은 자기들과 이야길 하 자는 둥 하는 사인족의 머릿속을 한번 깨보고 싶다는 충동이 일어나 나는 드러 누워 있는 사인족의 왕을 다시 돌아보았다. "뭘해? 쿠베린?" 튜나가 포로로 잡혀 있던 조인족들을 보다 못해 나에게 말을 걸었다. "세어 보고 있어." "뭘요?" "분명히 나는 가빈의 귀 하나에 사인족 스무명과 손톱 하나에 열명씩 죽인다고 했었지?" "아아.에에." 튜나가 약간 거북한 얼굴을 해 보인다. "그런데 내가 죽인 숫자는 아무리 생각해도 스물도 채 안되는 것 같단 말이야." 살기로 번쩍 번쩍 거리는 내 눈을 보고 튜나는 이상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입가 가 긴장한 듯한 조금 괴이쩍은 미소다. "....아무리 생각해도 열댓정도 밖엔 안돼." "그래서? 그,그래서 더 죽일려구?" "아직도 모자란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말야...." 그때 아헬이 조르르 달려나왔다. "일단 제 이야기나 듣고 결정하라니까요!" "시꺼!" 나는 잘라 말하고 둘러 보다가 엘레가 프루엘과 같이 셀레네를 부축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셀레네!" 내가 달려가자 셀레네는 날 보고는 크게 놀란 얼굴을 하더니 곧 담담해졌다.그 런 그녀의 몸을 끌어안고 가뿐히 안아 올리면서 물었다. "다친 데는?" "없어요.쿠베린. 당신 정말 본래 모습은 커다랗군요." "새삼스런 소리하는군." 나는 쿡쿡 웃고 그녀의 이마에 다정하게 키스해주었다.파리한 얼굴을 보면서 엘 레와 프루엘의 엉거주춤한 미소를 모른 척하고는 그들을 슬쩍 뒷 발로 차서 밀 쳐버리고 그녀를 안고 모닥불 가까이로 왔다. "가빈은요?" "저기있어." 나는 턱짓하고 아크가 붙여준 귀를 자꾸만 깜박이며 확인하고 있는 가빈의 멍청 한 모습을 무시한 채 그녀를 내 무릎위에 앉게 했다. "사인족의 왕이....묘인족의 왕이 올거라고 우리들에게 말했어요.정말 오셨군 요." 그녀가 내 얼굴을 올려다 보면서 부드럽게 말했다. 나는 그녀의 목과 뺨에 키스하고 부비면서 그럼 그럼 하고 응대해주었다. 그러나 그도 잠시 엄청난 살기의 회오리바람이 내 등과 내 앞과 내 옆에서 일어 나고 있었고 그와 동시에 나의 애물단지들이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왔다. "쿠베린!" 냉담하게 이에르네가 외쳤다. 케이링의 눈이 시퍼렇게 빛나고 있다. 그 뒤의 미하라의 입은 살짝 일그러져 있 다.그리고 그녀들의 앞으로 애들 세명이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셀레네를 바라보 고 있었다. "....누구?" "내 애들의 엄마들이지." 나는 내 애들을 자랑스레 소개했다. "드레인,에이리,케논이야." "아..." 그녀는 갑자기 입을 벌리더니 쓴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렇군요. 그 사이에 알을 낳았군요..." "우린 알 안낳고 아기를 낳는다구." 그녀는 쓴웃음을 짓더니 아이들을 흥미진진하게 바라보았다.그리곤 문득 생각이 난 것 처럼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사인족의 왕은?" "반쯤 죽여서 엎어 놨어." "순수한 사인족은 지금....스물도 채 안됩니다.쿠베린왕." 뭐라구? 이제 완전히 해가 떴다.아니 확실히 말한다면 해가 이제 막 중천에 다다라 오후 로 넘어가는 무렵이었다.사인족의 왕은 축 늘어진 채 바위에 몸을 기대고 앉아 날 바라보고 있었다.그런 그의 모습을 조인족의 여왕이 냉담하게 바라보고 있었 으며 엘프나 드워프들도 각자 자신에게 어울리는 표정을 하고 서거나 앉거나 혹 은 기대있거나 했다. 내 옆에 앉은 아크의 얼굴은 흥분과 심각함이 섞여서 애매 모호한 얼굴을 하고있었는데 그 때문에 나는 기분이 슬슬 나빠지기 시작했다. 자아,그럼 이제 아헬의 말 중에서 불필요한 것을 제외한 나머지 이야기를 듣자 면, 일은 아주 구질구질하며 기기묘묘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듯 하다. 첫째, 한 이백여년 전부터 사인족의 아이가 태어나지않았다고 한다.이백여년 전 부터라고 하면 이 널부러진 사인족의 왕이 왕이 될 무렵인데 그 때 쯔음 사인족 의 아이들이 줄기시작하더니 그 다음 해의 어느 날 부터는 아예 발정기가 지나 도 아이가 태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기냥 보통 놈도, 왕의 아이도 아주 공평 하게 지나치게 공평하게 아무도 아이를 낳지 못했다고 한다. 본디 사인족은 이 쪽 여자와 해도 사인족이 태어나고 저쪽 여자와 해도 사인족 이 태어나는 그야 말로 인구를 늘리기위해 태어난 것 같은 집단종족이라고 생각 하고 있었던 지라 나도 조금,아주 조금은 그 말에 당황했다. 아무리 머리에 든 게 없다고 해도 발정기가 지날 때마다 수십명씩 낳아제끼던 녀석들인지라 하나도 태어나지 않자 놈들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 다음 부터는 이 놈들도 노력하기 시작했다. 이 여자 저 여자 할 것없이 이런 저런 여자를 다 건드려 보았던 참인데 발정기 에도 발정기가 아닌 때에도 애를 낳을 수 있었던 그들이 이젠 발정기에도 애를 낳을 수 없게 되자 무척이나 당혹했다. 그리고 점차 그 불안감은 일족 전체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아이가 태어나지 않는 일족은 멸망한다. 그 심각한 존속 위기에서 고민하고 있 는 사인족앞에 왠 인간마법사가 턱 하니 등장했다. 이 인간마법사는 사인족의 무한한 힘의 비밀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접근하더니 만 사인족의 아이가 태어나도록 도와주겠다고 했단다.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일이긴 하지만 그는 자신이 엄청나게 강한 마법사이며 그 힘은 믿을 만 하 다고 강조했댄다. 그래서 사인족이 이 인간을 믿었는가? 만약 그렇다고 하면 사인족 놈들은 전부 접시물에 코를 박고 죽고 그 고기로 수 프를 푹푹 끓여도 할 말이 없는 놈들이다. 당연 안믿었다고 하는데 어느 날 어 떤 사인족의 여자 한 명이 다 죽어가고 있는 것을 그 마법사가 흔쾌히 고쳐주었 다고 하는 것이다. 그 덕에 경계심이 조금 늦추어질 무렵해서 마법사는 그들의 앞에 왠 작은 아이를 데리고 왔다. 그 아이는 사인족과 인간의 중간 모습을 하고 있었으며 그 모습을 보고 사인족 은 매우 당황했다. 마법사는 그 아이가 사인족과 인간의 혼혈이라고 말했고 그 모습에 사인족은 무 척 당황했다. 사인족이 인간의 여자를 취해도 인간과 섞여진 얼굴을 한 아이가 태어나는 법은 없다. 그런데 지금 이 앞에 사인족과 인간이 결합한 듯한 기묘한 얼굴을 한 아이가 나타났던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인족의 왕이여? 아이는 사인족의 혈통을 분명히 이어 받았습니다." 그렇게 되자 혼란 속에서 한 무리는 격노했고 한 무리는 조심스레 탐색을 시도 했다. 사인족은 그 두 개의 무리 속에 휘말려 들어 격렬한 논쟁과 혼란을 거듭 했다.그리고 일단 반대와 찬성이 뒤섞이는가운데 사인족의 왕은 일단은 이 마 법사의 말을 따라 새로운 종족의 탄생의 길을 모색해 보기로 결론을 내렸다. 무리도 아니다. 일족의 왕이 자신의 대에 일족이 멸망하는 꼴을 보아야만 한다면 그 비통함은 이루말 할 수 없을 것이다. 이해는 충분히 가지만 무척 어리석은 그들은 그래서 공짜없는 일은 안하기로 유명한 인간의 마법사에게 댓가를 치르기로 마음먹었 다. 바로 그 댓가가 땅의 엘프의 보물을 인간마법사에게 넘기는 일이었던 것이 다. 거기서 뭔가 문제가 삐걱 하고 발생하기 시작했다. 당연한 일이지, 문제가 발생 하지 않았다는 것이 더 이상하다. 이런 엉성하고 어처구니 없고도 서글픈 이야 기는 내 생전 처음 듣는다. 뭐 어찌되었든 바로 그 때가 바로 이 몸께서 친히 납시어 사인족 놈들을 주워 패 놓은 그 때다. 이 잘나신 왕께서는 사랑스런 일족의 아들인 포렌의 부상 소식을 알고 격노하 셔서 이 사인족들을 죽도록 패서 패퇴시켰고 거기에 이 사인족의 왕은 뒤에서 철시를 맞았으며 그 일로 그나마 별로 있지도 않았던 일족이 분열한 것이다. 그래? 어이, 사인족의 노랑둥아, 그래서 나에게 원한이 맺혔다는 거냐? 일단 말이 되는 소릴 해라.인간의 마법사에게 일족의 미래를 왕창 맡긴다는 게 일단 말이 안되고 이 막강무적의 쿠베린의 일족에게 싸움을 걸었다는 것 자체가 바보스러운 일이다. 그런 바보스러운 짓을 했다면 당연히, "아아 제가 바보짓을 했습니다. 감히 당신에게 대적하려 들다니 어리석었습니 다. 절 도와주십시오. 쿠베린님!" 하고 매달렸어야 하는 것이다. 그랬다면 뭔가 다른 결과가 나왔을 수도 있다. 사인족왕의 그 주먹만한 머리 속에 들긴 대체 뭐가 들었었겠는가? 고작해 봐야 노랑물 밖에 더 들었겠는가? 이 쥐털만한 사인족의 왕은 올해 삼백세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어린 주 제에 거물에게 죽어라 하고 덤벼온 것 자체가 진정 어리석은 것이다. "그래서 분열했는데?" 심각한 얼굴로 엘프의 왕이 재촉했다. 그러자 아헬은 심각한 얼굴로 금빛의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일족의 왕인 이분 헬레아스 님과 이 분의 아우인 데킬에논이 대결구도 양상이 되었습니다.그래서 그 데킬에논은 인간 마법사와 함께 인간의 군주와 함께 가버 렸대요." 인간마법사와 인간의 군주와 같이 가버린 사인족들? "그럼 지금 인간들과 쌈박질 하고 있는 놈들이?" "네,바로 데킬에논의 일파에요." 나는 팔짱을 끼고 사인족의 왕을 보았다. "이해할 수 없군,감히 왕의 명령을 거부하다니?" 사인족의 왕이 충혈된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조인족의 왕은 무심한 얼굴로 그 왕의 얼굴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럼 왜 사방의 일족들을 다 공격한 거지?" "공격한 것은 데킬에논의 일파에요.쿠베린님, 그들은 오크들의 황금과 조인족들 이 가진 휘나오린석을 가지기 위해서 공격한 거에요." 휘나오린 석? 그게 뭐냐? 내가 돌아보자 조인족의 왕은 굳은 얼굴로 아헬을 쏘아보고 있었다. "휘나오린 석을 가지기 위해서라구?" 드워프의 왕이 끼어들었다. 그게 뭐냐고 내가 막 손톱하나 꺼내 녀석의 옆구리 를 찌르려는 순간, "마법석입니다.그것은." 짧은 어투로 대신 아크가 설명했다. 녀석은 나를 바라보면서 궁금히 여기고 있 는 자들을 주욱 잘난 척하며 돌아보았다. 그순간 녀석의 긴 은발이 휘날리며 녀 석이 자랑하는 장발 미남의 면모가 드러난다. "무슨 마법석이지?" "마법력을 증폭시키지.놈들은 틀림없이 킬트의 빗나간 제자들일 거야." 그렇게 잘난 척을 하면서 녀석은 자신의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지금 이 심각한 와중에 자기 머리칼로 자기 얼굴을 선전해야 하는 거냐? "조인족이 마법을 쓰나?" 내가 놀라 조인족의 왕을 돌아보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마법을 쓰진 않아요.단지 우리는 마을의 결계를 마법석으로 처리했습니다." "헤에..." 그런가,그래서 아무도 조인족의 거처로 다가갈 수가 없었던 것인가. "마법사 중에서도 대단한 자가 아니면 발견할 수 없을 겁니다.결계석을." 침묵이 흘렀다. "다시 정리를 하면, 사인족은 애가 안태어나서 멸족지경에 처해 있고 거기에 대 해서 고민하고 있는 중인데, 사인족의 왕인 이 애꾸눈과 감히 이 몸에게 덤빈 싸가지 없는 데키어쩌고 하는 놈이 지금 인간마법사와 어우러져서 여기 저기 찝 쩍거리고 다는 중이다 그건가?" "그런 셈이죠." "그럼 그 인간마법사는 대체 어떻게 사인족의 애를 낳게 해준대? 그리고 대체 왜 사인족은 애가 태어나지 않게 된 거야?" "그건 모르죠." 아헬이 사인족의 왕을 대신해서 대꾸했다. "처음 부터 사인족은 여자가 적었다는 것은 잘 아시죠? 그때문에 사인족은 타 종족의 여자를 데리고 와 아이를 낳게 해서 일족을 불렸다고 합니다.그런데 언 젠지 부터 타종족의 여자든 일족의 여자든 어찌되었든 여자란 여자가 전부 사인 족을 낳지 않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건 이 대지의 축복이지." 아헬이 날 짜악 노려보았다. "..어찌되었든 그 마법사가 행한 마법은 아마도 킬트님이 전에 연구하시던 혼돈 의 마법중에 하나일 겁니다. 그 혼돈의 마법은 생명의 창조에 대한 것이었으니 까요." "생명의 창조?" 눈이 휘둥그레진 아크가 호기심과 희열에 불타면서 다가섰다. "흑마법사인 킬트가 생명의 창조라니! 그건 백마법이 아닌가!" "네에,뭐 그쪽 계열인 것 같긴 하지만 킬트님은 그 경계따윈 우습게 아시는 분 이니까요." 존경으로 가득한 그 금빛 눈으로 그녀는 두 손을 맞잡고는 우리들을 돌아보았 다. "어쨌든 생명의 창조에 열을 올리신 킬트님의 마법서를 제자들이 슬쩍 빼돌려 가지고 탈출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 뒤를 따라서 그 놈들을 찾아내기 위 해 왔고요." "흐음." 나는 그녀를 흘긋 보면서 미심쩍은 듯 물었다. "네놈은 킬트의 제자..아니 아이라고 했지? 킬트가 널 어떻게 만든거냐?" "그 엄청나고 오묘하신 수법은 저도 모릅니다만, 그 분께서 절 만드신 것은 분 명합니다." 아헬은 공손히 그렇게 말했다. 이 노란 눈의 계집애를 만들 때 킬트는 틀림없이 자기에게 무조건적인 숭배를 바치도록 만들었을 거야. 킬트님 킬트님 이라니, 아니꼬와서 듣기가 거북하다. 왠지 재미없어져서 나는 엘프의 왕을 돌아보았다. "이봐,엉덩이. 그럼 대체 킬트의 아이는 누구야?" 그는 조금 어색한 표정을 지었고 그 다음 아헬은 진지한 얼굴로 그쪽을 바라본 다.그리고는 손가락을 하나씩 꼽으면서 말했다. "그렇습니다.킬트님께선 아드님이 있으시단 이야길 듣고 나서부터 생명의 술에 열심이셨습니다. 저를 만드신 것도 그 일환이었지요. 아드님이 엘프의 일족가운 데에 있었기에....." 그 말에 놀란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엘프의 왕에게 집중되었다. 그리고는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엘프의 왕은 조용히 말했다. "이리오너라, 카나리안." KUBERIN...... 종족의 아픔에 눈을 돌린 자 그 고대의 성망을 알고 있는 자 보시오,우리들의 미래를 저물어 가는 석양은 핏빛으로 물든 것을 14 카나리안은 멍하니 이쪽을 보고 있다가 한 걸음 다가왔다. 갑자기 나는 녀석의 얼굴을 보고 뒤이어서 녀석이 곧-90여년만에 죽는다는 이상 한 체질이란 것을 떠올렸다. 그럼 이 놈을 위해서 킬트는 생명의 술인가 뭔가를 연구했고 그 와중에 그 수법에 눈독을 들인 놈들이 마법서를 가지고 도망가서 사인족을 두 갈래로 잘게 찢어버리고 그 괴이쩍은 사인족을 만들고 잘난 척을 했더란 이야기야? 생각해보면 무척 구질한 이야기잖아? 갑자기 무척 피곤해 졌다. 바닥에 널부러져 이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그 사인족의 왕의 한심한 모습과 조인족 왕의 지친 표정,그리고 아연한 드워프들의 얼굴, 그리고 내 일족들의 무 심한 얼굴,그리고 아헬의 공손한 표정. "킬트님의 아드님." 그녀는 공손히 무릎을 꿇고 색마앞에서 고개를 숙여 보였다. 색마는 어쩔 줄을 모르는 얼굴로 엘프의 왕을 바라본다.엘프의 왕은 어색한 표 정으로 조용히 말했다. "카나리안. 너의 부친은 인간의 마법사 룬 킬트 더 마이오스다.전에 말한대로.. 그가 너의 수명을 늘려줄 것이다." "그,그런! 하지만 저는 그럴리가 없어요! 저의 부친은 분명히....!" "너의 부친인 이스나는 이미 다 알고 있는 상황이야. 너의 모친 라스엘린은 널 안고 돌아와서 이스나와 결혼했으니까." "마,말도 안됩니다!" 색마가 절규하듯 외쳤다. "그런 말도 안되는 일이! 하지만..하지만!" 그가 파랗게 질린 얼굴로 아헬과 엘프의 왕을 번갈아 보았다. "너의 수명에 대해서 알고 이스나가 나에게 와서 의논했어.어쩌면 좋겠느냐고. 그래서 나는 킬트에게 연락했다. 그 기괴한 인간의 흑마법사는 엄청나게 능통한 인간이었으니까. 아크는 실패했지만 혹시 그라면 알 수 없다고 생각해서..." 엘프의 왕은 그렇게 말하곤 약간 시선을 떨구어 아헬을 바라보았다. "그의 연구가 이렇게까지 진전된 줄은 몰랐어. 그저 너의 수명을 길게 할 수 있 도록,엘프답게 살 수 있을 정도의 수명만 이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을 뿐인데 킬트는 무척..열심이었던 모양이야." 색마는 고개를 떨구고 아무 말도 하지않았다. "그런데 말이지. 사인족의 왕, 왜 너는 우리들을 데려올 생각을 한 거지?" 내가 물었다.사인족의 왕은 바위에 몸을 기댄 채 아무렇게나 널부러진 자세로 날 빤히 바라보았다. "...인간의 마법사가 또 있다고 해서 부른 것이다.그리고 ...." 아헬이 끼어들었다. "왕께선 모든 종족의 지혜를 모아서 뭔가 해보시려고.." "야,닥쳐. 끼어들지 마,계집!" 나는 손을 뻗어 끼어드는 아헬을 밀쳤다. 그녀가 당황하는 동안 나는 팔짱을 낀 채로 사인족의 왕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이건 왕끼리의 이야기다. 건방지게 끼어들지 마." 아헬이 입을 다문 동안 나는 사인족의 왕과 서로 시선을 마주했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피로, 그리고 고통은 자잘한 상처로 얼룩진 그 얼굴 속 깊 이 스며들어 그가 왕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했다. "이 일은....고대의 종족 모두의 일이다." 그가 조용히 말했다. 그의 말을 들으면서 조인족의 왕은 침착한 시선을 들어서 곧은 표정으로 그에게 서 눈을 떼고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고 나는 녀석의 얼굴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 마법사는 고대의 종족 모두를 합하면 용족을 부활시킬 것이라고 믿고 있 어." "....." 난 다시 뭐라 끼어들려고 하는 아헬을 쏘아 봐 주고는 팔짱을 끼었다. 살랑 살랑 바람이 불어와 조인족의 왕의 머리칼을 살랑 살랑 흔들고 있다.핏빛 처럼 붉은 날개가 바람에 따라 흩날린다. "그는 우리들 고대의 일족이 용족에게서 나왔다고 믿고 있다." 그는 조용히 고개를 돌려서 아무 것도 없는 숲속을 바라본다. 이미 해가 지고 있는 터라 검게 변하고 있는 그 숲속을 바라보면서 작은 위엄을 되살린 그는 단숨에 말했다. "그래서 이야길 하자고 한 것이다." "그런데 왜공격을 하고! 마법진으로 우릴 사로잡으려 들고! 조인족을 이렇게 해치고! 왜 가빈의 귀를 잘랐지?" 튜나가 뒤에서 갑자기 끼어들었다. 그녀는 분격한 듯이 갑자기 말릴 틈도 없이 끼어들어서 내 앞으로 달려들었다. 그리고는 사인족의 왕을 똑바로 바라보며 외쳤다. "왜 이런 짓을 했죠? 차라리 그냥 이야기를 청했으면 되었잖아요? 왜 이런 희생 을 치렀죠? 사인족은 지금 무려 이십명 이상이나 죽었고 조인족은 이렇게 많이 다쳤잖아요? 단지 이야길 하기 위해서라면...!" 난 시끄럽게 구는 하프엘프 녀석의 뒷덜미를 잡아 들어서 뒤로 밀쳤다.날 바라 보며 항의하는 그녀를 휙 던지듯 밀치는 순간 사인족의 왕은 꼿꼿한 자세를 무 너뜨리지 않고 튜나의 얼굴을 차갑게 조소하며 바라보고 있었다. "어리석군." 그가 핏 하고 여지껏 고요했던 표정을 바꾸어 오만하게 말했다. "나, 사인족의 왕이 엘프따위를 찾아가 이야길 나누자고 한단 말인가?" "아빠!" "아빠!" 애들이 주렁 주렁 어깨니 팔에 매달렸다. 나는 내 애들을 끌어안고 일일이 키스해 주었다.이쁘기도 하지. 그 모습을 사인족의 왕이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옆에 달라 붙은 아헬 은 기묘한 표정으로 그를 시중들고 있었다. 사인족의 왕은 하나 밖에 남지 않은 두 눈을 들어서 조인족들이 서로 치료하고 난리를 치는 광경을 바라본다. 그의 다 찢어진 옷깃은 피가 얼룩져 더럽기 짝이 없었다. "아빠, 저건 뭐야? 저 애꾸는 뭐야?" 케논이 슬쩍 손가락질을 한다. "사인족이다." "저건 왜 안죽인거야? 아빠?" "응,이야기나 좀 해볼려구." 아까 부터 에이리는 프루엘의 옆에 답삭 붙어다니면서 조인족 사이를 돌아다니 고 있다. 녀석은 예쁜 것을 너무 좋아해서인지 조인족을 무척 좋아한다. 프루엘 의 날개 꼭지를 붙잡고 돌아다니면서 조인족들이 자기를 귀엽다고 끌어안아 주 는 것을 즐기고 있었다. 아무래도 기질이 다분한 놈이다. 드레인은 점잖게 자기 모친과 같이 앉아서 뭔가를 계속 먹고 있었다.그러다가 시선이 마주치면 나에게 히죽 히죽 웃음을 던진다. 이에르네가 주변을 돌아보다 가 나에게 다가왔다. 그녀의 뒤에 선 데인과 바스티앙은 사냥거리를 들고 있었 다.불을 피우다 말고 문득 바스티앙이, 손톱을 하나 꺼내어 잡은 오리의 배를 가르고 내장을 꺼내고 있는 데인에게 눈짓을 했다. 바스티앙은 이번 발정기를 그냥 보냈다고 한다. 아직 어린 놈이니 여자를 얻을 기회는 널렸다. 팔짱을 낀 채로 내 아이들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는 다크시온 은 아직 어쩔 지 모르겠다. 이에르네를 단념했던가 혹은 다른 여자를 찾아다니 는 것인지도. 녀석이라면 여자가 듬뿍 매달리고도 남을 텐데 알 수 없는 일이 지. 듀나시는 어떨까? 다리를 저는 녀석임에도 불구하고 녀석의 강함은 여자들 을 이끌어 낼 수 있다.그렇지만 포렌 이래로 아이를 낳았다는 이야긴 들은 적이 없다.데인이란 놈은 이미 아이가 있다. 그 아이가 몇살인지는 모르겠지만 몇년 전 애를 낳은 모양이다. 이번에 새로 여자를 만났었는지는 모른다. 내가 여자들을 가져버렸으니까. 사인족의 왕은 아이들을 바라본다. 아이들은 떠들고 웃고 매달리고 있다. 조인족의 여자들은 상냥해서 매달리는 에이리를 귀여워 해서 저 놈의 음흉한 속 도 모르고 이리 안고 저리 안으면서 좋아라 하고 웃고 있다. 어느새인지 가빈이 아크의 조수처럼 달라붙어서 이리 저리 오락 가락하고 있다. 가빈 놈은 아직도 내 앞에는 감히 다가오지 못한다. 아마도 무서워서 일 것이 다. 바삭 바삭 바람이 불어서 말라 미틀어진 나뭇잎들이 소리를 내고 있다. 보글 보 글 드워프들이 뭔가를 퉁탕거리면서 가마솥을 얹고 스튜를 끓인다. 그들은 술을 돌리고 엘프들은 말린 나무열매를 꺼내 먹으면서 담소하고 있다.떠들썩한 분위 기가 나름대로 이루어 지고 있다. 조인족들은 다친 자들 아픈 자들 빼고는 나름대로 움직이면서 힐긋 힐긋 포로상 태나 다름없는 사인족의 왕을 살핀다. 사인족의 왕은 묶여버린 야수처럼, 인간들이 구경하고 조롱하기 위해 잡아다 놓 은 야수처럼 커다란 바위 사이에 앉아있다. 우리에 갇힌 야수의 눈을 하고 그는 미래의 자신의 일족을 그리고있다. 미래의 그의 일족은 어찌 되는 것일까. 저 고대에 사라져버린 거인족처럼 용족 처럼 사라져 버리는 것인가. 이 고대의 3개의 부족 중 가장 먼저 사라져 버리는 종족이 되어 버리는 것일까. "야." 내가 부르자 데인이 고개를 돌려 응했다. "네?" "저 노랑둥이에게 가져다 주어라." 데인은 약간 불만스런 표정이 되었지만 감히 반항하지 않았다. 그는 일어서서 잘 구운 오리 두마리를 들어 바위 틈 사이에 피투성이를 하고 앉 아 있는 사인족의 왕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조그마한 아헬이 그 것을 받아들어 자신의 왕에게 건넸다. 저 조그마한 계집애는 왜 사인족의 왕을 자신의 왕이라 부르는 것일까.대체 언 제부터 저 계집애는 사인족의 왕에게 자신을 바친 것일까. 사인족의 왕은 날 바라보았다. 그 분노에 찬 눈빛을 마주 보며 나는 묵묵히 내 몫의 오리를 뜯었다. 드워프들이 스튜를 한 그릇 씩 돌리고 있다. 사인족의 왕은 나에게서 시선을 돌려 오리를 묵묵히 물어 뜯었다. 고기를 뜯어 먹으면서 그는 계속해서 계속해서 하늘을 바라본다. 땅을 바라보는 것은 수치심 에 가득찬 겁장이의 행동, 그는 하늘을 바라보면서 몇번이고 몇번이고 생각에 잠긴다. 그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 패배의 고통인지 그의 일족에 대한 걱정인지, 혹은 이 자리에 있다는 수치심때문인지 잘은 모르지만 그는 죽음을 두려워 하지는 않는 다. 고개를 돌려서 조인족의 왕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신의 일족들이 바친 음식을 먹으며 바위위에 앉아있었다.그녀의 눈은 가끔 뛰어다니는 케논과 에이리, 그리고 드레인을 바라보고 있다.그녀의 눈이 슬픔과 알 수 없는 회한에 잠겨 있다. 사방은 시끄럽고 두서 없이 온갖 일족들이 모여 와글 와글 하지만 우리들 머리 위에 있는 황혼은 공평하게 붉다. 엘프의 왕은 색마 카나리안과 뭔가 이야길 하고 있다.그 옆에 선 아크는 잘난 척도 잊지 않고 흰 로브자락을 휘날리며 색마놈과 이야기를 한다. 엘프들은 황 혼을 보자 노래를 하면서 분위기를 맞춘다. 그 가냘픈 노래소리는 아름답지만 지금 듣고 싶지는 않다. "쿠베린." 갑자기 케이링이 목에 매달리면서 속삭였다. "왜." 내가 트릿하게 대꾸하자 그녀가 내 뺨에 키스하며 말했다. "우움.키스해 줘요." 그녀의 눈이 반짝 반짝 빛이 나고 있다. 뭔가 뱃속이 따끔 따끔 한 게 동하는 뭔가가 있다. 날씨가 스산해서 그런가. 밤이 와서 그런가. 역시 이 허전한 감각은 여자가 옆에 있으면 많이 해소가 되는 종류의 것인가. 나는 그녀를 꽈악 끌어안고 진하게 키스했다. 살내음이 난다.심장이 뛰는 소리가 난다. 숨소리가 들린다. 따스해서 기분 좋다. 음? 그런데 뭔가 뒤통수가 근질 근질하다. 키스하다 말고 고개를 슬쩍 돌려보니 그 자리에 도끼눈을 하고 있는 이에르네가 있다. 그녀의 송곳니가 반쯤 나오고 그녀의 손톱이 반쯤 튀어 나와 살벌한 푸른 빛을 뿌린다. "이봐, 케이링." 그녀가 낮게 짧게 끊어 불렀다. 내 품안에 있던 케이링은 흐응하는 얼굴로 눈 을 가늘게 뜨곤 이에르네를 노려본다. "장난 하지 말라고 했지? 내 앞에서 당당하게 쿠베린을 안다니, 무슨 배짱이 냐?" "웃기지마.나는 쿠베린은 내 남자야,내가 안고 싶으면 안겠다는데 왜 네 허락이 필요하지?" 케이링의 눈에서도 퍼런 빛이 일렁 일렁 거린다. 그 순간 갑자기 난 벌떡 일어났다. "그만!" 놀란 케이링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 무릎에서 굴러떨어졌다.그런 그녀의 팔뚝 을 탁 하고 잡고 도끼눈을 하다 말고 날 멀건히 바라보는 이에르네의 팔뚝을 잡 아챘다. 두 여자의 팔뚝을 질질 끌고 나는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쿠베린! 어딜 가요?" "어? 화난 거에요?" 여자들은 내가 말 없이 굳은 얼굴로 질질 끌고 숲으로 들어가자 얼었다. 이에르네조차도 내가 이런 표정을 짓는 것을 처음 본 것인지 입을 다물었고 뒤 에서 애들을 데리고 있는 미하라는 허억 하고 끼어들 생각을 못한 채 입을 벌리 고 서 있었다. "아이.쿠베린, 팔 아파.어딜 가?" "팔 아파,응?" 여자들이 이젠 약간 어조를 바꾸어 애교를 떤다.그렇지만 그만 둘 내가 아니지. 둘을 질질 끌고 나는 숲속으로 걸어 갔다. 아아..나는 뭔가 고독에 잠길 수도, 심각한 사색에 잠길 수도 없단 말이냐? 여자들이란 조금만 잘해주면 이렇게 날 괴롭게 한다. 물론 여자란 없으면 큰일 나는 소중한 존재이다. 하지만...무척 시끄럽고 독점욕이 강하고 겁대가리가 없 고 이 위대하신 왕을 알기를 우습게 알며 때로는 귀엽지만 때로는 피곤한 존재 이기도 하다. 나는 사내놈들보단 여자들이 훨씬 무섭다. 한 대 탁 치면 쓰러지는 주제에 악악 거리고 대드는 여자를 보면 인간의 여자나 일족의 여자나 드워프 여자나 혹은 엘프의 여자나 조인족의 여자나 모두 여자란 매한가지로 겁대가리들이 없다. 시험해보진 않았지만 오크 여자도 아마 그렇겠 지. "쿠베린,화 났어?" 케이링이 은근히 팔을 내 목에 휘감으며 다시 물었다. 나는 두 여자의 팔뚝을 놓아주고는 점잖게 둘을 풍성한 풀 숲 위에 앉게 했다. "쿠베린?" 이에르네가 조심스레 내 얼굴을 살필 즈음 나는 입을 열었다. "자아,사락 사락 벗깁니다. 사락 사락 벗겨요, 껍질을 벗겨요..." 악에 받친 여자들이 얼굴을 붉혔다! 음, 세상이란 의외로 단순한 것. 그리고 단순해서 아마도 행복한 것. 복잡해지면 그건 이미 행복이 아니겠지. 밥 먹고 여자랑 놀고 가끔 쌈박질 하고 가끔 똥도 누고 가끔 오줌도 누고 덤비 는 놈들 부수어 주고,애들이랑 놀아도 주고. 그럼 세상은 행복한 것이다. 제기랄,살아있다는 것은 사실은 즐거운 것이다. [쿠베린 막간극] 바다 KUBERIN....... 바람을 타는 자여 우리들의 노래를 전해 주세요 우리들은 소금기를 머금은 푸른 빛깔의 노래를 부릅니다 어이 어이야 어이 어이야 하늘에 속한 종족이 있고 땅에 속한 종족이 있고 바다에 속한 종족이 있다. 멀리 남쪽에 바다에 속한 종족 해양족이 있다는 이야길 들었다.그 종족은 손과 발에 물갈퀴가 달리고 콧구멍이 두 개로,코로 숨을 쉬면서 또 한편으로는 등으 로 숨을 쉰다고 한다.일설에 의하면 손바닥으로 숨을 쉰다고 하기도 하는데 그 자세한 일은 모른다. 어찌되었든 그 이야기는 신기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다. 나는 방파제 끄트머리에 앉아서 철렁이는 파도를 본다. 새파란 물빛과 어우러지 는 그 허연 거품이 하푸 하푸 헤엄치다가 실패한 뚱보처럼 허위적 거리다가 스 러진다. 방파제에 부딪치는 파도를 멍하니 보다가 오락 가락하는 크고 작은 배 도 본다.까악 까악 하고 바닷새가 오락 가락하면서 낚시 배에서 흘린 물고기를 사냥하느라 바쁘고 움직이는 선원들은 해가 남아 있는 동안 짐정리를 하느라 바 쁘다. 여행자들은 배에서 내려 이리 저리 구경하듯 고개를 돌리며 돌아다니고 선원들은 짐을 퍼 나른다. 어부들은 그물을 말리고 정리하느라 여기 저기에 그 물을 쌓아놓았다. 햇빛을 받은 그물에서는 짠 내와 갯비린내가 나서 구릿 구릿 한 냄새로 주변을 온통 채우고 있다. 나는 한가하다. 나는 졸리고 초가을의 느긋한 햇빛을 받아 나른해 있다. 내가 누워 있는 궤짝을 피해서 짐을 나르던 선원들이 중얼거리면서 불만을 토했지만 감히 내게 뭐라하는 놈들은 없다. 나는 그저 느긋하게 이 한때의 햇빛과 바람을 즐기기만 하면 된다. 철석 철석 하는 그 소리를 들으며 낮잠을 잘까 하고 길게 누워서 발가락을 까딱 까딱 하고 있는 참인데 뒤에서 누군가가 악악거리는 소리를 낸다. 그 악악거리는 소리는 인간의 소리라기 보단 왠 시끄러운 고양이 울음소리 같은 느낌이 든다. 대굴 대굴 굴러서 그 쪽으로 몸을 돌리자 사람들 두엇이 서서 무언가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무엇인가 하고 끼어들어보니 왠 자그마한 꼬마 계집애가 더러운 옷 가지를 뒤집어 쓰고 울고 있다. 항구의 선원들은 무심한 표정으로 스쳐 지나간다. 그들은 이런 일이 자주 있다 는 것을 알고 있고 여자들은 또 이런가 하고 귀찮은 표정을 짓는다. 나는 그들 사이에 서서 어린애를 바라보고 있었다. 인간을 이해할 수 없다.하긴 인간을 이해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이야기지만. 왜 아이를 낳고 아이를 버리는 것일까. 이 작은 항구도시 엘리야에서 매번 버려지는 아이들의 수는 한달에 한 두 번 꼴 로 최소한 열 댓명이 매년 버려진다. 항구에 들른 선원들이나 여행자들이 항구 의 여인들을 만나서 생기는 아이들과 자유도시의 이름에 혹해 이리저리 떠돌아 다니는 가족들이 버리는 아이들이 이렇게 거리에,혹은 항구에, 그리고 배가 떠 난 뒤에 발견된다. 철석 철석 파도는 방파제에 무심히 부딪쳐 박살난다. 수평선에 매달린 흰 구름 은 풍성하게 그 부피를 더해가고 있다.앙앙 거리는 그 소리는 이제 목이 메어 꺼억 꺼억 하고 소릴 내고 있다. 나는 하품을 했다.머리를 긁고 손등을 핥았다. 손톱 소제를 하면서 이해할 수 없는 인간들의 행동을 무심히 본다.분개해도 이 미 그건 소용없는 이야기고 그들의 무자비한 행태는 흔하고 흔한 일이다. 도시의 시장은 고아들을 모아다가 노예상에게 넘긴다. 구제방법이란 없다.어차 피 이 아이들은 노예시장으로 팔려나가는 것이다.그 애들이 앞으로 어떤 운명을 맞이하든 그건 그들의 운명이다.그들을 버리고 간 부모들은 이 애들이 어떤 일 을 당할 지 이미 알고 있다.그런데도 부모들은 아이들을 버린다. 그럼 왜 낳는 것일까. 낳아 키울 수 없다면 성교따윈 할 필요가 없다. 즐거움을 위해서라면 다른 방법 을 찾아야 한다.그런데 인간들은 자기 즐거움으로 성교를 하고 무책임하게 생겨 난 아이를 갖다 버린다.그리고도 또 낳는 것이다. 즐거움을 누릴려면 그 댓가를 치러야 한다. 그 댓가를 치를 자신이 없다면 하질 말아야 한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게 한다. 아이를 버리는 짓은 전 종족을 통털 어 인간만이 하는 일이다. 내 일족은 가끔 아이를 낳고 싶어서 아이를 가진 여자에게 다가가 위협한다.그 리고 아이를 죽이기도 한다. 앞으로 그 아이가 자라나 자신의 위협이 될 것이 두려워 아이를 낳을 발정기를 피하기도 한다.그렇지만 최소한 여자는 아이를 낳 으면 그 아이가 잘 클때까지 목숨을 걸어 키운다.사내들이 여자에게 꼼짝못하는 이유는 그것일 것이다.여자에게 시비를 거는 사내는 없다. 그건 수치다. 아이는 내내 울고 있었다. "엄마..엄마..." 아이는 그렇게 울며 사람들의 애써 무시하는 시선을 받으며 서 있었다. 내가 밥 먹으러 마미에게 돌아갔다가 저녁 느즈막히 돌아왔을 때도 그 자리에 내내 서서 바다를 향해 주저 앉은 채 울고 있었다. 시커멓게 된 얼굴과 손,맨발이 꼬질 꼬질 때가 끼어 있다.머리는 더러운 갈색머 리를 들쑤신 것 같은 모습,가느다란 팔 다리는 앙상하고 한 입 깨물어 먹어봐야 도무지 맛있을거 같지 않은 몰골이다.그런 계집애가 문득 눈을 비비다가 날 보 았다. 나는 그저 멀뚱 멀뚱 그 계집애를 보고 앉아 있었을 뿐인데 날 물끄러미 바라본 다. 계집애가 비시시 날 보고 웃었다. 웃긴 뭘 보고 웃나 하고 무시하려는 순간 철컥 철컥 계집애가 나에게 다가와 내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리고는 손가락을 물고 날 빤히 바라본다. 더럽기짝이 없는 얼굴이라 보고 싶지도 않았고 방금 먹고 온 것이 치밀어 올라 올 정도로 꼬질한 손가락을 입에 물고 있는 그 몰골이 싫어서 고개를 돌려 버렸 지만 그 꼬마는 내내 내 맞은 편에앉아서 주시하고 있었다. 선원들이 황혼이 지는 바다를 뒤로 하고 하나 둘씩 걸어가다가 그 몰골을 보곤 스리 슬쩍 웃는다. 오크 선원이 몇몇 크크 거리면서 이 계집애를 손가락질하며 걸어 간다. "곧 노예..크크..상인이 올 걸." 알 바가 아니야 라고 말해 주려고 다리를 주욱 뻗고 앉아 있는데 문득 계집애가 남의 두 발을 잡아 채더니 그걸 잡아 당겼다. 내가 놀라 쳐다 보자 계집애가 내 발을 잡아 당기더니 내 발등을 베고 드러눕는 게 아닌가. 너무 황당해서 입을 벌리고 있는 동안 계집애는 새근 새근 자기 시작했다. 왜 남의 발을 베고 자는 거지? 이런 습관을 가진 인간도 있단 말인가 하고 내가 머리 터지게 고민하고 있을 즈음 멀리서 어슬렁 어슬렁 스카가 다가왔다. "쿠베린, 여기서 뭘 하냐?" "...." "배 타고 어디 한 바퀴 돌다 올까나.." 그가 날 보다 말고 내 발치에 누운 계집애를 보았다. 그의 얼굴이 곧 안쓰러운 듯이 변했다.그리곤 날 흘긋 본다. "이 애가 그렇게 마음에 들었냐?" "넌 이 얼굴이 마음에 들어하는 얼굴로 보이냐?" "......." 그는 묵묵히 소녀를 바라본다. "...일곱살? 여섯살인가? 또 버리고 간 아이야?" "그런 게지." 스카가 가볍게 한 숨을 쉬었다.그리곤 자신도 주그리고 앉아서 꼬마 계집애를 내려다 보았다. 그리고는 손을 내뻗어 계집애의 더러운 머릿칼을 쓰다듬었다. 소금기가 달라붙을 듯한 바람이 불어와 머리칼을 휘날렸다. 혀를 내밀어 바람의 맛을 보면 약간 짭짤하고 비릿하다. 물고기가 떼로 나에게 달려들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이 비릿한 냄새와 맛. 바닷가에 오면 식욕이 돋는 다. 황혼이 지고 이젠 해가 진다. 해가 지는 광경은 몇번이나 봐도 질리지 않는다. 창공의 여신이 푸른 머리칼을 뒤집어 붉은 빛깔로 바꾸고 나면 시커먼 흑발의 여신이 뒤를 잇는다.그러나 그 마지막 순간 붉은 머리칼을 나부끼는 황혼은 서 쪽으로 모든 머리칼을 풀어 헤쳐 쥐어 짜면 뚝뚝 피가 흘러내릴 것같은 빨간 색 을 검푸른 바다위에 퍼트린 뒤에 사라져 버린다. 그녀가 사라지고 나면 흑발의 여신은 쿡쿡 웃으며 그 뒤를 덮어 버린다. "이 애...데려가자." 스카가 내 발치에서 꼬마를 주워들었다. 나는 맘대로 해 하는 태도로 어깨를 으슥해 보였다. 이미 어두워져 꼬질 꼬질한 계집애의 더러운 몰골은 잘 보이지도 않는다. 스카는 조심스레 아이를 들쳐 업 고 걷기시작했다. 나는 그가 만들어 낸 긴 그림자를 바라본다. 어둑해진 아무도 없는 항구의 방파제 위를 한 사내가 걷는다. 그는 아내도 없고 돈도 없고 집도 없다. 그가 가진 것은 젊음뿐, 자신이 몸에 지닌 칼에 대한 솜씨일 뿐, 그것도 초라하기 그지 없다. 그런데 그는 다른 자가 버린 아이를 줍는다. 이상하기도 이상한 일. 스카는 이상한 녀석. 나는 턱을 괴고 다리를 흔들다가 녀석의 뒤를 따라 걷는다. 다시 배가 고프다. 이젠 완전히 어두워진 군청색의 하늘을 바라보면서 나는 마 미의 옆으로 간다. 스카는 이 꼬마를 마미에게 줄 것이고 마미는 이 고아 소녀 를 부둥켜 안고 따스한 밥을 줄 것이다. "사라라고 부르자." 마미가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목욕물을 준비했다. 제 13화 마법사 II KUBERIN........ 가장 아름다운 여자를 얻는 자는 용기가 있는 자 가장 사랑스런 여자를 얻는 자는 지혜가 있는 자 이름을 얻을 수 있는 자는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자 1 데굴 데굴 구르는 동안 뜨끈한 감촉이 느껴진다. 오랫동안 생각해 봐도 좋은 것은 좋은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은 따끈한 침대와 맛있는 음식,그리고 좋은 여자다. 이건 만고의 불변의 진리이며 살아가는 보람이기도 하다. 간혹 이 이상가는 것 을 찾아 헤메이는 자들이 있는데 그런 고난과 가난과 고생을 삶의 보람으로 살 아가는 자들에게 세상의 엄청나고 역사적인 진리는 이미 다 발견되었다고 나는 말해주고 싶다. 발가락을 움직이는 것도 귀찮다. 그렇지만 움직이지 않으면 이불을 덮을 수 없다. 나는 꼬물 꼬물 거리면서 발가 락으로 발치에 둘둘 휘감겨져 있는 이불 끄트머리를 잡아 끌고 덥수룩하고 어딘 가 까칠 까칠하며 묵직한 것을 담요로 삼아 끌어당겨 온 몸에 온기를 더했다. 음...까칠 까칠하면서 묵직한 것이라.. 눈을 반쯤 뜨고 보니 내 눈앞에 보이는 것은 넓은 가슴이다. 넓은 가슴이라.. 이 냄새는 스카다. 스카는 쿨쿨 엎어져 자고 있었다. 짧은 바지만을 걸친 채 녀석은 침대의 기둥에 머리를 쳐박고 자고 있다.그런 놈의 한 팔을 내가 휘감고 적당히 끌어안고 자는 중이었던 것이다. 이 난로는 오랜만이군. 하품을 하면서 발가락을 계속 꼼지락 거려보니 뭔가 옆 발가락에 걸리는 뜨끈하고 부드러운 게 있다. 코를 킁킁 거려 보니 이건 가빈이 다.왜 가빈도 여기 침대에 있지? 베개가 발치에 있고 난로가 나랑 고개를 맞대고 있다니 이건 상당히 불편한 자 세가 아닌가 싶어서 자세를 회전했다.회전하고 가빈의 작은 몸뚱이를 잡아 당겨 베고 보니 이젠 스카의 발과 얼굴을 맞이하게 된다. "챗..." 희미한 햇빛이 창가로 스며들고 있었다. 하품을 하고 손을 뻗어서 허공중에 돌고 도는 금빛 먼지를 손가락으로 휘저었 다.고즈넉한 아침, 어제 밤새도록 퍼마셨던 스카는 아직 제 정신이 아니다. 새 로 생긴 자기 귀를 붙잡고 연이어 마셔라를 외쳤던 가빈도 제정신이 아니다. 침을 흘리면서 침대 시트를 꽉 붙잡고 자는 놈의 몸통을 발끝으로 툭툭 치면서 침대에서 기어 나오자 싸늘한 감촉이 온몸을 휘감았다. 세수를 해야지 세수를. 슬금 슬금 아래층으로 기어나가자 바삐 움직이던 마미가 나를 향해 두 팔을 벌 렸다.그 두툼한 가슴에 고개를 묻자 그녀는 내 등을 토닥이면서 웃음을 지었다. "우리 고양이,잘 잤어?" "아우우우우.." 하품을 하는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그녀는 따스한 물을 주었다.그것으로 얼렁뚱땅 눈꼽만 떼고 있는데 마미가 솥뚜껑만한 손으로 내얼굴을 부비 부비 문질러 억지로 세수를 시켜버렸다. 쳇..이런 날은 물에 손 넣기도 싫다. "점심 먹을래?" "아아..응." 길게 기지개를 펴면서 하품을 하고 있을 즈음 사라가 나를 흘겨 보면서 스쳐 지 나간다. 나는 턱을 괴고 활활 타오르는 벽난로에 달라 붙었다. 가게에는 손님이 거의 없었다. 갈색으로 번들거리는 탁자들과 의자는 이미 맥주와 음식냄새에 절어 있고 사람 들이 오다 가다 만들어 놓은 흔적들로 가득했다.나는 벽난로에서 춤추는 불꽃들 을 바라본다. 노란 불꽃들이 춤추면서 나를 유혹하고 있었다. "먹어." 사라가 내 앞으로 음식들을 내려 놓았다. 그녀는 약간 나를 신기한 듯이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녀는 얼마전에 나의 다 큰 모습과 작은 모습을 둘 다 보았고 1년가까이 지나는 동안 본 그녀의 모습은 성숙한 처녀의 그것이었다. 다 큰 처녀로 보이는 그녀는 뭔가 색다른 느낌이 든다. 그녀에게선 좋은 냄새가 난다. 그렇지만 그녀에게 손을 뻗힐 기분은 나지 않는다. 뭐라고 말하면 좋을까 그녀 에게 대한 감정은 마미와 비슷하다. 탁탁 소리를 내면서 불꽃이 타오르는 동안 사라는 아무 말도 하지않았다.그리곤 한동안 침묵하더니 말했다. "나, 결혼하기로 했는데." "그래?" 뜨거운 스튜를 훅훅 불면서 내가 먹자 그녀가 말했다. "음..채소상인 케빈이야." "아아...케빈이라...케빈...케빈...케빈이 누구지?" 내가 고개를 쳐들고 묻자 사라는 약간 화가 난 듯한 얼굴로 말했다. "우리 집에 채소를 대주는 케빈 말이야! 키가 큰 갈색 머리!" "아아..두툼한 입술을 한 녀석. 그놈..아직 어린애 아냐?" 내가 눈쌀을 찌푸리자 사라가 흥 하고 말했다. "쿠베린에게 있어선 모두다 어린애 겠지!" 내가 그녀를 빤히 보자 사라는 빙글 웃어 보였다. "청혼했어.한달 전에. 나...응할려고 해." "음..그놈이 어떤 놈인지 내가 확인하고 나서 해." "쿠베린!" "사내는 본디 도둑놈이야. 나 이외엔 아무도 믿어선 안돼." 나는 엄숙하게 말했다. 그 말에 기가 막힌 듯이 사라가 날 바라본다. 그녀의 몸에서 성숙한 여인의 냄 새가 난다. 그녀는 허리에 팔을 턱 하니 얹고 나를 기가 차다는 듯이 바라보았 다. "그런 말을 쿠베린이 할 수 있어?" "응,할 수 있어.사내놈은 본디 다 도둑놈. 내가 확인해 보고 괜찮은 놈인지 결 정하겠어." "마,말도 안돼! 쿠베린이 뭐라고 그를 확인해?" "넌 내 애잖아?" 내가 그녀에게 그렇게 말한 순간 사라가 멍하니 굳어섰다. 그녀의 두 눈에 갑자기 눈물이 맺혔다. 그녀는 두 손으로 자기의 입을 가리고 그 다음에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나는 그런 그녀를 빤히 숟가락을 물고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순간 그녀는 홱 돌 아서서 밖으로 뛰쳐 나갔다. 탁탁탁 하고 멀리까지 그녀가 튀어 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멍청히 숟가락을 입에 문 채로 그녀가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마미 가 날 바라보는 것을 돌아보았다. 마미는 모른 척 입을 굳게 다물고 툭툭 맥주 잔을 닦고 있었다. 우리 둘사이로 정적이 흘러갔다. 너무나 무거운 정적이라서 다시 스튜를 퍼먹을 수도 없다. 내가 숟가락을 스튜 에 푹 꽂는 순간 깨질 정적이 두려워 한동안 그대로 숟가락을 물고 스튜그릇을 노려보고 있는 순간 나를 구원하듯이 쿵쿵 소리를 내면서 스카가 아래층으로 내 려왔다. "아우우우웅.." 녀석은 녀석다운 기지개를 펴면서 나의 앞으로 걸어왔다. 그리고는 이상하다는 얼굴로 날 바라본다. "어이,어이,쿠브,스튜에 뭐라도 빠졌냐?" 스카는 그렇게 하품을 하더니 내 앞에 턱 하니 앉았다. 마미가 말도 없이 녀석의 앞으로 스튜그릇을 가지고 온다. "마미! 이 녀석은 세수 안시켜?" 내가 항의하자 마미가 어깨를 으슥해 보였다. "내 애도 아닌데 하든 말든." "야야,냉정한 말이다." 스카는 한 손으로 눈꼽을 떼면서 아귀 아귀 먹어대기 시작했다. 그 덕에 나도 먹을 수가 있었다. "사라가 결혼한다는 상대가 케빈이라며? 야채장수인 입술 두둑한 놈." "아아..그래,그래.들었어. 그 놈은..아마 올해 스물 하나일거야." "사라가 몇살이더라?" "사라? 사라는 ...으음..이번에 18살이 되는 건가?" "헤에." 우리 둘은 마미의 가게를 나와서 찬바람 쌩쌩 부는 부둣가에 서서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이런 이상한 짓을 하고 싶진 않았지만 어째 마미도 사라도 있는 곳 에선 말하기 거북스러워서 놈을 이끌고 아무도 말을 엿들을 리 없는 곳으로 데 려온 것이다. 아무도 엿들을 리 없는 것 까지는 좋은데 너무 춥다. 쌩쌩 부는 이 바닷바람은 장난이 아니었고 콧구멍까지 얼어 붙을 것 같은 추위 다.이렇게 추우면 당연 아무도 엿들으려고 따라 붙는 정신빠진 놈은 없을 것이 겠지만 이 자리에 서 있는 것 만으로도 얼어붙어 버릴 것같았다.그래서 나는 사 삭 사삭하고 스카의 뒤로 은근히 피했다. 엄청난 바람이 스카의 머리털과 수염을 휘날리고 있는 가운데 내가 스리슬쩍 녀 석의 뒤로 숨자 스카가 눈치채고는 눈썹을 찌푸렸다. "야, 너 정말 지독하지않냐? 누굴 바람막이로 쓰냐?" 한결 낫군. "어차피 넌 내 난로, 난로를 바람막이로 쓰든 그냥 난로로 쓰던 그건 임자인 내 마음이다." "내가 네 꺼냐? 이 변태같은 놈!" 그가 발끈하는 동안 난 그의 몸 뒤에서 피하지 않았다. 스카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팔짱을 낀 채로 말했다. ".....어쩔 거냐?" "뭘?" "사라가 네 놈을 좋아한다는 것을 모르진 않겠지." "...야,스카." "왜?" "그래서 내가 그 앨 붙잡고 나랑 결혼하자, 결혼하지 마라 하고 말하면 그게 맞 는 거냐?" "....아니." "그럼 뭘 궁시렁 거리는 거야?" "......" "무엇보다 콧물 질질 흘리면서 구질 구질한 얼굴로 앙앙 울부짖던 꼬맹이 모습 을 본 이상 그걸 어떻게 여자로 보냐?" "넌 치마만 두르면 다 좋아하는 거 아니었냐?" "바지를 입어도 좋아해." "......" 콧물이 스카의 콧구멍에 맺혀있다. 얼굴이 시뻘겋다. 나는 스카의 휘날리는 옷깃을 둘둘 몸에 감고 어떻게해서든지 차갑고 매서우며 칼날 처럼 에이는 그 놈의 바닷바람을 멀리하고 있었다.그러나 스카는 이 멍청한 게 그대로 뻗대고 서서 바닷바람을 온전히 다 맞고 있었다. "..정말 벌써..벌써.." 그가 뭔가 감회가 새롭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어린 게 벌써 결혼이라...기가 막히군." "그렇군." 나는 얼른 긍정하면서 바람을 피해선 채로 스카를 슬쩍 잡아당겼다. "여기서 발견했었다.쿠브." "그렇군." "그러던 것이 어느새 10년..." "그렇군." "네 놈 같은 게 곁에 있어서 제대로 클까 걱정스러웠는데 제대로 잘 컸다니 정 말 이것은 신의 가호다." "그렇군..아니, 그건 무슨 의미냐?" 스카는 내 말은 들은 척도 하지않고 자기 세계에 빠져 괜히 먼 산,아니 먼 바다 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라의 지참금은 얼마 낼 거냐?" "뭐? 지참금?" 내가 묻자 스카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날 돌아본다. 그리곤 자신의 휘날리는 옷 자락을 둘둘 감고 있는 날 보곤 얼굴을 찌푸렸다. "모른 척하지마! 지참금을 줘야지!" "이봐,원래 우리가 지참금을 받아야 하는 거 아냐?" "....." 녀석이 날 흘겨 보았다. "여자를 데려가는 주제에 왠 돈을 가져가냐? 돈을 내놔야지!" "그래서 넌 지참금을 안내놓겠단 의미냐?" "뭐하러 내놔?" "......인정머리 없는 놈!" 스카가 호통을 치는 것을 모른 척하고 나는 되물었다. "그런데 그 입술 불어터진 것같은 그 야채장수 놈은 어떤 놈이야?" "성실한 녀석이지." "성실이고 두실이고 어떤 놈인지 알아봤어?" "알아보고 자시고 마미의 집에 10여년간 야채를 대 온 단골이잖아!" "그거야 알지만 녀석의 여자 버릇이라든가 술버릇이라든가 도박버릇이라든가 뭐 그런 것을 짜장하게 알아봐야 할 것 아니냐?" 내가 말하자 스카가 하 하고 한숨을 토하곤 날 바라본다. "이봐,쿠브. 세상 천지에 너 같이 버릇 나쁜 남자는 없어. 그러니까 너는 말할 자격없다구." "뭔 소릴 하는 거야? 이 몸과 그 입술 터진 놈이 어디가 같냐?" "......" 스카는 날 쏘아본다. "여자 좋아하기는 전설에 나오는 호색한 늙은이 같지, 먹기는 신화속의 거인족 같이 먹어대지, 화풀이 해대는 건 용족이 브레스 뿜듯 하지, 그 놈의 방랑기는 언제 터질 지 몰라 언제나 안절부절 해야 하지! 대체 어디서 엎어져 죽었는지도 모르게 사람 마음 조이게 하는 놈이 뭐가 잘났다는 거얏!" 그가 고함을 버럭 질렀다. "너 돌아오지 않는 동안 나랑 마미나 사라가 얼마나 가슴 조였는지 알기나 해? 또 어디가서 쳐박혀서 죽어가는 것은 아닌가! 쌈박질 하다가 어디서 화살맞고 죽은 것은 아닌가! 뭐가 잘못되어 영영 돌아오지 않는 것은 아닌가. 몇번이고 몇번이고 셋이 머리 맞대고 밤을 지새운 적이 한 두번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는 핏대를 올리면서 주먹을 치켜 들어 허공에 대고 두리 두리 휘둘러 보였다. 난 아무것도 듣지 못했어. 난 아무 소리도 안들려. 라라라라.. "그런데 갑자기 나타나선 여자 줄줄 애 줄줄 끌고 나타나서 내 애야 하며 까르 르 웃는 품이라니! 그걸 보고 마미나 사라나 내가 어떤 심정이었다고 생각하냐! 누구 도는 꼴을 보고 싶어? 네가 지금 잘났다고 떠들어 댈 수 있냐구!" 나는 루루루 하면서 허공을 바라본다. 오오 바람이 상쾌하군, 멋진 바람이야. 이렇게 오랜만에 바닷 바람을 쏘이니 기분도 상쾌하며 왠지 가슴 속까지 호쾌해 지는 듯 하군,움하하하하.. 파도가 마치 얼음덩이를 뭉친 것처럼 왕창 왕창 방파제에 부딪친다. 그리고는 사방에 얼음과도 같은 물방울을 튕겨낸다. 그게 사나운 바람과 어우러져서 멀찍 히 서 있는 스카와 나에게 까지 달라붙었다. 아아..파도가 높아지는데 슬슬 피할까? 이 몰골은 마치 바다가 기분이 나빠서 나에게 침을 퉤퉤 뱉어내는 것 같다. "듣고 있냐! 이 발정난 고양이 같으니! 모른 척하는 그 면상! 오늘 두들겨 줄테 다!" 녀석이 내 멱살을 막 잡아 채려 하는 순간 퍽 하고 파도가 우리 면상을 직격했 다. "쿠앗!" "엑!" 물론 나는 피하려 했었다. 그러나 스카가 날 붙잡고 있기에 그럴 수가 없었던 것이다! 홀딱 젖어버린 나와 스카는 동시에 으헤취 하고 재채기를 하고는 덜렁 덜렁 집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흠뻑 젖어서 돌아오는 길에 스카가 말했다. "....사라가 널 좋아해. 널 사랑해." ".....음,그럴 수 밖에,난 잘났으니까." 녀석이 내 등어리를 후려갈겼다. 앞으로 몇 걸음 튕겨 갈뻔 했지만 겨우 비틀 거리는 것으로 모면했다. 이 자식은 내가 후려갈기면 박살 날 주제에 날 치기를 무슨 동네 북같이 하는 군! "...넌 어때?" "...자기 애 보고 욕정하는 애빈 없어." "....그러냐?" 우리들은 처량맞은 거렁뱅이처럼 질척이는 신발을 이끌고 가게안으로 들어왔다. 스카와 나는 뜨거운 물을 뒤집어 쓰고 뜨거운 맥주를 마시고 뜨거운 스튜를 먹 으며 뜨거운 벽난로 앞에서 두 발과 두 손을 들이대고 앉아있었다. 해가 지자 손님들이 올망 졸망 들어와 자리를 메꾸기 시작한다. 몇몇 손님들은 나를 보고 아는 척을 하고는 마미에게 주문을 하느라 가게 안은 곧 시끄러워졌 다. 턱을 괴고 앉아서 불빛을 바라본다. "근데 너 애가 몇이라고 했지?" 갑자기 스카가 생각난 듯이 물었다. "일곱." "헤에!" "아들 넷에 딸 셋." "....죽여주는군.일년 새에 그렇게 낳았냐? 대체 여자가 몇이야?" "아아...음..몇이더라.." 그렇게 말하는 내 머리통을 한 번 더 후려갈긴 스카는 더 이상 말하지않았다. 아아..따스해서 기분이 좋다. 그러나 그때 갑자기 시끄러운 말발굽소리로 인해서 나의 이 즐거운 기분은 곧 깨졌다. "여기 쿠베린 있는가!" 갑작스레 어떤 녀석이 가게 문을 발칵 열고 들어섰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건방진 녀석의 면상에 주저하지않고 쥐고 있던 스튜 그릇을 선 사해주었다. 퍼억! 들어서던 녀석은 길게 뻗어 버렸다. KUBERIN........ 가장 아름다운 여자를 얻는 자는 용기가 있는 자 가장 사랑스런 여자를 얻는 자는 지혜가 있는 자 이름을 얻을 수 있는 자는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자 2 들어서던 녀석의 종자인 듯한 녀석이 황급히 쓰러진 녀석을 부축했고 뒤이어 그 뒤에 선 두 명이 황급히 칼을 빼들었다. 그러나 가게안의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와락 와락 킬킬킬 웃어대는 것을 보자 자신들이 얼마나 우스운 몰골인가를 새삼 깨닫고 도로 칼을 집어 넣었다.그리고는 그릇을 너무나 번개같이 던진 나 머지 누가 던진지 몰라 두리번 거리고 있는 녀석들을 도와 주기 위해 나는 점잖 게 입을 열었다. "누가 쿠베린을 찾는 거지?" 그제서야 가게안의 사람들이 일제히 이쪽을 바라본다. 이마에 주먹만한 혹을 달고 있는 녀석을 부축하다 말고 심각하기 이를 데가 없 는 표정을 짓고 있는 새파란 젊은 녀석이 입을 열었다. "쿠베린은 여기 없나? 우린 쿠베린님을 찾고 있는데." 내가 막 버릇없는 녀석의 면상을 향해 또 하나의 그릇을 던지기 위해 스카에게 손을 뻗은 그 순간 스카는 재빨리 자신의 그릇을 사수하며 입을 열었다. "아.아.이쪽이 쿠베린인데 무슨 볼일인 거요?" ".....밀명이요.우린 쿠베린이란 사람을 찾아서.." 그는 우물 거렸다. 스카는 뚫어지듯 그 젊은이를 바라보다가 내 입을 막고는 천천히 말했다. "나는 쿠베린의 친구로 용병 스카라하오.만약 누가 보낸 것인지 말하지않는다면 그대들은 엘리야용병길드를 찾아가야 할거요." 젊은 녀석은 버벅거렸다. 그리고는 옆에 있는 동료와 우물 우물 떠들다 말고 거대한 맥주 조끼를 들고 우 람하게 서 있는 마미를 향해 물었다. "저기..이곳이 쿠베린이 사는 사슴집이라고 하는 선술집이 아니란 말이요?" "그건 맞는데, 당신들이 누군줄 알아야 쿠브에게 안내하든 말든 하지." 옆에서 술을 마시던 늙으죽죽한 선원이 히죽거리면서 말했다. 그러자 주점안의 모든 작자들이 뭔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면서 공범자의 얼 굴을 한다. 이 음흉하고도 불온한 분위기를 감지한 젊은 놈들은 우물 우물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가슴에 왠 작대기 문장을 걸친 기사차림의 젊은 놈이 재빨리 말했다. "나는 미트라님의 명령을 받고 왔소!" 그 순간 선원들이 일제히 킬킬 웃는다. 마미도 쓴 웃음을 지었다. 스카와 나 만이 눈을 크게 떴는데 그 순간 선원들이 술을 퍼 마시면서 저마다 떠들어 대기 시작하였다. "어쩐지, 어쩐지.또 여자야?" "아아..쿠베린, 못쓰겠군.어디의 귀부인을 울렸길래 또 이러나." 녀석들이 킬킬 웃어대는 것을 나는 그 뒤통수를 차별없이 쿡쿡 눌러주면서 일어 섰다. "이봐! 미트라의 명령이라니, 그럼 이리와봐." 내가 말하자 젊은 놈이 욱하는 얼굴로 날 노려본다. "이봐! 어린 꼬마! 건방진 말하지말고 네가 쿠베린을 안다면 어서 안내해라!" "까불지 말고 이리와라. 이 몸이 쿠베린이시니까." 젊은 놈들이 일제히 입을 벌리는 순간 와락 가게안으로 웃음 소리가 가득찼다. 방안에 들어서자 마자 나는 이 녀석들을 새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세 명의 기사와 한 명의 종자인듯한 이 세 녀석은 아직 스무살도 안된 듯한 솜 털이 보송 보송한 놈들이었다. 칼을 차고 있긴 하지만 이 놈들이 진짜 적을 향 해 칼을 휘둘렀는지에 대해선 나는 분명히 내생명같은 돈을 걸고 말할 수 있 다. 이 놈들은 분명히 절대로 확실히 전.사.는 아니다. "자아,이제 말해 보시오." 스카가 느긋하게 자세를 취하면서 말했다. 그렇지만 녀석들은 자꾸 나를 흘긋 흘긋 보면서 망설인다. "하지만! 하지만 쿠베린은 어린애라고는..." 이런 방자한 소릴 지껄이고 있는 애숭이놈들이 버벅거리는 것을 우아한 나는 고 상한 자세로 턱을 괴고 물어봐 주었다. "얼렁 말해.애송이들아. 미트라가 뭐라고 했어?" "..미트라님에게 함부로 말하지 마라!" 욱한 가슴팍에 문장을 매달고 있는 젊은 놈이 막 항의를 할 무렵 스카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미트라..그 아가씨가 대체 누군데 그래?" "...델리암의 내친왕으로 시든 오이의 누이야.원래 이름은 엘란트라인 거 같은 데 미트라라고 하기도 한다네." "아...악! 그럼 공,공주님?" "너,그거 아직 몰랐던 거냐?" 내가 멀뚱거리며 녀석에게 묻자 스카는 버벅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몰랐어.하지만 넌 그 아가씨를 매달기도 하고 던지기도 하고..그랬었잖아!" 스카의 얼굴이 새삼 파랗게 된다. "그건 그렇다치고 어서 어서 말해 보시지.미트라가 어쨌다구?" 젊은 놈들-아마도 그녀의 호위기사인듯한 놈들은 혼란에 가득한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는 머리를 잠시 쥐다가 슬쩍 물었다. "저기...진짜 쿠베린이란.?" "그럼 누가 쿠베린이겠냐?" "하지만 왕녀께선 쿠베린은 키가 무척 크고 우람한 덩치의 검은 머리의 사내라 고 말씀하셔서..." "아아.그런가,그래도 검은 머리,녹색눈은 그대로 맞지?" "....." 녀석들은 날 바라보며 한동안 버벅거리다가 으음 하고 한 마디 했다. "마,말은 일단 전하겠소. 당신이 쿠베린이든 아니든 말이오.왕녀님의 말은 아주 간단하니까 말이오." "뭔데?" ".....그,그대로 전하겠소.." 붉어진 얼굴의 청년이 우물 우물 한다. 녀석은 뭐 마려운 얼굴로 몇번이고 사방 을 살펴서 우리들 이외엔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더니만 음음 하고 헛기침을 몇 번하고 나서야 겨우 말했다. "...왕궁에 와서 날 데려가주세요,쿠베린." 나는 한동안 멍청히 그 벌개진 얼굴의 놈을 바라보았다. 스카도 멍청한 얼굴을 하고 그 놈을 바라본다. 지렁이가 기어가도 들릴 만큼 무겁고도 어딘가 허전한 침묵이 우리들 사이로 걸 어왔다가 슬며시 걸어나갔다. ".....그게 전부냐?" "전.부.는 아니지만..." "그럼 다 말해." "...차마.." 녀석이 얼굴을 푹 숙이고 발갛게 얼굴을 붉혔다. 뒤에 선 세 명의 녀석들도 입 을 다문다. 이마에 주먹만한 혹이 달린 놈은 자신의 혹을 사랑스럽게 쓰다듬으 면서 말을 하지 못하고 버벅거리고 있는 녀석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고 있었다. 그러자 한 참 뒤에서야 벌겋게 된 얼굴을 한 녀석이 애써 입을 열었다. "나는 당신이 데리러 올 날만 기다리고 있어요. 이제..나는 당신의 눈이 뒤집힐 만큼 엄청나고 아름다운 미녀가 되었으니 날 데려가 주세요..만약 당신이 아니 라면 나는 재수없게도 저 뭔 대공이란 놈에게- 실례, 이 대공이란 바로 룬드바 르공국의 하인리히 에노트대공이오-시집을 가야 할 지도 몰라요.어서 어서 와서 날 데려가 주세요." 나는 침묵했다. 스카도 침묵하고 그 자리에 선 녀석들도 침묵했다. 왠지 약간의 간질 간질한 느낌이 얼굴 위로 기어다닌다. 스카를 보자 스카도 왠 지 얼굴을 긁고 있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이 젊은 심부름꾼들은 모두 멍하니 얼룩진 천장이라든가 얼룩 얼룩한 창문이라든가를 바라보며 듣지 않은 척 하고 있었다. "으흠..으음.." 스카가 헛기침을 한 뒤에 나에게 말했다. "그,그럼 말이지 천천히 이야기를해보자구.지금 궁성은 어떤가?" "...나는 기사다! 함부로 말하지 마라!" 젊은 놈이 벌개진 얼굴로 스카를 쏘아보았다. 나는 머리를 긁적 긁적 하고 있는 참인데 문득 문을 발칵 열고 사라가 고개를 내밀더니 물었다. "식사, 이리로 가져다 줄까요?" 스카가 세 명의 젊은이들을 바라보았다. "식사는...?" "...아,주시오." 내가 보기엔 아무리 봐도 기사같지도 않게 생긴 이 애숭이 기사들은 고개를 끄 덕이며 애써 멋진 척하려고 했다. "지금 궁성은 내가 알기로....룬드바르공국의 군사들로 바글 바글 한 것으로 아 는데." "그럴거야." 나는 트릿하게 말했다. 그러자 젊은 녀석들은 두 손을 움켜 쥐고 힘차게 말했다. "그렇소! 그래서 우리들은 애써서 여기까지 오는 데에 무척 힘들었던 것이오!" "자유 도시에서 살아서 다행야. 항구니까 룬드바르공국의 대공도 이 쪽은 안건 드리기로 시장과 조약을 맺었고 말이야." 스카가 어깨를 으슥하자 기사들은 입술을 앙다물고 그를 노려보았다. 지금 현 사태를 냉정히 보면 이러하다. 첫째 델리암은 망하기 직전이다. 시든 오이는 룬드바르공국에게 항복선언 비스끄무리 한 것을 했다. 룬드바르공 국의 대공이란 젊은 정복자는 지금 궁성에서 머무르고 있으며 그에게 대항하는 것은 오로지 저 잘난 척하는 에메스 베델대공과 일단의 무리를 이끌고 있는 그 이름도 기억이 잘 안나는 시장겸 영주였다.에메스는 아주 초라하게도 자신의 영 지태생의 군사들과 자기 기사들을 데리고 항거하는 중이고 그 시장겸 영주는 분 명히 용병대장 출신이었기때문에 용병들 몇몇을 이끌고 항거하는 중이라고 한 다. 뭐 인간들의 싸움에 대해서 길게 말할 것도 없지만 이 잘난 척하는 시든 오이와 그 화이딘스 대공이 어처구니 없게 항복해버린 것에 대해서 격분한 젊은 기사들 이 모조리 에메스 베델에게 달라붙은 것에 대해선 뭐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 니다. 전사란, 기사란 어디까지나 쌈박질을 하기 위해 살아가는 놈들이니까. 서쪽 끄트머리에 달라붙어 있는 에메스 베델의 영지, 아그랑은 지금 반룬드바르 공국의 기치를 높이, 너무 높이 쳐든 탓에 그 기치를 못봐서인지 아님 겁이 나 서인지 기사들이 별로 모이지 않고 있는 상태였지만 어쨌든 에메스 베델을 멋지 다,영웅이다 라고 부르는 자들이 꽤 있었다. 그 대표적인 케이스가 바로 엘리야 의 용병길드 마스터와 수도용병길드 마스터들인데 그 들은 베델과 그 이름도 기 억나지 않는 왕년의 용병대장-시장과 영주를 겸임했던 그 유능한 작자의 사이에 서 오락 가락하고 있다고 한다. 엘리야는 조막만한 자유도시이고, 항구도시인 탓에 룬드바르공국의 잘난척하는 해적출신의 선원들과 기사들이 지나쳐 가도 그런가 보다 저런가 보다 하고 신경 을 끊고 있었다. 처음에는 대포를 앞세우고 의기 양양한 몰골이 싫어서 침을 뱉 었던 사람들도 델리암 국왕이 항복문서에 조인해 버리자 에라 모르겠다 하는 태 도를 취하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장사가 아주 잘되고 있었던 것이다. 약삭빠른 엘리야의 시장은 룬드바르공국의 군주인 하인리히 에노트대공-이젠 대 공이라 부르기엔 무안한 영토를 가져버린 이 작자에게 기꺼이 친애의 표시를 했 고 그 덕에 엘리야는 다시 번성하고 있다. 전쟁이 나면 이리저리 오락가락하는 사람들과 물자 덕에 항구도시는 다시 번성하기 마련인 지라 아무도 불평하는 사 람은 없었다. 장사가 잘되면 다 좋은 것, 잘 먹고 잘 사면 다 좋은 것,뭐가 그렇게 피에 맺힌 의리가 넘쳐 흐른다고 에메스처럼 악악 거리면서 덤벼들 것인가. 그런데 그건 그렇다 치고 룬드바르공국의 대공 하인리히 에노트 룬드바르에게 미트라가 시집가게 되었다는 소리는 또 처음 듣는다. "그럼 역시..왕은 누이 엘란트라왕녀를 룬드바르군주와 결혼시킴으로서 이 나라 를 보전하려는 것인가?" 스카가 말하는 순간 아귀 아귀 스튜를 먹어대던 젊은 기사가 고개를 팟 하고 들 었다. "그런..일.." 그는 막 뭐라 말하려다 고개를 떨구고 계속해서 먹어댄다. 나는 턱을 괴고 어쩔까 생각 중이었다. 어차피 그놈의 룬드바르 공국의 군주란 녀석을 봐야할 입장이다.아니 정확히 말 한다면 그 놈을 보는게 아니라 그 놈 주변에 있다는 그 마법사와 그 마법사에게 동조했다고 하는 사인족을 봐야 했다. 왜냐면 녀석들이 바로 내 린을 죽인 놈의 하나이고 또 놈들이 우리들 고대의 일족들을 앞장서서 공격한- 솔직히 말해서 조인족을 공격했지만-놈들이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조인족들은 사인족의 왕과 함께 그들의 종적을 뒤따르고 있다. 하지 만 나로서는 그다지 그렇게 할 필요성이 없기때문에 헤어져 돌아온 것이었다. 묘인족을 공격한 것도 아니고, 묘인족은 놈들이 침을 흘릴 만큼 마법석따위를 가지고 있지도 않다. 물론 마법석을 내가 몇개 소유하긴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 조막만한 킬트의 만든 애가 말한대로 어차피 이 일을 해결할 것은 킬 트지 내가 아니다. 엘프들이 끼어들면 아크가 해결할 것이고 엘프들 자신도 약 한 존재가 아니다. 그 돌연변이 튜나를 생각해보면 별로 걱정스럽지도 않다. 드 워프? 드워프들이야 워낙 알아서 잘 해 왔다.그들은 마법은 그다지 좋아하지않 으니까 뚱땅 거리면서 잘 살아갈 것이다. 사인족 패거리가 이젠 난리를 치지않으면 그런대로 내가 나설 일은 없다. 전쟁이 일어나든 말든 그건 내 알바가 아니다. 인간 전쟁에 내가낄 이유는 없다. 그러니까 인간의 전쟁따위 보다는 당장 벌어질 사라의 결혼식이 나에겐 더 큰 일이었다. KUBERIN........ 가장 아름다운 여자를 얻는 자는 용기가 있는 자 가장 사랑스런 여자를 얻는 자는 지혜가 있는 자 이름을 얻을 수 있는 자는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자 3 가빈이 촐랑거리면서 흰 드레스를 들어보였다. "이거 이뻐요?" "아니." 나는 냉정하게 말했다. 옆에 선 스카가 신음성을 흘렸다. 사라는 지금 열 일곱번째 드레스를 입어 보고 있었다. 그녀도 지치고 스카도 지치고 마미도 지치고 가빈도 지쳤지만 나는 지치지 않았 다.가빈은 울상이 된 채로 투덜거리면서 아래층에서 재봉사를 데리고 왔다. "아리안, 다시 지으래요." "또? 지금 대체 몇벌을 짓는 줄 알기나 해!" 아리안이라고 하는 늙으죽죽한 여편네가 이를 갈면서 나를 쏘아보았다. 그 여편 네는 사라의 결혼식을 맞이하여 드레스를 만들어주러 온 여편네다. 내가 여자에 게 여편네라고 하는 호칭을 쓰는 것은 어디까지나 드문 일이지만 이 여편네는 여편네라고 불러도 된다. 일단, 이 여편네는 본인이 재봉사인 주제에 절대로 좋은 옷을 입지않으며 여름 에는 훌러덩 벗어 젖가슴을 반쯤 다 내보이고 다닌다. 나이는 오십대 중반으로 무척 뚱뚱하고 성격이 거칠다. 그리고 걸핏하면 술을 퍼먹고 술주정을 한다. 남 자들과 어울려 팔씨름을 하며 주먹다짐도 한다. 그런데 이 여편네는 엘리야 최 고의 재봉사인 것이다. 이 어찌 모순이 아닐손가. "쿠베린! 까다로운 것도 적당히 해! 아무리 아무리 옷을 만든다지만 지금 몇벌 째인지 알아? 이 아리안이 손이 다 부르틀 정도로 열 일곱벌이나 만들었어! 대 체 부족한 게 뭔지 말로 해! 말로!" 주먹을 부르르 떠는 여편네에게 나는 모른 척하고 사라가 지친 표정으로 걸친 드레스를 가리켜 보였다. "이봐, 이봐, 저 드레스는 프릴을 달아야 한단 말이야. 사라는 둥근 얼굴인데 저 드레스는 마치 저 앨 호박처럼 보이게 하고 있단 말이다. 어울리지 않아.어 울리지않는다고. 모양새도 너무 유치하고." "유치하다고! 내가 만든 드레스가 유치!" 그녀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주먹을 들어 날 후려갈기려다가 탁자를 내리치면서 소리 질렀다. "내 만들다 만들다 네 놈 같은 놈은 처음 봐! 두달동안 내가 무려 열 일곱벌이 나 만들어 내놨는데 하는 말마다 모두 마음에 안든다는 거냐!" 하하하 억지 웃음을 지으면서 스카가 화를 내는 그녀를 말려 뒤로 잡아 끌었다. 나는 진지하게 말했다. "내가 오랫동안 여행한 탓에 아주 안목이 높다는 것은 인정하겠지? 아리안?" "인정못해! 이 바람둥이자식아!" "허,바람둥이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품격이 있지 않으면 아무도 할 수 없 는 거야." "죽어버려!" 그녀는 씩씩 대고 나가버렸다. 당황한 사라가 그녀의 뒤를 쫓아 나가는 동안 마미가 한 숨을 쉬었다. "어지간히 해,쿠브. 아리안은 잘 만들었잖아?" "못만들었다기 보단 어째 결혼식 드레스 치곤 좀 초라하다구." 내가 말하자 마미는 쓴 웃음을 지으면서 내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초라하긴.사라는 지금 여지껏 이렇게 예쁜 옷들을 입어 본 적이 없어.언제나 허드렛일을 해왔으니까." 그녀는 씁쓸한 얼굴을 하고 중얼거렸다. 그 말에 스카가 하하 하고 어색한 표정을 짓다 말고 문득 말했다. "근데 쿠베린, 너 옆 방에 있는 그 기사들을 어쩔꺼야?" "어쩔 거...라기 보다도.." 나는 얼굴을 벅벅 긁었다. "일단 사라의 결혼식이 끝나면 가봐야 겠지." "...역시 그 미트라 왕녀를 구출하러?" "생각해보고. 그 계집애가 진짜 경천동지의 미녀가 되었으면 데리고 오고 아니 면 관두려고 해." 내 말을 애써 무시하면서 스카가 웃음을 지어 보인다. "하지만..만일 네가 그 왕녀를 데리고 와 버리면 룬드바르대공이 델리암왕국을 멸망시켜 버리는 거 아닐까?" "뭐,멸망이야 시키겠어? 그 시든 오이는 솔직히 말해서 무슨 매력도 힘도 없는 놈이라 죽여버리는 것은 손가락 하나로 족하잖아? 내 생각에는 그 해적왕이 시 든 오이에게 자기 누이든 아우든 줘서 명목상의 왕을 만들어 놓고 앞으로 전진 하게 되지않을까 해." 정복이란 젊었을 때 하는 거거든. 나이 들어 늙어보라, 정복할 마음이 생기기나 하나. 나의 고견에 감탄한 스카가 오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말이 가장 그럴 듯하다.그렇게 쉽게 일국의 왕이었던 자를 죽이진 않겠지." 내 생각으로 말하면 사악 죽여버리는 게 간편한 거 같은데 인간은 그렇게 죽이 질 않는다. 보통 왕이란 자신에게 고개를 빳빳이 쳐드는 놈을 모조리 죽여버려 야 하는 것인데 이 해적왕이란 룬드바르 공국의 대공이란 놈은 그렇게 하고 있 질 않았다. 뭐 녀석도 나름대로 인간답게 머리를 굴리고 있는 것이겠지. 인간의 나라가 세워지고 유지되는 것은 어차피 이삼백년정도다. 그 이상을 넘어 가면 뭔가 일이 터지고 터져 멸망해 버리던가 뭔가 반역자가 생겨나 난리를 쳐 대게 되어 있다. 결국 복잡하기 그지 없는 척, 뭐가 잔뜩 있는 척하긴 하지만 인간의 나라라고 하는 것은 끝이 너무나 뻔하다. 처음엔 거침없고 패기만만한 초대왕이 죽으면 후대가 잘난 척하다가 그 잘난척 을 못이긴 어떤 놈이 아래서 치받고올라온다.그렇게 되면 나라는 흔들 흔들.. 그러다가 다른 나라가 툭 치면 악 하고 쓰러지던가 아님 악 하고 덤비던가해서 이리 비틀 저리 비틀하게 되어있다. 그리고 나서 비실 비실한 왕이 나오면 그 자리에서 나라는 멸망한다 라고 하는 아주 뻔하고 흔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내가 이렇게 고견을 밝히자 스카는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언제 갈거야?" 갑자기 문을 열면서 사라가 물었다. 사라는 당당하게 내 얼굴을 똑바로 보며 물었다. "네 결혼식 끝나고." "...." 그녀는 입을 꾸욱 다문 채 치렁 치렁한 드레스들을 바라보았다.그리고는 날 향 해 물었다. "그렇게도 내 드레스가 마음에 안들어?" "응.새로 다시 지어." "..어떤 것을 원하는지 직접 말해달라고 아리안이 말했어.색깔은 처음에는 파랑 이라고 했다가 다음엔 분홍,그다음에 빨강..대체 어떤 것인지 모르겠대.지금 색 색으로 벌써 열 일곱벌이나 만들었어. 싼 옷도 아닌데..일단 뭐 돈을 내는 것은 쿠베린이니까 할 말은 없지만..." 사라가 옷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는 손을 젓고는 갑자기 생각난 듯이 말했다. "아! 그렇다.얇은 옷!" "얇은 옷이라니?" "얇은 옷도 만들어 보라고 해! 내가 생각한 것은 이렇게 나풀 나풀 한 것이었거 든? 그것을 전에 미트라인가 셀레네가 입었는데 그거 괜찮더라!" "지금은 아직도 겨울이야. 그런 여름 옷을 왜 만들어?" 사라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말했다. "아리안에게 그렇게 말해야 겠다.하늘 하늘 하는 옷으로 말이지...음..초록? 아 니면 진주색이라든가.." "쿠베린.." 사라는 한 숨을 쉬었다. "난 공주가 아냐..어딘가 귀족가문의 영양도 아니라고." 그녀는 한 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떨구고 나를 노려보았다. "....저녁먹으러 내려오라고 마미가 말했어." "알았다.알았어." 사라가 나가자 마자 스카가 내 머리통을 꾸욱 눌렀다. "뭐야?" 내가 그를 돌아보자 스카가 입을 주욱 찢더니 히죽이 웃어보였다. "뭐? 지참금따윈 안준다며?" "당연하지! 내가 왜 주냐!" "그럼..이 십수벌이나 되는 옷들은 다 뭐야?" 스카가 히죽 히죽 웃는다. "마음에 안든다고 다섯 벌 이상이나 다시 만들게 한 때 부터 묘하다고 생각했었 지.다시 다시 노래를 부르면서 벌써 열 일곱벌째..아니, 이제 부턴 여름옷으로 넘어갈 거냐?" 그는 침대위에 높고도 길게 쌓여있는 드레스의 더미를 바라보면서 고개를 끄덕 였다. "그럼 그렇지,색깔별로 줄줄이..이건 조끼가 없다.조끼를 달아라, 이건 장식이 모자란다 장식을 달아라..망토를 하나 덧씌워라,여기에 맞추어 장화를 만들어 라,구두 색깔을 바꿔라..말도 많더니..그거였냐?" 나는 쳇 하고 아무 말도 없이 배를 쓰다듬었다. "배 고파,쓰잘데기 없는 소리하지 말고 얼른 내려가 밥이나 먹어." "큭큭..네놈은 정말 웃기는 놈이라니까." 스카가 킥킥 웃는다. 나는 어디까지나 그런 의도로 옷을 만들게 한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나의 고상 하고도 높은 안목은 공녀나 왕녀나 혹은 귀족의 자녀만을 봐왔기에 어쩔 수 없 이 단련된 것이다. 그런 이 세련된 안목으로 보건대 아무리 잘 만든다는 아리안 이라 할지라도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실제로 촌스럽다구. 그러나 아래로 내려가자 아리안이 팔짱을 끼고 날 노려보고 있었다. 그런 여편네에게 다가가서 나는 점잖게 말해주었다. "음,사라에게 이야기 들었어? 내가 바라는 것은 말이지...이렇게 나풀 나풀 한 그런 의상 있잖아?" "나풀 나풀? 이 추운 날씨에 나풀 나풀한 옷을 입고 얼어죽을 일 있어?" 아리안이 나의 정신상태를 의심하는 듯한 시선으로 노려보기에 나는 인내심을 가지고말했다. "결혼식이 늦어질 수도 있지,안그래?" "악담하지마! 쿠베린! 네가 정말 사라를 결혼시키고 싶어한다면 그런 말을 해선 안되는 거야!" 아리안이 화를 버럭 내면서 내 앞에 있는 탁자를 쾅 하고 내려쳤다. "네가 아무리 여자를 밝혀도 그렇지, 딸내미 같은 사라가 결혼한다니까 배가 아 프냐? 애가 줄줄이 딸린 놈이!" 나는 그녀를 향해 인내심을 가지고 말해주었다. "이봐,이봐,여편네. 말을 잘 하라고. 애 많이 낳는 것도 능력이야! 여자 많이 거느리는 것도 능력이지. 내가 잘나서 여자와 애를 거느렸는데 거기에 대해 내 여자들이 불만이라도 토하는 거 들어봤어?" 아리안은 얼굴을 있는대로 찌푸렸다. "어찌되었든 사라를 고이 키워서 설마하니 마리아같은 창부로 만들 게 아니라면 고이 고이 보내주란 말이야!" 나는 손을 들어서 순간 아리안의 앞에 놓인 탁자를 내려쳤다. 퍼억하고 그 자리에서 둔중한 탁자가 두 동강이가 나서 두 개로 갈라졌다. 아리안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고 가게 안의 사람들이 조용해졌다. 시선이 일제히 이쪽으로 쏠린다. "여자라고 해서 모두 참아주지는 않아. 아리안.적당히 해." 내가 쏘아 보자 그녀의 얼굴이 굳었다. "한번만 더 그 입을 함부로 놀린다면 그 입을 그냥 놔두지는 않겠어." 난로앞에서 꼬리를 말고 있던 가빈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쪽을 본다. 주방에서 놀란 마미가 고개를 내밀었고 계단에서 내려오던 스카는 입을 벌렸다. 주변에서 술을 마시던 손님들과 선원들이 일제히 이쪽을 바라본다.사라는 쟁반 을 들고 놀란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구석진 곳에 앉아서 저녁을 먹던 그 기사차림을 한 세 녀석도 멍한 표정을 지은 채로 이쪽을 보고 있다. 불쾌한 침묵이 보이지 않는 망토를 펼쳐 일제히 가게안을 덮어 버렸다. "무슨 일이야? 응?" 마미가 탁자 너머에서 외쳤다. 나는 그녀를 휙 돌아보며 대꾸했다. "별거 아냐! 나가서 밥을 먹겠어!" "탁자 부순거야?" 마미가 앞치마를 앞세우고 걸어나왔다.아리안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굳은 채 로 서 있었고 나는 대꾸도 하지않고 박살난 탁자 조각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스 카가 뒤이어 내 뒤를 따라 나오는 것을 모른 척하고 걷자 뒤에서 참다 못한 스 카가 물었다. "어디 가?" "몰라도 돼!" 차가운 소금기를 머금은 공기를 입안으로 굴리고 천천히 삼키면 그 안에서 오락 가락하는 바다의 숨결을 느낄 수가 있다. 빌어 먹을 달이 구름 속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말았다 감질나게 구는 것을 등 뒤로 느끼면서 내 그림자가 생겼다 말 았다 하는 것을 본다. 입김이 만들어 내는 그림자가 땅바닥에 나타난다. 마리아가 있는 군터의 가게는 사람이 꽤 많다.거리 외곽에 있는 그 가게를 흘긋 흘긋 보면서 나는 발길을 돌렸다. 지금 가면 불쾌감만 더 늘어 나겠지. 손님이 많을 수 밖에 없는 것이 지금 룬드바르공국의 선원들이 왕창 왕창 이리 로 몰려들고 있기때문이다. 제기랄. 때 아닌 호황을 누리는 사창가를 바라보며 나는 나무 위로 기어 올라갔다. 원래 나무 위에 올라앉는 것은 좋아하지않는다. 그렇지만 오늘같이 기분이 더러운 날, 인간을 보고 싶지 않은 이런 날에 가끔 나무위에 올라오는 것도 나쁘진 않다. 무엇보다 추워서 오래 있고 싶진 않았지 만 이런 날은 정말 생각나는 게 꼬리를 물고 계속된다. 죽은 여자와 죽은 놈들과 바보같은 놈들과 어리석은 놈들과 슬픈 놈들이 계속해 서 눈앞에서 어른 거린다. 유령들이 말을 거는 이런 달밤엔 멀리서 들리는 파도 소리도 구슬프다. 아이를 낳는 여자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와 아이를 갖지 못하는 남자와 아 이를 가진 남자들이 서로 엇갈리고, 아이를 낳지 못하는 부족과 아이를 낳는 부 족이 얼크러져서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나무 위에서 보는 세상도 나쁘지 않다. 린은 언제나 이렇게 나무위에 올라 앉아 있었다. 녀석은 하늘을 어떻게 보고 땅을 어떻게 보고 달과 별은 어떻게 보았을까? 걸어다니는 인간들과 나와 조인족들과 사인족들과 나의 일족들을 어떻게 보았을 까? 그리고 녀석의 일족은 그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푸른 달빛이 어우러지는 이런 밤에 진절머리 나게도 서글픈 이런 밤에 나는 이 렇게 청승을 떨고 싶진 않았다.그래서 나무 위에서 부시럭 부시럭 내려와 생각 난 일을 하러 가기로 했다. "에..쿠베린?" 양파와 감자 상자를 나르던 녀석이 날 멀건히 바라본다. 입술이 두툼한 이 놈이 사라의 남편이 되리라곤 상상도 해 본적이 없지만 어찌 되었든 자세히 보니 일단 몸은 건강해 보이는군. 녀석은 내가 한 밤중에 들이닥쳐서 아래위로 몇번이나 훑어보고 있자 녀석은 스 산한 두려움을 느낀 듯 우물 쭈물 뒤로 몇걸음 물러선다. 그리고는 음음 하고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면서 나의 시선을 애써 피하려 들었다. 두툼한 어깨와 약간 꾸부정한 자세, 흙투성이로 더럽혀진 구두 코와 상처투성이 의 굵은 손마디가 눈에 은근히 거슬린다. 뭐 기생오라비 같이 매끈하길 바라진 않지만 최소한 기본적으로 생길 것은 생겨야 하잖아? 사라는 제법 얼굴이 예쁘 단 말이다.요염하진 않지만. "저,저기..쿠베린..하실 말씀이라도?" "...말해 두겠지만...말이지." 나는 점잖게 말했다. "사라는 이 몸이 키운 애라 그거다." "에...에에.." 녀석은 굽신 굽신한다. 어째 굽신 굽신하는 것도 마음에 안들기 시작하는데. "사라에게 손을 댄다든가.." "...그,그럴리가요!" "사라에게 구타 및 욕설 등등을 한다든가.." "그럴 리가 없어요!" 비명처럼 녀석이 외쳤다. 나는 히죽 녀석을 향해 웃어주었다. 녀석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다. "알고 있겠지? 어떻게 될지?" "......." 약간 떠는 다리를 바라보며 나는 흐흐 하고 녀석의 어깨를 쳐 주었다. "만약에 사라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이 쿠베린님은 네 놈의 다리 몽둥이를 부러 뜨려가지고 네 몸뚱이의 살갗을 하나 하나 찢어 네놈 아가리에 쳐 넣어주겠어. 알아듣지?" ".....에..! 저,절대로...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예를 들어서 네가 홱 바람을 피운다든가..도박으로 속을 썩인다든가 하면..." 나는 히죽 웃어보였다. "네 거시기를 툭 잘라 줄거야. 알아들어?" "에엑!" 녀석이 뒤로 물러서면서 무의식중에 사타구니를 가린다. 나는 손가락을 하나 치켜 들어서 빛나는 손톱을 녀석의 면상에 꺼내 보였다.오 오 멋진 나의 손톱, 어둠속에 빛나는 나의 이 손톱은 내가 봐도 황홀하게 달빛 에 어리여 마치 전설속의 드래곤 슬레이어처럼 빛을 발한다. 암암,멋지군, 너무 멋져 눈물이 나올 것 같다. "잘 알아듣겠지? 내 딸내미를 괴롭히면....흐흐흐흐.." 녀석은 등을 벽에 붙인 채 미동도 하지않았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이 괴물이라 도 본 것 같은 얼굴이었다. 달달 떨고 있는 그 녀석을 보면서 나는 천천히 미소지었다. 아차, 나도 모르게 송곳니를 드러내고 말았었군. 음,그렇다면 놀라는 것도 무리 는 아니지. "음,,그럼 나중에 결혼식에서 보자. 두꺼운 주둥아리." "....에에..네에.." 건방지게도 녀석이 고개만 까딱 까딱 하는 인사를 했지만 나는 마음 넓게 용서 해 주었다. 아아 그래..기분이 조금 풀리는 군. 달빛을 받으며 집으로 오는 이 기분, 제법 상쾌하군. 나는 거리를 걸으면서 파도소리를 감상했다. 그 동안 무심히 걸었던 이 달빛어린 거리를 걸으면서 마미의 사슴집을 바라보았 다.이 곳에 온 지 어느새 20년이 넘었다. 이 정도 오래있었던 곳은 드물었지만 이 정도로 마음에 드는 곳도 드물었다. "쿠베린! 빵하나 먹고 갈래? 지금 막 새로운 꿀호밀빵을 만들었는데 말야!" 문득 지나는 나를 보며 빵가게 주인인 하플링 주코가 손을 흔들며 불렀다. "먹고 말고." 내가 가자 하플링은 조그마한 손을 뻗어 커다란 빵을 건넸다. 아직 따끈한 빵이 어서 기분이 좋다. 냄새는 달콤하고 부드럽다. "오오,냄새가 좋다." "그렇지? 이제부터 시판해 볼거야,여기에 호두를 넣는 게 좋을까? 아님 땅콩을 넣는 게 좋을까?" 녀석이 작은 대가리를 흔들면서 고민스런 표정으로 작은 모자를 벗고 머릴 북북 긁는 동안 나는 한 입 깨물어 먹었다. 그리고 냉정하고 냉철하게 말해주었다. "호두를 넣어." KUBERIN........ 가장 아름다운 여자를 얻는 자는 용기가 있는 자 가장 사랑스런 여자를 얻는 자는 지혜가 있는 자 이름을 얻을 수 있는 자는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자 4 결혼식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오랫동안 생각해보지만 그다지 의미가 있는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최소 한 이유는 있는 것 같다. 결혼식이란 틀림없이 딸내미를 빼앗기는 아버지 들을 전혀 생각지 않고 만들어진 것이다. 나는 사라와 주둥이 두꺼운 녀석 이 키스하는 장면을 보며, 사람들이 축하의 인사말을 던지고 즐거워 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것을 실감했다. 나도 모르게 신랑이란 저 놈의 자식에게 건네줄 가죽 요대를 아작 아작 물 어뜯으면서 나는 녀석을 저주의 눈빛으로 노려보고 있다. 옆에서 보던 스 카와 마리아가 나를 쿡쿡 찌르며 진정하라고 말했지만 진정이 되질 않는 다. 진정? 진정? 진정이라구! 당연하지 않은가. 지금 눈앞에서 왠 산도둑같이 생겨먹은 놈이 내 여자앨 데리고 가는데 속이 온전할 리가 있는가. 나도 모르게 송곳니가 튀어 나오 고 손톱이 튀어 나오려 한다. 그것을 아주 억지로 자제하려니 눈앞에서 불 똥이 튀길 정도가 된다. 내 속도 모르고 마미는 자랑스레 가슴을 펴고 아름다운 드레스를 걸친 사 라를 바라보고 있고 여자들과 사내들은 저마다 사라의 아름다움을 칭찬하 고 있다. 그럼 그렇지, 내가 저 계집애의 드레스에 얼마를 들였는데. 날 사랑한다더니 시집만 잘 간다. 쳇쳇,웃고 웃고 떠들고 태연자약하게 저 두터운 입술이란 놈에게 더벅 더 벅 입술을 맞추고.. 젠장할! 아리안은 자랑스레 얼굴을 들고 그 광경을 지켜 보며 솥뚜껑만한 손으로 거대한 맥주잔을 휘휘 공중으로 내저으며 술을 퍼 마셔 댔다. "저 드레스, 내가 만든 거라구!" 잘난 척하긴! 옷을 다시 만들라고 지시한 것은 나란 말이다! 오크들이 기쁨의 의미로 거대한 장대를 들어 오색의 깃대를 만들어 휘둘러 댄다. 휘황하게 흔들리는 오색의 깃대와 드워프들이 만들어낸 불꽃놀이가 찬란하게 주변을 물들이는 동안 나는 술을 퍼먹으면서 왠지 모를 허함을 달래고 있었다. 가빈이 열심히 내 옆에서 술을 따라 준다. 아아 벌써 세 통 이나 먹어버렸다. 맥주도 아닌 포도주를 말이다. "춤춰요, 쿠베린." 사라가 이를 박박 갈고 있는 나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춤추는 놈들을 훑어보았다. 다들 내 끓는 속을 모 르고 잘난 척 춤을 추어 댄다. 제길 제길 제길! "그래요, 추, 춤춰요! 쿠베린!" 가빈이 나의 팔을 잡아 끌며 일으켜 세웠다. 나는 음산한 눈초리를 유지한 채로 일어섰다. 가빈이 겨우 겨우 안도한 한 숨을 내 쉬면서 재빨리 아까부터 자신을 부르고 있는 하플링 사이로 도망 쳐 버렸다. 흥, 배신자. 마미는 웃음을 머금고 산더미같은 축하 음식들을 퍼주고 있었고 모처럼의 축제에 근처 상인들이 모조리 몰려들었다. 신랑이라고 하는 그 두터운 입 술을 한 놈에게 장정들이 몰려들어 술을 곤죽이 되도록 퍼먹이는 것을 보 면서 나는 부루퉁한 어조로 사라에게 물었다. "저 부르튼 주둥이가 좋다는 말이냐?" "...부르튼 주둥이?" 그녀는 한동안 그게 무슨 소린가 하고 헤메이다가 내가 자기 신랑을 지칭 한다는 것을 알자 노골적으로 화를 냈다. 그리곤 그 분노의 표현으로 지나 치게 가까이 있는 내 발등을 사정없이 짓밟았다. 그러나 나는 눈썹을 찌푸리고 인내심 깊게 참아냈다. 밤바람이 차다. 밖에서 잔치를 하기엔 사실은 추운 날씨지만 여기저기 모닥불과 환한 불빛 으로 주변은 온후했다. ".....쿠베린." "왜?" "내가 시집가면 속 시원하겠네?" "시원하고 말고." 재빠른 나의 응답에 그녀가 이를 갈며 날 노려본다. ".....다른 여자들과 실컷 놀아난 주제에 나에겐 아버지 흉내를 낼 참이야?" "넌 말했다시피 내 취향이 아니라고 했잖아?" "그럼 저 산더미같은 옷은 다 뭐야?" 입도 싸다. 스카 놈. "그건 네가 워낙 촌 티가 나서 옷이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야. 도무지 무슨 옷을 입어도 어울리질 않잖아? " 내가 태연히 말해주자 그녀는 눈꼬리를 치켜 올리고는 날 노려보았다. "그래서 스무벌이나 되는 드레스를 계절별로 지어 주었다구?" "도무지 옷맵시가 나지 않으니 어쩌겠냐?" 내가 어깨를 으슥해 보이자 그녀는 갑자기 스텝을 멈추고 서서 날 끌어안 았다. 내가 미소년 사이즈이니 그녀의 품안에 푹 안길 수밖에 없다. 그녀의 체취가 느껴졌다. 건강하고 어딘가 젖냄새와 같은 순수한 냄새, 내 딸의 냄새다. 내가 직접 낳은 딸네미들이 다 클 때 또 이런 기분을 맛보게 될까? 아니, 딸네미들이 줄지어 이 남자야 하고 남자를 데리고 오면 잘근 잘근 밟아서 뜯어줄테다! 사라야 인간이니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내 딸은 동족! 내 명령 없이는 절대로 남자와 지낼 수 없다! 내가 그런 생각으로 불타고 있을 때 갑자기 사라가 내 이마에 키스하며 물 었다. "근데 말이지... 이런 날은 쿠베린이 작은 게 너무 이상해.." 그렇지만 이 자리에서 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버리면 또 곤란하지. 모 처럼 입은 새 옷이 엉망이 될 테니. 나는 머리를 북북 긁다가 말했다. "본래의 모습이라....." "쿠베린은 지금 모습이 본래의 모습이 아니라고 했지? 그럼 본래의 모습을 보여줘." "귀찮게 하지마! 자식아! 나 모처럼 새 옷 입었는데!" 내가 열 받아 외치자 그녀도 마주 외쳤다. "바꿔 입어! 나는 오늘 시집간단 말이야!" 눈물이 글썽 글썽한 눈. 할 말을 잃었다. 스카가 어느샌가 손을 내밀어서 그녀의 손을 잡아 주었다. 나와 사라 사이 에 끼어든 녀석은 나를 엉덩이로 툭툭 밀며 말했다. "가, 가서 본래의 모습으로 갈아입고 오라구." "이봐, 옷 없어." "내 걸 입으면 되잖아." "야, 나는 너 보다 커." 순간적으로 스카와 사라가 동시에 굳어서 날 바라보았다. ",..그, 그랬었던가?" 스카가 괜히 멋도 없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멋으로 왕을 하고 있는 줄 아는 건 아니겠지? 월등한 힘, 월등한 육체가 아니면 왕을 할 수 없단 말이다. 싸움은 힘만으 로 하는 것도 아니고 머리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두 개가 조화를 이루고 거기에 천부적인 재능과 감각이 덧붙여져야 한단 말이다 라고 내가 말할 참에 뒤에서 마미가 말했다. "모처럼의 결혼식이야. 사라를 기쁘게 보내줘, 쿠브." 여기서 변한다는 것은 마미를 다치게 하는 일이다. 마미는 평안한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 옛날 마미가 미쳤던 그 때부터, 그녀의 아이가 되 어 그녀의 곁에 있어온 지 30여년이 가까워 진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자리에 서서 사라의 손을 마주 쥐고 있는 것은 마 미였다. 그날 처럼 울부짖거나 고통스러워 하지 않는 그런 평온한 얼굴, 새끼를 바 라보는 어미의 얼굴이다. 나는 집안으로 들어가 내 방 침대를 뒤져서 처음 다크시온이 나에게 입혀 주었던 옷을 꺼내들었다. 커다란 검은 튜닉은 나에게 잘 어울린다. 허긴,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옷은 없다. 촌뜨기 사라와 달리 말이다. 후흐흐. 몸을 부풀려 옷을 끼어 입고 아래 층을 내려다 보았다. 사람들은 웃고 떠들고 즐기고 있었다. 아까부터 신랑을 둘러싼 사내자식들이 거의 고의적으로 술을 퍼먹여 네 발 로 기게 만들고 있었다. 그래, 그래, 푹 먹여서 죽을 고생 좀 시켜 줘라. 절 대로 술을 마실 생각도 들지 않게 고생을 시키란 말이다. 허긴 아까 결혼 식 전에 선원들을 불러서 저 두툼한 주둥이 놈을 곤죽이 되도록 퍼먹이라 고 시켰었다. 녀석들, 말 잘듣고 있군. 마미는 스카와 춤추고 있었다. 사랑스런 여자, 내 어머니 같은 여자, 가엾고도 따스한 여자, 큼직하고 가 련한 여자, 그리고 가장 나와 오래 있었던 여자. 나는 그녀를 바라보면서 그녀와 나란히 서서 케이크를 먹어대고 있는 내 딸을 바라본다. 딸은 웃으면서 스카와 춤추는 마미를 바라보고는 자신에게 춤을 청하는 신랑 친구들과 떠들며 춤을 춘다. 선원들은 어느 새인가 어깨 를 마주 하고 노래하고 있었다. 아래로 내려가자 마자 나를 제일 먼저 눈치 챈 것은 다름 아닌 마리아 였 다. 그녀는 나를 보고 눈을 크게 떴으며 제일 먼저 내 앞으로 다가와 나를 올려다 보았다. 흠, 맨날 마주 보다 내려다 보니 기묘한 감흥이 있군. 그녀의 눈은 아주 아주 컸다. 그녀의 눈안에 비친 나는 그녀의 눈동자 보 다는 작다. 뭐 어찌되었든 나는 그녀의 허리를 한 팔로 휘감으면서 물었다. "춤 출래?" "아아...응." 그녀가 새삼 얼굴을 붉혔다. 춤을 추면서 주변의 인물들이 흘긋 흘긋 돌아본다. "누구지?" "낯익어." "누굴까?" "왠 낯선 녀석일까?" 병신들, 못알아 보는 구만. 마리아가 내 가슴에 얼굴을 묻으면서 중얼거렸다. "당신, 진짜는 역시 굉장히 크네." "그래서 싫다는 거야?" "싫긴, 싫을 리가 있어? 멋있어." "핫핫..." 나는 그녀의 몸을 꽈악 끌어안았다. 역시 여자란 놀라운 존재, 날 금새 알 아차리곤 몸을 겹쳐 온다. "야! 그새를 못 참아서 거기서 그러고 있냐!" 스카가 소리를 질렀다. 나는 마리아의 허리에 한 팔을 두른 채 마미와 사라의 옆으로 다가갔고 그 제서야 사방이 조용해지도록 나를 바라본다. 사라의 얼굴은 멍하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미는 그다지 놀라지 않은 얼굴로 천연덕스레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곤 그녀가 입을 열었다. "쿠브, 사라와 작별의 키스를 해." 작별의 키스라? 내가 어리둥절하자 주변에서 아아 하고 놀라는 소리가 커졌다. "이야! 쿠베린이었어?" "쿠베린! 진짜 크다! 지금의 모습이 진짜인 거냐?" "에에! 사기다! 사기!" 여기저기서 날 바라보며 한 마디씩 던지는데 스카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아버지가 신부에게 하는 작별키스 말이야." 인간의 관습이란 기묘한 것이 있다. 나는 사라에게 손을 내밀었고 그녀는 주저하면서 한 걸음 다가와 섰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어깨를 잡고 이마에 키스했다. 뺨이 축축했다. 그 축축한 뺨을 핥아주면서 나는 머리를 쓰다듬었다. "가서 잘 살아라.그리고 저 두툼한 주둥이가 이상한 짓 하면 와서 다 일 러라, 만약에 너에게 이상한 짓거리라도 하면 짓이겨 줄테니까." 쿡 하고 사라가 웃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지 않고 기묘한 표정으로 날 올려다 보았다. "안녕히. 쿠베린." "뭐가 안녕이냐? 나는 사슴집에서 살고 넌 야채집에서 사는데." 내가 퉁명스레 말하자 그녀가 내 가슴팍을 후려쳤다. "하여간 작별은 작별이잖아!" 그녀가 우는 것인지 웃는 것인지 기묘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할 때에 나는 그녀의 뺨을 꼬집었다. 아직 축축한 얼굴을 만지면서 나는 엉덩이를 툭툭 쳐 보았다. 허어 역시 커졌다. 음..역시 믿어지지가 않아. 그 꼬맹이가 이런 이쁜 아가 씨가 되었다니. "무슨 짓이얏!" 그러나 그렇게 한 순간 또 한번 세차게 걷어채였다. 다음날 아침에 나는 숙취로 거의 바닥을 기고 있는 녀석들을 헤치며 밖으 로 걸어나왔다. 마미가 거대한 엉덩이를 흔들면서 닭내장을 훑어내리고 있 었다. 아마 닭죽을 끓여줄 모양이다. 음, 역시 술 마시고 난 뒤엔 그게 좋 지. 그러나 앞으로 이틀간 결혼식 파티는 계속될 거다. 사라를 야채 집에 빼앗긴 이 분함과 원통함을 하룻밤으로 끝낼 수 있나? 나는 음험한 질투의 불기둥을 불태우면서 야채집 그 두툼한 주둥이 자식을 작살내라고 이미 동네 방네 껄덕대는 녀석들에게 특별한 지시를 내려 놓았 다. 그리고 내 방과 이층 방 여기저기서 구르고 있는 자식들은 결혼식을 축하 하러 온 용병길드 놈들과 선원놈들, 그리고 기타등등의 놈들로 나의 아픔 을 같이 아파해 주겠다고 온 놈들이었다. 이름? 사내자식들 이름을 내가 뭐하러 외워? "쿠베린." 내가 뒤에 서 있는 것을 돌아보지도 않고 그녀가 말했다. "이제 되었으니까..어린 애 모습은 하지 않아도 돼." 그녀의 어조는 담담했다. 침묵이 흘렀다. 텅빈 가게의 벽난로가 탁탁 불꽃을 튀긴다. 나는 하품을 하면서 그녀의 두터운 허리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 녀의 넓은 등에 머리를 박으면서 조용히 말해주었다. "그건 곤란해, 마미." "......" "나의 멋진 모습을 보고 여자들이 몰려와 난장판을 치게 될 거야. 아직은 어린애 모습이 안전해." 그녀가 나를 돌아보았다. 무뚝뚝하지만 푸근한 웃음이었다. "게다가 내가 커지면 나는 안길 여자가 없어진다구." KUBERIN........ 가장 아름다운 여자를 얻는 자는 용기가 있는 자 가장 사랑스런 여자를 얻는 자는 지혜가 있는 자 이름을 얻을 수 있는 자는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자 5 "급합니다!" 녀석들이 소리를 빼애애액 하고 질렀다. 그리고 일순, 가게 안은 조용해 졌다. 나는 숙취로 머리를 부여잡고 술국과 닭죽을 먹으며 겨우 겨우 달래는 무 수한 사내들이 그들에게 살기를 보내는 것을 엄청난 공감대를 느끼며 주시 했다. 지금 이틀간이나 결혼 축하 파티라면서 내리 내리 술을 퍼먹은 나와 스카 를 비롯한 내 주변의 사내들 열 댓명은 지금 살아있는 자의 몰골이 아니었 다. 사흘을 밤새서 술을 퍼먹고 밤새도록 주정을 하고 겨우 겨우 살아났다. 지겨울 정도로 길고 긴 결혼식 파티였다. 젠장할. 난 이제 부턴 절대로 술 안 먹어! 숙취를 견딘다고 하는 것은 모름지기 수 천명의 사인족 무리들과 싸우고, 말도 안되고 씨도 먹히지 않을 논쟁답지도 않은 논쟁을 엘프들과 더불어서 수 백년쯤 하면서 그 맛대가리 없는 밥상에 얼굴을 들이밀고, 드래곤 슬레 이어를 만들겠다고 버벅거리는 드워프들과 광산에서 약 백년간 살면서 용 광로에 불을 때고, 땅을 뒤집어 엎어가며 광석을 찾으며, 화장한답시고 앉 아서 꼼짝도 하지 않는 인간의 여자들을 수 백시간쯤 기다리고, 용족의 껍 질을 벗겨내어 비단이 되도록 무두질을 한 것과 같은 그런 엄청난 인내와 노력, 그리고 힘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런 엄청난 일을 견디고 있는 우리들에게 소리를 지르다니, 그것도 계집 도 아닌 사내자식이 빽빽 소리를 지르면서 감히 나에게 재촉하다니, 이게 간이 부어서 배 밖으로 튀어 나와 그 놈의 간덩이를 가지고 공놀이를 해도 부족할 배짱이 아닌가! 나의 눈초리가 사나와 지고 내 주변에 앉아있던 수염 숭숭하고 지저분한 몰골들을 한 얼굴 창백해진 덩치들이 살벌한 시선을 보내자 세 명의 애송 이는 턱이 굳었다. 술을 먹는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하고 앞으로 겪을 숙취의 고통을 각고의 인내로 참아내야 하는 엄청난 일인 것이다. 그런 고통을 우리들은 사흘간 참아왔다. 그런데 지금 이 쥐털만한 애송이들이 그 고통의 사선을 넘어선 우리들 앞에서 소리를 지르다니. 그것을 그대로 두고 본다면 이건 체면에 관계된 일이 아니겠는가 하고 내가 주변 녀석들에게 눈으로 묻자, 그 뜻을 알아차린 한 녀석이 문간에 앉은 녀석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역시 어젯밤 지나치게 토해 버려 얼굴이 푸르죽죽, 푸른 아인족을 연상하게 만들정도로 퍼렇게 된 녀석이 자신의 시뻘건 수염을 털며 일어나 더니 조용히 소리도 나지 않도록 문을 열었다. 그러자 그 옆에 있던 녀석 이 역시 조용히 아주 조용히 의자도 끌지 않고 일어나 메이스만한 주먹을 치켜 올리면서 말도 없이 위협을 해 보였다. 그 주먹을 본 세 명의 애송이 기사들은 조용히 아주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발끝으로 걸어 가게를 나갔다. 그리고 우리들은 저마다 머리를 쥐어 뜯으면서 고통을 감내하고 절대로 술 을 입에 대지 않겠다고 맹세하면서 해장술과 술국과 닭죽을 먹었다. 뭔가 말하려고 하는데 계속 말하지 않고 버벅거리는 놈들이 있다면 정말 정말 짜증이 난다.말을 하려면 하고 말려면 말것이지 왜 버벅거리면서 뒤 에서 손톱을 물어뜯으면서 자기 콧털을 뜯어 허공에 날린단 말인가. "..저기..저기." 콧털을 뜯어 날리던 한 녀석이 입을 연 놈을 슬그머니 바라본다. 세 놈의 기사중에 정중한 얼굴을 한 녀석과 콧털을 쥐어 뜯고 있던 방자한 얼굴을 한 녀석, 그리고 애매 모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종자 놈이 날 스리 슬쩍 훔쳐 본다. "부탁인데요...말에 타시면 안될까요?" 그렇다. 지금 나는 걷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나는 앞서 걷고 녀석들 셋은 뒤에서 내 뒤를 한가롭게 말을 타고 따르고 있었다. 나는 원래가 말을 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 말이 불쌍하니까 그렇다. 본디 말은 먹는 것이지 타는 게 아니다. 가끔 타 긴 하는데 마차를 타거나 어쩔 수 없이 다른 놈들에게 보조를 맞추어 주기 위해서 타는 거지 본의로 타진 않는다. 재미도 없고 이리저리 흔들리는 꼴 이 즐겁지 않다. 내가 달리면 훨씬 더 빠른데 뭐하러 귀찮게 말을 타겠는 가. 뒤에 있던 스카가 킬킬 웃었다. "그래, 그래, 이봐. 차라리 나랑 같이 타자구." 스카가 따라왔다. 뭐 어차피 별로 따로 할 것도 없는 놈이기 때문에 수도용병길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싶다면서 따라 나섰다. 녀석의 뒤를 따라서 가빈이 따라 오려는 것을 나는 매몰차게 거절하고 녀석의 양쪽 귀를 틀어 쥔 채 조용히 충고해 주었다. "너, 지금은 아크도 없다는 걸 기억해." 새로 만들어진 두 귀를 붙잡고 가빈은 우는 얼굴을 하더니만 꼬리를 말고 마미의 앞치마를 쥐어 틀면서 숨어 버렸다. 녀석을 그렇게 내쫓을 즈음 며 칠사이 엄연히 아줌마가 된 사라가 주걱을 휘두르면서 나에게 충고했다. "쿠베린! 가빈을 겁주는 게 그렇게 재밌어?" "재밌어." 내가 대꾸하자 사라가 경멸의 기색을 지우지도 않고 말했다. "정말 그 덩치를 한 주제에 어린애 얼굴을 하고 가증스러워!" "시끄러, 아줌마." 사라가 이를 갈면서 나에게 주걱을 집어 던졌다. 속 쓰리군, 사라 생각을 하니. "마차를 한 대 빌릴 테니 타고 가자. 이 기사양반들이 불쌍하지도 않냐?" 스카가 뒤에서 종알거렸다. "됐어." 수도로 가는 길목에 서서 보면 여기 저기에 분명히 저는 델리암 녀석들이 아니에요 라고 얼굴에 써붙이고 다니는 얼굴이 검은 녀석들을 몇 볼 수 있 었다. 녀석들은 모두 아름다운 색깔로 장식된 새털 같이 생긴 것이 달린 모자를 쓰고 다니는데 그게 어째 상당히 우습다. 인간들의 자기 치장에 대해선 나도 일가견이 있긴 하지만 델리암근처에서 오래 지내온 터라 나역시 남쪽에서 지낸 것은 얼마 되지 않고 그나마도 몇 백년전의 일이기 때문에 남쪽 인간들의 장식은 나에게도 이채로왔다. 북쪽 놈들은 별로 장식이 없고 남쪽 놈들은 울긋 불긋하게 장식을 한다. 그리고 남쪽놈들은 거무죽죽하고 북쪽놈들은 히멀건하다. 관도를 걸어가다 보면 당당하게 말을 타고,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그 뭐라 고 하더라...그, 공국이던가..룬드바르 공국이라고 했던가 하는 녀석들의 병 사들과 기사들을 볼 수 있었다. 몇번 그들을 지나쳤는데 우리 일행들을 힐 긋 보았을 뿐 녀석들은 무심한 태도로 앞으로만 가고 있었다. 상당한 중장 비를 갖춘 놈들이었다. 랜스를 앞세운 두터운 갑주병이 말을 탄채로 지나 가고 뒤이어서 창병과 궁수대가 따라간다. 그 뒤를 각자 식량과 짐을 잔뜩 지운 수레와 종자들이 따르고 그 뒤를 약간 멀리 하면서 창부들이 따라 가 고 있었다. 갈 길이 바쁜지 이쪽을 보는 놈들은 별로 없었다. 우리들과 같이 가고 있 는 세 명의 이 애송이들은 그들의 시선을 스리 슬쩍 피하면서 지나가고 있 었다. 쳇, 녀석들의 가슴에 새겨진 문장들이 아깝다. 그렇게 숨을 거라면 차라리 달지나 말지. 스카가 예리한 눈으로 보면서 중얼거렸다. "북쪽의 고왕국을 친다는 게 사실인가 보군." "북쪽 고왕국?" "아아..프라임왕국말이야." "그렇게 추운 땅을 뭐하러 가지고 싶어하지?" 내가 중얼거리자 스카는 어깨를 으슥했다. "너는 룬드바르의 대공이 아니잖아." "그건 그래. 나는 세계정복 내지는 영토 확장이라는 무의미하고 바보스러 운 짓거리는 하지 않거든." 왜 안해 라고 스카가 물었다. 나는 녀석을 올려다 보았다. 말 위에 앉은 녀석은 이상하다는 듯이 날 바 라본다. "인간들을 가끔 이해 할 수 없는 부분이야. 죽어 넘어가면 겨우 한 줌의 흙이 되는데 뭔 땅이 그리도 많이 필요하지?" 게다가 지킬 수도 없다. 인간의 왕이란 것은 무지 무지 불편한 것이다. "..그러게 말이다." 스카가 드물게 동의했다. 녀석은 한동안 관도를 지나는 군세를 지켜 보면서 침묵했다. "나이 들면서 생각하는 것인데..정말 싸움은 싫다." "난 좋아." "..그러니까 널 어린애라고 하는 거다." "내 목숨 걸고 내가 내 힘으로 혼자서 싸우는 싸움이야. 그건 하나의 도락 이고 즐거움이다." 나는 스카와 나란히 날 주시하는 애송이들을 돌아보며 냉담히 말해주었다. "인간들의 수컷들이 우르르 떼지어 벌이는 땅따먹기와는 엄연히 다르단 말 이다. 알아들어?" ".....그런가." 스카는 침묵했다. KUBERIN........ 가장 아름다운 여자를 얻는 자는 용기가 있는 자 가장 사랑스런 여자를 얻는 자는 지혜가 있는 자 이름을 얻을 수 있는 자는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자 6 내 생전 인간들과 같이 모여 앉아서 히히덕 거리고 있는 사인족들을 보게 될 줄은 몰랐었다. 그것도 이 사인족들은 모두 인간의 옷을 걸치고 인간의 무기를 걸친 채 인간의 병사들과 어울려 앉아있는 것이다. 경이이다 못해 기가 막혀서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 나를 인도하던 애송이 기사들은 우물 우물 하면서 날 돌아본다. 엄밀히 말해서 사실 내가 화를 낼 이유는 없다. 사인족이 좋아라 뒤집어진 인간의 옷을 입고 춤을 추든 발가벗고 노래를 하든 그건 내 알 바는 아니 었다. 그러나 얼마 전-얼마전이었던가- 보았던 그 추욱 늘어진 사인족 왕 의 몰골을 기억하는 나로서는 이건 왠지 기분이 떨떠름하고 속이 미슥미슥 했다. 우리들은 막 왕궁 입구에 서 있는 중이었다. 지금 내 앞에는 당연한 일이지만 문지기가 있고 그 문지기는 얼추 나를 인 도하던 애송이 기사들에게 인사를 하면서 막 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나 는 그 문 가에서 후줄그레한 얼굴로 앉아 있는 예닐곱의 병사들 중에 사인 족이 두 명 끼어 있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그들은 델리암 병사가 아닌 듯 한 낯선 복장을 하고 있는 녀석들과 어울려서 히히덕 거리고 있었다. 왠지 껄끄러운 기분이 된다. 정확히 말하면 녀석들은 사인족이 아닌지도 모른다. 그들은 누런 털이 솟 은 손등을 가지고 있는 것 이외엔 전혀 인간과 다를 바가 없었다. 내가 그 들을 눈치 챈 것은 냄새 때문이었으니까. 그들의 변신은 사인족의 그것과 달리 반쪽에 불과하다. 손톱은 사인족의 그것처럼 쭉 고르게 나지도 못하 고 근력도 그렇게 빠르지 않고 어중간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저게 변신한 거 맞아 하고 고개를 갸우뚱할 정도다. 얼핏 보면 수인족의 꽁지 빠진 늑대인간들 처럼 보일 것이다. 아아..그렇군, 은빛 늑대족의 웨인놈아, 너 기쁘겠다. 너의 종족 비스끄무리 한 놈들이 나타났으니. 놈들은 나를 흘긋 보았지만 내가 어떤 분인지 못 느끼는 듯하다. 내가 뚫 어지도록 바라보고 있어도 그런가 부다 하는 얼굴로 멀뚱 거리고 있다. "어서 안으로..." 애송이 기사 중에 한 명이 인도했다. 스카가 내 등을 쿡쿡 찔렀기에 나는 일단 안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미트라가 머무는 곳은 왕년 내가 에메스들과 같이 머물렀던 공관 맞은편에 놓여진 화려하게 꾸며진 정원 안쪽의 안쪽인 모양이다. 그 정원을 통과해 서 추적 추적 걷다 보니 붉은 벽돌과 파란 벽돌을 겹쳐 쌓아 올린 화사한 벽돌담이 나왔다. 그 벽돌담을 두 개 쯤 지나서 걷다보면 드디어 하나의 새로운 정원이 나타난다. 아아, 깊기도 해라. 새로운 정원을 막 헤치고 나아가는 동안 풍덩 풍덩 물 소리가 들렸다. 혹 여 아리 따운 아가씨가 목욕이라도 하나 싶어 돌아보니 연못에서 잉어가 뛰고 있다. 밥주는 시간이라 그런가 보다. 문득 잉어를 보니 배가 슬슬 고 프다. 나는 배가 고픈 것을 워낙 싫어하니까 뭔가 먹었으면 좋겠다고 생각 하면서 뒤에 따라오고 있는 스카를 돌아보았다. "도시락이라도 싸왔냐?" "왕궁에서 도시락 까먹게?" "안될 건 뭐야?" "아마 왕녀님이 맛있는 것을 차려 두셨을지도." 스카가 싱글 웃으면서 말했기 때문에 나는 앞서 걷는 놈들의 뒷통수를 향 해 밥 밥 하는 소리를 중얼거리며 걸었다. 어느 정도 걷자 이젠 색유리와 금박을 덮어 치장한 건물이 보였다. 건물은 높은 탑 처럼 보였는데 문은 붉은 장미덩쿨로 얽혀져 나름대로 품위가 있 어 보인다. 철제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경비처럼 보이는 두 명의 기사 가 이쪽을 보고는 놀란 얼굴을 했다. "에드윈!" "돌아왔군!" "응. 다행히 왕녀님의 명령대로 쿠베린을 모셔왔어." 앞 서 걷던 점잖은 척하던 기사 애송이가 그렇게 말하고는 뒤에 선 나를 가리켜 보였다. 나는 반듯한 벽돌로 만들어진 길바닥을 물그러미 바라보고 있다가 코를 킁킁 거렸다. 탑처럼 보이는 게 아니라 눈이 돌아갈 정도로 높은 탑이었다. 붉은 벽돌과 붉은 장미 넝쿨로 돌돌 감겨진 이 높은 탑은 옛이야기에 나오 는 저주 받은 공주님을 연상하게 한다. 인간들은 저주를 무척 좋아했나 보다. 저주 받은 공주님이야기는 어딜 가 나 널려 있으니까 말이다. 기사 차림새의 젊은이 중 한 명이 급히 나와 스카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공주님은 이 안에 갇혀 계시는데..두 분 중 누가 쿠베린님?" "나야." 나는 그렇게 대꾸하고 목을 길게 빼서 높은 탑을 올려다 보았다. 탑 속의 공주님이라니, 이건 흔해 빠진 저주받은 공주님이야기와 똑같지 않은가. 다른 점이 있다면 그 공주님의 이름이 내가 아는 미트라라는 것이 다. 뒷걸음질을 쳐서 탑을 슬금 슬금 살피는데 확실히 미트라의 냄새가 나긴 난다. 그런데 대체 저기에 왜 갇힌 거야? 그것도 자기 집에서? "..공주님은 대공과의 결혼을 거부하고 도망치려 했다는 죄목으로 갇혀 계 시는 겁니다. 그리고 나흘뒤엔 진짜로 대공과의 결혼식이 거행될 것입니 다." 기사가 급히 말했다. 스카가 심각한 듯이 날 바라본다. 나는 탑을 뚫어지도록 바라보다가 창문 가에 선 미트라의 모습을 발견했 다. 미트라는 아래를 내려다 보고 있긴 하지만 내가 있는 줄은 모르는지 딴 곳을 보고 있다. "미트라가 있긴 있군." 내가 중얼거리자 스카가 어디 어디 하면서 목을 길게 뺐다. "여길 지키는 병사들은 너희들 뿐인가?" "네, 하지만 안에는 시녀들도 많고...일단 자물쇠가 채워져 있기 때문에 저 희들도 들어갈 순 없습니다." "자물쇠?"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앞으로 걸어가 그들이 지키고 선 문을 바라보았 다. 스카가 두 팔을 벌리고도 다 덮지 못할 정도로 제법 큰 대문은 두터운 흑 단목으로 만들어져 있었고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발로 그 문을 걷어차 자 뻥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놀랍게도 부서지질 않는다. "헤에." 뒤에서 스카가 놀라 소리를 질렀고 뒤에 있던 기사들은 패닉상태에 돌입했 다. "아앗! 소리를 그렇게 크게 지르면..!" 다시 한번 힘을 주어 문을 걷어찼다. 콰아아아앙 하고 시끄러운 소리로 귀가 쩌렁 쩌렁 울리지만 역시나 문은 열리지 않았다. 이건 보통 일이 아니다. 왜냐면 내 힘을 이겨낼 문짝이란 게 존재한다는 것은 이 문짝이 정상이 아니란 의미기 때문이다. "마법이다." 나는 중얼거렸다. "에?" "마법으로 봉인된 문이야." 스카가 눈을 크게 뜨고는 보따리를 풀기 시작했다. "그럼 어떤 열쇠가 맞을 지 시험해 보자." 녀석의 보따리에는 가지 가지 마법이 걸린 열쇠들이 널려있었다. 도둑은 아니지만 새끼 모험가 쯤은 되는 스카는 나와 달리 물건들을 챙기는 버릇 이 있다. 그 녀석이 가지 가지로 물건을 꺼내어 열쇠 구멍에 열쇠를 넣는 동안 나는 고개를 들어서 다시 탑을 훑어보았다. 범상치 않다. 아무래도 이 탑 전체가 마법이 걸려 있는 것 같다. "안 열려." 스카가 나를 향해 눈쌀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가 가진 도구들로도 열 수 없었다. 나는 스카의 보따리를 뒤져서 작은 꾸러미를 끄집어 냈다. 스카가 그 꾸러 미를 들여다 보는 도중에 나는 그 안에서 작은 금관을 꺼냈다. "황금관? 그런 게 안에 있었어?" 내가 가진 이 작은 꾸러미는 마법의 물건으로 고대 마법사들의 물건들 중 에 하나다. 이 안에 집어 넣으면 뭐든지 들어가게 되어 있다. 크기가 크던 작던 모두 들어간다. 대신에 무게만은 그 무게를 감당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이 보따리 자체에 경량화의 마법이 걸려있는 것이다. 스카가 최소 한의 짐을 언제나 매달고 다니기 때문에 나는 이 보따리를 그의 짐 안에 넣어두고 있었다. 나 같은 분이 어찌 짐 보따리를 메고 걸을 수 있으랴. 이 황금의 관은 왕년 땅의 엘프들이 만든 보물 황금 술잔과 맞바꾸어진 것 이다. 이 것을 쓰는 자는 불노불사의 힘을 가질 수 있다고 하는 물건이지 만 그 불노 불사를 견디려면 최소한 묘인족 이상의 힘을 가지지 않으면 이 루어 질 수 없다. 황금술잔과 이 황금의 관은, 왕년 묘인족에게 신세를 진 땅의 엘프들이 묘인족의 왕에게 만들어 건넨 황금술잔에 보답하여 고대 드 워프들이 만들어낸 불노불사의 황금의 관을 묘인족의 왕이 엘프의 왕에게 준, 서로 오락 가락한 선물이다. 그야 어찌되었든 두 개 다 내가 가지고 있다. 왜냐구? 황금술잔은 원래 내 것이고 황금의 관은 땅의 엘프들이 나에게 도 로 주었기 때문이다. "그걸 왜 꺼내?" 옆의 녀석들이 휘둥그레 눈을 뜨고 있는 와중에 나는 황금의 관에 박힌 초 록색의 보석을 빼냈다. 에메랄드처럼 보이지만 에메랄드가 아니다. 그 것을 꺼내서 나는 내 손바닥에 대고 황금의 관을 도로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그 보석을 들어서 문짝에 들이댔다. 파시식 하고 김 빠지는 소리같은 게 났다. 뭐야. 예상 외로 싱겁군. 나는 꽈앙 이라든가 퍼억 이라든가 최소한 하늘이 울리고 땅이 흔들릴 소리라도 날 줄 알았지. 그런데 뭐야? 겨우 피식이냐? 주저않고 발을 들어서 걷어 차자 삐걱 하고 문이 열렸다. 이 싱거운 상황에 뒤에 서 있던 녀석들이 일제히 입을 벌렸다. 스카가 뒤에서 눈쌀을 잔뜩 찌푸리고 있다가 물었다. "그게 뭐야?" "이 보석은 해약석이야." "해약석이 뭔데?" "마법을 푸는 돌이지." "마법을 풀어?" "응, 물건에 걸린 마법을 해약시키는 돌이란 말이다." "..그런 걸 너 가지고 있었냐?" "물론이지." ".....첨 봤는걸." "나도 이 것을 쓰는 건 첨이야." 스카가 멍청히 서 있는 동안 나는 그 돌을 입안에 넣고 삼켜 버렸다. 켁 하고 스카가 입을 벌릴 즈음 나는 뱃속에서 굴러 다니는 돌의 감촉을 차갑 게 느끼면서 재촉했다. "가자." "도, 돌을 삼키면 어떻게 해?" "뒤로 다 나오게 되어 있어." "하, 하지만..." "필요하면 싸면 되지." "......" 어찌 되었든 나는 스카와 함께 안으로 들어섰다. 안은 조용하고 생각외로 밝았다. 허긴 공주님이 거처하는 곳이 지저분하고 더럽고도 어둡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지. 기사들은 들어갈까 말까 망설이다가 낮게 소근 거렸다. "우리들은 망 보고 있겠습니다." "맘대로." 녀석들을 내버려 두고 안으로 들어갔다. 대 낮인데도 창이 없기 때문인지 어두웠다. 스카가 조심스레 앞장 서서 위 로 올라가는 계단을 찾아냈다. 그 계단 위로 올라가면 아마 미트라가 있겠 지. 이 일층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오래된 무구가 문 앞에 장식되어 있고 바닥 에 깔린 낡은 양탄자 이외엔 아무것도 없다. 군데 군데 장식된 색이 바랜 테피스트리가 걸려서 그나마 황량한 곳을 장식하고 있을 뿐이었다. 왠지 기분이 언짢아 진다. 냄새는 인간들의 냄새가 나긴 하지만 평온한 냄새가 아니다. 오래된 먼지 와 오래된 돌 냄새, 그리고 인간들의 인분과 인간들의 책과, 인간들의 옷깃 과.... 뭔가 빠졌다. "나가자. 스카." "에?" 나는 문으로 다시 돌아가려 했다. 그리고 그 순간 파직 하는 소리와 함께 스카가 뒤로 나뒹굴었다. 우리들의 주변으로 무언가가 움직인다. 바닥에 깔려있던 양탄자가 소리도 없이 타올라 불길에 휩싸이고 내가 스카를 잡아 채 옆구리에 낀 그 때를 맞추어서 파직 파직하는 소리와 함께 불길과도 같은 빛줄기가 사방을 덮 었다. "쿠베린!" 스카가 부지 불식간에 내 옷자락을 쥐는 감촉을 느끼면서 나는 문 쪽으로 달려가려 했다. 그러나 다가서기도 전에 파앗 하고 뒤로 튕겨져나갔다. 무 언가가 날 집어 던지는 것처럼 나뒹굴어서 나는 스카와 함께 얽혀 바닥으 로 쓰러졌다. "뭐지?" 뭐냐고 물을 것도 없었다. 눈앞에 떠오른 푸른 빛을 띈 광선들은 서로 얽히고 얽히더니 곧이어 그물 처럼 얽혀들었다.그리고는 그 그물은 곧이어 우리들의 머리 위까지 덮어 마침내는 우리들을 완전히 둘러싸버렸다. "함정이다." 뻔한 말을 스카가 중얼거렸다. 그의 얼굴이 질렸다. 그걸 이제 알았냐? 이 와중에 그의 얼굴을 살피는 나는 정말 대단하다. 강력한 푸른 빛의 마법진이 우리들을 완전히 감싸버렸다. 밖에서 보면 틀 림없이 재미있는 몰골이겠지. 그러나 나는 지금 그다지 재미는 없다. "하하하하하하하..어서 오시게. 쿠베린, 묘인족 최강의 왕이여." 그리고 어떤 녀석이 그렇게 말했다. KUBERIN........ 가장 아름다운 여자를 얻는 자는 용기가 있는 자 가장 사랑스런 여자를 얻는 자는 지혜가 있는 자 이름을 얻을 수 있는 자는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자 7 함정에 빠졌을 때의 태도. 첫 번째는 열 받아 펄 펄 뛴다. 두 번째는 침착하게 상대가 뭔 놈인가 파악하려 머리를 굴린다. 세 번째는 일단 여길 빠져나가는 게 우선이므로 박박 바닥을 기며 애원해 본다. 네 번째는 일단 잡혔으니 쉬고 기회를 포착해 보려 눈알을 굴린다. 다섯 번째는 ...기억 나지 않는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펄펄 뛰는 것은 어린 아이들이나 할 일이고 나같은 어 른은 펄 펄 뛰지않는다. 스카도 어린 나이는 벗어났으니 일단은 사태의 추 이를 지켜 보는 게 현명한 일이라고 판단했는지 얼굴색이야 똥색이던 회색 이던간에 일단은 침착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이오." 녀석은 천천히 다가왔다. 놈은 검은 옷을 걸치고 머리칼은 산발한데다가 코는 매부리 코요, 입은 얄 팍하게 찢어진 얼굴..이라는 전형적인 모습을 한 것이 아니었다. 걸친 옷은 찬란한 하늘 색과 금빛이 어우러진 로브요- 이렇게 화려한 로브는 본 적도 없다- 손목에는 금팔찌를 끼었으며 머리칼은 찬란하고도 화사한 금발머리 에 분홍빛 입술! 끄아악! 난 분홍빛 입술을 가진 남자는 싫어! 피부는 상아같고 눈썹은 매의 날개깃 같으며 미끈하게 빠진 몸매는 기사 못지 않고 오뚝한 코는 어느 나라 왕자 같은 얼굴을 한 놈이었다. 어찌되었든 얼굴만 본다면 녀석은 절대 뒷통수 때릴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 않았다. 어디로 보나 어느 나라 왕자 내지는 귀공자 다운 얼굴을 하 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런 얼굴에 미소를 띄우고 뺨에 홍조를 띄운 채 날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홍조! 홍조?! 대체 뭔 홍조? 왜 날 보고 얼굴을 붉히냐 말이야! "정말 기쁩니다. 쿠베린. 당신을 이처럼 내 손안에 넣다니..." 나와 스카는 완전히 얼었다. 스카의 얼굴이 날 바라본다. 그리고는 시커매진 얼굴로 날 향해 물었다. ".....저....자, 아는 사람이냐?" "아니." ".....널 매우...매우 좋아하는 것 같으니 난 여기서 빠지마." "...." 나는 아무 말 하지 않고 나를 보고 그처럼 기뻐하는 이 괴이쩍은 놈을 바 라보며 물었다. "넌 누구냐?" "훗훗훗..." 웃음소리 소름끼친다.... "제 소개를 하지요. 저는 마베릭 론, 마법사입니다." "...너 혹시 킬트의 제자냐?" "하,하하하하..역시 아시는 군요, 저는 다크마스터 킬트님의 수제자이지요." 녀석이 웃으면서 말한다. 그리고는 한 걸음 다가와서 속삭이듯 말했다. "킬트님에게 쿠베린님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들었습니다만 역시 명불허전 이시군요, 이 마법진 안에서 그렇게 태연할 수있는 분은 정말 드물답니 다." "이게 무슨 마법진인데?" "흡력진이라고도 하고 격장마법진이라고도 하지요. 훗훗훗.." 다 좋은데 그 훗훗훗만이라도 어떻게 빼 주었음 좋겠다. 웃으면서 얼굴을 붉히는 건 대체 뭐야! 무슨 의미냐? "자아, 그럼 말해. 대체 이 마법진안에 날 가둔 의도는?" 내가 진지하게 모처럼 진지하게 묻는데도 이 놈은 딴 곳을 바라보며 회상 에 잠기는 듯 한 걸음 두 걸음 걸으면서 고개를 갸우뚱하며 지껄이기 시작 한다. "제가 당신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은 40년전의 일입니다. 어느날 제가 마스 터에게 다가가 물었지요...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용족이 사라진 뒤에 남은 종족중에서 가장 강한 자는 누굴까요 하고 물었지요." 그거야 바로 나지. 녀석은 대답을 바라지 않는 듯 혼자 생각에 잠겨 우리가 갇혀있는 마법진 안을 뚜벅 뚜벅 걸으며 혼자 말하고 혼자 대답하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정상은 아니다. "그랬더니 마스터는 대답하셨지요, 이 지상에서 가장 강한 종족은 묘인족,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가장 강한 자는 쿠베린이라 하는 묘인족의 왕이라고." 당연한 말이지. 놈은 혼자서 고개를 끄덕 끄덕이면서 날 바라보곤 스스로 자랑스러운 듯 눈 안에 별빛과도 같은 빛을 번쩍이면서 동경하는 사춘기 소녀같은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그 날 이래 저는 묘인족의 왕 쿠베린님을 사로잡는 것을 소원으로 삼았습 니다. 그 날 이후 마스터께서 원하는 것이 뭐냐 하고 말하면 저는 주저하 지 않고 쿠.베.린.님을 원합니다 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왜 힘주어 말하는 거지? 전신으로 소름이 짜악 짜악 끼친다. 스카는 뭔가 딴 곳을 보며 고뇌하는 표정을 짓고 있다. 마치 자신은 관계 없다는 양 먼 산을 바라보는 듯한 그 얼굴이 괘씸해서 한 대 쥐어 박았다. 미친 녀석의 눈이 빛나는 광채를 담고 날 바라본다. 소름이 끼치는 저 눈. "그리고 오늘 이 자리에 쿠베린님이 계시는 것입니다! 이거야 말로 오랜 저의 소원이 성취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풀어! 미친 놈아!" 내가 담담히 말해주었지만 녀석은 딴 곳을 바라보면서 또 혼자만의 상념에 젖어들었다. "아아...제가 어느날 마스터에게 물었습니다, 쿠베린님의 약점은 무엇입니 까?" 나에게 약점 따윈 없다. "그랬더니 마스터께서 말해 주셨습니다. 쿠베린님의 약점은 다른 것도 아 닌 여자다." "......" "여자를 안기 위해 이산에서 저 산으로,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이 나라 에서 저 나라로 달려갈 수 있는 자이므로 여자가 그의 약점이다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는 혼자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저는 실험에 성공했던 것입니다. 쿠베린님의 약점이 여자라는 것을 알고 왕녀 미트라의 부탁을 들으면 반드시 와 줄 듯해서 기다리고 있 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진짜 오셨다니 어쩐지 슬픕니다." 그가 훗 하고 웃더니 이마에 손을 얹고 말했다. "쿠베린님, 남자란 슬픈 것이군요." "...음..그렇다면 당신은 왜 쿠베린을 잡으려 한 거요? 마법사?" 스카가 울컥 거리는 나를 제지하면서 조용히 물었다. 녀석은 어떻게 해서 든 정상을 유지하고 싶은 듯한 얼굴이었다. "훗...그거야 당연한 일입니다. 저는 묘인족의 힘을 가지고 싶은 것입니다." "힘을 가져?" 내가 얼토 당토 않은 녀석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묘인족은 오랫동안 자신의 힘을 쓸데없는 데에 쏟아왔습니다. 자기 동족 끼리 도전의식따위나 치르면서 스스로의 힘을 스스로에게 쏟아 붓는 어리 석은 일을 해 왔던 것입니다." 나는 냉정하게 녀석을 보고 있었다. 흥분한 녀석이 자기 말에 취한 듯 눈을 빛내며 허공을 본다. "그러나 이젠 다른 곳에 그 힘을 쓸 때인 것입니다! 묘인족의 어마 어마한 힘은 세계를 뒤덮을 수가 있습니다!" "또 세계 정복이냐?" 내가 트릿하게 말하자 마법사 녀석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쿠베린님." "킬트를 배신한 이유가 세계정복을 하고 싶어서야?" "마스터는 늙었습니다. 마스터는 전에 그 빛나던 야망을 가졌던 우리의 마 스터가 아닙니다." "그래서 배신을 하고 도망쳤어?" 그의 눈이 처음으로 가늘어졌다. "도망치지 않았습니다. 저희들은 그냥 결별한 것이지요." "그냥 결별한 놈이 뭘 훔쳐 가지고 나와?" "후후후후....뜻도 야망도 없는 늙은이에겐 필요없는 것이지요." 녀석은 그렇게 말하고 한 걸음 다가왔다. 광기에 찬 듯한 빛나는 눈이 날 똑바로 바라보았다. "당신은 왕위에 오른지 500년이 넘었지요. 뭔가 하고 싶다는 생각은 해 본 적 없습니까? 묘인족이 역사에 남는, 그런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한 일이 한 번도 없습니까?" "없어." 난 잘라 말했다. "역사란 거짓말의 도가니다. 특히 인간의 역사는 거짓과 기만의 연속, 그 거짓의 연속성에 빠지면 결국 뻔한 이야기가 나오지, 세계는 인간의 신이 만들었고 이 세계는 인간을 위해 존재하며 인간이 위대한 역사를 이끌어 가련하고 비천한 종족들을 이끌었고, 그리하여 비천하고 사악한 종족은 씨 를 말렸다...라고 하는 인간의 역사만이 남는다." 녀석이 빙그레 웃고 있다. "인간의 역사는 거짓의 역사지, 내가 만약 손톱을 들어서 인간들의 나라를 정복해 봐도 한 천년 후에는 마왕 쿠베린이 인간을 괴롭혔으나 인간의 영 웅이 나서서 마왕을 무찔렀다라고 말하며 끝을 맺을걸." 나도 히죽 히죽 웃어 주었다. "당신이 인간이 아닌 한 그건 어쩔 수 없지요." 그가 어깨를 으슥해 보였다. "그러니까 잘난 척할 것은 없단 말이야, 애송이 마법사여, 나는 그대가 태 어나기도 전에 왕이었고 그대가 잘난 척 머리를 굴렸을 때에도 왕이었다." 녀석은 여전히 히죽 히죽 웃는다. 얼굴을 살짝 붉히며! 으아아아악! 대체 얼굴을 왜 붉히냐고! 왜! 왜! 왜! "역시 멋지십니다. 쿠베린왕이여. 그러니까 더더욱 당신과 이야길 하고 싶 습니다. 어떻습니까? 여기서 저와 이야길 나누며 생각을 교환하는 것은?" "싫어." 나는 잘라 말했다. "왜죠?" "나는 엘프가 아냐, 이야길 나누고 생각을 교환하고 싶으면 넌 엘프를 불 러다 놓고 이야기 해. 아마 마르고 닳도록 이 세상 끝나도록 이야길 할 수 있을 게다." "완고하시네요." "난 묘인족이다. 묘인족은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자신의 생각대로 산다. 다 른 자가 존재하면 그 뿐이지." 녀석은 턱을 슬슬 만지면서 여전히 웃는다. "언제까지 그렇게 말하실지 궁금합니다. 옆의 동료분을 보시죠." 웃 해서 고개를 돌려보니 스카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녀석은 지 금 주저 앉아 있었다. 그런 녀석의 몸을 부축하자 숨을 헐덕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흡력마진입니다. 말씀드린대로 갇힌 자의 힘을 앗아가는 마법진이지요." 녀석이 친절한 어조로 말했다. 화가 치솟았지만 참고 스카의 몸을 조용히 눕혔다. 파랗게 질린 녀석의 얼굴을 보다말고 나는 이 새파란 마법사를 뚫어지도록 응시했다. "바라는 것은?" "당신의 피입니다." ".....저 엉터리 사인족과 같은 놈들을 만들어 내려고?" "엉터리라니요, 정말 지나치신 말씀입니다. 저들은 새로운 인간입니다. 인 간보다 강하고 훨씬 더 강한 새로운 인간전사지요." "사인족의 반쪼가리만도 못한 놈들이?" "사인족 입장에서 본다면 그렇겠지요. 그렇지만 인간의 입장에서 본다면 저들은 강하고 용맹한 전사입니다." "묘인족쪼가리를 만들고 싶은거냐?" "묘인족이라고 하는 최강 전사를 내 것으로 하고 싶습니다." "무리다." "왜지요? 왜 그렇게 단언하십니까?" 나는 조용히 물었다. "사인족은 어떤 종족과 결합해도 사인족이 나오지. 그렇지?" "그렇습니다." "그러나 묘인족과 조인족은 그렇지 않아. 우리들은 어떤 종족과 결합해도 아이를 얻지 못한다. 근본적으로 다르다." 난 왜 이 놈과 이딴 이야길 하고 있을까? 사인족 왕의 그 슬픔을 보고 사인족 전체에 내린 멸망의 전조를 보고 있었 던 주제에 난 왜 이 미친 놈과 이야길 하는 것일까. 나 자신에게도 호기심 이 남아있는 것일까? 묘인족과 인간이 결합해서 새로운 놈들이 나타나면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 서 이러는 것일까? "그렇군요. 확실히 그렇습니다. 조인족은 알을 낳습니다. 묘인족은 아기로 낳지만 하루 이틀이면 성장해서 인간의 어린애 10살 박이 정도로 자라버립 니다. 성장이 느린 사인족과는 차이가 있지요." 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진짜 바라는 것은 마법의 힘으로 무언가를 이루어 보려는 그런 것인 가?" 나는 조용히 물었다. "인간 마법사가 모두 원하는 것, 자신의 마법의 힘으로 뭔가를 이루어 보 이고 싶은 것인가?" 녀석은 똑바로 날 바라보았다. "그렇습니다." 힘이 강하면 강할수록 도전할 어떤 것을 바라는 법. 나는 그 마음을 안다. 이 놈은 지금 킬트를 넘어서고 싶어하는 것이다. 이 놈은 도전자다. 킬트라고 하는 자신의 스승을 넘어서서 엄청난 어떤 것을 이루고 싶어하는 것이다. 결국은 똑같은 일의 반복이다. 킬트는 어른이 되어버렸다. 킬트는 어린 야망을 버리고 어른이 되어 눈에 보이는 결과에만 집착하는 행위를 버렸다. 녀석은 왕이다. 킬트는 자신이 만든 그 암흑마도의 왕이자 주인, 녀석은 그렇기에 가지고 싶은 것이 없었다. 그렇지만 이 꼬마는 다르다. 이 꼬마는 가지고 싶은 게 많다. 스승을 넘어서서 도전하여 왕이 되고 싶은 것이다. 마법사라고 하는 일족, 그리고 인간이라고 하는 일족의 왕이 되고 싶은 것이다. 뭔가 마음이 가라앉는다. 이 놈이 일으킨 골치아픈 일들도 모두 지나가며 한 줄기 이야기가 되어버 린다. 내가 침묵하자 녀석은 날 보면서 물었다. "당신의 피를 건네주시겠지요? 아니면 당신의 동료가, 그리고 당신의 어여 쁜 왕녀가 다치게 됩니다." 나는 담담히 녀석을 보았다. "내 피를 바라는 것이냐? 아니면 묘인족의 피를 바라는 것이냐?" "당신의 피입니다. 묘인족이라면 아무래도 좋은 게 아닙니다." "어째서?" "당신이 가장 강하니까요." "...." "5백년간 당신을 이길 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당신은 이미 전설입니다. 쿠베린." "스카와 미트라를 내보내 줘라." "당신이 응하신다면." "좋다." 그의 눈이 약간 커졌다가 미소를 지었다. "묘인족은 거짓말을 하지 않지요. 명예를 아는 자들이니까요." "그래." 그리고 마법진이 해제 되었다. KUBERIN........ 가장 아름다운 여자를 얻는 자는 용기가 있는 자 가장 사랑스런 여자를 얻는 자는 지혜가 있는 자 이름을 얻을 수 있는 자는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자 8 탑 안에는 미트라는 없었다. 아까 내가 본 것은 아마도 환영이었던 모양이 다. 인간의 음식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 건물 따위는 빈 건물이라고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미트라의 모습을 보았다는 것 만으로 이 탑안으로 기어들어갔고 그리하여 잡혀버렸던 것이다. 확실히 내 약점이 여자라는 것 을 부정할 생각은 그다지 들지 않는다. 스카는 탈진한 채로 밖으로 실려나갔고 나는 이 자리에 남아 녀석과 함께 미트라가 있을 줄 알았던 꼭대기까지 걸어 올라왔다. 녀석은 나를 뒤에 두 고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내가 뒤에서 후려갈길 것을 별로 두려워 하지 않는 듯해서 나는 조금 감탄했다. 들어선 탑 위의 방은 온갖 책과 이런 저런 도구들로 가득 차 있었다. 아크 나 킬트와 같이 있을 때 봤었던 도구들이 널려 있었는데 내가 아무 데로나 가서 걸터 앉아버리자마자 녀석은 들뜬 얼굴로 나에게 유리관을 내밀었던 것이다. 그 유리관을 받아 손가락에 상처를 조금 냈다. 피가 흐르기 시작하자 그는 눈을 크게 부릅뜨고 열광적인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피를 흘리다 말고 유리관 안에 넣는 대신에 입안에 내 손가락을 집어 넣고 죽죽 빨았 다. 녀석이 벙벙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나는 물었다. "인간과 묘인족이 어디가 비슷한 줄 알아?" ".....인간과 묘인족이 비슷하다구요?" 녀석은 내가 피를 어서 담기를 재촉하는 시선으로 나와 유리관을 번갈아 바라본다. "자기 맘대로 거짓말하는 것도 닮았고." 나는 유리관을 집어던졌다. 그리고는 녀석의 눈이 커지는 순간 녀석의 목 을 잡아서 그대로 석벽에 집어던졌다. "자기 맘대로 죽여버리는 것도 닮았지." 나는 녀석의 목을 댕강 잘라버렸다. 핏줄기가 솟아나오면서 놈의 머리통이 천장까지 튀어 올랐다. 그리고 그 핏줄기가 주룩 주룩 아래로 내려 오는 것을 지켜 보면서 나는 되뇌였다. "또, 자기 맘대로 해석하는 것도 닮았지." 널 죽이지 않는다고는 말한 적 없단 말야. 벽에 난 창문가에 서서 나는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아래는 조용했다. 조용하고 고요한 장미덩쿨의 정원이 있고 애송이 기사들 이 멀뚱거리면서 그대로 서 있다. 놈들이 이 마법사의 존재를 알았는지 몰 랐는지 굳이 따질 필요는 없다. 확실히 나는 여자가 약점이다. 그렇지만 뭐 하는 수 없다. 나같이 강한 분에게는 하나 정도 약점이 있는 것도 매력이잖아? 뒤를 돌아다 보니 피 비린내로 가득한 방안에 피투성이로 데굴 데굴 구르 고 있는 금발 머리 꼬맹이가 보인다. 어처구니 없는 꼬맹이, 잘난 척하긴 하지만 어떤 종족이든 개인 차는 있는 법이다. 다크시온이나 듀나시는 물론 거짓말따윈 하지 않겠지. 그러나 나 쿠베린님 은 언제든 거짓말을 할 수 있는 분이고 그걸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다. 거 짓말 따위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멍청한 놈. 카산 같은 장사 엘프도 있고 카나리안 같은 색마 엘프도 있으며, 아크 같 은 백마법사도 있고, 다정한 오크도 있고 성실한 하플링도 있고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는 나 같은 묘인족도 있다. 한데 뭉떵그려서 분류하는 녀석은 바보 천치. 그래서 세상은 재미난 것이란 말이다. 나는 창문에서 뛰어내리면서 낮게 읊조렸다. "내 이름은 쿠베린 오호 오호..." 자아, 그건 그렇고 일단 확실히 해야 할 것은 다름 아닌 미트라의 행방이 다. 미트라는 대체 어딨지? 이 장미 가득한 변태 마법사의 탑이 아닌 어딘가 있긴 있을 텐데 말이야. 나를 함정에 빠뜨린 죄목으로 얼굴이 노래진 애송이 기사들은 전 아무것도 몰라요 하는 얼굴로 날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수줍은 처녀 처럼 고개를 숙이고 뜻대로 하십쇼 하는 얼굴이 되어 있었다. 내가 본디 기분대로라면 이 자식들을 요절을 내고 박박 밟아주었으면 좋겠지만 축축 늘어져서 낙지처럼 늘어진 스카를 부축할 놈들이 없으니 참는다. 축축 늘어져서 마치 낙지처럼 늘러붙어 버린 스카가 반쯤 고개를 기울이면 서 중얼거렸다. "시녀들에게 묻는 게 가장 좋은 방법..아닐까?" 옳으신 말씀이다. 여자가 약점인 이 몸은 여자가 또 장점이기도 하지. 내가 꼬셔온 수많은 여자들을 기억하며 나는 아리따운 미소년의 모습으로 수줍게 나이 지긋한 시녀들에게 접근하기로 했다. "저어..." "어머, 넌 대체 누구니? 왜 이런 데에 있는 거지?" 의심스러운 얼굴로 시녀가 날 바라보았다. 서른 중반으로 보이는 이 시녀는 두툼한 허리가 매우 먹음직스러운, 아니 탐스러운, 아니 부담스러운 체구를 하고 있었지만 후덕해 보이는 얼굴이었 다. 그녀의 손에 들린 쟁반을 슬쩍 잡아 대신 들면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나는 수줍게 말했다. "저기...저기..." "어디서 온 거니? 어느 기사의 시종이니?" ".....저어...도와 주세요,누님!" 나는 쟁반을 쥔 채로 눈물을 글썽 글썽하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마, 왜 그러는데?" 그녀가 당황한 채로, 그러나 얼굴은 살짝 풀어졌다. 누님이라 불려서 싫어 하는 여자 없다. "실은.. 실은...." "말해 봐, 너는 어느 분인가의 시종인 거 같구나." 그녀가 고개를 갸웃할 때 나는 수줍은 얼굴로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이 고 조용히 말했다. "...전....이름을 밝힐 수 없는 분의...시종인데요..." "음?" "....실은..실은..." "말해봐, 별로 대단한 거 아니면 도와주마." "....실은..실은..제가...주인님의 편지를 가지고 있어요.." "편지?" "네에..편지..편지인데요...그, 그게.." "무슨 편지인데?" 재미있다는 듯 그녀가 날 바라보았다. 호기심 깊어지는 얼굴만 보아도 이시녀가 뭔 생각을 하는 지 알만 하다. 이 또래의 여자들은 연애에 관심이 지대하므로 내가 가진 편지를 연애편지 라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고도 당연하다. 그 경계심 엷어진 얼굴을 보며 나는 부끄러운 듯이 말했다. "....왕녀..님께 가는 ...편지에요." "호오,그렇구나.하지만 말이야, 왕녀님은 궁안에 안계셔." "어? 그럼 어디에 계시는 데요?"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순진하게 물었다. 그녀는 싱글 싱글 웃고는 대답해 주었다. "별궁에 계셔. 아마 결혼식 끝날 때 까지는 그곳에 계실 거야." "결혼식이 언젠데요? 핫! 그럼 우리 주인님은 ..실연이군요!" "그렇구나, 안된 일이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뭐." 시녀는 고개를 끄덕여 웃더니 나의 등을 툭툭 쳐 주었다. "......" "......" 애송이 기사들은 모두 침묵하고 있었다. 나는 가슴을 펴고 말했다. "별궁이 어디냐?" ".....동쪽 끝에 있습니다. 동별궁이라고 불리우는 곳이죠." "좋아, 가자." 스카는 녀석들에게 부축 받으면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언제 봐도...정말 끔찍하게도 가증스러운 모습이야....쿠베린." 나는 긴 말을 하지 않고 그 놈의 머리통을 한 대 후려갈겨 주었다. 녀석들에게 일단은 숨어있으라고 말해 두고 나는 혼자 나왔다. 녀석들은 성 밖으로 나가서 그놈의 수도 용병길드의 술집-큰 사슴집인지 큰 인간집인지에서 기다리기로 하고, 나 혼자 미트라를 데리러 가기로 했 다. 놈들이 있어봐야 나에게 짐이다. 뭐 도움 되는 게 하나라도 있어야 말 이지. 놈들과 헤어져서 궁안을 헤메다 보니 살살 맛난 냄새가 스리 슬쩍 코로 스 며오기 시작했다. 아까부터 뱃속이 빈 탓인지 배가 고파 미치겠다. 미트라가 먼저냐, 아니면 먹는 게 먼저냐 하고 나는 한동안 고민했지만 사 실 이런 것은 고민할 문제는 아니었다. 미트라는 죽을 고비에 처해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앞으로 결혼식을 앞두 고 말괄량이 공주를 감금해 놓은 것에 불과한 상황일 뿐이다. 그러니까 이 몸이 배가 고파 살짝 음식을 먹어 치우는 것에 대해서 죄책감 따위를 느낄 필요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내 뱃속이 바라는 대로 이 몸이 원하는 대로 음식을 찾아 발 걸음을 옮겼다. 궁안은 조용하지는 않았다. 약간 시끄럽고도 낯선 사투리와도 같은 억양이 사방에서 들려온다. 약간 시비를 거는 것 같은 삐딱한 억양은 귀에 익지 않아 거슬린다. 이것은 델리암의 기사들의 말투가 아니라 틀림없이 저 룬드바르라는 곳에 서 온 놈들의 말씨다. 그런 자들이 궁안 곳곳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 몰 골을 보면 아마 자존심 센 그 놈의 화이딘스 대공이란 놈도 배가 아프겠 지. 저 둔탱이 에메스는 말할 것도 없고. 시녀들과 시종들이 바삐 복도를 오가고 있었다. 음식을 쌓은 은쟁반을 든 시종이 엄숙한 얼굴로 지나가는 게 보인다. 대체 어딜 가는 건가 하고 그 뒤를 스리 슬쩍 따라가보니 대무도회장이었다. 일년 전에 그 왕궁의 무도회장에서 열렸던 그 호화로운 먹거리가 널린 무 도회를 기억해낸 나는 침을 삼키면서 주저않고 대들보 위에 올라 앉았다. 왕궁의 천장은 얼마나 높은 지 내가 대들보 위에 앉아서 맴을 돌든 춤을 추든 닿을 것 같지 않았다. 시끌시끌한 소리와 더불어 긴장을 늦추려는 듯 느릿한 음악소리가 들려왔 다. 춤을 추기 위한 부드러운 템포의 음악을 들으면서 나는 주변을 돌아보 았다. 델리암 왕궁의 귀족들이 저마다 성장한 채 오고 가고 있었다. 그리고 군데 군데 긴 옷자락 대신에 짧은 튜닉에 꽉 달라붙은 바지, 그리고 소매가 달 라붙은 짧은 웃옷을 입은 자들이 섞여 있다. 허리에 찬 길고 긴 장검-만월 도처럼 언뜻 보아 끝이 휘어진 듯한 그 장검을 멘 것을 보아 모두 기사들 로 보였다. 녀석들은 그 특유의 깃털이 달린 모자를 쓰고 오만한 자세로 검게탄 얼굴을 자랑스레 드러내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둘러싸고 델리암 의 귀부인들이 미소를 보내며 불안한 애교를 보이고 있다. 내가 꾸물 꾸물 망설이며 언제 기어 들어갈까 말까 망설이고 있는 중인데 문득 시종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에드린스 백작부처드십니다!" "빌모리아 후작부처 드십니다!" "모레인공작부처 드십니다!" 화려한 옷자락들을 저마다 이끌고 보석을 주렁 주렁 달고서 하나 씩 하나 씩 입장하고 있는 녀석들의 얼굴엔 아무 생각이 없어 보인다. 이런 놈들을 보고 있자니 문득 자기 영지에서 난리를 쳐대면서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고 외치고 있을 에메스 놈이 바보 천치로 보이고, 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해서 길길이 날뛰고 있을 용병들이 어쩐지 불쌍하다. 금박과 호화로운 색유리로 치장하고 천장이 수십치아르나 될 듯한 왕궁의 대전에 가득한 이 호사스럽고도 아무 생각없는 무리들을 보다가 나는 부시 시 그들 사이로 끼어 들었다. 누군가의 시종이거니하고 모두 날 대수롭지 않게 보아 넘기는 것을 보면서 일부러 수상쩍게 숨을 필요는 별로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잔뜩 쌓인 음식들을 우아하게 먹으면서 그저 이 놈들의 옷자락을 구경하고 있는 중인데 드디어 주인공이 나왔다. "델리암 전 국왕전하 납십니다." 전 국왕전하? 귀족들이 좌락 양 갈래로 흩어지고 그와 동시에 시들 시들한 오이 국왕이 고상한 척 손끝을 시종에게 내민 채 걸어나왔다. 녀석의 손가락에는 여전 히 번쩍 번쩍 빛나고 있는 반지가 손가락마다 마다 끼여 있고 옷자락은 여 전히 은박 금박 입혀서 호박색 빨강색 파랑색 섞어 온 궁안의 먼지란 먼지 를 다 모으면서 길게 늘어뜨리고 있다. 전과 다른 것은 녀석의 머리 위에 왕관다운 것이 없다는 것인데 그 것도 워낙 다른 장신구들이 휘황찬란해서 눈에 띄지도 않는다. 녀석은 망국의 왕답지 않은 쾌활한 얼굴로 만면에 미 소를 지으면서 귀족들의 인사를 받고 있었다. 저 놈을 위해 목숨버린 기사들과 병사들이 불쌍하군 하고 생각할 즈음 또 한 번 외침이 터져나왔다. "룬드바르 대평원의 주인이시며 오세리온해(海)의 주인이시며 델리암의 주군이신 대제(大帝) 하인리히3세 폐하이십니다!" 오옷 하는 소리와 함께 모든 작자들이 일제히 벌떼처럼 갈라지며 새로운 주인을 반긴다. 그 하인리히 대제라고 이젠 이름도 바뀌어 버린 왕년의 룬드바르 대공은 아직 서른정도 밖에는 되어 보이지않았다. 분명 젊다. 잘 그을린 갈색의 윤곽 뚜렷한 얼굴을 한 녀석은 갈색의 눈과 짙은 갈색의 머리칼을 소년처럼 짧게 자르고 있었다. 오이와 나란히 서면 이쪽은 확실 히 날이 선 칼로 보인다. 오이가 칼을 만났으니 베어질 수밖에.. 단단해 보이는 어깨를 보니 이 놈은 상당히 수련을 한 듯이 보인다.단호 해 보이는 네모진 턱을 물끄러미 보면서 나는 쥐고 있던 오리구이를 마저 먹어 치웠다. 소문의 룬드바르 대공이란 놈은 상당히 귀염성이 있다. 저 시 든 오이보단 낫다. 낫고 말고. 그러나 저러나 이 놈들이 하는 짓거리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군. 벌떼 같 이 달려들어서 벌떼처럼 쏘는 게 아니라 서로 아부하고 핥느라 정신이 없 는 개떼로 보인다. 아니지, 개도 자존심이 있다. 이 놈들은 대체 어떻게 귀 족 자리를 가지게 된 것일까. 나는 화이딘스 대공을 은근히 찾아 보았다. 놀랍게도 화이딘스 대공은 이 자리에 없다. 보이질 않는다. 잘난 척하는 그 대공부처는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가? 소문에 의하면 룬드바르가 델리암을 점령하자마자 화이딘스 대공은 국외추 방인지 탈출인지를 한 것같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인지도 모르겠다. "대제..하하하... 엘란트라를 너그럽게 봐 주셔 고맙소이다." 시든 오이가 미소를 지으면서 은근히 이 하인리히라는 놈에게 추파를 던진 다. 하인리히 대제라는 이름을 얻었는지 자칭했는지 잘 알 수 없는 이 놈 은 그런 시든 오이를 지나가는 강아지 보듯이 처연하게 바라보면서 오만하 게 미소했다. "천만의 말씀, 그런데 왕녀는 이 자리에 참석했소?" "물론이오." 시든 오이가 애써 웃는다. 그리고 그때 음악이 곱게 깔리는 것과 동시에 시종이 외쳤다. "엘란트라 왕녀께서 드십니다!" KUBERIN........ 가장 아름다운 여자를 얻는 자는 용기가 있는 자 가장 사랑스런 여자를 얻는 자는 지혜가 있는 자 이름을 얻을 수 있는 자는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자 9 충격적이었다! 그녀의 미모는 말 그대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녀의 전언 그대로 나는 엄청나고 대단한 미녀가 되었다 라는 것은 허언 이 아니었다. 1년 전 그녀는 어린 계집애에 불과했지만 지금 이 자리에 선 그녀는 미녀 였다. 그것도 절세 미녀다. 이 자리에 선 모든 자들이 그녀의 아름다움에 감복했다. 짙은 갈색의 머리칼은 볼륨감 넘치는 품위를 가지고 틀어 올렸고 매끄럽게 빛나는 살결위에는 진주로 장식되었다. 밤색의 도발적인 눈동자는 아주 크 고도 시원하게 뻗어 올라가 보는 사람의 마음을 시원하게 만들어주었고 분 홍빛의 입술은 새초롬하게, 솔직히 말해 새초롬하다기 보다는 조금은 과격 할 정도로 튀어 나왔다. 이 튀어나왔다는 이야긴 기분이 나빠서 튀어나왔 다는 것이지 실제로 진짜 튀어 나왔다는 것은 아니다. 사실 조금 튀어나와 도 그 미모가 손상될 것 같지는 않지만. 그리고 내 초미의 관심사인 그 몸 매는 늘씬하게 좌악 빠진 팔등신의 매끄러운 몸매를 벨벳으로 감싸서 대담 하게도 풍만한 몸매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크으..결론부터 말하자면 엄청나게 이뻐졌다! 과연 여자는 한달 사이에도 달라진다고 하더니 사실인 모양이다. 그녀를 못 본지 거의 1년여 가까운 시간이 지났다. 그녀가 나에 대한 사랑으로 아 름답게 화한 것인지 아니면 본연의 모습이 아름다워서 아름답게 변한 것인 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그녀는 확실히 엄청나게 변했다. 그 말라깽이가 저 런 황홀한 몸매의 소유자로 변할 것이라고는 나도 상상치 못했었으니까 이 건 변신이라고 할 만한 일이다. "어서오십시오, 왕녀." 하인리히 대제인지 소제인지 하는 놈이 미트라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번쩍 번쩍 빛나는 호색한의 눈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미트라는 흘긋 눈썹을 치켜 올려 우아하게도 불쾌함을 표시하고는 오만하 게 걸어서 중앙에 놓여진 그녀를 위한 자리에 앉았다. 그녀의 뒤를 따르던 시녀들이 그녀의 빠른 발걸음을 따라가느라 바쁘다. 그리고 우아하게 그녀 가 앉자 다시 음악이 시작되며 저마다 쌍쌍이 춤추기 시작했다. "왕녀,춤추시겠소?" "아뇨,전 피곤해서요." 그녀는 잘라서 그렇게 말하곤 새침하게 고개를 팟 하고 돌려버리는데 그 모습을 보고 있는 내가 무안해진다. 그렇지만 뭐가 뒤집어 씌우기라도 한 것인지 이 놈의 대제인지 소제인지 하는 놈은 그런 그녀를 황홀하게 올려 다 보고 있었다. 화도 안나는 모양이다. 나는 어쩔까나 하고 음식을 먹어 치우면서 머리를 긁적거리고 있었다. 미 트라가 저렇게 하고 있는 와중에 내가 짠 하고 나타나면 어떻게 될까? 차 라리 잠깐 그녀를 사람 없는 데로 유인해 내서 데려가 볼까? 아니, 그 보 다 그녀를 내가 굳이 데려갈 필요가 있긴 한 걸까? 내가 머리를 더 굴리기도 전에 갑자기 소름끼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하...여기 계셨군요, 쿠베린님." 뒤로 소름이 좌아아아아아아악 지나간다. 내 생전 이렇게 놀라 보긴 또 처음이다. 뒤 돌아 보지 않아도 뒤에 뭐가 있는지 냄새로 알 수 있었지만 뒤를 돌아 봐야만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두 눈으로 똑바로 분명히 확실하게 확인 해야만 하는 일인 것이다! 나는 손에 꿀 빵과 호두를 넣은 샤벳그릇을 든 채로 몸을 천천히 돌려 나 에게 말을 건 놈을 바라보았다. 빙글 빙글 웃는 그 기분나쁜 얼굴. 금발로 화사한 빛깔을 사방에 떨치고 있는 변태성 가득한 그 얼굴. 화려무쌍의 짙은 붉은 색의 로브를 걸치고 있는 그 몸매, 그리고 그 흰 목 위에 그대로 아주 분명히 매달려 있는 그 머리통. 나는 그 놈에게 다가가 서 그 머리를 한 번 흔들어 잘 붙어 있나 확인하고 싶은 충동을 느껴서 쥐 고 있던 꿀빵을 내려놓고 진짜로 한 손으로 녀석의 금발 머리를 잡아 당겨 보았다. "아얏! 무슨 짓을 하는 겁니까?" 녀석이 눈쌀을 찌푸린 탓에 확실히 놈이란 것을 알았다. "흐음...신기하군." 처음 놀람이 가라앉고 나자 나는 히죽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웃을 수밖에... 바로 얼마 전에 내가 머리통 잘라 버린 놈이 지금 내 앞에서 싱글 싱글 웃 고 있는데 설마 울어야 한단 말인가! 놈은 머리칼을 쓰다듬으면서 미소를 던진다. "정말 대단하신 분입니다. 쿠베린님. 존경스럽습니다." "뭐가?" 나는 샤베트를 마저 먹어 치우면서 물었다. 여기서 새삼 더 놀랄 것도 없 을 거 같다. "그렇게 주저하지도 않고 저의 머리를 잘라버리실 줄은 저도 상상하지 못 했습니다." "아? 그거? 원래 마법사는 틈을 주지않고 머리를 날리는 게 가장 좋은 방 법이거든." 나는 그렇게 말하며 웃어 주었다. "너의 스승인 킬트나 아크 놈도 나에게 몇 번이나 머리통을 잘리우고 턱뼈 가 부서졌는지 몰라. 나중에 시간 되면 한 번 물어봐라. 킬트 놈은 꼬장 꼬 장하니까 전부 기억하고 있을걸." "아아..그렇습니까?" 녀석이 호호 하고 웃는다. 아아, 다시 기분이 나빠진다. 그는 손으로 입을 살짝 가린 채 아리따운 여인이 할 자세로 웃는다. 끔찍 하다. "그건 그렇고 저기에 왕녀님도 계시고 저의 주군도 계시니 한 번 인사라도 하시면 어떻습니까?" "주군이라..네 놈이 저 하인리히라는 애송이를 뒤에서 밀고 있는 거냐?" "멋진 분이기 때문에 저는 기꺼이 그의 마법사가 된 것입니다." 녀석이 또 배시시 웃는다. "전부터 이상히 여기는 것인데 왜 마법사들은 전부 주인을 찾는 거냐? 혼 자선 혹시 세계정복 못하는 거냐?" "아아..그것 말입니까?" 녀석은 또 웃는다. 윽! 저 죽일 놈의 배시시.. "군세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정복이 문제가 아니라 다스리는 게 문제이 기 때문이지요. 마법으로 다스리는 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녀석은 손가락으로 자기 입술을 살짝 누르면서 수줍게(?) 웃었다. "재미가 없잖아요?" "......" "주군." 녀석이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한 걸음 나서면서 입을 열었다. 동시에 시선이 이리로 다 집중이 된다. 아아, 제기랄! 하인리히라는 놈은 이 징그러운 놈을 돌아보면서 의아한 듯 눈썹을 치켜 올렸다. "마베릭, 무슨 일인가?" "소개해 드릴 분이 있습니다." "소개?" 하인리히가 고개를 갸웃하는 순간 그의 옆에 앉아있던 미트라가 벌떡 일어 났다. 그리고는 마치 발작을 일으키듯이 고함을 질렀다. 그녀의 얼굴이 무안할 정도로 환해지면서 달아올랐다. "쿠베린!" 아아..미녀가 저런 고함이라니... 그녀의 발작에 놀란 하인리히가 그녀를 돌아볼 찰나 그녀는 일어선 그대로 곧장 나에게 돌진하더니 그대로 내 품안에 안겼다. 안겨오는 여자를 거부할 내가 아니지. 웃, 좋은 감촉. 나는 진하고 멋드러지게 그녀를 끌어안고 그녀의 입술에 단숨에 내 입술을 겹쳤다. 그녀의 팔이 내 목을 끌어안는다. 으음..좋은 느낌... "아아아아악!" "아앗!"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경악성을 모른 척 하고 나는 그녀의 입술로 빠져들었 다. KUBERIN........ 가장 아름다운 여자를 얻는 자는 용기가 있는 자 가장 사랑스런 여자를 얻는 자는 지혜가 있는 자 이름을 얻을 수 있는 자는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자 10 미녀에겐 대접을 해야한다. 미녀를 일반적인 여자와 같이 취급하면 오래 살 수 없다. 왜 그런 일이 벌어지느냐고 나에게 물어봐야 나는 알 수 없다. 난 단지 남자일 뿐이고 여자의 너무 깊어 진짜 있는 지 없는 지 조차 의심 스러운 깊은 그 속과 그 복잡미묘한 시커먼 속 알맹이는 알 수 없으니까. 그건 그렇고 지금 나는 사실 그렇게 한가한 생각을 할 새는 없다. 본래라면 미트라를 안은 이 상태에서는 그녀만으로 머릿속이 꽉 차서 옆에 서 그 변태가 뭔 짓을 하든 혹은 하인리히라는 놈이 고래 고래 소리를 지 르든 혹은 시든 오이가 발작을 일으키든 그건 알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이 상황은 여자와의 키스에 성실히 임한다고 모든 것을 잊고 나 몰라 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지금 내 눈앞에 안긴 미트라를 놔두고 딴 생각을 한다면 그건 또 미트라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이다. 어디까지나 미녀에게는 대접을 해주어야 한다. 그러나.....지금 이 상황. 앞으로는 괴이쩍은 변태 마법사가 있고 그 옆에서 당장 칼을 빼들라고 파르르 떨면서 질투의 불꽃을 피우는 녀석이 있기 때 문에 나는 키스에만 전념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슬픈 일이. 어떤 인간도 키스에 열중하면서 등 뒤의 인간들의 적대감과 살의를 감지하 면서 또는 그 상황을 살피며 공격의 여유를 가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 나 나는 할 수 있다. 다년간에 걸친 여자들의 음산한 살기와 집요한 다단계 공격, 그리고 쉴새 없이 몰아치는 연속 공격과 기습공격에 단련된 나는 이제 남자들의 암팡진 살기에도 대처할 수 있는 몸이 된 것이다. 살기는 살기. 그게 음산한 살기든 암팡진 살기든 원한과 질투에 쩔어있는 살기든 나는 그 살기를 온 몸으로 느끼며 미트라의 입술에서 내 것을 떼고 동시에 미트라의 허리를 안아서 내 옆에 찰삭 붙였다. "아아.." 얼굴이 발그레해진 미트라를 보면서 나는 여지껏 완성된 살기를 보이지 못 하고 있는 인간들을 바라본다. 녀석들은 나는 뚫어져라 쏘아보며 실제로 눈으로 화살을 쏜다면 나는 관통된 고슴도치처럼 피를 뿌리고 쓰러졌어야 만 될 양의 눈화살을 쏘아대고 있었다. "이 놈은 뭐냐!" "왕녀를 구해라!" 여기저기서 소란이 일어날 무렵 오이가 말했다. "그, 그대는 쿠베린? 대, 대체 여길 어떻게 들어온 거냐?" 그가 노한 얼굴로 소매를 파르르 떨며 외쳤다. 걸어들어왔노라고 말하려다가 나는 입을 다물었다.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 는 것 아닌가. 만약 내가 비밀의 문으로라도 들어왔다해도 내가 그것을 밝 힌다면 세상에 다시 없을 바보요, 내가 특별한 기구를 썼다고 해도 그것 을 꼬치 꼬치 밝힌다면 역시 정상은 아닌 것이다. "네놈! 왕녀에게서 손을 떼라!" 당장 칼자루를 쥐고 나에게 달려드는 놈은 그 하인리히였다. 그는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엘리야의 부둣가에서 가끔 사람들이 장난 삼아 잡아다가 삶아서 오크들에게 술안주로 파는 문어처럼 변하고 있었다. 오크들 이외에 문어를 먹는 사람은 없다. 나도 먹긴 했지만 찔깃거리는 감 촉이 싫어서 안 먹는다. 그건 그렇고 하인리히의 앞을 용감하게 막아선 저 변태는 눈을 기묘하게 빛내면서 그 앞을 막아세웠다. "기다리십시오! 저 분은 보통 분이 아니라 쿠베린님이십니다!" "보통 놈이 아닌 것은 나도 안다! 저놈은 이곳 까지 스며들어 왔으니까!" 하인리히가 원색적으로 외쳤다. 음, 실제로 상당히 판단력을 구비하고 있군, 이 상황에 그런 판단까지 하다 니. 나는 미트라가 얼굴을 붉히면서 하는 말을 들었다. "쿠베린이 올 줄 알았어. 나 데려갈 거지?" "안 데려가려 했는데 미인이 되었으니 별 수 없군." 내가 말하자 그녀는 오호호호호하고 잘난 척 웃음을 터뜨렸다. "거봐, 내가 미인이 될 거라고 했지?" 그녀의 허리를 안고 들뜬 그녀의 웃음소릴 들으면서 나는 하인리히에게 미 소를 던졌다. "난 갈 거야." "잠깐만요!" 변태가 나서서 외쳤다. 녀석은 교활하게도 재빨리 시든 오이의 뒤로 가서 나의 공격에 대한 방패 를 챙겼다. 그리고는 자신의 주군에게 떠들기 시작한다. "저 쿠베린님이 제가 말했던 지상 최강의 종족인 묘인족의 왕이십니다!" 하인리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입술이 살짝 일그러졌지만 녀석은 말하지 않았다. 분노로 가득찬 그 얼굴 에 비해서 눈동자는 차가와 졌다. "그렇다면 저 사인족 보다 강하단 말인가?" 나는 그 말에 웃음을 터뜨리고 싶었다. 그러나 자제했다. 뭘 모르는 애송이 에게 긴 말을 해 봐야 대체 뭔 소용이 있겠는가. "강합니다. 아마 사라진 용족의 뒤를 이어 가장 강한 종족일 겁니다." 재빨리 녀석이 날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긴 말을 들을 이유가 없기에 미소를 던지며 상냥하게 말했다. "자아, 난 간다. 변태." "기다리십시오!" 녀석이 또 외친다. 들을 이유는 나는 없다네 하고 막 가려는 순간 갑자기 변태가 말했다. "당신의 애완동물이 곤란하게 될텐데요?" 나는 움찔했다. 찜찜한 마음에고개를 돌리자 미소하던 녀석이 손짓을 해 보였다. 그러자 기둥 뒤에서 경비서고 있었던 것 같은 경비들 두엇이 갈라지더니 쪼가리 사인족의 놈들이 누군가를 줄줄이 엮어가지고 다가오고 있었다. 그 누군가가 내 애완동물이라는 것은 불행히도 확실하다. 스카와 그 애송이 기사들이었던 것이다. 고개를 숙인 스카의 얼굴에는 핏 자국이 묻어있다. 기운이 없어 보이는 모습에서 녀석이 늘어져 있는 동안 잡혔다는 것을 짐 작할 수 있었다. 쪼가리 사인족놈들은 의기 양양한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 다. 감히 나에게 도전적이고 버릇없는 그 눈알을 굴리는 놈들을 나는 지극 한 인내심으로 바라보며 미소를 띄운 채 변태를 바라보았다. "변태, 그래, 어쩌자는 거냐?" "이 애완동물은 아마도 오랜 동안 당신의 것이었을 겁니다. 이 자를 다치 게 하기를 바라진 않으시지요?" 나는 대답대신 미소했다. 이 신경을 긁고 있는 변태는 뭘 하자는 이야긴가? 또 내 피 한사발 내놓으 라고 버둥 버둥 거릴 셈인가? 하지만 이 멋지고 훌륭하고 놀랄 만큼 우아 하신 묘인족이 저 쪼가리 사인족처럼 된다면 나는 죽지도 못할 것이다. 분 해서 죽지 못할 것이다. "저랑 이야기좀 하시죠, 쿠베린님. 당신은 이들이 죽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 으시겠지요?" "너는 더럽게도 킬트와 닮았구나." "그렇다면 영광이죠. 마스터와 닮았다는 것은 분명 영광입니다." 녀석이 미소해 보인다. 그러나 그 눈만은 미쳐서 도끼를 휘두르다가 자기 머리통을 깨부술 만큼 번들 번들 빛나고 있었다. 그 옆에 있는 시든 오이가 정상으로 보일 정도 였다. "어떻게해? 쿠베린?" 미트라가 걱정스러운 듯이 날 바라본다. 여자에게 걱정을 시키고 살아남는 남자는 수컷의 자격이 없다. 나는 따뜻 하게 미소해 보이고는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괜찮아. 괜찮아." "이봐!" 하인리히가 다시 외쳤다. "저 자를 잡아라!" 그가 명령하자마자 일제히 그 무도회자리에 있던 자들이 칼을 꺼내 들고 나에게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고 마베릭이 크게 외쳤다. "기다리시오!" 모두 멈칫 이 이상한 마법사를 바라보았다. 마베릭은 눈썹을 꿈틀거리고 있는 하인리히를 보면서 조용히 말했다. "여길 피바다로 만드실 셈입니까?" "무슨 의미냐?" 하인리히 대공인지 대왕인지가 눈을 부라리며 자신의 마법사를 바라보는 동안 나는 스카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어이, 어이! 스카!" 스카가 눈을 뜨고 희미한 눈초리로 날 바라본다. 역시 제정신이 아닌 거 같다. "이 분은 보통 분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지요! 인간의 병사 천여명을 단신으 로 상대하실 수 있는 분이랍니다! " "..하지만 저런 어린애..!" 대공녀석이 나에게 손가락질을 한다. 그리고는 다시 뭐라 막 입을 열 무렵에 마베릭의 얼굴이 기이하게 일그러 졌다. 그 지겨운 분홍빛 입술에서 혈색이 빠져나갔다. 그의 눈이 공포로 팽창되 듯 커졌고 공기가 찢어지는 듯 찌잉 찌잉 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시에 나는 강력한 힘을 느끼고 미트라를 안은 채 스카가 서 있는 방향으로 재빨리 도약했다. 콰콰콰쾅 하고 굉음이 터져나왔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전혀 자각하지 못했다. 궁정의 벽면이 뭔가에 얻어 맞았다. 그리고 그 벽면에 서 있었던 사람들은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벽돌과 한 덩어리가 되어 살점과 피를 사방 에 뿌리면서 반대편 벽면에가서 부딪쳤다. 그와 동시에 그 대전을 가로지 르는 엄청난 충격의 회오리는 부서진 벽돌과 함께 그냥 무방비로 서 있었 던 사람들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온통 기둥이 피에 물들고 갈갈이 찢어진 팔 다리가 기둥과 벽에 달라붙었다. 화려한 기둥은 순식간에 일어 난 충격으로 먼지와 살덩이가 벽돌과 엉망으로 엉긴 채 금이 가기 시작했 다. 예민한 귓속으로 찢어지는 공기소리와 괴수가 으르렁거리기라도 하는 듯한 지독한 굉음이 밀려들어왔다. 곧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이 기둥이 흔들리고 그 피투성이의 시체들 사 이에서 호화스러운 옷자락의 귀족들이 비명을 올렸다. 시야는 온통 희뿌옇게 돌먼지가 올라 아무 것도 보이지않는다. "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밖에서 인간의 것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괴음을 들으면서 나는 잿빛의 돌 먼지가 사방을 뿌옇게 덮는 그 순간을 노려서 스카에게 달라붙어 있던 쪼 가리사인족 한 명을 걷어찼다. 그리고 동시에 스카를 재빨리 잡아 챘다. 스카의 몸이 내 가느란 팔뚝에 덥석 잡혀서 바닥으로 몇번이나 고꾸라지듯 이 질질 끌려 벽돌이니 벽에 이리저리 부딪쳤지만 할 수 없다. 난 지금 키 가 작아서 큰 스카의 팔다리는 모두 감당할 수가 없다구. "허억! 크헉." 스카가 김빠진 소리를 낼 무렵 드디어 몇 개의 궁정기둥이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줄지어 쿠쿠쿵 소리를 내면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사람 살려!" "사람 살려!" "끄아아악!" 한번 무너지기 시작한 기둥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내려 심술궂은 아이 들이 장난을 치는 듯 대지의 여신이 신경질을 부리는 대지의 고함처럼 거 대한 땅울림을 퍼뜨리면서 인간들을 공포에 질리게 했다. "무슨 일이야? 대체!" "쿠베린! 쿠베린!" 미트라가 내 목에 달라 붙어 있는 동안 나는 스카와 그녀 둘다를 질질 바 닥에 끌다시피 하며 도약했다. 내 등 뒤로 무너져 내리는 천장을 피하면서 나는 곧 아무 것도 없는 궁정의정원까지 튀어 나왔고 그 뒤를 이어서 아 무도 따라잡지 못할 속도로 정원의 높다란 분수대를 밟고 뛰어 올라서 나 지막한 후원의 정자 지붕에 올라섰다. "하아, 하아.." 미트라가 손톱을 잔뜩 세워서 내 팔뚝을 쥐어 뜯었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위로 먼지가 새하얗게 씌워져서 마치 가면 쓴 미친 여 자의 몰골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것도 아랑곳 하지않고 자신이 방금 전 까지도 서 있었던 궁정의 대전을 돌아보았다. 무엇이 직격했는가. 그것은 별로 어려운 답은 아니었다. 공중에 검은 로브자락을 휘날리고 있는 한 남자가 있었다. 창백하고 무표 정한 사내는 검은 로브자락에 휘감긴 채 여느 마법사 답지않게 지팡이도 들지 않은 채 무너진 궁정의 대무도회장을 바라보며 허공에 서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아마 그는 이 자리에 있지 않을 것이다. 저 것은 환영인 듯 보였다. 그러나 그 환영으로도 그의 힘은 너무나 월등했다. 하늘은 온통 검었다. 무너진 건물들이 사람들에게 흙먼지로 완전히 숨이 막히게 만들고 있는 동 안 검은 로브의 검은 머리의 마법사는 허공에 사신처럼 서서 아래를 내려 다 보고 있었다. 그런 그의 등 뒤로, 그리고 주변으로 그의 명령을 기다리 며 유유히 날고 있는 것은 그레이트 키메라 세 마리와 에다마리온이었다. 경이다. 소환수를 불러내는 것은 물론 상위마법사라면 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레이 트 키메라씩이나 되는 것을 세 마리나 한꺼번에 불러내는 것은 말 그대로 경이 그 자체였다. 게다가 덩치 큰 저 에다마리온을 불러내는 마법사란 손 에 꼽을 정도다. 내 이제껏 살면서 저게 에다마리온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미친 두 놈들- 아크와 킬트의 누가 더 잘났나 다툼에서 처음 알게 된 것이다. 그 이래로는 본 적 없다. 아주 아주 오랜만이라 반가울 정도다. 이 덩치 큰 소환수는 일직선의 전극의 뿔을 오색의 빛깔로 물들이면서 다 시 한번 뇌전(雷電)을 뿜어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대체 뭐가 궁정을 직격 했는지 이제야 알만하다. 에다마리온이 한 번 뿜고 뒤이어서 그레이트 키 메라가 날갯짓이라도 했겠지. 아니면 브레스라도 뿜었던가. 원 세상에. 그러한 어마 어마한 괴수가 네 마리나 허공을 메우고 있으니 사방이 어두 워 진 것도 무리가 아니다. 뇌전의 마수 에다마리온은 그 날개를 뻗고 그 거대한 뿔을 들어올리는 것만으로도 맑은 하늘에서 구름을 불러낸다. "아아아아.." 어지간한 미트라도 다리가 풀리는 지 털석 주저앉아 결사적으로 내게 매달 렸다. 스카는 두 다리를 주욱 뻗은 채 넋을 잃고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 다. 자신들이 방금까지 있었던 그 궁정이 완전히 박살난 광경때문에 그러 는 지 아니면 저 끔찍하게도 거대한 소환수들때문에 그러는 지 스카는 헥 헥거리다가 날 바라보며 억지로 물었다. "설마....저거..." "맞아, 저 잘난 킬트, 룬 킬트 더 마이오스- 암흑마도의 군주 등장이다." 이 잘난 내가 이 소름끼치도록 유치한 이름을 외우다니, 내가 생각해도 난 지금 충격을 받은 상태인 모양이다. KUBERIN........ 가장 아름다운 여자를 얻는 자는 용기가 있는 자 가장 사랑스런 여자를 얻는 자는 지혜가 있는 자 이름을 얻을 수 있는 자는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자 11 마법사란 것들은 이상한 존재이다. 사실 마법사란 죽어도 입만 동동 뜨는 자들로, 엘프의 마법사든 인간의 마 법사든 주먹질과 칼질과 기타등등 육체적 노력과 단련을 하는 자들이 아니 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주둥이를 어떻게 하면 빨리 움직일까만 생각하고 미친 듯이 마법어를 외우고 중얼거리며 새로운 마법에 눈을 밝히고 고대의 마법에 넋을 잃고 책에 빠지는 자들이다. 그렇기에 엘프마법사가 인간 마 법사 보다 더 많은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머리가 좋다라는 것보다는 오히 려 그들에게 허락된 무한한 세월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그들이 좀더 자연의 여신에 가까운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엘프의 마법사들은 대다수가 정령마법으로 시작하고 백마술 일변도이지만 나름대로 인간들은 그 중간쯤에 해당하는 것 같다. 엘프마법사들이 쓰는 강력한 파괴마법이라 고 할 만한 것은 역시 정령마법을 사용한 공격술법으로 얼마전 그 교범이 될 만한 것을 하프엘프의 마법사 튜나가 아낌없이 보여주었었다. 그러나 파괴 그 자체의 마법인 홍색마법이나 파괴마법, 흑마법이라 불리는 기타 등등의 수법에 대해서는 확실히 인간의 마법이 공격력이 앞서있다. 뭐 방어술법에 대해선 엘프의 마법사가 앞서 있으니까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기야 하겠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장기전으로 들어갈 경우 엘프마법사가 인간마법사보다 유리한 것은 사실이다. 인간마법사는 대지의 힘에 동화하 는 엘프들 보다는 더 힘을 소비시킬테니까. 그럼 언제부터 인간은 마법을 썼을까. 그리고 언제부터 마법을 쓸 수 있게 되었을까. 우리들 육체를 쓰는 자들은 마법을 배워 쓸 머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강 력한 힘에 의존하여 살고 있다. 나에게 지금 당장 마법을 배워라 라고 한 다면 나는 분명히 배울 수 있다. 그렇지만 그 긴 세월을 마법- 언어의 마 력에 의지하라 라고 한다면 나는 하지않을 것이다. 나는 인간의 말보다 빠 르고 엘프의 화살보다 빠르며 어떤 달리는 짐승보다 빠르다. 그래서 나와 나의 일족들, 고대의 일족들은 입술을 달작거리며 대지와 언어의 힘을 빌 리려 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인간들에게 사인족은 속았다. 아니, 졌다. 허약한 인간인 주제에 지금 자신보다도 강한 존재- 소환수들을 거느리고 선 자들을 보라. 그 자신 가진 육체적 힘은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주제에 많은 살아있는 것들 위에 선 인간들을 보라. 그것이 인간의 마법사인 것이다. 그래서 슬프다. "쿠베린....저것은.." 스카가 입술을 깨물며 비슬 일어섰다. 그리고는 허공에선 검은 로브의 마 법사를 바라보며 내 팔뚝을 잡아 당겼다. 그의 얼굴에도 이 놀라운 광경- 거대하기 짝이 없는 네 마리 거수가 하늘 위에서 왕궁을 굽어 보고 있는 모습에 공포와 경이감이 떠올라 있었다. 미트라가 문득 벌떡 일어나 외쳤다. "오라버니! 오라버니가 안에! 어떻게 된 거지? 어떻게?" 그녀는 비로소 제 정신을 차린 것 같다. 무너져 버린 왕궁의 대전은 폭삭 가라앉아서 지붕이고 바닥이 온통 하나가 되어 엉겨 있다. 회랑이고 기둥 이고 남은 것은 무너져 내리고 부서져 버린 돌덩이들 뿐이었다. 아, 물론 거대한 양의 돌먼지도 충분히 남았다. 신음하는 인간들과 고통으로 울부짖는 자들의 가운데에 피어 오르는 먼지 를 뚫고 솟아오르듯이 나타난 것이 있었다. 쪼가리 사인족들 셋과 붉은 로브를 걸친 마법사 놈, 그리고 그가 호위하고 있는 하인리히 대공-대제, 대왕? 뭐 어느쪽이든 상관없다-의 모습이었다. 그들은 발 아래 널부러진 부상자들을 모른 척하고는 무너진 건물 바로 옆 의 공터에 유유히 나타났다. 마지막 순간 텔레포트한 것이 틀림없었다. 허공에 떠 있던 검은 킬트의 환영은 그 모습을 찾아 내고는 무표정한 얼 굴로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 얼굴은 완전히 무표정해서 분노인지 절망인 지 혹은 즐거움인지 알수 없는 듯한 얼굴이었다. "오랜만입니다. 마스터." 무심한 얼굴의 킬트는 자신과 같은 나이로 보이는 모습의 마베릭을 내려다 보고 낮게 말했다. "네가 아직도 날 마스터라 부르느냐?" "물론입니다. 마스터." 녀석은 붉은 입술로 인사했다. 미소는 얼어있었지만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 다. 고개를 숙인 그 모습을 보면서 하인리히는 아연한 얼굴로 무너져 내린 왕궁과 하늘 위의 거대한 괴수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펄럭거리는 거수들의 날갯짓 때문에 지상에서는 내내 바람이 일어나 시야 를 가리고 있었다. 눅진한 비린내가 섞인 바람이 코끝으로 몰려와 먼지와 함께 엉기듯이 나돌고 있다. 나는 코를 들고 이 싸움을 흥미진진하게 바라보고 싶었다. 하지만 미트라는 자신의 오라비가 무사한지, 그리고 그녀가 아는 자들이 무사한지 보고 싶어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싫어서 스카를 돌아보았다. 스카는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낮게 물었다. "저 것은..저 것은 대체...어찌된 일이지?" "나중에 이야기 해주지. 넌 미트라를 데리고 그 놈의 빌어먹을 용병들의 집으로 가." "...수도용병길드." 고집세고도 성실하게 스카가 그 말을 고쳐 주었다. 녀석이 그렇게 말할 정도라면 제 정신이라는 뜻이다. 나는 나도 모르게 웃 음을 짓고 미트라의 허리를 잡아 당겼다. 미트라는 넋을 잃고 주저 앉아 있다가 날 돌아보았다. "먼지로 얼굴이 엉망이군, 넌 조금 쉬어야 겠구나." "쿠베린, 오빠를 구해줘! 아무리 엉망이라도 오빠란 말이야!" 미트라가 울며 외쳤지만 나는 그런 것에 감동받을 정도로 여유가 철철 넘 치진 않는다. 대답대신 그녀의 복부를 가볍게 후려쳤다. 헉 하는 소리와 함 께 그녀가 늘어지자 스카의 앞으로 그녀의 몸을 건네주었다. "데리고 가 있어." "넌?" 스카가 주저않고 그녀를 후려갈긴 나를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바라보다 말 고 멍하니 되물었다. 얼룩 덜룩 멍이 남은 그 얼굴을 향해 나는 빙긋 매력 적인 미소를 던져 주곤 어깨를 툭툭 쳐 주었다. "조금 구경하다 가마." "하...하지만!" 그는 뭐라 말하려 했지만 입을 달싹거렸을 뿐 말을 잇지는 않았다. 그는 대신에 입을 꾸욱 다물고 영차 하며 늘어진 미트라의 몸을 안아 들었을 뿐 이었다. "어서피하기나 해." 나는 그의 등을 밀어주었고 그는 더듬 더듬 사방을 더듬으면서 미트라를 안고 정자 지붕에서 내려갔다. 땀을 줄줄 흘리는 그를 보니 가엾기도 했지 만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다. 주변에는 온통 기사와 병사로 깔려있었다. 비명을 올리는 시녀들을 헤치고 병사들이 떼지어 몰려들고 있는 중이었지만 워낙에 보통 문제가 아니라서 모두들 입을 저억 저억 벌린 채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게중에 용감한 몇몇이 화살을 날리기도 했지만 그 화살은 소환수들 가까이에 다가가지도 못하고 뚝뚝 떨어져 유시(流矢)가 되어버렸는지라 모두들 쏘기를 중단했다. "세상에.." "세상에! 저게 뭐야?" "와, 왕께선 어찌되셨나?" 난리가 났지만 정작 어떻게 되었나 알아보려 먼지가 풀풀 이는 무너진 대 전앞으로 나서는 놈들은 하나도 없었다. "돌아오라고 내가 말할 줄 알았더냐?" 짧게 킬트가 말했다. 마베릭의 입술이 가볍게 떨렸다. 그는 어깨를 들썩이며 굳어버린 미소를 지으며 킬트를 올려다 보았다. "당신의 아드님은 찾으셨나요?" "...." 킬트는 여전히 놈을 바라보고 있었다. 옆에 있던 하인리히가 마베릭을 향 해 물었다. "저자는 대체 누구냐?" 마베릭은 자신의 주군이라고 말했던 하인리히를 똑바로 바라보지도 않은 채 대꾸했다. "저의 주인, 저의 스승, 저의 아버지이지요." "그,그런데 왜 널?" 하인리히가 말하려는 순간에 킬트의 눈이 날 발견했다. 그의 눈이 가늘어지는 순간에 나는 손을 들어 아는 척을 해 보였다. 그의 얼굴이 불쾌감으로 물들었지만 지금 그는 나에게 떠들고 어쩌고 할 새는 없는 것 같았다. 마베릭이 뒤를 돌아보았다. 내 모습이 보이자 그는 한숨을 쉬듯 후우 하고 숨을 깊이 내 뱉고는 다시 킬트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마스터? 저를 없애시렵니까?" "......" 킬트는 애매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의 입술은 무겁고 긴 침묵을 만들어낸 채로 시선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 모습은 마치 유령처럼 공중에 뜬 모습만 보면 음산하기짝이 없었다. 마베릭은 어깨를 다시 으슥하고는 덧붙였다. "어차피 저는 당신에게 돌아갈 생각은 없습니다. 전 당신을 능가하고 싶으 니까요!" 마베릭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그는 항변하듯이 두 손을 치켜 올리더니 도 발적으로 그를 똑바로 쳐다 보았다. "당신은 늙었어! 당신은 절대로 ...!" "마베릭." 킬트가 입을 열었다. "너를 없애겠다." 그가 무겁게 말했다. 그리고 하늘에서 에다마리온이 백색의 뇌전을 그대로 지상에 직격했다. 빛은 불을 부르고 불은 바람을 부르며 바람은 비를 부른다. 나는 하마터면 뒤로 튕겨나가 몇번이고 데굴 데굴 구를 뻔했다. 작은 몸집 이라 무게감이 없어서 자칫하면 그대로 궁정바깥까지 날아갈 뻔했다. 그러 나 그것도 좋을 뻔했다. 그 엄청난 열기와 충격에 온 몸의 옷이 다 타서 새까맣게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제기랄, 이게 왠 일이람. 내 머리털은 보통의 열에는 그다지 타지 않는다. 조금 뜨겁긴 했지만 화상 을 입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뒤이어서 내려쳐지는 공격을 보고는 나 도 그 자리를 떠야만 했다. "메테오!" 유성우가 새까만 하늘에서 그대로 떨어지고 있었다. 입을 저억 벌리는 인간들의 멍청함을 뒤로 하고 나는 결사적으로 달렸다. 아무리 나라도 저런 것을 직격으로 맞으면 간단히 그을리는 것만으로는 끝 나지 않는다. 저 킬트놈의 메테오는 일반 마법사들이 내리는 것과는 차원 이 다르다. 말 그대로 온 하늘이 완전히 새까맣게 물들어 온통 세상이 멸 망할 것 같았다. 세상의 멸망, 말 그대로 세상의 종막, 세상은 완전히 불길에 휩싸여 잿더미 만 남을 것 같은 무시무시한 불의 바람이 그 수박보다도 조금 더 큰 유성 에 휘감겨 사방을 타오르게 하고 있었다. 메테오란 유성이지만 유성은 그 냥 돌덩이 하나 툭 떨어지는 수준이 아니다. 유성과 덧붙여 불의 바람이 함께 온다. 돌은 거인이 온 힘을 다해 내리친 것과 같은 속도로 지상을 부수고 깨뜨리고 그 돌덩이에 휘감긴 불의 바람 은 사방을 태우고도 모자라 허공까지 그 탐욕스런 이빨을 들이댄다. 죽고 죽고 죽고 죽고 부수고 부수고 부수고 타고 타고 타고... 공기는 열기로 가득차 입안까지 말라 입술이 갈라진다. 쓰러지는 무수한 인간들의 시체를 넘어 나는 맹렬하게 달렸다. 저 놈의 킬트는 진심이다. 저 킬트는 지금 이 왕성하나를 그대로 없애버릴 참이었다. 이 왕성을 완전히 없애서 마베릭을 없앨 수가 있다면 녀석은 기 꺼이 그렇게 할 것이다. 바닥이 뜨겁다. 등덜미가 뜨끈했다.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이글거리는 열기가 내 등을 향해 맹렬하게 아가리를 벌린 것이 느껴진다. 달려라 달려, 저 놈 성질 더러운 킬트놈, 두고 보자구! "진심이시군요! 그럼 저도!" 내 지나치게 예민한 귀에 마베릭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리고 새하얀 광채가 일어나 주변을 완전히 뒤덮기 시작했다. 거대한 냉 기가 이번에는 등줄기를 다시 후려갈긴다. 이건 장난이 아니다 하고 진땀 을 흘리며 나는 계속 달렸다. 두 놈중 어느 쪽이 이기든 지든 난 둘다 싫다. 이 지나치게 강력해서 말도 안되는 주둥이만 산 마법사 놈들, 다 죽어버려라! 그 빌어먹을 그 수도용병길드의 가게로 쓰고 있는 큰사슴집인지 작은 사슴 집인지 까지 달려왔을 때에는 나는 완전히 알몸이었다. 여기 저기 벌겋게 되어 버린 살갗을 느끼며 나는 가게 뒤 우물로 곧장 다가가 물을 뒤집어 썼다. 사람들은 왕성이 새빨갛게 달아오르고 여기 저기 얼음으로 뒤덮힌 것을 보며 웅성거리고 있었다. 웅성거리다니, 여유가 만만이로군, 두 놈다 그렇게 간단히 끝낼 것 같지 않 으니 난 어서 여길 뜨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 "얘야, 옷을...춥지 않냐?"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한 노파가 나에게 말했다. 나는 대답대신 시익 웃어주고는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가게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손님이고 주인이고 왕궁에서 벌어진 일을 구 경하느라 다 밖에 나가고 있는 것이라곤 의자와 탁자 밖엔 없다. 나는 욕 설을 퍼부으면서 맥주통을 꺼내어 손수 마셔야 했다. 목이 말랐던 탓이라 주욱 주욱 들이키고 있는데 문을 열고 그제서야 주인이 들어섰다. "어? 너 뭐하는 거냐?" "이봐, 여기..용병길드마스터는 어디있냐?" "...당신, 쿠베린?" 녀석이 눈썰미 좋게 날 알아본다. 허긴 나 같은 미남자를 쉽게 잊을 수는 없는 법이다. "그래, 여기 마스터는 어디있어?" "그건, 그건 그렇고 대체 왕궁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요? 지금 온통 난리인데?" 그가 오히려 나에게 다가와 물었다. "당신은 왕궁에서 왔소? 거기서 지금 막 온거요?" "진짜 세상의 종말이 온거요? 지금 왕궁 위에 마신이 강림했다던데?" "설마 전설의 용족이라도 나타난 거요?" 그의 얼굴은 진지하고 겁에 질려 있었지만 나는 트릿하게 되물었다. 그가 겁에 질리든 말든 내가 알 게 뭐냐... "알고 싶어?" "무, 물론이오!" "그럼 그 빌어먹을 용병길드 마스터가 어디있나부터 말해." "에? 그, 그는 지금 분명히......" 그는 눈쌀을 찌푸렸다. "베델공작과 같이 있을 텐데?" "역시나..그럼 여기서 용병을 불러서 조치할 수 있는 놈은 없는 건가?" "뭐, 물론 잠시 동안만이라면 내가 맡고 있소만." "믿을 수 있는 놈으로 다섯만 추렸으면 좋겠는데." "뭐, 부를 수는 있지만..대체 지금 뭔 난리가 난 거요? 진짜 다른 자들 말 대로 하인리히라는 그 죽일 놈이 이 나라를 멸망시키려고 마법사를 부른 거요?" 말들도 많다. 뭐 맞은 것은 없지만 마법사가 등장하는 것은 얼추 맞춘 거 같다. 나는 검댕을 닦아 내면서 막 입을 열려고 했다. 그러자 마자 타이밍 좋게 문을 비걱 열고 헐덕이면서 시커먼 검둥이가 두 명 들어섰다. KUBERIN........ 가장 아름다운 여자를 얻는 자는 용기가 있는 자 가장 사랑스런 여자를 얻는 자는 지혜가 있는 자 이름을 얻을 수 있는 자는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자 12 "주인장!" 검둥이는 들어오자 마자 소리를 질러댔다. "에?" 주인이 돌아보자 검둥이는 이빨만 하얀 채로 고래 고래 소리를지른다. "이 아가씨를 돌볼 여자를 좀 데려오쇼!" 시커멓게 그을리고 여기 저기서 아직도 연기가 나고 있는 검둥이는 비틀거 리는 검둥이 여자를 들어서 탁자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곤 물물 하고 소리 를 지르더니 멍하니 선 주인에게 고래 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어서 물 가져와!" 주인이 물동이를 가지고 오자 마자 검둥이는 그 물을 검둥이 여자에게 끼 얹어 그녀를 대강 대강 닦아 주었다. 그러나 워낙에 검둥이인지라 물이 묻 자 검둥이에서 얼룩이가 되었을 뿐 별로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다. "이 아가씨를 돌봐 주시오! 난 엘리야의 스카라 하오!" "에. 그.." 주인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검둥이 스카는 홱 돌아서서 황급히 밖으로 나 가려 했다. "어디 가냐?" 내가 소리쳐 묻자 녀석이 막 나가면서 외쳤다. "왕궁에! 그 불구덩이 안에 아직 쿠베린이 있어!" "그래?" "그..!" 나가려다가 녀석은 고꾸라질뻔 했다. 그리고는 홱 나를 돌아보았다. 정확히 말한다면 녀석은 날 그제서야 발견한 것이다. "하아.." 하고 녀석이 털석 주저앉았다. "정말 미치게 만드는 놈이구나, 너..." "뭐가? 설마하니 이 몸께서 고이 고이 불에 탈 거라고 생각한 거냐?" 나는 뽀얗고도 아름다운 알몸으로 한 바퀴 그 녀석의 앞에서 돌아보였다. 스카는 이마를 붙잡고 한 숨을 쉬더니 말했다. "주인장..나도 물..." 주인은 스카를 굉장히 불쌍하다는 듯이 바라보며 물 한 동이를 가져다 주 었다. 그리고는 알몸으로 팔짱을 끼고 선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옷이나 입으시오. 쿠베린." "어떻게 된 거지? 대체 뭐가 일어난 거야?" 물을 한동이 들이키고도 모자라 맥주를 두 잔 연거푸 마시고 머리에 쓴 검 댕을 벗겨낸 뒤에 스카가 물었다. 나는 옷을 걸치고 주인과 나, 스카 셋이 서 앉은 탁자의 끄트머리를 꾸욱 꾸욱 누르면서 그 말을 들으면서 고개를 근엄하게 끄덕이고 있었다. "간단히 말하면 킬트가 등장해서 방자한 제자를 쓸었다...라고 하는 것이 지." "에에..." "자, 잠깐! 킬트가 누구요? 그리고 방자한 제자는 누구고?" 주인이 황급히 더듬어 물을 때 용병들 다섯명이 들어섰다. 주점의 점원인 꼬마가 황급히 그들을 맞이해서 우리들 앞으로 데리고 오자 용병들은 고개 를 갸웃하면서 우리들 앞으로 앉았다. "키토, 우릴 부른 게 누구야?" "무슨 일이야? 왕성이 저 지경인데 이 와중에 무슨 일이야?" 저마다 한마디씩 하는 것을 무시하고 주인은 조용히 하라고 손짓했다. 나 는 새로운 용병들을 아래 위로 훑어보면서 말했다. "이들인가?" "그렇소. 내가 가장 믿을 만한 길드원이오. 이들 모두 수도에선 제법 알아 주는 인물들이라오." 그 중 하나가 나와 스카를 보더니 스카를 보고 아는 척을 했다. "여어, 스카가 아닌가?" "에, 오랜만이군, 마우." 스카는 고개를 끄덕여 보이더니 반가운 듯 악수를 했다. 그들이 그러고 있 는 중에 주인이 재촉하듯이 나에게 턱을 내밀어 보였다. "말하지. 지금 내가 바라는 것은 여자 하나를 베델공작의 영지까지 호송하 는 거야." ".....베델공작의?" 용병들 몇이 미심쩍은 표정을 하고 날 바라보았다. 스카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날 바라본다. "그럼 왕녀님을 베델공작에게 보호를 요청하게 할 셈이구나." "와, 왕녀!" 놀란 용병들이 눈을 크게 뜨는데 옆에 있던 주인은 뒤로 넘어갈 듯이 허걱 대면서 지껄였다. "그, 그럼 우리 집 위에 누워 있는 그분이 바로..그 분이오?" "그래 . 전에도 왔었는데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 내가 뜨악하게 말하자 주인은 허겁지겁 일어서더니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안쪽으로 달려들어갔다. 뭘하나 싶어 주시하고 있는 동안 주인은 자신의 뚱보 마누라를 데리고 오더니 다급하게 그녀를 이층으로 올려보냈다. 뒤이 어 주인의 딸내미같이 보이는 여자애들 둘도 따라 이층으로 올라갔다. 그 소동을 멀건히 보던 용병들이 날 돌아보았다. "넌 누구냐?" 그들을 무시하고 나는 다시 스카에게 말해두었다. "네가 이들과 같이 에메스에게 가 있어." "넌? 넌 어쩌려고? 왕녀가 바라는 것은 너 잖아?" "좀더 알아보려고 그래. 킬트자식은 여기에 있는 게 아냐, 마베릭놈도 쉽게 죽을 놈이 아니지, 녀석은 그 와중에 그 하인리히란 놈까지 보호하고 있었 다구. 게다가 내가 목을 댕강 댕강 잘랐어도 잠시후에 킬킬 웃으며 나타났 다구." 스카가 갑자기 머리를 잡으면서 그만 하고 외쳤다. "자, 다시 말해봐, 다시. 그러니까 그 마베릭이란 빨간 로브의 마법사는 킬 트의 제자로 킬트는 그 놈을 징벌하기 위해 나타났다가 왕궁을 통째로 날 렸다...그러나 마베릭이란 놈은 쉽게 당할 놈이 아니니 유유히 빠져나갈 수 있다..그러니까 그 뒤를 알아보고 뒷처리를 하겠다라고 나에게 말하는 거 야?" 노,놀랍다. "스카, 놀랍구나. 네 머리가 언제부터 그렇게 좋아졌단 말이냐?" 한꺼번에 너무나 많은 말을 쏟아내서 헥헥대는 스카는 가슴을 부여잡고 진 지하게 말했다. "자식아, 너와 20년이나 같이 있으면서 너의 그 두서없는 말에 얼마나 내 가 고통받았다고 생각하냐?" "너의 버릇없는 행동에 고통받은 나는 생각지 않냐?" "너의 행동에 고통받은 나에 비하면 너 따위의 고통은 알 바 아냐." 잘라 말한 스카는 내가 뭐라 덧붙이기도 전에 재빨리 자신의 옆에서 입을 벌리고 있는 용병들에게 말했다. "이 놈은 엘리야의 쿠베린이라고 한다. 알고 있겠지? 생긴 것은 이래도 속 알맹이는 구렁이 몇백마릴 삼켜버린 속이 시커먼 놈이야, 그러니까 우리들 은 이 놈이 말하는 것은 무시하고 우리들의 일을 하자구." "...자, 잠깐! 저 애송이가 엘리야의 쿠베린이란 말이야?" 놀란 용병 하나가 손가락을 들어 감히 나를 가리켜 보이길레 나는 그 손가 락을 부러뜨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지금 그럴 때가 아니라 서 참았다. "자아, 이제 스카, 너는 저 미트라를 데리고 출발해라, 그리고 내가 충고하 건데 이 수도를 어서 어서 빠져 나가는 게 좋아." 그렇게 말하는 순간 밖에서 콰쾅 하는 소리가 터져나왔다. 지축이 울리는 거대한 폭음에 가게 여기저기에서 부스러기 같은 먼지들이 쏟아져 내려와 내가 쥔 맥주잔으로 떨어진다. 부슬 부슬 내리는 먼지를 넋을 잃고 바라보던 우리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 하고는 재빨리 이층으로 달려올라갔다. 문을 박차고 미트라가 있는 안으로 들어가자 미트라가 침대위에서 세 명의 여자들과 같이 엉겨 있는 게 보였다. 나는 그들을 모른 척하고 창문을 열 어 지금 대체 뭔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알기 위해 살폈다. 왕궁이 있던 자리는 지금 시뻘겋게 물들어- 불길로 물든 저 모습, 마치 석 양이 통째로 내려앉은 것같은 저 모습, 그러나 지금은 불행히도 밤이다. 해 는 이미 저물어 붉은 기는 거의 남지 않았고 왕궁이 있는 자리는 동쪽이 다. 그것을 머리에 새기면서 나는 차례로 무너져 가는 왕궁을 멀건히 바라 보았다. 바람이 세다면 이 곳까지 불길이 번지고도 남는다. 아니, 반드시 번질 것이다. 불과 얼음의 대결을 벌이고 땅을 울릴 대지의 마법을 벌였다 면 남는 것은 바람의 마법이다. 바람이 불면 불씨는 하염없이 흩날리고 이 수도는 활활 타오르게 될 가능성이 무척 무척 매우 매우 크다. "쿠베린..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죠? 오라버니는..왕은?" "몰라,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오늘로서 델리암 왕가는 거의 망했다고 보면 좋을 거 같다." 나는 단순히 아주 명료하게 대답해 주었다. 그 순간 미트라가 아악 하고 혼절하듯이 축 늘어졌다. 스카를 비롯한 모든 작자들이 일제히 정직한 나를 향해 비난의 눈초리를 던진다. 이봐, 난 그저 정직했을 뿐 아무 잘못도 하지않았어. 정직한 것도 죄라니 인간들은 정말 거짓말을 즐기는 종족이구만. 쳇. "어서 이 애를 데리고 여길 떠나, 곧 불바다가 될테니까." "에에...불바다..그럼 피난을 가야 하나?" 주인이 뻔한 소리를 해서 나는 진지하게 말해주었다. "응. 죽고 싶지 않으면." 주인과 주인마누라들이 새파랗게 질리는 순간 스카가 주저하며 말했다. "왕녀는 네가 같이 있는 것을 훨씬 좋아할 거야, 쿠베린. 그녀는 널 사랑한 다구." "모든 여자들이 다 나를 사랑하지." 나는 잘라 말해주고 손을 저어 스카가 발작하려는 것을 막았다. "어서 준비해. 그렇게 시간은 없으니까. 이곳을 어서 떠나." 나는 그렇게 말하고 혼절한 미트라의 이마에 키스했다. 그리고는 문득 생 각난 듯이 스카에게 말했다. "내가 네 보따리안에 넣어둔 물건좀 꺼내봐." "이거?" 스카가 주섬 주섬 꺼내들자 나는 내 마법 주머니를 꺼내어 허리에 달았다. 이것이면 어느 정도 스카와 떨어져 있어도 나쁘지 않겠지. 그리고 할 일은 너무 너무 많다. 아아, 나는 인간들의 잘난 구국영웅은 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이대로 불바다속에서 허우적 거리는 것은 질색이다. 그러니까 저기 꼭대기에서 자기 환영으로 하여금 불덩이를 뿜어내고 있는 킬트 자식이 어디 박혀있는지 어서 찾아 내는 게 올바른 해결책이다. KUBERIN........ 가장 아름다운 여자를 얻는 자는 용기가 있는 자 가장 사랑스런 여자를 얻는 자는 지혜가 있는 자 이름을 얻을 수 있는 자는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자 13 말을 두서 있게 한다는 것은 매우 피로한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두서가 없으면 그것도 곤란하다. 인간들의 직설적이고 즉물 적인 주제에 빙 둘러서 말하는 그 어눌한 이야기를 듣다 보면 때로는 엘프 들의 장황하고 화려무쌍한 수식어남발의 이야기에 못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오크들의 짧은 말과 드워프들의 직설적인 이야기들이 호비트들의 수다스러움 보다 명확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왜 인간들은 빙빙 둘러서 말하는 인간들이 더 훌륭하다고 하는 것일까. 그 저 툭툭 잘라서 제대로 진실을 말하는 것이 왜 나쁜 것인가? 그렇게 스카에게 물었더니 짐싸다 말고 스카는 단도직입적으로 대꾸했다. "그럼 넌 왜 마미에게 이쁜 고양이인 척 하냐?" "난 이쁜 고양이인 척 한 적은 없어. 그저 그녀 혼자서 그렇게 보고 있는 거지." "그러나 입 다물고 있는 게 바로 그거나 다름없지않아?" "아니지, 분명 틀리지. 내가 말하는 것은 거짓말이 아니고 말하는 것을 빙 빙 둘러쳐서 잠시동안 수사어구에 대해서 깊이 탐구하지않으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왜 하느냐에 대한 거다." 그도 역시 미간을 찌푸리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문득 생각난 듯 말한다. "그런데 말야, 쿠베린, 너는 서둘러야 한다고 우리들에게 호통을 치더니 앉 아서 한다는 게 그런 소리냐?" "서둘러야 하는 건 너지 내가 아니거든." 나는 지금 짐을 싸고 난리를 치고 있는 자들을 앞에 두고 음식을 먹고 있 었다. 멀리서 박살이 나고 있는 인간들의 왕궁- 델리암의 왕궁을 바라보며 바비 큐소스를 얹어 구운 맛있는 훈제오리를 먹고 있는 중이었다. 내 앞에는 진 한 냄새를 풍기는 맥주통과 쌓인 호밀빵과 꿀항아리, 그리고 말린 포도와 살구가 놓여져 있었다. 무슨 일이든 하려고 마음을 먹는다면 일단 먹어야 한다. 나는 그들에게 짐 을 싸라고 시킨 뒤에 탁자위에 먹을 것을 산더미처럼- 이 정도양을 산더미 라고 한다면 산이 화를 내겠지-아니, 적당량 쌓아놓고 먹기 시작하고 있었 다. 굶주린 채로 사냥감을 찾아 다니는 것은 오로지 배를 채우기 위해서이지 굳이 그 상태를 즐겨서 그런 것은 아니다. 굶주린 상태를 즐기는 것은 오 로지 인간밖에는 없다. 먹기위해 사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살기위해선 먹 어야 하고 어차피 먹어야 한다면 즐기는 것이 좋은 것이다. 세상에는 좋은 먹거리 즐거운 먹거리가 산처럼 쌓여-아니지, 어쨌든 무진장 많이 있고 내 가 여기서 이것을 먹고 있는 와중에도 누군가가 맛있는 것을 요리하고 개 발하고 또 새롭게 치장하고 있을 것이다. 그것도 하나의 즐거움, 세상에 아 름다운 여자들이 많은 것처럼 세상에는 맛있는 것들이 널려있다. 그래서 삶은 살맛 나는 것이다. "쿠베린.." 스카가 신음하듯 말했다. "그렇게 아귀 아귀 먹어대지만 말고 대답해!" 나는 입안에 꿀을 바른 호밀빵과 잘 만들어진 소시지를 들어 겨자소스를 묻힌 채로 스카를 바라보았다. 손톱하나를 길게 들어 훈제 돼지고기를 뭉 텅 뭉텅 썰면서 녀석을 보자 녀석이 미간을 잔뜩 찌푸린채 날 바라보고 있 었다. 그 만이 아니라 주인 부부와 딸들-내가 바라는 연령도, 외모도 아니 기에 전혀 기억이 나지 않을 듯한 딸들-과 그리고 미트라를 호송해갈 다섯 명의 용병들이 일제히 날 바라보고 있다. 미트라는 창백한 얼굴로 힘없이 의자에 앉아 날 바라보고 있다. "뭘?" "넌 어쩔거냐고! 그리고 왕녀님을 아그랑에 모셔다드리는 것으로 모든 것 이 끝나는 거야?" "으음? 모든 것이 다 끝나진 않지, 델리암이 망했으니까 새로운 왕조가 나 올거잖아?" "우움.." 스카는 미트라의 눈치를 보면서 나에게 칼날같은 시선을 던졌다. 죽일 놈 하고 그가 소리도 내지않고 만들어 보이는 그 입매를 보며 나는 냉정하게 말했다. "미트라는 멸망한 왕조의 공주님이 아니라 내 여자다. 그러니까 그런 것 상관하지 않겠어." 미트라가 고개를 들고 날 빤히 바라보았다. "미트라, 넌 저 왕처럼 살고 싶지 않다고 했어. 네가 만약 왕녀로 살고 싶 은 거라면 이 자리에서 뜨는 게 아니라 당장 저 불구덩이속으로 기어들어 가서 마법사들의 쌈박질을 가로막으면서 그들에게 호통을 쳐야해. 물론 그 불구덩이 안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연기로 질색해서죽어버릴 가능성이 무지 무지 크지만." 미트라는 멍하니 날 바라보았다. "네가 이 왕궁을 살리고 이 궁성을 살릴 수 있다면 가서 그렇게 해봐. 네 가 엄청난 기사에 하늘을 뒤덮을 마법사정도 된다면 그렇게 될 수도 있겠 지. 그러나 만약 그렇게 할 수 없다면 난 힘없는 여자에요 라고 말하고 조 용히 이 자리를 떠서 아그랑으로 가. 거기라면 널 왕녀로서 받들어 주는, 머리는 비고 가슴은 터질 듯한 놈들이 바글 바글 하고 있을테니까." "말이 지나쳐!" 스카와 다른 용병들이 일제히 외치는 동안 미트라가 벌떡 일어섰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화가 치밀어 올라 견딜수 없는 얼굴이라는 듯이 나의 앞으로 저벅 저벅 걸어오더니 그 다음에는 내 앞에 있는 맥주 잔을 잡고 벌컥 벌컥 들이켰다. 그리고는 잔을 잡아서 벽에다 휘익 하고 내던졌 다. 두꺼워서 한번에 깨지지는 않았지만 퍼억 하고 맥주잔이 박살 나는 소 리를 내며 대굴 대굴 바닥 위를 굴렀다. 긴장한 얼굴의 일행을 돌아보지도 않고 미트라가 낮게 말했다. "나는 무적의 용사도 아니고 잘나가는 마법사도 아냐, 난 단지 절세 미녀 일 뿐이지. 그러나 그게 뭐 어떻다는 거야? 이 나라는 망해가는 나라였고 난 처음부터 공주가 싫었어!" 그녀는 낮게 말하다가 눈을 흐리면서 눈물을 떨구었다. "그러나 여기서 내가 도망가 버리면 난 아무 것도 아니야, 난 그저 머리 빈 계집애에 불과하고 다른 사람들이 구해주길 바라며 꽥꽥 소리치는 재수 없는 공주밖엔 안돼! 그러니까 이 자리에서 지금 당장 가지는 않아." 나는 눈쌀을 찌푸리면서 낮게 중얼거렸다. "구해줘요 하고 소리 지르는 공주도 귀여운데..." 미약한 자기 힘을 알고 나름대로 대처하는 방법 중 하나잖아? 그러나 미트라는 나를 향해서가 아니라 고개를 홱 돌려 거기 선 감동의 도 가니에서 벗어나올 수 없어서 버벅거리며 그녀를 향해 존경과 감탄의 시선 을 아낌없이 쏟아 붓고 있는 자들에게 말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할 일을 합시다. 여러분." "말씀하십시오. 왕녀." 고개를 숙이고 용병 중 하나가 말했다. "이 왕성은 지금 위험합니다. 방금 쿠베린이 말했다시피 당장이라도 불이 일어날 거에요! 사람들에게 대피령을 내려주세요!" 그녀가 재빨리 말했다. 그녀의 얼굴은 긴장으로 바들 바들 떨리고 있었다. "이 나라는 망했습니다. 아니, 이 나라 왕조는 망했어요. 오라버니는 훌륭 한 왕이 아니었어요. 그러니까 나는 왕위계승자로서 이 나라가 망했고 델 리암 국민들은 델리암 왕족들의 명령을 따를 필요가 없다고 말해주고 싶어 요." "에엑!" 놀란 얼굴로 모두 바라본다. 그녀는 바들 바들 떨리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며 재빨리 말했다. "피난하라고 말해주세요! 무시무시한 마법사가 지금 왕궁을 초토화시키고 있고 불길이 점점 거세지니 모두 대피하라고 말해주세요." 그렇게 굳이 말할 것은 없을 것 같다. 이미 몇몇의 사람들이 대피하고 있었다. 나는 턱을 고인 채 오리 다리를 들고 창문가에서 서서 사람들이 저마다 짐 을 짊어지고 황급히 달려가고 있는 거리를 바라보았다. 이 오래된 왕성도 끝장이다. 무척이나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군대, 특히 하인리히라는 그 놈 의 군대가 주둔하고 공격해왔었는데 정작 이 나라가 무너지게 되는 가장 큰 이유가 그들의 군대때문이 아니라 일개 마법사 때문이라니. 모든 일은 사실 킬트로부터 시작되었다. 킬트가 야망을 버리고 아들을 찾는데에 탐닉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의 제자는 그를 배반했고 그는 제자를 찾으러 나왔다. 제자는 그의 마력 을 이용해 작은 나라를 군사강국으로 키웠고 그는 그런 제자를 벌 주려 한 다. 그러나 더 멀리 원인을 찾아보자면 델리암이 결국은 약한 데에 원인이 있다. 아무리 하인리히의 마법사가 월등히 강했어도, 하인리히의 군대가 강했어 도 델리암의 군대가 강했다면 이렇게 쉽게 무너지진 않았을 것이다. 왕의 군대가 있긴 있었나? 왕에게 기사가 있긴 있었나? 내가 기억하는 것은 그 시든 오이같은 얼굴에 발라진 흰 분과 그의 가느다 란 부러뜨리고 싶게 만드는 그 손목과 잘난 척 화려무쌍한 값비싼 보석들 과 그에 달라붙는 무력한 귀족들과 길게 질질 끄는 옷자락뿐이다. "어서 대피하세요!" 미트라가 말했고 그녀에게 왠지 감격한 자들이 일제히 그녀의 말에 따라 밖으로 나가자 그녀도 곧 발걸음을 밖으로 돌렸다. 그녀는 어느 새인지 움 직이기 편한 바지를 입고 있는 중이었고 쓰지도 못하는 칼을 하나 차고 있 었다. "쿠베린!" 내가 돌아보자 그녀가 말했다. "나, 왕녀에요! 그렇지만 힘 없는 여자죠!" 그녀는 갑자기 활짝 웃었다. "그리고 아직 당신을 좋아해요! 당신은?" 나는 손을 휘휘 저어 보였다. "나는 예전 보다 훨씬 더 널 좋아해." 그녀가 웃었다. 그리곤 다른 자들의 뒤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KUBERIN........ 가장 아름다운 여자를 얻는 자는 용기가 있는 자 가장 사랑스런 여자를 얻는 자는 지혜가 있는 자 이름을 얻을 수 있는 자는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자 14 웃는 얼굴이 과연 예쁘군. 그러나 지금은 그것에 현혹될 때가 아니다. 나는 다 먹어 치우면서 밖으로 나갔다. 밖은 이미 난장판이다. 비명을 올리면서 울부짖는 여자와 아이들이 불길을 피해 피난하고 있었고 몇몇 사람들은 기도하고 있었다. 기도하는 상대는 보이지도 않는 신, 나라면 보이는 불부터 끄겠다. 그들을 헤치고 나는 속도를 붙여서 달리기 시작했다. 델리암 왕성의 뒤로 돌아가면 성곽을 둘러싼 북쪽 회색의 숲이 있다. 그 곳이 지금으로선 가장 확률이 높은 곳이다. 사실 내가 놈을 찾아낸다고 해도 별로 달라진 것은 없다. 그저 이 난장판 이 멈출 뿐, 그 난장판이 내게로 돌아올 것이 조금은 화가 치밀지만 이 두 놈의 변태같은 마법사놈들이 나에게 무차별 공격을 가하고 이 멋진 쿠베린 님의 옷자락을 태우고도 모자라 이 백옥같은 피부에 화상을 입힐 뻔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용서할 수준이 지났다. 게다가 이 몸께서 인간 마법사 두 놈에게 쫓기어 내달렸다는 것을 생각만 해도 얼굴이 붉어진다. 이런 사실을 동족들이 알게 되면 아마 다들 뒤집어 지고 손톱을 갈며 나에게 쫓아올 것이다. 당연 놔둘 수는 없지. 그럼 나는 이 놈을 찾아내면 어떻게 할 것이냐? 간단한 일이다. 놈의 머리통을 한 대 갈겨주던가 턱뼈를 으스러뜨리던가 혹은 머리통을 잘 라버리는 것도 나쁘진 않다. 그 정도만 해도 저 지긋지긋한 거대 소환수 네 마리는 사라져 버릴 것이다. 그러나 그건 그렇고 저 소환수 놈들은 아직도 하늘위에 떠있다. 그것은 즉 킬트의 마법력은 아직도 그 일대를 장악하고 있다는 뜻이고 다르게 본다면 저 분홍변태의 힘이 여전히 남아있다는 이야기도 된다. 숲 안에 들어서자 마자 나는 전신의 힘을 뺐다. 그리고 조용히 주저앉아서 배설을 시작했다. 배설, 생각해보면 식사와 배설은 엄청난 관계가 있다. 배설하지 못하면 먹 지도 말라는 말이 있다. 또 배설의 고통은 기아의 고통과 흡사한 데가 있 다. 배가 불러오는데도 배설하지 못하는 자들의 고통은 말로는 도저히 다 할 수 없다고 한다. 물론 나처럼 잘 먹고 잘 놀고 잘 뛰고 잘 자는 인물은 배설의 고통을 잘 모른다. 아마 앞으로도 알 리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 의 여성과 엘프들은 간혹 배설의 고통이 있다고 들었다. 음, 힘을 한 번 더 주자. 해결이 된 것 같아서 슬슬 일어나 엉덩이를 문댔다. 그리고 멀리 왕성에서 이는 불꽃을 바라보았다. 주변에 향기롭지 못한 냄새가 퍼져나가는 것을 애써 무시하면서 나는 찾고 자 했던 것을 찾아내서 시냇가로 가져가 북북 문질러 닦았다. 이미 사방은 어두워 졌다. 시냇물은 흘러가지만 달빛도 없는 터라 흘러가고 있는 것은 오로지 소리만 으로 판별될 뿐이다. 그러나 나는 눈이 아주 좋으니까 바닥에서 흐르고 있 는 것이 물인지 아니면 별빛인지 판별할 정도의 능력은 된다. 마른 풀냄새가 난다. 약간 축축해지고 있는 흙냄새가 난다. 흙냄새는 여름의 부패의 냄새와는 다르다. 이 것은 깊은 대지의 여신의 잠 든 모습, 대지의 여신은 언제나 처럼 잠들어 있다. 그러나 곧 이제 새로운 아침이 올 것이고 그 아침에 푸르른 싹이 얼굴을 내밀게 될 것이다. 대지 의 여신은 부지런하지는 않지만 언제나 새로우니까. 나는 마법석을 쥐고 눈을 감고 전신의 감각을 끌어올렸다. 바삭 바삭 숲안에 바람이 스쳐지나간다. 내가 디딘 땅과 내가 스친 풀잎과 나와 나란히 선 나무들이 바람에 부대끼 며 노래를 한다. 그들이 말을 한다. 눈을 감고 청력과 후각을 열었다. 나의 등장에 놀라 멈추었던 노래하는 벌 레들이 다시 조용히 노래를 시작했다. 향긋하고 구릿하고 이루 말할 수 없 는 비릿한 냄새도 난다. 나를 부르는 자그마한 소리들이 들려오고 내 머리칼을 내 피부를 간지르는 작은 존재들의 냄새와 촉감이 주변으로 휘감아 날아오른다. 어이 어이 들었나 누가 있다나 누가 있다나 다른 것이 있다나 사냥꾼이 있다나 사슴이 있다나 토끼가 있다나 겁에 질린 어린 사슴이 있다나 토끼를 노리는 산고양이가 있다나 나무들이, 밤새들이 말을 건다. 그들이 지껄여대는 소리가 점점 커진다. 온 몸에 남겨진 살기를 벗어던지고 조용히 서서 밤공기에 몸을 맡겼다. 부드러운 밤바람 속에 연기냄새가 섞여 있다. 다갈색의 짙은 흙이 발 바닥 에서 새로운 계절을 준비하느라 또아리를 트는 것이 느껴진다. 바위위를 기어 다니는 작은 도마뱀들이 이제 겨우 눈을 뜨고 움직이기 시작한다. 봄 이 곧 다가온다. 땅바닥과 나뭇속에는 새로운 것들이 기어나온다. 이제 살 수 있다는 계절이 온다. 나는 바람을 따라 걷는다. 바람은 숲 위로 숲 아래로 나무 밑으로 땅속으로 스며들고 어리숙한 토끼 의 뒷덜미를 스치고 교활한 산고양이의 엉덩이를 걷어차며 바위의 바삭거 리는 틈새를 헤집으며 달려간다. 그리고 나는 다시 눈을 떴다. 고요함. 눈을 뜨고 몸을 움직이고 내 몸을 내 것으로 되돌린다. 그리고 나는 발걸 음을 옮겼다. 사각 사각 떠들어대는 무심한 낙엽들을 지나 새로 싹이 돋아 날 흙더미를 짓밟고 날 듯이 달렸다. 냄새가 난다. 이질적인 냄새, 숲과는 다른 것이 숨어 있는 것. 밤은 우리들의 것, 밤은 숲안에 사는 짐승들의 것. 마른 가지들을 덮긴 했지만 냄새는 분명했다. 야수들을 막기위해 둘러쳐진 하얀 마법진을 보면서 나는 손바닥에 마법석을 들어올렸다. 그 것이 희미 하게 빛을 뿜어낸다. 내가 모르는 것은 모두 마법, 지금 나는 정신을 집중했다. 해약석이 피식 하고 마법을 해소시키자 마자 나는 발을 앞으로 디뎠다. 어둠속에서 몇 마리 짐승들이 고개를 쳐든다. 그리고 바스락 바스락 내 앞 으로 감히 걸어나왔다. 나는 웃었다. 내 몸안의 살기가 퍼져나가는 것을 느끼면서 짐승들이 걸어나오는 것을 본 다. 다크 트롤이 긴 입술을 찢듯이 벌리면서 이빨을 드러낸다. 시커먼 몸체에 보이는 것은 빛나는 일곱 개의 눈들이다. 나는 그 일곱 개의 눈이 빛나는 것을 기쁨으로 몸을 떨며 지켜보았다. 일곱 개의 눈이라면 여섯 개의 눈을 터뜨리는 것 보다 훨씬 즐겁다. 즐겁고 말고. 그리고 아무 것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곧장 놈에게 달려들었다. 다크트롤의 체구는 지금의 나보다 세 배 가량 크다. 그런 놈의 몸체를 내 손톱이 가른다. 트롤의 사나운 가시와 같은 체모가 내 몸을 찔러대는 것을 무시하면서 나는 몸안의 살기를 폭팔하듯이 솟구쳤다. 나는 왕이다! 나는 쿠베린이다! 나에게 덤비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조용했던 숲 안에 비명처럼 내 몸 안의 살기가 퍼져나갔다. 폭팔하듯이 사 방으로, 어둠 속으로 스며들어가며 숲속의 이야기들을 침묵시킨다. 달려드 는 다른 놈의 머리통을 발끝 발톱으로 짓이기면서 회전했다. 놈의 눈알이 손톱에 부딪쳐 질척한 체액을 분비하면서 터져나간다. 퍼억 퍼억 즐겁기도 하지. 이 상쾌한 소리를 즐겁게 받아 들이며 나는 다크 트롤의 몸안을 갈기 갈 기 찌으면서 앞에서 뒤로 뚫고 나왔다. 온몸에 끈적 끈적 놈의 체액이 묻 었다. 나도 모르게 씨익 웃으면서 혀로 핥았다. 내가 뚫고 나온 큼지막한 트롤의 몸뚱아리는 내 몸만한 크기의 구멍을 가지고는 털썩 하고 쓰러져 일어나지 못한다. 그것을 보면서 그것을 들으면서 그것의 냄새를 맡으면서 뒤 돌아서서 내게 달려드는 또 하나의 트롤의 머리통을 그대로 일직선으로 갈라버렸다. 질퍽 질퍽한 트롤 특유의 살덩이가 끈적하게 달라붙는다. 체액 이 끈적거려 상쾌함은 없지만 그만큼 칠 때에 탄력감이 있어 흐뭇해진다. 또 한번 발톱으로 찢는다. 찢고 찢고 그 다음에는 물어 뜯었다. 끈끈한 체 액이 내 몸안으로 흘러들어온다. 비릿한 냄새, 비릿하고 씁쓸한 체액, 그러 나 멀리 할 수 없다. 나도 모르게 웃음소리가 입안으로 새어 나간다. 달이 없는 밤은 몸안의 것들을 슬금 슬금 움직이게 만든다. 움직이게 만들 어서 나를 견딜 수 없게 만든다. 내 몸안의 모든 것들이 흥겨움으로 튀어 올라와 껑중 껑중 뛰게 만든다. 오호 오호 노래를 불러라 노래를 불러라. 그렇지만 나는 지금 여기서 트롤따위나 죽이려고 온 것은 아니다. 세 마리인지 네 마리인지 잘은 모르지만 놈들을 갈기 갈기 찢어 죽여버리 고 나자 마자 나는 고개를 돌려서 내가 가고자 했던 곳으로 고개를 돌렸 다. 아직 입안에 트롤의 살점이 질겅 질겅 씹혀서 기분이 좋다. 포만감이 일어난다. 동굴의 입구를 막아놓은 가시나무 덤불을 발끝으로 툭툭 채 버리자 마자 그 안에서 주먹만한 놈들이 기어나왔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여덟 개의 다리를 가진 마치 거미같은 것들이다. 이 것들이 튀어 나오더니 줄줄이 뜨거운 체액을 뿌리면서 나에게 달려든다. 놈들의 체액에 닿으면 녹아버린다는 것을 나는 실제로 닿아 보고 경험했다. 아프다. 그래서 기분이 무지 하게 나빠졌다. 바닥에 널려있던 트롤의 팔뚝하나를 들어서 그대로 나에게 달려드는 거미 중 하나를 후려갈겼다. 놈을 패대기를 치자 털컥 하고 자빠지더니 단념도 하지않고 나를 향해 아귀 아귀 달려드는데 이 놈이 가까이에 오자마자 그 집게같은 것으로 감히 나를 향해 휘갈긴다. 이놈이 휘두른 앞 발은 칼날로베어낸 것 마냥 상처가 생긴다. 멀리서는 체액을 쏘고 가까이서는 베어버린다? 꽤 효율적인 놈들이구만. 그러나 이 쿠베린님은 지금 나이 어린 애송이가 아니란 말이야. 싸우는 놈 들에게 일일이 당황해서 어마 뜨거라 하는 놈들은 바보 천치다. 트롤의 팔뚝을 방패로 삼고 손톱을 길게 들여 놈들의 집게를 잘라 버렸다. 그리고 동시에 그 놈들의 재빠른 발을 노려서 트롤의 다리로 휘갈겼다. 퍽 퍽 소리가 나는데 이놈들이 의외로 빠르다. 어엇 하는 사이에 내 다리에 또 한번 발을 휘둘러 상처를 내게 했다. 용서 못하지! 아무렴! 그러나 이 놈들이 수십 마리 떼로 몰려드는데 이건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간단히 처리하기 위한 방법을 생각해야지. 나는 바위위로 올라서 서 발톱을 키웠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놈들을 향해 일직선으로 달렸다. 징검다리 징검 다리를 밟아 보세, 밟아 보세, 오호 오호 꾹꾹 밟아 터뜨리 세! 터뜨리세! 놈들의 몸통위에 턱턱 하고 무게를 주어 밟으면서 뛰어다녔다. 놈들도 빠 르지만 나도 빠르다. 이 몸께서 작정하고 속도를 낸다면 네놈들의 속도를 못 잡겠냐? 팽팽 달려서 팽팽 달려서 놈들의 머리통을 이 발톱으로 꾹꾹 눌러 터뜨리고 동시에 그 가느다란 여덟 개의 다리를 와지끈 뚱땅 부러뜨 렸다. 이것도 재미들리니 나쁘지 않구만! 그렇지만 멀찍히서 산개한 채로 체액을 흩뿌리는 놈들을 피하느라 그것도 고역이었다. 나중에 보니 다리 쪽 살갗이 벌겋게 되어 버렸다. 트롤의 팔 다리를 쥐고 흔들었던 것은 녹아서 흐물 흐물해져있다. 이렇게 크고 질긴 트롤의 몸체가 녹아버릴 정도면 이건 장난이 아니였군. 그러나 이 쿠베린 님을 상대로 이런 벌레같은 것들을 내 놓는다면 흐, 킬트, 난 그대에게 실 망이야. 적어도 이 몸을 상대하려면 처억하니 그레이트 키메라정도는 내 놓았어야 지, 그것도 안된다면 에다마리온 정도 되던가! 거미들을 집어 치우고 동굴 안쪽으로 발을 쑤욱 집어넣으려다 생각해보니 이것이 끝인 거 같진 않다. 트롤의 다리 하나를 질질 끌어다가 휘익 던져 넣었다. 그러자 이 것이 안으로 떨어지자 마자 퍼퍼퍼퍽 하는 소리와 함께 뭔가 찢어지는 소리를 낸다. 이건 또 뭐야? 자세히 안을 들여다 보았더니 눈알이 하나 달린 괴이쩍은 놈들 다섯이 서 서 나를 째려보고 있다. 덩치가 방금 없앤 트롤만 한 체구다. 그런 것들이 다섯이다. 눈알이 하나 달린 이건 또 뭐야? 하나 밖에 없다니! 하나라니! 대체 무슨 즐거움으로 나보고 이 놈과 싸우 라는 거야? 이래서야 무슨 즐거움이 있단 말인가! 비록 그 하나가 조금 크긴 하지만 재미는 없잖아! 눈알은 자고로 많고 그리고 단단하여야 즐거움이 있는 거 야. 그런데 이건 크기만 하고 물렁 물렁하게 보이잖아! 누가 큰 눈알을 달 라고 했냐구! 흐, 유일한 즐거움은 단 하나다. 눈알이 하나인 대신에 팔이 네 개다. 이건 처음 보는 물건인 것을 보니 아마도 킬트가 암흑마도에서 가지고 왔든가 아님 놈이 만든 것이겠지. 킬트 이 자식, 그 노란 눈의 계집애를 만들어낸 것을 보면 이 놈도 제 정신은 아냐. 대체 왜 마법사들은 지가 신이라도 되 고 싶은 것인지 허구 헌날 이상한 것을 만들어내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중간에 터억 하고 날아들어온 것은 주먹이다. 에엑? 저기에서 어떻게 여기까지 주먹이 날아오는 것이지? 자세히 보니 놈들의 팔이 주욱 늘어나 나를 향해 공격해온다. 놈들은 가만히 서 있지만 주먹은 줄줄이 좌악 좌악 늘어나 나를 공격해온다. 슬쩍 피하는데 이게 상당한 힘 인지 바로 옆에 있던 바위 벽이 커억 비명을 지르면서 구멍이 뚫린다. 그 리고 사아악 하는 또 한번의 소리와 함께 내 아랫도리로 또 달려든다. 그 런 놈의 팔뚝을 재빨리 손톱으로 콰악 찍어주었다. 탱하고 손톱이 거부당 했다. 어엇? 놀라운 일이었다. 내 손톱을 감히 거부하다니, 이 사랑스런 손톱을 거부하고 이 놈이 마치 늘어난 진드기처럼 죽죽 늘어나며 날 공격해 온다. 절대 용서할 수 없지. 나는 당장에 녀석들을 향해 도약하다가 어떤 놈에게 옆구리를 얻어맞아 바 닥으로 그대로 굴렀다. 아, 아파! 기분이 점점 괜찮아지는데, 이런 식의 공격도 받아 보니 신선해. 그렇다고 이 몸이 체면 상하게 바닥을 길 수는 없다. 나는 재빨리 굴러서 놈들의 공격을 피하는 것과 동시에 나의 턱을 휘갈겨 오는 놈의 팔뚝을 그 대로 잡아 온 힘껏 놈을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파악 하고 놈이 내쪽으로 이끌려온다. 그리고 그 순간에 나는 맞은 편 보이는 돌벽을 향해 놈의 팔 뚝을 잡은 그대로 메다 꽂았다. 퍼억 하고 시퍼런 뇌수가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오옷! 이것도 상쾌한 재미다! 그 다음 공격해 오는 놈이 내 발목을 잡아 질질 끌더니만 그 다음에는 내 머리통을 그대로 바닥에 패대기를 친다. 퍼억 퍼억 하고 내 몸이 바닥에 내던져지는 것이 느껴진다. 감히 날 내던져? 울화가 치밀어서 어떻게 하려 했지만 일단은 머리를 계속 부딪치니 제 정신이 아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나 죽었어 하고 늘어져 봤자 이 머리 나쁜 한 개짜리 눈깔괴물이 죽었나봐 그런가봐 하고 놔줄 것 같지는 않다. 그러면 당연히 이럴 수 밖에 없다. 패대기치는 놈의 팔 힘을 이용해서 두 팔로 힘껏 바닥을 짚었다. 우지끈하 고 팔목과 손바닥이 아팠다. 그렇지만 하는 수 없지, 사소한 아픔으로 싸움 의 기회를 잃으면 그건 죽음이니까. 손바닥으로 튕긴 덕분에 작은 내 몸은 튕겨올라서 허공으로 올랐다. 그 순간 몸을 구부려 나를 잡은 놈의 팔뚝을 잡아챘다. 그리고 자유로운 한 발로 놈의 팔뚝을 향해 아낌없이 걷어찼다. 퍼억 하고 놈의 팔뚝이 여지껏 없었던 방향으로 구부러진다. 발 목이 자유 로와졌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 다음에 나는 나의 발을 잡은 놈의 팔 을 무시하고 곧장 녀석의 몸체로 달려들었다. 손톱이 날아간다. 손톱이 놈 의 커다란 눈알을 그대로 관통했다. 퍼억 하고 체액이 터져나간다. 오오, 눈알이 크니 역시 만만치 않은 큰 소리가 나는군. 나는 그대로 놈의 머리통을 발길로 걷어찼다. 퍼억 하고 놈이 쓰러지자 마 자 다음 놈이 숨돌릴 틈도 없이 공격해온다. 좋아 좋아! 없애주지! 오라 오 라! 오호 오호 나의 즐거움은 너의 고통, 그러니 나는 역시 이 즐거움을 놓칠 수 없으리! 발기 발기 찢고 나서 정신이 들었다. 가만 생각해 보니 역시 나는 이곳에 이 놈들 죽이러 온 게 아니었다. 원래의 목적을 잊으면 안된다. 놈들의 시 체를 사뿐히 즈려 밟고 안으로 들어섰다. 동굴은 그다지 길진 않았다. 대신 꽤 넓다. 누군가, 아니 틀림없이 곰이나 뭐 그런 것들이 겨울 잠자리를 만 들기 위해 지키고 있을 법한 넓은 굴이었다. 넓지만 길진 않은 그런 자리 에 킬트놈은 은신처를 만든 것 같았다. 몇번이나 걸리적 거리는 돌멩이에 희생당하면서 나는 안으로 들어섰다. 냄 새가 계속해서 킬트임을 알리고 있었기 때문에 별로 걱정은 하지 않았다. 곧 동굴이 끝이 나려는지 돌냄새와 오래된 먼지의 축축한 습한 비린내가 난다. 지독한 냄새의 박쥐똥 냄새도 난다. 그리고 제일 안쪽 자리에 내가 찾던 것이 보였다. 삼각을 몇겹으로 후려갈기듯이 겹친 마법진 위에 앉은 것은 물론 그 잘난 척 하는 저 암흑마도의 군주이자 더럽게도 잘난 흑마법사 킬트였다. 놈은 책상 다리를 하고 앉은 채로 두 눈을 감고 마법진 한 가운데 앉아서 고요 히 있었다. 놈의 주변으로 푸른 기운이 돌고 있다. 그렇지만 놈의 입술은 움직이고 있고 눈썹도 찌푸려졌다, 말았다 한다. 뭔가 불만이라도 있는지 주절 주절 떠드는 것이 느껴진다. 그런 것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나는 생각했다. 내가 당한 꼴을 생각하면 역시 여기서 이 놈의 킬트놈을 한데 후려갈기면 좋겠지만 이 마법진이 내가 손이나 발을 디디는 순간 나를 산산히 태운다 던가 혹은 이상한 개구리로 만들어 버리기라도 한다면 그건 또 무슨 개망 신이고 개죽음인가? 그래서 나는 이 놈의 마법진 안에 여유로운 태도로 해약석을 던져 넣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조금, 아주 조금 큰 반응이 그 안에서 터져나왔다. 마법진이 그대로 폭팔했던 것이다. KUBERIN........ 가장 아름다운 여자를 얻는 자는 용기가 있는 자 가장 사랑스런 여자를 얻는 자는 지혜가 있는 자 이름을 얻을 수 있는 자는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자 15 별이 보인다. 빛나는 별이 돌아다니다가 내 눈을 향하고 있다. 나는 별을 잡으려고 손을 뻗는다. 아름다운 밤의 여신이여 그대의 눈동자를 깜빡여주세요 라고 어느 시인이 노래했었지. 젠장할. 그 놈은 더 맞고 싶어했는지도 모른 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잡고 나는 내 몸 위에 감히 올라앉은 무례한 돌더미를 발길로 걷어차면서 비실 비실 일어섰다. 눈앞이 노랗다. 아니 사실은 거의 보이는 게 없다. 어느새 밤이어서인지 아니면 아직도 동굴 안이어서 그런 건지 알 수가 없다. 마법진이 폭팔하면 어떠한 현상을 보이는지 마법사도 아닌 나로선 알 수가 없다. 뿌연 먼지더미를 헤치고 한 참 동안 기어나가자 겨우 차가운 공기가 코 끝 에 와닿고 진짜배기 빛나는 별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 얼음처럼 차가운 공기가 콧속 깊숙이 뛰어들어와 뱃속까지 가슴 속까지 스 며들어온다. 밤 공기에는 말라비틀어진 풀내음과 누릿누릿한 땅내음, 그리고 고슬고슬 한 나무냄새가 섞여 있다. 희미한 연기냄새를 떠올리며 천천히 방향을 잡 아 보니 멀리 아직까지도 연기냄새를 풍기고 있는 수도가 보인다. 정확히 말하면 여기서 수도가 보여선 안된다. 여기는 상당히 먼 숲속으로 수도외곽을 끼고 도는 성곽 너머에 있는 숲이 니까 수도 안쪽이 보이는 것은 정상이 아니다. 불빛이 아롱거리고 있는 수도의 거리에는 여기 저기 산발적으로 빛이 올라 오고 있다. 그 빛은 아직 그 안에 사람이 있다고 하는 표시이고 또 수도 자체가 완전 붕괴되지는 않았다는 증거이지만 분명한 사실은 수도 중앙에 위치한 저 잘난 델리암의 왕궁이 박살난 것은 확실한 듯하다. 아직까지 공 기중에는 연기냄새가 깊이 스며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선명한 증거로 서 내가 서 있는 이곳 서쪽 숲에서 수도 안쪽이 보일 정도로 서쪽 성벽이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는 것이다. 어쩌다 무너졌는지 아무래도 모르겠지만 소환수들이 파괴한 것으로 생각된다. 서쪽 성벽은 무너져 추한 잔해를 사 방에 흘린 채 추접스런 시체로 누워있다. 그 언저리에서는 사람의 그림자 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미트라는 잘 피했을까. 스카는 무사할까. 내가 멍청히 바위더미 위에 앉아서 모처럼의 상쾌한 공기를 맛보고 있는 뒤로 문득 부스럭 거리며 인기척이 들렸다. 돌아보자 무언가 꿈틀 꿈틀하 면서 무너진 바위더미를 헤치고 기어나오고 있었다. 멀건히 지켜 보는 동 안에 그 꿈틀거리는 것은 흐느적거리는 점액질의 푸른 덩어리로 바위위까 지 치밀어 올라와 자신을 억누르고 있는 그 바위를 슬그머니 밀어버린다. 그리고는 슬금 슬금 치밀어 올라오는 데 그 모습이 거대한 젤리처럼 보였 다. 설마 킬트녀석이 만든 최신형의 젤리형 소환수인가? 아니면 놈이 배고플 때 만들어낸 창작품인가? 아니면 그저 진짜 젤리인가? 흥미진진하게 내가 들여다 보고 있는 동안 퍼런 젤리는 꿈틀 끔틀 하고는 바위를 완전히 밀치고 거대한 구렁이가 담 넘어오듯, 트롤이나 슬라임이 슬금 슬금 기어나오듯 바위 틈 사이로 완전히 기어 올라왔다. 그런데 다 올라오고 나니 이건 상당한 크기다. 나보다 약간 크다. 이게 대 체 뭔가 하고 돌멩이를 하나 집어들어 냅다 집어던졌다. 퍽하고 부딪쳤는데도 퍽 소리 대신에 물컹하는 소리...가 아니라 느낌이 났 다. 물컹, 물컹이라는 그 느낌은 그다지 흐뭇한 기분이라곤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왠지 기분이 나빠 옆에 있던 바위를 한덩이 들어서 확 집어던졌다. "이봐!" 그 바위가 막 그 젤리에게 뭉클 닿는 순간 젤리가 뒤로 발라당 넘어지며 고함을 질렀다. 젤리가 지르는 고함 소리를 듣고 나서야 나는 젤리에게도 어딘가 입이 있 다는 것을 깨닫고 그리로 다가가 젤리를 발로 꾹꾹 눌러보았다. "뭐, 뭐하는 거야!" 녀석이 큰 소리로 외치는 것을 무시하고 나는 그 위로 올라섰다. 뭉클 뭉 클한 게 기분이 나쁘지않다. 엄청나게 거대한 젤리위에 올라서서 춤을 추 는 것 같은 느낌이다. 퉁퉁 뛰어 보았더니 퉁퉁 튕겨진다. 재밌다. "적당히 해!" 고래 고래 녀석이 소리를 질렀지만 무시했다. 이따위 퍼런 젤리를 내가 존중해야 할 이유가 있을 리 없다. 이것은 젤리 고, 젤리가 아니라면 젤리형의 물건이다. 그렇다면 이 몸께서 젤리 따위의 말을 들을 필요가 있겠는가. 나는 이 젤리가 있던 자리에 있었던 고약한 놈을 생각하며 젤리를 힘껏 걷 어찼다. 그러자 젤리는 대굴 대굴 바위더미 위를 구르기 시작한다. "우와아아.. 무슨짓이야!" 녀석을 이리 저리 차며 굴리는 동안 달이 떴다. 달은 멋지게도 날 내려다 보며 이 퍼런 젤리덩이 안에 들어가 있는 연약하고도 고약하고도 사악한 인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 안에서 녀석은 꿈틀 꿈틀 거리고 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더더욱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놈을 걷어찼다. "쿠베린!" 데굴 데굴 구르다기 나무 둥치에 부딪친 녀석이 헥헥 거리며 소리를 질렀 다. 녀석의 몸으로 그 퍼런 젤리가 점점 엷어져 가더니 곧이어 데구르르 하고 작은 구슬이 되어 녀석의 손아귀로 들어갔다. 녀석은 헉헉 거리면서 날 쏘아보았다. "너, 대체...! 왜 이러는 거냐!" "뭘 왜이래?" "대체 왜 내 일을 방해하는 거냐! 조금만 더했어도 녀석을 잡아 죽일 수 있었어!" "거짓말." 녀석의 얼굴이 굳었다. 달빛에 비추어진 녀석의 주름살 하나 없는 미끈한 흰 얼굴은 음침한 녀석 의 이목구비와 함께 적나라하게 표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니 지나치게 적나라해서 녀석의 얼굴이 막 무덤에서 뛰쳐나온 시체처럼 보였다. 바삭 바삭 마른 풀소리가 들렸다. 멀리서 밤새가 구르륵 하고 울고 있다. 탄 내음, 먼지 냄새, 축축한 흙냄새, 그리고 녀석이 가지고 있는 마법의 냄 새가 주변을 채우고 달빛은 그 놈의 얼굴을 히멀겋게 드러내주고 있었다. "무슨 뜻이야?" "무슨 뜻이고 뭐고 왜 그놈을 보자 마자 죽이지않았지?" "보자 마자 죽이려고 했어. 네가 방해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했다구." "거짓말하지 마라. 소환수 네 마리를 끌고 온 놈 치고는 너는 너무 조용했 다." "대체...네가 뭘 안다고 그러는 거냐?" "왜 놈을 여지껏 내버려두었지? 너, 여기 온지 한 참 되었잖아? 설마 너 정도 되는 놈이 몰라서 못찾은 건 아니겠지?" "......" "그 노란 눈의 계집애와 저 놈은 네가 다 만들어낸 거지? 그렇지않아?" "....아헬을 봤나?" "봤어, 파랑머리에 노란 눈의 계집애, 정상이 아니더군." 녀석은 날 빤히 노려보고 있었다. "진짜 애를 바랬던 것은 너지, 너는 후계자를 바랬지? 그래서 애들을 만들 었겠지?" "인간은....너와 같지 않다." 녀석이 차갑게 말했다. "나는 후계자나 애를 가지고 싶었던 게 아냐. 내 힘으로 얼마나 많은 일을 할 수 있는가를 알고 싶었을 뿐이다." 녀석의 눈은 차갑게 빛나면서 나를 똑바로 본다. 이질적인 그 눈은 아크와 같다. "알고 싶다구?" "알고 싶다. 용의 피가 얼마나 다른지, 인간과 얼마나 다른지, 묘인족의 피 가 얼마나 인간과 다르며 사인족의 피, 아인족의 피, 엘프의 피가 얼마나 다른지 알고 싶은 것이다." "피는 피다." "너따위 단순한 놈이 알 리가 없지." 녀석은 경멸의 눈초리로 날 바라본다. "인간에게는 호기심이란 게 있는 것이다. 그 호기심으로..." "살아있는 것들을 죽이지." 나는 짧게 대답해 주었다. 녀석이 날 바라본다. 차가운 눈동자, 여전히 냉철하고 그러면서도 불안정하고도 격렬한 불꽃을 간직한 인간의 눈, 사악한 것 이상으로 사악한 인간의 눈. "인간은 살아있는 모든 것들의 적이다. 네 말대로라면." "...그럴지도 모르지." 녀석이 피식 웃었다. "자신은 죽기 싫어 버둥거리면서 살아 있는 것을 죽이기를 즐긴다. 그렇지 않나?" "죽이지않으면 살아갈 수 없어." 나는 고개를 들어서 힘을 천천히 개방했다. 숲 안의 생물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들이 떠들어대는 소리가 들 려온다. 까. "너는 그래서 기쁘냐?" 흠칫 하고 녀석이 날 바라보았다. "너는 그래서 기뻤냐?" "...." "나는 기뻤다. 나는 나와 싸우는 자들과 싸워 이겨 기쁘고 즐겁다. 살아있 는 감각을 느낀다. 내 몸안의 피가 흐르는 것을 느끼고 내 살과 내 발톱이 찢는 생명을 느낀다. 내가 먹고 마시는 모든 것들은 다 자연의 여신의 소 유다. 나도 약해져서 언젠가 죽어넘어지면 대지의 여신이 말하는 공정한 약속으로 흙으로 돌아간다." 나는 두 팔을 벌려서 내 팔안으로 흘러들어가는 공기와 소리를 안았다. 어디선가 풀향기가 느껴진다. 어디선가 사슴과 토끼의 냄새가 느껴진다. 나무가 말한다. 나뭇가지가 부딪치며 소리를 내고 있다. 땅 속에서 밀려오는 풋풋한 냄새를 느낀다. 밤바람속에 스민 비의 냄새를 맡는다. "너는 기뻤냐?" "...." "기뻤냐고 물었다." "호기심을 채워 기뻤다." "그 이외엔?" "....." "너도 젊지않다. 어린 애숭이가 아니겠지. 솔직해져라. 넌 이제 아들을 가 지고 있어." 킬트의 시선이 정면으로 나를 보았다. "너의 아들을 보았어. 제법 엘프치고는 깨인 놈이지." "...." 킬트의 시선이 가늘게 흔들렸다. "저 노란 눈의 아헬과 저 분홍의 주둥이를 가진 버릇없는 놈은 다 네가 만 들어낸 너의 자식들이겠지?" "내가 만들었다. 그렇지만 친 자식은 아냐." "마법으로 만들었냐?" "그렇다." "노란 눈을 가진 그 계집애는 용의 피를 섞었지, 그 분홍의 주둥이 나불거 리는 놈은?" "엘프의 피다." "......그 미끈한 얼굴은 엘프의 것이었냐?" 나는 한숨을 내 쉬었다. "내 것으로는 무엇을 만들었냐? 킬트?" 이 놈이 내 피를 가져가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동안 만난 세월이 얼마인 데. "아무것도." "헤에? 왠일로?" "네 피로는 아무것도 만들 수 없었다. 네 피와 사인족과 조인족의 피로는 아무것도 만들어 낼 수 없었다." "뭐야?" "고대족 3부족 모두 어떤 것과도 섞이지 않았다." "그럼....그럼? 그건 말이 안되지않냐? 네 제자란 저 분홍주둥이는 분명히 사인족의 ..." "진짜가 아니다." "엑?" "진짜가 아냐. 저 것은 사인족의 피로 만든 게 아니라 갈색아인족과 수인 족의 피를 섞어 만들어낸 것이다." "뭐라구!" KUBERIN........ 가장 아름다운 여자를 얻는 자는 용기가 있는 자 가장 사랑스런 여자를 얻는 자는 지혜가 있는 자 이름을 얻을 수 있는 자는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자 16 머리가 띵했다. 그렇다면 지금 사인족의 족장이 하고 있는 고민은 완전히 헛것이라는 의미 였다. 만약 사인족의 피로 아이를 만들 수 없다면 대체 왜 저렇게 사인족이 사분 오열되면서 난리를 쳤더란 말인가. "그..그럼?" "고대3부족- 너희들은 이제 곧 멸망할 종족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너희들 은 멸망할 수 밖에 없는 종족이다. 어느 족속과도 섞이지 않는 종족은 멸 망한다." "그래서?" 킬트는 나의 얼굴을 흘긋 바라보았다. "아인족과 인간들은 섞여, 수인족과 아인족도 섞이고 수인족과 인간들도 섞인다. 그러니까 한데 같이 살수 있지. 그리고 엘프와 인간도 아주 드물긴 하지만 섞이고 드워프와 인간도, 호비트와 인간도 섞인다. 트롤과 인간도 섞이고 오크와 인간도 섞인다. 모두 다 섞일 수 있다. 그런데 너희들은 섞 이지 않는다." 나는 팔짱을 끼었다. 결국 속았단 이야기로군, 사악한 인간의 마법사에게 속아 넘어가고야 말았 다는 것이로군. 그러나 전후야 어찌되었든간에 결국 사인족이 멸망의 길로 걸어가고 있다 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아이가 태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멸망의 전조, 그리 고 그 수가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는 것은 멸망으로 가고 있다는 분명한 사 실. "대체 너희들 고대의 일족이 어떤 족속인지 나는 알지 못해, 너희들이 용 족으로부터 왔다는 전설도 있고 고대 거인족과 용족의 연결이라는 이야기 도 있었지만 너무나 틀려서 어느쪽이 진실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조인족은 알을 낳는다. 인간들중에, 아니 아인족들 중에서 알을 낳는 자들은 물론 한 종류-소조인족이 있다. 그러나 그들도 분명히 인간과 섞인다. 또, 엘프들 중에서도 변신엘프- 숲의 엘프중 일부는 알을 낳는다. 그리고 그들은 분명 히 엘프에 속한다. 그렇지만 대체 너희들은 무엇에 해당하는가." 킬트의 눈이 갑자기 열망을 담고 날 바라보았다. 나는 피식 웃었다. "꼭 알아야 한단 거냐? 알 수 없는 존재는 감당할 수 없다는 거냐?" "감당이라구?" "결국은 뭔지 몰라서 두렵다는 이야기 아닌가? 알지 못하면 견딜수 없다는 말은 결국 몰라서 두렵다는 이야기다. 지금 너는 나에게 우리들이 어떤 존 재인지 몰라서 두렵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다." 킬트는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럴 지도 모르지." "네가 말하는 호기심이란 결국 두려움이 아닌가? 한 꺼풀 벗기면 정체를 모른다면 두려워서 견딜 수 없다고 버둥거리는 인간이 있을 뿐이다." "나이는 헛먹은게 아니군, 쿠베린." "나는 너의 배 이상을 살아왔다. 킬트." 잠시동안 나는 바닥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어서 주변을 돌아보았다. 이젠 조용해진 숲속은 내 등뒤로 펼쳐져 나에게 말을 건다. 숲은 나의 것 이다. "죽을 고비도 수없이 겪었고 이상한 인간, 괴이한 엘프, 수상한 드워프, 말 도 안되는 아인족과 수인족들을 봐왔다. 너는 인간이다. 킬트, 인간은 언제 나 두려워서 앞을 보고 달려만 간다. 그러나 노인은 조금은 다르지." 킬트는 아무 말도 하지않았다. "너는 이제 200살이 넘었다. 그리고 젊지 않다. 주변을 돌아볼 여력이 있 다. 그래서 넌 애들을 만들고 정을 쏟았다. 틀리냐?" 킬트의 창백한 이마위로 검은 머리칼이 스륵 스륵 흔들렸다. 밤바람이 그의 창백한 얼굴을 건드리다가 매몰차게 머리칼을 뒤흔들고 지 나간다. 어쩌면 얄미운 인간을 한 대 후려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넌 저 분홍주둥이가 죽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러나 암흑마도의 주인으로 서는 죽여야하겠기에 여기에 왔다." "....." "그리고 그 놈대신에 하인리히대공이란 놈을 죽이려 했지. 그 놈을 죽이면 주군이 사라진 분홍주둥이가 도로 참회하고 돌아올 지도 모르니까." 내 말이 틀리지 않을 것이다. 킬트의 힘은 순수한 마법의힘으로서는 아크밖에는 견줄 자가 아무도 없을 정도다. 그 정도의 소환수를 데리고 와 놓고 그 정도로 가볍게 끝냈다는 것은 놈을 죽일 의사가 없다는 뜻이다. "너, 아들을 만나고 싶지?" "그렇다." "놈의 이름은 카나리안, 너와 달리 얼굴이 매끈한 색마엘프다." "......" "노스엘스턴에 있다. 가서 만나봐라. 길게 질질 끌지 말고." "제자들을 처리하지 않으면 안돼." "저 분홍주둥이이외에 또 있냐?" "있어." 흐 하고 쓴 웃음을 지은 킬트는 낮게 말했다. "....가장 위험한 놈이 하나 있다." "어디에 있는데?" "마베릭의 주변에 있을 것이다. 마베릭과 그 녀석은 남매니까." "여자야?" "그래." 킬트는 쓴 웃음을 지었다. "머리가 좋은 여자애다. 마베릭은 냉혹하지만 녀석은 잔인해." "정정해라, 그 놈은 느끼한 놈이야." 킬트가 크 하고 웃었다. 그리곤 나를 이상야릇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난 제자들에게 너를 말할 때 상당히 대단한 존재라고 말해두었었다. 그래 서 마베릭이 너에게 집착하는 거야." 죽일 놈이로구만. 존경하게 만들어두면 좀 좋으냐.... "그 여자앤?" "그애는 마베릭처럼 만드는 것 보다는 부수는 걸 더 좋아한다." "부수는 것?" 난 한숨을 내 쉬었다. 만드는 것이 무서운 지 부수는 게 더 무서운 지 그건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이 몸이 너무 강한 덕에 골치 아파졌다는 것이다. "그건 그렇고...궁금하군. 그 퍼런 젤리는 대체 뭐냐?" "아, 방어실드다." "...그걸...실드라고 불러야 하냐?" 그걸 실드라고 부른다면 나는 나의 털과 나의 비늘들을 공격겸 방어 실드 라고 부르겠다. "보통 실드는 물리력에 약한 편이야. 그래서 이것을 만들어보았지. 이건 물 리력 전용의 실드다. 볼품은 없지만 효과는 확실하고 무엇보다 힘은 거의 안드니까." 녀석은 문득 경멸의 눈초리로 날 바라보았다. "설명해 봐야 네 놈이 알아듣기나 하겠냐?" 나는 대꾸하지 않고 대신에 녀석의 턱뼈를 가볍게 부셔주었다. 나는 마법사가 싫다. 말로 사는 녀석들이 싫다. 호기심으로 모든 것을 죽이는 녀석들이 싫다. 자기 힘으로 서는 게 아니고 남의 힘을 빌어 서는 주제에 다른 자들 위에 군림하려는 마법사가 싫다. 그건 그렇고 배가 고프다. 널부러진 킬트 놈을 버려두고 나는 처억 처억 숲안으로 들어왔다. 한 대 후려치고나니 기분은 조금 풀린 것도 같은데 문득 내가 왜 여기 뛰 어들어와 녀석을 두들겨 패고 녀석과 같잖치도 않은 배도 부르지 않은 시 시껍절한 대화를 나누었어야 했나 하고 미심쩍은 기분이 된다. 생각 난 게 있어서 바윗덩이를 뒤지면서 해약석을 찾았다. 그거 꽤 쓸만한 물건이다. 앞으로 마법사들이 섞여서 너 죽어 나죽어 소리 지르고 싸우고 있으면 이걸 하나 휘익 집어던져주면 아주 볼만한 꼴이 벌 어질 것같다. 틀림없이 퍼엉 퍼엉 하고 터져버리면서 소환수들은 해약된 나머지 길길이 뛰면서 제 멋대로 날아가 버릴 거다. 흐음.. 이 좁쌀만한 돌멩이 하나가 그 정도 까지 위력이 강한지 미심쩍긴 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 폭발이 일어나면, 방어실드를 펼친답시고 킬트놈은 퍼런 젤리를 뒤집어 쓸것이고 분홍주둥이는 분홍 젤리를 뒤집어쓸지도 모른다. 그럼 나 는 두놈을 툭툭 발로 뻐엉 걷어차 저 멀리 암흑마도까지 집어던져 주어야 지. 마법사 몇 놈 때문에 내가 겪은 고초를 생각하면 기가 막혀 분통이 터 진다. 그러고 보니 한 대 친 것으로는 모자라는 것 같다. 어차피 죽지도 않는 놈 인데 몇대 더 치고 올까? 아, 발견했다. 내가 한번 싼 것이라 냄새를 확실히 기억하는 지라 찾기란 어렵지 않다. 이 물건을 또 입안에 넣고 있다가 또 배설해? 그건 조금 귀 찮을 것 같으니 본래의 자리- 인간들이 염원하는 저 빌어먹을 불노불사의 황금의 관에 끼어 두도록 하지. 그것보다 배가 고프다. 모든 일은 배가 고프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싸움도 사랑도 그리고 생각도 행동도 할 수 없다. 잘난 척 떠들고 소리질러 봤자 배가 고프면 밥을 먹어야 하는 것이다. 마 법사들이 애타게 부르짖는 그 놈의 호기심이 당장 배를 불려주지는 않는 다. 배를 채우려면 움직여야 한다. 아무렴, 움직여야 하고 말고. 그래서 나는 지나가는 사슴 한 마리를 잡아 뜯었다. [쿠베린 별전5] 케빈 이야기 KUBERIN........ 야채장사 케빈 이야기 나는 케빈 프르하트. 지금은 평범한 야채 도매상 중의 하나지만 10년 후면 늦어도 20년 내에 엘리야 최고의 야채상이 될 사람이다. 내가 구태여 사람이라는 것을 말 하는 이유는 내가 엘리야에 살기 때문이다.엘리야는 아주 다양한 종족이 모여 사는 매우 특이한 도시다. 드워프에 하플링, 엘프 온갖 종류의 수인족에 아인족 심지어는 오크까지 여기에 살고 있다면 믿겠는가? 다른 곳에서 엘리야에 이런 저런 용무로 방문하는 사람들은 엘리야 거주민의 다채 로움에 놀라기도 하고 불안감을 느끼기도 한다. 나? 나는 여기서 태어나고 여기서 자랐다. 친구 중에는 수인족도 있고 거래처의 절반은 하플링과 오크다. 하플링이야 음식 만들기도 먹기도 즐기는 종족이니까 당연하게 느껴지겠지만 오크는 좀 의외라 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던데 엘리야의 선원의 절반 이상이 오크고 우리 가게의 주 력 품목 중 하나가 선식이다. 배에다가 음식재료를 팔려면 당연히 오크를 상대해야 한다. 이렇게 인간이 아닌 다른 종족하고 어울리며 살다 보니 내가 사랑에 빠져서 청혼 한 여자의 보호자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아! 그녀 는 인간이다. 난 분명히 보호자라고 했다. 보호자 치고는 좀 이상한 보호자지만. 처음에 그녀를 본 것은 마미의 가게에서였다. 그 때의 나는 10살이었지만 아버지 의 가게에서 한 사람 몫의 종업원 역활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내가 8살 때부터 나를 당당한 남자로 취급해서 가게에서 일을 시키고 임금을 주었다. 덕택에 20살인 지금은 자신의 가게를 가진 12년의 경력의 노련한 야채상인이 되어 있다. 마미의 가게는 중요한 거래처다. 많이 팔아주고 대금의 지불을 어겨본 적이 없 었다. 많이 팔아주는 가게답게 마미의 가게의 모든 것은 무식하게 크다. 그 엄청난 양의 스튜(난 끝내 그 선지피 스튜라는 것에 익숙해질 수 없었다.), 새끼돼지 통구 이 (그건 절대로 새끼 돼지가 아니다. 그게 새끼 돼지면 수박보고 참외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거다.), 덩치 큰 선원들에 어울리는 덩치 큰 탁자와 의자, 칼싸움을 해도 괜찮을 듯 싶은 나이프와 쇠스랑 같은 포크, 심지어는 마미까지도 선원들의 덩치에 밀리지 않는 몸을 하고 있었다. 당연히 마미의 가게의 맥주잔도 엄청 커서 가장 작은 것이 어른 머리통만하다. 그런 맥주잔을 끌어안고 낑낑대면서 나르고 있 는 깡마르고 까무잡잡한 꼬마 여자애를 봤던 것이다. 처음에는 그냥 왠 꼬마냐? 라는 식으로 그냥 지나쳤다. 그러나 그녀가 마미의 가 게에서 일하기로 됐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고객과의 관계를 친밀히 하라는 아버지의 충고에 따라 그녀에게 친한 척 하기로 했다. 그리고 나는 무시당했다. 곧 바보취급 을 당했고, 마미의 가게에서 힘쓰는 일은 모두 내 차지가 됐다. 어디까지나 고객과 의 관계를 개선하고자 하는 노력의 결과로 벌어진 일이었다. 이러한 사태에 대해 간혹 저항해 보기도 했지만 고객제일주의가 몸에 배어버린 나 로서는 그녀의 반짝이는 눈에 굴복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식으로 10년을 지내다 가 더 이상은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에 세 번 마미의 가게로 가서 일을 돕고 있었고 더 자주 가고 싶었지만 더 자주 갈 수가 없었다. 나도 내 일이 있는 바쁜 사람이란 말이다. 그래서 청혼했다. 다행히도 그녀의 보호자가 오랫동안 떠나 있었던 터라 어느 정도는 안심하고 청혼 할 수 있었다. 적어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테니까. 한 달 가까이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기다려야 할 때는 기다려야 한다. 상인은 기다릴줄 알아야 한 다. 심지어는 손해를 보면서도) 그녀의 보호자가 돌아왔다. 아이에 여자까지 주렁 주렁 매달고. 나는 엘리야에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 과연 안전할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엘리야의 쿠베린!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용병으로 이름을 떨치던 자다. 생긴 것은 예쁜 10대 소년처럼 생겼지만 그 모습에 속아서 얕보다가는 숟가락아 그만 안녕 해 야 할지도 모른다. 분명히 나이도 100살은 넘었을 거다. 아마도 엘프나 수인족에 속하는 자일 것이다. 그녀 - 사라는 그가 항구에서 주워온 아이였다 - 를 마미에게 맡기고 신경도 안 쓰는 것 같지만 쿠베린이 없을 때 사라에게 무례하게 굴었던 자들 이 한 군데씩 부러져서 발견된 것을 보면 보호자로써의 자각은 있는 듯 했다. 그리 고 솔직히 그게 더 무서웠다. 쿠베린은 변덕이 죽 끓듯 하고 도대체 종잡을 수 없 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상식이라는 것이 전혀 통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사라에게 청혼한 것을 뭐라고 생각할지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 불안에 떨며 사라의 대답만을 기다리고 있던 어느 저녁날이었다. 다음날 입항할 배에 공급하기로 한 감자와 야채를 창고에서 준비하고 있을 때 쿠베린이 나타났다. "에..쿠베린?" 쿠베린이다.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심상치 않다. 몸의 구석구석을 유심히 살펴는 것이 마치 백정이 잡을 소를 미리 살펴보는 것 같다. 쿠베린은 묘인족이라는 소문 이 있다. 묘인족은 무서운 종족이라고 한다. 살육과 육식을 즐기는... 설마 사람도 먹는 것은 아니겠지? 나도 모르게 주춤거리며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러한 행동 은 오히려 쿠베린을 기분 나쁘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이성의 경고가 계속 머리를 울 리고 있지만 이미 몸은 나의 통제를 벗어난 후였다. 간신히 정신을 수습하며 말했다 "저,저기..쿠베린..하실 말씀이라도?" 쿠베린은 사라의 보호자다. 잘 보여야 한다. 어쩌면 사라는 쿠베린에게 모든 것을 맡겼는지도 모른다. "...말해 두겠지만...말이지." "사라는 이 몸이 키운 애라 그거다." 어딘지 모르게 딸을 가진 아버지가 유세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약간은 불안이 가 시며 다른 의미에서의 불안이 고개를 쳐들기 시작한다. 어떻게 하면 성실하고 예의 바른 청년으로 보이게 할 수 있을까? "에...에에.." 음? 쿠베린의 눈초리가 다시 싸늘해진다. 12년 경력을 가진 상인으로 확신을 가지 고 말하건대 쿠베린은 지금 뭔가 못 마땅해하고 있다. 내가 뭘 잘못했나? "사라에게 손을 댄다든가.." 잠깐! 머리가 하얗게 빈다. 어떤 녀석이 쿠베린에게 나에 대해 근거없는 중상모략 이라도 한 것이 아닐까? 빵집의 엘빈 녀석이 사라에게 추근대다가 나한테 엉덩이를 걷어채인 것이 작년이었던가? 설마 그 녀석이 경쟁자만 제거한다면 자기에게 다시 기회가 있으리라는 망상을 한 것은 아니겠지? "...그,그럴리가요!" 떨려서 말도 제대로 안 나온다. 제발 쿠베린이 어디선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듣 고 와서 넌 안 돼 따위의 말을 하지 않기를. "사라에게 구타 및 욕설 등등을 한다든가.." 사라에게? 사라의 어디를? 사라에게 때릴만한곳이라도 있었던가? 그 아름다운 얼굴을? 아님 그 풍만한 가슴을? 날쒼한 허리를? 내가 너무 오버하는 건가? ".....에..! 저,절대로...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간신히 몸이 다시 풀리는 느낌이다. 케빈. 케빈 프르하트! 엘리야의 제일가는 야 채상 지망자. 정신차리자. 아직 거래가 끝난게 아니다. "예를 들어서 네가 홱 바람을 피운다든가..도박으로 속을 썩인다든가 하면..." 쿠베린은 어딘지 장난기가 어리는 듯한 웃음을 지었다. "네 거시기를 툭 잘라 줄거야. 알아들어?" "에엑!" 이건 농담이다. 농담이야. 하지만 쿠베린은 정말 그렇게 할 지도 모른다. 원체 종 잡을 수 없는 성격이니까. 쿠베린은 갑자기 손가락을 하나 치켜들었다. 헉! 손가락의 손톱이 갑자기 길어져 서 손가락 보다도 더 길어졌다. 쿠베린은 마치 아끼는 수집품이라도 보는 듯한 눈 으로 손가락을 쳐다보다가 나를 쳐다봤다. "잘 알아듣겠지? 내 딸내미를 괴롭히면....흐흐흐흐.." 쿠베린이 묘인족이라는 소문이 맞는 모양이다. 쿠베린의 얼굴이 변했다. 송곳니를 드러낸 쿠베린의 얼굴은 공포스러웠다. 친구인 수인족이 변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것과 비슷한 모양이다. 아니다. 다르다. 많이 다르다. 쿠베린은 자신에게 도취되 어 있다. 위험한 종류의 성격이다. 잘 못 건드리면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음,,그럼 나중에 결혼식에서 보자. 두꺼운 주둥아리." 아! 뭐라구? 결혼식! 오오 그럼 지금까지 이 모든 것이 사라한테는 나 같이 무서 운 아버지가 있으니까 까불지 말고 잘 대해주라는 이야기였다는 건가? "....에에..네에.." 간신히 고개만 숙이며 인사할 수 있었다. 난 정말 엄청난 아버지를 가진 여자한테 청혼했던 모양이다. 저 쿠베린이 마미의 가게에서 늘어져 있던 그 쿠베린이맞기는 맞는 건가? 어딘가 많이 변한 것 같이 보인다. 하지만 뭐 그런게 어떻단 말이냐. 정말 오래동안 기다렸다. 케빈. 10년을 일편단심으로 기다렸으니 이제 그 보답을 받을 때가 온거다. 우하하하하. 제 14화 유령 KUBERIN.... 그것은 언제나 내 창문을 두들긴다. 알 수 없는 두려움으로 창문을 열면 막을 수 없는 힘으로 고개를 들이미는 사나운 짐승. 그것이 운명. 1 나는 망설이는 것을 싫어한다. 주저하는 것도 싫어하고 남의 일에 끼어드는 것도 싫어한다. 지저분한 사 내자식들을 싫어하고, 울먹이는 어린애들도 싫어하며 남에게 매달려 지분 거리는 것도 싫어한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싸우는 것을 좋아하고 먹을 것을 좋아하고 예쁜 것 들을 좋아하며 떠드는 것을 좋아하고 자는 것을 좋아한다. 나는 내가 몇 살인지 잘 모른다. 내가 알고 지내는 엘프들의 나이와 드워프들의 나이를 모른다. 인간의 나 이도 잘 모른다. 나의 여자들의 나이도 모르고 지상 위에 세워진 인간의 나라들이 얼마나 되었는지도 모르고 그것의 가치도 모른다. 알 바가 아니 니까. 나는 인간이 아니고 인간의 나라에 속해있지 않으니까. 엘프들이 떠드는 것과 그들의 차가운 중립성과 잘난 척하는 그 면상을 싫 어하지만 나이가 든 자들은, 아니 인간에 비해서 오래 사는 종족들에게는 어쩔 수 없는 버릇이 있다. 세월이 가는 것을 모른다. 흔히 스카가 불평하듯이 시간에 대한 개념이 없다. 간혹 엘프들이 얼마전이라고 하는 말을 듣고 진짜 얼마전인 줄 알던 인간 들이 있다. 그러나 엘프들의 얼마전과 인간들의 얼마 전은 아주 틀리다. 엘 프가 얼마나 오래 사는지 나도 따져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 드워프 들은 노쇠가 눈에 보이지만 엘프들의 노쇠는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허긴 인간들에 비한다면 드워프들의 노쇠도 거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할 수 있겠군. 아주 크게 나누자면 엘프들은 태어날 때부터 쭈글쭈글한 녀석들과 태어나 면서부터 미끈한 녀석들로 나뉜다- 엘프들의 종류도 워낙에 많다. 일일이 어디의 엘프라고 말한다면 지역과 속성을 일일이 대야 할 것이고 그러다 보면 몇 날 며칠을 새도 다 부족할 것이다. 노스엘스턴의 엘프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미끈했고 죽어서도 미끈할 녀석들 이고 그와 반대의 하이드엘스턴의 엘프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쭈글쭈글하고 죽어서도 쭈글쭈글할 놈들이다. 대개 인간들은 미끈한 엘프들을 더 많이 기억한다. 눈이 크고 기이하게 구 부러진 등을 가진 땅의 엘프들과 태어나면서부터 쭈글쭈글한 얼굴바가지를 하고 있는 하이드엘스턴의 엘프들은 혐오한다. 지금이니까 하는 말이지만 아크놈을 하이드엘스턴의 엘프들이 키웠다면 상 당히 아크놈도 성질이 좋아졌을 것이다. 나는 엘프들이 쭈글하든 미끈하든 둘 다 싫어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역시 나 역시 오래 사는 자들다운 점이 분명히 있다. 지금 내가 어기적거리고 길가에서 헤메는 것만 보아도 그렇다. 즉,언.젠.가. 가면 되겠지 하고 왠지 기분이 탁 풀어져 버리는 것이다. 급 할 게 없다. 델리암이 망했다. 하지만 델리암이라고 했던 나라가 섰던 곳이 아예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달 라진 것은 하나도 없을지도 모른다. 아, 있긴 있군, 델리암 국왕이 바뀌..아 니, 없어졌다. 지금 델리암왕국은 없어지고 그 자리에 룬드바르제국이 생겨나고 있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룬드바르 제국의 일부가 되어가고 있다. 걸어가는 길목마다 행군하는 기사들과 군대들은 모두 룬드바르제국의 제왕 기을 달고 있다. 남색바탕에 날아오르는 듯한 기괴한 새를 수놓은 그 깃발들은 가격도 만만 찮을 것인데도 잘들 들고 다닌다. 병사들은 기세가 올라 있어 살기 등등할 정도로 기분이 좋아보인다. 지나가는 인간들 모두 그런 병사들을 무기력하게 바라보고 있다. 이미 체 념과 같은 무관심이 어제까지만 해도 델리암왕국의 사람들이라고 불리웠던 자들의 이마 위에 드리워져 있다. 아그랑으로 몰려드는 자들은 모두들 그런 무기력을 벗어나고자 하는 자들 일 것이다. 그렇지만 역시 나에게는 다른 이야기, 내가 반드시 아그랑에 가 야하는가 하는 점이 나에게는 가장 큰 문제다. 아그랑으로 가는 것은 그다지 오래 걸리는 일이 아니다. 전력으로 달려가면 반나절이면 도착한다. 그렇지만 그 곳에는 가고 싶지 않다. 왜 가기 싫은가. 그곳에 미녀가 없기때문인가. 아니, 미트라보고 가 있으라고 했으니 거기 가 있을 것이다. 그럼 미트라 말고는 미녀가 없기때문인가? 아니다. 잘 구해보면 미인은 어디든 있다. 아그랑에도 없을 리가 없지. 아 니면 거기에 맛난 음식이 없어서? 아니다. 내가 가면 분명히 잘 차려줄 것이다. 에메스 자식이 투덜거려도 분 명히 비오나는 맛난 음식을 상 다리 부러지게 차려주겠지. 에메스가 보기 싫어서? 그런 점도 있긴 있겠지. 내 애새끼가 주렁 주렁한데 굳이 에메스에게 연연 해 할 필요는 더 이상 없다. 그렇지만 역시 녀석이 안간힘을 쓰면서 이리 저리 돌아 다니는 것은 안쓰럽기도..아니, 놈이 안쓰러울 것은 없다. 비오나 가 오히려 안쓰럽지. 지나가는 병사들과 지나가는 상인들과 지나가는 새들과 말들, 노새들을 지 나쳐서 나는 엘리야로 가고 싶었다. 이제 지긋지긋한 인간들과 엘프들과 마법사들의 이야기는 때려치우고 예전처럼 지내고 싶다. 술을 마시고 떠들고 여자를 안고 스카랑 장난이나 치고 가끔 돈푼깨나 있 는 자들의 부탁을 받아 이런 저런 일을 해치우고 지내고 싶다. 그런데 이런 스산한 기분이 되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지금 왜 스산하고도 진절머리나는 짜증스런 기분이 되는 것일까. 사인족의 왕은 바보천치다. 사인족은 바보천치이다. 멍청한 자의 표본이다. 다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그러나 역시 그들의 일은 슬픔, 그것은 모든 종족들의 슬픔이다. 슬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나무들이 노래하고 수풀들이 지저귀는 이 아름다운 땅위에서 슬픔은 멸망 의 길을 걸어가는 자들에 대한 슬픔, 그리고 어느 존재든 멸망을 피해갈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슬픔이 가슴을 메운다. 가장 강한 것도 가장 약한 것도 종말은 같은 법, 어떤 강력한 제왕도 사후 에는 자기 무덤 조차 가지지 못한다. 대지의 여신은 잔혹한 공평함으로 모 든 것을 가른다. 자연의 어머니는 우리들을 공정한 인과율에 넣고 휘휘 내 돌려 대지에 쏟아놓는다. 그러니까 한탄할 것은 없는 것이다. 한탄해 봐야 소용없는 것이다. 나는 혀를 내밀어서 공기의 맛을 보았다. 곧 비가 내릴 것이다. 그럼 눈을 감고 모처럼의 비를 음미하도록 하자. 그리고 나는 다시끔 엘리 야로 돌아간다. 나의 마미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돌아간다. "안녕하세요..쿠베린." 눈을 뜨자 또 다른 아침. 해는 중천에 떠있다. 파리한 하늘이 조각구름 아래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 나에게 말을 건 것은 자그마한 체구의 소녀, 소녀는 두 손을 모은채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귀는 뾰족하고 키는 작달막하다. 발은 크고 손은 작다. 얼굴형은 세모꼴이지만 눈은 크고 동그랗다. 피부는 갈색이지만 소녀 인 주제에 주름이 져 있다. 그런 그녀가 그 작은 체구에 어울릴 가죽 주머 니를 한 손에 쥐고 그리고 한 손에는 아몬드빵을 쥔 채 날 바라보고 있었 다. "전 '잘 구운 빵집'의 모드야에요." "...그런데?" 나는 하품을 길게 했다. 턱이 빠져라 하품하는 동안 모드야라고 하는 꼬맹 이는 뒤로 한걸음 물러서서 날 조심스레 주시하고 있었다. "의뢰가 있어서요." "흐음." 나는 입맛을 쩍쩍 다셨다. 침대에서 대굴 대굴 굴러서 아래로 발을 디디자 문이 기세좋게 열리면서 가빈이 들어왔다. "쿠베린! 아침식사하러 내려오래요!" "아아..." 나는 두 팔을 벌려 기지개를 펴고 두 발을 주욱 펴면서 일어섰다. 내 허리 까지 오는 자그마한 계집애가 말한다. "의뢰를 하러 왔어요." "뭔데?" 호비트 여자애는 첨 본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나에게 의뢰하러 온 것은 첨인지라 상당히 생소한 기분이다. "저기요....하하하하..전 랑그에 가고 싶어요." "랑그라..?" "네에, 호비트의 마을입니다. 여기서 산 세 개를 넘고 숲 두 개를 넘어야만 이 갈 수 있는 곳이지요." "그런데?" "그 곳에 가려면 트롤과 그레이트 오크의 마을을 지나야 한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쿠베린님에게 호위를 부탁하라고 오빠가 말해주었어요." 나는 머리를 박박 긁었다. 그놈의 오빠라고 하는 놈은 분명히 꿀빵이고 호두빵이고 호밀빵이고 무조 건 나에게 한덩이씩 건네주던 놈이다. 거절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대금은?" "여기요." 꼬마 계집애는 가죽 주머니와 함께 갓 구워진 아몬드빵을 내밀었다. 나는 아몬드빵은 입에 넣고 가죽주머니를 열어 보았다. 그 안에서 비취석 세 개가 나왔다. 터무니없이 싼 가격이었다. 그렇지만 별로 멀지도 않고 트롤이나 그레이트 오크정도라면 내가 걸어가는 것만으로도 자식들은 길을 비킬 것이다. 그러 니 어려운 일은 전혀 아니다. 산책정도라고나 할까. "흐음." 나는 빵을 먹어 치우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갈거냐?" "오늘 오후에 출발하려고 해요." 두 눈을 반짝 반짝 하면서 꼬마 호비트 계집애가 말했다. "좋아, 밥이나 먹자." 나는 머리를 긁적이면서 밖으로 나갔다. 아래층에 마미가 한 상 잘 차려놓고 있을 것을 기대하면서 나는 연신 하품 을 해댔다. 꼬맹이와 같이 아래로 내려가 보니 가빈이 여기 저기 손님들에게 바쁘게 술잔과 음식을 나르고 있다. 흠, 쓸모 있는 놈이라 다행이다. 내가 앉자 사라가 턱턱 걸어오더니 내 앞에 접시와 사발을 놓고 수저를 주 었다. 그리고는 스튜한 그릇과 선지떡, 구운 돼지 족발을 내 놓고 그 옆에 꿀 술을 한 잔 놓았다. "쿠베린, 술좀 작작 먹어." 사라가 시집간 여자 답게 머리를 틀어올리고는 나에게 잔소리를 한다. 왠지 시집가서 얼굴도 뽀얗게 변한 거 같다. 그리고는 모드야에게 가엾다는 듯 시선을 보낸다. "너도 참 큰일이다. 쿠베린과 같이 길을 간다구?" 모드야란 꼬마는 빙글 빙글 웃고 있다. 손등을 덮은 노란 털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귀염성이 있었다. 술동이를 나르던 가빈이 내 앞에 꼬리를 치면서 쪼르르 굴러와 앉았다. "쿠베린, 저기 이번에 여행갈 때 나도 데려가요." "글세..." 심심한 여행이 될 거 같으니 데려갈까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빈이 눈을 반짝 반짝 빛내면서 말했다. "그런데 말이죠, 호비트의 마을이란 곳은 어떤 곳이죠?" 나는 모드야에게 고개를 돌렸다. 모드야는 머리를 갸우뚱하면서 대꾸했다. "모르는데요, 저도 가 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왜 가냐?" "아아, 고향인데 그 곳에 약혼자가 있어요." 문득 사라가 들고 있던 쟁반을 늘어뜨렸다. "에...?" "그 나이에 결혼을 해?" 놀라 가빈이 묻자 모드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저어..전 90세 인데요?" 순간 정적이 흘렀다. 사라는 머리칼을 괜히 쓸어올리면서 아하하 웃더니만 싱긋 웃고 그러냐 하 고 얼버무렸고 가빈은 아아 그래 하고는 고개를 열심히 끄덕인다. 호비트 나이를 짐작하는 것은 엘프 나이를 짐작하는 것 만큼 어렵다. "이 근처에서는 쓸만한 호비트들이 드물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서 마을로 가서 약혼자를 만나려고 해요." "네 약혼자는 뭘 하는데?" "응, 좋은 사람이라고 했어요, 30년전에 만난 이래로 주욱 못만났으니까 잘 은 모르겠지만." 그녀는 생긋 웃었다. "그럼 거기서 아주 살거야?" 사라가 궁금한 듯이 물었다. 그녀는 자기가 결혼한 탓인지 뭐가 그리도 궁 금한 게 많은지 앞에 터억 하고 앉더니 다그치듯이 다가와 묻는다. 호기심으로 빛나는 눈을 한 그녀에게 모드야가 생긋 웃어보였다. 뭔가 연 장자 다운 느긋함이 있는 것 같은 얼굴이다. 그래봐야 인간에게 호비트가 충고할 건덕지가 있을까. 아니, 그보다 인간에게 충고해 봐야 알아듣기나 하나. "여기로 올까 아니면 거기서 살까 생각중인데 오빠 말로는 이 곳 엘리야도 변해버릴 지도 모르니까 그 곳이 좋을 거라했어요." "변한다구?" "네, 델리암왕국은엘리야가 자치도시가 되도록 내버려 두었지만 지금은 델리암이 아니라 정복왕 룬드바르제국의 영토가 되어버렸잖아요?" "흐음." 의외로 정곡을 찌른 말이라 할 말이 없어졌다. "많이..변할까?" 사라가 불안한 듯이 날 바라보았다. "모르지. 그러나 일단 엘리야시장은 바보 천치가 아니니까 적당히 잘 넘어 갈 거야, 전에도 대포건으로 시끄러웠을 때 적절히 잘 넘어갔었잖아?" 그렇다. 상인의 지혜는 그것. 돈을 벌고 즐거움을 얻고 이득을 얻기 위해서는 일단은 명예를 접어두고 국가이념일랑 접어두고 실리를 취한다. 그것이 바로 상인의 바른 도리. 엘리야의 시장은 오크든 호비트든 드워프등 어떤 종족이든 받아 들이면서 모든 세금을 공평히 걷는다. 그리고 그 것을 오히려 자랑거리로 내세워 다 른 항구도시에선 찾아볼 수 없는 자유도시로서의 이름을 높혀왔었다. 룬드바르가 이 곳을 점령-그것을 점령이라고 봐도 좋을지는 모르겠지만- 했을 때도 대포로 항구를 가리키고 위협했던 그 때도, 시장은 여유 만만하 게 나서서 타협했다. 그런 걸 보면 보통 사람은 아닌 것이다. "어찌되었든 저도 왠지 그렇게 지내고 싶기도 해요." "호비트만의 마을이라...옹기 종기 좋을 거 같기도 하네." 사라가 왠지 생각에 잠겨서 중얼거렸다. 그녀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나는 문득 야채장수만의 마을이 생각났다. 온통 야채범벅인 식탁과 말린 야채, 싱싱한 야채, 썩어가는 야채, 늘어진 야채, 시퍼런 야채, 쌓아둔 야채 더미 를 놓고 멍청하게 풀린 눈동자를 들고 중얼거릴 야채장수들을 생각하자 왠 지 속이 메슥 거렸다. 그 메슥거리는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문을 끼익 열고 싱글 벙글하는 얼굴 로 시간 맞추어 그 놈의 두툼한 주둥아리가 들어왔다. 날 보자 약간 얼굴 이 굳어 주눅 든 얼굴이 되는데 그래도 엉기적거리고 나에게 다가와 고개 를 숙여 목례를 했다. "안녕하세요, 쿠베린." "아, 두툼한 주둥아리." 녀석이 눈을 크게 떴고 사라가 재빨리 내 발등을 걷어찼다. "케빈이에요!" 그녀가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쏘아보는 것을 모른 척하고 나는 먹던 것을 계속 먹었다. 문득 녀석이 어색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돌아오셨네요." "응. 불만이냐?" "아, 아뇨..." 녀석이 질려서 입을 다무는 순간 사라가 갑자기 나에게 쏘아붙이기 시작했 다. "잠깐! 기억났어! 쿠베린, 전에 건달패들에게 뭐라고 말하고 간 거야? 왜 다들 이이만 보면 다들 술을 권하지? 하마터면 죽을 뻔했잖아!" 그녀가 삿대질을 마구 해대는 통에 콧구멍을 찔릴 뻔했다. 나는 냉정하고 점잖게 부정해 주었다. "무슨 말을 하는 거냐? 이 녀석 술버릇이 나쁜 거냐? 그런 거야?" 내가 찌릿 하고 쏘아보자 녀석이 얼어붙는다. 그 때 재빨리 사라가 끼어들 었다. "다른 소리 하지마! 케빈에게 술 퍼먹이라고 다른 놈들에게 시키고 갔지? 그지? 그지?" "허어, 뭔 소릴 하는 거야? 내가 비싼 밥 먹고 그 딴 짓을 왜 하냐?" 내가 그녀를 쏘아보자 그녀는 시덥지않다는 듯이 날 쏘아본다. 아줌마 티를 이렇게 물씬 풍기면서 나에게 이렇게 대 들수가 있는 거야? 이 꼬맹이가 주워다 키운 은혜도 모르고 이렇게 기어오를 수가 있느냐구. 정말 원통하고 분하다. 대체 내가 이 애를 얼마나 애지 중지 키웠는데 이 녀석이 이렇게 나에게 쌍심지를 켜고 덤비는 거야? "마미!" 마미가 고개를 내민다. "왜?" "대체 이 사라라는 계집애,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이 나에게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태도를 취할 수가 있는 거야!" 내가 소리를 지르자 마미가 눈을 조금 크게 떠보이더니 어깨를 으슥한다. 그리고는 모른 척 주방으로 돌아서며 말했다. "아비가 시원치 않으니 그렇지." "마미! 내가 이 애를 얼마나 애지 중지 키웠는데..! 그런 섭한 소릴!" 내가 외치자 사라가 재빨리 내 정강이를 걷어 차올린다. 그런 것을 슬쩍 피하면서 나는 사라를 쏘아보았다. "사라! 너 지금 태도가 이게 뭐야? 내가 뭘 어쨌다고 여기서 난리를 치는 거냐! 이 버르장머리 없는 계집애야!" "누굴 보고 내가 대체 버릇을 배웠다고 생각해? 바로 당신이잖아!" 사라가 내 앞에서 감히 턱을 세우고 잘난 척을 한다. 건방지구만. 하고 생각한 순간 나는 사라의 허리를 확 나꾸어 채서 무릎에 엎었다. "꺄아아아아!" 사라가 소리지르는 것을 모른 척하고 나는 그녀를 엎어 놓은 채 엉덩이를 두들기기 시작했다. 철석 철석 소리가 난다. 마치 갓잡은 돼지 엉덩이 때리 는 기분이 된다. "꺄아! 꺄아! 뭘 하는 거야!" 발버둥 치는 것을 모른 척하고 나는 엉덩이를 흠씬 때려주었다. 사라가 꺅 꺅 소리를 질러대고, 아연한 가빈이 꼬리를 말고, 모드야가 턱을 한껏 벌리 고, 얼어붙은 두툼한 주둥아리가 넋을 잃도록 두들겨 준 다음에 나는 사라 를 내려놓았다. "정말 건방진 것도 정도가 있지!" 엉엉거리는 그녀를 내려놓고 나는 캐빈을 자아아악 쏘아보아주었다. "너도 그래! 너도! 사라가 건방지게 굴면 나서서 막아야지, 그걸 보고 있 냐!" "저기..저기..." 놈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서 있는 동안 사라는 엉덩이를 만지면서 엉 엉 울면서 주방으로 달려들어갔다. "쿠베린, 미워! 죽어버려!" 나는 헤 하고 비웃었다. 내가 처음 듣냐? 저 소릴? "따라!" 녀석이 굽실 굽실하면서 내 잔에 주루룩 술을 따랐다. 나는 한잔 스윽 걸치면서 흐음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른을 대접할 준비 가 된 놈은 살려둘 가치가 있다. 자기 주제도 모르고 깝죽거리는 놈들은 다 죽여버려야 하겠지만 말이다. 녀석은 나를 슬금 슬금 훔쳐보면서 사라가 사라진 주방을 바라보고 있다. 따라 갈까 말까 망설이고 있는 듯하다. 가빈이 꼬리를 살랑이면서 내게 애교를 부렸다. "쿠베린, 저기 저기..." "뭐야? 그 꼬린!" 내가 쏘아보자 녀석은 얼른 꼬리를 감추면서 머리를 긁적였다. "저기....언제 떠나?" "아...오늘 떠날 수 있나요?" 모드야가 궁금한 듯 나에게 물었다. 이 눈치 빠른 호비트 아가씨는 나의 눈치를 슬슬 보면서 어떻게 할까 생각하는 듯하다. 나는 술을 주욱 들이키 면서 슬쩍 창문을 바라보았다. 창문에 비치는 햇빛은 이제 중천에 달하고 있었다. 떠나도 나쁘진 않다. "마미에게 도시락 달라고 해." "네에!" 가빈이 쏜살같이 주방으로 뛰어들어가자 곧이어 마미가 두툼한 보따리를 들고 나오며 묻는다. "또 나가는 거야?" "응. 금방이야, 이 꼬맹이 아가씨를 고향에 데려다 주고 오는 것 뿐이니 까." "가빈도 데려가?" 마미가 가빈을 가리키며 물었다. 가빈은 이미 짐을 한 짐 챙겨가지고 허리에 둘둘 감고 있었다. 모자를 쓰 고 꼬리는 허리에 감아서 언뜻 보면 보통 소년처럼 보인다. 그리곤 이미 여행을 떠날 준비를 갖추고 발에는 장화까지 신고 있었다. "별로 먼데도 아니니까 그렇게 하려구." "궁금했는데 쿠브." 갑자기 마미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네 아이들은 다 어디있어?" "지 어미들이랑 있어." "네가 돌보지 않는 거야?" "어미가 있는데 왜 내가 돌봐?" 마미를 비롯한 모두가 일제히 날 비난의 눈초리로 바라본다. "내 여자들 전부 약한 여자들 아냐, 남자놈들 몇은 찜쪄 먹고도 남을 여자 들이라구. 그녀들이 아이를 돌본다면 잘 돌볼거야. 그런데 뭐가 문제야?" "원래..아이를 낳으면 돌보는 건 여자가 한다는 거야?" 어느 새인지 사라가 허리에 손을 턱하니 얹고는 날 쏘아본다. 울어서 얼굴 이 벌겋다. "그래." "하지만...." "애들을 키우는 건 엄마가 해. 그런 고유권한을 내가 침해하면 모두 화를 낸다구." "하지만 아버지가 하는 역할은 대체 뭐지?" "다른 놈들이 해치지 못하게 하는 역할." ".....해친다구?" "아아, 간혹 그런 일이 있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미가 건네준 도시락을 서슴치 않고 가빈에게 들 게 했다.가빈은 울상이 되어 그 도시락을 들었다. "자아, 그건 우리들 종족에 대한 문제니까 참견은 그만, 자아, 가자구!" 여자들이 줄지어서서 나에게 말없는 비난을 보내고 있는 가운데 나는 성큼 성큼 걸어서 밖으로 나갔다. 모드야는 짧은 다리로 종종 거리고 따라오고 가빈은 총총거리고 따라온다. 햇빛은 제법 따스하다. 이젠 봄이다. 바람에 실려오는 바닷바람에는 이제 향기가 있다. 활기에 찬 사람들이 떠들어 대는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거리를 걷는다. 여 기 저기 가게문을 연 사람들이 장사하는 소리와 배에서 갓 내린 혈기 방장 한 선원들과 선원들을 유혹하는 여자들의 목소리가 어우러져 제법 시끌벅 적 하다. 향기로운 꽃내음을 맡으세요 아름다운 처녀들을 사랑하세요 찰랑이는 금빛 물결 위로 아리따운 처녀들의 웃음소리 이젠 봄입니다. 사랑하는 연인들의 봄입니다 어디선가에서 굴러들어온 음유시인이 노래하고 있었다. 호리인을 뜯으면서 노래하는 음유시인은 오가는 처녀들을 유혹하듯이 달작지근한 목소리로 노 래하고 있었다. 물론 처녀들만이 아니라 아줌마들도 많이 있다. "쿠베린!" 그 처녀들 사이에 낀 마리아가 손을 들어 나에게 아는 척을 한다. "어디가?" "아아, 여행." "또 가?" 그녀가 답삭 목에 매달려 나에게 키스했다. 그녀의 입술에 키스하며 그녀의 살갗을 맛보는 동안 모드야가 뒤에서 흠흠 하고 헛기침을 한다. 사람들이 워낙 자주 보던 광경이라 그런가 부다 하고 모두들 지나간다. 나는 미소하다가 그녀의 가슴으로 스리슬쩍 손을 올렸다. "안돼애." 마리아가 살짝 웃으면서 내 코를 깨물었다. "왜 안돼?" "갈 거라며?" "가긴 가지만..." 내가 미련남은 얼굴로 웅얼거리자 그녀가 웃음을 터뜨리면서 나를 살짝 밀 친다. "저 호비트 아가씨가 화를 낸다구! 자아 얼른 얼른 갔다와!" "좋아, 갔다오지." 마리아가 잠시 나를 밀치다 말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고개를 갸우뚱한다. "음, 나에게 선물 하나 사다 줘." "선물?" "응,나, 머리핀." "머리핀?" 그녀가 나에게 뭘 사달라고 조르긴 처음이라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나는 본디 선물따윈 모자란 사내들이나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터라 그녀가 나에게 선물을 말하자 무척 놀랐다. 그렇지만 그녀와 사귄지도 몇 년이나 지났다. 생각해보면 나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사라에게 드레스를 열댓벌이나 해줬다며?" 낮게 그녀가 내 귓가에 대고 속삭인다. "에에?" "소문 짜아 하게 다 났어. 다 났다구! 과연 쿠베린이라고 소문이 자자해." "그건 다 헛소리야, 이 내가 딸내미 결혼시키면서 돈을 받지 거기에 돈을 얹혀서 보낼 거라 믿냐?" 내가 흥 하고 말하자 그녀는 흥 하고 눈꼬리로 날 쏘아본다. "어찌되었든 어찌되었든 꼭 사다 줘! 알았지?" "아아, 알았다. 알았어, 네가 바란다면 사다 주고 말지." 쳇 하고 내가 말하자 그녀는 나를 쏘아보더니 흥 하고 코웃음쳤다. "내가 말하는 건 웃긴다는 거야?" "난 선물이란 모자란 사내들이나 하는 것으로 생각해, 이 잘난 내가 왜 선 물을 하냐?" "잘난 쿠베린님이 어떤 걸 사오나 잘 봐둬야지, 시시한 것은 사오지 않겠 지?" 푸하하 하고 그녀는 웃더니 내 이마에 키스하고는 팔랑 팔랑 옷자락을 나 부끼며 가버렸다. 아아, 저 종아리, 죽여준다. 먹음직스럽다. 내가 멍청히 있을 즈음 나를 쿡쿡 찌르면서 모드야가 재촉했다. "어서 가요. 쿠베린." "아아, 알았어." 쳇! 여자란 요물! KUBERIN.... 그것은 언제나 내 창문을 두들긴다. 알 수 없는 두려움으로 창문을 열면 막을 수 없는 힘으로 고개를 들이미는 사나운 짐승. 그것이 운명. 2 짜증스럽고 답답하다. 본디 다리 길이라는 것은 선천적인 것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이렇게 온몸으로 느껴본 것은 처음이다. 드워프와 같이 길을 간 적은 있지만 사실 걸어간 게 아니고 날아간 것이어서 별로 느끼지 못했었다. 일개 호비트와 이 잘나신 나는 원래 다리 길이만이 아니라 기본적인 체력과 기본적인 속 도가 다르다는 것을. 그나마 야묘족인 가빈은 뼈가 가는 대신에 무척이나 가볍고 빠른 몸놀림을 가지고 있다. 허긴 녀석이 가진 장점이라곤 가볍고 빠른 몸놀림과 애교밖 에는 없다. 그  털만한 손톱으로 고기를 찢을 수 있길 하나, 적에게 치명 상을 입힐 수나 있나, 그렇다고 이빨이 튼튼한가. 그저 입이나 좌악 벌리고 그 앙상하고 별 볼일 없는 송곳니나 드러낼 줄 알지 할 수 있는 거라곤 전 혀 없다. 이 놈이 성년이 된다해도 지금 모습에서 그다지 변할 것 같지는 않다. 본래 야묘족 자체가 그다지 완력이 있는 체질은 아닌 것이다. 지금 녀석이 경쾌함을 잃기 시작하는 것은 하루 온 종일 걸었기때문이 아 니라 단지 지루해서일 뿐이다. 지루한 것을 못참는 야묘족은 언제나 문제 를 일으키기기로 유명한데 호비트 못지 않게 나쁜 손버릇을 가지고 있다. 야묘족 하면 언제나 도둑- 그것도 대도도 아닌 좀도둑-이라고 불리는 것 은 다 이런 이유에서다. "쿠베린, 저게 무슨 꽃?" "노랑꽃이지." "저건 무슨 열매인데?" "나무 열매다." "이 나무에 열린 열매는 노란 색이야! 맛있을까?" "먹어보면 알겠지." "독이 있음 어쩌지?" "죽을 수 밖에." 숲속을 그저 지나가기만 하는 데도 새삼스레 끝도 없이 뻔한 것을 물어댄 다. 입을 가만히 놔두면 무슨 문제라도 벌어지는 지 정신없이 떠들어대는 데 옆에 있는 호비트아가씨도 가세해서 떠들어댄다. "그래요, 저건 뭐죠? 아아..저건 뭘까?" "저건 노랑 꽃, 저건 파란 꽃, 저건 나무 열매, 저건 풀 열매." 내가 대꾸하면 둘이서 동시에 뜨악한 표정을 지으며 날 돌아본다. 대체 왜 어린애들은 이렇게 뻔한 소릴 해대는 거지? 일개 꽃이름, 나무 이름따위 이 내가 기억해둘 리가 없잖아? 날씨도 좋은데 한 숨 잤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찰나에 문득 이상한 냄새가 느껴진다. 이건 뭔가가 썩는 냄새였다. 굳이 자세히 표현하자면 시체 썩는 냄새라고 해 두자. 이런 숲에선 저렇게 요란하게 썩는 내를 풍길 짐승은 흔치 않다. 왜냐면 대개 죽은 짐승은 다른 짐승의 밥이 되고 나머지는 자잘한 벌레들의 밥- 즉 대지의 여신에게 바쳐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냄새를 팍팍 풍기면서 오 랫동안 널부러져 썩는 냄새를 팍팍 풍기고 있을 이유,아니 여유가 없다. "무슨 냄새죠?" 가빈이 뭐라 하기도 전에 파다다다닥 달려가면서 외쳤다. 호비트 아가씨도 호기심을 참지 못하는 듯 뒤쫓아서 달려간다. 팔 다리가 다 짧으니 걷는 게 엉기적 엉기적 하긴 하지만 속도는 아까보다 몇배는 빨 랐다. 확실히 호기심 많은 호비트는 정설인 모양이다. "꺄아아아악!" 풀 숲으로 다가가자 마자 호비트 아가씨와 가빈이 둘이서 동시에 외쳐댔 다. 덕분에 놀란 숲속의 새들이 파다다다다닥 날아가버리고 새들이 날자 자잘한 벌레들도 날고 그 덕에 토끼등 작은 짐승들도 파다다다다닥 움직여 달아난다. 나는 별로 급할 것 없다는 마음으로 느긋하게 수풀을 헤치고 걸었다. 이미 살기는 없었으니 별로 긴장할 기분도 없었다. 발치에 냄새가 나는 뭔가가 널부러져 있다. 하나터면 손가락을 밟을 뻔했 다. 허긴 손가락을 밟든 손등을 밟든 이미 죽은 시체에게 굳이 신경을 쓰 는 것도 우습긴 하지만 말이다. 바닥에 늘어져 있는 것은 작은 몸집을 한 아인족이었다. 아니 아인족들이 었다. 갈색아인족은 본디 남쪽에서 산다고 알려져 있다. 그들은 푸른 아인족보다 는 덜 벗지만 최소한 인간들 보다는 더 벗고 더 짙은 피부색을 하고 있다. 물론 성질도 인간보다 더 급하다고 알려져 있다. 완력도 인간보다는 강하 다. 그런 그들이 댓명이나 한 데 엉켜서 죽어 널부러져 있었다. 팔 다리가 여기 저기 널려 있고 끊긴 머리통이 대굴 대굴 구르면서 겨우 푸른 빛을 띄고 있는 풀숲 속에 멀뚱하니 버티고 있었다. 나는 그 머리통 하나를 집어 들어 잘려진 그 단면을 살펴보았다. "쿠베린! 쿠베린!" "이게 왠일이에요?" "이 근처에 그레이트 오크라도 있는 거 아냐요?" "왜 여기에 갈색 아인족들이 죽어 있어요?" 두 명의 호기심이 넘쳐 흐르는 꼬맹이들을 뒤로 밀치고 나는 머리통을 휘 익 던져두었다. 별로 바라는 바는 아니지만 어쩔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진 듯했다. 근처에 살기는 없었다. 기척도 없었다. "누가 한 걸까요? 아인족들은 강하잖아요? 이런..짓을 인간이 했을 리는..." 가빈이 중얼거린다. 그리곤 킁킁 콧구멍을 벌름 거리면서 냄새를 맡는다. 모드야는 내 옷자락을 쥐고 사방을 살피고 있었다. 불안감에 가득찬 얼굴 치고는 지나치게 눈빛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일단은 어서 가자." "이 시체들은...?" "대지의 여신이 이미 받아들였으니 내버려 둬."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갈 길을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저건....." 가빈이 질린 듯 손가락을 들어서 허공을 가리켜 보였다. 나무에 주렁 주렁 매달린 것은 갈색 아인족의 시체, 그 것들은 하나 같이 치명상을 입은 채 나무에 매달려 있었다. 그 모습이 무척 거슬렸다. 바람이 라도 불라 치면 피투성이가 된 그 아인족들의 시체들이 살아있는 양 다리 를 좌우로 흔들면서 나무 위에 매달려 있기때문이다. 눈이 썩어버려 벌레가 들락 날락하고 있는 것도 있고 혹은 새들이 쪼아 먹 어 시커멓게 변한 동공도 있고 말라 비틀어진 뺨 위에 뼈가 희게 드러나 있는 것도 있다. 그렇지만 모든 목이 온전한 시체들이 나뭇가지위에 대롱 대롱 매달려 이리 저리 흔들리고 있는 모양은 모두 같았다. 시체들의 모습 은 아무리 보아도 모두 전사로 보인다. 그렇다면 항의할 수도 없잖아. 목이 부러진 채로 목을 나무에 매달아 놓은 모습은 아무리 보아도 전사의 행위라기 보단 미친 녀석의 행위 같았다. 그러나 이런 것도 드문 모습은 아니다. 남방의 나라에서는 이런 일을 한다고 한다. "...무서워요." 시체에서 툭툭 썩어가는 진물이 떨어지는 것을 피하면서 모드야가 중얼거 렸다. 가빈은 파랗게 된 얼굴로 내 옷자락을 쥔 채 끙끙거린다. "시체열매군." 나는 그렇게 중얼거려주었지만 둘 다 웃지도 항의하지도 않았다. "이 근처에 야수가...있다해도 저렇게 많은 수의 갈색 아인족을 죽일 수는 없겠죠? 그렇다고 해서 그레이트 오크나 트롤이 떼거리로 덤볐어도 저렇게 일방적으로 죽일 수는 없었을 거에요. 무엇보다 바닥에 무기가 다 그대로 있구...." 쥐뿔도 모르는 가빈이 아는 척을 한다. 녀석은 바닥에 널린 무기들을 가리키면서 흥미진진한 표정의 모드야에게 잘난 척을 해보인다. "대체 뭘까요? 사인족이나 조인족의 전사들이라면 몰라도....." 나는 흘긋 가빈을 일별하고는 무시했다. 갈 길이나 가자. 전사들의 일에 참견할 바 아니다. "진짜....트롤이나 그레이트 오크만이 있는 것이 아닌가봐요." 모드야가 풀이 죽어 말할 즈음 나는 잘라 말했다. "어서 가자." "쿠베린, 무서운 거에요?" "응, 무섭다. 네가 더 이상 지껄일까봐 무서워." 나는 하품을 하며 말했다. 진짜 졸렵다. 곧 해가 질 것이고 나는 배가 고프 다. 썩어 가는 저 시체를 먹을 마음은 없으니까 어서 자리 잡고 야영준비를 하는 게 옳다. "드세요." 모드야가 빵집 아가씨답게 금새 즉석으로 빵을 구웠다. 잘 발효된 덩어리를 봇짐안에 가지고 있다가 불을 피우면 달구어진 넙적한 돌에 찰삭 붙여내서 구워낸다. 즉석 화덕에서 구워낸 바삭한 빵위에 꿀을 바르고 막 잡아 구운 새 구이와 함께 곁들여 먹는다. 뼈까지 오독 오독 씹 으면서 나는 여기에 술 한병이 있다면 하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밤새가 와락 와락 하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운다. 짐승들이 멀리서 우는 소리가 들리지만 그다지 험상궂지는 않다. 여기저기 자기 전에 오줌을 누고 왔기 때문에 쓸데 없는 놈들은 다가오지 않을 것이다. 나는 하품을 하고 모포를 길게 깐 가빈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벌러덩 누웠 다. 모드야가 발치에서 자면서 귀엽게 하품을 했다. 가빈은 가랑 가랑 숨소리 를 내면서 품안으로 파고 들어온다. 바삭 바삭 풀이 바람에 날리는 소리, 눈을 감으면 사방으로 밀려드는 흙내 음과 함께 봄이 오는 소리가 난다. 푸릇 푸릇한 땅바닥은 이제 그다지 차 갑지도 딱딱하지도 않다. 나뭇가지 사이로 조각난 달이 빛을 뿌린다. 눈을 떴다. 뜨고 싶어서 뜬 게 아니라 뜰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눈을 떴다. 모닥불이 탁탁 소리를 내며 불똥을 사방으로 튀기고 있었다. 바람소리가 사라라락 나뭇가지를 비비며 스쳐지나간다. 나는 눈을 뜨고 내 앞에 나타난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모드야가 어느새인지 일어나 앉아 내 옆으로 바짝 다가와 앉는다. 태평스럽다 못해 둔해 빠진 가빈은 아직도 자고 있었다. 히멀건한 그 것들은 천천히 움직인다. 천천히 천천히 마치 공중에 떠다니듯이 흐릿한 형체를 가지고 스쳐지나간 다. 하나가 지나가면 또 하나가 지나가고 그 또 하나가 지나가면 그 다음 이 그 자리를 메운다. 인간의 형태를 한 그것들은 모두 스물에 가까운 숫 자였다. 말 그대로 바글 바글 하다. 달빛에 어린 그것들은 몽롱한 얼굴을 하고 피로한 낯빛을 하고 지나가고 있었다. 그 얼굴을 보고 그 낯빛을 보면서 나는 턱을 고이고 바라본다. 길죽한 얼굴에는 초점이 없는 눈이 날 바라본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우 리들이 길게 누운 곳을 바라보고 있다. 입은 잘 보이지않지만 희미하게 등 뒤쪽까지 비쳐 보인다. 다리가 없다. 다리가 있을 자리에는 바닥에 불빛으로 일렁이는 돌멩이들이 위치하고 있다. 두둥실 떠 다니는 것들은 유유히 우리들 앞을 스쳐지나가 면서 우리들에게 일별을 던진다. 그리고는 고요히 고요히 어두운 숲으로 사라져간다. 마치 그렇게 맴돌고 돌아 다니는 것이 그놈들이 할 일이라는 듯이. 대체 이 놈들 언제부터 이러고 돌아다닌 것일까. 희미하긴 하지만 그들이 멘 활통과 활이, 그리고 그들이 찬 단검과 장검이 낮에 본 아인족들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게 한다. 그들이 스쳐 지나가면서 뿌리는 한기가 타탁 타탁 타오르는 모닥불을 무색하게 만들고 있었다. 몸이 덜덜 떨리는 지 모드야가 내 팔뚝을 잡았다. "저게...뭐죠?" "유령이겠지." ".....아까 ..아까 본 갈색아인족 전사들?" 그들은 우리들 앞을 몇번이나 오가고 있다. 