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마의 구슬 ( http://hoyanet.new21.net/zero/zboard.php?id=karma ) 1 - 프롤로그 - 카르마에게 생긴 일 창조신의 권능아래 창조된 모든 존재들의 운명이 관장되고 관리되는 '카르마의 탑'에선 지금 갑작스런 소란으로 온통 술렁이고 있었다. 웬만한 일로는 고민조차 해 본적 없던 '카르마'는 그 자신이 현재 일 어 난 일의 진위를 두고 갈팡질팡 하는 탓에 탑 전체가 긴장하고 있 음을 알 수 있었다. 어차피 모든 생명체와 심지어 하급 신들의 운명까지도 관리되고 있는 곳이기에 어떤 면에서는 사건이 끊이지 않아 항상 소란스러운 공간이 라 놀라울 것도 없었지만, 문제는 탑 전체가 동요할만한 일을 제공한 존재가 고작 단 한 명의 '인간'이란 점이었다. 인간은 영혼을 가지고 있다. 신은 그들에게 환생을 통해 끊임없이 윤회하는 카르마의 법을 따르게 했다. 신이 내린 축복으로 이뤄졌다시피 한 그들은 생명체로서의 삶을 마감하면 살았던 동안의 시간을 삶의 성격과 가치를 측정하는 저울의 눈금대로 다음 번 생을 부여받게 되는데, 앞뒤의 모든 과정은 카르마 의 탑에 보관되고 기록되며 예측되고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계의 수많은 인간들 중 하나가 그 법을 벗어났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 인간의 과거 여러 전생들에서도,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당시의 상황에서도 전혀 예측되지 않았으며 징조조차 없었다. 보통 존재 자체가 지워지는 경우를 겪거나 신 벌을 받은 피조물들이 영혼 자체가 소멸되는 경우는 종종 있었는데 그런 경우 대상이 되는 카르마의 구슬은 스스로 페이지를 끝내거나 운용을 멈춰 그 고유의 빛을 잃게 되어 있었으며 이런 사실마저 여러 신들의 간섭에 이미 예전에 예고가 있었더랬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정말 있을 수 없는 일 투 성이었다. 갑자기 한 인간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영혼이 소멸하여 카르마에서 벗어났다면 구슬에도 곧 반응이 있어야 하는 게 옳았다. 그런데 구슬은 원래대로의 용량을 지닌 채 여전히 반짝이고 있었고, 그 존재의 전생 역시 기록된 그대로 얌전히 자리를 하는데 환생하여 생을 시작한 시작 부분에서 갑자기 공백이 생겼으며 여러 선택의 기로에서 생길 수 있는 미래에 대한 예측 기록도 깨끗이 사라졌다. 그에 따라...... 그 인간의 수명조차 알 수 없게 되었고 다음 생에 대한 카르마의 법을 적용할 근거가 없는 탓에 이러 지도, 저러 지도 못하게 되었다. 공백이 생기다니! 그럴 수도 있는가? 차라리 이유 없이 구슬이 소멸되었다거나 앞으로 기록될 여백도 함께 사라졌다면 특이한 일이라 치부하고 넘어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건 뭔가. 처음 카르마의 구슬을 신의 힘을 청하여 만들었을 때 하나 하나의 영혼이 그 무게가 다해 영원한 안식에 이르게 될 때까지의 모든 과정 을 담도록 '이름' 했지 않은가? 이 일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놀랍게도. 신이 정한 운명의 틀에 겁도 없이 대항하는 인간들은 충분 히 많았다. 그 무모한 열정에 때로 그들은 정말 운명을 극복하고 개척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어떤 인간도 자신의 운명을 새롭게 만들어 내는데 성공 한 예는 없었다. 만드는 것..... 그것은 신의 영역이다. 가능할 리가 없다. 어쩌란 말인가. 이 일은 곧 천계의 신들에게도 알려지게 될 것이다. 채워지지 않은, 미래의 시간을 가진 사라진 존재라니.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인간이라니. 주어진 임무의 성격상 가장 먼저 대책 없는 사실을 접한 카르마는 머 리가 아파 왔다. 신들은 이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길지도 모른다. 이 일로 까다로운 그들에게 약점을 잡히게 되더라도 어쩔 수 없다. 도움을 청하고 조언을 구해야 할 사항이었다. 아무리 하찮고 작은 존 재라도 함부로 할 수는 없다. 규칙은 지켜져야 한다. 아무리 작아도, 확실히 빠진 것이 분명한 톱니바퀴를 무시할 수는 없 는 것이다. 맞물려 가야함이 원칙이니까. 결심을 하고 일어서는 그에게 결심을 하고 일어서는 그에게 갑자기 존재 자체에 각인 되 듯. 존재 자체에 각인 되 듯. 어떤 의지가 새겨졌다 의지가 새겨졌다. [ 그대로 두어라 ] 카르마는 흠칫하며 정지했다.................정지했다......정지했다. 카르마 자체랄 수 있는 탑이 갑작스런 침묵에 휩싸였다. 그는, 냉정하고 철저하여 그에게 주어진. 일에 항상. 충실해 왔지만. 그로 인해 너무나. 많은 것들로부터 무수한. 세월동안 묵묵히 받을 수 밖에 없었던. 원망과, 저주와, 절망의 그늘에서 한'순'간'에 벗'어'났'다! 그리고 대답했다. "네. 아버지." << 1 부 >> 1. 슬럼가의 소녀 봄이 오고 있었다. 인간이 사는 세상에서라면 어떤 일이든 있을 수 있음을 거짓없이 증 명할 세계의 중심지 뉴욕. 그곳, 번화하고 화려한 이면의 어둡고 빈곤하고 타락한 거리 중 하나 에 앳된 소녀하나가 걷고 있었다. 아무리 추운 겨울이라도 언젠가는 물러간다. 아무리 문명이 발달해도 여전히 돈 없고 힘없는 사람들은 있으며 혜 택 받지 못하매 그들은 겨울을 더 춥고 힘들게 받아들인다 그러니 싫고 무서울 수밖에. 낡아서 흰 실밥이 터져 나오기 시작한 청바지 차림의 진은 제법 따뜻 해진 날씨에 애써 밝은 기분이 되어보려 했다. 낮이라 해도 위험할 할렘가에서, 이미 어스름이 깔린 거리를 상점의 불빛과 네온사인 아래 터벅거리며 걷고 있다는 것은 인간이 가진 가 장 기본적인 인권마저 위협받을 수 있는 일이었지만 그녀는 전혀 거 리낌 없는 태도였다 그리고 그런 태도는 지나치는 그녀를 보고도 흥미를 보이지 않는 주 위 상황과 동일했다. 흑인들이 간혹 눈에 띄었지만 거주하고 있는 구성원이 세계 곳곳의 이민자들도 포함했기에 동양 계 쪽에 가까운 외모를 한 그녀를 낯설 게 보는 이는 없었고, 어중이떠중이나 뭣 모르는 이방인이 아닌 이상 자신을 보호할 수단이나 믿는 구석 없이 당당하게 밤거리를 활보하는 바보는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그녀는 이 파렴치한 거리에서 꽤 힘있고 영향력 있는 인물과 가까운 사이이며 십 년 이상을 같은 거리에서 살아온 이웃이었다. "어이~ 귀염둥이. 샘에게 가냐?" 몇몇, 패들과 어울려 길가에 널려 있다시피 한 흑인 소년들 중 안면이 있던 사이몬 하워우드가 고개를 들고 아는 척을 했다. "내 이름은 '진'이야. 이 머리 나쁜 자식아." "그래~ 귀염둥이 진. 우리랑 놀지 않을래? 오늘 피터네 집이 빈데. 밤에 파티 할건데 오는 게 어때?" "싫어" 그들의 파티라면 뻔하지.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그대로 걸어가며 그녀가 대답하자, 우우~ 하 는 야유와 가벼운 농담들이 패거리들로부터 흘러 나왔다. "야~아. 너 그렇게 콧대만 세우다간 시집 못 간다? 샘에게 소박 맞고 갈데 없으면 피터네로 와. 알았지?" 진은 돌아보지도 않고 가운데 손가락을 세워 어깨 너머로 보여주었다. 또 뭐라고 그들끼리 지껄이고 웃는 소리가 들렸지만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악의 없는 야유들임을 알고 있었으니까. 설사 악의가 있다해도 그들은 진에게 위협이 되지 못했다. 샘은 어두운 그곳. 알콜 냄새와 담배 연기에 찌들고 가지가지 쏟아내는 소음들 속에 묻 혀 관망하는 자세로 자신의 지정석에 앉아 있었다. "꼬마야 방금 뭐라고?" 진은 탁한 공기를 한 모금 들이키고 시끄러운 소음 탓에 주위의 무리 짓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목소리지만 또렷하게 대답했다. "데이먼이 출옥한대. 난 그를 다시 보길 바라지 않아. 떠날 수 있게 도와줘." "......그러니까, 드디어 네 후견인(?)이 깜방에서 나오게 되었는데, 돌아 오면 귀찮아지니 미리 피해 보겠다고? .........어디로 갈 건데?" "다른 세상." "풋~~" 190cm에 가까운 키에 우락부락한 근육으로 무장한 듯한 샘은 평소 그다지 이 당돌한 꼬마에게 화를 내지 않고 대했던 것이 실수가 아니 었나 생각했다. "진. 어차피 이 바닥이 그 바닥이야. 어디로 가든 한번 찍힌 낙인은 숨길 수 없어.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다른 세상 따위가 허락될 리 가 있겠어?" "알고 있어. 하지만 오랫동안 생각해 온 일이 있어.....돈도 충분하고. 샘이 조금만 도와주면 돼. 도와 줄 거야 말 거야?" 그녀가 예전부터 이미 준비했다고 하면 마음을 바꿀 수는 없을 것이 다. 그리고 그렇게 실행 불가능한 일도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샘은 무시하고 싶었다. 어리지만 강하고 매력적인 이 소녀를 앞으로 보지 못하게 된다면 이 거리 누구보다도 그 자신이 섭섭해지지 않을까? 인생 밑바닥을 경험하면서 인격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진심으로 누릴 수 있는 신의라고는 약에 쓰려고 해도 찾기 힘든 버러지 같은 인간들 속에서.... 진은 그들에게 희망을 보여 주었었다. 샘은 그녈 알게된 지난날의 일들을 잠깐 회상했다. * 인간 쓰레기였던 데이먼 플랜트는 제법 목돈이 되는 일거리를 물었고 (그 일이 무슨 종류의 일이었는지는 뻔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성공 했다. 후미지고 볼 것 없는 할렘 생활을 청산하고 바다가 있는 따뜻한 휴양 지로 떠난 지 3년도 안되어서 그는 다시 예전의 그 고약한 모습으로 이 거리에 다시 돌아왔다. 하지만 빈손으로 온 것은 아니었다. 그의 손 에는 밤을 연상시키는 검푸른 머리카락에 짙은 남청색 눈동자를 가진 예쁘장한 피부의 혼혈 여자아이의 손이 쥐어져 있었다. 데이먼은 백인이었다. 흑인들인 자신들과 일상을 함께 어울리진 않았지만 적어도 같은 흑인 을 우습게 보거나 배신하지 않았었기 때문에, 또 때론 함께 건수가 되 는 일거리를 맡아 일한 오랜 경험을 통해 굳이 친구들은 그를 배척 하지 않았다. 그가 돌아왔던 것이 벌써 9년 전이다. 이 가엾은 아이는 그의 손에 학대당하며 2년 남짓 할렘가의 어떤 아 이들 보다도 비참한 생활을 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샘 자신조차도 그에 대한 관심을 보이지 않았었 다. 7년 전 그 사건이 있기 전까지. 망할 놈의 데이먼은 술에 취해 콜걸을 불렀다가 사소한 시비에 휘말 려(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신만이 아시겠지) 정말 그답지 않게도 여자 를 죽이는 실수를 했다. 그 창녀의 친구는 아침이 되도 룸메이트가 돌아오지 않자 데이먼에게 전부터 감정이 있었던 탓인지, 의심을 했던 탓인지 곧 경찰에 신고를 했다. 그는 체포되었고 재수 없게도 그가 여잘 사는 장면을 본 목격자의 증 언과 피 묻은 옷과 함께 발견되었던 당시 상황으로 여지없이 감방 행 이 되었다. 그때 경찰의 눈에 뜨인 그 아이는 그대로 사회 복지 원을 통해 바깥 세상으로 나가려니 했다. 그런데 겨우 학교 갈 나이쯤 되었던 그 아이 는 당당히 자신의 소유(?)권이 샘에게 있다고 증언을 했던 것이다. 영악한 여자아이는 어른들을, 그것도 -경찰 공무원들을 완전히 속여 넘겼다. 그 사건은 모두 데이먼의 다 삭아 가는 아파트에서 일어났는데 근처 에서 발견된 그 아이는 그 집이 자기가 사는 집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이해시켰고 사건에 대한 목격 여부 역시 교묘히 부인했다.-도대체 그 런 사실을 경찰은 어떻게 믿었던 것일까!- 데이먼은 자신이 보호자가 아니라고 말하는 아이의 말을 듣고도 가만 히 있었던 것이 무슨 꿍꿍이가 있었음에 틀림없다. 어쩌면 엄청 머리 를 굴리느라 아이에 대해선 잊어 버렸는지도 모를 일이지. 데이먼과 같은 층에는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노파가 살고 있었는데 진 이 샘의 심부름으로 아침 일찍 자신의 집에 들렀다는 증언을 웃기게도 강력히 긍정했다. 경찰이 조금만 의심했다면 다른 이웃들이나 적어도 위 아래층에 사는, 사정을 아는 사람들에게 확인을 했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들은 그렇 게 하지 않았다. 또한 경찰이 파악하고 있던 데이먼 플렌트에게는 어 떤 가족도 없었으니 곧장 아이를 샘에게 보내는 처사를 한 것이다. 다행이 그 날 아침 샘은 평소와 달리 클럽에 있지 않고 안방 마누라의 옆에서 잠이 깨어 있다가 경찰의 방문을 받았다. 이미 친구들이 아침 일찍 그 일들을 아침 식사 메뉴에 끼워 넣으라는 친절로(정보는 생명이니) 상황을 알고 있었던 샘이었지만, 전혀 관계 없던 탓에 안심하고 있다가, 꺼릴 수밖에 없는 경찰을 갑자기 맞이하 게 되자 무척 당황했었다. 얼토당토 한 경찰의 질문에 샘은 당연히 부인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그는 그 아이의 눈을 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짐작 할 수 없을, 깊은 바다의 심연을 연상 시키는 남청색은 샘에게 긍정을 명령했다. 샘은 순간 얼이 빠진 채 대답하고 말았다. 그리곤 소스라쳐서 덧 붙 이기까지 했다. "네. 맞아요.....제 친 아이는 아니지만 친구에게 부탁 받고 돌봐주고 있는 아이랍니다. 아침부터 어딜 다녀오는 거니, 진?" 다행이 이름을 알고 있었던 샘은 보호자로서의 걱정이 묻어나는 어투 까지 내비치며 말했다. 아이는 웃었다. 너무나 환하고 행복해 보이기까지 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고 샘은 눈물이 나올 뻔했다. "샘. 어제 내게, 아침이 되면 네이 할머니(데이먼의 옆방 노파)에게 가서 아침 준비하는 것을 도와주라고 했잖아요. 오늘도 네이 할머니 는 다리가 아파서 잘 일어나지도 못하고 있더라고요" 경찰은 아이를, 그리고 샘까지, 빈민가에서 보기 드문 마음 좋고 정의 로운 이들이라고 판단한 눈빛을 하고, 사건이 있었으니 조심하라는 충고까지 해 주고는 곧 물러갔다. 샘은 다시 그 앨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대답이 잘못 되지 않았음을, 잘못되지 않을 것임을 확 신 할 수 있었다. "어쨌든 왔으니...... 들어오렴." 그렇게 그 아인 이 거리에서 샘을 통해 처음으로 인식되기 시작했고 그 후 7년 동안을 승냥이 같은 이 세상에서 대단히 훌륭하게 살아남 는 능력까지 발휘했다. *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도와 줄 거야 말 거야?" -꽤 오래 딴 생각을 했었나 보다- 샘은 머쓱해져서 조명이 비치지 않아 검게 보이는 진의 눈을 담담히 들여다보았다. "안도와 주면... 어쩔 건데?" "다른 사람을 알아봐야지. 보수 준다는데 마다 할 사람 있겠어? 어려 운 일도 아니야" "그렇겠지. 돈 10달러에 살인도 하는 놈들이 천지인데....." 돈이 문제가 아니지... 샘은 다시 생각했다. 진은 어리게 보여도 굉장한 녀석이다. 샘은 이제껏 수많은 머저리들이 돈 때문에 타락하고 파멸해 가는 것 을 보아 왔다. 거기다, 여자의 경우라면 더 쉽게 망가지고 재기 불능 이 될 여지가 비단 이 거리뿐만 아니라 도처에, 도시 전체에 깔려 있 음을 잘 알고 있었다. 눈감으면 코 베어 가는 세상이 아닌가. 어디를 가든 설사 다른 나라로 떠난다 해도 무슨 차이란 말인가. 탐욕에 지배받고 돈에 의지하지 않는 인간들이 사는 나라나 도시는 들어 보지 못했다. 꿈 같은 일이지. 허나.... 진. 그녀라면. 자신이 원하는 세상을 찾아낼지도. 아니 이제껏 이곳에서 그래 왔던 것처럼 충분히 적응해 내고 변화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벌써 저 아이는 15살이다. 샘은 그녀의 평범한 생활과 평범한 일상으로의 복귀를 진심으로 바랬다. 이 도시에서 물어 뜯기길 경계하며 거칠게 살아가는 것을 그만둬 줬으면 했다. 비록 다시 보지 못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샘은 진을 사심 없이 사랑했다. 한번 눈여겨보기 시작하자 발견할 수 있었던 그 긍지 높은 자존심, 육체적인 강함, 아름다운 심성, 비상한 머리. 딸아이 같던 아이지만. 이제쯤 독립 할 때도 되었지. 그래 인정하자. 진은 어딜 가든 잘 지낼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어떻게 도와 줄까? 아- 그전에, 유료임을 확실히 해 두자고, 꼬마야." 진은 웃었다. 2 -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 혹은 지난 과거. 진은 눈앞에 펼쳐진 세상에 어리둥절했다. 아무런 준비 없이 갑자기 세상에 내팽개쳐져 혼자가 된 것이다. 엄청난 소음과 수많은 사람들의 인기척 속에 멍하니 주위를 구경하던 진에게 지나가던 행인들 중 갈색기가 섞인 금발머리의 아저씨 하나가 호기심을 보이며 말을 걸어왔다. "길을 잃었니, 꼬마 아가씨?" 진은 그의 목소리가 굉장히 특이하게 들렸다. 어쩐 일인지 생소하기 까지 했다. 반듯한 외모에 비교적 좋은 옷을 입고 입던 그는 진을 이리저리 뜯어 보더니 친절한 미소를 띄우며 다시 물어왔다. "집에 데려다 줄까? 이름이 뭐니?" "난, 진이야" "그래 진. 몇 살이니?" "다섯 살." "다섯 살? 흠. 더 들어 보이는데.... 아빠 엄마는?" ".................." 진은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방금 전만 해도- 방금 이름과 나이를 말 할 때만 해도, 자신이 누군지 왜 여기 있는지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생각이 전혀 나지 않았던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가, 그것도 자기처럼 어리고 작은 아이에게 치 명적이 되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없었던 진은 순진하게 대답했다. "몰라, 생각 안나." "이름이 진이라며?" "잊어버렸어. 생각이 안나...." 진에게 말을 걸어 온 그는 데이먼 플랜트라고 했다. 그는 그녀와 만났던, 사람이 엄청 붐 비는 그곳에서 진에게 아이스크 림을 쥐어주고 한참을 의자에 앉아 이런 저런 것을 물어 보았다. 아는 것이 없었던 탓에 별다른 대답을 못하고 묵묵히 혀에 녹아드는 차갑고 달콤한 맛에 정신이 팔려 있던 진은 한참을 고민하는 듯 하던 데이먼이 자신과 함께 가겠느냐고 한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그와의 첫 만남이었으며 진이 기억하는 과거의, 맨 처음 부분 이었다. * 처음 호감을 가지고 시작한 그들의 관계는 순전히 철없는 어린아이의 착각이었음을 얼마 지나지 않아 진도 알 수 있었다. 그가 정말 친절하고 진을 위하는 인물이었다면 자신을 따라오게 할게 아니라 진이 발견되었던 공항에서 미아 신고를 했어야 옳았다. 하지만 그는 그런 기본적인 미덕조차 발휘하지 못하는 인간이었다. 인적이 드물었고 작은 집이긴 했지만 제법 살만한 곳에 거하던 그는 날이면 날마다, 지키는 사람 없는 집에 진을 남겨두고 이른바 '삶을 즐 기기 위해 필수 불가결'하다고 외치곤 하던 몇 가지들을 누리기 위해 항상 돌아다녔다. 그러더니 꽤 있는 척 으스대던 그는 어느 날 갑자기 빈털터리가 되었 다. 웃기게도, 자제할 줄 모르던 생활 태도에 맞춰 생각해 보면 아이 러니 하지만 그는 적어도 빚을 지진 않았다. 무엇이 그렇게 무서웠는지, 아니면 단순히 철저한 성격 탓이었는지 그는 운전하면서 딱지 한번 떼는 일이 없었고 주위에게서 신상이 들어 날 정도의 일을 만들어 사회라는 규범에 주목받는 일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진은 보호자를 두었음에도 실제로는 어떤 서류 양식도 갖 추지 않은 상태로 이른바 유령이었다 사람들이 자신의 일 외의 것들에 얼마나 무심해 질 수 있는지 증명하 라면 진은 자신을 증거 할 수도 있을 것이다. 1년 가까운 시간동안 그녀는 그의 무관심(어떻게 생각하면 치밀함으 로)으로 세상과 별개의 생활을 해야했다. 나중에 생각하면 비로소 다른 아이들과 비교 가능해진 자신의 유년이 대단히 위험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그때는 전혀 알지 못했다. 처음 그의 집에 진을 데려가서 그가 말하길. "이곳이 이제부터 네 집이다. 냉장고는 항상 채워둘 테니 알아서 챙겨 먹고 사온 옷가지들이 있으니 당분간은 새로 살 필요도 없을 거야. 난 귀찮은 앤 싫으니 울거나 하면 다시 밖에 갖다 버릴 테니 얌전히 있어." 그러고는 집안을 대충 안내해 주고는 자신의 방에 틀어 박혔다. 진은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어린아이는 모두 그와 같은 생활을 하는 줄 알았으며, 그땐 이미 배가 많이 고파진 상태라서 먹을 것을 찾아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진은 요리되지 않은 야채와 햄, 우유나 통조림 등으로 끼니를 때우곤 했다. 그것도 데이먼이 몇 일씩 식료품을 가져와 주지 않으면 굶기 가 일쑤였기에 일찌감치 식료품을 나누고 아껴먹게 되는 생존에 가장 필요한 처세술을 배우게 되었다. 무지로 인해 인스턴트 음식에 유통기한을 염두 하지 않고 우유마저 아껴 먹었지만 상한 우유로 인한 복통으로 고생을 한 후엔 식료품 포장지에 쓰여진 글들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천만다행의 운으로, 진은 혼자서도 병을 이기는 힘이 있었다. 음식을 잘못 먹어 아프거나 잘못된 주방기구의 사용으로 혹은 아이 다운 실수로 넘어지거나 해서 다치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빠르 게 회복되었다. 처음엔 세탁기의 존재도 사용법도 몰라서 욕실에서 서투르게 손빨래 한 옷을 입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세탁기를 사용할 줄도 알게 되었다. 바깥과 단절된 생활이었지만 하루 하루가 작은 집안에서는 모험이나 다음 없었으므로 심심하단 생각도 하지 않았다. 진이 가장 경이로운 체험을 했던 것은 데이먼의 집에서 생활한지 3개월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그는 오랜만에 도박으로 돈을 땄는지 기분이 좋아져서 집에 있을 때도 숙취로 잠을 자느라 거의 켜지 않았던 TV를 진에게 볼 수 있 게 허락해 주었다. 진은 그 작은 상자를 곧 경외하고 사랑하게 되었다. 그 작은 요술상자는 그녀를 무지에서 그리고 외로움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나게 해 주었지만 그로 인해 몇 개월 지나지 않아, 자신의 생활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의지할 곳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믿어야만 했던 그를 귀찮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왜 부모가 없는지 왜 돌봐주는 사람이 없으며, 왜 우편배달부 아저씨를 포함하여 어떤 사람과도 말을 해서는 안 되는지. 그런 것 들을 묻다가 진은 매를 맞기 시작했다. 그때쯤 시작된 구타와 욕설은 진이 그를 마지막으로 볼 때까지 점점 강도가 세어지고 지독해졌다. 진은 그때부터 타인의 감정에 민감해지기 시작했다. 그의 기분을 거슬러서는 지독한 모욕과 폭력을 피할 수 없었기에 혼 자 있을 때 마저 점점 말이 없어졌다. 곧잘 다치기는 했지만 자체 치유 술이라도 있었는지 금방 회복(불가 사의한 일이지만)될 수 있었다. 그렇게 그의 집에서 지낸 지 1년이 못되었을 때 그들은 세든 집을 떠나야했다. 그가 있는 돈을 다 썼으니 이젠 이곳에서 더 이상 살 수 없다라는 말을 했을 때 진은 순진하게 속으로 기뻐했다. 이제 다른 곳으로 옮기면 친구도 생길지 모른다 어쩌면 데이먼은 처음 만났을 때처럼 친절해 질지도 모른다는 생각 으로 진은 그를 따라 그 곳을 떠났다. 그리고 악몽이 시작되었다. 그들이 이사한 곳은 미국에서 가장 번화하고 범죄로 가득 찬 뉴욕의 뒷골목이었다. 전에 살던 곳보다 훨씬 못해 보이는 아파트에서 처음 생활을 시작하 게 되었을 때만해도 이웃이 있다는 사실에 진은 희망을 버리지 못했 다. 하지만 몇 일 지나지도 않아서 그녀는 현실을 직시했다. 그때가 겨우 6살 경이었다. 데이먼 플랜트는 사회악이었다. 그는 주정뱅이들을 털었고 거리의 여자들이나 거지의 주머니를 슬쩍 했으며 법망이 사소하다하여 미치지 않는 그늘에서 온갖 악행을 저 질렀고 술집을 단골 삼았다. 그런 와중에도 하루나 이틀에 한번은 버릇처럼 비좁고 더러운 집에 들러 어린 진에게 온갖 행패를 부렸다. 진은 그에게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마지막 자존심까지 버려야 하는 모습을 보여야 했고 빈민가 어떤 아이보다 더 자주 편의점 쓰레기통 을 뒤져야 했다. 그는 순전히 스트레스 해소용 구타와 주지 않는 보살핌에도 굴하지 않는 듯 고갤 숙이고 묵묵히 받아내는 진에게 점점 성을 냈다. 도망가려는 기미만 보여도 몇 일씩 방안에 가두고 굶겼으며 쳐다만 봐도, 발소리만 내어도 반항한다는 트집을 잡아 구타를 했다. 보통의 아이라면 병원에 실려갈 만한 상처나 부상에도 몇 일 지나면 완쾌되는 이상한 체질조차 그에겐 중요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때린 사실 마저 곧잘 잊어버리는 듯 했으니까. 진은 그를 증오했다. 진은 수 없이 꿈속에서 그를 죽였고, 창녀의 버림을 받은 존재라는 악담과 거지나 다름없는 불법체류자를 아비로 둔 탓에 발견되는 즉 시 추방당할 것이라는 그의 말을 부정하고 또 부정하고, 언젠가 찾 아 올지도 모를 부모를 꿈꾸곤 했다. 진은 그를 통해 증오란 감정을 처음으로 배우게 되었다. 왜 자신을 주워와서 괴롭히는 걸까 진은 차라리 다시 버림받길 원했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녀는 나이가 들면서 그 이유를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진은 꽤 예쁜 편에 속했다. 여자아인 금방 자란다. 머지않아 돈을 갖다 바칠만한 수입원이 될 자신을 멍청하게 길거리에 그냥 다시 버 리겠는가. 별로 돈을 들이지 않아도, 신경 쓰지 않아도 다른 아이들 과 달리 진은 멀쩡히 생활해 내었으니 귀찮지만 집에 가끔씩 들러 도망가지 않았는지 확인만 하면 되었다. 그녀가 좀 더 아이다워서 주위에 불쌍한 모습을 보였더라면 도움을 줄 사람들을 만들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타인에게 도움 자체를 바라는 일을, 뭔가를 원하는 일을 진은 생각 해 내질 못했다. 누구에게도 그 방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너무 어렸었다. 7살을 넘겼을 때쯤 더 이상 이런 생활을 견딜 수 없음을, 견디지 말 아야 함을 진은 깨달았다. 계기는 사소했다. 처음 그와 만났을 때와 비교해서 진은 그다지 키가 많이 자라지 않 았고 그냥 보통 7살 먹은 아이들의 수준이었다. 성장이 빠른 서양 아 이들의 체질이 아니라 동양 계였나 보다. 부모를 모르기 때문에 자신이 어떤 인종에 해당하는지 알 수 없었 지만 혼혈이라는 점은 확실했다. 사실은 영양섭취가 부실해서 잘 크지 않았는지도 모를 일이고. 그는 더 기다리기가 지루했는지, 아니면 미리 흥정을 해 보려한 의도 였는지 가지가지 상품(?)을 취급하는 포주들을 수소문하기 시작했고 그 사실을 진은 곧 눈치 챌 수 있었다. 진은 두려웠고 열심히 궁리를 했다. 그리고 결심했다. 거리의 여자가 되어선 더 이상 미래는 기대할게 없어진다. 어떤 수단을 쓰든지, 어떤 방법이던지 그를 벗어나야 했다. 그렇다면 그 후에는? 진은 세상 물정에 고루 밝진 않았지만 사회의 부정적인 면에 노출되 어 있었으므로 그녀가 처한 상황을 어린 나이에도 비교적 잘 파악하 고 있었고,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일이었지만- 머리도 제법 좋았다. 그 예로, TV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혼자서 글을 이미 깨우쳤으며 영어가 아닌 언어들도 조금씩은 이해했고 한번보고 들은 것들을 정확히 기억하는 재주도 가지고 있었다. 진은 그 사실을 이용하고자 했다. 아직은 시간이 있었다. 악당이었지만 충동적이지 않고 금전적인 면에 있어서 사리 밝던 그의 성격상 금방 자신을 팔아 넘기진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진은 차분히 계획을 세웠다. 먼저, 무관심하고 이기적인 이웃들을 눈여겨보았고 그 넓은 거리에 서 힘있고 영향력 있으며 제법 동정심까지 갖춘 인물을 찾아내기 위 해 분주해졌다. 주위에 무관심했던 태도를 버리고 적어도 그녀 자신 만이 눈치챌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정보를 모았다. 사람들이 있는 곳이라면- 그것이 아이들이든 주정뱅이든 거리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소년들이든- 어떤 이야기든 오가게 마련이니 그녀가 움직일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최대한 귀를 열었다. 또한 주위의, 진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영향을 끼치기 힘든 이웃들을 경계하기 위해 모습을 감추는 용의 주도한 면도 보여야 했다. 원래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그들은 더더욱 진을 잊어갔다. 가장 우선한 계획은 데이먼에게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를 법의 심판에 맡겨야 했다. 이쪽 세상에서 그는 신의를(참으로 웃기는 일이지만) 갖춘 인물로 통했기에 그의 배신을 꾸며서 소리 소문 없이 암살케 하거나 쫓겨 나게 일을 꾸미는데는 진의 힘으로는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차라리 단 몇 년이라도 감옥에 집어넣을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리고 그 후엔...... 진은 자신이 어린아이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사회 복지 원 이나 고아원등을 통해서 새 인생을 기대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곳의 부조리는 머리가 있는 사람은 누구든 알고 있었다. 어렸지만 진 역시, 어찌될지 알 수 없을 미래를 막연히 기다릴 곳으로 가고 싶지 않았다. 이제껏 없었던 운을 갑자기 믿을 수는 없는 일이었으며 무엇보다도 자신의 보호자는 스스로 골라야한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결심할 수 있었다. 그런 조심스런 움직임으로 진은 처음으로 인간관계다운 것들을 가질 수 있었다. 옆방의 네이트 이스트먼 이라는 할머니는 연금으로 근근히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까다롭게 늙은 다른 노인들처럼 괴팍했다. 게다가 나이가 많아서 체력도 기억력도 좋지 않았다. 하지만 조금씩 호의를 보이기 시작하며 그녀의 말상대가 되고자 접 근한 진을 모질게 물리치진 못했다. 그녀 역시 외로웠으리라. 접근하기 어려웠던 처음과는 달리 금방 진을 귀여워 해 주기 시작 했다. 그리고 때로는 과자를 구워 주기까지 했다. 그녀는 진의 편이 되었다. 4층으로 구성된 아파트는 관리인조차 건물에 없었다. 각 층에는 진만큼 어린, 아이가 있는 가구는 없었고 네이트처럼 연 금 생활을 하는 가난한 노인이나 건달이나 밤을 근무시간으로 하는 여자 몇과 세상과 담쌓고 사는 대인 기피증 환자와 세만 들고는 거의 집을 비우는 인간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곳 3층에 살기 시작했던 진과 데이먼을 여전히 무시했다. 그들의 아래층에 살던 빨간 머리의 캐서린은 종사하고 있는 밤의 일 때문에 거의 얼굴을 보기 힘들고 방안으로 초대해 주지는 않았지만 진을 보면 아는 체 했다. 그녀는 데이먼도 몇 번인가 손님으로 대한 적이 있었고 진이 학대 당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지만 어느 정도까지 인지는 몰랐다-상처 가 잘 남지 않았던 점은 불운이었는지도.- 그녀는 진이 당시 접할 수 있었던 사람들 중 제일 착하고 상냥했다. 그래도 집이라도 있는 게 어디니...하며 힘을 내라는 말을 해 주기도 했으니까. 교활하지 않고 마음만 좋다면 손해 보기 십상이다. 그녀 역시 힘없이 이용만 당하는 소모품이었다. 캐서린은 아무리 일해도 돈을 모으기 힘든 일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래도 사치하지 않고 착실히 모으면 돈을 모을 수 있지 않느냐고 언젠가 진이 물었지만 그녀는 자신도 세상 모르고 이일에 뛰어들었 을 땐 그렇게 생각했다고 했다. 그녀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거기에다 그녀는 빚이 많아서, 함께 사는 룸메이트 크리스티나도 포주의 소개로 같이 살게 된 것이고 거의 감시 역이라고 씹어 뱉듯 말했다. 그리고 그녀의 피를 빨아먹듯 부려먹는 포주보다도 크리스를 더 혐오하고 증오했다. 진이 무심한 태도를 버리고 그녀에게 호감을 드러내자 그녀도 '네가 웬일?' 이라고 경계했던 첫 반응과 달리 기꺼이 친구가 되어 주었다 그런 사실을 크리스나 데이먼등의 주변사람에게 알리는 것은 서로가 다짐을 하지 않았는데도 자연히 이뤄졌다. 그녀도 작은 친구와 나누는 잠깐 잠깐의 우정을 개인적인 것으로 하 여 자기만의 시간을 갖고 싶어서 그러했는지도 모른다. 이웃이라 할만한 주위의 다른 아파트 사람들에게는 미처 손을 뻗지 못한 상태에서 갑자기 기회가 왔다. 진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던 탓에 당황했지만, 기회란 사람이 바랄 때 딱 맞춰 찾아오는 맘 좋은 친구가 아니었다. 결과가 어찌되든 진은 도박을 하기로 했다. 애초에 세운 계획과 후일 거취 문제만 아니라면 실패해도 상관없을 정도로 좋은 기회였으니까. 그 날 데이먼은 잔뜩 취해 가지고 아래층에 사는 크리스티나를 겨 드랑이에 끼고 그리 늦지 않은 밤에 휘청 이며 들어왔다. 그는 술내기를 해도 자주 돈을 딸 정도로 주량이 높았지만 그 날은 한 몫 떼어 볼 속셈의 크리스에게 잡혀서 맘껏 술을 들이켰는지 인 사불성으로 취해 있었다. 그들은 진을 아랑곳하지 않고 -크리스는 진에게 좋은 구경시켜 준다며 킥킥대며 웃기까지 했다.- 하나밖에 없는 방안으로 들어갔다. 진의 침실은 TV가 있고, 부엌 겸 거실로 이용하던 한 구석에 놓인 2 인용 소파였는데 그들의 소리가 모두 들릴 정도로 취약한 환경이었다. 자정이 지났을 때쯤. 그들은 또 부엌 찬장을 뒤져 번갈아 가며 사다 놓은 술을 방으로 가져다 나르기 시작했고(술내기라도 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싸 우는 소리가 들려 왔다. 호기심은 어쩔 수 없었나 보다. 진은 마지막으로 문이 닫혔을 때 제 구실을 못한 탓에 삐끗이 열려 있던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 보았다. 그들은 화대가 적네 어쩌네, 술값 만해도 오히려 돈을 받아야 하네 마네, 쩨쩨하네. 더럽네. 별의별 험담과 욕설을 나누더니 이내 서 로를 밀치고 물건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크리스는 그가 휘 두르던 주먹에 얼굴을 맞더니 코피를 흘렸고 벗어 놓은 데이먼의 셔츠로 코를 감싸며 소리를 질러 댔다. 이미 술과 약을 짬뽕 했는지 정신이 없던 데이먼은 다시 덤벼드는 크리스를 손을 휘저어가며 막다가(자신을 때릴 때의 기세는 어딜 간 걸까? 진은 그 광경을 보면서도 의아했다) 짜증이 배가되었는지 손 에 잡히는 아무거나 집어서(그것은 재떨이였다) 던졌다. 크리스는 그걸 이마에 정통으로 맞았다. 그리고 쓰러졌다. 조용해지자 그는 투덜거리며 드디어 잠을 잘 수 있게 되었음을 감 사히 여기는지 휘청 이며 침대로 다시 눕더니 그대로 코를 골기 시작했다. '죽었나?' 진은 그녀가 죽었으면 했다. 그러면 얼마나 일이 수월한가! 진은 살며시 방안으로 들어갔다. 데이먼이 깊이 잠이 든 것을 확인하고 크리스에게 다가갔다. 그녀 는 옆을 향해 쓰러져 있었는데 이마에 멍이 들기 시작하고 피부가 찢어져 피가 베어 났지만 숨을 쉬고 있었다. '죽지 않았어.' 진은 절망적인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이제껏 지긋지긋한 생활에서 탈출하기 위해 모아두었던 모든 자료들이 머릿속에서 아우성을 치는 것을 느꼈다. -캐서린도 손님과 있을지 몰라. 하지만 그녀는 어쨌든 날 도울 수 있을 거야 -네이 할머니는? 그녀는 내가 말하는 걸 뭐든 긍정할거야. 그리고 는 또 오락가락 말이 바뀌겠지. 하지만 단 한가지만 '그렇다'고 말 해 주면 돼. -아파트 다른 사람들은? 몇몇은 아침이면 집에 없을 사람들이고 나중에라도 내 안부를 물을 정도로 내게 관심을 보여 줄 사람은 없어. -대인 기피증 환자는 말할 것도 없고. 대부분 경찰과 관련된 일이 라면 모두 문을 꼭꼭 걸어 잠글 거야 -나중에라도 토를 달만한 사람들은 모두, 샘의 영향권에 있어. -샘은? 이 도시 가까운 뒷골목에서 그를 모르는 빈민층은 없어. 그만 내편이 되어 준다면..... -샘은 데이먼과 크게 관련 된 일이 없었어. 날 도와 줄지도 몰라. -그가 아침에 집에 있을까? 그럴 거야. 그가 모처럼 사탕을 사들고 귀가하는 것을 저녁에 네이 할머니 심부름을 가다가 보았었어. -경찰은 어른이야. 어른들은 어린아이의 말을 의심하지 않아. -난 일단 어떤 과거도 존재하지 않아. 단 한번에 속일 수만 있다면. -데이먼은 날 모른 척 할거야. 조사를 받게 되면 나와 관련되어서 죄목이 늘게 될 테니까... -.................... 등등 수많은 속삭임이 단 몇 초 사이에 머리 속을 헤집고 다녔다. 진은 쓰러져 있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그녀는, 데이먼과 별 다를 바 없는 인생에 죄도 많이 지었 어. 죽어도.......슬퍼해 줄 사람은 없을 거야. -하지만 그녀도 사람인데? -내가 데이먼에게 학대받는 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시했고, 오히려 경멸했었어. -팔려 가면 더 비참해 질 거야. -후회하지 않을까? 후회 안 해! 후회 안 할거야. 데이먼은 수 없이 날 죽였었어. 그런 생활보다는 낫잖아? -난............ 그때 크리스는 정신이 드는지 머리를 부여잡고 얼굴을 찡그린 채 일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머리가 아픈지 몸을 바닥 쪽으로 돌린 채 고개를 숙이고 엎드린 자세로 신음 소리를 냈다. '시간이 없어!' 진은 침대 맡 스탠드 불빛으로 그다지 환하지 않은 방안을 빠르게 둘러보았다. 그리고 크리스가 등을 돌리고 있던 방향에서(엎드린 상태였기 때 문에 일어난다면 뒤쪽의) 데이먼이 비상용으로 침대 밑에 넣어 둔 야구방망이의 손잡이에 눈이 갔다. 그것은 때때로 진이 그에게 얻어맞을 때에도 유용했던 도구였는데 생각할 것도 없이 단 두 걸음에, 진은 침대 아래로 손을 뻗어 잡았다. 막 일어서려고 하는 그녀의 뒤로 조금 다가섰다. 그리고 두 손을 치켜올렸다. -신은!!! 절규하듯 외치는 마음의 소리가 비명이 되어 울렸다! 진은 눈을 감았다.... 다. 시. 떴. 다. -신은 날 버렸어! 그리고 있는 힘껏 내리쳤다. 둔탁한 타격 음이 울리고 크리스는 앞으로 고꾸라졌다. '죽었을까?' 진은 갑자기 떨리기 시작한 다리와 두 손을 진정시키고자 심호흡 을 했다. 그리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죽지 않았다면? 알 수가 없었다. 금방이라도 악다구니를 쓰며 일 어나 그녀가 자신을 덮칠 것만 같았다. 앞으로 굽힌 채 뻗어 있는 그녀의 손목에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가져다 대어 보았다. 맥이 느껴졌다. '아니다. 이건 그녀의 것이 아니야. 내 맥박이야!' ............................. 그녀는 죽은 듯 했다. 진은 몸을 바로 하고 여전히 잠에 취해 있는 데이먼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에게서 생기를 영원히 느낄 수 없으리라는 것을 깨닫 자 갑자기 멈췄던 사고 회로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진은, 기계적으로 들고 있던 배트 손잡이 부분을 치마를 이용해 정성스럽게 닦고 천 자락으로 감싼 채 데이먼에게 다가갔다. 대자로 누워있는 그의 양손을 차례로 잡아 어설프게나마 배트를 쥐는 듯한 동작으로 보이지 않는 손자국을 몇 번 찍어내었다. 그리고 침대에서 가볍게 던지면 닿을만한 거리에 조심스럽게 내 려 놓았다. 방안에는 여자아이를 연상시킬 만한 것은 어느 것도 없다! 진은 미련 없이 방을 나왔다. 그렇게 겨우 8살의 나이에 진은 첫 살인을 했다. 그 다음은 훨씬 쉬웠다. 진은 입고 있었던 옷을 모두 벗고 가장 깨끗하고 상태가 좋은 옷으 로 갈아입었다. 얼마 되지 않은 자신의 물건을 모두 깨끗이 정리해서 가방이라고 부를 것도 없는, 언젠가 거리에서 주워 왔던 끈이 달린 자루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현관문 손잡이를 간접적으로 잡아 연 다음, 짐을 들고 조용 히 아래층의 캐서린에게 찾아갔다. 그녀는 혼자 있었고 데이먼이 크리스를 죽인 듯 하다는 진의 말에 눈을 빛내었다. 진은 그녀에게 고아원에 가길 원하지 않으니 자신의 존재에 대해 함구해 달라는 부탁과 함께 짐을 맡겼으며, 경찰에 신고하는 일 역시 부탁했다. 시간을 적당히 흘린 후 캐서린이 911에 전화하여 룸메이트를 걱정 하는 듯한 어조로 순찰을 부탁하자, 좀 길다 싶은 시간이 지난 후 두 명의 순찰 경찰들이 초인종을 눌 렀다. 진은 숨어 있었고, 문 앞에 서서 장황히 어제 밤에 들려왔던 위층소 리들을 설명하는 캐서린의 목소리와 그들의 반응을 숨죽여 들었다. 그들은 의무를 다하기 위해 위층으로 올라가 초인종을 눌렀으며 잘 못된 일을 발견했다. 곧 수사 팀이 들이 닥쳤고 그 소란 와중에도 눈을 뜨지 못하던 데이 먼은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조사가 진행되어 이웃들의 증언을 듣고자 경찰들이 여기 저기 흩어 지기 시작했을 때 캐서린의 도움으로 밖에서 들어온 듯한 태도를 하고 진은 그들에게 다가갔다. 당연히 진은 저지 당했고, 용건을 묻는 그 경찰에게 또박또박하고 순진한 얼굴로 네이 할머니네 집에 가려고 한다고 말했다. 열린 문안에서 언뜻 고개를 들고 데이먼이 그런 그녀를 쳐다보았지만 진은 더더욱 순진하게 약간의 호기심을 담고 네이 할머니의 이웃에게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데이먼은 고개를 돌렸고 경찰은 할머니네 집의 초인종을 눌렀다. 귀가 어두워서 잘 듣지 못하던 할머니도 꽤 오래 소란스러웠던 탓인 지 문을 열고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고함을 질렀다. 진은 앞으로 나서서 천진하게 할머니 일어나셨네요. 아침은 드셨어요? 하고 말했고, 그녀는 곧 안색을 바꾸고 오~아가야 아침을 함께 먹으련? 하고 간절히 진이 바라던 대답을 해 주었다. 하지만 진은 오! 할머니 오늘은 안되겠어요. 경찰아저씨들이 아파트에 들어오면 안 된대요. 나중에 꼭 다시 들를 테니 섭섭해하지 마세요? 전 샘 아저씨 집에 가 있을게요. 보러 오셔도 좋아요, 하고 말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고 경찰은 곧장 옆방에서 어제와 오늘 새벽에 있었던 일에 대해 아는 것이 있는지 물었다. 그녀는 콧방귀를 뀌며, 난 귀가 먹어서 옆에 누가 사는 지도 몰라! 도대체 거기 사람이 살긴 사는 거야? 한번도 인사하러 오지도 않더 니만...아이고 다리 아파서 서 있지도 못하겠네. 요즘 젊은것들은.... 하는 불평을 해대었고 내용조차 이랬다저랬다 이 이야기 저 이야기 하는 것으로 심문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진은 한 명의 경찰과 함께 이미 알고 있던 샘의 아파트로 향했고 마음 속으로 수없이 빌고 또 빌었다. '마지막 관문이다. 이 고비만 넘기면. 그가 날 받아들이기만 하면.' 좀더 깨끗하고 넓은 그의 집의 초인종을 누를 때까지 진은 옆의 경찰 아저씨가 눈치채지 못할 엄청난 불안에 휩싸여 있었다. 엄청나게 커 보이는 그가 나왔다! "이 아이의 보호자 되십니까?" 어리둥절하던 그는 진을 내려다보았다. 진도 그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간절히, 간절히 소원했다. 그가 대답했다. "네... 맞습니다. 제 친 아이는 아니지만, 친구에게 부탁 받고 돌봐 주고 있는 아이랍니다" 그러고는 한번 숨을 몰아 쉬더니 "아침부터 어딜 다녀오는 거니, 진?" 진은 비로소 심장이 제 자리에 자리함을 안도하며 그녀가 지을 수 있는 최대로 밝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샘. 어제 저에게 아침이 되면 네이 할머니에게 가서 아침 준비하는 것을 도와 주라고 했잖아요. 오늘도 할머니는 다리가 아파서 잘 일어 나지도 못하고 있더라 구요" 경찰은 떠났고 그는 다시 진을 찬찬히 내려다보았다. "어쨌든 왔으니..... 들어오렴." 진은 그의 안내로 그의 집에 발을 내딛었다. 그 후 미처 진이 대비하지 못했던 일들과 주의가 필요할 만한 일들은 '난 샘의 보호를 받고 싶어요'한 간단한 진의 의사 표현에 아무 말 없이 그가 손을 써 주었다. 그렇게 해서 진은 드디어 3년을 넘게 지옥 같았던 데이먼의 처마아래 서 탈출하는데 성공하게 되었다. 어느 누구도, 경찰은 물론이거니와 캐서린이나 샘조차도 살인에 대 해서만큼은 진을 연관시키지 못했다. 어떻게 어린아이의 힘으로 성인 여자를 죽음으로 몰아 넣겠는가. 그 누구도 진이 특이하게 성인 못지 않은 완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 을 적어도 당시까지는 알지 못했었고(진 자신조차도 몰랐었다) 그 사건은 곧 잊혀지게 되었다. 진은 죄책감에 사로잡히지 않았다. 그녀는 더욱 냉정해졌고, 해낼 수 있었던 가장 적절한 방어였다고 자조했으며 다시는 자신의 인간성을 타인에 의해서 위협받게 하지 않으리라 맹세했다. 캐서린.(외전) 난 내 과거에 대해 그다지 말하고 싶지 않다. 포인트만 집어내자면, 난 그다지 배우지 못했고 남다른 재능도 없었으며 머리도 그저 그 랬다는 것이다. 도시에 대한 환상과 막연한 기대로 고향을 떠났을 때(어떤 꿈을 가 지고 있었는지는 부끄러워서 말못하겠다) 난 겨우 십대였고 세상을 핑크빛으로만 보았다. 단 몇 개월에 불과했지만 난 먹고살기 위해 일을 했다. 그리고 끈기 없고 힘든 일을 해보지 못했던 탓에 금방 지쳤다. 좀더 나은 수입을 찾기 시작했고 다행이 춤에 소질이 있었던 난 클럽에 취직되었다. 하지만 그 싸구려 클럽에서조차 주정뱅이들을 상대로 술이나 나르다가 몇 번 무대에 서 보지도 못하고 돈벌이가 되는 듯 한 일에 발을 딛고 말았다. 후회해도 늦은 감이 있었지만 그때만이라도 정신을 차렸다면 더 나았을지 모른다. 아직 젊었으니 얼마든지 재기 할 수 있었을 텐데. 의지가 약하고 용기가 없던 나는 인생을 개척하질 못했다. 난 세상에 이리저리 치이며 점점 타락하고 젊음을 잃어만 갔다.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땐 적지 않은 빚에 덜미가 잡혀 있었고 포주가 붙여준, 돈만 알고 같은 친구들 마저(친구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르 겠지만) 팔아먹던 증오해 마지않던 크리스티나(본명이 아니다)의 간섭을 받고 있었다. 난 그녀가 싫었다. 너무너무 싫었다. 그녀는 돈을 너무 좋아했고 또 아무하고나 하는 그 짓도 좋아했다. 그리고 그걸 잘 이용할 줄도 알았다. 참 직업 선택을 잘한 여자였다. 피해의식인지도 모른다. 비슷한 처지의 우리들은 서로를 외면하더 라도 존중은 했다. 하지만 그녀만큼은 모두가 꺼렸다. 제 얼굴에 침 뱉기라고 해도 모두들 그녈 욕하고 미워했다. 그녀의 고자질이나 이간질 때문에 수입을 따로 챙기기도 힘든 일이었고 서로 동정하는 이들끼리 사소한 도움마저 주고받질 못했다. 그리고 룸메이트가 된 후론 그 밥에 그 나물 주제에 포주의 여자라 는 으쓱댐으로 날 하녀 취급을 했다. 그런 그녀가 어느 날 갑자기 죽어 버렸다. 아..아....얼마나 고소하던지. 그 사실을 내게 전해다 준 천사는 다름 아닌 내 작고 예쁜 친구였다. 이 더러운 거리에서 유독 다른 세상 인물처럼 기품이 느껴지고 고귀 하게까지 보이던 그 작은 숙녀를 난 정말 좋아했다. 그 아이가 학대받음을 뻔히 알면서도 도움 주지 못했었지만, 사람들을 원망하는 기색조차 없음을 알고 또 얼마나 안타까웠던가. 그 아이가 청하던 작은 도움을 기꺼이 주었다. 아이의 이름은 '진'이라고 불리었다. 진은 샘의 보호 아래 당분간은 안전할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샘의 가장 오래된 정부(마누라)의 집에서 *독자 님들 죄송합니다. 캐서린의 표현을 용서해 주시길* 그들과 함께 거 하는 줄 알았던 그 아이가 다시 날 찾아왔다. 그때는 이미 진이 가장 꺼려할 데이먼의 감옥 행이 결정된 후였다. 난 반갑게 맞아 주었다. "캐서린 빚이 얼마야?" 갑작스런 진의 물음에 난 놀랐다. '왜? 갚아주려고?' 하니까 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돈을 얼마나 갖고 있는데?" "얼마 되지는 않지만, 캐서린을 도울 수 있을지도 몰라." 내 빚은 물론, 돈 많은 부르조아 들에겐 몇 끼 식사 값도 되지 않을 돈이었지만 내게는 아주 큰돈이었다. 자꾸 이자가 늘어나 원금을 갚는 것은 꿈이 된지 한참 되지 않았는가! 난 혹시나 해서 용기를 내어 액수를 말했고, 놀랍게도 진은 곧장 증 인과(샘의 똘마니 중 하나) 함께 내 포주에게로 가서 내 자유를 사 주었다. 난 울었다. 처음 도시에 올라와 밑바닥으로 추락만 하던 생활을 할 때처럼 서럽게, 서럽게 내 작은 친구를 붙잡고 울었다. 그리고 신께 감사를 했다. 이 아름답고 친절한 천사를 내게 보내 주 셨음을. 나중에 어떤 돈이냐고 묻자 진은 말해주었다. "훔쳤어......2년 동안 훔친 돈이야." "누구에게?" "거리에서. 모든 거리에서 조금씩 훔쳤어....데이먼의 지갑에서도 아주 조금씩...." "그렇게 큰돈을?" "운이 좋은 적이 몇 번 있었거든. 그리고.....9개월 전에 빌리 영감 이 죽었던 일 생각나?" -물론 기억하고 말고-빌은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주정뱅이였는 데 어느 날 해서는 안 되는 비밀을 발설하고 말았다. 자기에게 그래 도 꽤 재산이 있다는 식으로 떠벌린 것이다. 그는 그 날밤 집으로 살아서 돌아가지 못했다. 그 후 몇 일 동안이나 비어있던 그의 집은 도둑들이 들끓었지만 누구도 그가 감춰 뒀다는 돈을 찾아내지 못 했었다. "난 그가 술집 밖에서, 토하는 그의 등을 두드려 주는 종업원에게 돈에 대해 말하는 것을 제일 먼저 들었거든. 난 상황 파악이 빨랐어. 빌리 영감이 집에 무사히 돌아가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마자 그의 집으로 달려갔었지. 그리고 너무 쉽게 돈 뭉치를 찾아내었어. 범인과 소문을 들은 도둑들이 방문한 것은 그 후였고." "................" "게다가, 인사차 들렀던 네이 할머니에게서......할머니는, 혼자 앓고 있었는데 내게 전 재산이다시피 한 돈을 쥐어주었었어. 정말........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래....그리고 그 신경질적이었던 노인은 숨졌었지.- 난 가슴이 아파 왔다. 그녀의 임종을 혼자 지켰었어. 이 아이는.......... 진은 날 담담히 쳐다보았다. "난 그 모든 돈을, 찌그러진 동전을 포함해서 단 1센트도 쓰지 않았 어. 난 먹을 것은 쓰레기통에서 입을 것은 자선 단체에서 던진 것을 주워 입었어. 알잖아. 내가 어떻게 생활했는지..." 난 말을 잇지 못했다. "..........그 돈을 모두 내게...?" "괜찮아. 이제 데이먼이 없으니까, 돈은 얼마든지 벌 수 있어." 난 다시 목이 메어서 고마워. 고마워. 하며 울음을 터뜨렸다. 우린 빈민가에서 조금 벗어난-그래도 경찰 순찰이 돌고 건물에서 곰 팡내가 덜 나는-새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진은 이제 자유니까, 고향으로 갈 거냐고 물었지만 난 그녀 곁에 있고자 했다. 10년 이상이 지나서, 빈털터리에 평판마저 추호의 여지없이 망가진 내 과거는 어디를 가든 따라다닐 것이다.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 고 뒤늦게 번듯한 직장이 날 기다릴 리도 없으니 다시 거리로 돌아가 거나 막일이라도(얻는 것도 견디는 것도 불가능하겠지만) 찾아야함 을 냉정히 판단하고 한숨을 쉬었다. 진은 그런 날 보더니 제안을 했다. "괜찮은 남자를 잡아, 캐서린. 내가 도와줄게." "......뭐?" 난 갈수록 진에 대한 시각을 달리해야 했는데 그것은 '놀라움'이란 단어 때문이었다. "약 하지말고 얼굴을 가꿔. 옷도 좋은 것으로 다 바꾸고. 챠밍스쿨 같은 곳에 다녀." "진....." "내가 하라는 대로 해. 반드시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 그러면 안전 하게 돈도 벌고 결혼도 할 수 있을 거야. 돈 많은 남자를 잡아. 아니, 그냥 그런 사람들 곁에 얼쩡거리기만 해. 그러면 내가 알아 서 할게." "그 말은..... 진이 내 포주가 되겠다는 거야?" "캐서린은 자유야.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아도 돼. 하지만 혼자서 는 잘 지내지 못할 것 같아. 난 머리가 좋아 캐서린. 샘의 보호를 약속 받았으니까 특별한 문제에만 관련되지 않으면 문제없어. 어떻게 하겠어?" "날 돌봐준다고? 8살인 네가?"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날 바라보기만 했다. 난 형언 할 수 없을 감정에 휩싸였다. 보호받아야 할 쪽은 이 아이 야. 그런데 내가 왜 보호받는 기분이 되는 거지? 그녀의 말은 거짓이 아닐 거야. 난 진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거짓일 리가 없지. 그리고 정말 오랜만에. 아니 어찌 보면 한번도 세상을 살면서 느 끼지 못했던 든든한 안도감이 가슴속에 차 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 진. 널 믿어. 날 돌봐 줘." 또 울려고 하는 날 말리려는 의도인지, 진은 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래 캐서린. 날 믿어야해. 반드시. 어떤 일이 있어도 믿어야해. 그럼 이제 우린 동업자야 그렇지?"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한가지 약속을 해. 좋아하는 남자가 생기게 되면 주저하지 말고 내게 의논 해야해?! 우리의 동업은 돈도 돈이지만 캐서린의 새 인생이 목표야. 그거 잊어버리면 캐서린, 캐서린은 영원히 진흙탕에서 발 빼지 못할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나는 계속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그래 진. 뭐든 다 시키는 대로할게. 뭐든 다 너에게 얘기할게. 난 네 거야 진." 어이없다는 듯이 그녀는 날 보더니 드물게 소리내어 웃었다. "캐서린- 캐서린은 캐서린 거야. 그리고 난 애라구! 게다가 동성 취향을 키우고 싶지도 않아." 난 그녀의 작은 몸을 절대 놓치지 않으리라는 결심으로 꼭 끌어 안았다. 그리고 내 생활은 달라졌다. 난 더 이상 몸을 팔지 않았고, 평범하지만 깨끗한 아파트에서 비싸 고 고급 옷은 아니지만 충분히 내게 어울리는 옷들을 입고 말씨의 교정과 천한 생활로 인해 베인 몸 동작 등을 교정하기 위해 챠밍스 쿨을 다녔다. 문화 생활도 했고 외출 후 돌아올 땐 식료품을 사서, 소질은 없지만 진과 내 자신을 위해서 직접 만드는 가정요리를 시도했다. 난 술과 담배도 많이 줄였고(끊지는 못했다. 의지가 약한 탓인지) 약도 더 이상 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난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충분히 생기 있게 되 었고 발랄해 졌다. 생활은 진이 알아서 해 주었다. 그녀는 본격적으로 뒷골목 세계에 뛰어 들어 어린 아이란 이점을 이용해서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그녀는 정보를 팔았으며 소매치기를 했고 그녀를 인정하게끔 건방진 어른들의 약점을 잡아 협박했으며 혹은 직접 총이나 칼을 쥐고 굴복시켜 나갔다. 기적 같은 일이지만 그녀는 그것을 모두 차근차근 해내었다. 13살을 넘겼을 때는 샘의 입김이 아니라도 그녀를 터치하는 건달들 은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들었을 정도니까. 또한 진은 그동안 날 효과적으로 이용해서 돈 좀 있고 썩어 빠진 사고방식을 가진 남자나 여자들을 우려내었다. 어떻게 했느냐고? 진은 내 이름을 빌려서 주식에 손을 대었다. 실패도 많이 했지만 금방 그쪽 계통의 생리도 파악하여 수익을 올 리기 시작했다. 난 나도 모르는 새 짧은 시간 안에 자수성가한 베일 에 쌓인 인물로 사회의 긍정적인 주목을 받게 되었고 진은 내 거처를 도시의 상류 계층들이 거주하는 아파트로 곧 옮겨 주었다. 난 귀부인이 되었다. 모든 것은 진이 관리했지만 주마다 통장에 이체되는 용돈을 받으면 서 사치스럽지는 않지만 고상하고 고급스런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욕심을 부릴 만 했지만 난 그녀를 대리하는 대리인이며 정보원이라 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진을 철저히 믿었고 아무런 불만도 없었다. 사회의 정당한 주목을 받게 되자 사냥감(?)들은 알아서 다가와 주었 고 진은 그런 환경을 놓치지 않고 철저히 이용했다. 난 그녀가 가 앉아 있으라는 곳에 가서 시간을 보내고, 사인하라고 하는데 사인했다. 주목하라는 인물에게서 사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 게끔 도와주었고 뉴욕의 자질구레한 스캔들이나 소문이나 사업정보 들도 놓치지 않고 다 알려 주었다. 진은 아무것도 아닌 듯한 의미 없는 정보들도 다른 많은 정보원들을 통해 얻은 것들을 종합시켜 효과적으로 이용할 줄 알았다. 그리고 결코 서두르지 않았으며 평범하고 약한 말단 계층들은 건드 리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런 그들의 약점을 모르게(때론 알게) 없애 주기도 했다. 그것은 이쪽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버러지 같은 인간들을 법망에 노출시키는 일을 하는 정의의 사도는 아니었지만 그런 그들의 그늘 아래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하는 창녀 나 중독자나 성실한 파산자나 소년소녀 가장들을 돕는 일은 기꺼이 했다. 대가 없이 빚을 갚아 주기도 하고 제대로 일하는 자선 단체에 충분 한 기부까지 했다.(서류에 동원 된 이름은 나나 혹은 샘이었다) 그런 일들의 결과로 그녀는 많은 아군을 두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사실이 아니더라도 그녀는 내 천사이며, 보호자이며, 주인이었다. 난 그녀를 사랑했다. 시간이 흘러 내 나이 서른 셋 되었을 때 난 늦은 사랑에 빠졌다. 진의 나이 14살 때의 일이었다. 노먼 k 와일러. 그는 영국인이었다. 미국에서 꽤 명문인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하 고 맨하턴에서 몇 년째 직장을 다니고 있었다. 세계 어디든 경기는 침체되어 있는 상황이고 명문대학 졸업장도 그 다지 효력이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고급 실업자가 많은 도시에서 그는 눈을 낮추고 자존심을 낮춰서 어찌 되었든 생활은 가능한 나날 을 보내고 있던 평범한 샐러리맨이었다. 나는 진이 참석하라고 한 사교 파티에 나갔다가 네 살 어린 그를 만났다. 그리고 사랑에 빠졌다. 그 사실은 버릇처럼 하루 일과를 재잘대던 내 혀 탓에 곧, 진도 알게 되었다. "진, 노먼은 날 좋아하지 않을 거야! 그는 뉴욕의 기회주의적인 남자 들과 달라. 그는 신사야.... 나 같은 것은 눈에 차지도 않을 거야." "왜 그런 소릴 해? 캐서린은 아직도 예뻐. 그리고 지금은 상류계층이 잖아." "사실이 아니잖아 진. 처음은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나중엔 어떻게 든 알게 될 거야. 그럼 날 경멸하겠지." 풀이 죽어서 중얼거리는 내게 진은 턱을 긁적이며 물었다. "그 사람도 캐서린을 좋아해? 아니, 사랑해?" "........모르겠어. 굉장히 멋진데. 날 좋아하는지....아니 조금은 좋아하는 것 같아. 매일 전화하는 걸." "그와 잤어?" "아니, 아직.......진!!" 나는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왜 그래?" 난 다시 소파에 주저앉았다. 아-- 저런 소릴 딸 뻘의 여자아이에게 듣는 나는 도대체 멀까나. "그와 데이트를 몇 번이나 했는데?" "데이트라면 뭐하고, 파티에서 만나 함께 춤추고, 몇 번 점심 같이 하고, 좀 길게 전화 통화하고......" "저녁 식사에 초대 안 해?" "했는데, 요즘 진이 매일 참석할 파티 목록을 짜주었잖아. 그는 그런 파티에 올만한 배경(?)을 갖추지 못했어. 파트너도 진이 정해 주니까 같이 가잘 수도 없고....." "........음." 조금 원망이 섞인 듯한 내 대답에 진은 신음 소리를 내었다. "그를 유혹해봐 캐서린." 나는 또 놀라 고개를 들고 소리쳤다. "진! 그는 가난뱅이야. 영국에 부모님이 사신다지만 얼마 안 되는 저축을 모두 자신의 교육비로 쓰고 해서, 돈을 벌 때까지는 맘에 안 드는 직장이지만 어쩔 수 없이 다닌다고 했단 말이야!" ".......뜯어내려고 하는 거 아니야 캐서린." 난 조금 무안해 졌다. "그와 친해지고. 정말 사랑할 만 하는지, 평생을 같이 하고 싶은 건지 알아보라고. 당분간 다른 일은 신경 안 써도 돼." "에. 그러니까........." "그러니까 캐서린. 그를 유혹해 보라고. 최선을 다해서, 그도 캐서린 을 사랑하게끔 말이야." "그와 결혼해도 돼?" "바보 아냐? 캐서린? 그걸 내게 물으면 어떻게 해?" "그....그렇지?" 진은 몇 가지 주의사항을 일러 주었다. 오랫동안 그녀의 세밀한 지시로 이미지를 꾸며대고 드레스와 장신 구를 선택하고 사람들과 나눌 대화마저 컨트롤 받은 탓에 내 개인의 개성이 무엇인지 잊은 지 오래되었는데(그것은 옛 직업 탓도 있었다) 그녀는 순수하게 지금 내가 가진 것으로만 P.R 하라고 했다. 난 노먼이 진심으로 날 사랑하게 되길 바랬기 때문에 이 도시에 와 서 써야했던 가면을 벗고 도전하듯, 그에게 대시하기 위해 마음을 다져먹게 되었다. "그를 매료시켜봐, 캐서린. 하지만 데이트는 가난하게 해." 그녀는 끝까지 충고를 아끼지 않았고, 난 잠시 자기 연민에 빠졌다. 그 후 몇 일은 너무나 행복했다. 난 그와 매일 만났다. 도시의 다른 가난한 연인들처럼 내가 직접 싸 가지고 간 소박한 점심을 공원에서 먹었고 초대장이 필요 없는 밝고 쾌활한 파티에서 춤을 추었다. 그의 작은 아파트에서 사랑을 나누고, 그의 가족 얘기며 직장 얘기며 십대 때 품었던 꿈들을 주고받으며 그의 품에서 잠들곤 했다. 그런 짧은 행복은 2주도 안되어서 끝이 나는 듯 했다. "해고를 당해?" "응. 그다지 큰 잘못이 아니었는데, 내게 책임이 돌아와서.....뭐 별로 애착이 가는 직장도 아니었으니......걱정 마, 캐서린. 금방 재취업 할 수 있을 거야." "소개장은 받았어?" ".................." 난 두려워졌다. 이 일엔 뭔가가 있었다. 그가, 아니면 그녀가..... 둘 중 한사람이 배신에 관련되어 있음을 조금....아주 조금 예감했다. 안 돼! 안 돼! 진은 안 돼. 노먼도 안 돼! 난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고 기다리고 있던 진을 대했다. "노먼이 청혼했어. 캐서린?" "진............." "청혼 안 해?" "노먼의 해고, 진이 꾸민 거야?" 아무 말 하지 않았지만 그녀가 관련되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왜 그랬어?" 난 주저앉아 울고 싶었다. "그는 자존심이 강해. 내가 직장 문제를 알아봐 준다고 하면 화낼지 도 몰라. 진, 그는 내가 돈 많고 능력 있는 여자인 줄 알지만 한번 도 그에 관해 물어 보지도 않았어! 아이스크림 하나도 그가 사줘서 먹었단 말이야!" "그는 자신이 가난뱅이인 것을 미안하게까지 여겨. 그런데....그는 영국으로 가버릴지도 몰라. 왜 그랬어, 진?!" "그럼, 가버리면 그는 캐서린을 사랑 않는 거겠지. 그런 사일 계속 유지할 수는 없잖아?" "아니야, 바보야! 넌 어린애잖아. 그가 날 사랑 안 해도 난 그를 사랑 한단 말이야!" 화를 내는 내게 진은 오히려 어린아이가 투정 부리는 것을 바라보듯 날 보며 말을 이었다. "캐서린. 날 믿으랬잖아. 날 믿지 않아?" ".............................." "이젠 믿지 않아? 나는 이제, 사랑 안 해?" "사랑해, 진. 아직도 믿어. 그래.....난 참 바보야." 나는 어떤 사실을 깨달았고 기운이 빠져 버렸다. "머리가 아파. 자러 가도 돼?" 진의 한숨 소리가 거실에 가득 울리는 듯 했다. "그런걸 일일이 내게 뭐 하러 허락 받아?" 난 바보니까.........훌쩍이며 나는 침실로 들어갔다. 난 정말 바보야. 그가 날 사랑한다고 해도, 내 일을 모두 알면 가버리 겠지. 그가 날 사랑하지 않는대도, 그는 가버릴 거야. 어쨌든 그를 잃게 되는 거야. 진에게 화를 내는 것은 정말 바보짓이지. 나는 정신을 잃듯 침대에 쓰러졌다. 낮엔 직장을 알아보는 일 때문에 노먼을 볼 수 없었다. 저녁에는 점점 침울해 가는 그를 지켜보기만 했다. 일주일쯤 지났을 때 그는 많이 생각했다며, 내게 이야기를 꺼냈다. 난 가슴이 덜컹거려서 비명을 지를 것 같은 기분이 되어 그의 말을 들었다. "캐서린. 난 캐서린보단 적지만, 나이가 많아. 추천서 없이 이 도시에서 괜찮은 직장 구하기는 틀린 것 같아. 계속 이렇게 있다간 그나마 힘들게 모은 돈도 다 쓰게 될 테고......지금 돌아가면 차라리 고향에서 뭔가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 ".......돌아가겠다고?" "응. 그래서 말인데 캐서린. 나와 같이 가지 않겠어?" 난 숙였던 얼굴을 쳐들었다. "......같이?" "응. 난 별로 가진 게 없지만, 가난뱅이라도 괜찮다면 나와 결혼 해 주지 않겠어?" "결혼?" "그래. 결혼." 난 눈앞이 뿌해 졌다. 그리고 단순히 감동해서 우는 것인 줄 착각했 는지 안아주는 그의 품에서 어깨를 들썩이며 울기 시작했다. "노먼.......고마워. 고마워. 노먼을 사랑해." "나도 사랑해, 캐서린." 그가 키스해 왔지만 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결혼은 할 수 없어. 정말, 미안해." 움칫거리며 그가 팔을 잡아 왔다. "왜..........?" "난, 부자가 아니야....저. 모두들 그렇게 알고 있지만 돌봐 주는 사람이 있어. 그녀 때문에 풍족하게 생활하지만, 사실은 전혀 아니야." "...그녀?" "내........보호자야." 노먼은 날 소파에 앉히고 자신도 내 옆에 와서 앉았다. "캐서린. 나도 부자는 아니야. 대학을 나왔지만, 내세울 만한 것도 아니고. 차라리 잘 됐어. 돈 때문에 널 사랑한 것도 아니고, 남들에게 돈 많은 여자 꼬셔서 결혼하는 게 아니냔 눈초리를 안 받아도 되잖아. 사치스러운 생활은 못하겠지만. 나 제법 성실해. 그러니까 결혼하자. 궁핍하게 살게 하진 않을게. 응...?" 난 노먼이 너무너무 다정하게 말하자, 다시 눈물이 나왔다. 아.아... 그냥 결혼한다 그럴까? 가장 중요한 고백을 앞두고 난 갈등 했다. 그냥 모른 척 그와 영국으로 가서 조용히 살면 안 될까? 하지만 진은, 노먼을 유혹하라고 했을 때 조건을 달았었다. -진심으로 대해야 해, 캐서린.- 난 바보다. 어린아이의 보호를 받아 왔을 정도로 엄청 바보다. 그래서 그런 진의 말쯤은 쉽게 잊어버릴 수도 있어. 그렇지만 노먼을, 너무 사랑해. 너무 사랑해서......속일 순 없어! "노먼. 난 창녀였어." "..............뭐?" 더더욱 움츠리며 꼭꼭 숨겨 두었던 내 과거를 단숨에 토해 내었다. "난 창녀였어. 무려 10년이 넘게..... 난 구제불능이었어, 노먼. 화내 지마. 나 너무 널 사랑해서. 조금만, 아주 조금만 옆에 있고 싶었어. 그래서 말 안했........." "뭐라고?!!!" 갑자기 그가 고함을 질렀다. 그리고 난 꿈이 깨어지는 소리와 그의 가슴이, 내 마음이 부서지는 진동을 느꼈다. 퉁퉁 부은 눈으로 돌아온 나를 진은 아무 말 없이 맞아 주었다. 갈라진 음성으로 '자주 보내?' 하고 말했지만 그녀는 대꾸하지 않았다. 난 지치고 약해진 가슴을 안고 방에 틀어 박혔다. 이튿날 이른 아침. 진이 손님이 왔다면서 잠옷 차림의 날 깨워 응접실로 데려갔다. 새벽 녘에 깜박 졸았던 모양이다. 내 몰골은 엉망이었지만 찾아 온 사람이 노먼임을 알고는 헝클어진 머리를 수습하지도 못하고 뻣뻣이 굳어 버렸다. 그는 잠을 자지 못했는지 충혈 된 눈을 하고 있었지만 깔끔한 정장차 림으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머뭇거리는 내가 답답했는지 아니면 놀리고 싶었는지 진이 나서서 대화(?)를 시작했다. "Mr. 와일러. 캐서린에게 할 이야기가 있어서 찾아 오셨다면서요?" "아....저, 그래요. 캐서린의 보호자 되시는 분은.......?" "캐서린의 보호자요? 무슨 일이신대요?" 그는 생글거리는 그녀를 돌아보다가 비로소 그녀가 어리긴 하지만 굉장히 미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눈을 조금 크게 떴다. 하지만 대답은 제대로 했다. "캐서린에게 청혼하려고요." 난....나는............. 나는 노먼의 품에서 겨우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캐서린 고만 좀 해. 미성년자를 앞에 두고 어디까지 가려는 거야 하는 진의 목소리에 현실로 돌아 왔기 때문이다. "노먼, 정말 나와 결혼할거야? 내가, 그......" "됐어. 캐서린. 난 한달 전에 널 만났고 네게 반했어. 그 이전에 어떤 생활을 했던 나와는 상관없어. 지금이 중요하니까....나와 결혼해서 영국으로 가겠어?" 그는 스스로에게도 수 없이 설득했었을 말을 되 내이며 다시 날 감 동시켰다. "응! 노먼과 결혼할게. 영국으로 따라 가겠어. 그리고 요리도 하고 청소도 하고 아이도 낳고 싶어." 내 대답에 그는 뜻밖의 말을 했다. "아이......가질 수 있어? 저.....다른 뜻이 아니고 몸은 건강해?" "건강해! 그 일을 그만 둔 건 벌써 6년이나 되었는걸? 그리고 그동안 사귀는 남자도 없었단 말이야. 병 같은 것은 없다고!" 그는 그저 한숨을 쉬며 다행이네. 하고 말했다. "그럼 이제 네 보호자에게서 허락만 받으면 되겠네. 집에 없어?" "앞에 있잖아." 나는 의자에 앉아 다리를 포개고 발을 까닥이며 우리를 구경하고 있는 진을 가리켰다. 이해를 하지 못하는 듯 해서 나는 그에게 자세 히 설명했다. "그녀는 진이라고 해. 6년 전 8살이었을 때 내 빚을 갚아주고 날 수 렁에서 건져 주었었어. 그 후 지금까지 날 보살펴 준 내 '주인'이야" "주인?!" 난 여유를 되찾아 웃기까지 하며 어제 그가 했던 것처럼 진을 마주 한 채 다정하게 소파에 함께 앉았다. "진은 내 주인이고 하늘이야. 맞아. 진에게 결혼 허락 못 받으면, 우리 결혼할 수 없을 거야. 그러니 어서 무릎 꿇고 날 달라고 해 봐, 노먼."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설명을 덧붙이고 강조하고 반복해서 겨우 그 를 조금 이해시킬 수 있었다. "자, 그럼. Mr.와일러. 저에 관한 이야긴 나중에 천천히 들으시고.... 캐서린, 현실적인 문제가 남았어." "무슨 문제?" 진은 미리 준비했었는지 몇 장의 서류를 찾아다 탁자 위에 펜과 함 께 내밀었다. "사인해. 현재 캐서린의 이름으로 되어 있는 증권과 부동산, 각종 투자수익금의 권한, 고급 클럽 회원권 등등을 모두 샘에게 즉시 무상으로 양도한다는 내용의 서류야." ............................. "무슨 소리야?!" 반응 없는 날 제치고 노먼은 또 놀라서 소리쳤다. "캐서린, 가진 게 없다며? 그리고 왜 재산 양도를 해야 하는 건데?" 난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니까...알아듣게,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Mr.와일러. 캐서린은 제 대리인이었답니다. 캐서린의 이름을 빌리고, 성인인 그녀가 내 대신 사회에서 얼굴 마담 역을 한 것이죠. 당연히 내가 버는 돈은 그녀 구좌로 들어오게 되어 있는 거구요. 그래서 법적으로 캐서린은 아주 부자랍니다." "맞아, 노먼. 내가 입은 옷이며 헤어며 심지어 손톱 메니큐어까지 진의 돈이 들어 간 거야. 나는 그냥 우아하게 돈을 쓰며 이것저것 심부름만 해 왔어." "아무리 그렇다 해도........이런 일이 가능해?" "빨리 사인하고 결혼하러 가야 하지 않아?" 진이 능청스럽게 말했다. 난 그녀가 내민 서류를 잡고 펜을 들었지만 다소 시무룩해진 목소 리로 중얼거렸다. "너무하다, 진. 그래도 수고 비 명목으로나마 조금은 떼어줄 줄 알았는데......" 사인하려는 날 노먼이 말렸다. "기다려봐 캐서린! 어쨌든 그녈 위해 일한 게 있댔잖아. 그런데 그냥 다 넘기겠다고?" "Mr.와일러 이건 저와 캐서린의 문제 에요. 그리고 듣자 하니, 빈털 터리라 해도 그녈 사랑하니 함께 새 출발하겠다고 하지 않았나요?" 노먼은 진을 바라보았다.-사실 참견을 하자면 못할 것도 없지만... 아니 캐서린의 재산 문제야. 당연히 참견을 해야....나와 상관없이 그녀 문제인가? 하지만 그녀의 것이지만, 아니기도 하고.....- 그리고 갈등에 휩싸인 것이 분명한 얼굴을 했다. 나는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하듯 속삭였다. "괜찮아 노먼. 나 용돈으로 받았던 돈, 다 쓰지 않고 조금씩 모아 두어서 완전히 빈털터리는 아니야. 난 진을 믿었고, 진도 날 믿어 주었었는걸? 이제 와서 배반할 수는 없어. 난 진도 무척 사랑해." "호오~ 모아 두었어, 캐서린?" 웃음기 띈 그녀의 목소리에 난 약간 언성을 높여 말했다. "그래! 이 구두쇠야. 동전 훔쳐서 모은 돈으로 남의 빚까지 갚은 경 력이 있는 누구누구와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뭘 그래?" 진은 쿡쿡 대며 웃었고 노먼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인이나 해. 캐서린." 나는 사인했고 노먼은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 여러 장의 서류에 모두 사인하고 나자, 진은 다시 노먼에게 말을 걸었다. "Mr.와일러 이제 캐서린은 정말 빈털터리 에요. 아- 조금 돈을 모 아 두었다고는 하네요. 어떻게 하시겠어요? 여전히 캐서린과 결 혼할 생각이세요?" 노먼은 한숨을 쉬었지만 담담해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쩔 수 없지. 본인이 자기 것이 아니라는 데야 뭐. 그리고 돈을 보고 캐서린에게 청혼한 것은 아니니까. 이제 그녈 내게 주겠어요, 어린 보호자씨?" 진은 참 예쁘게 웃었다. 그리고 몇 장의 서류를 다시 우리 둘에게 내밀었다. "이거 줄게요. 재산 양도 서류에 사인하는 캐서린을 계속 말렸다 거나, 사인 후 와일러씨 마음이 달라졌다면 이 서류가 효력을 발 휘했겠지만, 이제 필요 없게 되었으니까요." 나와 노먼은 그 서류 내용을 보고 기절할 듯 놀랐다. "이....이건...거의 노예 계약 서류잖아. 게다가 샘의 앞으로 되어 있는데?" 그 서류 안의 내용은 내가 진 엄청난 빚의 청구권자가 샘이라는 증명 내용과, 가지고 있는 전 재산의 저당권, 그가 경영하는 클럽 (당연히 뒷골목에 있는)에서 나이 50세까지 저 임금으로 봉사한다 는--참으로 천인공노 할 내용의 취업계약서가 활자화되어 있었고 버젓이 내 사인이 들어가 있었다. "이건 언제 준비했니, 진?" "옛날 옛날에,(진은 운율을 붙여 노래하듯 이야기했다) 우리가 맨 처음 동업하기로 했을 때 내가 이것저것 사인해 달라고 했었잖아. 그 중에 섞여 있었어. 그때 난 샘의 친절을 받고는 있었지만, 솔직히 캐서린까지 다른 건달들에게서 지킬만한 방패(?)가 없었거든. 그리고 요 몇 년간 돈을 노리고 접근하던 남자들에게서 마지막에 캐서린 편이 되어 줄, 혹은 그건 내 돈을 지키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어. 샘은 그 서류에 대해서 몰라." 나와 노먼은 말문이 막혔다. 난 부끄럽기까지 했다. "정말, 보호자였네요. 미스......." "진이라고 부르세요. 와일러씨. 그런데 우리 서로 악수도 나누지 않 았네요? 계속 성으로 불러야 하나요?" "아, 그렇군. 노먼이라고 불러요, 진. 흠. 그동안.....엄마뻘인 캐서린을 무사히 돌봐 줘서 고마워요. 그런데, 성이 뭐지요?" 뒤늦게 묻는 그의 말과 함께 그들은 서로 악수를 나눴다. "전 성이 없답니다. 캐서린이 모두 얘기 해 줄 테니, 나중에 천천히 들으세요. 그나저나 캐서린. 이제 앞으로는 어떤 경우든 사인할 때는 정신을 바짝 차리도록 해. 잘못하면 큰일나는 수가 있어." "내가 어린애니? 하지만 이런 황당한 경험도 했으니 말 안 해도 조 심 할거야." 난 곧바로 서류를 처분했다. "그런데 결혼식은 언제 할거야?" 노먼과 나는 서로 쳐다보다가 함께 대답했다. "오늘!" "마침 잘 됐다. 오늘 일요일이고 우리 서로 약속 없으니까...진! 증인 으로, 에, 또 들러리도 할 겸 함께 가자!" "오늘? 지금?" 나는 옷을 갈아입기 위해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내가 못 살아. 정말." 진이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파트 밖으로 나와 노먼에게 운전대를 잡게 했을 때 나는 탄성을 질렀다. "진. 차는 어떻게 해? 이건 목록에 없었는데?" ".........그냥 가져. 캐서린." "우와-! 수지 맞았다. 이거 비싼 찬데.....진, 잊어먹었구나?" 난 그녀를 놀리며 키득거렸고 우린 성당으로 달려가서 단 한사람의 하객을 두고 신부님을 졸라, 식을 올렸다. 내 생애에 최고로 다사다 난한 때가, 최고로 행복한 순간이 지나고 있었다. 아, 여기서 내 이야기가 끝났으면 좋으련만. 진은 또 한번 날 놀래 켰다. 노먼이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기겁을 한 것은 당연했고. 진은 결혼 선물이라며, 샘에게 양도한 목록에 없던 내 명의의 통장 을 건네 주었다. 신혼 여행 경비를 주는 건가, 하고 안을 들여다 본 후 얼마나 놀랐 는지. 통장엔 70만 달러가 들어 있었다. 무려 70만 달러가.....!! "캐서린, 양도한 주식 등은 처분하기 아까운 것들이라 팔지 않았어. 아파트도 곧 세를 뺄 거야. 그 외엔 그다지 중요한 것들이 아니고. 옷이나 보석 등도 잘 싸서 가져가도록 해. 짐이 번거로우면 거 할 곳이 정해지는 대로 보내 줄게." "..................진..........." "왜?" "진!!!!" "................" 난 얼마나 운이 좋은가. 난 얼마나, 얼마나 큰 행운을 누리는가. 난 너무 지나친 축복을 받아서 이제 몇 일 못 살고 죽어버릴지도 모른다. "노먼, 캐서린을 잘 부탁해요. 그녀는 날 많이 도와 주었어요. 그러 니 그것은 그 정당한 댓가라고 여기시면 되어요. 두분 이서 잘 쓰 세요. 두 사람이 항상 행복했으면 싶네요...하하...이제 정말 그녀를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긴장이 풀려서 진땀이 다 나오네 요. 엄청 손이 많이 가는 동업자였거든요." 사랑해 진. 사랑해 내 구원자. 존경하는 내 보호자. 내 주인. 아름다운 내 천사..... 노먼을 만나기 전, 내 모든 것이었던 친구. 난 그녀를 떠났다. 공항에서 배웅하는 그녀에게 마구마구 키스를 날리며 아이를 나으면 무조건 '진'이라고 이름 붙이겠다고 다짐하 고는 난 노먼과 함께 영국으로 갔다. 그리고 행복했다. 1년 후 아이를 낳아 그녀에게 대모를 부탁하러 갔을 때를 마지막 으로 난 그녀를 다시는 보지 못했다. [4] 3. 뉴욕이여, 안녕! "진! 아직 안 일어났어? 문 열어봐!" 할 일이 없는 경우의 아침은 언제나 그러하듯 아침 햇살이 방안을 모두 훑고 지날 때까지 뒹굴 거리기만 하던 진은 이른 아침의 방문 객의 소란에 인상을 찌푸렸다. "누구야?" "암호명 '그대의 기사'.....이시닷! 빨리 문 열어. 진." 문을 열자 샘의 큰아들 니콜라스가 맛있는 냄새가 나는(꼴~각) 피크 닉 가방을 들고 서 있었다. "그거 뭐야?" "제기랄, 엄마가 보냈어. 오면서 쪽팔려서 죽는 줄 알았다. 얼른 받아. 네 아침식사야." 집안으로 들어온 니콜라스는 원룸으로 구성된 방안을 휘휘 둘러보고 는. "야~ 여전하구나. 가구 하나 없이 참 삭막하게도 산다. 이게 집이냐, 작업실이냐?" "아침 먹었어?" "먹었어." 진은 마리(니콜라스의 엄마)가 보낸 푸짐하고 맛있는 조반을-그녀는 카드까지 써 보냈다-펼쳐 식욕 돋는 냄새에 기꺼이 굴하여 아침을 먹기 시작했다. "학교 안가?" 밥 먹는 것을 구경 당하니 멋쩍어져서 진은 물었다. '오~ 그러고 보니 등교시간이 지났는데 뭐 하는 거지?' "오늘은 빠지기로 했어." "허- 샘이 알면 가만있겠냐?" "괜찮아. 핫! 그 샘이 오늘은 학교가지 마라고 했거든!" "뭐?" 샘은 자식 교육에 있어, 다른 것에 대해서는 관대했지만 아이들이 등교하는 것에 소홀히 하면 굉장히 화를 내었다. 머리가 나빠서 공부를 못하는 것은 둘째치고, 학교에 가지 않는 것은 배울 자세가 애초에 없는 것이라며 기필코 등교 일은 지켜야 함을 강조하고는 했던 것이다. 그런 샘의 의견이 그녀에게는 먹히지 않아서 아예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진이었지만. 다행히도 니콜라스는 운동에도 소질이 있고 제법 성적도 좋았다. 아마, 아들이 모두 한 인물 하는 사람이 되길 바라는 모든 아버지들 의 공통적인 욕심으로 이제껏 뿌듯했을 것이다. "샘이?" "헤헤. 오늘 하루 널 에스코트하라는 두목의 말씀이 있으셨다." "에스코트 좋아하네." "어- 그러지 마, 진. 샘이 좋은 소식을 전해 주라고 했단 말이야. 내게 잘 보여야지!" "...............?" -샘이 벌써 몇 일전 내가 부탁한 일들을 마무리지었나? 그러고 보니 - 진은 니콜라스가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샘과 마리도 알고 있었다. 그는 일부러 진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도 록 아들을 배려 한 것인지도. "무슨 소식?" "놀라지마...캐서린이 아이를 낳았대!" "......그게 뭐 놀랄 일인데? 결혼했으니 아이를 낳은 것은 당연하지." "좀 놀래봐라. 오늘 아침에 연락이 왔단 말이야. XX호텔에 와 있대. 널 보러 왔다던데?" "여기 와 있다고?" "그래! 샘이 너와 함께 캐서린과 아기를 보러 가보라고 했단 말이야." 진은 캐서린을 만나기 위해 니콜라스의 중고차를 타고-그는 올해 16살 이 되어 면허를 따자마자 샘의 허락으로 차를 샀다. 그때의 자랑스런 얼굴이란. 귀엽기까지 했었지.- 그녀가 머무는 호텔로 향했다. '웬지, 시집 보낸 딸의 집을 방문하는 기분이 되는 군.' 1년 만에 다시 만난 그들은, 너무 행복해 보였다. 진은 그들 가족의 모습이 한 폭의 그림 같다는 생각을 하며, 가슴 이 찌릿해 옴을 느꼈다. '.........난 속죄했어....그렇지?' '이제 내 죄는 사해졌을 거야' * 아이의 대모가 되어 달라는 노먼의 말에 진은 부드럽게 사양의 말을 했다. "진, 왜?! 대모라고 아이를 항상 책임지는 것은 아니잖아. 네가 이런 형식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알지만, 부담 가질 필요는 없어. 노먼과 내 아이의 첫 대부모는 반드시 네가 되어야 해! 대모가 되어 줄 거지?" 진은 조금 난처해졌다. 이제까지 계속 불편을 감수하고 미뤄왔던- 신분을 만들고 새 생활을 찾아 떠나려는 지금으로서는, 과거에 속하 는 그녀를, 그녀의 가족과의 인연을 어떻게 해야하나 하는 고민이 생겼기 때문이다. "캐서린.....그렇지 않아도 한번 연락하려고 했었어. 떠나기 전에 얼굴만이라도 보려고 했거든." "떠나?" 캐서린보다도, 니콜라스의 눈이 왕방울만 해졌다. "깨끗한 신분을 만들기로 했어. 그리고 이곳을 떠날 거야. 다시 보지 못하게 될지도 몰라." "진, 세상 어디든. 지구 밖으로 가는 것도 아닌데 새삼 다시는 만나 지 못할 것처럼 말하니? 괜찮아. 이름뿐인 대모라도 우리 아이에겐 영광이야. 이름도 '진'이라고 지었는걸? 이름만 받고 다시 보기 힘 들어진다고 해도, 나와 노먼은 널 사랑해. 어디 있든, 무엇이 되든 널 사랑해. 그리고 우리 '진'도 네 이야기를 들으며 클 거야.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다고 아이의 대모 되길 거절 할 필요는 없어. 넌 제일 중요한 것을 우리들에게 주었잖아?" "..........돈?" "바보!! 사랑, 믿음, 신의, 내게 그 모든 것을 주었잖아, 진!" 진은 눈을 비볐다. "대모가 되어줄 거지, 진?" "그래. 노먼도 괜찮다면........" 노먼이 냉큼 말을 받았다. "진, 괜찮다 뿐이에요? 정말 고마워요. 우리 가족이 된 것을 진심으로 환영해요!" 그들은 모두 웃으며 축배를 들었다. 아. 니콜라스는 조금 시무룩해 있었지만. * 돌아오는 길에 니콜라스는 묵묵히 운전에만 집중하더니 진의 아파트 현관에서 돌아가지 않고 머뭇거리고 있었다. "할말 있니, 니콜라스?" "그래....들어가도 돼?" 저녁까지 먹고 그들과 헤어졌기 때문에 배가 불렀던 진은 코코아를 대접했다. "코코아가 뭐냐. 커피도 아니고. 맥주 없어?" "냉장고에 있어, 가져다 마셔." 니콜라스는 캔 맥주 몇 개를 가져다 늘어놓고 마시며 계속 시무룩해 했다. "진........미안해." "뭐가?" "진이 우리 집에 온 첫날. 내가 괴롭혔던 것 말이야." "첫날만 괴롭혔냐?" "그래. 그 후에도 얼마간, 널 못마땅해 했지. 사과하고 싶어. 그게 항상 꺼림칙했었어. 동생과 내가 너에게 친절했더라면 우리 집에서 계속 살았을지도 모르는데....." "괜찮아. 넌 겨우 9살이었잖아. 그리고, 내가 너의 가족과 계속 살았 더라면 지금의 캐서린을 만날 수 있었겠어?" '내가 조금만 빨리 샘의 집에서 나왔더라면, 네이할머니와도 시간을 좀더 보낼 수 있었을 텐데.' -진은 혼자 생각했다. "그건 그렇지. 저, 진....." "왜?" ".......내가 널 좋아하고 있는 거 알고 있지?" "그래." "그래, 제길. 넌 머리가 좋으니까 다 알 거야. 난 처음 우리 집 부엌 에 앉아있던 널 보고 굉장히 예쁜 애라고 생각했었어. 하지만 백인 으로 보였기 때문에, 흑인 아이인 나하고는 친해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 뭐...아무튼 그땐 어린애라서,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몰랐어." "널 원망한 적 없어, 니콜라스. 네가 괴롭혔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내 게 아무것도 아니었어. 데이먼에게 당한 것과 비교하면, 하하...그 정 도야 뭐, 우스웠지. 단지, 샘의 체면을 생각해서 자리를 피해 주었던 거야. 내가 앙심을 품었다면 너와 친구가 되었겠어?" "진, 정말 떠날 거야?" "응" "......어디로 갈 건데?" "한국." "korea? 월드컵이 열리는 곳?" "그래. 대만이나 일본으로 갈까하고 생각도 했었지만, 그곳으로 가는 쪽으로 고려 중이야." "다른 잘사는 나라도 많잖아. 왜 굳이 그렇게 작은 나라로 가려고 하 는데?" "글쎄, 그건. 음....여러 가지를 알아보았거든." 진은 자신이 혼혈인 점과 공항에서 발견되었던 점, 등등. 자신의 과거와의 연결점을 찾으려 했던 지난 시간들을 고려하여 새로운 인생 을 살 곳을 물색했었다. "네 부모에 대한 단서를 찾은 거야?" "아니. 전혀.... 난 아무래도 땅에서 솟은 것 같아. 부모를 찾는 것은 이제 포기했어. 다만, 일본과 한국을 조사하다가 재미있는 점을 발견 했거든." "그게 뭔데?" "그들은 지리상으로 아주 가까운 나라들이야. 그런데 감정적으로 굉 장히 적대하고 있더라고. 지나온 역사 자체가 원수들이더라." "뭐? 한국이 일본과 상대가 돼?" "오히려 지난 세기까지는 한국이 항상 우위였어. 일본이 지금 어떻게 주장하든지 말이야. 음....일종의 배신이지. 한국은 오랜 세월 일본을 계획적으로 침략하거나 할 필요를 느끼지 않고 견제만 했는데, 일본은 가장 가까운, 대륙의 연결점인 한국을 참 자주도 침략했더라. 40년 가까이 한국전쟁 이전에 그들을 지배하기도 했었어. 여기, 백인과 흑인 들의 오래 묵은 감정처럼 그들도 그래. 한국전쟁으로 일본은 급부상 했고 한국은 바닥으로 떨어져 다시 시작했어. 그들 자존심이 얼마나 상처받았겠니? 내내 해적 수준이었던 약소국에게 반세기 가까이 지배 받은 흔적 때문에 구세대들은 이를 갈고 철없는 신세대들은 일본에 열광하지. 웃기는 일이야." "정말 바보들이네. 그렇다면 일본이 차라리 낫지 않아?" ".......다른 것들도 고려했어." 진은 빈 코코아 잔을 치우고 진지하게 무릎을 감싸 안았다. "세계에서 가장 아이를 많이 수출하는 나라가 한국이야." ".................." "그들은 아직도 휴전 중이기 때문에 공항 검문이 꽤 철저해. 이곳 생활 의 꼬리가 내게 다시 침입하는 것을 일본보다 잘 막아 주리라 생각해. 그리고 그들의 국민성이 일본과 너무 달라." "어떻게?" 니콜라스는 얘기가 재미있어 지는지-진의 일이라 더욱 그런지도.- 관심을 보여왔다. "일본인은 외국인에게 친절해. 인사법만 봐도 비굴해 보일 정도잖아. 하지만 그들은 깊이 사귀는 것이 좀 어려워. 뭔가, 이질감이 많이 느껴지더라. 한국인은 외국인에게 친절하긴 하지만 단일 민족국가라 서 그런지...." "단일민족?" "응. 그들은 드물게 그들만의 말과, 글이 있어. 다른 것은 모두 희석 되다시피 하는데 문자와 언어가 존재한다는 것은, 게다가 문맹률이 세계에서 최하야. 문자와 언어란 문화 자체야. 한국어는 내가 배웠던 언어들 중에서 가장 어려운 편이었고, 문자는 내가 배운 글들 중 가 장 정교했어. 국민성 이야기 하다가... 아무튼 그들은 일본과 반대의 정서를 가지고 있어. 외국인에게 친절하기는 하지만, 배타적인 면이 더 강해. 하지만 한번 친해지면 뭐랄까, 상대를 굉장히 믿고 헌신적 이기까지 하더라. 한국과 일본을 비교하면 모든 면에서 한국이 뒤지 지만 그 점 하나가 마음에 들었거든." "그리고 네 부모 중 하나의 나라일 가능성도 제일 크고?" "..........그래." "진."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고 눌러 앉아 있던 니콜라스는 다시 입을 열 었다. "용건이 있으면 빨리 좀 말해라, 니콜라스. 웬 뜸을 그렇게 들여?" "하지만, 진. 내가 널 좋아하는 것을 알잖아." "그래 알어. 그게 뭐 어쨌다는 건데? 나도 널 좋아해." 니콜라스는 희색을 감추지 못하고(바보 같은 놈 ;작가생각임. 흠흠) 기대에 찬 목소리를 냈다. "저.....그럼. 내 여자친구 할래?" "니콜라스. 너처럼 어수룩한 프로포즈를 하는 녀석은 없었던 것 같다. 여자친구가 된다고 해도.....이제 난 이곳을 벗어나려고 하는데, 이제 와서 어쩌겠다고? 말해두지만 난 다시는 이 뒷골목 세계에 관여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아직 몇 일은 더 있을 거잖아. 그리고, 나도 이곳에서 뼈를 묻을 생각 따윈 없단 말이야. 언젠가 다시 만나면 그때는...." "물론, 내가 워낙 출중하니까 한국에서 최초의 여자대통령이 되어 세계의 이목을 받을 수도 있겠지(여기서 진은 쿡쿡 대며 웃었다) 그러면 쉽게 날 찾을 수는 있겠지만 난 평범해 지고 싶어. 다시 만 나지 못할지도 몰라, 니콜라스." "난 다시 널 찾을 거야. 너에게, 저.....부끄럽지 않게 사회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될 거야. 그리고 이제 오랫동안 볼 수 없게 될지 모르는데. 널 좋아해 진. 너에게 어울려 보려고, 배우려고 많이 노력 했단 말이야. 난 럭비팀의 캡틴이라고?! 학교 선생도 내게 좋은 대학 에 가서 성공할 수 있을 거라고도 했고." "난 아무것도 약속할 수 없어, 니콜라스." "괜찮아. 나중 일은 누구도 모르는 거잖아......키스해도 돼? 진?" ".........그래." 진은 니콜라스의 키스를 받으며, 잔잔한 흥분이 이는 것을 느꼈다. 어리기는 하지만, 그래서 더욱 솔직하고 급해진 니콜라스의 욕망을 감지하며 이제까지 다가오던 다른 치들에게서 느꼈던 불쾌감과 다르다는 점을 인정했다. '이 앤, 정말 날 좋아해.' 허리에 느껴지던 그의 손이 얇은 스웨터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느 끼자 진은 그에게서 물러났다. "니콜라스, 난 미성년자야." 부루퉁해진 그는, "나도 미성년이야. 그게 뭐 어쨌다고?" "그러니까 우리가 에. 그....하면, 불장난이 되는 거야, 니콜라스." 진은 니콜라스의 볼을 토닥거리며 달래듯 말하고는 귀가를 명령(?) 했다. 니콜라스는 자신보다 몸집이 훨씬 작은 진을 내려다보며 힘으로나마 가져버릴까 했지만 금새 포기했다. 진을 힘으로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길. 그래 쪼그만 여자 애 주제에 힘도 나보다 세지. 도대체 못하는 게 뭐냐.' 그렇다고 거리의 건달들처럼 그녀에게 얻어맞고 나가떨어지고는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순순히 물러났다. "내일 또 올 거야, 진." "학교 안가냐?" "아빠를 협박해서라도.....안되면 수업이 끝나는 대로 곧 올 거야. 집에 있을 거지?" "그래. 샘의 연락이 올 때까지는 집에서 죽치고 휴가를 보낼 거야." 니콜라스는 배웅하는 그녀에게 재빨리 도둑키스를 하고는 도망갔다. 문을 닫으며 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참 내, 저 녀석 등살에, 다시 돌아오게 될지도 모르겠네.' -그런 진의 생각은 전혀 다른 형태지만 나중에, 실현되었다.- 그 후 몇 일 동안 집에서 뒹구는 진의 옆에 니콜라스 역시 죽치고 있었다. 니콜라스는 진의 곁에서 숙제를 하고, 음악을 듣고, 조르고 졸라 그녀에게 키스하고는 했지만 끝내 유혹하는데 실패해서 그녀를 눕히 지는(?) 못했다. 따뜻한 햇살이 전 뉴욕을 내리 비치던 어느 날, 샘은 실패한 이민으로 돈이 궁하던 어느 한국인에게서, 이민생활에 넉넉할 만큼의 큰돈을 주고 차후 진의 신상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각서와 비밀엄수까지 조건으로 달아 호적을 사서 국적을 만들고 진 이 거주할 한국의 집이나 학교까지 수소문해서 그녀에게 넘겨주었다. "진. 찾아갈 거야! 꼭 찾아갈 거야! 나 잊으면 안 돼?!!" 낯뜨거운-공항에서 그렇게 소리치다니.- 니콜라스의 외침을 뒤 로하고 진은, 샘이 준비해 준 신분증과 여권과 의뢰 후에도 넉넉히 남은 돈이 든 통장 등을 가지고, 난생 처음 비행기를 타고 데이먼을 피해 한국으로 떠났다....... 4. 골드 드래곤 투비와이즈의 사정. 골드 드래곤 투비와이즈는 자신의 레어 앞 널찍한 앞마당에서 몸 부림을 치며 포효하고 있었다. "우-와-악--!! 이 꼬맹이가 도대체 어딜 간 거야!! 도대체 어딜 갔 느냐고오~!! 도대체...!!!" 그리고 지난 7년 가까운 시간 동안 알고 있는 모든 투시마법과 추 적마법을 동원하여 감히 위대한 자신을 농락하고 있는 괘씸하기 짝 이 없는 한 인간을 찾고 있었다......그리고 여전히 찾아낼 실마리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가깝게는 자신의 영역인 그 넓은 메칸타나 산맥을 시작으로 가까운 인간들의 도시부터 저 멀리 인간들의 나라와 허허벌판, 심지어 몬 스터와 드워프와 엘프들의 땅까지도 마법을 이용해서, 또 때론 직접 몸으로 뛰며 샅샅이 뒤지고 있는데 고작.......그 미천한 인간 꼬맹이 하나를 찾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난 끝났어!! 안돼에~~! 고것을 찾기만 하면!!!" 체면상 다른 드래곤들에게 도움을 청하지도 못하고, 우습다고 생 각한 일에 혼자 힘으로 아무래도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자 투비와이즈는 드래곤답지 않게 절망스런 몸부림을 치며 혼자서 발 광을 하고 있었다. 실수로 마계에 떨어진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사실이 정말이라면 또 엄청 큰일이고, 투비와이즈에게는 남은 희망마저 사 라지는 일이기에 애써 부인하고 있었다. ".......엉엉엉......멍청한 꼬마야. 아니 나 드래곤 투비와이즈를 감히 물 먹이고(X)..아니 절망케 하고 있으니 대단한 꼬마야. 죽이지 않을... .......때리지 않을 테니 제발 나타나다오. 제발......그 미천한 것이! 정말!!! 찾아내기만 해봐라!!" 혼자서 애원을 했다가 화를 냈다가 하며 마구잡이로 드래곤 피어와 드래곤 아이를 쓰고 브래스를 홧김에 날리고 하는 탓에 요 몇 년간 메칸타나 산맥은 쥐 죽은 듯 고요했고 사정을 모르는 영역 밖 세상 에서는, 드래곤 사회에서마저도, 드디어 별난 짓을 많이 하던 드래곤 투비와이즈가 미쳐가고 있다는 소문이 감돌고 있었다. "위대한 드래곤의 신이며 창조신이신 카-여.....어찌하여 저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나이까. 으어어어어어어~~~용언으로 약속하는 게 아니었는데......어어어어어~~미치겠네 정말!!! 으아아아아아아~~!!" 대자연은 묵묵히 그런 모습을(....꼴을) 자신의 한 부분으로 담고 아무 렇지도 않은 듯, 그 날도 그렇게 황혼이 지고 있었다. [5] 5. 평범한 일상, 쌍둥이들의 친구 서울은 초여름에 접어들고 있었다. 진은 자신의 나이와 비슷한 또래의 학년이 되기 위해 얼마간 열심 히 공부해서 중학 검정고시를 치르고 고교를 선택했다. -참고로 진은 학과공부를 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이제껏 실전에(?) 필요한 지식 습득과는 달라서 꽤 고전해야 했다. 혼자서 배운 한국어는 정확한 의사소통에 약간의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시간을 내서 부지런히 아파트 주변을 다니며 귀동냥을 해야했다. 한국의 거리는 좁고 복잡했다. 샘이 건네 준 쪽지의 주소를 찾아 서울에 왔을 때 처음 느꼈던 것 이 바로 그것이었다. 놀랍게도 큰 거리의 뒷골목은 뉴욕의 뒷골목과 달랐다. 그 곳은 활기 차고 비좁은 거리에 사람들이 넘쳐났다. 지나치는 모 든 사람이 대부분 검은머리와 검은 눈동자라는 것과, 건물 전체가 약간씩 낮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그다지 뉴욕과 다르지 않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자신과 비슷한 색의 머리카락과 외형에 친근감이 들어서 거부감을 느끼지는 않았지만, 오랜만에 완벽하게 혼자가 되었던 탓에 왠지 예전, 데이먼과 처음 만나 그의 외딴 집에서 살기 시작했던 때로 돌아간 듯 해서........가슴이 가라앉는 듯 했다. 쉽게 외국인 고등학교에 들어갈 수도 있었지만(샘은 그렇게 준비 해 줬었다) 굳이 검정고시를 치르고 서울의 한, 남녀공학을 택한 것 은 서울 생활을 하게 된지 몇 주되지 않았을 때 알게 된, 한 남매들 의 영향이 컸다. 상희와 상민 남매는 이란성 쌍둥이였다. 진은 아파트 근처 작은 공원에 들러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아이들의 혀 짧은 말들과(그들의 언어는 이해하기 쉬웠다) 아이들의 어머니 인 듯한 사람들의, 수다에 가까운 이야기들을 엿듣고(?) 있었는데 아주 강렬한 시선을 느끼고 원인을 추적하다 자신을 주시하고 있던 여자아이와 눈이 마주쳤는데 그 애가 바로 상희였다. '친구가 아쉬운 쪽이 먼저, 손을 내밀어야겠지?' 많은 사람들이 진을 돌아보고는 했었지만 가까이 다가와 눈동자 색 을 확인하면, 사람을 잘못 본 듯한 태도로 외면당한 경우를 겪었었 기 때문에....반대로 열렬히 쫓아오는 남자들도 있었지만 당연히 진 은 그들의 접근을 거부했었다. 그렇지만 상희의 경우엔, 비슷한 또래의 여자아이로 보였으므로 호 감이 생기고 해서-어쩌면 수줍은 탓에 말을 걸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모처럼 관대한 마음이 들어 그녀에게 다가섰다. "혼자 세요?" 넋 나간 표정이 자취를 감추고 금새 경계 어린 얼굴이 되었다. 멀뚱히 쳐다보는 전형적인 동양인의 외모를 한 그녀에게 진은 약간 어색한 발음으로 다시 말을 건네는 성의를 보였다. "옆에 앉아도 될까요?" 그리고 진은 드물게-정말 드물게도- 깜짝 놀랐다! 그녀가.....냅다 튀었기 때문이다. '아니 이럴 수가. 두 번이나 먼저 말을 걸어 주었는데.....내가 그렇게 괴상하게 생겼나?'(말투가 이상했어, 임마-작가 말) 그 여자 애는 벌써 저만큼 뛰어가 버린 후였다. 왠지, 허탈해진 진은 한국식 식단을 몰라서-하지도 못하거니와- 빵과 인스턴트 음식 등을 사 담은 비닐 봉투를 집어 들고는 터벅 거리며 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몇 일 지나지 않아서 진이 산책 겸 지나치던 그 공원에서 그 애는, 비슷한 얼굴을 한 남 자 아이와 서성이다가 정말, 안쓰러울 정도의 용기를 내며 진에게 말을 걸어왔다. '한국은, 아니 한국인은 정말 묘하다니까.' * "오빠- 오빠야!" 상민은 여동생이 하나밖에 없는 단칸방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면서 소리쳐 부르자 그만 놀라서 만들고 있던 반죽 그릇에 그대로 손목 채 집어넣을 뻔했다. "깜짝이야." 커다란 양판에 역시 커다란 주걱을 휘휘 저으며 상민이 대꾸했다. "반죽하고 있었어?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어디 들렀다 왔어?" "어......응. 챙기는 것 도와 줄게. 엄마가 먼저 와 계시겠다." 그들은 반죽이 든 주전자와 시럽과 버터 등 와플을 만드는데 필요 한 조리기구들을 들고 집 근처에 세워 둔 미니이동마차로 갔다. "날씨가 더워지기 시작하니까 잘 안 팔려. 업종을 바꿔야 하지 않을 까?" "바꿀 만한 게 있냐? 아이스크림은 간수하기가 더 힘들어. 한철 장사만 할 것도 아닌데, 방학이 되면 생각해 볼 문제야. 어차피 낮 엔 일도 못하잖아." 오늘은 학교가 일찍 끝나서 두 사람 모두 일찌감치 엄마를 돕기 위 해 반죽까지 해서 집을 나설 수 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엔 학원이 끝나는 저녁이나 밤이 되어서야 귀가를 했기 때문에 주말이 아닌 날엔 낮까지 파출부 일을 하고 저녁 이후 늦게까지 수레 수준의 이동 마차를 가지고 와플을 파는 엄마를 그다지 많이 돕지 못했다. "그 여자 앤 정말 굉장히 예쁘더라~ 난 검은머리가 그렇게 이쁜지 이제까지 몰랐어. 백설공주가 왜 검은 머리로 설정되었는지 알겠더라니까. 그리고 눈동자가 정말 파랬어. 너무너무 예쁘더라. 그냥 파란색이 아니고, 남청색! 그래, 남청색이 었어." "그런데 왜 도망갔는데?" "뭐 조금, 외국인은 가끔 봤어도.....어쩐지, 무서운 느낌이 들잖아. 게다가 이상한 어투로 말을 걸 길래......" "무서워?" "아니, 에.....모르겠다. 이런 곳에 있을 것 같지 않은 사람이었어. 그 리고, 너무 당당해 보이니까. 예전....생각이 났던가 봐." 상민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은 사이 좋은 오누이지만. 어릴 때도 그랬지만, 한동안 그들은 사이가 무척 좋지 않았다. 중학교를 다니던 3년 간은 상희에게도 상 민에게도 엄마에게도 대단히 힘든 시기였다. 상민은 아버지가 떠오르자 잊어버릴 요량으로 그다지 마음에 없던 말을 꺼냈다. "우리나라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았나 보지. 친구가 될 수도 있잖겠어? 혼혈이라는 점 정도로 색안경을 끼고 볼 필욘 없잖아. 우리 경우에 비하면 뭐, 그 애도 친구가 필요한지도 모르고....말이지." "그래, 어쩌면 우리와 친구가 될 수 있을지도 몰라." 그들은 다시 침묵했다. 엄마는 장사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침에 서로 약속했던 그 자리로, 약간 피곤해 하는 얼굴을 하고 찾아왔다. 여자 애들은 함께 몰려다니고 어울릴 동성 친구가 꼭 필요한 법인 가 보다. 상희도 다르지 않았는지 하루 이틀을 꼬박 고민하더니 그때 말했던 그 여자아이에게 말을 걸 용기를 드디어 내었고, 상민 을 응원군으로 이끌고 그녀를 만났던 공원에서 시간이 나는 틈틈이 기웃대더니 기회를 포착하자 과감히(하지만 용기를 내는 티를 팍팍 풍기며) 말을 던졌다. 상희가 꺼낸 첫 문장은- ".....와...와플 좋아해?"였다. 그렇게 그들은 만났다. "진. 10살도 안된 꼬마에게 그렇게 정중하게 높임말을 쓸 필요는 없 어. 애도 놀라잖아. 으하하하. 너무 웃기다." 상희는 아무래도 참기 힘든지 배를 잡고 소리내어 웃기까지 했다. 상희 남매와 진은 대학가 근처에서 와플을 팔고 있었다. 일요일쯤은 쉬시라고 엄마를 강제로 집에 남겨놓고 요즘 매일 그들과 함께 다 니고 있는 진과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던 것이다. 학교 내는 한산하겠지만 밖은 본교 학생들 외의 사람들로 충분히 붐볐고, 괜찮은 자리를 잡아서 오늘은 수입을 기대할 만 했다. "정말.....한국말은 어려워. 높임말을 어느 정도로 써야하는지, 대상도 단순히 나이만을 추측해선 판단하기 힘든 경우도 많고......" 진은 웃는 상희에게 변명 비슷하게 말을 했다. 진은 와플을 만들어 파는 그들을 한 걸음 떨어진 곳에 대충 쭈그리 고 앉아 구경하고 있었다. 한국인의 특성 중, 니콜라스에게 설명했을 때 대단히 중요한 것을 빠뜨렸다는 것을 그들 남매를 보고 알았다. 그들은 부지런했다. 대단히, 대단히 부지런했다. 그리고 그들의 어머 니는 그들보다 더 부지런했다. 진이 감탄하자 상희는 피식 웃으며 다들 그 정도의 생활은 한다고 하는 것을 보니, 그들 가족만의 특 성이 아님은 분명하다. '나도 꽤 부지런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아무리 친구로 지내자는 그들의 제의를 받아 들였다고는 해도 진의 성격상 밀착취재 하듯 그들과 함께 할 필요는 느끼지 않았지만 '친구'란 개념마저 그들은 참 가지가지의 의미를 두는 듯 했다. 그들이 원하는 '친구'의 개념은 단순히 어울리는 수준이 아님을 쉽 게 알아차렸고 진은 자신에게 무언가 원하던 사람들에게 해 줄 수 있는 대부분의 것을 제공하며 살았던 생활 태도에 따라, 기꺼이 이 남매의 '친구' 성향을 흉내내 보려하고 있었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한국에 왔으니, 한국법을 따라야지.' "도와 줄까?" "뭐. 둘이서도 충분한걸? 그냥 있어 진. 빨리 다 팔고 우리 놀러가자." "그럼 도와주는 게 낫겠네." 그렇게 말한 진은 그들의 작은 이동상점에 가까이 붙어 앉더니 다른 도움이 아니라 행인들의 이목을 끌기 위한 공연을 시작했다. Eagles의 Hotel California를 제법 큰 목소리로 부르기 시작한 것이 다. 사막의 까아만 고속도로를 달리는 내 머리 결에 바람이 스치고 은은한 콜리타스 냄새가 대기에 진동하는군 저 멀리 앞에 가물거리는 불빛이 보이는군 머리가 무거워지는 듯하고 시야가 점점 흐려지고 있어 오늘밤 묵을 곳을 찾아봐야겠어 문가에 그녀가 서 있었어 미션풍의 종이 울리는 소리를 듣고 난 혼자 이렇게 생각했어 '여긴 천국이던가 아니면 지옥일거야' 그리고 나서 그녀가 촛불을 켜고 내게 길을 인도해줬어 복도 아래에서 소리가 들렸는데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어 캘리포니아 호텔에 잘 오셨어요 여기는 아름답고 묵을 방도 많이 있지요 연중 어느 때고 여기서 방을 구할 수 있어요 그녀는 티파니 같은 비싼 옷에 쏠려 있었고 벤츠를 몰고 다녔어 잘생긴 남자 친구들이 많이 있었고 그녀는 그들은 친구라 불렀지 그들은 마당에서 춤을 추었고 달콤한 여름의 땀에 흠뻑 젖었어 어떤 춤을 기억하고 싶지만 잊고 싶은 춤도 있었지 지배인을 불러서 와인을 한잔 갖다 달라고 하자 그가 이렇게 말했어 "우린 1969년 이래 그런 술은 팔지 않아요" 그 목소리는 아직도 저 멀리서 날 부르고 있는 것 같고 그 소리에 한밤중에 깨어나기도 하지 그들이 이렇게 말하는 걸 듣기 위해 캘리포니아 호텔에 잘 오셨어요 이곳은 아름다운 곳이죠 사람들은 이곳에서 인생을 즐기고 있어요 놀랍지 않아요? 핑계거리 대고 이리 놀러 오세요 천장에 펼쳐진 거울, 그리고 얼음이 얹혀진 핑크빛 샴페인. 그녀는 이렇게 말했어 '이곳에서 우린 모두 우리가 만들어낸 도구의 노예가 되어 버리죠' 그리고 주 응접실에서 사람들은 만찬을 위해 모이고 나이프로 음식을 자르지, 하지만 그들은 짐승을 죽이진 못해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건 입구를 향해 뛰었던 거야 난 내가 원래 있던 곳으로 다시 돌아갈 길을 찾아야 했지 '진정해요'라고 야간 경비원이 말했어 우린 손님을 받기만 할 수 있어요 당신은 언제든지 방을 뺄 수는 있지만 떠날 수는 없을 걸요. "정말 노래 잘한다. 원어로 직접 들으니까 정말, 대단하다. 그렇지 오빠?" "...........그래..." 효과는 탁월했다. 젊은이들이 많던 주위엔 곧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그들을 에워쌌다. "와-! 아가씨. 한 곡 더 불러봐요. 라이브 까페에서 듣는 것 보다 더 실감나네." 기대에 찬 구경꾼들에게-진도 조금 놀랐다. 이곳은 거리공연이 생활 화되지 않은 건가?-진은, "팁은 와플로 받겠습니다. 안 사 드시는 분은 귀 막으세요."하고 조금 뜸을 들인 후 다시 4 Non Blondes 의 What'up을 부르기 시작했다. 상민과 상희는 정신 없이 와플을 만들기 시작했고 속도가 늦어서 차례를 많이 기다려야 할 듯 하자 몇몇은 노래 값으로 아예 선금을 내고 편히 자리까지 잡았다. 그 후로도 몇 곡의 팝을 더 부르고-와플이 얼른 만들어지지 않아서 노래 부르는 중간, 중간 멘트까지 섞어가며 매출을 도왔다. "이봐요. 언제 또 오나요?" ".................." "언제 또 오는데요?!" 한차례 공연 후 와플 재료가 떨어져 자리를 파하고자 하자 완전히 팬이 된 듯한 학생 몇이 아우성을 쳤다. 진이 상희들을 돌아보니까 의외로 상민이 나서서 가게 선전을 한다. "매일 저녁엔 여기 옵니다. 좀 더 자리가 넓은 곳을 잡으면 옮길지 도 모르지만요. 주말엔 오후 내내 있구요!" 돌아오는 길에 상희는 약간 진이 마음에 걸린 듯 상민에게 말했다. "오빠, 진에게 계속 노래를 부탁할 순 없잖아. 오늘만 해도 너무 미안한데....." "괜찮아 상희야. 나도 재미 있었는 걸? 별로 할 일도 없는데. 특별 한 일 없으면 계속 도와 줄게." "저기, 와플 판 돈 말고도 수입이.........여기....." 상민은 구분해 두었던 진의 수입을 내밀었다. 의외로 남자에게서 거리감을 받지 못했던 진은 상민의 경우가 매우 특이한 경험이었다. 상희와 달리 그는 깍듯하기까지 하고, 진에게 수작(?) 비슷한 것도 걸지 않았다. '어렵다니까. 도대체 파악이 안 되는 남매야." "상민아, 장사는 너희들이 했잖아. 난 돈이 별로 필요 없어. 그냥 가 져. 굳이 구분해서 주겠다면, 뭐.....나도 부담스러우니 노래는 앞으로 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 "...................." 진의 의사를 충분히 이해했는지 상민은 얼굴이 조금 붉어져서 고맙 다고 얘기했다. 그들은 늦지 않은 오후시간을 모처럼 많이 확보해서, 이것저것 미뤄 뒀던 일을 했고 서점에 들러 책을 고르거나 PC방에 가서 게임과 인 터넷을 진에게 가르쳐 주기도 했다. 진은 그 사소한 놀이들이 즐겁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름방학이 시작되었고, 진은 방학이 끝나고 새학기가 시작되어 그 들의 학교에 편입을 하기까지 많은 시간을 쌍둥이들과 함께 보냈다. 스스로 원해서, 자기 자신을 위해서 시작하게 된 생활은 그동안 진 이 미처 누리지 못했던 자잘한 경험들을 가능케 했고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객관적이 아닌, 주관적인 시각으로 삶을 대하는 방법을 터득 하게 되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런 생활을 당연하게 하는 것이 이제껏 진에 게는 허락되지 않았으니 그녀에겐 '평범'으로 가는 가장 필수적인 관문이기도 했다. 한국을 알고 싶어서 이곳을 택했고 평범한 생활을 하기 위해 친구 만들기를 시도하면서 그녀는 자연스럽게 긴장이 풀리고 냉철하기만 했던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그에 따라... 얼어붙어 있던 마음이 순화되고 있음을 .........은연중 깨닫고 있었다. 쌍둥이들의 친구 * 상민은 상희가 그 혼혈 여자아이에게 말을 걸었을 때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 되었었다. 동생의 말대로 너무 예뻤기 때문이다. 행동과 말에 절도가 있고 차가운 느낌이 들 정도로 표정에 변화가 없었지만 자신도 다른 사춘기 소년들과 다르지 않았기 때문에 외모 에 영향을 받은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리고.......의외로 성격도 좋았다. 그 애는 이민자 부모와 함께 거의 미국생활을 해 오다가 그곳의 생 활에 염증을 느껴 한국으로 혼자 와 있다고 했다. 생활 방식의 차이와 대중적인 가치관의 차이로 쉽게 한국사회에 자 리 하기 힘든 점을 감안하여-우리의 조심스런 호의를 받아들여-우리 를 통해 배우고자 한다고 처음부터 확실한 교제 목적을 밝혔다. 상민은 그녀가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상희도, 겪어 보지 못한 타입의 친구이지만 오히려 그런 솔직하고 확실한 의사표현에 단숨에 마음의 거리를 좁힌 듯 보였다. 상민이도 소극적이기만 하던 친구 관계에 그 애를 대할 때만큼은 상희처럼 허물없게 다가서고 싶었지만. 그들에겐 병이 있다. 그것이 우리나라 보다 의식의 벽이 낮은 외국생활을 한, 그 애의 친 구 선택에, 인간 관계에 별다른 상관이 없을 지라도 상민이 에게는 상관이 있었다. 그래서 항상 지켜보기만 했다. 동생과 함께 그 애와 어울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만큼의 감정적인 만족을 얻을 수 있었으니까. 그 애는 놀라웠다! 거리에서 그들을 위해 처음, 공연 수준이었던 노래를 불러주었을 때 상민이는 그 듣기 좋은 노랫소리에 희열까지 느꼈다. 막힌 감정의 찌꺼기가 터져 나가는 듯한. 진은 가치관을 그대로 행동으로 옮기는 타입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머릿속에 든 생각을 그대로 밖으로 표현하지는 않는 다. 그렇게 했다가는 얼마나 아수라장이 되겠는가. 