몇번이나 오가는 지 잘 모르겠지만 나는 느긋하게 구경하기로 마음먹고 등 의 바위에 몸을 기대고 옆에 모드야를 끼고 앉아서 두 다리 주욱 펴고 내 앞에서 오락 가락하고 있는 유령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우리들을 보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우리들의 앞을 스쳐지나가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그 저 그 자리에서 뱅뱅 돌고만 있을 뿐이었다. 아마 녀석들에게 우리들은 그저 돌멩이 1,2에 불과할 것이다. "...뭘까요?" "...여기서 죽었나?" 내가 중얼거리자 화들짝 놀란 모드야가 발딱 일어선다. 그리고 발딱 일어 서는 순간 그녀의 앞에 서 있던 유령들이 일제히 그녀를 돌아보았다. 마치 지금에서야 발견한 듯 돌아본다. 눈이 마주쳤다. 멍한 초점없는 눈동자들이 일제히 모드야를 바라본다. "헉!" 모드야는 파랗게 질려서 뒷걸음질을 쳤다. 그 순간 유령들이 모드야의 앞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두 팔을 벌리고 왠지 스산하고 무감동한 얼굴로 다가온다. 다가오는 소리도 들리지않기 때 문에 미끌어져 오는 것처럼 보인다. 다리가 없으니 소리가 나지 않는 것인 가하고 나는 순간 멍청히 생각했다. 나는 모드야가 비명을 올리기 전에 그녀의 몸을 잡아 당겨 내 뒤로 밀었 다. 그리고 바닥에 구르고 있는 모닥불에서 불타는 나뭇가지 하나를 꺼내 어서 앞으로 내밀었다. 화라락 치솟는 불길을 보고 유령들이 잠시 걸음을 멈춘다. "무, 무서워요." "유령일 뿐인데." 모드야는 덜덜 떨었다. 내 등짝에 와 닿는 그녀의 작은 몸뚱이가 마치 튀 어오르는 공처럼 떨리고 있었다. 나는 느긋하게 미소하면서 유령들을 마주 보며 말했다. "꺼져라!" "우오오오오오...." "오오오오오...." 유령들은 불행히도 비극적이게도 떠나지 않았다. 오히려 기괴한 소리를 내 지르면서 우리들 주변을 빙빙 돈다. 나는 불쾌감으로 녀석들을 쏘아보았다. 지금 유령주제에 감히 나에게 반항하는 거야? 우오 우오 하는 소리로 나의 이 예민하고 섬세한 귀가 피로해지고 있었다. 이 귀가 바라는 것은 아리따 운 미녀의 애교어린 목소리지 음침하고 음산한 유령 따위의 합창이 아니란 말이다. 화가 치밀어 올랐다. "시끄러! 썩 꺼져버렷!" 큰 소리로 그 놈들의 소리를 제압할 정도로 외치자 숲 일대가 쩌렁 쩌렁 울렸다. 나는 발을 구르고 소리를 질렀다. "이 건방지고 싸가지 없는 자식들! 이 쿠베린님께서 꺼져라 라고 말했으면 꺼지는 거다! 왠 말들이 그렇게 많아? 뭐가 우오오오냐? 약하니까 죽은 주 제에 뭔 말들이 그렇게 많아? 불만 있으면 다음 생에 센 놈으로 태어나서 끝장을 봐! 왜 죽인 놈에게 나서지도 못할 주제에 악악거리고 내 앞에서 얼정 거려? 내가 지금 너희들의 우오오 소리를 듣고 앉아 계실 어른이라고 생각하는 거냐! 꺼지지 못해!" 나의 쩌렁 쩌렁한 목소리와 함께 유령들의 모습이 굳었다. 숲속은 내가 질 러댄 고함소리로 왕왕 울려대는 메아리소리로 가득 찬다. 유령들의 우오오 소리도 삼켜버린 나의 음성에 나는 나 스스로 만족했다. 그럼 그렇지, 이 내가 누구라고. 그리고 마침내 내가 발을 한 번 더 구르는 순간 홱 하고 주변이 정적으로 휩싸였다. 그리고 그들은 사라졌다. 너무 거짓말 처럼 사라져 버려서 모드야는 아연해 있었다. 가빈은 눈을 부 릅뜨고 자다 깬 얼굴로 눈을 비비면서 날 돌아본다. "쿠베린? 지금 그거 뭐였어요?" "유령이야. 원 싸가지 없는 것들 같으니라구! 잠이나 자자!" 내가 다시 자리를 잡자 모드야의 몸이 달달떨며 내 품안에 팍 안겨왔다. 나는 그 작은 호비트의 몸을 들어서 내 등짝에 붙였다. 난로2 다. "내 등에 붙어." 가빈은 유령이란 말에 퍼렇게 질리더니 품안으로 파고 들어온다. 나야 앞 뒤로 난로가 확보된 덕에 춥지 않아 잘됐다. 유령이란 소리질러 주면 끝장 나는 별 볼일 없는 것들, 무엇보다도 건방지게 죽은 놈들이 알 짱대면서 나에게 위협을 가하려고 소리지르는 그 꼴들은 무척이나 분수를 모르는 것들인 것이다. 죽었으며 곱게 저승으로 가란 말이다. 저승의 여신 이 저희들을 한 손에 틀어쥘 가죽 주머니를 휘두르면서 기다리고 있지않는 가. 무섭고도 스산한 공포와 저승의 여신을 화내게 하면 어쩌자는 거야? 죽었으면 갈 길을 가야지. "이봐요." 막 자려는 참인데 누군가가 또 부스럭거리며 다가왔다. 또 뭐하는 짓이냐? 나는 눈을 다시 뜨고 짜증이 치솟아 올라서 손에 잡히는 대로 돌멩이를 던 졌다. 잠시후 켁 하는 소리가 나고 그 다음엔 털석 소리가 난다. 사방이 고요해 진다. 잘 되었군, 잠이나 자자. 원 재수없게 남 자는 데 방해를 하다니. 눈을 뜨니 가빈이 누군가와 떠들고 있었다. 일어날까 말까 잠시 망설였다. 해는 중천에 뜨긴 했지만 어제 늦게 버릇없는 것들이 알짱 거려서 잠을 설 치지않았던가. 본디 잠이란 것은 최소 해가 중천에 떠서 그림자를 작달막 한 난쟁이로 만들 때 까지는 자야 하는 것이다. 일찍 일어나는 것은 천한 것들이나 하는 짓이다. 그 천하디 천한 그 누군가는 이마에 주먹만한 혹을 매달고 가빈과 이야기 하는 중이었다. 가빈은 불을 피우고 건포를 구우면서 모드야와 함께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는데 왠지 그 주먹만한 혹을 달고 있는 놈에게 하는 태 도가 공손하다. "쿠베린, 일어났어요?" 나는 턱을 고이고 엎드린 채로 대굴 굴러서 혹을 이마에 붙이고 있는 녀석 을 바라보았다. 얼굴이 히멀건하게 바짝 마른 작대기 같은 녀석이 날 멀뚱 멀뚱 바라보다가 갑자기 화가 치미는지 욱하는 얼굴로 주둥이를 팍 들이내 밀며 날 쏘아본다. "당신! 대체 뭡니까!" "...넌 뭐야?" "왜 다짜고짜로 공격했던 거죠?" "나는 내가 자려는 순간 내 머리맡에서 불순한 짓거리를 하는 놈들은 다 공격대상이라고 정해놓고 있어." "내가 그 돌덩이 맞고 죽기라도 했으면 어쩔 뻔 했어요?" "그럼 내 아침식사가 되었겠지." "....." 순간 녀석의 얼굴이 팍 질렸다. 굳어버린 녀석을 무시하고 나는 느릿 느릿하게 걸어서 숲속으로 걸어갔다. 녀석이 악악 소리를 지르면서 내 뒤를 따라온다. "이봐요! 난 아직 말이 다 끝나지 않앗습니다! 당신은 대체 뭐하는 사람이 길래..." 나무 앞에 서서 나는 바지 앞섶을 주섬 주섬 풀렀다. 녀석은 그제서야 내가 뭘 하는 지 깨닫고 정지했는데 나는 그 놈을 무시하 고 내 볼일을 봤다. 좔좔좔 흘러가는 내 것을 바라보다가 목을 가볍게 비 틀어 흔들어 아침 운동을 대신하고는 발목도 한 번 스리 슬쩍 돌려 보고 이상없음을 확인했다. 그러고 나자 녀석이 또 말을 건다. "저기..." 나는 녀석을 무시하고 흐르는 시냇물을 찾아 갔다. 졸졸졸 흐르는 시냇물 은 좋아 보인다. 비록 멀리서 시체 썩는 냄새가 나긴 해도 시내자체는 깨 끗했다. 손을 씻고 두 손가락을 이용해 두 눈사이에 낀 물건을 제거하고 얼렁뚱땅 몸을 닦아 냈다. 그리고 녀석을 올려다 보자 녀석은 팔짱을 낀 채로 멍하 니 시냇가 윗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뭘 보나 나도 돌아보니 녀석은 당장 눈앞에 있는 것을 보는 게 아니었다. 녀석은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보면서 입을 저억 벌리고 있다. "심하군...." 나는 뭔가 생각하는 녀석을 도와주고자 기꺼이 녀석의 등을 밀어서 시냇가 에 처넣었다. 그렇지, 녀석도 씻어야 겠지. "으악!" 푸아 하고 녀석이 무릎까지 오는 시내에 앞으로 고꾸라진 뒤에 나는 두 손 을 털고 이미 구수한 냄새가 나기 시작하는 야영지로 발걸음을 돌렸다. "이 나쁜 놈! 대체 무슨 짓이냐!" 놈이 바둥 바둥 젖은 몰골로 어기적거리고 모닥불 앞으로 나왔을 때 나는 이미 준비된 음식의 반 이상을 다 먹어 치운 터였다. 왠일인지 포도주도 한 병 있길래 사양하지 않고 먹어치웠다. "에블리. 괜찮아요?" 놀라 모드야가 물에젖은 새앙쥐, 아니 머리에 주먹만한 혹을 달고 흡사 뿔달린 뭣같은 몰골을 한 놈을 바라보며 물었다. "괜찮아보이냐? 호비트?" "아뇨, 추워보이는 군요." 모드야가 멀뚱거리며 대꾸하는 동안 녀석은 허겁지겁 젖은 옷을 벗어던지 고 모닥불을 끼고앉았다. "으..추워, 아까 놔둔 내 포도주를 좀 줘." 가빈이 가엾다는 듯이 혀를 차면서 음식을 권했다. "안됐어요, 에블리, 지금 막 쿠브가 당신 포도주를 다 먹어버렸어요." "뭐라구!" 놈이 다시 도끼눈을 하고 날 바라보는데 이제 배가 채워져서 관대하고 이 해심 많은 심성의 소유자가 된 나는 미소를 지으며 녀석에게 물었다. "넌 누구냐?" KUBERIN.... 그것은 언제나 내 창문을 두들긴다. 알 수 없는 두려움으로 창문을 열면 막을 수 없는 힘으로 고개를 들이미는 사나운 짐승. 그것이 운명. 3 "....에블리 카로에. 고스트 헌터, 유혼사(幽魂師)다." "......" 나는 녀석을 무시하고 고기를 뜯었다. 참 맛난 고기로군, 역시 날이 좋을 때 잡은 새는 맛있어. 이유는 모르겠지 만 약간 배가 고파 있는 새는 더더욱 감칠 맛이 있단 말이야. "나는 이 근처가 유령들의 집산지라는 이야길 듣고 왔다. 이곳에 악령이 많다는 이야길 들었어." 진지한 녀석의 말에 모드야와 가빈이 일제히 날 바라본다. 나는 정중하게 뼈까지 씹어 삼키는 중이었다. "어젯밤에 유령이 너희들을 덮치는 것을 보고 도와주러 달려왔었는데 여 기 있는 이 애송이 꼬마가 쫓아버리는 것을 보고 감탄했던 것이야. 그래서 막 말을 걸려고 하는데..." 녀석은 먹어대는 나의 발등을 힘껏 걷어찼다. "이봐! 너, 사람이 말을 하면 들어라! 멍청아!" 나는 녀석의 발을 슬쩍 피하고 대신에 녀석의 무릎을 가볍게 뒤에서 차 주 었다. 관절이란 게 이상해서 앞은 강한데 뒤에서 치면 쿡 하고 고꾸라지게 되는 기이한 점이 있다. 녀석도 그 기이함에서 벗어날 수 없는 평범한 놈인지라 내가 뒤에서 툭 치 자 억 하고 엎어졌다. "허억..대체 뭐 이런 놈이 다 있냐?" 그 놈이 고함을 막 지르려는 순간 나는 그 놈의 면상을 손바닥으로 콱 눌 렀다. 등줄기로 오한이 스쳐지나간다. 이것은! "후하! 소, 손떼! 아이구, 짜!" 녀석이 내 손에서 겨우벗어나서 팻팻 거렸다. 그리고 한 순간 고개를 들 고 내가 바라보고 있는 수풀 쪽을 돌아보았다. 그 평범한 히멀건한 얼굴로 진지한 눈빛이 스쳐 지나갔다. 등줄기가 오싹할 정도의 살기는 내 정면 오른쪽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 살기는 살아있는 생물이 내뿜는 것이라고 하기엔 상당히 심각한 것이었 다. 그 살벌함에 질린 이 놈이 입술을 깨물면서 허리춤을 더듬는다. 그리고 그 허리춤에서 장난감 처럼 생긴 은빛의 활을 꺼내 들었다. 화살도 없는 그런 활이었다. "나와라." 나는 낮게 말했다. 그러자 수풀이 흔들렸다. 그리고 누군가가 고요히 나타났다. "누구냐? 너는?" 그렇게 에블리 놈이 외치는 찰나에 나는 입을 저어어어억 벌리고 정면을 바라보았다. 믿을 수 없어! "린!" 놀란 가빈이 벌떡 일어서서 상대를 바라보았다. 녀석이 곧장 그리로 달려 가려고 하는 것을 나는 잽싸게 그 발목을 잡아 멈추게 했다. 사납게 엎어 진 가빈이 울상이 되어서 겨우 고개를 들어 올렸다. "린이야....." 푸른 살갗을 그대로 드러낸 그 모습은 푸른 아인족의 모습이었다. 등뒤로 맨 검은 색의 강궁과 화살통이 허리에 매달려 있고 그 허리춤에는 약간 휜 날의 단검이 매어져 있다. 발에는 납작해 보이는 샌들을 신고 있 었는데 여전히 걸친 것은 오로지 아랫도리를 감싸고 있는 모직 천이었다. 짙푸른 머리칼은 목덜미까지 다달아 있었고 두 팔은 지금 당장이라도 공격 을 할 수 있도록 양 옆으로 늘어져 있었다. 푸른 피부에 어울리는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보석처럼 빛을 발하고 있었지 만 그 눈빛은 싸늘하고 냉혹했다. "린...린이야! 린의 유령인가봐!" 가빈이 엉엉 울면서 중얼거리는 것과 달리 나는 숨을 들이키는 순간 다른 냄새를 맡았다. "넌 누구냐?" 녀석은 말을 하지 않고 물끄러미 울고 있는 가빈을 바라보았다. "린..." 가빈이 막 뭐라 말하려는 찰나 차갑고 딱딱한 어조로 녀석이 물었다. "린이라고 하는 것은 린 에브레인 에고린 더 마스라탈, 에브레인을 말하는 것이냐?" 가빈이 고개를 번쩍 들고 날 돌아보았다. 나도 녀석을 쏘아보듯이 바라보 았다. 키가 린 보다 조금 더 크고 어깨가 더 넓고, 어딘가 더 나이가 들어보인다. 눈매는 조금더 날카롭고 입매는 엄격하다. "넌 누구냐? 린의 가족인가?" 내가 묻자 녀석은 고개를 돌려 날 정면으로 바라본 뒤에 천천히 대꾸했다. "나는 로손 에브소핀 에고린 더 케타라니. 에고린가의 가주다." "무척 긴 이름이네.." 에블리 녀석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푸른 아인족은 아무런 내색 없이 날 정면으로 바라보며 조용히 물었다. "에브레인은 어디 있는가?" ".....린의 가족이세요?" 가빈이 주저하며 물었다. 녀석은 입을 다문 채 대답을 기다렸고 나는 린 못지 않게 녀석도 과묵하다 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린은 대지의 여신에게로 돌아갔다." 녀석의 푸른 눈썹이 꿈틀 했다. 그리고는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흔들림도 없이 주욱 계속해서 진지해진다. "붉은 달을 채우고 돌아갔는가?" "붉은 달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어찌되었든 몸은 대지의 여신에게 머리는 창공의 여신에게 돌아갔다." 내가 대꾸하자 녀석은 팔짱을 천천히 끼고 적의감을 떨쳐냈다. 사방을 조 이는 듯하던 살기도 잦아 들었다. 침묵하는 얼굴. "....마음을 더럽히지 않았는가?" 뭔 소리인지 잘 모르겠다. 가빈이 고개를 갸웃하면서 대꾸했다. "무슨 의미지요?" "....어떻게 죽었는가?" 녀석은 한숨도 쉬지않고 고요한 어조로 물었다. 가빈의 눈안에 눈물이 차 올라왔다. "에메스, 바보같은 공작을 구하고 죽었어요. 괴물같은 사인족들을 상대로 공작을 지키려다 죽어버렸어요!" 녀석이 엉엉 울면서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내며 말하는 동안 푸른 아인족은 침묵하면서 나를 돌아보았다. "마음을 더럽히지 않았는가?" 멋지게 죽었냐고 묻는 것인가? "내 명령을 지키려고 용감하게 싸우다 죽었다고 말하면 되겠나?" 내가 말하자 녀석이 다시 날 바라본다. "에브레인을 산 것은 당신인가?" 스산한 슬픔이 푸른 눈동자에 배어 나왔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녀석은 나를 향해 조용히 고개를 돌려 물었다. "에브레인에게 당신은 이름을 주었는가?" 무슨 의미인지 이건 대체.... 본디 푸른 아인족이 쓰는 말은 다른 것인가? "이름을 주었다는 것은....무슨 의미냐?" "이름을 주었다는 것은 살려 주었다는 의미, 마음을 더럽히지 않았다고 하 는 것은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기게 되었다는 것." 녀석이 명료하게 대꾸했다. "그런 거라면 확실히 그랬다. 넌 누구냐?" 녀석은 한동안 내가 아닌 허공을 바라보았다. "로손 에브소핀 에고린 더 케타리니, 에고린가의 가주로서, 에브레인의 형 으로서 당신에게 감사를 표하겠소." 녀석이 갑자기 고개를 숙여 보였다. 멍청히 있던 가빈과 나, 에블리라는 놈은 그의 난데없는 말에 어안이 벙벙 해졌다. 엷은 미소를 띄운 그는 고개를 들고 나를 정면으로 향해 보았다. "마음을 더럽힌 아이에게 이름을 주고, 그 것을 씻을 기회를 준 당신에게 감사하오, 인간이 아닌 분, 그대의 가족의 이름을 알고 싶소."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대체 뭔 소리를 하는 지 알 수가 없었다. 본래 다른 아인족들과 달리 푸른 아인족들이 폐쇄적이라는 것은 들어왔지만 이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 다. 린이 말수가 그렇게 없었던 것도 무리가 아니다. "나는 쿠베린이다. 묘인족의 왕이지." 그가 고개를 끄덕이고 가볍게 무릎을구부렸다가 폈다. 그리고는 나를 정 면으로 바라보며 묻는다. "그럼, 쿠베린, 에브레인은 어디에서 돌아갔소?" "...인간들의 땅에서." "그 그릇은 어디에?" "...시체를 묻는 거라면 태웠다." 골치 아프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돌렸다. "알려 주셔서 감사하오." 녀석이 돌아서서 막 가려는 순간에 에블리가 갑자기 소리쳐 물었다. "잠깐만!" 녀석이 돌아보자 에블 리가 다급하게 물었다. "당신은 지금 그 쪽 숲에서 온 거지요?" 무심한 얼굴을 한 그는 에블리를 잠시 일별한 뒤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쪽에 혹시 시체같은것 못봤소?" "봤소." "그, 그럼...그 시체들이 있는 곳으로 날 안내해 주시오!" "...냄새를 따라 그냥 가기만 해도 될거요." 무심한 얼굴이었다. 지나칠 정도로 그 무심한 얼굴을 보니 가슴 한 구석이 왠지 지끈 지끈해진다. "자, 잠깐만요! 린의 형이라면..저기 저기...린의 이야기라도 해 주세요!" 가빈이 벌떡 일어나서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이번에는 나도 막지 않았다. 나도 궁금했으니까. 가빈의 말을 듣고 그는 잠시 침묵했다. 망설인다기 보단 생각에 잠기는 것 같아 보였다. 나는 왠지 허탈한 기분에 사로잡혀서 바위 위에 걸터 앉았다. 이 유령의 숲이라는 곳은 유령과 진짜 인연이 깊은 모양이다. 나는 순간적으로 린의 유령이 나타난 줄 알았었다. 턱을 괴고 우울한 기분에 사로잡혀서 나는 바닥을 본다. 꺼져가는 모닥불 의 시커먼 장작들을 본다. 아이는 죽었고 그의 형은 나에게 찾아와 그의 행방을 묻는다. 요즘은 기분 좋은 일이 하나도 없구나 하고 멍청히 앉아 있을 즈음 문득 고개를 들고 숲 너머를 바라보았다. 멀리서 천둥소리가 들려온다. 아니 천둥 소리가 아닌 지도 모른다. 이건 의외로 위험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천천히 일어서려는 순간 위로하듯이 모드야가 나의 팔목을 잡았다. 엘리야에서는 린의 죽음은 유명하다. 내가 유명하니까 린도 따라서 유명해 진 것이고 다들 린에 대해 알고 있다. 말이 지나치게 많은 취객들과 선원 들이 저마다 나름대로의 전설을 가지고 싶어서 안달하는 동네가 엘리야니 까. 콰릉 콰릉하고 다시 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아니 소리가 다가오고 있다. "가빈." 그 린의 형이라는 녀석에게 달라붙어 있던 가빈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 다. 어느새인가 진지한 얼굴이 된 에블리라는 녀석이 심각하게 자기 허리 춤의 은빛활을 꺼내들고 눈쌀을 찌푸리고 있다. 녀석이 향하고 있는 곳도 내가 바라보고 있는 쪽, 그리고 린의 형이라는 지나치게 긴 이름을 가진 그 놈도 내가 바라보고 있는 쪽을 바라보고 있다. 가슴이 뜨거워 지고 불쾌감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흥분감이 점점 가슴 아래서부터 치밀어 오른다. 심장이 뛴다. 나의 심장들이 강적을 기대하며 뛰고 있다. 내 혈관에서 굴러 다니는 내 붉은 피는 지금 나타날 놈이 강한 놈이라는 것을 확실히 강조하고 있었다. 나는 모드야의 몸을 뒤로 밀치고 나타난 놈을 상상했다. "대체 뭐지?" 낮게 에블 리가 중얼거렸다. 그의 얼굴이 희게 탈색되고 있었다. 히멀건한 얼굴은 더 희어진다. 이 근처에서 살고 있는 그레이트 오크나 트롤들은 하나도 보지 못했다. 본 것은 갈색아인족의 시체더미 뿐이었다. 그럼 결국 내 앞에 지금 나타날 놈 은 갈색아인족을 몰살시켜서 나무에 주렁 주렁 매달아 놓은 장본인일 것이 다. 대체 이건 누구일까..... 요 근래 강력한 놈이 나타났다는 소문은 들은 적이 없는데.... KUBERIN.... 그것은 언제나 내 창문을 두들긴다. 알 수 없는 두려움으로 창문을 열면 막을 수 없는 힘으로 고개를 들이미는 사나운 짐승. 그것이 운명. 4 가슴이 두근 두근하기 시작했다. 온 몸의 감각이 기이하게 지잉 지잉 울리고 내 손가락끝에서 뭔가 알 수 없는 기운이 일어나 전신을 휘감아 올린다. 바람이 뺨에 닿는 것이 어지러 울 정도로 선명하게 느껴지는 것을 느끼면서 나는 걷잡을 수 없이 웃음이 새어나오려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우흐흐흐흐흐흐흐..." 놀란 녀석들이 일제히 날 미친 놈 보듯 바라본다. 특히 내 옆에 답삭 붙어있던 모드야는 화들짝 놀라서 뒤로 세 걸음이나 단 숨에 물러섰다. 과연 과연 짧은 다리에도 재빠른 몸놀림이다. 가빈이 날 흘긋 흘긋 바라보며 물었다. "괘, 괜찮으세요?" "우흐흐흐흐..." 나는 웃음을 억누르지 못하면서 두 손을 허리에 얹고 가슴을 폈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선명해진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몇번이나 아우성을 치대도록 고통을 당해도, 다리가 댕강 댕강 부러지고 심장이 짓이겨져도 묘인족은 묘인족, 우리들 본연의 피는 사라지지 않는다. "이봐, 너, 미쳤냐?" 에블리란 놈이 물었다. 나는 그 놈을 향해 히죽이 웃어보였는데 그 와중에 송곳니가 드러났는지 이 놈이 갑자기 어마 뜨거라 하는 자세로 후다다다닥 뒤로 다섯 걸음 물러서더니 새삼 스레 외쳤다. "너 인간이 아니지! 그것을 이제서야 깨달은 이 놈도 어지간히 경험 부족의 얼간이다. 나는 린의 형제란 녀석이 살벌한 빛을 띄운 푸른 눈으로 날 흘긋 바라보다 말고 그 뭔가가 다가오는 것을 기다려 고개를 돌리는 것을 지켜 보았다. 녀석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흥분과 공포와 살의가 녀석의 몸안에 서 피어올라오는 게 보인다. 역시 놈도 전사인 것은 분명한 것 같아 보인 다. "저기.." 가빈이 뭐라 말하려다 말고 옆에 선 모드야와 나란히 서서 나에게 불쌍한 표정을 지으면서 가냘프게 꼬리를 흔들어 보였다. "그 애 데리고 이 자리를 떠나." "에?" "여길 뜨라구." "에?" "에가 아냐! 얼간아. 지금 곧 여기서 즐거운 파티가 벌어진단 말이다!" 나는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와라 와라 와라! 나는 이 자리에서 가장 강한 자, 이 땅 위 살아있는 자들 중에서 가장 강 한 자. 내가 바라는 것은 강한 상대와의 싸움, 그 싸움으로 죽더라도 이것만은 그 만둘 수 없는 심장을 짓이길 정도로 호쾌한 자극. "에..에...에에..어.엄청나...엄청난 영기!" 에블리란 녀석이 자신의 활을 쥔 채 큰 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이 기운! 이건! 이건!" 녀석이 비명과도 같은 소리를 내지르는 순간 그 뭔가가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검푸른 삼림위로 고개를 내민 그 것은 아주 길고긴 목을 가지고 있었다. 검푸른 비늘이 움직일 때마다 햇빛에 부딪쳐 빛을 발한다. 그것은 아주 거 대한 대가리를 거짓말 처럼 움직이면서 푸른 창공에 빛을 발하고 있었다. 마치 창공에 빛을 발하는 것이 녀석의 사명인 듯 꿈틀거리는 그 거체(巨 體)에 빛나는 태양이 작열하며 사방으로 햇빛을 반사시키고 있었다. 심지 어는 눈이 부실 정도였다. 그 대가리가 고개를 쳐들면 태양이 가린다. 세상 에! 태양이 가리는 거대한 체구라니! 아니, 아니 대가리만 가지고도 태양을 가리는 것이다! 쿵 쿵 하는 발 걸음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녀석이 숲 속 위에 유유히 대 가리만 들고 서 있는 모습은 말 그대로 장관이었고 그 자리에 있던 우리들 모두를 아연하게 했다. 나는 지랄맞은 반응을 보이고 있는 에블리란 놈을 밀치고 앞으로 나섰다. 그 거대한 대가리에 어울릴 거대하고도 큼직하며 오만하게 생겨먹은 두 개 의 좌우로 길게 찢어진 눈동자가 툭 튀어나온 매끄러운 이마를 슬그머니 흔들며 날 바라본다. 눈은 호안석마냥 가늘고 긴 수직의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고 황금색에 가까 운 누런색. 그 누런색의 눈동자가 번쩍 번쩍 빛을 발하고 있으니 황금색이 라고 해두어야 할까. 몸은 아예 보이지도 않지만 최소한 대가리를 둘러싼 껍데기는 검푸른 색깔 로 움직일 때 마다 햇빛이 반사되어 오색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굳이 간단히 표현하자면 지나치게, 조금 지나치게 거대한 뱀 대가리..정도 라고 해야 되나? "태양을 가리는 거냐?" 나는 낮게 중얼거리면서 녀석을 바라보았다. 녀석은 날 바라보고 있었다. 아주 천천히 천천히 나를 주시하고 있는 동안 뒤에 서 있던 린의 형제라는 놈이 내 옆으로 걸어왔다. 다른 놈들은 말 그 대로 움직이지도 못한 채 굳어 서 있는 것 같았다. 무리도 아니다. 전신이 달달 떨릴 정도로 위압적이고도 강력한 기운이 사방을 덮어서 질식시킬 것 같았다. "넌 뭐냐?" 내가 물었다. 녀석은 거대한 대가리를 아래로 내린 채 날 주시하고 있었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다른 것들은 신경도 쓰지않는 녀석의 모습에 나는 이 놈이 범상치 않다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 다른 놈들은 허수아비에 불과하 고 이 내가 바로 엄청난 존재라는 것을 금방 눈치챌 수 있는 자들은 그렇 게 흔하지 않은 것이다. 그 거대한 눈동자가 천천히 흔들렸다. 그리고 잠시 후에 거짓말 처럼 녀석의 몸이 스르륵 사라졌다. 태양을 가리던 자못 크던 그 거대한 대가리가 사라지자 그 대가리가 있던 공간이 무척 허전해 졌다. "으왓!" 뒤에서 시끄러운 놈들이 비명을 올려댔지만 나는 놀라지도 소리지르지도 않았다. 녀석은 사라진 게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기때문이었다. 녀석이 이렇게 팍팍 기운을 풍기고 있는데 모습이 안 보인다고 해서 놀랄 것은 하 나도 없다. "어디로 간거죠?" "설마 환상은 아니었겠죠?" 급히 가빈과 모드야가 내 옆으로 뛰어 왔다. 에블리란 녀석은 경계를 흐트 리지 않으면서 중얼거렸다. "강력한 영기야!영기!" "대체 그건 뭐죠? 그 거대한 괴물은?" 저마다 마구 떠들어 댈 무렵에도 나는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녀석들이 내가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을 깨닫자 마자 내가 뭘 보고 있는가 하고 일제히 고개를 돌린다. 침묵이 순간적으로 감돌았다. 움직이는 수풀, 인기척이라기 보단 무심하게 바람이 수풀을 건드리고 짓밟 는 듯이 보일 정도로 무심해 보이는 움직임. "넌 누구냐?" 그렇게 말을 걸고 나타난 것은 그 대가리가 있던 숲 속에서 걸어나온 소년 이었다. 검푸른 머리칼과 노란 눈을 가진 그 놈은 척 보기에도 모델이 나인 듯 보 인다. 나와 비슷한 체구, 나와 비슷한 얼굴생김새, 나와 비슷한 옷차림, 나 와 비슷한 말투를 하고 있었다. 독창성이 없는 놈이군. 왠지 불쾌해졌다. "넌 뭐냐?" 노란 눈을 일렁이면서 녀석이 나를 아래 위로 훑어보았다. "재미있군, 넌 제법 강한데." "건방진 자식아, 위에서 대가리 흔들다가 내려온 주제에 말이 많군." 내가 팔짱을 끼며 그렇게 대꾸하자 내 옆에 있던 아인족 녀석과 뒤에 있던 일행들 모두가 흠칫했다. "저...저 자가...아까 그 괴물?" 가빈이 숨을 삼키는 순간 나는 녀석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그 강한 기운은 점점 강해진다. 그렇지만 이 놈의 정체는 여전히 알 수 없 었다. 문득 에블 리가 큰 소리로 외쳤다. "왜 평안을 찾지 못하는가!" 달달 떨고 있는 주제에 녀석이 외치고 있었다. 돌아보니 옆에 선 푸른 아인족 못지않게 시퍼렇게 질린 녀석이 두 손으로 은빛 활을 쥔 채 외치고 있었다. 녀석의 다리가 얼마나 흔들리는지 옆에서 손가락으로 쿡 찌르면 발라당 넘어져서 다신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이 보인 다. 흥미있다는 듯이 녀석도 에블리를 바라보았다. 에블리는 눈이 마주치자 진지하게 외쳤다. "그대는 잠들어야 해! 왜 여기서 이렇게 헤메이는 거지?" 뭔 소릴 하고 있는 거지? 내가 어리벙벙한 채로 녀석을 보고 있는 동안 갑자기 노란 눈의 재수없는 녀석이 조용히 말했다. "왜 내가 잠들어야 하지?" "왜냐면 그대는 죽었으니까!" 에블리는 마치 비명을 지르듯이 외쳤다. 침묵. 에블리는 내 옆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아니 다시 말하자면 내 옆으로 걸어 온 것이라기 보다는 내 앞에 선 그 놈 앞으로 걸어왔다고 하면 옳을 것이 다. 그 앞에 다가오더니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말한다. "죽음에서 돌아온 자여! 그대는 돌아가야한다! 이곳은 그대가 속한 곳이 아니다!" 그의 은빛 활이 갑자기 빛을 뿜었다. 나는 놀라서 옆으로 물러서며 에블리란 녀석과 그 뱀대가리 녀석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활이 빛을 뿜으면서 빛덩어리로 이루어진 화살을 만들어 팽팽히 활 시위가 당겨지는 동안에도 뱀대가리는 미소짓고 있었다. "내가 죽었다고?" "그, 그렇다!" "나는 죽지 않았다. 어린 자여." 그 녀석이 뻔뻔하게 말했고 나는 주둥이만 놀리지 말고 한바탕 했으면 하 고 조금 초조해졌다. 이 자는 내가 본 이래 가장 강한 자였고 그게 유령이 든 뭐든 사실 신경쓰지 않을 생각이었다. 강함이라는 것은 그 것만으로도 경외심을 불러 일으키고 그것만으로 여자들의 가슴을 쥐어 짜며 그것만으 로도 사내들의 기분을 저 멀리 무저갱의 지하로 집어던져 버린다. "적당.." 뭐라 말하려 하는 순간 에블 리가 쥐어 뜯듯이 말했다. "용족은 다 멸족했다!" 머리가 띠잉 해지는지 뒤에 선 가빈과 모드야가 뒤로 화들짝 물러섰다. 푸 른 아인족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로서도 대 체 어찌되어 가는 것인지 궁금하겠지. 나도 궁금하니까. "....그런가?" 뱀대가리가 동요없이 말했다. 그러나 그 노란 눈은 폭풍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엄청난 기운이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자들의 숨통을 막고 그 주변에 널린 숲속의 작은 짐승들을 공포와 고통으로 휘어 감았다. 압박감, 압박감, 정신이 몽롱해질 것같은 강한 기운, 숨이 막힐 것 처럼 거대한 존재가 내 앞에 서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싸웠던 모든 존재가 나와 대등했지만 이 존재는 나와 대등하지 않았다. 내가 사랑을 속 삭이는 여신들도 이 존재에 대해서는 고통을 느낄지도 모른다. 이 존재가 지상에 존재하고 그저 서 있는 것만으로도 모든 생물체는 고통을 느낄 것 이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원초적인 공포가 가슴 밑에서 밀려나오는 것은 내가 그 의 강함을 알기 때문이오, 내가 그와 맞부딛쳐 싸운다 해도 그것이 진실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용족인가?" 내가 묻자 그는 나를 새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기묘한 빛이 떠올랐다. "그대는 기절하지 않는군." 내가 뒤를 돌아보니 사방은 정적에 휘감겨 있다. 온 숲속이 다 죽어버린 것같다. 그러나 죽지않았음을 나는 안다. 용족은 생물체를 함부로 죽이지않 는다. 가빈과 모드야, 에블리는 물론이고 푸른 아인족 마저 혼절해서 그 자리에 널부러져 있었다. 마치 시체처럼 널부러진 그들을 바라보면서 나는 다시 뱀대가리를 바라보았다. "그대는 용족인가?" "그렇다. 나는 고룡족의 하나, 셀러로니 에발룬." 그가 조용히 말했다. KUBERIN.... 그것은 언제나 내 창문을 두들긴다. 알 수 없는 두려움으로 창문을 열면 막을 수 없는 힘으로 고개를 들이미는 사나운 짐승. 그것이 운명. 5 아주 예전, 기억도 할 수 없는 머나먼 옛적에 오로지 존재하는 것은 엘프 와 거인과 용족만이 살던 그 때에, 엘프와 거인족이 서로 대화를 나누었다. 엘프는 용들의 날갯짓이 싫었고 그들의 존재가 너무나 거대해서 싫었으며 그들이 너무나 독선적이어서 싫었고 거인족은 용족이 너무 강해서 싫었다. 용족이 날개를 펴고 허공을 날면 거인족은 허리를 굽혀야만 했다. 만약 반 듯하게 선 거인족이 용족과 부딪치면 용족은 거인족을 부수고 그 뼈와 그 살을 짓이기며 지나갔다. 거인족은 용족을 증오했고 그들의 독선과 강력한 힘을 증오하여 엘프와 손 잡고 용족의 알을 해하기 시작했다. 처음 용족들은 자신들과도 같은 강대한 존재를 감히 적대시하는 거인족과 용족을 무척이나 어처구니 없게 생각했고 그 다음에는 그들을 멸시했다. 그들은 너무나 강했고 그들은 용들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교활한 엘프들은 꾀를 생각해냈다. 아직 어린 용들과 용의 알 중에서 암컷만 골라 죽였던 것이다. 암컷이 없 다면 용은 아이가 생겨나지 않는다. 그렇게 해서 다시 무수한 세월이 지나 용족의 숫자는 줄어들게 되었다. 그리고 용족들의 쇠락의 시기가 왔다. 창조신 에르타마나는 용족에게 멸망을 노래했다. 그들은 너무 강대했고 지 나치게 강하여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고 있음을 천명하고 창조신 에르타마 나는 엘프와 거인들의 오른 편에 섰다. 용족이 하나 둘 죽어갔다. 지상 위에 가장 거대한 존재가 죽어갔다. 엘프와 거인들의 습격을 받고 죽어가는 용족들은 신을 원망했다. 용족의 왕 헤카에타눔은 자신의 세 개의 심장을 뜯어 내어 자신들의 창조신 아르 타마나를 저주하며 대지 위에 던졌다. 그 원망하는 마음으로 죽어가는 용 왕의 피가 흘러서 세 가지의 보석을 이루었다. 그의 심장이 깨지면서 세 가지 보석이 생겨나고 그 보석은 흙에 묻혔다. 대지의 여신은 용족을 안쓰럽게 생각했다. 자비롭고 풍요로운 그녀는 두 손을 벌려 세 개의 보석을 안아 올려 그 보 석에 살과 피와 힘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창공의 여신이 새로이 나타난 세 종족을 바라보고 그 종족에게 미소짓자 그들이 숨을 내쉬기 시작했다. 창 공의 여신은 그들에게 숨결을 불어넣어 삶의 기운을 뿜어내 완성시킨 것이 다. 첫 번째 나타난 붉은 보석의 종족은 여신들에게 키스하면서 달려나갔고 두 번째 나타난 푸른 보석의 종족은 창공의 여신에게 감사를 표하며 날아올랐 고 세 번째 나타난 노란 보석의 종족은 여신들의 자비에 감사하며 걸었다. 그리하여 고대의 세 종족은 용족의 죽어버린 심장에서 태어나 뛰고 달리고 날기 시작했던 것이다. 세 개의 종족들이 어우러져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자신들을 막아서는 거인 족과 싸우는 일이었다. 날개가 달린 조인족은 용족의 나는 힘을, 사납고도 교활한 사인족은 용족의 교활함을, 거칠고 오만한 묘인족은 용족의 살기를 얻었다. 그들 세 종족은 서로 반목하고 서로 다투면서 거인족과 대결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거인족의 마지막 거인의 왕 오롤프의 눈을 꿰뚫은 것 은 조인족이오, 오롤프의 다리를 자른 것은 사인족이며, 오롤프의 심장을 가진 것은 묘인족이었다. 그리하여 이들 세 개의 부족 중에서 가장 강한 것은 묘인족이 되었다. 그리고 그 때부터 서로의 강함을 질투하는 세 종족의 반목이 시작되었다. 거인족의 피에서 무수한 아인족이 생겨나고 아인족 중에서 가장 아이를 많 이 낳는 인간이 지상 위를 덮기 시작했다. 거인족이 멸망하던 그 순간 중 립을 지키고 뒤로 물러났던 엘프들을 멸시하며 아인족들은 사방으로 퍼져 나갔으며 그리고 그 보다 더 많이 아이를 낳았던 인간들이 다른 아인족들 위에 서서 자신도 아인족이라 불리는 자들 중에 하나인 주제에 스스로를 '인간'이라 불렀다. 지금 내가 굳이 이야기만 들은 신화를 떠올리는 건가. 그건 간단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 내 눈앞에 있는 자가 진짜 용족이라 한다면 대체 위의 전설은 뭐가 되는 거지? 나는 녀석을 다시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신화를 생각해내자 왠지 마음이 가라앉았다. 내가 이 놈에게 공포를 느끼 는 것은 당연하다. 놈은 용족이라고 하니까. 뭐 별로 자존심이 상할 것 까 지는... 하지만 뭐 용족이라고 해도 내가 꼭 이기지 못하리란 법은 없으며 또 한편 으로는 이 놈이 진짜 용족인지도 불확실하며 또 나 자신을 위로하자면 어 떤 생명체도 용족 앞에서는 쫄아드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쿠베린님이 쫄아들면 곤란해. 나는 이 땅위에서 가장 대단하신 분이니까. 머리를 굴리면 침착성을 얻는다. 어차피 공격할 기회는 잃었다. 그럼 침착하지 않으면 안된다. 눈앞의 존재는 절대 나의 하수가 아니다. 등줄기가 빳빳해진다. 스스로를 셀러로니 아발룬이라고 말한 녀석은 내 앞에서서 자신의 손바닥 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너도 내가 죽었다고 말하는 건가?" "몰라, 그러나 확실한 것은 기운이 보통이 아니란 거지." 그는 침묵하고는 발을 굴러보였다. 마치 이 발로 디딘 모습을 보라는 것 마냥 움직여 보인다. 어쩐지 약간 불 쌍한 기분도 들긴 하는데.... 뭐, 저녀석의 발은 보통의 발로 보인다. 나는 슬쩍 발끝을 움직여 녀석의 정강이를 갈겨보았다. 터억 하고 꽤 세게 찼지 만 녀석은 아픈 얼굴이 아니다. 그렇지만 분명히 채였다. 유령이든 뭐든 손 에 잡히지 않는 허깨비는 아닌 셈이다. 그렇다면 쿠욱 찌르면 분명히 크윽 하고 비명을 올리며 피를 흘릴 것이다. 별로 무서울 것도 없네, 뭐. "무슨 짓야?" 녀석이 날 쏘아본다. 나는 팔짱을 낀 잘난 척하는 자세로 녀석의 정강이를 여전히 발끝으로 톡톡 건드려 보며 말해주었다. "확인해 봤어, 진짜 허깨비같은 유령인지." 그 말에 그는 기가 막히다는 듯 쓴 웃음 비슷한 것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는 조용히 물었다. "너는 누구냐?" "이 지상위에서 가장 대단한 묘인족."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녀석은 날 조금은 황당하다는 듯 정면으로 보며 말 했다. "내가 잠을 깬 이래 너 같이 강한 녀석은 아무도 없었다." "그건 당연하지. 그런데 잠이라구?" "그렇다. 나는 잠에서 깼다. 그리고 서 보니 이곳 숲이었다." "저 갈색아인족들을 죽여 주렁 주렁 매단 것도 당신인가?" "아니다. 그것은 나의 시종이다." "시종?" 내가 아연해 질 무렵 거의 기척도 없이 내 앞으로 다가온 놈이 있었다. 숨 이 막힐 정도로 놀랐다. 이 내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속도라니! 내 바로 옆에 선 녀석은 빙글 빙글 웃는 듯한 얼굴의 갈색머리 소녀였다. 키가 작은 게 아직 13세 가량 되어 보였는데 그녀는 빙글 빙글 웃고 있었 다. 그리고 눈 색깔이 노랑이고 팔뚝에는 뭔 비늘 비스끄무리한 것이 박혀 있었다. 그 팔뚝을 보니 문득 기억나는 것이 있었다. "넌... 누가 만들었냐?" 내가 그렇게 묻자 소녀는 여전히 빙글 웃으면서- 그다지 매력적이라곤 볼 수 없다. 웃기만 하는 인형따위 뭐가 재밌냐?- 대꾸했다. "주인님께서." 나는 다시 용족이라고 스스로 자처한 녀석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네가?" "아니, 내게 잠을 지운자." "뭐라구?" "내가 잠에서 깨어나 보니 난 이곳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들 아인족들이 나에게 시비를 걸어왔고 그 것을 이 애가 해결해 준거지." "하아." 내 알바가 아니긴 하지만 어째 이야기가 이상하게 돌아간다. 노란 눈을 한 계집애가 날 바라본 것은 처음이 아니다. 게다가 이푸르딩 딩한 팔뚝도 처음이 아니고 왠 잘난 척하는 녀석 옆에 달라 붙어서 주인님 운운하는 것도 처음이 아니다. 처음이 아닌 것이 이렇게 겹쳐지면 왠지 찝 찝해진다. "당신, 누가 잠재웠다는 거지?" 자장가라도 루루 랄라 불러주었다는 건가? 아니면 진짜 누구 말대로 마법 의 봉인이라도 있었다는 것인가? 그는 조용히 날 주시했다. "나의 본체는 이 땅아래 있다." "이 땅 아래?" 내가 무의식중에 고개를 아래로 내리는 순간 조그마한 꼬마계집애가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파아아악 하고 내 옆으로 다가오는 것은 그게 뭔지알 아보기도 전에 내 살갗을 찢어온다. 나는 뒤로 몸을 제끼면서 동시에 다리 를 뒤로 돌려 올리며 공격해오는 녀석의 목줄기를 뒤꿈치로 걷어찼다. 그 러나 이것도 상호간에 무위로 끝난다. 계집애는 나를 공격하는 데에 실패 했고 나는 녀석을 공격하는 데에 실패했다. 그러나 한번 불이 붙은 싸움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가는 들불과 같은 것, 다음 순간 나는 숨을 삼키면 서 손톱을 뽑아내어 계집애의 목줄기를 뜯어갔다. 계집애의 노란 눈이 빛 을 발한다. 그리고는 순간 손을 내뿜자 그 손바닥 안에서 믿을 수 없는 물 건이 튀어 나와 내 팔뚝을 휘감아 왔다. "엑?" 이게 대체 뭐란 말인가. 내가 오랜동안 무수한 녀석들과 싸우고 뒤집어져 봤지만 이런 물건은 내 생전 처음본다. 계집애의 손바닥안에서 튀어 나온 것은 살아있는 듯 아가리를 벌리고 튀어 나오는 뱀 대가리와 같은 것이었다. 그 것들이 튀어 나오자 마자 내 팔뚝 을 휘감으면서 불끈 불끈 치솟아 오르는데 나도 모르게 끔찍해서 달랑 잘 라버렸다. 내 다른 손톱이 그 것들을 잘라버리는 순간 시퍼런 액체가 튀어 올라왔다. 그리고 팔뚝에 달라 붙는다. "쿠욱." 치이이익 하고 살갗에 불이 붙었다. 앗, 뜨거라! 나는 내 팔뚝에서 타오르는 푸른 불길을 노려보면서 재빨리 계집애의 측면 으로 훑어내렸다. 계집애의 팔뚝이 내 팔뚝과 맞닿자 역시 지독한 고통이 등줄기로 흘러내린다. 까칠 까칠한 비늘이 튀어나와 내 살을 찔러댄다. 금 새 팔뚝이 너덜 너덜해졌다. 제기랄! 열받은 순간에 나는 한 팔에 힘을 주고 전투모드로 바꾸었다. 이렇게 한 팔에만 힘을 주어 전투모드로 바꾸면 강하고 시커먼 털들이 튀어 나오면서 팔의 여린 살갗이 모두 스며들어가 치유된다. 나는 그 상태로 계집애의 체 액을 의심스레 바라보면서 돌진했다. 공중으로 몸을 띄우는 것보다는 역시 아래를 걷어치우는 것이 좋다. 계집애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나의 변화된 팔을 들여다 보면서 히죽 히죽 웃고 있다. 그 면상을 보자 속이 부글 부글 끓어 올라 울화통이 터져나간 다. 계집애 따위에게 져서야 내 체면이 말이 아니지! 바닥을 긁듯이 몸을 낮추면서 나는 계집애의 얼굴을 향해서 팔뚝의 털을 날렸다. 파사사하는 소리와 함께 공기를 찢으면서 계집애의 얼굴과 전신으 로 강침이 날아간다. 그리고 계집애가 피하느라 몸을 웅크리고 구르는 찰 나에 나는 바닥에 구르는 돌멩이 하나를 주워들어 계집애의 정면을 향해 집어던졌다. 퍼어억! "아악!" 과연 계집애는 내 생각대로 그다지 전투경험이 많지는 않다. 자고로 싸움은 하면 할수록 는다. 계집애가 아무리 뛰어난 체력과 능력을 가지고 있어도 경험이란 것은, 특히 싸움의 경험이란 드잡이 질을 얼마나 많이 해 봤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계집애의 복사뼈가 박살이 났다. 피와 뼛조각이 엉겨서 피를 울컥 울컥 쏟 아내고 있는 것을 바라보면서 나는 다시 한번 달려나가면서 비틀거리고 있 는 계집애의 목줄기를 훑어갔다. 나에게 싸움을 건 녀석을 그대로 남겨둔 다면 그건 체면이 말이 아니지! "기다려!" 갑자기 녀석이 끼어들었다. 나는 이렇게 건방지게 끼어든 녀석의 턱주가리를 걷어찼다. 퍽 하고 소리가 나긴 했지만 녀석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내 발목을 잡아챈 다. 그 잡아챈 발목 덕에 나는 뒤로 튕겨올라가 다시 공중을 한바퀴 돌고 서야 착지할 수 있었다. 젠장할, 조금만 더 했으면 목을 뎅강 잘라버릴 수 있는 것인데! 녀석은 나를 물끄러미 주시하다가 자신의 옆에서 주저앉은 채 신음하는 계 집애의 모습을 무심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마치 석상처럼 무심한 얼굴 로 계집애의 부서진 발목을 잡더니 인정이고 사정이고 보지 않고 말 그대 로 뚝 부러뜨렸다. "아아아아악!" 계집애는 비명을 올리며 혼절했다. 부러져 버린 발과 발목, 말 그대로 '부러진' 발목을 하고 피를 철철 흘리며 쓰러진 계집애를 묵묵히 바라보던 녀석은 다시 날 바라본다. 이상한 놈일 세, 이 여자애를 구해주려고 날 막은 게 아니었던가? 녀석은 혼절한 여자애를 천천히 살펴 본다. 그렇다고 해서 여자애를 치유 하려는 것으로는 보이지않는다. 마치 그 계집애의 몸안에 들어있는 핏줄기 나 그 몸안에 흐르고 있는 피를 검사하듯이 살피고 있을 뿐 살리려는 노력 도 치유하려는 노력도 없었다. 어린애가 무심히 그 자그마한 곤충의 다리를 뚝뚝 부러뜨리고 모가지를 뎅 강 잘라 그 반응을 지켜 보는 듯 녀석은 계집애의 몸과 다리의 반응을 지 켜 보고 있었다. 처음 보는 물건을 바라보는 양 무심한 그 얼굴. 그 얼굴에는 동정심도 우울함도 그렇다고 해서 자상함도 보이지않았다. 그 얼굴은 좋아하지 않는다. 감정이 없는 그 것은 나와는 다른 존재, 살아 있는 자들과는 다른 존재임을 강조하는 듯한 무심한 존재,신이나 전설속 에 나오는 움직이는 석상과도 같은 존재. 재수 없는 존재다. "야." 그렇다고 해서 이 놈이 신은 아니잖아? 이렇게 멍청한 신은 있을 수 없지. 대지의 여신도 자연의 여신도 무심하지만 법칙은 흘러가는 것, 호기심을 위해 멀쩡한 다리를 부러뜨리진 않는다. 놈은 그저 존재하기만 하는 허깨 비 같은 얼굴로 계집애를 바라보고 있다. 내가 말을 걸자 녀석은 마치 이 곳에 존재하지 않는 구름위의 존재처럼 초연한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었 다. 방정맞은 바람이 주위의 수풀을 바락 바락 건드리며 스쳐 지나가는 동안 녀석과 나는 그저 마주 보고 서 있었다. 이런 어색한 가운데에 내가 끼어 들어 뭐라고 해야 되나? 아니면 그냥 가버려? 하지만 이 정도로 강한 녀석 은 흔치가 않으니까 한 번 붙어 보고 싶은데. 내가 한 팔의 전투모드를 풀자 마자 녀석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며 조용 히 물었다. "이 아이를 죽이고 싶은가?" "뭐, 별로. 죽이고 싶은 것은 아니야, 난 싸우는 게 재밌을 뿐 살인마는 아 니거든." 그렇게 말하고 나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녀석이 내 등줄기를 찢을지도 모르지만 어찌되었든 바닥에 이리저리 돌멩 이처럼 구르고 있는 모드야와 가빈의 몸통을 집어 올려 내 어깨에 메고 옆 구리에 차고 어느정도 누울 만한 자리를 발끝으로 톡톡 차며 올려놓았다. 내가 그런 짓을 하는 동안 녀석은 날 물끄러미 보고만 있었다. 피를 줄줄 흘리던 계집아이는 여전히 널부러져 있다. 녀석은 날 주시하고 있다. 눈알이라도 빼주련? 대체 왜 저렇게 보고만 있는 거야? 짜증나는 놈일세. "누가 재우고 누가 깨웠어?" "......." 녀석은 말 없이 보다가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그리고 주변을 훑어본다. "잠을 자는 것은 우울해." 뭔 소릴 하는 거야? 이놈 어딘가 모자란 거 아냐? 아님 좀 돌았다든지. "나는 죽었는가...나의 잠은 영원한가..." 그는 다시 바닥을 내려다 본다. 그 이마에 찰랑이는 머리칼은 진짜의 것이 아니다. 녀석은 내 모습을 투영 하고 있을 뿐이었다. 만약 이 자리에 오크나 트롤이 있었어도 녀석은 아마 그 흉내를 냈을 지도 모른다. 아니지, 내 잘난 얼굴을 보고 감탄해서 따라 하는 것일수도 있어. 흐음, 이렇게 내 얼굴을 새삼 내가 보니 어째 상당히 잘 생긴 얼굴이로군, 과연 난 잘 생겼어. "여기는 어디지?" "여기는 숲이야." 뻔한 것을 묻는군. 나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어차피 기나긴 대화를 나눌 것 같으니 앉아서 떠 들자구. 아직도 의식을 차리지 못한 그 에블리란 놈과 푸른 아인족의 녀석은 길게 누워 널부러져 있었다. 녀석의 말라 비틀어진 엉덩이를 발끝으로 툭툭 차 자 푸른 아인족의 녀석이 눈을 반짝 뜬다. 음, 역시 엉덩이는 포동한 것이 질감이 풍부해서 좋은데. 녀석은 날 보고 눈쌀을 찌푸리더니 그 다음에는 나와 자신의 앞에 멀건히 선 이 놈을 보고 일어나 앉았다. 여전히 침착한 얼굴이었다. 그 얼굴을 보니 린이 생각났다. 녀석은 입을 열지않고 눈으로 나에게물었다. 저 앞에 버티고 선 나와 비 슷한 얼굴을 한 녀석이 누군지 궁금한 것이리라. 나도 굳이 질문 받지 않아도 대답해 주었다. "용이래." 내가 트릿하게 말하자 녀석이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는 경이로운 듯 다시 뱀대가리 녀석을 바라본다. 아래위로 보고 그 다음에는 피를 흘리며 나자 빠진 계집애를 보다가 다시 날 돌아보는데 그 눈에 뭔가 미심쩍다는 기색 이 완연하다. 내 말을 못믿겠다는 듯한 그 얼굴에 나는 공정하고 관대하게 말해주었다. "용.이.라.고. 녀석이 말했어, 내가 말한 게 아냐." 그 말을 듣자 녀석은 다시 그 용임을 자처하는, 혹시 용일 수도 있고 그저 용임을 자처하는 미친 놈일 수도 있는 녀석을 자세히 바라본다. 그리고는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당신이 용이라구요?" "나는 셀러로니 에발룬, 용족의 하나다." 다시 녀석이 대꾸했다. 그래, 하지만 지금은 저 놈이 셀러로니인지 아발룬 인지 에발룬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저놈이 용족이냐 아니냐가 더 중요 한 문제다. "자아, 자세히 말해보자구. 내가 들은 게 맞다면, 너는 용이고 잠자다 깼 다..라는 거냐?" "....." 녀석은 날 물끄러미 바라본다. 또 뭔가 혼란되는 듯한 표정이다. "그리고 저기 널부러진 계집애는 너의 시종이고 너는 저 시종과 함께 이 숲속에서 어슬렁 어슬렁 거리고 있는 거다 그거지? 잠자다가 깨보니 이곳 이고?" 나의 놀라운 정리실력에 녀석은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바보 자식, 머리가 안돌아가는 거 아냐? 그 모습을 보던 푸른 아인족 녀석도 혼자 듣기 아깝다는 듯이 자신의 발 밑에 누워 있는 에블리를 슬금 슬금 흔들어 깨웠다. 그런데 에블리란 놈은 눈을 뜨자 마자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어서 피해요!" "뭘 피해?" 내가 트릿하게 묻자 에블리는 난처한듯이 말했다. "이 곳에는 엄청난 영기가 있어요, 그래서 몇 년전부터 이 곳에서 유령들 이 출몰하는 횟수가 늘고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 앞에 있는 이 자도 유령 인 거에요." "이렇게 단단한 유령 봤냐?" 나는 돌멩이를 하나 들어서 스스로를 용이라 부르는 녀석의 가슴팍에 던졌 다. 돌멩이는 팍 하는 소리와 함께 녀석의 가슴에 맞고 떨어져 내렸다. 아 픈 기색도 없이 석상처럼 선 녀석은 자신의 가슴에 부딪친 돌멩이를 물끄 러미 바라보다가 다시 날 보고 그 다음에는 에블리를 본다. "내가 죽었다는 거냐?" "....으.." 돌멩이가 도로 튀어 나온 이상 지금 이 자리에 존재하는 것은 실재이다. 그건 확실하지, 더 확인해 볼까? 나는 돌멩이 몇 개를 던져서 녀석에게 마구 던졌다. 옆에서 보던 에블리와 아인족 녀석이 입을 벌리고 나를 말리려는 것을 모른 척하고 나는 팍팍 집 어 던지면서 나를 감히 놀라게 한 녀석의 가슴팍에 멍이 들기를 기원하고 최소한 갈비뼈 하나라도 깨어지길 기도하며 돌을 던졌다. 그러나 대여섯개 를 던졌건만 녀석은 말짱했다. 그리고 대체 내가 뭔 짓을 하는 거야 하는 얼굴로 멀뚱 멀뚱 바라보기만 했다. "그만해!" 에블 리가 외쳤다. "유령은 아니지? 너 이런 유령 봤어?" "하지만 이 엄청난 영기는....!" 녀석은 혼란스러운 듯이 머리를 쥐어 짜며 말했다. 그리고는 자신이 들고 있는 은빛 활을 들어보였다. 그 활자루는 은은히 진동하면서 빛을 뿌리고 있었다. 웅웅 우우웅 하고 소리를 내는 활을 나는 신기한 듯이 바라보았다. 이런 기구는 처음 본다. "이건 유령이 가까이 오면 소리를 낸단 말이야! 이 마법기는 은영궁이라고 하는데...나의 스승에게서 물려받은 것이지, 한번도 영기를 읽어내지 못한 적이 없었어. 그리고 나 자신도 무서울 정도의 강력한 영기를 느끼는 걸! 저건 사람이 아니라구!" "인간이라곤 나도 생각안해." 나도 동의해 주었다. 갈비뼈를 부러뜨리고 살갗을 찢을 만큼의 돌멩이를 맞고도 고통도 못느끼 는 놈이 인간일 리가 있나? 그리고 인간이 뱀대가리를 늘어뜨리고 수풀을 방황하지는 않는다. 당연히 아니고 말고. "그...그럼 대체 뭐야!" 에블 리가 비명처럼 외쳤다. 그리고 그 순간에 갑자기 내 눈앞에 말뚝처럼 꿋꿋하게 서 있던 녀석의 모 습이 흐릿해 졌다. 흐릿? 흐릿? 흐릿해지는 순간 말 그대로 공기 중에 녹 아버리듯이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 바닥에 쓰러져 있던 계집애 역시 사라져 버렸다. 바닥에 자욱한 핏자국만 남기고. "으아아아아악!" 에블 리가 비명을 올렸고 하마터면 나도 비명을 올릴 뻔했다. 세상에 맙소사! KUBERIN.... 그것은 언제나 내 창문을 두들긴다. 알 수 없는 두려움으로 창문을 열면 막을 수 없는 힘으로 고개를 들이미는 사나운 짐승. 그것이 운명. 6 유령이란 무엇인가. 유령이란 조금 덜 떨어진 녀석들이 가다 말고 흘린 조각의 일부분이다. 그 일부분이 생각일 수도 있고 혹은 혼백일 수도 있다. 나는 유령이 될 마음이 전혀 없다. 죽으면 그 뿐, 상쾌하게 난 죽었다 하고 가뿐히 사라지면 그뿐이다. 나는 내 자신에게 동정따윈 하지 않는다. 패해서 죽으면 그뿐이다. 크하하 하 하고 웃고 가버리면 그뿐이다. 뭐 배신당해서 등을 찔러 죽었대도 하는 수 없다. 내가 약하니까 배신당했겠지, 뭐. 그런 걸 구질 구질하게 챙기면 서 일일이 나는 배신당했어, 슬퍼 슬퍼 울부짖어봐야 좋을 거 하나 없다. 악랄하든 잔인하든 나쁜 놈이든 사악한 놈이든 간에 내가 약하면 죽는다. 그건 별수 없다. 엄청나게 분해서 오장육부가 0뒤집히긴 하겠지만 약해서 죽는 바에야 어쩌겠는가. 후일을 기약할 수 밖에. 그러나 결국 유령이란 동정받고 싶어하는 자들이거나 자기가 당한 게 억울 해서 개기고 있는 놈들이 대부분이다. 악령이 있긴 하는데 이런 놈들도 근 성이 있는 면에서는 좀 봐줄 수 있다. 그러나 몇 백년동안 떠도는 악령같 은 놈들은 말 그대로 몬스터가 된다. 뭐, 몬스터가 되고 싶다면야 말리지는 않겠지만 몇 백년을 두고 두고 어스름한 곳에서 스물 스물 기어나오는 몬 스터가 되는 것 보다는 상쾌하게 다시 태어나는 게 좋지 않나? 어찌되었든 지금 내 눈앞에서 일어난 이 괴이쩍은 사건, 스스로를 용이라 자처하는 녀석의 정체는 진짜 기기묘묘하기 이를 데 없다. 놈은 실체가 있었고 스스로를 용이라 했고, 여기서 잠자다가 깨어났다고 했으며...무엇보다도 지금 또 눈앞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흐음..." "자세히 설명해봐." "......" 퍼렇게 질린 놈을 가운데 두고 나는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해 조용히 음식 을 찢어 입안에 넣었다. 용족이 나타났든 유령이 나타났든 놀라서 얼굴가 죽이 뒤집어 졌든 배가 고픈 것은 배가 고픈 것이고 골치 아픈 것은 골치 아픈 것이며 할 일은 해야 하는 법이다. 여전히 모드야는 모닥불을 다시 피우면서 가빈과 함께 음식물을 내놓았고 푸른 아인족의 녀석도 내 맞은 편 구석에 도도하게 앉아 에블리를 바라보 고 있었다. 퍼런 얼굴의 에블리란 놈은 먹고 있는 나의 얼굴을 뚫어지도록 바라보면서 침을 삼키며 말하고 있었다. "그러니까...나는 북부 유소라는 도시에서 사는 유혼사인데 약 이년 전부터 대륙을 돌아다니면서 음..유령을 돌려보내는 일을 하고 있단 말이오." "흠." 나는 손톱으로 빵을 찢었다. 가빈이 내 옆에 와서 토끼뼈에 달라 붙은 살조0각을 떼어 먹으면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유령을 어떻게 돌려보내는 건데요?" "아아..나의 도구는 뭐..이런 저런 것인데 유령을 봉하는 것과 퇴치하는 것 과 달래는 것과 기타 등등 이런 저런 게 있단 말이지." "별 이상한 직업이 다 있네, 그럼 마법사 같은 건가요?" "난 마법사처럼 무언가를 하진 못해, 그리고 살아있는 멀쩡한 것들에 대해 서도 공격하지 못하지." "그럼 어떻게 몸을 지키는 거지?" "나 그렇게 약한 놈은 아냐, 잘 싸우는 편이야, 제법 검도 다룰 줄 아니 까." 에블리란 놈은 자랑스레 말하다 말고 푸른 아인족과 눈이 마주치자 시무룩 어깨를 늘어뜨렸다. "뭐어, 푸른 아인족에 비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야... 어쨌든 수행하는 도중 이었어. 원래 유혼사의 면허를 따려면 오년 이상 수련을 하지 않으면 안 돼." "헤에." 특이한 직업이다. 유령을 따라 다니는 유령사냥꾼이라. "그런데 이 숲엔 어떻게 오게 된 거지?" "으음...소문을 들었어, 이곳에서 몇 달 전부터 유령이 나온다는 거야, 그리 고 그 뿐만이 아니라 유령이 살육을 벌인다고. 이 근처에 있던 블루오크의 근거지는 말 그대로 쑥대밭이 되었다는 소문도 들었고." "그런 소문 나는 못들었어." 내가 미간을 찌푸리자 옆에 있던 모드야가 재빨리 말했다. "저는 들었어요." 엑? 모드야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면서 모른 척하고 말을 이었다. "쿠베린님은 돌아오신지 얼마 안되어서 모르겠지만 소문은 몇 달전부터 있 었는걸요." "........" 나는 얼굴을 찌푸리고 모드야를 쏘아보았다.000 "그래서 오빠는 걱정된다고 최소한 쿠베린님을 따라 가라고 한 거죠." 생글 생글 웃는 호비트..... 울화가 치미는 묘인족..... 멍청한 얼굴의 야묘족... 무심한 얼굴의 푸른 아인족... 멀뚱거리고 있는 인간... 생각해보니 골고루 잘도 모여있군. "그래서 어쩐다는 거야?" 다 먹어 치우고 반쯤 누운 자세로 내가 묻자 에블리는 진지하게 말했다. "분명히 또 나올 거야." "또 나오면 네가 잡을래?" 묻자 녀석은 입을 다물었다. 잡아? 웃기네, 잡을 수나 있겠냐.... 야릇한 침묵이 흐르는 동안에 우리들은 모두 모두 침묵하고 있었다. 너무 침묵이 오래 되길래 나는 그냥 자기로 했다. 머리 싸매고 있어봐야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니까. 그리고 온기를 찾아 내 전용 난로로서 이미 깊은 자각을 하고 있는 가빈놈의 허리를 잡고 그리고 말 그대로 웅크 리고 누워 버렸다. 희끄무레한 달빛이 지나치게 휘황하다. 기묘한 우울감에 섞인 보랏빛 밤. 가빈은 내 품안에 안긴 채로 멀뚱 멀뚱 린의 형제를 바라보고 있었다. 린 의 형제는 린의 형제 답게 단정히 앉은 채로 바위 위에 기대어 앉아 잠을 청하고 있었다. 그놈에게 뭐라 말을 걸어볼까 생각도 했지만 할 말이 없어 관두었다. 린은 죽었다. 그러니까 할 말은 없다. 린의 유령따윈 없다. 녀석은 깨끗이 죽어버렸으니까. 나는 때때로 진짜 내가 죽인 자들과 내가 보고픈 자들이 유령이나마 내 앞 으로 걸어왔으면 좋겠다.내 앞에서 아가리를 벌려 으르렁거리든지 교태를 부리든지 죽일놈이라 욕을 해보든지 뭐 어찌되었든 좋다. 그 모습을 보고 싶다. 물론 예쁘장한 모습이 더더욱 좋겠지. 그러나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죽음이란 한 번 건너간 건너편의 강기슭같은 것, 돌아와서 내 앞에 선다 해도 그건 그가 아니다. 가빈이 훌쩍 훌쩍 울기 시작했다. 눈물이 가슴위로 툭툭 떨어진다. 기이한 숲, 기이한 인연, 기이한 상황. 울고 있는 가빈을 모드야가 흘긋 보고 나의 시선을 외면한다. 모드야는 가 죽으로 만든 주머니안에 들어가 잠을 청하고있었다. 오로지 호비트만이 사용할 만한 자그마하고도 체면을 차리지 않는 도구다. 그 안에 들어간 모습이 어째 번데기 속 애벌레처럼 보여 웃음이 나온다. 뭐 그래도 따스하 긴 하겠지. 에블리란 녀석은 모닥불을 등에 진 채 긴장한 어깨를 하고 앉아 있었다. 나는 울고 있는 가빈을 모른 척하고 하늘의 별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슴이 축축하다. 짭질한 소금 내음이 가슴으로부터 올라온다. 눈물은 찝찔하고 소 금기를 가지고 바다처럼 일렁 일렁인다. 눈알은 바닷물을 담은 채 넘쳐 흐 르는 액체를 억누르려고 이리 저리 움직인다. 이렇게 어색한 상황에 가장 어울리는 것은 저 하늘의 별을 보는 것이다. 그래, 가빈아 저 하늘의 별을 봐라. 엣? 뭐야, 보이지 않는군. 별은 완전히 나뭇가지에 가려 있다. 차가운 남빛, 보랏빛의 밤, 유령들이 들끓는 숲속의 밤. 왠지 웃음이 나온다. 아침에 눈을 뜨니 단정한 얼굴의 린의 형제가 나에게 작별을 고하고 있었 다. "안녕히." "아." 나는 멀뚱 멀뚱 녀석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손을 뻗어서 그 녀석이 반항하고 자시고 할 여지도 주지않고 와락 끌어안았다. 녀석이 소년체인 나 보다 덩치가 크지만 내가끌어안자 와락 끌려온다. 내 얼굴이 녀석의 가슴에 와 닿는다. 린보다 키가 크다. 뛰는 심 장의 소리는 작고 그리고 세 군데서 들려온다. 나는 녀석의 냄새를 맡아 보았다. 린과 비슷하지만 다르다. "...." 녀석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날 바라본다. 그리고는 아주 드물게 아주 희 귀하게도 미소같은 것을 지어 보였다. 나는 그 웃는 얼굴에 조금 머슥해 졌다. 푸른 얼굴을 한 녀석은 나에게 목례를 건네고 울먹이는 가빈을 한 번 바라 본 뒤에 말 그대로 아무런 주저함도 없이 등을 돌렸다. 그리고 숲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시퍼런 등이 시퍼런 녹색의 숲과 어우러져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다. 우리 가 본 것이 린의 유령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착각이 들어 갑자기 기분이 기 묘해졌다. 진짜 이 유령의 숲에 걸맞게 간밤에 린의 유령이 나왔다면 가빈은 아마 심 장이 터져버렸을 지도 모른다. 가빈은 그가 가버린 방향을 향해 넋을 잃고 있다. 죽임을 당하고 죽은 것은 그 갈색 아인족들과 마찬가지이지만 린의 유령은 없다. 아니, 없으리라고 나는 믿는다. 나 답지 않은 감상에 빠져서 허덕 허덕이는 것은 역시 이 숲의 마력탓인지 도 모른다. 내가 죽인 자들이 줄지어 행진이라도 하면서 이 유령의 숲에서 나온다면 어떨까? 아마 이 숲 전체가 유령으로 가득차고도 넘칠 것이다. 왜냐구? 내가 살아오면서 죽인 자들이 어디 한둘이어야 말이지, 그리고 내가 먹어 치운 자들과 내가 무심히 밟아 죽인 벌레들과 개미들도 한 둘은 아니란 말 씀. 내가 최초에 먹어 치운 작은 짐승들부터 시작해서 내가 재미 삼아 죽 여버린 작은 짐승들과 내가 먹기위해 희생된 무수한 돼지떼와 사슴떼 및 엘프나 심지어는 기타 등등 족속들 모두 다 튀어 나와야지, 그래야 공평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용의 유령이 나온다면 개미의 유령도 나와야 한단 말이야. 허 긴 개미의 유령이 나온다고 해도 개미 유령을 누군가가 발견할 수 있을 리 라곤 장담하진 못하겠다. 그러고 보니 세상 천지가 다 유령으로 가득 차고 도 모자라겠군, 그렇지만 누군가가 불편하다고 개미의 유령따위를 해결해 주세요 하고 의뢰따윈 하지 않겠지. 왜냐면 세상은 공정한 것이 못되니까. 자아 바닥 긁는 건 대충 해두고 갈 길이나 가자. "밥 먹자." 내가 말하기도 전에 이미 모드야는 준비하고 있었다. 가빈은 웅크리고 앉 아서 눈물을 뿌리고 있었고 나는 그 놈의 허벅지를 차 주었다. "야, 밥 차려!" ".....쿠베린..." 끄응 거리는 놈을 무시하고 나는 모드야가 준비해 놓은 음식보따리를 벌렸 다. 이 음식을 다 먹기 전에 빨랑 이 숲을 벗어나 저 오물조물한 호비트의 마 을에 들어가야 한다. 호비트의 손재주는 유명한 것이라 메플 시럽파이라든 가 꿀빵이라든가 혹은 기타 등등의 음식물은 맛나기 그지 없을 것이다. 기 대된다. 우물 쭈물 자리에 앉은 에블리가 날 향해 물었다. "어디로 가?" "호비트의 마을에, 숲을 건너서." "에헤....그럼...." 녀석이 눈알을 굴렸다. "같이 가지 않겠어요?" 드물게도 모드야가 생긋 웃으며 말해주었기에 녀석은 구원받은 양 얼굴을 환하게 하고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그덕에 머리카락 사이의 먼지가 우 수수 구운 고기위로 떨어져 내린다. 나는 녀석의 앞으로 고기를 밀어 주고 물었다. "그런데 넌 유령을 찾아서 돌아다닌다고 했지?" "응." "여기에 있던 그 용족이라는 녀석의 유령을 찾아낼 수 있겠냐?" "....몰라, 하지만...찾아낸다고 해도..." 녀석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원래 강한 녀석의 유령은 강하단 말이야...내 힘으로 보낼 수 있을지는 몰 라." "그럼 내버려 둬라." "하지만! 나는 유혼사란 말이야! 동료들을 모으면 가능할지도 몰라, 신관도 부르고 하면.." "가기 싫다는 유령을 뭐하러 억지로 보내려는 건데?" ".......원래 유령이 남아 있으면...몬스터가 늘어나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힘들 어져." 내가 흐응 하고 바라보자 녀석이 정색하고 말했다. "유령이 있는 곳에는 강한 악기가 모이기 마련이야, 강한 유령일수록 뿜어 내는 악기가 커지고 그럼 숲 주변이 건강한 상태가 되기 힘들어, 과실수는 열매를 맺기 어렵고 가축은 새끼를 낳지 못하고 젖이 안나와. 숲속의 짐승 들도 줄어들게 되지...." 녀석의 말이 점점 많아지려는 순간 나는 그 녀석의 주둥이 앞에 손을 내밀 어 주었다. "잠깐." "왜?" "내 알 바 아냐." 녀석이 멍하니 날 바라본다. "내 알 바 아냐. 그리고 네 주제에 넘치는 것은 하지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사람은 해야 할 일이라는 게 있단 말이야!" 녀석이 발끈한다. "아니, 해야 할 일과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하지 않으면 안될 일이란 것은 분명히 구별이 되는 거다. 애송아." "이봐..." "네가 머리통이 있으면 생각해봐, 너는 녀석과 마주치자 마자 의식을 잃었 어, 그런 주제에 막아낼 수 있다고 생각해?" 웃 하고 녀석이 말을 잃었다. 의문스러운 모든 것들이 한 바퀴를 돌고 돌고 스쳐지나간다. 퍼런 비늘을 가진 노란 눈의 계집애가 내 앞에 또 나왔고 그리고 사라진 족속이 튀어나왔다. 그걸 우연이라고 말한다면 맷돌에 머리통 갈아 버릴 일이다. 모든 것은 우연이 아니다. 불행히도 우연의 여신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눈이 멀지 않았다. 나는 심각한 얼굴로 시럽을 발라주는 모드야의 조그마한 손에서 빵을 받아 들고 입안에 집어 넣었다. 맛이 좋다. 조금 너무 단가...그러나 먹을 만 하 다. 우연은 뒷덜미를 후려갈기면서 갑자기 나타나지만 사실 우연의 수많은 조 작과 원인들은 필연 속에 있다. 오오 우연히 만났네, 오오 우연히 이런 일이..따위 말 나는 그다지 믿지 않 는다. 그런 것을 믿는 것은 바보 천치다. 우연으로 넘겨둘 일은 오로지 아 주 아주 간단한 것들만 가능하다. 아침 식사에 전 날 밤 꿈꾸었던 갈비가 나왔다든지 내가 먹고 싶어하는 토 끼찜이 나왔다든지 혹은 아리따운 아가씨가 하필이면 바로 내 앞에서 치렁 한 치마를 끌고 가다가 흰 허벅지를 드러내면서 넘어진다든가 하는 것 정 도다. 그러니까 우연의 범주에는 왠 용족의 유령인지 아닌지 모를 놈이 튀어 나 와 스르륵 사라졌다든가 아니면 전에 본 기이하고 괴이한 노란 눈의 계집 애가 해실 해실 쪼갠다든가 하는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모든 일들을 나의 놀라운 지혜와 연륜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데 나는 놀지만 녀석들- 그 킬트의 도망친 버릇없는 변태 제자들과 킬트는 전혀 놀 지 않고 있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에이, 골치 아파. KUBERIN.... 그것은 언제나 내 창문을 두들긴다. 알 수 없는 두려움으로 창문을 열면 막을 수 없는 힘으로 고개를 들이미는 사나운 짐승. 그것이 운명. 7 호비트들을 향해 귀엽다고 말하는 여자들이 있다. 통통하고 작아서? 아니면 포동한 뺨에 길죽한 귀를 가져서? 아니면 짧아 뒤뚱거리는 엉덩이와 무릎이 있긴 있는가도 의심스러운 작달막한 다리를 가졌기 때문에? 아니면 남녀 구분이 잘 되지도 않을 정도로 일직선으로 뻗 어내린 몸매와 눈꼬리가 찢어진 주제에 기이하게도 선량한 큰 눈을 하고 있어서? 여자들은 작은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작은 것을 좋아하지 않으면 안된다 고 하는 심각한 의무감도 가지고 있다. 남자들에게 작은 것을 가리키면서 꺄아 귀여워라고 말하는 것은 여자들의, 솔직히 말해서 인간여자들의 공통 적인 특징이다. 만약 인간 여자가 작고 귀여운 어떤 것을 보고 흐응 하고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면 그 여자를 약간 미묘한 시선으로 바라보는,심지어 조금 이상한 여자라고 생각하는 남자들을 종종 볼 수 있다. 호비트란 귀엽지 않다. 귀여운 것은 길죽한 것이 더 귀엽다. 예를 굳이 들자면, 늘씬하게 뻗어 내 린 처녀의 종아리나 청순한 아가씨의 길죽하고 흰 목덜미, 나에게 아낌없 이 매달리는 길고 흰 팔 등등이 더 귀엽다. 작달막하고 작은 것은 별로 귀 엽지 않다. 게다가 시끄럽게 재잘 재잘 떠들어 대는 것이라면 더더욱 귀엽 지않다! "이 사람이 쿠베린?" "쿠베린이 바로 이 사람? 믿어지지 않네! 겉으로 보기엔 인간 소년이랑 차 이가 없어 보여!" 떠들어 대는 호기심 왕성한 호비트들을 발길로 걷어차면서 나는 모드야의 약혼자라고 하는 녀석의 집으로 안내되었다. 모드야는 조금 지친 기색이었 지만 결혼적령기의 아가씨다운 수줍음을 담은 매력있는 모습으로 반기고 있는 남자 호비트들사이를 성큼 성큼(?) 걸었다. 그 뒤를 걷는 가빈과 에블리는 흥미진진한 얼굴로 호비트들의 마을을 보고 있었는데 그런 그들을 호비트들 역시 못지않게 흥미진진한 얼굴이었다. "그 숲을 ..그 귀신이 붙었다는 숲을 어찌 왔수?" "그 숲에서 실종된 친구들이 한 둘이 아닌데 용케도 왔네!" 그렇게 떠들어 대는 동안 내 앞으로 어떤 호비트가 걸어왔다. 다른 호비트보다 몇 배는 더 땅딸하고 다른 호비트보다 몇 배는 늙어보였 으며-사실 호비트의 나이를 측량하기란 드워프의 나이를 측량하는 것 이상 으로 어렵다.- 다른 호비트보다 몇 배는 더 긴 턱수염을 가진 그 호비트는 내 앞에 긴 호두나무 지팡이를 짚고 나타나서 그 돼지오줌보처럼 부풀어 오른 배를 흔들면서 인사했다. "쿠베린- 저 머나먼 고대의 피를 이으신 고귀한 분이시여, 이 누추한 마을 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 땅딸하고 사과를 볼에 갖다 붙인 것 같이 생긴 호비트의 족장은 나의 앞에서 그렇게 엄숙하지 못한 얼굴로 엄숙하게 인사를 한 뒤에 턱짓을 해 서 내 앞으로 반짝이는 것들- 갓 캐낸 노란 호박을 가지고 왔다. "저의 예물입니다. 받아주시지요, 왕이여." "좋아." 호박이란 원래는 보석이지만 땅을 뒤집어 엎어서 구하는 보석은 아니다. 호비트들은 호박을 귀히 여긴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나는 그다지 내 취향 은 아니지만 아량 넓게 받았다. 나는 본디 반짝 반짝 빛나는 게 아니면 보석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 빛나 지 않는 보석은 보석으로서의 자격이 없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산호라든 가 비취, 호박은 나는 보석이라고 생각지도 않으며 그런 것들을 모으지도 않는다. 물론 준다면야 그 성의를 봐서 받아주긴 하지만 말이다. 어찌되었든 내가 호박을 받아 들자 마자 족장은 정중한 뒤뚱거리는 걸음걸 이로 걸어 마을을 거의 한바퀴 돈 다음에서야 자신의 집인 듯 보이는 동굴 로 안내했다. 옆에서 보고 있는 가빈과 에블리란 놈도 나의 위치를 새삼 느끼는지 감탄 한 얼굴로 호오 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그런 무지를 가슴 아프게 생각 하면서 족장의 퉁퉁한 몸매를 보며 점잖게 걸었다. 집을 지어 사는 호비트도 있고 나무 위에서 사는 호비트들도 있다고 하지 만 한 편으로 말하자면 동굴에서 사는 호비트들도 만만치 않게 많다. 동굴 에서 살자면 동굴에서 서식하기 마련인 온갖 짐승들을 물리쳐야 한다는 문 제가 있긴 하지만 그런 짐승들이 없다면 동굴에서 거처하는 것은 매우 편 리하다. 구릿 구릿한 박쥐똥을 다 치운 동굴은 따스하고 약간의 습기만 뺀 다면 못 견딜 것도 아니다. 호비트들의 집들을 구경하다가 족장의 동굴집안으로 들어서자 마자 족장이 심각한 어조로 말한다. "안그래도 위대한 왕을 뵙고 친히 부탁을 드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뭘?" 어떤 녀석이 뜨끈해 보이는 스튜그릇과 함께 온갖 종류의 과일과 빵을 가 져와 널어놓기 시작했다. 나는 그 빵을 서슴치 않고 먹으면서 빵처럼 투실 거리는 뺨을 가진 족장을 빤히 바라보았다. "유령의 숲 말입니다. 그 숲을 좀 처리 해주시지 않겠습니까?" "뭘?" "유령말입니다. 죽어가는 자들이 한 둘이 아니고...오죽하면 오크들과 트롤 들도 그 숲을 떠났습니다. 우리들도 그 곳에 버섯도 캐러 가지 못하고..꿀 도 따러가지못하고...피해가 막심합니다." 족장은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유령사냥꾼이란 놈들을 불러다가 시켜 보았지만 말입니다, 영 시원치 않 아서 그 놈들도 들어오는 족족 그 숲에서 죽어나가더군요. 이렇게 나가면 숲이 아예 죽음의 숲이 될 것 같습니다." "흠." 옆에서 에블 리가 심각한 얼굴로 날 바라보면서 시선을 열심히 던지고 있 었다. 만약 인간의 시선이 물질화 된다면 내 얼굴에 구멍은 아니더라도 최 소한 멍은 들었을 정도일 것이다. 열심히 시선을 집어던지고 있는 에블리 를 무시하고 나는 족장에게 물었다. "그럼 얼마 내놓을래?" "...음....위대하신 왕께서..." "위대하신 왕께서 운운으로 넘어가려 하지마라. 애송아. 이 내가 누군데 내 앞에서 스리슬쩍 위대하신..내지는 엄청나신..으로 넘어가려는 거냐?" "........."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나는 내가 내키면 의뢰를 받고 의뢰금이 마음에 들면 움직인다구. 알고 있겠지?" "......." 역시 침묵하는 이 사과 두덩이를 입에 물고 있는 것 같은 형상을 한 호비 트의 족장을 보고 난 친절하게 말해주었다. "나를 세 치 혀로 움직이려고 생각한다면 그건 아주 바보스러운 일이야." "만약 여자를 원하신다면..." 갑자기 녀석이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 나는 으하하핫 웃고 말았다. "웃기지 마! 너, 어디서 뭔 소리를 들었는지는 몰라도 호비트 여자는 내 취 향이 아니란 말이다! 둥실 둥실 납작 납작 오동통한 여자를 어디 안고 싶 어할 거 같냐!" 나에게도 취향이 있는 거라구! "....." 호비트 여자들의 시선이 처음에는 실비처럼 내리다가 곧이어 소나기가 되 더니 곧이어 우박이 되기 시작한다. 그들의 시선의 우박은 점점 커지더니 급기야는 휘몰아치는 북풍한설의 진눈깨비와 합세하고 뒤이어서 천둥과 벼 락이 함께 하기시작했다. 흐음....약간 뒤통수가 땡기는 군. "저는 고스터 헌터입니다만 어떤 자들이 왔었습니까?" 갑자기 에블 리가 옆에서 입을 열었다. 녀석은 진지한 얼굴로 호비트 족장 의 앞에 나서서 무릎을 기꺼이 구부리고 족장의 시선을 맞추려고 애썼다. 그가 뭐 친절하거나 혹은 예의가 바르기 때문에 무릎을 굽힌 것은 물론 아 니다. 호비트의 집은 당연하게도 무척 지붕이 낮기 때문에 키가 제법 큰 인간은 자기 맘대로 허리를 펼 수 없다. 에블리는 크지는 않지만 작은 것도 아니어서 호비트의 집에 들어오자 마자 엉기적 엉기적 허리를 굽히고 있던 차였다. 그런 자세로 오래 말하자면 당연히 허리가 아프고 목덜미도 아프다. 그런 엄청난 장애에도 불구하고 녀석은 그래도 뭔가 할 말이 있다고 답삭 끼어 든 것이다. "당신도 고스트 헌터? 유혼사요?" "네, 그렇습니다. 저도 그 유령들을 봤습니다만." "우리가 고용한 자들은 마이스터 코룸이란 자와 네이딘 이라는 자였소 만..." "어, 그들이 죽었단 말입니까!" 놀라서 에블 리가 입을 벌렸다. 그의 얼굴이 삽시간에 백짓장처럼 퍼렇게 되었다. 그런 그의 반응을 즐기듯이 족장이 사과 볼을 한 채로 시익 웃으며 말한 다. "죽었소, 네이딘이란 자는 목이 댕겅 잘린 채 시체가 나무에 걸려있었고.... 마이스터란 자는 내장을 다 뜯긴 채로 피를 좌악 빼서 푸줏간에 널린 돼지 새끼마냥 거꾸로 달려있었소." "허억..." 숨을 삼키는 에블리를 무시하고 나는 스튜를 먹다가 족장을 바라보았다. "그게 유령 짓이라고 생각해?" ".....아뇨." 족장이 다시 날 바라본다. "유령이라곤 생각지 않습니다. 악령도 아니고 유령이 그런 짓을 할 리는 없으니까요. 아마도 그 숲에서 유령과 함께 지내고 있는 어떤 무시 무시한 괴물이 있는 듯합니다." 에블 리가 다시 나와 족장을 번갈아 보았다. "맞아, 그 괴물같은 놈은 얼마전에 다리가 부러져서 한동안은 그 짓 못할 거야." "아? 그럼 그들을 보셨나요?" "봤어. 그리고 괴이쩍은 이야기도 들었지." 나는 족장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너, 용족의 이야길 들었어? 이 근처에서?" 호비트의 족장은 날 멍하니 바라본다. "에? " "에가 아니야, 어서 지껄여봐. 용족이 이 근처에서 살았다는 이야길 들었냐 구!" ",......아, 아니오..이 근처에서 용족이 살았다는 것은..용족의 신전이 있다는 이야기도 들은 바 없습니다." 녀석은 조그마한 고깔 모자 같은 것을 헤치고선 머리를 북북 긁었다. 그리 곤 주름이 쪼글 쪼글한 이마를 찌푸리면서 나에게 다시 묻는다. "용족은 전설에나 나오는 것 아닙니까?" "나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아까 오다가 자기가 용이라는 녀석을 하나 봐서 확인해 보려고 해. 이 근처에 용과 관련된 뭔가가 있는 거 모르나?" "......모르겠는데요. 하지만 이 아래 사는 두더지 드워프는 알지도 모르죠." 녀석의 얼굴이 새초롬해진다. "두더지 드워프는 또 뭐야?" "우리들 마을 아래 쪽에 사는 놈들입니다. 녀석들은 맨날 굴을 파서 시끄 럽게 하지요." "드워프마을이 이 근처에 있어? 그건 처음 듣는 이야긴데?" "녀석들도 온 지 얼마 되진 않았어요, 겨우 50년정도인가? " 하긴 드워프들은 보물과 관련된 전설에는 상당히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 다. 호비트들의 잡설에 못지않게 그들이 가진 지도와 전설은 상당히 핵심 을 꿰뚫는다. 물론 지나치게 핵심만 꿰뚫어서 주변 머리 이야긴 모른다는 것이 한계이긴 하지만 그래도 엘프보단 낫다는 거다. 일단 드워프와 대화할 경우, "용족전설 알아?" "알아." "어떻게 되었는데?" "거인족과 엘프가 합심해서 용족을 죽였잖아!" "........" 이것으로 끝이다. 그들에게는 엘프들에게 전해지는 구전의 노래 같은 것도 거의 없고 구구절 절이 수식어를 붙이려는 부지런하고도 섬세한 드워프도 없기 때문에 이야 기는 아주 간단하고 직설적으로 전해져 온다. 엘프에게서 전설을 들으려 하는 놈이 있다면 나는 도시락 싸들고 다니면 서 반대하겠다. 물론 시간이 무한대로 널려 있고 인내심이 바다같이 깊고 창공같이 드넓은 족속이라면 모를까 그들에게서 본론을 들으려면 하염없이 하염없이 길게 늘어지는 시시껍절한 미사려구를 모두 듣다가 벅벅 긁다 졸 도해버리기 마련이다. "용족의 전설을 알아?" "아! ...그 슬프고도 애잔한 전설 말입니까? 그 전설은 엘프의 10대 왕이신 아레일레 마르센님께서도 길고 아름다운 서사시를 남기신 예가 있지요. 그 아레일레 마르센님이 남기신 서사시를 또 유명한 엘프의 용사 '한 줄기 바 람을 헤치는 자', 아노에 실프렌이 다듬어서 짤막한 시를 남겼지요, 그 전 설에 대해선 정말 아름다운 시가 많습니다. 실프렌이 남긴 싯구절에 따르 면 '배신과 슬픔의 거대한 강 저쪽에서 울부짖는 위대한 종족이 있었으 니....그 위대한 종족은 핏줄을 빛나는 보석으로 바꾸어 그 종족의 슬픔을 대신 하였노라.'...라고 했지요. 그 다음 구절을 아십니까?" ".....몰라." "그럼 계속하지요. 그 위대하고도 거만한 종족의 최후는 마지막 불타는 참 나무의 숯불처럼 뜨겁고도 장렬하였노라, 배신과 음모의 벼락은 마침내 지 상 최고의 종족이라는 그들에게도 그 불꽃의 그림자를 드리웠으니.... 지고 하며 자비로운 대지의 여신을 찬양할 지어다....." "........" 한 마디로 끝이 안 난다. 음. 각설하고 어찌되었든 드워프들을 찾아가서 확인해 볼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저 처량맞은 얼굴을 한 용족의 셀러론인지 셀러루인지 잘 알 수 없는 이름을 가진 그 뱀대가리녀석의 이야기도 어째 미심쩍고 그 노란 눈의 계집애의 출신성분도 미심쩍다. 역시 확인해 보지 않으면 안될 듯 싶 다. 어차피 확인할 거라면 돈을 받아야지. "이봐, 넌 나에게 어떻게 사례할 생각이냐? 설마하니 이 시시껍절한 호박 덩이 하나 주고 끝입니다 할정도로 뻔뻔한 것은 아니겠지?" "......" 땀을 주룩 흘리던 사과볼의 족장이 조심 조심 날 바라보고 그 다음은 바닥 을 바라보고 그 다음은 벽을 바라보고 그 다음은 내옆에 아무 생각 없이 꼬리를 흔들고 있는 가빈을 보다가 그 다음에는 옆에 멀뚱거리고 있는 퍼 런 얼굴의 에블리를 본다. 그리고 나서도 아무도 입을 열지 않자 한 숨을 택택 쉬어 대더니 벌떡 일어서서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에 녀석이 나올 때는 손안에 뭔 상자를 들고 있었다. 달달 떨리는 손으로 녀석이 그 상자 안을 여는 순간 나도 상당히 놀랐다. 그 안에 있는 것은 금강석- 오색으로 빛나는 금강석이었던 것이다! 에블리는 엑 했고 가빈은 억 했다. 그리고 주변에 있던 호비트들은 내가 세상천지에 다시 없는 악당이라는 듯이 원망에 가득 찬 시선으로 날 노려 보기 시작했다. 금강석은 주먹만 했다. 다른 놈들이 넋을 잃고 그 놀라운 색채를 보는 것을 모른 척하고 나는 스 윽 집어서 주머니에 넣었다. 내 움직임을 뚫어지도록 바라보던 족장은 내 가 주머니에 답삭 넣자 마자 한숨을 땅이 꺼지고 벽이 무너지도록 내쉬었 다. 옆에 놈들은 눈알이 빠질 정도로 부릅뜨고 있다가 자기 눈알이 떨어질 것 이 걱정스러웠는지 재빨리 고개를 돌려 날 바라본다. 어떻게 그런 것을 서 슴지 않고 주머니에 넣어요? 하고 눈으로 묻는 기세였다. 흐, 이 정도로 내가 놀랄 줄 아냐? 너희 수준과 내 수준이 같냐? 어이 어이, 한숨을 백 번 내쉰들 내가 도로 내놓진 않지. 네가 아쉽지 내가 아쉽냐? "그럼...부탁합니다." 녀석은 단념한 듯 고개를 떨구고 말했다. 그런 그에게 일제히 동정의 시선이 쏟아졌다. "좋아. 갑시다!" 나는 기세좋게 일어나는 에블리를 모른 척하고 일단 식사를 마치기로 마음 먹었다. "밥 먹고." KUBERIN.... 그것은 언제나 내 창문을 두들긴다. 알 수 없는 두려움으로 창문을 열면 막을 수 없는 힘으로 고개를 들이미는 사나운 짐승. 그것이 운명. 8 "이쪽입니다." 모드야의 약혼자라고 하는, 호비트 특유의 얼굴과 특유의 몸매와 특유의 눈매와 특유의 귀와 특유의 키를 가진 호비트 특유의 연령미상의 모습을 한 녀석이 우리들을 안내했다. 이 특유의 모습이라 하는 것은 종족을 대신할 만큼 아주 아주 평범하고 흔 하며 발길에 걷어채여도 이건 호비트야 할 정도로 종족적인 특성이 강하다 는 뜻이다. 녀석은 그러니까 특유의 초록색 조끼를 걸치고 털이 약간 난 오동통한 손 등과 넙적한 발등을 맨발로 유지하며 귀는 약간 뾰족하면서 눈은 동그라한 올챙이를 연상시키는 모양새에 입은 입술이 얇고 두꺼비처럼 좌우로 조금 찢어졌다. 코는 작지만 콧구멍은 작지 않다. 약간 쭈글한 입매를 하고 있긴 하지만 이 놈이 젊다는 것은 수염을 기르지 않았다는 데에서 금방 알 수 있다. 드워프와 달리 호비트들은 수염을 기르는 것은 노인네들 뿐이니까. 가빈은 자기 보다 작은 이 놈을 아주 호의에 찬 시선으로 보내고 있었지 만 녀석은 호의라기보다는 특이한 모양새를 갖춘 가빈을 호기심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큼직한 올챙이 모양의 눈알이 대굴 대굴 굴러 다니면서 가빈이 기분 좋아 흔들어 대는 꼬랑지를 슬금 슬금 바라보고 있었고 만져 보고 싶어 견딜 수 없다는 듯 에블 리가 옆에 찬 은영궁이란 물건을 힐긋 힐긋 바라보고 있었다. 나에게야 감히 시선을 둘 수 없는지 은근히 피하고 있었지만 나에게도 감히 그 방자하고 버릇없는 시선을 보낸다면 나는 그 올챙이 눈알을 뽑아다가 얼렁 얼렁 굴리면서 구슬치기를 할 마음의 자세가 충분히 되어 있었다. 녀석이 가리켜 보이는 곳은 드워프의 부락이었다. 옹기종기 모여있는 부락은 호비트들의 마을보다 앙증맞은 점은 별로 없었 다. 일단 직선적인 그들답게 오두막을 짓긴 지었는데 그 지붕은 호비트들 이 흔히 짓는 식의 둥근 지붕이 아니라 일직선은 낮으면서도 넓적한 형태 이기 때문에 멀리서 봐도 드워프 마을이라는 게 드러난다. 드워프들은 무 언가를 잘 만들기로 정평이 나 있다. 이들이 만든 물건은 정교하고 근사하 기로 평판이 자자한데 그것은 건축물을 만들 때에도 확실히 드러난다. 묘 인족들은 금방 거처를 옮기기 때문에,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 자리에 주 저 앉아서 농사를 짓는 체질들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튼튼한 집을 만들지 않는다. 드워프들의 집은 납작한 대신에 넓고, 그러면서도 튼튼하 다. 그런데 이 마을은 어쩐지 조금 기묘한 데가 발견된다. 일단 집이 드워 프 치고는 얼렁 뚱땅 만든 기색이 완연한 것이다. 게다가 지붕만 만들어 놓고 벽을 만들지 않은 대장간들이 여러 군데 있다. 이런 식으로 집을 짓는 것은 떠돌이 드워프들이나 하는 짓이다. 떠돌이 드워프라고 하면 매우 특이하게 생각하겠지만 드워프들중에서도 이 런 자들이 간혹 있다. 다시 말해 안착하는 드워프가 아니라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면서 자신의 마음에 드는 곳을 발견하면 그 곳에서 한동안 일을 하는 것이다. 대개 이들 떠돌이 드워프들은 금속을 다루는 데만이 아니라 발견하는 데에도 목숨을 걸고 있다. 이상한 금속이 대륙 어디선가에서 발 견 되었다드라 하는 소문이 퍼지면 으와아 하고 몰려드는 것이 바로 이 드 워프들이다. 그들은 눈이 벌건 채로 달려들어서 으싸 으싸 캐내어 이런 저 런 것들을 만들어 내다가 싫증이 나면 손을 던져 버린다. 안착하고 있는 드워프들은 이들을 조금 떨거지 취급을 하긴 하지만 그래도 멸시 할 수 없 는 것이 이들이 바로 새로운 유행의 창조자이기 때문이다. 이들을 환영하 는 아인족의 마을이나 인간의 마을은 많다. 이들이 한번 파헤치고 난 광산 은 유명해지기 때문에 장사에 아주 유리하다. 호비트 마슈가 드워프의 마을로 우리들을 데리고 들어갔을 때에는 이미 몇 몇 드워프들이 우리들을 발견하고 시커먼 도끼날을 번뜩이며 바라보고 있 을 때였다. 눈매가 본래 드워프는 올챙이눈을 한 호비트와 달리 왕방울만한 편이라 살 벌한 느낌을 줄 때는 인정 사정이라곤 보이지 않는다. 그런 자들이 줄지어 자기 머리통보다 커다란 도끼날을 은근히 쓰다듬으며 시선을 보내고 있으 니 다른 놈들이 쫄아 드는 것은 당연하다. 가빈이 당장에 쫄아들어서 꼬리를 뒤로 내리고 내 옆에 찰삭 달라 붙는데 그 꼬락서니를 보고 에블리놈도 내 옆으로 스스스슥 소리도 없이 달라 붙 었다. 이봐, 네가 내 난로야? 아님 애인이야? 사내자식이 왜 나에게 달라붙어? "이봐, 족장이 누구야?" 내가 묻자 한 드워프가 나를 짜악 노려보더니 이를 갈 듯 말한다. "넌 누구냐?" "나, 나는 쿠베린이다." 웃 하고 말을 건 드워프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서더니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본다. 그리고는 뭔가 쑥덕 쑥덕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그 미심쩍은 얼굴에 내가 뭐라 한 마디 해 주려는 찰나에 호비트 녀석이 입을 열었다. "우리 족장님께서 부탁하셨어요. 그 숲의 유령좀 어떻게 해달라고 말이에 요...." "에?" "유령이라구!" "숲의 괴물 말인가!" 드워프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떠들면서 내 앞으로 밀려들었다. 그들이 난리를 치는 동안에 나는 팔짱을 끼고 잠시 주변을 돌아보았다. 어쩐지 이상한 느낌이 든다고 생각하던 차인데 이건 분명한 일인 듯 싶다. "어이, 어이." 내가 말하자 드워프와 호비트가 일제히- 자세히 말해서 드워프들과 호비트 하나가 날 올려다 본다. 나는 그 중 조금 낡은 옷을 걸친 드워프를 쏘아보며 조용히 물었다. "대체 이 마을은 어찌된 거야? 내 생전 과부들의 마을은 첨 와 본다." 순간 사방이 고요해졌다. 호비트 마슈가 얼어 붙은 얼굴로 날 바라보고 그 다음에는 가빈과 에블 리 가 날 멍하니 바라본다. 나는 드워프들의 멍청한 얼굴과 내 일행들의 멍청 한 얼굴 사이에 서서 그들의 누가 누가 멍하나 대결하듯 선 그 얼굴들 사 이에서 긴 시간을 인내심 깊게 기다려야 했다. "여..여, 자라구요?" 마슈가 중얼거리는 동안 드워프들이 까르르 웃기 시작했다. 역시 웃으니 여자다운 느낌이 든다. 그녀들은 까르르 웃더니 갑자기 박장 대소를 하고 자기들끼리 끼득거렸다. 그리고는 한 여자가 허리인지 의심스 러운 몸통의 중간 부분에 손을 대고 나를 바라보며 눈을 찡긋해보인다. "과연 쿠베린님이로군. 우리들을 여자라고 알아챈 것은 당신 뿐이야!" "맞아! 맞아!" 그녀들이 깔깔대고 있는 동안 나는 머리를 북북 긁고 있는 마슈를 모른 척 하고 다시 물었다. "족장은 어디야?" "아, 작업장에 있지. 따라와, 따라오세요. 바람둥이 임금님." 드워프들은 킬킬거리면서 앞서 걷기 시작했다. "지,진짜로 다 여자들이야? 수, 수염이 나 있는데?" 에블 리가 내 옆에 달라 붙으면서 다시 물었다. "수염만이 아니고..저기...굴곡이 전혀 없는데..." "흐, 바보놈아, 드워프 여자가 굴곡있단 소리 들었단 말야?" "...." 에블리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날 흘긋 흘긋 바라보았다. 가빈은 감탄스러운 얼굴로 날 보다가 조용히 말한다. "과연 쿠베린님은 천부적으로 바람둥이가 될 자격이 있어요." "난 바람둥이가 아냐." "에? 그럼 뭐라고 생각하세요? 색마? 강간마?" 천연덕스레 가빈이란 놈이 말하는 것을 듣고 있자면 가끔 이 자식이 진심 으로 말하는 게 아닌가 싶어서 화가 불끈 불끈 치민다. "너 단어의 뜻이나 알고 말하는 거냐?" "하지만...여자를 좋아하는 남자를 가리키는 말이란 한정이 되어 있어요. 호 색마라든가 강간마라든가 색마라든가 바람둥이라든가....." "그것이야말로 네 어휘가 부족하단 증거지." "그럼 뭐라고 해요?" "...여자들을 사랑하는 남자." 에블 리가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대굴 대굴 구른다. 가빈은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 끄덕 하다가 의심스러운 양 다시 물었다. "그럼 남자를 사랑하는 남자는 뭐라고 해요?" "남자들을 사랑하는 남자." "여자들을 사랑하는 여자는요?" "여자들을 사랑하는 여자." "......뭔가 이상해." 가빈이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는 동안 배를 움켜쥐고 있던 에블 리가 킬킬 거리면서 끼어들었다. "남녀 모두를 사랑하는 남자를 뭐라 하는 줄 알아?" "뭔데요? 에블리?" "모두를 사랑하는 남자지. 크하하하하핫...." 별로 웃기지도 않는 농담을 한 녀석이 대굴대굴 구르면서 웃음을 터뜨렸 다. 나는 별로 안웃겨서 녀석을 무시하기로 하고 갈 길을 걸었다. 그러나 듣고 있던 드워프나 마슈는 웃겨 죽겠는지 킬킬거리느라 난리였다. 드워프들의 작업장은 그들이 발견한 광맥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들은 어떤 금속의 광맥을 발견하면 그 곳에 터를 잡고 마을을 꾸미는데 그 마을 전체가 달캉거리는 금속을 건드리는 소리들로 시끄러워진다. 드워 프의 왕이 노래했던 것처럼 '부딪치는 망치에 불꽃이 튀기고 힘이 튀긴다' 는 것은 조금도 과장이 아니다. 한 참을 뒤뚱거리는 드워프들의 발걸음을 참으며 걷다 보니 시커무리 죽죽 한 돌 벽을 뚫고 굴을 뚫은 드워프들의 광산안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문득 앞 서 걷던 드워프 여자가 말했다. "근데 어떻게 알았수?" 드워프여자가 슬쩍 나에게 추파 비슷한 것을 던지며 물었다. "나를 보는 눈이 심상치 않았기때문이지." 내가 담담히 말해주자 녀석들이 뒤로 자빠지면서 웃기 시작했다. 녀석들이 웃거나 말거나 나는 인내심 깊게 앞으로 한 참을 전진해서야 마침내 머리 에 띠를 동이고 심각한 얼굴로 태운 턱수염을 쓰다듬고 있는 떠돌이 드워 프의 촌장을 만날 수 있었다. "뭐야?" 촌장은 나에 대해서 설명을 들으면서 나를 아래 위로 바라본다. 이 여자 촌장은 풀무질을 하다 왔는지 검뎅을 입 코에 붙이고 있다. 그리 고는 나를 주욱 주욱 훑어 보면서 낮게 말했다. "....진짜 당신이 쿠베린 왕이야?" "나를 자청하는 놈이 나 말고 또 있을 거 같으냐?" "알 수 없지만...뭐어." 드워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까부터 매우 어려운 자세를 하고 있는 에블 리를 슬쩍 돌아보았다. 에블리는 무릎과 고개를 숙이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걷다가 몇번이나 이마를 천장에 부딪쳐야만 했는데 그건 어쩔 수 없는 일 이다. 모든 것은 다 드워프 키에 맞추어져 있고 드워프가 인간에게 맞추어 서 집을 짓거나 작업장을 만들 이유란 전혀 전혀 없으니 말이다. "당신이 숲의 유령을 없앤다고 온 게 맞소?" "정보를 얻으러 왔을 뿐인데." 드워프 촌장은 나를 물끄러미 올려다 보더니 그 퉁방울만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좋아, 나를 따라 오쇼. 그리고 놀라지 마셔." 한참을 뚱땅거리는 녀석들 사이를 지나서 걷는 동안 천장은 점점 낮아 지 기 시작했다. 그 낮은 곳을 고개 숙이고 걷는 동안 에블리의 걸음새는 점 점 거북해지기 시작했고 곧이어 나와 가빈도 조금은 불편한 자세가 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건 어쩔 수 없는 법, 앞에 가는 여자 드워프에게 나를 안고 가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길을 내거라 하고 말할 수도 없 는 입장이다. 별 수 없으니 내가 참지, 그렇지만 이렇게 하염없이 가다보니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만약 놀랄 것이 저 안에 없다면 나는 이 드워 프를 주욱 잡아 좌우로 찢어 그 키를 늘려 이 드워프의 키를 최소한 인간 만큼만 늘려 줄 참이다. 만약 이 여자가 나에게 눈물을 흘리며 감사하다고 몇백번씩 절을 해대도 나는 놀라거나 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우하하 생 각해 보니 그 꼴도 나쁘진 않구만. 그런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역시 내 생각을 알아 차렸는지 왠지 드워프의 걸음이 점점 빨라지고 에블리는 점점 나에게서 조금씩 물러서고 가빈은 주 춤 주춤 내 옆에서 몇 발자국 떼고 걷기 시작한다. "저기.." 문득 나를 뒤돌아본 드워프가 얼굴이 굳는다. 그 시커먼 얼굴에서 점차 흰 얼굴로 변해가는 것을 은밀한 즐거움으로 바 라보면서 나는 송곳니를 드러내고 시익 친절하게 웃어 주었다. 그러자 슬슬슬 에블리와 가빈, 호비트 마슈가 뒤로 물러서고 못 볼 것을 봤다는 양 드워프의 발걸음은 몇 배로 빨라지기 시작한다. "멀었어?" "아니요!" 드워프가 소리치듯이 대답했고 그녀는 거의 달리듯 걷기 시작했다. 짧은 다리로 잘도 뛴다. 허긴 호비트나 드워프나 짧기는 해도 느리진 않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낮고 구불 구불한 땅굴을 파 놓은 덕에 몇 번이고 몇 번이 고 에블 리가 이마를 피가 낭자하도록 치박아 불쌍한 몰골이 다 된 이후에 야 도착했다. 그 곳은 생각보다 넓은 지하 광장이었는데 돌무더기가 무수히 쌓여진 그 사이로 천연동굴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천연동굴은 종유석이 드문 드문 빛을 발하고 드워프들이 작업을 위해서 켜 놓은 횃불들과 천연의 수정들이 어우려져서 눈부시게 밝은 곳이었다. 아마 동굴 자체 안에 나의 녹수정 동 굴처럼 수정이 박혀 있었던 모양이다. 이 수정은 흰 결정체로서 그대로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외에 종유석들이 노랗고 푸르고 붉은 빛을 가 지 가지 발하고 있었다. 제법 비경에 가까워서 보고 있던 녀석들이 일제히 입을 저억 저억 벌렸다. "멋, 멋지다!" "진짜..저 수정좀 봐!" 그러나 나는 수정따위에 눈이 멀 그런 작은 그릇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만약에 이 동굴이 온통 금강석으로 깔렸다면야 모르겠지만 이 정도 가지고 헤에 하고 입을 저억 저억 벌린다는 것은 나의 체신에 관계된 일인 것이 다. "이게 내가 놀랄 것이냐?" 내가 트릿하게 묻자 드워프는 나에게 흐 하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손짓했다. "저길 보시오." 나는 고개를 들고 돌 더미를 보았다. 아무것도 없다. "거기 말고 조금 더 위쪽." 짧은 다섯 개의 손가락이 조금 더 위를 가리켜 보인다. 진짜 짧기도 엄청 나게 짧은 손가락이다. 이렇게 짧고 우둥퉁한 손가락으로 그런 세공을 만 든다는 것은 희안하기도 엄청나게 희안한 일이다. "암 것도 없잖아!" "내 손가락을 보지 말고 저 앞을 보란 말이오! 저 위!" 나는 그대로 했다. 그리고 놀랐다. 젠장! KUBERIN.... 그것은 언제나 내 창문을 두들긴다. 알 수 없는 두려움으로 창문을 열면 막을 수 없는 힘으로 고개를 들이미는 사나운 짐승. 그것이 운명. 9 나는 청승떠는 일이 가장 싫다. 주룩 주룩 내리는 비를 처량 맞게 맞으면서 왠지 여자들에게 불쌍한 척 분 위기를 풍기면서 쓴웃음을 지어 보이며 비에 젖어 추욱 늘어진 머리칼을 쓸어 올리곤 뭔가 과거가 있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사내자식들. 그것 을 나는 청승이라 부른다. 여자가 고개를 떨구고 긴 머리를 늘어뜨리면 그 건 청순이지만 사내자식들이 그럴 경우는 청승이다. 모든 이야기, 모든 일들은 대개 사랑-애증이 뒤범벅이 되고 아래 위로 마 구 섞이며 거기에 신뢰-배신이 얽히고 설키고 악당-선인등이 대굴대굴 구 르면서 벌어지는 일이다. 아무리 복잡 미묘한 과거가 있고 사연이 있어도 결국 모든 일은 한 가지로 축약된다. 바로 감.정.이다. 감정이 없으면 화도 안 나고 사랑도 하지 않고 증오도 하지 않으며 배신따 위도 하지 않는다. 대개 모든 것들이 다 감정과 이득, 두 가지 사이에서 벌 어지는 일이니까.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바로 살아있다는 증거로서 까불고 떠들고 울고 웃으며 속이고 속고 이해타산을 따진다. 누가 우위에 있나 어 깨를 견주어 보고 비비적거리다가 스리 슬쩍 웃어 아양을 떨기도 하고 등 뒤에서 칼로 푸욱 찌르거나 목덜미를 와락 물어 버리기도 한다. 이 모든 일들이 결국 살아 있다는 이유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즉, 그건 결국 죽어버리면 끝장이란 의미다. 죽으면 다 끝장인데 뭘 뒤집어 지고 난리를 치고 고민하면서 비실비실 자 빠지고 울고 불고 머리털을 쥐어 뜯어가며 난리를 치는 것일까? 그건 나도 할 말 없다. 결국 살아있으니까 이 짓거리를 하게 되는 거겠지. 그리고 죽을 때까지 이따위 짓을 계속하겠지. 그게 산 자의 할 짓거리니까. 그렇다면 죽은 놈은 대체 뭔가. 죽은 자는 어떤 것을 할 수 있는가. 그들이 바라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무엇 때문에 살아있지도 않은 죽은 몸으로 어슬렁 어슬렁 걸어다니고 있는 것일까. 흠...역시 오래된 종족은 오래된 종족답게 이런 감상을 나에게 넘겨주는 군. 이런 깊은 상념과 우아한 사색을 다른 놈들이 이해할 수나 있는 것일까. 나는 팔짱을 끼고 거대한 죽은 놈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리 거대하고 아무리 잘나고 아무리 강대하고 아무리 건방져도 죽은 놈 은 죽은 놈이다. 죽은 놈 앞에서 이렇게 하나 저렇게 하나 죽은 놈이 알 게 뭐냐? 나는 드워프의 끔찍하게도 짧고 포동한 손가락 끝의 손톱 밑의 때까지 바 라보면서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렇군, 그래." 회색과 오렌지 색과 푸른 색이 은은하게 섞인 종유석의 동굴 안에 거대한 물건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 것은 눈을 감고 잔뜩 추운 듯 웅크린 자의 찌 푸린 얼굴, 우리들의 머나먼 조상이자 머나먼 전설이었던 그 것이었다. 색깔은 회색이다. 거의 화석이나 다름 없는 그 거대한 모습에는 강력한 비 늘과 살갗이 아직도 그 몸체안에 고스란히 붙어 있었다. 당장이라도 일어 나서 포효할 듯한 그 거구는 네 개의 발을 도사리고 마치 작은 산등성이 만한 체구를 작은 산등성이 만한 네 장의 날개로 감싼 채 웅크리고 있었 다. 길고 단단해 보이는 비늘이 엿보이는 긴 목은 고개를 숙인 채 바닥에 늘어져 있다. 그 얼굴이 향한 것은 이미 회색 빛이 된 두 개의 알이었다. 알은 이미 회색으로 단단한 바위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알 중 하나는 금 이 가 있었다. 금이 가 있었지만 회색으로 죽어버려 있었다. 아마도 깨어나 기 직전에 죽어버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비인지 어미인지는 잘 모르겠지 만 이 용은 틀림없이 그 새끼를 돌보고 싶었을 것이다. 모든 자들이 외경으로 입을 다문 그 동안 나는 슬픔을 맛보았다. 사라진 종족과 멸망한 종족을 보면서 나는 슬픔을 맛본다. 오렌지와 초록색의 찬란한 종유석 아래 회색으로 굳어진 강대했던 종족의 하나를 본다. 그리고 그 멸망을 본다. 새끼가 태어나지 못한 그 슬픔에 가 득찬 용들의 머리 위에 경의를 표한다. 죽어버린 자들의 아픔을 산 자가 노래하는 것은 바보 천치 같은 일. 장례는 산 자들의 몫. 이 것은 시체다. 굳어버린 돌이 된 시체. "......용인가요...?" 가빈이 큰 소리를 낼 수 없다는 듯이 속삭이면서 내 팔뚝에 붙으며 물었 다. 당연한 소리 좀 하지 마라, 이게 용이 아니라면 거대 도마뱀이겠냐? "이것이 용이군요." 침묵이 깨어지자 에블리도 한 마디 한다. 당연한 소리를 또 했다. "헤에..진짜 크군요." 호비트 마슈가 말한다. 이 셋은 지금 당연한 소리를 하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는 모양이다. 하는 수 없지. "그런데....이게 바로 유령이란 것인가요?" 이제서야 에블 리가 제법 필요한 말을 지껄인다. 대답해봐 하고 내가 드워프를 바라보자 드워프 여자는 투구처럼 생긴 둥근 쇠 모자를 벗고 새 둥우리가 된 머리를 벅벅 긁어 보였다. "글세." "글세가 아니지, 대체 이 걸 나에게 보여준 이유는?" "이 것을 우리가 캐고서부터 유령이 나왔으니까." 드워프가 당연하다는 듯이 날 바라본다. 나는 턱을 쓰다듬다가 목이 빠져라 길게 목을 뽑은 채로 점잖게 뒤로 물러 섰다. 이 높고도 높은 곳에서 봐야만이 그 진가를 알 수 있는 거대한 회색덩어리 를 자세히 보기 위해 뒤로 물러서면서 사방을 훑어보았다. "저 것을 캐자 마자 유령이 나왔다면 당신들의 말은 우리가 숲에서 본 유 령이 바로 이 거대한 .....이 거란 말이오?" 에블 리가 아악 소리만 안냈지 역시나 아악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렇지." 드워프여자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는 쇠모자를 도로 쓰고 날 향해 물 었다. "그래, 이 놈의 용의 유령을 어쩔 셈이오? 이걸 없앨 수가 있수?" "없어." 나는 냉정하게 말해주었다. "에?" "엑?" 호비트와 야묘족과 인간이 이상한 소리를 낼 때 나는 냉정하게 말해주었 다. "우리가 본 것은 이 놈이 아니었어. 우리가 본 것은 이 용이 아니었단 말 이야." "그거..그걸 어떻게 알아요?" 가빈이 급히 묻자 나는 손가락을 뻗어 아주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이 놈의 날개를 보라구, 그 놈은 날개가 없었어. 이 멍청이들아." 그 말을 듣자 멍청이녀석들은 급히 고개를 돌려서 다시 용의 화석을 바라 보았다. "그, 그렇군요! 날개가 없었어!" 에블 리가 동의할 때 나는 팔짱을 끼고 우람하게 섰지만 결코 우람하게는 보이지않는 드워프의 여자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저 알, 어찌된거야? 처음부터 깨진 상태였어? 아님 너희들이 망치로 두들 겨 보기라도 한 거야?" "우릴 뭘로 아는 거요? 저걸 왜 두들겨?" 드워프여자가 발칵 화를 내는 것을 무시하고 나는 금이 간 알을 만져 보았 다. 확실히 돌이다. 딱딱하고 금이 가 있을뿐 다른 것들과는 차이 나는 게 하나도 없다. 힘을 주어 알을 밀자 드득 하고 조금 흔들리기만 할 뿐 움직 여지지는 않는다. "흠..." "이 근처에 다른 알은 없었어요. 단 두 개 뿐이었었지." 드워프 여자가 급히 말하곤 어깨를 으슥해 보였다. "다른 흔적은?" "없었어요, 우리가 발견했다니까, 몇 달 전에." "다른 놈들은 들어온적 없었고?" "없었다니까!" 그럼 대체 우리가 본 놈은 뭐야? 그리고 그 노란 눈의 계집애는 또 뭐고? "쳇..." 의문점만 늘었지 결론 난 것이 하나도 없군. 역시 그 숲에 다시 가서 뒤져 볼 수 밖에 없는 것인가? 하고 생각했을 때, 우리들은 소리도 없이 움직이는 어떤 놈을 발견했다. 녀석은 그림자처럼 움직인다. 그리고 언제 나타난 것인지 알 수도 없다. 이 내가 감지 못하다니, 약간 기분이 상한다. 그러나 녀석은 온전한 놈이 아니다. 검은 머리, 녹색 눈에 체구는 소년의 체구, 그리고 걸친 것은 튜닉에 맨발, 검은 머리는 뒷덜미에 늘어져 있고 허리에는 작은 주머니를 매달고 있다. 즉, 나와 똑같은 모습이다. 그리고 그 몰골을 한 녀석이 우리들 앞을 주욱 걸어와 척하니 그 용의 화 석 앞에 서서 심각한 얼굴로 올려다 본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더니 나타난 것과 마찬가지로 스륵 하고 사라져 버렸다. 본디 사라졌다라고 하는 의미란 손을 댈 여가도 없이 엄청나게 빨리 없어 졌다는 의미와 그저 가버렸다는 의미, 두 가지가있다. 이번 경우는 전자 다. 말 그대로 손이고 발이고 이빨이고 내밀 사이도 없이 스륵 하고 사라 져 버렸다. "유령이닷!" 마슈가 뒤로 벌러덩 쓰러지면서 소리를 질렀다. "유령이얏!" 소리지르는 것은 좋은데 왠지 한 템포가 늦었다. 드워프는 입을 벌린 상태로, 나와 가빈, 에블리는 또냐 하는 얼굴로 눈을 둥그렇게 뜨고만 있었다. 이 용족이란 놈, 장난을 너무 좋아하는데. 아니, 정확히 말해서 용족임을 자처하는 이 놈 말이다. "유령이래." "유령이 왔었다는군." 수군거리는 드워프들은 태연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유령을 보든 귀신을 보든 그들은 이 상황을 심각히 여기지 않고 있었다. 별로 두려워 하지도 않는 거 같다. 그들은 그저 유령이 나타났었다라고 하는 단순한 상황으로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 놈이 사라진 이후로 나는 코를 들고 사방을 돌아보았다. 축축한 냄새는 거의 없다. 여긴 아주 건조했다. 이건 그다지 동굴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마슈와 가빈이 달달달 떨고 있을 때 에블 리가 날 돌아보며 머리를 쥐어뜯 었다. "이해할 수 없어! 대체 이게 뭐야? 저건 유령일까? 영기는 분명히 있고.... 게다가..." 녀석이 뭐라 말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버석거리는 발밑의 누런 흙들을 밟으면서 걸어나왔다. 내 뒤로 가빈과 마슈가 지나치리만큼 답삭 붙어 따 라 나오는 동안 드워프들이 궁시렁거리고 있는 소리가 들린다. "저 유령을 없앨 수 있어?" "아니, 저 유령을 없애야 할 필요가 있는 건가?" 발 걸음을 조금 멈추고 생각했다. 현실적이고도 즉물적이며 단순한 사고방식의 드워프들에게는 언제나 나도 약간의 경의심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말이 맞다. 유령을 없앨 수 있어 가 문제가 아니고 유령을 없애야 할 필요가 있는 것 인가 이다. 내가 유령을 싫어하긴 하지만 이런 곳에 처박힌 유령따위를 굳이 없앨 필 요따윈 없다. 아니 세상 전체로 보아서 드워프들의 말마따나 악착같이 그 따위 유령 하나, 스리 슬쩍 나타나서 어슬렁 거리다가 사라지는 유령따위 를 두려워 할 필요가 무엇이 있는가. 사라진 용족 비스끄무리한 것들이 이 세상에 미련을 남기고 어슬렁거린다 고 해서 우리들이 악착같이 쫓아다니면서 에블 리가 가진 저 장난감같은 영궁따위를 휘둘러 댈 필요가 있는 것일까. 창백한 에블 리가 날 보며 말했다. "이 숲을 위해서, 먼 미래를 보아서는 유령을 없애는 것이..옳아요!" 그가 번쩍 번쩍 빛나는 같잖치도 않은 정열에 사로잡혀 나에게 강요한다. "쳇." 하지만 나는 이미 흥이 깨졌다. 숲을 향해서 걸어가면서 마슈에게 물었다. "엘프들이 사는 곳을 알고 싶은데." "엘프요?" 마슈가 놀란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물의 엘프라면 좋겠고...없다면 숲의 엘프라도 좋겠지." 엘프따위를 왜 찾는 것이지요 하고 녀석이 바라보는 동안 나는 유령이 돌 아 다니는 숲으로 걸어 가면서 사방을 돌아보았다. 녀석이 궁금해하든 말 든 내 알바는 아니다. 녀석은 내가 시키는 대로 하면 되는 것이다. 물 내음이 느껴진다. 바닥에 바스락 거리는 나뭇잎들이 대굴 대굴 굴러다닌다. 살아있는 숲은 이렇게 소리를 낸다. 밤새가 울다가 뭔가에 걸린 듯이 큭큭 거리는 소리를 낸다. 나는 팔짱을 끼고 뿌연 은하수를 바라본다. 은하수는 밤의 여신이 찬 은빛의 허리띠다. 그 허리띠로 여신은 찰싹 찰싹 달의 여신을 때린다고 한다. 달의 여신은 밤의 여신의 허리띠에 아름다운 허리춤을 맞으면서 둥글고 뽀얀 엉덩이를 들고 뛰듯이 밤하늘을 달려 서쪽 으로 사라진다. 아픔으로 그녀의 눈가에서 흘러내린 눈물들이 방울 방울 떨어져 크고 작은 별들이 된다. 별들이 날 바라보고 있다. 밤의 여신은 별들에게 미소를 보낸다. 그 별들은 무수한 눈길로 땅을 내려다 보고 있다. 땅위에서 숨쉬는 모든 것들처럼 별 들도 숨을 내쉬어 빛을 발한다. 별들의 숨소리는 별빛에 따라 작게 흔들리 고 있다. 나는 지금 감상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왜 내가 감상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일까. 용족을 만났기 때문인가. 녀석이 용족이란 것도 확실치 않은데 왜 용족의 유령 비스끄무리 한 것을 만났다는 이유로 이런 기분에 사로잡혀 하늘을 올려다 보며 턱을 내밀고 있는 것일까. 나는 왜 슬픈가. 왜 유령이란 슬픈 것일까. 조용한가 싶더니만 가빈과 마슈놈들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쿠베린이 조금 이상하지 않아요?" "유령에게 홀렸나?" "유령에게 홀릴 분은 아닌데. 설마하니 여자가 없어서 뭔가....서운해서 그 런 거 아닐까요?" "하지만 이곳은 드워프들의 마을인데...쿠베린님이 여자 드워프도 좋아한대 요?" 저것들이? "..그, 그건 나도 모르겠는데..." "하지만 단번에 드워프들이 여자라는 것을 알아냈어요! 그것은 즉...여자가 필요하단 의미가 아닐까요?" "내 생각에는....여자가 필요한 것 보단 먹을 것이 필요한 게 아닐까?" "하지만 방금 먹었는데요. 쿠베린님은 지금 막 사슴을 한 마리 통째로 드 셨고 거기에 계피를 넣은 롤빵과 땅콩빵을 한 바구니 먹었고, 거기에 ....산 양주를 두 동이, 훈제 햄을 세 덩이나 드셨다구요. 그런데 부족해요?" "...그, 그런가? 그럼 역시 여자가 부족해서..." "아, 그래서 엘프를 찾는 게 아닐까요? 엘프의 여자는 예쁘니까...엘프의 여 자를 찾으시나 봐요." 어쩔 수 없다...... 원래 나라고 하는 고상하고도 세련된 남자는 주변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 다. 어디까지나 이 것은 나의 문제가 아니다. 나역시 시인의 마음과 감수성 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상황이 나를 그렇게 허락하지 않는다. 모든 자들이 위대한 이 몸께서 명령을 내리고 결단을 내려주길 고개를 조아리고 기대하 고 있다. 그렇기에 나는 어쩔 수 없이 내 몸 안에 흘러넘치는 이 주옥같은 싯구절을 읊을 여유조차 갖지 못하는 것이다. 아아, 이 수 백년 살아온 이 세월 동안 나는 대체 무엇을 했단 말인가! 쌈박질? 음식? 여자? 그러고 보니 애들을 조금 낳아두긴 했군. 어리석고도 어린 두 야묘족과 호비트꼬마는 나의 고독한 심중을 헤아리지 못한다. 아아, 그렇다. 창공의 여신이여 밤의 여신이여, 그대들은 나의 이 넓고도 깊은 고독을 이해하시나이까? 나의 이 감수성 풍부하고도 사려 깊은 마음을 이해해줄 수 있는 이는 어디 에 있습니까? 역시 이런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름다운 여인뿐. 나의 여린 감수성을 이해하고 아름답고 상냥한 손길로 나를 이해해 줄 여 인은 대체 어디에? 멍청한 야묘족과 둔해빠진 호비트 꼬마와 수염난 가죽공 드워프들 말고는 여자가 없는 이 비극적인 상황하에서 내가 대체 어떻게 이 마음을 치유받 을 수 있으리오! 내가 마음 속 깊숙히 그렇게 외치고 있는 순간 비명소리가 찢어질 듯이 울 려퍼졌다. "으아아아아아악!" KUBERIN.... 그것은 언제나 내 창문을 두들긴다. 알 수 없는 두려움으로 창문을 열면 막을 수 없는 힘으로 고개를 들이미는 사나운 짐승. 그것이 운명. 10 비명을 하도 맹렬하게 질러서 나는 엄청나고 대단한 일이 벌어진 줄 알았 다. 그러나 달려가 보았을 때 내가 본 것은 에블리 녀석의 찢어진 입과 드 워프들의 화난 얼굴들, 그리고 우울하다 못해 땅속으로 꺼질 듯한 회색의 돌 덩이 앞에선 노란 눈의 계집애였다. 에블리 자식은 영궁을 치켜 든 채로 덜덜 떨며 허공을 향하고 있었다. 녀 석의 엉덩이는 바닥에 꽈악 눌려있었고 두 다리는 덜덜 떨리고 있었으며 입은 자악 벌어져서 턱이 바닥과 합체가 된 듯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앞에 선 것은 거대한 덩치를 한 환영이었다. 길고 길죽한 뱀대가리- 라고 말하기에는 조금 어폐가 있는 그 거대한 덩치 와, 불끈 치솟은 양 보이는 그 거대한 꼬리와, 노랗고 파랗게 섞여진 그 찬 란한 비늘과, 눈동자가 수직선으로 마름모꼴을 하고 있는 그 눈알이 눈 아 래에 놓여진 살아서 꼬물거리는 것들을 바라보며 태연자약하게 꼬나보고 있었다. 환영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 선명한 그 색깔과 그 광택을 나는 바라보면 서 팔짱을 낄 수 밖에 없었다. 본디 팔짱을 낄 때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나는 무섭지도 않아, 놀라지도 않아라고 항변하기 위해서 이고 두 번 째는 나는 잘났으니 반항하지마 라고 말하는 두 가지 이유다. 지금 이 상 황에서 내가 팔짱을 끼는 것은 둘 중 하나이지만 솔직히 말해 전자다. 거대한 환영 때문에 얼어붙은 작자들은 눈앞에 노란 눈의 계집애가 눈을 부라리고 있든 말든 아무런 상관을 하지 않고 있었다. 나는 너무나 눈을 부릅뜬 나머지 두 눈알이 튀어 나올까봐 걱정스러워 보이는 가빈을 잡아 당겨 뒤로 놓고 에블리의 덜덜 떠는 바로 등 뒤로 다가가 섰다. 드워프들은 각자 자다 뛰어 나왔는지 머리엔 헝겊으로 만든 두리 뭉실한 모자따위를 쓰고 수염과 머리칼이 섞이지 않도록 조절하기 위한 모양새를 하고 손에는 보기에도 큼직한 도끼들을 제각각 크기별로 들고 있었다. 그 큼직한 환영은 꼼짝도 않고 에블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에블리의 발 밑에 떨어진 망치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이 놈이 대체 뭘 하려 했는지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분노에 찬 드워프들의 눈은 일제히 에블리를 향해 있다. "인간이여!" 드워프가 외쳤다. 여자 드워프는 그 누군지도 판별할 수 없는 보편적인 형태를 가지고 있는 상태로 외쳤다. "이 무슨 짓이냐!" 노란 눈의 계집애는 마치 그 자리에 있는 에블리를 죽일 듯이 노려 보며 거대한 몸체의 앞에 서 있었다. 그 거대한 용족옆에 선 그녀는 작은 밤톨 같았지만 그 위압감은 용이나 진배없었다. 그녀가 나를 힐긋 바라보았다. 부러진 곳은 멀쩡한 지 그녀는 나를 직시하고 있었다. 드워프들은 그녀와 용은 무시하고 에블리에게 다가가서 그의 목에 도끼날을 들이대고 있었다. "쿠베린, 에블 리가 저 용의 알을 깨려고 했나봐요!" 가빈이 뒤에서 내 옷자락을 잡은 채 외쳤다. 에블리는 창백한 채 나를 돌아보았다. "구해줘!" 드워프들이 날 돌아보았다. 무시 무시한 기세로 그들이 나에게 물었다. "이 자와 상관이 있소이까? 쿠베린 왕이여?" "없어." 나는 상큼하게 대답해 주었다. 그 말과 함께 에블리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는 나에게 뭐라 항의의 말을 지껄이려고 손을 뻗혔지만 드워프들의 도끼날에 위협되어 소리도 지 르지 못했다. "그러나, 잠시 기다려봐." 나는 그렇게 말해주고는 한 걸음 다가서서 그 노란 눈의 계집애를 바라보 았다. "너를 만든 자는 누구냐?" 내가 물었다. 노란 눈의 계집애는 날 빤히 바라보더니 생긋 웃었다. 이 웃는 낯짝을 보 고 나는 무심코 생각나는 얼굴이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생긋 웃든 히죽 웃든 그녀의 뒤에선 그 거대한 덩치의 용은 시선을 에블리에서 내게로 돌 려 눈알을 대굴 굴렸다. "아무 생각없이 히죽 히죽 웃는 노랑머리 마법사인가!" "마베릭님을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계집애가 정색을 하고 그렇게 외쳤다. 그리고는 입술을 잘근 잘근 깨물며 날 노려보았다. 모처럼 그 생글 생글과 다른 표정을 지어 보이기에 나는 조금 기분이 풀렸다. "좋아, 그럼 그 변태는 지금 뭘하고 있지?" "아버지를 그렇게 말하지 말아!" "아버지냐? 그래, 널 이리 주물럭 저리 주물럭해서 만들었으니 아버지라 부를 수도 있겠지." 나는 관대히 고개를 끄덕여주며 계집애를 쏘아보았다. "건방지다! 그분은 너 따위가 범접할 수도 없는 위대한 분이란 말이다!" 계집애가 파르르 떨며 날 쏘아보았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계집애를 가늠해 보았다. 이제 어느 정도 뭐가 어찌되는 지 알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킬트가 만들었던 노란 눈의 계집애와 비슷하지만 이 계집애와 그 계집애는 아주 다르다. 능력의 차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 체력적으로는 이 계집애가 우 월하겠지만 이 계집애는 마법을 쓸 수는 없다. 마법을 쓴다고 하는 것은 특별한 재능이 필요하니까 아마도 킬트가 만든 그 노란 계집애는 특별한 것이 틀림없다. 이 눈앞에 있는 계집애는 틀림없이 몸놀림이 다른 놈과 좀 더 나은 정도일 것이다. "그 놈은 어디있어? 널 내세워서 뭘 하는 거지?" "시끄러워!" 계집애의 몸이 곧장 나에게 돌진했다. 그리고 곧장 나에게 그 작은 몸이 튀어 나와 나를 공격하려는 그 순간이었 다. 거대한 덩치의 뱀 대가리가 갑자기 몸을 틀어서 작은 계집애의 몸을 막았 다. 모두 놀랐고 나도 조금은 아주 조금은 놀랐지만 가장 크게 놀란 것은 그 계집애였다. 자신을 막아선 그 거대한 뱀대가리에게 놀라 몸을 추스렸 다. 하지만 사실 추스릴 필요는 없었다. 그 거대한 녀석의 몸체를 그대로 통과해서 계집애는 바로 내 눈 앞의 땅에 내려섰던 것이다. "아..앗! 대체 무엇을!" 계집애가 외치는 순간 거구가 갑자기 움찔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내 눈앞에서 모든 자들의 눈앞에서 스르륵 하고 꺼져들었다. 꺼 져들더니 그의 몸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무너져 내리면서 작은 덩치를 한 검은 머리 소년으로 화했다. 내가 맨 처음 발견한 그 모습이었다. 검푸른 눈을 하고 검은 머리를 하고 나와 똑같은 복장을 하고 나와 비슷한 얼굴 생김을 한 소년으로 변해 있었다. "무슨 짓입니까!" 노란 눈의 계집애가 난폭하게 외쳤다. 그러나 그도 한 순간 검은 머리의 소년은 노랑 계집애의 정면, 정확히 말 하면 안면을 노리지도 않고 정확히 후려갈겼다. 퍼억 소리가 뒤에 선 드워 프들에게까지 선명하게 들렸을 정도고 나는 코뼈가 부러지는 소리까지 들 렸다. "우욱!"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계집애가 대굴 대굴 구르면서 바닥을 굴렀다. 피가 점점이 떨어져 먼지가 풀풀 나는 돌바닥을 더럽혔다. 모두 놀란 채 그를 지켜 보는 동안 검은 머리의 소년은 나를 직시 하고 있 었다. 그는 입을 다문 채 조용히 물었다. <나는 죽었는가?> 입을 다문 채 물었다는 것은 기이한 일이다. 녀석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그 자리에 있는 모두에게 울려퍼졌다. "죽었다고도 죽지 않았다고도 말할 수 있다." 나는 천천히 말해주었다. 바닥에 구르고 있는 계집애의 입안에서 후투둑 떨어져 내리는 이빨들을 바 라보면서 뚝뚝 떨어져 내리는 검붉은 핏방울을 바라보면서 나는 우울하게 대꾸했다. <나는 용족이다.고룡족의 하나 셀러로니 에발룬.> 녀석이 고집 세게 말했다. 나는 화석이 된 회색의 알들을 가리켜 보였다. "저것이 너다." 녀석의 시선이 그 곳을 향했다. 그의 눈동자가 그리운 빛깔을 띄운다. 돌처럼 무심한 일직선의 그 시선도 아련한 빛을 띄우고 한동안 망설였다. 그리고는 아주 천천히 녀석은 그 알들에게 다가가 매만지기 시작했다. <그럼 여기 있는 나는 뭐냐? 나는 죽은 것인가?> 녀석이 날 향해 물었다. "죽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알이 너니까. 너는 태어날 때 이미 죽어가고 있 었다. 그리고 너의 피를- 아마도 피라고 생각되지만..." 나는 잠시 머리를 굴렸다. "그 피가 묻은 것을 어떤 마법사가 얻었다. 그리고 그 죽여버릴 변태놈은 그것이 용의 피인줄 알아내고 널 불렀다."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향하고 있었다. 나는 녀석에게 다가갔다. "여기 있는 너는 실체가 아니다. 여기에 있는 너는...." 나는 다시 바닥에 떨어진 돌을 주워 녀석의 몸체에 집어 던졌다. 녀석의 몸체에 닿자 마자 돌은 탱 하고 도로 튕겨 나와 바닥을 대굴 대굴 굴렀다. 녀석은 아파 하는 기색은 조금도 없이 여전히 무표정하게 날 바라본다. "여기에 있는 너는 용으로서의 기억을 가진 존재일 뿐이다. 네가 지금 이 돌을 튕겨낸 육체는...." 나는 손을 뻗어서 녀석의 어깨를 만지며 말했다. "금강석이다." 그 순간 내 손안에서 갑자기 녀석이 변화했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뒤에 보고 있던 놈들이 일제히 허억 하고 소리를 질렀 고 나는 그 것을 부여잡은 채 가만히 서 있었다. 내 두 손에 잡힌 '그 것'은 눈 부신 광채를 뿜어내는 금강석이었다. 잘 세공된 그 금강석은 내가 호비트의 구질한 족장에게서 받아낸 것 보다 배는 컸다. 번쩍 번쩍 빛을 발하는 그 것은 휘황한 광채를 뿜어내면서 그 엄청나게 단단하고도 단단한 표면위에 작은 미스릴로 만든 사슬을 매고 있 었다. 소년의 모습에서 제 모습으로 돌아온 금강석은 내 손안에 있었고 그리고 그 대신에 거대하기 짝이 없는 용의 모습이 다시 허공에 떠올랐다. 바닥에서 신음하고 있는 노란 눈의 계집애가 다시 낭패의 신음을 터뜨렸 다. 용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용은 나를 바라보며 금강석을 내려다 본다. <그러면 나는 어찌된 것인가?> "그런 걸 내게 일일이 묻지 말고 스스로 좀 생각해 보는 게 어떠냐?" 내가 트릿하게 말하자 용은 한동안 나를 내려다 보고 다시 내가 쥔 금강석 과 반쯤 금이 간 알의 화석을 돌아보고 다시 내 주변에 입을 저억 저억 벌 리며 경악으로 주저앉아 있는 녀석들을 바라본다. <나는 고룡족의 하나, 셀러로니 에발룬, 나의 모친은 게이트뤼트 에발루니 아이시다.> 용이 차분하게 말했다. "그리고 넌 알에서 깨어나기도 전에 죽었다." 녀석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녀석은 날 바라보지만 날 바라보지 않는다. 녀석은 여기 서 있지만 여기에 존재하진 않는다. 길고 긴 목을 들어서 녀석은 천장을 향해 치켜 들고는 한동안 침묵을 지켰 다. 드워프들이 헛허 하고 헛기침을 하는 동안 나는 금강석에 매인 미스릴의 사슬을 바라보다가 녀석을 다시 바라보았다. "너는 마법사의 실험에 이용된 거다." <나를 여기에 묶어 둔 것은 누군가? 그 마법사란 어떤 것인가?> "주둥이로 중얼 중얼해서 이런 저런 것을 만들어내는 사깃꾼 같은 놈들이 다. 본디 이 세상에 있어도 좋은 물건은 아니지만 때때로 미친 놈같이 드 물게 잘난 놈들이 나와 세계를 어지럽히지." 나는 한숨을 쉬고 있는 노란 눈의 계집애를 바라보며 친절히 말해주었다. <......속이는 자들인가?...> "그렇다고 해두지." 나는 설명하기 귀찮아서 대강 손을 흔들어 보였다. 용이라면 어느 정도 마 음을 읽을 수 있다고 들었는데 이 놈도 읽을 수 있나? <읽을 수 있다. 그러나 너의 마음은 읽기가 어렵군...> "그렇겠지, 나는 잘난 분이기 때문에 쉽지 않을 거다." 용은 나를 묵묵히 바라보았다. "당신에게 두 가지 길이 있다." 나는 천천히 걸어서 에블리와 노란 눈의 계집애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첫째는 이 세상을 떠나 가버리는 것이고, 두 번째는 이 자리에 남는 것이 다.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 에블리와 드워프들이 날 바라보고 노란 계집애가 날 바라본다. 나는 금강 석을 쥔 채 미스릴 사슬을 끊기 위해 두 손에 힘을 주어 보았지만 꼼짝도 않는다. 어쩌면 이 것에는 마법이 걸려 있는 지도 모른다. 이 자리에 용족 의 영혼을 붙잡아 두기 위한 공고한 마법이 걸려서 이 금강석에 서려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해약석을 꺼내서 밀어 볼까? 용은 침묵했다. <나는 가야한다고 저 자가 말했다. 나는 죽었기에 가야 한다고 했다.> "구질 구질하게 일일이 남의 말을 들을 것은 없다. 네가 결정해라." 에블 리가 뭐라 말하고 싶어 입을 벌리고 버금 버금하는 것을 무시하고 나 는 잘라 말해주었다. 용은 길고 긴 목을 들어서 자신의 어미의 화석을 바라본다. 자신의 알을 보고 이미 바닥에 얼어 붙듯이 정지한 회색의 화석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여자의 긴 목이 슬퍼 보이는 것은 여러 번 보았지만 뱀 대가리처럼 길고 굵기가 왠만한 건물 기둥 만큼 굵은 그 목줄기가 슬퍼 보이는 것은 처음 보았다. 허긴 내가 용을 보는 것도 처음이다. 이 용이 만약 죽지 않았다면 어떤 모습이 되었을까. 그리고 이 용은 과연 이 땅 최후의 용인 것일까? 대체 그 놈의 변태마법사 놈은 이 용의 알을 어떻게 발견한 것일까? 알 게 뭐냐? 세상의 모든 비밀을 다 내가 지고 갈 것도 아니고 다 캐내어 뭐 달라지는 것도 없고, 그저 호기심 만족일 뿐일 터이니 그깟 것 별로 궁금하지도 않 다. 오히려 아는 게 더 무섭다. 나는 금강석을 옆구리에 끼고 노랑 눈 계집애를 바라보았다. 계집애는 어느새 다 나은 듯한 얼굴을 곧게 들고 날 쏘아보고 있었다. "당신, 감히 방해를!" 계집애가 날 향해 외쳤다. 그리고 외치는 순간 그녀의 몸이 허공을 격해서 나를 향해 곧장 덮쳐왔다. KUBERIN.... 그것은 언제나 내 창문을 두들긴다. 알 수 없는 두려움으로 창문을 열면 막을 수 없는 힘으로 고개를 들이미는 사나운 짐승. 그것이 운명. 11 이미 실수는 한 번했다. 계집애의 몸을 함부로 잡아서 받는 위험을 이미 겪었다. 계집애가 살기로 눈을 불태우며 달려드는 것을 슬쩍 피해주었다. 한번 붙 은 속도는 금방 떨어지지 않는다. 계집애가 허공으로 치솟으며 나를 아래 로 향해 내질러 온다. 뭐, 모양새는 멋질 지 모르지만 위에서 아래로 공격 하는 것은 엄청난 부담감을 안는 공격이다. 나는 잽사게 피하면서 계집애 가 손바닥을 뻗어 나를 공격하려는 것을 마주 보며 몸을 돋쳐올렸다. 파앗 하고 계집애의 손바닥에서 그것이 튀어온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그 계집애의 몸보다 위로 더 뛰어 오르면서 그 계집아이의 손바닥의 그 뱀대 가리- 대체 왜 나는 뱀대가리가 바글 바글 거리는 상황에 처했던 거냐? 쳇!- 나를 공격해 오는 타이밍을 슬쩍 늦쳤다. 아래로 곧장 달려오던 뱀대 가리는 공격목표를 잃고 휘청인다. 바로 그 때를 노려서 나는 그 계집애의 머리를 발톱으로 그었다. 퍼엇! 비명을 올리지도 않고 계집애가 튕겨 나가 대굴 구른다. 그 머리와 목에서 푸른 피가 치솟아 오르지만 절명하진 않았다. 계집애는 나를 노려보면서 휘청 휘청 일어서더니 착지한 나를 향해서 다시 달려들었다. 너덜 너덜해 진 목줄기의 살갗과 푸른 피가 바닥으로 툭툭 떨어지면서 동굴의 석회질 바닥을 녹이기 시작했다. 보는 자들은 뒤로 모두 물러섰다. 에블리는 입을 자악 벌렸고 드워프들도 흥미진진한 기색으로 숨죽이고 있 다. 에벌룬인지 아발룬인지 하는 놈은 냉담한 시선으로 이 모습을 지켜 보 고 있을뿐이다. 자아! 이제 집중! 집중! 싸울 상대를 앞에 놓고 딴 생각을 해선 안돼. 싸움 이란 주변을 잘 살피며 해야하고 상황을 체크해야 하는 것이지만 상대를 앞에 두고 주변에 너무 집착해선 안되지. 상대가 아무리 약해도 말이야! 순 간의 선택이 영원을 빼앗아 가는 법이다. 나는 계집애가 돌진하는 속도를 가늠했다. 눈을 가늘게 뜨고 계집애가 돌진해 오면서 다시 뱀대가리를 내게 집어던지 듯 손바닥을 여는 것을 측정해서 몸을 옆으로 피했다. 스윽 하고 바로 내 뺨을 뱀대가리가 아가리를 벌리며 스쳐지나간다. 그리고 내가 피하는 것을 견딜 수 없다는 듯이 계집애는 그것을 노리며 한 발 나에게 내달려온다. 나는 그 한 발을 잘 측량해서 마주 한 발을 뻗었다. 그리고 동시에 손톱을 늘어 계집애의 정 미간을 향해 뻗었다. 계집애는 나를 공격하고 있다. 그리고 공격하는 상대는 얼굴을 피할 수 없 는 법. 손톱이 계집애의 미간을 정면으로 뚫고 그 뒷 머리로 튀어나왔다. 퍼어억 하고 푸른 피와 누런 뇌수가 튀어오르는 것을 나는 재빨리 뒤로 머 물러 서서 피했다. 계집애의 눈은 동공이 벌어진다. 갑작스런 죽음에 아픔 도 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뇌수가 바닥으로 뚝뚝 떨어져 내리고 푸른 피가 내 손톱이 빠져나간 그 구 멍으로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는 천천히 천천히 나를 향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털썩 하고 계집애가 쓰러지자 마자 나는 내 손톱이 상하지 않았는가를 확 인했다. 다행히도 내 멋진 손톱은 이 사악할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진 푸 른 피에도 상하지 않았다. "히에에에엑..." 에블 리가 이상한 소리를 낸다. 드워프들이 입을 다물고 심각한 두려움에 찬 눈빛을 나에게 던졌다. 나의 이 위엄이 가득한 모습에 감탄과 경악과 경외심을 한꺼번에 품으며 드워프 여자들은 나에게 몹시도 깊은 인상을 받았다는 양 일제히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곤란하다. 나는 드워프 여자는 좋아하지 않는단 말이야! 가빈은 침착해 보였지만 호비트 마슈는 얼어 붙었다. 녀석은 새파랗게 질린, 누르팅팅한 얼굴로 날 바라보다 말고 가빈을 보고 어버버버하고 마치 막 말을 배운 어정쩡한 인간의 꼬마처럼 버벅거리고 있 다. 그런 놈들을 돌아보다 말고 나는 쓰러진 계집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계집애는 부들 부들 떨고 있었다. 아직 살아있어서가 아니고 몸안에서 영 혼이 빠져나가느라 그런 것이다. 푸른 피로 얼굴을 적시고 노란 눈을 마치 튀어 나올 듯 부릅뜨고 벌벌 떠는 모습은 차마 보기 민망하다. 그렇지만 확인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나는 발을 뻗어서 계집애의 엎어진 몸을 온전히 뒤집었다. 계집애는 피를 줄줄 흘리며 뒤로 털썩 힘없이 뻣뻣하게 드러눕는다. 그런 계집애의 가슴 에 손톱을 세우고 주욱 아래로 내려그었다. 뒤에서 헤엑 어헉 하는 소리들 이 들려온다. "아무리 여자가 필요하다지만 너무해요!" 뒤에서 마슈놈이 외쳤다. 가빈은 녀석을 말리면서 외쳤다. "이럴 때 나서면 맞아죽어! 그만해!" 왠지 울화가 치민다. 나는 녀석들을 무시하고 계집애의 가슴을 주욱 찢어냈다. 작은 유방이 흔 들렸지만 지금 내가 그거 보려고 가슴을 연 건 아니란 말이다. 나에게도 취향이란 게 있어. 설마하니 지금 이 죽은 괴이쩍은 계집애에게 손을 대리 라고 상상한단 말이야? 손톱으로 주욱 가슴살을 찢어내자 푸른 피가 주루룩 흘러내린다. 나는 그 찢어낸 가슴살을 손톱으로 헤집어 찾고자 하는 것을 찾아냈다. 푸른 심장이 두 개. 그 심장을 손톱으로 끊어냈다. 털썩하고 뽑아내자 작은 심장이 펄쩍 뛰며 바닥으로 대구르 굴렀다. 그 모습에 드워프들과 보고 있던 놈들이 어억 하 고 왜액 하기 시작한다. 에블리는 고개를 떨구고 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드워프들은 얼굴을 찡그리고 나의 하는 짓을 바라보고 있다. 문득 한 드워 프가 도끼를 들며 나에게 외쳤다. "그만해!" 일일이 설명하지 않으면 안될 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 말을 무시하고 심장 을 모두 꺼내 바닥으로 내던졌다. 그리고 나서 계집애의 시체를 버려두고 손톱에 묻은 피를 옷자락에 닦아 냈다. 내가 하는 모습을 모두 보던 드워 프들이 일제히 달려들면서 도끼를 들며 항의한다. "대체 이게 무슨 짓이야? 죽일 수도 있지만! 그런 짓을 하다니!" "그래! 그래!" "무슨 짓인가!" "이런 짓을 우리 일터에서 하다니! 이런 천인공노할 짓을!" "이 꼬맹이는 보통 물건이 아니야. 이대로 놔두면 또 살아날 거다." "뭐야?" "살아난다고! 이 멍청이들아!" 나는 그 한 마디를 하고는 손을 털며 아직도 무심한 얼굴의 에발룬을 바라 보았다. 녀석은 시체가 되어 늘어진 계집애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그 렇지만 그 뱀대가리처럼 찢어진 주둥이의 그 얼굴엔 표정이 없다. 허긴 저 얼굴에 표정을 짓기도 어렵다. 저 얼굴로 히죽 웃기라도 한다면 정말 끔찍 할 지도. 계속 악악거리는 드워프들을 무시하고 나는 그의 앞으로 가서 물었다. "결정했냐?" <....> "거기서 계속 생각하고 있어. 그럼. 난 알 바가 아니니까." 나는 손을 털고 계집애랑 싸우느라 바닥에 내려놓았던 미스릴에 휘감긴 금 강석을 내 주머니에 집어 넣었다. 허어, 상당히 묵직하구만. 아직도 드워프들은 악악거리고 있다. 아무리 드워프라고 해도 여자는 여자 구만, 지겨워서 도중에 그만둘 영양가 없는 소리를 계속해서 계속해서 떠 들고 있는 이 모습들은 말이야. 하지만 에블리 놈은 창백한 얼굴로 구역질을 하다 말고 날 쏘아보았다. "이런 짓을 하다니! 악당놈!" "너야 말로 알은 왜 부수려고 덤비냐? 덤비길!" "저건 유령이야! 유령이니까 없애야해!" 녀석이 벌떡 일어난다. 그리고는 영궁을 치켜 들어서 거대 뱀대가리를 향 해 겨눈다. 이게 아주 간덩이가 부었나? 살려두니 간덩이가 부어 배밖으로 튀어나왔 군. "계속해 봐, 난 갈테니." 내가 걸음을 옮기자, 드워프들과 마슈등이 일제히 날 바라보며 입을 벌린 다. "가다니? 어딜?" "어디긴 어디야? 내가 할 일 다했으니 난 간다는 건데." "이, 이렇게 난장판을 해놓고 어딜가!" 드워프들이 고함을 지른다. "여긴 우리 일터야! 이 엉망을 해놓고 어딜 가는 거요! 쿠베린 왕! 당신 너 무하잖아!" 나는 뒤를 돌아보며 손가락을 들어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이 여편네들아! 정확히 말해두지만 난 여기 저걸 보러 왔단 말야, 저거 정 체와 저걸 확실히 봤는데 내가 왜 여기 남아?" "저...저 시체와! 저 용 유령을 내버려두고 그, 그냥 간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맞아! 저 용 유령을 해결하란 말이야! 불러낸 건 당신이잖아!" 나는 그들의 머리 나쁨을 한탄할 수 밖에 없다. 역시 드워프는 섬세함이 모자라. "이봐, 친절하게 이 몸께서 설명해주지. 저 유령을 부른 건 내가 아니고 저 놈이잖아?" 내가 에블리를 가리켜보이자 드워프들의 시선이 일제히 다시 에블리에게 쏠렸다. 그들의 눈빛이 험악하다는 것을 확인한 에블리는 영궁을 쥐고 우 물 쭈물 그들의 시선을 받으며 쪼그라들었다. "에에..하지만 나는 저 유령을 없애려고.....에에.. 하지만 잔인한 짓을 한 것 은 ..저..자이고.." 녀석이 멍청한 낯빛으로 변명을 하는 순간 나는 흐흐 웃었다. "자아, 설명해주지, 아무 것도 모르는 너희들을 위해서 말이다. 저 계집애 는 인간도 아니고 엘프도 아니고 호비트는 더더욱이나 아니고 수인족도 아 니고 드워프도 아니고 용족도 아닌 어떤 마법사가 만들어낸 존재로서...심 장이 여러 개 있고...에, 재생 능력이 탁월해서 내가 푹 찔러도 잠시 후면 벌떡 일어나는 존재다 그거지." 녀석들이 일제히 나를 초롱 초롱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그들의 트릿한 시 선이 감탄과 존경의 시선으로 화하기 시작했다. 역시 드워프는 말하면 통 하는 상대지, 엘프와 달라서 잘 설명하고 직설적으로 설명하면 오해란 없 다. 그런데 설명하다 보니 귀찮다. 내가 왜 설명하지 않으면 안되지? 왜 놈들 은 알려고 노력을 하지 않는 거야? 이 몸께서 일일이 구질 구질하게 설명 하지않으면 안되는 이유가 대체 뭐야? 내가 입을 다물자 침을 꿀꺽 삼키면서 도끼날을 쓰다듬으면서 드워프 촌장 - 겨우 구별했다-이 날 흘긋 흘긋 보며 물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심장을 꺼낸 것은 죽은 걸 확인하려는 거다 그거 죠?" "그렇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녀석들은 고개를 마주 끄덕이면서 이번엔 끄덕이던 고개를 갸우뚱하며 날 바라본다. "그런데 이 용의 유령은 어쩌죠?" "나도 몰라." 나는 어깨를 으슥했다. 나는 유령을 해결한다기 보다 살해가 벌어지고 있 는 무시 무시한 숲을 구하러 온 거다. 살해를 한 지금 저 계집애를 죽인 이상 내가 한 일은 끝이다. 그러나 나의 간단하고도 명료한 대답에 드워프들은 모두 경악하면서 쏘아 본다. 다시 도끼날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 건 해결해 주셔야죠, 우리 작업장에 이런 게 버티고 있음 곤란 하단 그거요!" 어깨를 으슥하면서 작달막한 주제에 근육으로 탱탱한 드워프 여자가 눈을 가늘게 떠보인다. 여차하면 덤비겠다는 의지의 표명인 거 같지만 후, 이 쿠 베린님에게 도전하기엔 드워프따위는 백년, 아니 최소 천년은 이르다. "이봐, 왜 내가 해결해야해? 부른 건 저 놈이고 여긴 그대들의 작업장이잖 아?" "하지만..." "설마하니 내가 없으면 일이 안된다는 거야? 해결할 수 없다는 거야? 그런 거냐?" 내가 흐흐 웃으며 말하자 녀석들의 안색이 변한다. 드워프들은 자존심이 무척 세다. 자신들이 해결할 수 없는 일이라곤 없다 고 확신하는 놈들이다. 흐흐흐흐. "그럴리없지! 우리도 해결할 수 있어!" 서너명 무리에서는 반드시 이렇게 떠드는 놈이 나온다. 녀석의 얼굴이 벌 개지면서 악악 소리를 내며 외쳤다. "우리도 해결할 수 있다구!" "그래! 좋은 마음가짐이야, 그렇고 말고. 그러니까 난 간다." 나는 히죽 히죽 웃으며 몸을 돌렸다. 그러나 그 순간 에블 리가 외쳤다. "저 유령은 우리 힘으론 안되는 거야!" 그 순간 나는 멈추어 서지 않고 모른 척가려고 했다. 그러자 녀석이 또 외 친다. "이봐! 쿠베린! 당신 말만 듣잖아! 저 유령은?" 저 자식이? 돌아보자 새파랗게 질린 놈이 다리를 후들거리면서 외쳤다. "당신 말만 들어! 그러니까 당신이 말해 해결해야 한다구!" "왜?" "....다, 당신이 그의 정체를 밝혀냈으니까!" "네가 유혼사잖아? 게다가 넌 없앤다며? 어서 없애, 어서 없애." 나는 친절하게 말해주었다. 녀석의 얼굴이 노랗고 빨갛고 파랗게 변했다가 다시 안색에서 핏기가 가신 하얀 얼굴이 된다. "나의 ...역량으론..안돼!" 나는 팔짱을 끼었다. 드워프들이 입을 다문다. 그들은 있는 지 없는 지도 알 수 없는 짧은 목을 길게 늘여서 석상처럼 선 용족의 화석과 그 화석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그 유령을 바라보았다. 드넓은 동굴 안에 침묵이 흘렀다. "모르겠어....난 모르겠어...저렇게 큰 유령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어....." 에블 리가 머리를 잡고 중얼거린다. 유령은 크거나 작거나 유령이다 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나는 입을 다물었 다. "그럼 나에게 뭘 지불할 건가?" 내가 물었다. 드워프들이 날 보며 난색을 표했다. 에블리는 날 바라보며 간이 배 밖으로 튀어 나온 놈답게 너무나 격렬한 감 격의 표정을 지어 보인다. 회색의 거대한 화석, 거대한 무덤, 지나치게 거대라는 말이 반복해서 쓰여 지는 이 거대한 동굴의 거대한 유령을 존재가 거대하신 이 몸은 침묵으로 서서 드워프들에게 관대하게 물었다. "뭘 지불 할 수 있어?" ".......그, 글세, 아직 이 곳에서 마땅한 물건을 파내지도 못했고..." 족장은 우물 우물 거렸다. "이봐, 이봐 촌장, 나는 말이지, 덜 떨어진 인간의 정의의 용사가 아니란 말이다. 나는 어디까지나 확실하고 확고하게 부탁을 들어주면 그 대가를 반드시 받는 공정한 분이다." "아. 알고 있다구요. 쳇. 하지만 지금 당장 무얼 주어야 할지 우리도 난감 한 걸." 드워프촌장은 머리를 다시 벅벅 긁었다. 에블리는 축 늘어진 채 날 바라보고 있었다.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당신, 진짜 지독하잖아..." 문득 생각난 게 있어서 주머니에서 무거운 팔찌를 꺼내들었다. 그리곤 그 걸 촌장에게 던져주었다. "이거," "에?" "이게 대체 뭐하는 물건인지 좀 알아봐." "에?" "이걸 말이지 내가 얻었는데 이 마력이 깃든 이 물건이 뭐하는 물건인지 모르겠단 거다." 드워프 촌장은 내가 던진 팔찌를 주워 들어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고대의 물건이군." "그래, 고대신의 신전근처에서 파냈다는데 무겁고 뭔가 마기같은 게 서려 있어, 이 물건의 연원을 밝혀봐. 너희들은 그냥 드워프도 아닌 떠돌이 드워 프니까 아는 게 좀 있겠지." 마후투도 몰랐다. 이 물건 그 동안 쥐고 다니기만 했는데 잘 되었지 뭐, 번 쩍 번쩍 빛나는 이쁜 것도 아니고. 정체나 밝혀보자. "조사를 더 해봐야 하겠는데..요. 이건....분명히 드워프의 세공도 아니고, 엘 프의 세공도 아니란 말씀, 이런 무거운 금속을 엘프들이 건드릴 리도 없 고...마기가 풀풀 날리는 이런 것을 ....대체 어디서?" "몰라, 기억 안나. 얻었어. 그러니까 너희들이 알아내라." "음,..시간을 좀 주쇼." "알았어, 준다. 하지만 하염없이는 줄 수 없어." "알았어, 알았어. 희안한 물건일세! " 촌장은 그 물건을 들여다 보면서 흥미진진한 얼굴을 했다. 그러자 주변의 드워프들도 나도 나도 하고 달려들어 들여다 보기 시작했다. "뭔데?" "뭔데? 나도 볼래!" 그리고 그들은 그 물건을 둘러싸고 이리 저리 모여들어 마침내는 이 동굴 안에 유령이 있다는 것조차 까먹어 버렸다! KUBERIN.... 그것은 언제나 내 창문을 두들긴다. 알 수 없는 두려움으로 창문을 열면 막을 수 없는 힘으로 고개를 들이미는 사나운 짐승. 그것이 운명. 12 "흠,..이봐, 뱀대가리." 내가 말하자 녀석이 천천히, 아주 빌어먹게도 천천히 고개를 돌려서 날 바 라본다. 침착하지만 아무 생각도 없어 보이는 얼굴이다. 허긴 이 얼굴에 생각이 있 어 보이면 더 끔찍할 지도 모른다. 뱀 눈깔과 뱀 머리통과 뱀에는 없는 화 려한 비늘을 가지고 뱀에는 없는 큼직한 콧구멍과 뱀에게는 없는 네 다리 를 가진 놈은 아주 천천히 날 주시하고 있었다. 나는 문득 이 놈이 날 주시하는 것인지 내 주머니 속의 금강석을 주시하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어쩔거냐? 여기 내내 있을 거야?" <......모른다.> "야, 돌탱아, 널 감시하던 계집애가 죽었으니 넌 돌아다니든 이 세계를 떠 나 갈 곳으로 가던 상관없어." <......하지만 떠날 수 없다.> "왜?" <...그 돌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난 여길 벗어날 수 없다....아니 그 돌 주변 을 벗어날 수가 없다.....> 나는 주머니에서 금강석을 꺼내서 집어던졌다. 쾅 하고 소리가 나며 금강석이 대굴 대굴 굴렀지만 금강석답게 조금의 흠 집도 생기지 않았다. 금강석이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보석과 돌 중에 가 장 단단한 것이다. 물론 이쁘기도 이쁘다. 반짝 반짝 빛나는 이 돌은 매혹 적이고 모든 욕심있는 종족들의 속안을 박박 긁는 물건이고 ...고가이기도 하다! 그 금강석을 미스릴로 칭칭 감아 놓았다. 미스릴은 마법을 걸기에 가장 적당한 금속이라 알려져 있다. 이 신비의 금 속은 이게 금속인지 아닌지도 확실하지 않기에 더더욱 신비한 것이다. 제 기랄. 나는 주머니를 뒤져서 해약석을 꺼냈다. 그리고는 그 금강석과 미스릴을 북북 문질렀다. 마법이라면 해약시켜 버리겠다! 퍽퍽 하고 빛이 오르고 불꽃이 튀고 불똥이 튀기고 난리가 나기 시작했다. 이거라면 되겠지! 이 지긋 지긋한 마법! "와앗..웃. 그게 뭡니까?" "저게 뭘까?" "이야! 저거 해약석 아냐?" 그 빛을 본 드워프들이 눈은 또 있어서 옆에서 떠들어 대는 동안에 궁금한 듯 에블 리가 내 주머니를 흘긋 흘긋 본다. 가빈은 이미 단념한 좀도둑의 표본처럼 점잖게 날 바라보고만 있을뿐 주머니를 뒤지려는 생각은 감히 하 고 있지도 않다. 호비트도 손버릇 나쁘기로 유명하긴 하지만 마슈는 일단 이 용에게 얼어버린 나머지 호비트 다운 호기심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아무리 해약석으로 박박 문질러 봐도 이놈의 미스릴은 풀리질 않는다. 아무래도 해약석 이상의 레벨을 가진 마법을 걸기라도 한 것일까? 하지만 이 해약석은 왠만한 마법은 모두 다 해약시켜 버리는 것인 데. 에라, 모르겠다. 나는 해약석을 도로 주머니에 넣고 용을 바라보았다. 용의 유령은 날 물끄러미 바라보고 다시 돌을 바라본다. "알았어, 너 가져." 내가 홱 돌아서서 금강석을 에블리에게 던져주었다. 그러자 끼아아아악 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에블 리가 뒤로 자빠지더니 그대 로 뒤통수를 땅에 부딪치고 기절을 해버렸다. 어라라? 가빈을 보자 가빈이 급히 고개를 저었고 드워프들도 화들작 고개를 저었 다. "왜?" "....그걸 가지면 용의 유령과 내내 같이 있어야 하잖아요!" "맞아! 그런 걸 어떻게 가지우? 못 가져!" "이봐, 이봐, 너희들이 파냈잖아! 그러니까 너희들 꺼라구!" 내가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드워프들이 친절하고 빌어먹게도 친절한 어투로 공손히 말한다. "우리들은 감히 용족과 말을 할 수도 없구요, 감히 감히 저 위대한 용족을 우리들 꺼라 할 수가 있겠수? "이봐, 말 바꾸지마!" 내가 어처구니 없어 말하자 드워프들이 급히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그 금강석을 지니시고 이곳에서 멀리 멀리 떠나 주셨으면 대단히 감사하 겠나이다. 쿠베린 왕이여!" "위대하신 쿠베린 왕이시여! 그 금강석을 가지고 떠나 주소서!" "....." 이거 뭐하는 짓들이야? 드워프가 이렇게 표리 부동하다니. 이런 귀찮은 물건을 나보고 내내 지고 다니라고 말하는 거야! 어림도 없는 소릴 하고 있구만! 문득 그 드워프가 감히 가질 수도 없는 위대하신 용족의 유령쪼가리 놈이 나에게 말을 건다. <나는 ....여기에 봉인된 건가?> "알 게 뭐야! 젠장!" 나는 금강석을 휙 던지고 성큼 성큼 이 자리를 떠나기로 마음 먹었다. 그 러자 그 순간 갑자기 휘익 하는 소리와 함께 그 용대가리가 갑자기 스륵 사라지더니만 곧이어 나와 같은 소년의 모습으로 화했다. 그리고는 내 옆 에 선다. 그 멍한 눈을 보며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봐, 뱀대가리." <.....난 셀러로니 에발룬이다.> "너 이리 저리 변할 수 있는 거야?" <....일단 겉모습은....본질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것이니....> 호오. "그럼 너, 여자로 변해봐." 그럼 데리고 가주지. 흐흐. 침묵이 흘렀다. 약간 거북한 침묵이 흘렀다. 드워프들이 매우 민망한 얼굴을 한다. 가빈이 머리를 짚었다. 마슈가 입을 저억 벌린다. 그러나 잠시후 고개를 갸웃하던 그 놈의 용이란 게 흐릿해지더니 그 담에 는 짧은 다리 두터운 몸통, 시커먼 수염, 부릅뜬 두 눈탱이, 찢어진 넙적한 입으로 화했다. "야! 그게 뭐야?" 내가 아악 비명을 올리는 순간 녀석이 말했다. <여자다.......> 나는 드워프 여자들을 바라보았다. 드워프들도 나를 보고 있다. 그리고 잠시 후에 이 놈의 여.자.들이 킥킥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갑자 기 대굴 대굴 구르며 웃기 시작한다. "푸하하하하하핫! 맞잖아! 여자는 여자다!" "쿠하하하하하...!" 드워프의 탈을 쓴 통나무들이 대굴 대굴 구르는 동안 나는 인내심 깊게 그 드워프여자로 변한 용대가리 놈에게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본래 드워프 여자는 여자라고 말하는 게 아니야, 알아 듣겠냐?" <....이상하군, 여자는 여자다...> 녀석이 얼띠게 지껄이는 것을 나는 깊고도 넓은 인내심으로 억누르고 조용 히 말했다. "모름지기 여자는 볼륨이 있고 가늘고 긴 팔다리와 풍만한 가슴과 엉덩이 가 있어야 하는 법이란다. 알아 듣겠냐!" <.........> 하긴, 여기서 설명해 봐야 어찌 알겠냐? "좋아, 일단 널 데리고 가지. 가서 멋진 여자를 보이면 알아듣겠지." 나는 문득 마리아를 생각했다. 그래, 마리아에게 선물 하나 사주고 이 놈을 마리아 스타일로 변하게 하는 거야, 마리아와 달리 금발로 하고 눈 색깔은 멋진 보랏빛으로 하자! 크흐흐 흐... 그리고 가빈 대신 끌어안고 잘까? 하지만 금강석이 원형이니 끌어안으면 딱딱할 지도 모른다. 나는 시험해 보기 위해서 녀석을 덥썩 끌어안았다. "꺄아아!" "와아!" "에헤!" 드워프들의 야유를 물리치고 나는 그 감촉(?)에 만족했다. 단단하긴 해도 감촉은 살아있는 것이랑 별 차이가 없잖아! 좋아, 좋아! "좋아, 내가 가져야지." <......> 녀석은 말 없이 날 바라보고 있다. 진짜 아무 생각 없는 놈이다. 허긴, 막 알에서 깬 놈이 알긴 뭘 알겠어? 이 놈은 굳이 말하자면 내 아이들 보다도 어린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약간 죄책감이 생기는데, 흐, 하지만 원래 종족을 넘어선사랑도 있으니 연 령을 뛰어넘은 사랑도 있을 수 있는 법! 좋았어! 가자! 가자! "쿠베린..." 가빈이 중얼거린다. "여자가 그렇게 좋아요? 휴우......." [쿠베린 별전6] 엘프의 아이 KUBERIN... 어느 새인가 내 눈등 위에 올라선 잔인한 운명의 여신은 얼기설기 얽힌 실타래를 살피며 은색의 가위를 든다. 초록의 풀잎이 흔들리고 있다. 반듯하게 누워 있던 소년은 부시시 일어나 앉았다. 바람이 무표정한 소년의 얼 굴을 건드려 머리카락을 흩날리고 지나갔다. 소년의 흰 이마와 금빛의 머리칼은 짙은 녹음 속에 녹아들어서 그 자리에 박힌 돌멩이처럼 자연스러웠다. 아직 예닐곱살 정도 될 듯한 소년은 몸을 웅크리다가 인적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짙은 녹색의 숲을 바라보았다. 그가 언제나 도망치듯이 웅크리는 수풀속의 정령 들이 그에게 말을 걸어 온다. 희고 투명한 몸체를 가진 이목구비가 없는 여인이 작은 두 장의 날개를 흔들면 서 소년의 머리 위에 앉았다가 날아오른다. 토끼처럼 긴 귀를 가진 동그라한 얼 굴을 한 작은 정령이 그의 얼굴을 들여다 보다가 풀쩍 공기 중으로 사라진다. 정령은본래는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고,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지도 않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소년은 이목구비가 없는 여인의 모습을 한 정령을 자꾸만 자신의 앞으로 나타내고 있었다. 수풀 안쪽에서 바스락 하고 인기척이 들려왔다. 소년의 무심한 얼굴이 잠시 일그러지다가 오만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소년은 앉 은 자세를 바꾸지 않고 오히려 꼿꼿이 목을 들고 정면을 바라본다. 그리고 잠시 후에 아름다운 녹색빛을 띈 갈색머리를 한 두 명의 엘프들이 나타났다. 엘프들 은 모두 흰 피부에 청명한 푸른 눈을 하고는 옆에 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산딸 기와 무언가 이름도 모를 나무 열매를 한 가득 채운 채 그들은 바구니를 옆에 끼고 다가오고 있었다. "인간의 아이네." "그렇군." 두 엘프는 무심히 지나쳤다. 소년은 입술을 깨물고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인간의 아이네. 그렇군. 엘프들은 오로지 그 말만 할 뿐이었다. 그 아이가 어떤 아이인지 잘 생긴 아이인지 못생긴 아이인지 나쁜 아이인지 착 한 아이인지 똑똑한 아이인지 멍청한 아이인지 남자아인지 여자아인지 아무 것 도 상관하지 않는다. 관심이 없다. 그들은 그가 있어도 그를 보지않는다. 소년은 다시 턱을 괴고 무릎을 끌어당겨 앉았다. 엘프들에겐 그가 돌멩이와도 같고 바위와도 같고 풀잎과도 같고 나무와도 같고 조그마한 벌레들, 개미들과도 같은 것이다. 그는 발끝으로 와글 와글 굴러 다니는 벌레들을 짓밟아 죽였다. 그도 벌레는 벌레일 뿐 그 벌레가 어떤 벌레인지 관심이 없다. 그 벌레가 나뭇잎을 많이 갉아먹는 벌레인지 날 수 있는 벌레인지 얼마나 빨리 기어갈 수 있는지 그런 것 따윈 알지 못하고 관심도 없다. 그에겐 벌레는 벌레 일 뿐. 밟아 죽여도 무력한 벌레일 뿐. 소년은 벌떡 일어나 숲속으로 가서, 당장에 걸친 셔츠를 벗어들고는 그것으로 물을 담아 땅벌의 집안에 물을 흘려 넣었다. 물이 가득 차 땅벌의 애벌레들이 모조리 물에 잠겨 죽어버리고, 그 무수한 알들이 썩어 버리고, 날개가 젖은 벌들 이 주둥이와 더듬이를 흔들어 죽어가는 것을 그는 지켜 보았다. 차가운 물을 벌집 안에 무심한 얼굴로 들이 붓고 그들이 죽어가는 것을 지켜 보 았다. 소년은 땅벌을 죽이고 메뚜기를 잡았다. 메뚜기의 다리를 하나 씩 하나 씩 떼어 내고 그 다리 없어 벌버둥 거리는 메뚜 기를 거미줄 위에 달아 놓았다. 버둥거리는 그 기척을 보고 시커먼 거미가 파르 르 쫓아와 버둥거리는 메뚜기를 칭칭 감으며 묶어 버린다. 그 모습을 소년은 바라보았다. 걸으면서 그는 벌레를 죽이고 나뭇가지를 꺾고 돌멩이를 걷어차면서 자신이 그 들과 다름을 증명하고 있었다. 바람은 불고 숲속은 언제나 활기에 찬 소리를 낸다. 그리고 그 와중에 죽어버린 것들이 썩어가는 고목 위 불길한 버섯들마냥 모여 있다. 햇볕은 지나치게 뜨겁다. "아크." 갑자기 그의 주변이 회전했다. 그는 자신의 앞에 선 엘프를 본다. 그의 엘프는 그를 바라본 채 한 숨을 쉬고 있었다. 키가 휜칠한 백금발의 엘프의 왕은 손을 뻗어서 아크의 이마를 쓸어 올렸다. 땀 방울이 묻어난다. 그는 웃고, 그의 땀으로 얼룩진 이마를 쓰다듬고 나서 소년을 안아 들어 올렸다. "밖에서 너무 놀면 지쳐. 넌 인간이니까 몸이 그렇게 강하진 못하지." 소년은 그의 목을 무표정한 채로 끌어안았다. 그가 태어나서 제일 처음 본 웃는 얼굴을 한 이 아름다운 엘프는 그가 시커먼 마법사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그의 양부가 되어 있었다. 엘프는 그를 안고 엘프의 마을로 걸었다. 지나가던 엘프들이 그를 향해 인사한다.상냥하고 웃는 얼굴이 그들의 얼굴에 배어나와 우아하고 유연하게 그들의 왕에 대해서 인사했다. 소년은 자신의 양부이자 엘프들의 왕인 그를 향해 인사하는 엘프들을 냉혹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그의 양부에게 인사하는 것이지 자신에게 인사하는 것 은 아니었다. 그들은 '엘프' 이고 자신은 '인간' 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인간을 좋 아하지도 않고 인간을 좋아할 이유도 가지고 있지 않다. 우아하지만 차가운 엘프들의 인사를 받으면서 소년에게 있어서 유일하게 체온을 가진 엘프인 엘프의 왕이 조용히 말했다. "씻고 오렴. 그리고 내가 너에게 할 말이 있다." 소년은 그를 바라보았다. 엘프의 왕은 약간 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새둥지에서 새알을 훔쳐낸 것이 너니?" "이유 없이 뱀을 눌러 죽인 게 너니?" "물고기를 잡아서 먹지도 않고 나무에 꽂은 것이 너니?" "매미를 잡아서 날개를 뜯고 머리를 잡아 뜯어 꼬챙이를 꽂은 게 너니?" "나비의 날개를 발기 발기 뜯은 게 너니?" "네." 그가 대답하자 양부는 화를 냈다. 그는 화를 내는 얼굴로 말했다. "벌이다! 절대로 네 방에서 나오지 마!" 그는 화를 냈지만 실제로는 화를 내진 않았다. 그는 기분이 나빠 보였지만 실은 기분이 나쁜 것은 아니다. 그는 왜 그랬는지 이해도 하지 못하지만 받아들인다. 소년은 턱을 괴고 자신의 양부를 바라보고 있었다. 엘프는 화를 잘 내지 않는다는 것을 소년은 알고 있었다. 그들은 화를 내지도 않고 즐겨 웃지도 않고 소리내어 싸우거나 시비를 걸지도 않는다. 그리고 따스 하게 안아주지도 않는다. 그것이 엘프다. 소년은 엘프의 방처럼 다듬어진 자신의 방에 틀어가 박혔다. 주변에 늘어진 무수한 마법서들이 유일한 즐거움, 그는 부친의 유품이자 어머니 의 유품인지도 모를거울 앞에 서서 그 것들을 바라본다. 거울에 비친 자신은 부드러운 금빛 머리칼을 한 흰 살결의 소년. 그는 소리내어 말해보았다. "아크는 아름다워. 아크는 착한 아이야..." 그는 거울을 잡고 속삭였다. 거울 속의 금발 소년의 얼굴이 천천히 일그러지고 우는 것도 웃는 것도 아닌 기 기묘묘한 표정이 되어 버린다. 죽음처럼 조용한 방, 발자국 소리조차 내지 않는 엘프들의 방. 그는 거울을 보면서 속삭였다. "너는 나의 친구야, 너는 아크. 나도 아크." 거울을 쓰다듬으면서 그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마법서를 읽고 또 읽고 읽으면서 자꾸만 자꾸만 생각한다. 방안에 있는 또 다른 친구, 그는 따사롭고 나를 안아주고 나에게 말을 걸어주 고 나만을 생각해준다. 그 친구는 나와 같이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 엘프들은 아름답지만 자신은 아름답지 않다. 어떤 엘프의 아이도 자신처럼 생긴 아이는 없다. 그는 자신의 머리칼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자신의 얼굴과 손과 발 과 다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바닥에 누워서 마법서를 본다. 마법서를 보며 자신의 손을 그리고 다리를 바라본다. 그리고 잠이 들었다. "아크. 이젠 일어나야지." 문이 열리고 양부가 들어섰다. 그는 눈쌀을 찌푸리고 침대 위에서 자고 있는 그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는 이 마를 쓸어 넘기면서 잔소리를 시작했다. "바닥에 늘어진 저건 뭐냐!" 그가 고개를 돌리자 마법서로 쌓여진 작은 담장이 보였다. 침대를 둘러싸고 온 통 담을 쌓은 그 모습을 보고 그는 입을 벌렸다. "에..?" "이런 짓은 왜 했니? 깔끔하게 정리하렴." 아크는 잠시 동안 생각했다. 자기 전에 저렇게 했었나 하고 그는 생각했지만 기억이 나지 않았다. 옷을 끼어 입고 널려진 책들을 정리하다 말고 그는 움찔했다. 벽에 걸린 거울에는 누군가가 서툰 글씨로 무언가를 써 놓았다. 거울에 쓰여진 이런 저런 글자들은 마법서의 주문들이었다. 그렇지만 그 것을 썼던 기억은 없다. 그는 멍하니 거울을 바라보았다. 거울 위에 저런 걸 써놓은 건 누구지? 손가락을 뻗어서 그 거울을 만져 본다. 소년은 웃었다. '그 친구'가 썼구나. 소년은 웃었다. '그 친구'가 장난을 쳤구나. 그는 손을 뻗어서 거울을 만지고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는다. 거울 속에 자신이 있고 그를 아는 친구가 있다. 그는 거울을 만지고 이마를 거울에 댄 채로 눈을 감았다. 마법의 주문이여 나에게 나를 주소서 마법의 신이여 나에게 나를 주소서 마법의 힘이여 나에게 나를 주소서 이름으로 그 힘을 가진 자들이여 나에게 나를 주소서 나에게 체온을 주게 하고 내 이름을 주게 하고 나를 이 자리에 있게 해주소서 그는 그렇게 하고 고개를 들었다. 그가 빙긋 웃자 그가 이마를 뗀 그 자리에 그와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금발의 소녀가 있었다. 제 15화 해적 KUBERIN 우연히 아주 우연히 발부리에 걷어차인 돌멩이가 물 속에 빠지면 파문이 생겨나는 것은 필연이다 1 길게 누워서 햇빛에 반짝이는 먼지쪼가리와 내 손가락 사이로 흩어지는 햇 살들을 멀끄러미 바라보면서 다리에 감겨드는 부드러운 촉감을 즐긴다. 체 온이 스며오고 따스한 감촉이 등줄기를 스치면 절로 웃음이 난다. 그렇다. 이것이 바로 적당한 아침. 아침이란 이래야 한다. 창문에 수줍은 처녀마냥 다가서는 햇살과 비비적 비비적거릴 때마다 와 닿 는 부드러운 감촉과 방안 전체에 감도는 온기. 그것이 바로 아침이라 부를 수 있는 조건이다. 으스스한 한기와 축축한 습기도 없이, 빨랑 빨랑 하고 뛰어 다니는 선원들 의 시끄러운 소리들과 일어나라고 소리지르는 여자들의 목소리를 뺀 이 아 침.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아침인 것이다. 이 얼마만의 날이냐.... 불행히도 이 곳 엘리야는 항구다. 항구에는 물이 무척 많다. 물이 많으면 당연히 안개도 낀다. 폭풍우가 치면 비바람과 함께 짭찔한 바닷물도 코를 찔러댄다. 그뿐이랴? 바람은 왜 이리 찬지 추워 달달 떨린다. 한가지 즐거움은 먹을 게 많다는 것정도인데 오늘 날씨는 무척 좋다. 아주 흐뭇한 날씨인 것이다. 흰 구름이 멀리 한 두 개 오락 가락 창문 틈새로 보이고 몸은 노곤 노곤하다. 작은 손가락이 어깨를 슬금 슬금 문지르면서 머리에 키스해 준다. 음... 여자는 뼈가 없는 것 같이 느껴질 때가 종종 있다. 내 몸에 와닿는 감촉이 그렇고 착착 감겨들때도 그렇다. 분명히 마른 것 같긴 한데 뼈는 느껴지지 않는다. 이게 바로 신비의 여체라 부르는 것일지도. 쿵쿵 거리고 계단을 올라 오는 소리가 들렸다. "쿠베린!" 군터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리아가 고개를 들고 내 어깨에 턱을 묻으면서 중얼거렸다. "뭔가 급한 일인가?" 잠이 덜 깬 목소리로 그녀가 중얼거리다가 비스듬히 몸을 일으키고는 침대 에서 떨어져나갔다. 나는 그녀가 사라진 온기를 아쉬워 하면서 대굴 대굴 침대에서 고개만 내밀고 문가를 바라보았다. 시원찮은 일로 나의 이 평화 롭고도 아늑한 아침을 망쳤다면 자식의 머리통을 몇 대 후려 갈겨 놈의 저 녁, 아니 하루를 망쳐주리라 하고가벼운 결심을 하면서 나는 턱을 고이고 엎드렸다. 마리아가 문을 열자 마자 군터와 스카가 고개를 내밀었다. 그리고는 스카는 나를 마뜩찮게, 그리고 군터는 나를 조금 두려워 하면서 힐긋 힐긋 나를 바라본다. "이봐, 손님이 왔어." "뭔 손님?" "...시장이야." 스카가 무뚝뚝하게 말했고 군터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시장이라니?" "엘리야 시장 말이야!" "그 시장이 왜 와?" "너에게 의뢰가 있대." "나에게 왠 의뢰가 있대?" 스카가 날 노려보았다. "말 따라 하지 말고 냉큼 그 엉덩이 들고 일어나!" "내가 시장 따위의 의뢰를 받기위해 애인과의 감미롭고 달콤하며 온화한 이 아침을 망쳐야 겠냐?" 내가 녀석을 쏘아보자 스카는 팔짱을 낀 채로 주저하지도 않고 말했다. "응." "어째서?" 자식이 기어오르는 구만. 조금 머리통 커졌다고 나에게 이럴 수가 있나 하 고 내가 비스듬히 몸을 일으켜 녀석을 쏘아보자 스카가 잘라 말했다. "내가 받아들였거든. 너와 난 동업자잖아!" 궁시렁 궁시렁 거리면서 군터의 가게 일 층으로 내려오자 마자 나를 보고 한 녀석이 손을 척 하니 들어올렸다. "여어, 쿠베린, 오랜만이오." 녀석은 두툼한 상인용 자주색 외투에 한 눈에도 나는 거상이오 라고 쓰여 진 듯한 두툼한 보석 반지와 물소가죽으로 만든 허리띠에 비단으로 만든 돈지갑을 허리에 매달고 바지는 짙은 남색의 미끈한 것을 걸쳤다. 두리 뭉 실한 턱주가리 주변으로는 이중턱이 곧 삼중턱으로 변할 조짐을 보이고 있 고 흰 것과 막 섞이기 시작한 갈색머리와 주름살이 진 갈색눈은 맨날 별로 하는 것도 없이 즐겁다는 듯한 표정을 담고 있었다. 그 녀석 뒤에는 경호 원으로 고용된 녀석 두 명과 원래 달라 붙어 있는 경비병 두 명이 따라 붙 어 있었다. 덕분에 군터의 이 가게에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허긴 본래 이 가게엔 아침에는 손님이 있는 게 이상한 가게다.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장사를 하고 있는 이 가게는 마리아 이외에 여럿 아 가씨가 있긴 하지만 군터가 굼뜨고 멍청한 편이어서 그다지 환경이 나쁘지 않은 탓인지 아가씨들이 이 남자 저 남자 잡아서 스리 슬쩍 사라지는 일이 태반이라 마리아처럼 오래 있는 아가씨들은 거의 없다. 허긴 마리아도 내 가 아니라면 벌써 여길 떴을 지도 모른다.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 기분이 찝찝해진다. "뭔 볼일이냐? 시장?" "의뢰요. 쿠베린." "돈은?" "이거요." 녀석이 돈지갑 하나를 내민다. 그 안을 열어보니 그 안에 델리암 금화가 들어있다. 나는 흥 하고 그 지갑 을 도로 밀었다. "잘련다." 내가 고개를 돌리자 녀석이 정색하고 말했다. "기다리라는 데도! 이봐, 이번 의뢰는 해적소탕이야!" "해적?" 나는 음 하고 녀석을 바라보고 그 다음은 히죽 히죽 웃고 있는 시장을 흘 긋 보았다. 그리고는 조용히 일어서서 옆에 서서 하품을 하고 있는 마리아 의 손목을 잡아 끌어 이층으로 갔다. 그러는 나를 재빨리 스카가 막아서며 급히 말했다. "기다려봐! 해적이 아주 극성이야!그러니까 어서 ..." "해적이 극성이어서 나보고 소탕을 하라고 하는 거라면 그 대답은 거절이 야." "어째서?" "난 물에 빠지는 거 싫어." "배를 타고 갈 거잖아!" "물 위에서 출렁 출렁 가는 것도 싫어." "금방이라니까!" "바다는 짜서 싫어." "너 수영 잘하잖아?" "수영 잘하는 것과 물에 빠지는 것과는 별개의 이야기지." 스카의 눈이 가늘어졌다. "설마....물이 무섭다든가 뭐 그런 건 아니겠지?" "흐응. 내가 무서워 하는 게 있을 줄아냐?" 으하하하 하고 비웃으면서 나는 녀석을 놔두고 이층으로 올라갔다. "하지만 쿠베린! 진짜 해적을 소탕하지 않으면 안된다구! 요즘 해적이 얼 마나 극성인줄 알고나 있냐! 이번 일에는 용병 길드도 경비대도 다 나섰 어! 게다가 외부 수상용병까지 사들였다구! 너도 참가하면 오죽 좋으냐!" 스카가 모처럼 열변을 토한다. "나는 허락했단 말이야! 게다가 시장이 직접 와서 오라고 하는 데 너 이렇 게 나올 거야?" 나는 스카를 향해 손가락을 휘저어 보였다. "이봐, 간단한 일인가 부다 하고 끼어들었다가 난장판을 수 없이 겪어 본 나로서는 그다지 하고 싶지 않다구. 난 엎어져 잘래." "이 ...자식! 사람이 이렇게 부탁하는데!" 스카의 얼굴이 분개로 달아올랐다. 알게 뭐냐. 나는 마리아의 허리를 안고 계단을 올랐다. "자다 죽어버려라! 개자식!" 스카가 하도 짖어대길래 마리아가 신고 있던 신발을 녀석의 면상에 던져 주었다. 시장이 어떤 얼굴을 했는지 군터가 어떤 면상인지 스카가 쓰러졌는지 자빠 졌는지 알 바가 아니다. "쿠베린, 일어나요." 마리아가 흔들었다. 눈을 게슴츠레 뜨고 보자 마리아가 빙글 빙글 웃고 있 다. "왜?" "..점심 안먹어?" "점심?" 침대에서 대구르르 일어났다. 그녀는 윤기가 흐르는 머리칼을 치켜 올려 묶으면서 옷을 입고 있었다. 어 느 새인지 화장도 마쳤다. 나는 몽롱한 얼굴로 그녀의 존재를 확인한 다음 에 비시시 일어섰다. 기지개를 길게 펴고 다리와 팔이 무사 안녕한지 확인한 뒤에 고개를 몇번 흔들어 이 몸의 건강을 확인했다. 그리고 여자에게 정중한 예의의 키스를 건네고 나서 밖으로 나섰다. 해가 중천에 뜨다가 약간 서쪽으로 가고 있는 이 시간, 과연 배가 고프긴 고프군. 중간에 스카 자식이 오지만 않았더라도 이렇게 늦게 일어나진 않 았을 게다. "오셨어요?" 마미의 사슴집에 이르자 마자 막 야채를 나르던 두툼한 주둥이가 날 보고 생긋 웃으면서 고개를 숙인다. 녀석의 두 손에 가득 담긴 당근과 양파가 왠지 거슬린다. 그 양파대가리가 사라와 녀석이 낳을 애새끼들처럼 보이는 걸 보면 나도 정상은 아니다. 둥굴 둥굴 길쭉 길쭉한 것들이 줄지어 푸짐 하게 아빠 엄마하고 매달릴 모습을 생각하니 왠지 울컥 울컥 해진다. 녀석은 여전히 그다지 매력없는 모습으로 그다지 잘 생기지도 못한 모습으 로 날 바라보며 아무 생각없이 히죽 히죽 웃는다. 아아...제길. 눈 버렸다. "어서옵쇼!" 기운 차게 외치다 말고 가빈이 날 보고 헤에 하는 얼굴로 꼬리를 말았다. 그리고는 시큰둥한 얼굴로 부엌을 향해 외친다. "여기 쿠브 왔어요! 3인분 추가요!" 이 자식 태도가 뭐 이래? 나는 가빈 녀석의 꼬리를 한번 흔들어 주고는 자리에 앉았다. "아팟!" 녀석은 귀를 처억 늘어뜨리고는 눈물이 그렁한 얼굴로 날 노려보곤 줄래 줄래 꼬리를 말고 다른 밥 손님의 탁자로 뛰어가 버린다. 태도 봐라, 태도! 고작해야 베개인 주제에 이 자식이 지금 반항하는 거야? 그 머리통에 달린 귀가 누구 덕분에 무사한지 알고나 있어? 왠지 울컥 울컥 해서 탁자를 탁탁 두들기자 사라가 입이 사발만큼 튀어 나 와서는 툭툭 걸어나와 내 앞에다가 이루 말할 수 없이 방자한 태도로 밥그 릇을 내던지고 홱 돌아선다. 이거 오늘 태도들이 다 왜 이런거야? "왜? 그 여자랑 밥이나 먹고 오지?" 사라가 탁 쏘아붙인다. 음, 그렇군. 자식, 여자라고 질투도 하는 구만. 나는 깊은 이해심으로 사라의 엉덩이를 툭툭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 이해 한다. 이해해. "왜 이래? 이 색마!" 눈알이 새초롬해진 채로 사라가 팩 토라져서 탕탕 부엌으로 뛰어들자 여기 저기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밥 손님이라 해봐야 녀석들도 모두 선원들이 대부분이다. 상인들도 몇 있지만 그래도 상인이 대부분인데 낯익은 놈들이 많다. 건방지게 웃긴 뭘 보고 웃어? 니들이 사라 엉덩이를 만지기라도 하면 그 놈의 주둥아리들을 주욱 주욱 뜯어줄 참인데. 내가 스윽 녀석들을 쏘아 봐주자 녀석들이 슬금긴다. 스카는 뭔가 잔뜩 준비한 얼굴로 가죽으로 만든 보호장구까지 착용하고 있 었다. 그리고는 그 뒤로 이런 저런 놈들이 따라 와 있었는데 그 중 몇몇이 낯이 익다. 틀림없이 이 놈들은 용병길드 소속인가 부다. "쿠베린. 이제야 일어났냐?" "어. 그래. 멀리가냐?" "..." 스카는 날쏘아보았다. "멀리 가냐? 내가 너에게 해적 소탕하러 간다고 말했잖아!" 물론 듣기는 들었지. 잊어버려서 그렇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잘 갔다 와라." ".....이 자식이 진짜..." 녀석이 다른 놈들과 떠드는 사이에 나는 아침인지 점심인지 알 수 없는 밥 을 먹고 한 숨 더 늘어지게 잘까 하는 마음으로 내 방으로 올라갔다. 다른 놈들이 뭐라 하든 나는 내 맘대로 한다. 해적소탕을 하고 싶으면 하는 거 고 하기 싫으면 하지 않는거다. 하지만 다른 건 몰라도 원래 바다위에서 출렁 출렁 흔들리는 것은 나의 취향도 아니고 나의 위엄에 극히 거슬리는 미천한 행동인 지라 나는 삼가고 있다. 내가 여기 항구 도시에서 꽤 지냈지만 결코 배에 올라탄 채 덜렁 덜렁 흔 들려 본 적은 없다. 원래 두 발 달린 것들은 땅위에서 걷거나 뛰는 거지 출렁거리는 바다위에서 허부적 거리는 것이 아닌 것이다. 수영을 할 수 있 고 할 수 없고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내가 배 멀미를 해서가 아니다. 절대로 아니다. 어디까지나 배를 타고 출렁거린다는 것은 매우 미천하고 비천하며 천박하 고 한심한 행동이기 때문인 것이다. 나는 한동안 잊고 있었던 허리에 달린 주머니를 턱 하니 탁자 위에 올려놓 고 그 안의 내용물을 확인하기로 했다. 오늘 같이 사방이 조용한 날, 한 개 의 베개는 주점에서 시중들고 한 개의 묵은 난로는 바다에 체신머리 없이 나가 출렁 출렁 거리겠다고 하니 나는 오늘 제법 조용히 하루를 보낼 수 있게 될 것이다. 흠, 이런 기회를 맞이하여 짐 정리를 좀 해둘까나. "야, 쿠브." 그러나 스카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섰다. 녀석은 나를 물끄러미 보더니 내 가 주머니를 탁자위에 올려놓고 내용물을 꺼내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는 잠시 침묵했다. "뭐야?" "그동안 모았던 걸 꺼내보는 거야." 주먹만한 금강석부터 호박 덩어리, 금덩이,은덩어리, 자수정, 백수정, 녹수 정 기타 등등, 보석박힌 팔지, 목걸이, 왕관, 황금배, 기타 등등이 줄지어 나오자 스카의 얼굴이 이상해졌다. "....쿠브.." "왜? 갖고 싶냐?" "갖고 싶다고 줄 너냐?" "물론 안주지." "여자에게도 안주는 놈이 나에게 주겠냐?" 왠지 자조섞인 어투로 녀석이 말하기에 나는 관대하게 말했다. "갖고 싶은 거 있음 하나 주지." 그러나 예상 대로 스카는 고개를 저었다. "그보다 차라리 해적 소탕에 같이 가자구." "안가." "정말 질기군 질겨. 가자, 같이 가주면 좋잖아!" 나는 어깨를 으슥하면서 주머니에 물건을 도로 넣었다. 해약석같이 작은 것은 찾기 어렵기 때문에 도로 왕관안에 박아 두고 그 사슬로 휘감아 놓은 금강석을 잠시 바라보고 있는데 문득 스카가 주머니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 작은 곳에 많이도 들어간다. 마법주머니냐?" "몰라, 알 바도 아니고. 어쨌든 다 들어가니 나로선 좋지." 이 주머니가 언제 생겼는지 나도 잘 기억이 안나지만 이 주머니에 물건 넣 어서 다 채워본 역사가 없는 것으로 보아 이 것도 보통 물건은 아닐 것이 다. 허긴 내가 가진 물건중에 평범한 물건은 없다. "얼마나 들어가는 거야? 다 채워져 본 적은 있어?" 주머니는 원래 크기는 주먹보다 조금 더 크다. 물론 내 주먹 말고 스카 주 먹크기로. "한 번 보자." 봐도 말리진 않아. 내가 덥석 주머니를 녀석에게 건내는 순간 갑자기 녀석이 잡아 들자 마자 그대로 뒤로 홱 넘어갔다. "으악!" "야!" 스카가 주머니를 쥔 채로 뒤로 완전히 넘어가 버렸다. 와당탕 소리와 함께 스카는 바닥으로 널부러져서 주머니에 깔렸다. 나는 눈이 허옇게 드러난 녀석을 잡아 채며 외쳤다. "야! 임마!" "허억..어걱...이...이거 치워!" 스카가 비명처럼 외쳤고 나는 얼른 녀석의 손위에 놓여진 내 주머니를 잡 아 챘다. "헥헥..켁..." 거품을 물고 있는 양 버둥 거리던 녀석이 눈을 허옇게 뜨고 외쳤다. "내 허리! " "에?" "내 허리! 허리 부러진 거 같아아아악!" "내 물건을 함부로 들면 곤란하지. 이거 무겁다구." "들..들기전에 말했어야지, 이 개자식아!" 스카가 진땀을 뻘뻘 흘리면서 이를 벅벅 갈았다. 새파랗게 질린 그 얼굴이 어째 장난이 아닌 거 같다. "진짜로 부러졌냐?" "......으윽..." "그 정도 가지고 뼈가 부러지다니, 설마하니....농담이겠지?" "......죽어라..." 난리를 치는 그 순간 문이 발칵 열리면서 사라가 들어왔다. "무슨 비명소리에요?" 그녀는 바닥에 널부러진 채 꼼짝도 못하고 있는 스카를 바라보다가 날 보 았다. "쿠베린이 쳤어요?" "이 놈이 칠 데가 어디있다고 내가 치냐? 혼자 자빠진 거야." "아으윽...아윽..치,치료사를 ..." 스카가 일어서지도 기지도 못하는 아까 쓰러진 그 자세 그대로 돼지처럼 비명을 올렸다. "쓰러진 것으로 이렇게 된단 말이에요? 스카는 노인네도 아닌데!" "...으윽..몸이 예전 같지않아.....으윽..크으으으.." 음..허긴 스카놈도 이젠 오십줄을 바라보니....끌끌.... "네 놈 탓이야! 쿠베린! 이 개자식! 이 XXXX자식아!" 이 자식이 간덩이가 부었나? "이봐, 스카. 어디 몇군데 같이 더 부러지고 싶냐? 왜 나를 끼어들어 욕이 야? 욕이!" "너 때문에 다쳤어!" "네가 혼자 다쳤지 내가 다치게 했냐!" "시끄러! XXXX아! 이 XX만도 못한 자식!" 뭔가 피직 솟는 거 같길래 녀석의 널부러진 다리를 가볍게 쓰다듬어 주었 다. 그리고 조용히 걷어찼다. 빠직 하고 뭔가 또 소리가 들렸다. "으캬갸갸갸갸악!" "하나 부러지나 두 개 부러지나 어차피 치료기간은 같지?" "...." 녀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졸도한 것이다. KUBERIN 우연히 아주 우연히 발부리에 걷어차인 돌멩이가 물 속에 빠지면 파문이 생겨나는 것은 필연이다 2 빌어먹을 태양이 날 조롱하고 있다. 뱃전에 부딪치는 파도는 허옇게 이를 드러내며 웃는다. 출렁 출렁 퍼런 언덕들이 오락가락 이리 저리 겹쳐 지나가다 부딪쳐 이 몸 이 발을 디디고 선 이 곳을 흔들어 댄다. 하늘이 빙빙 돌고 구름이 떼로 머리 위를 지나간다. 어느 새인가 옆구리 옆에 나란히 갑판이 섰다가 어느 순간에는 발 밑으로 투욱 떨어지고 보이지 않는 거대한 거인이 쥐고 흔들 듯이 등덜미를 툭툭 건드리고 이빨을 딱딱 부딪치게 한다. 아마도 거대한 바다의 여신이 심술 이 난 듯, 아니면 이 잘 생긴 양반을 가까이 두기 위해 용을 쓰는 지도 모 른다. 나는 문득 의심스러운 기분이 되었다. 이 놈의 배 밑바닥을 좀 살펴봐야 한다. 분명히 이 아래 뱃바닥 아래서 바다의 여신이 두 손을 들어 이리 저리 흔 들어 대면서 나의 모습을 살피고 있는 거 같다. 이렇게 흔들어 대면 멀미 에 지친 내가 갑판에 튀어나와 바닷바람을 쏘인다고 어슬렁거린다는 것을 이미 이 놈의 여신께선 간파한 거다. 그리하여 이 잘생긴 이분의 얼굴을 보기 위해 여신은 배 안 선실에 내가 누워라도 있을라 치면 이리 저리 배 를 흔들어 대어 내가 멀미를 일으키도록 유도하고, 내가 못견뎌 배 갑판위 로 기어나오면 나의 얼굴을 찬란하다못해 눈이 부시고 눈이 부시다 못해 눈이 아픈 이 놈의 태양 빛 아래로 끌어내는 것이다. 으음..이건 정말 너무해. 아무리 내가 잘생겼어도 그렇지 여신은 너무나 잔혹하고 냉정해. 내가 속을 다 뒤집어 내서 어제 그제 먹었던 고기 한점 까지 모조리 다 쏟 아내고도 모자라 내장까지 쏟아내게 만들 작정인가? "으에에에엑..." "쿠베린, 아직도 인가?" 옆에서 어떤 자식이 씨부렁거린다. 한 대 치고 싶지만 참았다. 나는 지금도 물고기들에게 먹이를 주고 있다. 출렁 출렁 거리는 퍼런 물결만 봐도 이가 갈린다. 제기랄, 속을 뒤집어서 먹은 거 다 토해내고 내장까지 홀라당 꺼내어서 잘 씻어 버렸으면 좋겠다. "우에에에엑..." "대체...얼마나 먹었길래 아직도 쏟아낼 게 남아있어?" 건방지게 녀석이 옆에서 씨부렁거린다. 멀리서 몇몇 녀석들이 히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것들이 모두 간이 부어 배 밖에 튀어 나온 게 분명하다. 바다 위라고 해서 의기 양양한 모양 인데 어디 나중에 두고 보자. 원래 네발 달리고 두 발 달린 것들은 땅위를 걸어 다니는 것이지 물 속으 로나 물 위로 가는 게 아닌 것이다. 강물을 헤엄치고 노는 거야 어쩔 수 없다지만 이따위 같잖치도 않은 물건을 이끌고 대체 왜 바다로 들어오는 거지? 인간들이 만든 가장 쓸모 없고도 저주 받을 물건은 바로 이것이다. 배. 배란 모름지기 강물이나 떠다니고 두어명이서 오붓하게 노를 저어야 좋은 것이다. 왠 헝겊대기를 하늘에 매어달고 나는 범선이에요 운운하는 큰 배 를 만들어서 출렁 출렁 보기만 해도 울렁거리는 바다로 나오는 거지? 배를 발명한 인간이여! 저주 받아라! 네가 내 옆에 지금 있었다면 네 놈의 모가지를 댕겅 댕겅 자르고 내장을 박박 찢어서 물고기 밥을 주고 그래도 모자라면 내 밥으로도 기꺼이 써주 겠다. 그놈의 살점을 질겅 질겅 씹어댄다면 기분도 좀 나아지겠지. 흐음..과연 그런 상상을 하니 기분이 나아지는 군. "이, 이봐...이빨이 나왔어." 옆에 섰던 녀석이 갑자기 안색이 바뀌며 중얼거린다. 나는 그 놈을 향해 시익 웃어주었다. 그래, 지금 나는 기분이 나빠서 배를 만든 놈이 옆에 없으니 네 놈이라도 잡아 질겅 질겅 씹어버렸음 좋겠다. 그러니까 더 이상 내 심사를 긁지 말 란 말이야. 내 귀는 지나치게 예민하단 말이다. 녀석은 입을 다문 채 침을 꿀꺽 삼킨다. 녀석의 눈동자에 내 얼굴이 비친다. 내 얼굴은 유령처럼 창백하고 네 개의 송곳니가 입술 사이로 삐질 나와 있 으며 눈빛은 살벌하게 번쩍 번쩍 빛나고 있다. 창백한 얼굴인지라 더더욱 박력이 있다. 과연 과연 나의 멋진 얼굴이 이렇게 상할 줄이야. "기, 기분이 나빠? 그럼 수엘린 즙을 좀 먹어볼래?" 억지 웃음을 지어 보이며 녀석이 뒷걸음질을 쳤다. "가져와." 내가 명령하자 녀석이 슬금 슬금 사라져 버렸다. 뱃전 위는 어느 새인지 조용하다. 멀리 바람이 이는 소리만 귓가에 잉잉 거린다. 속이 좀 가라앉았다. 내 옆에서 알랑거렸던 녀석은 엘리야 용병 길드원인 마리오라고 한다. 이 놈은 이십 오세 가량 되었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엔 스카보다도 늙어보 인다. 생긴 것은 멀쩡한데 이상하게 입가에 주름이 많고 머리칼도 흰 것이 많이 섞여 있다. 피부는 까무잡잡하고 체격은 제법 탄탄해서 부려먹을 만 하다. 체온이 더운지 아닌지는 아직 모르겠다. 시험해 보지 않았으니까. 이 놈은 스카가 나의 감시 및 시중꾼으로 내게 붙인 놈인데 스카를 무슨 스승 님 스승님 하면서 쫓아 다니는 놈이다. 내가 보기에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사항이긴 하지만 스카가 이 놈의 가족을 살렸대든가 뭐래든가 하는 그런 일이 왕년에 있었던 모양이다. 스카라는 바보는 종종 이상한 짓을 해 서 은인이라든가 바보 멍청이라든가 하는 소리를 반반씩 듣는 놈인데 내가 보기엔 바보에 가까운 것 같다. 자아, 내가 왜 이놈의 이가 갈리는 출렁 출렁이 위에 있어야 하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스카가 내 주머니를 들다가 허리를 부러뜨렸다. 아니, 허리를 다쳤다. 그렇지만 놈이 다쳤다고 해서 내가 여기 있을 이유는 사실 없다. 그러나 이 놈의 스카놈이 쟁알 쟁알 나를 노려보면서 내가 일부러 그랬다 는 둥 내가 심술로 그랬다는 둥 혹은 자기의 명예를 저버릴 수 없다는 둥, 용병에게 있어서 계약은 중요하다는 둥 하는 소리를 계속하는 데다가 무엇 보다 용병길드 놈들과 기타 등등 떨거지 같은 놈들이 벌떼 같이 달려드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스카 대신 이 자리에 올라오게 된 것이다. 대체 내가 왜 내 물건 들다가 다친 놈을 대신해서 여기 와야 하는 거지? 내가 왜 말도 안되는 이유를 들어줘야 하는 거냔 말이다. 힘이 없어서 다친 놈을 내가 어쩌라구! 누가 들어보라고 하기라도 했냐구! "대신 가." "못가." "가야해! 나는 계약했다구!" "네가 했지 내가 했냐?" "만약에 가지 않는다면 나는 평생 얼굴 들고 못산단 말이다!" "다른 데서 살아라." "엘리야에서 뼈를 묻게 만들어 버린 게 누군데 그런 소릴 하냐!" "누가 여기서 뼈를 묻으래? 그리고 네 뼈를 네가 어떻게 묻냐?" "지금 말 장난 하냐!" "네가 죽었는데 어떻게 네 뼈를 네가 묻어? 설마하니 유령으로서 뼈를 묻 겠다는 거야?" "너 지금 나더러 죽으라는 소리냐?" "너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냐? 내가 언제 죽으라고 했어?" "어쨌든 네가 가. 나 대신 가라구. 나 계약금도 받았단 말야!" "돌려주면 될 거 아냐?" "보물이 잔뜩 있다고 하잖아! 너, 보물 좋아하잖아?" "출렁출렁이를 타고 내가 왜 그딴 짓을 하냐? 내가 가기만 해도 드워프들 이나 땅의 엘프들이 얼마든지 보물을 주는데." "해적과 싸워보고 싶지않아?" "해적이 사인족이나 조인족 수준은 된다드냐?" "개자식! 넌 의리도 없고 눈물도 없냐!" "없어." "나가 죽어!" 어찌되었든 나는 이놈의 출렁 출렁이에 올라 타 있다. 그리고 물결과 같이 흔들리고 돛과 함께 흔들리며 뱃전과 함께 흔들리고 세상과 함께 흔들리는 중이다. 아이구 머리아파. "식사 시간입니다!" 어떤멍청이가 식사시간임을 알렸다. 먹는 거 생각만 해도 속이 뒤집혀 치밀어 올라오지만 토해도 먹긴 먹어야 지. 내가 뭐하러 이놈의 출렁이를 탔는지 지금도 후회막급이지만 아마 안 먹으면 더 후회하게 되겠지. "....쿠베린님 드십시오." 두툼한 어깨와 두툼한 팔뚝과 두툼한 허리를 가진 주방장 놈이 내가 가자 고개를 꾸벅 숙이면서 그릇을 내밀었다. 내 전용 그릇 위에 올려진 음식은 갓 구운 생선과 소스를 얹은 훈제돼지고기, 그리고 딸기쨈을 바른 호밀빵 이었다. 그 외에 오렌지파이와 곁들여서 꿀에 절인 사과구이와 고기파이가 얹혀져 있다. 이 호화판 식사에 옆에서 바짝 마른 소시지를 씹고 있는 놈 들이 침을 흘리며 슬금 슬금 시선을 보냈지만 나는 늠름하게 무시하며 자 리에 앉았다. 물론 처음부터 이런 음식이 나온 것은 아니다. 원래 불의에는 항거하라고 누구든 말한다. 그렇다. 불의에는 항거하고 항의 해야 하는 법. 맨 처음 내가 식사시간에 왔을 때 내 그릇 위에 놓여진 것은 식어빠진 생 선을 넣은 스튜와 말라 비틀어진 소시지 한 조각, 그리고 곰팡내 나는 호 밀빵이었다. 이런 엄청난 불의에 나는 격렬히 분노했고 그리고 항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하여 내가 직접 주방장이란 놈을 찾아가서 조용히 말했더니 이 주방장 역시 깊은 반성을 했던 것이다. 모든 것은 일단 시도해 보지 않으면 안된 다. 내가 다른 선원이나 용병들 처럼 주는 대로 받아먹었다면 오늘날 이런 식사는 없었을 것이다. "왜..쿠베린만 식사가 다르지?" 등 뒤에서 한 멍청한 녀석이 질문을 던졌다. "쿠베린이니까." 옆의 녀석이 한 숨을 내 쉬면서 말한다. 흠, 뭔가 아는 놈이군. "쿠베린이 왜?" "주방장에게 말했대." "뭐라구?" "...이런 식사를 내온다면 널 잡아 뜯어먹겠다고 했대." "......진짜?" 녀석이 얼빵하게 되묻는다. 그 얼빵함에 내가 감명받고 있는 순간 뒤에서 한 녀석이 대신 말했다. "아니." "그럼? 어떻게 했단 거야?" "네 놈의 가죽을 주욱 뜯어내서 팔뚝은 살코기를 저며 소금에 절여 말려 먹고 갈비는 구워서 소스를 찍어 먹고 다리는 스튜를 만들어 먹고 내장은 바닷물에 잘 씻어 소시지를 만들어먹겠다고 했어." "히엑?" 그 긴걸 잘도 외웠군. "지,진짜야?" "응, 바로 옆에 내가 있었거든. 나라도 무서웠을거야." "왜?" "이빨이 튀어나오고 진짜로 침이 줄줄 흐르고 있었거든." 나는 그렇게 말한 놈에게 다 먹어치운 파이그릇을 집어던져 주었다. 나는 토하고 있었던 거지 저 지저분한 자식을 향해 침을 흘리고 있었던 게 아니란 말이야! "자아, 다들 들어라." 한 참 밥먹고 있는데 용병길드의 녀석이 아닌 선원 중에 한 명, 정확히 말 하면 이 출렁출렁이의 선장인 턱수염 칼스톤이 말했다. 녀석의 뒤에는 긴 칼을 좌우로 차고 선 상체를 벌거벗고 있는 왕년 해적이었던 두 놈이 해적 잡이를 위해 참가하고 있었다. 턱수염 칼스톤은 얼굴이 시커멓고 수염도 시커매서 어둠 속에서라면 도저 히 찾을 수 없는 재능을 가진 놈이다. 물론 이 놈의 출렁이를 몰고 다니는 미친 짓거리만 뺀다면 호의적으로 봐줄 수도 있는 놈이다. "모두들 알다시피 해적은 두 무리가 있다. 붉은 깃발을 단 붉은 해적들과 문디스 해적들 말이다. 모두들 알다시피 델리암이 망하면서 델리암의 수병 들 몇몇이 해적에 가담했다고 한다. 그 놈들 때문에 더더욱 해적이 기승을 부리고 있어. 수가 늘어나 버렸으니까... 허긴 놈들도 할 일이라곤 칼 옆에 차고 잘난 척하는 것 이외엔 없다가 갑자기 세상에 바뀌었으니....아, 흠 흠.." 옆에서 어떤 놈이 말을 계속할 것을 재촉한다. "모두들 알다시피 어찌되었든 해적이 요즘 바글 바글 끓고 있어서 소탕을 시작하는데 불행히도 예전이라면 조금이라도 영주들이나 기사들이 병력을 보태주었지만 요즘은 그런 것도 일절 없으니 용병으로 머릿수를 맞추게 되 었단 말이야. 그러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모두들 알다시피 돈이 상당히 들 었다는 의미고, 다시 말한다면 모두들 알다시피 우리들은 허탕을 쳐선 안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여기저기서 키들 키들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용병도 엘리야 만이 아니라 여기 저기 수상용병들을 데려왔으니까 조금 걱정스럽기도 하지만 어찌되었든 모두 알다시피 서로에게 믿음을 가지고 잘 해나가도록 하자. 우리가 목표로 하는 것은 저 붉은 해적인데 모두들 알다시피 그 놈들이 요즘 가장 극성이라고 하니까 그 놈들을 해치우도록 하자." "그런데 대체 그 붉은 해적이 어디있다는 거지?" 엘리야 놈이 아닌 어떤 놈이 날 대신해서 물었다. "정보원에 의하면 그 붉은 해적은 팔라치섬 주변에서 진을 치고 있다고 한 다. 모두들 알다시피 팔라치섬은 화산이 가끔 요동을 쳐서 아무도 가지 않 는 곳인데 붉은 해적들은 그 곳에서 신출 귀몰하게 나타나 공격하곤 사라 진다고 하지. 모두들 알다시피 붉은 해적들의 함선은 앞이 뾰족하고 끝을 쇠로 만들어서 남의 배를 푹 박아 뱃전에 구멍을 뚫는다고 해서 매우 이가 갈리는 놈들이지." 그는 잠시동안 이를 갈았다. "그럼 지금 우리들은 팔라치 섬으로 가고 있는 거야?" "정확히 말하면 모두들 알다시피 팔라치 섬의 부근 근해에 곧 접어들거고 놈들이 생각이 있다면 우리들을 공격하게 될거야." "흐음. 이 배가 상선처럼 깃발을 단 것은 그럼 우리가 미끼라는 의미?" 어떤 놈이 또 잘난 척하며 입을 연다. "모두들 알다시피 어떤 작전에든 미끼는 필요한 거야. 그리고 그 미끼는 오늘 우리다." 여기저기서 제길 제기랄 기타 등등의 반응이 나왔다. 나는 내가 하고픈 말을 여기저기서 해 주기에 입을 다물고 먹기만 했다. 지금은 먹고 조금 있다 토하도록 하자. "어서 식사를 끝마쳐. 곧 근해에 도착하니까." 턱수염이 막 말을 끝내자 마자 얼굴에 흉터가 있는 사나와 보이는 고리눈 깔을 한 녀석이 이를 갈 듯이 발음도 불분명하게 떠들어댔다. "싸우다 말고 도망갈 놈은 없겠지?" 우우하고 밥먹던 놈들이 손바닥으로 탁자를 두들겨 댔다. "해적을 향해 등을 돌리고 동료를 배신할 놈들은 없겠지?" 목청 높이 놈이 소리를 질러 뻔한 소리를 묻는다. 그에 화답하듯이 다른 놈들이 또 우우 하고 바닥을 두들기면서 괴성을 질 러댔다. "해적들의 보물을 가질 용자는 누구냐?" 녀석이 길게 고함을 지른다. "우리들이다!!" "우리들이다!!" 밥 먹다 말고 왠 괴성이야? 녀석들이 탁자를 두들겨 대길래 짜증이 난다. 뭘 소리지르고 난리를 쳐대 는 거야? 싸움은 싸움이고 먹는 건 먹는 거다. 이 몸이 지금 식사를 하시는데 건방 지게 소리지르고 사방을 두들겨 먼지를 일으키다니 나보고 지금 먼지를 먹 으라는 거야? "시끄러! 밥이나 먹어!" 내가 고함을 지르자 순식간에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소리를 질러서 분위기를 고조시키던 흉터의 사내가 날 사악 노려본다. 마 치 흥이 깨져서 기분 나쁘다는 얼굴이기에 나는 녀석에게 점잖게 말해주었 다. "밥 먹기 싫으면 넌 나가. 난 먹어야 하니까." "오호라! 네가 엘리야의 쿠베린이군? 헤에, 이쁘장한 이 꼬마가 엘리야를 가지고 논다는 거냐? 설마 그 낯짝으로 노는 것은 아니겠고..." 그런 말을 너무나 오랜만에 들은 나머지 나는 감상과 회한에 빠졌다. 옆에서 마리온이란 놈이 나를 말리려는 듯이 앞에 선 흉터에게 손짓 발짓 을 하며 안타까움을 표시했지만 나도 놈도 무시했다. "아주 오래전..그런 말을 한 놈이 있었지...." 나는 밥을 다 먹고 나서 옆 자리에 앉아 한 녀석이 나무로 만든 스튜그릇 을 죽죽 핥고 있는 것을 빼앗았다. 그 놈이 막 항의하려는 순간 그 그릇을 잡아 들어 한 손에 쥐고 꾸욱 눌렀다. 그 순간 파직 하는 소리와 함께 나 무그릇이 박살이 나서 가루와 쪼가리로 화해서 후두두둑 떨어져 내렸다. 그런 것을 탁자 아래로 나는 툭툭 밀고 손을 옆에 녀석 셔츠에 문질러 닦 으면서 안색이 파래지고 있는 한 놈의 앞에 놓인 탁자에 손톱을 하나 밀어 넣었다. 바각 하고 탁자가 두 토막이 난다. 와르르 무너지는 탁자를 보면서 나는 손톱을 도로 집어 넣고 흉터를 바라보았다. 흉터의 얼굴은 무표정해져 있었다. 무서워도 무섭지 않은 척 하는 것은 싸움꾼의 기본. 이 놈은 기본은 된 놈 이다. "하도 오랜만에 네 녀석이 지껄이는 그소리를 들어서 매우 매우 새로운 기분이 되는 군." 그렇게 말하고 일어섰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출렁이에 타고 있었던 그 여파가 엄청난 속도로 뱃속 을 밀치고 치솟아 올라온다. 먹기도 많이 먹었지만 그 치밀어 오르는 속도 도 엄청나다. 나는 그 속도를 계산하여 나를 아직도 노려보고 있는 그 흉 터의 앞에 가서 섰다. 그리고 그 흉터가 조용히 입을 여는 그 순간, "제법 하는 군...힘은 센 모양이지만..우악!" 그 면상에 모조리 다 토해 버렸다. 뜨끈 하겠군..... KUBERIN 우연히 아주 우연히 발부리에 걷어차인 돌멩이가 물 속에 빠지면 파문이 생겨나는 것은 필연이다 3 근사한 나날들이라고는 차마 말할 수 없지만 최소한 전 보단 나아졌다. 출렁이에 익숙해진 덕분이다. 나는 기지개를 켜면서 뱃전을 어슬렁거렸다. 바람은 제법 상쾌하고 부드럽다. 음, 바다의 여신도 오늘은 기분이 좋은 모 양, 천공의 여신과 더불어서 새파란 색깔을 자랑이라도 하듯이 여러 가지 빛깔로 바닷물을 치장한다. 햇살이 뺨 위에 닿으면 기분이 제법 좋다. 이러면 또 노래 하나 불러제껴야 하는데. "오호 오호 내 이름은 쿠베린..." "여보세요......" 여보세요? 나는 잠시 착각에 빠졌다 나는 지금 땅위에 있는 게 아니라 출렁이 위에 있다. 그리고 출렁이 갑판 위에는 아무도 없고 있는 것은 나 혼자 밖에 없다. 그런데 지금 누군가가 '여보세요'라는 흔치 않은 어투를 사용했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여자였다.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이 아닌가. 나는 지금 출렁이 위에 있고 여긴 바다 한 가운데다. 근처엔 육지는커녕 돌멩이 하나 없다. "여보세요...." 여자가 그렇게 내게 필요했던 것이란 말인가. 설마하니 내가 환청을 들을 정도인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순간 내 얼굴로 짠 바닷물이 틱 하고 튀었다. 내가 놀라 아래쪽을 내려다 보니 아래쪽에 놀랍게도 웬 연한 연두빛이 나는 머 리통이 올라와 있다. 그리고 그 머리통 사이로 흰 물살이 출렁 출렁거린다. 연두빛 머리통이라. 그리고 그 연두빛 머리통은 흰 피부와 초록 눈과 앙증맞은 코와 창백하지 만 분명히 사랑스런 입술을 가지고 있었고 놀랍게도 그 머리통에는 손이 달려서 그 흰 손으로 나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요 여기!" 나는 바다 한 가운데에서 만난 난데없는 미녀에게 약간 의심을 품으면서 뱃전에 몸을 기댔다. 분명히 이 여자는 아름답다. 그러나 설마하니 하체는 남자라든가 혹은 네 다리를 가진 것이라든가 하면 어쩌지? 어찌되었든 여자는 여자인 듯 싶다. 나는 그녀를 자세히 내려다 보았다. 그녀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빙긋 웃어보였다. 그리곤 말했다. "저랑 사귀지 않을래요?" 그녀는 아름답다. 그녀는 길고 흰 팔뚝과 길고 가녀린 목덜미를 하고 있고 길고도 긴 연두빛 머리칼을 발끝까지 기르고 있었다. 바닷물에 젖어 약간 짠 내음이 흘러나 오는 그 냄새는 비록 향긋하진 않지만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그리고 살결 은 건강하고 싱싱해 보였다. 눈은 아주 크고 속눈썹도 길지만 불행히도 눈꺼풀은 없다. 귀는 귓바퀴가 작고 거의 없다시피한데 그것을 머리칼로 가렸으니 뭐 사실 별 불만은 없 다. 입술은 핏기가 없긴 하지만 도톰하고 귀엽다. 그리고 무엇보다 상냥하 고 호기심 많은 전형적인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비록 그녀가 지느러 미가 달린 다리를 가지고 있긴 해도 말이다. "인어족이 이 근처에 사는 줄은 몰랐는걸." 내가 그녀의 허리를 안아 올려 뱃전까지 끌어올릴 동안 그녀는 축축한 머 리칼을 내 어깨에 기대면서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풍만하다기 보단 자그 마한 소녀같은 가슴이 팔뚝에 와 닿자 나는 수컷에서 점잖은 아버지로 화 하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성숙한 여인만 상대하기도 벅차니까 소녀는 다 큰 뒤에 받아주기로 하지. "에에, 이 근처에 인어족은 거의 안와요. 우리들의 영역은 이 보다 훨씬 남 쪽의 산호의 화환을 지나야 나오는 밝은 바다거든요." "그런데 넌 여기서 뭘해?" "아아, 남자친구를 사귀려고요." 그녀는 방긋 웃었다. "인간의 남자친구를 사귀는 게 유행이에요. 그거 몰랐어요?" "......" 인어족이란.... 지나치게 자유 분망한 데가 있긴 있다. 인어족의 여자들이 종종 인간 남자를 꼬셔서 익사 혹은 상사병을 앓게 한 뒤에 말려죽이는 것을 게임으로 즐긴다는 이야길 들은 적이 있다. 인어족 의 여성들은 뭍에 올라와 그 놀라운 미모로 남자들을 꼬셔서 가지고 놀다 가 안녕 하고 사라져 버린다. 버려진 남자들은 꺼이 꺼이 울다가 자살하거 나 실의에 빠져 폐인이 되거나 하지만 물론 요즘 같은 세상에 진짜 폐인이 되는 경우는 드물다. 좀 훌쩍이다가 몇 달쯤 지나면 아아 아름다운 인어랑 사랑을 했었어 하는 자랑 반 과시 반의 추억거리를 한 다발쯤 가지고 아무 것도 모르는 고향 처녀랑 결혼하고 잘 먹고 잘 사는 것이다. 그러니 뭐 인 어족에게 모든 잘못을 밀어 붙이는 것은 지나친 처사이기도 하다. 왜냐면 인간의 수컷이란 그다지 지조가 있거나 멋진 것이라곤 할 수 없기 때문이 다. 내 몇 백년 인간들과 얽혀 살면서 사랑 때문에 죽었다는 수컷 놈은 들 어보지 못했으니까. 어찌되었든 이 은빛 비늘이 반짝이는 두 다리에 투명한 지느러미가 달린 인어족의 아가씨는 약간 철이 없어 보이지만 사실 인어족이 철들었다는 이 야긴 내가 듣도 보도 못했기 때문에 나도 무시하기로 했다. "아아. 솔직하게 말하면 언니를 찾으러 왔어요." "언니?" "이 근처에서 놀다가 돌아오지 않았어요. 인간 남자와 사귄다는 이야긴 했 었지만 벌써 네 번이나 달이 기울고 찼는걸요. 이대로라면 너무 이상해서 찾으러 왔던 거에요. 설마하니 네 달동안이나 남자랑 사귄다는 것은 있을 법 하지도 않으니까요. 그것도 인간남자와." 그녀는 코를 킁킁 거리면서 내 냄새를 맡았다. "그러다가 당신을 보고 손을 흔든 거에요. 내가 요즘 본 인간 남자 중에 가장 잘 생겼거든요." "난 인간남자가 아냐." 그런 미천한 종족과 비교하다니 하고 약간 기분이 상했지만 가장 잘생겼다 는 말에는 조금은 기분이 좋아진다. 뭐 어찌되었든 이렇게 드물게도 먼 바 다까지 나왔으니 인어족 아가씨도 보게 되는군 하고 나는 기분 좋게 생각 하기로 했다. 뭐든 긍정적으로 살다보면 좋아지는 법이다. 물론 물론 이 놈 의 출렁이도 제법 나쁜 곳만은 아니군 그래. 살랑 살랑 부는 바람결에 인어족의 아가씨는 머리칼을 다 말리우고선 나 에게 물었다. "인간 남자가 아님 뭐에요?" "인간 보다 몇 백배는 대단한 종족이지만 넌 아마 견문이 짧아 알지도 못 하겠지." "엥? 하지만 당신은 인간처럼 생겼는걸요!" "뭐 어찌되었든 좋아, 그래서 넌 그저 내가 잘생겼기 때문에 말을 걸었 냐?" "아..." 계집애는 얼굴을붉혔다. "무어..그렇다고도 할 수 있지요. 겸사 겸사 언니 일도 물어볼 겸해서 말이 죠...." "이 근처에는 해적들이 바글 바글 끓는다는데 넌 해적들을 본 적 없냐?" 그녀의 얼굴이 약간 창백해졌다. "해적이라면....이 근처에 있는 건가요?" "그렇다더군." "그럼 우리 언니는 해적에게 잡혔을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인어족의 고기는 매우 비싸고 인어족 여자의 머리칼은 매우 훌륭한 고가품이니까." "꺄앗!" 그녀가 낮은 비명을 올릴 때 그녀를 발견한 선원들과 기타 등등들이 줄줄 이 다가들었다. "뭐야? 뭐야?" "왠 여자지?" 다들 몰려드는 그 때 그녀가 내 목에 잽싸게 매달렸다. 그리고는 약간 질 린 양 그들을 쏘아보고 말했다. "뭐죠? 이 못생긴 남자들은?" 갑자기 이 계집아이가 맘에 들기 시작했다! "드십시오." 주방장이 필사적으로 정중하게 말했고 나는 접시를 받아들고 아귀 아귀 먹 어대는 인어계집애에게 건네주었다. 그녀는 두 손으로 음식을 움켜 쥔 채 누가 빼앗아 먹기라도 할까봐 정색을 하고 먹어 치우고 있었다. 나는 그녀 앞에서 느긋하게 스카가 나에게 건네준 해도를 보고 있었는데 해도를 나에 게 줘봤자 사실 나는 지도를 읽지도 못하고 읽을 마음도 없다. 본디 지도 나 책은 한 놈 탁 찍어서 읽어라 하고 말하면 되는 것이다. 이 존귀하신 몸께서 일부러 들여다 보거나 머리를 싸맬 필요는 조금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계집애는 궁금한 듯 날 흘긋 흘긋 보면서 물었다. "당신, 왕자님?" "아니." "그럼 왜 다들 굽실 굽실 하지요?" "나는 왕이야." 나는 주방장이 만든 절인 무화과를 먹어 치우면서 점잖게 말해주었다. 계 집애는 안그래도 큰 눈을 부릅뜨면서 날 바라보았다. "진짜?" "그래. 너야 말로 배추머리, 이제 슬슬 돌아가면 어떠냐?" "배추가 뭐야?" "네 머리색과 같은 야채." "야채? 풀 같은 건가?" "네가 지금 먹고 있는 게 야채의 한 종류야." 계집애는 두 손으로 쥐고 있는 절인 오이를 쥐고 멍하니 바라보더니 아작 아작 깨물어 먹었다. 이빨도 약간 날카로운 것 같다. 키스하다가 잘못하기 라도 하면 팍 혀가 잘려져 나갈 지도 모른다. "언니를 찾으러 왔으니 돌아보기라도 해야지. 만약 언니를 못찾으면 로맨 스라도 해야해요." "왜?" "왜라니요? 모든 인어족의 여자들은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로맨스를 가지 지 못하면 바보취급을 받아요. 다른 애들이랑 이야기도 할 게 없다구요!" 그녀가 교활하게 웃으면서 날 바라보았다. "게다가 모처럼 잘생긴 남자를 만났는데 이렇게 헤어질 수는 없어요." "그 말에는 동의하지만 나는 너랑 놀고 싶지 않아. 너처럼 어린 애랑은 사 귀지 않는 법이거든." 나는 냉정하게 말해주었다. 내가 잘생긴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어린애랑은 사귀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다. 어찌되었든 사귈 수 있는 여자란 몸매가 좌악 빠진 성숙한 여인이어 야 하는 것이다. 나의 마누라들 처럼. 혹은 마리아처럼, 혹은 미트라...처럼. 제길, 미트라. 기억이 나 버렸다. "난 어린애가 아니에요!" 발끈한 그녀에게 나는 점잖게 말해주었다. "어린애는 어리다고 말하지 않는 법이지." "하지만 난 이미 나이가 다 찼다구요! 이 젖가슴을 봐요!" 배추머리 계집애는 자신의 가슴을 들어보였다. 나는 그 빈약한 가슴을 물 끄러미 바라보다 대꾸해 주었다. 이 앤 아무리 봐도 사춘기도 안지난 거 같다. "그 것을 보고 네가 어린애인 줄 알았어." "이봐요! 큰 여자는 매력없어요!" "그건 개인 취향이지. 그리고 난 네가 내 취향이 아니라고 말하는 거라구." 계집애는 화가 난 듯 입을 툭 내밀고 오이를 꽈악 쥐었다. 날카로와 보이는 이빨이 입술을 살짝 깨무는 게 보인다. 연둣빛 배추 머리 는 인상을 쓰다 말고 날 다시 바라본다. "난 올해 129세에요. 결코 어리지 않아요." "인어족의 성년 시기는 200세로 알고 있는데." "...." 침묵이 흘렀다. 그럼 그렇지, 나는 한 숨을 내 쉬었다. 이놈의 출렁이 위에서 제대로 된 여자가 튀어나올 리가 만무한 것이다. 난 요즘 그다지 일진이 좋지 못하다. 드워프 과부들과 호비트 호박들과 돌덩 이 같은-아니 실제로 돌덩이인- 괴이쩍은 그놈의 뱀대가리같은 것들만 만 나고 있다. 요즘 영 일진이 안좋아. 안좋아. "그러지 말고 나는 라리엘이라고 해요, 자아, 당신 이름을 가르쳐 줘요." 한동안 삐뚤어진 입술을 하고 있던 배추머리가 다시 내가 한 말을 모두 잊 은 듯한 얼굴로 방글 방글 웃으면서 날 바라보았다. "난 쿠베린이다. 그런데 라리엘, 네 언니는 진짜로 납치된 거냐?" "그건 몰라요. 어찌되었든 남자랑 사귀느라 집에 안 들어온 거라면 너무 기간이 긴 거 같아서.." 그녀는 멍하니 말했다. 대체 걱정을 하는 건지 마는 건지 애매모호한 태도였다. 허긴 인어족이 머리 좋고 재치 있다는 이야긴 들어본 적이 없다. 그리고 그렇게 그녀가 애매모호한 멍청함을 보여주고 있는 동안 멀리서 고 함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해적이다!" KUBERIN 우연히 아주 우연히 발부리에 걷어차인 돌멩이가 물 속에 빠지면 파문이 생겨나는 것은 필연이다 4 콰아아아앙! 콰콰콰아아앙! 갑작스런 소리와 함께 출렁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본디 흔들리던 출렁이 의 흔들림이 더한 강도로 내 전신을 흔들었다. 하마터면 공중으로 치솟을 뻔했다. "무슨 일이야?" 여기저기서 외치는 소리와 함께 도끼, 창, 칼들을 두 손 가득히 들고 용병 들이 튀어 나온다. 뱃전에 순식간에 가득찬 그들은 악을 지르면서 선원들 이 지르는 고함소리를 먹어버렸다. "놈들이 배에 구멍을 뚫었다아!" "어서! 놈들을..!" "해적이다..!" 무슨 소린지 잘 알 수는 없지만 결국은 해적이 배에 구멍을 뚫었다는 한 줄기 문장으로 해석가능한 소리 같다. 어쨌든 우왕좌왕하는 수많은 녀석들을 내버려 두고 나는 해적들을 보고파 서 고개를 밖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그 순간 감히 이 몸을 향해 집어던지 는 쇠갈쿠리를 보고 재빨리 잡아챘다. "어떤 자식이야!" 내가 고함을 칠 무렵, 쇠갈쿠리를 집어던지고 그 갈쿠리 끝에 매어달린 기 나긴 쇠사슬을 들고 있던 놈이 날 향해 멍청히 입을 벌렸다. 해적들의 배는 예상을 깨고 자그마한(?) 노 젓는 배였다. 이 배의 형상은 범선도 아닌 것이 갤리선도 아닌 것이 그렇다고 해서 나룻 배라고도 할 수 없는 형상인데, 굳이 말하라고 한다면 가죽을 둘러친 길죽 하고 길다란 이 배는 가느다란 버들잎 모양을 하고 있었다. 배의 끄트머리 는 양 끝다 뾰족하고 그 끄트머리에는 시커먼 쇠조각과도 같은 것들이 날 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놓고 있었다. 그리고 배의 양 쪽에는 보통 나룻배보 다도 굵은 노가 줄줄이, 마치 게 다리, 아니 지네다리들처럼 줄줄이 늘어져 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지네 위에는 마치 꿀 한 방울에 매달린 개 미떼처럼 반쯤 벌거벗은 시뻘건 사내놈들이 바글 바글 거리고 있었다. 놈 들은 저마다 나는 해적이어요 라고 말하고 싶은 듯 온통 문신과 갈쿠리와 칼로 중무장을 하고 있었는데 그 중 드물게도 델리암 왕실문장으로 바지를 해 입은 특이한 개성을 가진 놈도 있었다. 어쩐지 배 전체가 기어다니는 지네같은 형상이라고 멍하니 생각하는 순간 갈쿠리를 든 녀석이 힘을 써서 내가 쥔 갈쿠리를 빼앗으려는 듯이 잡아당 기기 시작했다. 원, 멍청한 놈을 다 보겠군. 너 나랑 힘을 겨루려는 거냐? "저기다! 해적을 쳐라!" 내 뒤에서 소리 지르던 놈들이 모두들 다가와 칼을 휘둘러 댄다. 물론 놈 들은 아래 있고 우린 위에 있는 형상이니까 새삼 여기서 칼 흔들어 봐야 놈들에게 닿을 리는 없다. 나는 그런 말을 녀석들에게 해 줄까 하다가 관 두었다. 어차피 쌈박질을 하다 보면 이성을 잃는 인간들은 한 둘이 아니니 까. 나처럼 이성적이고 냉철한 분만이 이런 상황에 정신을 차리고 있는 것 이다. "저기다!" "막아!" "못 올라오게 해!" 한 용병이 놀란 듯 겁에 질린 듯 소리를 질렀다. 돌아보니 다른 지네 위에 타고 있던 놈들이 일제히 사슬을 던지는 게 보인 다. 이제 지네는 거미로 화했다. 지네 위에 있던 놈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갈쿠리를 일제히 던지고 있 었다. 힘이 모자란 놈은 기냥 밧줄을, 힘이 있는 놈들은 쇠사슬이 달린 갈 쿠리를 던져내고 있었다. 그렇게 수십개의 밧줄과 쇠사슬이 공중을 격해서 이쪽 배의 난간에 매달리기 시작하자, 그 수십개의 갈쿠리를 향해서 이 쪽 놈들이 일제히 달려나가 갈쿠리를 바다로 도로 내던지기 바빴다. "어서!" 이번엔 화살이 날아온다. 옆에서 방패를 쥔 놈들이 고래 고래 뭐라고 소리치고 있다. 뭐 그래봐야 별로 영양가 있는 이야기 같지는 않기에 무시하고 나는 두 손 을 일단 얼굴에 슬쩍 대고 옆에 서서 웅크리고 있는 인어에게 외쳤다. "넌 물속으로 들어가!" "그, 그럴 참이에요!" 배추머리가 소리쳤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내게 갈쿠리를 던진 녀석을 잘 보고 겨냥한 뒤에 내 가 쥔 갈쿠리를 도로 집어 던졌다. 패애앵 하는 소리와 함께 깨애앵 하는 소리와 더불어 그걸 내게 던진 놈이 뒤로 넘어간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내 바로 앞에서 거미줄을 흩뿌리고 있던 해적들을 향해 도약했다. 콰아아악 하고 밟은 것은 불행히도 -내게는 그다지 불행은 아니었지만- 노 젓던 해적들 중 한명이었다. 녀석은 으아악 비명을 지르고선 길게 널부 러졌다. 마치 밟힌 개구리같은 형상을 한 녀석을 보고 바로 옆에 있던 놈 이 나를 향해 도끼를 휘둘러 온다. 그 도끼를 슬쩍 피하면서 손톱을 꺼냈 다. 녀석의 목덜미에 내 손톱이 박히는 그 순간 바로 뒤에 있던 놈이 내 등줄기를 감히 칼로 찍었다. 그러나 찍는 것과 동시에 내 두 번째 손이 손 톱을 내뿜으면서 녀석의 가슴을 갈기 갈기 찢었다. "으아아악!" 비명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나는 히죽 웃었다. 소금 내음, 비린내는 어딘가 피냄새와 닮아 있다. 살육은 바다와 아주 친근한 울림을 가지고 있다. 인간들이 혹은 수많은 아 인족들이 바다로부터 생선을 건져올리며 말하지 않았던가, 그들이 생선을 살육하며 말하지 않았던가! 바다는 생명의 어머니라고! 그렇다면 어머니에겐 어울리는 경배를! 나는 한 발자국 떼면서 내게 돌진하는 녀석들의 머리통을 밟으면서 돌진했 다. 작은 이 배 위에서는 어차피 일직선으로 달려가는 것 이외는 방법이 없다. 달리고 달리고 달려서 이 놈들을 끝장 내줄 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일직선으로 달렸다. 발톱을 꺼내놓고 녀석들의 머리통과 가슴을 한 번씩 걷어차며 달리자 이 동선은 상당히 적절한 선을 그리고 있다는 것을 나는 곧 깨달았다. 델리암 왕실기로 바지를 해 입은 개성이 넘치는 해적 놈이 나를 향해 이를 드러내면서 쌍 도끼를 휘둘러댄다. 그리고 그 옆에 놈이 내 등을 호시탐탐 노리면서 활을 당기고 있다. 이렇게 나온다면 나도 같은 무기를 사용해주지. 나는 등줄기를 휘어서 강침을 내 쏘아 주었다. 그러자 옆에서 활을 준비하 고 있던 놈들이 와라락 쓰러진다. 그 모습을 보고 쌍도끼는 놀란 눈을 크 게 뜨고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인간이 아니다!" "저, 저 놈 괴물이다!" 그리고 그 순간 뱃전에 남아 있던 살아있는 놈들은 나에게 덤비는 것보다 수 배는 빠른 속도로 일제히 배 밖으로 튀어 나갔다. 얼마나 빨리 도망쳐 바다로 뛰어들었는지 혼자 남아 있는 나는 망연자실한 상태로 멀건이 서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아아, 인간이란. 꼭 자기들이 감당해 낼 수 없는 강자가 나오면 괴물이라 칭하면서 현실도 피를 하는가! 나는 피 바다 아니, 피로 물든 지네 위에 홀로 서서 고독을 맛보고 있었다. 내가 죽인 놈들 열 댓 명이 일제히 고꾸라져 있는 가운데 내가 서 있는 배 는 출렁 출렁이 쪽으로 흘러간다. 아니 다가간다. 내가 엥 하는 그 순간, 물결의 힘을 이기지 못한 이 지네는 사정없이 그 사나운 쇠꼬챙이를 박은 선미로 출렁이를 들이 박았다. 콰아아앙 하는 소리와 함께 내가 타고 온 출렁이에 구멍이 났다. 잠깐, 여기서 구멍이 나면 어떻게 되는 거지? 내가 잠시 의문을 품고 있는 동안 그 의문에 답하듯이 출렁이에 타고 있던 놈들이 비명을 올리고 고함을 질러댄다. "또 구멍이 났다!" "이젠 침몰이다!!" 그리고 물이 출렁이의 뚫린 옆구리로 하염없이 치밀어 들어가기시작했다. 이렇게 되면 내가 구멍을 낸 거나 다름 없는 건가? 아하하하....제길.. 푸른 바다의 푸른 파도는 피거품을 입에 물고 있었다. 시체들은 주변으로 둥둥 떠다니고, 부서진 뱃전에 배를 찢긴 자들은 내장을 드러낸 채로 울부 짖고 있었다. 쇠붙이에 찔린 자들과 찌르고 있는 자들은 어느 쪽이 다치고 어느 쪽이 다치게 한 것인지 알 수도 없을 정도로 서로 목청이 찢어져라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또 하나의 지네가 출렁이를 콰악 들이 박는다.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비명 소리는 이제 들리지도 않는다. 내 머리위로, 내 바로 옆으로 칼과 창이 후 둑 후둑 떨어지고 그 옆으로 시체들도 떨어져 내린다. 나는 고개를 길게 뽑아서 다시 출렁이 위로 올라서기로 결심했다. 그 안에서 벌어지는 싸움은 분명히 내가 끼어야 할 일이었던 것이다. 손톱을 내뻗어서 기울고 있는 배에 콰악 찍었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뛰 었다. 나는 공중을 격해서 재빨리 출렁이 위로 올라섰다. 내가 올라서자 마자 놀 란 어떤 놈이 내 머리통을 후려갈기려 들기에 그 놈 머리통을 확 부수어 주려다가 간신히 멈추었다. "이 자식이!" 알고 보니 이 자식은 그 악 쓰던 흉터 가진 고리눈깔 아닌가. 녀석도 나라는 것을 깨닫자마자 흥 하고 돌아서서 자기에게 덤비는 놈을 향해 칼을 내지른다. 이 건방진 녀석의 다리 몽둥이를 부러뜨리려다 나는 간신히 참아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서 내게 공격해 오는 건방진 해적들을 향해 손톱을 돌 렸다. "배가 기울어!" "배가 가라앉는단 말이야!!" "기울면 잡아! 이 자식아!" 어떤 놈이 고함을 지르기에 대꾸해주었다. 그러자 그 놈은 고함을 지르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계속 칼 놀리기에만 열중하는 녀석을 보고 나는 만족 했다. 해적들의 수는 약 오십이 넘는 거 같다. 우리의 수는 약 삼십, 게다가 배가 박살 나서 무척 우왕좌왕하고 있다. 이 곳에 올라탄 자들은 용병 이외에 선원이나 수병출신 용병들도 있었기 때문 에 배 위에서 벌이는 싸움은 별로 어색한 점은 없었다. 그렇지만 배가 박 살나 기울고 있는 상황이란 것은 그 만큼 극악한 상황임은 분명한 일이다. 이 정도의 수를 부리기란 간단하지 않을 텐데 대체 두목이란 어디서 굴러 먹던 놈일까. 놈들은 갈쿠리를 던져서 배를 잡고 그 위로 뛰어 오른다는 평범한 방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배를 박살 내는 것이 기존 해적들과 다른 점인 거 같다. 보통 해적들은 배를 부수진 않는다고 들었는데 이 놈들은 상당히 악랄하지 않은가. 망망대해에서 배가 박살나면 선원이고 뭐고 다 죽어버리지 않겠는가. 부서진 뱃조각과 출렁이는 파도 위에서 나는 고개를 돌렸다. 문득 청량할 정도로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시커먼 섬이 어느새 바로 앞에 보였다. 그 덕에 뜨끈 뜨끈한 바닷바람 대 신에 서늘하고 축축한 바람이 불어 오는 것이다. 시원해서 좋군. 섬의 모양은 기괴하게 생겼다. 고리 모양의 시커먼 바위가 마치 둥근 문처럼 섬의 입구를 장식하고 있고 그 옆에는 기암괴석이라고 밖엔 할 말이 없을 듯한 슬라임을 주욱 잡아 늘 린 듯한 형상의 시커멓고 허연 바위들이 줄지어 섰다. 그바위들에 부딪쳐 서 파도들은 허연 물거품을 내 뿜어 대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간혹 드러 나는 퍼렇고 검은 바위들이 보인다. 둥그스름하고 길죽하기도 한 그 검은 바위들... "저거...암초 맞지?" 나는 무의식중에 중얼거렸다. "으어어어억!" "와아아앗!" 콰직 하고 출렁이가 흔들렸다. 그리고 길게 견디고 자시고 할 건덕지가 전혀 없었다. 그 다음 흉터가 날 향해 소리질렀다. "뛰어 내려!" "왜?" "뛰어 내리라구!" 녀석은 길게 말하지도 않고 내 뒤통수를 잡아 뛰어 내렸다. 풍덩하고 물속 에 뛰어 들자마자 녀석은 격렬하게 헤엄을 치기 시작했다. 나역시 헤엄을 치기 시작하긴 했는데 격렬하게 헤엄치지는 않았다. 난 네가 아니라구, 그 렇게 격렬하게 헤엄치지 않아도 된다구. 그리고 문득 뒤 돌아 보자 내 눈앞에서 허우적 거리고 있는 마리온을 발견 했다. 마리온은 수영을 못하는 것은 아닐 텐데도 이상하게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놈의 목덜미를 잡는 순간 난 그 이유를 깨달았다. 수류였다. 엄청난 압력의 물기둥이 내 다리를 휘어 감아 잡아 당긴다. 어억 하는 소리와 함께 빨려들 뻔한 순간에 나는 온 몸을 비틀어 발버둥을 치면서 마리온의 등줄기를 콱 하고 밀어 주었다. 마리온이 수류에서 빠져 나가자 마자 나 역시 이를 악물면서 그 자리를 빠져 나왔다. 마리온의 얼 굴이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그 놈의 뒷덜미를 잡고 맹렬하게 헤엄치는 동 안 갑자기 사방에 인구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여기 저기서 발버둥치는 놈들이 늘어나 주변에는 온통 사람들의 팔다리 밖 에는 안 보인다. 배가 가라앉은 것인지 아니면 배에서 뛰어 내린 것인지 사방은 몸부림 치는 인간들의 팔 다리 투성이었다. 분명히 헤엄 치지 못하 는 놈들은 거의없을 텐데 왜 이리 몸부림을 치는 거냐 하고 돌아보자 배 가 가라앉으면서 동반자를 고르는 중인 것을 깨달았다. 그저 무심히 떠돌던 나뭇조각과 가장 가까이에 있던 인간들이 동반자로 선 택되어 질질 심해로 끌려들어간다. 그 뒤를 이어 그 다음 가까이 있던 자 들이 마치 선택받은 희생양처럼 징징 일그러진 얼굴로 심해로 이끌려 들어 간다. 물 속은 가히 지옥이었다. 마리온이 더더욱 공포에 질려서 맹렬하게 헤엄을 친다. 나역시 선택받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다. 그 놈의 흉터가 하던 대로 나도 맹렬하고 격렬하게 헤엄을 치기로 마음먹 었다. 나의 수영실력은 인어족이 질투할 지경이니 인간들의 그것에 비할 바가 아니다. 물살을 헤치고 곧장 일직선으로 내가 나아가자 놀란 인간들 이 날 넋을 잃고(?) 바라본다. 그런 내 뒤를 마리온이 맹렬하게 달라 붙었다. 그런데 이 놈은 맹렬하게 헤엄을 치는 게 아니고 맹렬하게 내 옷자락을 잡고 늘어진다. 이 건방지고 양심없는 놈을 한 대 걷어 차려다가 관두었다. 오죽하면 이러겠냐.. 그러나 마리온 하나라면 또 모르겠는데 어느 순간엔가 한 놈이 달라 붙더 니 그 다음에는 두 놈, 세 놈 달라 붙기 시작했다. 이거 뭐 하는 거야? 내 가 무슨 구명대인줄 아냐? 열이 받는 순간에 내 눈앞에서 비슷한 광경을 또 발견했다. 한 아가씨에 댓명의 사내들이 달라 붙어 있다. 아가씨는 몸부림을 하고 있고 댓명의 사내들은 아귀 아귀 달라 붙어서 그 녀의 지느러미를 잡고 늘어져 있다. 어쩌자는 거야? 다같이 자살하자는 건 가? 아가씨는 배추머리를 하고 인어족 같은 얼굴에 인어족 같은 몸매를 하고 있다. 그런 것을 보면 확실히 인어족은 인어족 같다. 그쪽을 향해 나아가자 그 쪽 파랗게 질린 인어 아가씨가 날 발견했다. "쿠베린.." 물 속이라 소리가 날 리는 없을 테지만 어쨌든 나는 그 목소리를 들었고 그녀의 지느러미에 매달린 녀석들의 면상을 후려갈겨 주었다. 아니, 정확히 말한다면 내가 놈들을 친 게 아니라 내 팔다리에 매달린 놈들이 놈들을 후 려갈겼다. 그 놈들이 내 팔 다리를 대신해서 갈기는 것을 보자 문득 내 팔 다리가 두 배로 길어진 거 같아서 재미있다. 그런데 또 떨어진 놈들이 또 달라 붙은 놈들에게 또 달라 붙는다. 이건 어쩐지 새끼치는 슬라임형태같 군 하고 생각하고 있는 동안 배추머리에게 달라 붙어 있던 놈들이 일제히 도로 내게 달라 붙었다. 어찌되었든 인어족의 덜떨어진 미숙한 아이인 배추머리가 안도의 한 숨을 내 쉬고 앞장서서 헤엄쳐 나가는 동안 나는 마치 소라 고동을 몇 개씩 매 어 단 바다거북처럼 줄줄이 내 팔다리 어깨 허리 등등에 수명의 녀석들을 꿰어 차고 헤엄치게 되었다. KUBERIN 우연히 아주 우연히 발부리에 걷어차인 돌멩이가 물 속에 빠지면 파문이 생겨나는 것은 필연이다 5 "헥헥헥..." "헉헉헉..." 물 밖으로 나온 놈들이 헉헉거리면서 물을 토하고 있었다. 나는 팔짱을 끼고 그런 놈들의 등을 가차 없이 밟아 주면서 놈들의 장수에 도움을 주고 있었다. 사실 내가 헤엄을 쳤지 니들이 헤엄을 쳤냐? 주변은 검푸른 바위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바위 라기 보다는 거의 절벽 수준이었다. 아니, 정정하자면..진짜 절벽이었다. 그것도 마치 벽처럼 늘어선 절벽들은 하늘을 찢고 올라서기라도 할 듯 거 대한 존재감을 가지고 우리들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옆에선 파도가 철석 철석 소리를 지르고 있는 가운데 우리들은 조촐하고도 동글동글한 바위들 사이에 올라 서 있는 중이었다. "여기...밀물 들어 올 텐데요?" 옆에서 배추머리가 말했다. 나는 주변을 돌아보았고 아닌게 아니라 그럴 가능성이 무척 크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덧붙여 이 곳은 절벽을 넘어 서지 않으면 올라설 자리도, 혹은 넘어갈 길도 없다는 것도 함께 깨달았다. "대체 여기가 어디야?" "여..헥헥..여기는..헥헥...트, 틀림없이...팔라치 섬이야. 팔라치 섬의 동쪽 해 안인 거 같군." 엎어져서 물을 왝왝 토하고 있던 놈이 고개를 들고 말했다. 그 놈이 누군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분명한 것은 그 놈의 몸뚱이를 끌고 온 게 나라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끌고 온 놈들은 일곱명이나 되었다. 많이도 끌고 왔군... "그래, 너 말잘했다. 그럼 여기서 넘어갈 길이 있냐?" "..어, 없어." 켁켁 거리던 녀석이 절망적으로 말했다. "팔라치 섬은 천혜의 요새라구, 북쪽은 항구로 쓸만한 해변이 줄지어 있지 만 남쪽은 암초지대, 그리고 동쪽은 절벽지대를 이루고 있어서 보통 자들 은 침입하기가 불가능하지..우리들은 지금 그 놈의 동쪽에 있는 거라구." "좋아, 그럼 남은 서쪽은 뭐야?" "서쪽? 서쪽은 화산지대잖아." 나는 잠시 침묵했다. 별 괴이쩍은 섬이 다 있다. "앞으로 어쩌지?" 마리온이란 놈이 살려주니 그 고마움도 모르고 서슴없이나에게 기대며 물 었다. "손톱이 빠져라 저 절벽을 올라가라." 나는 태연히 말해주었다. "기한은...오늘 밤이 지나기 전이다. 새벽이 오면 가차없이 물이 불어날 테 니까 그걸 각오하고 저 절벽을 기어 올라가라구." 내가 절벽을 가리켜 보이자 놈들은 일제히 절망의 신음을 터뜨렸다. 배추머리가 날 바라보며 속삭였다. "그럼 난 이 바다 밑으로 갈 만한 곳이 있는가 보고 올께요." "그래라. 근데 이 근처 해류는 어때? 이 바보들이 헤엄칠만 하냐?" "음..글쎄요, 이 근처는 해저 화산이 많아서 해류가 불안정하니 잘 모르겠 어요. 어쨌든 한 번 돌아보고 오지요." 그녀는 그렇게 귀여운 표정으로 말하곤 물속으로 잽싸게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나는 그다지 도움이 안되는 놈들을 이끌고 둥글 넙적한 바위 위에 앉아서 바다를 바라보게 되었다. "쿠베린..." 갑자기 마리온이 내 옷자락을 잡아 당기면서 말을 걸었다. 어둑 어둑해지는 즈음이었지만 어느 한 녀석도 절벽을 향해 기어오르는 놈 은 없다. 왠지 이렇게 노력하지 않는 놈에겐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차라 나는 이 놈 들에게 점점 정나미가 떨어지고 있었다. "저기...엘리야에..." "뭐냐?" "엘리야에 '푸른 수염의 도끼'라는 주점 알고 있어?" "그런 괴이쩍은 주점은 몰라." 내가 대꾸하자 옆에 앉아 있던 턱수염 난 녀석이 그 말을 이어 받는다. "난 알아. 가슴 큰 베스가 있는 주점이잖아?" 갑자기 마리온놈이 도끼눈을 하고 도끼라는 이름의 주점을 말하는 놈을 쏘 아보았다. "베스에게 함부로 말하지 마!" "뭐야, 주점의 매춘부에게 뭘.." 그 순간 마리온이 놈의 턱주가리를 걷어찼다. 퍽 하고 그 놈이 뒤로 넘어 가는 순간 마리온이 식식대며 다시 쓰러진 놈의 몸뚱이에 올라타고 퍽퍽 하고 휘갈겨댄다. 그러자 맞고 있던 놈이 열을 받았는지 주먹을 들어서서 자신의 몸에 타고 있는 마리온을 향해 내둘러댔다. "죽어!" "이 자식이!" 둘이서 드잡이질을 하던 말던 나머지 다섯명의 사내는 냉철하다. 그들은 각자 주변을 돌아보면서 먹을 만한 것들을 주워오고 있었다. 썰물 때라서 여기 저기에 널린 게와 조개들을 주워온 녀석들은 마치 해달이라도 된 듯이 바위에 조개를 깨서 아그작 거리고 먹고 있었다. 아무도 나에게 먹어보란 소리를 하지 않기에 나는 무척 화가 나서 제법 큰 조개를 들고 있는 녀석 두엇을 두들겨 주었다. 그제서야 녀석들은 나에게 공손히 바쳤 다. 조개 두어개 가지고 내가 배가 찰 리가 없다. 그래서 나는 제법 오동통한 녀석을 나도 모르게 주시하고 있었는데 그 놈 이 내 시선을 눈치챈 것인지 갑자기 열정적으로 변하여 물고기 몇 마리를 잡아 가지고 왔다. 낚시줄도 없이 어떻게 잡았을지 나로서도 약간 궁금했 지만 그런 걸 물어봐야 내 손수 잡을 일이라곤 있을 리 없기 때문에 나는 그저 받아 두기로 했다. 어쨌든 내가 이 보잘 것 없는 물고기들을 맛있게 먹고 있는 동안 드잡이질 을 하던 마리온이 헥헥하고 쌍코피를 흘리며 주먹만한 입술탱이를 해가지 고선 나를 향해 다시 다가왔다. "쿠베린..그래서 말이야..." 그 놈과 싸우던 놈도 이제 싸우길 단념하고 자신도 혹시나 뭔가 먹을 만한 것을 찾을 수 없을까 해서 바위틈사이를 뒤지고 있었다. 그 놈도 쌍코피를 터뜨리고 이마빡에 주먹만한 혹을 매달고 있었다. "그래 큰 가슴을 가진 베스라는 여자가 어떻다는 거냐?" "....그녀와 난 결혼 약속을 했어." 녀석이 진지하게 말했다. 그런 엄청난 약속을 하고 나는 경악해서 녀석을 다시 보았다. 옆에 있는 놈들도 제법 호기심이 이는 지 일제히 이쪽을 바라본다. "그 여자는...고생을 무척 했다구. 그녀가.. 고향을 떠나와서 엘리야에 있게 된 것은..그러니까..지금으로부터 5년 전이래. 여자 홀몸으로 무척 고생했다 고 하더군." 녀석의 눈이 갑자기 먼 곳을 바라본다. 그리고는 전형적인 바보 멍청이처럼 시익 웃는다. "이 해적소탕전에서 돌아오면 한 몫 챙길 수 있을 거고. 그럼 그녀에게 작 은 가게를 차려 줄거야. 그녀는 고향에서 자주 만드는 과자이야길 했어. 그 과자는 안에 라즈베리와 블루베리를 넣은 손가락만한 과자인데 아이들에게 무척 인기가 있었대.. " "...엘리야에서 과자집을 차리겠다구?" 나는 미심쩍은 어투로 되물었다. "과자집은 안될 지 모르겠지만...어쨌든 작은 식료품점 같은 걸 하면 괜찮 을 거 같아. 그녀는 요리 솜씨도 있는 편이고..헤헤..어쨌든 그러기로 했어." 나는 턱을 괴고 이 바보 천치같은 녀석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그녀는 날 기다리고 있을 거야." "이봐." 옆에서 듣고 있던 머리털이 다소 많이 빠졌지만 차마 대머리라곤 말할 수 없는 녀석이 말을 걸었다. "그녀는 너 보다 나이가 많아." "그녀는 스물 다섯이라고 했는데?" 얼치기처럼 마리온이 말하자 아직 덜 된 대머리 녀석이 하 하고 크게 코웃 음을 쳤다. "농담하냐? 그 얼굴에 무슨 스물 다섯? 그녀는 서른 댓살은 되었을 거야!" "시끄러워! 그녀는 젊어!" 얼굴이 시뻘개진 마리온이 악을 썼다. 나는 또 싸우려는 두 놈 사이로 다리를 주욱 뻗어서 장벽을 만들고 다시 녀석에게 물었다. "야, 말이나 마저 하고 싸워. 그래서 뭐가 어떻다는 거지?" "..아. 그러니까.." 마리온이 화를 내려다 말고 비시시 웃었다. "...내가 만약 여기서 죽으면 길드에서 나올 내 돈을 그녀에게 주라고. 내 전재산을 그녀에게 주라고 길드마스터에게 전해줘." 그 말에 갑자기 사내들이 침묵했다. 그 가슴 큰 여자 베스를 들먹이며 놀리던 녀석들도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나는 멀뚱 멀뚱 녀석을 바라보며 물었다. "진심이냐? 그 여자랑 결혼할 거냐?" "응." "결혼이란 것은 인생의 무덤이오, 남자의 일생에 한줄기 시커무리 죽죽한 절망이란 말을 혹시 들어 본 적이 없냐?" "헤헤..없어." "그런 지고 지순한 충고를 너에게 해주는 선배도 없었냐? 너는 교우관계가 무척 빈약했던거 아니냐?" 나는 녀석의 편협한 인간 관계를 깨닫고 점잖게 충고하기로 마음먹었다. "이 중에서 결혼한 놈 손들어 봐." 내가 나머지 여섯 녀석을 향해 묻자 녀석들 중 두 놈이 손을 들어 보인다. 그 두 놈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쿠베린 말에 동의하겠다. 결혼이란 인생의 무덤이요, 내 발등에 스스로 도 끼를 찍고 내 코에 낚시바늘을 꿰는 격이란다." 그렇게 말한 녀석은 구릿빛으로 태운 피부가 아깝도록 추욱 늘어진 뱃살을 가진 녀석으로 아까 나에게 아낌없이 물고기를 잡아다 바친 포동 포동한 녀석이었다. 녀석은 약 사십여세 되었는데 고생을 하도 해서 그런지 최소 한 오십세는 넘어 보였다. "내가 얼마나 고생을 했으면 39살 밖에 안되었는데 이렇게 늙었겠냐? 그게 다 마누라때문이란다. 젊은이." 녀석은 그렇게 충고했다. 그 옆에 있던 놈이 키득거렸다. "웃기지 마. 자식아, 넌 실제로 사십 칠세 잖아!" 그 놈의 말을 무시하고 나는 다른 녀석, 결혼했다는 녀석의 얼굴을 바라보 았다. 그 녀석은 신중한 얼굴로 조용히 말하고 있었다. "내 마누라는 내가 바다에 나간 사이에 도망갔다. 내 전 재산을 가지고 조 용히 날라 버렸지." "헤에.." "흐음.." 사내들이 제각각 자신의 주제에 맞는 맞장구를 치고 있는 가운데 도망간 마누라를 가진 녀석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물론 용병생활이란 게 멋진 게 아니라는 것은 나도 알아. 도망갈 수도 있 겠지. 이혼할 수도 있고. 그런데 다른 놈과 눈 맞아서 도망가려면 내 돈은 놔두고 도망가야지! 내가 이십년 동안 뼈빠지게 피 눈물 쏟아가면 모은 돈 을 싸그리 퍼가지고 사라지다니 그게 인간이냐? 원수다 원수! 내가 왜 이 바보같은 해적소탕에 나선 줄 알아? 돈이 없어서 그래! 돈이!" 점잖게 시작하던 녀석은 갑자기 눈에 핏대를 세우면서 소리를 고래고래 지 르기 시작했다. 녀석은 주먹을 쥐고 악을 지르고 있었다. "너희들 생각해봐! 상인의 돈도 아니고 용병의 돈이란 말이야! 우리가 피 로 번 돈이야! 이 돈이 어떤 돈인데! 크아아아아아..." 녀석이 발광하길래 방법이 없어서 나는 조용히 녀석의 면상을 밟아주었다. 어쨌든 그 두 놈의 악다구리가 끝난 뒤에 나는 마리온에게 조용히 말해주 었다. "어때? 너 그러고도 결혼하고 싶냐?" 마리온은 벙벙한 표정을 짓고 있더니 그래도 바보 멍청이처럼 고개를 끄덕 였다. "응. 할 거라고 약속했어." 멀리서 별 빛이 다가온다. 간혹 뱃사람들이 말하듯 바다에서 죽어버린 뱃사람들의 영혼들이 갈 곳을 잃어 줄줄이 매달려있다는 바다 위의 별들은 육지 위의 별들 보다 많다. 아마도 육지 위의 별들이 갈 곳이 많아서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것과 달 리 바다 위에서 죽은 자들은 갈 곳이 오로지 하늘 위뿐이라 주저리 주저리 매달려 있는 것일런지도 모른다. 바다의 여신은 그들 모두의 시신을 받아 대지의 여신처럼 바다 전체에 그들의 생명과 그들의 시선을 뿌린다. 대지 에서 죽은자들이 대지로 돌아가듯 바다에서 죽은 자들은 바다로 돌아가 물고기들의 배를 부르게 하고 자잘한 바다 벌레들의 손으로 갈기 갈기 찢 어 내어 새로운 물고기들을 만들어낸다. 밤의 여신이 자신의 옷자락에 매달린 뱃사람들의 영혼을 망토끝자락에 장 식했는지 아니면 망토 윗자락에 장식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바 다에서의 그녀의 옷자락은 분명 대지위에서 보다는 무거울 것이다. 갈 곳 을 잃은 뱃사람들의 영혼은 너무나 많으니까. "이봐." 대머리 녀석이 말했다. 내가 돌아보자 대머리 녀석은 옆에서 졸고있는 마리온을 슬쩍 밀어 제치 고 내 옆에 와서 속삭인다. "아까 그 이야기 말이야..." "그거 뭐?" "저 애송이의 말 말이야.." 녀석의 얼굴이 조금 일그러졌다. "..장난이 아니라구, 저 자식 너무 순진한 거 아냐? 그 베스란 계집은 매춘 부야, 그 여자는 저 애송이 말고도 수도 없이 남자가 있다구." "그래서?" "저 애송이의 전 재산을 그런 매춘부에게 준다는 건.." "어차피 저 놈 가족도 없다는 거 아냐?" 내가 시큰둥하게 묻자 녀석이 머슥해서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내버려두면 길드 재산밖에 더 되냐? 게다가 저놈 돈이야, 쓸데 없는 참견 관둬." "그야 그렇지만..속는 게 안타깝잖아!" 대머리가 투덜거렸다. "네가 안타까울 게 뭐냐? 게다가 저 놈이 죽는다는 보장이라도 있어?" "저런 소릴 지껄이는 놈 치고 안 죽는 놈 봤어?" 대머리가 진지하게 말한다. 웃, 갑자기 엄청난 설득력이 있는 소리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유언장 남긴 놈 치고 안죽는 놈 없고 친구와 피가 섞인 맹세했다는 놈 치 고 배신당하지 않는 놈 없으며 여자를 차지했다고 자랑하는 놈 치고 뒤통 수 안맞는 놈 없다. "어쨌든 저 놈 돈이고 저 놈 맘이니 참견 마." "그 여자에게 당한 놈들이 어디 한 둘인감..서른이나 홱 넘어버린 그런 싸 구려 매춘부에게..쳇..." 녀석이 투덜거리면서 무거운 엉덩이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나는 마땅한 베개를 찾지 못해 잠이 들지 못하고 있는 중이다. 아아, 제길...스카를 데려 올걸, 아니, 가빈을 데려올걸.... 따끈한 난로와 부드러운 베개, 그리고 맛좋은 맥주와 먹음직한 돼지 통구 이... 그런 생각을 하면서 바위 위에 앉아 있는 동안 어쩐지 엉덩이가 축축하다 생각했더니 슬금 슬금 물이 발목까지 올라와 있다. "야! 절벽으로 가라!" 내가 고함 치기도 전에 나랑 수다 떠느라 안 졸고 있던 대머리가 소리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졸던 놈들은 일제히 절벽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KUBERIN 우연히 아주 우연히 발부리에 걷어차인 돌멩이가 물 속에 빠지면 파문이 생겨나는 것은 필연이다 6 절벽에 까지 다다르자 어느 정도는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어느 정도의 여유이지 상당한 여유라고는 볼 수 없었다. 먼 동이 터오기도 전에 바다의 여신은 우리에게 한 발을 내밀어 약을 올리 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나는 약간 갈등을 겪는 중이었다. 이 일곱 짐덩이를 내버려 두고 홀로 날렵하고 우아하게 이 절벽을 타고 올 라가 버릴까 하는 것과, 아니면 이 놈들을 줄줄이 매어 달고 위로 올라갈 까 하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다같이 죽어버릴까...하는 것 이었다. 물 론 마지막은 말도 안되는 이야기지만 어쨌든 나에겐 세 개의 가능성이 있 었다. 그런 것을 알아 차렸는지 어느 새인지 이 일곱 짐덩이가 일제히 애절한 눈 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래서? 어쩌라구 하고 내가 소리치려는 순간에 철석 철석 하고 무언가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쿠베린!" 살기가 전혀 없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푸욱 찔러 버릴 뻔했다. 배추머리 아가씨는 나의 목에 매달려 재빨리 외쳤다. "이 아래, 이 아래에 작은 동굴이 있는데 그 게 반대편으로 통해요." "거기가 어디야?" "그곳으로 가자!" 그 말을 듣자 마자 다들 미친 듯이 외치는 동안 나는 이 인어아가씨의 지 능을 익히 아는터라 냉정하게 되물었다. "크기가 얼마나 되는데?" "응..내가 빠져나갈 정도." 그녀는 상큼하게 대답했다. 그 순간 일곱 덩이 짐덩이가 앞으로 폭삭 쓰러졌다. 이 아가씨의 몸체는 나보다도 작을 정도다. 즉 나보다 무지 막지하게 큰 이 일곱 덩이 살덩이들은 지나갈 수 없다는 이야기와 일맥 상통한다. "그 것이외엔 없어?" "돌고래들이 다니는 길이 있어." "흠...그건 얼마나 큰데?" "음...돌고래 두 마리가 나란히 나다닐 정도?" "그거로 하자." "하지만 ...그건 너무 길어. 지나가려면 한 참 걸릴 걸." "얼마나 걸려?" "우우우움.." 그녀가 머리를 쥐어 뜯을 찰나 옆에 있던 놈들이 잽싸게 외쳤다. "그냥 가!" "그래! 그냥 가자구! 여기서 죽나 거기서 죽나 마찬가지야!" 녀석들의 가슴까지 물이 차올라 왔다. 나에겐 목까지 차 올라왔지만 나야 이 잘 부스러지는 절벽에 내 손톱 퍽퍽 박아 가며 올라가도 되니 그 다지 급할 일은 없다. "거기로 가자구! 쿠베리이이인!" 녀석들의 소리가 비명으로 화할 때 나는 모험을 하기로 결정했다. 심호흡을 깊게 하고 물 속 아래로 그녀의 뒤를 따라 갈때에는 나와 일곱 짐덩이들은 허리띠를 풀어서 서로를 연결하고 있었다. 이 멍청하고도 미약 한 놈들은 어둠 속에서 배추머리를 뒤따라 갈 능력이 없기에 내가 결국 이 끌고 가야 한다. 나에게 있어 귀찮기 짝이 없는 일이지만 어찌되었든 방법 이 없어서 이 놈들을 줄줄이 이끌고 갔다. 사실 바다의 깊은 어둠은 대지의 깊은 어둠에 비할 바가 아니다. 달빛은 이 물속까지 스며들지 못하고 별빛은 당연히 없다. 게다가 반딧불 같은게 있을 리도 없고 달빛을 받은 이슬이 있을 리도 없으니까 인간처럼 눈이 어두운 종족들은 어쩔 수 없이 장님이 되어 버린다. 나역시 자세히 감각을 기울이지 않으면 사방을 알아 차리는 데에 시간이 걸린다. 묘인족은 대지위를 달리는 종족이다. 바다에서 살도록 만들어진 종족이 아니란 말이다. 당연히 어렵고도 어렵다. 생각없는 이 인어족의 배추머리는 그런 나의 입장과 인간의 생각따위는 거 의 하지않고 제 맘대로 헤엄친다. 그 뒤를 따라가기란 상당히 고역이다. 난 인어가 아니란 말이다! 한 참 어둠 속을 헤엄치자 그녀가 안내하는 작은 굴이 보인다. 그 굴 근처 에 몇몇의 바다 늑대가 이빨을 드러내기에 나도 사정없이 손톱을 들어 녀 석들의 대가리를 꿰뚫어 주었다. 이 배추머리 아가씨는 그 와중에 나에게 박수를 친다. 이 바다 늑대란 것들은 바위틈에 또아리를 틀 듯이 둥지를 가지고 대가리만 내밀어서 덥석 덥석 먹이를 물어뜯는 놈인데 이 놈에게 한 번 물리면 손목이 잘려져 나가더라는 말을 왕년 들은 바 있다. 하여간 그 자그마한 동굴 안으로 그녀가 앞장 서서 지느러미 달린 발목과 다리를 움직이면서 전진한다. 그녀의 등과 다리로 작은 물방울들이 일어나 내 시야를 슬그머니 방해한다. 내 허리춤에 매달린 일곱 덩이 짐들은 짐덩이들 답게 이리 저리 흔들리면 서 잘 따라오고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따라온다기 보다는 거의 매달려 온다는 게 정확할 것이다. 이 놈들이 아직 의식이있는 지는 나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 얼마나 가야 되는 거냐고 고함을 치고 싶지만 물 속이라 할 수가 없다. 이 배추머리 아가씨는 흐느적 흐느적 헤엄을 잘도 치며 여유가 만만이지만 이쪽 인간들은 상당히 급하단 말이다! 화가 치밀어서 그 출렁이는 엉덩이 를 주먹으로 콱 찍었더니 그녀가 화들짝 놀라며 앞으로 확 앞서 가기 시작 했다. 이것 괜찮은 방법이다 생각해서 그녀의 엉덩이까지 또 접근해서 콱 주먹으로 내질러 주었다. 그러자 그녀도 맹렬하게 앞으로 돌진해 나간다. 이제야 속도가 붙는 군, 좋아, 좋아. 이 정도 속도만 유지하자구. 어느 정도 헤엄쳐 들어갔을까? 갑자기 그녀의 움직임이 거의 수직으로 바 뀌었다. 그녀는 지금 수면 위로 올라가고 있는 것이다. 이제 다 왔나 보다. 어느 정도 상승하자 빛이 보인다. 아무 것도 없이 오로지 그녀의 움직임만을 따라서 길고 어두운 동굴을 헤 엄쳐 왔던 터라 나는 기쁨에 가득찼다. 그녀는 은빛으로 빛나는 수면을 향 해 치솟아 올랐고 나도 그 뒤를 따라서 화끈하게 올라섰다. "푸하!" 그리고 순간 내 몸뚱이를 칭칭 감는 그물을 느끼고 재빨리 몸을 움추려 수 면 아래로 피신했다. "핫핫핫..잡혔다, 잡혔어!" "진짜로군, 이 근처에 인어가 있다고 하시더니 사실이었어!" 내 뒤에 주렁주렁 매달린 짐들이 서로 수면위로 올라가겠다고 아우성 치는 것을 억지로 찍어 누르고 나는 옆으로 슬금 슬금 이동했다. 바로 지금 수 면 위에 있는 것은 그물이었다. 그것도 상당히 잘 짜여진 것으로 일반 물 고기를 잡는 게 아니었다. "살려줘어! 쿠베린!" 몸부림 치는 배추머리의 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냉정하게 일곱덩이의 짐들을 데리고 바위 틈 사이의 수면으로 부상했 다. 그리고 내 짐덩이들도 일제히 켁켁 거리면서 수면으로 부상했다. 그 중 몇몇은 의식을 잃고 있었지만 그 놈들의 숨을 일깨울 여가가 없어 나는 일 단 허리에 매달린 끈을 끊고 전방을 주시했다. 우리가 올라온 것은 둥근 연못처럼 보이는 웅덩이였다. 그 웅덩이가 바다로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마 다른 놈들- 저기 있는 해적 놈들도 익히 아는 일이었던 모양이다. 그들 네 명의 해적 놈들은 그물을 치고 이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주변은 마치 동굴처럼 지붕이 있고 어두웠다. 희미한 달빛이 이 연못을 비추고 있긴 했지만 기괴하게 일 그러진 이런 저런 천연의 돌기둥들이 주변을 적절히 가려주고 있는 차였 다. 녀석들은 우리들을 발견하진 못하고 그물에 걸려든 인어를 건져 올리 는 데에 열중하고 있었다. 배추머리의 아가씨는 버둥 버둥 거리면서 살려달라고 소리치고 있었지만 그물은 점점 그녀의 몸을 조이고 있었다. 그도 당연할 것이 저 그물은 보 통 그물이 아니다. 저 그물은 바로 인어족을 잡기위해 특별히 만들어진 그 물로, 소문이긴 하지만 저 그물로 고래까지 잡는다고 하는 그 그물이다. 굵 기가 거의 한 뼘이나 되는데 그 한 뼘이나 되는 굵은 그물코 안에 가늘고 질긴 낚시줄에나 쓰는 그물이 또 있다. 그래서 몸부림치면 칠수록 더더욱 얽히고 인어족의 가느다란 지느러미가 갈기 갈기 찢어지게 된다. "살려줘요!" 배추머리 라리엘의 울음소리가 점점 고통에 겨운 것이 되어 가는 동안 나 는 내 일곱덩이 짐들이 전부 올라 왔는지 확인했다. "인어는 전부 예쁘다고 하는데 그거 거짓말 아냐?" "아직 어린 새끼야." "쳇...어딘가 성숙한 인어가 있지않을까?" "아냐, 이 것만으로도 꽤 가격이 나가." "그 보다 소두목에게 바치지 않으면 안돼." "아아..진짜 소두목은 왜그렇게 여자를 밝히는 거야?" 녀석들이 저마다 한 두마디씩을 던지고 있는 그 때에 나는 소리 없이 녀석 들의 뒤로 다가갔다. 적절하게 문득 뭍으로 겨우 올라와 파김치가 되어 있 는 내 일곱덩이 짐들중에 하나가 돌멩이를 던져 소리를 냈다. 풍덩 하는 소리에 고개를 갸웃하던 녀석이 허리를 들고 일어서려는 순간 나는 그 놈의 목을 댕강 잘라냈다. 소리도 없고 당연한 일이지만 비명소리도 없었다. 그저 좌아아악 하고 피분수가 올랐고 그 다음에는 옆에 있던 놈이 놀라 고 개를 돌리고 그 다음에는 그 옆의 놈이 심장이 꿰뚫렸다. 그리고 나서야 비명 소리가 울렸다. "에에에에.." 그 비명소리가 다 터져 나오기도 전에 나는 그 놈의 아구창을 박살 내고 오른 손을 들어 그 놈의 갈비뼈를 쥐어 뜯어 내 주었다. 녀석이 썩은 토막 처럼 고꾸라 지자 옆에 앉아서 그물을 쥐고 있던 마지막 놈은 앉은 그 자 리로 굳어져서 입을 저억 벌린 채 완전히 넋을 잃었다. "너, 운이 좋았다." 나는 시익 웃으면서 그 놈에게 손톱에 아직도 매어달린 심장 조각을 흔들 어 보이며 말해주었다. "너는 그물을 풀어서 꼬마를 풀어주는 거야." "에...." 녀석은 새파랗다 못해 시꺼매진 얼굴로 그물을 황급히 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서 엉금 엉금 기어서 일곱덩이의 짐들이 기어 나왔다. 얼굴은 전부 새하얗지만 적어도 죽진 않았다. "쿠베린..아파.." 잉잉 거리는 인어를 그물에서 꺼내서 막 등에 매달고나서 버벅 거리면서 핏속에 앉아 있는 녀석에게 나는 점잖게 물었다. "어디에 네 놈 본거지가 있냐?" "........에.." "말 하지 않으면 그 쓸모 없는 모가지를 댕겅 잘라줄게." "아, 아뇨! 밖에 있습니다!" "밖에 있는 줄을 누가 몰라? 밖의 어디?" "저...섬 중앙에 ....중앙부에 있습니다아아!" 녀석이 바짝 바닥에 엎드려서 잉잉 울기 시작했다. 오줌을 지린 그 놈을 쿡쿡 밟다가 문득 생각나서 나는 그물을 들어서 녀석을 칭칭 감아 주었다. "이 놈을 죽여야 하지 않아?" 문득 일곱 덩이 중 하나가 내게 헥헥 거리며 물었다. "내가 잡았지, 네가 잡았냐?" 내가 가볍게 대꾸하자 녀석은 입을 다물었다. 라리엘은 잉잉 거리다 말고 갑자기 눈을 빛내면서 말했다. "그물로 칭칭 감아서 물 속에 쳐넣어!" 그 말이나 그 말이나 똑같은 말이기에 나는 무시하고 그 녀석이 질질 싸서 흘린 오줌 묻은 바지를 부욱 찢어서 녀석 아가리에 넣어 주었다. 그리곤 애벌레 형상의 녀석을 한 구석에 집어던져 주고는 유유히 손을 털었다. "가자." 동굴 밖으로 나오니 밖은 환했다. 수풀이 제법 우거진 섬의 풍경은 그런대로 살만한 곳이란 느낌이 들었다. 왕년 해적들이 본거지로 삼았다고 하는 이 섬은 중앙에 분지가 있고 사방 은 잘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다. 요즘들어 해적들의 하는 짓거리가 점점 대 형화 추세에 있다고 하는 것도 어쩌면 이런 요새가 있기 때문일런지도 모 른다. 그런데 그건 그렇고 어째 우리가 분명 미끼였다고는 해도 이런 식으 로 박살 난 이후 우릴 찾아오는 강아지새끼 한 마리 없다는 것은 작전이 실패했다는 거 아냐? 내가 그렇게 말하자 옆에 있던 잘난 척하는 대머리가 말했다. "어쩌면 우리가 동쪽 해안가에 밀려 와 있었기 때문에 격전을 벌인 곳에서 상당히 떨어져 있었을 수도 있어." "그래, 우리들의 바로 뒤에는 네 척이나 되는 배가 있었다구." 녀석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하는 동안 나의 예리하고도 맑은 두 눈은 작으 나마 푸른 숲에 둘러 쌓인 마을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제 해가 뜨면 확실히 눈에 보이겠지만 아직은 주변이 밝지 않았다. "우리 말이야.." 한 녀석이 조심스레 말했다. "우리 여덟으로 설마하니 해적의 본거지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겠지?" "설마.." 한 녀석이 웃음을 짓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입을 다물었다. "우, 우리는 겨우 여덟밖에 안되는데 저 해적의 소굴에 들어가서 뭘 어쩔 건데?" 더듬 거리며 묻는 녀석들의 질문을 들으며 나는 코웃음을 쳐주었다. "푸하하하하..바보 같은 녀석들, 너희들은 이곳에 왜 왔지?" "그, 그야..해적을 소탕하러..그게 계약이었지만.." 나는 점잖게 고개를 흔들고 손가락을 흔들어 주었다. "바보 같은 소리 마. 우리들은, 아니 이 몸께선 해적을 소탕하러 온 게 아 니고 해적의 보물을 소탕하러 온 것이다!" KUBERIN 우연히 아주 우연히 발부리에 걷어차인 돌멩이가 물 속에 빠지면 파문이 생겨나는 것은 필연이다 7 바람이 불고 있었다. 소금기를 띈 축축한 바다의 바람이 섬 중앙에 위치한 마을까지 덮는 것을 보아 어쩌면 비가 올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밤의 여신이 장식한 자잘한 뱃 꾼들의 영혼들은 아직도 그녀의 끝자락에 아슬 아슬하게 매달려 있다. 섬 안의 작은 짐승들이 나의 기척에 숨죽이고 있는 것을 관대한 마음으로 나 는 지켜 보고 있었다. 녀석들을 내버려두고 수풀을 기어서 오는 동안 이런 저런 생각이 났다. 나는 왜 새삼 보물에 집착하는 것일까? 보물이란 뭐냐? 단지 반짝이는 물건인가? 아니면 다른 이들의 부러움을 받는 힘을 가진 물 건인가, 아니면...나에게 의미가 있는 물건인가. 저벅거리고 두 명의 사내들이 내 앞을 지나갔다. 나는 나뭇가지 위에 올라 앉아서 그들을 굽어 보다가 다시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그 멋지다는 보물을 가지고 싶다가도 그 다음에는 그다지 가지고 싶어지지 않는다. 세상에 밤의 여신의 옷자락에 매어 달린 것들만큼 아름 다운 보석은 없고 아름다운 여자의 몸만큼 영향력 있는 물건은 없다. 그런 데 왜 수많은 존재들이 귀한 것, 보물을 찾아 언제나 헤메이는 것일까. 왜 갖고 싶어할까? 보석은 먹을 수도 입을 수도 없다. 그러나 분명히 그것을 바꾸어서 드워프나 엘프의 물건을 얻을 수는 있겠지. 단지 그것 때문에 보 물을 가지고 싶은 것일까? 나는 나 자신의 즐거움 때문에 보물을 찾는다. 보물을 지키고 있는 무수한 모험과 내 몸의 피를 끓게 하는 것 때문에 보물을 찾는다. 아름다운 것을 들여다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에 찾는다. 그렇지만 끝나지 않는 파티는 없다. 모든 것은 해가 지고 별이 지듯 사라 지는 것, 밤의 여신이 언제나 하늘을 덮고 있을 수는 없는 것. 아직 오렌지 빛을 띄운 햇빛이 내 그림자를 바닥에 그려놓는다..... 잠깐, 잠깐! 여기서 감상에 빠져 있다가 되는 일은 하나도 없지! 정신을 차리고 할 짓을 하자구! 여기서 그림자나 감상하면서 사라져 가는 별빛이나 세며 시인을 연출할 생 각은 조금도 없지, 내가 지금 여기 있는 이유는 그 지긋 지긋한 출렁이를 타고 버틴 시간이 아까워서 그렇다! 당연히 당연히 나는 한아름 아름다운 보물을 안아야 한단 말이다! 내가 지금 나무 위에서 주시하고 있는 것은, 이 놈의 해적섬에 어울리지 않는 3층의 건물이었다. 왜 이 건물을 주시하고 있느냐 하면, 이 저택이 중 앙부를 차지하고 있는 집들 중에서 가장 호화롭고 크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 단계 다른 것은 보통 섬마을에서나 볼 수 있는 다른 집들과 달리 사방에 울타리를 치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마치 시가지에서나 보 던 것 같은 멀쩡한 건물로 방이 아무래도 열 댓개 정도 되는 것처럼 보이 는 규모, 게다가 그 옆에 창고는 세 개가량 있다. 이 정도라면 웬만한 부호 집정도는 될 듯도 싶다. 그러나 저러나 해적섬 안에 이런 부호나 살고 있 음직한 저택이라니 도무지 어울리질 않는다. "잠깐! 넌 누구냐!" 갑자기 어떤 녀석이 외쳤다. 내가 아래를 내려다 보니 허약하게 생긴 꼬마가 날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 다. 이 놈이 사람을 부르거나 하면 귀찮으니 죽여버리자하고 나 역시 녀석을 물끄러미 보고 있는데 이 녀석이 별로 사람을 부르려는 기색도 없이 태연 히 날 바라보고만 있다. 어쩌면 이 놈도 내가 너무 태연자약하게 앉아 있었던 탓인지라 날 얕보고 있는 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 아름다운 미소년의 자태로 윗도리도 벗은 채 맨발로 나뭇가지 위에 앉아 있었으니까 어찌보면 그다지 심각한 분위기로는 느껴지지 않았 는지도 모른다. 가엾기도 하지. 인간들이란 너무나 어리석다. 상대가 자신보다 작다, 어리다 등등을 느끼면 느긋하고 헛점투성이의 태도 를 취하며 오만하게 군다. 이빨 가진 짐승이라면 어느 짐승이든 맹수를 알 아보는 셈인데도 말이다. 뭐, 하는 수 없지, 인간에게 많은 것을 바라지 말 자고 나는 오래전부터 생각해왔지. 끌끌. 가만 서 있던 녀석은 입도 열지 않고 내가 앉아 있는 나뭇가지 앞으로 천 천히 걸어와 날 올려다 보았다. 녀석의 얼굴을 보아 하니 아직 어리다. 어라, 생각보다 곱상한 얼굴인걸? 나이는 고작해야 열 여섯 일곱밖에는 안되어 보인다. 흰 얼굴은 도무지 해 적이라고는 믿어지지않는 얼굴, 게다가 걸친 옷은 해적들이 흔히 하는 차 림새가 아니라 반듯한 튜닉차림에 신발은 장화를 신고 있었다! 장화! 장화라! 자, 여기서 나는 잠시 장화라는 물건에 대해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 뱃사람들이 장화를 신는 경우란 존재하지 않는다. 뱃꾼들이란 맨발로 걷고 맨발로 일하고 맨발로 뛰어 다니며 맨발로 싸우는 자들이다. 왜냐면 바닷 물에 미끌어지기 쉽기때문이고 무엇보다 습기가 많은 바닷가에서 가죽을 두른 장화따윌 신었다가는 아마 한 달이 지나기도 전에 발바닥에 곰팡이가 피고 버섯이 솟아 날 것이다. 너무나 당연하겠지만 나는 연약해 빠진 허여 멀건한 발바닥을 가진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굳이 신발을 신고 돌아다닐 이유를 찾지 못해서 겨울이 아니고선 보통 맨발이다. 엘리야와 같은 항구 에 사는 다른 자들도 뱃꾼은 아니지만 배를 탈 경우라면 다 맨발이다. 물 론 땅위를 걸을 때는 적당히 가죽을 댄 헝겊 샌들을 신지만 말이다. 그런데 지금 이 섬에서, 바다로 둘러싸인 이 섬에서 장화를 신고 있는 해 적을 나는 만난 것이다. 그것도 얼굴이 하얀 해적을 말이다! "너, 여기서 뭘 하는 거냐?" 녀석은 날 빤히 보며 웃기까지 한다. 왠지 웃는 모습이 해적들과 엄청난 차이가 보인다. 게다가..이가 희다! 손가락은 가늘고 마디가 거의 없다시피 하다! "넌 누구냐?" 내가 묻자 녀석은 고개를 갸웃했다. "어디서 사는 애니? 아무리 보아도 여기 애 같이 보이지는 않는데." 고개 갸웃? 고개 갸웃? 그것이 해적이 할 태도냐? 해적이란 모름지기 우락 부락하며 와락 와락한 천둥벌거숭이같은 면이 있어야 한단 말이다. 생긋 생긋, 고개 갸웃 갸웃따 위는 해적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이건 엘프가 수염을 기르고 드워프가 맨들맨들한 턱을 가지고 있는 거나 다름없잖아? 왜 해적섬에서 해적과 같이 있는 해적의 꼬마가 해적같이 보이질 않는 거 냐구! 게, 게다가 이 녀석은! 나는 머리를 잠시 짚었다. "어디서 온 건지 잘은 몰라도 여기 있으면 위험할 지도 몰라. 다른 사람들 이 보기 전에 가는 게 어떠니?" 녀석이 한 발자국 다가오면서 나무에 손을 얹었다. 새벽 햇빛 아래 드러난 그 희고 둥근 얼굴은 찰랑이는 다갈색머리와 함께 분명히 어디선가... "피시어스전하!" 갑자기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갈색 머리 녀석이 황급히 고개를 돌리자 그 자리에는 머리를 틀어올린 여 자라고 부르기에 민망한 사나와 보이는 아.줌.마.가 눈꼬리를 치켜 올리면 서 살벌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드레스는 아무리 봐도 해적들의 아 낙네가 입는 옷으로는 보이지않았다. "이런 곳에 혼자 계시면 위험하다고 몇번이나 말씀드렸나요! 어서 안으로 들어가세요!" "하, 하지만 그저 산책을.." 갈색 머리가 우물 거리자 찢어진 눈초리의 뱁새같은 눈을 한 아줌마는 더 사납게 말했다. "만약에 미천한 것들이 전하를 해하기라도 한다면 어쩌려고 하십니까!" "하지만...." 갈색머리 녀석이 내가 있던 나뭇가지를 슬그머니 올려다 본다. 어이 어이, 이 맹꽁아, 거기에 내가 그대로 올라 가 있을 줄 알았냐? 녀석은 내가 없자 안도의 한숨을 내 쉰다음 아줌마의 무시 무시한 눈초리 를 채찍처럼 맞아가면서 걸음을 옮겼다. "어서 들어가세요! 새벽부터 왜 이러십니까?" "하지만 이제 해도 뜨고...그렇게 위험하진 않을 거 같은데!" "전하께서 이 곳에 계시는 이유를 잊으신건 아니겠지요?" 아줌마의 말에 녀석이 움찔 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숙이 고 걷기 시작했다. 녀석이 들어간 곳은 내가 아까부터 들여다 보면서 들어갈까 말까 망설이고 있던 건물이었다. 건물이라 부를려면 그래도 최저 3층은 되어야 한다. 그리 고 해적 소굴에 3층의 저택(?)이라면 이건 장난이 아니다. 녀석은 그 저택 으로 들어갔고 그 녀석의 뒤를 따라 아줌마가 궁시렁 거리면서 따라 들어 갔다. 그리고 나 역시 따라 들어갔다. 바닥을 기는 것은 나의 취항은 아니기에 나는 나무에서 나무로 건너뛰었 다. 그런데 건물 가까이에 오니 나무가 없다. 방법이 없어서 결국은 나뭇가 지를 휘어서 재빨리 저택의 귀퉁이로 뛰어 숨었다. 새벽이라 역시 돌아 다 니는 놈들은 거의 없다. 어쩔까? 그냥 창문으로 뛰어 올라가 볼까? 그런데 갑자기 녀석이 들어가며 닫혔던 현관문이 살짝 열린다. 그리고는 빼꼼히 고개를 내민 꼬마 놈이 두리번거리더니 계단 옆 구석에 선 날 바라보았다. "얘, 저기.." 녀석의 바로 앞에 얼굴을 불쑥 내밀자 녀석은 놀라서 뒤로 한 걸음 물러섰 다. 그리고는 히죽 웃고는 조심스레 말했다. "드, 들어올래?" 안은 밖과 마찬가지로 전혀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였다. 해적섬과 해적과 이 저택은 물과 기름처럼 어울리지 않고 시인 드워프나 대장장이 엘프만큼이나 어울리지 않고 오크의 공주님처럼 어울리지 않는 다. 대체 왜 해적섬 한가운데 테피스트리와 카펫으로 장식되고 기사의 갑 옷과 우아한 린넨으로 장식된 저택이 있냐고! 거기에 해적섬과 어울리지도 않게 칠보 항아리와 우란꽃이 장식되어 향기 를 뿜어내고 있는 거야? 이거 해적섬 맞아? "전하, 아침을..." 내가 태피스트리 뒤에 숨는 사이에 시녀같이 생긴 여자가 꼬마에게 말하고 있었다. "오늘 아침은 뭔데?" "치즈를 얹은 호밀빵과 꿀, 야채 스프, 그리고 훈제 돼지고기입니다만?" 시녀같이 생긴 여자가 상냥하게 대꾸했다. 내가 침을 삼킬 때 꼬마가 고개 를 끄덕였다. "와아, 맛있겠는데! 오늘은 2인분을 내 방으로 가져다 줄테야?" 시녀같이 생긴 여자는 눈을 크게 떴다. "2인분이나요?" "응, 오늘은 아침 산책을 했더니 배가 고파, 부탁해." "그렇게 하지요, 전하. 식사를 잘 하시는 것은 아주 좋은 일이네요." 시녀같이 생긴 여자는 방그레 웃으면서 몸을 돌렸다. 그녀가 사라지자 마자 꼬맹이는 태피스트리를 들쳐 올리고 내게 속삭였다. "2층이 내 방이야, 얼른 따라와!" 배가 고팠기 때문에 나는 그 뒤를 따라 올라갔다. 이 꼬맹이는 내가 자기 또래인줄 아는 건지 내 손목을 잡고 바삐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계단..이 놈의 계단은 마치 귀족집 계단처럼 미끈한 단목으로 되어 있었다!! 위로 올라가자 복도 안쪽으로 녀석의 방이 있었다. 몇 개의 방이 있었지만 기척이 전혀 들리지 않았다. 어쩌면 비어 있는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이상하다를 되뇌였다. 어찌되었든 방으로 들어가자 마자 녀석은 안도의 숨을 내 쉬었다. 그리고는 창가에 다가가 커튼을 치고- 커튼! 커튼이라니!- 린넨으로 장식 된 침대위에 걸터앉았다. 나는 그 린넨의 침대 보에 장미의 수가 놓여진 것을 유심히 바라보며 꼬맹이를 다시 바라보았다. 벽에 걸린 초상화는 귀족적인 매부리코를 자랑하는 듯 뻐기는 얼굴을 하고 있는 중년의 사내 얼굴로 군청색의 튜닉과 금목걸이를 자랑스레 하고 버티 고 선 그림이었다. 아마도 화가가 신경깨나 썼음직한 그 몰골을 보다가 나 는 꼬맹이를 다시 돌아보았다. "너는 어디서 왔어? 아래 마을?" "아니면 혹시 잡혀온 애니?" "아니면...누구의 하인이나.." "닥쳐라. 꼬마." 내가 짧게 꼬마의 횡수를 막자 녀석의 눈이 커졌다. 그러더니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화를 낸다. "지금 누구에게 감히..." "감히? 그 감히라는 말은 이 몸께서 쓸 말이다. 이 몸께서는 잘나고 잘난 쿠베린님이라 하시는 분으로 지상최고의 강자이시다. 감히 인간의 어린꼬 마가 잘난 척하고 나설 분이 아니야, 알아 듣냐?" 녀석은 눈을 크게 뜨고 날 바라본다.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내가 여기 왜 왔는가 하는 것은 네가 알바가 아니고 알 자격도 없다. 네 가 여기서 할 일이란 이 몸에게 이 빌어 먹을 곳이 어떻게 생겨 먹었느냐 를 설명하기만 하면 된다, 알았나?" "에...." 녀석은 멍청한 얼굴로 있더니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푸하하..너 정말 재미있는 애구나!" 나는 팔짱을 끼고 녀석이 킬킬 거리면서 침대에 얼굴을 묻는 것을 바라보 고 있었다. "내 이름은..." "네 이름은 필시 피시어스겠지, 델리암 왕족의 왕자중 하나로 아마도 시든 오이의 사촌쯤 되리라 생각한다. 안그래?" 내 말에 녀석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는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 "간단무쌍한 일이지, 이 몸께선 한 눈에 간파하셨다. 그보다 내가 더 궁금 한 것은 너를 이곳으로 데려온 녀석이 누군가 하는 거야. 왜 이런 곳에 처 박혀서 해적들을 가지고 약탈이나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정말 짜증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녀석은 입을 열지 못하고 멍청히 날 바라본다. 나는 폭신한 린넨 베개를 움켜쥐며 나 스스로의 추리에 만족했다. 델리암이 망할 즈음 해서 어떤 잘난 척하는 녀석이 재물과 자기 병사들을 데리고 탈출하여 이런 곳에서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거 같다. 그리고 어쩌면 이 정도 규모라면 잘하면 해상왕국이라도 꾸밀 수 있 을런지도, 아니면 충분한 자금력을 모아서 지금 룬드바르인지 구크바르인 지에게 대항하고 있는 자들과 합세하기 위한 용병을 사려고 하는 지도 모 른다. 이야, 이야, 한 번에 좌라락 추리하는 나의 이 놀라운 실력. 뭐, 물론 이 자식이 지긋 지긋하게 미트라를 닮지 않았다면 이렇게 금방 알아채지 못했을지도. 꼬맹이는 내 말에 파랗게 질린 상태로 멍하니 있다가 벌떡 일어섰다. 갑자 기 녀석의 눈에 노기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룬드바르의 첩자냐!" 파르르 떨면서 칼도 없는 허리춤을 더듬는 녀석의 얼굴을 향해서 나는 쥐 고 있던 린넨 베개를 집어던져 주었다. "너 멍청이냐? 이 잘난 분께서 룬드바르인지 군드바르인지 그 얼간이들과 연관 있을리가 없잖아?" "그, 그럼.." 녀석이 겨우 베개로 맞은 주제에 비틀 비틀 거리면서 이마를 쥔 채 날 바 라보았다. 그리고 그때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나는 잽싸게 침대 위로 드러누워 이불을 덮어 썼다. 문 소리와 함께 시녀가 쟁반을 들고 들어선 것은 내가 막 이불을 뒤집어 쓴 직후였다. "맛있게 드세요. 전하..." "아..응.." 녀석이 뭐라 입을 열려는 순간 나는 손톱 하나를 꺼내서 녀석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녀석의 몸이 굳었다. 시녀는 쟁반만 놔두고 나갔다. 나가려는 시녀를 향해 움직이려는 녀석의 옷자락을 손톱으로 지긋이 눌러 버린 나는 미소를 지으면서 침대에서 일어났다. 따끈한 빵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너,,,너.." 파랗게 질린 꼬맹이가 내 솟아난 손톱을 보고 기절할 듯 놀라는 동안, "입다물고 있어. 이 몸이 식사를 하셔야 하니까." 나는 웃으면서 아귀 아귀 먹기 시작했다. KUBERIN 우연히 아주 우연히 발부리에 걷어차인 돌멩이가 물 속에 빠지면 파문이 생겨나는 것은 필연이다 8 약간 모자랐지만 방법이 없다. 나중에 주방가서 먹어봐야지. 나는 긴장한 채 굳어진 녀석의 면상을 보며 물었다. "그래, 미트라랑 헤어진 지는 얼마나 되었지?" "억? 엘란트라 누나를 알아?" 녀석은 놀란 얼굴로 움찔 거렸다. "알고 말고, 그런데 네 놈을 데려온 것은 대체 누구야? " "......." 녀석은 옹골차게 입을 다문다. 이 놈을 어떻게 요리할까 생각하다 말고 굳 이 이 놈과 마주앉아서 내가 귀찮음을 자청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이 놈을 데려와 이런 저런 일을 생각하고 꾸미는 놈의 정체를 알아서 내가 뭘 할건가? 인간들의 쫀쫀한 일 따위 내 알 바가 아니잖아? 그저 나 는 반짝 반짝 빛나는 아름다운 보물만 가지면 충분하단 말이다. 그리하여 나는 콧노래를 부르면서 녀석에게 다가갔다. "에..뭐, 뭐야.." 움찔거리는 녀석의 등덜미를 누르고 녀석의 옷가지를 홀라당 벗긴 뒤에 녀 석을 둘둘 묶어 침대 안에 집어 넣었다. 그리고는 젖고 털면 허옇게 소금 이 드러나는 짭짤한 내 옷대신 이 놈 옷을 걸쳤다. 역시 뽀송해서 기분이 좋구만. 녀석은 허연 엉덩이를 드러낸 채 나에게 항의와 분노의 시선을 던 졌지만 항의와 분노의 시선따위야 받아봐야 아프지도 않다. 룰루 랄라 하면서 녀석을 침대에 쑤셔 넣고 이불을 상냥하게 덮어준 뒤에 나는 녀석에게 친절하게도 충고해 주었다. "꼬맹아, 원래 낯선 자를 집안으로 함부로 끌어들이는 게 아니란다." 녀석이 신음을 터뜨리는 순간 나는 빈그릇을 들고 살짝 밖으로 나가 문 밖 에 내려놓았다. 빈 쟁반을 가지러 시녀가 오긴 오겠지, 그리고 그 다음이야 알 바가 아니어요, 아니지요. 다시 복도로 나가서 재빨리 다른 방 문을 열어 보았다. 비어있었다. 물론 잘 장식된 장식품들은 많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멋진 보물이 있 는 것은 아니다. 모름지기 보물이란, 보석과 아름다운 유리로 장식된 금관 이나 은관, 혹은 금덩이 상자나 은덩이 상자, 혹은 아리따운 여성을 새긴 매혹적인 백옥상이나 에메랄드, 루비같은 것들을 보물이라 부르는 것이다. 인간들이 멋져라를 외쳐대는 별 볼일 없는 그림이나 꽃병따위는 대체 뭐에 쓴단 말이냐? 방안 여기 저기엔 칠보로 장식된 대형 꽃병이나 비단으로 짠 듯한 태피스 트리, 혹은 양면이 다 근사하게 비치는 황금수로 놓은 고양이나 잉어 따위 가 놓여져 있긴 했지만 내 수준에 미치는 것은 전혀 없었다. 내가 무척 슬퍼하고 있는 동안 여기 저기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기 시작 했다. "침입자다!" "침입자!" 나, 들킨 건가?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아니, 편안한 안락의자에 앉아서 나는 생각해 보았 다. 내가 지금 들킨 건가? 그럼 이 자리에서 내가 도망을 쳐야 되는 건가? 그러나 발자국 소리는 바삐 움직이긴 했지만 내가 기품 있게 앉아 있는 곳 으로는 다가오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나는 우아하게 앉아서 방안에 놓인 수많은 물건들을 감상하다가 문득 생각난 것이 있어서 손톱 하나를 들어 보았다. 창문을 열자 밖이 무척 시끄럽다. 방책을 쌓아놓은 밖으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아니 와르르 달려가는 해적 다운 해적들이 보인다. 반 벌거숭이의 해적들은 손에 손에 무기를 바리 바 리 들고 악을 지르면서 한 쪽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 방향에 있을 놈들이 누군지 알 수는 없지만 그 쪽에 있을 녀석들에게 나는 애도의 뜻을 표하고 보물을 찾기로 굳게 굳게 결심했다. 다시 방을 나와 복도로 나왔을 때는 상 하 아래로 인적이 거의 없었다. 나는 유유히 계단을 올라 3층으로 향했다. 누구든지 말한다. 가장 사나운 맹수는 맨 꼭대기에 도사리고 있고 가장 사악한 마법사는 맨 꼭대기에서 웅크리고 있으며 가장 아름다운 공주님은 맨 꼭대기에 갇혀있 는 법이라고. 그러니 가장 그럴 듯한 보물도 역시 맨 꼭대기 아니면 맨 아 래 지하창고쯤에 있겠지. 아아, 세상은 이상하게도 너무나 뻔하다니까. 계단을 올라가는 동안 맞은 편에서 어떤 시녀와 마주쳤다. 시녀는 나를 보고 흘깃 스쳐갔고 나는 미소로 답해 주었다. 그녀 역시 미소로 나를 스쳐 갔는데 그녀는 내가 누군지 알지도 못하면서 별로 경계심을 갖지 않았다. 아아, 내가 왜 이렇게 절세미소년의 모습을 하 고 있는지 궁금해 하는 모든 사내놈들에게 알려주고 싶군. "저어, 너, 누구니?" 막 스쳐가던 시녀가 나에게 물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수줍게 말했다. "저어, 전 메어리의 동생이어요." "아, 그랬구나...하지만 메어리는 이 층엔 없는데." "어? 그럼 몇 층에 있나요? 3층에 있을거라고 다들 말하던데."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래? 이상하네, 나, 3층의 주인님 방에 갔다 온 건데." "그럼, 메어리는 어디 있을까요?" 내가 고개를 귀엽게 갸우뚱하자 그녀는 미소해 주었다. "아아, 나도 잘 모르겠다. 남들이 그렇다면 그렇겠지 뭐, 가보렴." "네, 그런데 주인님 방이 어느 쪽이죠?" "복도 가장 끝의 왼쪽이란다." "감사해요, 누님." 내가 싱긋 웃자 그녀도 웃었다. 그녀와 나는 친근하고 상냥하게 헤어졌다. 그리고 나는 유유히 주인님의 방이라는 복도 끝 방까지 걸어갔다. 복도에는 두 명의 덩치가 서 있다가 날 발견하고는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리고는 살벌한 눈빛을 감히 던지며 비계덩이처럼 생긴 두 주먹을 나에게 휘둘러 댔다. 그런 무례함에 답하여 나는 우아한 손톱을 들어 그 두 놈들 의 목을 댕강 댕강 잘라 주었다. 목이 대구르르 구를 즈음 나는 손을 털고 바닥에 흩어진 피와 머리통에 애 도를 표하면서 조용히 문을 열었다. 문은 금으로 장식된, 역시 해적섬에는 어울리지 않는 문이었다. 그렇지만 금으로 장식되든 은으로 장식되든 문은 문이다. 문이란 열어야만 가치가 있는 법.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책상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저, 잘난 척하는 에메스 녀석의 성에 있을 법한 거대한 백목의 책상을 여 기서도 볼 수있을 줄은 나도 몰랐다. 그리고 그 책상에는 에메랄드의 인어 상이 아리땁게 놓여 있었고 그 앞에는 왠 주먹만해 보이는 주석과 루비로 장식된 반지가 놓여 있었다. 물론, 그 물건들 이외에도 책상 앞에 앉아 있 는 인간도 있긴 있다. 문득 내가 녀석을 빤히바라보고 있자, 책상에 앉아서 뭔가를 쓰고 있던 녀석이 고개를 들었다. "넌 뭐냐?" 녀석은 긴장도 하지않고 날 빤히 바라보았고 나 역시 어처구니가 없어서 팔짱을 끼고 녀석을 빤히 바라보았다. 강팍해 보이는 매부리코를 가진 녀석, 오십 여세 가량 되어 보이는 이 인 간은 숱이 적어 보이는 콧수염을 기르고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이런 얼 굴을 나는 왕년에 본 일이 있었지.. "아까 시킨 잉크를 가져온 거냐?" 녀석이 그렇게 묻다가 갑자기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녀석의 눈이 천천히 커지더니 낮은 신음소리가 녀석의 입술에서 새 어 나왔다. "넌..쿠베린...." "헤에, 날 알고 있나?" "알고 있지....네가 왕녀 엘란트라를 빼돌렸다는 소문을 들었었지만..." 그는 들여다 보고 있던 양피지에 손을 대고는 나를 정시했다. "어떻게 네가 여기 있는 거지? 네 근거지는 엘리야로 알고 있는데?" "나야 말로 네가 어떻게 나에 대해 알고 있는지, 그리고 네가 왜 여기 있 는지 궁금한 걸." "변함없이 무례한 놈이군." 녀석이 쓴웃음을 짓더니 콧수염을 비틀어 보였다. 버릇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콧수염은 그런 버릇을 들이기 엔 지나치게 위험했다. 숱이 너무 적었던 것이다. "흠...이 곳에 네가 왔다는 것은...엘리야의 그 배신자 시장이 해적토벌대라 도 보낸 모양이지?" 머리가 잘 돌아가는 놈이다. "그럴 지도 모르지. 배신자는 아니지만." 내가 대꾸하자 녀석은 턱을 어루만지며 느긋하게 물었다. "자아, 어쩔 거냐? 여기서 너는 해적을 토벌할 거냐?" 나는 시익 웃었다. "당연하지." 녀석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 곳에 왕녀의 사촌동생인 피시어스왕자가 있어도?" "응." 나는 명랑하게 웃어 주었다. "넌 그녀의 애인이 아니었던가?" 그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애인이 될 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피시어스란 꼬마는 내 애인이 아니잖 아?" 내 말에 녀석, 왕년의 화이딘스대공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는 낮게 말했다. "거래하자." "뭐?" "나의 편지를 엘란트라왕녀에게, 아니, 네가 모시는 베델대공에게 전해라, 그러면 네가 바라는 대로 돈을 주겠다." 나는 묵묵히 녀석을 바라보다가 말고 조용히 녀석에게 되물었다. "내가 왜 거래를 해야하지?" "돈이 걸려 있으니까. 넌 용병이 아닌가?" 녀석이 뻔뻔하게 말했다. 그리고 나도 뻔뻔하게 녀석의 책상에 놓여진 에메랄드 인어상을 끌어안으 면서 말했다. "네가 안 줘도 난 가지는데?" 녀석의 눈이 커졌다. 그렇지만 녀석은 동요하지 않았다. "내가 바라는 것은 베델과의 협력이야, 그리고 넌 베델대공을 모시는 처지 이겠지?" 나는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내가 녀석이 마음을 바꾸어 에메스 빌어먹을 자식과 협력을 하든지 지지고 볶던지 나에겐 알 바가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이 에메랄드 인어상이 마음에 들었고 또한 이렇게 마음에 든 물건을 가질 힘도 있었으며 또한 더 많은 물건을 찾을 기운도 넘쳐흘렀다. 그래서 녀석이 뭐라 떠들든지 신경쓰지 않고 녀석의 눈앞에 놓인 책상을 벗어나 녀석의 방안 가득히 놓여진 책장을 훑어보다가 와르르 쏟았다. "뭐하는 거냐!" 녀석이 낮게 으르렁거리는 것을 들으면서 나는 손톱을 하나 꺼내 보였다. "네 보물이 어디있나 찾고 있어." "뭐라구? 이봐! " 그가 마침내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소리를 질러 봐야 밖에 선 두 명의 보디가드들은 이미 사망한 지 오래다. 그들의 머리통을 가지고 와서 도로 붙여봐야 붙지도 않는다. 나는 책장을 무너뜨리고서야 마침내 찾던 것을 찾았다. 바로, 비밀통로였다. "이 놈이!" 녀석이 칼을 들고 나에게 덤벼드는 것을 보고 나는 책 한 권을 들어 휘익 던져주었다. 녀석의 미간에 맞자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녀석이 좌악 뻗어 버렸다. 녀석의 미간에 길고도 벌겋게 1자가 쓰여졌다. 하긴, 양피지 장정본의 책이란 장난이 아니게 무거운 편이지, 책에 깔려 죽 을 수도 있다구. 이제서야 밖이 시끄러워 지기 시작한다. 시녀같은 여자의 비명 소리부터 시작해서 밖으로 발자국 소리가 어지러울 때 나는 시커멓게 입을 벌린 비밀 통로 안으로 발을 디뎠다. 그 왕년지긋 지긋한 미로처럼 이 곳도 돌계단으로 이루어진 끝이 안보이 는 통로로 시작되고 있었다. 정말 독창성이라곤 조금도 없다. 미로나, 비밀통로나 언제나 이렇게 구태의연한 장치인 거냐? KUBERIN 우연히 아주 우연히 발부리에 걷어차인 돌멩이가 물 속에 빠지면 파문이 생겨나는 것은 필연이다 9 찰랑 찰랑 물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어두운 통로를 걸으면서 코를 치켜 세웠다. 비릿한 바다 내음이 느껴진다. 게다가 물 소리와 물 냄새, 그리고 외부로 이어지는 바람의 기척도 느껴진다. 주변은 새까만 어둠 뿐, 횃불이 벽 여기 저기에 비치되어 있지만 그 것에 는 손을 대지 않았다. 나는 어둠을 두려워 하는 인간족이 아니다. 어둠이 내 피부에 찰삭 와 닿아 내 몸안의 뭔가를 깨울 때까지 나는 침착하게 걷 고 있었다. 발바닥에 느껴지는 것은 축축한 돌계단, 그리고 그 계단이 끝나 자 이어지는 것은 자연스레 만들어진 동굴처럼 느껴졌다. 이 동굴도 전에 봤던 그 동굴처럼 바다로 이어져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되었다. 소금내음과 비릿한 피냄새와 흡사한 갯내음이 느껴진다. 약간의 박쥐똥 냄 새도 난다. 곰팡이냄새와 해초가 썩는 냄새도 나고 있다. 그리고 약간은 따 스한 바람의 기척도 느껴졌다. 나는 두 눈을 천천히 떴다. 이미 어둠에 익숙해진 두 눈을 뜨자 색깔은 잘 구별할 수 없어도 주변의 실루엣정도는 파악이 가능했다. 여기는 자연스레 만들어진 해저 동굴의 일 부인 듯 했다. 이런 갯내음과 냄새가 나는 것은 아마도 아래쪽에 바다로 곧장 이어지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 바닥이 미끌 미끌했다. 축축한 해초가 군데 군데에서 썩어 가고 있다. 조개 같은 것들이 바삭 바삭 밟혔다. 썩어가는 해초 냄새는 어쩌면 밀물 때 이 통로도 물에 잠기기 때문인 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지금은 해가 중천에 떴을 때니까 바닷물이 이 근처까지 들어 오려면 상당히 시간이 걸릴 것이다. "이봐, 여길 보라니까." 그리고 인간의 소리도 들렸다. "이건 내 꺼야, 넌 손대지 말라구!" "이봐, 잡은 건 나야! 그러니까 내 꺼라구!" "또 있을 테니까 잡아오라고 했잖아!" 어라, 어라...이건 또 뭐야? 한 모퉁이를 돌아서자 빛이 보인다. 그리고 웬 놈들의 목소리도 들린다. 계단이 또 있다. 고개를 들고 쳐다 봐야 할 정도로 가파른 계단 위에서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두 놈인거 같다. 그 두 놈은 계단 꼭대기 위에서 대체 뭘 하고 있 는 것일까? 나는 에메랄드 인어상을 허리춤에 꼭 매고 잠시 후회했다. 아아, 나의 보물 보따리를 가지고 올걸.. 어두침침한 해저 동굴 안에서 징징 울리는 녀석들의 목소리는 상당히 추한 것이어서 나는 잠시 갈등했다. 이런 놈들을 굳이 신경써서 해치우고 갈 필 요가 있을까? 그래봐야 쓸모 없는 사내놈들이 아닌가. 저런 놈들은 틀림없 이 지나가는 보초나, 건달이나, 쓸모 없는 쫄다구임에 틀림없다. 그러니까 굳이 건드릴 필요조차 없을 거다. 그래서 나는 놈들을 무시하고 그저 계속 바깥 내음을 풍기는 방향으로 걷 기로 했다. 그러나, "놔줘요..제발..." 라고 아리따운 음성이 들리는 순간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그 목소리는 한 줄기 바람처럼 청량하고 고와서 순간적으로 나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 정도로 아름다운 목소리는 조인족의 셀레네 이후 처음이었 다. 게다가 이 목소리는 묘령의 아가씨의 목소리임이 분명했다. 그래서 나는 오랫동안 갈등하지 않았다. 미녀는 위험에 처해 있고 그런 미녀를 놔두고 가는 것은 수컷의 수치이며 치욕이다. 그래서 나는 걸음을 옮겨서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계단은 자주 올라 다니지 않았는지 미끌 미끌해서 발바닥을 잔뜩 오무려서 버티며 올라가야 했다. 거의 이백은 되는 긴 계단을 올라가자, 그 추한 놈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밝은 등불을 네 개나 달아 놓은 석벽은 오랫동안 기름등불을 사용해온 덕 으로 그을음이 가득 묻어 있다. 통로같이 생긴 세 개의 구멍이 뚫린 석벽 앞으로 둥근 연못이 있었다. 그 연못의 물은 거의 다 썩어서 냄새가 고약 했는데 그 앞에 두 놈이 서서 무언가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놈들은 그 자리에 어울리지 않게 화려한 옷차림으로 내 눈에는 지나치게 밝은 등불아 래서 금실 은실로 짜여진 옷을 걸쳐서 번쩍 번쩍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놔 주세요..." 피로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돌 바닥에 앉아 있었다. 정확히 말한다면 바위에 몸을 기대고 발은 그 썩어가는 연못에 담그고 있 었다. "안돼. 내 것이 되겠다고 맹세하면 또 모를까.." "인어의 맹세를 믿진 못해. 하지만 일단 내 여자가 되고 나면 어쩔 수 없 지." "내 말을 잘 듣는다면 좋은 곳으로 옮겨주겠다. 어때? 그 더러운 해초더미 에서 이젠 나오고 싶지 않아?" 음흉한 두 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불빛에 비춰진 두 놈의 얼굴을 보고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이건 또....두드러기 난 오크같은 얼굴과 말라 비틀어진 트롤과 같은 몰골을 한 두 놈이 아닌가. 그 두 놈은 음흉하게 번들거리는 눈빛을 번뜩이면서 나직하게 말하고 있었다. "어서 결정짓는 게 좋을 거야, 우리들은 다른 인어도 가지고 있다구. 이곳 에서 널 던져버릴 수도 있어." "차라리..던져라, 던져.. 아무려면 너희 같은 놈들과 놀 인어가 어디있다고 생각해?" 발끈한 여자가 소리를 질렀다. "거, 꽤 질기네. 네 애인이 죽어도 좋아?" "......" "네 애인은 이미 널 여기에 팔아 넘겼다구, 그 놈은 다시 오지 않아. 꼭 시 험해 보고 싶다면 그 놈을 불러다가 그 놈의 사지를 찢고 그 눈알을 네게 보여주랴?" "......흑.." 녀석들이 낄낄거린다. 나는 그 놈들의 뒤로 가서 조용히 섰다. 그리고 팔짱을 낀 상태로 이 한심한 것들을 바라보다가 혀를 찼다. "쯧쯧..." "누구냐?" "엣!" 놀란 두 놈이 화다닥 뒤를 돌아다 보았다. 나는 녀석들의 얼굴을 빤히 보고 그 놈들이 누군지 곧 깨달았다. "이봐, 너희들은 여전히 이 짓이냐?" "너, 넌 누구냐!" "넌, 여기 어떻게 왔어?" 녀석들이 놀라다 말고 갑자기 화를 내기 시작한다. 오크 놈이, 아니 오크같 은 놈이 칼을 빼어들더니 내 앞으로 흔들어 댔다. "이 놈! 네 놈이 감히 내 앞에서 이런 무례한 짓을!" "놀고 있네." 감히 내게 쇠꼬챙이를 들이대는 놈을 놔둘 수 없어서 나는 한 발자국 앞으 로 달려들어가 녀석의 턱을 올려쳤다. 캑 하고 놈이 큰 대자로 널부러지는 순간 옆에 있던 놈이 나에게 다시 칼을 휘둘렀다. 그런 놈의 칼을 챙 하고 손톱으로 잘 받아 준 뒤에 뒤이어서 정중하고도 정중하게 녀석의 팔뚝을 댕겅 잘라 주었다. "끼아아아악!" 녀석이 비명을 올리면서 뒤로 나자빠졌다. 그리고는 길게 길게 울부짖더니 오줌을 마구 싸기 시작했다. 물론, 아픈 것이야 이해하지만 조금 심하잖아? 피는 팔뚝에서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고 그 꼴을 보자 턱을 쥐고 있던 놈이 부러진 이빨을 내 뱉으면서 엉금 엉금 뒤로 물러서서 기어 도망가기 시작 했다. 또 이런 꼴을 보면 놔 둘 수가 없잖아? 도망가는 놈의 발을 잡아서 계단 아래로 휘익 집어 던졌다. "으아아아악!" 녀석의 찢어지는 듯한 비명 소리가 길게 길게 동굴안으로 퍼져나간 직후, 이백 여개는 되는 계단아래에서 뭔가 퍽 하는 터지는 소리가 난다. "으어, 으어..." 잘려진 팔뚝을 쥐고 있던 놈이 파랗게 질린 얼굴로 날 보곤 침을 질질 흘 리며 외쳤다. "나, 나는 대공의 아들인 쿠샨공자다! 나, 날, 해..해칠 수는 없어!" 나도 역시 정중하게 말해주었다. "나는 지상 최고의 왕 쿠베린이라고 한다. 인간 따위가 내 앞에서 잘난 척 을 하는 꼴은 못봐." 그리고 발버둥 치는 녀석을 가리키며 여자에게 물었다. "이 놈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던 연두색 머리의 아가씨가 날카롭게 외쳤다. "죽여버려욧!" 그래서 나는 그대로 했다. 냄새가 고약한 인어를 안고 나는 터벅 터벅 걷고 있었다. 인어는 오랫동안 갇혀있어서 허약해져 있었다. 꽤 오래 갇혀있었던 기색인 데 그녀의 얼굴은 허탈과 두려움, 그리고 안도감으로 무표정해 있었다. "언제부터 갇혀 있었냐?" "...보름 정도요.." "라리엘이 너 찾으러 왔던데 너 오랫동안 인간남자와 지낸 거 아냐?" "에? 라리엘을 알아요?" 그녀가 놀라 외쳤다. "알아, 알아. 조금 모자란 배추머리 아가씨지. 널 찾으러 여기까지 왔었지." "저런! 저런! 아아..." 그녀는 눈물을 떨구면서 내 목에 팔을 감았다. 아름다운 아가씨인 것은 사실인데 썩는 냄새가 진동을 하니 섬세한 내 코 가 배겨낼 수가 없다. 나는 얼굴을 찌푸리면서 물었다. "너, 조금 내게서 떨어질 수 없냐?" "냄새가 고약하죠?" 비로소 수줍은 얼굴이 된 인어는 미안한 듯 중얼거렸다. "물론 고약해, 썩은 해초냄새와 오물 냄새로 아주 고약하기 짝이 없어. 마 치 수천년간 묵은 박쥐똥 냄새같다." "심해욧! 나라고 이러고 싶어서 이런 게 아니라구요! 놈들이 자꾸 덮치니 까 그런 오물을 뒤집어 쓰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단 말에요!" "알았다. 알았어.." 변명하는 인어를 어깨에 들쳐 메고 나는 주욱 걸었다. 이 인어 아가씨는 해적의 한 청년과 사랑에 빠졌었다고 한다. 그리고 어느 날 이 아가씨가 해적청년과 노는 모습을 발견한 그 두 오크와 트롤놈이 청년을 위협해서 이 아가씨를 탈취했던 모양인데 이 아가씨로선 이 오크와 트롤과 지낸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굳게 거부 했댄다. "생각해 보세요! 어떤 인어라도 그런 놈들과 연애를 할 수는 없어욧!" 그녀가 결사적으로 말했다. "죽는 한이 있어도?" "당연하죠! 인어는 사랑에 죽고 사랑으로 사는 종족이라구욧! 그런 놈들과 미쳤어요?" 