그런데 진은 단순한 방법이지만 자신의 사고방식을 거짓없이 생활 에 대입시키며 사는 것 같았다. 쉽게 말해서 우리들이 흔히 얘기하는 표현으로 '내숭,가식'이 없었다. -자기 계산이 없었다. 진은 당당히 큰 소리로 노래를 불러(가수지망생도 아닌데)사람들을 모으는 것을 태연히 해내고, 몰려든 사람들에게 당혹 감을 느끼지도 않았다. 진은 카리스마가 있었다. 나중에 상희는 문화적인 차이에서 오는 행동이니 특별한 것이 아니 지 않을까 했지만 상민은 그런 것을 염두 하면서도 진의 내면을 약 간 본 것 같은 기분이 사라지지 않았다. 진은, 상희가 했던 처음 감상 말을 상민에게도 떠오르게 했다. '이곳에 있을 사람 같지 않다'란 말을. * 상희는 요즘 너무 기분이 좋았다. 중학교를 다니면서 갑자기 그들에게 닥친 그 생각하기 싫은 일들 탓에 학교에서도 왕따를 경험해야 했던 그녀로서는, 고등학생이 된 후에도 편견과 호기심의 눈초리를 피할 수 없었던 학교 내에서 결코 가질 수 없었던 '친구'를 얻었기 때문이다. 상민도 진을 좋아하는 듯 했다. 하지만 뭐, 그녀의 오빠는 언제부터 인가 대단히 굳건한 마음의 성벽을 쌓고 있으니.....게다가 그렇게 이 쁜 여자애에게 어떤 남자가 기죽지 않고 대할 수 있겠는가!-여기서 상희는 잠시 상민을 위해 묵념(?)을 했다.- 진은 그들을 위해서 거의 날마다 와플 파는 것을 도와 주었고 그 덕에 쌍둥이들의 엄마는 밤늦게까지 일하지 않고 쉬실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학가 거리에서 소문이 금방 나더니 그다지 크 지는 않지만 가게 밖에 테이블이 몇 개 있는 원두커피 전문점에서 그들에게 그곳 야외에서 와플을 팔아도 좋다고 친히 와서 교섭까지 해 왔다! 진은 좋은 생각이라고 했다. 여러 가지로 편한 방법이고 이왕 할거 돈을 더 벌면 좋지 않느냐며 그들에게 전혀, 어떤 대가도 받지 않고 여전히 기분 내키는 대로 쌍둥이의 곁에서 노래를 불렀다. 그러면서 '야-아, 난 내가 가수 소질이 있는지 몰랐다. 뉴욕의 친구 가 알면 괴물이라고 할거야'라는 그들 남매로선 이해할 수 없는 말 을 했다. 커피숖은 진을 기다리는 몇몇의 단골을 확보해서 좋았고 상희와 상 민은 두 배의 가격으로 와플을 팔았다. 진은 노래만 듣고, 혹은 그녀의 외모를 구경(?)만 하며 와플을 사 지 않는 얌체들이 많아지지 않게 가끔 그냥 가만히 앉아 있거나 아무것도 안 들리는 듯 엎드려서 자는 시늉을 했고 그러면 또 잘 팔리고는 했다. 정말.......수완까지 갖춘 친구가 아닌가. 상희는 진이 넘 고마웠다. 그들에겐 돈이 절실했으니까. * 가을학기가 시작되었다. 개학 첫날 진은 난생 처음 교복이라는 것을 입고 남매를 따라 학교 에 갔다. 수업이 시작되는 다음날부터 나와도 좋다는 학교측의 허락이 있었지 만 다니게 될 학교를 천천히 구경도 할 겸 상희와 상민을 따라 등교 를 했다. 약속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던 상희는 진을 보자 뛰어와 냉큼 팔짱을 꼈다. "헤헤......" 진도 웃었다. 지켜보고 있던 상민은, 처음 어울리기 시작했던 때 보다 진의 웃음을 훨씬 자주 본다는 생각을 하면서 뒤를 따라 버스에 올랐다. [6] 6.위기 '뭔가 이상해' 진은 상희와 함께 학교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며 생각했다. 아르바이트를 도와주는 진에게 달리 보답할 만한 것을 찾지 못해서 미안해하던 상민, 상희 남매가 진의 도시락만큼은 날마다 챙겨와 주 겠다고 했고, 사먹는 밥에 입맛을 잃고 있던 형편이라 기꺼이 제의 를 받아들여 진은 쌍둥이들과 항상 점심을 함께 먹었다. 셋이 모두 다른 반에 편성되어서 얼굴 볼 수 있는 시간이 드물었으 니 점심시간엔 모두 모여 일상스런 대화를 나누곤 했는데 그것은 개학 후 단 몇 일에 불과했고 웬일인지 하교 후 시간외에는 상민의 얼굴을 보는 경우가 갈수록 드물어지고 있었다. 남학생이니까 나름대로 어울리는 친구가 있으리란 생각에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짐작가지 않는 태도로 불안해하는 상희 덕에 진도 덩달아 무슨 일이 있는 건가 하고 궁금해졌다. 학교생활은 단조로웠다. 진은 보기 드문 외모에 혼혈 이민자란 딱지가 원인이 되어 처음, 지 나치다 할 만큼 소란스런 환영과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었다. 그러나 학생들은 진이 떠들썩한 관심에 이도 저도 아닌(좋은 것도 싫은 것도 아닌) 뚜렷하다할 만한 반응을 보이지 않자 시들해 졌는 지, 조용한 속삭임으로만 진을 주시하는 듯했다. 그러던 것이, 그녀가 상민과 안면이 있으며 상희와도 곧잘 어울리는 것을 목격하자 호감 어린 속삭임들이 진이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 이질적인 것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것은 지금 앉아 있는 학교 내 식당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반찬이 입에 맞아?" "맛있는데?" "식성이 틀리지 않을까 해서 싫어할 줄 알았는데, 잘먹네?" "음. 먹는걸 가릴 형편이 아니었는걸. 지금도 그렇고 말이야." 진은 쓰레기통을 뒤지던 생활이 떠올랐다. 그때의 교훈으로 먹는 것 에 까다로워서는 이익 될 것이 없다는 것을 아주 어릴 때 이미 깨 달았었다. "상민은 오늘도 따로 먹나 봐?" ".......오빠는..........." "왜?"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진, 얼른 먹고 오빠를 찾아보자. 어쩌면 진 이 너무 예쁘니까 오빠 반 남자들이 우리에게 못 오게 하는 건 줄 도 몰라." 농담처럼 말하고 상희는 곧 먹던 도시락을 덮어 버렸다. 쌍둥이들은 다른 형제와는 조금 다르다. 진도 그것을 알았다. 그들은 같은 피를 나눈 보통의 형제들 보다 더 돈독하고 친밀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이들은 뭔가 이상해.' 사소한 일이지만. 하나 늘은 도시락도 언제나 상희의 가방에 들어 있었고 와플을 팔러 갈 때도 무거운 반죽 주전자는 상희가 들었다. 일하다 쉬는 것도 상민이 먼저였고, 그런 꼬집어 말하기 힘든 일은 레이디퍼스트란 의미의 거꾸로 된 행동이었기 때문에 진은 의아 했 었다. 등교 전에는 같은 날 태어나서도 꼬박꼬박 오빠라고 존칭하는 상희 를 보고 한국의 예절 탓에 웃어른(?)인 상민에게 상희가 의젓하게도 배려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다른 동급생들과 선생들을 대하고는 그것이 잘못된 이해가 아니었나 했기 때문이다. '그저, 이들 형제는 특히 서로를. 아니 상희는 오빠를 끔찍이 위하기 때문에....?' '정보가 부족하군.' 진은 피식 웃으며 꿋꿋이 도시락을 끝까지 비우고 기다리고 있던 상희를 따라 일어났다. 기분 탓인지 상희는 오늘따라 더 불안했다. 그래서 손을 씻기 위해 화장실에 들르는 진의 뒤통수에 대고 조급 하게 먼저 상민을 찾아가 보겠다고 말하고는 밖으로 뛰어 나갔다. 진이 학교의 조악한(!) 화장실에서 약간 찌푸리며 손을 씻고 있는데 같은 반으로 기억하는 한 여자아이가 들어오더니 말을 걸어왔다. "저............" "? 내게 무슨 용건이 있나요?" 얼굴이 약간 상기된 여자아이는, "말 높이지 않아도 돼....요. 아, 나만 아니라 모두, 아니 동급생들에 게는 말을 높이지 않아도 화낼 사람은 없을 거야. 난- 저, 수경. 이수경이라고 하는데....." "좋아, 수경. 높임말은 아직도 좀 어려워서 말이야. 몇 번 실수를 해 서 예의 상 조심하려던 것이고. 내 이름은 최진이야." 진이 선뜻 웃으며 말하자 수경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던 여자 애는 용기를 내길 잘했다는 생각을 하고는 마주 웃었다. "이름은 모두 알고 있어. 왠지 넌 넘 멋져서....다른 애들도 친해지고 싶어하지만.....상희 때문에........" "상희? 상희가 왜?" "그, 그것은." "그러고 보니, 왜 상희를 아니 상희나 상민이를 멀리하는 거지?" "소문..... 때문에 그래." "소문?" "그 애들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고. 안 좋은 소문이 있어서, 모두 꺼 려해." "무슨 소문이지?" 한국인은 이상하다. 이곳도 역시 미국의 청소년들과 크게 다를 바 없지만 설사 악감정을 가지고 있다해도 이곳처럼 뱅뱅 돌려서 은근 한 위화감을 주는 것을 그다지 보지 못했기 때문에(미국에도 따돌 림은 있지만.) 진은 약간 불편한 마음이 되었다. 싫으면 싫은 것이고, 싫은 부분이 있으면 당사자 앞에서-그것이 모 욕이 될지언정- 떳떳하게 자기 의사를 밝혀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그들은 뒤에서 모의한다는 느낌을 주는 탓에......그런 점은 나쁘지만 그럼에도 다른 면에서는 관계된 사람들에게 흉을 보는 일 에 해당하는 일종의 정보제공을 잘, 하지 않으려 했다. 어떤 계기가 없이는 상희나 상민에게 이유를 제대로 듣긴 힘든 것 같고 기회가 왔으니 진은 수경이란 이 아이에게 궁금하던 것을 묻 기로 했다. "그 애들은 병이 있대." "병?" '뭐야. 병이 있는 것이 이유야?' 진은 기가 막혔다. 그리고 놀랐다. "아픈 애들 같지는 않았는데, 병이라고?" "잘 몰라." 뭔가 아는 것 같았지만 자기 입으로 말하기 힘든 듯 수경이는 망설 이며 말을 이었다. "에이즈라고도 하고........" "에이즈?!" 진은 또 놀랐다. "사실이 아닐 거야. 그럴 리는 없는데?" "정확한 것은 모르겠어. 소문이란 원래 부풀려지는 것이니까. 그것 보다. 상희의 쌍둥이 오빠 쪽이 요즘 학교 짱에게 찍혔다고 들었어." "짱?" "에- 잘 모르지? 우리학교에서 제일 잘 싸우는 남자애야. 2학년인데 좀, 무서워. 나쁜 애들과 어울리고. 저, 돈도 뺏고 그래......상민이가 몇 번 그들에게 불려 가는 것을 봤거든." ".................." "아까도. 진, 그 애들이 나쁜 애들은 아니지만. 아니 난 좀 안됐다는 생각도 해. 하지만 함께 어울리다간 불똥이 튀길지도 몰라. 그래서 난, 네가 모르고 당하지나 않을까 해서......." "아까 상민이 불려 가는 것을 봤어?" "응. 학교 뒤에 산이 바로 붙어 있잖아. 거긴 산새가 낮지만 곧잘 사고가 나. 그러니 너도.........." "수경아!" "......에?" "말해줘서 고마워. 학교 뒤라고 했지?" "으응." -진은 뛰었다. * "이 새끼가?!" "오빠 때리지 마세요, 선배!!" 뒤늦게 알고 달려온 상희는 소리를 지르며 남철의 앞을 가로막았다. "어쭈구리. 야~ 느네 들은 남매끼리도 연애 하냐? 정말 웃기네." 남철의 주위에 모여 있던 패들은 모두 그의 말에 킥킥대었다. "돌아가, 상희야. 어서!" 상민은 당황했다. 이들은 여자 애라고 봐주는 그런 애들이 아니다. 눈에 띄지 않는 태도로 조심스런 학교생활을 하기 위해 그렇게 노 력 했는데, 재수 없게도 제일 경계해야 할 인물에게 찍혀버렸다. "야-아. 누가 니 오라버니 잡아죽인대? 내가 똑똑히 봤단 말이다. XX대학 앞 커피숖에서 요즘 그 소문난 미인 여자 애랑 장사를 하 는 것을 말이야. 돈 좀 벌었을 테니 가난한 우리들에게 적선 좀 하 라는 데 왜 그렇게 뻣대냐?!" 남철과 함께 건들거리던 한 아이가 말했다. "......................" 상희는 절망했다. '그 돈은, 그 돈은.....' "오빠 줘 버려. 돈은 또 벌면 되잖아?!" "이미 줬어. 그것도 여러 번...... " 억울하고 분하고, 약한 자신 때문에 생길지 모를 일이 두렵기까지 한 상민은 내뱉듯이 말하고 상희를 밀어냈다. "어서 가. 상희야." "나쁜 자식들아. 그 돈이 무슨 돈인 줄 알어?! 돈이 필요하면 직접 벌어 쓰란 말이야!!" 그들은 상희의 비명 섞인 외침에 얼씨구나 하는 표정으로 주먹을 우두둑대며 다가섰다. "안 돼!!" 상민은 소리쳤지만, '누구에게? 누구에게 도움을....?!' 도움을 청해 볼만한 사람마저 주위엔 없었다. 패들 중 하나가 상민에게 주먹을 날렸지만 상희는 망설임 없이 오 빠를 감쌌다. * "이게 도대체........." 진은 경악했다. 도대체 그녀는 이곳에 와서 이들 남매 덕에 얼마나 자주 놀.라.는. 가! 하지만 이번만큼은 아니었다. 진은 뛰어오다가 그 광경을 보았다. 대여섯 명의 남학생들에게 둘러 쌓여 있던 쌍둥이 중, 상민이 막 그 들이 뻗은 주먹에 맞으려는데 상희가......상민을 몸으로 감싸고 대신 주먹질을 당하는 것을. 진이 근처에 다 달았을 때 상희는 잘못 맞은 어깨 부위에 한 손을 올리고 일그러진 얼굴의 상민을 다른 한 손으로 여전히 감싸 안은 채 상민과 주저앉아 있었다. 주먹질을 한 녀석도 황당했는지 혀를 찼다. "허-참. 정말 기가 막히네. 이 계집애가 어딜 나서는 거야?" "너희들은 우리 소문도 못 들어 봤냐? 우리는, 오빠는 다치면 안돼. 알어?! 오빠는 다치면 안 된단 말이야!!" 아파서 우는지 비참해서 우는지 상희는 눈물을 흘리며 그래도 여전 히 대들었다. 말 없던 남철이 나섰다. "야~아. 눈물어린 형제애다. 하지만 그게 어쨌다고? 내 참. 여자 애 라고 봐 줄 것 같냐? 한번 맛을 봐야겠네." 그가 직접 나서려는지 소매를 걷어붙이고 다가서자 상희는 상민을 더욱 끌어안았다. 진은. 너무 화가 났다. 오랜만에, 아니 저 먼 기억의. 데이먼으로 인해. 증오스런. 폭행의. 한 부분이 떠올라 눈에 핏발이 서는 것 같았다. 그리고.....이해 할 수 없는,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의미를 규정하기 힘든 미묘한 감정이 가슴 한 언저리에서 꿈틀. 형성되는 것을 느꼈 다. '이 기분은 뭐지?' ........하지만 계속 생각해 볼 시간이 없었기에 진은 과감히 앞으로 나섰다. "너! 거기 멈춰." 갑자기. 소나무가 듬성듬성하고 뭔가 타는 듯한 냄새가 떠도는 공기 중에 허스키한 목소리가 파문을 일으키며 그들을 저지했다. * "오~ 저런. 이런 미인께서 직접 행차하시다니, 영광스러워서 몸둘 바를 모르겠네." 잠시 소강상태의 순간이 지나자 남철이 다시 이죽대었다. 패거리들도 눈을 반짝였다. 진은 말없이 상희들을 내려다보았다. "진, 어서 가. 끼어 들어서 좋을 것 없어. 빨리 가!" 상민은 더 늘어난 피해자(?)가 너무 걱정되어서 울고 있는 상희를 떼어내지도 못하고 떨리는 음성으로 말을 했다. "크게 다친 것 같지는 않네.....그럼." "아- 너무 우릴 나쁘게 보지는 말라구, 이쁜 전학생. 그저 우린 약 간의........." 남철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금방 저들의 곁에 서 있던 그녀가 어느 순간 남철이 서 있던 바로 앞에 서서 사용한(?) 주먹을 휘돌리며 손목운동을 하고 있었다. 패거리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그들의 우두머리가 서너 걸음 떨어진 곳에 의식하지 못한 사이 널브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욱- 이 계집애가......." "넌, 꼭 하워우드처럼 말하는구나. 실속이 없다는 것이지." 진은 냉정하게 그녀만이 아는 인물을 인용하여 남철의 인물됨을 평 하고 그에게 다가서더니, 일어서려는 그의 멱살을 잡아끌어 올려서 방어할 틈도 주지 않고 다시 한번 그의 얼굴에 펀치를 먹였다. 남철은 기절했고 망연히 서 있던 다른 아이들에게 얼굴을 돌린 진 은 상대를 바꿔 그들을 손봐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너무 짧게 끝났다. 그들은 정말 어이없게 준비 자세조차 취해 보지 못한 채 단 한방 에 모두 나가 떨어졌다. 아마 모두들 맞은 부위에 깁스를 해야할 지경이 되었을 것이다. 상민은 눈을 크게 뜨고 입까지 벌린 채 그 광경을 보았다. '움직임이, 보. 보이지 않았어!' "자. 그럼, 이제 말해봐." "......................" 쌍둥이와 진은 양호실에 누워 있거나 앉아 있거나 서 있었다. 누워있던 상희는 그들을 올려다보았다. 죄지은 표정으로 서있던 상 민은 그저 고개를 숙였다. 화가 가라앉지 않아서-충분히 패 주지 못 했다-진은 차갑게 느껴지는 목소리로 다시 질문했다. "말할 수 없는 사정이야? ......상황이 이해가 안 돼." 그렇다. 진은 좀 전의 상황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친구가 되자고 한 것은 저쪽이 먼저다. 마음을 터 놓는 문제는 당사 자 마음이지만, 진은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상민을 도와주려는지, 아니면 숨기고 있던 사 실에 내내 미안했던 탓인지. 아무튼 입을 연 것은 상희였다. "진..........." 진은 상희를 돌아보았다. 어서 말해-하는 진의 눈빛에 그녀는, "오빤 혈우병이야. 난 혈우병성 보인자야." "............................." 진은 머리가 띵함을 느꼈다. << 막간에..... >> 먼저. 혈우 가족분들께 이 글의 내용에 혈우병을 소재로 하여 전개 한 점이 실례가 되었다면 정중히 사과 드립니다. 제 소설에서 진이 한국에 와서 겪어야 되는 일은, 자기 성찰. 자신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을 찾게 되는 계기가 되어야 했습니다. 특색 있고 거의 불가능한 일들을 해 온 그녀로서는 잘 표 현 되진 못했지만, 남다른 고초가 있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더욱, 누구나 인생이라는 짊을 짊어지고 세상을 살아가며 같 은 종류의 고난이 아니라도 개개인에게는 누구에게나 타인과 비교 할 수 없는 아픔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인물이 필요했습니 다. ; 그런 것들은 머리로는 알아도 가슴으로 느끼지 않으면 소용없 는 것들이니까요. 그래서 인용한 것이 혈우병입니다. 보통 많은 병들은 해로운 것이 사람의 몸 속에 존재하거나 침범하 기 때문에 생기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이 병은 원래 인간이 가지고 있어야 함이 당연한 것 중의 결핍으로 생기는 병입니다. 덧붙여져서 아픈 것이 아니라 부족해서 아프다는 것은, 다른 병으로 고생하는 분들과 영혼의 자람이 다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본격적인(?) 판타지가 시작되면 여타 소설과 비슷한 전개가 되 지 않을까 합니다만. 이 소설의 설정 중 가장 전제가 되어야 하고 독자 분들이 속아 주 셔야 할 부분은 -덩치 큰 것으로- 두 가지가 있습니다. 1. 신도 실수는 한다! 2. 인간의 능력은 무한하다. or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든 생존에 대 한 본능을 발휘하게 되어있다. or 사람 사는 곳은 어디든 마찬가지다. (에.....두 가지가 아니라 구요? 제 눈엔 두 가지로 보여서.....윽. 돌 맞았넹.) 위의 생각을 바탕으로. 실은, 우리가 사는 세상이 판타지가 아닐까? 드래곤의 판타지세계가 현실이고 우리 현실이 판타지가 될 수도 있 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래서 지어낸 인물이 '진'입니다. ...........얼토당토 하지 않지만 판타지는 '환상'이니까요. 제 환상에 동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참고; 이해를 돕기 위한 약간의 설명. <혈우병> 사람의 몸 속의 피 속에는 열두 가지의 혈액 응고인자가 존재하며 다치면 멍이 들거나 출혈을 보일 때 위의 혈액인자들의 활성화로 혈액이 응고되는데, 바로 그 12가지 중 어느 하나만 부족해도 지혈 장애를 가져오는 혈우병이 됩니다. 각각의 혈액응고 인자의 결핍에 따라 증상도 처방도 다르며 치료는 부족한 응고인자의 보충을 직접 몸에 주입하거나 관절 주사 등으로 합니다. 출혈이란 인간의 몸 어디에서든(뇌. 관절. 근육 등등) 일어날 수 있 으므로 꾸준한 치료로 예방하지 않으면 자칫 사소한 부상이나 수술 에도 치명적이 됩니다. 이 병은 유전으로만 얻게 됩니다. 염색체와 관련이 있으며 아버지가 혈우병인 경우 혈우병성 보인자 의 딸이 태어날 확률 100% 혈우병 아들이 태어날 확률이 0%이며 어머니가 혈우병성 보인자인 경우 성별을 불문하고 50%의 확률로 유전 정보가 자녀에게 전해집니다. 여아의 경우 두 부모가 모두 혈우병일 때 혈우병성 보인자가 아닌 혈우병이 될 수 있지만 대개 태아일 때 사망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직계 유전이 아닌데도 혈우병이 생기기도 하며 여성 의 경우에도 드물게 혈우병성 보인자로 유전에만 영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직접 혈우병을 앓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문제는 예방만 잘하면 치명적이 될 이유가 없는 이 병이 앞으로 획 기적인 치료법이 나오지 않는 한, 완전한 치료는 아직 까지는 불가 능하다는 것입니다.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는 이 병에 대한 대책이 미흡합니다. 따라서 병에 필요한 약값의 비용이 평생토록 너무 큰 부담이 되기 때문에 많은 분들이 제대로 된 예방 과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하 고요. 의료보험 혜택이 불과 얼마 전에 일부 시작되었다고 합니다만 글쎄요........... 진은 오후 수업시간을 계속 쌍둥이들의 일을 생각하는데 할애했다. '난치병이라니.......그것도 제일 골치 아픈 병이야.' 진은 한숨을 쉬며 그동안 그들의 이치에 맞지 않았던 태도와 악착 같이 아르바이트에 매달리던 태도에 대해 이해했다. '하지만 그것보다. 내가 그때 느낀 느낌은 뭐였을까?' 상희가 상민을 감싸고 대신 폭력을 막았을 때, 진은 이상한 느낌을 받았었다. 그것은 양호실에서 그들의 병명을 알게 된 후에도 다시 고개를 들 어 지금껏 계속 되고 있었다. '연민? 분노? 아니야...!!' 진은 불규칙하게 뛰는 심장을 의식하며 보다 솔직하고 정확하게 그 감정의 이름을 규정했다. '그것은 질투였어!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질투. 동경.....' 진은 그녀가 미국에서 생활 할 때 믿음을 주고받던 사람들이 원인 이 되어 때때로 겪어야 했던 두통이. 가슴으로 옮겨져 있음을 알았 다. 눈이 아프고 머리가 아프던 것처럼. 아니 그랬던 기억보다 더 심란 하고 무 방비한 느낌으로 가슴이 아파 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이제껏 자신에게 호의라고 생각했던 것들을 주었던 사람들. 샘과 마리, 캐서린, 네이할머니, 니콜라스와, 그녀에게 고마워 하던 그녀에게 도움을 받았던 사람들. 노먼까지도. 그 모든 사람들을 떠올리며, 가슴이 죄어옴을 느꼈다. ................진은 마음이 아팠다. '난, 사랑 받았었어. 그런데 그걸 몰랐어!' * 하교 후 상희는 머뭇거리며 진의 반을 찾아왔다. "어깨는 괜찮아?" "어- 응. 괜찮아." 진이 상희의 어깨를 가볍게 터치하자 상희는 움찔했다. "멍이 많이 들었겠어. 괜찮아 질 때까지 며칠은 아르바이트를 쉬는 게 좋겠어. 상민이도 그렇고." "저......화 안 났어, 진?" 진은 이 가엽고 착하고 무모한-그러면서도 존경스럽기 까지 한 여 자 아이를 바라보았다. 상희로 인해 진은 당연히 알았어야 했을, 배우지 않았어도 인간으로 서 이미 오래 전에 스스로 터득했어야 할 것들을 오늘에야 깨닫고 인성에 추가시킬 수 있었다. "화를 왜 내? 고맙기까지 하는데." "응?" "가자. 상민이랑도 함께 집에 가서. 우린 나눌 이야기가 많을 것 같 아." "아. 응......." 가방을 메고 교실을 나서는데 수경이가 그들을 좇아 나왔다. "진." "응? 왜, 수경아? 아- 그렇지. 상희야 이 앤 오늘 인사를 나눴어. 이 수경이라고 해." 소개받은 상희도 소개 당한 수경도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바. 반가워. 상희야. 자주 봐서 이름은 알고 있었어. 4반이지?" "응.....안녕?" 서로가 어색해 하자 진은 '하늘에는 구름이 흐른다'는 투로 다른 사 람 같으면 소개하는 자리에 꺼낼 생각도 하지 않을 말을 했다. "수경아. 상희와 상민은 에이즈가 아니야. 잘못된 소문으로 지레 사 람을 평가할 필요는 없어. 그리고 상희 너도 병명을 숨기니까, 오히 려 와전된 소문이 나서 친구 사귀는 것이 힘들어 지는 거야. 오해는 풀어야 사는 게 덜 힘들어지지. 고 1쯤 되었으면 서로의 사정을 이 해할 만한 인격을 대부분 가지고 있을 거야. 그렇지 않아?" 진은 뻔뻔스럽게 서로의 비밀을 태연히 발설하곤 원망할 마음이 사 라지게 하는 미소를 지었다. "미안해, 상희야. 내가 속없이 진에게 소문에 대해 얘길 해서. 널 나 쁘게 보았던 것은 아니야." "괜찮아.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나도 잘못은 한 걸......" 둘은 비슷하게 얼굴이 빨개져서 서로를 어긋나게 바라보았지만, 처 음 치곤 괜찮은 대면이라고 진은 생각했다. "그런데 왜? 수경아 용건이 있었던 거야?" "아- 응. 저, 반 애들이 그러던데. 남철선배와, 같이 다니던 다른 남 학생들이 되게 당했다고 해서. 오후 수업에 다들 안 들어 왔대. 뭐 자주 빠지긴 한다지만, 조퇴했다고도 하고.....난 혹시 진, 네가......." 그러면서 수경은 그럴 리가 있겠는가 하는 눈빛으로 진을 흘낏 보 며 눈치를 살폈다. "음. 내가 몇 대 때려주기는 했지. 그런데 그게 왜?" "정말? 진 네가 때려 주었다고? 어떻게?! 아니, 진은 운동을 잘해? 혼자서 그 자식들을 다?! 속이 다 시원하더라!! 정말로 진이 그 새 끼들을 싸워서 이긴 거야?!!.....합-!" 진은 수경이 화장실에서 처음으로 말을 걸었던 것들은 연습이 있었 을 거라고 확신했다. 수경의 질문이 속사포처럼 쏟아지더니 급기야 본래의 말투가 나왔 기 때문이다. 진은 너무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맙소사 재미있다고 말이다!- "진, 정말 그렇다면 조심해. 그 자식들 아주 질이 나빠. 그냥 넘어가 지 않을 거야." 수경은 곧 어색함을 수습하고 진지한 태도로 돌아왔다. "감정이 나빴구나. 몹쓸 짓을 많이 했나 보지?" "말도 마. 애들이 얼마나 미워하는데. 걔네 들에게 돈 안 뺏겨 본 사람이 드물 정돈데. 뭐. 남자애들은 그 정도지만 여자 애들은 더 무서워해. 전에 다른 학교 어떤 여자애가 그것들에게 걸려서 돌림빵 을 당했다는 소문이 있어. 선생들도 어쩔 수 없나봐. 짱인 남철이는 집이 한가닥하나 보더라. 정말 재수 없는 애들이야. 그러니까 진, 무 슨 일이 생길지도 몰라......" 계속 듣자니 은어인 듯한 모르는 단어가 튀어 나와서 진은 수경의 말을 가로막고 물어야 했다. "돌림빵이 뭐지? 한가닥-이란 말은 무슨 뜻이고?" "아- 저." 수경은 다시 자신이 흥분했다는 것을 알고 삐질 거렸다. 묵묵히 듣 고 있던 상희는 얼굴에 핏기가 조금 가신 채 진에게 대신 설명해 주었다. "돌림빵이란, 한 여자 앨 여러 남자들이 돌아가면서 범하는 거야. 한가닥이란 말은 힘 좀 있다는, 집이 한가닥 하다니까. 집안이 돈 있고 권력이 있다는 소리야. 진." "윤간을 말하는군. 뭐 괜찮아. 나도 한가닥-하거든." 진은 그렇게 말하고 친구들과 하교를 서둘렀다. 몇몇 반 아이들이 귀가하지 않고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는 것을 알 았기 때문에 진은 자리를 옮겨야겠다고 생각했다. 함께 교문을 나서기까지 수경은 계속 재잘댔다. "진, 너 정말 그렇게 싸움 잘해?!" "그래. 난 강해." 뉴욕의 뒷골목에서의 싸움은 그냥 싸움이 아니라 목숨이 걸린 일이 기도했다. 그런 살벌한 곳에서도 10년 가까이 살아 남았는데 그런 애송이 패거리들 쯤이야. '하지만, 혼자 얽힌 것도 아니니 손을 써야겠군.......한가닥이라....이곳 에서도 내 전공(?)을 살리게 될 줄은 몰랐네.' 진은 유쾌하기까지 했다. 교문 앞에서 상민을 만나 그들은 수경과 헤어지고 진은 쌍둥이들과 함께 그들의 집으로 갔다. [7] 6-3. 고백 "대접할 만 한 게 별로 없어, 진." "상관없어. 앉아도 돼?" "그럼-" 몇 개월을 알고 지냈는데 처음으로 집안에 들어 온 진은 그들의 열 악한 가정 환경에 다시 한숨이 나오는 듯 했다. 상민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방으로 들어갔고 상희와 진은 부엌 겸 거실에 마주 앉아 있었다. "집이 너무. 초라하지?" "상희야." "으응-?" "난 이곳 보다 넓긴 하지만 더 나쁜 환경에서 살았었어." ".............................." 상민이 나오자 진은 몸을 바로 하고, 그들 남매를 곧게 주시하며 이 야기를 시작했다. "난 이제까지 내 속내를 남들에게 내 보인 적이 없어. 한국에 온 것 은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철이 들기 시작하면서 내게 무언가 빠진 것이 있다는 생각을 했고 그걸 채우기 위해 뉴욕을 떠나온 거야. 여기 와서 너희 남매에게서 특히 오늘 있었던 일을 경험하고서야 내게 부족했던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어. 그리고 이미 그것이 나에게 있었다는 사실도 알았어. 그 점 정말 감사하게 여겨. 그리고 너희들 을 정말 받아들일 수 있다고, 받아들이고 싶은 욕심이 생겼어. 그래 서 이제 정식으로 교제를 청하고 싶어. 나와 정말 '친구'가 되어 주 겠어?" 뜻밖의 말을 경청하던 쌍둥이들은 당황했다. "무. 물론 친구야, 진. 처음부터 우린 널 친구로 대했는걸? 병에 대 해 말 안한 것은, 정말 미안해. 하지만 친숙해 지지도 않았는데 처 음부터 우리 사정을 낱낱이 얘기하는 것은 좀. 그래서......." "나도 그래, 상희야. 내 얘기를 다하자면 오늘 밤 잠잘 시간도 없을 거야. 한 가지씩 기회가 닿는 대로 모두 이야기 해 줄게. 상민이는?" 상민은 대화를 듣고만 있다가 진의 물음에 어렵게 대답을 했다. "병 때문이 아니라도. 아니 병 때문에 평생 안고 살아야 할 문제들 로 난......잘 모르겠어. 오늘 있었던 일만으로도. 난 동생 하나도 지 키지 못해, 진. 함부로 친구를 만들어서는 상대에게 미안해 질 거야. 하지만......나도 너와 친구가 되고는 싶어. 상희처럼 당장 터 놓고 지 내는 것은 이. 익숙해져야 가능하겠지만.........." 진은 미소지었다. "지금은 그것으로 충분해. 나도 진짜 친구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 지 잘 모르는 편이야. 처음부터 잘해 내는 사람은 없지 않겠어?" 상희는 자신 없어 하는 상민을 곁눈질하고는 진에게 물었다. "그런데 진. 전부터 묻고 싶었는데, 미국에 남자친구는 없었어?" "있어. 지금도 날 애타게 그리워할 남자아이가 있지. 하하... 아이라 고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덩치 큰, 어린애 같은 친구가 있어. 니콜라스라고 해. 그 애의 행동에 적당히 맞춰주고는 했는데 이제 와선 조금 후회가 되네. 내가 정말 그 앨 아끼는 마음이 있다는 것 을 깨달았었다면 여기에 올 필요도 없었을 거야. 하지만 잘된 일이 야. 여기 와서 배울 수 있었던 것들은 내게 꼭 필요했던 것 들이었 어. 그래서 너희들이 정말 고맙고, 부럽고, 질투가 나." "........그게. 무얼 배웠다는 거야, 진?" 상민이 모처럼 먼저 물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 사랑을 주는 사람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 모든 것을 걸고 지켜야하는 대상. 모든 것을 기꺼이 맡길 수 있는 대상. 진정한 신뢰와 믿음." 진의 파격적인 표현에 상민은 '그. 그 정도는 아니야. 우린.' 했고 상희는 '그런 것들을 몰랐어?' 했다. "난 머리로는 너무 잘 알았지만 가슴으로 깨닫질 못했어. 그러니 그 런 의미에서 너희들이 내 머리를 한 대 쳐주었던 셈이고 비로소 정 신이 든 거야." 진은 나이에 어울리는 미소를-너무나 화사하고 그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진은 16세가 되어가고 있었다. * 진이 돌아간 후 상희는 오빠에게 기대서 눈물을 글썽였다. "오빠. 난 눈물이 나서 혼났어. 진은 우리보다 더 비참하게 살았어. 그런데도 너무 강하고 예뻐...... 그녀가 고아인 채 유괴되어 학대 받 은 일들은 너무 처참했어. 어린아이일 때 그런 폭행을 몇 년씩이나 견디어 내다니. 진이 너무 불쌍해." ".........하지만 몸이 비정상적으로 건강했잖아. 다행한 일이야. 우리 같은 사람도 있는데 상처가 흔적도 없이 아무는 체질의 사람도 있 구나. 세상은 공평하다는 생각 안 들어?" "그래. 오빠에게 없는 것이, 우리에게 없는 것이 진에게 더해진 거 야. 헤헤.... 나 사람 볼 줄 알지? 그런 멋진 친구를 잡다니. 오빠도 운이 좋은 거야." 상민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 정말 운이 좋다고, 커다란 행운이 그들 에게 손을 내밀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증오스러웠던 자신의 병에 대해 묘한 친밀감이 느껴지기 까지 했다. '상희의 말대로 우리에게 없는 것이 진에게 덧붙여진 거야. 그런 진 은 우리를 찾았고!' 진은 마음만 채워주고 돌아간 것이 아니었다. 쌍둥이들의 엄마가 귀가하자 진은, 자기를 반기는 그들의 어머니에 게 새삼 정중하게 자신을 소개하고(물론 몰라도 되는 일은 빼고 얘 기했다.) 엄마가 버는 한달 수입을 그대로 줄 테니 자신의 집에 와 서 풀로 일해달라고 했다. 출퇴근하기 번거로우니 가족과 함께 입주해서 생활할 것을 조건으 로. 진은 45평이 넘는 고급 아파트에서 혼자 생활하고 있다고 설명하며 방도 여러 개고 해서 쌍둥이들이 함께 생활해도 전혀 지장 없고, 한 국에서 생활하는데 오히려 도움이 된다고 엄마를 설득했다. 그들 가족은 그 주 일요일에 바로 진의 집으로 이사를 했다. 이튿날 등교를 했을 때 교실 앞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은 학생들 로 인해 또는 수경의 수다로 인해 거의 전교생이 진과 쌍둥이들의 이야기로 몸살을 앓았다. 첫 교시 후 쉬는 시간에 담임의 호출로 진은 교무실로 불려갔다. "진. 나도 이야기를 들었다. 그게 사실이니?" "그거란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요, 선생님?" "음. 그. 2학년 선배 남학생들에게 폭력을 휘둘렀다고 하던데...." "폭력이라고요? 아니요, 전 정당방위였답니다." 중년을 넘어가는 나이인 듯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이 엿보이는 5반 담임은 이 당당한 유학생을 어떻게 다뤄야 하나 잠시 고민이 되었 다. "상민과 상희의 병을 알고 계시나요?" "아. 몰랐는데 그들의 담임선생님에게서 아침에 들었다." "그렇다면 그 선배들이 상민에게 폭력을 휘둘렀고 상희가 그걸 몸 으로 막았고 제가 그들을 대신하여 처벌한 것은 충분히 정당하겠지 요?" "어..... 그런 면도 있지만 그들도 학생이란다. 진. 그들에게도 부모가 있고, 아직은 아니지만 학교에 항의를 해 올 수도 있다. 그리고 어 떤 이유이든 학교 내 폭력은 정당화 될 수 없어." "선생님. 상희와 상민은 아주 작은 폭력에도 생명이 걸린 일이 되는 병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친구들이 자신의 병을 치료코자 열심히 모은 상당액의 돈을 대가 없이 여러 번 뺏겼어요. 게다가 생명의 위 협이 되는 폭력에 대항할 힘이 없던 상황인데 제가 나섰던 것이 잘 못인가요?" "......................." "그들의 부모에게 항의를 하라고 하십시오. 전 미국 국적 또한 갖고 있는 유학생입니다. 변호사를 통해 능히 그들을 처벌할 재력까지 가 지고 있지요. 오히려 항의 해 주면 좋겠네요." 진의 담임은 할 말이 없었다. 그녀의 말이 옳았으니까. 학교 폭력도 학교 처사도 힘이 없는 학생이나 학부모에게만 적용 되는 고질병이 사라지지 않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선생님. 그들은 중학교 때 처음으로 자신들의 병을 알아, 친아버지에게 버림받았습니다. 학교 친구들에게 병에 대한 무지로 따돌림당하고 무일푼으로 어머니와 세상을 헤쳐와야 했지요. 고교에 들어와서 그들의 어머니는 동급생들에게 자녀가 소외되는 것 만이 라도 면해 주고자 상민의 담임 선생님께 병명을 말하고 선처를 부 탁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혀 학교 내에서 어떠한 배려도 보호도 받지 못하고 있었더군요. 그러니 이 일에 대한 책임은 다른 학생들에게도, 선생님들에게도 있는 것입니다." ".........................." 진과 담임의 면담은 교무실에 있던 몇 몇의 선생들의 귀에도 똑똑 히 들렸다. "그래서 한가지 그들의 친구로서 학교측에 요구하고자 합니다. 상희 와 상민이를 앞으로의 어떤 사소한 위험에도 방치되지 않게, 위험에 대비할 수 있게끔 저희가 서로 같은 반에 재편성되길 바랍니다. 최 대한 즉시. 고교를 졸업할 때까지 말이에요." "같은 반에?" "네. 같은 반 에요." ".........그건. 일단 나도 건의를 해서 선생님들과 의논해 보마. 그리고 한가지.........." "말씀하세요 선생님." 진은 되려 담임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는 투로 이야기했다. "어제 일은 네 말대로. 일리가 있다만. 피해자, 아니 가해자였던 학 생들 중 한 아이는 부모가 꽤. 큰. 흠. 영향력을 학교에 행사하고 있 단다. 미국에서 생활해서 잘 이해가 가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내 개인적인 충고라서 나중 일이 어떻게 될지 확답은 못하겠다. 그 렇지만 그런 부분을 염두 하지 않으면......사실 그 학생들은 이미 여 러번 다른 많은 학부모들에게서 항의를 받고 있지만, 이제까지 처벌 이 내려지지 않았단다........부끄럽지만 말이다."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선생님들께도 그들은 골칫거리였군요. 제 가 부조리한 면을 개선하는데 힘을 쓰면 되겠군요." 어떻게? 하는 얼굴의 담임은 학생에게 꿀렸다는(?) 것을 깨닫고 다 시 흠. 흠. 헛기침을 했다. "어쨌든 폭력은 안 된다. 이유가 정당하다고 다 봐 주다가는 학교는 더 엉망이 될 거야." '증거 없는 폭력은 상관없겠지요?' 진은 미소했다. 그 날 하교 길에 진은 남철의 패들로 보이는 남학생 네 명에게 연 행(?) 되어 갔다. 상희와 상민은 진의 과거를 일부 들어서 그녀를 믿었지만,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어서 발을 동동 구르는데. 걱정하지 말고 먼저 집에 가서 이삿짐이나 싸라는 단호한 진의 말 에-'너희가 함께 있으면 방해만 돼' 이런 말도 들었다.-어쩔 수 없 이 집으로 돌아가 진의 귀가를 초조하게 기다려야 했다. "어쩔 수 없어. 상희야. 우리는 도움이 안 돼. 진의 말대로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 "알지만.......오빠 경찰에 연락해 볼까?" "안 돼. 진은 무사할 거야. 경찰이 개입하면 진이 더 귀찮아질지도 몰라." "그래도......." 상희는 안절부절 했지만 상민은, 상희가 우느라고 놓쳤던, 진이 남 철들을 제압했을 때의 그 믿기 힘들었던 광경을 잘 기억했다. '진은 괜찮을 거야. 그녀는 강해.' * 남철은 얼굴 반쪽이 시퍼렇게 멍이 든 모습으로 진을 맞았다. 그들은 어제 진에게 당한 녀석들을 포함해서 열댓 명 정도가 모여 있었고, 짓다 만 상 건물의 한 공간에선 소리가 벽에 부딪혀 여러 명의 인기척이 울리 듯 퍼지고 있었다. "이 숫자가 다냐?" "쳇. 겁 대가리 없는 계집애야. 어젠 방심해서 어이없게 당했지만 오늘도 쉽게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냐?! 넌 죽었어! 내가........" "상희와 상민을 끌어들이지 않은 것에 대한 예의로 모두 뼈를 부러 뜨리 지는 않겠다. 그리고 넌 사설이 너무 길어. 내게 지면 짱 자리 를 내 놓아야 한다던데? 규칙 따윈 없는 패들이냐?" "이 기집애가 정말?!" 또 다시 말을 씹힌 남철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진을 향해 삿대질 을 했지만 진은 아랑곳하지 않고 남철을 제외한 주위 남자아이들에 게 교복 스커트 자락을 펄럭이며 순식간에 다가가 군더더기 없는 공격을 시작했다. "우 와 악-" "억-" 각목도. 몇몇이 들고 있던 나이프도 전혀 도움이 되질 못했다. 도대체 인간으로 낼 수 있는 속력인가 의심스러울 빠르기로 진은, 그들을 단 몇 분 사이에. 차례차례 헛된 방어와 공격을 무마 시켜가 며 말 그대로 남자들을 두들겨 주고 있었다. '속전 속결이 최고지.' 진은 어깨를 휘두르며 태연히 생각했다. 어제 기절해 버리는 바람에 미처 보지 못했던 진의 공격을 지켜보 며 남철은 입이 벌어졌다. 마지막 차례가 된 남자아이는 진이 자신에게 눈길을 주자 "히익---" 하는 괴상한 소리를 내며 들고 있던 각목을 놓쳤다. "맞기 싫으면 무릎 꿇어." 그 남학생은 거대한 힘이 위에서 누르는 느낌을 받으며 지체 없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자. 이제 네 차례다. 무릎 꿇고 빌어라. 다시는 못된 짓 하지 않고 건전~하게 살겠다고 맹세하고 용서를 빌어. 기회는 한번 뿐이야." "이 년이 정말?!!" 그녀의 힘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쯤은 확실히 알았지만 자존심만큼 은 누구 못지 않던 남철은 무모하게 진에게 덤벼들었다. 진은 가볍게 몸을 비틀어 피하면서 빈틈 투성의 남철의 동작에 혀 를 차며, 발을 걸고 차서 넘어뜨렸다. 그리고 친절하게 남철만을 대상으로 퍽. 퍽. 소리가 울리도록 능란 한 구타 솜씨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약속대로 뼈를 부러뜨리지는 않았지만 여기 저기 심한 타박상이 생 겼을 곳의 통증으로 보아 금이 가는 것까지는 조절해 내지 못한 듯 했다. "기회는 한번뿐이라고 했지?" 기절한 남철의 뺨을 다시 때려 깨워서, 진은 경고를 했다. 남철과 주위의 겨우 몸을 추스르고 일어난 아이들은 속수무책으로 진의 말을 들었다. "해산! 너희 패는 이제 해산이야. 불복하려는 녀석은 지금 나서라. 아작 아작 밟아 주마. 나중에라도 눈에 거슬리면 뼈마디를 모두 분 질러 줄 테니 잘 판단해!" 그들은 그 날 부로 팀이 와해됨을 보아야 했다. 진이 그들을 따라 빈 건물에 들어간지 20분도 채 되지 않은 사이의 일이었다. [8] 6-5. 나쁜 짓 같은 날 저녁 서울에서 그래도 꽤 이름 있는 한 심부름 센터 사장 은 굉장한 미녀의 방문을 받았다. 어떻게 오셨느냐는 공손한 그의 말에 밝은 금발의 진 녹색 바지 정 장 차림의 그녀는 간결하게 대답했다. "뒷조사." 밤이 가까운 시간에 선글라스를 쓴 미녀 외국인이 던진 한마디에 40을 바라보는 강 사장은 흔해 빠진 치정에 얽힌 일인가 보다 했다. 하지만 그녀가 의뢰한 인물의 이름과 의뢰 내용을 듣고는 보통 인 물이 아닐 것이라 짐작했다. "청구한 인물은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미스....." "이름은 알 것 없고. 선금으로 현금 천만원을 내겠어요. 최대한 짧 은 시간 안에 조사할 수 있는 한 모든 정보를 원합니다. 모레 안에 괜찮다 싶은 정보를 가져오시면 한 정보 당 천만원씩 보너스를 지 불하지요. 정보의 질은 제가 직접 판단하겠습니다." "에? 처. 천만원이요?" 그는 횡재 건이 들어왔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녀가 의뢰한 인물에 대해서는 이쪽 계통에 있는 사업가라면 기본적인 인적사항이나 비 록 뚜렷한 증거는 없지만 각종 비리 내역이나 약점이 될만한 자질 구레한 것들이 이미 파악되어 서류철에 참고 자료로 보관되고 있 었으니 짧은 시간이지만 운만 좋으면 제법 짭짤한 선금 액수 보다 훨씬 큰 막대한 보너스가 약속될 수 있었으니까. 비록 직접 정보를 고르겠다고는 했지만 의뢰한 인물은 털지 않아도 먼지 나는 인물이니 헛고생은 하지 않을 것이다. 강사장은 흔쾌히 의뢰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모든 직원이 총동원되어 그녀가 준 시간 안에 의뢰 대상과 그 주변 인물까지 돈이 될만한 모든 꼬투리를 잡아내는데 열을 올 렸고 약속한 이틀 후의 시각. 금발의 그 의뢰인에게 조사결과를 넘겨주었다. * 상민과 상희는 밤늦은 시간까지 여전히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남매에게 진은 야속하게도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잠깐 그들 의 집에 들르더니, "뭐해? 짐 안 싸고. 내일 토요일이니까, 빨리 준비해. 모레 이사하자. 가구는 내가 쓸만한 것으로 대충 주문해 두었으니까 낡고 고장난 것 들은 모두 버려." 했다. "진. 다친 데는 없어? 왜 이렇게 늦은 거야?" 상희가 진의 몸을 살피며 묻자, 진은 "좀......놀다 왔어. 어머니는?" "주무셔. 진! 정말 걱정했단 말이야 연락 좀 하지!" "어떻게? 전화도 없잖아?" 말문이 막힌 상희를 두고 진은 실실 웃으며 내일 보자는 인사를 하 고 돌아갔다. "정말. 건방져! 뭐 저렇게 뻔뻔한 친구가 다 있냐. 실컷 걱정시켜 놓 구선 놀다왔대.... 안 그래 오빠?" 투정이 분명한 상희의 말에 상민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 이튿날은 토요일이었다. 정규 수업 시간이 짧은 탓에 들뜬 소란스러움이 어느 때보다 더한 요일이었지만, 그런 문제가 아니더라도 학생들은 같은 인물로 인한 화제로 또 다시 산만해져 있었다. 진은 역시나 교무실에 불려가 있었다. 교무실에는 난처한 얼굴의 5반 담임과 나이 지긋한 교장이 어제 남 철들과 함께 진에게 톡톡한 맛을 보았던 학생 몇과 그들의 부모들 로 보이는 학부모들과 함께 진을 에워싸고 있었다. "제가요? 그럴리가요. 댁의 아드님이 넘어진 충격으로 기억에 혼란 이 왔나 보군요. 전 어제 하교 후 곧장 집으로 돌아가서 이사올 고 용인을 위해 청소를 하는데 시간을 다 보낸걸요?" 뻔뻔하게 자신의 행동이 아니라고 말하는 진에게 담임은 한숨을 푹 내 쉬었고, 고자질을 한 것이 되어 버린 다섯 명의 남학생들은 진의 시선을 피해 얼굴을 숙이고 있었다. "아니, 뭐 이렇게 맹랑한 여자애가 다 있어? 네가 그랬다고 우리 보 람이가 분명히 그랬단 말이다. 다른 애들은 아예 입원까지 해서 등 교도 못하고 있다고! 어떻게 이런 학교 폭력이 생길 수가 있느냔 말이다! 우리 보람이는 5대 독자야! 네 까짓게 함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해?! 김 회장님(남철의 아빠)도 일이 바쁘셔서 오시진 못했지만 이번 일을 그냥 넘길 것 같으냐? 빨리 사실대로 말하지 못해?!" 화려함을 고급스러움으로 잘 못 이해한 듯 온통 번쩍이는 차림새의 화장 짙은 한 학부형의 말에 진은, 그녀가 '우리보람이'라고 칭한 2 학년 남학생에게 힐끗 눈길을 주고는 한마디, 한마디 강세를 효과적 으로 주며 또박또박 대꾸를 했다. "학교 내가 아니라 학교 밖이겠지요. 그런데 15명의 건장한 남학생 들이 단 한 명의 여학생에게 집단구타를 당했다고요? 저런~ 제가 몸이 약한 것은 아닙니다만 말에 어패가 있군요. 제가 그런 힘이 있 게 보이십니까?" -여기서 진은 가련한 표정으로 가는 팔목을 슬쩍 내 비치기까지 했다- "한 보람 선배의 기억이 잘못된 것이 분명합니다. 만약 정말 선배들이 폭력에 희생되었다면 그 가해자가 그 자리에서 떳떳이 자신의 이름을 밝힐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지 않겠어요? 제 가 유학생이라 화제가 되어서 대부분 제 이름 정도는 압니다만, 친 구들과 몰려다니다가 재수 없게 다치게 된 것에 어떻게 제 이름을 거론할 수가 있었을까요. 판. 단. 을 잘못하셨군요, 선배." 판단이란 말에 다섯 명의 남학생들의 얼굴은 하얗게 사색이 되었다. 어제 그녀가 그러지 않았는가! '나중에라도~ 판단 잘 해.' 라고 말이다. 어차피 이런 자리에 피해자로 서 본 것이 처음인지라 과거 자신들 로 인한 피해학생들의 입장을 몰랐던 그들은, 부모가 방패가 된다고 하더라도 정말 당사자에게 돌아 올 보복이 두렵다는 것을 진심으로 깨달았다. "엄마. 아니라니까요. 저 애가 아니었어요. 엄마가 하도 이름을 대라 고 해서 아무 이름이나 막 대었던 거 에요... 정말 저 애가 아니라니 까요! 우린 얻어맞은 것이 아니라 보드 타다가 넘어진 거라니까요!" 새파랗게 질린 보람이란 학생은 다시 극구 부인을 했고, 유일한(?) 증인과 증거가 없어진 그들은 씩씩거리기만 했다. "어머님들. 오늘은 토요일이라 수업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지 않습니 까? 전 학과 공부가 급해서 계속 이런 실랑이를 할 시간이 없습니 다. 이 자리에 나오지 못한 김 남철 선배의 경우 가장 큰 피해자라 고 하시니, 돌아가셔서 사건의 진위를 차분히 파악하시고 월요일에 나 다시 항의를 하시든지 하시지요. 정말 제가~ 가해자라면 말 입니 다. 계속 이러시면 저도 가만있지 않겠습니다. 돈과 힘이 여러분에 게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아셔야 겠군요."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냉정함으로 진은 어른들을 위협했 고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두고 보자, 하는 얼굴을 하고 돌아갔다. "최 진 학생... 정말 골치가 아프다. 월요일이면 뭐, 뾰족한 수가 있 겠냐? 김 회장이 나서면 빼도 박도 못한다고." 한숨만 푹푹 쉬는 담임에게 진은, "담배 좀 줄이세요, 선생님. 냄새가 지독해요." 하고 말하고는 교무실을 나갔다. 그 날 밤도 진은 이런 저런 일들로 바빴다. 일요일 오전. 상희네는 진의 아파트로 이사를 했고, 대충 정리가 되 자 그들의 어머니가 해 준 늦은 점심을 먹고 진은 태평하게 낮잠까 지 잤다. 저녁이 되어서 상희가 진의 방문을 두드렸지만 그녀는 대답이 없었 고 아직 새집에 익숙지 못했던 상희는 그녀의 방에 쳐들어 갈 이유 를 만들 여유가 없어서, 피곤한 탓에 깊이 잠이 든 것으로 알고 진 을 더 깨우지 않았다. * 김 회장은 이번 주말이 너무 성가실 지경이었다. 월말이 다가와 어음 처리 문제도 급하고 노사문제로도 골치를 썩고 있는데 둘째 아들놈이 또 사고를 쳐서 번거로운 일을 쓸데없이 늘 려 주었던 것이다. 어제는 그와 동창이며 아들놈의 친구 부모이기도 한, 한 박사까지 직접 찾아와 불만을 떠들어대서 스트레스가 쌓이기도 했다. '병신 같은 놈. 체육관까지 기증해서 겨우 그런 3류 학교에 집어 넣 어 주니까 이젠 계집애에게 얻어맞고 다니기까지 하네. 정말 내 자 식이 맞나 싶어.' 혀를 찼지만 돈의 힘으로 안 되는 일이 뭐, 얼마나 있던가. 일요일이지만 일 핑계를 대고 잠깐 나왔던 사무실을 뒤로하고 그는, 내일 학교 교장에게 전화 한 통으로 압력 좀 넣어 주면 되겠지 싶 은 생각을 하며 집사람 몰래 살림을 차려준 애인의 집으로 갔다. "회장님. 저 그 다이아 세트가 너무 갖고 싶어요. 정말 사 주실 거 죠?" 20세도 채 되어 보이지 않는 젊고 예쁜 그의 정부는 김 회장의 품 에서 온갖 아양을 떨며 비위를 맞추고 있었다. "그래. 대신 다음달 용돈은 없다. 지출이 너무 잦으면 마누라가 바 가지 긁어. 귀찮아지면 그것으로 끝이니 너무 보채지 마라." "아이 참. 회장님도 그 정도 갖고 뭘 그래요? 사모님은 더 돈이 많 을 텐데..." 이번 계집은 꽤 마음에 들었다. 기분도 잘 맞춰 주고 어리지만 제법 미인에, 김 회장의 취향에 들어맞기까지 했다. 겉보기엔 풍모도 갖춰 보이는 김 회장은 풍기는 근엄함과는 달리 딸 뻘 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 애인의 집에서 저녁 내내 뒹구는 것 으로 소일하고 있었다. "정말 더 봐주고 싶은 데 말이야. 난, 시간이 곧 돈이라 말이지." 그때 불쑥 제 3자의 목소리가 그들 귓가에 울렸다. 보통 가정집의 구조를 하고 있는 그 집은 도둑이 숨어 들만한 곳도 없었고 방범도 철저한 곳이라 안전이나 비밀 누설에 그다지 신경 쓸 일이 없었기에 항상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는 경호원 겸 비서들 도 곁에 두지 않고 밖에서 기다리게 했던 탓에 김 회장은 갑자기 나타난 인영으로 크게 놀랐다. 설상가상으로 옷조차 제대로 갖춰 입지 않은 상태라 어린 계집애는 비명까지 꺅꺅 내질러 혼란스러움을 가중 시켰다. "너. 넌 뭐냐?!" 어깨 부위에서 금발머리를 물결치며 까만 색안경을 쓴 여자는 아무 대답 없이 호들갑을 떠는 여자에게 다가가 수도로 목 뒤를 내리쳐 간단하게 기절 시켰다. 그러더니 재빨리 그녀의 옷가지들로 손목을 뒤로 묶고 재갈을 물린 후 금발 여자는, 그녀를 아직도 어안이 벙벙 한 김 회장의 곁에 그대로 던져두었다. "너 머리 나쁘냐?" "...어떻게 들어왔지?" 김 회장은 잠시 패닉에 빠진 상태에서 금방 빠져 나왔다. 일행은 없는 듯 했고 외국인으로 보였지만 고작 젊은 여자 하나라 는 생각에 정신이 들었던 것이다. 돈 좀 만지다 보면, 흑심을 품거나 배은망덕한 자들이 위협하려는 일이 종종 있었고. 그 정도야 뭐, 약간의 돈이나 친분 있는 권력을 끌어들이면 그다지 대수롭지도 않았으니까. 그리고 보복은 뒤에 충 분히 할 수 있었다. 머리를 굴리는 것을 훤히 안다는 듯이 그 여자는 엉거주춤 옷으로 몸을 가리고 있는 김 회장 면전에 서더니 팔짱을 끼고 질문을 했다. "얼마 줄래?" 김 회장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겨우 젊은 여자 하나 거느리는 사실로 얼마나 뜯어내려고?' 그리고 여자 주제에 아무리 경호원이 주위에 없다고 무사 할 수 있 으리라 여기는 걸까? 거기다, 지시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금 방 그들은 올라올 것이다. 가소로웠지만 김 회장은 점잖게 대꾸했다. "돈은 무슨. 너도 꽤 예쁜 편인데 내게 귀엽게 보이면 아파트 하나 쯤은 그냥 주마. 뭐 하러 뒷일 캐내는 일을 하는 거냐? 돈이라면 쉽 게 벌 수 있단다, 금발머리 아가씨. 내겐 이런 일이 위협이 안 돼. 그리고 연장자에게 그렇게 막 반말하면 안돼요. 한국말을 아직 잘 못하나 보지?" 여유를 잃지 않고 음흉한 눈빛으로 여자의 몸매까지 훔쳐보며 말을 하던 김 회장은 그 순간이 지나자 곧, 벌거벗은 채 폭행을 당하기 시작했다. 기습? 그런 것도 아니었다. 김 회장은 도저히 막지 못할 구타에 체면도 잊고 억. 억. 소리를 내 다가 반격이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에 위기를 느꼈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소리를 지르려 하자 그녀는 주먹을 김 회장 의 입에 끼어 넣은 채로 아무런 말 없이 나이 지긋한 성인 남자를 남은 주먹과 양발을 사용해 성실히(?) 패 주고만 있었다. 그녀는 김 회장이 너무 꽉 깨물어서 억지스럽게 입을 막고 있던 왼 주먹에 피가 나기 시작하자 잠시 멈추고 눈짓을 했다. "시끄럽게 또 소리쳐 봐라. 혀를 뽑아 줄 테니." 그 낯선 살기에 나이도 잊고 김 회장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진 녹색 정장 바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손을 닦고 묶더니 그 외모만 화려한 무시무시한 여자는 다시 평이한 목소리로 물었다. "얼마 줄래?" "...얼마를 주. 줄까요?" 아무리 돈이 많아도 연륜 있고 사회적인 지위가 높아도 체면이 누 구 못지 않아도. 인간은 자신의 몸에 직접 가해지는 폭력에는 약할 수밖에 없다. 김 회장은 굴욕감과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이었지만 현재로서는 저 괴물 같은 여자를 상대할 방법이 없었다. 침대 옆 작은 테이블에 놓 인 전화와 애인의 핸드폰에 자신도 모르게 눈이 갔지만 금발여자에 게서 들은 다음 설명으로 남은 전의마저 잃게 되었다. "웃기지 마라. 뒤 구린 아저씨야. 전화선이 무사하리라 생각해? 핸 드폰이 탐나면 집어보렴. 옆에 갈 수나 있을까 몰라. 노. 쇠. 해서 말이야...고용인들도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걸? 지금 곤하게 넓 은~ 차안에서 구겨져 자고 있을 테니. 평소에 조금만 부려먹지 그 랬어? 기회가 오니까 옳다구나 하고 잘도 자더라." "............" "어이~ 거기 기절한 척 하고 있는 원조교제 중인 아가씨. 소란 떨지 않으면 해 끼치진 않을 테니 얌전히 있어." "............" "자, 나는 시간이 무척 아까운 사람이니까 가진 패를 다 보이도록 하지. 가격 흥정은 제대로 해야지 않겠어?" 그녀는 구타로 인한 충격으로 주춤거리고 있던 회장을 내버려두고 등을 보이며 소파 뒤에서 서류철을 꺼내 들었다. 회장이 눈을 빛내 고 뒤돌아 서던 그녀에게 마땅한 무기를 찾지 못해서 맨 몸으로 막 덤비는 데! 눈에서 번쩍 별이 튀었다. "야-아. 이 아저씨야. 옷도 안 입고 누구에게 막 덤 비냐. 아직 초반 이라 정신이 온전한가 보지? 안 돼지~ 우리 다시 맞고 시작하자." "으-억-! ...억!!" "내 참. 이 나라에 와서 또 한번 놀랐어요. 어떻게 이렇게 뒤가 구 린 인간이 버젓이 회장 소리 들어가며 떵떵거리며 사는 걸까. 어떻게 이렇게 쉽게 건수 되는 정보를 가족 전체가 제공할 정도로 썩어 빠질 수가 있지? 참 내. 돈이 아깝더라... 그저 너희 같은 인간 은 두들겨 패야 말이 먹히는데 말이야. 아무도 이제껏 그런 사람이 없었던 것을 보면 엄청 운이 좋은 '한 가닥'하는 집안이라니까! 그렇지 않아, 아저씨?" 그녀는 말을 하면서도 묶인 채 동그랗게 눈을 뜨고 바라보는 다른 한 명을 관객으로 부지런히 주먹질과 발길질을 했다. "그. 그만!.....살려줘. 억. 그만.... 잘못했어!" "뭘 잘못했는데? 그리고- 너 아직 한국말 제대로 못하냐? 누구에게 반말이야? 정신을 아직 못 차렸구나?" 빈정거리던 그녀는 여전히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김 회장을 얼굴만 제외하고 사정없이 밟아 주고 있었다. 그 후 김 회장은 공포를 넘칠 정도로 체험하고 그녀가 내민 자신의 거의 모든 내, 외적 치부와 정치 관련 비리와 회사 이중장부의 존재 와 가족들- 두 아들과 시집 간 딸과 부인의 비리까지- 돈으로 환산 하는 일에 울기까지 하면서 열렬히 동의했다. 그녀는 3일의 여유를 주었다. 그동안 그의 큼직큼직한 잘못들과 가 족 한사람 한사람의 치부를 모두 처리하겠다는 확답을 받고 걸레가 되다시피 한 몸을 어린 정부 곁으로 걷어차더니 신음 소리도 못 내 고 있던 겁먹은 여자에게 몇 마디 훈계를 한 후에 -'그렇게 재능이 없어?'- 당당히 현관문을 열고 사라졌다. 김 회장은 절망했다. 이제까지는 언론 정도야 얼마든지 무마할 수 있었지만 그것은 작은 이 나라안에서의 일이었다. 그 귀신같던 여자는 자신의 구질구질한 이면을 국제 사회에- 그것 도 사업을 추진 중이거나 이미 진출해 있는 해외기업이 있는 선진 국들에게 먹이로 던져 주겠다고 협박했고 그럴 힘이 있음을 단편적 이지만 몸소 증명했다. 세상에, 5개 국어로 협박을 하고 미국과 영국에서 사회적 인지도가 높은 몇몇 인물들의 이름까지 거론하며 인맥까지 떠벌리는 데야 아 무리 뒤탈 없게 언론을 주무르던 전례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도저 히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개발도상국인 우리나라에서는 터주대감이나 다름없었으니 문제가 아니라고 해도 경영이 투명하고 인권과 인륜 문제에 언론이 큰 힘 을 발휘하는 외국에서는 그에게 막대한 타격을 주는 것을 막기 힘 들 것이다. 비록 그녀가 내민 패들이 대부분 확실히 증명할 수 없 는 것들이라고 해도 당장, 오늘 있었던 미성년자와의 정사를 담은 필름만으로도 치명적이 될 수 있었다. 그는 이를 갈았지만 그녀의 말을 듣지 않은 채 흉계를 꾸미거나 경 찰을 관련지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3일 후에 여기로 다시 오지. 그동안, 지적했던 것들- 제대로 해내 지 못하면 먼저 맛 배기로 인터넷에 재미있는 동영상이 뜰 거야. 수작 부리고 싶으면 부려. 제대로 해보고 싶으면 얼마든지 상대해 주지. 하지만 그때는 약간의 돈과 평판만이 아니라 완전한 파멸을 각오해야 할거야." 그는 50이 넘은 연륜으로 섣부른 상대가 아님을 파악했다. 그리고 나중에라도 저 금발이 어떤 인물인지 알아내기에는 그녀가 남긴 증거가 너무 없었다. '하지만 한가지 있지.' 어렴풋이 둘째 아들의 일을 떠올리고 관련 인물을 짐작했지만, 다음 날 아픈 몸을 이끌고 직접 찾아간 아들의 학교에서 회장은 자신의 짐작이 틀렸다는 것을 알았다. 남철에게 폭력을 휘둘렀다는 혼혈 여학생의 왼손은, 오른손마저도. 어떤 상처나 자국조차도 찾아 볼 수 없었으니까. 그는 그녀가 지시한 일을 하나 하나 실행하며 아버지대로 부터 물 려 받았던 부를, 조각조각 흩어지게 하는 것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이루고 있었지만 이만 갈 뿐 뾰쪽한 수가 없었다. 김 회장은 3일 후에 다시 찾아오겠다던 그녀를 온갖 함정을 파 놓 고 기다렸지만 그 빌어먹을 여자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고, 다음날 자신의 집 사치스런 거실 탁자에서 쪽지 하나를 발견한 것으로 그 후 오랫동안 불안에 시달려야 했다. '이봐, 돈이 썩어나는 양반. 약속 받은 액수만큼은 아니지만 친히 내 가 수금해 가니 고마워 하라고. 무슨 현금을 그렇게 집안에 쌓아 두 고 사나, 그래. 아무튼 고마워. 약속을 그런 대로 이행했으니 더 이 상의 협박은 않겠어. 하지만 앞으로도 조심해야 할거야. 꼬리가 생 기면 또 밟히는 수가 있으니 말이야.' 회장의 부인은 IMF 때도 안면 몰수하고 내 놓지 않았던 미화 30만 달러에 해당하는 현금을 몽땅 도둑 맞았다. * "상민아 교무실에 다녀왔어?" "어. 응." 상민은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뭐래, 오빠?" "그게. 말이지... 선배들이 가져간 돈을 모두 돌려 받았어. 남철 선배 아버지가 직접 주더라. 저. 위로금이라면서 수표까지 끊어서 더 주. 주던데?" "뭐?" 상희는 진과 먼저 도시락을 먹고 있다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월요일이 되자 여전히 태평한 진을 남매는 불안해했지만, 반 아이들 도 덩달아 오늘은 또 무슨 일이 생길 것인지 잔뜩 교장실과 교무실 의 동정을 살폈는데. 지난주까지 발생했던 사건 보다 더 획기적인 뉴스거리가 생겨 버렸다. 진이 불려 갔다 온 다음, 상민도 역시 불려 갔었는데 그가 가지고 온 소식은 주시하고 있던 학생들에게도 희소식이었다. "그뿐이 아니야. 얘들아. 김 남철 선배의 그 대단하신 아빠가 물의 를 일으켜서 죄송하다며 학교 시설 수리에 쓰라고 기부까지 한 것 있지! 정말 빅뉴스야!" 상민을 따라 갔다 왔던 수경의 수다스런 말에 상희는 더 놀라서 상 민에게 물었다. "오빠, 정말이야?" "그게... 나도 그렇게 들었어." 그 소식은 주위에 삽시간에 퍼졌고 모두들 식당 한 구석에서 점심 을 먹고 있는 그들을 훔쳐보았다. "진아~ 우리 친하게 지내자. 아무래도 네 영향인 것 같은데~ 진의 부모님이 그네들 보다 더 세단 소리 아니겠어?" "수경아 밥풀 튀어. 그리고 내 부모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수선스런 새 친구 덕에 말을 꺼낼 기회를 못 잡던 상희는 진에게 의문스러운 눈초리를 보내며 속말을 했다. '진. 어제 밤에 어디 갔다 왔었어?' 진은 그저 수경의 말에 간간이 장단 맞춰 주며 도시락을 비우는 데 만 열중하고 있었다. [9] 7. 쉬는 시간에 하늘이 푸르고 높았다. 진은 한국의 가을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적당히 서늘하고 낮엔 따 뜻한 햇살이 교실 창문을 통해 네모지게 비춰주고. 밤엔 도시하늘임 에도 별을 볼 수 있었다. 새학기 첫 달은 쌍둥이들의 문제에 얽혀 무척 정신 없게 보냈지만 진이 건의 한 대로 상민과 상희가 5반으로 다시 편성되어 셋은, 아 니 수경까지 넷은 도시 한 구석에 자리 잡은 그들의 학교에서 호의 어린 지지를 받고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생활했다. "다 좋은데 수업시간이 너무 많아. 이렇게 학교에 오래 붙잡아 둘 필요가 있나?" 진이 익숙지 않은 교과과목 수업에 아직 동화를 못 했는지 짧은 불 평을 하자 상희는 안쓰럽다는 듯이 대답했다. "한국의 학교는 다 그래, 진. 외국인 고등학교는 안 그럴 텐데. 후회 돼?" "너희가 있잖아. 어쩔 수 없지. 참아보는 수밖에." "진. 우린 1학년이라 그래도 널널한 편이야. 고 2만 되 봐, 얼마나 짱 나겠니." "고 3은?" "고 3은 인간이길 포기해야하지 않겠어? 안 그래 상민아?" "................" 상민은 진의 노트에 한 학기 분에 해당하는 필기를 대신 해 주고 있어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오는 것이 있으면 가는 것이 있어야 하 는 법이라며 필요 없다는 진의 말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어이 모든 과목의 요점 정리에 요즘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러지 말고, 진. 네가 학교에 건의 좀 해 봐. 정규 수업도 좀 줄이 고 자율. 보충학습 모두 강요 좀 하지 마라고 말이야." "수경아,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게 먹히겠니?" "모르잖아 또. 진이라면 말이야." 진은 머리가 깨이는 듯 한 가을 햇살을 받으며- 그녀는 창가 자리 를 고수한 채 쉬는 시간이면 늘 그 자리에서 굼지럭거리고 있었다.- 친구들의 대화를 들었다. "쉬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화장실 안가, 진?" '거- 참.' 한국의 여자 애들은......어째 저리 몰려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걸까. 화장실마저도 같이 가지 않으면 큰일나는 듯 행동했다. "난 안 마려워. 수경아." 상희는 킥킥 웃었고, 공책에 고개를 쳐 박고 있던 상민은 더 고개를 숙였다. "진. 가서 감독해야지. 화장실도 엄청 좋게 다시 만들어 졌는데 시 간 나는 데로 순찰을 돌아야지 않겠어? 어 후~ 난 우리학교 화장실 이 너무 좋아 졌어. 삐까번쩍하잖아! 진, 너에게 정말 고맙다고 다시 말하고 싶다. 화장실의 그 큰 거울 앞에 서면 난 여왕이 된 듯한 기 분이 든다니까." 극적인 제스처를 취하더니 수경은 콧노래를 부르며 교실 밖으로 나 갔다. "진이 화장실 감독을? 쿡쿡.... 남철 선배 아버지 정말 많이 변했다. 애들이 그러든데 우리학교만이 아니라 좋은 일을 많이 했대. 회사 직원들 복지도 개선시키고 전에 가족들이 손해 끼친 사람들에게 뒤 를 봐주고 해서 요즘 신문에서도 난리들이잖아." "개과 천선 했나보지." 진은 그 일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이곳과 그곳은 세계가 다 르다. 진은 이. 곳. 에 속하고 싶었다. 상희와 상민은 그것을 가능케 해 주었으니 머무를 집으로는 안성맞춤이었다. 그들과 함께 하는 포 근함 섞인 공간을 퇴색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굳이 자세한 내 막을 남매에게 얘기는 하지 않았으나 그들도 눈치는 있는지 어느 정도는 짐작하는 듯 했다. 상관하지 않는 듯 했으니 별 문제는 없었 지만. "오늘도 아르바이트 갈거니?" "응" "그래? 음. 난 학원을 하나 다니려고 하는데.... 아무래도 수업이 끝 난 다음은 시간이 부족하니까 등교 전 아침 시간으로 알아봐야 겠 다" "학원? 무슨 학원에 다닐 건데?" "아-학원이 아니구나, 도장. 태권도 도장에." "에-?" "공부는 학교에서 하는 것으로 충분해. 그걸 다 외우려니 머리가 아 프다. 격투기를 두루 섭렵했지만 난 주로 손을 사용했거든. 그런데 한국의 태권도는 다리, 발을 잘 사용하더라. 위력이 있었어. 배워두 는 게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아서 말이야." '더 강해져서 뭐 하려고?' 상민은 마무리한 필기를 멈추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상희도 같은 생각인 듯 했지만 굳이 반대는 하지 않았다. "진. 우리가 너무, 돈을 밝힌다는 생각하지 않아?" "응? 그 정도로 뭘? 스스로 일해서 미래를 대비하는 건데. 좋은 일 아니야? " 진의 집으로 이사도 했고 맡은 일거리가 현저히 줄어들어서 그 동 안 몸이 많이 나빠진 어머니도 안색이 훨씬 좋아지셨다. 저번 일로 받은 수표를 저축에 더해서 남매는 학생치곤 꽤 부자였지만, 어깨의 멍이 가시자 상희는 그 후 다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었고 진도 늘 도와 주었었다. "하지만. 음. 우리가 너무 돈벌이에 연연해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 어. 전에는 엄마를 돕는 정도였지만 지금은 우리끼리 하니까.... 오빠 나 나도 학원들도 다 그만 두었고. 그래서 진 네가 우릴 너무 욕심 이 많다고 생각하진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 상민은 괜히 정리 끝난 공책을 들어 펄럭대었다. "상희야." 진은 앞자리에 앉아 있던 상희의 볼을 톡톡 건드리더니 턱을 괴고 이야기했다. "너흰 돈이 많이 필요해. 지금 당장은 아무 문제도 없지만 너희 병 은 유전이 되니까 자자손손 돈이 필요하잖아? 틀린 말 아니지? 상 민이 젤 급하지만. 나중에 결혼해서 남자아이만 낳는 행운이 따른 다면 또 괜찮겠지. 하지만 너는? 그런 먼 후의 일을 미리 걱정하지 않는 다고 해도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이 왜 나빠? 사회경험도 되고, 그것도 '배우는 것'이야. 난 너흴 나쁘게 안 봐. 아르바이트 금지란 교칙을 들고 누가 걸고넘어지거든 내가 막아 줄게. 심각해 할 필요 없어." ".......응." "누가 병 문제로 또 수군대거나 하진 않아?" "그럴 리가. 모두 친절해 졌어." 상희는 표정이 밝아졌다. 진의 반으로 오빠와 옮겨왔을 때, 새 담임이 된 물리 선생님은 조회 시간에 학급아이들에게 상민과 상희를 소개하며 그들의 병에 대해 공개했다. 그리고 병에 대한 오해가 없도록 자세한 설명을 직접 해 주고 반 친구들의 우애를 이끌어 내는데 신경을 써 주셨다. "진, 고마워." "고맙다는 소린 정말 지겨워." 눈을 흘기며 상희는 대꾸했다. "그런 것을 지겨워 할 수 있다니 정말 넌 대단해." "그래. 내가 한, 대단하긴 하지." 진은 특유의 미소를 지었고, 선생님 오신다는 외침과 함께 그들의 대화는 끝났다. [10] 8. 마법의 나이 재미있는 일이 많았다. 와플을 팔며 노래를 부르던 진은 모 에이전트 사에서 스카웃 제의 를 받기도 했고-진은 끈질긴 그들에게 계약금으로 100억을 주면 생 각해 보겠다고 했었다.-노기 충전하여 한 팀이 돌아간 후에도 잦은 프로포즈를 다른 연예계통에서 지속적으로 받곤 했다. 하지만 모든 제의에 "싫어요"하고 대답했고 거리에서는 건방진 그 녀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웬일인지 더 인기가 좋아졌다. 중간고사가 끝났을 때 진은 손등으로 이마를 훔치며 "시험이란 정 말 무서운 거구나"했고 다른 아이들 못지 않게 기진 맥진 해 했지 만 성적은 쌍둥이 남매들 보다 좋게 나왔다. 학생회장 선거에 후보로 나와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현 학생회장 인 2학년 선배의 말에도 진은 "귀찮아서 싫어요" 하며 필시 접근 의도도 있어 보였던 그 인기 있 던 선배를 보기 좋게 딱지 놓았다. 진의 일이 다른 학교에까지 소문이 퍼져서 패거리의 문제점등에 도 움을 달라고 찾아 온 써클 남학생들과 여학생들에게 "공부하느라 바빠. 님들은 공부 안 해?" 하고 핀잔을 주어 좇아 보냈고, 한판 뜨자는 도전에는 미꾸라지처럼 도망 다니다가 발목을 잡힌 경우에는 여지없이 도전자를 깨 주며 말했다. "정신 좀 차려라. 엉?" 상희가 진과 엄마의 동의가 적힌 취업계약서를 발견했을 때도 한바 탕 난리가 났다. "진. 이건 너무 과해! 우리 엄만 그렇지 않아도 너무 많은 월급을 받고 있는데 아파트까지 명의를 이전해 주다니?!" "내가 한국을 떠나면 유효한 거야. 퇴직금이지 뭐." "진 도대체 재산이 얼마나 되는 거야?" "음. 아주 많거든?" 상희는 오빠에겐 알리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상민은 아마 더 위축될 것이다. 가을은 점점 깊어가고 있었다. 학교에서 한번은, 속없이 여학생들에게 치근대던 학교의 모 선생이 진에게 그 광경을 목격 당하고 징계 처분으로 해고되기까지 했다. 재미없는 수업을 진행하는 선생의 과목 시간에 진은 다른 학생들 처럼 대 놓고 잠을 잤고, 성실하고 인기 있던 선생님의 시간에는 제 일 질문을 많이 하며 재미있어 하기도 했다. 그런 모난 학습태도에도 불구하고 진은 선생님들에게 총애 받았고 아이들에겐 우상이 되었다. * 진은 점점 웃음이 많아졌다. 우스개 소리나 농담도 곧잘 하며 상희등을 놀리기도 했고 하루하루 밝게 진화해 갔다. 그녀는 자신의 변화된 삶을 즐기는 여유를 부릴 수 있게 되었고, 그 에 관한 꾸밈없는 진의 고백에 상희는 웃으며 말했다. "엄마가 전에 그랬는데 말이야, 진. 16세는 마법의 나이라고 그랬어. 그 나이에 가장 젊고, 가장 많은 꿈을 꾸고, 일생을 통틀어 가장 행 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한 대... 꿈 꿀 수 있는 시기이고 꿈을 이룰 수 있는 가장 좋은 시기라고도 했어. 그러니까 진은 지금 마법의 나이 16세인 셈이야." "마법의 나이라......너는?" "내게도 마법의 나이야. 널 만났잖아. 한국 나이로 치면 17세지만 만으로는 16세니까! 나도 그래." 상희는 자정이 넘은 시간이 되었음을 확인하고 숙제는 아침에 학교 에 가서 베끼는 것으로 대신 하기로 했다. 그리고 친구의 곁에서 웅얼대듯 이야기했다. "진. 넌 우리에게 도움을 받는다고 하지만 모두들 도움을 받고 있는 쪽이 우리라는 것을 알아. 오빠도 나도 엄마도 그렇게 생각해. 널 만나지 못했으면 어땠을까....우리야말로 항상 굶주렸었어. 아, 배고 픈 거 말고 말이야." "알아 들었어." 진은 전등 불빛으로 방안이 환했지만 밤이 되면 으레 느낄 수 있었 던 특유의 고요함을 의식하며 상희의 말을 경청했다. "우리... 항상 사이가 좋았던 것은 아니야. 중학교 2학년 때 오빠가 치과에 갔다가 이를 뽑고 피가 도통 멈추지 않아서 알게 된 그 병 으로, 우리 집은 정말 아수라장이었어. 그 전에는 그래도 보통 가정 이나 다름없었는데 말이야..." "엄마는 아빠를 속이고 그때까지 혼자서 불안해하던 일을 마주하게 되자 날마다 울기만 했어. 나는, 엄마가 너무 미웠어. 보통 이런 병 을 겪어도 우리처럼 쌍둥이 모두에게 병이 유전되는 경우는 드물잖 아? 쌍둥이 인 것도 드문 일인데 더 드문 병이 우리 둘에게 모두 물려 지다니. 아무튼, 왜 날 낳았느냐고 나도 엄마처럼 살게 될 거 라고 많이 화내고 엄말 원망했었어. 오빠는 그런 내게, 자기보다는 낫다며 또 화내고....우린 매일 싸웠어. 너무 무서워서 이성을 잃었던 것 같아." "..................." "처음에 아빠는 그래도 자식이니까. 낫게 해 보려고 방법을 알아보 는데 애를 썼지만 난치병이라는 것을 알고... 때마침 직장도 잃고 해 서 더 견디지 못하고 엄마에게 이혼하자고 그랬어. 결혼해서 평생을 죽은 듯이 살던 엄마는 자존심도 버리고, 그래도 우리를 봐서 그러 지 마라고 했지만 아빠는 우리들을 견뎌내질 못했어. 아빠가 집을 나가자 오빠는 가장의 책임을 져 버렸다고 아빨 증오하고....날 미워 하고 엄마를 무시했어." 진은 말 없이 상희의 얼굴을 훔쳐 주었다. "진. 우리가 다시 마음을 합하게 된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었어. 오 빠도 엄마도 나도....우리들은 혼자서는 안됐어. 서로를 받치고 있던 기둥 중 하나가 빠져나가 버리자 휘청대었지만. 정말 어쩔 수 없었 어. 생활은 해야했고....그때쯤 소문이 이상하게 나기 시작해서 오빠 와 나는 따돌림을 심하게 당했어. 아빠는 우리를 버렸지만 엄마는 아니었어. 어느 날, 몇 일 동안을 집에 들어오지 않던 오빠가 들어 오니까 엄마는 오빠를 붙들고 막 울면서 미안하다고. 미안하다고.... 빌었어. 오빠도 울기 시작하고 나도 울었어.....그리고 이를 악 물었 어........우린 죄지은 게 없어. 그렇지, 진?" "죄가 아니야. 상희야." "그래. 죄가 아니야. 널 만나게 돼서 나도 알았어. 우리 병은 어쩌면 다른 사람이 가지지 못할 행복을 얻게 될 계기였던 것 같아. 그리고 난 지금 너와 같은 나이야. 세상은 공평해. 누구도 너처럼 예쁘고 강한 친구를 얻진 못 할거야. 난 소원했던 친구를 받았어. 신은 있는 거야. 그렇지?" "그래. 신이 한 일이라면 칭찬해 줄만 하지." "정말 그렇게 자신을 높게 평가하다니 뻔뻔해. 진." 상희는 눈물을 멈추고 웃었다. "상민이도 마법의 나이일까?" "그. 글쎄? 오빠는 남자지. 음. 남자들은 좀 웃기는 방향으로 이상을 키우지만 우리처럼 꿈은 꿀 거야. 뭐? 아니라고? 오빨 무시해?" "우-웃-! 무시한 거 아니야. 그만둬!" 그들은 숙제 물을 널려 둔 채 우당탕거리며 서로를 간질이며 깔깔 대고 소리 높여 웃기 시작했다. "아니야....너희를 만나서 난 약점이 생겼어. 그만해! 던져 버린다. 하. 하. 하..아...배야. 내가! 간지럼을 타다니!" "음. 유일한 네 약점을 어떻게 공격 안 할 수가 있어, 진? 으헷-! 오빠가 얼마나 부러워할까. 요즘 오빠가 내게 불평까지 하지 뭐야. 하지만 끼워 줄 순 없지. 음. 또 간 닷!" 진은 상희의 손톱 세운 공격을 피해 부엌으로 도망가면서 계속 배 를 잡고 웃었다. 진은 상희의 말이 맞다 고 생각했다. 요즘처럼 진심으로 웃게 되면서 저 깊은 곳에서 차오르기 시작 해 가슴 전체를 메우는 그 밀도 높은 충족감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으 니까....... * 그 날 밤 진은 꿈을 꾸었다. 생생한 색채의, 기억 속의 한 단편이 물밑에서 떠오르는 듯. 진의 무의식 속에 펼쳐졌다. 할머니는 힘없이 침대에 누워 있다가 침실로 들어 온 어린 여자 아이의 얼굴을 확인하고 반겼다. "오- 아가, 잘 잤니?" "네이 할머니. 어디 아파요?" "나이가 들어서 그렇단다. 널 보게 돼서 기쁘구나. 요즘 몇 일 집에 없는 것 같던데." "예에. 데이먼이 잡혀갔어요. 전 샘의 집에 있겠다고 했잖아요." "그랬던가? 음......" 할머니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할머니 아파 보여요. 병원에 연락해 드릴까요?" "아니다, 진. 나는 시간이 다한 거야. 아픈 게 아니란다. 이리 오겠 니?" 진은 침대에 까치발을 하고 서서 침대에 기대앉아 할머니의 손을 잡았다. "널 알게 되어서 정말 기뻤단다. 진. 내가 조금만 젊었어도 너에게 도움이 되었을 텐데." "................" "진아. 넌 어릴 때 죽은 내 딸을 닮았다. 너처럼 짙고 고운 색은 아 니었지만 그 애도 검고 곱슬 거리는 머리카락을 하고 있었지. 그 앨 사랑했어." ".......죽었어요?" "그래. 소녀 시절을 넘기지 못하고 사고로 나보다 먼저 주님 곁으로 갔지." 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노쇠해서 뼈마디가 잡히는 할머니의 손 을 잡고만 있었다. "난 이 가난한 동네에서 살고 있지만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었단다. 예전엔 나도 미인 소릴 들으며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하기도 했었 지. 지금은 그런 것이 모두 추억일 뿐이지만 말이다." 할머니는 눈이 침침해졌는지 안경을 찾아 코에 걸쳤다. 진은 익숙한 할머니의 방안에 낯 설은 기운이 감돌고 있음을 감지 했다. 무언가....그리운 것. 할머니의 옛 이야기가 불러일으키는 향수 같은 것. 그리고 두려움. 어린 진이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난 죄도 많이 지었단다. 나이 들면서 속죄하지 못한 일들로 가슴 아팠던 적도 많다. 하지만 황혼에 접어들어 내겐 더 이상의 희망이 없는 줄 알았는데, 널 만났단다. 어쩌면 내 인생을 신께서 받아 들 이지 않으실 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는데 널 보내 주신 것을 보면... 나도 그 분의 은혜를 입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단다. 진." "신이 있나요?" "그럼! 진. 신은 계신다. 언제나 우릴 지켜보고 계시지. 사람들은 모 두 그 분의 사랑으로 태어나고 그 분에게로 돌아간단다." "할머니. 저도 죄를 지었어요. 그럼 저도 벌을 받게 될까요?" "진........" 네이 할머니는 진을 끌어안아 품속에 가두었다. "인간은 누구나 죄를 짓는단다. 그리고 신의 시험에 들고 신의 자비 를 청하고 신의 축복을 갈망한단다. 살면서 짓는 그 많은 죄를 신께 선 또, 항상 용서하신 단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렴. 잘못한 것이 있 으면 그만큼의 속죄를 하면 된단다. 죄 값은 누구든 어떤 형태로든 치르게 되어 있거든. 뉘우치지 않는 자는 주님 곁으로 갈 수 없겠지 만, 너처럼 착한 아이를 신이 거절하시겠니?" ".............." "걱정 말아라, 아가. 넌 아직 어린아이이고 어린아이의 죄는 죄가 아니란다. 항상 주님께 감사 드리고 그 분의 가르침대로 열심히 살 면 언젠가는 너도 사랑해 주고 믿어 주는 친구들이 주위에 많다는 것을 알게 될 거야. 진. 사람은 누구나 행복해 질 특권을 주님께 받 고 태어난단다. 하지만 신을 믿지 않는다면 그런 것이 다 무슨 소용 이 있겠니?" "......정말 신이 있는 거 에요?" "그렇고 말고. 의심이 많은 아이구나. 내가 죽어서 주님 곁으로 가 면 아니, 죽어서 사실은 신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너에게 제일 먼저 나타나 알려 주마. 내 말이 헛소리였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럴 리는 없을 거야. 주님을 믿으렴, 진. 그러면 가장 강력한 동반자가 생기는 거란다." "................." 할머니는 애독서 중 한 권이 분명한 책을 배게 아래를 더듬어 찾아 내었다. 그리고 페이지를 넘겨 한 부분을 찾더니 진에게 보여 주었 다. "아가. 너에게 해 주고 싶었던 것이 많았지만 아무래도 내겐 시간이 별로 없는 것 같다. 네 곁에서 네가 자라는 것을 보고 싶은 욕심이 들지만. 하늘에서 내 딸과 먼저 간 남편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학교에 안 다니지? 교회도 안 나가고. 하지만 이 근처에서 너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올바르게 가르쳐 줄 사람이 드물다는 것이 늘 걱정이 되었단다. 이건 내가 가끔 보는 시집인데.....여길 보렴. 도움이 될 거야. 어렵지 않은 시니까.......글을 읽을 줄 아니?" "네. 읽을 줄 알아요." 할머니는 대견하다는 듯 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어느날 나는 하늘의 신께 말하였습니다 이제 나는 내 존재의 의미를 밝혀 보렵니다 이제 나는 내 속에 감추어진 재능을 찾아내어 내 능력이 닿는 데까지 그것을 크게 발전시키려 합니다 그리하여 내게 주어진 이 삶을 더없이 충만된 삶으로 가꾸어 나갈 것입니다 또 그렇게 하되 나처럼 살아가려고 하는 다른 이들의 삶을 침범하지는 않으렵니다 그러자 신이 대답하였습니다 "더 바랄 것이 없다" > "좋은 시지? 요즘엔 머리 나쁜 사람도 이해할 만큼 쉽고 잘 써진 글이 많더구나. 내 젊었을 때는 싯구 하나 알면 두고두고 써먹을 정 도로 귀하고 의미도 알기 힘들었는데 말이야. 이것도 가지렴." 할머니는 전 재산이 분명한 지폐를 지갑에서 꺼내어 진의 작은 손 에 쥐어 주었다. 그리고 후련하다는 듯이 주름진 얼굴에 웃음을 띄 고 진의 뺨에 키스했다. "널 사랑한다. 아가. 예쁘게 자라렴. 주님께서 항상 돌봐 주실 거 야." 진은 할머니 곁에서 그녀가 주었던 책을 펴들고 처음부터 하나 하 나 읽어 내려갔다. 침대에 다시 누워 진의 낭독을 듣고 있던 네이 할머니는 얼굴에 평 온한 미소를 지은 채 잠이 들었다. 진은 점심시간이 훨씬 지났음을 알고 할머니를 깨웠지만. 그녀는 일어나지 못했다. -네이할머니. 할머니 말씀이 맞아요. 신은 있는 거죠? 진은 꿈속에서 소리쳤다. 갑자기. 화면이 바뀌듯 꿈이 일그러졌다......! 그리고 새카만 어둠 속에서, 한 여자아이가 찢어져 옷의 형태도 갖 추지 못한 차림을 하고 무릎을 꿇고 웅크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이의 곁에서 혁대를 들고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남자가 갑자기 고개를 치켜들고 똑바로 쳐다보았다. "트라우마는 극복했어, 진?" -헉!! 진은 꿈에서 깨어나 벌떡 일어났다. 손으로 얼굴을 감싸다가 이마에 식은땀이 맺힌 것을 알았다. '데 이 먼 !!' 상희가 도장에 나갈 시간이라며 방문을 두드리는 순간, 진은 악몽에서 깨어났다. "들어와" "어제 너무 늦게 잤나 봐. 못 일어나겠어, 진?" 진은 불쾌한 꿈을 털어 버리려는 듯, 벌떡 일어나 상희에게 다가가 그녀를 깊이 끌어안았다. "왜. 왜 그래?" "..........어젯밤 간지럼의 복수." "으잇- 정말! 또 한번 당해 볼래?" 힘의 차이로 꼼짝 못하고 꼼지락거리는 상희를 보고 진은 다시 웃 을 수 있었다. *참고 : 위의 시는 누군가에게 무엇이 되어(Something to Someone) -라는 제목의 예반 (Javan) -이라는 사람의 시집에서 발췌했습니다. *트라우마(trauma) : 충격적인 사건을 계기로 생긴 마음의 상처. 외상. (영구적인 정신 장애를 남기는) 충격. [11] 9. 편지 -친애하는 나의 친구 니콜라스에게- 잘 있니, 니콜라스? ........고만 뛰어. 침대 내려앉겠다. 그렇게 좋으냐? 내가 연락 않겠다던 다짐을 깬 것이 놀랍지? 한국에 와서 친구를 많이 사귀었어. 그리고 그들과 생활하면서 너와 샘. 마리. 캐서린. 네 동생 찰리까 지. 아주 보고 싶다는 것을 알았지 뭐야. 두 달 후쯤 이곳에서 다니고 있는 학교가 방학을 하면 뉴욕에 갈까 생각 중이야. ........샘과 마리에게 주위에서 서성거리지 말고 함께 읽으라고 하렴. 너희 가족의 행동 패턴이 다 보인다. 후 훗. 나와 같이 사는 쌍둥이 친구들-그들의 이름은 박 상민, 박 상희야.- 은 혈우병을 앓고 있어. 알아보니까 난치병이긴 하지만 10년 후쯤엔 완쾌시킬 치료법이 나 올 것이라는 전망이 있더구나. 이곳보다는 미국에서 연구가 더 진행되고 있지 않을까 해서 친구들 을 데리고 가보려 해. 진찰도 받고. 10년 후라면 기회가 있는 셈이니, 선 치료가 가능 하도 록 예약을 해 볼까 하고 말이야. 그러니 그때 볼 수 있었으면 해. 잊지 말라고 공항에서 악을 쓰더니 벌써 날 잊은 것은 아니겠지? ^^농담이야. 이웃들에게 안부 전해 줘. 마리에게 바가지 적당히 긁으라고 얘기 해 주고 샘도 이젠 위험한 일에는 나서지 말라고 전해. 나이도 생각해야지. 찰리에겐 가수 되는 거 어렵지 않더라고 전해 주고 말이야. 하 하. 잘 지내. 두 달 후에 보자, 니콜라스. -마음을 담아, 너의 친구 진.- 추신 ; 내가 이런 식의 편지를 쓰다니! 내 자신이 더 놀랍다. * 기말고사가 끝났다. 진은 쌍둥이들을 데리고 곧 바로 뉴욕으로 가고 싶었지만 그 동안 불어난 친구들 때문에 잠시 지체해야 했다. "진. 그렇게 급할 것 없잖아! 우리랑 조금만 놀자. 겨우 시험도 끝났 는데. 고1 마지막 방학이라고! 아. 나는 시간이 너무 무서워. 이 겨 울만 지나면 입시 전쟁터에 갇히게 될 거야." "네가 공부에 그렇게 신경을 쓰다니, 난 그 동안 왜 그걸 몰랐을까" 수경의 말에 새로이 그들의 패에 끼어 들게 된 반장이 눈썹을 치켜 뜨며 이야기했다. 그들 중 가장 모범생이기도 한 학철은 진도 상희도 상민도 막지 못 하던 수경의 수다를 적당히 막아 주는 방패막이기도 했다. "날씨도 추운데 뭐 하러 밖으로 놀러를 다녀? 윽- 상희야. 이번 방 학엔 아르바이트 패스야. 실내에서라면 몰라도 일부러 사서 고생은 하고 싶지 않아. 상민이도 무리하면 안되니까....가끔씩은 노는 것도 좋잖아? 여비 걱정말고 미국에 가자. 전에 말했던 것처럼 검사 받아 보게." "에.....그게...." 상희와 상민은 그렇게 하자고 말하고 싶었지만 수경과 학철과 전에 진에게 학생회장을 권했던 2학년 유성선배의 눈초리에 선뜻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패스푸드 점에서 시험이 끝나고 모인 그 자리에는 유성선배의 여동 생인 유영이도 나와 있었다. 유영이는 자신의 오빠와 아는 사이라는 것을 모른 채 쌍둥이들이 와플을 팔던 곳에서 열렬한 진의 추종자로 따라다녔는데 나중에 유 성과 같은 학교라는 것을 알고 '땡 잡았다!' 하는 표정으로 중학교 수업이 끝나면 오빠 핑계를 대고 그들의 학교 안까지 쳐들어와 진 과 쌍둥이들을 염탐하고는 했다. "진. 수경의 말도 맞아. 시험기간에 모두 스터디 그룹까지 하며 열심 히 공부했잖아. 몇 일 늦게 간다고 큰일나는 것도 아니고." "그래. 나도 그렇게 급하진 않다고 생각해." 상민과 상희의 말에 진은 턱을 만지작거리며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렇다면.....물론 나도 서울에서만 돌아다녀서 갔다오면 전국일주라 도 해 볼까 했지만. 방학기간도 짧고 아무래도 겨울은 추워서 싫으 니까. 음. 그럼 가는 길에 하와이에 들를래?" "하와이?!" 수경은 기도하듯 두 손을 깍지 끼더니 애타게 진은 쳐다보았다. "........모두 다 가자. 헉...내가 이렇게 끌려 다니다니. 5박 6일! 그 이 상은 안 돼. 그 후엔 너희들은 집으로 돌아와. 상민과 상희는 내 말 대로 미국에 가는 거고?!" "좋아! 얏-호!!" "좋지!" "나도. 몇 일쯤은 학원을 쉬어도 돼." "언니들 오빠들~ 나도 끼워 줘요" "대신! 너희 개인 용돈은 알아서 해. 그것까지 바라면 굶길 거야!" 수경을 위주로 환호성을 지르면서 그들은 기대에 부풀어 떠들어대 기 시작했다. "저.....진. 5박 6일이라니. 너 그걸 짧게 잡은 거야? 바보구나. 쿡쿡." "상희야 아직 진은 우리문화에 완전히 동화되지 않은 거야. 1, 2박 도 아니고 학생이 5박 6일이라니. 저 녀석들이 희희낙락하는 것도 당연해." "거기다 하와이.....쿡쿡쿡." 상민과 상희의 말에 진은 한번 더 한숨을 쉬었다. * "너희들은 시차가 뭔지도 모르냐? 자지 않아도 돼?" 낮에 출발했는데 긴 시간이 걸려 도착한 하와이는 여전히 낮이었다. 진은 예약한 호텔에 짐을 풀기 위해 들러 눈을 좀 붙이려 했지만 친구들의 활기찬 모습을 보고 어쩔 수 없이 따라 나설 수밖에 없었다. "진. 우린 젊음이 넘쳐흐르다 보니, 하루가 아니라 몇 일을 자지 않 아도 상관없어. 공부하는 것도 아니고 노는 일에 왜 잠을 자서 시간 을 낭비하니? 가자. 얘들아! follow me!" 수경은 여왕처럼 포즈를 취하더니 친구들을 이끌고 달려나갔다. 태평양은 아름다웠다. 진은 그 찬란한 햇살이, 푸른 바다가, 꿈꾸는 표정의 관광객들과 여 유로움이 풍겨나는 화려함이. 처음 겪는 것이라는 것을 친구들과 어 울리며 깨달을 수 있었다. 밤이 되자 관광객들을 위한 여러 가지 공연이 이곳 저곳에서 열렸 다. 진은 귀에 꽃을 꽂고 누군가 걸어 준, 야생화로 엮은 목걸이를 하고 굵게 웨이브 진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친구들과 함께 모닥불을 돌면 서 춤을 추었다. 타닥거리며 타는 불꽃이 재와 함께 별빛이 무수한 하늘로. 하늘로. 날아올랐다. 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졸고 있는 줄 알았던 상희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진, 너무 좋다. 그지?" "응." "우리 맨 날 여행만 다녔으면 좋겠다. 학교를 졸업하면, 세계일주를 하는 거야. 맛있는 것만 먹고, 멋진 것들만 보고, 좋은 사람들을 많 이 만나고...." "그래. 좋은 생각이야. 그렇게 해." "후후. 네게 말하면 뭐든 이뤄지는 것이 신기해. 네가 너무 좋아 진." "나도 네가 좋아." "진......." "왜?" 밤이 늦어 사람들의 숫자가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모닥불의 열기 로 사람들의 얼굴이 붉게 물들어 가고 어디에선가 잠의 요정을 부 르는 듯한 조용하고 따뜻한 음악소리가 들려왔다. "넌 내 친구야. 널 믿어. 너무 믿으니까, 언젠가....날 배신해도 돼." "..........?" "널 너무 신뢰하니까, 너무 사랑하니까. 너만큼은 날 배신해도 용서 할게." "배신 안 해." "알아. 그 말은.... 내가 배신하게 되어도 날 용서하란 소리야....그냥, 해본 소리야, 진. 난 네가 너무 좋아." 진은 밝고 빛나는 별들이 가득 떠있는 밤하늘을 쳐다보며 상희의 말을 생각했다. '그래. 그런 친구가 진짜 친구인지도 모르지.....' 10. 과거의 그림자 공항에 마중 나와 있을 줄 알았던 니콜라스를 찾을 수 없었다. 진은 서운한 마음이 드는 것에 멋쩍은 기분이 되었지만 일단 말이 통하지 않아 곤란을 겪고 있는 남매를 위해 호텔을 잡았다. "진, 중요한 일이 있나 보지. 너무 섭섭해하지마. 뭐, 남자친구에게 새 애인이 생겼을 수도 있고 말이야." 상희는 기대하는 듯한 어조로 오빠를 의식하며 진을 위로했다. "음. 일단 쉬고 있을래? 지배인에게 편의를 봐 달라고 얘기를 해 놓 을께. 니콜라스에게 시합이 있어서인지도 모르고....무슨 다른 일이 있는지도 모르니까, 나 혼자 갔다올게. 뉴욕거리는 위험해. 멀리 돌 아 다니지 말고 기다려?" "응. 진, 갔다와. 하와이에서 실컷 놀았는데 뭘. 돌아 다녀도 오빠와 같이 호텔 내에만 있을게." "상민이 너도 괜찮겠어?" "상관없어, 진. 우리가 애도 아니고. 갔다와. 무슨 일이 있으면 전화 하면 되잖아." 진은 쌍둥이들을 남겨두고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보냈던 그녀의 거 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얼마 지나지 않아 상희와 상민을 기다리게 하고 온 것을, 아니 그들을 뉴욕에 데리고 왔던 자체를 평생동안 후회하고 또 후 회했다. * "마리아!" 샘의 집은 적막이 감돌고 있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 파티 준 비중이었는지 갖가지 색상의 풍선이 어지럽게 거실에 넘쳐나고 있 었다. 음식을 만들다 말았는지 하다만 요리 재료들로 부엌은 혼란스 러웠지만 북적대어야 어울릴 주위 모습과는 다르게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발치에는 '진, 집에 돌아온 걸 환영해!'라고 커다랗게 쓰여진 플랭카 드가 구겨진 채 방치 돼 있었다. 진은 불안감이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밖에서 자동차 브레이크의 마찰음이 들리자, 진은 다시 집 밖으로 나갔다. "진!" "찰리! 마리아. 어떻게 된 거야? 무슨 일 있어?" 키가 자라서 예전의 니콜라스를 연상시키는 찰리와 홈웨어 복장에 급하게 두른 듯 외투 차림의 마리아는 진에게 달려왔다. "와 줬구나. 공항에 나갈 수가 없었다, 진. 오! 진. 어떻게 하면 좋으니?" 마리는 울음을 터트렸다. 진은 그녀에게서 사정을 듣는 것을 미루고 찰리에게 시선을 옮겼다. "무슨 일이야?" "형이 납치됐어! 모르고 있다가 오늘 아침에야 아빠가 찾으러 나갔 는데, 아빠도 사라졌어!!" '누가?! 무슨 이유로?!!' 샘은 부자다. 원래 돈을 만지는 일에 관여하고 있었지만 진이 그를 도와 검은 돈이 아닌 떳떳하게 돈을 벌어들일 수 있게 도와 주었었 기 때문에 여전히 그 뉴욕 버림받은 거리에 살고 있었지만 지하경 제에서도 사회의 들어 난 경제에서도 양면에 영향을 끼치는 주요인 사였다. 그래서 그의 힘은 막강했고, 진을 만나기 전, 위험한 일만 할 수 있 었던 때에 비해 안전이 보장되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가족에게 어떤 간 큰 멍청이가 손을 댄 것일까... "진. 우린 이 거리를 떠나 이사하려고 했었어. 샘도 이젠 나이가 들 고 해서 흑인들을 돌보는 일에 더 이상 기력이 없었거든. 내가 오랫 동안 그렇게 하자고 했었지만, 그는 듣지 않았잖아? 그런데 네가 떠나고 나서 샘은 후배에게 클럽도 넘기고 힘든 일이 있으면 도와주겠다고 약속도 하고...좋은 집으로 이사해서 환경을 바 꿔 보려고 했었어. 하지만 네가 보낸 편지를 받고 니콜라스와 샘은 돌아올 집이 있어야 한다면서 널 만날 때 이 집에서 마중하자며 이 사를 미루었었어. 우린 네가 친구들과 방문하면 깜짝 놀라게 해 주려고 몇 일 전부터 파티를 준비했어. 니콜라스가 어제 저녁에 네게 줄 선물을 따로 준 비하겠다며 집을 나갔는데 돌아오지 않았어. 거리는 위험하지만 우리에겐 아니잖아! 돌아오지 않았어도 별 걱정 은 하지 않았는데 아침에 배달된 신문지 사이에 카드가 들어 있었 어. 샘은 곧 밖으로 나갔지만 클럽에도 오지 않았대. 어디에서도 찾 을 수가 없었어!" 마리가 내민 카드는 네 장의 타롯(Tarot) 이었다. 진은 그것들을 펼쳐 두고 단서를 찾기 위해 머리를 회전시켰다. 운명의 수레바퀴 뒷면에는 붉은 매직으로 복수(Revenge) 라고 쓰여 있었고 죽음(Death) 카드에는 유괴(Abduction)라고 쓰여 있었다. 타롯 카드는 의미가 너무 많았다. 일단 진은 그 중에서 가장 부정적 인 의미만을 추려 내었다. 공통점이라면 네 장의 카드가 모두 정방 향이든 역방향이든 부정적인 면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 운명의 수레바퀴(wheel of fortune ; 윤회) 악마 (devil ; 구속) 심판 (judgement ; 부활) 죽음 (death ; 종말) > '-운명의 수레바퀴는 윤회. 돌고 도는 바퀴. 기회. 인과 응보. 변심. 운의 하락......(복수) -악마는 구속. 공포. 불안한 만남. 재기의 여지없음. 위험. 반성의 계 기. -심판은 부활. 참회. 자각. 인과응보. 빚 청산. 과거의 상처 상기. 절 망. 운의 저하. -죽음은, 종말! 희망 없음. 가치를 위한 희생! 새 친구의 출현......(유 괴)....!!!!' 카드의 의미를 더듬어 가다 문득 떠올린 생각에 진은 태어나 처음 으로 가장 무시무시한 공포를 체험했다. "마리! 내가 귀국한 것을 모두 알아?" "...어? 알지, 진. 니콜라스가 두 달 전부터 자랑하고 다녔는데." "데이먼은! 데이먼은 출옥한 후 이곳에 왔었어?" "데이먼 플랜트? 그래. 그가 어딜 가겠어? 경찰의 감시 때문에 예전 처럼 자유롭지는 못하지만 상점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다가 가끔 클 럽에 왔었어." '오...하느님. 하느님.....' 진은 수화기를 잡고 상민과 상희가 머무는 호텔에 전화를 걸었다. 아득하게 느껴지는 벨소리가 몇 번 울리고, 헤어진 지 몇 시간 되지 도 않았는데 벌써 멀게 느껴지는 한국어로 상민이 전화를 받았다. 진은 가슴을 쓸어 내렸다. "진? 친구는 만났어? ....상희? 상희는 아래층에 내려 갔어. 사람 구 경을 좀 하겠다며. 난 네게 전화가 올까봐서 방에 있었는데....무슨 일 있었어?" "찾아 봐! 지금 당장. 어서! 그리고 지배인에게 신변보호 요청을 해. 일단, 상희를 찾아! 이곳 전화번호 알려줄게. 빨리- 서둘러 상민아!" 진은 상민에게 전화번호를 불러 주고 수화기를 내려놓은 채 초조하 게 기다렸다. 상민에게 전화가 온 것은 그로부터 15분쯤 지나서였 다. 벨이 울리자마자 진은 다시 수화기를 낚아챘다! "진. 상희가 보이지 않아. 호텔이 넓어서 다는 찾을 수가 없었어. 영 어를 잘, 못해서 사람들에게 물을 수도 없고. 그런데.....어? 여기....." "왜?!" "아니, 아까는 없었는데 누가 다녀 갔나봐. 전화기 옆에 카드가 놓 여 있어. 상희가 두었을까? 진은 심장이 너무 거칠게 뛰어서 비명이 새어 나올 것 같았다. "무. 무슨 카드야?" "타롯 카드 네 장이야. 뒤에....진! 붉게 숫자가 쓰여 있어. $1,000,000 이라고... 무슨 뜻이야. 상희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거야?!" 진은 전 뉴욕 거리에 돈을 풀어 정보원들을 끌어들였다. 샘과 친분이 있으며 그를 따르던 패거리들과 도움을 주었으면 주었 지 결코 손 빌리지 않았던, 샘과 그녀에게 은혜를 입었던 뉴욕 시민 -주로 힘있는 자 위주였지만 실낱같은 정보라도 얻기 위해 거의 모 든 이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마리와 찰리를 상민에게 데려가 함께 있게 하고 진은, 쏟아지기 시작한 정보더미에 휩쓸려 미친 듯이 데이먼의 행방을 찾 았다. 진이 그의 자취를 제대로 찾아 낸 것은 자정이 지나서였다. 그는 항구와 가까운, 냄새나고 불결한 느낌의 한 부두창고 근처에서 마약을 하려고 몰래 숨어 있던 꼬마 녀석들을 통해 꼬리가 잡혔다. 인질의 안전을 위해 경찰을 부르지 않고 진은 혼자 찾아가기로 했 다. 그녀를 돕기 위해 달려 온 사람들 중에는 현 FBI 특수요원인 맥칼린 파커도 끼어 있었다. 그는 예전 캐서린과 살 적에 진의 도움을 받아 파산 직전이었던 사 업을 부흥시켰던 Mr.파커의 아들이었다. 맥은 마약에 찌들어 있었지만 그 역시 진의 도움으로 대학까지 졸 업하고 FBI에 스카웃 돼서, 화해한 아버지의 배려 속에 신출내기임 에도 불구하고 탄탄대로를 걷고 있던 VIP 격의 인물이었다. "진. 혼자서는 너무 위험해요. 데이먼 플랜트는 그렇다 쳐도 그와 손을 잡은 자들은 샘의 신뢰를 배반한 자들과....확인되지 않은 인물 도 끼어 있어요" "맥. 이들을 부탁해. 데이먼이 노리는 것은 나야. 달리 요구사항이 없는 것을 보면 내가 찾아내리라는 것도 알 것이고 인질이 세 명이 나 되는 데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어. 장소는 파악했으니 주위를 부 탁해. 총성이 울리거나 하면 그때나 달려와 줘. 지금은 나 혼자 가 겠어. 그들도 바보는 아니고, 계획도 있을 테니 상황을 알게 되기까 지 기다려 줘." "............." "진! 나도 가겠어. 아빠와 형이 잡혀 있는데 그냥 손가락 빨고 기다 릴 수는 없다고!" "찰스-!" 진은 현금이 든 가방과 맥이 준 방탄조끼와 총을 챙기면서 냉정하게 대답했다. "마리와 함께 있어. 엄마가 불안 해 하고 있잖아. 무슨 일이 있다 면...그럴 리는 없겠지만 마리를 돌 볼 사람은 너 밖에 없어. 나서지 말고 기다려." "진......." 새파랗게 질린 얼굴의 상민은 검고 흰 얼굴들 사이에서 유독 눈에 뜨였다. 진은 그들 남매와 아침까지 웃으며 재잘거렸던 사실이 너무 나 먼 꿈속의 일처럼 느껴졌다. 하와이에서 그 행복하던 기억을 어 떻게 해야 할까.....그곳에서 헤어진 다른 친구들은 지금쯤 한국에 도 착했을 지도 모른다. 그들과 함께 돌려보냈더라면. 아니, 아예 이 곳에 올 생각도 하지 말 것을. 진은 상민에게 다가가 그를 끌어안았다. "미안해 상민아. 이런 일에 너흴 말려들게 해서. 상희를 구해 올게. 꼭 구해 올게. 기다려 주겠어?" "......조심해 진. 내가 건강하다면 반드시 따라 갔을 거야. 하지만 짐 밖에 되지 않을 테니. 기다릴게. 상희도 걱정되지만 너도, 조심해. 너도 상희 못지 않은.... 내 가족이야." "그래. 상민아. 꼭 돌아올게." 돌아서는 진에게 마리가 눈물을 훔치며 다가와 검은 얼굴을 진의 목에 묻고 울먹이며 말했다. "진. 샘과 니콜라스를 살려줘... 그들을 구해다오, 진." "그래요. 마리. 최선을 다할게요." 진은 두 눈이 흐려져서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구할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무슨 일이 있더라도!! [12] 11. 인질극 뉴욕의 밤바람은 매서웠다. 진은 한국에서 교복을 입을 때와 상희들과 하와이에서 관광을 할 때를 제외하고, 변장이 필요 없을 경우 항상 입던 청바지와 청자켓 차림으로 부둣가에 다가갔다. 줄줄이 늘어선 창고들은 문들이 모두 닫혀져 있었다. 진은 숨을 내 쉴 때 하얗게 뿜어 나오는 입김을 바라보며 고요한 밤거리에 혼자 서 있다는 것을 외롭게 실감했다. 가까운 선착장에는 크고 작은 다양한 종류의 배가 을씨년스럽게 서서 가냘프고 작아 보이는 그녀를 엿보고 있는 듯 했다. 더러운 바닷물, 지저분한 냄새를 실은 비릿한 바다 바람. 진은 어디에선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지 모르는 적을 어렵지 않게 감지할 수 있었다. 그 곳의 모든 것이 적이었다. 진은 숨을 한 번 크게 몰아쉬고 제보를 받았던 곳을 향해 한쪽 발 을 내딛었다. * "세상에, 빨리도 왔군. 이거 정말 반가운데?" 기다리고 있었던 듯 어두운 금발 머리의 중년 남자가 진을 맞이했 다. 그는 수화물이 널려진 한쪽 구석에 짐을 깔고 앉아 술병을 손에 들 고 소리 없이 들어온 진을 바라보았다. 다른 한 손에는 권총이 쥐어 져 있었다. "데이먼." "그래. 반갑구나, 딸아. 이렇게 예쁘게 자라다니. 내가 보는 눈이 있 다니까." 주위엔 기척이 없었지만 진은 오감을 총동원해서 어딘가 붙잡혀 있 을지 모르는 인질과 그의 동료들을 찾았다. "내가 언제 네 딸이 되었지?" "그래? 내가 널 주워 다 키웠던 것을 잊었나 보구나. 배은망덕 한 년 같으니라고." 데이먼은 진이 기억하고 있던 옛 모습보다 훨씬 나이 들어 보였다. 아무리 그라 해도 세월의 힘에는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희미한 랜턴 불빛에 자세한 모습은 볼 수 없었지만 진은 탁월한 시 력으로 그의 빛이 바랜 머리카락을 포착해 낼 수 있었다. "돈은 가져 왔겠지?" 진은 무거운 가방을 그의 발 근처에 가볍게 던져 주었다. "인질들은 어디 있어? 무사하겠지?" 뒤쪽에서, 진이 들어올 때 소리나는 것을 막으려고 완전히 닫지 않 았던 무거운 철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오는 것을 알았지만 진은 돌아보지 않았다. 그와 함께, 어둠 속에서 녹슨 문이 열리는 소리가 데이먼의 뒤쪽에서 또 들리더니 몇 명의 사람들이 나왔다. 그들 중 하나가 스위치를 올렸다. "샘...." 꽁꽁 묶여 몇 명의 흑인들에게 끌려 나온 익숙한 덩치의 검은 얼굴 의 남자는 샘이었다. 그를 인도한 흑인 청년들 중 한 두 명은 진도 아는 얼굴이었다. "사이몬 하워우드." "어이, 반가워. 귀염둥이. 오랜만이야." "어떻게 네가 샘을 배신할 수 있었지?" 진은 물었지만 대답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의 얼굴은 약으로 찌들 어 있었고 눈동자에도 총기가 사라져 있었다. 데이먼은 그것을 노렸 을 것이다. 의지 박약한 흑인 소년과 청년 몇 명을 약에 물들게 하 고 천천히 잠식해 왔을 것이 분명했다. 샘의 얼굴은 입술과 눈이 찢어지고 약간의 타박상을 입은 듯 했지 만 다행이 그 이상의 큰 부상은 없는 듯 했다. 그는 진을 발견하고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샘, 니콜라스는?" "모르겠다. 가까이 있는 듯 했지만 얼굴을 볼 수는 없었어." "아- 네 흑인 남자 친구는 무사히 있으니 안심해라, 진." "상희는? 동양 여자아이." "아. 그 노란 얼굴의 여자 애? 보험으로 남겨 두었지. 지금은 알 것 없어." 진은 낭패감을 맛보았지만 표정에 변화를 주진 않았다. 데이먼과 사이몬의 패들은 걱정되지 않았지만 조금 전 들어와 뒤쪽 에서 자리하고 있는 인물은 위험하다는 경고로 몸의 신경들이 아우 성을 치고 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하워우드, 내가 살아서 돌아간다면 널 죽여버리겠 다. 반드시!" 사이몬은 그의 친구가 겨누고 있는 총구를 믿고 약에 취해 위력은 없었지만 샘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뻗었다. "진의 탓이야. 진, 네가 샘만 위해 줬기 때문이라고. 나도 부자로 만 들어 줬으면 좀 좋아? 그랬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거야." "미친 자식" "돈을 가져 왔잖아. 인질들을 풀어 줘." "아, 안 돼지. 인질은 세 명인데 돈은 한차례 밖에 받지 못했잖아?" 데이먼은 이죽거리며 진이 던져 놓은 가방을 열어 안을 확인했다. "그럼 인질을 바꿔. 도시를 빠져나갈 때까지 내가 인질이 되겠어." "야-아. 너 정말 돈 많구나, 진. 우릴 이렇게 빨리 찾아 낸 것도 놀 라운데, 현금으로 이걸 다 마련해 오다니...기쁜데?" 진의 요구를 무시하고 데이먼은 웃기까지 했다. 긴장과 두려움 무력감이 어우러져 진의 머리를 차갑게 식히고 있었 다. 단 한 명도 무시 할 수 없었다. 모두 구해내야 했다. "진. 넌 총알도 피한다면서? 시험 해 볼까?" 데이먼은 그들 사이에서 가장 여유가 있었다. 그는 변한 것이 없었 다. 나이를 먹어도 예전과 다름없는 것을 보면 말이다. 진은 그에게 달려가 눈을 파내고 사지를 찢고 싶은 충동을 애써 참 았다. 그때 뒤에서 여전히 경계만 하고 있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플랜트. 길게 끌어서 좋을 것 없어. 달고 온 꼬리는 없었지만 근처 에 경찰이 진을 치고 있는지도 모르고. 밖은 내 정보원이 지키고 있 지만 충분하지 않아." ".......그러지." 데이먼은 축축해 보이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고 들고 있던 술병을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려놓았다. 남은 술이 약간 넘치더니 병이 데굴 굴렀다. "거리의 영웅 샘. 돈을 받았으니 널 풀어 주마. 하지만 네 아들과 귀여운 진이 다시 인질이 되었으니 얼른 뛰어가서 다시 교환금액을 만들도록 해. 이번이 마지막이야. 직접 가져올 필요 없어. 저기 내 동료가 가르쳐 주는 계좌로 당장 입금시켜라. 넌 진보다 금액이 많 아. 미성년자에게 받아내는 돈보다는 그래도 더 커야할게 아니야? 체면이 있지." "얼마?" "$ 2,000,000" "..............." "알아서 해라. 아무데나 뛰어가서 당장 돈을 입금시켜. 은행 문이야 열리려면 한참 남았지만 네 인맥을 동원하든 어쩌든, 한 시간 안에 이체시켜. 정확히 한 시간이야. 시간을 지키지 않으면 네 아들은 바 로 저 세상으로 가게 될 거야. 음...진도 마찬가지이지만 그녀는 죽 여도 죽지 않는다더군. 하지만 중상은 각오해야할걸?" 샘은 진을 바라보았다. 사이몬 등이 그의 몸에 감긴 밧줄을 풀었지 만 머뭇거렸다. "자. 카운트 시작이다!" "샘. 어서 가!" 샘은 슬픈 느낌이 드는 젖은 눈으로 당부의 뜻을 전하더니 이름 모 를 남자가 건네 준 메모 지를 쥐고 입구를 향해 달려나갔다. 육중한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그의 발자국 소리가 멀어졌다. "은행거래로는 꼬리가 잡힐 텐데?" 진의 말에 데이먼은 다시 짐짝에 주저앉아 대꾸를 했다. "소개가 늦었군. 그는 감방에서 만난 친구지. 의사소통을 위해 'K' 라고 불러라. 웃기지 않아? 겨우 절도죄로 들어와서 2년 살다가 나 왔어. FBI는 멍청이들이야. 그의 정체를 가두고 있는 사이에도 알아 내지 못하다니. 그는 해커이기도 하지. 능숙하니까, 네 걱정은 필요 없을 거다, 진." "클리너로군." "이제 이야기를 해 봐야겠군. 사실 이번 소동은 모두 네 탓이라는 것을 알지, 진? 난 가석방 중이라 행동에 제약이 따라서 네가 떠났 다는 것을 알고 닭 좇던 개 신세였는데 말이야. 네 남자친구가 고맙 게 떠벌려주는 바람에 기회를 잡았지. 널 만나게 돼서 정말 기쁘다, 진. 아주 거리의 전설이 되어 있더구나.... 자랑스럽기까지 했어. 내가 준 힌트는 마음에 들었어? 케이 저 친구에게 도움을 좀 받았지." "니콜라스는 어디 있지?" 데이먼은 사이몬 등에게 눈짓을 했다. 그들은 들어왔던 간이 문을 열고 사라지더니 눈이 가려져 있고 귀 와 입도 막혀 있는 니콜라스를 들것에 실어 가지고 나왔다. "...........!!" 니콜라스의 두 다리가 심하게 꺾여져 있었다! 데이먼의 지시에 사이몬은 니콜라스의 얼굴에서 막고 있던 것들을 풀었다. 갑작스런 불빛에 눈을 깜박이더니 니콜라스는 진을 발견하 고 통증과 피로와 무기력함으로 지친 얼굴에 희망을 비치며 반색했다. "진-!" "움직이지 마, 진. 총구가 적어도 당장 세 개다. 넌 총알 몇 개쯤 피 한다고 해도 네 남자친구는 피하지 못 할 테니 허튼 수작하지마." "니콜라스는 럭비 선수야. 다리를 부러뜨리면 어떻게 하냐! 샘에게 보여 주지 않은 것도 이해하겠군." "어쩔 수 없었어. 저 녀석이 주제도 모르고 너무 심하게 반항을 해 서 말이야. 뭐. 아직 죽은 것은 아니니 상관없잖아?" '네 놈이 <꿈>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알겠냐?!' 진은 너무나 화가 치밀었지만 소리를 내지는 않았다. "진. 미안해. 나 때문에......" "니 걱정이나 해. 바보야." "사랑싸움은 그만 해, 진. 시간은 자꾸 간다고. 난 바빠. 이 녀석은 따로 쓸데가 있어서 아직 살려 두었지. 우린 청산해야 할 빚이 있 지, 진? 총을 가지고 온 것을 알아. 무기를 모두 버려라." "..................." 진은 니콜라스의 관자놀이와 등뒤에 겨누어진 총구를 의식하고 어 쩔 수 없이 품안의 권총을 꺼내 바닥에 조심스럽게 놓았다. "발로 차." 진은 그가 서 있는 다른 방향으로 가볍게 총을 걷어찼다. 뒤쪽에서 진을 견제하던 검은 옷의 남자가 진의 몸을 수색해 몇 자 루의 단검을 찾아내어 수거 해 갔다. "방탄복도 벗는 것이 좋겠어. 별걸 다하고 왔군. 경찰에게 알렸나?" 'FBI에겐 알렸다. 멍청한 녀석아.' "알리지 않았어." K의 말에 진은 대답을 하면서 자켓과 셔츠를 벗고 방탄 조끼를 끌 러 벗어 내었다. "케이 정말 이쁘지? 피부가 너무 곱잖아? 어릴 때 보다 더 나아 보 여. 날 배신만 하지 않았다면 잘 해 줬을 텐데 말이야." 진은 검은 색의 끈 없는 스포츠 브라 차림으로 난방이 되어 있을 리 없는 실내공기에 추위를 느꼈다. "자. 이제 됐지? 니콜라스에게 가게 해 줘." "아직 안 돼. 나에게 빚이 있잖아, 진?" 관자놀이에 겨누고 있던 총구를 니콜라스의 입안에 밀어 넣으며 데 이먼이 말했다. "벌을 받을 시간이다. 무릎 꿇어, 진." 진은 핏발이 서는 눈자위를 아프게 의식하며 느린 동작으로 무릎을 꿇고 니콜라스를 바라보았다. "난 그 더러운 창녀를 죽이지 않았어. 그렇지, 진? 기억이 혼란스러워서 처음엔 몰랐지만 말이야. 감옥에서는 시간도 많고, 명상 시간까지 있어서 곰곰이 너에 대해 생각 할 시간을 가질 수 있었지. 넌 불가사의한 존재였어. 내가 그렇게 때렸는데도 항상 말끔했지. 희한 한 일이었지만 그때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어. 나도 세상 관념에 물들어 있어서 설명 할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것을 그때는 받아들이지 못했지." 진은 데이먼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으면서 제발 좀 오래 말을 해 주 길 아이러니 하지만, 바랬다. 무릎을 꿇는 정도야 진심이 아니니 마 음 상할 이유는 없었다. 샘이 갔으니 무슨 조치를 취할 것이다. '그때까지만 버티면....' "하지만 감옥에서 내가 아니라면 너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8살 밖에 안된 어린애 주제에 말이지. 그렇게 이상스런 체질인데 어쩌면 살인도 가능할 수 있다고 짐작했지. 나와서 보니 너에 대한 이야기들로 확신 할 수 있었고 말이야." 진은 부러져서 바지 아래에서 크게 부어 오르기까지 한 니콜라스의 다리를 보고 상희에 대한 걱정으로 미칠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 겪는 가슴의 통증이, 지껄이고 있는 저 인간에게 같은 자세로 구타당하던 어린시절의 정신적 육체적 고통과 비슷하다는 것을 알고 눈을 감았다. "난 정말 억울했다. 진. 너 때문에 내 아까운 청춘을 그 빌어먹을 곳에서 썩혀야 했어. 이제 기회를 만들었으니 빚을 갚아야지. 샘을 보낸 것은 케이 저 친구에게 의뢰한 돈을 주기 위함도 있지만 너에게 나와 같은 일을 경험하게 해 주고 싶어서 말이야. 아무리 사 이가 돈독해도 아들이 죽었는데 조금은 의심을 하지 않겠어? 조사 하면 금방 들어 날 수도 있겠지만 위해 주던 새 보호자에게서 진, 네가 약간의 미움만 받아도 난 만족하겠어." 데이먼은 들고 있던 총을 사이몬에게 붙잡게 하고 진이 버려 둔 권 총을 손수건을 꺼내 감싸 잡아 니콜라스를 향해 겨누었다. '안 돼!' 마음 속의 외침과 함께 진은 꿇어앉아 있던 자세 그대로 쏜살같이 앞으로 튀어 나갔다. 여러 발의 총성이 울렸고 진은 데이먼의 발치 에 넘어졌다. "제길 플랜트! 쓸데없는 일을 왜 자꾸 만드는 거냐!" "방금 봤어? 저것이 움직이는 거? 너무 순식간이라 보지 못했어!" "운이 좋았던 거야. 내가 표적을 놓쳤어! 젠장. 우연히 한발이 맞았 던 거야. 소문이 사실이었군.....척추에 맞았어. 살아난다고 해도 식물 인간이나 반신불수는 면치 못하겠는데? 자, 이제 어떻게 할거야?" 총성이 울렸으니 배로 위험해 졌다. 그들은 다급해 졌다. "자- 받아. 대충 반으로 나누었어. 난 요트로 갈 거야. 샘에게 돈을 받아내든지. 그냥 도망가든지 알아서 해. 원래는 이건 모두 내 몫이 지만 위험 부담이 커졌으니. 구해 준 중고 요트 비라고 생각해서 더 얹어주는 거야." "제길. 이백만 달러야! 포기할 수는 없잖아!" "그럼 저 샘의 아들을 어딘가 숨겨두고 가던가. 시체가 발견되지 않 으면 희망을 가질 테니 돈을 입금시킬 수도 있지 않겠어? 저년은 위험해. 정신을 잃었다지만 난 모험은 안 해. 영악한 아이야. 머리만 깨어 있으면 위험 할 수 있다고. 어쨌든 잘 해봐." "데이먼! 잠깐. 우리에게 약속한 돈은?!" "그래, 그게 있었지." 다시 총성이 몇 발 울렸다. 사이몬과 그의 친구 한 명도 손에 총을 들고 있었지만 넘어져 있는 진과 기절한 니콜라스에게 정신을 빼앗 겨 그의 예상치 못했던 갑작스런 사격에 반격하지 못했다. "퉤! 더러운 깜둥이 녀석들. 내가 이뻐서 지네들이랑 어울린 줄 아 나? 꼴에 끝까지 몫은 챙기려고 하네. 지네 은인을 배신 한 멍청이 들 주제에... 케이 난 간다." "가다 둬져라." "아- 이건 버리고 가야지." 데이먼은 손수건으로 감싸 잡고 있던 진의 총을, 죽어 넘어진 흑인 소년들 틈에 던져두고 자신의 총을 찾아들더니 밖으로 사라졌다. 케이는 제법 가까운 곳에서 울리기 시작한 사이렌 소리를 듣고 서 두르기 시작했다. 다리가 부러진 흑인 소년은 가슴 부위에 총을 맞 았지만 아직 숨이 붙어 있었다. "젠장. 이렇게 번거롭고 일이 꼬이는 인질극 따위엔 애초에 끼지 말 았어야 했는데." 그는 노트북과 돈이 든 자루를 챙긴 후 니콜라스의 팔을 잡아 등에 걸치려고 몸을 숙이다가...... 목 뒤에서 날카로운 충격을 느꼈다. "어.....?" 그는 문득 손을 목에 대었다가 피가 범벅이 된 것을 보면서 옆으로 쓰러졌다. 감기기 전 그의 눈에는, 정신을 잃었을 것이 분명한 검은 머리의 소녀가 손에 반짝이는 것을 들고 서 있는 것이 비춰졌다. '어떻게? 분명 총에 맞았는데?' 그는 더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팔이 다시 그 반짝이는 무언가 를 휘두르며 그의 목을 향해 내질렀기 때문이다. -헉. 헉. 진은 기절하지 않았다. 등뼈가 부서진 아픔에 혼절할 것 같았지만 꼼짝 않고 재생되기를 기다렸다.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데이먼이 나 가자 겨우 몸을 추슬러 조용히 움직여서 그가 버린 굴러다니던 술 병을 손에 쥐었다. 케이가 니콜라스에게 몸을 숙이는 사이 술병의 목을 맨손으로 끊어 그의 목을 그었다. 둔탁해 보이는 유리조각은 진의 손에서 치명적인 무기로 작용했다. 그가 목이 몸에서 거의 분리되다시피 해서 피 웅덩이에 쓰러져 있는 것을 확인하고 진은 비틀거리면서 니콜라스에게 다가갔다. "니콜라스! 니콜라스. 정신 차려!" 진이 여러 번 뺨을 때리자 그가 눈을 떳다. "진........" "그래, 니콜라스. 곧 사람들이 올 거야. 조금만 견뎌 봐." "..........키스...해 줄 거지?" "이런 상황에 너 돌았냐? 그래 제길! 뭐든 해 줄게. 제발 정신차려!" 진은 가시지 않은 몸의 통증에 거친 호흡을 하면서 그에게 용기를 주기위해 머리카락을 쓸어 주었다. 니콜라스는 부들부들 떨면서 힘 겹게 한 손을 들어 올리더니 가슴을 가리켰다. "그래. 가슴에 총을 맞았어. 뭐?" "피....피어스....." 진은 그가 가리킨 가죽 점퍼 안 주머니에서 아주 작고 납작한 상자 하나를 찾아내었다. "선......물." 그리고 곧 니콜라스는 진의 꿇은 무릎 앞에서 바닥에 놓인 들것에 그대로 실린 채 숨을 거두었다. 진은 믿을 수 없는 사실에 망연해 하면서도 계속 그의 얼굴을 때렸다. "정신 차리라니까! 너 건강하잖아! 조금만 참아 봐! 니콜라스!! 나도 총을 맞았지만 멀쩡하잖아! 내게 지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어?" '이럴 줄 알았다면. 이럴 줄 알았다면........' 항상 그녀의 뒤를 따라다니던 어릴 적 그의 모습과 그녀가 뉴욕을 떠나기 전 그녀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던 그의 모습들이 스 쳐 지나갔다. 진은 고통스런 후회로 가슴이 사무쳤다. 그를 구하지 못했다...... 눈이 너무 아팠다. '안아 줄걸...안게 해 줄걸...' '좀 더...사랑해 줄걸....' 몇 초 지나지 않아서 적막이 감도는 창고 안으로 사람들이 들이 닥쳤다. 샘이 앞장 서 있었고 그의 뒤에는 그와 그리고 그녀와 도시 의 일을 함께 해온 오랜 동료들이 늘어 서 있었다. "죽었니, 진?" 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샘은 그들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아들의 비참한 모습을 내려다보던 검고 주름진 그의 얼굴에서 굵은 눈물 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샘이 바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진에게 던졌다. 그것을 받아 확인 한 진은, 손아귀에 꼭 쥐었다. "의뢰다, 진. 데이먼을 죽여. 그를 죽여 다오." -상 희 ! ! 진은 샘에게 아들의 시신을 넘기고 그가 던져준 10센트 짜리 동전 과 니콜라스의 유품을 호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샘. 상민을. 나와 함께 온 동양인 친구를 돌봐 줘요.' "..............." 진은 주위에게 칼을 청하고 한 손으로 등뒤의 총알이 박힌 부분을 더듬었다. 벌써 상처가 거의 아물어 새살이 만져지는 그 부분을 어림하고 누군가 건네 준 날카로운 예기를 흘리는 작은 단검을 뒤 로 가져가, 크게 심호흡을 한번 한 후 박힌 총알이 있는 부분을 거 침없이 헤집었다. "진!!" 진은 누구의 외침인지 관심 두지 않고 피가 터진 입술을 손등으로 닦고 박혀 있던 총알을 스스로 빼내었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걸음 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녀를 지켜보던 흑인 들 중 하나가 바닥에서 진의 옷을 주워 들어 걸쳐 주었다. '요트라고 했지? 제발... 기다려 줘, 상희야..... 기다려, 데이먼! 널 반드 시 따라 잡겠어!' [13] 12. 추적 & 상실 상민은 초조하게 기다리고만 있었다. 진이 떠난 후 상황을 주시하기 위해 맥은 직접 관계자라 할 수 있 는 사람들을 그녀가 간 부두와 가까운 한 모텔로 자리를 옮겨 주었 다. 상민을 제외하고는 모두 미국인이었던 탓에 답답한 마음을 호소할 곳도 없고 돌아가는 상황을 알 수가 없어서 더욱 불안했던 그에게, 동양 계의 한 중년 남자가 찾아왔다. "네가 진양의 친구니?" 낯설기만 한 이국 땅에서 상민은 너무나 반가운 한국어를 들었다. "네. 누구세요?" "맥칼린 파커. 라는 사람이 도움이 필요하다고 전화를 했더구나. 호텔로 갔었는데, 이리로 자리를 옮겼다고 해서 물어, 물어 찾아 왔다." 추운 겨울 날씨인데도 많이 서둘렀는지 그는 손수건을 꺼내 이마 의 땀을 닦았다. "난.....음. 그러니까. 최 진양. 아니 진양의 양부모란다." "진의 아버지요?!" "그래." 멋쩍고 어색한 얼굴로 그는 자신을 소개했다. 그는 진이 의뢰했을 때 샘이 찾아낸 한국인 이민 자였다. 서울에서 꽤 고급스런 레스토랑을 경영하며 부를 축적하던 그는 사 고로 외아들을 잃고 불화를 이기지 못해 아내와 헤어진 뒤, 한국을 떠나 뉴욕으로 왔었다. 배우고 의욕에 찬 사람들도 번번이 실패하는 이민을 그 역시 성공 시킬 수 없었던 케이스였고. 모든 것을 잃고 절망하고 있을 때 샘의 제의를 받아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한번 실패했기에, 그 나이에 다시 재기 할 수 있었던 것을 너무나 큰 다행으로 여겨서 그는 샘과 자신의 양녀가 된 진을 은인으로 여 기고 있었다. "하지만 한번도 그 아이를 본적은 없다. 허. 허. 참.....네가 보기엔 내가 음흉해 보일지도 모르겠구나. 그 아이의 사진을 대리자였던 그 흑인이 보여 주어서 대충 얼굴은 알았지만 그 아이의 신상에 관여 하지 않겠다는 계약조건 때문에 궁금하기도 하고.....또 감사를 하고 싶어도 내가 먼저 연락은 할 수가 없었지." "......하지만 아저씨 덕에 우린 진을 만났어요. 나쁘게 생각 안 해요. 누구라도 그런 제의를 받았더라면 거절하지 못했을 거 에요." ".....그래. 어쨌든 안됐구나. 사정은 대충 들었단다. 난 흑인사회를 잘 모르지만 우리 한국인 교포들 사이에서도 진양의 소문은 있어서 조금 알고 있었다.....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돌아가는 상황이 이해 가 안 되는 구나. 어떻게 진양 혼자 가게 내버려 둔 거지?" '.......그녀가 가장 강하니까요.' 상민은 몇 일 떠나오지 않은 서울에 있는 그들의 집이 너무나 그리 웠다. 상민이 향수를 느끼는 것을 알았는지 최 아저씨는 말을 이었 다. "안 좋은 일이 생겼지만 넌 관광객이잖니? 너무 걱정 마라, 동생과 곧 돌아갈 수 있을 거야." "아저씨도 돌아가고 싶으세요?" "그래. 자포자기 한 심정으로 한국을 떠나오긴 했지만 난 이 곳에 적응을 못했단다. 진양 덕에 다시 넉넉해지긴 했지만 풍족해졌다고 이곳이 좋아지진 않더구나. 고향이잖니....그리운 것은 어쩔 수가 없 구나." "돌아가실 수 있을 거 에요. 진은 좋은 아이 에요. 우리와 처음 만 났을 때는 굉장히 차가운 느낌이 들기도 했었지만.....지금은 그 애만 큼 따뜻한 마음을 가진 친구는 없다는 것을 알아요. 아저씨가 돌아 가고 싶다고 한 마디만 해도 그렇게 하게 해, 줄 거 에요." "....그렇구나.....진양을 좋아하니?" 상민은 잠시 안정되었던 마음이 다시 어지러워지고 찌릿찌릿 아파 왔다. "네. 진을 좋아해요. 하지만 전 자격이 없어요. 너무.....부족해요." 아저씨는 말 없이 상민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상민은.....엄마와 상희와 자신을 버리고 집을 나갔던 아버지를 떠올 렸다. 그리고 필사적으로 참고 있던 눈물을 급하게 닦아내기 시작했 다. * "맥!" "진. 무사하군요. 상황은?!" "데이먼이 도망쳤어. 맥. 이 근처에 요트 정박지가 있어?" 진은 창고에서 나오자 케이의 정보원이라는 자를 찾았으나 이미 자 리를 피했는지 발견할 수 없었다. 샘보다 조금 늦었지만 맥은 믿을 수 있는 지원세력과 함께 사이렌을 울리며 막 도착하고 있었다. 차에서 뛰어내린 그는 뉴욕시가 한 눈에 들어오는 지도를 펼쳤다. "없어요. 진. 아....이 곳이라면 요트도 정박이 가능해요. 육로로 50 분, 모터보트를 이용한다면 20분쯤 걸려요." 진은 그가 차 본네트에 올려놓은 지도를 보며 거리를 측정했다. "데이먼이 떠난 지 몇 분되지 않았어. 그는 보트로 갔을 거야. 난 육로로 가겠어. 바이크 좀 빌려줘. 맥." "진! 새벽이라 차량은 많지 않겠지만 시간이 걸려요. 이쪽 길들이 마구 엉켜있는 거 알잖아요!....설마?" "길로 가지 않을 거야." 진은 그와 함께 온 다른 한 사람에게서 자신의 체구에 비해 엄청 커 보이는 경찰 오토바이크를 양보 받아 올라타며 말했다. "그는 바다로 나갈 생각이야. 당장 따라 잡지 못하면 방법을 잃을 수도 있어. 먼바다로 나가기만 하면 그 자식은 내 친구를 또 해칠 거야. 맥, 가다가 인명피해가 생길 지도 몰라. 안에 50만 달러가 있 어. 그것으로 뒷일은 알아서 수습을 해 줘." 진은 아직 시동이 꺼지지 않은 바이크 위에 앉아 공 회전을 했다. "진. 너무 위험해요. 차들 때문이 아니라, 길들에 장애가 너무 많다 구요!" "걱정 마. 죽지 않을 자신 있어. 잘하면 15분내로 단축시킬 수 있을 거리야. 보트로 가면 늦어. 맥, 뒷일을 부탁해. 샘은 정신이 없어. 해 양 경비대에게도 도움을 요청해 줘." 진은 굉음을 울리며 그를 떠났다. "......진, 무모해요. 정말. 신세를 갚고 싶었지만 도움이 되질 않는군 요. 젠장! 꼭 돌아와요, 진-! 조심해요!" 맥은 멀어져 가는 그녀의 뒤통수에 대고 들릴 리 없는 응원을 했다. * 진은 데이먼이 가고 있을 곳을 향해 일직선으로 달리고 있었다. 도로에서 도로로 차선과 일방통행과 차량금지 구역과 마주 오는 차 량 등을 모두 무시하고 최고 속력를 내고 있었다. 그녀가 지나친 몇 곳에서는 처절하게 들리는 브레이크 음과 함께 전복되는 차들도 몇 있었지만 진은 상관하지 않았다. '상희야. 상희야. 제발. 기다려 줘. 금방 갈게...' 진은 미친 듯한 질주로 엄청나게 무겁고 거세게 느껴지는 맞바람에 최대한 몸을 숙이고 저항했다. 헬멧을 쓰지 않은 얼굴과 귀가 쓰리 게 얼어가고 있었지만 감각을 잊었다. 진은 달리던 길에서 멈추어야 했다. 방향을 바꿀 수도 없음을 알았다. 다리 위의 길에서 돌아가면 저 너머 차량이 드문, 약간 높이가 낮은 다리에 도착 할 수는 있겠지만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진은 바이크를 세웠다. 요트가 정박해 있을 곳은 이제 코앞이었지만 진은 서 있는 다리 위 에서 날아가든지, 되돌아 가야함을 선택해야 했다. 현재 있는 새 다리와 약간 엇갈리게 놓여져 있는 그 다리와의 거리 를 가늠해 보았지만 도저히 불가능한 거리였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받침대로 쓸만한 것이 없어서 진은 직접 내려 다리 난간 이음새의 한 부분을, 육안으로 포착되지 않을 빠르기로 몸을 회전시켜 태권도의 돌려차기로 충격을 주었다. 한번...또 한번. 그 두껍고 시멘으로 고정되어 있던 난간이 찌그러 졌다. 가는 두 팔로 힘껏 잡아당기자 믿기 힘들게도 새것으로 보이 던 난간이 우두둑거리며 뜯어져 나왔다. 진은 다시 바이크에 올라 타 건너편 차선 아래로 후진을 했다. 충분하다 싶은 도약거리는 직선으로 더 이상은 불가능했지만 끊어 서 바이크가 지나칠 공간을 확보한 난간을 향해 어슷하게 달리는 모험을 택해야 했다. 몇 대의 차들이 경적을 길게 울리며 지나쳐 갔다.... 진은 숨을 크게 내쉬고 다시 공 회전을 했다. '신이여. 당신이 있다면- 정말 당신이 존재한다면 이번 한번만 도와 주세요! 단 한번이에요. 처음으로 부탁해요. 상희에게 가게 해줘요. 그 아일 살려야 해요.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잖아요?' 그리고 가능한 최고의 속도로 질주했다. ".........!!" 바이크와 함께 진은 날았다. 관성에 의해 포물선을 그리며 날던 문명의 이기는 자연의 법칙을 이기지 못하고 목표점에 다다르기 한참 전의 거리에서 하강하기 시 작했고 진은 망설임 없이 바이크를 발 받침대로 있는 힘껏 뛰어 올 랐다. 그리고 진짜 날았다! 진은 아슬아슬하게 낡은 다리의 난간을 잡아챘다! 엄청난 통증이 어깨에 느껴졌다. 우지직-거리며 잡고 있던 낡은 난간이 떨어져 내리려 하자 진은 얼 굴을 찡그리며 팔의 통증을 무시하고 다시 힘을 주어 다리위로 올라 챘다. 한쪽 팔이 어깨에서 빠져 흔들거리자 진은 그 자리에서 바닥에 빠 진 팔의 손바닥을 대고 다른 한 손으로 받힌 후 어깨를 돌려 다시 끼워 맞추었다. "윽-!" 진은 어깨를 마사지하며 날아온 뒤를 잠깐 돌아보았다. 바이크는 물에 빠져 보이지 않았고 멀게 보이는 그 다리에 몇 대의 차량이 헤드라이트 불빛을 멀리 비추며 서서 경적을 울리고 있었다. 진은 목표지점을 향해 다시 뛰어 나갔다. 12-2. 상 실 상희는 오전에 진이 남자친구를 만나러 호텔을 나간 후 할 일 없이 호텔 방안에서 뒹구는 것이 금방 싫증이 났기에 프론트에라도 내려 가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상민은 약간 침울해져서 방에 남아 있겠다고 했고 그런 오빠를 내 버려두고 상희는 방문을 나섰다. '바보. 그렇게 마음에 걸리면 못 가게 할 것이지.' 소심한 오빠의 태도에 혀를 차며 상희는 긴 복도를 따라 승강기를 향해 갔다. 한 외국인 남자가 옆방 문손잡이에 손을 대고 있었지만 상희는 어떤 의심도 없이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Excuse me....." "네?" 상희는 돌아보려다 코를 찌르는 강한 약품 냄새에 아득해지는 것을 느끼며 정신을 잃었다. 다시 정신을 차린 것은 몸이 너무 불편하고 아팠기 때문이다. 눈을 뜨고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상희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 도통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기겁해서 정신을 가다듬어 보니 자신의 손목과 발목이 뒤로 묶여 있음을 알았고 손과 발의 밧줄이 연결되어서 요가 자세 마냥 몹시 불편한 자세로 꼼짝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어둠 속에서 버둥거렸지 만 어떻게 할 수도 없었다. 무서워진 상희는 비명을 지르려 했으나 입까지 막혀 있어서 그것 마저 여의치 않았다. '어떻게 된 거지? 내가 납치된 건가?' 진을 따라 이국 땅에 와서 난생 처음 겪는 낯선 공포에 상희는 마 음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오빠는?! 진은!' 한참을 혼란스러워하다가 상희는 깨어난 후로도 묶여만 있을 뿐이 지 더 이상의 위협이 가해지지 않고 있음을 깨닫고 마음을 가라앉 혀 보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무슨 일에 연루되었는지도 어떤 것도 짐 작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갇힌 곳은 방 같은 곳이 아닌 듯 했고 주위에서 풍기는 냄 새에 식료품 등이 있는 곳이거나 아주 작은 주방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바닥이 약간씩 흔들리고 있음을 알고 땅위 건물에 있지 않다는 것도 알았다. '배일까?' 상희는 불편한 자세에 점점 몸이 아프고 손발에 피가 통하지 않아 고통스러웠지만 정신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상희는 너무 무서웠다. 할 수 있는 한 모든 가능한 동작을 취해 보 았지만 밧줄은커녕 입을 막고 있는 접착력 강한 테잎도 떼어낼 수 가 없었다. 몸이 조금만 움직여도 벽에 부딪히는 것으로 보아 아주 좁은 폐쇄 된 공간임을 알 수 있었다. '괜찮아. 진이 알면 금방 구하러 올 거야. 오빠가 내가 없어진 것을 곧 알게 될 테니까...그러면 진의 친구들도 같이 올지 몰라. 그래. 아 무 일도 없을 거야.' 스스로 열심히 위로하면서 상희는 무시무시한 어둠과 솟아나는 두 려움에 열심히 저항했다. * 시간이 자꾸만 갔다. 춥고 배고프고 몸 전체가 결리고 아파서 더 이상 못 견디겠다 싶었 을 즈음엔 참으려 했던 눈물이 막 나오기 시작했다. '누구든 빨리 좀 와 줘. 도와줘, 진! 오빠.....' 상희의 기도에 대한 대답이었는지 시간이 조금 더 흐르자 인기척을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머리 위에서 울리는 그 반가운 사람의 발자 국은 자신을 찾아낼 의도는 없는 듯 했다. 상희는 귀를 바짝 세워 무슨 소리든 놓치지 않으려고 필사적이 되 었다. 무엇인지 짐작 할 수 없는 여러 소리들이 들리더니 바닥의 흔 들림이 심해짐을 느꼈다. '배. 배가 가나 봐.....' 상희는 다시 두려움이 몰려와 흘리던 눈물을 멈추고 새파랗게 질렸 다. 구원자가 아니라 자신을 납치한 사람인가 보다 하는 생각에 머 리 속이 하얗게 비어 버렸다. 몇 분이 더 지나자, 드디어 그 발자국이 다시 상희의 머리 위에서 울리더니 머리 위의 낮은 천장 문이 열렸다! 밖은 밤이었고, 차가운 겨울 바람 속에 옅은 갈색머리로 보이는 금 발 머리의 남자가 어두운 그림자에 물들어 묶여 있는 상희를 내려 다보고 무어라고 말을 했다. 하지만 상희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는 곧 입에 붙여 두었던 테잎을 잡아떼고-너무 아파서 상희는 신 음소리를 내었다.-연결된 밧줄을 풀어 주었지만 손과 발에 묶인 밧 줄은 그대로 두었기 때문에 여전히 두 손을 뒤로하고 뒤로 꺾였던 무릎만 겨우 제자리 할 수 있었다. "일어나" 그 말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상희는 잔뜩 겁에 질려서 일어나려고 했지만 쥐가 나서 도로 주저 앉았고 그런 그녀를 흘끗 쳐다보던 외국 남자는 다시 앞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최고 속도다. 운이 아주 조금만 따라줘도 난 잡히지 않을 거야. 쳇! 50만 달러도 적은 돈은 아니지. 아깝긴 하지만 케이 그 녀석을 떼어 놓으려면 어쩔 수 없었어." 너무 빠른 영어표현에 상희는 여전히 이해를 못했지만 당장 자신에 게 위 해를 가하지는 않을 것으로 알고 조금 안심이 되었다. 상희가 앉아 있는 갇혀 있던 곳은, 돛이 커다란 작은 배의 창고(?) 같은 곳으로 보였다. 아래에는 크고 작은, 건어물과 과일냄새가 나는 여러 궤짝과 캠핑 용품 등이 있었다. '바다로 나가서 몇 달 항해나 해야지. 날 찾을 수 없으면 포기하겠 지. 그리고 멕시코로 가는 거야. 이 정도 돈이면 여생을 편히 보낼 수 있을 테니. 진 그년만 그대로 죽어 버려도 위험 부담이 훨씬 줄 어들 텐데 말이야...중상을 입었으니 시간은 번 셈이야.' 그 남자는 중얼거림을 멈추고 상희를 흘끗 돌아보더니 다시 말했다. "야. 동양계집애. 몇 시간은 더 살려 줄 테니 신경 건드리지 말아. 아. 영어를 못하나? 귀찮네....이건 알아보겠지?" 상희는 그가 빼든 권총을 보고 위협을 당하고 있음을 알고 얼른 대 답을 했다. "Ye...Yes!" 무슨 말인지 정확히 알 순 없었지만 얌전히 있으라는 뜻일 거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뭐...생긴 건 맘에 안 들지만 추적을 벗어나면 이뻐 해 줄 수도 있 지.." 즐거운 일을 생각하는 지 그 남자가 히죽대는 것을 보고 상희는 본 능적인 거부감으로 소름이 끼쳤다. 밤바다에서 주위를 돌아보니 아주 멀리서 도시의 불빛들이 보였지 만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상희는 어렸을 때, 교회에서 기도하는 흉내를 냈던 일을 떠올리며 당장 종교를 가졌다. '하느님. 도와 주세요. 저 사람 총을 가지고 있어요. 도와 주세요.... 진. 오빠. 너무 무서워...어떻게 해?' * 깜깜하던 하늘에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묵묵히 키를 조정하던 데이먼은 멀리서 다가오는 보트의 엔진 소리 에 욕설을 내 뱉었다. "야. 너 이리와!" 그 말도 알아들었다. 하지만 상희 역시 뭔가 다가오는 소리를 들었 으므로 머뭇거렸고 희망이 솟는 것을 느끼며 소리가 나는 어렴풋한 밤바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데이먼은 다가와서 상희의 뒤 머리채를 거칠게 잡아 당겼다. "꺄--악--" "젠장! 누구야. 이렇게 빨리 따라오다니. 샘 그 놈인가?" 데이먼은 총구를 상희의 관자놀이에 가져다 대고 머리채를 휘어잡 아 계단처럼 조금 돌출 되어 있는 갑판 턱에 올라가게 했다. 그리고 움직이지 못하게 자신의 앞에 고정시켰다. "진-!!" "제기랄. 저 괴물 같은 년!" 데이먼은 마지막 보루가 된 상희를 휘어잡고 사격 범위 내에 들어 온 진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상희는 귀가 멍멍한 총성에 얼이 빠 져 버렸다. 진은 밤 보다 더 검고 밤하늘 보다 더 푸른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여전히 굉장한 속도로 따라오고 있었다. 데이먼은 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두 번째 총성에 상희는 정신을 차렸다. -이 나쁜 남자가 진을 죽이려 한다!! "안 돼! 가만히 있어!!" -진의 외침을 귀가에 흘리며 상희는 머리카락이 뽑히는 아픔에 눈물 을 찔금 흘리며 몸을 돌려 데이먼을 온 몸으로 밀쳤다. -데이먼은 욕설을 내뱉으며 놓친 상희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진은 유일한 무기를 들어난 데이먼의 가슴에 힘껏 던지며 보트의 방향을 비틀고 퉁기듯 솟아올랐다. -그 모든 것이 거의 동시에 이뤄졌다! 진은 요트에 착지했다. 데이먼은 심장 깊숙이 박힌 단검을 내려다보며 천천히 무너졌다. 상희는 반동으로 몸이 뒤로 붕 뜨더니 갑판에 나동그라졌다. "아....안 돼...." 진은 묶인 채 쓰러져 있는 상희에게 다가갔다. "사. 상희야.....?" 상희는 니콜라스처럼 가슴에 총을 맞았다. "콜록- 진......" 진은 떠나 왔던, 밝아 오고 있는 육지 쪽을 바라보았다. 최대한 빨리 돌아간다고 해도 상희는....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녀는 피를 많이 흘리고 있었다. 너무 많이. 계속. 진은 상희의 포박을 풀어 주고 덜덜 떨리는 손을 겹쳐 피가 뿜어 나오는 총상자리에 가져다대었다. "미안해. 실수했나...봐. 그냥. 가만히 있을걸." "그래. 바보야. 난 상민이 아니야. 총 몇 발 맞아도 죽지 않아. 가만 히 있지!" "오. 오빠 땜에. 하하....버릇이 됐. 나봐..." 동녘이 밝아 오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깜깜하던 바다는 기 다렸다는 듯이 태양의 빛을 온몸으로 받아들여 아침을 맞기 시작하 고 있었다. "진. 우는 거. 처음 봐...." 진은 피투성이가 된 한 손을 들어 얼굴을 더듬었다. 상희의 피처럼 따뜻하고 짭짤한 물이 볼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그래. 나도 내가 우는 것은 처음 봐." "울지마. 진.... 나...죽는 거지?" ".................." "울. 지마 진... 나. 별로. 안 무서워. 사는 것이 항상. 더 무서웠어...." "나도 무서웠어." "널 너무. 좋아했어." 진은 깜박이지도 않고 눈을 크게 뜨고 눈물을 쏟아내면서 상희의 꺼져 가는 숨결을 붙잡기 위해 솟는 피를 막아보려 했지만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나도 좋아해." "응....엄마. 보다...오빠 보다 더. 좋아했어. 그. 콜록....그러니까. 재미 있게.... 살아야 해? 난. 너만 따라. 다닐 거야. 네...수호신이 될 거야. 공기처럼 돼서 항상...." "그래. 그렇게 해." "여행...할거지? 난 좋은데. 많이 가. 고 싶어." "그래. 그래." 진은 심장에서 거칠게 날뛰는 피를 눈물로 내뱉고 있었다. 시신경에 문제가 있는지 눈물에 피가 섞여 나왔다. 진은 눈앞이 온통 빨개졌다. 하늘도. 바다도. 갑판도. 상희도..... 상희는 점점 기운을 잃어 갔다. "그럼.....오빠, 에게. 말하고 올게...... 기다릴 거지?" 진은 기다리지 않을 테니 가지 마라고 말하고 싶었다. "기다릴게" 상희는 어렵게 입술 근육을 움직여 웃어 보였다. 붉은 태양이 막 제 모습을 모두 드러내 세상을 비추었다. 진은 피눈물을 쏟아내면서 울음소리를 삼키려 애썼지만 깨물고 있 는 입술사이에서 신음 비슷한 소리가 새어나오는 것을, 참아낼 수 없었다. "흐......윽....윽......." 진은 숨진 상희의 몸을 부여잡고 울부짖었다. "데- 이- 먼- ! !" 대답 없는 바다- 메아리 없는 바다- 무심한 바다- 인자한 바다- 위로하는 바다- 세상, 존재하는 모든 푸른빛이 머무는 곳. .......그곳에서 진은 이성을 잃었다. [14] 14. 독백 & 아가페 * 상민은 최 아저씨와 소파에 앉아 그의 격려를 받고 있었다. 함께 있던 진의, 흑인 친구가족이 바깥에서 나는 소란스러움에 울며 달려나갔다. "무슨 일이래요. 네? 아저씨?" "진양의 흑인 친구가 죽었다는 구나." "!!.......상희는요? 상희는?" 그때 키가 큰 흑인 남자가 상민에게 다가와 그의 옆자리에 털썩 앉 았다. 최 아저씨가 그에게 인사를 했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상민은 진에게서 얘기 들었던 그 사람인가 보다고 짐작했고, 최 아 저씨도 그를 진의 후견인인 '샘'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샘은 힘없이 의욕을 잃은 얼굴을 하고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너무나 불안해서 상민은 벌떡 일어나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주위의 다른 흑인들에게 돌아가는 상황을 물어 최 아저씨가 번역해 주었다. "진양이 네 동생을 구하려고 범인을 좇아갔다는 구나. 그녀라면 해 낼 수 있을 테니 걱정 마라고도 하고.......나, 참. 이해가 안가네. 이 거야, 원......." 최 아저씨는 여전히 진 혼자 나서고 있다는 소리에 불만스러움을 떨치지 못한 모양이었다. 아들이 죽었다는 데도 샘은 영안실로 향하는 그의 다른 가족들과 떠나지 않고 그대로 앉아 있었다. 상민이 통역을 부탁하자 최 아저 씨가 말을 전해 주었다. "진양이 널 돌봐 달라고 했다는 구나..." 상민은 다시 울고 싶어졌다. 자리에 앉아 그는, 그 큰 흑인 아저씨 를 의식하며 차분해 지려고 노력했다. * [ 오빠 ! ] 귓가에 울리는 생생한 울림에 상민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 오빠! 나, 진과 여행가기로 했어. 그러니까, 기다리지 마?! ] "상희야!!" 상민이 갑자기 이상한 행동을 하며 소리를 지르자 방안에 남아 있 던 모든 사람들이 쳐다보았다. [ 오빠... 진을 혼자 독차지 해서 미안. 진과 놀러 갈 거야. 부럽지? ] "왜 그러니? 상민아?" 걱정이 된 듯 최 아저씨가 상민의 어깨를 붙잡고 진정시키려고 했 다. "안 들려요? 상희가 말하고 있잖아요!" "무슨 소리야? 누가 뭘 말한다고?" 상민은 혼란스럽고 애타고 가슴 벅찬 기분이 되어 안타까움에 발을 동동 굴렀다. [ 오빠, 안녕. 돌아가면 유영이 에게 잘 해줘! 걔, 오빠를 좋아하나 보더라. 하. 하..... ] "어디 있어. 상희야?!" 상민은 밖으로 뛰쳐나갔다. 모텔 밖에는 여전히 웅성거리는 각양 각색의 사람들이 있었고 차가 운 겨울바람이, 우뚝 서서 망연해 하고 있는 상민의 몸을 훑고 지나 갔다. "......어디 있어?" 공허한 느낌의 슬픈 상민의 목소리만 남았다. 상민은 동생을 살아서 다시 볼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육감 했다. 그는 주저 앉아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다..... _같은 시간 한국에서 수경은, 하와이에서 사 온 기념품들을 가족에 게 자랑하며 신나 하고 있었다. _학철은 시차적응으로 잠을 청했다가 학원에 갈 시간이라는 엄마의 목소리에 겨우 일어나 세수를 하기 위해 방을 나가고 있었다. _유성은 번번이 기회를 놓치고 주지 못한 진에게 줄 선물과 러브레 터를 서랍에 넣으며 한숨을 쉬었다. _유영은 현상한 사진들을 널려 놓고, 진과 상민의 사진만 따로 분리 해 놓고 들여다보며 좋아라 하고 있었다. _상민의 어머니는 청소를 끝내고 편안하고 안락한 티타임을 갖으며 아이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 해양 경비대는 데이먼 플랜트가 타고 나갔던 요트를 발견했지만 인 질도, 구하러 갔던 이도, 범인도, 요트 내에서 찾아 낼 수 없었다. 몇 일 후, 해안 가에서는 두 눈이 파이고 심장이 도려내진 처참한 모습의 데이먼 플랜트의 사체가 떠올랐지만, 그 후 영원히 진과 상 희는 발견되지 않았다. 13. 독 백 진은 바다를 향해 휘파람으로 노래를 불렀다. 상희가 제일 좋아하던, 진이 그들을 위해 처음으로 불러 주었던 'Hotel California'와 한국 대중 가요들을, 한 두 곡 느릿. 느릿..... 상희는 얼굴이 새 하얗게 되어서 가슴에 두 손을 얹고 진이 뉘어 준 그대로 누워있었다. 진은 상희에게서 등을 돌리고 서 있었다. "네이 할머니. 거짓말쟁이. 신이 있다고 해 놓구 선.....천국에 갔어 요? 신이 없으면 찾아와서 귀뜸 해 주겠다고 했잖아요. 할머니가 안 오는 것을 보면......아무래도 난 신에게서조차 버림받았나봐...." 진은 상희 가족을 만나 많은 것을 배웠다. 평범한 즐거움. 따뜻한 친구. 가슴이 꽉 차 오르는 웃음. 유머까지.... 그리고 이제 다시 또 한가지를 배웠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아무리 몸이 아파도, 남들이 알아채지 못했던 아득하고 절망스러웠 던 어두운 심정에도 굴하지 않았던 그녀는 울고 있었다. 끊임없이. 끊임없이. "왜? 난 열심히 살았어. 난 정말 최선을 다했어. 난 누구보다, 누구 보다 노력했었어. 몰라서 하는 일은 죄가 아니잖아. 난 더 죄 짓지 않으려고 배웠어. 뭐든 배웠어. 열심히....그런데 왜? 왜 신은 날 버 린 거지? 왜 날 거절하는 거야?" 진은 갑판 위에 앉아 무릎을 세워 끌어안았다. "널 상민에게 돌려줘야 할까? ......돌려주고 싶지 않아. 난 약속을 지 키지 못했어. 돌아갈 곳이.....없어." 진은 너무 많은 눈물을 흘려 눈이 아팠다. 흘릴 줄 몰라서 아팠던 과거에 대비해, 이젠 지나친 눈물로 시력이 약해졌다. "상희야, 끝났어. 마법의 나이- 난 이제 17세가 되었나봐." 피가 스며들어 입고 있던 옷들이 군데군데 얼어 있었다. 진은 가슴 부위의 심장을 비롯한 모든 장기들을 도둑맞아 자리하지 않는 듯한 상실감을 맛보고 있었다. "상희야. 사실은 말이야. 난 네게 반했었어. 네가 학교 뒤 산에서 상 민이를 감싸는 것을 보고 충격 받았었어. 그래...그때 난 수경의 말 을 빌리자면 널 '찍었어' ......너처럼 되고 싶었어. 그런 널 갖고 싶었 어. 상민이 너무. 부러웠어. 나도...니콜라스보다도, 샘보다도, 캐서린 보다도 네가 좋았어. " 바닷바람이 너무 싸늘했다. ".....상민이 날 좋아하는 것을 알았지만 질투가 나서 일부러 모른 척 했었어....하. 하...나쁘지? 네가 날 네 오빠와 연결시켜주려고 애쓰는 것을 보고 재밌어 하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어." 진은 세운 무릎에 얼굴을 부비며 말했다. "그래. 그러니까 같이 가자. 난 널 겨우 찾아내었는데....겨우....내 걸 로 했는데 혼자가게 내버려 둘 수 없어." 아무 대답도, 어떤 반응도 상희는 보이지 않았다. 등을 돌리고 있었 지만 진도 그걸 모르진 않았다. "그리고 가서.....신을 만나면 그를 죽여 버리겠어. 어쩌면 발 빠른 다른 누군가가 먼저 죽여 버렸는지도 모르지....가서 확인 해 보자. 그래, 같이 가자 상희야." 진은 타이트한 청바지의 호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어 니콜라스가 주 었던 작은 상자를 꺼내 뚜껑을 열었다. 오전 태양의 빛에 작은 무지개들을 흩뿌리며 찬란하게 빛나는 다이 아몬드 한 쌍이 모습을 들어냈다. 별다른 장식 없이 새끼손톱 크기의 다이아는 세밀한 수공으로 반짝 반짝거리며 꽃잎에 올려진 동그란 수술처럼, 백금의 작은 받침 위에 놓여져 있었다. 그 곳만- 그, 진의 손위에 놓인 보석 주위만 가장 빛나 보였다. "하. 하. 하... 니콜라스 그 녀석. 샘의 카드를 쓴 게 분명해. 이거.... 비싸 보이는데......" 진은 다시,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의 검은 얼굴이 떠올라서 어린 애 처럼 팔 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 하나를 집어 들어 왼쪽 귀에 가져다 대고 살을 뚫어 귀 볼에 박았다. "상희야. 하나 줄게. 네게도 잘 어울릴 거야. 아파도 참아." 진은 상희에게 가까이 가서 허리를 굽히고 그녀의 오른쪽 귀 볼에 자신처럼 피어스 한쪽을 꽂아 걸어 주었다. 진은 요트의 닻을 풀어 적당한 길이만 남기고 잘라내서 자신의 발 목과 상희의 발목에 밧줄을 이어 묶었다. 그리고 이미 차갑게 굳어 버린 상희의 몸을 품에 꼭 끌어안았다. "숨을 쉬지 못하면, 아무리 나라도 어쩔 수 없겠지?" 진은 하늘을 한번 올려다보고 하얗게 굳어 있는 친구의 이마에 키 스 했다. "가자. 상희야." 그리고 요트 밖으로 나갔다. 닻의 무게로 진은 아래로, 아래로 상희와 함께 바다 깊숙이 가라앉 았다..... 14. 아 가 페 [[ 아이야 ]] 진의 의식이 깨어났다. '......어디지?' 그녀는 물 빛 공간에 둥둥 떠 있었다. 구겨지는 투명한 젤리 같은 것에 갇힌 듯 했다. '구겨지는 투명한 젤리? 훗-' 진은 자신이 생각해 낸 표현이 독특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른 표현을 떠올릴 수 없었다. 왜인지 마음이 안정되고 졸음이 올 때처럼 편안해 졌다. [[ 내 아이야 ]] "누구야?!" 다시 그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아니, 그건 소리라 하기에는 무언가 부족한.....울림? 울림이라고 해야할 듯했다. 그것도 자신의 의식 저 안에서부터 시작되어 진이 떠 있는 끝을 가 늠할 수 없는 공간 자체가 내는 울림이었다. [[ 난 너를 만들었다 의지를 주었다 ]] [[ 널 잃었다 ]] [[ 찾아내었다 ]] "날 만들었다고?" ".......날 잃어?" ".......찾아?" [[ 돌아와라 네 속할 세상으로 ]] "무슨 소리야!" "당신.....신이야? 신이야?!" 진의 의지는 바닥 없는 그 곳에 벌떡 일어나 섰다. "당신을 증오해! 당신을 경멸해! 난 당신에 반대한다!! 나와-! 당신 을 죽여버리겠어!" [[ 넌 내 아이다 ]] "당신을 죽인대도! 당신 얼굴에 침 뱉고, 당신을 욕되게 하고, 당신 을 비웃고, 반대된 길을 가겠다! 그래도 내가 당신 아이인가?!" 진은 평생을 두고 겪었던 모든 증오와. 고통과. 슬픔과. 절망의 감정 을 온 몸으로- 온 의식으로 표출하며 악을 썼다. [[ 널 사랑한다 ]] 진은 따뜻하고 밝고. 하와이에서 그녀가 행복을 느꼈던 감각들이 되 살아남을 느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몸 안에서부터 퍼져 나오기 시작한, 그 알 수 없는 울림으로 인한 것임을 알았다. 그 의지가 몸에, 진의 의식에 새겨졌다. 그것은 [사랑]이었다. 그 어림할 수 없는 엄청나게 커다랗고. 무엇보다 진하고. 바다보다 도 하늘보다도 깊은. 비교 대상을 찾아낼 수 없는 형언할 수 없는 감각에 진은 몸서리를 치며 자신의 존재를 낮추었다. 진의 의식은 울면서 고개를 떨구었다. "당신은 진짜 신이군요. 당신은 진짜 있었군요....왜 이제야 온 겁니 까?" 진은 답을 알았다. 그녀는 16세까지 살았던 그 곳이 자신의 세계가 아니었음을. 무언가 의 착오로 다른 세계에 떨어졌음을. 자신의 고향에서 자신의 신이 그녀를 이제야 찾아내었음을. "난! 무엇이었습니까! 난! 내가 온 힘을 대해 처절하게 살아왔던 시 간들이 모두 헛된 것이었습니까?! 내 노력도... 내 기억도....내가 감 수해야만 했던 고통도....내가 얻은 친구들도....'착오' 때문이라고 요.....? 아무리...내가 당신께 작고 작아 하찮은 존재라도....어떻게 제 인생이 착오였다 할 수 있습니까...." 진은 니콜라스와 상희를 잃었을 때 가슴 깊이 파고든 상실감을 다 시 한번 맛보았다.....모든 것이 잘못되었다. 자신의 존재 자체가 잘 못되었다....그들과의 만남이 없어도 될 일이었다...... [[ 헛되지 않다 하찮지 않다 ]] 진은 어두운 우주 공간에 떠 있는 기분 속에서 그곳, 어둡고 끝없고 까마득한 공간에서 유독 그 목소리. 그 울림. 그 의지자체가 위로가 됨을 알았다. 진은 사랑 받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전........ 당신을 제 신으로 인정하겠습니다. 하지만 전 제 뜻대로 세상을 살겠습니다. 살아가다 힘들면 당신을 원망할 것이고 살아가다 고통스러우면 당신을 욕할 것이며 살아내다 비참해 지면 당신을 버릴 것입니다. 당신이 필요하면 다시 기도 할 것이고 당신이 그리우면 다시 당신께 무릎 꿇겠습니다. 그리고 언제라도, 언제라도 저는 당신을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래도.....절 받아 주실 겁니까?" [[ 넌 내 아이다 ]] 진의 의식은 야단 맞는 아이처럼 서서 팔 등으로 울음을 훔치며 다 시 말했다. "상희와 가겠어요. 그 애와 가겠어요. 그래도 될까요? 그 앨 두고 갈 순 없어요." [[ 뜻대로 되리라 ]] 진은 다시 의식을 잃었다....... << 1부 끝 >> ------------------------------------------------------------- < 2 부 > - 1 장. ( 귀 환 ) 1. 카르마의 구슬 "어?" 무언가 느껴졌다. 카르마는 하던 일을 즉시 멈추고 변화가 감지된 그의 익숙한 공간 으로 이동했다. 구슬에 반응이 있었다. 공백이었던 곳에 존재가 새겨지고 있었다. 고유의 빛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던 그 구슬은 비로소 주인을 맞아 더 밝게 빛나는 듯 했다. "돌아왔군요. 행운의 인간이여. 환영합니다." 카르마는 순수한 반가움에 미소지었다. 얼마 전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은 이 후 관심을 끊지 않고 감지하고 있던 그 구슬은 다시 주인을 찾고 있었다. 구슬의 변화가 멈추었을 때, 카르마는 이색적인 일을 또 다시 목격 하게 되었다. 문제의 구슬에서 새로운 구슬 하나가 분리되어 나왔다! 새 영혼, 새로운 존재, 새로운 운명을 담은 구슬이 카르마의 힘을 빌리지 않고 직접 생성되고 있었다. "호-오-!" 눈을 떼지 않으며 카르마는 팔짱을 끼고 중얼거렸다. "이례적인 일이네요. 당신은 정말 특이한 존재. 친구를 만들어 왔군 요." 질서와 윤회를 상징하는 카르마의 탑에서는 그 날 기다리던 영혼과 또 다른 새 영혼을 맞이했다. 1-2. 작 별 진은 뭔가 차가운 것이 얼굴에 톡. 떨어지는 것을 느끼고 눈을 떴 다. 촉촉하게 젖은 풀밭에 일어나 앉았다. 맑고 풋풋한 풀 냄새가 묻은 듯한 아침이슬이 키 작은 풀잎에서 풀 잎으로, 혹은 풀들의 틈새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바로 옆에 상희가 누워 있었다. 진과 상희는 젖은 머리와 젖은 옷을 제외하면 요트에서 바다로 빠 지기 전과 같은 모습이었다. "허. 참. 우리들의 신은 센스가 별로 없나봐." 발목에 감긴 밧줄과 무거운 닻을 바라보며 진은 피식 웃음이 나왔 다. 줄을 풀고, 굳은 몸의 상희를 당겨 안았다. "봐, 상희야. 고향이야... 이 곳이 내가 있던 곳이래." 진은 상희에게 말하면서 자신도 주위를 둘러보았다. 싱그럽고 따뜻한 아침햇살이 세상에 내리고 있었다. 진은 의식을 버 리기 전에 뉴욕의 바다 위는 겨울이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이 곳은 어디일까? 봄인 것 같은데...' 그들이 앉아 있는 곳은 키 자란 잔디를 연상시키는 부드럽게 느껴 지는 풀밭이었다. 초록색, 연두색의 풀들 위에는 하얗고, 노랗고, 붉 은 색의 작은 꽃들이 일부러 누군가 뿌려 놓기라도 한 것처럼 흐드 러지게 피어 있었다. 허공에는 가지가지 색의 나비들도 팔랑대고 있 었고, 그런 작은 생명들이 움트는 것이 들리는 듯한 생동감 있는 풍 경에 진은 넋을 잃었다. 눈길을 조금 멀리 하니 양옆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는 울창한 산림 이 시작되어 우거져 있었다. 가깝게 보이는 그 숲들은 풀밭보다 더 푸르고 진하고 나무들이 이 제껏 보지 못한 큰 키를 자랑하며 바람에 흔들려 가지와 잎이 부딪 히는 소리를 전해 주고 있었다. "정말...별세계네? 이런 곳 본적 있어, 상희야?" 도시에서만 살아서 진은 하와이의 하늘이 푸르다고 생각했었는데, 이곳은 하늘은 더 푸르렀다. 너무 파래서 푸른비가 내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상희의 귓불에선 그런 이곳의 풍경과 너무 어울려 보이는 돌이 반 짝이고 있었다. "상희야. 나 열심히 살게. 이젠 순전히 날 위해 살 거야. 네 말대로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먹고, 좋은 일만 겪고, 좋은 사람들을 많 이 만날게. 꼭. 행복해 질게." 진은 상희의 몸을 받치고 있지 않던 다른 손으로 곁에 잡히는 동전 크기의 흰 꽃을 꺾어 보았다. 꼭 민들레처럼 생긴 꽃... 진은 그렇게 많은 꽃이 피어있는 곳에 와보기는 처음이었다. '마음이 화사해지는 것은 이 꽃 때문인가 봐.' "그러니까 너도. 약속대로 나와 함께 하는 거야? 내가 보는 것을 보 고 내가 느끼는 것을 느껴. 행복해지려고 노력할게. 너도 행복해 져." 상희의 피어스가 유난히 반짝였다. "사는 게 무서웠다고 그랬지? 나도 그랬어. 하지만 네가 같이 있다 고 생각하면 기운이 날거야....너희들이 항상 너무 고마웠어. 정말이 야. 잊지 못할 거야." 산뜻하고 향기까지 실은 바람이 살짝 불어왔다. 바람에 실려 작은 꽃잎들이 휘날리고 내려앉았다. 모든 것이. 그 모든 것들이 그들을 향해 고개 짓하고 손뼉을 치는 듯 했다. 진은 그 호들갑스러운 반가운 환영인사를 귀가의 속삭임으 로 들은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공기가 되렴. 항상 같이 있게. 공기가 돼서 바람이 돼서, 항상 나와 같이 다녀. 재미있게 살도록 격려해 줘. 수호신 같은 건 생각도 마. 남을 위해 몸을 던지는 일은 이제 안 해도 돼. 너처럼 힘없는 애가 할 일이 아니야." 문득 떠오른 생각에 진은 웃음이 나왔다. "하긴.....상희 네가 내 수호신이 되면 내 수명은 길어지긴 커녕 더 짧아지지 않겠어?" 따뜻하고 차분한 마음이 되어서 진은 앉은 채 주위 손닿는 곳의 꽃 들을 똑. 똑. 땄다. 상희의 몸이 가벼워지고 있었다. 진은 꺾던 꽃을 손에 쥐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상희의 몸이 투명해지고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 아니, 사라진다는 표현보다는.....녹아들고 있었다. 곧, 형체가 잡히지 않게 되었다. 상희의 귀에 걸린 작은 다이아몬드가 반짝 마지막 빛을 던져 주고 엷어진 상희의 몸도 함께, 대기 중에 소리 없이 녹아들어...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말없이 지켜보던 진은 나비가 날아다니는 주위를 훑어보면서 속삭 이 듯 물었다. "공기가 되었니, 상희야?" 멀리서 상희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진은 가슴이 따스함으로 차 오름을 느끼고 편한 자세로 풀 위에 앉 아서 미소했다. 2. 메칸타나 산맥에서. '빌어먹을 놈, 이젠 좀 가라.' "그러니 골드 드래곤 투비와이즈, 우린 정말 특별하고 신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존재가 아니겠소? 너무 완벽해서 미천하고 힘없는 저 작은 존재들처럼 무리 생활을 할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가끔씩은 서로의 시간을 한자리에 일치시켜 우리 들에 대해서, 우리의 신에 대해서. 토론도 하고 친목을 다지는....." '미치겠네. 눈치코치 없는 깜둥이 드래곤아. 제발 좀 가라~ 엉?' "알겠습니다. 블랙드래곤 바를로네스. 그러니까. 회합에 나오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말씀이시죠? 물론 저도 위대한 우리 종족의 미래와, 현재를 위해서 활기를 더 해 줄 그런 훌륭한 모임에 꼭 나가고 싶 답니다. 시간이 나면 제의를 잊지 않고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골드 드래곤 투비와이즈는 그의 레어 안, 인간 귀족들의 응접실처럼 꾸며진 화려한 룸에서 우아하게 의자에 앉아 방문한 손님을 접대하 고 있었다. 바를로네스는 드래곤들 중에서도 유일하게 거의 자신과 비슷한 나이 의 에이션트 블랙 드래곤이었다. 드래곤들은 직계가 아닌 다른 종류의 드래곤들과 그다지 교류하지 않았다. 직계라고 해도 성년이 된 후에는 지나치다시피 하던 관심이 반갑게도, 뚝 끊겨 주는 바람에 지겨운 웃어른 드래곤들의 잔소리나 참견을 받지 않아도 되었다. 그래서 이런 방문이 굉장히 드문 일이었고 권유해 온 소식도 아무 문제가 없는 상황이라면 환영하며, 드래곤들의 고질병인-관심분야에 만 적용되는 길고 긴 토론에 침을 튀겼을 것이다. 하지만 투비와이즈는 그의 수다를 들어 주고 있을 형편이 못되었다.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저 바보 같은, 뭔가 꿍꿍이를 가지고 염탐하듯, 드워프가 손수 수 작업한 찻잔을 두고 느긋해 있는 검은머리 인간으로 폴리모프 해 있는 드래곤의 속을 모르겠는가. '저 놈은 내가 곤란해하는 것을 즐기는 거야. 그 따위 소식을 그렇 게 장황하게 늘어놓을 필요 있냐? 빨리 좀 가라, 엉?' 바를로네시 뿐 아니라, 호기심이 조금 있는 다른 드래곤들도 모두 투비와이즈의 요즘 행적에 대해 궁금증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콧대 높고 거만하던 골드 드래곤 투비와이즈가 이제껏 보여 주었던 모습과 너무 동떨어진 행동들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에 그 중 할 일 없고 심심해 마지않던 한 마리가 뻔뻔스럽게 간섭을 하러 온 것이 다. 그런 것을 뻔히 알면서도 투비와이즈는 대 놓고 꺼지라고 할 수도 없고 사실대로 고민을 털어놓을 수도 없고 해서, 부글부글거리는 배 속을 꾹꾹 누르며 짐짓 여전히 똑똑하고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다 는 얼굴을 하고 손님을 상대하고 있었다. "이봐, 투비와이즈. 장난은 그만하지. 얼굴이 간지러워 죽겠다." 투비와이즈는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요 몇 년간 네 사천 살, 용 생을 두고 했을 희한 한 짓을 모두 몰아하고 있다는 거 알고 있냐고. 도대체 궁금해 서 참을 수가 없어서 와 봤다. 이유가 뭐야?" 투비와이즈는 자존심이 너무 상해서 죽어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 친하지도 않은 주제에 지금 너 막 말 하냐?! 하고 테이블을 엎어 버리고 싶은 충동을 애써 또 꼭. 꼭. 누르고 태연히 대답했다. "일은 무슨 일이 있겠습니까. 블랙드래곤 바를로네시. 전 그저 너무 심심해서 생활에 변화를 주고자 행동패턴을 달리해 보고 있는 것 뿐 이랍니다. 그다지 우리 드래곤들에게 해가 간 일도 없구요. 걱정 해 주시는 것은 고맙지만 사소한 제 취미 생활에 바를로네시께서 관심을 가질 만큼 절 위해 주시는 줄은 지금껏 몰랐군요. 정말 송구 스럽기 이를 데 없습니다." '안 가르쳐 줄 테니 그만 꺼지란 소리 군.' 바를로네시는 검고 윤기 나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뭔가 감추고 있는 것이 분명한 저 노란 머리 드래곤에게서 어떻게 사실을 알아 낼까 하고 궁리를 했다. '정중하게 떠 봐도 안되고, 친한 척 해도 안되고, .....협박이야 비슷 한 나이인데 말짱 도루묵이고. 도대체 뭐야? 에잉~ 더 궁금하네.' 바를로네시가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갑자기 투비와이즈가 벌떡 일 어섰다. 그의 눈이 놀라움으로 크게 둥그래져서 파란 눈동자가 바닥으로 톡 떨어져 버릴 것 같았다. "왜 그래?" "바를로네시!" "왜?" "집에 가라. 빨리- 어서 가라!" 바를로네시는 황당해서 갑자기 소리치는 정신나간 드래곤을 쳐다 보았다. 하지만 반론할 기회도 안주고 투비와이즈는 그를 자신의 레 어가 있는 곳으로 통하는 워프 게이트를 열더니 억지로 밀어 넣었 다. "회합에 꼭, 반드시, 기필코 나갈 테니 이제 됐지? 자, 어서 가라." "야........." 바를로네시는 그에게 떠밀려 워프 했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말이다. '저놈 정말 미친 거 아냐?' * 진은 인가와 지형을 알기 위해 좀 더 높은 지대를 찾아 오르기 시 작하면서 주위 풍경이 묘하다는 것을 알았다. 아까는 그냥 참 멋진 곳이다 고만 생각했었는데, 꽃과 들판처럼 보 이던 그 곳은 들에 해당하는 평지가 아니었고 약간 기운 듯한 지역 을 벗어나 꽃길을 따라 위로 올라가니까 울창한 산림이 다시 빽빽 이 시작되고 있었다. '왜 저기만...그것도 부채꼴 모양으로 큰 나무가 없는 거지? 누가 공 사라도 해 놓은 것 같네..' 진은 풀밭이 끝나는 지점에 커다란 바위무더기가 있는 것을 보고 그 위로 올라가서, 뭔가 이곳이 어떤 곳인지 알려 줄 만한 것이 보 이나 두리번거렸다. "어....?!" 그리고 너무나 놀랐다. 이유는 하늘 저 언저리에 떠 있는 행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행성'을 말이다! 우거진 나무들 때문에 가려져 있던 그것은 하늘에 가깝게 떠 있었 다. 달보다 크고 색깔도 있었다. 푸른빛이 강한 오팔처럼 푸른 빛깔 의 행성. 우주 밖에서 보낸 위성사진을 통해 볼 수 있었던 지구의 작아진 모습 같았다. "행성이잖아! 태양도 있는데. 대낮에. 달도 아니고 푸른 행성이!!" 너무나 경이롭게 느껴지는 사실에 진은 탄성을 질렀다. "이 곳은 정말 별세계구나....그 곳과 전혀 다른 차원인 가봐. 우와- 아-" 우주선에서 지구를 쳐다보게 되면 들게 될 것 같은 감격과 환희의 감정이 솟아났다. 진은 머리 속이 맑아지는 기분에 웃기 시작했다. * 진이 여전히 감탄하며 서 있을 때, 쐐애액-하는 비행기가 이륙할 때 나는 소음 비슷한 것이 들리더니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향한 진은. 진은. 또다시 기절할 듯 충 격을 받았다. [찾았다!] 거대한 몸체의 공룡을 닮은 생명체가 진의 머리 위에 높게 떠서 머 리 속까지 울리는 고음을 내었다. 드래곤이었다! 판타지 영화에서, 동화책에서, 인간들이 동경하던 신 화에 거론되던 드래곤! 최강의 몬스터! 진은 그 위압감에 그 큰 존재의 경이로움에 저도 모르게 탄성을 질 렀다. '아름답다!' 하늘에 떠 있는 행성이야, 과학적으로 설명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저 존재는 자체가 오랜 세월동안 인간들의 꿈이었지 않은가. [...........] 벼락같던 느낌을 주며 하늘 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던 그 놀라운 생 명체가 갑자기. 사라졌다. "......어?" 하늘을 향하던 고개를 내려 잘못 봤나하는 의구심에 멈칫한 진은, 곧 그녀의 서너 걸음 앞에, 반짝이는 금발을 허리까지 길게 늘어뜨 린 20세쯤 되어 보이는 굉장한 미남이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입고 있는 옷은 박스형 흰색으로 손목과 발등을 덮는 길이에 품이 넉넉해 보이는, 어깨에 끈으로 얼기설기 매듭을 짓고 허리에 벨트를 맨, 옛 그리스 복식처럼 보였다. 게다가 목둘레와 소매 둘레에는 금 자수가 놓아져 있어 고풍스럽고 고급스러워 보였다. '?......드래곤?' 멀뚱하니 바라보니까, 방금 전 진이 체험했던 그 굉장한 감각과 비 슷한 느낌을 주는 눈빛으로 성량이 풍부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그렇다. 드래곤이다.....방금 뭐라고?" '야-아. 드래곤이 말을 거네.' 진은 상황파악을 못하고 동화 속에 빠진 듯한 착각에 순수하게 기 뻐하며 대답했다.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그는 한쪽 눈썹을 치켜 뜨더니 진은 쏘아보았다. "아......내 생각을 읽어요? 정말 드래곤이다! 우하하하 정말 동화네... 아름답다고 생각했어요. 아, 남자 분인데 실례가 되었나요?" "내가 한 외모 한다 만은....아니, 그것보다, 너!" 실례가 된 말은 물론 아니었지만 그동안 저 꼬마-이제 여자가 돼서 나타난 인간으로 인한 지난 몇 년간의 곤혹스러움이 되살아나서 투 비와이즈는 살기를 피어 올렸다. 왜. 왜인지 주위가 갑자기 어두워지는 듯한 기분까지 들고 살벌한 바람이 휘몰아치는 가운데, 진은 웃음을 멈추고 다시 그를 주시했 다. [파이어 볼.] 무언가 알 수 없는 위험이 다가오는 것을 직감하고 진은 본능적으 로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탁월한 반사신경에 가슴을 쓸어 내렸다. 진이 서 있던 자리의 한 걸음 뒤에 폭음이 울리며 불덩이가 작열했 던 것이다. "............." "............." 둘은 똑 같이 움푹 패여 연기를 뿜고 있는 그 자리를 응시했다. 그리고 동시에 시선을 돌려 마주보았다. "뭐야? 왜 갑자기 공격을 해? 저거 뭐야, 마법이야?" 투비와이즈는 기가 막혔다. 저것이. 저 쪼그만 꼬마였던 것이 자신 이 날린 마법을, 그것도 캐스팅 없이 용언으로 날린 마법을. 피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저 써클 파이어 볼이긴 했지만 그 멍청하던 꼬마 여자애가 어떻게? '내가 찾던 그 꼬마가 아닌가?......아닌데. 분명히 맞는데....' 투비와이즈는 그가 몇 년 전에 그녀에게 걸어둔 추적 마법으로 당사 자임을 다시 확인했다. "이봐, 왜 대답이 없어?" 투비와이즈는 건방져진 여자의 말투에 다시 발끈해져서 자신의 실 수를 만회하기 위해 이번엔 용언을 쓰지 않고-체면이 있지.-공격마 법을 캐스팅 했다. "파이어 볼! 파이어 볼! 파이어..." "...저, 저거 왜 저래?" 진은 허공에 갑자기 생겨나 연달아 날아오는 농구공 만한 불덩이를 이리저리 피하며 당황해 했다. 꽝! 꽝! 꽝! 총성 비슷한 파열음이 여기 저기 탄 꽃잎과 풀 부스러기와 흙 등을 날리며 주위를 초토화시키고 있었다. 공격이 멈추자 진은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멈춰 서서 숨을 몰아 쉬었다. 처음 서 있던 자리와 상당히 멀어지게 된 진은 화가 치솟았다. 생명에 직접 가해지는 경험해 보지 못한 위협에서 잠시 벗어나자 조금 전까지 보이는 모든 것이 자신을 반기는 듯 해서 고맙고 따뜻 한 마음이었던 것을 잠깐 잊었다. 그리고 동화책이나 영화에서 언뜻 보았던 드래곤의 이미지와 너무 다른 실망스러움에, 소리쳤다. "야- 너, 정말 드래곤이야? 여기 드래곤들은 다 너 같아?" "버릇없는 꼬맹아..... 내가 돌겠네. 이것도 한번 피해 봐라... 아이스미사일!" 독이 오른 표정으로 다시 허공에 얼음 모양의 화살을 만들어 그가 진을 향해 날리자, 진은 기겁하며 다시 피해 다니기 시작했다. 한 개가 아닌 한꺼번에 네 개나 되는 그 얼음 화살은 피해도 다시 뒤돌아 날아와 따라 붙고, 다시 따라붙고 해서 진은 정신 없이 부상 을 면하기 위해 몸을 움직여야 했다. 그녀는 마음만 먹으면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반사신경을 끌어올 릴 수 있었다. 그래서 피하는 것에 별 문제는 없었지만, 먼저 번 불덩이와는 다르 게 얼음처럼 보이는 그 화살은 눈이라도 달렸는지 되돌아와 추적까 지 하며 쌕-쌔액- 따라 다니는 것을 보니 자신의 존재를 감지하는 것이 분명했고, 네 개가 제각각의 방향에서 돌진해 오니 정신이 하 나도 없었다. '이..이런. 진짜 화살이 따라다니는 것 같아.' 진이 자신이 날린 마법을 피해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하고 몸을 구르 고 비틀고 뛰어오르고 하는 광경을 지켜보면서 투비와이즈는 너무 나 황당해서 화가 가라앉았다. '조것이....도대체 어찌된 일이야? 그새 못 본 새 소드 마스터가 되었 나? 아니, 소드 마스터라도 검이 휘둘러지는 속도로 몸을 움직여?... 그리고 입고 있는 저 희한한 옷은 다 뭐야.' 팔짱까지 끼고 구경하던 드래곤은 마나 실린, 중 써클 마법이 한계 에 이르러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씩씩대면서 보기 드물게 굵게 웨이브 진 검고 푸른 곱슬머리를 어 깨 너머로 휘날리던 그 인간 여자가 멈추어 섰다. 거리가 다시 가까워져서 대여섯 걸음 앞에 서서 그녀는, 남청색 눈 이었던 빛에 노기를 더해 까맣게 보이기까지 한 눈을 하고 투비와 이즈를 향해 경고. 협박. 뭐 그런 비슷한 의지를 표출하고 있었다. "정말 어이가 없네. 너 어떻게 된 거야?" 투비와이즈는 진의 눈빛에, 너무 쌓인 것이 많아 잠시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리고 다시 놀랐다. "내가 물을 소리다! 너 땜에 좋은 기분 다 날라 갔잖아. 모처럼 싸 움 같은 거 않고 평화롭게 살아보려고 하는데, 왜 이유도 없이 다짜 고짜 날 죽이려드는 거냐! 이곳은 원래 다 그래?" 화사한 아이보리색-하지만 투명해 보이는 피부를 붉게 물들이며 진 이 말하자 투비 와이즈는 금빛 머리카락을 설레설레 흔들며, "죽일 생각은 없었다. 암, 지금 죽으면 곤란하지. 상처만 주려고 했 던 거다. 그 정도야 뭐... 중상을 입더라도 치료해 주면 되니까. 그런 데,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내가 화가 쌓여서 화풀이를 좀 한 것은 인정한다만, 너- 말을 하는 군. 게다가 그 반사신경이라니! 도대체 어딜 가서 뭘 하다 온 거야?!" "내가 말을 못했어? 아니, 그게 아니고. 날 알아?" 진은 그 냉랭한 미남자의 말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날 아는 사람. 아니 드래곤을 만나다니... 난 도대체 누구였지?' "넌 백치였다. 드리얀 왕국의 첫 번째 왕녀 제르티아 진 라이어스 D. 머리가 좋아 진 것 같긴 한데, 기억은 못하나?" ".................." 진은 더듬거리며 다시 반문했다. "배...백치? 왕녀?" 그리고 비로소 진은 정신이 없어서, 자신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내뱉 고 있는 언어가, 영어도 한국어도 그밖에 알고 있던 다른 언어도 아 니라는 것을 드래곤이 말한 자신의 이름을 듣고 깨달았다. 그들이 다시 만난 자리는 동 대륙에서도 손꼽히게 울창하고 긴 산 맥을 자랑하는 골드 드래곤 투비와이즈의 레어가 가까운 메칸타나 산맥의 한 귀퉁이였다. 그리고 진이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녀가 의식을 차렸던 자리는 몇 년 전 투비와이즈가 그녀를 찾다가 홧김에 브레스를 날려 나무들을 태워 먹은 자리였다.... [16] -[드리얀 왕국 & 드리얀 왕국의 잃어버린 왕녀] 3. 드리얀 왕국 대륙은 크게 네 개로 나눠져 있었고 타원형으로 옆으로 넓게 퍼진 형상이었다. 북 대륙에는 기후가 낮아 사람이 살만한 곳이 땅의 1/3 정도였기에 그다지 많은 나라가 세워져 있지는 않았지만 나라들의 면적은 얼어 붙은 땅을 포함하면 대륙에서 가장 넓었다. 동 대륙과 서 대륙에는 인간이 살기 가장 좋은 환경으로 그 곳에 대부분의 인구가 밀집되어 있었고 크고 작은 나라들도 많았다. 남 대륙은 아래로 갈수록 기후가 습하고 뜨거웠기 때문에 사막이 많은 지형이었고. 인간의 도시는 아래로 내려갈수록 규모가 작아지 고 드물어졌지만 바다로 나가는 선박의 선원이나 모험 자들이 많은 곳이기도 했다. 남 대륙 아래 뜨거운 사막을 건너 배를 타고 태양과 싸우며 나가다 보면 또 다른 대륙이 있다. 그 곳에는 전혀 다른 풍습과 의식주를 영위하는 인간들이 살았지만 험한 바닷길이 열린 지 얼마 되지 않 아서 교류는 빈번하지 않았다. 인간들이 아는 대륙은 그 정도였고 서 대륙이나 동 대륙에서 바다 로 나가면 크고 작은 많은 섬들이 있었지만 그 너머에 또 미지의 땅이 있다는 확인되지 않은 설도 있었다. 대륙의 곳곳에 넓은 평야가 산재해 있고, 서 대륙과 북 대륙에서 시 작 되어 대륙을 가르는 형상으로 산맥이 자리하고 있었으며 산맥을 따라 강이 형성되어 사방으로 바다를 향해 흐르고 있었다. 숲 속엔 엘프의 마을과 광맥을 찾아 집단 생활을 하는 드워프와 몬 스터와 유사인종들이 존재했다. 수많은 이름의 산맥 중 메칸타나 산맥은 동 대륙의 심줄 끝 부분에 위치해 드리얀 왕국을 북 대륙의 호전적인 나라들로부터 일부 지역 을 제외하고는 아주 효과적으로 막아 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진의 나라 드리얀 왕국은 사 대륙 중 동 대륙에 위치했고, 유달리 따뜻한 기후에 상당히 넓은 농지와 바다로 나가는 항구도 가지고 있는 중상 크기의 면적과 힘을 가진 왕국이었다. 드리얀 왕국은 초대 대왕이었던 드리얀 왕의 이름을 따서 지었고 500여 년 간 그의 성을 물려받은 후손이 다스리는 나라였다. 초기에 바다와 약간의 사막과 풍요로운 대지로 인해 동 대륙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그 곳은 초대 왕 드리얀의 사후, 왕족이 주도 한 반란으로 건국 30년 만에 드리얀과 스타파로 양분되는 비운을 겪었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 두 나라는 외세의 침략과 돌림병들로 인해 농 토를 잃고 축소되어 바다 쪽으로 밀려난 형세였지만 스타파는 강한 기사의 나라로 북, 서, 남, 가까운 동 대륙의 모든 나라로부터 위협 을 받아 국력이 강했고, 드리얀은 옛날 넓은 국토를 그리워하는 지위 계층들로 군사력을 키우는 것을 게을리 하지는 않았지만 대부분이 농노와 평민으로 구 성된 그들의 국민성은, 평화를 사랑하고 풍요로움을 약속하는 바다 와 대지의 여신을 섬겼기 때문에 온순하고 착했다. 흰 대리석으로 증축된 드리얀 왕 성은 전 대륙에서도 손 뽑히고, 나라에서 가장 크고 아름답기로 유명했다. 초대 대왕 드리얀이 평생을 걸려 막대한 재정을 쏟아 부어 후일 나 라가 양분되는 원인을 제공한 그 건축으로 인해 드리얀 왕 성은 사 람들에게 원망과, 애달픔. 동경을 주는 성이기도 했다. 왕 성은 크게 네 개의 궁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500년 전에 건축될 당시에는 없었던 거대한 드래곤의 석상이 정문 을 지켰고 문을 열고 들어가면 길게 늘어진 가로수 길과 양편에 넓은 정원을 가진 입구를 지나쳐, 국왕의 집무실과 나라의 비중 있는 연회가 열리는 연회장과 타국의 사신을 접대하는 등의, 주요 왕성의 일을 전담하는 '본궁'이 있었다. 안쪽 아름다운 정원과 다듬은 돌 바닥을 지나가면, 왕비의 궁과 왕 녀나 왕자의 궁이 이어져 있는 '태궁'이 있었고 후궁들과 그 들의 왕, 자녀들이 머무는 '동궁'과 더 안쪽으로 나라에서 높은 대접을 받고 있는 신관이나 마법사나 영 지를 갖추지 못했지만 국력을 좌우지하는 젊은 귀족이나 기사들이나, 궁성에서 사는 고 관직 관리들이 거하는 '만궁'이 있었다. 만궁 뒤에 는 정문만은 못하지만 육중한 궁의 후문이 있어서 만궁에 거주하거 나 밖에서 개인적인 용건으로 궁을 찾는 귀족들이 주로 이용했다. 드리얀 왕국의 건국 사에는 초대 대왕으로부터 200년 후에 새로이 쓰여진 역사가 있었다. 당시 국왕은 7대. 알폰스 드캄 라이어스 드리얀 이었고, 다른 나라 의 왕들이 그러하듯 왕이 되어 짊어져야 할 여러 중책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특히 노쇠하여 왕위를 물려주고자 해도 여럿 있는 왕자들 중 선택하는 과정에 너무나 나라 안팎이 어지럽던 시기, 왕국의 미 래를 위해 그는 드리얀과 스타파에 공통적으로 속했던 메칸타나 산 맥에 올랐다고 한다. 그는 골드 드래곤 투비와이즈를 만났고 그에 관한 내용이 역사책에 중요 부분을 차지하며 서술되어 있었다. [.....왕은 골드 드래곤 투비와이즈에게 말했다. "위대하고 현명한 존재시여, 저는 드리얀의 왕입니다. 살기 좋은 땅이고자 열심히 일하는 백성으로 두루 나라 안팎을 안 정되게 이끌고 싶으나 형제 국인 스타파의 끈질긴 도발과 잦은 외 세의 압력을 막아내기가 너무나 힘듭니다. 여신들의 가르침으로 평화를 지키고 덕망 있는 왕이 되고자 노력하 여도 뜻대로 되어 가지 않습니다. 저는 노쇠하였고 많은 왕자를 두었으나 마땅한 후계자를 선택할 지 혜를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당신은 드래곤의 신 아메시스트께, 또한 창조신 카로부터 가장 사랑 받아 강하며 영원한 존재. 저에게 저의 왕국의 안녕을 위해 해야할 일을 조언하여 주십시오. 당신의 도움을 바라고자, 이 곳까지 찾아 온 성의에 보답하여 주십 시오. 현명한 드래곤 투비와이즈여." 그러자, 골드 드래곤 투비와이즈가 말하였다. "너의 자녀를 내게 보내라 내가 내는 세 가지 시험에 통과하는 자가 너의 후계자가 될 것이다." 왕은 감격하며 물러나 그의 왕자 셋을 그에게 보냈다....] 이 기록이 왕국의 역사가 된 그 후, 드리얀 국의 역대 왕의 후계자 는 골드 드래곤 투비와이즈에게 세 가지 시험을 받게 되었고 드리 얀 왕국은 드래곤의 이름을 등에 업고 주변국을 견제했으며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게 되었다. 3-2. 드리얀 왕국의 잃어버린 왕녀. 15대 국왕, 페르티온 세르제 라이어스 드리얀은 25세 젊은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약혼녀였다 제위와 함께 국모가 된, 첫 번째 왕비 헤런 사르비아 라 이어스 D는 후궁들이 있었지만. 세 명의 왕자를 낳아 정통 후계자 를 둔 어머니로 왕에게 신임과 존중을 받으며 화려하고 권력 있는 궁정생활을 했다. 하지만 페르티온 국왕은 35세 되었을 때 바다의 여신을 모시는 신 전에 치성을 드리러 갔다가 젊고 아름다운 여 신관에게 반해 두 번 째 왕비를 맞았고 총애에서 밀려난 헤런 왕비는 그녀를 질투했다. 대륙에서도 보기 드문 검은 빛의 머리카락과 신을 모시던 사제로서 의 자애로운 성품을 가졌던 두 번째 왕비 세리아스 진 라이어스 D 는 왕의 관심을 독차지했고 온유한 성품으로 평민들로부터도 사랑 받았다. 결혼 후 3년 동안 아이가 없던 그녀는 왕에게 정통 핏줄의 최초의 공주를 낳아 주었고 비록 여아라 유명무실하기는 했지만 이복 형제 들과 똑 같이 왕위 계승 권을 물려받았다. 아이는 곧은 머리카락을 가진 왕족이 대부분이었던 때에, 굵게 곱슬 거리는 푸른 기운이 감도는 짙은 검은머리에 진한 청색 눈동자를 가진 너무나 사랑스러운 왕녀로 태어났고. 천진하고 천사 같은 행동 으로 모든 사람에게 사랑 받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세리아스 왕비는 근심스런 얼굴이 되었고 궁성에서는 왕녀 제르티아 진 라이어스 D에게 무슨 하자가 있는 것 이 아니냔 소문이 돌았다. 헤런 왕비는 라이벌의 약점이 될 소지의 소문에 혹해 세리아스를 자주 찾게 되었고 왕족에게 있어서는 오점이 될 문제를 안게 된 세 리아스는 아이가 3살이 되던 해에 두 번째 아이를 임신하여 불러오 는 배를 하고 그녀가 모시던 여신이 있는 신전으로 신탁을 받기 위 해 여행을 떠났다. 그녀만이 아는 신탁의 내용은 아무도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돌아 왔을 때 그녀가 데리고 갔던 3살 난 어린 왕녀는 자리에 함께 하지 않았다. 여러 소문이 무성했지만 그 후 12년 이상이 지나도록 왕녀의 안위 에 대해서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세리아스 왕비는 곧 두 번째 아이로 왕을 닮은 흑갈색 머리의 왕자 를 생산했고 사람들은 새로운 왕위 계승 권을 가진 어린 왕자에 관 심이 집중되어, 정통 계승 권을 가진 하나밖에 없던 왕녀에 대해서 는 잊혀져 갔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장성한 헤런 왕비의 첫째 왕자는 드래곤의 시 험을 받을 자격을 얻기 위해-혹은 점수를 따기 위해, 공을 세우고자 분쟁이 빈번하던 남 대륙과 국경선을 마주한 전쟁터에 나가게 되었 고 사막 지형이었던 그 곳에서 탈수증으로 숨졌다. 비슷한 시기에 둘째 왕자도 드리얀과 뿌리는 같지만 양분되어 오랫 동안 감정 싸움을 벌이곤 하던 형제 국 스타파와의 소규모 전투에 서 사망하였다. 헤런 왕비는 아끼는 두 명의 왕자를 잃고 가슴 병을 앓았으며, 그녀 의 머리맡을 지키던 마지막 남은 왕자 페르티온 라 라이어스 D는 어머니의 한탄과 원망과 희망을 한 몸에 받으며 커야 했다. 페르티온이 20세가 되었을 때 헤런 왕비는 마음의 병을 이기지 못 하고 숨졌고, 23세가 되었을 때. 어머니가 다른 이복동생 루시엔 진 라이어스 D 는 13살을 바라보고 있었다. 후궁의 소실은 계승 권이 없었기에 두 명의 왕자만이, 지지하는 귀 족들의 세력으로 왕권다툼이 시작되고 있었지만 드리얀 왕국은 여 전히 왕 성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며 평화로운 듯 했다. 그리고 세리아스 왕비는 잊혀진 왕녀 제르티아 진 라이어스 D의 16 세 성년식이 다가옴을 기억하고, 초조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17] 4. 드래곤과의 담판! or 협상? "어떻게 내가 백치였을 수가 있어?" "낸들 아냐? 아무튼 넌 백치였어. 그래서 내가 얼마나 성가셨는데." 진은 충격적인 자신의 신분과 과거의 상태에 대해 듣자 신을 만났 던 때를 떠올리고 혼란스러워졌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아, 모르겠다. 나중에 생각해 보고. 일단.' 호기심의 눈초리로 뻔뻔스럽게 공격한 사실 마저 당연하다는 태도 의 투비와이즈를 보고 진은 돌아온 이 고향에 대해 너무나 무지하 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장, 미지의 생명체로 저 인간으로 변신해 있는 남자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너무 없었다. 드래곤이 존재하지 않았던 세상에서 사람들이 상상해 내던 것과 실 제 드래곤을 어떻게 연관지을 수 있겠는가. 진은 신중해 져야 했다. "그렇다면 일단, 한가지 물어 보자. 넌 내 적이야?" 투비와이즈는 다시 눈썹을 치켜 떴다. "인간 따위가 어떻게 드래곤의 적이 되냐? 여전히 바보로군." '저 녀석 참 얄밉네.' "너도 바보구나. 내가 적으로 알고 대해야 하냐, 아니냐는 것을 묻 는 거다. 생각을 읽는 것이 아니었어?" 투비와이즈는 발끈했다가 포기한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가자. 집에 가서 얘기를 하도록 하지. 이 곳에 서서 네 물음에 답 하고 내 의문을 해소하기엔 장소가 불편하군." "너 정말 바보구나. 내가 그냥 따라갈 것 같아? 확실치 않는 대상에 게 순진하게 졸졸 따라가는 실수는 두 번 다시 안 해." "두 번?" "그래. 첫 번째 따라오라는 제의를 받았다가 내 인생은 엉망이 되었 었다." 진은 말을 하면서도 자신의 말투가 시비조인 것을 알았지만 저 녀 석을 이성을 잃지 않을 정도로만 자극해야 했으니 어쩔 수 없었다. 당장에 필요한 정보를 위해서라도 말이다. 먼저 호의를 보였던 자신을 실망시킨 것은 저 남자였으니 자신의 출생에 대해 안다고 해도 무작정 믿을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내가 정말.....돌겠네." "돌아라" 비웃음이 분명한 진의 말에 투비와이즈는 또 다시 살기를 피워 올 렸다. "너 정말 죽고 싶냐?!" "지금은 죽이면 안 된다며? 게다가 난 웬만해선 안 죽어." "그래.....?" [워 프!] 투비와이즈는 신경질이 나서, 건방지다 못해 자신을 농락하기까지 하는 여자에게 혼 쭐을 내주기 위해 그녀의 앞으로 마법을 써서 이 동했다. '웃기네.' 이곳에서 의식을 차린 후, 진은 사물에 대한 감각이 더 나아졌음을 깨달았다. 맨 처음 공격은 거의 본능적으로 피한 것이었지만 경계하 고 있던 그녀는 투비와이즈의 보이지 않는 접근을 금방 알아챘고 감지되는 자신의 코앞을 향해 멋진 돌려차기를 보여 주었다. 투비와이즈는? 그는 진의 앞에 나타나자마자 그녀의 몸을 잡고(어디부분?) 엉덩이 를 때려주려고 했다. 그런데. 그런데. 실드를 펼칠 순간을 놓치고 진의 발뒤꿈치에 안면 을 강타 당했다! 그 보이지 않은 스피드와 힘이란...인간으로 폴리모프 한 상태여서라 고 변명하고 싶었지만... "이. 이럴 수가..." '음. 드래곤이나 사람이나 반사신경은 별 차이 없네.' 진은 옆으로 서너 걸음이나 떨어진 자리에 나동그라져 있는 투비와 이즈를 보며 차분히 계산을 했다. "이럴 수가....앞니가...." 망연해 하면서 일어서는 그의 입술에 피가 터져 나오는 것을 보고 진은 당당히 말했다. "아까도 그랬지만, 네가 먼저 공격한 게 맞지? 난 방어했을 뿐이야. 내가 아는 드래곤은 강하고 현명하고 공정하다고 알고 있으니, 또 덤비면 내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고 더 이상 봐주지 않겠어." "............" -드. 드래곤 사천 살, 용 생을 돌이켜 그가 인간에게 얻어맞은 적이 있었던가? 무. 물론 유희를 나가 마법을 쓰면서 인간의 몸으로 부상 을 당했던 적은 있었다. 그런데 뻔히 드래곤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인간에게! 그 것도 발로.....얻어맞아?! 자존심이고 뭐 고를 떠나서 너무나 황당하여 투비와이즈는 말문이 막혔다. "이제 내가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면 전설의 드래곤이여! 자 신의 입장과 내 입장에 대해 이해 할 수 있는 설명을 해 줘. 그렇지 않다면 정말 바보처럼- 널 선선히 따라 갈 거라는 생각은 버리는 것이 좋을 걸?" ".............." 드래곤 투비와이즈는 태어나 처음으로 한 인간에게 그 것도 소녀 티를 벗지 못한 여자에게 얻어맞고 나가 떨어졌으며, 인내를 시험 당하는 순간을 맞았다.... 드래곤은 만년을 사는 생명체로 물질계에서 가장 강하고 완벽한 생 명체였지만 그들도 하찮게 여기기만 하던 인간들에게 당하는 일도 있었다. 그 증거로. '드래곤 슬레이어'란 말도 있지 않은가. 비록 성년을 갓 넘긴 나이 어린 드래곤이나, 방심하는 사이 떼를 지 은 인간들에게 죽임을 당하거나, 유희 시 어처구니없게 인간에게 살 해당하는 멍청한 드래곤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투비와이즈는 4천 살이 넘는 에이션트 급이었고 인간의 나 라 하나쯤은 하루밤 사이에 날려 버릴 수 있을 정도의 힘과 연륜을 가진 드래곤이었다. 그는 골드 드래곤이었고 성격이 뭐 같은 다른 드래곤들에 비해 인 간이나 유사인종에게 제법 공정한 면이 있었기 때문에 '정의를 수호 하는 자'라는 명칭도 가지고 있었다. 투비와이즈는 상대를 얕보았다는 것을 어렵게, 어렵게 인정하고 저 빌어먹을 꼬마녀석으로 인해, 엉망이 된 평판이 되기 전의 시절로 뒤돌아 건너. 예전의 침착함을 되살렸다. 마법도. 마나를 이용한 힘도 아닌 것에 아무리 방심한 사이라고 해 도 당한 것은 당한 것이니, 노여움을 일으켜 자기 무덤을 파는 일만 은 면해야 했다. 덧붙여 저 인간 여자는 자신이 은연중 화를 못 참고, 목소리와 눈빛 에 드래곤 피어를 섞어 쓰는 것에도 별다른 겁을 먹지 않고 있었다. 당장은 보복이 힘들고 협박이 가능하지 않는 상대에게는? '협상뿐이지. 제기랄!' 투비와이즈는 이가 부러진 탓에 고 써클 치료마법 리커버리를 써야 했다. "내가......." "내가, 뭐?" 투비와이즈는 두 눈을 찔끔 감았다. "내가 급하고 더러운 성질을 가진 레드 드래곤이나, 블랙 드래곤이 아닌 것을 감사히 여겨라. 그랬다면 아무리 금 제에 걸려 있다고 해 도 널 살려두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난 사물의 이치에 어떤 드래 곤 보다 밝은 골드 드래곤이다. 본능밖에 없던 백치 계집애였다가 의지를 갖춘 인간으로 다시 나타 나 내 공격을 받았으니.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 옛말에 비추어 네 목숨이 100개라도 봐주지 못할 행동을, 지금 한번만은 받아주마. 지금으로선 너는 내 보호 아래 있어야 하니, 내 레어로 가야한다. 뭐가 알고 싶나? 설명해 줄 수 있는 일은 대답해 주도록 하지." 진은 일단 한시름 놓았다. "다시 공격하지 않고 나에게 해 끼치지 않겠다고 하면 따라 가겠어. 말해 두지만 난 이 세계에 대해서는 전혀 몰라. 몰라서 하는 일은 죄가 되지 않지? 나중에라도 이 일로 트집을 잡을 것 같으면 그때 가서는 정말 적으로 간주하겠어." 투비와이즈는 팔짱을 끼고 -손 둘 데가 없는 기분이었으니-진의 말 을 들으며, 지금 자신이 저 작은 인간여자에게 경고를 받고 있는 것 이 꿈일까. 생시일까. 생각했다. "몰라서 하는 일이라.... 이 세계에 대해서 모른다고?" "그래. 난 이곳과 전혀 다른 차원을 건너 바로 몇 분전에 돌아왔어. 알 리가 있겠어? 기억조차 없는데." "............" 골드 드래곤 투비와이즈와 진은, 임시 평화 협상을 끝내고 투비와이 즈의 레어로 워프 해 갔다. * 바를로네시와 차를 마셨던 응접실은 찻잔이 치워지지 않은 채 그대 로였다. 투비와이즈는 가볍게 테이블 위를 손을 내저어 마법으로 치우고 의 자에 앉았다. 진은 난생 처음 텔레포트라는 것을 경험하고, 옛 그리스와 로마시대 를 연상시키는 실내장식의 넓고 화려한 룸에 서 있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난 당신 이름을 몰라. 뭐라고 불러야 해?" 위대한 드래곤 투비와이즈님이라고 불러라. 하고 말하고 싶었지만 저 앞 뒤 없는 여자에게 비웃음만 당할 것 같아서 투비와이즈는 그 냥 이름만 댔다. "....하지만 보통 인간들은 날, '위대한 드래곤 투비와이즈' '현명한 드래곤 투비와이즈' '정의로운 투비와이즈' '창조신과 아메시스트께 가장 사랑 받는 드래곤 투비와이즈' 등등으로 부른다." "............." 진은 웃음이 나올 것 같아 고개를 돌리고 방 구경을 하는 척 해야 했다. '드래곤은 참 재밌네.' "재밌긴 뭐가 재밌냐! 먼저 처음 의문부터 풀어 주마. 우리 골드 드 래곤은 본체 모습일 때는 마법을 쓰지 않아도 인간처럼 작은 동물 이 내는 마음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모두는 아니지만 강렬하게 하 는 생각이나 말하는 내용의 진실 여부를 알아채는 것은 할 수 있 지." 그래. 그래서 맨 처음 진이 아름답다고 한 말에...인정하긴 싫지만 투비와이즈는 마음이 흔들렸다. 보통 유사인간을 포함하여 모든 약해 빠진 그들은 드래곤과 마주치 면, 공포. 상식을 넘어선 위압감. 신을 대하듯 하는 경의 등을 표하 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아, 물론 원한이 있는 자들은 증오를 표현 하기도 했지만- 진은 순수한 경탄으로 외형이나 가진 힘이 아닌 드 래곤이라는 존재 자체에 탄성을 질렀었고, 그런 그녀의 목소리를 투 비와이즈는 똑똑히 들었었던 것이다. 그것은 이제껏 비굴 해 보이는 인간들의 태도에 비추어 신선한 반 응이었고 조금은 기쁘기까지 했었다. "그리고 지금처럼 작은 타 종족으로 변해 있을 때는 거짓말 탐지 (detect lie) 마법을 유지해야 진실 여부나, 단편적인 속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니 앞으로 내 앞에서 거짓말은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거야." 진은 다시 동화 속에 갇힌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정말 앞에 있는 저 남자는 전설에서나 가능했던 '드래곤'이었다. 현실 감각이 떠났다, 돌아왔다 해서 진은 일단 머리 속을 휘 젖는 여러 의문들을 정리해 볼 시간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배도 고프고 몸도 찜찜했다. "투비와이즈.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은데....목욕탕에 먼저 가면 안될 까? 난 배도 무척 고파. 언제부터 굶었는지 가늠할 수가 없어." 투비와이즈는 인상을 다시 한번 쓰더니, 의외로 더 이상 토달지 않 고 일어났다. "정말 특이하군. 목욕탕을 알아?" "에? 여긴 목욕탕이 없어?" "내 영역엔 있다. 보통 인간들은 그런 탕을 못 만들지....그보다 나도 당장 궁금한 것이 있다. 너 도대체 전에 살던 곳에서 직업이 뭐였 냐?" "직업?" "그래. 입고 있는 옷이....나야 보기는 좋다만, 거리의 여자라 해도 그런 옷은 안 입는다." 진은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았다. 군데군데 피로 물들어 갈색 기운이 도는 청바지와, 셔츠를 잃어 검 은 색 스포츠 브라 위에, 역시 스며든 피가 지워지지 않아 지저분해 보이는 청 자켓을 걸치고 있는 차림을 훑어보고 대꾸를 했다. "거리의 여자가 아니라, 거리의 아이였어. 내가 있던 곳에서는 이 복장이 평범한 거였는데....그쪽 옷차림을 보니까 여긴....여자들은 바 지를 안 입나 봐?" "안 입는 정도가 아니라 그런 옷은 보지도 못했다." 진은 자신의 차림새를 깨닫고 머리까지 가려워지는 듯한 느낌에 실 제로도 긁적이며 이야기는 나중으로 미루고 씻을 수 있게 해 달라 고 정중한 어조로 부탁했다. 태도가 변한 그녀를 투비와이즈는 한쪽 눈썹을 치켜들고 쳐다보았 지만 진의 모양이 지저분해 보이긴 했는지 안내를 해 주었다. '아쉬우면 어쩔 수 없잖아, 드래곤아.' * "여기다. 마법이나 정령을 이용해서 씻을 수도 있겠지만 넌 또 그것 땜에 시간을 잡아먹을 것 같군." "정령? 정령도 있어?" "그럼. 없겠냐?.....도대체 어딜 갔다 온 거야?" "다른 차원에 갔다 왔다니까 그러네. 일단 씻고. 에? 여긴....." 그가 텔레포트-진은 이 단어가 더 현실적으로 느껴졌다-해서 데려 다 준 곳은 실내 목욕탕이 아니라 숲 속의 작은 폭포였다. 맑고 시원해 보이는 물이 폭포 아래에 고여 흐르고 시끄러운 새 소 리와 울창한 녹음 속에 잘 그려진 풍경화처럼 낭만적이고 멋있어 보였다. "이게 목욕탕이야?" "그럼 뭘로 보이냐. 나도 가끔 인간의 모습으로 더운 날엔 수영도 한다." 진은 고개를 내 저었다. 목욕 문화가 발달하지 않은 것이 분명했고 투비와이즈가 입고 있는 옷을 보아도 거의 바느질이 사용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 곳은 자 연 환경은 최고였지만 문명은 한참 뒤쳐져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제 가봐." ".....그렇게는 못하겠다. 또 없어지면 난 곤란해지거든." "그럼, 돌아서 있던가?" "넌 드래곤이 인간 여자를 보고 흑심을 품을 거라고 생각하나? 인 간이 토끼 목욕하는 것을 보면 토끼가 부끄러워하던?" "투비와이즈 너 정말 바보구나. 토끼는 물 목욕 안 해. 그리고 인간 은 상황판단이 가능한 이성을 가지고 있어. 성의 구분도 뚜렷하지. 그걸 지금 핑계라고 해? 난 부끄러워서 그러는 게 아니고, '예의' 때 문에 그러는 거야. 예의가 뭔지는 알지?" 투비와이즈는 건방 떠는 계집애에게 창피 좀 줘 보려다가, 말싸움에 서 졌다는 것을 알고 이를 갈며 몸을 돌려주었다. 진은 차가운 물에 몸을 담고 불쾌하고 슬픈 과거의 기억들을 씻어 내기 시작했다. 진의 머리카락이 정오의 햇빛을 받아 유난히 푸르게 반짝거렸다. '차가워라' 진은 추운 것이 싫었다.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겨울엔 항상 좋지 않은 기억만 있었던 듯 했으니까. "투비와이즈 입을 만한 옷 없어?" ".............." 투비와이즈는 또 다시 이를 갈며 탐지 마법으로 레어 안에 있는 인 간의 옷들이 있는 곳을 더듬어 남녀 공용의 옷을 찾아 불러왔다. "수건은?" "젠장. 별걸 다 찾네. 내가 네 시종이냐?" "그럼 어떻게 해? 당연히 필요한 것들인데 미리 준비 좀 해 주지." 투비와이즈는 머리가 지끈거려서 온갖 고급스런 주문을 해 대는 건 방진 여자에게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물기를 닦아낼 만한 부드러 운 천과 신을 신발까지 찾아서 진에게 건네 주었다. 진은 옷도, 수건도, 닦을 만한 옷감도(그건 수건이 아니라 옷감 수 준이었다) 샌들로 보이는 신발도 마법인 듯한 작용으로 둥실 거리 며 자신에게 날라 오는 것을 보며 유쾌해 졌다. '마법이란 참 좋은 거구나. 그래, 마법이야말로 동화인 거지. 훗." 투비와이즈가 건네 준 옷을 연구하다 진은, 속옷으로 보이는 폭 좁은 반바지 형식의 얇은 옷을 끈으로 허리에 묶어 입고. 흰색의 박스형에 무릎까지 오는 길이의 옷을 구멍난 목 부분에 머 리를 들이밀어 뒤집어써서, 천으로 가늘게 말린 끈이 달려 있는 소 매가 되는 팔 부분과 겨드랑이 아래 부분을 이어 매듭짓고. 가죽으로 만들어진 촉감 좋고 탄력 있는, 허벅지까지 오는 조끼 형 식의 겉옷을 또 다시 몸에 걸쳐서 앞부분에 줄줄이 달린 가죽끈으 로 매듭을 만들어 타이트하게 묶어 입었다. '거 참, 귀찮은 옷이네...' 진은 물기를 머금어 곧게 펴진 검은머리를 손가락을 이용해 대충 빗어 내렸다. '인간치곤 꽤 생기긴 했네...큼.' 투비와이즈는 옷 다 입었다는 진의 말에 뒤돌아보다가 생각했다. 진은 벗어 놓은 청바지등의 옷을 장식용 끈이 달린 넓은 굽의 부츠 와 함께 물가에 주저앉아 빨려고 했다. "뭐하냐?" "빨아야지." "제발- 냅둬라, 그런 건. 성가셔 죽겠네....어? 신발이냐?" 투비와이즈는 이제껏 진의 긴 청바지 자락에 감추어져 잘 보이지 않았던 처음 보는 신발을 보고는 눈을 빛내었다. "내가 세탁해 두지. 이젠 됐지? 가서 서로 정보교환을 하도록 하자." "밥은?" "가서!" "알았어. 알았어." 투비의 눈빛이 처음 보는 신발에 탐욕이 깃든 것을 알아채고 진은 쓴웃음을 지으며 다시 실내의 그 룸으로 그를 따라 옮겨갔다. 투비와이즈는 진의 옷에는 호기심만 일었지만 신발엔 욕심까지 생 겼다. 그리고 처음부터 쪼그만 귀걸이 한쪽이 신경 쓰이기도 했다. 어쨌든 그는 드래곤이 아닌가. 세공이 정밀해 보이는 유난히 반짝이 는 보석과 처음 보는 신발에 입맛을 다시며 투비와이즈는 진을 데 리고 다시 레어로 워프 했다. [18] 4-2. 드래곤은 은인이었나? 진은 투비와이즈가 차려 준 밥상을 받고. 밀로 만든 빵과 이것저것을 넣어 끓인 듯한 잡탕 스프와 과일과 구 운 고기로 식사를 했다. 덩어리 설탕도 나왔다. 맛은 보기와 다르게 꽤 좋았다. 조미료라 할 만한 것이 거의 들어가 지 않았는지, 약간의 향신료와 소금 간 외에는 음식 자체가 내는 맛 외엔 없었지만 차라리 건강에는 좋을 듯 했다. 먹을 것에 대해서 항상 성실한 버릇 그대로 투비와이즈의 살기 어 린 눈초리를 받으며, 꿋꿋하게 상당히 많은 양의 음식을- 과일만 제 외하고 다 비웠다. "이젠 됐지? 자, 다 불어라." ".....잠이 오는데?" "죽을래?!" 진은 반 장난으로 내 뱉은 말에 그가 파랗던 눈을 노란빛으로 물들 이며 음산한 기운을 팍팍 풍기자 멋쩍게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와의 대화를 대강 정리하자면. 아마도 진은 투비와이즈의 말대로 백치였던 상태에서 신이 말한 무 언가의 착오로 그 세계에 떨어졌던 것 같다. 하지만 인간의 뇌 부분은 현대 과학으로도 모두 밝혀지지 않았지 않은가. 진의 일에 신이 개입했는지 안 했는지는 일단 젖혀 두고라 도 차원이동의 충격으로 진은 백치에서 벗어났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언어문제는 투비와이즈의 이야기로 대충 때려 맞출 수 있었 다. 진의 어머니는 목숨을 걸고 드래곤 앞에 서서 아이를 돌봐주길 간 청했다고 한다. "네 어미는 신관출신이었는데 신을 믿는 사제라 그런지 너처럼 간 뎅이가 부어 있었다. 왕실에서 네가 좀 모자라 다는 것을 확인 당하 면 버려지거나, 죽임 당하거나, 더불어 자신의 배속에 있는 아이에 게까지 해가 갈지 모를 두려움에 내게 사정을 했다. 똑똑하게 만들 어 돌려주지 않아도 되니, 당장 있는 위험에서 만이라도 널 지켜달 라고 했다. 말했다시피 난 진실을 보는 눈이 있고 네 어머니의 맹목 적인 자식 사랑에 처지를 동정하게 되었지." 진은 그의 말을 들으며 가슴이 저려오는 기분이 되었다. '난 버림받은 것이 아니었어. 항상. 그래, 항상 사랑 받고 있었던 거 야.' "때 마침, 난 네 나라에서 몇 십 년 만에 한번씩 꼭 찾아와 성가시 게 하는 것이 너무 귀찮았던 터에, 아예 내가 내는 세 가지 문제를 맞출 수 있는 인간을 직접 만들어보고자 하는 생각에 널 받아들였 다. 그랬다가 난 완전히 망한 거지. 제기랄." "....세 가지 문제?" 투비와이즈는 비웃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네 선조의, 선조의, 선조의, 선조의, 선조의....." "알았어. 선조의 뭐?" "네 선조였던 바보 왕에게 한마디 한 걸로 네 나라 왕족들은 두고 두고 우려먹더구나. 난 그때 동면을 끝내고 그 사이 내 영역에 늘어 나 있던 몬스터로 배가 꽉 차서 기분이 좋을 때였거든..." "몬스터를 먹어?" "그럼 뭘 먹겠냐. 보석도 먹긴 하지만, 그건 간식이지." '엽기적인 놈. 인간도 먹을지도 모르겠네!' "먹는다. 그러니 너도 조심해." 겁을 주려던 투비와이즈의 말에도 진은 눈 하나 깜짝 안 했고, 투비 와이즈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네 선조가 왕권 다툼을 하던 아들들에게 암살의 위험을 받고 내 영역까지 들어왔다가, 인간으로 폴리모프 해 있던 나를 만났다. 난 느긋한 기분으로, 단순히 인간 마법사로 알고 넋두리를 늘어놓던 네 선조에게 자식들을 내게 보내라고 해 줬지. 내가 세 가지의 문제를 내서 왕의 자질을 갖춘 자를 골라주겠다고 말이다. 그런데 그동안 단 한 명도 세 가지에 대한 답을 모두 제대 로 내 놓은 녀석이 없었다. 난 세 문제를 다 맞추는 것을 조건으로 했기 때문에 모두 맞추는 녀석이 나올 때까지 귀찮은 방문을 받아야했었지. 애매하지만 그 것도 약속의 조건이었으니 그동안 내게 오는 왕족 중 그래도 젤 나 은 녀석에게 표시를 해 주었었다." "그동안 한 번도? 문제를 항상 바꾸었어?" 투비와이즈는 고소를 머금고 말했다. "아니 바꾸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기억을 지워 버렸지. 증표를 가지고 돌아간 녀석들은 어떤 형식의 시험인지 기억하지 못했으니 아들들에게 힌트를 줄 수가 없었지. 그래서 멍청한 네 선조들은 열 심히 검술 수련이나 하는 정도로 수업을 해서 내게 왔었다. 인간은 그렇게 편협하다." ".............." 투비와이즈는 진이 세 살이 되었을 때 보육을 담당하게 되었고 낮 은 지능 문제가 아니라 그녀에게는 치명적인 결점이 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고 한다. 진에게는 육체를 가지고 있어서 본능만 있었을 뿐 '의지'가 없었다. 말을 하게 해 보려고 언어를 익히는 마법까지 동원해 여러 번 시도 를 했지만 실패했고, 아무리 당부해도 하지 마란 짓-애들은 다 그렇 다지만 진은 더했다고 한다-만 골라하다가 매일 다치기 일쑤였다. "그럼 다치는 것을 낳게 하는 마법도 걸어 둔 거야?" 자신의 재생능력이 그 때문인가 했지만. "치료마법 평생 가는 것 봤냐?...아니, 넌 모르겠군. 마법이 없는 곳 에서 살았다니. 치료야 매일 성가시게 해 줬지. 하지만 그때뿐이었 다. 그래서 내가 트롤을......콜록." "트롤?" 열나게 이야기를 하다가 조금 꺼림칙한 이야기까지 꺼낸 투비와이 즈는 멈칫했지만 에라~ 모르겠다하고 다 말하기 시작했다. "몬스터다. 재생력이 강하고 육체적인 완력이 뛰어나지만 마물에 해 당하는 전투적인 몬스터지. 그 놈을 하나 잡아다가 재생력이라 할만 한 핵을 피에서 뽑아 네게 주입했었다." '이. 이 녀석. 날 생체 실험에 썼다고?' 진의 눈초리를 받고 코웃음을 치며 투비와이즈는 또 말했다. "하지만 넌 그 모든 시도를 다 헛고생으로 만들어 주었다. 의지는 없었지만 몸이 '난 인간이다'라고 열변하는 것처럼 강렬한 거부반응 을 나타내서 실패했었다. 그런데 정말 재생능력이 있다고?" 혹시나 자신의 실험이 뒤늦게나마 성공한 것이 아닌가하고 눈을 빛내는 그에게 진은 고개를 저었다. "난 5살 때 처음 기억이라는 것이 시작된 순간부터 모든 것을 스펀 지가 물을 빨아들이듯이...." "스펀지?" "솜 같은 거 말이야." "흠. 그래?" "난 머리가 좋은 편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천재는 아니었어. 언젠가 혼자서 아이큐 테스트를 했었는데 140이 못 나왔었지. 좋은 편이지 만 천재는 아니라는 소리야. "아이큐?" "지능 말이야." 투비와이즈와의 대화는 문화의 차이로 잘 이어지지 않는 경우가 대 부분이었지만 진은 차분히 설명해 줘가며 신을 제외시킨 상태에서 이야기를 풀어 나갔다. "내 환경이 너무 특별해서 천재라고 느꼈는지도 몰라. 하지만 수치로는 아니었고....인간은 가진 소질을 개발하는 정도에 따라 능력이 자라난다고 알고 있어. 난 네 마법의 여파였는지 신의 배려였는지, 언어문제에 어려움을 겪지 않았고 처음 의식하는 것들 은 백치였다니까. 더더욱 잘 기억되었을지도 몰라. 그리고 내가 처 한 환경이...난 자주 다쳐야 했어. 상처가 아무는 정도가 처음에도 지금 같았던 것은 아니야. 서서히 빨라지고 재생이 확실해 졌었어. 완력 문제도. 내가 속했던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여러 능력이 요구되었었어." "뭔 일을 했는데?" "난 소매치기였고, 도둑이었고, 공갈협박을 했고, 투자가에 사업가 이기도 했어." '정말 만만치 않는 꼬마... 아니, 여잘세.' 투비와이즈는 점점 재미있어졌다. 신을 만난 사실도, 차원이동을 한 것도, 백치였던 과거에 비해 인간 의 잠재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리게 된 지금의 체력이나 상황도 말이 되지 않는다면 모두 말이 되지 않았고, 신의 존재를 믿는 것처럼 믿 는다면 또 믿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감정적인 면에서 그토록 서툴렀던 것도 백치에서 출발한 인격이라 그랬는지 모른다. 진은 더 이상 자신이라는 존재의 타당성을 따지지 않기로 했다. ".....난 친구들을 잃었고 절망을 이기지 못하고 생을 포기했어." 보통 자살 기도를 했다가 다시 희망을 찾아 살아 지내는 인간들은 적어도 쑥스러워 할 줄 아는데, 투비와이즈가 지켜보는 그녀는 자신 의 행동이 당연했다는 투로 당당해 보였다. '정말 특이한 케이스군. 말이 인간의 능력이 무한하다고 하지. 그게 쉽게 될 일인가?' 투비와이즈는 아무래도 진의 인생에 신이 개입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신관들도 신탁을 받고. 신의 신성력을 빌려 쓰는 판에, 꼬마에게 제 어미의 신이 자비를 내려줬을 수도 있지. 암.' ".....그랬는데 신의 목소리를 들었어. 신을 만났었어." 혼자 생각을 하다가 투비와이즈는 진의 이야기의 진실 여부를 탐지 했지만 거짓은 아니었다. "신을 만나? 직접 현신 해서?" "현신? 글쎄. 의식 세계였던 것 같은데? 난 과학이 범람하던 곳에서 자랐어, 투비와이즈. 그런 것은 내가 직접 겪고도 잘 받아들이기 힘 든 분야야." "그 도움을 받은 신이 누군데? 이름이 뭐라던?" "......유일신이 아니야?" "유일신이라니?" "여긴 신이 많아? 종족에 따라 한 신만 섬기는 것이 아니고?" "드래곤 수만큼, 신들의 수도 많다. 신계 까지 있는데 뭔 소리 하냐. 인간들은 없는 신도 만들어 섬기고. 툭하면 필요에 따라 신을 바꿔 먹기도 하고 잘 그러잖냐." "..........." "신의 이름을 모른다면 어떤 이름으로 네 신을 부를 건데? 이름을 알아야 앞으로도 도움을 청해 볼 게 아니냐. 너 정말 머리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구별이 안 된다." "정말 어이가 없네." 진은 그토록 인간들이 염원하던 신의 존재가 이쪽 세계에서는 직접 현신도 하고, 신탁도 내려 주고, 신성력도 쓰게 한다는 말을 듣고 화를 내야할지 빈정대야 할지 부러워해야 할지 알 수가 없게 되었 다. "여기 사람들은 모두 행운아들이군. 축복 받은 셈이야. 그걸 모른다 면 나보다 더 백치이지." 투비와이즈는 진을 다시 만난 후 버릇이 되어버린 한쪽 눈썹 치켜 뜨기를 하고 있었다. 4-3. 신 화 "좋아, 대충 알았어. 그런데 투비와이즈. 왜 그렇게 날 찾은 거야? 네 잘못이 아니니, 내 어머니에게 행방불명되었다고 해명했으면 되 지 않아? 인간을 그렇게 존중하는 것으로는 안 보이는데?" 투비와이즈는 두 손을 금발머리에 대고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받치 더니 한숨을 쉬었다. "너. 나와 나눈 이야기는 비밀이다. 넌 나와 이곳에서 10년 간 산 것으로 해라. 누구도 내게 있을 뻔했던 일을 알게 해선 가만 두지 않겠다. 넌 죽음이 두렵지 않은 것 같으니, 내게 떠벌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지 않는다면. 약속을 하고 지키지 않는다면 네 나라를 통 째로 태워 버릴 테다. 어쩔래?" "....내 이야기를 너에게 한 것은 정보교류가 불가피 했기 때문이야. 내가 쉬워 보여? 난 내이야기를 떠벌리고 다닐 정도로 한가하지도, 바보도 아니야. 게다가 그 이야기를 믿을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군. 너조차도 반신반의하고 있잖아." "어쨌든 약속해." "약속하지. 하지만 난 인간이야. 불가피한 경우는 있을 수도 있다 고." "그런 것은 나도 판단이 가능하다 꼬맹아." 진은 자주 '꼬마'라고 자신을 불렀던 샘이 생각나서 미소지었다. "그런데 왜 10년이야? 난 17세 인데." "넌 나이 계산도 못하냐? 곧 네 16세 성년식이 다가온다. 몇 일 남 지 않았어." "몇 일 남았는데?" "세 달이 조금 못 남았다. 아. 세 달이나 남지 않았느냐고? 드래곤은 만년을 산다. 드래곤에게 세 달은 인간의 시간으로 세 시간으로 도 못 쳐준다. 내가 다급해지지 않을 수 있었겠냐?" 설명을 들어보고 진은 이곳의 시간의 흐름이 저쪽 세계와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어쩌면 당연한 지도. 달 대신 더 큰 행성이 달 구실을 하는 것 같던데 1년의 시간이, 한 달의 시간이, 다르게 쳐지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이곳의 하루는 25시였고 한 달은 32~33일이었다. 1년은 13개월이었 고 그것은 모두 인간에게만 적용된다는 것도 알았다. 엘프나 드워프 나 그 외 소수 유사인간들의 시간은 더 더디게 흐른다. 그 말은 곧 그들의 수명이 인간 보다 훨씬 길다는 것을 의미했다. '25시라.....한계의 시간이 가능한 곳이군.' 투비와이즈는 진의 어머니의 부탁을 받고 진의 지능을 높이고 말을 트이게 하기 위해 성년이 되기 전까지 맡은 이상, 뭔가 얻게 되는 것이 있어야 했고-드래곤이 공짜로 일해줄리 없으니, '네 아이에게 마법을 걸겠다.' 라는 생략되고 미화된 이야기로 진의 어머니에게 생체 실험에 가까운 마법 실험을 약속 받았다. "드래곤에게는 금제가 있다. 그냥 약속도 아니고 거래가 낀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드래곤은 창조신 카로부터 육체를 받았고 아메 시스트. 드래곤의 신으로부터 마법을 받았다. 실은 아메시스트께서 아버지 카로부터 창조마법을 훔쳐다 우리에게 준거지. 마법은 신성력과 달라서 약간 불안하지만 그 때문에 우린 지상에서 가장 강한 생명체가 되었다. 인간들은 그런 우리 드래곤들을 꼬여 마법을 전수 받았지. 하지만 엘프나 드워프 보다도 마법엔 소질이 없다. 아메시스트 신은 과정이 불순하다 하여 드래곤들에게 존중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훔쳐서 뭔가를 해 줄 정도인데 그런 신을 무시해?" 투비와이즈는 날카로운 경고의 눈빛을 번뜩였다. ".........." "우린 마법을 태어나면서부터 자연스럽게 쓰고 성년이 되면 용언을 얻는다. 그것은 10써클에 해당하는 반 창조 마법이다. 신의 신성력 이자 마법이 11써클이고 창조신의 권능이 12써클이다. 우린 쉽게 10 써클을 달성하지만 그 이상을 바라볼 수는 없다. 그게 한계이지..." "인간은 몇 써클까지 마법을 익히는데?" "인간은 8써클이면 대 마법사 칭호를 얻는다. 몇 백년만에 9써클에 이르는 인간이 나오기도 하지만 그게 한계다. 하지만....단 하나의 예 외가 있었다. 신이 된 인간이 있지." "인간이 신이 돼? 누군데?" "카르마." 업보. 윤회. 운명의 수레바퀴....진은 예전에 무시무시한 느낌을 주었 던 타롯카드가 생각나서 양손을 서로 만지작거렸다. "카르마는 엄밀히 말하면 신이 아니다. 하지만 운명을 관리하는 힘 을 가지고 있지. 업보. 윤회. 길바닥의 돌맹이 하나도 신계의 신들 조차도 카르마를 벗어나지 못한다. 카르마는 카로부터의 부름으로 인간들의 의식에서 저절로 생겨났다." "신화에 대해서 처음부터 얘기 해 주겠어?" - 창조신 카는 카오스에서 따온 이름이다. 신께선 생명의 씨앗을 섞 어 대지를 만드시고 물로 채우셨다. 그리고 생명이 살 수 있는지 시 험하기 위해 드래곤을 만드셨다. 이 후 땅과 바다에 생명이 생겨났 고, 숲 속엔 두발 짐승 네발짐승 날개 달린 짐승과 그들을 지배하는 여러 종족의 원시 부족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들을 다스리게 하기 위해서 카께서는 자신의 권능을 나눠 대리할 신들을 만드셨다. 주신을 비롯한 일곱 신들은 땅과 바다에 속한 모든 생명체와 드래 곤과 엘프와 드워프와 인간. 유사인종들을 다스렸는데, 신의 권능을 나눠 받았다지만 나눠짐으로 해서 불안요소가 작용했는지 신들 사이 에 문제가 생겼다. 아메시스트는 다른 종족보다 우리 드래곤에게 관심이 많았고, 강한 육체와 오랜 수명을 가지고 있지만 독립된 성격 탓에 혼자 지내다 가 일찍 수명이 끝나곤 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서 카로부터 마법 을 훔쳐 드래곤에게 전수했다. 그에 노한 다른 신들은 아메시스트에게 드래곤 외의 다른 종족에게 관여할 권리를 박탈했다. 그리고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경우, 가진 능력이 거둬지는 금 제를 드래곤에게 걸게 했다. 그리고는 하계에서 입맛에 맞는 종족을 자신의 아이들로 점찍기 시 작했다. 엘프는 조화를 추구하는 가르디아엘 에게 사랑 받았고 드워프는 성실을 추구하는 니이카초우 에게 독점 당했다. 나머지 인간을 비롯한 유사인종은 모든 면에 골고루 권능을 부여 받은 주신 세르니프이스 에게 지배받았고 힘을 추구하던 카를로네데빌은 신들의 행태에 불만을 품고 신들과 싸움을 벌였는데 패했다. 그는 어두운 감정을 누르지 못하고 소외된 생명체들을 이끌고 카의 의지에 반하는 증오로 돌아갔다. 그들이 만든 것이 마계이다. 지금의 대지와 바다의 여신이 된 신들은 직접적인 힘을 펼칠 종족 을 얻지 못해 옛 이름을 버리고 대자연으로 돌아갔다. 많은 신들이 그들 4신으로부터 태어났었는데, 하계가 비좁아 지고 그들의 신성력을 담지 못해 새로 거주 할 곳으로 신계를 만들어 옮 아갔다. 그 후 하계에서 사는 이들에게 신탁과 신성력을 빌려주는 것으로만 지상에 관여하게 되었다. 신들 사이의 자리다툼으로 그들 만이 거주할 곳을 따로 만들어 하계에서 떠난 셈이다. 카르마는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그냥 이름 그대로 카르마이다.- "그럼, 지금 이 세계는 신계. 마계. 하계(=인간계 =물질계)로 나뉘는 거야?" "정령계가 하나 더 있다. 정령 역시 카르마의 존재와 함께 생겨났 다. 다스릴 대상이 한정되게 되자 처음 카로부터 대리하는 신의 힘 들이 떨어져 나와서 자연으로 돌아갈 때 그들이 태어났다. 대지와 바다의 여신들의 아이라고 해도 되지. 모든 생명체는 처음 카로부터 직접 의지를 받은 7신과 카르마를 제 외하면 모두 윤회한다." "흠. 그럼 어쨌든 유일신이잖아. 창조신을 모시면 될게 아니야?" "인간이든 유사인종이든 직접 보고 대답해 주지 않으면 믿음을 가 지지 않는 경향이 있잖냐. 창조신 카는 상징적인 의미이다. 신들이 신계로 돌아가고 생명체의 감정을 자극하여 어두운 감정을 먹고사 는 마계가 생겨나고. 정령의 영혼이 따로 분리되고 하는 혼란기를 거친 후에, 어느 누구도 그 분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하물며 인 간들이야.... 기도해도 답하지 않는 신은 잊혀져 가는 법이다. 모든 신전에 시작의 상징으로만 존재하고 있는 형편이지. 그분께선 세계 가 네 개로 분리된 후로는 어떤 종족이나, 신들에게도 직접적인 관 여를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내가 만난 신이 창조신이 아닐 가능성이 있는 거야?" "그럴 가능성이 있을 리가 있겠냐. 그 분의 의지 표현은 누구에게나 깃들 수 있지만 직접 나섰다는 소리는 나도 못 들어 보았고, 못 믿 는다. 네가 지레 잘 못 판단한 거지." "흠." '그 신들 중 내게 온 신은 누구일까? 주신일까? 처음 데이먼을 만났 던 시점과 직접 현신(?)이라는 것을 겪었던 시간에 공백이 생긴다. 왜 처음부터 나를 구해 주지 않은 거지? 신들에게는 시간 관념이 없는 걸까? 그럴 수도. 어쩌면 그의 배려로 갖게 된지도 모르는 의 지와 능력을, 개발하는 시간이 필요했는지도 모르지.' 진은 생각하면서 바다 속 저 아래에서 들었던 그의 울림을 기억했 다. 뇌리에 파고들고 가슴 깊이 침투하던, 하나하나 세포에 새겨지 던 그의 [사랑]을 떠올렸다. '헉.' 투비와이즈는 진의 마음을 엿보다가 너무나 강렬한 감정의 여파가 순간적으로 밀려와, 뒤로 펄쩍 뛸 뻔했다. '신을 체험했군! 어떤 이름의 신이든. 축복만 받은 것이 아니라 그의 직접적인 세례를 받은 것이 확실해!' 투비와이즈의 경악은 밖으로 표출되지 않았지만 진은 멈칫하는 그 의 반응을 눈치챘다.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다." 투비와이즈는 단순히 조금의 행운을 손에 쥔 것에, 건방지고 의기양 양한 인간으로 보았던 진에 대한 시각이 새롭게 바뀜을 의식했다. [19] 4-4. 드래곤은 완벽한가? "그런데 혼자 살아?" "그럼, 드래곤이 혼자 살지. 뭐가 부족해서 다른 누구랑 같이 살겠 냐? 지상에서 드래곤과 함께 살 정도로 완벽한 종족이 있겠냐?" ".......드래곤은 외로운 존재로군." "외로워?" 투비와이즈는 별소리를 다 듣겠다는 어조로 짐짓 되물었지만 이 인 간 여자가 또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하는 의아심이 고개를 들었다. "완벽하다고 하다고 하니, 어떤 종족보다 민감한 감정도 가지고 있 을 게 아니야. 혼자라면 고독해 질 것이 분명해. 인간이 미천하다 약하다 하면서도 네 이야기를 듣다보면, 그런 우리를 부러워하는 듯 한. 원망하는 듯한 기분이 드는데? 아- 오해하지마. 난 그냥 내 느 낌을 말하는 것 뿐이야." "너도 외로웠냐?" "응. 난 외로웠어. 그래서 열심히 친구를 만들려고 노력했었어. 시행 착오가 많았지만, 무엇이든 시도하면 결과가 따랐었어." 진은 두고 온 친구들을 떠 올렸다. 투비와이즈는 진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단 한번도 거짓을 탐지하지 못하고 있음을 자각했다. "당신들 종족이 보면 정말 하찮은 생을 사는 지도 모르지만. 인간은 불꽃이야. 한꺼번에 타오르고 갑자기 꺼져가지. 인간은 삶에 어떤 식으로든 충실해. 드래곤은 지나치게 긴 삶을 살아서 오히려 자신의 감정에 매몰찼던 것이 아닐까? 내가 살던 세상에서는. 주로 동화 속 이었지만, 강해 마지않은 드래곤이 인간에게 도움을 주고 친구가 되 길 희망하는 비유를 많이 보았어. 우리처럼 살게 되는 것을 바란다 는 느낌을 받았었어." 투비와이즈는 묵묵히 들어 주고 있었다. "그리고 내 경험상 다른 이들과 구별되는 특출한 능력을 가지고 있 다면, 더더욱 감정적인 면에서 불안정한 존재가 될 수도 있어. 내 경우에는 아무리 많은 간접경험을 해도 직접 겪지 않는 이상 실제 로는 지식으로 밖에 축적시킬 수 없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었어. 인간은 생을 지식이 아니라 가슴으로 대해. 그걸 고려한다면 드래곤 도 무작정 인간을 차별만 하지는 않았을 거야. 돌이켜봐. 투비와이즈 네가 우리 인간들을 대할 때 어떤 기대를 가 지고 있었는지 말이야." 진의 지적은 어느 정도 맞았다. 마법을 받기 전에 드래곤은 외로움에 지쳐 자살까지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했다. 마법으로 의지에 더 강함을 더한 후엔 그런 일은 사 라졌지만 인간이나 유사종족을 많이 체험한 고룡들은 젊은 드래곤 들에게 혼자 지내기보다는 유희를 해서라도 시간을 그냥 보내지 말 라고 충고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말이지. 이성을 가지고 의지를 가진 동물들은 모두 가장 견 디기 힘들어하는 것이 있어." "그게 뭔데?" 진은 피식 웃었다. "이성을 갖춘 존재일수록 고통이나 고난에는 강해지지만 무료함만 은 견디질 못해. 인간도 다른 것은 다 참아내도 생활에 있어서 의미 가 없어지는 것만은. 심심해지는 것만은 참아내질 못해. 드래곤은 더할게 아니야? 그러니 작은 종족으로 변신해서 유희를 하는 것이 아니었어?" "..........." 진은 이야기가 너무 길어져서 아마도 밤이 되었을 것이라 짐작했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하네. 드래곤은 결혼 안 해? 혼자 지낸다고 해 도 번식은 해야 할게 아니야?" 어떻게 저런 물음을, 나이 어린 계집애 주제에 얼굴하나 안 붉히고 할 수가 있는 거지?-투비와이즈는 혀를 차며 생각했다. '이 여자, 혹시 처녀가 아닌 건가?' "드래곤은 혼자서도 생식이 가능하다. 그러니 완벽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지. 2000살 웜급 드래곤만 되어도 혼자서 알을 낳을 수 있 다. 때론 같은 계열의 다른 드래곤들과 교합하기도 하고, 다른 종류 의 드래곤과 드물게 결합하여 중간색과 양쪽의 능력을 반씩 가진 드래곤이 태어나기도 한다. 결혼 제도는 없어. 마음이 맞아 알을 만 들기도 하지만 그렇게 되더라도 어느 한쪽이 육아를 담당하고 곧 헤어지지." ".......당신들은 문제가 있군." "뭐?" "내가 다녀온 세상에서 드래곤은 전설이야. 어쩌면 여기 당신들과 같았을 지도 몰라. 그래서 멸망했는지도. 인간이 드래곤보다 나은 것을 하나 발견했군. 인간은 이 대륙 전체가 멸망하지 않는 한 멸종 은 되지 않을 거야. 인간의 번식능력을 알지? 드래곤이 아무리 강하 다고 해도 서로 보안하며 삶을 이어가는 인간들처럼 진정한 영생을 얻기는 어렵겠어." ".......정말 웃기는 얘기다." 진은 투비와이즈가 불쌍하게 느껴졌다. 외로운 존재임이 분명한데, 자존심이 너무 세서 그것을 인정 못하거나, 아예 모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과학적으로 설명해 볼까? 아무리 드래곤이 완벽하다고 해도 번식 을, 자신의 직접 분신을 만드는 방법을 통해 계속하거나 가까운 친 족과 결합해서 하게 된다면 언젠가는 분명히 유전적인 결함을 얻게 될 거야. 그렇게 된다면 가진 힘이 무슨 소용이 있어? 아무리 오래 산다고 해도 2세가 불안해 지면 그걸로 끝장이야. 다른 드래곤도 그 와 같은 생각으로 안일해 한다면, 먼 미래를 정말 걱정해 보아야 할 것 같은데?" ".....인간도 왕족이나 귀족들은 친족과 결혼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 인간은 더 빨리 결함을 얻게 될 거야. 