인어가 사랑으로 살고 사랑에 죽는다는 이야긴 첨 듣는다. 그러나 새삼 이 아가씨에게 뭐라고 한 마디 하면 더 시끄러워질 거 같아 나는 침묵했다. "그런데 라리엘은 어디 있어요?" "숨어 있어." "조심해야 할텐데...아아, 나도 이젠 지긋지긋해...인간이라면!" 그녀는 고개를 설레 설레 젓더니 나에게 살짝 물었다. "그런데..당신은 인간이 아니라고 했지요?" "그랬지." "구해주셔서 감사해요! 당신은 저의 은인이어요!" "그렇지." "뭘로 보답하면 될까요?" "뭐든지 보답해봐." 나는 그렇게 말하곤 어서 이 시끄럽고도 냄새나는 인어를 내려놓기 위해서 발걸음을 빨리 했다. 바로 앞이 바다인 듯 했던 것이다. 그리고 첨벙 하는 소리와 함께 나는 앞으로 고꾸라졌다. 켁, 짜다! 어두워서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아무래도 물을, 바다를 밟았나 보다. 물속으로 처박히는 순간 그녀가 활동을 개시했다. 그녀의 긴 팔이 내 팔을 잡아 끌더니 그 다음 부터는 힘차게 헤엄을 치기 시작했다. 바닷물은 차갑고 짜기가 이를 데 없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 가 움직이는 모습을 관찰했다. 출렁이는 커다란 흰 엉덩이가 내 눈앞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음, 역시 인어 는 움직이는 모습, 헤엄치는 모습이 가장 매력적이라니까. 일렁이는 연두빛 머리칼도 멋지게 물속에서 흐르고 있었다. 그녀의 몸에서 오물이 떨어져 나가자 내 눈앞에서 풍만한 가슴이 드러났다. 이야, 절경이다. 그리고 그녀는 내 팔을 이끌고 수면으로 천천히 오르기 시작했다. 더 가도 괜찮을 텐데 하고 나는 중얼거렸지만 그녀는 아쉽게도 수면으로 날 이끌고 부상했다. "푸하!" "괜찮아요?" "괜찮아." 햇빛이 쏟아지는 해면 위는 조용했다. 주변을 돌아보자 나는 해변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곳에 도착해 있었다. 그 러나 해변은 낯선 곳으로 전에 우리들이 헤매던 곳이 아니라 잔잔한 수면 과 함께 수 척의 배가 정박해 있는 그런 모습이었다. 배들 중에 두 척은 약간 그을려 있었는데 모두 제법 큰 범선이었다. 그리고 그 주변으로 내가 전에 봤었던 그 길죽한 모양새의 해적선들이 수십척 도열해 있었다. 그리 고 그 몇 척은 주변을 순시하듯이 돌아다니고 있는 중이었다. 해변에 있는 해적들은 몇 십 명은 되었는데 모두 웃통을 벗고 배를 수리하 거나 술을 마시거나 길게 누워 낮잠을 자거나 하고 있었다. 몇몇은 낚시를 하는 듯 그물을 만지는 놈들도 있었다. "네 애인은?" "몰라요! 죽어버렸는지, 아니면 나를 팔아 넘겼는지..." 인어는 그렇게 중얼거리더니만 갑자기 내 팔짱을 끼고 물었다. "근데 라리엘은 대체 어디 있어요?" "섬 안에 숨어 있어." "그럼..어떻게 할 거에요?" "저기 안으로 다시 들어가 봐야지." KUBERIN 우연히 아주 우연히 발부리에 걷어차인 돌멩이가 물 속에 빠지면 파문이 생겨나는 것은 필연이다 10 해변으로 숨어 들어가는데는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인어야 일단 바다로 들어간 이상 신경쓸 거 없고 내가 신경쓸 것은 나와 같이 나왔던 그 놈들, 나에게 바위에 달라 붙은 소라고둥처럼 붙어서 악착 같이 안 떨어지던 그 놈들이 문제다. 그 일곱 짐덩이를 찾아서 나는 슬슬 움직였다. 해변가를 슬슬 지나가자 날 바라보는 놈들은 별로 없었지만 그래도 생각해 보니 이러다가 들키면 시끄 럽기만 할 거 같아서 다리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뛰었다. 모래 위를 달려도 발자국이 남지 않아야 묘인족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물 론 약간 지쳐 있을 경우 발톱자국정도야 애교로 봐줄 수 있지만 말이다. "어?" "뭐야?" 해적들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그 찰나에 나는 해변에서 배 깔고 누운 놈을 찍 밟고 도약했다. 녀석이켁켁 거리든 말든 나야 알 바가 아니니까 나는 힘차게 도약하는 데에 열중했다. 내 앞으로 휙휙 풍경이 바뀐다. 대낮에 녀석들 앞에서 뛰는 것은 그다지 현명한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걸을 수야 없지. "뭐야!" "뭐가 지나간 거야?" "쫓아라!" 막 쫓으려던 놈들이 문득 머뭇거리며 외쳤다. "뭐가 지나갔는지 아는 사람?" "몰라ㅡ 너무 순식간의 일이라." 녀석들의 얼빠진 소리를 등 뒤로 들으며 나는 내 달렸다. 그리고 숲으로 들어서자 마자 가장 높아 보이는 나무를 향해 내달려 단숨 에 그 나무 기둥에 손톱을 박고 그 다음에는 발톱을 박고 그 위로 올라 섰 다. 시야에 보이는 것은 초록의 숲들이었다. 작열하는 햇빛아래서 번쩍 번쩍 넙적한 초록 잎새들이 빛을 발하고 있는 숲속은 지독하게 조용했다. 게다가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아마 이 쪽이 내가 처음 왔던 곳 보다 지대가 낮은 모양이다. 나는 코를 치켜 들고 냄새를 맡느라 한참 동안 애썼다. 그리고나서야 겨우 나는 방향을 잡을 수 있었다. 시끌 벅쩍한 소음과 인간들의 냄새를 찾아서 움직이는 동안에 갑자기 머리 가 띵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까, 침입자다 하고 소리질렀을 때 걸린 놈들이 혹시 이 놈들 아니야? 내 종적이 발각된 게 아니고 혹여 이 멍청이들이 발각된 거 아니냐구! 바보들! 내가 조용히 숨어 있으라고 했는데 이 멍청이들이 날뛰다가 걸린 거 아냐? 마음이 조금 급해졌다. 해적들은 잔인하다고 알려져 있다. 잔인하지 않으면 상대가 자신들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 다. 잔인함으로 자신의 힘과 주도권을 차지하고 공포로서 사람들을 억누른다. 그건 어디서나, 마찬가지다. 해적이나 산적이나 마찬가지..그러나 아마도 해 적쪽이 더 잔인한 것은 거세고 억센 바다에서 산 뱃꾼들을 압도하려면 더 잔인하고 더 독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일 것이다. 해적의 마을에 도착했을 때는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있었다. 말뚝에 박힌 두 구의 시체가 피투성이가 된 채로 흔들리고 있다. 그 앞에서 놀고 있는 해적의 아이들과 무심히 지나가는 아낙네들 사이로 말라 비틀어진 핏덩이가 군데 군데 흙바닥을 검게 물들인 후였다. 나는 어린애들 사이에 서서 그 두 구의 시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알을 도려내고 살가죽을 벗겨내서 매단 그 시체들은 누가 누군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살가죽을 벗겨낸 시체들이 내가 매달고 왔던 일곱 개의짐덩이들 중에 두 개라는 사실이다. 그 증거로 찢겨져 나 간 낯 익은 옷가지가 아직 발목에 매달려 있다. 파리떼가 잉잉 거리면서 시체의 피를 맛보러 맹렬히 달려든다. "넌 누구야?" 내 뒤에 섰던 꼬마가 날 의심스레 바라보며 묻는다. 나는 그 꼬마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녀석이 왁 하고 앞으로 고꾸라지자 그 놈의 등짝을 밟고 지나갔다. 녀석이 이를 악물면서 돌멩이를 들고 나에게 돌진한다. 나는 그 놈의 면상을 후려갈겼다. 퍼억 하는 소리와 함께 녀석이 콰직 코뼈 부러지는 소리를 내면서 나동그라졌다. 그리고 그 주변에 있던 꼬맹이들이 은근히 살기를 뿌리면서 나를 중심으로 다가들기 시작했다. 교 활하고 사나운 그 눈빛을 한 번 훑으면서 나는 손을 천천히 햇빛 속으로 들어보였다. 그리고 손톱 다섯 개를 꺼내는 대신, 주먹을 쥐었다. 퍼억 하고 한 놈의 배를 후려갈겼다. 그 놈의 몸이 완전히 구부러지면서 나동그라진다. 녀석이 헉헉 거리면서 웅덩이를 이룰 만큼 토악질을 해대는 것을 발뒤꿈치로 내리쳐 주었다. 뒤 이어 뒤에서 내가 몽둥이를 들고 덤비는 놈의 팔뚝을 잡아 뒤로 꺾어 주었 다. 와드득 하고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백열의 햇빛아래서 선명하게 들려 온다. 눈이 부신 햇빛, 피 비린내, 누런 먼지가 일어난다. 두엇 놈이 또 덤벼든다. 손등으로 한 놈의 턱을 후려갈기고 뒤이어서 덤비는 놈의 갈비뼈에 손을 쑤셔 넣었다. 비명소리도 내지 못했다. 뼈가 일그러지고 부서지는 소리만 난다. "괴물이다!" "지독한 놈!" 몇몇이 공포에 질려서 나를 향해 창을 들었다. 창날이 햇빛에 번뜩이면서 내 몸을 향해 날아드는 순간에 나는 손톱을 꺼 내 들어 창날을 후려갈겼다. 뚝하고 부러진 창날을 아연하게 바라보는 놈 들을 향해 돌진하면서 나는 이를 악물었다. 송곳니가 튀어 나와 입술을 깨 문다. 손톱에 닿는 살점들이 갈갈이 찢겨져 나가 붉은 점을 공중으로 뿌려댔다. "와아아악!" "아아아악" 이젠 대항하는 놈들도 없다. 녀석들은 마치 야수를 만난 양떼 처럼, 온순한 가축처럼 달아나기 시작했다. 비명소리가 요란한 상태에서 나는 한 놈의 목줄기를 틀어 쥐었다. 그리고 그 놈의 갈비뼈 사이로 손톱 두 개를 밀어 넣으며 물었다. "어딨어?" "뭐? 뭐가..아?" "잡힌 놈들." "아아아악...으악.." "말해." 나는 갈비뼈를 하나 뜯어 냈다. 피가 분수처럼 쏟아진다. 녀석이 몸부림을 하다가 기절하는 것을 휙 던져 버리고 널부러진 채 나를 바라보고 있는 녀석에게로 다가갔다. 녀석은 내가 갈비뼈를 뽑아내는 것을 보곤 완전히 겁에 질려 있었다. "어억..어.." "어딨어?" "어...모,.모..몰라.." "말해." 녀석의 발목을 밟았다. 와드득 소리가 난다. "크어어어어어어!" 녀석이 비명을 올리며 오물을 쏟아 내었다. 울부짖는 소리가 터져나오는 동안 갑자기 나는 내 등뒤로 와 닿는 파공성을 느끼고 몸을 움직였다. 옆으로 슬쩍 몸을 틀자 화살이 한 대 바로 내 앞으로 스쳐지나갔다. 그 다음 날아오는 화살을 피해서 움직이자 또 화살이 소나기처럼 퍼붓기 시작했다. 등에 힘을 주고 나는 도약했다. 정면으로 와 닿는 화살을 두 팔 을 세워 얼굴을 막고 화살을 쏘는 녀석들을 향해 달려갔다. "이런!" "저럴 수가!" 화살이 내 몸에 닿자마자 모조리 튕겨나간다. 이건 철시도 아닌 평범한 화살이었다. 그나마 화살촉은 강철도 아닌 깎은 돌화살촉이었다. 화살을 쏘는 놈들은 입을 벌려 아연한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느라 도망치 지 못했다. 가장 정면에 있던 놈의 면상을 손톱으로 후려갈기자 얼굴에 세 줄기의 붉은 선이 그어 진다. "크아아아..." 비명소리가 터져나왔지만 듣지 않았다. 화살을 날리던 놈들이 일제히 활을 집어던지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나는 그 놈들의 등줄기를 잡아채서 공중으로 내던졌다. "어디 있어?" 피가 새어 나오는 등줄기를 꾸욱 밟으면서 다시 물어 보았다. 밟힌 녀석은 개구리처럼 사지를 꿈틀거리면서 날 바라보았다. "다른 포로들은 어디 있어?" ".......구..굴에..." "굴은 어디지?" "...불상어굴에....." 나는 바닥이 안 보이는 구멍을 바라보았다. 동굴도 여러 가지가 있다. 여러 가지의 굴 중에 가장 공포심을 자극하는 것은 수직으로 뚫린 동굴, 동굴이라기 보단 구멍처럼 보이는 곳이다. 바람이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아래는 잘 보이지도 않지만 잘 노려보면 일렁이는 흰 파도가 슬쩍 쓸쩍 보 인다. 입구 주변은 검붉은 자국이 가득하다. 발버둥 친 인간의 손톱이 가끔 뽑힌 채로 바위 틈새에 박혀 있다. 해적들은 포로를 잡아다 이 곳에 산채로 집어 던진 모양이다. 그러면 던져 진 자들은 이 구멍에서벗어나기위해 맨손으로 바위를 헤집고 올라오려 애 쓴다. 그러면 연약한 인간의 손가락은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피에 젖어 서 유일하게 단단한 부분인 손톱을 부러뜨리는 것이다. 새까맣게 입을 벌린 그 동굴을 바라보면서 귀를 기울여 보았다. 결사적으로 인간이 외치는 소리를 듣기 위해 나는 귀를 기울이고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물 소리 이외에는 들려오지 않는다. 파도가 바위를 후려갈기고 관처럼 생긴 이 굴을 통해 들어오는 차가운 바 람이 휘파람소리를 내며 내 머리칼을 뒤흔든다. 잔인한 바다의 여신과 냉혹한 대지의 여신의 합작이다. 살아 있는 자들은 없다. 밤의 여신의 옷자락에는 또 몇 개의 별들이 늘어날 것이다. 등 뒤로 스멀 스멀 벌레가 기어 오는 듯한 감촉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불어오는 바람에 그 냄새를 알 수 있다. 약 수십의 해적들이 무기를 들고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감고 내 몸안의 힘을 개방했다. 사지로 힘이 밀려나가면서 온 몸의 세포들이 노래를 부른다. 나는 강하다 나는 강인하고 잔인하며 나는 살아있다 나는 강하고 강하지만 죽은 자들을 되살려 낼 수는 없다. 그리고 나는 구멍으로 몸을 던졌다. 얼굴을 때려대는 그 바람을 맞으면서 나는 눈을 부릅떴다. 이대로 아래로 곧장 떨어져 내리다간 박살이 난다. 손을 들어서 힘껏 벽에 손톱을 박았다. 짜릿하고 손가락에 아픔이 달렸지만 뒤이어서 발톱도 벽에 후려박았다. 퍽 하고 툭툭툭 돌가루와 흙덩이가 바닥으로 떨어져 내린다. 바람소리는 잉잉 거리면서 점점 심해진다. 바닥을 다시 내려다 보았다. 마치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야수가 한껏 입 을 벌리고 먹이를 기다리는 것 처럼 보인다. 바닥의 돌들은 날카롭기 이를 데가 없다. 게다가 이 정도 높이에서 떨어지면 갈갈이 찢어져 버릴 것은 당연지사다. 시커면 벽면에 손톱과 발톱을 번갈아 박으면서 나는 천천히 내려왔다. 익숙한 썩는 냄새가 다시 코를 찌른다. 바다를 좋아하긴 해도 이 냄새만은 좋아할 수가 없을 거 같다. 이 썩는 냄 새보다 지독한 것은 세상천지에 없고 박쥐똥 냄새만큼 지독한 냄새로 가히 지상에서 쌍벽을 이룰 것이다. 축축한 냄새와 더불어 다시 아래를 내려다 보자, 파도가 하얗게 이를 드러 낸다. 둥그레한, 거의 타원형에 가까운 구멍이 이 동굴을 바다와 연결시키 고 있었다. 썩는 해초냄새등등은 틀림없이 이 동굴도 밀물때가 되면 물에 잠긴다는 의미일 것이다. 조심스레 바닥으로 내려서자 마자 무언가 질펀한 것이 발바닥에 달라 붙는 다. 살점이었다. 아직 채 말라 비틀어지지도 않은 살점들이 곳곳에 떨어져 있다. 아마도 떨어지면서 이 날카로운 바위들에게 찢겨진 모양이었다. 날카로운 바위가 배를 찔러 내장이 다 흘러나온 시체도 있다. 머리통이 산산히 깨져서 얼굴도 모르는 시체가 있다. 나는 그 곳에서 대머리를 발견했다. 내게 조개를 주워다 주고는 겁에 질린 얼굴을 하던 포동 포동한 놈도 있었다. 마누라가 돈을 가지고 날라 버렸다 는 놈도 있었다. 나는 널린 시체 냄새를 맡으면서 잠시 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바람은 점점 날카로운 노래를 부르고 있다. 차가운 파도가 내게 침을 뱉았다. 이제, 진짜 동굴은 지긋 지긋했다. KUBERIN 우연히 아주 우연히 발부리에 걷어차인 돌멩이가 물 속에 빠지면 파문이 생겨나는 것은 필연이다 11 바닷가에 돌아왔을 때는 의외로 해적들이 많지 않았다. 나는 팔짱을 끼고 서서 밤 하늘을 올려다 보고 있었고 그런 내게 참견하는 놈은 아무도 없었다. 뱃전에 부딪치는 파도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동안 문득 해변에 웅크리고 있는 물건을 발견했다. 다른 놈들이 썩은 나무둥치 에 묶어 놓고 있는 그 물건의 입에서는 신음이 터져나오고 있었다. 그리로 다가가 보자 나무 둥치에 묶여진 사지는 바짝 말라 갈라져 있었다. 입술은 하얗게 일어나 있고 눈은 퀭했다. 배나 가슴에 이런 저런 칼자국이 가득한 그 놈은 얼굴에도 칼 흉터가 가득했다. 아마도 며칠 간 이렇게 물 도 먹지 못하고 해변가에 묶여 있었던 것 같다. 그 놈의 눈에는 생기가 이 미 없었다. 해변가에 매달린 나무 열매 하나를 떼어 내어 그 놈의 입술에 그즙을 적 셔 주었다. "헉..헉..." 입술이 말라 붙어서 혀가 말라 붙어서 말도 하지 못하는 그 놈의 얼굴에 모처럼 표정이 떠올라 날 바라본다. 분명히 아무 생각도 없는 것 같다. 이 며칠간 작열하는 태양아래 발가벗긴 채로 묶여져 있던 이 놈은 내게 악 악거리던 흉터 있던, 그 놈이었다. 용병으로 잘난 척하던 그 놈이 이렇게 묶여 있는 것이다. 그 놈의 밧줄을 잘라 내어 그 놈을 축축한 밤의 모래 밭에 내려놓았다. 헉헉거리면서 녀석이 신음을 터뜨린다. 얼굴을 축축한 모래에 처박는 것을 바라보다가 나는 다시 바다를 바라보았다. 밤의 바다는 고요했다. 밤의 여신의 옷자락에 내어 걸린 그 영혼들이 빛을 발하기 시작하나 하고 나는 물끄러미 올려다 보았다. "도..도와..." 흉터녀석이 벌겋게 데이고 바짝 말려진 육포같은 몸뚱이로 나에게 중얼거 렸다. 나는 그 놈을 내려다 보다가 문득 다시 섬을 돌아보았다. 새삼스레 불근 불끈 살기가 치솟기 시작했다. 화상으로 비틀어진 피부를 가진 그 놈을 내 버려두고 나는 배로 발걸음을 옮겼다. "에? 너, 뭐냐?" 그물을 손질하던 한 녀석이 날 바라보고 입을 여는 순간 그 놈의 입으로 손톱을 밀어 넣었다. 뒤통수로 피를 토하면서 꼬꾸라진 녀석을 내버려 두 고 다음 녀석에게 다가갔다. 그 녀석은 새파랗게 질려서 나에게 단검을 들 이대고 있었다. 달빛이 춤추고 있다. 달은 핏빛 달, 나를 미치게 만드는 달. 하얀 해변가 위로 나를 미치게 만드는 핏빛의 달. 단검을 들고 달려들던 놈의 가슴을 갈랐다. 꿈틀거리는 검붉은 심장이 들 여다 보인다. 출렁 출렁 다시 배가 흔들리고 있다. 비명소리가 탁 트인 해 변인 덕에 멀리 퍼지지도 못하고 스러진다. 나는 발을 굴러 배에 구멍을 냈다. 바닷물이 스며 올라오자 배는 온통 붉은 빛으로 가득찼다. 시체에서 흘러 나오는 피와 검푸른 바닷물이 섞여 분홍빛의 물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다음 배, 다음 배, 이어가면서 돌아가면서 몇 척의 배에 구멍을 내 고 마지막 한 척만 남겨 두었다. 혼자 몰기엔 너무 큰 배이긴 하지만 뭐, 어떻게든 되겠지. 해변가에 해적들이 몰려오고 있다. 횃불을 든 놈들이 살기에 차서 달려오고 있었다. 나는 젖은 모래에 입을 대고 헉헉 거리고 있는 벌겋게 익은 흉터 녀석을 끌고 배위로 끌어올렸다. 녀석이 날 멍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을 모른척 하고 나는 천천히 노를 젓기 시작했다. 화살을 쏘는 놈들이 있었지만 금방 멀어졌다. 몇몇이 배를 타고 쫓아 오려다가 실패하는 것이 보인다. 해변은 와글 와글 시끄럽기 그지 없다. 마치 불타는 것처럼 많은 횃불들이 해변을 밝히고 있었다. 해변은 온통 소음으로 가득 차서 이 바다 위와 너 무나 대조적이다. 바다는 고요하고 밤하늘은 수많은 뱃꾼들의 눈으로 가득 차 있다. 저 눈들 중에 해적의 눈도 있을 지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해적 보다는 보통 뱃꾼들이 많다는 것이다. 아무렴, 그렇고 말고. 세상에는 보통 뱃꾼이 더 많다. "쿠베린." "이봐, 어딘지 말해주었으면 좋겠는데."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나는 축 늘어진 흉터녀석의 시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들을 끌어 올린 엘리야 소속의 해상용병단을 만난 것은 거의 하루 만 이었다. 그 하루에 말라 비틀어진 흉터녀석은 죽었다. 바짝 마른 육포처럼 죽어버렸다. 낯익은 놈들이 계속해서 뭐라 지껄여 대는 것을 무시하고 나 는 한 숨을 내 쉬었다. "배 고파." 내가 뱃전 위에서 음식을 먹고 있는 동안 나에게 말을 거는 놈은 하나도 없었다. 나는 우울했고 기분이 나빴다. "대체 어떤 일이 있었는 지 알려주겠나?" "해적섬을 소탕한다는 작전은 실패했어. 중간에 돈을 내겠다는 상인 중 세 명이 지불하길 거부했거든." "그래도 하긴 할 거야, 돈이 더 모이면 말이야." "어쩌면 룬드바르제국의 황제도 돈을 낼지도 몰라. 그 쪽도 제법 센 수병 들을 가지고 있잖아?" 시키지도 않은 질문에 대답하던 한 녀석은 내가 살벌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뒤로 슬그머니 사라져 버렸다. "이봐, 쿠베린, 미끼로 사용되어서 기분이야 나쁘겠지만 그건 작전이었다 구, 어쩔 수 없었잖아? 다들 목숨을 걸고 하는 직업인걸...." 한 녀석이 그렇게 떠들기에 그 면상을 후려갈겨 주었다. 녀석이 부러진 이 빨을 쥐고 이를 갈며 사라지는 동안 나는 멍청히 뱃전에 턱을 고이고 서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지금 엘리야로 돌아가는 중이다. 대체 무엇을 했는지 모르겠다. "쿠베린, 쿠베린!" 아래에서 또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뱃전 아래를 내려다 보자 연두빛 머리의 두 인어가 손을 흔들고 있었 다. 내가 내려다 보자 그녀들이 미소해 보였다. "무사했군요!" "쿠베린! 다행이네!" 나는 시큰둥한 기분으로 그녀들을 바라보았다. 그녀들은 활기찬 모습으로 헤엄을 치면서 배를 따라오고 있었다. "언니를 구해줘서 고마워요! 쿠베린!" 배추머리 라리엘이 그렇게 말하면서 건방지게도 성숙한 여인이나 하는 손 키스를 내게 던졌다. 옆에서 미소하고 있던 그녀의 언니가 소리내어 외쳤 다. "고마와요! 이걸 받아요!" 갑자기 무언가를 휘익 던지는 것을 내가 받아 채자 인어 아가씨는 소리내 어 외쳤다. "우리 인어족은 은혜를 잊지 않아요!" "쿠베린! 언제 나와 연애 할 거에요?" 손에 남겨진 것은 거의 주먹만한 흑진주였다. 나는 멍청히 그 진주를 들여다 보았고 그녀들은 손을 흔들어 보이면서 바 다 위로 천천히 사라져 갔다. 바다는...인어에게나 어울리는 것이다. 나는 한숨을 내 쉬면서 흑진주를 바라보았다. 이제 내 손안에 남은 것은 에메랄드의 인어상과 흑진주 한 알 뿐이다. 엘리야의 부둣가 끄트머리에는 줄지어 선술집들이 있다. 마미의 사슴집처럼 크지 않은 조막조막 모인 그 선술집들은 대개가 술도 팔고 여자도 파는 것을 겸하고 있는 집들이 많다. 그래봐야 여자들은 창녀 집에서 잘 받아 주지 않는 나이든 여자들이 많은데 그 여자들은 음식도 만 들고 술도 팔고 웃음도 팔고 몸도 판다. 주정뱅이들이 줄줄이 늘어져 토악질을 해대고 썩은 구정물 냄새를 풍기는 그 구석진 골목길에 '푸른 수염의 도끼'라는 작은 선술집이 있었다. "어이,..마실까?" "키킥킥.." 반쯤 벌거벗은 여자들과 술에 완전히 취해서 고주망태가 된 사내들이 엉겨 붙고 있는 것을 피해서 나는 문을 열고 들어섰다. 쉰 듯한 맥주냄새가 나뭇바닥이고 벽이고 온통 배어버린 그 술집은 의외로 한산했다. 나무 탁자가 다섯 개정도 있는 그 술집 한 가운데에 서 있는 기둥에는 낡 아빠진 도끼 자루를 가진 시뻘겋게 녹슨 도끼가 하나 턱하니 꽂혀 있다. 그게 아마 푸른 수염의 도끼인 모양이다. "어서와..어머, 꼬마네." 비쩍 마른 여자가 얼굴을 허옇게 칠하고 담배를 피우고 있다가 날 보고는 아는 척을 했다. 가슴이 다 드러나 젖꼭지까지 보일 듯한 그 후줄근한 드 레스위에는 음식 찌꺼기가 붙어 있었다. 아마도 사십은 되었음직한 그녀가 비틀 일어서서 나에게 다가왔다. "누굴 찾아왔니? 아님, 너도 손님?" 그녀가 혼자서 까르르 웃었다. 나는 그녀를 무시하고 두툼하게 생긴 무표정한 주인 사내를 바라보았다. 사내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 날 바라보다 말고는 맥주잔을 하나 꺼냈다. "술을 마실거냐?" "아니." 나는 짧게 말하고 사내에게 다가갔다. "베스를 불러라." "뭐?" "베스를 불러?" "그 년은 손님 받고 있어." 사내가 마뜩찮은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나는 손을 뻗어서 그 놈의 멱살을 움켜 쥐고는 천천히 잡아 당겼다. 처음에는 놀람, 그리고 그 다음에는 경 악, 그 다음에는 공포가 그 녀석의 얼굴에 떠올랐다. "크,,쿠베린!" "그래, 알았으면 얼렁 불러." 내가 낮게 말하자 녀석은 번들거리는 이마를 닦으면서 부시시 일어섰다. 녀석의 두툼한 목덜미가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 놀란 얼굴을 한 바짝 마른 여자는 날 멍하니 쳐다 보고 있었다. "이..이층이야." 녀석이 중얼거리듯 말하는 동안 나는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다. 계단은 다 썩어서 삐꺽 삐꺽 시끄럽다. 벽이 얇아서 온갖 소리가 다 들리는, 복도랄 것도 없는 짧은 복도를 걸어 서 사내가 손짓하는 방문앞에 다달았다. 그리고 나는 천천히 문을 밀어 열 었다. "누구얏!" "어떤 개자식이야!" 시끄럽게 외치고 떠드는 그 소리를 뚫고 한 걸음 내디디자 시뻘건 여자의 속옷과 더럽기 짝이 없는 어떤 놈의 속옷이 내 앞으로 날아들었다. 그런 것들을 슬쩍 피해서 방안에 들어서서 보니 더러운 침대 위에 두 사람이 엉 겨 있다가 날 쏘아 보고 있었다. "이런, 제기랄! 뭐하는 놈이야!" "이 꼬맹이가 미쳤나? 썩 꺼져!" 여자가 침을 튀기면서 욕을 하자 옆에 있던 벌거벗은 사내가 나에게 달려 들어 주먹질을 하려 했다. 그런 놈을 잡아 채서 공중으로 집어던져 버리자 파삭 하고 녀석이 벽을 뚫고 나자빠졌다. "꺄악!" "왁!" 그 시끄러운 소동에 여기 저기서 난리가 났다. 여자는 큰 가슴을 흔들거리면서 일어서더니 삿대질을 하고 고함을 질러댔 다. "이봐! 행패를 부릴려면 딴데 가서 해! 이 더러운 자식아! 너 어디 뭐하던 후레자식인데 감히 남의 장사를 방해하는 거야! 이 썩어빠질 더러운 새끼 야!" 침이 튀기고 얼굴이 일그러지는 여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사십은 족히 될 그 여자는 여자라기보다는 물건처럼 보였다. 아무런 마음 도 가지지 않은 욕심으로 돌돌 뭉친 그런 쓰레기 같은 존재로 보였다. 다 지워진 허여멀건한 화장이 그 주름진 입가와 눈가로 흘러내리고 있었고 벌건 입술은 이미 뭉개져서 턱까지 벌겋게 되어 있었다. "너, 뭐하는 자식이야?" 삿대질하면서 여자가 한 걸음 나에게 다가올 때 나는 조용히 말했다. "나는 쿠베린이다." "웃기네! 네가 쿠베린이면 나는 공주님이다!" 그녀가 침을 튀기면서 주름진 목을 드러내면서 비웃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가게 안이 너무나 조용하게 변해버리자 그녀의 얼굴 도 굳었다. "에?" 가게안은 그 정도 소란을 피웠는데도 쥐죽은 듯이 조용했다. 문 뒤에서 주 인이 겁에 질린 채 서 있고 손님이란 자들도 모두 눈치를 보면서 숨을 죽 이고 있었다. "에? 진..진짜야?" 여자가 멍하니 입을 벌릴 때 나는 그녀의 앞에 주머니를 던져 주었다. "에?" 턱 하니 가죽주머니가 그녀의 벌거벗은 몸통에 맞고 바닥에 떨어졌다. 그 녀는 그 것을 멍청히 바라다 보다가 날 바라보았다. "받아라." 여자는 이상하다는 듯 나를 지켜보다가 교활한 눈빛으로 주변을 살피더니 슬그머니 고개를 숙여서 주머니를 받았다. 그리고는 그 주머니를 열자 마 자 눈을 크게 뜨고 날 바라보았다. "어마나!" 돈은 꽤 액수가 많았다. 그녀는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날 보고 다시 돈 주머니를 보았다. 그리고는 배시시 웃었다. "쿠베린, 내가 마음에 들었나요?" 나는 침묵했다. 역겨웠다. "하룻밤에 이 만큼이나 주는 건가요? 네? 아니면..한달?" 그녀가 교활하게 눈웃음을 치면서 나에게 물었다. "그건 마리온의 생명이다." "에?" 여자는 눈을 크게 떴다. "마리온 놈은 길드에 맡겨둔 자기 돈을 다 너에게 준다고 유언했다." 그녀의 눈이 커졌다. "그래서 네게 왔다." 그녀의 눈이 점점 커졌다. 그리고 그녀의 입도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치 마리온의 시체를 집어 삼킨 동굴처럼 그녀는 입을 벌리고 비 명을 올렸다. 뭐라고 말할 수도 없는 비명이 그녀의 입안에서 터져나왔다. 뭐라 말도 되지 않는 단어와 소리가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는 단발마의 비 명처럼 터져나와 그녀의 얼굴을 채우고 그녀의 전신을 채웠다. 그녀의 눈에서 비통함이 쏟아져 나왔다. 그녀의 입안에서 절망이 쏟아져 나왔다. 그녀는 내 눈앞에서 갑자기 변화했다. 얼룩진 화장이 눈물로 벗겨져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비명, 그 애 통함이 전신에서 터져나와 그녀의 얼굴에 씌여진 창녀의 가면을 단번에 벗 겨 버리고 그 자리에 여자를 만들어 놓았다. 나는 그녀를 정면으로 보았다. 주머니를 끌어안고 바닥에 쓰러져서 우는 그녀는 마리온이 말한 대로 사십 이 아니라 이십 오 세로 보였다. "쿠베린?" 마리아가 눈을 크게 뜨고 날 바라보았다. "이게 뭐야?" "선물." "어머나!" 그녀가 놀라서 흑진주를 바라보았다. "마...마,..맙소사!" "이거 하나면 이 가게 때려 치고 네 가게 차릴 수 있을걸." "세, 세상에!" 그녀는 진주를 든 채로 나를 멍청히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베스처럼 몸을 팔고 있었 다. 그리고 언젠가 이 여자도 베스처럼 절망에 빠져서 창녀의 가면을 쓰고 몸부림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리고 틀림없이 이 여자에게도 마리온처럼 순진한 사랑에 미쳐서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남자가 나타날 지도 모른다. "대체..갑자기..왜?" 그녀가 날 바라보며 물었다. 나는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어 흰 목덜미에 키스했다. "난 이 것밖엔 못주니까." "이, 이 것 밖엔이라니....이, 이런 진주라면..대체..살 사람이나 있을까?" 그녀가 입을 벌리고 말하기에 나는 그녀의 입술을 어루만지면서 대꾸해 주 었다. "시장님에게 팔도록 하지, 시장님에게 팔아서 가게를 하나 차려, 빵집을 차 리든 야채가게를 차리든 술집을 차리든 그 것은 네 맘대로야." 그녀가 눈을 크게 뜨면서 내 목을 휘어 감았다. "당신은 여자에게 악착같이 선물도 하지 않았잖아. 그런데 ...가, 갑자기..." 눈물이 그렁 그렁 쏟아져 내 가슴으로 떨어져 내린다. "아아, 그건 간단해, 난 마음에 들지 않는 여자에게서는 선물을 받지 않는 주의거든." 나는 웃었다. 제 16화 소동 KUBERIN 미래는 용감한 자들의 몫 과거는 슬기로운 자들의 몫 내달리는 모든 것들은 뒤는 보지 않는다. 1 잠을 자는데 무언가가 목을 졸랐다. 숨이 막히지는 않지만 이건 귀찮다. 귀찮아서 손을 내저었더니 뭔가가 쿵 하는 소리가 난다. 알게 뭐냐 싶어서 그냥 계속 잤다. 그리고 해가 중천에 뜬 뒤에 일어나 보니 방안 한 구석에 스카가 엎어져 있었다. "야, 너 솔직히 말해." 뜨거운 고깃덩이를 입안에 넣으면서 내가 말했다. 스카는 이마에 난 혹을 물수건으로 댄 채로 이를 갈고 있었다. 녀석의 눈 탱이가 밤탱이가 되어 있었지만 나는 한 대 밖에 안쳤으니까 저 건 내 탓 은 아니다. "너, 나에게 원한이 있는 거냐? 왜 나에게 덤벼?" "....나쁜 놈아, 깨우려는 데에 네가 일어나지 않았기때문이야!" "그런데 왜 목을 졸라?" "목을 조른게 아냐! 베개로 눌렀을 뿐이얏!" 스카가 소리를 지를 때에 갓 구운 빵을 가지고 가빈이 왔다. 가빈은 고개 를 갸우뚱하면서 날 바라본다. "쿠베린." "왜?" "저기..이상한 일이 있어서요." "뭐가?" "어젯밤에 당신이 다리 밑에서 선원들 다리를 부러뜨렸어요?" "아니." 내가 황당해서 대꾸하자 가빈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상하네, 아까 선장같은 사람이 와서 항의하다 갔어요. 스카는 그래서 당 신 깨우러 간 것이구요." 이건 또 뭔 소리야? "그래, 맞아. 너 어젯밤, 그러니까 롱기론다리 밑에서 술 취해서 버벅대는 놈들 다섯의 팔 다리를 부러뜨렸냐?" "그게 언젠데? 난 몰라." "몰라가 아니야. 그 놈들은 네얼굴을 알고 있었다구. 너에게 인사를 했더 니 네가 대꾸도 않고 지나가더래. 그래서 이봐 하고 불렀더니 다짜고짜 덤 벼들어서 팔 다리를 부러뜨리고 갈비뼈를 부러뜨렸는데 죽지 않은 게 천운 이라는 군." "다짜고짜?"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게 대체 언제냐고? 난 잠을 자고 있었을 건데? 내가 여자랑 자면서 쓸 데없이 돌아 다니는 거 봤냐?" "그, 그렇군..어제는 마리아와 있었잖아?" "그럼 새벽에 돌아오는 길에 그들을 해친 거 아냐요?" 가빈이 머리를 제법 굴린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야, 웃기지 마. 난 달빛을 밟으며 돌아왔다구. 그리고는 고이 고이 엎어져 잤어. 네가 내 난로이면서 그걸 모르냐?" "그..그건 그렇네, 쿠베린은 어제 새벽엔 나랑 같이 잤는데...." 가빈이 뒤늦게 생각난 듯이 머리를 긁적였다. 녀석의 귀가 쫑긋해지는 순 간 갑자기 문을 발칵 열고 두 놈의 덩치가 뛰어 들어왔다. 와장창 하고 문을 급히 열고 들어와서 문소리가 시끄럽게 가게 안에 울려 퍼졌다. "야! 시끄러!" 내가 고함을 지르자 두 놈이 흠칫하더니 나를 바라본다. 그 바라보는 눈길이 어째 심상치가 않기에 나도 같이 노려봐 주었더니 이 놈들이 겁에 질린 듯 입술이 파랗게 변했다. "뭐냐? 너희들?" "어, 그, 그저께...당신이 우리 딸아이를 건드렸지?" "뭐라구?"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그저께 우리 딸애를 건드렸잖아!" 나는 잠시 동안 회고에 빠졌다. 그저께 내가 건드린 여자가 누구지? 마리아와 마미, 사라 밖엔 없다. 길 가던 여자에게 윙크 던진 거 이외에 대 체 뭐가 더 있는 거야? 구둣집 아가씨의 뺨에 키스한 거, 그것이외 또 뭐 가 있더라? 우물가의 아가씨와 손잡고 노닥 거린 거, 그거 이외에? 그거 이외에? 평소와 다른 짓을 한 게하나도 없잖아? 기억나는 게 없다. "안 했어!" 나는 잘라 말했다. "거짓말 마! 다들 네 놈이라고 증언했어! 다 네 놈이라고 했다구!" "우리 딸은 팔이 부러지고 갈비뼈에 금이 갔단 말이야! 모두 다 봤어! 다 봤다구!" "누가 뭘 내가 했다는 거야? 이 쿠베린이 헛소리하는 거 들어 보기라도 했 냐?" 어째 점점 화가 치밀기 시작한다. 그 때 문을 열고 또 한 무리의 인간들이 들어섰다. 빵집의 여주인과 그 남 편이 밀가루를 뒤집어 쓴 채 기세 등등하게 뛰어 들어오더니 날 보고 원한 에 가득찬 눈빛을 던진다. "쿠베린! 너무 했어!" "대체 뭘 너무 했냐구? 내가 뭘 어쨌다는 거야?" "어젯밤에 우리 가게를 다 부수고 내가 만든 케익을 박살 낸 게 너잖아?" "농담 마! 내가 왜 네 가게를 부수냐?" 내가 마주 외치자 점점 점점 주변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빵집 여자는 침을 튀겨가며 악을 지르기 시작하고 옆에 있던 사내는 팔뚝 을 걷어붙이며 내가 파렴치한이라고 욕을 하기 시작했다. "여자를 밝히는 줄은 알았지만 여자를 두들기는 놈인지는 몰랐다!" "정말 너무해! 아무리 케이크를 좋아한다고 해도 어쩌면 그럴 수가 있냐?" "내가 안했다니까! 말이 되는 소릴 해라!" "잠까아아안!" 스카가 고함을 질렀다. 녀석이 하도 악을 써서 귀가 멍멍해 지는 순간 스카는 헥헥거리면서 우리 들을 돌아보았다. "잠깐만 기다려봐, 뭔가 이상하잖아?" "뭐가 이상해?" "뭐가?" "뭐가?" 다들 한 마디씩 던지는 그때 스카가 흥분한 나의 어깨를 꾹 누르면서 일어 섰다. "쿠베린이 여자 때리는 거 봤어?" "에?" "나는 쿠베린과 이십년이 넘게 같이 있었지만 이 놈이 여자를 때리는 경우 는 사라 엉덩이 때리는 것 이외엔 본 적이 없어. 하물며 여자애 팔을 부러 뜨린다든가 발로 걷어찼다든가 하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다구." 갑자기 마미가 끼어 들었다. "그래, 맞아. 쿠브는 그런 일 안해." 과연 과연 날 믿어주는 군. "맞아요, 쿠브는 여자를 꼬실 뿐 때리진 않아요." 가빈도 끼어 들었다. 뛰어든 남자가 입을 다물더니 갑자기 심각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럴리 없어. 나 이외에도 다섯 명이나 쿠베린이 내 딸을 후려치 는 것을 봤단 말이야. 나도 이상하다곤 생각했지만 분명히 봤어!" "그래, 그래." 스카는 고개를 갸우뚱하고 날 보았다. "너 원한 진 놈이라도 있냐?" 나는 어깨를 으슥해 보였다. "너무 많아서 일일이 헤아릴 수 없지." 그러자 빵집 여주인이 끼어들었다. "하지만 우리는 쿠베린을 잘 알아, 그래서 더 화가 났다구. 쿠키라도 달라 고 하면 분명히 주었을 텐데 우리집 창문을 부수고 들어와서 내가 만들어 놓은 케이크와 쿠키를 완전히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 갔단 말이야! 내 가게 는 어쩌라구!" 여자가 앙앙 거리고 울기 시작했다. 귀가 따가와서 견딜수 없다고 부글 부글 끓기 시작하는 순간 스카가 다시 끼어들었다. "이봐요, 마가렛, 하지만 이상하지 않아? 쿠베린이 당신 뺨에 키스라도 해 주면 당신은 언제든지 케이크를 주잖아? 그런데 왜 쿠베린이 새삼스레 창 문을 부수고 침입했다는 거지?" 그 말에 옆에 있던 빵집 주인사내가 화를 바락 냈다. "뭐? 키스만 해주면 마구 케이크를 내주었다고? 당신 제정신이야? 미쳤어? 저 놈이 얼마나 먹어대는데 그냥 막 퍼 줘?" "하지만..쿠베린이 먹어 봐야 얼마나 먹겠어?" 여주인이 변명을 시작할 때에 스카가 턱을 잡은 뒤에 날 다시 바라보았다.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일이잖아? 쿠베린은 엘리야에서 이 십 년은 살아 왔다구. 이 놈이 해달라는 것을 거절할 자가 이 동네에선 거의 없단 말이 야. 그런데 새삼스레 여자를 두들기고 물건을 부순다는 건 말이 안돼." "맞아, 맞아," 스카가 갑자기 너무나 명석한 소리를 해서 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초롱거리는 눈빛으로 녀석을 바라보고 있을 뿐. "쿠베린과 원한이 있는 놈이 쿠베린으로 변장하고 돌아 다니는 거 아냐?" "그럴지도." 가빈과 스카가 열심히 머리를 맞대고 있는 동안 나는 여주인의 손을 잡고 상냥하고 조용히 물었다. "뭔지는 모르지만 내가 했던 거야? 그거 맞아?" "흑흑..쿠베린..." 갑자기 여주인이 날 끌어안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 풍만한 가슴이 와 닿아서 기분이 괜찮아 지는데. "떨어져! 떨어져!" 빵집 주인이 악을 지르는 순간에 여주인은 눈물을 닦으면서 내 몸에서 억 지로 떨어져 나갔다. 그러면서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말했다. "그러고 보니 진짜 쿠베린이 아닌가봐." "뭐?" "안아보니까 역시 달라. 전의 그 놈은 이상할 정도로 딱딱해서...이런 느낌 이 아니었어요." 그녀가 살짝 볼을 붉히며 말했다. 나는 다시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으면서 속삭였다. "이런 느낌이 아니었어?" "으응..그래요." 그녀가 진지하게 대답했다. "아아아악! 떨어져! 떨어져! 이 마누라가 미쳤나? 백주에 남의 남자를 끌어 안고 난리야?" 빵집 주인이 광란에 빠져 있을 때 문득 자기 딸내미가 다쳤다는 남자가 턱 을 만지면서 갑자기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까...무척 딱딱했어. 그 놈을 말리려고 달려들었었는데...팔뚝을 잡으니까 무척 딱딱해서 나무 토막같더라구...." 나는 여주인의 허리를 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딱딱한 놈이라..." 스카가 내가 아직도 여주인을 안고 있는 것을 보며 내 팔을 잡아 끌어 떼 어내며 묻는다. "그럼...그때 안아봤단 말이오?" 여주인이 얼굴을 붉혔다. "아아...그때 말리느라고..허리를 안았었어요." "이..이 마누라가!" 빵집 주인이 광분에 가득차는 순간 나는 빵집주인의 팔을 꽈악 잡았다. "악!" "기다려봐, 기다려봐! 이건 아주 중요한 증언이라구!" 내가 정색하고 그 놈의 얼굴을 마주 보자 녀석의 얼굴이 굳었다. "당신 가게를 부순 놈을 잡을 중요한 단서란 말이야. 그러니까 흥분하지 말고 들어!" "우..." 녀석의 울분에 가득찬 표정을 모른 척 꾸욱 눌러 주고 나서 나는 그 여주 인에게 다시 물었다. "상황을 한 번 말해 보라구." 그러니까.. 그녀는 케이크를 만드느라 정신이 없었다고 한다. 거의 한 밤중, 그녀는 새벽에 내 놓을 케이크를 만들기 위해 크림을 만들 어 막 삼단짜리 케이크에 얹고 있었는데 갑자기 창 밖으로 지나가는 내가 보였다고 했다. 그래서 그녀는 상냥한 마음에 갓 구운 쿠키 한 조각 먹고 가라고 불렀단다. 그러자 가던 내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더니 창가에 선 그녀를 빤히 보다 가 그대로 걸어서 창문을 뚫고 걸어 들어오더니 그녀가 경악에 가득 차서 비명을 올리자 태연자약하게 케이크를 박살 내고 그 위에 얹은 크림을 맛 보고 그리고는 쿠키 한 줌을 쥐어 들더니 말리는 그녀를 케이크 위로 집어 던지고 유유히 사라졌다는 것이다. 나는 눈을 꿈뻑거렸다. "이봐, 내가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잖아!" 내가 항의하자 여주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긴 그래요. 당신이 그런 짓을 할 이유가 없네.... 하지만 당신의 모습 그 대로 였는걸요?" 나와 스카들이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멍하니 앉아 있는 동안 갑자기 가빈 이 탁 하고 탁자를 후려갈겼다. "알았다!" "뭔데?" 모두 놀라 그를 바라보자 가빈이 눈을 반짝이면서 외쳤다. "쿠베린이 잠이 든 채로 돌아다닌 거에요! 즉, 몽유병이란 거죠!" 나는 그 놈의 머리통을 한 대 후려갈겼다. "말이 되는 소릴 해! 난 몽유병따윈 없단 말이다!" 그러자 스카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말했다. "하지만 어젯밤은 분명히 쿠베린은 마리아와 같이 있었어. 그러니까 거짓 말은 아니라구." "그건 그래. 증인이 있다고." 사람들은 다시 머리를 쥐어 짰다. "혹시 말이야..." 스카가 조심스레 고개를 들고 날 바라본다. "너, 너를 무척 좋아하는 마법사가 하나 있지 않았냐? 그 금발 머리의...." 갑자기 소름이 끼쳐서 내가 그를 쏘아 보자 스카가 진지하게 혹이 난 머리 를 어루만지면서 말했다. "그 놈이 혹시 말이야... 너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마법의 인형을 만들어서 널 조롱하는 거 아냐?" 나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울부짖으려는 것을 억눌렀다. 그리고 탁자를 힘차게 내리 꽂았다. "그 놈이 내 인형을 만들어 뭐에 쓰는 데!! 엉? 뭐에 쓴다는 거냐? 뭐에 쓴다고? 뭐에 쓴다고? 말해 봐! 말해 보란 말이닷!!!" 내가 당장이라도 스카를 먹어 치울 듯한 기세로 송곳니를 드러내고 그를 쏘아 보자 스카는 자기도 모르게 뒤로 물러서서 버벅거렸다. 녀석의 얼굴 이 퍼렇게 물든다. "어어..진정하라고. 진정. 어디까지나 가정이라니까." "전에도 말했지? 그 놈은 내 피를 바라는 거라고! 그런데 네 놈은 왜 그런 쪽으로 머리를 굴리는 거냐!" 스카의 멱살을 쥐는 대신에 식탁 위에 있는 나무 그릇을 빠득 빠득 부수면 서 음산하게 내가 말하자 스카는 물론이요, 주변에 있던 놈들도 화라락 모 두다 도망쳐서 가게 벽에 달라 붙어 버렸다. 흥분한 게 바보 같아 져서 나는 가루가 된 나무그릇을 휘익 던져 보고 주 변에 있는 놈들을 자악 훑어 보았다. "불만들 있냐?" "아..아니오." "아네요.." 그리고 그 순간 나는 그 딱딱한 게 뭔지 기억이 났다. 젠장할!! KUBERIN 미래는 용감한 자들의 몫 과거는 슬기로운 자들의 몫 내달리는 모든 것들은 뒤는 보지 않는다. 2 계단위를 달려올라가서 침대 밑에 있는 내 보물 보따리를 꺼냈다. 주머니를 꺼내 들고는 재빨리 미친 듯이 아래 층으로 뛰어 내려오자 녀석 들은 아직도 파리한 얼굴로 나의 일거수 일투족을 은근히 외면하며 지켜 보고 있었다. 탁자 위에 올려놓으니 탁자 다리가 부러질 거 같아서 허리춤에 다시 주머 니를 차고 나는 그 안을 뒤져서 왕년에 내가 쑤셔 넣어놨던 물건을 꺼내어 들었다. 번쩍 번쩍 빛나는 말 그대로 돌덩이처럼 커다란 금강석이 등장하자 옆에 있던 녀석들이 으아 하고 입을 저억 저억 벌린다. "아! 그거네!" 뒤 늦게 가빈이 외쳤지만 모른 척하고 나는 그 금강석을 꺼내어 탁자위에 놓았다. 금강석은 오색으로 빛을 뿌리면서 은빛으로 빛나는 미스릴 사슬을 마치 옷 처럼 걸치고 있었다. 그런 놈을 쏘아보면서 내가 고함을 질렀다. "나와! 이 뱀대가리야!" 그러나, 불행히도 잠잠했다. 모두 내가 머리가 어찌 된 거 아니냐는 듯한 시선으로 일제히 날 바라본 다. 그런 시선을 무시하면서 나는 금강석을 집어 들어서 바닥에 내동댕이 쳤다. 퍽 하고 나무바닥이 패여서 가루가 풀풀 날렸다. "이봐, 쿠베린! 진정해!" 스카가 왠지 겁에 질린 얼굴로 외치는 순간에 나는 열받아 악을 질렀다. "안나와? 안나오면 좋아! 네 놈을 무저갱의 바닥에 내 던지고 올테다!" 모두 숨을 죽이는 순간에 갑자기 그 금강석이 스르륵 사라지더니 그 자리 에 검은 머리에 녹색눈의 소년이 부시시 몸을 일으켰다. 녀석은 마치 환영같이 나타났는지라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너무 놀라서 다 뒤로 나자빠졌다. 그리고는 세상에를 외치면서 다시 가게 벽에 달라 붙었다. "으아! 또, 똑같잖아?" 스카가 입을 저억 벌리면서 턱을 바닥으로 떨어뜨리는 동안 나는 팔짱을 낀 채로 금강석으로 만들어진, 이 괴이쩍은 유령놈을 쏘아 보았다. "이 바보 뱀대가리야! 너, 누가 내 모습을 하고 돌아다니랬어?" 발로 걷어찼지만 이 놈은 반응도 당연히 없다. 가빈이 날 보면서 그게 용으로 변하면 어떻게 해요 하고 소리를 질렀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누가 내 모습을 하고 돌아다니면서 사고를 치라고 했어? 앙?" 내가 악을 지르자 금강석의 내 모습을 한 용이란 놈이 눈을 깜빡 깜빡 거 리면서 대꾸했다. "너와 가장 오래 같이 있었으니 네 모습을 한 거 뿐이다." "웃기지 마! 내가 말했잖아! 아리따운 미녀의 모습을 하라고!" "내 맘이야." "아쭈구리? 이게 유령인 주제에 말이 왜이리 많아? 너, 내가 시키는 대로 하겠다고 전에 말하지 않았어?" "그런 말 한 적 없다." "웃기지 마! 아니면 네 놈을 무저갱에 집어 쳐 넣겠다고 난 분명히 너에게 경고했어! 그런데 감히 나에게 거슬리는 거냐?" "......." 녀석은 눈을 깜빡이면서 날 보다가 가빈을 보았다. 가빈이 눈이 마주치자 겁에 질려 스카의 옆에 달라 붙는 동안 녀석이 중얼 거리듯 말했다. "난 단지 산책을 했을 뿐이다." "산책은 걸어 다니는 거지, 부수거나 두들기거나 하는 게 아냐!" 내가 음산하게 쏘아보자 녀석은 약간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상대가 공격해왔단 말이다." "공격?" 내가 어리둥절할 때에 녀석이 대꾸했다. "내가 길을 걷고 있을 때 한 여자가 다가와서 나의 가슴을 쳤다. 그래서 나 역시 그녀를 쳤을 뿐이다. 그리고 내가 걸어가는 데 한 무리의 사내들 이 내 등을 때렸다. 그래서 나도 같이 공격했던 것뿐이다." ".....때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첫째, 내가 유유히 걸어간다. 아가씨 하나가 날 알아보고 어머 쿠베린 반가와라 하고 내 가슴을 툭 친 다. 그때 나라면 아가씨 손을 잡고 부비 부비 하겠지만 이 놈은..... 둘째, 내가 유유히 걸어간다. 내 얼굴을 알고 있던 술 먹은 녀석들 몇몇이 어이 어이 쿠베린 오랜만 하 고 내등을 친다. 그때 나라면 이 자식들아 술 처먹었으면 가서 자라 하고 히히덕 거렸겠지만 이 놈은.... "....그럼, 너는 왜 빵집을 부수었냐?" 내가 머리를 부여 잡고 묻자 녀석은 빵집 여주인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여자가 날 보고 남편이 오기 전에 어서 들어오라고 했다. 케이크를 맛보 라고. 그래서 나는 최대한 빨리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그녀가 놀라며 내 팔을 잡았고 나는 그녀가 공격해 오는 것에 놀라 밀쳤다. 그리고 그녀 가 말한대로 나는 쿠키와 케이크를 먹었다." "......." 침묵이 감돌았다. 갑자기 빵집 주인이 여주인의 뺨을 철썩 때렸다. "뭐하는 짓거리야? 결국 네가 꼬신 거잖아?" "그게 뭐가 꼬신 거야? 앙? 그건 인정이라구! 당신 날 쳤어?" "그래, 쳤다! 어쩔래?" "내가 맞고 살 여자로 보여? 우리 아버지가 알아봐라! 당신이 살아 있을 줄 알아?" 악을 지르고 두 부부가 싸우기 시작하는 동안 나는 턱을 고인 채 내 모습 을 한 이 말썽장이놈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명석하게 말해주었다. "야, 네 논리에는 무척 엄청난 헛점이 있다." "뭐라구?" 녀석이 날 바라본다. 기분 나쁘게 나랑 똑같다. 뭐 이런 게 다있냐? 내가 날 보는 거 같잖아? 난 나르시즘 환자가 아니라 구. "이 들은 널 부르지 않았어, 이들은 쿠베린, 즉, 나를 불렀지, 널 부른 게 아니란 말씀이야." "......" "그러니까 이들의 말에 반응한 너는 잘못을 저지른 거다. 내 말 알아듣 냐?" "......" "네 이름이 뭐냐?" "..고룡족의 셀러로니 에발룬." "그래, 넌 셀러론인지 에발작인지 그런 놈이고 쿠베린이 아니란 말이야! 알 아 들어?" "......" "자, 알아 들었으면 어서 사과해라!" "......사과가 뭐냐?" "미안하다고 하는 거지, 물론." ".........미안하다고만 하면 되는 거냐?" "일단은 그 정도로 하고 나중에 교육을 시켜주지." "...알았다. 미안하다." "자아, 이 뱀대가리 놈아, 앞으로 내 모습을 하고 다니면 네 놈을 멀고 먼 늪지에 처박아 어떤 존재도 드나들지 못하는 곳에 처박아 둘거다! 알아 들 어?" ".......알았다." "그럼 내가 말한 대로 변해라." "음.." "일단 머리칼은 금발로 바꿔라." 녀석의 머리칼이 금발로 바뀌였다. 모든 자들이 입을 저억 저억 벌리고 넋을 잃고 바라보는 가운데 나는 손가 락을 들어서 천천히 되뇌어 주었다. "금발은 길게 허리까지 오도록 해라." 녀석의 출렁이는 금발이 허리까지 늘어졌다. 욱, 내 얼굴에 금발이 허리까지 내려오다니 왠지 끔찍하군. "얼굴 바꿔! 얼굴! 일단 흰 피부에 약간 얼굴은 갸름하고..." 녀석의 머리통이 마치 밀가루 반죽하듯이 꿈틀 꿈틀 변했다. 그리고는 그 다음에는 눈과 코가 만들어 졌다. 입술이 내가 설명하는 대로, 그리고 옆에 사람들을 보며 그들을 모델로 해서 조금씩 변해갔다. "그리고 어깨는 조금 좁게 해. 그리고 가슴은 약간 튀어 나오고..아니, 뼈가 튀어 나오는 게 아니고 가슴이 튀어나오는 거란 말이다! 멍청아! 가슴에 뿔 달릴 일 있냐!" 내가 일일이 설명하지 않으면 끝이 없었다. 한 참 창조활동에 열을 올리고 있는데 문득 스카가 말했다. "여자로 변하게 하는 데엔 조금 무리가 있으니까 그냥 남자로 해라." "왜?" "너, 설마 저 놈과 잘 거야?" 스카가 세상에 다시 없는 변태를 바라보는 듯한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생각해 보니 그렇다. 아무리 나라도 저런 놈과 얼싸안고 잘 마음은 없었다. 여자로 바꿔봐야 힘 들기만 하지. 그래, 그래, 여자를 옆에 두고 똑같이 해라 하기 전에야 이 놈이 뿔 달린 가슴을 가지게 될 뿐이겠지. 쳇쳇... "알았다. 그냥 남자로 해라." 그 말이 끝나자, 녀석의 몸매는 거의 스카와 비슷한 스타일이 되었다. 나쁘지 않은데. 왠지 이 놈의 얼굴은 미끈한 미남자가 되었고 몸은 스카처 럼 근육질이 되었다. 옆에서 보고 있던 여주인이 호오 하고 감탄성을 지르 는 순간 나는 왠지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옆에서 스카가 멍청히 중얼거렸다. "이봐, 쿠베린, 너 뭐니 뭐니 해도 역시..그 변태 금발머리 마법사를 좋아하 는 거 아냐?" 그렇다. 변한 이 뱀대가리의 모습은..재수 없게도.. 그 놈의 금발 변태같이 되어 버 렸던 것이다!! "바꿔! 가,. 갈색으로 바꿔라! 머리털, 갈색으로 바꿔!" 내가 결사적으로 외치자 뱀대가리는 눈쌀을 찌푸리더니 갈색머리칼로 바꾸 었다. "이야..대단하다..그냥 마구 바뀌네.." 가빈이 감탄할 무렵 나는 허탈한 한숨을 내 쉬면서 말했다. "자아, 앞으로 내 모습으로 돌아다니지 마라. 이 얼간아." "난 얼간이가 아니다." "그럼 얼간이가 아니면 뭐란 말이야? 멍청아?" "난 멍청이가 아니다." "그럼 바보 천치겠지, 제기랄, 이런 말도 안되는 소동을 일으키다니." 나는 머리를 긁다가 멍청히 선 마미에게 말했다. "소리 질렀더니 배 고파, 먹을 것 좀 줘." "그런데 쿠베린, 저 녀석도 뭔가를 먹는 거냐?" 마미가 커다란 국자를 들어 뱀대가리를 가리켜 보였다. 뱀대가리는 멀뚱 멀뚱 나와 마미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표정이 멍청이라고 이외엔 표현할 데가 없었다. "안 먹어도 돼. 원래 저 놈은 유령이라구." 스카는 한숨을 쉬면서 유령이란 말을 듣자마자 다시 가게 벽에 달라 붙은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이제 돌아가시지. 나중에 쿠베린이 돌아다니면서 손해배상을 할 테니까." "야! 내가 미쳤냐? 왠 손해배상이냐!" 내가 열 받아 소리치자 스카가 손가락을 들어서 뱀대가리를 가리켜 보였 다. "저건 네 거잖아?" "아냐! 저건 내 거가 아니라구!" "어쨌든 네 주머니에 있었으니 네 거지. 네 꺼가 소란을 피웠으니 네가 책 임져야 할 거 아니냐?" "마, 말도 안돼!" "말이 안되기는! 그건 당연한 거다. 이봐요, 다들 돌아가." 그 말에 만족한 자들이 고개를 끄덕여 보인다. "그래, 손해배상을 쿠베린이 해야지. 결국은 쿠베린의 물건(?)이 소란을 일 으킨 거니까." "자아, 그럼 꼭 와요, 오호호호.." "이, 이봐!" 내가 소리지를 사이도 없이 사람들은 우루루 나가버렸다.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스카를 돌아보았는데 스카는 나따위는 잊어버리고 는 턱을 고인 채로 그 뱀대가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처구니 없는 동료가 생겨 버렸잖아?" "이게 무슨 동료냐! 이건....유령이라니까!" 가빈이 혀를 찼다. "맞아요....이젠 별로 무섭지는 않지만...골치아플 거 같아요." "그럴지도...쳇.." 내가 이를 갈고 있을 즈음 스카가 말했다. "네 주변은 왜 이리 괴상한 게 많으냐?" "그게 내 탓이냐?" "...그럼 내 탓이냐?" "......" "자아, 시끄럽게 떠들었으니 밥이나 먹어라." 마미가 구운 돼지 족발을 가지고 와서 탁자 위에 널어 놓기시작했다. "그리고 쿠브, 네가 박살낸 그릇, 네가 가서 사와라!" 멍청한 뱀 대가리는 멀뚱 멀뚱 족발을 바라보고 있었고 나는 그 것들을 향 해 공격을 시작했다. 원통하고 분한 것은 사실이지만 일단 먹고 보자구! 제 17화 복수 KUBERIN 운명과 우연은 종이 한 장 차이 눈 먼 여신은 눈 먼 칼을 휘두른다 1 "이리와!" "축하해요!" 사방에서 인사 소리가 시끄럽다. 나는 팔짱을 끼고 서서 건물을 훑어 보았다. 군터의 가게를 나와서 드디어 자신의 가게를 가지게 된 마리아는 들떠 있 었다. 내가 아는 놈들과 내가 모르는 놈들이 얽히고 섞여서 이리 저리 그 럴 듯한 건물들을 만들어 놓긴 했다. 이층짜리 건물에는 방이 일곱 개, 그 리고 아래층은 다들 그렇듯이 식당이었다. 식당을 담당하는 것은 그녀와 그녀의 동업자인 저 울보 떼쟁이 시끄러운 계집, 가슴 큰 베스가 맡고 있었다. 그녀는 날 보자 부끄러운 듯한 표정을 잠시 지었지만 그것도 그 뿐 곧이어 뻔뻔한 암컷 특유의 꼬장을 부리며 나 를 턱으로 부려먹으러 들었다. 내가 알고 베스가 알고 마리아가 알고 스카가 아는 놈들이 일제히 들어와 퉁탕 거려가며 가게를 꾸몄는데 마미의 사슴집 보다는 다소 작지만 그런데 로 아늑한 집이 되었다. 그런데..가게 이름이 '암사슴집'이라니, 그건 좀 심하지 않았나? "암사슴집이 뭐냐? 대체?" 내가 기가 막혀 묻자 마리아가 어깨를 으슥하며 나에게 걸레를 들어보였다. "뭐, 어때요? 그럼 숫사슴집이라고 할까?" "사슴이외에 다른 동물이란 없는 거냐? 하다 못해 늑대라든가 돼지라든가 개, 고양이도 있잖아? 대체 뭔 의도로 사슴이란 거야? 세상에 사슴집이란 이름의 여관겸 식당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 내가 알기만으로도 큰 사슴집, 사슴집이 널려있다. "차라리 마리아의 집이라고 해." 내가 말하자 그녀가 고개를 갸웃하면서 말했다. "하지만 그렇게 지으면 창녀집 같지 않아요?" "창녀집이 아니면 그뿐이지 뭐가 상관야?" "마리아와 베스의 집이라고 하면 어때요?" 옆에서 베스가 끼어들었다. "시끄러워, 그 쪽이 훨씬 창녀집 같다." 내가 말하자 스카가 내 뒤통수를 갈기며 슬금 슬금 문질렀다. "말하는 것 하고는, 차라리 쿠베린의 집이라고 하면 어떠냐?" "여긴 마리아 집이지 내 집이 아니잖아!" 내가 이 대담하고도 버릇 없는 놈의 멱살을 막 잡으며 그렇게 대꾸하자 마 리아가 어머 하고 말했다. "하지만, 이건 당신이 준 돈으로 산 가게에요. 여기가 쿠베린, 당신의 집이 란 것은 엘리야사람들 모두가 다 안다구요." "하지만 이건 네 집이고, 나의 집은 저기 마미의 사슴집이라구." 마리아는 입을 다물고 노골적인 태도로 날 노려보았다. "그럼, 당신, 나랑 같이 살 게 아니란 말이에요?" 나는 잠시 동안 할 말을 잊고 그녀를 보았다. ".....너, 마리아랑 사는 거 아니었어?" 스카도 묻는다. 나는 잠시동안 머리를 긁적이며 생각해 보았다. 내가 그런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가? "아닌데. 난 그저 마리아에게 가게를 하나 만들어 여주인을 만들어주고 싶 은 생각이었을 뿐인데..." 마리아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럼..나랑 결혼할 마음도 없었던 거군요." 갑자기 분위기가 어두워 졌다. 나는 베스와 스카와 어느 샌지 모르게 다가온 가빈의 눈초리의 홍수에 빠 져서 허우적거리다가 마리아를 빤히 바라보았다. 마리아는 화장기 거의 없는 맨얼굴로 희고 반듯한 이마를 드러낸 채 날 바 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에 그녀는 씁쓸한 미소를 짓더니 피식 웃었 다. "뭐, 상관하지 않아요. 쿠베린이 인간이 아니니까...." 그녀는 살짝 웃음 띈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늙어 죽을 때까지 사랑해 주겠다고 말해주었으니까 그것으로 끝." 그녀는 그렇게 발랄하게 말하고 내 뺨에 키스했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잡 고 입술을 가볍게 겹쳤다. 그녀의 얼굴은 약간 슬퍼보였지만 웃음은 여전했다. "몇년 살다 도망가는 남자와 쿠베린은 다르니까."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일어섰다. 그녀가 일어서서 주방으로 가는 동안 나는 턱을 잡고 멍청히 그녀의 뒷 모 습을 바라보고 있었고 스카와 베스는 나에게 분노와 질책의 오라를 펼쳐 내 등을 휘갈기고 있었다. 베스가 벌떡 일어서서 주방으로 걸어가자 마자 스카가 다시 내 등을 휘갈 겼다. 철썩 하고 소리가 크게 났지만 나는 움직이지 않고 앉아 있었다. "너, 이 자식! 정말...!" "너나 결혼해, 멍청아." "너...!" 일어서서 밖으로 나왔다. 엘리야의 거리는 여전하다. 나는 무심코 간판을 바라보다가 마리아의 암사슴집이라 걸린 간판을 바라 보았다. 오늘 밤은 파티다. 개업기념 파티가 열린다. 그녀의 오랜 꿈이 이 제 완성되는 것이다. 그녀는 창녀집을 나와 멋진 여주인이 되길 바라고 있었다. 엘리야에는 주 점이나 여관이 발에 밟힐 듯이 많지만 이 곳 엘리야에서 마리아처럼 예쁘 고 싹싹한 여자는 없으니 그녀는 곧 인기있는 여관의 주인이 될 거다. 게 다가 그녀는 내 애인으로 소문이 자자 하니까 감히 그녀에게 찝적거리는 놈은 있을 수 없다. 아, 그러고 보니 한 마디 해주고 갈 곳이 있긴 하구나. 나는 해가 지는 거리를 걸으면서 소금내음을 맡았다. 인간의 세상은 제법 골치 아프다. 여기저기 미리 이야기를 해 두지 않으면 머리도 나쁘고 눈치도 없는 것들 이 까불 까불 하는 일이 벌어지고야 마니까 귀찮다. 아름다운 밤의 여신의 옷자락이 슬그머니 항구에 드리운다. 이제 귀항한 배들과 선원들이 떠들썩하게 떠들어 대면서 여관과 집과 식당 과 주점을 들락거린다. 여행객들은 엘리야의 낯선 풍경을 구경하면서 이리 저리 떠들어 댄다. 내가 가려는 곳은 엘리야를 다스리는 또 다른 패거리다. 엘리야는 물론 표면적으로는 시장이 다스린다. 시장은 바보도 아니오 멍청 이도 아닌 그럴듯한 상인인지라 제법 운영을 잘해오고 있는데 그 반면에 속알맹이를 다스리는 다른 놈들이 있다. 인간세상 어느 도시에나 그렇듯이 지하조직이라는것들이 있다. 깡패라는 것들은 이상하게도 자경단과 불량배의 중간을 달린다. 예를 굳이 든다면, 도시가 침략 받았을 때는 자경단으로 돌고, 평상시에는 불량배의 행동을 한다. 이 놈들은 엘리야의 대 밀수단으로 인신매매와 기타 등등 사 악한 일들을 한다. 이 놈들이 자경단으로 변신하는 것은 자신들이 애써 구 축해놓은 매매조직과 도시를 지키기 위해서지, 누구 말대로 정의와 도시수 호를 위해서는 물론 아니다. 원래 인간은 정의를 수호하는 자들이 아니다. 정의를 수호하겠다고 나서는 자들은 내가 생각하기에는 정신병자지, 정상이 아니다. 누구든 뭔가를 위해 싸우겠다고 나서는 것들은 자기 성질과 자기 이익을 생각해서 나서는 것이 정상이다. 울화가 치밀어 싸우고, 내 가족을 위해 싸우고, 억울해서 싸우고, 아니꼬와 싸우고, 복수심으로 싸우고, 침범 당하기 싫어서 싸우고, 굶주리기 싫어서 싸우고, 다른 놈들에게 짓밟힐까봐 싸우고, 얕보일까봐 겁나 싸우고, 내 애 인을 위해 싸우고, 내 친구를 위해 싸우고...기타 등등 기타 등등.. 이 모든 이유를 종합하면, 결국 싸우고 전쟁하고 뒤집어지는 이유는 단 두 가지, 열 받아 싸운다와 내 이익을 위해 싸운다이다. 그런 걸 정의를 수호 하기 위해서라든가 세상 평화를 위해서라든가라는 기타 등등 이유를 대는 것은 정말로 구질 구질한 태도다. 음, 기타 등등 기타 등등이란 말이 마음에 들었다. 그러니까...결국 자경단이든 깡패든, 밀수 조직이든, 성기사단이든 한 꺼풀 벗겨보면 거기서 거기란 말이다. 평화라는 게 어디 그리 간단히 뒤집어 싸 운다고 해결되는 문제인가 말이다. 끌끌.... 아아, 지금 이런 고차원적인 이야길 지껄이고 있을 때가 아니지, 어디더라? 이미 어둑어둑해진골목길을 이리 저리 돌아서 결국 내가 찾으려는 놈들의 아지트로 왔다. 아지트랄 것도 없이 여긴 도박장이다. 도박장의 꼬맹이들이 골목길에 줄줄이 앉아서 건방지고 지저분한 자세로 어울리지도 않게 다리 죽죽 펴고 앉아서 기타등등을 하고 있다. 녀석들은 날 보더니 눈을 크게 뜨고 부시시 일어났다. 그 얼굴에 두려움이 서려있기 에 나는 즐거워 졌다. "어쩐 일이세요?" 한 놈이 날 아는 척하고 감히 말을 건다. 내 성격이 얼마나 고상하고 무서운지 잘 아는 다른 놈들은 일렬로 서서 내 가 뭐라 지시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 있어 왔다. 왜 불만이냐?" "아니오...보스에게 오셨다고 말씀드릴까요?" "그래, 유젠녀석좀 보자." 내가 앞장 서서 들어가자 녀석들은 다시 두 줄로 서서 지저분한 문을 열었 다. 지저분하기는, 짜식들. 이 놈들은 청소라는 것을 모르는 건가? 안그래도 도박장에서 술먹고 겔겔거리는 놈들이 많은데 여기 저기 쌓인 토 사물을 내버려두고 그냥 그 자리에 주저 앉아 있다니, 오크도 안하는 짓을 가끔 한단 말이야. 안은 매캐한 연기로 가득 차 있었다. 유카리를 피우는 놈들이 날 보고 희멀건한 썩은 생선눈깔로 쳐다 보는 것 을 무시하고 스윽 앞으로 걸어가 이층으로 올라갔다. 내 앞에서 안내하는 녀석은 한 걸음 앞서 뛰어가 이층의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보스! 보스!" "뭐냐?" 방안에서 기분 나쁜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그 안에서는 여자 냄새가 났다. 나는 이 자식이 대낮부터 여자끼고 누워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건방진 자식. 이 몸이 여기 이렇게 손수 왕림했는데 목욕제계하고 기다려야지 이 자식이 여자 끼고 뒹굴고 있어? 내가 방안으로 들어가자 침대에 누워서 비비적거리고 있던 놈이 황급히 일 어나 버벅거리면서 급하게 옷을 끼어 입는다. 그리고 옆에 누워 있던 알몸 의 여자는 엥 하는 얼굴로 급히 가운을 걸치고 일어섰다. "형, 형님! 어쩐 일이세요?" 대머리에, 얼굴에 주우우욱 흉터가 생긴 내 아담한 소년 몸매의 네 배는 되는 이 놈이 나에게 형님이라고 말하면, 나는 소름이 끼치고 일순 밥맛이 사라진다. 녀석은 비슬 일어서더니 옆에 선 여자를 발로 밀고 재빨리 탁자를 가리켰 다. "형님 어서 앉으세요!" "뭐야? 이 꼬마는?" 여자가 화가 나서 외치자 대머리 놈이 솥뚜껑만한 손을 들어서 여자를 콱 하고 갈긴다. 한 대 맞은 여자가 대굴 대굴 바닥을 구르자 나는 화가 나서 녀석의 가슴을 가볍게 걷어차 주었다. "켁." 녀석이 침대로 나뒹굴자 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침대가 빠각하고 부서지 는 소리가 났다. "이 자식이 누구 앞에서 손찌검이야? 너 죽어볼래?" "아,,켁켁.." 녀석이 버벅거리는 동안 나는 얼굴이 퉁퉁 부운 채 바닥에 주저앉은 여자 에게 턱짓했다. "나가, 눈치없는 계집." 여자가 욕설을 중얼거리면서 비슬 비슬 일어나 나가자 대머리는 가슴을 부 여잡고 겨우 일어나 앉았다. 자식은 반바지를 막 걸친 난잡한 차림새여서 나는 한 대 더 두들기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눌러 참았다. "..연락이나 해주고..오시지..켁켁.." 녀석이 침을 퉤퉤 뱉으면서 겨우 일어나 앉더니 나를 탁자쪽으로 앉게 했 다. 다른 놈이 재빨리 뛰어나가 음식을 들여오기 시작했다. 내가 좋아하는 족발이라든가 내장스튜라든가 고기파이등을 바리 바리 쌓아 놓고 치즈를 듬뿍 얹은 호밀빵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보니 조금 기분이 풀렸 다. "어쩐 일이세요? 여기까지 온 것은 근 일년만의 일이네요. 형님." "그 형님이란 소리좀 집어 치울 수없냐?" 내가 족발을 뜯으면서 묻자 녀석이 비시시- 어울리지도 않는 흉악한 얼굴 로 - 웃었다. "내가 형님을 만난게 열 살때니까 뭐어, 어쩔 수 없지요." 그래도 그 흉악한 면상으로 형님 형님 하면 내 정체성이 의심된단 말이다. 내가 어딜 봐서 너 같이 흉악한 놈의 형님이냐? 네 말을 들으면 마치 내가 너 보다 몇 배로 흉악하게 생긴 대머리에 왕덩치, 거기다가 눈알 부라리는 깡패처럼 느껴진단 말이다. "장사는 잘 되냐?" "뭐어, 델리암이 망했을 때는 좀 별로 였는데 요즘 그 룬드바른가 룰루 랄 라인가 하는 그 녀석이 여기 저기 군대를 보내고 있잖습니까? 그 군대의 병졸들이 유카리를 미친 듯이 피워 주는 바람에 장사가 제법 잘 되지요." 유카리란, 중독성이 있는 풀이다. 담배와는 다르다. 그 풀은 흥분 및 약간의 환각작용을 일으키는데 너무 피우면 피골이 상접 하고 식욕이 저하되고 신경질이 난무하며 히스테릭한 미친 XX로 돌변하게 되는데 가끔 피우면 기분전환이 된단다. 난 이런 약풀따위 질색이지만 워 낙 인간 세상이 복잡하다 보니 이런 걸 피워 기분전환을 하겠다는 놈들이 널려 있다. 뭐, 내 알 바 아니다. "그건 그렇고, 너 마리아가 여관낸다는 거 알지?" "압니다." "거기에 두 놈만 애들 붙여줘." "에?" 짭짭거리면서 치즈얹은 빵을 먹고 있던 놈이 눈을 크게 떴다. "형님이 거기 계실 거 아녀요?" "아니, 없을 거야, 난 마미의 집이 집이니까." "하지만 마리아의 여관도 형님이 사준 거잖아요?" "마리아에게 사준 거니까 마리아 꺼지." "헤에...." 녀석은 고개를 갸우뚱하고는 머리를 북북 긁었다. 머리털도 없는 주제에 뭘 긁어? "하지만...전 그 여자랑 형님이 결혼 할줄.." "내가 인간이냐? 결혼하게?" 내가 쏴 붙이자 녀석은 입을 다물고 흐음 하는 태도로 팔짱을 끼었다. "알았어요, 마리아에게 찝적이는 놈들 있으면 박살 내라는 거죠?" "그래." "그렇게 하죠. 두 놈 보내 둘께요. 뭐, 내가 보내지 않아도 형님 애인이라 는 거 엘리야 바닥이 다 아는 사실인데 깝죽댈 놈은 없겠지만.." "베스랑 마리아 단 둘이서 하는 가게야, 당연 찝적이는 놈이 나올 걸." "간이 배 밖으로 튀어 나온 놈이라면 그렇게 하겠죠. 머리가 제대로 붙어 있고 간이 제 자리에 붙어 있는 놈이라면 형님 애인인 여자에게 손은 커녕 말도 못붙일 거라구요." "미친 놈은 어디나 있기 마련이고, 여관에는 원래 미친 놈이 모여." 정상적인 놈은 여관에 없고 자기 집에서 잠을 잔다. "허긴..뭐, 외지 놈이 깝죽댈 수도 있겠죠...." 나는 주머니를 뒤적 뒤적 거렸다. 뭐 쓸만한 거 없을까 하고 뒤적거리자 기대에 찬 눈빛으로 번쩍 번쩍 하는 대머리놈이 침을 줄줄 흘리며 날 바라본다. "너, 뭘 갖고 싶냐?" "....음..뭘 주실 겁니까?" 두 손을 박박 비비는 놈에게 나는 아무거나 잡히는 것을 꺼내 주었다. 꺼내주고 보니, 언제 집어넣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둥근 물체였다. "이게 뭐에요?" 내가 번쩍거리는 것을 좋아하다 보니 틀림없이 보석이나 뭐 그런 것으로 생각했던 녀석은 얼굴을 찌푸렸다. 나도 그게 뭔지 기억이 안난다. 이 시커 멓고 둥근 게 대체 뭐지? 나도 그걸 들여다 보고 있다가 기억이 났다. "아, 그거 폭탄이다." "에에엑?" 놈이 놀라서 뒤로 물러서는데 나는 그 것을 도로 주워서 주머니에 넣었다. "뭐, 넣고 잊어버렸군. 왕년에 엘리야 앞에 널린 대포 해체 할 때에 주워넣 은 거야." "그, 그런 걸..주머니에 넣고 다니시다니!" 허걱 거리는 놈을 무시하고 부시럭 거리면서 다른 것을 꺼내어 주었다. 꺼낸 것은 번쩍 번쩍 빛이 나는 황금으로 만든 검이었다. "헤에..." 눈이 번쩍 번쩍 빛나는 대머리에게 설명해 주었다. "이건...내 기억에 아마..왕년 어딘가의 신전에서 가져온 거 같은데.... 검신 은 황금이고 여기 박힌 건 에메랄드, 루비, 사파이어야, 요기 조그마한 것 은 묘안석종류인가 부다." "..신전의 의례용 단검이잖아요? 이런 걸 ...어떻게 가지고?" "몰라, 어떤 놈을 몇번 패주니까 감사해요 하고 어떤 신관이 주었던 거 같 은데." "...주실거죠?" 침을 줄줄 흘리는 놈에게 건네주고 나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져." 나는 족발을 마저 뜯었다. 이 앞에 앉아 있는 대머리 자식을 만난 것은, 잘 기억나진 않지만 이 놈이 조그마한 10 살배기 꼬마일 때다. 내가 마미랑 같이 살기 시작할 무렵 이 자식은 동네에서 말썽피우는 미치광이 꼬마였다. 이 꼬맹이가 여기 저기 얻어터져서 마미의 집 밖에 널부러져 있었던 까닭에 마미는 이 미치광이꼬 마를 집안에 데리고 들어와 치료해주고 밥 먹여 주었다. 그랬더니 이노무 자식이 마미의 돈을 훔쳐 달아났던 것이다. 이 방자한 꼬마를 가만히 내버려둘 내가 아닌 지라 나는 엘리야를 뒤져서 -사실 뒤질 것까지도 없었다. 냄새만 쫓아가도 간단하다. 자식이 도망 가봐 야 엘리야 안이고 그 안에서 내 코를 벗어날 수가 있단 말인가- 놈을 찾아 내서 죽도록 두들겨 주고 훔친 돈의 배를 도로 빼앗아 왔다. 내가 도로 빼 앗아 오는 것은 좋지만 그 꼬마에게 배로 빼앗아 왔다는 이야길 들은 마미 는 그건 좀 너무했다면서 원금만 받고 나머지는 돌려주라고 했다. "왜? 어차피 훔친 돈이고, 이건 치료비 및 식비로 대체하면 맞는걸." 내가 그렇게 말하자 마미는 큼직한 두 손을 들어서 내 엉덩이를 철썩 하고 갈겨주었다. "갖다 주고 와. 꼬맹이 혼자 사는 게 얼마나 힘든데!" 나는 얼결에, 이 노무 꼬맹이 때문에 엉덩이를 얻어맞고 이 놈을 도로 찾 으러 가게 되었다. 녀석을 찾고 보니 왠 동네 깡패들이랑 어울려서 이미 이리 터지고 저리 터지고 있었다. 잘 되었다 싶어서 구경하고 있는데 이거 어쩐지 도가 지나쳐 보였다. 쬐만한 꼬맹이를 두들기는데 네 놈이나 달려들어서 발로 밟고 지지고 부러 뜨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 몸은 원래 연약한 놈을 건드리는 것을 무척 싫 어하는 지라 그 꼬락서니를 보고 있다보니 어쩐지 기분이 몹시 나빠졌다. 게다가 원래 내가 저 놈을 패러 온 것이 아니었던가? "야." 내가 말을 걸자 네 놈이 동시에 날 돌아본다. "뭐야? 이 꼬맹이가?" "간덩이가 부었냐?" 네 놈이 나를 째려보는 동안 나는 그 무지에 가르침을 주기로 마음을 먹었 다. 그리하여 나는 친절한 마음에 그 네 놈의 갈비뼈를 세어 보고 팔목뼈 의 강도를 가늠하고 다리뼈가 얼마나 연약한지를 조사해 주었다. 나의 치 밀하고도 친절한 조사에 녀석들은 눈물을 흘리며 너무 너무 감사해 했다. 너무 감사해 하는 거 같길래 나는 우아하고 정중하게 그 감사를 거절하고 걸레가 된 꼬마를 질질 끌고 마미의 사슴집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걸레가 된 꼬마에게 미리 한 마디 해 두는 것도 잊지는 않았다. "너, 마미의 돈지갑에 손을 대면 네 뼈가 몇 개인지 세어 주마." 녀석은 나의 친절함에 이미 목이 메어서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는지라 입 을 다물었고 얌전히 치료받고 밥 먹고 그 다음에는 마미의 사슴집에서 잔 심부름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노무 자식은 바람이 들어서인지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더니 곧이어 달아나버렸다. 그리고 그대로 엘리야를 떠나 버린 것이 었다. 그게 이 놈 10살 때 일이었다. KUBERIN 운명과 우연은 종이 한 장 차이 눈 먼 여신은 눈 먼 칼을 휘두른다 2 그 동안 녀석이 뭘 했는지 알 바도 없고 알 마음도 없었다. 녀석이 돌아온 것은 10년만, 녀석이 20세가 되어서 였다. 그동안 이 자식의 면상에는 길고도 끔찍한 흉터가 생겨 있었고 콩알만한 녀석이 어느 새인가 우락부락한 덩치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녀석은 오자 마자 마미의 사슴집 에 터억 하니 들어와 맥주를 시켰다. 마미가 맥주를 주자 녀석은 갑자기 맥주 한 잔값의 스무배가 되는 돈주머 니를 그녀에게 주었다. 그것을 받을 마미가 아니다. 마미는 그 것을 들여다 보더니 그 돈주머니로 녀석의 면상을 갈겼다. "뭐냐?" 멋지게 건네줄 생각이었던 녀석은 얻어맞고는 눈을 부라리며 고함을 고래 고래 질렀다. "빚 갚는 거야!" "너, 외상값이었냐?" 마미는 시큰둥하게 흉악한 면상을 한 놈을 훑어보고는 휘익 주방으로 가 버렸는데 그 다음 녀석은 주변을 돌아보며 외쳤다. "쿠베린, 쿠베린은 어딨어?" 나는 그 때 이미 내 지정석인 난로 앞에서 따스한 온기를 즐기며 맥주를 마시고 있던 차였다. 고귀하고도 우아한 내 이름을 감히 이 건방진 꼬맹이 가 마구 불러대는 것을 원치 않았던 나는 그 자리에서 맥주잔을 녀석의 면 상에 집어던졌다. "간이 부었냐?" 맥주잔을 얻어맞고 뻗을 줄 알았던 녀석은 큰 대자로 널부러졌다가 부시시 일어나는 괴력을 보였다. 나는 그 머리통의 강도에 깊은 감명을 받고 두 번째로 맥주잔을 던져 주었다. 그 두잔째를 얻어맞고도 멀쩡한 그 놈은 눈 두덩이가 밤탱이가 되어 나를 쏘아보았다. 그리고는 머엉한 표정을 지으면서 날 바라보았다. "....쿠, 쿠베린? 서, 설마? 조금도 안변했잖아!" 그 재회의 날 이후 녀석은 나를 형님이라 불렀다....는 이야기지만 나는 조 금도 기쁘지 않았다. 이렇게 생긴 놈이 날 형님이라 불러봐야 조금도 기쁘 지 않다는 이야기다. 사내자식이 형님 하면서 앵기는 게 뭐가 이쁘고 뭐가 기쁘겠는가? 어디까지나 예쁜 여자애가 오빠 하고 매달리는 것과는 감도가 틀리다. 감도가. 어찌되었든 이런 과거를 가지고 있는 이 대머리 자식은 스무살에 엘리야에 도착하자마자 고만고만한 놈들을 다 때려눕혀 자신의 조직을 만들고 난리 를 쳐대더니 어느 새 한 십년 지나니까 이 놈의 머리가 순식간에 벗겨진 것처럼 엘리야의 지하조직을 순식간에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어쩌면 이 자식은 머리칼과 조직을 바꿨는 지도 모른다. 조직의 두목이 되자 마자 머 리털이 왕창 벗겨졌으니. "요즘 공작소식 들으셨어요?" "아니." "무척 골치 아프게 된 모양이던데요." "네가 말하는 공작이란...그 놈인가?" "네, 아그랑의 베델공작이요, 그 공작이 지금 반 룬드바르의 선봉이잖아 요?" "그 쪽에 뭔 연관이 있냐? 너도?" "별 연관은 없지만 그 쪽에 무기 팔고 있어요." 녀석이 히죽 히죽 웃었다. 나는 시큰둥한 기분이 되었다. "룬드바르의 황제놈이 결국 아그랑을 대대적으로 칠 모양이에요, 허긴, 그 동안 봐준것도 특이한 일이었죠...계속 북진하느라 아그랑에서 그 난리를 치는 것도 내버려 두고 있었으니까." "......." "게다가 아그랑에는 델리암의 왕녀 엘란트라 왕녀가 반란군의 구심점이 되 어 있다고 해서 매우 시끄러웠어요. 그 쪽에 델리암의 왕년 기사단이 모인 단 소문 들으셨어요?" "....." 시끄러워라.. "게다가 델리암의 왕년 용병단들도 일제히 그 쪽으로 모이고 있구, 룬드바 르에게 침략당했던 화타린공국의 잔여 세력들도 아그랑으로 집결하는 거 같아요." "화타린 공국은 또 어디 붙어 있는 거야?" "남쪽 룬드바르 공국 옆에 붙어 있다가 제일 먼저 병합당한 나라잖아요." "....그쪽의 공족들은 거의 회유당했는데 그 중 막내 공자가 반대 세력을 이 끌고 북상했대요. 그리고선 엘란트라왕녀와 합류한 거 같습니다." "공자, 왕녀, 공작..골고루 한다." "뭐, 내가 보기에도 그렇게 델리암이 멋진 왕국이었던 것 같진 않지만 룬 드바르에게 망한 것은 썩 좋은 기분은 아니니까요." "엘리야 용병길드 놈들도 그 쪽이잖아." 내가 트릿하게 말하자 대머리가 고개를 끄덕 끄덕했다. "상인길드 쪽도 그런가봐요, 장사는 룬드바르와 하고 있긴 하지만 다들 식 량이니 물자를 그 쪽에다가도 팔고 있으니까요." 기분이 별로 좋지 않다. 베델이란 놈은 또 구국의 영웅이 되겠다고 깃발 들고 휘두르는 모양이고 거기에 어울리지않게 미트라까지 같이 손수건을 흔들고 있는 모양이니까, 이렇게 되면 일이 간단하진 않을 텐데. 내가 보기엔 델리암 소속의 병사들이나 기사들보다 룬드바르 놈들이 훨씬 강하다. 일단 놈들은 싸움에 이골이 난 놈들인데다가 제법 군율도 좋고 기 세도 잘 나가고 있는 형편이다. 룬드바르는 신흥제국이라 기세가 잔뜩 올 라 있는 중인데 거기다가 망한 나라 왕녀, 공자들이 끼어 든 어중이 떠중 이 집단이 룬드바르를 뒤집어 엎는다는 것은 사실상은 어려운 일이다. 뭐, 물론 저 잘난척하던 룬드바르가 단번에 죽어버린다면야 룬드바르가 와해될 것은 분명한 사실이겠지만. 룬드바르는 내가 보기엔 그 젊어서 정복하고 싶어요를 외치고 있는 그 놈 황제 하나만 빼면 와르르 쓰러질 가능성이 무척 큰 나라다. 신흥제국이니 까 더더욱 그럴 거다. 후계자도 정해지지 않은 것 같고. 허긴 이십대인 시 퍼런 놈이 벌써부터 후계자를 정해 놓을 리가 없지. 지금 한 창 재밌어 재 밌어를 외치는 중일 테니. "나, 간다." "네, 그럼 나중에 .." 밖으로 나와서 나는 한 숨을 내 쉬었다. 왠지 기분이 찝찝하다. 그만 모든 것을 접어 버리고 내 부족으로 돌아가 버릴까나 하는 생각도 든 다. 그러고 보니 요즘은 도무지 도전하는 놈이 없군, 내 빌어먹을 막내 동생 이래로 도전하는 놈들은 하나도 없다. 그렇게 센 놈이 씨가 말랐나? 아님 내가 너무 무서워 도전을 못하나? 이게 뭐야? 그래도 몇 년 마다 한 번 씩 덤벼오던 놈들이 도무지 소식이 없다. 그 변태 마법사들도 그렇고, 아크놈도, 킬트 놈도 대체 뭘 하고 있을까? 심심해서 나온 인간세상은 나를 더 심란하게 만든다. 엘리야에 너무 오래 있었는지도 모른다. 저 대머리 놈의 말 대로, 유젠의 말대로 엘리야에서는 나를 모르는 자가 없고, 나를 무시할 수 있는 자는 없다. 그러니까 결국 나는 심심해져 버린 것이다. 내가 젊었을 때...대체 그게 언젠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나는 싸움으로 날 을 지새웠다. 그런데 이 나이가 된 지금, 나는 남들 뒤꽁무니나 따라다니기 바쁘다. 나에게 시비 걸고 나오는 담찬 놈도 이젠 없고, 나의 존재에 압박감을 느 껴 즐겨 싸움을 청하는 용기 있는 놈도 없다. 한참 걸어서 마미의 집까지 걸어오는 데 문득 냄새가 난다. 뭐지? 이 냄새는? 코를 벌름이면서 낯익은 냄새에 조금은 의아해 하면서 문을 열자 가게 안 에 있던 자들이 일제히 날 돌아본다. 음식냄새와 뒤섞인 동족의 냄새에 나는 점점 기분이 기묘해 졌다. 조금 감 상에 빠져 있던 터라 녀석들이 와준 것은 반갑지만, 우리 종족이라는 놈들 이 안부따위 전하러 들락거리는 종족과는 차원이 다른 놈들이라 이 놈들이 등장했다는 것 자체가 뭔가 좋지 않은 일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왕!" 나를 보자 마자 고개를 푹 숙이고 무릎을 꿇은 것은 다크시온이고, 그 뒤 로 듀나시의 심각한 얼굴이 보인다. 게다가 로오나와 케이링이 있다. 이건 뭔가 이상하군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녀들을 돌아보자 로오나의 얼굴이 형 편없음에 또 놀라고 말았다. "왕, 용서를!" 다크시온이 다시 말하면서 이마를 바닥에 대고 조아렸고 뒤이어 듀나시역 시 고개를 숙여 무릎을 대고는 녀석답지 않은 자세를 취해 보였다. 게다가 로오나와 케이링도 고개를 푹 숙이며 무릎을 꿇는데 이건 도무지 여자 답 지않은 태도라 불길한 기분이 등덜미를 후려친다. "뭔 일이야?" 나도 모르게 낮게 물었다. 가빈과 스카가, 마미와 나란히 서서 파랗게 질린 얼굴을 하고 있다. "아빠!" 문득 탁자에 앉아 있던 작은 놈이 벌떡 일어선다. 케이링의 아들인 드레인 이었다. 녀석은 졸졸이 달려와 내 품안에 답삭 안겼다. 나는 녀석을 무의식 중에 끌어안고 쓰다듬다가 녀석의 뺨에 난 흉터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녀석의 뺨에는 화상과 흡사한 상처가 나 있었다. 왠만한 상처를 입기 전에 는 흉터따윈 남지 않는 우리들인지라 나는 드레인의 뺨 상처에 크게 놀라 숨을 멈출 뻔 했다. "이게 뭐야?" "...어떤 미친 놈이 달려들어와 공격했어. 아빠!" 드레인이 열 받은 목소리로 카랑 카랑 외쳤다. "뭐라구?" "녀석이 마을을 공격해서 그 미친 XX놈이 XXX해서 XXX했단 말이야! 그 래서 나도 너무 화가나서 싸워 줬어! 그랬더니 그 자식이 나에게 불덩이 를 던졌어! 너무 화가 나서 녀석의 심장을 꿰뚫으려 하니까 녀석이...나를 잡아 채는 거야! 건방지게 이 몸을 잡아채려 하길래 그 놈의 손목을 물어 뜯어줬어, 그랬더니 그 자식이 나를 불구덩이에 집어던지는 거 아니겠어? 그래서 말이지.." 떠들어 대는 드레인을 내버려 두고 나는 시선을 듀나시에게 돌렸다. "지금 말 사실이냐?" "네...왕." 듀나시가 고개를 못 든 상태로 말했다. "지금 내 아들의 말에 따르면, 어떤 마법사가 닥쳐들어서 감히 묘인족의 마을을 공격하고 내 아들에게 상처를 입혔다, 라고 이해하면 되는 거냐?" "네....왕." 속이 점점 부글 부글 끓기 시작한다. 등덜미로, 목안으로, 가슴으로 뜨거운 것이 스쳐 그게 전신으로 퍼져나간 다. "그렇다면 그 버릇없는 자식의 포를 떠서 사방에 걸쳐놓고, 그 자식의 배 후 배경 할 것 없이 박살을 내놨겠지?" "......." 진땀이 흐르는 얼굴. 듀나시답지 않은 그 얼굴. 로오나의 얼굴은 점점 창백해지고 팔 다리는 후들거리고 있었다. 내 목에 매달린 드레인의 몸이 두려움으로 굳어질 즈음 나는 다크시온을 향해 다시 물었다. "대답은?" 나는 드레인을 바닥에 내려 놓았다. 드레인은 달달 떨며 뒤로 물러서서 마미의 뒤로 재빨리 숨었다. 케이링과 로오나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사색이 되어 있다. 점점 기분이 나 빠지기 시작한다. "왜 대답을 못하지?" ".........죽여주십시오." 다크시온이 대신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다크의 턱을 그대로 걷어찼다. 녀석의 거구가 가게 저 끝으로 가서 처박혔다. 뭔가 부서지는 소 리가 시끄럽게 가게안에 울려 퍼졌지만, 다크는 신음도 지르지 않았고 그 자리에 있던 그 누구도 소리를 내지 못했다. 나는 한 걸음 내딛어 듀나시의 앞에 섰다. 듀나시의 목덜미에 땀이 흥건했다. 녀석의 옷자락이 피에 물들어 있다. 이 자식은 부상중이다. "대답해." ".....마법사가 들이 닥쳐서, 로오나의 딸 플라티나를 납치해 갔습니다. 왕." 듀나시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고했다. "이에르네와 미하라가 분전했고 다크와 다른 자들이 일제히 싸웠지만 소환 수와 싸우는 사이에 플라티나를 납치해 갔습니다....아소미나는 무사합니 다..." "다친 자들은?" "죽은 자는 둘, 부상자는 서른 일곱." 듀나시가 차분하게 말했다. "아이들은?" "아이들중에 부상당한 아이는 둘, 에이리와 야히르가 싸움중에 다쳤고, 다 른 애들은 긴급히 대피해서 다친 애들은 더 이상 없었습니다." "마법사는 몇이 왔지?" "......하나..였습니다." "하나라...소환수는 몇?" "열 아홉 마리였습니다...." 나는 그 말이 끝나자 마자 듀나시의 턱을 걷어찼다. 듀나시가 뒤로 나뒹굴 며 탁자며 의자를 박살을 내고 쓰러지자 마자 나는 로오나에게 시선을 돌 렸다. 그녀는 흠칫 하고 고개를 떨군 채 떨고 있었다. "마법사 하나라, 마법사 하나에 묘인족이 둘이나 죽고 납치를 당하는 치욕 을 지금 나에게 알리러 온 거냐?" "........" 케이링과 로오나가 떨고 있었다. 로오나의 얼굴에선 끊임없이 눈물이 흘러 바닥으로 떨어졌다. "게다가, 넌 어미가 되어서 자식을 납치당해?" 외치자 마자 로오나가 바짝 바닥에 엎드려 몸을 숙였다. 그녀의 전신이 바 들 바들 떨렸다. 나는 그런 그녀의 멱살을 잡아 들어 사정없이 주먹으로 후려갈겼다. 피가 튀기고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터져나왔다. 로오나의 얼 굴이 피범벅이 되도록 후려갈기고 나는 그녀를 던져버렸다. 로오나는 신음 소리 하나 흘리지 않고 나뒹굴고는 그대로 실신했다. 케이링은 입술을 깨물면서 그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자식을 지키지 못한 주제에 여기까지 기어들어와? 간덩이가 부었군!" "용서..용서를..." 케이링이 고개를 떨구고 있는 동안 나는 그녀에게 시선을 다시 돌렸다. "어떤 마법사냐?" "......여자였습니다. 인간의 여자라고는 보여지지않는 차가운 몸뚱이를 하고 있는 여자로, 겉으로 보아서는....마치 사인족처럼 보였지만 송곳니는 없었 습니다." "노랑머리에 노란눈?" "네...힘은 마법사라고는 할 수 없을 정도로빠르고 강했습니다. 게다가..소 환수 열 아홉 마리라는 것은...." "변명하지 말고 말해." 케이링이 움찔했다. "그것은 이틀 전의 밤입니다. 한 밤중에 갑자기 낯선 냄새와 살기로 모두 잠이 깨어 허공을 바라보니 소환수가 새까맣게 닥쳐오고 있었습니다. 그래 서 일단 마을의 아이들을 녹수정 동굴에 피신시키고, 나머지 자들은 그 방 자한 것들을 없애기 위해 모여들었습니다..... 하늘에 떠 있던 노랑머리의 여마법사가 지팡이를 휘둘러 우리들을 공격했 고 우리들 역시 놈들을 공격했습니다. 듀나시가 제일 먼저 마법사를 공격 하려 달려들었을 때 그 마법사는 이동을 하더니 스펠을 외우지도 않고 우 리들에게 불덩이를 내뿜었습니다. 그것을 피해서 공격하고 있는 중에 소환 수 중 하나가 녹수정 동굴을 공격해 들어가는 게 보였습니다. 놀라서 다크 가 동굴로 달려가고 여자들이 달려갈 때에, 그 여자가...마법으로 마을을 직 격했습니다. 유성우 소환이었습니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라고 모두 놀라고 있는 와중 에 미하라가 분노해서 그 년을 공격했고, 미하라의 아들 에이리가 따라서 공격했습니다. 그러자 로오나와 듀나시도 그 년을 공격해 들어갔는데 그 년의 실드에 막혀서 공격할 수가 없었습니다. 소환수들은 동굴을 향해 공 격해 가고, 여자들과 남자들, 모두들 소환수와 어우러져 싸우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 때 에이리가 다쳤고, 그 모습에 드레인이..흥분해서 달려들 자 저도..달려 들어갔는데....에이리가 다친 것을 보고 플라티나와 아소미나 가 달려들었습니다. 야히르도 달려들어 아이들이 공격하기 시작하자, 그 마 법사는 아이들에게 눈독을 들이고 마법을 펼쳤습니다. 그 때 다크가 나타 나지 않았더라면 에이리도, 드레인도 잡혔을 겁니다. 그렇지만 플라티나는 잡혀 버렸고, 하나를 잡자 그 년은 만족한 듯 웃으면 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우리들은 그 뒤를 따라 달렸지만..." 케이링의 얼굴에서 분노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년이 소환수에 타고 날고 있었기 때문에....그만, 놓쳐버리고 말았습니 다..." "그 마법사의 정체는?" "......모릅니다." "냄새는 쫓고 있냐?" "...네. 지금 냄새로 쫓고 있습니다....동남부로 사라졌다고 추측하고 있습니 다. 뒤를 쫓고 있는 것은 미하라와 바스티앙입니다." 소환수 열 아홉을 동시에 부르고,그 와중에 유성우 소환을 하고, 우리들의 공격을 막아냈다는 것은 정상적인 마법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건 킬트나 아크로서도 무척 힘든 일이다. 내 생전 그들 보다 강한 마법사는 본 적이 없으니까 이 마법사란 놈이 범상한 놈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한 사 실인 셈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감히 묘인족의 마을을 침범하고 내 딸을 납치해? 이건 도저히 묵과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등덜미로 분노가 덩어리채 넘어간다. 무럭 무럭 살기가 치솟아 견딜 수 없 다. 온 몸이 불타버릴 것 같은 기분에 나는 한동안은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분노, 분노, 분노, 분노, 분노, 분노...... ".....그 마법사를 찾아라...찾지 못하면 네 놈들 모두 죽는다." 그 말에 그 자리에 있던 녀석들이 모두 몸을 굳혔다. 혼절한 로오나를 빼 고는 다른 놈들이 두려움에 떠는 것을 보면서 나는 이를 갈았다. "감히 묘인족 마을을 침범한 대가를 치르게 해라. 그 어떤 놈도 우리를 건 드리고선 살아날 수 없어. 그 놈이 어디의 어떤 놈인지 몰라도, 그 놈이 발 견되면 그 놈이 있던 그 자리를 초토화 시켜라, 그 놈의 피붙이란 피붙이 는 모조리 다 죽여버려라! 놈이 소환수를 부리면 소환수를 갈기 갈기 찢어 라. 그 놈이 걷는 곳, 그놈이 머무는 곳, 그놈이 조금이나마 연관이 된 곳 이라면 모조리 죽여라. 전 대륙의 묘인족들에게 알려라! 감히 마을을 침범 한 놈이 어떻게 되나 그것을 가르쳐 줘라! 이 지상 어떤 놈도 감히 묘인족 에게 덤비지 못하도록 갈기 갈기 찢어 주어라! 묘인족의 마을을 건드린 대 가가 얼마나 무서운지 골수에 치밀도록 그 대가를 치르게 해라!" 손톱이 튀어 나와 손바닥을 긁어 핏방울이 떨어졌다. 나는 주먹을 펴서 내 피가 바닥에 떨어지도록, 그 자리에 있던 놈들이 그 냄새를 맡을 수 있도록 했다. "이 피에 맹세코, 그 대가를 치르게 해라! 나, 묘인족의 왕 쿠베린의 이름 으로 전 대륙에 명하노라!" 이그러진 얼굴로 케이링이, 드레인이 겁에 질려 고개를 숙였다. 분노로 눈 앞에 새빨갛게 변한다. 내 생전 이렇게 분노해 본 것은 난생 처음. 얼마나 내가 화를 내면 무서운 지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거다. 내 딸을 건드리다니, 내 아이들을 건드리다니, 그 만용의 대가를 충분히 치 르게 해주겠다! 피! 피! 피! 전 대륙을 피로 씻어도 이 분노는 풀리지 않아! KUBERIN 운명과 우연은 종이 한 장 차이 눈 먼 여신은 눈 먼 칼을 휘두른다 3 "여기를 지켜라." 눈을 크게 뜨고 벙벙한 얼굴을 한 스카와 가빈이 날 바라본다. 나는 주머니에서 금강석을 꺼내어 마미의 앞에 내려 놓았다. 그 도마뱀의 금강석이다. 에발룬인지 다발인지 그 자식은 눈치 없이 나오지도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 녀석을 마미의 방 한 가운데에 툭 떨어 뜨리고서는 조용히 말했다. "여길 지켜, 마미를 지키지 못하면 네 놈은 무저갱의 나락에 집어 던져 버 릴 거다." 듣고 있다는 것을 빤히 알고 있기에 나는 대답은 듣지 않았다. 스카가 걱정스러운 듯이 날 보며 말했다. "내가 따라가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잔소리는 듣지 않아." 나는 짧게 말했고 가빈은 입술을 깨물었다. 마미가 한 숨을 내 쉬며 나를 끌어안으려 하는 것을 무시하고 나는 그녀의 손등에 내 손을 얹었다. 그녀는 그런 나의 태도에 약간은 충격받은 양 바 라보았지만 나는 더 이상 그녀에게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간다." "...이제 가면 언제 올 건데?" "내 딸을 찾고 그 자식들을 갈기 갈기 찢은 뒤에." "....네가 말하면 어쩐지 매우..매우...무섭군." 스카가 더듬거리며 말하는 순간 나는 짧게 말했다. "진심은 무서운 법이지." 마리아의 집에 들려서 대머리가 보낸 두 놈이 와 있는 것을 확인했다. 두 놈은 나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려다 말고 얼어붙었다. 내가 풍기고 있는 살기에 얼이 빠진 양 두 놈이 비슬 비슬 뒤로 물러났다. 그 몰골에 베스와 마리아가 놀란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쿠베린?" "일이 있어 나간다." "어. 어디로? 얼마나?" 마리아가 평소와는 다른 내 얼굴에 당혹한 얼굴로 조용히 물었다. 나는 대꾸하지 않았고 그녀는 불안한 표정을 억지로 밝게 바꾸면서 내 목 을 끌어안고 키스했다. "잘..될 거겠지. 뭔진 몰라도 당신은 잘 할 거야, 그지?" "그래." 짧게 말하자 그녀는 내 목에 더 힘을 주고는 억지 웃음을 띈 얼굴로 고개 를 끄덕였다. "쿠베린은 원래 강하니까..걱정따윈 안할거야." "그래."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돌렸다. 길게 말할 생각도, 틈도 없다. 마리아는 나를 붙잡으려다 말고 불안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녀는 매달리고 울부짖는 짓 따윈 하지 않는다. 내가 나가는 걸음마다 배웅하듯 뒤를 따르는 마리아를 돌아보지 않고 나 는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그녀는 내가 문을 나서자 문 앞에서 걸음을 멈 추고 내 뒤를 묵묵히 지켜 보고 있었다. "갔다와...쿠베린." 그녀는 매달리는 대신 그렇게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을 뿐이다. 마법사라는 것은 쉽게 등장하지 않는다. 아니, 쉽게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천재적인 검사도 나올 수 있고 물론 천 재적인 마법사도 나올 수는 있다. 하지만 천재가 천재답게 강해지려면 그 천재를 가르칠 뭔가, 혹은 누군가가 필요하기 마련이다. 대륙마법사 길드는 원래 그렇게 큰 단체가 아니라 학술단체다. 그리고 그 중심부에는 학교가 있고, 그 마법학교 샤네리아는 델리암의 동 부도시 카에 위치하고 있다. 물론, 지금은 델리암이 아니라 룬드바르 제국 령의 일부다. 내가, 우리들이 그 곳에 도착한 것은 내가 엘리야를 떠난 지 하루만의 일 이었다. 새삼스레 연약한 것을 돌볼 필요도 없이 일직선으로 산과 강을 건너 그대 로 질주했다. 밤과 낮을 구별하지 않고 내 피가 들끓는 그대로 질주했다. 필사적으로 듀나시도, 다크도 쫓아왔다. 케이링역시 필사적으로 달렸다. 모 두들 쉬자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고 나도 쉬자고 할 마음은 추호도 없었 다. 뒤떨어지는 녀석은 로오나 뿐이었지만 그녀는 불평하지 않았다. 필사적으 로 따라오는 동안 몇번인가 피도 토했지만 아무도 돌아보지 않았다. 묘인족의 여자로서, 자기아이를 빼앗겼다고 하는 것은 엄청난 치욕이다. 그 것도 타부족에게 빼앗겼다고 하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치욕이며 싸 움으로 타부족에게 졌다는 것과 같은 정도의 치욕이다. 우리들이 싸움에 진 적은 역사이래 없었다. 우리들은 고대종족 중 가장 강 하며 우리들에게 감히 시비를 거는 자들이나 싸움을 거는 자들은 사인족 이외엔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런 우리들의 마을이, 여자들과 아이들을 위한 '마을'이 타부족에게 공격당해 아이를 잃었다는 것은 그 곳을 지키고 있던 여자들과 남자들이 모두 산채로 심장을 뜯기워도 할 말이 없는 치욕중에 치욕이다. 로오나는 앞으로 얼굴을 들지 못할 것이다. 그녀가 그녀 손으로 아이를 구출해 온다 할 지라도 그녀가 겪었던 그 수치 는 그녀의 등에 낙인처럼 남아 경멸의 시선을 피할 수 없다. "...아빠.." 드레인이 속삭였다. 나는 녀석을 등에 매달고 달리는 중이었다. "...배고파." 나는 도시의 입구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드레인의 말이 맞다. 우리는 먹어야 한다. 쉬지않는 대신 먹는 게 좋다. 도시 카는 꽤 번성한 곳이지만 조용한 곳이었다. 이곳은 기술학교와 마법 학교가 있어 유명한 학술도시라 엘리야와 같은 번잡함 따위는 없었다. 우리가 주변을 돌아보다가 적당한 식당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오후로 넘어 갈 즈음이었다. 로오나의 파랗게 질린 얼굴은 남자들의 동정을 샀는지 그녀가 우리뒤를 따 라 들어가자 식당 주인은 얼른 다가왔다. "이런, 아가씨..이리로 앉아요. 지쳐 보이는 군요.." 로오나는 고개를 저어 그를 밀치고는 내가 자리 잡은 탁자 가까이에 와서 섰다. 파랗게 질린 얼굴을 차마 케이링이 보다 안된 듯 슬그머니 자신의 뒤로 밀어 내 눈앞에서 안보이도록 가렸다. 나는 모른 척 그녀쪽을 보지 않았다. 보면 울화가 치밀어 오를 것 같았고 그녀역시 날 보면 공포에 질릴 것임이 확실했다. 나와 드레인이외에 앉아 있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드레인은 내 앞에서 약간 주눅이 든 얼굴로 빵을 조금씩 뜯어 먹기 시작했 고 한 테이블에 앉지도 않고 선 듀나시와 다크는 케이링과 같이 음식을 먹 기 시작했다. 로오나는 그나마 먹지도 못한 채로 멀건히 서 있었다. 우리들의 이 몰골이 괴이쩍은 것은 사실이고, 그 때문에 식당안 사람들이 흘긋 흘긋 보기 시작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렇지만 참견할 자격은 없다. "이봐요. 앉아서 드시구려." 식당 주인이 멀대같이 큰 다크와 듀나시가 버티고 서서 살벌하게 음식을 먹어치우자 보다 못해 한 마디 했다. 우리들은 적어도 한 명당 인간의 분 량으로 사인분이상 먹어치웠고, 다크와 듀나시 둘이서만 돼지 한 마리, 오 리 열 마리는 먹어치웠다. 그렇게 먹어치우는 덩치 큰 두 놈이 버티고 서 서 앉지도 않고 아귀 아귀 먹고만 있으니 눈에 거슬릴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다크는 대꾸대신에 주인을 쏘아보았고 주인은 그 살벌한 눈초리에 얼어서 뒤로 물러섰다. 평소라면 깔깔 웃어대었을 케이링도 입을 다문채 먹는 것에만 열중했다. 그나마 로오나는 입술을 깨문 채로 불안정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식당 안이 조용해지는 동안 나는 식사를 마쳤다. 내가 일어서자 듀나시와 다크도 황급히 따라 몸을 돌렸고 케이링은 로오나 를 슬그머니 부축하면서 따라 나섰다. 식대를 지불하자 주인은 안도한 듯이 받아 들었고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 고 밖으로 나갔다. "...아빠, 어디로 ..가는 거야?" 드레인이 불안한 듯이 물었다. "마법학교." 나는 짧게 대답해 주었다. "누구시오?" "교장 만나러 왔다." "이봐요..." 길게 말할 필요가 없었다. 난 드레인을 등 뒤에 매단 채 그대로 정문을 후려갈겼다. 퍼어어엉 하는 소리와 함께 대문이 박살나서 허공으로 파편이 치솟아 오르 자 앞에 섰던 중년의 문지기가 새파랗게 질렸고 뒤이어 와글거리면서 경비 같이 보이는 기사들 서넛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약 이백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이 마법학교는 유명한 마법사 라실이 지은 것으로 왕립마법학교가 될 뻔도 했던 그런 곳이다. 물론 왕립마법학교였다 면 이 학교는 델리암의 멸망과 더불어 박살이 났을 테지만 델리암왕실은 마법사에게 그다지 호감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 왕립으로는 지정하지 않았 다고 한다. 그러나 굳이 지정할 필요는 없었다. 이곳의 교장은 전 대륙의 마법길드마스터이니까 그 권력은 충분했다. 크기는 웬만한 영주의 거성만한 크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보는 사람들은 다 위압감에 질려버린다고 한다고 스카가 말했다. 그러나 내가 이따위 건 물에 질릴 이유는 조금도 없다. "무슨 짓이냐?" "침입자다!" 기사들이 달려들어 검을 휘두르는 동안 나는 드레인을 안은 손에 힘을 주 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어느 정도 맛을 보여줘야 이런 놈들은 정신을 차릴 것이다. 이백년 동안 귀족처럼 고압적인 자세를 가져온 이런 마법사 놈들 은 먼지가 나도록 패줘야 고분 고분해진다. 나 대신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다크와 듀나시, 그리고 케이링이 달려들 어서 기사들을 도륙했다. 피가 낭자하고 팔다리가 저택의 담장에 내어 걸 리자, 이제서야 심각성을 깨달은 듯한 몇몇 마법사들이 달려들었다. "이런..천인무도한..." 그 순간 듀나시가 몸을 던졌다. 주문을 걸려고 하는 마법사의 자세나 입 모양은 너무나 뻔한 것이다. 그의 손톱이 허공을 가르면서 제일 앞에 있는 마법사 녀석의 목을 자르고 뒤이어 옆에 있던 녀석의 턱을 갈라버렸다. 피가 치솟자, 창백한 얼굴의 마 법사들이 비명을 올리며 뒤로 나자빠진다. 너무나 빠른 속도에 마법사들이 주문을 외울 기회를 놓치고 뒤로 도망치기에 바빴다. 도망친다고 해서 해 결될 일은 아니지만 이 무력한 입만 나불대는 자들의 등줄기를 가르면서 듀나시가 음침하게 외쳤다. "교장은 어디냐?" 다크는 무표정한 얼굴로 학교의 담장을 밟고 도약했다. 그는 이층의 창문 을 뚫고 그대로 돌진했고 케이링과 로오나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정 문의 현관으로 뛰쳐들어갔다. 비명소리, 그리고 몇몇이 마법을 써서 뭔가를 터뜨리는 소리가 나는 것을 음미하면서 나는 드레인을 안고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이..이게 무슨 짓인가? 대체 누구냐?" 나는 드레인을 안은 채 덜덜 떨고 있는 소년들과 늙으수레한 마법사를 바 라보았다. 이곳이 그냥 단순한 마법길드였다면 여기저기 마법의 아이템이 걸려있어 우리들이 들어오는 데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은 마법학교도 겸하고 있기에 어린 학생들을 위해서인지 전혀 트랩 따위가 없 었다. 늙은 마법사는 책상을 앞에 둔 채로 어린 아이들을 바닥에 끌어내 앉히고 있는 다크와 듀나시, 케이링과 로오나를 바라보다가 나를 돌아보고는 입을 벌렸다. "....묘인족?" "잘 알고 있군. 그리 잘 알고 있으니 간단히 말해두지." "..대체 이게 무슨 짓이지? 묘인족과 우리가 무슨...!" 노인의 얼굴이 파랗게 질리면서 수염이 파르르 떨렸다. "마법사가 내 아이를 데려갔다. 소환수 열 아홉 마리를 부리는 여 마법사, 노란 눈, 노란 머리의 인간답지 않은 여 마법사다." 그의 눈이 커졌다. "아느냐? 모르느냐?" "......이, 이보시오!" "여기는 마법길드다. 모르느냐? 아느냐?" 나는 손톱을 뻗어내어 노인의 코앞에 들이대었다. 천천히 뻗어나간 손톱이 노인의 코 앞까지 가서 멈추자 노인은 칼날처럼 곧게 뻗어 내린 손톱을 공포로 바라보았다. "으...." "나는 성질이 급하다. 만약 말하지 않겠다면 네 눈앞에서 이 애들의 사지 를 찢고 네 얼굴에 그 내장을 던져주마." 내가 손짓하자 다크가 제일 앞에 있던 꼬마의 팔뚝을 잡아 서슴없이 손톱 을 내리 그었다. "꺄아아아악!" 피가 튀기고 아이의 살점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모여 앉은 아이들은 울음을 터뜨렸고 당한 아이는 벌벌 바닥을 기면서 공포와 고통으로 울부짖 었다. 노인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그만해! 그만 두라구!" "대답은?" "이, 이런 짓을..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할 거라.." "질문은 내가 한다. 길드마스터, 누구냐?" "........당신도. 아이가 있다면...이런 짓은...." "누구냐?" "......노란 눈의..파괴의..여마법사.." 노인이 눈을 감고 필사적으로 중얼거렸다. 그는 억지로 기억을 퍼올리듯이 두 주먹을 쥐고 입술을 읊조렸다. 그러나 그 순간 나는 노인의 턱을 손톱으로 처올렸다. 퍼억 하고 핏방울이 공중으 로 튀어 올랐다. "누굴 바보취급하는 것인가? 마스터." 노인의 입안이 피투성이가 되어 책상과 흰 수염으로 울컥 울컥 피가 쏟아 져 내렸다. "내 앞에서 주문을 외려 하다니, 간덩이가 부었군." "우욱..." 노인은 피를 토하면서 피가 솟아나는 턱과 입을 부여잡았다. "그 마법사의 이름과 위치를 말해, 그럼 우리는 간단히 물러선다. 아니고 버틴다면 이 애들은 다 죽는다. 그리고 오늘 대륙마법길드는 새 길드 마스 터를 뽑아야 할 거다." 내 말이 아마도 진담으로 들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내가 고갯짓하자 아까부터 공포로 덜덜 떨고 있던 꼬마 하나를 잡아 든 다 크가 이번에는 다리를 댕겅 잘랐다. "으아아아아악!" 아이는 비명을 질렀다. 마치 인간이 돼지를 잡듯, 날카로운 비명이 방안으 로 울려 퍼졌고 주변에 앉아 있던 애들은 모두들 귀를 부여잡고 울부짖었 다. "아아악.." "아악!" "조용히 하지 않으면 다른 놈들도 잘라 버리겠다고 해." 시끄러워 내가 그렇게 말하자 다른 놈들의 비명소리가 멈추었다. 그러나 팔 하나 다리 하나를 잃은 꼬마는 바닥을 기면서 피를 바닥에 묻히 고 있었다. 녀석이 움직일 때마다 바닥에는 검붉은 반원이 생겨나고 있었 다. "으흑흑...서..선생님..." 아이가 울었다. 노인은 머리를 잡은 채 붉어진 눈으로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도 붉고 입도 붉고 수염도 붉고 흰 로브도 붉게 피로 물들어 그는 마치 붉은 색 일색의 노인네같았다. ".....그..그 여자는 자세한 것은..나도 모르지만.." 그는 발음이 새는 소리로 중얼거렸다. "...흑마법사중 하나로, 파괴의 마법사라 불리는.....룬드바르 제국의 군대를 따라 이동하는 걸로 알고 있소..." "룬드바르 황제의 직속마법사 인가?" "....그럴..거요, 자세한 것은 모르오, 우리들은 그녀를 교육시키지 않았고 흑 마법사 길드는 그녀를 모르고...얼마전, 흑마법사 길드 바빌덴이 그녀에게.. 파괴당해서..." 노인은 피가 울컥 울컥 나오는 입으로 말했다. 입술이 베어져 타액과 피가 한꺼번에 얽혀서 뚝뚝 떨어져 내린다. "어디 있나? 그 여자는?" "......모르오. 군대에 따라, 황제의 명령에 따라 움직인다고 알고 있으니....황 제나...알고 있을까...?" 그는 자조적으로 그렇게 말하고 날 바라보았다. 증오와 분노를 담고 그는 날 바라보며 낮게 외쳤다. "묘인족에게 저주가 있으라!" 나는 웃었다. "그 말을한 거인족과도 살아남은 우리다. 인간의 저주 따위로 움직일 우 리가 아니지. 잘 들어라, 인간의 마법사여. 내 아이가 무사하기를 기도해라. 만약에 우리 아이가 잘 못 되었다면 너희들 마법사의 무리는 오늘로서 씨 가 마를 것이다. 너희 마법사는 나의 아이를 건드렸다. 전 대륙에 걸쳐 내 말을 전하라. 내 아이가 잘 못되었을 때에는 흑마법사 적마법사 백마법사 가리지 않고, 그 놈이 마법사라는 이유만으로도 전대륙의 마법사란 마법사는 모조리 죽 일 것이다. 너희들이 이성이 있다면 우리들 묘인족이 어떤 존재인지 알고 있을 것, 허언을 할 이유도 없고 너희들에게 동정을 가질 이유도 없는 종 족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거다." "..하지만! 우리들은 이 일과 아무런 상관도!" 나는 웃었다. "흐, 웃기지 마라. 너희들 인간은 아무 상관도 없는 숲속의 짐승을 사냥하 며 즐거워하지 않는가? 웃으며 사냥하는 너희들이 여우에게, 사슴에게, 토 끼에게, 늑대에게 상관이 있어 죽였던가?" 나는 아래에서 피를 뿌리며 기고 있는 꼬마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 꼬마는 나에게 있어 토끼새끼정도에 불과할 뿐이야, 잔인하다는 말 따 위 지껄일 필요는 없다. 마스터여." "...다른 이의 잘못으로 우리까지..왜!" 그는 내 말을 듣고 있지 않았고 나 역시 내 말을 듣고 있지 않은 놈에게 내 금쪽같은 시간을 내 줄 시간은 조금도 없다. "가자." 나는 짧게 말했고 내 종족들은 내 뒤를 따라 뛰쳐 나왔다. KUBERIN 운명과 우연은 종이 한 장 차이 눈 먼 여신은 눈 먼 칼을 휘두른다 4 킬트가 말했었다. 하나가 더 있다고. 파괴를 즐기는 계집으로 저 분홍주둥이보다 더 한 놈이라고. 나는 팔짱을 끼고 인간들을 본다. 인간들의 간계에 빠져서 허무한 멸망의 길을 걷는 슬픈 사인족의 최후를 기억한다. 사인족의 왕은 인간도 아니고 사인족도 아닌 만들어진 기이한 계집의 품안에 안겨 울부짖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유일한 바램- 사인족이 불안정한 혼혈이나마 그 피를 이어가고자 했던 그 바램은 인간들의 간지 (奸智)와 호기심으로 물거품이 되었다. 속임수와 속임수, 그렇게 간절하지 않았다면 속을 리 없었던 그 절망감. "어디로 가는 거에요? 아빠?" 드레인이 물었다. 나는 밤의 여신의 옷자락을 붙들며 달리고 있었다. 숲안의 짐승들이 놀라 이리 저리 달린다. 등덜미에 매달린 보랏빛 하늘이 음울하게 매달린다. 발밑에 밟히는 풀잎들은 검푸른 빛을 띄고 내발아래 서 으스러진다. 쉴 새는 있었지만 쉬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어디로..." 드레인이 녀석 답지않게 약간 주저하며 다시 물었다. "..아그랑." 나는 짧게 대답했다. "안녕하십니까? 왕." "오랜만입니다. 왕." 고개를 숙인 녀석들이 다가와 있었다. 나는 아그랑을 내려다 보면서 아그랑의 서북면을 감싸안고 있는 나즈막한 산 에토일의 산등성이에 서 있었다. 드레인이 내 옆에 서서 나처럼 아그랑 을 내려다 본다. 아그랑은 여전히 풍요롭고 아름다운 도시처럼 보이지만 일촉즉발의 아슬 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 거리에는 살기를 띈 용병들과 병사들이 스쳐지나가고 물건들과 물건들이 길목마다 오락가락하고 있다. 이미 반년가까이 반 룬드바르의 분위기를 잡 아 놓은 터라 피난민들은 이미 아그랑을 떠났다. 이제 남은 자들은 끝까지 아그랑과 운명을 같이할 자들 뿐인 것이다. 그 덕에 델리암의 충신들 뿐 아닌 타지방, 타국민도 바글 바글 끓고 있다. 나는 기묘한 기분에 사로잡혀서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었다. 등 뒤에 모인 나의 일족들. 이 들이 이만한 숫자로 한번에 다 모인 것은 이번이 처음. 예전 사인족의 난리때에도 몇몇 젊은 놈들만 모았지 이런 묵직한 놈들을 다 모은 적은 없었다. 마을이 공격받았다고 하는 것은 이들의 심장을 뜨겁 게 달구어 놓고 그들의 핏줄에 분노를 들끓게 했던 것이다. 마을을 떠난 지 오래된 나이든 자들이 이 자리에 다시 모여 내 앞에 있다는 그것 자체 가 그들의 분노를 대변해 주고 있었다. 나이든 자들- 이백세 이상 된 자들 중에 나에게 도전하지 못한 자들과 도전을 했다가 패했던 자들은 내 앞에 되도록 나타나지 않으려 했었다. 그들은 자존심 때문에, 혹은 두려움과 그 들이 맛봤던 고통 때문에 내 앞에 나타나기는커녕 내가 돌아 다니는 지역 을 피해 다녔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이 모여 있는 것이다. 나는 기쁜 것인 지 슬픈 것인지 잘 알수 없는 모호한 기분에 사로잡혀서 마치 어제 처음 왕이 된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다크시온이 새로운 시중인 앗시아를 보 며 기묘한 표정을 짓고 있듯이 나 역시 낯익은 얼굴들을 보면서 기묘한 기 분이 되어 버렸다. 지금 '마을'은 없어졌다. 난장판이 된 마을따위, 한뼘의 땅 따위는 우리에 게는 관심이 없었다. 우리에게 있어 당면한 문제는, 감히 우리들을 공격하 고 왕의 딸을 납치해간 말도 안되는 발칙하고 더러운 인간마법사를 찾아내 갈기 갈기 찢어 그 죄의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것이다. 여자들은 자기 아이들을 각자 등에 메고 있었다. 우리 아이들은 인간의 아 이나 짐승들처럼 약하지 않다. 드레인도, 어린 드레인도 인간의 병사 수십 정도는 없앨 수 있다. 어떤 야수들도 감히 묘인족의 애들에게 덤벼들진 않 는다. 어릴 때부터 우리는 강했다. 어미가 없어도 우리는 두 발로 설 수 있 다. "지금부터, 왕의 이름으로 명한다." 나는 짧게 말했다. 숲 안 바위나 나무둥치 아래에 여기 저기 앉은 녀석들은 이미 자신들의 기 량과 힘과 기술을 서로에게 견주며 다음 번 도전할 자가 누구인지를 찾고 있었다. 안그래도 우리들의 기운으로 살벌한 이 작은 산은 젊은 녀석들의 내뿜는 살기로 가득 차 숨이 막힐 지경이 되어 가고 있었다. 산짐승들은 이미 피난해 버렸고 작은 벌레새끼 하나 울지 않아 사방은 우리들이 내는 소리만으로 가득 차 있는 상태였다. 내 말이 끝나자 녀석들이 동시에 날 바라본다. 여자, 남자, 아이들이 섞여서 동시에 나를 바라본다. 동경과 질시와 존경과 두려움 등 온갖 것들이 섞인 녀석들의 눈이 날 바라 보고 있다. "복수가 끝날 때까지 도전은 없다." 여기저기서 허억 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건방진 것들, 감히 어디서 소리를 지르는 거지? 내가 다시 쏘아보자 녀석들이 입을 다물고 불만과 격렬한 감정을 담고 날 바라보고 있었다. 묘인족들에게 있어서 도전이란 것이 없다면 삶에는 즐거 움이 없다. "알아들었나? 일족끼리 싸우는 것은 금지다." 내가 외치자 녀석들은 한 동안 나를 항의 섞인 시선으로 바라보았지만 곧 이어 한 번 더 노려보자 눈길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우리의 목표는 간단하다. 인간 따위가 얼마나 무력한지 그 것을 보여주는 거다." 속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한다. 제길, 인간, 인간, 인간! 그 나약한 존재여! "플라티나를 납치해간 그 건방진 마법사는 내버려 둬라, 그 년은 내가 찢 는다. 너희들은 그년의 주변 인간들을 철저히 없애라. 어느 종족도 어느 부 족도 어떤 놈들도 감히 묘인족을 건드릴 수 없다는 것을 철저히 보여줘라. 정당한 도전에 의한 것이 아닌, 추잡스런 잔재주 따위로 우리들을 건드린 자들에게 자신들이 얼마나 미약한지 보여줘라. 약한 놈들을 건드리는 것 따위 조금도 즐겁지 않지만, 감히 우리를 건드리려 한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그것을 알려줘라. 이 땅 전체에 우리들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강력한 존재인지 보여줘라! 이 땅위에서 가장 강한 것은 사인족따위도 아 니고 조인족따위도 아니다! 이 땅위에서 가장 강한 것은 바로 우리다!" "우오오오오오오오..................." "쿠오오오오오오오................." 울음소리가 터져 나갔다. 이 땅을 모조리 뒤덮을 살기가 퍼져나갔다. 흥분한 녀석들이 울부짖는다. 어느 누구하나 흥분하지 않은 자들은 없다. 여자들은 아이들을 안고 울부짖고 아이들은 흥에 겨워 울부짖는다. 우리들의 피는 들끓고 있다. 우리들의 피는 원하고 있었다. 새파란 하늘, 붉은 땅과 푸른 숲 전체가 울부짖었다. 대지의 여신이여 우리들의 분노를 보고 우리들의 힘을 느껴보시오. 우리들이 곧 그대에게 제물을 올릴 것이오. 피의 제물을. 나는 부풀어 오르는 몸을 느끼며 걸었다. 어느 새인지 다가온 시중인 꼬마 앗시아가 내게 재빨리 옷을 걸치게 해 주 었다. 녀석은 내 옆에 금방 달라 붙어 고개를 숙인 채 한 걸음 뒤로 조심 스레 걷는다. 그 모습을 다크녀석이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다크 녀석의 옆에는 언젠지 웬 여자 하나가 달라 붙어 있다. 케이링의 옆에서 걷는 드레인은 어느 새인지 플라티나의 쌍둥이인 아소미 나에게 달라붙어 있었고 아소미나는 바로 옆에서 걷는 창백한 로오나에게 달라 붙어 있었다. 지금 이 자리에 없는 것은 자신의 아들에게 부상을 입 힌 그 방자한 마법사를 쫓아간 미하라정도였다. 흠, 그러고 보니 한 놈 더 있었지. 바스티앙이다. 아직 어리지만 제법 매서운 눈매를 하고 있던 놈. 그 년을 어디까지 따라 붙었지? 왜 소식이 없지? 미하라의 아들 에이리가 야히르와 나란히 걷고 있다. 없는 미하라 대신에 유티아가 그들에게 바짝 붙어 걷고 있고 쇼나와 이에르네가 입을 꽈악 다 물고 케논과 라비니아등 아이들을 앞세운 채 걷고 있었다. 여자들의 살기 가 더욱 살벌했다. 마을은 여자들의 것이었다. 그 여자들의 거주지를 건드린 그 여자 마법사 에 대한 분노는 그녀들이 더 컸다. 게다가 아이들이 다쳤다. 비록 상처는 금방 아문다고는 하지만 아이들을 다치게 한 그 여자에 대한 어미들의 분 노는 매우 컸다. 사내들은 흥분해서 그저 무턱대고 싸우고 싶어할 뿐이지 만 여자들의 살기는 차갑고도 매서웠다. 우리들이 아그랑에 도착했을 때 도시 입구에서 자경단 같은 것들이 시선을 보내 왔다. 경계를 서고 있었던 듯한 창을 든 두 명의 사내들이 다가와 우리들 앞을 막았다. "이봐!" 살기를 무럭 무럭 풍기고 있는 집단이 나타나긴 했지만, 아이와 여자들이 섞여 있는 지라 적이라 생각하진 않고 난민인가 하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적극적으로 막는 대신에 덩치가 큰 나와 몇몇을 겨누어 창끝을 들이대고 외쳐 물었다. "어디서 온 거냐?" 건방진 것들, 감히 우리들이 난민이라고 생각하다니. "거기 서라!" 가죽의 갑주를 걸친 녀석이 무시하고 걷는 나에게 뭐라고 막 창날을 들이 대려는 순간, 앗시아가 튀어 나옴과 동시에 피가 튀었다. 꼬마의 손톱이 녀석의 눈알을 꿰뚫고 뒤통수로 빠져 나왔다. "으악!" 비명소리가 요란해지자 순식간에 거리 가득히 자경단 같이 생긴 것들이 십 수명 뛰어 나왔다. 미리 적들을 생각해서 배치되어 있었던 듯 녀석들은 창 과 칼을 휘두르며 삽시간에 불어나 우리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적이다!" "적!" 녀석들이 일제히 창날을 겨누면서 달려들자 어린 아이들이 제일 먼저 흥분 했다. 자제력 부족한 아이들이 튀어 오르면서 칼과 창을 앞세운 놈들의 목줄기를 꿰뚫으며 뛰쳐 나갔다. "야아!" 피가 사방에 퍼져 나간다. 나는 팔짱을 끼고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아그랑의 수비 태세는 나쁘지 않은 편이지만 우리들을 상대로 싸운다는 것 은 바보짓이다. 멍청한 짓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라이트닝!" 갑자기 빛줄기가 우리들 사이로 작열했다. 피해를 본 녀석들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 마법이 펼쳐진 그 순간 튀어 올 라 피해버렸기 때문에 애꿎은 바닥에 깔린 타일만 부서져 버렸을 뿐이었 다. 그러나 그 작은 마법이 발동된 순간 녀석들의 이성이 뚝 하고 끊어졌다. "마법사다!" "마법사!" 순간 눈을 가리는 살기가 퍼져 올랐다. 눈이 시뻘개진 녀석들이 고개를 돌 려 모퉁이에 서서 자신들에게 마법을 걸었던 애송이에게 일제히 몸을 돌렸 다. 마법사 녀석은 아이들이 일제히 쳐다 보자 눈을 크게 뜨고 당황했다. 당황한 얼굴을 보니 이 놈이 능란한 마법사가 아니라는 것은 너무도 당연 했다. "죽여라!" 공중을 치솟는 녀석들이 마법을 펼쳐낸 녀석에게로 일제히 돌진했다. "...스, 슬리.." 놀란 마법사가 채 주문을 끝내기도 전에 녀석의 목이 허공으로 날랐다. 뒤 이은 다른 녀석의 손톱이 마법사 녀석의 몸통을 갈랐고 그 내장이 허공으 로 튀어 올라 마치 끊어진 실꾸러미처럼 터져나갔다. "으아아악!" "아악!" 나는 그 와중에 서 있었다. 온 몸을 엄습할 정도로 느껴지는 강렬한 피의 냄새를 맡으면서 이성을 유 지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녀석들은 피 맛을 보고 싶어서 지금 미쳐가고 있 었고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플라티나를, 그 애를 내 손안에서, 그리고 마을에서 가져간 그 인간마법사 하나 때문에 나는 인간 전체가 미웠다. 나는 웃었다. KUBERIN 운명과 우연은 종이 한 장 차이 눈 먼 여신은 눈 먼 칼을 휘두른다 5 "이..이 무슨 짓인가!" "쿠베린!" 갑작스런 고함소리가 터져나왔다. 내 머리 위에서 익숙한 냄새가 났다. 고개를 들자 허공 위에 떠 있는 존재가 있었다. 조인족이다. 갈색의 날개를 활짝 편 조인족 엘레가 옆구리에 튜나를 끼고 날고 있었다. 튜나는 피비린내 나는 이 상황에서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날 내려다 보고 있었고 나는 그런 그녀에게 짧은 미소를 던져 주었다. "그만 두게 해!" 그녀가 큰 소리로 외쳤다. 그리고는 활을 꺼내 들어 내 쪽을 향해서 겨누었다. "그만 두게 해! 쿠베린!" 정령술사인 그녀의 활이 화살도 없이 팽팽히 만월을 그렸다. 한껏 활이 둥 글어지자 그녀는 눈살을 잔뜩 찌푸린 채 뭐라 외치며 활시위를 놓았다. 그 리고 허공을 꿰뚫으며 그 무언가는 불길로 화하더니 곧장 나에게로 쏟아졌 다.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 불길은 내 주변에 쏟아져 내렸지만 그녀는 나를 겨냥한 것이 아니었다. "쿠베린!" 그녀가 안타까운 듯 큰 소리로 외쳐댔다. "마법이다!" "마법사!" 일족들이 동시에 튜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들은 피 묻은 손톱을 핥으며 굶주린 시선으로 그녀를 올려다 보았다. 인 간들의 살과 피가 갈갈이 찢어져 땅 바닥을 적시고 있는 것을 넋을 잃고 바라보던 튜나는 그 시선에 흠칫했다. 엘레가 그 시선에 당혹한 얼굴로 좀 더 높이 상승하려는 그 찰나 한 녀석이 바닥에 떨어진 인간의 목을 집어들 고 그에게로 집어던졌다. 공중을 격해 날아든 그 목은 피를 뿌리면서 정통으로 튜나에게 맞을 뻔했 지만 엘레의 급격한 상승으로 인해 튜나의 발치에 맞았다. 그러자 아깝다 는 듯이 너도 나도 몇몇의 녀석들이 동시에 무언가를 각자 집어들고 튜나 를 향해 공격을 시작했다. "쿠베린!" 찢어질 듯한 비명을 튜나가 지르는 동안 일족들은 눈이 벌건 채로 그녀를 공격하고 있었다. "그만 둬." 내가 외쳤다. 녀석들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만 하지 못해! 저것은 엘프다!" 내가 고함을 지르자 공격을 하던 놈들이 일제히 움직임을 멈추었다. 어린 애들 몇몇이 공격하려다 말고 나이든 자들에게 제지 당했다. 나는 팔짱을 끼고 녀석들을 노려본 뒤에 고개를 쳐들고 튜나에게 손짓했 다. "내려와." 튜나는 겁에 질린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마치 날 처음 보는 듯이 나란 존재란 것을 처음 깨달았다는 듯이 새파란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지만 곧이어 하강하기 시작했다. 옆에 엘레가 붙어 있기 때문에, 이 엘프답지 않은 하프엘프는 제법 대담하게 내 앞으로 떨어져 내렸다. 엘레의 얼굴도 살벌하게 굳어 있었다. 녀석은 에이리와 다른 아이들을 보 았지만 아이들은 모두 피에 젖어 있었다. 어리광 피우는 귀여운 꼬마들은 이미 아니었다. "....이건 무슨 짓이야?" 튜나가 입술을 깨물며 외쳤다. "여기에....누구 누구 와 있지?" "대답해! 쿠베린! 이, 이게 무슨 짓이야? 우리들은 함께 싸웠잖아? 왜 이런 짓을 하지?" "질문은 내가 한다. 하프 엘프." 튜나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나는 그녀에게 다시 물었다. "여기에 누구 누구 와 있지?" "........어째서 이렇게 변했지? 미친 거야?" 튜나가 중얼거릴 때 엘레가 대신 대답했다. "이 곳에는 튜나와, 저, 그리고 사인족의 왕과 몇몇사인족이 있을 뿐입니 다. 묘인족의 왕이여." 녀석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역시 녀석쪽이 훨씬 말귀를 알아듣는 것 같았다. 굳어진 얼굴로 녀석은 무릎을 반쯤 꿇고 공손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안내해라." "네." 엘레가 일어서자 옆에서 튜나가 그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무슨 짓이야! 지금 쿠베린은 미쳐..!" 엘레는 튜나의 입을 재빨리 막고 낮게 속삭였다. "여기 계신 분은 묘인족의 왕 쿠베린님이시다. 말조심하지 않으면 다른 묘 인족에게 갈기 갈기 찢길 거야. 튜나." 그녀는 입을 다문 채 살벌하게 살기를 피어 올리고 있는 일족들을 바라보 았다. 일족들은 모두들 살기를 머금고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녀가 마 법을 쓴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그들은 당장에 그녀의 사지를 찢고 싶어 하 고 있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나도 그랬다. "쿠베린!" 미트라가 제일 먼저 뛰어 와 나의 품안에 스스로 안겼다. "쿠베린, 오랜만이야! 어찌된 거야? 응? 응?" 나는 대꾸하지 않고 그녀의 허리를 안은 채 정면에 선 애송이를 보았다. 공작녀석은 입을 벌린 채 나와 일족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 누구도 우 리들의 앞을 막지 않았고 막지도 못했다. 만약 엘레가 앞서서 제지하지 않 았더라면 우리들은 베델의 거성에 있는 모든 병사들을 다 죽여버렸을 것이 었다. "쿠, 쿠베린?" 미트라가 살벌한 살기 속에서 내 허리에 두른 팔을 풀면서 날 올려다 보았 다. 그녀는 왕녀다운 복장을 하고 있었지만 길고 긴 비단드레스는 아니었다. 아름다운 그 이마에 살짝 키스하자 미트라는 그제서야 다소 안심한 표정을 지었지만 뒤에 서서 살벌한 살기를 풍기고 있는 일족들을 보고는 얼굴이 굳어 있었다. "...이, 이게 대체 무슨..." 더듬으면서 에메스가 말했다. 녀석의 얼굴은 상당히 초췌했지만 전과 달리 예기가 번뜩이고 있었다. 그의 옆에 서 있던 비오나가 한 걸음 앞서서 내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왕을..배알합니다." 기생오라비 녀석은 전과 달리 수염을 기르고 있어 전보다는 나아 보였다. 맨들 맨들한 빛이 없어진 녀석은 그런대로 기사다워 보였다. 주제를 모르 는 것은 여전한 지 나에게 감히 살기를 보이고 있었다. "이게 대체 어찌된 거야? 왜 나의 병사들을 공격했지? 왜 살해한 거야!" 에메스가 당장에 흥분한 얼굴로 내 앞까지달려왔다. 그리고 막 내게 손을 뻗히려는 그 순간 내 옆에 있던 앗시아가 손톱을 내밀어 공작의 목줄기를 꿰뚫었다, 아니 꿰뚫을 듯이 뻗어냈다. "웃!" 핏줄기가 튕겨나갔다. 손톱은 날카로운 푸른 빛을 띈 채 에메스녀석의 목을 살짝 찌르고 있었다. 녀석의 목줄기에서 피가 뚝뚝 떨어져 내린다. "...에메스!" 놀란 비오나가 달려와 내 앞에 급히 무릎을 꿇었다. "무례를 용서해 주세요! 왕이여." "..이, 이게..." 에메스는 노한 것인지 공포에 질린 것인지 알 수 없는 표정이 되어 날 바 라보고 있었다. 그 눈 안에는 공포와 분노, 그리고 배신감이 서려 있었다. ".....묘인족의 마을을 습격했다구요?" "여마법사가...?" 음식물이 쌓여있는 탁자 가운데 앉아서 나는 음식을 먹고 있었다. 내 옆에, 아니 정확히 말해 내 주변에 둘러 서 있는 일족들은 묵묵히 입을 다물고 살기를 피어 올리고 있었다. 녀석들은 모두들 인간따위와 왜 내가 이렇게 말하고 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앗시아가 내 옆에서 식사 시중을 들고 있는 동안 기생오라비가 참을 수 없 다는 듯이 외쳤다. "그렇지만 왜 우리를 공격하는 거지!" "인간이기때문이지." 그 말에 대꾸한 것은 유일하게 나와 마주 앉아서 음식을 먹고 있던 사인족 의 왕이었다. 녀석의 옆에는 그 예의 노란 눈의 계집애가 식사 시중을 들 고 있었다. "뭐라구? 인간이기 때문에..?" 기생오라비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사인족의 왕을 바라보았다. 사인족의 왕은 묵묵히 갈비뼈를 뜯어 바닥으로 집어던지며 대꾸했다. "건방지게도 인간 따위가 공격하다니, 참을 수 없는 거지." 나는 눈썹을 치켜올리고 사인족의 왕을 바라보았다. 사인족의 왕은 노란 눈을 들어서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오랜만이군." 내가 준 상처와 내가 준 흉터는 여전히 그의 몸 안에 남아 있는 듯이 보였 다. 그렇지만 녀석이 이 곳에 있을 리라곤 나는 상상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우리가 공격할 리가 없잖아? 우리들은 쿠베린의 편이고..." 기생오라비가 건방지게도 그렇게 대꾸하는 순간 앗시아가 탁자 위에 놓여 진 작은 과도를 들어 녀석에게 집어던졌다. 파공성과 함께 녀석의 면상으 로 과도가 일직선으로 날아갔다. 녀석이 새파랗게 질려 비명도 지르기 전 에 꿰뚫리려나 했더니 그 과도는 앞으로 한 걸음 나선 엘레의 손아귀로 들 어갔다. 엘레는 굳어진 얼굴로 자신을 쏘아보는 앗시아를 보지도 않고 파랗게 된 기생오라비에게 충고했다. "말조심해. 너 따위는 끼어들 수 없다." "뭐..뭐.." 녀석이 더듬을 때 사인족의 왕이 낮게 물었다. "왜 온거지? 그 마법사가 이쪽에 있단 말인가?" 시선이 일제히 이쪽으로 쏠렸다. 나는 발을 탁자에 올린 채 부른 배를 살짝 어루만졌다. 기분이 조금 나아 졌다. 그래도 우울하긴 여전히 마찬가지다. 앗시아가 무릎을 꿇은 채 내게 손 씻을 수건을 내미는 것을 받아 들여 손 톱과 손을 꼼꼼이 닦는 동안 에메스가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다시 외쳐 물 었다. "대체 왜...여기에 온 거야?" 바보 자식. "룬드바르 제국군이 곧 이곳으로 집결할 예정인 거 같다." "에?" 녀석의 눈이 커지는 것을 무시하고 나는 천천히 사인족의 왕을 향해 지껄 였다. "녀석들 사이에 마법사가 끼어 있겠지. 룬드바르의 마법사는 모조리 죽는 다. 만약 그 무리 속에 마법사가 없다해도..." 나는 가늘게 웃었다. "보낸 군대가 전멸하면 마법사를 보낼 수밖에 없겠지. 그 쪽이 더 즐거울 거다." 에메스들이 아연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이에 사인족의 왕이 난폭하게 물었 다. "....아이를 데려간 놈들이 그 인간 놈의 마법사란 말인가?" 눈을 붉히면서 살기를 내뿜기 시작하는 사인족의 왕을 향해 나는 천천히 말해주었다. "그래, 그리고 널 속인 것도 그들이지." 쾅! 하고 사인족의 왕이 탁자를 후려갈겼다. 와르륵 하고 자단목의 탁자가 무너지는 동안 사인족의 왕은 송곳니를 드러 내며 외쳤다. "자세히 말해! 너는 뭘 알고 있지? 그들이 룬드바르의 마법사라는 것은 알 고 있지만 그 주동자가 누구지! 그 더러운 인간들이 바라는 게 대체 뭐 지?" 가여운 황혼의 종족. 나는 그를 무심하게 바라보았다. 사인족의 왕은 분노로 치를 떨고 있었고 옆에 선 아헬이란 그 노란눈의 계 집애는 파르르 떨고 있었다. 저 계집애는 자신의 주인에게 자세한 이야길 하지 않은 모양이다. "왕년에.....킬트라는 마법사녀석은 외로워서인지 심심해서인지 서넛의 아이 들을 만들었다." "..갑자기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녀석이 어리둥절 하는 것을 무시하고 나는 허공을 보면서 천천히 중얼거리 듯이 입을 열었다. 나도 머리좀 식히자. 저 놈처럼 발광하는 것은 바라지 않으니까. "녀석은 수인족의 피와 자신이 가진 용의 화석들을 이용해서 이리 저리 섞 어서 아이들을 만들었다. 원래 녀석의 목표는 불사의 힘을 가진 용족과 같 은 존재를 만들어내는 것이었었던 거 같지만, 그것은 실패하고 어찌되었든 비뚤어지고 괴이쩍은 애들 몇을 만들어낸 모양이다." ".....그래서?" 주먹을 쥔 사인족의 왕이 날 쏘아보며 재촉했다. 녀석도 뭔가 심상치 않은 기분이 된 모양이었다. "그리고 녀석들을 자신의 제자로 삼아 키웠는데 알고 보니 그 킬트 녀석에 게도 아이가 있었던 거지. 그 아이는 엘프의 아이로 하프 엘프, 게다가 인 간의 피가 섞인 덕에 수명이 엘프치고는 극히 짧았던 모양이다. 새삼스레 수백살 먹은 이 마법사 놈도 부정이 싹 텄는지 그 아이를 위해 불사의 연 구를 계속했다. 그리고 나서 녀석은 대륙의 정복, 즉 세계를 정복하겠다는 지극히 평범하고 멍청한 야망을 버렸지." "아들을 위해서?" "아들을 위해서." 사인족의 왕은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아이가 없는 자신의 일족을 생각했던 모양이다. 주변은 조용했다. 모두들 내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었다. 나는 약간 음울한 기분으로 붉은 포도주가 담긴 잔을 손바닥 안에서 굴렸 다. 찰랑 찰랑 피와 같은 포도주가 흔들렸다. "그 것에 실망한 제자들 몇이 튀어 나갔다. 암흑마도의 제왕, 흑마법사의 전설인 킬트 더 마이오스가 야망을 버린 것에 배신감을 느낀 것인지 어떤 것인지는 모르지만 어찌되었든 제자 몇 놈이 흥분해서 이 대륙으로 넘어왔 다. 그리고 녀석들은 킬트의 연구를 훔쳐서 불사의 연구, 종족의 연구를 계 속하면서 룬드바르 공국의 젊은 야심가에게 달라붙었던 모양이야." "핫! 그, 그럼..." 에메스가 놀라 입을 놀렸다가 다시 다물었다. 그런 그의 손을 비오나가 꼭 잡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놈들은 룬드바르의 젊은 야심가를 통해서 대륙정복을 시작했고.... 그 와중에 사인족에게 눈을 돌렸지. 하긴, 가장 상대하기 쉬웠을 거야. 멍 청하니까." "뭐라구!" 사인족의 왕이 파르르 떨며 나에게 달려들 듯이 일어섰다. "우리들은 인간을 상대하지 않아. 인간들 사이에서 여행을 할 뿐 우리들은 인간과 거래하지 않는다. 그러나 너희들은 거래했다. 그들에게서 무기를 사 고, 그들에게 너희들의 힘을 빌려주었지. 그게 바로 틈이 된 거다." 나는 냉정하게 말해주었다. "조인족은 깊숙한 산중에서 나타나지 않고, 우리들은 인간따위를 상대하지 않는다. 가장 쉽게 접할 수 있었던 너희들에게 녀석들이 다가간 것은 당연 한 일이란 말이다." 사인족의 왕은 그 답지 않게 침묵했다. "녀석들은 사인족을 이용했다. 너희들의 피를 수집하고 너희들의 힘을 이 용하고 너희들을 속여서 룬드바르의 돌격대로 사용했다. 틀리나?" ".........." 아헬이 옆에서 눈물을 떨구고 있었다. "그리고 너희들은 결국은 인간들 때문에 분열했다. 인간들이 만들어 준다 고 한 가짜 혼혈사인족아이들 때문에 너희들은 분열하고 멸망하고 있다." "뭐라구?" 사인족의 왕이 갑자기 고개를 쳐들었다. "너희들에게 나타난 사인족의 혼혈아이들은 가짜다. 녀석들은 사인족의 피 가 흐르지 않아." "거짓말!" 그는 이번에야말로 흥분해서 내 앞으로 달려들었다. 그의 몸이 단숨에 허공을 격해 내 앞으로 달려들었다. 엄청난 살기로 내 목을 조이려 두 팔을 뻗어 오는 것을 나는 슬쩍 피하면서 녀석의 복부를 걷어찼다. 걷어채인 녀석의 몸이 허공에서 비틀 했지만 그것도 잠시 녀석 이 두 발로 갈라진 탁자를 걷어차면서 노호성을 터뜨리며 돌진해 왔다. "이 거짓말쟁이!" 녀석의 절망에 찬 그 얼굴이 고통스러웠다. 나는 그 놈의 면상을 쥐고 힘껏 내던졌지만 녀석의 손톱이 내 어깨로 파고 들어왔다. 녀석은 송곳니를 드러내며 내 목줄기를 물어뜯으려 덤볐다. 으르 렁거리는 소리가 대전 안으로 퍼져나갔다. 팔꿈치를 들어서 녀석의 뒤통수 를 갈기고 뒤이어 무릎으로 녀석의 복부를 갈겼지만 녀석은 멈추지 않았 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당장에 전투모드로 바꿀 태세를 갖추기 시작했다. 나는 힘껏 두 손에 힘을 주고 녀석의 송곳니를 틀어 막으며 고함을 질렀 다. "쿠오오오오오오...!" 쩌렁 쩌렁 울리는 그 소리 때문에 대전안의 유리란 유리가 다 깨어져 나갔 다. 찬기가 깨져 허공으로 날고 그 자리에 있던 인간들은 일제히 몸을 숙 이며 괴로워했다. 사인족의 왕의 몸에서 약간 힘이 빠져나가는 그 순간을 기다려 나는 녀석의 턱을 손등으로 후려갈겼다. 퍽 하고 녀석이 뒤로 물러서자 나 역시 그제서야 의자에서 일어설 수 있었 다. ".......헉..헉.." 툭툭 녀석의 입안에서 피가 떨어져 내렸다. 내 어깨는 녀석이 할퀸 상처때문에 피가 흘러내렸다. "머리를 식혀. 애송아." "닥쳐!" 녀석이 시뻘겋게 변한 노란 눈으로 한 걸음 물러선 채 날 쏘아 보았다. "네 놈의 배를 살아온 나다. 침착하게 들어." "....." "네 놈들이 본 그 사인족 혼혈이란 것은 가짜다. 그 증거로 변신할 수 없 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불사의 술을 연구한 그 놈에게 직접 들은 이야 기다." "뭐라구!" "그 제자놈들을 벌하기 위해서 킬트놈이 왔었다. 녀석들은 킬트가 했던 연 구에서 조금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던 모양이다. 녀석들은 킬트의 연구서 에서 본 대로 수인족과 갈색아인족의 피를 모아서 사인족과 흡사한 녀석들 을 만들어서 너희들 앞에 내 세운 것이다." "거짓말이야!" 녀석이 피를 토하듯 외쳤다. "사인족 혼혈을 만들 수 없었던 이유는 단 하나다. 우리들 고대종족의 피 는 어떤 종족과도 섞이지 않기 때문이다." "거짓말이다!" 녀석이 외치는 소리는 이제 너무나 처량해서 차마 들을 수 없었다. 차라리 저 놈을 후려갈겨 입을 다물게 했으면 좋겠다. "우리들의 피는 아무와도 섞이지 않는다. 우리들에게 하프란 존재하지 않 아. 하프 묘인족, 하프 사인족, 하프 조인족따위란 태어나지 않아!" "시끄러워! 시끄러워! 다 거짓이다!" 녀석이 울부짖으며 외쳤다. "그렇다면 우리들 앞에 있는 것이란 멸망뿐이란 말이냐!" 절망감. 끝이 안보이는 검은 절망감. "그렇다." 나는 대답했다. KUBERIN 운명과 우연은 종이 한 장 차이 눈 먼 여신은 눈 먼 칼을 휘두른다 6 "...녀석들이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침착한 어조로 엘레가 침묵을 깼다. 녀석의 얼굴은 비교적 침착하고 차분했지만 안색은 좋지않았다. "...원래는 우리들을 합쳐서 용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 도 몰라. 녀석들은 녀석들대로 날뛰고 있으니." "우리들을 합쳐서 용을 만든다니오?" "3개 종족이 용족에게서 나왔다고 말해지기 때문에 우리들의 피는 다르단 거다." "그래서..피를 모으는 겁니까? 우리들의 피로 장난을 치기 위해?" 엘레의 눈 안에 살기가 피어올랐다. "그렇다." ".....대체 무엇 때문에 그런 짓을 하지요? 왜! 감히..." "호기심때문이라고 한다." "뭐라구요?" 나는 인간들을 돌아보았다. "인간의 호기심때문이라고 한다. 인간의 호기심 때문에." 나는 비웃듯이 말했다. "드워프와 엘프를 섞고, 엘프와 수인족을 섞고, 아인족들과 드워프를 섞고 섞고... 어떤 존재, 어떤 힘을 가진 자가 나오는 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 어서.....기타 등등 기타 등등...바로 그 증거가 저기에 있지 않은가? 저 노란 눈의 꼬마 말이야." 내가 아헬을 가리켜 보이자 아헬은 숨을 삼키며 몸을 움추렸다. 어처구니 없다는 듯한 얼굴로 엘레가 입을 다물었다. 옆에 있던 사인족의 왕은 다시 의자에 앉은 채 침묵하고 있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않고 아 무 소리도 내지 않고 있었다. 마치 석상이 된 것처럼 굳어서 그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시끄러운인간들 조차 모두들 입을 다물고 침묵했다. 불안한 공기가 좌중 안을 떠돌고 있었다. "...그런 인간만 있는 건 아니에요..." 그 침묵을 튜나가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듯 깼다.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리자 튜나가 억지로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말했 다. "그런 인간만 있는 게 아니라구. 잘 알고 있잖아? 우리들은 모두 서로를 위해 움직이고 있어. 모두 친구라구." 나는 무표정하게 그녀를 보았다. 그리고 무시했다. 엘레는 입을 다문 채 날 바라보다가 문득 뚫어질 듯 자신을 보는 튜나의 시선을 외면했다. "튜나..넌 엘프야." "하프엘프야. 반은 인간이지." 튜나가 억지로 정정했다. "엘프는 어찌되었던 생명을 존중하지, 다른 자의 생명도 존귀하다고 말하 지만 인간은 아니야." "...엘레. 당신까지 왜그래?" "인간 중에 우리를 도왔던 자들이 있다고는 하지만, 고통을 준 자들이 더 많지. 이를테면 조인족의 아이들을 노예로 사고 팔고 노리개로 쓴 인간들 말이야. 엘프도 마찬가지겠지?" "그, 그건..!" 엘레는 고개를 든 채로 튜나에게 말했다. "나역시 이곳에 있긴 하지만 인간이 좋아지진 않아. 몇몇은 마음에 들지만 종족 자체는 마음에 들지 않아." 엘레는 고개를 들고 날 바라본 뒤에 튜나를 바라보았다. "하물며 인간에게 조금도 도움을 받은 적이 없는 묘인족에게 있어서야 인 간들은 그저 바둥대는 하잘 것 없는 존재,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겠어?" "엘레!" "너 역시 때로는 인간이 싫어지지 않아?" "엘레!" "이 이야기를 우리의 왕에게 알려야겠어. 인간을 경계하도록 이야길 하지 않으면 안되겠지." "엘레! 그만해!" 튜나가 비명을 지르듯 말하자 엘레는 엄격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너 역시 엘프의 왕께 알리지 않으면 안돼, 그들이 엘프라고 놔 둘 리가 없어. 감히 사인족과 우리들에게도 손을 댄 자들이야. 엘프도, 드워프도, 어 떤 종족도 안전하지 않아. 인간들에게 방심하다간 어설프게 당할 뿐이라 고." 그의 시선이 격한 분노와 슬픔으로 물들었다. "너는 엘프들이 사인족과 같은 일을 당하게 하고 싶어?" 그 말에는 튜나도 침묵했다. "정말..우리들 앞에는 멸망만 있을 뿐입니까?" 앗시아가 물었다. 나는 술잔을 천천히 돌리면서 에메스가 내 놓은 방 침대 위에 누워 있었 다. 제법 호화로운 방이었지만 그런 것을 일일이 체크할 기분이 아니었다. 달빛이 창가로 스며드는 동안 발치에 앉은 앗시아가 다시 물었다. "..우리들 앞에는 멸망만이 있는 것입니까? 왕이여?" 나는 손을 뻗어서 녀석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녀석을 내 침대에 앉게 했다. 녀석이 당황하는 동안 나는 그 녀석의 가슴에 손을 대고 녀석의 심 장이 뛰는 것을 천천히 음미했다. 몇 개의 심장들이 점점 박동을 빨리 하면서 움직임을 계속하고 있다. 숨소 리가 들리고 살 내음이 느껴지고 체온이 느껴진다. 녀석은 내가 자신을 내 옆에 앉게 하자 안절 부절 못하고 있었다. 이 점은 내 시중인 꼬맹이들 모두다 그랬었다. "너는 살아있다." "....왕?" "살아있는 것은 언젠가는 죽는다." "....." "모든 것은 다 죽는 거다. 영원따윈 없다. 존재하지 않아." 나는 녀석의 체온을 음미하면서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들었다. "멸망하지 않는 존재란 없다. 그러니 놀랄 것은 없어. 어떤 존재든 끝에는 멸망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니까." 나는 음울한 기분으로 중얼거렸다. "이 심장은...언젠가 멈춘다. 네가 도전으로 죽는 날...너의 존재는 멸망하고 대지의 여신에게 돌아간다. 그것처럼 모든 것들도...다 그렇게....멸망하여 대 지로 돌아간다....." 나는 눈을 감고 누웠다. 앗시아는 안절 부절 못하면서도 멍청히 내 옆에 앉아 있었다. "멸망이 두려우냐?" "......." "죽음이 두려우냐?" ",......아니오." "난 두렵다. 난 멸망과 죽음이 두렵다." "왕.." "그러나 더 두려운 것은 내가 나를 즐기지 못하는 것.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다. 진짜의 삶이란 내가 여기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느끼고 즐기는 것이다." 말이 많구만. 이거 나이를 못 속이는 건가. 애 잡고 앉아서 지금 명상록 쓰고 있어.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닌데 나는 애를 붙잡고 쓸데없는 소릴 주절거리 는군. "....지금 중요한 것은 앞으로 죽어갈 내가 아니라...여기 존재해서 심장이 뛰고 숨을 쉬고 있는 이 내가 중요하단 말이다. 죽을 땐 죽더라도 할 짓은 하고 죽어." 나는 그렇게 말하고 녀석의 어깨를 잡아 당겨 난로로 삼고 잠에 빠져 들었 다. 룬드바르의 대군이 도착했다고 이야기를 들은 것은 내가 도착한 지 이틀만 의 일이었다. 약 이천의 대군이 아그랑의북부 평원을 압박하고 있었고, 남쪽의 평원으 로도 아그랑을 향해 달려오는 천이백의 군세가 있었다. 그 놈의 발칙한 황 제놈은 아예 끝장을 보려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군세는 아이러니하게도 델리암의 군대였다. KUBERIN 운명과 우연은 종이 한 장 차이 눈 먼 여신은 눈 먼 칼을 휘두른다 7 "총 삼천이군..삼천 이백이 아그랑을 둘러싼 건가?" 팔짱을 낀 채 에메스가 말했다. 나는 창가에 기대어 앉아 있었고 내 발치에는 앗시아가 무릎을 꿇은 자세 로 앉아 있었다. 제법 큰, 그리고 낯익은 에메스의 집무실 가장 안쪽 벽에는 지나칠 정도로 낯익은 그놈- 에메스의 애비 되는 녀석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나는 왠 지 그 놈 초상화의 눈초리를 등뒤에 느끼면서 술잔을 들이키고 있었다. 이틀간 일족들은 삼십이 더 모여들었다. 지금 우리 일족의 숫자는 내 어릴 때 이래론 상상도 못해본 숫자인 백사십칠명이었다. 물론 아이들까지 합한 숫자이긴 하지만 아직 대륙전체에서 몰려들고 있는 숫자들을 생각한다면 물론 아직도 멀었다. 하지만 내 생전 이 놈들을 모조리 이끌고 쌈박질하는 곳에 나와 앉아 있다는 것은 야릇한 흥분감을 느끼게 했다. "게다가 상대는 델리암의 전장군이었던 파일로 후작이오. 파일로 후작이 선봉이라든데?" 어떤 놈이 지껄였다. 낯선 얼굴이군. 나는 창문가에서 시선을 돌려서 둥근 탁자에 옹기종기 앉은 인간들을 바라 보았다. 사인족의 왕은 지금 지붕위에 앉아 있는 모양이다. 녀석은 아직 젊어서 피 가 너무 끓는 지 그날 밤 이래로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만약에 이번에 덮쳐오는 놈들 중에서 사인족이 있다면 그 놈들을 두들겨서 제 정신을 들 게 해야한다고 그는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법사라면 이제 치가 떨린다 고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왕녀, 우리들을 믿어 주시오." 갑자기 새된 소리같은 것이 나서 나는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탁자에 앉아 있던 놈들 중 약간 낯선 옷차림을 한 그 녀석은 긴 비단자락 을 둘둘 감고 초록의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귀족이란 것이 눈앞에 훤히 드 러나는 차림새였는데 길고 가는 얼굴생김새에 금발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 었다. 아무래도 이 애송이 티가 풀풀 나는 녀석이 화타린공국인가 뭔가의 공자인 모양이다. 이 놈의 공자는 미트라를 향해 정열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었지만 미트라는 냉담하다기보다는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여 보였 다. "지금 이 상황에서 서로를 믿지 않는다면 아무 것도 되지않겠죠." 문득 그녀가 내 시선을 느낀 듯 날 바라보았다. 불안한 미소가 그녀의 얼굴에 떠올랐다. 짐이 되기보다는 차라리 도망간다고 태연하게 말하던 꼬맹이는 지금 이 자 리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었다. 왕녀라는 것은 도망간다고 해결되는 것 은 아닌 모양이다. 어느 새인지 이 소녀는 아그랑의 구심점이 되어가고 있 었다. 갑자기 문이 난폭하게 열리면서- 아니 거의 부서져 나갈 듯 문짝이 튕겨나 갔다- 문을 지키고 있던 기사 두 명이 나동그라졌다. "쿠악." "뭐냐!" "침입자냐!" 난폭하게 사람들이 외치고 있는 동안에 덤벼드는 기사들 서넛을 다 집어 던진 녀석이 내 앞으로 달려왔다. "쿠베린! 사실이야?" 헐떡이며 달려온 놈은 휴런이었다. 녀석은 어디서부터 달려왔는지 온통 엉망진창의 몰골을 하고 있었다. 이 놈 대체 어디서 헤메다 뛰어 왔길래 진흙투성이에 풀더미따윌 몸에 얹고 있는 거지? 그 휴런을 향해 기사들이라 자처하는 자들이 칼을 뽑아드는 순간 에메스가 외쳤다. "그만!" 휴런은 에메스를 흘긋보고 간단히 지껄였다. "오랜만이군." 휴런은 내 앞에서 잠시 망설이다가 무릎을 꿇었다. "왕을 배알합니다." 시끄러운 소란이 멈추고 휴런은 옆에 어떤 놈이 있든지, 방안에서 시끄럽 게 회의를 하든 말든 신경쓰지 않고 꽃병에 있던 물을 머리에 뒤집어 쓰며 진흙을 떨구었다. 그 모습에 앉아 있던 귀족녀석들이 일제히 이를 갈며 이 쪽을 노려본다. 그리고는 태연자약하게 탁자 위에 깔려 있는 비단 탁자보 를 수건 삼아 진흙을 닦아 내면서 내게 다시 물었다. 그 놈의 뒤로 비명을 지르듯 입을 벌리고 있는 시녀들의 얼굴이 보인다. "그래, 대체 어찌된 거지? 진짜 쿠브의 딸이 납치된 건가?" "그래." 나는 술잔을 녀석에게 건네면서 한 잔 따라 주었다. "너야 말로 어디서 헤멨길래 그 모양 그 꼴이지?" "나? 나 룬드바르에 있었어." 그 순간 모든 시선이 이쪽으로 쏠렸다. "평원을..가로 질러 온 거냐?" "응, 그쪽에 꽤 많은 떨거지들이 집결해 있더군, 나야 뭐 그냥 달려왔으니 상관은 없는데 무엇보다 룬드바르 놈들은 대포를 가지고 있던데." "대포!" 벌떡 일어선 것은 다름아닌 그 놈의 공자라는 놈이었다. "대포 때문에 꽤 늦어지고 있는 것 같더군, 그건 그렇고 저 시든 오이처럼 생긴 녀석은 뭐야? 건방지게도 빽빽 소리를 지르고 있어?" 휴런이 그렇게 말하곤 문득 미트라를 본다. 미트라는 자신을 보는 휴런을 향해 약간 쓴웃음을 지어 보였는데 그 순간 휴런의 얼굴이 홱 변했다. "미, 믿을 수 없어! 너, 그때의 꼬맹이 아냐?" "지금은 꼬맹이라 할 수 없지." 미트라가 앵도라진 목소리로 말하자 휴런은 미트라의 옆에 다가서더니 옆 으로 보고 앞으로 보고 뒤로 보더니만 감탄 어린 어조로 고개를 끄덕인다. "호오, 호오..믿을 수 없어, 그 말라깽이 계집애가 이런 절세 미녀가 되다 니...쿠브, 이 여자 나 줘." 나는 대꾸하지 않고 술잔을 들이켰다. "뭐야! 이 멍청이가!" 미트라는 그 말에 대뜸 화가 치미는 지 휴런의 얼굴을 퍽 하고 갈겼다. 아 니 갈기려고 했다. 그러나 휴런은 그 손목을 잡더니만 킬킬 웃었다. "이거 이거...나도 쿠브처럼 미래를 보고 사귀어야 겠군, 이런 미녀가 될 줄 은 상상도 못했으니까." "이..이 추잡한 놈아!" 미트라가 발길로 막 걷어찬다고 하는 왕녀답지 않은 행동을 보이려는 순간 에메스가 날카롭게 외쳤다. "무례하게 굴지마라!" 휴런은 에메스를 향해 눈썹을 치켜 올렸다. "내가 무례하게 굴면 어쩔건데?" 녀석의 입술에서 사악 송곳니가 드러났다. "응? 말해봐, 어쩔건데?" 에메스가 살기에 찬 얼굴로 칼에 손을 대려는 순간 내가 한 마디 했다. "떠들지 말고 이리와. 휴런." 휴런은 흠칫 하고 날 바라보았다.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녀석의 얼굴이 굳었다. ".....쿠브?" "시끄럽게 떠들지 마. 지금 그다지 기분이 좋지 않다." "맙소사..진심이군?" 휴런이 입을 다물고 굳은 얼굴로 내 앞으로 왔다. 모두들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에메스들을 제외한 나를 처음 보는 놈들 은 우리들을 향해 못마땅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지만 그것들에게 신경쓸 기 분이 아니었다. "그 군대에 마법사가 있나?" "....몇 있었지만 별로 신통한 놈은 없었어. 소문에 따르면 놈들의 마법사들 중 한 놈이라 하던데...." 녀석의 말투가 조심스레 바뀌었다. 나는 턱을 괴고 담담히 말해주었다. "룬드바르 제국군이란 이름을 가진 놈들을 다 바친다." "...에?" "대지의 여신에게 피의 제물을." 휴런의 얼굴이 굳었다. 녀석은 어깨를 굳히고 날 바라보았다. "....농담이겠지? 인간들..저 인간들을 다 없애겠다고? 수천은 되는데?" "그래." "........다 죽이다니! 저런 약해 빠진 것들을 없애봤자 지루하기만 할 텐데? 저것들을 다 죽인다고?" "말이 많다." 휴런은 입을 벌린 채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못마땅한 듯이 머리를 긁적였다. "....목욕이나 하고 오지." 녀석이 나가자 나는 포도주를 마저 들이켰다. 인간의 군대를 상대로 싸워 본 게 얼마만의 일이더라...... 나는 흘긋 뒤를 돌아보았다. 에메스의 애비녀석이 날 바라보고 있다. 그렇군. 저 자식이군. 그 초상화에 술잔을 집어 던지면서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에메스가 발 작하려는 순간에 비오나가 재빨리 막았다. 엊그저께부터 비오나는 날 두려 워하고 있었다. 그녀 만이 아니라 튜나도, 엘레도 날 두려워하고 있었다. 날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모르는 인간들뿐이다. 그들은 아직 내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난 그것을 보여줄 참이었다. 초생달이 떠 있었다. 밤의 여신이 드리운 옷자락을 걷고 초생달이 머물러 있다. 나는, 우리들은 벌판에 서 있었다. 룬드바르의 제국기를 단 군대는 아그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나즈막한 둔덕에서 멈추고 야영하고 있었다. 그 제국기 아래 갖가지 모양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그 갖가지 모양은 아마도 룬드바르가 병합한 크고 작은 나라들의 상징인 모양이다. 그렇다면 갖가지 나라의 녀석들이 섞여 있겠군. 그렇지만 검거나 희거나 크거나 작거나 인간은 인간. 나라이름따위 아무리 붙여 봐도 인간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보초병이 서 있다. 여기 저기 불꽃들이 보인다. 보초들이 돌아다니고 야영지에 어울리도록 여 기 저기 불침번을 서는 녀석들이 수다를 떤다. 어둠이 그들 사이로 피워진 불꽃 사이로 조금씩 침식해 들어간다. 사방은 고요하다. 만약에 녀석들이 짐승들이었다면, 다른 종족이었다면 눈치 챌 이 살벌할 정도의 고요를 녀석들은 모르고 있었다. 말들이 공포에 질려 울고 있다. 달 구지를 끌던 소들이 울고 있다. 공포와 살기로 몸을 떨고 울고 있다. 뭐, 상관없다. 네 발 달린 짐승들이여. 우리들의 목표는 너희들이 아니니 겁에 질릴 필요는 없다. 대지의 여신에게 바치는 제물은 너희들이 아니다. "가라." 나는 낮게 말했다. 제일 먼저 아이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어린 아이들은 살육과 흥분에 흥겨 워 연신 마른 입술을 핥고 있었다. 그들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왕의 지도하 에 싸우고 있었다. 그리고 이 것은 복수, 어떤 신도 우리에게 항의할 수 없 는 복수의 달콤한 손짓이었다. 우리들은 날고 뛰고 달리는 바람처럼 구릉을 달리는 아이들을 보았다. 아 이들은 우리들의 미래로 우리들의 작은 씨앗, 그들이 뿜어내는 살기조차 사랑스럽다. 그 뒤를 이어 여자들이 달렸다. 아이들을 걱정하는 양 그들이 달리며 살기를 뿜어낸다. 마을을 공격당하고 아이들을 다치게 한 여자들의 분노가 바람에 실려 허공으로 맴돈다. 그녀 들이 치솟는 일직선의 손톱은 희미한 달빛에 반사되어 푸르게 보인다. 사 내들이 으르렁대고 있다. 자신들이 맛볼 피와 복수에 대해 그들이 바라고 있다. 나는 웃고 손을 내저었다. 나도 이제 이성의 끈을 놓을 때다. "으아아아아악" "아악!" 비명소리가 터져나왔지만 어디의 누가 터뜨리는 지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그들은 그저 휙휙 지나가며 갈라지고 찢어지는 자신들의 동료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여신의 옷자락 속에서 움직이는 우리들은 그저 연약하기 짝이 없는 인간들의 살을 찢고 그 자리에 있는 놈들을 죽이는 데에만 열중했다. 나는 손톱 다섯 개만으로 진중을 달렸다. 울부짖는 말들이 고삐를 끊고 달아난다. 소들이 울부짖는다. 개들이 짖고 있다. 공포에 젖은 울부짖음이 바람을 타고 사방에 퍼져나간다. 피내음이 코끝을 적셔온다. 나는 중앙으로 돌진했다. 나를 막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 다. 싱거울 정도로 이미 일족들이 다 해치워 버린 것이다. 일족들 중에 변 신한 녀석은 아무도 없었다. 변신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흥분한 아이들 이 변신하려 버둥거리지만 아직 어린 탓에 변신은 반신이 될 뿐이다. 드레인이 에이리와 짝을 지어서 살육에 눈을 밝히고 있는 것이 보인다. 아 소미나의 피에 젖은 송곳니가 건장한 기사의 목덜미를 꿰뚫고 있다. 나는 웃었다. "라이트닝!" "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 갑작스레 사방이 환하게 변했다. 그리고 일족들의 눈도 일제히 그 쪽으로 향했다. 허공으로 마치 태양처럼 환한 광구(光球)가 떠올라 어둠과 피에 젖은 들판 을 비쳤다. 참혹한 시신들이 미처 대항도 하지 못하고 널린 광경이 드러나 자 비명소리는 더더욱 커졌다. 우리들 일족은 빛이 뿜어진 방향을 향해 일제히 달리기 시작한다. "마법사다! 마법사다!" "마법사다!" "갈기 갈기 찢어라!" 여자들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퍼져나갔다. 나는 그 뒤를 따라 달렸다. 대포를 다루던 화약사와 기술자들이 당황한 얼굴로 새파랗게 질린다. 그들 은 희미하게 비치는 흰 빛 속에서 피에 젖은 손톱과 송곳니를 앞세운 자들 을 보고 공포에 질려 있었다. "괴, 괴물이다!" "죽여라!" 비명과 고함이 울려퍼졌지만 나는 그 비명을 지르는 목줄기를 갈라 버렸 다. 일직선으로 갈라지는 핏덩이가 소리를 삼키며 무너진다. 빛의마법을 사용 했던 마법사에게는 이미 일족들 사오십명이 달라 붙어 있었다. 퍼엉 퍼엉 하고 소리가 시끄럽게 들리지만 비명소리는 인간의 비명소리일 뿐이었다. 고작 이 정도인가? 저 비오나와 맞섰던 흑마법사가 있을 텐데. 저기서 비명을 지르고 내장을 뜯기우고 있는 마법사는 애송이 백마법사였 다. 아마도 회복마법따위를 위해 온 놈들일 것이다. "대지를 가르는 불길이여! 참혹한 마신이여! 그대의 힘을 빌어 고하노니.... 카이로라!" 갑작스레 음침한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리고 우리들 일족의 한 가운데로 시뻘건 불길이 그대로 직격했다. "쿠아!" 비명을 지르면서 뒤로 물러난 일족들은 마치 거짓말 처럼 갈라지면서 피해 섰다. 불길은 삽시간에 타올라 그 자리에 있던 인간들과 시체를 지옥의 화 염처럼 불태웠다. 그리고 우리들은 동시에 외쳤다. "마법사다!" "마법사!" 이가 갈리도록 강한 흑마법사가 저기에 있었다. 나는 흥분과 살기로 전신 이 타오를 것 같았다. 그를 향해 발길을 돌려 맹렬히 달리기 시작했다. 일 족들이 흥분하는 것이 느껴진다. 그렇다, 저놈이다! 저놈이야말로 이 분노를 퍼부어 댈 수 있는 놈인것이 다. "바람의 힘을 빌어.." 녀석이 두 번째 주문을 외기 전에 가장 먼저 도달한 한 여자가 그녀석의 면상을 향해 그대로 손톱을 휘갈겼다. 그러나 퍼엉 하는 소리와 함께 여자 는 뒤로 튕겨나갔다. 방어실드를 펼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자 분노한 다른 자가 달려들어 그에게 힘껏 손톱을 찔러 넣었다. 그러나 다시 터엉 하는 소리와 함께 뒤로 튕겨나갈 뿐이었다. 분노는 극에 달했다. 녀석이 또 한번의 주문을 외치기 전에 나는 그 음침 한 얼굴을 한 녀석의 얼굴을 향해 손톱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 파지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주문을 외우던 녀석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나는 그 녀석의 면상을 그대로 다섯 개의 손톱으로 꿰뚫었다. 피가 분수처럼 치솟아 올랐다. 마법사의 얼굴을 손톱에 끼운 채 나는 집어 던졌다. 그 뒤로 여자가 달려들어 갈기 갈기 찢는 동안 나는 시선을 돌려 다른 놈을 찾았다. 다른 놈이 더 있을 것이다. 흑마법사가 하나 밖에 없을 리가 없다. "쿠가아아아아아..." 갑작스레 허공을 찢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소환수가 어둠을 뚫고 치솟아 올랐다. 소환수 카마이라가 우리들 앞에 나서자 마자 소환수에 이가 갈린 사내들이 허공을 박차고 소환수의 다리로 뛰어 올랐다. 카마이라는 시커먼 몸체에 불길을 머금고 지상의 우리들을 향해 불길을 내뿜었지만 그도 잠시 벌떼 같이 달라 붙는 일족들 중 하나가 소환수의 일곱 개의 다리에 달라 붙어 올라 몸체까지 다다르자 당황한 듯 몸체를 틀었다. 그 덕분에 허공을 향해 인간의 창을 든 일족들이 일제히 무기를 던져내기 시작했다. 본디 우리들의 몸체는 가벼운 불길 정도로는 타지 않는다. "죽여라!" "그 마법사는 어디냐!" "소환수의 마법사는 어디냐!" 갑자기 콰쾅 하고 지축을 뒤흔드는 소리가 터져나왔다. 나는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어둠 속에서 대포를 움직이는 녀석들이 있었다. 인간이 아닌 일족이었다. 아이들이다. 에이리였다. "쳇, 실패다!" "하나 더!" 에이리는 갑자기 드레인과 함께 대포의 포신을 돌려 소환수를 향하게 하더 니 대포알을 안에 집어 넣었다. 그리고는 피에 젖은 송곳니를 드러내며 외 쳤다. "발사해!' 콰쾅 하고 소환수를 향해 대포가 발사되었다. 맞추는 데에는 두 번째도 실패했다. 그러나 그 것 만으로도 충분한 위협이 었는지 카마이라는 휘청이고 있었다. 시력을 돋구어 보건대 소환수의 목에 달라 붙어 있는 두 명의 사내는 일족이었다. 그들은 긴 손톱을 끄집어 내 어 소환수의 목을 찌르고 눈알을 터뜨리고 있었다. 고통의 비명을 지르면 서 카마이라가 비틀거리면서 하강하기 시작했다. "마법사를 찾아!" 고함을 지르자 여기 저기서 일족들이 눈이 벌건 채 주변을 뒤지기 시작했 다. 살아있는 인간의 냄새를 맡으면 그 자가 부상중이든 빈사 상태이든 혹 은 멀쩡하든 가리지않고 갈기 갈기찢었다. 죽이고 죽이고 죽이고 피가 흘렀다. 헛된 비명이 허공을 울린다. 인간들이 비명을 올리고 있다. 살육은 계속된다. 이 자리에 단 한명도 살아 남은 인간이 없을 때 까지 계속된다. 나는 허무해서 웃었다. 여기에는 그저 그런 마법사 밖에는 없었다. 나는 허공을 바라보았다. 카마이라가 사라진 검은 하늘에는 초생달과 별빛 만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 것들을 바라보면서 나는 손에 쥔 해약석을 들어 서 주머니에 넣었다. 룬드바르의 황제, 네가 정신이 있다면, 그리고 부하들을 더 잃고 싶지 않다 면 일찌감치 너의 마법사들을 이곳으로 보내라. 네 옆에 있는 그 발칙한 분홍주둥이와 그 사악한 노랑 계집애를 내게 보내는 거다. 그리고 나면 우리들의 피의 제물도 끝이 나는 것이지. 물론, 네가 더 하고 싶다면 더 해도 좋지만. KUBERIN 운명과 우연은 종이 한 장 차이 눈 먼 여신은 눈 먼 칼을 휘두른다 8 망원경을 들어서 보고 있던 손은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 떨리는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시선을 내려서 다시 먹는 것에 열중했다. 식량사정이 나쁘지 않다는 말은 사실인 모양이다. 내 바로 앞에 놓여진 탁자위에는 먹을 것으로 가득했다. 녀석은 떨고 있었다. 그리고 녀석의 뒤에서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는 두 명도 역시 떨고 있었 다. 녀석들이 왜 떨고 있는 지 안다. 그들이 뭘 보고 있는 지도 안다. 우리들은 저녁 한끼 먹을 시간에 이천여명을 죽였다. 명수가 얼마나 되는 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척후가 이천명쯤 있었다고 했으니 이천명 맞겠지. 도망간 자는 거의 없었으니까. 우리가 그 들판을 떠날 때 사방은 이미 코에 달라붙은 피비린내로 가득했 고 바닥은 진뜩한 액체로 질척거렸다. 검게 변한 액체를 꾹꾹 밟으면서 우 리들은 약간은 허탈하게 돌아왔었다. 마법사 한 둘 정도 밖에 없다는 것이 너무나 실망스러웠던 것이다. 흥분해 있던 것은 아이들 뿐으로, 녀석들은 흥분해서 잠도 자지 않고 식사도 제대 로 하지 않아 어미들에게 크게 혼났다. 에메스는 지금 낮의 태양빛 아래서 변색되어 가고 있는 시체 더미를 보고 있을 것이다. 뭐, 어차피 이 거리에선 잘 보이지도 않을 테지만 말이다. "..쿠베린." "왜?" "...피해는?" "없어." 나는 짧게 말했다. 어젯밤의 난리로 당연한 일이지만 죽은 놈은 없었다. 변신조차 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찰과상과 골절상을 입은 녀석들이 몇 있었지만 그 정도라면 하룻밤 쉬면 다들 낫는다. "....이천명을..몰살시키다니. 하룻밤 사이에." 낮은 목소리로 공자라는 놈- 화타린의 공자라는 놈이 파랗게 질린 얼굴로 날 바라본다. 멀리서 시체 냄새가 난다. 피에 젖은, 아니 피비린내가 퍼져 가고 있었다. 시체들이 이천 가까이 널부 러져 있다면 그 냄새란 진동하기 마련이다. 지금은 그렇게 추운 계절이 아 니니 그 냄새가 이곳까지 밀려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아그랑의 병사들 은 공포에 질려서 거리 여기 저기에 걸어다니고 있는 묘인족들을 넋을 잃 고 바라보는 모양이다. 하지만, 우리들은 어디로 보나 겉모습만은 인간들과 다른 점이 하나도 없 었기에 소문은 간단히 무서운 용병대가 아그랑을 위해서 도와주러 왔다고 난 모양이다. 덕분에 거리의 시민들은 공포에 질려 있지 않고 오히려 환영 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우리들 역시 깐죽대지만 않는다면 약해빠진 보통의 인간을 공격하진 않는 다. 우리들이 공격하는 이유는 재미와 도전이다. 약한 놈들- 손톱하나만 쭈 욱 찔러 넣어도 죽어버리는 인간들에게 흥미는 없었다. 대지의 여신은 우리들의 제물을 뭐라 생각하고 있을까. 좀 과했을까? 나는 낮게 웃었다. 작은 벌레들과 들짐승들에게 멋진 먹이감을 건네주었으니 의외로 그녀는 기뻐할 런지도 모른다. 모처럼의 포식이다. 즐겁게 먹어라. 작은 것들도 먹을 수 있도록 갈기 갈기 찢어 놓았으니 큰 새, 작은 새 할 것없이 즐겁게 먹어라. 들고양이, 들개, 약해빠진 늙은 늑대, 어린 여우, 교활한 들쥐떼, 쫓기던 것들이여 즐겁게 포식하라. "쿠베린!" 에메스가 날 홱 돌아보았다. 나는 먹던 뼈다귀를 바닥으로 던지면서 점잖게 기름기 묻은 손을 냅킨으로 닦아 냈다. 앗시아가 내게 차가운 맥주를 건넸다. "대체 여긴 왜 온거지?" 녀석은 분노하고 있었다. 지금 왜 분노하는 거야? 설마하니 당당하게 다같이 죽어가며 싸우고 싶었 다고 말하는 건가? "너라면 당장에 일족을 이끌고 저 룬드바르 황제의 거성에 달려들어서 끝 장을 낼 수도 있잖아? 그것이 훨씬 간단하잖아?" 녀석은 내 앞으로 와 주먹을 쥐고 항의하듯 고함을 질렀다. 혼란과 분노와 이루 말할 수 없는 두려움이 녀석의 눈안에 가득했다. 그런 표정은 나로서도 처음 본다. 아마 이 녀석도 나를 두려움으로 보기는 처음 이었을 지도 모른다. "물론 간단하지." 나는 웃어 주었다. "그런데..그런데 왜 여기에 와서 애꿎은 병사들을..죽이는 거지? 저 들은 너 와 관계 없잖아!" 나는 더 크게 웃었다. "너 바보 아니냐? 내가 여기 있는 것은 여러 가지 의도가 있는 거야." 나는 이 바보스런 녀석에게 조금 설명해 주어야 하는가 하고 한탄했다. "...여러 가지 의도?" "내가 룬드바르 황제의 목을 뎅겅하는 것은 무지 간단하지, 간단하고 말고, 그 막사를 찾아가서- 고왕국으로 전진하고 있는 녀석의 목을 잘라 버리면 그뿐이니까." "그런데 왜 하지 않아? 넌 복수를 하려는 거 아냐?" 에메스가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 머리가 나쁘군.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우리 일족을 건드린 녀석에게 간단히 죽게 한다니. 그런 어처구니없는 짓 을 복수라 부를 수가 있다고 생각하냐?" "에?" "우리 일족을 감히 건드린 녀석을 그냥 죽게 한다는 그런 간단한 짓을 복 수라 부를 수는 없는 거야. 꼬마야."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내가 웃을수록 녀석의 얼굴이 파랗게 변했다. "감히 나를 건드리고, 감히 우리를 건드린 녀석에게 본때를 보여 줘야지, 꼬마야. 수천 수만의 병사들을 잃고 헤메이게 만들어야지. 그 녀석이 거느 린 마법사란 마법사가 다 죽고, 그 녀석이 거느린 병사들이 한 명도 남지 않을 때까지 죽여버리는 거야. 그 녀석의 일족도, 그 녀석의 식솔도, 모조 리 다 죽이는 거지. 그리고 녀석을 잡아 놓고 자신이 어떤 짓을 했는가를 뼈저리게 느끼게 해 주는 거야. 꼬마야." 나는 피식 웃었다. 에메스의 파란 얼굴이 너무 웃겼다. "그걸 복수라고 하는 거야. 꼬마." 얼어붙은 에메스는 입을 벌린 채로 날 바라보았다. 뒤에 있던 녀석들이 숨 을 들이키면서 공포로 몸을 굳히는 게보였다. "그래서 여기 온 거야, 어차피 널 제압하기 위해 녀석은 제일 먼저 이곳에 병사를 보낼 테니까. 너는 녀석이 후방에 남긴 적이잖아? 틀림없이 꺼림직 해서 널 제거하려고 병사를 계속 보내겠지. 나는 계속 죽여주면 되고. 너에 게도 좋고, 나에게도 좋고, 일석이조지. 안그래?" 처음에는 이천, 삼천, 나중에는 오천도 보낼 거다. 그럼 오천도 죽여주지. 오천 가지고 안될 거라고 생각한다면 나중엔 만명도 보낼 거고, 그러고도 안되면 이만, 삼만이 되겠지. 그럼 녀석은 결국은 회군할 수 밖에 없을걸. 자신의군대를 그렇게 마구 멸군시키면서 어떻게 고왕국으로 전진할 수 있 겠어? 불가능하고 말고. 그리고 계속해서 점점 강한 마법사를 같이 딸려 보내겠지. 그 마법사도 하나 둘 씩 다 죽여버리면 녀석도 당황해 달려오게 되겠지. 이 놈이 바보가 아니라면 소문을 들을 거고 그러면 틀림없이 마법 사들을 보낸다. 그리고 마법사들도 떼거지로 달려오게 되겠지. 그 년이 킬 트의 말대로 파괴를 좋아하는 엉망진창의 흑마법사라고 한다면 여기에 오 고 싶어 좀이 쑤시겠지. 그럼, 그 년을 갈기 갈기 찢으며 나는 그 황제 녀 석의 면전에 그 살덩이를 던져 줄거다. 물론 던져줄 게 남을 때의 일이지 만. 여자들은 매우 흥분해 있어서 대체 그 여자의 살덩이 한 줌이나 남을려나 몰라. "그만 둬!" 에메스가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런 짓..하지 마! 차라리 차라리 황제와 마법사로 끝내! 이건 학살이야! 이건...있을 수 없어! 있어선 안되는 일이라구!" 나는 혀를 찼다. "이봐, 꼬마 에메스." 나는 손가락으로 여전히 벽에 걸린, 에메스와 똑같은 눈을 가진 녀석의 초 상화를 가리켜 보였다. "저 놈을 구하기 위해 내가 몇 명의 인간병사를 죽였다고 생각해?" 에메스는 멍하니 자신의 부친의 초상화를 바라보았다. 초상화 속에서 늠름한 얼굴을 하고 있는 녀석의 얼굴은 단려하고 전혀 흔 들림이 없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저 놈을 귀여워해서 내가 몇이나 죽였다고 생각하냐고? 저 놈이 영웅이라 고 불리게 되었을 때 내가 몇 명의 인간을 죽였을까?" "......." 나는 친절하게 웃어 주었다. "숫자도 기억나지 않지만 말이지. 최소 천명 이상이었다구. 나 혼자서 말이 야. 그리고 네 아비 킬리언 베델 대공은 나에게 감사했지." "그만 둬!" "그리고 아마 영웅으로 추앙 받았을걸." "그만 해!" 나는 이 어린 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직 절박한 상황에 처해 본 적이 없는 녀석이다. 이 놈은 역시 태평한 시 대에 태평하게 바람이나 피우고 여자나 울리면서 장사나 하는 게 어울릴 지도 모른다. "넌 미쳤어!" 녀석은 입술을 깨물며 외쳤다. 나는 턱을 괸 채 녀석을 관대하게 바라보았다. 이렇게 이 녀석을 자세히 보니, 역시 킬리언과 많이 닮았다. 그러나 그 보 다도 여렸다. 킬리언이 이 놈보다 고생을 많이 한 때문일까? 나는 한 숨을 쉬며 맥주를 들이켰다. "..쿠베린님." 비오나가 나를 불렀다. 난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 보고 있는 중이었다. 바로 옆에서 앗시아가 그 녀를 경계의 눈초리로 바라본다.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복도를 지나다니고 있는 시녀들은 공손한 자세로 물 흐르듯 움직이고 있었 고 나와 앗시아만이 정지해 있었다. 밖에서 풍기는 시체의 악취는 점점 강 해지고 있었지만 아직 예민하지 못한 인간들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아마도 나흘 정도 지나면 대단한 냄새가 될 것이다. 햇빛 속에서 부패한 시체들은 엄청난 냄새를 풍길 테니까. "뭐냐?" "......." "소문을 들었습니다." "무슨 소문?" "마법길드를...공격하셨다고요." "그래서?" "......마법사들이 묘인족들을 공격하게 될 텐데요, 그런 것은 좀..." "마법사를 살려두고 싶어하는 묘인족은 없어." 나는 짧게 말했다. "이 일은.....그들이 저지른 일이고 다른 자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턱을 괴고 그 변신엘프를 바라보았다. "너는 네가 인간이라 생각하느냐?" "네?" "네가 인간이라 생각하냐고." "...아닙니다." "인간의 마법사가 가진 호기심이란 것은 엘프의 마법사가 가진 호기심과는 류가 다르다는 걸 알고 있나?" "네?" 그녀가 눈을 크게 뜨고 날 바라보았다. 까마귀 날개죽지의 색깔을 가진 검은 머리칼이 푸른 빛을 뛰고 오묘하게 흔들렸다. "인간이 단지 호기심 때문에 죽이고 없앤다는 것을 알고 있느냐고." "그것은...." "에메스 자식도 기분이 나쁘면 기분 전환을 하기 위해서 말을 타고 뛰어 나가 산짐승들을 사냥하고 돌아오지. 자신은 먹지도 않을 짐승들을 잡고 먹지도 않을 짐승의 머리를 잡아 집안 장식으로 내 걸어 놓지. 안그래?" "다, 다른 자들을 위해서 그 사냥한 것들을 내 놓습니다. 식량으로요." "물론 그렇겠지, 자신은 먹지 않으니까. 널 녀석이 구했다고는 하지만, 그 건 잠깐 동안의 변덕이었을 뿐 너 자신 스스로가 잘 알겠지? 녀석이 다른 새들에게도 상냥하던가?" 그녀는 날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왜 이렇게 구질 구질 떠들고 있는 것일까. "...상냥한 인간도 있습니다. 전 그렇게 생각해요." "물론 있지, 나도 인간을 좋아하지. 그러나 마법사란 놈들은 좋아할 수 없 어. 녀석들의 머리통을 한번 뒤집어서 그 속에 뭐가 들었나 까집어 보고 싶어." 나는 다시 웃었다. 기분이 더럽다. 점점 더러워진다. "쿠베린님..." 그녀가 한숨을 쉬듯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무척...화를 내고 계시군요." 나는 다시 웃었다. "물론이지. 나는 내 생전 이렇게 화가 나 본 일이 없을 정도로 화를 내고 있어." "......." 인간들을 수천 수만을 죽여도 이 화가 풀리지 않을런지도 모르지. 왜냐면 사실 나는 오래 전부터 화가 나 있었던 것 같거든. 나는 아까부터 보고 있었던 지붕 위를 다시 창너머로 올려다보았다. 사인족의 왕은 아직도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는 혼자다. KUBERIN 운명과 우연은 종이 한 장 차이 눈 먼 여신은 눈 먼 칼을 휘두른다 9 "지겨워! 지겨워! 지겨워!" 휴런이 소리를 질렀다. 그는 소파에 길게 누워 있는 나를 흘긋흘긋 보면서 외치고 있었다. "답답해 죽겠어! 언제까지 여기서 죽치고 있을 거야?" "네 맘대로 해." "하지만 쿠브는 여기 있을 거잖아?" "너 하나 빠져도 달라지는 것은 없어." "젠장!" 나는 내 손톱 소제를 하고 있는 앗시아에게서 눈길을 돌려서 엘레에게 달 라 붙어 있는 에이리와 드레인을 바라보았다. 에이리는 예전부터 조인족을 좋아하고 있었고, 특히 엘레를 마음에 들어했다. 뭐가 어디가 마음에 드는 지는 몰라도 예쁘다 예쁘다 하면서 좋아하고 있었다. 내가 보기엔 뚱한 얼굴을 하고 있어 그다지 예쁘다고는 생각되진 않지만 조인족 특유의 여린 선과 날개가 아무래도 매력이라 할 수도 있을 거 같 다. 어린애들에겐 말이다. 물론 엘레는 그렇게 애정공세를 받아도 그다지 기뻐하고 있는 거 같진 않 지만. "엘레, 엘레. 들어보란 말이야!" 에이리가 잘난 척하면서 허리에 손을 탁 얹고 말하고 있다. 어쩐지 낯익은 포즈라고 생각하다가 나는 실소를 흘렸다. 미하라와 비슷한 자세다. "내가 엊그저께 얼마나 죽였는지 알려줄테니까. 나 말이지, 243명 죽였어. 내 또래 중에서 내가 최고야. 나보다 강한 놈은 없다구!" "웃기지 마! 243명 좋아하시네! 네가 숫자나 제대로 셀수 있냐? 이 몸은 200명이 넘자 세는 것을 포기했었다고. 새삼스레 숫자는 왜 세냐? 나는 귀 찮아서 안했는데 넌 무척 한가했던 모양이네." 옆에 앉아 있던 드레인이 한 마디 던졌다. 녀석은 아까부터 엘레의 갈색 날개를 황홀하게 바라보던 차였다. 에이리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대포를 쏜 것도 나야!" "쏘자고 한 건 나였어." "실제로 쏜 건 나라니까!" "내가 쏘자고 하지 않았더라면 너는 기억조차 못했을걸! 소환수를 위협한 건 바로 나야!" "내가 조준을 잘 하지 않았더라면 할 수나 있었을 거 같아?" "헤에, 너같은 덜렁이가 뭔 일인들 제대로 했겠냐? 너는 멍청이야." "이 자식이!" 콰직 하고 에이리가 드레인에게 달려들었다. 녀석들이 드잡이질을 시작하는 동안 엘레가 한 숨을 내쉬고는 두 녀석의 목덜미를 잡아 채려 했지만 어린 놈들이라고 해도 속도라는 게 장난이 아 니다. 둘다 악을 지르면서 손톱과 발톱을 꺼내 서로를 할퀴려는 상황이라 끼어 들기도 난감할 것이었다. "그만 좀 해요! 둘다!" 엘레가 말리다 말고 소리를 질렀지만 당연하게도 녀석들은 말을 듣지 않고 먼지를 피우고 난리를 치면서 손톱 발톱 이빨까지 꺼내어 가며 악악거리고 떠들어 댔다. 이제 한숨 잘까나 하고 있던 나는 귀가 아파서 녀석들을 즐겁게 바라보고 있는 휴런에게 한 마디 해주었다. "밖에 던지고 와." "귀엽잖아? 우리 어릴 때 같지 않아?" 휴런이 킬킬거렸다. "시끄러워." "원래 쿠브도 시끄러운 걸 좋아하지 않았어? 응? 나랑 한바탕 해볼래?" 녀석이 눈을 빛내면서 내 앞으로 다가오길래 나는 낮게 말해주었다. "지금 이 기분으로 싸우면 널 죽일걸." 녀석은 움찔했다. 앗시아도 흠칫했다. "내가 얼마나 자제하고 있는 줄 모르냐?" "......알았어." 휴런은 한숨과도 같은 숨을 내뿜더니 천천히 일어서서 아직도 투닥거리고 있는 녀석들에게로 다가갔다. 이 녀석들은얼마나 싸우고 있는지 한데 엉 켜서 떨어뜨릴래야 떨어뜨릴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엘레가 두 손 든 것도 무리는 아니다. 드레인의 송곳니는 에이리의 어깨를 깨물고 있었고 에이리의 손톱은 드레 인의 등을 찌르고 두 녀석 다 서로의 허리와 허벅지를 두 다리로 칭칭 감 아 조금만 더하면 서로를 부러뜨리기 일보직전이었다. 휴런은 두 녀석의 머리칼을 틀어 잡았다. 물론 엘레야 저런 짓을 할 수 없 겠지. "캬오!" "카악!" 흥분으로 거의 변신 일보직전인 두 놈을 질질 끌고 창문가에 끌고 간 휴런 은 주저하지 않고 창문 밖으로 집어 던져 버렸다. "카악!" "캭!" 녀석들이 어린 놈들 특유의 비명을 올리면서 아래로 곤두박질 치는 것을 휴런은 내려다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어릴 때라 싸우는 것도 재밌지, 재밌고 말고." 엘레는 그 난폭함에 입을 벌리고 창문가로 다가와 휴런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아래 덤불에서 버둥거리는 두 녀석은 크윽 으 윽 하고 비명을 지르면서 기어 일어나고 있었다. 다리가 부러졌는지 두 놈 다 절룩 절룩 하고 있었다. "죽어버려! 휴런!" "제기랄! 죽일거야!" 두 놈이 악 쓰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오오, 그래, 한 백년 뒤에 와 봐라. 으하하하핫." 휴런이 큰 소리로 웃었다. 엘레는 기가 막히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며 중얼 거렸다. "여기는...4층인데..그렇게 난폭하게...." "아아, 다리 좀 부러져도 안 죽어. 자식들 반나절이면 뼈가 붙을 걸 뭐." 휴런은 킬킬거리면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앗시아를 바라보았다. 앗시아도 쿡쿡 웃는다. 마치 묘인족아이들에 대해서 과소평가하지 말라고 말하는 듯한 그 웃음에 나도 모르게 쓴 웃음을 지었다. 아이들의 고함소리가 점점 멀어져갈 즈음 문이 살짝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 섰다. 그 누군가는 예쁜 드레스를 입고 살그머니 내 앞으로 걸어오더니 내 뺨에 키스했다. "지금 아무 것도 안하지?" 미트라가 물었다. "그래, 졸고 있는 중이야." "그럼 나랑 산책가지 않을래?" 미트라가 눈을 반짝이면서 물었다. 옆에서 얼른 휴런이 끼어든다. "지금 쿠베린은 기분이 무척 나쁘니까 나랑 같이 가지." 미트라는 휴런을 기분 나쁜 듯이 쏘아보고는 잘라 말했다. "내가 싫어!" "무슨 소리, 내가 옆에서 보호해줄 테니 신나게 한 번 달려보자구. 나도 심 심하던 차였고." 휴런이 수작을 건다. 그렇군, 이 놈은 수작 거는 것도 아무래도 모자라 보여. 한가한 덕에 이런 꼴도 보는군. 햇빛이 악악거리는 미트라와 휴런 사이를 오락가락하면서 오색빛 먼지를 뿌린다. 졸려움이 몰려온다. 따스한 햇빛은 여전히 나를 나른하게 만들어 준다. 그러고 보니 낮잠을 안잔 지 무척 오래된 거 같군. 그러나 천천히 기지개를 펴는 순간 바쁜 발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듀나 시와 다크가 들어섰다. "또 왔습니다. 왕!" 그가 웃으면서 말했다. "이번에는 마법사도 꽤 있는 거 같습니다." "어디쯤 와 있지?" "여기서 반나절 거리요." "우리의 거리로 말인가? 아니면 인간의 거리로서 말인가?" 듀나시는 잠시 입을 다물고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인간의 거리로는 닷새쯤 될 겁니다. 그 정도의 숫자-기병 3백을 포함한 1 천 8백정도-이니까 오려면 그 정도는 걸리겠지요." "아냐. 인간들 군대는 느리지. 아마 6-7일은 능히 걸릴거야. 기병만 3백이 라니 꽤 모았군 그래. 어디서 온 놈들인지 아나?" "동북부 평원의 용병인 거 같습니다. 기병들은 평원의 용병이고, 나머지들 은 룬드바르의 군대와 각각의 군대가 섞인 거 같더군요." "왜?" 그 말에 다크가 대꾸했다. "깃발의 수만 해도 각양각색으로 수십은 되던데요." "여기 저기서 끌어 모았군....이 자식 아직 뜨거운 맛을 못봤어." 나는 낮게 웃었다. "그럼 여기서....살아 남은 몇몇 패잔병을 놓아주도록 하지. 증언하도록 말 이야." 발에 힘을 주며 천천히 일어서 보았다. 온몸에서 우둑 우둑 소리가 난다. 그렇군, 이 삼사일 간 푹 쉬어서 몸이 노곤 노곤해졌다. 이제 움직여 볼까? 허긴, 움직일 가치가 얼마나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옆에서 미트라가 질린 표정을 하고 날 바라본다. 휴런은 쳇 하는 얼굴이지 만 반항따윈 하지 않는다. 듀나시의 얼굴에도 다크의 얼굴에도 흥분의 빛 이 떠오른다. 그래, 맞아. 오늘은 패잔병 몇 정도는 살려서 돌려보내주지. 그래야 뭐가 뭔지 깨달을 테니까. 녀석들도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지 알아야 하고 말고. KUBERIN 운명과 우연은 종이 한 장 차이 눈 먼 여신은 눈 먼 칼을 휘두른다 10 밤, 어둠, 그리고 별, 우리들의 밤의 여신의 옷자락 끝에 매달린 이슬. 녀석들은 사각사각 소리나는 풀숲을 걸어서 숲 안에 들어온다. 숲 안에, 바 보스레 태연자약하게도 걸어 들어온 그들을 향해 밤의 짐승들은 소리를 죽 인다. 자줏빛으로 가라앉은 밤 안개는 희뿌연 달빛을 받아서 검은 수풀을 기묘한 색깔로 일렁이게 만든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인간의 병사들은 이런 밤에 숲을 전진하는 것이 불안한 듯 발자국 소리조차 삼키며 발끝으로 걷는다. 그러나 그도 잠시, 무거운 군장덕분에 털벅 털벅 발꿈치로 딛는 소리가 난 다. 지루해 지루해 지루해........ 이건 너무 자극이 없어.. 너무 심심해... 모든 여신들에게 맹세코 이건 너무 재미가 없어. 배가 고플 뿐 전혀 흥미꺼리도 아냐. 약한 것을 건드려 무슨 재미가 있지? 지겨울 뿐, 지루할 뿐. 나는 바위에 걸터앉아서 일족들이 내쉬는 한숨소리를 듣는다. 녀석들의 핏 속의 분노는 금방 사라지고 일족 특유의 자극을 쫓는 녀석들의 상념들이 부글부글 치솟아 오른다. 나는 인간과 너무 오래 있어 인간을 닮아 버렸나? 복수의 개념은 인간에게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단지 본보기를 보일 뿐. 웬지 입안이 쓰다. 나는 강한 놈이 오길 바랬다. 강한 마법사가 나타나 우리들을 공격하고 짓 밟아주길 바랬다. 너무 약한 놈은 흥미가 없다. 제발 좀 강한 놈이 나왔으 면 좋겠다. 싱거운 복수는 복수도 아니다. 복수란 개념따위 우리들에겐 없다. 하지만 분노는 분명히 있고 울분도 있다. 되돌려주는 것, 상처받은 자존심과 일족 에 대한 희미하고 경박한 애착도 있기는 있다. 아이들이 어둠속을 걷는 병사들에게 다가섰다. 우리들 중 가장 흥미진진해 하는 것은 역시 아이들이었다. 아이들 서너명이 풀숲을 기어가 마치 장난하듯이 가장 끝 행렬을 걸어가는 우스꽝스러운 깃털을 모자에 장식한 병사들을 잡아 챘다. 아이들의 손톱이 일직선으로 달빛에 빛난다. 검붉은 피와 비릿한 내음이 퍼져나가고 비명도 없이 그저 퍼억 하는 뭔가 가 터지는 소리가 난다. 비명도 지르지 못했던 덕에 앞의 행렬은 뒤에 있 던 자신의 동료가 사라진 줄도 모르고 성실하게 바보스럽게도 앞으로 나아 가고만 있다. 등에 짊어진 갖가지 군장과 도구들이 달칵 달칵 소리를 낸다. 그래, 녀석들이 지르는 신음소리보다 녀석들이 가진 자잘한 도구들이 내는 소리가 더 크다. 아이들은 재미를 느끼고 또 다가간다. 그리고 또 가장 뒤에 있던 녀석들 일곱명이 수풀 사이로 끌려들어간다. 배 가 고팠는지 헉헉거리면서 자신이 잡아 반쪽으로 찢은 병사들의 살점에 입 을 대고 먹는 아이도 있다. 허긴, 약간 허기질 시간이다. 이 숲 속에 우리 들이 들어온 이래로 우리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어린애들에겐 간식이 필요하다. 빨리 커야 강해지므로 아이들의 식탐은 대단하다. 어미들도 합세한다. 여자들의 분노와 집착은 남자들의 그것 보다 집요하고 강력하다. 바위 위에 앉은 나에겐 그저 검푸른 수풀이 사사삭 하고 움직이는 소리만 포착될 뿐이지만 수풀 아래의 여자들이 자신들의 아이들에게 다가가고 있 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미들은 아이들에게 다가가 자신의 아이가 이상한 것을 먹지 않았는가 확인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이들은 다시 피에 젖은 송 곳니를 드러내면서 야간행군을 하고 있는 병사들의 뒤를 다시 덮친다. 다시 일곱, 이번에는 조금 더 합세해서 여자들이 열명을 끌어왔다. 열 일곱이 순식간에 수풀속에 누웠다. 아득 아득 하고 뼈가 씹히는 소리가 숲속을 채운다. 인간들은 아직도 모르 고 있다.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그들은 그저 걷고만 있었다. 힘들고 지쳤을 것이다. 물론 그들은 명령에 따라서 쉬지않고 삼일을 달려왔으니까. 좀 들켜줘도 좋을 텐데 하고 누군가 일족이 말했다. 지루한 나머지 손톱 소제를 하고 있던 사내 녀석이 중얼거렸다. "어쩌면 저렇게 인간이란 둔한 거지?" "숲 속의 짐승들은 벌레조차 모두들 숨어 버렸는데 인간이란 어쩌면 저렇 게 둔한 얼굴로 걸어가고 있는 거지?" 예민하면 인간이 아니지. 나는 턱을 괴고 상태를 보고 있었다. 아이들은 사냥을 즐기고 있었다. 몇몇은 배가 고파도 움직인다. 살육과 피에 젖은 아이들이 흥미진진한 얼굴로 악기와도 같은 숨소리를 내 며 인간병사들에게 달려든다. 곧이어, 아주 잠시 후에 작은 부대, 약 삼십명으로 이루어졌던 선두 부대가 모두 사라졌다. 선두부대인지 척후인지 잘 모르겠지만, 어찌되었든 사라졌 다. 숲이 삼키듯 아주 조용히 사라졌다. 바닥에는 핏자국만이 남았다. 군데 군 데 흩어진 살점들이 굴러다닌다. 내일 아침에는, 아니 우리들이 사라지고 난 뒤에는 다른 자들이 포식하게 될 것이다. 여기저기서 아득 아드득 소리가 난다. 작은 뼈를 갉아 먹는 아이들의 소리가 나고 사내들은 모두 침묵하고 있었 다. 빌어먹을 달은 여전히 희미한 구름에 가려서 회색빛을 뿌리고 있다. "다음 부대가 오는 모양인데요." 듀나시가 중얼거렸다. 녀석은 뒤에서 망을 보고 있었다. "다음 놈들은 몇인데?" "....한 이백? 꽤 되는 숫자군요. 이 정도 숫자라면 정예이던가 아니면 마법 사가 끼어있을 지도 모릅니다." "....어라? 어라?" 젊은 녀석이 듀나시의 뒤에서 튀어나오면서 묘한 소리를 지껄였다. "저기에 사인족 비슷한 게 있어요. 수인족인가? 저렇게 생긴 놈은 처음인 데요." 옆에 무릎을 꿇고 있던 앗시아가 고개를 번쩍 들고 날 바라본다. 나는 그 시선을 무시하면서 어둠 속을 바라보았다. 이제부터 슬슬 움직여 볼까. 이제 젊은 자들은 새로운 적에게 시선을 돌린 다. 냄새가 난다. 피냄새가 난다. "누구?" "무슨..." 헉 하고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뒤에서 났다.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뒤에서 누군가가 목을 갈라버렸다. 핏줄기가 솟아 오르는 소리가 난다. 목을 자르 고 사지를 자르고 혹은 목을 부러뜨리고 녀석들은 비명소리를 즐긴다. 그 러나 너무 빨리 죽이면 비명소리가 나지 않는다. "꺄아아아아악" "으아아악" 드디어 제법 그럴 듯한 비명소리가 났다. 어느 누가 건드린 것인지 모르겠지만 비명소리가 퍼져나가자 병사들은 대 오를 흐트러뜨리는 대신 작은 방패를 앞세우고 도사린다. 그러나 그런 모 습은 우습기만 할뿐, 누군가 앞서 있던 일족 중 한 명이 튀어 올라 단번에 방패로 방어하고 있는 병사들 사이로 파고 들었다. "캬앗!" "으악!" 치솟는 것은 비명과 핏줄기, 피에 흥분한 자들이 송곳니를 드러낸다. 마치 어린애 장난처럼 잘려진 병사들의 목이 댕겅 댕겅 허공으로 치솟아 오른 다. 그리고 그 때에 '상대'가 나타났다. "캬오오오오!" 나타난 녀석들은 모두 네 명이었다. 누런 털로 뒤덮인 놈들은 우리들을 향해 돌진해 온다. 어둠 속에서 인간들 따위는 볼수도 없는 우리들의 존재를 알아내어 달려든다. 젊은 자들이 흥 분하기 시작했다. 인간과 다른, 인간보다 강한 놈들이 나타나자 녀석들의 피가 요동치기 시 작한 모양이다. "죽어!" 건방지게도 한 녀석이 내 앞으로 곧장 달려들었다. 내 앞으로 달려든 녀석의 정면을 쏘아보면서 그 누런털의 가죽을 가늠해 보았다. 그리고 긴 말도 긴 동작도 필요없이 나에게 덮쳐드는 사인족 치고 는 짧은 그 손톱을 피하면서 다섯 개의 손톱을 뻗었다. 일직선으로 희게 뻗어가는 손톱이 녀석의 옆구리를 찢을 때 녀석은 비명을 올렸다. 피하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다섯 개의 손톱은 그대로 녀석의 옆구리에 박힌 채로 대각선으로 재차 파고들어갔다. 뜨거운 피가 얼굴까지 튀긴다. 묵직하고 뜨 끈한 살점과 내장이 손톱에 엉겨 마침내 내가 손톱을 뽑아내었을 때에는 손톱에 내장들이 얽혀서 같이 쏟아져 내렸다. "꾸어어엉..." 비명은 어느 종족이나 구슬프다. 녀석은 내 손톱에 내장이 걸린 채 앞으로 고꾸라졌고 뒤를 이어 흥분한 내 일족들의 숨소리가 제법 거세진다. 죽여라! 모조리 죽여라! 눈이 붉게 차오른다. 아이들은 이미 흥분하여 발광상태였다. 녀석들은 인간들 사냥에 열을 내며 날뛰고 젊은 사내놈들은 이 반쪼가리 사인족 녀석들에게 흥미진진한 얼굴로 대응하고 있었다. 인간의 병사들은 울부짖으며 숲안을 뛰어다닌다. 비릿한 피냄새와 구릿한 흙냄새가 피와 엉겨서 기기묘묘한 냄새를, 지독하 게도 매력적인 냄새를 풍겨내고 있다. 숲의 안개는 핏빛을 띄고 있다. 나는 내가 피에 미쳐서 그렇게 보이는 것인지 실제로 안개가 핏빛을 이루 고 있는 것인지 알지 못한다. "뜨거운 분노의 화신이여, 지금 이 자리에 강림하여 그대의 힘을 보여주소 서!" 갑작스럽게 우리들을 향해서, 적아의 구분도 없이 그대로 불꽃이, 아니 정 확하게 말하면 불기둥이 솟아 올랐다. 뜨거운 공기와 불길이 사악한 혀를 날름거리면서 우리들을 덮쳤다. 인간의 병사들은 불에 타오르며 비명을 지 르고 놀란 아이들은 비명을 지르며 땅에 뒹굴었다. 나는 등줄기가 서늘해 지는 것과 동시에 흥분되어 고함을 질렀다. "마법사다!" "마법사다!" "마법사다!" 제일 먼저 반응한 여자들이 튀어 오른다. 여자들은 피로 물든 상체를 그대로 드러내고 송곳니와 손톱을 있는대로 드 러낸 채 마법사가 있을 법한 방향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불꽃이 피어 오르고 뜨거운 화염의 폭풍이 숲을 직격해도 격렬한 여자들은 쫓기를 멈추 지 않았다. "죽여!" "죽여! "마법사다! 마법사다!" 나역시 그녀들의 뒤를 따라 내달렸다. 아이들을 뺀 어른들은 쪼가리 사인 족을 가지고 놀기를 멈추고 흥분과 분노에 겨워서 마법사를 향해 내달린 다. "블레이즈 스톰!" 갑자기 무언가가 내 몸을 직격했다. 살갗이 갈기 갈기 찢어진다. 고통. 제법 격렬한 고통. 커다란 도끼에 찍힌 고기덩이처럼 내 살과 피가 허공으로 보이지도 않는 칼날에 잘게 찢어지는 것 같다. 나 이외에 몇몇이 바람에 휩쓸렸다. 바람이 라기엔 너무나 큰 소용돌이치는 용권풍이 격렬하게 내 몸뚱이를 휘감아 올 렸다. 의지와 상관없이 내 몸은 공중으로 치솟아 하염없이 하늘로 올라간 다. 숨이 막히고 귀청이 찢어질 것 같다. "우왓!" "으앗" 비명을 지르는 자들 사이로 나는 간신히 눈을 부릅뜨고 아래를 내려다보았 다. 내몸은 가랑잎처럼 떠올라 숲의 꼭대기로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아래 에 보이는 것은 검은 로브를 입은 마법사, 흑마법사였다. 지팡이를 치켜 올 리고 있는 마법사는 자신의 주변에 용권풍을 뿜어내며 우리들을 내어 쫓고 있었다. 그 힘에 흥분한 일족들은 도망가기는커녕 오히려 미친 듯이 달려 든다. 강한 놈이다 강한 놈이다 하고 외치는 소리가 숲안을 떠도는 거 같 다. 나는 이를 악물고 전신에 힘을 주었다. 1차 변신모드로 들어가자 찢어지는 살갗들이 안으로 스며 들어가며 강철같은 피부가 치솟아 오른다. 숨이 막 히고 귓청이 찢어질 것같은 압박도 사라졌다. 나는 아래를 노려 보면서 내 주변에서 나처럼 허공을 날고 있는 일족들을 보았다. 일족들 세 명은 변신 모드로 화하고 있었다. 다들 눈이 번쩍 번쩍하고 있다. 변신모드로 들어가자 모두들 흥분한 상태인 것이다. 좋아, 좋아! 가자고! 바람이 사그러드는 그 순간 우리들은 돌멩이처럼 아래로 내리 꽂혔다. 귀 청을 찢는 바람소리가 우리들의 귓가로 비명을 지르며 스쳐지나간다. 죽여라! 흥분과 살기가 무럭 무럭 치솟아 오른다. 이 놈의 마법사! 마법사 를 죽여라! 나는 내리 꽂히는 힘을 이용해서 녀석의 실드에 힘껏 부딪쳤다. 콰앙 하는 소리와 함께 나와 같이 몇몇이 실드에 정면으로 부딪쳤다. 마법사의 몸체 가 크게 흔들리면서 뒤로 쓰러질 듯 휘청거렸지만 실드 자체는 부서지지 않았다. 그러나 마법사는 충격을 받은 듯 피를 토해냈다. 좋았어, 죽어라, 이 같잖치도 않은 마법사여! 반탄력을 이용해서 아래로 내려 섰다. 그러자 마법사는 충격을 받은 얼굴 로 나와 일족들- 허공에서 뛰어 내린 자들을 바라본다. "어떻게 ..어떻게 그 위에서 무사할 수가 있지? 너희들은 뭐냐!" 비명처럼 흑마법사가 외치는 순간 여자 하나가 실드를 호되게 내리 친다. 마법사는 비틀거리면서 다시 지팡이를 치켜올렸다. 어쩐지 근처에 있는 것 은 이 놈 밖에 없는가 보다. 번쩍이는 번개와 불길이 바람과 함께 치솟아 오르며 일족들을 직격하지만 일족들은 그 격렬함에 매료된 듯이 오히려 더 날뛰고 더 덤벼든다. 우리들 에겐 공포란 없다. 우리들은 강력한 존재에 매료되어 그 강력함을 꺾지 않 으면 잠도 자지 못하는 피를 가진 자들이다. "죽여!" 손톱과 충혈된 눈빛으로 일족들은 마법사를 공격하고 있었다. 보통의 짐승들이라면 이런 마법사에게 덤벼들지 않는다. 마법사는 지치고 있었다. 너무 지친 나머지 공격도 약화 되고 있었다. 그는 파리한 얼굴로 실드안에서 주변을 돌아보다가 문득 생각난 듯이 자신의 뒤를 노려 보며 고함을 질러댔다. "제기랄! 뭘 하는 거야? 랄프! 바실리스!" 지친 흑마법사가 외쳤다. 그 소리와 함께 쿠어어어 하는 고함과 함께 거대한 짐승들이 튀어 나왔다. 짐승, 이것은 본 적도 없는 마도(魔道)의 짐승이었다. 다리가 여덟 개나 달 린 곰과 늑대를 섞은 듯한 거대한 짐승이 세 마리나 나타났다. 그리고 그 옆으로 벌레인지 짐승인지 알수 없는 기이한 것들이 일곱 개의 눈알을 번 득이면서 여덟 개의 다리를 거미처럼 꿈틀거리면서 나타났다. 그 앞에는 반쯤 벌거벗은 듯한 머리를 산발한 금발의 사내가 고함을 질러대고 있다. "비스트 마스터! 어서 공격하란 말이다!" 파리한 흑마법사가 안도의 한숨을 삼키며 외쳤다. "오옷! 처음 보는 놈이다!" 일족들이 흥분한다. 그들은 이제 병사들에겐 흥미가 없다. "제법 강해보인다! 어떤 힘이 있을까!" "가자! 가자!" 흥분한 일족들이 도망가기는커녕 일제히 달라붙는다. 어린애, 여자, 사내 할 것 없이 다들 흥분한 얼굴들이다. 나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이건 대체 뭘까? 뭐하는 물건이지? 이것도 만들어낸 짐승들인가? 그러나지금 당장은 이성을 되찾아야해. 이곳에 소환수가 나타나면 또 한 번 뒤집어지게 된다. 이미 인간의 병사들은 거의 다 죽었다. 하지만 이 뒤 를 이어 진군하고 있는 자들이 이 난리를 모를 리가 없었다. "앗시아!" 앗시아가 날 보고 돌아선다. 아직 어린 이 녀석은 1차 변신모드에서 자제 하려고 무척 애를 쓰고 있다. 피와 흙먼지로 범벅이 된 녀석이 날 보면서 헐떡이고 있었다. 피에 물든 송곳니에서 흐르는 피가 가슴까지 이어져 있 다. "다크!" 다크가 고개를 홱 돌려 날 바라보았다. 녀석은 여전히 냉정한 눈빛을 유지 하고 있다. 과연 내 다크다. "따라와!" "어..어디를?"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는 다크가 나에게 따라 붙으며 물었다. "뒤의 부대를 친다." "하지만..여기 아직도 마법사가 둘이나 있지않습니까?" "본대가 아니잖아, 본대는 뒤에 있어. 더 강한 놈들이 뒤에 포진하고 있을 거야." 나는 헐떡이고 있는 흑마법사와 뭔지 모르는 소리로 고함을 지르고 있는 벌거벗은 사내를 흘깃 돌아보았다. 여자들은 집요하게 흑마법사를 공격하 고 기괴한 마수들을 공격하고 있는 것은 사내들이었다. 사내들이 여자들보 다 호기심이 강한 모양이다. "하지만...." "처음 보는 놈들이라 싸워보고 싶겠지만 저 것들은 어차피 마법사가 만들 어낸 거잖아! 어서 가!" "저거 소환수보단 약하겠죠?" 다크가 안타까운 듯 기괴하게 생긴 놈들에게 달려들어가는 일족들을 바라 보며 입술을 혀로 핥았다. 싸워보고 싶은 모양이다. 앗시아도 계속 그쪽을 바라보고 있다. 녀석은 어린애라 더더욱 충동을 이기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어린애들에게 맡겨." 나는 짧게 말했다. KUBERIN 운명과 우연은 종이 한 장 차이 눈 먼 여신은 눈 먼 칼을 휘두른다 11 "저 놈들이군." "몇이나 될거 같습니까?" "...흠, 육칠백?" "그럼 이쪽이 본대일까요?" "그럴지도 모르겠는데, 마법사가 둘....문장을 단 기사같이 생긴 놈이 여럿 보이는데.." "깃발도 있군요." "아까완 달라." 우리들이 자신들을 내려다 보고 있는 것도 모르고 그저 넋을 잃은 채 불꽃 과 괴성과 비명성이 숲안을 물들이고 있는 전방을 보고 있는 녀석들은 마 상의 기사만도 숫자가 약 오십에 가까웠다. 그런데로 제대로 격식을 차린 기사복장에 갑주와 방패까지 걸치고 그 중에는 어울리지않게 랜스까지 들 고 있는 놈들도 약 이십여명 있었다. 저 괴이쩍게 생긴 깃털 모자를 쓴 걸 보면 이 놈들은 확실히 룬드바르의 정예군 같이 보인다. 선두에 선 가슴에 문장을 단 기사녀석은 괴이하게 생긴 그 깃털 달린 모자 를 쓰고 망원경으로 불꽃놀이처럼 화려한 마법력의 행진을 펼치고 있는 전 방을 바라보면서 눈살을 있는 대로 찌푸리고 있다. 문득 녀석이 자신의 뒤 에 말을 타고 있는 로브의 마법사를 돌아보며 말을 걸었다. "무슨 일이지? 역시 공격인가? 저 화려한 폭팔은?" "그 쪽에는 티아긴과 랄프가 있으니까 큰 문제는 없을 거외다." 얼굴을 회색의 로브로 둘러싸고 있는 마법사가 말했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주름진 손등에 달라붙어 있다. 마치 말라 비틀어진 닭발처럼 보인다. "하지만...마법력이 저하하고 있는데." 낮게 그 옆에 있던 홍의의 로브를 입은 여 마법사가 중얼거렸다. 그녀는 불타는 것같은 홍의의 로브를 걸치고 모양 좋은 허벅지를 그대로 드러낸 채로 말 위에 앉아 있었다. 화려한 보석장식이 허벅지와 팔뚝, 그리 고 이마에 드러나 있었다. ".....상대는 누구지?" "여기서 우리를 저렇게 대대적으로 공격할 자들이 남아 있다고 보나?" 난폭한 어조로 문장을 가슴에 새긴 사내가 다시 물었다. "흥분 마시오. 보네아스장군." 회색로브의 마법사가 낮게 중얼거렸다. "앞선 병력은 총 이백이 넘는다. 그런데...." 그 때 갑작스레 시끄러울 정도로 난폭하게 수풀을 헤치면서 달려나오는 자 들이 있었다. "누구냐!" 앞에 모인 병사들이 일제히 창을 드러내도 겁에 질린 자들을 막을 수는 없 었다. "으아아악!" "아악!"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고 걸레처럼 살갗을 찢긴 병사들은 공포에 찌들어 내 달리고 있었다. 창날 앞으로 서슴지않고 뛰어드는 그 모습 때문에 놀란 자 들 몇몇이 창날을 치우자 발광한 듯한 병사들이 일직선으로 달려나가며 미 친 듯이 비명을 올려댔다. "비명을 막아!" 냉정하게 마상의 기사가 외쳤다. 그러자 창을 쥔 병사들이 달려가 미친 듯이 비명을 지르고 있는 병사들을 후려갈겼다. 몇몇은 바위에 스스로 부딪쳐 쓰러지고 비명을 올리며 기절하 는 자들도 있었다. "대체..." 기사의 얼굴이 찌푸려질 때 풀숲을 헤치고 또 한 명이 비틀거리며 등장했 다. 병사들이 일제히 창날을 치켜 세우는 찰나 창백한 얼굴을 하고 무기도 없이 지팡이만 하나 달랑 든 사내는 황급히 나오며 외쳤다. "공격하지 마!" "바실리스!" 마상의 홍의 마법사가 외쳤다. 그녀는 말고삐를 돌려 그에게 다가갔고 피투성이가 된 사내는 나자빠지면 서 피를 토해냈다. "어찌된 거냐? 앞에 대체 뭐가 있는 거냐?" ".....모, 몰라." 창백한 얼굴을 한 사내가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 얼굴은 공포로 잔뜩 일그러져서 자신을 바라보는 자들을 돌아보며 낮게 외쳤다. "괴물이었다. 뭐가 뭔지 몰라, 하지만 마법사를 죽이기에 혈안이 된 자들이 었어." "뭐라구?" "미친 듯이 티아긴이 공격했지만 녀석들은 더욱 흥분하기만 했어. 세상에 그렇게 강한 놈들이 존재하리라곤...." 그가 중얼거리는 순간 갑자기 회색 로브의 마법사가 낮게 말했다. "끝났다." "에?" 모두 동시에 전방을 주시했다. 화려한 불꽃놀이처럼 어둠을 밝히고 있던 마법력이 사라져 사방은 고요하 기만 했다. 바람도 불꽃도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굉음도 괴성도 들리지 않는다. 지독하게 고요하다. 끝냈구만. 금방 끝났군. "에...그럼.." 덜덜덜 떨면서 피투성이의 마법사가 외쳤다. "티아긴도 죽은 거야!" "어떤 놈이야?" "몰라! 블레이즈 스톰도, 흑염뇌격도, 랜덤 토네이도도 전혀 소용이 없었어! 녀석들에겐 아무 것도 통하지 않았어!" 지금 떠들고 있는 놈은 아무래도 공격에 참가하지 않은 마법사 나부랑이같 다. 이 자식을 안죽이고 그대로 살려보냈단 말인가 싶어서 나는 나도 모르 게 이를 갈았다. "너, 그래서 마법사의 로브까지 벗어던지고 여기까지 도망온 건가? 티아긴 과 랄프를 버리고?" 냉혹한 어조로 회색마법사가 물었다. 그 말에 파랗게 질린 녀석이 바닥에 널부러진 채 그를 올려다 보았다. 홍색마법사도 그 말에 새삼 다시 바닥에 주저 앉아 있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초리가 사나와 지자 녀석이 금방 다시 외쳤다. "하지만, 나는 백마법사일뿐이고, 공격력은 티아긴보다 훨씬 못해! 나보다 수배 강한 티아긴의 공격을 받고도 녀석들은...아무렇지도 않았는데..나, 나 따위가...나설 수는..." "비겁한 녀석!" 순간, 가장 가까이 있던 홍색마법사가 무언가를 들어 사납게 내리쳤다. 좌악 하고 허공을 찢는 소리가 들리는 가 하더니 으악 하고 바닥의 백마법 사가 고꾸라졌다. 그의 얼굴과 등으로 일직선으로 피가 솟아났다. 그 순간 천천히 천천히 바닥에 쓰러진 사내의 등줄기가 반으로 갈라지더니 피와 뼈 를 드러내며 두 쪽으로 갈라졌다. 피가 분수처럼 솟아 올랐다. 그 몸뚱이가 둘로 나누어진 광경을 보고 겁에 질린 병사들이 일제히 뒤로 물러섰다. 심지어는 같은 편의 기사들마저 숨을 삼켰다. 이야, 대단한 위력이군, 저 놈의 살아있는 채찍같은 물건이 어떤 건지 좀 보고 싶은데. 채찍이라기엔 지나치게 사악해 보이는 물건이 여자의 손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손목을 뻗어 내어 도로 휘감았는데 그 물건은 뱀처 럼 휘익 몸을 뒤틀더니 곧이어 그녀의 팔뚝에 감긴 화려한 보석팔찌로 화 했다. 신기한 물건이다. 여마법사는 겁에 질린 병사들따윈 신경도 않은 채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어떤 놈들인지 알아봐, 자비어류엔." 회색 로브의 마법사는 고개도 들지 않았다. "...정보가 부족해." "여기 정령들이 왜 이리...겁에 질려있는 거지?" 여자가 난폭하게 말했다. 아아 겁에 질려있고 말고. 당연한 일이지. "아까부터 짐승이라곤 쥐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문장을 가슴에 단 보레아스인지 키레아스인지 하는 놈이 낮게 말했다. 녀 석의 얼굴이 굳어 있다. "분명 앞에는 사인족의 부대도 있었다. 그런데 그들 중 돌아온 자는 단 하 나도 없어. 이건 좋지 않군..." "더이상 지체하면 공포가 전염되어 전 부대로 퍼진다. 전진하든가 후퇴하 든가 둘 중 하나를 택해라." 회색의 마법사가 조용히 말했다. 그러자 장군이란 놈이 서슴지 않고 외쳤다. "회군한다!" "회군? 이런 숲에서 회군하다가 뒤통수를 얻어맞고 싶은 건가?" 여마법사가 날카롭게 외쳤다. "어차피 이 숲을 지나지 않으면 아그랑에 도착할 수 없다. 하지만 보이지 도 않는 적이 숲에 매복하고 있는데 그대로 간다는 것은 바보짓이야." "웃기지마! 뒤통수를 맞고 싶은거야? 차라리 전진해!" 여자가 말하자 장군이 단호하게 외쳤다. "내가 명령한다! 황제께 명령권을 받은 것은 나다! 마법사 드마리온!" 홍의의 여자는 입술을 깨물었다. 일렁이는 검은 눈동자는 분노와 살기를 담고 있었지만 장군도 지지않는 패기로 노려보고 있었다. "그대와 그대의 제자들은 회군을 위해 전방을 맡고, 자비어류엔은 후방을 맡아! 알아들었나?" 장군이란 놈은 그렇게 외치고는 지휘봉과도 같은 작대기-아마 검일지도 모 른다-를 들어서 허공에 휘둘렀다. "명령에 따라라! 드마리온!" 여마법사는 입술을 깨물면서 말머리를 돌렸다. "보엔! 아우아! 따라라!" 여자가 외치며 내달리자 그 뒤를 이어서 무표정한 얼굴로 말 위에 있던 두 명의 남녀가 급히 뒤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그녀들이 사라지자 장군이란 녀석은 자신의 부관들과 더불어 말머리를 돌렸고 안도한 것인지 불안한 것 인지 알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던 병사들은 어둠에 서린 숲을 슬금 슬금 바라보면서 홀로 남은 자비어류엔이란 마법사를 내버려 두고 움직이기 시 작했다. "어떻게 하죠? 지금 덮치는 게..." 입술을 계속 혀로 핥으면서 다크가 물었다. "기다려봐." "제법 강한 마법사가 저기에 네 명이나 있는 겁니다. 게다가 저 여자, 저 놈도 상당한 마법사로 보이는 걸요." "저 여자는 아니지? 홍색마법사인 걸 보니." "아닙니다. 그 계집은 흑마법사였으니까요." 홀로 남은 자비어류엔이란 회색마법사는 두 손을 뻗히더니 뭐라 중얼중얼 거리기 시작했다. "....................." 알아들을 수 없는 걸로 봐선 소환수를 부르는 것으로 보였다. 그때 앗시아 가 갑자기 나무 위에서 뛰쳐 내려 녀석을 덮쳐갔다. "캬오!" 곧이어 핏줄기가 솟고 비명이 들릴 것이다 하고 상상하는 찰나 피를 뿌려 야 할 그 마법사놈이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마치 연기처럼 사락 사라져버린 것이다. "앗시아!" 불길한 예감에 다크가 뭐라 외치려는 순간 등줄기에 사악하고 찬기운이 밀 려왔다. 공간이 일그러지는 압박감이 이는 순간에 나는 주저 않고 등 뒤의 허공을 향해 손톱을 뻗었다. 퍼엇 하고 뭔가 감촉이 이는가 싶더니 눈앞에 서 전광이 번쩍 했다. "왕!" 다크와 나는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등줄기에 거센 충격이 일어서 눈에 별이 보일 정도다. 고개를 들자 마자 마치 물결이 일그러지듯 눈앞의 공간이 일그러지면서 바 짝 마른 나뭇가지 같은 손가락들이 튀어나왔다. 그 손가락을 향해 다크가 뛰어 올라 세차게 후려갈기자 퍼엉 하는 소리가 터져 나오더니 다크가 뒤 로 나자빠졌다.귀청이 찢어질 정도로 큰 소리였다. 실드다. "제기랄!" "기다려." 앗시아가 돌진하는 것을 나는 재빨리 그 녀석의 등덜미를 잡아 채어 말렸 다. "와앗!" 자기 힘을 못이겨 앞으로 고꾸라진 녀석의 목을 잡아 세우고 나서 나는 정 면을 바라보았다. 회색의 로브를 입은 마법사는 로브를 꾸욱 눌러쓴 채 변함없는 모습을 하 고 있었다. 녀석의 닭발 같은 쭈글하면서도 바짝 마른 손가락은 여전히 자 기 옷자락을 소중한 듯 쥐고 있었다. "공간마법사인가?" ".......누구냐?" 녀석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 자식은 우리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냈던 것이다. 앗시아가 뛰어 내리는 그 순간 우리들을 포착한 이 놈에게 경의를 표해둘까 하고 나는 잠시 생각 했다. "이 놈!" 튕겨나갔다가 도로 일어난 다크가 발작하려는 것을 손을 뻗어 말리고 나는 마법사를 바라보았다. 녀석은 몇번이나 얻어맞은 다크가 도로 멀쩡하게 일 어나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놀라고 있는 것 같다. 이 정도라면 낮은 지위의 녀석이 아닐 것이다. 이 놈은 게다가 보통 마법 사도 아닌 거 같다. "너도 블랙서클인지 뭔지 하는 곳에 속한 놈인가?" "쿡.." 녀석이 웃었다. "난 그저 계약을 이행하고 있을 뿐이다. 그대야말로 누군가?" "이 건방진 자식!" 앗시아가 튀어 오르려는 것을 밀쳐버리고 나는 녀석을 바라보았다. "계약이라? 룬드바르와의 계약? 아니면 덜된 쪼가리들과의 계약?" "........알 바 아니겠지." 녀석의 손, 닭발이 천천히 허공으로 치솟았다. 녀석의 모습이 일렁이면서 흐트러진다. 마치 물에 비친 그림자가 물결따라 일그러지듯 변하는 그것을 보며 나는 그 녀석의 바로 옆으로 손톱을 뻗었다. 바람을 베는 듯 아주 희 미한 감각이 손톱을 따라 흘렀다. 그렇지만 그 순간에 퍼엉 하는 소리와 함께 앗시아의 작은 몸체가 뒤로 튕 겨나갔다. 다크가 발작을 일으키듯이 몸을 튕겨올리면서 팔뚝을 뻗었다. 녀석의 팔뚝 에서 검은 털들이 허공을 새까맣게 물들이면서 튀어 나간다. 그렇지만 그 털들은 모두 허공을 가로질렀을 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내 손톱에 흐르는 붉은 피를 보았다. 희미하긴 하지만 피 냄새가 났다. "다크, 앗시아를 봐라." "하지만!" 흥분한 녀석이 날 돌아보는 그 순간에 나는 다시 쭈삣한 느낌으로 몸을 틀 었다. 콰릉 하는 소리와 함께 이번에는 뇌격이 쏟아져 내가 있던 그 자리 를 새까맣게 재로 물들였다. 이 자식이 사람을 놀리는 구만! 하지만 감 잡았단 말이다! 이 쿠베린님을 뭐로 아는 거냐! 이 닭대가리 같 은 놈! 일렁이는 공간에서 녀석의 옷자락이 일렁였다. 나를 우습게 알고 장난하지 말란 말이다! 나는 두 손을 뻗어서 녀석의 이동경로를 따라 찔러 넣었다. 녀석의 몸이 흔들리는 가 싶더니 그 다음에는 바닥에 핏방울이 떨어진다. 이번에는 깊 었다. 어둠 속에서 회색의 마법사를 쫓는다. 죽인다. 보이지는 않지만 감각 은 살아있다. 이 놈이 도망치지 않고 우리들을 공격하려 하는 이상 녀석은 반드시 내 손 에 걸린다. 아무리 공간을 열고 닫는 놈이라 해도 이 공간에서 우리들을 공격하려면 이 공간에 위치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바로 이 순간, 이 놈이 이 공간 에서 우리들을 공격하려는 그 순간이 이 놈이 죽을 때인 것이다. 흥분은 이미 온몸을 달리고 있다. 재미있다! KUBERIN 운명과 우연은 종이 한 장 차이 눈 먼 여신은 눈 먼 칼을 휘두른다 12 축축한 안개를 헤치고 달이 나왔다. 우아하면서도 날카로운 둥근 칼날이 은빛을 발하고 있다. 손톱같기도 하고 발톱같기도 하고 송곳니를 닮기도 했다. 그리고 그 것은 어느 것을 말하든 날카롭다. 피를 볼 정도로. "크억!" 비명소리가 낮게 퍼져나갔다. 나는 내 손톱사이에 낀 살점을 살짝 핥아 보았다. 겉이 아닌, 속에 있을 법한 새빨간 살점. 맛은 별로 없다. 나이 든 놈이라 그럴지도. 검고도 진득한 액체가 바닥으로 퍼져나갔다. 나는 그 놈의 반쪽 난 육체를 바라보았다. ".....크으윽.." 생명이란 건 참 이상한 데가 있어서 반토막이 났는데도 살아있다. 한 팔 한 다리가 잘려져 나가고 가슴이 반쯤 잘렸는데 심장은 팔딱 팔딱 뛴다. 회색의 마법사가 날 올려다 본다. 그 얼굴에는 공포보다도 고통이 더 강하 게 맺혀 있다. 사람의 얼굴에는 표정이 서려 있다. 얕고 깊은 계곡들이 자잘히 얽혀서 세 월과 감정과 노력과 성격을 드러내고야 만다. "....묘인족......." 그는 그렇게 말했고 나는 그의 뛰고 있는 심장을 밟았다. "왕, 뒤따라 갈까요?" 다크가 뒤에서 물었다. 앗시아는 숨을 헐떡이면서 일어나 서 있다. "앗시아, 공격할 때를 잘 맞춰라." "....네." 앗시아는 그렇게 대답했지만 다크는 날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본다. 나 역 시 쓸데없는 소리를 했다는 것을 곧 깨닫고 놀라버렸다. 어느 누구도 싸움의 기술따위는 가르치지 않는다. 어느 누구도 어떻게 하 면 더 잘 싸울 수 있는 지 따위는 가르쳐 주지 않는다. 모든 것은 스스로 깨닫는 것. 나는 인간의 스승같은 짓을 했다. 정말로 나, 인간에게 많이 물 들었구나. 내가 몸을 날리자 다크가 뒤로 따라 붙었다. 앗시아가 달리는 소리는 약간 불규칙하다. 그렇지만 그도 잠시 앗시아의 뒤로 달려오는 자들의 소리가 들려온다. 그들은 살육을 즐기고 피에 굶주리면서 좀더 강한 자를 원하면서 달려온 다. 그래, 앞으로 와라, 내 뒤를 따라라. 더 강한 자, 더 무서운 자, 보다 싸 울 보람이 있는 자들이 앞에 있다. 룬드바르의 정규군과 제법 강한 마법사들이 앞에 있는 것이다. 녀석들은 달리고 있었다. 제법 빠른 속도였다. 전 군이 전부 숲을 빠져나가진 못했지만 그런대로 재 빨리 움직이고 있었다. 어쩌면 그들에게도 예감이란 것이 있어 불안하게 여기고 있는 것일런 지도 모른다. 그래, 살아 있는 것인 이상 이 숲안 전체 를 메우고 있는 살의의 바람정도는 깨닫겠지. 나는 가장 높고 가장 나이든 떡갈나무 위로 뛰어 올라갔다. 죽이는 것 보 다 앞에 있는 놈들을 살피는 게 일단 더 급했기에 나는 꼭대기 까지 뛰어 올라 발톱으로 두터운 나무 껍질을 쥐고 사방을 살펴 보았다. 바삭 바삭 하고 소리가 들려온다. 인간의 소리와 말이 내는 소리가 숨가쁘 게 들려온다. 멀지도 않군. 그리고 바사사사삭 하는 좀더 재빠른 소리, 그리고 더 희미한 소리와 함께 그들을 따라가는 자들이 있다. 나의 일족들은 오늘 상당히 흥분을 했구나. 달은 여전히 날카로움을 자랑하며 검푸른 하늘 위에서 빛나고 있다. 그 달 과 손톱과 피는 기이할 정도로 어울린다. 신음소리와 피 냄새가 사방으로 퍼져 나간다. 어쩐지 조금 취하는 것 같은데. 온 몸에 흐르는 피가 들끓고 주변에 가득찬 피 내음과 살기로 정신이 아득 해 진다. 심장이 뛴다. 마치 변신모드로 들어갔을 때처럼 정신이 몽롱해진다. 이봐, 어린 것들아. 흥분해서 소리나 지르지 마라. 이 분위기가 깨지면 서 글프니까. 나는 술에 취한 녀석처럼 히죽 히죽 웃었다. 다크와 앗시아도 내 옆에서 나처럼 심장을 두근거리며 겉으로는 보이지 않 는 숲 안을 지켜 보고 있었다. 녀석들의 얼굴도 벌겋게 달아 올라 있었다. 제법 귀엽군. 잠시 후, 무언가 작은 것, 달빛에 어려 자줏빛으로 보이는 무언가가 휘익 숲 위로 올라왔다. 자줏빛의 옷을 입은 무언가가 거인이 집어던진 공처럼 휘익 내가 버티고 선 떡갈나무 높이까지 튀어 올라 숲 전체를 바라본다. 그리고 그 자줏빛 덩어리는 공중에 거짓말처럼 터억하니 정지한다. 정지. 정지. 정지라? 그리고 그 덩어리는 두 손을 모아 아래로 숲 아래로 무언가 시퍼런 것을 집어 던졌다. 쐐애애애액 하고 뭔가가 찢어지는 소리가 난다. 콰콰콰쾅! 땅을 울리고 나무가 송두리채 박살나 주변을 가득 메웠다. 갈색의 덩어리 들이 공중으로 치솟고 흙먼지가 하늘을 덮었다. 인간의 비명소리따윈 그 격렬한 폭음이 모조리 삼켜 버리고 주변은 온통 난장판이었다. 그 격렬한 폭음 뒤에는 바람이 일어나 주변을 다 헤집고 튕겨버렸으며 흙먼지는 구름 처럼 일어났다. 뒤집어지며 공중을 가득 덮은 나무조각들과 바위 조각, 그 리고 흙덩이들은 사방으로 흩어졌으며 내가 서 있던 거대한 떡갈나무는 옆 으로 기울었다. 나는 하마터면 나무에서 떨어질 뻔했다. 마법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깨닫기도 전에 제 이파가 몰려왔다. 이번에는 거대한 불꽃의 폭풍. 새빨간 화마가 피를 토하듯 불을 토해내면서 허공에서 아래로 지상으로 곤 두박질 쳤다. 그 상상도 못할 정도의 열기는 공기를 찢는 소리를 내면서 사방으로 퍼져나갔고 곧이어 바람을 등에 엎고 용권풍처럼 회오리를 이루 어 냈다. 아까의 공격으로 미처 해결하지 못한 것들을 모조리 다 불태워 버리겠다는 듯이 불의 바람은 사방을 나선형으로 꼬리를 끌면서 밀어 붙였 다. 사방은 온통 불바다. 나의 시야에 보이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내가 선 떡갈나무는 이 거센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잔가지를 모조리 부러 뜨리면서 허공으로 불속으로 뛰어 들었다. 나는 변신모드로 재빨리 몸을 바꾸면서 아래로 몸을 던졌다. 아래는 온통 불의 바다 였지만 그 뜨거움은 위 보다 오히려 나았다. 대지의 여신이 감싸안은 검고도 부드러운 흙더미로 몸을 날리면서 나는 두 번째 변신모드로 화했다. 미친 듯이 치솟아 오르는 손톱과 발톱으로 나는 땅을 파헤쳤다. 등덜미가 뜨겁다. 거대한 회오리가 내 등뒤로 다가온다. 살아있는 것 보다 더 지독한 무심한 화마가 모든 것을 죽여버리기 위해 태워 버리기위해 달려든다. 파라, 파라, 파라! 대지의 여신의 품안에 안겨라! 뜨거움이 전신으로 몰려들었다. 늦으면 안돼! 나는 차갑고도 부드러운 여신의 옷자락 속으로 몸을 덮었다. 예민한 귀가 포착한다. 찢어질 듯한 바람의 비명소리, 갈갈이 찢겨나가는 숲속의 고통, 살아 있는 짐승들의 무력한 절규, 모든 것을 다 태워 무로 돌리는 사악한 화마가 생 명을 앗아가고 있다. 나는 비명을 지르는 대신에 입안에 흙을 물고 한껏 몸을 움추렸다. 차가운 흙이 내 몸을 덮고 뜨거운 바람이 내 위를 지나간다. 숨을 고르면서 천천히 정지했다. 뜨거운 화마가 스쳐지나가는 시간이 얼마 나 될까. 인간의 마법사가 일으키는 이 인위적이고 사악한 불의 바람이 사라지기까 지 얼마나 걸릴까. 홍의의 마법사. 인간의 여자 마법사. 그 여자였다. 흙안에서 소리가 들린다. 살아 있는 것들의 버둥거리는 소리. 그렇군, 나의 일족들도 흙 속으로 파고 들었군, 어린애들 몇은 죽었을 지도 모른다. 그럼 또 다시 우리들은 마법사를 죽여야 할 이유가 늘어난 것일 지도 모르지. 살기가 피어올랐다. "드마리온! 드마리오오온!" 처절할 정도로 커다란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그 놈, 보레아스인지 뭔지 하는 그 놈이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그는 격노 한 음성으로 소리 지르고 있었다. "아군에게 직격하다니! 당신, 미쳤나!" 그는 격렬하게 외치면서 항의했다. 온몸을 부들 부들 떨고 있기라도 하고 있는 것인지 덜덜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지만 겁에 질린 것처럼은 느껴지진 않는다. 엄청나게 열 받았는 지도 모르지. "미치지 않았어." 냉정한 어조로 빌어먹을 여 마법사가 대꾸했다. "아군의 유무도 확인하지 않고 그대로 공격하다니... 당신, 그러고도 종군마 법사란 말인가!" "적의 소멸이 우선 아닌가? " 여자는 빌어먹게도 태연했다. "피해 보고해라!" 보레아스 근처에 있는 녀석이 떨리는 음성으로 외쳤다. 부관인지도 모르겠 다. 그리고 그 제서야 여기저기서 참혹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내 귀에는 말이 울고 있는 소리가 더 참혹하게 들린다. 인간의 싸움에 끌 려나와서 말이나 노새 따위가 죽는 것은 불쌍하지 않은가. 코끝이 온통 탄 내음으로 가득해서 이 위가 어떨 지 상상이 족히 간다. "드 마리온! 네 년을 용서하지 않겠다!" 갑자기 다다다다 하고 어떤 자가 달려왔다. 그는 격렬하게 외치면서 달리 더니 여자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곧이어 크윽 하는 짧은 신음 소리를 남기고 고꾸라졌다. 피냄새가 탄 냄새를 덮고 다시 생겨 난다. "무슨 짓이냐!" 보레아스가 큰 소리로 다시 외쳤다. "마스터에게 무례한 짓을 하다니." 어조가 없는 음성이 천천히 들려나왔다. "보레아스 장군, 잘 들으십시오. 여기 있던 것들이 무엇인지는 자세히 몰라 도 엄청나게 강한 놈들이 있었습니다. 그 놈들이 무서운 속도로 달려드는 데 거기에 병사 한 두명을 일일이 가려내서 공격할 여가가 있다고 생각하 십니까? 아니면 제 마스터가 병사 한 두명을 위해서 본대를 희생시켜야 한 다고생각하시는 겁니까?" 그 무감각한 녀석이 떠들고 있다. "하, 하지만! 아군의 철수도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이런 공격을 퍼부우 면 어쩌겠다는 거야!" 어떤 녀석이 고래 고래 고함을 친다. "그 보다 아군의 피해는 얼마냐! 보고해라!" 장군이란 놈의 목소리는 히스테릭해지고 있었다. 궁금해 죽겠군. 나는 손을 뻗어 흙을 열고 천천히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내 주변에는 인간들이 없다. 고개를 내밀자 아직도 뜨거워서 이글거리는 공기가 코끝을 덥힌다. 지독하게 탄 내가 숨이 칵칵 막히게 한다. 제기랄. 불은 싫어. 눈을 뜨기도 싫을 정도로 뜨거운 공기와 발을 디디기에 무안한 땅의 온도 를 무시하고 억지로 주변을 돌아보니 이건 온통 시커먼 재의 바다였다. 검 은 색과 회색덩어리들이 연기를 뿜어 내면서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이런 짓을 하다니. 내 시야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다 잿더미였다. 게다가 살아 있을 법한 나무 뿌리마저 다 파헤쳐져 땅은 신음을 터뜨리고 있다. 산불이 나도 이렇게 되진 않을 것이다. 그 뜨거운 용권풍은 숲을 완 전히 만신창이로 만들고 바위와 흙을 태워 버렸다. 살아 있는 것들은 하나 도 없을 것이다. 달은 보이지 않는다. 창백한 달빛은 이 연기더미위로 비추어지지 않는다. 하늘도 보이지 않는다. 사방도 잘 보이지 않는다. 두 번째 변신모드임에도 불구하고 내 발바닥은 무척 뜨거움을 호소하고 있었다. 목이 막힌다. 눈앞 이 잘 보이지 않는다. 분노가 심장을 뛰게 하고 머리를 뜨겁게 만든다. 이 무참한 모습을 대지의 여신이 용서할까. 숲의 정령들이 지르는 비명소 리는 이미 처절한 절규로 바뀌었다. 버석 버석 소리가 나는 잿더미 위를 이글거리는 공기를 이고 나는 분노와 함께 걸었다. KUBERIN 운명과 우연은 종이 한 장 차이 눈 먼 여신은 눈 먼 칼을 휘두른다 13 "으아아앗!" "와악!" 놀란 비명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잿더미 위에서 무언가가 튀어 올라오고 있었다. 툭 하고 땅 속에서 치밀어 오르더니 곧이어는 엉금 엉금 기어 나오고 그 다음에는 우뚝 선다. 크기는 각양각색 모양도 각양각색, 그러나 분명한 것은 모두 잿빛이라는 점이었다. 보이는 것은 두 눈, 거의 흰 빛으로 보일 정도로 강렬한 안광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내 바로 옆에서 손이 불쑥 튀어 나왔다. 그 손은 인간과 다른 시커먼 손톱을 마치 자랑스런 칼날을 든 전사처럼 앞 으로 내밀고 일어서고 있었다. 잿빛으로 형태를 잘 알 수 없는 그 몸뚱이 가 서서히 땅속에서 일어난다. 여기 저기 일어나는 몰골은 솔직히 말해서 멋지다기 보다는 기괴했다. "크흐흐흐흐흐..." "크르르르르르..." 여기저기서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터져나온다. 살기가 마치 일어나는 구름처럼 퍼져나간다. 이 아무 것도 없는 잿더미의 숲안에서 살아있는 것은 분노와 살기의 움직임뿐이다. 나는 송곳니를 드러내고 히죽 웃었다. 동족들은 일제히 땅속에서 일어나 살기를 발한다. 멋지다. 아직 밤은 길다. 새벽의 여신이 동녘의 창문을 열 그 때까지 즐기자꾸나. 어린 것들아. "저게 뭐야아아아앗!" 그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그 가련한 인간의 병사의 목줄기가 사라졌다. 목이 마르다, 목이 말라. 이 타오를 듯한 갈증을 무엇으로 풀 수가 있을까. 전신을 타오르는 열기와 분노, 고통이 눈앞에 있는 것들을 향해 일제히 쏟아진다. 달려라! 여기저기서 공기를 찢는 소리와 함께 비명소리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아 직 가시지도 않은 탄 냄새와 숨이 칵칵 막히는 열기 속에서 병사들이 비명 을 올리며 피를 뿜었다. 목이 마른 자들이 그 피를 구해 목덜미를 들이 물 고 피를 빨아댄다. 그들을 책할 마음은 조금도 없다. 지금 이 자리에 살아 서 액체를 뿜어낼 수 있는 존재는 인간뿐이다. 이미 전원 변신모드로 들어 간 녀석들은 주변을 보지 않는다. 오로지 갈증을 풀기위해 앞으로 나아간 다. 그래, 본래라면 우리들끼리 싸울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은 마법사에 대 한 분노로 불타올라 어느 누구도 동족에게 시선을 돌리지 않는다. 모두 앞 으로 나아간다. 앞으로 나아가고 솟아 오르며 피를 뿌린다. 나는 놀란 얼굴로 공포에 질린 인간들 머리 위를 뛰어 넘어 그대로 홍의의 마법사에게로 쇄도했다. 마법사는 눈을 크게 뜨고 파란 얼굴로 두 명의 남 녀 마법사와 함께 서 있었다. 그 자리에 선 자는 분명히 장군인지 뭔지인 지 하는 놈이었다. "서라! 괴물!" 장군이 고함과 함께 칼을 뽑아 들었지만 무시했다. 나는 곧장 마법사에게 달려들었다. 그 마법사가 지쳐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파리한 얼굴과 지친 기색이 완연한 그 년에게로 달려들어 그 목줄기를 잡 아갔다. 퍼어엉! 하고 강렬한 공격이 내 가슴에 직격했다. 나도 충격을 받고 조금은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그것은 마법이 아니라 메이스였다. 메이스를 휘두른 것은 무표정한 얼굴의 남자로, 홍의의 마법사의 제자처럼 보였다. "이 괴물!" 이를 갈면서 장군이란 놈이 다시 달려든다. 나는 그 놈을 무시하고 다시 이 무표정한 놈에게로 달려들었다. 인간이 나 를 막는 일이란 있을 수 없다. 이 놈은 인간이 아니다! "아이스 .." 여자 마법사가 마법을 걸려하는 그 순간 나는 손에 쥐고 있던 흙덩이를 그 여자를 향해 집어던졌다. 여자가 입안에 흙덩이를 가득 삼키고 뒤로 비틀 하는 그 순간을 기다려 나는 장군이 내 등을 공격해 오는 것을 휘감아 그 놈의 장검으로 나를 정면에서 공격하는 녀석의 가슴으로 내리쳤다. 늑골이 부서져 나가며 뼈조각이 살점과 함께 얼굴까지 튀겼다. 이 놈의 심장이 터 지는 소리가 들릴 듯했다. "으악!" 무표정한 녀석 대신 장군이란 녀석이 부러지는 자신의 팔뚝에서 나는 우둑 거리는 소리와 더불어 비명을 올렸다. "제기랄! 보엔!" 홍의 마법사는 비틀거리면서도 두 손을 곧장 뻗었다. 그리고 그 여자의 팔뚝에서 살아있는 양 뱀인지 채찍인지 알 수 없는 무언 가가 튀어 나왔다. "죽엇!" 그 아가리를 벌린 뱀 채찍이 나의 머리를 향해 곧장 달려왔다. 손톱이 주욱 앞으로 뻗었다. 내 팔뚝에 있는 털들이 일직선으로 곧추선다. 그리고 살육을 향해 피 냄새를 향해 맹렬하게 돌진해 가는 것이다. 뱀이 달려드는 것과 동시에 내 팔뚝에서는 시커먼 털들이 강침처럼 솟아나 여자의 전신을 새까맣게 뒤덮었다. "우웃!" 여자의 뱀이 격렬하게 반항하면서 실드를 이루어낸다. 그러나 그 실드가 채 갖추어 지기도 전에 여자의 가슴과 팔뚝 여기저기에 시커먼 침들이 박 혔다. 나는 그 여자를 향해 다시 달리면서 그 뱀을 손으로 후려잡았다. 엄청난 충격이 전신으로 밀려들어온다. 이글거리는 감각으로 등줄기가 아 연하다. 눈앞에서 별이 보인다. 온몸이 후들 후들 떨린다. "죽어라! 이 괴물!" 여자가 발악하듯이 소리를 지르며 실드를 완성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그 때에 나는 뱀을 잡아 당겨 그 여자의 몸을 포옹하듯이 끌어 잡았다. "이익!" 여자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졌다. 내 손톱이 닿기도 전에 그녀의 전신은 나 의 사랑스런 털들로 인해서 피로 물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아무리 애를 써 도 내 힘을 막아낼 인간은 없다. 그녀는 이를 갈면서 자신의 목에 걸린 목 걸이를 어루만졌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의 목에 걸린 목걸이에 조각된 독수리 머리를 가진 야 수가 갑자기 초록색으로 눈을 번뜩였다. 크와아아아! 이건 또 무슨 물건이야? 야수는 순식간에 투명한 반신을 들어 작은 장식품에서 팔뚝만한 크기로 화 하더니 구부러진 날카로운 부리를 자랑하면서 내 가슴을 향해 돌진해 왔 다. 나는 뒤로 물러서는 대신에 내가 쥐고 있는 뱀을 그 놈의 부리에 들이 대었다. 콰앙 하고 불꽃이 튀겼다. "으아아아앗!" 그 충격으로 나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서야만 했다. 그러나 나 보다 그 여 자는 충격이 더 심했는지 순식간에 십여 걸음이나 튕겨 올라가 땅바닥에 부딪쳤다. 그녀의 얼굴이 한껏 일그러졌다. 얼굴의 반쪽은 완전히 불에 그 을린 양 무너져 내리고 피와 재로 뒤덮히고 광대뼈가 드러났다. 놀랐다. 이건 장난이 아닌데. 여자의 장신구 중에서 팔찌와 목걸이가 박살이 났다. 나머지 발찌와 반지 가 어떤 효능이 있는지 궁금해서 죽을 지경이다. 나는 피투성이가 된 여자 에게 다가가 그녀의 옆구리를 걷어차 보았다. 꿈쩍도 하지 않는 것이 죽은 것 같지만 아무래도 심장은 뛰고 있다. 쇼크를 먹긴 했어도 죽은 것은 아 니다. 갑자기 뒤에서 바람소리가 일어났다. 옆으로 몸을 비키자 나의 허리를 통째로 가를 듯이 달려드는 대검이 보였 다. 그 대검을 든 놈은 아까 내가 심장을 갈라냈던 그 무표정한 녀석이었 다. 그 녀석은 이를 한껏 드러낸 전형적이고도 흔한, 증오와 공포에 겨운 표정을 모처럼 드러내고 있었다. "이 괴물! 감히 마스터를!" 대검을 휘두르는 그 모습은 아무래도 전설의 오우거다. 오크가 아무리 난 리를 쳐도 이런 놈은 없을 게다. 이 놈은 그 무표정의 가면이 벗겨지자 마 자 나를 향해 검을 휘두르는 데 그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인간이라곤 믿을 수 없었다. 물론 인간이 가슴이 박살났는데도 이렇게 팔팔할 수는 없다. 나 는 슬쩍 슬쩍 피하면서 찢겨진 옷자락 사이로 내가 내리쳤던 상처를 볼 수 있었다. 그 상처는 완전히 아물어 그저 흔적만 남기고 있다. 그렇구나. 이 놈도 인간이 아니다. 나는 광포한 살기에 휩싸였다. 정상이 아닌 것들, 인간이 만들어 인간의 도구로 쓰이는 것들에 대한 분노 가 치밀어 올라 증오와 함께 터져나왔다. 쿠아아아악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완전히 죽임을 당한, 부서지고 유린당한 그 잿더미의 숲 속에서 나는 광분 했다. 인간이여! 인간이여! 인간이여! 그 잘난 마법이여! 마법이여! 마법이여! 비명소리가 터지고 손안에서 살갗과 내장이 춤추었다. 핏방울이 사방으로 튀어 올라와 시야를 붉게 물들인다. 주변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나는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다. 동족이여, 죽여라! 자기 생명을 가진 자들이여 죽여라. 분노를 터뜨려라. 어떤 것이든 좋다. 부수어라! 인간이 이기로 만들어낸 이 간악한 것들을 없 애라!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 가지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 무엇 때문에 생명을 농락하는 가! 너는 무엇이냐! 너는 무엇이냐! 인간이 만들어낸 또 무엇이냐! 호기심이란 그 말로 이렇게 해도 좋은 것이냐! 이렇게 모든 것을 재로 만 들어 세상을 자기 맘대로 바꾸어도 좋은 것이냐! 심장이 터져나갈 것 같다. 세상이 빙글빙글 돈다. 오랜 세월을 살아오면서 가장 사랑스러운 생명을 두고 이 땅 위에 서서 나 는 세상을 바라본다. 나는 살아 있다. 나의 뜻대로 살아 있다. 가장 자연스러운 필멸을 바라보며 나는 살아 있다. 제 18화 분노 KUBERIN...... 살아있는 자라면 누구라도 죽음과 한 걸음 틈을 두고 걷는다 죽음을 피하는 것도 자유 죽음과 맞서 싸우는 것도 자유. 1 "몇명이나 죽였다고?" "..정확히 말할 수는 없습니다. 숲 전체가 시체 더미라서..게다가 성한 시체 라곤 거의 없고..모두 갈기갈기 찢겨져서..." 덜덜 떨면서 전령이 말했다. "....몇? 그래서 대략 몇이라는 거야?" 녀석이 집요하게 되물었다. 보고 있던 놈들도 일제히 안색이 굳는다. 어이, 어이, 그렇게 말하면 불쌍하잖아? "천 오백에서 이천 오백선..이라고 생각합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전령이 말했다. "천명이나 어떻게 차이가 나나! 정확히 말해!" 부들거리는 음성으로 녀석이 외쳤다. "말씀드렸다 시피...갈기갈기 찢긴 데다가 숲의 반 이상이 화재로 소실되었 고 그 주변에 널려있던 시체들도 타버렸고...사방엔 온통 시체더미입니다. 세세히 세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지경입니다." 녀석은 불안한 시선으로 나를 흘긋 바라보았다. 왜 날봐? 설마하니 뭘 죽이는데 고이 고이 사지를 보전해 주면서 없애는 획기적인 방법이라도 있단 말인가? 게다가 그렇게 난장판을 만들고 사방을 태운 건 내가 아니라고. 아무리 전지전능하신 이 몸께서도 그런 불장난은 못해. 나는 여유로운 자세로 탁자에 발을 얹은 채 포도주를 들이키고 있었다. 내 쪽을 은근히 외면하고 있는 녀석들은 덜 떨어진 창백한 몰골을 하고 있다. "게다가...몇백 메터 떨어진 마을에도 팔다리 같은 것들이 뚝뚝 떨어져 있 다는 보고가 들어와 있고...관도에도, 밭에도 시체조각이 여기저기에...." 녀석은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얼른 움추리며 피했다. 그리고는 우물 우물 주절댄다. "......그래서 추정하기가 어렵습니다...." 침묵이 흘렀다. "크크크큭...킥킥.." 누군가 웃었다. 돌아보지 않아도 그가 사인족의 왕이라는 것을 알수 있다. 녀석은 창턱 나 무 위에 걸터 앉아서 이죽거리고 있었다. 산발된 머리칼과 달리 눈빛은 번 쩍 번쩍 빛이 난다. 노란 눈이 일그러진 빛을 발하고 있다. 그 노란 눈에는 증오와 분노가 번 뜩이고 있어 보는 자들을 서늘하게 만든다. 인간들은 소름이 끼친다는 듯이 진저리를 치고는 다시 에메스를 일제히 바 라보았다. "쿠베린..." 에메스가 피를 토하듯 말했다. 그의 얼굴을 창백하고 피로해 있었다. 전령이 나가자 마자 그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주먹을 쥐고 내 앞으로 와서 섰다. "그만 해줘...." "뭐를?" "전의 너로 돌아와줘." "전의 나?" "....전의 그 오만방자하고 명랑하던 어처구니 없는 소년으로 돌아와줘...." 그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를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말에 뭐라 대꾸할까 하고 입을 벌린 순간 갑자기 발작적인 웃음소리와 함께 야유가 쏟아졌다. "바보천치 아냐?" 사인족의 왕은 날렵한 자세로 방안으로 들어섰다. 그가 들어서자 비린내와 더불어 술내음이 퍼져나가서 옆에 있던 인간들 모 두가 옆으로 갈라져 피했다. 그의 전신에서 풍기는 비린내는 피비린내, 그 의 몸에서 나는 술냄새는 비탄의 냄새다. 그는 팔짱을 끼고 에메스를 조소 하고 있었다. "인간이여, 묘인족의 왕은 묘인족이야. 너희들의 잣대로 재는 거냐?" 눈을 가늘게 뜨고 에메스가 그를 노려보자 사인족의 왕은 킬킬거리고 웃었 다. "너희들의 옆에 있는 자는, 소년도, 인간도 아니야, 너희들의 곁에 있는 자 는 지상 위의 가장 막강한 학살자, 수백년을 살아온 노회한 괴물, 자기 혈 족을 죽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자존심 덩어리의 살육자다." "말이 과하군. 이 내가 어디가 괴물이란 말인가?" 이렇게 잘생긴 괴물 봤나? 내가 중얼거리자 그는 날 보며 이죽거렸다. "당신 나이가 몇인지 나는 몰라. 당신은 아나?" "몰라." 당연 나도 모르지. 나이를 꼬박 꼬박 세는 건 인간이나 하는 짓이잖아. 자기도 자기 나일 모르면서 나에게 그런 걸 묻는 것은 실례 아닌가? 예의 도 모르는 놈. "최소 오백세가 넘었지? 아마도 당신 칠백세는 되어가지 않을까?" "몰라, 세어 본 적 없다." 내가 대꾸하자 그는 킬킬거렸다. "우리와 달리 묘인족은 강한 자를 가만두지 않잖아? 그 나이까지 살아남았 다면 너는 괴물이다. 너는 냉혹한 괴물일 수 밖에 없어." "시끄러워!" 그말에 반응한 것은 에메스였다. 그는 파리한 얼굴로 사인족의 왕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그렇지 않아!" 나는 새삼스레 에메스를 바라보았다. 대체 인간의 어느 점이 이렇게도 사랑스러운 것일까. 이 사랑스럽게도 아둔한 점은 놀라울 정도다. 에메스는 나의 앞을 가로막 고 자기에게 들려주듯이 외치고 있었다. "쿠베린은 괴물이 아니다, 그는 냉혹한 괴물이 아냐!" 나는 기묘한 감상에 사로잡혀서 에메스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필사적으로 외치고 있는 이 꼬마는 내가 자기 뜻대로 움직여 줄 거라고 순 진하게 믿고 있었다. 자기가 위기에 처하면 달려올 것이고 자기가 죽으면 내가 울고, 자기를 생각하고 있다고, 그렇게 믿고 있다. 감탄스러울 정도다. 인간의 자아 도취적인 애정이란 것은. 가끔 그것이 독인 줄 알면서 나는 그것을 들이킨다. 인간의 애정은 독과 같다. 순간적으로 목숨을 걸고 모든 것을 건다고 수십 번 맹세하면서 인간은 애 정을 당당하게 요구한다. 그렇지만 그 애정이 수십년 가는 법은 별로 없고 평생을 가는 법은 있을 법하지도 않다. 몇 년 몇 달에 걸쳐 수도 없이 맹 세와 배신을 거듭해 가면서도 인간은 계속해서 애정을 상대에게 요구한다. 그러나 빌어먹게도 찬란하고 지저분하게도 끈끈한 이 놈의 인간의 애정이 라는 것은 이기(利己)와 위선과 모략이 점철된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눈 이 멀게 만든다. 몇 번이나 이 순간의 사랑에 나는 눈이 먼다. 수많은 여성들에게서 나는 순간의 타오르는 애정을 받는다. 그러나 내가 보답해 줄 수는 없다. 그녀들은 나보다 먼저 죽고 먼저 울고 먼저 뒤돌아 선다. 킬킬거리는 사인족의 왕은 턱을 어루만지며 날 비웃고 있었다. 그에겐 나 를 비웃을 자격은 없다. 그는 배반당했고 현명하지 못했고 어리석은 행동 을 취했으며 멸망하고 있는 종족의 왕이다. 그가 강하긴 하지만 그건 이미 패한, 상처 입은 자의 강함일 뿐이다. 이미 무너진 자는 다시 단련되기 전 에는 강하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는 아직 무너져 있고 나는 그 무너진 얼 굴을 본다. "쿠베린이여...너는 언제까지 그런 가면을 쓰고 있을 참인가?" "가면?" "그럼 인간들을 희롱하는 이 연극이 그렇게도 재미있나?" "연극?" "그럼 연극이 아니면 뭐지? 인간들과 어울려 지낸다는 건 양들과 어울려 노는 맹수와도 같은 거야. 맹수는 이빨을 숨기고 양들을 바라보고 양들은 맹수가 자기 친구인양 착각하지." 그는 어깨를 으슥했다. "그리고 언젠가 양들이 맹수의 비위를 거슬리면 몰살당해 버리는 거야, 그 게 바로 네가 하고 있는 짓이지." "내가 인간을 먹는다구?" 이거 지금 멋진 비유라고 하는 건가? 인간이 양이라고? 살아있는 한 끊임없이 사방을 초토화시키는 음흉한 양이 있다면 뭐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 만약 인간이 양이라면 나는 새매 정도 되겠지. 양떼를 내려다 보고 간혹 양고기를 먹기도 하지만 결국 잡아먹지는 않는 그러한 정도. 양이라. 양.... 사인족의 머릿속에 대체 뭐가 들었는지 나도 좀 확인해 보고 싶군 그래. 그렇게도 어휘력이 모자라냐? "웃지 마." 사인족의 왕이 으르렁거렸다. 나는 말놀이를 즐기진 않는다. 고상하고 지루한 비유와 같잖치도 않은 풍 자를 즐기고 싶으면 엘프들과 놀면 된다. 어줍지 않은 사인족따위에게 일 일이 대꾸해 줄 정도로 나는 관대하지 않다. 나는 나에게 충실하다. 이런 놀이를 즐길 이유는 없다. 게다가 그다지 즐겁지도 않다면 놀이도 아니다. "나는 맹수가 아냐, 묘인족이지. 그리고 양들과 놀고 있진 않아, 난 인간을 먹어치우는 걸 즐기지 않거든." 녀석은 다시 조소하듯이 날 바라본다. 그 노란 눈초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내가 나이가 들어도 변하지 않는 게 있어. 사인족의 왕." "뭔가?" "나는 바보가 싫어." "뭐얏!" 그의 눈은 여전히 공허하고 분노에 차 있다. 그렇지만 그가 어떤 표정을 가고 있든 내 알 바는 아니다. 그의 분노는 여전하고 나의 분노도 여전하 다. 그러나 나는 어디까지나 나의 기분대로 움직인다. 나는 나의 종족을 건드리고, 나의 아이를 훔쳐간 놈들을 용서할 수 없다. 양이니 맹수니 따위의 비유는 필요 없었다. 나는 그놈들을 부수고 밟고 갈기갈기 찢고 없애버리고 싶을 뿐이다. 그것 도 아주 확실하게, '인간적'으로 분명하게 말이다. 그러나 저러나 그런 걸 아는 놈들이 이 자리에 몇이나 있지? 이 심오하고 도 간단명료한 이 심정을 아는 자가 이 자리에 몇이나 있지? 포도주를 들이키고 나는 에메스의 등을 보았다. 에메스는 내 쪽으로 등을 돌리지 않고 있었다. 잔뜩 굳은 등이 마치 힘 주고 선 채로 오줌을 갈기는 것 같은 진지함을 보 이고 있다. 겁에 질린 녀석들이 에메스의 눈치를 슬금 슬금 보고 있다. 그렇겠지, 저 오줌을 갈기는 것 같은 자세도 역시 무서울 수도 있겠지. 이 자리에서 실 제로 병사를 가지고 땅을 가지고 힘을 가진 것은 에메스다. 이 인간들 중 에서 실제로 힘을 가지고 이 자리의 주인행세를 하는 것은 에메스니까 다 들 눈치를 보는 건 당연하겠지. 그가 나에게 배신감을 느껴도 나는 어쩔 수 없다. 나는 그에게 나를 믿으 라고 강요해 본 적도 없고 그렇게 암시를 준 적도 없다. 그는 그고 나는 나. 인간과 묘인족인 것만큼 떨어진 관계다. 게다가 그는 엘리야의 인간도 아니다. 그저 왕년 내가 귀여워했던 꼬맹이 의 아들일 뿐이다. "쿠베린..." 그가 낮고 거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여길 떠나...." 별로 놀라울 것은 없다. 그렇지만 어디 내가 가란다고 가고 오란다고 오는 분이시던가. "여길 떠나라구!" 그가 난폭하게 말하자마자 나는 잘라 말했다. "싫어." "왜지? 왜!" 그가 난폭하게 몸을 돌려 나를 쏘아보았다. 그 눈을 빤히 바라보면서 나는 태연하게 대꾸해주었다. "무엇 때문에 내가 귀찮게 돌아다녀야 하지? 룬드바르의 그 놈은 지가 알 아서 날 찾아올텐데." "하지만..! 사람들이 죽어!" "죽어야만이 그가 돌아보지 않나? 그래야만이 녀석이 두려워할 거 아냐?" 그의 얼굴이 굳었다. 뭐 여전히 굳어 있었던 얼굴이긴 하지만 그는 굳은 얼굴로 나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인간은 뜨거운 맛을 보지 않으면 두려움을 몰라." 어디 한 둘 죽어서 눈 하나 깜짝 하기라도 하나? 인간의 왕들은 원래 아무 생각없이 둔감하단 말이다. "그만 해!" 나는 턱을 괴고 에메스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서 최초로 공포를 보았다. 그리고 나는 일어서서 그에게 한 걸 음 다가가 그의 어깨를 잡았다. 떨리는 그 어깨를 만져보고 그 얼굴을 마 주보고 그가 얼마나 나를 두려워하는가를 깨닫자 웃음이 나왔다. "...왜 웃는 거지?" "그냥, 귀여워서 그렇지." 나는 그렇게 짧게 말하고 그에게서 물러섰다. 건방지고 주제를 모르는 방자한 태도로 사인족의 왕이 흥 하고 옆에서 코 웃음을 치는 것을 들으며 나는 문으로 걸어갔다. 방안에 선 모두가 나의 위광으로 질식해 버리기 전에 문을 열고 나가자 마자 문 앞에 선 비오나와 튜나를 발견했다. 그녀들 옆에 선 것은 노란 눈의 계집애 아헬이었다. 그녀 는 작은 두 손을 쥔 채 사인족의 왕을 기다리고 있었다. 제법 그럴듯하게 옷을 끼어 입은 것을 보니 아마도 비오나가 옷을 주었나 보다. 그녀들의 시선에도 공포가 느껴진다. 나는 여자들을 무섭게 하는 취미는 없지만 이 상황에 무서워 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도 웃기는 이야기가 될까? 그 얼굴들을 보고 웃어주면서 나는 천천히 복도를 걸어 밖으로 향했다. 멀리서 불어오는 바람에는 피내음과 섞인 꽃향기가 난다. 바람의 여신과 천공의 여신이 옷자락을 뒤흔들어 사방으로 냄새를 날린다. 시체 냄새와 더불어 나는 꽃 향기, 풀 향기, 그리고 야릇한 인간의 오물 냄 새. 햇빛은 따사롭게 길고 긴 원추형 모양의 창틀을 넘어 그림자를 만들어내고 있다. 약간 낡아 얼룩진 난간을 쥐고 나는 밖을 내다 보았다. 나무는 푸르고 인간들은 시끄럽다. 슬프다. KUBERIN....... 살아있는 자라면 누구라도 죽음과 한 걸음 틈을 두고 걷는다 죽음을 피하는 것도 자유 죽음과 맞서 싸우는 것도 자유. 2 계단을 내려가면 떠들어대는 소리가 들려온다. 기묘하게 킬킬거리는 애들과 젊은 녀석들이 떠들어 대는 소리를 한 번 들 어볼까. 어라? 나도 나이가 들긴 들었군. 생각해 보니 내내 젊은 애들이니 아이들 이니 하고 떠들고 있잖아? 이제부터 젊은 애들이라고 부르지 말고 애송이 라고 부르자. 어디로 보나 이 몸은 아직도 팔팔한 힘과 정열과 의욕을 가 지고 있다구. 노쇠한 드워프처럼 구석탱이에 처박혀 파이프나 물고 앉아 연기를 내뿜어 대는 것은 내게 어울리지 않아. 은퇴한 엘프처럼 감상에 젖 어서 어허 어하 으아 이따위 소리하는 것도 물론 질색이다. 지금은 일단 냉정하고 이성적인 판단을 가지기로 하자고. 자, 판단해보자. 난 지금 외로운 거야. 그리고 왠지 너무 화가 나 지쳐버렸 어. 그러니까 허무하고 쓸쓸한 이 상태의 나에게 필요한 것은......역시 여자다. 그럼 자아, 여자를 찾아가 보자. 기분 전환, 기분 전환. "재밌었니?" "응, 막..피가 끓었어." "멋졌어...." 멍하니 황홀한 표정으로 아이들이 말하고 있었다. 휴런은 턱을 괴고는 끌끌 웃는다. 머리털이 조금 그을려서 잘라버린 것인지 조금 짧아 어린애 같은 얼굴이 되었다. 그 옆에는 무심한 얼굴로 아이들의 옷자락을 점검하고 있는 여자 들이 보인다. 그녀들은 쓴웃음을 머금으면서 애들이 떠들어대는 것을 듣고 있었다. 아이들은 몇 다치고 몇 죽었다. 하지만 그런 것으로 상심해 낙담하 는 아이들은 거의 없다. 아이들은 더 탄력적이고 더 탐욕스럽게 싸움을 목 말라 한다. 한창 강해질 아이들을 강하기만을 바라고 강한 것만이 의미가 있다. 옆의 누가 죽었다는 것보단 자신이 살아남았고 자신이 강하다는 증 명이 더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이 나이쯤 되면, 어린애들을 흐흐 하고 코 아래로 보게 된다. 헛, 이거 또 나이든 티를 내는 군, 허긴 나이가 들었다는 것은 노숙하다, 노련 하다, 유연하다, 현명하다 등등의 다양한 의미가 있으니까 어쩔 수 없다. 세월의 힘없이 강해진다는 것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호박같이 말도 안되는 일이다. 흠, 강한 것이라, 강함이라, 애들은 난폭하다. 그렇다고 해서 난폭한 놈이 강하냐...라고 하면 그것은 결코 아니라 할 수 있지. 난폭하다는 것은 나름 대로의 의미가 있다. 난폭하다는 것은 조급함과 그 만큼의 연약함이 있다. 난폭한 놈은 강하지 않고 강한 놈은 난폭하지 않다. 그러고 보니 아이들 옆에 있는 여자를 꼬시긴 조금 그렇군, 달리 아이 없 는 여자를 골라볼까. 이러다가 이에르네나 기타 등등 사나운 여자들의 눈 에 띄이면 골치 아픈데. "오랜만입니다. 왕." 나는 햇볕을 쬐고 앉아 있는 푸른 눈의 녀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머리칼은 금발과 은발이 섞여 있다. 햇볕이 잘 드는 양지 바른 곳에 즐거운 얼굴로 앉아 있는 녀석은 어딘가 낯익다. 나는 한 참 후에야 그 놈 이 누군지 기억해냈다. 난폭과 노련이 우연찮게도 얼기설기 얽혀서 강함을 드러내는 놈. ".....오랜만이군." "네, 지금 막 왔습니다. 이곳은 좋은 곳이군요." 녀석은 나와 비슷한 체구에 나와 비슷한 나이에 나와 비슷한 경력을 가진 녀석이었다. 놈을 다시 보는 것은 거의 삼백년 만이다. 녀석의 발치로 개미떼가 지나간다. 뭔가 먹이를 물고 줄지어 열지어 행진 하고 있는 중이다. 멀리서 여름 벌레가 잉잉거리고 먹이를 찾는 소리가 들린다. 햇빛이 탐욕스레 녀석의 울퉁불퉁한 팔 다리를 비치며 음영을 만들어 낸 다. 늘어진 녀석의 금발에는 청동빛으로 그을린 피부가 드러나 있다. 근육은 여전히 탄탄하고 그 근육에는 강인한 묘인족의 피로도 어쩔 수 없었던 격 렬한 결투의 상징들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흠, 여전하군. 나는 천천히 녀석의 맞은 편에 가 앉았다. "어디에 있었나?" "....북쪽에 있었지요. 아이들 때문에 왔습니다." "몇이냐?" "둘이요. 저기서 놀고 있습니다. 여자들과 함께." 녀석이 턱짓을 했다. 휴런과 놀고 있는 아이들 사이로 녀석과 닮은 금발머리 꼬마 둘이 이를 드 러내면서 뭐라 떠들어대고 있다. 여자들은 아이들을 온유한 눈으로 바라보 며 그 몸을 살피고 있다. "저게 휴런입니까? 많이 자랐군요." 문득 녀석의 눈이 가늘어 진다. 살의가 순간 스쳐지나갔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문득 녀석이 손가락을 들어서 살짝 깨물며 묻는다. 녀석의 버릇은 여전한 모양이다. "그건 그렇고..." 뜸을 들이는 것도 기억이 난다. 이 놈은 아주 느긋하게 상대를 노리고 순 식간에 상대의 숨통을 끊어 놓는 놈이다. 뱀처럼 침착한 태도로 한 순간에 상대의 목줄기를 물어뜯는다. "도전은 어찌된 겁니까?" "금지다." "언제까지요?" "인간들을 죽사발을 만들 때까지." ".....젊은 것들은 그렇다치지만 나이든 자들은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여전히 평정한 얼굴을 한 녀석은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흉터 가득한 팔뚝 을 드러내 보였다. "물론 왕께 패배한 자들은 입을 다물겠지만 아닌 자들은.....가만히 있지 않 을 겁니다." "그래서?" 녀석이 나직하게 웃었다. 이 녀석은 별로 변한 데가 없었다. 진짜 안 변했다. 아니다. 흉터가 좀 늘 었을까? 나와 일곱 번이나 싸운- 정상적이라면 한번으로 그쳤을텐데도- 이 놈이 아직까지 살아있을 줄은 나로서도 짐작하지 못했다. 허긴 나만큼이나 강한 놈이라면 살아남는 게 당연한 건 지도 모른다. 이 놈도 이미 오백 세는 훌쩍 넘었을 텐데. "어찌되었든 인간들 싸움에 끼어 드는 것은 현명한 일은 아닙니다. 왕. 나 이든 자들이 항의를 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을 겁니다." "끼어 드는 게 아냐." 등을 기대면서 나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여전히 맑다. "전에도 말한 것처럼, 인간이 우리를 건드린 그 대가는 치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면 곧장 그 인간이 있는 곳으로 가서 없애면 됩니다." "그러나 그건 너무 간단한 거야, 그건 흔한 일이라구." "인간의 복수가 아닙니다. 왕이여." 그래서? "우리들은 인간이 아닙니다. 인간의 흉내는 낼 필요 없습니다. 우리들은 우 리들 방식 그대로 그 인간의 거처로 들어가 그의 몸뚱이를 찢고 그의 피를 마시고 돌아오면 됩니다." ".........." "당신은 인간과 너무 오래 있었습니다. 우리들의 방식으로는, 한 인간을 벌 하기 위해서 수천 수만을 죽이고 유인해 오는 것 따위의 방법은 쓰지 않습 니다." 그 말이 맞기는 맞다. 그러나 속이 가라 앉질 않는다. 그 동안에 쌓여왔던 어떤 응어리가 한꺼번에 고여서 폭팔한 것처럼 무언가 가 계속해서 이글거리고 있다. 너무 단순하다고, 너무 간단하단 말이야. 그 방식이란 것은. "우리의 방식대로 합시다. 왕이여. 간단하고 빠르게. 신속하고 강력하게. 적 을 찾아가 그 몸을 찢고 그 피를 마시고 그 무엄한 짓거리의 대가를 그렇 게 치르게 하는 겁니다." "너는 인간을 모르는 구나. 오래된 시푸르." 나는 그렇게 말했다. "인간은 한 두 명 죽는 것으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단 말이다." 녀석은 날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다시 말해서 진짜 확실한 굴복이 필요하다는 거다. 시푸르. 인간은 어지간 해서는 굴복을 몰라. 그들은 인정을 하지 않아. 녀석들은 바보 천치라서 한 두명 죽어서는 모르는 거야. 수백이 죽고 수천이 죽고 수만이 죽어야만이 그들은 잘못을 알아." "어째서지요? 한 명이나 열 명이나 백 명이나 죽는 것은 같지 않습니까?" 나는 하늘을 보았다. "그들은 수치를 모르기 때문이지. 그리고 명예도 몰라." 나는 시푸르의 시선을 받으면서 조용히 말했다. "굴복을 위해서 나는 인간 수천 수만을 죽일 것이다." "단 하나의 인간의 굴복을 위해서?" 그런 귀찮은 짓을 하고 녀석이 입안으로 중얼거린다. "하나나 열이나 백이나 같다고 말한 건 너야." 나는 웃었다. 밤이다. 밤의 여신의 옷자락이 노니는 밤. 그녀의 옷자락에 박힌 수백 수천의 보석 들이 빛을 발하는 아름답고도 잔인스러운 피비린내 나는 밤. 멀리서 살덩이와 피내음이 은은히퍼져 나오는 밤. 아아, 수많은 수식어를 붙이기 어울리는 밤. 부드러운 손으로 여자가 날 만졌다. 역시 기분이 풀린다. 향기로운 냄새. 따사로운 살결의 냄새. 밖은 시끄러웠다. 뭔가 볶는 듯 시끄러운 소음과 악을 지르는 고함소리와 비명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있었다. 그 소리가 무언지 나는 알면 서 내 눈앞에 있는 부드러운 살결을 탐닉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흥분한 자들이 날뛰고 있다. 피내음과 살내음이 한꺼번에 퍼져나가면서 뇌 리를 가득 채운다. 좋아, 좋아. "쿠베린, 밖에 안나가 볼 참인가요?" "뭐하러나가?" 나는 심드렁하게 대꾸하고는 나가려고 엉덩이를 빼는 유티아의 손목을 잡 아 당겼다. 유티아는 한숨을 내쉬면서 슬그머니 문쪽을 바라본다. 문 앞에 앉아 있을 로오나를 생각하는 것임을 나도 알고 있다. 침대 끝에 앉아 있 던 쇼나가 슬그머니 일어서서 항아리에서 술을 따라 나에게 건넸다. "인간의 군대가 성 밑까지 나와있다고 하는데요." 그녀의 눈매가 살짝 날카로와진다. 나가서 싸우고 싶은가 보다. 아니, 어쩌 면 밖에서 열에 들떠 싸우고 싶어 제 정신이 아닐 아이들이 궁금해서 인지 도 모른다. "마법사는 없겠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럼 상관없잖아? 실컷 싸우게 놔둬." 원하는 대로 말이지. 순진하고도 고결한 소년기사 에메스가 바라는 대로 인간대 인간의 싸움을 벌이는 거야. 그 옛날 에메스의 애비가 했듯이 피를 뒤집어쓰고, 상대의 복부를 금속의 칼로 쑤시고, 팔뚝과 다리가 부러져 나가고, 피로 얼룩진 방패가 진창에 처 박히고 울부짖는 말들이 내장을 쏟아내는 거야. 그 와중에 공포와 살기로 뒤범벅이 된 인간들이 이리저리 뛰어 다니는 거지. 뭐, 원하는 대로 해. 승리를 얻기 위해선 울부짖어야 하지, 그것도 안하고 승리를 얻을 수는 없는 거야. 만약 암것도 안한 채 승리를 얻고 싶은 놈이 있다면 그건 목 부러뜨릴 도둑놈이지. 울부짖는 게 싫고, 희생당하기 싫으면 도망가면 돼. 도망가는 것에도 용기 가 필요한 법. 수많은 놈들에게 겁쟁이라고 불리워도 끄덕 않을 용기가 필 요한 법이지. 나는 술을 단숨에 들이키면서 쇼나의 무릎에 코를 박았다. 역시 부드러운 느낌. 나는 뭘 헤메고 있는 거냐? 큭큭 웃음이 새어 나왔다. 원래 나는 땅 파기를 즐겨하지는 않았다. 나는 땅을 보기보단 하늘을 올려다보는 편이 적성에 맞는다. 그런데뭘 이 렇게 헤메고 있는 거지? 인간 스타일의 쌈박질이냐, 아님 묘인족 스타일의 쌈박질이냐? 아직도 그것으로 헤메는 건가? 하지만 결단을 내린 이상 그걸 로 끝이다. 헤메는 것은 나에게도 주변에게도 그리고 세상천지를 위해서도 그다지 좋지 않아. "아직도 미하라와 그 놈- 바스티앙에게선 소식이 없는 거냐?" "없습니다....." 약간 불안해진다. 그럼 혹여 그들도 잡히거나 한 거 아닐까? 미하라도 바스티앙도 약한 놈이 아니다. 그렇지만 상대가 그런 마법사 여럿이라면 방심하면 잡힐 수도 있 다. 갑자기 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진다. 일족의 냄새에 쇼나가 몸을 일으키면서 옷자락을 추스렸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 "왕." 들어선 것은 긴장한 얼굴의 듀나시였다. "소식이 들렸습니다." "무슨 소식?" "수인족의 하나가 소식을 알려왔습니다." "무슨 소식?" "묘인족 두 명이 생포되었답니다. 인간의 마법사에게." "그들은 어떤 자들?" "어린 소년 하나와 여자 하나." "모자인가?" "그런 거 같습니다. 마법사쪽은 그들을 잡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라고 수인족이 알려왔습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거 뭐야? 묘인족 수난시대의 도래인 거야? 듀나시의 얼굴에 희미한 분노가 떠올랐다. "그리고?" "지금 일족의 아이들이 인간들의 싸움터에서 날뛰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크시온과 휴런등 몇몇이 어린 애들을 제지하고 있습니다만 모두 잡아 들이긴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서?" "................" 나는 턱을 괴고 엎드린 자세 그대로 듀나시에게 되물었다. "지금 나에게 어린 것들을 제지하러 나가라는 것은 아니겠지?" "....아닙니다." "그럼?" "보고일 뿐이죠." 듀나시는 묘인족중에서도 묘한 존재다. 이 녀석은 무표정하고 깎아 지른 듯이 단정한 얼굴을 그대로 하고 무심한 눈빛으로 상대를 본다. 냉정하고 가차없는 눈빛은 불구라는 그 다리의 결 점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자아낸다. 어린 것들이 듀나시에게 감히 도전했다가 몇이나 죽었는지는 나도 모른다. 그리고 그 덕분에 이 녀 석은 이런 지위가 되었다. 장로격이라는 이 묘인족들에게는 있을 법하지 않은 지위. 왕도 아니고 우두머리도 아닌데 묘하게 강인하게 녀석들을 이 끄는 힘이 녀석에게 생겨났다. 난폭함보다도 더한 냉혹함이 녀석의 몸 안 깊숙이서 맹수처럼 도사리고 있다. 차가운 응어리가 독기를 뿜어내며 조금 이라도 건드리면 폭팔할 듯이 도사리고 건드려주기만을 바라고 있는 것이 다. 그런 몰골은 우리 일족에게는 없는 것이다. 그 다리가 온전했다면 저런 눈빛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휴런처럼 명랑한 묘인족 특유의 성격으로 낄낄거리며 지냈을 것이다. 저 놈의 다리를 부러뜨린 것은 나다. 그러나 후회는 없다. 그 것이 아니라면 나는 저 놈을 죽였을 것이니까. 그리고 그 것이 이 놈에 겐 치욕이다. "어디의 수인족이냐?" "북동의 장벽 마케르의 일족. 회색 늑대의 일족입니다." 우리들의 지도는 인간들의 지도와 다르다. 인간들이 양피지 위에, 비단위에 그려놓은 국경선과 달리 우리들은 어느 일족이 그 곳에 많이 살고 있는가, 그 땅이 어느 일족에 속하는가 하는 것 이 우선된다. 굳이 표현한다면 내가 지냈던 델리암의 서쪽 끝 항구 도시 엘리야는 사실 어느 종족에게도 소속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나는 부담을 가질 필요가 없 다. 물론 다른 일족들도 그렇기에 엘리야에서 지내는 것에 부담을 가질 이 유가 없다. 엘리야의 남쪽 바다, 섬들이 줄지어 있는 그 곳은 별로 영역다툼을 할 것 이 없는 곳이지만 인어족이 간혹 있다. 동남쪽의 '푸른 알케리아의 평원'에 해당하는 다도해가 인어족의 주된 영역이다. 그 일대에선 인어족을 기꺼이 존중해 줄 수 밖에 없다. 아무리 머리에 크림덩어리외엔 든 게 없는 인어 족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리고 사실 아그랑은 수인들의 영역에 속했다. 그래서 간혹 수인족들이 눈을 부라리면서 내가 움직이는 것을 들여다 보는 것이다. 델리암 서북부는 물론 드워프들과 호비트들의 구역이 띠엄 띠엄 널려 있 다. 그들은 본래 그렇게까지 전투적이지 않으니까 자신들의 마을을 건드리 지만 않는다면 건드리지 않는다. 그와 반대로 동남쪽 레아가레는 갈색 아 인족의 영역, 아인족 중에서도 가장 호전적인 자들의 구역이다. 이 지역에 들어가면 싸움을 피할 수가 없다. 아인족 중에서도 갈색 아인족은 싸움을 즐기니까. 센 놈만 보면 달려든다. 그러고보니 우리들과 약간은 흡사하구 만. 군데 군데 산맥 깊숙한 곳에 위치한 조인족의 영역은 어딘지 모르니까 생 략하고, 어찌되었든 땅의 엘프의 지역이라든가 사우스엘스턴의 엘프 지역 은 골고루 흩어져 있다. 푸케슈아나라는 이상 야릇한 이름을 가진 반도의 근처 곳곳의 산중에는 사 우스 엘스턴의 못생긴 엘프들이 살고 있는데 녀석들은 상당히 폐쇄적이며 고상한 척을 해대는 버릇을 가지고 있어서 그 일대를 돌아다녀도 만나기도 어렵다. 그건 그렇고 북의 고왕국은 옛날부터 고왕국이라 불렸다. 인간들의 왕국이면서 동시에 엘프들의 왕국이기도 한 그 고왕국은 전설에 따르면 거인과 엘프가 공존했다는 전설이 있긴 하지만 내 알바는 아니고 이 구태의연한 왕국이 얼마나 오래되었는가는 하늘도 모르고 땅도 모를 것 이다. 아마 살고 있는 자들도 모를 것이다. 고왕국의 왕족은 자신들이 인간 인지 아닌지도 모르고 살고 있는 놈들이다. 엘프의 피따위는 수백년전에 이미 엷어졌을 텐데도 자신들은 인간이 아니라고 굳게 믿고 있다. 뭐어 보 통 인간들과 달리 수명이 백년이 넘으니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긴 하겠 지. 지금 저 씹어 먹을 룬드바르놈이 진격하고 있는 상대가 바로 고왕국인 것 이다. 그렇지만 고왕국으로 가기엔 너무 길이 험하다. 고왕국 인간들의 게 을러빠진 무사안일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버틸 수 있었던 이유 중 의 하나는....지겹게도 거북스러운 날카로운 계곡과 깎아 지른 듯한 산맥과 엘프들이나 돌아다닐 법한 가시덤불의 사나운 이빨들과 산맥 곳곳에 자리 잡은 암흑의 짐승들 때문이다. 내 기억으로는 고왕국으로 진격한 녀석들이 다 주저앉은 이유는 그 놈의 지긋지긋한 암흑의 세룩-엘라마이야산맥 때문 이다. 그걸 산맥이라고 부르기 보단 장막이라고, 장벽과 함정덩어리라고 나 는 부르고 싶지만 하여간 인간이 돌아다니기는- 특히 인간의 군대가 씩씩 하게 진격하기에는 무척 문제가 많은 곳이다. 길이 있기나 있는지 그것도 미심쩍다. 그리고 그 산맥의 중간 지역은 엘프 들의 구역, 그것도 가장 고귀한- 진짜 고귀한지 의심스럽긴 하지만- 엘프 들이라 불리우는 엘프의 왕국 노스엘스턴이 바로 거기에 있다. 북동의 장벽에 위치한 회색늑대의 일족은 이미 멸망한 은색 늑대의 일족 과 더불어 수인족 중에서도 오래된 일족이다. 은색 늑대의 일족의 최후 생 존자인 웨인 놈을 빼고서 그 놈의 장벽을 넘어 동방교국까지 오락가락하는 놀라운(?) 일족이다. 정확히 말한다면 그 혈통은 동방교국인과 은색늑대의 일족사이에서 나온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어찌되었든 이 회색늑대의 일족은 상당히 폐쇄적이고 다른 수인족들에 비해 인간들을 싫어한다. "어떤자들이 어떻게 잡아 갔다는 말은 했냐?" "어린 애 하나와 여자 하나, 인간의 마법사들은 그들을 사로잡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라고만 전해왔습니다." "...." 게다가 과묵하기까지 하다. "인간의 마법사는 여자냐 남자냐?" "그것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그 소식을 알린 녀석은 누구야?" "회색늑대의 일족 중 하나, 케슈파란이라는 녀석입니다. 그 녀석이 여기로 와 있습니다." 나는 의외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회색늑대의 일족이 여기까지 왔어?" "네." 이거 일이년 사이에 뒤로 자빠질 일이 수도 없이 벌어지는 구만. KUBERIN....... 살아있는 자라면 누구라도 죽음과 한 걸음 틈을 두고 걷는다 죽음을 피하는 것도 자유 죽음과 맞서 싸우는 것도 자유. 3 케슈파란이란 이름을 가진 놈은 무심한 얼굴로 푸른 기가 도는 회색머리칼 을 하고 회색 눈을 하고 우뚝 서 있었다. 녀석은 내 앞에서 약간 고개를 숙여 보인 뒤 입을 열었다. "일족의 명을 받아 왔습니다." "뭔데?" "사인족들이 공격을 감행해 왔습니다." 나는 눈썹을 찌푸렸다. 사인족이 공격을 감행해? 지금 사인족 왕이 여기 앉아서 술 퍼마시고 있는 데? 내가 뭐라 하기도 전에 녀석이 말했다. "인간의 마법사와 함께 공격해서 우리 일족을 공격했고, 뒤이어서 동방교 국으로 안내할 길잡이를 내어놓으라고 떠들었습니다." 나는 진짜 어안이 벙벙한 기분으로 녀석을 바라보았다. 듀나시도 묵묵히, 어느 새인지 들어선 앗시아도 불손한 눈빛을 하고 있는 그 놈을 쏘아보며 내 뒤에 서 있었다. 방안에 있는 유티아와 쇼나도 눈을 가늘게 뜨고 그 놈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직 어린 앗시아나 유티아, 쇼나등 은 아마도 이 회색늑대의 일족을 처음 보았을 것이다. 회색늑대의 수인족 은 비교적 수인족 중에서도 키가 크고 덩치가 당당해서 싸울 맛이 난다. 게다가 아인족 중의 갈색 아인족과 함께 싸움을 즐기는 것으로 알려져 있 으며 인간들과도 어울려 지내지 않는다. "길..잡이?" "네, 길잡이입니다." "어째서 그런 황당한 말이 나온 거지?" 내가 말하자 듀나시가 옆에서 대신 대꾸했다. "지금 북동의 장벽을 넘을 수 있는 인간은 몇 안되니까요." "그리고 북동의 장벽을 거머쥐고 있는 것은 회색늑대의 일족이니까?" "그렇습니다." 나는 턱을 붙잡았다. 이거 점점 이야기가 커져가는 듯 한데. 설마하니 룬드바르가 동방교국으로 진격해 들어가겠다는 의미인가? 동방교 국은 이 곳 대륙과는 아예 크기가 틀리다. 동방교국은 인구가 얼마고 그들 의 마법력이 얼마고 그들의 군사력이 얼마인지조차 알려져 있지 않은 미지 의 땅, 미지의 대륙이다. 간혹 동방교국의 암살자들이 재미 반, 수련 반으 로 이곳으로 넘어와 '영업'을 하고는 있지만 그 실체는 아무도 모른다. 동 방교국인들이 오만방자하고 그 물건들이 이곳에서 최고급을 홋가하는 것을 보아선 분명히 동방교국은 만만한 나라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내게 할 말은?" 녀석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회색 눈에 눈동자는 노란 빛을 뜨고 있다. 그 노란빛과 초록빛이 어우러져 서 진짜 늑대를 눈앞에 두고 있는 것 같은 눈매다. "소문을 들었습니다. 묘인족이 사인족을 멸망시켰다는 이야길 듣고 왔습니 다. 즉, 그들을 조종하는 인간의 마법사를 지금 묘인족이 학살 중이라는 것 도." 나는 턱을 고이고 녀석을 바라보았다. "그 때문에 우리 일족과 함께 있던 묘인족의 여자와 아이가 납치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녀석의 눈안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격렬한 감정이 일렁였다. "그래서?" "그들을 구하기 위해선 그 마법사의 거처를 알아내야 합니다." "그들을 구하기 위해서?" 나는 조금 뜨악했다. 묘인족을 구하기 위해서 회색늑대의 일족이 나선다는 이야기는 듣도 보도 못했다. 게다가 여자든 남자든 묘인족이 타 종족에게 납치되었다는 것 자체가 수치니까 어린애가 아닌 이상 납치되었다는 이야 길 들어도 구출따위 운운하는 법은 없었다. 뭔가 엄청나게 신선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내 아내입니다. 아이는 내 양자입니다." 나는 물론이고 뒤에 있던 유티아와 쇼나는 헉 하고 뒤로 넘어질 뻔했다. 앗시아는 입을 저억 벌렸고 듀나시는 경악으로 눈을 부릅떴다. 나는 턱을 고인 채 눈앞에서 감히 묘인족이 자기 아내라고 말하는 녀석을 멀건히 바라보았다. 믿을 수가 없는 소리였다. 아무리 강해도 회색늑대의 족속은 수인족이지 묘인족이 아니다. 사인족이나 조인족과도 남녀관계라는 것을 상상도 해 본적이 없는데 수인족을 상대로 하다니, 그 여자의 정신상 태를 의심스럽게 할 정도였다. "마, 말도 안돼요! 대체 어떤 미친 여자가 수인족따위와!" 제일 먼저 외친 것은 유티아였다. 그녀는 경악에 겨워서 외쳤다. "그런 수치스러운 짓을 한 여자가 있단 말이야? 이건 모욕이야!" 그녀와 쇼나가 얼굴을 벌겋게 하고 흥분할 때에 나는 손을 흔들었다. "조용히 해!" "하지만, 쿠베린!" 유티아는 얼굴을 두 손으로 잡고 흥분을 가라앉혔다. 쇼나도 어처구니 없 는 듯한 눈으로 케슈파란이란 놈을 바라보고 있었고 듀나시는 당장이라도 죽여버릴까 하는 얼굴로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이 회색늑대의 수인족은 입을 다물고 꼿꼿이 허리를 세우고 서 있었다. 눈빛이 여러 번 바뀌는 것을 보아 당장이라도 흥분해 변신해버 릴 것 같았지만 어찌되었든 녀석은 묘인족의 앞에서 당당히 서 있었다. "남녀관계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니까 그렇다 치고, 넌 그래서 온 거냐?" 나는 턱을 괴고 녀석을 바라보았다. 늑대의 일족이란 진짜 무모한 로맨티스트들이다. 이들은 우리와 달리 가족을 만든다. 인간들처럼 가족을 만들고 그 가족의 가장은 모든 자식들과 아내들을 지키는 데에 목숨을 건다. 그런 비정상적 인 책임감 때문에 미쳐버린 놈들도 한 둘이 아닐 것이다. 하염없이 떠돌고 있는 은색늑대의 마지막 생존자 웨인 놈을 생각해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녀와 맺어진 이래로 그녀는 나의 가족입니다." 녀석이 말했다. 나는 묵묵히 녀석을 보다 말고 조용히 말했다. "그래서 우리 일족 사이에 끼어서 그녀를 구출해 보겠단 생각을 감히 한 거냐?" "어찌되었든 상관없습니다. 저는 그녀를 구출하러 왔습니다. 인간의 마법사 에게 납치되어갔으니까 구출하기 위해선 뭐라도 합니다." 녀석은 다시 감정을 누그러뜨리면서 물었다. "놈들이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나는 턱을 고인 채 녀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왠지 맥이 다 풀리는 기분이다. 이 놈을 일족 사이에 두었다간 단 하루도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 누가 이런 놈을 놔둘 것인가. 절대 놔두지 않는 다. 이 놈은 반나절도 못되어 젊은 애들 사이에서 갈기 갈기 찢겨져 죽어 버린다. 흠, 그럼 그 납치된 묘인족의 여자는 슬퍼하겠지. "몰라. 그러나 누군지는 알만 하지. 너, 케슈파란이라고 했나?" "네." 녀석의 눈이 긴장했다. "당분간 널 데리고 있어주마." "정말 상상도 할 수 없어요!" 녀석이 듀나시와 나가자 마자 유티아가 외쳤다. "상상하실 수 있어요? 묘인족 여자가 수인족 따위와? 한 대 치면 죽어버릴 놈과 같이 지내다니?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을까요?" "알 게 뭐야? 저 북동의 얼음 장벽 너머에 놀러갔던 묘인족의 여자가 새삼 귀엽게 생긴 녀석을 귀엽게 여겨서 사랑을 느꼈을 지도 모르잖아?" 나는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하지만! 하지만! 어떻게! 어떻게!" 유티아가 한창 흥분할 즈음 쇼나가 한마디 던졌다. "그러나 저러나, 만약 그 여자가 잡혀갔다고 하면 묘인족이 벌써 셋이나 잡혔다는 이야기에요. 정말 어찌되려는 것일까요?" 정말로 용을 만들어내어 인간의 노예로 쓸 수 있을까? 저 미스릴에 갇힌 용의 유령 셀로로니인지 셀러론인지 하는 그 놈과 다른, 진짜 피와 살이 있는 용을 만들어 낼 수 있단 말인가. 우리들의 피- 묘인 족, 사인족, 조인족의 피를 섞어서? 그런 일이 가능한가? 진짜 용을 만들어낸다면, 아니 용 비슷한 것이라도 만들어낼 수 있다면 인 간은 고왕국만이 아니라 진짜 동방교국까지 진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일이 가능하다면 말이다. 나는 문득 모든 일을 다 제끼고 그 용과 대결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것에 가슴이 두근거린다. 진짜 얼마나 흥분되는 일인가? 진짜의 용족과 얼굴을 마주하고 눈썹을 마주 대며, 손톱을 서로 겨누고 싸울 수 있다는 것은! 움직이지 않으면 안된다. 나는 깨달았다. 움직여야 했다. 묘인족이 셋이 잡혀갔다면 조인족은 무수히 잡혔을 지도 모른다. 분명히 가능한 이야기다. 조인족은 여기 저기 둥지를 만들어 살고 있고 그 둥지의 반이 이미 사인족들에게 습격당한 일이 있었다. 그게 벌써 일년 이 상이나 흘렀다. 그럼 인간의 마법사들은 3대 종족의 피를 모두 수집한 셈이었다. 시간을 끌 새는 이젠 없다. 묘인족을 이끌고 천천히 북상하여 룬드바르를 쓸어버려야 한다. 아니, 남하 하는 것인가? 남하하는 쪽이 나을 것인가, 아니면 북상하는 쪽이 나을까? 룬드바르 본국 은 남쪽이고 룬드바르 본인은 북쪽에 있다. 어느 쪽이 나을까나.... 바람이 불고 있었다. 나는 팔짱을 끼고 성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아그랑에서 피 터지게 싸우고 있는 인간들의 뒤엉킴을 바라보면서 불화살과 돌멩이가 난무하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피를 흘리고 울부짖는 아우성 속에서 묘인족들은 이를 드러내 고 싸우고 있었다. 물론 그 싸우는 녀석들은 대부분 다 어린애들이었고 나 이 든 녀석들은 모두 어디선가 처박혀서 잠이나 자고 있을 것이다. 인간을 상대로 정면으로 싸우는 것은 너무도 재미가 없고 지겨운 일이기 때문에 왠만한 녀석들은 명령이 없다면 나설 마음도 되지 않을 테니까. "화살은 더 없는가!" "북문을 열어! 북문을 열어!" 어디선가에서 투구도 잃어버린 기사가 한 명 성문으로 닥쳐드는 적병을 향 해 도끼를 휘두른다. 피가 공중으로 검붉게 치솟고 뇌수와 살점이 뒤범벅 이 된 적병이 고꾸라진다. 은빛을 띄우고 있던 기사의 갑옷은 이미 그 본 래의 색을 알아볼 수 없다. 그는 한 손에는 장검을, 한손에는 도끼를 휘두 르고 있었다. 이미 방패는 잃어버린 지 오래이고 말고삐를 쥐고 있던 종자 는 보이지도 않는다. 아래서 미친 듯이 창날을 곧추 세우고 돌진하는 적병 들을 향해 말 고삐를 당기며 기사가 돌진한다. 피와 진흙으로 얼룩져 버린 머리칼과 수염은 이미 엉망진창으로 얼굴도 알아볼 수 없다. "죽어!" "죽여라!" 여기저기서 비명과 고함소리가 터져나온다. 기사의 말이 어느 새인가 다가 온 창병의 칼날에 뱃가죽을 꿰뚫리고 비명을 질러댔다. 가여운 말이다. 그 와 동시에 말이 고꾸라지자 안장 위에 있던 기사가 나동그라졌다. 진흙이 튀어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근처에 있던 적병들이 무수히 달려들며 기사의 몸을 향해 칼과 창을 찔러 댄다. 피가 튀긴다. 그 기사가 누군지 나는 모른다. 에메스의 모습은 찾을 수 없다. 엉망으로 엉기어서 어디에 누가 있는지 알 수도 없다. 하늘은 잔뜩 찌푸리고 있다. 비가 내릴 지도 모른다. 성벽에서 부어 내린 끓는 물과 돌덩이로 성 아래는 이미 진흙탕을 이루고 있다. 여기서 비가 내린다면 아마 늪지가 될지도 모르겠다. 사다리를 올리려는 적병들과 그들을 저지하는 자들과 소리를 지르며 두터 운 성문으로 돌진하는 자들과 팔 다리를 흩뿌리며 울부짖는 자들과 이미 죽어 넘어진 자들은 한데 엉겨서 휴식을 모른다. "우오오오오오오오오......................." 나는 가슴을 펴고 허공을 향해서 고함을 질렀다. 근처에 있던 자들이 일제히 귀를 부여잡고 뒤로 물러섰다. 어느 쪽의 병사 든 모두 새파랗게 질리며 뒤로 나동그라지고 공포에 오줌을 지릴 정도로 사방으로 소리는 퍼져나갔다. 성벽 끄트머리에 서서 나는 소리를 질러댔다. 들어라, 들어. 모여라, 모여. 일족들아 들어라. 화살이 몇 대 나를 향해 날아들었지만 곧 튕겨 나가버렸다. 그 모습을 보 고 녀석들이 공포에 질린 얼굴을 하고 날 바라본다. "우오오오오오오오........" "쿠아아아아아아아....." 여기저기서 호응하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나는 가슴을 펴고 성벽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인간들의 싸움이 천천히 멈추고 있다. 그들은 내 존재를 알고 나를 멍하니 올려다 보고 있었다. 그들을 내려다 보면서 나는 천천히 몸을 아래로 던졌 다. 성벽 아래로 일직선으로 떨어져 내리면서 다시 고함을 지른다. "쿠오오오오오오...........!" 오너라! 여기로 오너라! 다들 나와 이곳으로 모여라! KUBERIN....... 살아있는 자라면 누구라도 죽음과 한 걸음 틈을 두고 걷는다 죽음을 피하는 것도 자유 죽음과 맞서 싸우는 것도 자유. 4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눈을 크게 뜨고 피투성이가 된 휴런이 소리를 질렀다. "대체, 어떻게 하겠다는 거지?" "간단하고도 간단한 이야기지 뭐." 나는 가슴을 펴고 말했다. 눈앞에는 죽어 넘어진 병사의 시체들이 줄줄이 늘어져 있었고 조금 떨어져 나의 난데없는 등장에 놀라고 있는 병사들은 말 그대로 뜨거운 것을 맛본 강아지들처럼 뒤로 물러서 있었다. 휴런은 주변을 돌아보고 있었다. 그의 주변에는 피투성이가 된, 마치 잼을 훔쳐먹다 입주변에 가득 묻힌 인 간의 어린애같은 몰골들을 한 아이들이 와글거리고 있었다. 아마 휴런이 아이들을 제지하고 있었던지 그의 주변에만 특히 모여 있었다. 곧이어 다 른 애들을 이끌고 다크시온과 듀나시등이 다가섰다. 나는 그들을 돌아보지 도 않고 전면에 선 인간의 병사들을 훑어본 뒤에 낮게 명령했다. "여길 떠난다." 멀리서 진흙투성이의 에메스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바로 옆에 선 것은 역 시 진흙투성이가 된 기생오라비였다. 녀석의 금발도 지금은 엉망진창의 회 색빛을 띄고 있었고 그의 바로 옆에는 튜나가 서 있었다. 나는 에메스를 잠시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이 놈과의 인연도 이제 슬슬 끝인지도. "이 자리에 있는 인간을 다 치워버려라." 나는 짧게 명령했다. 그리고 일족들은 곧이어 고개를 들고 송곳니를 드러냈다. 에메스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쿠베린!" 버석 버석 소리나는 풀숲을 걸으면서 녀석들이 떠들고 있었다. 나름대로 강하다고 하는 젊은, 아니 애송이들이 저마다 떠들었다. 특히 여 자들이 옆에 있을 때는 더 크게 떠든다. 자식들, 그래서 어리다는 거야. "내 생전 이렇게 인간을 많이 죽여본 것은 첨이야." "지겨워 죽겠구만. 인간따위는 정말 재미 없어." "언제까지 인간을 죽이는 거지? 차라리 사슴을 죽이는 게 더 재밌겠다." 그지 하는 얼굴로 동의를 구하는 사내자식들을 여자들은 흐응 하는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나 말하다시피 여자들이 훨씬 똑똑하단 말이야. 그건 그렇고 인간을 죽이기에 신물이 난 녀석들은 나를 흘긋흘긋 보고 있 었다. 정확히 말하면 내 옆에 선 수인족의 녀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녀 석은 묵묵히 내 옆에서 걷고 있는 중이다. 이질적인 것은 언제나 눈에 띈 다. 아그랑을 떠난 지 이미 반나절이 지나가고 있었다. 아그랑을 덮친 룬드바르의 병사들은 모두 죽었다. 에메스는 처음에 반항하 는 것 같더니 뒤이어 자신의 부하들을 이끌고 성 안으로 들어섰고 우리들 은 나머지 룬드바르의 병사들을 죽였다. 얼마나 죽였는지 기억도 할 수없 지만 아이들이 모두 진저리를 치는 것을 보아서 상당히 죽인 것은 사실인 모양이었다. 인간을 죽일 때는 시간이 별로 걸리지 않는다. 창칼을 휘두르긴 하지만 녀 석들은 근본적으로 너무 느리다. 검의 명수라든가 어떤 기형무기의 달인이 라면 모를까 평범하기가 광주리에 쓸어담아도 넘쳐흐르는 보통의 병사는 죽이기에 지루할 지경이다. 그것도 상대가 진흙에 허우적 지쳐있는 놈들이 라면 말할 나위도 없다. 아그랑은 지금 시체더미, 대지의 여신에게 바쳐진 제물은 너무 지나쳐 넘 쳐나고 그 냄새가 이미 천공의 여신의 미간마저 찌푸리게 할 정도에 이르 를 것이다. 아아, 이제 슬슬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우리 일족들은 이렇게 뭉쳐 다니는 것을 무척 귀찮아 한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그렇다. 바로 그 때 였다. 갑자기 말 발굽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달려오기 시작했다. 일족들은 뒤를 돌아보면서 이것을 습격할까 말까 망설이는 듯한 얼굴로 손톱을 들여다 본 다. 나는 뒤를 돌아보면서 그 말을, 아니 마차를 쏘아보았다. 그 마차는 아 그랑에서부터 달려온 것이 분명한 물건이었다. 2마리의 말이 몰고 있는 마 차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그 말을 몰고 있는 얼토당토 하지 않는 인물을 나는 한숨을 내 쉬며 바라보았다. "쿠베린!" 소리를 크게 지르면서 다가온 것은 튜나였다. 꼬맹이 하프엘프는 말고삐를 당기면서 재빨리 말했다. "할 말이 있어서 왔어!" 튜나가 있다면 당연히 그 놈도 있겠지. 고개를 들어 올려 보니 태양아래 까만 점이 맴도는 게 보인다. 새치고는 물론 당연히 너무 크다. 그 놈은 슬금 슬금 아래로 미끌어져 내려오더니 곧이어 지상을 향해 내려왔다. 마치 시위하듯이 재빠른 속도에 젊은 것들, 아니 애송이들이 얼굴을 찡그렸다. 엘레가 땅에 내려서자 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마차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거기서 고개를 내민 것은 다름아닌 미트라- 친애하는 멸망한 델리 암의 말괄량이 공주님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옆에서 심통난 얼굴을 하 고 있는 것은 다름아닌 사인족의 왕, 그 부록으로 딸린 것은 물론 저 노란 눈깔의 아헬이었다. "무슨 일야?" 내가 그렇게 묻자 미트라가 정색을 하고 날 바라보았다. "쿠브, 전에 내가 말한 거 기억해?" "뭘?" "난 높은성의 공주님이 아냐!" 지금 뭔 소릴 하고 있는 거지? "난 원하는 것을 찾아왔단 말이야!" 그녀는 두 주먹 불끈 쥐고 외쳤고 그 뒤에 있던 사인족의 왕이 크게 웃기 시작했다. 