내 친구들이 그런 경 우였어. 대대로 유전적으로 문제가 돼. 하지만 또 그런 증상이 제일 빨리 나타나는 탓에 대처 방법도 빠르게 생겨나지." "..........." 드물지만 드래곤들도 하자가 있는 헤츨링이 태어나는 경우가 있다. 알에서 부화하지 못하는 경우는 더 많다. 저 어처구니없는 소리가 타당하기는 할까. 하지만 근거 없는 짐작은 아닌 듯해서 투비와이즈는 괜히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그쪽 세상에서 드래곤이나 엘프, 드워프, 정령 등등이 존재하지 않 는 것이 확실하냐?" "확실해. 엘프도 드워프도 동화에 자주 비슷한 형태로 표현되지만. 그들도 한쪽으로 치우친 인생관을 가지고 있었다면 존재는 했지만, 인간들에게 밀려서 옛날에 사라졌을 수도 있어. 난 인간이야. 그들 틈에 끼어 살았지만 대부분 객관적인 입장에서 그들을 지켜보았었 어.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이 어떤 종족보다 강하고 끈질기다 는 것을 잘 알아." "흠." 다른 인간이 그런 이야기를 드래곤에게 했다면.-아니 할 수 있다는 자체가 놀라울 일이지만.-가만 두지 않았었겠지만. 투비와이즈는 동 등한 입장에서 진과 대화를 하고 있음을 깨닫고 배가 아파 왔다. '저 계집애를 물 먹일 찬스를 자꾸 놓치게 되네....아, 그렇지!' 투비와이즈는 논리적인 이야기에서 진에게 밀린다는 기분에 영 찜 찜했다가, 그녀를 누를 건수를 떠올리고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넌 드리얀국의 왕족이지. 여자지만 계승 권이 있다. 왕족이야 여러 신들을 선택해서 섬기기도 하지만 오랫동안 네 나라 국민은 여신들 을 섬겨서 왕녀에게도 명목상이기는 하지만 계승 권을 주고 있지. 어차피 내 처음 목적이 그것이기도 했으니, 너- 내 시험을 받아라." "뭐 하러?" "여왕이 될 수도 있다. 욕심 안나?" "귀찮게 뭐 하러 정치를 해? 난 여행을 할거야. 친구와 그렇게 약속 했어." 이런 안 먹히네-하고 투비와이즈는 생각하며 짐짓 위엄을 갖춰 진 에게 시험을 받아야할 의무에 대해, 왕족으로서 가져야할 자각에 대 해 일장 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싫어. 시험이 뭐가 좋아서? 전에 학교에서 치렀던 시험이 생각난 다. 재미도 없는 일에, 뭐 때문에 내가 매달리겠어?" "그래도 받아라. 이 버릇없는 여자야. 하라면 할 것이지." "흥." "좋다. 난 네게 쌓인 것이 많아. 네 어미와의 약속을 지킨 후엔, 세 달 후면, 그 동안 내게 곤란을 끼친 벌로 네게도 골치 아픈 일을 잔 뜩 만들어 주마. 시험을 받는다면 또 모르지. 통과한다면 왕의 자질 을 갖춘 인물로 판명해서 뒤를 봐 줄 수도 있고 말이야." '아주 생떼를 쓰네. 바보 드래곤.' "....너 죽을래?!" 진은 완전히 말라서 윤기가 철철 흐르는 곱슬 머리카락을 손가락으 로 꼬아 가며 딴청을 피웠지만, 그의 잡아먹을 듯한 눈초리에 마지 못해 대답했다. "알았어. 시험에 통과하면, 나중에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날 도와줘. 내가 왕족이라니 어쩌면 내편이 하나도 없을 이 곳에서 네 힘이 도 움이 될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통과하지 못한다고 해도. 별다른 벌 칙이 없어야해. 동의해?" "잘 생각했다. 벌칙 같은 것은 없어. 그럼 지금부터 문제를....." "내일! 너무 시간이 많이 지났잖아. 나 또 배고파. 그리고 자고 내일 얘기 해." '죽일 년.....' 그 날 정상들의 대담 같던 그들의 대화는 그것으로 끝났다. 진은 늦은 저녁 식사 후 그 넓은 투비와이즈의 레어를 돌아다니며- 별게 다 있었다.- 구경을 하고 밖으로 통하는 동굴 입구를 발견하고 가까이 갔다가 다시 탄성을 내지를 광경을 목격했다. 아침에 보았던 그 행성. 그 오팔 색 행성이 별이 무수한 깨끗한 검은 하늘에 떠서, 낮에 볼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밝고 진한 푸른빛을 띄고 있었다. "정말 예쁘다....투비와이즈. 저거 뭐라고 불러?" 투비와이즈는 또 진을 놓치게 되는 악몽을 겪게 될까봐 인상을 있 는 대로 쓰고 그녀를 따라 다니고 있었다. "달이잖아. 그 곳엔 달도 없었냐? 다른 유사인종들은 '쌍둥이 별, 아 우 별' 이라고도 부른다. "쌍둥이 별......" 진은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그녀의 눈에 달이 가득 찼다. '집에 왔어! 여긴 정말 내 고향이야.' 투비와이즈의 레어는 절벽에 구멍이 크게 뚫린 동굴 입구를 현관으 로 가지고 있었는데 밖에서는 그 곳을 볼 수도, 입구를 찾을 수도 없도록 마법으로 겹겹이 위장되어 있었지만, 나가는 것은 투비와이 즈의 도움으로 어렵지 않았다. 진은 절벽아래 고운 풀들이 깔린 넓은 대 운동장을 연상시키는 공 터로, 30미터 높이를 바람을 가르며 사뿐히 뛰어 내렸다. "플 라 이-" 진의 옆에 선 투비와이즈는 달빛을 받고 서 있는 진을 보며 헛기침 을 했다. "너 대단하구나. 마나도 마법도 쓰지 않고 잘도 뛰어내린다." "그래. 그래서 난, 내가 괴물인 줄 알았었어. 하지만 지금은 너 같은 존재도 봤는데 뭐, 별거겠어? 다른 인간들은 이런 능력 없어?" "없다. 기사들이 마나를 다뤄서 검에 위력이 있기도 하고, 마법사들 도 마법을 사용해서 인간의 한계를 넘기도 하지만. 순수한 육체의 힘으로 너와 같은 행동이 가능한 인간은 못 보았다. 엘프가 몸이 가 볍고 잽싸기도 하고, 소수 인종 중에서도 전투적인 종족은 괜찮은 체력을 가지고 있기도 하지만. 인간들 중에는 없어." 진은 아름다운 달과 풀벌레 소리가 가득한 밤 공기에 숨을 몰아 쉬 었다. "투비와이즈. 내 친구는 공기 중으로 사라졌어. 그 앤 정령이 되었 을까?" "그랬다면 누군가에게 부림을 당하겠지." "뭐?" 진이 갑자기 놀래서 쳐다보자 투비와이즈는 드디어 진에게 자극을 주었음이 통쾌하기까지 한 기분이 되어서 의기 양양하게 말했다. "정령사라는 것이 있다. 정령과 친화력이 있고 마나를 조금 다를 줄 아는 인간은, 아니 엘프나 드워프들도 쉽게 정령을 불러서 부린다. 나도 정령쯤이야 얼마든지 불러내서 이용하고는 하지." "뭐야?! 그러면 안 되는데!" 진이 정말 걱정하는 듯 하자 투비와이즈는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고 설명을 덧 붙였다. "정령 계는 이 곳과 시간 개념이 다르다. 공기가 되었다고 해도 정 령의 모습을 갖추고 정령의 의지를 가질 려면 몇 백년이 필요해. 그 리고 정령이 된 후엔 오히려 이 곳 물질계에 나오고 싶어한다. 종속 적인 관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 스스로 주인을 택하니 네 친 구 걱정은 안 해도 될 거다." "그래?" 진은 달을 다시 바라보았다. "정령엔 뭐, 뭐가 있어?" "땅의 정령. 불의 정령. 바람의 정령. 물의 정령이 대표적이고 빛의 정령이나 꿈의 정령. 마계에 해당하는 어둠의 정령 등등 많다." "땅. 불. 바람. 물이라....4대 원소로군." 진은 투비와이즈의 독촉에 다시 레어 안으로 발길을 돌리며 생각했 다. '상희야-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좋겠다. 그렇지?' * 침실은 투비와이즈와 만담을 나누던 인간들이 사는 응접실처럼 꾸 며진 바로 옆방에 있었다. 진은, 작은 방 한쪽 구석에 시골 풍의 아기자기 해 보이는 침대가 꽤 마음에 들었다. 아마 자신이 어렸을 때 사용했을지도 모른다. "집이 이렇게 넓은데 침실이 하나 뿐이야?" "나 혼자 사니까 그렇지. 뭐 하러 여러 개를 만들어 놓겠냐?" 사실은 화려한 자신의 방이 바로 옆에 있었지만 하나 있다라고 않 고 여러 개~ 라고 했으니 거짓말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투비와이즈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골려 줄 찬스를 잡은 것에 기 뻐했다. "흠. 그래? 그럼, 레이디 퍼스트. 내가 침대에서 잘 테니, 넌 본체로 돌아가서 다른 곳에서 자라. 그래도 돼지?" "뭐? 내 집이다! 내 맘이야. 내 집 침대에 왜 너 같은 여잘 재우냐! 빨리 못 내려와?" 말하는 새, 진은 못들은 척. 척척 겉옷을 벗더니 짚이 푹신하게 깔 려 마른 풀 냄새가 나는 포근한 침대 속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안녕. 잘 자, 드래곤아. 내일 봐. 아-함-" "저. 저게....." 기가 막혀서 투비와이즈는 뻔뻔스런 진의 행동에 말을 잇지 못하다 가 또다시 벌컥 화가 치밀었다. '아주 봐주니까 눈에 뵈는 게 없는 꼬말세. 어디 어쩌나 보자!' 투비와이즈는 충분히 넓었기에 닿지 않고도 잘 수 있을 침대로 냉 큼 들어가서 진의 몸에 딱 달라붙었다. '흐흐....' "드래곤아. 드래곤은 인간 여자에게 흑심 안 품는다며? 한 입으로 두말 않는 걸로 유명하다며? 그러니 신경 끄고 잔다. 귀찮게 하면 걷어 채일 줄 알아." 진은 정말 졸음이 쏟아 져서 금방 잠이 들었다. '내가 미쳐. 내가 미쳐. 이 계집애에게 어떻게 복수를 해야 속이 시 원할까. 정말 돌겠네.' "야! 넌 수치도 없냐?! 아무리 종족이 틀려도 이렇게 미모의 남자가 달라붙는데 그냥 자?!" 진은 대답이 없었고 투비와이즈는 완벽하게 하루의 끝까지 자신을 농락하고 잠이 들어버린 여자에게 이를 갈았지만 더 이상 자존심에 금이 가는 것이 싫어서 꿋꿋이 자리 한쪽을 차지하고 내려오지 않 았다. * 진은 꿈을 꾸었다. 상희도 상민도 수경도 그 외 친구들도 모두 있었다. 그녀는 하와이에서 샘과 마리와 니콜라스와 캐서린과 그녀의 작은 '진'과 모두 만나 물빛 고운 바다에서 수영을 했고 소리 높여 떠들 어댔다. 파랗고 투명한 바다. 높은 하늘. 경쾌한 음악에 맞춰 진은 돌아가며 그들과 웃으며 춤을 추었다. 니콜라스가 자꾸 따라다니며 귀찮게 하고 수경이 큰 소리로 웃었다. 그들이 모두 엉켜서 진에게 손을 흔들었다. 상희가 그들 사이에 없다... 고개를 드니 그 앤 쌍둥이별을 배경으로 하늘을 날고 있었다. "행복해 질게. 꼭 행복해 질게, 상희야. 다시 만나?" "응, 진. 항상 기다릴게. 항상 같이 있을게." 상희의 웃음소리. 진은 마주 웃으며 하늘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 진은 맛있게 단잠 자고 새 인생이 시작된 세상에서 두 번째 아침을 맞았다. 촌스럽게도 창도 없는 방이라, 아침 햇살은 기대할 수 없었지만 고 풍스럽고 단아하게 꾸며진 방 한구석에서 낯 설은 느낌의 마른 풀 냄새와 깨끗한 침대 시트의 풋풋한 냄새를 맡으며 조용히 잠에서 깨어났다. '어?' 진은 반짝이며 고운 빛을 띄는 금빛머리카락이 자신의 어깨 옆에 펼쳐져 있는 것을 보고 눈을 깜박였다. 투비와이즈는 꽥꽥거리던 어젯밤과는 다르게 큰 키를 구부리고 진 의 어깨에 머리를 대고 잠들어 있었다. '뭐야? 잘난 척은 혼자 다하더니. 잠은 완전히 애처럼 자네? 애정결 핍 어린애 같다.' 진은 웃음이 나왔지만, 왜인지 니콜라스가 생각나서 그의 머리를 끌 어안아 등을 토닥거려 주었다. 투비와이즈는? 그는 진이 손을 뻗치자 곧 잠에서 깼다. 하지만 자신의 상태를 깨닫지 못하고 진이 무슨 행동을 하나하고 내버려두었다가. 기절 초풍할 만큼 놀랐다. 그녀가 작은 체구 안에 자신을 인간 아이처럼 끌어안고 토닥였기 때문이다. '미. 미치겠네...드. 드래곤 체면이. 용 생 4천살 위엄이. 내가 정말 돌았구나. 빨리 못 놔? 이 웃기는 여자야?!' 투비와이즈는 당혹스러움으로 진의 가슴에 묻힌 얼굴까지 빨개질 지경이었지만 죽어라하고 계속, 자는 척하는 흉내를 내고 있었다. [20] 4-5. 왕의 자질을 시험하는 관문. 투비와이즈는 인상을 팍팍 쓰면서 있는 대로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 다. 진은 그의 머리카락까지 한올, 한올 뻣뻣하게 굳어 있는 것 같은 느 낌을 받았고, 그의 얼굴을 보면 자꾸만 웃음이 나와서 아침 식사 중 에 접시에 계속 고개를 처박고 있었다. "빨리 먹어! 무슨 밥을 하루 세끼나 챙겨 먹냐! 돼지 오크도 그렇게 자주, 많이는 안 먹겠다!" 그가 좀체 잠을 깨지 않는 것이 이상해서 진은 투비와이즈의 얼굴 을 들여다보다가, 입술이 새파랗게 되어 있는 것을 보고. 모른 척 화장실로 비켜주었었다. 화장실 문고리를 잡고 얼마나 웃었는지 모 른다. -말이 화장실이지 그건 옛날 진을 위해 급하게 만들어 놓은 듯한 간이 화장실이었다. 그것도 한참 문명과 동떨어진...하지만 투 비와이즈의 마법이 걸려 있는지 깨끗하고 청결한 냄새가 났었다.- '푸-웃-! 자존심 덩어리다. 무시무시한 자존심이야. 큭큭큭....' "투비와이즈. 여기 사람들은 하루 세끼 식사 안 해?" 너무 재미있어하면 실례가 되리라 여기고 진은 웃음기를 애써 누르 며 관심을 돌렸다. "보통 하루 두끼 먹는다. 귀족들이야, 새벽까지 파티를 하고 하니까, 따로 먹기는 더 먹겠지만." "그래? 일은 평민들이 할텐데.... 배곯겠네. 습관이 그러면 상관없을 라나?" 투비와이즈는 시험을 받게 하려면 진의 이 세계와의 문화적인 차이 를 염두 해야 함을 알았다. "그쪽의 신분제는 어떻게 되냐?" "신분? 가지가지이지. 하지만 네가 묻는 의도를 짐작하자면, 그 곳 에서는 인간은 모두 평등해. 사회적 지위나, 족보를 따지는 귀족 계 층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돈의 힘이 크기도 하고 말이야." 투비와이즈는 한숨을 쉬며 아무래도 제시할 문제조차 그녀에게는 적용이 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인간이 평등해? 살다, 살다 별 소리를 다 듣게 되는 구나." "평등해야 하지만 그렇지 못한 게 인간 세상이야. 하지만 그 사실을 대부분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니야. 자- 다 먹었어. 지금부 터 시험문제 낼 거야?" "따라 와라." 진은 그를 따라 아침을 먹던 응접실을 나왔다. 그의 레어 안은 응접실과 침실 외에도 엄청나게 많은 두꺼운 책들 이 빽빽이 꽂힌 도서실 같은 서재도 있고, 보존 마법이 걸려 있는 가지가지 식료품이 보관 된 커다란 창고도 있고, 희한한 빛을 띈 구슬과 용기와 원시적인 실험기구 등이 잔뜩 있는 실험실도 있었고, 이것저것 잡다한 것들을 보관 해 둔 소품실 과 본체로 뒹굴어도 될 만큼 큰, 바닥에 암석이 깔린 공간도 있었 다. 그리고 못 들어가게 해서 뭐가 있는지 알 수 없던 몇 개의 방도 여럿 있었다. 투비와이즈를 따라 꼬불꼬불한 흙 길을 걸어 간 곳은 그 많은 방들 을 모두 지나쳐 안쪽 깊숙이 자리한 작은 방문 앞이었다. "이 안에서 시험을 쳐?" "그렇다. 안에 들어가면 자동으로 환상(a phantom)마법에 걸리게 될 거야. 환상이니까 실제로는 아무 해가 없으니 경계할 필요는 없 다. 안에 들어가서 네가 처한 상황에 맞게 네 뜻대로 세 가지 질문 에 대한 답을 해라. 답이 끝나면 다시 내 앞으로 오게 될 것이고 답 변했던 것에 대해 이유를 설명해 주면 내가 채점하는 형식이다. 이 해하겠지?" "알았어. 환상마법이란 말이지? 재밌겠다." '재밌나 들어가 봐라, 요 맹랑한 여자야.' 투비와이즈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진에게 자신의 의도대로 존재를 인식시키기 위해 용언으로 마법을 걸었다. [ 현 혹 ! -Seduction ] 진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 < 시 험 > 진은 여왕이었다. 그녀는 나라에 돌림병을 퍼트리고 몬스터들을 풀어 그녀의 백성을 학살하는 마족들을 피해 살아남은 소수의 백성들과 기사들을 이끌 고 주신 세르니프이스를 모시는 주 신전으로 피신하기 위해 왕궁을 떠나야했다. 그녀가 기괴한 모습의 몬스터들과 싸우며 피투성이가 되어서 신전 의 영향력이 미치는 영토에 발을 딛자마자, 원수인 악마가 나타나 그녀에게 말했다. "네게 세 가지 선택의 기회를 주겠다. 세 물음에 대한 답을 할 때까 지 네가 살아남는다면 내 아이들을 모두 거둬 마계로 돌아가겠다." 그가 사라지자 진은 그녀를 따르는 익숙한 얼굴의 지친 병사들과 비참한 몰골의 백성들을 돌아보았다. '난 왕이다.' 그녀는 마음이 아팠다. 그들은 모두 그녀의 친구들이었다. "힘을 내줘. 날 따르는 자들아. 신의 가호를 받을 수 있는 신전이 눈앞이다. 너희의 안전이 보장만 된다면 나 혼자서라도 반드시 가족 들의 복수를 해 주겠다." 떼를 지어 덤벼드는 몬스터들이 끊임없이 몰려들었고 희생은 커져 만 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지친 그들의 앞에, 다시 사악한 기운을 풍기는 식인족의 몸을 빌린 악마가 나타나 첫 번째 선택을 강요했다. "난 배가 고프다 인간의 왕이여. 너를 따르는 천한 인간들의 3분의 1을 주겠느냐, 네 팔 하나를 주겠느냐." 그녀를 군주로 모시는 신하들이 반대했다. "여왕이여. 현혹되지 마십시오. 신체의 일부를 잃어서는 왕일 수 없 습니다. 노예와 농노들을 저들에게 주십시오." 여왕 진은 대답했다. "내 팔을 주겠다." 눈앞의 신전은 너무나 멀었다. 진은 잃어버린 팔 부분에 천으로 칭칭 동여매 출혈을 막고 고통을 참으며 눈물을 흘리는 기사들과 허약해진 아이들과 노인들을 독촉 해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다시 몇 걸음 지나지 않아, 모두가 여전히 공포와 싸우며 전진하고 있을 때 그들 보다 더 강하고 탐욕스런 식인 마족들이 나타나 말했 다. "내겐 노예가 필요하다 인간의 왕이여. 너를 따르는 천한 인간의 3 분의 1을 주겠느냐, 아니면 용맹한 너의 기사들을 주겠느냐. 그렇지 않으면 네 나머지 팔을 주겠느냐." 그를 물리치기 위해 악을 쓰며 기사들이 덤볐지만 여왕이 된 진은 그들을 막아섰다. "내 남은 팔을 주겠다." 모두가 울면서 비참한 몰골로 팔 없는 여왕을 따라 신전 앞에 섰다. 신전 앞에 빛나는 갑옷을 입은 성 기사들이 줄지어 서서 그들을 맞 았다. 그들 앞에 진의 기억 속의 샘의 얼굴을 한 그녀의 형제 왕족이 나 서서 물었다. "형제여. 내게 왕의 증표를 넘기겠느냐, 아니면 모두 이 곳에 들어 오지 못하고 죽임 당하겠는가." '이럴 순 없어! 이럴 순 없어! 그가 날 배반하다니!' 진은 시린 배신감에 가슴이 도려내지는 듯 했다. 여왕의 기사들이 무릎을 꿇고 통곡하고, 처참한 몰골의 백성들은 여 왕을 버리고자 하며 아우성을 쳤다. 진은 배신한 그들을 돌아보며 결정을 내렸다. "증표를 넘기겠다!" -대답과 함께 환상이 끝났다. * "......최고 기록이다. 이렇게 빨리 나온 왕족은 없었어." 진은 투비와이즈의 응접실에 서 있었다. 자신의 양팔을 내려다보았다. 잘린 팔의 고통이 꿈처럼 느껴졌지만 너무나 생생하다....손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환상이었다니까? 진짜처럼 느껴졌지? 네가 한 답은 안다. 이제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설명해 봐라. 진짜 그런 상황에 놓였을 때의 대 답을 알고 싶어서 마법을 이중으로 걸었다. 그 방안에는 아무것도 없어. 위장용 돌멩이만 잔뜩 뿌려 놓았지." ".......정말 악취미야." 진은 갑자기 몰아쳐 악몽처럼 느껴졌던 그 방안에서의 기억에 짧은 옷 아래 드러나 있는 다리가, 떨리는 것을 느꼈다. '환상이라 다행이다...샘이 배신할 리가 없지.' 태연하게 말하고 진을 지켜보았지만 투비와이즈는 내심 또 놀라고 있었다. '이거 어떻게 된 거야? 저 여자- 분명히 소매치기에 도둑에 협박 범 일을 했다고 하지 않았었나? 젠장!' "풀이해라. 드리얀의 왕녀. 제르티아 진 라이어스 드리얀." 진은 엄격해 보이는 투비와이즈를 바라보고 그의 앞에 있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내가 왕이었으니까!" ".....그리고?" "그게 대답이야. 더 뭐가 있어?" 투비와이즈는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자세히 말해. 평가가 안되잖아!" 진은 진정이 되었는지, 담담해진 어조로 투비와이즈를 마주 보고 되 물었다. "왕이 먼저야, 백성이 먼저야?" "뭐?" "이곳은 문명이 뒤쳐졌어. 아주 많이. 그래서 문제를 푼 왕이 없었 던 것을 어느 정도는 이해하겠어. 문명이란 문화와 밀접하고 인간은 오랜 역사를 거쳐서야 비로소 인간 존엄성에 대해 인류 전체에게 받아들여 질 거야. 하지만 이곳은 아직 아니지. 그건 어려운 문제고 수많은 사람들의 피를 흘리고 원통해 하는 세 월이 필수 불가결해. 신분제가 생기는 것은 인간의 이기심이 있는 한 항상 있어. 하지만 교육을 받고 의식이 깨이게 되는 것은 인간의 시간으로 엄청난 시행착오를 거쳐야만 가능한 일이야." "............." "투비와이즈 난 직접 겪진 않았지만 그것을 알아. 이 곳보다 몇 천 년은 후의 사람들이 사는 세계에서 살았었어. 누구나 그 정도는 알 수 있어. 인간은 평등해. 그것은 지나온 역사가 증명해 주고 난 그 것을 책이나 매스컴등을 통해서도 보았었어. 이곳에서도 의식이 깨 인 사람은 많을 거야. 하지만 시대 관념이란 소수 사람의 힘으로 깨 뜨려 지는 것이 아니야." "......답에 대한 직접 설명을 해 봐라." 진은 한숨을 쉬고 떨림이 가라앉은 두 손을 피가 통하게 하려는 의 도로 마사지했다. "첫째 관문에서 노예들을 넘기지 않고 내 팔을 준 것은, 왕 없는 백성은 있어도 백성 없는 왕은 없기 때문이야. 왕은 그들을 대표하고 보호해야 해. 신체에 결함이 생겨 나중에 자리를 내어 주 어야 할지라도 당시엔 왕이니 책임을 져야 했으니까. 두 번째 관문에서 내게 믿음을 가지게 된 주민들과 기사들을 넘기 지 않았던 것은 역시 '신의' 문제였어. 그리고 기사들을 주었다면 난 세 번째 관문에 이르지 못했을 거야. 누가 날 지켜주었겠어? 세 번째 관문에서 날 배신한 형제에게 그 자리에서 왕의 자리를 넘 긴 것은 당연한 거야. 어차피 왕이란 것은 따르는 자가 있어야 하는 것이고 배신 했다하여 그들을 버린다고 해도 얻을 것은 없어. 후에라도 그들은 자신들의 선택을 후회할 것이고, 새 왕이 정치를 잘못하면 그를 끌어낼 용기를 갖게 될 거야. 바른 방향으로 나아 갈 초석이지. 그리고 그런 관문을 통과하며 자 신들을 이끌어 준 왕을 당장 목숨에 위협을 받아 본능적인 배신을 감행했다 하더라도 그들은 그런 왕을 잊지 않을 거야. 현명한 왕은 현재가 아니라 미래를 보아야해. 역사는 언젠가 그걸 꾸밈없이 증명해 줘. 대답이 되었어?" ".........정답이다." 투비와이즈는 다시 이 건방진 여자에게 패했다는 것을 알고 침울해 졌다. 힘과 인격과 추진력까지 갖추었다면 이제껏 인간들의 역사에 없었던 성왕으로서의 인정도 가능하리라. '정말 내가 돈다. 돌아....' 물 먹이려다가 물먹고 투비와이즈는 한 숨을 푹푹 내 쉬었다. "알았다. 넌 이제 최초로 세 문제에 대한 정답을 말한 왕족이 되었 다. 네 나라로 돌아가면 내 확인을 그들에게 증명해 주지." 진은 투비와이즈를 빤히 쳐다보며 턱을 긁적였다. "...그럴 필요 없어....난 여행을 해야 한다니까." "훗. 내가 네가 모든 문제를 맞추어서 더 이상 시험을 받으러 오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 주면, 그들이 어떤 식으로든 가만있겠냐? 말 안 해 놓으면 앞으로도 계속 귀찮게 할 테고, 난 그건 싫다. 왕이 되건 안 되건 그것은 네 맘이고, 네 능력껏 알아서 할 일이다." 진은 괜히 그딴 시험을 받아서 귀찮은 일에 휘말렸다는 것을 알았 다. "그 문제. 직접 만들었어?" "내 아버지에게서 약간 힌트를 얻었지. 인간에 대해서 나보다 더 잘 알거든." "내 아버지....현 국왕은 어땠어?" 진은 아버지라고 발음하는 것이 너무 생소했다. "보통 대답하는 데로 대답했다. 왕족으로서는 평범한 대답이었지." "어떻게 대답했는데?" "첫 번째 관문에서 노예들을 넘겼고 두 번째 관문에서는 싸웠다. 세 번째 관문에서는 증표를 넘기지 않았지." "......다 그랬어?" "현왕으로 칭송 받았던 네 선조들 중 몇 명은 첫 번째나 두 번째를 통과했었다. 하지만 세 번째까지는 관문을 통과한 자가 없었다." "골치 아프네." 진은 단순히 개인 적인 만족을 위해 자신의 나라를 모른 척 할 것 인지, 돌아가서 어머니와 동생이 있는 자신의 나라만이라도 뜯어 고 쳐주어야 하는지 갈등이 생겼다. "다른 나라도 그래?" "다른 나라 왕족은 더한 경우가 많지. 드리얀이야 내 이름을 빌려서 왕권을 그렇게 탄탄하게 구축하고 있지만 그렇지 못한 나라들은 얼 마나 어수선하겠냐. 드리얀의 형제 국 스타파에서는 불공평하다면서 자신들에게도 특혜를 주라며 찾아오고 해서 아주 골치가 아프기도 했다." 진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어차피 가보기는 해야 할거야. 내 나라다....가족이 있어. 가서 생각 해 보자.' "투비와이즈. 난 여행을 해야겠어. 지금 당장. 아직 어머니에게 날 데려갈 날이 세 달쯤 남았다고 했지? 돌아가면 여행을 할 기회가 얼른 안 올지도 몰라. 이 대륙은 끝에서 끝까지 가로지르는데 얼마 나 걸려?" 투비와이즈는 눈을 치켜 뜨고 대답해 주었다. "말을 갈아타며 한시도 쉬지 않고 달린다고 해도 1년이 넘게 걸릴 거다. 나라마다 지나쳐 온다면 3년 이상 걸릴걸? 그걸 어떻게 3개월 로 단축시킬 려고?" "네가 있잖아. 텔레포트 가능하지? 나랑 유희를 가는 셈치면 되잖 아. 너무 거리가 있으면 마법이 안 돼?" "인간들이나 안되지. 드래곤에게 그 정도가 무슨 문제 겠냐. 하지만 내가 왜 너....." 투비와이즈는 웃기는 소리하지 말라고 대답해 주고 싶었지만. 생각을 다시 해 보았다. '그렇군. 이 여자와 여행을 하면 재밌어 질지도 몰라. 골려 줄 기회 도 자주 만들 수 있을지 모르고. 시간이 되면 어디 있든 바로 드리 얀으로 워프하면 될 테니까....' 괜찮다는 생각이 들자 투비와이즈는 흠. 흠. 헛기침을 하며 조건을 달았다. "좋아. 네 성년식이 될 때까지 같이 다녀 주마. 나도 유희를 해 본 지 꽤 오래 되었으니까. 그렇지만 그 전에 네 어미에게 네가 이제 내게서 독립했다는 것을 알려서 나와의 약속이 지켜졌다는 것을 알 리도록 해라." "어떻게? 직접 갔다와야 해?" 진은 아직 가족을 만날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아서 머뭇거렸다. "편지를 써라. 여행을 해서 세상 경험을 좀 하고 성년이 되기 전에 꼭 돌아간다고 말이야." 진은 그의 속셈을 눈치 채고 의심스럽게 쳐다보았다. "그러면 금 제가 풀리는 거야?" "반만 풀리겠지. 처음 약속은 분명히 성년까지였으니. 네게 또 공격 할거란 생각은 안 해도 된다. 그리고....내가 낸 문제에 대한 답을 내어놓았으니 그 후에도 네게 적으로 간주될 일은 하지 않겠다." 말하고 보니 영영 이 버릇없는 여자에게 제대로 된 보복을 못하게 될 것 같아서 투비와이즈는 아쉬웠지만. 자존심만 조금 죽인다면 당 분간 재밌어 질 것 같았기 때문에 치미는 울화를 눌렀다. "알았어. 그럼 편지 쓸게. 바로 갔다 올 거야?" "빨리 갔다와야 빨리 떠나지. 시간이 별로 없잖냐." "그럼. 그렇게 하지 뭐." 진은 그가 마법으로 불러다 준 양피지와 잉크를 찍은 펜으로 편지 를 썼다. 투비와이즈가 참고로 내밀어 준 대륙 공통 문자로 쓰여진 책을 몇 장 넘기고 문자 문제도 금방 해결을 보았다. 대륙은 넓었지만 신화시대에 속해서 그런지 저쪽 세계에 있었다던 신의 벌로 언어가 다양해진 일은 아직 없나보다. 언어와 문자는 전 대륙이 동일했다. '편하네. 따로 글공부 안 해도 되고. 아무래도 투비와이즈 때문에 편 해진 것 같아서 고마운데? 후후....' [21] 왕비 세리아스의 손님 * 쉬울 줄 알았던 편지 쓰기는 첫 인사말을 써 놓고 막혀 버렸다. 진은 한번도 본 적 없는 엄마를 어떤 이미지로 떠올리고 대해야 할 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뭐하냐? 빨리 안 쓰고." "투비와이즈." "왜?" "나, 편지를 별로 써 본적이 없어. 그리고 전에....편지 한 통으로 엄 청 안 좋은 일이 생겼었거든? 편지 쓰는 게 무서워." "별게 다 무섭다. 그냥 간단한 용건만 쓰면 되지 뭘 그래?" 하지만 진은 예전에 니콜라스에게 달랑 한 장 보냈었던 편지로 겪 어야 했던 일들이 되살아나서 더더욱 쓸 수가 없었다. "안되겠어. 그냥 네가 가서 말을 전하면 안될까? 도저히 못쓰겠어." ".....알았다. 정말 성가시게 구네. 편지가 있으나 없으나 의사전달만 하면 되겠지." 투비와이즈는 진의 말에 정말 두려움이 깔린 것을 탐지하고 고개를 갸웃. 설레설레 내저었다. '도대체 뭔 일들을 겪으면 편지 쓰는 것이 무서워 진 대냐. 알 수 없는 여자라니까.' 진이 말해 준 저쪽 세계에서의 과거는 단편적인 것들이라 그는 알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그녀를 기다리게 하고 이동마법을 쓰려다 투비와이즈는 문득 조그 만 불안으로 진에게 당부했다. "너. 여기 가만있어라. 여기저기 쏘다니지 말고. 또 갑자기 없어지면 안 되잖냐." "알았어. 그럼 어디 있을만한 곳에 가 있을게. 멀뚱히 혼자서 이곳 에 앉아 있고 싶지는 않아." "....그래? 그럼, 음. 따라와라." 투비와이즈는 아무래도 안심이 안 돼서 진을 데리고 한번도 못 들 어가게 했던 한 방문을 열었다. '여기라면 어디 도망갈 생각은 않고 있겠지.' "우-와-아...." 진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작은 방문에 비해 안쪽은 엄청 넓고 천장이 높았다. 그리고...보석과 금화 은화들이 색깔별로 구분되어서 산더미처럼 방 안에 쌓여 있었다. 한쪽에는 만화에서 해적들이 이용하곤 하던 보석 궤짝처럼 보이는 것들이 또 쌓여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이 방에서 놀고 있어라. 다 내거니까, 욕심 부려봐야 소용없다. 문 이 닫히면 내가 걸어 둔 마법이 발동되어서 내가 올 때까지는 못나 올 거다.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 알겠냐? 야- 너, 듣냐?" 진은 휘황찬란한 보석더미 앞에 서서 고개를 쳐들고 투비와이즈의 말을 흘려들었다. "투비와이즈. 너 정말 드래곤이구나. 놀랍다. 이걸 다 어디서 구했 어?" "내가 뻘로 4000살을 먹었겠냐? 그리고 우리 골드 드래곤들은 부자 야. 고룡들에게서 유산으로 받기도 했지. 턱 빠진다. 암튼 난 갔다 올 테니 사고 치지 마라, 넋 나간 여자야." 진은 그가 자신이 놀래는 것 때문에 기분이 흡족해 하는 것을 알아 채고 웃음이 나왔다. '정말 애 같다. 장난감 보여 주고 자랑하는 것 같잖아.' 그리고 속마음을 눈치챌까봐서 얼른 대답했다. "알았어. 여기에서 놀고 있을게. 갔다와, 염려말고. 다시 어디 다른 세상으로 떨어질 확률이 있겠어? 신이 찾아줘서 돌아온 건데." "..........." 투비와이즈가 나가자 진은 회심의 미소를 짓더니 대리석 바닥에, 대 리석 둥근 기둥과, 깨끗한 색의 높은 천장으로 이뤄진 그 방안에서 눈을 빛내었다. "내가 도둑이었다는 것을 잊었나? 하지만. 흠. 저 녀석 그동안 봐온 것을 보면, 또 알지 못할 마법이라도 잔뜩 걸어 두었겠지." 진은 조심스럽게 발길에 채 이는 호두알 만한 붉은 루비를 집어들 어 공중으로 던져, 받았다가 다시 놓아보았다. '당장. 손대면 안 되는 것은 아닌가보다. 하긴 위험하면 여기 있게 하지 않았겠지. 그럼.....' 진은 씩- 웃음을 흘리더니 보석더미 앞으로 한발 다가섰다. 5. 왕비 세리아스의 손님 "또 누님 생각하고 계세요. 어머니?" 루시엔은 창가에 앉아 은실로 두꺼운 천에 뜸뜨기를 하다 무릎에 그대로 놓아둔 채로 멍하니 창 밖을 보는 어머니 세리아스를 쳐다 보았다. 생각에 잠겨 아들이 들어온 것도 모르고 있던 세리아스는 검은머리 에 따뜻한 햇살을 이고 그를 돌아보았다. 36세 나이였지만, 주름 하나 찾아보기 힘든 고운 피부의 얼굴에 미 소를 띄고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한 뼘 길이의 가는 실뜨기용 바 늘을 천과 함께 치우며 아들을 맞았다. "루시엔 왕자, 어서 와요. 조반은 드셨어요?" 루시엔은 13살의 나이에 비해 제법 큰 키를 하고 있었지만 150Cm 정도였다. 왕족이 입는 흰색의 화려한 전통 복식 차림의 그는 어머니에게 다 가가 그녀가 내민 손등에 몸을 숙여 키스했다. "네. 먹었어요. 어머니, 기분은 괜찮으세요?" "그럼요. 오늘은 날씨가 참 좋네요. 수업시간이 곧 시작될텐데 스승 님을 기다리게 하는 것은 아닌가요?" "타브로님이 오늘 조금 늦으신 댔어요. 검술 수업선생님도 아직 오 시지 않았고요." 그들은 아름다운 빛깔의 천으로 주름 장식이 되어 있는 커다란 창 가 앞의 마호가니 테이블에 마주 앉아 아침인사를 나누었다. 루시엔은 어머니를 자랑스런 기분으로 바라보며 아름답고 따뜻한 그녀의 미소에 의젓한 몸가짐으로 대하려고 노력했다. 세리아스는 태궁의 시녀들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어린 아들을 키웠 었다. 까다로운 귀족들이 체통 없는 일이라며 은근히 핀잔을 주기도 했었지만. 대부분 귀족 부인들이 아이를 유모에게 전담시키던 것과 달리 갓난 아이였던 왕자의 수발을 한동안 직접 들었었다. 그래서인지 그들 모자는 다른 어떤 왕족이나 귀족들보다도 끈끈한 유대감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리 오겠어요, 왕자?" 세리아스 왕비는 손가락 길이의 작은 장식용 머리 빗을 머리카락 사이에서 빼어 들고 아들의 곧고 긴 흑갈색 머리카락을 빗어 주었 다. "어머니. 그런 일은 직접 하시지 않아도 되어요. 누가 보면 절 아직 도 어린애라고 또 놀릴 거 에요." 세리아스 왕비는 미소지었지만 슬퍼 보였다. ".....누님이 많이 걱정되세요?" "아니에요, 왕자. 왕녀는 곧 돌아올 거 에요." 루시엔도 오래 묵은 궁정의 소문을 알고 있었다. 그의 누나는 시간이 지나 거의 잊혀졌지만 여러 가지 소문이 모두 없어진 것은 아니었고, 심심찮게 거론되어 별의별 소문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항상 침묵했다. 루시엔도 그의 친누나에 대해 궁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어머 니께 우울한 기분을 가지게 하고 싶지 않아서 한번도 묻지는 않았 었다. 그래도 최근 들어서는, 보이지 않는 꼬리처럼 따라다니던 수군거림 에도 영향을 덜 받으시는 듯 왕비는 많이 밝아져 있었다. "루시엔. 제르티아 왕녀가 돌아오면 날 대하듯 하셔야 해요? 하나 밖에 없는 친누이랍니다." "그럼요, 어머니. 제 누님인데 제가 멀리하겠어요? 너무 상심 마세 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어머니의 선택은 옳았을 거 에요. 그렇게 믿어요." 세리아스는 잃어버린 딸에 대한 사랑과 후회로 아들을 더 위해 주 었었다. 어떻게 지내는지. 어떤 여자로 성장했을지, 전혀 추측할 수 없었기에 루시엔의 검은 빛의 머리카락과 밝은 갈색 눈동자를 볼 때면 딸을 둔 어머니의 심정으로 불안해했었다. "페르티온 라. 왕자께서는 사냥에서 돌아오셨대요?" "....어제 오셨다고 들었어요. 저녁에 인사를 드리러 갔었지만 시종들 이 목욕중이라고 해서...." 자상한 어머니는 죽은 헤런 왕비의 막내 왕자에게도 따뜻하게 대했 지만 루시엔의 이복형은 그런 그의 어머니와 자신에게 예의를 갖추 기는 했어도 차가운 태도는 버리지 않았다. 루시엔은 자신이 아직 너무 나이가 어림에도 아버지의 변함 없는 사랑을 받고 있는 어머니의 후광으로 나이 많은 궁정대신들과 귀족 들에게 주목받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한 나라의 왕자란 아무리 피하려고 애를 써도 권력다툼에 휩쓸리기 마련이다. 그는 어렸지만 언젠가 적이 될지도 모를 형에게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있었고 얼마 전 자신의 수족이 된 파오아이의 충고로 조금씩 분위기가 변해 가는 왕실의 상황에 대처하려는 자세를 배워 나가고 있었다. 세리아스 왕비는 기대 이상으로 잘 자라 준 왕자에게 따뜻한 눈길 을 보내며, 오래 전 기억 속의 자신의 어린 딸을 떠올리고 그녀가 모시는 여신께 마음 속으로 기도를 드렸다. '바다의 여신 다이네프 님. 제 딸과 아들을 축복하소서. 제 아이들 이 당신의 사랑 속에 커갈 것을 소원합니다....' 그녀는 파란색, 어깨와 소매에 리본처럼 매듭을 지어 묶은 원피스 드 레스의. 넓은 천을 허리에 두른 차림으로 주름이 많은 치맛자락을 여미며 다가오는 7월 초의 제르티아 왕녀의 성년식 날짜를 다시 한번 가늠했다. * 루시엔이 나가고 세리아스 왕비는 그녀의 거실 방 여기 저기에 대 롱대는 굵은 실로 꼬아 만든 줄을 잡아당겨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녀들을 불러 빈 찻잔을 치울 것을 명했다. 궁성 사람들은 그녀가 장식을 넣고 있는 옷가지들이 자신을 위한 것인 줄 알았지만 사실 그것은 모두 제르티아가 돌아오면 입히려고 애써 직접 수를 놓고 있는 것들이었다. 세리아스는 다시 치워두었던 여성용 드레스의 허리 두르게 천을 손 에 들고 고개를 숙였다. "드리얀 왕비. 세리아스 진 라이어스 D." 갑자기 울린 낯선 남자의 목소리에 왕비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 았다. 넘실거리는 금빛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늘어뜨린, 마법사들이 주로 입는 통 큰 어깨 넓이를 가진 옷에 샌들을 신은 발끝이 보이는 긴 옷자락 차림의 젊은 남자가 세리아스가 앉아 있는 넓은 방 가운데 서 있었다. "?!......." 그에게서 풍기는 위압감과 노란 눈빛으로, 세리아스는 그가 인간이 아님을 알아챘다. 그녀는 떨리는 무릎에 손을 대어 짚고 일어나, 치 맛자락을 펼쳐 잡고 허리를 숙였다. "현명한 드래곤 투비와이즈여....." 그의 영역에 죽음을 무릅쓰고 찾아갔을 때 세리아스는 투비와이즈 를 본체의 모습으로 만났었다.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가 드래곤임을. 한때 신성력을 썼던 경력과 직접 그를 만났던 경험으로 쉽게 알아보았고. 지금도 여전히 주위 모든 것을 삼켜버릴 듯한 내재된 힘을 감지하 고 두려움이 몰려 왔다. "너와의 약속이 지켜졌음을 알리러 왔다." "예?" 세리아스는 그가 가져온 소식의 의미에 놀라며 숙였던 몸을 바로 폈다. 두 손을 맞잡고 그녀는 희망과 불안이 교차하는 가슴을 누르 며 되물었다. "제 딸을 데려 오셨나요?" "데려 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네 딸이 이제 내게서 독립했음을 알리 러 왔다. 네 딸은 드리얀에 돌아오기 전, 여행을 하고 싶다고 내게 전해 줄 것을 부탁했다. 성년식 안에 분명히 네 앞에 설 것이다. 나 와의 약속은 지켜졌다. 인정하는가?" "드. 드래곤 투비와이즈님. 그애가 여행이요? 여자아인데....혼자서 어떻게?" "네 딸은 강하다. 걱정할 필요는 없다." 세리아스는 지능이 낮아 걱정했던 딸의 소식에 다시 가슴이 뛰었다. "그 애가....마법을 배웠나요?" "마법은 배우지 않았지만 마법사보다도 강하고 네 소원대로 똑똑해 졌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나와의 약속은 끝났다. 인정하는가?" "고. 고맙습니다. 정의로우신 분....." 세리아스는 눈물이 맺힘을 느끼며 다급히 다시 질문했다. "그. 그 애가 혹시 절....원망하지는 않던가요? 어떻게 자랐나요, 투 비와이즈님." "널 원망하는 것 같지는 않더구나. 그럼 이제 난 간다. 어떻게 자랐 는지는 세 달 후에 직접 확인해 봐라." 그가 가버리려고 하자 세리아스는 다시 황급히 다가서며 물었다. "그. 그래도. 그 아인 여자아인데...여행은 위험합니다. 저...." 투비와이즈는 기쁨과 혼란과 안타까움으로 물들어 애써 용기를 내 고 있는 진의 어머니를 힐끔 바라보더니 몇 마디를 더 던져주고 자 리에서 사라졌다. "네 딸은 네가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하고, 내가 내는 왕의 자질을 시험하는 문제를 모두 풀기도 했다. 성년식이나 준비해라, 세리아스왕비." "..........." 용의 기운이 사라지자 세리아스 왕비는 긴장이 풀려서 자리에 주저 앉았다. "관문을 모두 통과했다고?! 제르티아가?! 오. 여신님...." 그녀는 왕비였기에 왕실의 비밀을 조금 알고 있었다. 그녀의 남편인 현 국왕도 시험을 받았었고 그것이 어떤 시험인지 기억하지는 못했지만, 역대 왕들이 세 가지 관문을 모두 통과하지 는 못했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동안 들리던 풍문으로, 투비와이즈가 이상해 졌다는 소문으로 얼 마나 가슴 졸였었던가. 하지만 그가 미쳤다는 소리는 잘못된 것이 분명했고 비로소 그녀는 딸의 안위에 안심이 되었다. 그렇지만 세리아스 왕비는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다가 올 딸의 운명에 그늘이 드리워졌음을 어렴풋이 추측하고 기쁨 반, 불안 반으로 바닥에 앉아서 눈물을 훔쳤다. * 투비와이즈는 레어에서 드리얀의 왕성이 있는 수도 안 사람들의 눈 에 띄지 않는 골목으로 워프 했다가, 다시 왕성 태궁의 키 높은 정 원수 그늘 아래로 이동을 하고 그가 기억하는 세리아스 왕비의 기 척을 탐지해서 혼자 있을 때를 포착해 그녀와 만나고, 올 때와는 다 르게 바로 자신의 영역 안으로 워프했다. 진에게 있으라고 한 방문 앞에 이르러서야 말을 타고도 보름이 걸 리는 수도까지의 거리를 왕복한 탓에 마나가 많이 소모되어서 핑글. 현기증이 났다. '인간의 몸은 이래서 불편하다니까.' 잠김 마법을 풀고 들어갔다가 투비와이즈는 주춤했다. "야. 너 뭐하냐?" "어? 빨리 왔네? 어머....엄마는 만나고 왔어?" 진은 보석더미 안에 몸을 파묻고 어깨와 머리만 내 놓은 채 허우적 거리고 있었다. 투비와이즈는 기가 막혔다. 인간들이야 드래곤 못지 않게 탐욕스럽 고 욕심이 많으니, 황금이나 보석을 보고 가만있을 위인은 없을 것 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진은 아예 몸 전체를 그의 수집품 안에 집어넣고 수영을 하고 있었다. "나오지 못해?! 니가 드래곤이야? 별꼴을 다 보겠네." "드래곤도 보석으로 목욕해?" 드래곤이야 본체로 돌아가면 그 단단한 비늘에 뽀득거리는 느낌이 좋아서 보석을 깔고 자기도 하고, 좋아하는 색의 돌은 오도독거리며 깨물어 먹기도 하지만. 진의 어이없는 행동에 투비와이즈는 고개를 내저었다. "도대체 넌 뭐가 될 인물이냐. 난 그저 가지고 놀아봐야 장신구나 찾아내서 몸에 걸쳐보고 있겠지 했는데....빨리 나와. 그리고 다 털 어. 옷 속에 들어간 것까지 다, 탈탈 털어라!" 진은 배시시 웃더니 엉금엉금 기어 나와서 그의 말대로 굵은 곱슬 머리카락 속에 파고든 작은 보석들과 옷가지 접힌 부분에 들어 간 보석들을 털어 내기 시작했다. "재밌었어. 보석 더미에서 수영해 본 사람은 나뿐일 거야, 안 그 래?" "너만큼 정신나간 인간여자가 또 있겠냐. 흥." "저 궤짝 열어 봐도 돼?"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진은 재빨리 다가가 궤짝의 문을 위로 열어 젖혔다. "우-와-아-" 궤짝 안에는 쌓여 있던 반 가공 보석들이 아닌, 제대로 세공 해 놓 은 여러 가지 장신구들이 빛을 내뿜고 있었다. "너 정말 부자구나. 투비와이즈. 이렇게 많은 것을 다, 어디다 써? 모셔놓기만 해?" "드래곤 취미 생활이다. 할 일도 없는데 반짝이는 돌이라도 부지런 히 모아서 심심하면 가지고 놀아야지." "나, 조금만 주지 않을래?" "웃기는 소리. 이 방 밖으로 내 허락 없이는 한 톨도 못 가지고 나 간다. 꿈 깨라." 대답했다가 그는 진의 신발에 생각이 미쳤다. "큼. 뭐 교환할게 네게 있다면 또 모르지만 말이야..." 진은 그의 의도를 금새 눈치 챘다. "그래. 투비와이즈 내 신발 줄게. 여행을 하려면 나도 당장 돈이 좀 필요할 테니까 바꾸자. 그런데 사이즈가 안 맞을텐데. 괜찮아?" 투비와이즈는 진이 쉽게 제의해 오자, 상관없다고 말하고 소품실에 두었던 진의 목 길이 부츠를 불러왔다. 용언으로 [ To change-in appearance! : 변형하다 ] 라고 외치며 마 법을 사용하자 부츠가 그의 발에 맞게 크기가 조절되었고, 새로운 마법을 볼 때마다 흥미로운 눈빛을 하던 진은 이번에도, '마법이란 좋은 거야~' 하는 생각을 했다. "뭘 얼마만큼 줄 거야?" 기분이 좋아진 투비와이즈는 궤짝을 향해 턱짓을 하며 마음에 드는 것을 찾아 가지라고 했다. 진은 쌓여있던, 한팔 길이보다 더 긴 직사각형 무거운 궤짝들을 가 뿐히 들어 내려놓고 하나하나 안을 뒤적여 보았다. 그러다가 목걸이도 아니고 반지도 귀걸이도 팔찌 등등도 아닌 그곳 에 어울리지 않은, 테두리에 구멍을 뚫어 굵은 색실로 장식 된 가죽 벨트를 찾아냈다. 양쪽 허리에 고리를 조절해서 걸어 매면 겹쳐져 있는 부분에 공간 이 있어서 휴대용 백처럼 이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 안에 뭐가 있는데?' 진이 손을 넣어 집어 내 보니 그건 금화 몇 개와 제법 큰 사파이어 하나였다. "야. 그건 안 돼!" 투비와이즈는 새 신에 정신이 팔렸다가 진이 허리에 자신이 신경 써서 만들어 쓰던 마법물품을 걸치려는 것을 보고 당황했다. '아니, 내가 저걸 여기에 뒀었나? 그렇군. 전에 인간 세상에 유희 다 녀와서 아무데나 넣어 둔다는 것이......젠장.' "뭐, 별로 비싼 벨트 같지는 않은데 왜 그래?" 그러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처음에 분명 벨트의 사이에서 여러 개의 금화와 보석을 꺼냈는데 다시 손을 집어넣어 보니까 그대로 또 금화들이 잡혔다. '호....이거 마법 주머니, 아니 마법 벨트 주머니인가 보다. 허리띠도 되고 지갑도 되는....' 투비와이즈의 낭패 스런 얼굴을 훔쳐보며 확신했다. '그리고 돈이 마르지 않는 지갑! 우 하 핫- 좋은 것 건졌다!' 진의 짐작은 맞았다. 그 벨트는 그 방 금화와 보석 무더기와 연결되어 있는 마법구였다. 돈을 잔뜩 가지고 다니는 것은 불편하고 적은 돈을 가지고 있어봐 야 그의 성격상 금방 써버려서 레어로 왔다갔다하거나 자꾸 마법을 이용해 불러오는 것은 눈에 띄고, 귀찮기도 해서 투비와이즈가 오래 전에 고안해서 사용하던 것이었다. 진은 그 벨트를 거래 물로 택했고, 투비와이즈가 다시 이를 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투비와이즈가 너무 억울해 하자 진은 쓴웃음을 지으며 그에게 맡겨 둔 청바지를 불러 달라고 했다. 호주머니에는 샘에게 받았던 10센트 짜리 동전이 그대로 있었고 진 은 그것을 한번 들여다보고 부어 있는 그에게 건넸다. "이거 가질래? 나도 조금 미안하긴 해서 말이야. 이건 저쪽 세계에 서 가지고 온 하나밖에 없는 동전이야. 이 대륙에서 유일한 거니까. 혹시 수집하고 싶지 않아?" 투비와이즈는 그녀의 말에 호기심을 띄며 처음 보는 동전을 받았다. "투비와이즈. 난 돈이 무섭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아. 걱정할 필 요 없어. 네 보물 창고를 거덜 내지는 않을 거야." ".......알았다. 하지만 다른 인간의 손에 들어가면 안되니까, 너만 이 용할 수 있게 마법을 걸어 두지." 투비와이즈는 진의 말투에 변화가 없었지만 전해져 오는 마음의 기 운이 잔뜩 우울해 있는 것을 알고, 더 이상 불만 삼지 않았다. "그런데 무슨 의미가 있는 돈이냐?" "........최초로 받아들인 살인청부 대금이지." "살인 청부? 어쌔신 일까지 했다고?" "그래. 난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살인도 가능해. 마음을 들여다보는 데도 몰랐어?" "..........." 투비와이즈는 이제껏 진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 지 않았었는데, 그 순간만큼은 그녀의 생각이 완전히 어둠에 쌓인 듯한 느낌으로 전혀 알 수 없음을 알았다. 진은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안부를 물으며 투비와이즈와 여행에 필 요한 간단한 짐을 꾸렸다. [22] 2 장. ( 80일간의 세계일주 ) 1. 이 름. 서 대륙 해안도시 네얀은 4월이었지만 북 대륙에 가깝게 위치해 있 어서 아직 아침에는 서리가 내리는 날씨였다. 대륙의 가장 길고 큰 산맥 중의 하나를 이고 북 대륙과 나눠지는 경계에 위치했고 험한 산맥을 넘어 교류하는 것은 일부 모험 자들 에게나 해당되는 일이라, 얼지 않은 항구를 가진 서 대륙의 첫 번째 나라 네카르도에 속한. 북 대륙과의 교역이 가장 빈번하고 여행자가 많은 도시로 사람들이 많고, 활기찼다. 진과 투비와이즈는 동 대륙 끄트머리에 위치한 메칸타나 산맥에서 산맥의 시발점인, 에요타 산맥으로 워프를 하고 그 곳에서 최대한 시간을 아끼기 위해 산을 타고 직접 내려오지 않고, 서 대륙에 해당 하는 항구도시 네얀 근경으로 다시 워프 했다. "저 산맥에도 드래곤이 살아?" 진은 그들이 빠져나온 웅장한 산등성이를 가리키며 물었다. "살지. 산에 사는 게 젤 편하거든. 드래곤 성질에 따라 바다나, 사막 같은데 사는 녀석들도 있지만." "그럼 드래곤과 드래곤 밥인 몬스터들만 사는 거야?" "산맥이다, 산맥. 엘프마을이나 땅속에 숨어사는 드워프도 있을 테 고, 인간들과 교류하지 않는 유사인종들도 살겠지." "네 영토에도 있었던 거야?" "그럼. 있지, 없었겠냐?" "아깝다. 보고 올 걸." 투비와이즈는 시간도 별로 없으면서 볼 건 다 보려고 한다고 핀잔 을 주었다. "산맥이 이어졌다, 끊어졌다 하면서 대륙을 가로지르고 있으니까, 가다보면 충분히 다른 유사인종들을 만나 볼 수 있을 거다. 그들 중 에서도 여행을 하는 녀석도 있으니까. 인간마을에서도 운 좋으면 볼 수도 있겠지." "그래?" 진은 투비와이즈가 처음에 주었던 옷차림에 한쪽 어깨에 고리와 걸 림쇠가 달린 무릎까지 오는 여성용 갈색 망토를 입고 있었다. 추운 지방으로 가면 샌들을 신은 다리가 시려 울 것 같아서 투비와 이즈가 가르쳐 준대로 짧은 옷감으로 발과 다리를 감싸고 끈 달린 샌들의 끈으로 무릎까지 엇갈려 동여맸다. -정말 불편했다. "말해 두지만, 네 여행 계획이 가능한 것은 순전히 내 덕이다. 알고 나 있는 거냐?" "알고 있어. 고마워. 비행기를 타도 이렇게 빨리 이동할 수는 없겠 지. 분명히 문명은 뒤 처져 있는데, 이곳은 마법 때문에 불가능한 일이 가능해 지는 것이 너무 신기해." "비행기?" "에- 교통수단이야. 엄청 크고 무겁지만, 하늘을 굉장히 빨리 날수 있는 기구지. 안에 사람들이 잔뜩 타서 날아다녀." "별 희한한 소릴 다 듣겠네." 진은 그에게서 얻은 마법지갑 외에도 가죽가방과 허리에 가늘고 가 벼운 여성용 검을 차고 있었다. 위장용이라고 해도. 검을 좀 쓰는 모험자인 척 하지 않으면 귀찮은 일에 자꾸 발목이 잡히게 될 것이라는 투비와이즈의 충고로 그의 무기창고에서 하나 집어들고 왔었다. 그는 대륙에서 거의 모든 마법사들이 입는다는, 테두리에 금색 자수 가 놓여 고급스럽게 보이는 겉옷을 평상복 위에 걸치고 있었다.-구 멍 뚫린 부분에 머리를 집어넣고 앞뒤로 발끝까지 오는 긴 직사각 형 천 자락을 허리에서 폭이 넓은 천으로 동여서 핀을 꽂은.- "신분은 어떻게 할거냐?" "신분?" 그들은 산기슭에서 인간들이 모여 사는 가까운 도시로 빠르게 향하 며 계속 대화를 나눴다. "단순히 여행자나, 모험자인 척 할거냐고. 그래도 어쨌든 기본 신분 은 설정해 둬야지. 나와의 관계도 입을 맞춰야 할 테고. 난 유희를 시작한 거니, 앞으로 철저히 인간 흉내를 낼 거다. 그 점 확실히 알 고 있어라." ".....음. 뭘로 할까? 여행 목적은 따로 없는데. 그냥 구경하는 거야. 이곳에 대해 거의 모르잖아. 너 외엔 만나 본 사람도 없고." "난 5써클 마법사다. 6써클 유저라고 해 두지. 그 정도면 좀 뛰어난 인간마법사로 볼 테니까." 진은 몇 마디 더 그와 의논을 해서, 자신은 드리얀의 한 영주의 딸 이고. 이름을 와이즈 리툰. 이라고 바꾼 투비와이즈와 친구사이로 (이 부분에서 와이즈는 또 못마땅해 했지만, 한번 말을 내렸으니 다 시 올리기 어색하다는 진의 고집으로 어쩔 수 없이.) 혹은 보호자로 세상구경을 나왔다가 돌아가고 있는 것으로 하기로 했다. 숲을 벗어나니, 오후의 태양으로 북 대륙과 가까워 제일 추운 편이 라는 평이 무색하게 봄기운이 완연했다. 바람이 많이 불어서 체감온도가 내려가는 것을 제외하면. 보이는 것 들이 모두 새로운 것들이라 진은 푸른 하늘색처럼 기분도 푸르러 지는 것 같았다. 들에는 군데군데 막 싹을 틘 개척된 농지가 보이는 것이 잦아지고. 사람들이 왕래한 흔적이 있는 길을 따라 진은 와이즈와 함께 항구 도시 네카르도-네얀의 입구에 다 달았다. "신분증명서 같은 것은 필요 없어?" 진은 도시로 들어가는 검문소 앞에 줄을 서서 기다리는 몇몇 사람 들을 보며 와이즈에게 물었다. "글쎄다. 전엔 그런 거 없었는데?" "지리는 잘 아는 것 같은데, 풍습은 몰라?" "그거야 널 찾으러 팔방으로......쳇" 진은 말하지 않아도 뒤 이야기를 알아들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마법으로 이동하는 문제도 한번 가본 곳이 아 니면 설사 드래곤이라고 해도 그렇게 간단한 이동이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머리가 좋아서 4000년 된 지리 지식을 그대 로 가지고 있지만 인간들이 사는 곳은 지형이 쉽게 바뀌곤 해서 그 대로 옛 기억을 써먹는 것은 위험해 질 수도 있다고 했다. 이동마법에 필요한 좌표나 뭐라나 그런 것이 꼼꼼히 적힌 책자도 그의 한쪽 어깨에 맨 가죽 가방 속에 들어 있었는데, 그것도 인간 마법사는 공들여 마법 진을(그건 또 뭔데?) 그려서야 사용하는 것이 라고 했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돌로 쌓아 만든 성문 앞에서 가슴 부분과 어깨, 팔꿈치, 무릎에 두 껍게 보이는 가죽으로 보호대를 한 통일된 차림의. 검을 찬 몇몇 병사들 중 한 명이, 리툰과 진에게 차례가 오자 물었 다. "여행 중입니다. 북 대륙에서 오늘 도착했습니다. 동 대륙으로 향하 고 있지요." "산맥을 넘어 오셨나요?" 그들이 놀라서 와이즈에게 되묻자. 그는 별거 아니라는 투로 그렇다 고 말했다. 와이즈도 진도, 외모가 화려했고 귀족으로 보이는 데다, 와이즈가 입고 있는 마법사 복장에 꽤 실력 있는 모험가로 판단했는지 '네카르도-네얀에 잘 오셨습니다.'하고 말하며 훔쳐보는 눈길로 통과 시켜 주었다. "성벽이 제법 튼튼해 뵈네." "여긴 성 밖에 토지가 있을 정도니 안전한 편인가 보다. 저 정도 성 벽은 보통이다." 성벽이란 적을 염두하고 쌓는 것인데, 자신이 입고 있는 복식이나 병사들의 군복은 문명에 뒤쳐져 있어도, 나라끼리의 분쟁이나 영지 끼리의 분쟁만 있는 것이 아닌 세계라서 그런가 보다하고, 진은 이 해했다. 어떤 영지의 성은 아예 전체가 성벽으로 둘러싸인 곳도 많 다고 한다. 큼직한 자갈이 흙에 묻힌 채 깔린 길을 걸어 들어가니 가장 먼저 여행자들을 위한 숙소로 보이는 건물들이 보였다. 대부분 나무를 베어 두꺼운 판자로 만들어진 집들이 대부분이었고 제법 부유한 사람들이 사는 집들로 보이는 돌로 만든 저택도 보였 다. 항구도시이고 북 대륙과 동 대륙의 교역을 담당하는 첫 번째 영 지라서 그런지 여러 나라 사람들이 섞여 복식에 약간의 차이도 보 였다. 사람들의 머리색도 가지가지였고, 의. 식. 주는 개발되지 않은 부분 이 많아 불편한 것이 많아 보였지만 나름대로 생활에 활기가 엿보 이는 곳이었다. 평민들인 듯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과 조금 떨어진 곳에, 영지의 성으로 보이는 돌로 증축된 건물도 보였다. "와이즈. 밥 먹고 돌아보자. 사람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구경하려면 꽤 시간이 필요하겠어." 와이즈(투비와이즈)는 '넌 먹는 것 밖에 모르냐' 하고 토를 달긴 했 지만 그녀가 열고 들어가는 여관과 음식점을 겸하는-포크가 그려진 판자가 처마에 대롱대는- 상 건물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이놈아- 왜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 듣냐?! 허파에 바람만 잔뜩 들 어서는! 마법은 무슨 마법이야! 장사나 하랬잖아. 이놈아!" 스프가 누른 듯한 음식 냄새와 술 냄새가 판자 벽에 스며들어 사람 들의 자취가 묻어나는 분위기였다. 몇 개의 테이블과 의자들이 놓여 있는 여관 식당에서는 저녁 식사 시간이 이른 탓에 낮 손님이 드문지, 사람이 몇 명 보이지 않았다. 주인으로 보이는 털 복숭이 아저씨가. 쩡쩡거리는 목소리로 종업원 인 듯한 갈색머리의 소년을 휘어잡고 있었다. "아버지. 낮엔 일이 별로 없잖아요! 저녁에는 일할게요. 때리지 좀 말아요. 아프다 구욧!" 그들은 손님이 들어오는 것을 늦게 야 알아채고, 곧 실랑이를 멈추 었다. "어서 오십시오. 두분 이십니까?" 굳은살이 박히고 손등에 갈색 털이 수두룩한데다, 얼굴에도 갈색 턱 수염이 잔뜩 덮여 있고, 무릎까지 오는 스커트형 짧은 옷에 들어 난 두터운 종아리에까지 털이 뭉실 거려서 진은 그가 꼭 곰처럼 보였 다. "식사 되나요?" 마법사로 보이는 멋진 금발머리의 키 큰 남자와 함께 들어 온 검푸 른 머리카락의 아름다운 소녀가 허스키 한 울림의 목소리로 묻자, 투덜거리며 어질러진 테이블을 치우려고 돌아서던 소년이 돌아보았 다. "그럼요. 여기 앉으십시오. 여행자 분들이신가 보군요. 무얼 드릴까 요?" "뭐가 있나요?" "에....밀 빵과 양젖으로 만든 치즈와 야채스프나 생선스프, 고기스프 해산물 요리 등등 많습니다. 드시고 싶은 것이 있으시면 말해 보세 요. 웬만한 것은 다 있답니다. 이곳은 북 대륙에서 들어오는 향신료 도 가지 수가 많아서 고기 요리도 맛있을 겁니다." "그럼. 빵과 스프와 고기요리 중에서 가장 잘하시는 걸로 2인분씩 주시고 후식으로 먹을 만한 것 있으면 함께 주세요." "에. 알겠습니다." 털 복숭이 아저씨는 그다지 많이 먹게 보이지 않은 소녀가 꽤 많은 요리를 주문해 오자 험상궂은 얼굴에 웃음을 띄며 돌아섰다. "내겐 포도주 한 병 주시겠습니까?" "예. 예. 기다리십시오. 얼른 내 오겠습니다. 야, 이 녀석아 들었지. 빨리 움직여!" 와이즈의 말투에 고개를 옆으로 하고 진은 조금 웃었다. "예의 바른 인간 마법사 와이즈네." "시끄럽다. 조용히 해." 주위엔 몇몇 그들처럼 여행자 복장을 한 젊은 남자 둘과 병사들로 보이는 사람 몇이 있었고 진과 와이즈가 들어왔을 때부터 호기심에 찬 눈빛으로 구석자리에 앉은 그들을 보고 있었다. 뛰어갔다 왔는지 진보다 조금 어리게 보이는 그 소년이 나무 컵 두 개와 포도주가 든 조그만 나무 술통을 가져와 그들 앞에 놓았다. "여기 있습니다. 더 필요한 것 있으세요?" "아니, 없....." "과일 없어?" 없다고 대답하려던 와이즈는 진의 주문에 눈썹을 치켜 떴다. "봄이라 생 과일은 없고요. 마른 과일이 좀 있는데 가져다 드릴까 요?" 진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고 소년은 부엌으로 보이는 프론트 뒤의 열린 문으로 사라졌다. "참, 입도 고급이다. 안주까지 찾냐?" "아, 난 술 별로 안 마셔. 그냥 맛만 볼게. 입가심은 좀 해야지. 저 쪽은 그런 게 당연히 같이 나오는데. 여긴 정말, 옛날 옛적에 해당 하는 문화권이네." 진은 배구공보다 조금 작아 보이는 포도주가 든 나무 술통을 두드 려 보았다. 잘게 썰어 말린 과일을 나무접시에 담아 가지고 온 소년이 테이블 위에 그것을 내려놓고 머뭇거렸다. 진은 와이즈가 따라 준 적포도주의 향기를 맡다가 그를 쳐다보았다. "저....마법사시죠?" "그렇습니다만." 진은 와이즈의 말투에 속으로 또 웃었다. "그럼, 이. 아가씨 분을 가르치고 계시나요?" 와이즈는 그 소년의 의도를 알았는지. 정중하지만 거절이 분명한 투 로 대답을 했다. "아닙니다. 하지만 제자를 둘 실력도 아니고 그럴 상황도 되지 않아 서 생각해 본적 없는 일이군요." 소년은 희망 섞인 기대를 가졌었는지 조금 기가 죽어서 돌아섰다. "마법을 배우고 싶은 가봐. 모두 따로 개인 스승을 찾는 거야?" "마법 학교가 있긴 하겠지만, 평민들이 무슨 돈이 있어서 비싼 입학 금을 내고 다니겠냐. 그러니 여행중인 마법사는 대우가 좋은 편이었 어. 지금도 그런 것 같다. 혹시 운 좋으면 수련 중인 마법사에게 제 자로 받아들여지는 경우도 있거든." "그래?" 진은 좀더 이곳 문화를 알기 위해서라도 책이라도 사서 읽어 봐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요리가 하나씩 나오기 시작했는데 괜찮은 맛에 양이 무척 많았다. 이곳에서는 식사로 다양한 요리를 코스별로 먹지 않고 한 접시 요 리만 해서 먹는 모양이었다. 귀족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스프와 토끼고기 요리가 담긴 접시는 청동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진에게 많이 먹는다고 구박하던 와이즈는 자신의 몫에 해당하는 요 리를 깨끗이 비우고 포도주도 끝장을 보고 일어섰다. "자기가 더 많이 먹는 구만." "나와 네가 같냐? 우리 드.... 우리들은 안 먹어도 살지만, 원래 술과 음식도 즐기는 편이다." 음식값이 어느 정도인지 몰라서 얇은 금화 한 개를 꺼내 놓자, 주인 의 눈이 커다래졌다. "저기, 손님. 아니, 레이디....귀족 분들이셨군요. 술과 음식값은 60실 링이면 됩니다. 거스름돈이....숙박은 하지 않으시나요?" 알고 보니 100실링이 은화 1개(1실버), 은화 10개(10실버)가 금화 1 개(1골드)에 해당했다. 두껍고 더 크게 만들어진 10골드 짜리 동전 도 있었기에 진은 이곳의 물가가 굉장히 낮은, 아니 와이즈가 엄청 난 부자라는 것을 다시 알았다. "방을 준비 해 주세요. 나갔다가 다시 들어올게요. 거스름돈은 나중 에 받지요." "예. 알겠습니다. 네얀은 볼거리도 꽤 있으니까요. 구경하고 오십시 오. 아, 이곳에 처음 오셔서 지리를 잘 모르시면 아들놈을 함께 보 내 드릴까요?" 더 공손해 진 그의 호의 어린 말에 와이즈도 별 반대를 하지 않아 서 진은 그렇게 해 달라고 했다. 그들이 나가자, 다른 테이블에 앉아 있던 한 병사가 주인에게 말을 걸었다. "이봐 후크. 귀족 여자야?" "그래. 그런 것 같아." "그런데 존대를 하네?" "그러게 말이야....." 털 복숭이 후크는 손에 들어 온 금화를 내려다보며 머리를 긁적였 다. 갈색 머리의, 진보다 조금 작은 160Cm 정도의 키의 소년은, 콜린스 라고 했다. 콜린스는 진과 와이즈를 다양한 문양의 깃발을 단 선박들을 지나쳐 선원들이 짐을 실어 나르거나 올리는 것을 구경하게 해 주고 간이 상점이 많고 시장이 열리는 거리로 안내해 주었다. 옷감과 해산물과 빵과 밀가루와 우유와 향신료를 넣어서 만든 과자 와 생활용품 등을 파는 잡다한 시장 통에서 진은 비로소 사람 사는 풍경을 제대로 본 것 같아서 즐거워졌다. 걸어서 돌아다니는 것에 금방 싫증을 낼 줄 알았던 와이즈는 의외 로 잘 따라와 주고 있었다. 여행객들의 발길을 잡아, 주머니의 동전 을 우려내는 자잘한 게임들에 흥미를 보이기까지 했다. "북 대륙에서, 유명한 상가의 대형 배가 들어오면 밤에 축제도 열려 요. 그럼 먹을 것도 많고 구경할 것도 더 많아져요." 콜린스의 설명을 들으며 그들은 땅거미가 지는 시장을 뒤로하고 여 관으로 향했다. 돌아가는 길에 진은 콜린스가 애써 보여 주려 하지 않았던 여러 가 지 광경을 목격해야 했고 그 때문에 시간을 지체해야했다. "저들은 뭐지?" 오후에 언뜻 보았던 선원차림의- 통 넓은 울 옷감의 상의에 짧은 바지를 입고, 가죽조끼를 걸치고, 머리에 수건을 둘러 묶은- 남자 여러 명이 배에서 하선시킨 듯한 족쇄를 찬 사람들을 끌고 가는 것 을 보며 진이 물었다. 콜린스는 귀족이 분명해 보이는 진에게. 아마도 귀하게 자라서 세상 물정을 모를 것이라고 여겼는지, 뒷골목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기분 나빠할까 봐서 깨끗한 거리만 안내해 주다가, 어두워지기 시작 하자 피할 수 없이 눈에 띄는 여기저기의 광경에 대해 묻는 것에 어색하게 대답했다. "노예에요. 북 대륙에서 팔려오기도 하고, 서 대륙에서 팔려가기도 해요. 유사인종은 잡기가 힘들어서 거의 볼 수 없지만 저들은 나라 를 잃거나 반란으로 노예가 된 사람들이거나 하고, 그들의 후손들이 에요. 죄지은 농노들도 섞여 있을 거 에요." 진은 얼굴이 굳어졌다. "이곳만 그러는 거야? 아니면 대륙이 다 그러는 거야?"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지, 콜린스가 머뭇거리자 와이즈가 대 신 대답해 주었다. "모든 대륙에서 그런다. 이제 뭔가 다르다는 것을 알겠냐?" 진은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자 스물. 스물... 숨어있던 악령이 구석 구석에서 바닷바람을 타고 기어 나오고 있음을 알았다. 병사들이나 용병들, 선원들을 대상으로 영업을 개시한 여자들이 골 목골목에서 모습을 들어내는 것을 보았고. 낮에는 뒷골목에서 둥지를 틀고 있다가 저녁이 되자 거리 곳곳에 자리를 차지하고 구걸하는 사람들을 발견했다. 그리고 10살도 되어 보이지 않은 아이들의 무리가 그들에게 덮치다시피 몰려와 지나치 면서, 진의 짐과 와이즈의 짐에 손을 대는 것도 겪어야 했다. 한 아이가 그녀의 벨트에 손을 댔다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지 더니 잽싸게 일어나서 도망갔다. "?" "마법을 걸어 두었잖냐. 전기가 통해서 그래. 생명엔 지장 없을 거 다." ".......내가 너무 안일했어. 너무 아름다운 곳이라 방심하고 있었는데. 여긴 더 심하군...심한 게 당연했는데." 진은 짙어진 푸른빛의 달을 쳐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더 어두워지면 위험하니 돌아가자는 콜린스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진은 발걸음을 건물 건물의 뒷골목으로 향했다. 제법 깨끗했던, 귀족이나 여행자들을 위한 거리와 달리 그 곳은 비 참했다. 이곳은 문명이 뒤쳐졌다. 그렇지만 하수구조차도 없다는 것을 진은 그때야 깨달았다. 뒷골목은 자체가 쓰레기장에 오물 투성 이었고 콜린스처럼 부유한 편에 속하는 평민들이 아닌, 농노들과 노인들과 고아나 다름없는 아 이들과 창녀들의 구질구질한 집들이 엉켜있었다. 네얀은 항구도시로 상업을 위주로 한다. 그래서 그 곳은 다른 곳보 다 형편이 낫다는 것도 알았다. 노예들은 대부분 부유한 상인이나 귀족들의 차지인지 모습을 볼 수는 없었지만, 눈앞의 갑자기 시작된 풍경으로 충분히 어떤 생활을 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농노들의 딸들로 보이는 젊은 여자들은 낮에는 농사를 짓거나 장사 를 하거나 운 좋은 경우엔 영주의 성에서 일을 한다고도 하지만 밤 엔 시키는 사람이 없어도 스스로 나서서 몸을 팔고 있었다. 그들을 전문적으로 수용하는 곳인 듯한 건물들도 보였다. 진은 달빛을 받으며 거리에 서서 호기심을 가지고 쳐다보는, 가슴을 거의 들어 내 놓은 여자들의 시선을 받고 있었다. "저..저...아가씨 위험해요. 어서 나가세요. 이런 곳에 올 분이 아닌 데...저기..." 콜린스는 팔짱을 끼고 진을 바라보고 있는 와이즈에게 도움을 청했 지만 그는 무시했다. "이봐, 예쁜 아가씨. 와- 정말 예쁘네. 내가 찍었다. 야- 저리가 느 네들....." 병사들과 비슷해 보이는 옷을 입은, 용병인 듯한 남자 몇이 그들에 게 다가왔고 한 남자가 진에게 수작을 걸었다. "와이즈님....!" ".........." 콜린스는 귀한 손님들에게 드디어 위험이 닥쳤음에 조급해져서 일 행 마법사의 도움을 청했지만 여전히 그는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콜린스. 낮에 보니까 들에 사람이 별로 없던데." "그. 그건..." "이봐 아가씨. 나랑 어때? 일거리 받아서 돈이 제법 있다구." "이 녀석아. 마법사랑 같이 있잖아! 죄송합니다. 아가씨, 이 녀석이 좀 취해서." 그들은 전혀 취객으로도 보이지 않았고 말리는 것도 성의가 없어 보였다. "이거 왜 이래? 가만 있어봐. 물어는 봐야지. 그거 아니면 여기 왜 있겠냐. 안 그래 아가씨? 돈줄게 나랑 하자." 진은 그들의 왁자지껄한 소란스러움을 무시하고 다시 콜린스에게 물었다. "들에 사람이 없었어. 어업만 하는 것은 아닌 듯 한데." "그건요. 지금 봄이라서 그래요. 씨앗은 이미 뿌렸고. 수확은 멀었 고, 배가 있는 사람도 별로 없거든요. 바람이 너무 세서 작은 배로 는 어림도 없고...세금은 똑 같고 하니까...이쯤이 젤 어려워요." "나 돈 있다니까! 얼마면 되는데, 예쁜 아가씨. 가게가 있어?" "이쁜 아가씨가 검은 왜 차고 다니나...귀여운 검이긴 하지만 말야." 진은 코앞에서 수작을 부리고 있는 그들에게 눈을 돌렸다. "난 비싸." 용병들 보다 콜린스가 더 놀랐다. 와이즈는 여전히 팔짱을 낀 채 눈썹을 치켜 떴다. "에...어. 얼만데?" 그들은 마법사로 보이는 와이즈 때문에 섣불리 나서지를 못하고 있 다가 의외의 말에 반색하며 되물었다. "1억 골드." ".........." 와이즈는 입으로 손을 가져다 댔고, 콜린스는 드디어 이 철없는 귀 족영양이 분수를 모르고 사고를 치려고 하는구나, 하는 생각에 마법 사 곁에 바짝 붙었다. 놀림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 그들이 벌컥 화를 내려고 하는데 진이 주위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호기심을 보이며 흘낏대고 있는 여자 몇을 손짓해서 불렀다. "이 사람들 오늘 돈이 좀 있다나 봐. 장사 안 해?" 그들은 곧 진에게서 넘겨받은 상권을 놓치지 않으려고 유감 없이 영업실력을 발휘하며 그들을 한 사람씩 맡아 끌고 가다시피 하며 사라졌다. 와이즈는 쿡쿡 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콜린스는 진을 귀족으로 판단한 것이 오판이 아닐까 생각하며 거친 용병들을 독특한 방법으로 물리치고 귀가하는 그녀의 뒤를 따라갔 다. 여관 건물이 늘어 선 곳에서 나이 들어 보이는 아주머니가, 작은 아 이들을 데리고 오가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밀가루로 빚어 구운 과자 를 팔고 있었다. 콜린스는 먼저 여관으로 들어갔고 진은 와이즈와 걸음을 멈추었다. "아가씨. 이것 좀 사 드시지 않겠어요? 우유도 넣었는데...." 밤이 되자 바닷바람으로 꽤 추웠는데 그들은 겉옷을 걸치지 않았고, 팔을 드러낸. 얇은 천을 몸에 둘러 가는 끈으로 허리를 묶은 차림이 었다. 신을....신지 않고 있었다. 진은 따뜻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여관 문을 몇 걸음 남겨 둔, 그들 의 앞에서 묵묵히 서 있었다. 살 생각이 없는 것으로 알았는지. 건너편의 지나가는 행인에게로 그 들은 상대를 바꿔 몸을 돌렸다. "안 들어가냐?" ".....투비와이즈." "와이즈라고 부르라니까." "그러고 보니 너, 내게 본명을 가르쳐 주기는 했지만. 한번도 내 이 름을 부르는 것을 못 들었어. 무슨 이유가 있는 거야?" ".........." "날 드래곤의 눈으로 보기 때문이지? 굳이 원치 않는데, 친구로 여 겨주길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네가 이름조차 불러 주지 않는 한, 나도 네 친구는 못 되어 줄 거야." ".........." "내 이름은 '진'이야." 진은 돌아서서 과자를 팔려다 다시 거절당하고 있는 아이들을 거느 린 어머니를 불렀다. "사시게요?" "과자 값으로 저녁을 사드릴게요. 아이들과 따라오세요." ".....예?" 굶주린 것이 분명한, 자신의 어머니가 팔고 있는 빈약한 과자에 눈 독을 들이고 있던 예닐곱 살쯤 되어 보이는 형제가, 기대에 찬 얼굴 이 되어서 일행을 남겨두고 걸어가는 진을 따라 여관으로 들어갔다. [23] 1-2. 어둠 속의 빛 "인간과 친구가 된다고?" 와이즈는 진이 먼저 자리를 뜬 후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혼자 중얼 거렸다. 인간과 친구가 된 드래곤이 있었던가? 엘프와 친구가 된 드래곤은 있었다. 엘프는 제법 오래 사는 편이고, 배신 같은 것은 모르는 종족이다. 인간은? 그들은 가장 믿을 수 없는 종족이고. 게다가 너무 빨리 죽 는다. 드래곤이 유희상대로 주로 인간을 택하는 것은 그들이 가장 빠르게 세대가 교체되기 때문이기도 했다. 오늘 만나 동료가 된다고 해도, 드래곤의 시간 관념으로 내일이면 죽어 버리는 그런 나약한 종족에게 어떻게 친구를 기대 할 수 있겠 는가. 그녀는? 그녀는 신의 세례를 받았다. 다른 인간들과 다름없을까? 아니면...... '젠장. 모르겠다. 일단 유희를 시작 한 것이니, 유희라는 것을 염두 하고 보면, 친구든 뭐든 못될 건 또 뭐야!' 와이즈는 골치 아픈 문제를 던져 주고 사라진 진의 뒤를 좇아 불빛 이 새어 나오는 여관으로 들어갔다. 여기 저기에 아이 손바닥만한 크기의 놋쇠 접시에서 기름이 타들어 가는 심지가 불을 밝히고 있었다. 낮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는데. 그새 여행자들이 많이 영지에 들어왔 는지 사람들로 바글거렸다. 주인장 후크와 콜린스는 정신이 없었다. 진은 데리고 들어갔던 아이들과 그들의 어머니와 함께 구석자리에 앉아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애들 아빠가 작년에 북 대륙으로 가는 배에 취직되어서 떠났는데 배가 돌아오지 않았어요. 여자는 아이를 데리고는 혼자서 너무 먹고 살기가 힘들어서요...할 수 있는 일도 없고 저는 나이가 들어서 남자 도 받지 못해요. 다들 서로 어려우니까 품삯이 될만한 일을 구할 수 가 없어서...." 바다와 면해 있는 도시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여기, 네얀도 바다의 여신 다이네프를 섬기고 있었고 신전도 있었다. 진은 신전의 도움은 받을 수 없는지 물었다. "아이들을 신전에 맡기고 싶어도 부모 중 한 사람만 있어도 받아 주지 않거든요. 차라리 제가 애들을 버리면 얘네 들도 굶어 죽지는 않을 것 같은데.....그렇게는 못하겠고. 사실 신전만 믿을 수도 없는 일이고요." 그녀는 실비아라고 했다. 겨우 35세가 넘는 나이에 4~50세는 되어 보일 정도로 고생에 찌들 어 있었다. 진은 허겁지겁 스프를 떠먹고 있는 어린 형제를 묵묵히 바라보며 그녀의 넋두리를 듣고 있었다. 와이즈는 콜린스에게 의자 하나를 청해서 진의 맞은 편에 자리를 잡았다. "아이는 둘뿐인가요?" 그녀는 진의 물음에 힘없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더 있었지요. 하지만 얘네 들 누나와 형은 어릴 때 죽었어요. 애들 은 자주....자라지 못하고 병드는 경우가 많아요. 아가씨...귀족 분이 신 것 같은데...." "출산은 어떻게 하나요?" 실비아의 말을 들으며 진은 다시 처참한 기분이 되었다. 이곳엔 신성력으로 병을 치료해 주는 신관들이 있고 마법으로 다치 는 것을 치료할 수 있는 마법사도 존재했다. 하지만 그들은 대륙에서 최고의 지위와 대우를 받는다. 그들은 귀족들의 차지였고, 나라간이나 영지끼리의 이권 다툼을 위 한 전쟁에 동원되었다. 수련 중인 그들에게 운이 좋은 천민들이 도움을 받는 경우도 있지 만 인구 비율로 따지면 극소수의, 그들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은 기 도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층계급의 여자들은 영지의 주인이나 귀족들에게 소작 민을 만들 어 주는 역할이 가장 크다. 그녀들은 모두 어린 나이에 아이를 낳고 끊임없이 또 갖는다. 다산을 장려하는 나라가 대부분이었고, 후처리가 따르지 않았기에 무지와 비위생적인 출산 과정으로 산모나 갓난아이들은 쉽게 감염 되어 최악의 경우를 체험하게 된다. 강한 어린아이들은 살아 남지만 생계로 바쁜 어머니들은 아이들을 돌보지 못한다. 걸음마를 하기 전의 아이들은 거의 하루 종일 방안에 묶인 채 갇혀 지내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전 여기 출신이 아니에요. 아버지가 영지를 떠날 수 없는 농노는 아니어서요. 남편과 결혼한 후 이곳으로 따라 왔었지요. 그래도 이 곳은 봄철만 잘 넘기면 굶지는 않는다고 해서...." 실비아의 두 아들은 빵과 스프 접시를 이미 비우고 손가락을 빨고 있었다. 진은 음식을 더 시키고 실비아의 이야기를 계속 들었다. "....남자들은 사냥도 하고, 병사가 될 수도 있고, 용병이나 선원이나 상인들이 되어서 충분히 먹고살지만. 배우지 못한 여자들은 보호해 주는 부모나 남편이 없으면 어쩔 수 없답니다. 그래서 젊고 얼굴이 반반한 처녀들은 영주 님의 성에서 일을 돕고 약간의 품삯을 받으 면서 지참금을 모아요.....첩이 되길 희망해서 일부러 성을 기웃대기 도 하고요. 귀족 마나님들은 그런 저희들을 업신여겨서, 영주 님이 나 자제 분들의 눈에 든 아이들은 뒤에서 안 좋은 일을 많이 겪는 답니다...." 진이 화내지도 않고, 찡그리지도 않고 잘 들어 주자. 차마 귀한 영애 앞에서, 평생 누구도 꺼내지 못했던 말까지 그녀는 조심스런 원망을 담아 머뭇거리며 말을 했다. 식당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용병이나 여행자들이었지만 대부분이 젊은 축에 끼는 남자 들이었다. 그들 틈에 끼인 몇몇 여자들은 술을 퍼 마시고 있었다. 진은 실비아의 말로 뒷부분까지 추측할 수 있었다. 이곳은 여자들이 부족할 것이다. 젊고 건강한 여자들은 힘있는 자들의 차지일 것이고. 짝을 찾기 위 해서는 나머지 남자들은 강해져야 할 것이다. 힘은 곧 돈이고. 돈이 없으면 평범한 결혼조차도 힘들 것이다. 그러니 탈취가 가능한 소규모 전쟁, 대규모 전쟁이 끊이지 않을 것 이고, 전쟁은 다시 빈곤을 낳을 것이고, 빈곤은 서민들에게 최고의 직업인 기사나 마법사나 신관 같은 일을 머나먼 꿈이 되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 굳이 신분에 제약을 두고 있는 것을 젖혀 두고 생각해 보아도 한 번 천민이면 대대로 천민을 벗어나기 힘들어진다. 선정을 베푸는 지배자를 생애 한순간 운 좋게 만난다해도, 이곳은 영지를 가진 귀족들의 세력이 더 강하게 영지 민들에게 영향을 끼 친다. 도움의 힘이 미치기도 전에 다시 옛날로 돌아간다. 하루 이틀 잘 먹는 것으로 평생을 버틸 수는 없지 않은가. 좋은 영주를 만나는 것은 하늘에 별 따기일 수도 있다. 귀족들은 농노나 평민들을 같은 인간으로 대하지 않는다. 이 곳은 신분제가 철저하게 작용되는 곳이었다. '무엇부터. 어디서부터. 누구부터....!' 진은 머리가 아파 왔다. 식당 안의 가까이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실비아가 진에게 하는 이 야기를 똑똑히 들었을 것이다. 그들은 모두 자신의 어머니. 누이의 이야기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거친 용병들이었지만, 가진 힘을 과시하고 싶어하는 모험 자들이었 지만, 모두 진의 자리로 고개를 향하지 않고 있었다. 묘하게 가라앉은 소란스러움이 주위를 휘감고 있었다. 진은 그들이 자신을 귀족으로 보고 있음을.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 지를 주목하고 있음을 알았다. 와이즈 조차도, 공개된 자리에서 인간들의 가장 희망 없는 부분을 파헤쳐 늘어놓고 있는 진의 다음 행동을 주시하고 있었다. "대륙이 모두 같은 상황이란 말이지?" 와이즈가 대답해 주었다. "더 심한 곳도 있을 걸? 인간들 사이의 일만 따진다면 그 정도지만, 몬스터 문제나 정신 나간 흑마법사가 생기면 마계의 일까지 덧붙여 진다." 그들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여행자들 중 한 사람이 드디어 일어나 말을 걸어 왔다. "실례합니다. 본의 아니게 대화를 다 듣고 말았네요. 앉아도 되겠습 니까?" 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검을 다루는지 무겁게 보이는, 폭 넓은 검을 망토 안의 허리에 차고 있었다. 이름을 '폴'이라고 소개했다. "아가씨.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사는 것은 아니랍니다. 최악의 경 우인 셈이죠. 아무래도 세상구경을 나오신 듯 한데. 우울해지는 이 야기를 듣고 계신 것이 안타까워서요." '글쎄? 과연 최악일까?' 진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충분히 짐작했다. 노예는? 영지 잃은 농노는? 노인들은? 전쟁터에서 패잔병과 포로들 은? 죄수들은? 나라 잃은 주민들은? -진의 머릿속에 끊임없이 단어 들이 떠올랐다.... "아직 어리시고 귀하신 분인 듯한데. 어떻게 할 수 없는 일도 있으 니, 상심하시진 마세요. 귀족 분이시라면 돌아가신 후에라도 저희 하층민들의 생활을 잊지만 않으신다면 다른 귀족 분들과 달리 친절 해 지실 수 있으실 테고, 그러기만 해도 아가씨껜 뒤에서 원망하는 소리를 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진이 뭔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다른 테이블에서 와이즈와 비슷한 복장을 한 젊은 남자가 다가와 인사를 했다. "이분 말씀이 맞습니다. 세상엔 안 좋은 일도 많지만, 극복해 내는 사람들도 있으니까요. 전 레나드라고 합니다. 수련 마법사죠. 앉아도 될까요?" 진은 긍정의 뜻을 비췄다. 그는 실력 있는 마법사로 판단한 와이즈에게도 동경의 눈초리를 보 내며 인사를 했다.-마법사 복장의 테두리에 수놓은 색으로 수련 정 도를 판별한다. 와이즈는 금색 수가 놓아져 있어서 5써클 이상임을 증명했고, 은색 수는 4써클. 붉은 색실은 3써클. 수가 놓아져 있지 않은 경우엔 2써클 이하로 구분했다.- 레나드는 붉은 색실로 수놓아 진 마법사 겉옷을 입고 있었다. "영주나 작위를 가진 귀족들은 여행을 하지 않나요?" 폴이 대답했다. "물론 하지요. 하지만 아가씨처럼 소외된 사람의 이야기를 그렇게 자세히 물으시는 분은 못 보았습니다. 레이디 분이 들으시기 엔 내 용이 좀...이분이 보호자이신 듯 한데...." 실비아의 이야기에서도 추측했지만 폴의 그 말만으로도 진은 이 대 륙에서 사회적으로 여성이 갖는 위치와 지위를 추정할 수 있었다. 평민이고 귀족이고 간에. 신분을 나누기 이전의 문제도 함께 하고 있었다. 어쩌면 지당하기까지 한 문제. "제 이름은 와이즈 리툰이라고 합니다." 폴과 레나드는 와이즈 역시 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멋쩍어졌는 지 뒷머리를 긁적였다. "죄송합니다. 저희들이 참견을...." "상관없습니다. 성이 있긴 하지만 저도 영지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 니고 오랫동안 깊은 산에서 마법 수련 중이었거든요." "그럼 레이디께선...?" "나이 차가 있긴 하지만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낸 친. 구. 사이죠. 몇 년 전, '진'의 부모님이 사정이 있어서 제게 보호를 부탁 하셔서 그 동안 저와 산에서 검술 수련을 하고 이번에 돌아가는 중입니다." 진은 와이즈를 건너다보았다. 그는 새 대화 상대에게 눈길을 주고 있었지만 분명히 진을 의식하 고 말한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젊은 분이신데, 써클이 높으시군요. 정말 부럽습니다...." 진은 식사를 마치고 졸기 시작한 아이들과 그들을 다독이고 있는 실비아에게 눈길을 주었다. "제 이름은 진입니다." 다른 이들도 모두 말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전 제 성을 사용한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어떤 성을 가지고 있는 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으니까요. 전 드리얀 국의 사람입니다. 이곳과 가장 먼 나라이지만, 인연이 닿아 저와 만나셨으니 선택하실 수 있습니다. 당신에겐 도움이 필요합니다.... 도움을 받으시겠어요?" 진의 목소리가 허공에 울리는 듯 했다. 저녁식사시간이 지나고 술손님이 대부분이 되었는지 그새 음식냄새 가 아닌 포도주 향기가 실내를 맴돌고 있었다. "저. 저는......" 그녀는 귀족의 값싼 동정심으로 저녁을 사주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 어 주는 줄 알았던 검은머리의 소녀의 말이, 가지고 있는 돈을 조금 나눠주겠다는 정도의 의미가 아님을 그녀의 진지하고 정중한 투의 말로 알아들었다. 그런 말을 귀족에게서, 힘을 가진 자에게서. 그 자리에 있던 그 누 구도 평생 한번도 들어 보지 못했었다 그녀가 울먹이며 대답을 하 려는데, 여관의 현관이 열리고 새로운 손님들이 몇 명 들어 왔다. 다들 침묵을 깬 그들을 돌아보았다. "뭐야, 분위기가 왜이리 우중충해? 이봐 후크 무슨 일 있어?" 그들은 영주의 성에서 치안을 담당하고 있는 기사 후보생들이었다. 그들 중 진짜 기사 복장을 한 사람도 한 명 끼어 있었다. 기사는 용병들이나 낮은 계급의 병사들과 달리 상의에 철로 만든 보호대를 하고 있었다. "어. 어서 오십시오. 나리. 자리가....." 빈자리가 없었다. 그 시간쯤이면 이미 예약한 방으로 올라갔었을 여행자들도 가정이 있는 선원이나 용병들도,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후크 는 곤란해 졌다. 진은 다시 말을 이었다. "내일 오전에 이리 다시 오세요. 늦었으니 돌아가 계시 구요." 실비아는 아이들을 재촉해 일어서면서 중얼거리듯 감사의 말을 하 더니 허리 굽혀 절을 하고 여관을 나갔다. 그녀와 아이들이 일어선 자리에 갈색 과자가 들어 있는 마른 넝쿨 로 엮은 바구니가 남겨져 있었다. 새 손님들이 빈자리에 와서 앉았다. "피곤해....." "올라가서 그만 자지 그래, 진." 유난히 이름에 강세를 두며 와이즈가 말하자 진은 피식 웃었다. "한시간만 잘게. 1시간 후에 좀 깨워 줄래, 와이즈?"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진은 콜린스를 불러 방을 안내해 달라고 하 고, 과자바구니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진이 비명을 지르는 계단을 밟아 위층으로 올라가는 것을 실내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야-아. 이봐, 도대체 뭐야?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와이즈는 현재 대륙상황이나 바뀐 풍습이 있는지 파악하기 위해 폴 과 레나드에게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24] 어둠 속의 빛(2) * 진은 콜린스가 초에 불을 옮겨준 방으로 안내되었다. 양초가 귀한 듯한데 후크가 일부러 그녀의 방에 가져다 놓은 것이 틀림없었다. 방은 그다지 넓지 않았지만 그 여관에서 가장 좋은 방임에 분명 했 다. 낯선 냄새들이 많이 났다. 질 좋지 않은, 촛농이 타들어 가는 냄새. 여러 가지 종류의 나무로 만들어진 벽과 바닥과 천장에서 풍기는 냄새. 침대 뼈대가 되는 상자 같은 공간에 채워진 마른 짚 냄새. 진은 이곳에 돌아온 것이 이제 겨우 이틀이라는 점을 상기했다. 자신의 신분을 알게 된지 고작 이틀. 여행을 시작한지 만 하루도 되 지 않은 시간. 하지만 사람 사는 곳은 어디든 마찬가지임을. 이곳이 설사 은색 달 대신 푸른 달이 있다고 해도, 인간만이 사는 것이 아닌 드래곤 같은 전설상의 생물이 존재한다고 해도. 4차원 세계가 가능한 마법이 존재한다고 해도. 하루 시간이 25시라고 해도! ......뉴욕의 뒷골목과 같았다. 그녀가 이제껏 살아왔던 그 세계와 조 금도 다를 바 없었다. 아니, 훨씬 심했다. 이곳에도 샘과 니콜라스처럼 검은 피부로 인해 겪어야 했던 과거를 살아가는 사람이 있고. 캐서린과 같은 아픔을 겪는 여자들은 더 많 았다. 아이들은 끔찍했던 자신의 어린 시절과 별 다를 바 없는 생활 을 한다. 진은 촛불을 끄고 헝겊조각들을 모아 만든 듯한 고르지 못한 배개 를 끌어안고 눈을 감았다. '난 자야해. 쉬어야해. 그리고 일어나서 생각해 보자.' 푸른 달빛이 나무 여닫이 창문의 틈새로 들어와 진의 얼굴에 내려 앉았다. * "정말 멀리서 오셨군요. 돌아가는 것도 장난이 아닐텐데, 고생이 심 하시겠네요." 와이즈는 진이 떠난 자리에서 폴과 레나드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주위 다른 손님들도 자세를 아예 그들 쪽으로 향하고 이야기를 하 고 있는 형편이었다. 마법사나 신관은 귀족 신분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직업의 영향으로 대부분 겸손한 경우가 많고, 그것을 잘 아는 그들에게 와이즈는 쉽 게 받아들여졌다. "그러게 말입니다. 동행이 워낙 겁 없는 아가씨라 앞날이 캄캄하군 요." 와이즈는 대충 맞장구를 쳐주며 오래 전에는 없었던 인간 세상에 새롭게 등장한 조직이라든가, 나라간의 분쟁이라든가, 몬스터 출현 지역이나 이름난 기사나 마법사에 대한 이야기를 주워 들었다. 옆자리에 앉은 기사가 와이즈에게 말했다. "그 아가씨 분이 귀족 분이셨다면 왜 영주 님의 성으로 모시지 않 고 이런 곳에서 머물게 두시는 겁니까. 시간이 좀 늦었지만 지금이 라도 백작 님께 기별을 하겠습니다. 모시고 가시지요." "여행을 하는 것은 그녀거든요. 전 덤으로 따라다니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결정권이 없습니다. 잠깐 쉬겠다고 했으니 내려오면 말씀 해 보십시오." 와이즈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용병들과 함께 있는 여검사가 벌떡 일 어나 질문을 해 왔다. "마법사! 어떻게 도운 다고? 그 아가씨 정말 귀족 맞아요? 귀족이래 도 드리얀이라면 서 대륙의 끝이야. 어떻게 돕겠대요?" 그녀는 취해 있었고 일행 용병들이 흥분하며 소리치는 그녀를 말렸 다. "이봐. 우리에게 한 소리가 아니잖아. 아까 그 아주머니와 아이들에 게 한 소리 였다구. 진정해." "놔- 난 그렇게 들리지 않았어. 우리 모두에게 한 말로 들었단 말이 야. 어떻게? 그녀가 신이라도 돼? 왕족이라고 해도 그 멀리에서 우 리를 어떻게 도와? 놀리지 마라고 그래!" 그녀는 자리에 다시 주저앉아 고개를 숙이고 머리를 감쌌다. "난 기사가 되고 싶어서. 엄마가 평생 모은 돈을 훔쳐서 집을 나왔 어. 하지만 기사학교에 들어가서 단 3년! 기사 후보생이 되는 졸업 장 하나 받아낼 수 없었던 적은 돈이었어. 엄마가 평생 모은 돈이었 는데....그런 돈을. 아무리 애를 써도. 엄마처럼 살지 않으려는 데도. 우리 같은 사람이 무슨 희망이 있어?" "그래, 알아. 그만 해. 지금도 잘하고 있잖아." "그런데! 왜 괜히 가만있는 우리들을 건드리는 거얏! 왜 꼭꼭 덮어 두는 상처들을 뒤집어 놓는 거냐고! 귀족여자면 귀족답게 집에서 수나 놓을 것이지!" 와이즈는 뒤통수가 근질거리는 느낌이었다. '정말. 왜 내가 이런 상황에 놓이게 된 거람.' "도움을 주겠다고 한 것은 그녀이니. 다시 만나게 되면, 물어보도록 하십시오. 전 그 방법이 뭔지 모르니 대답해 드릴 수가 없네요." 예의 바른 어조였지만 와이즈는 속으로 혀를 차고 있었다. * 와이즈가 진을 깨우러 갔을 때 진은 이미 깨어나 있었다. 그녀는 창문을 열어 창 밖으로 상체를 내밀고 턱을 고인 채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와이즈가 들어왔어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어떻게 할거냐. 사람들이 자리에 그대로 있어. 네게 어떻게 도울거 냐고 따지던데? 성의 기사는 귀족 레이디가 불편한 곳에 머물게 할 수 없다고 영주의 성에 사람을 보냈다." 진은 여전히 달을 보고 있었다. 쌍둥이 별. 아우 별. "와이즈. 언젠가- 나, 달에 가보고 싶어. 저곳에도 사람이 살 것 같 아." 와이즈는 눈을 치켜 떴다. "달에 간다고?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만, 인간은 힘들텐데?" 진은 돌아보았다. "갈 수 있다고?" "모르지. 왜 쌍둥이 별이라고 부르겠냐. 저곳은 이 대륙과 함께 만 들어 졌다. 드래곤은 고룡 쯤 되면 차원의 문을 열어 유지할 수 있 다면 모험이 가능하지. 드래곤들에게도 오래 전의 일이지만. 저곳에 갔다는 드래곤이 있기는 하다. 인간들은, 엘프에게 조차도 달에 관 한 것은 추상적인 소망을 비는 대상일 뿐이지만 말이야." 진은 웃었다. "우주선이 없어도 갈 수 있단 말이지...." "드리얀으로 바로 갈 거냐?" "여행 시작 한지 하루 밖에 안됐어. 볼 건보고 가야지. 뭘 좀 알아 냈어?" 와이즈는 폴과 레나드에게 들었던 대륙의 여러 정세에 대해 얘기를 해 주었다. "길드?" "그래. 전엔 그런 게 대륙에 넓게 퍼져 있지 않았는데, 길드 조직이 많이 생겼더군. 마법사 길드도 있고, 용병길드와 도둑 길드도 있단 다. 여기도 있다고 들었다." "도대체 전에 유희를 나온 게 언제쯤인 거야?" "한 300년 간 네 나라와 연관이 되어서 레어에 틀어 박혀 있었지. 그전에 몇 백년쯤 동면하고 자기 전에 유희를 한 후 처음이니까 700년쯤 되었다." "지겹다. 정말 오래도 사는 구나, 그렇게 오래 사는데 드래곤은 노 망 같은 것은 안 걸려?" ".......죽을 래?" 진은 쿡쿡 거리며 웃으며, 침대에 앉아서 벗어 둔 망토와 샌들을 처 음처럼 다시 신었다. "와이즈. 왜 신은 날 다시 불러들였을까?" "낸들 아냐. 내 사정이 억울해 보여서 '날' 도와 주려고 그랬는지도 모르지." ".....난 네가 말하는 것처럼 하잘 것 없는 인간에 불과해. 하지만 난 폭탄이야. 난 위험해." 와이즈는 진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는 듯 팔짱을 끼고 샌들의 끈을 무릎아래에서 매듭짓고 있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난 플라스틱 폭탄 제조법도 원리를 알아.....무슨 말인지 모르지? 이 곳의 앞으로의 몇 천년에 해당하는 문명에 대한 지식 부스러기들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야. "그럼 좋지 않냐. 아는 것은 힘인데." "아니, 위험해. 아주 위험하지. 문명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거든." 진은 일어서서 그의 앞에 섰다. 180Cm 가 넘는 와이즈를 165쯤 되는 진은 올려다 보아야 했다. "나 혼자서도 할 수 있지만 시간이 걸려. 도와 주겠어?" "......난 유희 중이다. 인간으로서는 도와 줄 수 있지. 그렇게 약속했 잖냐." "하지만 힘은 드래곤의 것이지...어쨌든 도와 준다는 소리로 알겠어." 진이 그를 지나쳐 방을 나가자 한 숨을 내쉬며 그도 몸을 돌렸다. "와이즈." "또, 뭐?" "고마워." "........." 와이즈는 진을 따라 계단을 내려갔다. * "레이디. 전 네얀 영주님의 호위기사 피터 패터슨이라고 합니다." 방에 가기 전에 보았던 기사가 다가와 목례를 했다. 뭔가 기다리는 눈치였지만 진은 멀뚱히 바라보았다. 그녀가 손등을 내밀지 않자, 기사는 어색해 하며 말을 이었다. "성에서 마차가 올 겁니다. 이곳에 머무르시기 엔 불편하실 테니, 백작 님의 보호를 받으시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제가 모셔다 드리 겠습니다." 진은 턱을 긁적였다. 와이즈는 웃음이 새어 나와서 천장으로 눈길을 돌렸다. "죄송합니다. 제가 귀족 신분이긴 하지만 어릴 때부터 산에만 살아 서 예의범절엔 무지합니다. 그리고 이곳이 그다지 불편하지 않으니 번거롭게 해드릴 생각은 없군요." 소란스러워진 탁자가 있어서 진은 그 곳을 찾아 고개를 돌렸다. 용병으로 보이는 여자가 술에 취해 진에게 오려는 것을 동료들이 말리고 있었다. "가지죠, 레이디. 이곳은 귀족 분들께는 위험합니다." 진은 와이즈를 돌아보았고 그녀가 묻는 의미에 대한 긍정의 뜻으로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은 사람들과의 사이를 가로막듯 서 있는 패터슨이라는 기사의 몸 을 돌아서 소란을 피우고 있는 여자 용병에게 다가갔다. "제가 말한 도움의 의미를 물으셨다지요?" ".........." "전 제게 손을 내미는 사람이나, 도움이 절실한 사람을 먼저 도울 것입니다. 그리고 방법은 이제부터 찾으려고 합니다. 변명 같지만 전 세상에 나온 지 하루 밖에 되지 않았으니까요. 그 이상의 답은 지금으로선 못해 드립니다." "나도. 도움이 필요해! 도움이 필요치 않은 평민이 어디 있어?! 신 분만으로 여자 주제에 어떻게 돕겠다는 거야? 성년을 넘기기는 했 어? 검을 배웠다고? 하급 용병인 나도 당신 정도의 여자는 한 칼에 죽일 수 있어! 우리는 생각이 없는 줄 알아? 왜 헛된 희망을 말하 는 거야!" 입까지는 막을 수 없던 동료들이 진의 뒤에 서 있는 마법사와 기사 를 경계하며 그녀를 끌어 앉히려고 했다. 진은 20세가 조금 지난 듯 보이는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했다. "당신은 평민이군요. 그럼 차례를 기다리셔야 해요. 세상을 바꿀 사 람이 있다면 귀족도, 농노도 아닌 당신과 같은 평민들일 겁니다. 아 직 더 버틸 수 있지요? 그럼 더 버티십시오. 당신보다 더 절실한 사 람이 많으니까요." 진은 그녀를 끌어안을 듯 두 손을 벌리더니 곧 회수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눈치채지 못한 그녀의 동료들은 어안이 벙벙했 다. 그녀가 힘없이 늘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신은 날 죽일 수 없습니다. 취하신 것 같으니 쉬시는 게 좋겠군요." "무. 무슨 짓을?" "잠깐 기절한 것뿐이에요. 취한 사람과 다툴 수는 없잖아요? 일어 나면 토할지 모르니, 조심하세요." 진은 몸을 돌렸다. 레나드가 다가와 기절한 여검사를 살폈지만 이상 없다는 진단을 알 려 주었다. 진은 콜린스를 불러 밖으로 나갔고, 와이즈와 기사도 따 라나섰다. 밖에는 성에서 온 듯한 네 필의 말이 끄는 구식 마차가 정차하고 있었다. "레이디...." 진은 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자신을 보호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있는 그에게 다시 말해 주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제가 직접 찾아뵙도록 하지요. 오늘은 일이 있어서 함께 가 드리지 못 하겠네요." 그를 남겨 놓고 진은 콜린스를 앞장 세워 자리에서 멀어졌다. "도둑길드요?" "그래. 여기에도 있다면서?" "에....있기는 하지만." 용병길드나 마법사 길드는 당연히 공개되어 있었지만, 도둑길드는 일의 성격상 비공개라고 한다. 어차피 도둑들이야 가진 사람을 노리 는 판이니 당연한 일이었고 아마도 낮부터 네얀 시를 구경 다녔던 이후 이미 진과 와이즈에 대한 신상도 접수되어 있을 것이라는 설 명을 콜린스는 했다. 그들의 눈과 귀는 하층민이었으니 실비아의 일도 이미 귀에 들어갔 을 테고 게다가 귀족 신분이니 괜찮은 고객으로 충분히 주목받고 있을 것이다. "콜린스. 그쪽에서 자극 해 올 때까지 기다리느니. 넌 여기 토박이 니 네가 아는 것을 가르쳐 줄 순 없어? 그들도 본거지는 있을 거 야. 그렇지?" 그는 머뭇거렸지만 진이 남청색 눈을 반짝이며 웃으면서 부탁하자 거절할 수 없었던지. 마지못해 몇 마디 소곤거려 주고 집으로 돌아 갔다. "가만있어도 찾아 올 것 같구만. 뭐 하러 위험하게 찾아 나서려는 거냐? 긁어 부스럼이다....그런데 아까 그 용병여자를 어떻게 한 거 냐? 기사란 녀석이 가로막는 바람에 못 봤다." "내가 소매치기였단 사실 잊었어? 명치를 한번 때려 주었을 뿐이야. 한가하게 술 주정이나 받아 주고 있을 순 없잖아. 우린 바빠." "그럼, 이제 어떻게 할거냐. 도둑길드라고 해 봐야 본거지도 없고 길드 원이 아니면 접근이 불가능하다는데." "없기 왜 없어? 잘 숨어 있다면 좋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소리 야. 더 숨어 버리기 전에 소란이라도 피워서 나오게 해야지." 진은 후크의 여관과 떨어져 걸으며 으슥한 골목을 택해 걸어 들어 갔다. 달빛이 밝아서, 늦은 밤거리는 푸르스름한 빛을 띄고 있었다. [25] 2. 도둑 길드 악취 나고 어두운 골목에 발을 딛자마자, 진의 코앞으로 무언가가 날아왔다. "꼬마야. 해치지 않을게. 이리 나와." 진은 반사적으로 잡아 챈 작은 돌멩이 하나를 발치에 떨어뜨리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대답 대신 이번엔 여러 개의 돌멩이들이 날아오기 시작했고, 진은 파리 잡는 동작으로 모두 받아서 주위에 버렸다. "괜찮아, 나와. 아까 우리를 덮친 애들이구나. 일을 실패했다고 야단 맞았니?" 진은 그들이 숨어 있는 쓰레기 더미 뒤나, 누구의 집인지 모를 낡은 문 뒤에서 경계하고 있는 작은 아이들을 잡아내지 않고 여전히 기 다려 주었다. "숨바꼭질은 낮에 하고, 나오렴. 해치지 않는다니까? 빨리 나오는 애에겐 밥 사줄게." ".........." "내 말을 믿어 주면 은화도 줄게." "정말? 라키 녀석이 밥 얻어먹었다고 했어. 영주 님께 잡아가는 거 아니야?" 지저분한 머리에 때 국물이 줄 줄 흐르는, 원래는 흰색이었을 천을 어깨와 몸통에 V자 형식으로 둘러, 끈으로 허리를 묶어 입은. 맨다리의 10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덜렁거리며 떨어질 듯한 나무 문 뒤에서 몸을 반쯤 내밀었다. "그래. 늦었지만 얼른 가서 주문하면 스프 정도는 시켜 먹을 수 있 을 거야. 잡아가지 않을게. 나오렴." 네 명의 아이가 꼭 좀비처럼 골목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모퉁이에서 도 두 명의 아이가 나왔다. "돈 줘. 그럼 밥 얻어먹어 주지." 진은 피식 웃었지만 벨트 지갑에서 1골드짜리 금화를 꺼내 가볍게 공중으로 던져 보여 주었다. "지금은 은화가 없어. 모두 6명이네? 그럼 나눠가져야 할텐데. 쪼개 줄까? 해치지 않겠다고 한 건 거짓말 아니야.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어. 누가 대답해 줄래? 대답해 주는 애에게 은화말고 이 금화 한 개 더 얹어 줄게." 그들은 눈치를 봤다. 그 중 가장 키가 큰아이가 짐짓 용감하게 나서서 손을 내밀었다. 진은 앞에 선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머리색이 다양한 세계에서. 씻지 않아 그 색이 그 색 같아 보일 정 도로 모두 더러워 보였다. 진은 아이의 때묻은 손위에 금화를 내려 주고, 잽싸게 몸을 빼려는 아이의 팔꿈치를 잡았다. "놔!" 다른 아이들이 순식간에 다시 사라졌다. 잡힌 아이는 진에게 발길질과 자유로운 한 손으로 열심히 할퀴었지 만 한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가만 안 있으면 키스해 버린다!" "!......." 진은 아이의 양팔을 붙잡아 진정시켰다. "해치지 않겠다고 했지? 봐, 마법사도 있잖아. 해치려고 했으면 진 작 그렇게 했을 거야. 네가 대장이니?" 예쁜 누나가 때리겠다는 말이 아니라 키스해 버린다는 말로 협박을 하더니, 여전히 적의를 띄지 않고 상냥하게 말해 오자 아이는 반항 을 멈췄다. ".....아니, 대장은 수입이 항상 좋거든." "다들 집이 없니?" "있는 애들도 있고, 없는 애들도 있어. 하지만 있으면 뭐해? 먹을 것은 하나도 없는데. 안 그럼 뭐 하러 도둑질 해?" "도둑질 안 해도 굶지 않게 해 줄게. 난 궁금한 것이 있거든? 대답 해 줄래?" "......배신하면 난 죽어." "배신 아니야. 나도 너희들 패에 끼고 싶어서 그래. 너희들을 돌봐 주는 사람, 무섭니?" 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야단 맞지 않게 해 줄 수 있어. 약속해." 아이는 의심스런 눈초리로 진을 쳐다보았고 와이즈는 지켜보다가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진도 어둠 속의 새로운 눈동자들을 감지했다. "고맙다, 꼬마야. 대답해 줘서. 친구들과 같이 콜린스네 여관으로 내 일 와. 약속대로 밥 사줄게." 진은 아이를 놓았고 영문을 모르고 진을 쳐다보던 아이는 금화를 쥔 손을 꼭 부여잡고 골목 안으로 사라졌다. "애들 상대하자니 곤란했는데, 나오시죠. 용건이 있어요." ".........." 도둑 길드 원은 생계가 도둑질이니 숨는 것만큼은 어쌔신 못지 않 았다. 그들은 진과 와이즈가 적의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 지만 모두 몸을 들어내지는 않았다. 세 명의 젊은 남자- 그 중 한 명은 소년이었다.-가 진과 와이즈의 몇 걸음 앞에 섰다. "무슨 용건이유, 귀족 아가씨. 정말 귀족이라면 우릴 찾아 나서진 않을 텐데. 혹시 가짜 귀족 아니야?" 근육질의 중년 남자는 콜린스의 여관에서도 쉽게 볼 수 있었던 가 죽 조끼를 걸친 용병차림이었다. 어깨에 무거워 보이는 검을 얹고 위협이 분명한 표정으로 말을 했 지만, 진이 아닌 와이즈를 더 경계하고 있었다. "당신들의 도움이 필요해요. 정보가 필요한데. 책임자를 만나게 해 주겠어요?" "나요. 말하시구려." 그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고, 진은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몸을 움직 였다. 눈앞에 서 있던 소녀가 갑자기 사라지자 그들은 반사적으로 몸을 빼고 용병차림의 남자는 검을 휘둘렀다. 진은 가장 어려 보이는 소년의 목을 달려가던 자세에서 한 팔을 굽 혀 걸었고, 망연한 방향으로 검을 내리치던 용병의 손목을 수도로 내리치고 나머지 한사람의 저항을 다리를 뻗어 턱을 올려 차는 것 으로 공격을 마무리를 했다. "억....." 두 명의 남자가 넘어지고 검을 떨어뜨리고 충격을 받은 손목에 손 을 대던 용병이 날카롭게 휘파람을 불었다. 지붕에서, 골목 언저리에서, 다시 몇 명의 사람이 각자의 무기를 들 고 덤벼들었고 진은 그들 틈에 가려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포위하려던 그들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벽에 내팽개쳐졌다. 넘어지지 않고 있던 용병차림의 남자만이 우두커니 서 있게 됐다. "자, 이제 내가 농담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셨다면, 책임자를 만나게 해 주세요. 전 시간이 돈이랍니다. 가끔은 성격도 급해요." '급하긴 하다. 빨리도 끝내내. 왜 나한텐 안 덤비는 거지? 큼.' 와이즈는 여섯 명의 손 꽤나 쓰고 검을 다루는 남자들이 맞은 부위 를 움켜쥐고 신음하면서 일어서려고 하는 것을 보며 중얼거렸다. "당신! 칼도 빼들지 않고. 어떻게?!" 진은 한숨을 쉬며 다시 좀 전에 아이들에게 했던 말을 반복했다. "당신들에게 해가 갈 일을 제공하지는 않을 거 에요. 도움이 필요 해요. 책임자와의 자리를 주선해 주겠어요?" "당신 일은 들었소 만.....정말 악의가 없다는 것을 맹세합니까?" "맹세해요." ".......그럼 여신상이 있는 광장에서 기다려 보시오. 확답은 못하겠 소만." 그들이 가고, 진은 와이즈와 함께 골목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 그들이 지시한 네얀 시 중심광장이랄 수 있는, 바다의 여신 상이 외롭게 자리한 돌 바닥 위에 자리를 잡았다. 공터가 있어서 시민들이 일부러 만들어 두었는지, 영주의 명령으로 만들어 두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기 저기 통하는 여러 길의 중심에 여신상은 세워져 있었다. 돌을 깎아 만들어 정밀하지 않았지만 무언 가 안으려는 자세로 두 팔을 벌리고 있는, 보통 성인체구보다 조금 큰 여신상이었다. 건너편에는 흰색의 대리석 신전이 보였다. 바다의 여신 신전은 높게 건축이 되지 않고 옆으로 넓게 지어져 있 었는데, 자정 미사를 마쳤는지. 견습 사제로 보이는 몇몇 젊은이들 이 신전 안에 들어와 있던, 가정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을 내 보내고 있었다. 밤이 늦은 탓인지 행인이 별로 없었다. 몇 사람인가, 선원들이 어깨동무를 하고 큰소리로 뱃노래를 부르며 지나쳐 갔다. 진과 와이즈는 차분한 발자국 소리가 울리기 시작한 신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행객이십니까? 봄이긴 하지만 밤엔 춥습니다. 여비가 부족해서 노숙을 하신다면 신전으로 오십시오. 좁긴 하지만 여행자 분들을 위 한 숙소가 마련되어 있거든요." 붉은 기운이 도는 갈색 머리의 20대 중반정도로 보이는 남자가 달 빛을 받으며. 서 있고, 앉아 있는 와이즈와 진에게 다가와서 말했다. 그는 희고 깨끗한 옷감으로 만든 겉옷을 목을 높여 몸 전체에 겹쳐 두르고 한 쪽 어깨에서 망토처럼 작은 고리와 걸림쇠 두 쌍으로 고 정시킨 차림이었다. 그 옷도 역시 바느질 처리가 되지 않았는지. 통 넓은 소매를 따로 덧대어 가는 실로 몸통부분과 소매를 잇고, 폭 넓은 소매 끝도 장식 실로 매듭을 지어 나풀거리지 않게 처리한 단을 하고 있었다. 유일한 무늬는 한 뼘 정도의 폭을 한, 허리 두르게 천의 테두리에 푸른 실로 수놓아진 물결모양의 장식이 다였다. '도대체 끈이나 고리가 아니면 옷이 안되겠네.' 하지만 고풍스러워 보이긴 했다. 진은 그의 긴 옷자락 아래 보이는 샌들 끝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 고 물었다. "사제시죠? 신성력을 쓰시나요?" "에....네. 미력하지만 조금 씁니다. 불편하신 데라도 있으신 가요?" 진은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재미있군요. 신의 축복을 받는 분이 도둑길드의 장이라니." 그는 다소 놀라는 듯 했지만 유쾌한 웃음을 지으며 부인했다. "그럴 리 가요. 사제가 무슨 길드 장입니까. 잘못 생각하신...." "그럴 리는 무슨. 당신이 책임자 맞군요. 그래도 희망이 있네. 신성 력을 쓰는 사제라면 사욕을 채우고 있다는 소리는 아닐 테니. 변화 를 바라는 사람이 많다는 거야. 노력하고 있다는 소리잖아. 앉아봐 요, 사제 님. 내숭 떨지 말고." 뻣뻣해지던 그는 서 있던 와이즈를 돌아보았지만, 그도 웃음기를 띄 고 있었다. 너무 쉽게 탄로 난 정체로 그는 얼굴을 약간 붉히며 진 이 권한 옆자리에 앉았다. "사제는 맨바닥에 앉으면 안 된답니다, 레이디. 레이디도 그렇구요." "맨바닥에 앉으면 바닥이 패어요?" "..........." 와이즈는 킥킥대었다. "와이즈 너도 앉아, 정신 사나워." "싫다. 옷 구겨져." "도움이 필요하시다 구요? 신전에 오셔야 할 일이 아닌가요? 도둑 들에게 도움을 청하시는 레이디는 처음 봅니다." "사실은 도둑 길드를 통째로 사버릴까 했지만, 사제 님이 장이라면 그러지 않아도 되겠군요. 제게 필요한 도움은 정보에요. 우린 시간 이 없으니 이미 존재하는 조직을 통해야 했어요. 듣기에 길드는 전 대륙에 퍼져 있고 모두 이어져 있다고 들었어요. 사실인가요?" "......그렇지요." "다른 지역의 길드와의 연락은 어떻게 하나요?" "왜 물으시는 겁니까, 레이디?" "제 일에 가장 중요하고 필수적인 사항이거든요. 말씀드렸잖아요. 시간이 없다고요." 그는 갈색 망토를 걸치고 달빛에 검푸르게 빛나는, 굵게 웨이브 진 머리카락을 장식 없이 늘어뜨리고 있는 이 소녀를 판단해 내야 했 다. 그녀의 왼쪽 귀에는 반짝이는 보석이 박혀 있었고, 그처럼 보석 같 은 느낌을 주는 눈빛엔 거짓이 보이지 않았다. "길드끼리의 연락은 다른 길드처럼 통신 마법을 통해 합니다. 이제 용건을 말해 주시겠습니까?" 진은 달빛을 폐로 한가득 삼켰다. "전 대륙 정세에 어두워요. 일일이 직접 알아내는 데는 시간이 걸리 고, 원하는 부분만 구별해 내는 일에도 역시 시간이 걸림돌이 됩니 다. 전 손발이 필요해요. 여기 네얀에서 뿐 아니라, 전 대륙에서요. 가능한가요?" ".....레이디의 일은 들었습니다. 소수 사람들이야 충분히 도우실 수 있겠지요. 하지만 어떻게 하실 작정이신대요? 전 대륙의 일이라면 너무 범위가 큽니다. 불가능해요." "불가능하다고 시작을 미루느니, 당장에라도 할 수 있는 일은 해야 지 않나요? 전 가능한 일만 할겁니다. 당신은 왜 사제면서 도둑들을 지휘하고 있는 거죠?" 그 역시 고개를 들어 하늘 언저리에 떠 있는 푸른 달을 쳐다보았다. "개인으로 신의 힘을 나눠주는 데는 한계가 있으니까요. 누군가 하 겠지만, 심성이 닦이지 않는 사람이 횡포를 부릴 수도 있는 문제를 방지하고자 했지요. 도둑길드 장이라면 악독한 사람으로 추측하시는 분들도 많지만. 사실 조금 편법을 써서 사람들 편에 서길 바라는 사 람들이 모임을 만드는 경우가 많지요. 예외도 있겠지만 말입니다." 그는 다시 진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곳은 영주 님께서 상업에 관심을 두시고 계시고, 그런 데로 관대 하신 편이라 형편이 낫습니다. 당장 정의감에 사로잡혀 검이나 마법 에 재능이 있으신 분들이, 상인이나 귀족을 털어 주민들에게 나눠주 는 경우의 일도 가끔 들리기도 합니다만, 장기적으로는 오히려 도움 이 되지 않습니다. 레이디께서도 그런 방법을 염두 하신다면....." 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사람도 있긴 하단 말이지...' "그 방법은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이지요. 그 방법도 쓸 겁니다. 하지 만 그에 관해서 필요한 정보 외에도 너무 많이 필요해요. 적어도 도 둑길드 만큼이라도 제가 가는 지역에 대한 자세한, 모든 정보를 얻 을 수 있도록 손을 빌려 주시길 희망합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정보를 말 하시는 거지요?" "대륙 지형, 해당지역의 생활 풍습. 그에 관한 의. 식. 주 전반에 걸 친 자료도 필요해요. 인구구성에 대한 다각도의 통계도 필요하고 왕 족이나 귀족, 기사, 마법사등등 지도계층의 사생활, 품성, 재산내역 까지 모두 모두 필요해요." 사제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레이디. 도둑이 신인 줄 아십니까?" 진은 웃었다. "제가 원하는 정보의 성격을 말씀드린 것뿐이에요. 가능한 수준에서 정리를 해 주시면 됩니다. 네얀에서 다른 나라 일까지 모두 알 수는 없겠지만, 도시마다 있는 길드는 자신들의 지역에 관한 만큼은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을 거 에요. 그래서 다른 길드와의 연계가 불가피 합니다. 사실, 돈 있는 사람 찾아내는 일이야 도둑이 가장 잘 할 것 이고, 토박이들이라면 자신들의 고향에 대해 타지 사람인 제게 알려 주는 정도야 어렵지 않을 일이 아닐까요? 제 정보원이 되어 주길 바라는 셈입니다." "대륙을 상대로 무얼 하실 생각이십니까? 전쟁이라도 벌일 생각이 세요?" "비슷하네요. 대륙을 상대로 약탈을 할 생각입니다." "......정확한 신분을 여쭤봐도 될까요?" "제 신분은 곧 공개될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비밀로 붙일 이유도 없게 될 테니까요. 제 의뢰를 받으시겠어요? 모을 수 있는 정보를 모두 모아주시고 각각 가까운 다른 길드에 통보 해 주셔서 제가 다 시 원하는 정보를 받아 보게끔 조치만 취해 주시면 됩니다." 그는 말이 없었다. "...너무 막연합니다. 레이디. 약탈을 하시겠다면 대상에 있어, 귀족 과 상인만이 아니라 어떤 나라에서는 신전까지 적으로 돌리시게 될 겁니다. 그리고 너무 시간이 많이 필요한 일이에요. 누구도 몇 십년 이 걸릴 일을 변치 않고 처음 목적 그대로 해낼 수는 없을 뿐만 아 니라, 저희조차도. 눈멀었다 생각하고, 레이디를 돕는다고 해도 모든 길드가 나서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6개월이에요" "예?" "저는 길드를 6개월만 이용할 겁니다. 최대한 많은 나라를 지나칠 생각이지만 그것도 3개월에 한정된 시간 안에 끝내야 합니다. 그 이 후의 일은 아직 미정입니다. 6개월 간만 제 수족이 되어 주십시오. 모든 책임은 제게 돌아오도록 신경 써 보겠습니다. 길드에서도 그렇 게 협조하면 화살이 엉뚱한 곳으로 가는 일은 드물어 질 겁니다." 사제는 눈이 다시 커졌다. 아무래도 이 소녀는 정신이 나갔거나, 망상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기까지 했다. "믿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니, 믿지 마세요. 