미트라는 그가 웃자 제풀에 놀라 흠칫 뒤를 돌아보았으나 사인 족의 왕이 킬킬거리는 모습을 보자 마자 화가 난 듯 입을 내밀었다. "뭐야!" "정말 웃기는 군! 인간의 여자가 묘인족을 따라다니다니." "시끄러워! 이 노란 털 야만인!" 그녀는 기세좋게 악을 지르면서 사인족의 왕에게 달려들었다. 녀석은 킬킬 거리면서 그녀의 주먹을 이리 저리 피했는데 나로서는 그녀의 주먹을 피하 며 웃고 있는 녀석이 도무지 한심해 보이기도 하고 어처구니없기도 해서 혀를 찰 수 밖에 없었다. "싸우지 마세요!" 아헬이 당황해 외쳤다. 정확히 말한다면 쌈박질이라기 보다는 말다툼, 말다툼이라기 보다는 너 할 퀴고 나 할퀴고 하는 고양이 으르렁거림 비슷한 짓이라 할 수 있었다. 나 는 여자랑 싸우는 즐거움을 잘 알고 있는 터라 관대한 마음으로 녀석을 바 라보다가 본론을 이제 들어야 하지 않나 하는 마음으로 고개를 돌렸다. "해 봐." 엘레는 진지한 얼굴로 말하고 있었다. "쿠베린님께 여왕의 말씀을 전해드리려 합니다." "뭔데?" 나랑 자고 싶다는 것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이지. "동북의 산맥에서 우리들 일족은 싸움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엘레의 눈이 번쩍 번쩍 빛나고 있다. "동북의 산맥이라면?" "엘카라타의 산맥, 지쳐버린 초승달의 계곡입니다." "조인족 전사들이 총 출동했다...라고 하는 거야?" 이건 조금 놀랐다. "네, 묘인족이 인간들을 없애고 있다는 이야기가 이미 전 대륙에 퍼져있습 니다. 인간의 마법사를 살려두지 마라 라고......" "조인족의 여왕이 이미 나섰다....조인족도 지금 인간들과 싸우고 있다고 하 는 건가?" 나는 조금 기묘한 기분이 되었다. 약해 빠진 인간들을 향해 태고의 종족 두 개, 아니 세 종족이 모조리 나서 서 싸우고 있다는 건가? 이건 어쩐지 자존심 상하는데? "조인족 아이들.....약 오십여명이 이미 잡혀갔다는.....소식이 있습니다." 엘레가 토해내듯이 겨우 말했다. "어디에?" "......세룩-엘라마이야.....암흑의 산맥이라고 합니다." "그곳에 인간의 마법사들이 모여 있다는 의미인가?" 내가 눈썹을 치켜 올리자 엘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소식을 알려온 것은 누구야?" "고왕국의 인간들, 그리고 노스엘스턴의 엘프들입니다." "그들은 우리들을 이용해서 룬드바르의 발목을 잡겠다는 의미 아냐?" "......" 나는 녀석의 면상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노스엘스턴의 엘프 놈들이 책상 위에서 지껄이는 반만큼만 정의와 빛의 수호자라고 한다면 그대로 좌시해선 안되지, 그렇게 생각지 않냐?" "........" 엘레의 얼굴이 울퉁불퉁해질 정도로 거칠어 졌다. "말 심하지 않아?" 튜나가 뭐라 하려는 순간 엘레는 차분히 말했다. "그건 아무도 모르죠, 그러나 엘프는 우리들 보다 명백히 약합니다." 그 말엔 동의해. 그리고 모처럼 그럴 듯한 말을 해냈구만. "그리고..." 녀석의 얼굴이 순간, 음침무쌍하게 변하면서 더더욱 그럴 듯한 말을 해 냈 다. "그들의 구출을 엘프나 인간들 따위에게 맡길 수는 없습니다." "잘 들어." 날 멀건히 바라보는 녀석들을 둘러보면서 나는 조용히 침착하고도 우아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이렇게 우아하고 점잖은 태도로 말해도 상관없는 것 이 다들 귀들은 기가 막히게 좋으니까 품위 없게 소리를 지를 필요는 전혀 없다. 녀석들은 내가 중얼거려도 다 알아들을수 있다. 모인 녀석들의 수는 약 이백 가까운 숫자, 젊은 애들, 아니 애송이들과 진짜 어린애들과 여자들 과 노련한 놈들과 방자한 놈들이 얼추 이리 저리 섥히고 얽혀 있다. 이 상 황에서 싸움이 안 일어나는 것은 진짜 드문 일이다. 아마 아이들이 많아서 일런지도 모르겠다. 평소라면 아이들이 몇이나 죽어넘어지고 사내자식들은 여자에게 추근거리느라 모든 것을 잊었겠지만 왕이신 이 몸이 처억 하니 버티고 있는데 개길수는 없을 게다. 허긴 이렇게 모인 것도 수백년 만일테니 녀석들도 추억거리는 되겠지. 날 바라보는 애들의 눈이 동글 동글 빛나고 있다. 자신의 모친과 달라붙어 있는 애들은 마치 소풍이라도 온 것같은 얼굴들이었다. "이제부터 각자 자기 길로 간다." 나는 조용한 어조로 말해주었다. 녀석들은 뭔 소린가 하는 듯한 태도가 완 전히 몸에 배여서 그 얼렁한 머리통을 그대로 과시하고 있었다. 아, 내 일족이니 부탁이다. 제발 좀 똘똘한 얼굴들을 하고 있어 다오. "단 한 가지는 명심하라! 절대로 인간의 마법사를 내버려두지 말 것! 그리 고 그 룬드바르의 깃발을 그대로 세우게 하지 말 것을. 그 이외엔 룬드바 르로 가서 난장판을 치든 여자들과 어울려 뒤집어지든 맘대로들 해라. 지 금 죽인 숫자가 내 기억으로는..." 나는 잠시 내 자신의 숫자개념을 원망했다. 하지만 여지껏 죽인 수만도 약 오만 가까운 숫자다. 룬드바르가 아무리 통이 넓은들 자기 군사 오만이 죽어 넘어졌으면 쇼크를 먹든 배앓이를 하든 하긴 할 거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시간을 끌 수는 없었다. 아이와 여자가 잡혀가고 마법사들의 손이 저 멀리 북동까지 이르 르고 있다면 룬드바르와 그 놈의 마법사들은 각자 행동하고 있다는 이야기 였다. 우리들이 뭉쳐 다닌다고 해서 살상력이 극대화 되는 것도 아니다. 그 렇다면 별로 길게 이야기 할 것도 없다. "가라, 제 갈길로 가면서 각자 룬드바르 군을 죽여라. 얼마를 죽이든 그건 알아서 해라, 특히 룬드바르의 마법사는 살려두는 게 아니란 것을 너희들 도 잘 알겠지? 룬드바르는 요즘 들어 상당히 괴이한 물건들을 많이 키우고 있는 모양이니 심심치는 않을 것이다. 북으로 가든 남으로 가든 서로 가든 그들을 죽여라." 자유를 주지. 맘대로들 해봐라. 나는 히죽 웃었다. 이제 슬금 슬금 맛을 보여주어야 할 때다. 오만을 죽였고 나머지는 각자 해보라고 하지. 틀림없이 그렇게 하면 이 놈 들도 재미를 붙여 난장판을 쳐댈테니까. "그럼, 이제 흩어지는 겁니까?" 한 애송이가 주저하면서 입을 열었다. "뭉쳐 다녀도 좋아. 하지만 심심하지 않냐?" 내가 반문한 녀석에게 대꾸하자 녀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의 눈이 슬 그머니 여자에게 가 닿는 것을 보고 나는 쓴 웃음을 짓고 말았다. "어디든 가도 좋아." 원하는 대로 가서 죽여라. 원하는 대로 분노를 터뜨려라. 그것이 내 목적이니까. "무서워..." 미트라가 낮게 중얼거렸다. KUBERIN....... 살아있는 자라면 누구라도 죽음과 한 걸음 틈을 두고 걷는다 죽음을 피하는 것도 자유 죽음과 맞서 싸우는 것도 자유. 5 본래, 원래, 사실은 나는 약간 간과하고 있었다. 노스엘스턴에 분명히 얼마전에 갔었다. 그러나... 제기랄! 걸어가진 않았었단 말이다! "얼마나 가야할까?" "하염없이, 계속해서." 소환수를 타고 날아간다면 얼마나 편할 거냐고 튜나가 계속해서 궁시렁거 리고 있었지만 방법이 없다. 우리들 일행에 마법사는 하나도 없지 않은가? 그리고 있었다고 해도 그걸 살려둘 리도 없고 말이다. 본래 두 다리는 걷 게 만들어진 것이고 그러므로 우리들은 열심히 걸어가야 하는 것이다. 일족들에게 제 맘 대로 가라고 선언한 뒤 나에게 남은 일행은 당연한 일이 지만 상당한 인원이었다. 일단, 내 마누라들(?)과 아이들, 그리고 앗시아와 듀나시, 다크시온, 휴런등이 남았다. 물론 그 수인족의 꼬맹이도 남아 내 옆에서 물끄러미 사인족의 왕을 바라보고 있었다. 녀석은 사인족의 왕이라 는 것을 알자마자 넋을 잃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사인족의 왕은 그게 무척 껄끄러운지 불쾌한 면상을 하고 야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둘이서 야리든 쏘든 그건 내 알바가 아니었다. 가장 큰 문제는 내 뒤에서 불꽃을 튀기다 못해 대장간을 차린 여자들이 문제다. 그녀들은 미트라의 등장 이후 눈부신 불꽃을 피어 올리고 있었는데 그 불꽃에 등에 구멍이 뚫리고 목덜미에 화상을 입을 지경이었다. 그 덕분에 사내들 모두는 얼어붙어서 입을 열면 폭팔할까 두려워 모두 입 을 꽈악 다물고 걸었다. 말 많은 휴런도 괜히 야히르나 케논을 데굴데굴 굴려 가지고 놀면서 시선을 딴 곳으로 두고 있었으며 듀나시는 괜히 다크 시온과 대화하는 척 시선을 두고 있었고 앗시아는 불안해서 안절부절 못하 고 있다. 사인족의 왕까지도 괜히 친하지도 않은 튜나에게 친한 척하다가 엘레의 사나운 눈길을 한 몸에 받고 있었으며 아헬은 괜히 아무 것도 안 묻은 스커트자락을 털어댔다. 물론 당사자인 미트라도 바보는 아닌 지라 불안한 듯이 억지 웃음을 띄고 내 바로 뒤에서 바짝 붙어 걷고 있었다. 그러나 그 불꽃은 점점 커지고 곧 이어 활화산이 되어 용암을 분출하고 불덩이를 쏘아낼 지경에 이르르자 미 트라는 비명을 지르듯이 내 옆에 답삭 와 달라붙으면서 억지 웃음을 짓고 말을 걸었다. "얼마나 가야해?" "하염없이......." 미트라는 불안한 얼굴로 내 팔뚝을 잡았다. 그걸 바라보던 이에르네가 팔짱을 끼고 터억하니 미트라와 나의 사이를 가 로막았다. "기다려봐. 너 따위 인간이 어딜 감히..." "뭐얏!" 미트라가 이에르네를 쏘아보았지만 아아, 슬프도다. 묘인족의 여자에게 인간의 여자가 당해내려고 생각한것은 가여울 정도다. 미트라는 이에르네에게 단숨에 목덜미를 잡혀서 바닥에 내동댕이 쳐졌다. "아악!" 그녀가 비명을 지르는 것은 가슴이 아프지만 별 수 없는 것이 이에르네는 내 아이를 낳은 내 여자인 지라 미트라가 그녀에게 힘으로 이길 수 있다면 모를까 나는 거기에 참견할 수 없다. 미트라는 악악 거리면서 비슬비슬 일어섰다. 그리고는 한껏 독기어린 눈매 로 이에르네를 노려보았지만 왠걸, 독기어린 눈매라고 한다면 묘인족 전체 에서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이에르네에게 당해낼 리가 없다. 이에르네는 오 만하고도 살벌하게, 그리고도 아름답게 그녀를 노려보며 선언했다. "까불지 마라, 인간의 여자야. 너는 쿠베린 옆에 설 자격이 없어." "자격? 자격이라니! 뭔 소릴 하는 거얏!" 미트라는 벌벌 떨면서도 벌떡 일어났다. 그 오기에는 나도 박수를 보내고 싶지만 일단은 나는 먼산을 바라보도록 하자. 아아, 날씨 좋군. "쿠베린....조금 너무하지않아?" 은근히 튜나가 내 옆에 와서 낮게 물었다. 그녀는 불만에 가득찬 얼굴로 나를 쏘아보고 있었지만 나는 관대하고도 너 그러운 태도로 그녀의 말을 씹어 삼켰다. 뒤이어서 쇼나가 날카롭게 말하 는것이 들려온다. "이에르네, 이런 여자를 데려갈 필요가 있을까요?" 헉, 쇼나까지! "그래요, 이런 인간의 여자따위는 짐덩이일 뿐이에요. 없애버려요." 날카로운 유티아의 어투. 유티아는 그래도 온후한 성품이라 생각했는데! "오호호호호호호호.........인간의 여자따위, 자기 주제를 알게 해주어야해." ...케이링..... 미트라는 새파랗게 질렸다. 자기 보다 목하나는 큰 장신의 여자들 사이에 둘러싸인 그녀는 살기에 가 득찬 야수들 앞에선 한 마리의 연약한 사슴이었다. 그녀는 바들 바들 떨면 서도 큰 소리로 외쳤다. "난 쿠베린과 결혼하기로 약속했단 말이야!" "오호, 그러셔? 인간의 결혼?" "어쩌나, 우리들은 인간따위는 저녁 찬거리로도 쓰지 않는걸." "쿠베린의 여자가 되려면 얼마나 강해야하는지 모르고 있는 것 같은데?" "시, 시끄러! 나는 인간이지만....강하다구!" 가여운 미트라. "어떤 면에서 강한데? 너, 트롤을 한 손에 없앨 수 있나?" "오우거 갈비뼈를 부러뜨릴 수 있냐?" "혹시 키메라정도는 상대할 수 있는 거야?" 미트라는 우욱 하고 아무 말도 못한 채 버벅거렸다. 그녀의 얼굴이 삽시간에 시퍼렇게 질리는 것을 보면서 튜나가 한 숨을 내 쉰다. "이봐, 이봐요, 적당히들 해 두는 게 어때? 미트라는 따지고 보면 불쌍한 거야. 이 사악한 색마 쿠베린의 마수에 걸린 한 마리 가여운 나비인 거라 구." 그녀의 말에 케이링이 야릇한 눈빛을 번뜩였다. "시끄러, 반쪼가리 엘프." 이게 하는 얼굴로 튜나가 주먹을 쥐고 덤비려 했지만 튜나도 바보는 아닌 지라 살벌한 케이링의 눈빛을 보곤 단념했다. 이에르네는 힐긋 나를 돌아보며 은근한 어투로 말했다. "쿠베린.....이 계집애를 찢어버려도 할 말 없겠지?" 미트라가 헉 할 때에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있는 힘껏 인상을 팍팍 쓰면 서 나는 그녀들을 노려보았다. 그러나....일제히 여자들이 나에게 시선의 소 나기를 보내는 순간 사정없이 꿰뚫려 전신이 마비되었다. 그렇지만 여기서 굴복하면 미트라는 죽는다. 사실 따지고 보면 미트라가 뭔 죄가 있겠는가? 그저 내가 잘난 게 죄다. 힘내라! 쿠베린! 너 같이 잘난 놈은 버텨야 한다! "적당히 해둬." 나는 있는 힘껏 무게잡고 말했다. 이에르네와 케이링이 한 걸음 내앞으로 다가섰다. 그녀들의 미간에 떠오 른 시퍼런 힘줄과 불똥이 튀는 그 눈동자를 보고 나는 뒤로 나자빠질 듯한 쇼크를 맛보았지만 끝까지 버텼다. 힘내라! 쿠베린! "지금 우리에게 저 따위 지푸라기 같은 한 줌도 안될 계집애를 인정하라고 하는 거야?" 케이링이 이를 갈며 외쳤다. "쇼나나 유티아는 그래도 괜찮아! 미하라도 괜찮다고! 케이링은 저렇게 드 세니 어쩔 수 없다고 치지! 그래도 괜찮은 전사니까! 그렇지만 저 계집애 는 대체 뭐야! 가죽이 미끈한 거 이외에 악악 소리 치는 것 밖에 더해? 저 런 말라깽이에 참새대가리같은 계집애를 끌고 지금 우리가 가야한다고 말 하는 거얏!" 이에르네가 악을 지르면서 눈빛을 번뜩였다. 세상에 무서워라. 튜나도, 엘레도, 사인족의 왕도, 아헬도 무의식중에 뒤로 물러설 정도였다. 붉은 머리를 번뜩이면서 초록의 눈빛을 번쩍이는 이에르네의 위세는 주변 에 있는 모든 남자들을 모조리 다 얼려버렸다. "게다가, 당신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지금 우리가 가는 곳은 저 지긋지긋한 북의 산맥이란 말이야! 여기서 거기까지 가려면 우리 일족의 힘으로도 닷새는 꼬박 달려야해. 저 계집애를 누가 안고 달릴 거야? 당신? 당신이 안고 달릴 거야? 만약에 그렇다고 말한다면 나는 저 계집애의 머리 통을 댕강 잘라 안겨주겠어어!" 송곳니를 드러내면서 악악 거리는 그녀의 얼굴을 보니 아아 왠지 오금이 저릴 정도다. 나는 숨을 가다듬고 시퍼렇게 질린 미트라를 바라보았다. 미트라는 두 주먹 불끈 쥐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런 눈길을 보내는데 내버려둘 수는 없지. 어떻게서든 설득해야지. "이에르네." "왜?" "너라면 너를 바라는 남자를 죽도록 내버려둘 수 있나?" "응." 이에르네는 냉정하게 잘라 말했다. 젠장. 나는 질려서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지만 별 수 없이 조용히 말을 이었다. "너와 달리 나는 그렇게 못해. 그리고 저 애는 내가 보호해온 애다. 내 눈 앞에서 잘못되는 것을 난 볼 수 없어." 이에르네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오호, 그렇다면 당신 눈앞에서만 아니면 되겠네." "말 장난 하지마." "말 장난 하는 것은 당신이야. 지금 일족의 여자들을 가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쳐. 당신은 왕이니까, 그렇지만 인간의 여자는 안돼. 지금 인간을 없애는 중인데 인간의 여자를 안겠다고? 그걸나보고 놔두고 보라고 할 참 인가? 저기 있는 로오나의 얼굴이 보이지도 않아?" 그녀는 진지한 분노를 담고 물었다. 로오나. 로오나는 일행 구석에 무표정한 채로 서 있었다. 파리한 그녀의 옆에 아소 미나가 붙어서 모친을 불안한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동요하지 않았다. "로오나는 로오나이고 미트라는 미트라야. 미트라를 건드리면 용서하지 않 아. 여자를 죽이는 일은 왠만해선 하지 않지만 만약에 그럴 일이 생긴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는다는 걸 알겠지? 이에르네?" 이에르네의 얼굴이 증오로 일그러졌다. "그래요? 백년전에 당신이 죽인 일렌처럼 말인가요?" 그 말을 듣자 마자 내 안에서 무언가가 끊겼다. 퍼억 하고 이에르네의 몸뚱이가 날아갔다. 그녀는 생명이 없는 물체처럼 공중으로 떠올라 덤불 속에 사납게 쳐박혔 다. 침묵이 흘렀다. 케이링도 미트라도 쇼나도 유티아도 모두 입을 벌린 채 굳어 서 있었다. 나는 이에르네가 쓰러진 것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해도 될 말이 있고 안될 말이 있는 거다. 이에르네." 그녀는 헝클어진 붉은 머리칼을 쓸어올리면서 부시시 일어섰다. 뺨이 부어 오르고 입술이 터져 피가 흘렀다. 놀란 케논이 재빨리 제 어미에게로 달려 간다. "엄마..!" "결국 당신은 일렌 이외에는 어떤 여자도 진심이 아닌 거잖아!" 이에르네가 비명을 지르듯이 외쳤다. 그 독기어린 눈동자에 지친 기분이 된다. 나는 한 숨을 쉬고 어느 새인가 와서 매달리는 에이리와 라비니아를 안아 들었다. 에이리는 제 어미가 없어서 그런지 약간 불안해 보였지만 그와 반 대로 라비니아는 계집애다운 기지로 이 불안한 분위기에서 내게 애교를 떨 어 분위기를 쇄신하려는 목적의식을 가지고 있는 듯 보였다. ".....미트라를 건드리지 마." 나는 그렇게 한 마디만 던지고는 등을 돌렸다. 안아 올린 라비니아가 내 머리칼을 쓰다듬는다. 에이리는 내 팔뚝에 손톱 을 박을 듯이 꽉 쥐었다. 등뒤로 와 닿는 시선이 따갑다. KUBERIN....... 살아있는 자라면 누구라도 죽음과 한 걸음 틈을 두고 걷는다 죽음을 피하는 것도 자유 죽음과 맞서 싸우는 것도 자유. 6 "일렌이 누구야?" 미트라가 물었다. 그녀는 불안한 듯이 어깨를 추스리고 내 옆에 바짝 붙어 앉아 있었다. 그 녀의 옆에 붙은 케논은 그녀가 예뻐서 마음에 드는지 바짝 붙어서 말끄러 미 쳐다보고 있었고 다른 애들은 제각기 제 어미에게 달라 붙어 있었다. 앗시아가 가져온 저녁거리를 뜯으면서 나는 모닥불을 바라보고 있는 차였 다. 멀리 산등성이로 밤의 여신의 옷자락에 내걸린 별들이 빛을 발하고 있다. 바람은 나직나직하게 열기를 풀고 산뜻한 향기를 전해온다. "쿠베린." "내 여자였다." ".....죽었어?" "죽었어." ".............." 미트라는 날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떻게? 묘인족은 강하잖아? 설마 병으로?" "내가 죽였다." 그녀의 눈이 커다래졌다. "어째서?" "강했으니까." 나는 그렇게 잘라 말하고 눈을 감았다. 지루할 정도로 떠오르는 영상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그녀는 심장을 뜯기웠고 나는 그녀의 심장을 씹는다. 그녀는 나를 배신했 고 나를 배반했고 나를 우롱했고 나를 고통스럽게 했고 나의 심장을 가져 갔다. 검붉은 피와 검붉은 살점과 아직도 아른거리며 떠오르는 고통. "아빠!" 갑자기 소리를 지르면서 케논이 달려왔다. 케논은 기세등등하게 내 앞으로 오더니 갑자기 내 정강이를 걷어찼다. 내가 눈을 뜨자 녀석은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이주먹을 휘두르며 나에 게 항의했다. "생각해 보니 너무 억울해! 왜 우리 엄마만 맞는 거야?" ".......그럼 다 같이 때려주랴?" 케논은 흠칫했다. 미트라가 놀라 케논을 보자 케논은 눈을 가늘게 뜨고 미트라를 쏘아보았 다. "저 인간 여자는 내가 먹을래! 그러니까 날 줘!" 미트라가 입을 저억 벌리는 순간 갑자기 벌떡 일어 선 아소미나가 외쳤다. "아냐! 내가 먹겠어!" 아소미나는 눈빛이 활활 타오르는 것 같은 얼굴로 내 앞에 오더니 맹렬하 게 말했다. "우리 엄마는 맨날 괴로워하는데 저 인간여자가 옆에 있는 것은 불공평해! 그러니까 내가 먹어서 공평하게 할 거야!" 나는 로오나를 바라보았다. 로오나는 멍한 눈빛으로 자신의 딸이 외치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아빠! 플라티나는 내가 구할 거야! 그러니까 저 인간을 날 달란 말이야! 설마하니 아빠는 플라티나보다 이 인간 여자가 더 중요한 것은 아니겠지?" "......." 여자는 어려도 여자다. 아소미나는 불타는 것같은 눈빛을 내게 던지면서 항변했다. 그 말에 동의하듯이 케논과 에이리도 고개를 끄덕였다. 멀리 있던 라비니 아도 그래 하고 큰 소리로 대꾸했다. "그래요! 아빠, 우리가 플라티나를 구할 거야! 그러니까 저 인간여자를 줘 요! 인간따위와 같이 있을 필요는 없잖아!" 이 기세등등한 아이들을 물끄러미 보면서 나는 짧게 말했다. "자라." "아빠!" "떠들지 말고 자." 아소미나는 격렬한 증오의 눈길을 미트라에게 보냈다. 미트라는 어떻게 해야할지 알수 없는 얼굴로 멍하니 아이들의 증오 어린 눈길을 받고 있었다. 그녀는 이런 상황은 상상도 해 본 적이 없을 것이었 다. 그런 그녀의 어깨를 튜나가 안아주었다. 튜나는 한 숨을 내 쉬고 미트 라의 울 것같은 어깨를 안아주었다. 나는 피로한 등을 바위에 기대고 아소미나가 자지도 않고 나를 어둠 속에 서 노려보는 눈길을 느끼면서 허공을 바라보았다. 평소에 보던 상냥하고 예쁜 내 딸의 눈초리라고는 할 수 없을 정도로 살벌한 증오와 분노에 찬 눈동자였다. 아이들은 증오를 빨리 배운다. 그리고 모든 것을 너무 일찍 배운다. 전에도 내가 몇번이나 말했었는데. 인간은 먹을 것이 아니라고. "나...돌아가는 게 옳을까." 미트라가 조용히 말했다. 나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약해진 눈빛이다. "나는......당신이 좋아. 하지만...뭐가 뭔지 모르겠어." "넌 대체 내 어디가 좋은 건데?" "....모르겠어. 처음에는 어처구니없는 남자라고 생각했었을 뿐인데." 나는 턱을 괴고 미트라의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다음 마을에서 돌아가라." "난 역시 높은 성의 소리지르는 공주님인 걸까?" 미트라가 한숨을 내 쉬며 중얼거리듯 물었다. "네가 바라던 것은 어떤 것이었는데?" "나는 그저.....평범하게 대등하게 지내고 싶은 것 뿐이었어. 나를 공주님이 라 부르면서 아부하거나 혹은 벽에 장식된 그림같이 바라보지 않는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을 뿐이었다구." 나는 다정하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꿈 깨." "뭐?" "꿈 깨라구." "너는 절세미녀야. 어떤 사내새끼도 네가 공주여서가 아니라 미녀여서 그 림같이 바라보게 될 거고 미녀님 미녀님 하면서 아부하게 될 거야. 그러니 까 그런 취급 받는 것은 너의 운명인 게야." "운명?" 미트라가 억지로 웃었다. "사내란 동물은 미녀가 앞에 있으면 그렇게 되는 거야. 처음에는 위치에 놀라고 그 담에는 미모에 감탄해서 절절 매는 거지. 튜나와 네가 나란히 있을 경우 네가 공주인 걸 몰라도 다들네게 더 친절하지 않냐?" "그거 지금 나보고 들으라는 소리야?" 튜나가 사납게 눈꼬리를 치켜세우면서 돌아본다. 미트라는 쓴 웃음을 지으면서 튜나를 보다가 다시 날 바라보았다. "그거 위로하는 거야?" "그래." "그런데 당신은 왜 나에게 쩔쩔 매지 않는 거야?" "나는 주변에 워낙에 미녀가 많다보니 아쉬움이 없어서 그렇지." 내 말에 미트라는 철썩하고 내 팔뚝을 때렸다. 튜나는 흥흥 하면서 옆에서 쥐고 놀던 나뭇가지를 휘둘러 보였다. "바람둥이라 말도 잘하는 구만. 하지만 이 튜나님에게는 엘레가 있단 말이 야. 엘레는 내가 아름답다고 말해줬다고." "조인족의 미적 감각을 의심할 수 밖에 없구만." 나는 간단히 답해 주었다. "그런데 일렌이란 여자는..." 미트라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야기 해줘." 여자란 잔혹하다. 태연하게 남의 상처를 헤집는다. "싫어." "왜? 괴로운 거야?" "괴로워." "말해줄 수 없는 거야?" 나는 그녀를 보며 잘라 말했다. "말하기 싫은 것을 말하라고 하는 것은 오만이지."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약간 얼굴이 굳었다. "너는 내가 너의 첫 생리일이 언제였냐, 네가 기저귀를 가리게 된 게 언제 였냐, 아버지에게 엉덩이를 맞지 않게 된 것이 언제였냐, 네 가슴이 봉긋해 진 것은 언제부터냐, 네가 데리고 도망쳤던 녀석이 어떤 놈이냐 따위의 말 을 물으면 흔쾌히대답할 수 있냐?" 미트라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싫은 것은 싫은 거니까 긴 말하지 마." "심해!" "여자는 심하고 남자는 심하지 않냐? 남자는 여자보다 훨씬 섬세하고 단순 미묘해서 상처받기 쉽단 말이다." "말도 안돼." 나는 뒤에 앉아서 내 말을 듣고 있는 휴런에게 시선을 돌렸다. "야, 휴런, 그렇지 않냐?" 녀석은 벙벙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하더니 지껄인다. "자, 잘 모르겠는데. 내가 섬세하던가?" "저 봐라. 남자란 너무나 섬세한 나머지 본인이 섬세한 것도 모르고 있는 불쌍한 종자다. 그러니까 남자는 상처를 받아도 자기가 다쳤는지도 모르고 피를 줄줄 흘리면서 돌아다닌단 말이야." 미트라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가?" "저 말을 믿어? 쿠베린의 말 중에서 반 이상이 헛소리인데." 튜나가 같잖치도 않다는 듯이 말하는 동안 옆에서 사인족의 왕이 거들었다. "사실이야." 엥? 나도 모르게 녀석을 돌아보았다. 녀석은 수인족 놈과의 눈싸움을 무시하고 내쪽으로 고개를 돌리고선 먹다 만 뼈다귀를 휘휘 돌리는 섬세하지 못한 동작을 취하며 지껄였다. "남자는 훨씬 섬세하단 말이다. 이 둔탱이 여자들아." "둔탱이? 둔탱이라구? 그런 말을 노랑탱이 사인족에게 들을 이유는 없어!" 튜나가 그를 쏘아보자 사인족의 왕은 조소하듯이 대꾸했다. "남의 상처를 호기심으로 쑤셔대는 게 여자잖아?" 그 말에 튜나가 흠칫했다. "뭐라는 거야? 지금 이 자리에서 여자 남자 쌈박질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뭐어, 사실을 말하는 것 뿐이지." 아아..난 다시 보았다. 사인족의 왕- 이름이뭐더라....뭐, 뭐였지? "너 이름이 뭐였더라?" 사인족의 왕은 날 불쌍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너 조금 모자란 거 아니냐?" "남자이름을 결사적으로 외울 이유는 조금도 없는 거야. 네가 누렁이니까 그저 누렁이라고 기억하면 되는 거지." "그런데 왜 새삼 이름을 묻냐?" 사인족의 왕은 화가 난 듯이 이빨을 드러내며 물었다. "넌 내가 널 누렁이라고 부르는 게 좋으냐? 그렇다면 그렇게 불러주지, 누 렁아." 그 다음에 날아온 것은 뼈다귀였다. 그 뼈다귀는 호되게 나를 향해 날아왔 지만 그 것에 맞아 머리통을 깨트리는 것은 나의 취향이 전혀 아닌 지라 나는 태연자약 피해주었다. 그러나 그 뒤를 이어 날아온 돌멩이에 그만 별 을 보고야 말았다. "윽.." 이 자식이 시간차 공격을 했단 말이야? 이걸 그냥! 내가 화악 일어서려는 순간 듀나시가 짧게 말했다. "우린 적어도 삼일 안에 산맥에 도착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사.삼일이라니! 농담마! 아무도 그렇게 갈 수는 없어!" 튜나가 입을 벌리며 말하자 듀나시는 차갑게 말했다. "시간을 지체할 이유가 전혀 없지. 사흘 밤낮을 달린다면 세룩-엘라마이야 에 도착할 수 있어. 우리는 유람 중인 게 아니니까." 그 말이 옳다. 엘레도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나는 엉덩이를 붙인 채로 사인족의 왕 누렁이에게 조용히 말했다. "이제 살아남은 사인족이 얼마나 되는 지 아냐?" "몰라. 하지만 분명한 것은...." 녀석이 시니컬하게 웃었다. "내가 마지막 왕이라는 점이다." KUBERIN....... 살아있는 자라면 누구라도 죽음과 한 걸음 틈을 두고 걷는다 죽음을 피하는 것도 자유 죽음과 맞서 싸우는 것도 자유. 7 전에 말했다시피 룬드바르의 애송이는 북으로 진격중이었다. 그리고 우리도 북으로 가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우리가 녀석의 군대를 만 날 수도 있다는 것은 정말 당연한 일일 것이다. 원래 움직이면 그만큼의 음식이 필요하다. 날면 날개가 아프고 달리면 다리가 아프고 지껄이면 입이 아프다. 그것을 채워주는 것은 음식인 지라 우리들은 도시에 들리기로 했다. 튜나 는 이런 저런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도시에 들러 떠들어야 한다고 주장했 으며 우리들은 미소를 지으며 기꺼이 응해 주었다. 미트라는 이번 도시에 서 돌아가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 같았지만 사실 인간의 공주님, 그것도 절 세미녀에 세상물정 모르는 아가씨를 전쟁터를 방불케할 시끌벅적지근한 인 간의 도시에 투욱 떨구고, 그 미녀가 어정어정 걸어서 보호자라 할 만한 놈들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은 정말 가능성 없는 일 중 하나인 지라 나는 이 애를 엘프의 마을까지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나의 타당하고도 적절한 생각에 모두들 동의한 것은 아니었지만 튜나는 그럴 듯한 소리라고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물론 그 사이에 나의 묘인족 여자들 사이에서 내가 가까이 가면 찌르고 할 퀴고 두들기며 물어뜯는다는 협정이 이루어져 나는 외로운 밤을 보내고 있 었다. 그러나 하는 수 없다. 할 일은 해야지, 게다가 여자 하나 꼬시는것 은 별로 힘든 일은 아니지만....그저 쓸쓸한 밤에 앗시아와 다크를 끼고 잘 수 밖에는 없는 것이다. 아아, 냄새나는 수컷들끼리 등을 붙이고 자는 서러운 밤이라니. 어쨌든 애들까지 뭔가 눈치를 챘는지 지 어미에게 바짝 붙어서 이 아버지 를 개차반취급을 하고 있다. 별 수 없어서 나는 머리를 북북 긁으면서 그 화풀이를 누군가에게 하면 좋을까 고민하고 있었다. 바글 바글.. 여기는 북부의 소도시 멜리라는 곳이다. 이 곳의 치안은 엉망진창이었다. 군대가 지나가는 도시라는 것에 뭐 바라는 것도 없고 바랄 수도 없는 것이 긴 하지만 이건 상당히 심한 몰골이었다. 시장이란 녀석은 코빼기도 보이 지 않고 치안대라는 것들은 날깡패, 그리고 상인이라는 자들은 돈에 대한 집착을 노랗게 불태우며 상대를 등쳐먹을 생각만 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길거리에 애들은 새까맣게 그을려 까마귀새끼들마냥 오락가락하면서 뭔가 주울 거라도 없나 눈을 부라리고 있고 여자들은 예쁘게 치장하면 누가 잡 아가기라도 할 듯이 살벌한 눈초리로 눈을 찢고 있었다. 물론 사내들은 말 할 나위 없이 다른 도시에선 족히 사깃꾼이라 해도 통할 듯한 눈매들을 하 고는 음침하게 돌아다닌다. 그 와중에 스쳐가는 듯한 룬드바르의 병사들은 술을 퍼먹고, 아니, 정정하 자면 룬드바르의 정규군은 주둔지에서 거의 나오지 않는 바른 생활(?)을 하고 있는 듯했지만 룬드바르의 점령지에서 뽑아내온, 이를 테면 델리암군 대 같은 놈들은 시내를 쏘다니며 쌈박질이며 노략질이며 부녀자 희롱하기 를 필사적 결사적으로 하고 있었다. 이러한 도시에 미트라를 떨군다라고 하는 것은 미트라의 인생을 완전히 망 치려고 결심을 한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었다. 물론 바보가 아닌 이상 미트라도 이 도시 안에 들어오는 순간 마음을 바꾸었다. "헤이 헤이, 미녀!" "여기 좀 봐! 저게 왠일이야!" 여기저기서 뭐같지도 않은 놈들이 수작을 걸고 있었다. 나는 미트라와 함께 걸었고 나머지 여자들은 각기 애들을 데리고 걷고 있 었다. 우리 스스로야 우리들을 건드릴 놈이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 지만 그것은 사리를 알고 분별을 아는 현명한 자들에게나 통할 이야기지, 술에 절인 보랏빛 가지들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다. 녀석들은 이에르네를 비롯한 미녀군단을 보며 침을 질질 흘리면서 접근해 왔다. 물론 다크와 사인족의 왕- 이름을 기억못한다-과 휴런, 듀나시는 보기에도 적지 않은 체구이고 나역시 마찬가지지만 여기에 이에르네와 미트라, 케이 링, 유티아, 쇼나, 로오나라는 죽죽 빠진 팔등신 미녀들이 노출도 두려워하 지 않고 흰 팔다리를 드러낸 채 걸어가고 있다면 눈알 제대로 박힌 사내들 이 접근하지 않을 리가 없는 것이다. 물론 그 마음 이해는 한다. "여기좀 봐봐, 근사한데?" "우리랑 놀지 않겠어?" 몇몇이- 도시에 들어서자 마자 일곱이란 놈팽이가 달라 붙었다. 그리고 그 순간에 녀석들의 목이 좌라라라락 날아갔다. 그리고 골목길에는 침묵이 흘 렀다. 도시에 들어선 직후 벌어진 일이다. 그리고 너무 빨리 일어나 어떻게 하고 자시고도 없었다. 그 일의 당사자인 케이링은 손톱을 자연스레 집어 넣고는 피를 뿌리고 데굴데굴 구르고 있는 머리통을 하나 걷어 찬 뒤에 태연자약 걸음을 멈춘 나를 바라보았다. "마...맙소사." 튜나가 중얼거렸다. "여기서 살인을 하면 시끄러워 질거라는 생각정도는 할 수 있지 않아?" 그녀는 이마를 잡은 채 중얼거렸다. 골목길에는 이미 수명의 사람들이 이 사태를 지켜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들은 각자 골목 사이 사이, 내지는 그저 길 가에 멍하니 입을 벌리고 서 서 케이링과 우리들을 바라보고 그 일곱명- 지금은 14조각이 된 시체들을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다. 조금 늦은 반응이긴 하지만 몇몇이 비명을 질렀 고 그 뒤를 이어서 곳곳에서 비명소리가 연이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살인이다!" "살인이야!" "흥, 시끄럽긴." 케이링은 냉담하게 말하고는 튜나에게 지껄였다. "이 도시에서 뭘 보겠다는 거야? 이건 쓰레기같은 곳이잖아?" "정보수집을 은밀히 좀 해보려고 했어. 정말 묘인족이란 시끄럽기 짝이 없 구만...." 그녀가 한 숨을 내쉴 때 갑자기 여기 저기서 타타닥 하는 발자국 소리가 터져나왔다. "저기다~!" "저 일행이야!" "살인자!" 아마 치안대 아니면 뭔가 끼어들기 좋아하는 무리들일 것이다. 나는 손짓을 하면서 조용히 말했다. "모조리 죽이는 것도 귀찮으니 아무 데나 들어가자." "쿠베린...." 튜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미치겠네. 아무 데나라고 하더니 진짜 이런 짓을..." "그럼 별 볼일 없는 시선을 받기 위해 주점으로라도 가야만 했다는 거야?" 나는 탁자위에 다리를 얹으면서 되물었다. 우리들은 케이링이 목을 댕강댕강 잘랐던 바로 그 골목길에서 가볍고 우아 하게 담장을 넘어 바로 옆 골목에 달라 붙어 있던 집으로 뛰어들어왔던 것 이다. 그 집은 여느 도시의 집과 마찬가지로 작고 볼품없는 대문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들은 가볍게 문짝을 떼어 안으로 들어가 악악거리는 술에 취한 주인의 항의를 손쉽게 무시할 수 있었다. 만약에 조신한 양가집이었다면 양심의 가책 비슷한 것이라든가 남의 영역 을 침범했다는 가슴 저리는 기분을 맛보았을 지도 모르지만 이 놈의 집안 은 좁고 더러웠다. 벽에는 거미줄이 쳐 있고 햇빛은 들지도 않아 곰팡이 냄새가 나고 바닥에 는 주먹만한 벌레들이 기어다녔으며 주인인 듯한 얼굴을 한 녀석은 술에 잔뜩 취해서 골골 거리고 있었다. 게다가 그 녀석 이외엔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우리들은 그저 느긋하게 시끄러운 소란이 지나갈 때만을 기다리고 있기만 하면 되었다. 튜나는 한숨을 쉬고 주변을 돌아보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이 곳의 상황을 조금 알아보고 올게." "뭐하러?" 내가 묻자 그녀는 진지한 낯으로 말했다. "일단 이곳 녀석들과 접촉해서 룬드바르 군이 얼마나 진격했는지, 그리고 다른 도시의 사정은 어떤지 알아봐야지." 그런 일을 뭐하러 그렇게 어렵게 알아본단 말인가? 그러나 관대하게 나는 튜나의 그 '엘프적인 태도' 라기 보다는 일반적인 인 간의 태도를 너그러이 용서하기로 했다. "올 때 먹을 거나 가지고 와." 내 말에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정색하고 말했다. "부탁이니까 제발 좀 조용히 있어줘. 먹는 것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말 이야." 그 말이 끝나자 마자 튜나는 엘레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케이링." "네?" 케이링이 시큰둥한 태도로 지저분한 방안을 돌아보다 말고 날 바라보았다. "다크" "네." "..누렁이.." "죽엇!" "그리고 너...수인족의 ..꼬맹이." 녀석은 눈을 껌벅이면서 날 바라보았다. 앗, 제길, 녀석의 이름을 잊어버렸다. "나랑 잠시 나갔다 오자." 케이링이 눈을 크게 뜨고 날 보았다. "어디요?" "가서 뭘 좀 물어보고 오려고 해." 나는 짧게 말했고 케이링은 약간 의미심장한 눈으로 미트라를 바라보았다. 미트라는 그 순간 헉 하고 굳었다. 내가 없고 튜나가 없는 상황, 게다가 그나마 호의적인 사인족의 왕도 없다 고 하면 여자들 사이에서 미트라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녀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내 옷자락을 잡으려 했지만 나는 휴런을 돌 아보았다. "휴런, 지키고 있어, 미트라를." "헤에 헤에." 휴런은 흐흐 웃더니 자신만만하게 미트라의 어깨에 자기 손을 척하니 올리 고는 웃어보였다. "걱정 마, 설마하니 여자 하나 보호 못할까봐?" 그 말에 이에르네와 케이링, 쇼나, 유티아의 시선이 일제히 화살이 되어 녀 석을 들이 박았다. 휴런은 하하 웃더니 미트라를 자기 등 뒤로 돌리고는 태연히 손을 흔들어 보였다. "걱정 마, 걱정 마, 이 휴런님이 잘 보호해 둘 테니 형은 가라구." 그 음흉한 손이 은근히 미트라의 허리까지 내려오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 면서 나는 혀를 찼다. 피는 속일 수 없는 것일까? "어딜 가는 거죠?" 케이링이 물었다. 다크는 왠만해선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녀석은 충실히 따라오고만 있었다. 그러나 누렁이는 내 옆을 달리면서 되묻고 있었다. 그 옆에 당연하다는 듯이 말 한마디도 하지 않는 아헬이 달라 붙어 있었다. 이 놈이 생각해 보면 우리 일행 중에 유일한 마법사잖아? 따라 오라고 말 도 하지 않았는데 악착같이 이 누렁이를 따라 달려온다. "대체 어딜 가는 거냐? 뭔 볼일이야? 나라면 그냥 일직선으로 산맥으로 가 는 게 옳다고 생각하는데, 저 놈의 엘프는 느긋하기도 하군." "정보수집하러 가는 거야." "정보수집?" 내 식대로 정보수집을 하러 가는 거지. 나는 지금 엘리야에 있는 것도 아 니고 어디까지나 적대하는 녀석들의 영역에 있는 거라고. 흘긋 보니 수인족녀석은 용케도 잘 따라오고 있었다. 아무리 수인족 중에 가장 강한 회색늑대의 일족이라고 해도 우리들이 진심으로 달리면 따라 올 수는 없다. 녀석은 묵묵히 내 뒤를 눈을 빛내며 따라오고 있었다. 주둔하고 있는 룬드바르군은, 정확히 말하면 주둔하고 있다기 보단 휴식을 취하고 있는 중인 것 같았다. 대개 대규모의 병력이 움직인다고 하는 것은 그 대규모의 병력의 세 배는 되는 보급이 움직인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다. 어떤 모자란 놈이 굶어가며 맨손으로 쌈박질을 하겠는가. 병사란 징집되었을 때는 유순한 양이지만 일단 병사라는 이름으로 창이라 든가 칼이라든가 하는 것들이 쥐어지게되면 그 순간부터 날깡패, 날강도 등으로 돌변한다. 그리하여 양갓집 규수를 넘본다든가 혹은 남의 집에 태 연자약 들어가 노략질을 한다든가 평소에는 모자 벗고 인사할 점잖은 부인 의 스커트자락을 들춘다는 기이한 행각을 벌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따라서 강한 병사, 멋진 병사, 구원군 내지는 성스런 군세 소리를 듣고 싶은, 조금 대가리 돌아가는 군주들은 당연한 일이지만 보급을 철저하게 해서 잘 먹이 고 잘 입히고 잘 토닥거려 주어서 녀석들이 양에서 갑작스런 날강도로 돌 변하지 않도록 보살펴 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자기 영지의 영 민들은 헐벗고 굶주리게 하는 한이 있어도 싸움터의 병사들에게는 새 신발 과 새 창과 칼들을 지급하고 적절히 때를 가려 음식을 퍼먹이며, 창녀들을 이끌고 다니면서 여자를 찾아 병영을 이탈하지 않도록 배려해야 한다. 아, 인간의 병사란 얼마나 돈과 노력과 힘이 많이 들어가는 것일까. 어찌되었든 때는 황혼이 질 무렵, 배가 슬슬 고파지고 따라서 짜증이 증 가하고 살기가 무럭 무럭 가슴속에 우러날 이즈음, 나와 애송이들은 도시 외곽에 주둔하고 있는 룬드바르의 병영이 잘보이는 언덕 위에 섰다. 빌어먹을 태양이 아직까지 안지고 버럭 버럭 버티고 있길래 눈을 한 번 흘 겨주었다. 물론 내가 눈을 흘긴다고 해서 태양이 안녕 이제 그만 하고 사라질 리는 없겠지만 어찌되었든 지는 해 주변은 시뻘겋게 물들어 그런 대로 어둑어둑 해지기 시작한다. "뭘 할 건데?" 누렁이가 계속 묻길래 나는 잘라 말해주었다. "누렁아, 계속 떠들면 너 떼놓고 간다." "이, 이자식이! 누가 누렁이야? 내 이름이 뭔지 내가 그렇게까지...!" "왕의 이름은 헬레아스, 푸른 갈기의 헬레아스님입니다." 아헬이 잽싸게 끼어들어 항의어린 어조로 외쳤다. "헤에? 이름만은 그럴 듯하군. 푸른 갈기의 헬레아스? 어디가 파랗냐?" 내가 녀석을 아래 위로 훑어보자 막 발작하려는 녀석을 누르고 아헬이 재 빨리 대신 답했다. "이분은 변신하시면 푸른 갈기가 가슴에 생겨서..." 본 적이 없는데. 이 놈을 한번 변신시켜서 그 몰골을 한 번 볼까? 막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무렵, 수인족의 녀석이 입을 열었다. "해가 저물었습니다." 붉은 태양이 완전히 산 아래로 사라지자 마자 나는 병영을 주욱 돌아보았 다. 움푹 패인 분지에 놓인 도시의 서쪽에 위치한 평원에 주둔한 녀석들의 병 력은 얼추 보기에 2천 이상은 되는 것 같이 보였다. 방사형으로 위치한 그 모양새는 별로 규칙적인 모습은 아니었지만 그 주변 부근에 모여든 보급대 라고 이름 붙은 장사치와 창녀집단보다야 덜 했다. 저녁밥을 짓는 지 가마솥을 걸어놓은 녀석들은 나름대로 분주해 보였다. 여기 저기 횃불과 모닥불이 올라오고 보초같이 생긴 놈들이 창을 들고 오 락가락하면서 사방을 경계하고 있긴 하지만 여긴 적지도 아닌 곳인지라 녀 석들은 느긋하기만 했다. 하품하는 녀석, 잡담하는 녀석, 뭔가를 주억거리고 먹는 녀석, 밤이 다가오 자 멀리 보이는 창녀들의 흰 허벅지를 보고 킬킬거리는 녀석등 가지 가지 의 행태를 보이고 있었다. 그런 녀석들을 태연자약하게 뚫으면서 우리들은 전진했다. 먼저 노린 것은 중앙에 위치한 제법 큰 막사였다. 막사안에 들어가자 마자 눈에 보인 것은 제법 반듯하게 차려입은 기사차림 의 녀석이 팔짱을 끼고 제법 심각하게 지도를 노려보고 있는 장면이었다. 녀석의 옆에는 기사의 종자인 듯한 녀석이 진지한 얼굴로 스프 그릇을 탁 자 위에 내려놓고 있었다. 그리고 물론 진지한 얼굴로 창녀로 보이는 젊은 여자가 반쯤 젖가슴을 드러낸 채 바닥에 앉아서 자기 머리칼을 땋고 있었 다. 내가 들어가서 녀석들을 빤히 바라보고 있을 때까지 녀석들은 나름대로 진 지하게 자기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우리 일행들, 약간 굼뜬 케슈파란인지 케슈너트인지 하는 녀석까지 모조리 다 들어올 때까지 녀석들은 모르고 앉 아 있다가 뒤늦게 창녀가 머리를 땋다 말고 어 하는 소리를 내었다. "누구?" 종자가 그 소리에 고개를 들고 우리들을 보았다. 그리고 손톱을 흉악스레 꺼내들고 히죽 웃고 있는 케이링을 보는 순간 종 자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KUBERIN....... 살아있는 자라면 누구라도 죽음과 한 걸음 틈을 두고 걷는다 죽음을 피하는 것도 자유 죽음과 맞서 싸우는 것도 자유. 8 비명을 지르는 것은 어찌 보면 모든 인간의, 아니 모든 지각 있는 자들의 행위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놀라서 비명을 지르는 것은 의외로 그 숫자가 적다. 대개는 아파서 비명을 올리거나 죽을 때 비명을 올리는 일이 태반인 것이다. 인간의 경우는 비명을 아주 즐겨 지르는 것 같은데 내가 왕년 한 여자에게 그 일을 물어보자 그녀가 답하길, 비명을 지르면 나름대로의 공 포나 스트레스가 해소된다고 말해주었다. 히스테릭하게 비명을 지르는 여자는 주로 스트레스 해소용이라고 할 수 있 고 비명을 올리는 남자는 대개 공포라고 한다. 그 말을 듣고 내가 스카에 게 물었더니 스카는 그것을 완강히 부인했다. "여자는 겁이 많아서 비명을 많이 지르는 거야. 남자는 비명이라기 보단 신음에 가깝지 않나? 그리고 대개 죽을 때 비명을 지른다구!" 그렇지만 원래 남자란 허세와 자존심과 허풍과 잘난 척으로 일생을 살아가 는 것이라는 것을 진실로 알고 있는 나는 그 말을 안들은 것으로 치기로 했다. 남자가 강하다고 뻐기지만 결국 찾는 것은 궁극적인 귀착점은 단 하 나, '엄마' 가 아니던가! 어찌되었든 나는 종자와 기사놈이 그 절대적인 외침, '엄마'를 찾기 전에 녀석들의 턱뼈를 반쯤 빼고 여자가 히스테리를 부리기 전에 졸도시켰다. 처음 그 일을 하려고 한 케이링을 만류한 이유는 단 하나, 그녀가 힘을 조 절할 필요성을 그다지 느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지 내가 직접 하고싶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이제 뭘 할건데요?" 케이링이 죽여버리고 싶다는 듯이 손톱을 집어넣지도 않고 탱탱 튕기고 있 는 동안 나는 탁자에 놓여진 음식을 천천히 먹어치우면서 턱이 빠진 기사 녀석을 톡톡 발끝으로 걷어찼다. "이봐, 순순히 말하면 목숨만은 살려줄게." 녀석은 아픔과 공포와 기타등등 내가 알수 없는, 그리고 알 생각도 없는 감정에 사로잡혀서 나를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보다 배는 더한 공포심을 가지고 케이링의 그 기나긴 퍼런 손톱을 바라보았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첫째, 룬드바르의 애송이는 어디까지 진격했는가야." 녀석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나는 녀석이 대답할 수 있도록 턱을 도로 맞추어 주었다. 그러자 녀석은 완강히 몰라라고 떠들려고 한다. 그 말을 듣기도 전에 나는 그 녀 석의 손가락을 힘껏 밟았다. 콰직 하고 손가락뼈가 부서지는 순간 녀석이 악하고 비명을 올리려 했고 또 바로 그 순간 아헬이 두 손을 내밀었다. "사일런스!" 뭔지는 모르지만 우리들 주변으로 화악 하고 무언가가 펼쳐졌다. 내가 돌아보자 아헬이 그 주인에 어울리지 않는 명민하고도 진지한 눈으로 나에게 말했다. "지금 이 곳에 주문을 걸었습니다. 밖으로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을 것입니 다." "오호." 케이링은 반사적으로 마법을 행한 아헬을 쏘아보았다. 그녀의 얼굴이 일그 러지면서 증오의 빛이 떠오르자 아헬은 흠칫하면서 진지한 어투로 그녀에 게 변명했다. "케이링님, 저는 그 놈들과는 아무 연관도 없고 또 인간도 아닙니다." 케이링은 송곳니를 드러내며 흐으 하고 웃었다. "그거야 알고 있지만 마법을 쓴 네 피를 한번 보고픈 생각이 안드는 것은 아닌걸." "까불지 마라, 여자!" 푸른 갈기의 헬레아스란 녀석이 눈을 가늘게 뜨고 살기를 흩뿌리자 케이링 역시 사나운 시선을 동시에 던졌다. 살벌한 기운이 좁은 막사안에 퍼져나 갔다. 나는 그들의 일촉즉발의 분위기를 무시하고 탁자위에 놓인 스프를 들이키 면서 완강한 턱을 가진 기사녀석을 바라보았다. "들었냐? 여긴 아무리 비명을 질러도 아무도 못듣는단다." "....." 녀석은 원한과 증오로 날 바라보았지만 어디 그런 눈으로 날 바라본 자가 한둘이던가, 오히려 요즘은 그런 눈을 안보면 가슴이 허한 상태다. "다시 묻지, 룬드바르의 애송이는 어디까지 진격했다더냐?" "모른다!" 녀석이 완강히 외쳤고 나는 뒤를 이어서 옆에 있는 종자녀석을 걷어찼다. 녀석은 아직 십사오세로 어린 놈으로 보였지만 어리든 늙든 그거야 상관없 는 일이다. 그 놈의 허벅지를 콱 누르자 웬만해서는 부러지지 않는다는 인 간의 허벅지뼈가 뿌직 하고 박살 났다. "크아아아아..." 비명은 그렇다 치고 엄청난 양의 피가 쏟아져 나왔다. 내가 알기론 허벅지뼈 근처에는 다량의 혈액이 흐르고 있는 핏줄이 있어서 그 것을 건드리면 출혈과다로 죽는다고 한다. 다리가 절단되었을 뿐인데도 죽었다는 녀석은 아마 그쪽을 건드려 죽은 녀석일 게다. 그 피가 기사녀석의 얼굴까지 튀었다. 파랗게 질린 녀석의 귓전에서 종자 가 미친 듯이 비명을 올리고 있었다. 자기가 맞았을 때에는 얼굴색도 변치 않던 녀석이 종자가 옆에서 울부짖자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외쳤다. "저 앤 아직 어린 애다! 기사도를 아는 자라면 이런 짓은...!" "난 기사도따윈 몰라, 기사가 아니거든." 나는 친절히 말해주면서 녀석의 턱을 긁어주었다. 강아지는 이렇게 긁어주면 좋아하지. 그러나 녀석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비열한...!" 옆에서 비명을 올리고 있는 종자녀석은 졸도했고 그 덕에 창녀도 잠, 아니 기절에서 깨어났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또 다시 비명을 크게 지르다 말고 뒤로 넘어졌고 그 때문에 옆에 있던 케이링이 짜증을 내며 걷어차 대굴대 굴 굴렀다. "대답하지 않으면 나는 자꾸 자꾸 짜증이 날 것 같다." 그 말에 따라 나는 손짓했고 입구 근처에 서 있던 다크시온이 천천히 일어 서서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두 명의 병사를 데리고 들어왔다. 두 병사는 어리숙한 얼굴로 창을 든 채 들어왔다가 막사 안의 풍경을 보고 새파랗게 질렸다. 그리고 그 들의 목이 그 자리에서 공중으로 날았다. 머리통이 타악 하고 기사의 발치까지 날아와 굴렀고 그 피가 막사 전체에 퍼져나갔다. 기사는 피를 뒤집어 쓴 채 눈이 쟁반만해져서 입을 벌렸고 그 다음에 나는 상냥히 다시 물어주었다. "대답할래? 아님 더 죽일까?" "어..어떻게 이런 짓을...!" 녀석이 더듬거리는 순간 나는 다시 손짓했다. 그러자 다크시온은 다시 밖 으로 나갔고 그 다음에는 두 명의 병사를 또 데리고 들어와 또 목을 날렸 다. 머리통은 이제 네 개가 되고 시체도 역시 네 개, 그리고 공포와 고통으 로 졸도한 녀석이 둘이 되어 막사안은 이제 상당히 비좁아졌다. "다시 묻겠다. 룬드바르의 애송이는 어디까지?" "......" "안되겠네, 너무 짜증나게 하는데." "이번에는 옆의 막사로 갈까요? 그 곳에 있는 녀석도 이 놈과 지위가 비슷 해 보이는데요." 다크가 조용히 말하자 녀석은 추욱 늘어진 얼굴로 우리들을 쏘아보았다. "대체 누구냐? 너희들은 누구야?" "알고 싶어?" 나는 히죽 히죽 웃었다. 먹을 것을 잔뜩 들고 돌아오는 길에 케이링이 입을 비죽거렸다. "체엣, 뭐 그런 거 정도로 이렇게 많이 갈 필요가 있었을까요?"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먹을 것을 들려면 손이 많이 필요해." 나는 진지하게 말해주었다. 어디 먹보가 한 둘인가? 나 먹을 것도 모자라는 판에 애들은 워낙에 한 참 클 때라 엄청나게 먹어댄다. 게다가 사인족의 왕이라는 이 누렁이도 왕답 게- 거기에 왕답게라는 수식어가어울리는 지는 잘 모르겠지만- 엄청나게 먹어댄다. 앗시아도 성장기다. 게다가 듀나시와 휴런, 다크도 덩치에 어울 리게 먹어댄다. 여자라고 해서 빠질 리 없다. 일반 인간이 먹는 것의 세 배 이상을 먹어대는 우리들이 대체 몇이나 모인 거냐? 생각해 보면 암담할 정 도로 먹을 것이 부족했다. 어쨌든 우리들이 먹을 것을 잔뜩 가지고 도착하자 일행들은 쌍수를 들어 환영했고 아이들은 뒤집어질 듯이 기뻐했다. 안그래도 배고플 때다. 만약 내가 조금이라도 늦었으면 미트라는 한 떼의 굶주린 아이들에게 먹혔을 거 라고 휴런이 뒤에서 귀뜸해 주었다. 우리 일족과는 다른 의미로 기쁨의 눈물을 흘린 미트라의 허리를 안아주고 서 나는 음식준비를 시작하는 앗시아와 여자들을 내버려두고 탁자에 다시 앉았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구르고 있던 집주인이 안 보였다. "어디갔냐?" "아, 지하실이 있길래 거기 쳐넣었어요." "지하실이 있어? 그 지하실엔 뭐가 있냐? 혹 포도주라도 있지 않던?" 내가 기대하며 묻자 이에르네는 고개를 저었다. "먼지와 거미줄이라면 잔뜩 있더군요." 식사를 한 참 하고 있던 중인데 마침 엘레와 튜나가 돌아왔다. 그들은 음 식물을 잔뜩 싸 짊어지고 오긴 했지만 역시 내 생각대로 병아리 모이만큼 만 가지고 돌아왔다. 우리들이 먹는 것을 보자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고 항 의했다. "뭐야? 자기들끼리 먹고!" "너희들 둘이서 가져온 음식으로 우리가 해결될 거 같냐? 얼른 와 너도 끼 어 먹어." 엘레는 서슴지않고 앉아 먹기 시작했지만 튜나는 눈살을 찌푸리고 탁자 아 래를 쏘아보았다. "정말..너무 한다...이건 걸신들린 거지떼들 같아!" 그녀는 바닥에 수북히 쌓인 수많은 뼈들을 가리키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모르는 자들이 보았다면 이 자리가 도살장이라고 착각했을 거야." "그건 그렇고 말해봐. 정보란?" 내가 돼지 뒷다리를 뜯으며 진지하게 묻자 튜나는 보리빵을 뜯어 우리들의 먹성에 질린 미트라에게 권하면서 입을 열었다. "룬드바르군은 지금 산맥의 중앙신성도시 마튜스에서 막혀있다고 해. 마튜 스에는 알다시피 하프엘프들이 많이 살고 있고 그 곳에는 수인족도 꽤 많 아." "그리고 천혜의 요새이기도 하지." "응, 조인족들도 그 곳에 몇 가 있는 것 같긴 한데 잘은 모르겠고....일단 산맥의 중앙 노스엘스턴까지는 들어서지 못한 것 같아. 마튜스에는 지금 고왕국의 병세가 집결하고 있는 모양이고...." "마법사는?" "마법사로는 그 곳에 몇 가있는 것 같긴 한데 자세한 이야기는 아직 몰라, 본대가 거기에 있는 것을 보아선 룬드바르 본인도 그 곳에 있는 듯한 데....."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또 다른 소문에 의하면 황제는 아그랑에서의 폭거로 인해서 남하하고 있 다는 이야기도 있어." "아그랑의 폭거? 파핫..." 내가 웃자 튜나는 고개를 저었다. "공식적으로 알려진 사망자만 해도 6만 이천에 달한다고 하던데, 쿠베린, 그렇게 많이 죽인 거야?" 공식적으로 알려진 사망자가 몇인지 그건 나도 모르겠다. 벌써 6만이나 죽 었단 말인가?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튜나가 진지하게 말했다. "그래서 룬드바르는 그 사악하고 잔인한 마왕을 없애기 위해 손수 아래로 남하하고 있다는 이야기야." "엘프와 고왕국 쳐부수기를 단념하고?" "그건 모르겠어. 남하하고 있다는 설과 자신의 오른팔인 장군을 보낸다는 설과 두 가지 설이 교차하고 있어서 말이야." 나는 왠지 유쾌해져서 킬킬 웃었다. 마왕이라. "그리고 마법사에 대해서인데...아무래도 룬드바르에 비협조적이었던 마법 사 길드가 그쪽으로 돌아선 거 같아, 쿠베린이라는 잔인무도한 마왕을 없 애기 위해서 말야." 튜나는 한숨을 내 쉬며 말했다. 내가 킬킬 웃자 그녀는 빵을 뜯던 손을 멈추고 오렌지 쨈을 바르면서 중얼 거렸다. "일류의 마법사들이 묘인족을 없애기 위해 총 출동을 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어. 물론 그에 따라서 각 지에서 미친 듯이 살육을 하고 있다는 무지막 지한 묘인족들에 대한 소문도 같이 들려오고 있지." 흐음. 잘들 하고 있는 모양이군. "이렇게 해선 아무것도 안돼, 쿠베린. 정말 당신, 아이들을 되찾고 싶은 거 야? 아니면 단지 복수하고 분풀이를 하고 싶은 거야? 전 인간을 다 당신 적으로 돌려도 상관없어?" 튜나가 진지하게 다시 물었다. KUBERIN....... 살아있는 자라면 누구라도 죽음과 한 걸음 틈을 두고 걷는다 죽음을 피하는 것도 자유 죽음과 맞서 싸우는 것도 자유. 9 분노라는 것은 감정 중에서 가장 강하다. 누군가 사랑이 가장 강하다고는 했지만 사랑이란 것은 일종의 도취로, 부 드러운 감정에 속하지 강한 감정은 아니다. 단지 사랑에서 유래된 감정이 엄청난 힘을 가졌을 뿐인 게다. 흠, 따지고 보면 분노의 가장 밑뿌리는 사 랑이란 감정에서 비롯되니까 결국은 사랑 만만세라고 해둘까. 이를테면 사랑하는 여인이 어떤 빌어먹을 자식에게 다쳤다, 내지는 납치 폭행을 당했다 라고 하면 정상적인 남자라면 돈다. 그 돈다는 감정은 그녀 를 사랑하는 만큼 강해지고 과격해져서 마침내는 분노로 폭팔하고 증오로 불타오른다. 이쁜 아가가 어떤 찢어죽일 녀석에게 납치, 죽임을 당했다라고 치자, 그 부모가 제정신일까? 완전히 돈다. 어떻게 돌까? 사랑하는 만큼, 사랑하는 것 이상으로 돌아 분노와 증오로 이성을 잃는다. 그것이 바로 분노, 감정 중에 가장 강력한 것이다. 감정적인 존재일수록 분노에 사로잡혀 모든 것을 잊는다. 아픔, 시간, 고통 을 모조리 잊고 분노의 대상에게 덤벼드는 것이다. 상대적인 것은 있겠지 만 분노와 증오라는 감정은 나이가 많고 적음에 비례한다. 나는 감정에 완전히 사로잡히기에는 나이가 들었을 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감정은 내 살아가는 원천이다. 감정이 없는 자는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을 모조리 적으로 삼아도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나. 인간전체가 나에 게 대들어도 나는 상관없어." 내가 웃으며 말하자 튜나의 얼굴이 흠칫했다. "진심이야? 엘리야의 사람들이, 그리고 에메스 공작등이 쿠베린을 죽이겠 다고 뛰어와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거야?" 나는 턱을 고인 채 대꾸대신 웃었다. 튜나는 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당신은 인간들과 이십년 이상, 아니 삼십년가까운 세월을 살았다고 들 었어, 어쩌면 더 긴 세월을 보냈는 지도 모르지, 그런데도 아무 상관이 없 어? 그렇다면 엘리야의 마미라는 여자에게 해준 것은 뭐지? 스카라고 하는 그대의 친구는 뭐지? 당신의 애인이라고 하는 그 여자는 뭐지? 응? 그들을 위해 난리를 쳐댄 것은 뭐지?" 그녀는 혼란에 빠진 듯, 아니 거의 화를 내는 것 처럼 보였다. 흥분한 그녀가 내 앞으로 다가와 거친 숨소리로 항의한다. 나는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 하프엘프는 아직도 수많은 시 간들을 엘프와 인간 사이에서 살아갈 것이고 또 수많은 이야기와 일들을 겪게 될 것이다. 이 하프엘프가 긴긴 시간 조인족의 전사 엘레와 사랑스런 나날들을 보내게 된다 해도 그 안에는 반드시라고 할만큼 슬픔이 끼어들게 될 것이다. 우스운 나날들과 슬프고 기쁜 나날들이 연이어 펼쳐질 것이고 그녀는 마침내 나이를 들어 분노하든 체념하든 어쨌든 각양각색의 추억과 감정과 회한들을 가지고 대지의 여신에게 돌아간다. 그 누구든지 피할 수 없는 대지의 여신의 품으로. "그만하지 않겠어?" 흥분한 튜나를 제지한 것은 엘레였다. 엘레는 입을 다물고 그녀의 팔뚝을 잡았다. 그리고는 조용히 말해주었다. "그의 일이다." "하지만!" "남의 일에...왜 참견하는 거지?" "엘레!" 튜나가 기가 막히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쿠베린님이 무엇을 하든 그것은 그의 의지. 참견할 이유는 없어, 자격도 없고." 튜나는 입을 벌려 엘레를 보았다. 그녀 몸안의 인간이 엘프와 충돌하고 있는 걸까? 엘프라면 입에 담지 않을 말을 하는 것을 보면 그녀는 인간과 많이 흡사한 것이다. "쿠베린님, 그럼 저녁에 출발하실 겁니까?" 나직하게 엘레가 본론으로 들어갔다. 나는 턱을 괴던 상태 그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룬드바르가 회군할 마음이 없을 테니까. 우린 마튜스로 갈까나. 거기서 그 의 잘나가는 마법사들을 만나봐야지, 그리고 룬드바르 본인도." 나는 웃는 얼굴 그대로 대답했다. "룬드바르가 회군하지 않을 것을 어떻게 알지?" 미심쩍은 듯이 튜나가 물었다. "공문이 왔던걸." "뭐라구?" "룬드바르의 장군 중 하나인 렝바이란공작이 이만 이천을 이끌고 남하 중 이라고 공문이 왔던걸, 게다가 마튜스로 보급물자를 보내라는 공문도 같이 말이야." 튜나의 눈이 커졌다. "....그건?" "묘인족식으로 알아낸 거지." 나는 여전히 웃었다. "쿠베린." 낮게 미트라가 내 옷자락을 잡았다. 내가 돌아보면서 그녀의 허리를 안아 올리자 그녀는 내 목을 감싸 안았다. 따스한 냄새가 난다. 가볍게 다리를 움직여 본다. 탄력을 가지고 튀어 오르는 발끝을 느끼면서 나는 달빛도 흐린 밤을 내달리고 있었다. "당신은 나를 사랑하고 있어?" "응." 발밑으로 와 닿는 마른 풀들이 소리를 낸다. 밤 하늘의 별들이 여신의 옷 자락 사이에서 살랑살랑 흔들며 빛을 발한다. 마치 여신의 보석함에서 쏟 아져 나온 보석들처럼 빛이 나는 그 것들. 미트라의 살결에서 나는 냄새로 코끝은 야릇한 기쁨을 맛보고 있다. 눈을 감은 미트라의 속눈썹은 반원을 그리며 창백한 그늘을 만들고 있었 다. 진주빛의 살결위로 흐르는 별빛과 달빛, 아아 정말 이 계집애는 기찬 미녀가 되어주었군. 사랑 사랑 사랑 사랑... 수많은 자들이 말하고 노래하고 외치고 울부짖는 그 단어를 생각하면서 나는 달렸다. 대체 뭐가 사랑일까? 뭐가 사랑다운 것인가? 여자와 남자 그 사이에는 대체 뭐가 있는 것일까? 지긋지긋하게 따라 붙는 사랑타령, 지겹기 그지없는데도 왜 사랑 사랑 떠 들어 대면 나도 모르게 응 하고 대답이 나오는 거지? 미트라는 내 어깨에 고개를 묻은 채 말이 없다. 여자는 묘하게도 모든 것을 버리고 남자에게 온다. 내 아이들이 호시탐탐 잡아 먹기위해 눈을 빛내고 내 여자들이 손톱을 곤두세우며 바라보고 있는 데도 그녀는 나에게 온다. 대체 뭘까? 여자의 무엇이 모든 것을 버리고 나 에게 오려 하는 것일까? 종족도 초월하고 그 모든 것도 다 초월하고 다 버 리고, 그녀는 나에게 왔다. 뒤에서 달리고 있는 수인족 녀석을 문득 생각했다. 헐덕이는 녀석의 숨소리가 들려온다. 그렇겠지, 수인족 주제에 우리를 따라 온다는 것은 사실 엄청나게 힘든 일이다. 사인족의 누렁이가 자기 애인인 지 종인지 알수 없는 계집애를 안고 내달리고, 엘레가 자기 애인을 안고 나는 동안 수인족의 꼬맹이는 심장이 터져라 달리고 있었다. 저 놈과 같이 지냈다는 그 묘인족의 여자는 대체 어떤 여자일까. 묘인족의 모두가 다 경멸해 마지 않는 그런 일을 감행한 그 여자는 어떤 여자일까? 바람은 뺨을 스치고 밤의 여신의 옷자락은 보석처럼 빛을 발한다. 산맥을 넘기 위해 내달리는 우리들은 신음소리 하나 내지 않고 내달리고 있었다. 나의 아이, 나의 딸, 나의 혈족이 저 너머에 있는 것일까. 이렇게 할 일없이 달리기만 하는 밤에는 온갖 잡념이 다 떠올라 뇌리를 어 지럽힌다. 결국은 아이를 구출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 분노하는 것 자체가 목표. 복 수하여 살육하는 것 자체가 목표인 것이다. 내 딸은 이미 이종족에게 납치를 당한 어이없는 몸, 어처구니 없는 일을 당한 몸, 어린 아이이기 때문에 용서될 수는 있겠지만 우리들 무리 안에서 그것은 치욕중의 치욕. 나의 아들 딸 중에서 가장 치욕스런 일을 당한 그 아이, 플라티나가 어린 애들 사이에서 어떤 일을 당할지 안 봐도 뻔한 일이다. 그 때문에 분노하 지 않으면 안된다. 복수해 주지 않으면 안된다. 내 아이가 당할 치욕과 내 가 받은 치욕과 우리 종족이 받을 치욕, 그리고 감히 이종족이 우리들을 향해 내뻗을 치욕들을 향해 분노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상념이 또 머리를 지배하기 전에 행동하자. 나는 미트라를 안고 있는 것을 잠시 잊은 상태로 눈 앞에 보이는 가장 높 은 푸아케 나무둥치에 발톱을 박았다. 부드러운 나무결이 그대로 발톱사이 로 느껴진다. 그것을 그대로 밟고 수직으로 올라간다. 내 뒤를 따르던 자들 이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날 바라보는 것을 느끼면서 나는 나무 위로 올라 가 거센 나뭇가지를 밟고 사방을 돌아보았다. 차가운 바람, 냄새는 매캐한 회색. 어둠에 물들어 시커먼 수풀 사이로 보이는 것은 인간의 병영이었다. 그동 안 너무 봐서 낯익어 버리다 못해 친숙해져 버린 그 모습을 나는 찬찬히 훑었다. 숫자는 얼마나 될까? 저 안에 쓸만한 마법사는 얼마나 될까? 이제 깊은 밤이니 각자 잠을 청한 놈들과 보초를 서고 있는 놈들이 얽혀있 을 것이다. 하지만 여긴 아직 세룩-엘라마이야에 속해있지도 않고, 저 놈들 이 정복했다고 믿고 있는 땅 위다. 아마 조심하자고 생각하는 것은 밤짐승 정도일 테지. "........인간들이군요." 어느 새인지 내가 선 옆의 허공에서 날고 있는 엘레가 말했다. 그의 눈은 내가 보고 있는 곳의 멀리를 보고 있다. "어느 정도 가면 마튜스 일까?" "이 속도라면.... 반나절이겠지요." 그의 시선이 아랫쪽을 향했다. 꽤나 높은 나무 아래에서 내려다 보면 푸르다 못해 시커먼 수풀속에 헐떡 이는 녀석들이 보인다. 모두 나를 올려다 보고는 있지만 자세는 각기 다르 다. 아직 체력이 남아 날 올려다 보고 있는 녀석들이 있는가 하면 체력이 딸려 서 때는 이때다 하고 널부러져서 헐떡이고 있는 녀석들도 있다. 물론 후자 는 수인족 꼬맹이와 애들. "그렇다면 저기 보이는 놈들은 마튜스로 가는 룬드바르의 군대겠구만." "그렇겠지요." 엘레는 무심히 말했다. 지쳤다는 말을 할 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미트라를 나무위 가지에 올려놓고 떨어지지 않도록 잘 묶어 두었다. 그리고는 나를 바라보는 일족들을 향해 조용히 명령했다. "죽여라." 살기가 번들거리면서 피로를 덮었다. 지겨운 비명소리를 들으면서 손톱을 휘둘렀다. 변신모드에 들어갈 필요는 전혀 없었다. 어둠 속에서 지르는 비명소리는 어쩐지 한가로울 정도로 익 숙해졌다. 인간을 죽이는 일을 내 생전 이렇게 많이 한 적도 없었다. 그리 고 인간에 대해 이렇게 분노해 본 적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분노하고 있는 게 대체 뭘까? 이젠 너무 죽여서 퇴색해가고 있는 이 감정은 대체 뭘까? 6만인지 7만인지 소문이 자자하다는 마왕의 이 름을 걸고 마구 마구 죽여줘야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일까? 관두자, 이 지상에서 가장 강한 자, 쿠베린이여, 지금은 잡념으로 생각을 분산할 필요는 없다. 생각해라 생각해라 생각해라. 룬드바르의 애송이가 어떻게 나올 것인가? 녀석의 마법사들은? 화가 나 어쩔줄 모르는 아이들이 울부짖고 있다. 도망가고 넘어지는 병사 들의 등너머로 손톱을 휘두르는 아이들의 몸부림은 슬플 정도로 느렸다. 아이들은 죽이고 죽이면서 찢어져나간 살점들을 돌아볼 새도 없이 전진하 고 있었다. 내 손톱에 금속성이 울려나온다. 어떤 병사가 용감하게 나에게 대든다. 그러나 그도 잠시 녀석이 든 창날은 부러져 나가며 공포에 질려 새파랗게 된 두 눈으로 날 올려다 보고 있다. 녀석의 눈에 내가 있다. 검붉은 피로 물든 몸과 검붉은 눈을 하고 피가 떨어지는 손톱을 늘어뜨린 내가 녀석의 부릅뜬 눈속에 있다. 그 얼굴을 후려갈기고 목줄기를 뜯어낸 다. 그 죽어버린 시체의 눈에 내 모습이 그대로 담겨있다. 그러나 움직인 다. 지긋지긋하게 움직여 또 다른 자를 죽인다. 사인족의 왕이 울부짖는 것이 보인다. 살육에 흥분하여 변하는 녀석의 누 런 털이 이젠 검붉게 변해 있다. 갈기처럼 휘날리는 황색의 머리칼이 이제 는 검게 보이는 피와 살점에 뒤덮여 있었다. 이에르네가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본다. 그녀는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그녀의 아들이 바로 옆에서 붉어 진 두 눈으로 도망가는 병사들을 쫓고 있다. 비명소리는 이제 들리지도 않는다. 달아나려는 가축들과 한데 섞여서 숲은, 숲 속은 엉망진창의 아비규환을 이루고 있다. 살육의 흥분에 겨워 변신하려는 꼬맹이들을 뒤로 하고 나는 한 걸음 앞서 나무 위로 올라섰다. 나무 위에 올라서자 주변이 더 잘 보인다. 피의 냄새로 가득찬 이 주변은 이제 들짐승들의 기척은 없다. 들짐승들은 모두 달아나 멀리 사라져 버렸다. 별 빛이 떨어져 내린다. 밤의 여신의 옷 자락은 엷어져 있다. 도망치는 인간들이 만드는 선이 어둠 속 수풀을 가르고 있었다. 헐덕이는 공포가 그들의 숨결에 배어나온다. 공포, 공포, 미지의 것에 대한 공포. 알지 못하는 것은 두렵다고 늙은 마법사가 말했다. 그러니까 끊임없이 알 아내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했다. 공포란 인간의 원동력, 감정은 여전히 힘 을 가진다. 그러나 나에게 지금 힘을 주는 것은 분노. 나는 발톱에 힘을 가하고 서서 그들을 내려다 보았다. 알려라, 인간들이여, 분노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인간들만이 지상 위에 존 재한다는 생각은 버려라, 이 세상 어느 존재보다도 약하고 탐욕스러운 존 재들이여, 알리고 알려서 내 분노를 퍼뜨려라, 마왕이든 악마든 뭐든 좋다. 너희들이 마왕이라 부르든 악마라 부르든 나는 나, 묘인족의 왕 쿠베린이 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 그리고....나는 남이 던지는 한 두마디 말 따 위로 흔들리지 않으니까. 나는 소리내어 웃었다. 제 19화 전쟁 KUBERIN....... 증오와 증오가 만나고 의지와 의지가 부딪치고 야만과 야만이 힘을 겨룬다 죽음이 명예롭다고 하는 자는 누군가 선혈이 아름답다고 하는 자는 누군가 1 나는 싸움을 확실히 좋아한다. 피를 들끓게 하는 흥분감과 고양감이 등줄기로 스치고 나도 죽을지 모른다 는 긴장감과 전신을 후들거리게 하는 격렬한 감정이 온 몸의 털을 곤두세 운다. 죽을지 모른다는 그 짜릿한 두려움의 순간에 나는 살아있다는 것을 느낀다. 상대가 강하다는 것을 느낄 때면 이루 말할 수 없는 즐거움과 함 께 동지의식을 느껴서 나도 모르게 상대에게 혹하게 된다. 상대의 움직임, 상대의 목소리, 상대의 살기, 살의, 분노가 온 몸의 각 곳 구석 구석에게 외쳐주는 것이다. 너는 살아 있다 라고. 황혼이 깃드는 시커무리한 산맥, 전 대륙에 걸쳐 가장 웅대하고 가장 음 침하며 가장 전설적이고 가장 악랄하고 가장 깊으며 가장 고약한 원시림의 바다, 세룩-엘라마이아 산맥을 눈 앞에 두고, 아니 그 산맥자락 한 구석 숲 에서 나는 오줌을 누고 있었다. 깊은 삼림이란 생물에게 안도감과 공포감을 동시에 주는 것은 확실한 모양 이다. 좀더 민첩해진 내 일행과 좀더 공포에 질린 미트라의 얼굴이 모든 것을 극 명하게 드러내주고 있었다. "아직 멀었어?" 내가 오줌을 누고 있는 이 기둥은- 일곱명의 인간이 두 팔을 벌리고 끌어 안아야 안을 수 있을 정도의 두께와 목이 부러져라 고개를 쳐들고 올려다 보아도 끝이 보이지 않는 나무라기엔 조금 지나친 감이 없잖아 있는- 쿠야 마라스토네라는 이름의 나무라고 한다. 물론 이 지독한 이름을 내가 지을 리도 없고 기억할 리도 없다. 이건 엘프들이 지은 이름이다. 이 엘프들의 엄청난 작명실력은 얼마나 엘프들이 쓸데없는 곳에 시간을 투자하고 있는 가를 드러내고 있다는 증거다. 쿠야마라스토네? 세상에, 그런 이름의 나무 가 있다면 우라질놈의 스토네 같은 이름의 나무도 족히 존재할만 한 것이 다. 모든 나무에는 각자 종족들이 부르는 명칭이란 게 있다. 당연한 것이지만 우리들이 붙이는 이름에는 세 자 이상이 넘어가는 것들은 거의 없다. 때로 우리들은 드워프들이 쓰는 나무 이름을 쓸때도 있고 인간들이 쓰는 이름을 쓸 때도 있다. 그러나....엘프의 이름만은 사양하겠다. 오줌을 누고 있는 나를 거북하게 바라보던 튜나가 괜히 그 자리를 빙빙 돌면서 중얼거렸다. "대체....쿠베린, 당신은 어떤 머리통을 가지고 있길래 여자들이 이렇게 많 은데 ....을 하고 있는 거야? 부끄러움이란 걸 모르는 거야?" 그녀들은 내가 오줌을 누는 것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미트라는 외면한 채로 다른 곳을 보고 있고 그 옆에는 휴런이 왠지 모르 게 느끼한 감각을 느끼게 하면서 달라 붙어 있다. 물론 이에르네들의 매서 운 살기를 막아주기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너무나 적극적이어서 어딘가 느 끼한 구석이 있는 휴런의 태도에 미트라도 조금 미심쩍은 얼굴을 하고 있 었다. 아이들은 별 상관 않고 내 뒤를 따라 여기 저기 오줌을 누고 있었는 데 그게 무슨 재미난 장난이라도 되는 지 킬킬거리면서 사방에 오줌줄기를 내뿜어 대고 있었다. 물론 다크나 듀나시들은 침묵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수인족의 꼬맹이는 긴장한 듯이 등줄기를 약간 내린 채 사방을 돌아보고 있다. 세룩-엘라마이야, 암흑의 대륙답게 황혼이 내린 숲은 이미 새까맣게 변해 있었다. 숲의 여신들이 킬킬거리면서 작은 존재들을 압박하는 산맥, 세룩- 엘라마이아에는 이런 저런 명칭이 많이 붙어 있다. 가장 많은 나무들을 가진 이 거인의 산맥은 과거 거인들이 잠들었다는 전 설이 있다. 거인을 없앤 묘인족, 사인족, 조인족의 공격이 극심할 무렵 거 인들은 그 싸움에 지쳐 북으로 도망쳐왔다. 그리고는 죽어 시체의 산을 이 루었다. 그들이 넘어진 곳에 나무가 자라고 그들의 피와 내장으로 계곡과 냇물이 흐르고 그들의 뼈와 근육으로 산맥이 이루어진 이 음침한 어둠의 산맥너머에는 거인과 반쯤은 동조했던 엘프들의 왕국이 존재한다. 노스엘 스턴의 엘프들은 가장 고귀한 엘프들이라 불리우며 엘프들의 귀족 행세를 하고 있는데 그 것을 가능하게 하고 있는 것이 이 세룩-엘라마이야산맥의 장벽인 것이다. 이 산맥 아래로 보통 지내는 엘프들은 그들처럼 잘난 척을 하고 있지 않 다. 엘프는 그저 엘프다운 태도로 살아가고 있건만 이상하게도 이 노스엘 스턴의 엘프들은 자신들이 엘프들의 조상이며 그들의 왕족인양 행세하고 있다. 내 보기엔 그저 구석탱이에 처박힌 세상물정 모르는 얼뜨기에 불과 한 것을. 하긴 더한 존재가 여기 이 너머에 존재하고 있기는 하다. 얼뜨기들, 자신들만이 고귀하다고 믿고 있는 물정 모르는 얼뜨기들은 엘프 만이 아니다. 엘프의 피를 이어받은 하프 엘프들이 세운 왕국 고왕국이 있 다. 얼마나 오래되었으면 고왕국이라 불릴까나 싶은 이 놈의 왕국은 인간 들의 왕국인 주제에 본인들이 인간이란 것을 잊고 있는 태고의 왕국이다. 이 왕국을 다스리는 것은 전설이지 법도 아니오, 왕도 아니다. 허기야 세룩-엘라마이야 산맥 때문에 이 놈의 고왕국이 공격받은 적이 없 었으니 이 놈들이 방자하다 못해 주제를 모르는 것도 무리는 아닐게다. "쿠베린, 마튜스는 이 앞이야, 여기서 야숙할 거야?" 튜나가 약간 초조하게 발길질을 하면서 물었다. "아니, 전진할 거야." 나는 짧게 말하면서 손을 털었다. "대체 왜.." 뭔가 항의하려다가 입을 다문 튜나를 대신해서 엘레가 말했다. "묘인족의 냄새를 맡고 덤벼들 숲의 짐승들은 없겠지." "에?" 엘레는 쓴 웃음 지으면서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숲 안은 조용했다. 어둠이 내린 숲은 이제 검은 숲으로 화해서 바람 한 점 없이 조용하다. 그 너머에 어떤 것들이 있는 지 알 수는 없지만 일단 내가 여기 저기 오줌을 누었으니 간덩이가 부어 앞으로 튀어 나온 놈이 아니고선 우리들에게 덤빌 놈은 없다. 뭐, 인간이라면 다르겠지만. 마튜스는 내가 알기로는 하프엘프들의 도시였다. 정확히 말하면 숲의 도시 라고 불리우는 요새, 세룩-엘라마이야의 유일한 요새다. 이 마튜스가 무너 지면 곧장 고왕국으로 통하는 길이 뚫린다. 원래 산세가 험하다 못해 끔찍 한 이 산맥을 넘어 고왕국으로 가는 유일한 길목은, 마튜스를 통해서만이 가능하다고 한다. 물론 마법사가 소환수를 이용해 하늘을 날아가는 방법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 방법을 쓸만한 마법사는 사실 엄청나게 드문 것이 다. 물론 궁수로서 눈매가 매운 엘프들이 와글거리는 이 산맥을 그 따위로 넘어가려는 멍청이도 드물겠지만. "속도를 내야겠습니다." 듀나시가 짧게 말했다. 여전히 녀석은 말 수가 적다. 나는 대답대신에 미트라의 허리를 안았다. 피로해서 얼굴이 파리해진 미트 라는 내 목에 팔을 감고 고개를 수그렸다. 이미 그녀도 움직임에 익숙해져 있는 것이다. 물론 덜렁덜렁 흔들려서 가니까 피곤하긴 엄청 피곤하겠지만.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튜나는 흥분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그녀, 하프 엘프로서는 마튜스에 다가가고 있다는 것 자체가 흥분에 겨운 일일 것이 다. 하프 엘프지만 엘프는 엘프니까. 엘레는 여전히 무감각하게 숲 위를 낮게 날고 있었다. 가장 힘겨운 것은 역시 그 수인족 녀석, 그렇지만 녀석도 온갖 표정을 다 지어 가면서도 곧장 달리고 있었다. 속도가 떨어지고 심장이 터져 나올 듯 숨가빠 하는 것을 알지만 우리들 중 누구도 녀석을 돌아보거나 하지는 않 았다. 알 바 아니니까. "아빠! 마튜스란 어떤 곳이야?" "재미있는 곳이야?" "또 싸우는 건가?" "또 죽이는 거야?" 애들이 한 마디씩 던져온다. 나는 웃음을 머금으면서 짧게 대꾸해 주었다. "그래." 재미있기도 할 테고 싸우기도 할 테고 죽이기도 할 테니까. 밤의 여신이 짜내린 검은 장막은 숲의 여신들이 장난스레 뻗어낸 어둠과 어우러져서 엄청나게 어두운 숲속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것이 산인지 바단지 계곡인지도 헷갈릴 정도로 깊고도 깊은 수해(樹 海)는 침묵과 함께 태고의 기운을 엄청나게 뿜어대고 있었다. 공기는 무겁 고 침침하며 모든 것을 거부하듯이 적막했다. 우리들이 그 무거운 공기를 가르며 내달리는 동안 당장이라도 거대한 거인 의 손이 다가와 우리들 앞을 막아설 것 같았다. 그러나 거인을 죽인 것은 우리다. 거인을 죽여 이 땅위에 눕혀 산맥을 이 루게 한 것은 다름 아닌 우리들의 조상, 그 조상이 남긴 피를 헛되게 암흑 산맥의 위명따위에 흐트러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인 게다. 나는 왠지 웃고 싶은 마음과 엄숙한 마음이 동시에 일어나 헷갈렸다. "묘한 일이야." 갑자기 아헬을 안고 달리던 사인족의 왕이 중얼거렸다. "지금 이 자리에는 3개 부족이 모두 있다. 묘인족, 사인족, 그리고 조인족 까지...." 그 녀석의 목소리는 묘한 감회에 사로잡혀 있었다. 아무런 생각이 없는 사인족 누렁이가 이런 고급스런 생각까지 하게 되다 니, 많이 컸군. 사인족이 감상에 빠질 정도로 고상하지 않다는 것은 모든 자들이 다 알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순간 재수 없는 생각이 떠올라 버렸다. 녀석들, 룬드바르의 군대가 이 곳까지 쳐들어온 것이 단순히 고왕국을 치 기 위해서 일까? 그리고 이 곳에 마법사들이 모여든 까닭도 단지 고왕국을 치는 헐렁한 자 신들의 주군을 위해서 그 보잘 것 없는 목숨을 바치겠노라고 나선 것일까? 그건 좀 미심쩍은 일이다. 용을 부활시키겠다는 놈들이 설마하니 거인족을 부활시키지 못할까? 그걸 생각하니 기가 막혀서 말이 안나온다. 설마하니 이 산맥을 통째로 들 어올려 거인족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겠지, 아니 진짜로 전설대로 이 산 맥에 널부러져 있는 것이 거인들은 아니겠지? 그리고 진짜 거인의 뼈로 이 산맥이 이루어졌다고 해도 대체 어떻게 먼 까마득한 과거에 죽어버린 거인 족을 부활시킬 수 있단 말인가. 그건 말이 안되지. 안되고 말고, 아니, 말이 안되야 정상이지. 나는 무의식중에 아헬을 흘긋 돌아보았다. 아헬은 아무 생각없이 사인족의 왕의 목에 찰싹 붙어 있었다. 저 계집애라 면 소환수를 불러서 날아갈 수도 있을 텐데 그러지 않고 있는 것은 우리들 을 자극하지 않겠다는 의미겠지. 젠장할.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니. "마튜스.....가 포위되어 있는 것 같군요." 엘레의 목소리가 허공에서 들려왔다. 엘레는 날고 있는 채로 날개를 작게 펼치고 공중에 멈추어 서서 전방을 바 라보고 있었다. 튜나가 날카롭게 외쳤다. "전쟁 중이에요! 마튜스는 공격받고 있어요!" 알고 있어, 그래서 온 거잖아? 녀석들은 허공에 있고 우리들은 지상에 있었지만 그 전화(戰火)는 곧 알아 볼 수 있었다. 새빨간 불꽃이 어둠을 꿰뚫고 있었다. 도저히 걷힐 것 같지 않은 암적색의 불꽃,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치열 한 그 불꽃은 마치 살아있는 듯이 마튜스의 성벽을 후려갈기고 있었다. 덕 분에 주변의 모든 상황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마튜스의 장벽은 마법력으로 보호를 받고 있는 고대의 옥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때문에 어떤 군대도 감히 마튜스의 장벽을 부술 수는 없었다. 마튜스가 함락되지 않는 한 고왕국역시 무사한 것이다. 그런데 그 장벽이 시뻘겋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달아오르고 달아오른 그 시뻘건 장벽덕분에 사방은 한 밤중인데도 엄청나게 밝았다. 그 주변만 대낮같아 보였다. "저건 마법이야!" 튜나가 날카롭게 외쳤다. 그래, 마법이 아니면 뭐겠냐? 결국 저 짓거리를 하고 있는 게 공격하는 인 간들이란 이야기지. 나는 재빨리 발톱을 세워 나무 위로 올라가 정황을 살펴보았다. 엘레는 조 금 더 높이 날아 상황을 알아보려는 듯 했지만 튜나가 재빨리 말렸다. "이쪽을 들키면 곤란해요! 나무 위로 올라가요!" "농담이 아니군....." 낮게 사인족의 왕이 중얼거렸다. 마튜스의 성벽을 둘러싼 군대의 높이 세운 창날이 그 암적색의 불꽃에 어 우러져 빛을 발하고 있었다. 마치 고슴도치가 털을 잔뜩 세우고 도사린 듯 이, 멀리서 보면 마치 창날의 벽이 촘촘히 세워져 그 어떤 틈도 들어갈 수 없을 듯이 보였다. 그만큼 숫자가 많다는 이야기겠지. 앞에 선 창병들이 그 정도 숫자라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거야? 최소한 수만명이란 이야기 였 다. 이 깊은 삼림까지 수 만명을 이끌고 오다니 정말 룬드바르 자식은 지 독한 놈이야. 막사라 할 것들은 그 두꺼운 나무들을 베어버린 공터에 세워져 있었다. 그 단단한 나무들은 수백년, 수천년을 그 자리에 있어왔던 것들인데 이 놈 의 쌈박질 때문에 가차없이 베어져 버려져 있다. 그리고 녀석들은 그것을 마튜스 공격에 사용할 방책으로 사용할 모양인지 가지런히 한 구석에 늘어 놓고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작은 나무들을 모아 방책을 만들어 세워 자신 들의 막사를 보호하고 있었다. 호화로운 그 놈의 불꽃 덕분으로 놈들의 막사는 구석 구석 다 보였다. 불타오르는 성벽에서는 비명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 열기로 인해서 얼 마만큼의 피해가 나올런지는 마튜스 안쪽에 있는 인간들만이 알고 있을 게 다. 튜나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서 입을 반쯤 벌린 채로 그 쪽을 바라보고 있 었다. "아나올의 마법입니다." 낮게 아헬이 속삭였다. 튜나가 돌아보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진지하게 말했다. "그들이 확실합니다. 저것은 아나올의 마법, 마스터를 배반한 자들 중 하 나입니다. 그의 특기인 작열의 마법입니다. 풍계과 화염계를 섞은 것으로 강력한 화력을 일으킵니다. 절대로 그냥은 꺼지지 않습니다." "그럼...그 자식들이 저기에 있단 말이지? 그 년도?" 날카롭게 케이링이 외쳤다. 아헬은 나를 흘긋 본다. 사인족의 왕은 주먹을 쥐면서 낮게 이를 드러냈다. "그렇다면 저 곳에 멍청하기 짝이 없는 내 종족과 그들을 속인 놈들이 한 데 얽혀있다는 이야기도 되는 거 아냐?" 아헬은 그를 슬픈 듯이 바라보았다. "그럴 겁니다. 왕이여." "대체 킬트놈을 배반한 마법사놈들이 몇이나 되는 거지?" 나는 흥분해서 살기를 내뿜는 녀석들을 내버려두고 다시 물었다. "내가 알기론 그 분홍주둥이 놈과 그 미친 계집애가 중심인 줄 알았는 데." "분홍주둥이요?" 멍하니 아헬이 나를 바라보았다. "잘난 척하는 분홍 주둥이. 얼굴이 하얀 녀석." ".....마베릭님 말씀이시군요..." 아헬은 조금 아연한 듯 말했다. 그녀는 조금 웃었다. "마베릭님과 카산드라님, 그 두 분이..가장 강한 것도 사실입니다만그 외 에도 있습니다. 마베릭님과 카산드라님이 만들어진 것은 저보다 30년 먼저 로, 그 이외에도 킬트님은 인간의 마법사들 몇을 거느리고 계셨습니다." "대체 그 자식은 얼마나 많은 제자들을 거느리고 있는 거야!" "암흑마도의 주인이자 왕이신 마스터께서는 총 이 백 칠십 이명의 마법사 를 거느리고 계십니다." 아헬은 살짝 웃었다. 272명? 이거 적은 숫자가 아니잖아? 게다가 킬트의 제자라면 시원찮은 놈 은 다 죽였을 게고. 내가 아연해 하자 아헬은 진지하게 말했다. "그 중에 사십 이명이 마베릭님과 카산드라님을 따라 마스터를 배반했습 니다. 물론 다른 자들은 전부 암흑마도에 그대로 있습니다만...." 옆에 있던 튜나가 낮게 외쳤다. "사십 이 명? 사십 이 명이나 된다는 거야? 저 끔찍스런 흑마법사가 사십 이명이나 되는 거야?" "마스터께서는 흑마법만이 아니라 백마법까지도 달통하신 분입니다. 그 사십 이 명중에는 백마법사, 홍색마법사, 공간마법사를 비롯해서 다양한 마 법사들이 있습니다." 아헬이 짧게 말하자 튜나는 한 숨을 내 쉬었다. "그렇다면.....저 놈들이 이 대륙을 뒤집어 엎는 것도 놀라운 일은아니란 이야기군." "그렇습니다. 그 중 마베릭님과 카산드라님이....." "저 놈들이 노스엘스턴에 집착하는 이유는 뭐지?" 갑자기 내가 묻자 아헬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 뒤를 이어서 놀란 듯이 튜나가 바라보자 아헬은 쓴 웃음을 지어 보였다. "설마하니 저 자식들...킬트의 아들을 노리는 거야?" 이거 장난이 아니잖아? 저 놈들은 완전히 어린애의 시기심으로 움직이는 건가? 아버지가 누구 하 나 편애한다고 앙앙거리며 매달리는 어린애의 시기심? 어처구니가 없어서 입을 벌리고 있는 동안 튜나가 낮게외쳤다. "어떻게든 해야 하잖아! 저 놈들을 막아! 저대로라면 아무리 마튜스의 철 벽이라고 해도 무너져 내릴 거얏!" 그건 그렇군. 그 말이 끝나자마자 아헬이 두 손을 치켜 들었다. "일단, 후미를 공격하겠습니다. 마법이란 정신이 흐트러지면 일단 흐트러지 니까 뒤에서 제가 공격하면 아나올은 당황할 겁니다." 좋아, 좋아, 그럼 한 번 해볼까? 이번에는 전처럼 싱겁지는 않을 게야! KUBERIN....... 증오와 증오가 만나고 의지와 의지가 부딪치고 야만과 야만이 힘을 겨룬다 죽음이 명예롭다고 하는 자는 누군가 선혈이 아름답다고 하는 자는 누군가 2 아헬이 손을 내뻗는 순간 터져나온 거대한 폭염에는 솔직히 말해서 나도 좀 놀랐다. 녀석이 아크를 상대로 감히 덤비려는 간 큰 자세를 보일 때부터 저 계집애 에 대해서는 나도 조금은 인정해 주고 있었지만 쥐톨만한 데다가 누렁이에 게 달라 붙어 있어서 조금 무시했던 점도 없잖아 있었다. 그런데, 으아, 말 그대로 이거 장난이 아니다! "화이어 그래쉬 메테오!" 그녀의 노란 눈이 황금빛을 발하는 그 순간 터져나온 광휘는 그대로 어두 운 밤 하늘을 가르면서 그대로 곧장 인간의 군대의 한 가운데를 직격했다. 말 그대로 직격이었다. 귀를 찢는 폭음은 그 자리에 있던 녀석들의 고막을 다 터뜨렸을 것이다. 공기가 찢어지고 화염은 충천하며 그 흙과 돌멩이의 파편이 사방으로 날았 다. 강렬한 그 폭염과 동시에 일어난 거대한 화염의 폭풍은 군대의 반 이 상을 쓸어버리듯이 휘감고 돌았다. 비명소리따위는 들리지도 않고 완전히 묻혀 버렸다. 그 화염의 폭풍은 멀찍히 선 우리들에게까지 그 여파가 미쳐 서 우리들이 서 있던 나무까지 덮쳐왔지만 어느 새인지 우리들 주변에 펼 쳐진 실드로 인해서 우리들이 선 나무만은 무사했다. 그렇지만 바로 옆에 서 귀청을 찢을 듯한 굉음을 내면서 한데 쓸려나가는 엄청난 화염풍은 그 거대한 거목들을 수수깡 부러뜨리듯이 단숨에 쓸어버리면서 사방을 훑어버 렸다. "케엑...우리가 할 것도 남겨야 하잖아!" 휴런이 귀를 붙잡으면서 외쳤다. 예민한 귀를 가진 튜나는 귀청을 틀어 막으면서 눈물을 찔끔거렸다. 미트 라는 내 목에 매달린 채 비명을 낮게 지르고 있었지만 울지는 않았다. "대, 대단하네..." 전에 당했던 마법사 보다도 한 단계 위임이 분명하다. 킬트의 직제자인 이 놈의 계집애는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실력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나는 조금은 반성하기로 마음먹었다. 저 인간의 군대는 말 그대로 엉망진창이었다. 화염이 휩쓸고 간 그 일대 는 완전히 쑥대밭으로, 잘난 척 버티고 있었던 그 수만의 병사들은 다 어 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는다. 시커먼 숯덩이가 이리 저리 구르고 비명과 신음이 사방을 덮었다. 너무 끔찍해서 나는 잠시 동안 욕설을 퍼부었다. 이 거대한 나무들이, 수 천년의 세월을 견뎌온 그 거목들이 말 한 두어 마 디로 맥없이 사라져버렸다. 대체 이 놈의 마법이라는 것이 얼마나 많은 손해를 대지의 여신에게 건넬 것인가. 그러나 몇몇 군데, 분명히 마법사가 있을 법한 몇몇 군데는 말짱한 모습 을 이루고 있었다. 틀림없이 마법사들이 실드를 쳤을 게다. 그렇다면 시커 먼 숯덩이와 불구덩이 가운데 멀쩡한 모습을 한 그 곳이 우리가 바로 노리 는 곳이었다. 나는 미트라를 나무 위에 놓은 채 낮게 명령했다. "간다." 달려가는 동안 온 몸을 덮는 열풍이 가장 큰 방해였다. 이미 공포와 고통 으로 몸부림치는 숯덩이들은 내버려두고 멀쩡한 놈들을 향해 돌진한다. 그 놈들을 죽여서 끝장을 보는 것이 우리들이 하려는 일이다. 바닥을 통해 열 기가 치밀어 올라 숨이 턱턱 막혀온다. 대지가 이글거린다. 뜨거운 공기가 콧구멍을 통해서 불만을 토해낸다. 손톱을 꺼내들고 돌진하는 동안 발바닥에 와 닿는 그 뜨거운 열기는 대지 가 토해내는 신음과 같았다. 용서하시라, 대지의 여신이여. 눈을 부릅뜨고 나를 바라보는 한 녀석의 목줄기를 그대로 그었다. 퍼억 하 고 녀석의 핏줄기가 뜨거운 대지 위에 흩어진다. 그 뒤를 이어 비명을 올 리며 칼을 뽑아드는 녀석의 가슴을 후려갈기고 도약한다. 눈을 크게 뜨고 나를 향해 뭐라 입을 벌리는 녀석의 팔뚝을 가르며 착지했다. 그 다음 뛰 어 넘어 가려는 녀석을 발톱으로 가슴을 부수고 디뎠다. 나를 향해 칼을 휘둘러 오는 녀석의 머리통을 밟고 고함을 지르면서 나를 가리키는 녀석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흰 옷을 입은 녀석들 몇은 이 상황에도 흰 빛을 유지하고 있었다. 기사의 문장과 기사의 방패를 든 그 놈들, 마법사의 실드 아래 무사한 그 녀석들 을 향해 웃자 녀석들의 얼굴이 공포로 일그러진다. "막아!" "괴물이다!" "저건 뭐냐!" 녀석들이 떠들어 대며 들어올린 방패를 가차없이 우그러뜨리면서 다시 한 번 도약한다. 그리고 두 손을 허공에 들어 나를 향해 마법을 걸려고 하는 양 보이는 흰 로브자락의 마법사를 향해 사정없이 손톱을 휘갈겼다. "으아아악!" 핏줄기가 새빨갛게 흰 로브를 물들인다. 로브자락 아래 앙상한 흰 피부의 마법사가 비명을 올리면서 널부러진다. 그 옆에 있던 기사녀석이 나를 향 해 메이스를 휘둘렀다. 어리석은 놈, 그 놈의 이마를 부수고 다른 목표를 찾았다. 그리고 나를 향 해 돌진해 오는 홍색의 로브 녀석을 발견한 순간 나는 아연해졌다. "윈드 블레이드!" 파아아아앗 하는 알수 없는 파공성이 나를 덮쳐온다. 귀청이 울렸다. 위험! 위험! 내 주변에 있던 기사 녀석들, 병사들이 순식간에 보이지 않는 예리한 칼 날로 베어진 듯이 갈갈기 찢겨서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나는 두 팔로 얼굴을 가린 채 도약했다. 있는 힘껏, 내가 할 수 있는 그 한껏 도약했지만 다리께가 찢어지는 것은 막지 못했다. 뼈가 드러날 정도로 갈가리 살점들이 찢겨져 나간다. 그러나 나와 달리 그 자리에 남아 있던 인간들은 말 그대로 뼈를 허옇게 드러내며 살점을 찢기웠다. "으아아악!" "아악!" 비명과 함께 핏줄기가 분수처럼 솟아 올랐다. 나는 착지하면서다시 도약 해 홍색의 마법사에게 돌진했다. 여기서 이 놈을 죽이지 못한다면 나는 쿠 베린이 아니다. "죽어랏! 괴물!" 다시 녀석이 뭔가를 쏟아낸다. 물론 허공에서 방향을 바꾸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지만 나는 바꾸었다. 팔뚝에서 일으킨 강침을 쏘아내는 것과 동시에 옆으로 몸을 틀어 녀석의 정면에서 비껴나갔다. 덕분에 녀석이 쏘아낸 알수 없는 붉은 것을 간신히 피해낼 수 있었다. 이노무 자식! 갈가리 찢어주마! "헛!" 녀석이 숨을 삼키는 그 순간 단숨에 강침을 쏘아내자 강침은 사정없이 녀 석의 면상으로 돌진했다. 하지만 팅팅 소리와 함께 강침을 튕겨져 내려왔 다. 실드다! "허억..허억.." 홍색의 마법사는 헐떡이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다. 이 따위 자식을 없애지 못한다면 나는 이름 바 꾼다니까! 제기랄! 하지만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실드를 깰 방법은 없다. 뭐 그럼 좋겠지, 다 른 놈을 없애주지, 이 놈은 조금 기다리고 있으면 실드를 풀지 않을 수 없 을 테니까. 나는 녀석을 내버려두고 주변을 살폈다. 헥헥거리는 녀석의 숨소리를 무시하고 다시 내달렸다. 아이고 뜨거라. 아헬의 마법의 여파로 대지는 아직도 이글거렸다. 그 이글 거리는 공기속을 달리면서 나는 원망하는 숲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이래서 마법이 싫다니까! "죽여!" "막아라!" "으아아아아악!" 비명소리가 가차없이 터져나온다. 대체 어디 있지? 그놈의 하인리히 룬드바르와 그 놈의 주변에 둘둘 감싸고 있는 그 마법사놈들은 다 어딨어? 아까 그 엄청난 마법을 쓴 그 놈은 어딨 는 거야? 소리를 지르고 싶은 것을 참고 내달리며 걸리는 놈들을 죽인다. 난장판이 된 그 바닥 위로 갑자기 휘익 찬 바람이 일어났다. 응? 왠 찬바람? 그리고 그 순간에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앞이 안보일 정도의 장대 비는 맞으면 아플 정도로 굵어서 순식간에 대지의 열기를 식혔다. 이거 좋네, 덜 뜨겁잖아. 하고 기뻐하는 순간이었다. 흰 김이 사방으로 퍼져 올라 눈 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제기랄. 앞이 안 보여! 안개처럼 사방이 온통 하얀 김으로 가득 찼다. 비명을 올리는 녀석들도 비 명을 올리게 하는 녀석들도 앞이 안보이긴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는 되도 록 이 인위적인 안개 속을 헤치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여기 저기 치칙 소 리를 내면서 흰 김을 내뿜어 대는 덕에 예민한 귀가 간지러웠다. 불 다음엔 비. 이건 확실히 정상적인 비는 아니다. 이것은 물의 정령을 불러낸 마법이었다. 이걸 누가 펼친 것일까 하고 돌아보는 순간 나는 갑자기 등줄기가 서늘해 짐을 느꼈다. 뭐야? 고개를 들자 허공에 거대한 존재가 하나 버티고 있었다. 거대한 덩치의 그 것은 새파란 물빛을 한 바다뱀처럼 보였다. 번들거리는 거대한 비늘이 어둠 속에서 더더욱 끔찍하게 드러난다. 날개도 없는데 그 것은 허공 위에서 날고 있었고 정확히 말한다면 날고 있다기 보다는 허공 에 박혀있는 듯이 보였다. 성채 하나를 통째로 띄워 놓은 듯한 그 거대한 덩치, 그리고 거대한 아가리는 독사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눈알은 언뜻 보 기에도 여덟 개쯤 되는 것 같다. 비늘이 번들거리는 걸 보면 뱀과 비슷한 종류인 것 같기는 한데 꼬리는 여러 갈래로 갈라져 그 끄트머리에 칼날처 럼 예리한 은빛의 갈기가 달려 있다. 저 걸 보면 아무리 봐도 뱀이라고 부 르기엔 어폐가 있어 보인다. 저게 대체 뭘까 하고 멍하니 생각하는 순간 그 것의 머리통 위에 선 콩알 만한 녀석이 보였다. 마법사의 로브도 걸치지 않은 평범한 튜닉차림의 계집애, 아헬이었다. 비는 아헬이 불러낸 것인 모양이다. 내가 멍하니 바라보는 동안 나 이외의 다른 놈들도 싸움을 멈추고 모두 멍 하니 바라보고 있다. 허긴 저런 괴물같은 것을 본 적이 없다는 게 당연한 일이다. 견문이 넓고 경험이 바다같이 깊은 나도 첨 보니 다른 놈들이 놀 라는 것도 당연하지. "저게 대체 뭘까.." "저건 뭐냐!" 여기 저기서 놀람의 고함소리가 터져나올 즈음에서 겨우 흰 김이 가라앉았 다. 쏟아 붓는 그 장대비의 힘으로 겨우 시야가 트이자 이번에는 시커먼 숯덩이가 된 놈들과 아직 그나마 그런대로 싸울만한 놈들이 얽혀서 떠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모여라!" "적의 습격에 대비하라!" 대비하고 자실 것도 없을 게다. 나는 다시 움직였다. 나의 일족들도 다시 움직였다. "으아아악!" "아악!" "대체 뭐냐!" "괴물이다!" 비명 소리가 터져나오는 가운데 나는 고개를 들어 아헬의 모습을 관찰했 다. 아헬은 그 괴이쩍은 거대 뱀의 머리통 위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 작은 몸뚱이에 어울리지 않는 심각한 태도를 주시하고 있자니 곧이어 그녀에게 대항하려는 듯 어떤 놈이 천천히 등장했다. 검은 로브를 걸친 그 자는 두 손을 로브자락에 감춘 상태로 천천히 공중 으로 뜨고 있었다. 희미한 푸른 빛이 놈의 몸 안에 일렁여서 마치 유령처 럼 보인다. 그 놈의 주변으로 달려가는 일족들이 보인다. 그래, 바로 저거 야! 우리가 죽일만한 놈들은 바로 저거지! 나도 내 달리면서 주변을 훑어보았다. 또 없나? 마법사 같은 것들이 없나? 그러나 그 생각을 더 하기도 전에 크아아악 하는 소리와 함께 달려드는 누렁이를 발견했다. 녀석들은 모두 셋, 나를 보자 안그래도 흉악한 노란 눈빛을 번뜩이면서 이를 드러냈다. 이미 변신모드로 들어간 것으로 보아 이 놈들은 진짜 사인 족이었다. 사인족 셋 이라, 나쁘지 않아! 오오옷! 재미있다. 내가 흥분해서 눈을 번뜩이는 순간 한 녀석이 나의 정면으로 돌진해 온다. 그리고 뒤이어 한 놈은 내 등뒤로 돌아와 옆구리를 할퀴어 온다. 사인족 놈들은 동시다발적인 공격도 수치로 여기지 않는 놈들인 것을 잘 알고 있는 지라 나도 가차 없이 변신했다. 검은 털이 전신을 덮는 그 동안 정면으로 달려드는 녀석을 먼저 처리하기로 마음을 먹고 내달렸다. 손톱이 이중으로 튀어 나와 녀석의 면상을 갈겼지만 녀석은 처억 하고 막아낸다. 그렇지, 그래야 사인족답지, 수인족 처럼 팩팩 죽어버리면 무슨 재미가 있 겠나! 푸아하하핫! 웃음이 터져나오는 것을 억누르면서 내 옆구리를 찔러오는 녀석을 팔꿈치 로 내리찍었다. 녀석의 팔뚝이 부러져 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우득 우득 하 고 명쾌한 소리를 내는 그 놈을 가차없이 무릎으로 찍어 내동댕이치면서 다시 내 등 뒤를 후려갈기는 녀석을 향해 오른 손을 뻗었다. 어라! 눈앞에 별이 보이는 군! 등줄기를 강타당하긴 했지만 역시 흥겹기 짝이 없구만! 그 놈의 면상을 갈겨주려 했지만 아슬아슬하게 손톱은 녀석의 가슴을 할퀴었을 뿐이었다. 그 사이에 한 놈이 악을 지르면서 송곳니를 들어 나의 어깨를 깨물었다. 아까 무릎으로 찍어내린 녀석이 피를 토하면서 내 어깨를 물어 뜯었다. 핏 줄기와 함께 살점이 허공으로 날았다. 죽어라! 그 놈의 가슴 한가운데를 주먹으로 꿰뚫으면서 세 개의 심장을 들이 뽑았 다. 핏줄기가 얼굴에 튀어 오른다. 비명소리가 귀청을 찢는다. 뒤이어 달려 들어온 녀석의 머리통을 그 심장조각으로 후려갈기는 순간 한 놈이 내 옆 구리를 발톱으로 찢어온다. 이 놈이! 이 건방진 놈이! 녀석의 머리통을 팔꿈치로 찍어 후려갈기면서 이미 시체가 된 녀석의 목줄 기를 틀어 잡아 방패삼아 휘둘렀다. 피와 살점이 사방으로 날았다. 달려드 는 놈들은 이를 드러내며 내 주변을 맴돌았다. 속도는 속도, 살의는 살의. 근사하다. 이 빗속에 벌어지는 이 쌈박질은 피가 들끓게 만든다. "멈춰!" 갑작스레 쩌렁한 고함소리가 터져나왔다. 허억 하고 사인족 놈들이 흠칫했다. "우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그리고 허공을 찢는 듯한 비통한 울음소리가 터져나왔다. KUBERIN....... 증오와 증오가 만나고 의지와 의지가 부딪치고 야만과 야만이 힘을 겨룬다 죽음이 명예롭다고 하는 자는 누군가 선혈이 아름답다고 하는 자는 누군가 3 비에 젖은 녀석은 전신으로 울분을 뿜어내고 있었다. 피에 젖어 늘어졌던 사인족 두 녀석은 그를 보자 움직임을 멈추고 망설였 다. 그리고 잠시후 녀석들의 몸 안에서 변신이 풀려나갔다. 그 놈들은 길게 기른 갈색의 머리칼을 알몸 위로 늘어뜨리고 빗속에 서서 자신들의 왕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놈들이 그에게 복종할 지 안할 지 알 수 없지만 어쨌거나 나는 싸움이 중지되어 좀 서운했다. "......어디 있는가?" 낮게 사인족의 왕이 으르렁거렸다. 그의 전신에서 뿜어나오는 위엄이 나도 흠칫거릴 만큼 대단했다. 살의와 함께 일어나는 그 기운은 명백한 분노, 이가 갈리는 고통 속을 걸어나온 자답게 사인족의 왕, 그 이름도 유치찬란한 푸른 갈기의 헬레아스는 그들 을 노려보고 있었다. 하나 밖에 없는 푸른 눈은 변신도 하지 않았는데 이 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데킬에논은 어디 있어?" 와르르르르... 사방을 울리는 굉음이 들려와 나는 고개를 들어서 허공을 바라보았다. 공중에는 두 명의 마법사들이 대치해 있었다. 그 알 수 없는 거대한 뱀에 올라타 있는 아헬과 그녀를 마주 보고 있는 녀 석, 녀석은 눈을 부릅뜨고 빌어먹게도 창백한 얼굴을 빼꼼히 로브자락 사 이로 드러내고 있었다. 얼추 보아 나이는 오십대 정도 되어 보였지만 그 얼굴에 수염은 한 포기도 없다. 주름살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오십대...즈음 이라고 보여지는 것은 후, 역시 나의 눈썰미 덕분인가. 그놈도 뭔가를 중얼거리는 것인지 손바닥을 펴들어 허공을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에 녀석이 바라는 것이 튀어 나왔다. 거대한 소환수, 블랙키메라였다. 일그러진 공간에서 튀어나온 거대한 키메라는 세 개의 머리통을 흉악스레 휘감으면서 자신을 소환한 마법사를 자신의 어깨 위에 올려놓았다. 그런 모습을 아헬은 묵묵히 그 거대뱀대가리 위에 서서 바라보고 있었다. 나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그 뭔가가 튀어 나오기 전에 아헬이 녀 석을 한방 먹여버리면 말 그대로 가볍게 끝날 것을 뭐하러 그 시간을 들여 서 기다리고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이거 진심으로 싸울 마음이 있기는 한 거냐? 역시 뭔가 아헬도 바라는 게 있는 걸까? 그건 그렇고, 내 앞에 있는 사인족놈들은 서로를 노려보느라 말도 하지 않 고 있었다. 어쩐지 기분이 꿀꿀해진다. 빌어먹게도 비는 죽죽 내리지, 발바닥은 질척하 지, 싸움은 어쩐지 이상스레 싱겁지, 게다가 뭔 사연들은 그렇게 많아 시원 스런 싸움질이 안되는 것일까? "......아나올, 여기서 뭘 하는 거지?" "아헬님이야 말로, 설마 여기서 뵐줄은..." 녀석의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겁에 질린 것 같은 느낌도 든다. "마스터의 명령으로 너희들을 회수하러 온 거다." "그건..." "그 소환수를 불러냈다는 것은 감히 나에게 대적하겠다는 것인가?" 노란 눈의 아헬은 눈빛을 번뜩였다. 그만큼 어딘가 위협적이다. 내 보기엔 작은 고양이가 털을 곤두세운 듯한 모양새지만 녀석에게는 두려 움인지 뭔가 움추러든다. "저 혼자만이 아닙니다. 아헬님." "이 자리에 마베릭님이나 카산드라님이 없다면 날 상대할 자는 없다." 아헬은 짧게 말했다. "이 자리에 있는 것은 누구지? 아나올?" 그 순간 아나올이란 녀석의 손에서 번개가 튀어 나와 아헬을 직격했다. "와앗!" 놀라서 보고 있던 튜나가 소리를 질렀다. 그녀 이외에도 다른 자들도 이 놀라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는지라 아헬의 위기라고 생각했는지 일제히 그 쪽으로 달려가려 했다. 그러나 아헬은 손하나 까딱하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아나올이란 녀 석이 내뿜은 번개는 그녀의 털오라기 하나도 -아니, 아헬은 미끈한 몸뚱이 를 하고 있으니 털은 별로 없고- 머리털 한 올도 건드리지 못했다. 그저 그녀는 작은 얼굴에 음침한 미소를 띄우고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음침한 미소는 아나올이란 녀석이 걸친 음침하기 짝이 없는 로브를 능 가하고 왠만한 인간의 음침함을 때려잡을 정도로 상당한 것이었다. "우웃..." 그 음침한 미소를 대한 아나올이란 녀석이 뒤로 물러서면서 또 한번의 캐 스팅을 하려는 순간 입 다물고 있던 아헬을 대신해서 그녀를 둘러싸고 있 던 거대 뱀이 카아악 하고 입을 벌렸다. 쏴아 하는 귀청 따가운 소리와 함 께 무언가가 그 거대하기 짝이 없는 입안에서 튀어 나갔다. 아니 정확히 말해 튀쳐나갔다. 무수한 화살과도 같은 그 무엇이 튀어 나갔는데 나의 이 놀랍고도 총명한 두 눈으로 확인한 바에 따르면 그것은 팔뚝만한 뱀떼 였 다. 날개가 달렸으니 그걸 뱀이라 부르긴 약간 모순이 있겠지만 그 날개 달린 작은(?) 뱀들은 쏜살같이 아나올의 면상을 향해 날아갔다. 그 뱀들 하나 하 나가 입안을 벌리고 달려든다. 그리고 아무리 봐도 그건 정상적인 뱀들이 아니었다. 날개가 달린 그 뱀들은 엄청난 속도로 허공을 격해서 아나올에 게로 돌진하고 있었다. "화살인가..." "아냐, 바늘일지도...." 마치 화살 같았다. 멀리서 보는 모든 녀석들은 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듯했지만 생각해 보면 인간도 아닌 거대 뱀- 그것도 소환수가 화살을 입안 에 품고 있다가 내갈기다니 그건 아무래도 말이 안되는 이야기다. 어쨌든 보고 있는 자들이 뭐라 생각하든 간에 그 뱀들은 아나올의 몸뚱이 에 도달해 그를 물어 뜯고 갈기 갈기 찢으려는 듯이 달려들었지만 순간 키 메라의 거대한 몸뚱이에 가려진 아나올의 몸에 쉽게 접근하진 못했다. 키 메라는 이 귀찮기 짝이 없는 작은 것들을 향해 기력을 내뿜어 댔다. 지상 에 있는 자들이 일제히 보이지 않는 압력으로 분분히 피해 달아나는 동안 키메라의 울부짖음은 주변을 완전히 뒤흔들었다. "카오오오오오오......." 아나올은 실드를 펴고 그 뱀들을 막기 위해 나름대로 안간힘을 쓰고 있었 다. 뱀들은 사납게 노리고 있었으며 당연 인간들이 쏘아낸 화살과 달리 한 번 튕겨나가면 또 한번 시도한다는 생명체 특유의 집요함으로 아나올을 어떻 게 해서든지 꿰뚫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불쌍한 것은 키메라였다. 키메라는 처음에 이 작은 것들을 무시했었는지 아가리를 벌려 불덩이를 토한다든가 아니면 타액을 뿌려 이 것들을 막는다고 판단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이 작은 뱀들은 그런 것은 대수롭지 않게 피해내며 키메라의 몸뚱이를 마구 후벼파듯이 아가리를 움직여 댔다. 주저없이 키메라의 머리통에 아가리를 박는 뱀들은 살갗을 찢고 단단하기 그지 없는 비늘을 무시한 채 파고 들어 간다. 수 백 마리의 뱀들이 키메라 의 대가리에 달라 붙어 눈알을 깨물어 터뜨리고는 집요하게 살갗을 파고들 었다. 불길을 내뿜는 거대한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키메라는 고통으로 울 부짖었다. 피 냄새에 흥분한 뱀떼들은 더욱 집요하게 달라 붙어 그 거대한 덩치는 달라붙는 뱀 떼로 뒤덮혀 마치 고슴도치처럼 화하고 있었다. 피에 물들어 가는 키메라의 울부짖음은 주변을 시끄럽게 만들었다. "제기랄!" 아나올의 당황함과 달리 아헬이 속삭였다. "가장 온후한 자의 이름으로, 있던 자는 있던 곳으로, 귀환하라." 그녀의 손이 빛을 뿜는 순간 키메라가 있던 공간이 일순 일그러졌다. 아나올의 길죽한 얼굴이 혈색을 잃는 그 순간 일그러진 공간으로 고통으로 울부짖는 키메라가 뛰어들었다. 뱀떼는 공격목표를 잃고 우왕좌왕했다. "안돼!" "바보 같으니! 키메라 따위로 사이오크라이마를 상대하려 했더냐!" 흠, 저 거대한 뱀대가리가 사이오크라이마...라는 괴이쩍은 이름이었군, 첨 보는 소환수다. 아헬은 제법 준열하게 꾸짖고는 도망간 키메라를 내버려 두고 홀로 덩그마 니 외롭게 남은 아나올을 바라보았다. "아나올! 지금이라도 무릎을 꿇고 빌면 살아남을 수는 있을 게다! 대체 마 베릭님과 카산드라님은 어디 있는 거냐!" "그런..." 아나올이란 녀석은 온통 뱀떼로 휩사여서 보이지도 않았다. 녀석도 실드로 몸을 감싸고는 있겠지만 실드라는 것도 사실 안전한 곳만은 아니다. 마법력이 떨어지면 당연히 실드는 제거된다. 그러하니 실드를 빽빽 하게 둘러싼 그 작은 뱀들은 실드의 힘이 조금이라도 떨어진다면 단번에 아나올의 몸뚱이를 꿰뚫고 말 것이었다. 거, 아가리 벌린 뱀 떼에 둘러싸인 기분은 기이하겠는걸. 내 말을 들은 듯이 갑자기 거대 뱀대가리-사이오크라이마가 입을 벌렸다. 그러자 그 뱀떼들은 일제히 엄마의 부름이라도 들은 듯이 대가리를 홱홱 돌려서 도로 사이오크라이마의 거대한 입안으로 달려들기 시작했다. 사악 사악 하고 녀석들이 공기를 찢고 입안으로 날려드는 광경은 장관이었다. 순식간에 뱀떼들이 사라지자 마자 아헬은 진중하게 말했다. "어디 있느냐?" 실드 안에 쭈그리고 앉은 아나올의 모습은 가관이었다. 로브를 둘러쓴 채 로 실드안에 말 그대로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마..말할 수 없습니다!" "그럼 사인족들은 다 어디있지?" "사, 사인족들은 카산드라님이 데리고 가셨습니다." "사인족 모두를? 아니면 가짜로 만든 사인족들을?" "......진짜의 사인족들은 카산드라님이 모두 데려가셨습니다. 몇몇만 빼놓고 는..." 머리를 웅켜쥐고 있는 아나올이 순순히 대답하자 아헬은 슬픈 듯이 이쪽을 내려다 보았다. 헬레아스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몰골은 비에 흠뻑 젖어서 엉망진창이었지만 내가 본 중에 그래도 그 나마 나아 보였다. 여지껏 술에 취해 흐느적거리던 그 몸은 분노와 긴장으 로 팽팽해져서 예전 녀석을 처음 보았을 때처럼 활기에 차 있었다. 그의 앞에 선 사인족 녀석들은 흐르는 피도 지혈하지 않은 채 멍하니 허공 을 바라보고 있었다. "카산드라님은 사인족을 데리고 대체 뭘 하시려는 거지? 그들에게 진짜 아 이를 줄 수도 없으면서...." "아이를 창조하려고 하시는 겁니다. ......마도의 주인님께서 하신 것처럼...." 아나올은 움찔 움찔하며 대꾸했다. "사인족에게선 아이는 나오지 않아. 만들 수가 없단 말이다. 마스터도 하시 지 못했는데 그것을 마베릭님이나 카산드라님이 할 수는 없어, 대체 왜 마 스터에게 거역한 것이냐?" "........" 아나올은 말하지 않았다. "어리석구나, 마스터의 힘을 얕보다니, 마스터의 가장 어린 자식인 내가 가 진 힘이어느 정도인지도 모르면서 감히 마스터에게 반역의 길을 꾀하다 니...." 아헬은 마치 인간 음유시인이 말하듯 한탄조로 말하고 나서는 손을 뻗었 다. "아나올, 마스터의 명령을 전한다." "에에..." 바짝 웅크린 녀석은 말 그대로 실드도 거두고 바짝 엎드렸다. 비록 허공에 엎드린 것이긴 하지만 엎드린 것은 확실했다. "암흑마도의 규율을 어긴 것은 명백한 사실, 마스터의 명령을 어긴 것도 명백한 사실, 너를 참살한다." "그, 그것은! 아헬님! 저, 저는!" 아나올이란 녀석은 놀라서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마 항복하면 살려줄거라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 말은 다 이어지지 않았다. 아헬의 손아래서 튀어 나온 것은 백 열의 화염구였다. 그것은 일반의 화이어 볼과는 달리 희고 너무나 눈이 부셨다. 그리고 빨랐다. 아나올의 몸에 직격하는가 하는 순간 녀석의 몸은 말 그대로 산채로 불타 올랐다. 그 비명소리가 소름끼치게 사방을 뒤덮었다. "끼아아아아아아아아......." 순식간에 머리털이 타오르고 손가락이 타들어가고 물집이 터져나오고 살갗 이 일그러져 녹아들어가며 뼈가 일그러진다. 그리고 순식간에 녀석의 몸은 백열광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흔적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빠르게. 주변의 모든 자들이 그 광경을 보았다. 솔직히 말해 나처럼 자세히 볼 수야 없겠지만 그것을 본 자는 수천에 달했 다. 허공에서 벌어진 이 광경에 경악과 공포로 온 인간들이 다 얼어 붙어 있었다. 나로서도 아헬이 마법력이 강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 까지나 되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사인족의 헬레아스는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 보다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자신의 일족들을 바라보았다. "그 마법사와 데킬에논이 같이 있는 거냐!" ".....네.." 꿀꺽 침을 삼키면서 한 녀석이 대꾸했다. 이미 아헬의 마법에 사라져 버린 그 아나올이란 마법사 녀석의 몰골을 보 고 쇼크를 받았는지 멍청하기 짝이 없는 면상을 하고 있었다. "저 마법사의 이야길 들었겠지? 녀석들이 바라는 것은 우리들의 피지, 우 리들의 아이들이 아니란 말이다!" 헬레아스가 분노에 차 외치는 동안 사인족 두 놈은 망설이듯이 그를 바라 보고 있었다. "잘 들어라! 우리들은 멸망하고 있는 중이다! 그렇지만 그 멸망을 가속시 킨 것은 저 인간의 마법사란 말이다!" 그 외침에는 피가 섞여 있었다. "튜나!" 입을 벌리면서 다가온 푸른 색 머리칼을 가진 여전사가 덥석 튜나를 안았 다. 튜나는 그녀를 끌어안으면서 머리를 부볐고 그녀들은 진한 포옹을 나누고 있었다. 그 광경을 엘레가 희미한 미소를 띄우며 바라보고 있었고 내 일족 들은 심심하다는 얼굴로 아직도 핏덩이가 엉긴 손톱을 손질하고 있었다. 아헬은 여전히 헬레아스옆에 바짝 붙어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엉거 주춤 미심쩍은 눈초리를 한 사인족 두 놈이 달라 붙어 있었다. 마튜스의 성문이 열린 것은, 아나올이 타 죽고 병사들이 다 도망가고, 우 리 일족들이 살육에 조금 질릴 즈음으로 나는 그 도망간 녀석들 사이에 대 공인지 황제인지 룬드바르란 그 놈이 없다는 것 정도만 확인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이런 싱거운 싸움이라니. 이건 마치 아헬을 위한, 아헬에 의한, 아헬의 쌈 박질이 아닌가 하고 찝찝해질 무렵 눈이 휘둥그레질 미녀가 튀어 나와서 나는 기분이 조금 풀렸다. 튜나를 끌어안은 그녀는 단번에 고개를 돌려 아헬을 바라보았다. 아헬은 여전히 작은 계집애 모양을 하고는 공손히 헬레아스의 옆에 서있 었는데 그 모양으로 봐서는 아나올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태워 죽인 계 집애로는 보이지 않았다. "도와주셔서 감사하오만, 어디의 마법사시지요?" 물빛 머리의 이 여자는 틀림없이 물의 엘프의 하프엘프였다. 물의 엘프란 미녀로 유명하고도 유명한 지라 이 여자는 하프엘프임에도 불구하고 저 튜 나보다 훨씬 더 미녀였다. 허긴 하프엘프도 대부분 아름다운 편인데 튜나 의 경우 조금 그 은혜를 벗어나 있는 셈이다. "암흑마도의 마법사입니다. 저 위대하신 룬 킬트 더 마이오스님의 마지막 아이입니다." 아헬이 공손히 말하자 그녀의 눈은 왕방울만해졌다. "암흑마도의? 그, 그럼 저 마법사들은 전부 암흑마도에서 온 겁니까?" 약간 힐난조가 된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일 게다. 하지만 나는 그건 알 바가 아니다. "마튜스에는 지금 누가 와 있지?" 내가 대뜸 끼어들자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날 바라보았다. "당신은 누구요?" "마튜스에 와 있는 건 누구 누구지? 이곳에 조인족과 노스엘스턴의 엘프들 도 와 있다고 들었는데?" "그 무례한...말투는 ..." 발끈한 물의 하프엘프가 뭐라고 한 마디 할 즈음이었다. "오오오오오오오!" 누군가가 갑자기 두 팔을 벌리며 나를 향해 다가왔다. "친구!" 나를 향해 친구라고 말하는 녀석이 감히 없었는 지라 나는 눈을 부릅뜨고 상대를 바라보았다. 아니 내려다 보았다. 작달막한 체구에 거대한 도끼, 거대한 망치를 옆에 끼운 녀석은 작달막한 덕분에 더더욱 단단하고 굵고도 날렵하지 못한 몸매를 하고는 두텁기 그지 없는 손바닥을 내게 들어보이고 있었다. "오옷! 너!" 나도 모르게 녀석과 똑같은 어투로 대꾸하고 말았다. 녀석은 내 앞에 오더니 그 두터운 손바닥을 내밀어 내 손을 잡고는 흔들어 댔다. "여기서 만나다니 기쁘군! 과연 이곳의 위기를 듣고 도우러 와 주었군!" "내가 미쳤나! 도우러 오게! 그저 난 놀러왔을 뿐이야!" 으하하 웃는 그 드워프의 면상을 향해 나도 마주 침읕 튀겨가면서 과격하 게 손을 흔들자 드워프가 으하하하 하고 안그래도 큰 입을 벌려 웃으면서 대꾸했다. "어쨌거나 대마왕 쿠베린이 와 주어서 무지하게 기쁘군! 나는 엘프들 사이 에서 엄청나게 심심했거든!" "그렇겠지, 엘프란 나무 키우고 물 키우는 것 이외엔 도움이 안되는 존재 니까!" "그렇고 말고! 싸움이든 뭐든지 간에 그다지 도움이 안되는 엘프들 사이에 서 내가 얼마나 어려웠을지 상상해봐." 드워프의 왕은 진지하게 짧기 그지없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내 팔뚝을 잡고 말했다. "가는 거야!" "어딜?" "어디긴, 술 마시러!" "좋아." 내가 히죽 웃자 뒤에 섰던 일족들이 킬킬거리고 웃기 시작했다. 여자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그 드워프의 옆으로 다가와 서서 내려다 보느라 난리가 났다. 이 시끄러운 광경에 물의 하프엘프가 눈쌀을 찌푸리며 외쳤다. "드워프의 왕! 너무 심하십니다!" "심하긴 뭐가 심해!" "싸움 중에 무슨 음주입니까!" "싸움이니까 음주가 필요한 거야!" 드워프가 대꾸했다. 하프엘프가 나를 미심쩍은 듯이, 아니 조금은 두려운 듯 바라본다. "정말 묘인족의 왕이십니까? 그럼...이들이 모두 묘인족?" 그런 뻔한 말에 내가 대답해야 되냐? 아무리 예쁜 계집애라지만? 애들이 바글바글 떠들면서 피에 물든 몸뚱이로 이리저리 웃고 있는 것을 기가 질린 듯 바라보던 그녀는 내가 자신을 무시하자 발끈한 모양이었지만 대답대신 묵묵히 길죽한 손톱 사이에서 살점을 떼어 내고 있는 다크시온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드워프의 왕, 일단은 안으로 모시지요, 그리고 성주님과 다른 분들을...." "아냐, 아냐! 술이닷!"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성주님께서도 장로님들께서도 모두 기다리고 계시는데!" "이봐, 내가 그따위들에게 가서 인사를 해야 한단 말이야? 설마하니?" 내가 기가 막혀서 그 계집애를 향해 묻자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하지만 성주께서..." "놀고 있네! 성주가 나에게 배알하러 와야지 내가 놈을 보러가냐?" "기다려 주세요! 뭔가 화를 내시지 말고...저는 마튜스의 경비대장인 가이엘 다이다슈라고 합니다만...묘인족의 왕, 일단은 안에서 성주님을 만나시고..." "술이다, 술!" 드워프가 낄낄 웃으면서 외쳤다. "괜찮은 맥주집이 있다구! 함께 퍼마실 상대가 마땅치 않았는데 잘 되었지 뭐야! 가자, 쿠베린!" 그 소릴 들으니 출출하기 짝이 없다. 한바탕 움직인 녀석들도 모두 들떠서 먹는다는 데에 정신이 팔려서 눈이 반짝반짝하기 시작했다. "오오, 배가 고프다." "먹을 것을!" "배고파!" "가자!" 하프엘프는 당황한 나머지 손을 들어서 막으려 했다. "기, 기다려주세요! 여기 마법사도 그렇고 저 사인족들도 그렇고....묘인족의 왕, 기다려 주십시오!" "시끄러! 시끄러!" 내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드워프는 두터운 손을 들고 왕방울만한 눈을 부 릅뜨며 말했다. "엘프들은 점심식사 메뉴 정하는 데에도 반나절이 걸리잖아! 싸움은 순식 간! 결단은 빠른 게 좋아!" 맞는 이야기다. 아마 엘프의 전통같지도 않은 전통을 그대로 따른 마튜스의 성주녀석은 나 를 어찌 맞이할 것이냐부터 시작해서 뭘 먹일 것인가까지에 이르기까지 생 각하느라 최소 반나절 이상은 우리들을 굶길 것이다. 그러면 우리 애들은 먹을 만한 것들(?)을 찾아 굶주린 배를 이끌고 성안을 누비겠지. 그러면 성안에서 어떤 유혈사태가 벌어지더라도 그건 우리탓이 아닌 게다. 그럼, 그렇고 말고. 결단은 빠르게! KUBERIN....... 증오와 증오가 만나고 의지와 의지가 부딪치고 야만과 야만이 힘을 겨룬다 죽음이 명예롭다고 하는 자는 누군가 선혈이 아름답다고 하는 자는 누군가 4 생각보다 드워프들이 많았다. 드워프의 왕이 날 데려간 곳은 드워프들이 바글바글 모여있는 곳이 아니라 마튜스의 성내 한 가운데에 위치한 주점이었다. 이 주점은 그 빌어먹을 시 인의 노래터와 비슷한 낡아빠진 구조였지만 그 곳 보다는 더럽지 않았다. 테이블은 모두 해서 일곱 개 밖에는 안되지만 들어서는 순간 맥주의 냄새 가 코를 찔렀다. 점원인 듯한 녀석이 들어서는 우리들을 보고 입을 벌리자 드워프의 왕이 큰 소리로 외쳤다. "있는 대로 다 내와!" 우리들이 자리에 앉자 마자 음식물들이 마구 마구 실려나왔다. "어찌된 것인지 이야기 좀 듣자. 어쩌다가 여기 드워프들이 와 있었던 건 가?" "마튜스는 원래 드워프들이 만들어준 성이야. 이 정도 단단한 성을 엘프들 이 만들 수 있으리라 생각하나?" "아니." 당연한 이야기다. 엘프들이 이런 성채를 지을 수 있을 리가 없지. 그 가녀린 손에 짐을 어찌 들 것이며 돌이 아파할까봐 돌을 어떻게 찧었겠 는가. 엘프들이 성채를 쌓는다면 틀림없이 돌이여 스스로 쌓아지소서 따위를 지 껄이면서 돌덩이 주변을 빙빙 수 백년 돌았을 지도 모른다. 주둥이만 산 놈들 같으니라고. 내 대답에 드워프의 왕은 고개를 끄덕끄덕 하면서 짧디 짧은 손가락으로 맥주잔을 높이 들어 휘둘러 댔다. 거품이 휘휘 일어 바닥으로 굴러 떨어진 다. "얼마나 되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왕년 드워프의 왕이 엘프의 왕에게 부탁 받아 지은 것이라 들었어. 정확히 말하면 고왕국의 인간들이 엘프에게 부 탁하고 그리하여 드워프에게 청탁이 왔던 것 같아. 일단 재료는 엘프들이 건네주어서 이 성채가 만들어진 것이야." "헤에..그러고 보니...이 곳의 성채는 그냥 돌덩이는 아닌 것 같던데." "물론이지, 그냥 화강암따위로 수 천 년을 버틸 수는 없으니까. 여기의 돌 들은 그 옛날 드워프들이 다듬은 돌에 엘프의 마법사들이 보존의 마법을 건 것이야. 그 마법력은 엘프들이 인간들과 사이가 좋은 동안 내내 지속되 었었지." "그럼 지금은 사이가 좋지 않냐?" 하프엘프들이 들끓는 이 성채는 확실히 고왕국의 인간들과 엘프들이 사이 가 좋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 아닌가? 드워프는 맥주 거품이 묻은 턱수염을 탈탈 털었다. "예전 같지는 않지." "그건 그렇고 하프엘프는 엘프보다는 덜 예쁘지만 매력은 있어." 갑자기 툭 하고 휴런이 끼어 들어 웃음을 짓는다. 드워프의 왕은 나와 휴 런을 번갈아보더니 물었다. "누구야?" "내 막내동생." "히야, 묘인족의 왕에게도 동생이 다 있군, 무척 닮았는걸." 그는 신기하다는 듯이 휴런을 보고 그 다음에는 내 아이들을 사랑스럽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아이들은 이미 먹을 것에 달려들어서 아귀아귀 먹고 있 었는데 그 모습을 본다면 차마 인사치레로라도 이쁘다든가 사랑스럽다든가 기타등등을 말할 수는 없었다. "아이들은 많이 컸군." "아아." "그건 그렇고 소문은 들었어. 마법사들을 다 때려죽이고 인간의 왕국을 공 격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응." "덕분에 대마왕 쿠베린이라며?" "그렇다더군." "그렇지만 그렇게 무차별로 죽이는 것은 어리석지 않은가?" "뭐가? 우리로선 인간이 얼마나 죽든 말든 그리고 우리가 인간에게 어떤 존재가 되든 상관이 없는걸." 드워프는 머리를 긁적였다. "허긴 묘인족 입장에서야 기르던 가축들이 눈을 흘긴다고 해서 뭐 의식할 필요는 없겠지만 자네는 인간들과 꽤 친하지 않았나?" "나도 룬드바르와 관련 없는 인간들을 죽이진 않아. 일단 재미도 없다구." 맥주를 들이키자 싸아한 맛이 오랜만에 목줄기를 훑어내려간다. 아아, 오랜만이구만. 이 맛. "하지만 인간들은 쓸데없는 소문에 열중한단 말이야, 곧이어 아마 자네가 수천만의 죄없는 아녀자들을 죽이고 아이들을 노예로 끌고 갔다는 둥의 소 문이 퍼져나갈걸." "여자들을 죽이는 건 내 취미가 아닌데다가..." 나는 시큰둥하게 말했다. "싸움도 못하는 존재를 죽이는 것은 재미가 없어." 드워프의 왕은 어깨를 들썩해보였다. 작은 덩치의 그가 그런 자세를 취하니까 어쩐지 조금 우습다. 하지만 그는 드워프답게 나에게 잔소리를 멈추었다. 드워프들은 잔소리를 하지 않는다. 그건 그거고 저건 저것, 간단하고 명료하고 그리고 진솔한 것이 드워프의 미덕이다. 물론 쓸데없는 고집불통은 분명히 단점이지만 흐리멍텅하고 안 절부절 못하고 매사를 질질 끌며 엉덩이 무거운 엘프에 비하면 그것은 분 명한 미덕. "그렇지만 저 아가씨는 인간으로 보이는 걸." 미트라는 무척 지쳐 있었다. 그녀는 탁자에 몸을 기대고 나를 바라보고 있 었는데 아무에게도 자신이 지쳤다는 것을 말할 수 없는 처지인지라 입을 다물고 파리한 얼굴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휴런은 다른 녀석들이랑 먹느 라 정신이 없고 그나마 돌봐주던 아헬은 헬레아스에게 답삭 붙어서 뭐라 속삭이고 튜나는 아까 만난 그 하프엘프와 손잡고 가버린 상태라 그녀 는 혼자였다. 당연한 일이지만 수인족 꼬맹이는 완전 녹초로 들어오자 마자 먹는 건 둘째치고 문앞에 쓰러지듯이 널부러져 자고 있었다. 아, 이건 내 잘못이군. 나는 손을 뻗어서 미트라의 허리를 안아 내 옆에 앉게 했다. 아앗, 그 순간 날아오는 무수한 살기의 화살들! 미트라는 힘든 얼굴을 억지로 펴고 드워프의 왕을 바라보았다. "드워프시네요." 드워프에게 드워프라고 말하는 것은 어쩐지 묘한 말이지만 사실 드워프에 게 엘프라고 하는 것보다는 정상적인 발언이다. 그렇기에 드워프의 왕 킬 라이 어쩌고 저쩌고는 히죽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응, 드워프다." "사실 드워프는 처음 봤어요." "그래? 어때? 감상이?" "....짧군요." 미트라는 지나치게 솔직하게 대꾸했다. 그러나 화를 내는 대신 킬라이는 크게 웃었다. "푸하하하하핫! 간결하군!" "하지만 좋은 분 같아요. 다정하고." 미트라가 웃자 킬라이는 맥주잔을 들어서 흔들어댔다. "오오옷, 마음에 들어! 인간의 아가씨 치곤 꽤 호탕하군!" 그 쩌렁한 웃음이 터지는 동안 미트라는 나를 흘깃 보며 물었다. "......좀 잘 수 없어요?" "자, 여기서." "에?" "내 품안에서 자라구." "하지만....." 미트라는 얼굴을 살짝 붉혔다. "네 몸하나는 받쳐줄 수 있으니까 내 품안에서 자라구. 다른 녀석들이 손 댈 수 없도록 내 품안에서 자는 게 좋아. 내 난로로." 미트라는 얼굴을 화락 붉히고 나를 쏘아 보았지만 싫다는 말은 하지 않았 다. 손을 뻗어서 그 어깨를 감싸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그 모습을 보던 킬라이는 입을 벌리고 먹던 맥주를 화락 쏟아 내면서 나와 미트라를 멍하니바라본다. 아깝게 왜 흘려? ".....쿠베린." "왜?" "그런 말을 눈 하나 깜짝 않고 잘도 하는 군." "다 경험이지." 내가 대꾸하자 드워프는 고개를 절레 절레 내저었다. "그건 그렇고...말 좀 해보지. 마튜스에는 누가 있는 건가? 설마하니 비루먹 은 망아지 같은 하프엘프 몇과 도끼 휘두르는 드워프만 있는 것은 아니겠 지?" "아니야, 여기는 머리 빈 인간들도 수 백 명 있고 그 인간들을 돕겠다고 온 피 끓는 수인족들도 수 백 명 있으며 의리상 하는 수 없다고 하는 고귀 한 저 노스엘스턴의 엘프들도 몇 있고 거기에 조인족 전사들도 여왕의 명 을 받들어 몇 와 있지." "헤에. 조인족 전사라고? 누군데?" "안면이 있는 자도 있고 첨 보는 자들도 있을걸." "여왕도 있나?" 내가 미소를 띄우며 묻자 드워프의 왕은 혀를 찼다. "여왕은 노스엘스턴에 가 있어." "거긴 왜?" "거기서 저기 있는 꼬맹이 마법사의 마스터를 만나고 있는 가봐." "엑? 그럼 킬트가 노스엘스턴에 있단 말야?" 내 외침에 눈을 반쯤 감고 있던 미트라가 흠칫 했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보듬어 안으면서 발끝으로 드워프를 재촉했다. "킬트 자식이 진짜로 노스엘스턴에 있어? 그런데 여기서 자기를 배신한 제 자들이 날뛰는 걸 내비두고 있단 말이야?" "뭘 하는 지는 모르지만 거기 처박혀서 뭔가를 하고 있대, 그러니까 별수 없지. 게다가 킬트 마이오스의 이름은 불행히도 고왕국 인간들과는 무척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이어서...." 그건 그렇다. 어찌되었든 마튜스는 고왕국의 영토였다. 고왕국이라 부르는 것을 보면 인간들의 역사로 보아 얼마나 오래되었는가 를 짐작할 수 있게한다. 그들의 혈통에 엘프들이 몇이나 섞여 있는지 잘은 알 수 없어도 고왕국의 인간들은 일반 인간들보다도 훨씬 수명도 길고 생 긴 것도 얍삽하다. 그런 그들이 흑마법사에게 관대할 리가 없는 것이다. 원래 킬트는 북쪽 태 생이라고 들었다. 물론 북쪽이라고 해도 인간의 마을이나 나라따위를 내가 일일이 기억할 수는 없다. 어찌되었든 북쪽 태생인 것이다. 북쪽은 대륙남 쪽 보다 훨씬 흑마법사에게 냉혹하다. 어쩌면 거의 신경질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특히 고왕국 쪽, 세룩-엘라마이야 대륙 일대에서는 흑마법사는 거 의 인간 취급을 하지 않는다고 들었다. 즉 범죄자 취급인 것이다. 아직 어렸던, 연약했을 것이 분명한 킬트에게 잘난 척하는 엘프들과 고왕 국의 인간들이 뭔 짓을 했을지는 안봐도 분명하고 성질머리 더러운 킬트가 입다물고 네네 할 리 없으니 뭔 짓을 해서 보복을 했을 지는 안 봐도 훤한 사실이다. "....." 미트라가 자고 있다. "야, 잠자리좀 안내해. 푹신한 침대에서 잔 지 오래되어서 말이야." "아, 이 위층에 침실이 있을거야." 나는 계단을 올려다 보았다. 방이 있긴 있을 법하다. 미트라를 안아 올리자 시선이 좌악 화살이 되어 등 뒤로 박힌다. 돌아보지 말자. 돌아보면 정말 무서운 것을 볼 것 같구나.... 살기가 충천한 여자들 사이로 갑자기 낯선 냄새가 밀려들어왔다. "흑마법사는 용납할 수 없다." "사인족을 받아들이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 뒤돌아 보니 주점안에 갑주를 입은 일곱명의 기사 비스끄무리한 녀석들이 서 있었다. 녀석들은 살기를 피워 올리면서 사인족의 왕 헬레아스와 아헬 의 앞에 서 있었다. 기사 비스끄무리한 것들이라 함은 녀석들이 어울리지도 않게 호리호리 했 기 때문이다. 저 에메스의 기생오라비가 아무리 호리호리했어도 최소한의 근육이라는 게 있었고 심지어 견습으로 앵앵대는 기생오라비의 막내 동생 놈조차도 칼을 휘두를 기본 근육이라는 게 있었지만 이 앞에 선 이 놈들은 아무리 보아도....가느다란 여자애가 갑주를 입고 선 몰골인 것이다. 다리에 아무리 보호장구를 끼워도 그 가느다란 허벅지와 가느다란 종아리 를 모두 감추진 못했으며 넙적한 가슴장식으로 몸을 가려도 이 놈이 삼두 박근 이두박근따위를 가지지 못한 것은 확실한 것 같다. 칼은 비죽하니 뾰 족해서 레이피어 같긴 한데 레이피어치고도 저렇게 얇은 놈은 처음 봤다. 나는 미트라를 어깨에 둘러 멘 채로 그들을 구경했다. 여자들은 오호 호오 하면서 재미있어 하고 있고 드워프들은 맥주를 쥐고 호기심 왕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헬은 그 초라할 정도의 창백한 얼굴 에 무표정한 그 모습 그대로 헬레아스의 옆에 서 있고 노랑 털 헬레아스는 자신의 일족 두 명을 옆에 세운 채 무심히 갈비를 뜯고 있었다. "이 더러운 사인족 놈!" "여기 성지에 발을 디딜 수는 없다!" 두 놈이 악을 질렀다. 새된 소리를 악악 거리고 있는 동안 갑자기 툭 튀어나온 에이리가 그들을 보면서 물었다. "저거 뭐야?" "아아, 쿼터 엘프나 아니면 인간일걸." 대답한 것은 휴런이었다. 휴런은 흥미진진한 표정을 한 애들과 달리 무관 심한 상태로 순대를 손톱으로 잘라 먹을 것인가 아니면 통째로 먹을 것인 가에 대한 고민 중인 듯했다. 그 옆에 있던 듀나시가 짧게 설명했다. "고왕국의 인간기사인 모양이다." "엄청나게 비리비리하네, 먹으면 비린내가 날지도 몰라." 드워프에게서 맥주를 얻어 마시면서 라비니아가 중얼거리자 쿡쿡 목 안으 로 웃으면서 케논이 중얼거렸다. "의외로 감칠맛 있을 지도...엘프는 원래 맛있잖아?" 그 말에 아이들이 까르르 웃었다. 기사같은 녀석들은 그 말에 충격을 받은 양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뭐, 뭐야?" 아무래도 그들은 아이들이 인간의 아이들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라비 니아의 천사같은 얼굴과 어울리지 않는 발언에 충격받았을 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나는 미트라나 눕히고 와야지. 돌아와 보니 아직도 그 상태다. 뭐야 뭐야, 사인족녀석들 성질에 확 뒤집어 엎을 줄 알았더니만 내버려 두 고 있었나? 성질들 많이 죽었구만 그래. 내 일족들은 역시나 먹는데 혈안 이 되어 있고 애들은 싸움은 안나나 하고 기대에 찬 눈으로 바라보며 있고 드워프는 시큰둥한 표정이다. 잘 놈은 자고 먹을 놈은 먹고 무시하는 놈은 무시하고 시비하는 놈은 시비 하는, 그런 뻔한 상황이어서 나는 맥이 탁 풀렸다. "우리 말이 들리지 않는가!" 기사 놈이 또 외쳤다. 가슴에 흰 물푸레가지와 엉겅퀴 장식을 한 문장을 새겨놓은 기사같은 놈은 시뻘개진 얼굴로 레이피어를 탁 뽑아들었다. 그리고는 그것을 사인족에게 돌려세웠다. 그러자 가만히 있던 킬라이가 큰 소리로 외쳤다. "이 무슨 무례한 짓들이냐!" 드워프는 목청이 크다. 그 덕에 자던 놈들도 모두 깼다. 쩌렁 쩌렁 울리는 그 목청과 함께 드워프의 왕은 맥주잔을 탁 하니 탁자 위에 내려놓고- 그동안 이 놈의 고주망태 드워프는 무려 17잔을 들이킨 뒤 였다- 새로운 잔에 손을 뻗히면서 외쳤다. "도와주러 온 자들에게 무슨 짓들이야? 너희들은 수치도 모르냐!" "사인족이 우리들을 도와주리라고 어떻게 믿습니까? 드워프!" "그렇습니다! 사인족이 놈들의 편이라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입니다!" "벌써 수백명이 그들의 손에 학살되었고 그들은 이미 룬드바르의 꼭두각시 란 말이오!" 한 마디 하면 수 마디를 하는 구만. 한 주먹거리도 안되는 것들이 꼭 말이 많아. 하기야 힘이 되었다면 벌써 칼들고 덤벼들었겠지만 이렇게 악악 학학 대는 것은 누군가가 도와주길 바 란다는 의미거나 혹은 사인족 여러분 너무 무서우니 떠나 주세요 라는 의 미겠지. "이곳 마튜스에 사인족들을 들일 수는 없소!" "맞다!" "이들을 어서...!" 시끄럽기 그지 없구만 이거. "놀고 있네." 갑자기 어디선가 말이 터져나왔다. "여기서 그들이 너희들을 죽이려고 하면 니들 막을 수 있냐?" 그렇게 말한 것은 내가 아니고 구석에서 자고 있던 수인족 꼬마였다. KUBERIN....... 증오와 증오가 만나고 의지와 의지가 부딪치고 야만과 야만이 힘을 겨룬다 죽음이 명예롭다고 하는 자는 누군가 선혈이 아름답다고 하는 자는 누군가 5 "뭐, 뭐야?" 회색늑대의 일족인 괴이한 취향과 엄청나게 대담한 연애관을 가진 그 놈은 비시시 일어서더니 피로로 지친 몰골로 탁자에 몸을 기대고 의자에 앉았 다. 은빛에 가까운 머리털이 싸늘하게 빛이 났다. "너, 대체 뭐냐! 너도 사인족인가!" "눈알이 삐었군. 사인족과 수인족도 구별하지 못하는 주제에." 녀석은 그렇게 말하고는 마른 입술을 혀로 적셨다. 맥주잔이 앞에 놓이자 녀석은 그것을 꿀꺽 꿀꺽 마시면서 자신을 재미있다 고 보는 자들의 시선과 죽일 듯이 노려보는 자들의 시선과 무심한 자들의 시선을 뒤로 제꼈다. "이 자식! 수인족이라면 왜 사인족을 비호하느냐!" "수인족이면서 우리들을 그렇게 대하다니!" "사인족에게 당한 동족을 잊었냐!" 정말 시끄러운 놈들이다. 기가 질릴 무렵 수인족 꼬마는 따악 한 마디를 던졌다. "싸우는 자는 말이 없다." 녀석은 짧게 말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푸하하하하핫...." 너무 웃겨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나는 너무 우스워서 계단에서 하마터면 구를 뻔했고 우리들 일족들은 먹던 걸 멈추고 모두다 웃음을 터뜨렸다. 그 뿐이 아니라 완전히 무시하고 있던 사인족들도 일제히 웃고 말았으며 그 자리에 있던 드워프들도 다 웃느라 뒤로 넘어갔다. 안그래도 목청이 큰 일족 셋이 악을 질러대며 웃으니 주점이 다 흔들릴 정 도다. 나는 녀석들이 멍청하니 나를 바라보는 사이에 계단을 내려와 킬라이의 맞은 편에 앉았다. 킬라이는 웃음을 멈추지 못하고 킬킬대다가 겨우 겨우 나에게 말했다. "상대하지 마." "대체 누구야? 저 얼뜨기들은?" "마튜스의 경비기사단의 기사들이야." "칼을 제대로 휘두를 수 있어?" "휘두르기는 해." "저거 칼 맞아? 바늘 아냐?" ".....저래뵈도 드워프들이 만든 제대로 된 레이피어야." "보통 칼은 휘두를 수 없기때문이겠지...." 내가 혀를 차자 킬라이는 킬킬거리고 웃음을 멈추려고 애를 쓰다 말고 기 사들을 돌아보았다. "기사들, 이 중에 너희들 보다 약한 자는 아무도 없으니 그만 물러가라." "드워프!" "말도 안되는!" "저 놈들이 우리보다 강하다고 해서 우리들이 물러날 수는 없는 것이오!" "그건 기사의 수치지!" 꼭 한 마디를 하면 세 마디 네마디를 하는 구만. 저놈의 주둥이를 콱 문질 러 줄까보다. 갑자기 케논이 발딱 일어섰다. "나랑 놀까?" 그 말에 갑자기 케논의 옷자락을 라비니아가 잡아 당기면서 외쳤다. "기다려! 나와 놀자고 해!" "잠깐, 내가 먼저다!" "아냐, 아냐! 나야 나!" 갑자기 애들이 바글거리기 시작했다. 기사들이 아연한 표정을 짓고 있을 무렵 애들이 갑자기 배를 문지르면서 탁자위로 처억 하니 올라섰다. 배가 불렀나 보군. "자아, 이 묘인족의 한 분이신 케논님께 한 번 도전해 봐라, 인간." 손가락을 구부리고 자신을 가리킨 케논의 모습에 기사같은 녀석들은 아연 해 입을 자악 벌렸다. "푸하하하하핫!" 킬라이가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사인족들도 수인족도 여자들도 애들도 웃느라 정신이 없다. 주점에서 음식을 나르던 말없던 나이든 점원까지도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서 처억 하니 에이리가 끼어들었다. "기다려, 케논. 이 에이리님이 건재하신데 어딜 먼저 나서냐?" 에이리도 탁자 위에 처억 하니 올라섰다. 가슴을 내밀고 선 폼이 케논이나 에이리나 별 다를 바 없지만 이상하게 이 두 놈이 제일 경쟁의식이 강한 것 같다. 무슨 일이 생기면 제일 먼저 나서는 놈은 이 두 놈, 그리고 말없이 앉아 두 눈을 반짝이고 있는 놈이 야히르, 두 놈이 싸우고 나면 그 사이에 천연덕스레 이득을 얻는 놈이 드 레인이다. 계집애들이야 그렇다 치지만 이거 어째 성격들이 장난이 아니다 싶은 생각이 들어 웃음이 나온다. "에이리, 너 바보냐?" 케논이 눈쌀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뭐가?" 발작하려는 듯이 화라락 하는 에이리를 향해 케논은 비웃듯 말했다. "이 비릿한 인간들 일곱을 상대로 우리 둘이 다 나서면 대체 뭘 갖고 놀 겠다는 거야?" "어리석긴, 네가 셋, 내가 넷 하면 될 거 아냐? 잠시 간의 장난감인데 얼 마나 오래 놀겠다고 그러는 거야?" "뭐라고? 왜 네가 넷이고 내가 셋이냐? 난 일곱도 모자라! 전에 내가 해 치운 병사들을봤지? 난 최소 수십이상이 아니면 상대하지 않아!" "넌 나보다 일곱이 적었다고! 일곱이 적었으면 순순히 내게 형님이라 불 러야 하는 거 아냐?" 놀고 있네! 저 번 그 뭐시기 성 앞에서 싸울 때는 내가 너 보다 수십은 더 죽였다구!" 둘이서 그렇게 떠들어 댈 때였다. "흐, 적당히들 해둬라." 제법 음산하게 앉아서 구경하고 있던 드레인이 입을 열었다. "이 형님이 가만히 있는데 어지간히 떠드는군." 그 말에 두 놈이 동시에 빽하고 소리 질러댔다. "누가 형이냣!" "어라? 분명히 이 몸께서는 너희들 보다 한달은 앞서 태어나신 거 같던 데? 니들이야 앞서거니 뒤서거니 낳았지만 나는 너희들 보다 한달은 빠르 단 말이다. 내가 첫째야, 그건 부정할 수 없지?" 허억 하고 두 놈이 입을 벌리는 순간 드레인은 턱을 괴고는 태연히 히죽 케이링을 향해 웃어보였다. "엄마, 내가 첫째 맞지?" "맞고 말고. 넌 장남이야." 카랑 카랑하게 케이링이 오호호호홋 하고 웃음을 터뜨리자 분한 기색이 역 력한 이에르네는 그녀를 쏘아보았다. "흥, 일찍 태어난 게 대순가, 결국은 약하면 그뿐이잖아!" "오오호호호호.....어쨌든 형님이라 불러야 한단 말이야." 케이링도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이에르네를 바라본다. 이거 어째 애 싸움이 어른 싸움이 될 조짐이 보이는 걸. 어쨌든 애들이 나서고 여자들이 한 두마디 던지는 동안 기사들은 모두 얼 이 빠진 듯한 얼굴이 되어 입을 벌리고만 있었다. 덕분에 조용해졌다. 그리고 때마침 문이 덜컥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섰다. 정확히 말하면 그 누군가는 엘레와 튜나와 그 성질 급한 물의 엘프 경비대 장이라는 계집애였다. 그녀들은 들어서자 마자 멍청히 서 있는 기사들을 흘긋 보고는 다시 내쪽을 바라보았다. "배를 채웠으면 가자." "어딜 가?" "성주에게 인사를 하러." 튜나의 말에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허 하고 허탈히 웃어주었다. "미쳤냐? 내가 이 좁쌀만한 마튜스의 성주에게 인사를 하러 간다니?" 그 말에 또 발끈한 기사들이 악 소리를 내며 나를 돌아보았다. "용서할 수 없다!" "이 무례한!" 소리를 지르는 기사들을 누르고 재빨리 엘프계집애가 나섰다. "조용히!" 그녀는 진지한 얼굴로 나를 보면서 조용히 말했다. "어찌되었든 성주님의 거처로 가셔서 쉬시지 않겠습니까? 이런 곳에서 계 시는 것 보다는 나을 겁니다만...." "이런 곳이라니?" 킬라이가 기분나쁜 표정으로 되뇌었지만 엘프는 진지한 얼굴로 그와 나를 번갈아 보면서 말했다. "성주께서도 긴히 말씀하실 것도 있고 어차피 이런 저런 상의도 해야하지 않을까요?" "뭘 상의해? 난 곧 마튜스를 나가서 노스엘스턴으로 갈건데." 내가 짧게 말하자 그녀는 얼굴을 조금 찌푸렸다. "그럼 마튜스를 도와주시러 온 게 아니란 말입니까?" "고왕국의 인간들에겐 볼일이 없어. 내가 그들에게 무슨 볼일이 있다고 여 기서 긴 시간을 머물러야만 하지?" 그 말에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나를 아연한 듯이 바라보았다. 옆에 있던 튜나가 조금 초조한 듯이 물었다. "그, 그럼 지금 떠나려는 거야?" "배만 채우고 곧 떠나. 어차피 이 자리에 룬드바르의 황제놈도 없고 마법 사 놈들도 없어.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볼일은 없지." 그 말에 공감한 듯이 사인족의 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더 이상 볼일은 없다." 튜나의 시선이 엘레를 향했다. 어쩔 것이냐는 연인의 시선에 엘레는 짧게 대답했다. "노스 엘스턴에 여왕이 계시니까 그 곳에 갔다 와서..." "하지만 지금 급한 쪽은 이곳이야! 노스 엘스턴은....!" 튜나가 급히 말할 때에 그 말을 막듯이 사인족의 왕이 말했다. "자신의 종족이 가장 중요한 법이다." 그 말에 순간적으로 그 자리에 있던 자들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허어, 너 무나 뻔해서 길게 말하고 싶지도 않은 그 말에 놀라는 녀석들이 더 놀랍 다. "하지만....다른 종족이라고 해서 도와주지 않는다는 것은 편협한 이야기 지." 튜나는 짧게 말하면서 사인족의 왕을 노려보았다. "당신 역시 묘인족이나 조인족의 도움을 안받았다고 말할 참인가? 게다가 당신은 에메스공작의 도움도 받았잖아!" "그래서?" 사인족의 왕은 트릿하게 물었다. 술에 안취한 상태면 제법 또렷하네. "그래서라니? 당신은 보답이라는 것을 모르는 거야?" "너는 내 보답을 바랄 자격이 없다." 그 말에 튜나의 몸이 바르르 떨렸다. "뭐라구!" 얼굴이 벌개서 화를 내려는 순간 사인족의 왕은 천천히 일어서서 자신의 일족들을 바라보았다. "배를 채웠으면 떠난다." 사인족 두 명만을 거느린 초라한 상태의 사인족의 왕은 아무도 돌아보지 않은 채로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 옆에 바짝 달라붙은 아헬은 멍한 눈으 로 그의 뒤를 따랐다. 튜나가 악을 질러도 녀석은 돌아보지 않았다. 허긴 돌아볼 이유도 없었다. 사인족의 일은 사인족이 처리할 수 밖에는 없는 것이다. 붙잡을 이유 같은 것은 아무에게도 없다. 녀석의 어깨는 인간들 사이에 있을 때보다도, 맨 처음 나와 겨룰 때보다 도 더 넓어 보였다. KUBERIN....... 증오와 증오가 만나고 의지와 의지가 부딪치고 야만과 야만이 힘을 겨룬다 죽음이 명예롭다고 하는 자는 누군가 선혈이 아름답다고 하는 자는 누군가 6 "드시지요." "음음..." 잘 차려진 음식을 바라보면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일족을 남기고 가 주셔서 감사합니다." "뭐어..." 나는 흘긋 만면에 미소를 짓고 있는 휴런을 보았다. 휴런의 옆에서 찡그 린 얼굴을 하고 있는 미트라의 얼굴과 뭔가 부루퉁한 얼굴을 하고 있는 라 비니아와 케논은 어미와 떨어져 불쾌한 얼굴이었다. 유티아가 그 옆에 달 라 붙어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것도 불쾌한 듯 입을 불룩하게 내밀고 있는 라비니아는 곧 울음이라도 터뜨릴 것 같았다. 케논은 이에르네의 옆에 달라 붙어서 웅얼거리고 있었지만 울지는 않았다. 다른 녀석들은 먹어대느라 바쁘고 새로운길을 떠난다는 데에 흥분해 있었 다. 물론 듀나시도 다크시온도 가는 길이 얼마나 험한지는 애들에게 말해 주지 않았다. 세룩-엘라마이야를 뜀박질로 넘는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 지만 뭐 어차피 애들은 해 봐야 할 일이다. 이 자리에서 세룩-엘라마이야가 초행인 것은 로오나와 유티아, 쇼나였다. 로오나와 그녀들은 아직 어려서 이 곳까지 올 일이 없었다. "...." 첫 아이를 빼앗긴 로오나의 안색은 너무 형편없어서 나로서도 동정심이 일 정도였다. 하지만 이것은 어미의 명예에 대한 일이니 나도 뭐라 할 수는 없었다. 아 소미나도, 로오나도 모두 이미 묘인족으로서의 명예는 땅에 떨어져 버려 일족들 사이에서 뭐라 불릴 지 나도 참담한 기분이었다. 처음에는 화가 났 다가 지금은 슬프기까지 했다. "쿠베린님, 그러시면 지금 룬드바르황제의 뒤를 쫓고 계시는 것이군요." 감탄한 듯이 새삼 말하는 여성주에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나는 눈 앞에 있 는 과실주를 마저 마셨다. 마튜스에는 산포도가 난다. 그 산포도주는 엘프 의 술 못지 않게 훌륭한 맛으로 드물디 드문 맛, 오랜만에 맛보는 것이었 다. "그러시면.....이 곳에 남아서 그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텐 데요." 여성주는 여전히 상냥하게 말한다. "그건 그렇군..." 내가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예의상의 일이다. 뭐 성주가 아리따운 쿼터엘프이고 발치까지 이르르는 물빛의 긴 머리칼을 가지고 있다든가, 그 눈동자가 제비꽃 빛깔이든가, 백옥같은 피부와 풍만하 고도 가녀린 몸매를 가지고 있다든가, 혹은 상냥하기 이를 데 없는 낭랑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든가 하는 것은 전혀 관계 없다는 말이다. 나는 그런 것에 현혹되지는 않는다. 그저 나이도 들만큼 들었기에 나는 성 숙한 남자로서 어디까지나 아름다운 것에 예의를 잃지 않는 것뿐인 게다. "쿠베린......" 한탄하듯이 이에르네가 중얼거렸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으르렁거렸다. 막 사인족의 왕이 떠난 직후에 나와 킬라이는 계속해서 맥주를 들이키면 서 누구의 위장이 더 넓고 더 넉넉한가, 누가 더 숙취라고 하는 무서운 고 통에 대해 용감하게 대항할 것인가에 대해서 겨루고 있었다. 물론 내 옆에 앉은 휴런이라고 하는 애송이는 끼어 들어 있었고 아이들은 하품을 하다가 잠이 들었으며 여자들 중에서도 잠이 들지 않은 것은 이에르네와 로오나뿐 이었다. 허기야 로오나는 침대에 편히 누울 처지도 아닌 지라 라비니아와 나란히 딸을 눕히고 돌아와 내가 마시는 탁자 맞은 편에 조용히 앉아 있었 다. 나의 시종이자 난로 중에 하나인 앗시아는 여전히 내 발치에 무릎 꿇고 앉아 있었다. 졸고 있는 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남에겐 순종적인 자세로 앉 아 조용히 하고 있었다. 문을 열고 조용히 그녀가 들어선 것은 그 때였다. 그녀가 들어서자 마자 주점안에는 맑은 향기가 퍼졌고 그리고 그 다음에는 여성들 특유의 사락 사락 소리와 함께 매끈하고도 부드러운 드레스 자락으 로 인한 효과음이 퍼져나갔다. 나는 맥주잔을 들고 멍하니 그 여자를 바라보았다. 요즘 들어서 내가 미녀에 굶주린 것은 아니지만 여자는 아름다운 게 좋긴 좋지. "위대한 묘인족의 왕 쿠베린이십니까? 저는 마튜스의 성주인 오르레카 마 터리에 세르엘이라고 합니다." 우아한 미소가 날개처럼 펼쳐지는 순간 나는 마튜스에 온 것을 아주 잘한 결정이라고 판단내렸다. 그러나 그런 판단을 내린 것은 나뿐이었나 보다. 이에르네는 날카로운 눈 썹을 치켜들면서 싸늘하게 되물었다. "그래서?" 뭔가 썰렁한 분위기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휴런이 얼른 나섰다. "아, 마튜스의 성주인가? 일단은 자리에 앉고...." 휴런이 의자를 당겨 여성주의 앞으로 내미는 순간 이에르네가 싸늘하게 되 물었다. "우리는 곧 떠날 것인데 무슨 볼일이지?" "곧 떠나신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그저 감사의 말씀을 드리기 위해 서...." 그녀는 이에르네의 살벌한 어조에도 눌리지 않고 사쁜히 말했다. 그리고는 뒤에 늘어선 자들에게 손짓했다. 아, 잊고 있었지만 그녀와 같이 들어선 자 들은 기사 비스끄무리 한 놈들 세 명과 시녀같이 보이는 소녀들 두 명이었 다. 그 소녀들이 작은 상자를 들고 와 내가 앉은 탁자에 내려놓자 휴런은 궁금한 듯이 그 상자를 열어보았다. "헤에.." 반짝이는 것이 그 안에 가득 차 있었다. 상자 안에는 노랗고 푸르고 붉은 보석들이 빛을 한껏 발하면서 뽐내고 있 다. 손바닥 만한 상자 두 개에 가득 찬 그 보석들은 한 눈에 보아도 최상 품의 보석들로 이곳 세룩-엘라마이야의 광산에서 뽑아내는 보석들이 틀림 없다. "근사하군. 이건 최소 이백년 이상은 된 물건들인걸." 킬라이가 하나를 들어서 감정하는 동안 나는 여성주를 빤히 바라보았다. "예물입니다. 왕이여." 그녀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마튜스를 지키기 위해서 힘을 빌려주시지 않겠습니까? 길게는 바라지 않 겠습니다. 단 사흘만, 사흘만 이 곳에 머물러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물론 도와주어야지...하고 막 말이 나오려는 순간 이에르네의 손톱이 옆구 리를 사정없이 찔렀다. 으아아아아악! 비명을 올리고 싶었지만 겨우 참았다. 눈물이 흘러나올 정도다. 이에르네는 살벌한 표정으로 날 보며 묻는다. "우리에게 사흘이란 시간이 있을까요? 왕이여?" "......우..." "아이들의 행방과 그 간사스러운 미천한 마법사들을 쫓고 있는 우리가 여 기서 사흘이나 머물 이유가 있느냐고 지금 묻고 있지요?" 이에르네의 눈빛이 점점 지독하게 빛나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이에르네!" 갑자기 휴런이 하하 웃으면서 말했다. "이에르네는 쿠베린과 함께 떠나라고. 여기는 내가 맡을게. 그럼 됐지?" 내가 기가 막혀 휴런을 노려보자 휴런은 싱긋 웃음을 지어 보이면서 가슴 을 툭툭 쳐보였다. "걱정하지마. 내가 이 곳에 남아서 마튜스를 도와주지, 쿠베린은 얼마나 마 음이 급하겠어? 아이들도 있고 말이야. 걱정하지마, 다 내가 알아서 할 테 니까!" 조금 썰렁한 침묵이 우리들 사이를 스치고 지나갔다. "오호호호호호호....과연 그렇네, 휴런이 남으면 되겠네. 그럼 다크도 남을 건가?" 다크시온은 그 말에 입을 약간 비뚤게 하면서 날 흘긋 본다. "왕이 명령하시면." 난 별로 명령할 기운도 없다. 그때 듀나시가 드물게 입을 열었다. "그럼 이렇게 하면 어떻습니까? 저 인간의 공주를 이 곳에 맡기면?" "에?" "저 인간의 공주를 노스 엘스턴까지 데리고 가실 계획은 설마 아니었겠지 요? 더 이상 저 인간의 공주를 데리고 다닐 이유는 없습니다. 저 공주가 왕의 여자도 아닌데 굳이 걸리적 거리는 존재를 데리고 다닐 필요는 없지 요." 그 싸늘한 어조를 들으면서 나는 듀나시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애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재 다친 아이들은 라비니아와 케논입니 다. 두 아이는 지금 부상중이고 이왕이면 이 곳에 남게 하는 것도 좋습니 다." "그렇네.." 이에르네가 중얼거렸다. "어차피 노스 엘스턴까지 가려면 산맥을 가로지르지 않으면 안됩니다. 소 환수를 쓰지 않고 간다고 하면 수십개의 절벽과 계곡을 넘지 않으면 안됩 니다. 그런 길에 부상한 아이를 안고 달린다는 것은 무리입니다." "그래서?" 내가 조용히 묻자 듀나시는 휴런을 힐긋 보았다. "휴런과 저 수인족을 여기에 남겨두고 아이들을 돌보게 하지요." 휴런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래, 나 여기 남을래. 아이들을 내가 돌보지, 으하하하하하..." 저 자식...여성주에게 눈 빛내는 것 좀 봐라. 거울 보고 말해라, 임마.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습니다." 수인족 녀석이 끼어들었다. 녀석은 살벌한 눈빛으로 감히 우리들을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내가 여기까지 온 것은 인간들과 하프엘프들 따위를 보러 온 것이 아닙니 다! 난 내 아내를 찾으러 온 것입니다! 왕이여! 왕도 도와주시겠다고 말하 시지 않았습니까!" 난 도와주겠다고는 말한 적 없는데. 내가 녀석을 보고 한 마디 하려는 순간에 듀나시가 싸늘하게 말했다. "너의 체력은 우리를 따라올 수 없다." "죽어도, 심장이 터져도 따라 가겠습니다." 케슈파란은 입술을 깨물며 대꾸했다. "수인족 따위가 우리들을 따라오겠다고?" 가소롭다는 듯이 웃는 듀나시를 향해 케슈파란은 일그러진 얼굴로 대꾸했 다. "절대로 거들어 달라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아내와 아이를 구하러 왔습니다." "....." 만약 그 자리에 그 여자가 있었다면 눈물을 질질 흘리며 감동했을 게다. 그러나 나는 원래 감동을 받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는 분이고 내 옆에 선 듀나시는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 주변에 선 이에르네와 킬라이를 비 롯한 드워프는 감동을 잘 하는 종족이고 더욱이 인간이라면 말할 것도 없 다. 오오, 불타는 사랑이여, 목숨걸고 달리는 저 애달픈 수인족 녀석을 보라. 그 진지함에 감명을 받은 무리들을 내버려두고 나는 천천히 일어서서 위 를 올려다보았다. 아닌게 아니라 언젠지 모르게 잠이 깬 미트라가 계단 위 에서 날 멀건히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피로감 과 불안감에 가득찬 파리한 얼굴에 나는 조금 안스러워서 손을 내밀었다. "미트라." "...어딜 가요?" "이곳에 남아 있어. 갔다 올테니." "하지만...." 그녀는 불안한 듯이 여성주를 바라보고 뒤이어서 싸늘한 얼굴의 묘인족들 을 돌아보았다. 휴런이 만면에 느끼하기 그지없는 미소를 지으며- 그래도 나와 닮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슬픔을 새삼 느꼈다-그녀 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괜찮아, 나는 여기 남아 있을 거니까." "앞으로 갈 길이 너무 험하니까 여기 있어. 금방 데리러 오지, 그리고 나 서...." 그리고 나서 어쩔까? 미트라를 내 여자로 한다고 해서 엘리야로 데려가나? 그럼 거기에 마리아 가 있잖아? 그것도 좀 곤란하겠는걸. 그렇다고 부락에 데리고 갈 수도 없 지. 그럼 역시 아그랑에 맡긴다? 아그랑은 싸움터인데? 여기도 마찬가지이 긴 하지만. 내가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미트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노스 엘스턴으로 가는 것이지?" 그 불안한 눈길에 뭔가 조금 찔린다. "그래, 그래. 곧 데리러 오지." "그럼 일단은 성으로 가시겠습니까? 안내하지요." 재빨리 여성주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킬라이는 휴런과 나를 번갈아 보면서 혀를 찼다. "정말 닮은 형제로구만." KUBERIN....... 증오와 증오가 만나고 의지와 의지가 부딪치고 야만과 야만이 힘을 겨룬다 죽음이 명예롭다고 하는 자는 누군가 선혈이 아름답다고 하는 자는 누군가 7 "안죽었어요?" "안죽었다." "죽을 거 같애." "그걸로 죽은 놈은 없어." "하지만 가슴이 터질 거 같애." "그럼 터져봐." "원, 이걸로 터지는 놈이 어딨어?" "이걸로 터지면 네가 약해 빠진 놈이라는 게 증명되는 거지 뭐." "웃기지 마!" "기운들도 좋네, 떠들 여력도 있어?" 빌어먹을 산맥을 건너는 일은 원래 간단한 일이 아닌데 거기에 애들을 달 고 내달린다면 당연히 어렵다. 게다가 치솟아 오른 거대한 나무들덕에 방 향을 틀기도 상당히 어렵다. 마튜스에서 일직선 거리로 약 이틀거리인- 내 걸음으로 이틀-노스 엘스턴 은 내 옆에 달라 붙은 짐덩이들 덕분에 사흘 거리로 늘었다. 뭐 일직선으 로 달린다고 해도 바위넘고 절벽을 넘고 계곡을 건너는 동안 그게 진짜 일직선으로 달린다는 게 미심쩍을 정도이긴 하지만 말이다. 아이들은 완전히 사색으로 내달렸지만 우는 소리를 하는 애들은 없었다. 간혹 에이리가 없는 어미인 미하라를 찾아 내 품으로 기어 들어오곤 했지 만 다른 애들은 거의 선잠을 어미의 등에서 해결했다. 어미들은 지쳐 떨어 진 애들을 허리에 매달고 내달렸기에 배로 지쳤다. 뭐, 그래봐야 엄청나게 지친 수인족의 꼬맹이만큼은 아니었다. 세 번째 절벽을 타 넘을 때였다. "크억!" 하는 소리와 함께 뭔가가 와르르르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는 소리가 들렸 다. 뒤돌아 보니 수인족 녀석이 절벽에서 미끌어져 바닥으로 구르는 듯했다. 끌끌... "떨어졌어. 바보 아냐?" 지쳐서 이젠 잡담도 없어졌지만 그래도 입은 산 에이리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말에 대꾸하는 애들은 아무도 없다. 에이리는 주변에서 흔히 말대꾸 할 케논이 없자 제풀에 다시 입을 다물어 버렸다. 드레인이나 야 히르는 원래 그렇게까지 말이 많지는 않다. 물론 지쳐서 말다툼다운 것이 오고 갈 기운들도 없는 가 보다. 어쩔까요 하는 듯이 앗시아가 날 흘긋 보았다. 녀석의 얼굴도 형편없이 지친 얼굴이다. 허긴 이 중에 가장 어린 앗시아는 아직 성년체도 되지 못했다. 게다가 도움을 받을 어미도 없다. 뭘 어째? 당연히 내비두는 거지. 나는 그 얼굴도 무시하고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내가 손톱을 박으면서 절벽을 기어 올라가는 동안 내 뒤를 바짝 따르는 다크시온이 움직인다. 그 뒤를 이어 여자들과 아이들이 오르고 그 다음으 로 듀나시였다. 듀나시는 뒤를 살피기 위해 맨 뒤로 처져 있었고 그 뒤를 간신히 따르고 있는 것이 케슈파란이었는데 아무래도 역부족이었는지 몇 번이나 늦어졌다. 허기야 수인족이라고 해도 녀석은 우리들처럼 손톱도 강 하지 않고 근력도 약하다. 덕분에 움직이는 것이 빠를래야 빠를 수도 없고 당연한 일이지만 기본체력도 떨어지니까 별 수 없는 것이다. "좀 쉬었다 가면 안되요?" 에이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직 어린 녀석이니까, 게다가 어미도 없으니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만약에 이 자리에 미하라가 있었다면 단연코 입에 올리지도 않았을 말이 었다. 그렇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이제 곧 세룩-엘라마이야의 진 짜 장벽에 도착하니까 체력을 보강하고 음식을 먹을 참이 되었던 것이다. "사냥 해오겠습니다." 다크녀석이 내가 걸음을 멈추자 짧게 말했다. "그래." 언제나 처럼 다크는 수풀속으로 사라졌다. 너무나 깊은 이 산중에는 산짐승도 거의 눈에 띄이지 않지만 다크는 어디 선가에서 적절하게 사냥을 해왔다. 확실히 쓸모 있는 놈이라니까. 그 말에 지쳐 떨어진 자들이 일제히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듀나시는 팔짱 을 끼고 사방을 살피고 있었고 나는 바위 위에 앉아서 에이리가 엉망진창 이 된 손톱을 다듬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에이리는 제 어미가 없어서 가장 가련해 보인다. 몸을 기댈 곳도 상처를 감싸줄 이도 없는 것이다. "에이리." 손을 뻗어 녀석의 머리통을 쓰다듬으려고 하는 순간 일제히 이쪽으로 시선 이 쏠린다. 여자들, 애들, 듀나시와 앗시아의 시선이 등줄기에 박히는 순간 소름이 좌 라락 돋았다. 얼굴이 뜨겁다. 으으, 제길, 보지 말란 말이다! "왜요?" ".........소, 손톱손질이란 핥기만 한다고 다 되는 게 아니다. 으허허험." "에에." 에이리는 먼지투성이 얼굴로 입술을 비죽였다. 등덜미로 새삼스레 땀이 주루룩 흘렀다. 여자들이 나를 흘긋 흘긋 본다. 듀 나시는 눈썹을 하나 치켜올리고 바라보고 있다. 그래, 알아, 안다구! 제기랄, 이 쿠베린님이 애새끼 옆에 끼고 헤롱거리는 건 아니다. 나, 난 그저 충고를 하려고 했을 뿐이라구. 제길! 그만 좀 봐라! 다른 애들은 어미에게 달라 붙어서 지친 뺨을 쉬고 있었다. 어미들은 애 들을 옆에 안고 다리를 주무르고 팔을 주무르고 아직은 어려서 여린 손톱 들을 들여다 보며 청소해 준다. 색색거리는 애들 숨소리가 들려온다. 음습 한 바람으로 바닥의 나뭇잎들이 이리저리 흔들린다. 검은 나무그늘 아래, 산맥의 여신은 음침한 숨결을 불어 넣어 침묵으로 우리를 감싸고 있다. 검녹색의 부드러운 이끼 위에 드러눕자 한기가 드는 지 에이리가 주춤거리면서 내 옆구리에 와서 얼굴을 비볐다. 녀석을 끌어 안아 주자 녀석은 한숨 비슷한 것을 쉬면서 이마를 내 가슴에 들이댔다. 음, 그래, 내 새끼, 이리와봐. 아름다운 숲이라고 그 놈의 엘프들이 노래하긴 했지만 이 숲은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앞을 잘 볼 수도 없을 정도로 어두운 이 수풀 속에서는 잡목 이나 수풀이 거의 없을 정도다. 이 안에는 무언가가 있어 어리고 약한 살아있는 것들을 깔아 뭉개 버린다. 그게 뭔지 나도 잘 모르겠지만 오래 전부터 어린 것들에게는 그다지 좋은 영향을 끼친다고는 볼 수 없다. 무겁 고 차가우며 어딘가 비비꼬인 듯한 이 분위기를 억지로 풀려고 해봐야 별 수 없기에 나는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그러고 보니 요즘 만족할 만큼 자 본 적이 별로 없다. 앗시아를 손짓으로 불러 등어리에 대고 앞으로는 에이 리를 안았다. 흠, 앞 뒤 난로가 정해졌구만. 부시럭 부시럭......... "뭐야?" 마지막 뼈다귀를 핥고 있던 아소미나가 흠칫거리면서 뒤돌아 보았다. 나타난 놈은 만신창이가 된 수인족의 꼬맹이. 우리들이 음식을 다 먹어 치운 뒤에야 나타난 케슈파란의 몰골은 심각했 지만 우리들 모두 신경 쓰지 않았다. 녀석은 갈비뼈가 부러졌는지 가슴을 부여잡고 절룩이면서 우리들 앞에 섰다. 헐떡이는 숨소리로 근처에 있던 짐승들이 다 도망갈 지경이다. 이 자식은 가슴 전체가 가죽피리라도 되는 양 삐익 삐익거리면서 숨을 몰 아쉬고 있었다. 피로 얼룩진 얼굴과 몸뚱이를 하고 무너지듯이 자리에 앉은 녀석을 보면 서 나는 다 먹어치운 뼈다귀를 밖으로 내던졌다. 다크놈이 잡아온 사슴 두 마리를 먹어치운 참으로 내장까지 골고루 다 먹어치워서 남은 것은 가죽 밖에는 없었다. 이런 곳에서는 물을 찾기도 어렵기 때문에 피도 전부 다 마셨다. 아이들은 연한 살을 찾아서 이빨을 들이댔지만 지쳐서 식욕은 별 로 없는 것 같았다. 그런 애들을 야단을 치면서 어미들이 억지로 살을 먹 이고 난 뒤다. 늦으면 당연히 먹을 것은 없지. 아쉬우면 너도 잡아 먹어. "..........." 케슈파란은 그런 그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출발하자." 내가 일어나자 애들은 칭얼거리면서도 일어섰고 케슈파란은 졸도 직전인 듯한 얼굴로 비슬 일어섰다. 이 놈이 또 뒤처질 것은 뻔한 일이지만 사실 내 알 바는 아니었다. 노스 엘스턴에 도착했을 때에는 한밤중이었다. 뭐 한밤중이라고 해서 달라질 것은 하나도 없었지만 사방 조용한 엘프의 거리로 우리들이 들어섰을 때에는 심각한 얼굴로 경비를 서는 엘프 녀석들 몇이 살벌하게 화살을 들이대면서 고함을 질러댔다. 놀구 있네. "나는 묘인족의 왕 쿠베린이다!" 한 마디 던지자 삽시간에 조용해진다.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여기 저기서 투명한 불꽃이 일어났다. 기괴하게 일그러진듯한 엘프들의 나무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동안 나는 성 큼 성큼 앞으로 나서서 애처러울 정도로 가는 몸체를 한 엘프들을 돌아보 았다. 궁수들은 활을 겨누고 있었지만 곧이어 나의 얼굴을 본 녀석들이 나 섰다. "쿠베린님!" 놀란 녀석들 중에 황급히 튀어나온 것은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엘프 놈으 로 아무래도 얼마전 소환수와 함께 사인족을 처리하러 갔던 그 일행 중 하 나인 모양이다. "엉덩이는 어딨어?" 내가 묻자 녀석은 난처한 얼굴이 되었지만 곧장 나를 안내했다. 곧장이라, 곧장...... 엘프치고는 쓸만한 놈이구만. 다른 놈들이라면 엉덩이가 누구냐라든가 혹은 어떻게 오셨느냐는 둥 일행은 어떠시냐는 둥 말들이 많 았겠지만 녀석은 단번에 우리들을 데리고 바쁜 걸음으로 걸었다. 이 놈, 설마 하프엘프일까나? 낯익은 엘프의 왕의 거처가 보이자 안내하던 녀석이 나에게 낮게 말했다. "이곳에 고왕국의 사자가 와 있습니다." "고왕국의 사자?" "네, 왕께 도움을 요청하러 온 것 같습니다만....." 녀석의 얼굴이 흐렸다. 앞장서서 걷는 품이 엘프들 사이에서 지위가 낮은 놈은 아닌 거 같다. 어 쩌면 나이가 오륙백살은 넘는 전사일런지도 모른다. 노란 머리의 엘프녀석 은 신중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드워프의 왕께서는 이미 고왕국을 도와주겠노라고 말씀하셨지만...." "그 놈은 이미 봤어. 그런데 고왕국의 사자가 노스엘스턴까지 오다니, 그건 드문 일 아니냐?" "그렇습니다...이미 이백년 전에 직접적인 왕래는 끊겼으니까요." "아크와 킬트도 여기 있어?" "아, 킬트님은 조금 떨어진 곳에 계시고.....아크님은 왕과 함께 계십니다." 그런 말을 내게 자세히 하는 걸 보면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눈치다. 나무의 엘프같이 보이는 이 노랑머리는 은근히 나를 보면서 입을 열었다. "엄청나게 무례한 사자입니다. 왕이여." 이거 뉘앙스가 묘하군. 엄청나게 무례한 놈이라 상종하고 싶진 않지만 엘프 체면에 봐주고 있다는 이야기 같다. 그렇지만 이 묘인족의 위대한 왕께서는 그 놈의 사정을 봐줄 리가 없으니 적당히 주물러 달라, 뭐 그런 이야기 같은데? "야, 그거, 나에게 미리 경고하는 거냐? 그 놈이 싸가지 없게 굴어도 놀라 시지 마라, 그런 의미냐?" "...에....그,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애써 웃음을 머금은 엘프답지 않은 녀석은 나를 향해 약간 두려운 기색을 지어 보였다. "조인족이 여기 와 있다는 이야길 들었는데." "네, 여왕께서 여기 계십니다. 전사들 몇하고요." "노스엘스턴에 모조리 총집결했구만. 그럼 지금 뭘하고 있는 거야? 대체? 모두 한꺼번에 우르르 나가서 놈들을 사라라락 없애버릴 것이지, 뭘 여기 서 뭉기적 거리면서 엉덩이 평수를 넓히고 있는 거냐?" 그렇게 말하고 있는 사이에 이미 나는 엘프의 궁전- 그걸 궁전이라 부를 수 있다면- 나무의 개같은 미로에 도착했다. "이리로..." "안내 안해도 알아." "에?" 어둠 속에서 아련히 내가 얼마전 남긴 냄새가 모락 모락 후각을 자극한다. 녀석들의 안내 없이도 나아갈 수 있도록 여기 저기 마킹해 놓은 덕에 나는 자신있게 걸었다. 아무렴, 일단 내가 표시해 놓은 곳은 분명히 기억하고 말고. 내 등뒤에서 여기 저기에서 킁킁거리는 애들과 함께 아연한 얼굴로 입을 벌리는 엘프들을 무시하고 나는 당당히 걸어 들어갔다. KUBERIN....... 증오와 증오가 만나고 의지와 의지가 부딪치고 야만과 야만이 힘을 겨룬다 죽음이 명예롭다고 하는 자는 누군가 선혈이 아름답다고 하는 자는 누군가 8 원래 인간이란 거만한 족속이다. 사실 아인족...이라는 말은 인간과 닮은, 혹은 인간같은, 뭐 그런 기타 등 등의 의미를 가진 거 같은데 인간이 워낙 많아지다 보니 인간과 조금 다른 모양새를 한 녀석들을 다 아인족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것은 즉, 결국 무리수가 많으면 별 수 없이 그 쪽을 따라간다는 말도 안 되는 법칙의 증거로 인간들이 그처럼 날이 떠도 애를 낳고 달이 떠도 애를 낳으며 눈만 마주쳐도 임신을 하고 애들을 줄줄이 열이든 스물이든 낳아댄 덕분이다. 입 한 두 개가 입 백 개를 당해내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렇게 어느 세월인가 인간들을 제외한 종족들을 전부 아인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니, 흠,세월이란 어처구니 없는 것. 그런 걸 보면 인간들도 머저리는 아닌 게다. 무리 수를 그렇게 열심히 늘 려왔다니, 생각해 보면 감탄하게 된다. 그렇겠지, 약한 주제에 무슨 수가 있었겠나? 낳고 낳고 또 낳아 복된 인간세상을 이루세를 부를 밖에. 이렇게 되면 언젠가 건방진 인간들이 우리들도 아인족이라고 부르게 되겠 지, 그러다 보면 저 느려터진 엘프들도 아인족이라고 하고 결국은 고집 센 드워프도 아인족이라고 부르고 언젠가는 오크도 아인족이라 부르게 될지도 몰라, 이러다가 트롤도 아인족이라 부르게 되면? 하여간 아무 생각 없는 인간들의 범주에는 두 다리 달린 건 다 아인족이라고 하게 될 게다. 그리 고 새삼스레 놀래겠지, 오오, 세상에 인간과 저렇게 닮은 존재가! 하고 말이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녀석은 '오오 세상에 이렇게 엘프랑 닮은 존재가!' 이다. 녀석은 엘프도 아닌 주제에 너무나 엘프다운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고대 엘프들이 해 온 초록빛의 길고 늘어진 튜닉과 하늘하늘해 보이는 무리게풀 로 짠 셔츠, 그리고 거기에 금박과 은박을 입힌 문장이 찍힌 밑단, 그리고 허리에 찬 설마하니 미스릴제인 듯 보이는 가냘픈(?) 레이피어, 그리고 고 대 엘프들이나 할 법한 길고 긴 백금발을 길게 땋아 늘이고 있었다. 만약 에 녀석의 턱 밑에 수염 깎은 티가 푸르스름하게 나지 않았다면 나는 그 놈이 수백년전의 엘프들이라고 믿었을 게다. "저건 뭐냐?" "쿠베린?" 놀라서 엘프의 왕이 날 바라본다. 내가 멋지고도 우아하게 등장한 때에는, 엘프의 왕과 조인족의 여왕, 그리 고 몇몇의 엘프들이 진지하다 못해 심각해 보이는 구겨진 얼굴로 앉아서 미간에 줄 세 개를 그리고 있던 차였다. 엘프의 왕 엉덩이는 -외관상으로는 비쩍 말라 비틀어졌음에도 불구하고 - 무거운 엉덩이를 의자에 구겨 넣고 그다지 늠름하지도 못한 덩치를 찌그러 뜨린 채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옆에 앉은 조인족의 여왕은 희고 흰 백옥석 같은 미모를 무표정하게 드러낸 채로 홍옥과도 같은 길고 풍성 한 붉은 머리칼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 천년설처럼 흰 피부는 어울리지 않게도 뭔가 기분이 나쁜지 언짢은 기색이 역력한 홍적색의 눈썹을 둘러싸 고 주름져 있었다. 그들만이 아닌 그 자리에 있는 엘프들 모두가 썩 좋지 않은 얼굴들을 하 고 있기에 나는 그들에게 유쾌한 장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는 엄청난 사명 감을 느꼈다. "무지 무지 심각한 얼굴들을 하고 있군. 그건 그렇고 저건 뭐야?" 내가 정면으로 앉은 길죽한 얼굴에 고대 엘프의 복장을 하고 있는 녀석을 가리키자 그 녀석 옆에 있던 두 놈이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무엄하다!" "건방진!"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 자리에서 앗시아가 튀어 나갔다. 퍼어어억 하고 두 놈이 그 자리에 나자빠지자 앗시아는 핏발이 선 눈으로 두 놈을 바라보면서 스산하게 말했다. "왕께 무례하면 죽는다." 순간 좌중이 조용해졌다. 당연히 조용해 졌겠지, 주제도 모르고 떠드는 무지한 놈들은 그 녀석들 밖 에 없었으니. "쿠, 쿠베린..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냐?" "배고파." "......" "배고파, 여기 오면 먹을 게 있겠지? 배고파 죽겠다. 야들한 엘프 잡아 먹 기 전에 먹을 거나 좀 내놔 봐라." 나는 제일 먼저 조인족의 여왕의 옆자리로 가서 부드러운 표정을 지어 보 였고, 그 옆자리에 앉아 있던 엘프는 스스로 알아서 잽싸게 일어섰다. 나이 든 것이 역력한 엘프는 기특하게도 나에게 가없는 존경과 경의로서 의자를 내밀었다. "오랜만이오, 여왕." 내가 그녀의 손을 잡고 그 손등에 키스하자 그녀는 한껏 미소지었다. "정말 그런 셈이군요. 어떻게 이 곳까지 오셨나요? 지금 대륙 쪽에선 난리 도 아닐 텐데?" "아아, 물론, 그렇지만 이 근처까지 인간들이 왔다는 이야길 듣고 ...." 이렇게 부드럽고도 사랑스런 무드가 조성될 즈음 갑자기 어떤 버릇 없는 녀석이 끼어들었다. "당신은 누구요?" 그것은 앗시아의 발 아래 깔린 두 놈을 거느리고 있던 엘프도 아닌 주제에 고대 엘프의 복장을 하고 거만하게 앉아서 모든 이의 미간에 주름을 만들 고 있던 놈이었다. 나는 그 녀석을 다시 바라보았다. "저 놈 대체 뭐냐? 엘프도 아닌 주제에 엘프의 복장을 하고. 요즘 유행은 저게 아닐 텐데?" 그 말에 복잡한 표정을 지은 것은 엘프들이고, 건방지게 불쾌하다는 표정 을 지은 것은 그 놈이었다. "인간이면 인간다운 복장을 하고 있을 것이지, 새삼 고대 엘프의 복장을 하고서 거만하게 앉아 있는 게 엘프도 아닌 것이, 우습기만 하잖아?"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나와 나의 일족들 앞으로 내 오는 음식들을 지켜보 았다. 전과 달리 무지 빨라진 속도로 나오고 있는 음식들은 물론, 우리들의 취향 은 결코 아니었지만 적어도 배를 채울 만큼의 양은 되었다. 엘프의 왕은 내가 배가 고프면 무척 난폭해진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아귀아귀 먹어대고 있는 가운데 나는 가장 큰 블루베리 파이를 손에 들고 기분나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녀석을 다시 돌아보았다. "저게 고왕국에서 왔다는 사자냐?" "....일단은 그런 셈이지." 엘프의 왕이 억지로 대답했다. "왜 왔는데?" "......옛 동맹 때문이다." "옛동맹? 설마하니 그 고리짝 시절 엘프의 아리따운 아가씨가 눈이 삐어서 수상쩍은 인간의 나뭇꾼에게 겁간당하고 그 이래 줄줄이 엘프들이 가엾어 서 돌봐주었다는 그 전설을 말하는 거냐?" "대체, 대체 뭐라 하는 거냐!" 녀석이 얼굴이 시뻘개진 채 벌떡 일어나 나에게 달려들려고 했다. "아빠, 그게 무슨 이야긴데요?" 에이리가 얼굴 가득히 라즈베리즙을 묻히며 나를 돌아보았다. 아이들은 모 두 먹느라 정신이 없는데 에이리는 여전히 말이 많다. "아아, 엘프와 인간 사이에 얽힌 너무나 비극적인 이야기지." "어떤 비극요?" "응, 인간의 남자에게 재수없게 걸려서 슬프고도 긴 생애를 살았던 한 가 련한 엘프여인의 인생역정인 거야." "뭐, 뭐야! 말도 안되는 소리 말아!" 녀석이 시뻘개진 얼굴로 나에게 달려들려다가 말고 탁자를 주먹으로 후려 쳤다. 흠, 진실은 원래 쓰디 쓴 법이지. 엘프의 왕의 딸 호레아이엘이 성년의 날 우연히 암흑의 숲에 든 인간 청 년을 발견하여 구출하였고 그는 그녀에게 청혼한다. 사랑에 빠진 두 남녀 는 종족을 초월해 맺어지는데..운운 하는 그 스토리는 결국은 뻔한 이야기 다. 엘프의 기나긴 수명은 인간에겐 질시와 증오, 그리고 동경의 대상인 것, 하프 엘프를 몇이나 낳은 그 엘프의 아가씨는 대를 이어 내려오는 인간들 을 또 보살피고 보살피고...그 것이 이어져 그 엘프의 피를 받은 아이들은 인간들 사이에서 추앙 받는 지도자가 되고, 그리고는 결국은 왕이 되고- 인간들은 대개 추앙 받으면 그 담에는 왕이 된다- 그리고는 엘프의 피를 자랑하면서 오래 오래 살다가 아쉬우면 또 엘프의 영역에 와서 저의 할머 니의 할머니의 할머니를 찾아요 라고 엘프들의 인연에 의지하는 것이다. 경쾌하게 정의 내리자면, 그것이 바로 엘프의 왕국 노스엘스턴과 고왕국 의 인연인 게다. 즉, 할머니의 할머니의 할머니의 할머니의 할머니.....는 우릴 도울 거죠라는 말도 안되는 어리광인 게다. 그리고 그 할머니의 할머니의 할머니의 할머 니의 할머니가 있으니까 우리들은 고귀하다...가 고왕국 왕실들의 주장인 게다. 나의 이 명쾌한 정의에 감동한 엘프들이 오오옷 하고 감탄하고 있는 가운 데 녀석은 시뻘개진 얼굴로 주먹을 쥐고 이를 갈 듯 외쳤다. "아름다운 전설을 왜곡하지 마라!" "웃기고 있네, 원래 전설이란 왜곡되는 거야." 나는 진지하게 녀석에게 타일렀다. "우리들의 성스런 어머니 은빛의 호레아이엘께선....!" 녀석이 뭐라 말할 찰나에 나는 진지하게 다시 엘프의 왕에게 물었다. "너 설마 나에게 포도주는 안주는 거냐?" "아, 가져와라!" 잽싸게 아리따운 엘프 아가씨가 포도주단지를 가지고 와 내 앞에 놓았다. 그것을 따라서 목을 축이면서 나는 다시 조인족의 여왕에게 물었다. "어떻게 이 곳에 오게 된 거요?" "나도 비슷한 이유지요, 룬드바르의 마법사들을 찾아서 그들을 없애기 위 해서입니다. 전에 듣자하니, 마법사들은 정말로 우리들을 노리고 있는 것 같아서 말이죠." "마법석을 전부 빼앗겼소?" 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 "전부는 아니지만 십중팔구는 그들의 손에 들어간 것 같아요. 습격을 받은 둥지가 한 둘이 아니니까." "그런데 대체 녀석들은 숨겨진 조인족의 둥지를 어떻게 안 걸까? 난 그게 계속 이상했소. 물론 우리들의 마을은 그다지 숨겨지지도 않았으니까 별 관계없지만, 조인족의 둥지는 기암절벽 깊숙이에 숨겨져 있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놈들이 알고 습격한 거요?" 그게 계속 의문이었다. 그 말에 그녀는 다시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나 그말에 대한 대답을 듣기도 전에 벌떡 일어선 그 인간주제에 엘프 의 탈을 쓰고 있는 녀석이 악을 지르면서 꼬챙이-칼을 뽑아 들었다. "너! 감히 호레아이엘을 모욕하다니! 용서할 수 없다! 일어서라!" 나는 포도주잔을 든 채 녀석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런 대사를 너무나 오랜만에 들어서 뭔가 아련한 추억이 생각난다. 그러 고 있는 한 편 앗시아가 음산하게 물어왔다. "왕께 도전하는 거냐?" "뭐라구?" 녀석이 돌아본다. "왕께 도전하는 거냐? 감히? 너 따위가?" 앗시아가 핏발선 눈으로- 당연히 핏발이 섰을 게다. 잘 먹지도 못하고 쉬 지도 못한 채 몇날 며칠을 달려왔으니 제정신은 물론 아니지, 아직 성년체 에도 이르지 못한 꼬맹이인데- 녀석을 노려보았다. 뭔가 단단히 화난 듯한 그 얼굴을 보고 그리고 그 녀석의 발 밑에 깔린 자신의 호위기사인 듯한 두 놈의 널부러진 모습을 본 엘프의 탈을 쓴 인간녀석은 입을 다물었다. 음, 너무 길군. '엘프의 탈을 쓴 인간녀석'이라는 명칭은 너무 길어. "크크크크...도전한단 말이지." 뭔가 이유없이 스산한 어투로 괜시리 듀나시가 웃었다. 듀나시는 기묘하게 번뜩이는 눈으로 그 놈을 보고 나를 보았다. "왕이여, 저 놈이 왕께 '도전'한다는 데요?" 나는 무심한 얼굴로 듀나시를 바라보았다. 이 놈은 여전하다. "자, 자, 그만들 하지. 정식으로 소개하지 않으면 안되겠지, 쿠베린." 엉덩이가 잽싸게 끼어들었다. 그는 약간은 풀린 낯짝으로 날 바라보면서 '엘프의 탈을 쓴 인간녀석'을 가리켜 보였다. "고왕국의 이태자인 하레이엘 마사이엔 듀얼 트레이에이네. 그리고 이쪽은 묘인족의 왕 쿠베린이오." 하레이엘 마사이엔 듀얼 트레이에? "........." 이거 엘프 이름 보다 더 하잖아? 내가 그따위 이름을 외우리라고 생각하는 거냐? 내가 어처구니 없어서 엉 덩이를 보자 엉덩이는 쓴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이번에 고왕국에선 노스엘스턴에 옛 동맹을 되살리기 위해 이태자를 보낸 거야." 그래, 줄여서 이태자라고 부르는 게 낫겠다. 그렇다면 일태자도 있단 의미 겠지?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이 놈을 태자- 왕자라고 부르는 것에는 조금 감질 거리는 기분이 있다. 여지껏 내가 보아왔던 인간들의 왕자나 왕이나 쓸모 있는 게 어디 하나라도 있었나? 그나마 쓸만한 놈은 단 하나- 그 죽일 놈 의 룬드바르일 뿐이다. 하인리히 룬드바르라는 그 놈은 원래 제대로 된 왕 국의 왕자가 아니라 쥐톨만한 공국의 공자였지만, 최소한 왕자라고 거들먹 거리는 놈들 보다 훨씬 나았다. 지금 눈 앞에 있는 이 놈이 어디가 좀 나은 것인지 좀 찔러 보고 싶은 기 분이 되었다가 나는 다시 어른답게 단념했다. 어차피 인간의 왕이란 진짜 쓸모 있는 물건이어서 왕이 되는 게 아니라 아비가 왕이니까 지도 왕이 되 는 것뿐이니까. "자, 저 꼬맹이가 이태자든 삼태자든 내 알바는 아니고, 내가 가장 알고 싶 은 것은 말야..." 나는 손톱으로 크린베리즙을 듬뿍 발라 구운 호박파이를 반으로 가르면서 물었다. "왜 여기서 뭉기작거리고 있느냐 하는 것이야. 조인족 전사 열댓만 있어도 저 인간의 군대를 박살낼 수 있고, 킬트 놈 하나만 있어도 마법사들 열은 문제없는데 왜 여기서 엉덩이 비비적거리면서 뭉개고 있느냐 하는 거야." 내 말에 그 이태자라는 놈은 헉 하는 얼굴로 조인족의 여왕을 보았고 뒤이 어서 엘프의 왕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건방지게도 감히 내 앞에서 주둥 이를 열었다. "그런 힘이 있다면 왜 일찍이 말하지 않았소! 헥!" 그런 건방진주둥이를 내버려 둘 수는 없기에 나는 파이 반쪽을 들어 녀석 의 아가리에 던져넣었고 그 파이의 위력으로 녀석은 뒤로 나자빠졌다. 뒤 로 댁대굴 구르면서 녀석이 쓰러졌지만 녀석을 부축할 수 있는 자는 아무 도 없었고 솔직히 말해 엘프들은 그다지 부축하고 싶지 않다는 얼굴로 그 저 묵묵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조인족의 여자들 삼십여명이 지금 그들의 손아귀에 있어요." 짧게 그녀가 말했다. 내가 눈을 크게 뜨자 여왕은 입술을 일그러뜨리면서 천천히 말했다. "여자들 삼십여명이라면....전사급이 아닌 여자들이 삼십여명 잡혀 있다 면.....우리들은 그들을 공격할 수 없소." ".........킬트는?" 내가 신음하듯 묻자 엘프의 왕 엉덩이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는 지금 아무의 말도 듣지 않아... 들을 리가 없지, 그는 암흑마도의 마 스터야, 우리들이 뭐라 떠들든 지금의 그에게는 아무도 안중에 없어." "그 색마녀석을 고치느라 제정신이 아닌 거냐?" ".....아크도 옆에 달라 붙어 있긴 하지만...아무래도 카나리안을 쉽게 고칠 수는 없는지...." "하지만, 그렇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전사들이 바글 바글 모여있는데도 공 격하지 않는다는 건 말이 안되는 걸. 룬드바르군이 이곳 암흑산맥까지 올 라 온 것만으로도 녀석들이 얼마나 지독한 놈들이라는 걸 알 수 있어. 이 번에 인간들은 나름대로 끝장을 보려는 모양인 듯하던데." "그대가 여기 온 이유는 우리를 돕기 위해서란 말이야?"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엉덩이가 말하기에 나도 흐흐 웃어 주었다. "그야 물론 아니지, 나는 그 놈들을 부수러 오긴 했지만 왠지 너희들만 좋 은 일을 시키기 배 아파서 여기 온 거야." 그 말에 쓴 것을 삼킨 듯한 표정이 된 엉덩이는 한숨을 쉬고 턱을 쥐더니 짧게 말했다. "감동한 내쪽이 바보 같군. 그건 그렇고 쿠베린이여, 진짜 그대는 인간을 향해 전쟁을 할 참인가?" "그건 왜?" 그의 시선이 날카롭게 변했다. "마왕 쿠베린의 이름은 여기까지 알려져 있어. 모든 엘프들이 그대의 이야 기를 듣고 있다구. 마법사 길드가 엘프들에게 그대들을 없애도록 도와달라 는 청을 넣고 있단 말이야." "그래서? 기꺼이 도와서 우리 일족을 적대시 하겠다?" 그는 조금 껄끄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알다시피 엘프들 중에는 인간들과, 특히 마법사들과 친분이 강한 자들이 많이있어서 그들의 청을 거절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고, 게다가 그대들 일 족이 전 대륙에서 벌이고 있는 살육은 너무도 심해." "그래서?" "......자제해 주는 게 어떤가?" "일단 마왕이란 이름까지 얻었으면 갈데까지 가보자...라는 그런 생각을 가 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요?" 갑자기 옆에서 조인족의 여왕이 끼어 들었다. 그녀는 약간 불안한 표정으 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강하다는 것은 부러질 수도 있다는 의미입니다. 정말로 인간들을 전부 적 대시한다면..." "마법사라는 족속들을 멀리하는 것 뿐이야." 나는 퉁명스레 말했다. "그건 그렇고 킬트를 좀 만나보고 싶은데 어디 있지?" "안내 해 주지...그를 설득할 수 있으면 나로서도 좋고..." 엉덩이가 그렇게 말할 때였다. KUBERIN....... 증오와 증오가 만나고 의지와 의지가 부딪치고 야만과 야만이 힘을 겨룬다 죽음이 명예롭다고 하는 자는 누군가 선혈이 아름답다고 하는 자는 누군가 9 "기다려!" 갑자기 나선 것은 파이를 뒤집어 쓴 얼뜨기 왕자. 녀석은 줄줄 흘러내리는 호박쨈을 한 손으로 닦고 한 손으로는 무참하게 일그러진 파이껍질을 떼어 내면서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고대의 엘프복장 은 이제 파이로 얼룩 덜룩했다. 그 옆에 서서 그를 애써 부축하려는-사실 부축할 이유도 없건만- 녀석들은 모두 머리에 혹 하나씩 붙이고 엉거주춤 서 있었다. 녀석은 건방진 눈깔로 날 바라보며 외쳤다. "만약 네가 그렇게 강하다면 저 발칙한 놈들을 없애 보란 말이다!" 너무 발칙해서 말하기가 싫어진다. 그리하여 나는 두 번째 파이...는 아니고 아까 먹어 치운 빈 포도주병을 집 어 들었다. 그러나 집어드는 순간 옆에서 음식을 나르던 엘프가 황급히 외 쳤다. "그거 맞으면 죽어요!" 죽으면 어때 하고 내가 말할 찰나에 급히 그 엘프는 내 손에 있던 병을 빼 앗고 대신 말랑한 크림파이를 내밀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순순히 녀석 의 면상에 던져버렸다. 이렇게 말하면 엄청 긴 시간이 걸린 것 같지만 이건 순식간에 벌어진 일로 서 다른 자들은 모두 입만 벌리고 있었다. 퍽! "허어..허어.." 허옇고 뭉글뭉글한 크림이 주룩 주룩 녀석의 잘 차려 입은 튜닉 위로 툭툭 떨어져 내린다. 제 아무리 잘난 면상도 허연 크림을 뒤집어쓰면 다 구질 한 트롤이나 석삼년 안씻은 오크로 보이기 마련이다. 녀석은 긴 말도 하지 못한 채 종자인지 호위인지 알수 없는 두 놈의 부축을 양 팔에 받은 채 거 의 늘어진 상태로 버벅거리고 있었다. "헤에...." 나는 그 녀석에게서 시선을 떼고 내 옆에서 재빨리 포도주 병을 크림파이 로 바꾼 엘프를 바라보았다. 순발력이란 엘프와 전혀 관련 없는 물건인데 도 불구하고 재능을 드러낸 엘프를 나는 감탄하며 바라보았다. 히죽 웃는 그 얼굴을 보고 나도 모르게 따라 웃었다. "오랜만입니다. 쿠베린." 녀석은 엘프답지 않은 힘을 가진 장사 엘프, 카산이었다. "제 생전 쿠베린님의 무례함에 감탄하고 즐거워해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인 거 같아요." 이 놈은 지금 제 멋대로 떠들고 있었다. 킬트와 색마녀석의 거처로 안내한다고 나선 이 카산은 내 앞을 성큼 성큼 걸으면서 둔하기 그지없는 태도로 앗시아의 살기를 옆으로 비껴나가게 하 고 있는 참이었다. "사실 그 이태자는 무척 무례했어요. 대체 고왕국과 노스 엘스턴이 왕래를 하지 않은지 얼마나 되었는데 저런 태도를 취하는 지 모르겠어요." 원래 둔하면 나름대로 이득이 있는 법. 남들은 새파랗게 질리고 있는 살 기등등한 앗시아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카산은 자기 혼자 고개를 끄덕이면 서 열심히 지껄이고 있었다. 배를 채운 아이들은 아직도 손가락을 빨면서 수액을 뽑아 만든 엿을 먹고 있었고 일족들은 별로 고기도 아닌 것을 먹고 나서 뭔가 배를 채우긴 했지 만 허전하다는 얼굴로 걷고 있었다. "그런데 왜 고왕국과 노스 엘스턴이 왕래를 하지 않게 된 건데?" 카산은 고개를 갸웃했다. "잘 모르겠네요. 저도 그것에 대해선 들은 바가 없어요. 왕께서도 말씀해주 시지 않았지만 어른들은 다 아실 거에요. 원래 '풀리지 못할 원한에 대해 선 입을 다물라' 라는 말도 있잖아요?" 풀리지 못할 원한에 대해선 입을 다물라.... 오래 오래 살아가는 자들에게 있어선 빌어먹을 명언이다. 그렇지만 어디 그게 맘대로 되는 일이던가. "킬트는 어쩌고 있냐?" 냄새가 난다. 멀리서 엘프들과 그다지 관련이 없을 법한 유황과 기타 등등의 냄새가 풍 겨나오는 것을 느끼면서 나는 재촉해 물었다. "카나리안 숙부님과 같이 계세요, 그 분, 정말 카나리안 숙부님의 부친이 맞아요?" ".............본인이 그렇대니까 그렇겠지." "전혀 안닮았어요. 게다가..." 녀석은 주책 맞게 망설였다. 이걸 귀엽다고 해야 할지 둔탱이라고 욕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녀석은 날 돌아보면서 진지하게 말했다. "흑마법사잖아요?" 카나리안의 거처는 두리두리 감긴 넝쿨 사이에 있었다. 기본적으로 엘프들 이 좋아하는 이 놈의 거대한 나뭇가지 사이로 놓여진 그 집은 약간 위로 올라가야 한다는 문제가 있긴 하지만 몸이 가벼운 엘프들에겐 별로 대단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말이다...그러나..... ".....저게 그 놈 집이냐?" "네." "....저 놈이 직접 지은 거야? 설마?" "그런 셈이죠, 원래 자기 집은 자기가 짓는 법이잖아요?" 엘프들은 일찍 분가한다. 그건 물론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 다! 초록색 지붕을 얹고 흰 색을 칠한 그 집은 말 그대로 그림 같은 집이었다. 이 산중에 어디서 구했는지 흰 조개껍질로 장식된 창가에는 붉고 흰 꽃들 이 아기자기하게 피어 있는 데다가 희고도 고운 린넨 커튼이 쳐져 있는 게 보인다. 그 뿐이라, 말린 꽃잎들로 만든 것이 분명한 화관이 화려한 색상의 문짝에 처억 하니 달라 붙어 있다. 대체 이걸 무슨 취향이라고 불러야 되는 거지? 당장이라도 아리따운 아가씨가 흰 손을 흔들며 꽃바구니 옆에 끼고 튀어 나올 것 같은 집이다! 저게 남자 집이란 말이냣! 바로 그 때, 그 아리따운 아가씨가 꽃바구니 들고 손을 흔들 것 같은 그런 모양새의 집에서 시커먼 음침한 녀석이 걸어나왔다. "......" 그 집에 너무나 안어울려서 할 말을 잃게 만드는 녀석. 녀석은 날 빤히 바라보면서 음침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여기 왜 왔냐?" "왜 왔을 거 같냐?" 나는 녀석을 쏘아보며 물었다. 그는 입을 다문 채 묵묵히 날 바라본다. 그 음침하고 오만무례한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거의 없었지만 눈은 침울해 보였다. "색마 놈도 거기 있냐? 네 아들?" ".......거기 줄줄이 서 있는 꼬맹이들은 다 네 아이들이냐?" "그런데? 왜? 부럽냐?" 갑자기 킬트가 내 애들에게 관심을 가지는 걸 보니 뭔가 불안한 기분이 엄 습해 왔다. 내 애들은 시커멓다는 둥 깜둥이라는 둥 인간 마법사 맞냐는 둥의 소리를 지껄이면서 킬트를 손가락질하는 중이었다. 옆에 선 여자들이 긴장된 얼굴 을 하고 있는데도 애들은 애들이다. 애들은 연신 킬트와 집을 구경하느라 바쁘다. "안에 좀 들어가자." 내가 나무위로 막 오르려는 순간 킬트는 그 음침한 눈으로 나 아닌 애들을 뚫어져라 바라보면서 제지했다. "애들이 전부 몇이야?" "그건 알아 뭐하게?" "네 놈이 내 충고를 너무나 잘 받아들여서 놀라고 있는 참이다." "사내로 태어났으면 자손을 자자손손 퍼뜨려야 하는 법이지. 특히 나같이 잘난 분의 자손은 널리 널리 퍼뜨려야 마땅하니까." "흐응.." 킬트는 나를 건방지게도 조소하듯이 바라보다 말고 다시 애들을 바라보았 다. "예쁘군. 제 애비 닮아 건방지기도 하고." "원래 잘나면 건방져질 수 밖에 없어. 겸손한 놈은 진짜 모자라든가 아니 면 본인이 모자라는 걸 알고 있는 현명한 놈인 게지." 내 말에 완전히 동의했는지 녀석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숨을 내 쉬었 다. "한 마디도 안지는 군, 그보다 너 왜 내 아들을 색마라 부르는 거냐?" "네 아들에게 물어보렴." 킬트는 나를 쏘아보았다. 어쩐지 이놈 얼굴을 보아하니 나와 내 애들처럼 화기애애한 상태가 아닌가 부다. 녀석과 언제까지 눈싸움을 할까? 이 놈의 면상을 한 번 후려갈겨 줄까나 하고 막 결심할 무렵 그놈의 화사 무쌍한 문짝이 벌컥 열리면서 찰랑이는 머리칼을 가진 놈이 고개를 내밀었 다. "쿠베린님!" 녀석은 눈을 크게 뜨고는 문을 열고 날 맞이했다. "정말 오셨네요!" "저는 이만 갈께요." 카산은 날카로운 얼굴을 한 킬트에게 시선을 주면서 우물우물 물러섰다. 허긴 그 음침한 시선을 받고 물러서지 않을 수는 없을 게다. 안으로 들어가자 점점 더 가관이다. 집안 곳곳은 꽃으로 장식되어 있고 꽃이 아닌 곳은 리본, 리본이 아닌 곳 은 자수가 놓여있으며 자수가 없는 곳은 레이스, 레이스가 없는 곳은 물들 인 화사한 린넨이다. 탁자며 의자며 침대며 단촐한 가구에 이르기까지 몽땅 소녀취향-이걸 소 녀에게 말하면 화를 내겠지만- 인 것이다! 가구는 전부 흰 색, 창틀과 문 짝만은 옅은 초록색, 바닥에 깔린 주황색의 따스해 보이는 양탄자에 이르 기까지 할 말 없는 분위기였다. "앉으세요." 녀석은 나에게 상냥하게 웃음짓고는 의자를 권했다. 내가 앉기가 무안한 흰 레이스 커버를 둘러친 의자에 앉는 동안 카나리안 은 애들이 이 화려한 집안에 놀라서 이리 저리 레이스자락을 잡아당기려는 것을 애써 무시하고 있었다. "방, 되게 이상하네!" 그렇게 말한 것은 에이리로, 에이리는 입을 저억 벌리고는 주변을 보고 있 었다. "지천에 깔린게 꽃인데 왜 꽃을 집안에 들여 놔?" "언제나 보고 싶으니까." "보고 싶어서 이렇게 말라 비틀어진 것을 집안에 가져다 놔? 이건 꽃 시체 잖아?" 에이리는 말린 꽃다발을 서슴지 않고 콱 쥐었다. 덕분에 파삭 하고 가루가 되어 꽃이 바스라진다. 카나리안은 피곤한 표정으로 애써 말했다. "아름답지 않니? 그것도 하나의 아름다움이야." "체에, 가루가 되니 재밌긴 하지만....색깔도 우중충하고..." 에이리와 녀석이 떠드는 동안 애매한 자세로 서 있던 킬트는 의자에 앉아 자기 아들을 바라본다. 그 모습이 무척 어색해서 우스웠다. 저 색마녀석이 자기 성격답지 않게 부친을 똑바로 바라보지 않는다는 걸 나는 곧 깨달았다. 원래 저 색마놈은 색마라는 말이 붙을 정도로 상대에게 상냥한 놈이다. 그 런데 저 상냥한 놈이 전혀 관심 없다는 듯이 애써 무시하고 있다니, 그건 좀 묘한 일인 걸. "야, 먹을 거 안내놔?" 내가 묻자 카나리안은 애들을 정돈하기(?)를 단념하고 내 쪽을 바라보았다. "알았습니다.벌꿀주로 족하시겠어요?" "아무거나 가져와, 아까 조금 포도주만 먹었어." "나두! 나두!" 애들이 떠들어 대는 것을 보면서 한 숨을 쉰 카나리안은 밖으로 나갔다. "나가 놀아! 시끄러!" 내가 애들에게 외치자 내 애들은 에엑 하고 소리를 지른 다음 저마다 작은 집안의 창문이고 문을 바락 바락 열고 밖으로 뛰어 나갔다. 애들이 다 튀 어 나가자 어미들도 나름대로 따라 나가서 내 옆에 붙어 있는 것은 앗시아 뿐이었다. 킬트는 여전히 우울한 얼굴로 바닥을 파고 있었다. "네 제자들, 어쩔거냐? 난 이제부터 네 제자들을 죽이러 간다. 말을 듣자 하니 네가 제자들을 벌을 안주고 기냥 내버려 둘 거라 하든데?" "..........." "어쨌거나 넌 여기서 네 아들네미랑 지지고 볶아라, 난 네 제자들을 묵사 발 만들고 올테니까. 그건 그렇고 대체 왜 네 제자들은 그렇게도 우리 일 족의 피에 관심이 지대하냐? 설마 진짜 용이라도 만들어 보겠단 거야?" "......" "야, 대꾸를 하든지 대답을 하든지 좀 지껄여봐. 잘난 암흑마도의 주인아." "............" "네 제자들이 어디 처박혀 있는지 그거나 좀 알려줘. 어차피 너도 네 제자 들을 없애려고 여기까지 기어 나온 것일 테니까 그거나 알려줘." "......." "야! 너 계속 입 다물래?" "시끄러." 녀석이 그렇게 말하기에 나는 한 대 후려갈기려고 주먹을 홱 들었다. 그러나 그 순간 녀석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얼굴이 너무 우울해서 나는 치려다가 관두고 주먹을 내렸다. "후우, 좋아, 말해봐." 나는 너무 마음씨가 좋아. 지금 이렇게 내가 느긋하게 앉아 있을 때도 아 니구만. 제길. "뭘 말해?" 킬트녀석이 의아한 얼굴로 날 바라본다. "저 색마꼬맹이가 널 똑바로 보고 있질 않잖아? 말해보라구. 고민이 뭔가." ".............." "틀림없이 뭔가가 있겠지? 네 놈 면상을 보아 하니 뭔가 잘 안되는 것 같 고." 그러고 보니 아크는 또 어딨냐? "네 놈은 이해 못해." "뭘 이해 못해? 내 자식들 주렁주렁 있는 거 보면 몰라?" "너와 난 입장이 다르지." "물론 다르지, 네 놈같은 음험한 놈과 이 위대한 분이 같다는 것은 어불성 설이지." "..........죽어볼래?" "흥분하지 말고 말이나 해봐, 대체 뭐가 문제냐?" 아이들의 일이라면 역시 장난이 아닌 걸까? 인간들은 자기 자식들에 대해 선 끔찍하니까. 그리고 한 편으로는 냉혹하고 잔인하기도 하지. 하지만 킬 트 녀석이 아이에 대해서 민감하다는 것은 조금 의외인데... 녀석의 이런 반응은 흥미롭기까지 하다. 녀석은 침울하게 시선을 들어서 나를 보았다. 그러나 나를 본다기 보다는 내 등너머 뭔가 다른 것을 보는 것 같은 얼굴, 그리고 갑자기 시선을 내려 자신의 손바닥을 뚫어지도록 바라보았다. 보긴 뭘봐? 손바닥은 손바닥이고 발바닥은 발바닥인 것을. 새삼스레 감상 에 빠져 봐야 너는 어울리지 않아. 넌 흑마법사, 사악하고 잔인하고 오만하 고 건방지며 그리고도 재수없는 흑마법사인 것이다. ".....나의 이 몸은 저 아이의 부친이 아니다." "그야 당연한 말 아닌가? 넌 수시로 몸뚱아리를 바꾸잖아?" "그래서 위화감을 느껴." "뻔한 소리 하고 있네." "저 아이의 어머니와 맺어졌을 때는 나는 이십대의 백마법사의 몸뚱아리를 하고 있었지. 그때가 벌써......백여년전인가....." 나는 문득 정말로 이 놈이 엘프의 아가씨를 어떻게 꼬셨는지 너무 너무 궁 금해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미의식이 출중한 엘프라지만 엘프 아가씨가 이 놈의 본질을 몰랐을 리는 없다. 흑마법사란 흑마법사다운 분위기를 철철 풍겼을 것이고, 이 놈은 분명 시커먼 옷을 두리 두리 감고서는 나는 흑마 법사니까 까맣게 입는다 우하하하 이랬을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도 엘프의 아가씨가 이 놈과 맺어졌다? 이 놈 성질에 강간? 그것도 좀 이상하고. 약물을 써서 꼬셨을까? "너 약물을 써서 꼬신 거냐?" 내가 묻자 녀석이 날 사납게 꼬나 보았다. 녀석이 음침한 시선으로 뭔가 스펠을 외우려 하는 순간에 나는 재빨리 녀석의 입안에 손톱을 밀어 넣고 는 정지 시켰다. "알았어, 그러니까 이야기 해봐." "너, 대체 하라는 거냐? 말라는 거냐?" "어서 해. 삐지지 말고." "누가 삐진다는 거냐! 이 색마자식!" "알았어, 다 이해 할 테니 어서 말 해봐라. 궁금하네." 녀석은 나를 보고 푸들푸들 떨다말고 한숨을 픽 하고 내 쉬었다. 그리고 그 때 시간을 맞춘 것처럼 카나리안이 쟁반을 가지고 들어섰다. 그 의 뒤에는 아리따운 샘의 엘프 아가씨가 홍조를 띄운 채로 같이 쟁반을 들 고 있다. 그 쟁반 위에 있는 나무딸기 파이를 바라보면서 나는 손을 휘휘 저었다. "단 거 그만 좀 내와라. 아까부터 달아서 죽겠다." 킬트는 녀석이 나타나자 흠칫 고개를 들어 그 쪽을 본다. 카나리안쪽은 무 표정한 채로 탁자위에 쟁반을 놓고 술병과 파이를 올려놓았다. 쿠키같은 것도 있는 것 같다. 달콤한 냄새가 방안에 퍼졌다. "그럼..." 엘프 아가씨가 미소를 지으면서 밖으로 나가자 카나리안은 배웅하는 듯이 등을 돌려 목례했다. 녀석은 그다지 말수는 없었지만 야시시하게 웃는 분 위기로서 나는 당신을 꼬셔요 라는 분명한 글자를 드러내고 있었기에 나는 여전히 녀석을 색마라 부르기로 마음 먹었다. 이상하기도 하지, 왜 여자들은 음침한 낯짝을 한 샌님들에게 반하는 것일 까? 강건한 근육과 멋진 몸매와 씩씩한 낯짝과 넘치는 기운을 가진 남자는 왜 징그럽다는 거야? 허긴 뭐, 성숙한 여인들만이 알아주는 매력이란 소녀의 쓸데 없는 감수성과는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르지. 그녀가 가고 나자 카나리안은 내 잔에 벌꿀주라는 것을 따라 주었다. 역시 달다. 그걸 홀짝이면서 내가 킬트 녀석의 발등을 툭툭 차자 킬트는 흘긋 나를 바 라본다. "계속해 봐." "뭘 계속해?" "네가 저 색마 녀석의 엄마를 만났을 때부터의 그 이야기." 그 말에 카나리안이 더 흠칫했다. 그는 당황한 얼굴로 굳어서 킬트와 나를 번갈아보고는 그리고선 뒤로 물러섰다. 킬트는 그 반응에 녀석답지 않은 당황스런 얼굴로 날 쏘아보았다. "이 녀석!" "저 아이가 들으면 어때? 그 당시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 해봐." "농담하지마!" "농담 아냐. 저 애가 들으면 안될 이야기라도 있나?" 그 말에 카나리안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게다가 나는 매우 바빠, 너의 상담은 언제까지 들어줄 새가 있는 게 아냐. 난 네 제자들이 하고 다니는 짓을 끝장내야 하고 엘프들은 공격해온 룬드 바르 놈들을 없애야 한다구. 세상은 바빠. 네가 감상에 빠져서 헤우적거려 도 할 일은 줄어들지 않아." KUBERIN....... 증오와 증오가 만나고 의지와 의지가 부딪치고 야만과 야만이 힘을 겨룬다 죽음이 명예롭다고 하는 자는 누군가 선혈이 아름답다고 하는 자는 누군가 10 자, 여기서 또 다시 감상에 빠질 우려가 있다. 그렇지만 누구든지 말하기를 내가 하면 연애, 남이 하면 주책이란 말이 있 다. 나는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또, 킬트 녀석의 백 여 년 전 사랑 놀 음에 대해서 길게 설명할 기운도 없기에 그저 녀석이 떠든 것을 사실만 접 수하기로 한다. 왜냐구? 자기 연애담이란 뭔가 윤색되기 마련이니까. 게다 가 백 여 년 전 연애담이잖아? 노인네의 회색기억 속에 연애담이란 윤색되 고 각색되어 장밋빛 아름다운 스토리가 되기 따악 알맞은 이야기일 테니 까. "내가 그녀를 만난 것은 대륙 남쪽의 카빌로에아 지방을 지날 때였다. 그 때에 나는 새로운 몸을 얻어 움직이고 있었다." "어떤 몸인데?" 내가 묻자 킬트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꾸했다. "날 죽이겠다고 온 백마법사 애송이 몸이었지." "......" 카나리안의 얼굴이 퍼렇게 변했다. "그 몸이 좋디?" "아, 젊은 데다가 제법 마력도 있고 체력도 있는 놈이었어. 같이 온 전사 놈은 완전히 걸레가 되어버려서 쓸 수 없었지만 그 몸은 쓸만해서 남겨 두 었었지." 그야 어쨌든, 그 백마법사의 몸을 가지고 돌아다닐 무렵 녀석은 한 명의 아리따운 여성이 곤란에 처하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고 한다. 아마도 그 근처의 영주의 딸이든지 귀족의 딸이었던 거 같다. 그녀는 나들이 중 산적을 만난 것 같았는데 하여간에 그런 상황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아가씨를 구해 줬어요?" 카나리안이 드물게 끼어들어 물었다. "내가 왜?" 킬트는 킬트답게 되물었고 카나리안은 우물거렸다. "하, 하지만 어려움에 처한 아가씨가...." "난 이미 여든살이 넘어가고 있었는데 아리따운 아가씨가 뭔 짓을 하든 끌 릴 거라 생각하냐?" 녀석이 퉁명스레 그렇게 말하자 카나리안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다시 말했다. "그게 아니고요,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쳤다는....?" "내가 왜 구해줘야 하는데? 나랑은 상관도 없고 비명이나 질러대는 시끄러 운 계집애 따위를 구할 여가가 내가 어디에 있겠냐?" "......" 카나리안은 질린 얼굴로 경멸에 차 킬트를 바라보았고 킬트는 그런 자신의 자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쨌든 그 여자를 그냥 지나치려는 데 뭔 일이 발생했는데?" "구원의 기사가 나타났지." 킬트는 퉁명스레 말했다. "갑옷을 입은 기사 녀석이 튀어 나오더니 길고도 긴 장검을 휘두르며 산적 들을 끝장 내고 악악대는 계집애를 구했지." "그런데?" "그런 꼴을 보고 아아 하고 난 그냥 지나치려는데 그 기사와 동행이었던 한 엘프 아가씨가 나에게 따져 묻더군." "뭐라고?" "곤란에 처한 아가씨를 두고 그냥 가려하다니 정말 무슨 생각이냐 라고 묻 더군." 카나리안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고 그 얼굴에 킬트는 쓴웃 음을 지었다. 아마 카나리안의 얼굴 너머 다른 얼굴을 보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내 알바가 아니라고 했지." "그랬더니?" "옆에 있던 기사 놈이 날 아래위로 훑어보면서 말하더군. 아마 저 청년은 몸도 호리호리한 데다가 검도 가지고 있지 않다. 아마도 책이나 보는 샌님 인 듯 하니 시비걸지 마라 라고 말하는 거야." "그래서?" "그래서 나는 아아 그렇다 라고 말했고 엘프 아가씨는 갑자기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는 거야. 얼굴이 벌겋게 되더니 말이야." "왜 그렇다고 말했는데?" "더 지껄이면 시끄럽잖아?" 녀석이 태연하게 지껄일 때 얼굴이 붉어진 카나리안이 끼어 들었다. "그 엘프 아가씨가 우리 어머니?" "응." 킬트는 한숨을 내 쉬었다. 그 세상 물정 모르는 엘프 아가씨는 여행 중이었고 킬트는 그녀를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원래 세상은 좁고 할 일은 적은 법. 또 결국 그들은 웬 주점에서 만나는 인연을 획득했다. 게다가 기사 수행을 위해 돌아다닌다고 하는 이 세상에 드문 기사도 정신 에 입각한 기사 녀석이 아주 즐거운 척하고 킬트에게 말을 걸었기에 더더 욱 인연은 강화되었다. 사실 킬트는 녀석을 한 대 때려주고 싶었었댄다. 그 러나 녀석의 몸뚱아리가 하도 훌륭해서 나중에 수집해서 다음 몸으로 써먹 어 보자 싶어서 내버려 두었대나. "그 다음은 곧장 로맨스냐?" "......." 답지 않은 감상적인 얼굴로 하아 하고 킬트는 한숨을 내 쉬었다. "간단히 말해서 길 가다 보니 정이 들었다...뭐 그런 거야?" 내가 재촉하자 옆에서 카나리안도 재촉했다. "그래서 어찌되었는데요?" "별 다른 것은 없다. 여행 중에 우리들은 숲에서 마수들을 만났고 그 와중 에 싸우다가 나는 간단한 마법을 시전했으며 그 덕분에 그녀의 생명을 구 했지." "아." 카나리안이 입을 벌리자 킬트는 괜히 변명하듯 말했다. "아, 사실 구하려고 했던 건 아냐, 그녀가 나를 보호하듯이 칼을 쓰고 있어 서 나는 귀찮아져서 마법을 쓴 것 뿐인데...." "변명할 거 없어. 수컷이 암컷보고 반하는 것은 인지상정이지 뭐." 내가 관대한 이해심을 보여주었지만 킬트는 나의 관대함에 일그러진 얼굴 로 살기를 쏘아보냄으로서 보답하려 했다. 그 일그러진 얼굴을 빤히 보면 서 카나리안이 물었다. "그럼, 어머닐 사랑했나요?" 그 말이 나오자 마자 갑자기 하늘이 멈추고 땅이 진동하며 공기의 정들이 얼어붙었다. 나는 그 순간 얼어서 술잔을 들 수 없어 허공에서 굳었으며 곧 전신에서 두두다다 맹렬하게 올라오는 닭살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 것은 킬트가 더 한지 녀석의 얼굴은 두드러기가 돋자 못해 퍼렇고 빨갛고 하는 온갖 인간 이 지을 수 없는 빛깔까지 더하고 있었다. "..........." "어머닐 사랑했어요? 그래서...?" 카나리안이 가장 묻고 싶었던 것은 그것이었던 모양이다. 녀석은 정색을 하고 달려들었다. 그 진지한 눈 두 개를 마주한 킬트에게 애도를 표하면서 이 연애담이 빨랑 끝나기만을 기도했다. ".............." "대답해 보세요! 어머니가 날 배고 노스엘스턴으로 돌아왔을 때는 혼자였 어요! 아무도 어머니 옆에는 없었다고 말했어요! 그러니까....!" 카나리안이 답답한 듯이 외쳤지만 킬트는 입을 굳게 다문 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잘난 척 하고 있네. 흠, 그럼 내가 구해 주지. "이쪽 북쪽에서는 이 놈은 아주 사악한 놈으로 알려져 있다." 내가 입을 열자 카나리안이 이쪽을 본다. 킬트는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고 나는 연장자다운 유연함으로 부드럽게 설 명해주기로 마음 먹었다. 녀석에게 빚을 지워 줘야 나중에 괴롭힐 수 있지. "실제로 이 놈은 사악한 짓을 많이 해서 엘프들은 이 놈에 대해 이를 갈고 있고 지금까지도 흑마법사에 대해서는 정말로 이를 갈다 못해 손톱 발톱을 다 갈고 있는 중이지. 그런 와중에 네 어머니가 킬트의 애를 뱄다는 소문 이 나면 다른 엘프들이 네 어머닐 가만 둘 리가 없잖아?" "하지만...!" "너의 왕 엉덩이 녀석은 비교적 그런 쪽으로는 관대한 편이라-관대하다기 보단 둔감한 편이지만- 아마도 알고 있었겠고, 너의 양부도 알고 있었겠지 만 다른 놈들에게 그게 알려진다면 뭔 일이 벌어졌을 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지. 게다가 전대륙 마법길드에 대고 물어봐라, 저 저주 받은 암흑마도 의 지배자인 룬 킬트 마이오스의 아이가 있다 운운이 되면 네 어머니는 아 마 마녀로 몰려 쫓겨다녔을 게다." 게다가 가장 큰 이유는 엘프들은 원래가 남의 사생활에 간섭하지 않는 주 의다. 개인적인 일은 알아서 해결하자 주의인 이 놀랍고도 그나마 건질만한 사고 방식 덕분에 보통 인간의 마을에서는 방탕한 계집정도로 몰릴 이 카나리안 의 어미는 멀쩡히 잘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그렇고 카나리안 녀석은 동요를 감추지 못하는 얼굴로 나와 킬트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대체 어떤 일을 했는데 전 대륙의 마법사들이 다 싫어하고 엘프들이 증 오한다는 거죠?" "아, 그거? 백마법사나 일반 마법사 중에서 자기에게 덤비는 마법사 한 이 삼백정도 죽이고 달려드는 엘프들 한 수백 정도 죽이면 그렇게 돼." 카나리안은 멍하니 날 바라보았다. ".....수 백?" "원래 마법사들 중에서 백마법사나 정령사들은 엘프들과 친한 놈도 꽤 되 고 엘프들 중에서도 하프엘프들은 꽤 인간사이에 자주 끼어다니잖아? 그러 니까 하다 보면 다 그렇게 되는 거지." "어떻게 하다보면 수백씩이나 죽인단 말이에요!" 카나리안이 소리를 빼액 질렀다. "말도 안되요! 대체, 생명이란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데 수백을 죽여요? 수백과 수백을 합하면 최소 천은 될지도 모른다는 거 잖아요? 대체, 어떤 생각으로....!" 카나리안은 새파랗게 질려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나는 한심한 기분이 되어서 녀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엘프다운 사고방식이다. 뭐, 하는 수 없지, 녀석은 쿼터엘프라 해도 엘프는 엘프인걸. "끔찍한 죄악을 저질렀군요....." 녀석은 고개를 갑자기 들고 킬트를 증오하듯이 바라보았다. 그의 눈안에 담긴 경멸과 모멸에 킬트가 어떻게 반응할지 나는 궁금해졌다. 그러나 킬트는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그래서 헤어졌던 것이다." 어라? "그녀는 생명의 수호자, 엘프의 피를 받았고 나는 사악한 흑마법사이기에 헤어졌던 것이다. 다시 연락한다는 것도 필요도 없고 할 생각도 없었다." "책임감도 없군요." 질색이라는 듯이 카나리안이 그를 쏘아보았다. 어이, 너는 색마인 주제에 그렇게 말해도 되냐? 두 녀석들 사이에 싸늘한 공간이 형성되어서 나는 조금 추워졌다. 이 두 놈이 언제까지 이런 분위기만 풀풀 풍기고 있어서야 내 볼일을 볼 수 없기 에 나는 조금 참견하기로 했다. "그런데 왜 이 애를 위해서 생명의 술을 연구했냐?" 그 말에 카나리안이 홱 하고 고개를 쳐들고 외쳤다. "나는 그 마법을 받지 않을 겁니다!" "진짜? 죽어도?" 내가 녀석을 물끄러미 보며 묻자 카나리안은 고집세게 입술을 깨물고 벌떡 일어났다. "안 받아요! 난 그런 더러운 것을 받느니 차라리 죽겠습니다!" 하고 나가버렸다. 죽기 싫어하고 징징 울 때는 언제고 저따위 소릴 하다니, 콱 패줄까부다 하고 생각하고 있는 즈음에 킬트가 이상한 소리를 냈다. "휴우..." 나는 잠시 동안 킬트의 앞에 있는 마루 바닥을 노려보았다. 이 바닥이 꺼지나 안꺼지나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계속 이런 상태였냐?" "....비교적." "왜지?" "저 녀석이 너랑 다니면서 생명의 술로 살아난 내 애들을 봤다며?" "...아헬인가?" "그 이래로 싫다는 거다. 아니, 나 자체를 거부했다." "당연하지, 갑자기 나타나서 생김새도 이상한 녀석이 내가 네 생부다 하는 데 좋아할 놈이 어디있냐?" ".........." "저 녀석의 어미는 만나봤냐?" "라스엘린과는 이미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녀는 나를 다시 보고 싶어하지 않아." "그 낯짝을 누가 보고 싶어하냐? 게다가 낯짝도 틀린데." "그렇겠지....그녀가 백여년 전에 본 그 얼굴은.....제법 괜찮은 미청년의 얼 굴이었으니까." "얼굴로 꼬셨냐?" "엘프를 얼굴로 꼬신다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냐?" 그건 아니군. "뭐, 어쩔 수 없으니까 네 할 일을 해. 이렇게 어물쩡거리는 건 너답지 않 아. 네 쫄다구들이 길길이 날뛰면서 일어나는 것도 무리가 아냐. 네가 이렇 게 감상에 빠져서 죽어가고 있으니 녀석들이 괜히 대륙정복이니 마스터의 마음은 변했다느니 하고 날뛰는 거야." "........." "뭐냐? 이제 슬슬 말해주면 어떠냐? 녀석들이 뭉쳐있을 만한 장소가 이 곳 세룩-엘라마이야에 있는 거냐? 왜 이곳으로 마법사놈들이 오는 거야?" 내가 진짜 중요한 사항을 물었지만 녀석은 여전히 감상에 코 밑까지 빠진 상태로 중얼거렸다. "......벌써 백여년인가..." 열이 확 솟구쳤다. 녀석의 뒤통수를 한 대 후려패면서 나는 소리 질렀다. "야! 어서 네 할 일을 해! 저 녀석을 고치러 왔으면 녀석을 두들겨 패서 그 생명의 술인지 뭔지를 하라구! 그리고나서 여길 뜨는 거야! 그럼 간단하잖 아?" 얼결에 얻어맞은 녀석은 탁자와 정면으로 키스를 한 덕에 이마를 움켜쥐고 있었다. 코피가 나올 것 같은 얼굴이었지만 코피는 다행히 나오지 않았다. 녀석은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면서 이를 갈았다. "이...자식이?" "여기서 마법을 쓰면 너의 아들네미 집이 날아간다. 그거 아니?" 해죽해죽 웃으며 내가 말하자 녀석은 치를 떨 듯이 나를 노려보면서 머리 칼을 가다듬었다. "어서 해. 넌 여기에 저 놈의 생명을 늘리러 왔어. 그러니까 산뜻하게 하고 이 곳을 떠. 저 아이가 널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너도 저 아이를 이 해하는 것은 불가능해. 백살이 넘은 놈을 네 식으로 길들인다는 건 불가능 하지, 근본적으로 너와 저 놈은 달라." 킬트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 못볼 것을 봤다. 저 놈의 흉악한 얼굴이 일그러지면서 울 듯이 변하는 그 표정. "네 놈은 이해 못해." "뭘? 아아, 또 뭘 이해 못하냐?" 지겨워 죽겠다. 이런 공방. "나는 원래가 수백년을 사는 존재가 아냐. 너와 같이 간단히 단념하고 다 른 것을 찾아낼 재주는 없다. 너는 새로운 여자를 만나고 새로운 사랑을 곧 시작할 수 있지만 그렇게 못하는 사람도 있다." 킬트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때로는 기나긴 인생에서 단 한번의 감정에 모든 것을 거는 인간도 있는 거다." 녀석의 메마른 눈 안에서 기묘한 빛이 일렁였다. "그리고 그것이 수 십년, 수 백년이 가는 경우도 있는 거다. 세월이 흘러 몸뚱이가 수없이 바뀌고 감정이 무뎌져 가도 어느 한 구석엔가 그게 남아 있다.... 어떻게 해서든지 벗어나려고 몸부림쳐도 벗어날 수 없는 '그것'..." 어울리지 않게 녀석이 웃었다. "그런 게 있는 거다. 쿠베린." "멍청한 놈." 나는 그 놈의 청승에 동조해 줄 수 없다. 곧 죽어도 사랑이란 단어는 안쓰는 놈. 뭐가 '그거' 이고 '그것'이냐? 결국은 솔직하지 못한 까닭. 엘프인 그녀가 그렇게 사랑스러웠다면 단번에 마왕답게 납치해와서 가두어 두고라도 알콩달콩 살았으면 되었을 지도 모른다. 그럼 카나리안이 태어났 을 때 당장 생명의 술을 펼치고 그 녀석의 수명을 늘리고, 녀석을 후계자 로 삼았으면 좋았을 것을. 쿼터엘프라고는 하지만 녀석의 마법력은 제법 강한 거 같았으니 킬트가 어 릴 때부터 가르쳤다면 분명히 쓸만한 놈이 되어 후계자가 될 수 있었을 게 다. 만약에 그렇게 되었다면 지금 일어나고 있는 킬트의 아들네미 딸네미 비스 끄무리한 녀석들은 다들 카나리안의 부하내지는 친구가 되어서 즐겁고도 음침하게 웃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럼 이 몸은 이런 고생을 하지 않아 도 되고 이 놈은 여기서 나에게 이런 닭살 돋는 스토리를 전해주면서 청승 을 떨지 않아도 되잖아? 결국은 이 놈은 같잖은, 녀석답지 않은 배려를 그녀에게 한답시고 일어난 일인 게다. 뭐? 엘프인 그녀가 자신이랑은 어울리지 않아서 헤어졌어? 놀고 있네. 그럼 고집쟁이 엘프 처녀가 감정도 없이 자기 몸을 처억 내어주었을 거 같냐? 그 고상하기로 이름 높은 엘프가 백 살이 넘은 늙은이에 남의 몸뚱 이를 빌려 살고 있는 사악하기로 말하자면 대륙사에 길이 남을 놈과 억지 로 맺어지고도 그 애를 키울 거 같냐? 때로는 같잖지 않은 배려보다는 감정대로 나가는 게 옳을 때도 있는 것이 다. 바로 그게 지금 눈앞에서 벌어진 이 수많은 실타래중 한 가지다. 갑자기 이 놈이 무지막지 미워져서 나는 녀석의 뒤통수를 한 대 후려 갈기 고 그 다음에는 녀석의 목덜미를 주워서 벽에 집어 던졌다. 그러고도 웬지 기분이 풀리지 않아서 카나리안이 흰 레이스더미를 모아놓은 벽장에 구겨 서 집어 넣어 주었다. 그렇게 하고서도 속은 편치 않다. 그래서 기분을 풀기 위해 녀석이 말한 '그것'을 하려고 밖으로 나갔다. KUBERIN....... 증오와 증오가 만나고 의지와 의지가 부딪치고 야만과 야만이 힘을 겨룬다 죽음이 명예롭다고 하는 자는 누군가 선혈이 아름답다고 하는 자는 누군가 11 '그것'을 한참하고 난 뒤에 나는 악악거리는 비명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옷자락을 추스르면서 눈을 크게 뜬 유티아가 묻는다. "저거....누구죠?" "몰라." 그러나 그 상대는 조인족이었고 비명을 지르게 한 녀석은 아들네미 에이리 였다. 에이리는 한 녀석의 팔뚝을 잡고 거의 물어뜯을 듯이 매달려 있었는데 그 상대란, 에이리가 그렇게도 마음에 들어하던 조인족의 재수없는 녀석 프루 엘이었다. "놔." "싫어어어..." 에이리는 히죽거리면서 녀석의 팔뚝에서 떨어지질 않는다. 프루엘의 옆에 서 있던 조인족 전사들은 킬킬 웃고만 있다. 에이리의 옆에 있던 야히르는 감탄에 겨운 얼굴로 조인족녀석을 하나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조인족의 여왕이 도도하게 서서 날 바라보고 있었으며 그 옆에서 그녀를 열심히 노려보고 있는 것은 다름아닌 내 아리따운 여자 중 하나인 이에르네와 쇼나등이었다. 유티아가 나와 같이 오자 갑자기 도끼 눈이 된 그녀들이 맹렬하게 날 쏘아 보기 시작하는 것을 무시하고 여왕에게 말을 걸었다. "날 찾아 온 건가?" "그렇죠." 그녀가 가볍게 대답했다. "룬드바르의 마법사들의 목적을 알아내셨소?" "아직, 곧 알아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조금 굳었다. "고왕국으로 굳이 진출하려는 이유가 뭔지 알아내야지. 간단히 정복하고 싶어서는 아닌 것 같으니까." 내가 그렇게 말할 즈음 갑자기 끼어드는 녀석이 있었다. "고왕국의 수도 엘루리아-쿰에 오래된 신전이 있다는 걸 아나?" 돌아보니 녀석은 흰둥이 마법사 아크였다. 진지한 얼굴로 녀석은 히죽 웃으면서 나의 앞으로 나섰다. 아마도 나름대 로는 극적인 등장을 꿈꾸었던 모양이지만 그건 인간에게나 통할 일이고 나 나 조인족 전사들에게는 통할 등장방식은 아니었다. 갑자기 순간이동으로 팍 하고 나타났다면 모를까 걸어오는 소리따위 다 알아듣는 우리들에게 뭐 가 극적인 등장이냐? "고왕국은 오래되서 고왕국이니까 오래된 신전이 있는 건 당연하겠지." "아니, 그런 말이 아니고 오래된 신들을 모시는 신전- 그것은 고왕국에서 도 이미 신앙이 흐트러진 신전이야." "오래된 신들이라면?" "이를 테면, 잊혀진 신들이라는 거지." "그건 좀 묘한 말인데. 녀석들이 노리는 게 뭐라는 거지?" "마신의 신전이지." "뭐?" "파괴와 칠흑의 신전. 오 테라쿠마-세카나파스의 신전." 너무 길어 못 외우겠다. "그 오 라는 그건 뭐냐?" "약 삼 천년 여 년 전에 몰락한 파스의 교도를 아나?" "당연히 모르지, 인간의 신따위 내가 알게 뭐냐?" 아크는 그 말에 한껏 미소지었다. 잘난 척하려는 의도가 너무나 눈에 보여 서 나는 그 놈을 한 대 후려갈겨 둘까 하고 생각했지만 녀석은 내 앞에서 사악 비키더니 조인족의 여왕앞으로 나아가서는 소름끼치는 목소리로 설명 을 시작했다. "오 테라쿠마 세카나파스란, 암흑신으로서 고대인들의 신 중에 하나지요. 원래 고대인-그러니까 우리들이 흔히들 말하는 고왕국의 기초성립시기에 있었던 인간들은 매우 신에 대해서 엄격했다고 합니다. 지금과는 딴판이지 만." 고대인간의 신앙체계를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외울 필요는 없지만 어쨌 든 간단히 말해서 이런 이야기다. 오 마리아크 파리안이라고 하는 빛의 신이 있고 오 테라쿠마 세카나파스 라는 암흑신이 있는데 그 서로 억세게 다른 신 둘은 매양 싸웠댄다. 허기 야 싸울만도 하지, 한쪽은 빛이요 한쪽은 어둠이다 보니 빛의 속성이 잘났 네, 암흑의 속성이 멋지네 하고 싸운 모양이다. 그 아래로 크고 작은 신들 이 줄지어 암흑 이겨라, 빛 이겨라 하고 쌈박질을 열나게 하고 있는 그 와 중에 빛과 어둠의 존재라고 불리는 인간이 툭 튀어 나왔다...라는 게 바로 고대인의 신앙이었던 모양이다. 물론 우리들 고대종족의 체계에서는 거인 족의 피가 흘러 인간들을 만들었다고 하지만 그건 또 우리들 이야기고 고 대인간들은 다르게 믿었던 모양이다. 뭐, 믿는 건 자유니까 아무래나 뭐 어떻겠나. 그래서 뭐 어찌된 것이냐 하면, 그 고대인들이 몰락하면서 뭐 이런저런 아 이템을 남겼다 그런 말인 거 같다. "뭔 아이템인데?" "암흑신의 아이템이라면 대체 뭐겠어?" 음침한 얼굴로- 백마법사 주제에 음침한 얼굴로 아크가 시익 웃어 보였다. "자신들의 마스터인 킬트를 엿먹일 그런 아이템이겠지." 내가 대꾸하자 아크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셈이지, 그리고 그들은 그것으로 고대인의 신을 부활할 수 있을거라 믿어." 그 말을 듣고 나는 조용히 그 놈의 목덜미를 쥐고 그리고 가볍게 흔들어 주었다. "케엑, 뭘 하는 거야?" "대체 왜 인간들은 고대 신의 부활이니 거인족의 부활이니 혹은 용족의 부 활이니 하는 짓거리를 그렇게 좋아하는 거냐?" ".......켁." 목줄기를 한참 뒤흔들고 있는데 그 때 갑자기 음침한 살기가 뒤에서일어 났다. "쿠베린!" "꺅!" 긴말 할 것도 없이 아크 놈을 그 자리에 던지고 잽싸게 뛰어 올랐다. 그러 나 그 순간 갑자기 엄청난 열기가 등줄기를 강타했다. 나도 모르게 켁 하 고 소리가 터져나왔지만 그 보다도 먼저 갑작스레 웬 돌덩이 하나가 머리 통쪽에서 쏟아진다. 우와 하고 소리를 다시 지르려 했지만 그도 어쩔 수 없는 터라 손바닥으로 돌덩이를 밀치면서 겨우 옆으로 피하는데 이번에는 발밑에서 시커먼 석순이 튀어 올라와 발을 잡아끌려고 한다. 이거 뭐얏! 필사적으로 두 다리를 교차하면서 손톱으로 석순을 후려갈겨 다시 공중으 로 치켜올라가는데 이번에는 옆구리쪽에서 뱀도 아닌 것이 그렇다고 벌레 도 아닌 것 팔뚝만한 게 수 십 마리 아가리 벌리면서 달려든다. 카악 카악 소리를 내면서 이빨을 드러내는 걸 보고 나도 모르게 이빨을 드러내면서 손톱을 휘둘렀다. 팍팍 하고 몇 놈을 잘라내어 핏줄기가 허공에 튀어 올랐지만 수 십 마리를 몽땅 베어버린 게 아니라서인지 아니면 베어버린 게 마음에 안들었던지 날 개도 없는 주제에 착지하려는 내 팔뚝과 목줄기에 답삭 달라 붙어 또아리 를 튼다. 이거 장난이 아니잖아! 콰악 조여드는 촉감에 열받아서 힘 줘서 이 놈을 끊어 내리려고 하는데 발 밑에서 또 뭔가가 튀어 나온다. "조심해욧!" 이건 또 뭐야! 비릿한 냄새를 풍기면서 눈알이 대글대글한 납작한 놈이 촉수 수십여개를 꿈틀거리면서 내 정강이까지 밀려왔다. 그 촉수가 닿자 마자 정강이가 아 찔하고 아픈 것이 이거 뭔 독이라도 있는지 모른다. 이런 젠장! 열받아서 그대로 전투 모드로 전환했다. 팽창한 근육이 그 놈의 뱀대가리 들을 터뜨리면서 튕겨내자 마자 바닥에서 구르고 있는 놈을 그대로 발길로 걷어찼다. 퍼억 하고 녀석을 걷어차고 나자 마자 또 등뒤로 뭔가 음침한 게 날아들어 온다. "이 놈!" 콰악 찢어주마 하고 고개를 돌려보니 어렵쇼, 날아들어 온 것은 검붉은 화 염구다. 젠장할! 아무리 나라도 정통으로 맞으면 최소한 머리칼은 그을리니까 일단 피하고 보자. 옆으로 몸을 비키자 마자 이번에는 또 새액새액 소리를 내면서 달려드는 게 있다. 우아아아아! 핏방울이 파파팍 하고 튀어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내 등뒤로 내 옆으로 발치로 머리 위로 그 뭔가가 날아들어서 사사삭 하고 베어버렸다. 보이지 도 않는 칼날 같은 것을 봐선 이거 뭔 윈드 블레이드 종류같은데! "적당히 해! 킬트!" 소리를 지른 것은 아크였다. 녀석은 시퍼렇게 된 얼굴로 두 손을 맞잡았고 그에 따라 새하얀 광막이 펼 쳐올라가면서 사방을 뒤덮었다. 그러자 마자 퍼엉 퍼엉하고 마법력이 부딪 쳐 나는 소리가 시끄럽게 귀청을 때려댄다. "젠장! 이렇게 난리를 치면 어쩌자는 거야? 여긴 엘프의 땅이라구!" 아크가 악을 질러대는 동안 나는 그제서야 주변을 돌아볼 수 있었다. 주변에 있던 녀석들 중에 날 수 있는 놈들은 다 날고 있고 날 수 없는 놈 들은 다 멀찍이 뒤로 물러서 있었던 까닭에 그 자리에서 열나게 피하고 맞 고 두들기고 있던 것은 나 혼자 뿐인 줄 알았건만 아크도 이 자리에 있긴 있었다. 어, 잘했다. 아크. 안그래도 너무 바빠서 말이야. 지나치게 심각하고 침울하며 음침한 얼굴을 한 킬트는 시퍼렇고 울긋불긋 한 얼굴을 하고는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녀석의 두 손안에 이글거리고 있 는 검은 화염은 나를 곧장 향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내가 움직이면 쏴댈 거 같다. 물론 녀석을 내가 좀 두들기고 벽장에 구겨 넣은 것 때문에 녀석이 화를 낼 수는 있지, 하지만 엘프의 땅에서 소란을 일으키면 좋지 않잖아? 그지? 게다가 나에게 마법을 연속해서 십여가지나 쏴제끼면 나야 뭐 피하면 그만 이지만 여기 있는 엘프들은 악악 하고 죽어자빠지지 않겠어? 그렇지 않나? 이성을 찾으라구. "뭐야?" 아크가 날 돌아본다. 아마 알아들었나 부다. 킬트 놈은 일그러질대로 일그러진 얼굴로 날 쏘아보면서 소리를 질러댔다. "이 놈! 날 그렇게 하고도 무사할 줄 알았냐! 죽어랏!" "내가 얼마나 성실히 네 놈의 연애상담을 해주었냐? 너는 은혜도 모르냐?" "이 죽일 놈아! 오늘 너 죽여야 겠다!" 이글거리는 두 손을 허공에 들고 뭔가 녀석이 스펠을 외우려는 찰나 나는 바닥에 떨어진 돌멩이를 주워서 맹렬하게 녀석의 면상을 향해 집어던졌다. 그러나 팽 하는 소리와 함께 돌멩이는 튕겨져 나간다. 아마 녀석은 이미 방어실드를 쳐놨던 모양이다. 아크의 얼굴이 퍼렇게 변했다. "너 미쳤냐! 여기다 소환수를 몇이나 부르려는 거얏! 안됏!" 아크가 마주 스펠을 외우려는 순간 하늘이 시커매졌다. 쿠쿠쿠쿠하고 분위기 잡으면서 하늘의 한 구석이 터엉 뚫리더니 그 다음에 는 번개가 치고 천둥이 친다. 엄청난 굉음 때문에 예민한 청각을 가진 자 들- 허긴 이 중에 예민하지 않은 자는 아무도 없다- 모두가 귀를 막고 괴 로워 했다. 꾸어어어어어어어 하는 소리와 함께 저 놈의 거창한 에다마리온이 등장했다. 뇌격의 소환수 에다마리온이 등장하자 아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미....미친 놈!" 그리고 그 뒤를 이어서 그레이트 키메라가 등장하자 아크는 질 수 없다고 외치면서 뭔가를 또 소리질러댔다. 그러자 그에 부응하듯이 새하얀 빛을 띈 소환수가 등장했다. 이번에 등장 한 놈은 나도 뭐가 뭔지 모르겠다. 일단 말 같기는 한데 다리가 여덟 개에 이빨이 흉측하게 아래로 내려온 놈이었다. 꼬리는 마치 묶어 매어 놓은 화 살처럼 날카로워 보였으며 덩치는 에다마리온과 비슷했다. 그런 놈들 셋이 허공을 가득 메우고 있으니 엘프들이 완전히 미쳐버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 었다. 쿠와아아아아 카아아아아아아 끄아아아아아아 세 놈은 서로 나오자 마자 악을 질러대면서 불꽃과 번개와 바람을 쏘아대 기 시작했다. 너무나 엄청난 크기라서 허공을 날고 있던 조인족들이 일제 히 지상으로 내려왔고 녀석들이 일으키는 바람 때문에, 존재감 때문에 근 처에 있던 모든 생물들이 일제히 숨을 죽였다. 하늘의 색깔은 이제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색깔로 물들어 흰색인지 파랑색 인지 검은 색인지 아니면 회색인지 빨강인지 알수 없게 되어 버렸다. 우르르 쾅쾅 하는 소리와 함께 에다마리온의 뇌격이 그 허연 말같은 것을 직격하자, 그 허연 말대가리는 입을 벌려 희고도 흰 화염비슷한 것을 내뿜 었다. 그러나 그건 화염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것이 나오자 마자 공기는 째앵 하는 소리와 함께 얼어붙을 것 같은 한기가 퍼져나갔다. 무지막지한 한기가 퍼져나오자 에다마리온의 뇌격이 파직 파직하면서 갑자기 방전되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성대한 불꽃놀이다. 불꽃놀이. "그만들 두지 못해!" 누군가 외쳤다. 그러나 아무리 위엄 넘치게 소리를 질러대도 이 엄청난 소환수들이 난리를 치면서 빛을 뿌리고 한기를 뿌리고 바람을 뿌려대는 이 와중에 통할 리가 없다. "그만 해!" 나타난 것은 엘프의 왕이었지만 이를 갈고 있는 킬트나 그에 못지않게 손 톱을 물어뜯고 있는 아크를 말리기엔 어쩐지 역부족이다. 그렇다고 소환수 를부리고 있는 아크를 함부로 잡아끌면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라 이 엉덩이는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는 상황에 빠진 듯 시퍼렇게 질 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숲은 완전히 공포에 질려있었다. 그 세 마리 소환수가 뿌려대는 그 엄청난 힘앞에서 아무리 암흑산맥이라고 해도 거목들이 뿌리채 뽑혀져 나가고 뇌격에 불타오르고 냉기에 허옇게 얼 어붙는 것을 면하지 못하고 있었다. 엘프들은 공포에 질려서 이리저리 뛰 어다니고 비명소리가 사방에 울려퍼졌지만 소환수들의 대결 때문에 공기가 얼어붙은 것인지 아니면 바람소리때문인지 거의 들리질 않았다. "그만! 제발!!" 갑자기 뚜욱 하고 에다마리온이 멈췄다. 그레이트 키메라가 지상을 내려다 본다. 킬트는 허공에 내밀던 손을 그대로 두고 고개를 돌렸다. 그 자리에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 킬트의 검은 옷자락을 쥔 카나리안이 있었다. KUBERIN....... 증오와 증오가 만나고 의지와 의지가 부딪치고 야만과 야만이 힘을 겨룬다 죽음이 명예롭다고 하는 자는 누군가 선혈이 아름답다고 하는 자는 누군가 12 수습을 마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난장판이 된 그 와중에 나는 팔짱을 끼고 앉아 있었다. 내 앞에는 킬트와 아크와 엘프의 왕과 조인족의 왕과 그리고 별로 마땅치 는 않지만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는 고왕국의 이태자란 놈이 앉아 있 었다. 얼어 붙을 듯한 침묵이 뒤통수를 치고 있는 동안 엘프 처녀 하나가 겁에 질린 얼굴로 탁자 위에 이런 저런 먹을 것을 내어 놓았다. 눈 부셔. 이 비비꼬인 엘프의 궁전을 지탱하고 있는 나무들 중 과반수가 나뭇잎을 삽시간에 잃어버려서 벌거벗은 모양새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들 뒤통 수로 햇빛이 쨍쨍 내리 꽂히고 있었다. 졸려 죽을 지경이다. 그러고 보니 편히 잔 지 얼마 되지 못하는 군. "그러니까....." 이태자란 녀석이 건방지게도 먼저 입을 열었다. "다시 말해서 그 미천한 룬드바르의 시골뜨기가 본왕국을 치러 오는 것은 고대의 몰락한 신전에 모셔진 아이템때문이라 그거요?" "예상일 뿐이오." 아크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녀석은 엘프의 왕에게 야단맞아서 무척 기분이 나쁘다. 어이구, 나이가 몇인데 아무리 자기를 키워주었다고는 하나 그래도 타인인 데 꼼짝을 못하냐? "그들은 마력석을 모으고 있고 고대신의 마력석은 흑마법사에게는 엄청난 물건이 되지. 그렇지 않은가? 룬. 킬.트. 더. 마.이.오.스.?" 아크가 거의 이를 갈면서 힘주어 묻자 냉담한 얼굴을 한 킬트가 대꾸한다. "그렇다고 볼 수 있지, 룬. 아.크. 더. 팰.리.어.스." "두 놈이 뭘 하든 신경쓰지 말자구. 엉덩이." 나는 두 놈을 내버려 두고 시선을 돌려서 엘프의 왕에게 물었다. "그럼 이제부터 어쩔 거야? 결국 녀석들은 마력석을 모아 뭔가 불세출의 마법을 하려 한다...어쩐다로 추측되긴 하는데 말야, 결국 녀석들은 전 대륙 을 석권한다 뭐 그런 소리 아니야?" ".......그렇게 되겠지,이미 대륙의 반이 넘어갔고." "녀석들이 동방교국까지 손을 뻗힌다는 이야기가 있어. 동방교국으로 넘어 가는 동북산맥에 녀석들이 와서 회색늑대의 일족을 건드렸다는 군." "대체 놈들은 어디까지 뻗어나가려는 걸까? 무리라는 것을 모르는 걸까? 단지 룬드바르라고 하는 소왕국에서 일어난 자들이 어떤 국력이 있어서 전 대륙을 집어 삼킬 수 있다는 건가? 동방교국이라니? 동방교국에 어떤 자들 이 있을 줄 알고 그 쪽으로 가는 거야?" "나한테 물어도 난 몰라." 하여간 인간들이란, 경이다. 엉덩이는 한숨을 내쉬고 다시 옆을 보았다. 이태자란 녀석은 아까 아크와 킬트의 그 무지막지한 대결을 보았는지라 두 놈이 자신을 무시해도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렇지만 방금 들은 그 말이 무척 흥미진진했는지 다시 재차 묻는다. "그 고대의 아이템이란 게 그렇게 대단하다면 왜 알려지지 않은 거지? 그 리고 그건 대체 어떤 힘이 있는 거지?" "마신의 부활이란 점에서 흑마법사에게 무척 흥미진진한 부분이겠지요." 설명하기 좋아하는 아크와 달리 킬트는 원래 설명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 다. 녀석이 입을 열 때란 잘난 척할 때와 스펠을 외울 때가 고작인 지라 녀석은 아크가 잘난 체 하고 설명하는 그 상태로 내버려 두고 있었다. 그 런 그의 모습을 카나리안이 묵묵히 바라보고 있다. "마신의 부활이라면? 고대신의 부활? 그 암흑의 신을 강림시켜서 그 힘을 자신의 마법력으로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 말할 수 있겠죠. 원래 마법력이란 것 자체가 본래 있었던 정령과 자연과 신의 힘을 빌어 운용하는 것이니 말이오, 이 땅에서 신관이란 원래 는 신의 힘을 강령시키는 자들이었지만 요즘은 신관이란 게 없으니까." "고왕국에는 신관이 있소." 모처럼 이태자가 진지하게 말했다. "왕실의 수호신을 모시는 신관이 있소. 일루미나야 여신의 신관인데 그들 은 제례의식을 전담하고 있소." "제례의식?" "1년에 한번씩, 그리고 19년에 대제례의식, 그리고 대관식이오. 우리들은 전부 참석해야 하고 반드시 태어났을 때 일루미나야 여신에게 고해야 하 오." "그러고 보니 고왕국에선 왕족을 왕족이라고 부르는 게 아니라 신인(神人) 이라 부른다더군." 비꼬듯이 킬트가 끼어들었다. 이태자는 그를 무례하다는 듯이 코끝으로 바라보면서 낮게 말했다. "그 일을 집전하는 것이 신관, 신관은 약 이십여명 있고 모두 치유력과 기 도력이 있소." "그 기도력이라는 게 어떤 것이요?" 궁금한 듯이 아크가 물었다. "말로는 설명이 조금 모호한데....기도하면 이루어지는 것이오." "....저주?" 킬트가 캐묻듯이 묻자 이태자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무슨 소릴!" "흐흐흐흐.....정곡을 찔렀나? 완전히 고여 썩어가는 고왕국의 왕실다툼에서 신관들이라고 하는 것들이 하는 게 뭐가 있겠나? 저주겠지? 저주력을 말하 는 거지?" "입 닥쳐라!" 이태자의 얼굴이 퍼렇게 물들었지만 아크는 상관하지 않고 다시 물었다. "고왕국의 신앙은 어떻게 되어 있는 거요? 일루미나야 라고 하는 여신 혼 자뿐인가?" "아니, 신께서 말씀하시길, 대신(大神) 코카움이 어느 날 두 쌍둥이를 낳 았는데 그 중 빛을 가리키는 것이 오른 편의 여신 일루미나야, 어둠을 가 리키는 것이 왼편의 남신 쿠스차야. 그들의 대립이 낮과 밤을 만들고 선과 악을 만들며 귀한 것과 천한 것을 만들고 하늘과 땅을 만들었도다...라고 되어 있소. 그런 까닭에 미천한 천민들의 신은 쿠스차야의 신전에서, 우리 들의 신은 일루미나야라고 하는 것이지." "흠흠.." 아크는 고개를 끄덕 끄덕 하면서 이해한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뭔가 굉장히 어긋나 있는 것 같은 이야기구만. "그리하여 일루미나야 여신의 화신인 빛과 생명의 호레아이엘께서 숲의 청 년 제스엔과 맺어져 그 인연이 인간에게 이르르다 라고 하는 것이오." "뭐? 여신의 화신?" 거만한 어조로 떠드는 녀석을 멀건히 바라보다가 나는 엉덩이를 바라보았 다. 엘프의 왕의 얼굴은 무덤덤하다. 이미 너무나 겪어서 나는 할 말이 없소 하는 것 같은 그 얼굴에 동정이 절 로 간다. "너무 놀랄 거 없어. 쿠베린, 실제로 고왕국 왕족들의 수명은 이백년인데 반해서 평민들은 오십여년, 천민들은 삼십념정도 밖엔 안돼." 옆에서 아크가 내 얼굴을 보며 친절한 척 설명해 준다. 뭔가 무척이나 이상한 나라구만 하고 생각하는 건 나만이 아닌 것같다. 킬트는 무심한 표정속에 경멸을 띄우고 이태자를 보고 있었는데 이젠 증 오에 가까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결국 뿌리는 고대신앙과 다를 바 없군, 고대신화를 차용해 온 것같아. 그 럼 그 암흑신 쿠스차야를 섬기는 신관도 있을 거 아니오?" 아크가 질리지도 않고 묻자 이태자는 경멸에 가까운 듯 묘한 미소를 짓고 흥 하고 웃었다. "그런 천한 것들의 신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소. 신관이 있는 지 없는 지 나는 모르오." "그런 주제에 마력이 깃들어 있다는 아이템에 대해선 흥미진진한가부지?" 킬트가 비꼬자 이태자는 눈을 치켜뜨면서 그를 쏘아보았다. 막 뭐라 쏘아 붙일 것처럼 이태자가 입을 열려는 순간 여지껏 조용히 있던 조인족의 여왕이 입을 열었다. "전부터 궁금한 것이지만, 킬트 더 마이오스, 흑마법의 마스터여. 대체 왜 그들은 조인족과 사인족, 묘인족들을 납치하는 것이지?" 그 말에 일제히 시선이 킬트에게로 쏠렸다. 킬트는 그 말에 나와 조인족의 여왕을 번갈아보더니 대답했다. "문제는 힘이오. 인간의 능력을 벗어나는 힘." KUBERIN....... 증오와 증오가 만나고 의지와 의지가 부딪치고 야만과 야만이 힘을 겨룬다 죽음이 명예롭다고 하는 자는 누군가 선혈이 아름답다고 하는 자는 누군가 13 자신에게 없는 것을 구하는 것. 그것을 갈구한다고 하는 것이겠지. 그리고 때로는 아름답게, 혹은 추악하게 드러나는 감정. 질투와 시기와 부러움. 동경 같은 것. 날 수 있는 것들을 동경하는 땅 위를 걷는 것들. 내달리는 것들을 동경하 는 기는 것들. 커다란 것을 동경으로 바라보는 작은 것들. 강한 것을 동경하는 약한 것들. 그것을 전부 싸잡아 싸가지 없는 것들이라고 할 수는 물론 없다. 삶이라는 것은 참 이상한 것이다. 오랜 시간을 살아와도 부러운 것은 부러 운 것이다. 가끔 나는 내가 조인족처럼 강인한 날개를 가졌다면 내가 얼마나 강해졌을 까를 상상한다. 조인족같은 날개를 휘감고 허공을 나르고 가끔 발 끝에 물 도 적시지 않고 큰 강을 건넌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궁금도 하다. 하지만 내가 묘인족으로 태어난 것에 대해 후회따윈 없다. 나는 워낙에 잘난 분이시고 더 이상 잘나기가 어렵기 때문에 날개가 없는 것이다. 절세 미남자에 지상최강자에 현명하기가 이루말할 수 없는 이 흠잡을 데 없는 이 몸께서 날개까지 달렸다면 그것은 아마도 세상 모두가 불공평하다 고 땅을 치고 통곡하겠지. 그러니까 나는 나에게 만족한다. 뭐어, 수많은 존재들이 저 마다 나도 쿠베린님처럼 튼튼한 팔 다리를 가 졌으면 좋겠다든가 쿠베린님처럼 강해졌음 좋겠다든가 쿠베린님처럼 아름 다운 미남자가 되고 싶다든가 쿠베린님처럼 현명해졌으면 좋겠다든가 하는 마음을 먹는 거 다 이해한다. 당연하지, 당연하고 말고. 그렇지만 내 피를 뽑아다가 나같이 되겠다는 것은 아무래도 심하지 않은 가? 나처럼 어렸을 때부터 무수히 싸움과 단련을 거치면서 강함을 손에 넣은 것도 아니고, 단지 주둥이 나불나불하면서 남의 피 뽑아 강해지겠다는 건 때려죽일 도둑놈 심보인 것이다. 내가 어디 처음부터 강했던가? 내가 어디 처음부터 현명했던가? 내가 어디 처음부터 멋졌던가? 다 다년간에 쌓아온 경험과 수많은 시련과 시련 속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한 것을 단 한순간 에 얻겠다고 비비적거리는 놈들을 용서한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물론, 말이 안되고 말고. 그런 놈들은 다 때려죽여야 한다. 그런데 그게 바 로 인간이다. "강한 존재를 만들고 강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 수많은 인간들이 노력하고 연구해 왔다. 나 역시 마찬가지, 수많은 인간의 몸뚱이를 이어 받고 이용하 면서 계속해서 연구해 왔다. 언젠가는 뭔가 최고의 것을 얻도록 말이다." "그 최고가 뭔데?" 킬트는 나를 스산하고도 음침하게 바라보았다. 여전히 녀석의 눈깔은 기분 나쁜 음험함으로 가득 차 있다. "내가 알기로 이 대륙에서 가장 강한 육체를 가진 것은 묘인족이다. 지상 에 살아남은 종족중 가장 강하다고 할 수 있지. 변신하면 살갗은 평상시의 몇 배나 강력한 탄력을 가지고 손톱은 강철칼날보다 날카로우며 움직임은 인간의 육안으로는 찾아내기도 어렵다. 게다가 치유력은 순식간에 찾아들 어 가벼운 찰과상은 순식간에 아물고 관통상도 내장이 뚫려 터지지 않는 한 하루면 아문다. 물론 팔 다리가 떨어졌다든가 뼈가 완전히 으스러진다 면 다리 정도는 절겠지만 그 속도나 강한 힘은 여전하지. 세상에 그런 종 족은 없어." 나는 팔짱을 끼고 녀석이 지껄이는 것을 듣고 있었다. 그렇지만 뭔가 조인족들은 불만인 듯 프루엘이 입을 열었다. "조인족도 묘인족만큼은 강하오." "그러나 조인족에겐 핸디캡이 있지." 짧게 킬트가 대꾸했다. "조인족은 태어날 때부터 전사와 일반적인 보통 조인족으로 나뉜다. 그 비 율은 오십대 오십도 안돼. 아마...삼분지 이는 보통의 아름다운 날개를 가진 아인족과 다를 바 없지. 그러니까 전원이 당장에 싸울 수 있고 전원이 다 변신이 가능한 묘인족하고는 다르다 할 수 있어. 게다가...한 가지 차이는 조인족이 날개를 잃게 되면 묘인족보다도 힘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프루엘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나는 묵묵히 킬트 놈을 보고 있었다. 이 놈은 분명히 연구를 꽤 많이 했다. 인간 중에서 조인족을 알고 묘인족을 제대로 아는 놈은 거의 없다. 우리들 을 괴물 내지는 아인족의 한 갈래로 보는 놈들이 얼마나 많은가. "묘인족의 팔 다리가 금방 아무는 것에 비하면 조인족의 날개는 지나치게 섬세해서 날개뼈를 다치게 되면 전사라 할 지라도 금방 아물지 못하며, 때 로는 날개를 쓸 수 없게 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그 능력은 금방 반으로 준다고 할 수 있지." 조인족 전사들은 불만을 표시하고 있었지만 입을 열지는 않았다. 만약 우 리 일족이었다면 당장 멱살 쥐고 흔들면서 너 죽어볼래를 외쳤겠지. "사인족은 말할 것도 없다. 고대종족 중에서 사인족이 가장 취약하다. 사인 족의 변신단계는 최고가 3단계라고 하지만 묘인족은 몇단계가 한계인지 확 실치 않고 조인족 역시 4단계까지는 가능하니까. 게다가 변신해도 사인족 은 묘인족처럼 뛰어난 치유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역시 묘인족과 싸울 경우는 이기기 어렵지, 숫자가 아주 많기 전에는." 그렇다. 사인족은 원래 일대 일로 싸우는 놈들이 아니라 떼거지로 덤비는 놈들이다. 취약한 몸을 감추기 위해 녀석들은 간혹 갑주까지 걸친다. 무기도 들기도 하지. "그 덕분에 사인족은 무기를 사용한다. 고대 종족중에서 무기를 사용하는 자들은 그들 뿐. 갑옷이나 무기를 사용해서 다수로 공격한다. 그건 인간이 나 다름이 없는 행동이지만 말이야." 킬트는 낮게 웃었다. ".....그러나 사인족에겐 장점이 있다. 아니, 있었다. 그건 바로 어느 종족의 여자와 맺어져도 사인족이 태어난다고 하는 것이지. 그 덕분에 사인족은 고대종족 중 가장 수가 많았었다. 묘인족은 절대로 묘인족 이외의 종족과 의 혼혈이 생겨나지 않는다. 조인족도 마찬가지. 절대로 혼혈이란 것은 생 기지 않아. 그래서 언제나 숫자는 한정되어 있었지.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 고. 그러나 사인족은 기괴하게도 절대로 사인족만이 태어난다. 그래서 숫자 를 불리기엔 따악 좋은 듯했고 그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듯했 지." "그러나 지금은 완전히 상황이 바뀌었어." 아크가 짧게 끼어들었다. "맞아, 완전히 바뀌었지. 사인족의 여자는 원래가 수가 적었다. 그리고 사 인족은 여자를 중요히 여기지 않아. 묘인족이나 조인족은 여자들을 소중히 하지.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것은 그들뿐이니까. 그러나 사인족은 여자를 소 중히 하지 않았다. 여자는 힘이 부족하기 때문에 별로 부족에 도움이 안되 니까 여자애가 태어나면 귀찮다고 죽이기까지 했다." 그 말에 조인족 여왕의 뺨이 가늘게 떨렸다. "그 결과가 이거다. 사인족의 여자는 거의 없다. 아니, 지금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수컷만 존재하는 일족. 그 일족은 반드시 멸망하지." 킬트는 재수 없게 킬킬 웃었다. "그런데 왜 사인족의 아이가 태어나지 않게 된 거요?" 조인족의 여왕이 조용히 물었다. "그건 아무도 몰라. 누구 말대로 죽음과 멸망의 신이 사인족을 훑고 지나 갔는지도 모르지, 그리고 오래된 일족들이 결국은 멸망해 가리라는 징조일 수도 있지." 전율하는 조인족들 사이에서 킬트는 내쪽을 바라보았다. 기이한 웃음이 매달린 그 얼굴을 내게 돌리면서 녀석은 조소했다. "아무리 강한 존재라도 결국은 멸망해 가는 거지. 그건 아무도 막을 수 없 어. 다른 일족과 섞이지 않는다는 것은 희망이 없다는 것과도 같아." 킬트는 다시 아크를 보았다. 아크 녀석도 녀석답지 않게 시선이 마주치자 고개를 가볍게 끄덕여 보인다. 마치 동의하듯이. "그것이 우리의 결론이다." 우울한 침묵이 스쳐나갔다. 나는 팔짱을 낀 채 녀석들이 하는 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도 입을 열 려고 하지 않는다. 엘프들도 뭔가 전율을 느낀 것인지 착잡한 표정을 지은 상태로 침묵하고 있고 아이들마저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물었다. "어차피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멸망을 향해 나아가는 거야. 앞으로의 일을 걱정하느라 눈 앞의 일을 빼 먹을 수는 없지. " 너, 뭔가 논점을 흐리고 있는 거 같은데 지금 내가 묻고 싶은 것은 네 제 자들이 있는 곳이야. 내 아이를 찾아내고 녀석들을 죽여주는 게 지금 내가 가장 하고 싶은 일이란 말이다. 여기서 멸망하네요 죽어가네요 앙앙거릴 여가는 없단 말이다. 미래의 일은 미래에. 현재의 일은 현재에 해결해 놓고 보자고. 그 말에 킬트가 크 하고 다시웃었다. "좋아, 힌트는 주지. 녀석들은 고왕국으로 가 있을 게다. 고왕국의 신전을 뒤져보라구. 거기서 뭔가 하고 있을 게야." "이봐! 그럼 녀석들이 이미 고왕국에 들어가 있을 거라고 말하는 건가?" 갑자기 놀란 이태자가 끼어 들어 되물었다. "물론이지." 킬트는 재미있어 견딜 수가 없다는 듯이 히죽 웃었다. 고왕국으로 향하는 길은 노스 엘스턴에서 상당히 떨어져 있었다. 우리들이 나름대로 마킹을 하는 중간 중간에도 엘프들은 긴장된 상태를 늦 추지 않고 있었다. 대체 왜 엘프와 고왕국이 왕래를 끊었던가? 그 이유를 내가 아크에게 묻자 아크는 불쾌한 표정으로 잘라 말해주었다. "그건 고왕국의 인간들이 너무나 이기적이기 때문이야." 아크는 본인이 엘프라고 생각한다. 자신은 인간이 아니고 엘프라고 생각하 는 지 모든 것을 거의 엘프쪽에서 생각한다. 이걸 불쌍하다고 봐줘야 하는 지 아니면 한심하다고 생각해야 하는 지 잘 모르겠다. "그건 고왕국만이 아니라 원래 인간들의 속성이고 왜, 대체, 어째서 왕래를 끊었느냐고 묻는 거야." 우리들은 지금 어울리지 않게 마차를 둘러싸고 걷고 있었다. 물론 그 마차에는 그 이태자란 녀석이 타고 있었으며 원래 말을 타지 않는 엘프들은 걷고, 조인족들은 날고, 우리들은 걷고 있었다. 아크 녀석은 이태 자랑 같이 타는 것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 양 엘프들과 같이 걷고 있 었는데 그 움직임은 그런대로 엘프들이랑 비슷해서 속도 자체는 늦지 않았 다. 엘프들은 원래 걷는 속도가 빠르다. 아니, 빠르다기 보다는 민첩하다고 말 해야 될까? 숲 안에서 그들이 걷는 모양새는 비교적 쓸만하다. 우리들은 속도를 엘프들처럼 조절해 걷지 않지만 엘프들은 사냥하는 것도 아닌데도 뭔가 두리둑닥 두리둑닥 하는 리듬을 타고 걷는 것처럼 느껴진 다. 어쩌면 나뭇잎이 살랑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풀잎들이 누웠다 일어났 다 하는 것같기도 하는 그런 리듬감. 아마도 그래서 숲에서의 엘프들의 움 직임은 보기 좋은지도 모르고, 눈에 잘 띄이지 않는 지도 모른다. 엘프들과 나무들을 마구 섞어 놓으면 엘프들은 마치 숲 구석 돌멩이처럼 잘 눈에 띄 이지 않는다. 그런 그들 사이로 보이는 고왕국인들의 모습은 어딘가 어색한 어린애들의 걸음마같이보인다. 나무들이 뻗친 가지나 자잘한 풀뿌리, 돌부리, 드러난 나무뿌리들을 어색하게 피하면서 엉거주춤 걷는 양 보인다. 아무 생각 없 이 그들을 보고 있노라면 우습게도 두리둥둥 박자 맞춰 걷는 엘프들은 무 희들 같고 고왕국인들은 어색하게 그 뒤를 따르는 난생처음 무도회에 참 석한 애송이들같이 보인다. 거기에 비한다면 내 일족들은 뭐랄까 어슬렁 어슬렁 먹이를 노리는 맹수의 자세이긴 한데, 급하지 않아서인지 하는 짓 들이 자다 깬 야수들 내지는 졸려서 어쩔 줄 모르는 산짐승들처럼 보인다. 아닌 게 아니라 아이들은 자다 억지로 깨운 야수처럼 내내 하품을 하고 있 다. "고왕국의 인간들과 왜 거래를 끊었냐고요?" 어느 새인지 아크의 옆에 있던 엘프중 하나가 내 말을 듣고 끼어든다. 이 건방진 태도에도 불구하고 내가 잠자코 있었던 것은 녀석이 카산이기 때문 이다. 카산은 눈살을 찌푸리며 마차를 노려보았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모른다드니 어떻게 아냐?" "물어봤어요. 어머니에게." "그랬더니?" "....." 카산은 심각하게 마차를 다시 노려본다. 입술을 깨물다못해 잘근잘근 되씹 는 것을 보니 뭔가 진짜심각하긴 한 모양이다. "엘프사냥을 했다네요." "뭐?" "엘프사냥 말입니다. 인간들이 간혹 약한 엘프의 마을을 덮쳐서 노예시장 으로 끌고 가잖아요. 그거 말에요." "고왕국인들이 엘프사냥을 했다구?" "네, 그것도 엘프 사냥만이 아니고... 엘프를 잡아다가 자신들의 거처에 가 두어 두고......강간하거나 피를 뽑아 마셨대요." 농담이겠지. 내가 녀석을 보자 카산이 심각하게 말했다. "한...이백여년전에 달아난 엘프가 그 사실을 노스 엘스턴에 알렸대요. 그래 서 왕께서는 고왕국과의 인연을 끊겠노라고 말씀하셨고....아니 정확히 말하 자면 인연을 끊는다기 보다는 전처럼 왕래를 갖지 않겠다고 하셨답니다." "당장 쫓아가 죽여버리지 않았어? 그걸 가만 놔둬?" "고왕국의 왕실에서 이 사실을 알고 그 당사자인 고왕국인들을 엄중 처벌 했어요. 그리고 그 시체를 노스 엘스턴에 보내왔었답니다. 그래서 왕께서는 흥분한 엘프들을 진정시키기만 했었죠." "대체 왜 그런 짓을...? 고왕국인들은 자신들이 스스로 반엘프라 부르는 놈 들인데?" 내가 중얼거리자 옆에 있던 아크가 낮게 말했다. "간단히 말해서 고왕국 왕실에만 흐르는 엘프의피를 자신들도 가지고 싶 었던 거야." 결국 수명을 늘리고 싶다는 말인가? 엘프의 피가 섞이면 수명이 늘어난다. 심지어 더 현명해진다고 믿기도 하 고, 정령술을 구사할 능력을 소유하게 되는 경우도 생긴다. 그래서 왕족 이 외의 귀족이나 돈 있는 자들이 자신들의 가문에 엘프의 피를 소유하고 싶 어서 잡아 들이고 납치해서 남자든 여자든 가리지 않고 강간했다는 이야기 인가? 세상에나. "............무섭지요? 인간들이란...." "자신이 엘프라고 하는 놈들이 하는 짓이 그거라면 다른 놈들은 말할 나위 도 없군." 차라리 이뻐서 갖고 싶어요 하는 놈들이 덜 끔찍하구만. "멈춰라!" 반나절 정도 걸었고 또 해가 지기 시작할 즈음이 되었을 때야 비로소 결계 석을 볼 수 있었다. 그늘진 수풀 한 구석에 놓인 거대한 결계석은 천여년 은 족히 되었을 오래 묵은 물건으로 시커먼 이끼가 잔뜩 끼어서 나는 오래 되어요 라고 온 몸으로 말하고 있는 화강암이었다. 결계석이라고 해봐야 뭐 조인족처럼 마력석을 쓰는 자들은 거의 없으니까 이 돌 자체는 크기만 클 뿐 평범했지만 그 주변에서 눈을 빛내고 있는 갑주를 걸친 녀석들은 그 다지 평범하진 않았다. "어서 오십시오! 전하!" "전하를 맞이하옵니다!" 네 명의 기사인지 뭔지 잘 알 수 없는 놈들이 일제히 무릎을 굽혔다. 초록색의 갑주는 뭘로 만들어졌는지 나도 모르겠다. 솔직히 말해 알 바도 아니다. 그다지 단단해보인다기 보다는 어디까지나 멋을 위해 만들었음직 한 그 갑주를 입은 녀석들은 마치 새처럼 붉은 깃털을 단 투구를 머리에 쓰고 레이피어를 옆구리에 끼고 있었다. 고왕국인들 대부분이 전부 레이피 어를 선호하는 모양이다. 그리고 모두다 가느다란 허리를 강조하기 위해서 인지 허리를 잔뜩 동여매고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수 없을 정도로 가는 다 리를 고스란히 드러내 놓고 있다. 이태자란 놈은 거만한 태도로 코끝으로 끄덕이며 말한다. "음, 침입자는 없었느냐?" 세모꼴의 턱이 아무래도 보면 볼수록 웃겨서 나는 이 놈을 세모턱이라 부 르기로 마음 먹었다. "없었습니다만... 지금 막 마튜스로부터 급전이 왔습니다." 진지한 얼굴이 된 둥근 얼굴의 녀석이 세모턱을 직시한다. "마튜스로부터?" "네, 마튜스가 막 함락되었다고 합니다!" KUBERIN....... 증오와 증오가 만나고 의지와 의지가 부딪치고 야만과 야만이 힘을 겨룬다 죽음이 명예롭다고 하는 자는 누군가 선혈이 아름답다고 하는 자는 누군가 14 "케논!" 이에르네가 비명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나는 그렇게 말한 녀석의 머리칼을 쥐어 틀어 잡아 당겼다. "우앗!" "언제? 언제냐?" "....우아..이거 놔! 네, 네놈 이 무슨 짓이냐!" "말해! 언제냐!" 입을 벌린 이에르네와 유티아는 새파랗게 질린 상태로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는 녀석의 머리털을 쥔 채로 집어던져버렸다. 카악 하고 녀석이 널부러지자 마자 다음 녀석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대답해!" "누, 누구.." 녀석도 버벅거린다. 이 버벅거리는 녀석의 머리통을 으스러뜨리고 싶은 충 동을 억누르면서 나는 다시 녀석을 집어 들었다. "말해, 언제 함락되었냐? 대답해!" "아..으, 으으으..." 녀석의 얼굴이 시퍼래지든 말든 내 알바가 아니다. 녀석이 말을 못하기에 나는 다시 녀석을 집어던져버렸다. 그리고 다음 녀석을 쥐어 틀려는 순간 그 다음 녀석이 재빨리 외쳤다. "이십 바르 전에 마법사의 수정구로 연락이 온 거요!" "이십 바르?" "반나절쯤 되는 시간이야." 옆에서 아크가 덧붙였다. 나는 몸을 틀어서 그렇게 대답한 녀석을 쏘아보았다. "반나절 쯤 되었다면 오늘 새벽이냐?" "그, 그렇다...오늘 새벽 마튜스가 함락되어 성주 이하의 몇몇이 탈주했다고 연락이...." 덜덜떨면서 대답하는 녀석의 옆으로 이태자란 녀석이 대어들 듯이 나에게 외쳤다. "이 무슨 무례한 짓거리냐!" 그렇게 지껄이는 녀석의 면상을 한 대 후려갈기고 나는 듀나시와 다크를 돌아보았다. "나는 돌아간다." "에?" 옆에서 소리를 지른 것은 카산이었다. 엘프들은 나를 멍하니 바라본다. "마튜스에서 인간들이 도망쳤다는 걸 들으니 아이들도 무사하겠지. 그러나 미트라가 걱정이다. 난 가보겠다." 다크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옆에서 아크가 외쳤다. "이봐, 쿠베린, 지금은 저쪽이 더 중요한 거 아냐? 고왕국 신전에서 그마 법사 놈들을 찾아내어 아이들을 구하는 게 우선 아닌가?" 내가 녀석을 돌아보지도 않자 갑자기 누군가가 큰 소리로 되물었다. "일족을 구하러 가는 게 여자를 구하러 가는 것 보다 우선 아닌가요?" 그렇게 말한 녀석은 만신창이인 주제에 고집세게 달라붙어 있는 수인족의 케슈파란이었다. 그 녀석은 엘프들을 헤치고 내 앞에 다가와 외쳤다. 뭔가 필사적인 분노를 억지로 참고 있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당신은 왕으로서의 의무라는 걸 모르는 겁니까? 한낱 인간 애인 때문에 여기까지 와서 되돌아가다니! 당장일족을 구하러 가지 않으면....!" 이 놈이 간이 부어 배 밖으로 튀어 나왔군. "의무?" 나는 듀나시를 흘긋 보았다. 듀나시는 여전히 냉정한 얼굴이다. "내가 없으면 일족이 무너지냐?" "아뇨." 듀나시가 덤덤하게 대꾸했다. "내가 없으면 못 구하냐?" "아닙니다." 케슈파란과 아크가 입을 벌릴 때 나는 그들을 돌아보았다. "일족은 나의 짐이 아니다. 내가 없다고 해서 나의 일족은 약해지지 않아." 별 웃기는 소릴 다하고 있군. 케슈파란은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다. 뭔가 멍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하지만............" "너희들은 그 마법사 놈들을 없애고 아이를 구해." "알겠습니다." 다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 있던 굳은 얼굴의 로오나를 흘긋 보았다. 그 녀는 얼굴이 흥분으로 달아올라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구해내지 않으면 안되는 자신의 아이를 상상하면서 앙상해진 뺨으로 열기를 드러내고 있었 다. 그런 그녀의 옆에서 아소미나가 어미의 옷자락을 움켜 쥐고 입술을 깨 물었다. 나는 로오나의 머리를 잡아당겨 가볍게 안아주고는 옆에 선 케이링을 바라 보았다. 케이링은 날카로운 눈으로 날 쏘아보고 있었다. "그따위 인간계집애 때문에 돌아간다구?" "그 계집애는 약하니까." 케이링은 눈을 가늘게 뜨고 날 쏘아보았다. "죽여라. 그리고 구해라. 알고 있겠지?" 케이링은 고개를 억지로 끄덕여 보였다. 그리고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아 이들을 추스르듯이 어깨를 잡아 당겼다. 그런 모습을 보다가 나는 이에르네와 유티아를 돌아보았다. "같이 갈 거냐?" "네. 아이들이..." 유티아가 불안한 눈동자로 중얼거렸다. "그럼 출발한다." 나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달리고 달리고 달린다. 아이들이 있었고 미트라가 있었다. 마튜스가 안전하리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내 착각. 갑자기 미트라의 얼굴과 린의 얼굴이 겹쳐졌다. 아이들보다도 그녀가 더 걱정되는 것은 그녀가 약하기 때문. 한 순간의 실수로만으로도 그녀는 죽 는다. 가벼운 칼질 한 번에도 그녀는 죽는다. 내가 왜 그녀를 데려왔던가. 내가 왜 그녀를 마튜스에 두었던가. 발 끝에 닿는 풀잎들이 비명을 올린다. 말라 비틀어진 낙엽들이 내는 소리 가 살아있는 것들의 단발마처럼 들린다. 농후한 숲의 향기는 썩어가는 시 체의 악취처럼 느껴진다. 숲, 숲, 숲, 어둡고 무거운 숲, 어디에도 이렇게 무거운 숲은 없다. 암흑의 세룩-엘라마이야. 대지의 여신이여, 숲의 여신이여 나에게 길을 열어줘! 나에게는 시간이 없 다! 시간의 여신이여 내 앞으로 길을 열어줘! 시간은 멈추어 내 발 끝에 머물 게 해줘! 시퍼렇고 시커먼 것들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대체 저것이 어떤 식으로 생겨난 것인지 짐작도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검은 몸체에 뻗어나온 촉수는 마치 민달팽이처럼 꿈틀거리면서 전진하고 있었다. 속도는 그다지 빠른 편은 아니지만 지나쳐오는 곳 모두는 전부 녹 아들고 있었다. 덤벼드는 마튜스의 병사들의 화살은 그 놈에게 닿자 마자 튕겨나가 버리고 칼날은 제대로 들어가지도 않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녀석들이 촉수에서 뿜어내는 액체에 닿자 병사들은 산채로 녹아간다. 비명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리고 공포에 젖은 병사들이 어색한 칼질을 계속 하고 있다. 그 검은 괴물은 움직일때마다 점액질로 번들거렸다. 앞 뒤로 길죽한 촉수 가 세 개씩, 모두 여섯 개의 촉수를 꿈틀거리면서 뭔가 허연 액체를 뿜어 내고 있었는데 독액처럼 보였다. 그것들이 꿈틀거리면서 기어다닐 때마다 퍼런 액체가 마치 흔적처럼 남았다. 처음에 등장했을 때는 너무 느려서 병사들도 두려워하지 않았었지만 이것 이 칼도 화살도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들의 얼굴은 공포 로 뒤덮혔다. "으아아악!" "죽어라! 괴물!" 비명소리가 산산이 퍼져나가고 있었다. 게다가 이 괴물은 마튜스의 성벽을 꿈틀대면서 계속 기어올라오고 있었다. 수백마리나 되는 것들의 이 행진에 는 모두들 기가 질려버렸다. "불로 공격해봐!" 뜨거운 기름을 뿌리고 그 뒤를 이어서 화염을 부리는 마법사들과 정령사들 이 튀어 나와 계속해서 공격을 퍼부어댔지만 괴물은 몇몇으로 정통으로 얻 어맞은 놈들만 빼고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제기랄! 저게 대체 뭐란 말이야!" 튜나가 다시 자신의 활을 휘어 잡으면서 고함을 질러댔다. "자아, 정령들아, 나에게 힘을 빌려줘!" 공기 중에서 잉잉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그녀를 향해 무언가가 치달려온다. 보고 있던 자들 모두가 그녀를 흘긋 흘긋 볼 정도로 그녀의 힘은 강력한 울림을 가지고 있었다. "나의 친구, 모든 더러운 것을 정화하는 불의 마력이여, 깨끗함을 숭상하 는 천연의 마력이여,이제 내 화살에 내리어 그대의 힘을 보여라!" 그녀의 활이 팽팽하게 만월을 그렸다. 그리고 그 순간 불의 소용돌이가 일어나 둥글게 나선형을 그리면서 치솟아 올랐다. 마치 살아있는 뱀처럼 꿈틀거리는 그 엄청난 화력에 주변에 있던 자들이 일제히 뒤로 물러섰다. 그 화염의 소용돌이는 살아있는 짐승마냥 천천히, 그러나 점점 커지면서 주변을 압도했다. 이글거리는 화염의 열기로 차갑던 밤의 공기가 들끓기 시작한다. "나의 친구, 바람의 정이여, 그대 힘을 빌어 이 열기를 퍼트려라! 가장 강 력한 바람을 일으켜 나의 적을 부셔라! 부셔라! 부셔라!" 악을 지르는 것같은 고함소리와 함께 그녀의 활이 꿈틀거리면서 화살을 토 해냈다. 콰아아아아 하고 공기가 찢어지며 굉음이 터져나온다. 그리고 투명한 그 무엇인가가 꿈틀거리면서 허공 중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마치 새처럼 보이는 그 것은 날개를 활짝 펴고 지상 위에서 꿈틀거리는 그 괴물들을 향해 내리 꽂히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허공 중에 떠돌고 있던 화염이 그 날개 짓에 따라서 아래로 소용돌이쳤다. 모든 사람들이 동시에 귀를 막았다. 끼아아아아아아아아 괴이한 비명소리와 함께 마치 가죽 북 터지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괴물들 이 산산히 튀어 올랐다. 화염 속에서 갈가리 터져나가는 그 모양은 난폭한 어린애가 벌레의 유충을 짓밟아 던지는 것처럼 보였다. 땅 위에서 기던 것 들이 보이지 않는 바람에 의해 일제히 튕겨 올라가면 불길이 그것들을 쥐 고 사정없이 뒤흔든다. 펑펑하고 체액과 함께 불길과 함께 치솟은 그것들 을 보면서 다른 자들도 화염구를 쏘아 내기 시작했다. "죽여라!" 마튜스의 병사들은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 뒤로 물러섰다. 그들의 눈앞에서 터져나가는 괴물들의 모습에 진저리를 치면서 그들은 후퇴했다. 그렇지만 그렇게 간단히 일이 해결될 것은 아니었다. "출진!" 불길이 사그러들자 마자 적진에서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룬드바르의 군대 가 전진해 오기 시작했다. 흐트러진 불꽃사이로 보이는 숫자만 해도 마튜 스의 온 성벽을 뒤덮을 것 같은 엄청난 숫자였다. "마, 맙소사!" 눈이 좋은 튜나가 이마 위의 땀을 훔치며 중얼거렸다. 방패를 앞세우고 걷는 그들의 뒤로 보이는 것은 분명히 공성기로 보이는 물건이었다. 약 십여마리의 소와 사람이 끄는 거대한 철퇴가 굵은 쇠사슬 에 따라 음산하게 흔들리고 희미한 불꽃의 힘을 빌어 불길한 그림자를 뿌 렸다. 마튜스의 방벽을 부술 수는 없지만 최소한 마튜스의 성문을 박살낼 수는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앞으로는 암흑산맥의 거목 쿠야마스토 네를 가차없이 잘라낸 병사들이 그것을 어깨에 이고 움직이고 있었다. 날 카롭게 깎아낸 거목은 무엇보다도 단단하여 가공할 공성기가 되고도 남음 이 있었다. 고왕국에서도 그랬지만 마튜스에서도 이 험한 산맥을 거쳐서 거대한 공성 기로 마튜스의 방벽을 깰 군대는 천여년간 없었기에 방심하고 있던 차였 다. 실제로 그들은 공성기를 본 것은 난생 처음이었다. "맙소사...저게..." "저걸로 성문을 깨부수려는 건가?" 그 모양을 보던 경비대들이 시퍼렇게 질릴 즈음 경비대장 케시엘이 낮게 외쳤다. "정신들 차려! 여기서 이러면 안된다! 화염구를 쏠 수 있는 마법사들은 전 부 앞으로 나서서 저 물건을 공격한다! 절대로 여기서 저 놈을 앞으로 들 이면 안돼!" 그녀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고함을 질렀다. "마튜스는 함락되지 않는다!" 마튜스에는 당연한 일이지만 해자가 없었다. 험한 산맥을 넘어 오는 적들을 해자가 없어도 얼마든지 막아 올 수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마튜스의 방벽을 깰 것이라곤 믿어지지 않았다. 최소한 방 벽까지 다가오려면 이 엄청나게 눈이 예리한 궁수들의 화살을 피할 수 있 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케시엘의 얼굴은 삽시간에 새파랗게 질렸다. 어둠 속에서 드러난 그 새까만 군대의 행렬은 완전히 공포의 군대였다. "마, 맙소사!" "아악!" "으아아아...!" 병사들의 얼굴에 공포가 서렸다. 일그러지고 썩어가는 몸체와 비틀거리는 움직임, 걸을 때마다 쏟아져 나오 는 내장들과 악취가 사방을 진동시켰다. 그 것들은 움직이고 끊임없이 움 직이고 있었다. 썩어들어가는 몸뚱이를 한 군대는 방패를 그런대로 곧추 세우고 걷는다. 천천히 천천히 움직이는 그들의 동선을 따라서 땅이 움직 이는 것처럼 보였다. 군데 군데 아직도 남은 화염의 불씨들은 그런 그들의 모습을 검붉게 비추어 느릿한 움직임 만큼이나 두렵게 드러내고 있었다. "......언데드...누가 저런 저주받을!" 튜나는 낮게 외쳤다. 그녀의 얼굴도 새파랗게 질렸다. "저런 짓을! 좀비라니! 저런 짓을 하다니! 몇 백년 이래 가장 금기되는 저 런 마법을 쓰다니! 어떤 놈이야? 대체 저런 짓을!" 그녀는 비명처럼 외쳤다. "휴런님! 성문 앞의 적을 보십시오!" "보고 있어, 보고 있어! 호오오..." 휴런은 입이 찢어져라 웃었다. 그의 뒤에 선 케논과 라비니아는 살짝 얼굴 을 찡그렸지만 그것은 두려움때문이 아니라 눈 앞에 보이는 것들의 끔찍함 때문이었다. "너무 못생겼다." "누가 아니래." "저게 대체 뭐라 생각해?" "뭐긴, 마법사들이 이리 저리 주물러 만든 것이겠지." 애들은 그렇게 떠들어대면서 휴런을 돌아보았다. "휴런, 저거 강한 놈인가?" "해 보면 알겠지." 휴런은 껄껄 웃으면서 손톱을 꺼내들었다. KUBERIN....... 증오와 증오가 만나고 의지와 의지가 부딪치고 야만과 야만이 힘을 겨룬다 죽음이 명예롭다고 하는 자는 누군가 선혈이 아름답다고 하는 자는 누군가 15 "잘 해보자구!" 휴런은 제일 먼저 성벽 위에서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의 몸이 순식간에 바 닥으로 떨어져 내리는 것을 넋을 잃고 바라보는 병사들 사이에서 두 어린 묘인족은 망설였다. "우리도 뛰어내릴까?" "저 놈들을 없앤다고 해서 뭐가 달라져? 저건 시체더미잖아? 썩어서 먹을 수도 없는 거라구." 라비니아가 타당한 질문을 던지는 동안 케논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럼 휴런은 왜 나간 거야? 시체 부수려고? 그거 부수어 봐야 무슨 재미 가 있지?" 그들의 시야에 휴런이 날뛰는 것이 들어왔다. 휴런이 일직선으로 내달리는 동안 말 그대로 그의 앞에 선 좀비들이 조각 조각 난 채로 공중으로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너무나 빠른 속도 탓으로 좀비가 그의 앞에 서자 마자 스스로 분쇄되어 공중으로 치솟는 것처럼 보 였다. 두 묘인족들의 눈에도 그 정도로 보일 지경이었으니 다른 병사들의 눈에는 마치 좀비떼들이 휴런이 다가오면 알아서 스스로 쓰러지는 것처럼 보이고 있었다. 물론 좀비들이니까 비명도 없고 아무것도 없이 그저 퍽퍽 하는 의미없는 소리들만 소름끼치게 들려오고 있었지만 그 시체의 집단은 끝도 없이 한도 없이 휴런의 횡포함에도 아무런 감정 없이 무심히 전진하 고 있었다. "어디로 가는 거지?" 케논은 휴런이 좀비들을 뚫고 전진하는 것을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그러자 바로 옆에서 병사들이 비명을 올리고 유시(流矢)에 맞아 죽어 넘어 지는 것을 아랑곳하지도 않은 채 라비니아가 웃음을 터뜨렸다. "알았다! 휴런은 지금 좀비들을 조종하는 마법사를 죽이러 가는 거야!" "호오!" "그렇지, 당연한 이야기잖아? 저 것들을 조종하는 마법사라면 그럴 듯 할 거 아냐?" "분명히 배후에 있겠네." 케논은 라비니아와 의미심장한 눈빛을 교환했다. "그럼 우리도 가자!" 케논이 성벽에 발을 올려놓은 채 소리질렀다. 비록 다쳐서 쿠베린이 그들을 여기에 남겨 놓고 간 것이긴 했지만 이런 경 미한 상처- 그저 팔다리가 조금 부러지고 갈비뼈가 나간 정도- 는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라비니아는 문득 웃음을 터뜨리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에 고함을 치는 가이엘이 보였다. 그녀는 결사적으로 병사들을 독려하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병사들은 좀비에게 겁먹은 것이 완연해 보였 다. 인간들이란 겁쟁이에 한심하기 짝이 없는 족속. 라비니아는 케논이 웃음을 터뜨리면서 뛰어내린 그 뒤에 서면서 잠시 동안 성안에 있을 미트라를 생각해냈다. 미트라는 그녀의 아버지 쿠베린의 애인 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매를 앗아간 저주스런 인간들 중 하나였다. '언젠간 죽여줄거야! 아버지가 모르는 사이에!' 라비니아는 빙그레 웃으면서 허공을 밟았다. "마튜스는 함락되지 않아! 어서 불화살을 준비해라!" 좀비에게 불을 내리는 마법사들 사이로 병사들은 저마다 불화살을 준비하 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성 바깥에서 날아 들어오는 화살과 공포가 병사 들을 허둥지둥하게 만들고 있었지만 그런대로 가이엘은 병사들을 추스릴 수 있었다. "앗! 저길 봐라!" 갑자기 한 병사가 고함을 지르며 성 아래를 가리켜 보였다. "마, 맙소사!" 병사들은 성벽 너머로 보이는 모습에 입을 저억 벌렸다. 세 명의 묘인족이 말 그대로 좀비의 바다를 가르고 있었다. 좀비들은 그들의 속도를 따르지 못해 그들의 움직임에 따라 팔다리가 갈 라지고 배가 터지는 모양 그대로 널부러지고 있었다. 그것들을 가르고 자 르면서 돌진하는 세 명의 묘인족들의 앞으로 세 갈래로 길이 생겨나고 있 었다. 물론 그 길은 다른 좀비에 의해 다시 메워지고 있긴 했지만 그 무서 운 속도와 변화는 보는 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 정도였다. 그들의 앞 길로 무수한 좀비들의 파편- 잘리고 부셔진 팔 다리와 살조각들-이 허공 으로 치솟고 있었다. "자아! 어서! 기운을 내라! 곧 좀비들은 끝장이 날 것이다!" "어서!" 병사들을 독려하면서 가이엘은 애써 그 모습에서 시선을 돌렸다. 그 모습 은 용기를 준다기 보다는 공포를 줄 모습이었다. 십여세의 어린애들이 좀 비들 사이로 뛰어들어 좀비들을 말 그대로 부수고 찢으며 돌진하는 모습은 참혹하기 그지 없었다. 좀비라고는 하지만 원래는 인간이었다가 죽은 자들, 즉 인간의 시체인 것이다. 그 인간의 시체를 갈기갈기 찢으면서 돌진하는 모습이 후련하다든가 멋지다든가 할 여유는 조금도 없었다. 말 그대로 인 간이기 때문에 그 모습은 더더욱 끔찍한 것이다. "구경할 여유는 없어!" 그녀는 목이 터져라 외쳤다. "성문을 지켜! 성문을 지켜! 어서 기름을 부어라!" "마법사들은 성문으로 집결하란 말이다!" 성문을 짓찧으면서 돌진하는 거대한 거목은 이전에는 마튜스를 지켜주는 장벽이었지만 지금은 마튜스를 공격하는 쐐기가 되어 성문을 공략하고 있 었다. 그 거목을 쥐고 성문을 두들겨대는 자들은 좀비들 사이에서 성문을 가차없이 부수고 있었다. 아무리 단단한 천년 묵은 쿠야마스토네로 만든 성문이라 할 지라도 같은 쿠야마스토네라면 당해낼 재간이 없다. 쿵 쿵 하고 계속해서 둔중한 울림이 비명과 고함소리를 뚫고 들려오고 있 었다. 성문을 지키는 자들은 시퍼런 얼굴을 하고 열심히 움직이고 있었지 만 거목을 지고 돌진하는 자들을 건드리지는 못했다. 그들 주변으로 방어 하듯이 둘러 싼 좀비들의 벽은 높고도 두터웠던 것이다. "마법사! 공격하라니까!" 미약한 화염탄과 화염구가 그들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지만 그다지 그들에 게 큰 영향을 끼치진 못했다. 방금 전의 싸움으로 마법사들이 지쳐 있는 것은 확실한 일이다. 원래 마법사란 일정기간 마법력을 쓰면 지치는 것이 당연한 일로, 마튜스 의 마법사들은 벌써 며칠째 몇 시간씩 제대로 쉬지도 못한 채 싸우고 있는 중이었다. 그것을 노린 듯 적의 마법사는 대체 얼마나 교활한 자인지 저 수 많은 괴물들과 좀비들을 이끌어 내어 마튜스의 마법사들을 지치게 만들 고 있는 것이다. '틀렸어! 마법사들이 너무 지쳤어!' 게다가 강력한 마법사들이 마튜스에는 얼마 되지 않는다. 가장 강력한 마 법사인 튜나가 지금 지쳐 있는 상태임을 알면서도 가이엘은 고개를 돌려 튜나의 모습을 찾았다. 그렇지만 튜나의 모습은 보이지않는다. 그녀가 나서 준다면 하고 생각하던 가이엘은 마법사들에게 쉴 틈을 주기 위해 고개를 돌려 외쳤다. "궁수!" "화, 화살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누군가가 그렇게 대꾸하는 것을 들으면서 가이엘은 한 숨을 삼키고 얼굴을 창백하게 물들였다. 휴런은 질주하면서 꼬맹이들의 모습을 볼 여유조차 있었다. 사실 좀비라는 것은 두려운 존재가 아니었다. 묘인족의 속도라는 것은 좀비들이 따라올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묘인족은 날 듯이 움직여 상대를 베어버린다. 그리고 그렇게 베어버리면 좀비들은 팔 다리가 떨어졌는지 혹은 목이 떨어지고 허리가 두 조각 나도 실감하지 못할 정도다. 인간들보다도 느린 속도로 움직이는 좀비들을 두려워할 이유 는 조금도 없었다. 굳이 두려워할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지루함- 반응이 너무 느리고 수가 너무 많아서 지루할 따름이었다. '저 앞 어딘가에 분명히 녀석들이 있을 텐데! 어떤 마법사가 있을까? 아헬 이 다루던 정도의 마법사라면 상당히 애를 먹긴 하겠지만 더더욱 흥미진진 하겠지! 서둘러야 해!' 휴런은 묘인족답게 눈을 빛내면서 손톱과 발톱을 더 바삐 놀렸다. 그렇다. 지금 이렇게 느긋하게 있을 때가 아니었다. 만약에 휴런이 늦는다 면 그 마법사는 틀림없이 두 애송이의 차례가 될 지도 몰랐다. 그가 그렇게 웃음을 머금으면서 속도를 높이기 위해 발 끝에 힘을 주는 것 과 동시에 그의 몸은 주욱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좀비의 머리통을 밟 고 달리는 그의 속도는 말 그대로 나는 것 같았다. 그의 발톱과 발 끝에 채인 좀비의 머리통이 파삭 파삭 힘없이 부서져 내리고 목이 부러져 나갔 다. 그렇지만 휴런의 속도는 조금도 줄지 않고 있었다. "제길! 속도를 높였어!" 케논이 불만스레 소리를 질러댔다. 라비니아는 재빨리 고개를 돌려서 휴런쪽을 돌아보았다. 휴런의 뒤통수는 이제 아예 보이지도 않는다. 라비니아는 혀를 찼다. "쳇! 우리가 휴런을 따라 잡을 수가 있을 거 같아?" "하지만 이렇게 되면 휴런이 마법사를 없앨거야!" "바보! 발견 못하면 없앨 수 없을 걸!" "우리보다 먼저 가고 있잖아! 게다가 휴런은 성인이라서 변신하면 우리보 다 더 빠를 거라구!" "빠르기만 하면 뭘해! 휴런은 바보잖아!" 라비니아는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휴런은 강해! 강한 것은 바보가 아니라구!" 케논은 라비니아의 말에 대꾸하면서 화풀이로 눈앞에 있는 좀비의 머리를 후려갈겼다. 퍼억 하고 눈알과 함께 뇌수가 쏟아져 나와 케논의 작은 주먹 을 적셨지만 케논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다른 좀비가 그의 등줄기를 잡아 채려고 손을 내밀었지만 그 손이 닿기도 전에 케논은 앞으로 나아가고 있 었다. "빨리 서둘러! 젠장! 휴런이 다 잡아 없앨 거라고! 우리는 이런 쓰레기 같 은 것들만 상대하다 끝나는 거 아냐?" "서둘 거 없어! 냄새 좀 맡아 보라구!" "냄새라니?" "뭐 특별한 냄새 나는 거 없어?" "이 썩은 것들 사이에서 뭔 냄새가 있다는 거얏!" "멍청이! 그래서 수컷들은 쓸모가 없단 말이야!" 라비니아는 혀를 차면서 우아하게 발끝으로 땅을 차며 뛰어 올랐다. 그리 고 그와 동시에 좀비들의 머리통을 밟으면서 아까 휴런이 했던 그대로 허 공을 차고 뛰기 시작했다. 그녀의 발끝 아래로 부서져 내리는 좀비들의 머 리통이 대굴대굴 굴렀지만 그 뒤를 곧 다른 좀비들이 메꾸면서 끝없이, 지 루하게 숫자를 늘려간다. "어디로 가는 거야? 라비니아!" "따라와봐! 멍청아!" 라비니아의 뒤를 따라 달리면서 케논은 혀를 찼다. "암컷들이란...!" 아직 미숙한 손톱들이 허공을 휘저을 때마다 좀비들의 조각들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눈알과 뇌수가 터져나가고 썩어가는 육신 속에서 내장들이 튀어 나왔다. 바닥으로 굴러 떨어지는 자기 자신의 뼈조각들과 내장조각들 을 무심히 밟고 전진하는 좀비들의 모습은 인간들에겐 끔찍한 모습이었으 나 묘인족들에게는 밟고 지나갈 돌멩이에 불과했다. 엘프의 피를 이은 자답게 멀리까지 볼 수 있는 튜나는 기가 막혀서 한동 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녀는 지금 쉬기 위해서 엘레와 함께 십자총안에 기대 서 있던 차였다. "어린애들이 정말...." 그동안 아이들이 해온 일을 몰랐던 것은 아니다. 아이들은 가차없이 죽이고 살육하는 살인마처럼 보일 지경으로 무자비했 다. 아니, 어쩌면 무자비라는 말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양 인정사정 없었다. 특히 그 귀여운 얼굴과 천진한 태도 때문에 더더욱 소름이 끼쳤었 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처럼 아이들이 끔찍해 보인 적은 없었다고 튜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오래 생각할 사이는 없었다. 쿵쾅거리면서 성문을 공격하는 자들 사이에서 곧 함성이 터져나왔다. "성문이 뚫렸다!" "성주님! 어서 피할 준비를!" 화려한 차림의 기사가 달려오며 외쳤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음을 듣고 있던 여성주 오르레카는 금빛으 로 물든 드레스 자락을 걷어 올리고 앞으로 나섰다. 십자형의 창문가로 다 가가 밖을 바라보았던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다시 물었다. "지금 마튜스가 함락당할 거라고 말하는 건가?" "하지만 지금 막 성문이 뚫렸습니다! 모든 성민들은 겁에 질려..." 기사는 말을 잇지 못하고 부르르 떨었다. 그의 얼굴에는 진땀이 흐르고 있었다. 시퍼렇게 굳어버린 입술로 그는 더 듬더듬 말을 이었다. "어, 어서 피하십시오. 상대는 인간만이 아닙니다." "버러지 같은 인간들을 피해서 내가 달아나야 한단 말이냐! 마튜스는 함락 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누구냐! 마튜스가 내 대에서 함락되다니! 오, 세 상에!" 그녀는 두 손을 이마에 대고 연극적으로 외쳤다. 파리한 안색에 땋은 금빛의 머리칼이 출렁였다. 그 모습에 당황한 기사는 고개를 푹 숙이고 손가락을 떨었다. 멀리서 있던 미트라의 눈에는 그의 다리가 떨리는 게 눈에 띄었다. "대체 조상들의 존안을 어떻게 뵈면 좋단 말인가! 천한 것들에게 마튜스를 내어주다니! 마튜스는 성스러운 성이건만!" 비탄에 빠진 그녀가 비틀거리자 시녀들은 재빨리 그녀를 부축하면서 자리 에 앉게 했다. 보고 있던 미트라는 문득 비참한 기분이 들어 창가로 고개를 내밀고 밖을 내다 보았다. 밖은 화광이 충천했다. 이제 슬슬 지고 있는 황혼이 시뻘겋게 성벽을 물들이고 있었는데 그것이 황혼탓인지 아니면 밖에서 벌어지고 있 는 싸움의 불길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의 왕국이 멸망할 때는 이런 전투 도 없었다. 전투도 없이 무혈입성한 룬드바르의 군대는 그저 조용히 항복 과 굴욕의 조서에 사인하는 자신의 오라비를 기다렸을 뿐이었다. 기사들과 몇몇 젊은이들이 분노를 터뜨리며 싸움을 요구하고 나섰지만 그 들은 오히려 델리암 근위기사대에 의해서 억제되었다. 