지금 제가 보여드릴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단지 제 의뢰에 대해 계산만 하시면 됩니다. 당장 이 도시 안에서의 일만이라도 조목조목 알려 주시면 되는 것이고, 그 후의 일은 길드에 연락을 취해서 제가 오늘처럼 번 거롭게 일일이 접선하지 않을 정도로만 손을 빌려 주시면 됩니다." "어떤 일을 하시든 실패하게 된다고 해도, 저희에게 해가 되지 않고 돌아오는 것이 있단 말씀이 신가요?" 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과장을 섞었든, 무모함이든. 그녀의 눈빛은 단호했고 사제는 갈등이 되었다. "이어달리기를 해 주시면 됩니다. 어렵지 않은 일이에요." "이어달리기요?" "....에 그런 게 있어요. 어떻게 하시겠어요? 6개월이면. 아니 3개월 정도 만이라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사제는 고개를 저었다. "드래곤이라도 타고 날아다니실 겁니까?" 그는 농담이었는지 고개를 향하지 않았지만 진은 와이즈에게 눈웃 음을 지었다. "좋습니다. 무슨 일을 벌이실지 이해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만, 네얀 에서의 말씀하신 정보들이야. 모으는 것은 그다지 큰일이 아니니까 요. 어떤 보수를 주실 겁니까?" "어떤 식의 보수를 원하시는데요?" "저희는 도둑길드입니다. 정보를 파는 일은 그다지 해보지 않았어 요. 정보라고까지 할만한 것도 못될 수 있습니다. 보수를 정하는 것 도 막연하군요." "그러시면- 몇 일 후 제가 벌이는 일을 보시고 결정을 하세요. 떠나 기 전에 사제 님을 뵙고 가겠습니다." 그는 웃음 지었지만. 믿음의 여부를 떠나서, 어차피 이곳에서 그녀 가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고 해도 배신 내용이 길드에 영향을 미칠 성질의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위험부담은 언제나 있는 것이니... 그는 도박이 뭔지도 몰랐지만 짙은 남청색 눈동자의 소녀와 얘기를 나누면서 사제로서는 시도할 생각조차 품어서는 안될 모험 같은 것 에 손을 대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혹시 저에게 정신을 흩트리는 마법을 거신 것은 아니십니까?" 와이즈는 자신에게 묻는 그의 질문에 '당신을 현혹시키는 것이 가 능하다면 당신은 사제가 아니군요' 라고 말했다. 그들은 몇 분 더 이야기를 주고받고 헤어졌다. "네 말이 이해가 안 간다, 진. 구체적으로 뭘 어떻게 할건데?" 진은 돌아오는 길에 와이즈의 의문에 답해 주었다. "와이즈. 난, 전에 잠깐 살았던 곳에서 재미있는 것을 봤었어." "뭘?" "그곳은 사람들이 한 민족에서 출발한 단일민족이었어. 그들은 그들 자신의 말과 글을 썼지. 모두 고향이 있잖아? 추수감사절에 그들은 겨우 3~4일 정도의 휴일에 대규모 이동을 해. '민족대이동'이라고 부 르더군. 난 그걸 보고 감명 받았었어. 어디에 있든,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든. 뿌리가 되고 고향이 있는 사람들은 가족을 이끌고 단 하 루, 단 하룻밤 머무르기 위해 일터를 떠나서 고향으로 돌아가. 그것 은 장관이었어. 가슴 시리기도 했어. 사람들에게 돌아갈 곳을 만들 어 주면, 거리는 상관없어. 대륙은 넓어. 네가 보기엔 사람들이 우글 거리는 것 같아 보일지 몰라. 하지만 난 인구 밀도가 아주 높은 곳 에서만 살았었어. 이곳은 비어 있는 땅이 많아. 사람들은 아주 좁은 땅만 주어져도 얼마든지 둥지를 틀 수 있어.' 진은 잠깐 멈춰 서서 새벽이 가까워진 하늘을 보았다. 한 구석에 여전히 달이 떠 있었다. "가장 자유를 갈망하는 사람이 누굴까. 가장 희망을 기대하는 사람 이 누구겠어. 난 노예들로 마을을 만들 거야. 그들을 지키고 먹여 살리겠어. 희망을 찾는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찾아들 거야. 그러면 나라가 만들어질 테지." "무슨 소리냐. 드리얀은 어쩌고?" "드리얀도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들에게 흡수될 거야. 이 일 엔 네 도움이 절실해. '마법'이 필요한 일이야. 꼭 도와줘, 와이즈." 진은 스스로에게 할 수 있다는 암시를 끊임없이 걸며 시작 될 자신 과의 전쟁을 향해 걸어갔다. [26] 3. 바 다 이른 아침, 진은 그녀의 방에서 와이즈와 함께 콜린스를 시켜 구해 온, 대륙전도를 펼쳐 두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땅을 확보해 놓아야 해. 드리얀과 가까우면 더 좋고. 어디가 좋겠 어?" "내 눈엔 다 거기가, 거기다. 지도도 형편없네. 이 지도로는 파악하 기 힘들어. 직접 가봐야지. 드리얀과 가까운 곳이라면 스파타와도 가까울 것인데, 양쪽의 압력을 어떻게 감당하려고?" "괜찮아. 어차피 어디든 주위를 경계하지 않아도 될 곳은 없을 게 아니야. 차라리 인맥이 있는 곳을 택하는 것이 나중에 더 편해질 거 야. 그리고 난 드리얀을 버리겠다고 생각은 한 적 없어, 와이즈. 압 력을 받을 이유가 되려나 모르겠네. 내 개인 영지로 인식시키면 될 거 아냐." "그래, 너 잘났다. 맘대로 해봐라. 세상이 그렇게 만만한가." 진은 미소를 짓고 양피지를 접었다. "좀더 대륙지형을 알아본 다음 생각해 보자." 진과 와이즈는 사람이 살만한 지형에 대해 몇 마디 더 주고받다가, 콜린스의 부름으로 아침을 먹기 위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이른 아침에 식당을 찾는 사람이 드물어서 진과 와이즈는 제일 크 고 긴 식탁을 차지하고 앉았다. 미리 아침 일찍 식사를 하겠다고 말 해 두었기 때문에 후크와 콜린스는 오늘 다른 때 보다 일찍 일어나 야 했다. 진은 야채 스프와 막 구운 빵으로 간단한 아침을 먹고, 길 드 장이 보내주기로 한 사람을 기다렸다. 청소를 끝낸 콜린스가 주위에서 서성이는 것을 보고 진은 그를 불 러 앉혔다. "마법학교에선 어떻게 수업을 하지?" "에? 마법사 님과 함께 다니시는데 모르세요?" "학교에 대해서는 문외한이거든." 마법사가 되는 길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개인 교사 식으로 마법사에게 제자로 발탁이 되어 수업을 받거나, 나라마다 수도에 하나씩 있을 정도의 마법전문 학교에서 3년 과정 으로 공부를 한다. 대부분의 마법학교가 입학금이 비싸지만 수업료만 내면 일년 내 어 느 때라도 입학이 가능하다. 첫 과정은 마법에 필수적인, 마나를 느끼는 과정이고 교양과목 공부 와 마법주문과 활용법을 배우면서 1년을 보내게 된다. 1년 안에 마나를 느끼지 못하는 학생은 소질이 없는 것으로 판명되 어 많이들 중도 포기를 하게 되지만, 일단 마나를 느끼게 되면 몸 안에 그것을 모으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 후에는 마나를 이용해 마법으로 활용하는 과정을 더 배우게 되 고, 그 과정이 끝나면 혼자서도 독학이 가능하기 때문에 3년이 되지 않은 상태라도 졸업이 가능하다고 한다. "겨우 3년? 그런데 어려워?" "마나를 느끼고 모으는 과정이 어렵데요. 마나를 느끼게 되어도 일 정한 써클에 오르려면 몸 안에 축적시키는 과정이 시간이 많이 걸 린다고 들었어요." "그럼. 써클이 높아야 쓸 수 있는 마법으로 종류가 나눠지는 거야?" 와이즈가 대답해 주었다. "저 써클이라고 해도, 개발되어 알려진 마법 주문 등을 자신에게 맞 게 변형시켜서 쓰면 대부분의 공격과 방어 마법을 쓸 수 있다. 써클에 따라 위력에 차이가 있을 뿐이야. 중 써클이나 고 써클만이 쓸 수 있는 마법들도 많지만, 당장 마법사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정도는 그다지 어렵지 않다. 마나를 느끼고 조금만 모아도 1~2 써클은 짧은 시간에 쉽게 달성하 고 3~4년 수련하면 3써클도 비교적 쉽게 오를수 있지만 그 이상부 턴 써클간의 갭이 크기 때문에 마나 축적에 시간이 갈수록 많이 걸 려서 써클 수를 높이는 것이 힘든 거다." "좀더 자세히 말해 줘, 와이즈. 마나만 축적하면 항상 레벨에 맞는 마법을 쓸 수 있는 거야?" "모아진 마나가 써클을 이루게 되면 단계별로 숫치가 정해지는 것 이고 마법을 쓰게 되면 그에 해당되는 양의 모아둔 마나가 소모되 기 때문에 다시 자신의 레벨에 해당하는 마나가 모아질 때까지는 마법을 쓸 수 없다. 무리하면 신체나 정신적으로 타격이 가기도 하 지." "마나는 충전용 건전지 같은 것인가 보네..." "건전지?" "그런 게 있어....그럼, 마법에 소질이 있는 지의 여부는 처음에 모두 직접적인 학습을 하기 전이면 모르는 거야?" 콜린스는 기대 어린 눈초리로 진과 와이즈를 바라보았다. "고 써클. 6써클 이상 정도면 지망생들에게 자신의 마나를 흘려 보 내서 받아들이는 과정을 탐지해 낼 수는 있다. 선천적으로 마법에 소질이 있는 사람을 구별하는 방법이기도 하지만. 누가 일일이 사람 들을 붙잡고 마법에 소질이 있는지 없는지 판별하고 다니겠냐. 마법 사가 많이 생기면 경쟁도 더 치열해 질텐데. 이미 마법을 쓰는 녀석 들은 자신의 값어치를 높이기 위해서 개발한 마법 주문 등을 잘 가 르쳐 주지 않으려고 하는 경우도 많다." "그렇겠군." 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사들도 사람이지. 이기적인 면이 없다면 더 이상하겠다.' "기사는 어때?" 기사는 원래 영지를 얻지 못한 귀족 자제들을 위해 주어진 지위였 다. 하지만, 검을 익히고 주군에게 충성하며 레이디를 보호하고 약 자를 동정한다는 취지가 일반인들에게 환영받게 되어서, 지망생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기사가 되는 방법은 마법사나 신관보다 다양했다. 귀족 자제들은 어려서부터 검술을 익히고 성년이 되면 자의에 따라 기본적인 심사를 거쳐 쉽게 기사후보생이 되고, 주군을 정해 맹세를 하거나, 전쟁에서 공을 세운 경우나 작위를 줄 수 있는 귀족에게 인 정받아 정식 기사칭호를 얻게 된다. 평민은 귀족 가에 몸을 담았다가 주군의 눈에 띄어 이름을 얻게 되 기도 하고, 귀족이든 평민이든 구별 없이 기사 전문학교를 통해 교 양과 예절을 배우고 전문적인 교육과정을 수료한 후 기사후보생이 되기도 한다. 3년의 교육 과정 후 검에 인정받은 평민들은 귀족 가 에 스카웃 되기도 하고 기사 서약을 하면 평 기사 칭호를 얻는다. 귀족의 경우엔 졸업 후 자신의 가문에 몸담아 자연스럽게 기사가 되 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모실 주군을 택해 따르기도 한다. 실력에 따라 기사들은 초급. 중급. 고급 기사로 나눠지게 되고 어려 서부터 검을 익힌 귀족 가에서 중, 고급기사가 많이 배출된다. 신전에 속한 기사들도 있는데, 그들은 신전에서 어릴 때부터 따로 육성하게 되고 '성 기사'라고 불린다. 콜린스가 후크의 부름으로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진은 와이즈에게 다시 물었다. "와이즈 주문이 필요해? 넌 그냥 단어만 말하는 것 같던데?" "나와 같냐. 주문은 캐스팅 과정일 뿐이야. 숙달되면 주문 길이가 짧아지고, 캐스팅 과정이 짧아지면 마나 유동 능력이 향상된다는 소 리다. 고 써클일 수록 숙달되면, 긴 주문 없이 쉽게 마법사용이 가 능하지." "와이즈. 인간의 모습으로는 몇 써클인거야?" "10써클 용언 마법은 인간의 몸으로는 한계가 있어서 일부만 쓸 수 있다. 그래서 9써클인 셈이지만, 인간 마법사 9써클과는 차이가 있 지." "그럼, 마법을 쓸 때 정체를 들킬 염려는 없는 거야?" "써클이 더 높은 마법사는 낮은 써클의 마법사의 숙련 정도를, 축적 된 마나를 통해서나 마법의 위력으로 가늠할 수 있다. 하지만 난 내 기운을 숨기고 있어. 5~6써클 정도로 보이게끔 위장하고 있으니 대 마법사라 해도 잘 알아채진 못해." 진은 슬며시 미소를 띄며 와이즈를 충동했다. "저. 와이즈...." "뭐냐, 귀찮은 일을 시킬 셈이지?" 진은 배시시 웃었지만 부인하지 않았다. "인재 육성! 필요 불가결한 사항 아니야. 기사 만들어 내는 것보다 더 쉬워 보이는데. 소질 있는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나중에 불러 들이는 게 전력에 보탬이 될 거야. 직접 마법을 가르치는 것은 거절 할거잖아. 해 줄 거지?" "가는 곳마다 그 일을 시킬 셈이냐?" "어렵지 않은 일이잖아. 배우고 싶어하는데. 소질이 있는지의 여부 만 알아봐 주면 안 돼?" "골치 아픈 예감이 드는군." "이제 서야? 날 도와 주겠다고 했을 때 이미 느꼈어야지. 난 주위를 철저히 이용해.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네 도움을 있는 대로 받아 낼 거야." "내게 돌아오는 것은 뭔데?" "재미. 그 외엔 뭐가 있겠어? 유희를 재미있게 보내게 해 줄게." 와이즈는 뻔뻔한 진의 말에 인상을 썼지만, 솔직히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었고, 이 쪼그만 여자에게 휘둘린다는 기분만 빼면 곁에 있으면서 흥미로워지는 것은 사실이었다. "알았다." "고마워." 콜린스는 다시 진에게 불려져와 6써클 유저 마법사에게 자질을 시 험받게 되었다. 콜린스의 등에 댄 와이즈의 손에서 금빛 기운이 생성되더니 곧 콜 린스의 몸으로 사라졌다. "숨을 크게 들이셔 봐요." 손을 떼지 않고 와이즈는 지시하더니 조금의 시간이 지난 후에 거 둬들였다. "어때?" "보통이다. 마나를 느끼는 것도, 유동시키는 것도 보통 수준이야." "소질이 있단 소리야?" "그래. 마나를 느끼는데 노력여하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짧게 잡 아도 6개월은 걸릴 거다. 남은 평생 마나를 축적시켜도 5~6써클 정 도에 이를 정도다." 콜린스는 자신에게 다가온 행운의 기회에 마음 졸이고 있다가 그의 대답에 한풀 기세가 꺾였다. "왜? 그 정도도 괜찮지 않아? 아예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잖아. 마법 배워보겠다는 생각은 이제 포기 한 거야?" 콜린스는 고개를 바짝 쳐들었다. "3써클만 되어도 마법사로 인정받는 걸요. 급료를 받고 일거리를 맡 을 수도 있고, 괜찮은 파티에 끼일 수도 있어요. 배우고 싶어요!" 진은 프론트에서 그들이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던 후크에게 웃으며 손짓을 했다. "콜린스를 후원해 줄게요. 학교에 보내세요. 허락하실 래요?" 후크는 열렬한 아들의 눈빛과 선뜻 뒤를 봐주겠다는 진의 말에 가 슴이 떨려왔다. 어느 부모가 자식 잘 되길 기원하지 않겠는가. 진의 제의는 그에게도 행운이었다. "돈이.....많이 듭니다. 레이디. 우리 같은 사람에겐 평생 벌어야 할 학비인데...." "나중에 졸업하면 제게 도움을 주면 되지요. 일종의 투자인 셈이에 요. 졸업 후 당장 위험한 파티에 끼거나 혼자서 힘든 수련 과정을 거칠 필요 없이, 제게 와서 고용되면 됩니다. 어쩌실 래요?" 후크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고. 고맙습니다. 레이디 진...." 콜린스가 가슴 벅차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콜린스가 꿈에 부풀어 입이 벌어진 채로 후크의 심부름으로 아침 시장에 음식 재료들을 사러 나가고, 평민들의 식당에서 메뉴에 올라 오지도 못하게 귀한, 찻잎을 끓여 우려 낸 차를 마시고 있는데. 사제가 보낸 사람이 도착했다. 그는 어제 진이 골목에서 목을 걸어 넘어뜨린 소년이었는데 자신을 티미라고 소개했다. 티미는 소매치기를 하는 아이들의 대장이기도 했다. "사제님이 레이디께 무엇이든 대답해 드리라고 하셨어요. 에....의뢰 하신 내용은 직접 들어야 하신다면 서요. 그리고 또 사람을 보내시 겠다 고도 하셨구요." 그는 사제의 말을 전했지만 정확히 무슨 뜻인지는 모르고 온 모양 이었다. 정보라고 해도, 종이가 귀한 세상에서 서류로 받을 수는 없 는 노릇이었으니 사람들을 통해 직접 읊는 형식을 택하기로 했었다. 진은 어제 잠깐 둘러보았던 시장에서 얻은 지식으로 이곳의 모든 생활 풍습을 알 수는 없었기에 궁금했던 것들을 묻기 시작했다. "아침은 먹었니, 티미?" "예? 이제 먹을 시간인데요?" 정오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진은 사람들이 몇 명 앉기 시작한 주위를 둘러보고 티미를 시켜 문 밖에 누구 와있는 사람이 없는지 보게 했다. 그는 실비아와 그녀의 아이들과 자신의 똘마니로 써 먹는 꾀죄죄한 아이들을 우르르 몰고 들어 왔다. "내참. 자선사업가 나셨네." 와이즈는 그들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빈정대었지만 진은 한마디로 일축했다. "아니, 몰랐어? 내가 말 안 했나? 난 자선사업가이기도 했어." "......도둑에 소매치기에 공갈협박에 투자가에 사업가에 살인에 자선 사업까지? 너 참, 바빴구나." "그럼. 엄청 바빴지." "내 돈이....." 와이즈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고 진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 정도로 뭘 그래? 나중에 도로 채워줄게." 실비아와 티미와 아이들은 떠들썩하게 아침을 먹기 시작했다. 후크와 시장에서 돌아 온 콜린스는 작은 손님들의 걸신들린 배를 채워주기 위해 바삐 움직였다. "후크 아저씨." "네에-" 대충 아침식사를 끝낸 여관 손님들이 용무를 보러 나가고 조금 한 산해 지자, 진은 그에게 다시 말했다. "콜린스가 학교에 가면 혼자서는 일이 힘드시겠죠? 실비아를 고용 하는 것은 어때요? 급료를 많이 줄 필요는 없어요. 제가 아이들과 그녀를 위해 저축금을 따로 마련 해 줄 테니까요. 실비아에게 주방 일을 맡게 하는 게 어떠세요?" "....에예. 사람을 구할까 생각은 했으니까요.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 니네요. 실비아 일해 보겠소?" 실비아는 아이들의 입을 닦아주다가 진과 후크의 대화를 듣고 기뻐 했다. 그녀는 그 날로 직장을 얻었다. "레이디 누나. 저녁에 또 밥 먹어도 돼?" 티미 패거리 중 가장 어린 아이가 말했고, 다른 아이들도 기대에 차 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래. 여자아이들은 보이지 않는구나? 이웃에 저녁 못 먹는 여자 친구가 있다면 데리고 오렴. 내가 후크 아저씨에게 말해 둘게. 와서 저녁밥 먹어." 그들은 인사도 잊은 채 소리를 지르며 우르르 밖으로 나갔다. "저, 레이디 진.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아이들이 너무 많이 몰 려올 거 에요." "괜찮아 오늘 하루뿐인데, 뭘. 후크아저씨와 콜린스가 고생하겠다." "나도 마음 고생 중이다." 투덜거리는 와이즈의 말에 진은 그의 어깨를 툭툭 치고 나가자며 앞장섰다. 진은 항구로 갔다. 호기심에 찬 선원들의 눈길을 받으며 배들이 정박되어 있는 육지와 바다를, 커다란 바위와 돌로 막아 수심을 깊게 해둔 선착장을 지나 서 바닷물의 경계를 따라 계속 걸어갔다. "뭐 하는 거냐, 진? 계속 걷기만 하는 거냐?" "와이즈. 여기 말이야, 참 웃겨." "뭐가?" "여기 사람들은 굶지 않아도 돼. 왜 굶어? 바다가 있잖아. 조수간만 의 차가 심하진 않지만, 밀물 썰물이 존재하잖아. 보니까 해산물이 래 봐야 생선 종류가 다였어. 바다는 생명의 원천. 해상생물의 보고 인데. 썩히고 있잖아." 따라 다니던 티미는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티미." "예?" "시내로 가서 말이야. 네가 아는 누나들 중에 밤일을 하기 싫어하는 누나나 아주머니가 있으면 데리고 올래? 좋은 것을 가르쳐 줄게. 바 구니 같은 거 구할 수 있으면 하나 가져오고." 그가 뛰어간 후에도 진은 너무 유쾌해져서, 와이즈를 끌고 자신의 눈동자 색과 비슷한 바닷물에 손을 담그며 말했다. "봐. 선착장 근처에는 없었지만, 여긴 수심이 낮아서 밀려 온 바다 속 찌꺼기들이 있잖아. 저건 파래 같은데? 와이즈 전복 먹어봤어?" "전복? 조개 말이냐? 먹어봤지." "어떻게?" 진은 자신의 짐작이 틀렸나 해서 그를 돌아보았고 그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바다에 사는 실버드래곤의 레어에 놀러갔다가 별 희한한 걸 먹고 구경해 보긴 했지." "드래곤으로 말고 말이야. 내 기억으로도 이곳과 비슷한 문명이었던 신화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에서도 생선 외의 해산물이 식탁에 올라오는 장면이 그다지 없었던 것 같아. 보통, 진주를 찾으려고 조 개를 찾지. 먹으려고 찾는 게 아니었어. 이 곳 사람들은 바다를 신 으로 모셔. 땅을 개척하는 것처럼 바다도 개척할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이 분명해. 큰 게 정도야 낚시 식으로 잡을지 모르지만. 하하....정 말 바보들이야. 물질을 생각해 내지 못한 거야." "물질?" "해녀가 없어. 이곳엔!" "해녀?" 진은 와이즈의 반문에 다시 웃었다. [27] 3-2. 레이디의 해녀. 진은 샌들과 가죽 조끼를 벗고 바다로 들어갔다. 지형에 따라 모래가 많은 해변가도 있었지만 진은 바위가 많아 수 심이 깊은 곳을 택해 잠수를 했다. 오염되지 않은 바다 속은 빛이 들어와 비춰, 꿈결같은 기분이 들었 다. 충분히 앞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보통 사람들도 잠수해서 닿을 수 있는 깊이의 바닥에서, 여러 가지 해산물을 찾아 내었다. 뻘이 없는 곳이라 낮은 수심에서는 그다지 먹거리가 될 만한 것이 보이지 않았지만, 진 자신도 먹어 본적이 있는 것들과 비슷해 보이 는 종류의 커다란 조개들과 돌 틈에 숨어 있는 연체 동물들도 찾아 내었다. 바다는 숨을 쉬고 있었다. 군데군데 해초들이 너울거리고 있었고 숨어 있는 해상 식물과 동물 은 찾아보면 더 많을 것이다. 진은 티미가 가져온 바구니에 큼직큼직한 조개들을 채취해 담고, 멍 게처럼 생긴, 가시 투성의 딱딱한 껍질을 가진 것들과 모래 속에 숨 어 있던 낚지 비슷한 형태의 성인 허벅지길이와 굵기를 가진 연체 동물을 한 마리 잡아서 수면으로 떠올랐다. 진이 벗어난 자리에 꾸물거리는 연체 동물이 내 뿜은 검은 먹물이 퍼지고 있었다. "마법사님. 도대체 무얼 하신 답니까, 저 귀족아가씨는?" ".........." 시장에서 생선가게를 하는 쿠피는 어제부터 네얀 시에 소문을 흘리 고 있는 마법사와 귀족여자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가, 말썽꾸러기 티미 녀석이 형편이 어려운 여러 명의 여자들을 데리고 가는 것을 보고, 호기심에 따라 왔다가 희한한 광경을 목격했다. 그들은 뱃사람이 아니면 바다에서 수영도 잘 하지 않았다. 바다의 여신을 모시고 있는데 바닷물에 몸을 씻는 것은 신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귀족 여자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지켜보고 있는데, 겉옷 을 입지 않은 차림으로 평상복이 물에 젖어서 몸매를 다 들어 낸 채로 바다 속에서 찾아온 딱딱해 보이는 조개들과 보기에도 끔찍 해 보이는 꾸물거리는 괴물을 들고 왔다. "와이즈. 독 같은 것 있는지 알 수 있어? 내가 보기엔 없는 것 같지 만 확인은 해 봐야지." ".......없다." 간단한 독성 탐지 마법으로 투시해 보고 와이즈는 대답했지만, 진은 성의 없게 들렸는지, 아니면 한번 더 확인하려는 의도인지 와이즈에 게 은화를 빌려서 조개 껍질을 열고 속살에 상처를 내어 동전을 집 어 넣어 보았다. 은화의 색이 변색되지 않았음을 알고, 진은 모여 있던 여자들에게 가까이 가서 바구니를 보여 주며 차근차근 설명했다. "이것은 먹을 수 있는 것들이에요. 독이 있는 것도 있을지 모르지만 이것들은 아니에요. 이 수산물들은 모두 깨끗한 바닷물 속에서만 살 지만 여기선 조금만 깊은 곳에 들어가도 굉장히 많아요. 해산물이 생선만 있는 것은 아니에요. 굳이 몸을 팔지 않아도 되요." 마을 처녀들은 말 없이 듣기만 했다. "바람이 세더라도 바다 속은 크게 지장 없으니까, 연습하면 숨을 오 래 참을 수 있을 테구요. 조개 안에는 게 중에 진주가 있는 것들도 있을 거 에요. 이 일을 해보지 않을 래요? 이런 일을 하는 여자들을 해녀라고 해요." ".....해녀요?" 밤에 입는 옷보다는 점잖지만 다섯 명의 젊은 아가씨들은 가벼운 차림새로 바다 바람을 맞으며 멀뚱히 진을 바라보았다. 바다 물에 젖어 곱슬머리가 곧게 펴져 상체를 휘감고 푸른 눈을 빛 내고 있는 진은, 그들에게 너무 생소해 보였다. "진. 겉옷을 입는 게 좋겠어." 와이즈의 지적에 진은 자신을 내려다보고 가죽 조끼를 대충 걸쳤다. "정말 먹을 수 있어요?" 그들 중 분홍 머리카락의 한 아가씨가 호기심을 보였다. "먹을 수 있어요. 땅에서 나는 밀과 과일만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 에요. 바다에서 나는 이런 해산물이 훨씬 영양가도 높아요. 굶지 않 아도 돼요. 다른 사람들도 먹게 되면 비싼 값에 팔 수도 있을 테구 요. 사람들이 처음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면 내가 팔릴 판로를 개 척해 줄게요." "여신께서....노여워하지 않으실 까요?" 진은 종교의 벽을 염두 하지 않았다가 그녀의 말에 한숨을 쉬었다. "대지의 여신은 인간이 땅을 파헤치고 과일을 따는데 노여워하던가 요? 바다의 여신은 더 자애로워요. 그렇지요? 노여워하지 않으실 거 에요." 분홍머리 아가씨는 손을 뻗어 조개하나를 들어 보았다. "정말.....우리도 가능한 가요?" "가능해요. 초보자도 조금만 숨을 참으면 들어 갈 수 있는 바다 깊 이에서 주워 왔어요." ".........." 와이즈와 함께 해변의 바위 위에 서서, 진과 마을 여자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쿠피는 입이 근질거려서 참지 못하고 제동을 걸었다. "귀족 아가씨. 바다의 여신의 신전에서 그런 일을 하게 허락하지 않 을 지도 모릅니다. 그게 정말 먹을 수 있다고 해도요." "그럼, 가서 물어보도록 하지요." 진은 젖은 머리에서 물기를 대충 짜내고 바닷바람에 몸이 떨려와 입술이 파래지기 시작하고 있음을 알았지만, 바로 신전으로 향했다. 모여든 사람들은 그녀의 뒤를 웅성거리며 따라갔다. * 사제 마르카는 어제에 이어 다시 황당해 졌다. 레이디 진은 마을 처녀들과 몰려와서 신전의 고위 사제들과 싸움에 가까운 말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미사를 보는 널따란 예배 실에는 마을 사람들에게 소문이 돌아 사 람들이 점점 몰려들고 있었다. "이해 할 수 없군요, 사제님. 왜 여신께서 노여워하시리라 생각하시 죠? 물고기를 잡고 뱃길을 이용해 배를 타고 항해하는 것은 괜찮고. 진주만 꺼내고 죽여 버린 조개를 다시 바다에 버리는 것은 나쁘다 고 여기시지 않는 겁니까? 잘못 생각하신 겁니다." "레이디! 그것이 정말 먹을 수 있는 것으로 보입니까? 보십시오. 그 징그러운 괴물을 어떻게 사람이 먹을 수 있다는 말이오!" 네얀 시에 유일한 바다의 여신 다이네프의 신전에서 고위 사제로, 나이 들어 깐깐하고 고지식한 사제가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치부 하고 있는 그 일을. 마르카 사제는 이제껏 생각도 못해 본 일이었지만, 진의 말대로라면 바다를 가지고 있는 도시는 생활 형편이 훨씬 나아지리라는 것을 예상 할 수 있었다. 당장 거리의 여인들과 아이들은 생계에 큰 보탬 이 될 것이 분명했다. "먹을 수 있다니 까요! 왜, 토끼나 오리는 가죽을 벗기고 털을 뽑아 서 붉은 피가 질펀한 육질을 다듬어 요리를 하면서. 당신들이 믿는 신이 준비해 준 황금 어장을 포기하려는 겁니까! 그렇게 여신을 못 믿으면서 어떻게 사제랄 수 있나요! 시야를 조금만 넓혀 보세요. 당 신들이 믿는 신이 인간들에게 주는 가장 큰 혜택이 뭡니까? 자비와 사랑이 아니었던가요?" "그렇다고 해도. 여신의 바다에 옷도 제대로 갖추지 않고 들어가 헤 집을 수는 없지 않소! 모독이요!" "모독 같은 소리하시네! 남신인가요, 여신인가요? 왜 이 신전엔 여 신을 모시면서 여 사제는 보이지 않나요! 여신을 모시면서, 그녀가 베풀어주는 은혜를 입겠다는 여자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고 여전히 밤거리에 서성이게 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요?!" "누가 그런 것을 돈을 주고 사먹는 답니까!" 점점 말다툼이 치열해지고 원색적인 의미의 말까지 튀어나오자, 사 제들은 얼굴까지 붉히고 핏대를 세웠지만. 진은 검푸른 머리를 늘어뜨리고 젖은 옷에서 바닷물을 한 두 방울 씩 떨어뜨리며 서서, 너무나 당당하게 질책 어린 말을 쏟아내고 있 었다. "내 어머니도 바다의 여신을 모시는 사제였습니다. 제가, 이 일을 희망하는 여자 분들을 고용하는 셈치지요. 끼니를 때우고 남은 해산 물들은 제가 모조리 사들이겠어요! 판로 확보 됐지요? 진주를 만드 는 방법도 알려드리지요. 저들도 풍족해 질 수 있겠지요?! 신 벌이 두렵다고요? 제 이름으로 하겠습니다. 그럼 설사 신 벌이 내리더라 도 제게 내리겠지요! 그런데도 허락하지 않으실 참입니까?! 더 핑계 거리 있으신 가요?!" "............"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게 된 주민들은 새로 들어오는 이웃들에게 소곤거리고 있었고. 흰 대리석 벽과 마룻바닥은 진의 노여움 섞인 목소리에 묘한 울림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모르고 있었으니 죄가 되지 않지만, 알게 된 사실을 생활 형편을 개선시킬 수 있는 기회로 이용하지 않고 외면을 한다면. 정말 사람 들을 위해 봉사한다는 사제로 인정 할 수 없습니다. 뭐가 문제입니 까? 먹을 수 있는지 없는지는 제가 직접 시범을 보여드리지요! 영 주 님께서 반대하시겠습니까? 천만 에요. 설사 그러신다고 해도 제 가 직접 설득 시켜 드리겠습니다! 사랑을 주려는 여신께서 오랫동 안 얼마나 낙담하셨을까. 널려져 있는 양식거리를 주워 먹으려는 생 각조차 하질 못하고 있었다니." "말씀이 과하시오!" 처음. 진의 제안에 호기심으로 모여들었던 구경꾼들은, 아무래도 조 금 머리가 이상해진 여자로 동정의 눈길을 보냈었다. 하지만 그녀가 한 마디씩 내뱉는 주장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오랫동 안 그들을 위해 애써왔던 사제들에게 원망 어린. 심지어는 젊은 처 자의 경우, 살기 어린 시선으로 무언의 압력을 신의 사자들에게 보 내고 있었다. "......네얀이 먼저 시작하면 바다를 낀 다른 도시에서도 시작하게 될 것이고 육지 사람들도 먹게 될 겁니다. 제가 보장합니다. 해산물은 육지에서 나오는 곡류 못지 않습니다. 아니, 훨씬 가치가 높습니다. 받아들이세요!" "............" 마르카는 그녀가 바로 여신처럼 느껴졌다. 이제껏 어느 누가 저런 생각을 해 낼 수 있었던가. 그녀는 후줄근한 몰골이었지만, 바다 색 눈빛에 강한 의지를 담고 너무나 당당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마르카는 그녀가 대륙을 상대로 하려는 일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짐 작 할 수 있었고 신이 주신 신성력을 쓸 때처럼, 가슴 저 아래에서 희망의 기운이 솟아오름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결국 고지식해 마지않던 신전의 나이든 고위 신관들은. 겨우 몇 십 분에 걸친 웅변으로 주민들의 말 없는 응원을 등에 업 고, 자신만만한 진의 기세에 한풀 꺾여서 신전 주방으로 몰려가 진 이 해산물을 몇 가지를 골라서 요리를 하는 것을 구경해야 했다. 진은 밀가루와 야채로 스프를 끓이고, 커다란 조개의 속살을 꺼내 큼직큼직하게 토막을 내어서 김이 나고 있는 냄비에 넣어 함께 끓 이고 소금으로 간을 했다. 또. 밀가루와 약간의 야채를 물에 혼합해서 걸쭉하게 만들더니, 보 기에도 징그러운 괴물같이 꾸물대는 바다생물을 잘게 다지고 썰어 서 소금과 함께 반죽을 해, 돼지기름을 두른 팬에 얇게 구워내었다. 진은 두 가지 요리를 신전 주방에서 쓰는 움푹 패인 큰그릇과 넓은 그릇에 각각 담아, 사제들을 향해 씩씩하게 내밀었다. "자- 먹어 보세요. 제가 먼저 시식해 보지요. 와이즈! 와서 먹어. 내 가 사람들을 위해 요리를 하다니.... 니콜라스가 저 세상에서 얼마나 웃고 있을까. 안 먹어?! 먹어. 안 죽어!" 진은 살기까지 폴폴 풍기며 와이즈에게 협박 비슷한 권유를 했고, 자신의 그릇에 스프를 적당히 담아 먹어 보였다. 와이즈는 순전히 호기심과 진이 보여주고 있는 리얼하고 통쾌하기 까지 한 행동에, 비실...웃음을 지으며 그녀가 건네 준 스프를 한 입 떠먹고 부침을 뜯어먹어 보았다. "향신료를 넣으면 더 낫겠다. 맛이 있긴 하네. 독 같은 것은 없습니 다, 사제 님들. 그녀의 말이 맞아요." 인상을 쓰며 하는 양을 지켜보던 그들도. 육 고기 요리를 할 때의 동물 특유의 진한 향기가 아닌, 옅고 깔끔 한 음식 향기에 용기를 내어 스푼과 포크를 들어 조심스럽게 먹어 보기 시작했다. ".........!" "전 맛을 내는 요리를 해 본적이 없어요. 하다보면 요리법도 개발 될 것이고, 원래 이렇게 막 잡은 해산물은 그냥 날것으로 먹어도 됩 니다. 익숙해지면 그게 더 맛이 있고 영양도 더 높아요. 못 먹을 정 도인가요?" 마르카는 진이 끓인 조개 스프가 맛있었다. 입에 찰싹 달라붙는 느 낌까지 들 정도였다. "이 조개는 전복이라고 해요. 저기 제가 채취해 온 것들은 모두 바 다 깊은 곳, 깨끗한 물 아래에서만 사는 것들입니다. 여긴 바닷물이 아주 깨끗해서 지면에서 그다지 많이 들어가지 않아도 쉽게 찾을 수 있었어요. 그동안 아무도 그런 조개를 얻으려는 일을 하지 않아 서 굉장히 풍부해요. 1년 동안 땅에 땀방울 흘리며 농사짓는 것 보 다, 훨씬 쉽고 낫습니다." 나이가 든, 사제 복에 은색 수염을 늘어뜨린 고위사제가 헛기침을 하며 말을 했다. "진주를.....만들어 낼 수 있다고 하셨지요. 레이디." 진은 그제야 화가 좀 가라앉아서 빙긋 웃음까지 지어 보였다. "물 건너갔어요, 사제님. 약속대로 제 이름으로 상권을 확보하겠어 요. 욕심 생기세요?" 그들은 모두 멋쩍은 듯이 헛기침을 했고, 지켜보던 주민들의 얼굴엔 희망의 빛이 번져갔다. 네얀 시의 여성들은 그 후부터 '레이디의 해녀' 라고 불리게 되었다. * 진은 신전에서의 설전을 끝내고 와이즈와 함께 티미를 앞장세워 그 가 준 네얀 시의 상인들에 대한 정보를 참고해서 시민들에게 평판 이 가장 좋다는 '폴로네오' 라는 이름의 중년 아저씨를 찾아갔다. "와이즈 통신 마법이란 거 말이야..." "......또 우려먹을 일을 찾아냈구나. 참으로 놀라운 추진력이다." 진은 배시시 웃었다. 와이즈는 투덜거리면서 자신의 가방에서 꺼내 주는 척하며 레어에 서 불러온 마법이 걸린 통신용 구슬을 진에게 건네 주었다. 마법사가 아니더라도 사용할 수 있게 만들어진 마법 구였고, 시중에 는 제법 비싼 값에 팔리는 것이었지만, 와이즈가 건네 준 주먹만한 마법 아이템은, 구슬 안에 핵이라 할 수 있는 정령석 쪼가리가 들어 있어서 보통 통신마법이 걸린 구슬과 비교해 훨씬 자주, 오래 사용 할 수 있는 귀한 물건이었다. "두개가 한 쌍이다. 통신 할 지역이나 사람이 더 생기면 새 구슬을 덧붙여 사용할 수는 있지만 동시에는 불가능하다. 너무 자주 사용하 면 수명이 단축되니까 적당히 알아서 해라. 다른 인간에게 들어가는 꼴은 못 보니까 네가 지정하는 사람에게 한정되게 사용토록 나중에 마법을 걸겠다." "와이즈- 고마워." ".......평생 고마워 해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와이즈는 왜이리 쉽게 진의 요구에 따라 주고 있는지 스스로도 의아했다. '아까 속으로 너무 웃어서 내가 정신이 헤이 해 진 건가? 뭐, 도와 준 댔으니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여전히 뭔가 찜찜한 느낌이 남아 있었지만. 와이즈는 빠른 걸음으로 상인을 찾아가고 있는 진을 따라가며, 다음 번에는 또 어떤 광경을 보게 될까하는 기대 어린 생각에 잠겼다. 폴로는 작은 선박을 소유하고 직접 북 대륙과의 교역을 하는 선원 출신의 상인이었다. 그는 평민 출신이었고 선원 일을 해서 모은 돈으로 선장이 되어 북 대륙만이 아니라 서 대륙의 바닷길을 따라 멀리 아래 남 대륙까지 도 항해를 하는 배포 큰 상인이었다. 큰 부자는 아니었지만 단 한 척 있는 배로 그 정도의 항해를 사고 없이 해 왔다는 것에 점수를 줘서 진은 그를 택했다. 부자 상인이나 귀족출신의 상인의 경우, 선원들을 고용해서 배를 띄 우고 아랫사람을 시켜 벌어들인 돈으로 육지에서 사치스런 생활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폴로처럼 직접 몸으로 바다를 헤치고 나 라들을 다니며 작지만 견고한 판로를 확보해 둔 사람도 드물지만 존재했다. 그는 마침 네얀 시에 있었고, 그래서 행운을 잡게 되었다. 그는 정박되어 있던 자신의 배에서 진의 방문을 받았다. "레이디. 말씀대로라면 정말 성공이 확실한 사업이 되겠군요. 하지 만 이곳은 상업도시이고 전 그다지 힘이 없습니다. 상권에 크게 영 향을 미치고 있는 다른 상인들이 가만있지 않을텐데요." 그는 36세의 나이에 구릿빛 피부를 한, 듬직한 체구를 가진 붉은 머 리의 선장이었다. 그의 배 안의 약간 흔들림이 느껴지는 선장실에서 진은, 머리하나는 더 큰 그의 얼굴을 앉지도 않은 채 올려다보며, 걸어 들어왔던 자세 그대로 서서 단도직입적으로 용건만 말했다. "폴로. 적어도 네얀시 안의 일은 제가 조치해 줄게요. 당신은 제가 지시한 대로 수산물을 사서 유통시키면 됩니다. 머지 않아 육지 쪽 에서도 판로를 확보해서 동료가 될 사람과 연결시켜 드릴게요. 수산 물도 큰 시장이 되겠지만, 전 진주도 취급할 거 에요. 진주는 양식 이 가능해요. 시간이 걸리겠지만 분명히 수익이 남는 장사가 될 테 고, 걸림돌이 될 상인들과 세금 문제가 끼는 이곳 영주와의 마찰은 모레 안으로 정리해 드릴게요. 당신이 나와 해녀들을 배신만 하지 않는다면 가장 큰 수산시장 상권을 향후 20년 간 그냥 드리지요. 계 약하실 래요?" 폴로는 나이 36세에 항해를 하면서 약탈을 일삼는 해적과 마주쳐도 동요 없이 대처하던 태도에 변화를 느꼈다. 이 작은 소녀는 그에게 믿을 수 없는 꿈의 한 조각을 눈앞에 흔들 어 대고 있었고. 그는 그것을 잡고 싶었다! 폴로는 화려한 외모의 마법사를, 개인 호위 마냥 드리우고 서 있는 소녀를 다시 한번 쳐다보고 침을 삼켰다. 진주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말을 그대로 믿을 수는 없었지만. 새로운 먹거리로 떠 오른 수산시장의 미래만으로도 충분히 유혹이 되었다. 그는 재빨리 계산을 마쳤다. ".......계약대로 해서 돈을 벌 수 있다면, 왜 거절하겠습니까. 하겠습 니다. 레이디." 진은 개척되지 않은 해산물 채취에 따르게 될 위험과 무시하면 안 될 주의사항들과 통신을 통해 지시를 받을 것 등을 간단하게 몇 마 디 설명하고, 같은 내용이 섞인 정교한 거래 계약서를 직접 만들어 사인하게 했다. 진은 폴로네오를 통해 대륙의 상권을 손에 쥘 작은 열쇠의 끄트머 리를 손에 쥐게 되었다. * 폴로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도둑 길드 장인 마르카 사제가 새로 운 정보원으로, 네얀 시의 도둑고양이의 숫자와 부자들의 주방 포크 숫자까지 안다고 자신하는. 네얀 시의 인물 인적사항을 줄줄이 꿰고 있는 두 명의 정보원을 보 내 주어서 티미와 교대시켰다. 진은 그들을 통해 네얀 영주와 큰배를 가지고 있는 네얀의 상인들 에 대한 정보를 좀더 자세히 얻을 수 있었다.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흔적만 남기고 사라지는 레이디를 찾기 위해 론 백작의 호위기사 피터 패터슨은 네얀 시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도시는 다른 때와 다른 희망 어린 술렁임이 가득 했고, 네얀 영주는 자신의 영지에 갑작스런 동요를 일으키고 다닌다는 그 타국의 레이디를 잡아, 아니. 모시고 오라는 명령을 내린 상태였다. 피터가 그녀를 찾아 낸 것은 늦은 오후, 원점인 후크의 여관에서였 다. "......여기 계셨군요. 레이디. 백작 님께서 방문을 청하셨습니다. 함께 자리를 옮기는 것이...." 그는 또 거절당하나 했지만, 목욕을 막 끝냈는지 여행자용 새 옷으 로 갈아입은 그녀는 물기가 마르지 않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쓸 어 올리며 일어섰다. "후크. 아이들이 많이 올 거 에요. 저녁 준비를 넉넉히 해요." "예! 다녀 오세요. 레이디." 기운 찬 그의 답변을 뒤로하고 진은 와이즈와 함께 피터가 안내하 는 마차에 올랐다. [28] 4. 최초의 여 현자. "정말 진주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거냐, 진?" 와이즈는 앞서 들은 진의 자신 어린 말에 내내 궁금증을 가지고 있 다가, 성으로 가는 마차 안에서 둘만 남게 되자 질문을 했다. "만들 수 있어. 진주만이 아니라, 저쪽 세계사람들은 루비나 사파이 어, 다이아몬드도 만드는 걸?" "뭐? 인간이 색깔 있는 다른 보석도 만들 수 있다고? 그 쪽 세상 인간들이 정말 인간들이 맞냐?" 와이즈는 솔직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드래곤들은 고룡이 되면 보석에 흥미를 잃게 된다. 여전히 좋아 하 긴 하지만 7~8천살 정도면 이미 오랜 세월, 드래곤의 기운을 받은 레어 근처에는 값비싼 금속이 생성되고. 마음만 먹으면 마법으로 붉 고 푸른 돌들을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만들어 내는 것이 가능한 것은, 오랜 연륜과 강해진 마법 유 동력과 거대해진 몸체로만 가능해서 그 자신조차도 아직 금속 종류 외의 단단한 다이아나 색이 예쁜 보석을 만들어 내기에는 나이가 부족했다. 그랬으니, 와이즈가 진의 확신 어린 말에 되물은 것은 당연했다. "그곳의 문명이 이곳 보다 몇 천년은 앞서 있다고 했잖아. 진주 만 드는 것은 오히려 쉬워. 루비나 사파이어도 인조가 많아. 다이아는 천연 다이아몬드보다 인조 다이아가 더 비쌀 정도인걸? 하지만 만 드는 과정이 너무 복잡하고 비용이 많이 들어서 펑펑 보석을 쏟아 내지는 않지. 또 그렇게 한다면, 희소가치가 떨어지잖아. 일부러 안 만들어." ".....아무래도 넌 정말 위험하긴 하구나. 네 귀걸이도 인간이 만들어 낸 거냐? 전부터 궁금했는데, 드워프가 세공 한 것 못지 않아 보인 다." 진은 와이즈의 말에 귓불에 손을 가져다 딱딱한 보석을 더듬었다. "모르겠어. 나도 보석을 조금 보긴 했지만, 인조인지 천연인지는 확 인 안 해봤어. 왜 인조가 더 비싸겠어? 어렵게 만들어 내고, 천연보 다 더 말끔하기 때문이야. 상처가 없어야 가치가 높잖아. 루비나 사 파이어등의 보석이 이곳에선 다이아보다 더 비싸다고 하더군. 가공 기술이 발달하지 않아서 그래. 다이아가 훨씬 가치 있는 돌이야. 드 워프가 보석 가공하는 기술에 있어, 인간보다 앞지르고 있다면 그들 은 다이아몬드의 가치를 알고 있을 거야. 가장 강하고 영원에 가까 운 돌이야, 다이아는. 이건.....내 남자친구의 유품이야. 욕심내도 소 용없어, 와이즈." "남자친구?" "그래, 내 애인." 와이즈는 남자가 있었다는 꾸밈없는 진의 말에 현기증이 났다. 이곳의 귀족 가에 속한 여자가 내 뱉을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유희 중임을 감안하여 인간들의 문화에 속해 인간 행세를 하고 있 던 와이즈는, 그가 가진 인간에 대한 가치관을 심심찮게 타파해 주 고 있는 진의 존재가 너무 신선하고 호기심과 흥미를 유발시켰다. 그는 재미있었다. "넌, 네가 왕녀란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 같다, 진. 귀족들 앞에 서는 말조심해야 할거야." 진은 와이즈의 말에 눈을 깜박이더니 웃음을 지었다. "그렇지. 이곳의 상류계층 문화를 아직 접해 보지 않았어. 이제 다 왔네. 가서 직접 체험해 보지, 뭐. 재미있을 거야." 진은 피터가 내민 손을 잡고-진은 간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성문 을 통과해서 멈춰 서 있는 마차에서 내렸다. 그가 여전히 손끝을 잡고 있자, 진은 정중하게 말했다. "전 다리가 튼튼하답니다, 기사 님. 부축해 주시지 않아도 됩니다." 와이즈는 손등으로 다시 입을 가렸고, 피터는 얼굴이 붉어져서 진의 손을 놓고 앞장서서 걸었다. 성은 여러 개의 세모꼴 뾰족 지붕에 돌을 쌓아 지어져 있었다. 별다른 색깔과 무늬 장식은 없었지만, 유럽에 남아 있는 옛 귀족들 의 거대한 저택처럼 고풍스러운 기분을 느끼게 했다. 진은 몇 명의 하인들이 마중 나와 있는 성의 커다란 현관을 피터의 뒤를 따라 와이즈와 함께 걸어갔다. 응접실로 안내된 진은 또 눈을 깜박여야 했다. "백작 님께서 저녁 식사에 초대 하셨으니, 준비를 돕도록 레이디께 서 머무실 방에 하녀들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일행이신 마법사 님께 서는 여기에서 기다리시고 방으로 가시죠, 레이디." 전형적인 집사의 풍모를 가진 나이든 아저씨가 진을 맞아 하는 말 이었다. "드레스로 갈아입으라고요? " "예에...." 피터는 백작의 집사와 마주 서 있는 진을 지켜보며 예의 귀족 아가 씨와 다른 언행과 행동들에 어떻게 이 검푸른 머리의 레이디를 대 해야 할지 마음 속이 어수선했다. "와이즈. 어떻게 생각해? 방금 옷 갈아입었는데, 또 갈아입어야 하 나?" "체험해 보겠다며? 알아서 해. 갈아입든 말든....." 진은 가볍게 숨을 내쉬고 집사를 따라 방으로 안내되어 응접실을 나갔다. 마법사와 남게 되자 피터는, 괜히 허리에 찬 검 집을 만지작거리면 서 그에게 말을 걸었다. "저. 분명히 귀족 분이 맞으시죠? 에...실례된 질문을....." "분명히 귀족 아가씨입니다. 재미있지요?" "재미....요?" 와이즈는 웃음이 나왔지만 점잖게 앞에 놓여져 있는 찻잔을 들어 입을 가렸다. * 진은 울화통이 터질 것 같았다. 바느질 처리가 되지 않았더라도, 여행자용 망토와 평상복은 간편한 옷차림이었다는 것을. 화려하게 꾸며진 손님용 방에 들어와 젊은 아가씨들의 시중으로 몸 치장을 하면서 깨달았다. 안에 입는 속옷은 여행자용 짧은 옷안에 입게 되어 있던 바지처럼 끈을 허리에 묶어 입는 스타일이긴 했지만, 무릎까지 오는 스커트형 식이었다. 속치마는 상체에 나시 형식의, 부드러운 천으로 만들어져 역시 겨드 랑이 아래에서 조그만 끈으로 종아리 부위까지 줄줄이 매어 입어야 했다. 그들이 내어놓은 드레스는 흰색의 옷감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어깨와 소매에 작은 리본 매듭을 새심 하게 묶어야 몸에 걸칠 수 있게 되어 있었고, 종 모양으로 퍼지게 주름을 잡기 위한 드레스 자 락을 위해 가슴 바로 아래에서 한 뼘 넓이의 파란색 허리 두르게 천으로 조여야했다. 고정시킨, 클립처럼 생긴 핀이 빠지지 않게 하 려면, 숨을 크게 몰아쉬지도. 격한 몸놀림도 불가능할 것 같았다. 그렇게 입으니 가슴이 강조되어서, 청바지 스타일이었던 진이 보기 엔 지나치게 여성스러워 보였다. '내가 정말....드리얀으로 돌아가면 제일 먼저 바늘부터 만들어야겠 네.' 겨우 간지러운 하녀들의 손길이 어깨와 팔에서 떨어져 나가자, 진은 안도의 한숨을 쉬려다....또 움찔했다. "아가씨. 머리 장식을 어떻게 해 드릴까요? 올리는 것이 좋을 것 같 은데....피부가 너무 고우세요. 목을 들어내는 것이 좋겠어요." 의사를 묻는 듯 하다가, 자신의 판단을 은근히 강요하며 세 명의 하 녀들 중 한 명이 진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정말....귀찮네. 캐서린에게 옷 입는 것 잔소리한 것이 이제 와서 미 안해지잖아.' 다행이 따로 장식이 필요 없던 진의 굵게 말린 곱슬 머리카락은 귀 위, 옆머리에 핀 하나씩을 꽂아서 얼굴을 들어내게 하고, 나머지는 그대로 두었다. 하지만 뒷머리를 높게 쓸어 올려 푸른색 긴 천으로 칭칭 감아 리본 을 매어 어깨 아래까지 묶은 머리를 늘어뜨렸다. "정말 아름다우세요. 보석도 필요 없으시겠어요. 하지만 영주 님이 손님께 빌려주시는 것이 있거든요. 어떤 것을 하실 래요, 아가씨?" 또 다른 하녀는 한 뼘 반 길이의 보석 상자를 진의 코앞에 들이댔 다. 안에는 촌스런.....크기만 큰 루비 목걸이와 써클렛처럼 이마와 머리에 두르는 장신구가 들어 있었다. "전 귀걸이를 하고 있어요. 그것은 필요 없겠네요." "예에. 안 해도 너무 예쁘세요. 시간이 되었으니 아래로 모셔다 드 릴게요." 진은 하녀들의 안내로 드디어 영주란 백작을 만나기 위해, 푸른 색 수실이 놓인 천으로 만들어진 샌들을 신고 수 작업한 융단이 깔린 계단을 밟아 아래로 내려갔다. * 론 제베르타 백작은 네카르도에서 북 대륙과의 교류가 가장 활발한 탓에, 상업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는 부유한 귀족이었다. 그는 45세의 나이었고, 약간 살이 찐 체구에 부와 함께 호탕한 성격 으로 알려져서 궁정 사교계에서도 제법 인기 있는 축에 들었다. 영지가 도시 수준이다 보니 개인 사병도 꽤 견실했고, 기사 학교 출 신의 실력 있는 기사도 상당수 보유하고 있어서 군 계통에서도 영 향력 있는 귀족이었다. 그의 부인도 같은 나라 귀족 출신이었고, 40세의 약간 마른 체형에 20세와 18세의 백작의 친권 후계자를 가진 보통 귀족 마나님과 비 슷한 생활을 하는 백작 부인이었다. 백작의 아들들은 둘 다 기사 계급이었고, 이곳에 가장 많은 갈색과 금발 머리색을 하고 있었다. 진이 내려간 커다란 연회석 같은 식당에는 와이즈와 백작의 개인 마 법사와 기사인 아들들과 그 중 큰아들의 약혼녀로 보이는 젊은 귀족 아가씨와 백작 가에 신임이 두터운 부유 상인계층의 인물 둘 과 신전에서 바삐 찾아 온. 진과 말다툼을 벌였던 은색 수염의 사제 장 사레노민과 백작의 호위를 맡고 있는 귀족 출신의 두 명의 기사 - 그 중 한 사람은 피터 패터슨-들이 먼저 와 있었다. 백작 부인이 다가와 진의 앞에 서자, 진은 다음 자신이 행할 행동을 몰라서 멈칫하는데 와이즈의 목소리가 머리에 울렸다. [드레스 자락을 잡고 가볍게 목례를 해라] 진은 재빨리 그의 말대로 최대한 우아해 보이게 고개를 숙였고, 백 작 부인은 엄격하지만 은근한 호의를 보이는 얼굴로 물었다. "전 제베르타 백작 가의 안주인입니다. 아가씨의 성함이?" "진 리툰입니다. 백작부인." 그녀는 진의 손을 잡아 식탁 앞의 자신의 자리에 서 있는 사람들에 게 일일이 데려가 이름을 소개하고 소개받게 했다. 긴 식탁 상석에 백작이 앉았고 반대편에 백작부인이 앉았다. 와이즈가 의자를 빼 주어서 진은 먼저 자리에 앉았다. 사제가 백작 다음 상석이었고 그의 옆에 백작의 아들들과 약혼녀가 앉았고 상인 두 사람도 옆자리를 함께 했다. 사제의 건너편에 진의 자리와 와이즈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와이즈의 옆에는 백작의 마법사가 앉았고 호위 기사들이 그 옆에 자리했다. '상류 계층 겉치레는 어딜 가나 똑 같지만, 여긴 더 하네. 벌써 30분 이 갔다, 이 사람들아.' 진은 속으로 혀를 찼고, 와이즈는 웃음기 어린 얼굴로 그 역시 자리 에 앉았다. 하인들이 음식이 담긴 접시들을 커다란 쟁반에 가져다 나르기 시작 했고, 진은 몇 개의 크기가 다른 포크와 나이프를 와이즈와 사제를 곁눈질해서 흉내내었다. 저쪽 세계에서의 상류계층의 간단한 식사 예절쯤은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다지 다른 차이를 보이지 않았고, 아무도 진의 식사예절에 수상스런 동작을 발견해 내지 못했다. "산에서 검술 수련만 하셨다 고요, 레이디. 아직 어려 보이는데 집 안이 대단한 기사 가문이신가 봅니다. 허락 받은 여행일 정도니 굉 장히 개방적인 부모님을 둔 듯 하군요." 날씨가 어쩌네. 보석시세가 어쩌네. 수도 궁 안의 스캔들을 얼마간 주워 섬기던 그들은 드디어 진에게 화제를 돌렸다. 말을 꺼낸 것은 백작에게 사전에 지시를 받은 그의 큰아들이었다. "네. 그래서 전, 당연히 배웠어야 할 귀족의 예의범절에 익숙하지 못합니다. 그 점 양해 바랍니다. 대화 마저 전, 예절을 염두 하지 못 해서 핵심에 해당하는 것에 치중하는 면이 있습니다. 사제 님께서는 제 의사표현 방식을 아시겠지요? 전 시간이 남아돌지 않습니다." 사제 장 사레노민은 낮에 빽빽대고 서로 말싸움을 했던 기억에 헛 기침을 했고, 백작 아들의 약혼녀는 호기심을 보이며 눈을 빛내었 다. 와이즈와 이것저것 마법에 대해 토론을 하던 마법사도. 호스트로 식탁의 대화를 이끌던 백작과 그의 부인도. 진의 외모에 정신이 없어 보이던 백작의 둘째 아들도. 뭔가 의논 중이던 상인들도. 딱딱해 보이는 자세의 기사들도, 모두 진의 목소리에 고개를 모았 다. "오늘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 이미 알고 계시는 듯 하군요. 그리고 사제장님께서도 자리에 함께 하시고, 네얀의 상권을 쥐고 계시는 분 들도 계시니. 이 자리에서 백작 님께, 제가 바다를 개척해서 상거래 활동을 하고자 하는 문제를 인정받아 형식에 따르는, 법적인 허가를 얻길 청합니다." 론 백작은 미사여구를 뺀 사업제의를 나이 어린 타국의 귀족 아가 씨가 식탁에 툭 던져두다시피 한 화제에, 사제처럼 헛기침을 했다. "네얀은 네카르도에 속하오, 레이디 진. 하지만 레이디께서는 드리 얀 분이시고...이미 여기 네얀의 상거래 판로를 확보하고 있는 분들 이 계시니. 네얀과 가장 먼 나라의 레이디께 모든 일을 전담할 수 는...." "백작님." 진은 협상에 필요한 설득 과정에 들어갔다. 와이즈는 진의 싸움을 다시 구경하게 된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식기를 내려놓으며 포도주를 한 모금 마신 다음, 경청하는 자세를 취했다. "이제껏 있었던 상거래와 그다지 관계가 없습니다. 판로는 새로 개 척하면 되는 것이고, 바다의 은혜를 입는 방법은 제가 알려드리지 않았다면 앞으로 몇 백년간 모르고 계셨을 겁니다. 이제 아셨으니 니 따로 시도 할 생각을 하신다고 하셔도 다른 상인 여러분은 저와 는 경쟁이 안될 것입니다." 진의 말에 상인들 중 나이가 더 젊은 30세 후반의 '레이란' 이라는 이름의 남자가 목소리를 높였다. "왜 우리가 경쟁이 안됩니까, 레이디." 진은 그를 돌아보았다. "제가 아는 지식을 여러분은 활용하지 못하실 테니까요. 당장 여러 분의 협조를 얻지 못해서 판로를 확보하지 못한다고 해도, 제 개인 사비로 몇 년 동안은 해녀들에게 수산물의 가격을 쳐 줄 수 있을 정도의 부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완전히 시장을 혼자서 움켜 쥘 수는 없을 것입니 다. 레이디." "네. 물론 그렇지요. 전 최악의 경우를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전 바 다에 대해서 여러분 보다 더 잘 압니다. 이제껏 유통되었던 생선 종 류의 상거래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저는 이미 네얀의 모든 여성들을 제 해녀로 이미 채용했고 그들이 찾아낼 앞으로의 새로운 수산자원 도 미리 짐작 해 낼 수 있습니다. 그것을 가공하여 상품으로 취급할 방법 또한 압니다. 다른 나라에서 흉내를 내게 된다고 해도, 절 앞 지를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한가지 묻고 싶군요. 백작 님." ".....말씀하시오, 레이디." 백작의 마법사와 기사들은 묵묵히 듣고 있었고 사제는 대화에 끼일 찬스를 잡으려고 고심 중이었다. 와이즈와 백작 부인과 귀족 아가씨는 눈을 반짝이며 흥미를 보였고, 백작의 두 아들 또한 흔들림 없는 진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었 다. "네얀은 백작 님의 영지입니다. 그런데 바다도 그렇습니까?" 백작은 생각지 못했던 부분으로, 권리를 주장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 는지 헷갈렸다. 그는 다시 헛기침을 했다. "바다는 여신의 것입니다. 사제 분이 계시니, 인정하실 겁니다. 안 그렇습니까, 사제장님?" "그렇소. 바다 길을 이용하는 것도 그동안 고기잡이를 했던 것도 여 신의 허락 하에 보호받음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신 벌을 면치 못합 니다." "하지만 네얀 시에 사는 여성들과 상인은 세금을 내야 하오." "세금을 낼 것입니다. 백작 님. 제 말은 앞으로 개척 될 수산시장의 상권과 신전의 사제장님께서도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 진주 양식 권 을 다른 상인 분들에게 맨입으로 그냥 줄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세금을 내겠다니, 백작의 경계는 일단 풀어졌다. 어떤 식 인지만 협 상하면 될 일이었다. 론 백작은 웃음기를 띄고 호의를 비치기 시작했다. 상인 중 다른 한사람인 세네스는 진의 말에 반발했다. "독점입니다, 레이디. 상거래가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레이디 말씀처럼 모르고 있었지만, 이제 알았으니 충분히 다른 상인들도 시 도 할 수 있는데 왜 우리는 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까? 레이디께선 너무 우리 네얀과 네카르도를 가볍게 보시는 겁니다. 그 먼 드리얀 의 영향력을 어떻게 이곳에 끌어오시려는 건지요." 진은 다시 식탁의 아래 방향으로 눈을 돌렸다. "여러분은 성공 못합니다. 드리얀과 관계없습니다. 드리얀 역시 바 다와 면해 있고 이곳과 같거나 다른, 해양 자원을 개발 해 낼 수 있 을 겁니다. 제가 돌아가게 된 후라도 말이지요. 그 문제와 제가 드 리는 이야기는 초점이 다릅니다. 말씀 드렸다시피, 바다 수산물은 종류가 많습니다. 다른 항구도시에서도 알게 되면 시도하겠지요. 많 은 수산물이 갑자기 쏟아지면 공급이 초과해서 해녀들은 일에 대한 제값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상거래는 제가 보기엔 아직 대륙과 대륙의, 나라와 나라의 물물교환 수준입니다." 진은 포도주를 한 모금 마셨다. "전 유통에 따르게 될 문제를 미리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 러분과의 경쟁이 되지 않는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바다는 자 원이 풍부하지만 현재 해녀에게 의존해서 채취할 수 있는 조개는 시간이 지나면 고갈 될 수 있습니다. 고갈되지 않게 조치하는 과정 을 여러분은 모르십니다. 가격 역시 공급이 지나치면 바닥을 밑돌다 가 나중에 귀해지면 폭등하겠지만, 그렇게 되면 사 먹으려는 사람들 이 한정되게 될 것이고, 수산시장은 다시 침체 될 것입니다." 진은 자신의 말이 과장이 많이 섞였음을 알고 있었지만 첫 단추를 잘 끼워야함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있는 대로 겁을 줄 참 이었다. "하지만 그런 부분을 제외하더라도 가장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사제 장님." 진은 열심히 듣고 있는 나이 많은 은빛 머리의 사제 장을 쳐다보았 다. 그는 움찔하며 그녀를 마주 보았다. "이제까지는 바다의 여신을 모시는 사람들이 신을 두려워하여 바다 를 함부로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제 여신의 사랑을 믿고 바다 에 손을 대기 시작하면 아주 쉽게 바다는 오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역시 바다를 낀 다른 나라들도 그러할 테고, 수산자원 은 인간의 탐욕으로 먼 바다로 물러날 것입니다. 그래도 됩니까?" "무슨 말씀이신 지...레이디." "바다를 신의 몸이 아닌, 더 친숙하게 느끼게 될 것이란 말입니다. 그것은 어찌 보면 현재로서는 좋은 시작이지만 장기적으로 보게 되 면 인간은 그런 여신의 사랑에 배신하게 될 것이란 소리입니다. 두 려움을 잃으면 어떻게 될까요? 마구잡이로 바다를 파헤치게 될 겁 니다. 바다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비단, 양식이 되는 조개와 진주 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금도 보석도 금속 또한 얻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다시 서로를 흘끗거렸다. 금과 보석을? 하는 얼굴로. "쉽게 가까운 미래를 예측한다면, 사람들은 뒷골목 쓰레기와 오물을 바다에 내다버리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명령으로 막는다고 해 서 될 일이 아닙니다. 바다는 더러워질 테고 깨끗한 물에서만 사는 많은 해양식물과 동물들은 인간과 멀어질 겁니다. 그러면 다시 여기 사람들은 가난해질 테고, 신을 모독하는 행위를 하게 될 것이란 말 입니다. 제 말이 믿기지 않을까요? 사제 님과 상인 분들이 계시니 인간의 본성에 대한 충분한 동의를 하실 수 있으리라 봅니다. 백작 님. 백작 님의 영지에 면한 바다를 아드님과 손자 분들께도 여 전히 황금어장으로 물려주고 싶으시다 면, 방법을 모르는 사람들을 고용해서는 안됩니다." "..........." 솔직히 공장폐수나 생활폐수가 지독하지 않는 이 세상에서 바다가 오염이 되면 얼마나 되겠는가. 하지만 진은 자신의 시도로 이 아름 다운 곳의 환경에 조금의 부정적인 미래도 오지 않길 바랬다. 그래 서 여신의 신전을 이용하리라 마음먹었다. "그렇다면 안되오! 여신께 노여움을 끼칠 일을 허락할 순 없소." 사제의 말에 진은 다음 말을 이었다. "제가 말씀드리는 우려의 예측은 지금이 아니라 몇 년, 몇 십년 후 의 일입니다. 그래서 바다에 대한 지식이 없는 상인들께 제 상권을 나누지 않겠다는 소리입니다. 전 개척에 따르는 부작용을 최소화 할 수 있는 방법과 개척된 바다를 최대한 이용할 방법과 심지어 바닷 물을 이용하고 바닷바람을 이용해서 에너지를 창출할 수 있는 방법 까지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진의 말을 모두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모르니까 나설 수 없는 입장이 되었다. "하지만 무작정 독점하겠다는 말은 아닙니다. 제 지시대로 제 영향 권 안에서 바다를 개발하고 판로를 뚫을 의사가 있다면 최대한 악 영향이 발생하지 않을 선에서 다른 상인 분들도 도울 것입니다." "그렇다는 말씀은....." "바른 방향으로 돈을 벌고, 번 돈을 쓰실 수 있는 인품을 가지신 분 들은 저도 외면하지 않겠다는 소리입니다." 상인들은 눈치를 봤다. 그들은 시민들에게 그다지 호응을 받지 못하 던 상태였으니까. 그리고 저 검은머리의 소녀는 분명 그냥 있는 조 개를 주워 파는 정도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정도가 아닌 듯 했다. "기회를 얻고자 하시는 분들에게 전 항상 기회를 드렸습니다. 두 분 의 평판과 이 자리에 오시지 않은 소수 다른 상인 분들의 평판도 전 알고 있습니다. 운이 좋으신 겁니다. 기회를 잡으실 수도 있습니 다. 제가 아는 지식을 공유하실 수 있지요. 제가 알려드리는 방법으 로 상업을 하시겠다면 그렇게 해서 번 돈을 제대로 쓰시겠다면 기 꺼이 여러 분야의 상권을 나눠드리겠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레이디 그렇지만....." "바다를 만만히 보지 마십시오. 항해를 해 보신 적이 있으실 겁니 다. 바다는 인간에게 마지막 보루입니다. 처음 시작이 너무 빨리 온 것입니다. 제 잘못일 수도 있지요. 하지만 여러분이 바른 방향으로 앞으로의 수산 상권을 이끄시게 된다면, 오히려 대륙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진에게 설득 당했다. 그들은 진의 계획대로 바다 자원을 개척할 것이다. 그리고 육지와의 판로 역시 대신 뚫어 줄 것이고, 신전의 감시와 협 조 아래 폴로네오를 선두로 다른 나라의 바다에 영향을 끼치는 최 초의 상인들이 될 것이다. 심지어 영주는 네얀 시의 하수 정화시설에 대한 조언까지 받았다. 네얀은 전염병이 드문 도시가 될 것이다. 진은 그들의 지배 하에 있는 몇몇의 노예들에게 인권을 주는 개인 적인 문제까지 약속 받았다. 사제 장은 진주에 대한 얘기를 더 물어왔다. "진주 양식에 관한 것은 조개나 해양 동식물을 얻는 것보다 훨씬 더 오랜 미래 동안 알 수 없었을 지식입니다. 그 문제 역시 민감하 게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한가지씩 하지요. 전 상권을 쥐고 계시는 분들을 통제할 것입니다. 보석을 낳을 방법에 대해서는 서두르지 않 겠습니다. 보석은 귀해야 보석입니다. 현재로서는 채취하게 될 조개 에서 얻을 수 있는 진주만으로도 큰 수확이 될 것입니다. 지나친 욕 심은 화를 부릅니다 사제 장님." 후식으로 나온 과일 푸딩이 진과 와이즈 것만 빼곤 손도 대지지 않 은 채 식탁에서 거둬들여졌다. 자리를 옮겨 저녁 만찬 후 보통, 귀족들이 사교생활을 나누는 성의 응접실에서. 진은 상거래에 대한 조언과 상권을 조금이나마 더 확보하려는 속셈 의 상인들과 영향력을 행사할 목적의 사제 장과 백작에게 계약서를 써 주고 그 자리에서 사인하게 했다. 그리고 뭔가 빠진 듯한, 속은 듯한 기분을 느끼기는 했지만 그들은 만족했다. "레이디. 당신은 현자로군요." 백작의 마법사는 대화에 제대로 끼지도 못했지만, 응접실에서 그들 의 협상을 말없이 지켜보다가 진에게 그런 말을 했다. "현자요?" "레이디께서 하신 말씀은 솔직히 전 다 이해를 못했습니다. 그것은 지식이 아니지요. 배워서 축적되는 것이 지식이고 대륙에서 유일한 새 발상과 상거래에 이용된 과정에서 들어 난 레이디의 지식은 지 식이 아닌 지혜겠지요. 누구도 대륙에서는 그런 내용의 지식을 가르 칠 사람이 없다는 것쯤은 저도 알 수 있으니까요. 지식이든 지혜이 든 그것을 활용할 수 있다면 현자가 아니고 뭐겠습니까." "............." "드리얀의 작은 영지의 레이디로 보이지 않습니다......" 와이즈와 같은 차림새의 금색 수가 놓인 허리 두르게를 한 그는 진 의 정체에 대해 궁금해했고, 진은 공갈과 사기가 섞인 협상이 끝난 마당에 듣게 된 말로 조금이지만 뒷머리가 따가워졌다. "머지 않아 알게 되실 겁니다, 마법사님. 지금은 여행의 시작 단계 라 귀찮은 일을 피하기 위해 신분을 다 알려드리지는 못하겠군요." "부모님 존함이라도....험." 백작은 진을 가계에 끌어들일 생각을 했다가 큰아들의 약혼녀인 귀 족 아가씨의 째리는 눈초리에 말을 멈췄다. 진은 그들에게 동 대륙 모든 바다에 면한 도시들과 접촉해서 바다 자원의 개발과 유통에 선구자가 될 것을 권했다. 뻘이 있는 곳은 필수적으로 더 신경 써야 함과, 그 곳의 영향력 있 는 상인들을 직접 선택해서 연계할 것과, 여신의 신전의 통제와 협 조로 수산물을 유통시킬 것과, 다른 신전에는 바다자원의 개발에 따 른 위험성을 인식시키고 함부로 아무 상인이나 바다에 관여하지 못 하게 조치 할 것 등등....... "이야기가 너무 길어져서 피곤하군요. 먼저 쉬어도 되겠습니까?" 그들은 벌떡 일어나 진의 에스코트를 자청했고 와이즈는 또 입을 가렸다. "신사 분들 너무 하세요. 전 레이디 진과 말 한마디 못 나눠 봤습니 다. 제게도 기회를 주셔야 지요. 가세요. 저와 가까운 방이니까, 안 내해 드릴게요." 백작 가의 약혼녀는 진의 팔을 슬며시 잡고 기사와 자신의 약혼자 를 제치고 재빨리 응접실을 나왔다. 백작 부인이 따라 나와 인사를 했다. "쉬세요. 아가씨. 남자 분들은 좀 더 얘기를 나누시겠답니다." "저녁 맛있었습니다. 백작 부인. 따뜻한 대우 감사합니다." 그녀는 얼굴에 미소를 띄고 아들의 약혼녀와 진을 방으로 올려 보 내 주었다. [29] 4-2. 최초의 여현자(2) "당신은 정말 대단하군요. 전 어떤 귀족영애도 그처럼 완고한 남자 들 앞에서 한마디도 쳐지지 않고 수준 높은 대화를 하는 것을 보지 못했어요. 상업 지식을 가르쳐 주기까지 하며 대화를 이끄시다니." 진은 불편했던 허리 두르게의 핀을 뽑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평민들이 사용하던 침대와 다르게 성에 있는 손님용 침실에는 나무 를 폭넓게 다듬어서 이어 붙이고, 두꺼운 천안에 많은 양의 옷감을 넣어 만든 메트리스가 올려져 있었다. 흰 시트가 씌워진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서 진은, 그녀를 올려다보았 다. "주무시게요? 죄송해요. 제가 너무 실례를....방까지 따라 들어와 서...." "괜찮아요. 실례 아니에요. 아가씨도 앉으세요." 그녀는 다시 자신을 소개했다. 네카르도의 수도에 후작 아버지와 오빠들을 가족으로 둔 17세의 후 작 영애였다. 그녀는 남자들과 기사들이 우글거리는 집 안에 갇혀 지내는 것이 숨막혀서 약혼자의 영지에 놀러와 있다고 했다. "제 이름은 미르나 폰 훼이른 이에요. 그냥 미르나라고 부르세요." "백작의 성엔 가운데 이름이 없던데...." "예에. 후작과 공작의 경우에만 이름이 세 개 에요. 대륙이 모두 그 래요. 여기 백작 님은 저희 집안 보다 아래 귀족이지만 전 일부러 이곳을 시댁으로 택했어요. 집에서 멀어지고 싶었거든요. 네얀은 상 업도시라 조금 더 자유로울 것 같아서요. 저희 집안은 너무 고지식 하거든요. 게다가 제베르타 백작 가는 꽤 부자잖아요. 백작부인이 하고 계시던 장신구 보셨지요? 호호...이제 아가씨 덕에 더 부자가 될 테고, 제 약혼자가 영지를 물려받으면 저도 부자가 되겠지요." 진은 피식 웃었다. "음. 제가 너무....속 보여요?" "아니요. 오히려 솔직해 보여서 좋은데요." '그 정도야 귀엽지.' "전 이곳의 귀족층의 생활을 잘 몰라요. 얘기를 듣고 싶네요. 약혼 자를 좋아해서 결혼 의사를 가진 것 같지는 않은데. 집안이 기사가 문이라면 기사 분들 중에 마음에 드는 남자는 없었던가요? "멋진 분들이 있긴 하죠. 하지만 전 검술 수련만 하는 고지식한 남 자가 싫었어요. 너무 딱딱하고. 땀 냄새나는 사람들 곁에서만 살다 보니..." "약혼자분도 기사가 아니었나요?" "그렇지요. 하지만 그는 허울뿐인 기사 에요. 호호. 네얀 영지를 물 려받으려면 검술 수련보다 상법과 항해를 공부해야 하잖아요. 대부 분 귀족 자제들은 기사 칭호를 가지고 있지만 제 약혼자처럼 작위 를 물려받게 되어 있는 경우에는 영지의 특성에 따라 다른 방면을 교육받는 경우도 더러 있거든요." 귀족 아가씨들은 성년을 맞게 되면 정혼자가 있는 경우, 남편이 될 사람의 영지에 출입이 자유로워지고 16년 간 집안에 갇혀 신부 수 업을 받는 과정에서 대부분 많이 지치기 때문에 성년식을 통해 사 교계에 데뷔하게 되면 괜찮은 신랑감을 택하는 일에 열을 올리게 된다고 한다. 대륙의 귀족들은 기본적으로 비슷한 풍습을 가지고 있 고 몇 몇 나라를 제외하면 큰 차이가 없다고 한다. 귀족 영애는 집안과 집안을 결속시켜주는 매개체 역할을 하기 때문 에 권력과 부를 지키려는 그들의 습성 탓에 가까운 친족과 결혼하 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하지만 부모가 배필을 정해 주려는 것에 본인이 싫다고 하여, 그녀 의 의사가 반영되어 비교적 자유롭게 약혼자를 택할 수 있었던 것 은 그녀의 오빠들의 입김이 컸단다. 꼼짝없이 부모의 영향권 안에서 소녀 시절을 보내고 정해진 상대에 게 지참금을 바리바리 싸들고 팔려가다시피 하는 귀족 아가씨도 많 다고 한다. "제 지참금은 기사단이에요. 제베르타 백작 님은 그것에 혹해서 저 희 부모님과 사돈을 맺으셨지요. 결혼 전에는 여자들은 어떤 스캔들 에도 휘말리면 안 되요. 소문이 있는 아가씨들은 훨씬 못한 가문에 허리 숙이고 들어가기도 하거든요. 정말 웃기지 않아요? 그러면서도 대부분 귀족 신사 분들은 뒤에서 호박씨를 많이 까요. 여자들에게는 조신하지 않으면 온갖 비난을 퍼부으면서, 자기들은 결혼 전이나 후 나 평민들을 상대로 연애질이지요." "미르나의 약혼자도 그래요?" "........그것 땜에 와 있는걸요. 그는 벌써 20세 에요. 여자가 없었겠 어요? 전 정말 그 꼴은 못 보겠어요. 좀 더 낮은 지위의 귀족이라면 제 부모님을 어려워해서라도 바람을 덜 피우지 않을까 했는데 별 차이 없더라고요. 그는....벌써 사생아도 있어요." 결혼 한 후라도 귀족 부인들은 그다지 개방된 생활이 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일단 후계자를 낳으면 많이 자유로워진다고 한다. 그러다 과부라도 되면 더 없이 자유로워지긴 하지만 소수에게 찾아오는 행 운(?)이고 집안 살림 외에 가진 기량을 펼칠 만한 공간이 제한되어 있었다. 모시는 신에 따라 남자들도 여자들도 가치관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 에 모든 나라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미르나는 다른 나라의 경우는 이야기로만 들었기 때문에 자신이 아는 것만 얘기를 해 주었다. "왕족은 어때요?" "왕족이요? 호호..왕족은 보통 귀족보다 더 하지요. 왕자와 왕께서는 부인을 여럿 두시잖아요. 그야 뭐....왕비가 되고 싶어하는 아가씨들 도 있지만 전 후궁은 되고 싶지 않대요. 왕녀나 공국의 공작 영애인 공주님들은 저희보다 더 기회가 없지요. 타국으로 외롭게 혼자 시집 가는 경우도 많아요. 좀 불쌍한 분들도 계시답니다." ".........." "진. 그런데 그 마법사 님이요. 정말 너무 멋지더군요. 게다가 같은 집안 귀족이고, 함께 여행 다니시는 게 너무 부러워요. 저도 마법사 를 고를 걸 그랬나봐요." "와이즈요?" "네. 정말 너무 잘생겼던데. 연인 사이 아니에요?" "....아닌데요?" "그래요? 진에게만 말을 내려서 전 두 분이 약혼한 사이인 줄 알았 는데.....수도에서도 유명한 클레이스님 못지 않았어요. 저도 몇 번 밖에는 못 봤지만요." "그는 누군 데요?" "네카르도에서 20세 전후의 가장 인기 있는 기사 님 중 한 분이시 죠. 고급에 속하는, 거의 소드 마스터 수준의 실력을 가지고 계시고 정말 잘 생겼거든요. 사모하는 귀족 아가씨들은 많아도 아직 정혼자 가 없어서 더 인기 에요. 그리고 그분의 친구 분도 계시는데, 그 분 은요...엘프에요!" "엘프?" "예. 사교계에 잘 나오시지는 않지만, 정말 보기 드문 종족이잖아요. 클레이스님과 아주 가끔 파티 장에 오시기도 했어요. 그 분은 더 멋 져요. 음유시인인데, 정말 녹아 버리게 생겼는걸요. 그런데 당신의 마법사 분도 못지 않더군요. 좋아하진 않으세요?" "......글쎄요." '글쎄? 내가 드래곤을 남자로 봤던가?' 진은 문득 그의 등을 토닥거렸을 때, 와이즈의 질린 얼굴이 생각나 서 웃음이 나왔다. 미르나는 십대답게 네카르도의 인기 있는 기사나 귀족자제나 젊은 영주나 신관들에 대해 파삭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고 내내 수다를 떨어댔다. 진은 수경을 보는 것 같아서 미소를 지우지 못하고 끝까지 잘 들어 주었다. 사교 파티 장이 아니면 비슷한 또래와 만나기도 힘들고 해서, 미르 나에겐 진이 더 없이 좋은 수다 상대였을 것이다. 그녀는 자정이 지 났음을 늦게 야 깨닫고 미안해하며 인사를 하고 자신의 방으로 물 러났다. '정말 재밌네. 남편이 죽어야 자유로워진단 말이지....음모가 많은 세 상이겠구나...' 진은 코웃음을 치고 다시 한번 사람 사는 곳은 어디든 비슷한 면이 있다는 생각을 하며 잠을 청했다. * 물먹은 솜처럼 피곤해서 푹 잠들었다가 진은, 열려진 커텐에서 햇살 이 비춰 들어오는 것을 느끼고 일어났다. 성의 정원수가 창가에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잎새를 드리우고 그 사 이에서 들려오는 작은 새의 지저귐이 무척 싱그럽게 느껴졌다. "어머, 아가씨. 빨리 일어나셨네요. 아직 8시도 안되었는데...." 조심스럽게 방에 들어오던 하녀가 진이 속치마 바람으로 창가에 서 있는 것을 보고 놀라며 말했다. "의복을 갖춰드릴까요? 아니면 차를....?" "가볍게 먹을 아침을 준비 해 줄래요? 빵과 우유면 되요." "예에. 기다리세요. 금방 가져오겠습니다." 귀족들은 대부분 늦게까지 사교생활을 하고 아침은 9~10시쯤에나 일어나서 늦은 아침을 먹는다. 하녀는 다른 귀족과 다르게 자신에게 높임말까지 하며 예의바른 진 에게 감사를 표하고자 바삐 주방으로 내려갔다. 진은 어제 입었던 여행 복 차림으로 아침을 먹으면서 시중을 들어 주고 있던 마을 처녀에게 부탁해서 신전의 마르카 사제에게 전갈을 보냈다. "와이즈. 아침 먹었어?' 와이즈는 백작의 마법사와 함께 성내 정원 벤치에 앉아서 5써클 마 법 주문이나 유동력에 대한 의견을 질문을 받고 있었다. "레이디, 진. 부지런하시네요. 이렇게 이른 시간에 뵙게 되다니. 편 히 주무셨나요?" "네. 덕분에요." 마법사들은 보통 이른 아침 시간을 수련시간으로 삼기 때문에, 그도 아침 일찍 자신의 방에서 마나를 축적시키고 있었는데 정원에 나와 있던 와이즈를 발견하고 내려와서 그를 귀찮게 하고 있던 중이었다. [이 녀석 좀 떼어 내줘라, 귀찮다.] 진은 와이즈의 목소리에 피식 웃으며 성의 마법사에게, 백작 님께 기별을 하지 않고 그냥 가게 되어서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게 했다. "가시다니요. 몇 달 머무르시는 것도 아니고 단 하루 계시다가 그냥 가신다 고요?" "아- 시내에 들러서 사람들을 만나봐야 할 일이 있거든요. 지시할 것도 있고 해서. 성내에서는 할 일이 없으니까요." "기다리세요. 제가 백작 님을 모셔오겠습니다. 아침조차 드시지 않 고 그냥 가신다니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이렇게 이르게....기다리세 요, 레이디." 그는 뛰어갔다. "저 사람도 5써클인데, 같은 써클 사람에게도 얻을 게 있는 거야?" "써클이 같다고 모두 같은 수준은 아니다. 마법 주문 활용하는 것은 사람마다 다르니까 다른 사람 것을 참고하면 이로운 점도 있다. 암 튼 인간마법사들은 끈질기기가 오크 못지 않다니까." 진은 와이즈의 옆자리에 앉아서 싹이 돋아있는 나무들과 봄꽃이 피 어 있는 정원을 구경했다. "네얀에서의 일은 다 끝난 거야?" "아니. 이제 시작이잖아. 하지만 상인이나 신전이나 영주도, 서로 연 계하면서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자신들의 이익을 확보하려고 할 테니 까, 알아서 돌아가게 될 거야. 폴로에게 몇 가지 더 주의할 점을 지 적해 주고 콜린스네 여관에 들르고 나면....." "....나면?" "비교적 빨리 일이 처리되었어. 그들을 모두 한 자리에서 만나게 되 어 다행이야. 이제 내가 없어도 될 거야. 하지만 다른 상인들 중에 서 반발할 사람이 있을 지도 모르니까, 길드 장에게 알아봐 달라고 했어. 소문도 있는 대로 내라고 했고.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해서 문 제 없을 것 같으면 그냥 가고, 아니면 몸 좀 풀어야지..." "..........." 만류하는 백작에게 아침식사는 이미 했으니 시내를 좀 돌아다녀 보 고 다시 오겠다는 말로 겨우 영주의 성을 빠져 나왔다. 하지만 마부가 딸린 마차에, 피터 패터슨의 호위를 받는 것은 피하 지 못했다. 그다지 먼 거리는 아니어서 금방 도착한 네얀 시내에서 진은 의아해 했다. "어라? 이르긴 해도 벌써 9시경인데 시내에 사람이 없네?" 진은 여신상 앞에서 마차를 돌려보내고 인적이 드문 휑한 광장에서 머리를 갸웃거리다가 신전으로 들어가서 마르카 사제를 찾았다. 신전 안에도 사제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진은 묘한 도시의 정적에, 기사 피터와 와이즈와 함께 예배 실에 멀 뚱히 서 있게 되었다. "레이디, 진이시죠?" "네에." 그는 신전에서 사제가 되기 위한 과정을 밟고 있는 14살 소년이었 다. "바다로 가보세요, 레이디. 모두 그 곳으로 몰려가 있거든요. 사제 님들도 모두 동원되었어요." "..........." 진은 와이즈와 피터와 함께 신전을 나와, 어제 그녀가 물질을 시범 보인 곳으로 향했다. 바다가 보이는 바위투성이 해변에 서자 진은 말문이 막혔다. "난 네가 추진력이 강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닌가보다. 다른 인간들도 마찬가지네. 성격 급한 것은 인간이 제일이라니까." ".........." 거의 모든 네얀 시 시민들이 몰려와 있는 것 같았다. 사제들이 군데군데 마을 사람들을 통제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진은 자신이 만들었던 계약서를 눈으로 보았다. 시민들은 진과 계약한 상인들과 그들의 고용인의 지시에 따라서 물 질을 할 해녀들과, 그녀들이 채취한 조개에서 진주를 골라낼 사람들 과, 수산물을 이용해 요리법을 개발할 사람들, 수산물 전문 요리식 당으로 전환한 식당주인들과, 네얀 시에서 앞으로 개발될 수산물을 다른 도시나 나라에 유통시킬 중소상인들과, 그들을 호위할 용병들과, 뱃길을 타고 동 대륙의 다른 바다에 같은 식으로 진출할 상인과 선장들이. 구분되어 이름을 적고 그 자리에서 채용되고, 계약하고. 젊은 여자들은 해녀로 등록되자마자 바다로 뛰어들고, 먼저 들어갔 던 여자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수면으로 떠오르고....한마디로 아수라 장이었다. 희망 섞인. 기쁨이 넘치는, 아수라장. 진주가 발견된 듯 환호성을 지르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사람들은 고개를 향하고 축하의 말을 하면서 손을 흔들어 댔다. 아이들이 몰려다니며 덩달아 기뻐하고 있었다. 진은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그들은 너무 순박했다. 이곳은 바다와 땅과 하늘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끊임없이 희망을 찾았을 것이다. 단 하루. 그들을 위해 단 하루동안 한 일이 어떤 의미였는지, 진은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 광경을 보고 다시 새롭게 깨달았 다. "아주, 폭동이라도 일으킬 분위기네." 와이즈의 말에 피터는 움찔했지만 그도 난생 처음 보는 광경에 말 을 잃고 있었다. "레이디!" "아가씨!" "마법사님!" "레이디, 진.!" 사람들이 그녀와 일행을 발견하고 뛰어와서 진이 귀족이라는 것을 잊은 듯 몸에 손을 댔다. 그리고 끌고 가다시피 하며 군중 속에 가뒀다. 그들은 모두 들떠 있었고, 기뻐하고, 감사해 하고, 그들이 해낸 일을 그녀로 인해 할 수 있게 된 일을 보여 주며 허리를 숙였다. 눈물을 흘렸다. 진을 위해 기도를 했다. 진은 고향에 왔음을. 이 차원에서. 쌍둥이별이 뜨는 세계에서. 바로 그들이. 그녀를 기다 려 준 사람들이었음을. 열렬히 그녀를 받아 주고 있음을. 가슴 아프게 의식하고.... 고개를 숙였다. 마르카 사제의 도움으로 진은 겨우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빠져 나 왔다. 진은 충혈 된 눈으로 그의 말을 들었다. "레이디께서 소문을 있는 대로 내어 달라고 하셨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미 어제 저녁 식탁에서 레이디께서 하신 일을 네얀 시민들이 모두 알았으니까요. 아침에 폴로네오님께서 해녀가 되길 원하시는 여성분들은 등록을 해야 한다고 마을 사람들에게 알렸는 데 그 말을 듣고 모두 몰려왔습니다. 처음엔 나이든 할머니 분까지 하겠다고 나섰지만 레이디께서 미리 말씀하신 대로 노약자는 좀더 부담 없는 일에 채용하시더군요." ".........." 진은 차가운 아침 바닷바람이 전혀 춥게 느껴지지 않았다. "하루에 3시간 이상 물질을 못하도록 사제 장님께서 강조하시고 여 성분들만 바다에 들어가게끔 조치하셨습니다. 앞으론 가장 적당한 시간대를 택해 하루에 두 번 나눠서 바다에 들어가게 될 겁니다." 사람들이 저마다 새로운 일거리에 매달려 정신이 없어 보였지만, 몇 명의 사람들은 떨어져서 바위에 걸터 앉아있는 그들에게 손을 흔들 어 보였다. "하마터면 난장판이 될 뻔했는데 레이디께서 나눠주신 상권을 가지 신 상인 분들이 통제해 주셔서 질서가 이뤄졌습니다. 북 대륙에서 돌아오게 될 다른 상인 분들은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네요. 이미 거의 모든 네얀 시의 시민들이 레이디께 고용된 셈이니, 일부 상인 들의 힘으로는 어쩌지 못할 겁니다. 하하하....레이디 진. 하루아침에 거대해진 수산 상권을 손에 쥐신 기분이 어떠 신지요. 제가 보기엔 대륙에서 손 뽑히는 부자가 되신 것 같은데." 마르카는 밝은 기분에 그 자신조차도 놀라웠던 풍경을 다시 바라보 며 말을 이었다. "그저 조개를 얻어 굶주림을 벗어나는 정도인 줄 알았습니다. 그 정 도만도 대단한 일이지요. 하지만 레이디께서 일깨워 주신 방법으로 네얀 시의 주민들은 거의가 새로운 직장을 잡았습니다. 이런 일이 가능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해 봐서 저도 정말 놀랐습니다." 그랬다. 그들은 상거래라고 해봐야 직접 잡은 생선을 자신의 가게에서 팔거 나, 북 대륙을 왕래하며 값비싼 향료나 특산품을 사 들여와 비슷한 물품과 교환해서 보내거나, 상인들이 몸소 나라와 나라를 넘나들며 작은 가게를 가지고 있는 상점 주인들에게 파는 형식이었다. 이곳은 경제면에 있어서 유통에 필요한 단계가 들쭉날쭉했고, 오랜 세월 교류를 통해서 얻을 상업지식과 유통지식을 축적하지 못한 탓 에 진의 눈엔 그들의 상거래라고 하는 것이 소꿉장난으로 보일 정 도였으니까. 그녀는 뉴욕에서 성공한 사업가였다. 하루 밤사이에 그녀가 가르쳐 주었던 것들은 아주 기본적이고 아무 것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것만으로도 그들에게는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진이 각각의 유통과정에 있어야할 중간 상권을 나눠 구분해 주지 않았더라면 시작부터 엉망이 되었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들은 의심 없이 그녀의 말에 따라 주고 있었다. 와이즈와 함께 바위에 앉아 있는데 진의 눈에도 익은 분홍색 머리 의 아가씨가 물에서 막 나왔는지, 모포를 몸에 두르고 걸어 왔다. ".....아가씨. 전 오늘 보름을 일해야 벌 수 있을 돈을 한시간 동안 벌었어요. 이것 보세요." 그녀는 폴로네오에게 즉석에서 지급 받은 은화 한 개와 동전 몇 개 를 보여 주었다. 그녀의 입술은 추위로 새파래져 있었지만 행복으로 두 눈을 반짝이 고 있었다. "정말 고맙습니다. 정말 고마워요...저희 같은 여자들에게 이제껏 어 떤 귀족 분들도 아가씨처럼 애써주시고 배려해 주신 분을 보지 못 했어요. 정말 고마워요...." 진은 그만 고마워해도 된다고 농담처럼 말하면서 그녀의 분홍머리 카락에서 캐서린과 그녀의 작은 '진'을 떠올렸다..... [30] 5. 진정한 '귀족' 기사 피터는 보고를 위해 성으로 갔다. 진은 폴로네오와 세네스와 레이란 등과 만나서 몇 가지 더 지시를 내리고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물질이 끝난 해녀들이 몸을 녹이기 위해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하는 것과 어느 정도 정리가 되어 가는 것을 확인하고 후크의 여관으로 향했다. 후크와 콜린스와 실비아도 주민들 틈에 섞여 있다가 그녀를 따라 집으로 돌아왔다. "아가씨, 기다리세요. 금방 식사를 준비해 드릴게요." 실비아와 후크는 주방으로 먼저 사라졌다. 실비아는 하루 한 두 번 시간을 내서 물질을 할 것이고, 후크는 여 관 식당의 메뉴에 해산물 요리 한 두가지를 추가시킬 계획이었으며 공급받을 문제도 약속 받은 상태였다. 콜린스는 수도에 있는 마법 학교까지 덤으로 따라갈 만한 상인들의 허락을 얻지 못해 풀이 죽어 있었다. "콜린스. 우린 수도를 지나쳐 갈까 해. 가는 길에 대충 떨궈 줄게. 근처에 데려다 주면 혼자서 학교에 찾아 갈 수 있겠어?" 콜린스는 의자들을 정리하다가 진의 말에 반색했다. "그럼요. 레이디. 수도 근처만 가도 혼자서 갈 수 있어요. 가는 길에 몬스터가 나오는 숲도 있고, 강도 지나고 하니까 좀 위험해서 걱정 했는데....상인들은 출발하려면 준비 기간이 필요하다고 해서 마땅히 끼어 갈 일행을 찾을 수가 없어서 고민했거든요. 저. 마법사 님 따 라 가도 될까요?" 와이즈는 선뜻 그를 동행으로 데리고 수도에 가겠다는 말을 하는 진을 보며 눈썹을 치켜 떴지만 상관없다고 대답해 주었다. 둘만 남게 되자 와이즈는 물었다. "수도로 갈 거냐, 진?" "그럴까 해. 영지마다 돌아다닐 수는 없잖아. 발길 닿는 데로 가지, 뭐. 미르나에게 들었는데 네카르도 수도엔 엘프가 있대. 구경 좀 하 려고. 어쨌든 난 여행 중이잖아. 말로만 듣던 엘프가 있다는 데 가 서 얼굴을 좀 봐 줘야지. 그 후 행선지는 가서 생각해 보자, 와이 즈." "수도에 부자들이 몰려 있어서 가려는 것은 아니고?" 진은 의자에 기대어 상체를 젖힌 채 빙긋 웃었다. "그런 이유도 있지. 여기서 돈을 많이 썼잖아. 투자 금을 회수하려 면 시간이 좀 걸릴 테고....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 "내가 왜 반대 하냐, 쓰는 게 아니라 벌러 간다는데. 하지만 일행이 생기면 먼 거리는 워프 못한다. 눈치 챌지도 모르니까." "참고할게." 와이즈는 태연히 진과 대화하고 있었지만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는 오전에 본 광경으로 인간에 대한 시각이 조금 바뀌어 있음을 알았다. 그들은 진과 일행이라는 이유만으로 그에게도 축복과 감사 의 기도를 주었다. 그 많은 사람들의 감정이 혼잡하기 이를 데 없이 밀려들어와서 진 실 탐지 마법을 쓰는 것을 중단해야 했다. 드래곤이 인간을 부러워하는 것이 아니냔 소리를 했던 진의 말이 떠올랐다. 어쩌면.....그랬는지도 모른다. 그 작고 하찮은 존재들이 짧은 인생을 사는 것이 이유였던지, 어떤 종족의 것 보다 강렬하고 선명한 감정으로 아우성침을 느꼈었다. 그 파동이 머리 속을 헤집어 놓을 정도였다. 그는 인간에게 드래곤도 휘둘릴 수 있음을. 압박감을 느낄 수 있음 을, 그 한순간만은 인정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심리를 이끌어 낸 이 여자는 더 놀랍지. 인정한다, 꼬 마야. 넌 <신>이란 존재에게 선택받을 자격이 있었다.' 식사를 하고 성으로 가는 길에 진은 마르카 사제를 다시 찾았다. 그는 정신 없던 오전 일의 뒤처리를 위해 신전에 돌아와서도 바빠 보였다. 진은 와이즈에게 그들의 대화가 새어 나가지 않게 하는 종류의 마 법을 써 주길 부탁했다. "길드장님. 전 오늘 내에 네얀을 떠날 거 에요. 보수 문제는 결정하 셨어요?" 마르카 사제는 그녀의 말에도 주위 사람들이 동요되지 않는 것을 알아채고 와이즈에게 눈인사를 했다. "레이디, 진. 보수는 이미 받았습니다. 지나치다 싶을 만큼 요. 정말 따로 더 주실 생각은 아니시겠지요?" 웃음기 어린 그의 말에 진은 미소를 지었다. "그것과 이것은 다른 문제지요. 계산은 확실하게 하는 것이 좋으니 까요. 원하신다면 보수를 드릴 수도 있겠지만, 이미 받으셨다니. 제 가 청했던 문제를 길드 측에서 실행해 주셨으면 합니다." 마르카 사제는 진의 말에 그녀가 정말 '사업가' 임을 깨달았다. 그녀는 쉬운 존재도 우연한 존재도 아니었다. 사제는 그들을 신전 밖으로 데리고 갔다. "원래는 사제니까요. 여신 앞에서 뒷거래를 하고 싶지 않아서요. 하 하... 받으세요, 레이디." 그는 목에 걸어 옷안에 감추어 두었던 도둑 길드 장을 증명하는 패 를 꺼내 건네 주었다. "............" "통신 마법으로 힘닿는 한 모든 도시와 나라에 연락은 취해 두겠습 니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경계를 늦추지 않는 분들은 많을 테니까 요. 레이디께서 이곳 네얀에서 해 주신 일은 그 패와 교환하는 것으 로도 비교되지 않을 큰일이었습니다. 정말 감사 드립니다." 그가 건넨 메달은 은으로 납작하게 만들어져 있었고, 도둑 길드를 상징하는 듯 보석 모양의 무늬가 처음 보는 금속이 섞여서 새겨져 있었다. "그 메달은 신분만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제가 약간의 신성력을 모 아서 넣어 두었습니다. 부정한 것에 현혹되지 않게 하거나 경고를 해 줄 겁니다." "......고맙습니다. 길드장님." "천만 에요, 레이디. 전 앞으로 네카르도와 바다를 낀 다른 나라들 이 이 곳처럼 변해갈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기쁩니다. 저뿐 만 아니라 모두 그렇겠지요. 적어도 네얀의 도둑길드 만큼은 통째로 사신 겁니다. 다른 도시에서 길드의 힘이 필요하시면 그 패가 도움 이 될 테니 가져가십시오." 그는 시종 미소를 띄며 말을 했다. "이제 저는 사제일 뿐이고 네얀에서는 도둑들을 육성할 필요가 없 게 되었지만, 언제든 저희의 도움이 필요 하시 다면 어떤 방법으로 든 도와 드리겠습니다. 6개월이 아니라 가능한 내내요. 마음 같아서 는 함께 따라가 일을 돕고 싶지만 레이디께서 맡겨 주신 일들로 지 금은 엄두가 나질 않네요." 진은 그를 마주 보고 작별인사를 했다. "언젠가 꼭 드리얀으로 가겠습니다. 레이디, 진.' 진은 몸을 돌리려다 그의 말에 잠깐 발걸음을 멈추었다. 마르카 사제는 웃는 얼굴로 와이즈와 진에게 고개를 숙이며 배웅을 했다. 그의 햇빛을 받아 유난히 붉은 기운이 진한 갈색 머리카락이 바람 에 흔들리고 있었다. * "정말 지금 출발하신다 고요, 레이디?" "드리얀에 도착해야할 시일이 얼마 남지 않았거든요. 최대한 서둘러 야 하기 때문에 오래 머무를 수가 없습니다, 백작 님." 잠깐 성에 들러서 인사를 하고 떠나려 했던 진은 또 발목이 잡혔다. 백작 가의 가족들이 죄다 나와 있었다. "레이디. 정말 고집이 세시군요. 그럼....위험한 여행길에 두 분만 보 낼 수는 없습니다. 제 호위기사와 둘째아들을 호위로 데려가십시오. 마법사 님은 계시니 기사들만이라도...." "백작 님. 저흰 도보 여행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서요. 동행이 있으 면 더 늦어집니다. 마법으로 조금씩 이동할 생각인데, 인원이 많아 질수록 먼 거리 워프가 불가능하니까요. 성의는 고맙습니다만, 괜찮 습니다. 저도 제 몸 하나쯤은 지킬 수 있으니까요. 보이는 데로 믿 지는 마세요." 특히 백작의 둘째 아들은 따라가고 싶다는 심정을 얼굴에 대문짝만 하게 써 두고 있었지만, 진은 냉정히 모두 뿌리쳤다. "레이디, 진. 수도에 가신다면 저희 집에 들러 주세요. 저도 곧 돌아 갈 예정입니다만, 저보다 먼저 도착하실 것 같으니까요. 편지를 썼 어요. 혹시 도움이 필요하신 일이 생기면 저의 가문에 꼭 가셔서 오 빠들에게 이 편지를 보여 주세요. 좀 더 함께 있고 싶었는데 정말 아쉽네요. 친구가 되고 싶었는데...." 미르나의 말에 진은 웃음을 띄고 대답했다. "친구가 되고 싶어하신다면 이미 친구이지요. 고마워요, 미르나. 친 절 잊지 않을게요." "꼭 다시 만나고 싶어요." "자유롭고 싶다고 하셨지요? 그렇다면 사람들을 많이 만나보세요. 그건 다른 의미 자유이고 여행이기도 하답니다. 소망이 있다면 꿈으 로만 그치게 하지 마시고 행동으로 옮겨 보세요. 세상을 배우기는 여러 사람을 겪는 것 보다 좋은 방법은 없으니까요." 진은 그녀에게만 들리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대고 속삭였다. "약혼자분 관리 잘하세요. 그렇지 않으면, 우는 것은 미르나가 아니 라 힘없는 평민이 될 테니까요." "..........." 진은 인사를 하고 정말 성을 나갔다. 미르나는 그녀가 한 말의 의미를 곰곰이 생각했다. 진은 귀족이었지만 귀족 입장에서 생각을 하지 않는 듯 했다. 그녀가 네얀에서 한 일을 주워들어 봐도. 그녀는 뭔가....달랐다. 늦게 나마 그녀의 존재에 대해 희미하게 이해가 시작되는 것을 느 끼고 미르나는 성밖을 나가는 진의 뒤에 대고 소리쳤다. "드리얀으로 갈게요, 진. 몇 년이 걸리더라도 꼭 여행을 해 볼게요." 진은 손을 흔들어 주었다. * 콜린스와 만나기로 한 네얀 시 성문 밖에서 진은 턱을 긁적였다. "레이디께서 가신 다니까요....모두 오려고 하는 것을 아빠가 말렸어 요. 번거롭게 해드리지 말자고요. 하지만 이분들은 마을 분들이 아 니라서....." 콜린스와 함께 네얀 시 성문 밖에 나와 있던 사람들은 폴과 그의 일행과, 레나드 일행, 그리고 진에게 대들었던 여검사가 낀 용병일 행과, 인사를 나눌 기회가 없었던 다른 여관의 몇 몇 일행들이었다. 여검사가 진에게 다가와서 가볍게 뒷짐을 지고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사과 드리고 싶어서요, 레이디 진. 실례된 행동을 해서 죄송했습니 다." "사과 받을 정도는 아니었어요. 여행자 분들이 배웅해 주실 줄은 몰 랐네요." 그들은 쓴웃음을 지으며 서로를 바라보며 멋쩍어 했다. 레나드가 말했다. "저희들은 대륙 곳곳을 다니면서 돈벌이를 하고 여행을 합니다. 요 하루 이틀간 네얀 시에서 있었던 일들이 무엇이었는지, 어떤 의미를 가진 일이었는지 네얀의 주민이 아니라도 알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희망'이었습니다. 솔직히 저희들은 귀족 계급에서 저희 같은 평민들 을 명예와 부를 위한 발판으로 쓰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떻게 저항해야 할지 몰랐었습니다." 폴이 나서서 뒷 이야기를 덧붙여 주었다. "하지만 짧은 시간이지만 레이디께선 진정 그들이 했어야할 일들을 몸소 보여 주었었습니다. 레이디께선 그런 의미로 진정한 '귀족'이십 니다. 레이디의 일을 듣고, 보면서 그들에게 무엇을 바래야 하는지. 저희보다 못한 사람들에 대한 입장을 잊지 말아야 함을 조금이나마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 그는 동료들의 말없는 동의와 함께 계속 말을 이었다. "세상을 바꾸는 일을 하는 것은 귀족도 농노도 아닌 평민이라고 하 셨지요. 하지만 저희들은 무지합니다. 방법을 모릅니다. 그렇다면 그 방법을 아시는 분을 따르는 수밖에 없습니다." 폴은 진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기사의 예를 취했다. 진은 당황했고, 와이즈는 위장용. 전시용 마법 진을 열심히 그리는 척하다가 허리를 펴고 팔짱을 끼었다. "저기......" 폴은 진의 허락을 기다리지 않고 무릎을 꿇은 자세에서 자신의 검 을 빼어 땅에 꽂았다. "레이디께서 어떤 사정이 있는지 저희는 알지 못합니다. 기분 같아 서는 지금 당장 따라가고 싶지만 허락하지 않으실 것 같고. 제가 레 이디를 제 주군으로 모시는 문제로 허락을 받기 위함은 아닙니다. 진정한 의미의 귀족 분께 드리는 예우였습니다. 하지만 다음에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때는 저희들을 받아 주십시오. 당신을 찾아가겠습 니다. 레이디 진." 폴의 일행도 레나드의 일행도 다른 이들도. 그의 말에 같은 의사표 시로 고개 짓을 했다. 진은 그들의 희망이 오랜 숙원이었음을, 순수한 호의와 기대를 가지 고 먼 타국 땅에서 찾은 불을 지필 부싯돌의 존재에 의지하려함을 알 수 있었다. "레이디 진. 차례를 기다리러 가겠습니다. 분명히 그렇게 말씀 하셨 지요? 저도 아가씨를 찾아가겠어요." 진은 여검사의 말에 다시 턱을 긁적이다 대답했다. "전 드리얀으로 갈 것입니다. 도움이 필요하다면 누구나 좀더 가진 자에게 요구할 수 있겠지요. 요구하러 오십시오. 오시는 중에 희망 이 절실한 사람들이 있다면 제 이름이 들리는 곳으로 찾아오도록 권해 주십시오. 지금은 그 말 외엔 약속드릴 말이 없네요." 레나드가 웃으며 대답했다. "저희도 지금으로선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레이디. 좋은 여행길이 되시길. 무사히 다시 뵙길 바라겠습니다." 별말이 없던 용병들 중 한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아가씨. 간지러워 못 봐 주겠소. 하지만 나 역시 아가씨가 '귀족'이 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어차피 상인들에게 고용되어 대륙 안쪽으로 갈 테니, 우리도 언젠가는 아가씨의 이름이 들리는 곳으로 찾아갈 겁니다. 급하게 떠나시지 않는다면, 힘 겨루기라도 해보고 힘 좀 키 워드리고 싶지 만요. 지금은 아가씨의 마법사만 믿겠습니다." 진은 웃음 지었다. 아무래도 검에 소질이 없어 보이는 그녀가 못 미 덥다는 소리일 게다. 걱정되니 가르쳐 주고 싶다는 소리일 것이라고 진은 짐작했다. 와이즈는 먼 하늘을 바라보는 시늉을 했다. '걱정 마라, 등치만 큰 녀석아. 드래곤도 발로 차는 여자가 뭐가 무 섭겠냐.' 콜린스가 그들의 대화가 끝나 가는 것을 알고 진에게 뭔가를 내밀 었다. "상인아저씨들과 해녀 누나들이 이걸 가져다 드리라고 했어요. 에.... 급하게 만들어서 멋은 없지만 튼튼하대요." 콜린스는 네얀에서 해녀들을 통해 최초로 채취된, 진주로 엮은 팔찌 를 주었다. 은색 광택의 진주는 알맹이가 꽤 굵었다. 목걸이를 만들기에는 양이 부족해서 팔찌로 만든 듯 했다. "좀 단순하기는 하지만 네게는 어울리겠다, 진. 피부색에 맞는 것 같네." 와이즈의 평을 들으며 진은 팔찌를 왼팔에 끼었다. "가자, 와이즈. 콜린스. 금방 해가 지겠어." 진은 배웅하는 그들에게 미소로 답례를 하고 와이즈가 그려 놓은 일회용 마법진 안에 섰다. "조심하세요, 레이디." "레이디 진. 꼭 찾아뵙겠습니다." "아가씨. 제 몫이 될 차례 잊지 말아요." 진은 일행과 네얀을 뒤로하고 다음 목적지를 향해 워프했다. [31] 6. 버려진 마을 마법진의 웅웅~ 하는 울림이 멎자, 진은 펄쩍 뛸 만큼 놀랐다. 갑자기 장대처럼 쏟아지는 빗줄기가 머리와 어깨를 때렸기 때문이 다. "웃-!" 콜린스도 갑작스런 빗줄기에 당황했는지 자신의 가죽 배낭을 머리 에 이고 엉거주춤 서 있었다. 진은 초저녁 남아 있던 햇살이 빗줄기와 검은 먹구름 탓에 자취를 감춰, 사방이 어둡다는 것을 알았다. "와이즈. 여긴 어디야? 봄인데 이런 비가 쏟아지다니. 네얀이랑 많 이 떨어진 곳이야?" 와이즈는 또 알지 못할 마법을 썼는지, 자신의 주위에 급히 금빛 섞 인 투명한 막을 형성시키고 있었다. 와이즈는 실드의 넓이를 넓혀 진과 콜린스도 안에 들어오게 했지만, 짧은 시간에 이미 그들은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어 있었다. "네얀과 네카르도 수도 사이 중간쯤의 다른 영지다. 지명은 모르겠 는데.....콜린스 여기가 어딘지 알겠어요?" 콜린스는 어두운 들녘 와이즈의 실드 안에 서서 겨우 비를 피하게 되자, 머리카락의 물방울을 훔치다 그의 말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두워서 잘 모르겠어요. 저도 네얀을 벗어나 본 적이 없거든요. 여긴 인가가 없는 것 같은데....." 진은 어두운 벌판을 둘러보았다. 먹구름과 땅을 파헤치는 빗줄기의 갑작스러운 소음으로 귀가 멍멍했는데, 실드 안에 들어와 보게 된 밖은 다른 세상일 같은 기분이 들었다. 와이즈는 운디네나 실프를 불러서 지형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콜린 스를 염두 한 탓에 정령을 부르는 것도 마법을 쓰는 것도 자제해야 했다. "저거 뭐지?" 진은 빗줄기 사이로 멀리에 뭔가 희게 너울거리는 것을 가리켰다. "뭐 가요? 아무 것도 안 보이는데요?" "..........." 와이즈는 진이 가리킨 방향을 눈여겨보았다가, 다시 그녀를 흘끗거 렸다. '정령을 보네. 그것도 어둠에 속하는 것을....' 그것은 숲이나 깊은 산 속 못 주위나 폐허가 된 건물 등지에 깃들 어 사는 어둠 계열에 속하는 정령이었다. 와이즈는 아마도 그곳에 옛 인간들의 집터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진과 콜린스를 데리고 근처로 워프했다. 다 쓰러져 가는 판자 집. 집이라고도 할 수 없을 판자더미들이 군데군데 눈에 띄었다. 어두운 탓에 더 썰렁하고 음산하게 느껴져서 진은 비를 맞은 탓이 라고 둘러대고 싶었지만, 오싹해 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리툰 마법사님. 괜찮으세요? 먼 거리를 이동해 왔는데...." ".....마법 진을 이용해서 그다지 힘들지는 않아요. 분명 근처에 인가 가 있을 텐데. 허허 벌판 한가운데를 좌표로 기록해 두진 않았을 테 니....찾아봐요." "저거 불빛 아니야?" 진은 멀리에서 잠깐 반짝이는 것을 본 것 같아서 애써 시력을 돋구 어 보았다. "불빛 같기도 하고. 제가 가볼게요, 레이디. 여긴 비를 피하기 힘들 겠어요." 콜린스는 빗줄기 사이를 뚫고 뛰어갔다. 진도 이왕 젖은 거. 비속에서 뜀박질이나 하자는 생각에 와이즈에게 먼저 간다고 말하고 실드를 벗어나 콜린스의 뒤를 따라 뛰었다. 다행이 그것은 작은 통나무집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이었다. 몇 채 되지 않는 오두막과 판자 집이 듬성듬성 서 있고, 그 앞 개울 가는 내린 비로 불어 강이 되어 흐르고 있었다. "다행이다....레이디, 여기 계세요. 제가 가서 머무를 수 있는지 알아 볼게요." 콜린스는 시종 일을 자처하고 진을 커다란 나무 아래에 남겨두고 불빛이 새어 나오는 오두막을 향해, 무릎까지 오는 개울을 첨벙거리 며 건너갔다. "이상한 곳이다." 콜린스가 자리를 뜨자, 실드에 둘러 쌓여 느긋하게 걸어오던 와이즈 가 진의 곁으로 텔레포트 해 왔다. "이상해? 난 이곳이 죄다 이상해 보여서 별로 모르겠어. 너 얌체 같 다? 비가 오면 비를 맞아야지." "웃기네. 내가 뭐 하러 일부러 귀찮아질 일을 찾아하냐." "어쨌든 드래곤도 신의 피조물이니 자연의 이치를 거부하면 안 되 는 거 아니야?" 진은 나뭇가지 사이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피해 다시 와이즈의 실드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지만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힌 것처럼 막혔다 는 것을 알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까는 들어갈 수 있었잖아." "그거야, 내가 실드의 범위를 넓혀서 그런 거지. 원래 이건 공격에 대한 방어용이다." 말하면서 와이즈는 다시 실드를 넓혀 진을 안으로 들어오게 했지만 진은 그 혼자 뽀송뽀송 해 보이는 것이 못마땅해서, 머리를 흔들어 댔다. "진. 가만 못 있어? 나가. 이 여자야." 물방울이 튀기자 와이즈는 짜증을 냈지만 진의 행동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콜린스가 가까운 오두막 문 앞에서 손짓을 했다. 와이즈는 실드를 유지한 채 진과 함께 약간 공중으로 떠서 개울을 건넜다. "귀족 분들이신 대, 이렇게 누추한 곳에....." 오두막집의 주인은 나이 들어 보이는 할아버지였다. 그는 원래 머리색이 무슨 색인지 구분되지 않을 탈색 된 회색머리 를 목 뒤에 묶고 거친 옷감으로 팔을 들어 낸 원피스 형식의 옷을 허리에 가죽띠로 묶어 입고 있었다. "아니요. 머무르게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할아버지." 진은 그가 건네 준 마른 천으로 머리의 물기를 닦으며 대답했다. 벽난로에 불씨가 남아 있는 오두막 안은 따로 방이 구분되어 있지 않았다. 한쪽에 이 곳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용하는 짚 깔린 나무 침대 두 개와 기본적인 주방기구와 벽에 돌을 쌓아 만든 벽난로가 있었고, 탁자와 의자 몇 개가 놓여 있었다. 반대편에는 사냥에 쓰이는 듯한 여러 가지 무기들이 약간의 장작과 생활용품과 함께 정리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놋쇠 접시의 심지에 난로의 불을 옮겨 붙이면서 할아버지는 대접할 것이 없음을 송구스러워 했다. "이곳은 비가 항상 이렇게 많이 오나요?" 덧댄 판자 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요란했다. 팔걸이 없는 나무 의자가 네 개 있었지만 할아버지는 남아 있는 자 리에 앉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 콜린스가 가방을 뒤적여 실비아와 후크가 챙겨 준 빵과 말린 과일 과 치즈를 꺼내 진과 와이즈 앞에 놓는 것을 보고, 따뜻한 물에 향기가 나는 나뭇잎 한 장을 띄워 손님들 앞에 내려놓 으며 그는 진의 질문에 대답했다. "봄엔 비가 많이 내리는 것이 오히려 좋으니까요....항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 진은 먹구름과 습기 탓에 그의 목소리가 더 어둡게 들리는 것은 아 닌가 했지만, 세월의 흐름으로 당연해 보여야 할 그의 주름진 얼굴 에 뭔가 알 수 없는 그림자가 뒤덮여 있음을 알아 볼 수 있었다. 와이즈는 찻잎이 띄워진 물을 코에 가져다 대고 풋풋한 향기를 맡 고 있었고, 콜린스는 진이 쓰고 건네 준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있었 다. 진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다시 물었다. "혼자 사세요?" "예에....손녀가 있지만......" 뭔가 이상했다. 진은 이 작은 마을이라고 할 것도 없는 인가가, 비가 내리고는 있었 지만.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지나치게 조용하고 어둡다는 것이 마 음에 걸렸다. "길을 잘못 드셨나 봅니다. 이곳과 조금 떨어진 곳에 여행자 분들이 왕래하는 마을이 있습죠. 이곳은 숲의 사냥꾼들이 잠깐씩 머무르는 곳이라 불편하실 텐데...." "어두워서 안 보였는데 숲이랑 가까운 가요?" "......예."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환대만 바라는 것은 안 될 말이었지만 진은 그 나이든 할아버지에게 말을 걸수록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오두막 주인은 사양했기 때문에 그들끼리 가벼운 저녁을 먹었다. 침대가 있는 쪽에는 주방 겸 거실과 분리할 때 쓰는 듯한 받침대 달린 나무 판자가 있어서, 네얀에서 여러 벌 구입해 둔 마른 옷을 골라 가져가 갈아입었다. 습기 탓에 축축하게 느껴지던 공기 사이로 수상쩍은 냄새가 났다. 진은 원인을 찾아 두리번거리다가 놓여져 있던 두 개의 침대 중 하 나에서 그것을 발견했다. 시트가 씌워지지 않은 짚더미 사이와 나무 뼈대에 변색되어 갈색으 로 말라붙은 핏자국이 보였다. 굳어서 갈색 기운이 진한, 그다지 오래 되지 않아 보이는 그것과 여 기 저기 덜 닦여서 오래 묵어 보이는 핏자국도. 콜린스도 옷을 갈아입고 가방에 약간 비가 새서 눅눅해진 진과 자 신의 여행자용 모포를 난로에 말리고 있었고, 와이즈는 그런 그를 바라보다 진을 돌아봤다. 진은 여전히 생기 없이 서 있는 회색머리의 할아버지에게 가까이 가서 물었다. "손녀 분은 이 시간에 어디 갔나요? 밤이 늦어 가는데." 머뭇거리던 그가 입을 열기 전에, 밖에서 빗소리를 뚫고 오락가락하 는 울림으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여우야~ 이리와~ 나하고 놀~자~ ' 모두 들었는지 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여우야~ 이리와. 함께 놀자~ 토끼 잡을 덫도~있고~~ 배를 가를 칼 도 있어~ 이리와, 이리와~ 같이 놀자~ " 진은 마르카 사제에게 받아 걸고 있던 메달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 꼈다. * 문을 열고 들어 온 것은 검은머리의 14살 정도로 보이는 소녀였다. 그녀는 비에 젖은 봄꽃을 한 손에 쥐고 다른 한 손엔 돌멩이와 풀 줄기와 나무 조각을 담은 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어딘가 나사가 빠진 듯 한 표정에 풀린 눈빛으로 실내를 돌아보던 그녀는 노래를 멈추었다. 비에 젖은 얼굴로 진과 콜린스를 보고도 아무 반응이 없다가, 의자 에 느긋하게 앉아 있던 와이즈를 발견하고 뒷걸음을 쳤다. 진은 그녀의 얼굴에서 두려움을 보았고, 그녀의 분위기에서 잘못된 점이 있음을 직감했다. "아가씨. 해치지 않을게요. 들어와요." 그녀는 굳어 있는 콜린스를 힐끗 보더니, 부드럽게 달래는 진에게 비웃는 표정을 띄우고 밖으로 다시 도망갔다. "젠장. 방금 옷 갈아입었는데! 와이즈 잡을 수 없어?" "내가 나서면 곤란해 질 거다, 진. 붙잡는 정도야 쉬운 일이니까 직 접 해." "콜린스 그냥 안에 있어. 따라오지마." 진은 인상을 쓰며 문 밖으로 뛰어갔다. 소녀는 빗줄기 사이를 바구니를 꼭 끌어안은 채 달리고 있었다. 그 녀가 가는 방향은 처음 발견했던 폐허가 된 집들의 흔적이 있는 곳 이었고, 목적지를 알게 되자 진은 최대한 위협으로 보이지 않게 하 려고 천천히 쫓아갔다. 판자더미에 몸을 숨기고 적의를 발산하고 있었지만 진은 그녀의 숨 바꼭질을 하는 듯한 어린아이 같은 행동이 마음에 걸렸다. 그녀는 아이인 채 어른이 되어 가지 못하는 병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나랑 놀래? 여우보단 나을 거야." 소녀는 검은머리 아래 보라색 눈 부위만 내민 채 진을 쏘아보았다. "뭘 줄 건데? 뭘 줄 거야? 너도 맛있어 보여." 진은 그녀의 눈빛이 원래의 것이 아님을 깨달을 수 있었다. 더불어 그녀의 원래 의지조차도 어딘가에 숨어 있거나 묶여 있음을. 그녀의 몸과 의식에 깃들어 있는 것이 부정한 것이라는 경고를 메 달은 계속 보내오고 있었다. 진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일단 그 소녀를 붙잡아야겠다고 판단했다. 비는 계속 쏟아지고 있었고, 하늘에서 빛이 번쩍했다. 진은 번개가 친 후 더 어두워진 순간을 택해, 그녀의 몸을 낚아챘 다. "아-악! 놔. 놔. 괴물! 괴물!" 가까이에서 벼락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팔이 잡히자 그녀는 진보다 작은 체구를 버둥거리며 저항했지만 진 은 뒤에서 끌어 앉은 채 악에 받친 발버둥이 가라앉길 기다렸다. 그녀의 팔목과 짧고 헤어진 치맛자락 아래에 들어 난 발목의 상처 들이 눈에 들어왔다. 메달에서 흰 빛이 번져 나왔다. "아-악-!" [악. 재수 없는 계집애!] 소녀의 몸에서 어둔 그림자가 뽑혀 나가는 것처럼 떨어져 나가는 것이 보였고, 잡고 있던 앙상한 그녀의 몸이 축 늘어졌다. 진은 주위에 소녀의 몸에서 빠져나온 것과 비슷한 검고 흰 그림자 들이 모여들고 있음을 알았다. "기다려. 올 필요 없어. 지금은 안 돼." 형체가 불분명한 너울거림이 잠시 멈췄다. "너희 차례가 아니야." 진은 의식을 잃은 소녀를 안고 오두막으로 향했다. * 와이즈는 진의 무언의 요구에 딴청을 피웠지만 결국은 투덜거리며 두 소녀를 바짝 말려 주었다.-주위를 의식한 듯 희한한 주문을 외우 면서.- 잠을 자는 것인지, 기절한 것인지 알 수 없게 된 소녀를 침대에 밀 어 넣고 진은 탁자에 한쪽 팔을 걸치고 앉아서, 불안하게 서 있던 주인할아버지를 마주 앉게 했다. "............"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쳐다보기만 하는 어린 귀족 아가씨에게 위축 감이 든 그는 고개를 숙이며 변명했다. "손녀딸은 마족이 아닙니다, 아가씨....좀 이상하긴 하지만." "인간이라는 것은 알고 있어요. 왜 저렇게 되었는지 묻는 거 에요." 콜린스는 소녀가 집에 들어섰을 때 보았던 보라색 눈동자를 떠올리 고 혐오감을 들어내며 반박했다. "신 벌을 받아요, 할아버지! 거짓말이에요, 레이디. 보랏빛 눈동자는 마족의 증거 에요! 사람들을 피해 이런 곳에 숨어 있다니. 여신께서 도 버젓이 그런 존재가 사람 사는 곳에 걸어다니고 있다는 것을 아 시면 노하실 거 에요." 진은 네얀의 신을 들먹이고 있는 철없는 소년을 돌아보았다. "콜린스." "예?" "지금부터 단 한마디도 하지마. 그냥 듣기만 하던지, 자던지 해." "..........." 진은 와이즈의 관망 섞인 시선을 받으며, 다시 할아버지에게 고개를 돌렸다. "말씀을 해 주셔야겠어요. 상황을 들을 사람은 할아버지뿐이잖아요. 