반항하는 귀족들과 몇몇의 기사들은 왕성을 탈출했고 에메스 같은 이들은 자신들의 영지에서 불복의 빛을 비추거나 혹은 반대의 기치를 내세우고 싸움을 준비했었다. 그러나 이미 왕인 그녀의 오라버니는 비굴한 웃음을 지으며 자신보다도 한 두 살 어린 룬드바르대공의 앞에서 고개를 숙이며 그의 반지에 키스를 했 던 것이다. 그 여유작작한 룬드바르의 얼굴. 미트라는 부르르떨었다. 이 정도로 무서울 줄 알았다면 차라리 그녀의 오라비의 선택이 옳았을지도 하고 그녀는 갑자기 생각했다. 대체 룬드바르, 하인리히 룬드바르라고 하는 그 젊은 대공은 어떤 자이기에 대륙 역사상 아무도 못했던 전 대륙 통일이 라는 일을 하려는 것일까? 생각지도 못했던 무서운 마법사 집단만이 아니었다. 그 마법사 집단만으로 대륙을 정복할 수는 없다. 그의 밑에 있는 무수한 병사들, 그 병사들을 모 아 싸움터로, 이 깊숙한 산맥 한가운데의 마튜스까지 몰아칠 수 있는 그의 힘은 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까? 미트라는 냉정하게 붉은 빛으로 온통 물든 밖을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룬드바르공국은 델리암의 반쪽밖에는 안되는 작은 남쪽의 나라였다. 그 이 름도 미트라는 그다지 들어 보지도 못했다. 그런데 그 곳의 대공은 자기 영토보다 몇배나 되는 지역을 점령하고 그리고 이 대륙 전체를, 엘프들까 지도 공격하고 있었다. 쿠베린은 그를 애송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그는 보 통 사람은 아니었다. 그녀는 문득 대륙 역사에 남았던 영웅 자레이드 힐스 를 생각하고 오한을 느꼈다. 자레이드 힐스. 현재 대륙의 지도를 그리게 한 장본인으로....델리암왕국의 초기, 델리암왕조의 시조이던 소레이스 델리암을 가신으로 거느렸던 인물 이었다. 대륙의 반을 자기 영토로 하고 당시 가장 사나운 아인족인 갈색아 인족을 남쪽으로 밀어 버린 인간의 영웅. 그가 만든 제국 골다이스는 이 십 년만에 몰락했지만 그가 거느렸던 가신들과 병사들이 각기 흩어져 공국 과 왕국을 이룬 시초가 되었다. 어쨌든 현재 대륙에 존재하는 크고 작은 왕국과 공국들은 대부분 그의 제위 하에 있었던 인물들이 기초를 쌓은 것 들이다. 룬드바르는 제 2의 자레이드 힐스가 되려는 것일까? 그것도 자레이드 힐스 는 건드리지도 못했던 이곳, 고대엘프의 영역 세룩-엘라마이야산맥을 넘어 서까지. 그녀는 한 숨을 쉬었다. 전쟁과 전쟁, 싸움과 싸움, 지긋지긋한 일이었다. 사람이 수없이 죽고 다쳐도 남자들의 영웅심이라는 것은 사그러들지 않는 다. 그들은 수백 수천을 죽이고 수만을 죽여서도 대륙의 역사에 남아 영웅 이란 말로 그 학살을 무마한다. 자레이드 힐스가 얼마나 죽였는지는 대륙 역사에 남아있지 않다. 단지 그가 대륙을 정비하여 인간들을 살기 편하게 했고 사납고 야만스런 갈색 아인족들을 쓸어 버렸다고만 되어 있다. 그리 하여 인간들의 진정한 왕국이 세워지기 시작하였다 라고 쓰여있다. 미트라는 흘긋 뒤를 돌아보았다. 마튜스에는 인간, 엘프, 하프엘프, 드워프, 수인족, 아인족, 조인족등 여러 종족이 같이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같이 싸우고 있다. 그들의 적은 룬드바르 제국군이었다. 그렇지만... 갑자기 미트라는 현기증을 느꼈다. 수 백년, 아니 수 십년 흐른 뒤에 모든 사람들은 룬드바르대공, 아니 이젠 황제가 된 하인리히 3세를 가리켜서 뭐라고 부를 것인가? "다른 자들은 어디 있느냐!" 갑작스런 외침에 그녀는 정신을 차렸다. 여성주 오르레카는 불안한 얼굴로 노성을 지르고 있었다. 그녀의 옆에서 그녀의 얇은 면사포와 옷자락을 들고 서 있던 네 명의 시녀들은 불안한 얼 굴로 주인의 얼굴을 외면했다. 그녀들만이 아니고 계단 아래 선 두 명의 기사들역시 질린 낯빛으로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경비대야 지금 싸우 고 있을 터이고 그렇다면 성안에 있던 귀족들과 그녀의 근위기사들은 다 어디 있는 것일까? 왜 이 조용한 성주의 방안에는 시녀 넷과 기사 둘 밖에 는 안보이는 것인가 하고 미트라는 문득 불길한 기분으로 사방을 돌아보았 다. 그 때 그 의문에 답이라도 하듯이 문을 발칵 열고 길다란 옷자락을 잡아 쥔 사람들이 등장했다. 바짝 마른 중년의 귀족과 그의 아들로 보이는 한 명의 젊은이였다. 그들의 뒤로 은빛의 갑옷을 걸친 기사들 세명이 동시에 구르듯이 달려들어왔다. "성주님!" "성주님! 지금 이 상황은 어찌된 것입니까?" "마라렌 경!" 성주는 구세주라도 만난 양 얼굴을 밝게 하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 의 앞으로 다가섰다. 마른 중년의 귀족-마라렌경이란 사내는 수염도 없는 살팍한 뺨을 씰룩이면서 주변을 돌아보았다. "설마하니 진짜 마튜스가 함락된 것입니까?" "그런가 보오." 성주가 침을 삼키면서 말하자 옆에 있던 젊은이가 소리를 질렀다. "그럴 리가! 마튜스가 함락당하다니 그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에요! 무적 의 방벽을 가진 마튜스가 왜 한낱 시골뜨기에게 함락당한단 말입니까!" 미트라는 그들이 떠들어대는 소리를 들으면서 고개를 들어서 이번에는 천 정을 바라보았다. 천정에는 호화로운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벽화는 수많은 세월을 거짓말처 럼 비껴간 양 선명하고 아름다운 색채로 빛나고 있었다. 이 마튜스가 생겨난 것은 그 옛날의, 델리암왕국이 생기기도 전의 일이라 고 들었는데 저렇게도 선명하다니 하고 미트라는 감탄했다. 그 뿐이 아니 다. 마법이 걸려 있는 곳이라고 듣긴 했지만 이 성 전체, 아니 고왕국 유일 의 요새라고 불리우는 이 마튜스전체에는 마법의 힘이 서려있는 모양이었 다. 그러나 그것도 이미 끝장이다. 미트라는 자신이 서 있는 곳이 함락된다는 것을 들으면서도 별로 겁나지 않았다. 지금 이 곳이 당장에 무자비한 군세에 점령된다는 것에 대해서도 실감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은 그저 방관자처럼 둥 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저 밖에서 싸우는 자들의 고함소리는 한낱 꿈처럼 들려왔다. 자신은 이곳 에서 철저한 방관자, 알지도 못하는 싸움 속에 말려든 그런 느낌이었다. '쿠베린........대체 왜 이런 곳에 날 놔두고 간 거야?' 그녀는 쓴 웃음을 지었다. KUBERIN....... 증오와 증오가 만나고 의지와 의지가 부딪치고 야만과 야만이 힘을 겨룬다 죽음이 명예롭다고 하는 자는 누군가 선혈이 아름답다고 하는 자는 누군가 16 "우오오오오오옷!" 좀비떼를 막 벗어난 휴런은 의기양양한 소리를 내지르면서 전면을 바라보 았다. 전면에 나타난 것은 깃발이 휘날리는 인간들의 진지였다. 전에 쿠베린과 함께 그들의 진지를 한번 방문(?)한 적 있었던 휴런은 그 깃발들이 무척 낯익다는 것을 보면서 웃었다. "좋아, 좋아!" 그가 막 공포에 질린 얼굴을 한 병사들 사이로 뛰어들려 하는 순간 갑자 기 그는 갑자기 음산한 살기를 느꼈다. 그 것은 그가 이제껏 느껴왔던 살 기와는 아주 틀린, 이제껏 느껴 보지 못했던 그런 느낌이었다. 서늘한 기운 이 등줄기로 지나가는 것을 느끼며 그가 고개를 돌리자 그 자리에는 따각 거리는 소리와 함께 회색의 갑주를 걸친 기사가 서 있었다. 기사는 음산한 기운을 잔뜩 일으키며 서서 그를 노려보고 있었는데 진흙 으로 뒤덮힌 낡은 투구 사이로 보이는 두 눈은 붉고 사나왔다. "뭐야? 저 물건은?" 휴런은 그 답지 않은 불쾌감을 느끼면서 몸을 돌렸다. 어찌되었든 앞에 진영이 보이긴 하지만 바로 옆에 있는 이 물건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직성 이 풀리지 않았던 것이다. "감히 내 앞에서 나를 내려다 보는 거냐!" 그는 크게 웃고는 땅을 차고 뛰어 올랐다. 바로 앞에 기사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가 한 번 뛰자 순식간에 그는 허공을 격해 기사의 턱을 사정없이 걷어 찼다. 빠각하고 커다랗게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으며 기사의 목은 기이하게 꺾이면서 투구째 날아갔다. 그러나 휴런이 상상했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에엑?" 투구째 목이 날아간 기사는 그대로 굳건히 그 자리에 서서 휴런을 향해 느리지만 확실하게 칼을 휘둘렀던 것이다. 하마터면 멍하니 있다가 찔릴 뻔한 휴런은 뒤로 물러서서 그 기사를 다시 훑어보았다. "이 것도 마법으로 만든 물건인가?" 화가 치밀어 올랐다. 휴런은 이를 악물고 다시 손을뻗어 녀석이 쥔 칼을 후려갈겼다. 그러자 녀석의 팔뚝이 갑주째 파직하고 부서져 바닥으로 나동그라진다. 그래도 녀 석의 팔뚝에선 피 한방울 나오지 않았다. 목도 없고 팔도 한 쪽 없는 주제 에 말을 타고 휴런에게 돌진하는 그 모습은 상당히 괴기스러웠다. 게다가 전신에서 느껴지는 알수 없는 음산한 기운에 휴런은 불쾌감으로 몸을 떨었 다. "이거, 아까 그거랑 마찬가지아냐?" 그가 그렇게 외치면서 가슴팍을 향해 손톱을 찌르자 그와 동시에 기사도 그를 향해 손을 내뻗었다. 손보호대를 확실하게 한 그 갑주의 손이 휴런의 목줄기를 잡았다. 그러나 잡히는 것과 동시에 휴런의 손톱은 둘러 입은 갑 주도 무색하게 녀석의 가슴을 가볍게 관통했다. "하핫! 녀석!" 그러나 휴런의 목줄기를 잡은 기사의 손에서는 힘이 빠지지 않았다. 휴런 의 눈이 커질 즈음 갑자기 그의 목줄기를 움켜쥔 손이 엄청난 힘으로 그의 목을 조여오기 시작했다. "에엑?" 휴런은 당황해 기사의 몸통을 후려갈겼다. 그러자 기사의 상반신은 그의 힘을 못이겨 반토막이 된 채 나뒹굴었다. 그렇지만 그의 목을 조여오는 그 팔은 여전히 그의 목에 달려 있었고 기사의 허리 아래 두 다리는 여전히 자신의 말의 안장 위에 앉아 있었다. "말도 안돼!" 휴런은 훌쩍 뛰어 내리면서 자신의 목을 조이고 있는 팔뚝 하나를 뜯어내 려고 힘을 주었으나 이 팔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제기랄..." 아무리 강한 몸체라고는 해도 변신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목을 쥐어 잡힌 꼴이 되었다. 점점 숨이 막혀오고 얼굴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인간이라고 는 할 수 없는 엄청난 힘이었다. 휴런은 자신의 방심에 혀를 차면서 이 같잖치도 않은 마법괴물에 신경을 쓴 것을 후회했다. "하하하하핫..! 그럴 줄 알았어!" 그 때 갑자기 웃음소리와 함께 그의 앞을 무언가가 휘익 하고 지나갔다. 휴런이 팔뚝을 떼어내려고 버둥거리며 돌아보자 바로 앞을 지나간 것은 다름아닌 라비니아와 케논이었다. 두 어린 묘인족은 휴런이 잘려져 나간 팔뚝을 쥐고 있는 것을 보고 비웃으면서 앞으로 뛰어 나가고 있었다. "저런, 저런...." 휴런은 혀를 찼다. 아무래도 저 애송이들에게 선수를 빼앗길 모양이다. 울화가 치밀어 올랐 다. 그는 힘을 주어서 팔뚝을 떼어냈다. 그러나 팔뚝을 떼어내긴 했지만 손은 그대로 목에 달라 붙어 있다. 점점 숨이 가빠왔다. 그는 손을 떼어내려고 했지만 손가락이 그의 목줄기를 틀어 쥔 채 꼼짝도 않고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방법없이 그는 손가락 하나 하나를 부러뜨려 서 자신의 목에서 그 지긋지긋한 손을 떼어 냈다. 얼얼한 목줄기를 쓰다듬 으면서 휴런은 고개를 돌려서 아직도 자신을 향해 살기를 내뿜고 있는 허 리만 남은 기사를 보았다. "기가 막힌 물건이군. 그럼 저것도 결국은 시체란 거잖아?" 그리고 그 순간 여기 저기서 비명소리가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괴물이다!" "막아!" "으아아아아악!" 비명소리를 뒤로 하면서 라비니아와 케논은 달리고 있었다. 문득 케논이 외쳐 물었다. "휴런이 그러고 있을 거란 걸 어떻게 알았어?" "멍청이, 휴런은 이상한 물건만 나오면 싸우고 싶어서 안달하잖아?" 라비니아가 코끝으로 비웃으며 말하자 케논은 헤에 하고 감탄하는 양 그 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저런 게 휴런을 막을 거라는 걸 어떻게 알았냐고?" "어떻게?" 라비니아는 자신을 막아서는 병사의 목줄기를 잘라내며 어깨를 으슥했다. "너, 앞을 막아서는 적을 내버려두고 가는 묘인족이 있을 거라 생각하 냐?" 케논은 멍하니 대꾸하지 못했다. 라비니아는 흐응 하고 혀를 찼다. "수컷들이란....멍청이들이라니까!" 마구잡이로 돌진하던 그들의 앞에 갑자기 다섯 명의 기사가 등장했다. 정 확히 말하면 갑주를 걸친 다섯 명의 검사였다. 그들의 손에서 갑자기 검이 튀어나오면서 라비니아의 몸체를 쓸어갔다. 그 엄청난 속도에 라비니아는 방심하고 있던 차라 아앗 소리를 내면서 뒤로 튕겨 피해냈다. 케논이 뒤를 이어서 라비니아를 공격하던 검사의 옆에 있던 자와 손톱을 부딪쳤다. 그 러나 여지껏 만났던 자와는 힘이 달랐다. "왓!" 케논은 혼비백산했다. 검사의 검과 손톱이 마주치자 마자 그의 작은 몸은 뒤로 주욱 밀려났던 것이다. 검사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돌진해 들어와 케논의 목줄기를 다시 찔러왔다. 귀신같은 빠르기에 놀란 케논이 뒤로 몸을 제끼려는 순간 라비 니아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꺄앗!" 그렇지만 돌아볼 여력은 조금도 없었다. 케논은 자신을 찔러오는 검사의 검을 피하려고 두 손을 뻗어 손톱을 내놓았지만 검은 그의 손톱을 스치고 지나가 그의 옆구리를 사정없이 찔렀다. "우웃!" 이런 식으로 다쳐본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케논은 공포보다 분노가 더 강해지기 시작했다. 인간에게 일대일로 싸워서 졌다는 이야길 들으면 아마 모든 묘인족들이 그를 비난할 것이다. 비난이 아니라 조소하고 비웃을 것 이며 동족이 아니라고 외면하고도 남았다. 그는 숨돌릴 틈도 없이 자신을 찔러 오는 검사의 검을 피하면서 바닥을 대굴대굴 굴렀다. 어느새 허벅지와 옆구리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그 렇지만 아픔보다는 분노가 더 컸다. 만약에 휴런이 이꼴을 보고 소문을 내기라도 하면 그는 얼굴도 들지 못할 것이다. 케논은 마음이 급해져서 검 사의 몸통을 향해 돌진했다. "죽엇!" 원래 케논은 경험이 풍부한 편은 못되었다. 아직 성체가 아닌 지라 그는 변신도 할 수 없고 가진 것이라고는 두 손톱과 두 발톱, 그리고 강건한 몸 체와 재빠른 몸놀림 뿐이었다. 물론 인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강인한 회복력도 있기는 있었다. 검사는 인간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여유있게 케논의 손톱을 막아 내고 뒤이어서 찔러오는 케논의 발톱도 팔뚝으로 막아냈다. 그리고는 가차 없이 케논의 얼굴을 손등으로 후려갈겼다. 억 하는 소리와 함께 케논은 사 정없이 나동그라졌다. "....넌 누구냐!" 케논이 바닥에 구르는 것을 조소에 차 바라보고 있던 검사는 이를 드러내 며 웃었다. 그와 동시에 그의 검이 케논의 가슴을 찔러왔다. 케논은 있는 힘을 다해서 그 시퍼런 칼날을 피하기 위해서 몸을 뒤틀었다. 땅에 얼굴을 부딪치자 입안에 흙이 들어오고 눈물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덕분에 칼날 은 아슬아슬하게 그의 가슴살을 스치고 지나가 땅에 박혔다. 그렇지만 숨 돌릴 틈도 없이 다시 검사의 발차기에 케논은 사정없이 나동그라졌다. 마 치 공차기를 하듯이 검사는 즐거운 듯 이를 드러내며 케논을 재차 걷어차 허공으로 집어던졌다. "우욱!" 와작 하고 갈비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케논은 고통으로 몸을 뒤틀면서 피를 토해냈다. 이건 인간의 힘이 아니었 다. 케논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공포를 느꼈다. 상황은 라비니아도 별로 다르지 않았다. 라비니아는 다른 자의 손에 의해 이미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라비니아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면서 재차 공격하려고 손을 내밀었다. 그렇지만 그 속도에 맞추어 검사의 검이 날아들었고 이번에는 가차없이 그녀의 손톱이 잘려져 나갔다. 라비니아는 비통한 울음소리를 삼 킨 채 뒤로 물러섰지만 바로 뒤에 서 있던 다른 검사 하나가 장난하듯이 그녀의 다리를 걷어찼다. 바닥에 나동그라진 그녀의 머리칼을 향해 칼날을 휘두르자 금빛으로 빛나던 그녀의 긴 머리채가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제기랄..." 라비니아는 떨어진 자신의 머리털을 보면서 이를 갈았다. 이들은 비겁했다. 다수로 자신을 공격했고 단번에 숨통을 끊어놓는 게 아 니라 가지고 놀고 있었다. 문득 라비니아는 검사들의 눈에서 믿을 수 없는 빛을 발견했다. 욕정의 눈빛을 보고 그녀는 순간 전율했다. '말도 안돼!' 묘인족 여자가 범해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자의도 아닌 타의로 범해진다니, 아무리 성인이 아닌 라비니아도 그것만은 알고 있었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일어서서 그들을 향해 돌진했다. 차라리 싸우다 죽어 야 했다. 장난감이 되느니 죽어야 했다. 그러나 그녀의 결의도 무색하게 그 녀는 뒤에 서 있던 검사의 손아귀에 잡혀 다시 나동그라졌고 이번에는 두 팔을 뒤에서 잡혔다. 발끝을 차올려 뒤에서 잡은 검사의 얼굴을 후려갈겼 지만 녀석은 큰 타격을 입지도 않은 듯 그저 비틀거렸을 뿐 그녀의 팔을 잡은 두 손에서 힘을 빼지는 않았다. "죽엇!" 그녀는 이번에는 이빨로 녀석의 손목을 있는 힘껏 물어뜯었다. 이번에는 효과가 있었다. 손목을 물어 뜯자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검사가 그녀의 팔을 놓쳤고 그 뒤를 이어서 라비니아는 재빨리 도망가는 대신에 그의 품안으로 달려들어가 녀석의 가슴팍에 손톱을 꽂았다. "우아악!" 이번에는 확실했다. 그녀는 피투성이가 된 채 미소지었다. 그들은 여자라는 이유로 방심했던 것이다. 피가 솟아나는 가슴을 만족스 레 바라보며 그녀는 피에 젖은 얼굴을 들어 뒤를 돌아보았다. 아니, 돌아보 려 했다. 그리고 다른 자의 우악스런 손길에 머리채가 잡혀서 사납게 나동 그라졌다. "아악!" 나머지 세 명의 검사가 그녀의 팔 다리를 하나씩 잡은 채 다시 그녀를 허 공으로 집어던졌다. 그리고는 사정없이 그녀의 다리를 발로 짓밟았다. "아아악!" 아드득 하고 뼈가 어긋나는 소리가 선명하게 울려퍼졌다. 라비니아는 고 통으로 몸을 뒤틀었다. 몇 번이고 다리뼈가 부러진 적은 있었지만 이런 식 으로 허벅지 뼈가 부서진 적은 없었다. 온몸이 뒤틀릴 것같은 고통으로 그 녀는 눈물을 흘렸다. 그 뒤를 이어서 다른 검사가 그녀의 머리채를 잡아 목을 꺾으려는 순간이 었다. "이봐, 애들이랑 놀다니 과연 더러운 사인족답구만." 그 말과 함께 라비니아의 머리채가 갑자기 자유로와졌다. 라비니아는 얼굴로 뿌려지는 더운 액체를 느끼면서 고개를 돌렸다. 그녀 의 머리채를 잡고 있던 그 팔뚝은 몸통과 분리되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피를 철철 흘리던 검사는 잘려진 자신의 팔뚝을 부여잡은 채로 갑자기 튀 어나온 인물을 노려보았다. 휴런은 피투성이가 된 케논의 옆에 서 있었다. 케논은 전신이 상처투성이 가 된 채로 바닥에 누워 있었는데 상태는 라비니아보다 나을 것이 없어 보 였다. 라비니아는 재빨리 검사들의 얼굴을 훔쳐 보았다. 그들의 얼굴에 살짝 흔들림이 일어났다. 휴런은 이를 드러내고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 웃음에 분노와 살의가 묻 어나고 있었다. "간덩이가 부었잖아? 감히 내 앞에서 어린 묘인족을 죽이려 하다니. 엉? 너희들 목숨이 몇 개라도 되는 거냐?" 그리고 그 순간 검사들의 검자루가 막 움직이려는 찰나 휴런의 몸이 먼저 움직였다. 라비니아는 눈을 크게 떴다. 휴런의 긴 손톱은 맨 앞에 서 있던 자의 검을 피해 그대로 그의 목줄기를 꿰뚫었고 그 뒤를 이어 그의 몸이 회전하면서 악을 지르듯이 입을 벌린 자 의 가슴을 일직선으로 내리그었다. 크어어어억!" 피가 사방으로 튀어올랐다. 내장이 쏟아지는 것을 라비니아는 땅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멍청하니 바라 보았다. 우우우욱.." 그녀의 바로 옆에 있던 나머지 한 명의 검사가 부르르 하고 갑자기 떨었 다. 우둑 우둑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몸이 갑자기 두 배로 부풀어 올랐다. 누런 털이 옷자락 사이로 튀어 나오고 근육이 옷을 찢고 튀어 나왔다. 검 사의 입은 크게 벌어져 송곳니가 드러나고 눈은 노랗게 빛나기 시작했다. 어디에도 인간다운 점은 하나도 없었다. '이게 진짜 사인족!' 라비니아는 입을 벌렸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보는 사인족의 변신모습이었 다. 그동안 사인족의 왕과 함께 다녔지만 정작 사인족의 변신한 모습은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너는 누구냐!" 갑자기 음산한 어조로 변신한 검사가 외쳤다. "흐, 건방진 사인족 놈, 내가 누구냐고? 이 몸께서는 사인족을 이 세상에 서 없애기 위해 태어나신 존귀한 분이시다. 그렇게 말하면 충분히 알아 듣겠지? 이 얼뜨기 노랑털아!" 휴런은 그 변신한 모습을 보며 깔깔 웃으면서 외쳤다. 그의 눈도 살기로 가득차 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살기보다는 오히려 기쁨 이 가득한 것 같았다. 그의 몸안에서 힘이 흘러나오는 것을 라비니아는 느 낄 수 있었다. 두근 두근하고 맥박소리가 들려온다. 기쁨에 찬 맥박소리, 심장고동소리였다. 기쁘다. 기쁘다. 기쁘다..... 휴런의 전신이 외치고 있었다. 라비니아는 갑자기 눈안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면서 부르르 떨었다. 강 한 놈을 만나서 기쁘다고 온몸이 외치고 있었다. 휴런의 몸이 그렇게 변하 고 있는 것을 느끼면서 라비니아는 부러움과 경이에 차서 휴런을 바라보았 다. "오랜만에 제대로 된 사인족을 보잖아? 얼뜨기만 맨날 보다 말이야. 이리 와, 노랑털, 내 대지의 여신과 키스하도록 도와주지. 아낌없이 말이야!" 그는 송곳니를 드러내며 친한 친구에게 말하듯이 생긋 웃었다. 똑하고 차가운 물방울이 목덜미로 떨어졌다. 미트라는 부르르 떨었다. 소름이 끼쳤다. 철벅철벅하고 뭔가 질척한 진흙을 밟으며 걷는 앞 사람을 보면서 그녀는 우울한 기분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들은 지금 지하도를 걷고 있었다. 약 수백년전에 만들었다고 하는 이 지하도는 원래는 하수로와 연결된 곳 이었다고 하는데 워낙에 수도시설이 잘되도록 만들어준 드워프들 덕에 쓸 일이 없었다. 그래서 드워프들은 이 지하도를 즐거움의 하나로 남겨두기로 했다. 그들의 장기이자 특기인 비밀통로 만들기를 감행한 것이었다. 마튜스 가 물론 함락될 리는 없지만 역대 성주가 아무도 몰래 성을 빠져나갈 수는 있는 법이라고 생각한 드워프들은 성주의 사실 안 초상화 바로 밑에 비밀 통로를 만들어 두었다. 그리고 그 비밀통로는 대대로 성주의 밀사가 고왕 국에 보내지거나 혹은 고왕국의 밀사가 성주에게 올 때 쓰이곤 했던 모양 이었다. "발끝을 조심하십시오." 기사 한 명이 시녀들이 부축하고 있는 여성주를 향해 조용히 말했다. 여성주는 길고 거추장스러운 드레스 대신 가벼운 여행복 차림을 하고 있 었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는 그녀의 화려한 아름다움을 다 감출 수는 없 었는지 여전히 어두운 불빛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주변만 왠지 빛이 일어나 는 것 같았다. 미트라는 쿠베린이 직접 맡겼고, 게다가 원래 델리암의 공주였다는 이야 기를 들은 여성주의 호의로 여성주옆에 붙어 있었던 지라 이 탈출로에도 끼여 있었다. "제 팔을 잡으십시오, 왕녀." 어딘가 얼굴만은 낯익은 기사 한명이 자신의 팔뚝을 내밀며 예의바르게 말했다. 그는 미트라의 얼굴을 약간 수줍은 듯 긴장한 얼굴로 바라보다가 미트라가 자신의 팔을 순순히 잡자 얼굴을 붉혔다. "고마워요." 미트라는 자신이 미인이라는 것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단지 그것을 무기 로 하고 싶은 기분은 별로 없었지만 이 상황에서 누군가가 자길 위해준다 는 것은 그다지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그녀의 외모를 은 근히 자신의 것과 비교하는 여성주의 질투 어린 눈길을 받으면서도 꿋꿋이 버티고 있는 중이었다. 지하도 안은 음습하고 질척했지만 조용하고 의외로 넓었다. 사각형으로 곧게 이어진 통로 안은 곳곳에 벌레들이나 쥐들이 뛰어다녔지 만 그것에 놀라 일일이 비명을 지를 새는 없었는 지라 모두 묵묵히 나아가 고 있었다. 기사들 다섯과 귀족 서넛, 그리고 여성주와 그녀의 시녀 네 명이 전부인 이 일행을 미트라는 조금 미심쩍게 바라보았다. 여기서 싸울 수 있는 능력 을 가진 것은 기사들 밖에는 없는 듯 했는데 가장 큰 의문점은 이 큰 성에 서 여성주를 보호할 사람이 이 만큼밖에는 없느냐 하는 것이었다. 다섯의 기사라니. 이건 좀 이상했다. "....병사들이 더 있지 않았나요?" 그녀를 부축하던 기사에게 묻자 기사는 약간 굳은 얼굴이 되었다. "그들은 지금 시간을 벌고 있을 겁니다." "에?" "성주를 보호할 시간을 벌기 위해 통로를 막고 있습니다." "이 통로로 더 도망 올 사람들은 없는 건가요? 마튜스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으니까 그들도..." 미트라는 기사를 향해 작은 소리로 물었다. "그들은 기꺼이 성주를 위해 희생할 것입니다. 더 이상 숫자가 는다면 성 주님의 안전이 위험해 지지요." 기사가 심각하게 대꾸하자 미트라는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들은 원래 성주를 위해 목숨을 바치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미트라는 뭔가 기분나쁜 위화감을 느끼면서 앞서 가는 성주를 흘긋 바라 보았다. 그녀는 비통한 낯으로 시녀들의 부축을 받으며 걷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뭔가 말이 안되는 것 아닌가? 마튜스의 함락을 막기위해 달려온 사람들을 내버려두고 그들의 희생을 모 른 척하고 성주가, 가장 막중한 책임을 가진 그녀가 제일 먼저 도망간다는 것은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아니, 도망간다고 해도 어째서 그녀의 안전을 위해 다른 사람들도 도망갈 수 없다는 것인가? 그녀는 갑자기 드워프들의 유쾌한 얼굴을 생각해냈다. 그리고 갑자기 휴 런과 케논, 라비니아의 얼굴도 떠올렸다. 튜나는? 엘레는? 그들은 다 어떻 게 되었을까 생각하니 그녀는 갑자기 발길이 무거워졌다. 갑자기 앞에서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자, 조심하십시오." 옆에 있던 기사가 속삭였다. "이제 바깥입니다." KUBERIN....... 증오와 증오가 만나고 의지와 의지가 부딪치고 야만과 야만이 힘을 겨룬다 죽음이 명예롭다고 하는 자는 누군가 선혈이 아름답다고 하는 자는 누군가 17 숲에서는 음습한 냄새가 났다. 전에도 느낀 적 있는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는 듯한 섬뜩하고 위험한 냄 새. 부스럭거리는 마른 풀잎더미를 밟으면서, 밟히는 돌멩이들과 어딘가 비 정상적으로 단단한 땅바닥을 느끼면서 미트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앞은 어 두웠다. 숲에 내리는 어둠이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짙었다. 전에 느꼈던 감각 과는 달랐다. 그때는 쿠베린이 있었다. 아무도 이길 수 없는 강한 그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없다. 게다가 지금 그들은 쫓기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는 부지불식간에 자신을 부축하고 있는 기사의 팔뚝을 움켜 쥐었다. 쿠베린은 강했고 너무나 태연히 상처를 입히는 소리를 지껄였다. 몇 번이 나 그의 말에 상처 입었는지 모른다. 아마 그는 그것도 잘 모를 것이다. 그 러나 그건 그대로 좋았다. 그녀에겐 솔직한 인간이라곤 하나도 없었으니까 그가 주는 상처는 너무나 솔직해 그녀 스스로가 받는 상처일 따름이었다. 그러니까 그건 자신이 감당할 몫이라고 미트라는 생각했다. "엣취!" 누군가가 재채기를 했다. 그 소리가 엄청나게 크게 들려서 모두들 흠칫했 다. 불안했다. 견딜 수 없이 불안했다. 숲 전체의 나무들이 그들을 내려다 보면서 적의를 품고 있는 것처럼 보이 는 것은 착각일까? 이 곳 사람들은 오히려 이 산과 이 숲이 온통 자신을 지켜주는 존재라고 믿고 있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자신만이 아닐까 하고 그녀는 두려움에 떨었다. 버석거리는 나뭇잎들과 잘 보이지도 않는 앞을 그들은 횃불도 없이 비틀 거리면서 나아가고 있었다. 그저 앞서 가는 사람들이 내는 버석거리는 발 자국 소리만이 인도일 따름이었다. 여성주는 어둠 속을 잘도 걸었다. 어쩌면 엘프의 피가 섞여 있는 탓일지 도 모른다고 미트라는 생각했다. 엘프들은 어둠속을 잘 보고 숲에서는 능 숙하게 움직인다고 들었었다. 이 중에 앞을 가장 잘 보는 사람은 어쩌면 그러니까 성주일 지도 모른다고 그녀는 생각하면서 앞에 가고 있는 성주의 뒤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조심해서..." "서두르지 않으면 안됩니다. 다음 결계석까지 가지 않으면 안심할 수 없 습니다." 어둠 속에서 성주의 옷자락이 빛나고 있었다. 희미한 빛에 그녀의 금발머 리칼이 반짝인다. 그 빛만으로도 쫓아오는 자들에게 들키지 않을까 불안 해질 정도로 찬란한 머리색깔이었다. 엉뚱하게도 미트라는 그 머리칼이 부러워졌다. 그 때 갑자기 앞서 가던 자들이 흠칫 멈추었다. 뒤따르던 일행들은 순식 간에 얼어붙었고 사방은 정적으로 가득 찼다. 재빠르게 한 명 두 명 일행 들이 전부 몸을 바닥에 숙였다. 공포가 살아있는 짐승처럼 그들 사이를 배회했다. 미트라는 필사적으로 귀를 기울였다. 그녀가 움켜쥔 기사의 몸도 긴장해 서 단단해져 있었다. 처음에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잠시후, 무언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그녀의 몸은 한순간 얼어 붙었다. 파삭 파삭 하고 오른 쪽에서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적지 않은소리 가 나는 것으로 보아 하나 둘이 아니었다. 파삭 파삭... 두려움으로 온 몸이 얼어붙었다. 숨도 쉴 수 없었다. 짙은 어둠, 앞도 알 수 없는 어둠, 그 어둠 속에서 별다른 보호도 없이 서 있는 것이다. 그녀는 눈을 아프도록 감고 이를 악물었다. "누구냐!" 낮은 외침소리가 저쪽에서 먼저 들려왔다. 미트라는 갑작스레 침묵이 깨지자 숨을 내쉬었다. 전신이 굳어진 상태로 그녀가 기사의 팔안에 몸을 기대자 기사는 재빨리 그녀를 자신의 등 뒤로 밀어 주었다. 일행은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상대는 누군지알 수 없었고 게다가 한 둘이 아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겁에 질릴 만 했다. 여성주는 네 명의 시녀에게 둘러싸여 수풀 아래 주저앉아 있었고 다른 귀족들은 칼을 빼든 채로 기사들에게 둘러싸여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미트라역시 기사의 품안 에 안겨 바닥에 몸을 숙이고 있었다. "대답해! 누구냐!" 저쪽에서 재차 물어왔다. 그리고 갑자기 미트라는 그 쪽이 누군지 깨닫고 소리를 냈다. ".....킬라이?" 두려움이 깨졌다. 드워프의 왕은 피투성이가 된 도끼를 쥔 채로 수풀을 헤치고 그들에게로 다가섰다. "드워프의 왕...." 여성주는 옛 이야기에 나오는 음유시인처럼 읊조리듯이 그렇게 말했다. 한숨이 섞여 나오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인 땅딸한 드워프의 왕은 단단해 보이는 어깨를 흔들면서 주변을 살펴보았다. 드워프들은 모두 일곱 이었다. 다들 피투성이였고 다친 자들도 있었다. 미트라는 자기도 모르게 앞으로 나섰다. "다쳤어요?" "아아, 인간의 아가씨, 거기에 있었군." 킬라이는 여전히 평탄한 어조로 말했다. 그는 다소 걱정하고 있던 차였다. 쿠베린이 맡긴 아가씨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떤 난리가 벌어질지 그는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피가..." "내 피는 아냐." 킬라이는 간단히 말하고 여성주를 향해 물었다. "어느 쪽으로 갈건가?" "지금 고왕국 쪽의 결계석으로 향하던 중이죠. 그곳에서 연락을 할 참입 니다." 그녀의 대답에 킬라이는 혀를 찼다. "그대들은 어디로 가실 건가요?" "이 일을 알리기 위해서라도 노스엘스턴으로 가야겠지. 엘프의 왕에게 전 해 주어야 하니까." 킬라이는 미트라를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왕방울만한 눈이 선뜻 빛나서 미트라는 다소 우스워졌다. "아가씨도 나와 함께 가지. 쿠베린놈은 노스 엘스턴에 있을 테니까." "네." 그녀로서도 뭔가 이들 여성주 일행보다는 드워프들이 나을 거라 판단했 다. 이종족사이에 끼어 있는 것은 처음이 아니었고 킬라이라면 뭔가 믿음 직했다. "그런데 휴런과 아이들은....? 튜나는 보셨나요?" "모르겠어. 적진으로 뛰어드는 것까지는 보았는데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 는지는 나로서도 알 수가 없군." 미트라는 불안해져서 두 손을 모았다. 일행은 드워프들과 합류한 채로 다시 전진하기 시작했다. 오래 말할 여가 는 없었기 때문에 미트라는 킬라이의 옆에 바짝 붙어 걸으면서 이런 저런 것을 물을 수 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어둠 속에서 쫓기는 상황에 한가한 소리를 지껄일 수는 없기에 그녀는 결국 입을 다물었다. "아이들은 무사할 거야." "네?" "쿠베린의 아이들이야. 무사하지 않을 리가 없지, 그 우악스런 종족은 말 이야..." 킬라이는 히죽이죽 웃었다. "죽이고 싶어도 못죽이는 강인한 종족이란 말이야. 한 마디로 괴물이라고 부를 만한 종족 이라구." 미트라는 그 말에 웃고 말았다. 뭔가 설득력이 있어서 할 말이없었다. 작달막한 드워프의 몸체 어디에서 이렇게 강인한 느낌이 오는 것일까 하 고 미트라는 킬라이의 어깨를 바라보았다. 작은 나무통같은 몸체는 굴곡은 거의 느껴지지 않고 몸에서 보이는 것은 머리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단단한 어깨에 매달린 두 팔과 다리는 짧고도 말할 나위 없이 강해 보 였다. 드워프가 든 도끼는 드워프 자신만한 크기였지만 그것을 들고 있는 모습이 조금도 어색하지 않았다. 그때 맨 뒤에서 따라오던 드워프가 갑자기 쉬이이잇 하는 이상한 소리를 냈다. 드워프들이 몸을 굳히자 옆에 있던 일행 모두도 움직임을 멈추고 불 안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사악 사악하는 기분나쁜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킬라이의 얼굴이 약간 굳었다. "아가씨, 앞으로 가." 미트라는 군말을 하지 않고 조심스레 앞으로 한 걸음 내딛었고 그 뒤를 이어서 여성주 일행들도 앞으로 전진했다. 그러나 기사들은 뒤를 주시하면 서 천천히 드워프들에게 다가섰다. 킬라이는 쉬잇 쉬잇하는 기묘한 소리를 입술 사이로 내뱉으면서 도끼를 휘 둘러 보였다. 그러자 드워프들은 거대한 도끼를 움켜쥔 상태로 두 다리를 벌리고 몸을 숙여 보였다. 그 긴장된 모습에 뒤를 따르던 기사들도 칼을 재차 쥐었지만 드워프는 손을 흔들어 가라고 재촉했다. 미트라는 입술을 깨물고 조심스레 앞서 걷는 여성주일행을 따라 걸었다. 성주는 드워프들이 뒤에 남는 게 당연하다는 듯이 아무런 주저도 없이 나 아가고 있었고 다른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미트라는 뒤돌아 보고 싶은 것을 억누르면서 자신을 부축하는 기사의 팔뚝을 다시 잡았다. "카아아아아......!" "죽엿!" "이놈의 자식!" 무언가 소름끼치는 소리가 뒤에서 터져나왔다. 미트라는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녀의 팔을 잡고 있는 기사는 단호하게 그녀 를 잡아 끌고 달리기 시작했다. 드워프들이 대체 무엇과 싸우고 있는지 그 리고 어떻게 되어가는 지 미트라는 불안해서 견딜 수 없었다. 귓전으로 들 려오는 소름끼치는 비명은 드워프의 것인지 아니면 그들을 쫓는 적의 것인 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더더욱 끔찍했다. '너무나 무력해! 나는 정말 너무나 무력해!' 그녀는 울고 싶은 기분으로 내달렸다. 버석거리고 부서지는 나뭇가지들과 나무뿌리들 탓으로 몇 번이나 넘어질 뻔했지만 그녀는 그녀를 부축하는 기사의 팔에 이끌려 맹렬하게 달리고 있 었다. '무사해 주세요! 킬라이!' 헐떡이는 숨소리와 함께 멀리서 갑자기 퍼엉 하고 뭔가가 터지는 것 같은 소리가 나왔다. 그 소리에 움찔하는 미트라를 잡아 끌고 기사는 앞서 달리 는 일행들을 인도했다. "이쪽으로!" 거대한 고목 앞에 선 여성주는 시녀들의 부축을 받더니 갑자기 고목의 옆 에 놓인 거대한 바위를 가리켰다. 그러자 서둘러서 두 명의 기사들이 그 바위를 밀어 제꼈다. 그릉거리는 소리와 함께 바위가 움직이자 마자 그 자 리에는 시커먼 구멍이 나타났다. '비밀 통로?' 희미한 달빛에 구멍으로 내려가는 돌계단이 보였지만 미트라는 그 밑으로 내려가는 것이 뭔가 끔찍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숨을 삼키는 동안 여성주는 주저하지 않고 시녀들의 부축을 받으 면서 아래로 내려섰다. 그리고 내려서면서 홱 돌아보았다. "그대와, 그대! 할 일을 하시오!" 갑자기 성주의 시선을 받은 두 기사는 움찔했다. 그러나 곧이어 그들은 아무 말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여 보였고 그들에게 다시 시선도 두지 않은 여성주는 급히 시녀들의 부축을 받으며 구멍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내려갔다. 미트라와 귀족들이 다른 세 명의 기사들과 함 께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두 기사는 사방을 살피면서 그대로 입구에 서서 경계를 했다. "이건 어디로 가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미트라가 묻자 그녀를 부축하던 기사가 짧게 대답했 다. "그랑프라임 왕국으로 가는 통로입니다." "에? 이런 길이?" 미트라는 눈을 크게 떴다. 그랑프라임왕국이란 고왕국이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는 있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랑프라임왕국, 혹은 프라임왕국이라는 말 대신 에고 왕국이라 불렀다. "마튜스에서 왕국의 결계로 이어지는 지름길입니다. 아마 외지인으로는 왕녀께서 처음으로 이곳을 지나는 것일 겁니다." 통로는 좁고 어두웠지만 곧 누군가가 벽에 달려있던 등잔에 불을 붙였다. 불빛에 드러난 통로는 사각형의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단단해 보이는 벽으 로 이루어져 있었다. 벽에는 군데군데 오래된 세월을 상징하듯이 균열과 검은 이끼가 끼어있었지만 몇백년은 더 견딜 수 있을 것처럼 견고해 보였 다. 갑자기 미트라는 우르릉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뒤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더 이상 들려오지 않는다. "아까, 그분들은?" "입구를 막기 위해 남은 겁니다." "에?" 미트라는 자기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다. 기사는 진지하게 그녀의 팔을 재차 끌면서 말했다. "서두르십시오. 그들이 시간을 얼마나 벌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추적자가 나타날 지도 모릅니다." "그, 그럼.........그들은 시간을 벌기 위해서, 입구를 막기위해 그 자리에 남 은 건가요?" "그렇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기사의 얼굴은 너무나 당연한 듯이 보여 미트라는 할 말을 잊었다. 여성주가 말한 '할일을 하라' 라고 하는 것은 너희들이 남아 시간을 벌어 라 라는 의미였단 말인가? 그녀는 거의 끌려가듯이 걸어가면서 혼란으로 머리를 흔들었다. 그들이 다리가 아플 정도로 걸었을 즈음이었다. 갑자기 그들의 눈 앞에 둥근 문이 나타났다. 통로의 끝이었다. 그 문 앞에 선 여성주는 두 손을 뻗어서 문고리를 잡았다. 그 순간 우르 르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고 그 문 안쪽은 뭔가 밝은 빛이 일렁였다. 미트라는 들어서자 마자 빛나는 야광주에 잠시 눈이 부셔서 주춤거렸지만 그것도 잠시, 성주의 말에 또 다시 몸을 굳혔다. "문을 지켜라." 그렇게 말한 상대는 이번에는 네 명의 시녀중 두 명의 소녀들에게 였다. 파랗게 질려버린 두 명의 시녀는 입을 꾸욱 다물고 두 손을 맞잡은 채 침 묵했다. 겁에 질린 얼굴이 확연했지만 그녀들은 그 자리에 못박힌 듯이 멈 추어 서서 문고리를 잡았다. 왜 그녀들이 남아야 하는 걸까 하고 막 기사에게 물으려는 순간 미트라는 입을 다물었다. 기사들도 귀족들도 그녀들을 돌아보지도 않았다. 이미 성주는 나머지 두 명의 시녀를 데리고 주저없이 희게 빛나는 야광주가 박힌 복도를 걷기시 작하고 있었다. "어서." 미트라를 재촉하는 기사의 손에 이끌려 미트라는 주춤주춤 걸었지만 다시 돌아보았다. 파랗게 질린 두 명의 시녀는 문고리를 잡은 채 그대로 굳어 서 있었다. 아직 십육칠세 밖에 안된, 미트라와 비슷한 또래의, 혹은 그 보다도 어린 듯한 그 얼굴에 그녀는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끝없을 듯한 사각형의 길을, 그 휘황한 야광주의 빛 아래서 미트라는 멍 하니 걸었다. 무언가 작은 것이, 불씨 같은 것이 그녀의 가슴 밑바닥부터 치밀어 오르 고 있었다. KUBERIN....... 증오와 증오가 만나고 의지와 의지가 부딪치고 야만과 야만이 힘을 겨룬다 죽음이 명예롭다고 하는 자는 누군가 선혈이 아름답다고 하는 자는 누군가 18 "곧입니다." 앞서 걷던 기사가 주의깊게 속삭였다. 성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나섰다. 다리가 아프도록 걸었던 길은 이제 끝이 나고 있었다. 그들의 전면에는 돌문이 있었다. 그 돌문이 어디로 통하는 지 잘 알 수는 없었지만 최소한 마튜스에서 상당히 떨어진 곳임은 분명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확실히 룬드바르군의 포위망을 벗어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쨌거나 이제까지 는 탈출이 쉬웠다. 길고 고불고불한 이 지하암도를 걷는 동안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었다. 미 트라는 국외자로서, 외국인으로서 더 할 말이 없었기 때문에 입을 열지 않 았었다. "이제 겨우 안심을...." "안심하긴 이릅니다. 이 위로 올라가서도 안심할 수 없어요. 첫 번째 게이 트에 도착하기 전에는 마음을 놓을 수 없습니다." 귀족 한 명이 그렇게 입을 열었다가 성주의 말에 머슥해져서 다시 입을 닫았다. 성주는 주변을 돌아보면서 앞에 선 기사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열어요." 기사는 바로 앞 돌문에 손을 대고 밀었다. 그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놀랄 정도로 쉽게 문이 열렸다. 또다시 계단이 나타나자 이번에는 전과 달리 벽에 매달린 등을 하나 들고 기사가 앞으로 나섰다. 덕분에 어두웠던 계단이 환히 드러났다. 차가운 기운이 확 뺨으로 다가들었다. 숲의 냄새가 콧속으로 밀려들어오자 미트라는 이 밖이 다시 숲이라는 것 을 깨달았다. 사람들의 뒤를 따라서 계단을 올라 밖으로 나가려는 때 다시 성주가 말했 다. "그대는 문을 지켜라." 이번에는 바로 성주을 부축하고 왔던 시녀였다. 그녀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아직 이십도 채 되지 않은 소녀가 그 자리에 얼어붙자 성주는 돌아보지도 않은 채 걸음을 옮기며 명령했다. "우리가 간 뒤에 다시 문을 닫아 놓도록. 이 통로가 다른 자들에게 발각 되지 않도록 막아." 미트라도 얼어붙었다. 성주의 일행이 다시 어둠속으로 등을 들고 걷는 동안 미트라는 얼어 붙어 서서 시녀를 뚫어지도록 바라보았다. 시녀는 홀로 남아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지만 곧이어 체념한 듯 조용히 고개를 떨구고 다시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왕녀님, 가시지요." 미트라를 부축하던 기사가 그녀를 잡아 당겼지만 미트라는 사납게 뿌리치 고 시녀에게 외쳤다. "잠깐만!" 계단을 내려가던 시녀가 흠칫하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어째서 그 문을 닫아야 하지? 마튜스는 이미 멸망했어! 그 문을 닫을 필 요는 없다구!" 그녀가 난폭하게 외치자 기사도 흠칫했다. 불쾌한 듯 이쪽을 쏘아보는 성주의 얼굴이 보였다. 미트라는 홱 돌아서서 성주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외쳤다. "어째서 그런 무익한 명령을 내리는 것이죠? 이들을 남게 할 필요가 대체 뭐가 있나요?" "엘란트라 왕녀, 지금 무슨 말씀을 하는 거죠?" 성주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어떤 명령이 무익한지 유익한지는 내가 결정합니다. 왕녀가 결정할 사항 이 아닙니다." "나도 내가 주제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이건 말이 안되는 일이에요! 무엇 때문에 멸망한 마튜스의 비밀통로를 지키기 위해서 이들을 희생시켜야 하는 거죠?" "나중에..." 그녀는 오만하게 말을 이었다. "마튜스를 수복할 때에 이 통로들은 유익하게 활용될 것입니다. 그런 것 까지 왕녀에게 설명해야 하나요?" "하지만....이해할 수 없군요. 이들을 이런식으로 남겨서 죽게 할 필요까지 있어요? 문을 닫고 피하라고 왜 말하지 않지요? 왜 나중에 따라와라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성주의 얼굴이 노골적으로 조소로 가득 찼다. "이들은 내게, 왕국의 왕족과 귀족들에게 봉사하기 위해 태어난 자들입니 다. 그런 자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은 내 마음이에요." "뭐라구요?" 미트라는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모르겠단 말입니까? 호, 정말 어처구니가 없군요. 이들은 나에게 봉사하 도록 태어난 자들 이에요. 그런 자들의 목숨 때문에 내가 위험을 감수해 야 한단 말인가요?" 미트라는 이를 악물었다. "왕녀는 정말로 철이 없군요, 하기는 묘인족의 왕과 함께 이 먼 곳에 나 타났을 때부터 알았지만." 그녀는 가볍게 비웃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죽어라 라고 말한다구요?" 미트라는 나지막히 되물었다. 가슴 속 저 밑에서 무언가가 무럭무럭 치밀 고 올라왔다. "그래서 나를 위해 죽어라, 라고 말한단 말이죠?" "그래요. 나를 위해 죽어야 할 자들이니 당연한 일이죠." 그녀는 짧게 말하고 미트라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흠, 허긴 델리암왕국이 망했으니 그대도 이제는 왕녀는 아니죠. 나라 없 는 왕녀니 저런 아랫 것들의 마음까지 헤아리게 되었나 보죠?" 미트라는 성큼성큼 걸어서 성주의 앞 까지 걸어갔다. 모두 그녀들을 주목 하고 있었지만 미트라를 막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성주는 오만한 자세 그대로 미트라를 쏘아 보며 물었다. "그래서요? 왕녀, 그게 불만이라면 당장 당신이 저애 대신에 아래로 내려 가 문을 닫아 주겠어요?" "그런 식으로....사람을 부리나요? 고왕국에서는?" 미트라는 그녀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하, 정말 어처구니가 없군. 망해버린 나라의 왕녀를 대접해 주니까 적반 하장도 유분수지. 불만이라면 여기서 떠나요! 당신이 왕녀니까 그래도 대 접을..." 그 순간 미트라는 사정없이 여성주의 뺨을 갈겼다. 철썩 하고 소리가 선명하게 숲 안에 울려퍼졌다. 비명도 지르지 못한 성주는 휘청이면서 뒤로 두 발자국 물러섰고 남은 시 녀 한명이 급히 그녀를 부축하려 손을 내뻗었다. 기사들과 귀족들 모두가 아연해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미트라를 부축하던 기사 한 명이 급히 그녀의 팔을 잡아 제지시키는 동안 그녀는 아연해서 맞은 뺨만을 움켜쥐고 있는 성주를 노려보며 외쳤다. "별 거지같은 계집 다 보겠네!" "...이, 이, 발,발칙한!" 성주가 파들파들 떨자 미트라는 자신을 잡은 기사의 손을 밀어 버리며 외 쳤다. "야! 이 멍청한 계집아! 너는 이 와중에 네가 성주라고 생각하냐! 너는 성 을 버리고 성민을 버리고 너를 도우러 온 자들을 모두 배신하고 도망간 비겁한 계집이야! 모두 버리고 도망 친 주제에 뭘 잘했다고 큰 소리냐!" "저 발칙한 것을 가만히 놔둘 참이냐!" 성주가 바락바락 외치자 미트라의 팔을 잡은 기사가 힘을 주어서 그녀의 두 팔을 잡아 뒤로 묶었다. 그러나 미트라쪽이 더 빨랐다. 그녀는 성주의 정면으로 다가가 주저하지 않고 주먹을 쥔 상태로 그대로 성주의 턱을 후려갈겼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성주가 뒤로 넘어가자 미트 라는 큰 소리로 외쳤다. "진작부터 이렇게 하고 싶었어!" 그러나 기사 두 명이 달려들어 그녀의 팔을 뒤로 꺾었다. 미트라는 신음 을 토하면서 웅크렸지만 여전히 성주를 노려보며 외쳤다. "싸가지 없는 년! 네 년을 바로 썩어빠진 귀족이라고 하는 거야! 성주라 면 성주답게 굴어! 면상만 바로 뜨고 잘난 척하면 모든 게 해결되는 줄 아냐! 너 혼자 도망가면 다야?" 그녀는 발을 구르면서 쓰러진 성주와 귀족들을 노려보았다. 성주의 몸을 부축하던 시녀는 우물우물하면서 미트라를 바라보았다. 기사 들은 아연한 듯 그녀를 잡고있으면서도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 같았다. "누구든 피는 붉단말이다! 생명은 누구든 단 하나밖에 없어!" 그녀는 큰 소리로 외치고 자신을 잡고 있는 기사를 노려보았다. "놔!" 기사들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놔! 어차피 도망가는 길이야! 나를 잡고 언제까지 갈 거냐?" 기사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쓰러진 성주를 바라보았다. 성주는 완전히 졸도한 것인지 길게 늘어져 있었다. 턱을 제대로 갈긴 모양이었다. "놔, 나는 왕녀다!" 그녀는 기사들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기사들도 우물쭈물하면서 그녀를 잡은 손을 놓았다. 미트라는 바로 서서 옷매무새를 단정하게 했다. 그녀를 멍청히 바라보고 있던 귀족들이 성주를 부축하는 것을 보면서 그녀는 욱신거리는 주먹을 주 물렀다. 그들이 소리를 질러댔지만 숲은 여전히 조용했다. 밤새가 날아가는 소리 가 멀리서 들려온다. 미트라는 갑자기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고 조용히 말 했다. "너희들은 그 쓸모 없는 계집을 데리고 가. 이제 마튜스도 점령당했으니 그 계집도 성주는 아니야, 그러나 당신들은 어쨌거나 할 일을 하겠지." 미트라는 아직도 계단 위에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어린 시녀를 바라 보았다. 그녀는 어안이 벙벙한 듯 어쩔 줄 몰라 하면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 애 대신에 내가 남지, 그러니까 이 애를 데려가." 시녀는 입을 벌렸다. "그럼 불만이 없겠지? 내가 남을 테니까 이 애를 데려가라고." "왕녀님, 한낱 시녀 때문에...." 여지껏 그녀를 부축해 온 기사가 당황한 어조로 말을 걸었다. "무엇을 하든 내 마음이야, 이 애를 데려가요." 망해버린 왕국의 왕녀가 무슨 왕녀야? 그리고 나는 왕녀가 아니라 미트라 일뿐이야. 그녀는 어깨를 으슥해 보였다. 뭐가 어찌되었든 상관없잖아? 내가 바라는 것은 그대로 하는 것 뿐. 당황한 시녀가 몇 번이나 그녀를 향해 머리를 조아리는 것을 미트라는 모 른 척하고 팔짱을 낀 상태로 침묵했다. 기사들과 귀족들, 그리고 아직 의식 을 찾지 못한 성주를 부축하는 시녀들은 그녀를 몇 번이고 돌아보았다. 바 보같은 짓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미트라는 뭔가 상쾌했다. 그렇지만 그들이 다 떠나고 홀로 남자 갑자기 그녀는 공포를 느꼈다. 무섭다. 뒤쫓아온 무리들에게 죽게 될 지도 몰라. 아니, 확실히 죽을 것이다. "쿠베린...." 그녀는 망연히 중얼거렸다. '나는 확실히 바보인 지도 몰라. 쿠베린의 말대로 성안에서 꺅꺅 소리를 지르면서 구해주세요를 외치는 공주님쪽이 훨씬 지혜로운 것일지도...' 스스로를 격려하듯이 그녀는 다시 한 번 소리내어 웃었다. "하지만 나는 높은 성의 공주님이 옛날부터 싫었다구!" 그리고 그녀는 성주일행이 간 반대 방향을 돌아보았다. 시커먼 어둠.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깊고도 깊은 위압적인 숲. 그녀는 크게 한 번 숨을 들이키고 그런대로 익숙해진 여성용 레이피어를 손에 쥐고 그녀는 킬라이가 있던 곳으로 달렸다. "라비니아.." 라비니아는 피투성이가 된 채로 겨우 숨을 내쉬었다. 옆에서 부축하는 케논도 성한 곳은 거의 없었지만 라비니아처럼 다리가 부 러지진 않은 상태였다. 어떻게든 피해있으라고 휴런이 충고했기 때문에 라 비니아는 그 말에 따르기로 했다. 무척 기분도 나쁘고 자존심도 상하는 일 이었지만 그녀는 아직 어렸고 큰 부상을 입었으니까 그 충고를 따른다고 해서 잘못될 일은 없었다. 그들은 막 싸움터를 벗어난 터였다. 룬드바르의 본진이 그대로 부서진 성문으로 들이닥치자 좀비떼들은 마치 썩은 나무토막처럼 널부러졌다. 그리고 진짜 싸움다운 싸움, 인간대 인간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터였다. 비명소리와 화광이 충천한 마튜스를 바라보면서 나무 위에 앉은 두 어린 묘인족은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어둠 속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휴런은 어디 갔어?" "그 사인족과 싸우면서 사라져버렸어. 어딘가에서 날뛰고 있겠지, 제길." 두 소년소녀는 침묵했다. 이번 기회에 성인과 자신들이 얼마나 큰 차이가 나는 지 새삼 깨달아 버 린 터라 싸울 의욕도 별로 나지 않았다. 그들은 사인족을 상대로 형편없는 싸움을 벌였고 아마 그 것은 묘인족들이 비웃고 있는 수인족들을 상대로 싸워도 그다지 다를 것 같지 않았다. 여지껏 그들은 부친과 모친 사이에서 보호받으며 싸워왔다는 것을 싫을 만큼 절감했던 것이다. 거인들의 나무라고 불릴 정도로 거대한 이 나무는 가지 하나가 보통 나무 둥치 정도의 두께를 가지고 있었는 지라 두 어린 묘인족이 그 위에 올라서 서 한 참 동안이나 버티고 있었어도 그들의 존재를 눈치채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인간들의 싸움을 멍하니 지켜보면서 갑자기 케논이 물었다. "배 안고파?" "고파. 그보단 아파 죽겠다." 라비니아는 끙 하고 부러진 다리를 어루만졌다. 피로 얼룩진 다리는 만질 수 조차 없을 정도로 아팠다. 보통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골절 정도는 아물어 버리는 회복력을 가진 묘 인족으로서도 허벅지뼈가 이런 식으로 부러진 것이라면 잘못하면 다리를 절게 될 지도 몰랐다. 라비니아는 갑자기 듀나시를 떠올리고는 두려워졌다. "설마 이대로 다리를 절게 되는 것은 아닐까?" "설마...우린 어린애니까 금방 아물거야." "듀나시도 어릴 때 다쳤다고 했잖아?" 라비니아는 쏘아 붙였다. 케논은 잠시 침묵하다가 물었다. "어떻게 할까?" "뭘 어떻게 해?" "여기서 내내 이러고 있을 순 없어. 마튜스가 망했으니까 우린 아빠를 찾 아가야 한다구." "지금 이 몸으로? 그렇게 쉽게 노스엘스턴으로 갈 수 있었다면 우리를 두 고 가지도 않았을 거라구." 라비니아는 케논을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 말에 음 하고 케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네. 하지만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 "저 인간들의 싸움이 어느 정도 조용해지면 숲 안으로 들어가 사냥을 해 먹자고." "...역시 그래야 할까?" 두 '아이들'은 나뭇가지에 몸을 묻은 채 서로 엉켜 들었다. 이제 완전한 밤이 찾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밤이 바로 마튜스 최후의 밤이었다. KUBERIN....... 증오와 증오가 만나고 의지와 의지가 부딪치고 야만과 야만이 힘을 겨룬다 죽음이 명예롭다고 하는 자는 누군가 선혈이 아름답다고 하는 자는 누군가 19 ".............." 갑자기 생각했다. "아름다워...." 미트라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 보고 섰다. 땀이 등을 적시고 있었다. 이제 완전히 새까만 하늘이 별들을 이끌고 세상 을 덮었다. 하늘이 보이지 않을 이 빽빽한 삼림 안에서도 하늘을 볼 수 있 다는 것이 문득 놀라워서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자신이 아직 살 아있다는 것도 놀라웠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콧속으로는 피냄새와 흙이 가진 비릿한 냄새가 얽혀서 숲안에서 나는 특유 한 싸아한 냄새를 더욱 강조하고 있다. 뺨으로 닿는 공기는 차갑고 축축해 서 땀이 오른 체온을 가차없이 앗아간다. 그녀는 등을 나무에 기댄 채로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 보고 서 있었다. 별은 새까만 하늘을 청명하게 장식하고 있고 숲의 바람은 마튜스의 난리 도, 여성주의 고함도, 사람들의 악다구니도 모두 모른 채 흐르고 있다. 아 무 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그녀는 오한을 느끼면서 어깨를 떨었다. '그렇구나....델리암이 망했을 때도, 오라버니가 죽었을 때도, 수도가 불타 올랐을 때도 여전히 하늘은 맑았고 바람은 불었고....' 그녀는 갑자기 울고 싶어졌다. ".......그 때도 난 배가 고팠었지........" 정말로 이상한 일이었다. 나라가 망하고 왕이 죽고 세상이 모두 적으로 돌아선 것 같던 그 때 조차도 그녀는 배가 고프고 춥고 더웠었다. 마튜스가 망해도, 세상은 달라질 것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갑자기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쿠베린의 말처럼.....그 간악하고 제멋대로인 마왕 말대로...." 사람들은 여전히 먹고 마시고 자고 노래하고 울고 웃을 것이고 하늘도 바 다도 그리고 땅도 달라지는 것은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너정도의 미녀가, 살려달라고 애교를 부려도 상관은 없는 거야.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어." 쿠베린의 그 말이 마치 유혹처럼 들렸다. 성주를 후려갈기고 그녀에게 욕설을 퍼부운 것이 너무나 한심스럽게도 생 각되었다. 그래, 나 하나 어떻게 한다고 해서 세상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야. 그저 모 두들 그렇듯 그렇게 저렇게 세상은 흘러가고 나 혼자 흥분해서 달려나간다 고 해도....그것은 싸구려 영웅심일 뿐일 거야....난 약해 빠진 계집애인걸. 용사도 아니고 영웅도 아니고 마법사도 아니고........ 그녀는 레이피어를 들여다 보았다. 자신의 손 안에 잡혀 있는 그것은 너무 나 초라하게 느껴져서 뭔가 허무했다. 자신은 이 것으로 병사 한 명도 베 지 못할 것이다. 아니, 그렇다고는 하지만 병사를 베어야 할 이유는 대체 뭐지? 병사 한 둘을 죽인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 델리암왕 국이 도로 서는 것도 아니고 마튜스가 되돌려지는 것도 아니고 죽었던 사 람들이 모두 일어서는 것도 아니다. 달라지는 것은 그저 시체가 하나 느는 것 뿐이잖은가. 그렇지만 하고 그녀는 힘을 주어 다시 걷기 시작했다. 별은 별이고 땅은 땅이고 그리고 또 하늘은 하늘인 것처럼 나는 나이고 나 는........ "단지 도망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은 것 뿐이야. 나중에, 훨씬 더 나중에 내가 할머니가 되어서, 아니 아줌마가 되어서 그때 나는 비겁했다...라고 말 하고 싶지 않은 것 뿐이야. 내가 뭘 할 수 있느냐 아니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것은............." 그녀는 자신에게 들려주듯이 소리내어 말했다. ".............." 갑자기 허무해진다. 겁이 나고 오한이 난다. 나는 죽을 거야. 쿠베린이 와서 날 구해주지 않으면 나는 죽을 거야. 다리가 덜덜 떨렸다. 무섭다. 사방이 온통 적 뿐이었다. 여자가 만약에 잡히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 가슴 속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젊고 예쁜 여자가 전쟁터에서 당하는일이 어떤 것인 줄 알아? 힘없는 자가 전쟁터에서 당하는 일이 어떤 것인 줄 알아? 오한이 나서 그녀는 다시 뛰기 시작했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사방을 뒤덮은 거대한 거목들은 이미 죽어버린 거인들의 두터운 다리, 그 다리에 짓눌려 숨이 막힌다. 그녀가 달릴 때마다 발끝에서 튀어 오르는 소 리는 숲이 비웃는 소리, 하늘에선 별들이 노려보고 있다. 그녀는 미친 듯이 달렸다. 두렵고 무섭고 견딜 수 없는 후회가 그녀의 몸을 휘감았다. "누구냐!" 갑작스런 외침에 그녀는 얼어붙었다. 전신에 차가운 것이 퍼져나간다. 그녀는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부스럭 부스럭하고 무언가가 다가왔다. 그녀는 레이피어를 휘두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칼자루를 쥐고는 덜덜 떨며 그대로 눈을 감고 있었다. "아니! 아가씨?" 귀에 익은 목소리 때문에 그녀는 황급히 눈을 떴다. 눈앞에는 갈색의 액체로 번들거리는 몸체를 한 작달막한 통나무가 서 있었 다. 통나무와도 같은 체구를 한 그는 자기 몸통만한 도끼를 들고 그녀를 내려다 보고, 아니 정시하고 있었다. 주저앉아 있던 미트라의 눈에 그제서 야 상황이 들어왔다. 그녀의 앞에 선 것은 드워프의 왕 킬라이였다. 그리고 그의 뒤에는 세 명 의 드워프가 역시 피를 뒤집어 쓴 채로 서 있었고 그 옆에는 누군가를 부 축하고 있는 드워프가 보였다. "어떻게 된 거야? 이런 데서?" 킬라이는 손을 뻗어서 미트라를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아직도 후들거리는 다리를 억지로 들어 일어선 그녀는 킬라이의 손을 꽉 쥐고 물었다. "다친 곳은!" "아아, 괜찮아. 나 드워프의 왕은 그렇게 약하지 않아. 왜 이런 곳에 혼자 있는 거지? 성주와 같이 가지 않았던가?" ".....되돌아 왔어요." "왜? 그쪽에도 벌써 포위망이?" 킬라이가 긴장된 눈빛을 던지자 미트라는 고개를 돌렸다. "아뇨, 잘은 모르지만....그냥요." "되돌아 오다니, 어리석은 일이야. 어쨌든 어긋나지 않아서 잘 되었군. 안 그래도 묘인족의 꼬마아가씨가 냄새가 난다고 해서 돌아보길 잘했군그래." 미트라는 그제서야 부축을 받고 선 것이 누군가를 깨달았다. 드워프와 키가 얼추 비슷한 그, 아니 그 아이는 피투성이가 된 채로 드워 프의 부축을 받으며 서 있었다. 거의 전신이 전부 피로 젖은 듯 보이는 그 아이는 분명히 쿠베린의 딸인 라비니아였다. 적의로 번들거리는 눈빛을 던 지던 라비니아가 싸늘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여기서 뭘하는 거야? 멍청이같으니." 미트라는 오기가 솟는 것을 느꼈지만 입을 다물었다. 상대는 1살도 채 안된 어린애였다. 쿠베린의 아이이니 그 입담이 얼마나 대단할 것인가는 뻔한 일이었다. "어서 가자." 킬라이가 서둘러 앞장을 섰다. 미트라가 문득 주변을 돌아보며 물었다. "휴런은? 그리고...케논은?" "그들은 뒤에 있어. 그리고 너 따위가 남의 일 걱정할 처지가 아닐텐데?" 라비니아가 다시 되쏘았다. "걱정도 못하냐?" 미트라가 쏘아붙이자 라비니아는 흥 하고 비웃었다. "인간주제에 누굴 걱정하는 거야? 한 주먹거리도 안되는 주제에." "그 한 주먹거리도 안되는 인간에게 다친 너는 어떻고?" "난 인간이 아니라 사인족에게 당한 거야! 이 뻔뻔스런 인간계집!" 라비니아의 두 눈에 파란 불꽃이 튀기는 것이 보이자 미트라는 흠칫했다. 안그래도 쿠베린의 아이들은 자신을 싫어했던 것이 생각나자 걱정했던 자 신이 바보스러워진다. 그녀는 입을 다시 다물고 무시하기로 마음 먹었다. '대체 쿠베린은 어떻게 애들 교육을 시키는 거지? 왜 애들이 전부 저 따위 인거야!' 그녀는 울화를 누르고 킬라이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저 애는 어디서 발견한 거지요? 휴런이나 다른 아이는 발견하지 못했어 요?" "아, 저 애는 스스로 우릴 찾아왔어. 우리 냄새를 맡고 찾아왔다고 하더군. 다른 아이는 휴런을 찾으러 갔고. 저애는 부상 중이라 우리들을 찾아온 거 야." 킬라이는 쓰게 웃었다. "만약에 부상당하지 않았다면 절대 우리와 함께 걷는 일은 없었을걸. 묘인 족은 대단히 지독한 종족이니까." "쿠베린이 저 애가 다쳤다는 것을 안다면 난리도 아닐걸요. 하지만 휴런은 대체 뭐하는 거지요? 저 애가 저렇게 다쳤다면 보호해주러 와야 할 거 아 녀요?" 미트라는 얼굴을 찌푸렸다. 전부터 히히덕거리는 헤픈 웃음의 휴런은 어딘가 미덥지 않았었다. "그럴 리 없지. 묘인족의 남자는 절대로 아이를 보호해 주지 않아. 그게 자 기 자식이 아닌 경우는 특히 더. 게다가 자기 자식이라고 해도 남자들은 보호해 주지 않는다고." "뭐라고요?" 미트라는 놀라 킬라이를 다시 보았다. "심지어 귀찮을 경우는 아이를 죽이기도 해. 물론 엄마가 옆에 있을 경우 는 또 다르지만." "......마, 맙소사!" 미트라는 부지불식간에 라비니아를 돌아보았다. 그 말을 들은 것인지 라비 니아는 되쏘아 붙였다. "당연한 거 아냐? 누가 보호따윌 받는다는 거야? 엄마도 아닌데! 보호받는 다는 것 자체가 수치지!" 인간들이란 한심하고 연약한 것들이라니까 하고 라비니아는 소리내어 중얼 거렸다. 경멸의 시선으로 미트라를 보자 그녀는 연민에 가까운 얼굴로 라 비니아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하, 하지만 쿠베린은 아이들이 무척 귀여운 것 같던데요. 이번에 인간들과 싸우는 것도 자기 아이를 납치해 갔다고 그런 거 아니에요?" "아아, 쿠베린은 확실히 애들을 귀여워하지, 하지만 그건 쿠베린이 무척 강 하기 때문이라구. 여자들을 몇이나 거느리고 아이들을 한꺼번에 몇이나 낳 았는데도 애들을 귀여워 하는 것은 자기가 강하기 때문이야." 미트라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대체 무슨 상관이죠?" 킬라이는 새삼스러운 눈길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아가씨는 묘인족에 대해 전혀 모르는 거야?" "..........몰라요. 강한 종족이라는 것 외엔." "왜 강하다고 생각해?" "태어나면서부터 강한 거 아니에요? 저 애도 그렇잖아요? 고작 한 살 밖에 안된 애인데도.." "뭐, 그럴 수도 있겠지만 묘인족은 강해야만이 살아남을 수 있기때문이야." "그거야... 당연한 것 아닌가 하고 미트라가 중얼거릴 때 킬라이가 다시 덧붙였다. "쿠베린은 자기 숙부를 죽이고 왕이 되었어, 백부던가? 숙부던가? 뭐, 어쨌 든 그랬고, 그 뒤에는 자기 형제들을 죽였어. 심지어 자기 아내도 죽였다고 하더군." 미트라는 흠칫 하고 멈추어 섰다. 뭔가로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으로 킬라이를 보자 그는 큰 눈을 굴리며 그 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가 충격을 받은 것을 알았지만 그는 드워프답 게 직선적으로 말했다. "아이들은 강해지면 자기 보다 강한 자에게 본능적으로 도전하는 거야, 그 리고 서로 죽을 때까지 싸우지. 그건 부모자식간에도 마찬가지야. 자기 아 들을 죽인 아비가 얼마나 많은데. 물론 자기 아버지를 죽인 아들도 많고." "그...............그런!" 그런 잔혹한 짓을! 그런 끔찍한 일이란 있을 수 없다고 미트라는 외치고 싶었다. 쿠베린의 그 태연한 얼굴이 갑자기 떠올랐다. 그 아무렇지도 않은 쾌활한 얼굴이 자기 형제들을 죽이고 자기 핏줄들을 태연하게 죽인 자의 얼굴이라 니 믿을 수가없었다. "그는 이미 오백년 이상 왕위에 있었어. 왕이라는 것은 끊임없이 도전을 받는 자리야, 최소 몇백의 도전자들을 죽였을 거야. 만약에 그가 조금이라 도 약했다면...." 그는 흘긋 라비니아를 바라보았다. "절대로 강한 여자를 취해서 애를 낳지 않았을걸. 아니, 애가 강해질 조짐 이 보이면 당장에 죽여버렸을 거야." "말도 안돼요!" 미트라가 소리치자 쉿 하고 킬라이가 눈짓했다.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거짓말이죠?" 킬라이는 날뛰는 그녀의 팔을 움켜쥐고 끌었다. "조용히 해!" "그런, 야만스럽고 끔찍한 일이라니! 쿠베린이 그럴 리가 없어요!" 소름이 끼쳤다. 자기 혈육을 죽이는 쿠베린, 자신의 아들들을 죽이는 쿠베린의 모습이 떠 올라 이루말할 수 없이 역겨워지기 시작했다. "시끄러워, 인간의 여자!" 라비니아가 날카롭게 외쳤다. "인간 따위가 뭘 안다는 거야? 우리는 묘인족이야, 지상에서 가장 강한 종 족, 그런 종족을 인간이 뭘 알아?" 미트라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너야 말로 쿠베린에게 어울리지 않아! 너같이 어릿어릿한 인간계집 따위 가 무슨 도움이 되는 거지? 쾌락에 얼마나 재주에 있는 지는 몰라도 너따 위는..!" 갑자기 라비니아가 입을 다물었다. 안색이 돌처럼 굳었다. "왔다!" "뭐가?" 누군가가 멍하니 되물을 때였다. 미트라는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렇게 라비니아가 외친 순간 드워프들은 신속하게 움직였다. 그들은 동시에 도끼 를 치켜들고 짧고도 둥근 방패를 앞세운 채로 재빨리 내달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라비니아는 다리를 절룩이면서 달렸지만 미트라보다도 빨랐다. 미트라는 결사적으로 달렸지만 다리가 짧은 드워프조차 따르기 힘이 들었다. 아무것도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 숲이었지만 갑자기 공포심이 등덜미를 후려갈겼다. 라비니아는 묘인족, 저 애가 그렇다고 하면 그런 것일 것이다. 무언가가 다리를 물어 뜯을 것같아 미트라는 결사적으로 달렸다. 그리고 실제로 달리는 중 무언가 이질적인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헉헉헉헉........ 학학학학....... 무언가의 숨소리였다. 미트라는 뒤에서 뭔가가 따라오고 있다는 것을 보지않고도 느낄 수가 있었 다. 무언가 더운 입김같은 것이 목덜미에 느껴지는 것 같았다. 알 수 없는 짐승이 그녀의 뒤를 쫓고 있었다. 뒤돌아보면 안돼! 뒤돌아보면 안돼! 그녀는 필사적으로 달렸다. 나뭇가지가 뺨을 긋고 팔뚝을 찌르고 다리를 사정없이 할퀴어댔지만 그녀 는 미친 듯이 달렸다. 끔찍한 느낌이 전신으로 그대로 밀려들어왔다. "으아아아악!" 누군가 비명을 올렸다. 미트라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뒤돌아볼 새도 없었다. 그저 달리기만 할 뿐 뒤돌아서는 그 즉시 죽임을 당할 것임을 예감할 수 있었다. 숨이 턱밑까지 올라와 입안에서는 새된 소리가 튀어 나왔지만 달려야 했 다. 그 비명이 누구의 비명인지 조차 알고 싶지도 않았다. 학학학학........ 뜨거운 입김이 목덜미로, 팔뚝으로, 다리께로 다가온다. 그리고 그 무엇은 사정없이 그녀의 등을 휘갈겼다. "꺄아아아악!" 그녀는 앞으로 거세게 나뒹굴었다. 화끈한 아픔이 등줄기를 직격했다. 하도 세차게 굴러 입안으로 흙과 모래가 새어들어왔다. 눈은 어딘가에 부 딪쳐 잠시동안은 뜰 수 조차 없었다. "헉헉헉...." 미트라는 걸레처럼 처박힌 채로 나무등걸 아래 웅크렸다. 헉헉거리는 숨소 리로 고개를 들자 정면에 자신을 후려갈긴 그 무엇인가가 희미한 달빛아래 드러났다. 그것은 자기보다 몸집은 두 배 정도 큰 네발 달린 짐승이었다. 그것은 시 퍼런 눈알을 굴리며 어둠 속에서 침을 흘리고 서 있었다. 길게 뻗은 주둥 이에 달린 빽빽한 이빨들이 헐떡이는 혀와 함께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 다. "저, 저리 가!" 그녀 정도는 한 입에 갈기갈기 찢을 듯한 그 짐승은 한 발을 들어 미트라 의 앞으로 다가왔다. 미트라가 겁에 질려 뒤로 물러나 앉자 그 것을 즐기 는 듯이 더더욱 다가온다. 시퍼런 눈빛에는 잔인한 빛깔이 떠올랐다. 대체 이 괴물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그녀는 재빨리 주변을 살펴보았다. 아무도 없다. 드워프들은 다 죽었는지 다 도망친 것인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어디서인지 레이피어도 떨어뜨려서 가지고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빈 손이었다. 드워프들과는 완전히 어긋난 모양이었다.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처억하니 그 짐승이 한 걸음 다시 다가섰다. 헐떡이는 숨소리와 입김이 뺨 에까지 느껴졌다. '이젠 끝장이야!' 그 때였다. 갑자기 미트라에게 다가서던 짐승이 흠칫했다. "재미있게 생긴 물건이야." 라비니아였다. 도망간 것이 아니었던가 하고 미트라는 멍하니 생각하며 고개를 천천히 위 로 올렸다. 그녀가 구른 나무의 가지 위에 올라 앉아 있는 라비니아의 모습이 보였 다. 어둠 속에서 흰 이를 드러내고 웃는 모습이 기묘하게 천진스러워서 소 름이 끼쳤다. 피로 범벅이 되었고 게다가 다리 하나를 쓸 수도 없는 그 어 린 소녀의 몸은 그녀의 시선을 받으며 천천히 나무 아래로 내려왔다. 미트라는 소리를 질러 라비니아를 막고 싶었다. 하지만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고 사실 그녀의 말을 들을 라비니아도 아니었다. 놀라운 것은 짐승의 태도였다. 라비니아가 나서자 마자 짐승은 놀란 듯, 경 계하듯이 뒤로 물러섰던 것이다. 크르르 하고 위협적인, 경계의 으르렁거리 는 소리가 짐승의 목 안쪽에서 울려나왔다. 라비니아의 작은 몸에서 살기가 퍼져나왔다. 그녀는 몸을 약간 앞으로 숙 이고 고개를 들어 짐승의 정면을 마주 보았다. 그리고는 송곳니를 드러내 며 으르렁거렸다. "건방진 놈, 너 지금 나에게 대드는 것이야?" 짐승은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살벌한 기운이 공기 중으로 퍼져나갔다. 미트라는 눈을 크게 뜨고 라비니 아의 작은 등을 바라보았다. 놀랍게도 이 부상당한 작은 묘인족의 아이로 인해서 저 황소만한 야수가 물러서고 있었다. 그 야수가 라비니아를 두려 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트라는 손을 뻗어 더듬거려서 겨우 레이피어를 찾았다. 라비니아는 계속해서 짐승을 노려보고 있었다. 저 짐승이 대체 무엇인지 잘은 몰랐지만 범상한 것은 아님이 확실했다. 틀림없이 추잡한 마법사들이 부리는 짐승이라고 확신한 라비니아는 손톱을 꺼내 주욱 뻗었다. 아직 성 체가 아니어서 변신을 할 수는 없지만 이런 작은(?) 짐승 하나 해결하지 못한다는 건 말이 안된다고 라비니아는 되뇌이고 있었다. 크르르.... 짐승이 그녀의 살기를 새삼 느끼며 경계하듯이 으르렁거렸다. "와라!" 라비니아의 작은 몸이 타악 하고 땅을 박차고 튀어 올랐다. 아니 튀어 올 랐다기에는 너무 낮았다. 그녀는 그대로 일직선으로 뻗어나가 바로 정면에 선 짐승의 목줄기를 찔러갔다. 짐승은 피하기 위해서 고개를 돌려 라비니 아를 물어뜯으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앗 하는 사이에 라비니아의 손톱 은 그대로 짐승의 목줄기를 잡아 뜯고 할퀴고 있었다. 피가 분수처럼 솟아 나 미트라의 가슴팍까지 튀어 올랐다. 비명을 올리고 싶었지만 그럴 새도 없었다. 짐승은 목줄기에서 피를 뿌리 면서 고통에 찬 단말마를 올렸다. 가슴 속 저편까지 찢어질 듯한 처절한 소리로 울부짖더니 그대로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말 그대로 눈 깜빡할 사 이였다. 빼곡이 커다란 주둥이에 들어찬 이빨들 사이로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라 비니아는 만족한 듯이 웃고 그 다음에는 짐승의 목덜미에 이를 박고 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매우 배가 고팠고 목도 말랐던 것이다. 미트라는 덜덜 떨며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작은 라비니아가 그 짐승을 해치우는 모습은 그렇다치고 그 짐승을 사냥한 야수처럼 그대로 입을 박고 살을 씹는 그 모습이 너무나 끔찍했다. 지금 그녀가 보고 있는 광경은 도저히 인간이라고는, 인간과 비슷하다고는 볼 수 없는 그런 광경이었다. 맹수가 한 마리 튀어나온 것같은, 맹수의 정점에 선 가장 무섭고도 잔인한 맹수를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라비니아는 썩 맛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일단은 먹어야 했다. 오늘 내 내 별로 먹은 게 없는 데다가 부상 중이었고 피도 많이 흘렸다. 어떻게든 먹어서 보충을 해야 했다. 시뻘건 살점이 뚝뚝 떨어지는 것을 넋을 잃고 바라보던 미트라는 벌떡 일 어나 외쳤다. "그만해!" 물론 그녀의 말따위를 들을 라비니아는 아니었다. 라비니아는 그 짐승의 삼분지 일은 먹어치우고서야 일어섰다. 어느 정도 허기가 가시긴 했지만 충분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아직도 목이 탔다. 입과 가슴, 목덜미가 온통 피에 젖어 일어서는 라비니아의 모습은 미트라 에겐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아직도 살기가 남아 이글거리는 눈동자와 입 가를 핥는 혀라든가 짧게 단발로 잘려진 피에 젖은 머리칼등은 피에 미친 살인귀처럼 보였다. 인간이 생각하는 가장 끔찍한 모습 중에 하나 였다. "그, 그만해! 그런 것을 먹다니!" "난 배고파, 그럼 너라도 먹을까?" 라비니아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서서 미트라를 빤히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십여세의 어린애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끔찍한 모습에 그녀는 심장이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너 말이야...전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어." 라비니아는 이를 드러내며 외쳤다. "재수없게 말이야! 인간인 주제에! 연약하고 쓸모없는 인간인 주제에 감히 누구에게 꼬리를 치는 거야?" 피가 뚝뚝 입가에서 떨어져 내린다. 흰 송곳니는 이미 피에 젖어 있었다. "쿠베린의 여자란 강한 여자인 거야! 감히 너따위 희멀건 인간 따위가!" 손톱은 살점으로 더럽혀져 있다. 피비린내가 콧속을 가득 메웠다. 미트라는 그저 두 눈을 크게 뜬 채 멍하니 넋을 잃고 라비니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리가 덜덜 떨렸다. 상대는 어린애라고 할 수 없었다. 눈 앞에서 이글거리 는 짐승의 내장이 바닥으로 쏟아져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미트라는 구토 감을 느낄 사이도 없이 뒤로 물러섰다. 이 아이는 장난이 아니었다! 이건 괴물이야! "죽이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주 잘 되었어! 넌 이 놈에게 죽임을 당한 거야, 가엾게도 인간인 까닭에 이 따위 것에게 잡혀서 죽임을 당한 거지!" 라비니아의 눈이 노랗게 빛을 냈다. "죽엇!" 그녀의 손톱이 그대로 미트라의 가슴을 찔러왔다. "아악!" 피할 수도 없이 빨랐다. 그러나 그 것은 가슴대신에 어깨를 찔렀다. 격렬한 아픔이 전신을 쳤다. 뜨거운 것으로 지지는 것 같은, 처음 듣는 역 겨운 소리가 그녀의 귓전까지 울렸다. 으득으득하는 뼈와 라비니아의 손톱 이 부딪치는 것 같은 소리였다. 그 고통으로 그녀는 졸도할 것 같았다. "천천히 죽여줄게! 나의 플라티나가 당한 치욕만큼 말이야!" 잔인한 웃음으로 소녀가 웃었다. 미트라는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 갑자기 퍼억 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 따뜻한 액체가 얼굴로 튀어 올랐다. KUBERIN....... 증오와 증오가 만나고 의지와 의지가 부딪치고 야만과 야만이 힘을 겨룬다 죽음이 명예롭다고 하는 자는 누군가 선혈이 아름답다고 하는 자는 누군가 20 아픔은 전혀 없었다. 피비린내에 이미 익숙해진 코는 어떤 냄새도 맡지 못했다. 미트라는 입안으로 떨어지는 비릿한 피 맛을 느끼면서 천천히 두 눈을 떴 다. "허억..허억..." 갑자기 눈 앞에 드러난 장면에 그녀는 입을 벌렸다. 라비니아는 피투성이가 된 채로 그녀의 발치에 나뒹굴고 있었다. 미트라는 라비니아의 왼쪽 다리가 잘려져나가 바닥에 뒹굴며 꿈틀거리는 것을 멍하니 바 라보았다. 비명이 입안을 가득 메웠지만 소리가 되어 나오진 못했다. 라비 니아가 자신이 흘린 피 속에 누워있는 것을 보다가 그녀는 정면에 선 존재 를 겨우 발견했다. 회색의 망토를 걸친 칼을 든 검사가 서 있었다. 그 검사는 투구로 반쯤 가 려진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 웃음이 너무나 비인간 적이어서 미트라는 그가 어떤 존재인지 그대로 깨달아 버리고 말았다. "허억..허억..." 라비니아의 거센 숨결이 주변을 메웠다. 검사는 넋을 잃은 미트라를 내버려두고는 피투성이의 라비니아에게 다가갔 다. 미끌어지는 것 같은 걸음걸이였다. 그는 웃으면서 그대로 검을 라비니 아의 등줄기에 꽂았다. "카아아악!" 핏덩이가 그녀의 입안에서 튀어 나왔다. 부들부들 떨리는 그 작은 몸을 미 트라는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어린 묘인족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팔팔하게 살아 있었다. "이....이 놈! 죽여버릴 테다!" 라비니아는 처절하게 외쳤다. "크크크크...." 검사는 웃기만 했다. 차가운 회색의 검날이 이번에는 그대로 라비니아의 팔뚝을 찔렀다. 그리고는 그대로 절단했다. 꿈틀거리는 팔뚝이 미트라의 정 면으로 툭 떨어져내렸다. 피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이 흘러내려 그녀의 눈앞을 가렸다. "아아아아악!" 미트라가 대신 비명을 올렸다. 그녀는 두 눈을 가리고 미친 듯이 비명을 올리면서 몸을 웅크렸다. 너무나 처참해서 볼 수가 없었다. "그만해! 그만!" 미트라는 소리를 지르면서 벌떡 일어났다.발치에 떨어져 있던 레이피어를 들고 그녀는 그대로 돌진했다. 돌진은 했지만 미트라는 그 즉시 레이피어 와 함께 내던져졌다. 몇 번이나 바닥을 대굴대굴 구른 뒤에야 미트라는 겨 우 멈출 수 있었다. 정신이 아득했다. 입안에서 피가 흘러 나왔다. "그 애를 내버려둬! 그만해!" 검사는 미트라를 보고 히죽 웃었다. 그리고는 들고 있던 검을 들어 그대로 라비니아의 가슴을 찔렀다. "으아아아아악!" 작은 몸이 들썩였다. 고통으로 몸부림하는 그 몸을 보면서 미트라는 머리 털이 온통 곤두서는 것 같았다. "제발 그만해! 그만!" "묘인족은 이 정도로는 죽지 않아." 검사가 그제서야 입을 열어 말했다. 비릿한 웃음이 입가에 매달려 있었다. 갈색, 노란빛에 검은 홍채를 가진 사내는 어둠 속에서 눈을 파랗게 빛내면 서 웃었다. 웃는 입술 사이로 송곳니가 드러났다. "묘인족을 죽인다는 것은 다시 없는 즐거움이지." "커어, 커어...어허허허..." 라비니아의 입에서는 검붉은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숨은 붙어 있는 듯 여전히 숨을 쉬고 있었다. 미트라는 사내의 말을 들으면서 라비니아를 멍 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알고 있나? 인간의 아가씨? 묘인족은 말이야, 심장이 한 개가 아니라서 가슴을 한 두 번 찌른다고 해서 죽지 않아." 그 말과 동시에 그는 라비니아의 등을 한 번 더 찔렀다. 마치 장난하듯이 가볍게 그는 검날을 아래로 짓눌렀다. 비명은 더 이상 터져나오지 않았다. 대신에 마치 바람빠진 가죽공처럼 헐떡이는 소리가 터져 나왔을 뿐이었다. "그만해! 그만해! 너는 악마야!" 미트라는 비명을 올리며 고함을 질러댔다. 머릿속이 완전히 비어 버린 것 같았다. 지금 눈앞에 있는 사내는 끔찍했다. 절대로 인간이 아니었다. 그리 고 인간이 아닌 이 존재는 죽이는 것을즐기고 있었다. 어린애를 죽이는 것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재밌군." 사내는 그렇게 말하면서 웃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발끝으로 늘어진 채 숨만 쉬고 있는 라비니아의 몸체 를 걷어찼다. 축 늘어진 라비니아의 몸은 어린애 장난감처럼 대굴대굴 구르며 두터운 나 무 둥치에 처박혔다. 바닥의 날카로운 풀잎들과 가시 돋은 잡목들이 그 작 은 몸을 대신 받았다. "묘인족이 얼마나 오만한 종족인 줄 아나?" 사내는 웃으면서 검에 묻은 피를 닦아 허리에 꽂았다. 그의 발끝은 미트라를 향해 있었다. 넋이 반쯤 나간 미트라는 바닥에 주저 앉은 채로 라비니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법 예쁜 인간의 여자로군, 저 묘인족꼬마에게 죽을 뻔하고도 그만하란 말이 나오나?" 그의 손이 우악스럽게 미트라의 셔츠를 잡아 당겼다. 찌익 하고 흰 살결이 드러나자 미트라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려 그를 마주 보았다. 비인간적인 두 눈에 어린 욕정을 마주한 순간에서 야 그녀는 발버둥치기 시작했다. "놔! 놔!" 미트라는 두 손을 뻗어 사내의 얼굴을 할퀴었다. 그 뺨에 길게 손톱자국이 나고 핏방울이 툭 하고 떨어졌지만 사내는 아랑곳하지 않고 웃음을 터뜨렸 다. "발버둥쳐야 재미있지." 사내의 한 손이 미트라의 머리채를 휘어 잡았다. 흰 목이 그로테스크하게 희미한 빛에 드러나자 사내는 즐거운 듯이 웃으면서 그녀의 상의를 찢어 발겼다. "놔아!" 그녀는 고함을 질러댔지만 당해낼 수는 없었다. 사내의 힘에 밀려 바닥으 로 짓눌려진 그녀는 옷을 반쯤 벗기운 채로 발버둥을 쳤다. 사내의 손때문 에 온통 머리카락이 뽑혀 나갈 것만 같았다. 그녀는 이를 악물면서 그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몸을 움직였다. 꺾여진 손목이 땅바닥에 닿아 엉망진창 으로 긁히고 찢겨져 나갔다. "비켜!" 옷자락이 갈갈이 찢겨져 나갔다. 누군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바보같이. 높은 성에서 구해달라고 소리치는 공주님쪽이 네게는 더 어울리 는데. 네가 세상을 구원할 힘이 있는 기사야? 세상을 뒤덮을 힘이 있는 마법사 야? 그게 아니면 일찌감치 살려주세요를 외치는 순진한 공주님이 되는 거야. 눈물이 터져나왔다. 그리고 갑자기 사내의 손길이 멈췄다. "허억 허억..." 미트라는 고개를 들어 정면을 보았다.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상태로 자기 핏속에 엎드려 있는 라비니아가 보 였다. 피로 얼룩져 한 눈은 보이지도 않고 한 팔과 한 다리는 떨어져나간 상태로 온 몸에서 피를 흘리면서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다. "하악..하악..하악..." 벌린 입안에서는 피와 함께 거친 호흡이 새어나왔다. "이..이런....죽, 죽일 놈..." 미트라를 잡고 있던 사내는 비틀하고 머리를 움켜쥐며 쓰러졌다. 라비니아 가 던진 돌이 사내의 정수리에 정확히 맞아 피가 줄줄 흘렀다. "뭘 멍청히 있는 거야? 허억허억......그, 그 자가 그렇게 좋아?" 라비니아의 말에 미트라는 벌떡 일어섰다. 사내가 당장이라도 일어서서 발 목을 잡을 것 같이 두려웠지만 머뭇거릴 새는 없었다.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면서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어둠은 사방에 내려 있다. 사방에 내린 어둠 속으로 어떻게든 도망쳐야 했 다. 그의 손에 걸린다면 살아남을 수 없다! 언젠지 모르게 잃어버린 신발탓으로 그녀는 맨발로 달렸다. 발에 피가 맺 히고 살갗이 찢어졌지만 그녀는 느끼지 못했다. 어서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사내의 손길, 사내의 숨결, 그 끔찍한 피비린내에서 어서 벗어나야만 했다. 갑자기 그녀는 달리다 말고 걸음을 멈추었다. 홱 하고 고개를 돌려 그녀는 뒤를돌아보았다. 바닥에 널부러진 채 쓰러진 라비니아가 보였다. 그녀는 다리를 잃었다. 달릴 수 없는 것이다. 미트라는 되돌아 왔다. "이 바보!" 라비니아가 피를 토하며 외쳤다. "이 멍청한 인간! 너 따위가!" 미트라는 쓰러진 사내를 경계하면서 라비니아를 재빨리 업었다. 십여세의 어린 소녀의 몸인데다가 팔과 다리를 하나씩 잃은 라비니아는 생각보다 가 벼웠다. 미트라는 이 정도라면 업고 달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아, 그래, 그동안 단련한 것이 헛되진 않았어. 다른 규방의 처녀들처럼 몸이 약하진 않단 말이야! 그녀는 라비니아를 안은 채 내달리기 시작했다. 라비니아의 피가 그녀의 옷자락을 가득 적셨다. 끈적한 옷자락이 다리에 휘감겨 달리기 거북했다. 하지만 달릴 수 있었다. 달려야 했다. 라비니아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혼자 가도 살아날 수 있을지 알 수 없을 텐데 왜 날 안고 달리는 거야? 이 건 묘인족의 수치라고. 한낱 인간의 품안에 안겨 끌려가다니, 차라리 그냥 죽는게 낫다구. "멍청한 인간같으니....." 미트라는 웃었다. "너는 쿠베린의 딸이야, 그의 아이야. 나는 어쩌면 네 엄마가 될지도 모른 다구." "웃기고 있네. 인간주제에." 라비니아는 헐떡거렸다. 엄마라니, 웃기고 있었다. 강하지 않으면 엄마도 될 수 없다는 것을 이 인 간은 모르고 있는 건가? 주제를 모르는 구만. 그렇지만 화가 나지는 않았다. 라비니아는 한숨을 쉬고 고통을 참았다. 이 인간은 느리긴 얼마나 느린지 이런 속도로 달리는 게 최대한의 속도란 말인가. 그 주제에 헐떡거리긴 어지간히 헐떡거린다. 그래, 이렇게 참아보자. 조금 지나면 출혈도 멈출 것이고 잘려져 나간 팔 다리 쯤이야 보기 흉하긴 해도 살 수는 있을 터였다. 그나 저나 이런 식으 로 팔과 다리를 잃다니 정말 수치야 수치. 내가 성체이기만 했어도 저따위 자식에게 당할 리는 없었을 것을. 어리다는 게 이렇게 한스럽긴 처음이야. "쿠, 쿠베린을 만나면......." 미트라는 억지로 숨을 참으면서 중얼거렸다. 사방에 긁힌 팔과 다리가 저렸지만 지금 그런 것에 신경쓸 때는 아니었다. ".......만날 수 있을까?" 라비니아가 속삭였다. 그녀는 심장이 욱신거리는 것을 억누르면서 한숨을 토해냈다. "제기랄...." 미트라는 입을 벌리고 걸음을 멈췄다. 앞을 막아선 자가 있었다. "성질 나게 하는군." 어느 새인지 그들의 앞을막아선 것은 아까의 그 사내였다. 피로 얼룩진 얼굴로 사내는 웃음을 지었다. 왼쪽 눈에 돌이 맞은 것인지 왼쪽 눈이 일 그러져 하나만 남은 노란 눈이 더 끔찍하게 느껴졌다. 화가 난 것인지 일 그러진 입매에서 송곳니가 하얗게 드러났다. "이제 놀이는 그만 한다." 미트라는 사내의 손을 보았다. 손톱이길게 난 그 손은 쿠베린의 손과도 다르고 엘레의 손과도 달랐다. 그것은 사인족의 왕과도 흡사한 그런 손, 누런 털이 손등에 나고 약간 굽 어진 손톱에는 노란 빛이 돌았다. "사인족....." 미트라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뒤로 물러섰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라비니아의 피가 등을 타고 흘러 맨살을 드러낸 다리로 떨어져 내린다. 따스한 액체가 그녀의 맨 가슴에 흘러내렸다. 필사적으로 그녀는 라비니아를 지키려는 듯이 부둥켜 안았다. 라비니아가 욕설을 퍼붓는 것을 무시하고 그녀는 작은 몸을 필사적으로 끌어안았다. "이 더러운 사인족 자식!" 라비니아가 비명처럼 욕설을 퍼붓는 동안 미트라는 입을 벌렸다. 차가운 것인지 뜨거운 것인지 알 수 없는 그 무엇이 등줄기를 파고 들어와 그녀의 심장을 꿰뚫고 라비니아의 작은 몸을 꿰뚫었다. 뜨거운 피가 퍼져 나간다. 미트라는 눈을 감았다. 뜨거운 느낌. 쿠베린, 나는 역시 높은 성의 공주님인 것이야? KUBERIN....... 증오와 증오가 만나고 의지와 의지가 부딪치고 야만과 야만이 힘을 겨룬다 죽음이 명예롭다고 하는 자는 누군가 선혈이 아름답다고 하는 자는 누군가 21 멈추고 선 채 그 모습을 본다. 내 아이의 피냄새. 웅크린 채로 내 여자의 품안에 안긴 아이를 본다. 굳어버린 시체를 잡아 들여다 본다. 여자는 등에서부터 꿰뚫렸다. 심장을 단번에 찌른 것 같다. 아이는 몇 번이 고 심장을 찔리우고도 살아있었는지 가슴에 난 상처는 한 개가 아니다. 채 완전히 굳지도 않은 그 시체들은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여자는 아이를 필사적으로 보호하듯이 끌어안고 아이는 여자를 보호하듯이 필사적으로 끌 어안은 채 둘이 그렇게 엉켜 있었다. 여자의 얼굴은 평온하다. 아니 평온한 것처럼 보인다. 단번에 죽었기 때문 일까? 아이의 얼굴은 증오에 차 있다. 아이는 분한 듯 견딜 수 없다는 듯이 송곳 니를 드러낸 채로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상처투성이의 몸. 팔과 다리가 하나씩 없다. 아침 안개가 채 가시기도 전에 나는 거대한 나무 밑에서 피투성이가 된 둘 을 발견했다. 나의 냄새를 가진 그들이 서로 상처투성이인 채로 엉겨서 죽 어 있다. 희미한 햇빛이 안개를 뚫고 숲안으로 파고 들어와 그들을 비춘다. 피는 이 미 검붉게 변하여 검은 얼룩으로 남았다. 너덜너덜해진 아이의 살갗으로, 여자의 살갗으로 온갖 벌레들이 이미 침입을 시작하고 있다. 송장벌레가 날아다닌다. 청풍뎅이가 날아들었다. 나는 웅크리고 앉아서 아이의 피를 맛보았다. 아이는 분한 듯이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하나 밖에 남지 않은 팔로 여자의 몸을 안은 채 내 피의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여자는 아이가 자신의 아이 인 양 부둥켜 안은 채 떨어지지 않는다. 여자의 손끝을 맛본다. 이질적인 맛이 난다. 여자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숲안을 떨어 울리고 있다. 유티아는 아이의 몸에 손도 대지 못한 채 흙을 움켜쥐고 울부짖는다. 그녀 의 얼굴은 완전히 일그러져 당장이라도 변신할 듯이 보였다. 그 옆에서 울 고 있는 이에르네는 케논을 부둥켜 안은 채 돌상처럼 굳어 서 있었다. 휴 런은 입을 꽉 다물고 내 뒤에 서서 시선을 피하고 있다. 고개를 숙이고 엉덩이를 땅에 대고 두 손을 땅에 댄다. 움켜쥔 두 손에는 흙이 차 올라온다. 어디선가 빠득빠득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이 소리 를 들으면서 아이와 여자의 얼굴을 들여다 본다. 여자의 얼굴을 살짝 핥아 그 흙을 닦아본다. 더럽혀진 아이의 이마에 입을 대고 핥아본다. 혹시 이렇 게 상처를 핥아주면 살아나는 것 아닐까? 내 몸을 밀치고 급히 유티아가 달려들었다. 그녀는 아이의 몸을여자에게 서 떼어내더니 부둥켜 안고 온전하지 못한 팔을 찾아 두리번거린다. 온전 하지 못한 다리가 어디 있는가 하고 코를 허공에 들고 냄새를 맡는다. "....없어! 없어! 어디 있는 거지? 없어!" 그녀는 아이의 몸을 들쳐 안은 채 벌떡 몸을 띄워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 뒤를 급히 이에르네가 뒤따라갔다. 유티아의 비명섞인 울부짖음이 숲안을 가득 메운다. "없어! 어디 있는 거야? 어디야?" 나는 유티아에게 밀쳐진 채로 바닥에 앉아서 그들이 사라져간 곳을 바라보 았다. 여자는 죽어 있다. 그녀는 죽었다. 여기까지 날 따라왔다가 죽었다. 그녀는 연약해서 죽어버렸다. 연약한 자에게도 강한 자에게도 자연의 여신은 공평하게 죽음을 내린다. 대지 위에 쓰러진 시체들은 동등하다. 너무나 동등해서 미쳐 버릴 것 같다. 아직은 희미한 하얀 햇빛이 여자의 시체 위에서 흔들린다. 창백한 얼굴과 창백한 팔과 다리, 피로 물든 몸뚱아리를 바라보면서 나는 천천히 혀를 내 밀어 맛을 보았다. 대지의 여신에게 바쳐지기엔 아직도 너무 아름다운 몸뚱아리를 멍청히 바 라보다 말고 나는 고개를 돌렸다. 멍하니 섰던 휴런이 내 시선을 받자 뒤로 흠칫 물러섰다. 그의 눈에 공포가 서렸다. "네가 이 여자를 보호해준다고 하지 않았던가?" ".............." "네가 이 여자를 보호하겠다고 하지 않았나?" 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몸이 땅바닥에 처박혔다. 비명소리도 나오지 않는다. 퍼억 하고 주먹을 날리자 그의 턱이 돌아간다. 손등으로 녀석의 얼굴을 후 려갈겼다. 발길로 녀석의 복부를 걷어찼다. 손톱으로 녀석의 어깨를 짓눌렀 다. 발길질로 쓰러진 녀석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신음을 내는 녀석의 머리 채를 휘감아 두터운 나무둥치에 집어던졌다. 녀석의 목을 움켜쥐고 들어올리자 시퍼렇게 질린 녀석의 얼굴이 보인다. 공포와 고통에 젖은 그 얼굴을 바라본다. 두근 두근 두근 .... 두근 두근 두근.... 심장 소리가 들린다. 심장 소리, 살아 있는 자의 심장 소리가 들린다. 녀석의 심장에 천천히 손 톱을 대 보았다. 펄떡이는 심장의 소리, 살아 있는 자의 소리가 들려온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쿠, 쿠베린..." 녀석이 피를 토하며 중얼거렸다. 녀석의 심장에 손톱을 대면, 그 심장을 꿰뚫으면 기분이 어떨까. 그 예전 다른 자들을 죽일 때의 그 느낌 그대로인 걸까? 내 아이는 어떤 느낌일까? 세 개의 심장이 하나 씩 터져나갈 때의 고통은, 그 느낌은 어떤 것이었을까? 팔 다리가 떨어져 나간 아직 성체도 되지 못 한 어린애의 고통은 어떤 것일까? 아이를 움켜쥐고 죽어버린 그녀는 어떤 느낌이었을까? "쿠베린!" 휴런이 발버둥을 쳤다. 녀석의 손톱이 내 뺨을 스쳤다. 화끈한 아픔이 내달렸다. 녀석을 빤히 바라보았다. 휴런은 고통과 공포에 질린 얼굴로 날 멍하니 바 라보고 있었다. 대체 이 녀석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지? 알고 있어? 아이가 죽었대 팔 다리를 잃은 채 아이가 죽었대 여자도 죽었대 아이를 움켜쥔 채 연약한 여자가 죽었대 알고 있어? 아이의 팔 다리는 어디 있지? 아이의 떨어져나간 팔 다리는 어디 있지? 알고 있어? 여자를 죽인 녀석이 어디 있는지? 아이를 죽인 녀석이 어디 있는지? 온 숲이 떠들어 대고 있다. 시끄러워 견딜 수가 없다. 숲 전체가 떠들어 대면서 나에게 강요한다. 그들이 죽었다고 믿으라고 강요한다. 그렇지만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온 몸이 믿을 수 없다고 외치고 있다. 아직도 믿을 수 없다. 믿을 수 없어. 이건 거짓말일 게다. 이렇게 무력하게 죽어갈 리가 없다. 이런 식으로 헛되게 죽을 리가 없다. 심장이 움직이지 않는다. 심장이 멈춰있다. 절대로 이럴 리가 없는 것이다. 미트라는 살아 있고 라비니아는 웃고 있을 것이다. 내 귀여운 딸이 이렇게 죽을 리 없다. 내 여자가 저렇게 죽을 리 없다. 달리는 발끝마다 채이는 대지가 말하고 있다. 죽었어, 죽었어, 죽었어, 죽었어.... 아니다. 저렇게 죽을 리가 없다. 저런 식으로 죽을 내 아이가 아냐. 미트라 는 그렇게 죽을 여자가 아니야. "떠들지 마!" 땅을 후려갈겼다. 건방진 것들. 죽었다고 떠들지 마! 그럴 리가 없으니까! 죽었어, 죽었어, 죽었어, 죽었어..... 대지는 떠들어 댄다. 나무도 바위도 떠들어 댄다. 바람이 사방에 시체 냄새 를 나르고 있다. 그럴 리가 없다. 이 시건방진 것들, 감히 뭐라고 떠들어대는 거야? 그럴 리 가 없잖아! 그들이 죽었을 리가 없잖아! 바위를 들어 올려 땅을 후려갈긴다. 나무를 쥐고 뿌리 채 뽑아버린다. 돌멩 이를 들어 사방에 집어 던졌다. 시끄러운 숲, 시끄러운 땅, 시끄러운 자들, 참견하지 마. 참견하지 마. 꺼져버려라, 나에게 참견하지 마! 떠들지도 마! "...........휴런." "아? 응?" 녀석이 얼른 대답을 한다. 그녀의 몸을 어떻게 할까? 인간들이 하듯이 묻어야 할까? 아니면 대지의 여신에게 그대로 바쳐야 할까? 그녀의 손끝을 자꾸 핥았다. 검게 변색된 피가 손톱에 잔뜩 엉겨있는 그 손을 핥으면서 중얼거렸다. "휴런." "응? 아, 마, 말해..." "마튜스에 사인족이 얼마나 있다고 생각하냐?" "....에? 에... 잘 모르겠어. 내가 한 네 놈 해치웠는데 더 있을 지도. 전에 말했다시피 케논과 라비니아가 그 놈들에게 당하고 있는 걸 내가 봤거든." "......그럼 몇이나 될지 모른단 말이로군." "아, 응. 하지만 그래봐야 수는 얼마 안될걸. 전에 그 노랑둥이 왕이 말하 길 얼마 안남았다고 했잖아?" "그럼 하는 수 없지." 나는 무심히 중얼거렸다. "오늘부로 사인족은 모두 죽는다." 하나도 남김없이. "우오오오오오오오오........" 울부짖는 유티아의 소리가 들려온다. 그녀가 팔과 다리를 발견했기를 바란다. 새끼를 잃은 어미의 마음은 아무 도 모른다. 유티아의 울부짖음은 숲 전체를 떨게 하고 있었다. 그녀의 울부짖음으로 짐승들은 전부 달아났다. 숲이 공포에 젖는다. 대지가 떨고 있다. 새파란 수풀들이 옆으로 쓰러진다. 웅크린 바위들이 몸을 떤다. 나무들이 겁에 질려 비명을 올린다. 냉혹하고 무심했던 나무들도 몸을 사린다. 새들 은 겁에 질려 둥지 위로 날아간다. 작은 짐승들이 겁에 질려 질주한다. 숲안에 분노가 퍼져나간다. 나는 미쳤다. [쿠베린 별전7] 높은 성의 공주님 KUBERIN...... 사랑하는 나의 연인이여 당신은 나의 육체를 원하나요 아니면 나의 영혼을 원하나요 아니면 나의 지위를 원하나요 아니면 나의 재물을 원하나요 그도 아니면 단지 사랑을 원하나요 ".....그리하여 왕자는 거친 가시덤불을 헤치고 정면에 보이는 음침하고 낡 아빠진 탑을 올려다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높고도 높은 탑의 꼭대기에 자 그마한 창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왕자님은 그때 깨달았습니다. 아, 공 주님이 저기에 계시구나 하고......." 엘란트라는 읽던 것을 멈추고 슬그머니 모후를 바라보았다. 모후는 두 손으로 턱을 받치고 공허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중 이었다. 엘란트라는 뭐라 말을 걸려고 하다가 단념하고 계속 읽어 내려갔다. "마침 그 때 그 작은 창가에 선 아름다운 공주님이 보였습니다. 그녀는 눈 부신 황금빛의 머리칼을 휘날리면서 백옥같이 흰 피부를 드러낸 채로 울고 있었습니다. 왕자는 그 아름다움에 숨을 멈추고 한 걸음에 칼을 뽑고 탑으 로 다가갔습니다. <공주님, 울지 마십시오, 제가 왔습니다!> 왕자의 씩씩한 말에 울고 있던 공주님은 환하게 웃었습니다. <오, 왕자님, 드디어 절 구하러 오셨군요! 저는 믿고 있었답니다!> 그리하여 한 눈에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은 높은 탑을 사이에 두고 서로 눈 물을 흘렸습니다..." 지겨운 이야기, 지겹게도 똑같은 이야기, 행복한 결말. 왕자와 공주의 사 랑, 용사와 공주의 사랑, 마왕퇴치. 그런 이야기책을 모후는 끊임없이 읽게 한다. 그리고........ "하아..." 엘란트라는 한숨을 삼키면서 흘긋 모후를 바라보았다. 길게 땋아 내린 갈색머리는 흰 머리칼은 한오라기도 없었지만 생기 없는 창백한 얼굴과 공허한 회색눈은 과거 왕실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공주님이 라는 말이 무색해 보였다. 엘란트라는 기대하면서 모후를 바라보았지만 더 이상 모후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래서 왕자는 백마를 묶고 탑의 꼭대기로 향하는 문을 열었습니다. 문은 왕자의 손이 닿자마자 활짝 열렸고........" 모후는 멍하니 이야기를 들으며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은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서 갖가지 색깔을 뿌리면서 방안으로 스며들 고 있었다. 늦은 봄날의 나른한 오후, 차 한 잔과 더불어 쿠키 냄새가 달콤 하게 후각을 자극했다. 멀리 창 너머로 보이는 후원의 활짝 피어 흐트러진 꽃들이 현란한 색채를 자랑하는 시각.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후는 공허했다. 완전히 생기를 잃은 눈으로 그녀는 허공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마마마? 계속할까요? 아님, 그만 읽을까요?" 피시식하고 모후는 대답대신 웃음을 지었다. 웃음은 허공중에 흩날렸고 그 대상은 엘란트라가 아니었다. 10여년간 봐 온 모습이었다. 달라질 것도 없었다. "낮잠을 주무실래요?" 다시 물었지만 여전히 대답은 없다. 엘란트라는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잔인하고 포악한 괴물들을 하나씩 없애면서 왕자는 드디어 꼭대기에 도착했습니다. 작고 낡은 문고리를 잡아 문을 여는 순간 무서운 불꽃이 왕 자를 덮쳤습니다. 비명소리를 내지르면서 왕자는 쓰러졌고 고통으로 몸부 림쳤습니다. <공주, 공주!> <왕자님! 정신 차리세요! 이 잔인한 마왕같으니!> 공주님은 울면서 소리쳤습니다. 그러나 뜨거운 불꽃은 왕자의 몸을 둘러싸 고 점점 강해질 뿐이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말발굽소리와 함께 왕자의 백 마가 방안으로 뛰어들어왔습니다. 백마는 거친 말발굽을 들어 불꽃을 걷어 찼으며 그러자 놀랍게도 불꽃은 삽시간에 사그러들기 시작했습니다. 놀란 왕자가 고개를 들어 백마를 보자 백마는 어느새인가 흰 옷을 입은 청년으 로 변해 있었습니다. 흰옷에 푸른 머리칼을 가진 그는 미소를 지으면서 말 했습니다. <이제 나의 저주가 풀렸도다, 나는 물의 정령 마스칼리에.> 마스칼리에가 미소를 짓자 왕자의 몸의 상처들이 하나 둘씩 사라지기 시작 했습니다. 공주님은 기쁨의 눈물을 흘렸고 왕자는 감격하여 마스칼리에를 바라보았습니다. 마스칼리에는 푸른 빛을 흩뿌리면서 천천히 말했습니다. <나는 마왕의 저주를 받아 백마로 화해 피해있었던 것이다. 이제 너의 덕 분으로 저주가 풀렸으니 너에게 이것을 주마.> 마스칼리에가 준 것은............어마마마?" 모후는 일어서서 창밖으로 몸을 내밀고 있었다. 난간에 기대어서 그렇게 불안한 자세를 하고 있기에 엘란트라는 모후의 손을 잡았다. "미트라." 갑자기 고개를 돌려 모후가 속삭였다. "너는, 누구보다도 행복한 여자가 되렴." 그녀는 햇빛 속에서 아름답게 웃었다. 10여년만의 첫 번째 미소. 그리고 엘란트라의 손을 가볍게 밀고 그대로 창 밖으로 뛰어 내렸다. 흩어지는 꽃잎. <그리하여 왕자와 공주는 행복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그리하여 공주와 용사는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영원히 행복한 공주님은 없다. 엘란트라는 눈을 감고 책을 덮었다. 어머니는 높은 성의 공주님, 누군가가 찾아오기를 기다리기만 하는 가련한 공주님. 그 공주님은 원하지도 않은 왕자가 찾아와서 미쳐버렸다. 그러니까 이제 새로운 공주님은 왕자를 찾기 위해 길고 아름다운 치마를 자르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제 새로운 공주님은 용사를 찾기 위해 바닥까지 찰랑이는 긴 머리칼을 자르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제 20화 광란 KUBERIN............ 죽은 자들은 망각을 얻고 산 자들은 비수를 얻는다 1 비릿한 액체가 쏟아져 내린다. 그것은 내 손을 타고 내 팔뚝을 타고 내 허리를 타고 내 다리를 타고 대 지 위로 흐른다. 따스하다. 뭉클한 것들이 발 끝에 밟히는 것을 무시하고 앞으로 걸었다. 앞에 선 자 들이 입을 한껏 벌리고 비명을 올리는 듯 하지만 나에게는 들리지 않는다. 걸어가면서 손을 움직인다. 무력한 액체가 쏟아지고 바닥은 젖는다. 후각은 이미 마비되었지만 내가 쫓는 자들의 기색은 느낄 수 있다. 놈들은 쥐새 끼처럼 잘도 숨는다. 나는 바닥을 기고 온통 지릿한 냄새들 사이에서 놈들 의 행적을 찾는다. 손바닥에 닿는 물컹거리는 것을 씹으면서 주변을 다시 살핀다. 멀리서 시체를 찾는 야수들이 울고 있지만 감히 이쪽으로 오지는 못한다. 포식하라. 작은 것들아. 멀리서 누군가가 울고 있다. 그 침통한 소리는 울음으로 시작해 마침내 광소로 이어져서 울고 있는지 우는 지 알 수가 없다. 그녀는 지금 왜 울고 있을까. 눈이 가늘어 진다. 콧구멍이 열린다. 냄새. 녀석들의 피 냄새. 숲은 놈들을 숨길 수 없다. 숲은 철저히 강자만을 섬기는 곳, 내가 놈들을 쫓는 한 숲은 놈들을 숨겨 줄 수는 없다. 놈들이 그런 것을 바랬다면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 나는 웃 었다. 걷는다. 걷고 있다. 바위를 건너뛰고 나무를 튕겨내면서 걷는다. 바닥에 널부러진 무력한 조각들을 밟으며 걷는다. 사냥감을 쫓는 것은 생 애의 즐거움, 그래, 누구도 알 수 있겠지만 사냥감을 쫓는 것은 더할나위 없이 자기 자신을 만족시키는 일이다. 언제부터 사냥을 즐겼더라? 내 첫 사냥감은 무엇이었더라? 기억도 나지 않지만 제일 먼저 기억나는 것은 한 살인가 두 살때 굶주린 배를 채워준 한 마리 사슴이었었다. 사슴떼를 찾아내서 그 중 가장 약한 놈을 고른다. 강한 놈을 고르다가 실 패라도 하면 그 수치는 감당할 수 없으니까 제일 약하고 가녀린 녀석을 골 라 그 가느다란 목덜미를 후려갈긴다. 발굽에 채이는 일을 하지 않는 게 좋다. 만약에 채이기라도 하면 가슴뼈가 으스러질 수도있다. 가장 어린 사 슴이라고 해도 인간 하나 둘 쯤 갈비뼈 부러뜨리는 것은 어렵지 않으니까. 가장 큰 사슴이라고 한다면 한 번의 뒷발길질로 가볍게 뼈가 부러질 테니 까. 나는 가장 약한 사슴을 발견했다. 태어난 지 일주일 가량 되어 보이는 그 놈은 커다란 밤빛 눈을 하고 나를 발견했다. 부드러워 보이는 눈빛이 예쁘고 귀여웠다. 보드라워 보이는 털빛 도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음에 든 것은 녀석이 목이 가늘다는 점이었다. 부러뜨리기 좋도록. "쿠아아아아아아!" 건방지게도 자기 주제를모르고 덤벼드는 사냥감이 있다. 녀석은 이를 드러내고 수풀 속에서 갑자기 뛰어나왔다. 어리석기 짝이 없 지 않은가. 나는 지금 죽이려고 놈들을 쫓는 중인데 죽여달라고 튀어 나와주다니. 녀석의 철검이 내 가슴을 찔러온다. 철검따위를 내 앞에서 휘두르다니, 내 아이를 찌른 그런 인간의 무기로, 내 여자를 찌른 그런 인간의 무기로 내 앞에 나서다니. 녀석의 목줄기를 손톱으로 틀어잡은 채로 땅바닥으로 집어던졌다. 손톱의 가장 예리한 부분이 녀석의 목줄기를 그대로 꿰뚫었다. 녀석의 철검이 허 공으로 튀어 오른다. "끼아아아아아......" 비명소리가 터져나온다. 아아, 이 소리가 듣고 싶었다. 아니 이 소리 가지고는 모자란다. 목줄기를 손톱에 꿰뚫린 채 녀석이 대롱 대롱 허공에 매달렸다. 녀석의 몸무게로 꿰뚫린 목이 천천히 찢겨져 나가기 시작한다. 녀석은 다리를 어 떻게 해서든지 지탱하기 위해서 버둥거리면서 허공에서 몸부림을 치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녀석의 목은 단숨에 찢겨져 나갔다. 핏줄기가 반원을 그 리면서 숲안을 냄새로 채웠다. 녀석은 바닥으로 굴렀다. 목의 반쪽이 찢어져나갔어도 녀석은 살아 있다. 물론 그렇지, 사인족도 그 렇게 간단히 죽지는 않아. 나는 사인족의 생명력에 감사한다. 녀석의 전신 의 뼈를 산채로 박살낼 수 있는 녀석의 생명력에 감사하며 녀석의 살가죽 을 벗겨내도 살아있는 녀석의 강인한 핏줄에 경의를 표한다. 녀석의 가슴을 가른다. 녀석의 몸안에서 내장이 흘러나온다. 뛰고 있는 심장이 보였다. 사인족의 심장은 묘인족의 그것 보다 조금은 작다. 그렇지만 역시 단단하 게 생명을 자랑하고 있다. 그 심장에 손톱을 대고 가볍게 그었다. 퍼엇 하 고 내 얼굴로 피가 튀긴다. 강인한 생명을 가진 피, 내 피를 식혀줄 피. 내 머리를 맑게 해줄 피. 녀석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심장을 씹는다. 녀석은 아직도 살아서 비명 을 올린다. 오오, 강인한 사인족의 피. 뜨거운 액체가 목안으로 흘러들어간다. 온 몸을 황홀하게 하는 그 미혹의 액체. 내 아이의 피가 흘렀을 숲 안으로 녀석의 피가 흐른다. 내 여자가 흘린 피 속으로 녀석의 피도 흐른다. 심장을 씹어 삼키고 고개를 들었다. 녀석의 냄새로 코안이 완전히 막혀있 다. 여기는 어디였더라? 이번은 몇 번째지? 기억도 나지 않아. 나는 하늘을 올려다 보면서 얼굴에 묻은 핏자국을 닦아 냈다. 하늘은 회색빛이다. 주변에서 소리가 들려온다. 어리석은 자들의 어리석은 소리들이 들려온다. 그래, 와라, 제발 와라. "여기...여기다!" "저기 괴물이 있다!" "저기야!" 비력한 인간들의 외침이 들려온다. 나는 웃었다. 전신으로 피가 끓는다. 미치고 있다. 미치고 있다. 나는 지금 미쳐간다. 내 앞으로 와라, 내 앞으로 와서 내 속을 식혀라. 화살이 날아들며 내 앞을 희롱한다. 나는 웃으면서 전신에 힘을 모았다. 두 번째의 변신모드에 들어간다. 전신 으로 미칠 것 같은 광기가 치솟아 오른다. 자아, 미쳐보자, 내 앞을 막는 모든 것들에게 미쳐보자. 이성은 필요 없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광기 다. "쿠베린........."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다. 어느 새인가 숲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검은 숲이 온통 입을 벌린 듯 공 허하게 보인다. 이제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소리도 다 줄어들었다. 그리고 안개로 뿌옇게 흐려지기 시작한다. 지독한 안개다.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여기가 어디더라, 난 왜 여기에 있지? "재미있군." 누군가의 목소리다. "당신이 그렇게 미치다니 정말 오랜만인걸." 누구의 목소리일까? 귀에 익은 그 목소리는. "나를 잊었나? 너무 오래되서 잊었어? 아니면 너무 많은 여자들을 안았기 에 잊었나?" 부드러운 손이 내 턱을 쓰다듬는다. 그 손은 우아하게 호를 그리며 굳어버린 내 어깨에 내려 앉았다. 부드러운 손길, 날카로운 웃음. 요염하고도 강인한 눈매를 가진 그녀가 날 올려다 보고 있었다. 그녀의 두 팔은 내 목에 매달려 있고 그녀의 입술은 내 것에 와 닿는다. 풍만한 가슴이 내 가슴을 압박해 왔다. 입술이 떨렸다. "......일렌." "기억하고 있었나봐? 내 심장을 찢어 삼킨 주제에?" "여전히 아름답군......" 나는 망연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면서 내 목에 두 팔을 얹은 채 머리를 내 가슴에 기대 었다. 향기로운 냄새가 난다. 그녀의 손가락이 내 가슴을 천천히 애무해 왔 다. 따스한 기분이 들었다. "...해봐." 나는 그녀를 내려다 보며 나직히 물었다. "응?" 여전히 요염한 눈매, 생기에 가득찬 그 오만한 입매를 바라보면서 나는 오래 전부터 묻고 싶었던 것을 물었다. "날 사랑했었나?" 그녀의 얼굴이 웃는다. 늘씬한 몸은 온기를 담고 내 몸에 찰싹 붙어 나를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내 심장을 찢고도 그런 말을 해?" "나를 사랑했었나?" "이기적인 남자." "나를 사랑했었나?" "잔혹한 자. 더할 나위 없이 오만하고 잔인한 자." 일렌이 도톰한 입술로 속삭이며 말했다. 그녀의 입술이 내 입술을 덮는다. 혀끝이 입술을 더듬었다. 나는 그 감각을 음미하면서 그녀의 몸을 천천히 끌어 안았다. 내 안의 모든 것을 다 줄 수 있었던 여자. 온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전신의 피가 모두 머리로 오른다. "대답해봐, 나를 사랑했었나?" "사랑했어...미치도록 사랑했어." 그녀가 대답했다. 보랏빛 눈동자가 나를 황홀하게 바라본다. 욕정에 가득찬 눈동자, 그 숭배 에 가득한 눈동자를 보면서 나는 그녀의 눈을 직시했다. "정말로 나를 사랑했었어?" "물론. 당신이 날 죽일 때까지는.....왜 날 죽였어?" 그녀가 갑자기 분노의 기색을 담고 날 바라본다. "왜 날 죽였어? 용서할 수 없어! 잔인하고 더러운 놈!" 그녀다운 말투로 일그러진 입술이 욕설을 퍼붓는다. 그런 그녀를 마주 보며 그 뺨을 어루만졌다. 부드러운 감촉, 있을 수 없는 황홀한 느낌. 천천히 입술을 대자 그녀가 내 목을 끌어안는다. "보고 싶었어. 쿠베린...." 으스러지도록 그녀를 끌어안자 그녀는 행복한 신음을 내뱉었다. "나도 역시 그랬어." 그리고 나는 또다시 그녀의 심장을 뚫었다. 피가 뚝뚝뚝 바닥으로 흘렀다. 나는 손에 쥔 심장을 천천히 들이 뽑아 바닥으로 던졌다. 내 몸을 끌어안 은 일렌은 피를 토하며 천천히 미끄러진다. 그리고 내가 손을 놓자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졌다. 피에 젖은 청동빛 머리칼, 정말 오랜만에 그 모습을 보 는 군. "심한 짓을 하는 군. 전혀 죄책감도 없다는 건가?" 갑자기 누군가가 또 말을 걸었다. 정면을 쏘아보았지만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지독한 안개다. 안개가 아 니라 마치 장막처럼 느껴졌다. "이번엔 또 누군가?" 안개 속에서 웃음소리가 낮게 들려온다. 낭랑하고 귀에 익은 목소리. 검은 머리칼을 한 소년이 나뭇가지 위에 앉아 나를 바라본다. 희뿌연 안 개는 마치 그만을 위한 듯 놀랄 정도로 선명하게 그의 모습을 드러내 놓고 있었다. 덕분에 그는 동그마니 안개 속에서 홀로 선명한 빛을 띄우고 있다. "이건 또...." 회색 눈을 빛내며 아직도 소년기의 티를 못 벗은 내 형이 웃음을 터뜨렸 다. "오랜만이야, 쿠베린." "그렇군, 형도 진짜 오랜만이군." 아련하게 그리운 그 무언가가 가슴 속을 천천히 채웠다. 내 앞을 달리던 형, 내 옆을 달리던 아우, 같은 배에서 난 나의 형제들. 그리고 어머니. 형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천연덕스레 물었다. "형제들은 다 죽고 이젠 너와 휴런만 남았네? 그지?" "그래." "네가 나를 또 죽일 것인지 나는 궁금해. 또 날 죽일 거야?" 순간적으로 숨을 멈췄다. 그렇지, 맞아. 그랬어. 난 형을 죽였었지. "아마 그렇게 될 거 같군." "어째서지? 너는 죄책감이라는 게 없어? 네 아내를 또 그렇게 죽이고도 또 나를 죽일 텐가?" 정말 이상하다는 듯이 형이 고개를 갸웃했다. "형제들은 네가 다 죽였잖아? 데로스도 죽였고 나도 죽였고." "그래, 도전의식에서 다 죽였지, 루아스형." "전혀 후회라는 게 없어?" 잔인한 물음을 던지며 형이 웃는다. 천진한, 내가 어릴 때 보던 그 얼굴로 웃는다. "없어." 나는 한 걸음 다가서서 형의 목줄기를 잡아 비틀었다. 내 손아귀 아래서 아직 어린 소년의 몸을 한 형이 쓰러진다. 형의 얼굴은 파리해진 채 목이 뒤틀려 널부러진다. 안개 속은 일렌의 피에 이어 형의 피까지 겹쳐 온통 피비린내로 가득해졌 다. 숲은 안개에 휘감긴 채로 나에게 적의를 보내고 있다. 잔인한 놈, 잔인한 놈, 누구든 죽여버리는 이기적인 놈, 치사하고 죄악감 도 없는 놈...... "전혀 후회가 없다라...." 누군가 또다시 나타났다. 나는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갑자기 가슴이 떨렸다. 이번에 나타난 것은 나의 왕, 나의 백부였다. 그는 여전히 늠름한 가슴으 로 날 바라본다. 검은 머리칼, 나보다도 큰 키, 나보다도 더 넓은 가슴, 그는 몇 백번을 싸 워 이긴 백전노장다운 묵직한 걸음걸이로 천천히 나에게 다가온다. 무섭다. 두렵다. 나는 다시 초라한 어린 애송이가 되었다. 나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그 옛날 맛보았던 공포가, 스물거리며 내 가슴속으로 피어 오른다. 공포, 공포라는 두 글자가 나와 함께 걸었던 것은 수 백년전의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나는 수 백년의 시간을 넘어 그를 마주 하고 있었다. 여지껏 내 마음 속 한 구석을 지키고 있는 가장 무서운 존재, 내 어릴적 가장 강 했던 존재. "무서워하고 있군, 쿠베린." 그는 마치 모든 내 감정을 알고 있다는 듯이 위압적인 눈빛으로 나를 쏘 아보며 물었다. "정말로 후회가 없단 말이지? 형제를 죽이고 아내를 죽이고도 후회가 없 어?" "없소, 나의 왕." 나는 심호흡을 하며 그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가 내뿜는 위압감으로 질색할 것 같았지만 나는 그의 정면으로 향해 걸 었다. 내가 유일하게 두려워했던 존재.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가 우울한 얼굴로, 슬픈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정말로 너는 냉혹한 녀석이구나." 그러나 나는 그를 이겼다. 그러니까 또 한번 할 수 있다. 손을 뻗었지만 그는 방심한 것인지 무심한 것인지 여전히 그 큰 눈으로 날 바라볼 뿐이다. 심장을 꺼냈다. 핏줄기가 얼굴로 쏟아져 그 액체가 눈 앞을 붉게 물들인다. 그는 심장이 뻥 뚫린 채 뒤로 쓰러진다. 뭔가 말을 하려는 듯 입을 뻐금 거리는 그는 전혀 무섭지 않다. 그는 실 끊어진 인형처럼 둔중한 소리를 내며 땅 위로 쓰러졌다. 기분 더러운 무언극처럼. 재수없는 인간들의 희극처럼. 안개 속은 여전히 모호하다. 나는 어디에 있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여전히 정신은 아득하고 귓전도 아득하다. 나는 살아 있는 것 같지도 않 다. 차례차례 죽은 자들이 나타나 나에게 질문을 던진다. 웃기지도 않아 다 시 웃음을 터뜨렸다. "웃겨." 머리 속이 차가와 졌다. 두 손을 들여다 본다. 나는 강하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강한 쿠베린이다. 수백을 죽이고 수만을 죽이고 아직도 살아서 숨쉬 고 있는 쿠베린님이시다. 과거의 무엇이 나타나든 과거의 어떤 것이 지랄 을 하든 나는 나다. 과거는 과거고 나는 나, 절대로 희롱당하는 것은 질색 이다. 내 나이가 몇인데 지금 과거따위로 희롱당해서 헤롱거릴 것으로 생 각하나? "나와봐라, 인간의 어리석은 마법사." KUBERIN............ 죽은 자들은 망각을 얻고 산 자들은 비수를 얻는다 2 갑자기 모든 것들이 바뀌었다. 나는 숲이 아니라 인간들의 구조물 안에 서 있다. 피로 잔뜩 얼룩진 돌벽 과 바닥에 깔린 타일들이 갈가리 찢겨진 시체들 사이로 듬성듬성 보였다. 여기가 어디더라? 그렇군. 여기가 바로 마튜스 안이군. 사방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숨 막힐 것같은 정적 속에 나는 서 있었다. 오래된 마튜스의 성벽에 그려진 벽화는 이미 핏자국으로 온통 가려져 아 무 것도 보이지 않고 인간들의 집기들이 부서진 채 바닥을 뒹굴고 있다. 창에 장식되었던 커튼과 장식물들은 찢겨진 시체들과 어우러져 이상한 색 깔을 발하고 있었다. 그 옛날 엘프의 아가씨를 조각한 대리석의 조각상이 한 쪽 팔을 잃은 채 홀로 어리숙하게 서있을 뿐 지금 이 자리에서 서 있는 것은 나 혼자였다. 마튜스의 성안, 그것도 성주의 거처인 안성이 틀림없어 보인다. 이 홀은 분명히 기억에 있다. 하지만 왜 내가 이 곳에 있지? 사냥감들을 죽이러 쫓아 다니다가 이 곳까지 들어온 건가? 얼마나 죽인 것인지 잘 모 르겠다. 이 자리에 널부러진 시체들 이외에도 분명히 더 있을 것이다. 나는 기억하지 못했다. 두 번째 변신이후 기억하고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언제까지 웅크리고 있을 거냐?" 내 음성이 홀 안을 울렸다. 시체와 핏덩이만 가득한 화려한 홀 안이 어딘가 묘하게 그로테스크해서 웃긴다. 기분 나쁜 정적도 신경에 거슬리고 무엇보다 내가 변신을 풀게 된 이유도 기분이 나쁘다. 두 번째 변신을 하고 풀면 기력이 소모되어 무척 피곤하고 배가 고프다. 그렇다고 바닥에 널린 시체를 먹긴 싫고 무언가 싱싱하고 맛있는 것을 먹 었으면 좋겠다. 갑자기 울적해진다. "안나오면 찾아낼까?"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끼익 소리와 함께 내 정면의 문이 열리며 붉은 옷을 걸친 녀석이 나타났다. 그 녀석의 옆에는 오우거 비슷하게 생긴 누런 털의 녀석들 다섯이 으르렁거리며 따라 들어섰다. 붉은 옷을 입은 녀석은 키가 작은 꼬맹이였다. 붉은 눈을 한 그 꼬맹이는 지저분한 금발을 하고선 퍼런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녀석이 손에 쥔 자그마한 기생목으로 만 든 지팡이가 살아있는 뱀처럼 꾸물거리는 모습이 이채롭다. 거 희안한 물 건일세. "미혹의 마법이냐? 애송아?" 내가 웃자 녀석은 퍼런 얼굴로 나를 경계하듯이 바라본다. 그러나 그도 잠시 이를 드러내며 환히- 빌어먹게도 환히 웃어 보인다. 물론 그 얼굴이 잘생긴 얼굴이었다면 귀엽다고 이쁘다고 해 줄 수도 있었겠지만 녀석의 얼 굴은 푸르딩딩한 데다가 코는 납작한 주끈깨 투성이의 면상을 하고 있다. 그 얼굴로는 빈말로라도 귀엽다고는 할 수 없었다. 왜냐면 나는 어디까지 나 수준 높은 미의식을 가진 분이시니까. "당신이 쿠베린? 정말로 지독한 괴물이네." 새된 소리를 내는 그 주둥이를 한 대 후려패고 싶어진다. 저런 목소리는 원래 싫어한다. 게다가 녀석의 마법은 나를 상당히 기분 나쁘게 만들었다. 나는 희롱당하 는 건 질색이다. 특히 미혹의 마법이니 뭐니 하는 것 따위는 정말로 질색인 것이다. 그래서 녀석이 입을 여는 그 순간 몸을 날렸다. "우아아아아앗!" 녀석이 비명을 지르는 순간 내 손톱은 이미 녀석의 코 앞까지 와 있었다. 그러나 녀석의 몸을 막아서는한 몸뚱이로 인해 나는 상당한 지장을 받았 다. 눈 앞에서 다시 피가 튀긴다. 지겹기도 해라, 시야를 방해하니 정말 로 짜증스럽다. 오우거 비슷한 녀석이 내 앞을 가로막으면서 반토막이 났다. 이 별로 대 단찮은 근육질의 쓸모 없는 녀석은 기괴한 비명을 내지르면서 널부러졌다. 그러자 그 뒤를 이어서 좌우로 두 녀석이 달려들어 내 발길을 막아 섰다. 이런 지저분한 것들! 그 두 녀석의 목줄기에 세 개의 손톱자국을 남겨주면서 시체를 밟고 튀어 오르자 기다렸다는 듯이 주근깨 꼬마가 나에게 마법을 날렸다. "킬링!" 녀석의 기괴한 지팡이에서 시커먼 새 같은 것이 튀어 나오더니 나를 덮쳐 왔다. 나는 뒤로 몸을 제끼면서 내 바로 뒤에서 나를 덮치기 위해 팔을 뻗 고 있던 오우거의 팔뚝을 잡아채 그 시커먼 놈에게로 집어 던졌다. 퍼엇 하고 녀석의 몸뚱이가 그 시커먼 새에 닿자 마자 가루가 되어 사방에 핏방 울만 남기고 사라져 버린다. 이거 생각보다 살벌한 마법이구만. "제길! 킬링!" 꼬맹이는 분한 듯 다시 연신 나에게 마법을 날린다. 그렇지만 한 번 그 수법을 본 이상 또 당할 마음은 전혀 없다. 목줄기를 덜렁거리며 달려드는 근육질의 멍청이들의 팔을 한 개 잡아뜯었 다. 피와 함께 부우우욱 하고 별로 상쾌하지 못한 소리가 터져 나오자 나 에게 덤벼들었던 나머지 한 놈은 겁에 질려 뒤로 물러섰다. "이거 받아!" 나는 그 뽑아낸 팔뚝을 꼬맹이에게 집어던졌다. 그리고 녀석에게로 전력 질주했다. 그 팔뚝이 시커먼 것에게 잡혀 가루가 되는 동안 나는 녀석의 가슴팍을 후려갈겼다. 그러나, 불행히도 퉁 하는 소리와 함께 내 손톱은 그녀석의 가 슴 바로 앞에서 튕겨나와 버렸다. 철벽을 후려갈긴 것 같은 둔통이 은은하 게 손가락사이로 느껴졌다. "제기랄!" 실드를 펼친 녀석은 여전히 퍼런 낯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팔 한쪽을 잃고 신음을 터뜨리면서 피를 쏟아내고 있는 오우거 한 마 리와, 나에게 도전해 봤자 죽음뿐이라는 것을 깨달아 버린- 조금 현명한 오우거 한 마리를 재빨리 훑어보았다. 헐떡거리는 오우거의 숨소리와 신음 소리만 홀 안에 울려퍼졌다. "어때? 애송이? 이리 나와 보시지." 내가 가볍게 손가락을 까딱거리면서 이를 드러내며 웃자 녀석은 퍼렇게 질린 낯빛으로 고개를 저었다. "넌 괴물이야." "인간은 자기가 상대할 수 없는 존재를 만나면 괴물이라 말하지. 괴물은 즉 인간에게 있어서 강하고 알 수 없는 무적막강의 존재를 말하는 것이라 할수 있지. 아까는 고마웠다. 쓸모없이 간만 큰 꼬맹아, 감히 이 몸의 기분 나쁜 추억들을 몽땅 끌어내어 내 머리를 식게 해준 거 아낌없이 보답할게. 어떻 게 해 줄까? 어떻게 죽여주길 바래? 네가 원하는 대로 죽여주도록 하지." 나는 녀석의 주위를 빙빙 돌았다. 어차피 실드 안에서는 마법을 바깥으로는 펼칠 수는 없는 것이다. 천천히 뒷짐을 짓고 걸으면서 나는 주근깨 애송이를 호위하고 있던 오우거 중에 내가 팔을 들이 뽑아 버렸던 녀석을 돌아보았다. 아아, 너무 괴로워 하네, 도와주어야 겠구만. 녀석은 내가 자신을 보자 겁에 질린 채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이봐, 내 가 도와주려고 하잖아! 녀석이 도망치기도 전에 녀석의 어깨위로 뛰어 올랐다. 신장만으로는 녀석 이 나보다 훨씬 크지만 힘이라든가 기품이라든가 기타등등의 면에서 녀석 은 나의 상대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어깨위로 올라서서 녀석의 머리통을 잡고 가볍게 돌렸다. 우두두둑 하고 그다지 아름답지 못한 소리가 터져나 오자 마법사 녀석은 마치 토할 것같은 표정으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나는 그 머리통을 잡아 뜯어냈다. 오우거의 피부란 아주 단단하고도 질긴 편이 라서 내가 잡아 뜯는데는 상당히 힘이 필요했다. 그래서 결국 깨끗이 찢겨 지지 못해서 울퉁불퉁 살점이 떨어져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고 말았다. 쳇, 아름답지 못하구만. "하아, 하아...미쳤어. 미쳤어..." 꼬맹이가 나를 공포에 질린 눈으로 바라보는 것을 나는 만족스레 바라보 다 말고 오우거의 머리통을 집어 던지고 치솟는 피에 얼굴을 박고 피를 마 셨다. 목이 말랐다. 쩝쩝 거리는 소리가 홀안을 울렸다. 나도 웬만큼 목이 마르거나 배가 고프지 않았다면 오우거를 먹진 않았을 거야. 하지만 지금은 변신이 풀린 상태라 무척 배도 고프고 피로한 데다가 앞으로 내가 뭔 짓을 더 할지 알수 없는 순간 아냐? 당연히 힘을 비축해야 지. 이 마당에 내가 오우거든 트롤이든 따질 처지는 아니지 않겠어? 나야 원래 미식가이긴 하지만 그것도 상황을 봐서 그런 거라구. 아아, 그래 역시 머리가 식어서 너무 너무 좋아. 이제야 머리가 돌아가 내 가 뭔 일을해야 할지 뭐가 제일 중요한지 착착 머리에 떠오르는 구만. 다 저 놈 덕이지. 미혹의 마법인지 뭔지가 죽어버린 놈들을 다 끌어내와서 내 머리통을 탁탁 두들겨 시원하게 만들어 준 거잖아? 이렇게 고마운 것을 어떻게 보답하면 좋을까? 나는 친근한 미소를 띄우면서 아직도 실드안에 앉아 있는 녀석을 바라보았 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입가에 송곳니를 드러내면서 웃는 나의 모습이 너무나 친근해서 참을 수 없었던 지 녀석은 갑자기 지팡이를 들어 올려서 다시 외 쳤다. "킬링!" 저 놈은 저 마법 밖에 모르는 거야? 아님 저게 저 놈이 가진 가장 큰 마 법인 거야? 나는 먹고 있던 오우거의 몸뚱이를 다시끔 닥쳐오는 시커먼 놈에게 집어 던지고 동시에 바닥에 뒹굴고 있던 오우거의 머리통을 꼬맹이 녀석에게 집 어 던졌다. 퍼억 하고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부딪쳐 오우거의 머리통이 박살이 났다. 아아, 조금 늦었군. 실드가 벌써 완성된 상태였잖아? 왜 저 마법을 쓰는지 이해가 간다. 킬링 하고 외치기만 하면 되니까 그런 모양이군, 뭐, 바람이여 나의 몸을 노리는 적을 쳐다오 운운하고 튜나처럼 외치다가는 분명히 내 손에 머리통 깨져 죽고 말겠지. 거 생각보다 교활한 꼬맹이로구만. 바로 눈앞에서 오우거의 머리통이 터져나가자 꼬맹이의 얼굴은 이제 퍼런 게 아니라 허옇게 변하기 시작했다. 뇌수와 뼈, 살점등이 주르르 실드에서 미끌어지더니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그 모습을 보고 이 녀석은 무척 나에 대해 재삼 생각하게 되었는지 갑자기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너, 너, 너는 대, 대체! 무엇때문에...무엇 때문에 이러는 거냐!" 그런 말을 물어 보는 건 조금 늦었다고 생각지 않냐? 가만 있자, 내가 지금 왜 여기서 이러고 있었더라? 또 생각이 안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놈이 감히 이 쿠베린님에게 미혹의 마법이라는 같 잖지 않은 것을 걸었다는 점이다. "기운이 언제 빠질까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군." 나는 녀석을 향해 매력적으로 웃어 보였다. 실드를 펼치는 것도 상당한 소모니까 저대로 버티는 것은 정말 어려울 게 다. 그러니까 나는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것 같군. 그럼 그동안 나도 좀 쉬 어 보자. 그리고 머릿속을 좀 정리를 해 봐야 겠다. 여기가 마튜스인 것은 맞는 것 같은데 대체 내가 언제 왜 어떻게 하여 이 곳에 와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저 꼬맹이가 날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유인해 온 건가? 아니면 내가 놈들을 쫓다가 여기까지 온 건가? 왜 내가 여기 있지?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는 동안 녀석은 내가 방심하고 있다고 여겼는지 갑 자기 공격을 해 왔다. "윈드 브레스터!" 화악 하고 무언가가 잘려져 나가는 것 같은 박력있는 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리고는 그 보이지도 않는 그 뭔가가 내 앞으로 그대로 쇄도해 온다. 피 할 틈이 없었다 라고 하면 나도 내 자신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것이겠지, 나는 재빨리 도약했다. 그 뭔가가 바로 내 발치를 스쳐지나가자 싸늘한 한 기와 함께 날카로운 아픔을 맛보았다. 그리고 바로 내 뒤에서 웅크리고 있 던 단 한 마리의 살아있는 오우거의 몸뚱이가 말 그대로 반토막이 되어 깨 끗이 잘려져 나갔다. 위잉 위잉 하고 귀가 울린다. "제길!" 또 한번 펼치려고 손을 뻗는 녀석의 정면으로 나는 그대로 쏘아갔다. 실드가 뚫렸다! 좋았어! 손톱을 뻗어가자 녀석이 황급히 주문을 외운다. "화이어 애로우!" 불로 만든 화살 같은 것이 내 정면으로 날아왔다. 그 놈이 빠른 지 아니 면 내 손톱이 빠른지 어느게 먼저인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나는 그 뜨거 움을 모른 체하고 녀석에게로 곧장 내뻗었다. 자, 닿아라! 퍽 하고 손톱에 녀석의 벌린 입이 그대로 걸렸다. 주문을 외워 실드를 도 로 복구하려던 참이었던 지 녀석의 벌린 입 사이로 손톱이 들어가 그대로 꿰뚫었다. 그리고 그 순간 가슴이 타올랐다. "우앗!" 뜨겁다. 나는 그대로 심장까지 타들어가는 그 잡히지 않는 불꽃의 화살을 움켜쥐려 고 했지만 실패했다. 이 놈은 집요하게 살아있는 물건처럼 불길을 누그러 뜨리지 않은 채로 그대로 내 가슴으로, 심장으로 파고 들어온다. 이대로 두 면 그대로 심장이 꿰뚫릴 것이다. 그러나 이대로 죽을 수는 없는 일, 나는 단호하게 그 화살이 꽂힌 가슴을 쥐어뜯었다. 퍼억 하고 내 살이 뽑혀져 나왔다. "허억 허억..." 나는 많이 지쳐 있었다. 시커멓게 타버린 내 살갗을 뜯어 내면서 나는 가슴을 바라보았다. 뼈가 드 러날 정도로 깊이 패여나간 가슴을 보면서 고통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제 길, 재수없는 마법. 바보짓이다. 이게 얼마나 바보짓인지 나도 알고 있었다. 뼈저린 후회가 가슴으로 밀고 올라왔다. 눈 앞에 널부러진 꼬맹이 하나 죽이기 위해서 내가 내 가슴팍을 후벼내다 니, 조금 기다렸으면 이 자식을 가볍게 죽여버릴 수 있었는데 왜 이런 짓 을 한 거지? 생각좀 해봐, 쿠베린, 대체 왜 이래? 평상시의 나답지 않아. 대체 왜 내가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야? 내가 왜 이 놈과 싸우고 있었던 거지? 왜 마튜스에 내가 와서 이러고 있어? 나는 그 놈의 빌어먹을 고왕국으로 가던 참 아니었던가? 홀안을 한 번 더 돌아보고 나는 일단 이 자리를 뜨기로 마음 먹었다. 머릿속이 뭔가가 낀 것처럼 온통 몽롱하다. 일단 정상적인 사고는 가능한 것 같은데 이렇게 내가 오락가락하고 있는 이유를 모르겠다. 다시 배는 고 프고 지쳤고 바보 짓을 해버렸다. 이 상처가 다 나으려면 뭔가 잘 먹어두는 게 중요할 것 같다. 일단 먹을 것을 찾아 배를 채우고 지금 이 엉망진창의 상황에서 벗어나도록 생각을 좀 해보자. 뭔가에 무척 화가 나 있긴 했던 것 같은데 무엇에 화가 나 있었는지는 기 억이 안난다. 일단 내게 덤비는 모든 것을 다 없애면 그게 뭔지 해결이 나 겠지. 막 홀을 벗어나기 위해 문을 나서고 보니 복도역시 피비린내 투성이다. 어두침침한 복도 아래 널부러진 시체들은 대부분이 인간들, 인간들 사이 에 얼치기 사인족같은 것들도 조금 끼어 있다. 어쨌거나 아낌없이 부담없 이 끝장을 내서 시체를 늘어놓은 꼴을 보아 하니 내가 한 것이 아니라면 묘인족의 짓으로 보인다. 허, 역시 저것도 내가 한 것인가? 이거 수백은 되 고도 남겠는걸? 대체 언제 죽인 거야? 저것들은? "지독하군, 그대가 쿠베린?" 그리고 또 한 녀석이, 아니 또 다른 놈들이 내 고민을 해결해 주기위해 나타났다. KUBERIN............ 죽은 자들은 망각을 얻고 산 자들은 비수를 얻는다 3 "..........." 나는 한동안 너무나 뻔한 상황에 말을 잃었다. 길죽한 복도, 기괴한 차림새- 흑마법사가 흔히 입는 검은 로브를 걸친 녀 석과 휘황한 붉은 색과 노랑색이라는 기이한 색채로 로브를 해 입은 녀석- 를 한 적이 나타났다. 덕분에 좁은 복도는 꽈악 막힌 상태, 그 상황에 어울 리게 복도 옆 면을 장식한 알록달록한 색유리가 햇빛을 쏘아 보내어 뭔가 야릇하고도 심각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마튜스의 놈들, 거 참 되게 화려한 걸 좋아하는 군, 비싸고도 손 많이 가는 색 유리로 복도를 통째로 장식하다니, 저런, 저런. 어쨌든 분위기만은 만약에 내가 인간의 전설에 나오는 용사 비슷한 물건 이라면 최후의 악당, 즉 마왕, 바로 앞에 있을 법한 중간 단계 악당의 분위 기라고 느꼈을 게다. 그리곤 외쳤겠지, "저 놈들만 물리치면 마왕은 타도되는 것이다! 용사의 뒤를 따르라!" 근데마왕이라고 불리는 건 나지, 참. 내가 마왕이든 저 놈이 정의의 용사든 어쨌거나 두 명의 녀석이 내 앞을 가로 막고 있었는데, 아니 정확히 말하면 네 녀석으로, 두 놈은 마법사처럼 생겼고 다른 두 놈은 그 놈들의 종자 내지는 노예 같이 생겼다. 줄여서 말 하자면 두 놈의 졸개를 거느린 두 놈의 마법사가 내 앞을 막았던 것이다. 맨 앞에 선 알록달록한 로브를 걸친 녀석은 많이 낯이 익었다. 낯이 익었다고 말하면 내가 아는 놈이란 뜻이냐? 아니, 그게 아니라 너무 너무 흔한 얼굴이라서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란 뜻이다. 본래 잘생긴 얼 굴은 잘생긴 대로 흔한 얼굴이고 못생긴 얼굴은 못생긴 데로 흔한 얼굴인 법이다. 드넓은 대륙 위에 흔하게 널린 금발의 미남자 중에 한 명인 녀석 은 미남이라 부를 수는 있겠지만 너무 흔한 얼굴이라서 나에게 전혀 감명 을 주지 못하고 있었다. 허긴, 사내새끼 얼굴에 감명 받아 뭔 즐거움이 있 겠나. 녀석은 웃음을 지은 채로 내 앞에 서서 감히 팔짱을 끼고 있다. 감히 날 상대로 해서 그런 쓸데없는 여유까지 부릴 처지냐? 네가? "과연 마왕이로군." 녀석은 그렇게 말하고는 피식 웃는다. 웃긴 왜 웃어? 가소롭게스리. 그리하여 나는 긴말을 하지 않고 전진했다. 앞으로 손톱을 주욱 뻗고 녀석의 머리통을 향하여 말 그대로 전진했다. "죽어라!" 갑자기 녀석의 면상이 히죽 웃었다. 어라? 그리고 그 순간 녀석의 몸뚱이에서 튀어나오는 물건에 경악했다. 키에에에엑! 소리를 내지르면서 튀어나온 그 것은 두 눈은 독수리를 닮았고, 아니 대가 리는 독수리를 닮은 괴이한 물건이었는데 물론 날개 대신 달린 것은 뱀처 럼 유연한 몸통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목줄기를 그대로 부리로 찍어 간다. 나는 달리던 발은 그대로 둔 채 허리를 유연하게 틀어 그것을 간신 히 피해냈다. 그러나 그도 잠시 이 놈의 물건은 나의 옆구리를 향해 다시 짖쳐 오더니 내가 숨을 들이키며 피하기가 무섭게 다시 내 두 눈을 향해 돌진해 온다. 이 놈의 것을 피하기 위해 결사적으로 나는 몸을 뒤로 휘었 다. 아리따운 무희들이 흔히 하는 것처럼 뒤로 몸을 잔뜩 제치면서 발톱을 들어 올려 녀석의 턱주가리를 냅다 걷어찼다. 그러나 아프지도 않은 지 이 놈은 핑 하고 공중으로 튕겨올라가 내 발톱에 찢어진 대가리를 하고 나를 원독에 가득찬 시선으로 노려본다. 연두색 바탕에 마름모꼴의 눈동자가 섬 뜩하게 움직였다. 에? 이 놈 부서지지도 깨지지도 않는 걸. 이것도 처음부터 '살아있던' 놈은 아닌 거 같다? 쐐액 하는 소리와 함께 녀석이 다시 덮쳐왔다. 그러나 이 몸께서는 이 물 건의 가장 큰 약점을 아시고야 말았다. 그리하야 나는 몸을 홱 돌려서, "이야아아아압!" 하는 기합성과 함께 닥쳐오는 놈을 뒤로하고 나는 힘껏 달렸다. 즉 도망쳤 단 말이다. 녀석이 기가 살아 나를 미친 듯이 쫓아온다. 일직선의 복도를 바람처럼 달 리자 뒤에서 지껄이는 너무나 흔한 면상을 가진 별 볼일 없는 녀석의 쓰잘 데기 없는 말이 들려온다. "으하하하하하...저게 무슨 지상 최고의 종족이란 말이야?" 오냐, 진짜 개똥만큼도 쓸모 없는 눈을 가진 녀석이로다. 자식이 뭘 몰라도 너무 모르는 구만. 나는 일직선으로 하염없이 달리다 말고 왼발을 힘껏 바닥에 내리꽂았다. 퍽 하고 복도의 타일이 박살나면서 주저앉았다. 물론 나는 그저 주저앉게 하려고 그런 동작을 취한 것은 아니었기에 팍하고 내리찍는 그 순간 너무 나 우아하고 너무나도 빠른 속도로 몸을 홱 돌렸다. 그리고는 역시 너무나 우아한 자세로 반대로 달리기 시작했다. 나를 쫓던 이 이상한 부리를 가진, 뱀도 아니며 독수리도 아닌 것은 내 속 도를 쫓아오질 못해서 나를 그대로 지나쳐 버렸다. 녀석이 두 눈을 부릅뜨 면서 괴이한 소리를 내지르는 순간 나는 다시 맹렬한 기세로 내달리면서 녀석의 길죽한 몸통 위에 올라섰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나의 우아한 발톱 이 녀석의 길죽한 몸통을 갈기갈기 찢어버렸던 것이다. 키에에엑 하고 소리가 들려오는 것과 동시에 퍼엉 하고 별로 쓸모 없는 머 리통을 가진 마법사 녀석의 팔뚝에서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옳거니, 저것이 바로 본체인가? "이런! 젠장!" 그런 소리를 내지른 알록달록이는, 나를 향해 이를 드러내면서 두 팔뚝을 앞으로 내밀었다. "파야! 사야! 나와라!" 녀석의 로브자락 사이로 드러난 팔뚝에는 시커멓거나 시퍼런 문신같은 무 늬들이 줄지어 그러져 있었다. 녀석은 그것을 내 앞으로 내밀며 의기양양 하게 소리를 내질렀다. "죽어라!" 정말, 너무나 많이 들어서 이제는 물린 소리로군. 그러나 여기서 내가 저 놈을 상대로 시간을 질질 끌어서야 어디 지상최고, 지상 최강의 멋진 분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겠는가. 어디까지나 강하고 멋 진 분이란 머리도 좋아야 하는 법이다. "타아아아아아앗!" 나는 가슴을 부풀려 고함을 내질렀다. 그리고 그 순간, 복도의 색유리창이 진동하고 그 다음에는 내 앞에서부터 유리창이 줄지어 창창창창 하는 소리와 함께 모조리 터져나갔다. "우앗!" "앗!" 아낌없는 나의 목청에 터져나간 유리들은 말 그대로 아낌없이 산산히 흩어 지며 녀석들의 몸통 위로 떨어져 내렸다. 물론 나에게 쏟아져 내린 유리조 각들은 나의 늠름한 몸통에 튕겨 바닥으로 떨어졌지만 녀석들의 연약한 몸 통은 유리조각에 이리저리 찔리고 찢겨졌다. 그 덕분에 뭔가 자기 팔뚝을 이용해 공격을 하려던 너무나 흔한 면상을 한 녀석은 여기저기 다쳐 피투 성이가 된 채 나를 향해 고함을 질러댔다. "이 치사한! 네가 이러고도 왕이냐!" 치사? 흥, 원래 싸움이란 치사한 거야. 그리고 진 놈은 꺼이 꺼이 울며 돌아서는 게 정상이지. 내가 뭔 인간의 기 사라고 난 걸레 제국의 걸레 기사단의 서열 어쩌구의 어쩌구 저쩌구입니다 이제부터 싸우겠습니다 따위를 외쳐야 한단 말이야? 그리하여 나는 친절하게 답해주었다. "놀고 있네." 그렇게 말하고 녀석의 바로 앞까지 돌진해 한 대 걷어 차려는 순간, 이번 에는 다른 한 편의 마법사 녀석이 튀어 나왔다. "실드!" 또 실드야? "이 치사한! 네가 그러고도 마법사냐?" 내가 그렇게 말해주자 녀석들은 기가 찬 표정을 짓고 날 바라본다. 그러나 그도 잠시 실드에 튕겨나간 내가 주춤거리는 동안에 이 녀석들의 부하인 듯한, 어디까지나 부하인듯한 두 놈이 나에게 팔을 뻗어왔다. 말 그대로 뻗.어.왔.다. 그리고는 내 발목을 잡는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이 놈들이 고개를 들자 인간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했 다. 일단 녀석들은 눈이 두 개지만 입은 하나라고 말하기엔 너무 컸다. 얼 굴 아래쪽 전체가 다 입으로 만들어진 것 같다. 게다가 입안 전체는 이빨 로 가득 차 인간이라기엔 지나치게 이빨이 많다. 아인족도 아니겠지? 이런 면상이라면? 그 것뿐만이 아니다. 녀석들의 피부는 회색빛이고 무엇보다 몸통 자체가 인간의 세 배쯤 된다. 어디로 보나 나는 완력이 세요, 나는 힘이 센 놈이어 요 하고 전신으로 말해주는 듯한 놈들이다. 그런데 왜 내가 이 놈들의 존 재를 무시했냐고? 그건 아주 간단한 이유다. 내 머리통이 뭔 일인지 잘 모 르겠지만 제대로 작동을 하지 않는 것처럼 마법사들만 눈에 들어왔던 탓이 다. 냉정해야지. 냉정. 콰아아아앙 하는 소리와 함께 나는 복도의 벽에 정면으로 부딪쳤다. 정확히 말하면 부딪친 게 아니라 내동댕이쳐져서 벽면과 완전히 온 몸으 로 딥키스를 했다. 그 딥키스의 원인은 녀석이 내 발목을 잡고 휘두르고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이런 상황이 분명히 있긴 있었는데? 아, 머리가 띵 해. 콰아아앙 하고 다시 한번 내동댕이 쳐졌다. 이번에는 이빨까지 흔들리는 거 같다. 이러다가 코뼈 부러지는 거 아냐? 콰아아아앙 하고 세 번째. 이번엔 벽면이 아닌 복도와 딥키스. 온 몸으로 이 건물을 사랑하게 되는 구만. 하지만 코뼈가 부러지고 이빨이 빠져서야 이 아름다운 얼굴을 유지할 수는 없는 법이다. 자아, 머리를 굴려. 아무리 어딘가 하나 빠진 것 같은 머리통이긴 하지만 쌈박질에 져서야 내 이름 석 자를 내 놔야지. 내 손에 죽어간 무수한 영령들을 생각해서 이렇게 주인도 아닌 노예녀석에게 당해선 안되는 거지. 내 손에 죽어간 자들이 얼마나 억 울하겠어? 그럼, 그렇고 말고. 힘을 내자. 끙! 네 번째로 나를 이번에는 기둥에 키스시키려는 상황에서 나는 단번에 두 손에 힘을 주었다. 두 손바닥이 기둥에 닿는 그 순간 재빨리 탄력을 준다. 이거 언젠가 그때와 너무 상황이 비슷하다니까. 독창성이 부족해. 싸움도 독창성이 필요한 것인데. 그러자 내 몸은 휘익 하고 허공으로 떠오른다. 이 때 유연한 자세로 몸을 구부려 날 잡고 있는 녀석의 팔뚝을 움켜쥐고 우드 득! "캬아아아악!" 저번 상황과 너무 같으면 뭔가 기분도 찝찝해. 비명지르는 녀석의 팔뚝을 사쁜히 즈려밟고 나를 향해 돌진하는 녀석의 머 리통을 걷어찼다. 녀석이 뒤로 홱까닥 하고 넘어가는 것을 기다려서 이번 에는 나도 뭔가 색다른 것을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리하여, 자빠진 녀석 의 발목을 잡아 채서 이 놈도 나와 똑같이 온 건물을 전신으로 사랑하도록 만들어 주었다. "키아아아악!" "케엑!" 괴이한 비명이 애처롭게 울려퍼지는 가운데 나는 녀석의 발목을 마구 휘두 르면서 나를 향해 돌진해 오는 다른 한 녀석의 머리통을 이 놈으로 후려갈 겼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서 실드로 둘러싼 채 입을 저억 벌리고 날 바라 보는 두 놈의 시시껄렁한 녀석들의 실드 위에도 몇 번 후려갈겨 주었다. "크아아악!" 비명소리가 얼마나 큰지 온 복도가 쩌렁 쩌렁 울린다. 그럼 못쓰지, 녀석 아, 나도 똑같은 걸 겪었는데 난 비명 안 질렀어. 피가 튀기긴 튀기는데 색깔이 거무튀튀하다. 아무래도 이 놈도 정상적인 물건이 아니라 마법으로 만들어낸 거 같이 보인다. 나는 너무나 온 몸으로 이 건물을 사랑해서 전신이 만신창이가 된 녀석을 피투성이 복도 위에 던 져 놓고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두 놈을 향해 돌아섰다. 그 두 놈은 눈을 가늘게 뜨고 박살이 난 자신의 종자 비스끄무리 한 것을 바라보며 이를 갈고 있었다. "이 잔인한...." "잔인무도한 놈아!" 싸우라고 시킨 주제에 웬 말들이 그렇게 많아? 내가 왜 마왕이라 불리는 지 알고 싶다며? 거, 마왕 마왕 하다 보니 왠지 마음에 드는 군. 이 두 놈을 내버려두고 전진하도록 하자. 그래봐야 실드 안에서 웅크리고 못나오니까 말이다. 아냐, 잠깐만! 내가 왜 이 생각을 못했지? "야, 꼬맹이들아, 공격해봐." 내가 팔짱을 끼고 녀석들에게 말하자 녀석들은 잠시 미심쩍은 표정을 짓는 다. 나는 팔짱을 끼고 여유있는 미소를 지으면서 상냥하게 말했다. "너희들이 무척 피곤해 보이는 걸 보니 내 마음이 아프군. 자아, 얼른 공격 해. 그리고 얼른 끝내자." 두 놈은 뭔가 미심쩍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예전부터 생각하고 있는 것인데 실드란, 참으로 쓸모 있으면서도 쓸모 없 는 물건이기도 하다. 물론 공격을 막을 수는 있다. 하지만 공격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공격해 보라니까." 내 이런 상냥한 표정을 보고 녀석들이 무슨 생각을 했는 지 알 수는 없지 만 녀석들은 이를 드러내며 화를 냈다. 그리고는 역시 아까 무슨 주문을 외우려다 만 그 괴이한 문신을 가진 녀석이 팔뚝을 드러내면서 악을 질렀 다. "파야, 사야! 나와라!" 윙윙 소리와 함께 녀석의 팔뚝에 그려진 시퍼렇고 시꺼먼 그림들이 꿈틀거 린다. 우와, 이건 처음 보는 물건일세. 저 꿈틀거리는 게 대체 뭐하는 걸까. 그리고는 길게 말할 여유도 주지않고 녀석들이 튀어 나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나는 내가 박살낸 유리 조각을 힘껏 집어던졌다. 파공성을 내면서 유리조각이 날아드는 것과 동시에 시뻘건 피가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으아아아악!" 두 팔뚝을 내 놓은 녀석이 두 팔뚝을 잃으면서 뒤로 넘어진다. 시퍼렇게 질린 그 낯짝을 보면서 나는 쾌재를 불렀다. 그리고 녀석의 팔뚝에서 튀어 나온 두 마리의 괴이쩍은 물건은 자기가 갈 곳을 잃자 마자 그대로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날개 달린 뱀과 같이 생긴 녀석과 다리가 여덟 개쯤 달린 도마뱀같이 생긴 두 놈은 덩치가 나보다도 컸다. 저런 것들과 싸워도 재미는 있겠지? "이, 이런!" 옆에 있던 녀석이 당황성을 터뜨리면서 팔뚝을 부여잡고 있는 녀석을 부축 하려 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에 갑자기 공중으로 치솟았던 그 두 마리 의 괴물들이 다시 아래로 급강하를 하더니 실드를 뚫고 가차없이 아가리를 벌렸다. "으아아아악!" 팔뚝을 잃은 녀석의 목덜미를 깨문 도마뱀같이 생긴 녀석은 역시 도마뱀과 같은 길죽한 꼬리로 녀석의 두 눈을 꿰뚫었다. 그와 동시에 날개 달린 뱀 처럼 생긴 녀석은 자기 주인이었던 녀석의 가슴을 그대로 꿰뚫고는 심장을 깨물었다. 비명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나는 이 황당한 전개를 멍청히 바라보았다. 자기가 데리고 있던 괴물들에게 박살나는 마법사는 온 몸을 뒤틀면서 바닥 에 쓰러졌다. 전신에 구멍이 난 채로 피를 분수처럼 흘리고 있었다. 그 옆 에 있던 녀석은 부축도 하지 못하고 겁에 질린 표정으로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는 이 두 괴물이 자신을 바라보자 재빨리 주문을 외웠다. "블레이드! 블레이드! 윈드아머!" 공기를 자르는 소리가 터져나왔지만 두 괴물은 아랑곳하지도 않는다. 마치 눈 앞에 있는 마법사가 불구대천의 원수라도 된 듯이 이빨을 드러내 며 신속하게 달려들었다. 제일 먼저 날개달린 뱀이 녀석의 팔뚝을 물어 뜯 었다. "으아아악! 저리 비켜! 난 네 봉인자가 아니야!" 녀석이 두 팔을 흔들어대면서 비명을 올리는 순간이었다. "가이에락, 파이에로몬." 낮게 깔리는 목소리가 갑자기 터져나왔다. 그러자 마법사 녀석을 공격하던 두 괴물이 홱 고개를 돌리고는 허공을 본 다. 내가 박살낸 유리창 사이로 공중에 둥둥 뜬 시커먼 로브의 녀석이 보였다. 그 녀석이 팔짱을 낀 채로 이 쪽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이리로 와라." 시커먼 녀석이 그렇게 말하자마자 두 괴물은 홱 소리가 나도록 튀어 올라 와 그 시커먼 녀석의 품안으로, 정확히 말하면 로브를 걸친 녀석의 소맷자 락 속으로 사라졌다. 허어, 이거 상당한 구경거리로군. 얼결에 살아난 애송이 녀석은 그 시커먼 녀석의 존재를 발견하자마자 얼굴 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리고는 말 그대로 쿵 소리나도록 바닥에 납작 엎드 려서 머리를 조아렸다. "가장 위대하신 암흑마도의 제왕, 룬 킬트 더 마이오스, 그랜드 마스터께 인사 올립니다!" 나는 이 간지러운 소리를 들으며 귀를 팠다. KUBERIN............ 죽은 자들은 망각을 얻고 산 자들은 비수를 얻는다 4 킬트는 공중에 뜬 채로 무심히 녀석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공중에 떠 있는 녀석은 흑마법사라기 보다는 시커먼 유령 처럼도 보인다. 생각해 보면 이 놈으로부터 모든 일이 시작되었지. 그럼에 도 불구하고 이 놈을 참아주는 나는 얼마나 도량이 넓은 놈인가. "용서를! 용서를!" 녀석이 너무나 사시나무 떨 듯이 떨고 있어서 조금은 불쌍해졌다. "쿠베린, 적당히 해 둬라." 갑자기 녀석은 덜덜 떠는 애송이를 본 척도 않고 나에게 말했다. 나는 킬트 녀석을 바라보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뭘 적당히 하라는 거야?" "그 정도 죽였으면 됐지않나?" "뭘 그 정도 죽였으면 됐다는 거야? 넌 뭐 점잖은 놈이냐?" "............얼마나 더 죽여야 그 놈의 잘난 자존심이 치유되는 거냐?" "여기서 왜 나의 하늘같은 자존심이 나오지?" 이 녀석이 갑자기 왜 끼어들어? 킬트녀석은 한 숨을 쉬었다. "너와 유티아 만으로도 이미 마튜스는 시체의 산이다." "유티아?" 유티아가 거기서 왜 나오지? 내가 어리둥절해서 녀석을 바라보자 킬트는 한 숨을 내 쉬었다. "어쨌든 이 놈은 내가 맡을 테니 이 자리를 떠나라." "아, 떠나는 건 떠나는 것인데 왜 네가 여기에 나타난 것이지?" "네가 모든 인간들을 다 죽이기 전에 온 것 뿐이야." "난 별로 죽인 적 없어." 킬트는 시커먼 눈으로 시커멓게 날 바라보았다. "별로 죽인 적 없어? 이 시체의 산으로도 부족해?" 나는 입을 다물었다. 시체의 산? 이 홀안의 녀석과 복도안의 녀석들을 말 하는 건가? "이봐, 전쟁터에서라면 이 정도 죽는 건 흔한 일 아냐?" "이건 전쟁이 아니라 네 화풀이잖아? 그 덕에 인간들이 무수히 죽어 넘어 지고 말이야." "그럼 인간의 전쟁은 화풀이가 아니란 말이야?" "인간의 전쟁은 의미가 있는 것이다, 너의 그 같잖은 자존심을 세워주기 위한 쌈박질과는 달라." "헤에, 인간의 전쟁이 의미가 그렇게 깊었냐? 그럼 룬드바르는 왜 전쟁을 일으켰는데? 대륙의 수많은 인간들의 전쟁은 다 의미가 그렇게 깊어서 전 쟁 끝나면 땅따먹기냐?" "이봐, 네가 이해 못하는 것이야. 인간들의 전쟁에는 의미가 있다." "오호라, 너무나 심오해서 아무도 깨닫지 못하는 의미?" "쿠베린!" "헤에, 너도 인간이라고 내가 이러는 게 싫다는 거냐?" 킬트는 찢어진 눈으로 나를 묵묵히 쏘아 보았다.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지? 뭔가 하려고 했었는데. 여전히 머릿속이 흐릿하다. 뭔가 내가 빼먹고 있는 게 있는데. "네 심정은 이해한다만...적당히 해 두는 게 어떠냐? 아무리 죽여도 그들이 살아돌아오는 건 아냐." "그들?" 나는 어리둥절해서 녀석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누구지? "사인족을 아무리 죽여도 그들은 돌아오지 않아. 게다가 사인족은 안그래 도 숫자가 너무 줄어들었다. 네가 삼일간 얼마나 죽였는지는 하늘만이 알 겠지만....." 잠깐, 삼일간? 삼일간이라니? 그건 무슨 소리지? 내가 혼란에 빠져 있는 사이에 바닥을 기던 애송이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 더니 슬금 슬금 뒷걸음질을 친다. 녀석은 나와 킬트가 대화를 나누는 것이 자신의 유일한 기회인양 얼굴이 허옇게 된 채로 땀을 줄줄 흘리면서 은근 슬쩍 달아나고 있었다. 녀석이 막 기둥을 돌아서는 순간에 킬트 녀석이 입을 열었다. "봉인수라는 게 뭔지 아냐?" "몰라." 흠칫하고 달아나던 녀석이 고개를 푹 숙이며 멈추어 섰다. 녀석의 다리가 사시나무 떨리듯 덜덜 떨리는 것이 너무나 확연해서 나는 왠지 슬퍼졌다. "방금 네가 본 것이 바로 봉인수다. 너, 소환수는 알고 있지?" "알지." "이세계(異世界)에서 소환해서 부리는 것이 소환수인데, 그것과 마찬가지로 봉인수 역시 이세계에서 소환된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 녀석이 이 상황에서 마법강의하는 거야? "소환수가 쉽게, 아님 봉인수가 쉽게?" 갑자기 이 놈이 나에게 질문을 던진다. 나는 녀석이 던지는 질문에 응해주 기 위해서 바닥에 널려진 수많은 색색가지 색유리 중에서 가장 큰 것을 녀 석에게 아낌없이 던져 주었다. 물론 그 색유리는 킬트녀석의 주변에 가자 마자 팍 하고 먼지처럼 바스러 졌지만 나는 나의 응답이 녀석의 마음에 들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너 같은 무식한 녀석은 물론 모르겠지만 소환수는 주문만으로 불러들이는 것이기 때문에 쉬운 일은 결코 아니지." 녀석은 이를 갈면서 나를 눈꼬리가 찢어져라 째려보았다. "당연하겠지." 나는 이제 편안한 자세로 돌입했다. 안그래도 가슴팍은 찢어져서 아파 죽겠고,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변신모드 가 풀린 지 얼마 되지도 않은 탓이라 무지 피로해서 누워서 자고 싶었다. 그 전에 뭔가 더 먹었으면 좋겠지만 먹을 거라곤 바닥에 퍼진 종류도 알 수 없는 괴물녀석뿐인지라 먹을 수도 없다. 그리하여 나는 기둥에 두 다리 쭈욱 뻗은 상태로 팔짱을 끼고 조금 피로한 다리를 그놈의 괴물 녀석 다리 위에 올려놓고 녀석의 이야기를 옛날 이야 기 흘려듣듯 듣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그런데 소환은 해야겠고 소환수를 주문만으로 필요할 때마다 불러낼 자신 은 없는 녀석들은 어떻게하느냐 궁금하지?" 전혀 안 궁금하다. 나는 손톱소제를 하면서 무시했다. 물론 나의 무시도 역시 무시하면서 킬트는 말을 이었다. "마법원으로 소환한 뒤에 자기 몸뚱이에 봉인하는 거야. 그리하여 필요할 때마다 봉인을 푸는 거지. 자기 제어 주문에 의해서 말이야." 오호, 그 말은 조금 나로서도 흥미진진한 말이다. 그럼 아까 녀석들이 불러 냈던 그 도마뱀과 뱀대가리 같던 것들이 바로 봉인수?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흠이 있지. 하기야 마법에는 댓가가 따르는 법 이니까." 특히 흑마법은 댓가가 따른다고 고쳐말해야 하는 것 아니야? 그건 그렇고 내가 왜 여기서 이 녀석의 말을 일일이 듣고 앉아있어야 하는 것인가? 허긴 내가 일어나서 이 자리를 떠도 이 놈은 따라 다니면서 설명을 계속하 긴 하겠지. "봉인한 몸에 상처를 입으면 봉인수도 상처를 입는다는 거지." "그럼 아까 내가 저 놈 팔뚝 잘라냈을 때의 경우는 뭐야?" 내가 궁금해서 묻자 킬트는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이 읊조린다. "봉인한 부분이 떨어져 나갔으니 봉인수는 봉인이 풀린 거야. 그러니까 자 신을 구속한 녀석을 공격한 거지." "즉, 그동안 날 부려먹은 게 억울하다. 너도 죽어봐라 라는 의미란 거냐?" "대가가 돌아온다는 부메랑 효과이지만, 뭐 그렇게 말한다면 그렇다고도 할 수 있지." 호오, 거 참, 마법도 꽤 공정하군. 너무나 공정하고 공정해서 야멸차게도 느껴지는데. "그럼 말야, 뭐 심장이라든가 그런데 봉인할 수도 있는 건가?" 내 말에 킬트는 한심한 듯이 바라본다. "너, 심장에 줄 가게 하고 싶어?" ".........." 킬트는 내 대꾸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시선을 돌려서 엉거주춤 서 있는 녀석을 향했다. 녀석은 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서 있을 수도 없다는 듯 애매모호한 태도로 킬트의 시선을 어떻게 해서든 피해보겠다는 듯이 은 근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 피아드, 네 녀석과 올리스가 감히 내 봉인수들을 훔친 일 에 대해선 눈을 감기로 했다." 헉 하고 녀석이 고개를 들고 킬트를 바라본다. 녀석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두 눈을 부릅뜨고 킬트를 보다가 그 다음에는 무릎을 다시 꿇고 두 손을 땅에 짚은 채 외쳤다. 더할 나위 없이 감격한 얼굴이었다. "감사합니다! 마스터!" 녀석이 악악거리는 것을 바라보던 킬트의 눈에 잔인한 빛이 스쳤다. "올리스가 죽는 것을 보았겠지?" "........네." "너는 봉인하지 않은 모양이구나. 올리스는 세 개나 봉인했더군." "네, 네....제자는 그저....." 녀석이 어리숙하게 입술을 떠는 동안 킬트는 잠시 동안 생각에 잠긴 듯 소 맷자락을 들여다 보았다. 그 안에 봉인수라도 있는 양 심각한 얼굴로 그걸 바라보고 있더니 뒤이어 말을 이었다. "긴 말은 않겠다. 어떻게 할 것이냐?" ".................사, 삼년형을 기꺼이 받겠습니다." 그 말을 듣고 킬트의 눈썹이 가볍게 위로 올라갔다. "...사년형!" 급히 애송이가 말을 바꾼다. 그래도 킬트의 표정이 변함이 없자 녀석은 다 시 다급히 입을 열었다. "오년형이요!" 지금 장난하냐? 내가 어처구니없어서 녀석을 바라보는 동안 킬트는 손을 휙 내저었다. 그러자 그의 소맷자락에서 무언가가 튀어 나와 녀석에게로 쏜살같이 날아 갔다. 녀석이 놀라 눈을 크게 뜨는 그 순간 퍽하는 소리와 함께 녀석이 앞 으로 고꾸라졌다. 그리고 나는 녀석의 뒤통수에 갑자기 이상한 벌레같이 생긴 것이 올라타 앉은 것이 보였다. 그 벌레는 다리가 열 개쯤 달린 괴이 하게 생긴 갈색으로 손가락만 한 크기였지만 그 자빠진 마법사의 뒷목을 두 개의 집게로 파고 들더니 꾸물꾸물하고 녀석의 목으로 기어들어갔다. 녀석이 기어들어가는 동안 애송이마법사는 있는 대로 비명을 올리고 있었 다. 아, 기분 찝찝하겠다. 마침내 흔적도 없이 그 괴이쩍은 벌레가 다 들어가고 나자 침을 질질 흘리 며 헐떡이던 마법사 녀석은 절망에 빠진 듯한 얼굴로 푹 하고 바닥에 엎어 져서 한동안 일어나지도 못했다. 흠, 저건 무슨 벌레냐? 또 이상한 장난질을 치는 건가? 설마하니 킬트의 말을 안들으면 저놈의 벌레가 팍 하고 치솟아 올라 심장 으로 기어들어가 두 집게로 푹 터뜨린다든가 혹은 아래로 내려가 내장을 토막친다든가 하는 것일까? 어느 쪽이나 저 음침우울한 녀석다운 수법이로군. "가거라." 킬트가 짧게 말하자 녀석은 진땀을 줄줄 흘리는 얼굴로 고개를 간신히 들 었다. 그리고는 비틀 일어서서 말 그대로 비슬비슬 걸어서 내 시야에서 천 천히 벗어났다. 아니 벗어나려고 했다. "잠깐! 너, 말 좀 묻자. 그 룬드바르 황제인지 왕인지 하는 녀석, 이곳에 있 느냐!" 내가 묻자 녀석은 날 흘긋 같잖지도 않다는 듯이 바라보다가 나의 치켜든 주먹을 보고는 얌전히 입을 열었다. "이미 이곳을 떠난 지 사흘 되었소이다." "사흘?" 또 사흘? "그럼 어디로 갔는데?" 다시 입을 다무는 녀석. 안되겠군. 이런 놈은 머리통속에 벌레를 넣었든 걸레를 넣었든 조금 주물러 주어 이 몸의 위대함을 뼈저리게 느껴야만이 현명해지겠는걸. 흐... 내가 히죽이 웃으며 녀석을 바라보자 순간 창백해진 녀석이 다시 재빨리 대답한다. "고왕국으로....! 고왕국으로 전진하셨소!" 내가 거성을 나와 걷는 동안에 본 광경은 모두 한 가지 일색이었다. 피와 살, 시체더미들로 가득찬 이 요새는 이제 도무지 살아 있는 것들이라 고는 시체를 뜯기위해 모여든 벌레들뿐이었다. 이제 후각은 완전히 피 냄 새로 가득차서 느껴지는 것이라곤 하나도 없다. 석양이 진다. 이제 곧 날이 저물 것이다. 아까부터 묘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자꾸만 사흘이라고 하는 그 말이 걸린 다. 어제 뭘했었지? 기억나지 않아. 그럼 그저께는 뭘 했더라? 역시 기억나지 않아. 그럼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너, 생각보다는 냉정하군. 울고 불고 할 줄 알았는데." 킬트가 뒤에서 천천히 걸으며 입을 열었다. 바닥에 질척이는 살점들이 맨 발에 와 닿아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시체들 은 이제 굳어가고 있어서 닿는 감촉은 차고 축축하며, 질척거린다. 무엇보 다 찬 것이 기분 나쁘다. "뭘 울고 불고해?" "저번에 그 푸른 아인족꼬마 일도 있고 해서 울고불고 할 줄 알았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서 킬트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킬트는 무표정한 채로 자신의 발치에 걸리는 머리통을 가볍게 걷어 차 피하면서 걷고 있었다. "무슨 소리야?" "유티아는 휴런이 데리고 북상하고 있어. 한 발 먼저 말이야. 너는 도저히 막을 자신이 없다고우는 소릴 하길래 내가 왔지." "유티아를 왜 휴런이 데리고 간다는 거지? 지금 고왕국으로 갔다는 말이지?" 킬트는 시선을 돌려서 날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이 기묘하게 변한다. "너 설마....." 킬트는 갑자기 그 재수없는 면상에 미간까지 찌푸리며 날 다시 바라보았 다. 그렇게 봐 봤자 이 몸이 훌륭하시고 뛰어나시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 는 일이야. "기억 못하는 거냐?" "뭘? 아아, 어제 뭘 했는지 기억 못해. 나 술이라도 퍼 마셨던가?" 기묘한 얼굴로 날 바라보던 녀석이 찬찬히 말했다. "왜 사인족을 죽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단 말이지?" "에? "왜 미친 듯이 사인족을 죽이러 다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머릿속에 뭔가 불꽃이 어른거린다. 알 수 없는 섬뜩한 기억. "왜 화를 냈었는지, 왜 난리를 쳤는지 기억이 안나?" 내가 물끄러미 녀석을 바라보자 킬트가 조용히 말했다. "과연, 이 지긋지긋한 철벽의 심장을 가진 쿠베린님이 어떻게 그 긴긴 세 월 속에서 살아왔는 지 알 수 있을 것 같구만." "뭔 소릴 하고 싶은 거야?" 팔짱을 끼면서 녀석을 보았다. 듣기 싫은 소음이 윙윙 귓가에서 일렁였다. 그래, 듣기 싫다. 이 것은 정말 로 듣기 싫어. 녀석의 시커먼 눈이 날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네 딸아이와 미트라가 죽었다. 끔찍하게 살해되었지." KUBERIN............ 죽은 자들은 망각을 얻고 산 자들은 비수를 얻는다 5 "하하하하하하핫..........." 그랬었나? 그랬었군, 그랬었나봐, 그렇게 된 것이었군. 물끄러미 바라보는 킬트의 시선을 받으면서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목이 찢어지고 배가 가슴에 달라붙도록 킬킬거리고 계속 웃었다. 너무 웃다보니 기침이 나오고 눈물도 나왔다. 그렇지, 너무 웃어서 눈물이 다 나온다. 킬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녀석은 팔짱을 낀 채로 내가 웃는 것을 바 라보기만 했다. 그러고 보니 요즘 들어 이 녀석과는 이상하게 자주 얽히는 것같군. 내가 아이를 죽이지 않을 것이라고 그렇게 믿었었는데 결국은 또 아이를 죽이고 말았다. 여자를 죽이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었는데 결국은 또 죽이 고 말았다. 너무나 허탈해져서 웃음이 튀어 나온다. 하하하 하고 세 번 웃고 나서 크크크하고 또 세 번 웃어본다. 웃기는 군, 정말 웃겨. 뭐가 웃기는 지 모르겠지만 너무 웃겨서 말이 안나와. "가자." 나는 웃다 말고 고개를 돌려 킬트를 바라보았다. "어딜?" "어디긴 어디야? 당연히 고왕국이지, 거기에 그 놈들이 있다며?" "......유티아를 보고 가라." "뭐하러?" 내 말에 킬트의 얼굴이 싸늘해졌다. "네 여자잖아? 네 여자가 네 아이를 잃어서 괴로워 하고 있는데 너는 그녀 를 위로도 하지않을 참이냐?" "아이를 지키는 것은 여자의 몫이야. 내 할 일이 아니란 말이다." 기가 막히다는 듯이 킬트가 날 바라보았다. "뭐라고?" "여자가 아이를 지키는 거야, 나는 귀여워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잘했 다고 생각하는데?" "이.....녀석! 넌 네 아이가 죽었는데도 그런 소릴 하는 거냐!" "그래, 어쩔 수 없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죽는다는 건 그런 거야. 죽임을 당하고 죽고, 다 그런 거지. 묘인족의 아이가 그렇게 죽었다는 건 치욕적인 일이긴 하지만 말이야." "너! 머리라도 이상하게 된 것 아니야?" 킬트가 나직하게 물었다. 머리가 이상해졌다고? 물론 이상해졌지, 이상해지고 말고. 지금 내가 서 있 는 건지 앉아있는 건지 나도 나를 잘 모르겠으니까 굳이 놀랄 것은 없다고 봐. 나는 대체 지금 어떤 상태지? 나는 어떻게 하고 있는 거지? "헬시에 헬!" 갑자기 시커먼 불꽃이 일렁이면서 나를 덮쳐왔다. 소스라치게 놀라 뒤로 튀어오르자 그 뒤를 기다렸다는 듯이 시커먼 불꽃이 살아있는 양 나의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손톱을 들어 휘젓는다는 그런 어 리석은 일을 행하는 대신에 나는 재빨리 몸을 숙이며 그 시커먼 불길 속으 로 돌멩이를 하나 집어던졌다. 으싸! 파식하고 뭔가 야릇한 소리가 터져나오는 것을 듣는 그 순간에 그 불길 속 을 뚫고 무언가 뾰족한 것이 내 면상으로 그대로 짖쳐들어왔다. 우왓! 아가리를 벌리고 달려드는그 것은 아까 보았던 봉인수인지 소환수인지 하 는 그 괴이한 물건이었다. 날개가 달린 뱀과도 같은 그 것이 입을 좌아악 벌리자 바늘처럼 날카로운 이빨들이 열을 지어서 나는 위험한 놈이어요를 외치고 있었다. 그래, 나도 위험한 놈이란다. 녀석이 내 팔뚝을 물어뜯기 위해 아가리를 있는 힘껏 벌리고 닥쳐온다. 오 오, 좋아 좋아! 어디 물어봐! 물어봐! 물어보란 말이다! 녀석이 내 팔을 무는 그 순간에 나는 녀석의 목줄기를 잡아 움켜쥐었다. 물컹하는 촉감과 싸늘한 기운이 손목까지 치밀어 오른다. 차가운 감촉, 소 름끼치는 한기였다. 그렇다고 어마 차가라 하고 손을 뗄 수는 없는 노릇, 나는 녀석의 목줄기 를 잡아 비틀어서 말 그대로 바닥에 패대기를 쳤다. 아니, 치려고 했지만 녀석이 내 팔뚝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는지 도무지 이빨을 빼려고 하지를 않는다. 이 자식, 그렇게 내가 좋냐? 그렇게 나를 사모하냐? 그럼 온 몸으 로 사랑하게 해주마. 손톱으로 녀석의 목을 내찔렀다. 창창하는 소리로 녀석의 몸뚱아리는 요동 을 할 뿐 상처도 나지 않는다. 그래? 상처도 안나? 그럼 어디 끝장을 보자 구! 녀석을 쥐고 서로 애정을 확인하고 있는 동안 또 한 녀석이 뛰어들었다. 바로 아까 나타났었던 그 도마뱀새끼였다. 그래, 도마뱀새끼 놈아! 왔냐? 그리 질투나냐? 있는 힘껏 아가리를 벌리고 달려드는 그 도마뱀은 차가운 뱀대가리와 달리 불덩이처럼 화끈거리는 열기를 품고 달려들고 있었다. 아픔이 팔뚝전체로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끼면서도 나는 뱀대가리를 떼어내지 못했다. 그렇지 만 정면으로 다가오고 있는 이놈의 도마뱀새끼의 애정을 마다할 수는 없는 상황인지라 녀석을 잡으려 손을 뻗혔다. 그러자, 이 놈이 다리가 많다는 것 을 자랑하려는 것인지 재빨리 피해낸다. 이 자식, 피하긴 어딜 피해! 나의 이 불타는 사랑을 받으란 말이다! 녀석의 다리 한쪽을 겨우 잡았다. 화끈하 게 달아오르는 손가락에서 고기타는 냄새가 난다. 으아, 뜨거! 녀석의 주둥이를 잡아 내 팔뚝을 물고 있는 뱀대가리녀석의 목줄기에 틀어 박았다. 그러자 치직 지직하고 괴이한 소리를 내면서 뱀대가리가 몸부림을 하기 시작했다. 내 손톱이 박히지도 않는 이 괴이한 놈이 뜨거운 도마뱀녀 석의 이빨에 상처가 난 모양인지 내 팔을 문 아가리를 놓았다. 때는 이때 다. 그 지긋지긋한 뱀대가리 녀석의 몸체를 잡아다 패대기를 치는 것과 동시에 도마뱀녀석의 몸뚱아리도 바닥에 후려갈겼다. 그래, 이 자식들이 상처도 안 생겨? 좋아, 좋아! 그럼 아낌없이 밟아 주겠어! 터뜨려 죽여주겠단 말이야! 우하하하핫! 죽으라구! 죽어버리라구! 갑자기 싸늘한 액체가 툭툭하고 뺨에 와 닿았다. 나는 움직임을 멈추고 하늘을 보았다. 시커먼 하늘아래서 창공의 여신이 비를 뿌린다. 비는 장대비도 아니고 보 슬비도 아닌 그저 보통의 그저 그런 비였다. 물론 비가 올려고 마음을 먹 었으니까 비가 오는 것이겠지만 문득 뺨에 와 닿아 내 눈안까지 들어와 흘 러내리는 빗물은 참으로 내 마음에 들었다. 차가운 것이 온 몸에 닿아, 화끈거리다 못해 이글거리는 전신을 식혀주고 있었다. 좋아, 좋아, 목이 마르군. 입을 벌려서 한껏 비를 마셨다. 아무리 입을 벌려도 들어오는 것은 몇 방울의 빗줄기뿐이다. 내가 아무리 강해도 내 손은 두 개고 내 발은 두 개이며 내 발톱은 스무개에 불과해서 모든 악당과 모든 악귀와 모든 쓸모없는 것들에 대해 지켜주는 데에는 한 계가 있는 것이다. 하물며 그것이 약해 빠진 인간인 담에야........ 알고 있는데도 가슴 속에 자리잡은 분노는 이글이글 타올라 갈 곳을 모르 고 헤메고 있었다. 불끈불끈 치솟는 뭔가가 치밀어 그대로 변신해버릴 것 같았다. 그렇지만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불행이라고 해야하나, 지금 나는 부상중이고 게다가 배가 고프고 지쳤고 잘은 기억나지 않지만 적어도 사흘 간 변신모드로 있었음이 분명하다. 하하하하핫..... 아무리 내가 고명하시고 훌륭하시고 강하면서도 멋진 분이라고 해도 지금 이 상황에서 변신모드로 변할 기력은 없었다. 그러니까 뭐어, 그런데로 그 런데로.......... 차가운 액체가 어느새인가 뜨거운 액체로 변했다. 뺨위로 닿는 액체는 뜨듯미지근한 상태로 줄줄 흘러서 목까지 흘러내린다. 차가운 빗속에서 내 뺨위로 내리는 액체만이 따스하다. 내 팔뚝으로 흐르 는 액체도 따뜻했다. 내 가슴위로 흐르는 액체도 따스했다. 전신에서 흘러 넘치는 그 모든 것들이 다 따뜻했다. 갑자기 기억이 나서 부르르 떨었다. 손 끝에 닿던 차가운 감촉, 고통으로 굳어버린 그 몸뚱이와 이제는 파랗게 변해버린 붉었던 입술, 한때는 내 품안에 안겨서 웃고 있던 그 표정이 가 슴 저 밑바닥에서 폭팔하듯이 치밀어 올라왔다. 가련하게도, 가련하게도, 가련하게도..... 작은 손, 내 손바닥의 반밖에 안되는 그 작은 손을 한 내 딸의 팔, 갈기갈 기 찢어진 내 딸의 몸뚱이, 내 품안에서 웃음을 터뜨리고 투정부리던 그 작은 얼굴이, 죽음의 여신 앞에서 부서져있었다. 터진다. 터진다. 터지고 있다. 숨이 막혀서 말도 안나온다. 숨이 막혀서 말도 할 수없다. 가슴이 터져나갈 것만 같다. 아무 것도 들리지않는다. 아무 것도 알 수가 없다. 온 몸이 전신이 찢어져 버릴 듯이 고통스럽다. "허억...허억..." 머리털을 쥐어뜯었다. 핏방울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오다가 빗물과 엉겨 분홍빛 색깔로 변해간 다. 바닥은 진흙, 검붉은 진흙위로 붉은 물감이 흘러 기묘한 색깔을 낸다. 가슴은 불타오르고 입안은 말라 비틀어져 아무 소리도 낼 수가 없다. 정신 이 아득해진다. "아우, 아우우우우욱..." 가슴이 쥐어뜯었다. 심장을 뜯어 발기고 이 고통을 덜어내고 싶다. 심장이 뛰고 뜨거운 액체가 손안을 가득 메운다. 그래서 더더욱 느낄 수 있다. 그래서 더더욱 깨닫게 된다. 그들은 차가왔었다. 그들은 차가와서 소름이 끼쳤다. 나는 따스하다. 나는 따뜻하다. 그러니까 나는 살아 있는 것이다. 검푸른 밤의 여신이 등장해 있었다. 그녀는 어느 새인지 보랏빛 보석상자를 열어 은빛과 금빛으로 반짝이는 무 수한 보석들을 토해놓았다. 그 가운데 빛나는 노란 색을 띈 거대한 달은 지나치게 뚜렷해서 눈이 다 부셨다. 나는 반듯하게 누워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눈을 뜨자 마자 보이는 것이 밤하늘이겠지. 그리고 나 는 지금 노천의 땅바닥에 누워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까 차갑고 온 몸 이딱딱하겠지. 그리고 나는 지금 채 굳지도 않은 진흙에 전신을 박고 있 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까 온 몸이 축축하고 미끌미끌하겠지. 그리고 나 는 지금..........아아, 관두자. 피곤해 죽겠다. 이렇게 하늘을 오랫동안 본 것은 얼마만일까. 진짜 맑게 개인 밤하늘이었다. 흑옥석을 사방에 깔고 그 위로 사금을 아낌 없이 뿌려놓은 밤의 여신의 호방함에 감탄했다. 많이도 깔았네. 그녀의 보 석상자는 텅텅 비었겠구만. 긴긴 세월....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이 나의 짧은 시간 동안 요 일년이 가 장 다사다난한 때가 아닐까? 아니지, 앞으로 한 몇 십 년쯤 지난 뒤에 나 는 또 다른 소릴 하게 되겠지. 모든 것을 다 뒤로 넘겨 하하 웃고 나는 후 회따위는 안한다고 잘난 척을 해봐도 분명한 것은, 나는 지금 후회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인간과 같이 산 것을 후회한다. 나는 인간에게 정을 준 것을 후회하 고 다른 묘인족들과 달리 산 것을 후회하며 묘인족 고유의 삶의 방식을 거 부한 것을 후회한다. 가장 강하고 매력적인 여자를 취해 아이를 낳고, 강한 자가 나오면 도전자 를 받고, 내키면 여행을 하고, 자연의 여신이 원하는 대로, 바람의 여신이 권하는 대로 그렇게 살았어야 했다. 강해보이는 아이가 태어나면 그 아이 를 죽이기도 하고, 내키는 대로, 원하는 대로 킬킬대면서 그렇게 살아야 했 다. 만약에 그리했다면 지금 이렇게 괴롭지는 않았다. 이렇게 가슴이 터져나가 지는 않았다. 아직 성년도 채 맞이하지 못한 내 딸은 내 연인이 채 되지도 못하고 죽어 버린 미트라와 함께 죽었다. 바보같은 딸년 같으니! 제 애비를 닮았다면 그렇게 죽지는 말았어야 했 다! 제 애비는 수많은 것들을 다 죽이고 이렇게 팔팔하게 잘 살고 있는데 그 애비 앞에서 한낱 사인족 따위의 더럽고 치사하고 지저분한 종족에게 죽임을 당하다니, 네가 내 딸일 리가 없어! 유티아가 딴 놈과 자고 내 딸이 라고 한 거 아냐? 절대 내 딸일 리가 없어! 절대로! 내 딸은 그렇게 어리 석지도, 약하지도 않아! 젠장할! 내 딸이 아냐! 가여운 미트라, 바보같은 년, 어리석기 짝이 없는 년! 내 눈앞에 있었다면 당장에 모가지를 비틀 년! 대체 왜 죽은 거냐? 너 같은 인간의 공주님이, 인간의 공주님이 왜 거기서 내 아이를 끌어안고 죽어버린 거냐? 이런 아무 도 모를 곳에서 왜이렇게 왜 이따위로 죽어버린 거냐? 대체 왜! 왜! 아냐, 죽지 않았을 지도 몰라, 가서 확인을 해보는 게 좋겠다. 분명히 내 착각일 게야. 그들이 죽은 게 아니고 닮은 누군가가 죽은 거야, 그래, 이렇 게 누워있을 때가 아니고 얼른 가서 확인해 봐야지. 이건 다 꿈일 지도 몰 라, 그들이 죽었을 리가 없어! 비시식 하고 일어나려는 순간 온 몸이 끊어지는 것처럼 아팠다. 숨이 컥 하고 막히자 나도 모르게 두 눈을 감았다. 등줄기로 식은땀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지독한 고통이 온 몸을 타고 흘러 부들부들 떨리게 했다. 너무 아프면 온 몸이 덜덜 떨린다는 사실을 새삼 절감하면서 나는 눈을 감았다. 젠장........ 너무 아프니까 이렇게 아프니까 실감해 버리고 만다. 모든 것은 꿈이 아니라는 것, 모든 것은 실제로 일어났다는 것을 알아채고 말았다. 사방은 조용했다. 멀리서 우는 밤새와 추위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울고 있는 어떤 끈질긴 벌레들이 수풀속에서 지껄여대고 있었다. 대지의 여신은 오지랖도 넓고 포 용력이 지나쳐서 받아들여선 안될 자들도 받아들이고는 진지하게 날 바라 본다. 그래, 당신, 잘났수, 이 땅바닥에 언젠가 나도 드러눕게 되겠지만 당 신, 너무 그러는 거 아냐. 당신은 당신이 잘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이런 식 으로 어린 것들을 가차없이 죽여버리고 당신 그렇게 잘났냐고! 깊게 숨을 들이키고 그 다음에는 다시 내 쉬었다. 말라비틀어진 목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내가 죽여버린 시체들이 바로 내 발치에서 구르고 있다. 그 시커먼 형체들 은 밤의 여신의 보석들에 비추어 어렴풋이 윤곽을 드러낸 채로 날 조롱하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이봐, 아무리 몸부림쳐도 그들은 돌아오지않아. 자연의 여신은 절대로 되돌려 보내주지 않는다구. 한 번 흘러간 물은 되돌릴 수 없고 태어난 애기는 도로 뱃속으로 들어갈 수 없듯이 역시 죽은 자들도 다시 되돌아 올 수는 없단 말야. 죽은 자들은 죽은 자들, 산 자들은 산 자들. 무수히 몇 번을 되뇌이고 몇 번이나 들은 말이지만 익숙해지지 않는다. 나는 살아 있고 그들은 죽었다. 젠장, 나는 아.직.도. 살아있고 그들은 이.미. 죽었다. 천천히 손을 들어 이미 딱딱하게 내 손가락과 손톱사이에 박힌 진흙들을 바라보았다. 이마에 손가락을 대고 숨을 천천히 내 쉬었다. 나는 숨을 죽이고 천천히 울었다. 오늘 밤까지만 울자. KUBERIN............ 죽은 자들은 망각을 얻고 산 자들은 비수를 얻는다 6 "이제 울만큼 울었냐?" 눈을 뜨니 시커먼 녀석이 어느 새인지 머리맡에 앉아서 날 들여다 보고 있 었다. 뭐야? 이 녀석은 요즘 나를 위로해 주기 위한 위안부생활을 시작한 건가? 린 때도 그러더니 이번에도 역시 매달려서 이런 자세를 취하고 있 네. 코는 마비되어 뭔 냄새인지 구별을 못하고 있지만 눈과 귀는 정상적인 활 동을 개시하고 있었다. 더불어 뱃속의 내장들도 존재를 과시하기 시작했다. "배고파." "........." 킬트는 한숨을 삼키는 듯한 얼굴로 나를 들여다 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눈이 퉁퉁 부었다. 잘난 묘인족의 왕." "그러냐?" 나는 아직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 버티고 있는 팔 다리를 천천히 움직여 몸 을 일으켰다. 겨우 앉자 마자 그제서야 온 몸뚱이가 일제히 나 여기 있어 요를 외치기 시작했다. 팔도 쑤셔대고 다리도 쑤시고 어깨, 허리 할 것 없 이 모조리 쑤셔대기 시작했다.전신에서 우득 우득 소리가 나는 것을 들으 면서 나는 킬트 쪽으로 몸을 돌려 앉았다. "어이, 먹을 거 없냐?" "네가 베고 누운 걸 먹지 그러냐?" 킬트는 퉁명스레 쭈그리고 앉아서 시커먼 옷자락을 툭툭 털어보였다. 내가 베고 누운 게 뭐더라? 돌아보니 웬 인간의 팔 다리가 보인다. 물론 머리통은 없지만 어쨌거나 팔 다리는 건재하고 몸뚱이도 건재하다. 나는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다가 킬트 를 바라보았다. 죽은 지 최소한 삼일은 넘은 듯한 이 걸 먹으라고? 신선하 지 못한 것을 먹으면 체하는 법이야. "그런데 넌 여기서 뭘 하는 거야?" "카나리안에게 부탁 받았다고 했잖아." "그 색마꼬맹이에게 뭘 부탁받아? 내 시중을 들어주라고 하디?" "너, 아무래도 한 숨 자고 나더니 머리가 돌아버린 것 같군." "아니, 이제 정상적으로 움직이는 것 같아." 나는 킬트를 물어뜯는다는 그런 엄청난 상상을 하면서 일어섰다. 우드드드 득하고 팔 다리에서 엄청난 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일단은 그건 접어두고 사방을 돌아보았다. 여전히 사방은 진흙투성이. 마튜스의 일대는 인간들의 마법사와 엘프의 마법사와 인간병사와 쪼가리 엘프들의 쌈박질로 온통 난장판을 이루어서 땅이 패이고 나무가 뽑혀져 나 가고, 사방이 그을렸다. 그런데다가 어느 누군가가 쓴 마법의 비따위 때문 에 온통 진흙탕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그 진흙탕 가운데 내가 누워있고 내 주변으로는 온통 시체더미들이 여기저기 벌레들의 밥으로 자빠져 있다. 시체들은 인간이 가장 많았지만 인간이 아닌 것들도 있고 인간이 아닌 것 은 확실한데 대체 뭔 지 도저히 알 수 없는 것들도 있었다. 아마도 저 썩 어빠질 마법사들이 만든 것이겠지. 킬트는 그런 것들을 돌아보며 다니고 있었다. 재미있군, 자신의 제자들이 만든 것을 검사하는 시험관처럼 녀석은 매서운 눈매를 한 채 그 시체들을 들여다 보고 있다. 햇빛은 이 마튜스를 감싸고 있었다. 창공의 여신은 아무 것도 없었다는 듯 이 태연자약하게 순결한 햇빛을 보내준다. 항상 순결한 햇빛, 어떤 처녀도 이 정도로 깨끗할 수는 없을 듯이 깨끗하고 순결한 햇빛, 아무도 건드리지 도, 밟지도 못할 그런 깨끗한 햇빛. 나는 햇빛을 받으면서 한동안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늘은 얼마전의 난장판이 전부 거짓인 듯이 온통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렀다. 그러고 보니, 이곳 세룩-엘라마이야에 와서 이렇게 하늘을 올려다 본 것은 처음이로군. 온통 빡빡한 거목들로 가득 채워진 이놈의 산맥 한 가운데서 이렇게 뻐엉 뚫린 하늘을 바라보는 것은 처음이야, 처음. 그건 그렇고 배가 고프니 이렇게 하염없이 있을 수는 없지. 배는 채우고 기운을 보강해야 눈물도 흘릴 수 있는 법이야. 아무 생각 없이 거닐던 산사슴 한 마리를 잡아 뜯으면서 나는 킬트가 입을 다물고 앉아있는 꼬락서니를 주시했다. 킬트는 말 한마디 없이 멍청히 나 무 그룻터기에 앉아서 인간이라곤 하나도 없는 마튜스를 주시하고 있었다. 멀리서 보는 마튜스의 모습은 을씨년스럽기짝이 없다. 사방에 널린 시체 에 둘러싸여 불멸의 장벽이니 아무도 함락시킬 수 없는 곳이니 하고 말도 많던 그 드워프의 장벽만 덩그마니 남은 채 인간이든 엘프든 아무도 살아 남지 못한 것이다. 그러니까 잘난 체 최고라는 둥 최강이라는 둥 불멸이라 는 둥 하는 말을 내뱉어선 안되는 법이다. 특히 인간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은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것으로, 백년도 채 살지 못할 것들이 웬놈의 영원불멸의 존재를 그렇게도 많이 안단 말인가? 걸핏하면 영원의 맹세니, 불멸의 맹세니 떠들어대고는 지키는 건 10년도 넘기기 어려우니, 끌끌 끌...... "어디로 갈 거냐?" "고왕국." ".............." "간단하잖아? 거기에 그 놈이 있고 거기에 내 딸이 있고 그리고 거기에 내 가 죽일 놈들이 득시글거리는데 뻔한 이야기지." 킬트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너는 진짜 강하구나." "그걸 이제 알았냐?" "그들이 죽었다는 것을 인정한 게 어제인데 오늘 너는 배가 고프다고 밥을 먹고, 그리고 멀쩡히 웃으며 걸어 나간단 말이지?" "그래." 나는 다 먹은 넙적 다리뼈를 등 뒤로 던져내면서 대꾸했다. "네가 무슨 생각으로 사는 지 진짜 모르겠다." 한숨을 쉬고선 킬트는 턱을 괴고 시선을 돌렸다. "고민하는 내가 다 바보같아 지는군." "너, 바보 맞아." "........." "네 색마아들네미는 지금 뭘 하는데?" "고왕국으로 가고 있어." "고왕국으로 가서 뭘 하겠다는 건데?" "룬드바르제국군과 싸우게 되겠지." "결국 네 제자들과 싸우겠군?" 킬트는 턱을 괴고 앉은 자세를 그대로 한 숨을 내쉬었다. "너도 무척 약해졌군. 예전이었다면 널 배반한 제자들을 살려두었을 리가 없었을 텐데. 말 그대로 모두 갈기갈기 찢어 죽여버리곤 으하하핫 하고 웃 어버렸을 게다." "그랬던가?" "널 배신한 제자들 몇을 그 왕년 죽여버렸던 것을 기억하지 못하냐?" 그렇다. 그게 언제더라. 한 백여년 전쯤 되나? 아님....., 에라, 모르겠다. 알 바도 아니고. 자기 눈을 속이고 황금을 챙겼다고 녀석들을 산채로 불에 태우고 그을려 온 몸의 털을 없애버린 뒤에 맨들맨들한 꿀에 버무려 땅개미굴에 집어던진 놈이 바로 이 앞에 있는 킬트 놈이다. 또 한 놈은 뭔 뱀굴같은 데에 집어 던져 넣고 산채로 그 뱃속에 뱀을 집어넣었었지. 산채로 내장을 뜯긴 놈도 있었다. 하여간 수많은 희안한 벌칙을 그대로 적용했던 이 사악하기 짝이 없는 이 놈이 지금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 이렇게 감상에 빠져서 멀뚱거리 고 있는 건지. "그 애들은, 내가 직접 만들어 키운 애들이야." "그래서?" "그런데.....그렇게 죽여버리기엔......" "네가 죽이지 않으면 그들이 널 죽일 게다." 킬트는 대꾸하지 않았다. "죽고 싶으냐? 실컷 살았으니까?" "요즘은 내가 대체 뭔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쿠베린." "네가 뭐냐고?"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다시 시선을 텅 빈 마튜스로 향했다. "이백여년간, 그 긴 긴 세월 중에 내가 내 몸으로 산 기간은 고작해야 사 십여년에 불과해. 나머지는 다 다른 자의 몸을 빌어 살아왔지. 물론 알맹이 인 영혼은 나의 것이지만 가끔 거울을 보면 대체 이 게 누군가하고 놀랄 때가 있어." 나는 여전히 먹기에 열중했다. 녀석이 뭐라 고민해도 나는 해줄 말도 없다. 그리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것은 인간의 고민, 나로서는 알 수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으니까. 나도 지금 복잡해 죽겠다. "카나리안이 나를받아들이지 못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지. 자고 일어나면 나도 거울을 보고 순간 놀랄 때가 있으니까. 이백여년, 그 긴 세월을 이렇 게 살아온 나도 내 모습을 보고 놀라버리니까." "그러게 그렇게 맨날 몸뚱이를 바꾸니까 그렇지. 좀 진뜩하게 못하냐?" "네가 부순 몸뚱이만도 벌써 몇 개인데 그러냐!" 킬트가 날 사납게 쏘아보며 외쳤다. "네가 날 자극하니까 그렇지. 부수고 싶게 만들잖아?" "죽어라. 이 괴물." "괴물은 어느 쪽인데 그러냐? 나는 묘인족으로서 정상이지만 너는 인간으 로선 괴물이야." 순간 킬트는 멍청히 날 바라보았다. 어리석은 것. 순간의 존재가 영원으로 다가가려면 그만큼의 단련이 필요한 법이다. 물론 킬트는 보통의 인간보다 훨씬 강하지만 그것도 한계가있는 법이다. 자기 의 아이가 눈앞에 있다면 누구든 그것에 좌우될 수 밖엔 없겠지. 생각해보면 그도 그럴 것이, 카나리안의 아비가 킬트라고 해도, 킬트의 진 짜 몸은 이미 한 줌 흙이 된 지 오래이고 카나리안의 아비노릇을 했던 그 몸뚱이도 흙이 된 지 오래다. 그런데 그 주제에 카나리안에게 내가 네 아 비란다 하고 나서봐야 카나리안이 그걸 납득하기 어려운 것은 당연하지 않 은가? 애를 만들려면 영혼이 문제가 아니라 몸뚱이가 필요하니까. 그렇게 따지면 카나리안의 원수가 킬트일 수도 있다. 왜냐면 킬트가 카나 리안의 아비가 되는 몸뚱이의 소유주를 죽였으니까. 아아, 뭔가 복잡해졌 다. 기분으로는 분명히 킬트가 아비이긴 하겠지만 그 몸뚱이를 준 자는 킬트가 아니니까 누구든 헤메일 수 밖엔 없다. 아무리 온화한 엘프라도 그걸 참아 줄 순 없겠지. 그러니까 킬트녀석이 애초에 잔정에 흘러 잘못했다는 거 잖 아. 아니지, 참, 내가 남의 말하고 있을 참이 어디 있나? 얼른 가자. 얼른 가서 끝장을 보자. "어디 가냐?" "고왕국에 간다." 내가 몸을 휘익 돌리며 대꾸하자 킬트는 작게 중얼거렸다. "정말....회복이 빠르군." 회복이 빠르니까 이 몸을 향해 최강의 존재라 부르는 것 아니겠냐? 나는 달렸다. 킬트녀석이 뒤에 남아 웅크리고 앙앙 울든 질질 짜든 그건 내 알 바가 아 니니까. 물론 알고 싶지도 않고. KUBERIN............ 죽은 자들은 망각을 얻고 산 자들은 비수를 얻는다 7 남이 기쁨이라 불러도 아픔인 것은 아픔, 남이 고통이라 불러도 쾌감인 것 은 쾌감. 어느 것이 옳다고만은 할 수 없는 게 삶이다. 내달리는 발 끝에 채이는 시체들이나, 발톱에 걸려서 공중으로 흩날리는 풀잎들이나 내게는 다 마찬가지. 사슴 한 마리 죽이는 거나 얼굴도 모르는 아인족을 죽이는 것도 내게는 마찬가지. 남들이 뭐라해도 내 속에 있는 것 은 내가 판단할 따름이다. 숲안의 것들은 참혹함에 지쳐 조용히 널부러져 있다. 그 안에서 살아가는 모든 것들도 이젠 피로함을 내보이고 어서 이 침입자들이 나가기만을 기대 한다. 하늘 아래 가장 많은 나무를 가진 세룩-엘라마이야, 이제는 이 암흑 산맥도 인간들의 살육에 지쳐버렸다. 뺨을 스치며 바람이 지나간다. 창공의 여신이 벌린 옷자락 사이로 푸른 살 내음이 난다. 대지의 여신이 뿌리는 살아있는 것들의 냄새가 천천히 천천 히 콧속으로 스며 올라 머리 끝까지, 머리 속 깊은 곳까지 파고 든다. 그 래, 그래, 난 살아있다. 고개를 들고 힘껏 달렸다. 약간은 찌뿌드하던 팔과 다리도 힘껏 내뻗는 힘을 따라서 유연하게 움직이 기 시작했다. 내 팔과 다리, 내 충실한 이 몸도 죽어 넘어질 때가 있다. 불 끈불끈 치솟는 이 심장도 타올라 쓰러질 때를 기다리고 있다. 그래, 모두들 언젠가 죽듯이 나도 죽는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새삼스레 죽는 것을 앞당길 필요는 없다. 아무리 고통 스러워도 산 자는 살아가야 하지, 그래서 내가 살아가는 동안 죽인 모든 것들을 헛되게 해서는 안되지. 살아있는 것들은 모두 이기적인 것, 나는 나 를 위해 다른 것들을 죽인다. 뺨이 따뜻해졌다가 순식간에 다시 차가워진다. 짭짤한 액체가 뺨 위로 흐르는 그 순간 허공으로 튕겨 나간다. 나는 살아있고, 그들은 죽었다. 그러니까 앙앙대고 떠들어대는 대신 살아가 라. 뒤를 돌아보지 말고 후회도 하지 마라. 따라 죽겠다는 말도 안되는 감 상따윈 집어치워라. 다 모두 내탓이라는 같잖치도 않은 자괴심따윈 갖다 버려라. 나는 지금 여기서 달리고 있고 미쳐있다. 미쳤다는 건 살아 있다는 것, 미치지 않고선 살아갈 수가 없다. 잠까아아아안! 감상은 이제 그만! 여기서 끝! 우는 것도 여기서 끝! 끊을 것은 끊고 자를 것은 자르자! 나는 아픈 가슴을 부여잡고 잠시 걸음을 멈췄다. 새액새액하고 숨소리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보니 상태가 썩 좋은 것은 아니다. 자아, 여기서 머리 를 굴리자. 첫째, 나는 지금 킬트녀석의 말에 따르면 약 사나흘간은 제 정신이 아닌 상태였다. 게다가 기억이 없다는 것은 내가 변신모드인 상태로 최소 사흘 간 있었다는 이야기다. 변신으로 있는 시간은 최소 하루가 기본 시간. 그 기본 시간을 무려 세 배나 초과했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는 것은..........체력 이 바닥나 있다는 것은 뻔하디 뻔한 소리인데. 둘째, 나는 부상 중이다. 체력이 바닥나 있는 상태로 무리하게 바보 천치같 은 쌈박질을 하는 바람에 가슴은 한 주먹 뜯어내 구멍이 뚫린 상태고 팔 다리도 삐걱삐걱하는 걸 보니 뼈도 금간 부분이 있는 거 같다. 아까부터 아파 죽겠다고 바르르 떨리고 있는 이 팔뚝도 그러고 보니 어제 그 괴이한 봉인수들과 싸울 때 화상을 입었다. 이거,온전한 데라곤 이빨밖에 없는 거 잖아? 셋째는 더 심각한 문제. 나는 배가 고프다. 이런 부상을 입은 상태로는 사 슴 한 마리 가지고는 어림도 없다.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나는 다시 사냥을 하기로 했다. 사냥을 해서 배를 채우고 휴식을 취하자. 최고의 몸상태만이 최고의 결과 를 얻을 수 있는 법이다. 자아, 자아. 숨을 들이키고 쉬자. 쉬어. 젠장, 눈물은 이제 그만 흘리기로 했는데. 뜨겁다. 시끄러운 햇볕이 뺨을 후려갈기는 것을 느끼면서 나는 눈을 떴다. 워낙에 온 몸이 아팠기에 나는 맨처음 손가락을 움직여 보았다. 흠, 이상은 없는 것 같군. 내가 누워있던 곳은 절벽에 불쑥 튀어 나와 있는 커다란 바위 위였다. 사 방에 덤불과 마른 넝쿨, 그리고 내가 잡은 사슴가죽과 뭔지 모르는 털복숭 이의 가죽을 둘둘 감고 자고 있었는데 그 덕분에 햇볕이 직통으로 내 면상 을 후려갈긴 것이다. 그러고 보니 지붕이 없는 곳에서 잔 것도 오랜만의 일이군. 하품을 하고 팔 다리와 인사를 나누면서 하늘을 올려다보자, 눈이 부셔 견 딜 수가 없다. 제길, 그렇게 찌르지 좀 말라고, 안그래도 일어날 테니까. "아우우우우웅." 이 절벽을 올라가면 다른 길이 나온다. 즉, 노스엘스턴으로 가는 길이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노스엘스턴으로 가는 그 길을 내버려두고 서쪽으로 돌면 거기에 고왕국으로 가는 길이 나온다. 왕년 내가 남긴 흔적들이 여기저기 나무 둥치에 남아있어 찾기란 어렵지 않다. 그래서 평소에 미리미리 준비하는 게 필요한 법이다. 이런 걸 생활의 지혜라 부르는 법이지. 상처는 어느 정도 아물었다. 움직이는 데에 어려움은 없다. 나는 바닥에 누 워서 스스로 육포가 되기를 자청하고 있는, 사슴고기의 마지막 부분을 잘 라내 입안에 넣었다. 조금 질기군, 아아, 마미의 뜨끈한 스튜가 먹고 싶어. 선지를 듬뿍 넣은 그 선지국과 사과와 후추로 맛을 낸 새끼 돼지 통구이도 먹고 싶고. 이런 밋밋한 고기는 이제 질렸다. 너무 말라서 침이라고 흘려 넣기 전엔 넘어가지도 않는군. 어허, 뻣뻣해. 차라리 다른 걸 한 마리 잡아서 먹어볼까 하고 생각하고 있는 중인데 어디 선가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 여긴 절벽인데? 고개를 들고 위를 쳐다 보자 무언가가 꼬물꼬물 기어 내려오고 있다. 참고 로 말하자면 이 곳은 절벽의 중간 지역, 다시 말해 절벽에서 혼자 툭 잘난 척 튀어 나온 바위 위다. 톡톡 하고 위에서 꼬물거리며 내려오는 녀석이 흘리는 돌멩이가 내 발치로 떨어진다. 이러다가 내 머리통에 맞는 거 아냐? 그 놈의 돌멩이를 피하기 위해 절벽에 찰싹 붙어서 녀석이 내려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인데 그 위 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터져나왔다. "잡아!" "저 암살자를 잡아랏!" 허어, 저건 또 누굴까? 꼬물거리던 녀석은 누르틱틱한 옷을 걸치고 있는 녀석이었다. 밑에서 보는 거니까 잘 보이지는 않지만 누르틱틱한 옷에 누르틱틱한 신발에 누르틱틱 한 머리통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흠, 멀리서 보면 이 놈이 도드라져 보이질 않겠구만. 주변의 절벽과 같은 색깔의 옷을 걸치고 있으니 말이야. "죽어랏!" 갑자기 위에서 다량의 돌멩이와 화살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젠장! 이러다 내가 맞겠다. 나는 잽싸게 벽에 몸을 붙이고 날아드는 화살과 돌멩이 기타등등을 피했 다. 위에서 꼬물거리는 녀석은 그 많은 것들에 맞지도 않았는지 여유작작 네 다리, 아니 두 팔과 두 다리를 이용해서 내려오고 있었다. 어라? 자세히 위를 쳐다보니 절벽 위에서 꼬물거리는 녀석을 향해 화살을 날리는 것은 분명히 룬드바르제국군이다. 그 유별난 깃털모자 덕에 잘 기억을 하 고 있는데 그렇다면 이건 분명히 룬드바르의 적이란 의미가 아닌가? 호오, 이렇게 먼 곳에서 룬드바르의 적을 만나다니 감회가 새롭구만. 내가 그런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그 꾸물이는 꾸물거리며 내가 있는 바위 위에 도달했다. 그리고는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지 내가 달라 붙어 있는 벽쪽으로 맹렬히 달려왔다. 아니, 달려오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바 로 나와 시선이 따악 마주쳤다. 누르틱틱한 그 녀석은 정말로 누르틱틱이어서 머리까지 누르틱틱이었는데 그게 그렇게 누르틱틱일 수 있는 것은 머리에 누르틱틱한 두건을 푸욱 눌 러 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녀석은 그 두건 사이로 두 눈알만 내놓고 있 었다. 다행히 그 눈알은 까만 색이었다. 어쨌든 주춤하던 녀석은 내가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자 위에서 내려오는 화살의 비를 피해 잽싸게 절벽으로 달라 붙었다. 그리고는 나를 노려보면 서 은근슬쩍 살기를 피워 올린다. 건방진 자식, 피하도록 친절히 대해주었더니 내게 감히 살기를 날려? 그 때였다. 그 화살의 비 중 한 방울이 갑자기 그녀석의 어깨위로 투욱 떨어져 내렸 다. 덕분에 화살이 터억 꽂힌 녀석은 찢어질 듯한 비명을 올렸다. "으아아아악!" 그리고는 갑자기 비틀 비틀하더니 바위 아래, 즉 절벽 아래로 떨어져 내리 는 게 아닌가. 찢어질 듯한 비명 소리가 절벽에 부딪쳐 쩌렁쩌렁 울렸다. 나는 황당해서 아래를 내려다 보려다 말고 허공을 보았다. 거, 황당하네. 여기까지 내려오고선 저렇게 죽다니 말이야. 위에 있던 병사들은 녀석이 떨어지는 것을 확인하고는 죽었다 만세 따위등 을 외치고 물러서는 듯했다. 나는 아래를 내려다 보기 위해 바위 끝에 와 서 고개를 숙여 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갑자기 머리통을 얻어맞을 뻔했다. 피융하고 갑자기 누르틱틱한 놈이 아래서 튀어 오르는 게 아닌가. 녀석은 손에 가느다란 줄을-역시 누르틱틱한 줄이었다-어느 새인가 바위 한 끄트머리에 박아 놓고 있었는지 그 줄을 매고 뛰어 내렸다가 다시 기어 올라온 모양이었다. 그 찢어질 듯한 비명도 녀석의 수작이었던 모양이다. 녀석은 날 힐긋 보더니 어깨에 박힌 화살을 손으로 잡아 뽑아 내었다. 그 리고는 옷가지를 벗고 피가 솟아나는 그 어깨를 헝겊으로 묶었다. 그 조치 를 취하는 동안 나는 이 녀석의 움직임이 기묘하게 낯이 익어서 턱을 괸 채 녀석을 물끄러미 보고 있는 중이었다. "넌 누구냐?" 녀석은 날 빤히 바라보더니 아예 못들은 척을 한다. 이 자식이? "룬드바르군에게는 왜 쫓긴 거냐? 아무리 보아도 엘프나 아인족같이 생기 진 않았는데?" 녀석은 대답대신 얼굴에 뒤집어 쓰고 있던 누르틱틱한 두건을 벗어던졌다. 헤엣? 녀석은 약간 갈색으로 그을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분명히 평범한 얼굴인 것 같기는 한데 뭔가 얼굴이 다르다. 약간 가늘게 찢어진 눈매와 약간 낮 은 코, 그리고 작은 입술을 하고 밋밋한 눈썹을 하고 있었다. 못생겼다기보 다는 이건 엄청나게 이질적인 얼굴이었다. 그러고 보니 소년처럼 어깨가 좁고 가늘다. 이런 체구로 아까처럼 절벽을 휘익 휘익 뛰어 내리고 기어 올라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짧고 시커먼 머리칼을 한 녀석은 역시 까 만 눈으로 날 매섭게 바라보더니 짧게 묻는다. "너야 말로 뭐냐?" 나는 그 무례하고 건방진 녀석의 말을 듣고 녀석의 생명의 은인이 되기로 굳게 결심했다. 퍼억 소리와 함께 녀석이 뒤로 나자빠지자 마자 나는 녀석의 발목을 쥐고 절벽으로 조용히 들이밀었다. 그러자 으악하고 비명을 지를 줄 알았더니, 이 자식이 놀랍게도 발목을 내게 잡힌 채로 몸을 기이하게 뒤틀더니 두 주 먹으로 내 복부를 가격하는 게 아닌가! 퍼억 하고 녀석의 주먹이 내게 닿 는 순간 나는 상당한 충격으로 뒤로 물러섰다. 하마터면 녀석을 풀어줄 뻔 했다. 이럴 수가! "이 자식이 제법 재주가 있잖아?" 나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녀석의 발목을 쥐고 아래로 좌우로 대롱 대롱 흔 들어주었다. 그럼, 그럼아낌없이 귀여워 해주지, 나는 너의 생명의 은인이 되기로 이미 마음을 먹었다고. "풀어!" 짧게 외친 녀석이 놀랍게도 그 와중에 품안에서 단검을 풀어내어 날 찔러 온다. 퍼렇게 반짝이는 비수의 날을 보고 나는 어마 뜨거라 하며 녀석을 허공으로 집어 던졌다. "우앗!" 녀석에게서 처음 놀람의 외침이 터져나왔다. 물론 놀랐겠지. 녀석의 몸뚱이는 허공으로 치솟았지만 그 다음 순간 너무나 충실하게 대지 의 여신에의 사랑으로 아래로 곤두박질 치기 시작했다. 물론 여기가 평지 라면 쾅 하고 코뼈정도 부러졌겠지만 여기는 다행히도 절벽이다. 따라서 아래로 떨어져 내릴 곳이란 아주 아주 멀어서 녀석의 몸뚱이는 급전직하로 쏜살같이 아래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끄아아아아아아.........." 이번엔 녀석의 입에서 진짜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아, 기뻐. 이제 녀석의 생명의 은인이 되어 줄 수 있겠구만. 나는 떨어져내리는 녀석의 뒤를 따라 몸을 던졌다. 녀석이 바둥거리면서 떨어지는 것을 보며 아주 기쁘게 녀석의 등덜미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내가 녀석보다 빨리 떨어져야 녀석을 잡을 수 있을 테니 있는대로 몸을 웅크렸 다. 이거 놓치면 살인자이고 잡으면 생명의 은인이라, 아슬아슬한 순간이잖 아? 터억 하고 녀석의 옷자락이 손안에 잡혔다. 기쁘지? 난 이제 생명의 은인 이야. 웃음을 터뜨리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으면서 한 손으로 녀석을 잡고 한 손 으로는 절벽을 쥐었다. 퍼퍼퍽 하고 불꽃이 튀기면서 내 손톱이 다섯 개의 줄을 절벽에 그리기 시작했다. 다섯 개 손톱으로는 부족하니 그 다음에는 발톱을 슬쩍 밀어준다. 그럼 바바바박 하는 소리와 함께 발톱이 또다시 절 벽에 줄을 그린다. 내려가는 속도가 많이 줄어들었다. 바로 이 때, 놀라운 속도로 녀석을 절벽에 밀어 붙인다! 퍼억 하고 큰 소리가 나긴 했지만- 아마 갈비뼈 정도는 한 두 개 부러졌겠지- 이 녀석은 성공적으로 추락을 멈추고 절벽에 박혔다. 오오 드디어 나는 친절하게도 이 녀석의 생명을 구 해준 것이다. "으윽윽...." 녀석의 입안에서 피가 터져나와 주르륵 흘렸다. 물론 아프겠지. 하지만 떨어졌어봐, 여기서 이렇게 아픈 걸로는 도저히 끝 나지 않을 게야. 안그래? 나는 녀석을 질질 끌고 다시 절벽의 위를 향해 올라가기 시작했다. 거의 혼절한 녀석을 지고 올라가는 거라 아주 간단했 다. 마침내 다시 바위 위에 올라선 나는 녀석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면서 미소를 던졌다. "너 누구니?" 나의 이 상냥한 질문에 피를 포롱 포롱 흘리며 헐덕대던 녀석이 재빨리 대 꾸했다. ".....훈이라고 합니다." 무척 예의 바른 녀석이구만. 그런데 뭔가 낯익은 이름일세? 녀석은 우욱하고 자기 가슴을 움켜쥐었다. ".....모욕을 주지 말고 죽이시오." 고개를 숙인 녀석을 보면서 나는 오랜만에 옛날 기억들을 뒤적였다. 어디 더라? 어디서 이 이름을 들었더라? 이거 상당히 귀에 익은 이름이란 말이 야. 그러고 보니 이 녀석도 상당히 낯익은 몸놀림을 하고 있었지. "죽이는 건 어렵지 않은데 너, 혹시 나 모르냐?" 녀석은 찢어진 눈매를 들어 날 바라본다. 아까 좀 부딪쳤는지 녀석의 오른 쪽 눈이 실핏줄이 터져서 벌겋게 충혈되어 있다. "모르오, 너같이 강한 놈은 모르오. 룬드바르군은 아닌 듯 싶은데?" 이 녀석 그러고 보니 말투도 좀 이상한 데가 있군. "응, 아냐, 난 지금 룬드바르 황제놈을 죽이러 가는 길이라 널 죽이고 싶은 마음은 솔직히 별로 없어." 대체 이 놈을 내가 어디서 알고 있는거지? 아리송하네. 녀석은 내 말을 듣자 마자 고개를 반짝 들고 바라본다. "웃? 정말이오?" "그래. 그런데 너도 진짜 황제놈을 죽이러 온 거냐?" "네. 그렇소." 녀석은 진지하게 말했다. "이유는 뭔데?" "녀석은 내 가족들을 해치고 또 내 나라를 범하려 하고 있소." 뭔가 조금 심각한 이유네. "그래서 녀석을 용서할 수 없는 거요, 그래서 나는 그 황제놈을 죽여서 그 목을 내 나라로 가지고 갈 거요." "그거 가지고 가서 뭘 하게?" "당연히! 우리 집 앞에 걸어놔야 하는 거요!" "............." 조금 이상한 놈이라는 건 확실한 것 같군. "집앞에 걸어 놓을 이유라도 있나?" "그야, 훈이 룬드바르의 황제를 죽였다라는 증명이지요. 너는 그것도 모르 오?" 녀석이 진지하게 말한다. 나는 또 녀석의 말투에서 뭔가 거슬리는 점을 느 꼈다. "너라고 하는 강한 놈이 나를 도와주신다면 나는 정말 기쁠거 같으오." "내가 왜 널 도와주는데?" "음, 같은 목적이니까. 만약에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 할 지라도 나를 방해 하진 않겠지요? 당신같이 강한 놈은 사실 혼자서도 모든 걸 할 수 있을 테 니까." 녀석이 불안한 듯 흘긋 날 바라본다. 거참, 이거 뭐라고 말해야 되나. 이 녀석 뭔가 무지 무지 거슬리게 말하는 데 그걸 꽈악 집어서 말하기가 어렵네. "너의 나라가 어디냐?" "동방교국." 녀석은 진지하게 말했다. KUBERIN............ 죽은 자들은 망각을 얻고 산 자들은 비수를 얻는다 8 이름이라는 건 정말로 기묘한 의미가 있다. 맨 처음 나는 룬드바르녀석의 이름을 그냥 룬드바르 녀석이라 불렀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러하지만, 인간들은 그를 처음에는 대공이라 불렀고 그 다음에는 사악한 침략자라 불렀고, 그 다음에는 황제폐하라 칭한다. 그리고 요즘은 대륙을 통일하려는 대망을 간직한 영웅으로 변해가고 있다. 대륙을 통일한다는 것은 실은 인간들만의 이야기다. 인간이 아무리 여기 저기 침 략을 한다고 해도, 하늘을 나는 새들을 장악하지도 못하고, 숲안의 짐승들 과 그 안의 아인족들과 인간들 사이에 숨어있는 모든 수인족들, 그리고 깊 은 산 속에 숨어있을 무수한 존재들을 전부 제압할 수는 없는 것이다. 물 론, 이 녀석은 최초로 고왕국까지 전진하고 있었다. 이 암흑산맥을 넘어 아 무도 장악하지 못했던 고왕국까지 전진하는 이 녀석의 행보는 실로 대단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하지만' 이다. 그건, 그렇고... ..., 대체 이 놈을 내가 어디서 봤지? "그러니까 당신은 대단히 빠르게 달리고 있으오." "나는 원래 빨라." 그나 저나 어떻게 이 놈은 날 따라 달리는 걸까? 놀라운 속도다. 물론 땀 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기는 하지만 나를 뒤따라 달린다는 것 자체가 놀람 그 자체다. 아인족중 가장 강하다는 푸른 아인족의 린도 나를 뒤따르지 못 해 내가 들쳐업고 뛰었을 정도인데 이 놈은 인간인 주제에 나를 따라 달리 다니. 나는 녀석을 돌아보지도 않고 거목을 하나 발톱으로 찍으며 다시 도약했 다. 녀석은 내 뒤를 이어 도약하다 말고 거목에 정면으로 부딪칠 뻔했지만 잽싸게 손바닥을 대어 튕겨내더니 다시 내 뒤를 따라 내달렸다. 숲은 이제 끝나가고, 앞으로 남은 길은 고왕국으로 향하는 길뿐이다. 아, 방금 고왕국 으로 가는 결계석을 지나쳤다. 그건 그렇고 이 인간놈을 데리고 달릴 수 있다고는 나로서도 상상도 못했다. 녀석의 움직임은 인간이라곤 믿어지지않는, 거, 자꾸 반복하게 되지만 인간 답지 않은 속도와 정확함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문득 녀석이 땀을 줄 줄 흘리긴 하지만 호흡이 거칠지 않다는 데에 놀라 달리던 걸음을 멈추었 다. "이봐." "말하시오." 녀석이 내가 팔짱끼고 멈추자 자신도 내 앞에 멈추어 서며 말했다. 녀석의 온 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지만 호흡은 그런데로 거칠지 않았다. 게다 가 눈도 지쳐서 널부러질 것 같은 흐릿한 상태가 아니라 똘망똘망했다. 체 구가 가녀린(?) 이런 놈이 날 따라오다니. 감탄함과 동시에 나는 의문을 느 꼈다. 이 놈, 혹시 또 킬트의 그 빌어먹을 제자들이 만든 모조품아냐? 진짜 인간이라면 이렇게 말짱할 리가 없잖아? 그러고 보니 생김새도 이상해, 역 시 그 이상한 취향을 가진 놈들이 만들어낸 모조품일 지도 몰라. 내가 녀석을 아래위로 훑어보고 있는 동안 녀석은 바짝 달라붙은 옷가지를 적당히 벌려 바람을 맞았다. 그리고는 생각난 듯 묻는다. "근데, 이봐, 당신은 정말로 빠르시오만, 대체 어떤 단련을 하고 있는 것이 오?" "단련? 원래 이 몸께서는 강하신 분이시다. 물론 그동안 무수한 녀석들을 쓰러뜨려 온 나의 시간도 한 몫을 하지만 말이다." "오오, 그랬군. 나는 너같이 강한 놈은 처음이기 때문이오. 사실 나도 무수 한 강자를 만나 그들을 쓰러뜨려 왔지만 당신같이 강한 놈은 처음이오." 너라고 하든지 당신이라고 하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하는 게 어떠냐? 나는 부글부글 끓는 기분을 억누르면서 애써 웃었다. "네녀석은 인간이 맞냐? 아니면 동방교국인은 다 너 같은 거냐?" 녀석은 두 눈을 깜빡이더니 갑자기 하하 웃기 시작했다. "아아, 너도 똑같은 걸 묻는 구료. 동방교국인들도 단련을 하지 않은 자들 은 약하오. 그러나 나는 단련을 했고, 따라서 당연히 강한 거오." "단련? 그 단련이란 건 어떤 거지?" "아, 당연히 사람을 죽이는 단련이오." 녀석의 말에 나는 잠시 동방교국인들에 대한 나의 상상을 접었다. 이 인간 들은 역시 정상이 아니었던 게야. 녀석은 나의 태도를 오해했는지 잘난 척 가슴을 펴고 의기양양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우리들 가문은 무척이나 강한 가문으로 본국에서도 약 500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오. 물론, 이 곳 서방인들은 우리들의 강함을 모르고 계시오." 관두자. 나는 녀석의 말을 귓등으로 들은 채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황급히 녀석이 숨을 삼키며 뒤따라 달리는 것을 무시하고 일단 내 페이스로 달리 기로 마음먹었다. 초록빛은 검은 빛이 되고 바람은 존재를 가지고, 바위는 계단이 된다. 땅위의 모든 것들을 모두다 겨드랑이 밑으로 두고 뛰어오른다. 땅은 땅, 하 늘은 하늘, 그 선명한 경계를 넘으며 심장 소리를 듣는다. 심장 소리, 심장 소리, 두근두근두근... ... 이처럼 손이 닿지 않은 숲은 정말로 오랜만이다. 인간들과 아인족들과 엘 프들에게 둘러싸여있던 숲은 이제야 제 정체를 드러내고 내 앞에서 위용을 자랑한다. 강자에게만 굴복하는 숲의 것들이 일제히 나에게 아는 척을 하 며 존재를 과시한다. 그래, 안녕한가, 큼직하고 늙어빠진 이름도 모르는 나 무, 안녕한가, 나무 위에 숨은 이름 모를 넓적한 새. 안녕한가, 수풀 속에 숨어 날 보고 도망치는 자그마한 사슴. 바닥을 기는 작은 도마뱀과 커다란 도마뱀, 그리고 바람을 가르며 질주하는 창공의 매. 나는 달리고 달리고 또 달리며 웃는다. 이 숲 안 모든 것들이 듣는 소리를 들으며 그들이 내는 소리, 냄새들을 느끼면서 웃는다. 이런 건 몇 년만일 까? 내가 어린 시절 홀로 숲을 거닐며 성년을 맞이했던 그때였던가? 인간 이 드물고 드물었던 그 옛날, 아무도 없는 원시림의 숲을 헤메이고 아무도 없는 계곡에서 물을 마시던 그 옛날, 그 때는 적막한 공기 속에 무수한 것 들이 냄새를 피어올리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지.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자, 잠깐! 여기서 이러면 또 곤란해. 옛날이여를 외치는 것은 어리석고도 어리석은 일. 제 정신을 차리고 앞으로 나가자. 이러다 내가 갈 길을 잊고 바보처럼 헤벌레 숲에 취할까 무섭구만. "자, 자, 잠까아아안!" 갑작스런 외침 때문에 나는 뒤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돌 렸다. 그렇군, 나는 혼자 달리고 있던 게 아니었지. 저 멀찍이 한 녀석이 헐떡대는 게 보인다. 나는 걸음을 되돌려 그 녀석의 가까이로 다시 달려갔다. 바위를 건너 뛰고 시냇물을 건너뛰고 나무를 찍 으면서 녀석의 곁에 도착하자, 녀석은 바짝 마른 개구리처럼 바닥에 널부 러져 있었다. "저, 정말...저, 정말 빠르시오." "너도 꽤 하네, 여기까지 쫓아온 걸 보니." "학학학........" 녀석이 말을 잇지 못하는 동안 나는 입을 열어 조용히 물었다. "쉬는 김에 물어보자. 너는 어떻게 룬드바르를 암살할 계획이냐?" 녀석의 반쯤 감긴 눈이 반짝 떠 졌다. 땀으로 범벅이 된 녀석은 심장을 입 으로 토해낼 듯 헐떡거리면서 바닥을 기더니 웬 나뭇가지 하나를 들고 바 닥에 주욱 그었다. "잘 보시라." 잘 볼테니 네 심장이나 튀어나오지 않게 부여잡아라. "여기, 여기, 헥헥헥... ..., 우리들은 지금 막, 헥헥헥... ..., 고왕국의 경계를 넘어서서, 헥헥헥... ...," 천천히 말하라고 말하는 대신에 나는 바위위에 엉덩이를 붙였다. 대체 이녀석을 언제 본 거지? 냄새도 낯설고 얼굴도 낯선데 왠지 동작만은 눈에 익단 말이야. "헥헥헥... ..., 고왕국의 수도로 진격하고 있는 황제를, 헥헥헥... ..., 쫓아가 고 있는 중이라 그거요. 그렇지 않소?" 그렇다고 치자. 녀석은 호흡을 정돈하면서 다리를 꼬고 바닥에 철썩 앉더니 막대기로 괜히 줄을 죽죽 그어 보였다. 그러면서 진지한 나머지 홀라당 뒤집힐 듯한 눈으 로 날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고왕국의 수도는 장방형으로 이루어져 있고 방사형의 대로가 수도를 꿰뚫 고 있다고 들었소. 그리고 그 수도의 중심에 존재하는 것은 왕궁, 그 왕국 으로 진격하기란 찬 죽 훌렁 마시기보다 쉽다고 생각하오." 차, 찬 죽 뭐, 어쩌고 저째? "따라서 황제는 중군을 이끌고 그 방사형 대로를 따라 진격할 거라는 정보 를 이 분이 입수하셨오. 따라서 이 분은 황제의 부하중 한 명으로 변장하 여 그 뒤를 따를 작정이오." "들키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어?" 내가 웃겨서 말하자 녀석은 흐 하고 입가가 주욱 찢어진 맹한 웃음을 선보 였다. "이 분은 여지껏 실패라곤 단 한번 만 해본 분이오. 그 외에 이 분은 실패 라곤 없오." "이봐, 실패라곤 단 한번만 해봤다구? 단 한번도 없는 게 아니고?" "물론이오. 이 분은 무척이나 강하오, 단 한번의 실패후 각고의 노력 끝에 완벽하고 절묘한 수법을 많이 개발하였오." 이걸 지금 내가 말이라고 듣고 있어야 하는가? 나는 잠시 하늘을 보았다. 이 헤벌쭉 웃는 녀석은 다시 진지한 어투로 묻는다. "당신이란 놈은 어찌할 거요? 당신도 황제를 노리는 거요?" "정확히 말하면 나는 황제 옆에 있을 마법사들을 노리는 거지." "마법사도 아니고 마법사들? 그렇다면 여러명을 노리는 거요?" 이게 말뜻을 아주 잘 알아듣네? 녀석이 다시 히죽 웃었다. "나도 마법사 아주 싫어하고 있소. 만약에 당신이 마법사를 죽일거라 한다 면 나는 기꺼이 협력하고 싶어졌소." 나는 한 숨을 내 쉬고 이 녀석을 무시하기로 마음 먹었다. 이 녀석이 뭔 짓을 하든 내 알 바가 아니다. 그리고 이 놈이 협력따위를 얻을 나도 아니 지. "난 가련다." "아, 내가 약해 당신의 모가지를 잡아 대단히 미안하오. 어서 가시오." 녀석은 선선히 말했다. 이런 면은 조금 다른 놈들과 다르군. 다른 놈들 같 으면 같이 하자, 도와줘요를 연발할 텐데 말이야. "이 그림자 가문의 훈, 절대로 은인은 잊지 않으오. 도와주어 대단히 감사 하오." "알았다." 홱 돌려서 나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녀석이 어떤 몰골을 하고 있는 지 알 바 아니지만 어쨌든 내달리면서 녀석의 정보를 생각해 보았다. 나도 고왕국에는 가본 적이 없는데 녀석은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뭐? 수 도에 대로가 뚫려있어서 침략이 용이하다고? 하? 정말 웃기는 나라야. 그 신비의 고왕국이라는 곳에 대로가 뚫려있다니? 이 암흑대륙 깊숙이에 박혀 있는 나라가 대로를 뚫었다니? 그건 또 뭔소리야? 아, 가만, 잠깐, 잠깐. 잠 까아아안! "그림자의 훈?!" 나는 하마터면 앞으로 고꾸라질 뻔하다말고 고개를 팩 돌려 뒤를 돌아보았 다. 녀석은 이미 보이지 않는다. 나는 한동안 멍청히 뒤를 바라보다가 고개 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KUBERIN............ 죽은 자들은 망각을 얻고 산 자들은 비수를 얻는다 9 고왕국, 그랑프라임, 프라임, 어찌되었거나 지지리 못난 엘프쪼가리들의 왕 국. 원래 인간들의 왕국에 대해서 어떠한 환상도 품지 않는 나이지만 솔직히 말해 이번만은 조금은 환상을 품었다. 무엇보다 천여년 가까운 세월을 버 텨온 왕국이잖아? 당연히 뭔가 있을 거라는 환상을 품을 수도 있지. 하지 만 그 환상이라는 것은 고대 엘프 풍의 옷을 걸치고 흉내를 내고 있던 그 어줍잖은 태자녀석을 보는 순간 완전히 깨졌다. 인간이 대체 엘프 흉내를 내서 어쩌겠다는 것이냐? 아무리 말랐어도 오크는 오크이며 아무리 키가 커도 드워프는 드워프다. 머저리 같은 것들. 천년동안 그 머저리 짓을 해왔 다면 머저리들이 쌓이고 쌓여 길가에 지천으로 깔려있겠군. 결국 길가다 밟히는 것들 모두가 다 머저리라는 말이 된다. 나는 갑자기 이대로 발길을 돌려 내 사랑스런 도시 엘리야로 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나지막한 둔덕을 넘고 막 길다운 것을 발견했을 때, 나는 그것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들은, 전쟁터의 시체다운 태도로 길가에 이리저리 부서진 인형처럼 구 르고 있었다. 가느다란 몸매를 한 고왕국인 특유의 병사들이 대부분이었고 가끔 생각난 듯이 룬드바르제국군 녀석들의 깃털 모자가 바닥을 구르고 있 었다. 피에 젖고 흙이 묻은 시체들과 혼자서 색깔 찬란한 그놈의 깃털 모 자는 무척이나 대조를 이루고 있어서 어딘가 아귀가 안맞는 기분이 들었 다. 원래 고왕국으로 가던 길의 초병들이였는지 혹은 정찰대였는지 그것은 잘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약 이십여구의 시체들 대부분은 고왕국 녀석들이 었다. 그리고 발자국이 사방에 널려있다. 그 수많은 발자국탓으로 그다지 좁지도 않은 길바닥은 온통 구멍투성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길은 발자국이 찍히지 않은 곳을 찾을 수 없었다. 즉, 다시 말해 녀석들의 발자 국이 이놈의 길바닥을 완전히 밭 갈 듯이 뒤집어 엎었단 이야기다. 이런 정도면 적어도 수백을 넘었을 게다. 역시 제대로 길을 찾고 있었군. 나는 코를 들어서 시체냄새 이외의 것을 찾기위해 노력했다. 인분냄새와 인간이 무두질한 가죽냄새, 그리고 입안이 알싸한 그 쇠냄새. 냄새들은 사 방에 널려 있었다. 나는 길을 따라서 다시 발을 옮겼다. 제대로 뒤를 따라가고 있는 것이니까 조금 속도를 높이는 게 좋겠다. 햇빛은 여전히 빌어먹게도 찬란하다. 등덜미로 와 닿는 노란 광선은 적당 한 열기를 전신으로 보내주고 있었다. 그러나 역시 이 곳은 춥다. 엘리야의 벽난로가 그리워지는군. 아아, 기묘한 기분이다. 나는 사슴 넓적다리를 하나 입에 물면서 중얼거렸다. 이렇게 연달아서 파란만장한 시간이 계속되기는 내 살아오면서 처음일 지 도 모르겠다. 인간세상에서 살아온 것은 줄잡아 오십여년 정도인가, 아니면 육십? 어쩌면 백년일 지도 모르지. 엘리야에서 살아온 것만도 이십여년이 니까. 엘리야... ... 깡패, 상인, 하플링, 오크, 드워프, 아인족, 창부, 인부, 용병, 어부. 그 모든 존재들이 엘리야에서 살고 있다. 그들이 정말로 이 땅위에 존재하고 있다 는 것을 그 작은 항구도시 하나에서 알려주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나 말이다. 나는 고기를 천천히 씹으면서 입밖으로 넘쳐난 피를 혀끝으로 핥아 삼켰 다. 정말로 인간이 대륙 전체를 장악하면 드워프들이 편안하게 망치질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오크들이 숲속에서 겔겔겔 소리를 낼 수 있을 것인가? 인어 들이 웃으면서 바닷가에 놀러올수 있을 것인가? 아인족들이 카페트를 팔러 올수 있을 것인가? 하플링들이 빵을 구울 수 있을 것인가? 수인족이 지금 처럼 태연하게 자신의 몸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인가? 엘프들이 자신들의 지 나치게 기나긴 이름을 읊을 수 있을 것인가? 달라질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이라고 웃으며 말하기에는 나는 너무 나이 가 들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순진하지 않다. 제기랄. 다 먹어치운 뼈를 집어던지면서 나는 다시 일어섰다. 잠을 자고 싶지만 별로 잘 새는 없을 것 같다. 룬드바르 제국군은 나보다도 앞서 나가고 있 고 나의 일족들은 이미 고왕국에 있을 것이다. 이 속도로 나가면 나는 제 국군을 앞지를 수 있다. 겨우 나보다 닷새 먼저 출발한 그들을 따라 잡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아니, 이 발자국으로 보건대 오늘 해가 지기도 전에 그들을 따라잡을 수 있겠군. 그건 그렇고 정말 이 자식들 빠르군. 인간의 군대가 웬일로 이렇게나 빨 라? 순간 나는 멍하니 발걸음을 멈췄다. 어째서 아직까지 그 생각을 못했던 걸까? 당연하지 않나? 이 암흑산맥은 어느 누구도 들어오지 못했던 최악의 환경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곳 에 난데없이 대군을 이끌고 나타나다니. 그런 일이 가능했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다. 저 빌어먹을 엘프숭배집단이 그 동안 무사해왔던 것은 그 들이 잘나서도 아니오, 인간들이 못나서도 아니다. 단지 이놈의 세룩-엘라 마이야산맥이 너무나 험준해서 그 가는 길목이 너무나 험준해서 대군을 이 끌고 들어올 수가 없었을 뿐이었던 것이다. 헌데, 이 급조된 군대인 룬드바 르제국군은 수천, 아니 어쩌면 수만이나 되는 군대를 어떻게 이 암흑산맥 깊숙이에 보낼 수가 있었던 건가? 그것부터 미리 생각했어야 했다. 자, 생 각해! 생각해! 바닥을 다시 바라보았다. 땅바닥에 찍힌 무수한 발자국들. 이 발자국들은 정말 어디서 나타난 거지? 공중에서 툭 떨어진 것도 아닐텐데 어떻게 앞 뒤도 없이 고스란히 이곳에 터억하니 찍혀 있는 거야? 나는 뒷걸음질을 쳐 서 내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았다. 역시 그렇다. 이 앞은 발자국이 없다. 말 그대로 갑자기 뚜욱 하고 나타난 발자국들. 아까부터 느껴지던 위화감, 아니 어쩌면 맨 처음부터, 마튜스에 갑작스레 나타난 그 군대들 부터도 이상했다. 대체 그들은 어디서 나타난 거지? 이 묘인족의 다리를 이기고 이렇게 갑자기 나타난다는 게 가능한 일이란 말이 야? 게다가 어째서 이 암흑산맥의 나무들은 하나같이 전혀 다치지 않은 채 고고한 척 버티고 서 있을 수 있는 거지? 인간들이 나무를 그대로 두고, 숲을 그대로 두고 통과했다는 게 말이 되는 건가? 인간들은 걸어다니는 흉 신이다. 그들이 지나간 길에는 남아나는 게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산 맥의 나무들은 다친 곳이 거의 없는 원시림 그대로의 모습을 자랑하고 있 었다. 부서진 나뭇가지, 짓밟힌 벌레 하나 없이 이동하는 군대. 소리 소문도 없이 닥쳐와 번개같이 상대를 쓰러뜨리는 군대. 나는 멍하니 서서 여지껏 내가 지나쳤던 사실들을 하나씩 하나씩 떠올렸 다. 맙소사. "야, 오늘은 어디지?" "잔소리마. 그러나 저러나 정말 발이 아프군." "걸은 건 실제론 얼마되지도 않으면서 엄살은." "배가 고파." "전리품은 챙겼어?" "뭘 한게 있어야 챙기지, 너무 서둘러 오느라 아무 것도 챙길 수 없었 지....." 언제나 그렇듯 인간의 군대는 시끄러웠다. 나는 그 거대하고도 거대한 나 뭇가지 위에 앉았다가 이리 저리 움직이며 녀석들의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그냥 박살을 내는 것도 괜찮긴 하겠지만 지금은 그럴 때는 아니다. 뚱뚱한 녀석이 앞서서 네모난 상자를 이고 가는 홀쭉한 녀석에게 말을 걸 고 시시덕거리자 앞서가던 말대가리같은 녀석이 조용히 하라고 고함을 지 른다. 녀석, 여기서 제일 시끄러운 놈은 네 놈이다. 어쨌거나 인간다운 걸 음걸이로 뒤뚱이면서 풀숲을 뒤지며 걷는 녀석들은 불쏘시개로 쓸만한 것 들을 찾고 있었다. 바로 녀석들이 걸어온 저 편에 제법 그럴 듯한 넓은 장 소에서 다른 녀석들은 저마다 개미처럼 움직이며 잠자리와 식사를 준비하 고 있었다. 시퍼렇다못해 검푸른 녹음 속에서 녀석들이 움직이는 것은 어쩐지 기묘한 위화감이 든다. 녀석들은 숲의 정적을 깨고 불을 붙인다, 식사준비를 한다 하며 떠들어대느라 바빠 보였다. 각자 무기를 그런대로 챙겨들고 있는 것을 보아 녀석들은 그런대로 정병이 라 부를 수 있는 군대인 것 같다. 약 칠팔백은 되어 보이는 녀석들은 경비 를 서는 놈들, 주변을 살피고 있는 놈들, 이런 곳까지 나와 차를 마시면서 사방을 훑어보고 있는 오만한 자세의 녀석들까지 다양한 꼬락서니를 하고 있었다. 불행히도 녀석들은 혼자서 움직이는 일은 삼가고 있는 듯해서 조 금 실망이다. 뭐, 어쨌거나 저렇게 지도를 봐가며 이리 저리 살피는 저 놈 이 우두머리인 것 같은데? 아, 아니다. 그보다 먼저 막사가 마련된 곳, 룬 드바르 녀석들이 좋아하는 짙은 남색의 막사가 쳐진 곳이 바로 우두머리의 처소가 틀림없다. 모두들 우두머리가 되고 싶어 안달할 수밖에 없는 것은 우두머리, 두목, 두 령, 대장, 왕, 황제등 우두머리의 종류들이 모두 제일 먼저 편하게, 제일 먼 저 안전하게, 제일 호화스럽게, 제일 맛난 것을 먹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 른 놈들의 막사는 아직 펼쳐지지도 않은 이 곳에서 제일 먼저 막사는 물론 이오 식사할 탁자까지 펼쳐 놓고 음식을 늘어놓고 있는 저 놈이야 말로 우 두머리인 것이다. 시퍼런 낯짝을 한 음침한 얼굴의 여자 하나와, 노리끼리한 낯짝을 한 두 명의 사내놈은 모두 마법사의 로브같은 것을 걸치고 있었다. 회색 로브를 걸친 여자와 검은 로브를 걸친 사내놈 모두가 피로한 기색이었지만 등 뒤 로 보이는 녀석들은 전혀 피로한 빛을 띄우고 있지 않았다. 그 등 뒤에 선 녀석들을 보고 나는 이 세 놈들이 모두 킬트의 제자임을 확신했다. 정말로 독창성 없는 이 놈들은 전에 마튜스의 성에서 보았던 오우거와 비슷하지만 오우거는 아닌 그 덩치만 큰 놈들과 같은 것들이었다. 정말 맛은 없었 지....... 녀석들은 역시 이 세 놈 마법사들의 호위인 듯 그들의 등 뒤로 두 팔을 주 욱 늘인 채로 입을 헤 벌리고 이빨을 드러낸 채로 침을 줄줄 흘리고 있었 다. 그 덕분에 지나가던 병사들이 그 모습을 보고는 흠칫흠칫 놀라곤 했다. 낯짝이 퍼런 계집은 아무리 보아도 미녀라고는 하기 어려웠지만 일단 눈 코 입은 제대로 다 박혀 있었는데 무척 지친 듯 헐떡이고 있었다. 그 옆에 서 알랑거리면서 이걸 드세요 저걸 드세요 하고 있는 두 사내놈은 얼굴은 노리끼리 했지만 그런데로 반반한 낯짝이었다. 낯짝 퍼런 계집에게 문득 노리끼리1이 어깨로 담요를 덮어주자, 이에 질새라 노리끼리2가 계집에게 이걸 드세요 하면서 스프그릇을 내민다. 아니, 내민다기 보다는 거의 바치 는 수준의 몸짓이었다. 그것을 여자가 받아 들자 노리끼리2는 괜히 몸을 비비꼬면서 뒤로 물러섰다. "피로하시지요? 마스터?" 담요를 덮어주었던 노리끼리1도 질새라 괜히 여자의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 했다. "..........." 그러나 여자는 말이 없다. 아마 말하기도 귀찮은 듯 반쯤 눈을 감은 채 입 을 다물고 있었다. 스프그릇을 쥔 손이 가볍게 떨리는 것으로 보아 무척 지친 것은 확실해 보였다. "마스터, 따스할 때 드십시오." 억지로 노리끼리2가 다시 권하자 여자는 대꾸도 없이 땀을 줄줄 흘리며 그 릇을 입에 대고 훌훌 마셨다. 아, 그러고 보니 제대로 된 식사를, 따끈하고 향긋한 향신료를 넣은 식사를 한 것은 언제적의 일이던가? 별로 맛도 없는 저런 덩치들을 씹어 삼키기만 했으니....쳇. 그건 그렇고 역시 저 두놈은 여자의 노예가 분명하군, 마스터라고 부르는 것을 보면 제자의 탈을 쓴 노예이거나 노예의 탈을 쓴 제자겠지. 문득 그 세 녀석에게 병사1이 다가섰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깃털모자와 칼을 찬 멀쩡하게 생긴 병사1로 아마도 이 부대의 책임자나 지휘관은 되는 듯한 녀석이었다. 녀석의 뒤로 기사같은 모습의 졸개1, 2가 서 있었다. "몸은 어떠십니까? 마르테르님?" 그 말에 여자에게 알랑거리던 노예1이 고개를 쳐들고 병사1을 노려보며 오 만하게 대꾸했다. "말해 두었을 텐데. 마스터께선 다섯시간 이상 휴식을 취해야 한다." "다섯시간 이상? 이미 세 시간이 지났소이다. 이렇게 느긋하게 굴다간 앞 선 부대를 놓치겠소이다." 불만스러운 어조에 노예1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병사1은 사십가량되는 사내였지만 노예1은 고작해야 이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얼굴 이었다. 허긴 이 얼굴이 진짜 그 나이의 얼굴인지는 미지수지만. 녀석은 검은 로브자락을 가볍게 흔들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똑같은 말을 두 번 반복하게 하는 걸 보니 살기가 싫은 모양이군." 그 살벌한 어조에 병사1이 굳었다. 그의 뒤에 서 있던 졸개1, 2가 분격한 얼굴로 검자루에 손을 댄다. 그 모습을 보던 노예2가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로 바보같은 것들이군." "이, 이 무슨 무례요? 나는 상황을 이야기 하는 거요! 더 이상 늦을 수는 없다고 하지 않았소? 이미 황제께서도 앞에 나가신 이 때에 우리가 더 늦 을 수는....!" 그러자 노예1은 눈을 부릅뜨며 한 걸음 나섰다. 그의 손에 이미 시커멓게 뭉글거리는 기운이 쏠리는 것을 보고 병사1은 입을 다물고 뒤로 물러섰다. "무례?" 이글거리는 검은 기운이 녀석의 손아귀에서 선명하게 드러났다. 마치 살아 있는 짐승이 그 손바닥안에서 이글거리는 것을 병사1과 졸개1, 2는 공포의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기다려." 앉아있던 퍼런 낯짝의 여자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아직도 눈을 반쯤 감은 얼굴로 고저없이 조용히 말했다. "앞으로 한 시간뒤 출발할 것이다. 그렇게 알도록." "하, 하지만 선두부대는........." 목숨이 두렵지 않은지 뭐라 한 마디 덧붙이려던 병사1은 사납게 쏘아보는 노예1의 시선에 입을 닫았다. "앞에 가는 놈들도 휴식을 취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 그럼 수도에는 언제 진입할 수 있소?" "다음에 너희들이 눈을 떴을 때는 바로 고왕국의 수도일게다." 그렇게 말한 여자는 할말 없으면 꺼지라는 듯 다시 눈을 감았다. 피로가 역력한 그 얼굴을 보고 병사1은 뭐라 더 물으려하다가 입을 다물고 뒤로 물러섰다. 만약 자신이 여기서 조금만 더 지체한다면 바로 여자의 뒤에서 침을 질질 흘리며 자신들을 먹음직스럽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는 덩치큰 괴 물들의 일회용 양식이 되리라는 것을 깨달았는지 그는 조용히 발자국 소리 도 내지 않고 사라졌다. 그들이 사라지자 여자와 노예1, 2는 별로 높지도 않은 코를 높이 세우며 식사를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한 가지, 아니 두어가지를 결심했다. KUBERIN............ 죽은 자들은 망각을 얻고 산 자들은 비수를 얻는다 10 "안녕, 쿠베린." 미트라가 웃었다. 희고 매끄러운 진주빛 드레스를 입은 그녀가 나에게 다가와서 물었다. "날 사랑해?" "그래." "날 사랑해?" "그래." "날 사랑해?" "그래." 멍하니 계속해서 그 말만 되뇌이면서 그녀가 웃었다. 그 웃는 입가로 검붉 은 핏줄기가 떨어진다. 핏줄기는 점점 양이 늘더니 입안 전체로 흘러내리 고 그 다음에는 파삭 소리를 내며 그녀의 얼굴을 부서뜨렸다. 그녀의 몸에 서 흘러내리는 피는 무서운 기세로 파도처럼 일어나 그녀의 전신을 삼키고 곧 내게로 밀려온다. 대체 얼마나 많은 피가 흘렀기에 온 세상을 그녀의 피로 가득 채우는 것일까? 내 전신을 적시고도 모자라 시야에 들어오는 모 든 것들이 전부 피에 잠겼다. 나는 숨이 차오르는 것을 억누르며 팔 다리 를 움직여 헤엄을 친다. 그녀의 핏속에서 헤엄을 친다. 무언가 잡히는 게 없나 싶어 손을 허우적거리니 그녀의 팔 다리가 산산히 흩어져서 핏속에 떠오르고 그 뒤를 이어 그녀의 임자 잃은 머리가 둥둥 떠오른다. 부서진 인형처럼 흐트러진 모습으로, 갈색의 머리칼은 이미 피에 젖어 검은 색. 그 머리가 나에게 묻는다. "날 사랑해?" 눈 앞에 떠오르는 모든 것에 감사하면서 나는 눈을 떴다. 전신을 적시는 것은 그녀의 피가 아니라 내 땀이다. 내 뺨을 적시는 것은 눈물이 아니라 땀이다. 나는 진실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미트 라를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답을 한다. 사랑한다는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대답을 한다. 젠장할. 눈 안쪽이 뜨거워진다. 가슴 한 구석이 다시 불로 지지듯 뜨거워진다. 아이가 죽고 여자가 죽고. 인간이 죽고 묘인족이 죽고. 수많은 생명들이 그 렇게 덧없이 대지의 여신에게 바쳐진다. 아이가 죽어도 해는 떠오른다. 여 자가 죽어도 바람은 분다. 세상에 소중한 것은 나 자신밖에는 없다. 그들이 죽었어도 세상은 돌아간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지? 분명히 저번에 사슴 한 마리를 먹었었는데? 그 림자의 훈이란 녀석과 함께 달렸었는데? 그 다음에는? 그 다음에는? 머리를 식히자. 아이를 잃은 게 처음이라 이런 것이다. 여자를 잃은 것은 처음은 아니지만 이런 식으론 처음이지. 아니, 세상에 똑같은 죽음이 있을 리가 없지. 똑같은 상실은 있을 리가 없어. 몇 백년이나 온갖 일을 다 겪고 수많은 죽음을 거쳤는데도 새삼스레 고통스러운 것은 그 때문이다. 모든 생명이 똑같은 것은 단 하나도 없듯 죽음도 똑같은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얼마 전 린이 죽고 미트라가 죽고 내 아이가 죽고 나는 또 죽이고 죽고..... 머릿속이 아득하다. 할 일이 없이 이렇게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바닥을 파면서 별로 소용도 되지 않는 일을 자꾸만 떠올리고 있는 것은 내가 할 일이 없기때문이야. 제길. 적당히 좀 하자구. 룬드바르 군은 밤을 맞이하고 있었다. 밤이라고 해도 그들은 이미 행군할 준비를 다 갖춘 채로 정렬해 있었다. 수 백의, 어쩌면 천명 정도 될 법한 그 군세가 일제히 일곱 명으로 열지어 선 채 창끝을 하늘로 향한 채 도열 해 서 있다. 밤의 여신의 옷자락을 붙잡고 선 무모한 거인의 머리털처럼 보이는 그 인간들의 창날들은 창백한 별빛을 받아 희게 빛났다. 나는 나무 위에 올라 앉아 그들을 지켜보았다. 수백의 군세는 창과 검을 들고 무언가를 기다리며 정면을 향하고 있었는데 그 긴장된 얼굴에 흐르는 표정에는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그 수백 명 중 아무도 소리를 내는 자는 없었다. 모두들 진지하게 정면을 주시한다. 그리 고 그들의 시선 끝에는 세 명의 마법사가 서 있었다. 그 여자와 그녀의 노 예들이다. 조금 회복한 것인지 회색로브의 여자는 하얀 얼굴로 두 눈을 부 릅뜬 채로 지팡이를 들어 올리고 있었다. 웅웅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녀가 뭐라고 알아듣지도 못할 소리로 지껄이는 동안 텅 빈 허공이 다친 짐승처 럼 신음소릴 냈다. 그리고 천천히 천천히 그녀의 정면으로 주먹만한 구멍 이 열렸다. 곧 그 구멍은 사람 머리통만큼 커지더니 그 다음에는 문짝만하 게, 그 다음에는 웬만한 요새의 대문짝 만하게 커졌다. 윙윙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지는 동안 그녀의 옆에 음침한 얼굴로 섰던 노리끼리한 얼굴의 노 예1이 자신들의 뒤에 서 있던 병사1에게 손짓을 해 보였다. 그러자 잔뜩 긴장해 있던 병사1은 뒤를 돌아보며 팔을 크게 휘저었다. 녀 석은 소리라도 내면 큰 일이 날까봐 그러는 지 입을 꽉 다문 채 긴장한 얼 굴이 공포로 파리하게 질려있다. 맨 앞 줄의 일곱명의 병사들이 창끝을 앞세우고 전진했다. 그들은 그 구멍 을 향해 낮게 욕설을 퍼부우면서, 기도문을 외우면서 겁에 질린 채로 나아 갔다. 첫 번째 병사들이 사라지고 나자, 그 다음 열의 병사가 줄지어 구멍 안으로 사라졌다. 이것이다! 나는 맨 뒷줄에 선 병사의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것도 서슴지 않기로 했다. 이 것이 바로 룬드바르가 이곳까지 올 수 있었던 이유다. 이들 마법사가 길을 열지 않았다면 어떻게 어떻게 묘인족의 발걸음보다도 빠르게 이 곳까 지 올 수 있었겠는가! 병사들의 걸음은 빨랐다. 아니, 빠르고 싶지 않지만 빠를 수 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그들은 파리한 얼굴로 겁에 질린 사슴들마냥 앞의 동료를 따라 구멍으로 달려들어갔다. 아니 아예 몸을 던지는 듯이 황급히 뛰어들었다. 시간의 제한이 있는지 여자 마법사의 얼굴은 파랗다 못해 피를 토할 듯 허 옇게 질려있었다. 그녀의 옆에 있던 노예1, 2들은 그녀의 상태를 바라보면 서 이를 갈 듯이 서두르라고 낮게 외치고 있었다. 이제 곧 마지막 열의 병 사들이 구멍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나는 마지막 병사들 사이에 재빨리 끼 어들었다. 어차피 어두워서 잘 보이지도 않을 테고 누가 누군지 얼굴도 잘 모를 테니까. "앗!" 한 녀석에게 발을 걸었다. 그랬더니 급히 서둘러 걷던 녀석들 예닐곱명이 일제히 으악 하고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뭘 하는 거야? 이 바보 멍청이들아!" 지휘관인 듯한 녀석이 쓰러진 놈들에게 낮게 욕설을 퍼붓는 동안 나는 나 뒹군 녀석들의 엉덩이를 걷어차며 달렸다. "어서 서둘러!" 노예1이 낮게 외치면서 혀를 차자 흐트러진 줄을 채 정비하기도 전에 마구 잡이로 달려온 병사들을 병사1이 급히 구멍 속으로 밀어넣었다. 병사1이 서둘러 서둘러 하고 외치는 소리를 귓전으로 들으며 나는 재빨리 구멍 속 으로 발을 집어 넣었다. 찌잉 찌잉 하고 울리는 귀를 잡으면서 나는 하마터면 앞의 녀석과 부딪쳐 나뒹굴 뻔했다. 머릿속이 엉망진창이 된 듯 손이 발이 되고 발이 손이 되 는 것 같은 기묘한 감각 때문에 나는 혀로 내 손을 핥아보았다. 젠장, 눈앞 이 빙빙 돌았다. "어지러, 어지러워." "정신 차리고! 어서 정렬!" "아유, 죽겠다." 주변에서 들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겨우 주변을 살핀 순간 나는 입을 저억 벌렸다. 오렌지 빛으로 사방이 가득 차 있다. 오렌지빛의 둥글고 둥근 지붕들이 마치 공을 엎어놓은 양 보였다. 그 둥근 지붕들은 큰 것도 있고 작은 것도 있었지만 대머리가 된 불쌍한 어떤 녀석 들이 모두다 고개를 숙이고 절하는 것처럼 보여 나는 왠지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인간들의 취향이란 참 다양하기도 하지, 델리암의 삐죽삐죽한 지붕 들에 비해서 이곳의 지붕들은 뾰족하면 큰일이라도 날 듯 둥글둥글 맨들맨 들했다. 그 반질거리는 지붕을 설마 기어올라가 닦기라도 한 것인지 윤이 나고 빛이 난다. 그렇지, 어쩌면 이 곳의 하인들 중에는 지붕닦기 하인이 있을 지도 모르지. 게다가 바닥, 바닥은 주홍빛인지 분홍빛인지 잘 알 수 없는 타일로 깔려 그 지긋지긋한 진흙을 밟지않게 도와주고 있었다. 아아, 정말 반가운 일이야. "정렬해! 정렬!" 녀석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를 듣고 서야 나는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다시 돌아보았다. 어떤 녀석이 말한대로 우리들, 아니 나와 별 볼일 없는 녀석들은 말 그대 로 대로, 커다란 길 한 가운데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 길은 정면의 둥글둥 글한 지붕들로 이어진 건물로 향해 있다. 그 반대편은 흰색의 담장 사이에 선 대문- 이걸 정말 대문이라고 불러야 할지 알수 없지만 하여간에 대문이 있었다. 이거 뭔가 조금 묘한 기분이군. 다시 말하자면 나와 이 별볼일 없는 놈들은 어딘가 궁성안으로 이어지는 대로에 서 있었다. 그것도 대문조차 거치지 않고 말 그대로 툭 허공에서 떨어진 것처럼 말이다. 나도 놀랐지만 더 놀란 것은 아마도 그 대문- 붉은 색을 칠한 반원형의 어 마어마하게 큰 대문-옆에 선 녀석들인 듯 싶다. 녀석들은 전에 내가 노스 엘스턴에서 본 그 대로의 모습으로 쇠꼬챙이처럼 가느다란 다리를 드러낸 채로 바늘 꼬챙이같은 검을 치켜들고 서 서 얼이 빠진 얼굴로 바라보고 있 었다. 너댓명 되던 녀석들은 새된 비명소리를 내지르면서 이리뛰고 저리 뛰고 하고 있었지만 정작 이 곳으로 다가오는 녀석들은 단 하나도 없었다. "경비를 해결해." 헐떡이는 숨을 삼키면서 여자 마법사가 말했다. 그러자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몇몇 병사들이 미친 듯이 달려나가 멀거 니 선 경비답지 않은 경비들을 해치웠다. 녀석들은 별 반항도 하지 못하고 금방 거꾸러졌는데 그 모양새를 보고 나는 정말로 이놈의 고왕국이란 곳에 대한 미련을 버렸다. 길다란 담장은 제법 높았지만 적을 막을 수는 없었을 게다. 그 거대한 문 은 크긴 했지만 적을 멈출 수 조차 없었다. 나는 팔짱을 낀 채로 이 건물 이 대체 뭐하는 건물인가를 돌아보았다. 건물은 맨들거리는 지붕을 지고 약 일곱채 정도 보였다. 크기가 다들 각각이지만 그 중 가장 큰 것은 역시 정면에 보이는 건물, 둥근 지붕에 어울리게 둥근 기둥이 줄지어 서 있는 게 보인다. 그 오렌지 빛의 기둥에는 조각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조 각들 사이 사이 마다 색색으로 빛나는 보석들이 박혀서 눈을 즐겁게 해주 고 있었다. 건물로 올라가는 계단은 역시 옅은 분홍빛을 띈 돌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난간마다 조각된 장식이 세월의 풍화를 전혀 타지 않은 양 새로 워 보였다.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이 악취미의 붉으레 죽죽하고도 맨들맨 들한 건물을 올려다 보면서 나는 앞으로 걸었다. "우리들이 첫 번째로 도착한 것인가?" "알 수 없지. 하지만 우리보다 앞서 출발한 부대는 대체 어디있는거지?" "그보다 여긴 어디야? 설마 고왕국의 궁성인거야?" "이야, 저 건물봐! 보석이 박혔어!" 탐욕으로 이글거리는 눈동자를 들이내미는 병사들 사이에서 여마법사의 노 예2가 날카롭게 외쳤다. "페사야 페세! 키마이라 페세!" 그 순간에 갑자기 하늘에서 찌이잉하는 소리와 함께 그들의 머리위로 무언 가가 튀어 나왔다. 나타난 것은 키메라였다. 녀석은 상당히 넓은, 아니, 좀 넓은 날개를 좌악 펴서 사방을 덮듯이 위용을 자랑하려고 했다. 그리고는 자신을 소환한 소환자를 내려다 보았다. 아니 내려다 보려 했다. 그러나 녀 석이 어찌 이 몸을 무시할 수 있겠는가. 쪼맨한 키메라 따위가 이 몸이 이 렇게 버티고 섰는데 인사도 없이 그냥 자기 할 일을 할 수 있겠는가 말이 다. 녀석은 소환자에게 시선을 돌리다 말고 홱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길쭉하게 찢어진 두 눈은 나를 보자 마자 살기에 찬 얼굴이 되어서 이빨, 아니 부리인지 주둥인지를 일그러뜨렸다. "키메라! 저 건물에 바람을 일게 하라!" 소환자 노예2가 아무리 고함을 질러도 녀석은 들은 체도 않고 날 쏘아보느 라 여념이 없다. 녀석은 자기가 고개만 돌리면 내가 튀어 올라 자신을 죽 일까봐 겁에 질려있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귀여운 놈에게 히죽 미소를 던 져 주었다. "키메라! 소환자는 나다!" 아무리 소리쳐도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키메라를 향해 노예2가 열받았는 지 큰 소리로 고함을 다시 질러댔다. 그래도 키메라는 나를 보는 시선을 멈추지 않았다. 때문에 내 주변에 있던 병사들은 자길 보는 줄 알고 공포 에 질려 주춤주춤 밀려서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어마 뜨거라 하고 도망 가는 놈들 탓에 나 혼자만 댕그마니 그 자리에 남았다. 그제서야 노예2도 여자도, 노예1도, 졸개들과 같이 섰던 병사1도 나의 존재 를 눈치챘다. 그들은 의아한 얼굴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지만 그냥 보 기만 해서야 이 몸이 존귀하신 쿠베린님이란 사실을 알 리가 없다. "키메라!" "저 놈이 누구길래 키메라가 이러는 거지? 마법사인가?" "저 자는 누구야?" 모두 한 마디씩 던지는 동안 갑자기 여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첩자다!" 그녀가 히스테릭하게 소리를 지르자 마자 졸개들이 갑자기 창날을 곧추 세 우며 날 쏘아보았다. 그리고는 길게 말할 것도 없이 나에게 와르르 몰려들 었다. 나는 이 불쌍한 인간들을 넓은 자비로 발로 걷어 차버리고 나를 계 속 야리고 있는 키메라에게 손짓을 해보였다. "이리와, 이리와, 까마귀자식아." 키메라는 잔뜩 깃털을 곧추 세우더니 아가리를 있는대로 벌리면서 날개를 쳐들었다. 그리고는 소환자가 뭐라고 소리를 지르기도 전에 나를 향해서 광풍을 내뿜어댔다. KUBERIN............ 죽은 자들은 망각을 얻고 산 자들은 비수를 얻는다 11 고양이. 고양이라는 것은 인간들이 키우는 짐승이다. 주로 여자들이 즐겨 키우며 크기는 천차만별이다. 집안에서 키우는 이 짐승은 발톱이 수시로 나오고 들어가며 귀는 두 개, 다리는 네 개, 두 개의 커다란 눈알은 황금색이 대부 분이다. 성격은 그다지 온화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런데로 키울 만한 짐 승이란다. 마미는 왕년에 고양이를 키웠었는지 나를 보고 고양이라 불렀다. 대체 그 고양이라고 하는 짐승 어디가 나와 닮았다고 하는 것인지 가끔 나는 혼란에 빠진다. 물론 발톱이 들어가고 나오고 하는 점은 닮았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어슬렁거리는 태도라든가 여기저기 부비는 그 맹한 모습, 게다가 결정적으로 네 발로 걷는 그 몰골, 주먹만한 대가리 등은 아 무리 보아도 나와는 닮지 않았다. "흐음........" 지금 내 눈앞에서 얼어붙어 있는 일곱 마리의 고양이들을 보면서 나는 그 움직임과 그 몰골을 살피는 중이었다. 이렇게 큰 고양이들은 나도 처음 보 았다. 회색빛과 오렌지빛이 잘 조화된 이 짐승들은 저마다 각자에게 어울 리는 보석 목걸이를 하나 씩 걸고 있다. 회색 고양이에겐 루비가, 흰 고양 이에겐 사파이어, 푸른 빛 고양이에겐 희디 흰 오팔이 빛난다. 문득 너무 너무 아까워져서 나는 고양이에게 손짓을 했다. 녀석들은 나를 보고 완전 히 얼어붙어 있었지만 내가 손짓을 하자 네 다리를 달달 떨며 바닥을 기어 다가왔다. 허어, 걱정하지 마. 너희들에겐 그 보석이 전혀 어울리지 않아. 그렇고 말 고. 원래 보석이란 보석의 즐거움을 아는 자들이 가져야지 너희들 같은 짐 승들이 보석을 달아봐야 목만 무거울 게야. 녀석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 해서 나는 녀석들 목에 걸린 목걸이에서 보석을 하나씩 떼내어 주머니에 넣었다. 그래, 하나, 둘, 셋, 넷, 다섯, 음...작지만 질은 좋은 보석이구만. 그런 나를 화려한 옷매무시에 회색의 눈동자를 가진 계집아이가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다. 이봐, 아무리 노려봐야 나는 구멍 안뚫려. "쿠베린! 대체 지금 뭘하고 있는 거야?" "쿠베린, 지금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악을 쓰면서 튜나가 되물었다. 내가 돌아보자 튜나는 팔짱을 낀 채로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 다. 이 명도 긴 하프엘프의 옆에 선 조인족의 전사는 나의 모습을 물끄러 미 바라보다가 내 시선을 받고는 얼른 고개를 돌린다. 구석에 처박혀 있던 아크가 내 주머니를 흘금거리면서 다시 물었다. "몸은?" "보면 모르냐?" 우리들, 아니 나와 떨거지들은 지금 제법 큰 건물 안에 있었다. 건물은 전 에 내가 보았던 대로 둥근 천장을 아주 높이, 높이 띄워 바닥과 천장과의 사이는 무슨 원수라도 진 듯이 멀게 만들어 놓았다. 그 천장아래 선 나와 녀석들은 저마다 각자에게 어울리는 자세로 앉아서 쉬고 있었다. 튜나와 엘레, 그리고 조인족의 여왕과 조인족 몇 명이 앉아 있는 그 주변을 돌아 보면서 나는 잠시 동안의 일을 되새기려고 했다. 난장판의 싸움속에서 갑자기 등장한 이 조인족 일행들은 너무나 날렵하게 나타나 내 앞에서 그 존재를 과시했기 때문에 나는 길게 말을 이을 생각도 없었다. 물론 조인족의 여왕께서 무척이나 아름다웠기 때문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이야기는 들었어." 낮게 튜나가 내게 속삭였다. "뭘?" "미트라와 딸 아이가 죽었다고....." 내가 대꾸도 않고 빤히 바라보자 그녀는 우물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휴런에게서 들었어." "휴런과 다른 놈들은 어디 있지? 여기서 만났냐?" "응, 휴런과 유티아, 이에르네들은 지금 신전을 들쑤시고 있어. 룬드바르군 을 모조리 죽이겠다고 말이야." "그렇군. 녀석들은 나보다 빨리 왔는걸." 내가 그렇게 말하자 튜나는 나를 조심스레 다시 바라본다. 그 시선을 보면 서 나는 그녀가 이 쿠베린님께서 당장이라도 발광을 하는 것은 아닌가 하 고 불안해하는 것을 곧 알수 있었다. "녀석들은 왜 신전에 있는 거지? 룬드바르군이 노리는 게 신전의 아이템이 기 때문인 건가? 보통이라면 룬드바르군은 고왕국의 군대와 싸우고 있을 테니까 그 쪽에서 날뛰는 게 보통 아냐?" 내 말에 튜나는 고개를 저었다. "쿠베린, 이미 고왕국은 정복되었어." "헤에?" "이미 고왕국은 룬드바르 제국에 편입되었다고." "헤에? 그것참 빨리도 끝났네? 설마하니 사나흘 사이에 모조리 끝난 거 냐?" "그게......." 튜나는 갑자기 등을 돌렸다. 아까부터 가만히 고양이들 사이에 끼어 앉아 있던 작은 소녀가 이쪽을 바 라본다. 쪼만한 이 계집아이는 아까 내가 고양이들의 목에 걸린 보석들을 주머니에 넣자 매우 분개한 얼굴로 바라보던 그 꼬맹이였다. 그러고 보니 낯선 얼굴은 이 계집애 하나다. 나는 새삼스레 그 계집애에게로 시선을 돌 리면서 튜나에게 물었다. "저 계집애는 누구야?" "아아.......그게 말이지..." 튜나는 조금 복잡한 얼굴로 망설였다. "왕의 외동딸, 뭐 그런 거냐?" "에? 어, 어떻게 알았어?" 튜나가 놀라 나를 향해 되묻는다. 나는 팔짱을 끼고 조금은 한심한 기분으로 계집아이와 그 계집아이를 지키 듯이 날개를 펴고 선 조인족의 전사들을 바라보았다. 여왕은 약간 웃는 얼 굴이 되어 날 바라보고 있었다. 고양이들 사이에 끼어 앉은 계집아이는 여 왕이 자신의 무엇이라도 되는 양 건방지고 도도한 표정으로 날 쏘아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건 그렇고 너무너무 뻔한 이야기로구만. "어떻게 알았냐니까! 너, 설마하니 고왕국의 누구라도 만난 적이 있어?" "아니, 너무 뻔해서 그런다. 고왕국은 멸망했고, 왕이나 왕의 일족은 모조 리 룬드바르에게 잡혀 가거나 뭐 그런 상태이므로 여기 조인족의 여왕께서 애완동물 하나 키우는 셈 치고 그 중 온순한 공주 하나를 받아들였더라... 뭐 그런 이야기 아니냐?" "애완동물은 아니에요." 조인족의 여왕이 쓴 웃음을 짓고 나에게 말했다. 나는 일어서서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내게 손을 잡힌 채로 온후하게 말을 이었다. "조의를 표합니다. 왕." "뭐, 그런 거지요." 나는 그녀의 손등에 키스하면서 다시 물었다. "조인족들은 어떻게 여기에 있게 된 거지요? 다른 놈들, 아크라든가 엘프 의 엉덩이라든가 하는 그런 떨거지들은 다 어디로 가고 여기에 혼자 계시 는 겁니까? 아름다운 분?" "위대한 백마법사와 엘프의 왕께서는 지금 룬드바르 황제를 만나고 계시는 중이고 우리들은 여기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헤에에에?" "다시 말해서 룬드바르군과 엘프들은 싸우지 않기로 이미 조약을 맺고 있 는 것 같습니다." 자아, 여기서 튜나의 말을 종합, 분석해 보도록 해야 겠다. 룬드바르군은 고왕국에 너무나 빨리 진입했다. 엄청나게 빨라서 고왕국의 군대들이 돌아볼 새도, 군장을 갖출 사이도 없이 진행되었다고 했다. 물론, 그 약해서 길거리에 내다 버릴 정도의 고왕국군이 군장을 차릴 준비를 하 고 만반의 태세를 갖추었다고 해서 룬드바르군을 이길 가능성은 거의 없었 다고 생각하지만. 어쨌든 간에 그들은 너무나 빨리 들어와 왕을 위협했고 왕은 침실에 앉아서 항복문서에 조인했댄다. 그 의식이 끝나자 마자 황제 는 고왕국의 왕궁의 옥좌에 터억 하니 올라앉았고 뒤를 이어 왕자들이 줄 줄이 잡혀 유폐되었다고 했다. 정말 말 그대로 한 순간에 벌어진 일이라고 한다. 그렇게 다들 멍하니 입 벌린 상태로 고왕국의 군대는 무장해지를 당했고 룬드바르제국군은 지금 현재 사방에 널린 고왕국군대에게서 항복을 받으러 바삐 뛰어다니고 있는 중이라나. 그리고 그 와중에 내가 터억 하니 수도 한 가운데에 나타나서 키메라랑 한 바탕 신나게 했었던 것이다. "공간마법사야." 내 말에 튜나가 입을 벌렸다. "뭐라고?" "꽤 강한 공간마법사가 녀석들을 이끌고 공간을 열며 여기까지 당도했다 구. 나도 지금 막 그들의 군대에 섞여서 여기 도착했다니까. 그러게 그 놈 의 마법길드를 박살냈어야 했다구." "기, 기다려봐! 그럼 공간마법사가 룬드바르군을 이끌고 공간을 열어 여기 까지 왔단 말이야? 그게 진짜야?" "물론이지, 내가 바로 그렇게 왔다니까." "그럴 리가 없어! 어떻게 공간마법으로 군대를 데리고 온단 말이야?" "하지만 사실인 걸. 내가 그렇게 왔다구." "하지만 말이야, 공간마법이라고 해도 가 본적도 없는 공간을 불쑥불쑥 드나드는 게 아니야. 공간마법을 쓰기 위해선 그 장소에 가 본 적이 있어 야 해. 그렇다면 룬드바르의 마법사들은 이곳 고왕국에 와 본 적이 있었단 이야기잖아? 고왕국에는 외지인이 거의 들어온 적이 없었다고 들었는데." "이야긴 간단한 거지. 배신자다." "배신자? 이런 곳에 나라를 팔아먹을 배신자가 있을 리가?" "배신하려고 맘만 먹으면 나라가 아니라 제 자식도 팔아 넘기는 게 인간 인 걸 뭐."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공간마법이 어떻게 가능했을 거라 생각 하냐?" 설마하니 룬드바르가 가진 마법사들이 모조리 엄청난 천재라서 아무 곳이 나 제 맘대로 휙휙 넘나들 거라고는 나도 상상치 않는 걸. 만약에 정말로 그런 공간마법사가 있다면 이 세계 저 세계 오락가락하면서 천하무적이 되 었겠지. 나는 다소 한심한 얼굴로 튜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과연 엘프들은 새대 가리라고 하더니 여전하구만. 역시 이 모든 것은 경험과 이 우수한 추리력 의 차이라고나 할까. "고왕국 내의 배신자가 룬드바르에게 붙은 거야. 그래서 그들이 군대를 이끌고 잠입한 거지." "에엑?" "녀석들이 이렇게 빨리 무슨 수로 들어왔다고 생각해? 오래 고인 물은 썩 는 거고, 고왕국은 너무 너무 썩어있었으니까 그걸 참지 못한 머리 좋은 놈들이 밖으로 뛰쳐나간 거겠지." ".................쿠베린." "얼마나 오래 묵었으면 고왕국이겠냐? 그 고왕국이란 세 글자가 모든 것 을 말해주는 거지." 그 말에 갑자기 뒤에 앉아 있던 꼬맹이가 빽 하고 소리를 지른다. "무엄하다!" 나는 대꾸대신에 옆에 겁도 없이 어슬렁거리던 고양이를 집어들어 계집애 에게로 던졌다. "꺄악!" 당연한 일이지만 비명소리를 내지르면서 계집애는 움츠러들었다. 그러나 계집애의 옆에 섰던 조인족 전사 하나가 내가 던진 고양이가 깨끗 한 백옥석 바닥에 닿기도 전에 재빨리 낚아챘다. 덕분에 고양이는 핏덩어 리가 되는 것을 겨우 면해 오줌을 갈기면서 냥냥거리고 울부짖었다. 튜나 는 입을 저억 벌리고 그 모양새를 바라보다가 나를 향해 건방지게도 잔뜩 미간을 찌푸렸다. "우, 우, 우흑흑흑흑....아앙......." "룬드바르군이 너무 빨라서 이상했었어. 하지만 대체.....그 많은 군대를 공 간을 열어 데리고 왔다니. 왠만한 공간마법사로는 불가능한 일이야. 그 정 도의 마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역시 대륙에서 몇 안될 텐데!" 튜나는 약간 풀이 죽은 듯 엘레를 바라보았다. 엘레에게 무슨 동의를 구 하듯 약한 모습을 취하는 그 가증스러운 모습에 나는 가쁜하게 대꾸해 주 었다. 뭘 배신 정도로 그렇게 충격을 먹나? 인간의 배신이야 수많은 세월 속에서 흔하고 흔한 그런 일인 걸. "암흑마도에서 이끌고 나온 마법사가 이 십명 이상이라고 하니까 가능했 겠지. 내가 죽인 마법사만도 예닐곱명 정도 되는데, 아, 물론 약해 빠진 놈 들 빼고 말이야." 튜나는 등 뒤에서 고양이들을 쓰다듬고 있는 꼬맹이를 흘긋 돌아보면서 조인족의 여왕과 시선을 마주했다. 그녀는 씁쓸한 표정으로 꼬맹이를 바라 보고 있었다. 마치 어미새가 새끼를 바라보는 것 같은 눈이라 나는 조금은 우울해졌다. 계집애가 우는 것을 모른 척하고 나는 조인족 여왕에게 물었다. "그건 그렇고 여왕께서도 룬드바르군과 싸울 마음이 없는 건가?" 여왕은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생각에 잠긴 태도로 조용히 날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받으면서 나는 다시 물었다. "룬드바르군과 싸우지 않겠다는 엘프와 뜻을 같이 한 거요?" "아니오." 그녀는 담담히 말했다. "우리는 엘프와는 다릅니다. 그들이 중립을 선언하더라도 우리들은 붙잡 힌 동족을 찾기 위해서라도 그만 둘 마음은 없습니다." 동감이다. 엘프들이 뭔 난리를 치든 말든 우리들은 그만 둘 수 없었다. 룬 드바르는 그 일단의 오크 발싸개 같은 킬트의 멍청이 제자들을 거느리고 있다. 녀석들이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 냥 놔 둘 수도 없고, 녀석들도 그냥 있을 리 없다는 것이었다. 녀석들이 조 인족을 건드린 이상, 그리고 사인족을 건드린 이상, 우리들 고대의 부족들 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게다가 나의 아이들은. "우흑흑흑......." 낑낑거리는 계집애를 무시하고 나는 튜나를 향해 물었다. "그건 그렇고 먹을 건 없냐?" 그리고 그와 동시에 말귀를 알아듣는 것처럼 고양이들이 갑자기 벌떡 일 어나 일제히 벽을 향해 돌진했다. "우왓!" 놀라서 튜나와 계집아이가 비명을 지르는 동안 고양이들은 말 그대로 겁 에 질린 양떼들처럼 벽으로 가서 붙었다. 공포에 찌든 양양 거리는 소리를 내지르면서 녀석들이 어떻게서든 밖으로 나가려고 문과 벽을 박박 긁는 것 을 만족스레 바라보면서 나는 시익 웃어 보였다. "이 것들, 분명히 말귀를 알아듣는 걸? 이 고양이들은 대체 뭐에 쓰는 것 들인지 설명좀 해 보실까?" "신의 귀라고 해요." 계집애는 오만하게 말했다. 그 머리통을 한 대 쥐어박기 위해 손을 내미 는 것을 보고 재빨리 튜나가 여자애를 뒤로 숨겼다. 계집애는 불만이 가득 한 얼굴로 입술을 툭 앞으로 내밀고는 너무 울어 시뻘개진 눈가를 비볐다. 그리고는 나를 향해 건방진 태도로 어깨를 으슥했다. "당신은 너무나 무식해서 뭐가 뭔지 모르는 모양인데. 이 고양이들은 신 의 귀라고 불리는 신성한 동물이에요. 신전에서 키우는 것들이죠. 그런 신 성한 동물의 물건을 훔치다니. 비열한 도둑같으니." 그 말을 듣고 우하하하 하고 나는 크게 웃었다. "비열한 도둑? 아, 아, 그런 오해를 하다니. 나는 이 녀석들이 존경의 의 미로 바친 보석을 주워 담았을 뿐이야. 어디까지나 녀석들 스스로 바친 거 지, 내가 훔친 건 아니지. 혹시 너 훔친다는 의미를 잘 모르는 거 아니냐?" "시끄러워욧! 당신같은 비열한과 이야기를 하는 내가 수치스러워!" 계집애의 말에 나는 잠시 머리를 짚고 튜나를 바라보았다. "이 애를 던져도 될까?" "아니." 상황파악을 잘 못하는 계집애를 위해서 나는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기로 마음 먹었다. "이 밤톨만큼도 못한 계집애야, 너는 말이지, 지금 왕녀도 아니오, 공주도 아닌 시시껄렁한 거지 계집애가 된 거란다. 원래 망한 나라의 공주들은 다 들 노예가 되는 거야. 다시 말해서 너는 노예가 되었고. 그 까닭에 이 대단 하신 쿠베린님께 감히 그 주둥아리를 놀려서는 안되는 거란다." 웃 하고 계집애가 입술을 우물거리자 옆에 있던 튜나가 내 옷자락을 잡아 당겼다.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에요?" "사실을 말하는 거야. 원래 사실 파악이 빨라야 앞으로의 미래가 있는 법 이지. 나는 공주에요 따위 말해봐야 지금 거지인 신분이 달라지는 건 아니 거든." "지독한 말 그만하고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나 말해봐요!" "뭘 어떻게 해?" 내가 되묻자 튜나는 계집애를 품안에 안은 채로 나에게 호통치듯이 물었 다. "룬드바르군과 싸울 거라면 어떻게 할 것인지, 그리고 지금 엘프들이 그 들과 계약을 하고 있는 것을 어찌 생각하는지, 게다가 당신의 묘인족들이 지금 신전이란 신전을 마구 돌아다니며 살육을 계속하고 있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 지.....!" 나는 튜나가 떠들든 말든 몸을 숙이고 잔뜩 겁에 질려서 벽에 달라붙은 고양이들을 향해 손짓을 했다. 이리 와봐라. 이리 와. 안 잡아 먹을 테니까. 고양이들은 불안한 표정으로 저마다 각각의 빛깔을 띄운 눈을 대굴대굴 굴리면서 조심조심 다가왔다. 그리고는 조로록 내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 다. 물론 불안하기 이를 데 없는 표정을 짓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말귀를 알아듣는 녀석들답게 조신한 태도였다. "쿠베린!" 튜나가 한 마디 던지려는 순간 나는 녀석들을 향해 틱 하고 손톱 하나를 꺼내들어 보였다. 그러자 고양이들은 일제히 털을 잔뜩 곧추 세우면서 뒤 로 사사삭 하고 피한다. 그 몰골을 바라보며 나는 친절하게 미소를 지었다. "자아, 너희들 중 누가 내 밥이 되겠냐?" "쿠베린!" 튜나가 한 숨을 내 쉬면서 내 팔을 잡아 당겼다. "이 신의 귀라고 하는 고양이들은 전부 저 아이의 유일한 친구에요. 쿠베 린." "유일한 친구? 일곱 마리나 되는데 뭐가 유일이냐?" "저 애는 다리를 못 움직여요. 그래서....." 작은 소리로 튜나가 속삭였다. 나는 그런가 하고 아까부터 건방진 태도로 앉아 있는 계집애쪽을 바라보았다. 작고 가는 병적인 흰 얼굴을 보면서 나 는 다시 물었다.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여긴 그럼 어디야? 신전 아니냐?" "빨리도 묻는군. 여기는 신전이야. 일루미나야여신의 신전이라고 하더군." 나는 고개를 들어 사방을 돌아보았다. 코 끝에 희미한 피 냄새가 흘러들 었다.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지?" KUBERIN............ 죽은 자들은 망각을 얻고 산 자들은 비수를 얻는다 12 나는 박살난 신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신상. 신의 조각. 신이 어떻게 생겼나 하고 인간들이 상상하는 모습. 바보 같은 인간들의 습성. 보고 만지지 않으면 느끼지도 못하는 속된 인간들의 신. 가장 무지막지하고 가장 강력하며 가장 사랑스러운 우리들의 여신께서는 인간들에게는 별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인지, 아니 면 그저 그들이 눈 앞에 선 여신을 보지 못하는 것인지 잘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인간들이 생각하는 신은 우리들의 것이 아니다. 굳이 이름을 붙여봐야 신은 신인 것을 일루미나야든 알루미나야든 그게 진짜 신의 이름 일 리는 없지 않은가. 설마하니 신이 자신을 소개할 때에 <나는 일루미나 야 라고 해. 그러니까 그렇게 불러줘.> 따위의 말을 지껄일 거라 생각하 나? 뭐, 그건 그렇다 치고. 이 박살난 신상은 결이 고운 청옥석으로 깎아 만든 것이었다. 푸른 빛깔이 도는 투명한 옥석으로 만든 신상은 마치 엘프의 고 귀한 처녀처럼 보이는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이런 조각상은 가격도 꽤 할 거니까 보물축에 드는 것일 텐데 이걸 박살을 내 놓은 게 아까워 죽겠다. 어떤 망치로 두들겼는지 인정사정 없이 산산조각이 나서 홀 안 여기저기에 구르고 있었다. 그 주변으로 신관같은 인물들로 보이는 녀석들이 여기저기 널부러져 있다. 머리가 깨지고 배가 찢어진 그 형편없는 시체들을 이리 저 리 피해 걸으면서 나는 자리에 남아 있는 냄새를 찾아서 코끝을 들어 올렸 다. 자, 다시 여기서 수수께끼 하나. 대체 여기 있는 녀석들을 죽인 것은 누굴까요? 허옇고 금빛나는 휘황찬란 한 옷을 입은 녀석들의 머리통을 까부수고 다리몽둥이 부러뜨린 자들은 누 구일까요? 허름한 옷을 입은 쑥대머리 사내들이 곳곳에 널려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요? 그 찬란한 신의 조각을 박살낸 이유는 무엇일까요? "천민들의 짓이다. 천벌을 받을 것들." 꼬마 계집애가 바퀴 의자에 앉아서 중얼거렸다. 계집애는 화려한 장식을 땋은 머리에 잔뜩 박아 휘황한 색깔을 사방에 퍼 뜨리고 있었다. 계집애는 잘난 척 비웃는 듯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가 내 시선과 마주치자 금새 홱 고개를 돌려 입술을 비죽였다. "그러니까, 천한 신의 지배를 받는 것들이 한 짓이란 말이야....." "다시 말해서 평민들이 들고 일어나 룬드바르 만세, 썩어빠진 왕족과 귀 족들을 물리쳐 주세요 했다는 거잖아?" "이, 바, 발칙한! 천민들따위는 감히 그런 생각을 할 수 없엇!" 계집애가 또 그런 소릴 하기에 나는 이 놈의 바퀴 의자를 박살내줄까 아 니면 잘난 척하는 이 길다란 머리 끄댕이를 잡고 휘휘 돌려줄까 하고 잠시 고민했지만 옆에 서서 한숨을 쉬고 있는 여왕을 봐서 참았다. 참, 여왕, 거 대단한 계집애를 맡았네. 다리도 성치 못한 계집따위는 어디에 써먹겠어? 시중을 들어줄 줄 알아? 그렇다고 지 주제를 알고 바닥에 처박혀 있길 해? 주제도 모르는 게 입만 살아서 나불거리니. 끌끌. "배신자가 누군지 너무 뻔해서 말도 안나오잖아?" 내 말에 튜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역시 평민들 중 누군가가 룬드바르에게 다가갔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네." "그건 그렇고 언제까지 여기서 이렇게 하고 있을 거야? 왕궁 안에 룬드바 르가 있대며?" "응. 그러나 마법사들은 신전에 갔다고 해. 쿠베린은 어딜 갈거야?" 튜나의 질문에 나는 잠시 생각했다. "왕궁부터 가보지." "왜?" 긴장한 얼굴로 튜나가 물었다. "가까우니까." 생각해 보면 내 생전, 이렇게까지 마법사의 도움을 많이 받았던 놈도 진 짜 드물다. 아니, 전례가 없었다고나 할까? 그런 걸 보면 킬트녀석의 그 말 도 안되는 암흑마도의 힘이라는 게 제법 대단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인리히 룬드바르. 그 녀석의 이름을 듣게 된지 3년도 채 되지 않았다. 아 니, 2년정도 밖에 안되었을 텐데 이 놈의 힘은 이미 대륙전체를 들어 올렸 다 내렸다 하고 있으니. 장난이 아니라고 할 밖에. 녀석 휘하의 마법사들은 금지된 마법인 언데드의 술법을 써서 적을 박살내고, 저 사인족을 돌격부 대 내지는 선발부대로 활용하고, 적을 급습할 때는 공간마법사를 이용하며, 적이 강할때는 만들어둔 괴수부대를 사용한다. 이렇게 엄청난 마법사 집단 을 거느리게 되다니, 저 놈의 운도 엄청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 그러 나, 그러나 말이다. 여기서 녀석은 삐끗해버린 것이다. 이 쿠베린님을 건드리다니. 묘인족을 건드리다니. 가만히 놀고 있는 묘인 족을 건드려 여기서 불꽃을 피워 올리다니. 바보 아니야? 나는 누구 말대로 쭈욱 펼쳐진 방사형의 대로를 통해 걷고 있었다. 이 늠 름하게 걷는 이 모습을 보며 아무도 제지하지 않았다. 아니, 제지하지 않았 다기 보다는 아무도 내가 뭘 하고 있는지 신경 쓰지 않았다. 고왕국의 수도라는 것은, 상상외로 엄청나게 컸다. 금빛 둥근 지붕을 덮고 있는 건물들은 왕궁만이 아니라 보통의 큰 건물 대 부분이 다 그런 형식이었던 모양이다. 길은 깨끗하게 돌이 깔려 있고 담장 은 깨끗하기 이를 데가 없다. 그리고 그 깨끗한 붉은 벽돌로 만든 골목길 마다 룬드바르 군의 복장을 한 녀석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약탈하느라 바쁘다. 녀석들은 저마다 한 주머니씩 차고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그들 주변으로 비명을 질러대는 여자들과 남자들이 길 바닥에 무슨 강아지 끌 듯 끌려 다니고 있었다. 저마다 화려한 금빛과 초록, 연두 같은 선명하 고 매끄러워 보이는 옷을 걸친 그들은 척 보기만 해도 엘프들과 착각이 될 만큼 아름다운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후줄그레한 시커먼 옷 을 걸친 사내들이 억척스레 이리 저리 끌고 가는 것이다. 나는 어느 쪽에 도 해당되지 않는 평범한 옷에 덥수룩한 머리에 안그래도 피로 얼룩덜룩한 몰골을 하고 있었기 때문인지 아무도 나를 돌아보지 않는다. 그거 약간 서 운하군. "살려줘!" "이게 무슨 짓이냐!" 저마다 질러대는 소리는 비슷하다. 네깟것들이 어떻게 이런 짓을 하느냐 가 주된 화제인 모양이다. 나는 그런 소리를 들으면서 험악한 몰골의 앙상 한 자들이 끌고 가는 화려한 자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나 선명하고 깨끗하게 장식된 바닥과 그림이 그려진 울긋불긋한 담장 너머로 여자들을 강간하고 남자들을 학살하는 자들이 있다. 피가 그 화사 한 분홍빛 벽화에 튀어 거무튀튀한 얼룩을 남기고, 오렌지빛 선명한 바닥 의 타일에 뇌수가 튄다. 그 너무나 선명한 색깔을 피로하게 여기면서 나는 왕궁으로 걸었다. 튜나와 엘레는 그 말도 안되는 계집애를 지키고, 조인족의 여왕은 내 뒤 를 따랐다. 세 명의 조인족 전사들이 굳은 얼굴로 그 학살의 현장을 회피 하듯이 고개를 떨구고 따라 걷는 것을 보고 나는 여왕에게로 손을 내밀었 다. "이런 꼴 별로 좋아하지 않지요?" "..........네." 그녀의 우아한 흰 목을 바라보면서 나는 피식 웃었다. "여왕께선 이런 분쟁을 많이 보지 않은 것 같은데." "그렇습니다. 나는, 아니 우리들은 분쟁이 많은 종족은 아니지요." 그 완고하게 굳은 턱은 섬세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날 바라보고 있었다. 약간 턱을 치켜든 여왕은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을 그대로 좌시하기엔 고통 스럽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할 거요? 룬드바르 휘하의 마법사들이 저지른 일을 그대로 내버 려 둘 것은 아니겠지?" 내가 웃으면서 묻자 여왕도 희미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렇지요. 우리들 조인족의 희생도 사인족 못지 않아요. 더더욱이 그들은 우리들의 여자를 잡아 갔으니까요." 나는 빙글빙글 웃으면서 그녀의 허리를 잡았다. 아아, 나긋나긋한 허리. 향기로운 피와 살의 냄새가 난다. 그녀가 가지는 건강하고 강인한 삶의 냄 새. 화장기 따위는 없는 여인의 순수한 그 냄새. 나는 그녀의 목덜미에 코 를 묻었다. 역시 좋아. 여자라는 것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인한 여자는 아이를 만들어 내어 내 앞에 드러내 놓는다. 여자란 생명.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 인하고 유약한 그것- 생명을 키우고 보듬어 내는 놀라운 존재. 나는 조인족전사들이 발작하기 전에 그녀의 목덜미에서 얼굴을 떼며 웃었 다. "그럼, 여왕. 시작해 봅시다." 왕궁이라 이름 붙여진 궁을 향해 우리들은 맹렬하게 달려갔다. 처음 우리들을 본 자는 눈을 크게 뜰 사이도 없이 목이 댕강 하고 잘려져 나가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놀람의 비명을 지를 사이도 없이 두 번째, 세 번째의 병사가 조인족 전사들의 손에 의해 심장이 찢기워 바닥으로 나동그 라진다. 피의 냄새가 콧속을 완전히 채우고 뛰는 심장에 박차를 가한다. 날 아라, 날아! 달려라, 달려! 발끝으로 죽은 자를 밟고 손 끝으로는 산 자를 찌른다. 조인족이 얼마나 죽이는 지 나는 모르고, 내가 지금 얼마나 죽이고 있는 지 나도 모른다. 황금빛으로 뒤덮힌 섬세한 기둥을 피로 물들이고, 꽃을 새긴 화려한 타일 을 시체로 뒤덮으면서 나는 내달리고 있었다. 룬드바르 군이든 누구든 내 앞을 막으면 무조건 죽였다. 엘프의 냄새를 찾아 내 달리면서 나는 지금 어쩌면 인간으로선 제법 상당한 위치에 오른 놈을 찾아가고 있다는 것에 대해 약간은 흥분했다. 하인리히 룬드바르, 하인리히 룬드바르, 놀랍게도 내게 자기 이름을 기억하게 만든 그 어떤 발칙하고 방자한 놈 때문에 나는 웃음이 터져나왔다. 대단한 녀석이잖아? 이 몸께서 이름을 기억하다니 말 이야. "서랏! 누, 누..." 소리를 지르기도 전에 문을 막아선 녀석의 목을 댕강 잘라버렸다. 휘익 휘 익 녀석의 모가지가 피를 뿜으면서 문을 박았다. 엘프의 소녀를 새긴, 조각 으로 가득한 거대한 문짝을 발로 걷어 차면서 나는 큰 소리로 웃고 싶어 졌다. "쏴, 쏴라!" 문짝을 열고 들어서자 마자 어떤 녀석, 아니 녀석들이 안 쪽에서 일제히 나에게 화살을 날렸지만 그 화살이 내게 도달하기도 전에 나는 벽을 밟고 튀어 올라 높은 천정에 매달린 샹데리아에 매달렸다. 화살이 무참하게 바 닥에 가 박히는 것을 구경하면서 나는 샹데리아에 유유히 매달린 채로 주 변을 돌아보았다. "세, 세상에! 인간이 아냐!" "저건!" "폐하를 보호하라!"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제법 튼튼하게 생긴 녀석들이 옥좌에 앉은 녀석을 향해 맹렬하게 돌진하더니 그를 감싸기 시작했다. 금새 인간의 벽이 생긴 것을 바라보면서 나는 낯익은 얼굴을 향해 손을 들어 보였다. "여어, 잘 있었나? 엉덩이?" 엘프의 왕은 엉거주춤한 채 일어서려다 말고 도로 자리에 앉고 있었다. 그의 옆에 앉은 아크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한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었 지만 그 얼굴에는 긴장감이 떠올라 있었다. 그들의 옆으로 엘프들 몇이 앉 거나 서 있었다. 그들 중에 그 색마 녀석도 끼어 있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나는 재빨리 그들의 옆으로 뛰어 내렸다. "정말 어쩔 수 없군." 한탄하듯이 엉덩이가 말했다. "뭘 어쩔 수 없단 말이냐?" 나는 피식 웃었다. 시선을 다시 튼실한 기사들로 담을 쌓은 녀석에게로 돌 리자, 그 쪽에서 움찔 긴장하는 게 느껴졌다. 이미 내가 복도와 문가에서 죽인 자에게서 흘러나오는 피 비린내로 방안, 아니 홀 안은 가득 차있었다. 아마 여기는 왕궁에서도 대전에 해당하는 지 엄청나게 높은 천장에 상당히 넓은 공간을 가지고 있었다. 곳곳에 널린 황 금과 옥, 그리고 보석으로 치장된 것만 보아도 이놈의 고왕국이 얼마나 할 일 없는 녀석들인가를 단적으로 드러내 놓고 있는 듯했다. "누구냐?" 온통 기사들에게 둘러 싸인 채 앉아 있던 녀석이 일어서서 그 인간담을 헤치고 앞으로 걸어 나왔다. 녀석은 여전히 가무잡잡한 얼굴에 오만하게 생긴 낯짝을 하고 있었다. 걸쳐 입은 옷은 그 왕년 델리암의 왕이었던 시 든 오이가 걸쳤던 것과 비슷하긴 했지만 길이가 짧았다. 고왕국의 기사나 부랑이와는 전혀 다른 굵고 쭉 뻗은 다리와 팔이 제법 단단해 보였다. "뭐가 누구야? 너 나 처음 보는 것도 아니잖냐?" 내 말에 옆에 있던 녀석들이 악악 하면서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이 무례한 것! 대체!" "감히 대제께!" 악악거리는 녀석들을 모른 척하고 나는 씨익 웃어 주었다. 녀석은 나를 잔뜩 찌푸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 그렇군, 저 녀석은 내가 어린 몸일 때 봤었지? "분홍주둥이는 어디에 있지?" "분홍...주둥이?" 녀석이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더니 날 바라보며 묻는다. "너는 누구냐?" "건방진 녀석. 이 몸에게 감히 너는 운운하다니." 내가 웃자 녀석은 조금 더 초조해졌는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려 했다. 그 러나 그 순간 녀석의 앞에 있던 젊은 기사들이 파르르 떨며 내 앞으로 돌 진했다. "이 무례한 녀석! 죽어라!" 이 건방지고도 무례한 행동에 대해서 내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인가? 나는 관대하게도 녀석의 머리통을 깨끗이 분리시키는 것으로 응당의 보답 을 해주었다. 그 뒤를 이어 덤벼드는 녀석들 서넛을 일제히 반토막으로 만 들어 놓자 마자 그제서야 공포가 그들의 머리 위로 올라 앉았다. ".....허, 억....이, 인간이 아니군." 놀란 음성으로 몇몇이 중얼거리는 동안 엘프의 왕이 나를 제지했다. "기다리게. 쿠베린." "기다리고 있잖아?" 그럼 내가 지금 기다리고 있는 거지 뭘 하는 걸로 보이냐? 안 기다렸으면 이 자리에 한 놈도 살아 남지 못했고 말고. "그가 쿠베린인가?" 그제서야 경악한 음성으로 룬드바르 녀석이 입을 열었다. KUBERIN............ 죽은 자들은 망각을 얻고 산 자들은 비수를 얻는다 13 겁대가리 없이 날 바라보는 눈을 나도 마주 바라보았다. 이 녀석은 겁이 없는 편이겠지. 나도 그래, 겁이 없는 편이지. 녀석은 나를 처음 보는 듯이 아주 자세히 훑고 있었다. 어딘가 묘하게 나는 절대로 욕심쟁이가 아니어 요 라고 외치는 듯 보이는 간결한 갈색 눈동자에는 숨길 수 없는 호기심이 어려있다. 그래, 이 몸이 어떤 분인지 궁금하냐? "일단, 앉지." 엘프의 왕이 나에게 조용한 어조로 말을 건넸다. 나는 하인리히 녀석의 타오를 듯한 구애의 시선을 받으면서 의자에 앉았 다. 이봐, 그렇게 애절하게(?) 바라보면 나도 마음이 떨려. 주변은 조용해졌다. 바닥에 뒹구는 시퍼런 머리통들과 바닥에 흐르는 시뻘 건 선혈과 이리 저리 흩어진 주인 잃은 무구들을 스윽 훑어보면서 녀석이 나에게 말을 건다. "이게 무슨 짓이지? 전에도 말했지만, 쿠베린, 당신은 대체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지?" 자, 여러분, 잠깐만. 지금 여기서 이 놈이 뭐라 했는지 다들 들으셨겠지? 이야기 꾼, 음유시인, 이봐, 다들 적어 놔. 저 오세리안해의 주인이며 뭐, 좁아 터진 룬드바르 평원의 주인이자 대륙의 정복자인 분이, 너무 너무 한 일이 많아서 자기가 뭘 했는지도 기억을 못하네. 얼마나 그동안 저지른 일 들이 많았으면 이렇게까지 멍청한 발언을 서슴없이 하는 걸까? 녀석의 말에 내 옆에 앉아 있던 모든 엘프들이 아연한 얼굴로 녀석을 바 라본다. 정말 기 막히네. 사람 죽여 놓고 너 왜 죽었냐 하는 식 아냐? 이런 걸 엘리야 식으로는 '과부 욕보이고 눈물 닦는다' 라고 하지. 이 모든 이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던 녀석은 이 모든 자들이 전부 야릇한 눈초리로 바라보자 흠 하고 눈썹을 꿈틀거렸다. 네 녀석이 눈썹을 일부러 움직이지 않아도 눈썹은 눈썹이야. 다 눈 위에 달려 있지. "전에 말했을 때 옆에 있던 분홍주둥이 녀석은 어디있지?" "분홍 주둥이?" 녀석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는 옆에 선 자를 향해 다시 묻는다. "누굴 말하는 거지?" 옆에 서 있던 검은 머리에 회색 눈을 한 남자가 조용히 대꾸했다. "마베릭이겠죠." "마베릭....을 분홍주둥이라고 부르는 건가? 하?" 녀석은 뭐가 재미있는 지 킬킬거리면서 날 바라보았다. "마베릭은 왜?" "그 녀석을 죽여야 하거든." 내가 미소짓자 녀석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그러나 대담하게도 녀석은 나 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니, 이 경우 대담하다고 하는 게 아니다. 간이 배밖에 튀어 나와서 퉁퉁 뛰어 다닌다고 말해야 할 게다. "네가 마베릭을 죽일 수 있을까?" 나는 그저 미소만 지어 보였다. 이 말 같지 않은 일에 대해선 길게 말할 것이 없으니까. 그도 잠깐, 나는 보다 너무나 즐거운 사실을 발견했다. 아, 나도 둔해졌어. 저걸 왜 몰랐을까? 나의 시선이 룬드바르 본인이 아니라 녀석의 바로 옆, 아니 그 옆의 옆에 쏠려 있다는 것을 깨닫고 모두의 시선이 그리로 집중했다. 룬드바르의 옆 에 마누라처럼 달라붙어 있는 검은 머리 기사 옆에 팔짱을 끼고 선 누렁털 의 사내와 갈색털의 사내가 내 시야에 들어왔다.그리고 한 순간 한 줄기 바람처럼 무엇인가가 내 뒤통수를 스쳐 갔다. 시선이다. 냄새 나는 시선. 웃으며 돌아보니 다른 병사들과 함께 문가에 서 있던 은빛 털을 가진 두 놈의 젊은 녀석이 한 눈에 들어왔다. 그 녀석들은 나를 바라보면서 점점 숨이 거칠어 지고 있었다. 녀석들의 눈가에서 피어 오르는 숨길 수 없는 흥분의 빛과 공포의 빛, 그리고 살의 가 뭉개뭉개 치솟아 올라 이 좁지도 않은 대전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사인족?" 낮게 아크가 중얼거리는 순간이었다. 쨍그랑 하고 엄청난 소음과 함께 대전의 맨 꼭대기에서 갑자기 유리조각 이 쏟아져 내렸다. 비명소리에도 불구하고 그 유리조각은 마치 박살난 보석처럼 황홀한 빛을 사방으로 뿌리면서 우아하게 흩어져 내렸다. 그 아래 있던 몇몇 인간들이 피를 뿌리면서 다급히 피하려했던 것도, 돼지 잡듯 울려퍼지는 비명소리도 그 황홀한 아름다움을 어쩌진 못했다. 바깥의 빛과, 대전안에 있던 샹데리아에서 흐르는 빛이 박살난 색유리와 함께 형형색색의 그림을 그리는 동안 그 유리조각과 함께 등장한 네 명은 말 그대로 전설속에 나오는 여신처럼 등장했다. 붉은 날개를 공중 한 가득히 펼쳐내고 있는 조인족의 여왕과 그녀의 뒤에 마치 청동으로 만든 기둥처럼 버티고 선 세 명의 전사는 묵묵히 대전안을 훑어보고 있었다. "조인족!" 몇몇 녀석들이 감탄에 비명을 섞어서 야릇한 소리를 내지르는 동안 조인 족의 여왕은 보석처럼 빛나는 눈동자를 들어서 룬드바르를 직시했다. 그 황홀한 아름다움에 한 동안 말을 잊었는지 녀석은 입을 벌리고 여왕을 멍 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그 와중에도 녀석의 민첩한 부하들은 별로 소 용도 없는 인간의 벽을 몇겹이나 싸서 자신들의 주인을 보호하려고 했다. "..............처음이군요. 인간의 왕." 짧게 조인족의 여왕이 말했다. 그녀는 경멸의 기색조차 띄우지 않은 채 그 를 바라보고 있었다. 룬드바르는 황홀에 가까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가 그 말에 정신을 차린 듯 다시 수컷 특유의 능글맞은 표정으로 변하 고 있었다. "그렇군요. 조인족의 여왕이여." ".............." "당신께서도 이 곳에 조약을 맺으러 오신 거요? 아니면 여기 있는 쿠베린 처럼 나에게 시비를 걸러 오신 거요?" 그 뻔뻔한 말에 내가 막 뭐라 할 찰나였다. 푸앗 하고 무엇이 룬드바르의 앞으로 튀어올랐다. 그것은 시뻘겋고 시커먼 액체로, 룬드바르의 바로 앞에 몇 겹이나 벽을 쌓 은 기사들 열 명중 일곱 명의 몸안에서 튀어 올랐다. 얼마나 빨랐는지 자 기 몸에서 흘러나온 피를, 그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바라보고만 있었다. 자 신들의 팔뚝이 잘려나가고, 가슴이 쪼개지고, 머리가 잘려진 것도 모르고 두 다리는 서 있기만 했다. 마침내 여기저기서 숨막히는 비명이 흘러나오 자 그 제서야 목을 잃고 심장을 잃은 시체들은 푸들푸들 떨다가 앞으로 고 꾸라졌다. 나는 조인족의 여왕을 흘긋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무표정했고 움직임은 전혀 없었던 것 같지만 그녀의 옷깃 한 군데에 핏방울이 미세하게 튀어 있었다. 그녀의 손톱은 나와 달라 갈쿠 리처럼 둥글었지만 잔악해서 그 손톱 끄트머리에 방금 그녀가 죽여버린 기 사의 심장 조각이 달라 붙어 있었다. "우, 웃.....!" "시비를 걸러 온 게 아니오. 인간의 왕이여. 나는 당신의 죄를 물으려고 왔소." 여왕은 전혀 감정이 없는 목소리로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룬드바르 만이 아니고 주변에 있던 병사들은 그제서야 자신들이 얼마나 무 서운 존재들과 얼굴을 맞대고 있으며, 이 눈앞의 아름다운 여인이 밖의 수 많은 경비들을 어떻게 물리치고 이 곳으로 들어온 것인지를 깨달았던 모양 이다. 갑자기 이 둔한 인간들 사이로 공포라는 것이 물결처럼 일어나 순식 간에 그들의 시야를 덮어 버렸다. "무슨 소릴 하는 거지? 죄를 물을 자격이 그대에게 있다고?" 룬드바르가 동요한 얼굴을 숨기고 큰 소리로 묻자, 조인족의 여왕은 더더 욱이 조용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납치된 우리 동족은 어디 있으며, 왜 우리들을 건드려 수 많은 자들을 해쳤는가?" 그 말에 녀석은 얼굴을 찌푸렸다. "전쟁이다. 전쟁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하는 일 따위 나에게 일일이 물을 셈인가?" 녀석은 뻔뻔하게 그렇게 말을 잇더니 여왕을 똑바로 바라보며 외쳤다. "전쟁에 휘말린 것 뿐이잖은가! 그대의 일족은 그저 전쟁에 휘말렸을 뿐 이다. 희생자는 어쩔 수 없는 일이고, 그 일을 나에게 묻고 싶다면 그대들 이 죽인 내 병사에 대해서 나도 묻고 싶은 걸!" 나라면 그 대담성에는 박수를 쳐주겠지만, 여왕은 슬프게도 내가 아니었다. "그런가? 전쟁에 휘말린 것이라 어쩔 수 없는 것이라? 그대는 전쟁을 할 때 산 속 깊이 지내는 단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일족을 이끌고 들어갔다. 이것은 역대 어떤 인간도 하지 않은 짓이지. 이 것은 우연이 절대 아니다." 여왕은 지나치게 조리가 정연해서 나는 속에서 불이 날 것 같았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까지 줄줄이 설명하고 있는 것이야? 어차피 인간들 따위는 알아듣지도 못할 것을. "여왕, 길게 말할 거 없소. 그런 걸 알아들을 놈이라면 전쟁을 일으키지도 않았고 여기까지 나오지도 않았지. 저기 저 면상을 보면 몰라? 저 놈은 자 기 이외의 어떤 존재의 아픔에도 고개를 돌릴 자가 아니야. 자기 앞에서 지금 몇이나 되는 기사가 몰살을 당했어도 말짱하잖아?" 내 말에 여왕은 슬픈 듯 엷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렇군요. 묘인족의 왕. 인간은 너무나 많아서 하나 하나가 소중한 존재 라고는 생각지 않는가 봐요." 그녀는 슬픈 듯이 그렇게 말하고는 엘프들의 왕을 돌아보았다. 엘프의 왕 은 망연히 그녀를 쳐다보고 있는 중이었다. "엘프의 왕이여, 가장 오래된 지혜를 가진 한 분이여." 그녀는 너무나도 슬프게 말했다. "당신은 인간을 너무나 신용하고 있습니다." 그 순간 바람처럼 그녀의 뒤에 있던 자들이 움직였다. 날개가 움직이는가 하는 순간 그들은 이미 홀안에 있는 병사들을 향해 덮쳐가고 있었다. 이거, 이거, 늦으면 곤란하겠군. "사인족을 건드리는 놈은 내가 죽여버린다!" 맨 처음은 바로 문가에 서서 잔뜩 도사린 은빛 털을 가진 두 녀석이었다. "사인족!" 녀석들은 내가 외치자 대답대신 이빨을 드러냈다. "지긋지긋한 묘인족!" "이 몸께서 너희들의 목숨을 손수 걷어 가시려고 여기 왔다는 걸 영광으 로 여겨!" 나는 녀석들이 몸을 변화시키는 것을 느끼면서 일직선으로 허공을 날았다. 내 발 끝에 몇몇 인간들이 고꾸라졌지만 그건 내 알 바가 아니었다. 녀석 들은 노랗게 눈을 빛내면서 당장에 몸을 수그리며 변신모드에 들어갔다. 1 단계 변신을 지나서 녀석들이 단숨에 2단계 변신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며 나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너희들로 이제 사인족은 몇이나 남았을까?" 눈 앞이 붉게 타올랐다. 녀석들이 완전히 누런 털로 뒤덮히고 네 개의 팔뚝을 드러낸 채로 포효하 는 것을 몽롱하게 들으면서 나는 내 몸안에 흐르는 피를 느꼈다. 피는 역 류하고 나의 심장은 터질 듯이 그것들을 받아들이고 뿜어낸다. 내 온 몸 작고 가는 혈관으로 퍼져나가는 격류가 온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어 놓았 다. 터질 것 같은 묵직한 고통이 저 깊은 곳에서부터 튀어 나왔다. 나는 고 함을 치고 있었다. 고함 소리, 고함 소리. 사인족사인족사인족사인족사인족사인족사인족사인족사인족사인족사인족...... ....... 내 딸 내 딸 내 딸 내 딸 내 딸 내 딸 내 딸 내 딸 내 딸 내 딸 내 딸 내 딸........... 미트라미트라미트라미트라미트라미트라미트라미트라미트라미트라미트라미 트라....... 네 개의 팔뚝을 잘라내며 광분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기뻐서 덩실덩 실 춤을 추었다. 내 딸아, 너의 팔을 잘라낸 것처럼 모든 사인족의 팔을 잘라내고, 너의 다 리를 잘라낸 어떤 녀석처럼 모든 사인족의 다리를 잘라내고, 너의 배를 헤 집은 것처럼 모든 사인족의 뱃속을 헤집어 심장을 파낸다. 터져라, 심장! 사인족의 감탄할 만한 심장, 터지고 또 터져서 내 딸 보다 백 배 천 배는 고통스러워해라! 가슴에 손톱을 집어 넣어 녀석의 심장을 끄집어 내던지고 손안에 잡히는 따끈한 내장을 비틀어 꺼내 허공으로 내던진다. 강인한 사인족의 생명력이 나에게 뜨거운 피를 뿜으면서 덤비는 것이 너무나 기뻐서 나는 웃음을 도 저히 참을 수 없었다. 봐라, 미트라, 가련한 공주님! 너를 죽인 이 악당을 이 용사께서 이렇게 박살내 줄거야. 너의 심장을 꿰뚫은 것 이상으로 녀석들을 짓밟고 너에게 고통을 맛보게 한 것 이상으로 녀석들을 몰살시킨다. 이 세상 어디에도 미 트라, 너만은 단 한 명, 사인족따위보다 훨씬 무게가 나가는 무지막지한 내 아가씨, 가련한 내 공주님. 한 녀석이 나를 향해 노골적인 공포의 표정을 지으면서 뒤로 물러서고 있 었다. 2단계 변신까지 한 주제에 나를 향해 그런 태도를 취하면 정말 슬프 지. 슬프고 말고. 너는 말이지, 강해야 해. 내 모든 분노를 다 감당해 낼 정 도로 강하고 강하고 또 강하고 질기고 질기고 또 질겨야 하고 말고. 그래, 이리로 와! 네 놈의 손톱을 잡아 부러뜨리고 네 놈의 전신의 뼈를 박살내 고 네 놈의 살점을 갈갈이 뜯어서 집어 삼키겠어! 그래, 배가 고파! 배가 고파서 뱃가죽이 등에 달라 붙을 것 같아! 도망치다니, 사인족 양반, 그럼 못써! 나는 도망치는 한 녀석의 모가지를 비틀어 대며 녀석의 두 목줄기에 손톱 을 박았다. 손톱은 녀석의 강인한 근육을 제대로 뚫지 못하고 튕겨 나갔지 만 녀석의 어깨 뼈가 박살나게 만들어 놓았다. 비명을 지르며 녀석은 어깨 위에 올라앉은 나를 떨구기 위해서 몸부림을 치려고 했지만 나는 녀석의 두개골 밑 부드러운 연골을 향해 손톱을 밀어 넣었다. 푸욱 하고 부드럽게 박히는 그 감촉은, 살보다도 연하고 내장보다도 부드러운 감촉이었다. 주르 륵 하고 노란 색의 액체가 녀석의 머리에서 흘러내렸다. 녀석의 눈알이 반 쯤 튀어나오고 혀가 길게 빠져 나온다. 천천히 녀석의 몸뚱이가 제어와 힘 을 잃고 쓰러지는 것을 보며 나는 녀석의 목덜미를 덥석 물고 우드득 우드 득 씹기 시작했다. "흐흐... 으흐흐흐....." 모두가 날 바라보고 있다. 조인족의 전사들과 인간들, 그리고 엘프들은 나를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 었다. 나는 사인족의 뇌수를 삼키면서 아직도 허기를 느끼고 있었다. 제기랄, 대 체 왜 이렇게 배가 고픈 거지? 왜 이렇게 허전한 거야? 마미의 스튜가 그 리워, 그녀의 통구이가 그리워. 사방이 다 고요했다. 내가 씹어 삼키는 사인족의 뼈가 아드득 아드득 부서 지는 소리만이 대전 안을 울리고 있을 뿐이었다. 나머지 한 명, 바로 룬드바르 옆에 서 있는 사인족 만이 유일하게 살아 남 은 녀석이었다. 얼레, 너무 빨랐어. 벌써 세 놈이나 죽여버렸어? 천천히 죽 일 걸, 너무 급했네. 나는 겁에 질려 꼼짝도 못하는 사인족 녀석을 향해 씨익 웃었다. "네가 마지막이야." 내 시선을 받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난 녀석은 으르렁거리면서 다급히 외쳤 다. "나는 불사다." "허? 불사?" 나는 마지막에 남은 사인족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되물었다. 겁에 질린 녀석은 갈색 털을 잔뜩 도사린 채 변신도 하지 않고 있었다. 나 는 녀석의 앞에 서서 싱글벙글 웃으면서 친절하게 되물었다. "사인족이 불사란 이야기 나 들은 적 없는데?" 그리고 불사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까지 좋을 것도 없을 텐데. 네 놈같이 약해빠진 놈으로선 말이야. 오히려, 이 경우는 너무 너무 나를 즐겁게 해주 는 것이야. 나의 웃음을 보면서 녀석은 주제에 화가 난 것인지 이를 갈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마, 마법이다." 녀석이 대꾸같지도 않은 대꾸를 하면서 나를 향해 송곳니를 드러냈다. 그 리고 동시에 별로 대단치도 않은 두 개의 손을 내밀고, 그 날카롭지도 않 은 손톱을 들이밀며 내게 돌진해 왔다. 달려나오며 2단계의 변신을 거듭한 녀석은 내 주먹을 받고 뒤로 튕겨나가더니 그대로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그 여력을 못 이겨 바닥은 시끄러운 소리를 내면서 갈라졌다. 이미 근처에 선 자들은 하나도 없었다. 나는 녀석이 피를 토하면서 천천히 눈을 가늘게 뜨는 것을 지켜보았다. 녀석의 눈동자는 노란 색에서 천천히 흰 색으로 바 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눈동자가 흰자위와 같아지는 순간 녀석이 바닥을 박차고 뛰어 올랐다. 일직선으로 튀어 오른 녀석은 나를 향해서 그대로 어 깨로 들이밀었다. 두 팔을 앞으로 들어 올리면서 녀석의 몸체를 막자 엄청 난 충격이 글자 그대로 머릿속까지 달려들어와 이빨이 덜렁거릴 정도였다. 자, 잠깐, 아무리 나라고 해도 설마하니 나, 여지껏 변신도 하지 않고 싸우 고 있었네, 그려. 갑자기 팽 소리와 함께 머리가 뒤로 돌아갔다. 뻐억하고 별로 상쾌하지 않 은 소리와 함께 나는 뒤로 나자빠졌다. 녀석의 주먹이 나의 턱 한가운데를 명중시켰던지 턱이 얼얼하다 못해 빠개질 것 같았다. ".......................크으으앙" 녀석이 이를 갈면서 그렇게 외쳤다. 갑자기 웃음이 나와서 나는 시익 웃고 말았다. 웃는 바람에 턱과 입술이 아프다. 이런, 입가가 찢어졌네. 저 녀석의 저 소리는 틀림없이 <지긋지긋 한 묘인족> 이거나, <나는 묘인족이 싫어요> 라든가, <묘인족이 무서워요 >와 비슷한 의미일 것이다. 가련한 녀석. 무섭냐? 무서워? 그렇다면 나를 건드리지 말았어야지. 그렇다면 이 내가 변신하게 만들지 말았어야지. "우오오오오오오오오..........." 경쾌한 고함, 포효, 여지껏 지르지 않았던 소리. 눈앞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두 손에서 손톱이 튀어 나오고 숨겨졌던 발톱 이 자랑스레 튕겨 나왔다. 그래, 그래. 3단계 변신한 녀석을 앞에 두고 이 런 무례한 짓을 해선 안되는 거야. 녀석은 나의 변신에 놀랐는지 그대로 나를 향해 뛰어 들었다. 그리고 고개 를 앞으로 내뻗으면서 비명같은 고함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녀석의 전신에 난 털이 일제히 나를 향해 쏟아져 나온다. 공기를 갈가리 찢어대는 파공성 과 함께 녀석의 털이 수백, 수천이 일제히 내 몸뚱이에 들이박혔다. 끔찍한 감각이 가슴과 배에, 그리고 얼굴에서 일제히 몸부림을 치며 내 뇌수로 달 려 들었다. 고통, 고통, 선열한 고통. "크흐, 크흐. 하, 하하하하하하하...........!" 첫 번째 변신이 지나가고 그 다음 두 번째 변신이 시작되었다. 나는 온 몸 을 숙이고 내 몸안에서 살갗 안쪽으로 파고들어 오려는 사인족의 바늘같은 털들을 위해 전신을 흔들었다. 근육이 비명을 지르고 조금더 조금더 하는 소리를 외치면서 이 이물질들을 튕겨내려 애쓰고 있었다. 사인족의 녀석은 내가 변신을 더 하기 전에 끝내려는 듯 미친 듯이 달려들어 나를 할퀴기 시작했다. 사인족 놈들이 가진 그 짧은 손톱이 어느 새인지 인간들의 보검 으로 화해서 나를 내찔러온다. 그 보검이 내 가슴으로, 내 심장으로 찔러들 어오는 것을 느끼면서 나는 갑작스런 열기로 웃음을 터뜨렸다. "하! 파하하하하하하.......!" 두근두근하고 심장이 뛴다. 격렬한 움직임으로 심장이 뛴다. 이것이었다. 이것이었을 게다. 미트라와 나의 아이를 상처낸 것은. 어째서, 어째서 사인족들은 인간들의 무기를 사용하는 것일까? 묘인족과 조인족에 비해 짧고 왜소한 손톱을 보강하기 위해 녀석들은 인간들의 무기 로 자신들의 적을 죽인다. 대체, 이 놈들은 그토록 인간을 증오하면서도 가 장 인간들과 닮아 있는 것일까. 웃음소리가 터져나온다. 눈앞은 이미 새빨갛게 물들고, 귓가에서 들리는 소 리란 단 한가지, 상대의 심장소리뿐. 이거야, 이게 바로 내가 바라던 황홀 감.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나의 즐거움. 내가 바라는 것은 이 것이었다구. 인간들이 사라지고, 룬드바르가 사라지고, 엘프들이 사라지고, 조인족이 사 라지고, 마침내 사인족조차 사라졌다. 서 있는 것은 오로지 나와 '상대' 뿐. 어디에서 들리는 지 알 수도 없는 웅웅웅 하는 기묘한 소리가 내 몸을 덮 어간다. 미트라, 가련한 내 아가씨, 채 자라지도 못한 내 딸, 혼자 싸우다 죽어버린 조그마한 파란 내 아들. 울부짖는 자들의 소리. 내 숨소리인지 남의 숨소리 인지 잘 알 수 없는 작은 소음들. 땅 바닥에서 속삭이는 작은 벌레들의 움 직임. 살아 움직이는 것들은 모두 다 없앤다. 내 앞에서 강한 척을 하며 감 히 내 앞에 서서 움직이는 놈들은 다 죽인다. 나는 이 자리의 왕이다. 나는 이 자리에서 가장 강한 자이다. 나는 강하다. 나는 강하다. 나는 강하다. 뜨거운 열기와 함께 춤을 춘다. 내 심장소리에 맞추어 박수를 친다. 나를 막는 것을 부수며 웃음을 짓는다. 살육의 여신과 죽음의 여신이 내 어깨 위에 내려 앉아 나의 웃음소리에 맞추어 악기를 연주한다. 연주 소리는 내 가 들은 것 중 가장 흉측할 정도로 아름답다. 광기의 여신이 나에게 미소 를 짓는다. 대지의 여신은 내가 제물을 던져 줄 것을 기다리고 있다. 천공 의 여신은 나를 굽어보며 손짓을 한다. 나는 미치고 미쳐서 이 온 몸에 도 는 피가 부르는 노래에 맞춰서 노래하고 춤추고 웃음 짓는다. 두 다리는 무엇을 밟는 지 알 수가 없고 두 팔은 대체 뭘 하고 있는 것일까? 눈앞에 서 울부짖는 것은 대체 무엇이고 내가 짓밟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다 나가! 미친 듯이 도망가라!" "대적하지마! 당장 이 자리를 피해!" "어서! 어서 달아나라!" 누군가가 외치고 있었다. 그 누군가는 내가 아는 녀석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나는 웃으면서 춤을 춘다. 내 춤사위에 들떠서 검붉은 선은 제 멋대로 허공에 그림을 그린다. "제기랄! 미쳤어! 진짜 미쳤어!" "저, 저게 쿠베린 맞아?" "오오, 맙소사! 저 놈이 저렇게 되는 것은 대체 몇백년만의 일이냐?" "어서 나가!" 비명소리가 터져나오는 것을 무기력하게 들으면서 움직인다. 어떤 녀석이 떠들고 어떤 녀석이 강하고 그런 것은 이제 상관이 없었다. 내 앞에서 강 한 놈, 그 놈을 죽이면 된다. 자아, 이 자리에서 내가 말한대로 되는 거다. 일그러진 움직임을 한 어떤 녀석이 실제로 내 눈앞에서 일그러졌다. 녀석 의 팔뚝을 잡아 뜯어 삼키면서 내가 말하고 있다. "너, 불사라며? 불사라고 했지?" "미쳤어!" "불사라면 죽지 않는 거잖아? 그런 거지?" "어서 피해!" "이렇게 찢어도 죽지 않아? 그런 거냐?" 가슴을 향해 그대로 주먹을 뻗었다. 녀석의 강력한 근육이 항거하듯이 내 주먹을 튕겨냈지만 그 순간 다시 또 한번 나는 녀석을 후려갈겼다. 몇 번 이나 후려갈기자 녀석의 몸이 고통을 못이겨 공중으로 튕겨 올랐다. 녀석 의 몸뚱이를 쥐고 흔들며 바닥을 후려갈기고 벽을 향해 집어 던진다. 단단 하기 이를 데 없는 그 몸뚱이 덕분에 화려한 벽면에 금이 갔다. 벽면을 가 득 메운 색깔은 빨강과 검정. 나는 달려가 녀석의 뒤통수를 잡아 그 검정 색 얼룩이 진 벽면에 치대며 짓이겨댄다. 녀석의 이빨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황홀감. 그러나 허탈하다. 이 놈은 너무 약해. 너무 약해. 강한 놈은 없는 거야? 더 강한 놈은 없는 거 냐? "아크! 저 놈을 향해 한 대 갈겨!" "안됩니다! 지금 녀석을 공격했다간 놈이 절 향할 거라구요!" "젠장할! 그럼 어서 여길 빠져나가자!" 강한 자. 강한 자. 강한 자. 내가 가장 싫어하는 사인족의 냄새. 사인족이 몇이나 내 아이를 죽였어. 내 사랑스런 아이들을 둘이나 죽였어. 내 가련한 아이들을 둘이나 죽이고 감히 내 앞에서 잘난 척을 했어. 절대 로 잊지 못하지. 내 핏속에 맹세코 절대로 잊지 못하지. 강한 놈은 내 앞에 서 죽어야 한다. 강한 놈을 죽이고 또 죽여 내가 이 지상에서 가장 강하다 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나는 강하고 강하다. 자아, 어디야? 강한 놈은 어 디 있지? 나는 고개를 천천히 위로 올렸다. 붉은 날개. 붉은 색. 강함. 압도적인 강함. 이제껏 본 자들 중에서도 압도적으로 강함. 심장박동이 강해진다. "피하십시오!" "어째서 피해야 하지? 저, 정말 강하군." 흥분한 눈길이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 눈빛은 내가 익히 알고 있는 흥분과 전율의 눈빛, 기쁨의 눈빛이었다. 그것은 나를 향해 미소를 짓고 있 었다. 두근거리는 박동소리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멋지다!" 그 것이 나를 향해서 일직선으로 날아오기 시작했다. 나는 그 것이 다가오 는 것을 가슴 뿌듯한 즐거움으로 기다리면서 한껏 미소지었다. 그래, 와라! 강한 자! "그만해요!" 콰앙 하고 '그것'의 손톱이 나의 팔뚝을 파고 들어 상처를 냈다. 나의 손톱 은 '그것'의 옆구리를 길게 찢어 핏방울을 뿌렸다. 이렇게 기쁠 수가. 온 몸이 기쁨을 노래했다.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격렬한 환희로 전신이 부들부들 떨렸다. 나는 바닥을 박차고 달려들어 그 붉은 머리칼을 휘어잡 으려 손을 뻗었다. 손톱이 튀어 나오며 그 것의 심장을 노린다. '그것'은 나 의 손톱을 튕겨내며 건방지게도 나의 심장을 향해 잔뜬 휘어진 손톱을 내 리 찍었다. 핏방울이 튀기며 배에 상처가 생겼다. 끝이 구부러진 손톱은 내 살갗을 길게 찢으며 단단한 배 안쪽의 살까지 상처를 입혔다. 화끈한 고통 으로 흥분이 일어나 내 손톱은 순식간에 서른 개로 늘어났다. 하지만 내 손톱은 그 것을 만지지 못했다. '그것'은 유연하게 허공을 움직이며 나를 바닥으로 내리 찍었던 것이다.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나는 그 것에 대한 갈 망으로 미쳐버릴 것 같았다. 아아, 닿고 싶다. 닿아서 갈기갈기 찢고 싶다. 거대한 몽둥이 같은 것이 내 얼굴을 직격했다. 나는 그 것에 튕겨져 다시 바닥으로 깊게 곤두박질쳤다. 정신이 한동안 아득해질 충격이었지만 고통 은 거의 느끼지 못했다. 선홍색으로 물든 흥분이 심장을 파먹고 곧 머리조 차 파먹어 버릴 테니까 나는 괜찮다. "오오오오옷!" '그것'이 포효했다. 피로 물든 전신을 흔들며 나도 마주 웃었다. 즐거워서 견딜 수가 없다. 강 한 자가 눈 앞에 있다는 것은 생애 최고의 즐거움. 기쁨. 삶의 보람. 그리고 그 것이 갑자기 찾아왔다. "내가 죽어서 기뻐?" 심장이 하나 정지했다. 붉은 머리칼을 휘감고 손톱으로 그 것의 심장을 꺼내려는 순간 심장이 정 지했다. "내가 죽어서 기뻐?" 무서운 여자. 내 생애 최고로 무서운 여자. 죽이고 또 죽이고 하염없이 죽였던 그 무서운 여자. 심장을 짓이기고 내 손으로 그녀의 심장을 파서 내 입으로 씹어 삼켰다. "내가 죽어서 기뻐?" 부드러운 가슴의 감촉. 여자다. '그것'은 여자다. 강한 여자다. 차가운 것이 급속도로 흘러들어와 등줄기를 단숨에 꿰뚫고 지나갔다. 심장 이 멎으며 차갑게 조소했다. 믿을 수 없어. 그녀는 죽었다. 그럼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은 누구? 퍼억 하고 무언가가 내 목줄기를 쥐어 뜯었다. 화끈한 아픔이 얼굴까지 튀 어 올라 한 순간 눈을 감았다. 심장이 아픔으로 오그라들었다. "멈춰!" 그래, 멈춰. 나는 입술을 움직였다. 그래, 멈춰. 일렌. 이제 그만 내 심장을 놔줘. 천천히 눈을 뜬다. 흘러내리는 붉은 액체를 느끼면서 천천히 눈을 뜬다. 눈앞에 있는 것은 잔뜩 일그러진 얼굴의 도도한 미녀, 변신이 차츰 풀려가 고 있는 붉은 머리칼의 미녀였다. 그녀의 둥근 유방이 내 눈앞에 드러나 있었다. 피로 젖은 그 둥근 유방은 찢겨진 옷자락 사이로 드러나 나에게 존재를 과시하고 있었다. 내 손톱에 잔뜩 낀 것은 붉은 깃털. 붉은 피. 울컥하고 전신이 흔들렸다. 뜨거운 액체가 가슴을 타고 흘러내렸다. "끝입니까?" 뭔가 아쉬운 듯한 목소리로 그녀가 물었다. "............그래." "이제 재미있어지려던 참이었는데." 살의와 흥분이 범벅이 된 눈동자로 날 바라보면서 그녀는 피로 물든 입가 를 혀로 핥았다. 나 역시 그녀를 마주 보며 혀로 입가를 핥았다. 내 피와 남의 피가 한데 뒤엉켜 기묘한 냄새가 났다. 차가워지는 몸을 느끼면서 나 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뒤 늦은 아픔이 욱신거리고 찾아들었다. 여기 저 기 미끈거리는 액체 때문에 짜증이 났지만 참고 일어섰다. 붉은 날개의 여 왕은 내 목덜미를 반쯤 찢었던 모양이다. 피가 쉴새 없이 흘러내렸다. 나는 그 상처에 손을 대려다 말고 아픔 때문에 얼굴을 찡그렸다. 그녀는 옆구리 를 억누르고 있었다. 그녀 역시 발가벗은 상태였고 길게 찢어진 옆구리에 서는 당장이라도 내장이 흘러내릴 듯했다. 그 상처를 누르며 그녀는 팔뚝 에 난 상처를 천천히 핥았다. 나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사방은 온통 시체투성이였다. 팔다리가 온전한 시체는 하나도 없다. 사인족 들의 시체는 형체도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갈가리 찢겨진 상태고, 그 와 중에 엉킨 인간들의 시체는 말할 것도 없다. 내가 발광하는 동안 조인족전 사들도 나름대로 화풀이를 한 모양이었다. 저 정신없는 아크 놈과 엘프들 은 이미 사라져버리고 남은 것은 오로지 조인족의 여왕과 나, 그리고 시체 더미들 뿐이었다. 어라? 그러고 보니 룬드바르 녀석은 어디 갔어? 뜨끈할 정도의 살육의 열기가 지나간 뒤 그녀와 나는 한동안 말없이 자신 의 상처를 핥는데 열중하기로 했다. 뭔가 우스워져서 나는 웃음이 새어나 왔다. "왜요?" "아냐, 그런데 저기서 꿈틀거리는 것은 대체 뭐라고 생각해?" 내가 시체더미들 사이를 가리켜 보이자 여왕은 눈썹을 찡그렸다. "흥미롭군요." 나와 여왕은 시체더미들 사이로 걸어갔다. 걸을 때마다 피가 뚝뚝 떨어져 매우 성가셨고 변신의 여파로 눈앞이 제법 어지러웠다. 인간의 팔 다리를 하나 주워 들어서 여왕이 툭툭 무언가를 건드렸다. 그러자 그 무언가가 허 어어어억 하고 기묘한 소리를 내뱉었다. "이걸 살아 있는 것이라고 불러야 할까?" "글쎄요............" 머리는 목과 직각으로 헤어져 있었다. 가슴은 다 빠개진 채로 심장도 사라 지고 없었다. 아, 그러고 보니 그 심장을 파낸 사람은 나였다. 나는 쭈그리 고 앉아서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내장이 다 튀어 나가고, 팔 다리는 기괴하게 찢어져 여기 저기 흐트러진 모양새를 한 이 것은, 사라진 심장을 다시 재생하기 위해 헐떡이고 있었다. 내가 뽑아낸 심장 중에 반 토막이 아직 이 놈의 가슴 속에 남아 있었던지 그 것을 중심으로 혈관과 혈관이 엉기며 어떻게든 살아나기 위해 버둥거리고 있었다. 눈알이 다시 노랗게 된 그 것은 이리저리 힘없이 눈알을 돌리며 나와 여왕을 번갈아 보고 있었 다. 다 부러진 이빨들은 피를 머금고 찢어져버린 입술사이로 삐죽이 드러나 있 었는데 그 모습이 나이 먹은 인간 노인네들 같이 보여 뭔가 우습다기 보단 처절했다. "이걸 마법이라고 하는 건가요?" 여왕이 조용히 옆구리를 누른 채 물었다. 상처가 아프긴 아픈 모양이다. 허 긴, 나도 아프다. 주먹만큼이나 살점이 떨어져 나간 목덜미를 움켜쥔 채로 나는 대꾸했다. "불사의 마법이라나." 그 녀석을 쭈그리고 앉아서 들여다 보니, 점점 기분이 나빠졌다. "그렇구나. 이대로 놔두면 너 되살아 나는 거냐?" "...허억, 허억....." 그런가 보군. 녀석은 나와 여왕을 필사적으로 바라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눈알이 핑핑 돌아가는 것을 보고 있자니 내가 다 어지러울 정도였다. 헐떡 이는 녀석의 숨소리와, 말 그대로 꿈틀거리는 그 심장의 발악을 지켜보면 서 나는 편히 죽어 넘어진 녀석들의 시체를 힐긋 보았다. "약한 주제에 뭐하러 불사따위 되는 거지? 몇 번이나 계속해서 죽어보려 고? 불사라는 건, 죽지도 않지만 강해지지도 않겠지? 결국은, 말이야." 내가 물었지만 녀석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나는 턱을 괸 채 녀석의 필사적인 심장을 손톱으로 톡톡 건드리며 다시 물 었다. "이번에 네가 또 살아나면 나는 널 또 죽일 거야. 그리고 뒤돌아서서 네 가 살아나면 나는 널 또 죽이지. 너, 그런데도 또 살아나고 싶어?" 대답은 없다. 헐떡이는 소리만으로도 충분히 지겨웠다. "그리고 계속 계속 그 짓을 반복하다보면, 너는 사인족 중에서 홀로 살아 남는 녀석이 되겠군. 대지의 여신에게 돌아가지도 못하고 이렇게 계속 살 아남으면서 지긋지긋하겠구만." 대답은 역시 없었다. 녀석은 뒤로 넘어가는 눈알을 어떻게 해서든지 제대 로 돌리려고 애를 쓰면서 버둥기고 있었다. "근데 말이야. 잘라낸 팔뚝도 재생되는 거냐? 아니면 그건 그대로 남되 그 저 심장만 계속해서 뛰는 거냐?" "............" 이젠 제법 말을 하려고 버둥거린다. 나는 턱을 괴고 앉아서 그 필사적인 심장을 지켜보며 말을 이었다. "이런 짓을 한 마법사 놈이야 말로 지긋지긋하지 않냐? 아니면, 역시 너희 들은 불사의 힘을 얻는 대가로 자신들의 동족을 버린 거냐?" "...............제길." 녀석이 발음이 마구 새는 이상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사인족은 이제 사인족의 왕 이외엔 아무도 남지 않은 거로군. 허기야, 남 아 있어도 어차피 내가 다 죽일 거니까." 나는 친절하게 녀석을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그리고 어차피 너희들은 멸망당할 것이었잖아? 아이도 없으니까 말이야." "크으..........우, 우리는.....멸..멸망하지 않아." 열심히 대꾸하는 녀석을 바라보며 나는 다시 웃었다. "왜?" "......마, 마법의 힘을 빌어서라도, 천한 인간의 힘을 빌어서라도..........우리들 일족은, 일족은.....사라지지 않을 거야. 절, 절대로........." 나는 한숨을 쉬었다. "정말 미안하군. 하지만 말이야. 마법이든, 혹은 숙명이든간에, 너희들은 어 차피 멸망하게 되어 있어." 증오로 나를 쏘아보는 눈을 마주 보며 나는 녀석의 반쯤 재생한 심장을 움 켜쥐었다. "커억!" 그 몸이 마구 사시나무 떨리듯 떨리는 것을 바라보면서 나는 친절하게 그 심장을 잡아 뜯어냈다. 지긋지긋한 핏방울이 반쯤 일그러진 녀석의 얼굴에 까지 튀어 올랐다. 녀석은 파들파들 떨면서 온몸을 뒤틀기 시작했다. "왜냐면 내가 사인족을 멸망시킬 거거든. 그건 마법의 힘보다도 네 놈들의 똥고집보다도 훨씬 강한 거야." 녀석의 눈앞에서 심장을 눌러 터뜨리면서 나는 그 텅빈 가슴팍을 발로 짓 밟았다. 울컥울컥 검은 피가 터져나오는 것을 모른 척하고 나는 뒤를 돌아 보았다. 조인족의 여왕은 망연한 얼굴로 물끄러미 그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당신이 하고 싶었던 일이었나?" 내 말에 그녀는 흐 하고 쓴 웃음을 지었다. "그렇군요. 나야 말로 당신보다 사인족을 더 증오하는데도 역시 당신보다 는 못하군요." "왜?" "방금 저는 그 자를 살려둘까도 생각했었습니다." "왜?" "................살아있는 자로서의 연민이죠. 뭐." "연민이 아니라 살아있는 자로서의 오만이지." 내 말에 그녀는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컥컥거리는 녀석의 듣기 싫은 소리가 사라진 홀 안은 너무나 조용했다. 이제 서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살아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인간도 엘 프도 그 외의 것들도 없었다. 나와 그녀만이 오만하게 서서 조각난 시체들 을 바라보고 있었다. 갑작스런 허무를 느끼면서 나는 아픔과도 같은 짜증 을 되씹었다. 대체, 이 게 다 뭐야? 저번에 마튜스의 경우와도 같군. 설마 하니 나는 저번에도 3단계 이상의 변신을 했던 건가? 먹지도 않을 시체를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강하지도 못한 것들을 짓밟아 죽여 버리고 이러고 서 있는 거야? 정말 이거 기분 더럽군. 대체 이게 몇 번째더라........ 그녀는 붉은 빛이 도는 눈으로 나를 차분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옆구 리에 난 상처는 어느 새인가 반쯤 닫혀서 이제 피는 멈춘 것 같았다. 그렇 지만 아마도 달리기라도 하면 금방 터져버릴 것이다. 나의 상처는 살점 전 체를 뜯어낸 것이라 여전히 피가 흘렀다. 하지만 처음보다는 덜하고 그나 마도 점점 멈추는 중이었다. 그녀의 상처중에서 가장 심한 것 중 하나는 역시 날개에 당한 상처였던 모양이다. 내가 손톱으로 할퀸 날개의 가는 뼈 가 몇 개쯤 박살 난 모양인데 그 부분이 피로 물들어 있었다. "묘인족의 왕." "왜?" "........누구였지요?" "왜?" "그저 궁금한 것뿐입니다. 당신을 멈추게 한 것은 누굽니까?" 그녀는 물끄러미 나를 향해 물었다. 젊고 젊은 이 아름다운 아가씨는 아직 사랑의 고통을 모르는 것 같다. 나는 갑자기 엄청나게 길고도 긴 세월의 무게를 느끼며 그녀의 맑은 눈을 빤히 들여다 보았다. "너잖아." "그건 아닐텐데요?" 나는 대답대신 웃었다. [쿠베린 별전8] 마녀를 위한 노래 KUBERIN.......... 높이 나는 새들은 땅을 바라보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들은 걷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1 "삼공자를 죽여주면 돼." 어두운 흑자색의 커튼 너머로 두 명이 서 있었다. 방안은 짙고 붉은 카펫과 무거워 보이는 금빛 수술이 달린 테피스트리로 장식되어 있었다. 언뜻 보아도 호화스러운 방, 그 방안에 가득한 가구들은 소유자가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강조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리석을 깎아 만든 테이블도, 호화로운 빌로드를 덧씌워 만든 의자도 먼지가 하얗게 쌓 여서 결코 이 방이 주인을 자주 만나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박제된 독수리가 눈을 노랗게 뜨고 노려보고 있는 그 아래로 방주인은 초 조하게 발끝을 움직였다. "댓가는?" "황금으로 십만길레 내 놓겠다. 알고 있겠지? 십만길레라는 돈은 결코 작 은 게 아니라......" "이십만." "노, 농담하지마! 이십만이라니! 그걸 지금 말이라고?" 회색 로브로 얼굴을 가린 자는 방 주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방 주인은 호화로운 에메랄드의 브롯지를 달고, 그에 어울리는 에메랄드와 사파이어로 치장된 반지를 다섯 개나 끼고 있었다. 그의 허리띠에 달린 손 바닥만한 호박은 어떤 곳에서도 본 적이 없는 거대한 물건이었다. 그 시선 을 느꼈는지 다소 퉁퉁한 손을 가진 방주인은 자신의 손등을 급히 가렸다. 그리고는 더듬으면서 약간은 항의섞인 응답을 내 놓았다. "좋아, 그렇게 하지. 이십만을 내 놓을 테니까." "선금으로 십만." "알았어. 선금으로 십만." 하인리히는 장갑을 벗으면서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지금 그가 보고 있는 것은 늘어진 시체들이었다. 시체들은 온통 숲 안을 가득 메우고 말할 수 없는 악취를 풍겨내고 있었다. 맙소사, 모처럼 귀향한 이런 날 이런 꼴부터 보게 되다니. 그는 낮게 욕설을 퍼부우면서 옆에 선 젖형제이자 부관인 마르케스에게 장 갑을 건넸다. 마르케스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당장이라도 칼을 뽑을 듯 한 얼굴이었다. 모처럼 냉혹한 빛이 가신 그의 회색빛 눈동자를 보고 하인 리히는 조금은 안도했다. '이 녀석도 사람은 사람이군.' 간신히 참고 있긴 했지만 하인리히도 다른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욕지기를 참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부하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상황에 그가 연약 한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누구 짓인지 알수는 있나?" "모릅니다. 짐승도 아니고....이 근처에는 그레이트 오크도 없고, 사나운 수 인족들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을 인간이 했다고는 믿어지지 않는걸." "트롤이 혹여 했을 지도 모르지만, 이 근처는 트롤이 나오는 지역이 아닙 니다." 대답한 것은 살벌한 눈빛으로 당장이라도 호통을 칠 듯한 표정의 세레스 였다. 세레스는 하인리히에게 배속된 기사지만 할로엔백작의 아들이다. 서 자이긴 해도 할로엔 백작의 아들인 이상 경계해야 할 대상이었다. 반년만의 항해를 마치고 돌아온 하인리히가 수도 뮤네이젠로 향하던 길에 발견한 것은 형용이 불가할 정도로 학살된 영민들의 시체였다. 제법 큰 마 을의 주민들 오백여명이 몰살당한 채로 숲안에 널려 있었다. 남녀노소의 구별을 전혀 두지않은 지나치리만큼 공평한 학살장을 바라보면서 하인리히 는 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 "치안대는?" "저기에 있습니다." 세레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서면서 가리켜 보였다. 풀 숲 한 구석에 서서 토악질을 해대는 서너명의 병사들을 바라보면서 하 인리히는 눈을 가늘게 떴다. "제기랄. 어떤 놈인지 밝혀내!" 보통의 인간이라면 어린애를 반쪽으로 찢어서 나뭇가지에 걸어놓는 듯한 미친 짓을 할 리는없었다. 게다가 그럴 만한 힘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와 함께 시체들을 돌아보던 세레스가 낮게 신음하며 하인 리히에게 주의를 주었다. "발밑을 조심하십시오." 하인리히는 시선을 아래로 돌렸다. 낮으막한 붉은 버섯 옆에 자그마한 구 슬이 한 개 떨어져 있었다. 피로 물든 그 구슬은 푸른 눈동자를 가지고 그 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하인리히는 소름이 끼치는 것과 동시에 그 구슬 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어떤 미친 놈이 이런 짓을 했단 말인가? 수인족이 광란을 일으켰다고 해도 오백여명을 한 번에 학살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트롤이 나타났다면 근처 마을에서도 보지 못했을 리가 없다. 게다가 이 근 처는 항구 바레로아에서 가까운 곳으로 트롤이 소금물을 뒤집어쓸 위험을 감수하고 나타났을 리는 더더욱 없었다. 하인리히는 나뭇가지 위에 걸쳐진 어떤 여인의 조각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나뭇가지 위에 걸쳐진 인간의 사지는 어떤 거대한 괴물이 씹다 만 찌꺼기처럼 널려 있었다. 내장과 검붉게 변한 살점들이 푸른 수풀 곳곳 에 널려 있어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시체 조각들이 밟혔다. 파리떼와 송장 벌레들이 그 살점을 찾아 눈앞을 가리는 바람에 그는 앞으로 나아가길 한 순간 주저했다. 이래서야 아무리 능란한 병사라 할 지라도 토악질을 하는 게 당연하다. 하인리히는 억제했던 토기가 한꺼번에 밀려들어와 다시 코를 막았다. 옆에 섰던 세레스가 그에게 손수건을 내밀었다. 그 역시 손수건으로 입과 코를 막고 있는 중이었다. 놈은 산채로 사람을 갈기갈기 찢어서 사방으로 던졌다. 남녀 노소 상관치 않고 도망가는 사람들을 쫓아서 이 숲까지 들어와 갈가리 찢어 죽이고는 유유히 사라진 것이다. 이건 도대체가 인간의 짓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하 지만, 이 근처에서 대체 수인들이 있다는 소문은 전혀 들은 바가 없었다. 룬드바르공국은 이 백여년이래 수인족이 가장 적은 곳 중에 하나였다. 공 국의 북부에는 그레이트 오크의 서식지가 있기는 하지만 그레이트 오크는 사나운 만큼 자신들의 거처를 범하지 않으면 일부러 튀어나오진 않는다. 그들은 영토 확장에는 그다지 취미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이 근처에는 대 규모의 수인족 거처지는 전혀 없었다. 바다를 접하는 이 해양국에서는 소 금기를 싫어하는 이종족은 거의 없어서 굳이 찾는다면 가끔 발견되는 인어 와 항구도시에 호기심으로 찾아들었다가 사라지는 호비트들과 순한 그레이 오크 정도였다. 그러나 그들도 어디까지나 항구도시 일대에서 가끔 발견될 뿐이지 이런 공국의 깊숙한 곳에서는 거의 돌아다니지 않는다. 룬드바르 공국의 사람들은 폐쇄적이라 인간과 다른 모습을 한 그들을 고이 받아주지 않는다. 따라서 수인족도 이곳까지는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알 수 없지, 어떤 난폭한 수인족이 들어왔다가 이 마을 주민들에 게 발각되어 이들을 죽였을 지도 몰라.' 만약에 그렇다면 아주 위험한 일이었다. "다른 마을에도 위험이 닥칠지도 몰라. 마을 자치대들에게 빠짐 없이 알 려두도록." "네, 명심하고 다른 지역에게도 알리겠습니다." 치안대의 대장은 굽실거리면서 온 몸으로 무능함을 외치고 있었다. 하인 리히는 이 잔혹한 시체더미를 훑어보다가 몸을 돌렸다. 더 이상 이 곳에 있다간 온통 시체냄새를 뒤집어 쓸 것이 뻔했다. "이제 서두르시는 게 좋겠습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마르케스가 안색이 나쁜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삼공자 하인리히 룬드바르는 룬드바르 대공의 두 번째 비인 바탈리아 부 인의 이남일녀중 차남이었다. 원래 이공자이자 바탈리아부인의 장남이었던 헤르겐은 사냥중 불행한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승마의 명수이자 궁술의 명인인 그가 낙마로 목숨을 잃었던 것이다. 그 뒤를 이어서 하인리히의 누 나이자 헤르겐의 누이동생인 샤레이아가 또 갑작스런 열병으로 눈을 잃고 장님이 되더니 곧이어 불행한 사고로 실족사한 채로 그녀의 거처에서 발견 되었다. 계단에서 실족한 나머지 목이 부러져 죽어 있었다고 시녀들이 일 제히 증언했고 대공은 침통한 마음을 억누르며 유일한 딸을 그렇게 장사지 냈다. 연달아서 계속 아들과 딸을 잃은 바탈리아부인은 거의 반년간 제 정신이 아니었다. 그녀는 잠을 자지도 못했고 독을 시험해주는 시종이 없다면 밥 도 먹지 못했다. 매일 매일 반은 울면서, 반은 울부짖으면서 지낸 그녀에게 유일한 희망은 형 헤르겐보다 능숙하지는 못했지만 그런데로 우수한 하인 리히였다. 하인리히는 19세 때 눈 앞에서 형 헤르겐을 잃었고 그 다음에는 20세 생일 전날에 누나 샤레이아를 잃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자신의 모 친이 반미치광이가 되어 유폐되는 일을 겪었다. 그 모든 일을 겪고도 그는 지나칠 만큼 건강해서 대공의 뒤를 이어 거침없이 배를 타고 외해(外海)로 나가곤 했다. 덕분에 삼공자 하인리히는 해양국인 이 곳에서 가장 많은 배 와 충성심이 넘쳐나는 사악하고도 잔인한 일당들을 거느리게 되었다. 그런 그가 저 대공비 히르모니아에게 있어서 가장 두려운 존재가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대공의 첫째 부인인 대공비 히르모니아 세르오네 룬드바르는 세르오네 집 안의 장녀로 태어나, 대공의 정략결혼의 상대가 되었다. 물론, 그녀는 대공 자인 라데츠의 모친이기도 했다. 세르오네집안은 룬드바르 공국의 삼분지 일을 쥐고 있는 대가문으로 역시 뿌리는 해적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맨 처음 룬드바르 공국이 생길 때 초대 룬드바르 공작은 자신의 주군인 오르볼트 국왕에게 이 남쪽 지역의 해적을 소탕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워낙에 용맹했던 룬드바르공작의 이남인 데오오라 룬드바르는 서른의 젊 은 나이에 그 당시 군도를 거점으로 내해와 외해를 장악하고 있던 해적들 중 대부분을 복속시키고 자기 휘하의 사병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장남 에 밀라르 룬드바르가 룬드바르공국을 이어받고 지나치게 강건한 자신의 아우 를 제거하려던 그 순간 휘하의 해적들을 이끌고 자신의 친형을 공격했다. 기사단을 거느리고 있던 에밀라르는 이십여일간 싸웠지만 백전노장이 되어 버린 이 거친 동생에게 패하여 목을 바칠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노대 공은 장남 에밀라르의 잘린 목을 바라보면서 사나운 둘째 아들 데오오라에 게 대공위를 물려주게 되었던 것이다. 대륙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룬드바르 공국을 가리켜 해적소굴이라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었다. 그리고 세르오네 가문은 이 때 데오오라의 왼편에 서서 제일 먼저 칼을 휘 두른 해적 일가이기도 했다. "여자를 부르길 바라십니까?" "아니."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허름한 침대에 발을 길게 뻗으면서 하인리히는 눈 을 반쯤 감고 대꾸했다. 숲을 빠져나와 북상하는 길목 제일 첫 번째에 위 치한 마을에서 여장을 푼 일행은 그 신분에 어울리지 않게 이 십여명 정도 의 병사를 거느리고 있었지만 작은 마을의 여관에선 그나마도 다 감당할 수가 없어서 결국 두 개의 여관에 일행을 나누어야 했다. 마르케스는 자신 과 하인리히를 한 방에 배치하고 세레스가 이끄는 일곱의 병사를 다른 여 관으로 보냈다. 아무리 뭐라고 해도 할로엔 백작의 아들인 세레스는 대공 비 일가의 육촌에 해당했던 것이다. 여관방에서는 그의 장화를 벗기던 종자는 마르케스의 손짓에 뒤로 물러서 서 밖으로 나갔다. "오자마자 괜한 걸 봤어." "뭐어, 앞으로 갈 길은 더할 지도 모르죠." "악담이냐?"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마르케스는 냉혹해 보이는 얼굴을 한층 더 차갑게 했다. 하인리히의 유일한 지기인 마르케스 옥크토는 하인리히의 유모 벨큐레의 아들이란 것 이외에도 공통의 적이 있다는 데에 목적을 같이 하고 있었다. 마르케스는 평민이란 신분에도 불구하고 현재 기사위를 받고 있었다. 워낙 에 거친 룬드바르공국에서는 그런 일이 드물진 않았지만 흔한 것도 아니었 다. 평민이 기사위를 받기 위해선 보통 귀족기사가 해야 할 일의 최소 다 섯 배의 전공을 세워야 했다. 그러나 마르케스는 그 것을 해냈다. 그는 무 표정하고 냉혹하고 절도 있게 평민임을 비웃는 모든 귀족들을 가차없이 물 리치고 기사위에 당당히 올라섰다. 대공은 그를 위해 보검을 하사하고 영 지를 내렸다. "원하던 것을 얻었군, 축하해." 그 기사서임식의 날, 당시만 해도 성격상 그다지 어울리는 일이 없었던 하인리히는 마르케스에게 조소 어린 인사말을 건넸다. "아직." 마르케스는 냉혹하게 그의 말을 잘라버렸다. 차가운 회색눈과 갈색머리를 한 마르케스는 하인리히보다 머리 하나는 크 고 나이는 5세 연상이었다. 과묵하고 절대로 머리를 숙이지 않는 비사교적 인 성격을 하인리히는 미워하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미워하고 있 었던 것은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 "그럼, 네가 원하는 건 뭐야?" 약간은 술기운으로 하인리히가 웃으면서 묻자 마르케스는 대답대신 키가 크고 잘생긴 헤르겐과 같이 춤추고 있는 금발의 샤레이아를 바라보았다. 그 회색 눈에서 빛나는 놀랄만큼 온화한 눈동자에 하인리히는 숨을 멈췄 다. "........농담이겠지?" 하인리히가 다소 잔혹하게 물었지만 마르케스는 대꾸도 하지 않고 계속해 서 샤레이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샤레이아는 18세, 마르케스는 22세, 하인리히는 17세의 밤이었다. "옛 생각이 나는군." 마르케스는 그를 흘긋 바라보았다. 하인리히는 천장을 바라보면서 낮게 중얼거렸다. 천장에 부딪치는 빗소리 가 들려오고 있었다. 약간 눅눅한 공기 때문에 침대에 깐 시트가 금새 축 축해 졌다. "오랜만의 귀향이니까 그렇겠지요. 이제부터 정신을 놓으시면 안됩니다." "알고 있어." 하인리히는 눈을 감았고 마르케스는 탁자에 다가가 놓여진 포도주를 한 잔 따랐다. 그는 평소대로 제일 먼저 은으로 만든 숟가락을 대어 보고 그 다음에는 마법사가 건넨 해독용 약초가루를 살짝 뿌렸다. 포도주에 별 반 응이 일어나지 않자, 그는 그제서야 그것을 자신의 입술로 가져가 약간 맛 을 보았다. 그리고 한 참 뒤, 빗소리를 음미하듯이 허공을 바라보던 그는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하인리히에게 포도주잔을 건넸다. 하인리히는 마르케스가 내미는 잔을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고 마시면서 중얼거렸다. "그 암여우가 아직도 난리를 치고 있을까?" "당연하겠죠." "..........라데츠가 올해 몇 살이지?" "저랑 동갑입니다." 그 말에 하인리히는 마르케스를 돌아보았다. "너는 몇 살인데?" "올해 서른 둘 됩니다." 하인리히는 무표정한 부관을 바라보면서 다시 시선을 포도주잔으로 돌렸 다. "그럼 그때로부터 7년이나 지난 거군." 마르케스는 유일한 목표였던 샤레이아를 잃었고 하인리히는 누이와 형을 단숨에 잃었다. 그것만으로도 성격적으로 전혀 다른 두 사람은 한 덩이가 될 수 있었다. 하인리히에게 믿을 자는 단 하나였다. 피는 통하지 않지만 같은 젖을 먹고 자란 남아 있는 유일한 형제다. 비가 내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하인리히는 잔을 비웠다. 따스한 기운을 느 끼면서 그는 눈을 천천히 감았다. 내일부터 다시 보이지 않는 칼날이 난무 하는 수도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된다. 그는 마르케스가 자신의 장화를 벗 기는 것을 느끼면서 천천히 잠으로 빠져 들어갔다. KUBERIN.......... 높이 나는 새들은 땅을 바라보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들은 걷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2 하인리히가 잠이 들자 마르케스는 문가에서 가까운 침대에 앉아 차고 있 던 칼을 빼어들었다. 눅눅한 공기와 소금기 많은 바다에서 지내온 시간이 너무 많아서 아무리 고급인 강철로 만든 칼이라 할지라도 때때로 닦아야 했다. 그는 장신에 어울리지 않는 섬세한 태도로 아주 천천히 칼날을 닦아 내기 시작했다. 보검을 대공에게 하사 받기는 했지만 그가 쓰고 있는 칼은 저자거리에서 파는 평범한 칼이었다. 기사들이 멋으로 차고 다니는 보검보 다는 뭉툭하고 두둑한 해적용 칼이 그의 성미에는 잘 맞았다. 그런 칼이라 면 칼등으로 쳐도 상대는 뼈가 으스러지고 칼날로 베면 몸통의 반은 잘려 나간다. 그 정도 위력이 없다면 무기라 할 수 없다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 다.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자고 있는 하인리히는 실제로 샤레이아와는 그다지 닮지 않았다. 섬세한 얼굴에 금발을 가지고 있던 그녀는 룬드바르인이라기 보다는 북부 미인형에 가까워서 때때로 대공의 딸이 아니라는 소문까지 돌 았었다. 그러나 소심한 바탈리아부인이 그런 일까지 저지를 여자는 아니었 다. 마르케스는 충성심은 전혀 없었지만 하인리히만은 꼭 지켜주리라고 생 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샤레이아와의 약속이었으니까. 갑자기 발자국 소리가 들려와 그는 등줄기를 곧추 세웠다. 다급한 발자국 은 그의 예상대로 맹렬하게 다가와 그의 방문 앞에서 멈췄다. "전하!" "무슨 일이냐?" 하인리히 대신 마르케스가 입을 열었다. 그는 칼자루를 쥔 채로 일어섰지 만 문가로 다가서진 않았다. 갑작스런 공격에 대비해서 그는 하인리히가 누워 있는 침대가로 다가갔을 뿐이었다. "범인을 잡은 것 같습니다! 아, 아니, 지금 또 다른 희생자들이 나왔습니 다!" 떠들고 있는 것은 해적출신의 피오였다. 그는 문가에 서서 흥분한 채 외쳤 기 때문에 마르케스는 알았다라고만 대답하고 잠시 망설였다. "가자." 침대에 누워 있던 하인리히는 잠이 완전히 달아난 얼굴로 일어서고 있었 다.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닐 텐데요. 여기 치안대에게 맡겨두는 게 좋겠습 니다만." "아니, 나는 단지 그 사악한 일을 저지른 자들을 보고 싶을 뿐이야." 하인리히는 마르케스의 무표정한 얼굴을 향해 가볍게 말했다. 침대 머리에 놓여있던 검과 망토를 등에 걸치고 장화를 신자 마자 하인리히는 턱을 들 어 마르케스를 재촉했다. 비가 내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마르케스는 낮게 욕설을 퍼부었다. 희생자는 사냥꾼이었던 모양이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밤에 사람들은 갖가지 횃불을 치켜 들고 그 시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체는 냉혹하고도 잔인하게 갈기갈기 찢겨진 채로 늘어 져 있었다. 사냥꾼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가죽조끼와 가죽 신발이 조악하게 만들어진 주머니칼과 함께 얼굴이 반쪽 남은 시체에 달라붙어 덜렁거렸다. 피는 이미 빗길에 거의 다 씻겨 내려가 창백한 살점만 드러내고 있어 붉은 횃불 빛에 드러난 모습은 이미 인간이라기 보다는 히멀건한 살덩어리로 보 였다. 마을 사람들은 질척이는 진흙을 밟고 서서 그 시체를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공포와 증오가 그들사이로 스쳐 지나가는 것을 하인리히는 예민하 게 느꼈다. "범인이란 게 누구지? 범인을 누가 봤다며?" 그가 재차 묻자 사람들 사이에 서 있던 세레스가 그를 향해 대답했다. 저길 보십시오." 그가 가리키는 곳을 천천히 올려다 본 하인리히는 입을 벌렸다. 시커먼 덩어리가 마을 어귀 고목에 달라붙어 있었다. 정확히 말한다면 달 라붙어 있다기 보단 걸려 있었다. 아마도 사냥꾼들이 한 것인지 그 덩어리 여기 저기에는 창과 칼과 도끼등이 어지럽게 박혀 있었다. 그 모양새가 마 치 고슴도치 같아서 하인리히는 순간적으로 그 것이 대체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하인리히가 손짓하자 그의 종자중 한 명이 횃불을 그 덩어리에 갖다 댔다. "억!" 그 불빛에 드러난 형상은 곰도 아니고 트롤도 아니었다. 처음 보는 짐승이었다. 덩치나 모양새는 큰 곰과 같았지만 머리통은 길죽 한 곰의 주둥이와 달리 코가 없는 그 자리에 거대한 입만이 있었다. 그리 고 그 입안은 온통 삐죽한 이빨들로 가득 들어차 있었다. 늘어진 몸체의 다리는 모두 여섯 개, 발톱은 곰과 달리 날카로운 칼날을 이어 만든 듯 길 고도 예리해 보였다. 네 개의 눈이 핏기를 담고 이글거리는 횃불에 따라 번들번들 빛이 났다. "대체 저게 뭐야?" "알 수 없습니다. 저런 괴물은 본 바가 없습니다." 촌장인지 자치대 대장인지 잘 알 수 없는 중년의 사내가 아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인리히는 그 짐승을 자세히 살펴보다가 낮게 물었다. "이거 단 한 마리만 있는 것이야?" "발견된 것은 단 한 마리입니다. 사냥꾼 열 일곱이 숲을 뒤지다가 발견한 놈입니다. 살아남은 사냥꾼은 단 두 명입니다. 그나마 그 한 명이 바로 저 기 늘어진 시체이고, 다른 한 명은 집에 누워 있습니다. 심한 상처를 입었 습니다." 공포를 느끼는 사람들의 두런거리는 소리를 등뒤로 하고 하인리히는 다시 숙소로 향했다. 일단 한 놈 잡기는 했지만 대체 저 놈 하나가 온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을까? 물론 숙련된 사냥꾼 열 여섯을 잡아 먹은 놈 이긴 하지만 오백여명을 모두 학살한 범인이라고 보기에는 어폐가 있어 보 였다. "어떻게 생각해?" "다른 놈들도 있겠죠. 적어도 서 너 마리는 되지 않을까요?" 마르케스의 말을 귓등으로 들으며 그는 흥분한 얼굴로 짐승의 시체를 바라 보고 있는 세레스를 흘긋 보았다. 세레스는 아직 스무 살의 애송이였다. 집안 사람들과의 반목이 워낙 심하 다는 이야기는 듣고 있지만 신용할 마음은 전혀 없었다. 믿을 만한 인간은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이다. "전하!" 갑자기 등 뒤로 세레스가 말을 걸었다. 하인리히가 돌아보자 세레스는 흥분한 얼굴로 급히 외쳤다. "저 짐승이 또 있을지 모릅니다. 숲안을 수색하게 해 주십시오!" 하인리히는 무감동한 어조로 되물었다. "이 밤에 말인가?" 비가 내려 앞이 잘 보이지도 않고 바닥은 진흙으로 질펀거리는 이런 날에 어떤 야수가 있을지 알 수도 없는 숲으로 부하들을 이끌고 들어가겠다고? 하인리히는 짧게 조소했다. "난 부하들을 개죽음시키는 취미는 없어." 그는 면박을 당한 세레스가 굳건 말건 신경쓰지 않고 몸을 돌렸다. 망토는 이미 젖어들고 있고 머리칼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장화는 진흙에 주륵 주륵 미끌어진다. 하인리히는 희미한 한기를 느끼면서 여관으로 향했다. "마르케스님." 세레스의 말에 하인리히의 뒤를 따르던 마르케스는 몸을 돌렸다. "이대로 놔 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 우리들은 곧 수도로 들어가야 하고. 여기엔 그저 평범하기 짝이 없는 농부들의 자치대가 있을 뿐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끔찍한 괴수들을 맡기고 그냥 가버린다는 것은......." "요점이 뭐냐?" "말 그대로입니다. 몇 명을 이끌고 숲을 수색하게 해 주십시오." 마르케스는 흥분으로 눈을 빛내고 있는 청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1년 반의 해상 생활에서도 얻은 게 없는 것인지 이 청년은 무모한 열정을 앞세 워 앞으로 나아가려고만 했다. 어찌보면 이 성격은 하인리히와 닮은 일면 이 있었지만 하인리히보다도 어리석기 짝이 없었다. 마르케스는 그를 냉정 히 바라보며 대꾸했다. "전하의 말대로다. 이 밤에, 지리도 모르는 숲에 들어가 미지의 괴수와 맞 닥뜨리겠다? 그래서 뭘 할 테냐?" "하지만 기사란 것은........" "나아갈 때를 알고 움직여라." 마르케스는 일축하고 몸을 돌렸다. 세레스 덕분에 완전히 몸이 젖어버렸다. 그는 불쾌한 기분을 억누르면서 이미 여관으로 들어가 버린 하인리히의 뒤 를 따랐다. "세레스녀석은, 말이지." 하인리히는 젖어버린 옷을 벗어 낡아빠진 나무 의자에 걸었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을 한심하게 바라보며 그는 수건으로 머리를 닦아 내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그를 도와서 그의 진흙투성이 장화를 종자에게 건네고 마 르케스 역시 옷을 벗었다. "자기 육촌과는 전혀 안닮았는지도 몰라." "쓸데 없는 짓을 하는 점은 닮았습니다." 마르케스의 냉담한 말에 하인리히는 쓴 웃음을 지었다. "라데츠가 쓸데없는 짓을 했던가?" "귀족에게 완벽한 면세권을 부여했죠." 마르케스는 간단히 대꾸하면서 속까지 젖어버린 셔츠를 움켜 짜냈다. "어차피 귀족들은 세금을 내지 않았어." "영지가 있는 귀족들은 세금의 십분의 일을 바쳐야 하는 거였죠. 원칙은?" "원칙은 그랬지. 그러나 아무도 지키지 않아. 할아버지때 이래로 세금을 내는 귀족은 없어." "그러니까 멍청하다는 거겠죠." "네가 귀족이 아니니까 세금을 안낸다고 화를 내는 거겠지. 귀족들은 세 금을 내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구." 하인리히는 포도주 병에 손을 뻗어 한 잔 따르면서 말했다. 밤비에 젖은 몸은 으슬으슬 추웠다. 그런 그의 손을 막으면서 마르케스는 아까 한 대로 다시 은침을 포도주 잔에 넣고 그 다음에는 다시 약초가루를 뿌렸다. 침을 삼키며 포도주를 기다리고 있는 하인리히를 모른 척하고 마르케스는 포도 주를 한 모금 삼켰다. "추워. 어서 줘." "잠깐 기다리십시오. 즉효성의 독이 아니라면 시간이 걸릴 테니까." 마르케스는 무미건조한 어투로 그를 제지하면서 잠시 포도주잔을 노려보 면서 기다렸다. 자신의 몸으로 검사하는 이런 것이 위험하다는 것은 잘 알 고 있지만 일일이 종자를 불러내는 것도 귀찮은 일이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마르케스는 포도주잔을 하인리히에게 내밀었다. 하인리히는 그의 손에서 재빨리 잔을 빼앗아 단숨에 들이켰다. 아까부터 덜덜 떠느라 얼굴이 퍼렇게 질려있었다. "침대에 들어가십시오. 더운 물을 준비하라고 이를 테니까요." "알았어. 아, 마르케스. 내 망토는 덜 젖었으니까 그걸 걸치고 나가." 막 방문을 열고 나가려는 마르케스에게 하인리히가 덧붙였다. 순순히 망토 를 등에 걸친 마르케스는 치밀어 오르는 한기에 부르르 떨었다. 비에 젖어 체온을 상당히 빼앗긴 데다가 걸친 것은 얇은 속옷 뿐이었다. 그나마 망토 라도 걸치니 조금 나았다. 살인이 나고 사고가 난 지라 마을의 분위기는 어수선하기 짝이 없었으나 사방은 조용했다. 이미 밤이 깊었고 비까지 내리는 이 을씨년스러운 날씨 탓으로 나돌아다니는 사람들은 거의 없는 듯했다. 비 내리는 소리 이외에 는 귓가에 들려오는 소리는 없었다. 마르케스는 천천히 어두운 복도를 걸 어가 계단 앞에 서서 아래층을 내려다 보았다. 아래층은 조용했지만 벽난로를 피웠는지 열기가 느껴졌다. 계단을 따라 내 려가 보니 아닌 게 아니라 벽난로 앞에 서 넛의 여행자들이 두런두런 떠들 고 있었다. 음식냄새를 맡으면서 마르케스는 점원을 불렀다. "이봐." "네!" 상대가 높은 분이라는 것을 잘 아는 점원이 급히 달려와 고개를 숙였다. "발을 담글 더운 물과 탕파를 준비해 줘." "네, 알겠습니다." 점원이 사라지자 마자 그는 벽난로 앞으로 다가가 손을 쬐었다. 아직 축 축한 망토와 몸에 달라 붙었던 젖은 옷가지 때문에 불쾌했던 그는 이 온기 가 말할 나위 없이 기분이 좋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햇빛이 내리쬐는 해양에서 뛰어다녔던 지라 이 축축한 기운과 음산한 날씨는 무척이나 신경에 거슬리는 일이었다. "불을 가리지 마." 누군가가 낮게 말했다. 마르케스가 돌아보니 그의 바로 뒤에 불을 쪼이고 있던 여행자가 앉아 있 었다. 전신이 온통 젖은 그 여행자는 로브를 둘둘 몸에 말고 있었는데 그 로브 끝자락에서 계속해서 물이 뚝뚝 흐르고 있었다. 진흙이 잔뜩 묻은 장 화나 지팡이가 꽤나 멀리서 온 여행자로 보여서 마르케스는 순순히 옆으로 물러섰다. 그 여행자의 일행으로 보이는 다른 자가 문득 머리에 둘러쓴 로브를 벗었 다. 물이 계속 떨어져 내려 불쾌했던 모양이었다. 순간, 마르케스는 눈앞이 환해지는 것 같은 느낌에 눈을 크게 떴다. 황금빛의 머리칼을 한 여행자는 이십대 초반으로 보였다. 룬드바르에서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희디 흰 피부에 마치 소녀같은 용모를 한 청년은 마 르케스의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려 그를 힐긋 바라보았다. 젖은 금발 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어디서 왔나?" 마르케스는 조용히 물었다. 약간 미심쩍은 일행이란 생각도 들었다. "델리암에서 왔지요." 상냥한 웃음을 지어 보이는 청년은, 소녀같은 미소에도 불구하고 지독하 게 차가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마르케스는 섬뜩한 기분을 느끼면서 다시 물었다. "도보로 온 건가?" "네에." "무엇 때문에 여기 온 거지?" "그런 걸 일일이 말씀드려야 하나요?" 청년은 조각 같은 미모로 웃으면서 되물었다. "수상하니까." 마르케스는 그렇게 대꾸하고 다른 자를 돌아보았다. 그 시선을 의식했는 지 마르케스의 바로 뒤에 서 있던 여행자는 천천히 로브를 벗었다. 여자였다. 짙은 색을 한 금발을 가진 그녀는 황금빛의 눈을 한 채 마르케 스를 바라보았다. 밀빛 피부와 치켜 올라간 황금빛의 눈동자, 황금색이라기 엔 조금 어두운 금발을 가진 그녀는 말할 수도 없이 황홀한 눈빛을 하고 마르케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와 내 동생은 지금 긴 여행을 하고 있는 중이에요."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미소가 갑자기 그 입가에 떠올랐다. 붉은 입술은 말할 나위 없이 매혹적 이어서 마르케스는 한순간 넋을 잃었다. 그러나 그도 잠시, 그는 자신이 아 직은 세레이아를 잊을 정도는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차가운 눈빛으로 여자 를 마주 보았다. "여행의 목적과 이름을 대라." 그녀는 뜻밖이라는 듯이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매력적인 향내가 퍼졌다. 그것을 마르케스는 눈살을 찌푸리면서 지켜보고 있었다. "이름말인가요? 나는 카산드라, 제 동생은 마베릭이라 한답니다." "여행의 목적은?" "수행이지요. 우리들은 쓸만한 마법사랍니다." 그녀는 빙긋 웃어보였다. 마르케스의 머리 한 구석에 의심이 떠올랐다. 방금 본 그 괴이쩍은 짐승, 그리고 난데없이 나타난 이 두 명의 마법사. 원래 룬드바르에는 마법사가 흔하지 않았다. 오히려 드문 편에 속했던 것이다. "당신은? 당신은 하인리히 전하이신가요?" 그 말에 마르케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갑자기 이 여자가 그렇게 말한다는 것은 하인리히가 이 곳에 머문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그렇다면 대단히 미심쩍은 남매다. "그런 것을 왜 묻지?" "당신이 그토록 비싼 흰 사슴의 망토를 걸치고 있으니까요." 마르케스는 문득 자신이 걸친 하인리히의 망토자락을 거머쥐였다. 뭔가 위 험했다. 이 자들, 겉모습은 대단히 아름답지만 너무나 위험한 자들이었다. 그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면서 그들을 노려보았다. "나를 사랑하세요." 갑자기 황금빛의 여인이 미소지으면서 말했다. "뭐라고?" 마르케스는 눈을 치켜떴다. "나를 사랑하세요. 당신은 내 것이 되어야 합니다." "무슨 소릴 하는 거냐! 이 마녀야!" 마르케스는 허리에서 칼을 빼 들었다. 여인의 황금빛 눈 안쪽에서 불꽃과 도 같은 것이 순간적으로 타올랐지만 그는 그것에 정신을 빼앗기진 않았 다. 그가 칼을 빼들자 옆에 앉아 있던 금발의 청년이 킬킬 웃음을 터뜨렸다. "누님, 이 작자, 꽤나 고집스럽네. 현혹의 마법에 걸리지 않는거야?" "글쎄다. 그것도 재미로군." 그녀는 녹아내리는 듯 달콤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마르케스가 막 그녀를 향해 칼을 내리치려는 순간 갑자기 그의 눈앞이 새 하얗게 변했다. "마르케스?" 둥근 얼굴의 세레이아가 그를 바라보며 묻고 있었다. "진심이야?" "네, 진심입니다." 세레이아는 조금 흔들리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는 조금 얼굴을 붉혔 다. "하지만 아버진 허락하지 않으실 거야." "제가 기사위를 따내고 전공을 세운다면 마음을 바꾸실 가능성은 있습니 다." "하긴, 둘째 부인에게서 태어난 내가 대단한 가문에 시집가도록 대공비가 용서치 않겠지." 그녀는 킬킬 웃었다. "어쩌면 나와 마르케스가 결혼하는 것을 대공비가 도와줄 지도 모르겠네?" 그 말에 마르케스는 쓴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나는 불안해. 알고 있겠지만 오빠가 그렇게 죽은 것은 대공비의 짓이 틀림없어. 그 여우가 우리 오빠를 죽였어. 그러니까 다음에는 틀림없 이 하인리히야." "세레이아님." "마르케스가 하인리히를 썩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은 잘 알지만 말야, 나 에겐 믿을 사람이 마르케스 밖에는 없어. 그 애도 마르케스라면 믿고 있을 걸." 세레이아는 또렷한 갈색 눈으로 마르케스를 올려다 보았다. 그 얼굴에 미 소가 떠올랐다. "그러니까 마르케스는 하인리히를 지켜줘. 그 애가 오빠처럼 죽지않도록 말이야." "네. 세레이아님." "세레이아라고 불러. 그리고 말이지....." 그녀는 얼굴을 붉히고 마르케스를 약간 부끄러운 듯 올려다 보았다. "키스는 언제 해 줄거야?" 그 말에 웃음을 낮게 터뜨리면서 그는 그녀를 끌어안았다. 부드러운 입술 을 살짝 겹치자 그녀는 부끄러운 듯 낮게 웃었다. 눈을 떴다. 마르케스의 눈 앞에 있는 것은 알몸의 여자였다. 그녀는 세레이아와 비슷한 금발을 흰 어깨에 흐트러뜨리고는 마르케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흥미진진한 물건을 바라보는 듯한 그 무미건조한 눈빛을 보면서 그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깨닫고 아연해졌다. "깼네?" 그녀가 낮게 웃었다. "마녀, 나에게 무슨 짓을 한 거냐?" 그가 낮게 이를 갈며 묻자 그녀는 쿡쿡 작은 소리로 웃었다. 희미한 불빛 아래 흔들리는 금발은 사실 숨막히도록 아름다웠지만 마르케스는 그런 것 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재미있는 사내로군. 나와 실컷 놀아놓고 무슨 짓을 한 거냐고 묻다니?" 그 말에 그는 눈살을 찌푸리고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러나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가 고개를 돌아보니 그의 몸은 지금 침대 기둥 네 군데에 묶여 있는 상태였다. 그가 움직이려고 팔을 움직일 때마다 철컹 철컹하고 그를 묶은 쇠사슬을 소리를 냈다. 낯선 방이었다. 분명히 그가 있었던 곳은 여관의 일층이었을텐데 눈을 떠 보니 그가 선 곳은 낯선 방안이었다. 방은 호화스럽고 달콤한 향기가 났다. 밖은 보이지 않았다. 창문에는 호사스럽지만 두터운 커튼이 창문을 완전히 가리고 있었고 어두운 방을 비추는 촛불은 향기가 나는 향초였다. 귀족집 안에서도 여간해서는 쓰지않는 향초를 보고 마르케스는 냉정하게 머리를 굴리려고 애썼다. 지금 이 눈앞에 있는 여자가 대체 누구고, 자신에게 원하 는 게 뭔지 알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급한 것은 혼자 있 을 것이 뻔한 하인리히였다. "뭘 원하는 거냐? 마녀?" "흐음. 여전히 뻣뻣한 사내로군. 그 정도로 뜨거운 밤을 보냈으면서 말이 야." "대체.......나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별로 약간 기분을 돋궜을 뿐이야. 하인리히전하." 마르케스는 눈살을 찌푸리고 여자를 보았다. 여자는 의기양양한 웃음을 짓고 있었고 그 웃음을 보고 마르케스도 모르게 조소를 머금었다. "이제 무슨 일인지 알 것 같군. 너는 내가 하인리히전하일 거라 생각하고 유혹한 거냐? 미안하지만 나는 하인리히 전하가 아니다. 나는 그의 부하일 뿐이지." 그 말에 여자는 눈을 크게 떴다. "뭐라고? 네가 하인리히가 아니라고?" "후, 실망시켜 미안하군, 전하에게 미인계라도 펼치려던 모양이지?" 마르케스는 한껏 비웃으며 큰 소리로 웃었다. 그는 여자가 실망하여 분노를 터뜨릴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여자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 화를 내지는 않았다. 그 의외의 반응에 마르케스 는 잠시 그 황금빛의 여자를 살펴보았다. "그 아름다운 몸뚱이로 전하를 유혹해서 무슨 일을 하려는 거냐? 설마하 니 전하의 애인이라도 되고 싶었던 거냐?" 그녀는 화도 내지 않은 채 재미있다는 듯이 마르케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 그는 약간 당혹했다. 이 여자의 모든 것은 뭔가 보통의 여자와 달랐다. 그녀는 턱을 괸 채로 알몸을 가리지도 않고 마르케스의 옆에 엎드 렸다. 그리고는 마르케스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는 것이었다. 여자의 체온이 벌거벗은 팔에 닿자 마르케스는 그제서야 자신도 여자도 완전히 알몸이라 는 것을 깨달았다. 얼굴이 달아오를 수치스런 상황이었지만 그는 스무살 짜리 애송이는 아니었다. '대체 이 여자는 뭐냐? 뭘 바라는 거지?' "그럼 당신 이름은 뭐지?" "마르케스 옥크토. 기사다." "하인리히의 부하라고? 그의 가장 가까운 부하인가 보지? 그의 망토를 빌 려 입을 정도로?" 그 말에 흠칫하는 마르케스를 바라보면서 그녀는 즐겁다는 듯이 고양이처 럼 웃었다. "당신, 꽤 대담한 남자로군. 내가 아름다운가?" "마녀주제에." 마르케스는 그렇게 대답했지만 그녀는 화를 내지도 않고 빙글빙글 웃었 다. 갑자기 차가운 칼날이 그의 목에 와 닿는 것을 느끼면서 그는 몸을 굳 혔다. "대답해봐." "그게 대체 무슨 상관이지?" 그는 목줄기를 파고드는 칼날을 느끼면서 되물었다. 목에서 흐르는 피가 침대 위를 적셨다. 뜨끈한 액체를 느끼면서 마르케스는 황금빛으로 빛나는 여자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기묘한 빛깔. 이런 눈을 한 여자는 본 적이 없었다. 갑자기 그녀가 고개를 숙여 그의 입술을 덮었다. 따스하고 뱀처럼 요사한 입술이었다. 마르케스가 피하지 않자 그녀는 입술을 겹친 채 웃었다. 비인간적일 정도 로 매끄러운 피부와 눈동자는 확실히 아름다웠다. "하인리히전하에게 무슨 볼일이지?" 마르케스는 조용히 그녀의 입술을 바라보며 물었다. 여자와 키스해 본 것 이 대체 얼마만의 일이던가? 그는 7년만의 일이라는 것을 기억해 냈다. "그를 죽이려고." 놀라운 대답은 아니었다. "왜?" "부탁을 받았으니까." 그녀는 빙그레 웃었다. 그녀의 이마위로 젖은 금발이 몇가닥 흘러내렸다. 이 여자의 이 이상할 정도로 빛나는 미모는 그녀의 웃음에 따라서 점점 빛 을 발하고 있었다. "누구에게?" "호사인 세르오네." 그녀는 순순히 말해주었다. 호사인 세르오네라면 세르오네 집안의 장남이다. 대공비의 오빠로 막강 권 력을 휘두르는 인물. 그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마르케스는 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네가 세레이아님과 헤르겐님도 죽였나?" "아니." 그녀는 단숨에 부정하며 빙그레 웃어 보였다. 그 얼굴을 마르케스는 반쯤 은 어이없는 기분으로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 "그 이야길 나에게 하는 이유는 뭐지?" "하인리히를 죽일 마음이 갑자기 사라졌기때문이지." "뭐?" 마르케스는 입을 다물고 그녀가 말을 하길 재촉했다. 비록 알몸으로 뒹굴며 사로잡힌 몸이긴 하지만 머리는 정상적으로 굴러가 고 있었다. 이 여자는 보통 여자가 아니었고 룬드바르에서도 드문 마법사 였다. 그녀는 지금 하인리히를 죽이도록 의뢰받았으면서도 그를 죽이지 않 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처음엔 죽일까 하고 생각도 했었지만, 그래봐야 세르오네 가문만 좋은 일을 굳이 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 나는 룬드바르란 이 나라가 무척 마음에 들었어. 여기에서 뿌리를 내리고 싶다는 생각도 할 정도로." 마르케스는 말없이 재촉했다. "그래서 결심했지. 차라리 하인리히쪽을 도와 대공위를 잇게 해주면 어떨 까 하고 말이야." 그녀는 기분 좋은 듯 두 다리를 주욱 펴면서 속삭였다. 그 움직임으로 마 르케스의 팔뚝에 그녀의 젖가슴이 와 닿았지만 그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 다. 그런 그를 향해 빙긋 웃으면서 그녀는 낮게 물었다. "어때? 사상 최고의 마법사를 한 편으로 하는 것은 매우 유익한 일일 테 지?" "뭘 보고 널 믿지?" 마르케스가 재차 묻자 그녀는 흐음 하고 웃음을 지었다. "너에겐 전혀 선택의 여지가 없어. 마르케스 옥크토. 물론 하인리히에게도 말이야. 나와 손을 잡던지 아니면 죽던지 둘 중 하나지." "어째서지?" "오다가 숲을 보았겠지?" 그녀는 악마처럼 웃었다. 소름이 끼치는 그런 웃음을 머금으면서 그녀는 한가롭게 마르케스의 머리 칼을 쓰다듬었다. 지나치게 다정해서 소름이 끼치는 그런 움직임이었다. "그런 짐승들 백 마리 정도를 상대로 너희들 이 십 여명이 살아남을 거라 고 생각해?" KUBERIN.......... 높이 나는 새들은 땅을 바라보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들은 걷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3 하인리히는 기다렸다. 밤에 갑자기 사라진 마르케스를 기다리면서 그는 초조한 마음으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비는 이미 그쳤다. 질척거리는 땅바닥만을 남기고 이제는 푸른 하늘이 드 러나고 있었다. 마르케스가 갑자기 사라질 이유란 단 한 가지, 그의 죽음, 혹은 납치였다. 하인리히는 초조해지는 기분을 억누르기 위해 물병에 손을 뻗었다가 멈췄다. "절대로 나 없이 음식을 먹어선 안됩니다." 마르케스가 그렇게 말했었다. 그의 말이 옳았다. 마르케스가 사라진 이상 그가 믿을 수 있는 인물은 극히 적었다. 전적으 로 목숨을 맡길 수 있는 인물은 마르케스와 그가 어릴 때부터 길러낸 해적 출신의 애송이들 몇 뿐이었다. 초조한 마음으로 그는 물병과 탁자에 놓인 식사를 바라보았다. 벌써 이틀 간 온 종일 굶은 그는 허기와 굶주림으로 목이 탔지만 그 보다 더한 문제는 마르케스의 행방이었다. 만약에 그가 진 짜로 시체가 되었다면 하인리히는 당장 엄청난 위험에 봉착해 있는 셈이었 다. "젠장." 그는 주머니에서 은침을 꺼내 물병에 독이 있는가를 검사한 뒤에 마르케 스가 하던 것처럼 약초가루를 슬며시 뿌렸다. 다행히 물은 여전히 투명한 채로 변함이 없었기에 그는 허겁지겁 물을 마셨다. 마르케스가 전부터 말 했던 것처럼 그가 죽는다면 마르케스의 친우이자 부하인 베일러스를 불러 야 했다. 베일러스는 지금 바다에 있었다. 그가 거느린 선단이 여기에 도착 할 즈음이면 하인리히 자신은 죽어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마르케스를 건드린 놈이 누굴까? 설마하니 세레스놈인가?" 그러나 마치 아니라고 말하듯 세레스는 허둥지둥 마을 곳곳을 뒤지며 마 르케스의 행방을 찾고 있었다. 그 모습이 진심인지 아닌지 하인리히로선 감을 잡을 수 없었지만 세레스의 휘하 전부가 그의 행방을 찾기위해 난리 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덕분에 안그래도 어수선한 이 작은 마을은 무척 시끄러웠다. 마르케스가 사라진 뒤 그의 부하들은 하인리히의 방을 이중 삼중으로 눈 을 부릅뜨고 지키고 있었다. 마르케스와 최소 십 년 이상 지내온 부하들인 지라 어느 정도 믿을 수는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그를 대신할 수는 없었 다. 그들의 동요를 느끼면서 하인리히는 한숨을 내 쉬었다. 사흘, 사흘간 기다리고 이 곳을 떠나리라고 그는 결심했다. 마르케스가 죽었는지 살았는 지도 모르고 여기서 그렇게 오랫동안 지체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 성격 으로 보아 이때껏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 자체가 불길한 이야기였다. 하인리히는 제멋대로 자란 머리칼을 움켜쥐면서 욕설을 퍼부었다. "젠장! 마르케스까지 건드리다니! 죽여버릴 테다!" "침착하시지요." 갑자기 그의 등 뒤에서 낯선 음성이 들려왔다. 하인리히는 놀라 몸을 돌렸다. 그의 침대 뒤쪽으로 갑자기 어디서 나타났 는지 두 명의 그림자가 떠올랐다. 놀랍게도 이틀간 행방불명이던 마르케스 와 금발을 한 미녀였다. "마르케스!" 하인리히는 놀라 손을 뻗다 말고 멈칫했다. "무사하십니까?" 마르케스는 여전히 무감동한 회색눈으로 하인리히의 몸을 살폈다. 그 시선 을 받으면서 하인리히는 얼굴을 구겼다. "너, 대체! 여자랑 노느라 안 나타난 거냐!" 그가 고함을 지르자 마르케스는 눈살을 찌푸렸고 금발의 미녀는 기분 좋 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웃음을 들으면서 하인히리는 조금 흠칫했다. 지나치게 차가운 그 웃음소리는 결코 그녀의 외관처럼 듣기 좋은 것이 아 니었다. "나는 카산드라라고 합니다. 하인리히 전하." "넌 뭐냐?" 하인리히가 미심쩍은 눈초리를 던질 때 그녀는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세르오네님에게서 부탁을 받고 당신을 죽이러 왔습니다. 나는 강한 마법 사거든요." 그 말에 하인리히는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그제서야 상대가 소리도 없이 그의 방안 한 가운데에 나타났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그렇게 나타날 수는 없었다. 마법사가 드문 룬드바르인들은 마 법에 대한 공포가 남들보다 더 강했다. "그래서?" 하인리히는 마르케스와 여자를 번갈아 보며 되물었다. 마르케스가 자신을 죽이려는 암살자와 함께 나란히 서 있다는 것은 믿기지 않는 일이었기에 그는 약간 여유를 두고 물었다. 어차피 상대가 진짜 마법 사라고 한다면 자신을 죽이는 것은 별로 어렵지도 않은 일일 것이다. 게다 가 상대가 그를 죽이려 당장 덤벼들지 않은 것으로 보아 뭔가 할 말이 있 는 듯했다. 하인리히는 오히려 약간의 흥미를 느끼면서 그녀를 똑바로 바 라보았다. 그 시선에 카산드라는 웃었다. 상당히 만족한 듯 웃으면서 그녀는 옆에 말없이 선 마르케스의 팔을 잡아 살며시 연인처럼 기댔다. "그러나 마르케스를 만나서 설득을 당했답니다." 그 말에 하인리히는 눈살을 찌푸렸다. 마르케스는 무표정한 대로 그녀를 흘긋 보았을 뿐 그 말에 대해 정정할 마음은 별로 없는 듯했다.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군, 다시 말해 너는 나를 죽일 마음이 사라졌다는 것이냐?" "네. 단지 세 가지만 다짐을 받는다면 나는 당신의 힘이 되어줄 수도 있 어요." "세 가지?" 하인리히는 미심쩍은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카산드라는 두 손을 허공으로 뻗었다. 두 손바닥 사이에 푸른 기운이 맴도 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갑자기 화라락 하는 소리와 함께 시퍼런 비늘을 가 진 짐승이 떠올랐다. 그 짐승은 사람의 팔뚝만한 크기였지만 찢어진 두 눈 과 송곳 같은 이빨을 드러낸 채로 위협적으로 으르렁거렸다. 그 사나운 모 습에 마르케스와 하인리히 모두 눈을 크게 뜨며 주시했다. "가라. 가서 죽이고 와라." 그녀가 싸늘하게 말하자마자 그 짐승은 홱 하고 몸을 돌리더니 창문을 향 해 돌진했다. 그리고는 창문을 가차없이 꿰뚫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창문이 깨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퍼지고 차가운 바람이 방안으로 뛰어들었다. "어디로 간거지?" 하인리히가 묻자 그녀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달콤하게 웃었다. "숲안을 떠도는 짐승들을 죽이러." "뭐?" "마을 사람들을 습격한 짐승들 말이지요. 그 마수들을 죽이러 간 겁니다." "저 작은 것이 그것들을 죽일 수 있다는 건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하인리히가 중얼거리자 카산드라는 도도하게 웃었 다. "저것은 그것들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지요. 뭐, 궁금하시다면 지금이라도 당장에 확인할 수 있을 거에요." "지금이라도?" 하인리히가 묻자 마자 갑자기 비명소리가 찢어질 듯이 울려퍼지기 시작했 다. 그 짐승들의 시체는 마을 어귀에 널려 있었다. 하인리히들은 그 시체들을 바라보며 망연히 입을 벌렸다. 짐승들은 갈가리 찢긴 채로 바닥에 피를 뿜으며 쓰러져 있었는데 그 주변으로 마을 사람들 로 보이는 사람들의 시체도 같이 몇 구 놓여 있었다. 자치대라고 하는 자 들이 와서 겁에 질린 사람들 사이에 끼어 그 시체들을 돌아보고 있는 동안 카산드라는 시체더미 앞으로 다가가 두 손을 다시 내밀었다. 그러자 우걱우걱 하는 듣기 싫은 소리와 함께 시커먼 짐승이 튀어 올랐다. 비명을 올리는 사람들을 좌우로 두고 그 짐승은 부들부들 떨더니 갑자기 배가 불룩불룩하기 시작했다. 뼈가 으스러지는 듣기 싫은 소음과 함께 퍼 억 하고 피와 살점이 튀었다. 배를 가르며 그 퍼런 뱀과 같은 짐승이 튀어 나온 것이었다. 그 것은 피에 젖은 상태로 긴 혀를 내밀어 할짝 할짝 핥았 다. 여덟 개의 발과 갈래갈래 찢어진 꼬리를 가진 그것은 마치 도마뱀처럼 도 보였지만 길게 찢어진 입사이로 보이는 송곳같은 이빨덕분에 도마뱀이 란 착각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리 돌아와." 카산드라가 손을 뻗자 그 것은 홱 몸을 돌리더니 맹렬한 속도로 그녀의 손아귀로 뛰어들었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나타났을 때처럼 사라져 버렸다. 사람들은 동요했다. 마을 사람들과 주변에 섰던 하인리히의 부하들 모두가 겁에 질려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즐기듯이 카산드라는 하인리히를 바라보며 아리따운 태도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다 없앴습니다. 하인리히전하." "..............." 공포로 말을 못잇는 사람들 사이에 서서 하인리히는 심호흡을 했다. 이것은 엄청난 행운이던가 아니면 가장 끔찍한 악운일 것이었다. 무서운 힘을 가진 마법사가 영웅의 뒤를 돕는다는 전설은 흔히 있어 왔지만 하인 리히 자신은 이런 힘을 가진 마법사를 상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에겐 힘이 있고 병사가 있었지만 마르케스 이외엔 믿을 자가 없었다. 지금 눈앞에 선 이 여자 마법사를 믿는다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겠지만 그녀를 휘하에 둘 수 있다면 모든 것은 역전될 것이었다. ".....바라는 게 뭐냐?" 그녀에겐 힘이 있었다. 원한다면 그녀는 하인리히를 단번에 죽이고도 남 을 힘이 있었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그에게 다가와 기꺼이 손을 잡을 것 을 요청한 것이다. 흥분으로 떨리는 주먹을 내리며 하인리히는 그녀에게 물었다. "바라는 것을 말해라." 마르케스는 그녀의 힘을 보고 씁쓸한 기분이 되었다. 그녀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녀의 말대로 그녀는 강했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힘이 되어 줄 수 있었다. KUBERIN.......... 높이 나는 새들은 땅을 바라보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들은 걷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4 "나에게 지위를 주세요. 궁정마법사정도면 좋겠지요." "그건....앞으로의 일이야." 하인리히는 신중하게 대답했다. 다시 여관방에 돌아온 그들은 금발의 화사한 미청년과 함께 나란히 앉아 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물론 하인리히는 식사에는 손도 대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음식에 자연스레 손을 대면서 금발청년이 물었다. "우리들은 앞으로 당신이 룬드바르 대공이 되었을 때의 일을 말하는 겁니 다. 당연하잖아요?" 하인리히는 새파랗게 젊은 미청년을 바라보면서 약간 갈등했다. "그리고 우리들은 단순히 룬드바르대공으로 만족할 인물은 싫어요." 빵을 씹으면서 해사한 청년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는 뭔가 재미있는 일이라도 말하는 것처럼 상냥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그렇지 않아요? 나와 누님정도로 강한 마법사를 가진 군주가 시시하게 이런 남쪽 귀퉁이의 공국정도로 만족한단 말인가요?" 그 말에 하인리히는 주먹을 쥐었다. "최소한 대륙제패, 대륙제패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군주가 될 자격 은 없다고 생각해요. 그렇지요? 누님?" "그렇고 말고." 카산드라는 웃으며 포도주잔을 입에 댔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대륙의 통일, 그리고 그 군주가 나의 군주일 것. 그 것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룬드바르대공전하? 아니, 하인리히 황제폐하?" 쿡쿡쿡 하고 하인리히는 웃기 시작했다. 그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기 시작 해서 갑자기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너무 발작적으로 웃는 것을 보고 옆에 있던 종자들이 불안해 할 정도였다. 하인리히는 너무나 유쾌한 나머 지 눈물까지 나올 것 같았다. 여지껏 목숨을 부지하느라 급급했던 그에게 대륙통일의 황제가 되라는 그 들의 말은 정말로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먼 미래의 이야기가 될지 혹은 가까운 장래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인지 잘 알 수는 없지만 그는 너무 나 유쾌했다. "맞아, 그래, 맞는 말이야. 사내로 태어나서 그 정도는 해야해. 바다는 넓 어, 내가 나다닌 바다는 대륙보다도 넓을지 몰라. 그러니까 대륙통일, 그 정도 생각해 볼 만 하군." 그는 쿡쿡 웃으면서 옆에 앉은 마르케스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생각하나? 나는 정말로 대륙을 통일하고 싶어졌어. 이 좁은 땅덩 이에서 굴러다니는 돌멩이 취급은 이제 질색이야." 마르케스는 무심한 얼굴로 흥분한 하인리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가장 큰 델리암왕국은 부패했고 다른 군소 왕국들은 태평성대에 이가 빠 졌어. 못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아." 갑자기 빛나기 시작하는 그의 눈을 바라보면서 마르케스는 희미하게 미소 를 지었다. "그 영토가 바다로 시작해서 바다로 끝나는 왕국, 저 산맥너머의 고왕국 과 장벽너머의 동방교국까지 바라볼 수 있는 그런 대 제국." 하인리히는 자신을 바라보는 카산드라를 주시하며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 움직임에 카산드라가 눈을 크게 뜨자 그는 시익 웃었다. "그런 제국을 만들도록 네가 도와줄 건가?" "네." 그녀는 짧게 대답했다. "그리고 너의 조건은?" 손을 잡은 채 하인리히는 카산드라를 재촉했다. 그녀는 금빛 눈을 빛내면 서 매혹적으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첫 번째는 나를 궁정마법사로 할 것이었죠?" "승락한다." "두 번째는 대륙을 정복할 것." "좋아." "세 번째는 마르케스를 나에게 줄 것." 그 말에 하인리히는 눈을 크게 뜨고 마르케스를 돌아보았다. 마르케스의 얼굴은 평소대로 무표정해서 그 감정을 알 수 없었다. "그건 무슨 뜻인가? 마르케스를 달라는 건? 그의 목숨을 달라는 건가? 아 니면........?" "그를 내 연인으로 달라는 거지요." 여자로선 입에 담기 어려운 뻔뻔한 말에 하인리히는 순간 입을 벌렸다. "마르케스를 준다면 나는 당신을 불사신에 가깝게 만들어 줄 수 있어요. 최강의 마수를 당신의 휘하에 놓고 이 십여명이 넘는 최고의 마법병단을 당신에게 건네주지요. 그리고 대륙 전체를 내리칠 가장 강력한 군대를 만 들어주겠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을 대륙통일의 제왕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거에요." 카산드라의 엄청난 말에 하인리히는 말을 잊고 마르케스를 바라보았다. "마르케스?" 마르케스는 대체 이 여자의 진심이 어디까지인가 궁금해졌다. 난데없이 나타나더니 갑자기 하인리히의 휘하가 되겠다고 말하고, 그 다 음에는 자신을 달라고 말한다. 여자가 말하기엔 지나치게 수치스러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담는 그녀를 그는 주시하면서 이 여자의 허풍을 언 제까지 믿어야 하는가 고심했다. "마, 마르케스? 너는 이 여자가 좋은 건가?" 하인리히는 7년간 여자와 만나지도 닿지도 않은 지독한 철벽의 사내를 바 라보며 물었다. ".............." 마르케스는 묵묵히 카산드라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의미심장한 눈빛을 그 에게 던지고 있었다. 재미있다는 그 눈길을 받으면서 마르케스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인리히전하를 돕는다면 나는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너는! 너의 마음은?" 하인리히가 의외로 격한 어투로 물었다. 그 뜻밖의 태도에 마르케스는 그게 마법사를 얻기 위해 부하를 팔았다는 자책감인지, 혹은 그저 부하의 환심을 사려는 가식적인 행동인지 알 수 없 었다. 하인리히는 격한 성격이지만 뱀처럼 차가운 데도 있었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마르케스는 하인리히가 보이는 당혹한 표정을 물끄러미 바라보 면서 되도록 그것이 후자 쪽이길 바랬다. 그래야 하인리히는 오래 살 것이 었다. 그리고 그게 그의 바램이었다. "나는 상관이 없습니다. 이 여자는 매력적이니까요." 마르케스의 말에 하인리히는 미심쩍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샤레이아의 죽음이래 마르케스가 어떤 여자에게도 다가서지 않는다는 것 은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런 그가 갑작스레 나타난 정체 모를 여자마법사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은 믿기지 않는 일이었 다. '하지만 어쨌거나..........마르케스는 동의한 것이로군.' 하인리히는 조금 씁쓸한 기쁨을 맛보았다. 그가 자신을 위해 당연히 동의해 줄 것을 알면서도 재차 물어본 것은 정 말로 위선적인 행동이었다. 이 상황에서 분명 마법사의 이 조건은 거절할 수 없다는 것을 마르케스도 자신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하인리히는 재차 다른 말을 입에 올렸다. "그럴 순 없어. 마법사여, 다른 기사를 골라. 마르케스 말고 다른 기사들 도 얼마든지 잘생기고 아름다운 젊은이들이 많다구." 그 말에 카산드라는 훗 하고 웃음을 지었다. "나는 젊고 아름다운 남자를 찾는 게 아닙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저 회 색 눈을 한 저 남자입니다. 전하가 싫다면 없었던 일로 해도 상관없어요. 야망을 지닌 군주는 당신 하나 만이 아니니까." 그 말에 마르케스가 입을 열었다. "저는 상관없습니다. 전하." "마르케스!" "저 여자와 같이 지내겠습니다, 전하." 하인리히는 자신에게 혐오감을 느끼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무심한 얼굴을 한 마르케스는 여마법사의 동생이라고 하는 금발의 미청년과는 전혀 다른 바위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무표정하고 냉혹한 회색 눈을 바라보면서 그는 잠시 말을 잊었다. "누님의 취향은 정말 이상하군요, 저 남자의 어디가 마음에 들었어요?" 마베릭은 나른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카산드라는 마르케스가 하인리히와 나란히 나아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 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표정이 없이 담담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부하들은 갑자기 나타난 마법사의 옆으로 다가서길 꺼려 해서 그들은 약간 떨어져서 말을 몰고 있는 중이었다. 하인리히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마르케스의 뒤를 바라보면서 카산드라는 야릇하게 웃었다. "재미있는 주종이야." "그렇군요." 마베릭은 카산드라를 흘긋 보았다. "하지만 나는 저 남자의 매력을 모르겠는데요. 친애하는 누님?" ".............마스터와 닮았어." "어디가요?" 약간 긴장한 음성으로 마베릭이 묻자 카산드라는 낮게 대꾸했다. "그 무심한 회색 눈이 말이야." "마스터는 회색눈이 아니에요. 아니, 우리로선 마스터의 진짜 눈색깔은 알 수도 없다구요." "그야 그렇지. 그러나 나는 마스터의 눈이 회색일 거라고 생각해. 저런 눈 빛일 거라고 생각한다구." 카산드라가 킬킬 웃자 마베릭은 한숨을 내쉬었다. "전혀 닮지 않았어요. 저건 무력한 인간일 따름이에요. 마스터에 감히 비 교할 수는 없어요." "무력한 인간인 주제에 나를 무서워하지 않았지." 카산드라는 즐거운 듯이 대꾸했다. "저 회색 눈이 공포로 물드는 것을 보고 싶어. 마베릭." "이거야 참......" 마베릭은 한숨을 내 쉬었다. "저 회색 눈이 마구 마구 동요하는 걸 보고 싶단 말이야." "누님도 참 대단하군요. 그런 간단한 이유입니까?" 마베릭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곁눈질로 암흑마도 최강의 마법사를 바라보며 혀를 찼다. 가장 지독하고 가장 잔인하며 암흑마도의 마스터를 제외하고는 가장 강한 그녀는 자기 자신을 모르는 듯했다. "정말 단순한 이유로군요. 누님." 당신은 그저 사랑에 빠진 거랍니다. 암흑마도 최강의 마법사님. 마베릭은 웃었다. 제 21화 절정 KUBERIN.......... 불은 춤추고 물은 노래하며 얼음은 웅크린다 1 "쿠베린." 유티아가 손을 내밀어서 내 목을 끌어안았다. 그녀는 예전에 없던 요염한 얼굴로 계속 속삭이고 또 속삭이면서 애원하듯이 매달렸다. "아이를 줘요." "지금은 발정기가 아니야."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묘하게 얌전한 태도로 중얼거린다. 창백한 얼굴, 파리해진 입술을 하고 아이를 잃어버린 여자가 비탄에 잠긴 채 웃는다. "하지만, 하지만, 나는 아이가 없어요, 없다구요." "알아, 알고 있다구." 대체 아이를 어디에 묻었을까? 계속 매달리는 그녀의 허리에 팔을 감으며 나는 전면을 바라보았다. 전에 보았던, 고양이들의 신전과 다른 모양을 한 이 놈의 신전이란 물건은, 한 마디로 어둡고 침침하며 칙칙했다. 싸가지 없어 보이는 뱀 두 마리가 몸뚱이 긴 것을 자랑하며 휘어 감은 기둥뿌리들은 반쯤은 기울어 볼품이 없었다. 갈라지고 흐트러진 모양을 한 그 놈의 신전은 군데 군데 어울리지 않는 분홍빛이라든가 보랏빛 벽화가 곳곳에 드러나 정말로 유치해 보였다. 이렇게 유치하고도 유치한 건물을 중요하다고 저 대륙 끝에서부터 찾아 올라온 놈들은 대체 어떤 놈들일까? 아니, 신전이라는 이 건물을 이따위로 지어 놓은 녀석들은 또 대체 어떤 놈들인지. "난 아이를 가지고 싶다구요....응? 쿠베린? 응?" 유티아의 칭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지겨워졌다. "다른 놈들은 다 어디에 있는 거야?" 괜히 두리번거리면서 중얼거리자 그에 대답하듯이 조인족의 여왕이 대답했다. "신전 안에 있겠지요." 조인족의 여왕과 함께 냄새를 따라 움직이고 보니 도착한 곳이 여기였다. 너무 현명해서 한 대 패주고 싶은 엘프녀석들과 인간 녀석들은 내가 변신하자마자 이리저리 튀어 버려서 찾을 수도 없고 찾을 마음도 가셔버렸다. 여왕도 룬드바르를 죽여버릴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막상 나와 한번 쌈박질 해보더니 이미 룬드바르에 대한 관심은 많이 가셔버린 모양이다. 조인족 놈들은 나와 여왕의 대결을 위해서 자리를 피하더니 지금은 내 머리 위에서 어슬렁어슬렁 날아다니고 있다. 나에 대한 예의로 옆에서 걷는 여왕은 유티아를 연민에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유티아는 내 옆에 선 여왕을 잔뜩 노려보면서 마치 여왕이 내 애를 스무 명쯤 낳았다는 듯한 얼굴로 잔뜩 적대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덕분에 나는 문득 조인족 여자와 내 사이에서 아이가 생기면 그 애가 대체 어떻게 생겼을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역시, 날개가 달렸을까? 손톱이 구부러졌을까? 가장 멋진 것은 그 녀석이 조인족과 묘인족의 가장 좋은 점만 모아서- 때로는 구부러진 발톱, 때로는 곧게 펴진 손톱 그리고 내달릴 때는 묘인족처럼, 날아 오를 때는 조인족처럼, 그리고 쌈박질 할때는 공중과 지상이 동시에 되는 것이다! 이야, 멋지다! 만약에 조인족과 묘인족 사이에서 애가 태어나기라도 한다면 정말로 멋질 것이다! 갑작스런 열망으로 나는 조인족 여왕을 열렬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갑자기 내가 자신을 열렬히 바라보자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낮게 물었다. "시장하신가요?" "............." "이곳에는 사냥감도 마땅치 않으니 참으셔야 겠네요. 이 인간들의 시체를 보면 이 근처에는 인가도 없을 듯하군요." 나는 그녀의 시선을 따라서 바닥에 널부러진 인간들을 바라보았다. 정확히 말하면 시체, 인간들의 시체다. 정말 지겨워 죽겠다. 지겹다. 이젠 지겨워 진다. 바닥 여기저기에 누가 가지고 놀다 던져버린 것 같은 형체로 널린 그 시체들은 피를 흘리며, 피를 굳히며, 내장을 쏟아내며, 이상하게 꺾여져 있다. 그들을 죽인 자들은 묘인족도 아니고, 조인족도 아니고, 사인족도 아니었다. 저건 인간들이 한 짓이었다. 하나같이 반듯하게 화려한 옷을 걸친 그들은, 전에 봤던 고왕국의 이태자인지 삼태자인지 하는 그 녀석과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너무나 인상적이어서 잊기도 어려운 그 옷들은 엘프들도 안 입을 고대풍의 나풀나풀함과 호리호리함, 나약함 그 자체를 드러내고 있어서 정말로 우스웠었다. 사낸지 계집인지 잘 알 수도 없는 작대기 같은 두 다리를 드러낸 그 차림새는, 우리는 약해요를 열렬하게 외치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 나자빠진 녀석들은 여전히 <우린 약했어, 그래서 죽었어> 라는 두 문장을 외치며 널브러져 있었다. 거, 이렇게 죽어 넘어진 꼴을 보니 기분이 썩 좋지는 않군. 게다가 죽은 지 사나흘은 된 듯한 시체더미를 바라보고 이제는 부패하기 시작하는 시체더미를 보고 즐거워 할 수는 없지. 특히 배가 고플 때는 말이야. 그건 그렇고, 이렇게 감상에 빠져서 멍청하게 있을 때는 아니잖아? 유쾌해지자구. 나, 사인족을 멸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좀 기분 좋아도 되잖아? 사실 어떤 녀석이 감히 한 종족을 완전히 없앨 수 있겠어? 한 쪽에서 죽여도 저 쪽에서 낳아제끼는 게 살아있는 것들이잖아? 인간을 보라고. 이 며칠사이 대체 내가 얼마나 많은 인간들을 죽였는지는 옷자락 휘날리는 여신들도 모르고 나도 몰라. 아마 인간들도 모를걸.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방에 넘쳐나는 인간들을 보라고. 세상에 얼마나 많은지 온통 세상이 다 인간으로 뒤덮여 있는 것 같다니까. 그거에 비한다면 역시 내가 사인족을 없앨 수 있다는 건 행복한 거지. 저 놈들은 내가 죽이는 동안 자기들도 같이 죽어 가는 거거든. 그리고 녀석들 하나 하나의 죽음이 바로 종족의 멸망과 이어지는 거야. 하! 정말 즐겁군. 즐거워 죽겠어. 그리고 그 것들- 그 머리도 부족한 주제에 겁도 없이 대가리를 내민- 노랑털들은 인간들의 조종을 받아 겔겔거리고 있다는 거지? 정말로 너무 즐거워서 당장에라도 춤을 출 것 같아. 잘되었지. 그 냄새나는 것들을 이 번 기회에 아예 끝장을 내는 거야. 그럼, 녀석들도 <우연찮게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잘은 모르지만 아마 멸망하게 된 것 같습니다>따위를 대지의 여신에게 말하느니 차라리 <고귀하시고 훌륭하시며 우아하시기조차 한 묘인족의 쿠베린왕께서 손수 미천한 저희들을 죽여주셨습니다>라고 말하는 게 훨씬 즐거울 게다. 나는 휘파람을 불고 웃었다. "쿠베린........." 유티아가 자꾸만 몸을 더듬으면서 비벼왔다. 나는 그 허리를 안고 토닥토닥하면서 웃어주었다. "걱정하지마. 발정기가 되면 또 아이를 가질 수 있을 거야. 그때 낳은 아이를 라비니아로 짓자. 그 애는 아주 강하게 키우는 거야. 알겠지?" ".....우우우웅..." 대답이 어째 시원치 않다. 걱정하지마. 애는 또 낳을 수 있어. 죽은 아이는 어차피 대지의 여신에게로 돌아갔다구. 그러니까 툭툭 털고 일어나 또 다른 아이를 낳아. 내가 너에게 또 다른 아이를 줄게. 라비니아 못지 않게 강인하고 튼튼한 아이를 말이야. 그녀를 꽉 안아주면서 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자아, 기분 전환을 하자구. 언제까지 바닥을 긁으면서 뒹굴거릴 거야? 기분을 풀자구. 없애는 거야. 사인족은 대체 얼마나 살아남았는 지는 잘 모르겠지만 모조리 죽여버리고, 내 아이를 잡아간 저 간이 배 밖에 나온 그 건방지고 가소로운 놈은 그냥 죽여버리자구. 그럼 아주 간단해. 간단한 일이란 말이야. 이미 우리가 몇이나 죽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사방에 소문이 다 퍼졌을 거야. 묘인족 아이를 해친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얼마나 끔찍하고 무서운 일인지 알았을 게야. 그러니까 가자고. 가. 그건 그렇고 다들 어디 간 거야? 유티아는 여기 있다 치고, 휴런이나 다른 놈들은 다 어디에 갔어? 밥이라도 먹고 있는 건가? "............" 뭘 보는 거야? 건물로 들어서자 마치 숨어있듯이 곳곳에 서 있던 녀석들이 흠칫 흠칫하며 날 바라보았다. 인간인 녀석들도 몇 있고 엘프인 녀석들도 몇 있다. 이 놈들의 차림새를 봐선 아무래도 고왕국의 귀족녀석들이나 뭐 그런 것들 같은데 역시 비리비리하고 희여멀건한 그 얼굴들에게는 짜증만 난다. 그 겁에 질린 얼굴들 사이로 그 중 낯익은 얼굴이 몇 있길래 쏘아보아 주었더니 그 쪽은 다시 우물거렸다. ".......제 정신인 거야?" "아아, 물론이지." "그, 그쪽은 어떻게 되었어?" 물은 것은 변함없이 엘프답지 못한 튜나였다. 튜나는 방패처럼 앞에 자기 애인을 내밀고 나에게 겁에 질린 얼굴로 물었다. "뭘 어떻게 돼?" 내가 묻자 튜나는 고개를 돌려 시선을 여왕에게 돌렸다. 그리고는 여왕이 주변을 살펴보는 것을 보면서 다급하게 지껄이기 시작했다. "여왕! 저 미치광이가 정상인가요?" "전에도 미치광이는 아니었는데요." 여왕은 쓴 웃음을 짓고 그렇게 말했다. 옆에 섰던 엘레는 착잡한 표정으로 여왕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곳에서 엘프의 왕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나도 눈 있어 안다. 물론 여왕도 이미 알고 있다구. 그러나 저런 찝찝한 표정을 보아하니 뭔가 의견이 상충되는 것은 확실한 것 같군. 여왕의 시선이 엘레의 어깨너머로 향했다. 엘레의 뒤에 있던 얼룩덜룩한 문이 삐걱하고 열렸다. 그리고 그 안에서 서너명이 걸어나왔다. 엘프들이었다. KUBERIN.......... 불은 춤추고 물은 노래하며 얼음은 웅크린다 2 "제 정신이구나." 안도의 한숨을 삼키면서 아크가 말했다. 그는 손가락을 꼽으면서 약간 초 조한 듯이 나와 조인족 여왕을 번갈아 보았다. "하기야 너는 언제나 제 정신이 아니었지. 그 쪽은 완전히 피바다지?" "피바다를 이루든 말든 그거야 알 바는 아니지, 아악아악 하며 도망친 게 누구더라?" "엘프들은 섬세해." 아크는 흰 옷자락을 흔들며 말했다. "너무 섬세해서, 피만 보면 기절하지." 나는 피식피식 웃었다. 엘프들은 결국, 저 놈의 룬드바르 놈과 뭔 계약을 한 것이 틀림없었다. 앞으로 노스 엘스턴을 건드리지 않는다, 엘프들과 싸 우고 싶은 마음은 없다라고 녀석이 말했을 것이고 엘프의 엉덩이는 느려터 진 그 주둥이로 노랫가락 엮듯이 외쳤겠지. <이 우리들의 맹약이 해와 달 이 영원하듯 지속되길 빌겠소!> "했지?" 내가 묻자 아크가 괜히 신경질을 내면서 짧게 말했다. "하긴 뭘 해? 넌 나이도 많은 게 왜 그렇게 미치는 거야?" "했으면 했다고 해. 뭘 새삼스레 피하는 거야? 설마하니 내가 모가지 흔들 까봐?" "네 녀석은 진짜................" 아크는 뭐라 말하려다가 웅얼거렸다. 이 녀석답지 않은 태도에 나는 확신 했고 조인족의 여왕도 뭔가 생각한 듯 엘프의 왕을 바라보았다. 엘프의 왕 엉덩이는 약간 지친 얼굴이었지만 여전히 히멀건한 면상을 바로 들고 우리 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눈동자는 마치, <너희들은 나의 깊은 뜻을 모른 다> 따위의 묘한 고뇌 비스끄무리 한 것을 포함하고 있었다. "재주 좋은 놈이군. 엘프들을 끌어 들였다는 거로군. 그럼 녀석들이 노리는 것은 결국 묘인족과 조인족 뿐인가? 아니, 수인족도 있긴 하고. 다른 아인 족도 건드렸는지 잘 모르겠는데. 소문들은 거 있어?" 내가 의외로 담담하게 묻자 아크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이 놈은 대체 나이가 몇인데 걸핏하면 신경질이야? "갈색 아인족...........이 지금 거의 멸족 직전이라고 들었어." "갈색 아인족이? 그럼 동북쪽 팔라샤족의 영토까지 들어간 거야?" 내가 놀라 묻자 아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나는 감탄하기로 마음먹었다. 인간 중에 갈색 아인족과 정면으로 붙 은 놈은 없었다. 물론 갈색 아인족과 팔라샤족의 그 영토를 감히 넘본 놈 이 없었다고 말하는 게 옳은 일이다. 이 놈 진짜 뭔 영웅이 되려는 건가? "그런데도 그들과 조약을 맺었다는 것입니까?" 날카롭게 조인족의 여왕이 끼어들었다. 그녀는 한 걸음 나서면서 엘프의 왕을 쏘아보았다. "그들이 갈색 아인족의 영토까지 건드리고, 우리들의 둥지를 뒤엎고, 묘인 족의 아이를 납치하고, 사인족을 분열시켰는데 노스엘스턴인들 온전히 내 버려 둘 거라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현재는 확실히 그렇소." 엘프의 왕은 조용히 대꾸했다. 그는 젊은 여왕을 향해 놀랄 정도로 온화한 어조로 말했다. "우리는 그저 기다리는 것이오. 여왕." "기다린다고요?" 그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알고말고. 나는 웃어 보였다. 녀석도 웃는다. 엘프의 왕이여, 오래 사는 자들의 왕이 여, 당신은 알고 있지. 룬드바르의 최후가 어찌 될 것인지. 젊은 정복자의 영광은 언제나 짧다. 엘프의 수천년에 비한다면 인간의 수십년은 찰나에 불과한 것. 일일이 열낼 필요는 없어. "밥 먹자." 나는 몸을 이리저리 흔들며 말해주었다. "여왕은 외롭지 않나?" 나는 은근히 그녀의 팔뚝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그녀는 묵묵히 자신의 팔 을 쓰다듬는 나의 손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옆에서 아크가 괜히 코웃음을 쳤다. 너저분한 이 놈의 신전 뒤뜰에서 우리들은 막 식사를 마쳤다. 엘프들이 가져온 음식이라는 것은 빵이나 버섯 수프같은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나는 조인족들이 식사하는 사이에 끼어 앉아서 묵묵히 고기를 뜯었다. 조 인족들은 자신들이 사냥해온 고기를 뜯는 나와 여왕 사이에서 조신하게 식 사를 마쳤다. 참으로 우아하고 찬란한 종족이로구만. 이렇게 예쁜 주제에 또 강하고, 거기에다 얌전하기까지 하다니, 여자남자 할 것 없이 오로지 사 납기만한 묘인족들에 비한다면 이 들은 정말로 쓸만해. 말도 잘 듣고. 내가 그들을 사랑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자, 그들도 나의 사랑에 응답하여 살뜰한 미소로 마주한다. 정말로 귀엽기 짝이 없다니까. "쿠베린 왕." 조용히 여왕 옆에 있던 엘레가 입을 열었다. "왜?" "여기 있는 우리들은 다 남자입니다." "............." 그 말에 응답하듯이 조인족 놈들이 부르르 떨어 보였다. 나는 그들이 떨든 말든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자상하게 답해 주었다. "누가 그걸 몰라?" "그럼 왜 그런 눈초리로 우릴 보십니까?" "어떤 눈초리인데?" "당장이라도 우릴 잡아먹을 듯한 눈초리입니다." "배가 고파서 그렇지." 그 말이 끝나자 마자, 제일 가운데 있던 제일 어려 보이는 조인족 하나가 잽싸게 자신이 먹던 커다란 고깃덩이를 내 앞으로 내밀었다. 그 뒤를 이어 몇몇이 내 앞으로 고기를 내밀자 나는 한껏 미소지었다. "고마워. 정말 착한 애들이로군." 내가 감사의 미소를 짓자 녀석들은 모조리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앉았다. 아아, 귀여운 것들. 이래서 다들 조인족을 좋아하는 구나. 묘인족이었다면 다들 눈을 부라리면 서 <뭐야요 뭐야요 한 판 해볼 건가요> 따위를 외치며 손톱부터 꺼내들었 을 텐데. 일단 배를 채우면서 나는 다리를 길게 뻗었다. 그러고 보니 온 몸이 쑤시 네. 며칠간 제대로 쉬지 못했기 때문인가. 나는 옆에 앉은 조인족꼬마에게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다리좀 주무를래?" 녀석은 흠칫 하더니 마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주변의 동족들을 돌아보았 다. 그러나 그의 눈길을 받은 다른 동족들은 다들 한 걸음씩 물러서서 모 른 척했다. 꼬맹이의 마지막 눈길이 엘레에게 닿자, 엘레는 결심한 듯 나에 게 물었다. "농담하신 거죠?" "아니, 너 내가 실없이 농담이나 하는 놈으로 보이냐?" "......................" 엘레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지는 순간 갑자기 누군가의 손이 내 어깨에 닿 았다. 향기로운 그 흰 손은 가볍게 내 어깨를 쓰다듬더니 낮게 속삭였다. "놀리는 건 그만 하시죠." 여왕이 빙긋 웃었다. 오오, 멋져라, 붉은 머리칼의 이 미녀에게 모두다 기립박수를! "다들 흠칫흠칫하니까 놀리시는 게다. 그렇죠? 왕?" ".........뭐어...." 그렇게 정색하고 말하면 할 말이 없지. 그녀는 생긋 웃더니 나를 향해 조용히 물었다. "왕께서는 어찌하실 참입니까? 이제부터?" "이제고 저제고 별로 달라질 것은 없다고 보는데. 일단은 룬드바르의 곁 에 있다는 그 놈의 마법사를 없애는 게 최우선이고. 아이들을 구출하는 게 먼저지. 그나 저나 물어야 하는 것을 깜빡 잊었군." 나는 벌떡 일어서다 말고 내 발밑에 아직도 수북히 쌓여있는 고깃덩이 두 개를 집어 들었다. "대체 나보다 먼저 온 듀나시와 여자들은 다 어디로 간 거야?" 내가 엘프들에게 다가가자 가장 먼저 정색을 한 것은 물론 궁수를 맡고 있는 엘프들이었다. 그들은 그 하잘 것 없는 화살을 재운 활을 잔뜩 긴장 해서 쥔 채로 날 바라보았다. 그 뒤를 이어 마법을 쓰는 녀석들이 잔뜩 어 깨를 곤두세우고 날 보았다. "엉덩이. 그리고 아크." "무슨 일이야?" "너희들은 나보다 여기에 먼저 왔지? 그렇다면 묻겠는데 듀나시와 여자들 을 본 적 없나?" 아크는 고개를 저었다. 녀석은 백금발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면서 조용히 대 꾸했다. "그들과는 일찌감치 헤어졌어. 마법사의 냄새를 찾았다나 뭐래나 하면서 중간에 사라져버렸지." "그럼 너희들은 대체 어떻게 해서 그들과 같이 있게 된 건지 이야기 좀 해보실까?" 아크는 엉덩이를 흘긋 보았고 엉덩이는 나름대로의 자상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의 미끈한 얼굴에 미끈한 미소가 번지는 것을 보며 나는 아까 먹은 고깃덩이가 조금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일은 우리가 고왕국에 도착하면서 시작되었지." 아크가 인간이긴 해도 녀석은 엘프가 되고자 하는 불쌍한 놈이고, 또 엘프 여야만 하는 쓸데없는 똥고집을 가진 놈인지라, 설명은 구구절절 쓸모 없 는 단어로 가득할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요약이라고 하는 것이 필요한 법. "그러니까 간단히 말해서, 너희들이 줄줄줄 달려와 보니, 고왕국 왕은 이 미 항복 문서에 조인하고 그 놈의 그 쓸모없는 일태자, 이태자, 삼태자들은 어딘가 쪽방에 갇혀 버렸다 그거지?" "그렇지......그래서 우리들은......." "너희들이 한 마디 하려고 하자 마자 잽싸게 나타난 왠 분홍주둥이 놈이 나타나더니 <우리들은 쌈박질 할 필요 없죠> 따위를 외치면서 화해를 요 청하더라 그거지?" "그, 분홍주둥이라는 것은........그 룬드바르 황제의 직속 마법사였지. 그래 서 우리는......" "그래서 너희들은 대가리를 대굴대굴 굴려보고 <아아, 그렇군요. 우리들 엘프들과는 별 상관이 없는 일이었죠>따위를 말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잖아?" ".............." 아크는 이상한 것을 씹은 듯한 괴이한 표정으로 날 노려보면서 고개를 끄 덕였다. "그러니까, 우리들 엘프로서는 이 싸움이 대륙 전체, 그리고 종족 전체로 이어지게 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는 거야. 왜 쓸데 없는 싸움으로 귀중한 생명을 버리게 하는 건지 우리들은 이해할 수도 없고 용납할 수도 없다는 거지. 게다가 저 룬드바르 제국이 얼마나 갈지 우리들은 상상할 수도 있어. 내 생각에 저 제국은 겨우 이십여년을 이어가지 못할 거야. 그래서....." "그래서 그들과 타협했군요." 조인족 여왕이 조용히 잘랐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 어떤 표정도 띄지 않은 무표정으로 엘프들을 바라보 고 있었다. "엘프들과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그 말은 맞습니다. 그러니까 당장 엘프들 은 이 곳을 떠나시길 바랍니다." ".......에...." 그 말에 아크는 슬쩍 뒤에 앉은 엘프의 왕을 바라보았다. 엘프의 왕은 어 떠한 순간이라도 굳은 얼굴을 할 수 없다는 신념에 가득 찬 얼굴로 조인족 여왕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불가침 조약을 맺은 것과 달리, 몇몇 엘프들은 꽤 사납답니다." 어라라? 엘프의 왕은 조용히 일어서더니 손짓했다. "저기 있는 엘프들은, 워낙에 거칠고 사나운 데다가 호전적이고, 조인족이 나 묘인족과의 친분이 무척 두터운 편이라 저의 결정에 맹렬하게 반대를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결국 제 명령도 듣지 않고 뛰쳐나갔습니다." 약간 멋쩍은 미소를 지으면서 색마 녀석이 엘프의 활을 허리에 차고 일어 서서 앞으로 걸어나왔다. 그 뒤를 이어서 엘프들 치고는 덩치 좋은 놈들 열 댓 명 정도가 앞으로 나섰다. 그 중에는 카산도 있어서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솔직히 말해 카산이 전투력이 우수하리라고는 전혀 나는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그 자리에 에닌이 끼어 있다는 것 자체가 더더욱 놀 라웠지만. 어떻게 이 자리에 에닌이 있을 수 있는 것인가 하고 내가 입을 벌릴 때 카산이 재빨리 설명하듯 입을 열었다. "에닌은 이래뵈도 정령술사에요. 치유술도 괜찮구요. 에닌이 절대적으로 끼겠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에닌은 내 앞으로 걸어 나오더니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나는 어처구니 가 없어서 손을 내저었다. "이 애는 안 돼. 카산도 물론 안되지! 전투력 우수한 놈들만 내놔도 모자 랄 판에 왜 애송이들을 끼우는 거야? 저 색마 놈은 또 뭔 재주가 있다고? 앙상한 마법실력정도로는 어림도 없어!" 내가 예리한 지적을 했건만 이 놈의 꼬맹이들은 서로 고개를 젓더니 어울 리지 않는 주먹을 들어 보이면서 말했다. "저희들은 할 수 있어요! 쿠베린이 그렇게 보는 것이지 우리들은 사실 강 한 편이라구요!" "강한 게 다 죽었냐?"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크가 재빨리 손을 들었다. "자자, 어차피 시시껄렁하고 빈약한 엘프에게 위대한 쿠베린님께서 신경 쓸 필요가 뭐가 있어? 어차피 이 놈 저 놈 죽이고 돌진하는 네 놈이 참견 할 게 뭐야?" "그렇게 인물이 없냐? 저 애송이들을 보내게?" "너야 말로 대체 보는 눈이 그렇게 없냐? 저 카산만 해도 저 나이 또래중 에서는 아주 괜찮은 실력을 가지고 있어! 너를 만났을 때를 생각해 봐! 어 떤 엘프가 단신으로 널 찾아갈 배짱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냐?" "설마......저게 괜찮은 실력의 소유자라고?" 내가 기가 막혀 말하자 카산은 화가 난 듯 얼굴을 벌겋게 하며 소리를 질 렀다. "내 마법실력을 그동안 봤으면서도 그래요?" "기가 막혀. 엘프의 미래는 무척 어둡군." 나는 한숨을 쉬었다. 엘프의 왕은 어색한 웃음을 짓더니 손을 들어서 시끄러운 눈초리를 하고 있는 젊은 엘프들을 눌렀다. "자아, 어쨌거나 우리들은 이 젊고 난폭한 녀석들을 내버려두고 노스 엘 스턴으로 돌아갈 참이오. 쿠베린, 조인족의 여왕. 그럼 우리들은 여기서 작 별하겠소." "젊고 난폭? 하?" 나는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올 지경이었지만 조인족의 여왕은 예의 바르 게 이 놈의 젊고 난폭한 놈들(?)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좋습니다. 엘프들의 전사." 엘프의 왕은 만족한 미소를 띄고 일어섰다. 이런 솜방망이 같은 녀석들이 있으나 없으나 뭐 달라질 것은 하나도 없겠 지만 어쨌거나 이 것은 나름대로 배려를 한 것이니 고맙다고 해야 할 일이 겠지만, 솔직히 말해서 나는 이걸 짐덩이라고 밖에는 부를 수 없을 듯했다. 진짜 이 놈들이 돕겠다는 마음이 있다면 이런 놈들이 남는 게 아니라 아크 가 남아야 할 것 아니냐? "야, 흰둥이." 아크는 돌아서다가 갑자기 부르르 떨며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는 나를 고 리눈을 하고 쏘아본다. 그 찌그러진 얼굴을 보면서 나는 조용히 물었다. "너는 안 남아?" "난 노스 엘스턴에 결계를 치고 돌아올 거야." 으르렁거리면서 아크가 대꾸했다. "호오?" "항상 뒤통수를 치는 게 인간들이잖아? 그러니까 나는 노스 엘스턴에 결 계를 치고서야 안심하겠다 그거야." "호오, 호오, 너 같은 새대가리치고는 꽤 괜찮은 생각인걸." "죽인다." "얼마나 걸리냐? 그 결계라는 것은?" "...................." 아크는 잠시 동안 침묵했다. 녀석은 앞 서 걷는 엘프의 왕을 약간은 그리운 눈으로 바라보면서 서글프 게 말했다. "나는 봉인결계를 쓸 거야." "그게 뭔데?" "말 그대로 봉인의 결계. 아무도 풀 수 없는 봉인의 결계를 노스 엘스턴 에 쓸 거야." "뭐?" "아름답고 축복 받은 땅 노스 엘스턴에 인간들의 더러운 흙발이 닿지 않 도록 나는 그곳을 완전히 봉인할 거야. 정령들과 엘프들, 그리고 아름다운 자연만이 숨쉬는 땅으로 만들 거야." 엘프들은 모두 왕을 따라 걷고 있었다. 아크는 맨 마지막 끝자락에 선 채 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마치 나무들과 한 덩어리가 된 양 춤추듯 걷는 엘 프들의 걸음걸이를 동경으로 바라보며 녀석은 멍하니 그들의 뒷 모습을 향 해 서 있었다. 그 모습이 어딘가 무척이나 불쌍해서 나는 한 마디 말을 걸 어 주어야 할 것 같은 충동을 느꼈지만 녀석은 정상이 아니니까 관두기로 했다. 아크- 아키나는 엘프들의 끄트머리에 서서 인간도 아니고 엘프도 아 닌 기묘한 모습을 한 채로 언제까지나 그 자리에 서 있을 것 같았다. 문득 주름살 하나 없는 매끈한 얼굴에 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건 우는 것 같기도 하고 웃는 것 같기도 한 그런 표정은 엘프인 척 하는 녀석치고 는 무척 인간적이었다. "웬 죽상이냐?" "쿠베린, 인간들이 얼마나 더러운 지 엘프들은 아직도 몰라. 그래서 엘프 들을 지켜 줄 수 있는 것은 인간인 나밖에 없어." 그는 갑자기 음침하고 우울한 어조로 다짜고짜 입을 열었다. 그의 뒤에서 굳고 어색한 얼굴로 무기들을 든 채로 서성이는 열 다섯 명의 엘프 전사라는 녀석들은 조인족들과 어색한 인사를 나누며 이런 저런 이야 기를 나누고 있었다. 허기야 인사만 하는데에도 한 참 걸리는 놈들이니까. "계약을 맺었다고 해서 그들이 침략을 하지 않을 리가 없어. 암흑산맥이 뚫렸고, 이미 고왕국까지 진출한 인간들에게 두려움은 없겠지. 한 번 뚫은 길은 또 뚫리기 마련이야. 이제 암흑 산맥도 장벽이 되지 못해." 음침하다 못해 음험한 눈빛이 된 아크는 매끈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늙 어빠진 눈으로 낮게 속삭였다. 그래서 어쩌라고? "그러니까 이젠 봉인할 수 밖에 없는 거야. 쿠베린, 엘프들을 지키기 위해 선 그렇게 해야만 해." "엉덩이도 동의한 거야?" "나중에, 아주 나중에 이 싸움이 끝나고 난 뒤에 말할 거야. 아마 왕께선 이해해 주실 거야. 분명히 이해하고 납득하시겠지. 젊은 엘프들은 항의할지 몰라도 긴긴 세월을 살아온 엘프들은 다 납득하게 될 거야." "네가 죽으면 그 봉인을 풀 자는 없게 되는 거 아냐?" 내 말에 녀석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렇게 될 거야. 그러나, 어느 긴긴 세월이 흐른 날, 노스 엘스턴을 벗어나고 싶은 엘프들은 그 봉인을 풀게 되겠지." 녀석은 머리를 긁적이며 날 바라보았다. 잘 생긴 척 하던 얼굴이 조금 찌그러져 있었다. 녀석이 몇 백살이나 먹은 늙은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하는 그 얼굴을 보며 나는 조용히 말했다. "미친 놈." "흐......너라면 그렇게 말하겠지." 아크녀석은 내가 분명히 욕했음에도 불구하고 웃었다. "엘프들은 엘프들이야. 네 놈이 그런 짓을 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까?" "나를 엘프의 적이라고 나중에 부르게 되는 일이 생길 지라도...........나는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거야." "그런 소릴 지껄이는 건 네가 인간이기 때문이지. 엘프들이라면 그렇게 갇히느니 차라리 세상과 같이 멸망하는 편을 택할 걸." 아크는 묘한 표정을 지으며 날 바라보았다. "내가 인간이기 때문이라고?" "엘프들은 누굴 보호하기 위해 가둔다는 발상 자체를 하지 않아." ".............." "그들은 가둔다는 것을 싫어해. 갇히는 것도 싫어하지." "................오랜 세월을 나는........." 아크는 한숨을 내 쉬었다. "엘프가 되길 원했어." 한숨과 함께 오랜 세월이 녀석의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녀석의 어깨 위에 있는 수 백 년 세월은 엘프만이 감당할 수 있는, 아니 오래 사는 종족만이 감당할 수 있는 무게다. 백년도 살지 못하는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무게 는 아니었다. 자신이 질 수 없는 무게를 지면 당연히 찌그러지는 게 정상 이지. 그 찌그러진 형상을 한 킬트놈을 보면 잘 알 수 있지 않은가. "수 백년을 엘프와 살아도 넌 인간이야. 이기적인 인간이지. 그거야 하는 수 없잖아?" 내가 어깨를 으슥하며 말하자 아크는 이를 갈며 날 노려보았다. "닥쳐!" "인간인 주제에 엘프인 척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이나 하는 짓이란 걸 모르 냐?" 나는 소리 내어 웃어주었다. "엘프는 엘프, 인간은 인간일 뿐이야. 엘프인 척한다고 해서 진짜 엘프가 될 수는 없어. 물론 엘프가 인간인 척한다고 해서 인간이 되는 것도 아냐. 무엇 때문에 그렇게 엘프이길 바라는 것인지 나로선 도저히 이해 불가능이 다." "네 놈 따위가!" 이를 갈며 아크가 사납게 외쳤다. 이를 드러낸 그 표정은 분노한 인간의 전형적인 얼굴이었다. 잘난 척 우아한 척하는 엘프의 가면을 벗어 던진 녀 석의 얼굴은 오히려 신선해서 나는 기분이 좋아졌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녀석은 위협하듯 말했다. "나는, 인간이 싫어! 인간이 되기 싫다구!" "왜?" "더러운 인간이 되기 싫어! 인간은 탐욕스럽고, 천박하고, 더럽고, 오만하 며, 어리석어! 그런 존재의 피가 내 몸에 흐르고 있다는 것 자체가 싫어!" 나는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멍청할 데가. "수 백 년 동안 나는 봤다고! 인간의 마을을 돌며 은혜를 베풀려고 노력 해 왔지! 아크! 위대한 빛의 마법사라고 불리면서 나는 인간의 마을을 돌 면서 끊임없이 그들에게 도움을 주려고 해왔어! 인간들이 변하길 바라면서 그들의 소원을 들어 주었지!" 그는 두 주먹을 움켜 쥔 채 이글거리는 눈으로 날 쏘아보았다. 악문 입술 사이로 침이 튀길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변하지 않았어! 내가 마을을 부유하게 만들어주면 그 즉 시 탐욕이 판을 쳐서 더 더러운 마을로 타락했지! 그들의 병을 고쳐 주면 그 다음에는 다른 자들에게 내 이름을 팔아 돈을 챙겼어! 수 백년간! 전혀! 전혀 인간들은 달라지지 않았어!" 침 튀기지 말라고 내가 말하려는 순간 아크는 재빨리 내 옷자락을 잡아채 며 으르렁거리듯 말을 이었다. "나는 수치스러워! 알아? 인간이라는 게 너무나 수치스럽다고! 세상에 어 느 종족도 인간처럼 탐욕스럽고 저질이진 않아! 오크조차도! 트롤조차도!"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고? 이봐, 옷자락 늘어나. "그 행태를 보고 있자면 내 얼굴이 뜨거워져! 엘프 친구들이 거봐라 하고 말할 때마다 나는 당장이라도 쥐구멍으로 숨고 싶어져! 너도 말하잖아? 인 간들 따위는 정말 한심하다고!" "이봐, 신세 한탄하지마!" 나는 녀석의 입을 막았다. 아까부터 무슨 일인가 하고 엘프들이 이 쪽을 돌아보고 있었다. 아크가 흥 분하는 게 뭔가 이상했던 모양이었다. 아크는 내가 입을 막자, 식식거리면 서 억지로 입을 다물었다. "네가 무슨 생각할지 알 바는 아니다만, 네 맘대로 한 종족의 미래를 봉 인한다는 것 자체가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우며 비열하고 천박하고 오만한 인간다운 생각이라는 생각은 안 드냐?" 아크는 한숨을 내쉬며 날 바라보았다. "이봐, 넌 모른다니까." "그 모른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인간 특유의 오만하고 어리석으며 천박하 고 비열한 생각이라는 것이야. 나의 탁견이 언제 틀린 거 봤어?" "이봐! 쿠베린, 엘프들은 묘인족처럼 강하지 않아!" "그건 네 생각이지. 엘프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버티어 왔는지 아냐? 엘프 들은 그 옛날 용족과 거인족들 사이에서부터 이어져 내려온 종족이야. 인 간들 따위는 아예 있지도 않았을 그 옛날부터 있었다고." 아크는 입을 다물었고 나는 녀석의 머리통을 한 대 쳐 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놈은 극악의 토론상대다. 내가 옳다고 우겨대는 인간을 굴복시키는 것은 그놈의 머리통을 부셔주는 것이외의 방법은 없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나는 녀석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덕분에 녀석은 앞으로 고꾸라지면서 나뒹굴었다. 카악하고 발악을 하려고 하기에 녀석의 배를 가볍게 꾸욱 눌러주었다. 캑캑거리는 녀석을 보며 나 는 점잖게 충고했다. "미친 놈. 그래서 네 놈은 인간인 거야." 아무리 개겨 봐야 네 놈은 인간이야. 제 놈의 독단으로 남의 종족의 미래 를 좌지우지하려는 것 자체가 벌써 인간의 오만하고 비열하고 한심하며 또 한 천박한 생각이지. 아아, 그러고 보니 아크 놈의 생각 중에 그, 인간이란 오만하고 비열하고 천박하며 탐욕스럽다는 그 지적은 실로 예리한 지적이 군. "쿠베린! 무슨 짓입니까?" 뒤에서 색마녀석이 고함을 질러댔다. 녀석은 황급히 달려와 쓰러진 아크놈 을 부축해 일으켜 세우고는 나에게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대체 이 놈이 뭘 믿고 나에게 이렇게 잔소리를 하는 것인지 나로서는 알 수 없지만 어쨌 거나 시끄러우니 입을 다물자. 아아, 관두자. 이거야말로 영양가 없는 소리일 뿐이지. 엘프들이 봉인되든 말든 내 알 바 아냐. 예쁘장한 머리 빈 녀석들이 사라지는 것은 좀 슬프긴 하지만 녀석들도 알아서 애를 낳아 종족을 늘릴 테니 신경 끄자. 떠드는 것은 마법사들의 영역이다. 나는 오로지 움직일 뿐! KUBERIN.......... 불은 춤추고 물은 노래하며 얼음은 웅크린다 3 "............이건 뭐냐?" 나는 엘레가 들고 있는 꼬리가 길고 눈이 가느다랗고 손톱이란 것이 눈꼽 만한 짐승을 바라보았다. 녀석은 내가 주시하자 금새 꼬리를 내리고 오무 라든 채 고개를 떨구고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엘레는 조금 곤란한 듯이 입을 열었다. "저어, 이건 말이죠. 그 꼬마 공주의.........." "그 놈의 버릇없고 방자하고 한심한 계집애의 애완동물인 괭이라는 것은 나도 알겠는데 왜 이런 걸 네가 들고 오느냐, 그거야. 혹시 그거 도시락?" 내가 손톱을 길게 뻗으며 말하자마자 옆에 있던 튜나가 소리를 바락 질렀 다. "그만해욧!" 나와 조인족 여왕과 몇몇 애송이 놈들은 현재 신전이라고 하는 것을 향해 걷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한다면 조인족들은 날고 나는 걷고, 엘프들은 뛰고 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었다. 그 중에 엘레는 튜나를 생각해서인지 그녀의 옆에서 걷고 있었다. 헌데 그 녀석의 두 손에 두 마리의 그 고양이 라는 것이 들려 있는 것이다. 물론 튜나의 옆에는 그 바퀴의자에 탄 불손 하고 오만하고 어리석은 계집애가 도끼눈을 하고 날 쏘아보고 있었다. 나 는 그 여자애를 버리고 갈 것을 여러 번 주장했지만 불행히도 그 현명한 의견은 몇 번이고 묵살되었다. 나의 의견에 동의하는 것은 유티아 밖에 없 었던 것이다. 젠장. "그러고 보니 잊고 있었는데, 휴런과 다른 놈들이 어느 방향으로 간 지 알고 있어?" 유티아에게 묻자 유티아는 고개를 저었다. "몰라요. 어느 방향으로 갔는지. 어쨌든 인간들을, 마법사들을 죽인다고 갔어요. 쿠베린, 쿠베린......." 유티아는 아까부터 귀찮게 계속 몸을 비비고 있었다. 아이를 갖자는 것이 다. 그러나, 이봐, 아가씨, 발정기는 아직도 멀었어. 아무리 합방해도 애는 안 생긴단 말야! 귀찮아서 그녀를 밀어 두었더니 다들 나를 도끼눈으로 바라본다. 인정이 없다는 둥, 애정이 없다는 둥, 그래도 자기 애를 낳은 여자, 그것도 애를 잃은 여자에게 그 따위로 굴다니 수컷으로서의 자각이 없다는 둥의 시선이 무지막지하게 쏟아지기 시작해서 나는 하는 수 없이 그녀의 어리광을 받아 주기로 마음먹었다. 하아, 이래서 어린 여자와는 애를 안 낳는 거야. 나이 든 능숙한 여자였다면 이 고통을 혼자서 이겨냈을 텐데 말이야. "유티아. 적당히 해둬." "우흑, 우흑흑.........내 아이. 내 가련한 아이." "약해서 죽은 애를 어쩌겠냐, 잊어." "우흑흑흑...................." 다시 흐느끼기 시작하는 그녀를 옆에 끼고 나는 한 숨을 내쉬었다. 유티아 는 여전히 제 정신이 아니다. 언제나 온순하고 차분했던 그녀는 대체 어디 로 갔는지 애가 죽은 뒤로 엉망진창이다. 어쨌거나 방향을 잡은 것은 나였다. 녀석들의 냄새를 잡아 걷기 시작하는데 어쩐지 나로서도 자신이 별로 없었 다. 워낙에 사방에서 흘러나오는 피 냄새가 자극적이어서 시체냄새로 뒤덮 인 이 주변에서 묘인족 놈들의 꽁무니 냄새를 찾아내기란 꽤 어려웠다. 녀 석들 중 누가 오줌이라도 쌌다면 모르겠지만 이 놈들 뭐가 그리도 급한 지 오줌도 싸지 않았다. 암흑산맥의 자랑인 그 놈의 질기게도 긴 이름의 나무들은 숲을 이루며 시 야를 방해하고 있었다. 사방에서 피어오르는 냄새는 향긋한 버섯과 수액의 내음, 그리고 뭔가 썩는 듯한 풍요로운 흙내음이었다. 가끔 바람에 실려오 는 흐릿한 피 냄새는 대개는 인간들의 것이었기에 별로 관심이 없었지만 그 중 맛난 음식냄새도 실려오곤 해서 군침이 돌았다. 하지만 다른 놈들을 일제히 다 이끌고 가는 것이 다름 아닌 나인지라 고통스럽게 자제해야만 했다. "이 곳으로 가는 길은..........." 갑자기 그 쓸모 없이 오만하고 어리석으며 불손한 계집애가 입을 열었다. 덕분에 일제히 시선이 그리로 쏠리자 꼬마 계집애는 흠칫했다. 모두의 시 선을 받자 조금은 쑥쓰러웠는지 고개를 살짝 숙인다. "이 길을 알아요?" 조용히 튜나가 묻자 계집애는 당혹한 듯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저기, 이 길은 신전으로 가는 길이에요." "그건 나도 알아." 내가 말하려하자 옆에서 재빨리 튜나가 내 발을 밟았다. "네, 무슨 신전인지 알아요? 공주님?" "........이 신전은 오래된 옛 신전이에요. 예전에는 일루미나야 여신을 섬기 는 신전으로 쓰였다고 들었는데 너무 작고 낡아서 주신전을 옮겼지요." "그럼, 공주님이 숨어 있던 그 곳이 주신전인가요?" "그래요. 내가 아주 어렸을 때 한 번 가 봤을 뿐으로, 예전에는 왕실의 주 신전이었지만 지금은 지키는 신관 몇 밖에 없는 초라한 곳이에요." 꼬마는 그렇게 말하고는 불안한 듯 입을 다시 다물었다. 잘생긴 조인족 전 사들이 친절하게 자신의 바퀴 의자옆에 서 있는 게 조금은 부끄러웠던 모 양인지 창백한 뺨이 붉어져 있었다. 에닌은 그런 그녀의 옆에 한 걸음 다 가섰다. 외견상으로야 비슷한 또래처럼 보이지만 어찌되었든 한쪽은 엘프 의 아가씨고 한 쪽은 인간의 아가씨다. 나이 차이는 확실히 엄청나지만 에 닌은 그런 것 쯤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 자상하게 이 빈약한 꼬마의 손을 살짝 잡아 주었다. 덕분에 소리만 지르던 꼬맹이는 살짝 빈약한 미소를 지 어 보였다. "신전.......신전.......신전.......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색마녀석이 내 옆으로 다가서며 물었다. "내가 아냐?"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뭔가 있을 듯해요. 오래된 신전을 노리는 자들............" "네 아비 제자들이니까 친근감을 느끼기도 하겠지." 내 말에 녀석은 갑자기 창백해져서 날 쏘아보았다. "무슨 소릴 하는 겁니까?" "뭐, 틀린 말도 아냐. 그 놈들은 아마 네가 킬트의 아들이란 걸 알면 널 갈아먹으려고 할 게다. 질투에 몸부림치면서 말이야. 정말 간지러운 일이 지. 아마도 대륙사상 질투로 인해 일어난 가장 무서운 사건 중 하나로 길 이 기록될 일일지도 몰라." 녀석은 잔뜩 얼굴을 구긴 채 외면했다. "나는 인정 못합니다. 그는 내 아버지가 아닙니다!" "맘대로 해. 네가 인정하든 말든 네 놈은 그 놈 자식이니까." 나는 녀석이 뭐라 하든 무시했다. 녀석이 파르르 떠는 것을 보면서 나는 한숨을 쉬었다. 뭐가 이렇게 많이 꼬였는지, 아크도 꼬이고 킬트도 꼬이고, 나도 꼬이고 유티아도 꼬이고, 사 인족도 꼬이고. 온통 꼬인 것 투성이다. 상쾌한 결말이란 정말 물 건너간 일인가. 주변이 상쾌하지 못해도 내 발 밑은 상쾌했다. 풍요로운 흑색의 흙덩이에 서는 개미가 기어다니고 바쁜 풍뎅이가 똥덩이를 찾아 돌아다닌다. 바람은 초록색 풀잎 사이로 날아다니고 습기를 머금은 나뭇가지들은 햇빛을 찾아 잔뜩 일어선다. 거친 나무 등걸에선 달콤한 수액이 흐르고, 깊은 숲 속 어 디선가 익는 나무 열매들은 달콤한 내음을 뿌리기 시작했다. 눈이 오기 전 의 숲의 마지막 한숨, 북쪽 어두운 산맥에서의 풍요로운 짧은 휴식. 이제 짐승들은 바빠질 계절이 온다. 나는 상쾌한 바람을 느끼면서 걸었다. 대체 알 게 뭔가. 세상은 여전히 아 름답다. 인간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았던 이 놈의 암흑 산맥의 깊은 곳, 향 기로운 생명이 노니는 곳, 이 곳에서야 대체 아크 놈의 꼬인 심사나, 킬트 놈의 배부른 투정이나, 색마녀석의 똥고집이나, 혼자 들끓는 룬드바르의 야 망 따위는 다 웃기는 것들, 지나가는 개미가 하품할 일일뿐이다. 이봐, 유티아 비비지 마. 아무리 발정기가 아니더라도 그렇게 몸을 비비면 나, 이대로 걸어 갈 수 없게 된다구. 비릿한 냄새와 함께 흰 건물이 검푸른 나뭇가지 사이로 드러났다. 나무들 은 그놈의 신전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싫다는 듯 미적거리며 그 모습을 보 여주었다. 아닌게 아니라 낡은 듯 보이는 오래된 흰 대리석으로 지어진 그 놈의 신전 이란 것은 이끼가 잔뜩 끼고, 금이 가서 아무리 보아도 <나는 오래된 신전 입니다. 사람들은 안 옵니다>라고 써 붙인 것 같은 몰골이었다. "저건가?" 비릿한 냄새를 맡으면서 내가 그 신전의 입구에 다다르자, 갑자기 와악 하 는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뭐야?" "뭐냐?" 다들 삽시간에 흩어져서 신전안으로 뛰어 들었다. 물론 제일 먼저 내가 뛰 어 들었다. 내가 들어가 보니 안은 예전에 본 것처럼 신상이 박살나고 사방에 신관들 이 죽어 넘어진 그런 몰골은 아니었지만 그 못지 않게 너저분했다. 이끼가 낀 흰 대리석 계단 아래 잔뜩 질린 얼굴의 계집애가 바들바들 떨 고 있었고 그 앞에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면상을 하고 있는 놈이 있었다. 놈은 긴 손톱을 꺼내 든 채로 계집애의 얼굴에 들이대고 있었는데 그 손톱 끄트머리에 대롱거리는 뽑힌 눈알이 포인트였다. "사, 살려주세요!" "말해! 또 다른 신전은 어디 있나?"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외치던 놈은 갑자기 고개를 들고 날 바라보았다. 나도 녀석을 빤히 보며 물었다. "뭘하고 있냐?" ".......쿠베린!" "다른 놈들은?" 눈알을 꿰고 있는 녀석, 휴런은 손톱에 달린 눈알을 떼어 내더니만 뒤에 줄줄이 선 엘프들과 조인족을 보고는 대꾸했다. "잃어버렸어. 변신을 했기 때문에 다들 제각각 흩어져 버렸다고. 내 앞으 로 분명히 이에르네가 있었는데 그녀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어." 녀석은 피로한 표정으로 자신의 발치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는 여자에게 가 볍게 발길질을 하면서 나에게 다가왔다. "그래서 이 여자에게 묻고 있는 중이었어. 다른 신전이 혹시 있을까 하 고." "다른 신전이라니?" "전에 말했잖아. 아크가. 신전에 있는 뭔가를 찾기 위해 놈들이 혈안이라 고. 만약 이에르네가 놈들을 따라갔다면 분명히 그 놈의 신전근처에 있을 거 아냐?" 휴런치고는 꽤 머리를 쓴 축에 드는 일이었기에 나는 녀석의 머리를 쓰다 듬어 주고는 재빨리 유티아를 녀석에게 인계했다. 그리고는 모른 척 떨고 있는 여자에게 다가가 물었다. "이봐, 이 근처에 다른 신전이 있어?" "살려주세요!" 여자는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도 모르고 울고만 있었다. 이 상황을 온 몸 으로 깨닫게 해줄까 하고 내가 막 생각하는 순간 튜나가 툭 튀어 나와 여 자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신관이시죠? 일루미나야 여신의 신관?" "네, 네.....우흑흑....." "지금 신전을 돌아다니며 악랄하게 사람들을 죽이는 놈들이 있어요. 그 놈들을 찾기 위해 우리들이 온 거에요, 그러니까 말해주세요. 여기에 신전 이 대체 몇 개나 있지요?" "에, 그게....." 그녀는 멍하니 눈물을 흘리다 말고 갑자기 두 눈이 커지며 엘레를 바라보 았다. "아앗!" 그녀가 가리킨 것은 엘레가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가 들고 있는 고양 이었다. "신의 귀!" 낡은 대들보에는 얼룩진 자국이 완연했다. 이끼는 주책없이 퍼렇게 잔뜩 끼어서 비죽비죽 기어 올라와 있고, 뱀처럼 이리저리 고개를 뻗은 금은 흰 대리석 벽을 꽤나 괴롭히고 있었다. 사실 아름다운 풍경은 결코 아니었으 나 그 대들보 아래에 멋지고 휼륭하신 쿠베린 왕께서 길게 누워서 이야기 를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 놈의 낡은 신전에는 영광이 깃들었다. "다시 말해서 이 도시락들이 신전을 뜻하는 거라고?" "도시락? 에, 그러니까 이 신의 귀들은 일곱 신을 뜻하는 것으로, 일곱 개 의 신은 각기 세 개의 신전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신전의 수는 스물 하나, 그러나 그 신전이 각기 또 다른 소신전을 거느리고 있기 때문에 소 신전까지 합한다면 마흔 두 개의 신전이 있는 셈입니다. 물론, 그 마흔 네 개의 신전이 다 쓰이진 않습니다. 잘은 모르지만 안 쓰이는 신전이 열 댓 개 정도 된다고 하니까...........실제로 제사가 치러지는 신전은 서른 예닐곱 개 정도가 되겠지요." "......................." 나는 침묵했다. 나 이외의 모든 자들도 다 침묵했다. "서른 예닐곱개의 신전을 다 뒤져?" "아니요, 놈들은 어쩌면 안 쓰이는 신전을 노리는 지도..........." "그렇다면 어떤 신전이 문제인지 알 수 없잖아요? 결국은 모조리 다 뒤져 야 하는 거 아닌가요?" 각기 말이 많은 가운데 나는 결론을 지어 주었다. "가장 가까운 신전으로 안내해." "가장 가까운 신전이 어디 있는 지 저는 모릅니다. 하지만 신의 귀께서 안내하실 것입니다." 여자는 경건한 자세로 고양이를 마주하며 말했고 나는 재빨리 고양이를 노 려보았다. 그러자 고양이도 경건한 자세로 나를 바라본다. 아, 경건한 자세 란 아름다운 것. "안내해. 도시락1." 또 한번 오만불손한 계집애가 발작하기 전에 고양이는 순순히 고개를 돌리 고 밖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말 귀 알아듣는 고양이란 정말로 재밌는 물 건이군. 나를 비롯한 모든 녀석들이 그 놈의 고양이의 뒤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고양이는 잽싼 발걸음으로 가볍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보폭이 워낙에 좁아 서 지독하게 느렸다. "왜 신의 귀라 부르는 거죠?" "아, 보통 고양이와 달리 마음도 말도 모두 알아차리는 고양이니까요. 이 고양이들은 가장 큰 일곱 대신의 신전에서만 거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고양이들이 전부 한 곳에 있다니 믿을 수 없군요." 여자는 이제 정신을 차렸는지, 아니면 고양이를 보고 감격했는지 황공한 자세로 고양이들을 향해서 두 손을 모으고 대꾸하고 있었다. 튜나는 눈살 을 찌푸리며 내쪽을 돌아보았다. "보통이라면 이 고양이들은 그럼 각기 따로따로 있는 거에요?" "그렇지요. 신의 귀는 각각의 신을 대변하는 존재이니까요." 여신관은 그렇게 말하다 말고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 그런데 대체 왜 이 신의 귀들이 한 곳에 모여있나요? 설마하니 신전 모두가 다.........!" 그 말에 오만불손한 계집애가 시기적절하게 오만한 어투로 끼어 들었다. "나를 위해 아바마마께서 모아주신 거다. 신전의 신의 귀들이 가장 중요 한 존재이니까." 여신관은 눈을 크게 뜨고 여자애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갑자기 고개를 푹 숙이고 무릎을 꿇었다. "공주마마를 뵈옵니다! 미천한 3급신관 마사에노 수구에. 일루미나야여신 께 일생을 바친 몸, 불충하게도 이제야 마마를 알아보게 되었나이다! 용서 를!" 땅바닥에 이마를 댄 여신관의 모습에 약간은 풀린 얼굴이 된 계집애는 흐 응 하고 잘난 척 턱을 들더니 대꾸했다. "용서한다. 고개를 들어라. 신관." "감사 드립니다!" 부들부들 떠는 여신관은 고개를 살짝 들더니 발끝으로 걸어 계집애의 옆으 로 가서 걸었다. 계집애는 그것보라는 듯한 손짓으로 그녀에게 손을 내밀 었고 여신관은 빌어먹게도 공손히 그녀의 손등에 키스를 했다. 그러나 안 타깝게도 그 아니꼬운 모습에 일일이 반응할 자들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계집애는 실망할 수 밖에 없었다. 어쨌거나 고양이가 길 안내를 하는 와중에 나는 뭔가 계속 걸리는 무언가 가 있었다. 그게 대체 뭔지 알았다면 좋았겠지만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 지라 짜증만 치솟았다. 아크의 설명에 따르면 뭔 놈의 여신과 남신이 있고 그놈의 남신의 신전은 천민들이 섬긴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혹여 이 여신 관과 계집애는 그 천민들의 신전은 모르는 것 아닐까? "이봐, 여신관. 너 혹시 구린내 남신의 신전을 알아?" "구린내 남신?" 여신관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녀는 내가 휴런을 다루는 것을 보고 이미 나를 숭배하기로 결론을 내렸 던 모양이었다. 덕분에 내가 묻자 진지하고 성실한 태도로 대답했다.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혹, 혹시 구스차야 신을 말하시는 것입니까?" "그래, 그런 거 같다. 그 신의 신전도 알고 있나?" 그녀는 노골적인 경멸의 표정으로 망설였다. "신전이랄 것도 없습니다. 구스차야신의 신전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 니다. 그것들- 천민들은 길거리에 작대기를 세워놓고 기도할 뿐입니다." "길거리에서?" "네, 신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천민들의 신, 어둠과 무지와 야만의 신을 차마 신전에 모실 리는 없지요. 게다가 비천한 자들이 신이라 우기는 것일 뿐, 일루미나야신께서는 말씀하시길, 어둠에 휩싸인 자는 결코 빛으로 나설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결국은 신전이랄 것은 없다, 단지 천민들이 모시는 것 뿐이다라는 거야?" "네, 그렇습니다. 구스차야신의 신전따위는 없습니다. 단지 막대기만 있을 뿐!" "막대기?"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는 중 고양이가 갑자기 양양거리는 소리를 냈다. 푸른 빛깔의 고양이가 안내한, 푸른 빛깔의 건물은 깊은 숲 속에 위치하 고 있었다. 좁은 소롯길을 지나 도착해 보니, 그 주변은 온통 살벌한 분위 기였다. 소리를 질러대는 놈들과 그 소리에 맞추어 움직이는 놈들은 모두 수 십 명에 이르고 있었다. 그 중에는 낡아 빠진 옷을 걸친 고왕국의 천 민 같아 보이는 자들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화려무쌍한 룬드바르 제국군의 옷을 걸친 병사들이었다. 물론, 그 중에는 마법사 몇도 보였다. "찾았나?" "아니오!" 녀석들은 뭘 찾는 지 주변을 샅샅이 뒤지고 있었다. 낡아 빠진 걸레를 걸친 사내들 몇이 욕설을 퍼부우며 흰 옷을 걸친 신관들 을 줄줄이 엮어가지고 공터로 끌고 왔다. 그러자 병사들 몇이 그들에게 칼 로 위협을 하며 뭐라 심문하기 시작했다. "대체 뭘 찾는 거지?" "...............트, 틀림없이! 신의 귀 를 찾는 것일겁니다!" 여신관이 옆에서 분노와 공포로 바들바들 떨며 말했다. "뭐?" 내가 앞에서 얼쩡대고 있는 고양이 목덜미를 들어 올린 채 묻자, 여신관은 뒤로 나자빠질 듯한 얼굴을 하더니 급히 목소리를 낮추어 외쳤다. "부, 불경스러운 짓은 하지 말아주십시오! 신의 귀에게 무례해선 안됩니 다!" "이걸 왜 찾아?" "시, 신의 귀는 바로 신의 말씀을 듣는 창구이자 신탁의 증거이니까요! 신 전을 뒤져서 신의 귀 이상 가는 보물은 없으니까요!" 여신관은 달달 떨며 말했다. 나는 양양거리며 애교를 떠는 고양이를 일단 내 어깨 위에 올려놓고 상황 을 주시하기로 했다. 저 놈들이 신앙이 너무나 돈독해서 이 놈의 신의 귀 라는 괭이를 잡아다 놓고 신에게서 신탁을 듣겠다는 건지, 신의 말씀을 듣 겠다는 것인지 인간들 하는 짓거리는 어차피 불가사의한 것이니 신경을 끄 자. 설마하니 저 놈의 룬드바르가 고왕국의 신들에게 한 말씀 듣고자 여기 까지 진출한 거야? 내가 의문에 잠겨 있을 즈음 신관들을 앞에 둔 놈들은 소리를 질러대고 있 었다. 고문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는지 무척이나 간단한 심문방법을 택하고 있었다. "말해라!" "모릅니다!" "죽여!" "으아아악!" 긴 말도 필요 없었다. 말해 다음은 으아악이었다. 신관들은 약 십 수명정도였는데 이런 식으로 심문을 받자 그대로 댓 명이 죽어 넘어졌다. 그러자 남은 자들은 겁에 질 려서 오줌을 싸가며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말해! 어디 있나?" "모, 모르...아니, 대신관께서는 알고 계실 겁니다!" 한 녀석이 학습능력이 있다는 것을 과시하듯 대꾸하자 칼을 들고 있던 병 사는 고개를 홱 돌리며 다시 물었다. "그럼 대신관은 어디 있나?" "모, 모릅니다." "죽어." "으악!" 이런 일이 두 어번 반복되자 살아 남은 자들은 겨우 세 명 남았다. 그들은 이제 거의 반쯤 미치기 직전으로 보였지만 한 사람은 태연하고 두 사람은 눈을 꽉 감고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보아 하니 이 셋도 모르는 듯 보였다. "구, 구해주십시오!" 여신관이 내 옷자락을 잡으며 말했다. 그녀는 너무 창졸간에 신관들이 죽 어 넘어지자 구해달라는 말도 못하다가 이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눈물을 줄 줄 흘리며 애원했다. 그 말에 내가 다른 녀석들을 슬쩍 보자 다른 녀석들도 일제히 고개를 끄덕 여 보였다. 그래, 구해주면 뭔가를 알 수 있겠지. 그리하여, 내가 손을 쓰기도 전에 파라라락 하고 엘프의 꼬맹이들이 자신 들이 얼마나 난폭하고 사나우며 폭력적인 엘프인가 보여주기 위해 날뛰기 시작했다. 녀석들은 자신들의 활을 있는대로 휘더니 그 회색날개의 화살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사실 엘프의 활솜씨는 괜찮은 편이다. 카산처럼 악력이 있는 놈이라면 더더욱이나 괜찮다고 할 수 있다. 어, 그러고 보니진짜 카산 이 괜찮은 실력의 소유자인가? "으악!" "적이다!" 갑작스레 습격을 받은 병사들은 일제히 뒤로 물러서더니 화살을 맞고 나뒹 군 놈들을 내버려두고 재빨리 엄폐물을 찾아 뛰었다. 그러자 카산을 비롯 한 색마녀석이 두 손을 뻗쳐들더니 고함을 질러댔다. "화이어 볼!" "화이어 애로우!" 엘프들이 이렇게 마구 불을 쏘아대도 되는 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그 두 놈들은 엄폐물을 찾아 숨은 자들에게 불길을 뿜어댔다. 그러나 그도 잠 시 그들 중에서도 마법사가 있었는지 하얀 실드가 퍼져나왔다. 아니, 퍼져 나오려 했다. "퍽!" "으악!" 난데없이 날라든 돌멩이가 마법사 녀석의 머리통을 부수고 유유히 대지의 여신에게 돌아갔다. 피를 뿌리면서 나자빠지는 로브차림을 한 마법사 녀석 의 주변은 말 그대로 아연한 표정으로 굳어버렸다. 내가 돌아보자 휴런이 손을 털면서 물었다. "왜? 마법사를 보면 모조리 다 죽이기로 했잖아?" "............그랬었지." 나는 옛 기억을 되살리면서 고개를 들고 주변을 살펴보려 했다. 그러나 그 럴 새도 없이 엘프들의 화살을 피해 숨어 있는 녀석들을 향해 유티아가 달 려들었다. "으아아악!" "끄악!" 비명소리 요란하게 유티아가 해치우는 동안 엘프들은 멍하니 활 쏘기를 멈 추었다. 조인족들도 그저 주시할 뿐 할 말을 잊었다. 몇 되지도 않는 숫자 였지만 그렇게 유티아가 지나가는 호박 밟듯 죽이며 지나가자 할 말이 없 었던 것이리라. "이봐, 한 둘은 살려 둬!" 내가 고함을 치자 유티아는 마지막 남은 두 명의 병사의 목을 비틀다가 멈 췄다.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날 돌아보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그녀가 정 상이 아닌 것은 사실인 듯했다. 나는 피투성이가 된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잡아 끌어 안았다. "유티아." "룬드바르 놈들은 다 죽일거에요." 이를 바득바득 가는 그 모습은 룬드바르군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공포스러 웠는지 엘프들이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다. 어찌되었든 포로는 남겨 두었으 니 잘했다고 볼수 있지? 살아남은 신관들이 넋을 잃고 있는 동안 여신관이 황급히 그들에게 달려 갔다. "신관님!" "아아......." "무사하십니까?" "아아....신이여!" 두 신관은 고개를 떨군 채 말도 채 잇지 못했다. 한 명은 졸도했는지 아예 움직이지도 않았다. 병사들의 심문에도 그나마 꿋꿋하던 자들이었지만 유 티아의 솜씨에는 공포를 느꼈던 모양이었다. 나이든 신관이 바들바들 떨며 여신관의 부축을 받아 일어섰다. 오줌이라도 지렸는지 냄새가 고약했다. "신의 귀!" 이 나이든 중년 신관은 고양이를 보자 두 손을 맞잡으며 무릎을 꿇었다. 푸른 색이 도는 고양이는 그의 앞에서 한번 더 양양 소리를 내며 내 어깨 위에서 가르릉거렸다. "아아......무사하셨군요! 다행입니다!" "그런데 대체 녀석들이 노리는 게 뭐야?" 내가 묻자 중년신관은 경계의 시선으로 날 바라보았다. 자신이 지금 처한 상황을 아무래도 모르는 것 같기에 유티아의 뺨에 묻은 핏방울을 가볍게 닦아 보이자 녀석은 흠칫 굳었다. "말씀 드리십시오! 이 분들은 고귀하신 공주님을 모시는 일행들입니다!" 여신관이 그렇게 옆에서 외치는 순간 나는 뒤로 나자빠질뻔했다. 누가 누 굴 모셔? "오오! 공주님! 이 미천한 신관 피리야스 노사아가 고귀하신 분께 안부 를.........!" 중년신관이 무릎을 꿇자, 이 오만불손 시건방진 계집애가 손을 들어 보였 다. "예를 갖출 것 없다. 어서 질문에 답하라. 놈들이 노리는 게 대체 뭐냐?" "공주님! 이렇게 뵙게되어 무한의 영광..........대체 폐하께서는 무사하신 지........." 이 작자가 한가하게 눈물을 찔끔거리기에 나는 한 대 걷어차 주려했다. 그 러나 마침 그 자리에 선 색마놈이 재빨리 나서서 재촉했다. "시간을 다투는 일입니다! 어서 말해보시오!" 엘프의 모습에 눈이 휘둥그레진 신관은 감격의 눈물을 쏟아내며 말했다. "아아! 과연, 왕국이 위기에 처하면 엘프께서 와 주신다더니, 그게 정말이 었군요! 신의 가호를! 이 더럽고 추잡스런 놈들이 원하는 것은 신의 귀! 신 의 귀입니다. 이 놈들은 신의 귀를 노리는 것입니다." "이 괭이를 노려서 대체 어쩌자는 건데?" 내가 기가 막혀 다시 묻자, 이놈의 신관은 내가 엘프인 줄 알았는지 고개 를 숙이고 경건하게 대답했다. "신의 귀! 신의 신탁을 듣기 위한 신의 사자인 신의 귀를 노리는 것은 어 쩌면 당연한 일인 지도 모릅니다!" "...........놈들이 신탁을 듣기 위해서 노린단 말이야?" 내가 어처구니없어 고함을 지르자, 내 어깨 위에서 따끈하게 또아리를 틀 고 있던 고양이는 야옹하고 낮게 울었다. KUBERIN.......... 불은 춤추고 물은 노래하며 얼음은 웅크린다 4 일이야 어찌되었든 이놈의 고양이가 뭔가 중요한 것 같기는 한데 나로서는 그걸 납득할 수가 없다. 전쟁을 일으켜서까지 온 놈들이 바라는 게 신의 신탁이야? 그것도 이 비리비리한 고왕국의 귀족들이나 믿는 그런 신? 여기 에는 분명히 어떤 문제가 있다. 정리좀 하자. 첫째, 아크는 고대 신들의 아이템- 어떤 신기(神器)가 그 빌어먹을 마법사 놈들이 바라는 물건일 것이라 했다. 마법의 힘의 증폭, 아니면 인간 자신의 호기심에 의한 그 탐욕 때문에. 둘째, 그런데 여기 와 보니 뭐 그런 신기(神器)라는 것은 없고 고양이 몇 마리가 꼬리나 치고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놈들도 역시 고양이를 노리고 있다. 그렇다면 결론은 즉, 이 고양이가 뭔가의 힘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긴 데 내 보기에는 간식거리도 안될 그저 평범한 네 발 짐승으로 밖에는 안 보인다. 이봐, 고양이. 이리로 좀 와 봐. 나는 손톱을 들어 가볍게 명령했고 비루먹은 건방진 망아지 같은 그 공주 에게 아양을 떨고 있던 고양이들은 슬금슬금 내 앞으로 다가왔다. 말귀를 잘 알아들으니 확실히 귀엽긴 하군. 내가 손을 내밀자 녀석들은 달달 떨면서도 내 손 바닥위로 뛰어 올랐다. 그러더니 한 마리는 내 어깨에 올라서서 자기 얼굴은 부비며 애교를 떨기 시작했다. 그 온기에 조금은 나도 기분이 좋아져서 이 놈들 서너 마리를 안고 털을 쓰다듬어 주었다. 질 좋은 모피의 따끈한 감촉은 오랜만에 맛보 는 감각이라 나도 모르게 히죽 웃었다. "그래, 어디 말좀 들어볼까. 네 놈들에게 무슨 힘이 있을까나." "쿠베린, 부탁이니까 그 고양이들을 내버려 둬." 옆에서 튜나가 건방지게 말을 던졌다. 나는 약간 기분이 상해서 그녀를 노 려보았다. "이봐, 나의 깊고도 넓은 심중을 알고나 말해라, 사려라고는 길가의 말똥 구리만큼도 없는 계집애." "마, 말똥구리? 너 말 다했어?" 튜나가 펄쩍 뛰는 것을 모른 척하고 나는 다시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이 놈 들의 눈빛을 차분히 살펴보았다. 다른 고양이들과 다른 점은 눈빛과 털빛 이었다. 약간 특이하게 초록빛, 푸른 빛, 붉은 빛, 보랏빛 등이 돌긴 하지만 그게 그렇게까지 다른 점이라고는 말하기 어려웠다. 흰 고양이, 검은 고양 이, 갈색 고양이들이야 워낙에 흔한 것이니 그 중 보랏빛이나 붉은 빛, 푸 른빛이 도는 것이 있을 수도 있지. 말귀를 알아듣는 것, 뭐 그것도 뭐 그런 데로 쓸만한 재주이긴 해도 좀 머리 좋은 놈들이 있을 수도 있지 뭐. 그때 갑자기 내 어깨 위에 있던 고양이가 카아 하는 소리를 내며 내 어깨 위에서 뛰어 내렸다. 붉은 빛을 띄운 그 고양이는 뭔가를 말하고 싶은 듯 날 바라보았다. 이 중에서 내가 가장 강한 인물이라고 이 놈은 이미 인정 하고 있는 듯 나를 향해 호소하듯 눈빛을 던졌다. 고양이의 눈은 마름모꼴로 가늘어졌다. 빛을 발하는 그 붉은 빛을 띈 호박 빛 눈동자는 생각에 잠긴 듯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위대한 분에게 부탁을 좀 드려볼까. 이 분께선 혹 시 들어주실 지도> 뭐ㅡ 그런 시선이어서 나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앞 장 서." 내가 말하자 고양이는 그대로 정면을 향해 힘차게 달리기 시작했다. 무언 가를 위해 달려가는 것처럼 보이는 그 모습은 분명히 의지가 담겨 있었다. 갑자기 흥미진진해졌다. 사람들은 나와 고양이가 갑자기 달리기 시작하자 놀라 무슨 일이냐고 떠들 어댔지만 나는 그런 말에 일일이 대답해 주지는 않는다. 그런 건 자기가 알아서 알아내야 하지. 내가 왜 일일이 설명을 해야해? 고양이들은 마치 내가 자신들의 주인인양 내 옆으로 바짝 붙어 달리기 시 작했다. 고양이라는 게 달리는 것이 빠른 듯 보이지만 사실 그렇게 빠르지 는 않다. 녀석들은 발 밑에 울퉁불퉁하게 솟아난 나무 뿌리들을 피하며 가 죽 공처럼 뛰고 있었다. 붉은 빛의 고양이는 뭔가 급한 듯 내달리고 있었 다. "기, 기다려 주십시오!" 신관들이 떠들어대는 소리가 등뒤에서 들려왔지만 그것도 곧 사라졌다. 나 는 고양이에게 집중했다. 이 놈의 고양이는 다급하게, 절박한 몸놀림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제 내 주변을 둘러싼 고양이들은 지친 듯 속도가 떨어 졌기 때문에 나는 녀석들의 집어 올려 어깨에 올려 놓고 달리기 시작했 다. 대체 뭘까? 먹는 것 때문은 아닐 테고. 푸른 털 고양이가 자신의 신전으 로 우리들을 안내한 것처럼 이 붉은 털 고양이도 우리들을 자신의 신전으 로 안내하는 것일까? 다른 고양이들이 지쳐 떨어졌어도 붉은 털 고양이는 멈추지 않았다. 헐떡 거리며 그 작은 몸에 탄력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입가에서 흰 거품이 일어 나는 게 선명히 보인다. 하지만 이 놈은 멈추지 않고 오히려 속도를 높였 다. 나는 그런 녀석의 뒤를 느긋하게 쫓아가면서 이 놈이 수놈인가 암놈인 가를 살피기 시작했다. 들어가면 갈수록 어두워지는 숲 속은 자신들이 정말로 얼마나 오래되었는 가를 보여주면서 내 앞에 기생목과 넝쿨을 집어 던졌다. 인간들의 연극무 대처럼 막이 내려지고 올려지는 검푸른 넝쿨을 후려갈기며 나는 작고 지친 고양이를 바라보았다. 고양이는 하늘도 보이지 않는 거대한 나무들 아래서 지독하게도 작고 이질적으로 보였다. 이 고양이는 사람들과 같이 자란 고 양이다. 야생이 결코 아니었다. 손을 내밀어서 헐떡이는 녀석의 몸체를 잡아끌어 안자, 녀석은 반항하듯 으르렁거렸다. 건방진 그 콧등을 한 번 후려 갈겨주고 나는 코를 들어 주 변을 훑었다. 이봐, 숲, 잘난 척하지 말고 그 장막을 거둬라. 이 숲 안에서 최고로 강한 쿠베린이 명령한다. 길 가던 작은 사슴, 바닥을 기는 얍삽한 도마뱀, 바위 틈 사이 산 게, 나무 위를 뛰는 다람쥐들아, 움직임을 멈춰라. 이 숲 안에 서 가장 이질적인 냄새를 내게 보여라. 이 숲안에서 가장 이질적인 것들을 내게 드러내라. 내 명령에 복종해라. 강자에게 무릎꿇는 숲. 숨을 들이 마셨다. 내 뒤로 달려오는 엘프들과 숲안 여기저기를 날아다니는 조인족을 빼고, 가장 이질적인 쇠냄새가 피 냄새와 함께 희미하게 바람과 함께 다가왔다. 공기 중의 파리들과 송장벌레가 여기요 여기를 외치며 그 쪽을 향하고 있 었다. 그들의 냄새, 그들의 날갯짓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발끝을 차고 내 발을 거는 나무 뿌리들을 걷어차면서 앞으로 내달렸다. 바람이 휙휙 귓가로 지나치자 어깨에 매달린 고양이들이 몸을 움츠리며 발 톱을 세웠다. 달작지근한 꽃 내음을 지나자마자 비릿한 피 냄새가 콧속으 로 스며들어왔다. 그리고 바로 앞에는 무너진 돌 더미! 아차차. 나는 눈앞 의 나무둥치에 손톱을 박으며 공중으로 치솟았다. 공중을 한 바퀴 돌자 겁 에 질린 고양이들이 결사적으로 내 몸에 매달렸다. 나는 옆으로 기운 자세 로 단숨에 뛰어 내렸다. 돌더미는 뿌연 먼지를 아직도 피어 올리고 있었다. 그 먼지 속을 노려보니 웬 나풀나풀한 옷자락을 걸친 두 노인네가 보였다. 노인네들은 먼지 속에서 부들부들 떨며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이 사악한 자들! 저주 받으라!" "저주 받을 천한 것들!" 몇 번 들어도 비슷한 말만 계속하기에 나는 그들을 무시하고 그들에게 욕 을 먹고 있는 녀석들을 주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그 욕먹는 녀석은 팔짱을 낀 채로 웃고 있었다. 유달리 여유가 넘치는 재수 없고도 느끼한 미소와, 자신이 상당한 미남자인양 구는 그 비틀어진 자세. 정말로 싫은 놈 이다. 특히 그 분홍빛 주둥이가 눈에 몹시 띄었다. 그래서, 나는 그 반가운 분홍빛 주둥이를 향해 바닥에 널린 <던져 주세요>를 외치고 있는 돌덩이 들을 주워들었다. 고양이들을 어깨에 매단 채 나는 기쁨과 반가움에 넘쳐 사랑스런 돌덩이를 녀석을 향해 집어 던졌다. 아아, 사랑스런 돌덩이! 쇄애애액 하는 소리와 함께 돌덩이가 날아갔다. 분홍빛 녀석은 갑작스런 파공성에 뒤늦게 깨닫고 고개를 돌렸지만 정면으로 면상을 얻어맞았다. 퍼 억하고 정말로 상쾌한 울림을 사방에 퍼뜨리면서 녀석은 뒤로 나자빠졌다. 피가 분수처럼 치솟았지만 킬트의 아이인지라 나는 이 놈이 상쾌하게 죽었 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치사한 녀석은 깨끗하게 죽지도 못하는 법이다. "우아아악!" "악!" 비명을 지른 것은 여지껏 욕을 하던 노인네들과 분홍 주둥이를 둘러싸고 있던 병사들이었다. 그들은 고함을 있는데로 지르면서 이 분홍주둥이를 둘 러싸고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그에 따라 일제히 이쪽으로 시선이 집중된다. 여러분, 그래요, 나에요. 나. 나는 고양이들과 달렸다. 노인네들이 고양이를 보고 두 손을 치켜들고 무 릎을 꿇는 것을 지나쳐서 나는 내가 대가리를 깨뜨렸던 녀석에게로 다가가 녀석이 일어나기 전에 한 번 더 밟아주기 위해 속도를 높였다. 내 앞에서 나를 막아서는 병사1, 2, 3이 발길에 걷어채어 일제히 쓰러졌다. 분홍주둥 이는 큰 대자로 쓰러져 있었다. 면상 한 가운데를 맞힌 나의 이 절묘한 솜 씨덕에 얼굴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있었다. 아니, 뚫리지는 않았지만 어쨌 거나 이놈 머리통 한 구석이 날아가 피를 철철 흘리고 있었다. 두 눈을 부 릅뜬 그 얼굴을 사랑스레 바라보며 나는 녀석의 목을 뭉개버리려고 힘을 주어 내리 찔렀다. "무슨 짓이에요!" 그때 무섭게 나서는 어떤 녀석이 있었으니 그 놈의 이름하여 멍텅구리 카 산이라는 놈이었다. 녀석은 뒤에서 악을 지르며 나에게 화살을 날렸다. 그 화살을 피하면서 나는 기가 막혀 뒤를 돌아보았다. 대체 이 놈은 무슨 생 각을 하고 있는 거야? 카산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서 외쳤다. "그를 죽이면 룬드바르 황제를 제어 할 수 없다구요!" "제어 안 해도 돼! 내가 말하자 카산은 세차게 도리질을 하며 말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시겠어요? 그가 바로 궁정마법사라구요!" "나도 알아! 그리고 이 놈은 킬트의 아이들 중 하나지!" 말도 안 통하는 녀석을 모른 척하고 놈의 목줄기를 뜯으려 손톱을 들었다. 그러자 갑자기 카아아악 하는 소리와 함께 쓰러진 녀석의 가슴팍에서 무언 가가 튀어나왔다. 그것은 너무나 빨라서 순간적으로 내 팔뚝을 치고 지나 갔는데 함께 핏줄기가 튀었다. 이놈의 물건이 내 팔뚝의 살점을 뜯은 것이 다. 순식간에 주변이 어두워졌다. 녀석의 거대한 덩치가 햇빛을 막아 내 앞 에 그늘을 드리운 것이다. 이런 제기랄. 또 이상한 게 튀어 나왔어! 카랑카랑거리는 숨소리를 내면서 검푸른 그 놈은 몸을 뒤틀고 있었다. 날 개가 달린 뱀처럼 생긴 녀석은 처음 보는 물건이었다. 비늘이 잔뜩 달렸지 만 그렇다고 해서 꺼칠하다기 보다는 비단처럼 미끈했다. 눈은 모두 네 개. 그 하나는 내 피로 얼룩져 있었다. "봉인수!" 뒤에서 카산이 놀란 소리로 고함을 질러댔다. 말 안해도 알아. 알아. 나는 짜증을 내며 내게 으르렁거리는 이놈의 봉인수 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 놈은 나를 향해 허여멀건한 것을 내뿜었다. 뭔지 는 모르겠지만 그게 가래침이라면 절대로 맞을 수 없다! 이게 건방지게 나 에게 침을 뱉어? 아무리 뭘 모르는 봉인수라고 할 지라도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내게 침을 뱉은 이 방자하고 싸가지 없는 녀석을 향해 손톱을 내리 그었다. 놈은 공중을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꿈틀거리며 피하더니만 길죽하 고 뾰족한 날개를 길게 펼쳤다. 그리고 그 날개에서 갑자기 손가락만한 가 시가 튀어 나와 나에게로 쏟아져 내렸다. 물론 나는 그런 것을 맞아줄 생 각이 전혀 없었다. 이 건방진 놈은 내게 감히 가시를 곤두세우고 새침스런 계집애처럼 발버둥을 치고 있는 것이다. 손안에 쥐고 있던 돌멩이를 이 봉 인수에게 내던지자 이 놈은 꿈틀하며 그것을 피하더니 카악하고 다시 침을 뱉으며 내게 돌진해왔다. 겨우 일곱 개의 이빨을 가진 주제에 나에게 덤비 다니 정말로 주제를 모르는 놈이었다. 나는 네 놈보다 서너 배는 이빨이 많다 이놈아! 주먹을 들어 그대로 녀석의 면상을 가격했다. 뻐억하고 큰 소 리와 함께 녀석이 뒤로 튕겨올랐다. 녀석은 공처럼 튀어 듬직한 나무에 부 딪치고 다시 땅바닥에서 반쯤 치솟아 오른 나무 뿌리더미에 쑤셔 박혔다. 하, 건방진 놈! "저, 저거!" 카산과 엘프들이 입을 벌리고 있는 동안 봉인수는 꿈틀거리면서 일어났다. 정확히 말하면 일어났다기 보단 튀어 올랐다는 게 정상일 지도 모른다. 그 런데, 어라라? 이 놈의 봉인수의 덩치가 커졌다. 약 1.5배 내지는 2배쯤 커진 듯했다. 녀 석은 나를 향해 살기에 찬 눈빛을 던지더니 아가리를 있는대로 벌리고 다 시 내게 침을 뱉었다. 그 침도 역시 두 배로 커져 있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나는 그 침을 피하면서 이 놈을 관찰하기로 마음 먹었다. 세상에, 후려갈기 면 커지는 놈이라니, 이런 희한한 물건은 정말 처음 보았다. 흥미진진한 걸. "으악!" 비명 소리와 함께 내 뒤에서 얼쩡거리던 병사 1이 그 침을 뒤집어썼다. 그 러자 놀랍게도 그의 몸이 녹아들기 시작하는 것 아닌가? 병사는 찢어질 듯 한 비명소리를 내며 덮어 쓴 가슴부터 녹아들어 순식간에 흰 뼈를 드러내 더니 풀썩 쓰러졌다. 피는 오히려 한 방울도 남지 않고 이글거리는 소리만 이 음산하게 주변에 울려 퍼졌다. 사람들은 새파랗게 질린 채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노인네들은 기도문을 외는 듯 떠들어대고, 엘프들은 비명소리 를 삼키고 조인족들은 흥미진진한 눈빛을 던졌다. 스튜 끓는 보글보글 소 리로 이렇게까지 주변을 경악시키다니 이런 건 내 생전 처음이다. "쿠, 쿠베린! 그 놈의 브레스를 피해요!" 당혹한 어조로 카산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당연하지, 녹아 들지 않더 라도 기분 나빠서라도 절대 안 맞아. 놈은 이제 두 배로 커져서 나무 둥치만한 몸통이 되었다. 아가리를 벌리 고 나를 향해 돌진하기에 나는 그 돌진하는 속도를 재며 재빨리 좌측으로 몸을 틀었다. 그러자 녀석은 나를 놓치며 허공으로 스쳐지나갔다. 그러나 그도 잠시 약이 오른 듯 카악하는 소리를 내며 다시 나를 향해 돌진해왔 다. 학습능력이 그다지 없는지 이번에는 우측으로 피해버리자 또 스쳐지나 가며 분노의 소리를 내질러댔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쪽에서부터 덮치 려는 듯 날개를 가득 펼친 채 위에서 그대로 내리찍었다. 너무나 빈약해 보이는 일곱 개의 발톱이 나를 향해 내리 찍히는 것을 보며 나는 시익 웃 었다. 진짜 학습능력이 없어! 이래서 경험이 중요한 거지. 땅을 박차고 내 가 뛰어 오르자 녀석은 당혹한 듯 나를 바라보았다. 그 당혹한 다섯 개의 눈알을 마주 보며 나는 녀석의 빈약한 발등을 찍어 누르고 그 다음에는 녀 석의 배라고 생각되는 부위를 걷어 찼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그 반동을 이용해 녀석의 가슴 팍을 발톱으로 꽉 찍어주고 그 다음에는 버둥거리는 날개를 향해 손톱으로 좌악 긁어 주었다. 카아악 하는 소리와 함께 고통으 로 녀석이 비명을 질러댔다. 또 한 번 내 면상으로 침을 뱉으려 하기에 그 건방진 주둥이를 주먹으로 때려주었다. 대가리가 휙 돌아가는 것을 기다려 나는 목줄기에 손톱을 콱 찍어주었다. 녀석의 목에서 액체가 쏟아져 나왔 다. 앗, 뜨거. 뭔가 따끔한 물건일세. 이거 혹시 피인가? 녀석의 반쯤 잘린 목에서 피가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보며 나는 뒤로 우아하게 몸을 틀어 공중 제비를 넘었다. 아아, 아름다운 나의 육체가 허공을 원으로 수를 놓았다. 진정 아름다운 모습이로다. 사랑스런 모습이로다. 내가 이런 즐거운 기분으로 착지하자마자 녀석은 털썩 바닥으로 곤두박질 쳤다. 손톱에 갈기갈기 찢긴 날개 몇 조각이 내 앞으로 나풀나풀 꽃잎처럼 떨어져 내렸다. 정말 시적인 광경이군. "대단하시네요, 쿠베린." 느끼한 음성을 날리며 누군가가 뒤에서 박수를 쳤다. 나는 잊고 있었던 사실을 깨닫고 한숨을 내 쉬며 고개를 돌렸다. 정말, 이 놈 되게 빠르구만. 분홍주둥이는 생글생글 미소를 지은 채 피로 얼룩진 면상을 하얀 손수건으 로 닦고 있었다. 그 닦는 모습이 더 끔찍해서 차라리 안 하는 게 나았을테 지만 녀석은 방실방실 웃으며 검붉은 핏자국을 닦아 내고 있었다. "어, 어떻게?" 카산이 뒤에서 멍청히 중얼거렸다. 주변이 조인족과 엘프로 바글거리든 말든 분홍주둥이는 감탄스럽다는 듯이 나를 아래위로 바라보더니 황홀한 표정으로 손수건을 꼬옥 움켜쥐었다. "정말 멋지십니다! 저 봉인수를 변신도 하지 않고 가볍게 물리치시다니." "뭐, 그건 그렇고, 너 죽이려면 심장을 꺼내 부숴야 하는 거냐?" "하, 그런 걸 물으시면 제가 대답하기 곤란하죠. 뭐, 아시겠지만 머리 통 부수는 것 정도로는 잘 안 죽는다는 것만 알려드리죠." "그건 나도 알아." 나는 손을 털면서 나를 황홀한 듯이 바라보는 녀석을 향해 돌멩이를 집어 던졌다. 물론 녀석은 실드를 펼쳐 가볍게 그것을 막아내면서 생글생글 웃 는다. "아아, 똑같은 수법은 안 통합니다." 통통 튀어나가는 돌멩이를 보면서 나는 녀석에게 물었다. "그런데 너는 여기서 뭘하냐? 신전참배 중이냐?" "그런 셈이죠, 그런데 쿠베린님께선 여기 어쩐 일로 오셨나요? 이 다정한 대화에 물을 끼얹은 것은 뒤에 서 있던 노인네들이었다. "이제 괴물이 괴물과 싸운다! 아아! 세상은 멸망하리로다!" "신이여, 괴물들을 없애 주소서!" 하도 시끄러워 녀석들을 진짜 없애버릴까 하는 순간 붉은 빛 고양이가 팔 짝 뛰어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걸 보자 마자 노인네들의 눈알이 튀어 나올 듯 커졌다. "신의 귀!" 두 늙은이는 무릎을 꿇은 채 기도하는 자세로 고양이를 향해 고개를 숙였 다. 고양이는 마치 녀석들이 정녕 가련하다는 듯이 한 바퀴 휘익 돌더니 그 다음에는 분홍 주둥이의 마법사를 향해 분노의 눈길을 던졌다. 하? 분노의 눈길. 분노의 눈길. 고양이가 던지는 분노의 눈길. 황당하도다. 분홍주둥이의 눈은 커졌다. "놀랍군요. 신의 귀가 여기에 있었네요. 일곱 마리 모두?" "너 설마 고양이 찾아 헤메고 있었냐?" 내가 묻자 그는 생긋 웃으며 고양이를 향해 흥미진진한 눈빛을 던졌다. "이 고양이들은 고양이가 아닙니다." "그 말에는 엄청난 모순이 있는데. 고양이가 아니면 고양이가 아닌 거지, 고양이들이 고양이가 아니라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그러고도 네 가 입으로 먹고사는 마법사냐?" 나의 말에 잠시 멍청해진 분홍 주둥이는 심사숙고하는 얼굴로 턱을 쥐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말을 잘 못했습니다. 이것들은 고양이가 아닙니다." "그럼 뭔데?" 내가 그제서야 진지하게 받아들이자 분홍 주둥이도 진지하게 말해주었다. "이 것들은 바로, 세상의 일곱 기둥, 세상의 일곱 정령석의 화신입니다." 그리고 놈이 그렇게 말하는 그 순간 갑자기 쿠웅 하는 소리와 함께 땅이 울렸다. 모두의 시선이 옆으로 돌아갔다. "맙소사!" 놀랍게도 놀랍게도 아까 내가 갈기갈기 찢어 쑤셔박은 그 봉인수 녀석이 고개를 쳐든 것이었다. 그런데, 그 크기가 아까 내가 박살낸 크기의 세 배 는 되는 것이 아닌가. 녀석의 날개는 우리들에게 그늘을 만들어주고, 녀석의 아가리는 일곱 개가 아닌 서른 개 이상의 이빨을 가득 담고, 녀석의 몸통은 큼직한 건물 하나 정도가 되어 있었다. 이건, 꽤 놀라운 물건 아닌가! "깜빡 잊고 말씀 안 드렸었는데, 저 봉인수는 제곱의 봉인수라 불린답니 다." 분홍 주둥이가 생글생글 웃으면서 덧 붙였다. 나는 팔짱을 끼고 심각하게 그 봉인수를 바라보았다. 녀석은 나를 향해 증오와 살기로 범벅된 시선을 던지며 거대해진 날개를 자랑하듯 곧추 세우고 있었다. 곧 나에게 침을 뱉 을 듯했다. "흠, 분홍 주둥이." "네?" "저 물건, 나에게 팔아라." "네?" "저건 아이들에게 훈련용으로 안성맞춤이야." 내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흥분해서 어쩔 줄을 모르며 이미 휴런이 달려가 고 있었다. 아마도, 이 놈은 내가 혼자 박살 낸 것에 대해서 무척이나 아쉬 움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아.....저 분도 묘인족이었군요. 그러고 보니 무척 당신과 닮았네요." 분홍주둥이는 머리를 긁적이면서 휴런의 뒷모습을 탐욕스레 바라보았다. "뭐, 내 막내 동생이니까." 조인족들도 그 물건과 싸우고 싶었던지 휴런과 커지는 봉인수가 싸우는 주 변을 알짱알짱 날기 시작했다. 싸우는 것을 즐기는 것은 어쩌면 우리들 3 부족 전체의 성질일 지도 모른다. 뭐, 조인족이 온순하다고는 하지만 그 근 본적인 성격이 어디 가는 것도 아닐테니까. "그건 그렇고 이야기를 계속하자구, 저 고양이, 아니 저 것들이 정령석의 화신이라고?" "네, 그렇습니다. 앉아서 이야기 할까요?" 느끼한 미소를 지으며 분홍 주둥이가 박수를 쳤다. 그의 눈길이 엘프에게 머물자 엘프들은 적대적인 시선을 던졌다. 엘프에게 적대적인 눈초리라는 게 가능하긴 했구나. "아, 엘프의 왕과 룬드바르 황제 폐하는 평화조약을 맺지 않으셨던가요?" "그렇다! 그러나 우리들은 찬성하지 않는다!" 앞에 선 카산이 큰 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그는 활을 부여잡으며 분홍 주 둥이를 향해 외쳤다. "그동안 룬드바르가 행한 이 모든 악행을 생각해 봐라! 어떤 엘프도 용서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 룬드바르 군이 악행을 저질렀다고요? 룬드바르군이 엘프와 싸운 적 은 단 한 번도 없었을 텐데요. 오히려 엘프의 인신매매를 금지하는 법령을 제정해서 대륙 전체에 선포한 것은 황제폐하이십니다." 어라라? 그런 법을 제정했어? 그 말에 카산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 그 뿐만이 아니라 뒤에 선 엘프들도 당황했다. 그러나 앞에 서 있던 카나리안은 특유의 온화한 어조로 말했다. "그런 법을 제정했다니 반가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건 대륙 전체를 룬드 바르제국이 제어 할 수 있을 때의 이야기겠지요." 엘프답지 않은 반격에 분홍 주둥이는 눈을 크게 떴다. "물론 이미 제어하고 있습니다. 곧 대륙사는 새로운 통일제국을 기록하게 될 것입니다. 룬드바르제국은 대륙의 어떤 나라보다도 올바른 법령 통치를 할 테니까요." "네, 그야 물론 그건 룬드바르 황제 폐하가 길고도 긴 통치기간을 가질 수 있을 때의 이야기겠지만요." 미소지으며 말하는 카나리안의 말에 잠시 분홍주둥이는 입을 다물었다. 그 러나 그도 잠시 곧 호기심의 눈빛으로 그를 훑어보았다. "엘프답지 않으신 분이군요?" "네, 그럴지도 모릅니다. 저의 아버지는 흑마법사니까요." 카나리안은 더 짙은 미소를 지었다. KUBERIN.......... 불은 춤추고 물은 노래하며 얼음은 웅크린다 5 만약에 그 자리에 엄청나게 거대한 호박이 떨어져서 박살난다고 해도, 그 리고 그 호박 안에 팔등신의 미녀가 알몸으로 미소짓고 있었다 할 지라도, 지금의 이 분홍 주둥이만큼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말 그대로 굳은 채 카나리안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등 뒤에서 발광하듯이 즐기고 있는 휴런과 그 가여운 커지는 봉인수가 내뿜는 비명과 고함소리가 무색하게도 녀석은 입을 다문 채 석상처럼 굳어 있었 다. "당신이..............." 그는 창백한 얼굴로 뚫어지듯이 카나리안을 바라보았다. 카나리안은 그 노골적인 탐색의 시선을 거북하지도 않은 듯 무심하게 넘기 려 애쓰고 있었다. 그렇지, 아무리 이 놈이 어리다 할지라도 100년은 넘긴 놈이니 이 분홍주둥이보다도 나이가 많을 지도 몰라. "엘프들에게 정말로 호의적이라면 다른 생명체에게도 마찬가지겠지요. 그 러나 룬드바르의 마법사들은 결코 다른 생명체에겐 호의적이 아니었습니 다." 녀석은 조용히 되뇌듯 말했다. "룬드바르의 마법사는 가장 금기시 되는 마법을 사용했습니다. 잊고 계신 건 아니겠지요? 마튜스를 공격한 마법은 생명체가 가장 해서는 안 되는 마 법이었습니다." 그 엘프다운 맹렬한 눈동자에 녀석은 말없이 카나리안을 주시하고만 있었 다. 마치 생전 처음 엘프를 보는 듯한 표정으로, 녀석은 최초의 충격이 가 시고 나자 마치 관찰을 즐기는 듯한 표정으로 변해갔다. "언데드의 마법 말입니까? 하지만 그건 흑마법 중에서는 가장 흔한 것이 죠. 새삼스레 놀랄 필요는 없을 텐데요? 당신이 흑마법사의 아들이라고 한 다면 더 더욱이나." 그 비꼬는 말에 카나리안은 동요하지 않았다. "어떻게 놀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마법을 익히는 살아있는 존재로서. 가장 저주 받을 마법에 어떻게 화를 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당신은 마스터와 전혀 안 닮았군요." 열을 내던 카나리안은 그 말에 흠칫했다. "전혀 닮지 않았습니다. 우리들은 기대하고 있었지요. 마스터의 아드님을 만나는 것을 말입니다." 그의 얼굴에서 그 온후한 듯한 미소가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에 남은 것 은 창백한 얼굴에 일그러진 입가, 당장이라도 뜯어 발길 듯한 야수의 표정 이었다. 그 살벌한 표정에 엘프들이 모두들 숨을 삼켰다. 그러나 카나리안은 물러 서지 않았다. "당신들은 왜 이런 짓을 합니까? 마법이란 것은 생명을 파괴하기 위해 있 는 것은 아닙니다. 당신들이 애써 이런 짓을 하지 않아도 당신들이 강하다 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입니까? 마스터의 아드님?" 카나리안은 한 걸음 앞으로 디뎠다. 그 발걸음이 여지껏 보아왔던 어떤 놈보다도 무거워 보여 주변은 모두 침 묵하고 있었다. 신의 귀들인 고양이들 마저 일제히 내 뒤로 숨고 있었다. 방자한 계집애도, 미친 듯하던 노인네들도, 조인족들도 일제히 이쪽을 주시 했다. 숨이 막힐 것같은 긴장감에 모두들 말을 잊었다. "마스터의 아드님, 당신은 운이 좋았습니다." 녀석은 빙긋 다시 웃었다. 그러나 여전히 일그러진 입가에는 말할 수 없는 증오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웃는 것이 웃는 게 아니었다. 녀석은 말할 수 도 없이 이 색마 녀석을 증오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에 내가 아니고 누님을 만났더라면 당신은 그 해사한 얼굴을 남길 수도 없이 갈가리 찢겨져 야수의 먹이로 던져 졌을 겁니다! 아니지, 당신의 살점 하나 하나를 찢어 발겨 길거리에 던졌을 겁니다. 아니지, 발화 주문으 로 산채로 태워 피 한 방울을 남기지 않고 다 증발 시켜버렸을 지도 모릅 니다!" "..........왜!" 카나리안은 길게 말할 수도 없었다. 숨막힐 것같은 증오로 새까맣게 변한 녀석은 이를 갈며 가볍게 웃었다. "당신은 정말로 운이 좋습니다. 나는 그렇게 잔인하지 않습니다. 쉽게 죽 여드리겠습니다!" 그와 동시에 녀석은 두 팔을 치켜들었다. 마법을 쓰려는 듯한 그 모습에 내가 튀어 나가려 했으나 카나리안 녀석도 빨랐다. "실드!" 어떤 실드든 저 놈이 깨버릴 지도 몰라라고 말하려 했지만 그것도 이미 늦 었다. 입으로 먹고사는 놈들인지라 정말 빨랐던 것이다. 그러나 분홍 주둥이 녀석의 손에선 마법이 튀어 나오지 않았다. 녀석은 약간 의아한 듯 창백한 얼굴이 되더니 카나리안을 바라보았다. 그 리고는 잠시 일그러진 얼굴로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하하......." 실드를 펼치고 있던 카나리안과 엘프들은 황당한 그의 웃음에 모두 멍한 표정을 지었다. 살기에 찬 얼굴을 하고 있던 마베릭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아, 묻겠는데요, 마스터의 아드님?" ".........에?" "당신은 왜 우리들이 생겨났는지 아시나요?" "모, 모릅니다." 카나리안은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나는 갑자기 이 분홍주둥이 놈이 무슨 소릴 지껄이려는 지 깨달았다. "그만해!" "끼어들지 마세요, 쿠베린님. 당신이 마스터의 친구분이라 할 지라도 이런 일에 끼어들어선 안되는 법입니다." 녀석은 묘하게 여유있는 얼굴로 나를 향해 윙크를 던지더니 카나리안의 얼 굴을 바라보았다. "마스터는 말이죠, 당신을 생각하며 우리들을 만들었답니다." "뭐?" "당신이 태어나면서부터, 당신이 존재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우리들을 만들 었습니다. 최고의 육체, 최고의 두뇌, 어떤 자도 쫓아 올수 없는 강점만을 모아 만든 것. 그게 바로 우립니다." "너 적당히 해!" 내가 소리를 지르자 카나리안은 창백한 얼굴로 내게 손을 저어 보였다. 참 견하지 말라는 의미다. 나는 그 몰골을 보며 한탄했다. 이 분홍주둥이 놈은 정말로 교활한 놈이다. "엘프의 피를 이용해서 저의 외모를 만들었습니다. 저는 엘프를 닮지 않 았나요?" 그 말에 엘프들이 충격을 받아 움츠러들었다. 카나리안의 얼굴은 점점 창 백해졌다. "엘프의 피를 받는 방법을 알려드리지요, 마스터는 수정의 관을 이용해서 여기 심장에 그것을 박습니다. 물론, 그 수정관은 너무나 미세하기 때문에 엘프는 그 자리에 죽지는 않습니다. 산채로, 네에, 그렇지요. 산채로 했다는 게 중요합니다." "닥쳐!" 카나리안이 새파랗게 질린 채 외쳤다. "그 피를 받아서 재생의 술을 사용합니다. 그리고 긴 수명과 재생력과 외 모의 아름다움을 추출해내는 것이지요. 마스터의 생명의 술은 어떤 백마법 사도 따라오지 못할 정도로 대단하지요. 그 증거가 여기 있지 않습니까?" 녀석은 자기 얼굴을 가리켜 보였다. 카나리안은 당장이라도 졸도할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녀석의 뒤에 서 있던 녀석들은 구토할 것 같은 표정으로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엘프들 에게 언제나 이런 대화는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그게 다 당신을 위해서인 것입니다, 마스터의 아드님. 당신이 엘프의 수 명 대로 살아갈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 마스터가 당신을 위해 연구한 성과지요." "그만해!" 카나리안의 실드는 사라져 버렸다. 녀석은 주먹을 쥔 채 마치 인간의 남자 처럼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우리들은 당신을 위해서 몇 번이고 온 몸이 찢어지는 고통을 참으면서 실험을 견디었습니다. 마스터의 혹독한 마법훈련과 체력훈련을 받으면서 우리들만이 바로 마스터의 아이들이라고 자랑스러워했었지요." 녀석은 가늘어진 눈으로 카나리안의 부들부들 떠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즐 기듯이 녀석은 차분히 말을 이었다. "그렇습니다. 암흑마도의 마스터, 그 분이 우리들의 아버지였습니다. 그래 서, 우리들은......" "적당히 해둬, 질투심으로 대륙을 뒤덮을 셈이냐?" 나는 카나리안의 앞을 막아서면서 말을 던졌다. 마베릭은 나를 흘긋 보며 물었다. "당신은 당신의 존재를 의심해본 적 있습니까?" "없어." "오호, 정말 대단하십니다. 정말 단 한번도 없습니까?" "없어." "당신이 서 있는 것 자체가 꿈이다. 당신은 원래 존재하던 것이 아니었다 라고 생각해본 적이 단 한번만이라도 있습니까?" "없어, 그 쓰잘데기 없는 생각을 하느니 차라리 밥을 먹는다." 내가 말하자 갑자기 마베릭은 크게 웃었다. "존재가 부정된다는 게 어떤 건지 아십니까?" "몰라." 나는 어깨를 으슥했다. 정말 모른다. "그건 내 자신을 믿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건 내 세계가 부서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제 팔짱을 끼기로 했다. 그러자 왠지 초조한 얼굴이 되어 마베릭이 고함을 질렀다. "우리들 모두가 마스터의 아드님을 위한 실험도구였다는 것을 아는 순간, 우리들은 존재를 부정당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말에 카나리안은 헉하고 숨을 들이켰다. 아아, 정말 섬세한 엘프야. "그 모든 고통도 우리들은 마스터를 위해 견뎌냈습니다! 우리들이 마스터의 아이들이라는 것을 믿고, 우리들은 그분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 습니다! 우리들은 단지 그분이 백여년 전 잃어버린 아이를 치유하기 위한 실험도구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아이가 아니었어! 우리들은 도구야!" 비명처럼 녀석이 외쳤다. 카나리안은 마베릭이 외치는 소리가 자신을 찌르기라도 한 듯이 귀를 막고 뒤로 물러섰다. 엘프들이나 조인족들 모두가 넋을 잃고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베릭은 마치 온 몸에 시커먼 비극이라는 괴수를 짊어진 녀석처 럼 헐떡이면서 카나리안을 쏘아보았다. 세상의 모든 멸망이 너 때문이라는 듯이 증오에 가득 찬 눈동자였다. "그래서, 존재가 부정 어쩌고저쩌고 하는 거냐?" 나는 귀를 파면서 물었다. 괜히 심각하게 가라앉은 주변을 돌아보면서 손을 털고 다시 귀를 파면서 아직도 싸우고 있는 휴런과 그놈의 제곱의 봉인수를 바라보았다. 봉인수는 한 번 처박혔다가 일어났다가를 반복하면서도 지치지도 않고 휴런과 싸우 고 있었다. 먼지가 풀석풀석 일고 그 지독한 소음 때문에 귀가 따가울 정 도였지만 아무도 그 쪽을 주시하는 자들은 없었다. 모두들 이 심각한 상황 을 주의깊게 듣고 있었던 탓이다. "나는 인간도 아니고, 엘프도 아니며, 그 옛날에 살았다고 하는 용족도 아 닙니다. 그리고 마스터의 아이도 아닙니다." 녀석이 음침하게 말했다. "그래서 존재가 부정되었다 그거야?" 내 말에 녀석은 나를 흘긋 바라보며 감히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당신은 알지 못할 심오한 세계에 끼어들지 마시오>라는 그 얼굴에 나는 조금 기 가 막혔다. "이봐, 너의 존재는 <너는 내 아들이 아냐, 너는 내 실험도구야>하는 한 두 마디 말로 부정될 정도로 희미하고 미적지근한 것이었냐?" 내가 묻자 녀석은 흠칫 했다. "그 킬트라는 음침한 놈이 <넌 필요없어, 너란 거 사실 중요한 것도 아니 었어> 라고 말하면, 네가 싼 똥, 네가 먹은 음식, 네가 죽인 것들, 네가 떠 들어 댄 말들, 너와 놀던 그 미치광이 마법사꼬맹이들도 다 사라지는 거 냐?" 나는 두 손을 들어 보였다. "세상천지에 이렇게 멍청한 이야긴 내 생전 처음 들어봐. 그래, 내가 여기 서서 너는 똥이야 라고 말하면 넌 똥이 되냐? 킬트 놈이 넌 똥이지 사실은 분홍주둥이가 아니야 하면 넌 똥이돼?" "닥쳐! 당신 따위가 뭘 안다고!" 갑자기 일그러진 얼굴이 너무 재밌어서 나는 파낸 귀지를 녀석에게 던져 주었다. "차라리 말이야, 솔직히 이렇게 말해. <나 이뻐해 줘, 아님 난 반항할 거 야>라고 말하라고. 그 말을 못하겠으면 차라리 이렇게 말해. <그 동안 쌓 아왔던 마법 실력이 너무 아까워 나는 가만있지 못하겠어요. 세계정복에 나설래요. 방해하면 죽여!>라고 말이야. 뭘 같잖치도 않은 존재의 부정이고 나발이야?" "기다려요!" 옆에서 카나리안이 내 팔을 잡았다. "그런 심한 말.......!" "웃기지 말어. 이 놈이 하는 말 들었어? 존재의 부정? 좋아하시네, 놀고 자빠졌네. 그 말을 이 놈 때문에 죽어 넘어진 놈들에게 해봐! 그 놈들이 < 아아, 가여워, 오죽하면 우리들을 죽이셨을까> 따위를 말할 거 같아?"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죽어 넘어진 놈들이야 말로 존재의 부정을 당한 거야. 존재의 부정을 당 한 놈들은 수천 수만인데 그게 다 이 놈의 어리광에 놀아난 거야. 그런데 이 놈이 가엾냐?" 카나리안이 입을 다물지 못하자 나는 대신 대답해 주었다. "난 죽어 자빠진 놈들이 더 가여워, 차라리 그 놈들도 세계 정복에 희생 된 편이 훨씬 폼 난다고 생각하고 있을 걸?" "쿠베린! 당신은 인간의 마음을.........." 카나리안이 막 입을 여는 순간 나는 녀석을 밀쳤다. 별 더러운 소릴 다 듣 고 있네. 저 놈을 향해 뭐가 인간의 마음이야? "당신같은 자는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없기 때문에 그런 거야!" 옆에서 카나리안이 외쳤다. "나도 내가 흑마법사 킬트 마이오스의 아들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고 얼마 나 고민했는 지 몰라! 당신은 알던 존재의 소멸이란 고통을 몰라!" 갑작스런 녀석의 우는 소리에 나는 기가 막혔다. "존재의 소멸? 존재의 부정? 이 놈들 바보 아냐? 난 너희들의 몇 배나 살 았어. 너희들의 미친 애비 킬트보다 두 배는 더 살았다고 바보 놈들아." 갑자기 뭔가 이야기가 복잡하게 돌아간다. 이런 말도 안되는 말장난을 이 심각한 상황에 하다니, 과연 엘프로다. 여기서 갑자기 존재의 소멸이나 부 정 따위의 말로 시간을 지체할 여유가 우리들에게 있는 거야? 마베릭은 나를 경멸에 가득 찬 눈으로 바라보며 웃었다. 당장 스러질 꼬 맹이가 감히 우월에 찬 눈으로 날 바라봐? 이게 간덩이가 부었어? "당신같은 존재는 인간의 마음을 몰라, 아니, 유한한 존재의 아픔을 몰라. 그리고........." "자식아, 그런 거 별로 알고 싶지도 않아! 그리고 별로 알 필요도 없어! 네 놈은 지금 어리광을 피우고 있고 이 놈 카나리안은 자기 연민과 널 겹 치고 있는 것 뿐이야!" 나는 울화통이 터졌다. 냅다 돌멩이를 녀석에게 던지자 녀석은 실드를 쳐 피해내더니 나를 향해 물었다. "그럼 당신이 존재를 느낄 때는 언제지요? 아니,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나 있나요?" "언제라니? 언제나다!" 나는 고함을 질렀다. 이 말도 안 되는 말장난을 언제까지 하겠다는 거냐? 감상에 빠진 이 애송이들아! "나는 화를 낼 때 나를 증명한다! 나는 먹을 때 나를 증명한다! 나는 웃 을 때 나를 증명한다! 나는 똥 눌 때 나를 증명한다! 나는 여자를 안을 때 나를 증명한다! 나는 싸울 때 나를 증명한다! 나는 언제나! 언제나! 이 자 리에 서서 나를 증명한다! 나는 나! 이 세상 최강의 쿠베린님이시다! 따라 서 남을 위한 증명따위는 필요 없다! 나는 나로 존재한다!" 그리고 나서 이 너무나 오묘해서 말도 못하고 있는 놈을 향해 나는 몸을 날렸다. "이놈! 너는 죽으면 증명이 절로 될 테니까 더 이상 고민하지 마!" 손톱이 날고 발톱이 날고 주먹이 날았건만, 불행히도 너무 늦었다. 내 손톱이 녀석의 가슴팍을 찢으며 심장을 반쯤 갈랐지만 녀석의 몸은 이 미 반 이상 사라지고 있는 중이었던 것이다. "이동!" 날카로운 한 줄기 소음만 남기며 녀석은 사라져버렸다. 허공을 가르며 나 는 허탈해했다. 그러게 저 카나리안이란 멍청이 엘프와 떠들게 놔두는 게 아니었다. 게다가 녀석은 웃고 있었다. 정말 웃고 있었던 것이다. 교활하고 잔인한 웃음, 마음 먹은 대로 되었다는 그런 자신만만한 그 웃음. 녀석의 얼굴에 담겨진 그 기묘한 웃음 때문에 나는 금방 눈치챘다. 이놈의 마베릭 이란 놈은 진짜로 고민하기 때문에 이런 소릴 카나리안에게 늘어놓은 게 아니었다. 이 놈은 카나리안과 킬트가 영원히 화해하지 못하도록 이 따위 소리를 지껄인 것이었다. "으앗! 안돼!" 휴런이 뒤에서 소리치는 게 들렸다. 마베릭이 사라지는 순간 그 봉인수도 만신창이가 된 채 사라져 버렸던 것 이다. 휴런은 아까워서 견딜 수 없다는 듯 생채기가 가득한 얼굴을 들고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형! 정말, 그거 하나 못 잡아? 그 마법사새끼 하나 족치면 누가 뭐래?" "여기 와서 이 감상에 빠지다 못해 삐진 쿼터엘프에게 말해봐." 나는 혀를 차면서 말했다. 카나리안은 창백한 채 멍하니 사라진 마베릭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고 있 었다. 존재 좋아하시네. KUBERIN.......... 불은 춤추고 물은 노래하며 얼음은 웅크린다 6 존재라는 것은,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있다는 말이 나온 시점에서 이야긴 끝났다. 길게 말해서 말장난 할 건 없고 특히 살아있는 놈을 가지고 존재의 부정운운을 말한다는 것 자체 가 모순이다. 아니지, 모순이고 나발이고 존재의 부정을 생각한다는 것 자 체가 정말 할 일 없는 인간다운 짓거리다. 허? 존재의 부정, 놀고 자빠졌네. 내가 나를 생각하는 한 나는 존재하지. 물론, 모든 세계의 것들과 내가 얽히고 섥히고 비비고 있다는 것도 나를 증명하지, 아니다. 나를 증명할 이유 따윈 어디에도 없다. 왜냐구? 그건 바 로 내가 최강의 쿠베린님이시기 때문이지. 세상의 모든 존재들은 나에 대 해 당연히 공포와 외경과 사랑과 정열을 바쳐야 하는 거야. 그건 너무도 당연하지. 난 잘 났고, 또 그걸 잘 알고 있거든. 흠, 그건 또 모를 일이군. 나 말고 다른 놈들은 존재를 증명해야할 지도 몰라. 예를 든다면 저기서 훌쩍이는 신관놈들이라든가 바들바들 떠는 것 이외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조막 만한 거지공주 계집애라든가 말이야. 어쨌든 놈이 사라지고 난 뒤에 나는 이 고양이의 탈을 쓴 놈들을 살펴보 고 있었다. "쿠베린, 일곱 마리 전부 먹어도 네 배는 부르지 않을걸." 튜나가 슬그머니 쓸데없는 소릴 했다. "나도 알아." 축 늘어진 카나리안은 고개를 숙인 채 땅바닥만 노려보고 있었다. 그런 그 의 주변을 엘프들이 감싸듯이 모여 서 있었지만 그에게 직접적으로 말을 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고양이들은 내 앞을 떠나지 않고 튜나의 걱정 스런 시선을 받으며 내 다리에 얼굴을 비비고 있었는데 그 감촉이 꽤 기분 이 좋다. 나는 그 중 한 마리를 들어 올려 정면으로 들여다보았다. "대체 넌 뭐냐?" "..........." 당연하지만 녀석은 말하는 대신 동그란 눈알을 대굴대굴 굴릴 뿐이었다. 대체 이 것들이 뭔지 정체가 짐작도 가지 않는다. 일곱 기둥? 일곱 정령? "대체 이 고양이들을 얻기 위해 그들이 왔다는 게 정말일까?" 옆에서 생각난 듯이 튜나가 다가섰다. 그녀는 마치 아무 것도 안 하는 척 한 걸음 한 걸음 나서며 고양이 한 마리를 자기 다리 뒤로 숨기고는 뒷발 로 고양이를 걷어 치웠다. 하지만 걷어 채인 고양이는 낑 소리를 내며 뒤 로 주춤주춤 물러섰을 뿐 내 옆에서 떨어지려고 하지는 않았다. "정말 눈치 없는 놈이잖아." 튜나가 주먹을 들어 보이며 한 숨을 쉬었다. 눈치가 없는 게 아니라 영리 한 거지. 이 자리에서 누가 제일 강한지 잘 알고 있다는 의미니까. 그녀의 뒤에서 바퀴 의자를 굴리고 있던 재수 없는 그 거지공주가 날카롭 게 말했다. "나의 고양이들을 돌려줘요!" "이건 네 고양이가 아니라 신전의 고양이라고 하잖아!" 내가 재치 있게 말하자 "뭐야! 그건 아바마마께서 나에게 주신 거야!" "그곳의 신관들에게 물어봐. 이건 신전의 고양이지, 네 것이 아냐." 그러자 그녀의 앞에 있던 신관들 서넛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거지공주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바들바들 떨더니 날카로운 쇳소리를 내 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그건 내 거야! 내 고양이야! 아바마마는 나를 피 난시키면서 그 고양이를 나에게 주셨어! 나에게 주셨어!" "그게 아니라 고양이들을 너와 함께 피난시킨 거겠지." 나는 냉정하고 논리적으로 말해주었다. "신전에 두지 않고 너에게 맡긴 것은 틀림없이 놈들이 이 고양이를 노릴 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겠지. 어린 계집애와 양양거리는 고양이따위에게 신경을 쓰는 놈들은 없었을 테니까." "닥쳐! 아바마마는 나를 사랑하셔서.....!" "진짜 사랑했다면 너도 그 재수 없는 왕자들과 함께 왕궁에 있었겠지. 그 도 아니면 밖으로 피난 시켰던가. 하지만 네 애비는 그렇게 하는 대신 너 를 이 고양이들과 함께 신전으로 대피시켰어. 왜 그랬을까? 놈들은 신의 귀라는 이 고양이들을 뒤쫓고 있었는데. 그러니까 고양이와 함께 있는 너 는 가장 위험한 것이었는데." "시끄러워! 시끄러워! 시끄러워!" "신전이라는 것은 언제나 발각될 위험성이 높은 곳이지. 게다가 신관들은 몰살을 당했고 말이야. 너도 살해당할 위기에 있었던 거지. 그리고 이 고양 이들도 이게 진짜 신의 귀라는 것을 아는 것은 신관들뿐이니까 신관들이 살해당하는 그 와중에 이 것들도 죽임을 당했겠지. 그러니까 결국 네 애비 는 고양이들을 빼앗기느니 차라리 아무도 모르게 죽게 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 거지." 나는 역시 명석해. "꺄아아아아아아아아........................" 내 말이 끝나자 계집애는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 살벌한 비명은 마치 죽임을 당하는 가련한 송아지 같았다. 두 귀를 움 켜쥐고 계집애는 온몸을 뒤틀었다. 비명소리는 이제 인간의 소리가 아니라 무언가가 깨지고 부서지고 박살나는 것 같은 기분 나쁜 소음이었다. "진정해요!" 조인족의 여왕이 계집애를 부둥켜안았다. 그러나 계집애는 발광한 듯이 몸 부림을 치며 외쳤다. "난, 공주야! 나는 공주야!" 누가 공주가 아니래? 그저 너는 거지공주라는 것 뿐이지. "쿠베린! 너무 심하잖아!" 옆에서 튜나가 나를 밀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계집애는 비명을 지르면서 바퀴 의자에서 굴러 떨어졌다. 그리고는 진창에 구르며 나를 쏘아보았다. 증오에 가득 찬 그 눈동자를 보면서 나는 또 다 른 거지 공주를 생각해냈다. "미트라. 사랑스런 내 공주." 튜나는 흠칫했다. 나는 팔짱을 낀 채 그녀를 부축하고 있는 조인족의 여왕과 엘프들, 그리고 안절부절 못하는 신관들을 훑어보았다. 그들은 대체 무엇을 부축하고 있는 것일까? 가련한 계집애? 아니면 불행을 당한 공주? 이봐, 미트라. 너는 공주야. 너는 높은 성의 공주님. 높은 성도 어울리는 진짜의 공주님. 웃을 줄도 알고 화낼 줄도 알고, 사랑할 수도 있는 진짜의 공주님. 나라가 망했어도 너는 공주님. 여기서 울부짖는 꼬맹이와 다른 진 짜의 공주님. 나는 멍청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이 초라한 꼬맹이를 공주라고 부를 수는 없다. 왕녀라고 부를 수도 없지. 내가 누누이 말했지만, 진짜 왕은 이 나라에 없다. 그러니까 이 나라에는 진짜 왕녀도 없는 거야. 그러니까 이 자리에 있는 것은 비참한 꼬맹이. 다 리를 못 쓰는 성질 나쁜 꼬맹이일 뿐이다. "잔인하게 굴지 마세요." 옆에서 카산이 거지공주를 부축하면서 나를 책하는 듯한 얼굴을 했다. 나 는 녀석의 옆에 선 에닌을 보았다. 에닌은 창백한 얼굴로 몸부림하는 소녀 를 안아 의자에 앉히려고 애쓰고 있었다. 거지 공주의 주변에서 부축하고 있는 엘프들과 조인족의 여왕을 보면서 나는 다시 시선을 고양이에게로 돌 렸다. "보았냐? 너의 주인은 아무도 없다. 너는 뭐냐? 고양이 몰골을 한 놈아?" 고양이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일제히 일곱 마리가 동시에 날 바라보 았다. "원래 주인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아. 네가 정령석이라면 너는 주인이 필요 없지." 내가 중얼거리는 동안 고양이들은 내 말을 경청하는 듯 줄지어 앉았다. 그 리고는 말귀를 알아듣는 듯이 심사숙고하는 표정을 짓더니 그 다음에는 흰 빛의 고양이가 앞으로 한 걸음 나서서 내 어깨 위로 풀썩 올라섰다. 주변은 고요해졌다. 거지 공주는 훌쩍이다가 고양이들의 이상한 행동을 보 고는 멈추었고 엘프들과 조인족들은 모두 정색을 하고 나와 고양이들을 바 라보았다. 고양이는 마치 내게만 속삭이듯이 내 귀를 살짝 핥았다. 나는 아 무리 보아도 고양이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는 이놈의 정령을 손끝으로 건드 리며 시선을 마주했다. "네가 가진 힘이 뭐냐? 놈들이 바라는 게 대체 뭐냐?" 흰 색의 고양이가 히죽 웃었다. 실제로 웃은 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게는 웃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고양이는 갑자기 내 가슴을 앞발로 쓸었다. "................." "쿠베린! 고양이가 뭐라는 거야?" 튜나가 급하게 물었다. "내게 안기고 싶다는 군." "..........노, 농담이지?" 튜나가 혼비백산한 듯이 외쳤다. "이 상황에 농담이 나와?" "아니, 사실이야." 그리고 내 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흰색의 고양이는 갑자기 내 앞섬을 헤치 더니 내 주머니의 앞을 열고 스스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왓!" 나의 주머니, 무한의 주머니는 고양이의 몸을 그대로 빨아들인 듯 쑤욱 하 고 집어 삼켰다. 아니, 고양이가 스스로 주머니 안으로 몸을 던졌던 것이 다. 모두가 입을 벌리고 있는 사이, 고양이는 파란 놈, 붉은 놈, 노란 놈 할 것 없이 차례로 나에게 몸을 바쳤다. 내 가슴 위에서 대롱거리고 있는 주 머니로 들어가는 그 녀석들은 유령처럼 미끈하게 안으로 빨려 들어가 침묵 했다. 주머니는 흔들리지도 않았고 불룩거리지도 않았다. 그저 조용히 예전 의 상태로 돌아갔을 뿐이었다. 조그마한 주머니에 고양이 일곱 마리가 들 어가는 동안 아무도 움직이지도 못한 채 주변에 있던 자들은 그저 입만 자 악 벌리고 서 있었다. "........" "이, 이게 말이 됩니까?" 카나리안이 옆에서 중얼거렸다. 역시 충격은 충격으로 치료가 가능하군. 녀석은 허여멀건한 얼굴을 허옇게 물들인 상태로 나의 가슴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녀석만이 아니라 주변에 있던 자들 모두가 내 가슴을 넋을 잃고 바라본다. 음, 물론 내 가슴 이 멋지긴 하지. 매끈한 근육과 티 없는 살결, 무엇보다도 안기는 자에게는 넓고도 넓은 하해와 같은 아늑함을 안겨주지. "어, 어떻게 된 겁니까? 그거...........그 조그만 주머니가..." 조인족 여왕조차 말을 더듬었다. 그러자 마치 최면에서 깬 놈들처럼 신관들이 비명을 올려대기 시작했다. "이거 뭡니까! 어서 신의 귀를 내어 놔! 이 괴물! 어떻게 한 거야?" "신의 귀를 온전히 돌려 내놔! 당신! 대체 뭐하는 작자야?" "이, 도둑놈!" 하도 시끄러워서 녀석들의 턱주가리를 한 번 으깨줄까 생각할 무렵, 옆에 서서 재미난 듯이 바라보고 있던 휴런이 재빨리 신관들을 툭툭 건드리며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 주머니에서 그 고양이들 꺼낼 수 있지?" "있기야 있지." 나는 주머니 안으로 손가락을 넣어 휘저어 보았다. 그러나 잡히는 것은 없 다. "그럼 꺼내봐. 그거 참, 아무리 봐도 희한하네. 그거 대체 어디서 얻은 거 야?" "어디서 얻은 것인지는 나도 기억이 나지 않아." 나는 손가락을 아무리 휘저어도 잡히는 게 없는 이 주머니의 속사정을 뼈 저리게 느끼면서 설명해 주었다. "이 주머니 안에 있는 물건들이 너무 많아서 한꺼번에 꺼내기가 힘드네. 몽땅 꺼내서 뒤져야 할 거 같아." "그 안에 대체 얼마나 많은 것들이 들어 있죠?" 조인족의 여왕이 다가와 긴 손가락으로 내 가슴을 더듬었다. 음, 괜찮군. 내가 가슴을 내밀고 서자 재빨리 유티아가 다가와 여왕의 손가락을 후려친 다. 거참, 야멸차게도 후려치네. "나도 잘 모르지만 꽤 많아. 무겁거든." "끌러봐! 안을 보고 싶어!" 튜나가 눈을 반짝이면서 외치는 것을 무시하고 나는 주변의 녀석들에게 말 해주었다. "우리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럼?" "신의 귀가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알면 빌어먹을 마법사들과 룬드바르 군이 이리로 몰려들겠지. 그런데 여기서 한가롭게 꺅꺅대고만 있을 거야?" 그리고 그 말이 끝나가기 무섭게 갑자기 우리들을 향해 무언가가 날아들기 시작했다. 화살이었다. 화살. 혹자는 그것을 맞으면 죽는 물건이라고도 하며, 특히 엘프들이 잘 쓴다고 도 한다. 아닌게 아니라 엘프들의 눈썰미와 의외로 강한 팔뚝힘은 센 엘프 에게 활은 그지 없이 잘 어울리는 무기이기도 하다. 활로 뭔가 이름도 모 르는 곡을 연주하던 엘프도 있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쌔액쌔액 날아드는 소리가 물론 꽤 감각적이긴 해도 아프단 말이다. 어쨌거나 녀석들은 반 비명소리를 내지르며 엄폐물을 찾아 뛰었다. 우아우 아 소리를 내는 신관들 중 몇이 화살을 맞고 쓰러졌고 거지공주는 또 한 차례 그 특유의 찢어지는 비명을 내며 조인족 여왕의 품에 안겨 숨었다. 그리고 엘프들은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다 말고 갑자기 소리를 질러댔다. "조심해요! 마법이 온다!" 굳이 그걸 말로 안해도 누구든 다 알 수 있을 정도였다. 하늘은 붉고 이글거리는 소리는 귀청을 찌른다. 공기가 뜨거움에 놀라 지 르는 비명이 고막을 건드렸다.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 본 것을 후회했다. 하늘에는 시뻘건 것이 하나 더 떠올라 태양을 위협하고 있었다. 태양은 노 란 빛, 이 놈의 덩어리는 새빨간 빛깔을 뜬 뜨거운 놈이었다. 그리고 그 놈 은 미친 듯이 우리들을 향해 내리꽂히고 있다. "메테오! 피해욧!" 튜나가 엘레의 품에 안겨 고함을 지르고 있는 동안 나는 에닌의 몸을 안아 그대로 달리기 시작했다. 다른 자들은 알 바 없다. 에닌이 고개를 내 품안 에 묻고 귀를 잡아 뜯듯이 틀어 막는 것이 보였지만 그런 걸 신경 쓸 새 는 없었다. 뛰어라! 아이고 뜨거라! 쾅콰콰쾅하고 한 마디로 말하긴 쉽겠지만, 사실은 그것을 말할 수는 없다. 소리란, 때때로 내가 뭐라 말할 수 없는 경지를 넘어설 때가 있으니까. 지금처럼. 소리가 사라졌다.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다. 내 심장소리마저, 에닌의 심장소리마저 들리지 않는다. 오로지 들리는 것은 아찔한 그 무언가. 소리가 사라졌다고 하는 그 음침함뿐이다. 이글거리는 화염의 폭풍이 일어나 등뒤를 덮쳤다. 나는 에닌을 안은 채 앞 으로 고꾸라질 뻔했지만 다시 한번 도약했다. 거대한 나무들이 일렬로 줄 줄이 소리 없는 비명을 올리며 쓰러지고 숲안의 생물들이 갈가리 찢겼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지 두 눈 똑바로 뜨고 바라보면서도 나는 그저 달리기만 했다. 등줄기에 달라붙은 열기는 내 옷이 타고 있음을 말한다. 내 머리칼이 타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화염은 나아가고 전진하며 먹어치운다. 그 왕성한 식욕을 멀리 할 수 있는 방법은 역시나 한 가지. 미친 듯이 달리는 것 이외는 없다. 나는 빠르고 나 는 강하고 나는 끈질기다. 화염이 끈질겨도 놈은 고작해야 화염일 뿐이야. 인간이 만들어낸 화염은 지상에 내려서는 순간 생명력을 갖고 악착같이 달 려든다. 불은 살아 움직인다. 내 앞에서 불길에 휩싸인 거대한 나무 하나가 쓰러지며 내 어깨를 후려갈 겼다. 빠직하고 뭔가 소리가 난 것 같았지만 나는 동요하지 않았다. 아픈 것은 나중에 생각하지. 여기서 우물쭈물 할 새는 없다구. 찌르는 듯한 통증 을 모른 채하고 나는 달렸다. 바람이 일어나 내 등에 달라붙은 지긋지긋한 화염을 꺼줄 때까지 달렸다. 주변은 여전히 소리가 없다. 살아 있는 소리라고는 으르렁대는 화염의 소리뿐이다. "지금 생각한 것인데. 마법처럼 싸가지 없는 물건은 없다고 생각하지 않 아?" 나는 내 품안에서 심장 고동소리를 내며 떨고 있는 아이에게 물었다. "........모르겠어요." 한숨소리와 함께 여자아이는 고개를 들어 응답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 이 엘프 아이를 보면서 나는 미소지어 주었다. 에 닌은 내 웃음을 보고 약간은 수줍은 얼굴로 검댕이가 잔뜩 묻은 입가를 문 질렀다. 긴 머리칼 몇 올이 타올라 끝이 그을리긴 했지만 에닌은 무사했다. 내가 바닥에 내려놓자 그녀는 흠칫 놀라며 내 몸을 살폈다. "다치셨군요!" 말도 잘한다. 에닌은 손을 내밀어 피가 흐르고 있는 내 어깨와 아직도 연기가 모락모락 오르고 있는 내 온 몸을 살폈다. 그리고는 엘프다운 손 놀림으로 어루만지 기 시작했다. 흰 빛이 스며 나오는 그 두손을 보며 나는 물었다. "너도 마법을 쓰냐?" "치유력만 조금 있어요. 사실은." 에닌은 살짝 웃었다. 수줍어하는 그 얼굴이 놀랄 정도로 성숙해서 나는 그 동안 이 아가씨를 꼬맹이로 불렀던 것을 정정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래, 역 시 여자는 금방 성숙해. 이 아가씨의 미소를 보라고. 이건 이미 관능적인 색깔을 띄기 시작하는구만. 어쨌거나 시원한 기운이 등을 타고 스쳐가자 기분이 상쾌해지기 시작했다. 에닌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 나에게 치유력을 쓴 뒤 지친 듯 헉헉거렸다. 나는 푸석한 머리칼을 치켜 세우면서 주변을 돌아보았다. 물 냄새가 나는 곳은 꽤 멀었지만 가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 정도 연 기와 재를 들어마셨으면 당연히 물을 마셔야지.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걷 기 시작했다. "....쿠베린님." "왜?" "감사 드리고 싶다고 예전부터 생각해 왔어요." "뭘?" "그냥 모든 것을." "관둬." 나는 관대하게 말했다. 어린애들과 여자들은 언제나 운다. 아아, 특히 인간 과 엘프의 아이들은 언제나 울어 나를 피곤하게 만들었다. 갑작스레 사라 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계집애 남편과 잘 살고 있을까? 그 축 늘어진 놈 에게 얻어맞거나 하지는 않을까? "왜 룬드바르와 싸우시는 건가요?" 갑자기 에닌이 물었다. "녀석들이 먼저 건드렸으니까." "아이들이 납치당했기 때문인가요?" "그렇다고 할 수 있지." "하지만 묘인족은 아이들을 귀여워하진 않는다고 들었는데요?" 나는 그 말에 에닌을 돌아보았다. "아이들을 귀여워하지도 않는데 왜 아이들을 구한다고 나섰는지 궁금하다 는 거야?" "네....저기, 화가 나신다면....." 에닌은 당황한 듯 나를 바라보며 입을 다물었다. 이 조그만 입이 정말 의 외로 말이 많구나. 맨날 꼭 다물고 사슴같은 눈동자로 바라보기만 하더니. "맨 처음은 화가 나서 시작했지. 아이들을 납치당한 것 자체가 화가 나는 거야." 생각해 보니 그도 그렇다. 나는 아무렇게나 대답하기 시작했다. 일이 이렇 게까지 왔는데 사실 난 애가 별로 귀엽지 않아요 하고 뒤로 물러설 묘인족 따위 있을까 보냐.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타협을 한다거나 할 수는 없었나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죽여야만 했나요?" "묘인족 사상 타협이란 건 없어." "왜요? 자존심 때문에?" 에닌은 의외로 격렬하게 물었다. 나는 그녀의 조그만 얼굴을 바라보다 말고 물었다. "너는 길가는 토끼따위와 타협해 본 적 있냐?" 그 말에 에닌은 침묵했다. 여자가 침묵하기란 하늘에서 벌거벗은 미녀가 떨어지는 것 만큼 어렵다. 에닌은 그 또래 소녀답지 않게- 엘프의 소녀란 꽤 수다스런 편이다- 침묵 했고 나는 그게 마음에 들었다. 아직은 매캐한 냄새가 코끝을 맴돌고 있었기에 나는 에닌과 함께 물을 찾 았다. 회색 연기를 애써 쫓아내고 있는 수풀 근처에서 물 냄새가 났다. 긴 말을 할 것도 없이 에닌은 내 뒤를 따라왔기 때문에 곧 샘이 솟고 있는 작은 물가에 도착했다. 숲 속의 옹달샘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샘은, 주변 에 꽃을 피워내고 있어 꽤나 아름다웠다. 에닌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샘가 에 도착하자마자 하아 하고 입을 벌린 채 그 풍경에 빠져들었다. 불 속을 헤메다 온 터라 목이 말라 내가 샘가에 입을 대고 허겁지겁 들이키는 동안 에닌은 샘가에 피어난 꽃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흰 은방울꽃과 깊 은 숲 속에만 나는 산수선화, 그리고 향내를 물씬 풍기고 있는 자잘한 흰 꽃들은 이름도 몰랐지만 샘가의 나지막한 언덕과 바위 틈사이를 빠짐없이 메꾸고 있었다. 샘은 맑고 투명한 물을 쉴새없이 뿜어내며 바위 틈 사이로 물을 흘려냈다. 청량한 바람을 맛보며 나는 손 발을 씻어냈다. 에닌은 샘가 에 핀 꽃들을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갑자기 눈물을 흘렸다. 눈물. 참으로 싫은 물건. 특히 어린 계집애가 가지고 있으면 진짜 싫어지는 물건. "에닌." "네?" 놀란 듯 눈물을 닦으며 에닌이 날 돌아보았다. "지금 여기가 어딘지 생각이 났어." "네?" "여기에 나는 약 삼백년전에 와 본 적이 있었지." 나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바위에 몸을 기댔다. 발을 물 속에 대고 화 끈거리는 발등을 식히며 먼 산, 아니 허공을 바라보는 자세가 된 나는 에 닌을 향해 자상하게 말해주었다. "여기 와 보신 적이 있다고요?" "그래. 이 샘, 유별나지 않냐?" "유별나다고요? 어디가요?" "흠, 특별한 기분이 안들어?" "에.......아름다운 곳이긴 하지만." "끌끌끌..........암흑산맥 세룩-엘라마이야에는 여러 가지 숨겨진 전설과 사 연들이 많아. 아직 어린 너는 모르지만 나는 잘 알고 있지." "네에........" "여기는 고대 엘프의 샘이라 불리웠던 곳이야. 나도 까마득히 잊고 있었 지만." "고대 엘프의 샘?" 갑자기 반짝이는 눈을 하고 에닌은 천진스레 날 바라보았다. "성결과 안식의 샘이라고 불리웠지. 원래 이 근처는 완전히 널따란 구릉 지대였어. 그러던 것이 나무가 생겨나 숲이 된 거지." "하아........" 에닌은 놀랍다는 듯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전설에 따르면 고대 엘프 중에 가장 사랑스런 엘마미라는 엘프가 있었는데 그녀가 거인족에게 남편을 잃고 울다가 이 곳에 도착했다고 하지." 나는 진지한 시선으로 샘을 쏘아보았다. "거기서 너무나 멋진 한 남성을 만났는데 그는 그녀의 눈물을 씻어 주며 그 눈물로 이 샘을 만들었다고 해. 엘마미는 이 샘에서 목욕하고 일어서는 순간 그녀의 아픔이 모조리 사라지는 것을 느끼고 다시 새로운 세상을 바 라볼 수 있었다고 해. 그리하여 이 곳을 <치유의 샘>이라 부르지." "아까는 성결과 안식의 샘이라고 하셨잖아요?" "그렇게도 부르고, 저렇게도 부르는 거지. 엘프들은 원래 말들이 많잖냐?" 에닌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샘을 바라보았다. "이 샘을 삼백년만에 보다니 정말로 오랜만이야, 처음엔 여기가 어딘지 짐작도 못했었는데." 나는 감회가 새롭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바위 위에 길게 누웠다. 차 가운 것이 화끈거리는 피부에 닿아 기분이 좋았다. "참, 그 남자는 누구에요?" "나도 몰라. 성스러운 엘베린이라고 부른다고 하던데 그런 구차스런 이름 을 내가 일일이 기억할 거 같으냐?" "네에......." "여자 이름이니까 그나마 기억했지." 에닌이 살짝 웃었다. "나는 잘테니까 너도 씻고 한 숨 자둬. 조금 쉬고 움직여 보자." "네." 나는 눈을 감고 등을 돌려 모로 누웠다. 손에 익은 베개와 난로가 없어 무 척 허전하지만 별 수 있나? 내 생전 여자를 난로로 삼아본 적은 없으니 별 수 없지. 눈을 감고 귀를 바위에 댔다. 찰랑거리는 물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살랑이 는 에닌의 옷벗는 소리. 하아......여자 옷 벗는 소리는 정말로 좋아. 에닌은 목욕을 하고 있었다. <성결과 안식의 샘>에서, <치유의 샘>에서. 수줍은 아가씨도 이쁘지만 명랑한 아가씨도 이쁜 법. 아픈 걸 길게 쥐고 앉아서 나 아파요를 외치는 여자는 매력이 없는 거야. 툭툭 털고 일어나 우하하 웃을 줄 아는 것도 하나의 매력, 그럼그럼, 살아가는 것들은 새로운 매력을 계발해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법이다. 그게 바로 살아가 는 법, 살아가는 존재의 의무이자 책임. 또 그 뭣이다냐, 말 많은 놈들이 흔히 말하는 존재의 증명이다. 그 자리에서 멈추면, 그것은 살아있는 게 아 니다. 그저 숨 쉬고 똥이나 싸고 있는 거지. 아아, 나는 너무 고답적인 사 고에 빠져있어. 이래선 안되는데. 내가 여기서 더 이상 고상해지면 다른 자 들과 대화가 안 될 거야. 얼마 전 예로 그 분홍주둥이와 색마 녀석을 보라 고. 내가 말하는 걸 반도 이해 못하잖아? 끌끌끌......... KUBERIN.......... 불은 춤추고 물은 노래하며 얼음은 웅크린다 7 "안녕하십니까!" 나는 눈을 반쯤 뜨고 이 숲속의 깊은 옹달샘에서 안녕하십니까따위를 외치 는 녀석의 면상을 바라보았다. 에닌은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머리칼을 말 리다가 너무 기가 막혀 입을 저억 벌리고 있었고 나는 모로 누운 자세로 안녕하십니까를 외치며 고개를 숙인 놈을 멀거니 바라보고 있었다. "아름다운 아가씨, 잘 생긴 분. 정말로 멋진 그림이요!" "너........." 그 이상한 소리를 지껄여대던 녀석이었다. 녀석은 이상한 말투로 이상한 차림새로 언제나 얼결에 나타나더니 이번에 도 얼결에 나타나 내 앞에서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누런 얼굴과 시커먼 눈과 머리칼을 한 이 넓적한 녀석은 내 앞에 털썩 앉더니 놀라 내 옆으로 달려온 에닌을 향해 손을 휘휘 저어 보였다. "아름다운 아가씨, 목욕을 계속하십시오." "꺄아! 봤어요?" "네, 물론 봤으오. 이 아름다운 치유의 샘에서 아름다운 아가씨의 아름다 운 목욕장면을 못 보았다면 대대로 가문의 수치가 될 것입니다! 저 그림자 의 훈, 오늘의 이 일을 잊지 않고 길이길이 기억하겠오!" 한 대 치려다가 관두고 나는 녀석을 빤히 보았다. 생긴 건 이래도 이 놈은 확실히 인간이었다. 그림자의 훈이라는 이 놈의 암살자 집단의 녀석은 놀랍게도 나의 목소리와 에닌의 행동을 다 듣고 보 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야 말로 이 놈이 있었다는 것을 몰랐다니 확실히 대단한 능력이다. "너 어디 숨어 있었어?" 내가 묻자 훈은 시익 웃으며 말한다. "땅 속에요." 에닌은 알몸을 보였다는 수치때문인지 안절부절 못하면서 내 등 뒤에 숨 어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 요염함과 청초함 때문에 나는 무척이나 즐 거웠지만 어쨌거나 이 인간같지도 않은 인간을 앞에 두고 무슨 짓을 할 수 없기에 할 수 없이 시선을 녀석에게 돌렸다. "너도 치유의 샘을 알고 있었어?" "그럼요. 우리의 나라에도 비슷한 전설이 있으오. 순결을 잃은 가여운 전 쟁의 처자들을 위해 신령님께서 <순결의 샘>을 만들어 주셨지요. 신령님 께서 만드신 그 순결의 샘에 한 번 나왔다 들어가면 처녀막이 생성된다고 하는 놀라운 효험이 있다하지요. 여기에도 역시 그런 게 있군요." ".............." 이 놈의 말을 듣고 에닌은 고개를 더욱 숙였다. "뭐 어쨌거나, 당신을 다시 만나 대단히 기쁘오." "너야 말로 왜 이런 데 있어?" 내가 묻자 녀석은 심각한 듯 턱을 잡고 말했다. "그 룬드바르황제를 발견했는데 녀석의 주변에 마법사들이 있어 접근하기 어렵게 되었오. 그래서 기회를 보던 중인데 갑자기 불덩이가 날고 폭발음 이 터져 귀가 아팠오. 그리하여 나는 그것을 알아보러 온 것이오." "호오. 마법사들이 어디 있더냐?" "황제 옆에." "황제는 어디 있는데?" "마법사 옆에." 나는 주저하지 않고 녀석의 면상을 후려갈겼다. 퍽 하고 녀석이 나자빠졌 지만 어디 하나 부러질 정도로 아프게 때리진 않았다. 녀석은 큰 대자로 널브러지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 "농담도 통하지 않는 거요? 당신이란 놈은 너무 딱딱하오!" "한 대 더 맞을래?" "알았오. 당신, 너무 빠르오. 나는 피할 새도 없었오. 역시 권법의 대가 답 소." 녀석은 진지하게 그렇게 말하더니 바닥에 벌떡 일어나 앉았다. 눈두덩이 한 쪽이 곧 시퍼렇게 멍이 들기 시작했지만 녀석은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 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기 시작했다. "황제는 서쪽에 있으오. 여기 왕국의 왕과 왕자를 심문하고 있는 듯 하오." 땀냄새가 났다. 이글거리는 쇠냄새와 불꽃에 시달리는 나무조각의 매캐한 냄새도 났다. 나는 희고 매끄러운 궁전의 바닥 위에 늘어진 병사들과 그 병사들과 너무 나 대조적인 넝마를 걸친 인간들을 내려다보았다. 내 등뒤에 매달린 에닌 은 숨을 죽이며 고동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둥글둥글한 원형의 무늬와 구 름을 새겨넣은 오렌지 빛의 기둥들에는 조금도 전투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 다. 흰 대리석만큼이나 깨끗한 백옥을 새겨 넣은 옅은 초록빛의 벽과 오렌 지 빛의 기둥들에는 자잘한 보석들이 우아하게 선을 그리며 박혀 있었다. 그 보석들은 힐끔힐끔 천공의 여신이 빛을 뿌릴 때마다 빛을 발하고 있었 다. 그 빛과 함께 병사들의 창끝과 갑주에서 번뜩이는 빛이 궁전안을 제법 화사하게 물들였다. 그 빛과 대조적으로 보이는 자들은, 원래는 누런 색이었을 옷자락을 때와 먼지로 시커멓게 물들인 채 어딘가 어색하게 서 있었다. 룬드바르의 병사 들이 빛을 뿜어대며 <나는 승리자. 나는 멋진 놈> 따위의 말들을 온몸으 로 퍼뜨리고 있는 동안 그들은 초라한 옷자락과 때국물 줄줄 흐르는 얼굴 로 꽤나 어색하게 서 있었다. 마치 이들은 이 곳에 있어선 안될 존재처럼 보였다. "말 하시오." 쩌렁하게 울리는 음성으로 기사차림의 턱수염이 외쳤다. 붉은 턱수염을 가 진 사내는 잘난 척 어깨를 흔들며 왕좌 아래서 무릎을 꿇은 채 조아리고 있는 일곱 명의 사내들에게 소리치는 중이었다. 그 일곱명의 사내들을 굳 이 설명하자면, 고왕국의 왕과 왕자들이라고나 할까. "모르오." 왕은 잘라 말했다. 역시 땋은 금발 머리를 곱게 귀 뒤로 넘기는 정말로, 엘프들도 하지 않는 머리 모양을 한 이 작자는 파리한 얼굴과 파리한 눈빛을 숨기지도 않은 채 멍하니 대꾸하고 있었다. 정말로 멍해 보인다. 허기야 멍하니까 나라를 말 아먹었겠지. 그 옆에 앉아 있던 왕자들도 여전히 멍하니 앉아 넋을 잃고 있었다. 그 중 낯익은 왕자가 한 녀석 있었다. 틀림없이 나에게 파이를 대 접받은 행운의 녀석이었다. 이름은...........기억이 안난다. "왕께서 모르면 누가 안단 말이오? 지금 신전의 신관들을 한 데 모으고 있으니 발견되는 것은 당연지사요. 게다가.........왕께선 왕자들을 잃고 싶으 신 건가?" 그 말이 끝나자 마자 옆에 서 있던 병사들 몇이 날카로운 창날을 멍하니 앉아 있는 왕자들의 목에 들이댔다. 그러자 그제서야 멍한 게 풀리는 지 왕자들이 낮은 비명들을 올리기 시작했다. "허억!" "이......." 왕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마치 누군가 지켜줄 사람 은 없느냐는 듯한 태도였지만 주변에는 당연하지만 아무도 없다. 그런 왕 을 싸늘한 증오로 바라보는 넝마들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 넝마 중 한 명 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주신 일루미나야 신전을 뒤져 보았지만 아무 것도 발견되지 않았소. 하 지만 역시 발견되지 않은 게 하나 더 있소." "그것은?" 흥미있다는 듯 턱수염의 사내가 묻자, 넝마의 녀석은 새파랗게 빛나는 증 오의 빛으로 살그머니 웃었다. "바로, 막내 공주지." 그 말에 왕은 흠칫 떨었다. 아아, 정말 연기력 부족해서 뭘 하지도 못하겠 구만. "막내 공주가 그럼 신의 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겠구료?" 턱수염사내는 흥미롭다는 듯이 빙긋 웃고는 갑자기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왕께서는 그 거처를 알고 계시겠지요?" "모른다!" 덜덜 떠는 그 모양을 보며 턱수염은 피식 웃었다. "그런 말씀을 하시면 안되지. 여기 왕자님들을 생각해서라도." "뭐라고 해도 난 몰라!" 비명처럼 그가 소리를 지르자 턱수염은 갑자기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왕을 대접해 드리고 싶지만 여기 있는 분들을 생각해서라도 그건 쉽지 않을 것 같소."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까부터 눈을 빛내고 있던 넝마 몇 명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들의 손에 들린 시퍼렇게 날이 선 칼은 아무래도 쉽게 물 러설 기세는 아니었다. "기억하지도 못하겠지만, 왕이여." 앞선 넝마가 피식 웃었다. 시퍼런 눈빛과 흉터 투성이의 얼굴, 게다가 뭔가의 낙인 같은게 찍힌 손등 과 뺨이 더더욱 험상궂은 모양새를 하고 있는 이 사내는, 나이를 잘 알 수 없는 몰골이었다. 그는 머리까지 둘러치고 있던 두건을 집어 던지며 왕의 앞으로 나와 피싯 웃었다. "나는 말이오, 당신과 당신의 왕자들에게 충성을 했던 노예 파사길이오. 기억 못하시겠죠?" 그 말에 왕은 흠칫했다. "누구냐?" "나는 당신의 구두를 닦았던 노예요. 당신의 구두를 품에 안고 달려가 당신 의 다리 받침이 되고 당신의 깔개가 되었던 노예요." "............." "그 깔개에게도 이름이 있소. 내 이름은 파사길이요. 당신의 황후가 기르 던 새들이 노래하지 않는다고 개들에게 내 누이를 밥으로 주었던 것은 기 억하시오? 내 누이는 16살이었소. 그 애를 개밥으로 던져 주었던 것을 기 억하시오? 화덕일을 하다 손을 덴 내 아비가 흉하다고 팔뚝을 잘라 버린 것은 기억하시오? 내 뺨에 당신이 채찍질 한 것은 기억하시오?" 왕은 멍하니 입을 버리고 있었다. "내 아내는 당신의 후궁이 입던 드레스에 주름이 잡혔다고 채찍질을 당한 나머지 한쪽 가슴을 잃었고, 내 아기는 유산되었소. 그리고 나 역시 당신이 기분 나쁘다고 사냥길에서 늑대소굴에 던져 넣고 왔었지, 그러나 나는 살 았소." 그는 웅크리고 앉은 왕의 앞으로 다가가 눈을 맞추었다. 왕은 시선을 피하 기 위해 고개를 돌렸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잘 들으시오. 나는 파사길이오. 이것이 당신이 나를 매질한 상처이고, 이 것이 당신의 마부가 심심풀이로 찍은 말의 낙인이며, 이것이 당신이 나를 늑대소굴에 버릴 때 입었던 늑대에게 물린 자국이오. 나는 내장을 흘리며 밤새 길을 기어와 신전에 몸을 의탁할 수 있었소." 그의 눈은 퍼렇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어둠의 사제, 암흑의 대신 구스차야의 신관이오."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턱수염을 올려다 보았다. 턱수염은 무표정한 채 그를 지켜보고 있었지만 그 얼굴에도 희미 한 분노가 스며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파사길이란 신관은 조용히 턱수염에 게 말했다. "이제 왕족들을 우리들에게 건네주시오." "황제폐하의 결정이 있어야 하오." "이들은 신의 귀가 어디 있는 지 모를 거요." "그건 아무도 모르지. 더 심문해봐야 할 거요." "심문은 우리가 하겠소." 싸늘한 웃음이 파사길의 입가에서 흘렀다. "신의 귀를 찾아내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을 거요. 엘루미나야의 신전은 이미 파괴되었소. 그 중 죽어넘어진 고양이들을 확인할 수 있을 테지. 그리 고 그 자리에 구스차야의 신전이 세워질 거요." "신전을 세우는 것은 당연하오. 하지만 나는 황제폐하께 명을 받았소. 신 의 귀를 찾아 낼 것. 그것이오." 턱수염이 완강하게 말하자 넝마의 신관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뭐, 좋겠지요. 하지만 당신들은 찾아 내지 못할 거요. 신의 귀는 신물이 오. 단지 왕을 족친다고 알아 낼 수는 없을 걸. 그리고 왕도 그게 어디 있 는 지 모를 거요." "어째서?" "왕은 바보니까. 왕은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으니까." 그 말이 끝나자 마자 왕자들 중 한명이 벌떡 일어나며 고함을 질렀다. "이 비천한 것이! 감히 누굴 모욕하는 것이냐?" 그 소리와 함께 갑자기 넝마 서너명이 왕자에게 달려들었다. 그들은 거친 손을 들어 왕자의 머리칼을 잡아 뜯고 귀와 입을 잡아 뜯었다. 그 무시무 시한 기세에 지키고 섰던 병사들마저 아연해졌다. 마치 짐승처럼 달려든 그들은 왕자의 몸을 바닥에 짓밟고 머리칼을 뜯어내 피를 사방에 뿌렸다. 비명을 질러대는 왕자 때문에 병사들은 다급히 달려들어 그들을 떼내려 뒤 늦게 칼을 들이댔다. "그만." 파사길이 말하자 넝마들 몇이 동작을 멈췄다. 그러나 그들의 눈은 여전히 광기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왕자의 피로 번들거리는 손을 핥으며 그들은 정신없이 키득거렸다. 왕자는 피투성이가 된채 바닥에 늘어져 있었는데 주 변에 있던 왕자들 누구하나 그를 부축하지 못했다. 너무나 겁에 질렸기 때 문인 듯했다. "끔찍해요." 에닌이 뒤에서 속삭였다. 나는 그들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정말로 대조적이지 않은가. 미트라는 시정 잡배들에게도 인정을 받았다. 그 들은 그녀를 우리 공주님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지금 저들은 산채로 잡아 찢길 정도로 증오를 받고 있었다. 이 고왕국이란 허울만 좋은 왕국이 왜 이리도 빨리 무너졌는지 너무나 확연해서 정이 다 떨어진다. "이거, 너무 난폭하시군." 턱수염이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이래선 곤란해요." "우리들은 흥분해 있어서.......그리고 꽤 굶주려 있소." 파사길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흉터로 얼룩진 턱에는 너저분한 수염이 매달려 있었지만 눈빛만은 반듯하게 생긴 턱수염을 압도하고 있었다. "필요한 것은 전부 제공하라고 황제폐하께서 말씀하셨소." "알고 있소, 정말 관대하신 분이야." 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두 손을 벌려 보였다. "이 왕국을 통째로 그분에게 바친 것을 후회하지는 않지만,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을 어서 지급해 달라고 말씀드리고 싶소." "이미 왕궁의 창고는 활짝 열려 그대들에게 모든 식량과 재화를 분배하고 있소. 우리들 제국군은 필요한 만큼의 재화 이외엔 손을 대지 않소." "그건 나도 알고 있소. 정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깨끗한 군대더군요." 킬킬거리고 파사길이 웃었다. 정말 미친 놈이다. "이제 길가에서 굶주려 죽어가는 사람들은 많이 줄었소, 하지만 우리들은 아직 목이 마르오." "무슨 뜻이오?" "알면서 모른 척하지 마시오, 왕과 왕족들의 피를 마시고 싶다는 의미라 는 것을 당신도 잘 알고 있을텐데. 그대들 제국군에게 잡힌 귀족들이 아직 천여명이나 있다고 들었는데 그들도 내어 주시오." ".................." "그들과 왕족들의 피를 갈아 마시면 우리들의 목은 더 이상 마르지 않을 거외다." "어린 아이와 여자들이오." "그 어린아이와 여자들이 우리들을 죽였소. 알겠소이까? 기사양반, 깨끗한 기사 양반." 파사길은 빙긋이 웃고는 고개를 숙여 보였다. "황제폐하를 만나게 해주시구려. 그러면 내가 직접 부탁드리겠소." "황제께선 더 이상의 피를 원치 않으시오." "우리가 원하오." 그는 뚫어지도록 턱수염을 바라보더니 손짓했다. 그러자 갑자기 넝마들이 우르르 모여들더니 병사들을 헤치고 달려와 왕자 들을 움켜쥐었다. "이게 무슨 짓이냐!" "이 더러운 것들이!" 왕만 빼고 왕자들을 잡아 챈 넝마들은 주저없이 그들을 밟고 뭉개면서 질 질 끌고 자신들의 무리쪽으로 데리고 갔다. 비명소리가 터져나오자 병사들 이 손을 쓰려 했지만 넝마들이 맨손인데다가 병사들에게 대어들지도 않자 어쩔 줄을 몰라 멍청히 서 있기만 했다. "으아아악!"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부왕!" 비명을 질러대는 왕자들을 뒤로 하고 왕은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그는 그 저 부들부들 떨고만 있었다. 왕의 모습을 보면서 파사길이 말했다. "왕자들만 데려가겠소. 왕에 대해서는 황제폐하께 내가 직접 말씀드리지." "이건........." 턱수염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막지는 않았다. 병사들도 별로 막고 싶은 기 분은 아닌 지 모두들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들에 비해 넝마들은 살기로 흥분해 있는 기색이었다. 비명소리가 점차 잦아들자 파사길은 갑자기 턱수 염에게 물었다. "황제폐하께선? 안내해 주시오." "기다리시오." "나는 오랫동안 기다렸소, 인내심이 많은 편이지. 하나, 더 이상 기다릴 마음은 없소." 그 여유 있는 말은 턱수염을 압도했다. 턱수염은 낮게 한숨을 쉬며 병사들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병사들은 왕에게 달려와 그를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왕을 끌고 병 사들이 어디론가로 향하는 동안 홀안은 간간히 들리는 왕자들의 비명소리 이외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했다. "왕자들을 안 구해주실 건가요?" "뭐하러?" "그래도........." "엘프들의 피를 빨았던 놈들인데. 먼 옛날 엘프의 피를 이어받았다고 하는 것 하나로 개기는 놈들이야. 자기들이 지은 죄를 받는 것뿐인걸." "하지만...........너무 가엾어요." "난 저기서 놈들을 밟고 있는 넝마들이 더 마음에 드는 걸." "........하지만." "힘없다고 짓밟던 놈들을 불쌍히 여길 필요는 없어. 힘이 없어 밟힌 놈들 을 불쌍히 여길 필요가 없듯이." "쿠베린은 아무도 불쌍하지 않아요?" "세상에 불쌍한 놈들이란 없어. 저 파사길이란 놈은 훌륭히 일어섰잖아?" "불쌍한 사람들이란 아무도 없다구요?" "없어." 세상에는 불쌍히 여기는 사람들만 있을 뿐이야. 그건 그렇고 지금 여기서 그딴 소리를 할 처지도 아니다. 황제 근처에 분 명히 마법사 놈들이 있을 텐데. 그리고 그 근처에 내 애들이 있을 거다. 나를 안내한 그림자의 훈은 내 맞은 편 난간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로 주변 을 살피고 있었다. 황제를 기다리는 것이다. 이 놈은 황제의 바로 앞까지 몇 번이나 접근했다가 시도도 변변히 못하고 물러섰다는데 그 이유가 바로 마법사때문이란다. "어떤 마법사였지?" 내가 묻자 녀석은 심각한 어조로 대꾸했다. "빨강머리의 엄청난 글래머 미인과, 시퍼런 얼굴을 한 쭉쟁이 같은 마법 사였으오." "두 명?" "그렇소. 두 명의 마법사가 버티고 있고 그 주변으로 뭔가 이상하게 생긴 사내 세 분이 앉아 있는데 그 세 분의 사내가 보통 놈이 아니오." "어떤 놈인데?" "분명히 단련한 무사임은 확실한 거 같은데.........뭐랄까, 공기를 갈가리 찢 을 거 같은 살벌한 분들이었오. 체구도 평범하고, 뭐라 따악 꼬집어 말할 수 없는 이상한 냄새가 나는............." 사인족이다. "세 놈?" "그렇소. 세 분이었오." 다시 말해 황제의 바로 측근에 앉은 게 두 명의 마법사와 세 명의 사인족 이라 그거로구만. 그렇다면 이 그림자의 훈이란 놈도 감히 건드리기 어려 운 분위기일 수 밖에. 그건 그렇고 사인족이라. 으흐흐흐............. 살아 있는 놈들이 있다는 말이지? 게다가 살아 있는 놈들이라면 아마도 그거 일거야. 그 주정뱅이 사인족의 왕을 배신했다고 하는 그의 동생인 데뭐라는 놈. 갑자기 슬금슬금 몸뚱아 리 여기저기가 간지럽기 시작했다. 뭔가 따끈따끈한 것이 치밀어 오르기 시작하기에 나는 히죽히죽 웃기 시작했다. 아아, 그래, 그거라고. 그놈들이 있다고. 오오 기뻐라. 내가 혼자서 히죽거리고 있을 때 앞에서 대롱대롱 흔들리고 있던 훈이 나 에게 손짓을 했다. 그래, 나도 눈 있어서 알아. 바로 친애하는 황제께서 등장하신 것을. KUBERIN.......... 불은 춤추고 물은 노래하며 얼음은 웅크린다 8 넝마의 우두머리 파사길이 멋지게 등장하는 황제를 향해 고개를 숙여보였 다. 그 외의 다른 녀석들도 일제히 목례를 하며 황제에게 인사를 했다. 룬 드바르녀석은 여전히 애송이같은 얼굴을 한 채로 걸어나오더니 고개를 숙 인 파사길을 향해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이야기를 들었소." "황제폐하." "왕자들을 놔두시오. 어차피 그들은 아무 것도 못하오." "그러나 우리들은 목말라 있습니다. 황제폐하." 번쩍번쩍 빛나는 파사길의 눈을 빤히 보며 룬드바르는 재빨리 말했다. "피로 목을 축이면 다음엔 무엇으로 목을 축일 거요? 죽음은 죽음을 부르 고 결국은 또 다른 죽음을 부를 거요. 왕과 왕자들은 평생을 갇혀 말라죽 을 거요. 그런 허수아비같은 자들을 위해 당신은 당신들의 나라를 피로 물 들여 쓸데없는 전통을 세울 참이오?" "황제께선 모르십니다." "이야기는 충분히 들었소. 당신의 몸도, 당신의 원한도 다른 자들의 원한 도! 하지만 그 원한이란 것은 원래 풀릴 리가 없소!" 갑자기 룬드바르의 목청이 커졌다. "나 역시 어머니와 형과 누이를 잃었소! 물론 나는 복수했지! 그리고 후 회하고 있소. 만약에 그들을 죽이는 대신 평생을 말라 죽이며 그들이 얼마 나 실수를 했는가를 뼈저리게 느끼도록 해줄 수 있었는데 말이오!" 그는 갑자기 열변을 토하며 자신의 앞에 늘어서 있는 넝마들에게 말했다. "나는 내 가족을 잃었소. 그래서 나도 복수라는 게 뭔지, 원한이라는 게 뭔지 잘 알고 있단 말이오. 하지만 당신들은 무차별적인 복수요. 그들에게 당신들이 복수한다고 해도 당신들의 생활은 나아지지 않아!" 그는 넝마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며 피로 물든 바닥으로 한 걸음 내딛었다. 그의 호위기사들이 그를 조금 제지하려했지만 룬드바르는 그것을 물리치고 바로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넝마 파시길의 어깨를 덥석 잡 았다. 더러운 냄새가 코를 찌를 것이 분명한데도 룬드바르는 그의 어깨를 잡고 안은 채 넝마들 사이로 끼어들었다. "지금부터 당신들이 할 일이 있단 말이오! 당신들은 그동안 고통스러웠던 만큼 잘 살아야 하오! 그것을 위해선 당신들의 밭을 일구고, 당신들의 물건 을 만들어야 하는 거요! 나는 전에 약속한 대로 절대적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을 거요. 이 고왕국에서 벌어지는 일을 나는 당신들을 통해 모두 들었소! 그것은 공정하지 않소! 대륙전체를 통털어 여기처럼 불공평하고 여기처럼 고약한 곳은 없었소. 이제부터 당신들은 제국법에 의해 살아가는 거요! 절 대 고왕국의 귀족들의 손아귀에서 허덕이며 살아갈 일은 없소! 제국법은 대륙전체를 통괄하며 어느 누구도 함부로 사람들을 착취하거나 사람들을 죽이는, 노예로 만드는 일은 용납하지 않소! 이제 대륙에는 노예란 존재하 지 않을 거요!" 그가 그렇게 외치자 넝마들 사이에서 함성이 터져나왔다. 병사들과 넝마들 모두들 감격에 겨운 소리를 내지르고 만세를 부르는 동안 룬드바르는 파사길의 어깨를 굳게 잡으며 말했다. "당신은 이제 이 사람들을 위해 살아가는 거요! 쓸데 없는 피의 욕망을 다 버리고, 행복한 삶을 가꾸기 위해 노력하는 거요. 당신들의 신 구스차야 대신도 이제 어둠속에서 나와, 평민들과 노예들을 위한 새로운 세상을 열 도록 도와주실거외다!" 파사길은 자신의 어깨를 굳게 잡고 시선을 마주하는 젊은 황제를 바라보았 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황제의 손등에 키스했다. 그가 무릎을 꿇으려 하는 순간 황제는 그를 일으키며 말했다. "무릎을 꿇지 마시오! 당신은 이제 노예가 아니오. 아니, 당신만이 아니라 이제 고왕국에 노예는 없소!" 이글거리는 열기와 함성 속에서 사람들은 황제폐하 만세를 외쳤다. 병사들 과 고왕국의 천민들이 질러대는 소음은 궁 전체를 떨어 울릴 정도였다. 파 사길은 고개를 숙인 채 천천히 몸을 폈다. 그의 몸은 약간 구부정했지만 원래 룬드바르보다는 큰 키였던 듯 했다. "황제폐하......" "이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거요, 여기는 제국령이오. 삼림과 고요의 나라였던 이 곳은 이제 제국령으로 다시 태어나는 거요." 룬드바르의 눈은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다. 파사길은 그의 시선을 차마 받 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숙였지만 눈빛은 여전히 냉담했다. 아마도 보통 사람같았으면 감격에 겨워 눈물이라도 흘렸겠지만 이 놈도 보통 놈은 아닌 지 여전히 냉담하고 냉소적인 얼굴을 유지하고 있었다. 허긴, 모르지. 겉으 로야 이렇지만 이 놈도 감격하고 있는 지도. 어쨌거나 이 룬드바르의 열렬한 연설에 혹한 자들이 내뿜는 열기는 천정을 떨어 울리고 바닥을 시끄럽게 두들겨 대고 있었다. 나는 에닌이 숨을 죽이 며 바라보는 것을 보고 물었다. "왜?" "........노예를 없앤다고 하는대요. 엘프사냥을 금지하겠다고......" "응, 그렇다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에닌이 속삭였다. "저 황제는 훌륭한 사람같아요. 쿠베린." "그럴지도 모르지." "그런데도.....저 사람을 죽일건가요?" "저 놈이 훌륭하든 악당이든 저 놈이 한 짓은 변하지 않는걸." "하지만 대체.........저 사람이 한 것은 없잖아요? 쿠베린이 화를 내고 있는 건 역시 마법사들이잖아요? 그럼 마법사만 해치우면 되는 거잖아요?" 그 말에 나는 에닌을 자세히 뜯어 보았다. "저 놈이 마음에 들어?" ".........저 사람이 없어지면 어떻게 될까요? 저 사람이 없어지면 이제 이 대륙전체는 다시 혼란 속에 파묻혀 버릴 것 아닌가요?" 에닌은 결사적으로 말했다. "델리암도 망했고, 크고 작은 나라들이 다 망했어요. 인간의 나라들은 다 저 사람에게 멸망당했어요. 하지만 그들은 다 잘 살고 있어요. 그렇다면 대 체 뭐하러 저 사람을 죽여 대륙을 혼란으로 몰아넣는 거죠?" 갑자기 말이 많아지네. "그렇군." 내가 간단히 대꾸하자 에닌은 밝은 표정으로 급히 말했다. "마법사들과 싸우면 되는 거에요. 마법사만 해치우면 저 사람에 대해서는 굳이.........." "내가 마법사들을 해치우면 저 작자는 망할걸." "아니오! 마법사가 전부 죽는다고 해도 저 사람은 괜찮을 거에요!" "어째서?" "다른 사람들이 저 사람을 믿고 있으니까요!" 나는 빤히 에닌을 보았다. 에닌은 당황한 듯 시선을 피하다 말고 아직도 환호하고 있는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 넝마들이 가진 그 광기어린 표정은 이제 황홀경에 가까운 표정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룬드바르 황제는......저 사람들의 희망이 되었어요." "저 놈이 없다고 희망이 없어지는 건 아냐." "그, 그럴지도 몰라요. 하지만 이제 그는 희망이 되었어요." 에닌은 손을 꽉 쥐며 말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저 사람은 자신이 만든 법을 준수하도록 힘을 기 울일 거에요. 그럼 세상이 변할 수도 있다구요!" 엘프답지 않은 발언을 들으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에닌." "나, 노예로 팔려나가면서 온갖 짓을 다 당했어요, 쿠베린이 구해 줄 때까 지 나는 울고만 있었을 뿐이지만.........엘프만이 아니에요. 노예가 되는 것은 인간들도 마찬가지에요. 그리고 비참한 것은 그들도 마찬가지에요............" 가빈을 떠올리면서 나는 에닌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저 사람을 살려주세요. 세상을 위해서. 앞으로 노예가 될 인간들과 엘프 들을 위해서." 에닌이 울면서 속삭였다. "알았어. 알았어. 저 놈은 안 죽일게. 하지만, 그건 세상을 위해서가 아니 야. 나는 저 놈 하나가 세상을 바꿀 거란 생각따윈 안해." 에닌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나는 중얼거렸다. 그래. 세상이 한 사람을 위 해 돌아가는 게 아니듯 세상의 모든 나쁜 짓거리들이 저 놈 하나로 인해 모조리 종결될 거라는 단순한 생각따위는 절대 할 수 없지. 노예가 없으면 노예 비슷한 것이라도 만들어내는 게 인간이다. 소유에 목 을 매니까 노예따위를 만드는 것이지. 어떤 종족도 다른 생명체를 자기 소 유로 만들어 부리지는 않는다. 인간만이 다른 생명을 자기것이라 우긴다. 그런데 단지 법 하나로 그것이 바뀐다고? 아마도 노예라는 이름만이 바뀌 는 것이겠지. 노예가 아니면 하인이나 하녀, 뭐 그런 것으로. "귀여운 에닌이 부탁하는 거니까 들어주는 것 뿐야." 내가 그렇게 말하자 에닌은 울던 얼굴로 빨갛게 되어 웃었다. "쿠베린님.......당신은 진짜 바람둥이에요." "난 봉사정신이 투철할 뿐이지. 사랑스런 아가씨를 위해 이 한 몸 바치는 것뿐야." 룬드바르만 안죽인다고 하는 것뿐이지. 주변에는 죽일 놈이 넘쳤다. 약간은 안심한 에닌을 내버려 두고 나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흥분에 겨운 놈들을 내버려두고 룬드바르는 몇몇을 이끌고 홀을 빠져나가 고 있었다. 홀은 길고도 높은 오렌지빛 복도로 이어져 사발처럼 생긴 도움 을 지나 엎어 놓은 가마솥같이 생긴 대전으로 이어진다. 하여간에 이 놈의 고왕국 궁전은 크기도 하다. 그의 바로 옆에 선 것은 전에 힐끗 보았던 갈색머리의 기사, 그 녀석의 좌우로 두 명의 기사, 그리고 누가 봐도 확연히 다른 피를 가진 세 명의 녀석들. 다른 자들과 달리 가죽의 갑주에, 철검을 찬 세 녀석은 주변의 기 사들과 달리 정중하기는커녕 건방지고 아니꼬운 표정을 한 채 걷고 있었 다. 셋 다 노란 빛이 도는 머리칼과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황제의 옆에 가까이 서 있는 것은 드문 미녀였다. 붉은 빛이 도 는 금발을 가진 그녀는 전신을 새빨간 빌로드의 호사스런 로브로 두르고 있었는데 멀리서 봐도 그 눈빛이 황금빛이라는 것은 확실히 눈에 띄었다. 그녀의 바로 뒤에 종자처럼 서 있는 것은 내가 얼마 전 보았던 파리한 얼 굴의 마법사였다. 공간마법을 펼쳤던 종자 둘을 거느렸던 마법사. "신의 귀를 찾으러 간 마베릭은?" 룬드바르가 그녀에게 물었다. "곧 돌아올 겁니다. 폐하. 제법 귀찮은 일이 생겨버려서." "그 쿠베린은? 조인족의 여왕은 찾았나?" "네, 지금 마베릭이 처리 중입니다." "정말 무섭도록 강한 자들이었는데......." 생각하면 소름끼친다는 듯 룬드바르가 중얼거리자 미녀는 요요하게 웃었 다. "걱정하실 거 없습니다. 그래봐야, 묘인족. 날뛰어 봐야 손톱과 발톱밖에 못 쓰는 것들입니다." 그 말에 룬드바르는 약간 기가 막힌 듯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더 이상 말하 지는 않았다. "카산드라. 그렇게 자신이 있다면 대륙 전체에서 일어나는 살육을 막아보는 게 어때? 묘인족을 건드린 덕분에 몇이나 죽었다고 생각하나?" 룬드바르 바로 옆에서 걷고 있던 갈색머리의 키 큰 기사가 날카롭게 말하 자 붉은 머리의 미녀는 샐쭉한 듯 그를 쏘아보았다. "수 만이나 죽었다. 우리들은 하마터면 병력을 후방으로 되돌려야 할 뻔 했다고. 대체 왜 묘인족들을 건드린 건가? 왕의 딸을 납치해 왔다면서?" "지나간 일을 굳이 말할 필요가 있을까요? 게다가 오륙 만 명 정도야 대 단한 손실도 아닐테고. 마법에 관한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당신은 당 신 일이나 하면 되요. 마르케스." "지금 오륙 만 명이 적은 숫자라고 말하는 건가? 묘인족의 손에 죽은 병 사가 얼마나 많은 지 알고나 있는가? 그대의 마법병단의 마법사들이 몇이 나 죽었는지도 알아?" "알아요. 하지만 묘인족을 건드리고 그 정도라면 가벼운 편이죠." 그녀는 가볍게 말했고 그것이 사내의 기분을 거스른 듯 그는 그녀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조인족의 둥지에서 얻은 마력석이 없었다면 이 정도 대규모 공간마법은 불가능했어요. 그 정도 희생은 감수해야죠." "나는 묘인족을 대체 왜 건드렸냐고 묻고 있어! 그동안 우리들은 묘인족 이라는 게 있는지도 몰랐었다고!" "지상최강의 종족을 몰랐다는 게 자랑이에요? 그리고 어차피 대륙을 통일 하려면 그들과 부딪칠 수 밖에 없는 거에요. 내가 다 알아서 해요." "묘인족의 딸을 왜 잡아 왔지?" "마르케스. 당신답지 않게 집요하군요." 그녀가 쏘아보았지만 갈색머리의 사내는 회색눈을 번뜩이며 차갑게 대꾸했 다. "너의 방자한 짓거리를 말할 사람이 몇 없기 때문이지." "어마, 방자한 짓거리라니. 나의 일을 그렇게 말하는 것은 너무 하지 않은 가요?" "묘인족을 잡아다 무슨 실험이라도 하는 거야? 대체 왜 그들을......." "일일이 참견하지 말아요. 다 나중에 도움이 되는 일이니까. 당신은 군사 적인 부분에만 신경을......." 그녀가 말하는 동안 갑자기 룬드바르가 웃음을 터뜨렸다. "부부싸움은 적당히 좀 해." "어마, 폐하." 여마법사는 눈을 요염하게 흘기며 룬드바르를 쏘아보았다. "이렇게 눈이 많은 데서 부부싸움을 하다니 어지간들 하군. 둘 다 그만 해둬." "하지만 폐하. 카산드라는 지금 쓸데없는 분란을......" "그만해. 마르케스. 어차피 일어난 일을 가지고 왈가왈부할 시간은 없어. 카산드라의 말대로 그들이 그렇게 오만하고 냉혹한 종족이라면 어차피 부 딪칠 수 밖에 없어. 저번에 보았잖아? 엘프들과 달리 그들의 왕은 내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어. 하긴 델리암의 엘란트라 공주를 납치해 간 장본 인이니 나에게 적대하는 건 당연할 지도 몰라." 녀석은 얼토당토않은 상상을 하며 진지하게 혼자 납득했다. 별 같잖치도 않은 소리를 하네. 그들이 긴 복도를 걷는 동안 나와 에닌은 훈과 함께 난간에서 난간으로 이동했다. 긴 홀에 어울리는 긴 복도는 천장이 엄청나게 높아서 떨어지면 그대로 머리가 깨질 정도의 높이였기에 내가 움직이는데도 녀석들은 눈치 채지 못했다. 그러나 사인족들은 눈치챘다. 갑자기 사인족 녀석들 중 하나가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기이한 소리를 내지르면서 놈이 도약했다. "우어어어어!" 에닌이 놀라 비명을 삼키는 동안 나는 나에게 칼을 들고 덤비는 그 방자한 녀석의 면상을 그대로 손톱으로 그어주었다. 녀석은 내가 그렇게 달려들 거라고 생각지 못했는지 피하지도 못하고 그대로 떨어졌다. "적이다!" 기사들이 소리를 질러대는 그 순간이었다. 모두다 천정으로 시선을 돌리는 순간, 그림자의 훈이 말 그대로 그림자처 럼 그들에게 스며들더니 룬드바르의 뒤에 서 있던 기사 두명을 단숨에 제 치고 룬드바르를 향해 검을 내질렀다. "으아아아악!" 비명소리와 함께 사인족 놈이 바닥으로 떨어져 뒹굴고, 다른 놈들이 나를 향해 치솟아 올랐다. 그리고 인간의 기사들은 피를 뿜으며 훈의 칼날에 나 뒹굴었다. "폐하!" 갑자기 시간이 정지했다. 훈의 칼은 룬드바르의 정면을 그대로 찔렀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그 칼날 이 피로 물드는 순간 비명소리가 사방을 떨어 울렸다. "아아아아아악!" 룬드바르가 아니었다. 그리고 룬드바르의 비명도 아니었다. 룬드바르는 그 대로 눈을 부릅뜬 채 서 있었고 그의 앞을 막아선 자가 훈의 칼에 대신 찔 렸다. 그리고 비명을 지른 것은 그의 옆에 서 있던 붉은 머리의 마법사였 다. 룬드바르의 앞을 막아선 것은 갈색머리의 사내였다. 그는 훈의 칼을 몸으 로 대신 막아 내고 동시에 칼을 뽑아 훈을 향해 내려치려 하고 있었다. 하 지만, 훈의 칼은 너무 빨랐다. 단숨에 마르케스의 복부에 꽂힌 칼을 빼낸 훈은 주저하지 않고 마르케스의 팔을 베어버렸다. 피가 분수처럼 치솟고 룬드바르의 얼굴은 시퍼렇게 굳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일그러진 채로 훈의 얼굴을 바라보았으며 훈은 마치 어딘가에서 뛰쳐나온 악귀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갈색 머리 기사의 시체를 발로 걷어차며 룬드바르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마르케스!" 비통한 비명소리와 함께 훈의 등으로 갑작스런 화염이 펼쳐지면서 그를 내 동댕이쳤다. 보통이라면 그 자리에서 불탔겠지만 훈은 놀라운 속도로 도약 하더니 그 화염구에서 벗어났다. 그리고는 맹렬하게, 말 그대로 맹렬한 속 도로 복도의 모서리를 밟고 그대로 도약해 화려한 색 유리창을 깨고 도주 했다. "죽어! 죽어!" 얼굴이 시퍼렇게 질린 마법사가 그를 향해 마법을 계속 시전했지만 박살난 유리창과 두터운 벽에 가려 훈의 모습은 말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그 자리 에 남은 것은 피투성이가 된 기사들의 시체와 넋을 잃은 룬드바르였다. 비 명소리와 더불어 병사들이 물밀 듯이 달려들어와 룬드바르의 몸을 에워싸 기 시작했지만 룬드바르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폐하를 보호하라! 폐하! 폐하!" 그는 넋을 잃은 채로 멍하니 서서 쓰러진 갈색머리 기사의 시체를 바라보 고 있었다. 그는 머리를 쥐어뜯듯이 두 손을 치켜올리더니 갑작스레 비명 과도 같은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마르케스! 마르케스! 마르케스! 으아아아아아아악!" 그는 병사들의 몸을 밀치고 고함을 질렀다. "마르케스! 마르케스를 살려내라! 카산드라! 그를 살려 내! 카산드라! 카산 드라!" 그가 고함을 지르는 동안 붉은 머리의 미녀는 멍하니 서서 피투성이로 쓰 러진 갈색머리 기사의 몸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이 목석같이 서 있던 그녀는 한 걸음 다가와 눈을 부릅뜨고 죽어 있는 그 의 시체를 끌어안고 속삭이기 시작했다. "마르케스? 일어나요. 일어나. 이 정도 상처에는 누구도 죽지 않아요." 피가 솟아나 그녀의 로브를 적시고 바닥으로 흘러내렸지만 그녀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 "이봐요, 나의 주인님? 이런 상처 같은 것은 대단한 게 아니에요. 이런 거 금방 털고 일어날 수 있어요." 그녀가 웃으면서 속삭이는 동안 뒤에 서 있던 파란 얼굴의 마법사가 떨리 는 음성으로 속삭였다. "카, 카산드라님........그 분은 인간입니다. 그 분은... 돌아가셨습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는 고개를 홱 돌려 마법사를 쏘아보았다. "뭐라구?" "카산드라님........." 말을 잇지 못하던 그는 파란 얼굴로 덜덜 떨면서 애써 말했다. "그 분은 인간입니다. 카산드라님. 겨, 결코.......되살아 나지는........" "죽어." 카산드라는 냉담하게 말했다. 그 순간 파란 얼굴의 마법사는 그 자리에서 말 그대로 새파란 불꽃에 휩 싸이더니 찢어질 듯한 비명소리를 내며 그 자리에서 불타기 시작했다. 살 아 있는 불꽃으로 화한 그가 비명을 올리며 몸부림쳤지만 불은 꺼지지 않 았다. 그 무시무시한 비명 때문에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그대로 얼어붙었 다. 룬드바르를 둘러싼 기사들은 두려움으로 움직일 수 없었으며 나를 공 격하려던 사인족들 두 명도 입을 벌린 채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불길은 꺼지지도 않고, 다른 곳에 옮겨 붙지도 않았다. 마치 그 마법사를 위한 불인양 그 자리에 악착같이 달라붙어 그의 몸을 산채로 태우고 있었 다. 살이 타는 냄새와 그 찢어질 듯한 고통의 비명소리가 계속해서 울려퍼 졌다. 산채로 태워지는 고통에 마법사는 차라리 죽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비명을 울려대며 복도의 빈 벽에 머리를 쳐박았지만 그렇게 쉽게 죽 지는 않는 듯 계속해서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타올랐다. 비명과 살과 뼈가 타는 소리, 냄새가 이글거리는 열기와 함께 사람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마침내, 그의 다리가 재로 화해 떨어져 나가고, 팔뚝과 이글거리는 내장들 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자 그제서야 비명이 멈췄다. 그 마법사는 그대로 풀썩 바닥에 고꾸라졌다. 불길은 그가 죽어도 계속해서 타오르더니 마침내 그가 재가 되어 완전히 소진되서야 꺼졌다. 주변의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그들은 오로지 겁에 질린 채 굳어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에닌은 내 팔을 죽어라고 꽉 쥔 채 덜덜 떨기 시작했다. 카산드라는 여전히 요요한 미소를 지은 채 팔 하나가 떨어져나간 시체를 부둥켜 안고 속삭이고 있었다. "마르케스? 일어나요." 그 모습을 룬드바르는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입을 바보처럼 벌 린 채 카산드라라는 이 여마법사가 보여주는 장면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 보았다. "......마베릭을. 마베릭을 불러." 룬드바르는 떨어지는 눈물을 닦아내면서 중얼거리듯 말했다. "마베릭을 불러라. 카산드라가.............." 그는 고개를 숙이며 자신을 둘러싼 기사들에게 명령했다. "마베릭을 불러! 카산드라가 미쳐버렸다!" 나는 그가 그렇게 외치는 것을 들으면서 에닌의 어깨를 감싸 안고 몸을 밖 으로 던졌다. 내가 움직여도 나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자들은 아무도 없었 다. 카산드라라고 하는 그 마법사가 자신의 부하를 단 한 마디로 죽여버린 그 수법이 너무나 잔악해서 아무도 시선을 돌리지 못했던 것이다. 에닌은 당장이라도 기절할 것 같은 시퍼런 얼굴로 덜덜 떨기만 했고 나는 그 애의 몸을 안은 채 색유리로 장식된 복도의 창을 깨고 밖으로 튀어 나왔다. 훈의 종적은 찾을 수 없었다. 정말 대단한 놈이었다. 그 사이를 뚫고 들어가 황제를 암살하려 하다니, 보 통의 담력으로선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저러나 저런 몰골의 마 법사와 룬드바르를 건드릴 기분은 싸악 가셔버리고 말았다. ".........끔찍해요." 에닌이 내 등에 어깨를 묻은 채 중얼거렸다. 등이 축축한 것을 보니 그녀 가 울고 있는 것이 확실했지만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를 등에 업은 채 커다란 나무 가지 위에 올라 앉았을 뿐이었다. "믿을 수 없어......." 그 놈은 룬드바르의 친구였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 여마법사의 남편이었던 모양이다. 그가 죽은 순간 뭐랄까 나는 눈에 보이지 않은 커다란 기둥이 무너지는 것 같은 소리를 들었다. 사람이 몇이나 죽어도 눈 하나 깜짝않고 잘도 지껄이던 룬드바르녀석이 시퍼렇게 질린 얼굴로 울부짖었고, 말 한마 디로 자기 부하를 그대로 태워죽일 그 여마법사가 거의 실성한 것 같았다. 뭐라고 하면 좋을까. 세상에는 제어하는 물건, 무언가를 지탱해 주는 것이 반드시 있기 마련이 다. 나는 갑자기 룬드바르의 그것을 지탱하던 것이 죽어버린 갈색머리의 기사가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되어 착잡해졌다. 뭔가 일이 지저분해진 거 같다. 그리고 뭔가 끔찍한 일이 시작될 것 같은 느낌이 등줄기로 흘러내렸다. [쿠베린 막간극] 우정에 관하여 KUBERIN.......... ............길가메시는 말했다. "어머니, 꿈을 꾸었습니다. 튼튼한 우룩의 성벽 위에 도끼 한 자루가 놓여 있었 습니다. 그 모양이 하도 신기해 사람들이 모여들었죠. 그것을 보고 저는 기쁨에 넘쳐 그것을 공손히 집어 들었습니다. 마치 여인을 다루는 것처럼 소중히 그것 을 주워 제 허리에 찼습니다." 여신 닌순은 그 꿈을 이렇게 대답해 주었다. "여인의 사랑처럼 너를 매혹시킨 그 도끼는 내가 너에게 주는 동료이며 친구이다. 그는 하늘의 신들 같은 강한 힘을 가지고 네게 올 것이며, 네가 위험에 직면해 있을 때 가장 먼저 너를 구해줄 용감한 동반자가 될 것이다." .......길가메시 서사시 중 - 엔키두와의 만남 "폐하께선?" "잠드셨습니다." 시종이 대답했다. "그런가?" 마르케스 옥크토의 약간은 무거운 듯한 발소리가 멀어져 갔다. 만약에 인간이 운명의 여신이 짜 놓은 그물 안에서 스스로 선택할 수 있 는 유일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친구일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것마저 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했다. 이 십 여 년 간 같이 자란 젖형제이자 자신의 유일한 친우라고 말해지는 마르케 스가 제일 먼저 달려와 안위를 물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아니, 이렇게 별 말도 없이 순순히 떠나간 것이 오히려 희한한 일이었다. 먼지와 충격으로 인한 피로로 녹초가 된 몸을 뜨거운 물에 담그면서 황제 는 눈을 감았다. 언제 어디서 암살자가 나타날지 모르는 그 옛날부터 젖형 제 마르케스 옥크토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자신을 지켜주었었다. 분명히 감사해야 할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황제는 그가 싫었다. 아니, 어딘가 모르게 생리에 맞지 않았다. 감정이 결여된 회색 눈동자와 고저 없는 금속성의 목소리, 어찌되었든 사 내답다고 말하면 그런 대로 좋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그는 냉 혹한 남자였다. 그가 자신의 주변에 남아 있는 이유는 단 한 가지, 죽어버 린 황제의 누이가 원했기 때문이었다. 저 나무토막 같은 사내에게도 감정 이라는 게 있었는지 평민인 주제에 감히 황제의 누이를 사랑했었다. 아니, 그 당시에는 황제가 아니었으니까 전혀 바라보지도 못할 나무는 아니었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쨌거나 손을 내밀 수 있는 신분의 상대도 결코 아 니었다. "난 그가 싫어." 황제는 향유를 푼 더운물에 어깨를 담그며 소리내어 중얼거렸다. 자신의 누이가 어쩌자고 저런 인간에게 마음을 허락했는지 그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어디가 마음에 든 것일까? 아무리 누이가 다정했기로서니 저런 돌덩이 같은 사내에게 마음을 주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 이다. 그는 눈을 감았다. 뭐, 어쨌거나 누이는 그 정쟁(政爭)의 한 가운데서 죽 어버렸고 황제는 혼자 살아남았다. 덕분에 황제에게는 대놓고 내칠 수도 없는 저 돌덩이 같은 사내가 남아버렸다. 두 눈을 부릅뜨고 자신을 지켜주 겠다는 옹고집쟁이가. 그래서 가끔 황제는 연기를 하곤 했다. 마르케스라고 하는 젖형제이자 친구라는 존재를 하나 만들어 놓음으로써 다른 자들에게 황제의 관대함과 인간적인 매력을 더더욱 돋보이도록 말이다. 물론 그 친 구 놀이가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마르케스 본인만큼 더 잘 아는 사람은 없 을 것이다. 그는 몸을 일으켰다. 흰 손을 가진 시녀가 재빨리 그에게 타월을 건네주 었다. 질 좋은 면직의 감촉에 만족하면서 황제는 시녀의 시중을 받으며 천 천히 침대 위에 알몸으로 드러누웠다. 그가 엎드리자 시녀 두 명이 재빨리 다가와 향유를 듬뿍 묻힌 손으로 부드럽게 마사지를 시작했다. 잔뜩 긴장 했던 어깨와 등을 문지르자 한숨이 절로 터져 나왔다. "뜨거운 찜질을 하겠습니다." 긴장한 어조로 시녀가 고한 뒤에 그에게 더운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타월 을 들이댔다. 조금 뜨거웠지만 한 편으로는 시원해서 황제는 그저 눈만 감 았다. "폐하." 휘장을 친 밖에서 누군가가 불렀다. 그 목소리는 너무나 가까웠다. 그의 침실로 이미 들어온 모양이었다. 시종 장도 제지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떠올리자마자 황제는 대단히 불쾌해졌다. 그를 절대로 보고 싶지 않았지만 황제는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고 낮게 응 했다. "무슨 일인가?" "고할 말씀이 있어서입니다." 상냥한 듯 하지만 상냥하지 않은 자, 공경하는 듯 하지만 절대 공경하지 않는 자가 부드럽게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허락을 구하는 음성은 결코 아 닌 듯 마법사는 천천히 휘장을 젖히고 그의 욕실로 들어섰다. 금발에 흰 피부, 미녀라고 해도 부러워할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를 한 젊 은 마법사의 등장에 반라의 시녀들이 약간 동요했다. 그녀들은 드러난 젖 가슴을 가리고 싶어하는 듯 했지만 그의 등장을 꺼려서 그런 것은 결코 아 니었다. 오히려 호기심과 동경으로 긴장하고 있는 것이다. 황제는 아름다운 외모를 한 마법사를 반쯤은 노려보면서 불쾌한 음성으로 말했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잠시..........." 그는 미소했다. 그 순간 갑자기 황제의 몸을 마사지하고 있던 시녀들이 그 자리에 풀썩 쓰 러져 버렸다. 그녀들이 실 끊어진 인형처럼 풀썩 쓰러지는 것을 보고 황제 가 벌떡 일어서자 마법사는 생긋 웃어 보였다. "잠시 잠재운 것뿐입니다." "............대체!" 다시금 공포가 등줄기로 치밀어 올랐다. 황제는 이 마법사를 두려워하지 않으려고 무척이나 노력하고 있었지만 어 떻게 해도 공포감은 억누를 수가 없었다. 그는 주먹을 쥔 채 마법사를 쏘 아보았다. "무슨 일이냐고 몇 번이나 물어야 하는 거냐?" "시녀들에게 듣게 해서 좋은 일이 아니라서 말입니다." 마법사는 곤란한 듯 쓴웃음을 지어 보이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황제는 침묵했다. 이런 일을 처음 겪은 것도 아니었다. 이런 일은 묘하게도 마르케스가 없는 사이에 벌어지곤 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마법사는 마르케스가 꽤나 거북한 모양이었다. "마르케스님에게 말씀을 좀 해주시지 않겠습니까?" "무엇을?" "카산드라 누님께 친절하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 곤란한 듯이 말하던 그는 한숨까지 쉬었다.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오늘 보신 그 분, 저의 마스터는 저와 카산드라 누님을 길러내신 분이시라 저만으로는 절대 당해낼 수 없습니다. 오늘 그 분이 그렇게 물러가신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다음 번에 는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나에게 뭐라고 말하는 건가?" 황제는 짜증을 억누르며 물었다. "카산드라 누님은 저보다도 강합니다. 그러니까 카산드라 누님을 폐하를 위해서라도 다독여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나보고 남의 부부간의 일까지 끼어들라는 건가?" 불쾌한 음성이 된 황제를 향해 마법사는 더 한층 화사한 웃음을 피어 올렸 다. "어차피 중매를 서신 것은 폐하이시지요." 그 말에 황제는 입을 다물었다. 마법사가 그 자리를 떠난 후- 그는 시녀들을 잠에서 깨워 황제의 시중을 다시 들게 만들었다- 당황하는 시녀들이 황제의 몸을 마사지하기 시작했지 만 황제는 이미 흥을 잃어버린 뒤였다. 나무토막 같은, 돌덩이 같은 마르케스의 유용함은 단지 황제의 관대함과 친근함을 돋보이는 것 이외에도 또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저 무시 무시한 젊은 마법사 남매 중의 누이 쪽이 마르케스에게 빠져있었던 것이 다. 덕분에 황제는 황금이나 명예따위로 그들을 묶어 맬 필요조차 없었다. 그녀는, 카산드라라고 하는 이름을 가진 무서운 마력을 가진 마녀는 마르 케스에게 푹 빠져 그와 결혼시켜 달라고 요구했던 것이다. "이해할 수 없어. 미남도 아닌데." 여자란 알 수 없는 것이다. 대체 저 나무토막 같은 냉혹한 남자의 어디가 좋았던 것일까. 황제는 자신의 누이처럼 마르케스를 달콤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나운 마 녀의 모습을 떠올리고는 진저리를 쳤다. 멀리서 달이 뜨고 있었다. 사방은 이미 어두웠다. 황제가 머무는 별궁은, 이미 횃불과 향초로 가득 차 있었지만 밤하늘만은 어쩔 수 없는 듯 밤의 장막이 서서히 드리우는 참이었다. 시녀들의 손놀림 에 나른해진 몸이었지만 황제의 신경은 여전히 피로했다. "마르케스를 불러라." 그는 밤새도록 대기하고 있을 자신의 젖형제를 떠올리면서 문 밖의 시종에 게 낮게 명령했다. 침의를 고쳐 입으며 황제는 계속해서 생각했다. 마르케스와 자신은 언제까지 친구놀이를 계속해야 하는 것일까? 언제 속 마음을 드러내고 서로를 불편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속 시원히 이를 갈 수 있는 것일까? "젠장." 황제는 다시 그 기분을 접었다. 어찌되었거나 그는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치고 마지막 순간까지 자 신을 배반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그를 이용하도록 내버려두고 또 기꺼 이 그것을 감수할 것이다. 비록 비난, 혹은 경멸, 증오에 가까운 감정을 가 질 지라도 그라면 분명히 자신을 위해 무엇이든 아끼지 않을 것이다. 그것 만은 확실했다. 황제는 두통이 이는 미간을 누르면서 욕설을 퍼부었다. 아무리 싫다고 해 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 그가 아무리 마 음에 안 들어도 그를 내칠 수는 없었다. 주변의 눈이나 마법사들 때문이 아니더라도 그를 내칠 수는 없었다. 지긋지긋하게 달라붙어 있는 그를 내 칠 수가 없다. "옥크토경이 오셨습니다." 시종장이 침실의 문을 열면서 알려왔다. 황제는 침대 위에 앉아 있다가 그 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들었다. 이렇게 빨리 왔다는 것 자체가 이미 마르케스는 자신의 일을 생각해서 대 기하고 있었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그런 것조차도 왠지 짜증이 치밀어 올 랐다. '아아, 그래 그는 종기 같은 것이다. 