도움이 되려는 것이니, 경계하실 필요는 없어요." 그는 두려움이 서린 주름진 얼굴로 망설임을 보였다. 그렇지만 진의 짙은 남청색 눈빛에 거짓이나 악의가 없음을 알고, 지친 느낌을 주는 한숨을 내쉬며 말문을 열었다. 그들은 6년 전에 폐허가 되어있던 옛 집터에서 작은 마을을 이루고 살고 있던, 사냥과 밭일로 생계를 잇던 하층민들이었다. 마을과 가깝게 면한 숲에서 몬스터들의 잦은 위협으로 인해 작은 마을이지만 결속력을 가지고 서로 돕고 살던 주민들이었는데, 동 대 륙과 면한 에요타 산맥의 낮은 산등성이를 넘어 북 대륙의 어느 나 라에도 지배받지 않고 약탈을 일삼으며 몰려다니던 무리들이 그들 의 마을에 이맘때쯤 쳐들어 왔었다고 한다. 영주가 있는 성은 멀었고, 이지가 부족한 몬스터와는 달리 무장한 그들을 막을 수 없어서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이 학살되다시피 했다 고 한다. 때늦게 병사들이 그들을 쫓아 주기는 했지만, 몇 몇 살아 남아 숨어 있던 사람들은 오랫동안 개척해 왔던 농지와 집터를 버리고 사람들 이 많이 모여 사는 치안이 더 나은 성 쪽으로 이주를 했다. 하지만 그는 아들 부부와 손자를 잃고 벙어리가 된 8살짜리 손녀 레아와 근처에 집을 짓고 남았다고 한다. 그는 숲과 가까워서 사냥으로 끼니를 때울 수는 있었지만, 레아의 병을 치료할 수 없어서 오랫동안 사람들을 피해 숨어살고 있었다. "처음엔 말을 안하고 멍한 정도였는데, 점점 아이가 이상해졌습죠.... 이곳에 들르는 사냥꾼들이 한번은 레아의 눈을 보고 마족이라고 죽 이려는 것을 막느라고 가지고 있던 돈과 며늘아이의 지참금을 모두 썼던 적도 있습니다...." "도움을 받을 방법이 없던가요?"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겠지 했습죠. 하지만....점점 더 심해지더군요. 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에 데리고 갔다가는 그 날로 마족으로 몰려 죽을 것 같고. 그 곳에 있는 정직과 순수의 신 어니스트님의 신전에 서 사제 님을 청하고 싶어도 가진 게 너무 없어서....그리고 사제 님 들이라고 해도, 오해하지 않으실 거라는 보장이 없어서요." 와이즈가 덧 붙여 주었다. "정직과 순수의 신 어니스트의 사제라면 도와 주긴 커녕 제일 먼저 화형을 거론했을 거다, 진." 진은 이곳의 신에 대한 개념과 레아의 병을 정신적인 것으로 판별 하지 못하게 막고 있는 조금 전 그 애매한 존재들에 한숨이 나왔다. "레아의 부모님과 오빠가 어떻게 죽었나요? 설명이 더 필요해요." 그는 진의 물음에 거칠고 주름 투성이의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밖은 여전히 빗소리와 함께 천둥이 치고 있었다. "......북 대륙의 야만족들은 잔인합니다, 아가씨. 오크 정도의 몬스터 들은 저희도 힘을 합하면 막을 수 있기도 하고 몰려와 봐야 10~20 마리 정도였지요. 더 많이 몰려오면 양식과 생활용품을 조금 나눠주 는 선에서 타협을 보기도 했고요. 하지만 그들은....." "상황을 알아야 해요. 레아에게는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듯 했어요. 원인을 정확히 알지 못하면 방법도 잘못될 수 있잖아요. 말씀해 주 세요." 그는 귀족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소녀와 신족 같은 외모를 가진 그 녀의 마법사를 쳐다보았다. 자신과,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저 처량한 피붙이와는 너무나 다른 분위기의. 다른 세상 사람들. 한때는 증오해 마지않던 그들이 세월에 점령당한 몸과 마음에 회한 을 가져다 주었다. 왜 가만 내버려두지 않는 걸까. 돈도 명예도 손녀의 눈빛을 바꿀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자신은 몰라도 손녀는 아직 너무 어리고.....신전의 힘을 얻을 수 있다면 희망이 있을지도 모른 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진의 말에 대답했다. "전 그때 마을에 있지 않았습니다. 단 3일이었습니다. 그때 그들은 겨우 30명 정도의 인원으로 자정에 쳐들어와서 두 배 가까운 마을 사람들을 마구 죽이고, 씨앗으로 쓰고 남아 있던 곡식을 모두 먹어 치웠지요. 남자들은 대부분 죽고 마을 여자들은 그들에게 겁탈 당하 고 죽임 당했습니다. 몇몇 도망쳐서 성에 알린 사람들 덕에 영주 님 이 급히 보내신 병사들과 기사 님들을 따라서 제가 돌아왔을 때....." 그의 턱에서도 빗방울이 떨어졌다. "제가 돌아왔을 때 마을은 이미 폐허였지요. 그들은 그때까지 마을 에 있다가 병사들이 쫓아오는 것을 알고 농기구까지 챙겨서 달아났 지만 산맥을 넘지 못하고 거의 모두 죽임 당했습니다." 그의 탁한 목소리가 점점 거칠어졌다. "제 아들과 손자는 묶인 채....팔. 팔다리가 잘려서 숨. 숨져 있었고. 며늘아기는....레아는 바로 옆방 침대 옆에 웅크리고 숨어 있었습니 다. 3일 동안 계속...그 자세로. 절 봐도 알아보지를 못했습니다. 말 을 못하게 되었다는 것도 나중에 알았지요...." "눈빛은 언제부터 바뀌었나요?" 할아버지는 냉정하게 들리는 진의 낮은 목소리에 거친 입술을 일그 러뜨리며 대답했다. "레아는 말도 없고 그냥 웅크리고 앉아만 있었습니다. 저도 다른 살 아남은 마을 사람들과 손녀를 데리고 떠나고 싶었지만. 그 때 만큼 은 완강히 자리를 떠나지 않으려고 해서, 남게 되었지요. 몇 달지 나지 않아서 저 아이는 밤에 자다가 일어나 돌아다니기 시작했습니 다.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기도 하고. 제가 잠든 사이 자해를 하 기 시작했지요. 그때부터 간혹 눈빛이 변했습니다." "정령에게 먹혔군." 진은 와이즈에게 가만있으라는 뜻의 눈짓을 했다. "그리고요?" "......집터를 벗어나려고 하지 않았지만 불길해서 조금 떨어진 이곳 에 집을 지었지요. 처음에는 오히려 상태가 좋아지는 것처럼 보였습 니다. 하지만 밤에만 눈이 보라색이 되곤 하던 것이... 갈수록 제 눈 빛으로 돌아오는 시간이 짧아졌지요. 그럴 때면 아까 처럼 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하고. 사나워 지기도 합니다." "비는 요?" "..........." "여긴 원래 이렇게 봄비가 심하게 내리나요?" "......저 아이의 눈빛이 변한 후 해년 마다 봄에 이 근처만 비가 많 이 오긴 했습니다. 그게 해가 갈수록 양도 많아지고 비가 오는 면적 도 넓어지고 있는 것 같지만. 봄비는 많이 오면 농사에 보탬이 되니 까요....사람들이 사는 곳과 조금 떨어진 곳이고....신전에선 의심을 하지 않았습니다. 제 손녀딸 때문인지도 확실치 않고요..." 진은 생각에 잠겼다가, 콜린스에게 먼저 잘 것을 권했다. "할아버지 지쳐 보여요. 도울 방법이 있는지 제 친구와 의논을 좀 해볼게요. 먼저 주무세요." 그는 자신의 침대를 비워두고 콜린스가 누운 옆자리, 습기를 막으려 고 난로 가까이 깔아둔 모포에 앉았다. "와이즈. 알고 있는 것이 있으면 말해 주겠어? 설명이 더 필요해." 와이즈는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 진을 보더니, 할말 많아 보이던 콜 린스와 잠들 생각이 없어 보이는 사냥터지기 노인에게 마법을 걸었 다. "슬 립-(Sleep)!" [32] 6-2. 레아의 꿈 진은 쓰러져 코를 골기 시작하는 두 사람을 보고 와이즈에게 눈을 깜박여 보였다. "와이즈. 저 둘, 계속 잠들게 되는 거야?" "슬립 주문으로 영원히 잔 대냐. 가볍게 걸었다. 아침이면 일어날 거야." "내가 불면증에 걸리면 그 마법 좀 써 줘. 편하겠다." ".....불면증에 걸려? 네가?" "그럼. 나도 사람인데." 진은 비 맞은 머리가 가려워 져서 머리카락을 한 움큼 쥐고 털었다. "정령 말이야, 종류가 많다고 했지. 레아의 몸에서 검은 그림자가 나왔었어. 말도 하고 말이야. 그건 뭐야?" 와이즈는 딱딱한 낮은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폐허에서 네가 본 것도 저 여자아이에게 깃들었다 도망친 것도 모 두 어둠에 속하는 정령이다. 마계에서 가장 아래 계열에 속하는 힘 없는 정령이지. 인간의 사념에 영향을 강하게 받는 탓에 어디든 존 재 할 수 있다." "제일 힘없는 정령인데 사람에게 저 정도로 피해를 줄 수 있는 거 야?" "보통은 그다지 해를 끼치지 못한다. 인간들은 그들의 존재를 눈치 도 못 챌 정도로 흐릿하고 약한 기운을 가지고 있지. 저 여자 애는 스스로 불러들인걸 게다. 아무리 힘이 없어도 불러주는 사람이 있다 면야, 의식을 잠식해서 조금씩 갉아먹어 왔겠지." "지금은 없는 것 같은데, 안 그래?" 와이즈는 레아가 누워있는 침대 쪽을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저 아이의 의지는 현재 없어. 저 상태라면 계속 의식을 찾지 못할 게다. 그리고 한번 잠식당한 영혼은 쉽게 다시 오염되지. 마계에 해 당되는 녀석들은 대부분 먹이로 삼은 영혼의 감정에 집착하게 되어 있거든. 길을 터 놓았으니, 기회가 오면 또 저 여자 애를 지배하게 될 거다." "지금은 왜 그냥 두지? 네 영향인 거야?" "그럼. 그 인간보다 못한 하급정령들이 내 존재를 알면서도 찾아들 겠냐. 밖에 모여들고 있을 거다. 그건 그렇고. 난 네가 더 특이 해 보인다. 저쪽 세상에는 정령이 없다면서? 어떻게 감지할 수 있는 거 지?" "난 흑인들 틈에서 살았어. 그들은 개종은 했지만 그리 오래지 않은 그들의 조상들은 먼 대륙-아프리카-에서 토속신앙을 믿었던 영향이 있었거든." "흑인?" "얼굴이 검은 인종이야. 여긴 없어?" "남 대륙 인간들이 검은 편이긴 하지." ".....흑인들은 미신을 믿는 경우도 있었어. 그리고 네가 말한 그 어 둠의 정령들이라는 것이 그곳에서는 유령이나 악령이라고 표현되기 도 해. 증명할 수 없고 존재 여부도 불확실하지만 심령세계에 대한 논의는 항상 있었으니까." 진은 빗소리가 조금 잦아들고 있음을 알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굳이 그런 증명되지 않는 존재들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저 아이와 같은 경우는 많이 보았었어. 인간은 희망을 잃고 좌절하게 되거나, 지나친 충격을 받아 감당할 수 없게 되면 흔히 정신적인 문제를 겪 어." "그런 경우 그곳에선 어떻게 치료했는데?" "시간이 걸리기는 하지만 꾸준한 정신과 치료로 회복되기도 해." "정신과 치료? 이곳의 신성력으로 영혼을 정화시키는 것 같은 거 냐?" "그 곳은 의학이 발달했어. 신성력이나 마법은 없지만 의술이 이곳 못지 않을걸? 인간의 몸 어딘가 병들거나 잘못되면 장기를 교체시 키기도 해. 정신과 치료는 몸에 메스를 들이대지 않고 대화나 간접 경험을 통해하거나 최면술 같은 것도 동원되지." ".....정말 네 살던 곳은 희한 타. 들을수록 위험한 곳이란 생각이 드 는 군. 마법이나 신의 힘을 빌리지 않고 인간의 힘만으로 장기를 바 꾸기도 한단 말이지...." 진은 와이즈에게 마계에 속하는 존재들에 대해서 좀 더 설명을 들 었다. 그리고 궁리를 해야했다. "레아를 구해야 해. 저 아이의 일은 남일 같지가 않아. 나도... 그랬 거든." "너도?" "난......조금 다른 형태로 표현되었었어. 감정에서 멀어지고 지독히 이성적이 되었었지. 8살 때 어렵지 않게 살인을 했어. 그리고 그대 로였으면 막 나갔을 지도 몰라. 하지만 이웃 할머니에게서 신에 대 한 언급을 받았어. 그녀는 죽어가고 있었고. 그래서 인지 난 그 할 머니의 말을 받아들였던 것 같아. 신에 대한 절대믿음을 가진 것은 아니었지만, 내가 한 일에 대해 그 후 오랫동안 속죄하는 생활을 했 었어." 와이즈는 진이 노인에게 레아의 상태에 대한 원인에 대해 물었던 것처럼, 자신도 묻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그녀에게 더한 관심을 보이는 것은 솔직히 자존심 상해서 그냥 듣고만 있었다. 가늘어졌던 빗줄기 소리가 다시 우렁차졌다. 그들의 대화가 조용히 좁은 오두막 안에 퍼지고 있었다. "저 앤 트라우마(trauma)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거야. 이겨낸다 면 다시 정상으로 돌아올지도 몰라. 방법이 없겠어?" "정령들을 쫓아버리거나 소멸시키면 되겠지. 그리고 신전에 의탁시 켜서 오랜 시간, 영혼을 정화시키도록 신성력을 쏟아 부으면 정상으 로 돌아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 아이가, 약하다고 해도 정령과 계 약을 했다면 돌이킬 수 없어. 계약 파기를 정령쪽에서 먼저 하진 않 을 거다. 이미 의지를 거의 먹힌 것으로 보이는데 벗어날 방도가 있 겠냐.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났다. 처음이라면 간단했을 텐데." "벗어나지 못한 채라면?" "그렇다면 정말 마족이 되는 거지." 진은 한숨을 쉬었다. "......의지가 남아 있을 거야. 비가 내리고 있잖아. 이 비는 무엇이라 고 생각해?" "내가 이곳이 이상하다고 했던 것은 이 비 때문이다. 마법에도 날씨 를 조정하는 마법이 있지. 마나 유동능력이 뛰어난 고써클 마법사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만 이곳의 비는 마나를 이용한 것이 아니야. 하지만 자연적인 것도 아닌 것 같다." "레아가 울고 있는 거야, 도움을 청하는 것인지도 몰라. 난, 그런 생 각이 들어." "..........." 진은 어두컴컴한 실내를 돌아보았다. 습기 찬 공기는 왠지 숨이 막히게 했다. 진은 와이즈처럼 의자에 등 을 기대고 나직이, 체념 어린 목소리로 말을 했다. "신은 조용히 살게 날 내버려두지 않는군. 하지만 이름은 몰라도 난 내 신을 믿어. 한번도 해 보지 못한 일이지만, 가능성이 있다면 시 도해 봐야해. 안 그래?" "............" 진은 일어서서 잠들어 있는 콜린스와 노인의 몸을 돌아 파리한 얼 굴의 소녀에게 다가갔다. "와이즈. 꿈의 정령이라는 것이 있다고 했지. 불러들일 수 있어? 이 아이의 꿈속에 들어가 봐야겠어. 깨워주는 사람이 있어야 정신을 차 릴 게 아니야." ".......위험하다. 그 아이의 꿈속에 갇히면 너도 못 나올 수 있어." "아니야. 난 경험자인 걸. 레아를 끄집어내야겠어. 도와줘. 내가 '맥' 이 되어야겠어." "맥?" "인간의 악몽을 먹는다는 상상 속의 동물. 그 곳 동양에서 기억해사 라고도 해. 꿈의 정령을 불러들이는 것은 까다로워?' "아니, 간단하다." "그럼, 불러서 날 데리고 이 아이의 꿈속에 들어가게 해줘." 와이즈는 사제도 아니면서 무모한 시도를 하려는 것이 우려되긴 했 지만.....그녀라면 가능할 것이라는 계산을 했다. 진은 신을 체험했다.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녀 자신은 아직 모르고 있지만. 와이즈는 자리에서 일어나 진의 곁으로 갔다. "시간을 정하자. 1시간 안에 나와라. 오래 끌수록 빠져나오기 힘들 어질 수 있어. 위험부담은 될수록 줄여야지." "알았어, 와이즈." 와이즈는 막고 있던 드래곤의 기운을 서 있던 자세 그대로 발산하 기 시작했다. [꿈의 정령 드림스프리츠 나. 골드 드래곤 투비와이즈의 부름을 받 으라.] [꺄-아-악-!] 작은 오두막 안에서부터 시작 된 금빛 마나의 기운은, 빗줄기에도 영향 받지 않고 밖에서 너울거리며 수군거리고 있던 거무칙칙한 존 재들을 깨끗이 쓸어버리고 계속 번져갔다. 콜린스와 할아버지는 잠결에도 큰 충격을 받았는지 새파랗게 질렸 다. 진은 드래곤의 거대한 기운이 갑자기 짓누르는 압박감에 상체를 젖 혔다가, 다시 폈다. '폭풍 같네....처음 봤을 때 같다.' 가까운 인가에서 꿈을 엿보고 꿈을 나눠주던 정령들이 드래곤의 부 름으로 순식간에 끌려들어왔다. 오두막 안에는 반투명한, 크고 작은 존재들로 가득 찼다. "요란하게도 하네. 이렇게 많이 필요해?" "저것들이 보이냐?" "보여. 믿지 않으면 안 보일지 모르지만 존재한다는데 왜 못 봐?" ".........." 와이즈는 장난스런 동작으로 허공을 맴돌고 있는 정령들 중 두 녀 석에게 손짓을 하고 나머지는 돌아가도록 명령했다. 어수선한 주위가 정리되자. 진은 그 유령 같아 보이는 생물(?)을 찬찬히 구경했다. [이 아이 레아의 꿈속에 그녀, 진을 데려다 줘라.] [드래곤이여. 강한 존재여. 계약을 하셔야 합니다.] [1시간 동안의 임시 계약이다. 계약하겠는가?] [......하겠습니다. 인간의 시간으로 한시간 동안 저흰 당신의 정령입 니다.] 진은 다리 대신 꼬리 달린 상체의 여성 체도 남성 체도 아닌 것들 중 하나가, 누워있는 레아의 머리로 들어가고 자신에게 달려들 듯 다가오는 것을 보다가 의식을 놓쳤다. * 검은 공간에 진은 서 있었다. 바닥도 벽도 천장도 없는 곳. 주위를 둘러보다 자신을 인도해 준 정령을 발견하고 물으려는데 그 것이 손을 들어 가리켰다. 손끝으로 시선을 향하자, 처음엔 보이지 않던 문이 허공에 떠 있었다. '벽도 없는 곳에 문 하나만 달랑.....' 진은 그곳으로 걸어가서 손잡이를 당겼다. 열리지 않았다. 노크를 했다. 똑. 똑. 똑. "레아. 문 열어봐. 레아?" 반응이 없었다. 이곳에서의 시간의 흐름이 어떤지 알 수 없어서 마냥 기다려주고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 진은 힘으로 밀어붙이기로 했다. 두 손으로 힘껏 밀어도 열리지 않자 진은 턱을 긁적이다, 고개를 끄 덕였다. 그리고 이번엔 밀지 않고 당겼다. 쉽게 문이 열렸다. "꺄 악- 살려줘요. 살려줘요! 저리가. 저리가!!" 문 안쪽에는 작은 여자아이가 웅크리고 있다가 문을 열고 들어 온 진을 눈물이 범벅이 된 얼굴로 쳐다보며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진은 아이에게 다가가 팔을 뻗어 끌어안았다. "레아. 잠에서 깨. 너무 오래 자면 깨어 날 수 없게 돼. 듣고 있니?" 아이는 공포에 질린 얼굴로 귀를 막고 더더욱 움츠렸다. "내 목소리가 들리지? 다 끝났어. 괜찮아. 이제 나와도 돼. 이곳에 있지 않아도 돼, 할아버지가 기다리고 계셔. 가자, 레아. 응?" "할아버지...." "그래. 레아의 할아버지." "...언닌 누구야? 이상한 옷이야." 진은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레아의 꿈속일까, 내 꿈속일까.' "네 할아버지의 부탁을 받았어. 널 찾아 주기로 했어. 나와 가겠 니?" ".....어디로?" 어둔 공간이었던 사방에 형체가 갖춰졌다. 진과 레아가 있는 곳은 어린아이의 침대 두 개가 놓여져 있는 작은 방안이었다. "어디로?" 진은 레아의 몸이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알고 놓치지 않으려 고 급히 옷자락을 잡고 그녀를 따라 이동했다. 레아는 집과 조금 떨어진 친구의 집에서 같은 나이 여자아이와 머 리를 맞대고 소꿉놀이를 하고 있었다. 친구의 엄마가 가져다 준 과 자를 나눠 먹고 웃다가.....그들은 갑자기 들려오는 비명소리를 들었 다. 아이들은 남은 과자를 손에 쥐고 뒷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보려 고 했다. 친구의 엄마가 앞문 쪽에서 비명을 지르는 소리에 레아의 친구는 그쪽으로 몸을 돌려 달려갔다. 레아는 머뭇거리며 뒤를 따르 다가, 본능적으로 몸을 숨겼다. 친구의 머리가 몸에서 떨어져 숨어 있던 문 앞까지 굴러왔다. 그 눈....감지 못한 눈....친구의 엄마는 계속 비명을 질렀다. 레아는 손에 들고 있던 과자를 버리고 뒷문을 향해 뛰었다. 마을이 불타고 있었다. 마을 아저씨들이 잠옷 바람으로 여기 저기 죽어 넘어지고 있었다. 그들이....괴물형상을 한 그들이 사람들을 죽이고 또 죽이고. 언니들을, 이웃이었던 아주머니들을 깔아뭉개고 있었다. 레아의 눈에 마계 지옥이 들어왔다. 아이는 울면서 집들의 그림자들 을 밟고 뛰어갔다. '엄마. 엄마.' 작은 레아는 어둠을 골라 집을 향해 뛰면서 소리내지 않으려고 입을 막았다. 발에 뭔가 걸렸다. 시체...!! 다시 일어나 집으로 뛰어갔다. 레아의 집은 불붙지 않고 있었다. 아 이는 뒷문을 통해 집안으로 들어갔지만 엄마에게 갈 수 없었다. 아 빠가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와 오빠가 잡혔다. 그들의 웃음소 리.... 레아는 엉금엉금 기어서 한번 그들이 휘저어 놓은 오빠와 자신의 방 한쪽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숨었다. 옆방에서 들리는 소리들은 지옥 에서 온 악마들이 내는 소리들이었다..... 진은 웅크리고 있는 레아의 앞에 다시 섰다.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레아. 도망가면 안 돼. 외면하면 안 돼. 내가 도와 줄게." 레아는 침입자를 올려다보았지만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소리내도 돼. 괜찮아. 내가 지켜 줄게." 진은 아이 레아를 한 팔에 올려 안고 옆방으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레아는 진의 목에 얼굴을 묻고 매달렸다. "아무것도 없어, 레아. 모두 지난 일이야. 그들은 모두 죽었어." 레아는 진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비명을 질렀다. "악마야! 악마들이야!" 진은 방안에 다시 생긴 풍경을 돌아보았다. 그들은 진과 레아를 보 지 못했다. "아빠가....팔 다리가 잘렸어. 오. 오빠도....엄마는....엄마는. 윽. 윽... 오랫 동안 비명을 질렀어. 오래. 오래...." 진은 레아의 등을 토닥였다. "레아. 똑바로 봐. 저들은 네 몫이야, 할 일을 생각해 내. 이 악몽에 서 깨어나려면 네 허락이 필요해. 어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진은 정령을 돌아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레아를 내려놓고 강제로 얼굴을 향하게 했다. "네게 힘을 줄게. 어떻게 하고 싶니?" 레아는 공포와 증오가 범벅이 된 얼굴로 진이 보게 한 그것들을 보 았다. 엄마는 짓이겨져 기절해 있었다. 아빠와 오빠는 피를 계속 흘리며 눈을 부릅뜨고 허공에....레아에게 도움을 청하고 있었다. 그 사탄들은....아빠의 창고에서 가져 온 귀한 포도주 통을 통째로 들이키고 있었다. 레아의 손에 칼이 생겨났다. 진은 몸을 숙여 아이의 손을 잡아주었다. "괜찮아, 레아. 복수하고 싶으면 해. 도와줄게." 그들이 레아를 발견했다. 비웃으며 손가락질을 한다. 레아는 진을 등에 지고 그들에게 다가갔다. 진은 레아의 손을 잡고 팔을 휘둘렀다. 레아는 그들을 난도질했다! 비명은 그들이 지르게 되었다. 레아의 부모와 어린 오빠가 그들을 향해 아픈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모두 사라졌다. '헉. 헉...' 아이는 헐떡였다. 진은 꿈속에서 피범벅이 된 그녀의 손을 훔쳐 주었다. "레아. 기다릴게. 꿈에서 깰 거지? 난 가봐야 해." 아이는 진을 돌아보고 매달렸다. "여기 있어. 나랑 있어, 언니. 가지마. 그들이 또 올 거야." "레아, 그들은 죽었어. 내가 도와 주었잖니. 오지 않을 거야. 하지만 여기 계속 있으면 다시 찾아올 거야. 문을 열고 나와. 저기 저 문!" 다시 생긴 어둔 공간에서 처음의 그 문 앞에 두 사람은 서 있었다. "기다릴 거야?" "그래. 하지만 오래는 안 돼. 지금 나랑 같이 갈래?" 레아는 진의 팔에 매달려 고개를 끄덕였다. "레아, 문을 밀어." 레아는 밖으로 통하는. 두려움과 죄책감과 외로움에서 벗어날 유일 한 출구에 손을 가져가 열려고 했다. 하지만 어둔 그림자들이 그녀 의 손을 쳐내었다. "안 돼. 언니. 약속을 했어. 저들과..." 진은 희멀건 눈자위만 들어낸 검은 그림자들이 가로막은 문을 바라 보았다. 꿈의 정령이 그녀의 의식을 잡아당겼다. "레아! 깨도 되는 약속도 있는 법이야! 그들을 쫓아버려. 밖에서 기 다릴게. 꼭 나와?!" "약속....지키지 않아도 돼?" '그...래......' 진은 혼자서 다시 되돌아갔다. * 와이즈는 어안이 벙벙했다. 의식을 잃을 줄 알았던 진은 예전으로 돌아가 있었다. "야-아. 반갑구나, 백치 꼬마야.....가만히 좀 있어라. 정말 짜증나네." 진은 배시시 웃음을 입에 달고, 잠들어 있는 콜린스와 노인의 몸 위 를 기어다니고 있었다. 다 큰 처녀의 몸으로 하는 의지 없는 행동들 에 와이즈는 슬슬 웃음이 새어 나왔다. '재밌네. 이런 일이 또 생기면 골탕 먹이기 좋은 방법이 되겠는데?' 진은 기어와서 의자에 앉아 있던 와이즈의 다리를 깨물었다. "가만히 있어! 그 꼴을 네 주인에게 보여주면 얼마나 통쾌하겠냐마 는 못 봐주겠다. 내가 먹을 것으로 보이냐?" 뿌리치는 와이즈의 다리를 끈질기게 진은 물어뜯고 있었다. "내참....힘은 그대로 세네." 와이즈는 쿡쿡 거리며 웃기 시작하더니, 빈 나무 물 잔을 진의 코 앞에 가져다 보여주었다. "자. 이거 보이지?" 물끄러미 그가 내민 나무 컵을 보던 진은 물고 있던 와이즈의 다리 를 놓았다. 와이즈는 사악한....잠들어 있던 콜린스와 노인마저 움 찔할 미소를 띄더니 몇 걸음 떨어진 곳으로 컵을 던졌다. "물어와라~ 꼬마야~ " [33] 멧돼지 머리 오크 * 정신을 차리게 되자 진은 당황했다. 보이지 않는 밧줄에 누에고치처럼 몸이 꽁꽁 묶여 있었다. "이게 뭐야?" 와이즈는 물을 벌컥 이다, 진의 의식이 돌아온 것을 알고 탁자 위에 이빨 자국이 난 컵을 소리나게 내려놓았다. "너.....!" "뭐? 이거나 풀어." 와이즈는 그 빛깔 곱던 머리가 마구 헝클어지고 얼굴에 손톱자국까 지 나 있었다. 진은 그의 얼굴을 확인하자 웃음이 나왔다. "내가 기절한 것이 아니었어?" "그렇다! 이 버르장머리 없는 백치 꼬마야! 전 보다 더 다루기 힘들 어졌잖아. 무슨 힘이 그렇게 세냐? 젠장. 이 꼴이 뭐람...." 와이즈는 진의 몸에 걸어둔 마나로 만들어진 오라를 풀어 주지 않 고 자신의 몸에 생긴 생채기를 마법 힐링을 써서 치료하더니 혀를 차며 머리카락을 정돈했다. 진은 자신도 머리가 엉망으로 엉켜 있고 무릎이나 팔꿈치 등도 더 러워져 있는 것을 알았다. "이거 풀어달라니깐!" 와이즈는 의자에 다시 앉아 고소하단 표정으로 진을 쳐다보더니 코 웃음을 치며 딴청을 피웠다. '저게....?' 아마 자신이 의식을 잃게 되자 그가 말했던 과거 상태로 돌아갔었 나 보다. 의지 없이 육체적인 힘까지 그대로였다면 아마 고생을 좀 했을지도.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진은 와이즈가 심통이 나 있는 것을 알고 몸에 힘을 최대한 빼고 밧줄에서 빠져 나오려고 했다. 하지만 그 보이지 않는 밧줄은 피부에 찰싹 달라붙어 있어서 몸을 오그려도 같이 죄어왔다. 방법을 바꿔서 다음엔, 밧줄을 끊어보기 위해 몸의 힘을 있는 대로 끌어올리자. 툭툭...소리가 나도록 저항이 느껴지더니, 전류가 통하는 전선에서 전기가 나간 것처럼 갑자기 자유로워졌다. "헉- 되게 튼튼한 밧줄이네." 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겹쳐진 옷감 사이로 양팔에 생긴 생채기를 들여다보았다. 곧 상처는 사라졌다. ".......그걸 푸냐? 니가 인간이냐?" 진은 턱을 고이고 지켜보고 있던 와이즈에게 그가 자주 그러던 것 처럼 한쪽 눈썹을 치켜 뜨고 쏘는 말투로 대답해 주었다. "인간이다. 지금껏 그것도 구별 못하고 있었냐....?" 진이 말끝에 '바보 드래곤!' 하고 속말을 한 것을 알아차렸는지, 와 이즈는 씩씩대면서 일어났다. 예의 그 음산한 기운을 팍팍 풍기면서. ".....해 보겠다는 거냐, 이 버릇없는 꼬마야?!" 진은 작은 오두막 안이 정적에 쌓이고, 바깥의 빗소리가 천둥 번개 와 함께 더 요란해진 것과 더불어, 잠들어 있던 콜린스와 할아버지 가 가위에 눌리어 신음하는 것을 듣고 표정을 바꾸었다. "와이즈~ " "......뭐?!" "우린 친구지?" "친구 같은 소리하네!" 진은 살기를 펄펄 날리는 그에게 척척 다가가, 상냥하게 보이는 미 소를 띄고 반박해 주었다. "친구 맞잖아~ 이름을 불러주기도 하더니만, 그새 잊었어? 친구사이 에 쌈질하면 못쓰지~ 내가 맛있는 것 줄게." "?" 진은 속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그의 반응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하자마자 와이즈의 얼굴을 잽싸게 끌어내려 입술에 쪽 소리가 나도 록 입맞춤을 해 주었다. "..........!!" 그리고 입술을 떼지 않은 채, 와이즈의 아래 입술을 꽉 깨물어주었 다. "윽....." 진은 와이즈의 얼굴에서 손을 내리고 운율 붙인 가사로 노래를 부 르면서 레아의 침대 옆으로 갔다. "굳 나잇~! 굳 나잇~! 잘 자요~ 사랑스런 내 친구. 드래고온~~ " "@@##&&@@##@....." * 그날 밤은 유난히 하늘이 시끄러웠다. 와이즈는 볼을 부풀리고 있는 듯한 인상으로 퉁퉁 부어 있다가, 살 기를 날리다가, 끙끙대다가 했다. 진은 그런 그가 안 되 보이고, 웃겨 보여서 '와이즈. 너무 상심하지마. 장가 못 가게 되는 거야? 그럼 내가 책임 져 줄게. 쯧- 드래곤들도 꽤나 고지식한가 보다.' 하고 말해서 그의 혼백이 빠져나가게 했다. 진은 계속되는 요란한 빗소리에 레아의 파리한 얼굴을 들여다보며 속삭였다. "레아. 싸우고 있니? .....힘내. 잠에서 깨면 모두 반겨줄 거야." 진은 의자를 침대 옆에 가져다 놓고 밤을 샜다. 가까이에서 번쩍이는 번개 불빛과 천둥소리가 요란하더니 차츰 수 그러들었다..... 비가 그치고 아침이 되었다. 밤새 끔찍한 악몽에 시달리던 콜린스와 오두막 주인 할아버지는 이 른 아침에 겨우 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방음이 부실한 오두막 안에서 진은, 아침을 알리는 바깥의 소음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비 갠 후의 깨끗한 대기에, 물먹은 나무 잎들에 햇살이 내리고 여기 저기 작은 새들이 날아들어 지저귀기 시작하고 있었다. 콜린스는 깨어있는 진과 와이즈를 보고 미안해하면서 아침 준비하 는 할아버지를 돕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와-아. 무지개다. 레이디, 마법사님! 나와서 보세요. 굉장해요!" 와이즈는 표정 잃은 얼굴로 어슬렁거리며 밖으로 나갔지만 진은 그 대로 자리에 앉아 레아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불편한 의자 덕에 허리가 아파서, 앉은 채 몸을 좌우로 젓고 있는데 시선이 느껴졌다. 레아는 초록색 눈동자에 물기를 머금고 빛을 등진 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진은 미소지으며 아침인사를 했다. "잘 잤니, 레아? 좋은 아침이야." 레아는 오랫동안 정상적인 수면이 부족했고, 과로와 영양실조가 겹 쳐서 자리에서 금방 일어나질 못했다. 와이즈가 회복 마법을 여러 번 시술해 주고 남아 있던 상처도 깨끗 이 치료해주자. 겨우 일어나 앉아, 말은 하지 않았지만 눈물을 글썽 이는 할아버지가 떠 먹여주는 스프를 한 숟갈씩 받아먹었다. 밀가루가 없었기 때문에 빵을 굽지 못해서 어제 먹고 남은 음식들 과 할아버지가 내어놓은 고기 스프를 아침으로 먹고 진은 모두에게 짐을 챙기도록 했다. "예? 저희도요?" "그래요. 할아버지. 레아는 요양할 곳이 필요해요. 이곳은 불편하고, 언제까지 사람들을 피해 살수는 없잖아요. 마을로 가서 살 곳을 알 아봐 줄게요. 혹시 부작용이 있을지 모르니까 신전에 의탁할 수 있 는지도 알아보고요. 가기 전에 저쪽 집터에 가 봐요. 레아는 작별인 사를 하고 싶을 거 에요." "가....감사합니다. 레이디....정말, 고맙습니다....." 레아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진의 목에 팔을 두르고 꼭 매달려 있었다. 마르기는 했어도 14살 먹은 소녀라 진이 안고 있기엔 무거워 보여 서 콜린스는 와이즈를 힐끔대었지만, 와이즈는 먼 산을 보는 시늉만 내내 하고 있었고. 끝내 비난 어린 콜린스의 시선을 참지 못하고 벌 컥 내뱉듯 말을 했다. "콜린스. 걱정 안 해도 돼요. 진은 트롤보다도 힘이 세니까!" "............" 폐허에 들렀을 때. 진은 레아에게 주위를 둘러보도록 하고 말했다. "레아. 그 일은 벌써 6년 전이야. 이제 잊어도 돼. 네가 계속 그 기 억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으면, 이곳엔 그 기분 나쁜 그림자들이 계속 몰려들게 될 거야. 그리고 네 가족과 이웃들도 윤회(카르마)로 돌아가지 못하고 묶여 있게 돼. 이젠 시간이 많이 지났어. 넌 자라 야 해. 강해지렴. 또 그 비슷한 일을 겪게 되어도 다시는 무력해지 지 않게 힘을 길러. 어른이 될 거지?" "............" 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은 와이즈에게 그곳에 남아 있던 인간들의 흔적을 태워줄 것을 부탁했고. 드디어 화풀이 할 곳을 얻게 된 그는 짐을 가지러 오두막 으로 다시 향한 그들 뒤에서 망설임 없이 주위를 초토화시키고 있 었다. 모두들 멀리 떨어져서 와이즈가 불덩이들을 남발하며 비에 젖어 잘 타지 않은 집터들을 무시무시한 불길로 태우는 것을 보다가, 머리를 긁적였다. "레이디.....마법사님, 화난 일이 있으시대요? 아침 내내 말이 없으시 던데...." "....잠을 못 자서 그런가봐. 잠이 많은 편인데 어젯밤을 꼬박 샜으니 스트레스를 받았나 보지. 걱정 안 해도 돼, 콜린스. 할아버지, 준비 는 다 됐어요?" 진은 그들에게서 와이즈에 대한 관심을 돌리게 했지만, 속으로 혀를 찼다. '저 티라노 사우로스 같은 넘.....' 영주의 성은 걸어서 하루이상의 거리였지만 가까운 마을은 그다지 멀지 않았다. 처음 벌판으로 워프했을 때, 비가 내리지 않고 진이 정령을 보지 않 았더라면 인가를 잘 못 찾을 일이 없었을 정도로 가까웠다. 농사도 지었지만, 여행자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주민들이 대부분 이어서 어렵지 않게 마차를 빌릴 수 있었다. 가는 길에 먹을 먹거리를 싸들고 진은 바로 영주의 성과 어니스트 의 신전이 있는 네카르도-라돈으로 출발했다. 마부까지 여섯 명이라 말을 빌리는 것이 어떠냐는 콜린스의 말에 진은 말을 타본 적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와이즈가 말을 못 탄다는 진의 말에 눈을 빛내었지만 바로 그 때문 에 진은, 할아버지와 콜린스의 만류를 무시하고 레아와 짐이 실린 마차 지붕으로 올라갔다. "레아. 난 좀 잘게. 너도 자겠니?" 레아는 고개를 저었고 진은 지붕에서 굴러 떨어지지 않게 묶인 짐 들로 담을 쌓고 레아에게 어떤 반응이 있든 빨리 알아챌 목적으로 그녀의 짧은 치맛자락을 붙잡고 발목에 손을 올린 채, 짐을 배고 잠 을 청했다. 막 잠에 빠져드는데 레아의 목소리가 스치듯 들렸다. "언니....깨워 줘서 고마워요..." 진은 잠결에 미소로 답해 주었다. 진은 그렇지 않아도 덜컹거리는 마차의 진동에 편히 자지 못하고 있었는데 마차 바퀴가 거칠게 멈추자 투덜거리며 일어나야 했다. "무슨 일이에요, 마부 아저씨?" "레이디! 몬스터에요. 10마리도 넘어 보이는데. 큰일났다!" 그들은 오후 시각. 그다지 울창하지 않은 숲을 통과하고 있었는데, 길을 가로막고 서 있는 무리들로 인해 멈춰 세워졌다. "인간. 그륵. 가진 거 다 내어 그륵. 놓아라. 그륵." "............" 진은 지붕에 올라앉아 오후 햇살 덕에 그들의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근육질의 몸에 잘 만들어진 멧돼지 가면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있는 것 같은 외형에 옷이라고 부르기 뭐한, 가죽으로 이어 만든 타잔 패 션을 하고 있었다. "아아. 반가워라. 인간 외에(드래곤 외에 라고 진은 속으로 덧붙였 다.) 말로만 듣던 다른 종족을 만나게 되다니. 아저씨, 저들 오크지 요?" ".......예에......" 마차 안에서 와이즈가 코웃음을 치는 것이 들렸다. 진은 레아에게 자리에 그대로 있게 하고 지붕에서 뛰어내렸다. 그들은 위풍 당당히 길을 막고 있다가 자신들보다 훨씬 체구가 작 은, 가는 검을 허리에 차고 망토를 두른 검푸른 머리의 인간여자가 척척 걸어 다가오자. 들고 있던 둔해 보이는 도끼와-게 중엔 돌도끼 를 가진 녀석도 있었다.-무거워 보이는 폭 넓은 검을 위협용으로 들 이댔다. "안녕하세요?" 진이 한 손을 들어 인사를 하자 그들은 웅성거렸다. "그륵. 인간여자! 그륵. 안녕 못한다. 그륵 가진 거 다 내어놓아라." 진은 그들의 말에 섞인 가래 끓는 듯한 감탄사? 조사? 에 심히 가 슴이 아팠다.(?) "가진 것이 그다지 없는데. 말과 마차가 없으면 우린 걸어가야 해 요. 병자가 있어서 그렇게는 할 수 없고. 짐 안엔 쓰던 생활용품 밖 에 없는데, 그거라도 줄까요?" "........주라. 그륵." 그들 중, 대장으로 보이는 가장 험상궂게(그놈이 다 그놈 같았지만) 생긴 등치 큰 녀석이 코앞까지 다가 온 진을 경계하며 검을 든 손 을 까닥였다. 진은 걸치고 있던 검을 검 집채 빼서 마차 쪽으로 던졌다. 그리고 양 손바닥을 세워 보이며. "무기 없음. 협상합시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얘기도 나누고 싶은데..." 그들은 인간 남자도 아니고 약해 보이는 인간 여자가 웃는 얼굴로 제의해 오자 잠시 더 지네들끼리 그륵, 그륵 대었다. "그륵. 겁없는 인간 여자! 그륵. 마법사인가 그륵?" "아니, 마법 못해. 친해지고 싶어서 반말하는 것 같으니까 나도 말 내릴게? 괜찮지?' ".......그륵. 인간은 믿을 수 없다. 그륵. 여자 긴 하지만 그륵." "괜찮아. 난 믿어도 돼. 여행자들을 털어서 먹고 사나본데. 줄 수 있 는 것은 다 줄 테니, 목적은 이룬 셈이잖아. 나랑 얘기 좀 하지 않 을 래? 재미 있.....개성 있게 생겼어. 말을 할 줄 아니까 대화도 가 능한 거지? 쓸데없이 싸울 필요 없잖아. 안 그래?" 그들은 이제 완전히 혼란에 빠졌다. 진의 일행도 패닉에 빠졌다. 와이즈는 밖에서 들려오는 그들의 목소리에 내내 화가 풀리지 않아 굳어 있던 얼굴에 웃음이 피어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저. 리툰 마법사님. 저...레이디께서. 저....." 콜린스가 하얗게 질려서 더듬거리고 레아의 할아버지가 당황해서 일어나 문을 열고 나가는 것을 보고 그는 쿡쿡 웃기 시작했다. 그들은 길 한쪽에 마차를 세워두고 옹기종기 모여 앉아있었다. 오크들은 경계를 늦추지 않았지만 진의 황당한 제의에 나무가 드문 풀밭에 앉아 있거나 일부는 서 있었고 진의 일행은 초조하게 근처 에 서성거리고 있었다. 진은 오크무리의 대장과 함께 그들에게 둘러 쌓여서 풀 위에 주저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니까. 농사짓는 법은 모르고, 무기나 기본적인 생활용품을 만 들 줄 모르니까 마을이나 여행자들에게서 뺏어 쓴다는 말이지?" "그렇다. 배우고 싶어도 인간들은 가르쳐 주지 않는다. 의리 있는 인간들도 간혹 있어서 가르쳐 주기도 하지만 우린...머리가 좋지 않 아서 써먹을 수가 없다."-(그륵은 빼고 진의 통역입니다.) "물건 뺏는 거 외에는 다른 일은 안 해? 사냥이라든지." "한다. 우린 훌륭한 사냥꾼이다. 하지만 숲에서 잡은 동물들로는 가 죽 밖에 얻지 못한다." "봄철이라 사람들도 양식이 귀할 텐데." "안다. 그래서 봄에는 금이나 무기만 뺏고 식량은 뺏지 않으려 하지 만 인간 남자들은 우리를 보면 무조건 죽이려 한다. 우리는 싸우게 되면 모두 죽인다. 인간도 그렇다." "여자와 아이들도 죽여?" ".....그들은 잡아서 판다. 하지만 인간 여자들을 잡긴 어렵다. 잘 안 지나 다니고 제일 먼저 도망간다." "그럼 돈이 될 만한 것이나 여자들을 잡으면 어떻게 교환하는데? 인간들이 사는 마을로 갈 수는 없잖아." "모아 둔다. 사냥한 동물 가죽과, 물건을 많이 가지고 지나가는 인 간 상인들이 있으면 바꾼다. 그들은 인간 용병을 많이 데리고 있어 서 싸우면 우리가 죽는다." "싸움은 잘해?" "우린 강하다. 인간보다 강하지만 인간들 중 더 강한 검사나 마법사 는 못 이긴다." "당신들 머리가 나쁘지 않는 것 같은데.....?" "내가 제일 영리하고 힘이 세다. 그래서 내가 대장이다." 오크들은 보통 60마리 안팎으로 무리 지어 살지만 그 숫자가 꼭 정 해진 것은 아니었다. 오크 내부에도 끊임없는 약탈과 힘 겨루기가 있는지 나라를 이룰 정도는 아니고 대륙 곳곳에 널리 퍼져 있었다. 이곳 인간들이 신화시대의 문명을 가지고 있다면 오크들은 선사시 대의 문명을 가지고 있었다. 즉. 모계사회였다. 오크들은 인간보다 수명이 짧고 더 빨리 성년을 맞는다. 숫자가 현저히 부족한 여자오크는 성인오크가 되면 독립을 하게 되 고 그들을 따라 전사오크들이 무리를 벗어나 새로운 무리를 형성한 다. 남자오크들 중 가장 강한 오크가 대장이 되고 6:1 비율의 여자 오크들을 먹여 살리고 보호하게 되지만 한번에 여러 마리의 새끼를 낳기 때문에 종족번식이 느리지도 않다. 내부의 힘 겨루기와 무리간의 갈등만 없다면 인간보다 훨씬 번영(?) 할 수도 있겠지만 선사시대의 문명으로 무슨....이라고 진은 생각했 다. 그들은 비교적 적은 수의 무리로 산 속 동굴에서 50여 마리쯤 모여 살고 있다고 한다. 그들은 인간 병사들 보다 더 강한 체력과 힘을 가지고 있지만 이지 가 부족하여 번번이 약탈에 실패하고 있었고. 진의 제의에 응한 것도 인간 남자가 아니라, 약한 인간 여자로 보고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당신들은 순박하군. 어쨌든 할 수 있는 선에서 세상을 헤쳐 나가고 있잖아. 의사 소통이 제대로 된다면 굳이 인간들과 적대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조마조마하며 듣고 있던 진의 일행은 모두 사색이 되었다. 와이즈는 계속 쿡쿡 거리고 있었다. "진. 인간들이 모두 너 같은 줄 아냐? 재미있는 광경이다마는 곧 해 가 진다. 계속 그러고 있다가는 오늘 내에 라돈에 도착 못한다. 오 크들과 밤을 샐 거냐? 흥미롭긴 하겠다만." "인간 마법사! 그륵. 싸울 생각인가? 그륵." 진은 공격적이 된 그들을 달래려고 벨트지갑에서 집히는 금화를 모 두 꺼내 오크대장에게 내밀었다. "이게 내가 줄 수 있는 돈의 다야. 내 일행도 털면 더 나오겠지만, 그러려면 싸워야 해. 난 굳이 피보고 싶지 않아. 이거 가져. 정보 준 대가야." 오크들은 처음 진이 마차에서 내려준 짐 더미 곁에서 그녀의 하는 양을 멍청히 보다가, 내민 금화들을 받아갔다. "그륵. 이건 정당한 거다. 그륵. 인간여자. 그륵. 싸우고 싶지 않다고 한 것은 너다. 그륵." "그래. 그래. 정당한 거야....더 도와 주고 싶지만 지금 난 사람들의 문제만으로도 너무 벅차거든? 나중에 자리가 잡히게 되면 당신들 종족까지 도울 여력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자신 없어. 여기 있는 오크말고도 보금자리에 대기 중인 동료도 있고 대륙 전체엔 엄청 더 많다며? 그러니까 오늘은 그냥 갈게. 너무 지나치지 않는 선에서만 산적 일을 하도록 해." ".........." "나중에 내가 당신들과 거래 할 일이 있을지도 모르겠어. 그때가 되 면 내가 다시 찾을 게. 다른 무리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그륵......" "그리고 나도 힘이 세. 뒤통수 칠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진은 그들의 눈빛에 탐욕이 사라지지 않는 것을 보고 옆에 있던 제 법 큰 바위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 박살 난 바위덩이를 보던 오크들은 놓았던 무기들을 집어 들었지만 진은 계속 말을 했다. "마법 아니야. 난 거짓말 안 해. 내 이름은 진이야. 내게 우호적이면 어떤 종족이라도 친구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적으로 간주되면 누구 라도 죽여. 난 이제 가 봐야겠어. 싸울 거야?" ".......약속을 지켰으니 그륵. 싸우지 않겠다. 그륵. 인간 여자 진. 그 륵...어디로 가나 그륵?" 진은 일행에게로 돌아가며 대답했다. "동 대륙 끝에 있는 드리얀으로 가고 있어. 다음에 또 만나면 아는 체라도 하자, 오크대장? 그리고 목욕 좀 자주 해. 여자오크에게 인 기 있게 될 거야." "........그륵." 그들은 황급히 마차에 오른 다른 일행들과, 연실 웃음을 참지 못하 고 있는 마법사의 뒤를 따라 마차에 올라 떠나는 진을 지켜보고 있 었다. [34] 7. 네카르도-라돈에서 * "레이디....오크들은 이지가 인간보다 떨어져서 잘 구스르면 협상이 가능하기도 하지만 위험합니다. 저들이 덤볐으면 큰일 날 뻔했는 데...." 레아의 할아버지는 진이 바위를 깨는 것을 보았지만 와이즈가 마법 을 쓴 줄로 판단했는지 식은땀을 닦으며 말했다. 와이즈는 그의 말에 여전히 실룩대고 있었지만 콜린스는 맞장구를 쳤다. "그래요, 레이디. 마법사님이 계시지만 오크들은 무시 못해요. 리툰 마법사님이 모두 처리해 주셨다고 해도, 한 놈이라도 살아 돌아갔더 라면 계속 몰려들었을 거 에요. 여행자들에게 오크들은 무지, 끈질 기거든요." "콜린스 잘 끝났잖아. 그보다, 레아 할어버지께 사과는 했어?" "예....아침에....죄송했어요. 레이디. 뭐도 모르고 오해해서...." "내게 죄송할 건 없지만, 콜린스." "예?" "넌 배우러 가는 거지?" "예!" 진의 당연한 말에 콜린스는 기운차게 긍정했다. "마법을 배우려고 가는 것도 있지만, 난 네가 마법 외의 것도 배웠 으면 좋겠어. 학교에 가면 친구도 사귈 테고 그렇다면 가지가지 사 연을 가진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될 거야. 학생은 배우는 입장이니 까 실수해도 돼. 하지만 성년이 되면 자신의 실수와 가치관에 책임 을 질 수 있어야 해. 난 네가 그렇게 되길 바래." 콜린스는 진의 말에 약간 고개를 숙였지만 진지하게 들었다. 와이즈도 할아버지도 레아도 진이 콜린스에게 하는 충고를 말없이 듣고 있었다. "지금껏 네얀에서 배웠던 것 들 외에 마법말고도 배울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배워. 마법 실력은 중요하지만 중요하지 않기도 해. 평생 3써클에 머문다고 해도, 배운 것을 어떻게 활용하며 살지가 더 중요 해. 지식을 축적하는 것 보다 더 좋은 공부는, 사람을 배우는 것이 야. 친구를 사귈 때도 그런 점을 유념한다면 좋은 친구를, 평생 힘 이 되어 줄 친구를 얻게 될 거야. 콜린스." "네...레이디, 명심할게요. 그리고 열심히 공부해서 꼭 찾아 뵐 거 에 요." 라돈은 네얀보다 규모가 작은 농업 위주의 영지였다. 바다와 면해 있는 도시가 아니라면 서 대륙과 동 대륙에서 큰 특색 없는 가장 흔한 스타일의 영지. 진은 콜린스가 비좁은 마부 석에 끼어 가기로 해서 레아와 마차 안 에 자리잡고, 와이즈의 눈총을 받아가면서 내내 졸았다. 도착한 것은 자정 무렵이었다. 영주의 성을 기준으로 성벽이 높다랗게 쌓아 올려져 있었다. 성문지기가 마부의 외침에 아래를 내려다보고 사라지더니 성문을 올려 주었지만 신분 확인 절차를 거쳐야 했다. 진은 와이즈와 자신의 성을 빼고 평범한 여행자로 신고했다. 진은 세 명의 병사들 뒤에 약간 거리를 두고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한 병사의 시선을 느꼈다. 그는 다른 세 명의 병사와 비슷한 차림새였지만 하는 양이 상급자 로 보였고, 어둔 밤 성벽에 걸린 횃불에 의지해서도 분명히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눈에 확 띄는 주홍머리색을 하고 있었다. '눈빛이 좀 다르네...' 일행 중, 진과 와이즈를 유심히 보는 듯 했지만 말은 걸지 않았고 굳이 캐묻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던 탓에 다른 병사들의 환영인 사를 뒤로하고 진은 시내로 들어갔다. "네카르도 라돈에 잘 오셨습니다. 운이 좋으시네요. 축제 기간이라 이 시간에 들어오는 것이 허락 된 겁니다. 잘 머물다 가십 시오" 늦은 시각이라 왕래하는 사람들은 몇 명 보이지 않았지만 밤하늘에 떠 있던 푸른 달이 진 일행을 맞아 주고 있었다. "아저씨, 고마워요. 바로 돌아가세요?" "아니요, 레이디. 라돈에서 저희 마을 쪽으로 가는 여행객을 알아봐 서 돌아가야지요." 진은 그에게 이미 대여 비를 주었지만 후한 팁을 주고 헤어졌다. 짐을 모두 뺏겨서 빈손인 레아와 할아버지를 위해 진은, 가장 크고 깨끗해 보이는 여관을 찾아 들어갔다. "방 있나요? 단체로 머무를 수 있으면 좋겠는데. 다섯 명이에요." 고급여관인지 손님을 맞는 사람도 옷을 깔끔하게 차려입고 있었고, 주인으로 보이는 그 남자는 35~40세로 보이는 외모에 그리스 복식 처럼 옷감을 몸 전체에 둘러 어깨에서 허벅지까지 마지막 끝자락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종업원인지 호위인지 구별이 안 가게 생긴 건장한 청년들이 입구와 실내 여기저기에 몇 명 보였다. 주인 남자는 여행객들로 보이는 그들을 쓱 훑어보고 진에게 꼭 달 라 붙어있는 레아와 할아버지에게 인상을 좀 썼지만 귀티 나는 진 과 돈 있어 보이는 와이즈를 재빨리 눈어림하고 공손하게 대답했다. "네, 아가씨. 운이 좋으시군요. 우리 라돈에 곧 축제가 있어서 방이 부족했는데 제일 좋은 특실이 하나 남아 있답니다. 조금 비싸긴 하 지만...안내 해 드릴까요?" "네." "저. 요금은 선불입니다. 몇 일이나 머무를 예정이 신지." 진은 장사 속이 보이는 그의 떠보는 듯한 면상이 조금 웃겨 보였다. 프론트와 면한 식당과 여관 내부는 조금 더 고급스러워 보이고 훨 씬 크긴 해도 콜린스네 여관과 구조는 별 차이 없어 보였고, 늦은 식사를 하고 있는 여행객들과 술을 마시고 있는 손님도 몇 몇 보였 다. 진은 작은 호두알 만한 루비를 하나 던져주고 희색이 감도는 그에 게 방을 준비해 줄 것과 식사를 주문했다. 오크들에게 도시락까지 넘겼던 탓에 아침식사 후 아무것도 먹지 못 했던 그들은 윤이 나게 닦여진 네모난 탁자에 앉아 주방에서 날라 져 오는 음식 그릇에 고개를 내리고 열심히 배를 채웠다. "배고파서 혼났네..." "그랬겠지. 오크 못지 않은 식성인데. 그냥 그들과 살아 보지 그랬 냐, 진. 말도 잘 통하고 여자오크도 부족하다던데." "마. 마법사님...." "와이즈 네가 더 많이 먹었잖아. 드. 래. 곤. 못지 않은 식성이면서." ".........." "레. 레이디...." 식후 진과 와이즈의 느긋한 말다툼은 진이 콜린스와 할아버지에게 '아, 와이즈는 사랑 쌈을 걸고 있는 거니, 걱정 말아요.'하는 말을 해 서 시작되자마자 금방 끝낼 수 있었다. 탁자가 치워지고 와이즈가 주문한 포도주 통이 새로 배달되자 진은 콜린스를 시켜 마르카 사제가 가르쳐 준 방법으로 길드와 접선토록 지시했다. 접선 방법은 간단했다. 거리의 거지들 중 나이가 젊은 축의 인물을 골라, '누구 누구요, 좀 봅시다.' 라는 뜻으로 답변 없이 말을 건네기만 하면 되었다. "잠을 좀 자둬, 레아. 할아버지도요. 아. 먼저 좀 씻어야지. 이봐요. 주인아저씨!" 진은 주인에게 방에 목욕물과 갈아입을 옷 등을 준비해 달라고 청 하고 포도주를 앞에 둔 일행을 식당에 남겨두고 레아와 함께 먼저 올라갔다. 방은 3층이었다. 방안엔 양초를 꽂아 불을 밝힌 여러 개의 촛대가 놓여져 있었다. 가슴까지 오는 높이의 포도주 통을 닮은 둥그런 목욕통이 여러 개 의 침대가 놓여진 방 여유공간에 배달되고 시중을 들 여자아이만 남고 하인 일을 하는(노예들로 보였다.) 남자들의 물러가자, 진은 레 아의 옷을 벗는 것을 도와주고 헤어지고 더러워진 옷을 하녀에게 버리게 했다. 진이 레아를 목욕통에 들어가도록 부축해 주고 팔을 걷어붙이는 것 을 보고 수건으로 쓸, 기다란 천을 들고 있던 종업원이 나섰다. "제. 제가 돕겠습니다. 아가씨....' 그녀는 진보다 나이 들게 보였지만 정확한 나이를 가늠하기 힘들어 보였다. 짧은 원피스 차림이었지만 깨끗한 편이었고 노예들의 증표 인 사슬을 걸 수 있게 되어 있는, 족쇄처럼 생긴 발찌를 한쪽 발목 에 차고 있었다. 진은 그녀에게 일을 맡기고 의자에 걸터앉아 그들을 지켜보았다. 레아는 14살이었지만 정신연령은 8살 정도라서 부끄러워하는 기색 이 별로 없었고, 연두색 머리의 노예 하녀는 앙상한 레아의 몸을 씻 겨주며 의문을 담은 눈빛을 하고 있었지만 무표정한 얼굴로 결코 속눈썹을 들어 보이지 않았다. "라돈에는 아가씨 같은 사람이 많나요? 노예 말이에요." 그녀는 얼른 대답하지 않았다. 네얀은 상업도시였기 때문에 일부 부유한 상인들의 선박에서 노를 젓는 노예와 영주의 성에서 잔일을 하는 노예들이 아니라면 직접 쓰지 않고 파는 쪽이었다. 라돈에 와서 고급여관이긴 하지만 안에 배치된 노예들로 보이는 사 람들을 대면하자 진은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다지 많은 편은 아니에요. 이곳은 라돈에서 가장 비싼 여관이 라서 저희 같은 일...꾼이 몇 명 있지만, 대부분의 여관에는 없습니 다." 자세한 답변을 피하는 듯하고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조숙함에 진은 더 묻지 않았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 것도 소극적인 태도도 그녀의 신분 탓이리라. 레아가 새 옷으로 갈아입고 방이 치워지자, 연두색 머리의 일꾼 아 가씨는 물러가고 곧 일행들이 들어왔다. "와. 넓네요. 젤 좋은 방이긴 하나보다. 레이디. 침대가 여섯 개나 되요. 가운데에 칸을 가를 커튼도 있잖아! 여기 주인 아저씨 부자네. 노예들도 데리고 있고...." 침대 두 개 사이마다 커튼이 쳐지게 되어있었다. 진은 병동처럼 느껴지게 하는 그곳의 창가 쪽에 자리를 잡았다. 지쳤는지 콜린스와 할아버지는 진과 와이즈의 잠자리를 봐 주고 잘 준비를 했다. 노크소리가 들리자 진은 문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열고 들어온 것은 아까 그 노예소녀와 그녀보다 조금 더 나이든 다른 여자였다. 연두색 머리의 아가씨가 머뭇거리며 말을 했다. "저...주인께서. 손님들 의사를 물으시라고 해서요. 여자 분들이 계시 긴 하지만. 원하시면 따로 방을 준비해 주시겠다 고도...." "..........." 진은 칸막이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았지만 일행도 모두 들어 온 그 녀들을 보았을 테고 머리를 긁적이고 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콜린스와 할아버지는 그런 대우를 받아볼 형편이 아니었을 테고 와 이즈는 재미있어 할 것이다. '그 아저씨 거스름돈을 내주기 싫은가보군.' 진은 한숨이 나왔다. "아가씨들, 둘뿐이에요?" "예?" "손님 받는 일을 하는 아가씨가 이 여관에 둘뿐이냐고요." "예에....." "그럼, 들어와요. 오늘은 내가 사지요." "..........." 그들은 머뭇거리며 들어와서 지시를 기다리는 듯 했고, 진은 손짓으 로 비어 있는 레아의 침대로 앉게 했다.-와이즈 혼자 가운데의 침대 두 개를 차지하고 있던 중- 그들은 여자손님에게 불려가자 더 당황해 했지만 진의 의사에 따라 자리를 잡고 나란히 앉았다. "콜린스, 할아버지. 늦었으니 그만 자요. 내일 봐요." '와이즈. 잠들게 좀 도와줘.' 진의 의사를 알아들었는지 와이즈는 콜린스와 할아버지에게 속말로 어제처럼 슬립마법을 걸었다. 진은 팔에 매달려 자신과 함께 메트리스 위에 올라앉아 있는 레아 를 내려다보았지만, 창 밖에 새롭게 감지 된 존재들과 함께 묵인했 다. 와이즈가 자기 침대 옆의 커튼을 벽 쪽으로 치우자 노예소녀들이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그는 마법사 겉옷을 벗은 평상복차림으로 침대에 엎드려서 그들을 구경할 태세를 갖추었다. "아, 난 신경 안 써도 됩니다. 아가씨들. 이야기 나누세요. 두 분을 산 것은 그녀니까요." "..........." "화가 풀렸나 보네, 와이즈?....그렇게 재밌어?" "그렇다. 내 맘이다. 네 그 묘한 놀림...아니, 공격을 무시해 주기로 했다." 진도 기꺼이 그를 무시해 주고 아가씨들에게로 눈길을 향했다. "이름이 뭐 에요? 난 진이라고 해요. 17...아니 16살이고요." 그들은 진의 첫 물음이 뜻밖이었는지 조금 더듬거리면서 대답했다. 연두색 머리의 소녀는 17살에 미나라고 했고, 어둔 갈색머리의 아가 씨는 20살. 쟌느라고 대답했다. "하루 몇 시간 일해요? 하루 일과가 알고 싶어요. 오늘은 내가 샀으 니 내 요구에 따라서 질문에 답해 줘요. 뭐든지 말이에요. 노예니까 거부권은 없지요?" 쟌느가 대답했다. 진의 말대로 그들에게는 거부권 같은 것은 없었으 니까. "하루종일 일합니다. 이곳은 여관이라 손님들의 방문이 새벽에도 간 혹 있어서 자다가 불려 가는 일도 있고. 아침 일찍 일어나 청소, 빨 래, 요리, 손님상대. 모두 합니다. 힘든 가사 일이나 중노동은 남자 노예들이 하지만 저희도 거의 쉬지는 못합니다. 답이 되었습니까?" 그녀는 화난 기색을 모두 감추지는 못했고, 말투에 원망을 담아 진 의 물음에 답했지만 곧 눈을 내리깔았다. "내 얼굴을 보며 말해요. 시선을 피할 필요는 없어요. 당신들의 죄 를 물으려는 것이 아니니까요. 이곳은 정직과 순수를 주관하는 어니 스트 신을 모신다고 들었어요. 그렇다면 당신들에게 어떤 대우가 있 었을지 예상은 하지만 확인은 해 봐야하니까요." 그들은 서로 눈치를 주고받았지만 여전히 눈을 바로 하진 못했다. 진은 최대한 빠르게 그들에게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고 미나와 제인 은 번갈아 가며 짧은 대답을 계속했다. 노예는 인권이 없기에 노예이다. 어떤 계통이든 팔려가게 되면 그것으로 대가 없는 노동이 시작됨을 의미했고 예전의 신분이나 인격도 완전히 무시되었다. 몇 몇 나라들은 노예제도가 금지되어 있었지만 대부분은 소수라도 그들이 존재했다. 팔려 가는 곳에 따라 겪는 일상이 약간씩 다르지만 그들의 경우. 미나는 15살에 쟌느는 17살에 이곳에 팔려왔다고 한다. 미소녀나 미소년은 귀족 같은 부유한 계층들에게 국경을 넘어 비싼 값에 팔려 가는 경우도 많고, 게 중에 젊은 편인 그녀들 같은 경우 에는 전용 술집이나 여관 같은 곳으로도 많이 팔려간다. 일부 신전에서도 노예를 사서 일을 시키기도 하고, 좋은 주인을 만 나면 매질을 당하지 않고 굶지 않는 정도에 첩 구실을 하며 편한 생활을 하는 노예 남녀도 있지만, 그들은 해당되지 않았다. 그들은 손님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려는 주인의 상술에 일을 견디기 힘들 정도로 많이 하지는 않았고 깔끔한 편에 속했지만 노예는 노 예였다. "아이를 가지게 되는 경우는 없나요?" "있지요. 노예들끼리 붙여서 일부러 아이를 낳게 하는 경우도 있고. 안 그러면, 약을 먹여요. 비싼 약이지만 그런 약초가 있어요. 이름은 몰라요. 주는 데로 먹어야 하니까요." "......꾸준히?" "아니요. 처음에 세 번 정도 먹었어요. 독초라고 들었어요. 저흰 아 이를 가질 수 없어요. 해독하는 약은 더 귀하고 비싸다고 들었고 요." 미나의 고분고분한 대답에 진은 화가 치밀었다. '미치겠네.' "......그런 약초를 먹지 못하는 노예들 중 아이를 낳는 경우도 많아 요. 하지만 노예들이 낳는 아이는 모두 그 주인의 노예가 되어요. 아버지의 신분을 알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거든요." "그 외의 경우는 없어요?" 쟌느가 미나에게 바톤을 넘겨받아 대답했다. ".....신분이 높거나 돈이 많은 분들께 첩 구실을 하는 노예들의 경우 엔 아이를 낳으면 돈을 들여서 농노나 평민계급으로 올려 주기도 한다고 들었습니다. 주인이 너그럽다면 가능하지만. 저도 말로만 들 었고, 대부분은 인정받을 수 없어요." 그렇겠지. 진은 생각했다.-농노나 평민들이 낳은 자식도 정통이 아 니면 이름을 주지 않는 판에 노예가 낳은 아이를 자식으로 인정하 는 위인이 얼마나 있겠는가. 네얀에서 들었던 단편적인 노예들에 대한 정보보다, 직접 듣게 된 그들의 고백에 진은 더 짜증났다. "노예 신분을 벗게 되는 경우는 없나요?" 미나와 쟌느는 서로 눈치를 보다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주인께서 놓아주거나.....도망가면 되지요. 다른 나라나, 다른 도시로 요. 하지만 불가능해요. 노예들은 등에 낙인이 찍혀요. 저희 같은 경 우는 보기 흉하다고 족쇄만 채우고 감시를 받는 정도지만, 그것으로 도 성을 빠져나갈 수는 없거든요. 마나를 다룰 줄 아는 노예나 가격 이 높은 노예들은 마법이 걸린 팔찌 같은 값비싼 아이템들로 묶여 있게 되어서....도망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설사 도망친다고 해도 쫓기게 되고 잡히면 그 자리에서 죽게 됩니다." 대화 시작의 짧은 대답과 달리 미나의 점점 길어지는 대답에 쟌느 가 덧붙여주기까지 했다. "드물게 주인에게 신뢰를 얻거나 공을 세운 노예들은 신분을 벗기 도 합니다만, 능력 있거나 글을 배운 과거를 가진 남자노예들에게 생길수 있는 일이고. 저희 같은 노예들은 평생, 저희가 낳은 아이들 도 평생 묶이게 됩니다. 대륙의 다른 어떤 나라에선 노예가 낳은 아 이도 농노나 평민으로 받아주기도 한다고 들었지만....." 진은 좀더 그들에게 묻고 이야기를 들었다. 레아는 잠들지 않고 계속 진의 팔에 매달려 있다가 알아듣게 되는 말들에 움찔거리곤 했다. "....그 여자 애는 아가씨의 노예....아니, 하녀인가요?" 쟌느가 용기를 낸 듯 진에게 물어오자, 진은 레아를 내려다보았다. "아니, 친구 에요. 동생이려나...?" 쟌느는 아무래도 얘기를 할수록 진의 거리낌없는 태도가 그냥 돈 많은 여행자가 아닌 것 같은 생각이 피어올라-귀족 레이디라면 물 론 자신들을 쳐다보지도 않겠지만 혹시나 하는 생각에- 가졌던 희 망 섞인 바램이 좌절됨을 느끼고 힘없이 반문했다. ".....귀족 분이 아니셨나요?" "글쎄요. 내가 귀족이던가...." 여자들의 두런거리는 이야기 소리를 들으며 구경만 하고 있던 와이 즈가 툭 끼어 들었다. "귀족 맞아요. 웃기는 귀족이지요?" 듣기 좋은 남자 목소리에 그들은 잊고 있던 와이즈를 돌아보았다. 진은 인상을 한번 써 주고 쟌느와 미나에게 그들의 주인에 대해서 몇 가지 더 물었다. "됐어요. 이제 자요. 레아는 나와 자려는 모양이니까 빈 침대에서 자도록 해요. 늦잠 자도 되요. 좀 쉬어요." ".........." 진은 와이즈에게 눈짓을 했고 그는 창 밖에서 엿보고 있는 존재를 의식하고는 보란 듯 주문을 외우며 두 아가씨를 잠들게 했다. "....대기에 흐르는 잠의 요정이여, 휴식이 필요한 자에게....슬립." 레아까지 잠들었다. 진은 그들을 침대에 옮겨주고 창가로 가서 나무가 드리워진 창턱 그림자에 숨어 있던 사람 둘을 양손으로 턱 잡아 방안으로 끌어내 었다. "우왓-!" "하이! 밤손님들. 그 자세로 1시간이나 불편하게 기다리게 해서 미 안합니다. 이제 용건을 주고받읍시다. 젠장. 오늘밤도 잠자긴 글렀 네." [35] 네카르도-라돈에서(2) * 그들은 라돈의 길드 장이 탐색 목적으로 보내 온 1차 방문자들이었 다. 진은 그들의 길드 내에서의 책임과 역할이 하위에 머문다는 것 을 빠르게 파악했다. 거두절미하고 마르카 사제에게서 받은 메달을 보여 주며, 길드 장이 직접 오든지, 아니면 네얀에서 받은 메시지대로 정보를 줄 사람을 보내 주던지 하라고 그들의 코앞에 얼굴을 들이대고 또랑또랑하게 의사표시를 하고 다시 창 밖의 원래자리에 던져주었다. 와이즈는 진의 콩 볶는 듯한 잽싼 행동과 말에 배게에 얼굴을 파묻 고 킥킥대다가 진의 다음 요구에 머리를 싸맸다. "나 좀 씻겨 줘. 찜찜해 죽겠어. 전에 마법이나 정령으로도 씻을 수 있다고 그랬지?" "내가 네 시종이냐. 엉?" "난 매일 샤워하는 풍습의 세상에서 살다 왔단 말이야. 근질거려 죽 겠어. 어렵지 않잖아! 길드에서 사람이 오기 전에 빨리 좀 씻겨 줘. 여긴 물도 귀한 것 같더라." "젠장. 마법을 배우든지, 정령을 부르는 것을 익히든지 해라. 성가셔 죽겠네." 진은 그가 마법 어를 외치자 마나라고 부르는 그 뭐라고 표현하기 힘든 기운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감싸며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 다. ".....다 된 거야?" "그래." "어째 영....못미덥네. 물로 씻는 것이 제일이라니까." "운*디*네!" 와이즈가 진의 말이 끝나자마자 물의 정령을 부르더니 그녀를 가리 키며 엄숙하게 명령했다. "저 여자 좀 씻겨 줘라. 빡빡. 깨끗이." [네, 주인님.] 진이 처음 보는 물빛 형체의 긴 생 머리를 흐트러뜨린 어린 소녀모 습의 정령을 멀끔히 쳐다보다가, '와! 반가워요. 환상적으로 생겼.....' 하고 말하다, 명령을 받은 정령 이 곧장 달려들어 몸 주위를 빙글빙글 도는 것 때문에 인사차 든 한 손을 그대로 올린 채 말문이 잠깐 막혔다. [빡빡. 깨끗이 씻겼습니다. 주인님.] 어쩐지 웃음기가 느껴지는 정령의 말에 진은 세탁기 안에 갇혔다가 풀려난 기분으로 마주 미소를 짓고 정령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운디네가 사라지자 아쉬운 생각이 들어서 진은 언젠가 정령을 부릴 줄 알게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물기 어린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어 내리다가 입고 있던 옷까지 약간 습기가 머물러 있는 것을 알 고 와이즈에게 다시 요구(!) 했다. "하는 김에 말려 줘, 와이즈." ".........실*프!" [네, 주인님. 부르셨나요.] 짠하고 나타난 바람의 정령을 진은 또 말똥거리며 바라보았다. 빛깔 없는 여성 체의 정령은 운디네와 비슷한 외모였고 투명한 셀 로판종이를 구긴 것 같은 존재 감에 12~13살 정도의 체구를 하고 허공에 넘실거리고 있었다. '상희다....아니, 상희 선배인가?' "저 여자 좀 말려줘라. 바짝!" 와이즈의 명령에 그녀는 진의 몸 주위에 따뜻한 봄바람 같은 감촉 으로 휘돌다 다시 멈췄다. 와이즈가 손을 저으며 물러나게 하려는 듯 하자 진은 황급히 불러 세웠다. "잠깐만. 정령아가씨!" [.........] "....들어줘라. 실프." 진은 가슴이 찌릿한 작은 통증을 느끼며 물었다. "내 친구가, 공기가 되었을 텐데. 같은 식구, 아니 같은 계열이니까 혹시 알 수, 아니....젠장 표현을 못하겠네." [...공기가 되었다면 언젠가 정령이 됩니다. 그 상태라면 개별적인 존재로 거듭나려면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지금은 저희도 존재 여부 를 알 수 없답니다.] "....그래요. 그렇다면, 정령의 모습과 의지를 갖추게 되는 것은 정확 히 얼마나 걸리나요? 인간의 시간으로 말이에요." [약간씩 다릅니다만, 보통 300년 이후부터 형상을 갖추기 시작합니 다. 그전에는 '개인'의 개념이 없습니다.] "더 빨리 정령이 될 방법이나 전례는 없나요?" [....제가 알기론 없습니다. 아가씨.] 진은 말라서 다시 둥글게 말린 머리카락에 손가락을 대고 빙빙 꼬 며 말했다. "내 친구가...가족이 되면, 아니 정령이 되면 친절하게 대해 주겠어 요?" [아가씨의 친구 분을 구별해 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정령 계에서 저희는 모두 동등합니다.] 진은 몇 일 사람들의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혀 잊고 있던, 이 동화 같은 세계에서 얻게된 신비로움을 다시 체험하고, 상희와 친구들을 되살리게 하는 그들의 존재와 특이한 목소리. -가슴과 머릿속에 다 정하게 울리는 듯 들리는 의사표현 방식에 마음이 흔들렸다. "당신들은 어둠계열의 정령과 너무 다르군요. 기분 좋은 느낌, 상냥 한 느낌이 들어요. 대답해 줘서 고마워요. 실프 아가씨." [....저도 다정한 대화 고맙습니다. 저희의 목소리를 듣는 분은 영혼 이 아름답고 깊이가 있는 법이지요.] 실프는 와이즈에게 고개를 까닥이더니 곧 사라졌다. 와이즈는 침대에 걸터앉아 정령이 자리했던 허공을 그대로 응시하 며 서 있는 진을 바라보며 설명했다. "마나를 느끼게 되면 쉽게 정령을 부를 수 있을 거다, 진. 넌 친화 력이 있으니까. 보통은 정령을 보지도, 그들의 말을 들을 수도 없 다." 진은 와이즈를 돌아보며 조금 낮아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정령사는 어떤데?" "정령사는 드물다. 선천적으로 쉽게 마나를 느끼는 경우에 정령을 감지하게 되면 어릴 때 이미 정령을 부릴 수 있게 되기도 하고, 마 법을 배우다가 정령사가 되는 경우도 있다. 정령을 부리는 일은 신 체에 쌓인 마나를 이용하지 않고 그들이 원래 가지고 있는 마나-대 자연의 마나를 이용한다. 정령과의 의사소통이 자유로울수록- 친화 력이 강할수록 효과적으로 그들을 이용할 수 있다. 넌 보통 정령사 보다 더 큰 친화력을 가지고 있으니, 그들이 쉽게 널 찾아 줄 거 다." "............" "그들의 감정까지 느낀다면 대단한 편이지." "난 그 마나라는 것을 느끼기 힘들지도 몰라. 그런 게 뭔지 모르는 세상에서 자랐으니, 존재한다고 해도 눈으로 직접 보고 들을 수 있 는 것이 아니라면 큰 계기 없이는 캐치해낼 자신이 없어. 관념이란 때로 아주 고집이 세거든. 당장 급한 것도 아니니 천천히 생각해 보 지 뭐." "............" 진은 바람의 정령을 대하고, 옛 기억에 가슴이 비는 듯한 기분이 드 는 것이 싫어서 와이즈에게 다가가 앉아있던 그를 옆자리에서 끌어 안았다. "뭐하냐!" "스킨 쉽. 체온이 필요해. 좀 나눠줘, 와이즈." "............" 와이즈는 그의 등을 토닥였던 황당하고 괘씸했던 진의 행동을 잠시 떠올렸다. 낮게 코를 골고 있는 할아버지와, 뒤척이고 있는 콜린스. 쌕쌕대며 잠들어 있는 레아와, 조용히 꼼짝 않고 자는 미나, 이불을 몸에 칭 칭 두르고 잠에 빠져 있는 쟌느. 그들의 나른하고 잠을 부르는 인기척 속에서 진은, 소리내지 않는 조용한 방문자가 문 앞에 와 있음을 깨닫고 와이즈의 왼팔에 대고 있던 이마를 들었다. 그리고 노크 소리가 들리길 기다렸지만 움직임이 없었기 때문에 다 리에 힘을 주어 일어나 직접 문을 열어 주었다. 그는 성문지기 일을 하고 있던 주홍머리의 병사였다. "들어오세요. 우두커니 서서 뭐하시는지." ".........." 그는 방안으로 들어와서, 잠들어 있는 다른 사람들과 침대에 편한 자세로 앉아 있는 와이즈와 의자 두 개를 끌어다 작은 여자아이가 누워있는 침대 앞에 자리를 마련하고 앉는 진을 날카로운 눈빛으로 훑어보았다. "우리가 네얀에서 온 것은 알지요? 전 진이고 친구는 와이즈라고 합니다. 그쪽 신분을 말해 주겠어요? 길드 장인가요?" "난 도둑길드 소속이 아니요, 아가씨." "난 도둑길드라고는 안 했는데요? 관계자가 아니라면 어떻게 우리 에 대한 정보를 알았지요? 성문지기도 아니군요. 우릴 의식하고 있 었거나,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나요?" "내 이름은 판이고 22살이오. 앉아도 되겠소?' 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화려한 머리색을 하고 있었지만 가볍게 보이지 않는 인상을 하고 있었다. 대단할 것까지는 없었지만 이목구비가 뚜렷해서 미남 축에 들게 생겼고 와이즈보다 조금 작은 키였지만 단단해 보이는 체구를 하고 있었다. 입고 있는 옷은 성문에서 보았던 가죽 보호대를 한 병사복장이 아 닌, 평민들이 주로 입는 나시 형식의 무릎까지 오는 평상복위에 목 이 옆으로 많이 패인, 목과 끝단의 테두리에 색실로 수놓은. 받쳐입은 평상복 보다 짧은 겉옷을 걸치고 역시 폭 넓은 허리 덧개 에 핀을 꽂지 않고 한쪽 허리에서 덧 달린 끈으로 묶어 입고 있었 고 검 집도 걸치고 있었다. 샌들을 신고 있었지만 양말로 쓰는 천을 대지 않고 정강이까지 샌 들의 끈으로 진처럼 엇갈려 올려 맨 그의 들어 난 발목에는 흉터가 보였다. 진의 시선에 그녀가 자신의 과거를 알아챈 것을 알았는지 판은 자 조적인 미소를 띄고 약간 거칠게 들리는 목소리로 말을 했다. "그렇소, 귀족아가씨. 난 노예였소. 예를 갖추지 못해서 미안 하오 만, 불쾌해도 지금 당장은 어쩔 수 없을 거요. 난 믿는 것은 검 실 력뿐이니까. 마법사와 있다고 해도 말이요." 진은 픽 웃으며 옆으로 놓여진 의자 등받이에 팔을 올렸다. 왜 저들은 눈으로 직접 본 것도 믿으려 하지 않는 걸까. 진은 외모 덕에 가냘픈 아가씨 취급을 받는 것이 슬슬 지겨워졌다. "예를 취하길 바라는 것은 아닌데요. 아, 저, 씨. 말투가 나이에 어 울리지 않게 너무 노티 나요. 겉보기엔 20대 맞는데 50대 아저씨랑 이야기하는 것 같잖아! 그 점만 참고해 주쇼!" 진이 그의 말투를 흉내내 말을 끝맺자, 와이즈는 아예 편안히 엎드 려서 턱을 두 손바닥으로 고이며 입 부위를 가렸다. "....재미있는 레이디시네." "내가 유머까지 갖추긴 했죠.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전 길드에서 사 람이 오길 기다렸는데, 관계자가 아니라는 것과 어쨌든 절 찾아오게 된 경위에 대해 말씀을 해 주시죠." 그는 성년을 넘겼는지 아직 인지 구별이 되지 않는, 차고 있는 팔찌 와 비슷한. 아니, 더 투명하고 고운 피부색의 귀하게 자란 듯 한 그 녀를 관찰하는 시간을 연장시켰다. '메시지가 잘못된 거 아닌가?' "설명!" 진의 독촉에 그는 말문을 열었다. "도둑 길드 장의 아들을 친구로 두고 있소, 아가씨." 진은 바뀌지 않는 그의 말투에 고개를 옆으로 떨어뜨렸고, 판은 허 리의 검 집을 풀더니 바닥에 그림을 그리는 시늉을 하다가 말을 이 었다. ".....길드 장의 후임이 될 내 친구가 거의 라돈을 지휘하고 있는 형 편이라 가까운 사이의 난 그와 함께 있다가 네얀에서 들어 온 통신 을 받았...습니다. 아가씨 일행이 라돈에 들어온 것을 알려준 것도 나였고, 그가 보냈던 소식통에게서 이 여관의 노예여자들과 한 대화 도 들었...습니다." 진은 그의 고집이 아니, 자존심인지가 답답하게 느껴졌지만 참아보 기로 했다. "친구녀석이 직접 오려고 했지만 호기심이 일어서 먼저 방문해 본 겁니다. 라돈의 정보라고 할 만한 것들이야, 저 정도도 모두 파악하 고 있으니까요." "네얀에서 받은 통신 내용은 뭐였는데요?" 판은 피식 웃더니 들은 대로 대충 읊었다. "운 좋은 영지는 레이디 진의 방문을 받을 것임. 길드 측에서는 최 대한 레이디의 의사에 따라주기 바람. 그녀가 원하는 것은 얻을 수 있는 모든 정보. 손발이 되어줄 것을 권함. 네얀을 통째로 사신 분 임. 모든 거지와 농노들이 직업을 얻었음. 이었습니다. 정말인가요?" ".........." "처음엔 친구와 어이없어 했지만 길드 장의 패까지 넘겼다는 말에 무시할 순 없었지요." '기대하게 되면 돌려주는 것이 더 벅차진다고. 마르카 사제...' 진은 그가 통신내용에 대한 진실 여부에 대한 답을 기다리는 것을 알고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몸의 신경이 창 밖으로 분산되는 것을 애써 누르며 대답했다. "맞긴 하네요. 네얀 주민들을 모두 고용하기는 했으니까요." 말하면서 진은 이 미팅이 끝나면 폴로네오에게 통신마법을 시행해 보리라 마음먹었다. "자- 그럼, 대신이라도 온 것은 온 거니까, 줄 수 있는 정보를 좀 주시죠. 전 시간이 없어요. 바빠요." "뭐부터? 그리고 네얀과 라돈은 다른 영지요. 내게...우리에게 덕될 것이 있겠습니까?" "그거야 들어봐야 알 일이죠. 당신은 보기에 그다지 궁색해 보이지 도, 타인의 도움이 절실해 보이지도 않는데요?" ".....난 노예였습니다." "그래서요? 지금은 아니잖아요. 그리고 사정을 모르면 어떤 약속도 못하지요. 먼저 그쪽 개인 신상에 관한 것부터 시작하지요. 출발로 삼기 좋잖아요?" ".........." 그는 진이 보통내기가 아닌 것을 알았지만 아무래도 어찌해야 할지 막막했다. "당신이나 길드 측에 해 끼칠 일은 없을 거 에요. 호기심이 일었다 니, 얼굴을 확인한 대가로 알고 있는 것만 말해 주세요. 이곳 라돈 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어떤 생활들을 하고 어떤 문제를 안고 있는 지 알고 싶은 것뿐이에요. 그러다 도울 수 있을만한 사람은 돕고 힘 에 겹다면 그냥 떠나야지요. 아무것도 약속 못합니다. 계산이 나오 기 전에는 요." 판은 검 집을 든 손을 까닥대다 방안을 다시 휘둘러보았고, 진은 뜸 들이는 그를 포기하고 일어나서 닫아두었던 나무 창문을 열어 젖혔 다. "문 나두고 자꾸 창문을 이용하는 것은 아무래도 직업정신이 투철 한 탓이겠지요?" 검은 옷과 같은 색의 두건을 쓴 회색 눈동자의 청년이 빙긋 웃음을 띈 얼굴로 진의 초대에 방안으로 가볍게 뛰어 내려섰다. "어이- 판. 궁금해서 말이야. 이렇게 아름다운 아가씨와 이 야심한 밤에 네 녀석만 만나란 법은 없잖냐. 안녕하세요. 레이디 진. 전 카 일이라고 합니다. 저 속 늙은 녀석과 달리 파릇파릇한 19세. 장래가 촉망되는 좋은 남자지요. 손을....." 익살스런 동작으로 내밀지 않는 진의 손목을 잡아채더니 그는 손등 에 열렬히 키스를 했다. 그가 들어오자 조용조용하던 방안 분위기가 삽시간에 깨져서 진은 참 개성 있는 방문자들로 피곤한 밤이라는 생각을 했다. "알았어요. 인사는 받았으니 손은 고만 놓으시죠." 카일은 진의 말에 당치않다는 표정으로 의자 쪽으로 인도하더니 탁 자 없는 진의 의자를 척 빼는 시늉을 하며 앉기를 권했다. 와이즈는 일어나 앉아 손가락으로 귀를 후비는 시늉을 했다. "반갑습니다. 레이디 진. 네얀으로부터 조금 전 다시 통신을 주고 받았지요. 안부를 묻더군요. 거리의 아이나 여자나 네얀에 속한 모 든 주민들의 사랑을 받고 계시더군요." 진은 의자 아래 다리를 쭉 뻗고 앉아 팔짱을 끼고 천장을 바라보았 다. 카일이 방안에 남아 있던 두 개의 의자 중, 하나를 들고 와서 판과 어슷하게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제 사설은 좀 빼고 얘기 좀 들어보지요. 라돈의 도둑 길드 후임 자님." "카일 이라니까요. 이름을 불러 주십시오. 레이디 진." 판과 달리 장난기가 다분하지만 겉보기뿐이라는 것을 쉽게 짐작하 고 진은 미소까지 지어주었다. "카일. 읊어 봐요. 여기 영주 님에 대해서. 신전에 대해서. 인구구성. 생활수준. 부유한 계층....모두 있는 데로 들어 보지요." "소문대로 화끈하십니다. 레이...." 판이 검 집을 바닥에 찍는 동작을 하다 슬쩍 그의 발등을 찍자, 잠 깐 카일은 말을 멈추었다. "레이디. 제가 드리는 라돈의 소식은 이곳에서 사는 분들은 누구나 압니다. 해서, 굳이 보답을 바라지는 않겠습니다만 굳이 보수를 주 시겠다면 저와 하루만 데이트.....윽." 서로 신경전을 벌이던 그들은 진의 쏘는 듯 한 시선에 카일의 주도 로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36] 네카르도-라돈에서(3) * "......이상입니다, 레이디. 뭐 더 궁금하신 거 라도?" 카일은 라돈에 대한 리포트 내지, 논문을 읽는 것처럼 줄줄 주워 섬 겼다. 진은 뼈대라 할 수 있는 이야기만 머릿속에서 요약정리를 했다. -라돈의 영주는 악독한 것은 아니지만 존경받을 정도의 위인은 아 니고, 신전은 영지의 가장 큰 샘을 관리하고 있는 까다로운 곳이었 고. 머물고 있는 여관처럼 노예들을 부릴 정도의 상인들은 흔치 않 지만 그 몇몇에게 부가 집중되어 있으며, 농노들은 차라리 노예보다 못한 생활을 하고 있고, 영지 자체에서 나는 특산물이랄 수 있는 것 은 없지만 자급자족은 가능한 곳이다..... "라돈은 강이 가깝지 않나요?" 카일은 진회색-잿빛에 가까운 눈동자에 웃음을 담고 대답했다. "강을 끼는 영지를 남작정도의 귀족이 관리하겠습니까. 나라의 수도 쯤 되야 강 근처에 자리하겠지요. 대륙 정세에 어두우시군요." 진은 이해가 되지 않아서 다시 그에게 들은 말들을 더듬어 보았다. "산맥 수준은 아니지만 에요타 산맥에서 파생된 산지와 가깝잖아요. 강이 아니라면 작은 시내라도 없단 말이에요?" 그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에, 없습니다. 레이디. 물론 비가 오면 작은 시내가 여기 저기 흐 르긴 하지만 요. 그래도 이곳은 농사를 짓기에 기후환경이 그다지 나쁘지는 않거든요. 봄 가뭄이 극심한 정도는 아니고, 필요할 때 적 당히 비도 내려주고 원래는 식수로 사용하지만 가뭄이 들거나 하면 어니스트의 신전 앞의 공동 샘을 이용합니다." 진은 다시 문명의 차이를 실감하고 머리가 아파 왔다. "샘을 이용하는 것은 자유로운가요? 카일은 진의 물음의 방향이 생각지 못했던 엉뚱한 방향으로 가고 있음을 알고 그의 검은 두건 아래 눈 색과 같은 잿빛 머리를 다시 갸웃거렸다. "어차피 이 땅의 주인은 영주 님이시니 농업 용수로 쓰는 물에 제 약을 두지는 않지요. 농사짓는데 필요한 물을 못 쓰게 하면, 수확을 기대할 수 없지 않습니까. 세금을 받으려면 자유로이 이용하게 해야 하지요. 하지만 라돈의 샘은 신전과 관계가 있어서 영주께서 신전에 많은 기부를 하고 있기는 하지요." "우물은 요?" "우물이....요? 저희 라돈은 우물을 팔 정도로 물이 부족하지는 않는 데요, 레이디? 몇 몇 건물을 짓다가 우연히 물이 솟는 자리를 차지 한 집 주인은 여관을 개업하기도 하지요. 이 여관처럼 말입니다. 세 금이 조금 비싸지지만 돈이 좀 있는 상인들이라면 시도해 볼만한 사업이지요." ".........." 이곳은 문제가 많았다. 환경이 너무 좋다는 것이 문제였다. 인간은 고난이 닥쳐야 가진 능력을 개발시키려한다. 문명이란 그것 이 계기가 되어 발전한다. 하지만 이곳에선 개인의 꿈과 미래를 위 해서 마법과 검을 배우길 갈망하고, 신의 힘을 이용하고자 사제가 되길 희망하지만, 인류전체에게 미칠. 특히 최 하층민들에게 편이가 갈 문제에 있어서는 개척 능력이 아직 너무 부족해 보였다. 네얀에서 바다를 이용할 생각을 못했던 것처럼. 이곳에서는 충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저수지를 만들 생각도, 지 하수를 이용할 생각도 아직 해 내질 못하고 있었다. 신의 신성력이 존재하기 때문에 병을 막을 가장 기본적인 사항인 청결 문제에 있어서 오히려 무감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저쪽 세계에서도 지하수 나 댐을 이용한 방법으로 생활 수준을 향상시키기 시작한 것은 아 주 최근의 일이었으니까. "....영주께서 나이가 들었다고 하셨지요. 다음 후계자는 어떤가요?" 카일은 판을 흘끔 보더니 대답했다. "라돈의 타이 남작 님은 정통 후계자가 없습니다. 영애들만 두고 계 시죠. 두 분의 레이디께서는 혼인하셔서 라돈을 떠나셨습니다. 중년 의 나이에 타이 남작 부인께서 낳으셨던 막내자제 분이 한 분 계셨 는데, 기사수업을 끝내고 돌아오셨다가 몇 년 전 라돈에 돌림병이 퍼졌을 때 남작부인과 함께 돌아가셨지요." 판은 고개를 사람이 없는 쪽으로 향하더니, 손목을 휘돌려 들고 있 던 검 집으로 손장난을 쳤다. "그렇다면...타이 남작은 사위들이나 외손자 분들의 압력을 받고 있 지는 않나요?" "...날카로우시네요, 레이디. 당연히 그렇지요. 그래서 성에는 항상 귀족들이 들끓었는데 이번 영주 님의 생신 때 드디어 작위를 물려 줄 문제를 발표하겠다고 해서 라돈은 축제 준비중이지요." "정통 후계자가 아닌 다른 아들을 두고 계시진 않나요?" ".....에. 그게. 물론 있지요. 사생아 없는 귀족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마는, 타이남작은 손이 귀해서, 평민들에게서 낳은 아들도 몇 없고, 있다해도 출생을 정확히 증명할 길이 없어서....차라리 없다고 하는 것이 옳겠네요...." 카일은 내내 시원시원하게 대답하다가 눈동자를 굴리며 헤매는 표 정을 지었다. 진은 판이 관계가 있음을 눈치챘다. 그는 내내 말 없이 카인과 진의 대화를 듣고 있었지만, 진이 자신에 게 눈을 돌리는 것을 알면서도 외면했다. '확실하군.' 진은 머리 속에 새 정보를 추가시켰다. "이곳 신전에서는 어떻게 사제가 될 사람을 택하나요. 사제가 아닌, 신자를 의탁시킬 방법은 있나요?" 카일이 다시 대답했다. "대부분의 신전에서와 마찬가지입니다. 신전에서 받아들여진 고아들 중에서 사제가 나오기도 하고, 어렸을 때 부모가 기부를 해서 사제 가 될 길을 택한 소녀나 소년들이 신의 교리대로 수련을 쌓아 사제 가 되기도 하지요. 신자들은 평생 모은 재산을 헌납하고 신전에 의 탁하기도 합니다. 어니스트 신전에서는 결혼한 경력이 있거나, 죄를 지은 과거가 있거나 뭐 그런 경우에는 사제 수업을 받을 수 없을 뿐 아니라. 흑마법을 쓰거나 하는 경우에는 신자로도 받아주지 않지 요." "....어니스트의 사제는 결혼 할 수 없나요?" "없지요. 다른 곳에서는 결혼을 허락하는 신을 모시는 경우도 있지 만 그렇다고 해도, 대부분의 사제들은 결혼을 하면 신성력을 잃게 된다나 뭐라나. 그리고 이곳의 신전은 하필이면 '순수'를 지향하는 탓에 견습 사제라도 천연기념물들이.....윽." 진은 다시 판에게 발등이 찍힌 카일의 고통을 무시하고 계속 물었 다. "신전의 규모는 어떻게 되나요?" "그다지 크진 않습니다. 수업 중인, 준 사제들을 제외시킨다면 사제 분들이 10명도 안되지요." "모두 신성력을 쓰시나요?" 카일과 판은 비슷한 표정으로 비웃음을 흘렸다. "글쎄요. 신성력을 쓰시는지? ....쓰시는 분도 계시죠. 몇몇 분이시지 만, 사람들에게 친절하신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라돈의 어니스트 의 신전은 그다지 영지 민과 가깝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신전은 여 행자나 영지 민들에게 신성력을 써 주거나 힐링포션을 만들어서 팔 기도 하고, 신자들에게 기부를 받아 운영하는 것으로 압니다만. 라 돈의 신전에서는 샘을 관리하니까요. 평민들이 내는 찌그러진 동전 의 성금에 연연하지 않지요." 신전에서 영지의 샘을 관리하는 것은 이곳 라돈이 불모지였을 때, 어니스트의 한 사제가 수행 중 샘을 발견하고 개인 수련지로 작은 집을 지어 자리를 잡게 된 것이 이유란다. 라돈의 이름도 그 사제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물이 솟는 곳에 사람들이 모이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강의 혜택이 없어도 샘과 의외로 축복 받은 토양과 기후 덕에 영지 로까지 발전하게 된 곳이었다. 진은 잠들어 있는 레아를 돌아보았다. "저 아이는 어둠의 정령에게 지배를 받다가 겨우 벗어난 상태인데... 이곳 신전에서 받아 줄까요?" 카일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진이 가리킨 어린 소녀를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레이디. 지금 하신 말씀을 그대로 해 보십시오. 그들이 정신이 나 갔다고 받아 주겠습니까?" 진은 턱을 긁적이다 팔짱을 끼고, 천장을 쳐다보며 카일에게서 들은 이야기들을 나열하고 끼어 맞추고 정리했다. "레이디....?" "계산 중...." "예?" 진은 고개를 내리고 판을 향해 질문했다. "판..... 이름을 불러도 되겠지요? 노예신분에서 어떻게 벗어나게 되 었나요?" 판은 진의 남청색 눈을 똑바로 직시했다. 그가 보기에 이 귀족 아가씨는 좀 이상했다. 그녀가 도둑과 노예에게 하는 존대 말과 행동거지가 그랬고, 마법사 와 함께 있다지만 한 밤중인데.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지나친 침착 성과 여유 있는 분위기가 신경 쓰였다. 그리고 관망하는 태도의 그녀의 마법사도 영 석연치 않았다. 꼭 구경거리가 되고 있는 기분이었다. 대답해 주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자신의 이야기가 이곳 라돈에서 일급비밀에 속한 것도 아니었고 다른 사람을 통해 듣게 하느니 자 신의 입으로 말하겠다는 생각으로 그는 말문을 열었다. "내 등에 노예인장을 찍은 사람은 내 친 아버지였습니다....이곳 영 주이기도 하지요. 난 그가 데리고 있던 노예어머니가 타이남작부인 의 흉계로 돌아가시자 부인과 정통 핏줄이었던, 지금은 죽어버린 아 들의 강요로 11살 때 그의 손으로 직접 네카르도가 아닌, 이웃나라 로 팔려갔었습니다. 주인의 이름을 외우기 힘들 정도로 그 후 자주 주인이 바뀌었고 노예가 하는 일을 골고루 실컷 겪었지요." 진은 그의 얼굴이 머리색과 비슷하게 물들어 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15살에 노예들의 죽음의 경기가 유행이었던 서 대륙 끝에 있는 로 마노로 팔려갔다가, 검투사가 돼서 검을 배웠습니다. 그곳에서 3년 간. 살기 위해 악착같이 검에 매달렸지요. 몇 일 걸러 경기장에 서 서 맹수가 덤벼드는 경기에서 검 하나로 목숨을 부지하고, 귀족들의 구경거리로 상대로 지목 된 다른 동료 노예들을 죽여가며 살아남았 습니다." 그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우지 못하고 빠른 투로 말을 이었다. "그러다가 18살 때 난 행운을 잡았지요, 아가씨. 로마노의 정숙하고 아리따운(코웃음을 치며) 공주 님의 생신을 기념하는 죽음의 경기에 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영광으로 소원을 말하게 되었고. 전 자유를 택했습니다. 그리고 용병 일을 하면서 돈을 모아 여행을 하다가 라 돈에 돌아오게 되었지요." "왜 돌아왔지요? 절실했던 소원을 이뤘고, 실력을 갖추기까지 했으 니 용병 일을 통해서 충분히 넉넉한 생활을 어떤 나라에서도 할 수 있었을 텐데 요." 판은 카일과 진. 그리고 여전히 느긋한 자세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는 화려한 외모의 와이즈를 돌아보았다. "카일은 어릴 때 이곳에서 사귄 친구지요. 그때는 제가 노예의 자식 이라는 것을 깨닫지도 못했고, 세상을 몰랐던 때였습니다. 귀족 자 제로의 대접은 아니었지만 어머니 덕에 편한 생활을 했었습니다. 카 일은 내가 팔려가자 날 구하기 위해 애썼지만 저 녀석은 나보다 더 애였답니다, 아가씨. 그는 자신의 힘이 세상에 끼치는 영향이 쥐꼬 리만하다는 것을 알고....윽." 이번에는 판이 카일에게 발등이 밟혔다. 얘기 중에 진은 그의 말투가 많이 호전되어 있음에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카일은 라돈의 도둑길드를 육성시켰지요. 절 추적하기 위 해서였답니다. 길드 장인 아버지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혼자 힘으로 거의 라돈을 먹어 치우고 있더군요. 난 우연히 다시 이곳에 찾아들 었다가 그를 다시 만났고 발목이 잡힌 겁니다." "그게 아니지! 솔직해져 봐라. 이 늙다리야! 원래 돌아오려고 했잖 아. 우린 피의 맹세를 한 친구입니다. 레이디. 하하하.... 판은 날 벗 어날 수 없어요. 안 그러냐, 판?' 진은 투닥거리는-일방적으로 카일이 판에게 소용없는 주먹질을 하 는 모습을 보며 나머지를 추측했다. 판은 복수를 꿈꾸었을 것이다. 친아버지가 직접 등에 불 인장을 새겼다면, 보통의 노예들보다 더한 원한을 가졌을 테고 자신의 운명에 최대한 저항했으리라. 돌아왔을 때 아직 살아있는 영주를 보고 이곳을 그냥 벗어나려고 했겠는가. 그가 11년 동안 꾼 꿈은 고향에 돌아오는 것이었을 것이다. 어릴 때 누리고 있던, 당연했던 혜택이 가장 믿었을 친족의 직접 손 길에 부셔지고 밑바닥으로 떨어지게 되었다면, 이를 악물었을 것이 다. 진은 오래 생각하지 않았다. 그의 외롭고 비참한 과거의 투쟁이 충분히 짐작되었다. "정리해 봅시다. 라돈은 자급자족이 가능하긴 하지만 농노들은 굶주 리고 있습니다. 영주는 다른 영지보다 신전에 기부해야할 돈의 액수 가 더 많기 때문에 세금을 내릴 형편이 못되지요. 부자 영지는 아니 라서 노예들은 많지 않지만 그들 대부분이 인간으로서의 인격적인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고. 몇몇 부유한 계층의 횡포도 무시 못하며, 신전에서 표방하는 교리 때문에 대부분의 주민들은 그들의 은혜를 입지 못하고 있고. 영주는 후계 문제로 골치를 썩고 있어서 앞으로 의 라돈이 어떻게 되어 갈지는 미지수이다..." ".........." "옛스! 레이디. 바로 그렇습니다. 통쾌한 요점 정리입니다. 하하... 하 지만 그렇게 정직하게 말씀하시면 저희들이 너무 부끄럽지 않습니 까. 어찌해 볼 도리 없는 경우만 꼭꼭 집으시는 군요." 판은 아무 말 하지 않았지만, 카일은 그와 비슷한 날카로운 눈빛으 로 맞장구를 쳤다. 진은 그를 보며 다시 생각했다. 도둑 길드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래 봐야, 얼마나 되었겠는가. 영주나 부자들은 실력 있는 용병과 마법사를 방패로 꼭꼭 숨어서 재물을 끌어안고 있을 테고, 그들을 턴다고 해도 지나치게 되면 길 드 자체에 위협이 올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여행자들을 상대로 지갑 을 터는 일로 하층민의 생활이 나아지면 얼마나 나아지겠는가. "길드 원은 라돈 내에서만 활동하는 것은 아니지요?" "그렇지요. 모든 길드가 그렇듯이 영업 재주가 뛰어난 길드 원은 여 행객으로 위장하고 대륙을 상대로 본업에 충실합니다. 길드에서는 그들의 뒤를 봐주고 수수료를 받아먹지요. 라돈만 상대한다면 그다 지 영양가가 없지만 그런 이유로, 저도 꽤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 로 귀족은 아니지만 신랑감 후보로 괜찮.....윽." 진은 판에게 무심하게 들리는 어조로 질문했다. "왜 그의 말을 자꾸 가로막지요, 판? 신분을 넘어선 결합이 이곳에 서는 없었나요? 들어보니까 귀족이 아니라고 해도 기사나, 신관이나 마법사들과 맺어지는 귀족영애도 있고 엘프를 대상으로 한 연애 소 설도 있다고 들었는데. 아...카일 말대로 그를 신랑감 후보로 점찍어 서 하는 말은 아니에요." ".........." 그들은 진의 말에 눈을 껌벅이더니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카일은 그저 진을 파악하기 위해 말끝마다 덧붙여 본 떠 보는 말이 었거나, 아니면 원래 이성을 대하는 행동거지가 그러했는지도 모를 일이었고. 판은 어쨌든 진과 와이즈가 귀족이니, 무례하다 하여 뒷일을 감당하 지 못하게 되는 일이 생길까봐서 친구에게 경고하는 의미였을 것이 다. 와이즈는 침대에 우아하게 앉아서 제 3자의 역할을 충실히 하며, 여 전히 그 화사해 보이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에, 그렇다면. 그렇다는 말씀은 레이디께선 신분에 제약받지 않는 사고방식을 가졌다는 말씀....이신 가요?" 카일은 기꺼이 눈을 빛내며 물어왔다. 진은 그들의 뭐라 표현하기 힘든 얼굴 표정에 웃음이 새어나와 다 시 천장으로 눈을 돌렸다. "난 내가 귀족이라고 한 적 없는데요, 카일. 부모가 귀족이지만 귀 족으로 살지도 않았고 사람들의 신분은 스스로가 정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 세상에서 살다 왔지요." "부모님이 귀족인데....귀족이 아니라고요....?" "그런 세상이 어디 있습니까, 아가씨? 어디서 살다 오신 거지요? 저 도 서 대륙 정도는 대충 다녀 보았지만, 그런 나라를 보거나 있다는 소리를 들어보지는 못했는데요?" 진은 와이즈를 흘끗 바라보았지만 굳이 그와의 약속을 깰 정도의 상황은 아니었기 때문에 얼버무렸다. "찾아보면 그런 곳도 있을 테지요. 없으면 만들면 되고. 뭐 아무튼 카일." "네?" "내 예전 남자 친구는 노예 출신이었습니다. 난 사람의 개개인의 인 성을 보고 판단하지 신분을 보고 판단하지 않습니다. 제 사고방식에 대한 답이 되었겠지요?" "..........." "..........." 37 레아의 샘 * 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복잡한 생각에 머리가 어지러워 보이는 그들이 무심결에 따 라 일어나자 진은 그들에게 용건이 끝났음을 알렸다. "이제 가보라고요...레이디?" "네. 웬만한 것은 알았으니. 이제 됐으니까요. 더 하실 말씀이라도?" 카일은 검은 두건아래 나와 있는 자신의 윤기 나는 회색 머리카락 을 잡아당겼다. ".....그것으로 끝인가요? 네얀에서는 영지 민들에게 새 직업을 주셨 다고 들었는데. 이곳 라돈은 희망이 보이지 않는 다는 말씀이 신 지." 진은 그의 머리색이 참 특이해 보였다. 연두색도 분홍색도 환상적이 었지만 잿빛 머리색이라니... 카일은 내내 유쾌해 보이던 지금까지와는 달리, 굳은 얼굴의 판과 비슷한 표정이 되어서 진에게 약간 딱딱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말을 했다. '친구는 유유상종이지. 겉은 하나도 안 닮았는데, 속은 비슷하네..' "정보에 대한 보수를 바라지 않는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전 원치 않는 사람에게, 원하는 것이 없는 사람에게 일부러 도움을 주는 일 은 하지 않습니다. 그럴 시간도 없고요.....아, 그렇지. 데이트 해 드 려요?" 진은 웃으며 말했지만 카일과 판은 웃지 않았다. 그들은 놀림 받은 기분이 되었다. "제가 아직 애송이였군요, 레이디. 솔직히 하루 데이트 정도로 보수 를 지불 받을 수도 있을 작은 호의였지만, 네얀에서 받은 통신으로 어리석은 기대를 가졌던가 봅니다. 그들은 레이디를 여신의 사자로 까지 추켜세우고 있더군요." 진은 와이즈의 변함 없는 시선을 느끼며 팔짱을 꼈다. "전 신의 사자가 아닙니다. 귀족 행세를 했던 것도 아니었지요. 그 리고 전 두 분에게 어떤 요구도 받지 못했고, 적어도 두 분에게서는 도움이 필요한 부분을 발견해 낼 수 없었는데요. 그렇다면 뭔가 일 을 추진할 핑계거리가 없지 않습니까. 제게 원하는 것이 있으신 가 요?" "..........." 카일과 판은 야릇한 기분이 되었다. 그녀는 누구일까. 원하는 것이 없으니 상대하지 않겠단다. 적어도 그들 두 사람은 도움이 필요해 보이지 않으니 상대를 바꾸 겠다는 소리로 들렸다. 반대로 원하는 것이 있으면 들어주겠다는 소 리로도 들리기까지 했다. 그녀는 누구지? 누구든 가지고 있는, 막연한 희망과 기대를 어떻게 채우겠다는 소리 일까. 판이 입을 열었다. "원하는 것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가씨. 하지만 아가씨 가 어떤 능력을 가졌든지 어떤 배경과 지위를 가졌든지 세상엔 어 쩔 수 없는 일도 있고, 가능하지 않는 일도 있습니다." "밑져야 본전이죠. 무얼 바라나요?" 진은 그들에게서 들어야 할 말이 있었고, 그래서 일부러 판과 카일 을 자극하고 있었다. 판은 용병길드에 처음으로 발을 디뎠을 때 면접관 앞에 섰던 바로 그 기분이 되었다. ".....난 노예들이 사라지길 바랍니다. 더불어 복수도 가능하면 좋겠 지요. 하 참....내가 무슨 소릴 하는 거람." 진은 다시 의자에 앉는 판에게서 시선을 돌려 카일에게 물었다. "카일. 다른 원하는 것이 있나요?" 카일은 싱긋 웃더니 대답했다. "전 라돈이 더 살기 좋아지길 바랄 뿐입니다. 제 친구와 같은 사람 들이 줄어들면 좋고, 하층민들의 생활이 좀더 풍족해 지면 좋겠지 요." 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분의 바램을 알아들었습니다. 그렇게 되게 힘써보지요. 하지만 전 계기만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두 분이 앞장서서 라돈을 바꾸세 요. 한가지 확인할 것이 있네요. 라돈에 정령사가 있나요?" 카일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정령사요? 하하. 레이디. 그런 희귀한 능력을 가진 존재가 한 나 라의 수도도 아니고 작은 영지 이곳 저곳에 존재하겠습니까? 저도 19세 평생, 몇 번 보지도 못했습니다. 정령사라면 6~7써클 마법사 대우를 받습니다. 뭐, 네카르도의 수도엔 있을지 모르지요." "그렇다면, 두 분이 원하시는 일을 어렵지 않게 도와드릴 수도 있겠 네요. 제가 권하는 대로만, 지시하는 대로만 하세요." 판과 카일은 다시 자기들끼리 쳐다보며 진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 야 할지 어색해 했다. "이것도 일종의 거래입니다. 제가 해드리는 일에 대한 보답으로 네 얀이나 다른 도시에서 제 영향을 받고 있는 상인들의 상거래 판로 를 뚫는 일에 협조해 주십시오. 직접 하셔도 좋고 평판 좋고 수완 좋은 상인이 있다면 그들을 통하셔도 좋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라돈 의 경제에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개인적인 부탁이지만 가까운 다른 도시나 나라에 네얀처럼, 제가 벌인 일에 대해 늘어놓지는 마시고 경계를 풀 정도로만 통신을 부탁합니다. 제가 앞으로도 길드를 이용 하기 편하게 조치해 주세요." "..........." 카일과 판이 열심히 머리를 굴리며 진의 말에 대한 질문거리를 찾 고 있었지만 진은 이어서 계속 말을 했다. "판. 영주의 정통 후계자가 되게 해 드리지요. 영주가 될 생각이 없 다면 모르지만 의향이 있다면 영주가 돼서 라돈을 관리하게 해 줄 게요." 카일과 판은 진의 말을 잘못들은 것이 아닐까하는 반응을 보였다. "영주민에게 가장 영향을 끼칠 지위를 얻게 되면 원하신 대로 노예 문제를 적어도 라돈에서만큼은 금지시킬 수 있겠지요. 밑바닥 생활 을 아는 분이니 영지 운영을 어떤 귀족 보다 잘 해 낼 겁니다." 진은 황당한 표정으로 서있는 카일에게 시선을 돌리고 계속 말을 했다. "카일. 신전의 샘을 주민들에게 돌려드리겠습니다. 그들 중 신성력 을 쓰지 못하는 겉만 사제인 사람들을 잘라내 드리지요. 라돈의 어 니스트 신전은 개혁을 해야 할겁니다. 그러면 영지 민들도 신의 은 총에 가까워지겠지요? 친구가 영주가 되면 희망하셨던 대로 영지 살림을 꾸릴 수 있도록 옆에서 도우십시오. 개개인을 돕는 것보다 이곳 라돈은 우두머리를 바꾸는 것이 더 빠르고 효과가 있겠네 요." "..........." 그들은 입을 벌리고 정신나간 이를 보듯 진을 쳐다보았고, 와이즈는 눈을 반짝였다. "....어떻게 하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레이디? 판이 남작의 아들이긴 하지만 어머니는 노예였습니다. 영주가 후계자로 그를 선택할 리 없 습니다. 다른 인척들도 가만있지 않을 것이고 신전의 인정도 받지 못 할겁니다....뭐, 반란이라도 꽤하면 가능할지 모릅니다만. 영주의 사병을 주민들이 어떻게?" 판도 반문했다. "신전의 샘을 어떻게 주민들에게 돌려주겠다는 말이죠, 아가씨? 이 해가 가지 않는 군요." 진은 카일과 판의 의문을 풀어주기가 번거로웠다. "가능하게 보이는데요? 반란까지 가지 않더라도 타이 남작의 인정 만 받게 되면 영지 민들의 지지를 얻을 방법은 쉽지요. 이곳은 빗물 을 받아서 쓰고 있지만 개울이 없어 샘에 의존한다고 하셨지요?" 카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은 산이 가까운데 강 정도는 아니라 해도 시내가 있어야 정상 입니다. 라돈은 지표수가 아닌 지하수를 쓰는 곳이잖아요. 샘은 지 하수입니다. 그것을 막아버리면 신전에서도 권리를 주장할 수 없을 테지요. 라돈의 새 영주는 신전에 기부할 돈을 영지 민들에게 쓸 수 있을 겁니다." ".........샘을 막는다 고요?" 점점 황당한 소리를 듣게 되자 그들은 진에게 머리를 긁적여 보였 다. 진은 더 자세한 설명을 미루고 그들에게 돌아갈 것을 권했다. "듣는 것보다 직접 보시는 것이 빠르지요. 전 너무 피곤해서 일단 좀 쉬겠습니다. 내일 다시 찾아와 주겠어요?" 그들은 곧 쫓겨났다. 판은 아리송한 얼굴로 진의 기세에 밀려 문으로 나갔지만 카일은 '레이디.~ 너무합니다. 좀더 설명을...우악!' 하며 진에게 떠밀려 창문 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나뭇가지를 붙잡는 소리가 들리더니 카일도 아래로 내려가 사라졌다. "샘을 막는다고? 물의 정령이나 땅의 정령을 부리는 정령사라 해도 저절로 솟는 물줄기를 막으려면 웬만한 친화력 가지고는 안 된다. 진, 내게 그 일을 시킬 셈이냐?" 와이즈는 시끄러운 방문자들이 나가자 진에게 말을 걸었다. 진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으며 대답했다. "와이즈. 간단한 일이야. 조금만 도와주면 돼." "............" 진은 눈을 비볐다. "와이즈. 그 회복마법이라는 것 말이야. 좀 걸어 줘. 잠이 와서 죽겠 어." 진은 와이즈가 시행해 주는 마법 덕에 조금 피곤이 풀리는 느낌을 받으며 잠들어 있는 레아의 옆에 앉았다. "레아를 계속 데리고 다닐 수는 없고, 이곳 신전에 맡길 수 없다면 맡길 수 있게 환경을 만들어줘야지." 진은 자신의 계획이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다시 계산 했다. "영지 민이 모두 이용한다는 그 샘은 분명 지하 암반수일 거야. 산 지가 가까운데 개울은 없고, 토양이 메마르지 않다는 소리는 지표수 가 고이지 않고 지하로 스며들어 어딘가 모여있기 때문일 거야. 사 람들은 이미 누리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고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 진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물은 중요해. 사제들은 부패해 있을 거야. 샘을 신전에서 관리하고 있는데 막아버리면 그들의 신앙에 대한 자신감이 어떻게 될까. 충분 히 이용할 수 있어. 그리고 판은 글을 알아. 그는 11살까지 귀족 틈 에서 자랐어. 그렇다면 귀족으로의 생활도 가능할 거야. 아니면 배 우면 되지. 병사들과 주민의 지지를 끌어낸다면 샘을 잃어 목소리를 높이지 못하는 신전 측에서도 그를 반대할 순 없을걸?" "남작과 그의 인척들은?" 진은 풀어 헤쳐진 머리를 손으로 다듬어 가방에서 꺼낸 끈으로 뒤 에서 묶었다. "타이 남작에게 찾아가자, 와이즈. 그에게 현혹 마법을 걸어 줘. 어 차피 인척들이래 봐야 외척세력인데 남작이 확고히 의사를 표한다 면 불가능한 일도 아닐 꺼야." "현혹 마법으로 몇 일이나 속인 대냐. 마법으로 정신을 조종하는 것 은 한계가 있다. 그리고 주위에 마법사가 있다면 변한 남작의 행동 을 금방 알아차릴텐데?" "아니. 마법으로 현혹시킨 상태로 그에게 판을 인정케 하려는 것이 아니야." "그럼 뭐 하려고?" "남작에겐 스크루지 영감의 경험을 하게 해주지. 나이 들고 인척들 의 행동에 인생을 돌아볼 기회를 겪고 있다면 먹혀들 거야. 아니면 판에게 복수의 기회를 주는 셈치지 뭐." 와이즈는 눈썹을 치켜 떴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샘은....레아에게 주겠어. 판을 후견인으로. 라돈의 샘이 아 니라 레아의 샘으로 불리게 될 거야. 작전 명 <마농의 샘=레아의 샘>이다. 하하하..." "스쿠루지? 마농?" 진은 와이즈에게 받은 통신용 구슬을 문 옆의 쓰이지 못하고 내버 려져 있던 탁자에 올려놓고 통신을 시도했지만 새벽이 가까운 밤이 라, 잠들어 있는지 폴로네오는 답변이 없었다. 진은 구슬 위에 손을 대고 전보형식으로, 몇 마디 소리내어 말해 메 시지만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와이즈, 샘터에 가보자. 최대한 빨리 빨리 해야지. 먼저 물길을 찾 아야해. 남작에게 리얼한 꿈도 꾸게 해주고. 연극도 준비도 하고 말 이야. 바빠지겠다." 진은 카일처럼 창을 통해 밖으로 나가려다가 잠들어 있는 일행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자리를 비워도 될까 모르겠네. 무슨 괜찮은 마법 없어, 와 이즈?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한다던가 우리가 이곳에 그대로 있게 보 이게 한다던가." "결계를 치면 되지. 누군가 다시 방문하거나 결계 안팎에 변화가 있 으면 내가 감지할 수 있다." "그럼 해줘. 아침이 오기 전에 빨랑 해치우자, 와이즈." 와이즈는 진의 독촉에 일어나서 마법사 겉옷을 걸치고 방안에 결계 를 쳤다. 그리고 진과 자신에게 투명마법을 걸었다. "....뭐지?" "모르게 해야할 일 아니냐? 투명 화 마법을 걸었다. 나와 넌 서로 보지만 다른 사람은 못 봐. 늦은 시각이지만 거리에 사람들이 있긴 할 테니까." "....고마워, 와이즈. 정말 마법은 두루 편하다니까." 와이즈는 자신이 이렇게 너그러운 이유가 진의, 체온을 나눠 달랬던 요구에 연민을 가졌던 것이 원인이 아닐까 잠깐 의심했지만. '난 유희중이야!' 하는 생각의 상기로 고개를 저어 꺼림칙한 생각을 떨어버리고 창턱 으로 올라가 아래로 뛰어내리고 있는 진을 따라가기 위해 마법 시 동어를 외쳤다. "워 프!" [38] 레아의 샘(2) * 진과 와이즈는 라돈 영주 타이남작의 커다란, 저택 수준의 성 앞에 섰다. 성은 네얀의 제베르타 백작의 성보다 규모가 작았지만 역시 돌로 증축되어 튼튼해 보였고, 라돈 영지의 중앙에 자리잡은 광장에는 네 얀에서 바다의 여신상이 놓여져 있었던 것처럼. 낮은 돌담으로 분수처럼 땅에서 돌출 되어 있는 샘터가 있었다. 샘을 사이에 두고 영주의 성과 마주한 어니스트 신전은 성의 1/3 규모의 건축물로 성당을 연상시키는 흰 대리석 건물이었다. 진은 생각했던 것 보다 작은 크기의 샘을 한바퀴 돌았다. 물이 솟는 것을 돌로 막고 쌓아 세 군데의 돌 틈에서 파이프 모양 의, 동으로 만든 관에서 물이 흘러나오도록 조정해 두고 있었다. 쓰이지 않는 물은 조금 흘러가다가 바닥에 깐 돌 틈으로 사라지고 있었고, 가장 물줄기가 큰 곳에 땅을 파서 돌로 바닥과 벽을 막아 놓아 작은 웅덩이에 물이 고여 있게 해두고 있었다. 진은 건물에 가려지지 않은, 밤하늘을 둘러보았다. 달이 지는 시간인지 푸른빛을 뿌리던 행성은 하늘에 있지 않았고, 그 탓에 더욱 밝아 보이는 별들만 검은 하늘에 왕창 떠 있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멀리에 산등성이의 검은 그림자가 보 이기는 했다. 노숙자나 거지로 보이는 몇몇 사람형상이 건물주위 어둔 그늘에서 아주 작은 인기척을 내고 있었지만, 투명 마법으로 몸을 숨기고 기 척까지 감춘 진과 와이즈를 눈치 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속삭이고 있었다. "와이즈. 물의 정령을 불러 줘." "운*디*네!" [네, 주인님. 부르셨습니까.] 진은 샘의 흐르는 물에서 홀연히 나타난 물의 정령에게 가까이 갔 다. "그녀의 말에 따라주어라, 운디네." [..........] "운디네. 다시 만나서 반가워요." [네. 저도요. 아가씨.] "미안해요. 부탁할 게 있어요. 들어 줄래요?" [주인께서 허락하셨으니, 가능합니다. 아가씨는 제 목소리를 들으시 니 어렵지 않지요. 무얼 도와드릴까요?] 진은 상냥한 그녀의 목소리에 마음이 차분해 짐을 느끼고 미소지으 며 샘을 가리켰다. "저 샘물의 근원을 찾아주세요. 물길을 따라 가다, 가장 많은 물이 고여있는 곳을 찾으면 되요. 땅속이나 아니면 바위틈새에 있을 거 에요. 할 수 있겠어요?" 그녀가 약간 웃음 짓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럼요, 아가씨. 저 운디네는 물이 있는 곳은 어디든 갈 수 있습니 다.] "그럼, 땅속이라 해도 가능하겠지요. 샘물이 솟는, 이곳과 통해 있는 근원을 찾아 알려주세요." [네. 기다리세요.] 운디네는 샘물이 흘러나오는 호스를 통해 사라졌다. "달이 없다, 와이즈. 음모를 꾸미기 좋은 밤이지? 이곳 달은 너무 밝아서 밤에 도둑들도 실력이 좋지 않으면 재미를 못 보겠더라." "............" "오래 걸릴까?" 진은 샘터 낮은 돌담에 걸터앉으며 중얼거렸다. "거리가 멀거나, 너무 깊은 땅속에 물이 고여있다면 시간이 걸릴 수 도 있겠지. 그래봐야 몇 분이다. 조금만 기다리면 될 거다." 진은 까만 밤하늘에 총총히 떠 있는 별들을 눈에 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졌던 방식으로 샘을 통해 다시 물의 정령이 모습을 들어냈다. 진은 일어났다. [아가씨. 물이 고여 있는 곳을 찾았습니다. 두 군데인데요?] "어디에 있지요?" 정령은 라돈 시내와 떨어져 있는 산지와 조금 더 가까운 낮은 숲을 가리켰다. [저 앞, 숲의 돌무더기 안에 작은 공간이 있었습니다. 그곳에 물이 많이 고여 있고, 더 위쪽으로 산 중턱에 있는 옹달샘이 근원입니 다.] "고마워요. 운디네. 안내해 줄래요?" 정령은 고개를 끄덕이고 따라오라는 듯이 먼저 밤하늘에 떠올랐다. "와이즈 거리가 꽤 있어 보여. 뛰어야겠어." "먼저 가라, 진. 네가 도착하면 네 기척을 따라 워프 할 란다." 진은 그렇게 하라는 뜻으로 눈짓을 하고 앞선 정령을 따라 뛰기 시 작했다. 성벽 앞에 서자 진은 7미터가 넘어 보이는 성벽 위로 점프 를 했고 다시 아래로 뛰어 내려 라돈 영지를 빠져나왔다. [.....아가씨. 굉장히 빠르시네요. 마법이....아닌데.] "그래요, 운디네. 속도를 빠르게 해도 되니까 내가 따라갈 수 있게 모습만 남겨줘요. 시간이 없으니까요." 운디네는 진의 말에 따라 잔상만 남기고 속도를 높여 허공을 가로 질렀다. 진은 그녀를 따라 빠른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들판에 직선으로 무언가 공기를 가르 는 소리가 스치고 있었다. 단숨에 숲까지 거리를 좁힌 진은 잠시 멈춰서 숨을 몰아쉬었다. "헉헉...가깝게 보였는데 꽤 머네..." [괜찮으세요?] 진은 멀리 보이는 희미한 라돈시의 불빛을 돌아보며 괜찮다고 대답 했다. 숲이라고는 하지만 지면이 점점 높아지는 지형으로 낮은 산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을 듯 했다. 진은 다시 운디네의 안내로 울창한 나 무 사이를 가로질러 위쪽으로 올라갔다. 나무가 듬성듬성하고 커다란 바위들이 몰려있는 곳에 이르자 운디 네는 그 한 쪽을 가리켰다. 바위 틈새에 이끼들이 낀 것으로 봐서 바위를 들어내면 분명 물이 고여 있을 듯 했다. 진은 소매를 걷어붙이고 운디네가 가리킨 바위 더미들을 헤쳐내기 시작했다. [.....힘이 장사 시네요. 아가씨....] "하하하....." 진은 체구보다 더 큰 바윗돌을 들어 옆으로 치우며 멋쩍게 웃었다. "괴물...같지요? 흠. 좀 쑥스럽네." "쑥스러운 것도 알긴 했구나. 난 네가 철면피인 줄 알았지." 달리는 것을 멈춘 것을 알고 따라 온 와이즈가 정령과 이야기하고 있던 진의 옆에 나타났다. 진은 와이즈의 말에 인상을 좀 써주었지만 하던 일을 계속했다. 바위와 돌을 들어내자 진이 딛고 있던 땅바닥과 면한 비스듬한 공 간에 검은 굴의 입구가 생겨났다. 진은 성인남자 한 명 정도가 겨우 비집고 들어갈 크기의 공간으로 기어 들어갔다. 따라 들어 온 와이즈가 마법으로 둥근 구 형체의 빛 을 만들어 냈다. 진은 어둔 공간에 갑자기 빛이 들어오자 눈을 깜박이다가 엎드린 자세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작은, 폐쇄된 동굴이었다. 발 딛을 틈은 그다지 없었고 손끝에 채어 아래로 떨어지는 작은 돌 멩이 덕에 물소리가 나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물이 고여 있는 작은 지하 호수를 찾을 수 있었다. "여기가 맞아. 이곳 지형은 흙 아래 암반으로 이뤄졌어. 돌 틈으로 빠져나간 물이 흐르다 라돈시에서 잠깐 막힌 거야. 갈데 없는 물은 저절로 지면으로 솟았겠지. 샘은 가장 큰 물줄기가 지면으로 솟은 걸 테고, 작은 물줄기는 건물을 지으려 땅을 파헤친 탓에 물이 솟게 된 걸 거야." "............" "운디네. 라돈으로 흐르는 물의 통로가 있었지? 어디 있지?" [물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다지 깊지는 않아요.] "안내해 줘요." 진은 키를 겨우 넘기는 물웅덩이 아래로 정령을 따라 잠수했다. 진이 물 속으로 사라지고 뽀글거리는 기포가 수면에 뜨고 사라지는 것을 보며 와이즈는 좁고 낮은 천장 덕에 허리를 숙이고 있다가 바 닥에 주저앉아 턱을 고였다. "정말 별 짓을 다하네. 흥미롭긴 하지만...." 진은 희미한 마법 등의 빛이 비춰 들어오는 물 안쪽 바닥에서, 운디 네가 가리킨 돌 틈을 확인하고 다시 떠올랐다. 돌과 바위는 많았기 때문에 적당한 크기의 바위와 작은 돌들을 가 져다 날라 물이 빠져나가는 곳을 막기 시작했다. 작업을 끝내고 다시 진은, 와이즈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헤쳐두었던 바위들로 입구를 막기 시작했다. 손을 털며 뒷걸음 쳐서 수상스러운 점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진은 더러워진 손을 바위에 문질러 닦았다. "이제 다 했냐, 진?" "아니. 더 위로 가서 그곳도 막아두어야지. 몇 일동안만 막아 두면 되지만 이곳에 물이 넘쳐나면 안되니까. 