지긋지긋하고 짜증이 나는 종기.' 황제는 멍하니 생각했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깨닫고 있었다. 싫든 좋든 간에 그는 자신의 일부이고, 어쨌거나 유일한 형제라는 것을. 절 대로 좋아해서가 아니라 그저, 지긋지긋하게 태어나면서부터 언제나 곁에 있었던 존재라는 것을. 황제는 절대로 그를 가족이라든가 친구라고는 부르고 싶지 않았지만 사실 이 그랬다. 제 22화 의지 KUBERIN...... 빛을 향해 걷는다 그 빛에 눈이 타고 몸이 타오를 지라도 걷지 않으면 안될 길이 있다 1 "배 안 고파?" "전혀요." 에닌의 야멸찬 말에 실망하면서 나는 어깨를 으슥했다. 하는 수 없는 일. 배가 안 고프다니. 정말로 비극적이야. 이렇게 맛있는 사슴 넓적다리를 그 냥 썩히자니 사슴이 불쌍하다고. 그러니 내가 대신 먹어 주지. 안타까워라, 안타까워. 에닌은 슬픈 눈길로, 아니 꽤나 허한 눈길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이 불안해서 어깨를 슬쩍 안아주었더니 나를 향해 빙긋 웃어 보였다. 아 아, 정말로 요염해졌는걸. "슬퍼요." "뭐가?" "그 사람은, 그녀는 정말로 슬퍼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그녀가 바로 쿠베린님이 죽이겠다고 하신 그 마법사지요?" "그래." 그러고보니 그 여자를 잡아 눌러 아이들이 있는 곳을 뱉게 했어야 했다는 생각이 갑자기 떠올랐다. 아니, 이런 황당한 일이! 그런 걸 다 잊어버렸다 니! 나는 무의식중에 넓적다리뼈를 들고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재빨리 에닌이 내 옷자락을 잡았다. "어딜 가시려는 거예요? 어차피 늦었어요." 에닌의 말에 멍하니 서 있던 나는 잠시 고개를 내저었다. 이거 참, 어처구 니없는 일이로다. 어쩌다가 이렇게도 멍청한 일이 되었던가. "그녀는 그가 죽어서 슬퍼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런 그녀를 공격하신다는 것은 비겁하지 않은가요?" "내 애들이 어떤 일을 당할 줄 알고 비겁운운 하는 거야? 원래 나는 비겁 이라는 두 글자와는 아주 친한 사이야." 에닌은 금방 주눅이 든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뭐 하지만 어차피 지나간 일, 채인 애인 찾아 헤매는 것처럼 허망한 것도 없듯이 일단은 접어두자고. 그러면 일단 생각해 두었던 일이나 해결하자. 내가 갑자기 침묵하자 약간, 아주 약간 겁에 질린 에닌은 조심스레 나를 향해 물었다. "화, 화나셨나요?" "아니." 나는 가슴팍에 매달린 무한의 주머니를 꺼내어 바닥에 내려놓았다. 주머니 는 바닥에 내려놓자마자 푸욱 하고 바닥으로 손가락 마디만큼 꺼져 들어갔 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형태는 유지하고 있었다. 입구를 열어서 손을 집어 넣고 이리저리 더듬자 이런 저런 물건들이 일제히 자기 존재를 과시하며 튀어 나왔다. 금, 은, 보석, 왕관, 목걸이, 귀고리, 팔찌, 발찌, 항아리....... 비취 침대도 있었지만 꺼내지는 않았다. 대포알도 있었고 어디선가에서 주운 보검도 있 고 마검도 있었으며 수정으로 만든 지팡이라든가, 황금으로 만든 류트라든 가, 황옥으로 만든 피리, 금화, 은화들이 쏟아져 나왔다. 하염없이 쏟아져 나오니까 에닌은 이제 얼이 빠진 듯 입을 벌리고 있었다. 무리도 아니다. 주머니는 내 주먹만한데 나온 물건은 이미 집 한 채 보다 조금 작은 크기 로 차곡차곡 쌓였으니까. "......무, 무척 많이 들어가네요!" "응." "아직도 멀었나요? 지금 찾으시는 거 뭐죠?" "고양이." "신의 귀 말씀이군요. 그런데 그 주머니는 어차피 마법이 걸려 있을 텐데 왜 원하는 것을 찾지 못하는 것이죠?" "그거 참 좋은 말이군. 하지만 말이야 나는 지금 그 놈의 고양이의 진짜 형태를 도저히 알 수 없거든. 그래서 그래." "네?" "그건 고양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진짜 고양이는 아니었어. 그러니까 진짜의 모습을 모르니까 그걸 집어 올릴 수가 없다는 말이야." "아아." 에닌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동안 나는 열심히 뒤졌다. 그 고양이가 고양이 모습을 한 보석이라든가 뭐 그런 거가 진짜 모습이라 고 한다면 정말로 찾기 쉽겠지만 내 생각인데 절대 그런 게 아닌 것 같단 말이야. 굳이 예를 들자면 고양이가 주머니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그 놈은 이미 고양이의 탈을 벗어 고양이가 아닌 게 되어 버렸을 가능성이 대단히 컸다. 그렇다면 대체 본래의 모습이란 게 뭐야? 일곱 개의 기둥이니까 일곱 개의 막대기? 그럼 그 막대기라는 것의 크기 는? 설마하니 하늘까지 치닫는 거대한 기둥일 리는 없을 테고, 그렇다고 해서 내 팔뚝만한 막대기라면 기둥이라 불리지도 않을 테고........흠, 역시 비유니까 모양새는 아무래도 상관없겠지? 그럼 역시 고양이로 찾는 게 가 장 손쉽지. 아, 이건 200여 년 전에 어떤 드워프에게서 받은 도끼로군. 여전히 번쩍번 쩍 빛나는 걸. 어라? 이건 그 왕년 아리따운 엘프 메사나엘에게서 받은 정 표가 아니던가? 그녀는 잘 있을까나? 2, 300년쯤 흐르긴 했지만 엘프니까 살아 있겠지. 어쩌면 에닌 만한 딸내미가 있을 지도. 하아, 이건 땅의 엘프 에게서 얻은 황금의 관. 거추장스럽구먼. 두둑한 게 투박하기도 해라. 나중 에 잘 녹여서 다른 물건으로 만들어 봐야지. 그건 그렇고 이 놈의 일곱 개 의 기둥이라는 것은 대체 어디 있는 거야? 내가 에닌과 함께 들어온 숲은, 궁전에서 꽤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곳 고왕국의 수도라는 것은 사실 꽤 야트막한 분지로 둘러싸여져 있긴 한데 그 분지란 것을 눈치채기 어려울 정도로 숲이 빽빽했다. 곳곳에 녀석 들이 관도나 혹은 사냥길로 사용한 길들은 엘프의 후예를 자처하는 놈들답 게 그다지 반반한 편이 아니었다. 꾸불꾸불 이어지는 그 길들은 수도로 향 하는 길이라는 이름도 무색하게 꽤나 좁아 터졌다. 덕분에 룬드바르군대는 제일 먼저 길부터 넓히고 있는 중이었다. 이 좁아터진 길들은, 당연한 일이 지만 수천년 된 거목들을 해치지 않기 위해 이리저리 비비 꼬여 있었다. 대부분의 인간들이 나무를 밀어버리고 길을 내는 것과는 꽤나 대조적이었 는데 숲의 자녀들인 자신들이 감히 숲을 훼손할 수는 없다고 그렇게 지껄 이는 것을 언젠가 들은 적 있기는 했다. 하지만 인간의 손이 닿은 이상 숲 이란 온전할 수는 없는 법. 고왕국 놈들은 소문에 의하면 지하로 길을 뚫 고 있다고 한다. 즉, 위급할 때 지름길로 사용할 수 있도록 지하도를 뚫어 놨다는 것이다. 그 지하도는 드워프가 설계하고 노예들- 왕족이나 귀족 빼 면 다 노예니까 모으기 어렵지는 않았을 게다- 이 목숨 깎아가며 들이 팠 다고 한다. 어쨌든 그 지하도를 보고 룬드바르군도 꽤나 만족한 미소를 흘 리고 있긴 하겠지만 어쨌거나 그 지하도로 대군이 드나들 수는 없으니 녀 석들은 열심히 열심히 길을 닦고 있는 것이다. 덕분에 여기저기서 나무를 베느라 꽤나 바쁜 소리가 난다. 에닌은 오랫동안 그 여마법사와 인간녀석의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는 듯했 다. 대체 무얼 그리 열심히 생각하는 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녀가 룬드바 르에 대해 의외로 동정적이라는 데에는 조금 놀라버렸다. "그런데 그 신의 귀를 찾아서 어떻게 하시려고요?" "놈들이 찾아 헤매는 이유가 있겠지. 직접 물으려고." "고양이가 말을 하진 못하잖아요?" "놈들은 고양이가 아냐." 에닌이 말하는 순간, 나는 드디어 찾던 것을 찾아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그것은, 일곱 개의 색깔을 가진 수정처럼 보이는 보석이었다. 빛에 따라서 이리저리 빛깔을 바꾸는 그 길죽한 보석들은 육각형의 수정처럼 맑은 색으 로 빛났다. 이 것이 고양이였단 말이지? 참으로 기발하기도 하다. 고양이로 변한 보석이라니. 아니지, 이걸 기둥이라 부르다니. 민망하기도 해라. 아니, 민망 그 자체다. 빨강, 하양, 노랑, 초록, 파랑, 회색, 보라색을 가진 이 보석들을 손바닥으로 굴리면서 나는 그것들을 향해 물었다. "그래, 너희들은 대체 뭐냐?"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그들이 답해 줄 리는......." 에닌이 뭐라 막 말하려는 순간 갑작스러운 빛과 함께 주변이 하얗게 변했 다. 흰 색. 흰색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무채색에 가까운 기묘한 색채가 나와 에닌을 덮었다. 그것은 보석으로부터 시작되어 날개를 편 새와 같이 유유 히 빛의 장막을 뻗어 주변을 감싸버렸다. 사방은 온통 흰색 뿐이었지만 묘 하게도 눈이 아프거나 피로하지도 않았다. 아니, 그저 흰색이라고 부르기엔 지나치게 온후한, 환하다는 것을 지나 어딘가 포근한 빛깔이었다. 그 거짓 말처럼 온화한 빛 속에 잠겨서 나는 잠시 미소를 지었다. 어디선가 향기가 느껴졌다. 맑고도 상큼한 그 향기는 꽃향기 같기도 하고 과일향 같기도 했다. 그 향기에 이어, 따스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뺨에 와 닿았다. 매끄러운 비단에 얼굴을 묻은 것 같은 감각, 그리고 뒤이어서 느껴 지는 따스한 온기는 여인의 가슴처럼 온후했다. 손가락을 뻗어서 무언가 만져보려 했지만 만져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단지, 그 이루 말할 수 없는 감각이 손끝부터 발끝까지, 아니 머리털 끝에서 발끝, 발톱끝까지 이 어져 전신을 두루뭉실하게 감싸고 있는 것 같았다. 난생 처음 느끼는 쾌락에 가까운 감각, 기분은 둥둥 뜨고 머리는 뱅뱅 돈다. 절로 입이 벌어져 웃음이 연신 새어 나왔다. 대체 이걸 뭐라고 불러야 하지? 행복감? 만복감? 도취감? '거참, 이 정도의 기분이라면 당장이라도 죽어도 좋겠는걸.' 하고 무의식중에 생각하는 찰나, 나는 혀를 살짝 깨물었다. 바보같이, 감각에 취해서 별 같잖치도 않은 생각을 했구만. 절대로 멍하니 죽어선 안되지. 이런 감각도 살아 있으니까 느끼는 거 아니겠어? 자아, 살 아보자고 살아보세! 아직도 나에게 할 일이 너무나 많아! 나를 기다리는 미녀들을 생각해. 나를 위해 요리된 음식들을 생각하라고. 여기서 굴복하기 엔 나는 너무나 해야 할 일이 많거든. 나는 열심히 고개를 돌리고는 발을 굴렀다. 여기서 죽자고 늘어져 있어선 안 되는 법이다. 워낙에 할 일이 널려 있잖아? 단지 마법사들을 족치는 것 이외에도 할 일은 많아. 나는 단지 마법사를 죽이기 위해서 살아 있는 것 은 아니라고. 게다가 느낌만으로는 부족해. 나는 실제로 비단에 얼굴을 묻고 꽃향기를 맡으며 난로가에 앉아 온기를 구하겠어. 느낌으로 배가 부르진 않다고. 물 론, 기분이야 좋겠지만 말이야. 허어. 그러고 보니 이 감각만으로 말한다면 마치 인간의 마약같은 기분인걸. "아......." 에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흰 빛 속에 홀로 선 에닌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잔뜩 얼 굴을 붉힌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고개를 숙인 그녀의 목덜미까지 붉어 진 것을 보니 뭔가 묘한 상상을 한 게 아닐까 싶었다. 다가가 에닌을 끌어 안자, 그녀는 묘한 탄성을 내질렀다. "아!" "에닌, 기분 좋은 거 같군." 내가 머리칼을 쓸어주며 피식 웃자 에닌은 몽롱한 표정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아냈다. "나는..........나는 이대로 죽어도 좋아요."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마. 넌 아직 어려. 아직 애도 안 낳았고 연애도 못 했잖아? 연애란 일생일대 최고의 숙업이야. 그런 것도 못해보고 죽다니."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눈물이 줄줄 흘러 그녀의 길죽한 귀까지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몽롱한 얼굴은 행복감에 차 있었지 만 내 품안에서 굳이 나오려 하지 않는 걸 보니 어쩐지 묘한 기분이 든다. 에닌이 혹시 나랑 결혼이라도 한 꿈을 꿨나? 그렇지 않고서야 내 품안에서 이렇게 황홀해 할 리가 있어? "에닌, 할 일 많다고 했잖아?" 내가 휙휙 흔들자 에닌은 몽롱한 얼굴로 눈물을 흘리며 그 자리에 주저 앉 아 버렸다.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며 바닥에 뺨을 대고는 멍하니 중얼거렸 다. "난, 나, 나는 죽어도 좋아요.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이 보다 더 기분 좋은 일은 없을 거에요. 게다가.......나는, 지쳤어요." 정말? 남자랑 사귀어 본 적도 없을 텐데? 연애도 해 본적 없을 텐데? 엘 프니까 진짜 맛있는 음식도 먹어 보지 못했을 텐데? 키스라든가 포옹이라 든가, 낯간지러운 밀어라든가 뭐 그렇고 그런 거...... 여자랑 남자랑 할 수 있는 그 모든 것, 그게 얼마나 기분 좋은지 경험하지도 못했잖아? 그런데 도 이 두루뭉실 애매한 기분에 헤롱거릴 작정이야? 나는 혀를 쯧쯧 찼다. 뭐, 허기야 그녀가 움직이기 싫다고 해서 내버려둘 나도 아니지. 나는 그녀의 몸통을 옆구리에 낀 채 주변을 돌아보았다. 희뿌연 안개도 아닌, 그렇다고 해서 수증기도 아닌 아른아른 거리는 기운 들을 마주하며 나는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바보도 아닌 이상 나타나는 게 어떠냐?" 귀가 들어 본 중 가장 아름다운 소리라는 게 어떤 것인지 필설로서 형용 할 길은 없지만, 눈으로 본 중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 표현할 길은 없지만 어쨌거나 나타난 것은 그랬다. "안녕하세요?" 하늘색의 하늘거리는 의상을 걸친 금발의 머리채를 구름처럼 틀어 올린, 팔등신의 미녀는 표정 풍부한 커다란 눈을 살짝 찡그린 채 미소짓고 있었 다. 풍만한 가슴은 투명해 보이는 옷감에 휘감겨 살짝 드러나 있었고 한 줌 밖에 안 될 허리는 풍만한 둔부를 아슬하게 지탱하고 있었다. 길고도 매끄러운 흰 다리는 아슬아슬한 경계를 넘나들면서 수컷으로 하여금 <아, 내가 수컷이었구나> 하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만들고 있었다. 그녀는 순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는 나를 향해 사랑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쿠베린님?" "........누구야? 설마하니 여신?" 보통의 여자치고는 훤칠하게 큰 키를 가진 금발의 미녀는 고개를 다시 갸 우뚱하고는 미소지었다. 그녀의 옆으로 흰 공간을 가르고 갑작스레 흑발의 미녀가 나타나자 나는 다시 눈과 귀가 호강하는 감각으로 절로 입이 찢어 졌다. 어딘가 도발적인 매력이 돋보이는 흑발의 미녀는 요염한 눈매로 날 바라보 며 살짝 미소지었다. 유혹적인 그 미소에 나도 모르게 앞으로 내달릴 뻔했 지만 아아, 나는 그러기엔 너무나 노숙하고도 능숙하고도 멋진 분인지라 그녀의 요염한 미소에 그저 마주 미소지어 주었다. "여신이 둘이나 등장한 건가?" 흑발의 여인은 금발의 여인과 나란히 서서 붉은 빛이 도는 자주색 눈빛을 반짝였다. 깊어 보이는 눈매는 뭐라 말할 수도 없이 농염해서 바로 옆에 선 금발의 청순한 미녀와 엄청나게 대조적이었다. "만나서 반가워요." 흑발의 여인이 나에게 인사를 건넬 즈음, 갑자기 흰 공간을 가르고 긴 갈 색 머리칼을 늘어뜨린 소녀가 등장했다. 그녀는 아직 열 댓살 정도로 보이 는 가녀린 미소녀였는데 커다란 회색눈을 반짝이는 것이 뭐라 말할 수도 없이 귀여웠다. 가늘고 흰 팔을 드러낸 민 소매의 드레스를 걸친 그녀는 자그마한 악기를 든 채 나를 향해 상큼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안녕?" 나는 순간적으로 내 자신의 취향을 의심했다. 설마하니 나의 숨겨진 취향이 가녀린 미소녀였던가? 어째서 저런 미소녀에 게 마음이 동하는 것이지? 미트라처럼 키우면 매력적인 미녀가 되리라는 무의식적인 예감 때문에 이렇게 마음이 흔들리는 것일까? ".........믿을 수 없어." 나는 심각하게 이마를 짚었다. 그러자 소녀는 커다란 눈을 뜨고 날 보며 물었다. "쿠베린? 왜요?" 그녀의 옆으로 갑자기 또 한 명의 여인이 등장했다. "안녕하세요?" 이번에 등장한 여인은 인어처럼 연둣빛의 머리칼을 하고 있었지만 인어보 다도 아름다웠다. 짙은 녹음을 연상하게 하는 깊고도 맑은 녹색의 눈동자 는 갈색의 매끄러운 피부와 더불어 건강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했다. 그녀 는 다른 미녀들과 마찬가지로 나란히 그들 옆에 서서 나에게 미소를 던졌 다. ".............장난하나?" 나는 그저 입을 벌린 채 여신처럼 매혹적인 여인들이 줄지어 나타나는 것 을 구경할 수 밖에 없었다. 그 다음에 등장한 여인은 물의 엘프처럼 하늘색의 머리칼을 가진 미녀였 다. 그녀는 얼음처럼 차가운 미모와 냉혹할 정도로 냉정한 눈길로 내 마음 을 들쑤셨다. 다른 여인들과 달리 내 쪽을 향해 친절한 미소는커녕 경멸에 가까운 시선을 던진 그녀는 오만하게 턱을 돌린 채 나를 외면했다. 마치 너 따위는 먼지쪼가리만큼도 대단하지 않아 라고 말하는 듯한 그 눈길은 내 호승심을 단번에 갈아엎어서 나는 당장이라도 그녀의 손목을 잡아끌고 어디론가 가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의외로 나, 불타오르기 쉬운 체질 일 지도 모르겠군. 그 다음에 등장한 미녀는 고집 센 표정의 붉은 머리의 미녀였다. 그녀는 커다란 붉은 눈을 뜬 채 나를 바라보더니 마치 내가 말을 걸지 않아서 화 가 났다는 듯 흥 하고 괜히 코웃음을 쳤다. 순간적으로 나는 그녀와 내가 아는 사이인가 하는 착각에 빠져 인사를 하고 말았다. "안녕?" "흥!" 그녀는 내가 인사를 하자 오히려 코웃음을 치더니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러 면서도 나를 향해 한 번 시선을 주는 것은 잊지 않았다. 이거 어쩐지 전형 적인 튕기는 미녀 아닌가? 그 다음에 등장한 여인은 오히려 평범했다. 그녀는 마치 지나가는 보통의 여자처럼 부드러운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보통의 갈색머리에 갈색 눈을 가진 그녀는 다소곳한 자세로 서서 나를 향해 조금은 수줍고도, 예의바른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 눈부신 미녀들 사이에서 그녀는 너무 평범해서 오 히려 확 눈길을 끌었던 것이다. "대체 이게 뭐야?" "쿠베린님이 보시는 우리들의 진실한 모습입니다." "우리들.......이라고 하면?" 나는 그제서야 내가 그 놈의 일곱기둥인지 작대기인지 하는 일곱 개의 수 정을 쥐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내 손아귀에는 보석들 대신 축 늘어져서 황홀한 듯 두 뺨을 붉히고 있는 에닌만이 있을 뿐이었다. "여기는 정상적인 공간이 아니군. 역시?" "그렇습니다. 여기는 쿠베린님이 만든 공간이지요." "내가 만든 공간?" 여인들은 각자의 개성대로 살풋이 웃었다. 크게 웃는 여자, 조용히 웃는 여 자, 호탕하게 웃는 여자, 그리고 비웃는 여자까지 다양한 모습들이었다. "당신이 바라는 대로의 공간이란 의미이지요." "나는 이런 거....바란 적 없는데?" "편안한 상태를 가장 좋아하시니까 이런 모습이지요. 솔직히 말한다면 이 런 공간을 만들어 내는 분은 저희들로서도 처음이랍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희고, 아무 것도 없지만 부드럽고, 온후하며, 상쾌하고, 달콤한 기묘한 감각 들이 혼재된 텅 빈 곳. 설마하니 내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곳이 이런 곳 인가? "그럼 에닌이 보는 것은 내가 보는 것과는 다른 것이란 의미인가?" 그렇습니다. 다 각각의 눈으로 공간을 봅니다. 그리고 역시 각각의 눈으 로 우리들을 보지요." ".......나는 여인을 원했었구나." 아아, 내가 생각해도 꽤나 원색적이군. 하지만 눈은 즐겁네. 내가 히죽 웃자 그녀들도 같이 각각의 개성대로 웃었다. 그녀들은 내가 편안한 자세로 바닥에 걸터앉자 천천히 따라 앉았다. 그에 따라 아슬아슬 한 맨다리가 그대로 드러나, 나는 여인들의 매혹적인 일곱 쌍의 다리를 즐 겁게 감상할 수 있었다. "그래, 이야길 해보자구. 너희들은 뭐냐?" "쿠베린님은 저희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뭔 기둥이라며? 나는 뭔 작대기인가 생각했었지."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설마하니 이 미녀들이 일제히 쭉쭉 뻗은 작대기로 돌변할까봐 걱정스러워졌다. 그러나 다행히도 미녀들은 일제히 웃기만 할 뿐 변함은 없었다. "오랜 시간동안 저희들은 인간의 신전에 놓여져 있었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한다면 그 곳에서 모셔져 있었지요. 신성한 물건으로서 말입니다." "대체 어째서 신성한 물건이 된 거지? 실제로 너희들은 신성한 물건인가? 그리고 대체 왜 마법사들이 너희들을 가지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어?" 나는 턱을 잡은 채로 흑발 미녀의 허벅지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물었다. 그 녀의 허벅지는 거의 예술의 경지에 다다르고 있었다. 아, 내 심미안은 역시 훌륭해. 이게 다 내가 바란 모습이라는 거지? "몰라요." 갑자기 내 시선을 의식한 흑발의 미녀는 요염하게 날 쏘아보며 다리를 꼬 았다. 진지한 이야기를 하다말고 갑자기 돌변한 그녀 때문에 나는 순간적으로 당 황했다. 하지만 부드러운 얼굴을 한 여인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기 때문에 나는 곧 그녀의 반응조차도 내가 바란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어색한 웃음 을 흘렸다. "알았어, 어서 말해봐." "모르는데요." 이번에는 발랄한 소녀의 얼굴을 한 보석이 말했다. 그녀는 양 손으로 턱을 괴고 무릎을 세운 상큼한 자세를 하고 있었다. 아이고. 내가 상큼한 매력 운운하다니. 어쩌면 나의 깊숙한 곳 어디에선가 소녀취향의 미의식이 꿈틀 거리고 있었나보다. 그러나 저러나 상큼하든 시큼하든 모르는데요라는 그 말은 꽤나 기분이 거슬려서 나는 짧게 되물었다. "너희들이 모르면 누가 알어?" "인간들이 알겠죠." 흐응 하고 코웃음을 치며 붉은 머리의 미녀가 도톰한 입술을 내밀며 말했 다. 나는 그게 귀여워서 헤벌레 웃음을 지으며 다시 물었다. "정말 몰라?" "몰라욧." 빨간 머리칼을 흐트러뜨리며 그녀는 새침하게 말하고는 눈을 내리깔았다. 아이고 귀여워라, 지금 이거 튕기는 거지? 여기서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주고...... "흥." 내가 붉은 머리의 아가씨 머리를 쓰다듬는 순간 갑자기 차가운 비웃음소 리가 났다. 고개를 돌려보니 은발의 아가씨가 싸늘한 표정으로 날 쏘아보 고 있었다. 오만한 가는 콧날에 매달린 조소라는 두 단어에 화들짝 놀란 나는 그녀의 그 시선을 마주 쏘아 봐 주었다. "뭐야? 불만이야?" "색마." 짧게 말한 그녀는 고개를 홱 돌렸다. 나는 순간적으로 울화가 치밀었지만 붉은 머리칼의 미녀에게 다시 고개를 돌리고는 자상하게 물었다. "이름이 뭐야?" "일렌."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순간 나는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는 소리가 어떤 것인지 생전 처음 알았다. KUBERIN...... 빛을 향해 걷는다 그 빛에 눈이 타고 몸이 타오를 지라도 걷지 않으면 안될 길이 있다 2 "무슨 재수 없는 농담이냐?" "아뇨, 제 이름은 일렌이 맞아요."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고혹적으로 말했다. "웃기지 마!" 두 손을 들어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손아귀에 힘을 주고 당장이라도 부서 뜨릴 듯이, 미친 듯이 그녀를 흔들었다. 이리저리 힘 없이 흔들리는 그녀의 고개를 보며 나는 갑자기 그 머리를 물어 뜯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있을 수 없는 일. 그녀는 죽었다. 나를 배신하고 나에게 죽었다. 그런 그녀 의 이름을 사칭하다니. 그런 그녀의 이름이 대체 왜 여기서 튀어 나오는 거야! 눈 앞이 시뻘겋게 물들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절대로 용서할 수 없 는 이 발칙한 것을 없애고 싶은 충동에 온 몸이 덜덜 떨렸다. 아무도 일렌 을 사칭할 수는 없다. 일렌이란 존재는 단 하나만이 있을 뿐이다! 어떤 자 도 일렌이라 스스로 말하며 나를 희롱할 수는 없단 말이다! 흰 목줄기를 움켜쥐고 단숨에 목을 졸랐다. 그녀는 놀란 눈을 크게 치켜 뜬 채로 고통 스런 신음을 터뜨렸지만 나는 절대로 동정심은 들지 않았다. 그렇다. 그녀 는 감히, 감히 일렌을 사칭한 것이었다. 격렬하고도 가장 비참한 증오로 나는 그 흰 목을 부러뜨리고 그 심장을 찢기 위해 힘을 주며 웃었다. 이를 갈며, 당장이라도 타오를 것 같은 눈을 부릅뜨고 웃었다. "사랑해." 어느 순간, 시간이 정지하고 갈색의 머리칼이 흩어진다. 청동빛 머리칼이 손안에서 흐트러지며 구름처럼 피어올랐다. 아찔한 감각. 믿을 수 없을 정 도로 다정한 살결의 내음. "사랑해, 죽을 정도로, 죽일 정도로." 눈 안쪽에서 뜨거운 것이 흘러나와 뺨 위로 흘러 떨어졌다. 그렇다. 몇 번이고 나는 그녀를 죽였다. 실제로도, 마음 속으로도. "나는 일렌이에요. 쿠베린." 그녀가 속삭였다. "잊으면 싫어." 그녀가 내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속삭였다. 대체, 무엇에 그렇게 화를 내고 있었는지 조차 잊어버렸다. 나는 멍하니 그 머리를 끌어안았다. "너를 사랑해." 일렌이 대답했다. "바보 같으니. 이미 알고 있는 걸." 하지만 알고 있다. 이 머리칼은 붉은 색. 초록빛이 감도는 갈색의 머리칼은 아니었다. 일렌은 이처럼 가냘프지 않다. 일렌은 이처럼 온화한 어투를 쓰 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녀는 이미 죽었다. 이것은 내 미련, 내가 가진 끊임없는 자책감의 증거. 그렇구나 하고 나는 멍하니 기억해냈다. 나는 그녀에게 단 한 번도 사랑 한다는 말 따윈 건네 본 일이 없었다. 이상도 하지, 수십의, 수백의 여자들 에게 실 없이 건넸던 그 말을 왜 일렌에게는 하지 않았을까. "의외로 나, 꽤 멍청한 거 아닐까나......." 나는 피식 웃었다. 눈물 때문에 꽤나 짭짤했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뭐, 기분이 나쁘다고 해서 멀리 할 수는 없겠지. 이게 내 감정인 게다. 수 많은 여자들과 보내는 몇 백의 세월동안 단 한 번도 그녀를 잊을 수 없었 다는 것을, 지금 막 깨달았다. 일렌이라는 붉은 머리의 미녀를 안은 채 나는 옆에 앉은 소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커다란 회색 눈을 가진 앳된 소녀는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하는 지 알 수 없다는 것 같은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 천진한 얼굴을 보고, 나는 그녀가 누구인지 곧 깨달았다. "네 이름은?" "미트라." 그녀는 내가 손을 뻗자 방긋 웃으며 내 손에 매달려왔다. 작은 소녀를 끌 어 당겨 품안에 안은 채 나는 그 머리를 쓰다듬었다. 신비로우면서도 명랑 한 그 커다란 눈이 소녀다운 작은 얼굴에 너무도 잘 어울려 나는 왠지 쓴 웃음을 짓고 말았다. "안녕, 내 공주님." "나는 공주님이 아냐." 미트라는 그렇게 말하고는 투덜거렸지만 나는 그녀의 어깨를 바짝 안아 당 기며 속삭였다. "건방지게 굴지마. 내가 그렇다고 하면 그런 거야, 이 몸께서 공주님이라 불러준 여자가 흔한 줄 아냐?" "쳇, 나는 공주님이라 불리는 거 싫어." 투덜거리는 그 입술에 입술을 겹쳤다. 처음으로, 애정을 담아서, 놀리는 것도 장난치는 것도 아닌, 실제로의 애정 을 담아, 존중과 친애의 마음을 담아 그녀에게 키스했다. 어린 소녀의 몸은 내 품안에서 점점 부풀어올라 순식간에 처녀로 변했다. 커다란 회색눈은 변하지 않았지만 가녀린 몸은 처녀의 풍만함으로 아름답게 피어올랐다. 나는 그 처녀가 된 미트라의 얼굴을 잡고 조용히 쓸어 주었다. "사랑하는 내 공주님, 너보다 아름다운 공주님은 없어." 미트라가 환하게 웃었다. 피로 물든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명랑하고도 경쾌한 얼굴로 고집 센 턱을 흔들며 잘난 척하고 웃었다. "그야 당연하지!" 나는 고개를 들고 미트라의 어깨를 안은 채 내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여자 들을 돌아보았다. 그녀들은 각각의 표정을 지은 채 그림처럼 앉아서 날 바 라보고 있었다. 코웃음을 치는 냉정한 여인은, 이에르네. 그랬지, 그녀는 언제나 나를 향 해 화를 내고 있었지만 나를 언제나 사랑해 주었다. 언제나 나를 질책하고 언제나 앞을 향해 달리는 여자. 틀림없이 몇 년, 몇 십 년이 지나더라도 내 곁에서 내달릴 그런 강인한 여 자. 꿈결같은 금발머리를 흩날리며 수줍게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득한 내 젊 은 날 나에게 아이를 낳아 주기 위해 애쓰던 가련한 인간의 여인,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상냥하고도 다정한 여인. 그렇다. 내 손으로 그녀의 시체를 태워 주었었다. 그래도 달콤한 임종을 거둔 그녀는 순진한 얼굴로 나를 바 라보며 미소짓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으응, 쿠베린, 당신은 여전하네." 내가 손을 뻗자 그녀는 예전처럼 내 손에 얼굴을 비비며 꿈결같은 눈동자 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마치, 이 세상에 내가 전부라는 듯이, 이 세상에 나 밖에 없다는 듯 행복한 눈. 그 행복한 눈을 보고 나도 행복했었다. 그래서 그녀가 늙어 죽을 것이라 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의 곁을 떠나지 못했었다. 상대가 죽어 소멸해버린 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상대를 사랑한다는 것은 꽤나 괴로운 일. 나는 그 녀의 반짝이는 금발을 집어 들며 풍만한 가슴을 쓸어 내렸다. 두근거리는 심장소리를 듣는 것은 행복하다. 나는 그녀의 금발에 입을 맞추며 그녀의 옆에 요염하게 앉아 있는 흑발의 여인을 보았다. 그녀는 턱을 괴고 앉아서 흥미진진하다는 듯 지켜보고 있었다. 마치 나를 처음 본다는 듯 반짝이는 눈동자가 기묘해서 나도 그녀를 마주 보았다. 그 녀는 누구인지 잘 알 수 없었다. 그녀의 옆에 있는 연둣빛 머리칼을 한 여인도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대체 누굴까?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누 군가이길래 이렇게 내 앞에서 눈을 반짝이고 있는 것은 확실한 듯한데 대 체 저게 누구지? 일단 기억나지 않는 것은 젖혀두자. 고민해봐야 결론 나는 것도 없으니까. 당면 과제나 해결하자고. 나는 갈색머리칼을 한 평범하고도 온후한 인상을 가진 여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단정하게 앉은 채 내가 미트라와, 일렌, 그리고 인간의 여 자를 안고 있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호기심이라기 보다는 자상한 그 눈 매를 보며 나는 그녀가 누구인지 금방 깨달았다. "마미?" "응." 그녀는 웃음이 묻어나는 어투로 대답하며 두 팔을 벌렸다. 그 두 팔에 안 기면서 나는 그녀의 작은 몸을 토닥였다. 허어, 이렇게 마미가 날씬하던 것 이 언제적 일이던가? 아니지, 그녀는 이렇게 날씬했던 적이 없었다. "마미, 꽤나 이쁜 걸." "하하하하....." 마미는 작게 웃었다. 그렇다. 그녀는 웃었다. 포근한 웃음을 드러낸 그녀는 누구보다도 아름다웠 다. 요염하지도, 청순하지도, 가녀리지도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이 자리에 있는 어떤 여자들에게도 지지 않을 빛을 가지고 그녀는 고요히 앉아 내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하, 하하....전부 인정하지. 여기, 꽤나 행복한 공간이잖아? 이렇게 바라는 바대로 최고의 미녀들이 최고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말이야. 이게 바로 일 곱 수정들이 할 수 있는 힘인가?" 나는 마미의 무릎에 머리를 벤 채 벌러덩 드러누웠다. 희고도 온후한 공기를 가진 공간. 따스한 향기, 부드러운 맛을 가진 이 기 묘한 공간 속에서 나는 미녀들에게 둘러싸인 채 편안히 물었다. "잊지는 않아. 여기는 내가 만든 공간, 그리고 너희들은 내가 사랑했던 여 자들이야. 그러니까 도망갈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지. 그래, 너희들이 하는 일이라는 게 누군가의 마음 속을 뒤져 들여다보고 이루어주는 건가?" "어떤 존재냐에 따라 다르지요." 마미의 느낌을 가진 보석이 말했다. 그녀는 여전히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내 베개가 된 자신의 허벅지를 조금 은 편안히 했다. 그녀만이 아니고 내 주변에 몰려든 여자들은 각각 내 팔 다리를 주무르며 나를 편안하게 해주었다. 내 옆에 누워 있는 에닌은 여전히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눈을 반쯤 뜬 채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언뜻 보면 잠을 자는 것처럼도 보인다. "저 애는 어떤 꿈을 꾸는 것일까? 너희들이 만든 공간에 저 애도 들어가 있는 건가?" "그녀가 만든 공간이겠지요." "왜 깨지지 않지? 나는 이게 만들어진 공간이라는 걸 알고 있어. 이게 환 각이라면 벌써 깨져야 하는 거 아닌가?" 나는 왕년에 나에게 미혹의 마법을 걸었던 녀석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마미가 옆에서 속삭여 주었다. "이것은 환각이 아닙니다. 쿠베린님." "환각이 아니면 실재 하는 거야?" "네, 이것은 우리들의 힘으로 만들어진 공간입니다. 당신의 바램을 그대로 비추어 주는 공간이에요." "그럼 너희들은 신인가? 어떤 것을 아예 만들어내는 것을 신이라 부르잖 아?" 나는 대굴대굴 구르며 내게 말하고 있는 마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 녀는 미소를 지은 채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우리들도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모릅니다. 주인님. 그저 우리들은 존재할 뿐." "주인님이라는 것은 우스운 일이잖아." 나는 나른해지는 몸을 마음대로 늘어뜨린 채 대답했다. "나는 너희들을 내 주머니에 넣었을 뿐 너희들의 주인은 아니야. 모든 것 은 대지의 여신에게 돌아간다. 바다에서 사는 것들은 바다의 여신들에게, 날리는 것들은 천공의 여신에게. 그 모든 것이 공정한 자연의 여신의 품안 에 있는 거라고. 인간도 아닌 주제에 주인님운운이라니 창피한 줄을 알아 라." 마미는 흠칫 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가요?" "그렇게 멍청한 소리를 하고 있으니 인간에게 이용당하는 거 겠지. 그래, 너희들 자신도 왜 인간들이 노리는 지 모르는 것이냐?" "모릅니다." "아는 건 대체 뭐냐? 너희들은 귀만 있고 머리는 없냐?" 내가 코웃음치자 보석들은 일제히 속삭였다. "뭐라구?" "............." 무슨 의미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녀들은 마치 파도처럼, 마치 바람처 럼, 냄비에 물이 끓어오르는 것처럼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 소리는 점점 커 지고 커져서 순식간에 주변을 다 삼킬 것 같았다. 나는 그녀들에게 둘러싸 인 채 내가 만든 하얀 빈 공간에 까만 점이 생겨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마 치 보글보글 스튜가 끓어오르는 듯한, 그 기묘한 소리는 여인들이 저마다 입을 오므리며 내고 있었다. 그 광경을 멍하니 지켜보면서 나는 새삼 그녀 들이 살아 있는 게 아니라 그저 하나의 물건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주인님?"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주인님?" 그녀들이 떠들어대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갑자기 내 앞에 드러낸 시커먼 공간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시커먼 구멍 안에 빛이 있었다. 그 빛 속에 있는 것은, 자그마한 언덕이었 다. 아니, 자그마하다고 말하는 것은 어쩐지 어폐가 있다. 산은 산인데 산 이라고 부르기에는 조금 민망한 수준의 나지막한 산. 그 산 꼭대기 위에 흰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건물이 있었다. 누가 보아도 신을 모신 신전이라 고 불릴 만한 화려함을 가진 그 건물은 수십 개의 새하얗게 빛나는 둥근 기둥들로 지탱하고 있었다. 섬세한 열 일곱 개의 꽃잎을 가진 커다란 페리 아신꽃을 새긴 신전의 그 하얀 기둥들을 주욱 걸쳐 들어서면 그 흰 기둥들 사이로 빛이 새어 들어와 중앙의 원형의 홀을 비췄다. 그 홀의 정 중앙에 는 1메테르 정도의 높이로 올려진 제단이 있고, 그 제단의 위에는 적어도 4메테르는 될만한 거대한 석상이 서 있었다. 방패를 들고, 창을 든 이 석상 은 전사의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별로 신성한 느낌은 들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이 모양새로 봐선 뭔가 인간의 신이 분명해 보인다. 그리고 그 석상의 앞에 인간이 있다. 그는 거대한 기둥 사이에 놓여진 석 상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고대인의 옷차림을 한 그는 아직 십대의 소년처럼 보였다. 창백하고도 매끄러운 소년다운 얼굴. 하지만, 여기 저기 찢어진 고급 능직의 휘장에는 피가 묻어 꽤나 심상치 않은 비극을 겪은 듯 잔뜩 굳어있었다. 그러고 보니 제단으로 오는 복도 곳곳에 핏자국이 언뜻 보였다. "신이여........" 그는 흰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제단에 몸을 구부렸다. 무릎 아래로 피가 방 울방울 떨어지며 원을 그렸지만 소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진흙과 피에 젖은 검은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소년은 제단 위에 던진 상태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신이여, 도와주세요, 주신(主神) 파스여, 나의 나라를 구원해 주세요." 그는 피에 젖은 손가락을 들어 석상에 손을 얹었다. 석상의 발치에 그의 피에 젖은 손가락이 닿고 애절한 흐느낌이 계속되었다. 하지만 석상은 변 하지 않았다. 여전히 그대로 석상은 석상일 뿐이었다. 문득 소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석상 아래 쓰러진 소년을 향해 칼을 든 사 내들이 나타났다. 사내들은 소년이 석상아래 움츠리는 모습을 보고 비열하 게 웃더니 가차없이 그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가련한 소년의 목이 그 칼 날에 가차없이 잘려져 나가 흰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석상의 가슴에 부딪쳐 떨어졌다. 피. 흰 대리석상에 묻은 소년의 피. 석상은 당연한 일이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 그의 검붉은 피 를 뒤집어 쓴 채 고고히 서 있을 뿐이었다. 전신(戰神)의 모습을 한, 갑주 를 입고 거대한 칼날을 든 턱수염을 기른 사나운 얼굴을 한 사내의 모습의 석상은 가슴에 검붉은 핏자국을 그대로 매단 채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 다. 소년의 목이 바닥으로 구르며 피를 뿌릴 때에도 성난 병사들이 소년의 몸을 난자하듯이 칼질을 해댈 때에도 석상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다시, 어둠. 마치 어릿광대 놀음을 보는 듯 어둠 속에서 빛이 솟으며 새로운 막이 올랐 다. 이 번에는 작은 소녀였다. 소녀는 바짝 마른 얼굴에 윤기 없는 긴 머리칼 을 늘어뜨린 채 제단 위에 앉아 있었다. 이미 쇠락한 듯 잔뜩 이가 빠지고 금이 간 대리석의 제단 위에 걸터앉은 소녀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 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초점 없는 동공은 틀림없이 눈이 보이지 않는다 는 증거였다. 그녀는 턱을 괴고 있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뭔지 알아들을 수 없는 낮은 소리로 그녀는 속삭였다. "나는 죽어요." 그게 무슨 의미인지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소녀는 턱을 괸 채 낮게 노래를 계속했다. 노래는 자장가처럼 잔잔하고 기복이 없었지만 어딘가 서글펐다. 어린애들이 부르는 동요처럼 리드미컬했지만 경쾌한 느낌은 전혀 없었다. 소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노래를 계속하면서 발장난을 하며 제단을 툭툭 걷 어 찼다. 그에 따라 낡은 석상의 제단은 약간씩 흔들렸지만 소녀는 그만두 지 않았다. "신은 죽었어." 소녀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머지 않아 갑작스런 소란과 함께 흰 베 일을 쓴 여인들이 걸어 들어 왔다. 그녀들은 무언가 은 쟁반에 그릇을 받 쳐들고 있었다. 그 그릇을 내미는 여인들의 표정은 비장하기 짝이 없었다. "신의 부름이십니다." 여인들의 말을 듣고도 소녀는 무표정한 채 동요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는 여인들이 내미는 그릇을 받아 들고 천천히 마셨을 뿐이었다. 눈 먼 소녀는 낮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속삭였다. "나는 죽어요, 신이여." 그녀의 입가에서 피가 솟아올랐다. 검붉은 피가 제단 위를 적시고, 마침내 석상의 발치를 얼룩지게 할 때에도 석상은 움직이지 않았다. 전신의 석상 은 그저 그대로 허공을 바라보며 무심하게 서서 소녀의 핏줄기를 빨아들였 다. 다시 어둠, 이거 뭘까? 과거의 역사? 이런 식의 이야기는 결코 유쾌하지 않은걸. 어떤 비극도 결국은 남의 일, 과거의 일일 뿐인데 이렇게 나에게 보여봐야 무슨 상관이지? 게다가 인간들의 역사따위 나에겐 관심도 없어. 여신도 아닌 남신의 구질구질한 석상을 언제까지 봐야 하냐? 석상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신전도 그 자리에 있었다. 해가 지고 달이 뜨고 해가 뜨고 달이 졌다. 바람이 불고 비가 와도 석상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소녀와 소년과 그 외 다른 자들의 울부짖음을 들으 며 그대로 서 있었다. 석상의 얼룩진 부분은 전혀 지워지지 않은 채 오히 려 점점 그 얼룩과 자잘한 상처를 늘리며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드러냈 다. 어둠 속에 홀로 서 있는 석상은 어딘가 모르게 서글펐다. 저게 전신의 모습을 한 녀석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그런 서글픈 모습. "바램이란 것은 무엇일까." 석상 앞에 어떤 녀석이 갑자기 등장했다. 마치 별로 재미도 없는 구질한 인간의 연극을 보는 것 같군. 차례차례 나타나는 이 몰골들이라니. 이미 이때는 신전의 그 수십개의 둥근 기둥들은 꽤나 많이 상했다. 금이 가고 기울어진 기둥들에는 그 예전의 화려했던 조각들은 다 깨어져 나가고 둔탁한 형태만이 남아 있었다. 어허, 시간이 꽤나 지난 모양이구만. 녀석은 마법사의 로브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여자들의 베일도 아닌 어 정쩡한 길이의 두건을 쓴 채 석상 앞에 서서 그것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작은 체구에 마른 두 종아리가 드러난 녀석은, 사십대 정도의 안색이 나쁜 사내였다. 그는 고대인의 복장을 한 채로 숱이 적은 땋은 머리를 천천히 쓸어 내리면서 석상을 향해 중얼거렸다. "신이여, 당신은 대체 어떤 인간의 바램을 들어 주었나요? 아니, 바램을 이루어주지도 못하는 신이라는 게 필요하기나 한 건가요?"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석상을 향해 조소를 던졌다. 그의 손에는 망치 같은 것이 들려 있었다. 보통 목수나 석수들이 쓰는 망치보다도 작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작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망치를 든 그는 주저 없이 석상 을 향해 내리쳤다. "나, 엘로르 쿠스차야! 이 영혼이 무저갱에서 헤맬 지라도! 인간들의 저주 를 받을 지라도! 그대들 신을 저주하노라! 그대들의 무심함에 대하여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자, 나 쿠스차야는 너희들 신을 저주한다!" 그의 망치가 석상을 내리찍었다. 금이 가고 색이 바랜 대리석상은 그의 망 치질에 가차없이 부서져 내렸다. 망치에서 나는 소리는 온 공간을 전부 다 울릴 듯이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신에 대한 인간의 비명처럼, 인간에 대한 신의 비명처럼 울려 퍼지는 그 망치소리는 마치 절규와도 같았다. 나의 소원을 들어달라고 애달피 울어대는 어린 소년소녀들과도 다름이 없 는 그 애원하는 소리는 망치소리를 타고 증오로 변해 온 공간을 뒤흔들고 있었다. 결국은, 바램이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증오로 변하는 선망과 존경은 어쩌면 저리도 이기적인가. "나를 증오해도 좋아! 이젠 이따위 석상 따위! 석상 따위에게 빌지 말아 달란 말이다!" 그는 증오로 눈을 새까맣게 물들이며 고함을 질렀다. 쩌엉쩌엉 울려대는 그 망치 소리와 더불어 석상은 부서져 사방으로 그 조각들을 날렸다. 겉으 로는 얼룩져 있었지만 그 흰 대리석의 석상은 안쪽은 눈부시도록 희었다. 오히려 깨지면 깨질수록 빛이 나는 것 같은 그 모양새를 보며 나는 약간은 흥미진진해졌다. 그래, 잘했다. 차라리 부숴라. "누구냐!" "감히 무슨 짓을 하는 거냐?" 그 석상을 깨던 쿠스차야라는 남자는 곧이어 그 망치소리를 듣고 달려온 사람들에게 잡혀 죽임을 당했다. 그의 피가 얼룩진 망치는 이미 다 부서져 내린 석상 아래서 도드라진 불길한 색깔을 띄고 누워 그 남자의 증오를 드 러내 보였다. 피에 젖은 망치와 하체가 부서져 무너져 내린 석상. 그 기묘한 모습을 지 켜보면서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뭐야, 이걸로 끝인가? 이 것은 이 근처에 서 일어난 사건들인 것 같은데 옷차림이나 뭐 그런 걸 봐서는 고왕국보다 도 훨씬 전의 일인 듯도 싶다. 대체 이런 사건들과 일곱 개의 기둥이라는 이것들과의 관계는 또 뭐야? 가만 있자? 쿠스차야라고 한다면......굉장히 귀 에 익은 이름인걸? 그 뭔 구질구질한 신의 이름이 쿠스 뭐 어쩌고저쩌고 하지 않았던가? 어둠은 사라지지 않았다. 부서진 석상은 다시 만들어지지 않은 채 그대로 무너져 가는 제단 위에 놓 여져 있었는데 또 몇 번이나 계속해서 해와 달이 스쳐지나갔다. 이제 신전 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주변에 굴러다니는 흰 대리석조각들이 그 왕년의 화려했던 위용을 드러내고 있을 뿐, 신전의 주춧돌 사이에서는 푸 른 이끼가 자라고, 억새풀이 자라나고 잡초들이 자라나며 그 왕성한 대지 의 여신에의 예찬을 노래했다. 석상은 여전히 누워 있었다. 하체가 부서져 나가고, 잔뜩 이끼가 끼고, 잔뜩 부서져 버린 그 석상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이미 반 이상 부서져나간 제단 위에서 그대로 누워 있다. 석상의 손가락 사이로 토끼풀이 자라고, 석상의 허리춤에선 엉겅퀴가 자라나 길게 늘어졌다. 해와 달이 스쳐지나가고 바람과 비가 그 석상에 몇 번이나 침범 하는 그 시간이 지나가고, 문득 그 무너진 석상 근처로 한 소녀가 다가왔 다. 얼굴을 반쯤 가린 소녀는 거친 손마디를 가지고 있었다. 가축이라도 키우 는 듯 허리춤에 매단 빈약하게 생긴 회초리가 그녀가 걸을 때마다 한들한 들 흔들렸다. 그녀는 진흙으로 더러운 앞치마에 손을 어색하게 닦더니 무 너진 석상 앞에 서서 조심스레 머리를 조아렸다. 그리고는 어색한 표정으 로 자그마한 들꽃을 바쳤다. "어머니가 병에서 낫게 해주세요." 그녀는 약간은 쑥스러운 듯 아무도 없는 석상 앞에서 여기저기 두리번거리 더니 들꽃을 제단 위에 올려놓은 위치를 이리저리 바꿔 보다가 슬그머니 뒤로 물러섰다. 이 반쯤 부서진 석상이 두려운 것인지, 어려운 것인지 애매 한 표정을 지은 그녀는 그저 고개를 푹 숙이더니 종종걸음으로 빠르게 도 망쳐 나갔다. 그 순간 나는 그 때 소녀의 발걸음에 따라서 하나 씩 뭔가가 석상에서 튀 어나오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일곱 개의 빛 덩어리였다. 소녀가 종종걸 음으로 이미 쇠락한 신전을 한 걸음 벗어날 때마다 그 부서진 석상의 조각 에서 빛이 떠올랐다. 색색으로 빛나는 그 빛 덩어리는 곧이어 반짝반짝 윤 이 나는 수정으로 화했고, 곧 그 수정은 눈부신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 빛은 일곱 개의 빛나는 기둥으로 변하더니 잠시 후 주변은 그 광채로 가득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 옛날의 아름다웠던 대리석의 신전보다도 더 화려한, 그 보다도 더 커다란 일곱 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진 빛의 신전이 생겨났다. 어째서 일곱 개일까? 대체 어떤 이유로 일곱 개일까? 나는 멍하 니 그런 생각을 하며 그 모습들을 지켜보았다. "어머니의 병을 낫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자가 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들을 낳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풍년이 들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인간들이 일제히 절을 한다. 기도를 한다. 일곱 개의 빛의 기둥을 향해 인간들이 기도를 한다. 빛의 기둥들은 마치 무지개가 그대로 지상 위에 내려선 듯 우아한 빛깔을 뿜어내면서 고고히 서 있었다. 그들이 무너진 석상의 위에서 빛을 내고 있는 것을 이미 사람 들은 잊고 있는 듯했다. 이 빛의 기둥들이 석상에서 나온 것도 그들은 모 르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그저 기쁨과 외경에 찬 얼굴로 기도하며 바라고 또 애원하고 있었다. 그 옛날 석상 앞에서 죽어간 인간들처럼. "이건 대체 뭘까." 어느 순간, 또 다시 빛의 기둥 앞에 한 사내가 등장했다. 자줏빛 망토를 걸 치고 있는 사내는 왕관을 쓰고 고대인다운 땋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채 팔짱을 끼고 있었다. 턱수염을 기른 그의 각진 턱에는 뺨과 입가를 연결하 는 긴 흉터가 자리잡고 있었지만 뭐랄까 번쩍번쩍 빛나는 그 두 눈 덕분에 구질한 인상은 전혀 없었다. 그는 넓은 가슴을 활짝 편 채 미소를 짓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뒤에는 가녀린 몸집을 한 소년과 소녀가 턱수염의 약간은 겁에 질린 채 빛의 기둥을 바라보고 있었다. 빛나는 일곱 개의 기 둥이 존재한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 듯, 겁에 질린 두 아이들은 저마다 사내의 자줏빛 망토자락을 움켜쥐고 있었다. "이 것을 신의 기둥이라 부른다고 한다. 바라는 것은 전부 들어준다고 했 다. 너희들의 바램도 말해보아라." 왕관을 쓴 사내는 건방진 표정으로 턱 끝으로 소년과 소녀에게 말했다. 소 년은 긴장된 얼굴로 크게 외쳤다. "그랑프라임이 영원하기를!" 그렇게 소년이 외치자 왕관을 쓴 사내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신께 기도하지 않아도 상관 없다. 우리들은 언제나 강하다. 우리들 보다 강한 자는 대륙에 존재하지 않아. 우리들이 두 팔을 벌려 아인족과 함께 하는 한, 우리들보다 강한 자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가 그렇게 말하자 소년은 얼굴을 붉히며 낮게 대답했다. "하지만 전, 아인족들은 좋아하지 않아요." "제스엔, 나의 아들아. 너의 그런 마음은 왕국에 도움이 되지 않아. 외견 은 중요한 게 아니다. 진정 중요한 것은 다양한 종족들과 어울려 사는 넓 은 마음이다. 저 넓고도 거친 산맥을 보아라. 저 산맥, 저 산맥이 바로 우 리들의 방벽이자 터전이다. 거인족이 누웠다는 저 거대한 산맥을 우리들이 일구고 가꾸어 만든 것이 우리들의 그랑프라임. 자랑스레 가슴을 펴고 생 각해라. 이 땅위에 사는 자라면 어떤 자든 가슴을 열고 맞이하는 것이다." 왕관을 쓴 사내는 커다란 눈에 웃음을 머금고 노래하듯 말했다. 고대인이 란, 뭐랄까 꽤나 음율이 담긴 어투로 말하는 것 같아서 노랫가락을 듣는 기분이 든다. 그래, 이봐, 너 말 잘하는 구나. 소년은 약간은 어색한 듯 어깨를 움츠렸지만 사내의 말에 순응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 동안 소녀는 더 움츠린 채 고개를 숙이고 있 었다. 남매로 보이는 이 두 소년소녀는 자신들이 애써 말한 소원이 사내의 마음에 들지 않을까봐 전전긍긍하고 있는 듯했다. "아이엘. 말해보아라. 너의 소원은 무엇이냐?" 사내는 소녀를 바라보며 자상하게 물었지만, 아마도 그것은 본인생각일 것 이다. 사내는 길게 난 흉터덕분으로 아무리 잘 봐줘도 자상하게는 볼 수 없는 얼굴이었다. 그가 그렇게 고개를 숙이며 묻자 소녀는 더더욱 겁에 질 린 듯 뒤로 물러서며 고개를 저었다. "모, 몰라요." "허어, 말해봐. 아이엘, 이 기둥은 뭐든 들어준다고 하지 않았나?" 아이엘이라는 소녀는 약간은 불안한 얼굴로 기둥들과 사내를 번갈아 보았 다. 그리고는 약간은 주저하며 입을 다물었는데 그 것이 꽤나 답답했는지 사내는 조금 다그쳤다. "저는......저는........." "말해." 옆에 있던 소년도 다그쳤다. 소녀는 갑자기 다그치는 소년을 향해 원망스 런 시선을 던지다가 자꾸만 다그치는 두 사람에게 밀려 기둥의 앞으로 다 가섰다. 소녀는 몇 번이고 망설이듯 입술을 달작이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저기....저기......" 소녀는 자신을 쏘아보듯 계속해서 주시하고 있는 두 사람의 시선을 받으며 살짝 떨었다. 이 소녀는 아무래도 별로 말하고 싶은 소원은 없었던 듯 망 설임은 꽤나 심했다. 허기야, 할 말도 없는데 괴이쩍은 기둥 앞에서 미친 놈 마냥 소원을 비는 것도 별로 내키는 일은 아니겠지. 그러나 저러나, 이 작자들 꽤나 낯익은데 혹시나 이거 고왕국의 시조왕쯤 되는 놈들 아냐? 저 제스엔이라는 이름은 분명 엘프 호레아이엘과 맺어져서 고왕국을 세웠다는 그렇고 그런 놈의 이름 같은데. 저 빈약하기 짝이 없는 놈이 아름다운 고 대엘프를 꼬셨단 말인가? 거참, 세상 말세로다. "아버지, 저는........." 소녀는 말하려다 말고 뒤에 선 왕관을 쓴 사내를 향해 울상을 지어 보였 다. 그러나 사내는 주저하지 않고 손을 내저었다. 그냥 말해보라는 그런 몸 짓 같다. "저는........" 아이엘이란 계집아이는 하는 수 없다는 듯 다시 기둥을 향해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는 어색하게 더듬으며 말했다. "저는, 고양이를 가지고 싶어요. 누구보다도 아름답고 영리한 고양이를." 그리고 주변은 다시 흰색으로 물들었다. 나는 한동안 텅 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황당한 결말이다. 그래, 소원을 이루어주려고 애를 쓴 신의 조각들이 바로 이 보석들이라 치자고. 그런데 이 놈들이 결국 고양이 몰골을 하고 있는 게 조만한 계집애가 고양이를 바랬기때문이란 말이야? "이게 다냐?" 내가 누운 채로 보석들을 돌아보자 그녀들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꼬맹이 이후 누구든 너희들에게 소원을 빈 녀석들이 있었을 거 아니야? 그런데 왜 너희들은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이지?" "다른 모습을 원한 자는 없었습니다. 단지 소원을 빈 자들만이 있었을 뿐 이죠." "그런데 아직 내 질문은 끝나지 않았어. 너희 같은 대단한 힘을 가진 존 재들이 왜 신전에서 어슬렁거리며 병신계집애의 노리개가 되어 있었던 거 야?" ".........." 보석들은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너희 같은 힘이라면 저 놈들, 그러니까 룬드바르의 군대정도는 물리칠 수도 있었다는 그런 이야기잖아? 그런데 아무도 너희들에게 바라지도 않았 단 말인가?" "수 백 년 간, 우리들에게 소원을 빈 자들은 없었습니다." 보석들은 일제히 대답했다. "그렇다면......너희들의 힘을 아는 자들이 아무도 없었단 말이야? 설마하 니? 뭔가의 기록에도 남아 있었을 텐데?"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날 이후, 그랑프라임의 왕은 저희들을 기르며 아무에게도 우리들이 누구인가를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결국은 왕실의 놈들이 너희들을 독점했다는 말이겠군." 나는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그렇지. 이 정도의 대단한 힘을 가진 녀석들을 보통 인간들에게 풀어 놓을 리가 없지. 고왕국의 왕들은 이 고양이들을 왕실에서 키우면서 이 놈 들이 대체 어떤 놈들인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것이다. 그저, 고양이라 고, 성스러운 고양이라고만 말했을 게다. 그리고 결국 이 고양이들은 고양 이로 키워졌겠지. "하지만, 그 긴 긴 세월동안 너희들에게 소원을 빈 자들이 분명히 있었을 텐데. 일단 너희들은 신의 귀라고, 신전에서 귀히 여겨진 것들이잖아? 그러 니까 뭘 몰라도 이랬으면 좋겠다 저랬으면 좋겠다 따위의 소원 정도는 빌 었을 텐데." 보석들은 일제히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아, 저렇게 움직이는 몰골을 보자니 어째 정 떨어지네. 과연 살아 있는 것들은 아니라니까. "모르겠습니다."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들은 저희들에게 빌지 않았습니다." "그래, 너희들에게 안 빌고 텅 빈 신상들에게 빌었겠지."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대굴 굴러서 아직도 멍하니 누워 있는 에닌의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그녀는 눈물이 고인 눈으로 웃고 있었다. 아무래도 행복한 꿈인 모양이었다. 이런 행복한 꿈에서 깨우기란 꽤나 마음 아프지 만 그래도 꿈은 꿈. 현실은 현실이다. 두 발이 있는 이상 현실에 발을 붙이 고 자박자박 걸어가야 하는 법. 산 것은 산 것답게 움직이자고. "에닌." "......" "에닌!" 에닌은 여전히 말을 듣지 않았다. 나는 보석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언제 깨냐? 이 애는?" "그녀가 바라는 것은 망각입니다." 보석이 대답했다. "망각?" "네, 그녀는 망각을 원했습니다. 행복했던 시절의 어린 날을 기원했습니 다. 그녀는 그 꿈을 꾸며 평안을 얻었습니다." 나는 미소짓고 있는 에닌의 얼굴을 보았다. 그렇군. 과연 아직도 상처란 아물지 않은 것이다. 아니지, 그런 식으로 가 볍게 아물 상처였다면 그건 상처라고 할 수도 없을 거야. 그동안은 오히려 이 애가 입을 다물고 있으니 괜찮겠거니 하고 방심했었어. 누구든 무력으 로 짓밟히는 것은 쉽게 잊을 수 있는 것이 아니지. 게다가 그것도 몇 년간 이나 마음도 가는 어린 아이가 당한 것 아니던가. 느물느물한 다 큰 놈이 당한 것과 어디 같은가? "이 공간은 내 것인데 왜 에닌이 이러고 있는 거야?" "당신은 평안을 원했습니다. 그러니까 당신의 공간에 들어선 그녀 역시 평안을 구할 수 있게 된 것이죠." "평안이라는 게 그저 누워 잠만 자며 꿈만 꾸는 것이라면 내가 바라는 게 아니야." 나는 에닌을 안아 올리며 천천히 일어섰다. "내가 바라는 평안이라는 것은, 피가 들끓을 정도로 뛰고 움직이며 가슴 찢어지는 일들과 일들 사이에 얻는 휴식, 내가 한 일과 내가 당한 일들 사 이에서 얻는 시간을 말하는 거야. 나는 허망한 꿈을 바라지 않아. 나는 휴 식을 바라는 거라구." 순간, 공간은 깨졌다. KUBERIN...... 빛을 향해 걷는다 그 빛에 눈이 타고 몸이 타오를 지라도 걷지 않으면 안될 길이 있다 3 나는 눈이 퉁퉁 부운 에닌과 함께 걸었다. 내 주머니 안에서 이리 저리 흔들리고 있을 그 놈의 보석들을 내버려 두고 나는 두 발로 땅 위를 걸었 다. 콧속으로 스며드는 냄새가 향기롭지만은 않아도 이게 바로 흙냄새니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발바닥과 살갗으로 스쳐지나가는 풀잎이 따가워도 그게 바로 숲이니 어쩔 수 없는 거다. 눈이 부시고 몸 여기저기가 쑤셔도 그게 내 몸뚱이니 어쩔 수 없는 거야. 아, 그래도 내 몸뚱이는 훌륭해. 정 말로 멋지지 않은가. 나는 내 몸뚱이가 정말 좋아. 이 몸뚱이를 만들기 위 해 수백년간 얼마나 공을 들였는데? 후. 역시 이 몸은 멋져. 어떤 미친놈이 와서 바꾸자고 한다면 그 놈 모가지를 댕강 잘라줄 테다. "쿠베린님........." 뒤에서 에닌이 불안한 듯 불렀다. "왜?" "........어디 편찮으세요?" "아니?" "그런데 왜 자꾸 어깨를 으슥거리세요?" "응, 어깨가 잘 있나 확인했다." 내 말에 에닌은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퉁퉁 부운 눈과 충혈된 눈은 불쌍 하지만 아름답지는 않다. 가끔 눈물 흘리는 여인이 아름답다고 하는데 나 는 그 말이 얼마나 왜곡된 이야기인지 잘 알고 있다. 눈물이 나오면 콧물 도 나오고 눈은 시뻘겋게 충혈되고 붓는데 대체 어디가 아름답다는 거야? 그건 아름다운 게 아니라 지저분한 거야. 물론, 지저분해도 뭐랄까 불쌍해 보이니까 그저 귀엽게 봐주는 거지 그 모습 자체는 결코 아름다운 게 아니 라고. 눈을 비비던 에닌은 약간 불안한 듯 날 보며 말했다. "어떤 일이 있었나요?" "몰라도 돼." "행복한 꿈을 꾸었어요. 어릴 때의 꿈이요." 에닌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입을 열어 말했다. 약간은 어색한 미소를 짓는 그 얼굴이 꽤나 귀여워서 나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네 아빠가 이렇게 머리를 쓰다듬어 주더냐?" "네....." 방긋 웃는 에닌을 보고 나는 마주 웃어 주었다. "귀여운 꼬마였을 거야." "저는 별로 예쁜 편은 아니었어요. 하지만 커지면 미인이 될 거라고 다들 말씀해 주셨죠." "응, 그래, 그건 나도 장담하지. 넌 미녀가 될 거야. 이미 요염한 맛이 나 오기 시작했다고." 나는 엄숙하게 말해주었다. 그러자 에닌은 얼굴을 붉히며 조심스레 물었다. "정말인가요?" "물론이지, 나의 안목은 모든 종족들이 다 인정하는 바야. 내가 미녀다 라 고 말하면 그건 미녀지. 물론, 내가 아니라고 하면 그건 아닌 거야." 내 말에 에닌은 기쁜 듯이 웃었다. 이봐, 에닌, 넌 아직 어려. 나의 상대가 되려면 20년쯤 더 갈고 닦으렴. 나는 아직은 아비의 마음가짐으로 에닌의 머리를 쓸어 주었다. 그래, 아직 은 아비의 마음이지. 그렇고 말고. "그런데 지금 어디로 가는 거지요?" "맨 처음 이야기가 시작된 곳." "그게 어딘데요?" "고왕국의 수도를 다 내려다 보는 가장 높은 산." "거긴 왜요?" "그 곳에서 일이 시작되었거든." 엘루리아 쿰, 고왕국 그랑프라임의 수도. 분지로 둘러싸인 거목들의 도시, 그리고 나지막한 야산들로 둘러싸인 태고의 도시. 도시는 숲과 야산으로 이루어져 대로는 몇 개 되지 않는 듯하다. 그러고 보니 여기 이 곳에 와서는 위쪽을 올려다 본 적은 거의 없었던 듯한데. 허 어, 그것은 결국 무척 바빴다는 이야기로군. 아니, 어쩌면 어허 아하 따위 더 이상 지껄일 새는 없을 듯 싶기도 하다. 고개를 들어 북쪽을 보면, 푸른 하늘 아래 엉거주춤 엎어져 있는 엉덩이 같이 생긴 야산이 하나 보인다. 그 야산은 정말 엉덩이처럼 두리둥실 두 개의 모양새를 하고 있었는데 푸른 수풀과 적당히 엉긴 누런 화강암과 어 우러져 이 암흑산맥의 산등성이치고는 꽤나 헐벗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아, 그렇다. 저것은 과연 엉덩이로군, 헐벗은 엉덩이. 나는 에닌의 손을 잡은 채 씩씩하게 걸었다. 조금 속도를 빨리 할까 싶어 에닌을 덥석 안아 들어 올리고는 이내 달리기 시작했다. 에닌은 얌전히 내 목에 팔을 감고 조용히 가쁜 숨을 억누르고 있었다. 두근거리는 심장소리 가 그녀가 그동안에 느꼈던 이런저런 일들에 대해 말해준다. 두근, 두근, 그래요, 나 꽤 괴로웠다구요, 아니야, 나 괜찮아욧. 아뇨, 나 괜찮지 않아요. 나는 괴롭고 증오스럽고 한스러워요. 두근두근, 아니요, 그 런 거 다 잊을 수 있어요. 하지만 다른 이들은 나에게 일어났던 일을 기억 할 거에요. 이런 일을 당하고 어떻게 살아 나갈 수 있을까요? 아무리 씻어 도 더러운 기분은 사라지지 않아요. 두근두근, 그 옛날 아빠 엄마와 같이 지내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요. 이런 일 따위 없었던 그 옛날로. 인 간의 남자들에게 짓밟히기 이전의 옛날로. 두근두근.......두근두근....... 어린아이야. 세상에는 괴로운 일이 많단다 따위를 지껄일 생각은 추호도 없다. 괴로움이라는 것은 남이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물건이다. 내 손가락 에 박힌 가시가 남의 허벅지에 박힌 칼날보다도 아픈 법. 그러니까 잘난 척 구는 놈들따위는 시궁창에 던져버려라. 나는 할 말이 없다. 세상에는 불쌍한 놈은 없다. 불쌍히 여기는 놈들만 있 을 뿐. 에닌, 너는 불쌍하지 않아. 너는 너 자신만으로도 충분히 괜찮은데 혼자 그러고 있을 뿐이야. 나는 동정하지 않아. 동정하는 놈들이야말로 자부심에 가득 차 남들을 아래로 보는 것들이지. 그러니까 네 심장 소리 좀 어떻게 해봐라. 나는 워낙에 이해심이 넘쳐서 네가 두근거리는 소리만으로도 너무나 잘 느낀단 말이다. 오오, 여신이시 여, 당신은 왜 나를 이처럼 이해심 많은 분으로 만들어 놓으셨나요? 왜 이 리도 현명하게 만들어 놓으셨단 말입니까? 그리고 왜 이처럼 명민한 분으 로 만들어 놓으셨단 말입니까? "꺄악!" 놀란 에닌이 비명을 질렀다. 물론, 그녀는 내 생각을 알고 비명을 지른 건 아니다. 내 발밑으로 화살이 지나갔기 때문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나는 그놈의 화살을 여유 작작 피하 며 다른 곳으로 발을 디딜 수 있었다. 오오, 여신이여 당신은 왜 내 육체마 저 이토록 완벽하게 만드셨단 말입니까? 정말 당신은 뭘 좀 아시는 분이로 군요. 살펴 볼 것도 없이 그 화살이 어디서 날아온 것인지 아는 나는 또 한 번 여유 작작 한 바퀴 맴을 돌아 보이며 나무 둥치에 발톱을 박고 잽싸게 나 를 향해 달려, 아니 날아오는 화살 서 너 개를 후려쳐 주었다. 화살이 풀기 없이 나동그라지자 비명소리 비슷한 소리와 함께 칼과 창을 앞세운 놈들이 일제히 튀어 나왔다. 수풀 속에서 튀어나온 녀석들은 비슷 한 복장을 하고 있는 품이 아무리 보아도 별로 동정을 받을 만한 모습들이 아니었다. 룬드바르의 병사들다운 그 놈의 색색가지 깃털을 꽂은 놈들은 나를 보자 살기와 공포에 찬 눈길로 쏘아보며 외쳤다. "그 때의 그 괴물이다! 죽여라!" 그때의 그 괴물이라니, 정말로 한심한 발언이로다. 나는 한 바퀴 더 돌아 녀석들을 밟아 줄까 하다가 에닌을 안고 피를 보는 짓은 삼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고 말고. 여인을 품에 안고 그런 짓을 하는 것은 정말로 예의 없는 일이지. 나는 나를 향해 달려드는 녀석들을 향해 상큼한 미소를 던지며 내가 발톱 을 박고 있던 그놈의 거목 쿠야마...뭐더라, 어쨌든 간에 이놈의 나무둥치를 손톱으로 후려갈겼다. 콰앙 하는 소리와 함께 아름드리 거목이 갸우뚱하자, 나를 향해 달려들던 녀석들의 얼굴이 시퍼래졌다. "으악!" "피, 피해라!" 거목이 갸우뚱하며 자리를 못 잡는 듯하길래 나는 상냥하게 쓰러져 가는 나무에 손톱을 박아 방향을 지정해 주었다. 그러자 고맙다는 인사와 더불 어 거목은 먼지를 휘날리며 천천히 쓰러졌다. "캬아아악!" "우악!" 비명소리와 함께 녀석들이 사라졌다. 물론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그 정도 거목이 무너지며 잔가지들도 같이 나자빠졌는지라 원하든 원치 않 던 간에 병사들은 납작하게 깔렸다. 여기저기서 비명소리가 터져나오는 소 리를 들으며 나는 살아남은 병사들의 행운에 감탄했다. 대지의 여신의 사 랑을 담뿍 느끼며 땅 바닥에 얼굴을 박고 기분 좋게 누워 있어라. 너희들 은 오늘 여신의 자비로 행운을 잡은 거라구. 이 나에게 감히 칼날을 들이 대고도 살아 남았으니 말이야. 나는 미소를 지으며 에닌을 안은 팔에 힘주 어 달리기 시작했다. "오호 오호, 나는 쿠베린, 나는 잘난 분, 너무나 잘나서 어디선가 울고 있는 수놈들이 한 보따리....." 자아, 울지들 마라, 언젠가는 나 같이 멋진 분으로 태어날 수 있는 영광이 주어 질 테니까. "쿠베린님." 에닌이 품안에서 속삭였다. 나는 통통 뛰어 오르는 가죽공처럼 이 바위에서 저 바위로,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도약하며 달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휘날리는 나의 멋진 검은 머 리칼과 힘 좀 쓰는 이 잘 빠진 다리를 생각하면 이것도 나쁘진 않아. "..........설마하니 진짜 그렇게 생각하고 계신 건 아니죠?" "뭐가?" "저어, 그 노래요." 에닌이 약간은 수줍은 듯 어색하게 말했다. "뭐가?" "설마 정말로 그렇게 생각을 하고서........" "훗, 에닌, 너는 아직도 날 모르냐? 나는 어디까지나 진실만을 말하는 분 이란 사실을 잊으면 곤란해." ".........." "진실, 진실! 그 진실이라는 것이 눈에 보인다면 그것이 바로 나! 이 쿠베 린님이시다. 나로 말하면 미와 진실과 지성과 지혜의 결합체! 거기에 완벽 한 육체와 완벽한 미모로 온 여신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그런 분 이란 말이다!" ".............정말요?" "물론이지!" 나는 당당하게 선언하며 계속해서 내달렸다. "그런 걸 의문시하다니, 에닌, 역시 넌 어리구나." 나는 시익 웃어주었다. 에닌은 그 말에 갑자기 얼굴을 확 붉히더니 항의했 다. "전 어리지 않아요." "글쎄다. 완벽한 성인여성들은 내 말에 의문을 가지지 않던데?" ".....그, 그건...." 에닌은 다소 당황한 미소를 지으며 전후좌우를 훑어보았다. 나는 시익 한 층 더 매력적인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완벽한 여성만이 완벽한 남성을 알아보는 법이다. 훗, 에닌, 너는 아직 어리다니까." "난 어린애가 아니라니까욧!" 갑자기 에닌은 큰 소리로 말하다가 흠칫 놀라 얼굴을 새빨갛게 붉혔다. 그렇게 그녀가 큰 소리로 말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녀는 자기 목소리에 자 기 스스로 놀란 듯 얼굴을 붉히고 살짝 고개를 숙였다. "쿠베린님은, 짖궂으세요." "훗, 나는 상냥해. 나는 상냥하고 친절하며 나 자신이 바로 친절의 화신이 지." "그렇다면 쿠베린님은 진실하면서도 상냥하고, 강하시면서도 아름다운 분 이군요." "음, 이제야 이해하는 군." "엉터리야!" 깔깔대고 갑자기 에닌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 아가씨가 소리내어 웃은 것은 대체 얼마만의 일인가. 나는 흐뭇한 얼굴 로 마주 웃으며 그 이마에 키스해주었다. 에닌이 얼굴을 붉히자 나는 더 큰 소리로 웃어주었다. "이제 너도 어른이 되어가는 모양이군, 나의 이 매력을 눈치채는 걸 보면 말이야." "엉터리!" 에닌은 더 커다란 소리로 웃었다. 오랜만에 듣는 엘프꼬맹이의 웃음소리는 푸른 하늘에 너무나 어울리는 깨 끗한 울림을 가지고 숲속에 울려 퍼졌다. 그래, 숲의 여신이여, 당신들의 자녀들이 내는 소리를 듣고 기뻐하시라. 당신의 딸이 오늘 웃음을 겨우 되 찾았으니 품을 열어 보듬어 주시오. 이 당신의 자녀는 꽤나 아픔을 많이 알아 버렸단 말이야. 검은 빛을 띤 녹색의 숲 속에서 나는 엘프의 웃음과 함께 달렸다. 저 구 질구질하게 얽히고 설킨 인간들의 욕망 위에 세워진 인간의 신전으로. 신전으로 걷는 동안 이렇고 저런 것들이 막아 왔다는 것에 대해서는 새삼 길게 할 말은 없다. 워낙 내 발 끝에 채이는 게 많아서 나는 그저 이리 차 고 저리 차며 상냥한 웃음을 건네주었다고 밖에 더할까. 그렇다. 세상에는 내 발에 채이고 싶어 눈물을 흘리며 온 몸을 던져오는 좀 모자란 것들이 넘쳐나고 있는 것이다. 그토록 나를 사모해 왔다면 나도 사양하지 않겠다. "저놈, 저자야!" "저 괴물을 막앗!" 비명소리와 함께 우르르 와르르 쓰러지는 녀석들 사이로 뛰고 달리며 나 는 크게 웃어주었다. 가련하기도 하지, 기특하기도 하지. 그토록 평소에 나 를 사모해 왔단 말이더냐. 너희들의 마음을 기꺼이 받아주지. 나는 녀석들이 바라는 대로 차 주기도 하고 던져 주기도 하면서 인간의 병사들이 만들어낸 벽을 뚫고 산을 올랐다. 뭐, 산이라고 부르기도 무안한 조그마한 산을 오르며 나는 에닌을 향해 말했다. "정말 이 엉덩이 같이 생긴 산에 어지간히도 많이 모여 있구만." "네?" "저길 보라고, 넘쳐나는 것들을." 내가 보석들의 참견으로 보았던 광경, 쇠락하고 무너져 내린 대리석의 주 춧돌만 남은 신전터에 꾸역꾸역 중무장을 한 병사들이 나타났다. 짙푸른 녹색의 수풀 위에 버티고 선 녀석들은 돌멩이보다도 많아 그놈의 야트막한 야산을 전부 덮고 있었다. 이 정도 숫자에, 이정도 무장을 한 자신들이 질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는 그 의기양양한 면상에 어쩐지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이봐라, 룬드바르의 어린 아이야, 아니, 인간의 황제여. 너는 병 사들을 수 천 수만 모을 수 있겠지만 나는 그들이 살아 있는 것인 이상 반 드시 물리 칠 수 있어. 모조리 죽이지 않아도 병사들은 바보가 아닌 이상 두려움이라는 것을 알거든. 너, 두려움이란 게 뭔지 좀 알아야 하지 않겠 냐? "어, 어쩌죠?" 에닌이 겁에 질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녀는 아예 땅바닥이 보이지도 않 을 정도로 빽빽하게 들어찬 병사들과 녀석들이 번뜩이고 있는 그 창날들을 바라보며 입술을 씹고 있었다. "글쎄다." 나는 느긋하게 대꾸하면서 주변을 주욱 훑어보았다. 주변은 오히려 조용했다. 녀석들은 나 하나를 둘러싼 채로 천천히 맴을 돌 고 있었다. 아마도 나를 완전히 포위할 심산이었는지 크게 소리치거나 동 요하는 놈들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둘러싼 병사들의 얼굴에는 두 려움과 호기심과 증오에 가까운 기묘한 살의가 번뜩여 결코 유쾌하다고는 할 수 없겠다. 물론, 이 정도의 살의에 몸을 사리고 <어마나 무서워요> 따 위를 지껄일 나는 결코 아니지만 어쩐지 예감이 썩 좋지는 않은 걸. 한 눈에 보아도 적어도 수 백은 넘을 듯한 병사들은 슬금슬금 움직이며 나를 완전히 에워싸기 시작했다. 녀석들은 창날을 내 쪽으로 돌려 내밀며 위협하듯 칙칙거렸는데 그 모양새가 마치 개 몰 듯 하는 것 같아 영 우습 다. 병사들이 내게 내민 시퍼렇게 빛나는 창날은 햇빛에 반사되어 번쩍번쩍 은빛을 내며 화려한 장식을 이루었다. 나를 둘러싼 은빛의 꽃다발을 바라 보며 나는 그 창날 사이로 또 다른 움직임이 이는 것을 그냥 지켜보았다. 흔들리는 창날 사이로 한 무리의 녀석들이 병사들 사이로 끼어 들고 있었 다. 그 녀석들은 다른 병사들과 달리 제법 거센 기운을 띤 채 내 쪽으로 다가와 나를 포위했다. 냄새가 다른 녀석들이 약 삼십. 이건 어쩐지 익숙한 냄새로다. 노란 눈. 노란 머리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인족 치고는 거친 얼굴 생김새. 덩치는 오히려 사인족보다도 크지만 사인족보다도 약한 것들. 나는 모처럼 녀석들을 찬찬히 관찰했다. 놈들은 사인족과 정말로 흡사한 냄새를 가지고 있었다. 그 냄새는 누린내와 흡사한 발정기의 강아지 같은 냄새였지만 사인족 특유의 매캐한 유황냄새 같은 것은 없었다. 사인족의 체취는 약간 유황냄새처럼 매캐하다. 녀석들은 공격할 때 언제나 약간씩 고개를 앞으로 숙여서 돌진하는 버릇이 있긴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일 반적인 이야기지 실제로 사인족 놈들이 정말 돌진하듯이 덤벼드는 짓거리 는 결코 하지 않는다. 아무리 모자라도 녀석들도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지 긋지긋한 놈들 아니던가. 그건 그렇고. 참으로 못 봐주겠군. 그 면상들이라니. 사인족과 닮은 몰골이되 전혀 사인족 같지 않은 것들. 변신도 하지 않았는 데 비죽이 튀어나온 둔탁한 손톱이나, 입술 사이로 드러난 송곳니, 투실투 실한 손 등 위의 누런 털. 사인족이 어떻게든 원했던 그들의 후손이 저런 것이었던가. 아니지, 이것은 인간들이 사인족을 만들려고 했다는 증거품. 갑주까지 걸친 가짜 사인족 창병들이라. 어디엔가의 이야기책에서라도 튀 어나올 모양새들이군. 두 겹 세 겹에 걸친 녀석들의 방어진은 어쩐지 내가 가고 있는 방향이 엄청나게 중요할 것 같은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그렇고 말고, 이곳에 뭔가 엄청난 일이 날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 "..............사인족인가요?" 에닌이 내 팔뚝을 잡으며 속삭였다. "아니." 쪼가리지.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쪼가리도 아닌 가짜라고나 해둘까. 아, 그러고 보니 생각났다. 그놈의 존재의 증명, 존재의 혼돈, 존재의 의미 등등 존재와 관련된 그 고상한 척 할 수 있는 모든 단어들과 연관해서 생 각해보건대, 진짜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 것들은 다름 아닌 저 놈들 아냐? 저 놈들이야 말로 헷갈리는 거잖아? 사인족으로 이름을 붙였지만 실제로는 사인족이 아니고, 사인족이 자기 자식들이라고 생각해왔지만 사실은 아닌 것들. 인간이 만들어 내서 사인족 에게 건넨 것들. 저거야말로 알 수 없는 것들이지. 뭐, 녀석들은 존재의 증 명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인다만. 무식하게도 녀석들은 나를 향해 이를 드러냈다. 그리고는 위협하듯 입가 를 바르르 떨며 이죽거리기 시작했다. 그 괴이한 몰골에 나는 오히려 웃음 이 나왔다. 이빨이 좀 나오고 침이 뚝뚝 떨어지는 몰골은 언제 봐도 멍청 하기 짝이 없어. 그런 표정으로 설마하니 날 위협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 는 건 아니겠지? 내가 녀석들의 정신상태와 분수에 대해 깊이 고찰하고 잇는 동안 갑자기 병사들과 병사들의 사이, 그리고 가짜 사인족 사이가 떠들썩해지기 시작했 다. 뭘까나 하고 살피기도 전에 곳곳에서 악악 윽윽 소리가 터져 나오며 병사들이 사방으로 날리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흩날린다. 팔 다리가 흩날 리는 것도 있고 몸뚱이가 흩날리는 것도 있고, 병장기가 흩날리는 것도 있 다. 중요한 것은 퍽퍽 팍팍 소리를 내며 사방으로 병사들이 나뒹굴고 있다 는 것이었다. 나를 에워싼 녀석들의 얼굴에 불안한 표정이 어리기 시작했 다. 녀석들은 뒤쪽에서 들려오는 그 괴이쩍은 소리를 확인해 보고 싶어서 견딜 수 없는 듯했지만 나라고 하는 분을 앞에 두고 감히 고개를 돌릴 수 없었는지 그저 창을 가늘게 떨며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나야 뭐 아쉬울 것도 없기에 고개를 쭈욱 뻗어 사방을 훑어볼 수 있었다. 어허 참, 정말로 대단하구만. 저런 리드미컬한 소리를 내며 달려오 는 녀석들이라니. 어허, 어허, 이러다 춤이라도 추겠다. 퍽퍽 푹푹 소리와 악악 윽윽 소리는 적당한 운율까지 맞춰가며 보는 사람도 경쾌하게 터져 나왔다. "으어억!" "마, 막아!" "끄악!" 비명소리는 맨 뒤쪽에서부터 시작되었지만 곧 그 범위는 바짝 말라비틀어 진 지푸라기에 불 옮겨 붙듯이 사방으로 퍼졌다. 뭐라고 하면 좋을까, 마치 수확기의 농부들이 밀을 베며 돌진하는 형태라고나 할까? 맹렬하게 앞으로 돌진하며 낫을 휘두르는 농부들과 그들의 손길에 따라 흩어져 나가는 지푸 라기들. 말 그대로의 몰골이었다. 어디선가에서 어긋났던 다크시온과 듀나시들이 말 그대로 병사들을 날리 면서 내쪽으로 돌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나를 보자 너무나 반가웠 던지 시뻘개진 눈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얼마나 반가우면 두 눈이 시뻘개 져서 살기를 풀풀 날리고 있을까나. 얼마나 반가웠으면 저렇게 입에 거품 까지 물고 있을까? "오지 마십시오!" "오지마!" 비명같은 소리와 함께 내 눈앞이 하얗게 물들었다. KUBERIN...... 빛을 향해 걷는다 그 빛에 눈이 타고 몸이 타오를 지라도 걷지 않으면 안될 길이 있다 4 이것은 원초적인 어떤 것. 그 옛날 강하고도 강한 것들이 지상 위를 지배할 때 내 뿜던 기운. 공포. 뭐라 말할 수 없는 탈력감이 등덜미를 짓눌렀다. 나는 땅바닥에 주저 앉을 수 밖에 없었다. 에닌이 뭐라고 새된 비명소리를 내질렀지만 잘 들리지 않 았다. 에닌을 안고 있던 팔에서 힘이 빠져 나갔다. 이런 것은 처음이다. 진 땀이 살갗을 비집고 흘렀다. 눈 앞은 아득하고 귓속으로 윙윙대는 이명 때 문에 소름이 오싹 끼쳤다. "왕!" 뒤에서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뭐라고 계속 소리치고 있는 것 같았지만 도 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대체 그게 무슨 소리일까? 누가 뭐라고 하는 거지? 진땀이 배어나오는 손바닥을 땅에 짚고 어떻게든 몸을 추스르기 위 해 나는 결사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참을수 없는 소름끼치는 감각, 난생 처음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공포감. 이게 대체 뭐지? 어떻게 이런 감각 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냐? 나는 그 목소리를 알아듣기 위해 고개를 세차게 저어 보았다. 머리를 흔들 었지만 여전히 웅웅거리는 소리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지독한 이명 때문에, 눈앞이 아른거리는 현기증 때문에 구토감이 치밀었다. "왕!" "쿠베린!" 이름. 쿠베린.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고 버텼다. 나의 이름은 쿠베린. 나는 묘인족의 왕이 다. 내가 이 이름을 얻기 위해 나는 수백의 도전자를 죽였고 수천의 일족 을 죽여왔다. 내가 나이기 위해 잃은 모든 것들에 걸고서, 나는 이 자리에 서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정면을 보고, 그게 어떤 괴물이든 이겨야 한다. 나는 묘인족의 왕이다. 절 대로 묘인족 앞에서 왕이 져서는 안된다. 나는 이겨야 한다. 아니, 나는 이 긴다. 이를 악물고 덜덜 떨리는 무릎을 당겨 세웠다. 말을 듣지 않는 다리는 완 전히 풀려 있었지만 두 주먹을 땅에 후려갈기자 그 아픔 덕인지 그럭저럭 말을 들었다. 정면을 보라. 앞을 봐라. 나는 지지 않는다. 아니, 나는 이긴 다. "흐." 입술을 비집고 웃는다. 웃지 않으면 안되고 말고. 무릎을 세우고 천천히 허리를 폈다. 비틀비틀 몸이 제멋대로 비틀렸지만 그럭저럭 몸을 세울 수는 있었다. 에닌을 일으켜 안는 것은 무리였지만 최 소한 몸을 가눌 수는 있었다. 몇 번이고 두 눈을 부릅뜨고 앞을 보았다. 온통 뿌옇게 흐려진 광경들뿐 이었지만 어쨌거나 앞은 보인다. 살의라고 할 것이 특별히 없다는 것이 오히려 의외였다.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서 나는 흩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심호흡. 좋아. 일단 심장 두 개는 정상이 되었구만. 이제 정상으로 돌려야 할 것은 바로 이 몸뚱아리다. 웃자. 웃지 않으면 견디지 못한다. 이 끔찍한 압박감을 억누르기 위해 나 는 치밀어 오르는 것을 도로 삼켰다. 비실거리며 토하는 몰골을 적에게 보 일 수는 없지. 무겁고 거대한 손이 내 등줄기를 짓누르는 것 같은 감각을 이기기 위해 나는 조금은 삐딱하게 섰다. "후우." 몇 번 심호흡을 하고 정신을 집중하자 정면이 보였다. 그래. 앞에는 인간의 병사들이 창날을 앞 세우고 서 있군. 그리고 그 옆에는......... 나의 일족들이 서 있었다. 다크시온이 시퍼렇게 된 얼굴로 내쪽으로 달려 오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것이 보인다. 그의 앞을 막아선 가짜 사인족놈들 이 말 그대로 실 끊어진 인형처럼 흩날렸다. 그렇지만 그는 내 앞으로 다 가서진 못했다. 그는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송곳니를 드러낸 채 울부짖고 있었다. 그가 외치는 소리가 아주 멀리서 들리는 것처럼 아련하고 희미하 게 들려왔다. "왕! 쿠베린님!" 이봐, 다크. 그렇게 악악거리지 말아. 아주 비참한 상태는 아니라구. 이거, 아무래도 마법진종류 겠지? 전에 당했었던 흡력진인가 뭔가 하는 그 런 종류로 어쩌면 봉인진인지도 모르지. 나는 비틀거리면서 앞으로 몇 발자국 걸어 나갔다. 발바닥을 잡아당기는 뭔가가 땅 속에 숨어 있는 것 같았다. 내 발이 이렇 게 무거운 것은 내 생전 처음이었다. 듀나시의 창백하게 질린 얼굴이 보인 다. 그도 뭐라 망연하게 떠들어 대고 있었지만 자세한 것은 들리지 않았다. 필사적으로 악을 지르고 있는 다크에 비해 꽤 침착하게 보였지만 정말 그 런 것도 아닌 듯 뒤에서 몇 몇 놈들이 그를 향해 검을 휘둘러대는 데도 피 하지도 않고 있었다. 피하지 않고 뭘 하는 거야 라고 나는 입을 열어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대체 입안까지도 그놈의 마법진의 힘이 미치는 것인지 혀가 움직이지 않는 다. 어라? 그러고 보니 눈앞이 잘 안보이는 것도 결국은 눈꺼풀이 잘 떠지 지 않기 때문이었나? 이를 악물어 보려 해도 윗니와 아랫니가 잘 붙지 않 는다. 이거야 말로 모자란 천치 몰골 아닌가? 침이라도 입가에서 줄줄 흘 러내리고 있는 거 아냐? 나 같이 잘난 분이 그런 몰골을 보여서야 어디 쓰 겠나? 세상의 모든 여인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워하겠느냐 그 말이야. 나는 억지로 손을 움직여 턱을 잡아 보았다. 다행히 축축하지 않은 걸 보 니 침을 흘리고 있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손이 움직이고 발이 움직이니까 이제 두 눈을 다시 부릅뜨고, 그 다음에는 입을 벌려 보자. 내가 입을 벌리자 새된 소리가 새어 나왔다. 내 귀로도 내 소리가 잘 안 들리는데 이거 다른 놈들은 당연히 못 듣겠지. "멍청아." 그렇게 애써 말해보았건만 입안에서 새어 나오는 소리는 아우아우 뭐 그런 말도 안되는 소리뿐이었다. 몇 번이고 심호흡을 하고 나는 손을 뻗어 내 머리칼을 잡아 당겨 보았다. 아, 다행이다. 머리칼이 다 빠진 줄 알았네. 하 도 머리가 빠개지듯 아파서 말이야. 다크시온이 악악거리면서 내 앞 뒤로 왔다갔다 하느라 바쁜 동안 나는 녀 석이 내 바로 앞, 3 메테르 앞에서 빙빙 맴돌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렇다면 진의 크기는 사방 3메테르 정도인가? 생각 외로 작은 걸? 아니지, 작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꽤 힘이 강력하다는 의미도 되고 또 하나로 말하 자면 이 나를 이 사방 3메테르 밖에는 안 되는 이 진 안에 몰아 넣었다는 의미니까 내가 꽤 멍청한 짓을 했다는 이야기도 되는군. 역시 병사들이 나타나자 마자 녀석들을 쓰러뜨리고 무조건 직진해야 하는 것을, 에닌을 안고 있는 때문에 살생을 줄이려고 머뭇거렸던 것이 이런 결 과를 초래한 것이다. 어쩌다가 내가 멍청하게 이런 마법진에 걸렸나. 머리를 열심히 굴리며 사방을 훑어보고 있는 동안 갑자기 주변이 환해졌 다. 아니, 환해졌다기 보다는 내 앞에 가려져 있었던 희뿌연 막이 투명해졌 다. "정말 대단하시네요." 누군가 박수를 짝짝 치면서 지껄였다.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한숨을 내 쉬었다. 이런 허탈하고도 바보스러운 일이.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은 분홍주둥이였다. 희고 매끄러워 보이는 동방교국 산 최고급 비단을 걸친 녀석은 금발머리를 엘프처럼 흩날린 채 팔짱을 끼 고 있었다. 주변으로 모여 선 그 가짜 사인족 녀석들이 나를 향해 이를 드 러내고 있었지만 그 모습만으로도 녀석들이 내 앞으로 다가서길 두려워한 다는 것을 금방 알수 있었다. 그렇다. 이 마법진, 평소의 마법진이 아닌 것 같다. "이 거 뭐하는 물건이냐?" 내가 어버버 하고 떨리는 입술을 억지로 비집고 외치자 분홍주둥이는 눈을 크게 뜨며 박수를 열렬하게 치기 시작했다. "대단하십니다!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저 유명한 고대의 용족의 드 래곤 피어를 이겨내시다니요!" ".......용족의 드래곤 피어?" 내가 눈을 크게 뜨려고 노력하면서 비뚤어진 입으로 되뇌이자 녀석은 느끼 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고대 용족 중 가장 강한 용들만이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 힘 이지요. 신족마저도 억눌렀다는 힘입니다. 지금 쿠베린님이 들어가 서 계시 는 곳이 바로 드래곤 피어로 이루어진 마법진이지요. 그거 만드느라 저는 정말로 힘들었는데 쿠베린님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시네요." ".............그게 어떤 건데?" 나는 질질 끌리는 발을 억지로 끌며 앞으로 더 나섰다. 진의 실체를 만져 보고 싶은 기분이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몸에서 힘 이 더 빠져나갔다. 고개를 들고 있는 것 자체가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수 백, 수 천의 바윗덩어리가 내 머리 위에 쌓여있는 것 같은 기분이다. "신화에 따르면 성년에 이른 용족 중 십분지 일 만이 이 힘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상대를 억압하고 누르는 힘. 살아 있는 생물이라면 당연히 가지는 본연의 공포를 느끼게 하는 것이죠. 더불어 말한다면 이 진은 보통 용족의 드래곤 피어보다 세 배 정도 강한 것입니다." 생긋 웃는 녀석의 면상을 갈기갈기 찢고 싶다는 일념으로 나는 앞으로 더 내딛을 수 있었다. 그래, 저 놈의 면상을 쪽쪽 찢어 갈기고 쿡쿡 찔러 박살 을 내보자구. 그럼 얼마나 시원하겠느냐 말이야.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나는 몇 발자국이나 앞으로 나갔다. 옆에서 보는 놈들이야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비틀비틀 걷는 내 몰골이 꽤 나 우스웠겠지만 나는 정말로 힘들다. 힘들고 말고. 당장이라도 마베릭놈의 얼굴이 잡힐 듯했지만 손톱을 꺼낼 수가 없었다. 제기랄, 위축되어 버린 근육은 손톱을 꺼내지 못했다. 나는 이빨을 악문 채 몇 발자국 더 앞으로 가 마베릭을 향해 손을 뻗었다. "오, 이러시면 곤란해요." 그 순간 보이지 않는 막에 닿은 듯 파직하는 소리와 함께 손이 튕겨 나왔 다. 말이 튕겨나온 것이지 하마터면 손을 잃을 뻔했다. 나는 몇 번이나 뒤 로 물러서서 도로 주저 앉고 말았다. 그 놈의 반탄력이 얼마나 센지 간신 히 서 있는 게 고작이었던 나는 몇 바퀴나 굴렀다. "잊으시면 곤란하지요. 쿠베린님. 저는 당신의 힘을 원하는 것이니까 결코 해치지 않습니다. 당신은 그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으면 충분합니다." 마베릭녀석이 그렇게 지껄이고 있는 동안 악악 거리던 다크시온과 듀나시 가 마베릭을 향해 돌진해왔다. "이놈! 이 더러운 마법사놈!" 녀석들이 돌진해 오는 것을 보며 마베릭은 싸늘하게 웃었다. 제기랄, 저 녀석들도 마법진에 걸리는 거 아냐? 내가 그런 불안감으로 입 을 벌리는 순간, 마베릭의 손에서 눈부신 광채가 터져 나왔다. 마법이란 것. 눈을 감고 몇 번을 생각해도 마법이란 정말로 기이한 것. 태초에 엘프들과 용족이 정령을 부리면서 썼던 언령의 힘이 인간들 사이로 흘러내려 오며 꽤나 많이 변질되었다. 인간의 마법이라는 것은, 정령을 부려 그 힘을 극대 화시키는 고대의 마법에 비하여 더 한층 악랄하고 교묘하며 사악하다. 그 러고 보니, 요즘 들어 정령술을 쓰는 인간을 본 적이 없군. 아크 녀석정도 만이 정령마법을 동시에 시전할 수 있을 거야. 어쩌면 시커먼 킬트녀석도 사용할 수 있을지 몰라. 짧은 순간 다크시온과 듀나시의 전면에 있던 땅이 그대로 함몰되었다. 그 들은 땅이 주저 앉기 전에 공중으로 치솟았다. 그러자 마베릭의 옆에 있던 가짜 사인족 놈들이 일제히 무언가를 집어 던졌다. 그것은 하늘을 새까맣 게 메울 정도로 거대한 그물이었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펼칠 수 없을 정도 로 커다란 그물은 두 녀석의 몸을 완전히 덮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두 녀 석 모두 손톱을 꺼내들어 휘둘렀다. 하지만 그물은 단단했다. 녀석들의 손 톱은 그물과 마주치자 그것을 잘라내기는커녕 팅팅 소리를 내며 튕겨나갔 다. 그들의 얼굴에 비로소 당황스런 기색이 떠올랐다. 몇 번이나 손톱으로 그 그물을 후려갈기며 몸에 그물이 닿는 것을 피해보려 했지만 그러기에는 그 물이 너무 컸다. 다크시온은 갑자기 몸을 틀더니 자신의 뒤에 있던 듀나시 의 몸을 걷어찼다. 퍼억 하고 듀나시의 몸은 뒤로 튕겨나갔다. 그리고 그 순간 다크시온의 몸 체로 시커먼 그물이 쏟아져 내렸다. 그는 이를 갈면서 그물에 얽매인 채 땅바닥에 주저 앉았다. 하지만, 듀나시는 다크덕에 뒤로 물러서 그물에 갇 히진 않았다. 그는 경악에 찬 얼굴로 다크와 그물을 번갈아보더니 곧이어 사나운 눈초리로 마베릭을 쏘아보았다. "네 놈!" "묘인족도 희생이란 것을 하는 군." 마베릭놈은 느끼한 태도로 그렇게 지껄이더니 어깨를 으슥했다. 그물로 완전히 둘러쳐진 다크시온은 꿈틀거리면서 소리를 질렀다. "여기를 빠져나가 뒤를 노려라!" 듀나시는 일그러진 얼굴로 나와 다크를 번갈아 보았다. 물론, 여기서 그가 마베릭에게 정면으로 달려든다면 별로 승산은 없을 지도 모른다. 분명히 마베릭녀석은 우리들을 잡기위해 꽤나 많은 고심을 한 것 같으니까 말이 다. 듀나시의 평소 성격을 생각해보건대 녀석이 날칠 것 같지는 않았다. 하 지만, 듀나시는 나의 이런 기대를 저버리고 악을 내지르며 내 앞으로 달려 들었다. "쿠베린!"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내 이름을 부르는 듀나시는, 아주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어릴 적 내 뒤를 쫓아다니던 어린 꼬맹이로, 나에게 다리를 잃 은 뒤 증오로 잔뜩 얼굴을 일그러뜨렸던 그 과거로. 그의 손톱이 나를 둘러 친 마법진을 후려갈겼다. 파직파직하는 불꽃이 튀 며 진을 둘러싼 공간이 꿈틀꿈틀 움직였다. 마치 살아 있는 투명한 생물체 처럼 내 주변의 공간이 일그러졌다. 나는 그 꿈틀거리는 진을 보고 악을 쓰는 듀나시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바로 뒤에서 마베릭이 그를 향해 그물을 던지는 것이 보였다. "피해! 바보야!" 내가 고함을 질렀지만 듀나시는 듣지 않았다. 평소의 그 냉정함이 거짓인 양 녀석은 발광하듯이 악을 써대면서 나에게 달려들기 위해 몸을 던져 마 법진을 후려갈기고 있었다. "쿠베린! 쿠베린!" 그렇구나. 이 놈도 결국은 묘인족. 우리 일족은 눈에 피가 오르면 뵈는 게 없지. 나는 웃을 수 밖에 없었다. 듀나시의 몸을 둘러싼 그물은 금방 그의 몸을 조여들었다. 듀나시의 얼굴 에 순간적으로 공포가 떠오르는 것을 보며 나는 그에게로 손을 뻗었다. 파 직거리는 진의 반탄력이 내 팔뚝을 후려갈겼다. 우드득 소리를 내며 팔뚝 의 뼈가 부러졌다. 기이하게 꺾여진 팔꿈치를 보면서 나는 이를 악물었다. "듀나시!" 듀나시의 몸이 변신을 시도했다. 그는 단숨에 삼단계로 변신하며 몸부림쳤 지만 그물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몸이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더 그의 몸을 조여들었다. 대체 저 그물이 무엇으로 만들어졌기에. "이제 원하는 대로 된 거 같군요. 가장 강한 묘인족들을 이렇게나 사로잡 았으니 말입니다." 마베릭이 내 앞으로 다가섰다. 그는 내가 부러진 팔을 하고 있는 것을 보자 얼굴을 찌푸렸다. "팔이 부러지신 겁니까? 정말 성질도 대단하십니다." "..........." 나는 말하는 대신 내 앞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듀나시를 보고 있었다. 다크 시온은 그물로 둘둘 감긴 채 가짜 사인족들이 들쳐메고 있었다. 몇 몇이 다크시온의 발길질에 나동그라지기도 했지만 어쨌거나 녀석들은 다크시온 을 그물로 둘둘 싼 채로 옮기고 있었다. "네 목소리는 잘 들리는군." 내가 중얼거리듯 말하자 마베릭은 내 팔쪽을 들여다 보다 말고 고개를 들 어 답했다. "아? 그야 당연하지요. 그 진은 제 꺼니까요." "사라진 용족의 힘을 어떻게 재현한 거야?" "그건 비밀입니다." 녀석은 윙크까지 해대며 느끼하게 웃었다. 그 미끈거리는 면상을 한 대 후 려 패고 싶었지만 두 팔 다 부러뜨릴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나는 가만히 있었다. "그럼, 당신이 찾아오신 이 고대신의 신전에 뭐가 있는 지 보실까요?" 녀석은 자랑스레 말하며 손을 높이 쳐들었다. 그 순간, 다시 커다란 하얀 빛이 작열했다. "환영합니다. 암흑과 파멸의 대신(大神) 오 테라쿠마 세카나파스의 신전에 오신 것을!" KUBERIN...... 빛을 향해 걷는다 그 빛에 눈이 타고 몸이 타오를 지라도 걷지 않으면 안될 길이 있다 5 오 테라쿠마 세카나파스. 별로 기억하고 싶진 않지만, 어쨌거나 너무 거창하고도 긴 이름이라 외워 버렸다. 아니다. 내가 머리가 너무 좋기 때문에 저절로 외워진 것 아닌가. 나에게는 필요한 것을 칼같이 기억하는 놀라운 능력이 있으니까. 빛이 사라지자 어둠이 찾아왔다. 온몸이 후들거리는 것은 그런 대로 참을 만하다. 처음 느꼈던 것처럼 끔찍한 기분은 없었다. 어쩌면 이거 별로 대단 한 게 아닌 지도 몰라. 애써 그렇게 생각해보았지만 팔이니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는 것이 눈에 보 일 지경이었다. 턱도 아직은 덜덜 떨리고 있다. 거참, 이게 진짜 드래곤 피 어라는 것이라면 이렇게 당하지는 않을텐데. 나는 두 다리가 있으니 당장 에 달아나던가 달려들어 이 기운을 물리칠 수 있을 테니까. 이렇게 좁은 공간안에 이렇게 가두어 놓고 이놈의 기운을 계속해서 뿜어내게 하다니. 죽으라는 것과 똑같잖아? 아이고, 정신을 빼면 입이 삐뚤어지겠군. 나는 고개를 돌려서 아직도 쓰러져 있는, 시커먼 바닥에 완전히 널브러져 있는 에닌을 만져보았다. 에닌의 온 몸은 싸늘했지만 숨이 끊어진 것은 아 니었다. 그녀는 그저 가는 숨을 몰아쉬며 늘어져 있었다. 기절한 것 같지만 기절치고는 상태가 심한 듯했다. "그거 아십니까?" 연극처럼 지껄이는 녀석이 또 등장했다. 어둠 속에서 흰 비단옷자락이 보 였다. 녀석은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주절주절 잘도 떠든다. "엘프는 말입니다, 흔히들 순응하는 존재라고 알려져 있지요." 나는 어둠에 눈이 익숙해질 때까지 가만히 있었다. 에닌의 몸이 희미한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하자, 그때서야 비로소 나는 그 흰 옷 자락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설마하니, 말도 못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녀석이 또 주절거렸다. 나는 팔뚝을 만져보았다. 부러진 팔뚝은 여전히 움찔거리고 있었다. 고통도 고통이지만 이 상태로 놓여 있는 게 더 끔찍했다. 이 마법진은 정말로 지 독했다. 일단 앉아서 심호흡을 하고 부러진 팔뚝을 천천히 맞추려했다. 하지만, 이 상하게도 평소와 달리 근육도 뼈도 침묵하고 있었다. 나는 잠시 동안 내 팔뚝을 지켜보았다. 여전히 부들부들 떨리고 있다. 머릿속에선 별로 그렇게 두렵지도 않은데 왜 이렇게 몸이 떨리는 것일까? 이거야 말로 몸 따로 마 음 따로 인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지 않다. 어둠 속에 희뿌옇게 드러난 팔뚝은 기괴하게 비틀려 있었다. 뼈가 부러진 게 처음도 아니었지만 이런 식으로 물끄러미 지켜본 적도 없었다. 왜 상처 가 아물 생각을 하지 않는 걸까? "왜 상처가 안 낫는지 궁금하세요?" 녀석이 또 끼어 들었다. 아, 매력적인 남자는 너무 피곤해. 저 녀석은 어 떻게든 나랑 엉겨보려고 부득부득 끼어 드는군. 입 다물고 있자. 시키지 않 아도 다 말해 줄테니까. 저렇게 입이 가벼워서야 어떻게 그 과묵하다 못해 무거워 비틀어질 킬트녀석과 같이 살았을까? 혹시 킬트가 저 놈의 수다를 견디다 못해 놈을 갖다 버린 게 아닐까? 내가 저 놈의 과거에 대해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 녀석은 시키지 않 았는데도 계속 지껄여대고 있었다. "궁금하시죠? 제가 알려드리죠. 드래곤 피어는 말이죠. 살아있는 존재 그 자체가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온 몸이 지금 두려움을 느끼고 위축되어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묘인족의 강인한 회복력도 위축된 거죠. 어떻습니까? 기분은?" 엿같아 라고 대답해주려다가 나는 뒤에 쓰러져 있는 에닌의 몸을 살펴보았 다. 온기는 있으되 꽤나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마치 돌덩이 같다. "그 엘프소녀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은 엘프 자신의 특성 탓이지요." 엘프 자신의 특성이라. "엘프는 순응하는 존재라고들 하죠. 생명 자체를 위협하는 것이 뭐겠어요? 바로 죽음이죠. 즉, 드래곤 피어는 죽음을 느끼게 하는 힘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도 있어." 내가 대꾸하자, 녀석은 갑자기 기뻐진 듯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네, 그렇지요. 하지만 그것은 의지의 결과이죠. 본능적으로는 죽음을 두 려워하게 되어 있습니다. 죽음이란 것은 모두들 피상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거죠. 그 죽음이라는 게 생명의 파괴, 소멸이라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는 자들이 몇이나 된다고 생각하세요? 겪어보지 않으면 아무도 몰라요." 그러고 보니, 그 말도 틀린 것은 아니다. 죽고 나서 다시 태어난다는 둥의 말을 떠드는 인간들을 보면 알 수 있는 일. 결국 죽음이라는 것도 다 각자 알아서 받아들이고 생각한다는 이야기 다. "게다가 드래곤 피어는 계속해서 죽음이라는 것을 드러내놓고 압박한단 말입니다." 굳이 듣고 싶은 이야기도 아닌데 녀석은 계속해서 강조했다. 이것만은 꼭 들어야된다는 듯이 강조하는 그 어투를 듣다보니 조금은 녀석이 불쌍해졌 다. 가여운 것. 그래, 들어주마. 그동안 말을 못해 괴로웠나보구나. 맘껏 떠 들어. 대신, 안 들어도 원망하지는 마. "그 엘프 아가씨는 알아요. 엘프들은 죽음을 압니다." 나는 부러진 팔뚝을 쥔 채로 에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창 백했지만 표정은 그다지 고통스러워 보이진 않았다. "지금 그녀는 가사 상태에 빠져 있는 겁니다. 드래곤 피어에 맞설 힘은 없다는 것을 아니까요. 아니, 정확히 말하면 죽음에 맞설 수 없다는 걸 알 기 때문이죠." 용족은 대체 어떤 존재이기에 죽음을 대변할 수 있었던 것일까? 나는 잠시 동안 심오한 고찰에 들어가려다 말고 더 중요한 문제에 직면하 기로 했다. "배고파." "........." 녀석은 내 말을 듣는 순간 침묵했다. 말 그대로 경악이 섞인 침묵이었다. ".......진짜, 배가 고프십니까?" "응." ".........드래곤 피어 속에서 시장기를 느낀단 말이죠?" "응." 녀석은 이제 놀라다 못해 화를 내는 듯한 어조로 다시 물었다. "진짜죠? 저를 놀리시느라 그런 거 아니죠?" "아니지." 내 대꾸에 녀석은 굳어 있었다. 이런 걸로 놀릴 수 있다면 그것도 괜찮은 데. 메뉴라도 주욱 불러줄까.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하는 녀석의 실루엣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나는 이제 야 비로소 눈이 그럭저럭 보인다는 데 안심했다. "죽음에 맞서서 배가 고프다니, 당신이란 분은 대체..........." 녀석은 갑자기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떨었다. 분해서 견딜 수 없다는 그 모 습은 수십 년간 여자분들을 후리던 놈이 어느 한 순간 자신이 남자를 더 좋아한다고 깨달았을 때와도 같았다. 아, 비유가 조금 이상한가? 그럼, 남자를 후리던 미녀께서 어느 한 순간 여자를 더 좋아한다고 깨달았을 때 와도 같은........더 이상한가? 어쨌든 간에 꽤나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내 가 배가 고프다는 게 대체 왜 충격이 되는 거야? 여기서 내가 오줌이라도 싸갈기면 이 놈 기절하는 거 아닐까? "믿을 수 없어! 믿을 수 없어!" 녀석은 갑자기 어울리지 않는 자세로 손톱을 물어뜯었다. 이 놈이 손톱을 물어뜯는 꼬라지를 보아 하니 정말 어린애 같았다. 제 맘대로 안 된다고 손톱 물어 뜯고 머리칼 쥐어 뜯는 놈들 많이 봐왔지만 이 놈의 모습은 정 말 미친 놈 같아서 혼자 보기 아까웠다. "너, 뭐하나 잘못 알고 있는 거 아냐?" 나는 팔뚝을 주물럭거리면서 친절하게 물었다. "솔직히 말해서 너, 책하고 몇 몇 밖에는 아는 놈들이 없지? 그놈의 마법 공부와 킬트놈, 그리고 네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좀 모자란 마법사 녀석들 이외엔 아는 놈들도 없지?" "그,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녀석이 갑자기 말을 더듬었다. "너 분명히 책을 보고 지껄이는 거지? 엘프는 이렇다, 묘인족은 이렇다, 드워프는 이렇다, 인간은 아마 이럴 거다... 뭐 그런 식으로 말이야." 안색이 홀라당 변한 녀석은 손톱을 맹렬하게 물어뜯기 시작했다. 왜 이렇 게 약한 모습을 보이냐? 이 자애로우신 분의 마음을 흔들어 보려고? 그래, 정말 가엾구나. 내 너의 그 가련한 모습을 보아 사정없이 모가지 댕강, 심 장을 홀라당 뽑아 줄게. "세상 모든 게 다 책대로 굴러가냐? 네가 드래곤 피어를 맞아봤어? 이게 어 떤 느낌인지, 이게 어떤 것인지 다 알아? 아니지, 네가 날 아냐? 네가 모든 것을 다 알고 추론할 수 있단 말이냐?" 내 질문에 녀석은 침묵했다. 점점 더 배가 고프기 시작했다. 내 뱃속에서 낮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나 배고파, 나는 배고파, 이제 먹어야 해. 먹어서 더 강해져야 해. 이놈의 것을 이겨내야 해. 그리하여 끝장을 내자구. 필요한 게 많아. 피가 뚝뚝 배 어 나오는 고기와, 육즙이 잘 배어 나오는 구수한 스튜, 잘 그을린 사슴고 기도 괜찮지. 만약 더 있다면 호비트제 땅콩 빵과 호두빵이 좋겠어. 거기에 훈제된 베이컨과 매운 맛이 배어 나오는 겨자소스를 얹고 쌈박한 치즈를 두툼하게 썰어 넣은 샌드위치도 좋아. 그리고 달고도 강렬한 벌꿀술도 좋 아. 아니면 화끈한 흑맥주도 좋겠지. 먹자구! 먹게 해줘! 먹게 해달라구! 치, 침 나온다. 정말 나도 대단해. 내 뱃속은 말까지 한다고. 자기 생각을 밝히는 이렇게 대단한 뱃속 본 적 있냐? 손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뭔가 가 먹고 싶었다. 아, 맛난 것 잔뜩 먹고 따끈한 여자를 안고 누웠으면 좋겠어. 새로 깐 짚에 까슬한 시트를 덮고 그 위에 푸욱 자빠져 잤으면 좋겠어. 이런 생각을 하 다보니, 침이 더 나온다. 아, 쓰읍. 닦아 내고 정신을 차려야지. 이 미모에 침을 흘리다니. 이런 걸 남에게 보여주면 안되잖아? 나는 입가를 닦으면서 아직도 뭔가에 고민하듯 침묵하고 있는 녀석 쪽을 바라보았다. 내가 침 흘리는 거 못 봤겠지? 에닌이 기절해서 다행이네. 한동안 침묵하던 녀석은 어느 새 피투성이가 된 손톱 끝을 노려보며 중얼 거리듯 물었다. "진짜 배고프단 말씀이시죠?" "내가 너 같은 어린애를 데리고 거짓말을 해 뭘 하겠냐?" "전에도 당신은 거짓말을 한 적 있으시잖아요?" 뭔가 꽤 원망스런 눈빛으로 날 바라보기에 나는 흠칫했다. 이봐, 그런 교 태.....스러운 눈빛은 집어 치워 줘! 내가 너랑 그런 눈빛을 주고받을 사이 냐? "그런 적 없어." "없긴요! 피를 준다고 해 놓고 제 목을 댕강 잘라버렸잖아요!" "네 목을 자른 적은 있어도 피 준단 말은 안 했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분명히 절 속였습니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나는 너 안 속였어." "그 대단하다는 묘인족의 왕께서 지금 저 같은 한 낱 인간에게 거짓말을 하는 겁니까!" "아니." 녀석은 순간 숨을 들이켰다. 왜, 왠지 재미있어지기 시작하는데. 이 부러진 팔뚝과 온 몸을 짓누르는 이 감각만 없으면 어떻게든 꽤 재미있다고 할 만한데 말이야. "...........대단하시군요. 드래곤 피어 속에서 지금 농담 따먹기를 하시는 겁 니까?" "조금 있어보니 그럭저럭 견딜만 하네." 내가 명랑하게 대꾸하자 녀석은 입을 벌렸다. "..........공포로 마비되는 거 아닙니까?" "그럴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견딜만 하네. 내가 말이 많아진 걸 보니 느낄 수 있지?" 녀석은 조금은 황당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더니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어쨌든 식사는 나중에 하셔야 겠습니다." "지금 주면 안 돼? 잘 못하다간 에닌까지 잡아먹겠는걸." 녀석은 나를 물끄러미 보더니 지친 듯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마법진 안으로 음식물을 들여보내겠습니다. 그럼 되겠죠?" "그래." "...............믿을 수 없어." 녀석은 왠지 추욱 처진 어깨를 하고는 몸을 돌렸다. 가끔 생각하는 건데 혹시 저 녀석 순진한 거 아닐까? 하는 짓거리는 분명히 변태이긴 한데 뭔 가 꽤 순박하잖아? 어린애 약 올리는 거 같아서 슬슬 재미까지 붙는 걸.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잠시였다. 갑자기, 내 주변으로 불이 켜졌다. 처음에는 음식물이라도 나타나려고 불이 켜진 줄 알았지만 그것이 오산임 을 곧 깨달았다. 음식물은커녕 살아 있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었기 때문 이었다. 검푸른 이끼가 덮여 있는 돌무더기 위로 금이 죽죽 가 있는 기둥 몇 개가 보였다. 그리고 그 돌무더기 아래 늘어진 몇 구의 시체, 그 시체들은 죽은 지 한 참은 되었는지 잔뜩 말라 비틀어져 있었다. 아무래도 옷 꼴을 보아 선 이곳 고왕국놈들 같았다. 사방이 완전히 꽉꽉 틀어 막힌 것처럼 보여서 나는 조금 실망했다. 출입구가 대체 어디인지 문도 안 보이고 구멍도 하나 안 보인다. 그렇다면 대체 아까 그 모자란 변태녀석은 어디로 간 거야? 설 마하니 마법으로 텔레포트라도 했단 말인가? 만약에 그렇다면 내가 여기서 빠져나갈 길은 녀석의 주리를 틀어 내야 한다는 말인데? 문득 구석탱이에 먼지구덩이에 자빠진 시체들 몇 구가 보였다. 옷가지는 갖가지로, 종족도 갖가지인 듯 수인족으로 보이는 녀석과 드워프로 보이는 녀석, 물론 엘프인 듯한 녀석도 보였다. 십 수명의 시체들은 고통스럽게 죽 어간 것인지 잔뜩 웅크리거나 아니면 꽤나 손상을 입은 모양새였다. 그 시 체들을 둘러보던 나는 잠시 동안 숨을 멈췄다. 회색의 돌벽 한 귀퉁이에 반투명한 유리인지 수정인지 알 수 없는 길다란 관이 줄줄이 놓여 있었다. 그 투명한 관 안에는 줄줄이 몇 구의 시체들이 들어서 있었는데 그 모습이 꽤나 섬뜩했다. 아니, 몇 구라고 말하는 것은 옳은 표현은 아니었다. 수 십 개의 시체들이 거꾸로 꼿꼿이 수정관 안에 담겨 있었다. 자세히 보고 싶었지만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 수정관 안에 있는 시체들이 혹시나 내 아이들일까봐 차마 바로 볼 자신이 없다. 설마 아니겠지, 아닐 게야. 내 아이가 저런 곳에 있을 리는 없지. 그렇고 말고. 하지만 확인은 해야 겠지. 한숨을 몇 번 내 쉰 다음 나는 눈을 부릅떴다. 짙은 회색과 허여멀건한 돌무더기 사이에 일렬로 늘어선 수십 개의 관은 제법 끔찍해서 왕년에 먹 었던 것들을 모조리 토해낼 지경이었다. 나는 잠시 동안 시장기를 잊고 그 관들을 천천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내가 서 있는 장소는 거대한 지하광장의 일부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아주 거대한 지하동굴 속인 듯했지만 그 지하동굴이라는 게 아무래도 누군 가가 깎아 내어 만든 것 같은 몰골이었다. 그 증거로 무너져 내리긴 했지 만 각이 반듯하게 진 모서리라든가, 무너진 돌더미 사이로 간혹 보이는 벽 돌같은 것들이 보였다. 어쩌면 이 곳에 커다란 건물이 있었던 지도 모른다. 여기는 아까 그 분홍주둥이 녀석이 말했듯 그 놈의 그 파괴대신의 신전이 었던 장소인 모양이다. 꽤나 거대한 규모인 것을 보면 이 이상한 이름을 가진 신에 대한 숭배가 대단했는지도 몰라. 하지만 내 알기로 어떤 고대신 도 저런 수정관으로 자신이 신전을 장식할 리는 없을 터이고, 대체 저 수 정관들은 어디서 누가 가져온 것일까? "아직도 식욕이 있습니까?" 갑자기 툭 하고 한 구석에서 분홍주둥이가 나타났다. 나는 빛이 대체 어디 서 나오는 것일까 하고 고개를 들었다. 천장 한 구석에 희고도 둥근 광원 이 있었다. 그것에서 나오는 빛은 제법 강했던 모양이다. 좁지도 않은 이 곳을 꽤나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아직도 식욕이 있느냐고 묻잖아요?" "있어. 하지만 네가 가져오는 음식은 안 먹기로 했다." "어째서요?" "음식물에 이상한 걸 탈까봐 그래." 녀석은 묘한 표정을 짓더니 내 시선이 닿아 있는 수정관 쪽으로 고개를 돌 렸다. "저걸 보고 계셨군요. 멋진 콜렉션이죠?" "...............저건 뭐냐?" "저와 누님의 콜렉션이지요. 꽤 오래 걸렸어요. 저걸 모으는데." 잔뜩 눈에 힘을 주고 보았더니, 눈알이 아프다. 하지만 아무래도 윤곽이 희 미한 탓에 자세한 것을 알 수는 없었다. 단지, 그 안에 담겨진 것들이 다양 한 종족들이라는 것만을 알 수 있었다. 수인족, 엘프, 드워프, 호비트, 아인 족들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다양하게 들어 차 있었다. 내가 그것들을 묵 묵히 지켜보자 분홍주둥이는 자랑하듯 말했다. "아, 죽은 거 아니에요. 가사상태인 거죠. 참, 이거 정말 안 드실래요?" 녀석은 안타깝다는 듯이 갑자기 쟁반을 들이 내밀었다. 쟁반 위에는 잘 구 워진 베이컨과 꿀빵, 훈제 오리등이 놓여져 있었다.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 었지만 손을 내밀고 싶은 생각은 가셨다. "저걸 모아 뭘 할껀데?" "하긴요? 수집가에게는 수집 자체가 목적이에요." 녀석은 뻔뻔스레 말하고는 나를 향해 윙크를 던졌다. 나는 그 윙크를 무심 히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가여운 놈이 있을 수가 있나. "책 속의 것 이외에 네가 아는 게 대체 뭐냐?" "네?" 녀석은 조금 당황한 듯 쟁반을 든 채로 날 바라보았다. 내 반응이 의외였 던 모양인지 한 걸음 다가오기까지 했다. "책 속의 것 이외에 아는 게 뭐냐고 묻잖아? 진짜의 감정, 진짜의 일, 진 짜 인간, 진짜 아인족, 진짜 수인족에 대해서 얼마나 알아?" "훗, 무슨 소릴 하고 싶어하는 지 압니다. 제가 저것들을 모아서 무슨 연 구를 하고 있다고 화를 내고 있는 거죠?" 녀석은 피식피식 웃더니 내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앉은 모습이 어린애처 럼 보여서 이유 없이 괜히 불쌍해 보이는 자세였다. 알을 낳으려고 애쓰는 암탉이 연상되어 나는 조금 웃음이 나왔다. "이상한 걸 만들고 즐거워하는 어린애에게 뭔 말을 하겠냐. 내 피로 무언 가를 만들고 싶어하는 모양인데, 묘인족의 피는 다른 것을 낳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지 않냐?" "하지만, 갖고 싶은 걸요." 내가 네 장난감이냐? "하지만, 정말로 고통스럽지 않으신 건가요? 어째서 그 안에서 배까지 고 프고, 그 안에서 이렇게 태연자약하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까? 처음에는 분명히 당신도 타격을 입어 말도 제대로 나오지 못했었잖아요?" "그야, 그렇지." "그 드래곤 피어의 마법진은 제가 얼마나 많은 실험을 거쳤는지 모릅니다. 그 안에서 엘프와, 드워프와 다른 수인족으로 몇 번이나 실험을 해봤었어요. 당신 같은 반응은 난생처음입니다." "...............실험이라." 녀석은 턱을 고인 채 제법 심각하게 말했다. "엘프는 순응하는 자들이기에, 죽음의 공포를 느끼자 그 즉시 가사 상태 에 빠졌습니다. 드워프들은 개척하는 자들이기에 죽음의 공포를 느끼자 마 법진을 파괴하려고 애쓰더군요. 하지만, 그들도 곧 견디지 못하고 자멸했습 니다. 인간은 자해를 하던가, 미쳐버리더군요. 수인족들 대부분이 다 자해 하기 시작했습니다. 조인족은 당신처럼 반항하다가 결국은 탈진해서 쓰러 졌구요." 결국은 그 들 하나 하나를 다 죽여보고 날 여기에 가둔 셈이군. 그런데 결과가 어째 시원치 않았다 그거지? 그래서 손톱을 물어뜯으며 지랄발광을 한 번 해봤고. 나는 쓰러진 에닌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에닌은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았 다. "그거 아십니까? 살아 있는 것들은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자해를 시작합 니다. 어떤 수인족은 자신의 팔뚝을 씹어 삼켜 팔 하나를 다 먹어버리더군 요. 또 어떤 수인족은 자신의 심장을 스스로 뜯어냈습니다." 나는 널브러진 시체들과 수정관 안에 담겨진 녀석들을 향해 시선을 던졌 다. 여전히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들이 그저 순순히 잡혀 들어 갔으리 라곤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런데, 왜 당신은 그 자리에 서서 나와 말을 하는 겁니까? 아무리 지상 최강의 종족이라느니 말을 하지만 결국 당신도 살아 있는 자일뿐인데." 나는 다시 시선을 녀석에게로 돌렸다. 혼란스러워하는 그 얼굴이 묘하게도 어려 보여서 나는 묘한 감상에 사로잡혔다. 이 놈도 결국은 어린애가 아닌 가? 킬트 놈은 정말로 죄를 많이 지었다. "묘인족 하나를 잡아다 실험해 봤습니다만, 당신 같은 반응은 아니었습니 다. 그도 그저 견디지 못하고 주저앉아 버렸지요. 쿠베린님? 말을 좀 해보 시지요? 어째서 당신만은 다른 겁니까?" "이 세상에 똑같은 것은 단 한 가지도 없어."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묘하게 마음이 가라앉아 있었다. 배는 여전히 고팠지만 그 허기 때문에 오 히려 기뻤다. "나는 고대의 부족인 묘인족의 하나다. 그러나 묘인족이라고 해도 나와 같은 녀석은 단 하나도 없다. 나는 나니까." 녀석이 내 심오한 말을 알아듣든 말든 그것은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지 금 이 상황에서 입을 다물어도, 입을 열어도 결국은 다 마찬가지인 듯 싶 다. 이 이상한 마법진 안에서 내가 이처럼 태연자약한 것은 단 한 가지였 다. "나는 죽음이 두렵다. 고통이 두렵고, 슬픔이 두렵다. 그러나, 삶은 두렵지 않다." 내가 입을 다물자 녀석은 조금 미간을 찌푸리면서 낮게 중얼거리듯 물었 다. "그럼, 죽음의 공포보다도 삶에 대한 애착이 크다는 말인가요?" 뭐, 그 비슷한 이야기겠지. 식욕이 있다는 것 자체가 살아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 아닐까나. 여자와 구르고 싶다고 하는 생각이 무럭무럭 솟아나는 것만 봐도 그렇고, 잠을 자고 싶다는 것도 그렇고. 아아, 나는 여기서 죽기 엔 하고 싶은 일이 너무너무 많아! 아니지, 내가 죽고 싶어도 세상이 그것 을 용서하지 않아. 왜냐고? 나를 원하는 자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지! 인 기 있는 남자는 그냥 죽지도 못하는 법. 흐흐. 녀석이 이상한 표정을 짓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나는 큰 소리로 웃었다. 내가 소리내어 웃자 마베릭이 얼굴은 점점 더 이상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벌떡 일어서더니 바로 내 앞, 마법진 앞으로 달려들 었다. "웃지 마세요! 웃지 마!" 나는 계속해서 키득거리고 웃었다. 정말로 웃기지 않은가. 드래곤 피어, 가 장 끔찍한 죽음의 공포, 소멸에 대한 공포, 그리고 그것을 등에 지고 배고 파하는 나라니. "웃지 말라니까! 어떻게 거기서 웃기조차 하는 거냐!" 녀석은 떼를 쓰듯 외치면서 고함을 질러댔다. "어째서 당신은!" 그가 그렇게 외치는 순간 나는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녀석의 멱살을 덥석 잡고 그 목을 가차없이 꺾어버렸다. "컥!" 녀석의 눈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꼬맹아, 이 진이라는 물건, 드래곤 피어로만 이루어졌다는 거잖아?" "커, 커윽." 녀석의 몸이 추욱 늘어졌다. 놈의 부러진 목뼈가 삐죽하게 옆으로 솟아나 피를 뿜어냈다. "그렇다면, 드래곤 피어를 이겨낸 이 몸께서는 여기에 붙 박히지 않아도 된다는 거 아냐?" 녀석의 몸을 사정없이 걷어찼다. 퍽 하고 녀석이 멀리까지 날아가는 것을 지켜보다가 다시 부러졌던 팔뚝을 바라보았다. 근육이 움직이고, 핏줄이 움 직이고, 뼈들이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그들은 다시 왕성한 움직임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래, 이거야, 살아 있으라고. 살아 있는 자들의 거대한 힘이 이거지. 그러나 그도 잠시, 내가 한 걸음 내딛는 순간 짜릿한 감각이 발끝부터 등 줄기까지 치솟았다. 파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나는 뒤로 몇 발자국 물러설 수 밖에 없었다.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이 와 닿았다. "어허라?" 진위에 또 하나의 진이 더 쳐져 있었다. 이번에는 드래곤 피어와는 관계가 없는 평범한 보통 마법진인지 특별한 감각은 없었지만 빠져나갈 수가 없었 다. 손을 대어 보니 세 걸음 이상은 앞으로 걸어 나갈 수 없다. 이런, 가증 스러운! 이 자식, 진 위에 진을 또 치는 가증스러운 짓을 했단 말이냐? 내가 진 안에서 왔다갔다하고 있는 동안 돌벽에 거꾸로 쳐 박혔던 녀석이 부스스 일어섰다. 핏줄기를 닦아내는 녀석의 모습은 여전히 태연해서 소름 끼쳤다. 몇 번쯤 더 박아서 얌전하게 다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나는 녀석 을 사랑에 가득 찬 눈길로 바라보았다. "......믿을 수 없어." 녀석은 나를 향해 흐트러진 어조로 중얼거렸다. "어째서 당신은 그렇게까지 강한 거야? 이건 말도 안 돼." "훗, 말이 안 되긴. 500년을 하루도 빠짐없이 나는 강해지도록 노력했는걸." "거짓말 말아요. 당신이 정말 강해지도록 노력한 게 며칠이나 된다고. 내 가 알기로 당신은 매일 밤마다 여자를 갈아댔고 매일 술을 퍼마시고 매일 먹고 자기만 했다구요!" 억지쓰는 꼬맹이처럼 외치는 녀석을 무시하고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리석은 녀석. 나 정도 되는 분이라면 그것이 바로 생활속의 노력이라 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야." "말도 안 되는 소리!" 녀석은 얼굴을 벌겋게 붉히며 소리를 쳤다. 이번에야말로 화가 난 듯 이를 가는 녀석을 문득 보다보니 묘한 생각이 들었다. 저 자식은 왜 이렇게 나 에게 집착을 하는 것일까? 피를 구한다느니 어쩌느니 하는 것 따위 사실은 진심이 아닐 지도 모른다. 묘인족의 피야 나 말고 다른 자를 잡으면 구할 수 있는 것이고 녀석의 힘으로 그것이 불가능한 것도 아닐 터인데. "전부터 궁금한 게 있었는데 말이야."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내가 불쑥 말을 꺼내자, 녀석은 흘러내리는 피 를 소맷자락으로 닦아내며 나를 쏘아보았다. "뭐가요?" "너 진짜는 몇 살이냐?" 순간, 녀석의 얼굴은 놀랄 정도로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얼굴이 달아오른다는 것은, 사실 꽤 직접적인 감정표현으로 특히 남녀노 소 누구에게나 강력한 어필이 가능한 아이템이다. 특히 하얗고 뽀얀 피부 의 미소녀들이 고개를 살짝 돌리며 수줍은 듯 시선을 피할 때 강력한 효과 를 가질 수 있다. 나는 침묵했다. 아니 침묵할 수 밖에 없었다. 인기가 넘쳐흐르는 나이지만 멀대같은 사내놈에게 얼굴을 붉힌다는 미소녀 특유의 불멸의 어택을 받고 싶은 마음은 절대로 없다. 게다가 저 놈의 저 얼굴은 어디로 보나, 나이 어린 미소년들이 <정말 당신은 멋진 나의 우상 이세욧!>라고 보여주는 얼굴이 아니라 느끼하고도 피로하며, 피로한 동시에 절망적인 표정이었다. 여기서 저 녀석이 <당신을 좋아해요. 저와 함께 사랑 의 도피를!> 따위의 말을 지껄여도 나는 절대로 놀라지 않으리라! 아, 이 것이야말로 전쟁터에 핀 사랑? 카아아악! 내가 왜 어린애를 데리고 도피하 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냐! "..............제 어디가 어려 보인다는 겁니까?" 굉장히 거북한 침묵 뒤에 녀석이 조용히 물었다. 뭔가 고집스럽게 말하는 녀석의 말을 듣고 보니, 문득 정말 이 놈의 나이 가 몇인지 궁금해졌다. 대개 나이 많은 녀석들은 어떻게든 어려 보이려고 애쓰고, 정말 어린 놈들은 나이가 많아 보이려고 바둥거리기 마련. 이 놈이 이런 표정으로 심각하게 말하는 것을 듣고 있다보니 이 놈 나이가 보이는 대로 이십대 중반은 아닌 것도 같다. "분홍주둥이, 아니 마베릭이라고 했던가? 나는 연장자의 느긋한 마음으로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킬트는 아이들을 많이 만들었지? 그 중 넌 몇 번째가 되는 거야?" "......" 녀석은 뭔가 불안한 얼굴로 날 바라보다가 애써 다시 느끼한 표정으로 돌 아왔다. 꼬맹아, 늦었단다. 나는 너의 눈 속에 스쳐 가는 불안의 그림자를 이미 감지했다. "내가 알기로, 킬트의 아이들은 네 놈과 뻘건 머리를 한 미친 계집애, 그 리고 누렁이와 죽고 못사는 아헬이란 노랑계집애 기타등등이야. 그 외에 몇이 더 있지?" "모릅니다. 마스터는 우리들 몰래 다른 아이들을 만들고 있었는지도 모르 죠." 뾰로통한 얼굴이 된 녀석은 애써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여기서 뾰로통 이란 단어가 등장한 순간, 너는 이미 속내를 드러낸 게야. "어쨌든 킬트를 배신하게 된 이유가 카나리안, 그 약해빠진 쿼터엘프 때 문이라고 했던가?" 카나리안의 이름이 나오자 녀석의 이마에 핏대가 솟는 듯했다. 하지만 녀 석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입을 꾸욱 다물더니 내가 진 안에 갇혀 있 는 모습을 아래 위로 훑어보기만 했다. "솔직히 불어. 정말로 카나리안때문이야?" ".........대륙을 정복하고 싶었다니까요." 녀석이 한 마디 한 마디에 힘을 주며 대꾸하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히죽 웃었다. "진짜?" ".........무슨 말을 듣고 싶으신 겝니까? 전 당신에게 드릴 말이 없습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넌 어린애야. 내 생각엔 고작해야 넌 십여세 밖에는 안 되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무, 뭐라고요!" "그 미친 계집애가 제일 나이가 많은 지는 잘 모르겠지만 너와 아헬의 태 도를 비교해 볼 때 아헬이 훨씬 더 성숙해. 물론 계집애는 사내새끼보다 성숙한 게 보통이지만 아헬이 그 누렁이 녀석을 대하는 태도는 아무리 보 아도 성숙한 여인의 태도거든?" ".......아헬따위와 절 비교하지 마십시오!" 갑자기 일그러진 얼굴로 녀석이 소리를 질렀다. "아헬은 마스터가 그저 종족을 수집하기 위해 키운 합성체일 뿐이에요! 완벽한 것은 나와 누님뿐이라구요!" "역시 아헬이 나이가 더 많군. 그렇지?" "닥치라니까요!" 새빨개진 녀석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갑자기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아, 역 시 느끼한 녀석은 이렇게 좀 뭉개주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니까. "네 누님이라는 그 미친 계집애의 나이가 몇인데?" "그런 걸 내가 왜 대답해주어야 하죠?" "뭐 굳이 대답하고 싶지 않으면 안 해도 돼. 가히 상상이 가니까." "..............스물 일곱." 거북한 어조로 녀석이 대답했다. "정말이야?" "그래요. 누님은 첫 번째 아이는 아니지만 결정체로는 첫 번째지요." "결정체와 합성체의 차이는?" 내 말에 녀석은 자랑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합성체는 각 종족의 육체를 조합해서 이루어진 거지요. 결국은 이것저것 끼워 맞춘 거니까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겁니다." 나는 문득 아헬이 헬레아스에게 보여주는 무조건적일 정도의 극진한 애정 을 떠올렸다. 작은 몸집에 어울리지 않는 태도로 그를 시중들던 모습은 어 딘가 어울리지 않았었다. 물론 헬레아스 녀석이야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하 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사인족 놈들은 여자에 대해 굉장히 무지하니까. "결정체는?" "각 종족의 장점을 따서 직접 키워 낸 겁니다. 나와 누님은 여자의 자궁 속에서 나지 않았을 따름이지 보통의 아이와 다를 바가 없다구요." 어딘가 어설픈 자랑에 나는 한 숨을 쉬었다. "모가지 댕강댕강 잘려도 벌떡벌떡 일어나는 녀석이 보통의 아이라고 말 하는 거냐? 어울리지도 않아. 게다가 킬트 녀석이 보통의 어린애 따위를 만들 이유도 없잖아?" 그 말을 듣는 순간 녀석은 정말로 상처 입은 표정을 했다. "무, 물론 보통의 아이가 아니지요. 나는 보통이 아니에요. 나는 강력한 힘을 가진 마스터라고요. 다른 자들과는 다르지요. 나의 마법은 그, 그분을 제외하고는 가장 강해요." 녀석은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대꾸했다. 꽤나 자랑스럽게 떠들지만 어쩐지 어색했다. "그런가? 그럼 너와 그 미친 계집애와 비교해 보면 어느 쪽이 더 강해?" 내가 묻자 녀석은 나를 노려보며 피식 웃었다. "이간질 해봐야 소용없습니다. 누님은 파괴력 쪽이 강하고 저는 다른 방 면에 강하니까요." "파괴력 말고 네 힘이 무엇인데?" "나는 생성의 마력을 씁니다. 보셨잖아요? 내가 만들어낸 것들을?" "사인족을 흉내낸 수인족 쪼가리?" "쪼가리라 말하지 마세요. 그래뵈도 그들은 수인족 보다 훨씬 강합니다." "하지만, 대가리 속에 든 것은 별로 없지. 이봐, 꼬맹아, 너는 그게 생성의 마법이라고 생각하냐?" "네?" "새로운 생명체를 만들어 내면 그게 생성의 마법이냐?" "뭐라구요?" 녀석은 미간을 찌푸렸다. "왜 백마법사라고 하는 녀석들이 치유 따위에만 열중하고 새로운 생명체 따위를 만들어내지 않는다고 생각하냐? 정말 너는 그 이상하게 생긴 쪼가 리들을 만드는 게 생성의 마법이라 생각해?" "무슨 소릴 하고 싶은 겁니까?" 녀석은 딱딱해진 얼굴로 날 쏘아보았다. "너희들이 데리고 다니던 오거 비슷하던 것들, 그것은 오거가 아니지. 오 거는 몇 백년 전부터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있으니. 어딘가 산맥 깊숙한 곳 에서 살고 있을 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그것들은 오거가 아냐." 나는 내가 마튜스에서 박살냈던 두 놈의 오거 비슷하게 생긴 녀석들을 떠 올렸다. 살덩이와 핏덩이로 이루어져 있던 근육덩이들. 오거와 흡사하게 생 겼지만 전혀 다른 것들. "오거는 꽤나 이성적인 자들이야. 그들은 단 한 명의 상대와 결혼을 하고 자손을 단 한 명만 가지지. 상대와 싸우는 것을 즐기지만 함부로 싸우지는 않아." 녀석은 잔뜩 굳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집 센 그 표정에 나는 히죽 웃어주었다. "가장 큰 특징은, 오거는 절대로 인간 따위에게 부려질 자들이 아니라는 거지. 그들은 자존심이 높아서 절대로 다른 자들의 밑에 들어가지 않아. 심 지어 부모 자식간에도 그들은 굽히지 않아." 나는 빙글빙글 웃었다. "다시 말해서 너는 오거를 만들어낸 게 아니고, 오거를 파괴시킨 거지." "궤변을 늘어놓으시는 군요." 이를 갈 듯이 잔뜩 입가를 일그러뜨리면서 녀석이 중얼거렸다. "생성의 마법, 생명의 마법이란 말 따위를 그냥 집어치우고 말이야, 잡종 을 만드는 마법이라든가, 아니면 노예를 만드는 마법. 혹은 괴물을 만들어 내는 마법이라고 불러. 내 아무리 들어도 정말 가소로워서 들을 수가 없어." 마베릭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는 모욕을 당했다는 듯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이 애의 나이가 정말로 몇 일까? 설마하니 열 살은 넘었겠지? 합성인지 결정인지는 모르겠지만 인위적으로 만들어 졌을 테니 태어나면서부터 성년의 모습을 하고 있었을 것이 틀림없었다. 킬트의 성깔 로는 절대 어린애를 만들어 낼 리가 없으니까. 녀석이 기저귀를 갈며 인간 의 아기를 키울 거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말 다 하셨으면, 이제부터 내가 말하도록 할까요?" 녀석은 잔뜩 찌그러진 얼굴로 살벌하게 말했다. 여지껏 보여주었던 그 느 끼하고 태연한 태도는 씻은 듯이 사라져 있었다. 원래 이 놈은 이런 표정 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것을 내 놓으십시오." "뭘?" "모르시진 않겠지요? 신의 귀. 신의 일곱 개의 기둥. 이 나라 고왕국을 지 탱해온 기둥들 말입니다!" "그게 뭔데?" 내 말에 녀석의 얼굴은 그대로 일그러졌다. "다, 다, 당신께서 가져간 그 물건들 말입니다! 일곱 개의 기둥을 내 놓으 라구요!" 녀석의 말은 이제 비명 같았다. "나 그런 거 몰라." 그 비명소리를 즐겁게 들으며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순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녀석은 그 순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더 이상 참지 못하 겠다는 듯 부들부들 떨던 녀석은 갑자기 표정을 바꾸었다. "정말 모르신단 말이죠?" "몰라. 기둥이라니? 아무리 내가 힘이 세도 할 일 없이 기둥을 지고 다니 겠냐?"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좋습니다. 이런 짓은 하고 싶지 않았지만 보여드리죠." 갑자기 녀석이 손을 뻗었다. 그러자 녀석의 손 끝을 따라 광원이 생겨나더니 갑자기 석벽 한 구석에 커 다란 구멍이 뚫렸다. 아니, 뚫렸다는 것은 옳은 표현이 아닐 지도 모른다. 원래부터 있었던 구멍이 드러난 듯 그 구멍은 소리 없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구멍 앞에 잔뜩 무언가에 묶인 세 명이 보였다. 그 세 명은 다 름 아닌 다크와 듀나시, 그리고 놀랍게도 사라졌던 미하라였다. KUBERIN...... 빛을 향해 걷는다 그 빛에 눈이 타고 몸이 타오를 지라도 걷지 않으면 안될 길이 있다 6 미하라는 넋을 반쯤 잃고 있었지만 사지 중 어디 한 군데가 없어지거나 한 것은 아닌 듯했다. 그녀는 무릎을 반쯤 꿇은 굴욕적인 자세로 비스듬히 엎어져 있었다. 그녀는 내 쪽은 보지도 않았다. 아니, 볼 여력도 없는 것인 지도 모른다. 그에 반해서 듀나시와 다크는 잔뜩 일그러진 표정으로 웅크 리고 있었지만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고 있었다. 그 일그러진 표정에서 나 는 그들이 나와 같은 드래곤 피어로 만든 마법진에 놓여져 있다는 것을 금 방 깨달았다. "어떻습니까?" "뭘?" 나는 트릿하게 되물었다. "이들을 구하고 싶지 않습니까?" 마베릭은 음흉하게, 그 미끈한 면상과 별로 어울리지 않는 음흉한 표정으 로 물었다. 그 느끼한 면상을 보다가 나는 어깨를 멋지게 으슥해 보였다. "아니." 그 말에 마베릭은 턱이 빠진 것 같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니, 실제로 턱 이 빠졌는지도 모른다. 녀석은 마구 마구 침을 튀기면서 소리를 질렀다. "장, 장난하지 마십시오!" "장난 아냐. 어떤 얼빠진 묘인족이 인질로 흥정을 하냐?" 내 말에 마베릭은 진 안에 갇힌 채 일그러진 얼굴로 버둥거리고 있는 그들 을 돌아보았다. 마법진은 은은한 우윳빛을 띈 채로 빛나고 있었다. 밖에서 보면 하얀 사발을 엎어놓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크기는 별로 크지 않았지 만 그 힘은 뭐라 말할 수 없는 정도란 것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저들, 듀나시나 다크니까 그래도 제 정신을 차리고 있는 게다. "그건, 무슨 뜻입니까? 인질로 가치가 없다는 겁니까?" "없다네." 나는 빙그레 웃어주었다. "저, 저, 여자는 당신의 아내입니다. 당신의 아이까지 낳은 여자지요. 그리 고 저들은 당신의 부하로, 혈족이고 가장 가까운 묘인족 아닙니까? 나, 나 는 알고 있습니다. 다, 당신이 저들을 얼마나 아, 아끼는지." 갑자기 말을 더듬는 녀석을 보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저들은 내가 가장 귀여워하는 놈들이야. 듀나시는 나의 사촌형제가 되고 다크는 어릴 때부터 내게 붙어 있었던 녀석이지. 미하라는 내 아이를 낳았고." "그, 그런데 어째서?" 마베릭은 말을 더듬는 것을 억지로 억누르려는 듯이 입가를 일그러뜨렸다. 아까부터 조금씩 이 녀석의 그 싱글거리는 면상이 무너져 내리는 게 꽤 마 음에 들었다. "내가 일일이 설명해야 알아?" 내가 그것도 모르냐는 듯이 되묻자 녀석은 다시 처절하게 일그러졌다. 찌 그러진 솥뚜껑같은 얼굴을 한 녀석은 이제 주먹까지 휘둘러 보였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이제 그만 두시지요. 묘인족의 왕께서 이리도 치사 한 수작을 할 줄은 몰랐습니다." "치사하다니? 어떤 게?" 나는 방긋방긋 웃어 주었다. 마베릭은 일그러진 얼굴로 손짓했다. 그의 손끝이 닿는 곳에는 미하라와 듀나시들이 쓰러져 있었다. 듀나시는 몰라도 다크는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 다. 녀석은 내가 보이는 모양이었다. 덕분에 녀석은 뭐라고 말하려는 듯 입 을 벌리고 벙긋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소리가 나오지 않는 듯했다. "저들을 죽이고 싶지 않으면 일곱 개의 기둥― 정령석을 내어놓으시지요. 그것만 받으면 저는 당신과 굳이 적대할 마음은 없습니다." "나는 있는데?" 내가 대꾸하자 마베릭은 이를 악물었다. "내 놓으십시오. 아니라면 저들은 죽습니다." "죽여봐. 그리고 죽어도 할 수 없어." 담담한 내 말에 녀석의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묘인족인 주제에 인질씩이나 되다니. 그거야말로 죽어서도 못 씻을 치욕 이지. 나는 녀석들에게 그런 치욕을 줄 수는 없어. 그래, 죽여." 그 말에 미간을 찌푸린 마베릭은 손을 뻗었다. 조금의 주저도 없었다. 그리고, 둥근 사발 안에 있던 미하라가 일시에 부르르 떨었다. 아니, 그녀 의 전신으로 푸른 빛이 작열했다. 치익치익 하는 그 소리가 끔찍할 만큼 선명하게 굴 안에 퍼지기 시작했다. 그 소리에 다크와 듀나시도 일제히 미 하라 쪽을 바라보았다. 미하라는 전신을 떨면서 비명을 올리고 있었다. 흰 피부는 갈가리 찢어지고 머리카락은 산발이 된 채 허공에 흩날렸다. "꺄아아아아아악!" 엄청난 비명소리였다. 그녀는 비명을 지르면서 주먹을 치켜올렸다. 그녀를 감싼 그 시퍼런 불꽃 이 대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녀는 부들부들 떨며 일어서려 애썼 다. 그리고 이를 악문 채로 변신을 시도했다. 검은 털이 그녀의 등을 덮었다. 이미 찢어진 옷자락은 바닥에 모조리 흘 러내리고 피와 뭔가 알 수 없는 오물이 범벅이 된 채로 그녀는 부들부들 몸을 떨면서도 일어섰다. 드러나는 송곳니와 손톱이 그 놈이 둥근 사발을 후려갈겼다. 채앵채앵 소리가 울렸지만 그녀는 그것을 뚫지는 못했다. 그 대신 손목이 부러졌는지 우득우득 소리를 내며 덜렁거렸다. "우아아아아악!" 비명은 절규가 되었다. 그녀는 시뻘게진 눈으로 사방을 노려보면서 진안에서 빠져나오려고 몸부림 치고 있었다. 그녀의 손톱 두 개가 다시 부러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 는 어깨로 진을 밀쳐내려 했다. 그러자 역시 뭔가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어깨가 탈골되며 피를 뿌렸다. 팔이 반쯤 뽑히면서 드러난 그 살점 과 허연 뼈가 시야에 드러났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이를 드러낸 채, 증오와 살의로 불타오르는 눈을 들어 그녀는 계속해서 진에게 공격을 감행 했다. 그게 얼마나 무모한 짓이라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려는 듯 마베릭 은 다시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녀의 몸은 이번에는 붉은 빛으로 휘감겼다. 단단한 변신의 가죽 을 뚫기 위해서인 듯 시뻘건 불길은 뱀처럼 요사하게 그녀의 몸으로 달려 들었다. 누릿한 타는 냄새와 비명소리가 귓속을 쩌렁쩌렁 울렸다. 나도, 듀나시도, 다크도 묵묵히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우리들이 지켜보는 모습을 보며 마베릭이 입을 열었다. "아직도, 내 놓지 않으시겠습니까?" "싸우다 죽는 거다." 나는 조용히 말했다. "묘인족은 싸우다 죽는 거다. 포로도, 노예도, 인질도 없어." "굉장히 냉혹하네요." 마베릭은 일그러진 입 꼬리로 웃었다. "아이를 구하러 온 것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지금 당신의 말은 마치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들리는 군요." 나는 마베릭을 바라보면서 침묵했다. 나는 아이를 구하러 온 것이 아니었다. 아이를 구하러 올 자는 어미인 로 오나이지 내가 아니다. 이 녀석에게 일일이 설명해 보아야 이 놈은 이해하 지 않는다. 아니, 못하는 것일 지도 몰라. 녀석은 그저 비정하다느니 냉혹 하다느니 하는 소리나 지껄여 댈 것이 분명했다. 만약 인간이라면, 지금 내 눈앞에서 마법의 불길에 휩싸인 채 죽어가고 있는 것이 만약에 인간이었다면 나는 그를 구하러 달려들었을 것이다. 그 를 위해 굴욕도 참았을지 모른다. 마치, 그 옛날 스카를 구하려 했을 때처 럼. 하지만 미하라는 인간이 아니다. 묘인족이다. 묘인족인 그녀는 내가 자신 을 위해 굽힌다면 목을 그어 스스로 죽어버릴 것이다. 성년이 된 묘인족이 그런 굴욕을 참아 낼 수 있을 리가 없다. 로오나가 반폐인이 되다시피 한 것도 결국은 그런 까닭이다. 우리들 중에는 <인질>이란 단어를 이해 못하 는 녀석들이 많다. 인질이란 게 대체 뭔지 왜 인질이라는 것 때문에 꼼짝 못해야 하는 지 이해 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침묵하는 것처럼 듀나시와 다크도 침묵하고 있었다. 아니, 침묵이라기 보다는 어떻게 해서든지 그 진을 빠져나오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미하라 쪽은 보고 있지도 않았다. 지금 당면한 문제는 그녀가 아니라 자신들이었으니까. 하지만 녀석들은 마베릭을 향한 살기는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녀석들 모두, 마베릭놈을 향해 이를 부득부득 갈며 버둥거리고 있 었다. 문득 나는 녀석들이 드래곤 피어라는 그 무적막강의 희한한 마법을 놈들이 이길 수 있는 지 궁금해졌다. 내가 이 것을 이겨낸 것처럼 녀석들 도 이겨낼 수 있는지 그지없이 궁금해졌던 것이다. "정말, 정말.......그녀가 죽어가도록 내버려 둘 참입니까?"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마베릭이 갑자기 외쳤다. 나는 팔짱을 낀 채로 녀석 을 돌아보았다. 녀석은 잔뜩 구겨진 면상으로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그 눈 빛에서 나는 배신감이라고 할 만한 감정을 발견하고 정말 어이가 없었다. 뭔 배신? "당신의 아내인데! 당신의 아내인데 죽어도 상관없단 말인가요! 당신, 저, 정말로 그렇게도 냉혹합니까!" "죽어도 상관없다니.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냐? 그녀는 약해서 너에게 잡 혀 죽어가고 있는 거야. 죽이는 건 너지 내가 아냐." 내 말에 그는 부들부들 떨었다. "당신 때문에 죽는 겁니다! 당신이 나에게 정령석을 건네주었다면 그녀는 죽지 않습니다." 억지를 쓰는 어린애 같아서 나는 웃음이 다 나올 정도였다. "그걸 말이라고 하냐? 미하라는 너 때문에 죽어가고 있는 거야. 그녀는 너에게 죽는 거야. 나와는 관계가 없어." "어, 어떻게 관계가 없다는 겁니까!" 그는 이젠 비명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냉혹한 살인마 주제에 왜 난리를 치는 거야? 지가 죽이고 있으면서 왜 나 에게 책임을 전가하지? 이거야말로 말도 안 되는 논리일세. "당신의 아내인데, 당신은 그녀를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거예요? 아니, 사 랑하지는 않는다고는 해도 최소한 그녀를 좋아하고 있는 것 아니었어요?" "당연히 좋아해. 그런데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내 말에 녀석은 참을 수 없다는 듯 부들부들 떨었다. "좋아하는 여자가 죽어 가는데도 그렇게 태연할 수가 있어요?" "내가 태연해 보여?" 내가 다시 묻자 녀석은 입을 다물었다. 시퍼렇게 질린 얼굴이 경직되었다. 녀석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더니 재차 말했다. "정령석을 내 놓으면 됩니다." "나중에 죽여줄게." 나는 상큼하게 응답하고는 미하라 쪽을 계속 바라보았다. 그녀는 다시 변신하고 있었다. 2단계의 변신과정을 거치면서 그녀가 걸치 고 있던 모든 옷가지들은 모두 사라져버렸다. 아니, 마베릭이 펼친 불꽃에 모두 재가 되어버렸다고 하는 게 옳은 말일 지도 모른다. 그녀는 두 번째 로 변신하면서 몸을 꿈틀거리고 있었다. 사실, 드래곤 피어 속에서 변신하 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고통과, 치유되지 않는다는 공포였다. "끄아아........!" 비명은 내내 굴 안에 울려 퍼졌다. 그녀의 몸에 난 털이 2단계의 변신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타올라 재가 되어 떨어졌다. 강철만큼이나 단단하던 털이 었다. 보통의 불꽃이라면 그을리는 것 이상은 결코 상할 수 없는 털이다. 그 털을 재로 만든다는 것 자체가 마법의 불꽃만이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녀의 팔뚝은 부러져 덜렁거렸다. 어깨는 탈골되어 허옇게 뼈를 드러냈다. 2단계의 변신임에도 불구하고 상처는 낫지 않았다. 발톱은 부러져 피를 뿌 렸고, 손톱은 두 세 개만 남기고 모조리 부러졌다. 하지만 그녀는 계속해서 저항했다. 지글지글 살이 익어가고, 끔찍한 소음이 지나치게 예민한 귓속으로 뛰쳐 들어 왔다. 미하라는 묘인족 중에서도 강자에 속하는 여자였다. 그녀가 간 단히 굴복하리라고는 나도 생각지 않았다. 그녀는 살기와 공포로 이글거리 는 두 눈을 들어서 내내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는 절대, 절대로 포기할 성 격이 아니었다. "미하라!" 나는 큰 소리로 쩌렁하게 외쳤다. 내 목소리에 반응한 듀나시와 다크가 일제히 내쪽을 돌아보았다. 듀나시는 그제서야 나의 존재를 깨달았던 모양이다. 그는 갑자기 몸에 힘을 주며 내 쪽을 향해 다가서려 버둥거렸다. "미하라!" 미하라는 내 목소리를 듣고 있는 것일까? 그녀는 여전히 버둥거리고 있었다. 귀와, 머리의 일부분의 살갗이 지글대며 익고 있었다. 팔뚝과, 엉덩이, 등줄기에 걸쳐서 가슴까지 살이 익어 가는 고약한 냄새가 코끝을 마비시켰다. "미하라!" 그제서야 그녀는 내 쪽을 돌아보았다. 눈썹이 이미 사라진 그 시뻘건 얼굴 을 보며 나는 큰 소리로 외쳤다. "에이리! 에이리를 생각해! 에이리를 생각해라!" 그 말을 그녀가 알아 들었는지 나는 잘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갑자 기 부르르 떨었다. "에이리는 아직도 어리다! 내가 큰 소리로 외치자 그녀는 일그러진 입술로 이를 부드득 갈았다. 삐죽 이 튀어 나온 송곳니와 이미 찌그러진 입술 사이로 타액이 떨어져 내렸다. "까아아아악!" 그녀는 고함을 내질렀다. 불타오르는 몸체로 그녀는 진을 향해 부딪쳐 갔 다. 펑펑 소리가 나고 익어서 죽어버린 살점이 바닥에 떨어졌지만 그녀는 굴복하지 않았다. 비명과도 같은 그 고함 소리 속에서 나는 그녀가 우는 것을 보았다. 달라붙은 눈꺼풀 사이로 눈물이 흐르다가 곧 날아가 버렸다. 미하라는 고개를 바짝 들고 마베릭을 노려보았다. 처음 넋을 잃고 있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눈초리로 이글거리는 살의를 담고 그녀는 마베릭을 향해 이를 갈았다. 그녀는 덜렁거리는 팔뚝을 주저하지 않고 덥석 잘라 던졌다. 아까와 달리 조금 유연해진 몸놀림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 는 이미 불덩이였지만 의지는 그대로 살아 있었다. "에이리." 그녀의 입술이 움직였다. 그녀는 자신의 몸을 태우는 불꽃보다 이글거리는 두 눈으로 마베릭을 향해 걸었다. 달리거나 뛰는 것이 아니라, 그녀는 그를 향해 걸었다. 그리고, 그녀는 드래곤 피어를 통과했다. "대단하네요." 마베릭은 진을 빠져 나오자 마자 자신을 향해 돌진해 오는 미하라를 향해 가볍게 손을 뻗었다. 시퍼런 전격이 그녀의 몸을 적중시켰지만 그녀는 나 동그라지는 대신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다시 달려들지는 못했다. 그녀는 일어나려고 버둥거리면서 바닥을 기었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마베릭은 한숨을 내 쉬었다. 마치 안쓰러운 양. 그 가증스러운 면상을 한 대 두들기고 싶다고 생각할 무렵 마베릭은 가증 스럽게도 혀를 찼다. "지독하네요. 묘인족도 묘인족 나름이란 말이 맞는 지도 몰라요." 그는 그렇게 어깨를 으슥하더니 가볍게 몸을 공중에 띄웠다. 문득 마베릭 이 나를 향해 물었다. "에이리가 뭔가요?" "미하라의 아들." 그 순간 그는 묘하게 일그러진 얼굴을 했다. 그리고는 킬킬 웃어대기 시작 했다. "이야, 이야, 모성애라는 거예요? 정말 모성애라는 게 죽음보다 강한 건가 요?" "내가 여자가 아니라서 모르겠는데?" 내 말에 녀석은 배를 잡고 웃었다. 그 웃어대는 몰골이 마치 미친 놈 같아 서 나는 마주 웃어 주었다. "정말 기가 막히네요. 쿠베린님, 당신은 이렇게 될 줄 알았어요?" "글쎄다." 내 대꾸에 녀석은 피식 피식 웃으면서 바닥에서 어떻게서든 일어나려는 미 하라를 향해 손을 내뻗었다. 하지만, 그 이전, 갑자기 무언가가 그의 목을 댕겅 잘라버렸다. 피가 분수처럼 솟으며 텅 빈 공간에 반원을 그렸다. 녀석 의 목은 애들이 차고 노는 돼지 오줌보처럼 핑핑 튀어 바닥을 대굴대굴 굴 렀다. "어이, 어이, 살아 있어?" 나타난 것은 나의 버릇없는 동생 휴런이었다. 물론, 그의 뒤에는 카산과 튜 나, 엘레등이 섞여 있었다. 녀석은 바닥을 대굴대굴 굴러다니는 마베릭의 목을 모른 척하고 진안에 갇혀 있는 나와 다크, 듀나시를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는 바닥에서 꿈틀거 리고 있는 미하라를 잔뜩 찌푸린 얼굴로 쏘아보며 물었다. "이거 뭐야?" "미하라." "에?" "미하라라구." "미, 미하라라구?" 휴런이 갑자기 비명소리를 내면서 미하라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만신창이 가 된 미하라를 향해 입을 적적 벌리더니 부들부들 떨었다. "이, 이럴 수가! 누가 이런 짓을!" "네가 방금 목을 날린 놈이." 그 순간 휴런은 팩 돌아서더니 갑자기 널브러진 마베릭의 목없는 시체를 향해 발길질을 시작했다. 그리고는 그 가련한 시체를 이리 던지고 저리 던 지고 마구 패대기를 치더니 씨근덕거리면서 이를 갈았다. "이런 짓을 하다니! 이, 나쁜 새끼! 이 놈은 죽어도 용서할 수 없어!" 악악거리는 녀석을 보며 나는 혹시 이 놈이 미하라를 넘보았던 것은 아닌 가 하고 조금 의심스러워졌다. "아아아아악! 그 미녀를! 그 엄청난 미녀에게 이런 짓을 하다니! 아아악! 그 아름다운 백금발을 돌려줘어어어어어!" 휴런의 절규와 함께 내 앞으로 튜나와 카산이 다가왔다. "에닌!" 카산은 축 늘어진 에닌을 향해 달려왔다. 그는 악을 지르며 내 앞으로 뛰 어 들려다 말고 흠칫거렸다. 녀석도 왜 내가 움직일 수 없는가를 알아차린 듯했다. 하지만 녀석은 다짜고짜 고함을 질렀다.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미하라나 봐줘. 에닌은 그저 기절했을 뿐야." 내 말에 부들부들 떨던 카산은 어떻게든 다가오려고 손을 내뻗었다. 하지 만 바닥의 마법진이 번쩍거리자 녀석은 한 걸음 물러섰다. 이중의 마법진 이라는 것을 눈치 챈 듯 튜나는 계속해서 나와 에닌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 다. 카산도 그런 튜나를 따라 빙빙 돌면서 머리칼을 쥐어뜯었다. 사방 2메 테르 정도의 마법진 안에 드래곤 피어로 만들어진 1메테르 정도의 마법진 이 또 있다. "이 거 풀 수 있어?" "고단위 마법진입니다. 이건 흑마법이라서 저로선 모르는 것인데요? 이 문양과 이 계산은 생소한 것입니다." 카산은 살짝 손에 마법력을 뿜어내며 진을 시험하듯 건드렸다. 그러자 내게는 보이지 않던 주변의 원이 번쩍 빛을 발했다. 두 겹, 세 겹으 로 그어진 원 안에는 본 적 없는 기이한 글자들이 번쩍거리며 자신들을 드 러내고 있었다. 그 앙큼스러운 모습에 나는 혀를 찼다. 글자인지 무늬인지 도 확실치 않은 것들에게 갇혀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보니 좀 허망하다고 나 할까. "아크나 킬트 놈을 불러와야 하는 걸까나." 내가 그렇게 중얼거리자 뒤에 서 있던 튜나가 뒤를 돌아보았다. 뒤에는 목 이 날아간 마베릭을 창백한 얼굴로 지켜보고 있는 색마놈이 있었다. 카나 리안은 튜나의 시선을 받자 내 쪽을 돌아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하죠." "너 할 수 있나?"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는 한 걸음 다가서서 마법진의 모양새를 살폈다. 잠시 그의 얼굴은 잔뜩 찡그려지더니 내가 서 있는 바닥을 더듬거렸다. 뭔가 알아들을 수 없는 소 리를 중얼거리던 녀석은 한 손을 뻗더니 곧이어 낮은 소리로 바닥에 잔뜩 이상한 것들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가 그러고 있는 동안 튜나와 카산 은 쓰러진 미하라에게 달라붙어 있었다. 카산은 두 손을 뻗어 엘프의 자랑할 만한 치유술을 펼치기 시작했고 튜나 는 옆에서 그런 그의 모습을 관찰하며 약을 빼어 들고 있었다. 그녀가 펴 든 것은 엘프의 치료액인 듯했다. 다행히 미하라 역시 드래곤 피어를 빠 져나온 탓인지 상처가 급속도로 아물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미 모는 다시 되찾기는 어려울 것이 분명했다. 일그러진 살점과 녹아 사라진 이목구비를 어떻게 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녀의 의지는 지켜졌고 그녀의 명예는 나와 다크와 듀나시가 보는 가운데 살아났다. 그것만으로도 그녀는 견딜 수 있을 것이다. 에이리가 있을 테니 까.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눈 앞에서 별이 반짝였다. 누군가가 날 후려갈긴 게 아니라 번갯불이 번쩍이듯 순간적으로 내 눈 앞으로 빛이 번뜩였다. 내 앞 을 막아선 진이 사라진 것을 깨닫고 나는 화급히 마베릭을 향해 달려갔다. "그 녀석의 머리통을 잡아!" "에?" 구석에 서 있던 조인족의 꼬맹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녀석은 자신의 발치에 구르는 마베릭의 머리통을 집어 들었다. "이거 말입니까?" "그래. 그거 줘." 녀석은 의아해 하면서도 마베릭의 머리통을 내게 건네주었다. 나는 그 머 리통을 잡아 들고 카나리안에게 물었다. "야, 색마. 너 저 드래곤피어의 진을 해체할 수 있어?" "에? 저, 저게 뭐, 무슨 진이라고요?" 카나리안은 두 눈을 부릅뜬 채로 물었다. 녀석은 내가 서 있는 진을 해제 했을 뿐, 에닌과 다크들이 서 있는 드래곤 피어 마법진은 해제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 놈이 개발해낸 드래곤 피어를 뿜어내는 마법진이래. 너 해제 할 수 있어?" 카나리안은 그 말을 듣고는 멍하니 마법진을 바라보았다. 에닌은 여전히 꼼짝 않고 늘어져 있었다. 뒤늦게 말을 들은 카산이 지친 얼굴로 허옇게 되어 달려왔다. 마법진이 모두 해제 된 것으로 생각했던 그는 카나리안의 옆에 다가와 급히 캐물었다. "아, 안 되는 겁니까?" ".........이런 건, 처음입니다." 카나리안은 넋을 잃은 채 중얼거렸다. "당연히 처음 이겠지. 이 놈이 개발한 지 얼마 안 되었다니까. 풀 수 있어?" "시,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역시 쉽지 않을 것 같군요. 심각한 얼굴을 한 카나리안은 몇 번이나 마법진 주변을 빙빙 돌았다. 역시 새로 만들어 냈다는 이 마법진을 향해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기어다니던 카나리안은 날 올려다보면서 물었다. "그런데, 여기서 어떻게 나왔습니까?" "걸어서." 내 질문에 녀석은 잠시 동안 침묵하더니 뒤에서 이쪽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다크와 듀나시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저 분들은............." "드래곤 피어를 이겨내면 그 진안에서 걸어 나올 수 있어. 순전히 드래곤 피어 하나 만으로 만들어진 진이라고 했으니까." "하지만.......정말로 고대의 용족의 힘을 이런 식으로 재현하다니 믿을 수 가 없어요." 카나리안은 감탄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 보다는 이 주변에 널린 시체를 보고 떠오르는 생각은 없어?" 내 말에 카나리안은 흠칫 몸을 떨었다. 안 그래도 에닌에게 정신이 팔린 그들 이외에 다른 자들은 모두 넋을 잃 고 유리관 안에 담겨진 시체를 바라보고 있는 중이었다. 특히 엘프들은 당 장이라도 졸도 할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동족이 갇힌 유리 관 앞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조인족들도 충격을 받은 얼굴로 그 유리관안 에 담긴 자들 중 혹여 조인족의 아이들은 없는가 살피고 있었다. "이런 짓을 어떻게......." 카나리안은 하얗게 질리다 못해 퍼렇게 된 얼굴로 중얼거렸다. 카산은 그 런 그를 부축하면서 구석에 늘어져 있는 시체들을 가리키며 내게 물었다. "저 들은 어찌된 거지요?" "드래곤 피어를 시험해 본 것 같아. 덕분에 시체가 되었지만." "그, 그럼?" 카산은 짐작이 되지 않는다는 듯 입을 벌린 채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턱 짓을 했다. "어서 저 안에서 끌어내지 않으면 안 돼. 저 안에 오래 있으면 죽지도 살 지도 않은 상태가 될 거야." "그, 그냥 정신만 잃은 게 아니고요?" 카산이 급히 내 옷자락을 잡아 당겼다. 이봐, 잡아당길 옷자락이 내가 어디 있다고 이래? "드래곤 피어라는 게 어떤 건지 모르는 거야?" 낮게 카나리안이 속삭이듯 말했다. 충격이었는 듯 그의 목은 잔뜩 쉬어 있 었다. "드래곤 피어는, 곧 죽음의 날개라 불리우는 거야. 사신의 낫이라고도 불 리는 거라고." "그게, 그러니까 정신적인 공격인 거니까 의식을 잃으면 괜찮지 않나요?" 카산은 초조한 듯 에닌의 쓰러진 모습을 바라보았다. "의식을 잃으면 곧이어 숨 쉬는 것도, 심장이 뛰는 것도 안 하게 돼." "어째서요?" "죽음이 덮는 거니까. 죽음에 굴복하는 거니까." 카나리안은 급히 말하고 뻣뻣이 서서 이쪽을 보고 있는 듀나시와 다크쪽을 가리켜 보였다. "항의해야 해. 이겨내야 한다구. 굴복하면 죽는 거야. 아니, 양자 택일이야. 고통을 영원히 겪거나, 아니면 죽거나." 무슨 소리인지 알아 들을 수 없다는 얼굴로 카산은 나와 카나리안의 얼굴 을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는 엘프답지 않은 태도로 갑자기 이를 뿌드득 갈 았다. "이, 이, 이 잔인한 자!" 카산은 내 손에서 마베릭의 머리통을 빼앗아 들더니 인정사정없이 머리통 을 벽에 집어 던졌다. 퍼억 하고 피를 뿌리며 머리통이 돌벽에 부딪쳐 대 굴대굴 굴렀다. 뻐억 하는 소리가 나는 것을 보아 머리뼈에 금 정도는 가 지 않았을까? 그의 그런 태도에 옆에 있던 엘프들은 일제히 입을 저억 벌 렸다. "허억, 허억.....이, 이건 너무해. 대체, 대체 이 자는 이런 짓을 왜 하는 거 에요!" 그는 비명처럼 외치면서 흐느끼기 시작했다. 엘프의 비명이 쩌렁쩌렁 주변 을 울리는 동안 아무도 말을 하지 못했다. 그렇게 우는 카산을 위로하듯 튜나가 토닥여주었다. 조인족들은 말 없이 지켜보고만 있을 뿐 말이 없었 다. 조인족의 여왕은 다크들 쪽으로 시선을 두고 있었다. 그녀는 대체 그 드래곤 피어의 진이라는 게 어떤 것이기에 저렇게 묘인족이 찌그러진 상태 로 자빠져 있는지 궁금한 듯 했다. 아, 아슬아슬 했네. 저 여자에게 내가 저렇게 망가진 모습을 보였다면 나는 정말 살고 싶지 않았을 게야. 나는 듀나시와 다크쪽으로 다가가 점잖게 말해주었다. "빠져 나와봐. 미하라가 해 냈어. 만약 네놈들의 힘으로 거기서 빠져나오 지 못한다면 너희들은 미하라에게 절대 고개 못 들어." 내 말을 들은 것인지 못 들은 것인지 확인할 수는 없었다. 진 안에서는 말 소리조차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다크는 내 입모양을 보고도 무 슨 소리인지 알았던지 쓰러져 있는 미하라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일 그러진 입가를 억지로 바로 돌리려 애쓰며 한 걸음 내쪽으로 걸음을 옮겼 다. 듀나시도 그렇게 하려 했다. 하지만 그는 하지 못했다. 그는 잔뜩 일그 러진 얼굴로 버둥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그렇게 계속되면 몸이 천천히 산 채로 썩어 들어가게 될 것이다. 살아 있는 것이 죽으면, 썩게 되니까. 다크는 이를 악물고 있었다. 녀석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지만 나는 그 것이 슬퍼서도 분해서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눈물은, 그저 몸을 제 어할 수 없기에 새어 나오는 것이지 별 다른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일그러진 입가로 흘러내리는 타액도 마찬가지다. 녀석은 억지로 손을 들어 마법진을 건드렸다. 치직 하고 가볍게 소리가 나긴 했지만 여전히 진은 단 단한 사발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일그러진 눈과 부들부들 떨리는 눈꺼풀. 하지만 다크는 여전히 움직였다. 아, 나도 저랬을까? 아이고, 차마 못 볼 꼴이었겠군. "아우가후우고앙?" 뭔 소리인지 알아 들을 수 없었지만 최소한 다크가 말을 하려 한다는 것 자체가 꽤 고무적인 일이었다. 미하라는 비명 이외엔 말도 하지 못했었다. "무슨 소리인지 못 알아듣겠다. 너, 우냐?" 내 말을 반쯤 알아 들었는지 다크는 억지로 흘러내리는 눈가에 손을 들이 댔다. 제딴에는 눈물을 닦으려는 행동인 듯했지만 손은 그의 의지를 배반 하고 제멋대로 귀를 건드렸다. 그 몰골에 나는 상냥하게 격려했다. "병신." 다크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나는 아직도 제대로 일어서지 못하는 듀나시를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일어서지도 못하고 있는 것을 보아 하니 내 격려가 필요한 것 같군. 응원해 줘야지. "병신, 너는 내 말 소리조차 못 듣고 있지?' 그 말을 듣기나 했는지 억지로 듀나시는 다크쪽을 바라보았다. 그 녀석의 그 일그러진 얼굴은 다크보다도 더 심했다. 눈썹은 아래로 처지고, 입가는 잔뜩 뒤틀려서 타액이 줄줄 새어 나왔다. 혀가 반쯤 나와 있는 것을 보아 하니 다크 보다도 상태가 심각했다. 녀석은 찌그러진 눈꺼풀을 벌벌 떨면 서 나와 다크 쪽으로 손을 뻗으려 했다. 하지만 손은 닿지 않는다. 그 얼굴 에 깃들인 공포를 보고 나는 혀를 찼다. 듀나시의 공포. 그것은 대체 어떤 것일까? 내가 녀석의 다리 몽둥이를 부 러뜨릴 때보다 강할까? 듀나시의 일그러진 얼굴과 다크가 억지로 말을 하 려는 모습을 보며 나는 의문을 느꼈다. 왜 다크보다도 듀나시가 더 약한 것일까? 듀나시가 다크보다도 더 강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어차피 이 것 은 체력과는 관계없는 정신력의 싸움이다. 듀나시가 다리를 절든 말든 그 것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항상 질질 짜던 다크보다 냉정하던 듀나시가 왜 더 약한 것일까? "미하아나과아나사하?" 이제 겨우 말 비슷한 소리가 나왔다. 나는 다크를 돌아보았다. 다크는 제법 그런대로 볼만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녀석은 잘 안 움직이는 혀를 억지로 놀리며 흘러내리는 타액을 연신 손등으로 닦아냈다. "미하라는 괜찮아. 너희들 보다 훨씬 더 강한 여자지." "저마버사나주어거사스브가?" "뭔 소리인지 못 알아듣겠다. 병신아. 너 사타구니에 달린 그거 떼 버려. 앞으로 여자들에게 추근대면 내가 대신 그거 다 뗀다. 듀나시, 등신아. 창 피한 줄을 알아. 그 면상이 뭐냐? 그 면상이?" 다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녀석은 달아 오른 얼굴로 억지로 턱을 움직였 다. "그런마하지마사요!" 하지만 듀나시는 여전했다. 녀석의 손등이 시퍼래진 것이 보였다. 손톱을 빼들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듀나시의 손톱은 나오지 않았다. 그는 어색한 자세로 자신이 짚고 있는 땅을 긁고 있었다. 아아, 제길. "정말, 방법 없어요?" 튜나가 에닌과 다크들을 번갈아 보면서 카나리안에게 물었다. 카나리안은 여전히 심각한 얼굴로 뭔가를 끄적이고 있었다. 뭔 계산을 하는 건지 뭘 그리는 건지 앞으로 봐도 모르겠고 뒤로 봐도 모르겠다. 녀석은 한동안 고 민을 하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제 힘으로는 안 됩니다. 저기, 역시 아크님이나, 다, 다른 분을........." 이 상황에도 지 애비 이름을 안 대는 녀석을 보며 나는 혀를 찼다. "급한 걸 보면 모르냐? 이 마법진을 확 날릴 그런 마법 없냐? 해제는 안 돼도 뭐 그런 거 있잖아? 여기 쓰여진 것을 지운다던가. "마법진이라는 게 발로 쓱 밀면 지워지는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설마 아 니겠지?" 튜나가 미심쩍다는 듯이 물었다. "안 돼냐?" 내 말에 튜나는 핏대를 올렸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길게 떠들 수는 없다 고 생각했는지 한숨을 내쉬고는 카나리안에게 다시 물었다. "에닌은 얼마만큼 버틸 수 있을까요? 보아하니 확실히 저 묘인족들과는 상태가 다른데." 튜나의 말에 카나리안은 내 어깨 너머로 버둥거리는 두놈을 바라보았다. 그는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튜나. 저 묘인족들은 저 상태로도 몇 시간이나 버틸 수 있어요. 어쩌면 저기 검은 머리의 다크시온, 다크시온은 극복해 버릴 지도 몰라요. 하지만 에닌은..........." 그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길게 말 안 해도 뒤에 무슨 소리가 나올지 알 만했다. 그때였다. "그러니까 그 정령석을 내 놓아 보라고요." 우리들은 일제히 부르르 떨며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 새인지 자기 머리통을 품안에 안은 기괴한 모습이 된 마베릭놈이 벌 떡 일어나 서서 지껄이고 있었다. KUBERIN...... 빛을 향해 걷는다 그 빛에 눈이 타고 몸이 타오를 지라도 걷지 않으면 안될 길이 있다 7 "끄, 끄아아아아!" "아악!" 엘프들 사이에서 비명이 터져나왔다. 몇몇은 말 그대로 시퍼렇게 질려 구 토를 하기 시작했으며, 몇몇은 벌레 보고 놀란 귀부인처럼 탄식하며 비틀 거렸다. 언데드마법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를 거부하는 엘프들은 제 잘려진 머리를 안고 서 있는 마베릭놈의 꼬락서니를 도무지 참을 수 없었나 보다. 비명을 올리며 가장 마베릭쪽에 가깝게 서 있던 엘프 하나가 마법을 날렸다. 뭔지 잘은 모르겠지만 허연 빛을 뿌리며 달려간 마법력은 마베릭의 실드에 맞아 피식 꺼져 버렸다. 그러나 그게 도화선이 되었는지 엘프들은 졸도할 것 같 은 표정과 토할 것 같은 표정을 반반 씩 섞어가며 미친 듯이 공격을 시작 했다. "으악!" "저, 심해!" "오옷, 생명의 이름을 가진 이여! 용서하소서!" 엘프들의 비명소리를 들으며 나와 휴런, 그리고 조인족들은 잠시 침묵했다. 그들의 저런 발광을 한 두 번 보는 것도 아니었지만 오늘 이렇게 다시 보 니 참으로 새삼스럽다. 어쨌거나 마베릭의 실드는 강력하게 그를 감싸 안고 있었다. 엘프들 십수 명이 동시에 공격을 감행했는데도 전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만!" 내가 고함을 치자 헐떡이던 엘프들이 일제히 나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얼 굴에 노골적으로 드러난 그 표정― 저런 몰골을 봐야 하느냐는 의문과 질 책이 담긴 그 표정을 바라보면서 나는 친절하게 말해주었다. "시끄러워." 그들은 현명하게도 곧 침묵했다. 물론, 그 침묵 전에 조금 소음이 일어났지 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너, 머리를 안 붙여도 괜찮아?" 내가 자상하게 묻자 마베릭은 조금 멋쩍은 얼굴로 옆구리에 낀 머리를 긁 적였다. "아닙니다. 곧 붙여야죠." "그러니까 머리를 잘라내도 죽는 게 아니네?" "그렇다고 할 수 있죠." 녀석은 빙긋 웃었다. 정말 옆구리에 제 머리통을 끼고 떠드는 놈과 대화를 나누자니 여기저기가 거북해졌다. "쿠, 쿠베린...." 모처럼 휴런이 말을 더듬으며 내 옷자락을 잡아 당겼다. "왜?" "재, 재, 재......" "떨지 말고 말해. 뭐가 어쨌다구? 네 놈이 실수한 게 아니야. 그저 저게 이상한 물건일 뿐." "물건이라니 너무 심하시네요. 저는 분명히 살아 있는 존재랍니다. 보통 인간과 조금 다를 뿐이죠." 마베릭이 느끼하게 한 마디 하는 순간, 휴런은 내 팔뚝을 꼬집으며 외쳤다. "재밌어!" "..........." 잠시 동안 우리들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휴런은 내 얼굴을 보지도 않은 채 얼어버린 마베릭의 면상을 바라보며 얼굴을 붉혔다. 아아, 저 상기된 뺨. 시커무리둥둥한 사내자식의 얼굴 붉힌 모습은 얼마나 끔찍한가. "재미있잖아? 저거 봐! 제 머리통을 옆에 끼고 떠들다니! 저런 구경거리는 난생 처음이야. 조금 모자란 놈 같기는 해도, 저런 희한한 재주를 가졌다니! 감동했어!" 감동이란 단어를 여기에 써도 되는 것인지 나는 잠시 동안 갈등했다. 하 지만 휴런은 어린 놈처럼 방방 뛰며 흥분한 눈빛으로 얼어버린 마베릭을 느끼한 시선으로 훑어보고 있었다. 녀석의 느끼한 시선은, 돼지기름 엎어놓 은 것보다도 강력했으며 마차 바퀴 윤활유보다도 미끌거렸다. 녀석의 시선 에 공포를 느꼈는지 어지간한 마베릭놈도 애써 시선을 피했다. "아, 그러니까 그 진을 파해하려면....." 게다가 어떻게든 화제를 바꾸어 보려고 노력까지 하고 있었다. 허나, 휴런 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그에게 있어서 에닌이나 다크따위는 별로 중요하지도 않다. "얼굴도 잘 보니까 꽤 귀여운 면이 있는 거 같아. 이봐, 귀염둥이, 다른 묘기를 한 번 부려보는 게 어때?" 휴런이 갑자기 휘파람을 불었다. 그 순간, 모두다 얼어붙었다. 귀염둥이? 잠시 동안 나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이 분위기를 해결해야 한다는 의무감 에 사로잡혔다. 이 심각하고 비극적인 상황을 단숨에 희극적인 상황으로 바꾸어 버린 휴런에게 모처럼 감탄하면서 나는 그 놈의 뒤통수를 한 대 갈 겨주었다. "아팟!" "지금 이 상황에 귀염둥이란 말이 나온단 말이냐!" "그럼 뭐라 부르리? 설마하니 노랑 대갈통이라고 부르란 말이야? 분위기가 없잖아!" 휴런의 반문에 나는 다시 한 번 녀석의 머리통을 후려갈겼다. "저 놈에겐 이미 분홍주둥이라는 이름이 있어. 굳이 노랑 대갈통이라 부르 지 않아도 돼." 내 대답에 휴런은 갑자기 씨익 웃음 지었다. 꽤 거북한 웃음이었다. "질투하는 구나? 쿠브형? 어이, 뭘 그런 걸 갖고 그래?" 내가 이 놈을 패기 시작했을 때는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 "그래서 계속해봐. 아니면 그 머리통 들고 손 들고 서 있던지." 내가 휴런을 두들긴 손을 털면서 마베릭에게 묻자 녀석은 왠지 새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뭐, 고개라고 할 수도 없었다. 머리통을 옆 구리에 끼고 있는데 고개를 숙이고 마시고 할 게 있기나 하나. 그런데 대 체 왜 얼굴을 붉히는 거야? 왜? 대체 왜? "그러니까, 그......진을 파해하려면 정령석을 꺼내 보라는 말이지요." 녀석은 뺨을 붉힌 채 슬쩍 휴런과 나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그 은밀하고 도 야릇한 눈빛을 보고 나는 미쳐버릴 것 같았다. 어쩌라구! 어쩌라구! 아 악! 제발 부탁이야. 사내의 상기된 두 뺨 따위 절대 보고 싶지 않아! "그래서?" "뭐, 그렇다는 거죠. 그 덕에 저도 그 정령석 구경도 좀 하고 말이죠." 녀석의 말을 듣고서 옆에 있던 튜나가 재빨리 끼어 들었다. "저 놈의 말을 귀담아 듣지 마! 일단 아크님이나 킬트 마이오스가 오면 되니까. 아니면 시간을 더 주면......." "저런, 저런. 하프엘프아가씨, 너무 낙관적인 생각을 하고 있군요." 녀석이 평상시의 재수 없는 미소를 머금으면서 끼어 들었다. 하지만, 아무 리 네가 매끈한 미소를 지어 보여도 그건 엽기이상은 안 된단다. 어떤 미 친 여자가 머리통 옆에 끼고 선 놈에게 매혹되겠냐? "닥쳐! 너 같은 놈은 당장 머리 박고 죽어야 해! 만약 내게 힘이 있다면 네 놈을 몇 조각으로 갈가리 찢어 버릴 텐데!" 튜나의 열렬한 반응에 녀석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오, 미안하네요. 나는 머리를 박아도 죽지는 않거든요." 녀석의 여유만만한 대답에 막 튜나가 발작하려는 순간이었다. "아, 그럼 다른 재주를 한 번 더 부려보라고. 다음은 머리통으로 공차기를 해본다던가, 머리통을 옆구리에 붙인다던가." "......." "아, 머리를 엉덩이에 붙여보면 어떨까? 굉장히 야스러울 것 같지 않아?" 천연덕스레 끼어든 휴런 때문에 녀석은 다시 굳었다. "머리통을 엉덩이에 붙인다고 야해져?" 내가 의문을 표시하자 휴런은 진지하게 말했다. "그렇지만 사내자식인데 가슴에 달라고는 할 수 없잖아?" "만약 저 게 여자였으면 가슴에 달라고 하려고 했어?" 내 질문에 휴런은 고개를 숙이며 심각한 얼굴을 했다. "여자가 앞에 머리통을 달면 야해지나?" 휴런의 질문에 옆에 있던 튜나가 전속력으로 달려와 그 머리통을 후려갈겼 다. "야해지는 게 아니라 끔찍해진다! 지금 그런 대화를 나눌 정도로 여유가 넘치냐? 이 멍청아!" "이놈의 덜 빠진 하프엘프가!" 휴런이 버럭 소리를 지르는 동안 마베릭놈은 정말로 돌이 되어 있었다. 어 쩌면 그의 그 짧은 생애사상 이런 소리를 들어 본 것은 처음일런지도 모른 다. 감사해라. 이 첫 경험을. 돌이 된 녀석을 모른 척하고 나는 가슴팍에 대롱 매달린 내 주머니를 풀어 들었다. "그걸 정말로 내 놓을 생각이에요?" 갑자기 튜나가 놀란 어조로 외쳤다. 옆에 있던 카산도 얼굴색이 변해 나에 게 다가섰다. "쿠, 쿠베린님, 설마하니 정말로 정령석을 내 놓을 거예요?" "아니면 에닌이 죽잖아?" 내 말에 튜나와 카산, 그리고 카나리안등은 입을 벌렸다. 상처 입은 미하라를 돌보고 있던 엘프들도 일제히 내 쪽을 돌아보았다. 그 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나를 기가 막히다는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면상들은 다 뭐냐? "그, 그러니까......미하라님이 죽는다고 해도 내 놓지 않던 것을 왜........" 카산이 어색한 어조로 말했다. 녀석의 얼굴은 눈물 범벅이었다. 그 기괴한 면상을 보다가 나는 마베릭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베릭도 묘하게 일그러 진 얼굴이었다. "저 엘프 계집애가 더 소중하다는 겁니까?" "뭐가 더 소중이냐?" 나는 주머니를 들쑤시면서 그놈의 기둥들을 찾았다. 금방 손에 잡히진 않 았지만 어쨌거나 한참 들쑤시고 있는데 갑자기 옆에 있던 카나리안이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어떻게 이렇게도 가혹합니까!" 그는 눈가가 시뻘게진 채로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주먹을 쥐고 파르르 떠 는 몰골이 바람난 남편 다잡는 마누라 같은 모습이어서 조금 웃음이 나왔 다. 하지만, 점잖은 체면에 웃을 수가 없기에 나는 다정하게 대꾸해주었다. "가혹해?" "미, 미하라님의 이런 모습을 보고도 그런 얼굴을 할 수 있습니까? 미하 라님은 평생동안 저 모습이어야 할 겁니다! 저런 화상은 낫지 않아요! 그 러, 그런데! 그런데!" 카나리안의 얼굴을 보다 말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여전히 기둥들은 잘 잡 히지 않았다. 이 무한의 주머니는 보통 마법 아이템들 보다 결점이 많다. 무게가 많이 나간다는 것도 그렇고,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찾는 게 쉽게 잡 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내가 물건을 확실히 인식하고 있으면야 금방 찾을 수 있지만 물건의 모양새라는 게 어디 그렇게 쉽게 머릿속에 남는가. 오각형의 에메랄드를 생각하며 뒤진다고 해도, 오각형의 에메랄드가 어디 한 두 개여야 말이지. 오각형의 에메랄드가 박힌 물건부터 크고 작은 오각 형의 에메랄드가 줄줄이 잡혀 온다. 이렇게 되는 경우 한 개만 나오는 게 아니기 때문에 결국 한참동안 뒤적거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내 기억 으로 그 놈의 에메랄드는 주먹만한 크기였어도 사실은 손바닥만한 크기일 수도 있기 때문에 이 무한의 주머니의 특성상, 결코 물건을 쉽게 찾을 수 가 없다. "저 엘프 계집애가 당신의 아내보다도 소중합니까?" 이번엔 마베릭놈이 불쑥 다시 물었다. 그 말에 시선이 일제히 내 뒤통수 앞통수에 와 박혔다. 나는 주머니를 뒤 지면서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미하라는 소중하지." "그런데 어째서?" 마베릭은 카나리안보다는 침착한 얼굴로 물었다. 그나저나 이 놈들은 어 째서 이렇게나 쓸데없는 데에 관심이 많은 것일까? 마베릭놈이 저렇게 묻 고 있을 때 공격한다는 그런 상상은 왜 못하는 거지? 그렇다고 내가 공격 해라 라고 외치면 저 놈은 재빨리 실드를 들어 칠 것 아냐? 좀 눈치 있게 구는 놈은 없단 말인가? 그래도 공격면에서는 쓸모 있는 게 휴런인지라 나 는 그를 향해 눈을 찡긋거렸다. 그러자 눈치 없는 휴런 놈은 내 눈짓을 받 고 내게 윙크했다. 커억. 느끼한 것. 저게 내 동생이라니. 혹시나하고 이번엔 조인족의 여왕 쪽을 돌아보자 여왕은 쓴웃음을 지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예 그녀는 마베릭을 공격할 생각 조차 가지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대체, 조인족의 여왕마마. 바로 그대의 족속들을 공 격한 놈들이 바로 저 놈이외다. 그런데 왜 저 놈을 공격도 않고 팔짱끼고 서 있는 거요? "왜 미하라님을 위해서 그것을 내놓을 수 없고, 에닌을 위해서는 내 놓을 수 있다는 건가요? 에닌이 당신의 아이를 낳은 미하라님보다도 소중하다는 겁니까?" 카나리안이 마베릭의 질문에 이어 또 질문을 했다. 아, 정말 미치겠네. 이 놈들 정말 그 따위가 뭐가 궁금하다는 거야? 공격 안 할거야? 나는 한숨을 피익 쉬면서 조인족의 여왕을 보던 시선을 거두었다. 그녀의 얼굴에 떠오 른 표정을 보아하니 그녀도 궁금히 여기고 있는 듯했다. 조인족은 우리들 과 생각이 많이 다른가? "미하라는 묘인족이잖아?" 어쨌든 나는 답해 주었다. 이런 소릴 하고 있을 정도로 우리가 여유가 있 었던 건지 묻고 싶었지만 어쨌거나 그렇게 대답해 주고 나는 주머니를 뒤 지다 못해 홱 아예 엎어 버렸다. "묘인족이라서 그녀를 구하지 않는다고요?" 눈치 없는 카산이 또 물었다. 정말 짜증나! 내가 슬슬 살벌한 시선을 풍기 기 시작하자 그제야 휴런이 끼어 들었다. "그야 미하라의 명예를 위해서지." "그게 명예랑 무슨 관련이........" 튜나가 삐죽거리며 휴런에게 다시 묻자 휴런은 어깨를 으슥했다. "싸움은 명예를 위한 거지. 삶은 명예를 위한 것이고 죽음도 명예를 위한 것이야." 휴런은 모처럼 그럴듯한 말을 한 뒤에 내가 물건 고르는 것을 어깨너머로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어떤 묘인족이 상대가 자신을 위해서 뜻을 굽힌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할 까? 어떤 묘인족이 그렇게도 쉽게 명예를 저 버릴까." "그렇게도 명예가 소중합니까?" 카나리안이 차가운 어조로 묻자 휴런은 의외로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명예란 이름값이다. 그것은 내가 도전에서 죽인 자들의 이름을 위한 이 름. 그들이 약하거나 비겁하지 않았다는 데 대한 증명. 내가 죽인 자들을 욕되게 하지 않겠다는 맹세." 휴런은 천천히 중얼거렸다. 녀석답지 않은 침울한 어조였다. "나의 명예는 내가 죽인 자들의 명예로 쌓아 올린 것이니까." 잠깐 동안 침묵이 흘렀다. 꽤 어색한 침묵이어서 나는 내 등뒤에서 내려 앉고 있는 그 침묵이란 놈을 두들기고 싶었다. "하지만, 정말로 지독하군요. 애정이라는 것은, 감정이라는 것은 명예든 뭐든 상관없다는 것 아닐까요? 미하라님이 정말 죽었다면 얼마나 괴로운 일이 될까요?" 카나리안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나 엘프랑 같이 다니기 싫어. 지금 이 상황이 애정과 감정에 대한 고찰, 혹은 묘인족의 명예관에 대한 상고(詳考) 따위의 주제를 가질 시점이냐? 나는 화가 나서 마구마구 주머니를 뒤집고 흔들어댔다. 그러자 물건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마구 쏟아져 나왔다. 한 무더기, 두 무더기....... 카산 키 만한 황금과 보물들이 서 너 무더기쯤 생겨나기 시작하자 이제야 모든 시 선은 이쪽으로 쏠렸다. 역시 묘인족에 대한 고찰보다는 보물에 대한 고찰 이 훨씬 더 매력적인 게야. "대, 대체....." 뒤에서 카산이 더듬거렸다. 주머니 안에서 쏟아지는 것들은, 말 그대로 나의 살아있는 역사였다. 몇 백년이나 세월이 지난, 오래된 금화들과 은화들을 비롯해서 땅의 엘프 들이 진상해온 보석들과 고대의 보물들. 그 옛날 아리따운 엘프 아가씨에 게서 받은 머리칼로 꼬아 만든 활과, 어떤 드워프를 위협해 만든 황금으로 만든 가구들. 또,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어딘가의 옛 신전에서 끄집어 내 온 보석들과 조각상들. 옥으로 만든 베개며 침대, 거기에 화려무쌍한 옛 여 신의 축복이 어린 목걸이와 귀고리. 땅의 엘프에게서 받은 그놈의 지긋지 긋한 불노불사의 관이며 축복의 성배등 그 외에도 잡다하게 시대를 초월한 갖가지 재화들이 짜랑짜랑 소리를 냈다. 휘황찬란한 보석과 황금들이 줄지 어 쏟아져 나오자 옆에 앞에 뒤에 있던 엘프들 마저 입을 저억저억 벌렸 다. "꺄아! 쿠베린, 당신 부자야?" 옆에서 튜나가 큰 소리를 내질렀다. 나, 부자인 거 몰랐냐? "미, 믿을 수 없어! 그렇게 부자이면서 쪼잔하게 의뢰금이니 뭐니 해서 꼬 박꼬박 돈을 받아 챙겼어? 정말 치사하다!" 튜나의 말에 동조하는 엘프들의 잡담을 무시하고 나는 할 일에 열중했다. 허어, 그러니까 사실 나는 돈에 연연하는 게 아니라구. 어디까지나 나는 성 의표시를 받은 거라니까. "저기, 그거 혹시 마법석 아닙니까?" 옆에 있던 카나리안이 쭈그리고 앉아서 내가 꺼내 놓은 보석 중 하나를 가 리켰다. 녀석, 보석을 보더니 금방 고찰 따위 걷어 치웠군. 보석들이 수북 히 발 밑에 쌓여 있었기 때문에 어떤 것인지 몰라서 나는 아무렇게나 대답 했다. "뭐, 그럴걸." "이렇게나 마법석이 많다니. 이건 마법 무구 아닙니까? 마법을 싫어하시는 게 아니었습니까?" 녀석은 주먹만한 금강석이 박힌 보검을 들어 보이며 물었다. 검신이 푸르 스름한 빛을 내는 그 보검은 대체 어디서 주워 왔는지 기억도 안 난다. 틀 림없이 그 금강석이 마음에 들어서 주머니에 넣어 놨던 것 같다. "아? 그거? 그 금강석이 예뻐서." 내 대꾸에 그는 더 이상 할 말을 잊은 듯 턱을 괸 채 중얼거렸다. "그 옛날 마왕들이 보물 모으기를 즐겼다더니......" 녀석들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한 참을 고르던 나는 마침내 대굴대굴 굴러다니는 일곱 개의 정령석을 찾아냈다. 그 정령석은 정말 일곱 개가 한 세트인지 한꺼번에 손 안에 잡혔다. "그것입니까? 주십시오." 마베릭이 한 걸음 다가서기 전에 나는 정령석을 쥔 채 말했다. "나와라." 파직 하는 소리와 함께 불꽃이 올라왔다. 그리고 눈 앞은 완전히 휘황찬 란한 빛으로 물들었다....가 아니고 그저 순식간에 시야가 허옇게 변해버렸 다. 그 때와도 같았다. 다른 것은 나만이 아니라 내 주변에 있던 모두가 한 꺼번에 같이했다는 것일 뿐. 쓰러져 있던 에닌, 날고 있던 조인족은 물론, 조금 멀리 떨어져 있던 다크와 듀나시까지 함께였다. 심지어는 마베릭마저 도 그 엽기적인 모습으로 같이 있었다. "으아!" "뭐야?" "고, 공격이냐!" 발작하듯이 엘프들이 외치고 조인족들이 안절부절 소리를 질러대는 순간 휴런은 갑자기 손톱을 꺼내들어 허공에 대고 그어댔다. 공간이라도 찢겠다 는 건지 혹은 놈에게만 보이는 어떤 적이 있었는지 알고 싶지도 않다. "진정들 해." 내가 점잖게 말해줄 때까지 녀석들은 허옇고 아무 것도 없는 공간 안에서 버벅거리고 있었다. 허기야, 이 공간이라는 게 내가 편한 것이지 녀석들에 게 편한 것은 아니었는가 보다. 녀석들은 시퍼렇다 못해 허옇게 질린 낯으 로 나를 일제히 바라보았다. 아, 그러고 보니 이렇게 허옇고 아무 것도 없 는 공간에 툭 떨어지면 다들 놀라는 게 당연한 것인가? "별 거 아니니까 입좀 다물어. 시끄러워 죽겠다." 내 말에 다들 바르르르 떨리는 입술로 침묵했다. 케엑, 죽겠구만. 마베릭 놈을 보는 동안 시선이 맨날 주둥이로만 몰리니. 이것도 심각한 문제로다. "안녕하세요. 쿠베린님." "안녕하셨어요? 나의 왕?" "안녕하세요. 사랑스런 분." 갑작스레 일곱 명의 미녀가 일제히 나에게 다가서자 일행들은 일제히 입 을 저억 벌렸다. 그녀들은 전과 달리 상냥하게 내 어깨에 매달렸다. 어떤 여자는 내 허리에 팔을 감았고 두 여자는 내 팔뚝을 끌어안았으며 작은 소 녀―아, 나도 이제 슬슬 취향이 바꾸려는가―는 내 목에 대롱대롱 매달렸 다. 그리고 다른 여인들은 홋홋 웃으며 내 뺨에 입술을 대었다. 머, 멋지다. 잠시 동안 나는 이 아리따운 여인들의 환대를 받으면서 주변 을 잊었다. 시끄럽고 지저분한 모든 것들과 잠시 안녕을 고하면서 이 사랑 스런 여인들에게 나의 넓은 가슴을 아낌없이 보여주어야지. "잘 있었어? 내 귀염둥이들?" 내가 멋진 미소를 지어 보이자 여자들은 일제히 두 눈을 반짝이며 환호했 다. "꺄아! 불러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정말 만나고 싶었어요! 나의 왕!" "아앙, 보고 싶었어!" 새침해 보이는 한 여인―이거, 틀림없이 이에르네를 닮은 화신이다―은 내 옆구리를 살짝 꼬집으며 눈을 흘겼다. 미트라를 닮은 소녀는 동그란 엉 덩이로 나를 슬쩍 치기까지 했다. 아, 정말 내가 이런 모습을 바랬단 말이 지? 그래, 맞아. 이, 인정하도록 하지. 나, 취향 바뀌었어. 조금 빈약해도 괜 찮아. 금발의 미인은 내 입술에 키스하면서 달콤하게 속삭였다. "다시 보게 되어 기뻐요. 쿠베린." "응, 나두." 그녀를 으스러지듯 끌어안고 키스를 퍼부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여자들이 일제히 질투 어린 음성으로 항의하기 시작했다. "너무해! 너무해! 그녀에게만 키스해 주고!" "나두 해줘요!" "나두 해줘요!" 여자들의 항의에 나는 견디지 못하고 그녀들에게 일일이 키스를 해주기 시 작했다. 그러나 그 달콤한 장정은 금방 끝났다. 옆에 서 있던 튜나가 히스 테릭한 비명을 올렸던 것이다. "그, 그만 좀 해!"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나는 상큼하게 웃어 주었다. "질투하지 마." "죽어버렷!" 금발의 그녀는 내 오른 쪽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고, 흑발의 그녀는 왼쪽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소녀는 내 무릎 위에 올라 앉아 있었고, 근사 한 허벅지를 다 드러낸 요염한 빨강머리의 아가씨는 내 바로 앞에서 보란 듯이 길게 엎드려 있었다. 내게 먹을 것을 연신 권하는 자상한 아가씨와 녹색머리칼의 미녀는 녹아들 것 같은 미소를 지은 채 내 옆에 바짝 붙어 앉아 있었다. 그녀들이 움직일 때마다 팔이고 등이고 어깨고 허벅지고 간 에 보들보들한 감촉이 몰려들어와 나는 정말 이 정령석을 마베릭놈에게 줄 마음이 사라지고 있었다. 아아, 역시 이 것들도 나에게 와서 정말 즐거워하고 있잖아? "............세상에." "이건, 마, 말이 안 돼! 어째서 형에게만 여자들이 달라 붙냐고! 나도 매력 이라면 한 매력 한단 말이야!" 휴런이 말도 안되는 소리를 지껄이며 항의하는 그 한 편에서는 카나리안을 비롯한 엘프들이 일제히 얼굴을 시뻘겋게 한 채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녀 석들의 질투 어린 그 눈빛을 무시하고 나는 부드럽게 내 손바닥에 얼굴을 묻은 사랑스런 아가씨에게 키스를 던졌다. "........정령석으로 여자를 만들어서 이러고 노는 놈은 아마 저 놈이 처음이 아닐까?" 이를 갈면서 튜나가 중얼거렸다. "아닐걸. 남자란 다 그런 거야." 뭔가 달관한 표정을 지으며 휴런이 카나리안과 카산등을 훑어보자, 그들도 동의하는 지 시뻘건 얼굴로 침묵했다. 그래, 할 말 없을 걸. 나는 턱을 괸 채로 상냥하게 미소지었다. 물론 내 입가로 과일을 까서 권 하는 아가씨의 손등에 키스하는 것도 잊지는 않았다. 그녀는 내게 키스를 받더니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떨구었다. 귀, 귀여운 것. ".........당신은 언제나 그래." 갑자기 이 사랑스런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음산한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은근슬쩍 머리통을 제 자리에 갖다 박아 놓은 마베릭이 이를 갈고 있었다. 녀석도 사내라고 나의 이 미녀군단을 보고 질투를 억누 를 수가 없는지 어울리지도 않게 분홍 입술을― 끄어어! 또 분홍 입술이라 고 했어!―잘근잘근 깨물고 있었다. 그 퍼런 눈깔을 바짝 치켜 뜬 녀석은 주먹을 휘두르며 내 앞으로 다가왔다. "모든 일이 당신에겐 심각하지 않은 건가! 대체 당신은 무슨 생각으로 사는 거냐!" 갑자기 녀석이 심각하게 묻는 탓에 주변이 갑자기 심각한 분위기로 돌변 했다. 나에게 항의하던 엘프들도, 조인족들도 휴런도 모두 갑자기 심각해진 마베 릭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두 눈깔 부릅뜬 건방진 녀석에게 피식 웃어 보였다. "나야 내 생각으로 살지. 넌?" "나, 나는!" 녀석이 바르르 떨었다. "남이 한 마디 하는 것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주제에, 남이 뭐하고 사는 지까지 참견할 참이야? 너는 존재의 부정을 당했다며? 그래서 넌 부정당했 다며? 그놈의 존재의 부정에 대해서 내가 기나긴 설교를 해 줄 수도 있지 만, 어차피 넌 부정당한 놈이니 상관없잖아? 그지?" "그, 그..........!" "냅둬. 나 이렇게 살게." 마베릭은 부들부들 떨었고, 아리따운 아가씨는 아리따운 손길로 내 입안에 달콤한 포도알을 밀어 넣었다. 나는 포도알을 씹고 그 씨를 그를 향해 뱉 었다. 포도씨에 얻어맞은 마베릭은 흠칫 놀라 뒤로 물러섰다. "가장 불쾌한 것은, 남의 척도로 나를 재는 것이다. 그런 말 못 들어 봤나?" 마베릭은 침묵했다. 그는 웃음이 사라진 살벌한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그 모습이 너무나 생소해 보이기도 했지만 어쩐지 잔뜩 성이 난 어린애 같 은 모습이어서 굉장히 어울렸다. 결국은 다 그렇다. 결국은 성이 나서, 질 투가 나서 견디기 힘들어하는 어린애의 어리광이다. "이, 공간은 뭡니까?" 마베릭이 무뚝뚝하게 다른 것을 질문했다. "내 공간. 내가 만든 공간." "........그 정령석의 힘입니까?" "그래." "그 정령석은 당신을 주인으로 인정한 것입니까?" "뭐, 그럭저럭 그런 셈인가?" "그래, 그 정령석으로 여자나 만들어 노는 게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이었습 니까? 우습군요." 피식 웃는 녀석에게 마주 웃어 주고 나는 포도알을 집어 던졌다. 그것을 슬쩍 피해낸 녀석은 빈정거리는 웃음을 머금은 채 내 주변에 있는 여자들 을 싸늘하게 바라보았다. "일곱 명이군요. 이 여자들이 바로 정령석입니까? 신의 파편치고는 굉장 히 실망스러운 모습이군요." "이 아름다운 모습이 왜 실망스럽다는 거냐?" 내가 묻자 녀석은 코끝을 치켜 올린 채 아니꼬운 자세로 지껄였다. "고작해야 당신의 쾌락을 위해 봉사하는 모습 아닌가요? 쓸모 없는 계집 의 몸뚱아리로 모습을 드러내다니 신의 파편이란 이름이 아깝네요." "그럼, 남자의 모습으로 나타나야 하냐?" 내 질문에 녀석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역시 네 놈의 취미는 그런 것이었군. 이 아름다운 여인들을 보고도 쓸모 운운하다니, 역시 네 놈은 남자를 밝히는 것이었군." 나의 현명한 판단에 감탄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나왔다. 그들은 나 의 이 판단에 감격한 듯 박수를 쳤으며 모두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몇 몇은 이제야 마베릭놈의 그동안의 행적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며 납득했으 며 몇몇은 안타깝다는 시선과 함께 야리꾸리한 시선도 함께 던졌다. "조금, 가끔은 진지해지는 게 어떻습니까?" 으드득 소리를 내면서 마베릭이 일그러진 웃음을 머금었다. 녀석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더니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서서 자신의 앞에서 길게 누워 있 는 아리따운 아가씨에게 경멸이 담긴 냉혹한 시선을 던졌다. 녀석은 사랑 스런 아가씨를 보는 게 아니라,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돌멩이를 바라보는 듯한 표정을 지었고, 그 표정에 우리 일행들은 <역시!>라는 감탄성과 함께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령석이여, 그대들의 힘을 얻으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 거지?" "소원하면 되는 겁니다." 앞에 앉아 있던 아가씨가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소원?" "순수한 바램이 우리를 만듭니다." 그녀는 그렇게 대답한 뒤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 눈 빛에는 정말로 나에 대한 애정이 듬뿍 담겨 있었다. 아무도 없었다면 당장 저 하늘하늘한 옷을 벗기고 그대로 쓰러지고 싶었지만 주변에 눈이 많으니 참는다. "바램?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해서 신의 귀였던, 그러니까 고양이의 모습 이었던 그대들이 이런 모습이 되는 것인가?" 그가 그렇게 질문을 던질 때였다. 갑자기 휴런이 그의 앞에 나서더니 길게 말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그 대로 그의 턱을 주먹으로 내갈겼다. 퍼억 하는 소리와 함께 놀랍게도 마베 릭은 붕 떠오르더니 몇 메테르나 밀려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핏방울과 함 께 바닥에 대굴대굴 구르던 마베릭은 경악으로 가득 찬 얼굴로 고개를 들 었다. 그 얼굴에서 몇 개의 이빨이 두두둑 떨어져 내렸지만 그 웃기는 모 습을 보고 웃는 작자는 아무도 없었다. "...........설마!" "어라라? 정말 먹혔네? 여기가 쿠브의 공간이라 하기에 혹시나 했더니 역 시나네!" 기분 좋은 듯 휴런이 핫핫 웃었다. 녀석은 건방진 포즈를 취하며 나를 돌 아보았다. "여기에선 마법이 통하지 않는 거지?" "어? 그건 또 어떻게 알았어?" 내가 어리벙벙해 묻자 휴런은 갑자기 잘난 척 가슴을 펴고 말했다. "그야 당연하지. 쿠브형은 마법을 싫어하잖아. 그런데 자기 공간에 마법을 용납할 리 없는 건 당연지사 하니겠어? 우하하하하하!" 오옷 하는 소리와 함께 모두의 시선이 잔뜩 일그러진 마베릭의 얼굴로 쏠 렸다. 마베릭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쏟아지는 자신의 이빨을 들여다보았 다. 낭패한 몰골이 된 녀석은 비틀 일어서긴 했지만 그 다음에는 기다렸다 는 듯 카산의 주먹을 받아야 했다. 오, 카산. 엘프사(史)에 길이 남을 주먹 이여. 그대 이름은 카산. "이, 죽일 놈! 이 사악한 자여! 에닌을 살려놔라!" 퍽퍽 소리가 정말로 무안할 지경이었지만 말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문득 나는 에닌이 생각 나 고개를 돌렸다. 에닌은 여전히 쓰러져 있었다. "여기서 그 진을 해제할 수는 없습니다." 내 마음을 읽은 듯, 마미의 모습을 한 여인이 조용히 말했다. 그 말에 놀란 듯 카나리안이 끼어 들었다. "어째서요?" "이 공간 안에서 자기를 드러내지 못하는 자는, 변함이 없습니다." "뭐?" 카나리안이 눈을 크게 떴다. "그 증거로." 여인은 하얀 손을 들어서 천천히 내 쪽으로 걸어오는 다크시온을 가리켰 다. "그는 자신의 의지를 드러냈습니다." 다크는 마치 마법진이라는 것이 없다는 듯 움직이고 있었다. 일그러졌던 얼굴은 평소처럼 담담하게 돌아 왔으며 부러졌던 팔뚝도 다시 온전했다. 침을 흘리던 그 몰골이라곤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당당한 그 자세에 옆에 있던 자들은 일제히 경악했다. 하지만, 다크시온의 회복과는 달리 듀나시는 여전히 너덜너덜 했다. 팔뚝이 고, 어깨고 부러진 상태로 다리도 여전히 피를 흘리고 있었다. 의식도 그다 지 또렷하지는 않은 듯했다. "왕." 다크시온은 굉장히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멀쩡한 채로 너덜거리는 듀나시를 부축한 채 내 쪽으로 걸어 왔다. 마침내 녀석은 내 앞까지 걸어 오더니 한숨을 푸욱 내 쉬며 내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이, 이 녀석은 왜 그래?" 내 질문에 다크는 축 늘어진 듀나시를 내 발치로 던졌다. 내가 듀나시를 발끝으로 툭툭 치자 듀나시는 굴욕적이라는 듯 입가를 일그러뜨렸다. "그 진이라는 게 드래곤피어라고 했습니까?" 담담한 어조로 다크가 널브러진 마베릭을 슬쩍 바라보았다. "그래. 어때?" ".............짜증나더군요." 다크는 그렇게 말하고는 정말 짜증스럽다는 듯 카산에게 계속 얻어맞고 있 는 마베릭을 바라보았다. 카산은 다크와 듀나시가 제 발로 걸어 나오는 것 을 보고는 항의하듯 내게 소리쳤다. "왜 에닌은 안 일어나는 거예요?" 튜나는 축 늘어진 에닌의 몸을 부축하고 있었다. 이미 마법진이라는 게 무력하다는 게 밝혀진 지금, 주저는 잠깐이었다. 가 장 과감한 튜나가 에닌의 몸을 부축해 안고 카나리안의 앞으로 데려다 놓 았다. 카나리안은 그녀의 상태를 살피면서 잔뜩 얼굴을 찌푸렸다. 그 모습 을 보고 카산은 재빨리 에닌의 옆으로 다가앉았다. 그녀는 파리한 얼굴로 여전히 의식이 없는 상태였다. 숨결은 가늘어 심장만이 간신히 뛰고 있는 듯했다. "그녀는 자신의 의지를 포기했으니까요." 마미의 모습을 한 여자는 그렇게 대답해 주었다. 온화한 얼굴에 전혀 어울 리지 않는 냉정한 어조였다. "무슨 의미죠?" 카나리안은 미간을 찌푸리고 그녀에게 되물었다. "에닌이 그 놈의 드래곤 피어에 저항하려 하는 의지가 없기 때문에 못 일 어난다는 의미야." 내가 대신 말해주었다. "하지만, 이건 쿠베린님의 공간이라면서요? 그렇다면 뭐든 쿠베린님이 바 라는 게 일어나야 하는 것 아닙니까?" 격렬하게 카산이 끼어 들었다. "아닙니다. 이것은 오직 쿠베린님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지요. 쿠베린님이 바라는 것은 오로지 쿠베린님 본인에 한 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녀 가 어떤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면 이 공간 안에서는 그녀는 깨어나지 못합 니다." 아직도 거친 숨을 되새기면서 다크가 조용히 물었다. "그건, 이 공간만 아니면 그녀를 살릴 수도 있다는 이야기 아냐?" 그 질문에 나는 다시 보석들을 돌아보았다. 마미를 닮은 여인은 잠시 동안 침묵하더니 뭔지 쓸쓸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렇습니다." "그렇게되면? 저기 있는 마베릭 놈도 다시 마법을 회복하게 되나?" 내 질문에 마미는 어깨를 으슥했다. 정말로 살아 있는 여자 같았다. "그렇겠죠?" "그럼 내가 여기서 저기 있는 저 녀석의 마법력을 없애 달라고 소원한다면?" 그 질문에 마미는 웃었다. "한 번에 한 가지 씩입니다. 나의 왕." "그럼 내 소원이 한 번에 서너 가지를 한꺼번에 들어달라고 하는 소원이 라면 어떻게 되지?" 그 말에 보석들은 잠시 침묵했다. 내 눈에는 그녀들이 서로 시선을 마주 하며 의논을 하는 것으로 보였지만 그게 아닐 수도 있었다. 어쨌건 이들은 살아 있는 자들은 아니니까. 아니지. 가만 있자, 살아 있는 자들은 아니더라도 내가 인격을 부여했으니 까 이들은 내가 알고 있는 그녀들과 같은 인격을 가지고 있는 셈이 되나? "쿠베린님, 하지만 당신의 소원은 접수되지 않습니다." 갑자기 진지한 얼굴로 마미의 얼굴을 한 보석이 입을 열었다. 뭔가 묘한 시선으로 여자들은 일제히 나를 향하고 있었다. "에? 어째서!" 내가 놀라 되묻자 그녀는 조금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쌀쌀맞은 이 에르네의 보석은 사정없이 내뱉었다. "당신은 절실하지 않으니까요!" KUBERIN...... 빛을 향해 걷는다 그 빛에 눈이 타고 몸이 타오를 지라도 걷지 않으면 안될 길이 있다 8 "당신은 진실로 바라고 있지 않습니다. 절실하게 원하는 게 없습니다."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쌀쌀맞은 어투였지만 어딘가 부드러운, 그러면서도 묘하게 배려를 느끼게 하는 어조였다. "그럼, 카산. 네가 이 보석들의 주인이 되라." 나는 뒤에 서서 얼어붙어 있는 카산에게 말했다. 카산이 어물거리며 내 앞 으로 나서자 나는 보석들에게 다시 물었다. "이 아이가 보석의 주인이 된다면, 어때? 이 아이가 소원하면 이루어 줄 텐가?" 여인들은 차분한 눈으로 카산을 바라보았다. 그는 여자들의 시선을 받자 시뻘게진 얼굴로 낮게 애원했다. "에, 에닌을 낫게 해 주세요!" 그 말에 보석들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눈 앞이 샛노랗게 변했다. 아니, 황금색의 광채라고 해도 좋을 정도 였다. 너무나 갑작스런 변화에 눈이 적응을 못했는지 앞이 보이지 않는다. 아니, 빛으로 가득 차 사방을 볼 여유를 주지 않는다. 눈이 다 아리구만. 주변을 가득 채운 그 빛은 시야를 완전히 가려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빛에 휩싸인 채 나는 잠시 동안 눈을 감았다. 진실로 바라는 게 없다. 절실하게 원하는 것이 없다라고? 그것은 아니다. 그렇지는 않다. 나는 일렌이 다시 살아 돌아오길 바란다. 그녀의 입술에서 나를 사랑한다 는 말을 듣기를 원한다. 어릴 적 드물게도 느꼈던 두려우면서도 가슴 벅찼 던 감정― 동경과 존경, 경외심을 담아 나의 왕이 살아 돌아오길 바란다. 내 손톱에 갈가리 찢기었던 형제들이 돌아오길 바란다. 지금 내 아이들이 그러는 것처럼 같이 드잡이질을 하며 낄낄대길 바란다. 사랑스런 나의 여 자들이 죽음에서 눈을 뜨고 일어나 웃음 짓기를 소망한다. 파란 내 아들이 대지의 여신의 품안에서 돌아오길 바란다. 가련한 나의 공주님이 두 팔 벌 려 내게 미소하길 바란다. 까불기만 하던 내 귀여운 딸이 내 품안으로 돌 아오길 바란다. 바란다. 바란다. 바란다.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슬픔. 이것도 바램이 아니던가? 어째서 내 소원은 이루어지지 못하는가? 왜 내 소원은 거부당하는 것일까? "당신은 남에게 소원을 빌기에는 너무나 많은 것을 알고 있지요." 부드러운 목소리로 보석들이 말했다. 전처럼 와글와글 떠드는 것 같은 목 소리가 아니라, 마미의 목소리였다. 그녀들은 마미의 목소리로 나직나직하 게 속삭였다. "<납득>하고 <이해>하면,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납득하고 이해한다라......." 나는 빛 속에 파묻힌 채로 킬킬 웃었다. 아아, 웃을 수밖에. 더 이상 내가 뭘 어쩌랴. "아실 거예요. 쿠베린님, 나의 왕, 나의 주인님." 그녀는 상냥하게 속삭였다. 그 상냥한 속삭임이 더 우스웠다. 나는 배를 잡고 한 참 웃었다. 너무 웃다보니 배가 아프고, 배가 아프다 보 니 슬슬 기분이 나빠졌다. 아, 그래? 그랬어? <이해>하고 <납득>해서 미 안해. 정말 미안하다구. "카산이 주인이 되는 거 아니야?" "소원의 주인이 되는 거지, 우리들의 주인이 되는 것은 아니랍니다." 그녀는 내가 킬킬거리는 것에도 동요하지 않고 말했다. 아, 그렇지. 동요할 이유는 없지. "우리들에게는 주인이 없습니다. 소원의 주인이 있을 뿐이지요." "그럼, 왜 소원도 없는 내가 너희들의 주인이 되는 거야?" 나는 눈을 감은 채 속삭여 물었다. "그야, 당신이 소원이 없는 자이니까요." "당신이 두 번째의 우리들의 주인." "소원이 없는 자." 그녀들은 동시에 속삭였다. 옥으로 만든 종이 일제히 흔들리는 소리로 영롱하고 아름답게 그녀들이 속 삭였다. 시냇물이 흐르는 것처럼 청량하고 수정처럼 맑았다. 그래, 너희들 은 그렇게 속삭이는 구나. 지나치게 아름답게, 그리고도 잔인하게. 갑자기 시야가 타악 소리가 나는 것처럼 트였다. 초록과 검은 색, 누런 색등이 마구 엉킨 곳, 숲이다. 아니, 낮은 관목들로 이루어진 나지막한 수풀이었다. 덕분에 멀리까지 자알 보였다. 바위산과 흐 트러진 잡목들을 멍하니 지켜보다 나는 여기가 그 놈의 신전에서 그다지 멀리 떨어진 곳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박살난 대리석 기둥들이 군데 군데 보였다. 이름 모를 하얀 꽃과 노란 꽃이 어우러진 잡목림에서 나는 머리를 한 번 흔들었다. 이게 처음도 아닌데 머리가 다 띵하구만. 기척을 뒤늦게 느끼고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내 뒤쪽으로 눈물로 엉망이 된 카산이 에닌을 안고 있는 게 보였다. 에닌은 눈을 뜨고 멍하니 카산의 품안에 안겨 색색거리며 숨을 몰아 쉬고 있었다. 그 옆으로 아직도 어리벙 벙한 얼굴을 한 엘프들과 잔뜩 긴장한 채 독이 오른 눈빛을 번쩍이고 있는 조인족들이 있었다. 그들 중 엘레가 튜나를 부둥켜 안은 채 공중에 둥둥 떠 있는 게 보였다. 이 와중에도 끔찍이도 챙긴다. 그 악다구리같은 계집애 를. 어쨌거나 그들은 주변이 바뀌자 눈을 번쩍거리며 경계하고 있었다. 듀나시. 듀나시는 다크의 부축을 뿌리치고 혼자 서 있었다. 아직 다쳐서 온 몸이 얼룩덜룩했지만 제정신을 차리기는 했는지 눈은 다시 또렷해졌다. 하지만, 얼굴 전체에 남은 그 기묘한 패배감을 보며 나는 싸늘하게 물었다. "미하라는?" "제가 데리고 있습니다." 다크가 듀나시 대신 대답했다. 그는 담담한 얼굴로 자신이 걸치고 있던 옷가지를 들어 미하라를 둘둘 감고 있었다. 담담해 보이지만 그 얼굴에는 안타까움이 번져 있었다. 문득 나는 다크가 정말로 드물게도 따스한 성품 의 소유자란 것을 새삼 깨달았다. 성년 전에도 성년 후에도 저렇게 변하지 않는 녀석은 정말로 드물다. 녀석은 성격이 거의 변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녀석은 너무나 묘인족다웠다. 듀나시는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이를 악문 채 내 시선을 피했다. 그 얼굴 을 보고, 나도 더 이상 할 말은 없었다. "여기가 어디지요?" 카나리안이 두리번거리면서 물었다. 문득 카산이 아 하는 큰 소리와 함께 내쪽을 바라보았다. "쿠베린님?" 나는 주먹을 천천히 펴 들었다. 내 손아귀 안에는 일곱 개의 정령석이 고 스란히 놓여져 있었다. 소원이 없는 자. 그래서 정령석의 주인이 되는 자. 정말 꽤 웃기는 짓거리 아냐? "그걸 내 주시지요." 나는 마베릭을 힐끔 보았다. 여기저기 터진 몰골이었지만 녀석은 여전히 꼿꼿하게 서 있었다. 하지만, 그 상처도 잠시 뿐이었다. 터지고 찢어지고 멍이 든 그 상처들은 우리들이 보는 가운데 우아할 정도로 조용히 아물기 시작했다. 찢어진 상처는 살과 살들이 스스로 어우러져 아물었고 멍이 든 살갗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금 새 말짱해진다. 오로지 녀석이 다쳤었다는 증거는 핏자국뿐이었는데 그것 도 그가 옷자락으로 스윽 문질러 버리자 금새 멀끔한 얼굴이 되어 버렸다. "마, 맙소사! 인간이 아냐." 옆에 있던 튜나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엘프들은 이 비상식적인 일에 경악 하며 뒤로 물러섰다. 보지 않아도 녀석들이 얼마나 역겨워하는 지 뻔했다. "이제 놀아 드릴 시간은 없습니다. 내 놓으십시오." "이 미친 자식!" 그런 그를 향해 튜나가 발끈해 활시위를 당기려했다. 하지만, 마베릭은 그 녀 쪽은 보지도 않은 채 한 손을 휘둘렀다. "우앗!"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활시위를 당기던 튜나가 뒤로 나뒹굴었다. 핏방울이 튀며 그녀의 앞섶이 길게 베어졌다. 그런 그녀를 재빨리 감싸 안 은 것은 엘레였다. 엘레는 길게 날개를 빼 든 채 튜나를 안아 들고 있었다. 만약 그가 조금만 늦었다면 튜나는 반토막이 나고도 남았다. "이제 장난할 생각은 없습니다. 쿠베린님, 그걸 주시지요. 아니면 아무리 당신 측근이라고 해도 사정없이 죽여버리겠습니다." 녀석은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로 말했다. 녀석은 오로지 나만을 직시하고 있었다. 마치 다른 놈들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보여 옆에 있던 휴런등 은 화를 냈다. "너, 이 자식!" 휴런이 발작하듯 주먹을 다잡자 마베릭은 하얀 얼굴에 미소를 띄웠다. 휴 런이 악을 질러도 여전히 시선은 내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휴런따위 는 알 바도 아니고 관심도 없다는 듯한 태도여서 꽤 열 받게 하는 데가 있 었다. "묘인족은 아무리 죽여봐야 당신을 움직일 수 없으니, 다른 것을 건드려 볼까요?" 그의 손 안에서 시커먼 불길이 일렁였다. 손바닥 안에 떠 오른 그것은 불 길한 내음을 풍기며 독사처럼 도사렸다. 그는 파란 눈빛을 검게 물들이면 서 시익 웃었다. 내게 보내는 그 경고의 눈빛을 맞받으면서도 나는 움직이 지 않았다. 그러자, 마베릭은 갑자기 내게서 시선을 떼고 생각났다는 듯 고 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은, 카산과 엘프들이었다. 카산은 에닌을 안은 채 흠칫 뒤로 물러서며 실드를 펼쳤고 다른 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저를 화내게 하지 마십시오." 마베릭은 조용히 말했다. 하얀 얼굴에 붉은 입술만 동동 뜬 녀석은 가면을 뒤집어 쓴 것같은 무표정으로 속삭였다. "정령석을 주십시오." "절대 주지 마!" 튜나가 악을 질렀다. 그녀는 정령들을 끌어 모으고 있는 듯 잔뜩 굳어진 얼굴이었지만 활을 거두지는 않았다. 언제라도 당장 쏘아댈 듯 팽팽한 활 시위를 내내 유지하고 있었다. 그녀만이 아니었다. 에닌을 안고 있던 카산 도 이를 갈며 소리를 질러댔다. "절대로 건네주지 마세요! 우리들은 내버려 두시라구요!" 그 순간이었다. 그의 드러난 하얀 팔뚝이 갑자기 검붉은 얼룩으로 물들었 다. 아니, 물들었는가 싶은 순간 얼룩은 꿈틀거리며 튀어 나왔다. 돼지 내 장처럼 꾸불거리는 그것은 허공을 그대로 건너뛰어 카산쪽으로 달려들었 다. 카산의 실드에 부딪친 그 검붉은 것은 꿈틀거리며 키득거렸다. 말 그대 로 키득거렸다. 얼굴이고 몸뚱이고 구분도 안 가는 모호한 그 놈은 그저 꿈틀거리며 허공에서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그리고는 보이지도 않는 입으 로 키득거렸다. "허억. 어억." 몇몇의 엘프가 공포에 질린 신음을 터뜨렸다. "움직이지 마! 델카스타다!" 카나리안이 그렇게 외치는 순간, 그 시커먼 것은 카나리안을 향해 으르렁 거렸다. 그리고 검붉은 불길이 그의 몸을 그대로 덮쳤다. 파지직하는 거북 한 소리가 실드와 부딪쳤다. 불꽃과 불꽃이 색색으로 번뜩이는 그 모양은 보는 것만으로는 꽤나 어울렸다. 하지만 그 불꽃이 닿는 곳 주변이 온통 시커멓게 말라붙기 시작한다면 보는 것만으로는 끝나지 않는다. 휴런이 갑 자기 카나리안의 옆에서 비켜섰다. "이게 뭐냐?" 그의 팔뚝에 튄 그 검붉은 불꽃은 아주 작았다. 하지만, 휴런의 팔뚝에 떨 어진 불꽃은 살아 있는 벌레마냥 그의 팔뚝 안쪽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피와 살이 튀기고 지직거리는 소리를 내며 그것은 휴런의 팔뚝을 그대로 꿰뚫었다. "우웃!" 물론, 그의 상처는 금새 피가 멈추기 시작했지만 눈꼽만한 그것이 드러낸 위력에는 다크와 휴런도 모두 놀라고 말았다. 하지만, 공격은 오로지 엘프 들에게만 집중 될 뿐이었다. "실드가 그럭저럭 쓸만한 것 같군요." 마베릭은 흐응 하고 웃음지었다. 차가운 조소가 깃든 눈으로 녀석은 내쪽 을 돌아보며 상냥한 척 웃음을 지었다. "저들을 그냥 죽게 내버려두시진 않겠죠? 그리고 내가 진심으로 싸우면 저들을 쉽게 죽일 수 있으리라는 것도 알고 계시죠?" 녀석은 키득거렸다. 그 키득거리는 얼굴 한 가운데는 음산한 어둠으로 가 득 차 있었다. 가면을 쓴 듯 하얀 얼굴과 빨간 입술만이 가운데 동동 떠 있는 것 같았다. "아아, 나는 마법이 싫어!" 휴런이 한탄하듯 외쳤다. 그는 갑자기 몸을 틀더니 마베릭을 향해 솟구치 기 시작했다. 그의 주먹이 마베릭의 실드를 후려갈겼다. 얼마나 쌔게 쳤는 지 물리적인 공격으로는 소리가 날 리 없는 실드에서 터엉터엉 하고 소리 를 내기 시작했다. 마베릭은 귀찮다는 듯 그를 흘긋 바라보더니 다시 내쪽 을 돌아보았다. 어차피 실드를 거두지만 않으면 휴런은 그를 해칠 수도 없 었다. "젠장할!" 나는 휴런을 향해 조용히 명령했다. "뒤로 물러나." "형!" 휴런은 분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상처난 팔뚝을 손톱끝으로 쓸어 내 더니 흥 하고 콧소리를 내며 뒤로 물러섰다. 어차피 엘프들의 곤란에 대해 그는 별로 참견할 마음이 없었는지 머리만 긁적이고 있었다. "하나도 재미없어!" 다크는 그런 그를 보고 쓴웃음을 짓고 있었고 휴런은 그런 그를 잔뜩 쏘 아 봐 주었다. 그런 모습을 보면 확실히 이 놈은 아직은 어렸다. 다크는 미 하라를 어깨에 둘러 멘 채로 내 뒤에 조용히 서 있었다. 마베릭에 대한 분 노가 크긴 하지만 나설 생각은 의외로 없어 보였다. 검붉은 어둠의 짐승―델카스타는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저것은, 킬트가 사 용하던 것이었다. 파괴와 죽음의 불꽃은 이계에서도 가장 소환하기 어려운 것으로, 겉으로 보기에는 불꽃인 주제에 육식의 야수처럼 항상 으르렁거렸 다. 성질 더러운 저런 놈을 팔뚝에 봉인했다니. 마베릭놈도 확실히 보통은 아니다. 전에 내가 만났던 봉인수들과는 차원이 다른 놈이었다. 델카스타가 길길이 날뛰며 카나리안을 공격하고 있는 동안 마베릭은 기묘 한 미소를 지은 채 카나리안을 지켜보고 있었다. 실드를 펼친 자는 공격도 할 수 없는 법이긴 했지만 봉인수나 소환수는 시전자의 의지에 따라 움직 이니 다른 공격을 굳이 할 필요도 없을 것이었다. 델카스타는 갑자기 부르 르 떨더니 몸을 두 개로 나누었다. 그리고는 한쪽은 카나리안을, 한 쪽은 카산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마, 맙소사!" 그 뿐만이 아니었다. 갑자기 또 한 번 부르르 떨자 놈은 각각 두 개의 몸 에서 또 두 개를 뽑아냈다. 그리고는 실드를 친 채 도사리고 있는 다른 엘 프들을 덮쳤다. "우왓!" 한 명의 엘프가 실드를 소진시키고 불꽃에 휩싸였다. "으아아아아아악!" 비명소리는 길게 이어졌다. 그의 전신은 검은 불덩이에 그대로 잡아 먹히 듯 시커멓게 물들었다. 으르렁거리며 킬킬거리는 그것은 작은 불꽃들을 사 방에 흩날리면서 비명을 지르는 엘프의 몸뚱아리를 그대로 녹여 제 몸속에 흘러 넣었다. "허억, 허억!" 갑자기 엘프 중 하나가 휘청거렸다. 바로 옆에 있던 자가 먹혀 버리자 공 포에 질린 듯했다. 그 순간 그를 향해 시커먼 불꽃은 녹은 치즈처럼 흐물 거리며 달려들었다. 그의 얼굴이 그 검은 불꽃에 휩싸이자 젊은 엘프는 미 친 듯이 주먹질을 하기 시작했다. 비명은 터져 나오지 않았다. 얼굴 전체에 휩싸인 검은 덩어리는 이 가련한 엘프를 말 그대로 얼굴부터 녹이기 시작 해 순식간에 전신을 먹어 치웠던 것이다. 비명과 공포에 휩싸인 엘프들을 향해 카나리안이 고함을 질렀다. "정신들 차려!" 우는 자들도 생겨났다. 카산과 튜나, 몇몇 엘프들은 실드를 펼치면서도 시 퍼런 얼굴로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그들 뿐이 아니었다. 숲은 그 검 은 짐승이 내뱉는 열기와 증오로 순식간에 시커멓게 죽어가고 있었다. 조인족의 여왕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날개를 반만 편 채 내 뒤쪽에 공중에 정지해 있었다. 그런 그녀를 둘러싼 조인족의 전사들도 그 저 조용히 공중에 떠 있기만 했다. 엘레만이 불안한 듯 튜나의 주변을 어 슬렁거리며 날아다니고 있을 뿐이었다. 공격은, 우습게도 오로지 엘프들에 게만 행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마베릭." 내가 입을 열자 시선이 고요한 조인족들의 시선도 일제히 내 쪽으로 쏠렸 다. "이것으로 무엇을 소원할 테냐?" 내가 조용히 묻자 마베릭은 의외라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뭐라구요?" "무엇을 소원할 거냐고 묻는 거다. 어차피 넌 이 일곱 기둥의 주인이 될 것 같지는 않아." "아아, 그렇습니까? 꽤 불쾌한 추측이네요. 제가 왜 주인이 될 수 없다는 거지요?" "질문에나 대답해라. 애송아." "대륙의 통일." 녀석은 주저하지도 않고 말했다. 태연자약한 그 면상을 보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요." 녀석은 갑자기 화사한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마주 끄덕였다. "나의 군주를 위해서 대륙을 통일하고자 합니다. 어때요? 이 대륙의 통일 은 대륙사상 유래가 없지 않았나요? 엘프, 드워프, 고왕국, 그리고 다른 아 인족들과 동방교국까지 포함한 대 제국의 완성. 정말 근사하지 않습니까?" "그게 근사해?" "물론이죠, 무릇 태어났다면 대망(大望)을 품어 봐야 하지 않겠어요? 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의 군주는 역량이 있구요." 녀석은 갑자기 묘하게 삐죽거리며 웃었다. 덕분에 붉은 입술은 하얀 얼굴 사이에서 너무나 비정상적으로 튀어나올 듯 기괴해졌다. "우리들의 그랜드 마스터께서도 이 세상을 정복하겠다고 하셨었죠. 그럼 에도 불구하고 요즘은 털 빠진 개새끼처럼 추욱 늘어져 있단 말입니다." 녀석은 피식피식 웃었다. "그의 사랑스런 아들을 위해서 말이지." 내가 그의 말에 대꾸하자 마베릭의 얼굴은 눈에 띄게 굳어졌다. 그의 얼굴 은 마치 한 번 쥐었다 편 종이조각처럼 잔뜩 구겨져 있었다. "네에, 확실히 그렇지요. 자신의 병약한 아드님을 위해서 우리들을 배신하 셨지요." "그리고 너는 그를 직접 공격할 수도 없지?" 내 말에 그는 갑자기 몸을 부르르 떨었다. "킬트는 너희들이 카나리안을 공격할 수 없게 만들어 놓았지? 그렇지?" 마베릭은 부르르 떨던 손을 꽉 쥔 채 나를 쏘아보았다. 그 얼굴에 담긴 증 오는 너무 확연해서 오히려 순수하다고 할 지경이었다. 녀석은 음산한 그 늘을 얼굴에 깔고 나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거짓말입니다." "킬트는 저 애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너희들에게 무슨 짓을 해둔 게 분 명해. 저 애를 향해 너는 공격을 할 수 없어. 그렇지?" 내가 카나리안을 가리키며 말하자 마베릭은 입술을 깨물었다. 새파랗게 타 오르는 증오의 눈빛은 여전했지만 잔뜩 구겨졌던 그 얼굴은 차츰 나아졌다. "나는 당신이 싫습니다." "언젠 좋다며?" "나는 당신이 싫습니다." "누구든 자기보다 잘나면 싫어지는 거야." 내 대꾸에 녀석은 피식 웃었다. 슬슬 머리가 식는 모양이었다. "그럴지도 모르죠. 묘인족의 임금님. 하지만 직접적으로 공격은 못해도 그 를 죽일 수는 있습니다." 마베릭은 하얀 손가락을 들어 카나리안을 공격하고 있는 델카스타를 가리 켜보였다. "저 놈을 봉인하는데 정말로 애 먹었지요." "칭찬해 줄게." 내 말에 녀석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미소 띈 얼굴로 내게 재촉했다. "안 주실 겁니까?" 나는 손안에 있던 정령석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밀었다. "받아라." 정령석들은 빛을 뿌리며 허공으로 날았다. 마베릭은 순간적으로 흐트러진 얼굴로 나와 정령석을 마주 보았으며 바닥으로 떨어지는 정령석을 잡기 위 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나는 녀석의 품안으로 뛰어들었다. 일순간이었다. ".........헉." 피가 쿨럭 솟아 나왔다. 정령석은 녀석의 손아귀에 쥐어져 있었지만 쉽게 얻은 것은 아니었다. 녀 석은 검은 피를 뿜어내며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내 손톱 다섯 개가 녀석 의 가슴을 정면으로 관통하며 지나갔던 것이다. 뜨거운 피. 술렁대는 심장. 그 심장을 쥐어뜯으며 나는 녀석의 가슴에 내 주먹만한 구멍을 뚫어 놓았 다. 심장이 뜯겨져 나가며 생명도 같이 흩어져 나갔다. 마베릭은 온 몸을 떨며 고통으로 신음했다. 그러자 엘프들을 덮치고 있던 델카스타가 포효했 다. 그 울음은 거의 환희에 가까웠다. 봉인수들이 흔히 그렇듯 녀석은 봉인 자가 힘이 흩어지자 기쁨을 맛보는 듯 했다. 킬킬 웃음을 지으며 녀석은 몸을 뒤집더니 여기 저기 흩어졌던 자신의 몸뚱이를 하나로 합쳤다. 그리 고는 살기를 품은 채 쏜살같이 마베릭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마베릭 은 놀랍게도 그 몸을 한 채로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녀석을 향해 하얀 손 을 쳐들었다. 그러자, 공격을 하려던 델카스타는 신음 같은 소리를 잔뜩 내 지르며 다시 그의 팔뚝 안으로 스며들었다. 쑤욱 하고 뭔가가 빨아들이는 묘한 소리를 내며 델카스타가 사라지자 사방은 조용해 졌다. 별로 소리도 내지르지 않는데도 정말로 시끄러운 놈이었다. 녀석이 사라지자 마베릭은 울컥 피를 토해냈다. 부들부들 떨리는 그의 몸 뚱이는 이제 뒤틀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녀석은 손에서 정령석을 떨구지 않았다. "정말로 대륙의 통일이 네 소원이냐?" 나는 발치에 쓰러진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마베릭에게 물었다. 하얀 손과 팔뚝으로 검은 줄이 지나갔다. 검붉은 피는 그의 하얀 피부 위 로 줄줄 길을 내며 떨어져 내리며 작은 시내를 이루었다.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많은 양의 피가 녀석의 가슴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입으로 피 를 토하면서도 녀석은 주먹을 풀지 않았다. "나는, 내 소원은.........." "소원을 말해." 나는 조용히 녀석의 심장이 터져 나간 가슴을 짓밟으며 명령했다. "나는, 나는............" 녀석은 부들부들 떠는 손으로 시선을 향하고 있었다. 피가 맺힌 그 시선 속에서 보석들은 여전히 영롱한 광채를 뿌렸다. 피가 아예 묻지 않는 것인 지도 모른다. "대륙의 토, 통일..........." "거짓말." 나는 조용히 재촉했다. 녀석의 머리통을 밟으면서 녀석의 손목을 밟으며 다시 물었다. "네 소원은?" 마베릭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피가 작은 웅덩이를 만들 때까지, 녀석 의 몸이 경직되어 부들부들 떨릴 때까지 녀석의 입에서는 아무런 말도 흘 러나오지 않았다. "보석의 주인은 나다. 하지만 네가 소원을 비는 것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 아. 그러니까 말해. 소원은?" 나는 재차 물었다. 마베릭은 눈을 들어 내 쪽을 바라보았다. 녀석의 눈 안쪽으로 피가 차 올랐 다. 아니, 눈물이 차 올랐다. 그 공허한 눈빛. 그 눈빛을 보며 나는 재차 물 었다. "소원을 말해!" 녀석은 피식 웃었다. 눈물이 줄줄 눈 안쪽에서부터 흘러나왔다. 믿을 수 없 을 정도로 천진한 어린애처럼 녀석은 웃었다. "내 소원은............" 보석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녀석은 나를 향해 중얼거렸다. 희미한 입가 로 잔물결이 일어났다. 엉망진창이 된 몸이 굳어 가는 듯 경련을 일으켰다. "..........살고 싶어." 그의 몸은 그대로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잠시 동안 나는 녀석이 혹시 또 다시 움직이지 않을까 싶어서 툭툭 발로 건드려 보았다. 녀석의 손을 슬쩍 밟자, 손 안에서 보석들이 또르르 굴러 떨어졌다. 나는 그 보석들을 주워서 다시 내 주머니로 밀어 넣었다. 손이고 발이고 온 몸에 피가 묻어서 꽤나 끈적거렸다. 멀리서 잉잉거리며 벌레들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대지의 여신이 부 리는 종들은 시체 냄새, 피 냄새에 지극히 민감하다. 질척거리는 발을 들어 서 나는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마베릭의 몸은 다시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게 지긋지긋하게 다시 일어나던 것이 거짓말인양 녀석의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고통으로 잔뜩 구부린 몸, 흙과 자신의 피로 뒤범벅이 되 어 눈부신 금발은 이미 제 빛깔을 잃었다. 파란 눈동자는 확장된 채 다시 움직이지 않았고 채 마르지 않은 눈물만 피와 함께 얼굴을 적시고 있었다. "아." 나직한 신음을 터뜨린 것은 에닌이었다. 에닌은 카산의 품에 안겨서 마베릭의 시체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 녀뿐만이 아니라 그 자리에 있던 자들 모두가 전부 마베릭의 시체를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다. 시체 처음 보는 것도 아닐텐데 꽤나 웃기게 구는 군.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이었다. 웅크린 마베릭의 시체는 갑자기 희미한 빛 을 발하더니 홰액 소리를 내지르면서 사라져버렸다. 놀란 자들이 일제히 뒤로 물러났다. "저, 저런! 어떻게 된 거지?" "회귀마법입니다. 누군가가 그에게 회귀마법을 걸어 놓았어요. 무슨 일이 벌어지면 지정된 장소로 돌아오도록 말입니다." "그 무슨 일이라는 게 심장이 뜯겨질 경우를 말하는 걸까?" 내 말에 카나리안은 창백한 얼굴을 조금 일그러뜨렸다. 아무리 잘생긴 얼 굴을 한 녀석이라도 이런 표정은 정말 보기 괴롭다. "그런.....모양입니다. 그가 죽으면 지정된 장소로 돌아오게 걸어 두었던 모 양입니다."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 내가 한 말을 들은 듯했다. "정말일까요?" "뭐가?" "정말로 그, 그는............그는, 나를 공격하지 못하도록 금제를 받은 것일까 요?" "보면 모르냐?" 나는 차갑게 말해주었다. 평소 치밀한 킬트의 성격 상 자기의 그 소중한 자식놈에게 성깔 더러운 제자들이 상처를 입히도록 내버려 둘 리 없다. 전 에, 카나리안을 공격하려던 마베릭 놈이 흠칫거리기에 적당히 추리해 보았 는데 맞았다. 그거지. 아, 역시 나는 명민하다 못해 영리해. "......어떻게 된 거지요?" 조인족의 여왕이 긴 침묵을 깨고 처음으로 내게 물었다. 그녀는 나를 무슨 괴물을 보는 것 같은 얼굴이 되어 있었다. "뭐가?" "그는 분명히 소원을 말하지 않았던가요? 그런데 왜?" "그의 소원은 진실한 게 아니었거든." 나는 입을 다물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죽음 앞에서도 허세를 부리는 녀석은, 인간뿐일지도 몰라. 혼자 죽어갔다 면 녀석은 솔직했을 지도 모르지만 여기에는 눈이 너무 많았는지도 몰라. 다른 자들의 눈을 의식해서 허세를 부리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특징. 약점 을 공격당했다고 파르르 떨고, 무시당했다고 발끈하고, 죽어 가는 마당에도 자존심을 내 세우며 고집을 피우는 것이야말로 인간. 곧 죽어도 자신의 약 한 모습을 부정하려고 허세만 부려대는 어리석음이야말로 인간. 아무리 부정해도, 아무리 부정당해도 네 놈은 인간. 저 지저분하고 어리석 으며 한심스러운 인간의 족속. 이봐, 어린애야. 수백이, 아니 수천이, 아니 수 만 명이 너를 부정한다고 해 도 내가 인정해 주지. 네 놈은 저 빌어먹게도 너저분한 인간이야. 가련한 놈아. 제 23화 오만 KUBERIN........ 분노는 오만 슬픔은 연민 1 어두운 숲 속에는 짐승들이 산다. 물론, 밝은 숲 속에도 살고 있다. 나는 피워 놓은 모닥불이 만들어내는 불꽃의 숲을 지켜보면서 그 불꽃 속 에서 춤추는 티끌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불은 살아 있는 짐승처럼 새빨간 혀를 날름거렸다. 약을 올린다기 보다는 독사 한 마리가 혀를 날름거리며 위협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나는 그 위협하는 입 속에 나무토막 하나 를 던져 주었다. 엘프들은 각자 서로에게 치료마법을 써주고 있었다. 덕분에 식사 준비를 하는 것은 조인족이었는데 나로서는 그들이 준비하는 것이 훨씬 더 좋았 다. 조인족들은 묘인족 만큼이나 많이 먹으니 쪼잔하게 풀뿌리와 열매 몇 개로 때우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드십시오." 약간 떨리는 손길로 조인족 한 녀석이 내게 잘 구워진 사슴 뒷다리를 건넸 다. 기름기가 잘잘 흐르는 그 것을 엘프들이 가져온 향초를 뿌려 입에 물 자, 육즙이 흥겹게 흘러나왔다. "맛있다." 내가 히죽 웃자 내게 사슴 뒷다리를 잘라준 녀석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맛있다니 다행입니다." 정말 착하기도 하지. 묘인족 같았다면 뒷다리를 주욱 찢어 내게 건네면서 주둥아리를 댓발이나 빼물고 있었을 텐데. 조인족다운 차분한 미모는 엘프와는 다른 데가 있다. 섬세하고 아름답긴 하지만 유리같은 연약함이 아닌 눈을 뗄 수 없게 하는 맹수의 그것. 새가 다 카나리아와 같은 것은 아닌 것처럼 조인족의 아름다움은 엘프와는 전혀 다르다. "왜, 왜 그러시는 겁니까!" 놀란 듯 부들부들 떠는 녀석의 손목을 잡고 나는 천천히 가늠해 보았다. 확실히 뼈가 다를 지도 모른다. 지금 내 눈앞에서 파드득거리고 있는 녀석 은 확실히 성년이 지난 녀석이지만 이 녀석의 뼈는 묘인족에 비해 가볍고, 가늘었다. 그러니까 조인족 여자들이 그처럼 섬세하고도 아름다울 수 있는 게지. 단단하고 뜨거운 묘인족 여자와는 다른, 그 뭔가 섬세한 것이 깃든 것이 바로 조인족의 여자. 훗. "놔, 놔주십시오!" 갑자기 버둥거리는 녀석을 나는 빤히 바라보며 손목을 놔주었다. 녀석은 내가 잡은 손목을 파드득거리며 마구 쓸어 내리더니 눈물이 글썽한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그 모습이 진정 아름다워서 나는 상냥하게 대해 주 었다. "지랄 좀 떨지 마." 녀석은 흠칫 하더니 갑자기 애인에게 뺨 맞은 덜 떨어진 녀석 마냥 아앙 소리를 내며 뛰어가 버렸다. 그 녀석이 다른 녀석에게로 달려들어 훌쩍이 는 것을 즐겁게 바라보면서 나는 다리를 죽죽 뜯어 먹었다. 아, 맛있어. "놀리면 재밌어?" 갑자기 턱을 괸 채 튜나가 기가 막히다는 듯 물었다. "물론이지." "그렇게 무서운 짓 좀 하지마. 다들 얼마나 무서워하는 줄 알아?" 튜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뭐가 무서워?" 이 상냥한 분이 어디가 그렇게 무섭다는 거냐? 나는 그런 부당한 단어에 항의하면서 슬금슬금 조인족 여왕의 옆으로 엉덩이를 옮겼다. 그녀는 나와 몇 메테르 정도 떨어진 곳에 앉아서 자신의 종족도 아닌 거지 공주를 돌보 고 있었다. "다들 쿠베린이 덮칠까봐 두려워하잖아?" "뭘 덮쳐?" 나는 어리둥절해서 튜나에게 물었다. 어느 새 내 손은 여왕의 엉덩이 옆에 슬금슬금 다가가고 있었다. 그런 나의 손에게 감탄하면서 나는 다 먹어버 린 사슴의 뒷다리뼈를 휙 던졌다. "하나 더 드세요." 에닌이 어느 새인지 나와 여왕의 사이에 끼어 들며 내게 잘 구워진 갈비를 내밀었다. 그 갈비를 잡아 뜯으면서 나는 튜나에게 턱짓을 했다. "계속 해봐." "뭘 계속해? 그런데 왜 그 쪽으로 자꾸 슬금슬금 가는 거지?" 튜나는 미심쩍다는 듯 물었다. 나는 그 말에 대꾸할 필요를 못 느꼈기 때 문에 여왕을 향해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여왕." "네?" "내가 아브란 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내 말에 그녀는 잠시 동안 침묵했다. 할말을 고르는 것처럼 그녀는 고개를 가볍게 숙여 보이더니 조용히 말했다. "글쎄요." "애칭이라도." 내 말에 그녀는 흠칫했다. "설마하니 여왕, 여왕 그렇게만 부를 수는 없잖겠소? 거북하다면 내가 아 브란이 아니라 아브라고 부르겠소." 나는 애정이 담뿍 담긴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는 조금 당 황하는 것처럼 얼굴을 살짝 붉혔다. 붉어지는 저 뺨. 아, 아름다워라. "그, 그것은........." "내가 싫은 거요? 나는 그대의 소중하고도 아름다운 이름을 조금 탐내고 있을 뿐인데?" 나는 기름이 묻은 손을 허벅지에 적당히 문질러 해결하고는 그녀의 흰 손 을 잡고 그 손바닥에 가볍게 키스했다. 순간 그녀의 얼굴이 당황과 부끄러 움으로 순식간에 짙은 색으로 물들었다. 아, 나는 이렇게 홍조 띈 미녀의 얼굴이 너무 너무 좋아! "그렇게 말씀하시니, 정말로 드릴 말씀이 없군요. 묘인족의 위대한 왕." 그녀는 약간 비꼬는 듯 투덜거리더니 생긋 웃으며 말했다. "그래요. 그렇게 부르세요." "아브? 아, 아름답군요." 내가 감탄해 보이자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쿡쿡 웃더니 말했다. "정말 대단하시네요." "나야 원래 대단한 분이지요. 아름다운 나의 아브." 나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 모습에 옆에 있던 튜나와 휴런 등이 비명을 내지르며 시끄럽게 굴었지만 나는 무시했다. 우정이란 말이다. 우! 정! "그건 그렇고........." 갑자기 그녀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이 자리에서 분명히 밝혀주시지 않겠습니까?" "뭘 말이오?" "아까 마렐의 손목을 잡아 끈 것은 그저 장난일 뿐이었다고요." "마렐이 누군데요?" "방금, 왕께서 손목을 잡은 청년이지요."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들어 앞을 보았다. 질린 얼굴을 한 서너명의 조인족 청년들이 기묘한 자세로 서 있었다. 그 어색한 자세에 나는 연민을 느끼며 혀를 찼다. 그랬더니 녀석들은 그 엉거주춤한 자세로 뒤로 슬금슬금 물러 섰다. 아까 내게 사슴고기를 주었던 녀석은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마자 황 급히 시선을 피했다. 아예 탈색된 듯 허옇게 된 낯짝이 아무리 보아도 정 상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무슨 장난말입니까? 저는 장난은 치지 않았는데." 내가 묻자 여왕, 아니 나의 아브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그랬군요." "팔뚝 모양을 보느라 잡았던 것 뿐이죠." 내 대답에 그녀는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그렇지요." 그 묘한 표정은 뭐냐? 나는 그것에는 신경 쓰지 않고 그녀와의 대화에 열 중하기로 했다. 이런 향긋한 숲속의 밤에 미녀와 나란히 앉아 있는데도 기 분이 나쁘다면 그건 정상적인 수컷이 아니지. 그러나 그 때 엘프들의 상처 치료를 끝낸 듯한 색마 카나리안녀석이 퍼런 얼굴로 내게 슬금슬금 기어 왔다. 그리고는 나와 조인족 여왕, 아니 나의 아브를 번갈아 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이봐, 엘프 주제에 설마하니 조인 족에게 마수를 뻗치지 마. "이제 어떻게 할 건가요?" "어떻게라니? 가서 해결해야지." "어디를 말입니까?" "어디라니. 당연히 전에 있던 그 곳이지." "전에 있던 그곳이 대체 어딥니까?" 카나리안은 지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나를 향해 물었다. "바보냐? 가장 기본적인 목적을 기억해내야지." "가장 기본적인 목적?" 녀석은 멍하니 나를 올려다보았다. 어쩐지 이 녀석은 뭔가 잘 못 먹은 것 처럼 멍청해 보였다. 그 멍청함이 전염이라도 된 것인지 앞뒤좌우 할 것 없이 주변의 모든 놈들이 다 멍청해 보인다. 그나마 덜 멍청한 얼굴을 한 조인족의 여왕, 아니 나의 아브가 조용히 말했다. "그 동굴 말인가요?" "그렇소. 정확히 말하면 동굴이 아니라 지하 신전이었지만. 녀석이 날 가 두어 두었던 그 동굴에 뭔가 더 있을 걸. 시체들도 있었고 줄줄이 늘어놓 은 장식품도 있었으니까." 그 말에 그제서야 제 정신이 드는 지 카나리안은 흠칫했다. 녀석은 그 말 을 어떤 의미로 들었는지 기묘하게 우울한 얼굴이 되었다. 과부에게 뺨 맞 고 작부에게 엉덩이 맞은 형상이라고나 할까. "그 극악한 자가 저지른 만행의 증거들이 그 자리에 다 있었지요." 녀석은 갑자기 멍하니 중얼거렸다. "엘프들을 고문하고, 죽이고, 조인족의 노약자들을 빼앗아 가고, 묘인족의 어린애를 납치하고, 그리고.......전쟁을 일으키고........" 그는 바닥으로 시선을 던졌다. 마치 억지로 떠드는 것 같아 보기에 심히 괴로웠지만 녀석은 계속 지껄였다. "정말 사악한 자였지요." 그러니까 그런 말을 지껄일 때는 분개해서 떠들어야 하는 것 아니냐? 불쌍 해서 죽겠어요 라는 느낌을 팍팍 주면서 그렇게 딴 소릴 하니 정말 짜증난 다. "이상하게도 불쌍한 기분이 되었어." 튜나가 갑자기 끝도 밑도 없이 끼어 들었다. 이 하프엘프는 집요하게 나를 향해 시선을 던지며 슬금슬금 떠들기 시작했다. "그는, 정말로 제대로 소원하지 않은 건가?" "왜 새삼스레 불쌍하냐?" 내가 기가 막혀 묻자 튜나는 우물거렸다. 카산은 굉장히 복잡한 얼굴로 에 닌의 손을 잡은 채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너무, 냉정했어요." 카산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원망의 감정에 나는 기 가 막히고 말았다. "그 놈에게 죽은 놈이 대체 몇이나 되는데 지금 내 앞에서 그런 소릴 하 는 거냐?" 내 말에 녀석들은 우물거렸지만 그래도 내가 무슨 얼음덩이, 냉혈한이나 되는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아, 죽여서 복수해줬는데, 그것도 모자라냐? 방금 전까지만 해도 죽인다고 난리를 치던 게 너희들이지 나였냐? 내가 한참 노려보자 녀석들은 우물거리면서 내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는 기묘한 한숨들을 내쉬며 바람 빠진 뭐 마냥 축 늘어졌다. 나는 녀석들의 한심한 몰골에 신경 쓰지 않고 걸었다. 아름다운 세상이야. 그렇고 말고. 그 놈의 생각이란 것좀 줄이고 본다면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 운가. 복잡한 것은 복잡한 것으로 미뤄두고, 내가 정말로 그 놈의 분홍주둥이가 불쌍하다고 생각하게 된다면 그 놈은 또 얼마나 불쌍한 놈이 되는가? 상대 를 불쌍하다고 말하는 건 결국은 나는 저 놈보다 낫다고 말하는 오만이 아 닌가? 물론, 나는 저 놈보다는 훨씬 잘 났다는 것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정말 오만한 것은, 상대가 불쌍하다는 말을 어렵지 않게 내뱉는 것이다. 죽일 놈은 가차없이 죽여주는 게 바로 상대에 대한 존중이라고 나는 믿는 다. 사냥을 해서 먹는 자가 사냥감을 불쌍하다고 죽어 가는 놈 앞에서 눈 물 흘린다면, 그것만큼 오만한 일은 없다. 아니다. 싸가지 없는 일이다. 차 라리 두 눈 부릅뜨고 자신이 죽인 놈을 들여다보고 그 살점을 고이 먹는 것, 그것이야말로 사냥꾼의 올바른 도리. 나는 이런 심한 짓은 할 줄 모르 는 놈이에요 라고 말하는 것은, 자신이 한 짓에서 도망가는 짓거리다. 죽인 놈이 내가 한 게 아니에요 라고 외치면 죽은 놈은 뭐가 되나? 자살한 병신 밖에 더 되겠나. "쿠베린. 저기.........정말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는 것은 아니겠죠?" 갑자기 카나리안이 나를 향해 물었다. "뭔 생각?" 내가 시큰둥해서 돌아보자 녀석은 말라비틀어진 육포 같은 얼굴로, 시들 어 버린 건포도 같은 입술로 주절거렸다. "저, 마베릭에 대해서 당신은 나 보다 더 잘 알고 있지요?" "그래서?" "그는 당신을 좋아했어요." "그래서? 하지만 난 남색은 취미 없어." 내 진지한 대답에 모든 녀석들이 일제히 나를 뚫어지게 바라본다. 녀석들 을 보며 문득 나는 이 놈들이 혹시 나와 저 마베릭 녀석이 들끓는 사랑에 도 불구하고 사정이 여의치 않아 서로를 죽고 죽이는 비련의 연인들 쯤으 로 생각하는가 싶어 두려워졌다. "그러니까, 그게 아니라....." 카나리안은 내 대답에 더듬거렸다. 녀석은 잠시 동안 할 말을 고르는 듯 버벅거리더니 나를 한 참을 바라보았다. 나도 녀석을 한 참 마주보다 말고 헛헛 웃어 주었다. "어떻게 넌 그 놈을 그렇게 가차없이 죽일 수 있느냐고 말하는 거야!" 갑자기 튜나가 고함을 질렀다. 그녀는 한숨을 푸욱 내 쉬더니 카나리안과 나를 번갈아 보더니 중얼거렸다. "뭐, 카나리안님으로서도 저 녀석이 그렇게 죽어버린 것에 대해서 마음이 아플 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말이죠, 저 놈이 죽은 게 불쌍은 해도 다행이 라고 생각해요." "불쌍은 해도 다행이라니? 그건 또 뭐냐?" 내가 어이가 없어서 튜나에게 묻자 튜나는 고개를 황급히 저었다. "그래도 쿠베린 손에 죽었잖아?" 나는 다시 기가 막혀 튜나를 뚫어지도록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나는 남색에는 취미가 없다니까. 조금 작고 어린 녀석이라면 그래도 귀여워는 해 주겠지만 저 분홍주둥이 어디가 예뻐서 내가 귀여워 할 수 있다고 생각해?" 내가 다시 말하자 튜나는 발끈했다. "이 하반신만 살아 있는 자식아! 누가 그렇고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냐? 마베릭은 널 조, 존경하고 있었다는 말이야!" "존경하면 남의 마누라 납치해다가 태우고, 남의 딸내미 유괴하냐?" 내가 물끄러미 튜나를 보며 묻자 이 덜 떨어진 하프 엘프는 머뭇거렸다. "그, 그게......." "남의 마음을 제 것처럼 추측하는 것은 그만들 두라고. 저 놈은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하다 죽었고, 그건 그 뿐이야. 그 놈 속알맹이는 그 놈이나 알지 아무도 몰라." 나는 잠시 동안 생각했다. "그리고 남의 속을 읽으려고 버둥거리지도 마. 그것도 일종의 도둑질이지." "뭐라구?" "아, 그러고 보니, 네 직업은 도둑이었지. 그걸 잊어서 미안해."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튜나는 발끈하다 말고 힘없이 늘어지며 옆에 있 는 엘레에게 기댔다. 그 약한 척하는 모습을 보고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죽은 놈 하나 앞에 두고 말도 어지간히 많다. 남의 생각을 훔쳐보려는 것 은 결국은 자기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닌가? 대체 뭐가 그렇게 궁금한 게 많아서 남의 죽음을 가지고 온갖 이야기를 지어내는 것인가? "그러니까 너희들의 이야기를 종합하면, 자신의 출생에 비관한 가련한 마 법의 아이가 존경하는 묘인족의 임금님께 사랑을 바치다가 결국은 그 운명 에 굴복하고 그의 손에 목숨을 잃다 라는 이야기가 나오냐?" 내 말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튜나와 카나리안은 잠시 동안 시선을 마주하더니 카산과 다른 엘프들에게로 또 고개를 돌렸다. 그 시선의 흐름 의 끝은 결국은 조인족의 여왕, 아니 나의 아브가 장식했는데 그녀는 그 꼼짝 못하는 거지공주를 품안에 안은 채 어색한 미소를 내게 던졌다. 그 어색한 미소에 상큼하게 답하면서 나는 걷기 시작했다. "어디 가세요?" 카나리안이 어색하게 물었다. "오줌 누러." 내 대답에 녀석은 다시 침묵했다. KUBERIN........ 분노는 오만 슬픔은 연민 2 차가운 바람을 위해 노래하라. 상냥한 밤의 여신의 옷자락에 키스를. 냉혹한 대지의 여신을 경배하라. 풍만한 그녀의 육체에 애정을. 나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달렸다. 오줌 누러 나오는 길에 나는 결국 혼자 가기로 판단했다. 물론, 오줌이 조금 덜 나왔다던가 바지 끄댕이에 조금 묻 어서 얼룩이 져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그저 나를 비련의 주인공으로 만들 고 있는 저 감상적인 엘프들과 좀 멀리 떨어지고 싶어서 그랬다. 시커먼 어둠이 짐승처럼 도사린 수풀 속을 달리면서 나는 코를 조금 높이 치켜세 웠다. 그 기묘한 냄새. 마법의 일그러진 냄새. 우울하기 짝이 없는 기괴함 으로 가득 찬 그 지하의 신전. 조인족, 엘프, 드워프, 그리고 묘인족의 시체 들이 나뒹굴 곳. 사라진 옛 신들의 거처였고, 지금은 머리가 좀 이상한 미 친 마법사 몇이서 뭉개고 있는 곳. 솔직히 말해서 나는 내가 왜 여기 있는지 조차 잘 모르겠다. 이런 일 저 런 일 겪고 나니 내가 여기에서 뭘하고 있는 것인지 조차 알 수 없게 된 다. 그래, 거참. 처음에는 너무 열 받고 아니꼬와서 녀석들을 갈가리 찢어 죽이려고 했었 다. 내 아이를 데려간 그 놈들을 그저 없애고 한번 크게 경고를 할 참이었 다. 그런데 그 와중에 미트라가 죽었다. 미트라. 미트라. 가련한 내 공주님. 비련의 여주인공이 되기에는 너무 활 달한 공주님. 그리고 내 딸. 아직 성년도 되지 못한 어린 내 딸. 고집스럽 고 앙칼지던 귀여운 내 딸. 그들이 죽고 나서는 다시 모든 것이 다 허탈해졌다고나 할까. 너무 화가 나다보니 지쳤다고나 할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거대한 나무기둥들이 밤하늘을 향해 잔뜩 곤두선 몰 골이 어쩐지 서글퍼 보인다. 역시 이쯤에서 노래가 한 구절 나와야 하는 데. 오호 오호, 내 이름은 쿠베린. 너무나 잘나 슬픈 묘인족의 왕. 그래. 맞아. 너무 잘나 슬퍼진 왕. 나의 예민한 감수성을 생각해 봐. 나 같 이 여리고 풍부한 감성을 가진 분은 역시 험한 세파에 어울리지 않는 거 야. 인간이 죽든 엘프가 죽든, 합성체든 결정체든 어쨌든 간에, 죽은 것들 은 여전히 죽은 것들. 이렇게 감수성이 예민한 내가 고통스러워하는 것도 당연한 것. 이 자비심 깊은 분께서는 언제나 숲을 보며 하늘을 보며 모든 살아 있는 것들에게 애도의 기도를 올릴 밖에. 감상이야 어찌 되었든 나는 금방 그곳에 도착했다. 엉덩이 모양으로 두루뭉실한 산등성이와 이미 마모되어 주춧돌임을 의심케 하는 돌덩이들, 그리고 숨쉬는 풀벌레들과 이리저리 날뛰는 날파리들, 그리 고 귀찮은 모기떼. 뭔가 꽤 어울리는 조합이다. 그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돌 조각들을 피해 나는 습한 냄새가 풍겨 나오는 곳을 찾아 걸었다. 달빛은 이미 사라지고 오직 짙은 남빛과 검은 색만이 존재하는 하늘에는 별빛만이 초롱거리고 있었다. 밤의 여신의 옷자락에는 넘쳐나는 보석들을 주체하지 못한 나머지 흘러내린 보석들이 엉거주춤 매달려 있다. 차갑고 습한, 그리고 꾀꾀한 냄새가 치밀어 오르는 계단을 발견하기에는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비록 돌더미와 제 멋대로 자란 잡초에 완전히 가려져 언뜻 보기에는 그저 풀 더미로만 보였지만 나야 안 보이는 것도 보 는 분 아닌가?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안 보이는 것도 맡을 수 있는 분이라 고 말해야 하나? 얼마 전에 그 놈의 분홍주둥이의 짓거리로 순식간에 옮겨진 터라 어디가 어딘지 잘 알 수는 없었지만 그 때의 지하로 이어지는 통로임은 분명한 듯 했다. 낯익은, 아니 코에 익은 냄새가 풍겨나는 그 낡은 계단으로 내려가며 코를 킁킁거렸다. 곰팡내와 썩어 가는 냄새. 그것은 썩 아름답지 못한 냄새 였다. 그런데 이 계단 참으로 오래도 남아 있었구먼. 만약 이것이 그 옛날 그 뭐시기 하는 신의 신전이 세워 졌을 당시부터 있었다고 한다면 천년 이 상 된 거 아닐까? 나는 잔뜩 마모되어 갈라지고 둥글어진 계단의 모서리를 주의 깊게 관찰하면서 움직였다. 그건 그렇고 앞은 전혀 보이질 않는 군. 한 밤중에도 별 불편함이 없었던 나였지만 이 시커먼 어둠 속에서는 전혀 앞을 볼 수가 없었다. 새 오줌만큼의 빛이라도 있어야 뭘 보기나 하지. 이 거야 원, 눈깔없는 지렁이 꼴이 아닌가. 앞에서는 그저 뭔가 썩는 듯한 그 음험한 냄새만이 났다. 흙이란 원래 이것저것 썩는 내가 나는 곳이긴 하지 만 이건 좀........ 그 냄새를 맡으면서 문득 나는 이 것이 살이 썩는 냄새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 속에 무수한 시체가 쌓여 있나? 만약 그렇다면 나는 절대 안 가. 누가 시체 쑤실 일 있어? 그러나 흥분하기도 전에 갑자기 구멍이 막혔다. 계단은 흙에 파묻혀 있었 고 굴은 메워져 있다. 나는 조금은 황당해서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이게 입구가 아니었던가? 하지만 이 곳에서는 여전히 차가운 공기가 느껴졌다. 뭔가가 썩는 냄새도 여전했다. 일단 실험이나 해 보자 싶어 손톱을 하나 뽑아 쑤욱 밀어 넣어 보았다. 그랬더니 의외로 손톱은 큰 저항 없이 흙 속으로 파고들었다. 어쩌 면 이 굴, 막힌 지 얼마 안 되는 지도 모른다. 손톱을 다 꺼내 열심히 파내기 시작하자 어두운, 아니 어둡다기 보다는 완전한 어둠인 굴속은 흙으로 가득 넘쳐나기 시작했다. 숨도 막히고 내가 서 있을 곳도 없었다. 아참, 이거 이 자리에 나 혼자 있기 망정이지 다른 누가 있었다면 쪽팔려서 미칠 뻔했다. 이 아름다우신 내가 산두더지마냥 이렇게 땅을 파다니. 남이 알면 삼백년간은 얼굴 들지 못하리라. 어쨌든 땅을 파고 전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곧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텅 빈 공간이 나왔다. 그 공간에 고개를 내밀고 앞으로 보자 또 다른 흙벽이 있었다. 아니, 돌덩이가 있었다. 너무 허탈해져서 손톱을 탁 밀어 넣자 이게 건방지게 탁 하고 튕겨낸다. 틀림없이 이것은 흙이 아니고 바위 내지는 돌덩이가 분명했다. 이 쿠베린 님께서 어울리지 않게 두더지 흉내를 내며 파들어 왔더니만 여기서 갑자 기 바윗돌이 등장하다니. 허탈하고 허허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어쨌든 화를 낼 때는 아 닌 듯 하니 되돌아 가도록 해야지. 어쩌겠어? 사방은 흙이고 온통 구멍인 데. 되돌아가서 잠이나 자자. 미련없이 돌아서려는 순간, 갑자기 말소리가 들려왔다.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단 말이냐!" "이, 사악하고도 잔인한 자!" "너야말로 저주받을 것이다!" 악에 받친 자들의 목소리. 뭔가 귀에 익은 자들의 목소리도 가끔은 끼어 있었다. "입 닥쳐라!" "분명 천벌을 받아죽을 것이 틀림 없다!" 방금 악을 지른 녀석덕분에 난 확실히 방향을 잡을 수 있었다. 바로, 아래 다! 아래에서 들려온 그 소리는 있는 힘껏 고함을 내질렀는지 굉장히 선명한 울림으로 다가왔다. 그리하여 나는 주저하지도 않고 그대로 힘껏 발을 굴 렀다. "으아아악!" 콰앙 하는 소리와 함께 나는 그대로 빛 속으로 굴러 떨어졌다. 아니 굴러 떨어질 뻔했다. 그러나 역시 여신의 도우심인지 어떤 기특한 녀석이 내 깔 개가 되어 주었다. 나는 몸 바쳐 보호해준 녀석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 내 엉덩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엉덩이 아래에는 허연 낯짝의 애송이가 하나 널브러져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녀석은 아가리를 바닥에 박은 자세로 앞으로 고꾸라진 개구리 형상이 되어 있었다. 이빨 몇 개가 핏자국과 함께 쓸쓸히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다시 옮겨 말하자면 나는 위에서 떨어져서 그대로 어떤 애송이를 깔고 앉 았던 것이다. 떨어진 위를 올려다보니 약 10 메테르 전후정도 되는 높이 였다. 의외로 나 이상한 데에서 헤매고 있었던 모양이구만. 허기야 10 메테르나 되는 높 이에서 떨어진 나를 가녀린 몸뚱이로 받았으니 내 엉덩이 아래 녀석이 온 전치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세, 세상에!" 갑자기 내 앞에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던 꼬맹이가 눈물 콧물을 흘려가며 나를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나는 내가 깔고 앉은 녀석과 내 앞에서 울고 있는 녀석을 번갈아 보았다. 확실치는 않지만 내 앞에서 울고 있는 꼬맹이 는 어린 엘프였다. 그것도 계집애다. 그것을 알게 된 것은 내가 새삼스레 어린 계집을 밝히게 되어서가 아니라 앞에 앉은 애가 이미 반라의 몰골이 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나는 이 내가 깔고 앉은 개구리 같은 녀석이 무슨 짓을 하려다가 내게 몸을 바쳤는지 알게 되었다. "오. 오....! 이것은 천벌이닷!" 앞에 있던 녀석들이 일제히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박수를 치는 녀석부 터 시작하여 환호하는 녀석들의 열광적인 그 환영인사를 받고 나는 부드럽 게 미소로 답해주었다. "시끄러." "대, 대체 당신은 누구십니까?" 흐느껴 울던 어린 계집애를 놔두고 나는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바로 앞에 흐느끼는 어린 엘프 때문에 나는 나를 위해 몸을 바친 녀석에게 감사 를 표하는 것은 관두기로 했다. 내가 떨어진 곳은 조금 어정쩡한 형태의 토굴이었다. 전에 내가 있던 곳 과는 사뭇 다른 형태였지만 어쨌든 굴은 굴이었는데 넓지도 않은 길죽한 형태의 토굴 안에 앙상한 녀석들이 줄지어 갇혀 있었다. 그 앙상한 녀석들 은 아주 지저분하고 더럽고 또 꽤나 구질한 인상이었는데 뾰족한 귀를 보 아하니 분명 전부 다 엘프였다. "나를 모르는 걸 보니 어린애로군." 나는 나를 온 몸으로 받아준 녀석의 몸뚱이를 슬쩍 발뒤꿈치로 밀면서 우 아하게 일어섰다. 그 때문에 흐느끼던 어린 엘프 계집애는 달달 떨며 뒷걸 음질 쳤다. "이봐, 나는 어린애에게는 절대 절대 절대 관심 없다." 내가 엄숙하게 말해주었건만 계집애는 여전히 울기만 했다. 그래도 소리는 내지 않으니 일단 무시하기로 치고, 일단 주변을 살피기로 하자. 길죽하기만 하고 넓지는 않은 이 놈의 토굴은 높기는 꽤 높은 천장을 가지 고 있었다. 덕분에 내가 뚝 떨어져 어린애의 정조를 위협하는 사악한 녀석 을 하나 퇴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좁은 듯한 토굴의 한쪽 벽면에는 이상 하게 생긴 갈고리와 쇠스랑들이 줄지어 걸려 있었는데 그 쇠스랑과 갈고리 에는 죽어 썩어가는 시체들이 주렁주렁 걸려 있었다. 내가 맡은 냄새는 이 것이었던 모양이다. 거기에다가 사방에 오물과 피, 썩어가는 살덩이로 그득 해서 정말 코가 막혀서 견딜 수가 없을 정도였다. 이런 곳에서 계집애를 덮치려고 한 이 박살난 녀석의 그 무딘 신경에 나는 순간적으로 경의를 표 했다. 시체가 걸려있는 벽면 바로 맞은 편에는 강철로 만든 쇠창살이 빼곡이 들 어 차 있었다. 무슨 돼지우리나 도살장처럼 한 구석에는 시체, 한 구석에는 살아 있는 녀석들을 가두어 둔 것이다. 넉넉잡아 삼사십은 될 듯한 숫자였 다. 꽤나 오래 되었는지 시궁창냄새와 꼬질한 그 몰골들이 아무리 봐도 우 아 떠는 엘프라고는 볼 수 없는 몰골들이었다. "지금 내 몸을 희생적으로 받아 준 이 놈이 누군지 아냐?" 내가 질문하자 떠들어대던 더러운 엘프들은 잠시 동안 침묵했다. 내가 누 군지 알 수 없어서 그랬는지 조금은 겁에 질린 기색이었다. 엉덩이로 누구 하나 깔아뭉개 죽여놓고 태연자약한 내게 경의심을 표하기 위함인 듯했다. "그, 그는 마법사입니다. 그 블랙서클이라고 하는 흑마법사 집단의 일원이 지요." 쇠창살을 잡고 있던 조금은 늙으수레한 엘프가 말했다. 늙으수레한 엘프 라니 조금은 묘한 어감이었지만 아마 이 놈은 땅의 엘프인지도 모른다. 커 다란 눈동자가 데굴데굴 움직였다. 하도 더러워서 땅의 엘프인지 아닌지조 차 잘 알 수 없었지만 어쨌거나 녀석에게 다시 물었다. "그런데 여기서 뭘 하는 거야?" "뭐, 무슨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무슨 이상한 마법을 만든다고 우리들의 피를 뽑아가거나 산채로 내장을 뜯어가거나 하고 있습니다."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리며 녀석이 대답했다. 자세히 보니 머리가 산발하고 때가 꼬질한 얼굴의 한 가운데 코는 매부리코다. 아, 땅의 엘프가 맞긴 한 모양이군. "너, 땅의 엘프잖아? 네 왕도 잡혀 온 거야?" "어? 와, 왕을 아십니까? 아마도 그런 것 같습니다." 갑자기 왕을 말하자 눈물이 가득 고였다. 녀석은 그 커다란 눈에 눈물을 가득 담은 채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우는 건 싫은데. "으흐흐흐흐흐흑! 사악한 인간이, 우리들을 습격했습니다! 아아, 사우스엘 스턴까지 완전히 박살났습니다! 대체 우리가 무슨 죄를 졌다고! 크흐흐흐 흐흑!" 녀석은 대성통곡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그 주변에 있던 녀석들이 다시 흐느 끼기 시작했다. 그 옆의 몇몇은 땅의 엘프였던지 그 녀석이 울기 시작하자 결국 떼지어 대성통곡하기 시작했다. "왕은 어딨는데? 그 녀석 설마 벌써 죽은 건 아니지?" 어쨌든 서로 안면이 있는 처지라 내가 조금 황급히 묻자 녀석은 내 손을 갑자기 덥석 잡더니 끅끅댔다. "보물산을 내어놓으라고 지금 고문받고 계신 거 같습니다. 녀석들이 왕을 다른 곳으로 데려갔습니다. 크흑흑흑흑......." 그 보물산이라는 게 설마하니 보물이 산같이 쌓여 있다고 보물산인 것은 아니겠지? 잠시 동안 딴 생각을 하던 나는 일단 여기를 어서 벗어나기로 마음먹었다. "너희들은 언제 잡혀 왔냐?" "저, 저희들은 ...........그, 그런데 당신은 누구십니까?" "인간은 분명 아니신 듯하고." 녀석들이 웅성대기 시작하길래 나는 훗 웃으며 가장 내 앞에 있는 녀석에 게 처억 하니 손톱 하나를 보여주었다. 그 손톱을 본 녀석은 곧 시퍼렇게 질리더니 헥헥대며 필사적으로 내 앞에서 도망치려고 버둥거렸다. 그리고 녀석들 중 한 명이 큰 소리로 외쳤다. "묘, 묘, 묘인족!' 그 반응이 꽤 마음에 들어 나는 미소를 지어 주며 말했다. "그래, 다른 마법사들은 다 어디 있냐?" "구, 구출하러 오신 거로군요! 묘인족들이 어디에 갇혀 있는지 압니다!" "우와아!" 녀석들이 갑자기 또 박수를 치길래 나는 한 녀석을 가볍게 주물러 줄까 생 각도 했지만 워낙 녀석들이 꼬질해서 만지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긴 말 하지말고. 너희들말고 잡혀 있는 놈들은 어디 있냐?" "바로 옆 토굴일 겁니다. 그 쪽에서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쪽에 어린애 소리가 들렸습니다." "어린애라?" "우리들만이 아니고 수인족이나 다른 족속들도 잡혀 와 있는 것 같았습니 다." 엘프들은 침착하게 말해주었다. 이 자리에 있던 게 인간이었다면 다들 거 품을 물었지 이렇게 싹싹하게 대답해 주지는 않았을 게다. "알았다." 나는 일단 녀석들이 갇혀 있는 쇠창살의 문짝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마 법도 할 줄 아는 엘프들이 이렇게 무력하게 갇혀 있다는 것은 결국 무력화 의 마법진이나 뭐 그렇고 그런 장치가 달려 있는 듯했다. "이거 열쇠로 열어야 열리는 거야? 아니면 그냥 열어도 되는 거냐?" 내가 묻자 한 녀석이 손가락질을 했다. "저기 쓰러져 있는 녀석의 주머니에 열쇠가 있습니다. 그 열쇠가 아니면 열리지 않게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좋아, 그럼 다들 나와. 너희들 마법은 아직 쓸 수 있는 거냐?" "네, 이 곳만 벗어난다면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겁니다." 녀석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기에 나는 녀석들이 갇힌 창살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녀석들이 말한 대로 바로 옆에 있다는 다른 족속들이 갇힌 곳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KUBERIN........ 분노는 오만 슬픔은 연민 3 세상에서 가장 어처구니없는 일이란, 묘인족을 가두어 놓는 일이다. 물론, 조인족을 가두는 일도 그 중 하나이긴 하지만. 사인족은 어떤지 모르겠지 만 조인족이나 묘인족 모두가 갇혀있다고 하는 데 별로 취미가 없다는 것 은 확실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엘프들이 묘인족이 갇혀 있다고 하는 것을 믿지는 않았다. 무슨 약이나 마법진 같은 것으로 거의 혼절을 시키지 않았다면 모를까 멀 쩡한 정신으로 굴안에 갇혀 있는 형상이라는 것은 정말로 가능할 것 같지 도 않았다. "왕." 그러나 이건 조금 심했다고 생각된다. 얼굴이 벌게진 녀석이 어색한 자세로 일어섰다. 녀석의 바로 앞에는 발가 벗은 여자가 누워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녀석이 뭘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분명했다. 내가 녀석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녀석은 어색한 자세로 허둥지둥 일어나더 니 자신의 발치에 누워서 눈을 둥그렇게 뜨고 있는 여자를 얼른 옆으로 밀 쳤다. "저, 저어!" 녀석은 급히 고개를 숙이고는 무릎을 굽혀 보였다. 평상시라면 꽤나 단정했을 녀석의 몰골도 이 상황에서는 썩 멋지지 않았다. 엘프들이 갇혀 있던 굴과는 다른 조금 넓은 사각형의 방안에 있던 이 묘인 족 애송이는 분명히 잘은 기억나지 않지만 미하라와 함께 마법사의 뒤를 쫓았다고 하는 바스티앙인지 바스타라인지 하는 녀석이었다. 제법 총명한 척해서 듀나시의 신임을 받고 있었던 듯한 녀석이었다. "잘 논다." "그, 그게, 그게......" 변명하려고 녀석은 버벅거렸지만 나는 기가 막혀서 웃다 말고 뒤에 서서 입을 벌리고 있는 엘프들의 시선을 의식했다. 녀석들은 억울하고 분하고 기가 막히다는 그런 표정이었다. 녀석들은 틀림없이 여기에 갇힌 묘인족도 자신들처럼 고문받고 죽어가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자 신들 삼십여명이 갇혀 있던 것보다도 커다란 석실에서 산더미처럼 먹을 것 을 쌓아두고 예쁜 여자랑 뒹굴고 있는 이 놈을 보고 얼마나 억울할 것인 가? 아닌게 아니라 다르기도 엄청 달랐다. 이 바스티앙이란 녀석은 푹신해 보 이는 모피 위에서 알몸의 여자와 뒹굴다가 지치면 은쟁반에 가득 담긴 음 식을 먹었던 모양이었다. 그 음식들의 냄새를 살짝 맡아보고 나도 그 쟁반 위에서 훈제 햄을 집어들고 씹기 시작했다. "다, 당신 대체 뭐예요!" 벌거벗은 여자가 갑자기 바스티앙의 등뒤로 숨은 채 나를 향해 삿대질을 했다. 아무래도 교태로운 모양새가 창녀인 듯 했다. 그런 그녀의 머리통을 툭 치며 바스티앙이 소리쳤다. "건방지게 어디서 큰 소리야! 이 분은 왕이시다!" 여자는 이상하다는 얼굴로 나를 쏘아보더니 곧이어 뒤에 침을 줄줄 흘리고 선 거지떼 몰골의 엘프들을 보고 소리쳤다. "저것들은 뭐야!" 나는 쟁반의 음식들을 적당히 집어먹으면서 바스티앙을 빤히 바라보았다. 녀석은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시선을 아래로 떨구고 있었다. "그럼, 이야기를 좀 들어 볼까?" "저, 그것이........" "어떻게 적을 쫓아 간 놈이 여기서 여자랑 구르고 있었는가에 대해 심도 깊은 이야기가 필요할 거라 생각하는데." 내 말에 점점 창백해지던 바스티앙은 옆에서 계속 중얼거리고 있는 여자를 가볍게 한 대 후려갈겼다. 여자가 푹 나자빠지며 의식을 잃자 녀석은 벌거 벗은 엉덩이를 그대로 드러낸 채 앞으로 쓰러지며 외쳤다. "용서해 주십시오!" "내가 남자 엉덩이를 보고 싶어 할 거 같냐? 어서 간단 명료하게 말해." "죄, 죄송합니다." 녀석은 흘러내린 자기 옷자락을 억지로 묶어 매면서 말했다. "녀석들이 옷을 주지 않아서 말입니다...." 억지 웃음을 지으면서 녀석은 아랫도리를 모피자락으로 가렸다. "간단명료하게 말해." "그것이, 미하라와 미친 마법사년을 쫓아가다가 마법에 휘감겨 잡혔던 것 입니다." 녀석은 약간 더듬으며 말했다. "그 빌어먹을 마법진에 갇혀서 헐떡이고 있는데 갑자기 이 곳에 끌려와 여자와 먹을 것을 제공받았습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그게 전부야?" "네." 그 멀뚱한 얼굴을 보다 나는 문득 생각난 게 있어서 여자를 턱으로 가리켰 다. "저 여자랑은 얼마나 같이 지냈어?" "오늘이 처음입니다. 다른 여자도 있었지만." "그럼 다른 여자는 얼마나 돼?" "...........그게, 세어 보지 않아서 모르겠는데요." 뒤에 있던 엘프들이 줄지어 쓰러지는 것이 보였다. 탈진한 듯 자리에 주 저앉는 엘프들에게 먹을 것을 밀어 주면서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너, 여자를 그렇게 번갈아 들여보내는 저의에 대해서 생각도 안 했지?" "네?" "여기에 갇힌 지 얼마나 된 지 기억 하냐?" "해와 달이 없으니 기억은 할 수 없지만 그리 오래 된 것은 아닐 겁니다." 녀석이 모처럼 명민한 얼굴로 대답했지만 내용은 썩 명민한 게 아니었다. "그러니까, 네가 접한 여자들이 두 자리 수 정도 되냐?" "..........그 이상인 것 같습니다." 진지한 얼굴로 지껄이는 녀석의 머리통을 후려갈기면서 나는 소리질렀다. "이 병신아, 그래, 여기서 여자 수백을 안고 나자빠져 있었냐!" "하지만 마법결계 때문에 나가지도 못하니 별 수 없잖습니까?" 이 단순한 반응에 조금 허탈해진 나는 뒤에서 미친 듯이 먹을 것을 입안으 로 밀어 넣고 있는 엘프들을 돌아보았다. 엘프들 중 한 명이 어울리지 않 게 고기를 씹으면서 내 시선을 받았다. 그리고는 생각난 듯 설명했다. "맞습니다. 이 방 앞에 있던 것은 마법 결계입니다. 하지만 별로 강한 것 은 아니었기 때문에 금방 해제했습니다." "해제하면 다른 마법사들이 눈치채지 않겠나?" "네, 그렇기에 알람마법도 같이 해제한 것이죠." 갑자기 자랑스럽다는 듯 가슴을 내밀던 엘프는 이빨 사이에 낀 고깃조각을 떼어 내면서 말했다. "제 기억으로는 우리들이 이 곳에 온 것은 열흘이 채 못되는 것 같습니 다. 전에는 다른 곳에 갇혀 있었지요. 그러니까 저 분도 비슷할 겁니다." 엘프는 훈제 고기를 씹으면서도 바스티앙을 짐승 보듯 바라보는 시선을 거 두지 않았다. 허기야 며칠 사이에 수 십 명의 여자와 놀아난 녀석이 아무 래도 정상으로 보이진 않겠지. "참, 너는 누구냐?" 대꾸한 녀석을 향해 묻자 고기를 씹던 녀석이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저는 물의 엘프 레아디엘 세리프라고 합니다. 올해로 막 326세가 되었지 요. 특기는 마법입니다." 저 꾸질한 몰골이 물의 엘프란 말인가? 정말로 인정사정 없이 환상을 깨는 군. 차라리 땅의 엘프라면 모를까 엘프 중에서 가장 빼어난 미모라고 일컬어지는 물의 엘프가 저런 몰골로 고기를 씹어 대며 지껄이다니. 나는 환상을 일단 접어 두고 바스티앙에게로 시선 을 돌렸다. "그럼 다른 녀석들은 어디에 있는 지 아냐?" "모릅니다. 하지만 냄새로 기억은 해 두었습니다." 녀석은 갑자기 손을 뒤로 뻗더니 자신의 등뒤를 가리켜 보였다. "이쪽에 드워프들이." 그리고는 사방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저 쪽에는 틀림없이 조인족들, 이 쪽은 수인족들이 있습니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나는 혀를 찼다. "다른 건?" "또 이 위로는 인간들이 있습니다." 녀석은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그런 녀석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나는 재촉 했다. "알았어, 나가자." 갑자기 녀석이 주춤했다. 녀석은 조금 어색한 얼굴이 되더니 내 시선을 슬그머니 피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더니 자신이 아랫도리를 감추고 있었 던 모피 한 자락을 좌악 찢어 아래에 휘감았다. 모피가 좌아아악 하고 뜯 어지는 소리에 앞에서 태연자약 먹고 있던 엘프들이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나는 그녀석이 내 앞으로 한 걸음 내딛는 순간 대체 왜 녀석이 주춤거렸는지 깨달았다. 멀쩡하던 녀석이 다리를 절고 있었던 것이다. 눈에 보일 정도로 녀석의 한 쪽 다리가 짧았다. 벌거벗은 허벅지의 한 가 운데는 보기 싫은 흉터로 벌겋게 일어나 있었다. 내 시선을 느끼자 바스티 앙은 굳은 입가를 억지로 움직이며 답했다. "그 빌어먹을 마법사들이 제 다리뼈의 일부를 빼 갔습니다." KUBERIN........ 분노는 오만 슬픔은 연민 4 굴속에 갇힌 드워프들 사이에 내 친구라 할 만한 녀석, 킬라이가 있었다 는 것은 실로 놀라운 기쁨이었다. 녀석은 날 보자 큰 소리로 소리를 지르 며 두 팔을 벌렸다. "친구!" 하지만 나는 솔직히 녀석을 끌어안고 싶은 마음은 하나도 없었다. 왜냐? 더러웠으니까. 드워프의 짧은 키때문인지 녀석들이 갇혀 있던 토굴은 더더욱 좁았다. 엘 프들은 가늘지만 길죽하니 천장을 높이 뚫어 놓았지만 드워프들은 말 그대 로 토굴처럼 낮게 구멍을 뚫어 놓은 탓에 정말로 좁디 좁아 보였다. 킬라 이가 도도도 달려와 내 허리춤을 끌어안을 때 나는 솔직히 이 작은 친구를 걷어차 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아, 지독한 냄새. "마왕께서 여기까지 와 나를 구출하다니! 실로 놀라운 일일세!" "음, 적당히 놀라워하고 이 팔 좀 풀러줘." "수줍어하지 말게. 나의 이 넘치는 기쁨을 사정없이 보여주고 싶어!" 녀석은 더러운 수염을 내 배에 마구 문질러대면서 내 허리를 부러질 듯 끌 어안고 있었다. 아, 드워프여. 그대들의 이 단순과격한 감정표현은 실로 괴 롭구만. 그 자칭 물의 엘프 녀석은 드워프 왕의 감정표현에 눈시울을 붉히기까지 하면서 나를 초롱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다른 엘프들도 평소와 달리 초췌하다 못해 지저분하고, 지저분하다못해 더러운 드워프들을 따스한 눈 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 오가는 그 공감대를 등뒤로 하고 나 는 킬라이를 허벅지에 매달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 나쁜 놈들은 다 어디에 있지?" 드워프들은 들쥐 마냥 갇혀 있던 토굴에서 쏜살같이 튀어나오면서 복수심 으로 두 눈을 붉히기 시작했다. 그들은 바닥에 널려 있던 몽둥이라도 찾으 려는지 안 그래도 큰 눈알을 뒤굴뒤굴 굴렸지만 보이는 것은 아무 것도 없 었다. 하지만 그에 굴하지 않고 그들은 벽에 걸려 있던 횃불이라도 손에 집어 들고는 의기양양하게 가슴을 펴고 사방을 살폈다. "그나저나, 너희들은 그런 마법실력을 가지고 왜 갇혀 있었냐?" 내가 문득 생각나서 엘프에게 묻자 앞장서고 있던 물의 엘프는 너저분한 낯짝으로 얼굴을 붉혔다. "저기, 그것이 말입니다. 우리들이 갇혀 있던 그 굴에는 삼중의 마법이 걸 려 있었답니다. 그러니까 마법무력, 공간차단를 겸한 마법진이요." "그런데?" "그런데 쿠베린님께서 오시면서 그 마법진을 무력화시켰으니까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감옥창살에 걸려 있던 알람마법과 차단마법을 동시에 그 열쇠 로 깨 버린 겁니다." 나는 조금 이상스러워서 녀석을 다시 한번 보았다. 그랬더니 녀석은 어울 리지 않게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쿠베린님이 죽여버린 그 인간, 그 인간은 사실은 하위마법사입니다. 그의 몸 어딘가에 마법진을 구현하는 것이 심어져 있었던 것 같아요. 결국 녀석 이 죽어버림과 동시에 마법진이 깨진 것이죠." "몸 어딘가가 아니라 녀석 자체가 매개체 아니야?" 내가 말하자 엘프는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겁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런 하위마법사가 그런 고도의 마법을 펼칠 리가 없죠. 녀석은 때문에 항상 저희들과 같이 그 곳에 있어야 했습 니다. 그래서 우리들에게 그런 고, 고문을 했던 것이죠." 그 끔찍한 일이 생각난 것인지 엘프는 얼굴을 찌푸렸다. "무슨 이야긴데?" 내 허벅지에 매달려 가던 킬라이가 고개를 들고 물었다. 녀석의 부리부리 한 눈을 보다보니 어쩐지 조금 그리워져서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나중에 말하자. 넌 어떻게 잡혔냐?" "나는 마튜스의 멸망 때 잡혔지. 기괴한 마수들이 달려 들어오더니 한 입 에 우리들을 척척 물고 마법사 주인에게 달려가더군." 간단명료 확실한 대답이었다. "잡혀 먹히지 않은 게 다행이구만." 그 말에 킬라이의 얼굴이 굳었다. "차라리 먹혔던 게 나았을 수도 있겠지." 나는 드워프들도 엘프들처럼 고문을 당하거나 이상한 실험을 당했을 것이 라는 것을 짐작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빛이란 참으로 기묘한 괴물이다. 잔뜩 주름진 토굴 안을 비추는 그 빛들 은 우리들이 움직일 때마다 미묘한 그림자를 던지면서 불쾌함을 조성했다. 지나가다 만난 몇 몇 애송이들을 빼고 의외로 우리들을 막는 자들은 없었 다. 의외로 감시가 소홀했다. 어쩌면 들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인지도 모르고, 이제는 이 들이 별로 필요 없어서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대체 얼마나 가야 플라티나가 잡혀 있는 곳이 나올 것인가 싶어 조금 짜증이 났다. 설마하니 플라티나도 절룩거리는 바스티앙처럼 되었을까 싶 어 걱정스러웠다. "플라티나는 보지 못했냐?" 내 질문에 바스티앙은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묘인족 여자를 보기는 했습니다만 아이들은 보지 못했습니다." "네 다리뼈를 가지고 어디로 가더냐?" 내 질문에 녀석은 움찔했다. 하지만 그 대답에는 조심스레 대답했다. "모릅니다. 하지만, 뼈만이 아니라 살과 피도 함께 였습니다." 묘인족의 상처는 빨리 아문다. 부러진 뼈 정도는 쉽게 붙지만 잘려져 나간 것은 어쩔 수 없다. 바스티앙이 다리를 절게 된 이유도 그것일 게다. 그 옛 날 내가 어린 듀나시의 발목을 부러뜨려 그의 한 발이 제대로 자라지 못하 게 된 것처럼 바스티앙의 허벅지 뼈 일부분을 그 마법사들이 베어 갔다. 그래서 상처가 아물었어도 그의 다리는 한 쪽이 짧아 질 수 밖에 없었으 리라. 수인족이 갇혀 있던 토굴을 해제하고 나자 잔뜩 굶주린 채 으르렁거리고 있던 수인족들은 당장에 달려가려고 버둥거렸다. 그런 그들을 제지한 것은 엘프들이었다. "분명히 여기 곳곳에 마법이 설치되어 있을 겁니다. 역시 마법을 해지하 면서 움직이는 게 옳아요." 엘프들의 제지에 성질 급한 수인족은 헐떡거리면서도 자제했다. 뱀의 일족, 늑대의 일족, 그리고 처음 보는 범의 일족까지 다양한 자들이 모여 있었다. "죽여!" "그 놈들을 죽여야 해!" 떠드는 소리가 하도 시끄러워서 나는 녀석들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것 을 눈치 챈 바스티앙이 재빨리 끼어 들었다. "조용히들 해라." 