어차피 바위투성이라 모두 지면 아래로 스며들겠지만 만반의 준비를.....운디네. 산으로 안내 해 줄래요?" [네. 따라오세요.] 진이 다시 뛰어서 숲을 가로질러 산을 타려고 하자 와이즈가 불러 세웠다. "날아가자. 네 발이 빠른 것은 알지만 산이 험해서 시간이 걸릴 거 다." "그래. 고마워, 와이즈." 와이즈는 젖은 옷과 머리를 말려주고 진의 허리에 팔을 걸쳤다. "플 라 이-" 그리고 정령을 따라 날아올랐다. "와이즈. 자세가 안나온다. 이게 뭐냐, 내가 짐짝이야?" "시끄러. 고마운 줄 알아야지." 진은 와이즈의 팔에 몸이 걸쳐진 상태에서 다리를 늘어뜨린 채 슈 퍼맨처럼 나는 동작을 취해 보았다. "하하...이거 재밌네....." "....좋기도 하겠다." 산 중턱에 다다라 와이즈가 진을 내려놓자, 진은 운디네가 안내 해 준 어둔 풀숲사이 은밀한 곳에 자리한 옹달샘 앞에 섰다. 진은 그 아기자기하고 귀엽게 보일 정도로 작은 샘 앞에 무릎을 굽 히고, 물을 떠내 손을 씻고 두 손에 고인 물을 마셨다. "깊은 사안~속 옹달샘. 누가 와서 먹나요~ 새벽에 토~끼가 눈 비비 고 일어나~ 세수 하~러 왔다가. 물만 먹고 가지요~ " "..........." [좋은 노래네요. 아가씨.] "그. 그래요? 하하..." 진은 샘을 소재로 한 단순한 한국 동요에, 정령이! 칭찬을 해 주자 다시 멋쩍어졌다. 진은 샘을 이뤄지게 하고 있는, 물방울이 또륵또륵 떨어지는 곳을 나뭇잎을 이용해 물길의 방향을 바꾸었다. 물방울은 나뭇가지를 받침대로, 위에 올려진 나뭇잎을 타고 옹달샘 이 아닌, 반대편으로 방향을 바꿔 흐르기 시작하더니. 땅으로 떨어 져 흙 속으로 스며들고, 조금씩 흘러 내려갔다. "자. 다 됐다. 샘은 막았어. 늦은 아침이나 적어도 정오쯤엔 라돈의 샘은 마르게 될 거야. 가자, 와이즈. 운디네! 정말 고마워요." [별 말씀을. 저도 즐거웠습니다.] 정령은 진에게 인사를 하고 와이즈의 허락으로 정령 계로 돌아갔다. * 진은 와이즈의 이동 마법으로 다시 샘터 앞에 섰다. 그리고 영주의 성을 바라보며 다음 일을 시작했다. "와이즈 투명마법.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거야?" "용언으로 걸었다. 내가 풀지 않는 한 지속될 거다. 보통 인간마법 사의 마나로 이렇게 오래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 좋아, 가자. 텔레포트 안 돼?" "성의 마법사가 마나의 움직임을 눈치챌지도 모르고, 용언을 쓰면 되겠지만 굳이 그럴 필요 있겠냐. 실프를 쓰자. 실*프!" [네. 주인님.] 와이즈는 실프에 실려 진과 함께 성안으로 날아 들어갔다. 영주의 방은 3층에 있다고 했었고, 몇 개 창문 틈으로 안을 들여다 보고 그들은 영주의 방인 듯한 곳의 테라스에 내려섰다. 진은 성의 대문 쪽을 돌아다보고 보초를 서고 있는 몇 몇 병사들과 교대 중인 성의 치안 담당으로 보이는 이들을 둘러보았다. 위에서 내려다보니 성안의 사병들의 숙소인 듯 한 건물도 보였고, 훈련장인 듯 넓은 공터도 보였다. 진은 창문 안쪽에 걸려진 구식 창문 걸이를 눈여겨보고, 키 큰 정원 수의 나뭇가지를 팔을 뻗어 꺾어서 잎과 줄기를 쓸어냈다. 그리고 나뭇가지를 손끝에 힘을 주어 얇게 눌러 폈다. 진이 창 틈에 납작해진 나뭇가지를 들이밀어 쉽게 걸림 쇠를 젖히 고 방으로 들어가자 와이즈도 따라 들어갔다. 그들은 또 속삭였다. "와이즈. 옆방에 시종이 있을지 몰라." "실프. 이 방안에서 나는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가지 못하게 해라." [네. 알겠습니다. 주인님.] 허공에 너울거리던 실프가 사라졌다. 진은 고급스럽게 꾸며진 어둔 방안을 둘러보고 커다란 침대 곁으로 조용히 다가갔다. 타이 남작은 잠들어 있었고, 60세에 가까워 보이는 외모였다. 판과 같은 머리색이었던 듯. 어둠 속에서도 탈색되긴 했지만 여전히 붉은 색을 띄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곧 해가 뜰 거야. 하지만 꿈이란 원래 시간에 제약을 받지 않지. 와이즈. 그에게 아침까지만 현혹마법을 걸어 줘. 그리고 효과를 높 이게 꿈의 정령에게도 부탁하자." "무슨 꿈을 꾸게 할 건데?" "그의 과거. 어릴 적 기억이나 판과 관련 된 부분의 기억을 다시 겪 는 것처럼 보여주자. 그리고 현재 그의 고민을 다시 보여 주고, 카 르마(업보)에 타당할 미래를 보게 해 줘. 내일도 잠들면 또 꿈을 꾸 게 해주지. 날마다 괴롭혀 주고 싶지만 시간이 없으니까, 한 두 번 으로 끝낼 수 있게 리얼하게 부탁해, 와이즈." "복잡하네." 진은 좀더 남작이 꾸어야 할 꿈에 대한 내용을 만들어 냈고, 와이즈 는 그것을 참고로 현실처럼 느껴지게끔 현혹마법을 걸었다. 그리고 꿈의 정령을 불러내어 그의 기억 속의 단편들을 끌어내게끔 지시했 다." 정령이 남작의 머리 속으로 사라지고, 그는 곧 신음을 내뱉기 시작 했다. "가자. 와이즈. 해가 뜨는 것 같아." "내일 또 이런 일 하러 오긴 싫다. 같은 일이 한번 더 반복되게 침 대에 마법을 걸어놓겠다." "그래, 와이즈. 너무 존경스럽다. 별걸 다 하는구나. 힘이 되어 주어 서 정말 고마워." 진의 칭찬인지 추켜세움인지에 와이즈는 기뻐해야 할지 멋쩍어해야 할지 잠깐 갈등이 생겼지만, 그런 자신이 우스꽝스러워서 엄숙하게 대꾸해 주었다. "잊었냐. 난 드래곤이다. 미천한 인간 여자야." 진은 피식 웃어주고 그와 함께 다시 실프에게 안겨 성을 빠져나갔 다. 긴 밤에 마침표를 찍고 동녘이 밝아오고 있었다. 진은 와이즈와 함께 여관 앞에 서서 들어가지 않고 팔짱을 꼈다. "진. 안 들어가냐?" "와이즈. 한 건 더 하자." "뭘?" "이 여관 주인아저씨 말이야. 라돈에서 제일은 아니지만 꽤 있대잖 아. 돈은 돌고 도는 것. 원래 그래야 하는데, 아마 많이 감추고 있을 거야. 그럼 안 돼지~ 미나와 쟌느에게 지참금을 주어야겠어." "너처럼 하루 25시간을 쪼개고 쪼개서 잘도 이용해 먹는 인간은 내 생애 처음 본다. 그래, 해라. 누가 말리냐." "와이즈. 시간은 돈이야. 오래 사는 네가 보기엔 인간은 하루살이겠 지만, 하루살이에게도 그 하루는 평생이라고. 같은 시간이 똑 같이 주어진 조건에서 얼마나 효율적으로 시간을 이용하고, 알차게 보낼 수 있느냐가 인간에게 주어진 최대의 승부수가 아니겠어?" 진은 다시 소리 없이 1층 프론트 뒤의 여관 주인의 방을 찾아 숨어 들었다. 침실에 들어가기 위해 거쳐야 하는 작은 방에는 호위로 보이는 두 명의 용병이 의자에 앉아 졸고 있었지만. 진과 와이즈는 그들을 깨 우지 않고 조용히 지나쳐서 침대 방으로 들어갔다. 부지런한 노예 몇이 맡은 일을 하기 위해 일어나 막 하루 일을 시 작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늦은 시간까지 프론트를 지키던 주인 남자는 정신 없이 잠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부인으로 보 기엔 너무 젊어 보이는 여자도 한 명 누워 있었다. 그렇게 넓지는 않지만 호화로운 방안에서 진은 주위를 빠르게 둘러 보고 숨겨둔 금고 같은 것을 찾으려 했지만, 재물에 후각이 더 발달 한 드래곤 탓에 별다른 노력 없이 쉽게 보석 상자와 금화 자루가 있는 곳을 찾아내었다. "손대지 마라. 마법이 걸린 상자다. 주인 아닌 사람이 손대면 벨이 울리게 되어있어." "해제 할 수 없어?" "가소로운 일이지." 와이즈가 두 개의 금고에 '해제'라고 외치고 내용물을 꺼냈다. "오-옷-! 이 아저씨 부자 긴 했다." 가구를 들어낸 낮은 벽에 구멍을 뚫어 만든 금고와 침대 아래 마룻 바닥에 숨겨둔 금고, 그리고 그의 침대 옆 서랍에서 빼낸 가죽 지갑 에서. 야구공 두 개 부피의 보석들과, 세공 된 금과 보석이 섞인 장 신구 몇 개와, 100골드 정도의 금화자루와, 마법 아이템-와이즈가 가르쳐 주어서 알았다.-인 짧은 거리를 이동할 때 쓰인다는 비싼 마 법 스크롤과 보통 향수병만 한 크기의 무지개 빛을 뿌리는 힐링포 션 병을 찾아내었다. 와이즈가 그걸 엄숙한 얼굴로 서랍에서 찾은 자루에 모조리 쓸어 넣으려 하자 진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와이즈. 그걸 다 가져가면 저 아저씨는 심장마비로 죽을 지도 몰 라. 숨통은 틔어 주어야지." 보석과 금을 보니 눈이 잠깐 뒤집혔던 와이즈는 큼큼 헛기침을 하 고 물러났다. 진은 빠른 동작으로 금화와 보석과 마법용품과 힐링포션 병을 챙기 고 은화와 동전이 든 가죽지갑은 그대로 돌려놓았다. 상자에 금화 두개 보석 두개씩을 담아서 제자리에 돌려두고 씩씩하 게 창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며 흔적을 여기 저기 만들었다. "뭐하냐?" "밖에서 들어 온 도둑이야, 우린. 그냥 워프하면 마법사인 줄 알 거 아니야." "..........." 진은 여관의 정원을 벗어나 흙바닥이 끝나는 대로에 서자, 다시 와 이즈와 함께 방으로 워프했다. "보람찬~ 하루 일을~ 끝마치고 서어!~ " "너 정말 희안 한 노래를 많이 부르는 구나, 진." 한탕 뛰고 들어오자 기분이 좋아져서 진은 자신도 모르게 나온, 한 국에서 수경을 통해 들었던 노래 가사에 배시시 웃으며 머리를 묶 은 끈을 풀었다. 와이즈는 투명마법과 방안에 쳐 두었던 결계를 해제했고, 진은 도둑 질한 자루를 가방에 넣어두고 레아의 옆으로 기어 들어가서 잠을 청했다. [39] 7-3. 라돈에 내린 신의 벌 아침이 되자 콜린스와 레아의 할아버지는 제일 먼저 일어났다. 모시는 분들이(진과 와이즈) 이른 아침에 식사를 하는 습관이 있다 는 것을 상기한 콜린스는 여관 종업원에게 씻을 준비와 아침식사까 지 미리 준비 해 두길 당부하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부지런한 그들은 그래서 제일 먼저 여관의 소란스러움을 보고 듣게 되었고, 무례하게도 쳐들어 온 듯한 태도의 젊은이를 방으로 못 들 어가게 하려고 할아버지는 필사적이 되어있었다. "아, 할아버지. 레이디 진과 약속을 했다니까요~ 주무시고 계신다면 깨워주세요. 난 궁금해서 한 잠도 못 잤는데... 주무시고 계시다고! 만나게 해 줘요. 노인장." "젊은이. 거참... 아무리 예의가 없기로서니, 귀족 영애께서 잠든 침 실에 들어가겠다니요. 아래서 기다리시게나." "단체석이잖아요! 혼자 주무시는 것도 아닌데....." "할아버지! 여관에 도둑이 들었대요. 주인 아저씨가 사색이 되어 난 리가 났어요!" 콜린스가 뛰어 올라오며 하는 말에 카일은 멈칫했다. '어? 누가 했지? 보고가 안 올라왔는데.....?' 시끄러운 밖의 소란으로 잠을 깬 진은, 비틀거리며 일어나서 방문을 열어제쳤다. "레이디, 진. 안녕히 주무셨어요. 좋은 아침입니다. 하하...." 진은 카일의 뻔뻔한 면상을 올려다보다가 고개를 떨어뜨리고 입을 가리며 하품을 했다. "으...들어와요, 카일. 할아버지, 콜린스. 아래로 내려가서 무슨 일인 지 자세히 알아봐요." "네. 레이디." 그들은 아래층으로 내려갔고 카일은 방으로 들어와서 진이 올려놓 은 통신 구슬이 놓여있는 탁자 옆에 섰다. 진은 비몽사몽의 상태로 폴로네오에게서 온 메시지를 확인하고 기 다리고 있는 그에게 통신을 시도했다. "폴로. 상황이 어때요?" <레이디, 진. 반갑습니다. 잘 계시죠?> "그래요." '잠이 부족한 것만 빼면요....' <하하하. 여긴 모두 잘 돌아가고 있습니다. 라돈에 계시다고요. 거 기까지 빨리 가셨네요. 마법사님이 힘드시겠어요.> "하하...내가 좀 부려먹고 있기는 하지요." 진은 와이즈의 무언의 눈초리를 무시하고, 폴로네오에게 수산물 채 취현황과 서 대륙 바다에 면한 다른 도시와 나라에 사업을 추진하 기 위해 떠났다는 상인과 사제들의 이야기 등등....보고를 받고 몇 가지 지시한 후, 통신을 마쳤다. "......바쁘시네요, 레이디. 흠. 좀 무례하게 되어서 죄송합니다." "앉아요, 카일." 카일은 내내 서 있다가 진이 권한 의자에 앉았다. 와이즈는 베개를 끌어안고 자고 있다가 진이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약간 얼굴이 창백해 져서 취침 자세를 바로 하고, 반쯤 감긴 눈으로 그들을 보고 있었다. "카일. 어쩌겠어요. 어제, 아니 오늘인가. 내가 한 제의를 받아들이 겠어요?" ".....에....그게 그러니까."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진의 화법에 그는 잠깐 천장을 올려다보다 가 잿빛 눈동자에 웃음을 담고 대답했다. "물론. 레이디께서 말씀하신 대로 될 수 있다면 야, 뭐든 못하겠습 니까마는...아무래도 이해가 가지 않아서요." 진은 팔꿈치를 탁자에 올리고 오른 손으로 머리를 받쳤다. "카일. 설명하기 귀찮으니 눈으로 직접 봐요. 도와줄 거 에요, 말 거 에요? 오늘 하루만 내 손발이 되어 줘요. 하루 안에 결과가 나올 테 니 그때 가서 다시 판단해도 좋아요. 빨리 결정해요." "......하지요. 지시에 따라보겠습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위험하지만 않다면 요." "위험하지 않아요. 그런데 판은?" 카일은 일할 때 입는 복장이 아닌 평범한 흰색 계통의 옷을 입고 있었는데, 두건을 쓰지 않은 긴 잿빛 머리카락이 밤에 볼 때 보다 훨씬 산뜻해 보였다. "그 녀석은 혼자 웅얼대고 있을 겁니다. 자긴 신중한 거라고 하겠지 만, 제가 보기엔 미적대는 거죠. 하하..." "그에게 전해요. 내 제의를 받아들여서 정말 영주 자리를 차지하고 싶은 결심이 들면, 찾아오라고요. 오늘 내에 오지 않으면 다른 사람 을 찾겠다 고요." "............." "그리고 카일은 지금 바로 나가서 해 줘야 할 일이 있어요." "무얼 요, 레이디?" 진은 깨지 않은 잠에 정신이 사나웠지만, 풀어 헤져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또렷하게 말했다. "지금부터 라돈영지에 소문을 내어 줘요. 최대한 많이. 모든 시민들 이 수군거리게 해줘요." "무슨....소문이요?" "어니스트 신께서 노하셨다 고요. 신전의 사제들에게 신이 노하셔서 신 벌을 준비중이라고요. 신성력을 쓰지 못하는 사제 아닌 사제들이 신전을 모욕하고, 사람들을 위해 일하고 봉사하지 않는 그들 때문에 라돈에 재앙이 닥칠 거라고요. 그리고 어느 정도 소문이 퍼져서 영 주와 신관들에게까지 소문이 들어가게 되면, 다음 소문을 다시 퍼뜨 려요." ".............." "마계의 검은 음모에서 탈출한 가여운 영혼의 여자아이만이 신의 노여움을 풀거라 고요. 듣고 있나요?" "예에. 레이디......하지만...." "그리고 아마도, 신 벌은 사제들이 도화선이 되어서 정직하지 않고 순수하지 않았던, 영주의 성에도 미치게 될 거라고요. 하지만 라돈 을 구할 영웅이 고아 소녀를 데리고 나타날 거라고요." "............" "이상 끝. 가서 빨리 행동해요. 길드 원을 모두 이용해요. 그들에게 도 될 수 있으면 조작된 소문이 아니라 진실로 받아들일 수 있게 조치하면 더 좋구요. 어서 가요, 카일. 이건 시간 싸움이니까." "하지만, 레이디...." "하라는 대로만 하세요. 소문이야 잘못되어도 소문으로 그치게 되 요. 그걸 못해요, 도둑들이?" "........알겠습니다....." 여전히 의자에 앉아 할말 있어 보이는 그를 진은 다시 쫓아내며 당 부했다. "말한 대로 확실하게 일 처리해요, 카일. 그렇지 않으면 나도 약속 못 지켜요. 알았지요?" 그리고 진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문을 닫았다. 조금 후에 콜린스와 할아버지가 들어와서 여관 주인의 방에 든 도 둑이 전 재산이다시피 한 재물을 쓸어갔고, 그가 부리던 용병들이 밀린 일삯을 당장 내 놓으라고 협박하고 있다는 것과, 소문이 밖으 로 퍼져서 외상값을 달라고 몰려든 시장 사람들로 아래층에 난리가 났다고 알려주었다. 와이즈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몰래 웃고 있었고, 콜린스의 호들갑 스러운 목소리에 레아와 미나, 쟌느도 깨어났다. 레아는 다시 진의 팔에 매달리고, 미나와 쟌느는 절을 하고 허둥지 둥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와이즈, 안되겠어. 회복마법 한번 더 부탁해." 진은 마법시술을 받고 잠에서 깨어 겨우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콜린스를 시켜 아래층의 동향을 계속 전해 달라고 지시하고, 레아의 길고 거친 머리카락을 다듬어 땋아주었다. "할아버지." "네, 레이디?" "여관은 소란스러우니까. 할아버지께서 나가셔서 라돈에서 솜씨 좋 은 재단사를 불러와 줄래요? 갔다와서 식사하세요. 아니, 식사가 될 지 어쩔지 모르니까 빵이라도 사와요. 넉넉히 말이에요." "네. 레이디. 다녀오겠습니다." 진이 건네 준 은화를 받아들고 할아버지는 방을 나갔다. "진, 비라도 오면 어쩔 거냐.?" 마법사 겉옷을 다시 걸치고 와이즈는 레아와 진이 앉아있는 맞은편 침대에 걸터앉았다. "비가 오면 오는 대로 이용해야지. 어니스트 신이 슬퍼한다고 하면 되지 않겠어? 큰비만 아니라면 당장 막힌 샘이 다시 솟지는 않을 테니까. 비가 올 것 같아?" "아니, 비가 내릴 것 같지는 않다." 와이즈는 나무 여닫이창을 열고 화창한 봄 하늘을 바라보며 대답했 다. 그가 내려다 본 여관 주위 풍경은....재밌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고, 밖으로 끌려나온 여관 주인은 남아있 던 돈으로 화난 그들을 무마시키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와이즈는 창턱에 팔을 대고 다시 미소짓고 있었다. 조금 후에 콜린스가 들어와서 여관 주인 아저씨에게 생긴 일들에 대해 낱낱이 고했다. 재단사를 부르러 나갔던 할아버지가 시간이 좀 지나서, 먹거리를 커 다란 바구니 두 개에 가득 담아 가지고 들어왔다. "재단사가 오기로 했습니다. 레이디. 옷감을 챙겨 가지고 오겠다고 하더군요." "그래요, 그럼. 그동안 우린 아침을 먹어요." 진은 탁자 위에 그가 늘어놓는 빵과 말린 과일과 치즈와 훈제 고기 와 우유들로, 레아를 무릎에 앉히고 함께 아침밥을 먹었다. "저기. 그런데...." "네?" 진은 음식을 오물거리며 할아버지의 말을 들었다. "시장에 이상한 소문이 돌더군요. 어니스트 신이 노하셨다고 사람들 이 수군거리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새? 카일, 동작 빠르구나. 능력은 있네." 진은 일행과 식사를 마치고 콜린스가 치우는 동안, 할아버지가 직접 떠다 준, 동으로 만든 두 개의 대야에 담아 온 물로 레아와 함께 손 과 얼굴을 씻었다. 재단사는 30대로 보이는 아주머니였는데, 남편인 듯한 조수와 함께 옷감을 바리바리 싸들고 그들의 방에 들어왔다. 할아버지가 귀족 아가씨의 부름이라고 알렸는지, 그들은 지극히 공 손했고 그들이 파는 가장 좋은 옷감들을 가지고 와서 늘어놓았다. "드레스가 필요해요. 제것은 한 벌이면 되고, 이 여자아이 걸로 편 하게 입을 수 있을 만한 옷으로 다섯 벌 정도 만들어 줘요. 저기 저 소년의 옷과 할아버지가 입을 옷도 네 벌 정도씩 필요해요. 가죽이 들어간 실용적인 것과, 평상복과 예복으로도 입을 수 있는 옷을 섞 어 만들어 줘요... 와이즈. 옷 필요해?" "필요 없다, 진." 그들은 진의 많은 주문량에 기뻐하는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곧 치 수를 재기 시작했다. 어색해 하며 치수를 재고 있는 할아버지와 콜린스를 보며 진은 물 었다. "모두 만들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나요?" "아닙니다. 아가씨. 옷 길이와 품만 알면 하루 안에 다 만들어 드릴 수 있지요. 저흰 라돈에서 가장 일 잘하는 재단사랍니다." '재단사는 무슨....옷감을 잘라서 끈이나 리본만 달면 될 텐데...' "그래요, 그럼. 부탁해요. 제 드레스와 이 아이의 옷 한 벌을 먼저 만들어 주세요." "네. 급하시다 면 이 자리에서 바로 가봉해서, 만들어 드리겠습니 다." 진은 재단사 아주머니가 시키는 대로 팔을 벌리고 서서, 콜린스에게 여관주인을 불러오도록 시켰다. 하얗게 질린 얼굴의 주인 아저씨는 이마에 땀을 닦으며 뛰어올라왔 다. "부르셨습니까, 손님...아니, 아가씨. 죄송합니다. 안 좋은 일이 생겨 서 편의를 봐드리지 못했습니다." "그것보다. 도둑이 들었다면서요?" "네에...하지만 지장 없습니다. 곧 다시 일할 사람들을 구할 테니까 요." "노예 외의 다른 일꾼들이 모두 떠났다고 들었는데요. 빌린 돈도 있 어서 여관 문을 닫아야한다고 들었는데요?" "저....저...그건..." 그는 방안에 널려진 질 좋은 옷감들과 옷에 쓰이는 비싼 장신구들. 그리고 옷을 만들고 있는 재단사들과, 진과 그녀의 일행을 돌아보며 계속 땀을 닦았다. "내가 이 여관을 사지요. 노예와 함께. 파실 래요?" "네에?" 그는 아무래도 귀족 신분인 듯한 진의 말에 속으로 반색했다. 이 여관은 규모도 큰 편에 속하고 작은 샘도 있어서 비싸게 팔 수 있을 것이다. 빚쟁이들이 당장 빚을 갚지 않으면 여관이나 노예를 빼앗겠다고 해서 큰일이었는데, 당장 구원의 손길이 오게 된 것이 다. '이럴 줄 알았다면 돈을 가지고 있지 말고 액수 큰 빚은 갚아두는 건데. 젠장!....하지만 다행이다. 그냥 넘길 뻔했는데...좀 높게 불러서 다시 개업하면 되지." 하지만 장사 속이 좀 있던 그는 곤란한 표정으로 말을 했다. "사주신다면 저도 영광입니다만, 노예까지라면 좀 비쌉니다. 아가 씨." "얼마 부르실 래요?" 진은 재단사를 물리고 다시 침대에 걸터앉았다. 여관주인은 재빨리 속으로 계산을 했다. "노예가 모두 6명입니다. 모두 젊은 편이고 경매에 내 놓아도 여자 노예는 두 배로 받을 수 있으니까...200골드는 충분히 됩니다. 제 여 관엔 샘이 있어서 250골드는 주셔야 합니다. 아가씨." ".....내가 사지 않겠다면 빚 대신 넘기게 될 텐데, 너무 많이 부르시 네요." "그....그럼. 200골드만..." 진은 건방지게 보이는 코웃음을 쳤다. 그가 진땀을 빼고 있는데, 양발에 족쇄를 찬 하인 남자가 들어왔다. 그의 눈빛에 비웃음이 서린 것을 진은 놓치지 않았다. "주인님. 식사를 준비할 수 없습니다. 샘에서 물이 나오지 않는데 요?" "뭐?" 그는 진과 하던 협상 중에, 허둥지둥 아래층으로 뛰어내려갔다. 영문을 모르는 다른 일행과 달리 와이즈는 느긋해 보이는 웃음을 끊임없이 흘리고 있었다. 라돈 영지는 어수선해 졌다. 몇 군데 있던 작은 샘에서 먼저 물이 나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라돈의 샘으로 몰려갔지만 고여 있던 물은 금방 바닥을 들어냈고, 다른 때 보다 조금씩 흐르던 광장의 샘은 정오가 가까워 진 시간에 깨끗이 말라버렸다. 그리고 이른 아침에 시작되었던 불길한 소문이 점점 퍼지더니, 삽시 간에 라돈영지를 휩쌌다. 신 벌이 내린 것이고 원인은 신전의 사제와 영주라는 소문이 돌았 다. 영지 민이 아닌 여행자들까지 모두 신전과 성을 원망과 불안의 눈초리로 흘끔대었고 갈수록 사람들의 원성이 커가고 있었다. 당장 식수가 부족해져서 시민들은 빵을 구울 수 없었고, 여관주인들 은 손님들의 아우성에 곤란해졌다. 물 대용으로 포도주가 풀어졌지만 하층민들에게는 가지 않았다. 농지에 물을 길러다 날라 농작물을 돌보던 농노들은 손을 놓게 되 었다. 시장에서는, 조리할 시 물이 필요 없는 먹거리들과 미리 만들어져 있던 식료품이 동나기 시작했고 사람들의 불안은 점점 커져갔다. 오후가 되자 카일과 판이 다시 진을 방문했다. 진은 자신의 드레스를 구겨지지 않게 나무 옷걸이에 걸어 창문걸이 에 걸쳐두고, 레아에게 무릎아래까지 오는 고운 빛깔의 귀여운 드레 스를 입혀 놓고 그들을 맞았다. "......레이디, 다시 뵙네요..." "그러네요, 카일. 상황은 어때요?" "에...그게....하하. 물론 난리가 났지요. 신전에서도 그렇지만 영주의 성안도 대단히 시끄럽습니다. 다음 소문을 흘리도록 조치해 두고 왔 습니다." "잘했어요." 그들은 머뭇거리고 있었다. 판은 소란스런 밖과 다른 공기가 흐르는 진과 그녀의 일행의 방안 에서, 눈빛에 여전히 번뜩임을 담고 있기는 했지만, 친구와 같이 황 당하단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가씨....아니, 레이디께서 하신 일입니까? 아니면 정말 신 벌인가 요?" "그건 중요하지 않지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원래대로 돌려놓을 수 있으니 걱정은 안 해도 됩니다. 판, 결심은 했어요? 영주가 되겠 어요?" "..........." 그는 이른 새벽. 진이 던져 주었던 선택의 문제로 어떤 길을 택해야 할지 무던히도 고민했지만, 영지 내에 일어난 그 믿을 수 없는 사태 를 보고 마음을 굳혔다. 신의 벌을 끌어내는 존재가 영주의-아버지의 마음을 열게 하는 것 정도를 못해 내겠는가. 그는 대답했다.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레이디, 진. 하층민과 노예들의 영주가 될 것을 약속합니다." 진은 일어나서 풀어두었던 검 집에서 검을 빼어들고 판의 앞에 섰 다. "무릎을 꿇으시죠. 판 타이." "..........." 다른 사람들은 생략하자. 카일은 입을 막고 눈을 동그랗게 떴고, 와이즈는 눈을 반짝였다. 판은 진의 말과 행동에 잠시 멈칫했지만 어색하게 한쪽 무릎을 바 닥에 대고 몸을 굽혔다. "나. 드리얀의 왕녀 제르티아 진 라이어스 D는 라돈의 판 타이를 내 이름을 걸고, 내가 모시는 신을 증인으로 기사로 임명합니다. 칭 호를 받으시겠습니까, 판 타이?" ".........!!" "난 왕녀지만 왕위 계승 권이 있어, 정식 기사를 임명할 권리를 가 지고 있습니다. 칭호를 받으시겠습니까?" ".......바. 받겠습니다." 카일은 진의 말에 눈이 튀어나올 듯한 표정을 짓다가 바닥에 판처 럼 무릎을 꿇었고, 할아버지와 콜린스도 놀라고 당황해서 무릎을 꿇 었다. "그대에게 기사칭호를 내립니다. 드리얀의 가호와 신의 가호를....주 군께 충성하고 약자를 보호하며 기사로서의 신념을 위해 맹세하십 시오." 진은 전에 네얀에서 이것저것 정보를 모을 때 들어두었던, 대륙에서 대표적으로 사용되는 기사임명식 과정을 기억해 내고 대충 읊었다. 그리고 말을 이으면서, 판의 양어깨에 번갈아 가며 칼등을 대고 손 잡이를 판에게 내밀었다. 그는 그것을 받아 들고 무어라 형언하기 힘든 표정으로 일어나서, 진을 향해 한 손으로 검을 세워 보이며 맹세의 말을 했다. "저, 판 타이는 드리얀의 왕녀 제르티아 진 라이어스 D의 기사이며, 기사의 도리를 지킬 것을, 그분의 신을 섬기며, 그분을 주군으로 죽 음을 맞아 카르마로 돌아가게 될 때까지 충심으로 모실 것을 맹세 합니다." 판은 기사가 되었다. [40] * "할아버지. 언니가 공주 님이야?" 막혔던 말문을 열게 된 레아의 목소리에 모두 침대에 앉아있는 검 은머리의 소녀를 돌아보았다. 할아버지는 다시 듣게 된 손녀의 목소리에 바닥에 꿇어앉은 채, 입 을 가리고 눈시울을 붉혔다. 진은 서약을 끝내고 멍하니 서 있는 판을 내버려두고 레아에게 갔 다. 레아는 초록색 눈동자에 순진함을 담고 진을 빤히 바라보며 물 었다. "공주 님이라고 불러야 되요, 언니?" "아니. 연극을 한 거야. 그대로 언니라고 불러, 레아." 레아는 손을 뻗어 진의 목에 다시 매달렸다. 진은 어린애 같은 소녀를 안고 일행을 향해 말했다. "모두 일어나세요." 그들이 부스스 일어나자 진은 그녀 특유의, 낮지만 막힘 없게 들리 는 목소리로 명령했다. "내 신분은 비밀입니다. 이 방 밖으로 새어 나가서는 안됩니다. 잊 어버리세요. 모두들!" 할아버지와 콜린스도 머뭇거렸지만, 카일과 판은 더 혼란스러워했 다. "판. 기사 칭호란 어차피 명예를 뜻하지요. 칭호를 줄 수 있는 귀족 에게 받았으니 그것으로 충분히 자격이 있는 셈이에요. 절 따라다닐 필요는 없고, 남작의 인척들에게 노예 출신의 용병에게 영주자리를 주는 문제에 대한 저항을 조금이나마 완화시키기 위한 의도 에요. 판은 예정대로 라돈의 영주가 되어 이곳을 관리하세요. 기사칭호는 예전에 이미, 여행 중이던 드리얀의 리툰 후작에게 받은 것으로 해 두죠. 꼭 확실하게 주군의 이름을 밝혀야 할 일이 있다고 해도 2~3 개월 정도는 미룰 수 있겠지요? 지금은 비밀로 해요. 난 여행 중이 고 복잡하게 되는 것은 싫으니까요." "..............." 와이즈는 진의 하는 양을 계속 지켜보며 침대에서 다리를 꼬고 턱 을 고였다. "카일. 3개월 안에 제 신분을 발설하면 라돈의 도둑길드를 뿌리 채 뽑아버리겠어요. 알았어요?" "예에....하지만 왕녀님...." "원래대로 불러요, 카일. 콜린스와 할아버지도 마찬가지 에요. 아셨 지요?" 강압적인 진의 말에 그들은 죄지은 표정으로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말 없이 서 있던 판이 입을 열었다. "확실히....기사 칭호를 누구에게서 받았는지 조사까지 할 위인은 없 겠지요. 원래 기사란 자부심이니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전 맹 세를 했습니다. 레이디." "라돈에서 영주로 일하며 지켜요, 판. 노예와 하층민의 영주가 되겠 다고 한 다짐을 실천하는 것이 제가 인정하는 당신의 기사로서의 신념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판은 진의 남청색 눈동자에서 애써 지금껏 보지 않으려 했던 그녀 의 굳은 심지와 강해마지 않는, 가슴을 치는 '힘'을 느꼈다. 형언할 수 없을 벅찬 감정에 판은 다리가 굳어왔다. 노예로 살아야했던 지난 고통스러운 시간들이 머리 속을 스치고 지 나가고, 표현하기 힘든. 평생을 두고 키워왔던 갈망을 한순간에 이 어린 소녀가 채워주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자신을 믿어주고 있었고 기사로까지 받아주었다. 판은 진을 진심으로 주군으로 인정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레이디를 따라 드리얀으로 가지 않는다고 해 도, 전 앞으로도 계속 레이디 진. 당신에게 맹세한, 당신을 주군으로 모시는 기사입니다." ".............." * 타이 남작은 끔직한 악몽에 시달리다 땀에 흠뻑 젖은 채 아침을 맞 았다. 그의 눈엔 회한과 고통. 후회. 연민. 두려움이 가득 맺혀있었다. 침대에 일어나 앉아 그는, 탈색되어 갈색이 된 붉은 머리를 손으로 부여잡았다. "내가....무슨 짓을 했던 거지? 내가......" 아침 식사시간. 식탁에 앉아 그는, 중년의 나이에 접어 든 딸들과 사위들과 그들의 아들들인 외손자들을 지켜보았다. 탐욕 섞인, 허울 좋은 예의 범절과 겉치레뿐인 미소들을 보면서 그 는 꿈속에서 다시 만났던, 그의 또 다른 아들을 떠올렸다. '나으리! 왜 아버지라고 부르면 안되나요?' 타이 남작은 눈을 감았다. 귓가에 어지러운 사람들의 목소리가 울리고 또 울렸다. '주인님. 소원입니다. 판이 글을 배우게 해 주세요.' '아버지! 엄마가 아파요!' '남작 님이라고 부르라고 했지 않느냐!' '버르장머리 없는 노예 같으니라고. 누구 안전이라고 뛰어들어와 소 리를 지르느냐! 남작. 가만두고 보실 건가요?!' '나..남작 님. 엄마가....' '아버님. 저 분수를 모르고, 불결한 노예를 언제까지 이 집에 두실 겁니까. 썩 나가지 못할까! 고얀 것.' 타이 남작은 어디 편찮으시냐고 물어오는 큰딸을 향해 얼굴을 쳐들 었지만 그의 눈은 그녀를 보지 않았다. '살려 주세요. 잘못했어요. 나으리. 이렇게 빌게요. 하지 마세요, 하 지 마세요....나으리! 아버지! 아-아악-!' '당신을 저주하겠어! 당신을 죽이러 오겠어! 엄마를 죽인 당신들을 모두 마계 지옥에 쳐 넣을 거야!! 신 벌을 받아라!' 타이 남작은 몸이 불편하다는 말을 하고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나 침실로 돌아갔다. 그리고 침대에 앉아 고개를 저으며 뇌까렸다. "이미 지나간 일. 이제 와서 어찌해 볼 도리가 없지 않나....내가 죽 어. 카르마(윤회)로 돌아가 다시 태어난다면, 꿈에서처럼 노예가 될 지도...." 그는 새벽에 꾼 악몽으로 지친 마음과 탈진한 몸을 쉬게 하기 위해 침대에 몸을 뉘었다. 그리고 다시 악몽에 시달렸다. 오랫동안 영주의 곁에서 시중을 들던 시종이 영지 민들이 찾아왔다 는 것을 알리기 위해 긴 낮잠을 자는 타이 남작을 깨웠다. 그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비틀거리며 일어나서 비 오듯 쏟는 땀을 씻기 위해 물을 가져오도록 시켰지만, 물그릇은 대령되지 못했다. * 라돈의 어니스트 신전의 최고위 사제 장은 불안에 시달리고 있었다. 영지에 도는 소문을 처음 들었을 때 그는 노발대발하며 소문을 퍼 트린 사람을 찾아내라고 사제들을 닦달했지만, 샘이 말랐다는 소식 을 접하고 가슴속에 비집고 들어온 불안으로 초조해 지기 시작했다. 신께서 그를 버리셨다. 신자들의 시선에서, 후배 사제들과 견습사제들의 시선에 그는 두려 움이 피어오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젊을 때부터 누리고 있던 당연했던, 존경과 신임을. 나이 들어가면서 저도 모르게 어느 순간 잃게 된 그 문제의 신성력 으로, 겉치레 교리와 위엄으로 위험천만하게 유지 해 왔는데. 이제 지나치는 모든 사람들의 눈초리가 그를 단죄하고 있었다. '신이여. 어니스트 신이여, 죄송합니다. 오만했던 저를 용서하소서. 제 죄를 사해 주소서.' 최고 신관의 기도 실에 놓여져 있던 어니스트 신의 신상은 그의 기 도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와 동년배의 동료사제와 그 외 몇 명의 사제들의 얼굴에도 비슷 한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고, 오후가 되자 신전은 황폐한 적막이 감 돌았다. 신전 앞 샘터 광장에는 점점 모여든 영지 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 고 있었다. 그들은 사제들을 끌어내자는 외침을 간간이 드높이고 있 었고, 사제 장을 비롯한 신성력을 잃고 있던 몇몇의 사제들은 개인 신상을 끌어안고 떨면서 끊임없이 기도문을 읊조리고 있었다. 사제 장이 희망이 될 소식을 다시 접한 것은 늦은 오후였다. 가장 젊은 나이의 후배 사제 나이카가 그에게 찾아와 새롭게 주민 들 사이에 퍼지고 있는 영웅과 신의 노여움을 달랠 소녀의 이야기 를 들려주었다. 그는 벌떡 일어나서 비슷한 생각을 하고 방에서 나오는 다른 사제 들과 예배 실로 뛰어갔다. 그들은 모두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를 올렸다. "정직과 순수의 어니스트 신이여. 가르쳐 주십시오. 그들은 어디 있 습니까. 당신의 노여움을 풀 존재를 보내셨다면 저희에게 죄를 사할 기회를 주십시오. 저희를 버리지 말아주십시오. 신이여." 애타는 기도에도 그들에게 아무런 계시도 내려지지 않았고, 사제 장 은 사제들을 이끌고 직접 알아보기 위해 두근대는 가슴을 안고 신 전을 나섰다. 그리고 군중과 맞닥뜨렸다. 신전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서성이던 주민들에게 그들은 둘러 쌓 였다. "!!......." "물러서시오. 잊었습니까! 우린 신의 가르침을 따르는 신의 사자요!" "웃기지 마시오! 신성력을 못 쓰는 당신들 때문에 라돈에 재앙이 닥 친 거요!" "그래, 맞아! 난 라돈에서 10년을 살았지만, 저 노인이 신성력을 쓰 는 것을 한번도 못 봤어!" "진정하십시오. 여러분. 사제 장님께서는 오랜 시간 신께 의탁하신 분입니다." "나이카 사제님. 당신께 은혜를 많이 입었어요. 하지만 저들은 아니 에요! 정말 신의 사자라면 신성력을 보여 줘요. 그러면 믿겠습니다." "그래요. 보여주시오. 여긴 아프고 다친 사람도 많단 말이오! 돈이 없어서 치료도 못 받고 있는 사람이 한둘이요!" "보여 줘요. 보여 줄 수 없다면 바로 그 사제가 신의 벌을 받아야 해! 왜 우리가 대신 받아야하느냐고?!" "영주도 마찬가지야!" "맞아. 영주도 신 벌을 피하지 못할 거 랬어." "신성력을 증명하시오. 사제 님들!" 점점 퍼져 나가는 군중심리는 당장이라도 사제들을 덮쳐 갈기갈기 찢어 놓을 듯한 분위기가 되었다. 새파랗게 질린 사제들은 한군데 모여서 사람들의 벽에 갇힌 채 꼿 꼿이 서 있거나,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영주 성의 성문이 열리고 기사들과 샘터 앞에 병사들이 도열했다. 사람들은 웅성거리며 모두 돌아보았다. "기-립-!" 영주의 기사장의 외침에 병사들과 말에 올라 탄 기사들이 줄 맞춰 검을 가슴 앞에 세웠다. "라돈영주 타이남작입니다. 영지 민들은 모두 예를 취하시오!" 기사장의 우렁찬 목소리에 일부 주민들이 무릎을 꿇었지만, 원망과 증오 어린. 가장 많은 숫자의 하층민들은 그대로 서 있었고, 그래서 다시 그들은 일어났다. "............" 늦은 오후 햇살이 마지막 빛을 라돈에 뿌리고 있었다. 타이 남작은 나이 든 몸에 벅차게 느껴지는 무게의 철 갑옷을 입고 말에 올라타 양쪽에 도열해 있는 기사와 병사들 사잇길로 호위기사 를 대동하고 저벅거리며 걸어나왔다. 그는 샘터 주위 빽빽하게 모여들어 있는 자신의 영지 민을 돌아보 았다. 그들은 지저분하고 헤어진 옷차림에 대부분 신조차 신지 않고 가난에 찌든 몰골들이었지만, 눈빛에 진한 원망과 한을 담고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침묵이 모든 사람들의 머리 위에 내려앉았다. 타이 남작은 그 무언의 압박감에 심장이 죄어 들어왔다. '내 잘못인가? 내 잘못이다. 내 카르마(업보)이다....' 타이 남작은 노쇠한 목소리에 힘을 주어 외쳤다. "내 영지의 주민들이여. 난 라돈의 타이 남작이다. 난 기사이다. 신 의 벌이 내렸다면 나조차도 피할 수 없는 일. 하지만 그대들은 정직 한가, 그대들은 순수한가. 난 너희를 이끌어야 한다. 라돈을 구해야 한다. 신의 노여움을 풀 자를 아는가. 그렇다면 내 앞에 세워라. 너 희가 말하는 소녀를 찾아와라." 잠시 유지되던 침묵은 곧 깨졌다. 사람들은 웅성거렸고, 그리고 더 노했다. "영주여. 잘못을 뉘우치지 않으시면 신의 노여움이 걷혀지겠습니 까!" "그렇습니다. 영주 님. 저흰 죄 많은 밑바닥 생활을 하지만 다른 방 법이 없었습니다." "저희가 하루 두끼 밥만 제대로 먹고살아도 도둑이 될 일도 없었 고." "아이들이 죽어 가는 것을 보면서도, 얻을 약도 없고 도움도 없음을 한탄하지 않는다면 왜 몸을 팝니까!"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한달 은화 한 닢도 모으지 못합니다." "제 아들은 기사가 되고 싶어해도 하루 연명할 주린 입도 채우지 못하는데 무슨 희망이 있습니까." "저희는 농노지만 노예보다 못 먹습니다." "저흰 딸들을 노예시장에 보내 팔지 않으면 겨울을 날 수 없습니 다!" "그런 저희가 어디에 하소연해야 합니까!" "영주 님은 그런 저희를 돌보셨습니까?" "왜 우리가 신 벌을 받아야 합니까!" "왜 우리가 신의 노여움에 당신들과 함께 희생되어야 합니까!" 주민들의 원성을 커져만 갔다. 그들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들의 영주 앞에, 신전 앞에 고개 숙이 지 않고 발악했다. "사제들을! 신성력이 없는 사제들을!!" 악에 받친 그들이 외치자, 사제 장과 그 외 몇몇 사제가 새파랗게 질려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폭동이 일어나려는 찰나. 그리고 기사와 병사들이 보호를 위해 남작을 에워싸는데. 그들을 멈추게 하는 젊은 남자의 진중한 목소리가 라돈 샘터를 후 몰아쳤다. "기다리십시오. 라돈의 주민 여러분." 진은 건물 사이 군중과 떨어져서 와이즈가 불러낸 실프에게 부탁해, 판의 목소리를 라돈샘터 주위 구석구석까지 퍼지게 하고 있었다. 몰려들어 있던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길을 내어 목소리의 주인이 지 나가게 비켜섰다. 그는 주홍색 머리의 그들에게도 친숙한, 몇 달을 라돈에서 함께 지 낸 이웃이었다. 판은 평범한 용병차림으로 길고 폭 넓은 검을 차고 뚜벅거리며 시 민들을 지나쳐서 말에 올라타 있는 영주 앞에 섰다. 그는 목례조차 하지 않고 단호한 목소리로 갑옷차림의 영주에게 말 했다. "라돈 영주 타이 남작님. 저는 드리얀의 리툰 후작의 기사 판이라고 합니다. 신의 노여움을 풀 소녀를 압니다. 앞에 대령하라고 하셨던 가요?" "............" 타이 남작은 의식이 아득해지고 현기증이 났다. 머리색. 이목구비. 그 붉은 기가 도는 갈색 눈빛.... 그는 자신의 손으로 직접, 달궈진 쇠 도장을 몸에 새겨 팔았던 꿈 속의 그.....아들이었다. 영주가 대답이 없자, 주민들이 소리를 높였다. "판, 그 소녀를 정말 아나?" "이 사람아. 기사 분 이셨잖아!" "아......" "기사 님. 신의 노여움을 풀 방법을 아나요? 아시면 알려주세요. 저 희는 죽고 싶지 않아요." "그래요. 기사 님. 그 소녀가 누구지요?" 군데군데에서 키를 높여 소리쳐 묻는 그들에게 판은 몸을 돌리고 큰소리로 말했다. "그 소녀는 어둠의 정령에게 오랫동안 지배당하다가, 겨우 몇 일전 보라 빛 눈동자에서 벗어났습니다. 14살이지만 가장 순수하고 정직 한 8살 어린아이의 영혼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디에 있나요? 라돈에 있나요?" "이곳에 와 있습니다. 그 소녀가 신께 빌면 어니스트 신께서 노여움 을 풀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원래 그 일을 해야했던 사제 님들은 자신의 잘못을 아신다면 뉘우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순 수한 영혼이라 하여도 신께서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더불어!" 판은 다시 영주를 향해 말했다. "진정으로 주민을 위하지 않았던 영주는 자리에서 물러나야 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여러분?" "옳소!" "맞아요! 사제 복을 벗어야합니다." "판은 영주 님의 아들이잖아요!" "! 그래, 맞아! 판을 후계자로!" "차기 영주로!" 타이 남작은 묵묵히 당당한 눈초리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아들 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그가 다시 돌아와 있었다는 것도 모르고 있 었다. 웅성거리는 주민들이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알았 지만 목이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노예신분의 아들은 기사가 되어, 장성하여 자신 앞에 서 있었다. 그에게 저주를 퍼붓고 팔려가던 그의 눈빛이 되살아났다. 후회 어린 회한으로 남작은 가슴속에 바람이 불었다. 그는 탁해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드리얀의 기사 판. 그대가 진정 신의 노여움을 풀 방법을 안다면 증명하시오. 신 벌을 면하게 하여 내 영지 민들을 구한다면 내 작위 를 물려주겠소." 타이남작은 판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머리를 돌려 성안으로 들 어갔다. 영지 민들의 얼굴에 희망이 돌았다. 너무 쉽게 목적을 달성한 판은 진과 와이즈가 서 있는 쪽으로 흘끗 눈길을 던졌다가 미소지었다. 신성력을 못쓰는 사제들은 광장에서 주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스 스로 사제 복을 벗었다. 눈물을 흘리는 그들은 판과 세 명 남은 후배사제들의 권유로 다시 견습사제로 돌아가고, 그들 3명의 사제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사제 가 사제 장이 되었다. 사제들과 주민들은 어두워진 거리에서 내일 새벽 해가 뜰 때 기우 제를 지낼 준비를 하기 위해 흩어졌다. * "재밌었다, 진." 진은 판이 사람들에게 이것저것 지시하는 것을 보고 와이즈와 함께 여관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와이즈의 그 덜 성숙하게 들리는 말에 진은 고개를 내저었다. '철없는 이 드래곤아.' ".....죽을래?" 진은 주먹으로 입을 가리고 '험'하는 소리를 내며 와이즈의 버릇이 되어버린 협박에 빙글 웃어 주었다. "잘되긴 했어. 우리가 나서지 않아도 되었잖아. 영주의 꿈이 효과가 있었던 거야. 안 그랬으면 폭동을 완전히 막지 못했을 텐데." 진은 두고 온 일행이 기다리는 여관으로 들어갔다. 여관주인아저씨는 집회 구경을 갔다 돌아 온 진에게 여관을 팔았다. 라돈의 험악한 분위기에 편승하여 빚쟁이들 마저 그를 신 벌과 연 관시키는 둥, 그들의 압력을 더 피할 수가 없었던 그는 겨우 100골 드에 노예와 여관을 진에게 넘겼다. 그의 절망 어린 얼굴에 대고 진은 무심하게 들리는 충고를 했다. "빚을 갚고도 20골드나 남잖아요. 그 돈이면 평민치곤 부자 에요. 다시 작은 여관을 개업할 수도 있잖아요?" "............" 그는 돌아서서 옷가지들을 챙긴 짐 보따리를 들고 여관을 나가며 울어야 했다. 그리고 그 빌어먹을 도둑에게 온갖 저주를 퍼부었다. 와이즈는 그런 그를 보며 다시 고개를 돌리고 웃음을 감춰야했다. 진의 방으로 노예들이 불려져 왔다. 그들은 새 주인이 된 귀족아가씨를 감정이 담기지 않은 공허한 눈 으로 바라보며 정렬해 있다가, 진이 칼을 빼들고 다가오자 흠칫거렸 지만 그녀가 모두의 발목에 채워진 족쇄를 무 자르듯 칼을 그어 끊 어버리자 자신들의 발목과 그런 진의 행동을 바라보며 의문의 눈초 리를 했다. 진은 훔쳤던 가죽주머니에서 100골드 금화자루를 꺼내 그들에게 건 넸다. 쟌느가 무심결에 그걸 받아들었다. "당신들은 이제 자유 에요." "!!" "그 돈은 그동안 일한 품삯입니다. 나눠 가지세요.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하시고, 고향에 가고 싶다면 가세요. 혹시나 등에 새긴 인으 로 다른 곳에서 누명을 쓸지도 모르니까 원한다면 지워줄게요. 아프 겠지만 마법사가 있으니 빨리 치료해 줄 수 있어요. 인장을 지워 줄 까요?" 그들은 믿을 수 없는 진의 말에 멍청이 서 있다가, 그녀의 말이 거 짓이 아님을 깨닫고 서 있던 자리에서 하나씩 무너졌다. 그들은 고개를 무릎에 박거나, 무릎을 꿇고 얼굴을 감쌌다. 미나와 쟌느는 눈물을 훔치며 진에게 가까이 와서 무릎을 꿇고 그 녀의 발등에 키스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가씨....." "감사 드려요, 아가씨. 하지만 저희는 돌아갈 곳이 없어요." "갈 곳이 없다면 이 여관에 남아 그대로 일하세요. 여관을 당신들에 게 맡길게요. 그리고 그런 행동은 하지 말아요. 보기 흉해요." "............" 그들은 울음을 터뜨렸다. 남자 노예 중 한 명만이 가족이 있다는 가까운 고향으로 떠나게 되 었고 나머지는 모두 여관에 남아 진에게 고용된 공동경영자가 되었 다. 아침에 할아버지가 사왔었던 먹거리가 남아서 다시 방문한, 판과 카 일과 함께 그들은 저녁을 먹었다. 카일은 내내 정중하게 대화를 시도했다가도 끝내는 꼭 판에게 발을 찍혀야했고, 할아버지는 간간이 말문을 여는 손녀 곁에서 머리를 쓰 다듬어 주고 있었다. 한밤중이 되자 진은 들떠서 잠들 생각이 없는 그들을 와이즈에게 부탁해 모두 강제로 재우려고 했다. 판과 카일은 와이즈가 마법을 걸려고 하자 결사적으로 몸을 피했다 가 콜린스와 할아버지와 레아가 잠든 후에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하하..레이디. 우릴 빼 놓으시면 안되죠~ 하시는 일을 꼭 보겠습니 다. 궁금하면 전 그냥 도는 수가 있......윽." "레이디. 무슨 일을 하시든 주군인데 따라 야죠. 라돈에 계시는 동 안만이라도 호위하겠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진은 방에 결계를 치고 나서는 와이즈와 함께 졸랑졸랑 따라오는 꼬리를 달고 밤일을 나가야했다. "카일. 라돈의 가장 악덕 부자 네로 안내해요." "에? 샘에 가시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그건 조금 나중에 해도 되요. 판이 네카르도의 왕실과 다른 귀족들 에게서도 인정받으려면 갖다바칠 재물이 많이 필요할 거 에요. 라돈 의 부자들을 털어 봅시다." "......어제 여관의 그 도둑도....레이디셨나요?" "하하하...." 진은 웃음으로 얼버무렸지만 카일과 판은 다시 황당한 표정으로 머 리를 긁적였다. [41] 비를 내리는 소녀 * 카일과 판은 당황하고 황당하고 놀랐다. 진과 와이즈는 죽이 딱딱 맞아서 라돈의 부유 계층의 저택들을 하 나 하나 털어 갔다. 카일이야, 자신도 도둑이니 재물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진 은 하루 밤에 하는 영업치고는 지나치기까지 했다. 진은 표적으로 삼은 집의 대문 앞에 서게 되면, 그들을 담 밖에 와 이즈에게 부탁해서 따라오지 못하게 마법으로 움직이지 못하게 해 놓고, 높다란 담을 한번에 뛰어올라 하늘을 나는 마법을 시행한 와 이즈와 함께 안으로 사라졌다가. 바리바리 싸든 보따리와 함께 같은 방법으로 담을 뛰어 넘어 돌아 오곤 했다. 문제는 진과 와이즈가 나온 집에선 사람들이-노예로 보 이는 이들이 짐 보따리를 각기 들고 뛰쳐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있는 쪽을 보고도 입이 벌어진 그들은 전혀 상관하지 않는 듯 사방으로 달려가고는 했다. "..........." "레이디....어찌된 일입니까? 마법이 걸린 곳도 많을 테고, 호위하는 용병들도 꽤 많을 텐데. 게다가 저 사람들은 노예들 같은데..." 진은 첫 번째 집을 털고 나와 값진 물건과 귀금속만 챙겨서 담아 온 커다란 자루를 어깨에 턱. 걸치고 만화영화에서 본 괴도처럼, 허 리에 한 팔을 얹고 '핫. 핫!' 하고 웃으며 얼버무렸다. 그리고 그 무거워 보이는 짐을 판에게 넘기지 않고 그대로 든 채 다음 집으로 가서 또 똑같은 행동을 했다. 진이 두 번째 집에서 잠시 맡겨둔 짐 보따리를 받아들었다가 판은 깜짝 놀랐다. 부피만 큰 게 아니고, 굉장히 무거웠기 때문이다. 진은 담을 넘으면 와이즈와 투명마법을 써서, 저택내의 사람들에게 모조리 슬립마법을 걸게 했다. 마법사가 있는 집도 있었지만 그들은 와이즈가 알아채서 슬립마법 에 제일 먼저 희생자가 되어 주위 돌아가는 상황을 알지 못하게 했 다. 진은 주로 보석과 금화와 마법 아이템과 힐링포션과 아주 귀한 수 입 특산물들만 챙기고, 주인들과 묶여 있거나 밤까지 일하고 있던 노예들만 따로 모아두고 깨웠다. 어리둥절한 그들은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발목의 족쇄와 쇠사슬을 끊는 것을 지켜보았다. 진은 와이즈에게 부탁해서 인이 있는 노예들을 약한 파이어 마법으 로 등을 지지고 치료마법을 바로 시행하게 했다. 그들은 갑자기 닥친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금새 깨끗이 사라지는 통 증에 어안이 벙벙해 했지만 족쇄가 저절로 끊어지더니 만져 본 등 에 익숙한 표시 대신 새 화상자국이 생긴 것을 알고 머뭇거렸다. 진은 그런 노예 한, 두 명에게 인기척을 내지 않고 다가가서 속삭였 다. '어니스트 신의 자비입니다. 도망가세요.' 진의 목소리를 들은 노예들이 먼저 몸이 굳어 있는 주인들이 보는 앞에서 너무나 잘 아는 집구석 구석을 다니며 재물을 챙겨 달아나 기 시작했고, 나머지들도 곧 따라하고는 했다. 마법으로 몸이 묶이고 입이 막혀 있던 주인과 그의 가족들은 멀거 니 그 광경을 보며 혼란스러워하며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마법사가...? 아니야. 불가능해. 마법이 아닌가 보다. 신 벌인가...? 신 벌인가 보다. 오오..신이여. 재앙을 멈춰주소서. 살려주십시오. 잘 못했습니다.' 몇몇의 노예들은 자유로워지자 저항하지 못하고 있는 주인들을 발 길로 걷어차고 침을 뱉거나 했지만, 다시 울린 낮은 소녀의 목소리 에 황급히 도망하곤 했다. '시간을 많이 드리지 못합니다.' 와이즈는 계속 비실 웃음을 지으며 마법을 남발하며 진의 뒤를 따 라다니고 있었다. "레. 레이디...이제 그만 하시죠. 당한 사람들이 영주께 도움을 청할 텐데, 아직 판이 영주가 된 것도 아니고....그러면 제 길드는 아작이 나....윽." "카일. 걱정 말아요. 신고하지 않을 거 에요. 직접 노예들을 풀어주 었다고 할 거 에요. 뭐, 집을 무너뜨린 것도 아니고, 아주 싹쓸이 한 것은 아니니까. 뉘우치고 재기할 거 에요. 그럴 여지는 남겨두었으 니까. 하하하...그리고 지금은 시기가 안 좋아. 신 벌이 내리고 있는 마당에, 무슨 담력으로?" 마지막으로 들어간 집(그래봐야 라돈엔 큰부자가 몇 없어서 네 번 째였다.)에서 진은 맡겨 두었던 보따리들을 모두 받아 가지고, 집안 으로 사라졌다가 같은 방법으로 돌아왔다. 대문을 열고 같은 패턴으로 나오는 노예와 몇몇 하인들의 모습은 그대로였지만, 진이 가지고 갔던 짐은 손에 없었다. "?" "너무 부피가 커서 가지고 다니기 불편해서 와이즈가 숨겨 두었지 요." "............" 달이 지고 더욱 어두워진 밤하늘을 쳐다보고 진은 어림한 시간이 되었음을 알고 와이즈에게 말했다. "와이즈. 판과 카일도 데려가자. 알아두어야 할 테니까." 와이즈는 판과 카일을 힐끗 보았지만 진의 의사대로 가까이 오게 하고 숲의 바위무더기 쪽으로 워프 하기 위해 위장용 주문을 뇌까 렸다. "대기여. 대지여. 원하는 곳으로 갈 길을 열어주십시오. 공간을 가르 고 밤을 가로지릅니다. 워프!" '주문한번 그럴싸하네.' 진은 속으로 웃었다. 숲의 바위투성이 공간으로 이동하자 판과 카일은 또 어리둥절했다. "에...샘이 아닌데요, 레이디?" 진은 대답하지 않고 시간을 맞추기 위해 소매를 걷어 부치고 바위 들을 들어내기 시작했다. 물의 정령에게 부탁해서 그녀로 하여금 막 은 돌을 치우게 할 수도 있었지만, 카일과 판을 의식해서 정령을 불 러 부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판이 서둘러 도우려고 했지만 진은 '비켜요, 비켜. 방해되니 떨어져 있어요' 하고 말하며 그 커다란 바위들을 걷어내고 있었다. "..........." "리툰 후작 님. 레이디께선 산에서 무슨 훈련을 하셨길 래....인간이 맞.....윽." 와이즈는 미소를 지우지 않은 얼굴로 카일의 말에 대꾸했다. "진은 분명히 인간입니다. 그리고 전 후작이 아니에요. 적어도 공작 자리는 줘야하는 거 아니냐, 진?" 진은 와이즈의 말에 돌아보지 않고 소리쳤다. "해라. 공작이든 뭐든. 그냥 왕 하지 그래, 와이즈?" 진과 와이즈의 대화로 그들은 애써 의문을 표하지 않았던 문제에, 물어도 되는지 아닌지 고민했지만 궁금증에 인내가 부족한 카일이 질문했다. "저기 두 분은 그러니까. 아니 리툰 마법사님은 분명 왕녀 님. 아니, 레이디 진과 인척 사이 되신다고 네얀에서 말하던데, 그럼 마법사님 도 왕족이신 대....저기, 이해가 안가설랑....두 분은 약혼하신 겁니까? 아니면 남매 신지..." "전 왕족이 아닙니다. 계승 권이 있는 것도 아니죠. 진과는 친구사 이입니다." "그. 그래요...."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그들은 진을 대할 때와는 다른 와이 즈의 애매한, 정중한 답변에 더 물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진은 검은 굴로 사라졌다가 물에 흠뻑 젖어 고개를 번갈아 들이밀 고 안을 보고 있던 카일과 판에게 곧 돌아왔다. 그리고 카일과 판에게 라돈 샘의 형성 원인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 "저 위 산으로 한번 더 가야해요. 그곳이 근원이니까요. 앞으로 라 돈의 샘이 마른다거나 물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에는 이곳을 확인해 봐요. 다른 사람들은 이곳을 모르게 하세요. 악의를 가진 사람이 있 다면 이곳을 오염시키거나 독을 풀기만 해도 라돈은 쉽게 무너질 수 있으니까요." "............." 그리고 다시 산 중턱으로 워프해서 바닥을 들어내고 있는 옹달샘의 물줄기를 원래대로 해 놓았다. 카일과 판은 진이 하는 일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라돈 영지를 살리 고 죽이는 일은 너무 간단해 보였다. 미처 생각지 못했던 너무나 당연했던 '물' 문제는 앞으로도 두려움 을 가지고 대하지 않으면 신 벌 못지 않은 큰 문제로 대두될 수 있 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레이디. 실제로 레이디께선 라돈의 운명을 쥐고 계셨 군요." 카일과 판은 진에게 고개 숙이고 감사를 표하며 그녀에게 약속한대 로 라돈을 이끌어 갈 것을 다시 다짐했다. 숙소로 돌아와서 진은 와이즈를 졸라 마법으로 씻고 기우제가 있을 새벽에 깨워 달라고 하고 이불을 둘둘 말고 레아의 곁에서 다시 짧 은 잠을 청했다. 판과 카일은 물러가야 하는지 안 그래도 되는지 갈피를 잡지 못하 다가 슬그머니 눌러 앉아, 와이즈와 함께 이것저것 얘기를 나누었 다. 판과 카일은 의식을 시작하기 위해 먼저 방을 나갔다. 사제들이 샘터 주위에 모여 기우제를 준비하고 있었고 해 뜨기 전 더욱 어두워진 라돈 샘터 주위에 주민들이 하나 둘 모여들고 있었 다. 진의 지시대로 판과, 사람들의 그늘에서 카일이 그들을 주도했다. 일행과 레아를 깨워서 진은 잠이 깨게 마법을 쓰게 하고 새 옷들을 입게 했다. 그리고 진도 드레스로 갈아입고 와이즈에게 빌린 보석 장신구로 머 리를 장식하고 장식이 너무 아름다운 샌들도 신었다. 여관에 있던 두 개의 마차 중 손님용이지만 크고 화려한 마차를 준 비시켜서 진은 일행과 함께 올랐다. 귀족이나 부유한 상인들을 위해 준비해둔 듯 그 마차는 내부가 꽤 넓었고 6필의 말이 끄는 마차였다. 할아버지와 콜린스가 깨끗한 옷을 입고 마부 석에 앉고, 진과 와이 즈와 레아는 마차 안에 자리를 잡았다. 진은 한번에 일을 끝내기 위해 옷을 갈아입는 동안 쟌느에게 미리 말해서 준비해 두었던 고급 보석 상자와 궤짝에, 와이즈가 레어에서 다시 불러온 훔친 것들을 나눠 담아 마차에 함께 실었다. "언니. 어디 가는 거야?" "응. 레아. 축제가 있을 거야. 레아에게 사람들이 신의 축복을 기원 해 달래. 기도할 줄 알지?" 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가 근처에 있을 거야. 무서워 안 해도 돼, 레아. 할아버지에게 배운 대로 사람들 앞에서 기도하면 모두 너에게 고맙다고 할거야." ".....물이 없어서 그래?" "그래, 레아. 하지만 레아가 기도하면 샘에서 물이 나오게 될 거야. 부탁할게, 레아. 해 줄 거지?" "응." 환하게 웃는 레아의 검은머리를 진은 쓰다듬어 주었다. 소녀는 머리를 양 갈래에서 땋아 둥그렇게 양쪽에 원을 만들어 리 본을 매고 무릎아래 종아리까지 종 모양으로 퍼진 흰 드레스를 입 고 있었다. 동이 트려고 하늘이 밝아오기 시작하자 기우제가 시작되었다. 사제들이 샘터 앞 임시로 마련된 제단에 신상을 세우고 신전의 상 징이 되고 있던 보물들을 늘어놓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절을 했 다. 판은 진의 격려를 받은 레아의 손을 잡고 약간 떨어져 있던 마차에 서 내려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샘터 앞으로 갔다. 나이카 사제는 지치고 피곤한 몸이었지만 간절한 마음이 되어서, 소 녀를 마차에서 내려보내는 귀족아가씨와 기사의 손을 잡고 걸어오 는 어리고 마른 소녀를 지켜보았다. 사람들이 점점 몰려들고 있었다. 성문도 다시 열리고 갑옷이 아닌 보통 기사복장을 한 영주와 그의 인척들이, 기사들과 사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걸어나왔다. 동녘이 밝아왔다. 라돈에 아침 햇살이 비치기 시작했다. 레아는 판의 손을 잡고 있다가 그의 인도로 마지막 차례가 되자 융 단이 깔린 바닥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했다. 쥐죽은듯이 고요한 주위에 레아의 가냘픈 목소리가 퍼져 나갔다. "어니스트님. 작은 레아가 소원을 빕니다. 노여움을 푸시고 라돈에 샘을 돌려주세요. 라돈을 용서해 주세요. 정직과 순수를 주관하시는 신의 이름, 어니스트." 짧은 기도 말을 마치고 레아는 맞잡은 손을 풀고 앉은 채 절을 했 다. 그리고 일어났다. "다했는데, 판 아저씨." "............" 판은 너무 짧게 끝내는 레아의 기도에 그녀가 어린아이였다는 것을 상기하고 약간 난처해졌다. "한번 더 기도하겠니, 레아?" "말도 안 되오! 신 벌이라는 것도 우습지만, 몇 일 지나면 다시 솟 을지도 모르는데 그런 어설픈 기도 따위로 막힌 샘이 뚫어지겠소?!" 판의 말이 끝나자마자 소리친 사람을 주민들과 사제들이 돌아보았 다. 그는 영주의 큰 사위였고 장인이 사생아, 그것도 노예출신의 아 들에게 작위를 주겠다고 한 소식에 벼르고 있던 약소 귀족이었다. 사람들은 다시 웅성대었고 영주는 아들과 검은머리의 소녀를 내내 말 없이 지켜보다가 사위의 다시 시작 된 반론에 눈을 감았다. "기우제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쉽게 풀릴 노여움이었다 면 신의 벌이 아니었겠지요." "어쨌든 그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소. 샘물이 말랐다면 우물을 파면 되지 않소." "우물을 팔 곳을 찾을 수 있습니까? 라돈 땅 전체가 말랐다는 것을 모르시는 모양이군요." "물이야 얼마든지 끌어 낼 수 있는 문제요. 수도에서 정령 사를 초 빙해서 물길을 찾게 하면 간단할 것을 이 소동이라니!" "수도까지 갔다오는 동안 라돈 시 주민들은 어찌해야 합니까. 물이 없으면 사람은 당장 몇 일도 버티기 힘듭니다." 샘터 주위는 그들의 신경전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로 가득 했다. "당신은 자격이 없소! 어떻게 노예출신에게 영주를 하게 한단 말이 오! 비천한 태생으로 귀족이 될 수는 없소. 난 인정 못하오!" "전 지금은 노예가 아니오. 난 기사이고 주군이 있소." "주군이라니. 어떤 정신나간 귀족이 노예에게 기사 칭호를 내린단 말이오! 난 못 믿겠소. 기사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소? 웃기는 일이 지!" "내 주군을 모욕할 참이오!" 그들의 언성이 높아지고 사람들은 더욱 쑥덕대고 있었다. 그때 새로운 목소리가 주민들의 틈새에서 새어나왔다. "웃기는 소리는 당신이 하시는군요. 비천한 태생의 기사도 아는 예 의를, 지키지 못하는 분이시군요." 사람들은 새 목소리의 주인공을 돌아보고 길을 비켜주었다. 그녀는 파란색 드레스 자락을 잡고 곧은 걸음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어깨와 팔. 부분 부분을 들어내고 비싼 보석 가루로 무늬를 놓은 흰 색 허리 두르게를 한, 검푸른 머리카락을 눈 색과 비슷한 사파이어 머리장신구로 감아내려 오른쪽 가슴으로 늘어뜨리고 있었다. 귀 볼에서 투명하게 반짝이는 작은 보석이 아침해를 받아 빛나고, 걸어올 때 살짝 엿보이는 굵은 푸른 보석구슬로 엮은 샌들이 발끝 까지 빛을 뿌리고 있었다. 진의 옆에는 용모만으로도 눈길을 확 잡아끄는 굉장히 아름다운 마 법사가 따르고 있었다. '언니. 저 장신구들...드워프가 가공한 거야, 그렇지?" 영주의 딸들은, 자신들도 남편들과 마찬가지로 보석으로 몸을 치장 하고 있었지만 진의 머리장신구와 샌들을 보고 눈이 뒤집혔다. 귀족들과 주위 모든 사람들도 진과 와이즈를 돌아보고 한 순간 목 이 막혔다. 진은 와이즈를 약간 뒤에 세우고 영주와 그들의 인척 앞에, 판의 옆 에 섰다. "그 정신나간 귀족이 저의 가문 분이십니다. 증명이 필요하시다니 구경만 할 수 없어서 나섰네요." "그.....아....." "예의가 없으시군요. 전 다른 나라이긴 합니다만, 후작 가의 여식입 니다. 이분도 저의 가문 분이시고 보시다시피 마법사이기도 하지요." 영주의 큰사위는 얼굴이 붉어져서 진이 내민 손등에 허리를 굽혀 입을 맞추었다. 와이즈는 화사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진의 오만한 귀족행세에 속 으로 낄낄대고 있었다. 다른 귀족들도 모두 목례를 했고 부인들도 드레스 자락을 잡고 살 짝 고개를 숙였다. 진은 한번 고개를 까닥인 것으로 모두에게 답을 했다. "판은 저의 리툰 후작가문의 자유기사입니다. 그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몰랐는데 여행 중 우연히 만나게 되어 정말 기뻤지요. 그는 훌 륭한 기사였으니까요. 이곳에 일어나고 있는 일이 너무 안타깝군요. 판이 시민들을 이끌 자격이 없는 이유가 진정 있습니까, 영주 님?" ".....난 분명 신의 노여움을 그가 잠재울 방법을 증명한다면 작위를 주겠다고 했소. 리툰 영애." 진은 거만하게 느껴지는 태도로 고개를 끄덕이고 판에게 얼굴을 돌 리고 더 없이 우아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말을 했다. "나이트 판. 기우제를 계속 진행하시지요." "기다리시오. 기우제는 누구든 올릴 수 있소. 요컨대 저 소녀의 기 도가 신께 닿을지 아닐지 증명하는 일을 왜 꼭 그가 해야 하는 게 요!" 진은 30대가 훨씬 넘어 보이는, 젊음이 사라지고 있는 귀족남자의 얼굴을 다시 돌아보고 차갑게 눈을 빛내며 막- 대꾸해 주려는 데 팔을 잡아오는 레아 탓에 고개를 돌려야 했다. "언니. 물이 없어서 싸우는 거야?" 레아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과 화난 듯한 귀족들의 기세와 샘터 주 위에 떠도는 불신 같은 것에 불안해져서 진에게 매달렸다. "레아. 싸우는 거 아니야. 레아의 기도가 너무 짧았나봐. 한번 더 기 도해 주겠니?" 레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자리로 가서 꿇어앉아 손을 잡고 눈 을 감았다. 영지 민들과 영지에 와있던 여행자들과 사제들. 영주성의 기사와 사 병과 귀족들 모두가, 그런 진과 레아를 바라보다가 다시 웅성대기 시작했다. 진은 영주의 사위에게 눈을 돌리고 시간을 끄려는 의도로 다시 말을 했다. "전 아직 사과를 받지 못했습니다. 판은 과거 노예였던 어쨌든 지금 은 저의 가문의 기사입니다. 그만이 아니라 저의 가문까지 모욕하신 발언에 대한 사과를 하지 않으십니까? 전 소개조차 받지 못했습니 다. 당신이야말로 귀족이 맞나요?" "말씀이 심하시......" 얼굴이 붉어진 그가, 새파랗게 어린 타국의 귀족 아가씨의 말에 자 존심에 상처받으며 은근히 반박하려는 말을 꺼내려는 데, 갑자기 하 늘에서 굉음이 울렸다. 모두 간이 떨어질 듯 놀라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방금 전 까지만 해도 구름 몇 점 없는 푸른 하늘이었는데 검은 구 름이 몰려들어오고 있었다. 마른하늘에 천둥이 울리기 시작하고 육 안에 잡히는 그 놀라운 구름의 이동에 사람들은 비명을 질렀다. "신 벌이다.! 신께서 더 노하셨어!" "꺄악-!" 삽시간에 어두워진 하늘에서 계속 보이지 않는 천둥이 발악하듯 울 렸다. 사람들이 허둥대기 시작하자 진은 시민들 틈에 섞여 있던 카일에게 진정시키라는 의미로 눈짓을 했다. "우리 모두 빕시다! 기도합시다. 여러분! 신께서 더 노하시기 전에, 어서 무릎을 꿇어요!" 카일의 목소리에 아우성이 일기 시작하던 사람들의 무리가 물결을 이루며 쓰러져나갔다. 무릎을 꿇고 바닥에 엎드려 주민들이 각자 어 지러운 기도 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진은 앉아서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고 있는 레아를 돌아보았다. '레아야! 레아가 비를 부르려 하는 거야!' 굳은 표정과 두려움이 가득한 영주 측 사람들도 계속 되는 하늘의 울부짖음에 가슴이 서늘해졌다. 가까운 곳에 벼락이 떨어졌다. 사람들이 울면서 기도를 하는 소리가 웅얼웅얼 주위에 퍼지고 있었다. 진은 다시 영주의 인척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했다. "사과를 하시지요." 그는 이 상황이 자신의 탓인 듯 되어버린, 아니 어쩌면 자신의 탓인 지 모를 알 수 없는 공포에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실언을 해서 죄. 죄송했습니다, 레이디......실례를 했소. 기사 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곧 내리는 것이 아니라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샘터 가까이에 있던 시민이 탄성을 질렀다. "물이다! 샘물이 솟고 있어!!" 막혔던 샘은 다시 터져 물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42] * 공포에 질려 있던 군중들은 감사의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사제들도 모두 다시 한번 신상에 절을 올리고 샘터 주위에 자리잡 고 서서 다음 판의 지시를 기다렸다. "영주 님. 그가 증명했군요. 그에게 정식으로 작위를 주시는 문제를 결정하시죠. 전 판이 너무 아까운 인재라 이런 작은 영지에 남겨두 고 가고 싶지 않으니, 혹시나 후계로 인정하지 않으신다면 제가 드 리얀으로 함께 가길 청하려고 합니다." 쏟아지는 빗줄기에도 아랑곳없이 진은 그대로 서서 타이남작에게 말했다. 남작의 인척들은 진의 말에 아무런 대꾸를 할 수 없었고, 타이남작 은 비를 뿌리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생명을 다시 얻은 샘과 기쁨에 넘치는 영지 민들의 얼굴을 돌아보고 검 집에서 검을 빼어들고 진 의 말에 대한 대답을 모두에게 들리도록 큰 소리로 외쳤다. "나, 라돈의 영주 타이남작은 기사 판을 정식 후계자로. 내 성과 내 작위와 내 영지를 이 자리에서 물려줌을. 내 기사들과 내 영지의 주 민들과 어니스트 신을 증인으로 그가 영주가 되었음을 선포한다." 주민들은 환호했다. 판은 아들로 인정해 준, 자신의 아버지가 뽑아 들어 하늘을 향해 쳐 들었던 검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목례를 했다. "감사합니다. 남작 님." 타이남작은 판의 작은 속삭임에 눈이 붉어져서, 그에게 자신의 애 검을 넘기고 진과 와이즈에게 목례를 한 뒤 자리를 떠났다. 호위기사들이 그를 따라 성안으로 들어갔지만, 남작의 다른 기사들 과 사병들은 새 영주에게 무릎을 꿇었다. "라돈의 판 타이 남작. 새 영주 님을 뵙니다. 주군께 충성을." 판은 영주가 되었다. 레아가 와이즈에게 깨워져 일어나자, 사람들이 다시 환호했다. 사람들은 서로를 축복하고 신전으로 몰려 들어가 나이카 사제를 비 롯한 3명의 사제들에게 급한 환자들을 옮겨 치료받게 했다. 얼굴이 일그러진 남작의 인척들은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주춤대다 가 진이 마차에서 콜린스와 할아버지를 시켜 운반케 한 궤짝들의 내용물을 보고 전의를 상실했다. 그들 스스로 기사임을 인정한 판이, 어마어마한 재력을 등에 지고 있음을 지레짐작하고 약소 귀족의 힘으로 더 이상 판에게 시비를 걸 수 없음을 알고 포기하는 마음이 되어 그들은 성으로 돌아 들어 갔다. "판은 저의 가문의 기사이니, 독립시키는데 빈손으로 시작하게 해선 안되겠지요. 제 작은 성의입니다. 판 타이 남작. 좋은 영주가 되세 요." "감사합니다. 레이디." 판은 밤이슬을 맞으며 진이 라돈 시를 털어 그럴듯하게 포장한 금 화와 보석들을, 미소 띈 얼굴로 기사들을 통해 받게 했다. * 한번 몰려들었던 비구름은 금방 흩어지지 않고 계속 비를 뿌려 마 른 농지에 물을 주었다. 신전에 축적되어 있던 포도주와 식량이 풀어졌다. 영지 민들은 새 영주의 지시로 축제를 열기 위해 잔뜩 들떠서 각자 의 집으로 돌아가고, 진은 성으로 판을 카일과 함께 들여보내고 일 행과 함께 비를 피하기 위해 신전으로 안내되었다. 와이즈가 마법으로 일행을 말려주었다. 레아가 사람들에게 불려가 감사의 말을 듣고 축복을 받는 것을 지 켜보며 와이즈는 말을 꺼냈다. "저 아이의 능력은 위험하다, 진. 이곳에 그냥 맡길 거냐?" "폐허에 내리던 비와 같은 종류였지?" "그래. 정령을 통한 것도 아니고, 신성력도 마법도 아니었다. 저 아 인 자신의 의지로 구름을 불러 온 거야.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성질 의 힘이 아니다. 감당 할 수 없을 지도 몰라." "그래, 위험해. 악용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스스로 조절할 수 있을 거야. 저 앤 강해. 혼자 힘으로 잠에서 깨었잖아. 내가 한 일은 계기 가 되었을 뿐이었어. 그리고 레아는 자신의 능력을 알고 있었어. 물 이 필요 하느냐고 자꾸 물었잖아. 이곳에서 어떻게 사용해 나갈지 배우게 해야해." ".......전의 그곳에도 저런 능력을 가진 사람이 있었냐, 진?" 진은 기네스북과 세계의 초능력자 어쩌고 하는 책자들의 제목이 떠올랐다. "글쎄. 알 수 없지. 그런 능력이 소재가 된 초능력 자 이야긴 있었 지만. 다른 계통으로....눈에서 보석을 만들어 낸다거나, 철과 같은 금속을 씹어 먹어 소화를 시킨다거나 머리카락을 자유롭게 자라게 한다거나. 의지로 물건을 움직이고 투시를 할 수 있다거나 독심술이 나 미래를 보는 눈이나...뭐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있기는 했 지. 아주 드물었지만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없었던 것은 아 니야." "눈에서...보석을 만들어 내? 투시를 한다고?....그곳 인간이 정말 인 간들이냐?" "하하하...와이즈. 인간의 능력이 무한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그래. 기 네스 북이나, 세계의 불가사의나, 괴기스런 이야기들 중에 찾아보면 얼마든지 그런 사람들을 찾을 수 있다고. 증명하는 것은 어렵지만 세기에 한번 나올 만한 인물들이 있긴 했지.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 그 중에 진실도 포함되어 있을 거야. 레아가 비를 내리는 것 도, 내 능력도 이곳에서 보니 그다지 이상해 보이지 않는데...? " ".........." 가늘어지던 빗줄기는 정오가 가까워진 시간에 멈추고 다시 태양이 구름사이로 얼굴을 내밀었다. 언제 비가 왔느냐는 듯이 깨끗해진 하늘을 올려다보며 사람들은 신 전의 창고에서 풀어져 나온 푸짐한 술과 보존마법이 걸린, 제철이 아닌 귀한 음식들로 낮부터 샘터 주위를 기준으로 축제를 시작했다. 한산해진 신전 안에서 진은 감사를 표하러 왔던 나이카 사제에게 레아를 신전에 의탁시키는 문제를 상의했다. "그럼요. 레이디. 레아는 착하고 정말 순진하더군요. 어린 아이의 영 혼이라던 말씀이 틀린 말이 아니었어요. 신전에서 거절할 이유가 없 지요." "레아와 알게 된지는 불과 몇 일 되지 않았어요. 전 바다의 여신의 사제 분이 신성력을 담아준 물건 덕에 저 아이를 구할 수 있었어요. 하지만 앞으로 또 상처받거나 절망하게 되면 어찌될지 장담을 못하 겠습니다. 그러니 신전에서 수양을 할 수 있도록 배려 해 주세요. 사제가 되길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레아는 아직 너무 어리니, 커서 스스로 자신의 길을 택할 여지는 남겨주세요." "알겠습니다. 당연히 저희가 해야 할 일이지요." 진은 견습사제들과 몇몇 남아 있던 주민들에게 웃음을 보이고 있는 레아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나이카 사제 님만 알고 계세요. 저 아이는 비를 내릴 수 있습니다. 레아가 옳은 가치관을 가지고 자신의 힘을 쓸 수 있게 곁에서 지도 해 주십시오. 위험해 질 수도 있는 능력이니, 레아를 사랑해 주고 아껴주는 보호자가 꼭 필요합니다. 새 영주가 된, 판 타이남작도 알 고 있는 사실이니 어려운 문제가 생기게 되면 도움을 청해보도록 하세요." "그럼....오늘 비가 내린 것도....." 나이카 사제는 진의 긍정에 다시 놀라며 그 작은 여자아이를 돌아 보며 대답했다. "걱정 마십시오, 레이디. 레아를 잘 보살피겠습니다. 정말 신께서 저 희에게 인도해 주신 존재였군요." "............" 수줍어했지만 즐거워하는 레아를, 할아버지와 콜린스와 함께 축제를 벌이고 있는 사람들의 틈에 남겨두고 진은 여관으로 돌아가 거추장 스러웠던 드레스를 여행자용 옷으로 바꿔 입고 잘 준비를 했다. "진. 축제에 안 가보냐?" 진에게 장신구를 받아 들고 레어로 다시 이동시킨 후 와이즈는, 이 불을 둘러쓰는 진에게 말을 걸었다. "와이즈. 가서 놀아. 난 잠이 부족해. 실컷 좀 자고, 일어나면 나중 에나 가 볼게. 내일 아침에 수도로 가자." "알아서 해라. 그럼 난 가서 포도주라도 마시겠다." 와이즈가 나가자 진은 피곤이 몰려와, 정신 없이 잠에 빠져들었다. '보람찬. 하루 일이.... 끝났구나 아....' 진은 잠이 들기 직전 삐죽 웃음을 지으며 생각했다. * 밤이 되어 피곤해 하는 레아를 신전에서 내 준 방에 재우고 할아버 지가 여관으로 돌아왔다. 진은 내내 잠들어 있다가 할아버지의 인기척에 하품을 하며 일어났 다. 왠지 허탈해 하는 그에게 진은 준비해 두었던 금화 자루를 내밀 었다. "할아버지. 레아는 신전에 의탁되었으니까, 할아버지도 손녀 곁에서 신전 일을 조금씩 거들면서 편히 지내세요. 이제 쉬실 때도 되었고 레아도 할아버지가 옆에 있어주는 것을 바랄 거 에요. 이건 필요한 데 쓰시고 나중에 레아의 지참금으로도 쓰세요." "너무 많습니다. 레이디. 그렇지 않아도 저희에게 베풀어주신 호의 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벅차기만 한데...." "가지고 계세요. 레아도 크면 돈이 필요하게 될 일은 얼마든지 있을 테니까요." "......감. 감사합니다. 왕녀 님....이 은혜를....저와 제 손녀를 구해 주 시고 돌봐주신 것을 죽어서도...잊지 않겠습니다..." 진은 할아버지에게 쉬라고 해두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어두워지자 아이들과 내일을 준비 해야하는 주민들은 대부분 집으 로 돌아갔지만, 아직도 많은 수의 평민들과 여행자들이 라돈의 모든 여관에 자리를 잡고 축배를 들고 있었다. 쟌느와 미나의 여관은 넓어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여들어, 술을 마시며 떠들어 대고 있었다. 진은 콜린스가 술에 떡이 되어서 탁자에 엎어져 있는 것을 보고 혀 를 차며 그를 방으로 옮기도록 고용인-예전 노예였던-에게 부탁했 다. "와이즈. 많이 마셨어?" "아. 나야 많이 마셔도 끄덕 없다, 진. 푸하하하..." '아주 골로 갔네. 얼마나 마시면 드래곤이 술에 취하냐? 바보니까 그렇겠지.' 눈을 부라리는 와이즈가 뭐라 하기도 전에 진도 자리에 눌러 앉혀 져서 술잔을 받아야했다. "귀족아가씨. 아름다운 레이디. 아. 아. 전 레이디께 한눈에 반했지 뭡니까. 구세주를 데리고 왔다는 거 다 압니다. 제 잔을 받아 주시 길. 에....제가 귀족은 아닙니다만, 오늘은 신도 용서를 하신 날인데. 좀 무례해도 목은 치지 않으시겠죠. 파하하하.." 카일과 함께 있던 산만한 등치의 용병이 진에게 반 협박으로 술잔 에 포도주를 퍼부었다. "야. 저리가. 귀하신 분이야. 네 놈들은 끼어 들 거 없어! 레이디 진. 제가 한잔...." 카일도 술에 잔뜩 절어 있다가 동료를 제치고 진에게 또 다른 술잔 을 쥐어 주었다. "그래. 마셔라, 진. 보호자인 내가 허락하마. 이렇게 너그러울 수 가..." '놀고 있네. 잘한다.... 에잇! 나도 몰라. 마시지 뭐....' 진도 응원까지 받아 가며 술을 퍼야했다. 왁자지껄한 소란 속에 라돈 영지의 밤이 깊어갔다. * 판은 서둘러 떠나는 이복누이들과 매형들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떨떠름한 얼굴들이었지만 그들은 예의를 갖춰 판을 대했고, 밖에서 축제를 벌이고 있는 영지 민들을 피해 자신의 영지나 형제의 영지 로 돌아갔다. 인수인계 문제로 판은 축제 자리에 잠깐 얼굴을 비추었을 뿐 곧 일 더미에 묻혀야 했다. 카일은 일찌감치 자기 구역의 일이 아니라고 내뺐고 자신의 편이 된 사람들이래 봐야 모두 몇 시간 되지 않은 상태라서 성 안팎의 문제를 모두 파악하는 데, 원활한 명령계통이 아직 그에게 맞게 체 계가 잡히지 않아 막막했지만. 영주의 방까지 양보해 주고 다른 방으로 옮겼던 타이 남작이 아무 런 말없이 판의 옆에 서서 대신 지시를 내려 주고 빠르게 일을 배 우도록 도움을 주었다. 판은 성 내부를 샅샅이 돌아다니고 기사와 사병들을 파악하고 세금 문제와 영지 민 관리 상황들을 단 시간에 빠르게 습득해 나갔다. 마구간에서 말들의 수와 상태를 검사하고 돌아오던 중. 내내 개인적인 대화 없이 한 걸음 뒤에서 따라다니며 결정을 내리 고 지시를 내리는 데 도움이 될 일을 언급해 주던 아버지에게 판은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건강하셨습니까. 아버지." ".......그래, 판. 너도...잘 지냈었느냐." ".........." "미안했다. 네 어머니의 일도. 네게 몹쓸 일을 했던 것도. 모두 내 잘못이었다. 사과하마, 판." ".....네. 이젠 받아 주셨으니 까요. 기사 작위를 받는 순간, 원한을 버릴 수 있었습니다." "고맙구나." 판은 잠깐 멈춰 서서, 말을 마치고 그대로 걸어가는 나이 든 아버지 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판이 서 있는 성의 정원에는 달의 푸른빛이 내리고 있었다. 내린 비로 씻겨 더욱 맑아진 공기로 청아하게 느껴지는. 별과 달이 아주 아름다운 계절의 밤이었다. '고맙습니다. 제 주군이시며. 드리얀의 왕녀 님. 레이디 진....' 판은 진이 참 여러 가지 호칭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며, 도둑질 하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라 쿡쿡 거리며 웃었다. * "뭐 하는 거냐! 카일! 빨리 일어나지 못해?!" 갑자기 쩌렁쩌렁하는 남자의 목소리에 진은 골치가 땡. 울리고 토할 것 같은 숙취로 머리를 부여잡고 잠에서 깼다. "우......" 판은 기가 막혔다. 자신은 밤새 일하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새벽에 겨우 조금 잠을 자 고, 대충 가닥이 잡힌 영지 일을 잠시 접어두고 주군께 아침 인사를 드리기 위해 여관을 찾아왔다가, 화딱지 나는 광경에 부아가 치밀었 다. 여관 3층, 낯익은 방에는 사람들이 엉켜서 잠이 들어 있었다. 바닥이며. 침대며.... 진은 한쪽 침대에 퍼져 자고 있었는데 카일과 와이즈 사이에 끼어 있었다. 판의 서슬 퍼런 목소리에 다들 부스스 일어나 주위를 둘러 보고 킥킥 웃는 녀석들이나, 주섬주섬 벗어 던진 가죽 조끼를 걸치 고 새 영주께 인사를 하는 녀석이나, 구토를 못 참고 밖으로 뛰는 녀석이나, 아예 창턱에 매달려 토하는 녀석들..... 일어나지 못하고 아직도 인사불성 상태로 진의 허리를 끌어안고 눈 을 못 뜨는 카일을 판은 냅다 들어 바닥에 매다 꽂았다. "우-왁. 판! 날 죽일 셈이냐! 아우~ 머리야....하하하....모두 좋은 아 침..." 와이즈는 판이 문을 열 때 잠이 깼지만, 자신이 진의 목을 끌어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새파랗게 질려 얼른 일어나 비틀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내가 미쳤지. 내가 미쳤지. 기분 좋다고 해독을 안 했더니....내가 정 말 돌았구나....' "여. 영주 님. 그게...제가 아무리 뜯어 말려도 시. 신사 분들이...." 여기까지 말하던 할아버지는 와이즈가 방을 나가자 얼른 말을 바꾸 었다. "글쎄 저 불한당 같은 놈들이 방안까지 쳐들어와서 술을 퍼 마시고 나갈 생각을 안 하지 뭡니까! 레이디께 마구 술을 마시게 해서 다 들 인사불성이 되어 새벽까지 술을 펐답니다! 정말!! 게다가 저 젊 은이는 한사코 레이디 곁에 달라붙어서...정말이지! 혼 좀 내 주십시 오!" 판은 굴러다니는 포도주 통을 증오스럽게 쳐다보며 모두에게 나가 라고 명령했다. 사람들은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입을 가리며 밖으로 한 둘씩 허둥 지둥 빠져나갔다. "레이디...이 일을 어쩐담. 카일! 이 빌어먹을 녀석아. 네가 정말 정 신이 있는 거냐, 없는 거냐! 이 도둑놈아!!" "하하...이런..어쩌나...레이디. 시집도 못 가겠다. 이럴 수가. 어쩔 수 없지. 내가 책임지는 방향으로....윽. 윽. 악...살려줘. 판! 그만해!" 진은 쇠방망이로 머리를 얻어맞는 것처럼 쩡쩡 울리는 그들의 목소 리에 신음을 하며 도로 침대에 엎어졌다. '아...이래서 파티가 싫어. 술이 싫어. 젠장! 머리 아파 죽겠네...' 밖에 나갔다가 옷까지 세탁하고(마법으로 했겠지.) 멀쩡한 얼굴로 돌아온 와이즈는 방을 치우고 있는 쟌느와 미나를 지나쳐 새 시트 를 깐 침대에 걸터앉았다. "마법사 님. 어떻게 마법사 님까지 한패가 돼서! 좀 말리시지!!" "............." '어쩌냐, 인간의 몸이다 보니 한계가 있는 걸. 이 주홍머리 인간아. 떽떽 거리지 마라. 나도 황당하다, 제길....' "너무 그러지 마, 판. 모두 술에 취해서 제정신이 아니어서 그랬는 걸...." "시끄러. 넌 죽을 때까지 감옥에 갇혀 지낼 줄 알앗!" "안 돼. 난 드리얀으로 따라가기로 했어. 그렇지요 레이디?" 진은 술 결에라도 자신이 허락했을 리 없을 일을 엉큼한 도둑 청년 이 스리슬쩍 넘겨 짚으려하자, 남아 있던 술기운에 침대 옆에 있던 카일의 잿빛 머리를 발로 걷어찼다. "판과 일이나 해, 카일. 그리고 소리 좀 지르지 마, 판. 머리 울려." "............" 진의 과격한 행동과 언사에 잠깐 판은 멍해졌다가, 킥킥대는 카일을 역시 걷어차 주었다. "술을 좀 깨야겠어. 너무 마셨나봐. 이런 제길. 머리가 당겨 죽겠네. 와이즈 회복마법 좀......" "싫다, 진. 좀 있으면 나아질텐데. 넌 회복 력이 누구 못지 않잖냐." 엄청나게 술을 둘러 마셨던 진은 머리가 맑아지려면 시간이 좀 있 어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쟌느에게 물을 받아오도록 부탁했다. 방이 정리되자 진은 판의 활활 타오르는 듯한 눈초리를 피하며 열 어진 창문 가에서 하늘을 보며 핫. 핫. 웃음소리를 냈다. "좋은 아침이야. 아아...새들도 그렇다고 하네." "........레이디." 카일은 계속 싱글싱글 웃고 있었고, 와이즈도 쓴웃음을 짓고 있었 다. 진은 평소로 돌아와, 깨어난 콜린스에게 짐을 싸라고 시키고 내 내 판의 원망스러운, 비난 섞인 눈초리에 딴청을 부렸다. "괜찮아, 판. 아참. 부담스럽네. 내가 주군이라며? 말 좀 들어라. 별 일 아니라니까. 전에 있던 곳에서는 더 험한 파티도 많이 열렸는 걸." "어떻게 이보다 더한 파티가 있답니까.....로마노라도 가 계셨나요?" "아니. 로마노? 흠. 그래? 거기 가봐야겠네." 다시 판이 눈을 부라리자 진은 멋쩍게 웃으며 떠날 것이라는 말을 꺼냈다. "바로 요? 더 계시다 가시지 못하고요?" "그래, 판. 난 2~3달 안에 드리얀으로 가야 해. 여기서 오래 지체할 수 없어. 이제 라돈은 판의 영지잖아. 잘해봐, 희망대로. 카일도 많 이 부려먹고. 내가 나설 일이 없는데 더 있을 이유가 없지. 레아와 이곳 내 고용인들도 부탁할게....전 영주에게도 안부 전해 줘. 뵙지 못하고 가는 이유도 대강 둘러대 주고." 판은 진의 선언에 반대를 할 입장도 아니고, 핑계거리도 없는 데다 그녀의 신분으로 무언가 말못할 사정이 있지 않을까 하여 말릴 수 가 없었다. "왕녀 님...묻고 싶은 것이...." "응? 뭔데?" 진은 망토를 두르며 돌아보았다. "예전 그 남자 친구 분은...." 진은 판의 질문을 이해하고 침대에 앉아 조금 웃음기가 가신 얼굴 로 대답했다. "난 그를 구하지 못했어.....판. 당신에게 기회를 준 것은 노예로의 삶을, 가장 비천한 인생을 직접 경험했기 때문이야. 누구 보다 하층 민을 위하는 정치를 하게 될 것이라는 짐작을 했기 때문이었어. 그 렇지? 같은 아픔이 대물림되지 않게 노력해 줘. 나 역시 노예라는 존재가 이곳에서 사라지길 원해. 수도에 판에 대해 알려지고 깐깐한 귀족들에게 앞으로도 많이 시달리게 될지도 몰라. 극복하는 것은 판 의 역량이야. 다짐한 대로 능력이 닿는 한, 항상 힘없는 사람들의 편에 서게 되길 바래." "............" 판은 칭호를 받은 후 처음으로, 그리고 언제 다시 볼지 모를 주군에 게 마지막으로 무릎을 꿇고 예를 취해 보였다. "안전한 여행을 기원합니다. 조심하십시오, 주군. 언젠가 꼭 다시 찾 아뵙겠습니다." 판은 절을 하고 일어나면서 한마디 더 덧붙였다. "그리고 앞으로는 다시는 술을 드시지 마십시오. 레이디 진!" 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판은 적어도 네카르도를 뒤흔들 기사가, 귀족이 될 것이다. 많은 사 람들이 그를 따를 것이다. 그의 강하고 강렬하게 다가올 미래를 진 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그들은 짐을 챙기고 레아를 만나러 신전으로 갔다. 몇몇 진과 그녀의 일행들과 술을 마셨던 평민들이 지나가는 그들에 게 손을 번쩍 들고 아는 체를 했다. 진은 그들에게 화사하게 웃어 주며 마주 손을 흔들어 주었지만, 새 영주의 눈총에 그들은 슬그머니 돌아서고는 했다. "하하하...좋은 아침이야, 그렇지. 와이즈?" "좋기도 하겠다." "..........." "쿡쿡....윽..." 영문을 모르는 콜린스만이 머리를 긁적이며 할아버지와 나란히 뒤 를 따랐다. 레아는 나이카 사제와 예배 실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가 진 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뛰어왔다. "언니. 갈 거야? 나도 같이 가면 안 돼?" 진은 레아를 한번 안아주고 가까이에 있는 긴 의자에 걸터앉았다. "레아. 난 가야해. 같이 가고 싶지만 레아는 몸이 많이 약해졌고 따 라오면 위험해 질 수도 있어. 여긴 안전하고 그 검은 그림자가 찾아 오지도 않을 거야." "하지만 그래도...언니는 힘이 세잖아. 마법사 님도 있는데. 같이 가 면 안 돼?" "크면. 레아, 커서도 내가 보고 싶으면 찾아와. 지금 레아는 여행하 기엔 너무 어리고 내가 항상 함께 있어주지 못할 지도 몰라." "............." "레아. 난 널 믿어. 넌 착하고 예쁘게 자랄 거야. 나이카 사제 님께 서 잘 돌봐주실 거야. 강해지겠다고 약속했지? 그럼 내 옆에 있으면 안 돼, 레아. 항상 보호만 받으면 강해질 수 없어. 여기서 공부하고 건강해져. 그렇게 할거지?" 레아는 초록색 눈망울에 눈물을 담고 진을 쳐다보았다. "......크면. 어른이 되면 언니한테 가도 돼?" "그래. 레아. 찾아와 기다리고 있을게." "그럼. 나, 여기서....." 진은 레아가 울려고 하자 다시 안아주었다. "레아. 넌 비를 내릴 수 있지? 남들이 가지지 못한 특별한 능력은 책임이 따라. 꼭 강해져야 해. 나쁜 사람들도 세상엔 얼마든지 있으 니까 언제나 아이인 채로 있으면 이용당하거나 상처받게 돼. 그러면 또 꿈에 갇힐지 몰라." "구름을 부르면 안 돼?" "사람들이 간절히 비를 원한다면 해도 돼. 하지만 조절하지 못하면 다른 많은 사람들이 불행해 질 수도 있어, 레아. 그건 언니와 비밀 로 하자. 비가 필요하다고 해서 그럴 때마다 비를 내릴 필요도 없 어. 사람들은, 어른들은 레아가 애쓰지 않아도 충분히 잘 지낼 수 있으니까. 사제 님 말씀에 따라서 꼭 필요할 때만. 그럴 때만 구름 을 부르는 거다?" 레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눈물을 참으려고 했지만 결국엔 울음을 터 뜨렸다. 밖은 여전히 화창했다. 진은 혹시나 하늘이 흐려지려나 했지만, 안심이 되어서 레아의 머리 를 쓰다듬어 주었다. "레아. 조절할 수 있구나. 다행이야. 라돈에도 좋은 사람들이 많고 널 모두 아껴줄 거야. 잘 지내?" "응. 언니. 꼭 어른이 돼서 찾아갈게." "그래." 진은 할아버지에게 레아의 손을 쥐어 주고 눈물을 훔치는 레아의 손등을 꿈에서처럼 닦아주었다. 그리고 이마에 키스해 주고 신전을 나섰다. 지켜보던 이들도 모두 따라 나섰다. 신전 앞 광장을 지나쳐서 성문까지 모두 배웅해 주었다. 잠깐의 외출인 줄 알았던 여관의 노예들이 나중에서야 주위 주민들 에게 듣고 성문까지 뛰어 나왔다. "가...가세요. 아가씨...." 진은 헐떡이며 뛰어 온 그들에게도 인사를 했다. "쟌느. 미나. 잘 있어. 여관운영은 완전히 일임했잖아. 수익금은 잘 나눠 쓰고 어려운 사람 있으면 조금씩 도와가며 경영하면 돼. 문제 가 생기면 새 영주 님에게 도움을 청하고. 모두 성인이고 여관 운영 은 베테랑들이니까 잘 해 낼 거야." 쟌느와 미나가 번갈아 가며 말했다. "저희에게 내리신 은혜에 다시 감사 드려요. 가시더라도 언제든 돌 아오세요. 저희 주인은 아가씨인걸요." "......조심하세요. 건강하세요. 아가씨." "잘 있어요. 모두들." 진은 와이즈가 다른 이들에게 들리지 않게 투덜거리며 열심히 그리 는 척 했던 마법 진에 콜린스와 함께 다시 올랐다. 손을 흔드는 레아와 할아버지. 여관 종업원과 사제와 기사와 그에게 잡혀 있는 도둑과 라돈의 성벽에 대고 진은 손을 흔들었다. 카일이 판에게 잡혀 있다가 소리소리 질렀다. "안 돼. 나도 같이 갈 거라고! 에잇 네 녀석과 맹세 따위를 하는 게 아니었는데! 기다려 줘요. 나도...읍." "조심히 가세요. 리툰 마법사 님, 레이디 진을 잘 부탁드립니다." "안 돼! 하룻밤을 함께 지냈는데...난 책임을 져야...억...윽." 진은 피식 웃으며 마법 시동어를 외치는 와이즈의 목소리를 들었다. [43] 8.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네카르도-네카르도. 한 나라의 수도란 왕이 산다는 것을 뜻한다. 권력과 재물에 관련된 암투가 끊이질 않고, 가장 많은 수의 귀족과 가장 많은 수의 시민들. 가장 많은 범죄와 가장 많은 희망이 움트는 곳. 그래서 가장 부유하고 가장 가난하며 희망과 절망이 어지럽게 교차하는 혼돈의 도시, 인간들의 땅. 파키오는 오늘 15세 생일을 맞았다. 하지만 축하해 줄 가족도 없었고, 뭔가 자신을 위해 해 줄 일을 기 대할만한 대상도 없었다. 그는 수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부랑아였고, 하루를 무사히 보내는 일에 그날그날 충실한, 평범한 소년이었다. "제기럴. 니미럴. 선수를 뺏겼잖어. 빌어먹을 새끼. 남의 밥에 먼저 손을 대다니!" ..........평범한 게 아니었나 보다. 파키오는 수도로 들어오는 길고 긴 성벽, 성문을 통과하는 여행자들 을 잡아 편이를 제공하는 일로 약간의 수고료를 받거나 안내해 준 여관 등에서 동전을 받아먹고 살았는데, 오늘은 첫 손님이 될 사람 들을 그도 익히 낯이 익은 동년배 소년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개새끼. 지갑이나 털어 갖다 바칠 일이지. 이런 일까지 하냐. 몇 푼 이나 된다고. 지는 집도 있으면서. 쳇." 그 녀석은 길드 소속이었다. 파키오도 도둑길드에 들어가 볼까하는 생각을 안 해 본 것은 아니 었지만, 혼자하나 길드를 통하나 수입은 별 차이가 없었다. 물론 그들은 재수가 몇 일씩 따르지 않는다 해도 마냥 굶지는 않아 서 조금 더 낫긴 하겠지만, 애써 벌은 돈을 보호 비 명목으로 뜯기 고 싶은 생각이 없어서 여태 미루고 있었다. 파키오는 거래하는 여관 주인들에게 가끔씩 빈방을 제공받아 자기 도 하고, 그곳의 마구간이나 거리의 누나들에게 귀여움을 받는 편이 라(손님을 데려다 주거든) 노숙이 불가능한 경우 방이 아니라 해도 처마 아래서 비나 눈을 피해 밤을 보낼 수도 있었다. 봄이 되어서 생활하기가 훨씬 나아지기도 했다. 몇 일 전 운이 따라서 괜찮은 모험 자들을 잡아 여관과 시내를 안 내해 주고 귀엽게 보인 이유로 후하게 받은 수고료로 아껴 써서 어 제아침까지는 굶지 않았는데, 그 후 돈이 될만한 일을 얻지 못하고 있었다. 수도에는 사람이 많았지만, 넓다고 해도 도둑질과 소매치기 일이 아 니라면,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안면 있는 사람들의 잔심부름 과 새로 성문을 통과해 들어오는 사람들을 꼬시는 일에 한정되어있 었다. 급료를 받을 수 있는 일을 제공해 줄 만한 여력이 있는 사람도 드 물고, 있다고 해도 그런 자리는 금방 자리가 차버리니 일자리를 구 하기는 어려웠고, 길드 원이 아니면 구걸하는 것도 제약이 따랐다. 하지만 그는 꽤 오랫동안 혼자 힘으로 살아왔다. 파키오는 다행이 사람 보는 눈이 있었다. 부랑아 치고 흔한 재주일지 몰랐지만 그는 시내 토박이나 상인이나, 여자들이나, 여행자나, 귀족들을 잘 파악해 내는 눈을 가지고 있었 고 그걸 이용해 대상마다 다르게 행동하여 호감을 얻어내는 처세술 이 있었기 때문에 굳이 구걸이나 도둑질을 피해서도 이제껏 잘지 내 왔었다. 그는 성문과 면해 있는 시내로 들어가는 입구 길목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수도와 가까운 곳에 귀족들의 영지가 많았기 때문에 성문을 통과하 는 귀족이나 여행자들을 가장 많이 만날 수 있는 시간이 바로 그 시간이었다. 조금 늦게 나온 탓인지 성문이 열리는 시간이 되어 우르르 들어온 사람들을 다른 사람들이 손님으로 물어 가버린 후였고, 마지막으로 들어 왔던 여행객들도 눈앞에서 선수를 당하자 파키오는 한숨을 쉬 었다. "오늘도 운이 없으려나 보다. 아, 제기럴! 이럴 줄 알았다면 말 여물 이라도 먹는 건데, 배고....." 하지만 혼잣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잽싸게 일어나서 막 성문을 통과하는 사람들에게로 뛰어갔다. "네카르도-네카르도에 잘 오셨습니다. 전 파키오라고 해요. 필요하 신 것은 뭐든 도와드릴 수 있어요. 안내가 필요하지 않으세요?" "안내가 필요할 정도로 넓은가?" 파키오는 자신이 덮치듯 앞으로 뛰어들어 외친 말에 눈에 웃음기를 띄우며 매력적인 목소리로 되묻는 소녀를 재빨리 눈어림했다. '따봉이닷! 이쁘기도 하네. 상급으로 낙찰!' 옆에서 함께 걷던 굉장한, 굉장한 미남 마법사는 뭐가 우스운지 쿡 쿡 웃으며 그 소녀의 말에 대답했다. "수도니까 넓긴 하겠지." '와! 따따봉이다. 봉 잡았다.' "레이디. 굳이 돈 쓰실 필요 없어요. 아침시간이고 시내 구경 다니 다 보면 금방 다 알아낼 수 있을 테니까요." 뒤에서 따라오던 소년에게 눈을 돌린 파키오는. '야! 새 옷 좀 입었다고, 와이번이 드래곤 되는 거 봤냐? 촌뜨기 구 만' 하고 생각하는데 그 미남 마법사가 마구 웃어 제꼈다. "..........?" 진은 바람잡이 소년에게 미소를 지으며 그의 친절하고 붙임성 있는 얼굴 뒤에 감춰진 생각들을 어렵지 않게 짐작하고 와이즈가 갑자기 웃어대는 것을 이해했다. 제법 귀엽게 보이는 용모의 파키오라고 소리치며 뛰어온 소년은 콜 린스와 같은 또래로 보였고, 허름한 차림새였지만 샌들도 신고 있었 고 머리도 감고 사는지, 지저분해 보이지마는 않는, 권 색 계통의 짙은 색의 머리를 뒤로 묶고 있었다. "안내해 드릴게요. 레이디. 수도에 누굴 찾아오셨나요? 전 이곳 지 리에 아주 밝아요. 말만하세요. 수고료도 비싸지 않아요." "글세. 그다지 안내까지는 필요 없을 것 같은데?" 파키오는 진이 평범한 여행 복을 입고 있기는 했지만 그녀의 표정 과 몸짓에서 절도를 느꼈고, 그들의 대화로 그녀가 귀족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비슷한 나이의 귀족 아가씨들에게서 풍기곤 하는 호들갑 스러움도 내숭도 골빈 거만함도 찾아내질 못했다. 이 소녀는..... 그리고 결정권을 가진 것이 옆의 실력 있어 보이는 마법사가 아니 라 그녀라는 것도 눈치챘다. 파키오가 불쌍한 척 해야하는지. 큰소리를 떵떵 쳐야하는지. 사근거 려야 하는 건지. 잠시 갈등하는 사이, 진은 이어 말했다. "하지만 그렇게 안내해 주고 싶어하니 받아보지 뭐. 먼저 식사. 아 침밥을 안 먹었어. 안내해. 파키오. 음식 잘하는 곳으로." "...네에. 따라오세요. 끝내 주게 잘하는 곳이 있어요." 파키오는 위장이 필요 없는, 계산이 필요 없이 대해도 될 인물로 진 을 구별해 내고 겉치레 말을 삼키고 기운차게 앞장섰다. 이번 손님들은 좀 특별해 보였다. 파키오는 최고급은 아니지만 바가지를 덜 씌우고 음식 솜씨도 제법 괜찮으며,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푼돈이라도 더 얹어주는 주인이 경 영하는 식당으로 진과 일행을 안내했다. 일부러 여관을 겸하는 곳이 아닌. 전문식당으로 안내한 이유는 두 번째 받을 일거리를 늘일 의도였다. "걸어오느라고 배고팠어. 쟌느에게 도시락 좀 싸 달랠 걸. 그랬으면 천천히 구경하면서 왔을 텐데." "진. 벌판에서 구경할 게 뭐 있냐?" "무슨 소리. 여행이란 원래 자연을 벗삼아해야지. 하루종일 하늘만 쳐다봐도 되겠더구만. 콜린스 부족하면 더 시켜먹어." "아니에요, 레이디. 충분해요. 속이 안 좋아서 많이 못 먹겠어요." '분명히 귀족 같은데 시종녀석이 왜 자리에 함께 끼는 거야, 희한하 네. 나야 냄새라도 맡으니까 좋긴 하지만...아니야...더 나쁘다....' "그러게 그렇게 많이 뭐 하러 마셔? 아. 내가 할 소리는 아닌가? 하 하하....파키오는 안 먹어? 밥 먹었어?" "예? 먹어도 돼요?" "그래. 차려 놓은 밥상인데, 먹어. 한 사람 더 낀다고 큰일이야 나겠 어?" 파키오는 '역시 내가 제대로 봤어.' 하는 회심의 미소를 숨기고 감사 하는 표정으로, 얌전하게 보이도록 성급하지 않게 시켜 놓은 음식들 에 손을 댔다. 아무래도 파키오는 행운을 잡은 듯 했다. 선수를 뺏겼던 앞선 여행자들을 그냥 넘기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진이 시켜 놓은 음식들은 최고급 요리들에 속했고, 개인 주문으로 나온 것 외에도 단체 요리- 돼지 통 구이까지 날라져 왔기 때문이 다. 파키오가 보기에 마법사나 소녀나 보기와 달리, 많이....좀 지나 치다 싶을 정도로 많이 먹었다. 식탁 예절이 우아해 보이긴 했지만. 그래서 더 눈에 띄었다. '귀족여자들은 보통 되게 쪼금 먹는 체 하는데, 재미있는 여자네.' 어쨌든 파키오는 그들과 똑같이 탁자에 올려진 푸짐한 성찬을, 후식 으로 나온 군침 도는 푸딩과 케익까지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먹을 수 있었다. 파키오에게는 최고의 생일 식탁이었던 셈이었지만, 빈티 나는 행동 과 표정은 절대 짓지 않았다. 진은 계산을 하고 식당을 나오며 안내를 자청했던 소년이 식당주인 에게 동전을 받아들고 서비스로 나올 수 있는 음식과 남은 음식을 싸두라고 속삭이는 소리를 들으며 빙긋 웃었다. "잘먹었습니다. 레이디. 또 필요한 것 있으세요? 머물 숙소도 좋은 곳을 많이 알아요. 수도라서 구경할 것도 많고요. 궁성이나 귀족들 의 저택도 안내해 드릴 수 있어요." "마법학교로 안내해 줄래, 파키오? 학교 내 견학이 가능 하려나 모 르겠네." "그럼요. 지금 식사시간이니까, 교문이 열려 있을 거 에요. 밖으로 밥을 먹으러 나오는 학생들도 많거든요. 이 시간에는 개방이 되어 요. 따라오세요." 파키오는 역시 자신의 눈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며 기운차게 앞장섰다. 진은 영국의 오래 된 기숙사를 연상시키는 분위기의, 네모로 다듬은 돌로 지어진 네카르도 마법학교 앞에 섰다. 마법학교는 다루는 분야답게 외부인 출입이 제한되어 있었고 학교 전체에 결계가 쳐 있었다. 교사들과 졸업생들의 합작품으로 그 넓 은 학교 모두가 결계 안에 들어가 있었다. 학교내의 귀한 마법 아이템들과 교수들의 연구실과 학생들을 보호 할 목적이라고 했다. 학생들은 마법이 걸린 뺏지를 팔뚝에 부착하고 다녔고 교문을 통해 서만 오갈 수 있었다. 외부인의 경우 정오 식사시간에 견학이 가능했지만, 교문 안쪽 작은 건물의 수위실로 보이는 곳에서 나온 사람들이 일일이 신분확인을 하고, 임시로 시간 제한이 되어 있는 교문 통과 뺏지를 입장료처럼 돈을 받고 붙여주어야 통과할 수 있었다. 진은 몇 몇 수위들 중 말을 걸어 온 한 아저씨와 이야기를 나누고, 학교 입학에 대해 물었다. 입학은 1년 등록금을 내고 바로 할 수 있지만 기숙사에서 지내려면 학비를 더 내는 문제도 따르고 신분을 보증할 추천이 있어야 한다 고 해서, 교문 안 내부를 한 바퀴 돌아 구경하는 선에서 대강 견학 을 끝내고 학교 내 건물로 향한 가로수 길에 놓여있는 벤치에 앉았 다. 콜린스는 잔뜩 들뜨고 기대 어린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고는 했 다. "귀족들이나 부자들은 수도에 모두 별장쯤은 가지고 있거든요. 기숙 사에 따로 방도 배정되어 있지만 하교 후에는 각자 집으로 가는 경 우가 많아요. 마법에 열심인 귀족 자제들의 경우 기숙사에 남아 공 부하는 경우도 있지만 요." "평민들의 경우는 어때, 파키오?" "평민들은 기숙사를 배정 받으려면 돈이 더 드니까 아주 넉넉하지 않는 한, 대부분 수업이 끝나면 아르바이트를 해요. 직장에서 자고 먹고 하지요." 파키오는 나무그늘에 앉아서 학교 관계자가 아닌 자신에게 이것저 것 물어주는 진에게 계속 친절해 보이는 얼굴로 성의껏 대답했다. '다~아. 돈이 될 대답이유. 이쁜 귀족누나~ ' "아르바이트 일은 얻기 쉬워?" "에....마법 학교를 다니잖아요. 학생들은 일자리를 얻으려고 하면 충 분히 얻을 수 있어요. 학교에서 알아봐 주기도 한다고 들었어요. 돈 을 모을 정도는 아니라고 해도 생활은 가능하지요. 마법을 쓰는 고 학년의 경우에는 제법 수입이 좋기도 해요." "3년 과정이라고 들었는데, 모두 3년 안에 졸업하는 거래?" 콜린스는 진과 함께 앉지 않고 옆에 서서 열심히 파키오의 대답을 듣고 있었고, 와이즈는 근처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었다.-아마도 학교 에 둘러쳐진 결계에 관심이 간 듯. "3년 동안 재학했다고 해도 졸업장을 못 받는 경우도 있어요. 공부 에 전념 못하고 아르바이트에 매달리다 보면 유급 하는 경우도 있 지만 학비가 비싸서 대부분 단 1년이라고 해도 악착같이 공부를 하 긴 하죠." "기숙사는 빈방이 많지 않아? 시내에 있는 집으로 가서 통학하는 학생이 많다며?" "방이 비어 있더라도 처음에 돈주고 배정 받은 임자가 있는데 다른 학생은 쓸 수 없잖아요." '공부하러 왔으니 공부에 전념시켜야지. 낭비다...비어있는 방을 그냥 썩히다니.' 평민의 경우 수업시간 외의 수련시간이 부족하다할 지라도 열망하 는 학업을 시작해서 꿈을 키우는 그들에게 그 정도의 제약은 감당 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진은 했다. "파키오는 학교에 대해서도 잘 아네?" "그럼요. 여기서 오래 살았는걸요. 웬만한 건 다 알아요." 진은 콜린스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대화상대를 바꾸었다. "콜린스. 학업을 빨리 끝내고 싶지? 기숙사에 넣어 줄게. 생활 걱정 말고 공부만 해. 아르바이트 하고 싶니?" "아니요. 아니...그게 아니고.....레이디. 학비만으로도 너무 큰 신세를 지는 걸요. 이곳까지 직접 데려와 주시고...다른 사람들도 수업 끝나 면 다들 하는 일을 저라고 안 할 수는 없잖아요." "하지만 일할 시간에 공부를 하면 더 많이 배울 수 있을 거야. 몸이 지쳐서야 머리도 잘 안 돌아가겠지. 마법 공부는 어렵다며?" "............" 와이즈가 가까이 오자 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그냥 가자, 와이즈. 보증인을 알아보고 다시 오는 게 낫겠 어." 파키오는 그들을 안내하면서 마법을 배우려는 것이 검푸른 머리의 소녀가 아니라 촌뜨기로 보이는 동년배 소년이라는 것을 알고 부러 움이 치밀어 올랐다. '좋겠다. 쨔식. 귀족 여자를 어떻게 물었냐?! 엄청 운 좋은 놈이네.' "콜린스 나가자." "예. 레이디." '자슥아- 좀 튕겨 봐라. 나도 좀 끼어 들게. 기숙사 들어갈 돈이면 한 명 더 배운다. 성질 나네.' "파키오. 깨끗하고 서비스 좋은 여관 알면 안내해 주겠어?" "예. 맡겨 주세요." 와이즈는 앞장 선 파키오를 따라 교문 밖으로 나가는 진의 뒤에서 쿡쿡거렸다. 파키오는 진의 말대로 학교와 가까운 곳에 있는 숙박업소 중 깨끗 하고 종업원이 많은 고급여관을 택해 안내해 주었다. "저. 시내 구경은 안 하세요? 저녁이 되면 볼거리도 많아요. 공연이 열리는 곳도 있고 시장도 날마다 크게 열리거든요." 진은 파키오의 하늘색 눈을 들여다보았다. 와이즈가 내내 킥킥대는 것을 의식하지 않더라도 그녀 역시 비슷한 환경에서 살아왔던 경험으로, 사람 마음 속 들여다보는 일이나 타인 의 감정에 대해 아주 민감했던 과거의 경력으로. 그 소년이 짓고 있 는 표정 뒤에 오가는 생각들을 능히 짐작했다. 그리고 짧은 시간이 지만 지켜본 봐, 어리지만 그가 자신의 힘으로 이제껏 살아왔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파키오. 집 있어?" "예? 아니....요." "글은 알아?" "아니....요." 파키오는 물어오는 진의 질문 내용에 자존심이 상하긴 했지만 전혀 표정에 변화를 주지 않고 대답했다. "언제부터 혼자가 됐지?" "......5년 전에 아빠를 따라 할머니와 수도에 왔었다가요. 할머니는 그때쯤 돌아가셨어요." "아빠는?" "....용병길드에 소속 돼서 일거리를 받아 상인들을 따라갔었는데 돌 아가셨다는 소식을 받았어요. 할머니는 그 좀 후에 돌아 가셨고요." "도둑 길드 원은 아니야?" "아니에요. 전 도둑질은 안 해요. 구걸도 안 합니다. 아가씨." 파키오는 너그럽게 보았던, 자신과 별 나이차이 없어 보이는 귀족소 녀에게 받는 취급에 화가 났지만 친절하고 착해 보이는 인상을 잃 지 않았다. "꿈은 있어?" "예?" 진은 다시 질문하지 않고 그가 안내해 준 여관의 열린 문으로 들어 갔다. 와이즈는 곧 따라 들어갔지만 콜린스는 머뭇대다가 비슷한 키 의 파키오의 귀에 작게 스치듯 속삭이고 안으로 들어갔다. "소원을 말해. 파키오. 들어주실 거야." "............." * "재능이 있어. 그렇지 와이즈?" "무슨 재능? 속말과 겉말이 완전히 따로 노는 재능?" 진은 프론트에서 4인용 단체 침실을 예약했다. 방을 청소하는 시간이라고 해서 준비되는 동안 기다리기 위해 프론 트와 면한 식당의 탁자에 자리잡았다. "4인용이라니. 이번엔 저 꼬마를 데리고 잘 거냐, 진?" 농담처럼 말하는 와이즈에게 진은 턱을 고여 보였다. "질투하는 구나, 와이즈. 네가 목을 너무 꽉 끌어안고 자는 바람에 난 숨이 막힐 뻔했었어. 내가 그렇게 좋아?" "....죽을래?" 진은 낄낄대며 웃고 좀 늦게 들어오는 콜린스에게 앉으라고 눈짓을 했다. * 파키오는 밖에서 그 촌뜨기 녀석이 한 말을 곰곰이 생각했다. '소원을 말하라고? 들어줄 거라고?' 그야 귀족이니 돈만 조금 들이면 자신 같은 평민 소년하나 마법학 교에 보내 준다거나 기사학교에 보내 주는 거야 어렵지 않겠지만. 그런 귀족을 잡기, 아니 알게 되는 것만도 대단한 행운이라는 것도 알지만. 하지만 파키오는 괜히 떨떠름했다. 그는 진이 물었던 질문의 대답처럼 집도 없고 가족도 없지만, 다른 바보들처럼 잡히면 죽도록 맞기 나 하는 도둑질이나 자존심 상하는 구걸 같은 것을 해서 길드에 갖다바치지 않고도 이제껏 잘 살아왔 었다. 그런 자신을 은근히 대견하게 여기기까지 했다. 그런 그의 마음 한 구석. 작은 자부심을 귀족의 한순간 동정이나 선 심으로 돈 칠을 하는 것은 조금....아니, 많이 자존심 상했다. '뭐야. 그 여자. 돈이 남아도나 보지? 쳇. 난 마법에도 검에도 소질 이 없다고! 그렇게 선심 쓰고 싶다니, 실컷 우려먹어 주마.' 파키오도 콜린스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여전히 호의 어리고 호감 가는 얼굴로 파키오는, 와이즈 옆의 남은 의자에 붙임성 있게 웃어 보이며 앉았다. "방이 준비되면 짐을 풀고 구경을 가세요, 레이디. 낮에는 가지가지 돈이 걸린 경기도 열리고, 저녁에는 길거리에서 맛있는 간식거리도 많이 팔고 음유시인들의 공연도 있고 그래요." "안내까지는 필요 없겠는데 파키오? 여관까지 안내해 줘서 고마웠 어. 수고료를 얼마나 주면 돼?" "............." 파키오는 갈등했다. 무언가 놓친 기분이 들었다. 저 촌뜨기 말이 '진실'이었을까? 고운 얼굴의 그녀는 동정심이 많아 보이기도 하고 전혀 아닌 것 같기도 했다. 턱을 고이고 앉아 있는 소녀는 이상....했다. 너무 여러 가지 면이 보여서, 아니면 반대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서 파키오는 처음 봤을 때 파악했던 그들 일행에 대한 짐작이 틀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혼란스러웠다. '의외로 능구렁이였나? 계산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게 아니라, 철저히 재고 따졌어야 했나? 젠장. 물 건너 간 건가?' 와이즈는 파키오의 옆자리에서 다시 씨익-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10골드면 되요. 주시면 오늘 내내 남은 시간도 안내해 드릴게 요." 콜린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비난 어린 눈초리로 파키오를 봤다. 어떤 대답을 할까, 어떤 반응을 보일지 신경이 곤두서 있는 파키오 앞에 진은 선선히 10골드짜리 금화를 딱 소리가 나게 탁자에 내려 놓으며 말했다. "이후 시간까지 안내해 주지 않아도 돼. 파키오. 또 일거리를 찾아 봐야지. 아직 하루해가 많이 남았으니까 돈이 될 일을 더 찾을 수 있을 거야." 날강도라며 거절한다고 해도 손해는 아니었다. 실컷 배부르게 밥을 얻어먹었으니까. 이제껏 보지 못한 타입의 귀족여자라 떠보려고 했 었다. 파키오는 노란빛의 두꺼운 금화를 내려다보았다. 큰돈이었다. 평민들은 몇 년을 모아야 할 정도로 큰돈이었고 그 돈 이라면 작은 집을 사고 장사를 시작할 수도, 아껴 쓰면 몇 년은 굶 지 않고 풍족하게 생활할 수 있을 정도로 큰돈이었다. 하지만 그 돈을 집으면.....파키오는 오늘이 자신의 생일이고 특별히 믿는 신은 없지만 흔해 빠진 신들 중 누군가 그에게 생일선물로 기 회를 주려했음을 깨달았다. '아직 늦지 않았어!' 파키오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장 큰 도박을 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저.... 이 돈을 받는 대신....원하는 것을 말해도 될까요? 일행 소년 이 권해 주었어요." 콜린스는 삐죽대었지만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진은 의자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웃음기를 지우지 않은 채 파키오의 말에 대답했다. "뭘 원하는데, 파키오?" 파키오는 거침없이 대답했다. "당신이요!" 콜린스가 의자에 앉은 채 뒤로 자빠졌다. 와이즈는 내내 미소짓고 있다가 갑작스런 파키오의 말에 한방 먹은 얼굴이 되었다. 진은......웃었다. [44] * "날 선택하게된 이유를 물어봐도 돼? 파키오?" 파키오는 진의 다음 반응에 귀족을 농락한 죄를 범할 뻔한 것을 피 했다는 안도감과, 얼굴이 달아오르도록 벅찬 희열을 느꼈다. 정말 행운이었다.! 이제껏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 파키오는 아무래도 행운의 신이 자신에게 미소지었을 것이라고 확 신하며 또랑또랑하게 대답했다. "할머니가 살아 계셨을 때 항상 말해 주었어요. 기회란 누구에게나 오는 것이고 바보들은 모르고 지나치기도 하지만 기회를 잡게 되어 선택하는 것도 사람마다 다르다고요. 선택에 따라 결과도 각양각색 이라고요. 어떤 경우이든 기회를 주는 대상에게 소원을 빌게 되면 실행가능 한 경우를 염두 하지 말고 기회를 주는 그 대상을 직접 선택하라고 했어요." "예를 들면?" "예를 들면. 누군가 부자로 만들어 주겠다고 하면 돈을 바라지말고 그 말을 할 수 있는 원천을 붙잡으라고요. 힘을 가진 사람에게 제의 를 받으면 힘을 나눠 받으려 하지말고 그 힘을 가진 사람을 직접 선택하라고요. 빵 가게 아저씨가 한달 동안 빵을 공짜로 주겠다고 하면, 보통사람은 감사히 받아먹기만 하겠지만 똑똑한 사람은 한달 동안 빵 만드는 기술을 배울 거라고요. 하지만 더 똑똑한 사람은 한 달 동안 그 집에서 살면서 빵 가게 딸을 꼬실 거라고 했어요." ".....현명하군." 와이즈의 중얼거림에 진은 웃으며 말했다. "나이든 할머니나 할아버지는 그래서 무섭지. 누구나 알고 있는 일 이지만 지나고 나서야 깨닫는 수가 많거든. 미처 생각해 내질 못하 는 거야." 콜린스가 넘어졌다 일어나서, 함께 넘어진 의자를 세우며 뒤통수를 만지다가 간이 부어도 한참 부은. 정말 분수를 모르는 녀석을 향해 화난 목소리로 말을 했다. "너. 정말 어이없는 녀석이구나! 뉘 신지나 알아? 