낮게 으르렁거리는 그 음성과 함께 살기가 퍼져나가자 수인족들은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바스티앙은 살기로 번들거리는 눈을 그대로 드러내면서 위 협했다. "감히 누구 앞에서 떠드는 거냐?" 그들이 침묵하는 순간, 나는 냄새를 맡았다. 어딘가 그리우면서도 낯익은, 그런 감정이 느껴지는 냄새였다. "조인족이군." 내가 벽의 한 면을 가리켜 보이자 수인족의 살벌함에 웅크리고 있던 레아 디엘이 앞으로 나서서 두 손을 뻗어 보였다. 엷은 빛이 살짝 스쳐지나갔다. 파직하는 소리가 들렸기에 나는 앞으로 나서려고 했다. 그러나 엘프녀석 은 고개를 살짝 저어 보였다. "기다리십시오, 여기도 무력화 마법이 광범위하게 펼쳐져 있습니다." 녀석의 손짓에 따라 빛의 입자같은 것이 먼지처럼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겉으로 보기에는 보석을 부수어 놓은 듯 화려한 색채였지만 녀석은 진지한 얼굴로 손을 펼친 채 뭔가 알 수도 없는 주문을 외웠다. 그러더니 손을 내 리고 잠시 고민하는 얼굴로 뒤에 선 다른 엘프들에게로 다가갔다. "멀었어?" "잠깐만요. 의논 좀 하고요." 어차피 마법에 대한 것은 모르니까 나는 녀석들을 내버려 두었다. 엘프들 은 뭔가 수군덕거리며 바닥에 숫자 같은 것을 그리기도 하고 마구 이상한 선을 그어대더니 고심하는 표정으로 웅얼거렸다. "이봐, 이것도 마법진이라면 매개체만 찾아 부수면 되는 거 아냐?" 내가 엘프들에게 묻자 레아디엘이 대표로 고개를 저었다. "그게 문제가 아니라, 대개 이런 경우에는 알람마법이 같이 걸려 있기 때 문입니다. 무력화진이 소멸하면 분명히 그 놈들에게로 연락이 갈 겁니다." "흐음, 그럼 왜 너희들 때에는....." "그야 열쇠가 있었잖습니까?" 그 말에 다시 침묵했다. 뭔가 잘 알 수는 없지만 마법은 녀석들이 더 나으 니 그만 두자. 가만있자, 내가 녀석들을 피할 이유라는 것은 사실 별로 없 지 않나? 어차피 녀석들을 죽이러 온 거 아냐? "이봐, 비켜봐." 나는 킬라이와 엘프들을 엉덩이로 밀치며 앞으로 다가갔다. 어림잡아 흙벽의 두께는 상당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흙벽이 돌벽이 되지는 않는다. 나는 바스티앙을 향해 눈짓했다. 녀석은 알아 들었 는지 절룩거리며 내 앞으로 다가오더니 주저 없이 주먹을 휘둘렀다. 터어어어엉 하고 긴 소리가 굴안으로 울려 퍼졌다. "무, 무슨 짓입니까!" 엘프들이 소스라치게 놀라서 고함을 질렀지만 나와 바스티앙은 무시했다. 그리고 한 번 두 번 벽을 후려갈기자 퍽퍽 소리와 함께 돌덩이처럼 굳은 흙덩이가 쏟아져 내렸다. 구멍이 뚫리고 부서져 내리는 흙벽을 보면서 엘 프들은 한숨을 내쉬었다. 몇 번 후려갈기자 벽은 금방 뚫렸다. 머리통만한 구멍이 뚫리자 나는 두 눈을 있는 대로 뜨고 안을 살펴 보았다. 어두워서 잘은 안 보이지만 조인 족의 냄새임에는 확실했다. 녀석들도 갇혀 있느라 갖가지 냄새로 뒤범벅이 되어서 그런지 냄새가 무척이나 강렬했다. 원래 목욕을 안하면 체취가 강 해지는 법이다. "횃불 던져 봐." 킬라이가 바로 옆에 있던 드워프의 손에서 횃불을 빼앗아 들더니 그 시커 먼 구멍 속으로 들이밀었다. 그러자 어렴풋이 구멍 안의 풍경이 보였다. "누구냐!" 사나운 어투가 쏘아져 나오자 나는 급히 물었다. "이봐, 아브의 일족아." 상대는 흠칫했다. "아브의 일족아, 그곳에 몇 이나 있냐?" "누, 누구요?" "대답이나 해라." "스물 두 명입니다." 그러고보니 구멍 속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좀 더 크게 들려왔다. 나는 설 마하니 조인족 전부를 이런 어둠 속에 몰아 놓고 있었던가 싶어 크게 놀랐 다. 구멍 안은 조금의 빛도 들지 않았고 엘프들이나 수인족들과는 전혀 달 리 완전한 어둠 속이었던 것이다. 황급히 주먹을 휘둘러서 구멍을 넓혔다. 구멍을 넓히고 희미하게나마 빛이 들어서자 어둠 속에 있던 조인족들이 희미한 비명을 올렸다. 그들은 마치 벌레처럼 꿈틀거리면서 얼굴을 가렸다. 그 중에는 여자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앙상하게 마른 남자들도 몇 있었다. 그러나, 역시 애들은 없었다. "어찌된 거야?" "누, 누구십니까?" "나는 쿠베린, 묘인족의 왕이다." "아!" 한 명이 갑자기 큰 소리를 냈다. 긴 머리칼로 온통 온몸을 휘감고 있는 여 자였다. 흙먼지와 더러운 얼룩으로 몸은 꽤나 더러웠지만 그 냄새로 나는 금방 그게 누구인지 깨달았다. "셀레네!" 나는 크게 외치며 벌레처럼 웅크리고 있는 조인족 사이로 뛰어들었다. "쿠베린님!" 내가 끌어 안자 셀레네는 어린애처럼 달려들어 울음을 터뜨렸다. 엉엉 울 고 있는 그 모습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이런 곳에서 이렇게 만 날 줄은 몰랐지만 어쨌든 무사한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주변을 돌아보고 나는 왜 이들이 이렇게 무력하게 앉아 있었는지를 알았다. 여기 있는 자들 중에 전사는 한 명도 없었다. 모두 평범하고 연약한 보통의 조인족이었던 것이다. "구해주러 오셨군요!" 울음을 터뜨리는 셀레네를 바짝 안아 들고 나는 조인족들을 향해 외쳤다. "일어나 걸어!" 꿈틀거리던 자들은 얼굴, 정확히 눈을 가린 채 비틀비틀 일어서고 있었다. 다들 균형을 못 잡는 것처럼 비틀거렸지만 엘프들과 드워프들이 달려들어 서 그들을 부축했다. 조인족에 대해서 알고 있는 자들이 몇 없었지만 그래 도 엘프들은 자신들과 비슷해서 인지 그다지 거부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게 전부인가?" "애, 애들을 잡아 갔어요!" 황급히 셀레네가 눈물과 콧물로 얼룩진 얼굴로 외쳤다. "애들?" "네, 애들을 전부다 잡아 갔어요." 그 말이 터지자 여기저기서 울음이 터져나왔다. 구출되었다는 안도감 때문 인지 아니면 그저 괴롭기 때문인지 잘은 알 수 없었지만 그들은 울음을 터 뜨리며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다. "얼마나 갇혀 있었는지 알아?" "몰라요. 모르겠습니다. 마법사의 습격 때문에 갑자기 이 곳으로 끌려왔 고, 그 다음에는 내내 갇혀 있어서....." 셀레네가 대답하는 동안 조금은 똑똑해 보이는 젊은 남자가 고개를 쳐들고 나를 바라보았다. 아직 빛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 같긴 했지만 아까 대답했 던 그 자인 듯 했다. "묘인족의 왕, 그럼 당신만 오신 겁니까?" "아니, 아브도 왔어." "아브가 누구예요?" 셀레네가 끼어 들며 물었다. "너희들의 왕." 그 말에 그들은 잠시 동안 말을 잃고 날 바라보았다. "우리들의 왕, 아브란 셀님?" "응." 내 대꾸에 더 이상 지체하지 않겠다는 듯이 레아디엘이 외쳤다. "어서 가시지요! 여기서 더 지체하다가 놈들과 정면으로 부딪칠 겁니다!" "정면으로 부딪치든 말든 여긴 일직선 토굴인데 뭘 어쩌겠냐?" 내 대답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문득 엘프들 사이에서 한 녀석이 손을 들 면서 말했다. "제가 길 안내를 하겠습니다!" 돌아보니 큰 눈알의 땅의 엘프였다. 땅의 엘프는 모두의 시선을 한꺼번에 받자 수줍은 듯 얼굴을 붉히더니만 더듬으며 말했다. "방향을 잡았습니다. 어디로 가면 지상인지 알 수 있겠습니다." 그 녀석의 말에 모두 안도의 한숨의 내쉬었다. 허기야 토굴 안에서 땅의 엘프처럼 믿음직한 것은 없겠지. 그러나 녀석은 내 눈치를 보더니 재빨리 말을 붙였다. "그 대신에 우리들의 왕을 구출해 주십시오." "알았어." 내가 너무 선선히 대답했는지 녀석의 눈은 휘둥그레졌다. 나는 진지한 얼 굴로 녀석의 머리통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묘인족과 땅의 엘프의 친목은 수 천년간 이어 내려온 기나긴 전통이지. 오랫동안 땅의 엘프와 묘인족은 긴밀한 유대를 이루고 있었지." 나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말에 감동을 한 땅의 엘프가 그 커다 란 눈알에 눈물을 가득 담을 즈음 옆에 있던 킬라이가 어울리지 않게 입을 비죽였다. "그래, 묘인족의 땅의 엘프의 보물을 대대로 뜯어 온 것은 정말 수천년간 있었던 일이지." 나는 킬라이의 엉덩이를 가볍게 걷어차며 충직한 땅의 엘프를 재촉했다. 가자, 가! 보물산이라! 그러나 더 전진하기도 전에 갑자기 좀 거슬리는 냄새를 맡았다. 내가 바 스티앙을 돌아보자 녀석은 내 시선을 받더니 씨익 느끼한 웃음을 지었다. "옵니다!" "그렇군." 녀석은 절룩이는 다리에도 불구하고 한 걸음에 자신의 앞에 모여 있던 드 워프들의 머리 위를 넘었다. 드워프들이 입을 벌리는 동안 그는 손톱을 뽑 아들며 짐승의 내장처럼 굴곡진 굴의 한 가운데로 치달렸다. 헐떡이는 소리와 함께 나타난 것들은 네 발 달린 기괴한 괴물이었다. 침을 좔좔 흘리며 달려드는 꼬락서니가 미친 개처럼 보였지만 크기만은 4메테르 에 육박했다. 발 하나가 사람 머리통 만한 그 괴수는 우리들을 향해 일직 선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제일 먼저 바스티앙의 손톱이 반원을 그 리며 녀석들을 덮쳤다. "으아아악!" 엘프들과 조인족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바스티앙은 좁은 굴 안을 팔딱팔딱 뛰며 덮쳐드는 괴물들의 몸통을 향해 손톱을 휘둘렀다. 피와 살점이 분수 처럼 쏟아져 좁은 토굴안을 메웠다. 뒤에 서 있던 엘프들과 조인족들은 물 론이고 드워프들마저 토악질을 할 지경이었다. 괴물의 덩치가 커서인지 내 장들도 커서 바닥에 주루룩 흘러내리는 그 모습이 결코 아름답다고는 할 수 없었다. 바스티앙은 그동안 갇혀 있었던 것이 억울했던지 가차없이 인 정 사정 없이 그 녀석들을 죽이고 있었다. "저, 저게........그러니까 우리들을 덮친 괴물이야." "그러냐?" 킬라이가 잔뜩 굳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셀레네는 있는 힘껏 내게 매달렸다. 겁에 질린 자들을 돌아보면서 나는 눈 살을 찌푸렸다. 또 다른 것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이거,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긴 한데. "왕눈아. 어느 쪽이 출구냐?" 내 질문에 얼이 빠져 있던 땅의 엘프가 급히 대답했다. "저 쪽입니다!" 시선이 일제히 녀석의 손끝으로 향했다. 하지만 녀석이 가리킨 방향은 불 행히도 벽이었다. 벽을 향해 손가락질 한 녀석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 올라 있었다. 모두 어처구니 없다는 얼굴로 그를 쏘아볼 때 나는 녀석이 가리킨 방향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퍼억 하고 흙더미가 쏟아져 내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킬라이가 외쳤다. "좋아! 여길 뚫자! 어차피 이 굴도 뚫어서 생긴 길이잖아!" 그 말에 동조한 드워프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하지만 도구도 없는 터라 썩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그저 내가 벽을 부수면 녀석들은 흙더미를 치웠 을 뿐이었다. 내가 퍽퍽 대며 흙벽을 부수는 소리와 바스티앙이 좌악 좌악 소리를 내며 살덩이를 가르는 소리가 꽤나 규칙적으로 들렸다. "다른 놈들이 오는 군요." 바스티앙이 어느 새인지 아예 출구를 막아버린 괴물들의 시체를 뒤로 하고 내게 다가왔다. 녀석의 얼굴은 아까와 달리 생기에 가득 차 있었다. 허기야 같잖치도 않은 인간들에게 시달려서 다리까지 절게 된 녀석이 기분이 좋지 는 않았겠지. 녀석은 생기발랄한 얼굴로 나를 향해 물었다. "사방에서 오는 걸요." "그럼 사방에서 죽여줘라." 나는 벽을 뚫는 데 열중하며 대꾸해주었다. 피범벅이 된 바스티앙은 시익 웃더니 자신을 향해 공포로 질린 얼굴이 된 드워프들과 엘프들을 밀어 제 치고 앞으로 걸었다. 녀석은 그 공포의 시선을 즐기고 자신의 몸에서 풍기 는 피 냄새를 자랑스럽게 퍼뜨리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녀석이야 어쨌 든 나는 벽을 뚫고 앞으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이쪽도 온통 어둠인가 싶었 는데 의외로 어둠이 아니라 새로운 굴이었다. 이 쪽은 아까와 달리 횃불이 잔뜩 달려 있어서 걷는 게 편했다. 막상 길이 나타나자 땅의 엘프는 쪼르 르 달려와 급히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아, 저, 저 분은요?" 내 옆에 있던 셀레네가 반대 방향으로 사라진 바스티앙을 바라보며 내게 급히 물었다. "알아서 하겠지." 내 심드렁한 대꾸에 셀레네는 바스티앙이 사라진 방향을 멍하니 바라보았 다. "우리들을 위해 괴물들을 막으러 가시는 거군요." 사실 그렇게 멋진 이유는 아니었지만 나는 귀찮아서 대강 대꾸해주었다. "그런 셈이지." "호, 혼자서 괜찮을까요?" 옆에 있던 레아디엘이 질린 얼굴로 황급히 물었다. 그러면서도 녀석은 내 뒤에 따악 붙어 걷고 있었다. 그만이 아니라 다른 녀석들도 모두 내 뒤를 바짝 붙어 걷고 있었다. 덕분에 나는 걷기가 꽤 불편했는데 워낙 길 폭이 좁으니 뭐라 할 수도 없다. "괜찮겠지." 내 대꾸에 킬라이가 옆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묘인족은 혼자 움직인다더니 정말이군." "떼거리로 움직이는 취미는 없긴 하지." 굴속은 짙은 고동색과 검은 색, 그리고 회색으로 잔뜩 얼룩져 있었다. 이 굴을 대체 누가 만들었는지 굳이 묻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옆에 있던 킬 라이가 설명하듯 불쑥 입을 열었다. "여기 말이야, 고왕국의 사람들이 살던 곳이래." "뭐?" "고왕국의 천민들이 숨어살던 곳이라고. 잡혀 오면서 들었어. 누더기 같은 것을 둘러쓴 고왕국의 천민들이 자기들이 모시던 옛 신을 모시던 곳이라는 군." "구질신인가 구스차야인가 하는 그거?" "구스차야신이라고 했던가? 어쨌든 고왕국의 귀족과 왕족들이 천민들을 죽기살기로 쥐어 짠 덕분에 이런 데서 숨어살았다고 하던데?" "그랬군. 그러니 결국은 뒤집어엎었지." "에?" "여기 살던 천민들이 고왕국을 뒤집어엎었다고. 지금 고왕국은 이미 룬드 바르에게 합병된 상태야. 여긴 룬드바르 제국령이야." "으엑!" 킬라이와 엘프들이 일제히 이상한 소리를 내며 날 바라보았다. "몰랐냐?" "그, 그 사이에 고왕국이 멸망했다는 거야?" 킬라이는 입을 저억 벌리며 물었다. 자신이 갇혀 있는 사이 고왕국이 멸망 했다고는 생각지도 않았던 모양이었다. 엘프들도 순식간에 술렁거리기 시 작했다. "그렇다니까. 고왕국 왕과 왕자들은 줄지어 천민들에게 얻어맞아 곤죽이 되고 끝장났어." 내 말에 그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세상에, 천여년을 이어 내려온 고왕국이 정말로.......단 몇 달만에 멸망을?" "몇 달이 뭐냐? 실제로 고왕국에 온지 며칠도 되지 않아서 끝장 났는데 뭐." 모두 침묵했다. 엘프들은 나름대로 고왕국에 애증을 함께 가지고 있었던지 고왕국의 멸망에 묘한 태도를 취했다. 멀리는 핏줄이 연결되어 있고 가깝 게는 사악한 사건을 일으켰었던 그 놈의 고왕국이 그렇게 쉽게 끝장났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거참, 마튜스에서 싸우던 게 엊그저께 같은데 벌써 고왕국이 멸망했다 라......." 킬라이는 더러운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셀레네는 내 팔을 끌어안고 걸었다. 그 따스한 감촉에 문득 사라진 아이들 이 생각나 셀레네에게 물어 볼까 했다. 설마하니 그 애들, 샤로네과 지노엔 도 납치된 건가? 하지만 셀레네의 초췌한 얼굴을 보고는 묻지 않았다. 뭐, 애들을 구출하다 보면 알게 되겠지. "저기." 갑자기 뒤에 있던 조인족 여자가 내게 말을 걸었다. 그녀는 누군가의 부축 을 받으면서도 꼿꼿이 걷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모습을 봐서는 어떤 죽일 놈들에게 강간 같은 것을 당한 것 같았다. 헝클어진 금발과 더러워진 얼굴 도 그녀의 미모를 다 감추진 못했다. 그녀는 부르튼 입술로 나에게 말했다. "아이들을, 우리의 아이들을 먼저 찾아갈 수는 없을까요?" 그 말에 조인족들이 웅성거렸다. 엘프들은 조인족들의 말에 동정은 하면서 도 동의는 하지 않는 듯 내 대신 끼어 들었다. "이 상황에서 다른 곳으로 간다면 분명 쿠베린님과 다른 분들에게 짐이 될 겁니다." "그래요. 일단 여기서 나간 다음 따로 애들을 구하러 오는 게......" 엘프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끼어 들 때 조인족의 여자가 애타는 시선으로 날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이들 없이 여길 떠날 수는 없어요. 부탁입니다. 아이들을 구해 주세요. 아이들은......." "일단 나간다. 어차피 난 애들을 구출하러 온 거야. 그 애들이 묘인족이든 조인족이든 애들이라면 일단 구할 거니까 너희들은 나가기나 해." "그러나........" 여자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혼자서 걸을 수도 없는 주제에 어쩌려고? 너는 애들이 앞에 있어도 그 애들을 구출할 능력이 없잖아?" 내 말에 충격을 받은 듯 여자는 고개를 숙였고 셀레네는 내 팔을 사납게 꼬집었다. "너무 심해요!" "사실을 말하는 것 뿐이야. 능력도 안되면서 나서지 마." 내 말에 엘프들도 웅성거렸다. 그래도 엘프들은 아이들을 잃은 것은 아닌 지라 조인족들에게 동정심을 느끼는 듯했다. 그리고, 바로 그 때였다. 갑작스런 기척. 알 수 없을 정도로 모호한 느낌이 등줄기를 쓰다듬었다. 밤의 여신이 옷자락을 드리운 듯 시나브로 은근히. 너무나 은근해서 간지 러움을 느낄 정도였다. 나는 잠시 동안 내 몸 안에서 일어나는 감각을 정 확히 알아보기 위해 멈췄다. 그리울 정도로 벅찬 그것. 온몸을 저리게 하고 피를 끓게 하는 그것.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농후한 살기였다. 그 달콤한 울림은 그 자리에 있던 모두를 다 던져버리고 따라갈 만큼 유 혹적이었다. 이렇게 농후하고 강렬한 살기는 인간이나, 엘프나 수인족등의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가진 증오를 닮은 차가운 살기와 어떤 깊숙한 곳에 서부터 올라오는 듯한 뜨거운 그 기운은 한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쿠베린님?" 셀레네가 갑자기 멈춰 선 채로 눈을 감고 있는 나를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뜨거운 살기. 숨을 멈출 만큼 강렬한 그것. 나는 내 팔을 잡고 있는 셀레네를 가볍게 밀치고 걷기 시작했다. 내 앞에 서 있던 땅의 엘프가 내가 자신을 밀쳐버리고 앞서 걷기 시작하자 이상하 다는 듯 바라보았다. 나는 그의 시선과 다른 자들의 시선을 동시에 느끼면 서도 홀로 걸었다. 아니, 달리기 시작했다. "쿠베린! 어딜 가는 거야?" 뒤에서 들리는 킬라이의 음성을 모른 척하고 나는 맹렬하게 달렸다. 몇년전, 아니 몇 십년전의 천민들이 만들어 낸 토굴 속을 달리면서 나는 감각을 끌어 올렸다. 이 강렬한 감각은 내 심장을 모조리 달리게 했다. 하 지만, 나는 애써 입술을 깨물었다. "쿠베린! 쿠베린!" 걸음을 멈추고 잠시 심호흡을 했다. 머리를 굴리자, 머리를 굴려. 이봐, 심장, 그만 해. 나는 잘나신 분이야. 똥 냄새 맡고 달려드는 파리처럼 그냥 맞대놓고 달려들 수는 없다고. 체면이 있지. 내 뒤로 헐떡이면서 킬라이들이 오는 것을 기다리면서 나는 한숨을 내쉬 었다. "대체 왜 그러는 거야!" 헐떡이며 달려온 킬라이가 다짜고짜 내 허벅지를 걷어차면서 소리쳤다. "저 앞에 사인족이 있어." "에?" 모두 의아한 듯 눈을 크게 떴다. 나는 그런 그들의 시선을 받으며 친절하 게 설명해 주었다. "저기 사인족이 있다고." "그게 어때서?" 킬라이가 이상하다는 듯이 얼굴을 찡그렸다. 아이고 드러운 얼굴을 그렇게 찡그리지 마. 때가 밀려 주름이 다 생기네. "진짜의 사인족이 진짜의 사인족과 싸우고 있단 말이야." 그 말을 알아 듣는 녀석은 아무도 없었던 듯 했다. 오히려 땅의 엘프들은 적대감과 공포감을 느꼈는지 잔뜩 굳은 얼굴을 했다. 경계하는 것은 조인 족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사인족이란 자신들을 괴롭힌 인간 마법사와 같은 패거리라는 의미였을 테니까. "그럼 피해가야지." 킬라이가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난 가 볼거야." "쿠베린." 한숨을 내쉬면서 막 킬라이가 뭐라 할 때 땅의 엘프가 말했다. "사인족들이 우리들을 가만 놔둘 리가 없어요. 어서 피하는 것이!" "너나 가." 나는 녀석의 말을 무시하고 걸었다. 뒤에서 뭐라 떠드는 소리가 나긴 했지만 나는 신경쓰지 않았다. 이미 가슴 은 가라앉았고 머리는 차가웠다. 아무리 그 살기가 달콤해도 현재 그것에 현혹되어 헤맬 만큼 나는 어리지 않다. 얼마나 걸었을까. 나는 문득 차가운 공기가 코 끝에 와 닿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점차 밝아지는 전면을 의식 하며 그대로 전진하자 곧 탁 트인 광장이 나타났다. 대체 어떻게 이렇게 좁디좁은 토굴과 토굴로 연결되었던 곳에 저런 넓은 곳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넓었다. 전에 내가 분홍주둥이의 간교한 짓거 리로 갇혀 있었던 곳과 비슷할 정도로 넓었다. 그리고 확실히 주변 몰골도 비슷했다. 그 넓은 지하광장에의 가장 중앙에는 마치 나무의 뿌리를 연상케 하는 거 대한 석순이 늘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석순의 바로 아래에 피투성이가 된 몇몇이 있었다. 정신을 잃게 할 정도로 황홀한 살기는 그들에게서 스며 나 오는 것이었다. 아니, 스며 나온다기 보다는 그들이 발산한다고 하는 게 옳 았다. 뜨거운 피가 흐르는 낯짝으로 선 자. 상처 입은 어깨와 온전치 못한 이목 구비를 한 자. 증오와 분노, 그리고 절망에 가까운 탄식으로 무장한 자가 싸우고 있었다. "끄아아아아아!" 그의 고함은 탄식에 가까웠다. 그의 피에 젖은 이빨은 비통에 사로잡혀 있 었다. 나는 넋을 잃고 그들을 지켜보았다. 이미 백발에 가깝게 변해버린 갈기를 휘날리는 사인족의 왕은, 자신과 비 슷한 체구와 이목구비를 한 자와 싸우고 있었다. 완전한 알몸인 그와는 달 리 상대는 인간의 도구인 갑주를 걸치고 있었다. 몸의 움직임을 최대한으 로 살리려고 애를 쓴 티가 역력한 그 갑주는 왕이 움직일때마다 조금씩 우 그러들었다. 와각와각 소리를 내며 제 모양을 잃어 가는 그 갑주의 모습은 그들의 살기에 취해버린 내 눈에는 마치 겁에 질려 웅크리는 형상으로만 보였다. 피에 젖어 제 색을 잃어버린 갈기와 갈기가 교차했다. 손톱만이 아니라 금속의 이기를 휘두르는 자를 향해 맨 손으로 달려드는 왕의 몸에는 새로 운 상처가 생겨났다. "크아아앙!" 이미 한 번의 변신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시 한번 변신했다. 2차 변신이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갑옷처럼 단단한 피부, 칼처럼 단단한 손톱이 몇 배나 강력해져서 돌아왔다. 그의 주먹이 갑주를 걸친 자에게 작열하자 갑주를 걸친 자는 몇 메테르나 붕 뜨더니 바닥으로 사납게 곤두박질 쳤다. 그러자 그의 몸에 걸쳐졌던 갑주가 차가운 소리를 내며 조각나 떨어져 내 렸다. 사내는 부러진 이빨을 내뱉으면서 벌떡 일어섰다. 부서진 갑주의 존 재를 아랑곳하지도 않고 그는 잔뜩 이를 드러내며 몸을 웅크렸다. 그리고 왕을 향해 그대로 도약해 부딪쳐 갔다. 그 짧은 시간, 사내의 몸이 변화했 다. 갑주로 연약해 보였던 근육은 다시 선조로부터 받은 피로 단단해졌으 며 칼을 쓰던 그의 손은 어느새 시커먼 손톱이 덮여 있었다. "캬아앙!" 사내의 손이 왕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왕은 뒤로 물러서면서 그 손을 가슴 으로 대신 받았다. 덕분에 그의 가슴에는 선명한 열 개의 줄이 그어졌다. 다시 피가 솟아나 그의 울퉁불퉁한 가슴을 적시며 누런 털을 물들였다. 꿈 틀대는 근육이 다시 한번 포효하며 날뛰었다. 왕의 몸은 상대를 향해 그대 로 돌진하며 두 손을 내밀었다. 피와 살점으로 얼룩진 검은 손톱이 희미한 불빛아래 음험하게 빛났다. 상대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증오로 가득한 눈빛 을 사납게 번득이며 그대로 왕의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퍼억 하는 소리와 함께 둘은 격돌했다. 손톱과 손톱이 부딪쳐 몇 개는 깨져 나갔고 손가락과 손가락이 부딪쳐 뼈가 어긋나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들의 가슴과 가슴이 맞닿고 근육이 부딪쳤으며 그 순간 그들의 어깨와 어깨가 서로 살과 뼈를 과시하며 충돌했다. 살과 살이 부딪치는 소리가 소 름끼치도록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부러진 이빨을 드러내며 그들은 서로의 목줄기를 물어뜯었다. 누가 더 강한 목덜미를 가지고 있는가, 누가 더 강력한 이빨을 가지고 있는가. 날카로운 이빨이 목뼈의 어느 부분을 깨물었는지 아득아득 하는 소리까지 들려왔다. 시커먼 손톱은 이미 피로 변색되어 알 수 없었다. 서로의 살점을 헤치고, 서로의 심장을 찾아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손톱과 손톱들은 으르렁거리는 소 리와 함께 질척거리는 소리까지 냈다. "캬아아악!" "와아아악!" 이미 비명은 없다. 그들은 서로의 숨통을 끊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었다. 고 통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오로지 순수한 증오로 불타오르면서 사인족의 마지막 왕 헬레아스와 그의 아우 데킬에논은 움직이고 있었다. 너무나 순 수한 증오와 살기에 나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쿠베린님! 뒤에서 겁에 질린 어조로 셀레네가 외쳤다. 나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억지로 헬레아스에게서 시선을 뗐다. 그리고 그 녀가 보는 것, 그리고 킬라이와, 조인족과, 엘프들이 보는 것을 함께 보았 다. 넓적한 광장의 천장을 향해 투명한 상자들이 오밀조밀 쌓여 있었다. 그 앞에서 경비를 서고 있었던 것 같은 오거를 닮은 짐승들이 나를 향해 으르 렁거렸다. 녀석들은 네 개의 팔을 마구 휘저으며 나에게로 달려왔지만 곧 멈칫했다. 그 오거와 나란히 있던 마법사의 로브를 걸치고 있던 몇몇의 비 리비리한 녀석들도 날 보고 뭐라 소리를 치더니 우물거렸다. 투명한 상자 안에는 아이들이 있었다. 모두 잠이라도 자는 듯 잔뜩 웅크 린 채 상자안에 담겨져 짐짝처럼 쌓여 있었다. 나는 내가 아는 얼굴을 찾 기 위해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내 뒤로 엘프들과 조인족들이 숨을 헐떡 이며 달려왔다. 아이들. 상자 안에 담긴 아이들은 각각이었다. 엘프도 있었고, 수인족으로 보이는 아이도 있었으며 인간으로 보이는 애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 모 두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시체처럼 푸른 안색으로 웅 크리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 안에 담긴 아이들 대부분이 조인족의 아이 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직 성년이 되지도 못한 어린 아이들. 그 아이들 이 혈색을 잃은 채 차곡차곡 쌓여 있다. "아아아아아악!" 기나긴 비명을 외치며 절룩이던 여자가 앞으로 뛰어나갔다. 그녀의 뒤를 이어 다른 조인족들도, 셀레네도 앞으로 달려나갔다. 그녀들만이 아니고 음 침하게 눈만 번뜩이고 있던 수인족들도 달려나갔다. 그들 모두다 앞에 버 티고 선 오거를 닮은 마수나, 마법사들은 있지도 않은 듯 달려나갔다. 나는 그저 그 자리에 못 박혀 서 있기만 했다. "케랑!" "마사!" "내 아이! 내 아이!" 비통한 울음으로 사방이 부풀어오르는 것만 같았다. 아이를 잃은 어미들 과 아비들이 미친 듯이 울부짖으며 앞으로 달려나갔다. 오거들이 이를 드 러내며 그들에게 주먹을 휘둘러도, 그들의 사지를 잡아 찢을 듯 흉악한 소 리를 내질러도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마, 맙소사." 킬라이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는 멍하니 입을 벌린 채 아이들의 산과 부 모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잡아라!" 마법사가 외치는 소리가 멀리서 들린 것만 같았다. 나는 부모들을 향해 달 려드는 오거들을 쏘아보았다. 침을 흘리며 이빨로 가득 찬 입을 벌린 녀석 들은 순간 흠칫했다. 나는 한 걸음 앞으로 걸었다. 녀석들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나는 두 걸음 앞으로 걸었다. 녀석들은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 두근두근하고 심장이 울었다. 귓가로 무언가가 차 올라왔다. 이명과도 흡사 한 감각이 청각을 마비시켰다. 나는 오거를 닮은 놈들을 향해 한 걸음 더 다가섰다. 놈들은 물러서지 못했다. 놈들은 그저 그 자리에 붙박힌 채 몸을 떨었다. 울부짖는 부모들의 음성 속에서 나는 유티아의 울부짖음을 들었다. 그 절 망적이고 비통한, 울음. 분노보다 더 진한 슬픔을 느끼면서 나는 걸었다. 눈길이 닿자 녀석들은 뜨거운 것이 닿은 듯 부르르 떨었다. 고개를 숙이 고 마침내 이를 악문다. 그리고는 주먹을 쥔 채로 공손히 바닥에 주저앉았 다. 녀석들은 가여운 몸짓으로 복종을 서약했다. 나는 녀석들을 지나쳐서 상자로 이루어진 아이들의 산을 올려다보았다. 조인족 몇몇은 날개를 펴고 상자를 꺼내들고 있었다. 무거워서 쩔쩔 매면서도 그들은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낯익은 자신들의 아이들을 향해 울부짖었다. 그 비통함 속에서 살기와 분노로 몸을 떠는 엘프들이 마법사들을 공격했다. 그들의 싸움을 나는 실감할 수 없었다. 그저 나는 숨을 죽이며 그 상자 속의 아이 들 중 내 아이가 있는가를 살펴보았다. 혹시나, 묘인족의 아이가 있는 것은 아닐까. 혹시나 내 딸이 있는 것은 아닐까. 몇 번을 살펴도 내 아이들은 없었다. 묘인족 아이들은 없었다. 나는 안도와 함께 뒤를 돌아보았다. 어울리지 않게도 피투성이가 된 엘프 들이 마치 야수가 된 듯 마법사들의 시체를 짓밟는 것이 보였다. 울부짖는 엘프를 본 것은 정말로 오랜만이었다. 주인들이 죽어가도 오거를 닮은 그 짐승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내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려는 듯 잔 뜩 웅크린 채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 짐승들을 뒤로 하고 나는 다시 시선 을 돌렸다. 사인족의 왕과 그의 아우는 피투성이가 된 채 아직도 싸우고 있었다. 그 들의 찢어진 배 사이로 내장이 흘러내려 덜렁거렸다. 어느 쪽이 헬레아스 고 어느 쪽이 데킬에논인지 나는 순간적으로 구분을 할 수 없었다. 원래 비슷하게 생긴 데다가 변신한 그들의 몰골은 똑같았다. 치솟은 갈기, 단단 하게 구릿빛으로 달아 오른 근육, 검고 윤기가 나는 열 개의 손톱, 잔뜩 도 사린 채 구부러진 검은 발톱. 그리고 벌어진 어깨와 근육으로 굽은 것처럼 보이는 등. 어느 것 하나 다르지 않았다. 내장이 덜렁거리며 흔들려도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고통도 느끼지 못하 는 것인지 그저 물어 뜯고 부딪치고 할퀴고 찢고만 있었다. 그 싸움을 보 다말고 나는 그들의 주변에 마치 말뚝처럼 버티고 선 두 명의 사인족을 지 켜보았다. 그들은 왕과 그의 아우의 싸움을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 러나 오거를 굴복시킨 내 살기를 느꼈는지 내 쪽으로 시선을 천천히 돌렸 다. 그들의 노란 눈에서 나는 두려움을 보고 만족했다. 그들은 이를 악문 채 나를 향해 어떻게든 강해보이려는 듯 허세를 부리고 있었다. 솟아 나온 손톱과 구부러진 등을 살피며 나는 피식 웃었다. "꾸아아아악!" 비명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한 명의 사인족이 다른 한 명의 사인족의 가슴에 이를 박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가슴속의 심장에 이를 박고 있었다. 아드득아드득 살과 뼈 가 씹히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고통을 이기지 못한 데킬에논은 자 신의 심장에 이를 박고 있는 헬레아스의 어깨를 물어 뜯었다. 살점을 문 채 미친 듯이 머리를 흔들어대는 그 모습은 고통에 겨운 발버둥처럼 보였 다. "쿠어, 쿠어어어어...." 비명은 점점 거칠어졌다. 헬레아스의 어깨를 문 데킬에논의 입안에서는 검 붉은 피가 쏟아져 내렸다. 그의 찢어진 두 눈과 붓고 터진 얼굴은 잔뜩 일 그러져 있었다. 벌려진 입가에서 흐르는 피는 덩어리 진 채 뭉클뭉클 쏟아 져 내렸다. 그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래도 그는 헬레아스의 어깨에서 이를 뽑지 않았다. 피와 살이 뒤엉킨 채로 그의 입안은 가득 찼다. 쩝쩝거리는 소리까지 선명하게 들려왔다. 헬레아스는 데킬에논의 심장을 씹어 삼키고 있었다. 늘어진 내장은 이제 힘을 잃고 끊어졌다. 쏟아진 내장 이 바닥까지 흘러내려도 데킬에논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다. 그는 오로지 헬레아스의 어깨에 이를 박는데만 열중하고 있었다. 산 채로 심장이 씹히 면서도 그는 절대로 단념하지 않았다. 쩝쩝. 할짝할짝. 헬레아스역시 어깨뼈와 근육이 뜯겨져 나가는 것을 내버려두고 있었다. 그 는 그저 데킬에논의 심장을 먹는데만 열중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완전 히 그 가슴속에 파묻혀 보이지도 않았다. 마침내 데킬에논의 다리가 구부러졌다. 그 거구를 지탱하던 다리가 휘청 하고 옆으로 고꾸라지자 헬레아스는 거칠게 피에 젖은 얼굴을 들었다. 뚝 뚝 얼굴에서 피가 떨어져 내렸다. 노랗게 변한 눈동자가 문득 나와 부딪쳤 다. 멍하니 초점을 잃은 데킬에논의 눈동자는 아무 것도 비추고 있지 않았 다. 헬레아스는 나와 시선을 마주하자마자 거칠게 데킬에논의 몸뚱이를 밀 어냈다. 털썩하고 심장을 잃은 몸뚱이가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아우의 심장 을 먹어치운 헬레아스는 나를 향해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얼굴도 알아 볼 수 없는 피에 젖은 그 몰골은 아주 예전, 내가 알던 모습 이었다. 몇 백년 전의 내 모습이고 몇 십년 전의 내 모습이며 앞으로의 내 모습이었다. 피에 젖은 입으로, 하나밖에 없는 애꾸눈으로 그가 다시 웃었다. 시뻘건 송곳니에서 타액과 엉킨 피가 뚝뚝 떨어져 내렸다. 그는 두 팔을 벌리고 내게 웃었다. 그런 그를 향해 나도 웃었다. 처음으로 그에게 깊은 애정을 느꼈다. 나는 그를 향해 걸으며 변신했다. 검은 털이 내 등줄길을 따라 돋아나며 내 손등 위로 또 다른 손톱이 돋아나고 내 발등위로 또 다른 발톱이 솟아 났다. 그리고 그를 향해 돌진했다. "카아아아앙!" 그가 포효했다. "우오오오오오!" 그의 부서진 어깨를 손톱으로 들쑤시며 나도 화답했다. 그의 상처 입은 뱃가죽을 발톱으로 찢어발기며 나는 미소했다. 그의 심장 을 꿰뚫고 그의 목줄기를 부러뜨리며 나는 웃었다. 그의 몸이 쓰러지는 것을 한 손으로 부축하면서 그의 심장을 씹었다. 천 천히 사인족 최후의 왕에게 어울리는 예우로 그의 심장을 씹었다. 내 팔 안으로 그의 몸이 쏟아져 내렸다. 덜렁거리며 그의 목이 흐느적거렸다. 뻥 뚫린 그의 심장으로 피가 솟아났다. 그의 심장은 격렬하게 죽음에 항의했다. 내 손에 꿰뚫린 채로도 내내 생명 을 주장하며 움직였다. 나는 그의 심장을, 그의 생명을, 그리고 사인족의 생 명을 씹어 삼키면서 사인족 최후의 날을 새겨두었다. 사인족은 오늘 묘인족 최강의 왕 나, 쿠베린에 의해 멸망했다. KUBERIN........ 분노는 오만 슬픔은 연민 5 아이들의 시체를 안은 그들을 이끄는 동안 아무도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셀레네는 내 옆으로 오지 않았고 킬라이 마저도 내 옆으로 오지 않았다. 그들이 내가 사인족을 모조리 다 죽여버리는 것을 멍하니 지켜보는 것을 나도 알고 있었다. 모두들 다 방심상태처럼 멍했다. 모든 피를 다 빼앗긴 채 죽어 있는 아이 들을 발견한 그들과 사인족을 멸망시킨 나,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지켜본 킬라이 모두 할 말을 잃고 있었던 것 같다. 아직도 입안으로 피비린내가 났다. 헬레아스의 심장을 씹었을 때의 느낌 은 여전히 입안에 남아 있었다. 나는 내 앞에서 걷는 느릿한 땅의 엘프들 을 바라보며 문득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꿈틀거리는 심장. 뜨거운 피. 감촉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기묘한 감각으로 온 몸이 들쑤신 듯 뜨거웠 다. 여자랑 몸을 겹칠 때처럼 온몸은 여전히 달아올라 있었다. "내 아이를 죽인 녀석들을 그냥 놔 둘 수는 없어." 갑자기 한 여자가 중얼거렸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을 하고 아이의 시체를 업고 걷는 중이었다. 추욱 늘어진 아이의 팔이 거추장스럽게 흔들렸다. 여 자는 문득 자신의 옆에, 앞에, 뒤에 있는 동족들을 향해 말했다. "아이를 죽인, 내 딸을 죽인 자들을 가만히 놔 둘 참이야?" 그녀의 음성이 끓기 시작하는 것을 나는 조금 멍하니 지켜보았다. 아까부 터 묘하게도 둥 뜬 기분이었다. "아무리 전사가 아니라 해도 이렇게 아이를 죽인 자들을 그냥 놔두고 돌 아서야만 하는 건가!" 그녀는 피를 토하는 듯 외쳤다. "내 딸이 죽었어! 내 딸의 몸에서 놈들이 피를 뽑았어! 한 방울도 남김없 이 피를 뽑아 물건처럼 내버려두었어! 나는 참지 못해! 나는 놈들을 죽여 야만 해! 죽일 거야!" 비명이 울려 퍼졌다. 그녀는 업은 아이의 시체를 부둥켜안고 고래고래 고 함을 질러댔다. 그에 따라 멍하니 걷고만 있던 자들이 일제히 울부짖었다. "나는 이 아이의 엄마야! 나는 절대로 절대로 이대로는 가지 못해! 내 아이 의 핏값을 받아 내지 않으면 안 된단 말이야!" 울부짖는 그녀를 모두다 멍하니 바라보았다. 다른 여자들도 남자들도 애통 한 울부짖음을 터뜨렸다. 아이의 시체를 부둥켜안은 부모들은 분노와 슬픔 을 참지 못해 마침내 복수심으로 불타올랐다. "아, 안 돼요, 어서 이 자리를 빠져나가지 않으면....." 옆에서 레아디엘이 눈물을 훔치며 중얼거렸다. 그는 쏟아지는 눈물을 주먹 으로 문질러 닦아내면서 쓰러져 울고 있는 엘프여인의 몸을 감쌌다. 그러 나 바닥에 쓰러진 채 울고 있는 여자는 돌아보지도 않고 흐느껴 울뿐이었 다. "가자! 가서 내 아이의 복수를 할 테야!" 여자가 덜렁거리는 아이의 시체를 안은 채 갑자기 뒤 돌아서서 걷기 시작 했다. 그러자 그 뒤를 이어 시뻘게진 눈가를 비비던 남자도 아이의 시체를 안은 채 걸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동조하여 몸을 돌렸다. "아, 안돼요!" 엘프들 몇몇이 말리려고 손을 뻗었지만 살기와 광기로 번들거리는 자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킬라이도 당황한 듯 크게 고함을 질러댔다. "그만 두시오! 다들 돌아가요! 일단 이 자리를 어서 벗어나는 게 급선무 요! 바깥에는 그대들의 왕이 기다리고 있다고 하지 않았소!" "내 아이의 복수도 하지 않고 어떻게 간단 말이냐!" "복수!" "복수다!" "여기서 다 죽을 지언정 그대로 갈 수는 없어!" 악을 지르는 자들은 거의 울부짖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가장 앞에 선 여 자의 팔뚝을 잡아챘다. "악!" 여자의 품안에 있던 아이의 시체가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내 딸!" 여자는 내게 팔을 잡힌 채 울부짖었다. 그녀는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발 을 굴렀다. "내 아이가 아파! 내 아이를 떨어뜨리다니! 널 죽여버릴 테야!" 여자는 손톱을 세우며 내게 달려들었다. 나는 그런 그녀의 얼굴을 그대로 후려갈겼다. "아악!" 퍼억 소리를 내며 여자가 바닥으로 나뒹굴자 갑자기 소란을 떨던 자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무, 무슨 짓이에요!" 레아디엘이 달려들어 쓰러진 여자를 부축하려 했다. "입 닥치고 나가라." 여자는 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피에 젖은 입으로 이를 갈았다. "방해하지마! 당신이 뭔데 이래? 내 아이! 내 아이가 죽었다구!" 그녀는 부축하는 레아디엘을 밀쳐버리며 달려들었다. 악에 받친 여자처럼 다루기 힘든 것은 없다. 하지만 힘들 뿐, 못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여자를 다시 한 번 후려갈겼다. 손등으로 후려갈겼으니 그다지 강하 지는 않았겠지만 워낙에 약한 여자였기 때문에 그녀는 그대로 고꾸라졌다. "그렇게 고꾸라지는 주제에 복수를 하겠다고?" 나는 차갑게 말했다. "정신을 차리는 게 어떠냐? 방금 사인족이 멸망했다." "알게 뭐야!" 한 녀석이 주먹을 움켜쥔 채 나를 쏘아보며 나섰다. 녀석은 증오로 가득찬 눈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그래서 어쨌다는 거야? 우리 애들을 위해 복수도 못한다는 거냐? 아무리 약해도 우리의 고통을 놈들에게 보여줄 테다! 여기서 피를 토하고 죽는 한 이 있어도 나는 갈 거다!" "나도 간다!" "나도!" 놈들은 이를 악물고 나를 쏘아보았다. 그 번들거리는 눈빛은 마치 내가 아 이들을 죽인 원수인양 증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나는 증오에 익숙했 다. 악악대는 녀석의 머리통을 가차없이 후려갈겼다. 퍽퍽 소리와 함께 두 어 명이 다시 고꾸라지자 주변이 조용해졌다. "조인족도 오늘 멸망하고 싶은 거냐?" 나는 차갑게 물었다. "조인족도 하잘 것 없는 인간의 손에 멸망하고 싶은 거냐?" "뭐야!" "죽기 위해 걸어 들어갈 정도로 너희들은 머리가 빈 거냐?" 나는 웃으면서 약해 빠진 것들을 쏘아보았다. "잉잉대지마. 우쭐대지마. 너희들은 약하다. 너희들은 전사가 아냐." 증오와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들을 능멸의 눈초리로 핥으며 나는 다시 웃 어 주었다. "세상에는 싸워서 이기는 자가 있고, 싸우지 않고 이기는 자들이 있다." 차가운 것이 가슴속으로 흘러내렸다. 너무나 오랜만에 해묵은 고통을 다시 느꼈다. "아이를 낳아. 아이를 또 낳아 그들을 키워라." 그들은 모두 침묵했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아니, 그들이 뭐라 하기 전에 나는 입을 벌리고 선 레아디엘을 향해 말했 다. "입구로 나가.' "에?" "입구로 이 멍청이들을 이끌고 나가." 나는 귀찮아서 손을 내젓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킬라이가 급히 뭐라 외 쳤지만 들리지 않았다. 나답지 않게 괜히 설교씩이나 했다니 내 자신이 다 부끄럽네. 아이, 수줍어. 이봐, 여자야. 너는 애를 낳고 새로운 생명을 낳을 수 있는 귀한 존재야. 네가 여기서 죽으면 네가 낳을 아이들은 태어나지 않아. 영원히. 시체에 시 체를 보태는 것 밖에는 안 된다고.사내새끼 죽는 거랑은 다른 문제지. 저 빌어먹을 사인족이 왜 멸망했게? 여자가 없어서 그래. 아이가 없어서 그래. 이유 없이 가슴이 뻐근해졌다. 아니지! 아니야! 아니고 말고! 그들은 애 낳는 여자가 없어서 멸망한 게 아니야. 어디까지나 나라는 분, 이 위대하시고 영명하시고 자애로우시며 우 아하시기까지 한 쿠베린님의 심기를 어지럽히고 분노를 일으킨 죄로 멸망 당한 것이야, 암, 그렇고 말고. 그러니 얼마나 영광인가? 이 위대하시고 영명하신 분의 손 아래 멸망당했 다니 그 얼마나 가상하고도 멋진 최후이냐? 그렇고 말고. 사인족이여, 자부 심을 가져도 좋아. 대지의 여신께 가차없이 말하라고. 우리들은 위대하시고 아름다우시며 고결하시기까지 한 묘인족의 왕 쿠베린님께 죽임을 당했나이 다 라고. 깊은 사색에 빠져 한 참 걷다보니 피 냄새가 풍겨왔다. 피냄새라. 피냄새. 그래, 즐기자고! 내 앞을 막는 오거 비슷한 것과, 요즘 은 볼 수도 없는 트롤 비슷한 것! 좋았어! 와봐! 와! 일단 눈에 보이는 것은 다 해치우기로 했다. 발에 채이는 것은 차고, 손에 걸리는 것은 치우고, 죽여주길 바라는 것들은 죽여주고 쓰다듬어 주길 바 라는 자들은 쓰다듬어 준다. 훗, 오는 자 안 막고 가는 자 안 잡는 것이 내 평소의 행동지침이지만 오늘은 그 원칙을 깨도록 하지. 오는 자는 잡아당 기고 가는 자는 붙잡아 패대기를 친다. 그 얼마나 화끈한 법칙이냐. 어두운 토굴은 살육의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끊임없이 전진했다. 내가 찾는 것은 아직도 잊지 않고 있었다. 아이들. 내가 찾는 것 은 아이들이었다. 그리고 그 빌어먹을 마법사들이 원하는 것은 묘인족의 피라는 것도 잊지 않고 있었다. 쭈굴한 땅의 엘프의 늘어진 턱만큼이나 늘어진 토굴 안은 지저분한 냄새 로 가득 했다. 슬슬 배가 고파지기도 했지만 먹을 만한 게 없다보니 어쩔 수가 없었다. 정말로 이 지독한 어둠 속에서 나는 뭘 하고 있는 것일까? 아이들이 여기 있기나 한 것일까? 머리를 굴리기 위해 나는 조금 넓적한 바위 위에 걸터앉았다. 축축한 기 운이 엉덩이를 치고 올라오긴 했지만 별수 없었다. 차가운 엉덩이를 가지 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바닥에 앉는 것이 싫어서 그냥 참았다. 코끝으로 약간은 차가운 공기가 느껴졌다. 아까부터 빛 한 점 없는 미로와 같은 땅굴을 헤매고 있었지만 답답하거나 쓸쓸하지는 않았다. 왜냐면 시기 적절하게 이상하게 생긴 것들이 나타나 나를 위로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 친절함에 감동해서 눈물이 다 날 지경이었지만 아무리 어둠 속이라 해도 여기서 울면 곤란하기에 나는 꾸욱 참았다. 역시 나는 인내심이 대단해. 턱을 괴고 앉아서 어둠을 음미했다. 시커먼 어둠이지만 솔직히 아무 것도 보이질 않으니 내가 눈을 뜨고 있는지 감고 있는지 조차 알 수가 없었다. 미궁과도 같은 이 놈의 토굴은 횃불도 걸려 있지 않았다. 아니, 원래 횃불 이 걸려 있었지만 나를 향해 달려드는 그 친절하고 상냥한 녀석들 때문에 금새 꺼져 버리고 말았었다. 덕분에 나는 이렇게 뱅뱅 어둠 속에서 코와 손에 의지해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어디가 눈이고 어디가 코인지 조차 알 수 없는 어둠. 하지만 이런 토굴이라고 해도 결국 어디로인가 이어지기 마련이니 그다지 걱정되지는 않았다. 어둠에는 익숙하지만 혼자 있는 것은 별로 원하는 바는 아니다. 나는 차가워진 엉덩이를 들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희미하게 흔들리는 공 기의 흐름을 따라 두 손을 벌려 벽을 짚으며 걸었다. 눈도 뜰 필요가 없으 니 그저 감고, 코와 뺨의 감각에 모든 것을 맡겼다. 어둠, 어둠, 무거운 어 둠. 그 옛날 성년기가 되자마자 맞닥트렸던 어둠 속의 괴물. 그것이 무엇이었 는지 지금도 알 수가 없다. 홀로 지내기 위해 적당한 거처를 찾다가 깊이 도 모를 깊은 땅굴 속으로 떨어졌었다. 그 때 만난 그 괴물은 어둠 속에서 차갑고 비린내가 나는 입김으로 나를 공격해 왔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 마 뱀 종류일 것 같다고 생각은 하지만 그 당시에는 어둠에 질려서 거의 굳어 있었다. 그래, 나도 순진하고 여렸던 시절이 있기는 있었지. 정말 그 때는 백설처럼 곱고도 고운 심성과 맑고도 맑은 감수성의 소유자였지. 그 러던 나였기에 이처럼 고결하신 성품의 소유자로 성장한 것 아니겠어? 토굴은 여전히 어두웠다. 여기저기서 미약한 벌레들이 움직임이 느껴졌다. 아무리 어둡고 아무리 탁한 공기로 가득 차 있어도 살아있는 것들은 스스 로를 지키고 보전한다. 풍만한 생명의 여신은 미약하고 가엾은 것들에게도 젖가슴을 빌려주기에. 그들이 원하고 또 원한다면 기회는 언제나 던져 준 다. 비록 눈 먼 기회이긴 해도. 문득 조금 생소한 기척이 느껴졌다. 아니, 약 십여 메테르 정도 떨어진 곳 에 빛이 있었다. 그 빛과 함께 느껴지는 것은 꽤나 낯익고도 낯선 기이한 감각이었다. "쿠베린님?" 놀람의 기색이 역력한 음성이 터졌다. 두 눈이 타오르는 것 같아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갑작스레 다가온 빛은 어둠에 익숙했던 눈을 사정없이 난자했다. 뜨거울 정도로 강렬한 감각에 나는 눈물이 찔끔찔끔 나왔다. 하지만 눈을 못 뜬다고 해서 내 눈앞에 있는 것을 못 알아차릴 정도는 아 니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침착을 되찾은, 아니 허탈하기까지 한 그 음성을 들으면서 나는 눈을 가늘 게 떴다. 몇 개의 토굴이 연결되어 모인 듯한 형상을 한 직사각형의 석실이었다. 방금 내가 지나온 모든 방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깨끗한 방에 나는 잠시 입을 벌렸다. 물론 갑자기 내 눈앞에 나타난 것에 비하면 별로 놀라울 것 도 없었지만. "놀랄 노자구나."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내 눈앞에 앉아 있는 소녀를 주시했다. "그리고, 참으로 해괴한 포즈다." 계집아이는 사인족의 왕 헬레아스와 함께 다니던 노란눈의 마법사 아헬이 었다. 아헬은 두 팔과 두 다리가 없는 상태로 쇠사슬에 묶여 바닥에 누워 있었다. 그녀에게서 흐른 피가 아이러니하게도 기괴한 도형을 이루며 마법 진을 만들고 있었다. "어쩌다 그런 몰골이냐?" "그녀에게 잡힌 것이죠." 담담한 어투로 그녀는 나를 올려다보았다. 석실 중앙에 놓인 청동으로 만 든 거대한 화로만이 불빛의 전부였다. 하지만 그 벌건 불빛도 짙은 어둠 속에서는 꽤나 장대한 빛줄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석실, 분명 고대로부터 내려온 듯해 보이는 석실이었다. 고왕국의 천민들 이 두더지처럼 오가며 파둔 그런 굴이 아니라 반듯한 화강암으로 깎아 만 든 석실이었다. 바닥은 네모 반듯한 화강암을 틈새도 없이 깔아 놓았고 벽 에는 이끼조차 끼어 있지 않았다. "그 마법진은 뭐야?" "보존의 마법진이죠." "그게 뭔데?" "물체를 상하지 않게 보존하는 것입니다." 나는 쭈그리고 앉아서 꼬맹이의 얼굴에 얼룩진 검은 핏자국을 물끄러미 바 라보았다. "그 마법사가 이렇게 했나?" "네. 그녀는 나를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하려는 거죠." 나는 한숨을 내쉬고 꼬맹이 옆에 앉은 채 두 팔과 두 다리가 사라진 그 앙 상한 몸뚱이를 바라보았다. 어린 계집아이의 고통은 두 눈뜨고 볼만한 게 못된다. 이 짓거리를 한 그 미친 계집애는 정말로 미치다 못해 돌아버린 계집이다. "재생하지 못하도록 보존의 마법을 건 겁니다. 그리고 저의 척추를 뚫어 이 화강암 바닥에 고정시켰지요." 나는 왜 아헬이 꼼짝도 하지 않고 누워있는가 했다. 정말, 별 짓거리 다 하 는 군. "어차피 그냥은 죽지도 못하는 몸입니다. 벌써 몸의 일부는 척추를 뚫은 쇠사슬과 동화해버렸지요." 담담한 어투로 설명하는 계집애를 보고 있자니 참으로 묘한 기분이었다. 짙은 어둠 속 마치 옛 이야기에 나오는 마신(魔神)에게 바치는 희생양 같 은 몰골로 피구덩이 속에 누워 있는 사지가 잘린 소녀. 불타는 화롯불에 비치는 그 몰골은 차마 나의 미의식으로는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녀는 저를 아주 미워합니다. 물론 저도 그녀를 미워하지요. 아니, 그녀는 마스터와 관련된 것이라면 모두다 미워할 겁니다." "그건 그렇고 언제까지 그렇게 떠들 거야?" 내가 묻자 그녀는 잠시 침묵했다. "........두렵기 때문입니다." "뭐가?" 그녀는 노란 눈동자를 내게로 돌렸다. 고통으로 핏발이 섰다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두 눈을 맑았다. 푸른 비늘이 몇 개 허연 어깨 위에 드러나 있었다. "그 분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나는 계집아이의 눈, 아니 여인의 눈을 말없이 들여다보았다. 작은 몸집이 나 어린 얼굴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에서 풍겨 나오는 것은 말할 수도 없 이 성숙한 여인의 냄새였다. "그래서?" ".....조인족, 사인족, 묘인족은 정말 어디서 온 걸까요? 왜 그들은 그렇게 도 강하고 그렇게도 동떨어져 있는 걸까요?" "혼혈이 안 된다 뭐 그런 말을 하고 싶은 거냐?" 그 뜬금 없는 소리에 내가 단념하고 묻자 그녀는 또 딴 소리를 했다. "이 옆에 있는 석실에 가 보세요." "왜?" "그 곳에 용족이 있어요." "용족?" 내가 어이가 없어서 되묻자 아헬은 눈을 감은 채 담담하게 말했다. "잠이 든 용족이요." "잠이 든 용족?" 얼간이처럼 반복하자 아헬은 기침을 몇 번하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기침 할 때마다 핏자국이 새롭게 생겨났다. "백 칠십여 년 전에 마스터는 용족의 화석과 알을 발견했어요. 그리고 그 알 속에서 아직 살아 있는 용족을 꺼냈지요." "뭐?" 나는 입을 벌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용족은 이미 멸족했어. 남아 있는 것은 미스릴 사슬에 얽혀있는 얼뜨기 셀러로닌가 하는 유령 뿐이야." "이름은 몰라요. 알속에서 깨어날 시기를 놓친 채 동면해 있던 것이니까. 알속에 웅크리고 있던 새끼였어요." 내가 침묵하자 그녀는 말을 이었다. "마스터는 동면해 있던 용족의 새끼를 알속에서 꺼내서 영육분리(靈肉分 離)를 했어요. 그리고 영혼은 금강석에 봉인했고요." "그리고 그 몸뚱이에서는 피를 뽑아내 너나 다른 놈들을 만드는데 사용했 고?" 내가 조용히 되묻자 그녀는 고개만 끄덕였다. "제가, 용족에 가장 가까운 몸을 하고 있어요." "왜 그런 짓을 해야 했어?" "용족은 자기애가 강한 종족이라고 해요. 그래서 육체에 위해가 가해지면 동면에서 깨어날 거라고 하더군요. 아무리 새끼라지만 용족은 지상을 지배 했던 종족이죠. 그런 위험한 종족을 오크나 인간 다루듯 할 수 있었겠어 요?" "하지만 셀러로니라는 그 용족 유령놈은 자기 몸을 만들어 냈어. 정말 단단 한 몸을 만들어 내더라고. 그런 게 어떻게 가능해?" 나는 머리를 쥐어짰다. 그러고 보니 그 때 숲에서 만났던 영혼사인지 유혼사라는 놈이 살아 있는 것도 죽은 것도 아니라면서 방방 뛰었었지. 만약 정말로 흑마법에 의해 영 혼과 육체가 분리가 되어버린 상태라면 유령이면서도 유령이 아니라는 그 놈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아, 그때 돌팔이 취급했는데 조금 미안해지는 걸. "그를 만났나요? 참으로 기이한 인연이네요. 용족의 힘은 아무도 몰라요. 그 분리된 영혼이 어떤 힘을 발휘했는지 우리가 어떻게 알겠어요? 우리들 은 진정한 용족의 힘도 알 수 없는데." 그녀는 그렇게 말하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어찌되었든 옆방에서 그 용족을 데리고 가 주세요. 그를 죽이든 살리든 그것은 쿠베린님의 뜻대로 하시고요. 되도록 마스터께 돌려드렸으면 하지만 쿠베린님이라면 그렇게 하지 않겠죠." 마베릭이나 카산드라라는 그 미친 것들이 용족까지도 훔쳐내온 모양이었 다. 허기야 마베릭놈은 자기 부하를 시켜서 셀러로니가 봉인된 그 금강석 을 지키고 있었으니까 몸도 훔친 것이 맞겠지.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 오기 전에 그 용족을 구해가세요." "정말 그것 뿐이야?" 나는 아헬이 서둘러 말하는 것을 가로막고 다시 물었다. 그 말에 그녀는 흠칫했다. 노란 눈동자가 다시 흔들렸다.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 네가 정말 묻고 싶고 하고 싶은 말은 다른 것 이지?" "듣고 싶기도 하고, 듣고 싶지 않기도 해요." 눈동자는 점점 흐려졌다. 몽롱하게 흔들리는 그 눈을 똑바로 지켜보다가 나는 한숨을 몰아쉬며 다른 화제로 돌렸다. "그 덜떨어진 놈을 어떻게 만났냐?" 그래, 자기 연애 이야길 하면 누구든 흥겨워 떠들기 마련이지. 별 대단치도 않은 이야기를 마치 엄청난 사연이 있는 것처럼 떠버리기도 하고. 아닌게 아니라 아헬의 표정은 갑자기 부드러워졌다. "3년 전인가, 2년 전인가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화살에 꽂혀 쓰러져 있는 것을 수풀 속에서 발견했어요. 그래서 그를 치료했고, 그는 일어나자마자 저를 범했습니다." 나는 그 황당한 이야기를 듣고 입을 벌렸다. 열 서넛 밖에는 안 되어 보이는 계집애를 범해? 그것도 자신을 구해준 애 를? 황당하다못해 너무나 사인족다워서 할말이 없다. 화살을 맞았다느니 하는 걸 보니 땅의 엘프를 습격해 오던 그 때의 이야기인가? "그리고 나서 저를 끌고 부락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는 아마도 제가 아 이를 가질 것이라고 상상했었던 모양이에요. 아시다시피 사인족은 어떤 종 족의 여자에게 서건 아이가 나오니까요." "그, 그래....." "게다가 그는 사인족 중에서도 가장 강한 왕이었으니 틀림없이 제가 아이 를 가졌을 거라고 확신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당연히 저는 아이를 가지지 못했고, 사인족들은 점점 숫자가 줄어들고 있었지요." 그녀는 담담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제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자 그는 친절해졌어요. 아이가 생기 지는 않았지만 친절하게 절 대해주었어요." 나는 조금 머리를 긁적이고 있었다. 이 아헬이라는 애가 조금 모자란 애 는 아닐까 싶었지만 킬트의 아이치고 정상적인 사고패턴을 가진 녀석이 없 었기에 그저 입만 다물고 있었다. 그래, 그 분홍주둥이가 그랬고 그 금발을 가진 계집애가 그랬지. 킬트 녀석 본인이 정상이 아닌걸 어떻게 그 놈의 애들이 정상이길 바라겠는가. "그리고 사인족이 분열되었지요. 데킬에논은 헬레아스님에게 반역을 꾀했 고 헬레아스님은 불같이 노해 싸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전 그 가운데 카 산드라님과 마베릭님이 있다는 것을 눈치챘어요. 그런데도 전......." 그녀는 눈물을 흘렸다. 표정 없는 얼굴에서 떨어지는 그 눈물은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입을 다물고 모른 척했지요. 헬레아스님이 고통스럽게 된 것도 다 그들 때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혹시나 마스터가 저를 그분에게서 떼어 놓을까 봐 두려웠어요." 타닥거리는 소리 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화로에서 이는 불꽃이 먼지와 재 를 제법 시끄럽게 태우고 있었다. "그 분은 자존심이 세고, 거칠고, 난폭했지만 그래도 절 여자로 대해주었 어요." 범한 게 여자로 대해 준 거라면 강간범을 사모하는 여자들도 나올 법하군. 내가 미간을 찌푸리고 있자 아헬은 기묘하게 웃었다. 증오와 기쁨이 뒤섞인 이상한 표정이었다. "저, 저는 마스터의 만들어진 아이예요. 몸뚱이는 여자지만 애를 낳는 아 기집은 없어요." "뭐?" "만들어진 애가 그런 것이 있을 리가 없잖아요? 어차피 마스터가 우리들 을 만든 이유는 병든 아드님의 장기(臟器)를 대신하기 위한 것이니까요. 아 드님이니까 아기집 따위는 필요가 없었겠죠." 그녀는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화 내지 마세요. 마스터는, 마스터는 아드님을 너무나 사랑한 거 거든요. 인간이라면, 어쩔 수가 없는 거예요. 자신의 혈육을 위해 무슨 일이든 하는 게 부모니까요." "무슨 일이든 다 한다구?" 내가 중얼거리자 그녀는 힘없이 웃었다. "화 내지 마세요. 남의 일로 화 내지 마세요." 나는 그저 그녀를 내려다보았을 뿐이었다. 노란 눈은 호박처럼 반짝였다. 의외로, 나는 이 꼬맹이가 꽤 아름답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떻게 해줄까? 킬트 자식을 잘근잘근 밟아서 씹어 먹어 줄까? 그 미친 계집애를 잡아다가 으스러뜨릴까?" 내가 그렇게 친절하게 묻자 그녀는 방긋 웃었다. 아니, 웃는가 싶더니 입가 를 일그러뜨렸다. "그, 그 분의 이야기를 해주세요." 투명한 액체가 호박색의 눈동자를 흐리게 했다. 샘처럼 솟아오르는 눈물은 초라할 정도로 앙상한 얼굴을 가로질러 까맣게 굳어 버린 그녀의 핏자국 위로 떨어졌다. "나를 유일하게 사랑해준 분, 내가 유일하게 사랑한 분의 이야길 해주세요." 나는 마법진 위로 손을 뻗었다. 치직소리와 함께 내 손은 다시 튕겨 나왔 지만 나는 그 것을 억지로 억누르고 그녀의 이마로 손가락을 대는 데 성공 했다. 요란한 소리가 우박 쏟아지는 것처럼 다닥거리며 내 손 주변으로 터져나 왔다. 손이 짜릿짜릿했다. 그녀는 내 손이 닿자 두 눈을 크게 뜨고 낮게 중 얼거렸다. "손을 다쳐요. 이건 마력 봉인진이기도 하거든요." "이 손으로, 그 녀석의 목을 꺾고." 나는 손가락을 그녀의 입술에 댔다. 눈을 감은 그녀는 내 손가락이 입가 에 닿자 꿈틀거렸다. 충격을 받은 듯 부들부들 떨리는 그 작은 몸체에 억 지로 손바닥을 댔다. 말 그대로 뼈만 남은 듯 앙상한 그 가슴에 손바닥을 대자 그녀는 마치 뜨거운 것이라도 닿은 듯 부들부들 떨었다. "이 손으로 녀석의 심장을 뽑아서.........." 나는 억지로 두 팔을 벌려 마법진 안으로 상체를 들이밀었다. 머리카락이 파직파직 소리를 내며 곤두섰다. 피부가 따끔따끔 아팠다. 그녀는 두 눈을 감은 채 내 말을 듣고만 있었다. 핏기 하나 없이 허옇게 일어난 마른 입술에 나는 내 입술을 겹쳤다. 애정과 경의를 담아 작고 작 은 여인에게. "..........내가 먹었다. 이 입으로." 내 입술이 닿자 그녀는 눈물을 주르륵 다시 흘려냈다. 파직파직 거슬리는 소리 때문에 뭔가 그녀가 중얼거리는 것 같은 소리를 들을 수는 없었지만 나는 억지로 상체를 들어 올리고 묵묵히 그녀를 내려 다보았다. 마법진이란 거 함부로 들어갈 게 못 되는 구만. 손과 목덜미에 작은 생채기가 마치 그물처럼 생겼다. 뺨도 있을래나. "그 분을 먹었어요?" "응, 내가 먹었다." 떨리는 목소리였지만 제법 분명했다. "......그랬군요." "이 마법진을 파괴할 방법은 없냐?" 내가 조용히 묻자 그녀는 두 눈을 감은 채 입을 다물었다. 눈물로 얼룩진 얼굴은 종잇장처럼 얇아 보였다. 당장이라도 바스러질 것 같았다. "그냥 가 주세요." "왜?" "저, 당신을 보고 싶지 않아요."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머리로는 당신을 이해할 수 있어도 당신을 용서할 수는 없어요." 다시 눈물이 굴러 떨어졌다. "그 분을 죽인, 당신을 증오합니다." 나는 쭈그리고 앉은 채 눈을 감고 있는 그녀를 보기만 했다. 그녀가 증오하는 게 어디 나 하나 뿐이랴. 그리고 날 증오하는 게 어디 이 애 하나 뿐이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말한다는 것은 역시 이 계집애 는 독한 애는 못 된다는 이야기다. "정말 증오하면 내 얼굴을 보고 침이라도 뱉지 그래?" 내가 시큰둥하게 말하자 그녀는 피식 웃었다. "쿠베린님은, 헬레아스님과 참 비슷해요." "그 애송이와 날 비교한다는 건 모욕이지." 나는 발끈했지만 그 덜떨어진 녀석을 오직 한 마음으로 숭배하고 있는 계 집애는 딴 소리를 지껄이기 시작했다. "고대 3부족들은 서로 닮아 있는가 봐요. 헬레아스님도 당신과 같았어요. 거친 말만 하지만 사실은 참으로 다정했지요." "그 놈은 강간마라니까. 난 그런 짓 안 해." 내가 누차 나와 그 놈의 차이점을 설명하려 했지만 원래 첫사랑에 빠진 계집애란 진리와 진실에 등을 돌린 존재인지라 아헬은 내 말은 듣지도 않 고 그저 멋지다는 둥 훌륭하다는 둥 전혀 핵심에 맞지 않는 말들만 중얼거 리고만 있었다. "이제 다 끝났냐?" 내가 묻자 그녀는 네 하고 대답했다. "정말 바라는 게 그것뿐이냐? 용족을 데리고 가 달라 그거 뿐?" 내가 재차 묻자 그녀는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여전히 눈은 감은 채 였다. 징하기도 해라. 질기기도 해라. 허기야 이렇게나 질기니 그 변태 같 은 헬레아스에게 붙어 있겠지. "...그 분은 편안했나요?" "죽는데 편안한 게 어딨냐? 죽는 만큼 아팠겠지." "그래도......원하던 죽음이었겠지요." "날 보고 병신처럼 웃어대더라." 그녀의 눈가에는 다시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는 웃음을 터뜨렸다. 경련을 일으키듯 부들부들 떨며 웃는 그녀의 모습은 꽤나 이상 했다. 웃으면서 울고 울면서 웃는다. "맙소사. 쿠베린님, 당신은 정말로........" 그녀는 눈물을 닦고 싶었던 것 같았지만 닦지는 못했다. 이미 팔이 없었으 므로 손도 없었기 때문이다. 새삼스레 그것을 깨달았는지 그녀는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저도 죽여주세요." "날 증오한다며? 내 손길조차 증오할 텐데 어떻게 나에게 그런 청을 다 하냐?" 내가 가볍게 빈정거리자 그녀는 쿡쿡 어린애처럼 웃었다. 얼굴은 더럽고 사지는 잘린 계집애가 귀여워 보인다면 나도 꽤 이상한 취향으로 접어들었 다는 증거일런지도 모른다. "그 분 곁에 가고 싶어요. 하지만, 틀림없이 그렇게 되지는 못할 거예요. 나는 합성체니까 이것저것 다 주워 모아 만든 그런 인형 같은 거니까 사인 족의 전사들이 가는 그런 곳에는 가지 못하겠죠." "그것들이 가긴 어딜 가? 피와 살로 이루어진 것들이라면 다 거기서 거기야. 대지의 여신은 공평하다고." 하도 헛소리를 하기에 나는 조금 지쳤다. "대지의 여신은 공평............" 그녀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죽어서 가는 곳이란 없는 건가요? 쿠베린님?" "없어. 다 죽어 썩어 문드러지는 거야. 그리하여 썩은 살은 벌레가 먹고 새가 먹고 그리고 흙이 되어 버리는 거지. 그러니까 똑같아. 네가 죽은 거 나 그 변태 놈이 죽은 거나." 그녀는 안도한 듯이 미소지었다. "정말로, 다행이네요. 사후의 세계 같은 게 없어서 정말로 다행이에요." 그녀가 그렇게 중얼거릴 때 나는 손톱을 뻗어 그녀의 심장을 찔렀다. 그 리고 단번에 뽑아 그 심장을 터뜨려 바닥에 떨구었다. 그녀는 충격으로 부 들부들 떨었지만 별 다른 징후는 보이지 않았다. 얼굴에서 다시 눈물이 떨 어져 내렸다. 그녀의 척추에 매달렸던 쇠사슬이 철컹하고 음산한 소리를 내뱉었지만 그녀의 몸은 다시 움직이지 않았다. 검붉은 심장이 내 손아귀에서 뚝뚝 피를 토해냈다. 예전에 한 번 그녀의 심장을 찢어낸 적이 있기는 했지만 이렇게 송두리째 짓이겨 버린 적은 없 었다. 틀림없이 그녀는 죽었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눈물이 아직도 맺혀 있는 얼굴은 여전히 두 눈을 감고 있었다. 고통스러운 듯 미간을 찌푸리고 있긴 했지만 그래도 한정 없는 시간을 고 통 속에 누워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다. 그래, 차라리 증오해라. 슬 픔으로 심장을 녹이기보다는 증오로 심장을 불태우는 편이 훨씬 더 좋아. 그녀는 끝까지 나를 보지 않았다. KUBERIN........ 분노는 오만 슬픔은 연민 6 나는 사실 용족에 대해 아는 것은 얼마 없었다. 뭐, 우리들 묘인족의 멀고 먼 옛날 그들의 피가 연관되어 있다는 말은 듣기는 했었지만 그거야 내 피 에게나 물어볼 일이고 내 자신은 조금도 모른다. 정상이라는 궤도를 벗어 나 열심히 절대 무적 미치광이라는 칭호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마법사들만 아니었다면 여전히 몰랐을 것이다. 덕분에 용족을 봤으니 이거 감사해야 하나? 킬트라는 미친놈이 알 속에서 동면하고 있는 새끼를 강제로 끌어내지 않았다면 나는 용족이란 걸 보지도 못했을 테니까. 내 눈 앞에 있는 것은 초록빛과 은빛이 기묘하게 어우러진 몸이었다. 마 치 에메랄드와 은을 적당히 섞어 세공한 것처럼 오묘한 빛깔. 하지만 크기 는 내 기대와 달리 작았다. ".............설마하니 정말 고양이만할 줄이야." 화석이 되어 있던 알이 그저 애들이 차고 노는 돼지 오줌보만하길래 크지 는 않겠거니 하고 생각은 했었다. 하지만 정말로 저 유명하신 용족께옵서 괭이 만한 크기일 줄이야. 물론 새끼니까 그렇다치지만 용족의 새끼가 이 렇게 작다면 전에 본 그 화석만한 크기가 되려면 얼마나 오랜 세월이 지나 야 하는 걸까? 나는 유리 상자 안에 든 초록색의 도마뱀을 물끄러미 보고만 있었다. 뱀 대가리처럼 길죽한 머리통이 아니라 괭이처럼 짧은 머리를 하고 있는 녀석 은 반짝이는 비늘과 네 개의 다리, 그리고 한 개의 길죽한 꼬리를 가지고 있었다. 눈을 감고 있으니 눈알이 어떤 모습일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셀러로니란 이 놈의 유령과 똑같을 게다. 그나저나 내가 본 그 유령놈은 그래도 꽤나 컸는데 이 몸뚱이는 너무나 작다. 대체 얼마나 용족이 유능하 고 대단하길래 유령까지도 그렇게 성장을 하냐? 경악할 만 하다. 나는 유리 상자를 깨부수고 늘어져 있는 조금 묵은 도마뱀을 들어 올려 옆구리에 끼었다. 얼마나 차가운지 꼭 얼음덩이를 안은 기분이었다. "그럼 가자." 너무나 싱겁게도 녀석을 주워들었기 때문에 나는 조금 사방이 미심쩍었다. 물론 이 안이 꽤나 깊숙한 곳이라는 것은 나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고, 도마뱀새끼가 있던 상자 바로 아래에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는 것을 보아 내가 이 놈의 새끼를 집어 가는 것을 마법사들이 모를 리가 없겠다고 생각 은 했다. 어디까지나 생각만. 뭐 놈들이 안다고 해서 내가 어쩌랴? 새삼스레 몸을 사릴 것도 없는 게고 그렇다고 해서 이걸 그대로 두고 갈 나도 아니다. 그래서 태연히 석실에 달린 문을 밀고 그저 걸어 나왔다. 얼마나 걸었을까. 다가오는 어떤 기척과 기척들이 분명 있기는 했지만 내 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심지어는 내 발치 아래를 슬쩍 지나가면서도 모른 척 차가운 숨결을 내뿜는다. 하지만 놈들은 내 주변을 빙빙 돌고 있다는 것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 것들, 틀림없이 이 곳을 지키거나 혹은 지키려 하는 것들일 텐데 내게 직접적으로 손을 대지는 않는다. 훗, 그렇다고 내가 감동해 그냥 지나칠 줄 알았더냐? 그거야말로 나의 자 비심을 과신한 듯하구먼! 나는 손톱을 그대로 뽑아 내 바로 옆으로 비린내를 풍기며 스쳐 지나가는 녀석을 후려갈겼다. 키이익 이라는 조금 거슬리는 소리가 났지만 일단 접 어 두었다. 그리고 바로 내 앞에서 얼쩡거리는 녀석을 질끈 밟아 주었다. 케엑 하는 소리가 났지만 내려다보지는 않았다. 허기야 내려다 볼 필요도 없지만. 석실로 연결된 통로는 토굴과는 전연 달랐다. 그 토굴이 조악하게 그저 사람 한 명이 겨우 지날 정도의 통로였다고 한다면 이쪽은 확실히 폼 나게 망토라도 휘날리며 걸을 수 있을 정도로 넓직했다. 비록 횃불 하나 걸려 있진 않았지만 오히려 방향을 잡기는 이 쪽이 더 쉬웠다. 뭐, 쉬울 수밖에 없나? 일직선으로 연결된 길이니 말이야. 한참 걷다 말고 나는 문득 이 용족의 어린애를 어떻게 할까 고심했다. 엘 리야로 돌아가서 이 놈과 그 금강석에 갇혀 있는 셀러로니유령놈을 한 데 합치면 좋긴 하겠지만 그럼 세상에 용족 하나가 떠억 하니 등장하게 되는 건가? 엘리야가 전 대륙적인 유적이 되고자 한다면야 그것도 나쁘진 않겠 지. <용족 부활의 열쇠를 쥔 항구 도시 엘리야! 전설의 용족의 발치 아래 사 라지다!> 조금 문제가 있으려나. 어쨌든 영육분리라고 하는 흑마법 특유의 극단적인 짓거리를 킬트가 한 이상 좀 덜 떨어진 용족 셀러로니가 자신의 몸에 이런 장난질을 한 인간을 살려 둘 리가 없겠지. 그럼 어떻게 되는 걸 까? 잠시 동안 나는 머리를 싸맸지만 별 방법이 없어서 생각하길 관두었다. 어 차피 해결 안 되는 거 고민해봐야 머리만 아프다. 일단 여길 빠져나가고 보자. 아니지, 내 애들을 찾고나 보자. 내가 굳이 찾으려 하지 않아도 상대가 날 찾으려고 할 것이니 일단은 느 긋하게 걷기나 할까. 그나저나 대체 고왕국 귀족놈들이 얼마나 지독하면 이런 무덤 같은 곳에서 땅굴까지 파며 살았던 것일까. 공기는 탁하고 곰팡 이와 너저분한 악취가 진동한다. 물론 지금 걷고 있는 이 통로는 아까 그 곳보다는 훨씬 더 나았지만. "꾸엑!" 아, 똥 밟았다. 차가운 용족의 육체는 단단하고 매끄러워서 돌덩이 하나를 안고 있는 것 같은 감각이었다. 이 돌덩이를 그냥 주머니 안에 넣어 볼까 하다가 생각을 바꾸었다. 하지만 안 그래도 반쯤 죽어 있는 걸 이 안에 넣었다가는 그냥 골로 갈 수 있다. 나로서도 용족이 그냥 가버리는 것은 좋아하지 않으니 일단 몸과 마음을 합하게 한 뒤에 겨뤄봐야지. 유령 놈이 자기 본체를 찾 고도 영 멍청하면 두들겨서라도 좀 용족 답게 만드는 거야. 그래서 놈을 키워서 한 번 겨루어 본다. 아! 멋지다. 용족과 싸울 수 있다니! 피가 부글부글 끓는 듯했다. 생각해보면 이거야말로 불가능한 일 아닐까? 전설의 용족과 마주하고 겨룰 수 있다니. 물론 이 놈의 능력을 보아 하건 대 재수 없으면 그냥 밟혀 죽는 일도 있을 수 있겠지만 그래도 용족과 싸 운다는 그런 놀라운 짓거리를 내 평생에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정말 멋 진 일이다. 나는 이 퍼렇고 차가운 새끼를 귀한 보물 끌어 안 듯 보듬으며 애정의 눈 길로 바라보았다. 귀여운 것, 이게 곧 크게 자라서 나와 같이 놀아 준다 그 거지? 그거야말로 멋진 일. 나는 발걸음도 가볍게 달리기 시작했다. 아아, 멋지다. 멋져! 묘인족 사상 용족과 싸운 놈은 나 밖에 없을 거야! 어둠 속을 얼마나 달렸을까. 물론 밟히는 똥들과 스쳐가는 날파리들은 내 버려두고 나는 너무나 간단히 통로를 지나 마침내 웬 길다란 계단을 발견 했다. 계단은 일직선으로 주욱 허공을 향해 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돌로 만든 게 아니라 무슨 끈 같은 것으로 연결된 계단임을 알 수 있었다. 이 어둠 속에서 유일한 빛이 새어 나오는 것은 그 계단의 끝이었다. 분명 밖 으로 나가는 통로인 것 같았다. 나는 용족의 사랑스런 새끼를 소중히 끌어 안고 계단으로 올라섰다. 한 번 올라설 때마다 출렁거리는 걸 보아하니 이 걸 만든 놈은 지나다니는 분의 고충은 절대 생각하지 않은 듯하다. 그래도 대체 뭘로 만들었는지 꽤나 낡았는데도 어디 하나 끊어진 곳이 없었다. 나 는 적당히 발로 몇 번 굴러 보고서는 출렁이는 이 따위 물건을 멀리 하기 위하여 힘차게 달리기 시작했다. 이리저리 출렁출렁 질릴 정도로 출렁이는 덕분에 나는 말 그대로 멀미를 할 뻔했지만 멀미를 하기 전에 계단의 입구 에 도착했다. 아, 위험했어. 설마하니 이렇게 흔들릴 줄이야. 눈이 부셔서 눈을 반쯤 감고 앞으로 나서자 모처럼 깨끗한 공기가 느껴졌 다. 내가 들어 선 곳은 전에 와 봤던 곳이었다. 넓직한 광장에 줄줄이 늘어 선 유리인지 수정인지 알 수 없는 관들과 관들. 그리고 늘어진 시신들. 이 봐, 이거 치우지도 않았냐? 시체 썩혀서 뭐 좋은 꼴을 보려고 여기다 그냥 굴리냐? 그나저나 여지껏 얼마나 굴러다녔는데 이제 겨우 여기냐? 그렇다면 그 토 굴이란 곳은 정말 꽤나 깊은 곳에 있었던 모양이군. 나는 굴러다니는 시체 를 모른 척하고 줄줄이 늘어서 있는 수정관을 자세히 들여다보기 시작했 다. 전에도 보긴 했지만 정말로 이 수정관에는 묘인족은 없었다. 수인족과, 사인족, 조인족, 엘프, 인간, 드워프 등 가지가지가 있기는 했지만 그거야 내 알 바가 아니고 말이다. 사인족의 시체를 보자 조금은 묘한 감흥이 일 었다. 사인족을 가장 많이 죽인 것은 확실히 나다. 땅의 엘프 때도 그랬고, 에메스의 영지에서도 그랬으며, 여기서도 그랬고, 어딘지 알 수 없었던 그 숲 속에서도 그랬다. 하지만 사인족의 왕, 헬레아스의 비통함은 나를 향해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놈은 인간을 증오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의 여자 아헬 역시. 나는 시선을 거두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이 곳에도 내 애들이 없다면 룬 드바르라도 가 보면 될 일이다. 죽었다면 시체라도 거두고 아니라면 빼 내 와야지. 설마하니 이 용족의 새끼처럼 내내 피를 빨리며 산 것도 죽은 것 도 아닌 상태로 늘어져 있다면 다시 합쳐 주던가 혹은 죽여주던가 해야 했 다. 죽을 놈은 죽여주는 것. 그것이 올바른 것이다. "안녕하세요." 갑자기 너무도 귀에 익은 목소리가 터져나와서 나는 흠칫했다. 막 통로로 빠져나가려는 순간 희끄무레한 것이 바닥에 어른거렸다. 너무 놀라서 나는 그 희끄무레한 것을 인정사정 없이 후려쳤지만 놀랍게도 그대 로 내 주먹은 통과해 버리고 말았다. "뭐야?" "접니다." 그 희끄무레한 것은 하늘하늘 마치 아지랑이 일어나듯 이글거리며 점점 커 졌다. 그러더니 인간의 크기가 되더니 내 쪽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다시 만나 반갑습니다. 쿠베린님." 허깨비 일그러지듯 잔뜩 구겨놓은 형상이긴 했지만 그 뻔뻔한 얼굴은 분명 히 분홍주둥이 마베릭이었다! "반갑지 않으십니까?" "너, 유령이냐?" "유령으로 보이십니까? 뭐, 그렇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이건 결국은 일 루전이라고 하는 아주 기초적이고 기본적인 마법 중 한 가지지요. 즉, 자신 의 환영을 멀리까지 내 보내는 원격 일루전입니다만." "설명 안 해도 돼." 나는 용새끼를 안은 채 녀석을 뚫어져라 바라보다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 랬더니 녀석은 유령처럼 흐느적거리면서 내 뒤를 따라온다. "그냥 그렇게 가시면 어떡합니까?" "그럼 허깨비를 상대로 가위질이라도 해 주랴?" "섭섭하군요, 그래도 제가 죽어서 슬펐던 것 아닙니까?"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도 설마 설마했더니 이 자식 정말 살아나다니. "참, 너야 말로 내 앞에서 몇 번이나 죽었냐? 적어도 세 번은 내 손아래 서 죽은 거 같은데." "이번은 정말 위험했습니다." 녀석은 쓴 웃음을 머금더니 나를 초롱한 눈빛으로 올려다보았다. 본래 녀 석이 나보다 작긴 했지만 지금은 하체가 없는 상태로 그저 공중에 둥둥 떠 있는 중이라 그럭저럭 눈 높이가 맞았다. "누님이 제게 심장을 주셨죠. 당신이 박살낸 그 심장 말고요." "참, 재주들도 좋다." 나는 상대 않고 그저 걷기만 했다. 마베릭은 내 뒤를 졸졸 따라 오면서 물 었다. "정말 제가 살아 돌아 온 게 기쁘지 않으세요?" "기쁜 게 다 얼어 죽겠다. 너라면 장례식 치르고 관에 못질까지 한 원수 놈이 밤중에 벌떡 일어나 침대 위로 기어올라오면 기쁘겠냐?" 녀석은 잠시 오묘한 얼굴을 하더니 반문했다. "제가 언제 침대 위로 올라갔다고 그러세요? 여기엔 침대도 없는데. 게다 가 쿠베린님은 관에 못질 따윈 하지 않잖아요?" "넌 비유라는 두 글자도 모르는 것 같구나." "쿠베린님은 농담이라는 두 글자도 모르시네요." 녀석의 말을 등 뒤로 흘려들으며 나는 모른 척했다. 녀석은 옆에서 혼자 낄낄대더니 매달리듯 내 어깨에 고개를 들이밀며 물었다. "안 웃기나요?" "너라면 웃겠냐?" "네." 녀석의 말을 그대로 씹고 걷기만 했다. 이 광장에서 빠져 나가는 길을 찾 아야 할텐데 도대체 사방으로 뚫려 있으니 어느 게 통로인지 알 수가 있 나? 내가 이리저리 걷고 있는 것을 보며 마베릭이 다시 말을 걸었다. "그 어린 용족을 어디로 가져가시는 거죠?" "엘리야로." "왜요?" "깨워 보려고." "왜요?" "싸워 보려고." "왜요?" "그러고 싶어서." 내 말에 녀석은 한동안 멍한 표정을 짓더니 내 옆으로 다가와서 품안에 안 긴 용족새끼를 내려다보았다. "이 꼬맹이가 당신의 아이들보다도 소중해요?" "아니, 그건 또 다른 문제지." 내 말에 녀석은 조금 얼굴을 찡그렸다. 그리고는 조금은 차가운 미소를 머 금고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집착하지 않는 것은 알아요. 당신은 언제나 그랬다고 하더군요. 아니지, 집착하지 않으니까 그 긴 세월을 잘도 지내온 거겠지요." 그래 니 맘대로 생각해라. 여전히 나는 그 말을 씹었다. 그러나 뒤이어서 터지는 말에는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엘리야에 용족의 영혼을 봉인한 금강석이 있었죠?" 내가 돌아보자 마베릭은 피식 웃었다. 잔인하고 어딘가 묘하게 슬퍼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런 걸 거기다 두면 어떻게 해요? 안 그래요? 묘인족의 임금님?" "무슨 의미야?" 불길한 냄새가 저 밑바닥부터 치밀어 올랐다. 녀석은 모호한 웃음을 지은 채 킬킬거렸다. 그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악령처럼 보였다. "묘인족으로는 인질이 되지 않지만 당신이 그렇게 아껴 왔던 인간들은 어 때요?" 나는 주저하지 않고 녀석을 향해 손톱을 휘둘렀다. 파앗 하고 무력하게 손 톱이 허공을 찢었다. "흥분하지 마세요. 해치진 않았다구요." 녀석은 여전히 킬킬거렸다. 내가 흥분하자 더더욱 재미있는지 어깨까지 들 썩이고 있었다. "내 뒤를 따라 오시겠어요? 그리고 우리 거래를 해요." "무슨 거래?" 차가운 불안이 스물스물 피어올랐다. 불안은 차가운 뱀처럼 내 목줄기를 억눌렀다. "당신이 30 여 년에 가까운 세월을 엘리야에서 보낸 이유 말이에요. 그 이유를 없애기 싫으시다면 나를 따라 오세요." KUBERIN........ 분노는 오만 슬픔은 연민 7 이유라는 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살아 있는 자가 살아 있는 자에게 가진 미련이라는 것은 또 어떤 것일까. 나는 마침내 녀석의 뒤를 따라 목적지 비슷한 곳에 도착했다. 어둠에 묻힌 기둥들이 열 지어 늘어선 그 곳은 어쩐지 왕궁처럼 보였다. 희미하게 흔들리는 등잔불 때문에 잘은 알 수 없었지만 바닥은 네모 반듯 한 벽돌로 메워져 있고 벽은 정교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아까 있었던 그 토굴이나 음침했던 그 지하 신전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게다가 묘하게 온 기가 피어 오르는 것이 분명 사람들이 살고 있는 기색이 완연했다. 나는 공기 속에서 약간의 곰팡이 냄새를 느꼈지만 그래도 주변이 꽤나 화려하게 꾸며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주황색의 대리석으로 지어진 건물은 이 고 왕국에서는 단 하나 뿐이다. 바로 왕궁이었다. 이 넘어진 엉덩이 같은 야산은 결국 지하도를 통해 고왕국의 왕궁과 연결 되어 있었다. 왕궁에 그처럼 쉽게 반란을 일으킨 천민들이 들어갈 수 있었 던 이유도 그것이었나 보다. 내가 고개를 돌려 텅 빈 주황색의 석주들을 돌아보자 마베릭은 천천히 설 명해 주었다. "궁금하시다면 이야기 해 드리지요. 우리들은 이곳 고왕국의 천민들과 접 촉한 지 얼마 안 돼서 이 길을 알아냈습니다." "그래?" "물론 직접적으로 우리가 군사를 이끌고 나타난 것은 아시다시피 얼마 전 의 일입니다만, 천민들은 꽤나 많이 쌓여 있었을 겁니다." 그는 뭔가 숙연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인간이면서 인간의 대접을 받지 못하고 가축 이하의 대접을 받아온 사람 들이 어떤 마음이었을까 상상해 보신 적 있습니까?" "글세." "당신이 지나온 그 지하신전, 그리고 그 신전을 주변으로 거미줄처럼 얽힌 토굴들은 그들이 수십 년, 수백년 간 뚫어 온 것입니다. 그들이 믿고 있던 유일한 구원의 신, 암흑대신 구스차야를 위해서 말입니다." 그는 뭔가 감동스럽다는 듯이 나를 보면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변변한 도구도 없었을 겁니다. 어떤 자가 말하길 처음에는 손으로 팠다고 하더군요. 지하에 매몰되었던 자들이 달아나 곡괭이를 훔치고 조그마한 주 머니칼을 훔치고, 그리고 부지깽이만도 못한 작대기로 바위를 뚫고 돌을 꿰 뚫었던 겁니다." "그래?" "그리하여 마침내 그들은 이곳까지 왔습니다. 우리들은 그저 그들에게 군 사들을 보내준 것에 불과합니다. 실제로 이 고왕국을 무너뜨린 것은 그들 이지요." "물론, 그들은 너희들에게 지도와 좌표를 알려주었겠지." 그는 생긋 웃었다. 정말 가증스러울 정도로 상큼한 미소였다. "교육받지 못한 자들이라 좌표를 알아내기란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웠지요. 하지만 그것도 잠깐, 우리 마법사 몇을 이곳에 보내는 것으로 간단히 일은 해결되었습니다." "그래." 내가 여전히 시큰둥하자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항구의 한 여자를 위해 삼십여년을 허비한 당신이, 수백년간 수 많은 사 람들이 인내와 각고의 세월을 보낸 이 길에 대해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 한다는 겁니까?" "그래." 나는 여전히 가볍게 대꾸했다. "나는, 그 한 여자가 수 백, 수천의 모르는 녀석들보다 소중해." "하! 이해할 수가 없어요!" 마베릭은 화가 난다는 듯 나를 향해 외쳤다. "뭘 모른다는 거야? 네 놈은 나보다 더 하잖아? 너는 너의 고통을 위해 수 백, 수천을 이끌고 전쟁을 일으켰고, 카나리안을 향한 질투로 사방을 다 귀찮게 하고 있잖아?" 그 말에 마베릭은 입을 다물었다. "내가 단지 내 자신의 고통 때문에 전쟁을 일으켰다고요?" "아니냐?" 그 말에 그는 소리 높여 웃음을 터뜨렸다. 마치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들 은 양 웃어대던 녀석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말이 안 되는 군요. 이 전쟁은 대륙을 통일하기 위한 거룩한 전쟁입니다. 인간의 전쟁이고, 이 전쟁을 일으킨 것은 나의 주군이신 룬드바르 대제이 십니다." "대공이 그 새 대제가 되었냐? 어쨌든 녀석도 너와 그 미친 계집애라는 돌아버린 마법사집단이 아니었다면 전쟁씩이나 일으켰겠냐? 그저 자기 집 안 다스리는 대공정도로 족했겠지." "미친 계집애가 아니라 카산드라 누님입니다. 저와 마찬가지로 단 둘 뿐 인 결정체." "결정체든 합성체든 킬트놈이 만들어 낸 이상한 물건임에는 별 차이가 없 어." 녀석은 갑자기 이글거리는 눈으로 날 쏘아보았다. "아헬을 어떻게 했습니까?" "아? 죽였다." "아끼지 않았습니까? 그 더러운 합성체를?" 집요하고 치열한 눈초리. 놈은 아무래도 구렁이 댓 마리는 잡아먹은 듯했 다. 이 음험한 질투의 화신을 보면서 나는 잠시 동안 이 녀석이 혹시 헬레 아스를 남몰래 사모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했다. "더럽긴, 너보다 백 배는 나은 훌륭한 여인이더군." "마, 말도 안 돼! 그 천한 것이 어째서!" 마베릭은 부르르 떨었다. 녀석은 견딜 수 없다는 듯 갑자기 이리저리 날 뛰며 고함을 질러댔다. 텅 빈 왕궁에서 이 녀석의 고함소리는 인적 없는 기둥과 바닥에 부딪쳐 쨍쨍 울려댔다. 안 그래도 제법 어두운 곳에서 악을 질러대며 몸부림하는 그 몰골은 아무 리 잘 봐 주어도 저주받은 악령이상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이거 정말 꼬리 에 불이라도 붙었나? 왜 이리 날뛰는 거야? 나는 녀석을 잡아채서 사정없 이 두들겨 패고 싶었지만 환영인지라 어차피 실체는 없다. "가만 못 있어? 정신 없이 굴지마!" "어째서 나와 누님은 이상한 물건이고 그 따위 것이 훌륭한 여인인 겁니까?" "그래." "어째서? 능력도, 외모도 모든 것이 우리가 나은데 어째서!" "내 맘이야." 나는 너무나 뻔한 것을 묻는 녀석을 향해 뻔한 대답을 해 주었다. 녀석은 허탈한 얼굴로 날 빤히 바라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마치 나와는 상종할 수 없다는 듯한 자세였기에 나는 조금 어이가 없었지만 일 단 접어 두었다. 이 녀석이 이상한 짓거리를 하는 게 오늘이 처음도 아니 지 않은가. "잠시 잊었군요, 당신이 어떤 분인지." "그래, 잊지 마. 앞으로는." 내가 유쾌하게 대꾸해주자 녀석은 마치 버림받은 강아지 표정으로 날 바라 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떠들며 걷는 동안 우리들, 아니 나와 녀석의 환영은 어떤 계단으로 향하고 있었다. 또 계단이야? 또 지하야? 이거 정말 미치겠네. 토굴을 지나 이젠 지하실로 들어가라고? 정말 인간들의 생각은 이렇게도 뻔하단 말인가?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곳이라면 전부다 지하냐? 머리 좀 굴려서 나무 위나 절벽 위, 뭐 그런 곳은 안 되는 거야? 제법 깊은 계단을 바라보며 내가 미간을 찌푸리자 녀석이 시큰둥하게 말했 다. "이 쪽이예요." "뭔가 고약한 냄새가 나는군." "뭐어, 어쩔 수 없죠. 여기는 왕궁의 오물처리장이라고나 할까요?" "오물 처리장?" 녀석은 음험하게 웃었다. "여기는 본궁(本宮)이 아니에요. 외궁(外宮)에 해당하죠. 이 외궁의 지하에 뭐가 있었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별로." 내가 멀뚱히 대꾸했어도 녀석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설명했다. 여전히 잘도 떠든다. "이 지하에는 왕궁에서 일하는 천민들이 살았어요. 아니, 천민들이 사육되 었지요. 그들은 이 안에서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고 갇힌 채 죽어가기도 하고, 죄수의 목을 베거나 고문도 했지요." "그걸 전부 천민들이 하냐? 병사들이 하는 거 아냐?" "천만예요. 잊으셨나요? 그랑프라임은 고왕국, 이 대륙에서 가장 오래된 왕국입니다. 그 왕국의 기반을 흔들 것은 아무것도 없었어요. 죄인은 죄인 이고 천민은 노예지요. 병사들은 병사들일 뿐이고. 보통 병사들이 하는 일 은 그저 왕족이나 귀족들의 권위를 지키는 것이면 충분했어요. 그러니까 더러운 일은 다 천민들이 하는 거지요." "노예가 전부 천민인가?" "그런 셈이에요. 우리들은 노예라 말하지만 이쪽에서는 천민이라 말하지요." 녀석은 뭔가 굉장히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길 만 보면 나도 엘프들이 말하는 <가련한 어린 마법사의 비극적인 러브스토 리>에 손을 들어 줄 정도였다. 하지만 이 분홍주둥이가 뿜어내는 그 음험 한 질투와 음침한 악의는 가련하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는 것이다. "폐쇄되었으니 다른 것은 볼 수도 생각할 수도, 들을 수도 없는 사회. 그 게 그랑프라임이예요. 그저 퇴폐적인 도락과 현상 유지에나 급급한 그저 그렇고 그런 제도와 관습으로 얽혀진 나라. 절대적으로 왕족, 귀족, 평민, 천민으로 굳어진 신분제도의 사회지요. 평민들은 천민들에 대해 무심하고 귀족과 왕족들은 그들을 쥐어짜지요. 의외로 평민의 수는 천민의 수 보다 많지 않아요." 나는 대꾸도 해 주지 않았다. 어차피 알아서 떠들 걸 내가 굳이 맞장구까 지 쳐 줄 필요는 없을 게다. 나는 그저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풍기는 그 끔찍한 냄새를 맡으며 걸었다. "누구냐!" 오랜만에 인간을 다 보는 군. 갑자기 튀어나온 시커먼 옷을 입은 남자는 나에게 창을 들이댔다. 하지만 꽤나 어설퍼서 아무래도 병사로는 보이지 않았다. "누구냐?" "너야 말로 누구냐? 나야 볼일이 있다만." 내가 태연하게 말을 받았더니 녀석은 잠시 우물거리며 나를 관찰했다. 옷 입은 꼴을 보니 분명히 그 천민집단 중 한명인 모양이었다. 녀석은 어설픈 자세로 창을 쥔 채 경비병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뒤로 몇 몇의 사 내들이 뛰어 왔지만 나를 어떻게 해 볼 생각은 없는 듯 했다. "귀족은 아닌 거 같고. 그렇다고 해서 동지도 아닌 거 같고. 그럼 룬드바 르 군의 한 사람인가?" 창날을 들이댔던 사내가 중얼거리는 것을 보고 나는 손을 저어 주었다. "룬드바르 군은 당연히 아니지. 나는 그런 녀석하고는 별로 큰 상관은 없어." "뭐?" 그 순간 어둠 속에서 흰 것이 뭉클 하고 솟아 나왔다. "우, 우아아아악!" 비명소리와 함께 일제히 사내들이 뒤로 물러섰다. 툭 하고 튀어 나온 마베 릭은 녀석들을 향해 생긋 웃으며 말했다. "지하 감옥으로 이 분을 안내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누, 누구냐!" "유령이얏!" 녀석들은 꽤나 두려워했다. 나는 그 소란을 이기지 못해서 결국은 조용히 손을 뻗었다. 퍽퍽 소리와 함께 녀석들이 나자빠지는 것을 보던 마베릭은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은 이렇게 될 것을 괜히 시간을 낭비했군요." "그런가. 지하감옥에 누가 갇혀 있는데?" "당신의 소중한 사람이요." 나는 녀석을 빤히 바라보다 고개를 돌리고 들어왔던 방향으로 걷기 시작 했다. 놀란 마베릭이 소리쳤다. "뭡니까? 어, 어디로 가는 겁니까?" "웃기지마. 건방진 녀석아." 나는 내려 왔던 계단을 도로 오르면서 타일러 주었다. "감히 네가 이 쿠베린님께 갇혀 있는 그 누군가를 보라고 손수 지하감옥 까지 찾아가라고 말하는 건 아니겠지?" "뭐라구요?" "내 앞으로 데려와. 나는 뭘 좀 먹고 있을 테니." "쿠, 쿠, 쿠베린님!" 마베릭은 비명 같은 소리를 내면서 내 뒤를 쫓아 왔다. "지금 뭐라고 하시는 겁니까? 지금 내게 누가 잡혀 있는 지 몰라서 이러 는 것은 아니시겠지요?" "모르겠는데. 그리고 위협을 하려면 상대를 잘 알고 해야지 않겠냐?" 나는 녀석을 싹 무시하고 곧장 빛을 향해 걸었다. 마침내 미로처럼 굽이진 복도를 지나 몇 개의 계단을 올랐다. 물론 오르는 도중 몇몇의 사내를 만나기도 했고 몇 몇의 병사를 만나기도 했지만 그건 물론 중요한 사실이 아니다. 아니고 말고. 이 내가 설마하니 구질하게 몇 몇 인간들을 만나 주먹질을 조금 했다는 것을 일일이 떠들고 다닐 수야 있겠는가? 그저 나 정도 되는 위대한 분께 서는 마수라든가, 조인족이라든가, 혹은 용족 쯤 되는 것들과 드잡이 질을 해야 <아, 싸움좀 했구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창을 어설프게 든 급 조된 천민 의용대라든가, 맨날 보던 룬드바르의 병사들 정도는 언급할 필 요조차 없는 것이다. 어쨌든 내가 그렇게 계단을 오르고, 복도를 지나고 뭔 정원 같은 것을 지 나 점점 병사들과 기사들이 많아지는 지점에 도착할 무렵, 어느 새인가 마 베릭은 사라지고 없었다. 아마 내 말을 듣고 녀석이 인질을 데리러 갔겠지. 나는 룰루랄라 가벼운 발걸음으로 음식냄새를 찾아 움직였다. 지금은 이 미 새벽을 지나 아침에 이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잠도 자지 못했구만. 온 몸은 피투성이에 너저분한 냄새로 가득했다. 아침식사를 준비하는 주방 을 찾아 움직이는 동안에도 몇 몇을 만났지만 역시 그것들을 만져 주는 데 인색하지는 않았다. "누, 누구냐!" "배 고파." 나는 거대한 주방에서 주걱을 쥐고 있던 덩치 큰 남자를 향해 미소를 지 어 보였다. 남자는 어처구니 없다는 듯 멍하니 날 바라보더니 곧이어 비명 처럼 큰 소리를 질러댔다. "침입자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음식을 먹었고 사내는 나자 빠졌을 뿐이었다. 그 사내의 뒤를 이어 시종으로 보이는 자 역시 눈두덩이 가 밤탱이가 된 채로 뒤집어 졌으며 칼을 들고 덤비던 용감무쌍한 어린 주 방하인 역시 엉덩이를 걷어 채인 채 밖으로 나뒹굴었다. 나는 그들이 만들 고 있던 호화 찬란한 식사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아몬드 조각이 보석처럼 빛나는 꿀빵과 시나몬 향이 물씬 흐르는 질척한 시나몬롤과, 사과소스를 얹은 새끼 돼지 구이와, 허브의 잎사귀를 매단 앙 증맞은 훈제 햄. 거기에 향기로운 포도주까지. 실로 가벼운 아침식사로는 과한 내용물이었다. 그것들을 만들어낸 대지의 여신에게 감사의 노래를 부르며 나는 입안 가득 히 여신의 은총을 맛보았다. 밖에서 떠들어대는 병사들의 고함과 솥에서 지글지글 끓고 있는 매혹적인 색깔의 선지 스튜의 노래를 들으며 나는 행 복했다. 소박하기도 하지. 이 정도로 행복해 하다니. 이 얼마나 풍부한 감 수성인가. 스튜를 한 접시 들고 나는 매끄럽게 주방에서 빠져 나왔다. 물론, 중간에 병사들이 잡기 위해 달려들었다는 그런 말은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 나 도 좋은 식사를 했다는 이 상쾌한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으니까. 어쨌든 스튜를 홀짝이며 걷다보니 어느 새인가 나는 완전히 포위된 채로 이 위대하신 쿠베린님까지도 이름을 외우고 만 놀라운 사나이 하인리히 룬 드바르 대공, 아니 요즘 대제라 불리게 된 작자 앞에 서 있었다. "맙소사. 또 당신인가?" 그는 진저리가 난다는 듯 나를 향해 이를 드러냈다. 나는 손에 든 스튜를 완전히 다 마시고 빈 그릇을 옆에서 잔뜩 긴장하고 있는 기사에게 내밀었다. 기사는 내가 그릇을 내민 이유를 전혀 알 수 없 다는 듯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더니 내가 재촉하자 무의식 중에 받아 들었 다. "나중에 주방에 돌려줘." 그 말을 듣자 그제서야 그는 시뻘게진 얼굴로 나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물론 휘두르려고만 했다. "기다려. 너희들의 상대는 아니다. 사인족 부대!" 룬드바르는 귀찮다는 듯이 손을 들어 보였고 그 명령에 따라 갑자기 나를 둘러싼 인간 병사들이 뒤로 물러서고 털이 북실북실한 노랑털 부대가 앞으 로 나섰다. 녀석들은 검을 든 채로 나를 향해 이를 드러냈다. 그들이 나타 나자 인간부대는 일제히 뒤로 물러서서 방관하는 태도를 취했다. 아마도 이 가짜 사인족 부대의 지휘를 맡은 것은 마법사였던 모양이다. "헤이자르!" 이상한 소리를 내지르면서 검은 로브를 걸친 녀석이 펄쩍 뛰어 나타나더 니 갑자기 내게 홱 시커먼 무언가를 뿌렸다. 물론 나는 그런 것을 받을 정 도로 궁색하지 않았기에 나 역시 펄쩍 뛰어 피해 주었다. 그랬더니 녀석은 그게 더 화가 나는 지 다시한번 소리를 질러대며 무언가를 뿌려대기 시작 했다. "으악!" 아리따운 나의 두 발이 얼마나 민첩했던지 그 시커먼 것은 나를 지나쳐 내 뒤에 서 있던 가짜 사인족 중 한 명에게 맞았다. "끄아아아악!" 처절한 비명이었다. 녀석은 시커먼 액체에 휩싸인 채로 부들부들 떨면서 그대로 오그라들기 시작했다. 우둑우둑 소리를 내며 찌그러지는 그 모습은 아무리 보아도 결코 아름답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 시커먼 게 뭔지는 잘 모르지만 이로서 맞으면 안 된다는 분명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위대한 분께서 방정맞게 펄쩍펄쩍 뛰기만 해서는 안 되는 일. 나 는 이상한 것을 흩뿌리는 녀석의 정면을 향해 그대로 뛰어 올랐다. 손톱이 튀어나오며 호선을 그렸다. 그저 공격을 받았다고 캑캑 하고 괴상 한 소리를 내질러대는 가짜 사인족따위 나는 알지 못한다. 변신도 못 한 채 인간의 도구를 휘둘러대는 사인족을 나는 알지 못한다. 물론, 인간의 지 휘를 받는 사인족이란 있을 수도 없었다. 그것들은 내 상대도 아니고 내가 상대해 줄 가치조차도 없는 것들이다. 나는 독액을 던지는 사내의 어깨에 올라탄 채로 그대로 그의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손톱을 선사해 주었다. 퍼 억 하고 선혈이 튀어 또 다른 얼룩을 만들어 냈다. 주변에 있는 것들이 전 부 다 병사들이라서인지 비명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나는 녀석을 쪼갠 뒤 주저하지 않고 도약했다. 사인족이라. 사인족이라. 감히 이것들을 사인족 부대라 불렀겠다? 변신도 못하고, 그 심장 속에 싸 움의 묘미를 즐기는 그 뜨거움도 가지지 못한 허수아비들을 사인족 부대라 불렀겠다? 너희들이 정말로 이름을 가질 자격이 있는지 시험해 주겠다. 자, 와라! 엉거주춤 서 있는 녀석의 가슴을 뚫고 바로 뒤에 있는 녀석까지 한 번에 쓰러뜨렸다. 발톱을 세워 일렬로 서 있는 녀석들의 목줄기를 한꺼번에 훑 었다. 피가 솟고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이런 것들을 상대로 변신할 필요 도 없다. 변신한다는 것 자체가 바로 나 자신에 대한 모독이 된다. 할퀴고 베고, 찌르고, 자르고, 뚫고, 쓰러뜨린다. 목줄기를 잡아 그대로 잡아 뜯기 도 하고 몸통을 반으로 갈라 버리기도 한다. 손등으로 맞은 녀석의 턱이 으스러지며 바닥으로 몇 메테르나 튕겨 올랐다. 어떤 녀석들은 칼을 들이 대기도 전에 내 손에 죽는다는 것을 깨닫고는 석궁을 들어 화살을 매단다. 쇠로 만든 철시가 시커멓게 빛을 발하며 내게로 뿜어졌다. 십 수 개가 제 법 까맣게 몰려들었지만 나 역시 그냥 있지만은 않는다. 몇 개는 피하고, 몇 개는 발톱으로 쳐서 되돌려 주고, 몇 개는 손으로 잡아 채 되돌려 주었 다. 자신들이 쏜 화살에 자신들이 꿰뚫려 나자빠지는 사태가 벌어지자 남 은 몇몇이 겁에 질려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나는 빙긋 웃으면서 녀석들을 향해 두 팔을 벌렸다. 자, 와 봐. 이리 와서 이 걸 보라구! 너희들의 앞에 서 있는 게 누구지? 그 어떤 존재인가? 내 뛰는 심장의 노래를 들어라. 내달리는 맥박의 노래를 들어봐라. 살육으 로 환희에 떠는 이 나를 보아라. 내 앞에 서 있던 가짜 노랑털들은 모두 뒤로 물러섰다. 오줌을 지리고 공포에 질려 울음을 터뜨리는 놈들도 있었다. 어떤 놈들은 주저앉았고 어떤 놈들은 엉덩이를 내뺀 채 엉금거리며 기어 도망가기도 했 다. 어떤 놈들은 발라당 나자빠진 채 큰 대자로 드러누워 버리기도 했다. 이 우스운 몰골을 보면서 나는 시퍼렇게 질린 얼굴을 한 룬드바르 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녀석은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이봐, 전에는 더한 모습을 보기도 했잖아? 그런데 새삼스레 왜 그래? 부들부들 떠는 그 를 위해 병사들과 기사들이 몇 겹의 호위망을 짜며 달려들었다. 몇 겹, 그 래, 몇 겹이더라. 나는 여전히 웃으며 그대로 달려들었다. 룬드바르의 앞을 막아서는 병사 들의 얼굴을 찢고, 칼을 든채 울부짖는 기사들의 목줄기를 손톱으로 훑으 며 피로 막는 자들을 피로 덮었다. "폐하를 보호하라!" "폐하를 보호하라!" 무슨 배짱으로 룬드바르 놈을 내게서 보호해보겠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룬 드바르 놈 자신이 이렇게 멍청해서야 그럴 수도 없을 게다. 룬드바르 녀석은 나름대로 대항해 보겠다는 것인지 검을 들고 나를 향해 찔러 왔다. 나는 그 무례한 쇠붙이를 댕강 부러뜨려 주었다. 녀석의 얼굴이 창백해지는 그 순간, 나는 이 친애하는 하인리히 룬드바르 녀석의 목줄기 를 잡아 채 그대로 어깨에 멨다. 비명소리와 고함소리가 정신 없이 울려퍼 졌지만 모두 다 알 바가 아니다. 그저 나는 웃으며 병사들과 기사들을 짓 밟을 뿐이다. 이걸 원한 게 아니었던가? 친애하는 하인리히 룬드바르 개자식아? KUBERIN........ 분노는 오만 슬픔은 연민 8 "어, 어쩔 참이냐?" "아? 인질교환." "뭐?" 나는 친애하는 하인리히 룬드바르 개자식의 발목을 잡아 묶었다. 그리고 고왕국이 자랑하는 왕궁 중, 후궁(後宮) 안쪽에 놓인 커다란 인공호수 위에 늘어진 나뭇가지 위에 걸쳐놓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녀석은 마치 고치에 싸인 나비 번데기처럼 이리저리 흔들렸다. 하늘은 푸르고 바람은 시원했다. 인간들이 흔히 하는 이 짓거리를 나도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이것도 나름대로 재미있잖아? 멀리서 룬드바르 제국군들의 난삽한 소리들이 들려왔다. 당황과 우려와, 공포, 그리고 이루말할 수 없는 모호한 감정들이 여기저기서 흘러들어 왔 다. 나는 등을 기대고 편히 앉아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룬드바르 대공, 아니 대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 놈과 나는 의외의 악연인 모양이다. 사실 이 놈 자체에는 그렇게까지 악감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는데 어쩌다 보니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고 있었다. "어서 날 내려 놔라!" 거꾸로 매달려 있는 황제는 고함을 지르며 핏대를 세웠다. 피가 몰려서 그 런지 얼굴은 시뻘겋게 변해 썩 위엄 있는 몰골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감히 나에게 이런 짓을 하다니! 무엄한 놈!" "꼬마야." 나는 다정하게 불러주었다. "뭐라구!" "대륙을 정복하는 게 재미있냐?" "뭐라구?" 내 질문에 녀석은 눈을 크게 뜨고 날 쏘아보았다. 그러나 이리저리 바람 에 흔들리는 터라 나에게로 시선을 집중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녀석은 어지러운지 잠시 눈을 감았다가 핏발 선 눈동자로 날 다시 쏘아보았다. "네가 대륙을 정복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게 뭐지?" "그런 말을 내게 왜 묻는지 잘 모르겠지만, 나도 나의 이상이 있다!" 녀석은 입술을 깨물고는 천천히 말했다. 고래 고래 소리를 질러서인지 목 이 많이 쉬어서 말할 때마다 꽤나 느끼한 울림이 퍼졌다. "너야 인간이 아니니 인간을 알 수 없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어릴 때부터 생각해 왔다. 넓은 대양을 건너, 드넓은 지평선을 지나 그 안에 있 는 어떤 새로운 것을 갈구해 왔다." 그래서 라고 반문해 주고 싶었지만 관두었다. 어차피 시간이야 널널하니 까 그냥 듣고 보자. "작은 분지 속의 나라에서 산맥을 건너 새로운 땅에 도달할 때마다 느끼 는 감정은, 뭐라 말할 수 없다. 네가 뭐라든 나는 그 감정을 포기할 수는 없어." "그래?" "내가 아직 어릴 적에 보았던 델리암왕국은 풍부한 토지에 풍부한 산물, 그리고 많은 인구를 가진 왕국이었다. 더 이상 혜택을 받을 수가 없을 정 도로 풍부한 땅이지. 그러나 그 왕국이야말로 더 이상 썩을 데가 없을 정 도로 썩어 있었다. 귀족들은 놀고 인형처럼 옷이나 갈아입을 뿐이고, 왕은 허수아비처럼 웃고만 있었다. 평민들이 귀족들에게 얼마나 수탈을 당하든 말든, 그들은 알 바 아니야. 단지 그들은 침실에서 시중들 새로운 노예에나 신경 쓸 따름이지. 매일 매일 노예시장에서 아름다운 아인족들을 사 모으 고, 그들의 육체에 빠지고 그들을 소유한 것을 자랑한다. 빚에 팔린 가여운 어린 아이들도 그들의 눈에는 그저 쾌락의 도구일 뿐이다. 너는 보았는가? 노예시장에서 팔리는 어린애들을? 귀족에게 빼앗긴 딸의 시체를 안고 울부 짖는 아비를? 아이와 아내를 잃고 미쳐버린 남자는 보았어?" 녀석은 자기 말에 흥분했는지 큰 소리로 외쳤다. "내 영지가 작다해도 귀족이 그렇게 썩지는 않았다. 영주들은 아직도 배를 타고, 아직도 해적을 소탕하며 아직도 사냥을 해! 병사들은 강건하고 백성 들은 건강하다! 나는 이 대륙 전체를 바꿔 버릴 것이다!" 내가 대꾸도 하지 않자 녀석은 갑자기 김이 빠졌는지 침묵했다. "너의 마법사가 어떤 일을 했는지 아는가?" "...........몰라. 그리고 알 바 아니다." "어째서?" "나는 인간의 일로도 머리가 터질 지경이야. 그녀와 마베릭이 강한 병사 를 만들기 위해 유사인종에게 무슨 짓을 했다해도 나는 제지할 수 없어." "유사인종?" 내가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를 보자 녀석은 나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너 역시 너의 종족을 위해 인간들을 학살하지 않았던가?" "아니. 그건 아니지. 그건 그렇고 유사인종이라니. 설마하니 인간과 닮아서 아인족이라는 말을 쓰다 말고 거기에 한 층 더 얹어서 유사인종이라고 해서 다른 종족들까지 한데 섞으려는 거냐?" "그럼 뭐라고 부를까? 드워프, 엘프, 수인족, 너희같은 묘인족, 조인족들을 아인족이라 부를까?" 녀석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조신조신 따져 물었 다. "자, 한 번 말해봐. 유사인종이라는 말은 인간과 닮은 종족이라는 말이겠지?" "그래." "그럼 인간이 모든 것의 중심이라는 말이 되겠구나?" "당연하지." 녀석은 확실한 눈으로 날 쏘아보며 말했다. "이 땅은 인간의 땅이야. 저 엘프의 유령이 어슬렁거리는 고왕국처럼 썩 어버릴 왕국따위 나는 만들고 싶지 않다. 인간다운, 인간의 왕국이 바로 세 워져야 해!" 나는 묵묵히 녀석을 빤히 바라보았다. "애초에 왜 고왕국이 썩었다고 생각하는가? 엘프의 아름다움과 긴 수명에 빠져 버렸기 때문이야. 인간은 인간이다. 두 손과 두 팔로 일어서서 자신에 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는 것, 그게 바로 인간이다. 고왕국의 왕족들은 인간 인 주제에 자신들이 엘프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른 인간들은 더럽고 추 한 것들이라고 멸시했지. 그게 바로 고왕국이 망한 이유다." 녀석의 눈은 활활 불타기 시작했다. "인간이 인간임을 포기한다는 것만으로도 타락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룬드바르 공국은 삼면이 바다, 북쪽은 산맥으로 이루어진 해 양국가였다. 그들이 볼 수 있는 다른 종족들이란 사우스 엘스턴에 엎드리 고 있는 땅의 엘프와 가끔 볼 수 있을 인어족이 전부였다. 그런 그들에게 인간이나 다른 종족과의 차별성을 이야기해봐야 녀석은 달라질 것이 없어 보였다. "노예제도를 반대한다는 것은 결국, 인간을 파는 것을 반대한다는 이야기 겠지? 네가 엘프들에게 한 말과 달리 말이야." "나는 노예 자체가 싫어! 어떤 종족이든 노예는 싫다고 말했다." 고집 세게 말하는 녀석을 보다말고 나는 혀를 찼다. "너의 마법사가 이상한 마수들을 만들어 네 병사들과 함께 싸우게 할 때 자랑스럽던가?" "뭐?" "그건 노예가 아니라고 말할 거냐? 아니면 그들에게 돈이라도 내고 있어? 그들이 싫다고 하면 안 싸워도 된다고 허락해 주냐?" 무, 무슨 소릴!" "그 이상한 마수들의 피 속에 섞인 다른 피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 없 겠지." "뭐라고 하는 거냐?" "그 미치광이 마법사들은 엘프의 피와, 인간의 피와, 수인족의 피와, 다른 종족들의 피를 혼합해서 마수들을 만든다. 네가 방금 내 앞으로 내 몰았던 사인족부대라고 하는 것이 어떤 것인 줄 아느냐?" "뭐? 그야 사인족을 인공적으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었던가?" "그건, 수인족과 인간들을 섞어 만든 가짜지. 진짜 사인족은 이미 멸망했다." "뭐? 그건 말도 안 돼! 얼마 전 나는 사인족의 왕을 만나보았다." "사인족의 왕은 이미 죽었다." "그럴 리가! 데킬에논은 내게 전면적인 협력을 맹세했다!" 녀석이 항의하는 이야기를 듣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 놈은 왕이 아니다. 반역자일 뿐. 진짜 왕은 헬레아스 라고 하지. 녀석은 데킬에논을 죽이고 내 손에 죽었다." 그 말에 룬드바르는 입을 벌렸다. 그리고는 다시 한 번 눈을 감았다. 아마 흔들려서 어지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녀석은 그래도 흔들리지 않는 어조로 말했다. "뭘 원하는 거냐?" "별로 원하는 것은 없어. 난 마법사들이 저지르고 있는 짓거리를 관두고 그저 내 아이들과 함께 떠나는 것 뿐." "나와 같이 대륙을 통일하자. 너처럼 강한 자는 없다." "물론 그렇겠지. 나처럼 강한 자는 없다." 나는 하늘을 바라보며 낮게 노래를 흥얼거렸다. 녀석이 뭐라고 마구 떠들 어댔지만 무시했다. 새로운 왕조가 열리는 중이었다. 인간 대륙사에 새로운 황제가 나타난 시점이다. 하지만, 대체 그것이 무슨 관계가 있을까? 엘리야 의 저잣거리에서 상인은 여전히 값을 깎는 여자들과 드잡이질을 할 테고, 사람들은 여전히 웃고 울 것이다. 항구에 버려지는 애들은 여전히 거지가 되거나 창녀가 될 테고, 농민들은 영주가 내 놓으라는 세금에 골머리를 썩 힐 것이다. 들판에 꽃은 피고, 산에 나무는 자라고. 우는 자는 울고, 죽는 자는 죽고, 웃는 자는 웃는다. 대륙이 통일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이 몇 개나 될까? 같은 돈을 쓰는 것? 같은 황제를 받드는 것? 세금이 많아지거나 적어지는 것이야 관계가 있겠지만 어떤 황제든 세금만 적으면 나머지 사람들은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을 것이다. 이 놈의 말대로 정말로 노예시장에서 팔리는 어린아이들이 사라질까? 아름다운 아인족을 사냥하는 놈들이 사라질까? 천만에. 불법인 줄 알면서도 하는 놈들은 언제나 있기 마련이다. 황제를 떠받드는 기사와 귀족들은 달라질 지도 모른다. 물론, 그들이 달라 지면 그들이 다스리는 영지가 달라질 테니 보통 인간들의 삶도 달라질 지 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또 그 뿐. 엘프들과 드워프들과 수인족들과 다른 아인족들 과 그리고 우리들에게는, 대체 얼마나 다른 점이 있는 것일까? 이 왕이 저 왕으로 바뀌고 이 황제가 저 황제로 바뀔 뿐이다. 대륙이 통일되는 동안 죽은 인간의 수는 통일 된 후 쓰여진 역사서에는 기록되지 않는다. 그들은 위대한 황제를 쓸 뿐, 전쟁에 휩쓸려 죽어간 보통 인간들에 대해서는 쓰지 않는다. 황제의 야망에 대해서 쓸 뿐 보통 인간들이 가족과 어울려 그저 살아가길 바랬단 말 따위는 쓰지 않는다. 마치, 내 눈앞에 있는 황제를 지키기 위해서 몸을 던졌던 병사들의 이름이 역사서에 오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너, 정말로 네가 그런 것들을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하냐?" 내가 피식 웃으면서 이 들끓는 놈을 향해 묻자 룬드바르는 나를 옆 눈으로 쏘아보았다. 제 딴에는 사납게 보이려고 하는 짓거리인 줄 알기야 하지만 그래봐야 바람에 흔들리는 번데기 몰골이다. "지금 당장 할 수 없다고 주저앉으란 말이냐?" 녀석은 어지러운 것을 억지로 참으면서 나를 향해 연설하듯 말했다. "할 수 없다고 주저앉는다면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 인간이 아닌 너는 모르겠지만, 인간은 할 수 없었던 일들을 해치우며 살아 왔다." 그는 크게 숨을 몰아 쉬었다. "그러니까, 앞으로도 할 수 없었던 일들을 하면서 살아갈 거다." 기온이 제법 쌀쌀해졌지만 여전히 찾아오는 놈은 없었다. 황제녀석은 이 제 축 늘어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여전히 바람에 흔들리는 번데기다. 거 참, 이렇게 찾기 쉬운 곳에 놔두었건만 아직도 찾지를 못하고 있는 겐가? 내가 휘파람을 불면서 시간을 죽이고 있을 때였다. "쿠베린님." 아래를 내려다보니 어느 새인지 마베릭이 서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왜?" "이제 우리 주군을 돌려주시지요." "글쎄." "우리 주군께서 병이라도 나기 전에요." "글쎄다." 나는 거의 나무토막처럼 뻣뻣한 용새끼를 가슴 위로 올려 놓았다. 하도 오랫동안 품고 있었더니 놈도 따스해지기 시작했다. 건방지게도 이 놈이 내 몸을 난로로 삼아 체온을 올리다니. "미리 말해 두지만, 이 모든 것은 쿠베린님이 자초한 일입니다." 녀석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웃기지 마. 책임전가를 하려고? 이 모든 일은 너희들이 일으킨 일이다. 그러니까 벌을 주겠다고 누군가가 뛰어 오면 네네 하고 목을 내미는 게 좋 아." 마베릭은 쓴웃음을 짓더니 갑자기 손을 들어 자신의 가슴에 댔다. 절이라 도 하는가 싶어 녀석을 굽어보자 놈은 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제 가슴속에 있는 심장이 누구의 것인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뭐?" 녀석의 커다란 눈이 기묘하게 일렁거렸다. 화를 내는 것 같기도 했고, 슬퍼 서 눈물이라도 떨굴 것 같기도 했다. 그 이상한 표정이 마음에 걸렸다. "당신이 찢어 버린 나의 심장 대신에 이 안에 들어 있는 것은 묘인족의 심장이랍니다." "누구의 심장이냐?" 나는 조용히 물었다. "그녀의 이름은 모릅니다. 어떻습니까? 이래도 당신은 아무렇지도 않으신 가요?" "너는 그렇게도 내 손에 죽고 싶은 게냐?" 마베릭은 나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그러더니 비웃음에 가까운 미소를 짓고는 두 팔을 벌려 보았다. "저는 몇 번이나 죽었다 살아나지 않았습니까? 저는 안 죽습니다." 나는 그대로 나무 위에서 몸을 던졌다. 일직선으로 허공을 찢으면서 그대 로 아래로 뛰어 내렸다. "커억!" 마베릭의 목을 잡아 채는 데에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녀석의 턱을 으깨 마법시동어를 말하지 못하게 하는 데에도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는 그저 마베릭의 목줄기를 잡아 둔 채 녀석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두근두근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렸다. "애송아." 나는 나와 마베릭을 내려다보고 있는 매달린 애송이를 불렀다. 녀석은 두 눈을 부릅뜨고 놀라 입을 벌린 상태였다. "들었냐? 이 놈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그, 그.....!" "살아 있는 자의 심장을 파내는 자를 너라면 용서할 수 있는 거냐? 그것 도 너의 그 잘나빠진 야망 속에 들어 있는 거냐? 아니면 흔히 인간들이 말 하듯 대를 위해서 소는 버린다는 거냐?"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나는 그가 어떤 얼굴로 울부짖었는가를 기억했 다. "너는 이제 친구도 잃지 않았나? 이 다음에는 어떤 것을 잃을지 궁금하지 않으냐?" "마, 마르케스를 죽인 게 너였나!" 갑자기 녀석이 부르르 떨었다. 그는 증오로 뒤범벅이 된 얼굴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이놈! 죽이고 말테다! 마르케스를 죽이다니! 죽이고 말테다!"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나는 녀석을 무시했다. 그저 내 손에 잡힌 마베 릭녀석의 심장을 꺼내기 위해 손톱으로 찔렀을 뿐이었다. 그러나, 순간적으 로 나는 뭔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냄새! "쿠윽!" 잡은 녀석의 몸뚱아리를 내던지며 나는 재빨리 도약했다. 내가 막 룬드바 르 녀석의 몸을 잡아 채려는 순간 시커먼 무언가가 내 앞으로 튀어 올랐 다. "다크 샤이닝!" 일직선의 검은 번개가 나를 찔러왔다. 나는 본능적으로 뒤로 몸을 눕히면 서 룬드바르녀석이 매달린 끈을 발톱으로 잡아 채 내 앞으로 끌었다. 아니 나 다를까 마법은 녀석을 다칠까 두려웠던지 재빨리 회수되었다. "으아아악!" 어울리지 않는 비명을 올리며 룬드바르녀석은 내 옆구리에 매달린 채로 이십메테르나 되는 나무 위에서 그대로 떨어져 내렸다. 바닥에 착지하자마 자 갑자기 이글거리는 도형이 서너 개씩 공중에 떠올랐다. 나를 둘러싼 도 형들은 거미줄처럼 몇 겹의 그림을 그리면서 야시시한 미녀의 침실에 매달 린 베일처럼 나풀거렸다. 바람이라도 부는 듯 일렁거리던 그 도형들을 보 면서 나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도형들은 나를 에워싼 채로 움직인다. 이 건 또 무슨 마법일까? 꽤나 아름답기는 하군. 엇? 우우와아앗! 도형들이 갑자기 겹쳐지는 순간 칠채색으로 현란한 빛을 뿜으며 내 몸을 공격해 왔다. 바로 코 앞에 닥쳐든 광선 때문에 하마터면 코가 베일 뻔했 다. 나는 이 도형들의 공격패턴을 그제서야 깨달았다. 이것들은, 말 그대로 기회만 닿으면 나를 향해 그 놈의 시퍼런 광선을 쏘아대는 것이다. 이거, 속도를 한 번 올려보아야 하겠는걸. 그래, 맞아, 이 정도의 재미난 물건이 나를 사모해 따르겠다면 어디 한 번 나를 잡아 보라고 해봐야지. 사랑스런 두 다리여 달려라, 달려! "잡아라!" "잡아!" 고함소리와 함께 병사들, 기사들이 일제히 내 뒤를 쫓았다. 물론 끝까지 쫓을 수는 없었지만 그들은 숫자가 많았기에 몇 개씩 무리를 지어 나를 쫓 아다녔다. 몇 몇은 내게 화살을 날리거나 창을 던졌지만 맞지도 않았거니 와 내가 옆구리에 끼고 있는 룬드바르 때문에라도 손을 대지 못했다. 물론, 이 몸께서 신경쓰는 것은 그따위 것이 아니었지만. 인공으로 만든 호수를 지나, 인공으로 만든 야산을 지나, 그리고 말 수백 필은 동시에 매어 있을 마굿간으로, 나는 계속해서 움직였다. 멋지기도 하 지, 나의 두 다리. 크게 도약하고 빠르게 달린다. 솟구치는 힘 때문에 룬드 바르가 힘 없는 인형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며 엑엑거렸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이봐라, 인간아. 네 생전 이렇게 빨리 높이 달려 볼 수 있을 줄 아 냐. 그러니까 이 순간만은 내게 잡혔다는 생각을 잊고 즐겨 두라구. 이런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아. 사내인 주제에 이 넓은 가슴에 안겨 짙푸른 하늘 아래 내달리다니 이런 축복 받은 상태를 원하는 미녀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알기나 아냐! 달리고 달렸기 때문에 도형들은 나를 따라오다가 몇 번이나 모양새가 이 그러졌다. 나는 그것을 확인하며 이번에는 반대로 달렸다. 거꾸로 내가 왔 던 길을 다시 올라가기 시작하자, 도형들은 제자리를 잃은 듯 이리저리 방 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흐트러진 도형들을 내가 막 확인하는 순간, 내 앞으로 시뻘겋게 이글거리는 무언가가 달려오기 시작했다. "폐하를 구하라!" 웬 떨거지 같은 마법사들이 내 앞길을 가로 막고 고함을 질러댔다. 그런 녀석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하여 나는 도형들을 거느린 채로 녀석들 사이 로 달리기 시작했다. 약간 속도를 늦추었더니 도형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일렬로 줄을 서며 사랑의 광선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으, 아아악!" 광선에 맞은 두 명의 마법사가 그 자리에서 광선에 꿰뚫려 고꾸라졌다. 광선에 닿자 말 그대로 가슴의 반이 날아가고 팔 다리는 그대로 이글이글 타오른다. 생각보다 더 끔찍하네. 도형들은 여전히 나에게 사랑의 광선을 쏘아댔지만 난 이 아름다운 도형 들에게 슬슬 싫증이 나기 시작했다. 이봐, 이제 슬슬 헤어지자고. 원래 헤 어질 때는 말없이, 조용히, 담담히 헤어지는 게 멋진 거야. "크아아악!" 이번에는 나를 막아서던 병사들 일곱이 일제히 그 자리에서 산산조각났다. 그 다음에는 실드를 막 형성하려는 마법사의 머리통을 끝장내더니 다시 나 를 향해 달려오기 시작한다. 하지만 나를 에워싸고 있던 인간들을 뚫지는 못했다. 순식간에 도형들에 의해서 내 주변에 있던 마법사, 기사, 병사 할 것없이 수 십명이 그 자리에서 끝장났다. "프리즘 포스 해제!" 차가운 목소리로 나타난 것은 마베릭이었다. 그는 완전히 피바다가 된 주 변을 보며 한숨을 내쉬더니 나를 향해 가볍게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는 하는 수 없다는 듯 두 손을 들었다. 그러자 갑자기 주변을 시뻘겋게 달구 는 거대한 불덩이가 나타났다. 빨갛다 못해 시커멓게 타오르는 불덩이는 마베릭놈의 배후에 마치 말 잘듣는 강아지처럼 도사리더니 곧이어 시뻘건 화염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씨뻘겋게 이글거리는 화염구는 내가 선 그 자리 전체를 모조리 태워버릴 듯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어차피 화염에 다칠 것은 내가 아니라 룬드바르놈이니까. 이 변태놈도 설마하니 시커멓게 탄 숯덩이 주군을 바라는 것은 아닐테지. 생각대로 화염은 내게까지 닿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위협이라도 하듯 내 주변 1메테르 정도에서 맴을 돌 듯 뱅글뱅글 돌면서 움직였다. 나는 내 주 변이 새까맣게 타오르는 것을 냉정하게 지켜보았다. "쿠베린님." 화염 속에서 마베릭이 속삭이듯 말을 걸었다. "이렇게 나오시면 곤란합니다." "왜?" "저의 주군은 이 대륙의 전부나 다름없는 분입니다." "웃기지 마." "당신은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사지요. 그 분이 사라지면 제국 전체가 흔 들리고, 그렇게 되면 대륙 전체가 전화(戰火)에 휩싸일 겁니다. 그걸 바라 시는 겁니까?" "내 알 바 아냐." 그는 한 숨을 내쉬고는 피식 웃었다. "내 쪽의 패도 보여드려야 하나요?" 그 순간 화염이 마치 기둥처럼 변하며 좌우로 벌어지기 시작했다. 십여 메테르는 될 듯한 그 화염의 기둥이 주변을 휘감으며 도도하게 바짝 서는 순간 나는 이를 악물었다. 두 명의 인간이 화염의 한 가운데에 서 있었다. 한 명은 스카였고 한 명 은 마미였다. 그들은 나를 보자마자 눈을 크게 뜬 채 굳었다. 스카의 몸은 상처투성이 였고 마미도 멀쩡해 보이지는 않았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일이 지저분하게 되는 것일까. KUBERIN........ 분노는 오만 슬픔은 연민 9 "나의 주군을 돌려주십시오." "싫다." 내 대답에 녀석은 눈을 치켜 떴다. "아주 공정한 거래를 하는 건데 불만이십니까? 당신이 나의 주군을 돌려 주면 나는 당신의 소중한 애완동물 중 하나를 풀어 줄 겁니다. 당신이 정 령석을 내 놓으면 나는 다른 애완동물도 놔 드리지요." "네 말을 믿기가 참 어렵기 때문에 나는 응하지 않겠다." "무슨 썰렁한 말씀을. 제 말을 안 듣는다 해도 방법은 없을 텐데요?" 마베릭은 피식 웃더니 소맷자락을 흔들면서 손가락을 치켜올렸다. 하얗고 긴 손가락이 한 번 흔들릴때마다 화염의 기둥이 조금씩 그들에게 다가섰 다. 스카는 마미를 끌어안은 채 나와 마베릭을 번갈아 보고 있었으며 마미 는 무표정한 그대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얼굴을 본다. 이십 년 동안 보았던 얼굴. 삼십 여 년 동안 보았던 얼굴. 처음 홍안의 청년이었던 스카는 이미 중년의 나이였다. 강직하기만 한 투 박했던 젊은 과부는 이제 뱃사람을 휘어잡는 중년의 여자가 되어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 난 주름살 하나도 나는 기억하고 있었다. "이 여자를 위해서 당신이 어린애 모습을 하고 있었다는 것도 알고 있습 니다. 그런데 그녀를 위해서 정말로 그깟 정령석을 내주지 않을 셈입니 까?" 마베릭이 이죽거리며 말했다. "쿠베린...." 스카가 마치 신음하듯 내 이름을 불렀다. "먼저 당신의 오랜 벗이었던, 아, 난로였던가요? 이 사람을 풀어주지요." 마베릭은 일그러진 얼굴을 한 스카를 가리켰다. 그리고는 손을 내밀었다. "우리 주군을 돌려주세요." 나는 옆구리에 끼고 있던 번데기 몰골의 룬드바르를 툭 바닥에 떨어뜨렸 다. 돌멩이에 부딪치기라도 했는지 윽하고 룬드바르놈이 신음을 터뜨렸다. 나는 그리고 나서 주머니에 손을 넣어 정령석을 꺼내들었다. 마베릭이 살 짝 미간을 찌푸리는 순간 갑자기 스카가 소리쳤다. "하지 마! 그런 꼴을 보느니 차라리 죽겠다." 녀석은 가증스럽게도 불기둥 쪽으로 움직이려 했다. 하지만 몸은 움직이지 않는지 꿈틀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그럴 줄 알았다. 이놈아. 설마하니 네 가 가증스럽게도 나를 위해 그 한 몸 희생하겠다는 가당찮은 생각을 할까 싶었더니만 결국 그렇게 나오는 군. 쯧쯧 혀를 차면서 마베릭이 그를 향해 박수를 쳐주었다. "그럴 줄 알았어요. 이 정도의 사람이라면 당신을 위해 목숨마저도 바치려 들겠죠. 그죠?" "그런 짓 하면 짜증난다. 스카." 내 말에 스카는 흠칫했다. 녀석의 일그러진 눈매에 물기가 서리는 것을 보 고 나는 흠칫했다. 아, 못 볼 걸 봤어! "네에, 쿠베린님은 당신이 스스로 죽어버리면 정말로 화를 낼 겁니다. 스 카씨." "닥쳐! 이 비열한 놈아! 죽어버려!" "용병인 주제에 욕설이 빈약하군요. 자아, 어서 내 놓으세요. 쿠베린님." "가져가." 내가 팔짱을 낀 채 어깨를 으슥하자 피식 웃으면서 마베릭이 말했다. "똑같은 수법은 이제 통하지 않습니다." "그래?" "네, 안 통합니다." "알았어. 그럼 알아서 해." 나는 룬드바르의 몸뚱이를 집어 들고는 녀석을 향해 던졌다. 그리고 그 순 간 손안에 쥐고 있던 정령석도 함께 뿌렸다. "무, 무슨!" 정령석은 일곱 개다. 그 일곱 개의 보석들은 산산히 흩어지며 몇 개는 불 기둥 속으로, 몇 개는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미간을 찌푸리며 신음을 터 뜨리던 마베릭은 이를 악물고 소매가 흔들었다. 그러자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던 룬드바르의 몸이 그의 품안으로 떨어졌다. 마치 어린아기를 품고 있는 여자 품새가 된 마베릭놈은 이를 갈며 여기저기 흩어져 버린 정령석 들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정령석은 이미 사방으로 흩어진 상태였다. 불기둥 속에서 그것들이 무사할 지는 나도 모르겠다. 나는 팔짱을 낀 채로 마베릭에게 말했다. "자, 이제 그들을 풀어 줘." "이, 무슨!" "약속을 지켜야지." "무슨 소립니까!" "아, 참, 그 마법 안 거둬들여? 그러다가 정령석이 녹으면 어떻게 할건데?" 내가 상냥하게 묻자 녀석은 신음을 터뜨렸다. "신의 파편이라 불리는 것들이 이 정도의 화염에 잘못 되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주변을 짐승처럼 핥고 있던 불기둥은 순식간에 사그러 들었다. 역시 정령석이 잘못 될까 무섭긴 했던 모양이다. 마베릭은 화염을 거두고는 창백한 얼굴로 나를 쏘아보았다. "좋아요, 어차피 이 들을 데리고 있는 것도 당신에게는 하나의 짐이 되겠지 요." 그의 말과 함께 내 앞으로 스카와 마미가 달려왔다. "쿠베린!" 마미가 막 나를 끌어안으려고 손을 내밀었다. 스카가 뭐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하늘에서 말 그대로 바람을 찢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쏟아져 내렸다. 그것은 쏟아져 내렸다고 밖에는 할 말이 없었다. 말 그대로 쏟아져 내리며 내 몸을 그대로 찍어눌렀다. 나는 그대로 땅바닥에 곤두박질쳤다. 내 주변으로, 아니 정확하게 마미의 발끝서부터 시작된 원과 원이 푸른 빛 을 발하며 둥글게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원, 원, 원. 눈앞이 어지러웠다. 대체 무엇이, 무엇이 있었던가. 눈앞은 불길한 푸른 빛으로 가득 차고 머리는 깨질 듯이 아팠다. 팔과 다리, 그리고 온 몸을 어 떤 쇠뭉치가 찍어 누르는 것만 같았다. 나는 무력하게 사지를 억눌린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차가운 흙이 뺨에 와 닿아 아득한 정신을 겨우 되 돌려 놓았다. 쇠냄새가 입안을 맴돌았다. 사방이 온통 벌레로 가득 찬 것처 럼 잉잉대는 소리로 시끄럽다. 단단하게 굳은 팔 다리에서 점차 감각이 사 라졌다. 아아, 또 마법진인가? 이건 또 새로운 것인가? 나는 눈을 감고 천천히 머리를 굴리려고 애썼다. 하나, 둘, 셋, 넷, 킬트의 이름은 킬트 더 마이오스이고 빌어먹을 아크의 이름은....뭐더라? 아아, 기 억 안 난다. 내 아이들의 이름은 뭐였더라. 플라티나, 케논, 에이리, 아소미 나, 라비니아.....아아, 그래 가여운 내 딸 라비니아. 이에르네, 로오나, 미하라, 유티아, 쇼나, 그녀들이 있었다. 따스한 살결의 그녀들이.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두 팔을 움직여 보려고 했다. 처음에는 손가락을, 그리고는 손바닥을, 그리고 아주 천천히 손목과 팔을. 나는 상체를 두 팔로 디딘 채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그것만으로도 산등성 이 하나를 통째로 짊어지고 있는 것같은 고통을 느꼈다. 내 바로 앞, 말뚝처럼 굳어 선 마미가 보였다. 그녀는 두 손을 벌린 채 나 를 향해 달려오려다 굳은 자세 그대로 서 있었고 조금 떨어진 곳에 스카가 쓰러져 있었다. 내 주변으로, 푸른 빛이 감도는 마법진이 몇 개의 교차점을 그리며 유유히 빛나고 있었다. "쿠, 쿠베린!" 마미가 나를 향해 두 팔을 뻗은 상태로 외쳤다. 그녀의 얼굴에 공포와 불안이 짙게 새겨져 마치 불안과 공포의 석상처럼 보였다. 그녀는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움직여 보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이 마에서 땀방울이 흐르고 두 팔은 부들부들 떨렸지만 이미 더러워진 치맛자 락 끝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어떠세요?" 마베릭이 낮게 속삭였다. "흡력마진을 세 개를 겹쳐 증폭시킨 겁니다. 쓸만하죠?" 나는 녀석의 목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그쪽으로 돌렸다. 내가 두 팔을 움직 이는 것을 보자 그는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 마치 실수했다는 듯이, 슬프다 는 듯이. "저런, 정말 대단하시네요. 세상에 마법진을 세 개나 겹쳤는데." "무슨 수작이야?" "아까 말씀드린 대로죠, 뭐." 그는 바닥에 쓰러진 룬드바르를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룬드바르는 난데 없이 나타난 마법진에 놀라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의기양양 바로 일 어섰다. "괜찮습니까? 주군?" "그래, 정말 지독한 괴물이로군." 그는 혐오를 가장한 공포로 나를 바라보았다. 괴물 좋아하시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묘인족의 왕은 대단히 강하니까요. 일단 다른 곳으로 가시지요. 저 자는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마베릭이 그렇게 말하자 룬드바르놈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도 저 놈을 어떻게 해치우는 지 똑바로 봐야 겠어. 대체, 저렇게 지독한 놈은....." 그는 혀를 차더니 한 걸음 내 쪽으로 다가섰다. 하지만 번쩍이는 마법진이 무서웠는지 뒤로 다시 한 걸음 물러서며 마베릭에게 물었다. "이 게 마법진이라고 하는 건가?" "그렇습니다." 그는 그렇게 대답하더니 걱정스럽다는 듯 룬드바르의 창백한 얼굴을 올려 다보았다. 안 그런 척 해도 역시 팔다리가 후들거리고 있을 터였다. "옥체가 걱정스럽습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 쉬시고 나중에 보고를 받으 시는 것은......" "나를 뭘로 보는 건가! 저런 괴물에게 이기지 못하고서는 아무 것도 할 수 가 없어!" 룬드바르는 갑자기 큰 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게다가 저 놈은 마르케스를 죽인 놈이 아닌가! 마르케스를 죽인 놈을 어떻 게 처리할지 나는 두고 보겠다!" "그는 마르케스 형님을 건드리지 않았을 텐데요." 마베릭은 평이한 어조로 대꾸했다. "뭐라구?" "쿠베린님은 인간을 암살하려고 할 분이 아닙니다. 만약 그럴려고 했다면 주군께서는 여기 서 있지도 못하실 겁니다." "네 놈은! 섬기는 게 대체 누구냐!" 룬드바르는 격분한 듯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마베릭은 동요하지 않았다. 그가 손을 흔들자 그에 따라 어느 새인지 달려오는 병사들이 룬드바르를 에워쌌다. 하지만 룬드바르는 그 자리에서 벗어나기 싫었던지 완강히 거절 하고는 흙바닥에 털썩 주저 앉았다. 그런 그의 행동에는 마베릭도 조금 의 외였던 모양이다. "주군, 옥체를......" "이 정도로 상하지 않아. 나는 진흙탕 속에서도 잠을 잤다." 잘난 척 말을 잇던 룬드바르는 내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자 잔뜩 얼굴을 찡 그리고 고개를 돌렸다. "제기랄! 저 괴물을 어떻게 할 거냐고 묻지 않았던가!" "..........산채로 피를 뽑아 마법의 재료로 쓸 것입니다." 마베릭이 조용히 대답했다. 그 말에는 룬드바르도 놀랐는지 눈을 부릅떴다. "안 돼!" 스카가 바닥에 널브러진 채로 고함을 질러댔다. 녀석은 시체처럼 퍼르딩 딩한 얼굴로 악악거리고 있었다. "이놈아! 이 천인공노할 놈아! 차라리 칼을 들고 싸우란 말이다! 사람을 이렇게 묶어두고 산채로 피를 뽑아? 네 놈도 사람이냐!" 그가 악을 쓰는 것을 병사들과 룬드바르는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저 마법진이라는 것은, 지워지지 않는가?" 땅에 그려진 것이라고 보기에는 조금 이상한 형태의 진을 가리켜 보이며 룬드바르가 묻자 마베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건 바닥에 그려진 게 아닙니다. 매개체를 이용한 것이지요." 매개체. 나는 눈을 들어 아직도 꼿꼿이 서 있는 마미를 바라보았다. 마미의 두 눈은 여전히 공포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는 두 팔을 벌린 채 어쩔 줄을 모르고 그대로 석상처럼 굳어 있었다. "괜찮아, 마미." 내가 속삭이자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떨어져 내렸다. "괜찮고 말고, 나는 죽지 않아. 마미." 그녀는 나를 애정에 가득 찬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언제나 그렇듯 말은 없 지만 온화한 눈빛으로, "매개체라니?" 룬드바르가 멍하니 물었다. 마베릭이 막 입을 열려는 순간 나는 큰 소리로 외쳤다. "내 딸은 어디에 있냐?" "아, 당신의 딸은 옛 실험실에 있지요." "옛 실험실이라는 게 뭐야? 내가 묻자 마베릭녀석은 갑자기 생각난 듯 시익 웃었다. "말해봐야 당신은 모르겠지요. 그나 저나 매개체가 무엇인가부터 말씀드 릴까요?" "별로 들을 마음 없어." 녀석의 재수 없는 웃음이 더더욱 진해졌다. 녀석은 마치 흥미진진하다는 듯 두 손을 마주 잡더니 옆에 있는 룬드바르에게 말을 걸었다. "마법진을 그리는 것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만, 힘을 증폭시키는 데에는 역시 매개체만한 것이 없지요." "그게 어떤 건데?" "사실 마법진을 그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게다가 그냥 땅에 그려 놓는다면 눈이 있는 자라면 누구든 마법진을 피해버리겠지요. 그래서 눈에 보이지 않도록 그리기도 합니다." "그럴 수도 있어?" "네,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지요. 직접 그려야만 한다는 한계점이. 그래서 나온 것이 매개체를 이용하는 수법입니다." 룬드바르는 별로 흥미가 없는 듯한 얼굴이었지만 악의에 가득찬 얼굴을 한 변태놈은 생글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시끄러워! 변태놈!" "아아, 그렇게 조르지 않아도 말해 드릴 테니 걱정 하지 마십시오." 녀석은 호호 웃으며 말을 이었다. "매개체를 하나 둘 쯤 놓으면 마법진은 배로 힘이 확장되기도 해서 그 범 위가 무척이나 커질 수 있게 되지요. 예를 든다면, 사방 20 메테르 정도도 가능하다고나 할까." "그, 그렇게나!" 놀라서 룬드바르가 되묻자 녀석은 재수없게 호호 웃었다. "네에, 그리고 증폭도 되니까 저렇게 몇 개의 마법진을 겹칠 수도 있는 거지요." "시끄러워!" 나는 큰 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쩌렁하고 큰 소리가 퍼져나가자 몇몇 병사들이 귀를 잡고 휘청거렸다. 룬 드바르도 몸을 수그리고 얼굴을 찌푸렸지만 마베릭은 아무렇지도 않은 기 색이었다. "굉장히 친절하시고 상냥하신 분이네요. 쿠베린님. 그렇게까지 제 입을 막 지 않아도 저 여자가 바보가 아닌 이상 금방 알 것이란 생각은 하지 않나 요?" 녀석은 깔깔대며 웃기 시작했다. "자신이 매개체라는 것 정도는 머리가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알 수 있을 거 아닙니까." "시끄러워!" 녀석이 웃음을 터뜨리는 가운데 마미의 얼굴이 굳었다. 그녀는 움직이지 도 않는 두 눈을 억지로 초점을 맞추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에 안색이 빠져나갔다. 혈색이 빠져나간 얼굴로 그녀는 뚫어지도록 나를 바라 보았다. "마미...." 나는 괜찮다고 그렇게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잔뜩 굳은 채 로 나를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어떻게든 몸을 움직이려고 애를 쓰는 것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움직이지 못했다. 눈물이, 공허 할 정도로 답답한 눈안으로 넘쳐 흘렀다. 오로지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눈 물인양 아주 천천히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마미." 나는 부드럽게 미소지어 주었다. 그녀의 가슴속에서 흔들리고 있을 그 무 엇인가를 위해서 나는 애써 웃었다. 문득 바람이 불었다. 아니, 바람이 불려고 하고 있었다. 허공에 무언가가 있었다.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렇게 막 생각하려는 순간이 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아!" 비명소리와도 흡사한 소리와 함께 뭔가 튀어 나왔다. 그것은 일직선으로 움직이더니 그대로 마베릭을 향해 돌진했다. 제법 빨라 서 주변에 있던 병사들은 어떻게 대처 할 수도 없을 정도로 빨랐다. 하지 만, 마베릭의 얼굴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째앵 하고 유리가 깨지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걸레처럼 너덜거리는 몸을 한 어떤 녀석이 마베릭을 향해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물론, 그 칼은 마베릭의 실드에 막혀 있었다. "자, 잡아라!" 뒤늦게 마베릭을 보호하기 위한 양 병사들 십 수명이 공격한 녀석을 향해 달려들었다. 허나, 녀석은 미친 듯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피와 살이 튀기고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는 그 놈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믿을 수 없게 도 회색 늑대의 일족인 케슈파란이었다. 어떻게 저 놈이 여기에 있을 수 있는 거지? 어떻게? 그와 동시에 갑자기 다른 것들도 튀어 나왔다. 그 것들은 병사들을 도륙 하면서 거침없이 내 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이에르네!" 어떻게 하필 이 때 그녀들이 올 수 있는지 나로서는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괜찮아요?" 이런 쪽팔린 모습을 보여줘야 하다니. 나는 혀를 찼지만 별 수는 없었다. 이에르네는 비아냥거리는 듯한 얼굴로 내 몰골을 바라보더니 푸르게 빛나 는 마법진을 한 번 다시 살펴보았다. 그녀의 뒤로 유티아가 급하게 물었다. "괜찮아요? 나의 왕?" 애들의 얼굴이 머슥하니 나타나자 나는 더더욱 쪽팔렸다. 아아, 이 상태로 여자들에, 거기에 애들까지 보게 되다니. "이거 풀려면 어떻게 하면 되나요?" 나는 흠칫했다. 이에르네는 미간을 찌푸리며 묻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되냐구요!" "몰라." 내가 시큰둥하게 대꾸하자 그녀는 흥 하더니 내 몰골을 다시 한 번 훑고 는 아직도 실드 안에 있는 마베릭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병사들은 이 미 다 죽어버린 상태였다. 시체더미 위에서 마베릭은 여전히 실드 안에서 룬드바르를 보호하며 유유히 버티고 있었다. 문득 이에르네와 쇼나가 자신 을 공격해 오자 녀석이 교활하게 웃으며 말했다. "마법진을 깰 방법을 알고 싶나요?" "그래! 이 미치광이놈아!" 이에르네가 손톱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간단합니다. 왕의 아내여." 녀석은 질 나쁜 웃음소리를 냈다. "저기 서 있는 저 여자만 죽이면 되는 겁니다." KUBERIN........ 분노는 오만 슬픔은 연민 10 그 말을 듣고 이에르네는 내 앞에 석상처럼 선 마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미심쩍다는 얼굴로 잠시 동안 녀석과 마미를 번갈아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흐응, 뭔가 속셈이 있군." 맞아, 똑똑하군. 이에르네야. 나는 한숨을 내쉬면서 외쳤다. "마베릭 놈이나 죽여버렷!" 그렇게 내가 막 외치는 순간, 갑자기 쿠쿵 소리와 함께 땅이 흔들렸다. 대 체 왜 땅이 흔들리는 지 고개를 들자 어느 새인지 마베릭의 마법사들인지 누군지 알 수도 없는 것들이 손을 벌리고 있는 게 보였다. 시커멓고 누런 로브를 걸친 자들은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주문을 뿌리고 있었다. "으, 우아앗!" 갑자기 사방이 뒤집혀 버리는 줄 알았다. 내가 엎드려 있던 땅이 그대로 바닥으로 내려 앉기 시작했다. 흙먼지와 굉음이 사방으로 터져나가고 나는 마미를 향해 손을 내밀려고 했다. 허나 나와 마미 사이에 갑작스레 매서운 칼날들이 줄지어 생기기 시작했다. 이, 무슨 황당한 짓거리야? 금속의 차가 운 냄새를 풍기며 수십개의 칼날의 숲이 마미와 나, 그리고 쓰러진 스카를 중심으로 투툭거리며 튀어 오르고 있었다. 대체 무슨 놈의 주문이 이렇게 짜증이 난단 말이냐? 나는 어떻게든 움직여 보려 했지만 이 지랄맞은 마법 진의 힘은 그대로 였나보다.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두 팔 뿐이었다. "우욱!" 갑자기 치솟은 칼날이 뺨을 스쳤다. 아앗, 아슬아슬했다. 하마터면 목을 그대로 꿰뚫을 뻔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안도도 잠시 뜨거운 불에 닿은 듯 옆구리를 사납게 찢으며 칼날이 솟아 올랐다. 나는 비명을 삼키며 몸을 일으켜 보려 했다. 그러나 여전히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 이 무슨 황당 무계한 상황이란 말이냐? 화끈한 아픔이 옆구리에서 허벅지까지 이어졌다. 창 하는 소리와 함께 또 다른 칼날이 바로 왼쪽 귀를 찢으며 또 솟아올랐 다. 나는 멀쩡한 손가락들에 힘을 주며 다시 몸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역 시 그것은 불가능했다. 이러다가 완전히 고슴도치가 될 지도 몰랐다. 나는 몸에 힘을 주며 변신을 시도했다. 허나, 여전히 힘은 줄 수 없었다. "쿠베린!" "쿠베린님!" 내가 있는 땅이 아래로 함몰했기 때문에 위의 사정은 보이지 않았다. 하 지만 악악대는 내 여자들의 소리와 시끄럽게 울려대는 이 땅이 내는 비명 때문에 귀가 다 어지러웠다. 우앗! 또 하나의 칼날이 이번에는 배를 제대로 뚫고 지나왔다. 뜨끈한 아픔. 으아, 이거야 말로 확실하게 내장을 다쳤는걸. 나는 숨을 멈추고 이를 악물었다. 고통이라는 두 글자가 등줄기를 지나 슬금슬금 발끝까지 닿는 것을 느끼 는 동안 이번에는 콰릉 소리와 함께 또 한 번 땅이 흔들렸다. 아예 땅 끝 까지 떨어지는 것인가 하고 아찔하게 생각하는 순간, 몸이 홱까닥 뒤집혔 다. "으헉!" 아프다. 제기랄, 더럽게 아파. 나는 칼날에 꽂힌 채 비스듬히 치솟은 땅으로 곤두박질 쳤다. 덕분에 옆구 리에 있던 칼날은 어디론가 사라졌지만 배에 꽂힌 칼날은 옆으로 이동해서 배를 더 찢어 놓았다. "허억, 허억." 피가 입안으로 튀어 나왔다. 이런 꼴로 좌중 앞에 서다니 정말로 창피해 서 말이 안 나오는군. 내가 헐떡이며 겨우 움직이는 손을 뻗어 내 배에 꽂 힌 칼날을 부러뜨리는 동안 멀리서 이에르네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쿠베린, 괜찮아요?" 사실 별로 먼 거리도 아니었다. 그러나 땅이 뒤집히고 갈라지고 말 그대 로 지랄발광을 한 덕에 나처럼 땅에 납작 붙어 있는 상태에서는 도저히 그 녀가 보이질 않는다. 그녀만이 아니라 주변 상황이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우와, 설마하니 이게 내 생애 최대의 위기가 되는 것은 아니겠지? 쿠베린. 갑자기 누군가가 부른 것 같은 생각이 들어 고개를 돌렸다. 내가 흘린 피 가 끈끈하게 목덜미로 흘러 굉장히 거북했다. 나는 이를 앙물고 손가락을 내 뱃속으로 쑤셔 넣고 내 뱃속을 휘젓고 있는 칼날을 부러뜨렸다. 크억, 아파 죽겠다. 부들부들 떨며 칼날을 뱃속에서 뽑아 내자 뭉클거리며 피와 내장이 함께 튀어 나왔다. 나는 이 끔찍한 물건을 멀리 치워버리면서 슬금 슬금 내 주변을 훑어보았다. 아까처럼 또 칼날이 버섯 솟듯 솟아나오면 곤 란했다. 아닌게 아니라 내가 누워 있는 주변은 온통 칼날로 번쩍이고 있었다. 어떤 미친 놈이 칼로 숲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사방이 1 메테 르도 채 되지 않을 칼날들로 가득했다. 수 십 개가 빽빽하게 솟아 있는 곳 도 있었고 한 두 개가 엉성하게 솟아 있는 곳도 있었다. 아마도 이 놈의 땅 이 이리저리 갈라지고 치솟아서 이렇게 된 모양이다. 지랄맞군. 고통은 점점 하체를 마비시켰다. 머리가 다 몽롱할 지경이었다. 변신도 하 지 않은 상태에서 이 모양이라면 정말 곤란하다. 게다가 이대로라면 출혈 도 만만치 않을 것이 분명했다. 다시 한번, 다시 한번 변신을 시도해 보지 않으면............ 쿠베린. 또 한 번 누군가가 불렀다. 아니, 누군가가 부르는 것만 같았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허, 설마하니 대지의 여신께서 부르는 소리는 아니겠 지? 여신께서 손수 <이리 와서 내 애인이나 해라> 따위를 속삭인다 해도 나는 거부할 테다. 그 뺨을 사정없이 두들겨 주지. 아직은 때가 아니라구! 난 포기 안 했어! 쿠베린.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몇 메테르 정도 떨어진 곳에, 세모꼴로 치솟은 둔덕이 새로 생겨나 있었다. 그리고 그 둔덕 이에 희끄무레한 것이 보였다. 그 희끄무레한 것이 살짝 흔들렸다. 뭐야? 쿠베린. "마미!" 나는 억지로 몸을 일으켜보려고 했다. 그 쪽에서는 내가 보일 것이다. 하지 만 나는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대체, 그녀는 어떤 상태인 거지? 나는 몸을 억지로 비틀어 일어나 보려고 애썼다. 저기에 마미가 있다. 가야만 했다. "우우욱." 억지로 기어 보려고 했다. 팔꿈치가 벗겨지도록 힘을 주었다. 하체는 이미 피투성이, 짐덩이에 불과했다. 나는 차라리 하체를 잘라버릴까 하고 잠시 동안 고민했다. 다시 한번 땅이 흔들렸다. 우르르 흔들리는 덕분에 나는 다시 한번 흙더 미에 고개를 처박은 상태로 나자빠졌다. 아니, 내가 나자빠진 게 아니라, 내가 널브러져 있는 땅이 비뚤어진 오각형으로 갈라지더니 제멋대로 홱 뒤 집혔던 것이다. 비명소리가 절로 났지만 나는 입을 다물었다. 입안으로 다시 피가 새어 나왔다. 이런 젠장할! 쿠베린. 하지만 한 번 더 뒤집힌 덕분에 마미의 모습은 어렴풋이 보였다. 말 그대 로 어렴풋이였다. 그녀의 옷자락으로 짐작되는 펄럭이는 그 무엇과 흩날리 는 흙먼지 사이로 보이는 실루엣이 전부였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아, 가야한다. 그녀가 기다리고 있다. 그녀는 항상 나를 기다릴 것이다. 내가 가지 않으면 그녀는 죽는다. 나는 이를 악물고 다시 몸을 일으켰다. 의외로 땅이 뒤집혔기 때문인지 조금은 움직일 수 있었다. 나는 기었다. 피로 완전히 젖어 버린 아래를 무 시하고 팔꿈치가 벗겨져라 기었다. 쿠베린. 알았어, 마미. 내가 갈게. 걱정하지 마. 다 잘 될거야. 내가 간다구. 나는 항상 너에게로 돌아왔잖아? 절대로 널 버리지 않아. 내 푹신한 마미, 절대 로 나는 너에게로 돌아간다고. 고개를 들고 그녀를 향해서 나는 다시 한번 힘을 주었다. 나지막한 흙더미에 불과할 텐데도 움직이기란 정말로 힘이 들었다. 게다가 같잖지도 않은 그놈의 칼날이 곳곳에 솟아 있어 그냥 순순히 기어가기란 불가능했다. 하는 수 없지. 그녀가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쿠베린. 간다고, 마미, 꼭 간다. 나는 고개를 들고 그녀 쪽을 바라보았다. 의외로 그 얼굴이 보였다. 어떻게 된 걸까? 아까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았었는데. 그녀는 분명히 두 팔을 벌 린 채 석상처럼 굳어 서 있었다. 하지만, 아까와 다른 것은 조금씩 움직이 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두 눈을 부릅떴다. 이봐, 설마, 설마.... 머릿속에는 아무 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마미! 오지 마!" 마미는 나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 아름답지도 않은 두둑한 팔과 어깨, 몇 번이나 갈라지고 헤어진 손등과 굵 어진 손마디. 그 손이 나를 향해 벌려져 있었다. 그녀는 무표정했다. 하지 만 미소짓고 있었다. 그녀를 만난 지 30년. 처음 만났을 때보다도 아름다운 미소가 주름진 눈가에서 입가로 흘렀다. 그녀가 저렇게 웃는 것이 대체 몇 년 만의 일일까? 그녀가 나를 향해, 저렇게 웃었던 것은 대체 얼마만의 일 일까? 그녀는 자랑스러운, 그러면서도 하염없는 애정의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다. 두 팔을 벌리고 선 그녀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나를 향해 속삭이고 있었다 사랑하는 나의 아이. 눈물대신 웃음이 그녀의 눈가에서, 입가에서, 얼굴 전체로 퍼져나갔다. 세 상에서 가장 행복한 듯한 그 미소가 나를 향했다. 그녀는 두 팔을 벌린 채 내 앞으로 걸어왔다. 마치 통나무처럼 뻣뻣한, 아 주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지만 분명히 걷고는 있었다. 한 발이 아주 어렵게 조금 전진하면, 그 다음 발이 그 뒤를 따랐다. "안 돼!" 그녀가 한 걸음 걷자, 그녀의 발등이 날카로운 칼날에 찢겨져 나갔다. 피 가 분수처럼 솟아났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웃음을 머금은 채로 그녀 는 걸었다. 교활한 짐승같은 창날이 그녀의 허벅지를 찔렀다. 또 다른 칼날 이 그녀의 두툼한 허리를 갈랐다. 그녀는 그러고도 걸었다. 그녀의 커다란 몸에 칼날이 달라붙는 것만 같았다. 그것들은 살아 있는 은빛 뱀처럼 그녀 의 배를 갈랐다. 비틀거리는 걸음에 그녀가 천천히 앞으로 쓰러지자 기다 렸다는 듯 다른 칼날이 가슴을 찔렀다. 가슴에서 붉은 꽃이 피어나 그녀의 얼굴로, 내 얼굴로 튀어 올랐다. 그녀는 그래도 두 팔을 뻗은 채 나에게 걸 어와 자신의 피를 나를 향해 내주었다. 고통대신 희열에 가까운 빛을 띄운 그녀의 눈가와 달리 그녀의 입가는 피를 뿜으며 웃고 있었다. 그녀의 온몸 을 칼날이 찢는 동안 그녀는 나를 향해 미소했다. 마치 행복하다는 듯이. "마미......" 비명소리가 멀어져갔다.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귓속이, 손끝이 마비되어 갔다. 그녀는 따스한 피를 내 주변에 흘렸다. 피 냄새가 코로 스며들더니 단숨에 머릿속 깊은 뇌수까 지 치솟았다. 나는 내 앞에서 쓰러진 인간의 여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가여운 여자, 그녀는 나와의 유희를 즐겼었다. 자식과 어미, 어미와 자식 간의 즐거운 유희였을 터였다. 그저 그런 것이었을 터였다. 그러나......... "마미.......설마, 아니겠지?" 나는 그녀를 불렀다. 나는 그녀의 이름조차 몰랐다. 그저 나에게 있어 그녀의 이름은 어미였을 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아이였다. 그녀는 짙은 피냄새가 일렁이는 공간을 헤집고 내게 다가왔다. 공간을 찢고 단숨에 내 손을, 내 발을 본래대로 돌려놓았다. 나는 그 손을 처음으로 써서 내 어미를 끌어안았다. 뜨거운 피가 손가락사이로, 흘러내렸다. 내 어미의 피가 내 몸 위로 흘러 내렸다. 사랑스러운 여자, 사랑스러운 내 어미. 30 여 년 전에 이미 당신은 내 어 머니가 되었었던 것을 나는 이제야 깨달았어. 용서해 줘. 당신은 아이를 위 해 죽고 싶어하는 어미였다는 것을 잊었던 나를 용서해 줘. 내 얄팍한 기 분으로 당신을 희롱했던 것을 용서해 줘. 왕 쿠베린이 아니라 엘리야의 당 신 아들 쿠브로서 바라봐 주었던 당신을 몰랐던 나를 용서해 줘. 마법진은 피로 풀렸다. KUBERIN........ 분노는 오만 슬픔은 연민 11 비명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는 것을 나는 무심히 듣고 있었다. 품안에 안긴 여자는 나를 몇 번이나 살렸던 여자였다. 잠깐 동안 모른 척 하고 있었지만 확실히 그녀는 나를 몇 번이나 살렸다. 내가 그녀를 살리고 그녀가 나를 살렸다. 그런 것을 나는 나 혼자 그녀를 보호하고 있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얼마나 웃기는 짓거리, 얼마나 가련한 오만이냐. "쿠베린." 분노에 겨워서 날뛸 거라고 생각했던지 스카는 나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 다. 피투성이가 된 그의 얼굴도 무척이나 지쳐 있었다. "마미......" 그는 스스로 자신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는 다가오더니 나를 덥썩 끌어안 았다. 녀석은 난로였다는 것을 증명하듯 따스했고, 어미는 어미답게 죽어서 도 따스했다. 스카의 입김이 목덜미에 닿았다. 녀석은 흐느끼고 있었다. 뜨거운 눈물이 계속해서 차갑게 얼어붙은 내 체온을 녹였다. 따스하다. 따뜻하다. 이상할 정도로 기분은 담담했다. 아니, 어쩌면 이미 미쳐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왜 하필 그녀가 여기에서 죽어야만 했고 그것도 마법의 매개체 따위가 되어 날 지키겠답시고 스스로 칼날위로 몸을 던졌던가. 그녀를 안은 채 내 쪽으로 다가오는 유티아와 쇼나등을 바라보았다. 그녀 들은 눈이 커진 채 내쪽으로 단숨에 달려와 나를 바라보았다. 피투성이가 된 나와, 피투성이가 된 인간 여자의 시체, 그리고 바보처럼 흐느끼고 있는 인간 남자. "뭐야? 아빠?" 멍하니 에이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아소미나가 손을 뻗어 피투성 이가 된 내 팔을 잡아 왔다. 작고도 따스한 손. "왜 우는 거야? 왜 아빠는 울고 있는 거야?" "슬퍼서." 나는 간단히 대답했다. 의외로 목소리도 마음 속처럼 담담했다. "그 인간 여자는 뭐야?" "죽은 그 여잔 뭐야?" 케논이 물었다. 에이리가 물었다. 아소미나가, 야히르가, 드레인이.......... "아빠의 엄마." 아아 하고 아이들이 한숨을 몰아쉬었다. 전에 마미를 보았던 아이들은 일 제히 마미에게 달려들어 그녀의 얼굴을 보려고 작은 손을 내밀었다. 이렇 게나 무참할 정도로 죽음에 태연한 아이들을 보면서 나는 쓰게 웃었다. "마미, 마미잖아?" 안타까운 듯 에이리가 한숨을 내쉬었다. 드레인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제 어미처럼 한숨을 내쉰다. "맛있는 수프를 끓여 주었는데." 나는 아이들의 감상을 하나씩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스카가 나를 부 축하려다가 비틀거리는 통에 나는 하마터면 마미의 몸을 안은 채 뒤로 넘 어 질 뻔했다. "여, 스카." 나는 그에게 마미의 시체를 내밀었다. 스카는 잔뜩 눈물이 고인 눈으로 마 미를 안아 들었다. 그가 비틀거리면서 그 시체를 안아 드는 것을 확인하고 서 나는 천천히 걸었다. 내장이 쏟아져 나오려고 요동하는 것을 억지로 잡 아 누르면서 상처가 아물기를 기다렸다. "아빠, 아파?" 아소미나가 문득 내 손을 잡고 물었다. 나는 웃으면서 대답대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소미나의 밝은 색 머리에 검붉은 피가 묻었다. 여전히 소리는 계속 되고 있었다. 하지만 어쩐지 현실감이 없다. 쨍쨍거리는 이상한 소리와 피로 물든 주변, 이상하게 칼날의 숲과 일그러 진 대지. 나는 그 모든 것을 먼 곳에 있는 것처럼 느끼면서 이에르네와 로 오나가 이를 악물고 계속해서 공격을 퍼붓고 있는 마베릭이 있는 쪽으로 걸었다. 기묘한 환수들이 으르렁대며 케이링과 맞붙어 싸우고 있었다. 어느 새인 지 달려온 쇼나가 마법사들을 향해 공격을 퍼붓고 있다. 마법의 환수와, 봉 인수와, 소환수까지 으르렁거리는 주변은 완전히 정신이 없을 정도로 시끄 러웠다. "죽엇!" 로오나는 필사적이었다. 그녀는 이미 변신한 상태였고 눈 앞에서 실드를 치고 있는 마베릭을 죽이기 위해 혼신을 기울이고 있었다. 으르렁거리는 이빨, 이미 시뻘겋게 물든 눈동자, 전신을 가득 메운 은발에 가까운 금빛 털과 잔뜩 솟아난 손톱과 발톱이 실드를 공격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마베릭은 여유로운 얼굴이었다. 그의 바로 옆에 룬드바르가 실드 아래서 변신한 채 공격을 퍼붓느라 정신이 없는 로오나와 이에르네의 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주머니에서 해약석을 뽑아 들었다. 문득 아직도 떨어져 나간 게 아니었는지 품속에서 용새끼가 툭 하고 떨어진다. 나는 무심히 그것을 도로 품안에 쑤셔 넣었다. 용새끼는 제법 따스해진 상태였다. 실드 안에 있던 마베릭과 내 눈이 마주쳤다. 녀석은 잠깐 미간을 찌푸리 고는 일그러진 웃음을 내게 던졌다. 그래, 인간의 감정을 느껴봐라 그거냐? 나는 해약석을 손바닥에 쥔 채로 잠시 굴렸다. 햇빛을 받은 보석이 반짝 빛을 발했다. 여전히, 묘하게 현실과 유리된 감각이었다. 머리가 띵했다. 배를 만져보니 배는 반쯤 아물기 시작하고 있었다. 옆구리도, 귀도 이미 출혈은 멈춘 지 오래였다. 녀석의 실드를 향해 해약석을 던졌다. 햇빛을 받으며 포물선을 그리면서 보석은 마치 그림처럼 우아하게 녀석의 실드로 떨어져 내렸다. 콰쾅― 제법 커다란 소리를 내며 실드가 해제되었다. 멀리서 룬드바르의 얼굴이 허옇게 질린 것이 보였다. 마베릭은 해제되는 그 순간 믿을 수 없다는 듯 잠깐 내 쪽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햇빛에 하얗게 빛나는 로오나가 마베릭의 몸을 그대로 덮쳤다. 그녀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마베릭의 목을 그대로 갈가리 찢었다. 손톱 이 움직일 때마다 빛과 빛이 갈라지고 반사되며 검은 액체를 뿌렸다. 피가 분수처럼 솟아나 쓰러져 있던 룬드바르의 몸을 적셨다. 피는 심지어는 제 법 멀리 있는 이에르네에게까지 쏟아졌다. "우와아앗!" 로오나는 고개를 갸웃 하더니 마베릭의 머리통을 잡은 채 훌쩍 뛰어 아직 까지 싸우고 있는 케이링등과 마법사들 사이로 끼어 들었다. 봉인수 하나 가 그녀의 손톱에 의해 갈가리 찢겨져 나갔고 마법사는 비명을 올리며 뒤 로 물러섰다. 몇 몇이 공간을 찢고 달아났다. 몇 몇이 실드를 펼친 채 주저 앉았다. 현기증이 날 정도로 피와 피가 계속해서 새파란 하늘 아래서 춤을 추었다. 변신 탓에 어린 로오나는 이미 이성이란 거의 남아 있지 않을 텐데도 아 직도 마베릭의 목을 쥐고 있었다. 마치 그녀는 마베릭의 머리를 어떻게 할 까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쿠베린님!" 갑자기 차가운 바람이 불어 내 뺨을 스쳤다. 나는 멍하니 있던 정신을 추 스르고 고개를 들었다. 커다란 그림자가 내 머리 위에서 흔들렸다. 그녀는 피처럼 붉은 날개를 활짝 편 채 내 바로 앞 공중에 떠 있었다. 마치 태양처럼 화려한 그녀의 주변으로 룬드바르의 병사들을 해치우고 있 는 조인족의 전사들 몇이 보였다. "나의 아브." 나는 감격한 어조로 손을 뻗어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아브, 이 사랑스런 조인족의 여왕은 내게 발을 잡혀서 놀랐는지 잠시 날개 를 퍼덕거렸다. 약간 홍조가 얼굴에 스쳐 가는 것을 나는 즐겁게 바라보며 웃어 주었다. "당신이 와서 기뻐!" "그, 그랬나요?" 그녀는 당혹한 어조로 내가 자신의 맨 발을 쓰다듬고 있는 것을 거북하게 바라보았다. 조인족들은 신발을 신지 않기 때문에 나는 그녀의 맨발을 만 질 수 있었다. 간지러워서 그러는 지 그녀는 발을 조금 움츠리고는 눈을 흘겼다. "이미 상황은 끝난 것 같은걸요." 그녀의 말 대로였다. 이미 무기를 잡는 자들도, 공격해 오는 자들도 아무 도 없었다. 몇 몇이 죽어가며 신음을 내뱉었고 늘어진 채 상처를 부여잡고 공포에 찌들어 있었다. 그 중에서도 나는 룬드바르녀석이 멍하니 입을 벌 린 채 아직도 살아 있는 것을 보고 조금 놀랐다. "정말, 끝났군요." 내가 다시 한번 매력적인 미소를 던지며 대답했다. "응." "쿠베린님?" "아?" "뭔가, 무슨 일이 있었던가요?" 그녀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우아하게 날갯짓을 하며 내 옆으로 내려섰 다. 덕분에 차가운 바람이 뺨과 이마를 덮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아무 일도." 그녀는 이상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딘가 미묘하게 흔들리는 그 시선에 나는 매력적인 웃음을 지어 보였다. "별 다른 일은 아무 것도." "하지만 평소와는 어딘가........."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놀랍게도 내 얼굴을 만지려 했다. 나는 그녀의 손 길을 느끼며 꿋꿋하게 그대로 서 있었다. 약간 걱정스러운 듯 변한 그녀는 피로 엉겨 버린 머리카락을 만져 주더니 뒤에서 마미의 시체를 안은 채 멍 하니 선 스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몇몇 조인족이 그를 공격하려다가 엘 레의 제지를 받고 물러서고 있었다. "누군가요?" "내 난로요." "난로?" 그녀는 아아 하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가 안고 있는 마미의 시체를 보며 물었다. "저건 누구인가요?" "..........나의 어머니." "네?" 놀란 그녀의 얼굴을 보고 나는 그대로 그녀의 얼굴을 잡아 당겨 입술을 겹쳤다. 따스한 숨결, 따스한 살결. 그 향기로운 몸을 끌어안고 나는 계속 해서 키스를 퍼부었다. 혀로 입안을 핥고 살아 있는 것을 맛본다. 입술이 찢어질 정도로 빨아 피를 맛본다. 그리고 두근거리며 뛰고 있는 심장을 느 낀다. "............"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렇다. 그녀는 죽었다. 아브란의 몸을 끌어안은 채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고 그녀의 붉은 눈썹과 나를 똑바로 바라보는 청량한 눈동자에 경의를 표했다. 그리고 마미. 이미 죽은 지 30년이 지난 내 어미에게도. 변신이 풀린 로오나가 넋을 잃은 듯한 얼굴로 케이링의 부축을 받고 일어 서고 있었다. 이에르네는 내가 아브란을 안고 있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잔뜩 얼굴을 찌푸린 채 내쪽으로 달려왔다. 시체와 시체를 건너 뛰어 그녀 는 곧장 내 앞으로 달려들었다. "쿠베린!" 그녀가 막 고함을 지르려는 순간, 로오나가 내 앞으로 곧장 달려와 무릎을 꿇었다. 아직도 마베릭의 머리통을 잡고 있는 그녀는 여전히 몽롱한 눈빛 이었다. 그녀가 무릎을 꿇자 뭔가 항의하려던 이에르네도, 케이링도, 유티 아도 쇼나도 모두 입을 다물어 버렸다. 로오나는 피투성이에 잔뜩 엉긴 금 발의 머리카락을 힘없이 늘어뜨린 채 내 발밑에 무릎을 꿇고 수그리고 있 었다. 벌을 받기 위해 도사린 인간의 어린애처럼 무력해 보였다. "일어나." 내 말에 그녀는 고개를 살짝 들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 몽롱한 눈빛을 보 며 나는 쓰게 웃었다. 대체 어쩌랴. "일어나. 아직 플라티나를 찾지 못했다." 플라티나의 이름을 듣자 그녀의 눈이 다시 빛났다. 그녀는 벌떡 일어서더 니 사방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마치 어딘가에 아이가 홀로 서 있기라도 한 듯. 그 모습을 보고 아소미나가 재빨리 달려와 어미의 손을 잡아 당겼다. "아아." 로오나는 아소미나를 보고 홀린 듯 미소지었다. "아소미나, 엄마를 잘 돌봐라." 내 말에 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로오나를 끌어당겼다. 그 모습에 다시 무 거운 침묵이 주변을 휩싸고 돌았다. 피와 시체, 시체와 피. 질릴 지경으로 피곤했다. 자고, 먹고, 쉬고 싶었다. 스카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는 입을 저억 벌린 채 날 보고 있었다. 그는 마미의 시체를 부축하며 주섬주섬 일어서더니 조인족 여왕과 나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그새 새, 새로운 여자냐?" "아? 하하하하하....스카, 그런 망발을 입에 담다니. 이쪽은 조인족의 여왕 이시다. 그렇게 함부로 입을 놀리다가는 언젠가 뒤통수 맞고 뒈질 날이 온 단다." 나는 상냥하게 말해주면서 아브란을 소개했다. 그녀는 어리둥절한 얼굴이 었지만 새삼 내가 손을 뻗자 어색한 한숨을 몰아 쉬며 나를 끌어안았다. 결코 이유를 묻지 않는 여자. "이, 바람둥이 새끼!" 옆에서 스카가 큰 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녀석은 소리치다 말고 자신의 손안에서 흘러내리는 마미의 시신을 억지로 추스렸다. 그래, 마미, 덩치도 큰 나의 어미여. 생각하고 보니 스카보다도 덩치는 컸어. 스카는 약간 버거운 듯 주섬주섬 마미의 시체를 자신의 몸에 묶었다. 아마도 안고 돌아다니기에는 힘들어서 그렇겠지. 내가 녀석을 빤히 보고 있자 녀석은 내 시선을 받고는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시신을 어떻게 할까 하고 고민하는 듯한 그 표정에 나는 피식 웃어 주었다. 죽은 자는 대지의 여신에게. "하지만, 그녀를 엘리야로 데리고 가지 않으면........." 울적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는 스카를 모른 척하고 나는 마미의 시신을 받 아 바닥에 눕혔다. 잊으면 안 돼. 그녀는 나를 위해 죽은 내 어머니야. 만 약에 그렇다면 묘인족 방식으로 해야 할까, 인간의 방식을 따라야 할까. 나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여기는 너무나 시끄럽고 너무나 너저분했다. 망 해버린 고왕국의 왕궁 한 구석에 설마하니 그녀를 묻을 수는 없지. 사방이 온통 시체라 이 시체 저 시체 마구 엉겨서 뭐가 뭔지도 모르게 될 거야. 피투성이의 시신을 내려다보았다. 역시, 좋은 장례란 것은 그럴듯한 묘비명 과 그럴 듯한 장지(葬地)가 필요한 법. 나는 그녀의 시체를 안고 달렸다. 뒤에서 뭐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신경은 쓰지 않기로 했다. 그래, 어떻게되었든 그녀의 시체를 안고 돌아다 닐 수는 없지. 그건 그녀의 안식을 방해하는 것뿐이니까. 그녀의 시체에 꼬 이는 벌레들을 물리치고 대지의 여신의 손길을 거부할 수 있는 방법은 아 무 것도 없었다. 나무들이 나뭇가지를 비비며 노래를 한다. 나뭇가지들이 흔들릴 때마다 깨지는 햇살이 노래를 한다. 오래된 나무들이 그 거대한 몸을 곧추 세우며 노래를 한다. 작은 새들도, 작은 벌레들도. 그리고 우울한 바위들도. 쿠야마라스토네는, 어쩌면 묘비로 썩 어울리는 나무일지도 모른다. 쭈욱 뻗어 내린 강한 동체와 여간해서는 흔들리지도, 휘지도 않는 견고함. 그리 고 무엇보다 숨이 막힐 정도로 주변의 공기를 무겁게 만드는 점에서 말이다. 나는 마미의 시체를 숲 속의 어느 나무아래 내려놓았다. 이름 모를 잡초 사 이로 벌레들 몇 마리가 놀라 달아난다. "여기서 쉬는 거야. 마미가 보던 바다는 아니지만, 여기도 바다는 바다야. 나무들의 바다." 그녀를 묻을 구멍을 파면서 나는 낮게 속삭여 주었다. 그래, 그러니까 여기에 있어. 마미가 대지의 여신에게 돌아가면 어디든 나 는 이 땅을 밟고 서 있는 한 마미와 함께 하는 것이니까. 나를 기다리느라 다리가 퉁퉁 붓도록 서 있거나 할 필요도 없어. 그저 편안히 누워. 이미 굳어버린 핏덩이를 닦아 내면서 나는 그녀를 땅 속에 묻었다. 인간 들이 하듯이 땅속에 묻으면서 울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고 그저 한숨을 내쉬었다. 울음은 울음. 한숨은 한숨. 죽음은 언제나 내 옆을 따라 걷는다. 잊지 말라고 휘파람도 불고 노래도 부른다. 때로는 내 왼쪽 어깨 위에 올라앉아 상냥한 미소를 짓고 잔인한 목소리로 끊임없이 속삭인다. 잊지 말라고. 절대로 잊어선 안 된다고. 나는 몸을 돌려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가슴이 아파도 이번에는 숲도 울지 않는다. 땅도 울지 않는다. 울 필요가 없으니까. 그녀는 바라는 대로 죽었으니까. 멍청한 내 머리통을 가차없이 후려갈기고 나를 감싸 안은 채 그대로 죽었다. 안녕, 마미, 내 어머니. 자식은 어미의 품을 박차고 다른 곳을 향해 달린다. KUBERIN........ 분노는 오만 슬픔은 연민 12 금방 돌아왔기 때문에 스카도 다른 자들도 내가 뭘 하고 돌아 왔는지는 빤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스카의 얼굴을 보자 어쩐지 서글픈 것 같은 생 각이 들었다. 녀석은 뭐라고 막 나에게 말을 걸려고 하다가 갑자기 몸을 숙이고는 바닥을 훑기 시작했다. 이 자식이 설마하니 땅을 치고 통곡이라 도 하려고 이러나 싶어 순간 긴장했다. 그러나, "기다려, 분명히 여기에....." 녀석은 아까 내가 내던진 정령석을 집어 들었다. ".........너." 가끔 생각하지만 인간의 감정이라는 것은 참으로 단단하기도 하다. "이거 중요한 거잖아? 나와 마미를 인질로 삼았을 만큼. 그런데 이렇게 버 려두면 안 되지." 이 녀석은 이 와중에 별걸 다 챙기고 있었다. 하지만 손가락이 떨리고 있다는 것을 숨기지는 못했다. 녀석은 잔뜩 긴장 한 채 이를 꽈악 물고 흙바닥을 뒤졌다. 마치 그 짓거리를 하지 않으면 내 게 눈물로 시뻘겋게 짓무른 눈두덩이를 보여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듯이. 그가 네 개인가 집어 들었을 즈음 나의 아브가 낮게 신음했다. "저런." "으, 아아아아아악!" 비명이 울려 퍼졌다. 덕분에 시키지 않아도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한 곳 에 쏠렸다. 비명을 지른 것은 놀랍게도 아직도 살아 있는 룬드바르였다. 그는 결사적으로 달아나려는 듯 버둥거리고 있었는데 그의 어깨를 잡고 일으켜 세운 것은 다름 아닌 목이 없는 마베릭의 시체였다. 피가 아직도 쿨럭쿨럭 쏟아지는 그 시체가 그의 어깨를 잡고 있는 것이다. 룬드바르는 완전히 공포에 질려버렸다. 허기야, 누구든 목 없는 시체가 자신의 몸을 주 무르고 있다고 한다면 당연히 끔찍할 밖에. "저리가! 저리가! 저리 가라!" 그는 미친 듯이 마베릭의 몸뚱이를 걷어차기 시작했다. "저리 가라! 괴물! 저리 가라!" 목이 없는 마베릭의 몸은 그래도 여전히 룬드바르의 어깨를 잡고 서 있었 다. 마치 나름대로는 보호하겠다는 의미인 것처럼 보였지만 완전히 공포에 질린 룬드바르로서는 그런 것을 납득하기란 무리였다. "으아아악! 이 괴물!" 그는 주먹질을 해댔지만 놈의 몸이 어디 좀 질긴가. 아무리 걷어차도 그 몸은 흔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은 지도 모른다. "접니다. 주군." 로오나의 손에 매달린 마베릭의 목이 그렇게 말한 순간, 로오나는 놀라 그 목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데구르르 구른 그의 목이 공교롭게도 룬드바 르의 정면으로 떨어져 얼굴이 마주쳤다. 흙이 묻고 피가 묻긴 했지만 허연 녀석의 낯짝은 분명히 생생한 생기를 띄고 있었다. 그 모습에 넋이 나간 룬드바르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을 뻔했다. "진정하십시오." 마베릭의 얼굴은 약간 일그러져 있었다. 그렇게 찢겨져 나간 목에서는 아 직도 피가 흐르고 충격때문인지 한쪽 눈알은 찌그러졌다. "괴, 괴물이야. 세, 세상에!" 룬드바르는 넋을 잃은 채 중얼거렸다. 그는 입술을 악물고 잠시 동안 마 베릭의 얼굴에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 잠시라도 마베릭은 고개를 돌 릴 수 없었다. 혼자 떨어진 머리통은 혼자 움직일 수 없었으니까. 그도 잠 시, 마베릭의 몸뚱이가 비틀비틀 걷더니 자신의 머리통을 주워들었다. 그리 고는 곧이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자신의 어깨 위에 올려놓았다. 휴런이 있었다면 재미있어 죽었을 게다. 그는 잠시 동안 침묵했다. 목이 도로 붙는 동안, 살점과 살점이 이어지고 찌그러진 안구가 바람 불어넣은 돼지 오줌보처럼 다시 부풀어올라 본래의 모습을 하기까지는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녀석은 평소와 달 리 모습이 회복되어도 움직이지 않았다. 녀석은 잠시 동안 넋을 잃고 자신 을 외면하고 선 룬드바르의 등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주군, 일단 이 자리를 피하시지요." 녀석은 의외로 그렇게 말했다. "이, 이 괴물 저리 가!" "적당히 하십시오, 주군. 대륙의 황제이신 분이 이 무슨 추태입니까?" 녀석은 일그러진 얼굴로 미소지었다. 하지만 룬드바르는 별로 표정을 관리할 마음은 없었던 모양이다. 그는 자 신을 잡으려 하는 마베릭의 손을 후려치고 뒤로 몇 발자국이나 물러서더니 한 참 동안 씨근덕거렸다. 공포로 다리가 후들거리는 모양이었다. "이, 이런 괴, 괴물이.....너, 너라는 것은 대체! 정말로 인간인가?" 그는 억지로 위엄있는 목소리를 내려고 애를 쓰면서 숨을 몰아 쉬었다. "새삼스럽게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입니까?" 녀석은 일그러진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는 증명하듯이 자신의 팔과 다리 를 룬드바르의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나 룬드바르놈은 마치 묘인족을 본 사인족처럼, 아니, 사인족을 본 조인족처럼 혐오스럽다는 듯 바라보았을 뿐 이었다. 그 몰골을 보고 있던 마베릭은 쓴 웃음을 지으며 속삭이듯 말했다. "당신은 대륙을 정복할 마법사가 필요했을 뿐 아니었던가요?" 그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잔뜩 혐오와 공포가 뒤섞인 히스테릭한 여자 처럼 힐끗거리며 마베릭놈을 쏘아보았을 뿐이었다. 그 모습은 아무래도 막 색마에게 시달림 당하는 가련한 처녀몰골이어서 나까지도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 정도였다. 하지만, 녀석은 가련한 처녀도 아니었고 마베 릭 역시 색마는 아니다. 룬드바르는 잔뜩 굳은 얼굴로 얼굴을 들더니 천천히 마베릭쪽으로 몸을 돌렸다. 하지만 여전히 시선은 피한 채였다. "왜 카산드라는 오지 않는 거지? 그녀와 넌 무엇을 하고 있었던 거지?" 갑자기 그는 화제를 바꾸었다. "왜 갑자기 그게 궁금해지신 겁니까? 그동안은 한 번도 묻지 않았으면서?" 마베릭은 고요하게 물었다. "너, 정체가 뭐야?" 시퍼렇게 질린 낯짝을 한 룬드바르 놈은 일그러진 얼굴로 나와 여자들, 그리고 조인족의 여왕을 돌아보더니 다시 마베릭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 치 모두를 대변해 묻고 있다는 듯한 태도여서 나는 조금 흥미진진해졌다. 그래, 하고 싶은 대로 해 봐라. "마르케스가 계속해서 말할 때부터 알아채야 했어! 너는 어떤 괴물을 만들 고 있는 거냐?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야?" "저희들은 마법병단과 최강의 병사들을 약속했고, 그대로 이행했습니다. 그것에 대해 불만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마베릭은 고저 없는 말투로 말했다. "너희들이 정말 나를 주인으로 섬기고 있다면 분명히 말을 해라! 무슨 짓 을 벌이고 있는 거냐!" "당신이 정말로 우리들을 신하로 여기고 있다면 왜 똑바로 보지 못하는 겁니까?" 마베릭은 차갑게 물었다. 순간적으로 룬드바르의 몸이 굳었다. 그는 마베릭을 노려보려 눈에 힘을 주긴 했지만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앞에 있는 것 이 그저 강한 마법사가 아니라 괴물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고 있는 모양이 었다. "이제 대륙통일을 눈앞에 두고 있으시니 잡념이 생기신 모양이군요. 우리들 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 옛날 룬드바르의 작은 시골에서 당신 앞에 나타났을 때나 지금이나." 녀석은 그렇게 말하더니 오만하게 턱을 반듯하게 들고는 명령하듯 말했다. "주군답게 행동해 주십시오." "네, 네 이 놈! 이 괴물놈!" 그는 이를 갈았고 마베릭은 시니컬하게 웃었다. 우리들 모두는 이 두 주종의 웃기면서도 웃기는, 꽤나 불쌍한 대화를 들 으면서 침묵했다. 어쩐지 이 상황이 뭔가 꽤나 꼬여 있다고 생각되서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었다. 더 이상 이들의 몰골을 봐줄 수가 없었던지 갑 자기 송곳니를 드러내며 늑대 한 마리가 마베릭의 팔뚝을 움켜쥐었다. 잔 뜩 일그러진 그 얼굴과 상처투성이의 몸은 반인반수의 형태였음에도 불구 하고 뚜렷한 어조로 묻고 있었다. "내 아이는 어디있어? 내 아내는!" 어디서 잃었는지 녀석은 외팔이었다. 이빨들로 가득한 입가에선 시뻘건 혓 바닥이 꿈틀거렸고 뭉툭한 손톱은 시커멓게 피로 물들어 있었다. "너, 내 아내와 아이를 잡아 간 마법사와 한 패지? 그렇다면 내 아내가 어 디에 있는 지도 알고 있겠지?" 마베릭은 더러운 것이 닿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자신의 팔뚝을 움켜쥐고 있는 자신보다도 머리 하나가 더 큰 수인족을 경멸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대답해!" 녀석의 발톱에 마베릭의 옷자락이 찢어졌다. "내가 어떻게 알겠어? 한낱 수인족 한 둘 따위 나는 몰라." "이, 이 죽일 놈!" 미안하지만, 저 정신 나간 수인족이 말하는 <아내와 아이>는 묘인족이라네. 나는 혀를 쯧쯧 차면서 마베릭과 케슈파란의 신경전을 무시하고 큰 소리로 입을 열었다. "자, 이제 슬슬 움직이지." 그 말에 일제히 시선이 내 쪽으로 몰렸다. "저, 분홍주둥이 놈의 마법쇼는 일단 접어 두고 가장 큰 문제부터 해결합시 다. 친애하는 룬드바르 애송이. 너는 내 아이들이 어디 있는 지 알아내도록 해라. 그게 과제야." "뭐?" 룬드바르는 멍하니 날 바라보았다. "정말 죽고 싶은 건 아니겠지? 내 아이들이 어디 있는 지 그것부터 말하라고." 마베릭은 창백한 얼굴로 날 돌아보았다. "내가 심장을 빼냈다고 말했지 않습니까?" "내 아이들은 한 명이 아냐." 내가 조용히 말하자 녀석은 비틀어진 웃음을 짓더니 갑자기 정중하게 고개 를 숙였다. 마치 연극하듯 절하는 놈의 몰골은 정말로 광대 같았다. "하하하....존경하는 위대하신 묘인족의 임금님, 정말로 당신의 냉혹함과 냉정한 판단에는 경의를 표합니다." "내가 잘났다는 것은 온 세상이 다 알고 있어. 그러니까 이제 좀 쓸데없는 것말고 쓸모 있는 것을 지껄이는 게 어때?" "당신의 그 인간 여자가 그렇게 희생했는데도 당신은 여전하네요, 정말로 그렇게 몇 방울 눈물을 흘리고 끝인 겁니까?" 녀석은 이상하게 비뚤어진 웃음을 머금으며 다시 물었다. "네 알 바 아냐. 그나저나 어서 대답이나 해. 내 아이는 어디 있어?" "글쎄요." 녀석은 자신의 팔뚝을 잡고 있는 케슈파란을 향해 마법이라도 쓰려는 듯 손을 들어 올렸다. 녀석이 입술을 달싹이는 것을 막으려 내가 막 돌멩이를 던지려는 찰나였다. 갑자기 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설마하니, 저 멍멍이 케슈파란이 쥐고있는 팔뚝이 아파서 그런 건 아니겠지? 녀석은 잠시 동안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케슈파란과 나를 번갈아 보더니 묘하게 일그러진 웃 음을 머금었다. 당장이라도 죽어 나자빠지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로 묘한 웃음이었다. "이봐라." 내가 다시 녀석을 부르려는 순간, 마베릭이 고개를 저으면서 물었다. 당장 이라도 쇳조각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쉰 목소리였다. "그런 걸 내가 말할 거 같습니까?" 내 말을 받은 것은 마베릭이 아니라 조인족의 여왕이었다. "이 자를 죽이고 찾아보도록 하지요." 그녀의 말은 냉혹했다. 살기에 찬 그녀의 눈동자는 얼음보다도 차고 매서웠다. 나는 문득 그녀가 풀려난 조인족 놈들과 만난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어 무심코 위를 올려 다보았다. 아닌게 아니라 시퍼런 살기로 똘똘 뭉친 듯한 조인족 전사들이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십 수명의 조인족 전사들은 자신들의 동족이 어떤 일을 당했는지, 그들의 아이들이 어떤 일을 당했는지 알아버린 모양이다. 하긴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여기에 왔을까. "살아 있는 것을 가지고 장난을 친 죄는, 무겁다." 그녀는 긴 말을 하지 않았다. 나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베릭은 창백한 얼굴을 한 채 나를, 그리고 아브란을 바라보고 있을 따름 이었다. 룬드바르는 시퍼렇게 날이 선 것 같은 살기 속에서 움직일 수 없 었던 지 그저 굳어 있었다. 아브란이 손을 뻗었다. 나는 이 날에야 비로소 조인족이 변신하지 않고도, 인간의 무기를 쓰지 않고도 사용할 수 있는 무기가 어떤 것인지 알았다. 공기가 흩어진다고 느낀 순간 이미 붉은 덩어리가 녀석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얼마나 빠른지 그저 붉은 덩어리만 느꼈을 뿐이었다. 그 덩어리는 맨 처음 마베릭의 미간을 정확하게 꿰뚫었다. 그 뒤를 이어 그의 입과 턱 을 부수고, 그 다음에는 정확히 가슴을 꿰뚫었다. 깃털. 붉은 깃털이었다. 그 뒤를 이어 그보다도 더 큰 덩어리가 그대로 그의 몸을 갈가리 찢기 시 작했다. 공중에서 날고 있던 조인족들도 마치 미쳐버린 것처럼 달려들어 그의 몸에서 살점 하나라도 찢기 위해 달려들었다. 발톱이 드러나 할퀴고 내장이 허공에 흩어졌다. 살과 살을 찢어내는 육식동물의 무자비한 소음이 주변에 흩어졌다. 살조각이 날고 뼈조각이 흩어진다. 끊어진 내장이 마치 뱀처럼 또아리를 틀며 땅바닥으로 떨어져 내린다. 살가죽이 찢어지는 소리 에 스카는 귀를 막았고, 룬드바르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입만 벌리고 있었 다. 아이들도, 여자들도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다. 아까와는 전혀 달랐다. 그저 목만 잘라냈던 그것과는 전혀 달랐다. 산채로 찢어대는 그 무자비한 잔치는 복수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분노 와 본보기. 그리고 경멸. 아무도 시선을 돌릴 수 없었다. 하지만, 어째서? 녀석의 하얗게 질린 얼굴. 미쳐버릴 정도로 입을 벌리고 있는 절망을 보았다. 어째서 녀석은 그런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었던 거지? "쿠베린님." 아브란이 고저도 없는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투명할 정도로 감정이 없는 그 목소리에 나는 새삼 그녀를 보았다. 그녀 는 희고 고운 얼굴에 화장이라도 한 듯 한 두 방울의 피를 묻히고 있었다. 그것 외에는 그녀의 얼굴은 놀랄 정도로 깨끗했다. 그녀의 다리와, 그녀가 딛고 선 땅바닥은 빨갛다 못해 검은 선혈로 온통 젖어 있었지만 얼굴만은 깨끗했다. 아직도 퍼덕이며 조용히 허공을 날고 있는 조인족들 역시 마찬 가지였다. 방금 전에 있었던 그 살육 아닌 살육이 거짓인 양 그들은 조각 상처럼 아름다웠다. "당신이 할 일입니다." 나는 그녀의 말에 따라 앞으로 나섰다. 그녀의 발치에는 마베릭이었던 조각들이 늘어져 있었다. 뼈 조각도 온전히 남지 않은 그 와중에 놀랍게도 아직 움직이고 있는 것이 있었다. 심장 이었 다. 전에 사인족 놈을 건드렸을 때와 마찬가지로 마베릭의 심장은 온 몸이 찢 긴 상태에서도 뛰고 있었다. 마치 날 보라는 양. 생명의 여신에게 항의하듯 이, 그리고 모든 것을 거부하듯 뛰고 있었다. "..........묘인족의 심장입니까?" 그녀가 다시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눈에 익었다. 이 심장은 분명 묘인족의 것이었다. 마베릭놈은 거짓말을 하지 않은 셈이다. 나는 펄떡이고 있는 심장을 잡았다. 죽음에 격렬히 항의하는 그 심장을 들어서 천천히 잡아뜯었다. 그리고 살점을 입에 넣고 씹었다. 그 맛은, 보 통 때와 다르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고 스카가 고개를 돌리는 것을 보았다. 나는 피하지 않고 천 천히 심장을 씹었다. 옆에서 보고 있던 룬드바르가 토악질을 하고 있는 것 도, 스카가 몸을 돌린 채 애써 토악질을 삼키려고 하는 것도 보았다. 나는 녀석을 돌아보지 않은 채 마베릭의 심장, 아니 묘인족의 심장이었던 것을 묵묵히 씹어 삼켰다. 마지막 한 조각까지 삼키고 나자 이제는 완전히 죽어버린 마베릭의 시체―아니, 시체라고도 볼 수 없는 잔해만이 남았다. 하지만 정말로, 어째서지? 어째서 이런 일이? 하지만 그건, 내 알 바가 아니었다. 녀석이 나를 향해 울며 애원해도 녀석 은 죽었을 것이고, 나를 향해 욕설을 퍼붓는다 해도 녀석은 죽었을 게다. 그러니까 결국은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는 법. 나는 멍하니 주저앉아 있는 룬드바르녀석의 멱살을 집어 올리며 물었다. "그 미치광이 계집애의 거처는 어디야?" 녀석은 토사물로 젖은 얼굴로 날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몰골은 아무리 보아도 대륙을 흔드는 느끼한 황제의 모습은 아니었다. 나는 그 놈의 몸을 툭 걷어차고는 몸을 돌렸다. 그럼 원초적인 방법으로 찾아보자. 냄새로. 내가 막 걸음을 옮기려고 하자, 스카가 옆에서 외쳤다. "자, 잠깐만 기다려!" 녀석은 시퍼런 얼굴로 입가를 닦으면서 바닥을 기었다. 그렇게 엑엑 거리 며 토한 게 아무래도 미안하다 그거지? 그건 그렇고 이 녀석 뭘 하는 거 야? 대체 뭘 하나 싶었더니 여전히 바닥에 굴러다니는 정령석을 줍고 있었다. 집요하구나, 너. 허긴, 그 정령석이라는 게 중요하긴 하지. 우리들 중 유일한 인간인 스카는 잔뜩 굳은 표정으로 그것들을 줍더니 고 개를 들고 날 향해 물었다. "저기, 그, 셀러로니는 찾았어?" "셀러로니?" "응, 그 금강석말이야. 마법사들이 빼앗아 갔는데." 나는 녀석이 어색한 표정으로 내민 일곱 개의 정령석을 도로 받았다. 어 떻게서든 화제를 바꾸어 보려는 그 가상한 노력에 나는 웃음을 참을 수 없 었다. 스카는 내 시선을 피하지는 않았지만 꽤나 거북한 표정을 지으며 버 벅거리고 있었다. 내가 심장을 먹던 콩팥을 먹던 신경 쓰지 않겠다는 나름 대로의 표현인 모양이다. 그래, 이 난로야. 용케도 넌 그 20 여 년 간 녹도 슬지 않았구나. "가자." 나는 정령석을 주머니에 도로 집어넣으면서 말했다. 그 때 갑자기 스카가 내 앞섶을 툭 치며 물었다. 아무래도 이 녀석 평소와 같은 태도를 취하려 고 무진장 애를 쓰고 있는 거 같다. "그런데 그건 뭐야?" 내 품 속에 꼬리만 내밀고 처박혀 있는 몰골을 한 도마뱀새끼. 잊고 있었 군. "용새끼. 셀러로니." "용새끼? 셀러로니? 이게?" 스카는 평소대로 이상한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더 이상 상관하지 않고 내 옆에 달라붙은 에이리를 덥석 안아 어깨 위에 올려놓고 걷기 시작했다. 다 른 아이들과 달리 어미가 옆에 없었던 탓인지 에이리는 내 목에 결사적으 로 매달렸다. "쿠베린, 할 말이 많을 텐데요." 갑자기 서늘한 감각과 함께 날카로운 손톱이 옆구리에 와 닿았다. 이에르네 를 보니 나를 몇 번쯤 삶아 먹고 싶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만 이 아니고, 유티아나 쇼나, 케이링 모두다 그랬다. "뭔 말?" "저 여자랑 어디까지 갔어요? 역시 끝까지 갔나요?" 음험하게 속삭이는 이 여자가 정말로 그리도 귀여웠던 쇼나가 맞단 말인 가. 쇼나는 이에르네의 바로 옆에 바짝 붙어 서서 새파랗게 눈을 빛내고 있었다. "가긴 어딜 가. 어디까지나, 우.정.이야. 우정." "어떤 우정이 그토록 키스를 해 대죠? 우정에는 입이 없어요." 턱을 바짝 치켜세우고 항의하는 케이링을 보자 나는 한숨이 나왔다. 이봐, 아가씨들. 이 와중에 그런 걸 일일이 챙기다니. 그럴 수는 없는 거 아닌가? 그대들도 눈이 있고 코가 있고 입이 있다면 지금 당면 과제가 무엇인가 정 도는 잊어선 안 되지. 나는 그렇게 투덜거리다가 문득 생각했다. 가만 있자. 그녀들의 당면 과제 가 뭐였더라? 새삼스럽게 그녀들을 보자 그녀들은 요염한 포즈를 각자 취하며 나를 바 라본다. 나는 그 요염함에 취하려다말고 내 당면 과제를 다시끔 깨달았다. 나의 당면 과제, 내가 해야 할 일. 마법사를 해치우고 애를 되찾는다. 하지만, 내 당면 과제가 그녀들과 같은 것이라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그녀들 중 나와 당면 과제가 같은 것은 결국은 로오나 뿐이니까. 그녀들이 여기서 이 잘난 쿠베린님을 위해 질투를 하고 싶다고 생각한다면 질투하도 록 놔 둘 밖에. 질투와 쿠베린님 쟁탈전이 그녀들의 당면과제라고 한다면 그러라고 놔둘 수밖에. "미하라를 만나보았어?" "아뇨, 미하라가 여기에 있어요?" 놀란 표정을 짓는 그녀들을 보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에이리가 내 목을 꽉 쥐며 소리쳤다. "엄마는 어디 있어요?" 이 어린 녀석이 온통 화상으로 벌겋게 된 제 어미를 보았을 때의 충격을 생각하고 나는 조금 기분이 더러워졌다. 그래, 맞아. 미하라는 이겼지만 대 단히 다치고 말았다. 여자에게 있어 외모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 중 하나 였지. 아브란은 여자들의 맹렬한 시선을 받으며 훌쩍 공중으로 날아 올랐다. 아 무래도 조금 얼굴이 따가웠겠지. 다크와 듀나시, 그 놈들은 또 어디에 있는 거야? 휴런과 미하라는? 어쨌든 알아서 헤매다 돌아오겠지. 안 돌아와도 할 수 없고. 나는 에이리의 손을 잡은 채 그저 걸었다. 일단, 그 카산드라인지 심드라인지 하는 여자를 찾아 내 애들을 돌려 받는 게 우선이다. "엘프들은 내 일족들을 보호하느라 남아 있어요." 아브란이 평온한 어조로 말했다. 마치 내가 궁금해 할 거라는 듯 그녀는 상냥하게 설명해 주었다. "병들고 다친 일족들을 보호해야 하니까요. 그 증오스러운 마법을 써서라도 말이지요." 내가 흘긋 그녀를 보자 그녀는 허공을 유유히 날며 속삭이듯 말했다. "이로서 우리의 숫자도 상당히 줄어들었군요." 그 목소리에 담긴 서글픔을 느끼면서 나도 말해주었다. "사인족은 멸망했소." 그녀는 움찔하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투명한 두 눈 속에 담긴 슬픔이라고 잘라 말하기엔 짙은 감정이 나를 가슴 저리게 했다. "누구의 손에?" "내 손에." 그녀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마치 울분을 토하듯 공중으로 치 솟았다. 그녀가 허공으로 치솟자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바람 속에 서 있는 그녀의 모습과 마치 공중에 박힌 듯 조용히 날고 있는 조인족의 모습을 나는 새삼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녀만이 아니고 날고 있는 조인족들 모두가 아름다웠다. 조인족은 하늘에서 가장 아름답다. 그들 이 날개를 펴고 허공을 맴도는 그 모습은 시간을 정지한 듯 고요하기만 했 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스카가 스카답게 물었다. "이런저런 일." 귀찮아서 짧게 말하자 스카는 한숨을 몰아쉬었다. "또 이러는 군, 너는 항상 네 일을 말해주지 않아." "이 상황에서 마누라처럼 치근덕거릴 거냐?" 내가 점잖게 충고하자 스카는 벌개진 얼굴로 내 등을 후려갈겼다. "제발 좀, 진지하게 좀 말해라! 인질까지 되었던 이 상황에 너 정말 그럴래?" "미친 마법사 하나 때려잡고 내 아이를 구하면 일은 다 끝이야." 그나저나 내가 먹어버린 그 심장의 주인은 누구일까? 내가 모르는 묘인족 일까? 아니면 내 아이? 아니면 내 마누라? 아니, 아이는 아니었다. 심장은 이미 다 성장한 성인의 것이었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조용히 걷고 있었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콰콰콰쾅! 갑자기 나의 이 고요한 사색을 방해하는 거대한 소리가 터져나왔다. 나는 에이리의 몸을 감싸 안으며 지축을 울릴 정도로 거대한 굉음을 낸 쪽 을 돌아보았다. 흙먼지와 화염과, 기타등등들이 허공으로 신났다고 날아 오 르고 있는 어떤 건물. 아아, 여기서야 건물이라고 해봐야 그저 왕궁밖에는 없지, 정말 고왕국 놈들 왕궁 하나는 크게도 지었다. "가자!" KUBERIN........ 분노는 오만 슬픔은 연민 13 역시 끝은 시작한 놈이 끝내는 건가? 나는 흙먼지와 화염과 기타등등이 휘날리는 가운데 건방진 포즈로 선 시 커먼 놈을 바라보았다. 녀석의 등뒤로 녀석의 봉인수로 보이는 이상한 것 들이 잔뜩 이글거리며 포진하고 있었다. 소환수를 부르지 않은 것은 아마 도 귀찮아서 일는지도 모른다. "저, 저건?" 스카가 입을 벌렸다. 그 이상한 봉인수들 때문에 겁에 질린 모양이었다. 그는 검은 로브에 몸을 감싼 채 조용히 서 있었다. 또 몸뚱이를 바꿨는지 키가 꽤나 컸다. 물론 나야 놈의 기세로 그 놈이 그놈인지 알아 볼 수 있 지만 놈을 모르는 자라면 당연히 놈을 알아 볼 수 없다. 게다가 더 중요한 것은 그 놈 뒤에 선 봉인수들 사이로 얼이 빠진 엘프들 몇이 서 있었다는 것이었다. 놀랍게도 색마 카나리안 녀석과, 카산, 에닌등이었다. 이것들이 언제 킬트하고 붙었을까? "어이." 내가 조용히 놈을 부르자, 먼지와 화염 속에서 괜히 폼 잡고 서 있던 녀석 은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고요한 회색의 눈동자. 이번에 잡은 녀석의 몸 주인은 기사였는지 덩치가 제법 볼 만했다. 검은 로브에 싸여 있어도 단련된 듯한 몸은 확실해 보였다. "너, 그렇게 몸 바꾸면 네 아들네미가 못 알아볼텐데?" 내가 친절하게 충고하자 킬트놈은 대꾸도 하지 않고 갑자기 검은 로브를 펄럭이며 내 앞으로 다가섰다. 그리고는 갑자기 제 옷자락을 들쳐 올렸다. "왜 몸매 자랑하냐?" 내가 막 그렇게 입을 연 순간 갑자기 놈의 로브 자락 사이에서 두 명의 어린아이가 굴러 떨어졌다. 축 늘어진 어린 아이 둘은 내 발 밑으로 무력 하게 떨어져 내렸다. "프, 플라티나?" 나는 너무도 놀라 어린아이를 들어 올렸다. 아름다운 금발, 로오나와 똑같 은 꿀빛 같은 금발이 내 손가락 사이로 흘렀다. 창백하고 야위었지만 아이 는 여전히 숨을 쉬고 있었다. "아아!" 나는 내 딸을 힘껏 끌어안았다. 살아 있었구나! 역시 살아 있었어! "아아악!" 비명소리를 내며 뒤에 서 있던 로오나가 미친 듯이 달려왔다. 그녀는 내 손에서 늘어진 플라티나를 빼앗아 들더니 으스러지듯 끌어안았다. 창백한 얼굴에서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아아, 아아."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로오나는 통곡하듯 플라티나를 끌어안고 끊임 없이 키스를 퍼부어 댔다. 그 모습을 보고 여자들이 눈물을 찔끔거렸다. "이쪽은 네 아이가 아니었냐?" 킬트가 갑자기 물었다. 검은 머리에 창백한 얼굴. 모르는 아이였지만 묘인족인 것만은 분명했다. "내 애 아냐." "그래도 네 일족이지?" 나는 녀석의 말을 들으며 낯선 꼬맹이를 들어 올렸다. "그건 그런데 낯이 설어." 그 때 뒤에 있던 케슈파란이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아사! 아사!"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된 이 불굴의 늑대일족은 감히 묘인족의 아이를 끌어 안더니 울부짖기 시작했다. "살아 있었어! 살아 있었어! 오오, 신이여!" 눈물을 펑펑 쏟아가면서 아이를 안고 흐느끼는 이 늑대녀석을 조금 못 본 척하면서 나는 재차 물었다. "대체 아이를 어디서 찾았냐?" ".........옛 실험실에서." "뭐?" "내가 예전에 쓰다 버린 실험실에서 찾았다." 킬트는 그렇게만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녀석은 케슈파란이 아이를 끌어안 고 있는 모습을 조금은 기묘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저건, 분명히 묘인족은 아닌데?" "맞아." "어떻게 수인족이 묘인족 애의 아비가 될 수가 있는 거지? 저 애가 혼혈 이란 말인가?" 그는 잠시 혼란을 일으켰는지 잔뜩 미간을 찌푸렸다. "이 아이, 어디 다친 것은 아니지? 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거야!" 갑자기 겁도 없이 케슈파란놈이 고함을 버럭 질렀다. 녀석은 눈물과, 콧물, 거기에 피와 먼지로 뒤범벅이 된 얼굴로 감히 암흑마도의 마스터에게 소리 를 질러댔다. "아니, 단지 탈진했을 뿐이야. 잘 먹이고 쉬게 하면 돼, 쨍알거리는 게 귀 찮아서 잠시 수면마법을 걸어 놓았을 뿐이니까." 킬트도 의외로 화를 내지 않고 응답했다. 평소의 녀석과 조금 다른 반응이 었지만 그것은 분명 케슈파란과 이 묘인족꼬마와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내 아내는! 내 아내 세피아는 어디에 있어!" "여자는 몰라." "세피아도 있었을 거야! 세피아는 어디있냐고!" 그가 악악거리는 것을 무시하고 나도 은근슬쩍 끼어들었다. 문득, 내가 먹 어치운 그 묘인족의 심장이 케슈파란의 그 묘한 마누라일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애 말고 다른 놈들은 없었냐?" "뭐, 다른 인간이나 아인족들, 수인족 등이 있긴 했지만 내 알 바 아니었어. 저거ㅡ 설마하니 양자야?" "뭐 그런 셈이지." "묘인족 아이가 수인족에게서 양육된다구? 별 꼴을 다 보는군." 녀석은 악악대다 못해 이제는 통곡하고 있는 케슈파란과 묘인족꼬마에 대 한 호기심은 사라졌는지 아예 무시해버렸다. 녀석이 몸을 돌리는 순간 지독한 악취가 진동했다. 악취라고 해서 똥냄새 같은 것은 아니었다. 그저, 피비린내 정도였다. "우웃." 아이를 안고있던 케슈파란이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고 스카는 숨을 삼켰 다. "저, 저런!" 먼지가 조금 가라앉자 그 자리에는 완전히 박살난 시체들이 줄지어 자빠져 있었다. 아니, 이건 단순히 자빠져 있다고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엉망진창 이었다. 나는 킬트를 흘긋 보았다. 이놈이, 정말 손을 쓰면 이런 짓을 하는 구나. 수백은 되는 것 같았다. 가짜 사인족처럼 보이는 시체부터 시작해서 오거 같이 생긴 것들, 거기에 가짜 트롤같은 것들이라든가 보통 인간의 병사이 었을 법한 조각들. 말 그대로 널브러진 것은 시체의 산이었다. 고왕국의 거 대한 왕궁 중 하나가 완전히 날아가 버리고 그 자리에는 흙먼지와 시체도 못되는 살덩이들만 남아 있다. 이건, 너무나 일방적인 살육이라 뒤가 찝찝 한 상황이다. 우리들은 물론, 조인족들도 침묵하고 있었다. 그들은 마법의 힘이라는 게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뼈저리게 깨닫고 있는 중이었다. 창백해진 얼굴의 스카는 입을 다시 틀어막으면서 내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어쩌라고? "이것들은 다 뭐야?" "내 앞을 막았던 것들." 킬트의 한 마디에 나는 혀를 찼다. 그래, 잘났다. 잘났어. "대륙의 몇 군데에 내가 왕년에 쓰던 실험실이 있어. 폐쇄한 지 오래되어 나 조차도 잊고 있었는데 그 애들은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야." 담담한 그 어투를 들으면서 내가 툭 하니 끼어 들었다. "분홍주둥이 놈은 죽었다." 그는 흘긋 나를 보았다. 그러더니 무심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럴 줄 알았지." "대체 애들 교육을 어떻게 시켰길래 이 엄청난 사태를 초래하는 거냐?" "내 애들이 능력이 뛰어난 것을 어쩌란 말이냐." 녀석은 농담 같지도 않은 농담을 지껄이면서 걷기 시작했다. 시커먼 로브를 걸치고 시체 더미 위를 걷는 녀석의 모습은 대단히 어울렸 다. 녀석은 자신의 발치에 피투성이가 된 시체들이 있어도 아랑곳하지 않 고 질끈질끈 밟으면서 걸었다. 마치 눈앞에 있는 게 시체가 아니라 그저 돌멩이인 양 태연자약했다. 그래, 역시 인간이란 맛이 가면 더 골치 아픈 존재야. 흑마법사의 고향, 마법 그 하나로 하나의 왕국을 건설한 암흑마도의 마스 터 킬트 마이오스는 건방지기 짝이 없는 자세로 검은 옷자락을 휘날리고 있었다. 그 아니꼬운 모습을 보며 나도 천천히 걷자, 뒤에 있던 애들이 속 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왜 이런 걸 다 죽인 걸까?" "마법이란 건 정말 이상해. 왜 이렇게 약한 것들을 다 죽여 버리는 거야?" "이것 봐. 머리통도 온전하지 않잖아?" 애들이 쑥덕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킬트와 인간의 잔혹성에 대한 깊 은 사색에 돌입했다. 어째서 죽이는 마법을 쓰는 놈들은 이렇게도 간단히 모든 생명체를 죽여버린단 말인가. 직접적으로 살과 살이 부딪쳐 해결 보 는 게 아니고 주둥이로 해결 보는 마법이야말로 정말 너무나 지독하게 고 약한 것 아닐까. 죽인 놈에 대한 존중도 없는 이 빌어먹을 마법. 이래서 난 마법이 싫어. "쿠베린." "왜?" "아이를 얻고 잃은 네 기분은 어떠하냐?" 갑자기 그렇게 물어서 나는 녀석을 빤히 바라보았다. 녀석은 묵묵히 먼지 로 뒤덮인 반 이상 무너진 건물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무감각해 보이는 얼굴에 나는 짜증이 났다. 녀석이 바라보고 있는 곳을 쳐다보았다. 솟아오르는 흙먼지와 화염, 기타 등등으로 시야가 불분명한 가운데 홀로 서 있는 여자가 있었다. 아니, 홀로 서 있는 게 아니었다. 그녀는 무언가를 품안에 안고 있었다. "........." 킬트는 물처럼 고요한 시선으로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붉은 금발, 흐트러진 옷자락, 모호하게 흐려진 눈동자를 한 여자였다. 그 녀는 파리한 얼굴로 한 남자를 끌어안고 있었다. 그 남자는 무표정한 얼굴 로 그녀의 옆에 서 있었는데 시체처럼 창백했다. 그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 고 나는 잠깐 숨을 멈췄다. 회색의 눈, 흐트러진 갈색 머리. 전에 보았던 남자였다. 이 미치광이 여자가 끌어안고 울부짖었던 그 시체였다. "왜 왔어요? 마스터?" 여자가 가느다란 목소리로 물었다. "괘씸한 우리들을 벌하러 오셨나요?" 그녀는 싸늘하게 웃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남자의 갈색 머리를 쓰다듬었다. 남자는 여자가 하 는 대로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감정이 전혀 없는 그 회색 눈이, 생기라고 는 조금도 없어 보이는 그 눈이 굉장히 불쾌했다. 아니다. 생기가 있었다면 더 불쾌했을 게다. 저건, 죽은 시체니까. "당신은 늙었어요. 지금은 나의 시대예요." 그녀는 피식 웃더니 옆에 선 남자에게 달콤한 어조로 속삭였다. "사랑하는 당신, 위험하니까 뒤로 가 있어요." 그 말에 남자는 비틀 몸을 돌리더니 조용히 뒤로 물러섰다. 그가 몇 메테 르 정도 뒤로 물러서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두 손을 모으고는 마치 흥미진 진한 장난이라도 하는 양 생긋 웃었다. "이 자리에 묘인족, 조인족의 왕까지 모여들었으니 정말 재미있군요. 그 래, 마베릭은 어디 있나요?" "죽었다." 내가 말하자 그녀는 살짝 눈웃음 쳤다. 붉은 금발이 매혹적으로 흔들렸다. "그랬군요. 어땠나요? 그 아이의 심장을 내가 묘인족의 것으로 대치해 주 었는데." "그래, 확인했다." 내가 담담히 말하자 그녀는 풋 하고 웃더니 여자들에게 매달린 아이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애들은 실컷 썼으니 뭐, 도로 가져가도 돼요." 그 말에 살기로 똘똘 뭉친 여자들이 동시에 달려들려고 했다. 나는 손을 뻗어서 그들을 제지하면서 그녀를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이제는 화도 나지 않았다. 애들을 데려다가 피라도 뽑았던 건가? 아니면 갈비뼈라도 하나 뽑았나? 그녀는 우리들을 향해 다시 미소지었다. 꽤나 위험하면서도 매혹적인 미소 였다. 대리석처럼 흰 피부는 창백했지만 요염했고, 반짝이는 금빛 눈은 마베 릭과는 달리 강렬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이었다. 그녀는 킬트의 뒤에 서 있는 창백한 얼굴의 카나리안을 보자마자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얼마 전 마베릭놈이 보였던 증오와는 아예 색깔이 다른 증오였다. 그 짙 고도 끔찍한 색깔은 내가 본 적이 없을 정도로 강렬했다. 아니, 내가 알고 있는 색깔 중 가장 지독하고 가장 강렬했다. 핏빛에 가까운 기운이 그녀의 금빛 눈을 스쳐지나갔다. 그녀는 카나리안을 보고는 살짝 입매를 비틀며 웃었다. "멋지군요. 마스터의 아드님이 마스터와 나란히 서 있다니." 나란히라니. 아무리 보아도 저건 뒤꽁무니에 억지로 끼어 선 꼴인걸. 킬트는 말없이 그녀와 그녀가 데리고 있는 남자만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지독하게 우울한 그의 얼굴을 보며 여자가 노래하듯 속삭였다. "마베릭이 죽었데요, 마스터. 슬프지 않으세요? 가장 당신을 따르고 있었던 아이인데. 불쌍하지 않으세요?" 그만 좀 지껄였으면 좋겠다. 머리가 다 아플 지경이다. 나는 킬트를 향해 물었다. "더 듣고 싶냐?" 그러나 킬트는 움직이지 않은 채 여자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 애는 굉장히 물렀어요. 저기 있는 묘인족의 임금님 뒤를 졸졸 따라다 니면서 어떻게든 인정을 받고 싶어했죠. 당신의 유일한 친구인 그의 인정 을 받으면 자신도 뭔가 대단한 존재가 될 거라고 생각이라도 했나봐요." 그녀는 방긋방긋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친구 아냐." 나는 한숨을 몰아쉬며 말해 주었다. 그러나 계집애는 재수 없게도 내 말을 씹어 삼켰다. "그리고 결국 그의 손에 죽었지요." 그녀는 깔깔대며 웃었다. "너무 어려서 그래요. 마베릭은 너무나 어렸어요, 그 애는 어떻게 해서든 지........" "아직도 할 말이 남았나, 카산드라?" 킬트는 말을 뚝 잘랐다. 계집애는 입을 다물고 자신의 주인이자 아비인 자 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네, 할 말은 많아요. 하지만 당신은 들어 주지 않겠죠." 그녀는 그렇게 말하더니 손을 가볍게 들어 보였다. "당신의 아드님을 위한 선물이에요." 그녀는 갑자기 키득거리고 웃었다. 그녀가 마치 절이라도 하듯 우아하게 손을 옆으로 내뻗자 검은 가루 같은 것이 쏟아져 내렸다. 또 한 번 손, 아 니 소맷자락을 흔들자 흰 가루가 새어 나왔다. 그리고 찰랑거리는 방울 소 리가 들렸다. 찰랑, 찰랑. 찰랑. 그저 보통의 방울소리였지만 등줄기가 오싹하도록 섬뜩했다. 그녀는 꿈꾸 는 듯 금빛 눈동자를 반짝이며 속삭였다. "지하에서 잠드는 자들이여, 우리들이 무엇을 위해 이 자리에 있는 지 그 뜻을 헤아려 보라. 순수함을 자랑하는 자들이여, 우리들이 진정 한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을 알려다오." 분명히 그녀는 살풋이 사랑스러운 표정으로 속삭였지만 그 반향은 끔찍스 러웠다. 흙더미를 헤치고 무엇이 툭 튀어 나왔다. 반쯤 썩어 문드러진 인간의 손 가락,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움직이고 있는 인간의 손가락. 그것이 시작이었다. 느물느물 살이 흘러내리는 인간인지 엘프인지 잘 알 수 없는 것부터 시작해서 꿈틀거리며 전진하는 하체가 없는 시체까지. 그 모양은 다양하고도 나름대로 끔찍해서 불쾌했다. 방금 킬트에게 맞아 김이 모락모락, 아니 연기가 피어 오르고 있었던 시체들마저 벌떡벌떡 일어섰다. 일어설 때는 각각이었지만 목표는 한 가지 인 듯 일어난 시체들은 일제히 우리들을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절룩이며, 비틀거리며, 혹은 바닥을 기 며. 그 모습은 솔직히 말해 무섭다기 보다는 기분 나빴다. "저거, 또 시작인 거야?" 뒤에서 케논이 낮게 속삭였다. 케논은 언제 좀비를 상대해 보기라도 했다 는 듯 묘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킬트는 그런 것들을 무심히 바라보더니 어느 새인가 꺼내 든 작은 지팡이 를 흔들었다. 그러자 그의 뒤에 서 있던 봉인수들이 일제히 좀비들을 향해 튀어 나갔다. 바람을 가르는 그 속도는 소름끼치게 빨라서 녀석들이 일제히 한 군데로 튀어 나가자 귓속이 다 잉잉거릴 지경이었다. 전혀 아름답지 못한 소리를 내며 악악대는 봉인수들 사이에 선 킬트는 정말로 지옥에서라도 올라온 마 신처럼 보였다. 아니, 마귀처럼 보였다. 몸을 비비 비틀며 악을 쓰듯 아가리에 잔뜩 솟은 이빨들을 곤두세운 채 달려나가는 그것들은, 지루할 정도로 천천히 달려드는 좀비들의 몸뚱아리 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만으로 산산이 부셔 놓았다. 말라비틀어진 낙엽처럼 흩어지고 부서지는 좀비들의 시체에서 살아 있었다는 증거인 양 썩은 것들 과 썩지 않은 부분들이 쏟아져 내렸다. 피와, 살, 썩어 들어가는 것일망정 살아 숨쉬고 있었다는 증거인 그것들이 아무런 여과도 없이 날뛰는 이세계 (異世界)의 괴수들 사이에서 흩어지고 찢어졌다. 바닥으로 떨어지는 내장과 터져 나가는 머리통은, 내장을 뱃속에 품고 뇌 수를 머릿속에 지닌 모든 살아 있는 것들에 대한 모욕. 흩어지는 눈과 이 미 떨어져나간 귀와, 팔다리는, 두 눈으로 앞을 보고 소리를 듣고, 물건을 잡고, 앞으로 걸었던 그 모든 것들에 대한 모욕. 갈가리 찢겨져 돌멩이처럼 흩어지는 이빨들은 씹어 삼켰던 살아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모욕. 시체를 일으켜 세워 산 자들과 대면시키는 이 순간은 대지의 여신에의 모독. 그렇다. 이것은 생명을 존중한다는 엘프들을 모욕하기 위한 수법일 뿐, 별 대단한 수법은 아니었다. 킬트라는 무자비할 정도로 강력한 살상력을 가진 흑마법사와, 우리들 묘인족과 조인족들은 상대가 좀비라고 해서 흔들릴 자 들은 결코 아니었다. 우리들은 그저 무심히 이 지저분한 살상 아닌 살상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그만 하세요!" 가장 견디지 못한 것은 당연하게도 엘프들이었다. 그 중 카나리안이 갑자기 앞으로 튀어나오더니 킬트가 막을 새도 없이 바 로 카산드라의 앞까지 뛰어들었다. 무모하게도 그는 갑자기 그녀를 향해 검을 찌르며 고함을 질러댔다. "그만 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의 무모한 행동에 그녀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요사스럽게 웃었다. 그녀의 눈빛에 따라 푸르고 흰 장막이 마치 우아한 부채꼴처럼 피어올랐다. 실드는 분명히 움직였다. 분명히 실드는 그녀를 중심으로 완전히 작동했다. 하지만 카나리안의 몸은 그대로 그녀의 실드를 뚫고 그녀의 어깨에 검을 박았다. "우웃!" 보고 있던 우리나, 심지어는 검을 찔러 넣은 카나리안 마저도 입을 벌렸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자신의 상처를 넋을 잃고 바라보던 카산드라는 충격을 받은 게 확실했다. 그녀는 바로 눈 앞에 있는 카나리안과, 자신의 상처를 번갈아 보더니 갑자기 쿡 하고 웃었다. 검에 관통되고도 웃음을 터뜨리는 그녀에게서 놀란 카나리안이 빠져 나오려 몸을 틀었다. 그러나 그녀는 어 깨를 흔들며 키득대다 말고 광기와 증오에 가득 찬 눈으로 카나리안을 쏘 아보았다. 증오로 이글거리는 눈빛. 그녀는 자신의 어깨를 관통한 검날을 손으로 잡아 들이 뽑아 던지더니 두 말 없이 카나리안의 목을 덥석 쥐고 조르기 시작했다. "우, 우욱!" "죽어! 죽어! 죽어!" 그녀의 외침이 찢어질 듯 갈라졌다. "너 같은 것 때문에! 너 같은 것 때문에!" 그녀는 반쯤은 울고 반쯤은 웃는 것 같았다. 카나리안의 목을 조르고 흔들고 마구 내저으며 그녀는 그의 얼굴을 할퀴었 다. 핏방울이 툭툭 그들 사이로 떨어져 내렸다. "그만 둬!" 킬트가 큰 소리로 외쳤지만 그녀에겐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녀는 악을 지르며 고함을 질러댔다. "나, 나는 너의 대용품이 아니란 말이다아!" 나는 이제야 계속해서 느끼고 있었던 이상한 느낌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적금발과 금색 눈. 금발과 보랏빛의 눈. 그것 밖에 차이가 없었다. 카산드라와 카나리안은 말 그대로 똑같은 이목 구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왜 마베릭이 만약 카산드라가 카나리안을 만난 다면 미쳐 날뛸 거라고 말했는지 깨달았다. "당신은 잔혹하고도 고약해! 아버지!" 그녀는 비명처럼 소리 질렀다. "어째서! 어째서 우리들에게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어째서 이 따위 녀석 에게 대항할 수조차 없게 만들어 놓은 거야아아아!" 그녀는 말 그대로 카나리안을 움켜 쥔 채 고함을 질렀다. 버둥거리던 카 나리안이 허리에서 단검을 뽑아 그녀의 팔을 내리칠 때까지도 그녀는 그대 로 울부짖고 있었다. 마침내 그녀의 오른 손을 잘라내 겨우 자유롭게 된 카나리안은 바닥에 나뒹굴었다. 하지만 아직도 그의 목을 조르고 있는 그 녀의 오른 손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시커먼 얼굴이 된 그를 도와 황급히 엘프들 몇이 달려들었지만 그 오른 손은 떨어지지 않았다. 카산드라는 미친 마녀처럼 킬킬대며 그 몰골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잘려진 오른 손이 있던 자리에서는 끊임없이 피가 쏟아져 나와 그녀가 살아 있는 존재라는 것을 증명했다. "정말 대단하시네요, 아버지." 그녀는 잘려진 오른 손 대신 왼손으로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광 기와 피로 얼룩진 그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킬트가 갑자기 입을 열었 다. "어리석은 것." "네에, 저는 언제나 어리석고 아버지는 언제나 무시무시하지요." 그녀는 킬킬거렸다. 어린애처럼 킬킬거리는 그 모습을 보고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이것들이 뭐하고 있는 거냐? 응? 잃어버린 자신의 아들과 똑같이 생겨 먹은 녀석을 만들어 낸 킬트나, 자 신의 존재 가치, 내지는 증명을 하겠다고 온갖 미친 짓을 다하고 돌아다니 는 애새끼들이나 정말 한심해서 봐 줄 수가 없었다. 이런 것들 때문에 여 지껏 얼마나 죽었나 생각해 보자 정말 울화통이 치밀어 올랐다. "내가 너희들에게 무엇을 했다고?" 킬트가 갑자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하? 자신의 아들 앞에서는 마력을 쓸 수 없게 만들어 놓지 않았던가요? 정말로 황송할 정도로 강렬한 부성애를 가지고 있네요." 카산드라가, 마베릭이 그렇게 말했다. 마베릭 놈, 미하라가 드래곤피어를 이겨냈을 때 뭐라 했더라? 모성애가 어쩌고 저쩌고 했었지? 대체 이 놈들이란! 이 놈들이 생각하는 것이란! "왜 마베릭이 그렇게 쉽게 죽었는가 했어요. 녀석이 직접적인 마법을 제 대로 쓸 수 없다고 했을 때 그때부터 알아냈어야 했어요. 그렇게도 아드님 이 소중하신가요? 아버지?" 빈정거리는 그녀를 앞에 두고 킬트는 침묵하고만 있었다. 그는 어딘가 서 글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정말, 정말, 이것들이! 나는 머리털을 쥐어 뜯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서 고함을 질렀다. "이 미친 것들아! 대체 너희들은 그렇게도 그 빌어먹을 존재를 증명해야만 되는 거냐!" 내가 악악거리면서 앞으로 나서자 킬트는 물론이고 겨우 오른 손을 떼어 낸 카나리안 마저 내쪽을 돌아보았다. 나는 썩은 눈깔을 하고 있는 카나리 안의 뺨을 후려갈겼다. 그리고 비련의 여주인공 마냥 청승을 떨고 있는 카 산드라의 뺨도 사정없이 후려갈겼다. 녀석들이 데굴데굴 나뒹굴던 말던 신 경 쓸 일이 아니었다. 내가 홱 몸을 돌려서 킬트 녀석의 턱주가리를 올려 찰 때까지도 녀석들은 그저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나자빠진 킬트녀석까지 나는 이 같잖지도 않은 세 놈을 좌악 훑어보며 중 얼거렸다. "멍청하고 기가 막힌 어리석은 것들아. 그래, 그렇게도 외치고 싶었냐? 나 좀 봐달라고? 그렇게 많은 생명을 희생시켜 가면서 하고 싶은 말이 고작 그거냐?" 카산드라라고 하는 계집애가 발딱 일어서며 나에게 달려들려는 것을 나는 한 마디로 멈추게 했다. "너는 저 놈의 대용품이야!" 그녀는 달려들다 말고 이를 악물고 나를 쏘아보았다. "이 더러운 놈! 네가 왜 끼어 드는 거냐!" "더러운 게 어느 쪽인데 그 따위 소리를 지껄이는 게야? 멍청한 계집아." 나는 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는 계집애를 향해 한 대 치려다가 참 았다. "마력이 봉인된 게 아니야. 이 멍청한 계집아이야." "뭐?" 나는 이 한심하고도 기가 막힌 사태를 똑바로 지켜보며 조용히, 아주 조용 히 물었다. "마법사라는 게 뭐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물론, 대답할 만한 킬트 녀석은 턱주가리를 부셔 주었기 때문에 회복하려면 시간이 좀 걸리긴 할 것이다. 나는 부서지고 깨진 좀비들의 시체, 아니 좀비들의 잔해 위에 서서 카산드 라를 인내심 있게 지켜보았다. "마법사가 마력을 쓸 수 있는 것은, 자신이 마력이 존재함을 믿기 때문이 다. 마법은 이 세상을 구성하는 원리와 힘을 신봉하는 자들이 그 미지의 힘과 맺는 계약이다." 내가 마법에 대해서 설명을 할 날이 올 줄이야. 허참. 모두 나를 존경의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기에 나는 말을 이었다. "계약에는 두 가지 선행 조건이 따른다. 마력에 대한 신뢰와 자신에 대한 신뢰. 왜냐고? 마법사가 마력과 계약을 하기 위해선 그 마력을 이끌 수 있 는 자신에 대한 신뢰가 없어선 안 되니까. 마법이라 하는 것은 마력을 이 용하지만 그 마력을 이용하는 것은 마법사 자신." 나는 창백한 얼굴로 완전히 힘을 뺀 채 갈기갈기 찢겨 죽었던 마베릭의 얼 굴을 떠올렸다. "자기 자신을 부정하면 마력이 사라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지. 마법사 중 에서 오만방자하고 저만 아는 미친놈이 많은 이유는 그것 때문이지. 자신 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 자신(自身)에 대한 절대적인 자신(自信)." 이 미친 년놈들― 마베릭과 카산드라는 자신들을 잃었다. 마베릭은 자신을 괴물이라고 외치는 룬드바르에 의해서. 카산드라는 자신 과 똑같이 닮은 카나리안에 의해서. 카나리안도 카산드라도 모두 입을 다물었다. 카나리안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지만 카산드라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한, 그럼에도 멍청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갈곳을 잃어버린 것 같 은 이상한 그 표정을 보며 나는 뭔가 가슴팍이 빠개질 것 같은 기묘한 슬 픔을 맛보았다. "그렇게도,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냐? 어린 계집애야?" KUBERIN........ 분노는 오만 슬픔은 연민 14 그녀는 멍청히 나를 바라보다가 묘하게도 살짝 시선을 피했다. 그러더니 뒤에 선 사내를 돌아보았다. 사내는 여전히 멍청이처럼 그녀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사내를 보던 그녀는 문득 생각난 듯이 피식 웃었다. "아니오, 나는 증명할 필요 없어요." 그녀는 갑자기 그렇게 말했다. 갑자기 공손해진 어투로 그녀는 비틀비틀 일어서더니 묘한 시선으로 나와 킬트를 번갈아 보았다. 그녀의 얼굴에 떠 오른 표정은 복잡미묘해서 나로서는 그 너무나 심오한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계집애의 표정을 읽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인 게다. "그가, 나를 증명해 주었으니까." 그녀의 뒤에 선 갈색머리에 회색 눈을 한 평범하다면 평범하고 비범하다면 비범한 놈. 놈은 초점이 없는 눈을 멀겋게 뜬 채 이쪽을 보고만 있었다. "그가 말해주었어요. 너는 카산드라. 마녀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라고." 나는 그녀를 정말로 불쌍하게 바라보았다. 어떤 작자가 여자는 정말로 알 수 없는 소리를 잘도 사리에 맞게 지껄인다고 하더니만 그 말이 따악 맞 다. 뭐가 말이 되어야 옳거니 하고 맞장구라도 쳐 주지. <넌 마녀다. 그 이 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뭐가 그래? 그 말로 기쁘고 존재의 증명이 되어 행복하냐? 아까는 팔 다리 잘린 아헬이 강간마에게 사랑을 바치더니만 이젠 무뚝뚝 한 말뚝이 사랑의 밀어 대신에 너는 마녀다 라고 한 마디 해 준 걸로 끝이 라고 하다니. 세상에, 실연 당한 모든 남녀들이여, 그대들은 죄가 없다. 만 약에 죄가 있다면 상대가 조금 제 정신이 아닐 뿐이다. 이런, 젠장할, 정말 로 죽어 나자빠진 마베릭놈이 다 불쌍할 지경이다. 내가 너무나 기가 막혀 침묵하고 있는 동안 어느 새인가 턱뼈를 맞추고 나선 킬트가 녀석답지 않게 끼어 들었다. "그래서 저 놈을 저렇게 인형으로 만들어 놓은 거냐?" 그 말에 카산드라는 굳은 얼굴로 자신의 뒤에 선 남자를 감싸듯 앞으로 나 섰다. "알 바 아니지 않나요? 마스터가 아드님을 위해 우리들을 실험재료로 썼 든 말든 우리가 뭐라 할 자격이나 있었나요?" 킬트는 대꾸대신 그저 그녀를 물끄러미 보기만 했다. 시커먼 녀석의 눈탱이 속에는 아무 것도 비치지 않았다. 오랫 동안 마모되 고 쓸려 내려갔음직한 인간의 격렬한 감정이라는 게 이 놈의 얼굴에선 거 의 느껴지지 않았다. 이상도 하지, 얼마 전 내가 미트라와 라비니아의 죽음 으로 죽을 둥 살 둥 골골거리고 있을 때 마구 지껄여 대던 녀석이 아니었 던가. 그러던 녀석이 며칠만에 다시 냉담해 지다니. "인간의 영혼이라는 것은, 아니 영혼이라는 것은 그렇게 쉽게 잡을 수 있는 게 아니야." 녀석은 마치 심사라도 하듯 조용히 말하며 카산드라의 상태를 슬쩍 살폈 다. 어깨의 상처는 어느새 아물었고 잘려진 손목도 언제 붙였는지 철커덕 잘도 붙어 있었다. 마베릭이나 이 계집애나 정말 편리한 몸뚱이로군. "네가 다시 만들어 낸 저 놈의 몸뚱이는 단단하지만 그 안에 있는 것은 놈이 아니지. 그저 네 말대로 움직이는 인형일 뿐. 그건 지금 이 바닥에 늘 어져 있는 좀비들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어." "알 바 아니라고 했잖아요!" 그녀는 비명처럼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 알 바 아니야! 상관할 일 아니라구! 어쨌거나 그는 내 것이고 나는 그것으로 충분해! 충분하다구!" 고집 피우는 어린애를 다루는 듯한 얼굴로 지껄이던 킬트는 결국 다시 입 을 다물었다. 내 눈에는 아무래도 이 자식이 이 버르장머리 없는 제자들을 죽이러 온 게 아닌 걸로 보이는데. 설마하니 이 자식, 이 자리에서 <내 제 자는 지금 참회하고 있으니 내버려두고 가세요>따위를 외치는 것 아니야? 그러나 킬트놈이 입을 열기도 전에 카산드라가 먼저 말을 던졌다. "당신의 실험실에서 뭘 만들었는지 한 번 봐 주시겠어요?" "너에게는 지금 마력은 거의 없어. 네가 아무리 부정해도 너는 저 인형을 움직일 힘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 킬트는 무덤덤한 어조로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킬킬 웃어버렸다. 미친 계집아이가 혼잣말하듯 뭐라 중얼거리며 킬킬 웃었다. 바로 뒤에 있 던 남자 역시 그녀가 킬킬거리자 따라서 묘하게 경직된 입꼬리를 올렸다. 정말,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인지. 키이이이잉 하고 이상한 소리가 울렸다. 뭔가 꽤나 수상한,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등줄기를 타고 내려갔다. 더럽고도 끔찍한 예감과 친숙하면서도 서 글픈 느낌. 그녀는 두 팔을 벌렸다. 마치 날개를 펴듯이, 자신이 날아 오를 듯이. 문득 그녀를 중심으로 하나, 둘 붉은 선이 그어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 것이 단지 선이라고만 생각했다. 무심코 마법진이라도 펼치는 것인가 하고 생각했을 즈음, 그녀의 온 몸에서 그 붉은 선이 일제히 폭발하듯 터져 나 오기 시작했다. "아앗!" 놀란 스카가 뒤로 물러섰다. 나는 여자들을 뒤로 밀었다. "저게 뭐야?" 킬트에게 묻자 녀석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설마........." 그녀의 온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선은 마치 거미줄처럼 얽히더니 마 침내는 사방 10메테르에 달하는 주변을 완전히 휘감았다. 나는 콧속으로 스며드는 강한 피비린내에 그녀를 휘감고 있는 그 붉은 선이라고 하는 게 피라는 것을 한참 후에야 깨달았다. "이봐, 왜 그냥 놔두는 거야? 이때 쳐버려!" 내가 킬트에게 말하자 킬트는 고개를 저었다. "이미 실드를 치고 있었어." "그럼 저건? 설마 하니 실드를 저렇게나 넓게 펼치고 있단 말이냐?" "그런 셈이지." 마력을 순식간에 소모해버릴 정도로 무지막지한 실드였다. 그리고 대체 자신의 피로 저런 짓거리까지 하는 것을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뭘 하려고? 귀청을 울리는 굉음마저 울리며 그 붉은 선이 마침내 하나의 형태를 이루 었다. 그녀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면서도 허공으로 치솟자, 그녀의 손 안에 서 어떤 것이 튀어 나왔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밝은 빛을 뿜어내던 그것 은 마치 태양처럼 밝게 빛났다. 너무 눈 부셔 정면을 볼 수도 없다고 잔뜩 눈살을 찌푸리던 순간에 나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깨달았다. "맙소사!" 거대한 짐승. 피와, 그 어떤 것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짐승. 그 언젠가 이 땅위를 거닐며 세상을 지배하던 광폭하면서도 위대한 짐승. 검붉은 빛깔로 뒤덮인 비늘을 가진 것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길다란 목 과 우울할 정도로 찢어진 수직선의 루비같은 눈동자와 너무나 붉어 검게만 보이는 몸체가 앙상할 정도로 지친 날개를 펴 든 채 서 있었다. "요, 요, 용?" 스카가 비명을 올리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나는 너무나 놀란 나머지 두 눈을 부릅뜬 채 잠시 동안 머리를 굴리고만 있었다. 지금 정말로 내 눈앞에 있는 것이 용족이란 말인가? 그 옛날에 있 었다는 용족? 하지만 용족은 이미 멸족했는데. 셀러로니라고 하는 멍청한 유령 한 마리 남기고 사라져 버렸는데? "결국은 만들어 냈군." "용족을 만들어 냈다구?" 내가 멍하니 묻자 킬트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용족과 가장 가까운 것이 묘인족의 피야. 고대 3부족의 피를 나도 모으긴 했었지만....." "그럼 저게 저 계집애의 피가 아니고 묘인족의 피와 다른 놈들의 피란 말 이냐?" 핏덩어리는 완전한 형태를 가지고 그 자리에 서서 우리들을 굽어보고 있었 다. 음침할 정도로 어두운 음성이 문득 허공을 울렸다. <너희는 누군가.> "용족의 특성은 강력한 정신체라는 것이지." "뭐?" "그 거대한 몸 전체를 제어하고 마법 자체를 운용하며 자연과 호흡한다. 그럴려면 얼마나 어마어마한 정신력이 필요하겠나?" "그래서?" 킬트는 뭔가 꽤 불쌍하다는 듯 날 바라보았다. "용족은 몸뚱이로 강한 게 아니란 소리야." 그는 한숨을 몰아쉬듯 그 거대한 가짜 용새끼를 뚫어지도록 바라보았다. "몸만이라면 나도 만들 수 있지만. 저것은 아무래도......." 가짜 용새끼는 길다란 모가지를 이리저리 굴리더니 천천히 고개를 들어 하 늘을 올려다보았다. 푸른 하늘은 여전히 질릴 정도로 푸르러서 녀석의 시 뻘건 몸체와 대조적이었다. <너희는 누구인가? 무엇인가? 그리고 여기는 어디인가?> "정신붕괴를 일으킬 지도 몰라." 킬트는 또 딴 소리를 지껄이며 아직까지도 두 팔을 벌린 채 뻣뻣이 선 자 신의 망할 제자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두 팔을 벌리고 말 뚝처럼 우뚝 서 있었다. 의식을 잃은 것처럼 보였지만 뭔가 마법에 집중하 느라 그러는 것일 수도 있었다. <여기는 어디냐? 너희들은 무엇이냐?> 용새끼는 또 웅웅 울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주변의 모두가 귀를 잡고 고 통스러워하는 순간 내가 큰 소리로 외쳤다. "셀러로니! 설마하니 네 녀석이냐?" 용새끼가 날 돌아보았다. 그 왕년 셀러로니녀석이 보여준 환영과는 전혀 다른 몰골이긴 했지만 시뻘건 루비와도 같은 눈은 어딘가 닮은 데가 있었 다. 아니, 닮은 데가 있었다기보다는 닮았다고 느껴지는 데가 있었다. 녀석 은 도저히 표정을 알 수 없는 모습으로 날 내려다보았다. 허기야 도마뱀 새끼의 얼굴을 본다고 해서 내가 그 표정을 알 수 있을 리가 있나. 그 면 상이야 어디까지나 그 면상이지. <너는 뭐냐?> "역시 네놈이 맞군. 용족의 정신이라, 용족의 영혼이라고 하면 네 놈 하나 밖에 없을 테니 역시 그렇구나." 나는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용족이라고 하는 녀석이 이렇게 인간에게 휩쓸려 꼭두각시처럼 헤매고 있 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용족이라면 어디까지나 거만하게 욕 찍찍 갈겨대면 서 건방지게 굴어야 제 맛이 아니겠는가? 얼마나 건방지면 거인족도, 고대 엘프족도 용족을 상대로 시비를 걸었겠는가. <너는 나를 아는가? 너는 무어냐? 대체 조그마한 너는 누구냐?> 이 새끼가! 그럼 그 덩치로 누구든 다 작지, 내가 정말 작단 말이냐? 이래 뵈도 이 중에선 내가 제일 크단 말이다. 나는 녀석을 바라보다 말고 실 끊 어진 인형처럼 서 있는 카산드라라는 여자 마법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이를 드러내고 웃는 그 웃음은 창백하기보다는 푸른 얼굴과 함께 섬뜩한 느낌을 주었다. 정말로 재수 없게 웃고 있었다! "셀러로니가 아니야! 네 이름은 파괴신 오 테라쿠마 세키나파스!" 그녀는 짜랑짜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름을 바꾼다고 그 놈이 다른 놈 되는 거냐!" 내가 마주 고함을 질렀으나 옆에 있던 킬트가 내 어깨를 잡아 무언가 제 지했다. 갑자기 그녀의 한쪽 손이 가볍게 흔들렸다. 그러자 그녀의 몸안에서 나온 붉은 선이 가볍게 움직인다. 그에 따라 시뻘건 용새끼도 꿈틀했다. 꼭두각 시 인형처럼 흔들리는 그 가짜 용새끼는 마치 좀비 같았다. 흐리멍텅한 두 눈을 뜨고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고 자신이 뭔지도 모르고 그저 서 있는 그 런 존재. "너는 나의 소유다! 내가 바로 너의 주인이다!" 그녀는 짜랑하게 웃으며 또 한 번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가짜 용새끼는 휘청거리듯 몸을 흔들며 날개라고 하기에는 빈약해 보이는 날개를 펼쳤다. <우오오오오오오!> 괴로워하는 그 고함소리를 들으며 나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이봐, 지금 뭘 하는 거야? 이름을 바꾸었다고 해서 그 본질이 바뀌기라도 한단 말이 냐? 꽃을 똥이라고 해서 꽃이 똥이 되는 건 아니잖아? 나는 막아서는 킬트 를 뒤로 밀치고 고함을 질렀다. "웃기지도 마! 주인이란 게 어디 있냐!" 그대로 그녀를 향해 날아 올랐다. 그 기괴한 용족 아닌 용족이 고통의 신 음을 흘리는 것을 등에 지고 그녀를 향해 그대로 손톱을 휘둘렀다. 하지만 가까이 가기도 전에 터엉 소리와 함께 뒤로 튕겨나왔다. 확실히 실드를 치 긴 친 모양이었다. 나는 고개를 들고 가짜 용새끼를 올려다보았다. 크긴 더 럽게 컸다. 비늘 하나가 내 손바닥보다도 컸다. "첫번째 목표는 저 것이다!" 그녀는 큰 소리로 외치며 킬트를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용새끼는 시뻘건 눈알을 크게 뜨며 킬트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마치 붉은 보석에 줄 하나를 그은 것 같은 눈동자는 킬트의 존재를 적이라고 규정지 었나 보다. 적개심에 찬 그 눈길을 보며 킬트는 쓴웃음을 지었다. 녀석이 앞으로 나서려는 것을 나는 재빨리 밀어 버렸다. 킬트가 뒤로 쓰 러지려고 하는 것을 무시하고 나는 외쳤다. "셀러로니! 이 망할 용새끼!" 나는 두 팔을 벌리며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이 망할 용새끼야! 네 놈을 저 깊은 무저갱에 집어 던져 버릴 테다! 내 흉내를 내지 말라고 했지? 아무의 흉내도 내지 말라고 했지!" 목이 터져라 외치는 덕에 주변으로 웅웅 소리까지 났다. 뒤에 서 있던 예민 한 척하는 엘프들이 귀를 잡고 있을 때 나는 주먹을 들어 휘두르며 외쳤다. "이 나를 기억하느냐! 네가 누구인지 말해 봐라!" <비켜라. 비천한 것.> 용새끼는 여전히 딴 소리를 지껄였다. 비천? 내가 비천해? 웃기지 마. 두 발을 대지의 여신에게 맡기고 머리를 천공의 여신에게 맡기고 살아가는 나다. 나는 어느 누구보다도 존귀하고 대단하시고 훌륭하신 분. 내 자신이 얼마나 훌륭한지 세상 누구도 다 잘 알고 있다. "웃기지 마. 어리석은 꼴통아." 나는 큰 소리로 웃었다. 뱃속이 다 비어버리도록, 가슴이 터져 버리도록 웃 었다. <이, 이것이!> 용새끼는 화가 났는지 안 그래도 찢어진 눈꼬리를 잔뜩 찢으며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덕분에 쿵 하고 땅이 울린다. 그 순간 카산드라가 큰 소리 로 외쳤다. "정신을 차려라! 지금 네 상대는 저 쪽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저 쪽을 해치우면 당연히 저 어리석은 것도 해치울 수 있단 말이다!" 그 말을 듣자 용새끼는 움찔했다. 그리고 그 것에 맞추어 갑자기 서 있기 만 했던 킬트가 지팡이를 들어서 갑자기 용새끼를 향해 가리켰다. "다크 샤이닝!" 시커먼 불꽃아닌 불꽃이 대기를 화끈하게 달아오르게 하며 솟구쳤다. 용새 끼의 가슴팍에 퍼억 하니 명중한 그 불꽃은 살아 있는 것처럼 이글거리며 그 몸뚱이를 태우기 시작했다. 워낙에 상처도 크니 이글이글 타는 소리도 지랄처럼 선명했다. 그러나 용새끼는 태연했다. <치유의 힘. 작용하다.> 그 순간 이글거리던 불꽃이 사그러들고 녹아들고 일그러졌던 피부가 천천 히 원상태로 복구되었다. 그 모습을 보자 킬트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오호호호호호호! 몸뚱이만 해결한 게 아니에요. 마스터. 이쪽은 정말로 용 족의 부활이랍니다. 당신이 봉인한 영혼으로 이렇게나 키운 거예요. 대단하 지요?" 그녀는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당신을 이겼어요! 마스터! 이겼단 말입니다! 오호호호호호......!" 의기양양한 웃음이었지만 그렇게 웃으면서도 그녀의 몸은 아래로 꺼지듯 내려앉고 있었다. 입과 귀, 그리고 눈에서까지 피가 가늘게 흘러내렸다. 물 론, 그에 따라 새하얗던 안색은 시체처럼 시퍼렇게 변해가고 있었다. 그녀 의 힘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증명하듯 그녀의 뒤에 서 있던 사내 역시 뻣뻣하게 굳어가고 있었다. 그녀가 바닥에 주저앉아 헐떡이자 그 사내도 나무토막처럼 뒤로 넘어가 버렸다. 대체 이 놈들의 몰골을 뭐라 말하면 좋을까나. 나는 불쾌함이 배가되는 것을 느끼며 킬트와 용새끼의 대결을 그냥 지켜보았다. "정말이군. 마력까지도 부활한 것인가?" "하지만 머리통은 어떤지 몰라. 셀러로니는 어린애 같았는데." 나는 품안에 있는 용새끼의 몸뚱아리를 가볍게 눌러보았다. 정말로 살아 있는 것에게 이런 짓을 저지른 킬트놈을 죽여버리고 싶기도 했지만 이 상 황에서는 오히려 알 게 뭐냐는 기분이 되어버렸다. "유성우 소환." 너무도 담담하게 킬트가 말했다. 나는 순간적으로 그 유성우가 그 유성우 가 아닌 줄 알았다. 메테오라고 불리우는 그 유성우 맞지? 하는 순간 하늘 이 시커멓게 변하더니 우르르 꽝꽝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우와와아! 피해!" 나는 악을 지르며 뒤에 멀거니 서 있는 자들에게 고함을 질렀다. 놀란 자 들이 일제히 뒤로 물러서고 엘프들이 실드를 치느니 마느니 하는 그 순간, 바로 하늘에서 시뻘겋다 못해 시퍼렇게 변해있는 돌덩이들이 쏟아져 내리 기 시작했다. 귀와 귀를 완전히 마비시키고, 코와 코를 완전히 무너뜨리는 그런 지독한 소음과 열기가 온 전신으로 쏟아져 내렸다. 하늘은 무너지고 땅은 이글거리고. 대지의 여신과 창공의 여신은 고개를 돌렸다. 나는 킬트 놈의 실드 안에 서 있으면서도 정신이 오락가락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더 무서운 장면은 따로 있었다. 그 무시무시한 유성우를 곧이곧대로 맞으면서도 용새끼는 눈 하나 깜짝하 지 않았다. 녀석은 그것들을 유유히 피하며 허공에 살짝 떠올랐다. 아니, 피했다는 표현은 옳지 않았다. 녀석은 피한 것이 아니라 유성우 자체를 자 신의 몸에서 맞지 않도록 밀어 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저건........." 킬트의 얼굴이 비로소 변했다. 그는 유성우가 용새끼의 몸에 하나도 맞지 않는 광경을 뚫어지도록 바라보며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가 불러온 유성 우로 인하여 고왕국의 다 무너진 왕궁이 박살나 불타오르고, 또 녹아 내리 고 있는 동안 그와 용새끼는 그저 얼굴, 아니 눈을 마주 한 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달아 오른 그 무시무시한 열기 속에서 카산드라와 그 남자가 불타는, 아니 녹아버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어째서 킬트의 이 어린 아이들 은 이렇게나 서글픈 것이냐. 그 광대한 힘을 갖고도 어쩌면 이렇게도 한 순간에 죽어버리는 것이냐. 그러나 킬트는 그들에게 이미 관심이 없었다. 그는 그저 바로 앞에 있는 용새끼에게만 관심이 쏠린 듯 열중해 있었다. "대단한데." 그는 빙긋 웃더니 손을 뻗으려 했다. 하지만 그것도 순간이었다. <압(壓).> 나는 재빨리 실드 안을 튀어 나왔다. 뭐라 용새끼는 길게 말하지도 않았 다. 그저 그 순간 킬트의 실드가 납작하게 그대로 찌그러졌다. 실드가 찌그 러지는 모습은 나로서는 난생처음이었다. 주문도 너무나 간단했다. 나는 하 마터면 내 사랑스런 다리가 찌그러지는 모습을 볼 뻔했다. 납작하게 찌그 러진 킬트의 실드를 보고 그 안에 있었을 킬트가 그대로 박살난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그 순간, 푸른 빛과 함께 킬트의 몸이 솟구쳐 올랐다. 녀석 은 약간은 다쳤는지 창백한 얼굴로 솟아 오른 즉시 지팡이를 휘둘렀다. "나와라, 델카스타!" 그 순간 그의 소맷자락 사이에서 시커먼 것들이 튀어 나왔다. 하나가 아니 라, 서넛은 되는 듯했다. 그것들은 으르렁거리면서 그대로 용새끼에게로 달 려들었다. 어둠의 야수는 그 이름답게 시커멓게 이글거리면서 용새끼의 몸체에 그대로 달려들었다. 이글이글 타오르고 아작아작 씹어대는 그 마수 를 상대로 용새끼는 우아할 정도로 유연하게 실드를 전개했다. 아니, 그것 은 단순한 실드가 아니었다. 델카스타는 그 실드에 닿자마자 자지러지듯이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불에 닿은 불나방처럼 파지직 하는 소리를 내며 뒤 로 튕겨나왔다. "바리어인가?" 뭔가 심오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킬트가 다음 것을 준비하는 순간에 나는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뭐야?" "저건, 내가 맡는다!" "쿠베린." 킬트가 어이가 없다는 듯 나를 불렀다. 대꾸도 할 필요 없었다. 나는 고개를 치켜세워 내 눈앞에 선 거대한 괴물 아닌 괴물을 바라보았다. 괴물이면 어떻고 아니면 어떠랴. 내 눈앞에 선 이 것은 과거 용족이라 불렸던 그것. 물론, 그 것과는 조금 다르긴 하지만 상 관은 없었다. 이것은 강하다. 이 놈의 용새끼는 진저리나도록 강한 것이다. "이리 와, 네가 정말로 용족이라면 이리 와라, 용새끼." 내 말에 녀석은 길고 긴 대가리를 흔들며 분노를 표시했다. <뭐라고 하는 거냐? 이 미천한 것아.> "이리오라고. 여기 있는 내가 두려우냐? 이리 와 봐. 어차피 널 부리던 계 집도 죽었잖아?" 나는 빙글빙글 웃으며 재촉했다. 두근두근, 심장이 뛰었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게 진짜로 용족이든 아니든, 아무래도 좋았다. 중요한 것은 이 순간의 희열, 몸 안에서 외치는 고함. 내 피와 내 심장이 노래하는 강렬한 리듬. 이게 대체 얼마만의 일일까. 일그러진 분노도, 슬픔도 아닌 그저 순수한 감각으로 흥분하는 것은. 나는 등줄기로 퍼져나가는 아플 정도로 짜릿한 감각에 취해서 방글방글 웃었다. 거대한 덩치의 시뻘건 용새끼는 잠시 동안 망설였다. 상대가 나인지 아니 면 킬트인지 알 수 없어서 인 듯했다. <강렬한 마력이 느껴지는 너. 강렬한 살기가 느껴지는 너.> 용새끼는 나와 킬트를 번갈아 보며 중얼거렸다. 아니, 사실 중얼거리는 게 아닐 지도 모른다. 나는 지팡이를 쥐고 있는 킬트를 한 대 후려치면서 말 했다. "이 놈은 없는 걸로 쳐. 나와 하는 거다. 나와 춤을 추는 거다." "웃기지 마. 진정해라, 저건 너 혼자 상대할 수 있는 게 아냐!" 킬트가 기가 막히다는 듯 나를 제지하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나는 목에 매달려 있는 무한의 주머니를 녀석의 손에 터억 하니 안겨 주었 고 녀석의 손은 빠각 소리를 내며 그대로 부러져 버렸다. 주머니가 녀석의 부러진 팔과 함께 땅에 깊숙이 박히는 것을 보며 나는 빙글 웃어 주었다. "봐, 너는 부상 중이라 안 돼. 그렇지?" "미, 미친....." 고통으로 팔뚝을 부여잡은 채 킬트는 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일렁이는 용새끼의 기운은 점점 강도를 더 해가고 있었다.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는 그 기운은, 빨강색이 주된 색깔이었지만 곧 주황색과 노란색도 섞였다. 나는 그 기운을 신기하게 바라보며 물었다. "너는 마력으로 싸우는 거냐, 아니면 몸뚱아리로 싸우는 거냐?" 오랜만에 주머니를 떼고 섰더니 목덜미가 허전했다. 나는 목을 천천히 주 무르면서 녀석과 킬트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웃음이 나온다. 아아, 너무 기뻐서 웃음을 참을 수가 없다. 조금씩 조금씩 머릿속이 묘하게 깨끗해 졌다. 이 용새끼가 강하면 강할수록 머릿속은 깨끗해진다. 두근두근...... 가슴속의 심장은 벌써부터 환희의 노래 를 부른다. 용새끼는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악악대던 카산드라의 존재 자체를 잊은 듯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너는, 누구냐?> "묘인족의 왕 쿠베린. 이 지상에서 가장 강한 자." 그 말에 용새끼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웃었다. 길죽한 대가리에 길죽하다 못해 찢어진 눈과 길죽하다 못해 늘어진 주둥이 를 가진 녀석이 씨익 하고 웃었던 것이다. 나는 그 시뻘건 눈에 그어진 한 줄기 선 같은 눈알을 말끄러미 올려다보면서 같이 웃어 주었다. <나는, 너를 알고 있는 것 같다. 먼 기억 속에.> 녀석이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놈의 목소리는 머릿속으로 웅웅 울리듯 퍼져나갔다. 목소리에 온기가 있다면 바로 이것일 지도 모른다. 따스한 목 소리, 차가운 목소리가 각각의 감촉을 남기면서 내 몸 안에서 슬그머니 또 아리를 틀었다. 용족은 음성만으로도 다른 살아 있는 것들을 죽이고 살렸 다고 하더니 그 전설이 맞기는 맞는 모양이다. 용새끼의 온 몸에 마치 후광처럼 드리운 오오라, 붉은 색과 노란색이 점 멸하고 있는 그 아지랑이와 같은 오오라가 살아 있는 것들의 심장을 마치 쇳덩이처럼 누르고 있었다. "너는 고룡족의 하나인, 셀러로니 에발룬, 네가 기억하지 못해도 나는 기억 해 줄 테니까." 내가 고동치는 심장을 누르면서 말하자 녀석은 흉측한 빨간색과는 어울리 지 않는 온화한 음조로 대답했다. <이름은 아무래도 좋아. 나는, 너를 알고 있고 너는 나를 안다. 그것만으로 도 충분하다.> 나도 녀석을 향해 온화하게 말했다. "그러냐. 용족의 하나여." 두 팔을 벌리고 나는 크게 웃었다. 그 어리디 어린 멍청한 녀석이 어떻게 이렇게나 넓고 깊은 영혼으로 탈바꿈 한 것인가? 영혼이 육체를 얻은 것만 으로도 이렇게까지 변할 수가 있는 것일까? 이 놈은 내가 알던 셀러로니가 아니었다. 어쩌면 다른 존재, 용족이면서 또 다른 존재일 지도 모른다. 하 지만, 그 알맹이는 역시 용족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나는 발을 굴렀다. 쿵 하고, 다시 한 번 쿵 하고. 상대에 대한 깊은 존경과 애정을 담아 나는 소리 높여 노래를 불렀다. 가 슴이 떨릴 정도로 그리운, 사랑스런, 자랑스런,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섭도 록 경건한 이 기분. 어느 새인가 내 뒤에 서 있던 여자들도 노래를 시작했다. 내 아이들도 노래 를 시작했다. 이것은 싸움의 상대를 위한 경례, 내 자신의 심장을 뛰게 하는 그 거대한 존재에 대한 예의. 날고 있던 조인족도 노래를 시작했다. 가느다란 그들의 목소리가 굵은 내 노래와 아이들의 카랑카랑한 노래와 어우러져 점점 크게 울려 퍼졌다. 아 아, 그래. 이 자리에 사인족이 있었다면 좋았을 걸. 이 자리에 사인족도 함 께 노래를 했다면 좋았을걸. 엘프들은 뒤로 물러섰고 킬트도 고개를 숙이며 뒤로 물러섰다. 킬트는 이해 할 수 없다는 듯 나를 뚫어지도록 바라보았다. 그래, 너는 알 바가 아니야. 노래는 노래. 영혼은 영혼. 용족의 시신을 앞에 두고, 그리고 그 시체에 어울리지 않는 거대한 영혼을 앞에 두고 우리들은 노래를 한다. 아이들은 어미의 손을 잡고 노래를 한다. 조인족들은 날개를 꼿꼿이 펴고 반듯하게 날며 노래를 한다. 나는 주먹을 쥔 채 가슴에 대고 노래를 한다. 그 옛날, 기억도 할 수 없는 어린 시절에 나는 떠들고 웃었다. 어미와 아비, 그리고 형제들. 첫 싸움, 첫 사냥. 첫 몽정, 첫 사랑. 그리고 두 번째 싸움, 두 번째 사냥, 두 번째의 사랑. 그 아련한 그리움보다도 더 짙은 향기, 향기 와도 닮은 그 뭐라 이름지을 수 없는 감정. 머릿속 뇌수에서부터 심장, 심장 을 지나 내장 전체로, 그리고 발끝까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순식간에 스며 드는 이 환희의 감정을 대체 뭐라고 말할까. 내 몸 속에 도사리고 있는 내 심장의 부름에 나는 단 한 번도 거스른 적 은 없었다. 나는 나로 태어났고 또 그것에 항의할 필요도 없다. 누가 뭐라고 하든 나는 나. 웃어도 나, 울어도 나, 얻어맞고 흙탕물 속에 처박혀도 나는 나, 살아 있는 것들을 죽이고 살아가는 나도 나. 이것 봐, 웃어라. 묘인족으로 태어나 저 전설의 용족과 이렇게 부딪치며 싸울 수 있 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즐거움이냐. 살아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 이 거대한 덩치의 용새끼, 아니 덩치만이 아니고 그 정신이 더 큰 용새끼 를 보며 나는 따끈한 애정을 느꼈다. 몸이 일그러지고 찌그러지고 그 본래 의 몸과는 비교도 할 수 없겠지만 녀석은 여전히 강했다. 그 정신이 얼마 나 높이 치솟아 있는 지 그 마음이 그 얼마나 더 넓은지 녀석을 보고 충분 히 알 수 있다. 인간의 마법사가 이 무한에 가까울 정도로 넓은 이 정신에 어울리지 않는 피투성이 시체를 붙여 놨어도 녀석은 여전히 용족의 하나. 인간따위, 아니 이 지상 위에 서 있는 생명 중에서 그 높고 깊음을 짐작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거창하게 커다란 존재였다. 멀리서 노래소리가 들려왔다. 다크가, 듀나시가, 휴런이 노랫소리와 함께 달려오고 있었다. 그 뒤를 이어 절룩대며 바스티앙이 달려온다. 모두 다 노 랫소리에 맞추어 발을 구르며 내 앞, 아니 용족 셀러로니 에발룬이었던 자의 앞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다크." 나는 웃는 얼굴로 달려온 다크에게 말을 걸었다. "다음에 플라티나가 성인이 되면, 네가 안아 아이를 만들어 주는 거다." 그 말에 그의 눈이 커졌다. 그가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였지만 나는 들을 수 없었다. 노랫소리로 가득한 귀와 머릿속이 다른 것들을 다 거부했다. 아아. 이런 감각을 느껴본 것은 대체 얼마만의 일이냐. 아니, 이 런 감각은 난생 처음일지도 모른다. 여자들은 눈물을 흘리며 노래를 하고 있다. 그녀들은 홀린 듯 나를 바라 보지도 않고 노래를 하고 있었다. 그래, 너희들도 아는 거냐? 아이들은 노래를 부른다. 조인족도 노래를 부른다. 조인족의 여왕은 나에 게로 시선을 맞춘 채 노래하고 있었다. 붉은 그녀의 입술이 움직일 때마다 가슴이 뛰었다. 품안에서 용새끼의 몸을 꺼내 바닥에 내려놓았다. 셀러로니는 그것을 묵묵히 내려다본다. 그 뻘건 눈동자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침착함을 갖춘 채 자신의 몸을 내려다본다. <그것이 내 원래의 몸인가?> "그래." 내가 대답해 주었지만 녀석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마치 고양이 새끼처럼 늘어진 작은 몸뚱이를 보며 그저 피식 웃었을 뿐이었다. 놀라지도, 슬퍼하지 도 않았다. 오히려 발을 구르며 웃고 있는 나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너는 나와 싸울 작정이냐?> "그래." <어째서?> "그러고 싶으니까." 나는 다시 방긋 웃었다. 몸과 마음이 빙글빙글 춤을 춘다. 이 세상에서 가장 기쁜 환희의 춤을. 들어 보아라. 묘인족으로 태어나 이 세상에서 가장 기쁜 일은 자신보다 강 한 자와 겨루는 일. 나는 이 백여년간 제대로 싸워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 두 팔을 버리고 두 다리를 벌리고 벅차게 타오르는 심장을 들고 상대 와 춤을 춘다. 이 보다 기쁠 수는 없다. 나는 계속해서 웃었다.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럼, 시작할까?" <좋아.> 녀석 역시 캐묻지 않았다. 그도 들었으리라. 뛰고 뛰고 또 뛰는 내 심장의 소리를. 벅찬 환희를 이기지 못하고 부들부 들 떨리고 있는 이 팔다리를. 두 발을 대지에 대고 춤을 추면서, 두 팔을 허공에 던져 날갯짓을 하면서 기쁨으로 노래하는 이 몸뚱이를. 단숨에 변신했다. 녀석이 짓누르는 힘에 맞서서 단숨에 몇 단계나 겹쳐 변신했다. 내 모습이 어떤지 나는 그에게 물어 보고 싶었다. 시뻘건 핏덩이 로 이루어졌으나 그 몇 곱이나 매혹적인 자태를 가진 그 전설의 용족에게 나는 물어 보고 싶었다. 이봐, 내 모습은 어때? 나는 강한가? 나는 그대와 겨룰 자격이 있는가? 그럴 필요는 없었다. 그의 힘이 나의 몸을 격렬하게 두들겼고 나는 태어나 서 처음으로 일어나기도 힘든 강렬한 타격을 맛보고 나뒹굴었다. 피와 살 이 뭉개지도록 대단한 힘이었다. 하지만 기뻤다. 환희에 불타는 몸은 여전 히 불타고 심장은 미쳐 날뛰었다. 와라, 와라, 강한 힘이여, 강한 자여, 나 와 함께 겨루자. 그리하여 나와 함께 걷고 나와 함께 달리자. 그의 길죽한 눈알을 손톱으로 그어 터뜨리고 그의 피로 이루어진 몸뚱이를 찢었다. 내 몸에 와 닿은 그의 힘처럼, 내 힘이 그의 몸에 타격을 입히길 원 했다. 아아, 그래. 이것이 바로 내 심장이 바라는 바. 머릿속이 뭐라 악을 내 질러도 이것이야말로 원하는 것. 일곱 개의 보석아! 나의 소원을 받아라! 나는 피로 물든 눈을 훔치며 외쳤다. 녀석의 앞발이 내 배를 후려갈겼다. 녀석의 거대한 마력이 가까스로 피한 내 팔을 으스러뜨렸다. 나는 가장 간절한 소망을 담아 외쳤다. 내 소원을 받아라! 이것이야말로 진정 내가 바라는 소원! 나는 웃음을 머금고 다시 달려들었다. 혼자 내달리는 것은 외롭다. 자, 나와 함께 걷자. 버림받은 용의 새끼여. 나의 어깨에 올라탄 죽음의 여신은 이제 너무나 무거워. 이리와 내 손을 잡아. 나와 함께 가자. 내 생애 가장 강한 존재여, 내 손을 잡고 춤을 추자 구. 살아 있는 자들만이 출 수 있는 환희의 춤을. 너의 진정한 마력이 무엇 인지 내게 보여봐, 너의 힘이 어떤 것인지 나에게 보여봐. 네가 살아 있다 는 것을 보여 봐. 아니, 나만이 아니고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살아 있는 자 들에게 보여봐. 아니, 이 지상 위에 있는 모든 존재들에게 보여봐. 용족을 부활시켜라. 사라져 버린 용족을 부활 시켜라. 이것이야말로 진정코 바라는 바. 대지의 여신에게, 죽음의 여신에게, 그리고 창조의 여신에게 던지는 나의 도전장. 묘인족이 홀로 달리기엔 너무나 이 땅은 넓어. 조인족이 혼자 날기에는 그 하늘은 너무나 넓어. 사라진 사인족의 울부짖음을 대지의 여신은 들었 는가? 자아, 보석들아, 이 것이 나의 소원. 보석의 주인으로 명하노니, 용족을 부 활시켜라. 지상의 살아있는 것들이 나를 증오해도 상관없어. 나를 마왕이라 칭해도 상관없어. 이 기쁨을 모르고 죽어갈 수많은 묘인족과 조인족을 위해 나는 기원할 테니까. 그 옛날 용족이 지상을 지배하던 것처럼 무시무시한 고대 가 다시 돌아와도 상관없어. 그러면 젊은 묘인족이, 젊은 조인족이 그 옛날 그랬던 것처럼 용족을 물리치기 위해 손을 잡고 싸워 나갈 테니까. 심지어 인간이 나설 수도 있겠지, 인간과 또 다른 아인족들, 청색, 갈색의 수많은 종족들이 모두다 힘을 합쳐 싸우러 갈 수도 있을 거야. 그러면 어때? 그것 도 하나의 즐거움. 새로운 전설의 시작. 나는 피로 앞이 보이지도 않는 두 눈을 주먹으로 쓸어 닦아 냈다. 그리고 는 마지막 변신을 시작했다. 자아, 이제 끝장내자고. 이제 이성따윈 필요 없어. 이제 생각따위는 필요 없어. 친애하는 버려진 용족의 새끼여, 끝장내자구! "나는, 너에게 도전한다. 이 빌어먹을 용새끼!" 나는, 크게 웃었다. [뒤가 없는 막간극] 항구의 여인 -완결- KUBERIN.............. <전략>......네가 진정한 왕이라면 이 황금의 관을 써 보아라. 이 황금의 관 은 진실한 왕만이 쓸 수 있는 것. 네가 만약 진정한 왕이 아니라면 너는 이 황금의 관의 무게에 짓눌려 그 자리에 서 죽어버릴 것이다. 하지만, 네가 진정 한 왕이라면 이 황금의 관을 쓰는 순 간, 너는 불노불사의 영원한 생명을 얻 을 수 있을 것이다. 어떠하냐? 너는 이 관을 쓸 수 있겠느냐?" 마왕 쿠베린이 유혹적인 목소리로 속 삭였다. 그러자, 대제가 대답했다. "나는 영원한 생명을 원치 않는다. 인 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염원은 할 수 없는 일을 해 내는 것, 만약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면 인간은 실로 타락해 버리고 말 것이다. 인간이 인간답지 못 하게 될 때, 인간은 타락하여 인간이 아니게 된다. 나는 그 것을 원치 않는 다." ― 룬드바르 대제(大帝)와 황금의 관 에 대한 전설 중에서 항구도시 엘리야에서 가장 붐비는 음식점 중에 하나는, 마리아의 암사슴 집이라고 하는 여관을 겸한 식당이었다. 이곳에서 가장 자랑하는 요리는 통 돼지 바비큐요리였는데 그 요리가 가장 유명한 것은 그 집의 아리따운 여주인이 반라의 몸으로 땀을 뻘뻘 흘리며 직접 고기를 잘라주기 때문이 다. "보스, 오늘도 가시는 겁니까?" 키가 작은 폴더가 조금 한숨을 삼키며 물었다. 폴더의 손에는 보랏빛 두레 국화다발이 얌전히 꽂혀 있었다. 바짝 마르고 키가 작긴 했어도 찢어진 세 모꼴 눈초리에 당장이라도 누군가를 죽여버리겠다고 외칠 것같은 얄팍한 입술을 가진 삼십대 중반의 남자에게, 이 국화다발은 전혀 어울리지 않았 다. "시끄러." 그러나, 어찌하랴. 그는 졸개였고 보스는 보스다. 대머리에 깊은 흉터, 거기에다가 보통 장정 둘은 겹쳐 놓은 듯한 거구를 한 이 엘리야의 숨은 보스, 유젠 코르크라고 하는 남자에 대해서는 갖가지 전설이 많지만 그 중 하나는, 마왕의 직속 부하라고 조금 미심쩍은 것이었 다. 룬드바르제국이 세워진 지 1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질릴 정도로 반 군을 일으켰던 아그랑의 공작가도 지금은 공국으로 홀로 독립을 한 마당 에 새삼스럽게 제국을 공격하려는 무리들은 없었다. 사실, 제국이 들어섰다 고 해도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지방 영주들은 그대로 자신의 땅을 다스렸고 시장들은 여전히 시장이었다. 단지 세제가 조금 가벼워졌다는 것과, 동방교국의 듣도 보도 못한 물건들이 대상인이라고 이름 붙여진 자들에 의해 옮겨지기 시작했다는 것 정도였다. 교류를 하지 않기로 소문난 동방교국이 룬드바르 제국과 교류를 시작하게 된 것은 3년 전 룬드바르 대제가 동방교국의 암살자에 의해 서거한 해부터 시작되었다. 겨우 나이 서른 다섯에 서거한 이 젊은 대제에 대한 경의로, 어 떤 나라에게도 문호를 개방하지 않았던 동방교국이 교류를 허락한 것이다. 덕분에 대륙 전체에 동방교국에서 들여온 신기한 상품들이 봇물처럼 쏟아 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찌 이 무서운 암흑가의 깡패두목께 서 귀하디 귀한 동방교국의 비단옷을 걸칠 수 있겠는가. 마리아의 암사슴집에 도착하자, 아직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비교적 조용했다. 유젠은 침을 삼키고 문을 열었다. "거기 좀 잘 닦아!" 큰 소리로 외치는 여자의 목소리에 그는 살짝 얼굴을 붉혔다. 아주 살짝만. "어라? 당신, 또 왔어?" 나이 사십이 넘은 주제에 짙은 화장과 수박만한 가슴을 안고 있는 여자, 베스가 질 나쁜 웃음을 머금으며 유젠을 흘겨본다. 유젠은 그 추파와도 흡 사한 눈초리를 무시하고 낮게 깔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마리아는 있냐?" 베스는 깔깔대며 주방을 향해 소리쳤다. "마리아! 마리아! 유젠이 청혼하러 또 왔어!" 그 말에 튀어 나온 것은 마리아가 아니라 키 작은 소년아닌 소년. 꼬리가 달린 금빛 눈의 아인족이었다. 아인족 소년은 튀어 나오더니 그 금빛 눈을 매섭게 흘기면서 방울이 달린 꼬리를 흔들어 댔다. "또 왔어? 뭐하러 온 거야? 마리아는 쿠베린 거란 말이야!" "시끄러, 쥐방울." 유젠은 대머리에 핏대를 하나 올리더니 사납게 대꾸해 주었다. 그때서야 겨우 주방에서 앞치마를 두른 마리아가 나왔다. 그녀는 하얀 피 부에 요염한 얼굴로 팔짱을 낀 채 유젠을 쏘아보았다. 이제 곧 서른이 되 어 가는데도 아름답기만 한 그 얼굴에 새삼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 며 유젠은 부드럽게 웃으려고 노력했다. "안녕, 마리아." "또 왔어?" 마리아의 반응은 여전히 시큰둥했다. 그녀는 팔뚝을 걷어붙인 채 턱을 치 켜들고 말했다. "오늘은 왜 왔어?" "청혼하려고." "청혼같은 소리하고 있네, 나를 지켜달라고 쿠베린이 그렇게 말했는데 네 가 나에게 흑심을 품다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쿠베린은 죽었다잖아? 그러니까........" 유젠의 말에 마리아는 팍 소리가 나도록 얼굴을 찌푸리며 외쳤다. "누가 죽었다고 그래? 안 죽었어! 안 죽었다구!" 옆에 있던 야묘족소년 가빈이 이를 드러냈다. 소년은 달려들어 유젠의 팔 뚝을 물어뜯었다. "쿠베린은 죽지 않았다구우! 쿠베린은 절대 안 죽어!" 사나운 고양이처럼 달려드는 소년을 억지로 밀쳐내면서 유젠은 터져나오 는 신음을 억지로 삼켰다. 마리아 앞에서 설마하니 이 주먹만한 녀석을 상 대로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쿠베린이 죽지 않았다면 여기까지 안 올리가 없잖아? 벌써 7년이나 지났 어. 쿠베린이 살아 있다고 해도 이 정도 시간이 흘렀는데도 안 온다는 건, 마리아를 잊었다는 이야기야. 마미도 스카도 여기에 없잖아? 그런데 쿠베 린이 여기 올 거 같아?" 유젠은 욱신거리는 팔뚝을 주무르면서 은근슬쩍 가빈을 발끝으로 밀었다. 가빈은 계속 갸르릉거리다가 옆에 있던 폴더의 손에 이끌려서 한 구석으 로 밀쳐졌다. 그 모습을 약간 불안하게 보았던 베스가 마리아를 보았다. "그래서?" 마리아는 긴 스커트 자락을 치켜올리더니 터억 하니 옆에 있는 의자에 한 쪽 발을 올리며 물었다. 턱을 치켜 든 그녀의 모습은 꽤나 도전적이긴 했 지만 여전사도, 마법사도 아닌 그녀에게 겁을 먹을 사람은 없었다. "솔직히 생각하라고. 쿠베린과 몸을 섞은 여자는 강가에 돌멩이처럼 많아. 그 중 네가 사랑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 관계는 네가 이 가게를 얻으 면서 끝난 거야. 알겠어? 쿠베린은 네게 가게를 사주고 아예 발을 끊은 거 라구." "닥쳐!" 마리아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외쳤다. "누가 쿠베린을 알지? 네가 알아? 나는 그를 알아. 그는 나를 버리지 않아. 절대로 버리지 않아!" 옆에서 베스가 말리려고 했지만 마리아는 재빨리 발을 디디고 있던 의자를 빼들어 유젠에게 집어 던졌다. "이 멍청한 놈아! 꺼져! 꺼져 버리라구!" 유젠은 의자를 피해 뒤로 물러섰다. 불쌍하게도 바닥에 부딪친 의자가 박살나자 그 서슬에 놀란 가빈이 낮게 비명을 올렸다. 마리아는 식식거리면서 유젠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다시 여기에 오면 네 놈 멱을 딸 테다! 나는 절대로, 쿠베린의 여자니까 네 것 따위는 되지 않아!" "너......." 유젠이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안 그래도 흉악한 인상인 그가 얼굴을 찌푸리자 말 그대로 살인마처럼 살벌했다. 그러나, 정작 입을 연 것은 옆에 있던 폴더였다. "웃기지 마! 창녀 주제에 정조라도 지킨다는 거냐! 보스가 귀엽다 귀엽다 했더니 네가 어디의 양갓집 규수라도 되는 줄 알아?" 옆에 있던 폴더가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만 둬." 유젠은 의외로 폴더의 머리통을 한 대 두들겨 그 입을 막았다. 그는 이글 거리는 눈으로 폴더를 한 번 더 쏘아보더니 억지로 이를 악물고는 폴더가 쥐고 있던 두레국화다발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가겠어. 그러니까.........." "가지고 가! 그 따위 것! 네 것은 안 받아!" 마리아가 꽃다발을 들어 내던졌지만 유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입을 굳게 다문 채 뒤로 조용히 걸어 나갔다. 그 뒤를 따라서 나가던 폴더 는 마리아를 사납게 흘겼다. "미친 년, 네 주제를 알아. 그래도 보스니까 네 지랄을 다 받아 주는 거야." "닥치고 꺼지지 못해!" 보다 못한 베스가 들고 있던 걸레를 폴더에게 집어던졌다. 폴더는 악하고 달려들려다 말고 앞서서 가고 있는 보스의 뒤를 급히 따랐다. 나가면서 가 게 앞에 침을 뱉는 것도 잊지는 않았다. 마리아는 탁자를 짚고 잠시 동안 멍청하니 서 있었다. 옆에 있던 베스가 한숨을 삼키며 의자에 그녀를 앉히자, 마리아는 그제서야 가빈을 돌아보았 다. "가빈, 안 다쳤어?" "으응." 울상이 된 가빈은 손톱이 사라진 두 손으로 얼굴을 비볐다. 당장이라도 눈 물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은 그 눈을 보고 마리아는 억지 웃음을 지으며 두 팔을 벌렸다. "이리 와." 마리아는 꼬리 달린 소년을 안은 채 한숨을 삼켰다. 정말 울고 싶은 것은 그녀였다. 7년간 그녀는 꽤나 재산을 모았다. 하지만, 그 재산을 모으는데 도움을 준 것은 분명히 유젠이었다. 그가 사람들을 시 켜 여행자들을 끌어 모으고, 행패를 부리는 깡패들을 몰아내주지 않았다면 마미같은 완력도 없는 마리아로서는 이런 항구도시에서의 장사가 쉬웠을 리가 없었다. 엘리야의 모두가 그녀가 쿠베린의 여자라는 것을 알고는 있 었지만 뜨내기들이 쿠베린의 이름을 알 리가 없다. 그나마 7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쿠베린을 아는 사람들은 점차 그가 마리아를 버렸을 거라고 말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확실히, 마리아는 마미와는 달랐으니까. 쿠베린이 엘리야로 돌아오는 것은 오로지 마미 때문이었으니까. 가빈은 마리아의 눈가를 살짝 핥았다. 그 까칠한 감촉에 그녀가 흠칫하자, 가빈은 위로하듯 속삭였다. "괜찮아. 쿠베린은 바보지만 그래도 마리아를 버리진 않아. 이렇게 안 돌 아오는 걸 보면 뭔가 일이 생겨서 그런 거야." "그럴거야. 쿠베린은 항상 돌아 왔으니까." 억지로 웃던 마리아는 문득 얼굴을 매만졌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어서 얼굴을 다듬어야만 했다. "베스, 목욕물 좀 데워줘." "알았어." 음식 장사하는 여자가 아침저녁으로 목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 래도 마리아는 했다. 언제 쿠베린이 돌아와서 그녀를 볼지 모른다. 몇 백 년이 지나도 늙지 않는 그와 달리, 마리아는 조금씩 나이를 먹고 있었다. 그녀도 피부의 탄력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만약에 그가 늙어버린 자신을 보고 그냥 가버린다면 어떻게 할까. 그것만은, 그것만은 막고 싶었다. 그녀는 손거울을 꺼내 들여다보았다. 딸랑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아직 장사시작 하지 않았다고 막 그녀가 말하려는 순간, 갑자기 가빈이 악 하고 소리를 질렀다. "오랜만이야." 들어선 것은, 스카였다. "스카!" 그를 부여잡고 가빈이 눈물을 흘렸다. 그의 꼬리가 미친 듯이 흔들어대는 것을 보며 마리아는 멍하니 스카를 보다말고 그의 뒤를 살폈다. 혹시, 쿠베 린이 돌아온 것은 아닐까. 그녀가 손거울을 잡고 스카를 올려다보자, 그는 어색한 얼굴에 애써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이야. 마리아." "쿠베린은?" 그녀가 묻기도 전에 가빈이 황급히 따져 물었다. 그 소리에 스카가 한숨을 내쉬며 가빈을 안아 올렸다. 가빈이 스카의 몸에 대롱 매달리자 마리아는 재차 물었다. "쿠베린은 어디 있죠?" "쿠베린은....없어." "뭐라구요?" "쿠베린은 죽었어." "거짓말!" 그녀는 악 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탁자를 움켜잡았다. 눈앞이 깜깜해져서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가빈이 스카의 몸에 매달린 채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거짓말! 쿠베린이 죽을 리 없어! 그 엉망진창의 색마가 죽을 리가 없다구!" 그의 몸에 매달린 채로 가빈이 그를 발버둥치며 마구 할퀴기 시작했다. 스카는 억지로 가빈의 몸을 눌러 안으면서 비틀거렸다. 그는 한숨을 삼키 면서 마리아의 기색을 살폈다. 마리아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의외로 침착한 모습 에 스카는 조금은 안심했다. "쿠베린.......은 어떻게 죽었어요?" "용족과 싸우다가." "용족과 싸우다가? 용이 정말 있는 거예요?" "소문도 듣지 못했어? 용족이 부활해서 대륙 몇 몇 곳에 용의 영토가 선언 되었잖아?" 스카가 애써 부드럽게 말했지만 마리아는 날카롭게 그를 쏘아보았다.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에요? 용병들 몇에게 소문은 들었지만 실제로 본 적은 없으니까 나로선 모르겠어요. 그 용이란 게 얼마나 대단하기에 쿠베 린이 그런 것과 싸우다 죽었다는 말인가요?" "용족은, 신과 큰 차이가 없다고 보면 돼. 수십 메테르에 달하는 덩치와 마법을 쓰는 무시무시한 존재니까." 마리아는 미간을 잠시 찌푸리다가 스카를 다시 매섭게 쏘아보았다. "그런데 왜 이제 온 거죠? 왜 이렇게나 시간이 흐른 뒤에 왔어요?" "나는, 부상을 입어서 조인족의 마을에 가 있었어. 그 쪽에서는 내가 다시 인간의 마을로 돌아가는 것을 싫어해서......게다가 마미도 죽었으니까." 그는 어두운 얼굴을 하고 마리아와 가빈을 번갈아 보았다. 가빈이 마미의 소식에 눈물을 줄줄 흘리는 것을 보다가 그는 가볍게 어깨를 으슥했다. "사라에게 직접 말을 하는 게 도리겠지만, 어쩔 수 없어. 내 입으로는 차 마 사라에게 말을 할 수가 없어. 쿠베린도, 마미도 죽었다는 말을 듣고 사 라가 어떻게 할지......." "사라에게는 그래도 남편이 있으니까." 마리아는 그 말을 내뱉고는 눈을 감았다. 지루한,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지붕이 높은 목조 건물인지라 소리는 잘 울렸다. 솥에서 끓고 있는 스튜의 소리가 바글바글 나직나직하게 들려왔다. 가빈의 훌쩍이는 소리, 마리아의 한숨에 가까운 숨소리와 어색하게 버티고 선 스카의 발 밑에서 나는 삐걱 이는 소리 이외에는 아무 소리도 없었다. 이 거북한 침묵을 깬 것은 목욕 물을 살피다 가게로 들어선 베스였다. "누구야?" 베스는 훌쩍이는 가빈을 안고 선 스카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울고 있는 가빈과 넋을 잃고 있는 마리아를 보고 금방 무슨 일인 지 눈치를 챘는지 황급히 달려와 마리아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마리아." 스카는 베스가 마리아를 끌어안는 것을 보며 조용히 불렀다. "나는 가빈을 데리러 온 거야." "왜?" 날카로운 목소리로 마리아가 묻자 스카는 가빈을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가빈은 인간이 아니니까. 만약에 가빈이 갈 곳이 없어진다면 어떻게 할 수가 없으니까. 야묘족은 요즘 거의 남아 있질 않아." "내가 가빈을 버릴 리가 없잖아!" 마리아가 큰 소리로 외치자 스카는 고개를 저었다. "가빈은, 앞으로 150년 이상은 더 살 거야.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겠지?" 마리아는 눈을 크게 뜨고 가빈과 스카를 번갈아 보았다. 가빈이 눈물을 닦 으면서 어리둥절한 얼굴로 마리아를 돌아보자 마리아는 입술을 깨물며 스 카를 노려보았다. "내게 가빈까지 빼앗으면 남는 게 뭐야? 너무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 "너는 아름답고 좋은 여자야. 다른 사람을 얼마든지......" "쿠베린을 대신 할 남자가 있을 거 같아!" 그녀는 악을 질렀다. 비로소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눈물이 줄줄 흘러내 리자, 스카의 모습이 흐려지더니 결국 아무 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하지 만 그녀는 계속해서 스카를 노려보았다. "아무도 그를 대신 할 수는 없어! 그가 바로 내 전부였다구!" 흐느껴 우는 그녀를 내버려두고 스카는 가빈을 알아 올렸다. 가빈이 다시 발버둥을 쳤지만 스카는 애써 그를 품안에 가두었다. "가빈, 쿠베린이 죽고, 마미가 죽고, 또 마리아도 언젠가는 죽고, 또 사라 도 죽어. 그래도 넌 엘리야에 남아 있을 거냐?" 그 말에 가빈은 몸부림을 멈췄다. "모두 다 없어진다구?" 금빛 눈동자의 검은 홍채가 커졌다가 다시 작아졌다. 눈물로 충혈된 그 이 질적인 눈을 바라보며 스카는 한숨을 억지로 삼켰다. "결국은 모두 다 사라져. 나도, 마찬가지야." 가빈은 말 없이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너 홀로 남겨 둘 수는 없어. 나와 같이 가자. 너와 다르기는 해도 수명은 너와 비슷하거나 너보다도 긴 종족들이 있으니까. 그들이 너를 데리고 오 라고 하더군." "누군데?" 가빈이 눈물을 닦으며 묻자 스카는 살짝 웃었다. "에닌과 카산." "아!" 가빈은 팔짝 뛰듯 놀랐다. 기쁨에 가득 찬 단순한 눈동자를 바라보며 스카는 그 머리를 쓰다듬어 주 었다. 뭐라 말하든 야묘족으로서 가빈은 아직 어렸고, 야묘족은 정에 굶주 린 듯 항상 보듬어 주어야 하는 종족이다. 스카는 그 작은 몸을 끌어안은 채 속삭였다. "에닌이 널 보고 싶다고 했어. 그러니까 같이 가자." "엘프들은 사라졌다고 하던데? 노스엘스턴은 사라졌다고 하던데?" "카산과 에닌은 있어. 그리고 노스엘스턴으로 돌아가지 않은 몇 몇 엘프들도." "그럼, 그들은 다 무사한 거야?" "무사하고 말고." 문득 가빈이 망설이며 물었다. "마리아는? 내가 가고 나면 마리아는?" "마리아는 잘 지낼 거야." 가빈이 마리아를 돌아보자 그녀는 눈물을 닦으며 일어서고 있었다. 일어 선 그녀는 스카에게서 가빈을 받아 힘껏 끌어안아 주었다. 가빈은 마리아 의 가슴에 얼굴을 품고 속삭였다. "그럼, 가도 돼? 마리아?" "그래. 사라에게는 내가 말할 께." 마리아는 울어 목이 잠긴 목소리로 낮게 말했다. 옆에 있던 베스도 가빈을 힘껏 안아 주었다. 그녀는 어쩔 줄 모르는 가빈 의 꼬리를 악 소리나도록 잡아 당겨 주고는 이별을 고했다. "잘 가. 건방진 고양이." 스카는 가빈의 손을 잡은 채 마리아에게 잠시 시선을 두고는 밖으로 걸어 나갔다. 정말로 아무런 미련도 없다는 듯 주저 없이 걸어 나가버리는 그 모습에 마리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눈물이 차 올랐다가 순식간에 빠져 나 간다. 아무리 울어도 별로 변하는 것은 없었다. 그 옛날 그녀가 부모에게 버려졌을 때처럼 아무리 울어도 변하는 것은 없다. 쿠베린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와 함께 했던 시간 역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녀는 천천히 의자에 주저앉아서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분명히 마음은 담담했는데도 눈물은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몸과 마음이 두 개로 갈라진 것 같았다. 옆에 있던 베스가 어느 새인지 가게문을 걸어 잠그고는 부엌에 가서 포도주 통을 통째로 가지고 왔다. "마리아, 마시자." 마리아는 베스가 따라 준 술잔을 들고 피식 웃었다. 그래, 마시자. 울어서 변하는 게 아무 것도 없다면 잊어 주도록 하자. 그 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시간이 거꾸로 흐르지 않는다면 잊어 주도록 하자. 그가 바라는 대로, 그가 말하는 시간의 여신이 바라는 대로. 하지만 지금은 울고 싶었다. 시간은, 흘러가 버리니까 소중한 법이다. 쿠베린 완. 이 자료는 http://wndksl.cf.st 의 자료입니다. 다른곳에서 받으신 분들은 위 주소로 다시 접속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