이분이?!" 새빨개진 얼굴의 콜린스는 이제껏 보아왔던 레이디 곁의 그 누구보 다 무례한 이 망할 녀석을 멱살을 잡고 흔들어 주고 싶은 기분이 되어서 씩씩거렸다. "콜린스. 자리에 앉아. 왜 네가 흥분 하냐. 내가 한말 그새 잊었어?" 입을 다문 콜린스가 부어서 자리에 앉자 진은 파키오에게 고개를 돌리고 웃음 띈 얼굴로 말했다. "파키오. 할머니의 유산 중에서 생활철학으로 삼은 다른 이야기 또 있어?" "에....그 외엔 어른들이 흔히 하는 잔소리들이었지요. 뭐. 성실 하라 거나, 남을 속이지 마라거나, 깨끗이 씻고 다니라거나...뭐 그런 거 요." "파키오. 무슨 말인지 알았어.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날 손에 넣어서 하고 싶은 일이 있을 거 아냐? 귀족의 정부가 되겠다는 소리로는 안 들리고, 내 신랑감이 되고 싶다는 말로 쳐도 그 다음엔? 미리 말 해두지만, 난 내 직접 인척. 인맥이라고 해도 능력 없거나 스스로 뭔가 하려는 생각이 없는 사람에게 알아서 금화를 손에 쥐어주지는 않아. 날 이용해서 무얼 하고 싶니?" 파키오는 머리를 긁적이며 어색하게 웃었다. "에....저도 세상 돌아가는 순리 정도는 알아요. 말 그대로의 의미를 뜻한 것은 아니었어요. 제겐 모험이 될 소원이었지만 꿈은 크게 가 질수록 좋다 잖아요. 전. 하고 싶은 것이 많아요. 딱히 무언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아직 결정을 못했어요." 진은 재미있었다. 여전히 웃으며 그에게 선택할 수 있는 경우를 들어 다시 물었다. "부자 상인과 권력계층 둘 중에서 고르라면, 어떤 것을 고르겠니, 파키오?" "돈은 때로 권력에 지배당하지만, 권력에는 항상 돈이 따라요. 권력 을 택할래요." "현명한 생각이야. 와이즈, 내가 재능이 있다고 그랬지?" "..........." 진은 잠시 머리를 굴렸다. 파키오는 가능성이 있었다. 훔치는 일과 구걸하는 일을 피해서도 지 금껏 혼자 힘으로 살아왔다. 그건 대단한 일로 평가할 수 있고, 그 의 사람을 대함에 있어 정확한 판단과 처세와 담력은 상인의 필수 조건이기도 하고. 권력의 핵심이 될, 최고 권력자의 한쪽 팔이 될 소지도 되었다. 진은 결정을 내렸다. "원하는 것을 이루도록 도와 줄게. 파키오. 초석은 깔아줄 수 있어. 하지만 바라는 것을 누리고 얻을 문제는 스스로 노력해서 쟁취해야 해. 네가 배우고 가진 소질을 개발해서 큰 인물이 되게 된다면, 그 때는 네 프로포즈를 생각해 볼게. 하하....간만에 듣는 재미있는 종류 의 요구였어. 하지만 지금으로선 내 상대는커녕 보통 부유한 아가씨 의 상대도 안되니까. 과정이 필요해. 한번 해 보겠니?" "네!" 파키오는 행운을 잡았다. 진은 탁자 위에 놓았던 금화를 다시 거둬갔다. * 파키오는 그 자리에서 바로 진의 임시 일행이 되었다. 그를 통하면 정보를 얻는 문제로 길드를 이용할 일이 당장은 없었 기 때문에 진은 네카르도에 있는 가장 큰, 수도의 도둑길드와 교류 를 시도하는 것을 미뤘다. 방이 준비되었음을 전해 듣고, 이층의 단체 석으로 들어가서 진은 파키오에게 네카르도 내의 귀족과 부유층과 마법, 기사학교 등등. 하던 데로 그가 아는 선에서 모든 정보를 주워 들었다. 그리고 파키오의 잡기인 머릿속에 저장된 그 방대한 자료들에 진은 감탄해 주었다. "웬만한 것은 다 안다더니. 웬만한 것 정도가 아니네." "헤헤....." 콜린스는 처음 인상 좋게 보았던 그 얌체 같은 소년의 뻔뻔함에 여 전히 부아가 치밀었지만 레이디 앞이라, 꾹꾹 눌러 참고 있었다. 그런 그의 심정을 알았는지 진은 웃으며 위로 아닌 위로를 해 주었 다. "콜린스. 사람마다 다른 재능이 있는 거야. 파키오는 검에도 마법에 도 소질이 없다 잖아. 내가 말했지? 사람들은 각자의 가치관과 꿈이 모두 천차만별이야. 이해하려고 해봐, 콜린스. 둘 다 이곳에서 지내 게 될 텐데, 친구가 되면 서로가 좋을 거야." "......네. 레이디." 파키오는 착해 보이는 웃음을 짓고 있었지만 속으로 또 딴 생각 중 이었다. '촌놈아. 마음에 안 들면 어쩌겠다는 거냐. 날고 기어도 넌 내 발 밑 이야. 음하하하...' "파키오." "예?" 순진한 표정으로 돌아보는 소년을 보며 진은 와이즈처럼 웃음이 새 어 나왔다. "넌 대단한 재능이 있어. 보통 사람들은 네 진짜 생각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할 거야. 하지만 난 아니거든. 내 친구 마법사도 마찬가지 고. 우리와, 너처럼 상대에게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또 다 른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야. 앞으로는 많이 만날 수 있을지 몰라. 생각하는 것은 자유지만 아무리 위장한다고 해도 그런 것은 밖으로 표출되는 수가 있어." 방안에 놓여 있던 2인용 나무 탁자에 앉아서 와이즈는 아쉬워했다. '저 꼬마, 겉과 안이 참 재밌었는데. 이제 못 보겠군. 큭큭...' "그것은 재능이기도 하지만 치명타가 될 약점이 될 수도 있어, 파키 오. 네가 원하는 생활을 가능케 하려면 먼저 그것부터 고쳐. 머리 속의 생각을 숨기는 것은 아주 중요하지만, 가장 좋은 방법은 생각 자체를 하지 않는 거야." ".............." "생각한대로 행동하는 것이 사람들을 내편으로 만들 가장 좋은 방 법이야. 그렇다면 속이 까만 생각을 하는 성격을 버려야 해. 넌 좋 은 인상을 가지고 있잖아. 마음속까지 좋은 생각을 품게 된다면 그 때가 되어야, 정말 네가 바라는 일들을 누릴 수 있게 환경이 갖춰지 게 될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지?" "진심으로....대하라는 거지요? 적어도 같은 편, 힘을 실어 줄 사람을 진짜로 얻으려면....요." "그래. 잘 아네." 파키오는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그의 속 생각을 모두 빤히 보고 있었다는 확인에 얼굴이 빨개져서 약간 더 듬거렸다. "죄송했습니다. 레이디. 알고는 있었어요. 사람들에게 마음만 먹으면 쉽게 친절을 끌어낼 수는 있었지만, 사실은 전 이제까지 친구가 없 었어요. 저에 대해 모두 알고, 모두를 받아들여 주는 친구는 불가능 할 거라고 생각했었어요. 하지만 이제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니 금방 고칠 수 있어요." "좋은 자세야. 배우는 게 빠를수록 유리하지. 친구를 얻고 싶다면 자신이 먼저 마음을 여는 방법을 배워야 해. 콜린스와 사이좋게 지 내. 파키오." "하하...예. 레이디...야. 촌뜨기. 잘 지내보자!" "........너!" 진은 신경전이 시작 된 그들을 보며 앞으로 좋은 짝이 될 거라는 느낌을 받고 미소지었다. * 진은 오후가 되자 아직 해가 남아 있을 때를 이용해 파키오의 안내 로 수도를 구경하러 다녔다. 그의 말대로 볼거리가 많았다. 시장 통의 그 복잡한 사람들의 사이를 지나쳐서 조금 공터가 있는 곳에 와글와글 모여들어 있는 사람들을 보고 가까이 가보니, 권투경 기의 링처럼 사각형의 무대를 만들어 둔 곳에서 힘 겨루기 경기가 열리고 있었다. 구경꾼들은 재미 삼아, 혹은 돈을 따기 위해 서로 머리를 맞대고 출 전자들에게 돈을 걸고 있었다. "자. 여러분. 이제까지 3승을 기록한 대장장이 맥콜입니다! 더 도전 하실 분 안 계십니까? 에...지금까지 모인 금액이 은화 다섯! 5실버 입니다. 도전에 성공하시면 이 돈이 모두 우승자에게! 도전하실 분!" "어딜 가나 도박은 있다니까." 진의 중얼거림에 와이즈가 부추겼다. "나가봐라, 진. 재밌겠다." "싫어. 구경거리 돼서 뭐 좋을 게 있는데? 눈에 띄면 성가셔진다 고." "에? 마법사님. 마법은 못 써요. 무기를 사용하는 것도 금지되어 있 는 걸요. 이 경기는 평민들이 주로 대상이 되니까요. 다른, 마법이나 검 실력을 겨루는 경기도 있어요. 그런 경기에는 상금도 많이 걸리 고 귀족들도 참가하고 그래요." 콜린스의 째리는 시선을 계속 받으면서 따라다니던 파키오의 말에 와이즈는 피식 웃음을 지으며 먼 산을 보는 시늉을 했다. "내가 도전해 보겠소! 사냥꾼 코스터요!" 새 도전자는 출전 금을 내고 링 위로 뛰어올랐다. 도전자를 맞아 사람들은 와와 거리면서 응원을 보내고 다시 돈을 걸고 하는 동안에 사회를 보는 아저씨가 규칙을 설명하고-'무기 사 용 금지. 죽지만 않게 서로 패시오. 먼저 쓰러지거나 무대 밖으로 나가는 자가 집니다.'- 시작 구호를 외쳤다. 그들이 엉켰다가 물러났다가 주먹질과 견제와 서로 팔을 맞잡고 힘 겨루기를 하는 모양을 보며 진은 피식 웃었다. "바보들 같아. 어딜 가나 남자들은 다 바보야." "............" 와이즈는 진의 말에 자신도 남자니 화를 내야하는 건지, 사실은 인 간 남자가 아니니 상관없는 것인지 헷갈렸다. 돌아서는 진에게 가깝게 모여 서 있던 아저씨와 청년들이 빙글빙글 웃으며 참견을 해왔다. "아- 저런. 아름다운 숙녀 분께서. 구경만 해줘도 힘이 날텐데. 우린 바보라서, 하하하....힘 겨루기가 재밌거든요. 가시지 말고 보세요. 아 가씨. 힘이 좋아야 사랑 받지. 안 그러냐?" "그렇지~ 아가씨 앞으로 가세요. 자자...좋은 자리를 마련해 드릴게 요. 마음에 드는 청년 있으면 콕. 집어 주시죠. 이렇게 예쁜 아가씨 가 모처럼 관객이 되어 주는 데. 코스터 녀석도 악착같이 이기려고 할거야. 난 쌈지 돈을 다 걸었다고! 지면 안 돼!....아가씨, 좀 도와 주구려. 가만~ 구경만 해 주면 됩니다. 하하하..." 진은 두 팔이 잡혀서 앞쪽으로 인도....끌려갔다. '바로 갈걸....괜히....으휴....' 콜린스는 당황해서 따라오고 파키오는 '마법사 곁이 항상 가장 안전 한 법.' 이라는 생각을 하며 링 앞으로 와이즈와 함께 따라갔다. "코스터. 아름다운 아가씨가 지켜보고 계시다! 넌 지면 남자도 아니 야!" 무대 위에서 다시 견제 중이던 그들은 잠깐 소리친 곳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손을 흔들었다. "무슨 소릴! 어이 정말 예쁜 아가씨네. 나 맥콜이 이길 거유. 응원 좀 해 줘요. 아가씨!" 사람들의 함성이 한번 울리고, 진은 누군가 어디서 주워온 듯한 낡 은 의자에 앉혀졌다. 와이즈가 옆으로 와서 낄낄댔다. "이미 충분히 구경거리가 됐구나, 진. 안됐다." "부아 돋굴래, 와이즈? 가만있어." 경기는 다시 시작되었고 코스터라고 했던 사냥꾼 복장의-얇은 편인 털가죽을, 나시 평상복 위에 짧은 조끼로 걸치고 무릎까지 오는 스 커트 형식의 옷 아래 허벅지까지 다리에 천을 둘러 긴 가죽샌들 끈 을 올려 맨 차림의- 청년이 이겼다. "잘했어! 코스터! 또 이겨라 아~ " "아가씨 응원 좀 해 줘요. 저렇게 애타게 쳐다보고 있구만. 불쌍하 게 봐주는 셈치고요. 하하하..." 진은 피식 웃으며 아무래도 조용히는 빠져나가지 못하게 될 것 같 자 자리에서 일어나, 출전자에게 돈을 받는 일을 하던 링 아래 대기 중인 아저씨에게 걸어갔다. "출전비가 얼마 에요?" "예? 에잉~ 저 소년들을 내 보낼려고요? 아니면 잘생긴 마법사를? 택도 없습니다. 아가씨." "얼만 데요?" "30실링이죠." 진은 벨트지갑에서 거스름돈으로 모여있던 동전을 꺼내 내밀고, 링 위로 올라가는 세 칸 계단을 밟고 사각형 꼭지점에 나무를 박아 링 의 구역을 표시해둔 밧줄 아래로 머리를 숙여 안에 들어가 섰다. "직접...출전하시게요, 아가씨? 위험한데....험한 녀석들이라 사정 안 봐 줄 겁니다." "여자는 안 되요?" "아니, 출전비만 내면 누구라도 상관은 없는데....검사 세요? 검은 쓸 수 없는데요." 진은 익숙해져 버린 허리에 차고 있던 장식. 위장용 검을, 검 집 채 풀어서 콜린스에게 던져 주었다. "야아...코스터 져줘라. 아가씨가 돈이 필요하나 보다." "그래, 코스터! 져줘라. 그렇게 이쁘고 가냘픈 아가씨를 때리면 넌 사람도 아니야!" 와하하하....하고 구경꾼들이 웃으며 소리쳤지만 그들은 또 내기 돈 을 걸었다. 물론 코스터에게. 와이즈가 빙글 웃음을 짓더니 콜린스와 파키오에게 점잖게 충고해 주었다. "있는 돈 있으면 모두 걸어 보세요. 진에게 요. 딸 겁니다." "동전 몇 개뿐이라서 요. 너무 작은 금액은 안 받아 주거든요." 파키오의 말에 콜린스는 못마땅한지 입을 삐죽대었지만 진이 더 걱 정 된 듯 무대로 고개를 돌렸다. 와이즈는 은화를 하나 그에게 빌려주었고, 받아든 파키오는 내기를 하는 사람들 틈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그는 진과 와이즈에 대해 아 직 어떤 귀뜸도 받지 못했지만 확신이 있었다. '자신 있으니까 걸라고 하는 거겠지? 보기와 다른 뭔가 있을 거야.' 사회자는 어쨌든 자격이 있게 되었으니 진행을 해야 했다. "에. 이름이. 아가씨...?" "진이에요. 여행자고요." "뭐, 출전비를 냈으니 경기에 출전할 수 있습니다. 반대 안 하시죠, 여러분?! 여행자 진양입니다!" "이봐. 사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어떻게 싸웁니까. 아가씨, 제가 상금을 좀 나눠드릴게요. 그냥 내려가세요." "시작 안 해요? 사회 아저씨?" 진은 그의 말을 흘려듣고 시작을 독촉했다. "시작-!" 에...그리고 물론 진보다 훨씬 키가 크고 듬직한 체구의 사냥꾼 청년 은 느긋이 몇 걸음 걸어와 앞에 선 진에게, 팔을 잡혀서 유도기술 비슷하게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졌나요?" 그는 일어나서 빨개진 얼굴로 흠흠. 하며 대답했다. "아참. 그럴리가요, 아가씨. 보기보다 힘이 있으시네. 그럼 제대로 해 봅시다." 사람들의 야유와 함성 속에 코스터가 곧장 덤벼들었지만 진은 살짝 옆으로 피했다가 그의 허리 부분을 다시 잡고 링 밖으로 던졌다. "우-악!" "........." 소란이 잠깐 멈췄다. 진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의 사회자에게 말했 다. "저 사람 졌네요." ".....에....그러네요." "우하하...캡이다! 야! 코스터. 아무리 져주라고 했다고 정말 져 주 냐! 가서 죽어라 이놈아!" 코스터는 져 주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는데, 다들 그렇게 여겨주자 차라리 안심이 되어서 링에서 던져져 아픈 엉덩이를 문지르며 멋쩍 어 했지만, 속으로 갸우뚱거렸다. '어라? 이상하네...이상타....' "다음 도전자요." "예에. 다음 도전하실 분! 현재 은화 다섯. 60실링이요!" 도전자가 줄을 이었다. 와이즈는 피식거리고 있었고 파키오는 다시 판돈을 모두 진에게 걸 었다. 콜린스는 오크들을 만났을 때 진의 괴력이 와이즈가 마법을 건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말해 무엇하랴. 다음 경기에서도 똑 같은 일이 벌어졌다. 시작 구호와 함께 공격을 시작한 도전자들은 모두 진에게 밀어내는 발차기 한 방에 링 밖으로 날아가고, 던져져서 밖으로 나가고, 걷어 채여서 무대 밖으로 떨어졌다. "마법 아니야?" "아닙니다! 마나 유동은 전혀 없었어요!" 경기 주체 측에 고용되어 있던 저 써클 마법사가 단호하게 증명했 고, 사람들은 우연이겠지...에잉, 저 녀석도 져 주냐....하다가 계속 반 복되는 상황에 입을 벌였다. "다음 도전자는?" "어. 없는데요, 아가씨...." "그럼 폐막! 상금 주시죠. 사회자 아저씨." "............" 진은 수수료를 뺀 은화 7개를 받아들고 링 아래로 내려갔다. "레이디. 대단해요! 굉장히 강하시네요! 마법사님. 여기 원금 돌려 드릴게요." "얼마 땄어, 파키오?" "헤헤...10실버가 넘어요. 보세요. 드릴까요?" "가져. 네가 걸었잖아. 나보다 더 벌었네. 앞으로는 확실하지 않은 일에는 도박하지 마, 파키오." "예. 레이디. 도박할 돈도 이제까지는 없었지만, 저 그렇게 바보는 아니에요." 진은 수군거리는 사람들 틈을 벗어나 어스름이 깔리고 있는 시장 통을 벗어났다. 구경꾼들은 몇몇. 나중에서야 진에게 걸었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다들 돈을 잃었지만, 성을 내려고 해도 우승자가 너무 세 다는 것을 알았고 그녀가 레이디로 불리며, 마법사가 옆에 떡 버티고 있는 것 을 의식하고 말 한마디 못하고 길을 비켜주었다. "허허....참. 살다 별일을 다 보네...." 사회자는 구경꾼들과 같은 기분이 되어서 머리를 긁적였다. [45] 8-2. 드래곤과 엘프 뒤통수가 따가운 것이 어느 정도 가시자 진은, 따라오고 있는 사람 들을 뒤돌아 기다려 주었다. "용건이 있나요?" 두 사람이었다. 구경꾼들 틈에 섞여 있던, 30대 중반의 평범한 평민 복장의 아저씨 와(직업이 구분이 안 되는) 역시 평범하긴 하지만 산뜻해 보이는 차 림에 검을 찬 검사로 보이는 20대 청년이었다. "아. 저는 집으로 돌아가던 길입니다, 아가씨. 여관을 운영하고 있지 요. 머물 숙소는 잡으셨나요?" 진은 그에게 낯익은 냄새를 맡았다. 샘에게서 풍기던, 독특한 분위기의 사연을 가진. 생각을 품은 냄새. 진은 그가 길드와 관련 있을 것임을 확신했다. "어디 있지요? 나중에 찾아가 볼게요." "제가 알아요, 레이디. 안녕하세요, 아담스 아저씨?" "파키오, 우리 여관으로 모시거라. 서비스 잘해 드리겠습니다, 아가 씨. 꼭 오세요." 그는 여관 선전을 끝내고 가던 길로 계속 걸어갔다. 진은 멈춰 서 있던, 콜린스보다 훨씬 옅어 보이는 밝은 갈색 머리의 청년에게 눈을 돌렸다. "......전 릭페르 폰 훼이른이라고 합니다, 레이디. 귀족 영애 신데 밤 거리는 위험하니까요. 경기를 보긴 했지만, 아....솔직히 말씀드리면 호기심으로 따라왔습니다. 실례가 되었다면 죄송합니다." 가벼운 목례와 함께 소개한 이름을 듣고 진은 그가 미르나의 오빠 라는 것을 알았다. 진은 속으로 웃었다. '세상 참 좁네. 아니군. 네카르도의 수도가 좁은 건가.' "전 진 리툰이라고 합니다. 밤거리 위험한 것은 아니까 걱정하실 필 요는 없어요. 염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에. 하지만 보호가 필요할 일이 있을지 모르니 숙소로 가실 때 까지는 동행하겠습니다. 레이디 진." 그는 20대 초반에 서글서글한 인상이었지만 하는 양이 미르나가 말 했던 것처럼 고지식한 기사가문의 일원인 탓인지 정중하면서도 단 호했다. 진은 그가 따라오도록 내버려두었다. 어차피 그들과도 접촉할 생각이었지만, 아직은 미르나의 이름을 거 론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해서 더 이상의 대화는 시도하지 않았다. "파키오. 여기 수도엔 엘프가 있다고 들었는데, 모르니?" "엘프요? 알지요. 너무 유명해서 미처 말씀드리는 것을 잊어 먹었 네...." "엘프가 많아?" "그럴리가요. 여행 중의 엘프는 몇 명, 저도 보았어요. 아주 드물지 만요. 하지만 수도에서 살고 있는 엘프 분이 한 분 계세요. 잘 모습 을 보이지 않아서 얼굴 보는 것은 힘들어요. 운 좋으면 볼 수도 있 어요. 신전들이 밀집되어 있는 세르니프 광장에서 가끔씩 다른 음유 시인들과 노래를 부르기도 하거든요. 가보실래요?" "가보자, 파키오. 엘프를 한번도 못 봤거든. 어떻게 생겼을까?" "귀가 길지요. 그리고 굉장히 아름답고요. 마법사님 만큼요." "그래?" 진은 훗훗 웃으며 와이즈를 흘끗거렸다. '진. 나와 비교했다가는 목을 졸라 주마. 감히 엘프 따위와....' 하지만 와이즈는 차마 목소리를 내지는 못했다. 진은 일행과 묵묵히 따라오고 있는 기사를 호위로 파키오의 안내를 받아, 푸른 달빛이 진해지고 있는 시내의 복잡한 거리를 걸어서 주 신의 이름을 딴 세레니프 광장으로 갔다. * 진은 일행과 세레니프 광장에서 한동안 몇몇 음유시인들의 거리 공 연을 지켜보고, 모여들었다 흩어졌다하는 사람들의 움직임을 구경했 다. 광장은 네얀과 라돈의 광장을 세 개는 합해 놓은 크기였고 바닥 도 건물과 만나는 지점까지 모두 돌이 깔아져 있었다. 주위에 가깝게나 약간 떨어진 곳에 대리석이나 흙으로 지어진 크고 높은 신전의 건물들이 다른 건물들과 섞여서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와이즈. 저기 흙벽으로 세워진 신전은 무슨 신전이래?" "대지의 여신을 섬기는 곳이겠지." "그렇구나. 어울린다. 근데 튼튼 하려나?" "겉에만 흙으로 발라둔 건데 튼튼하겠지." "겉만 흙으로? 흠. 그래?" 릭페르는 괜히 따라 왔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 복 차림의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말했는데도-이름이 세 마디 임을 알면서도 그에게 안중이 없었다. 아마 함께 있는 마법사가 너무 미남이라 그러나 하는 생각을 해 보 긴 했지만. 좀 전의 그 민첩함과 괴력의 경기도 그러했고, 하녀를 데리고 하는 여행이 아닌 듯 한, 차분해 보이기는 하지만 보통 귀족 영애들의 조신한 몸가짐이 아니라서 더 호기심이 일었다. 광장에서는 여행자나 길가는 사람들의 발길을 잠깐씩 잡아서 몇 명 의 음유시인들이 각기 자리잡은 곳에 앉아 돌아가며 부르는 노래에 동전을 주기도 하고 박수를 치기도 하며 지나치고 있었다. "오늘도 엘프 분이 나오시지 않나 봐요. 엘프가 노래를 하면 사람들 이 굉장히 모여드는데 몇 명 모여있지 않은 걸 보니.....귀족 분들도 엘프가 나오는 것을 알면 많이 오시거든요." 진은 주위를 둘러보고 길목이나 사람들의 왕래를 막지 않기 위해 약간 비켜선 구석진 곳에, 나무로 만든 수레를 세우고 간식거리를 파는 사람들에게 콜린스와 파키오를 보냈다. "골고루 모조리 사와, 얘들아~ 다 먹어 보게." "예. 레이디." 릭은 진이 소년들에게 시키는 심부름에 쓴웃음을 짓는 듯했지만 아 무말하지 않고 곳곳에 놓여 있는 긴 나무 벤치 하나에 앉은 진과 와이즈의 곁에 서 있었다. "기사님. 저희, 비. 밀. 이야기를 좀 하려고 하거든요? 귀 좀 막아 주시겠어요?" "..........." 그는 멈칫했다가, 약간 얼굴이 붉어져서 한참 떨어진 거리로 물러났 다. 아무래도 진과 와이즈를 연인 사이로 착각한 듯한 얼굴 표정에 진은 피식 웃었다. "와이즈. 엘프 부를 수 없어?" ".......왜 내가 네 같잖은 호기심을 충족시켜주는 일까지 도와줘야 하 는 거냐, 진. 성가시게." "와이즈. 그러지 마~ 저 사람들 노래가 노래냐. 못 들어 주겠다. 무 슨 영웅이 어쨌네. 신이 어쨌네. 노래가 아니라 하프 켜면서 웃기게 들리는 서사시를 읊고 있잖아. 간지러워 죽겠어. 몰래 불러낼 수 있 으면 불러봐. 엘프 노래 좀 들어보자. 유명하다는데 그냥 가면 안 돼지~ " 와이즈는 다시 뻔뻔하게 들리는 진의 주문에 부아가 치밀었다. "....조건이 있다. 들어주면 불러주지." "뭘, 또?" "너 죽으면 시신을 내게 넘겨라. 꼭 네 머릿속을 한번 해부해 보고 싶으니까." 진은 멀뚱거리며 와이즈를 쳐다보더니, 큭큭거리며 웃었다. "좋은 자세야. 암. 인체 해부를 해 보지 않고서 어떻게 인간을 아냐. 해부해. 와이즈. 죽은 다음엔 아프지도 않을 텐데. 어려울 것도 없 지. 전망 있는 의사가 되겠구나." "............" 와이즈는 진의 대답에 간만에(?) 황당해졌다. 누가. 어떤 인간이 아무리 죽은 후라도 시신에 칼을 대겠다는 말에 저토록 태연할 수가 있지? 인간들 사이에서는 자칫 고인과 고인이 모시는 신을 모독하는 행위가 될 터인데, 평민도 아니고 왕족이 할 대답이 아니었다. '아니지. 이 여자는 자신이 왕족이라는 것을 전혀 상관을 안 했지...' "그렇게 엘프가 보고 싶냐? 머리를 갈라 열어보겠다는데?" "와이즈. 저쪽 세상에서는 의사가 되려고 공부하는 학생들은 사람의 두개골을 끌어안고 자고, 검시관들은 시체를 해부하는 자리에서 케 찹을 듬뿍 얹은 핫도그나 스파게티를 먹어. 의식의 차이야. 마법이 없는 세상이니 의학지식을 얻으려면 직접 인간의 몸을 해부해 봐야 알 거 아냐." 와이즈는 케찹과 핫도그가 뭐냐고 묻는 것을 생략했다. "인간의 존엄성을 안다며?" "와이즈. 죽은 사람의, 영혼이 빠져나간 몸이 중요해. 아니면 앞으로 살아갈 날이 많거나, 죽음을 피하려는 사람들의 희망이 더 중요해?" "..........." "그렇다고 아무나 시신에 손댈 수 있는 것은 아니야. 의사들은 시체 를 해부해 보는 과정이 필수지만 보통은 금지되어 있고, 직업에 관 련된 사람들을 제외하면 보통 사람들의 인식은 여기와 마찬가지야. 죽은 사람 몸을 이용해서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혜택이 가는 문제에 만 법으로 허용이 되고 있지. 놀랠 거 없어." ".......머리 아프네. 그러니까, 리치를 만들지는 않는다는 소리지?" "리치?" "죽음을 피하려는 흑마법의 일종이다. 인간만이 아니라 어떤 종족에 게도 가능하긴 하지. 신과 반대된다. 카르마에게도 반하는 일종의 금기주문이지. 마계에 속한 마법이라고 해야겠군." "그러면 안 돼. 설마 날 리치로 만들겠다는 소리는 아니지?" "내가 뭐 하러 인간을 위해 흑 마법까지 써가며 금기를 어기냐?" "그래. 그래. 그럼 해부해. 와이즈." 진은 웃음기를 띈 얼굴로 앉은키를 높여 와이즈의 더 높은 어깨에 척 팔을 올리며 격려하듯 말했다. "안 내려?" 진은 다시 쿡쿡 거리며 웃었고, 장난스레 올렸던 팔을 내리고 좀더 설명을 해 주었다. "거기선 말이야. 죽기 직전이나 막 죽은 사람의 몸에서 장기를 떼어 내 보관해 두다가 병이 있는 사람이나 새 장기가 필요한 사람에게 이식해서 새 생명을 주기도 해. 물론 본인과 가족들의 동의 하에 이 뤄지지. 내가 살던 곳에서는 그게 당연한 일이었어. 죽음을 눈앞에 두게 되면 사람들은 착해지지. 남을 위해 무언가 하려는 갸륵한 의 도가 아니겠어?" ".........그래. 너 잘났다. 죽으면 꼭 머리를 열어봐 주마, 진. 영광으로 알아라." 삐진 듯한 그의 말에 진은 다시 입을 막고 웃음을 가렸다. 와이즈는 잘못 꺼낸 말에 투덜거리며 수도 어딘가 있을 뾰족 귀 녀 석에게 드래곤의 기운을 약간 실어 '부름' 했다. * "재미없어." ".........." 블루는 기사 클레이스 클레본의 집에서 정원 가득한 화초와 나무들 을 돌보고 있다가 그가 길고 아름다운 세공의 의자에 다리를 뻗고 중얼거리는 말에 오싹해졌다. "야. 블루. 뭐 재미있는 일 없을까? 엘프에게 물어서 뭐하냐. 제일 재미없는 녀석들인데...아. 심심하고 잠 오고." "......오늘은 파티에 가지 않으세요, 클레이스님?" "지겨워졌어. 그 여자가 다 그 여자들이야. 다른 나라, 전쟁터에나 가볼까?" "..........." 그들이 있는 정원은 해가 져서 달이 뿌리는 푸른빛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래도 어둡기는 해서 정원의 나무를 돌보는 일은 불편하고 어려운 일이었지만, 블루에게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고. 달리 할 일이 없던 친구.....로 알려진 검은머리의 늘씬한 기사와 정 원에 면한 테라스에서 잡담을 나누고 있던 중이었다. 크진 않지만 아담하고 아름다운 그 집은 기사로 이름 높은 클레이 스의 개인 저택이었다. 일하는 하인들도 몇 명 되지 않았지만 그들이 있는 곳은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발을 딛지 못하는 금지 구역이었기 때문에, 클레 이스는 평소 기사다운 몸짓을 버리고 그가 특별히 주문 제작한 긴 의자에 긴장 푼 자세로 반쯤 누워서, 블루가 정원을 돌보고 있는 것 을 떨어진 거리에서 구경하고 있었다. 거리가 멀어도 대화하는 것에 불편을 못 느끼는 듯 그들의 목소리 는 각자가 평이한 높낮이였다. "블루야. 노래나 해봐라." "......제 노래는 잠이 온다면서요, 클레이스님." "자지 뭐. 할 일도 없는데. 유희가 재미없어지고 있으니 관둘까 생 각 중이다." "그러시면...저는...." "네 갈길 가렴. 내 옆에서 숨 막혔을 텐데. 레어로 돌아가면 이곳 정원을 가꿀 필요가 뭐 있겠냐." "....감사합니다. 클레이스님." 블루는 하던 일을 마치고 운디네를 불러 흙이 묻은 손과 옷자락을 씻었다. "뭐 하러 직접 하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 재밌냐? 흙에 손대는 일이?" "가지나 잎에도 손대는 데요?" "그래. 가지나 잎에도 손을 대는 일이 재밌냐고. 따지기는." "재미있다기보다는, 즐겁습니다." "그 말이 그 말이구만."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해 내기가 모호해서요." 클레이스는 항상 그랬던 것처럼 엘프와 하는 대화가 금방 싫증이 났다. 고급기사로 추켜 세워주는 인간들과 어울리고 가끔씩 도전을 받아 점잖게 응대해 주는 것도 싫증이 났고, 귀족 여자들을 꼬시는 일도 재미가 없어졌다. 게다가 요즘엔 잠이 막 쏟아 져서 회합이 열리기 전에 레어로 돌아가 잠을 좀 자야할 까 궁리 중이었다. 이곳 네카르도의 수도에서 엘프녀석과 지내게 된 게 5년쯤 되었다. 클레이스는 북 대륙이나 남 대륙으로 가 볼까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잠이 오면 만사가 귀찮아지고는 해서 내키지 않았다. 블루는 노래를 부르라고 했던 클레이스의 말에 따라 주변 정리가 되자, 그의 옆의 다른 의자 위에 놓여 있던 하프를 들고 자리에 앉 았다. 하지만 무릎에 악기를 세우고 하프를 켜려는 자세를 했다가 그대로 다시 일어났다. 클레이스도 일어났다. "..........." "손님이 왔군. 뭔 일로 왔지? 심심하던 차에 잘됐다. 투비와이즈 녀 석이야! 워프해라 블루." "..........." * '이. 이런...' 와이즈는 워프 해 오는 녀석이 하나가 아니고 둘이고, 그 중 한 녀 석의 익숙한 동족의 기운에 잠시 이마에 땀이 맺혔다. 블루는 마나 유동이 멈추자마자, 그에게도 익숙한 세르니프 광장의 가장자리. 서 있는 공간의, 소리가 밖으로 새지 않게 하고 그들의 모습이 행인들의 눈에 띄지 않게 하기 위해 가벼운 결계를 쳐서 차 단시켰다. "여-어! 투비와이즈. 여긴 웬일이냐? 몇 일 전 보고 또 보네." "와이즈다. 바를로네시." "유희 시작했냐? 난 여기서 클레이스 클레본이라는 이름이다. 어떻 게 된 거야? 엘프는 뭐하러 불러?" "어떻게 되긴. 네가 돌아간 후 나도 유희를 나왔다. 너야말로 회합 이 어쩌고 하더니 유희 중이었냐?" "아, 나야. 여기서 몇 년 놀았지. 할 일이 뜸해져서 레어로 왔다 갔 다 했었다. 지금 막 그만 둘까 생각 중이었지.... 네 유희 상대냐?" 진은 갑자기 앞에 나타난 그들을 맞아 의자에 앉은 채 멀뚱거렸다. 칠흑 같이 긴 검은머리의 기사는 미르나가 말했던 그 소문난 미남 기사인 모양이었다. 고급스럽게 보이는 옷감으로 만든 기사 복장에 허리에 비싸 보이는 검을 걸치고 있었다. 확실히, 굉장히 매력적인 미남이긴 했다. '지나치게 완벽하네. 만든 얼굴이라 그렇겠지.' 와이즈가 자리에서 일어나 나누는 말로 그도...드래곤이라는 것을 알고 진은 생각했다. 그리고 함께 이동해 온 파란, 몹시 파란색 머리 에 파란 눈동자의, 귀가 인간보다 2배 이상 길고 뾰족 한 엘프.... 그는 목이 많이 파이고 품이 넓은 긴 흰색 옷에 역시 무늬 없는 흰 색 허리 두르게를 하고, 한 팔에 금박이 박힌 고풍스런 하프를 들고 있었다. '너무 눈에 띄고....반대로 존재감이 없어. 뭐야? 이 느낌은...' 진은 파란머리 엘프의 산림욕을 연상시키는 분위기의 외모와, 그로 부터 받는 느낌을 표현 할 단어를 찾아내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나무. 풀....꽃이야. 근데....파란색 꽃도 있었나?' 자신의 생각이 웃기게 느껴져서 진은 릭에게로 잠깐 눈을 돌렸다. 진과 와이즈가 갑자기 모습을 감추자 미르나의 오빠는 그들에게 시 선을 향하지 않고 있었지만 신경을 두고 있었는지, 머뭇대다가 다시 얼굴이 빨개지고-무슨 짐작을 했을까? 진은 웃음이 나왔다.- 고개 를 돌렸다. 블루는 자신을 부른 드래곤의 기운을 따라 클레이스와 워프하고 결 계를 쳤지만 부른 이유를 물을 형편이 아니라서, 두 남자의 대화에 가려진 인간 소녀에게 시선을 주었다. 엘프의 외모를 닮은 소녀..... 블루는 진이 잠시 옆을 보다가 웃음기를 띈 얼굴로 자신에게 다시 얼굴을 향하자, 맑고 투명하게 공명을 일으키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허락 없이 결계를 쳤습니다. 저와 클레이스님의 모습 을 사람들이 보게 되면 대화가 불가능해 질 것 같아서요." "죄송할 것은 없고, 반가워요. 제가 불렀어요. 엘프...뭐라고 불러야 하나..." '와. 목소리 끝내주네. 얼굴도 저쪽 보다 낫다. 자연산 미인이 언제 나 더 나은 법이지~ ' 와이즈가 그녀의 속말을 들었는지 아니면 바를로네시의 물음 때문 인지 실룩이며 진을 돌아보았다. 블루는 인간인 그녀가 두 드래곤 사이의 대화를 듣고도 전혀 동요 하는 기색이 없어 보여서 호기심이 일었다. 그리고 자신을 보고도 보통 인간여자와 약간이지만 구별되는 표정과 말에 특이하단 느낌 과 함께, 드래곤을 통해 그 소녀가 '부름' 했다는 말을 상기하고 인 사를 했다. "하늘이 아름답고 땅이 너그러운 것은 신이 주신 사랑입니다. 가르 디아엘 저희 신의 축복으로 숲의 속삭임과 생명을 그대들과 나누고 자 합니다. 저는 샤 마을의 라하르네 블루엘 샤 라고 합니다." 엘프가 허리를 약간 숙이며 하는 긴 인사말에 눈을 깜박이다가 진 은, 얼떨결에 일어나-그때까지 계속 태평스럽게 앉아 있었다는 사실 에 진은 '깜박했어! 깜박. 절대로 넋나간 거 아니야.' 하고 자신에게 변명해 주었다.-함께 인사를 하며 답을 했다. ".....전 드리얀의 진 리툰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되물었다. "그건 엘프들의 인사말인가요, 아니면 시인가요? 엘프는 인사할 때 시를 읊나요?" "......인사말입니다. 아가씨." 와이즈가 자리에 다시 앉았다. "와이즈. 친구야? 드래곤이지? 무슨 종류. 아니, 무슨 색 드래곤이 야? 검은머리니까 블랙 드래곤이야?" "............" 와이즈는 한숨을 푹 내 쉬었다. 골치가 아파 왔다. 하필이면 저 참견쟁이 깜둥이 녀석과 마주치게 되다니....진의 반응으로 더 성가셔 질 것 같았다. [뭐야. 저 버르장머리 없는 인간은?] [남의 유희엔 상관하지 않는게 우리 철칙이잖냐, 신경쓸것 없다. 바를로네시.] [경우가 다르지 않냐?] [끼어든 것은 네쪽이다. 처음부터 용언으로 대화를 시도 하지 그 랬냐. 그럼 문제 없었지.] 바를로네시는 와이즈를 어이없다는 눈으로 보며 물었다. "유희라며? 네가 가르쳐 주었냐? 드래곤이라고? 기억도 안지우고 데리고 다녔어?" "드래곤이라는 것을 알고도 유희가 가능한 인간이라서 말이야. 너도 저 파란머리 엘프를 데리고 있었잖냐." "나야. 정원사가 필요해서지. 내 주위엔 풀이 잘 안 자라잖냐. 어차 피 저 녀석들은 눈치가 빨라서 마주치면 금방 알잖냐. 입이 무거우 니 상관없고. 그런데 인간이 드래곤이라는 것을 알면서도.....분위기 가 희안타? 설명 좀 들어보자, 투비와이즈." 와이즈는 아무래도 이 진드기 녀석의 의문을 풀어주지 않고서는 편 해지지 않을 것 같아서 속으로 끙끙대는데 진이 툭 말을 던졌다. "와이즈와 전 유희 시 친구로 설정했거든요. 에....친구의 친구에게 말을 높이려니 이상하네. 아무튼, 제가 어릴 때 와이즈가 구해 주었 어요. 전 백치였거든요? 그래서 예의가 없는 것을 너 그 럽 고, 상 냥 한. 드래곤 투비와이즈님은 이제껏 제 무례와 실수를 눈감아 주 고 있는 거지요." "..........뭔 말이다냐, 투비와이즈?" 와이즈는 피식 웃었고, 바를로네시는 요 몇 년간 노란 드래곤 녀석 이 대륙을 넘나들며 했던 웃기는 행동과 쓸데없는 화풀이들을 했던 이유가 삼삼하게 생긴 인간 여자-백치를 돌보느라고 열 받아서 그 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고 해도 뭔가 많이 부족한데?' "백치로 안 보이는데?" "전에는 백치였지만 지금은 아니죠. 와이즈 덕에 의지를 가지게 된 셈이에요. 좋은 드래곤이죠?" "......좋은 드래곤....." 와이즈는 진이 한 말에 깜둥이 드래곤이 혼란스러워하는 것을 보고 속으로 낄낄댔다. '나도 못 이기는데 네가 이길 여자가 아니다. 깜둥아.' "어쨌든. 제 일행이 절 찾고 있어요. 와이즈의 친구 드래곤님. 드래 곤이라는 사실은 잊어 드릴게요. 유희 중이라니 인간으로 대하면 되 지요? 이름이 클레이스라고 했었어. 기사 클레이스라고 부를게요. 일단 이 결계부터 치워 주세요. 엘프 라하르네 블루엘 샤님." "블루라고 부르세요. 아가씨." "블루. 전 진이라고 부르세요. 정리는 나중에 하고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지요.....콜린스가 울려고 하잖아!" "............" 결론이 나지 않은 상황에서 진은 블루에게 결계를 거두게 했다. [46] * "콜린스. 우냐?" "레이디! 갑자기 사라졌대서 걱정했어요.....손님들이시네요." 콜린스와 파키오는 얼기설기 넝쿨로 엮은 간식거리가 든 바구니를 들고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휴~ 이쁜 후견인이 갑자기 없어져서 놀랬.....' "레이디. 절 버린 줄 알고 놀랬어요. 하하....죄송합니다. 또 딴 생각 을...." "안 버려. 파키오." 릭은 함께 다시 모습을 들어낸 엘프와 안면 있던 기사 클레이스의 모습에 자신의 생각이 지레짐작이었음을 알고 다시 얼굴이 붉어졌 다. "안녕하십니까. 나이트 클레이스 클레본. 친구분과 이런 곳에서 뵙 게 되다니. 뜻밖이네요." "......저도 뜻밖이네요. 나이트 릭페르 폰 훼이른." "하늘이 아름답고 땅이 너그러운 것은 신이 주신 사랑입니다. 가르 디아엘 저희 신의 축복으로 숲의 속삭임과 생명을 그대들과 나누고 자 합니다. 저는 샤 마을의 라하르네 블루엘 샤 라고 합니다." "예에...안녕하세요, 엘프 님. 저는 콜린스라고 하고 저 녀석은....." "저는 파키오 라고 합니다. 레이디 진과 아는 사이셨나요?" "아니오. 방금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안녕하세요. 릭페르 님. 레이디 진. 일행이신 마법사 님께는 아직 인사를 드리지 않았군요. 하늘이 아름답고 땅이 너그러운......." 진은 블루의 흐트러짐 없는 인사태도에 조금 어이가 없어서 정신 없이 각자 나누고 있는 말들에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방관하는 자 세를 취했다. '뭐야. 처음 보는 사람에게 모두 일일이 저 긴 인사말을 하는 건가? 엘프도 유머가....유머가 아닌가?' 결계가 걷히고 이 사람 저 사람 이야기를 나누고 인사를 하는 동안 와이즈와 클레이스는 머리 속에서 부지런히 의사소통을 전개하고 있었다. [투비와이즈. 저 여자 은근히 열 받게 한다? 죽여도 되지?] [안 돼. 내가 보호하고 있다. 바를로네시.] [기억을 지우든지.] [그럴 필요가 없다니까. 신경 꺼라.] [어떻게 신경을 안 쓰냐. 정체를 아는데도 아주 싸가지가 없는 인간 일세.] [.....내가 보호하고 있댔지? 죽이는 것도 안되고, 공격도 안 돼.] [너. 나 좀 잠깐 보자.] "진. 난 친구와 잠깐 얘기 좀 하고 오겠다. 금방 올 테니, 여기 있어 라." 진은 블루의 인사가 끝나고도, 묵묵히 서 있기만 하던 와이즈의 트 인 말문에 클레이스를 흘끗 보고 실실 쪼개며 대답했다. "와이즈와 친구사이였군요, 기사 님. 회포를 풀고 오세요. 여긴 다른 사람이 많으니까요." [투비와이즈. 죽여야겠다!] [인간들이 많잖아! 당장 유희를 그만 둘 셈이냐? 잔말말고 따라와, 바를로네시.] "대기여. 대지여 원하는 곳으로 갈 길을 열어주십시오. 공간을 가르 고 달빛을 가로지릅니다. 워프!" [워 프!] 들리지 않았지만 귀가 가려웠던 그들의 신경전이, 와이즈의 이동마 법 주문이 끝나고 모습과 함께 사라지자 진은 웃으며 주변을 정돈 했다. "와이즈와 클레이스 기사 님은 친구사이였나 봐요. 릭페르 기사 님 도 블루 님이나, 클레이스 님과 안면이 있으시나 보네요?" ".....예. 그렇지요. 두 분 모두 네카르도의 꽃.....아니, 죄송합니다. 블 루님." "아닙니다. 릭페르님. 꽃이라는 말이 실례가 될 일은 없지요.....클레 이스님은 다르겠지만." 진은 앞서 클레이스와 릭페르의 짧은 대화와 지금 블루와 나누는 이야기로 클레이스가 릭에게 호감을 얻지 못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 았다. 파키오와 콜린스는 눈을 빛내며 엘프를 쳐다보고 있었고, 주위 지나 치던 사람들도 그를 발견하고 하나 둘 모여들고 있었다. "블루님. 반가워요! 오늘 노래 해 주시려고 오셨나요? 저쪽으로 가 세요." 한 여류시인이 그를 발견하고 뛰어 오다시피 한 걸음걸이로 다가오 더니, 블루의 팔을 잡고 끌었다. "아. 아닙니다. 이 레이디 분과.....저기......" 진은 광장의 행인들 중, 몇 명 보이지 않았던. 주로 여자들이 몰려 와 순식간에 엘프의 주위를 둘러싸자, 이곳에서 그의 존재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이해했다. 아가씨들의 유탄공세에 블루의 진땀을 흘리는 듯한 당황하는 태도에 슬며시 웃음이 나오기까지 했다. '아이돌. 아니, 스타였구나. 엘프 블루. 유영이와 수경도 블루를 보면 아주 좋아했을 거야.' "저기. 죄송합니다. 오늘은 레이디 진과 약속이 있어서 나왔습니다. 파. 팔을 놓아주십시오." "레이디?" 진은 블루가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듯한 말에 눈에 쌍심지를 켜고 돌아보는 평민 아가씨들과 두 명의 여류시인에게 -그들은 평 범한 색 없는. 종아리나 발등까지 오는 드레스 차림에, 단지 하프를 들고 있는 것만 다른 여자들과 달랐다.-멋쩍게 웃어 보였다. 그들은 진을 머리에서 발끝까지 훑어보고 질투 어린 시선과, 시기 어린 삐죽댐과 몇 명은 호위로 보이는 기사의 존재에 할 말 많지만 힘없다는 억울 함들을 얼굴에 가득 담고 무릎을 굽혀 귀족 영애에 게 보이는 겉치레 예를 취해 보였다. "..........." 진은 그들이 아무런 말없었지만 은근한 살기를 피워 올리며, 자신의 결정을 기다려 주고 있음에 쓴웃음을 지으며 블루에게 말했다. "제가 뵙기를 청한 것은 블루 님의 노래를 듣고 싶어서였습니다. 노 래 부르는 것을 싫어하시거나, 이런 자리에서 사람들의 이목을 받는 것이 곤란하신 가요, 블루 님?" "아니요. 노래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어디서든 어떤 분들 의 앞이든, 순수하게 노래를 듣길 원하시는 분들이라면 싫어할 리 없지요. 하지만 이 손. 손을 좀 놓아주시면....." 진은 여전히 그의 가까이에 붙어 양팔을 붙잡고 있는 두 명의 여류 시인에게 웃으며 충고해 주었다. "도망가지 않으신다 네요. 저도 노래를 듣고 싶으니, 블루 님을 자 유롭게 해 주시는 것이 좋겠 네요. 여류시인 님들." "............" 블루는 겨우 숨을 돌리더니 광장의 한쪽 가장자리에 큰돌들로 둥글 게 쌓아 만들어져 있는,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심어져 있는 화단으 로 갔다. 진도 앞서 추종자들을 이끌고 걸어가는 엘프의 뒤를 콜린스와 파키 오와 검 집을 몸에 두르는 역할의 가죽 벨트를 만지작거리고 있던 릭과 함께 따라갔다. '달려들지만 않으면 괜찮나 보네. 구경꾼들이 많이 모여드는데.' 블루는 바위 돌에 옆을 향해 앉더니 하프를 무릎에 세우고 켜려는 동작을 하고 있었다. 진은 그의 다시 차분해진 몸짓을 보며 앞쪽까지 걸어나가 기대 어 린 표정으로 서 있는 구경꾼들 틈에 유일하게....바닥에 주저앉아 경 청의 자세를 취했다. "..........." 사람들의 시선이 잠깐 그런 진에게 쏠렸다가 수군대었지만 다시 엘 프에게 모아졌다. "콜린스. 파키오, 앉아. 앉아서 들어야 편하지. 서서 뭐해?" "예? 예에...." "기사 님은 앉지 않으세요?" "....저는 그냥 서 있겠습니다, 레이디." 릭은 기가 막힌 귀족 영애의 행동에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돌 바닥에 그냥....앉네. 앉으시네....의자를 준비....해 와야 하나....' 하지만 릭도 시작 된 블루의 하프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 와이즈는 주문을 외워 인간 마법사인 척 마법을 사용했지만 네카르 도와 한참 떨어진, 풀조차 보기 힘든 황무지로 바를로네시와 워프 했다. 달빛이 가득 한, 듬성듬성 풀 포기가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황야에는 황량함이 감돌았다. 그들은 자리에 내려서자 한 걸음씩 떨어져 경계태세를 갖추었다. "뭐냐. 남 대륙 경계잖아. 여기까지 뭐 하러 오냐, 투비와이즈." "장소가 마음에 안 들면 네가 다시 워프 해라. 이동마법도 엘프를 시켜서 하는 것을 보니 기사 흉내를 내느라 마법을 안 쓰고 있었던 모양이다마는, 보는 인간 없으니 다른 장소로 가던지. 네 레어 근처 로 가든지 해, 안 말린다." "장소야 상관없지. 마법이야 성가시게 매달리는 여자가 있으면 기억 에 손대는 정도였고. 엘프가 있는데 정체가 들어 날지도 모를 마법 을 직접 쓸 필요는 없잖아? 그런데 너 은근히....시비조다? 화는 내 가 내야 하는 거 아니냐?" "아. 아. 나도 그 맹랑한 꼬마에게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러나 보다." 그들의 대치를 푸른 달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벌레 소리조차 없는 황야엔 침묵 속에 두 드래곤의 음성만 퍼지고 있었다. "왜 그냥 두지? 약점이라도 잡혔냐?" "계약을 했다. 보호해 주기로 했어." "뭔 계약?" 와이즈는 거짓말을 피해, 사실 무근이 아닌 선에서 돌리고 건너뛰고 생략해서 말해 저 음흉한 블랙 드래곤의 성가신 호기심을 막아보기 로 했다. "그 여자는 백치였다니까. 걔 어미가 내게 와서 바보라 세상살기 힘 들까봐, 말을 할 수 있게 만들어 달래서 어렸을 때 맡아 길렀다. 인 간의 정신분야를 연구 해 보고 싶어서 마법실험을 조건으로 걸고 받아들였지. 내 뛰어난 마법실력으로...." 바를로네시는 속으로 삐죽였다. 하지만 순수 백 마법으로 저 노란 녀석이 더 앞서는 것은 인정하기 때문에 토 달지 않았다. '뛰어난 마법 실력은 뭐....흥. 흑마법과 검으로 치면 내가 더 세다. 노랑아.' "....내 뛰어난 마법실력으로 효과를 봐서 말만 트인 게 아니라 똑똑 해 지기까지 했지.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시작할 때, 처 음에 날 친구로 인식했다. 지금은 그 꼬마가 말했던 데로 너그러운 내 성격에 그대로 받아주고 있지. 백치 인간이었던 게 사람 몫을 하 며 성장하는 것이 재미있어 보였거든. 이제 됐냐?" "네가 희한안 일을. 특히 인간들에게 관대했던 일은 나도 안다만 아 무리 그렇다고 해도. 아니, 네게는 어쨌든 나에게까지 버릇없는 태 도를 취하는 것은 못 봐주겠다." "드래곤이라는 사실을 잊어 준다고 하지 않던? 그 꼬마는 약속을 지킬 거다. 너 그렇게 속이 좁았냐?" "......이상하게 말이 돌아간다, 투비와이즈? 약속은 지켜졌으니 이제 상관없잖아. 왜 죽이면 안 되는데?" '미쳤냐. 난 아직 금제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형편이다. 그걸 알 면 네 검은 머릿속에서 어떤 생각을 하게 될지 뻔히 아는데 알게 해 줄줄 알고?' "지금 죽으면 곤란해, 바를로네시. 그 여자는 몬스터 보다 나은 재 생력을 가지고 있어. 죽일려면 네 특기인 독으로 녹여버리든지 소멸 시켜야 할 텐데. 그럼 난 그 어미와 했던 거래와 다른, 본인과 약속 한 대가를 못 받거든." "무슨 대가?" "죽으면 시체를 내게 해부용으로 넘기기로 했다. 됐냐?" "........이해가 안 가네." "어쨌든 내 보호아래 있는 인간이니, 못 받아들이겠으면 아예 내 유 희와 겹치지 않게 상관을 안 하면 되지 않냐, 네가 그 꼬마에게 화 풀이를 하게 된다면 나와 싸워야 할거다. 그 꼬마에게 용언이 아닌 인간의 말로 한 약속이라 지켜지지 않아도 큰 상관은 없다만 약속 은 약속이니까." 바를로네시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저 노란 머리 드래곤은 은근 슬쩍 넘어가길 잘하고 말려든 것도 몇 번 있었다. 그는 그 점을 상기하며 여전히 이해가 덜 가서 갸우뚱했 다. 용언이나 본체 상태에서 한 약속이 아니라 해도, 지키는 것은 체면문제이기도 하고. 저 녀석은 평판에 신경 쓰는 편이라 그럴 수 도 있겠다는 생각은 들지만... "너. 설마 그 인간여자에게 빠진 거냐?" "웃기지 마라. 뭔 소리냐. 너 돌았냐?" '어라? 이 녀석 반응 보게?' "뭐야. 유희 상대라더니 같이 다니면서 아직 못 안았냐? 키웠다며?" "내가 로리타 취미가 있었냐? 여자 밝히는 것은 네가 더 했지. 난 그런 코 흘리......" 말하다가 와이즈는 자신이 지금 무슨 말을 하나 싶어서 잠깐 멈추 었다. ".......투비와이즈~ 괜찮게 생기긴 했더라. 근데 그 인간여자가 네가 드. 래. 곤. 이라는 것을 알고도, 네가 항상 자신 있어 하는 그 노란 머리를 앞세우는데도 넘어오지 않았다는 말이지? 백치라 겁이 없었 다는 것은 이해가 간다만, 이제 다 컸는데 꼬시지도 못했다는 거냐? 우하하하핫. 야. 네 경력이 운다.....큭큭....." 자존심이 엄청. 엄청 상했지만 와이즈는 '꼬실 상황이 아니었다 이 깜둥아!' 라든지. '난 처녀만 상대해. 고것은 남자가 있었다고 했단 말이다!' 라거나 '그런 여잔 그냥 줘도 싫어!' 라거나 '내 쪽이 성적으로 놀림받고 있을 정도다, 자식아!' 라는 말들을, 저 까만 드래곤 녀석의 호기심을 이쯤에서 끝낼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냥 꿀꺽 삼켰다. ".......이제 의문이 풀렸겠지, 바를로네시? 마음대로 웃어라. 젠장. 내 가 어떻게 유희를 하던 참견 마! 그냥 이대로 레어로 돌아가지 그 러냐?" 바를로네시는 그가 스리슬쩍 발을 빼려고 하자, 껄껄 웃다가 그의 어깨를 턱 짚었다. "그래. 그래. 네가 찍은 여자라니 봐줄게. 하지만 그냥은 못 물러나 지이~ 죽이지 않고 때리지만 않으면 되는 거지?" 와이즈는 그의 말에 대한 의미를 짐작하고 화딱지가 났다. ".....싸우지 않고 말로 끝내려고 했더니....해 보자는 거냐?" 살기를 피워 올리는 와이즈를 보며 바를로네시는 회. 심. 의 미소를 지었다. 이 노랑이 드래곤 녀석은 아무래도 하찮은 인간이. 그것도 인간여자 하나가 마음대로 안 되다보니 집착하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안 싸워. 안 싸워. 우리가 싸워봐야 남는 게 있겠냐? 서로 힘만 빼 지. 그 여자와 네 말에 동의해서 인간으로 행세해 주겠다니까, 그러 네. 그럼 됐지? 네가 일행과 수도를 떠날 때 나도 유희를 그만 두지 뭐. 모처럼 같은 종족. 유일한 또래가 내 유희 구역에 들어왔는데 편이를 봐 줘야지. 암. 투비와이즈, 가자~ 아~ " '젠장. 젠장. 뭐라고 할 수도 없고....' 와이즈는 무어라 꼭 집을 수 없는 울화가 치밀어서 머리가 어지러 웠다. 그들은 다시 네카르도-네카르도의 세르니프 광장으로 워프 했다. * "........푸른 잎사귀 생명이 움트는 나뭇가지에는 새들이 앉아 노래합니다. 여행객들은 발길을 멈추고 그들의 노래를 듣습니다. 소박한 소망을 가진 누구라도 들을 수 있는 길고 짧은 지저귐들 숲은 그들의 보금자리며 잠시 머무는 손님들에게도 친절합니다 신이 주신 사랑 속에 너무나 당연한 사랑 속에 잊고 사는 사람들이여 때로는 그들의 작은 소망도 들어 주십시오 숲에서는 모두가 친구입니다 서로를 위하면 모두가 행복해 집니다 그곳은 엘프들의 고향이며 신의 사랑이 머무는 곳.........." 숨죽인 사람들은 청아하게 맑고 고운 블루의 목소리에 눈물까지 짓 고 있었다. 진은 그 듣기 좋은 목소리에......잠이 왔다. '이런. 자장가인가? 이런....노래.....가 맞긴 한데. 운율 붙인 시에 가 깝잖아. 리듬의 강약이 부족해. 중간에 하프 연주가 너무 오래 들어 가고....' 블루의 노래는 숲 속에 앉아 있는 기분이 들게 했다. 산뜻하고 싱그럽고 약간 높은 엘프의 목소리는 주위 모든 것에 스 며들고 있었다. 뒤쪽에 커다란 가지와 잎새를 드리우고 있는 나무 에, 푸른 달빛이 감도는 어둔 대기에, 사람들의 가슴속에 하프의 낭 랑한 선율과 함께 공명하듯 퍼지고 있었다. 진은 그 마음을 울리는 고운 노래 소리에, 두고 온 또 다른 '고향'과 친구들을 떠올렸다. 노래는 계속되었다. "......모두가 고향을 그립니다. 당신의 고향은 어디인가요. 세상 어디든 고향은 신의 품 대지의 품입니다......." 진은 와이즈가 돌아와 옆에 서 있음을 알았지만 고개 들지 않고 공 연을 관람하며 중얼거렸다. "정말 녹겠네." ".....녹아라. 너도 엘프에게 반했냐?" 진은 그의 빈정거리는 말에, 서 있어서 한참 위에 보이는 와이즈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아니고, 저 사람. 아니 엘프 말이야." "엘프가 녹아?" "블루가 녹을 것 같다고. 하늘에 땅에 나무에. 처음 봤을 때 너무 아름다운 외모가 분명 눈에 확 띄는 데도 존재 감이 없었어. 마치 자연의 한 부분인 것처럼. 다른 엘프도 모두 저래?" "..........." 클레이스는 와이즈와 나란히 서서 바닥에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는 진과 소년들을 보고 조금 갸우뚱하다가 기사 릭에게 묻는 시선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그는 와이즈와 나누기 시작한 말에 고개를 내리고 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황당한 여자네. 백치과거 때문에 그러나?' "고향에 가고 싶은가 봐. 누구에게 묶여있나?" 진은 블루의, 고향을 그리는 가사로 바뀐 노래에 클레이스를 흘끗 보았다. '어라? 뭐냐. 그 눈초리는. 그래, 내가 붙잡고 있었다. 건방진 인간 아, 어쩔래?' "레이디 진. 행동에 제약이 없으신 분이시네요. 저도 앉아도 되겠습 니까?" "앉으세요. 기사 클레이스님." 진이 거리낌없이 웃으며 말하자 바를로네시-아니 클레이스는 매력 적인 미소를 띄며 '작업'에 들어갈 준비로 곁에 앉았다. 와이즈는 클레이스가 자리를 잡도록 살짝 비켜주며 코웃음을 치더 니 상관 않겠다는 태도를 했다. 블루는 노래를 부르면서도 밝은 엘프의 귀로 진의 말을 또렷이 들 었다. 그리고 클레이스의 버릇이 또 도지고 있는 것을 보며 평소보 다 짧게 노래를 끝냈다. 하프 연주가 멈추자 사람들이- 그중 아가씨 관중들이 소리를 높였 다. "엘프 블루 님. 너무 좋은 노래 에요. 하나 더 불러 주세요, 네?" "그래요. 블루 님. 항상 그렇지만 정말 듣기 좋아요. 한 번 더 불러 주세요." 진은 아쉬운 기분이 들기는 했지만 또 비슷한 경향의 노래를 듣게 될까봐 자신도 옆 사람들처럼 목소리를 높여 말을 했다. "블루님. 다른 소재로, 다른 주제의 노래 없어요? 감정에 관련된 노 래도 돼요. 사랑이나 증오나 꿈이나 뭐 그런 소재로 좀 짧은 거로 요. 너무 기니까. 잠이....아...실례...하하하....." 진의 말에 모두 가 그녀에게 눈이 쏠렸다. '이런. 솔직하게 말을 하는 게 아니었나보다. 낯 뜨겁네.' '잠이 와? 인간의 반응치곤 훌륭하다. 음. 그렇지. 나도 그렇거든.' 클레이스는 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진. 엘프가 사랑을 주제로 노래를 하는 것은 관례에 얽힌 문제라 안 될 거다. 성격상 증오를 소재로 해서도 노래는 못하지." "관례?" "청혼하는 상대에게만 사랑을 주제로 노래를 하지. 안 그렇습니까, 엘프 블. 루. 님?" 와이즈가 존대를 하는 것에 강세를 두는 것을 의식하고 자리에서 내려오던 블루는 역시 유희 중이니 입 다물라는 말로 알아들었다. "그렇습니다. 마법사 님. 제 노래가 부족했나봅니다. 부끄럽네요. 레 이디." "아니에요. 그게 아니고. 굉장히 좋은 노래였어요. 단지....." 진은 블루가 자리에서 일어나 내려오자 파키오와 콜린스와 함께 일 어나며 대답했지만 주위 모여들어 있던 사람들의 눈초리에 말을 잠 깐 끊었다. 그들은 엘프의 노래에 정신이 팔려서 미처 보지 못했던. 유명한 기사로 알려진 검은머리의 클레이스와, 블루와 클레이스 못 지 않은 금발머리의 아름다운 마법사를 발견하고 조용한 소란스러 움이 일기 시작했다. 진은 왠지 사람들의, 특히 아가씨들의 시선에 등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생각했다. '이런...이런 상황에 빠져 본 적이 없어...드래곤과 엘프 사이에 끼어 서 미움을 받다니 참. 하하...난 정말 한 가닥~ 한다니까.' [47] 8-3. 인간의 노래. 민트는 몸종인 여자아이에게 소식을 전해 받았다. "블루 님이 노래를 하신다고?" "예. 마님. 방금 심부름 나갔다가 보고 왔습니다. 세레니프 광장에서 하프를 들고 계시는 것을 사람들의 어깨 너머로 보고 왔지요." "외출 준비를 하라. 드레스는 내가 고를 테니 넌 어서 가서 마차를 준비시키도록 하고 호위기사에게도 준비를 하라고 말해둬라." "네. 알겠습니다. 마님." 민트는 서둘렀다. 준비시간을 최대한 절약하고 바삐 가면 엘프를 만 날 수 있을 것이다. '아이참. 파티에도 잘 나오시지 않더니만 기별도 없이 또 평민들 앞 에서 노래를 하시려나 보네.....이 옷은 안 돼. 블루 님은 화려한 것 을 싫어하신 단 말이야. 보석도 하나만. 머리 장식은 어쩌지?....' 그녀는 급하게 서둘러서 자신의 붉은 머리에 맞춰 붉은 계통의 드 레스를 골라 방으로 들어 온 하녀들의 시중을 받아 갈아입고 머리 도 정리하고 드러난 목에 루비 목걸이를 걸고 빠른 걸음으로 마차 에 올랐다. "세레니프 광장으로 가자. 어서 출발해라." "네. 마님." 민트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백작 가 호위기사들의 말발굽 소리 를 들으며 광장으로 달려갔다. 도착했을 때. 기사들의 부축을 받아 마차에서 내려, 음유시인들이 노래를 부르는 화단으로 그새 많이 몰려든 사람들 사이를 호위기사들의 안내로 앞 으로 나가며 민트는 블루의 마지막 노래 구절을 들었다. 도착하자마자 끝나버린 노래에 안타까웠지만, 평민들이 다시 노래를 청하는 것을 듣고 다시 들을 수 있으려니 하며 숨차게 느껴지는 호 흡을 가다듬고 있다가 민트도 진의 목소리를 구별해서 들었다. 그리고 그녀 곁에 있는 기사 클레이스와 처음 보는 마법사와 노래 를 끝낸 블루가 자리에서 일어나 검푸른 머리의 여행자 복장을 한 소녀와 대화하는 것을 보고 눈이 커졌다. '저 여잔 뭐야! 귀족 여자가 하고 있는 꼬락서니하고는!' 민트는 당당한 걸음걸이로 그들에게 다가갔다. "실례합니다. 기사 님들." 진은 수군거리는 사람들 앞을 기사 두 명의 호위를 받아 하녀를 대 동한 채 당차게 걸어와 앞에 서는, 불꽃같은 머리색의 여인을 보았 다. 머리를 위로 틀어 올려 루비가 섞인 머리 장식 핀으로 고정시키고 흰 목을 드러낸 엷은 붉은 빛이 도는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호두알 크기의 루비를 목에 두르고 폭 넓은 허리 두르게 위에 로프 굵기의 붉은 색실을 꼬아 만든 장식 끈으로, 간격을 두어 여러 번 돌려 허리를 장식하고 매듭을 지어 한쪽에 늘어뜨린 차림으로, 가슴 과 풍성한 드레스 자락을 강조하고 있었다. '예쁘네. 20대 초반? 중반?' 진이 그녀를 관찰하는 동안 민트는 우아한 몸짓으로 손을 내밀어 릭과 클레이스에게 손등에 인사를 받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길레스피 백작부인." "나들이를 나오셨나 보네요. 백작부인. 반갑습니다." 와이즈는 가볍게 목례를 해 보였고 블루도 안면이 있는지 그 긴 인 사말을 주어 섬기지 않고 약간 등을 굽혀 보였다. 진은 여전히 그녀를 멀뚱거리고 쳐다보고 있었다. [후작의 성을 써라. 안 그러면 네가 먼저 예를 취해야할 거다. 진.] 진은 와이즈의 전음을 듣고 '너 뭐냐?' 하는 듯한 눈초리의 빨간 머 리 백작부인에게 웃음 띄운 얼굴로 영화에서 흔히 보았던 신사들의 인사법을 흉내내어 인사를 하며 말했다.-한 손을 배에 대고 다른 한 손을 옆으로 펴며 허리를 약간 굽혀 보였음.-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전 드리얀의 진 폰 리툰이라고 합니 다." "..........." 잠깐 주위의 작은 소란이 멎었다. 민트는 약간 당황해서 드레스 자락을 잡고 살짝 몸을 숙였다 펴며 말했다. "실례했습니다. 후작 영애. 전 길레스피 백작 가의 안주인. 민트 길 레스피라고 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부군은 함께 오시지 않으셨나 보네요?" 민트는 무례를 범할 뻔한 것 때문에 약간 상기되었지만, 새파랗게 어린 상위귀족에게 다시 우아해진 표정과 몸짓으로 대답했다. "길레스피 백작 님은 별세하셨습니다. 영애." ".....실례 된 질문이었군요. 죄송합니다. 부인." '미망인이었군! 재밌겠다.' [............] 민트는 초조해 졌다. 네카르도의 제일 가는 기사와 지위 높은 후작 가의 후계자와 엘프 와 그녀의 마법사로 보이는, 누구 못지 않은 외모의 실력 있는 마법 사의 호위를 받고 있는 저 건방지고 무례하게 보이는 타국의 후작 영애는 너무 젊었고. 입고 있는 구질구질한 옷차림에도 불구하고... 자신보다 아름다워 보였다. 저 바람둥이에 무정한 기사 클레이스는 미뤄두더라도 블루는..... 그녀가 열심히 자신과 진을 비교하고 있는 사이 백작 가의 기사로 따라왔던 호위들도 진에게 예를 갖춰 보이고 있었다. 진은 하고 있는 차림새를 이유로 손등을 내밀지 않고 남자들처럼 목례만 해 보였다. '새파랗게 어린 계집애가. 블루 님의 노래가 잠이 오네, 다른 주제로 불러라 마라 했었지? 블루 님이 너무 좋은 분이라 가만있지. 난 가 만 못 있겠다. 후작집안이면 다냐, 드리얀이면 멀고도 멀다. 무서울 것 없지!' 와이즈는 눈을 깜박대다 고개를 쳐들어 달을 쳐다보았다. "전 블루 님의 열렬한 팬이랍니다. 리툰 영애. 노래를 더 듣지 못하 는 것이 아쉽네요. 아가씨께는 흡족치 않게 들릴지 몰라도 전 더 듣 고 싶은데, 불러주지 않으실래요, 블루 님? 부탁드려요." "예에. 민트 백작 부인. 저도 그러했으면 하지만 오늘은....저기....." 블루가 민트의 나긋나긋한 청에 더듬거리며 말하는 것을 보며 진은 눈치 빠르게 둘의 관계를 파악했다. '우하하. 재밌다. 미망인에게 프로포즈 받고 있었나봐, 블루는. 저 도 망가고 싶어하는 얼굴 좀 봐. 와이즈!' [....재밌기도 하겠다.] '....근데 친구 드래곤은 내 생각을 알 수 없는 거야?' [마음을 읽는 것은 골드 드래곤의 특기라고 했잖냐. 하지만 조심해 라, 눈치 빠른 녀석이니까.] 민트가 약간 찡그린 얼굴로 진에게 연극 배우처럼 어조에 힘을 주 며 말해 왔다. "블루님의 노래를 저는 무척 좋아합니다. 배우지 못한 평민들도 그 것은 인정할 겁니다. 그런데 리툰 영애께서는 블루님의 노래가 싫으 신가 보군요. 노래를 감상하는 면이 부족하신가 봅니다. 아가씨께서 싫어하시니 블루님이 다시 노래를 들려주실 의향이 없으시나 봐요." "아니요. 부인. 그게 아니고....." 블루는 진땀을 흘리며 자신의 코앞에 다가와 서서, 진을 향해 말하 는 붉은 머리여인에게 더듬거리며 말했다. 진은 은근히 포장된 언어 구사로 싸움을 걸고 있는 민트에게 빙긋 웃어주었다. "아니요. 제게도 무척 아름답게 들린 노래였습니다. 듣기 힘든. 엘프 의 노래였지요. 하지만 인간은 그런 노래를 부를 수 없습니다.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무척 드물겠지요. 저는 오늘 태어나서 처음으로 엘프를 보았습니다. 엘프는 자연에 가까운 존재더군요. 숲 과 나무. 그 자체인 종족이 부르는 노래에 공감하는 것이야, 감정을 가진 존재라면 누구나 긍정하겠지요. 하지만 우리 인간들은 따라 부 를 수 없을 고귀한 느낌의 노래였습니다. 기분 상하셨다면 죄송합니 다. 블루님." "아닙니다. 레이디. 제 노래를 가장 잘 이해해 주신 말씀이신대요. 지나치게 높게 평가해 주셔서 오히려 부끄럽습니다." "..........." 진의 말이 맞았다. 음유시인들은 애를 써서 엘프의 노래를 따라 불 러도 흉내 밖에 되지 않았었다.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시인이라고 해도 엘프 특유의 공명 음을 낼 수 있기는 불가능에 가까웠으니까. 그들의 대화는 가깝게 서 있던 다른 음유시인들도 충분히 들을 수 있었고 그들은 들고 있던 하프를 만지작대고 있었다. "그렇다는 말씀은. 영애께서는 달리 부를 수 있다는 말씀으로 들리 는 군요." 진은 주위 몰려들어 있던 사람들이, 귀족들이 얼굴을 맞대고 나누는 이야기에 약간 떨어져 서서 웅성거리고 있는 것을 둘러보았다. 아까 그 두 명의 여류시인과 블루와 비슷한 복장을 하고 있는 젊거 나 나이든 다른 음유시인들이 평민들 앞에 진의 일행과 가까이 서 서 궁금증을 들어낸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 '와이즈. 다른 나라 음유시인들의 노래도 저들 같애?' [....그런 편이지. 왜? 그 옹달샘 노래라도 부르려고?] "............" 진은 민트를 내버려두고 시인들 앞으로 갔다. "음유시인분들. 인간의 목소리는 엘프와 다릅니다. 엘프가 표현하는 노래를 따르려 하다보니 오히려 인간이 부를 수 있는 좋은 노래들 이 만들어지지 않는 거겠지요. 살아가는 환경과 가치관이 다른 종족 의 노래를 인간이 굳이 따라 할 필요는 없습니다." "..........." "노래란 시인만 부를 수 있어서는 안됩니다. 감정을 가진 사람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신분에 상관없이 모두 부를 수 있어야합니다. 어차피 노래란 가진 감정을 표현하는 수단이니까요." 자신의 말에 대한 대답을 초라하고 무지하기 이를 데 없는 평민들 앞에 가서 하는 진을 보고 민트는 모욕감을 느꼈다. "그렇다면 불러보시지요. 리툰 영애. 저도 호기심이 이는 군요. 영애 께서 부르시는 노래를 꼭 들어보고 싶네요." 젊은 미망인의 도발에 진은 웃어 보이며 친절하게 대꾸해 주었다. "불러드리지요. 백작부인. 하지만 세상엔 공짜란 없는 법이랍니다." '옳은 말이다, 암. 불러봐라 건방진 인간 여자야. 잠 오지 않게 잘 부르면 나도 동전을 던져주마.' 사교계에서 콧대 높기로도 유명하고, 자신에게 노골적인 유혹을 하 기도 했던. 지금은 블루를 쫓아다니며 소문을 흘리고 있는 귀족 미 망인과 방금 먹이로(?) 찍게 된 여자와의 신경전을 지켜보던 클레이 스는 진의 '공짜는 없다' 라는 말에 또 끄덕일 뻔했다. "여기 하프를...." 여류시인 중 한 명이 자신의 하프를 빌려주겠다는 의사를 표하자 진은 그 고풍스럽기 이를 데 없는 악기를 물끄러미 쳐다보다 웃으 며 대답했다. "인간의 목소리도 충분히 악기랍니다, 아가씨. 그리고 제가 부를 노 래는 하프 연주가 맞지 않아요. 게다가 전 그걸 켤지도 모르거든요. 하지만 고마워요. 여러분 모두를 위해 불러 드릴게요." "............." "아. 그리고 제가 부르는 노래의 가사에 연연하지는 마세요." 민트는 화가 치밀었다. 저 예의도 모르고 경우 없는 계집애가 정말 노래를 하려고 나서고 있었다. 그것도 품위 없이 평민들 앞에서! 사교계나 다른 귀족부인들이나 영애들 앞이라면 모의를 해서라도 비웃음을 보내거나 따돌려서 떼어버릴 수 있겠지만, 여긴 그녀의 편 이 없었다. 자신이 마음을 얻기 위하여 그토록 애를 쓰던 아름다운 엘프 블루 는, 인간들의 신분을 의식하지 않는 종족의 특성상. 그가 그랬던 것처럼 전혀 상관없다는....아니 차라리 기대 어린 표정 을 짓고 있는 것을 보고 민트는 울화가 치밀었다. 기대를 하는 듯한 표정은 다른 남자들도 마찬가지였다. '흥. 얼마나 잘하나 보자! 잘난 체를 해도 비웃어주면 그만이지!' 진은 귀족부인과 기사들 앞이 아닌, 음유시인들을 선두로 모여 있던 평민들과 행인들 앞에서. 두 걸음 뒤로 물러나 머리 속의 저장된 곡목을 뒤져 선곡을 했다. 이들의 정서에 크게 어긋나지 않을, 하지만 확실한 인상을 심어 줄 노래로 진은 한국에서 친구들과 노래방에 가면 귀 따갑게 들어야 했던 수경의 18번을 골랐다. 숨을 들이쉬고 특유의 음성으로 무게 있고 잔잔하게 시작되는 노래 가사에 맞춰 감정을 실어-다른 차원, 지나간 과거를 떠올리며 목소 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젠 너의 모든 것을 지워야겠지 더 짙은 어둠의 숲 저 밖으로 지금까지 사는 건 너 있는 추억 때문이었지 어느새 난 너의 짐이 되어 있었던 거야 다신 우연히도 만나지 말아 가슴에서 죽어간 끝이 보이지 않았던 그리움 내 지친 이 가슴속을 누가 위로해 줄까 혼자만에 사랑으로 남은 나 추억은 이쯤에서 접어야만 하는 거야 아픔은 혼자만의 몫인 걸 아픔은.... 이젠 모두 지난 강에 떠나 보내야하는 너를 뒤로 한 채 돌아선 거야 주체할 수 없었던 눈물의 끝을 감추면서 내 지친 이 가슴속을 누가 위로해 줄까 혼자 만에 사랑으로 남은 나 추억은 이쯤에서 접어야만 하는 거야 아픔은 혼자만의 몫인걸 아픔은...... 가슴에서 죽어간 끝이 보이지 않았던 그리움 내 지친 이 가슴속을 누가 위로해 줄까 혼자만의 사랑으로 남은 나 추억은 이쯤에서 접어야만 하는 거야 누구의 가슴으로 기대어 살까 아픔은 혼자만의 몫인걸 아픔은....." 진은 노래를 하면서 어쩌면 상희를 상민에게 돌려주지 않고 다른 차원까지 데려온 것이 잘못은 아니었을까 하는 우울한 생각이 들었 다. '미안해. 상민아....상희야, 돌아가고 싶니?' [.............] 진은 봄밤 작은 바람 한줄기가 얼굴을 쓸고 지나가는 느낌을 받았 다. '괜찮아.... 상희는 여기 있고 싶어 할 거야. 틀림없이 그럴 거야.' 진은 노래를 들으며 가슴을 부여잡고 소리 없는 울음을 삼키고 있 는 사람들을 보며 위안했다. 진의 노래는 사람들을 바닥에 주저앉게 했다. 엘프의 노래가 신선한 바람에 향기를 실어 사람들 가슴에 스며들었 다면, 진의 노래는 그들의 마음 깊은 곳의 응어리를 끄집어내다 다 시 거센 바람이 되어 머리와 심장에 타격을 주는 듯 했다. 그 성량 높은, 힘을 실은 노래 소리는 달빛 가득한 광장의 사람들을 휘몰아치고 건물 벽에 울려 돌아오는 메아리를 만들어 냈다. 콜린스와 파키오는 눈물을 글썽이며 가슴을 붙잡고 있었다. 릭은 경직 된 자세로 서서 진의 입술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고 블루는 하프를 쥔 손에 힘을 지나치게 주어서 손가락 마디가 하얗 게 되어 있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드물게 미소를 잃고 멍한 표정 을 짓고 있었다. 와이즈는 묵묵히 듣고 있다가 클레이스의 흘끗거리며 말을 걸려다 말다 하는 행동을 무시하고 있었다. 민트는 진의 노래를 듣다 입을 틀어막아야 했다. 평민들은....대부분 체면치레가 필요 없는 그들은, 블루의 노래를 들 을 때의 진의 자세로 바닥에 주저앉아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노래가 끝나자 진은 블루에게 평을 청했다. "인간의 노래도 괜찮지요, 블루님?" ".......레이디.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훌륭합니다. 정말 부끄럽네요. 그렇게 마음을 울리는 노래는 저도 이제까지 들어보지도, 불러보지도 못했습니다." 블루는 진에게 대답하면서 뒤늦게 그 아름다운 파란 눈동자에서 눈 물을 만들어 냈다. 그는 자연스럽고 순수한 경탄를 표해 보였지만 다른.... 사람들은 노래의 여운에 여전히 말문이 막혀 있었다. [네가 가르쳐 주었냐? 특이한 노래다....아니지. 나도 처음 듣는 형태 의 노래인데...네가 가르쳤을 리는 없고...] [몰라. 나한테 일일이 묻지 마라. 바를로네시.] [....뭔가 참 묘한 가사 아니냐?] [가사에 연연하지 마란 소리 못 들었냐? 기껏, 인간의 노래가지고 무식하게 놀지 좀 마라, 바를로네시.] [............] "레이디 너무 슬프고 너무 목이 막혀요. 더 듣고 싶어요." "그래 더 불러봐라, 진. 내게도 괜찮게 들렸다. 다른 분들도 모두 원 할 것 같은데...." 파키오가 얼굴을 싸매고 있는 콜린스의 옆에서 눈물을 훔치며 하는 말에, 와이즈가 썰렁하게 들리는 내용으로 맞장구를 쳐주었다. "아무리 그래도 엘프의 노래와 견주지는 못하겠지요." "아닙니다. 레이디. 저희가 부르는 노래와 너무나 다르지만 굉장히 아름답고 심금을 울리는 노래 였는 걸요. 저도 또 듣고 싶습니다." "......저 분들을 위한 노래였지만, 원하신다면 이번엔 '벙어리 하프'라 는 노래를 부를 게요. 듣기 뭐하시면 귀 막으셔도 되어요. 여러분." ".........." 웃음기 띈 진의 말에 아무도 귀 막는 사람은 없었다. 진은 벙어리 바이올린을 벙어리 하프로 바꿔서 다시 노래하기 시작 했다. "라라 라라라라..... 내 마음을 울리던 그대의 금빛하프 주인 없는 빈방에 혼자 놓여있네 이젠 그대가 부르던 슬픈 노래들은 누가 들려줄까 누가 들려줄까 꿈이 높은 사람들에 도시를 떠나 먼 들녘에 제비꽃이 되고 싶다며 욕심 없이 착한 눈을 글썽거리던 그대 지금 어디에 그대 지금 어디에 밤이 내린 거리를 쓸쓸히 걷다가 그대의 맑은 웃음이 문득 떠올라 조그만 그 까페를 찾아갔지만 그대는 없었네 그대는 없었네 침묵에 강에 떠 있는 낡은 금빛하프 어느 날에 닫혀 있는 가슴을 열까 아흔 아홉 어두운 굽이 어디쯤에서 다시 눈을 뜰까 다시 눈을 뜰까 라라 라라라라 라라..... 우~ 우~ 라라 라라라라 라라 라라라라 라라 라라라~ " 평민들 사이에서 소리내어 우는 사람들까지 나왔다. 진은 다시 그들의 순박함과 물들지 않은 순수한 영혼에 고개 숙이 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진은 시인들에게 말했다. "노래란 감정을 표현하는 가장 좋은 수단입니다. 영웅의 일대기나 신을 찬양하는 서사시도 훌륭하지만 인간의 감정을 다루는 노래야 말로 앞으로 모두에게 불리게 될 노래겠지요. 노래는 소리를 낼 수 있는 모든 사람이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 "그런 노래를 불러주세요. 당신들이 할 일이잖아요. 힘없고 억울하 고 희망을 찾는 사람들에게 노래를 통해 위로하고 기운을 북돋아 주시면 좋겠어요. 음악은 문화이고 음유시인들은 문화 자체가 될 수 도 있습니다. 아주 큰 힘을 가지신 분들이지요. 글을 배우지 못한 농노들도 평민들도 노래는 따라 부를 수 있으니까요. 당신들은 그들 에게 힘을 실어 줄 수 있습니다. 용기를 주고 희망을 심어 줄 수도 있지요." "..............." 처음 블루를 발견하고 뛰어와 그를 끌어가려 했던 여류시인이 눈물 을 손등으로 닦으며 대답했다. "아가씨. 노래는......정말 강하고 슬프고 뭐라 표현하기가 힘드네요. 맞아요. 저도 블루님의 노래를 흉내내고는 했지만 엘프와 인간은 다 르니 흉내밖에는 되지 않았어요. 하지만 아가씨의 노래는 인간의 노 래면서도.....너무 가슴이 아파요. 배우고 싶어요. 저도 그런 노래를 부르고 싶어요." "제가 불렀던 노래를 그대로 부르는 거야, 어렵지 않겠지만 형식을 알았다면 다른 좋은 노래도 만들 수 있을 거 에요.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을 노래로 만들어 내는 일은 대단히 광범위해요. 기분 좋은 흥 얼거림도 노래가 될 수 있고 경쾌한 리듬을, 느끼는 감정과 생각들 에 맞춰 지어내면 되어요. 어려울 것 없어요. 노래 가사에 고운 목 소리에 연연하지 않고 높낮이로 박자로 표현하면 되어요." ".......아가씨는 목소리도 고와요." "고마워요." 진은 웃었다. "무슨 뜻인지 조금은 알겠어요. 하지만 그런 식으로 불러 본적이 없 어서 막막하게 느껴져요. 솔직하게 사람들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호응을 받을 수 있는 노래가 된다는 말씀이시죠?" "그래요." "저도 그런 노래를 부르고 싶어요. 아가씨. 그리고 가사도 너무 슬 퍼요. 슬픈 사랑을 하셨나봐요...." 다른 한 명의 여류시인의 말에 진은 너무 슬픈 주제를 택했나 싶었 다. 앞으로 사람들의 노래가 무지 우울해지진 않을까 해서 머리를 굴려야 했다. "들어서 웃음 지을 수 있는 노래도 좋아요. 인간의 감정이 슬픔만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재미있는 노래도 만들어 보세요. 들어서 사 람들이 웃으며 박수치는 노래도 좋은 노래 에요. 에....생각이 안 나 네. 하하...제가 너무 머리 속이 어둡다보니 밝은 노래가 생각이 안 나네요.....전 시간이 많이 없어서 이제 가야해요. 도움이 되었다면 그것으로 됐지요." "어디로 가세요? 아직 밤이 늦지 않았으니 머무시는 숙소에 함께 가고 싶....아, 귀족 분이셨지요. 죄송합니다." 진은 민트와 와이즈들과 약간 떨어져, 좀 전의 블루와 비슷한 상황 에 빠져 있는 것을 깨닫고 턱을 긁적이며 일행을 돌아보았다. "파키오. 아담스 아저씨의 여관이 이곳에서 머니?" "아니요, 레이디. 가까워요." "그래? 여관식당이 규모가 얼마나 돼?" "꽤 큰 편이에요. 고급은 아니지 만요." 진은 고개를 끄덕이고 우호적이 된 시인들에게 대답해 주었다. "아담스라는 분이 운영하는 여관으로 갈까해요. 오래 시간을 함께 보내지는 못하겠지만 원하시면 식사하시고 나중에 오셔도 되요." 그들은 평민인 자신들에게 노래까지 불러주고 초대를 해 주는 진에 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백작부인. 저는 이제 숙소로 돌아갈까 합니다. 헤어져야 겠네요. 다 음에 기회가 닿는다면 또 뵙겠습니다." "아, 전 나들이를 나온 걸요. 영애와 좀 더 이야기를 나눴으면 하는 데 실례가....될까요? 저녁을 사겠습니다. 공....무료가 아니라고 하셨 으니...." 민트는 진의 노래에 가슴이 저렸었다. 그녀는 그 박력 있는 노래에 넋 나가 있다가 그녀가 평민 여자들과 하는 대화에 정신을 수습하 고, 작별인사를 해오는 진의 말이 끝나자 서둘러 말을 했다. 아무래 도 클레이스와 블루도 따라갈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더 조급해져서. "평민들의 식당에 가시는 것이 부인의 품위에 손상이 가지 않는다 는 생각이시면 함께 가셔도 저는 상관없습니다." ".......그럼...마차에 저와.." "아니요. 저는 그냥 걷겠습니다. 권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인." 진은 우두커니 서있는 기사들에게 눈을 돌렸다. "기사 분들은 귀가하지 않으시나요?" "......숙소까지 모시겠습니다. 레이디 진." "저와 블루도 저녁식사는 아직 이거든요. 레이디. 와이즈 이 친구도 만났는데 함께 가야지요." "......배는 고프지 않습니다만, 저도 레이디의 노래를 더 듣고 싶으니 따르겠습니다." "다 가시려나 보다. 가자 진." "파키오. 안내해." "네. 레이디." 파키오가 먹지 않은 간식거리를 담은 바구니를 들고 앞장서고 진은 그를 따라 와이즈. 클레이스. 블루. 릭페르. 콜린스와 함께 광장을 벗어났다. 민트는 그녀의 마차로 가서 부축 받아 오르며 그들을 따라가도록 마부에게 지시했다. '이거.....오리 엄마가 된 것 같잖아....' [.......죽을래? 내가 오리라는 거냐?] 자신까지 해당된 진의 말에 와이즈가 성을 벌컥 내었다. 진은 쿡쿡 웃으며 파키오의 들뜬 목소리를 들었다. "레이디. 전 오늘 생애 최고의 생일이에요. 정말 너무 기뻐요. 신의 행운이 모두 제게 쏠린 것 같지 뭐 에요!" "생일이었어, 파키오?" "예에..헤헤....레이디를 만나서 성찬도 먹었고 꿈도 가졌고 멋진 노 래도 듣고 최고라는 게 과장이 아니에요." "생일 축하 노래가 빠졌구나, 파키오. 노래 불러 줄게." "생일 축하 노래요?" "그래......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친애하는 파키오. 생일 축하합니다.~~ " 진은 파키오를 위해 짧은 노래를 불러 주며 푸른 달빛이 내려앉는 네카르도 수도의 거리를 걸어갔다. [아무에게나 노래를 불러주네...? 단순하긴 하지만. 저 노래도 처음 듣는다. 좀 전의 노래는 세이렌의 노래를 연상시키더니.] [신경 끊으랬잖냐. 바를로네시.] [.....더 신경 쓰이는데? 마음에 들기까지 해. 투비와이즈.] 와이즈는 얼굴을 찡그리며 불빛이 새어나오는 여관 건물로 진을 따 라 들어갔다. [넌 분명히 내가 수도를 떠날 때 유희를 그만 둘 거라고 했다. 바를 로네시.] [...........] '뭘~ 저 인간 여자를 꼬셔서 레어로 데려가면 그만이잖아. 노랑아~ ' 와이즈는 깜둥이 드래곤의 엉큼한 생각들이 충분히 짐작되어 머리 가 아파 왔다. '진드기 같은 놈. 너도 한번 당해봐라.... 진! 저 녀석 물 먹이지 않으 면 금제고 뭐고 확 태워버려 주마. 젠장.' [48] * 아담은 네카르도의 쟁쟁한 귀족들을 자신의 가게로 우루루 끌고 들 어오는 소녀에게 눈을 껌벅여 보여야 했다. 생글거리는 얼굴로 진은 '아담스 아저씨. 테이블을 좀 붙여 주세요. 손님이 많이 오실 거 에요.' 했고, 그는 잠깐 당황했던 정신을 수습 하고 종업원을 시켜 이미 자리에 앉아 식사를 하고 있거나 술을 마 시던 손님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식당 중앙에 탁자를 길게 이어 붙 여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또 멀뚱거려야 했다. 붉은 머리의 귀부인의 반발에 진은 '콜린스와 파키오는 제가 후견인 으로 있거든요. 시종이 아니에요, 부인. 함께 앉아도 되겠지요. 기사 님들?" 하고 말하더니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일행을 모두 한자리에 몰아 앉게 했다. 주문을 받으러 몸소 자리로 갔던 주인 아담스는 얼굴이 머리색처럼 붉어진 귀족여자가 '풀 코스! 최고급으로!' 라는 말에 몸을 돌리려는 데 진의 다음 말에 멈칫해야했다. "식사가 준비되는 동안 잠깐 실례합니다. 여러분. 아담스 아저씨. 화 장실 어디 에요?" "........에...화장실이요..." ".....진 품위 좀 지켜라. 기사 분들이 당황 하시잖냐." "아. 그런가? 실례했습니다....쿡...따라오지 않으셔도 되요." 자리에 착석했다가 진이 일어나자 벌떡 벌떡 일어섰던 기사들은 진 이 여관 주인에게 '화장실.' 이라고 묻는 말에 대부분 얼굴이 빨개졌 다. 물론 드래곤과 엘프는 제외되었지만. '나중에 장난 쳐봐야지. 일어났다. 앉았다. 일어났다 앉았다.....' [.....나 없는 자리에서 그래라!] "얘기 나누고 계세요. 제 소개는 와이즈가 해 줄 겁니다." 귀족들의 정식 소개 자리에서 슬그머니 발을 빼고 진은 아담을 따 라 자리를 벗어났다. 벽 쪽으로 밀려난 테이블에는 그런 그들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의 속삭임에 귀가 가려웠다. * "영애께서는....무척 개방적인 가문에서 자라셨나 보군요. 마법사님." "그런 셈이지요. 제 소개가 늦었군요. 전 와이즈 폰 리툰이라고 합 니다. 부인." 진이 사라지자 염탐 목적으로 물었던 민트는 또 머리가 아파 왔다. '같은 집안이었잖아. 뭐냐! 도대체 둘 사이는.' "제가 또 실례를 범할 뻔했군요. 약. 혼. 자. 되시는 줄은 몰랐습니 다." 와이즈는 민트가 블루를 의식해서 못을 박으려는 말에, 저 검은머리 찰거머리를 떼어내는데 써먹을 방법으로 긍정해 버릴까 했지만.....그 놈에 자존심 때문에. 원래의 설정에 따라 대답했다. "인척이긴 하지만, 저흰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친구 사이입니다." "와이즈. 저 친구는 마법 연구에 성실한 편이라 저 나이 되도록 집 을 떠나 수련하면서 아직 약혼녀도 없답니다. 부인." ".....뭐. 아직 젊어 보이신대요?" "아니죠. 저래 보여도 나이가 꽤 많거든요." [바를로네시 뭔 수작이냐!] [왜? 저 여자도 괜찮은 편이야~ 다리 놔줄게. 금방 넘어 올걸? 자신 없냐?] [....한판 붙어 보자는 거야? 네 눈은 와이번 눈이냐?] [큭큭.....] 그들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서로를 다시 소개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진이 자리에 없다보니 질문에 대한 답을 와이즈가 도맡아 하다보니 자꾸 신경을 건드리는 클레이스와, 진의 노래에 관심을 보 여오며 물어오는 블루와 민트 덕에 골치가 아팠다. 릭은 한술 더 떠서 아무리 인척이라도, 지나치게 허물없는 사이는 무례네 어쩌네 정중히 충고까지 해와서 와이즈는 속으로 혀를 찼다. '뭐 하느라고 이렇게 늦는 거야!......지하에 가 있잖아! 또 뭔가 하고 있나보군. 쳇.' * "아담스. 제게 용건이 있지요? 시간이 없으니 얼른 들을게요. 아담 이 길드 장이에요?" ".....아닙니다, 레이디." 귀족 부인이 데리고 왔던 하녀를 대동시키려는 것을 사양한 레이디 때문에, 가게에 여 종업원이 없어서 그는 직접 그녀를 식사만 하는 손님들을 위해 마련된 작은 간이 화장실 앞까지 안내해야 했다. 주방과 가까운. 음식재료들을 다듬는 곳에서 진이 손을 씻으며 묻는 말에 아담은 딸 뻘로 보이는 어린 귀족 소녀에게 말을 꺼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당연히 고민 해야했다. "시간 없다니 까요, 아담. 길드 장이 아닌데 절 알고 있다면 이미 수도에 저에 대해 알려진 건 가요? 그런 느낌은 못 받았는데요." "......자리를 옮기는 것이 좋겠네요. 레이디." 아담은 부엌 뒷문을 통해 요리사와 종업원에게 지시를 하고 진과 창고로 보이는 문안으로 들어가, 바닥에 교묘히 숨겨둔 출입문을 열 고 지하로 통하는 계단을 내려갔다. 건물 내부와 외부 구조로 보아 하니 프론트와도 연결되어 있는 듯 했다. 지하 공간은 어둡고 좁았다. 아담은 가구도 몇 개 없는 을씨년스러 운 방에 선선히 따라들어 온 진에게 의자를 권했다. "네얀과 라돈에서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그들이 뭐라던가요?" "......네얀에서는 아가씨가 부자고, 네얀의 길드 장이고, 신의 사자라 고 하더군요. 라돈에서는 지혜롭고 힘이 장사 시고 아름답고 화끈하 고 임자 있다는 소리를 전해 들었습니다." '카일이 설쳤나 보군.' 그는 자신이 하는 말이 조금 우습게 들리는 데도 표정에 변화가 없 었다. "통신을 받게 된 상황과 입장이 어떻게 되는 거지요?" "전 길드 장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세력다툼 중인가요?" "그런 셈이지요. 아가씨의 소식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얼마 간은 막을 수 있었지만 저쪽도 곧 소식을 전해 듣겠지요." 진은 희미한 놋쇠 접시의 불빛으로 아담의 중년에 접어든 얼굴을 바라보았다. 다시 만나게 되자 더 확실해 보였다. 그는 샘의 분위기 와 비슷했다. "아담. 통신을 받고 제게 접촉해 온 것은 뭔가 도움이 필요해서 겠 지요? 난 여행 중이에요. 작은 영지에서는 개인의 입장에서 도울 수 있는 문제들에 조금씩 보탬을 줄 수 있었지만 이곳에서도 그러하리 라고는 장담 못 드려요. 하지만 이렇게 큰 도시에서 길드 내, 내분 으로 문제가 있다면 다른 영지의 길드 장에게라도 도움을 청해야지 않나요?" "......그렇지요. 네얀의 길드 장인 아가씨의 도움이 두 가지 필요합니다." "뭔데요?" "자금과 귀족신분." "......설명해 보세요." 아담은 어두운데도 푸른빛이 사라지지 않은 진의 머리카락과 눈을 주시했다. 이 소녀는 희망일까, 허상일까. 아담은 그녀가 전혀 다른 계층의 신분이라는 것을 아는데도 동료... 의 느낌을 받았다. 다시 배신당할 지도 모른다. 그러면 파멸이겠지. 하지만.......아담은 말문을 열었다. "현 길드 장은 귀족입니다. 저와 의형제를 맺은 형 같던 사람이었지 요....." 진은 그가 배신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임을 눈치채고, 아담의 얼굴에 샘의 얼굴이 겹쳐졌다. 이야기하는 내내 듣기만 하던 진은 아담이 말을 마치자 의자에서 일어났다. "도와 줄 게요. 아담." "..........." "수도의 길드 장 패를 돌려 받게 해 줄게요. 그 동안은 이걸 사용하 세요." 진은 마르카 사제의 메달을 그에게 건네 주었다. 아담은 아무 말 않고 그걸 손에 받아, 지하실을 나가는 진의 뒷모습 을 보고 있었다. * ".......화장실을, 짓고 있는 줄 알았다, 진." "와이즈. 품위 좀 지키라 더니?" "난 건물 증축에 관한 얘기였다." 진은 식당 삼면 벽 쪽으로 밀려나 있는 탁자들 중 하나에 광장에서 만났던 시인들이 모두 와 있는 것을 보고 손짓을 했다. "제 손님이니 함께 앉는 것을 허락해 주세요. 여러분." ".............." "시인 분들은 저녁 드셨어요?" "아....저, 아니요. 저희끼리 이야기를 나누다 오는 길입니다. 아가씨 의 노래를 들었던 사람들이 모두 좋은 노래를 불러 주신 것에 고맙 다는 말을 전해 달라고 하더군요. 몇 분 함께 오신 분들도 계시고 요." 진은 그들도 부르고 싶었지만 민트의 째리는 시선에 그냥 눈인사를 하는 것으로 그쳤다. 진은 긴 탁자의 비어있던 아래 자리에 그들을 앉게 하고 클레이스 가 빼어 놓고 앉길 기다리는 상석으로 가지 않고 평민과 귀족들의 경계가 되는 중간자리의 남은 의자를 직접 빼서 앉았다. "............." '흐흐. 꼴 좋다. 깜둥아.' 음식 쟁반이 날라져 오기 시작했다. "차례도 모르느냐! 무지한 것들!" 두 명의 어려 보이는 종업원이 스프 접시를 잘못 놓아 민트에게 듣 는 나무람에 당황하는 것을 보고 진은, 소년의 시선을 잡아 괜찮다 는 뜻으로 무시하라는 뜻으로 윙크를 해 주었다. 그는 얼른 백작부인에게 죄송하다고 중얼거리고 빈 쟁반을 들고 다 시 주방으로 가는 길에 진에게 쑥스럽게 웃어 보였다. [저 여자 갈수록 웃긴다?] [.....너 자꾸 쓸데없이 용언 쓸래?] [...........] 스프 그릇을 앞에 두고 바늘방석에 앉아 있는 얼굴들의 시인들에게 진은 씩씩하게 숟가락을 놀려 떠먹어 보였다. "괜찮아요. 독 안 들었네요. 드세요." ".......예. 감사합니다. 아가씨." 진의 말에 그들은 웃는 표정으로 살벌한 시선의 귀족 부인의 눈길 에서 조금 벗어나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다섯 분이시네요. 수도에 그 정도면 적당한 인원인가요?" "많은 편이지요. 음유시인은 그리 흔치 않으니까요. 여기엔 블루님 이 계시기에 저희가 모이게 되었지만 원래는 저희도 다른 여행자들 틈에 끼어 각자 여행을 다니면서 노래를 하지요." "힘드시겠네요." "마법이나 검을 쓰는 것도 아니니 위험한 일도 간혹 있지만 저희들 은 탐험이나 모험을 하려는 목적으로 여행을 하는 것이 아니니 큰 어려움은 없었지요. 산적들을 만나도 시인들은 그냥 보내 주는 편이 니까요." "우릴 털어서 나올 것은 없을 테니까요. 하하...부끄럽네요." "원래 시인이든 소설가든 가난한 법이죠. 하지만 가난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에요." "........네.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아가씨." 진은 주로 음유시인들과 얘기를 나눴다. 민트는 평민들과 같은 자리에 앉는 수모와 구질구질하고 촌스런 식 당에 앉아 저녁을 먹어야 하는 것에 짜증이 났지만, 옆에 고집을 피 워 앉힌 블루 덕에 참을 수 있었다. 솔직히 진의 노래에 그녀도 감동했지만 그 순간이 지나고 시간이 지날수록 느낌이 엷어지고 있어서 다시 엘프에게 정신이 팔렸다. 진의 처사가 불쾌하기는 했지만 그녀가 시인들과 이야기를 하는 탓 에 상석, 자신의 맞은편에 앉은 클레이스를 비롯해서 릭페르와 블루 와 다른 기사들에게 대화의 주도자가 되자,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을 했다. 그들은 각자 날씨 이야기처럼 흔하고 무겁지 않은 주제로 서로 대 화를 나누면서도 아랫자리에서 오가는 이야기들에 귀 기울이고 있 었다. '노랑이 녀석. 저 여자 행동 패턴을 아니까 처음부터 가운데 앉아 있었군. 이거 뭔가 해 보려고 해도 자리가 너무 멀자나. 쳇.' 진은 시인들에게 책 한 권 분량의 장편 서사시가 아니라도 짧은 가 사 안에 함축적인 의미들을 담아 시민들에게 어필할 수 있음 등을 설명하고, 깨이지 않은 의식 구조의 사람들에게 언론이 가진 힘에 대해 은근슬쩍 돌려가며 설명해서 이해시켰다. '귀족들이 같이 있다보니 낱말 선택에 에로가 많구나. 돌리고 돌려 말하기도 참 어려운 문제야.' 하지만 그들은 진의 말을 잘 알아들었다. 금발머리가 은색으로 탈색되어 가던 묵직한 바리톤 음성의 중년시 인은 진의 부를 수 있는 노래의 종류와 성격에 대해 하는 이런 저 런 이야기를 듣고 열심히 긍정했다. "개인의 감정으로도 전체가 대변될 수 있는 것이 문학이에요. 어려 울 것 없지요? 아이들이 따라 부를 수도 있을 만큼 짧고 쉬운 동요 에도 사람들의 소망이나 희망을 담아낼 수 있어요. 노래는 펜 이전 과 이후를 통틀어 가장 강한 무기 에요. 잘 사용하셨으면 좋겠어요. 돈이 많거나 신분이 높은 분들보다도 더 큰 힘을 가질 수 있는 대 상이 있다면 바로 여러분이라고 생각해요." 대화 중간 중간에 은근히 귀족입장으로 위화감이 드는 말들에 민트 가 끼어 들려고 하면 진은, '어? 블루님. 소금이 필요하신가 보네.' '블루님. 백작부인의 잔이 비었네요.' 라는 말들로 그녀의 관심을 돌 려버리고는 했다. 블루는 자리가 멀어 시인들의 이야기에 끼일 수는 없었지만 엘프의 청각으로 모두 듣는 것은 가능했다. 간혹 민트가 몸을 부딪혀 오지 만 않았다면 그 부드러운 미소도 경직되지 않았을 테지만. 릭은 간간이 말을 걸어오는 민트에게 정중히 맞장구를 치면서도 진 이 시인들을 계몽시키고 있는 것에 신경을 늦추지 않고 생각에 잠 겨있었다. 클레이스는 진의 화법이 흥미롭다는 것을 알았고 그의 트레이드 마 크인 매력 있는 미소를 유지하고 있었다. 와이즈는 진의 잔에 새침해 보이는 얼굴로 포도주를 채워주며 대화 를 부채질하고 있었고, 콜린스는 진의 목소리를 구분해서 들으며 감 정이 쌓이고 있는 파키오와 눈싸움 중이었고 민트의 호위기사들은 묵묵히 식사에 열중하고 있었다. 모두 제각각 속생각들을 하고 있었지만 귀족이든 평민이든 진을 의 식하고 한결같이 한가지는 공통된 생각을 했다. '많이도 드시네.' 식사가 끝나고 자리가 치워지자 진은 그들의 원래 희망에 따라 몇 곡의 노래를 더 불러 주었다. 그리고 따라 부르게 해서 어색한 부분을 지적해 주기까지 했다. 리듬을 만들어 내는데 경험이 없던 그들에게 부르기 쉬운 노래 몇 구절을 들려주고 가사를 만들어 붙여 새 노래를 만들어 부르게 하 는 편법도 썼다. "너무 늦게까지 붙잡아서 죄송해요. 아가씨." "괜찮아요. 시인 분들도 쉬셔야 겠네요." "예. 숙소로 돌아갈까 해요." 그들은 허리 굽혀 인사하고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한 후 돌아갔다. 진은 민트가 나서기 전에 계산을 하고 밖으로 나왔다. "영애. 제가 사겠다고 말씀드렸었는데." 다시 듣게 된 진의 노래에 태도가 부드러워진 빨강머리 미망인에게 진은, 다혈질인 그녀의 성격을 파악하고 이용하고자 다른 요구를 했 다. "파티요?" "네. 부인께선 해 주실 수 있으실 거 에요. 전 로체스터 백작 가의 무도회에 꼭 가고 싶거든요. 무리한 부탁일 까요?" ".....로체스터 백작 님은 파티를 자주 여시는 편은 아닙니다만....뭐 어려울 거야 없지요. 전 내세울 것은 없지만 사교계에서 꽤 인지도 가 있답니다. 하지만....." 진은 그녀의 머뭇거림이 끝나길 기다리지 않고 블루에게 말했다. "블루님. 어떤 자리에서도 노래를 듣길 원하는 사람들 앞이라면 부 르는 것이 어렵지 않다고 하셨지요? 제 노래에 대한 답례로 민트 백작부인이 청하셔서 열게 되는 무도회에서 노래를 불러 주시지 않 으시겠어요? 부탁드립니다." "레이디....노래를 부르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전 무도회가...무섭습 니다." 상기된 얼굴의 엘프는 어렵게 고백을 했다. "한 곡이면 되요. 참석하셔서 노래가 끝나면 바로 돌아가실 수 있게 제가 도와드릴게요." "알겠습니다. 레이디의 노래를 듣는 편이 제가 부르는 것보다 더 낫 다는 생각이지만 뭔가 생각하시는 게 있으신가 보군요." '엘프는 너무 솔직하군. 그런 것은 언급 안 해도 되는데.' [뭐 하려고 그러냐, 진?] '나중에 얘기 해 줄게. 와이즈.' "민트 백작부인. 블루 님이 참석하시겠다니 다른 귀족 분들도 많이 오실 것 같은데 그래도 어려울 까요?" "전혀 요! 문제없습니다. 영애. 맡겨 주세요." "감사합니다. 부인. 릭페르 기사님 늦게까지 호위해 주셔서 감사합 니다." ".....이곳이 숙소가 아닌 듯 한데, 레이디. 불편하실 테고. 저희 집에 가셔서 머무시...." "아니지요. 와이즈와 일행이 신데 저희 집으로 가셔야지요. 레이디." [좋겠다, 진. 인기 많아서.] '조용히 해. 와이즈. 그 놈의 품위 때문에 혀가 꼬여 죽겠다.' "제의는 감사합니다만. 오늘은 그냥 돌아가겠습니다. 릭페르 기사님. 후작 가에 몇 일 안에 정식으로 방문하고자 하는데 허락하시려는 지." "정식 방문이요? 아. 물론이지요. 환영합니다. 레이디." "클레이스 기사 님께서도 블루 님과 함께 파티에 오시겠지요?" "레이디께서 원하신다면 기꺼이 가겠습니다." 목적을 이룬 진은 민트에게 파티 날짜가 정해지는 데로 연락을 받 는 문제를 약속 받고 그들과 정중한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뭘 하려는 거냐, 저 여자?] [바를로네시. 나도 몰! 라! 집에나 가라.] 진은 콜린스와 파키오를 데리고 와이즈와 함께 하루 종일 비워둔 마법학교 앞의 숙소로 갔다. [49] 무도회에 가자 * 진은 숙소로 돌아오자 와이즈를 졸라서 콜린스와 파키오도 함께 마 법으로 샤워를 했다. "콜린스. 잠을 자둬야 할거야. 내일부터 학교에 가게 될 테니까, 면 접도 하고. 파키오도 마찬가지야. 내일부터 해야할 일이 있어. 그만 싸우고 자." 침대 다툼을 벌이고 있던 소년들은 진의 말에 그제야 얌전해져서 잘 준비를 했다. "안녕히 주무세요, 레이디. 마법사님." "그래. 잘 자, 콜린스. 파키오." '슬립.' 시키지도 않았는데 와이즈는 알아서 두 소년에게 주문을 걸어 재웠 다. "그러고 보니 콜린스는 집 떠난 후 매번 강제로 재워지네. 후후...좀 미안하네." "오늘은 안 나가냐, 진?" 진은 간식 바구니를 뒤적여 산새 꼬치구이를 꺼내 군것질을 할 준 비를 했다. "응. 오늘은 그냥 쉴 거야. 하루가 길기도 하다. 라돈에서 아침에 떠 나온 거 맞아? 오늘 한 일로도 충분히 일용할 양식에 대한 가치는 되었겠지. 쉬어야 내일 또 일하지. 난 놀려고 여행을 시작한 건데, 이렇게 애 쓰고 있는 것을 내 신도 알아주면 좋겠다." 와이즈는 외출이 없을 거라는 말에 마법사 겉옷을 벗어 벽에 붙어 있는 옷걸이에 걸었다. "너도 신에게 뭔가 바라는 게 있는 거냐, 진?" "그럼. 나도 사람인데 꿈이 없겠어?" "무슨 꿈?" 2인용 탁자의 남은 의자를 빼어 앉으며 와이즈는 물었다. "글세. 나도 파키오처럼 딱히 뭔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 하지만 사람들의 꿈은 모두 비슷하잖아. 어떤 꿈이든 행복의 다른 말이 되지. 난 평범해지고 싶었는데, 그것만은 맘대로 안 되더라." "진. 별나게 들린다. 이제껏 다른 인간들에게 소원을 물어보고 다니 더니만 자신의 꿈은 맘대로 안 된단 말이야?" "그러게 말이야. 내가 워낙 잘나서 그렇겠지? 그렇게 쳐다보지마, 와이즈. 농담으로 들어도 되잖아." "네 말이 농담인 게 하나도 없는 게 문제가 아니었냐? 그래서. 구체 적으로 무슨 꿈을 가지고 있는데?" 진은 턱을 고이고, 예쁜 머리색의 가짜 인간 마법사를 말똥거리며 쳐다보았다. "왜 물어? 들어주려고, 와이즈?" ".....들어 나 보자는 거다. 단순한 호기심이다. 알면 안 될 정도로 대 단한 꿈이냐?" 진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가 인간과 다른, 다른 어떤 종족 과도 구별되는 초월에 가까운 존재라는 사실을 상기했다. 그 지나치게 차이나는 수명과 힘은, 그 오랜 시간 굳어진 타 종족에 대한 편견은. 오히려 인간을 이해하는데 장애가 되었을 일인지도 모 른다. 그들은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까. 몇 백년도 아닌, 몇 천년의 시간을 무엇에 의지해서 살아온 걸까. 진은 그가 살아온 세월을 가늠하다가 몸서리가 쳐졌다. '뭐든 지나친 것은 좋지 않아.'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내가 지나치다 고?" 인상을 쓰는 그가 진은 불쌍하고 어떤 면으로는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귀여워?! 불쌍해?!! 너 죽을래? 정신이 나갔냐?" '반응이 왜 저리 애 같을까' 와이즈는 못 참고 벌떡 일어났다. 진은 방긋 방긋 웃으며, 그의 살기가 어리기 시작한 눈을 외면하고 꿈꾸는 표정으로 연극대사를 읊는 것처럼 말했다. "말했잖아. 내 꿈은 말이야~ 평범해 지는 거였다니까. 여행을 많이 하고, 좋은 사람도 많이 만나고, 맛있는 것 많이 먹고, 행복해지는 거지. 좋아하는 친구들 틈에서 웃고 있을 때가 제일 행복했었어. 그 런 시간을 많이 갖는 것이 꿈이야. 그러다 보면 나도 욕심이 생겨서 괜찮은 남자 물어서 바가지 긁는 결혼 생활이 하고 싶어질지도 모 르지. 아이도 키우고 싶어질지 몰라. 계속 바램대로 행복해 지면 또 욕심이 생겨서 더 오래 오래 살고 싶어질지 모르지. 음..." 와이즈는 무시를 당한 건지 놀림을 받은 것인지 구분이 안되었지만 상대를 해 주지 않고 슬쩍 비껴 가는 진의 태도에 그냥 도로 주저 앉았다. "....그래도 언젠가는 죽겠지. 그러면 다음 생에서는 너처럼 드래곤으 로 태어나게 해달라고 신께 빌지도 몰라. 아니, 엘프가 더 나으려나. 엘프도 천년을 산다며? 천년.....민트는 그 세월이 무섭지도 않을까. 용감한 여자야, 블루를 좋아하는 것을 보면. 그녀가 나이 들어도 블 루는 여전히 젊을 텐데 말이야.....그러고 보니 블루의 나이를 안 물 어봤네." '바가지 긁는 결혼을 해? 애를 낳아? 드래곤이나 엘프가 되고 싶다 고? .......그래, 니 맘대로 해라. 네 신에게 부지런히 빌어봐라. 쳇.' 와이즈는 진의 하찮고 가당치 않은 꿈 내용에 그녀와 종족이 다르 고 생각자체가 다르다는 것을 다시 실감했다. 아무것도 아닌, 지나치게 평범한 진의 꿈은. 물질계에서 가장 차별되는 드래곤이라는 점과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 같은 것과는 너무 별개의 소리로 들렸다. '깜둥이 말대로 기억을 지워버릴까....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람. 까만 자식 땜에 머리가 어떻게 됐나보군.' "와이즈는 꿈 있어?" "드래곤이 뭐가 아쉬워서 꿈 따위를 꾸냐. 난 부족한 것 없이 잘 살 았다. 인간들의 하찮은 꿈 따위가 우리에게 해당이 될 리가 있냐." "와이즈. 그러니까 내가 불쌍하다는 생각을 하지. 꿈이 없다는 것은 미래를 기대할 수 없다는 소리인데 그걸 몰라?" ".......관두자. 내게 종족으로의 회의를 느끼게 하고 싶은 가본데, 택 도 없다. 날 네 주위 미천한 인간과 똑같이 보지마. 무도회 얘기나 해 봐라, 진." 진은 좀 더 물고늘어지고 싶었지만 밤이 늦었고 잠이 왔기 때문에 화제를 바꾸는 것에 토 달지 않았다. "식당 지하에서 무슨 모의를 했는데? 길드와 관련 있는 거냐?" "응. 아담에게 수도의 길드 내분에 관해 들었어. 길드 장이 로체스 터 백작이라더군." "귀족이 도둑 길드 장을 해?" "사연이 좀 있더라. 시간이 없어서 요점만 듣고 왔지만 현재 수도의 길드 상황에 대해선 얼마든지 짐작 할 수 있지. 아담은 계획이 있긴 하지만 실현시키려면 귀족 인맥이 필요하대서 도와 주기로 했어." 진은 '그만 좀 먹어라' 하는 눈빛의 와이즈에게 바구니 하나를 통째 로 건네 주었다. "혼자 다 안 먹어, 와이즈. 저녁 많이 안 먹는 것 같아 보이던데. 식 욕이 없었어? 드래곤이 식욕이 없다니까 이상하게 들리네." '....참견 쟁이 깜장 드래곤 때문에 열이 받아서 못 먹었다.' "클레이스랑은 사이가 안 좋나봐, 와이즈? 릭페르도 그를 달갑지 않 게 여기는 것 같았어. 블루는 음....모두에게 친절하고 태도가 평이한 데도 클레이스에게는 거리 있게 대하는 것 같았고. 많이 시달렸나 보지?" "그럼. 드래곤이라는 것을 아는 데 엘프가 다른 종족에게 하는 것처 럼 똑 같이 대해 지겠냐? 네가 이상한 거다. 감이 빠른 유사인종들 은 보통 기가 눌리게 마련인데....넌 둔한 거냐, 단순히 겁이 없는 거 냐?" "드래곤도 신의 피조물이잖아. 하긴....난 널 처음 봤을 때 에베레스 트나 K2가 하늘에 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어." "그게 뭔데?" "산. 저쪽 세상에서 가장 높고 험하고 악명 높은 산들이지. 사람들 을 불러서 끊임없이 죽음으로 몰아넣는 무시무시한 산들이야. 하지 만 그게 어쨌는데? 인간은 그런 산도 정복하지. 못 오를 것 없잖 아." ".....날 기어오를 생각은 하지도 마라. 건방진 여자야....기가 막히네." 진은 그의 본체에 언젠가 타! 보리라 생각하고 와이즈의 눈총을 받 아가며 속으로 웃었다. "와이즈. 드래곤들도 성격이 모두 제각각이겠지? 전에 블랙 드래곤 과 레드 드래곤은 성질이 더럽 댔지? 클레이스도 성질이 더러워?" "그럼 넌 그 녀석, 성질이 좋아 보이든?" "글세. 첫 반응은 너보다 차라리 나았잖아. 다짜고짜 불덩이를 날리 지는 않았으니." 와이즈는 야채와 고기를 섞어 둥글고 딱딱한 과일 껍질 안에 넣어 통째로 구워낸 간식거리를 들고, 나무 포크로 파먹으려다가 진의 말 에 실룩였다. "상황이 같냐? 오늘도 네 앞 뒤 없는 성격에 그 녀석 충분히 열 받 았었다. 내가 안 말렸으면 넌 이미 먼지가 되었을 텐데. 무슨 헛소 리냐!" "성격이 괴팎 해?" "호기심이 누구 못지 않은 녀석이다. 머리는 좀 딸리는 편이지만 블 랙 드래곤들은 사소한 것에 집착하는 면이 있지. 흉계 꾸미길 좋아 하고 원한은 절대 잊어먹지 않는다. 어떤 식으로든 보복하지. 널 공 격하지 않겠다는 다짐은 받았다만, 생명에 지장 없는 일에는 나도 더 못 도와준다. 조심하는 게 좋을 걸." "흠....보복을 할 지도 모른다고? 너랑 사라졌다 돌아 온 후엔 엄청 눈웃음을 치던데 날 찍었나 보군." "............." "웃겨. 드래곤 주제에, 인간을 넘보려고 하다니!" "......드래곤....주. 제. 에. ?" "농담이야. 와이즈. 반어법이었어. 아, 영광이구나 드래곤이 날 찍~ 어 주다니~ " 진은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와이즈는 그 말이나 저 말이나 마음에 안 들었다. "그 자식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으니 길드 이야기나 해봐라, 진." "그러지 뭐....." 진은 아담에게 들은 이야기를 들려주며 해설까지 덧붙였다. 현 길드 장 에릭 로체스터는 백작 가의 둘째 자제로 형이 이미 차 지한 작위에 미련을 버리고 평민들을 상대했다. 젊은 치기로 그는 귀족 신분에 얽매이지 않았고 친구로 대해 주는 드문 귀족에게 평 민들은 신뢰를 하게 되었다. 그는 길드의 존재를 알았고 쉽게 요직에 올랐다. 처음에 그는 분명히 친구였다고 한다. 하지만 근본 귀족 사고방식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던 그는 치정에 얽힌 결투에서 형이 상대에게 패배를 하고 숨을 거두자 작위를 넘겨받게 되었고 다시 귀족계층으 로 돌아갔다. 하지만 여전히 길드 장이었고 길드 원들을 우려내기 시작했다. 가문의 손상된 체면과 몰락하기 직전의 백작 가를 부흥시키기 위해 하층민들의 상납금을 이용하게 되었고, 길드는 그의 세력과 다시 모 이게 된 옛 세력으로 양분되었다. "젊을 때 그는 아담과 의형제를 맺을 정도였는데, 원래는 아담이 길 드 장이 되었을 테지만 그가 하고 싶어하는 것을 알고 아담이 양보 를 했나보더라고. 귀족 가의 둘째아들이었다면 가문을 책임질 일도 없었을 테니 형보다 자유로운 생활이 가능했을 거야. 이곳은 귀족들 이 많이 몰려있는 수도다 보니, 그 놈의 소문이나 품위 문제가 개인 영지보다 까다로웠을 거야 뻔하잖아. 형의 일도 내가 보기엔 큰 일 도 못되던데 결투까지 하고 결과가 패배로 나오다보니 백작 가는 그 후 다른 귀족들에게 외면당하고 있는 입장이지." "무슨 스캔들이었는데?" "에릭 경의 형수인 백작 부인이 바람을 피웠대나 어쨌대나...뭐 그런 걸로 칼부림까지 하냐. 참았으면 안 죽었을 텐데. 부인을 끔찍이 위 하는 것도 아니고 단지 체면 때문에 말이야. 정말 바보들 아니야?" 와이즈는 천장을 향해 한숨을 쉬었다. "로체스터는 자신에게 은근히 의지해 오는 하층민 친구들과 지내는 것이 재미있었는지도 모르지. 그런데 형이 죽고 작위를 넘겨받게 되 자, 사람이 변했대. 아니, 원래의 신분과 사고방식으로 되돌아간 걸 로 보여." 더는 못 먹을 것 같아서 손을 뗀 바구니를 와이즈가 가져갔다. 진은 잠이 쏟아져서 빠르게 이야기를 이었다. "문제는 말이야. 도둑길드는 용병길드와 마법사길드 사람들의 중복 가입이 가능하다는데 있어. 길드 원이 꼬맹이들이나 거지들로만 구 성되어 있다면 돈이 되면 얼마나 되겠어. 로체스터는 몇 년을 길드 장으로 있었고 길드 내부 일에 대해 아주 잘 알지. 심복이 된 사람 들도 역시 길드 원들이고, 원래 도둑들은 돈이 더 되는 쪽에 붙는 경향이 있지. 로체스터 백작 가는 요새나 다름없어. 그것도 모두 배 신자들의 소굴이라고 해야 할까나." "그자만 암살하면 되는 거 아니냐?" "그를 암살한다고 해도 잘못하면 등록되어 있는 길드 원의 명단이 유출 될 위험이 있고, 그렇게 되면 끝장이지. 귀족들의 가장 큰 적 은 암살자와 도둑이잖아." "그렇긴 하겠군." "아담은 나와 먼저 접촉하길 바랬어. 내 신분이 귀족이라는 것을 알 고 이용할 생각이었겠지. 날 완전히 믿고 있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난 그를 돕고 싶어. 그는 거리의 장이 될 사람인걸. 난 그걸 알아." 와이즈는 진이 힘 겨루기 시합을 한 후의 거리에서와, 저녁을 먹었 던 곳에서 다시 보았던 담갈색 머리의 중년 남자를 떠올렸다. "로체스터는 작위를 물려받기 전의 장으로서의 일 처리에 도통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에게 부족한 면은 아담이 채워 주었나 봐. 아담 은 그를 오랫동안 친구로, 형으로 믿고 돕고 의지했어. 그런데 로체 스터는 작위를 받자 보통 귀족이 되어버린 것이고, 그 것만으로도 실망스러울 일에 인질까지 잡고 있고. 길드 원들의 블랙리스트를 쥐 고 단지 굶지 않기 위해 도둑질을 하고 소매치기를 하고 구걸을 하 는 그 죄스런 부스러기들까지 착취당하는 것은 원한이 되고도 남 지." "인질?" "아담의 여동생이래. 정부취급을 받고 있나봐." ".......그래서? 백작 가의 무도회를 열어 무얼 할 건데?" "무도회는 날짜가 잡히려면 몇 일 걸릴 거야. 민트는 블루 때문에라 도 최대한 빨리 개최되도록 백작을 충동질 할 거고, 클레이스도 오 고 릭도 아마 올걸? 그들과 블루가 나오니 민트의 재량으로 다른 쟁쟁한 귀족들도 올 수 있을 테고, 그러면 귀족 아가씨들도 모두 몰 려들 테고, 아가씨들이 오면 부모와 기사들도 올 테고~ 최고로 성대 해 질 거야. 그 말은~ 보석 목걸이들이 날 기다린다는 소리지. 귀족 들을 한자리에 모이게 해서- 그 전에 민트를 통해 소문을 좀 흘려 서 엄청 사치스럽게 하고 오도록 유도하면...." 진이 말하면서 장난스럽게 손등으로 입술을 훔치는 시늉을 하자 와 이즈가 픽 웃었다. "파키오를 맡길 만한 귀족도 알아보고 백작과 그 집안 식구들을 모 조리 함정에 빠트릴 만반의 준비를 해 놓고 귀족들 앞에서 터뜨려 주어야지. 그 형의 스캔들로 그 집안은 한번 크게 타격을 입었었어. 동생이 백작이 되어서 더 흉한 스캔들에 휘말리게 되다면 귀족들은 영영 외면하게 될 테고 일의 진행 중에 그는 파산하게 될 테니. 그 럼 난 그를 아담에게 던져 줘야지." "....노래는?" "응? 노래? 블루가 하기로 했잖아." "아니. 너 음유시인 일도 했느냐고 묻는 거다." 진은 쌍둥이들과 하던 아르바이트 일이 떠올라서 부드러운 웃음을 지었다. "맞아. 거리 공연을 꽤 했었어. 친구들을 위해서였는데...여기 수도에 서 내가 한 일 중. 앞으로 하게될 일 중에서 가장 큰일이야." "음유시인들을 교육시켰던 거 말이냐?" "그래. 바다를 개척하게 한 것 보다 더 큰 일이었어. 대륙은 그들의 영향을 받게 될 거야. 그들에게서 희망을 전해들을 거야. 원래 그들 이 하고 있었어야 할 일이었는데, 이곳엔 엘프의 존재로 오히려 제 길을 가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아. 하지만 이제 알았으니 그들은 선 구자가 될 수 있겠지. 와이즈. 넌 오래 사니까, 훨씬 나중에라도 그 들의 힘이 얼마나 큰 것인지 직접 볼 수 있을 거야. 인간의 노래가 얼마만큼의 힘을 갖는지 꼭 확인해 봐." "............." "내일부터 또 바빠지겠다. 자야겠어. 안자?" "잔다." 진은 가죽 겉옷을 벗고 침대로 들어갔다. "진. 몸가짐 좀 조심 할 수 없냐? 앞으로도 아무 앞에서나 막 벗어 제낄래?" "엉? 갑자기 왠 잔소리야, 와이즈? 겉옷만 벗었잖아. 혹시....너도 까만 드래곤처럼 내게 흑심을?" "웃기지 말고 자라!" 낄낄거리는 진의 태평한 태도에 와이즈는 열이 뻗쳤다. '노리는 인간...아니 드래곤이 있다고 했잖냐! 이 뻔뻔스런 여자야.' "알았어. 다음부턴 방을 따로 잡아 줄게. 그럼 됐지?" '그게 아니고.....젠장.' 탁자에 그대로 앉아 있는 와이즈는 뭔가 더 할 말이 있어 보였지만 진은 그만 자고 싶어서, 노래를 하게 된 하루의 마지막을, 노래로 맺음 해 볼까 하는 생각에 친절하게 물었다. "와이즈. 잠이 안 와? 노래 불러 줄까?" 진이 침대에 누워 턱만 내밀고 하는 말에 와이즈는, 노래를 불러준 다니 -성의가 갸륵해서 들어 주마. 하고 말해야 하는지. 자장가를 불러준다는 소리 같으니 성질을 내야 하는지....갈등했다. "헛갈린다. 헛갈려. 네 머리 속을 꼭 열어봐 주겠다, 진." "그래. 그래. 약속했잖아. 죽. 으. 면 열어봐도 된다고. 노래해 줄게, 와이즈. 좋은 노래야." 와이즈는 자신의 침대에 기어 들어가 잠잘 준비를 하며 진의 잠이 묻은 잔잔한 노래소리를 들었다. "그 날 그 날이 너무나 따분해서~ 언제나 재미없는 일 뿐이야~ 사랑을 해보아도 놀이를 해봐도~ 어쩐지 앞날이 안보이지~ 뭐야~ 아아 기적이 일어나서 금방 마법처럼~ 행복이 찾아오면 얼마나~ 좋을~ 까~ 이따금은 지름길로~ 가고파 그럼 안될까. 고생은 싫어. 그치만~ 어쩔 수 없지 뭐. 어디론가 지름길로~ 가고파 그럼 안 될까. 상식이라는 걸 누가 정한 거야. 정말로 진짜~ 음음~ 음음~~ " '정말 가사가 묘하네....드래곤을 노래하는 것 같기도 하고, 조것이 그저 은근히 놀리는 것 같기도 하고....' 진은 쌍둥이 가족들과 하교 후 아르바이트를 나가기 전, 저녁을 먹 는 자리에서 TV에서 흘러나오곤 하던 보노보노의 주제가를 불렀다. 진은 와이즈가 너부리와 보노보노를 약간씩 닮았다는 것을, 아니 너 부리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하고 그가 눈치채지 못하게 웃음을 감춰 가며 잠이 들었다. 이튿날 숙소를 나오려는데 민트가 보낸 마차와 함께 클레이스가 찾 아왔다. "클레이스 뭐 하러 왔냐." "레이디는 기사의 호위를 받아야지요. 백작 부인이 백작 가로 모시 길 희망하더군요. 귀하신 분이 이런 곳에 머무시게 할 수 없는 일이 고 무도회에 참석하시려면 부인의 도움도 필요할 테니까요. 외출하 십니까?" 클레이스는 못마땅해 하는 와이즈를 무시하고 진에게 검은 눈동자 를 반짝이며 호위를 자청해 왔다. "안녕하세요. 클레이스님.....감사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누구 기사 분 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었는데, 와주셔서 잘되었네요. 부탁을 드 려도 되려나 모르겠습니다." "레이디의 일이라면 무슨 부탁이든 성의껏 도와야지요. 무슨 문제라 도?" 진은 클레이스의 매력이 철철 넘치는 면상에 자꾸 웃음이 나왔지만 우아한 동작으로 곁에 있던 파키오를 끌어다 그의 앞에 세웠다. "파키오에게 예의범절을 가르쳐 주시겠어요? 잘 배우는 편이니 어 렵지 않으실 거 에요. 백작부인께서 초대해 주셨다니 바로 가야하겠 지만 일이 있어서 지금은 안되고, 나중에 찾아 봬야 할 것 같은데 그 동안만이라도 부탁드립니다." "이....소년을 요?" "네. 파티에 함께 데리고 갈 생각인데 전 기사 분들 사이의 예의엔 어둡거든요. 클레이스님은 누구보다 뛰어나고 이름 높은 분이시니 더 좋은 스승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데, 어려운 일일까요?"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마..." "그럼 클레이스님만 믿겠습니다." 진은 클레이스가 뭐라고 반론하기 전에 얼른 그에게 파키오를 건네 주고, 콜린스와 와이즈와 함께 휑하니 자리를 벗어났다. [야! 저 여자 날 뭘로 보는 거냐!] [바를로네시. 인간으로 행세하기로 했잖냐. 맞는 말이구만. 너야 이 모저모로 이름 있는 기사이니 그녀의 말대로 너보다 더 좋은 스승 없지. 잘해 봐라~ 그 꼬마 꽤 재밌어.] 파키오는 착해 보이는 얼굴로 네카르도 최고의 기사에게 눈을 동그 랗게 떠 보였고 그런 권 색 머리의 소년을 내려다보며 클레이스는 혀를 찼다. '그 여자 만만치 않네.... 두고 보자고~ ' [50] * 진은 콜린스를 입학시키기 위해 와이즈와 함께 마법학교를 방문했 다. 교장실은 약간의 흙을 깔아두고 작은 나무들을 키우는 옥상에, 개인 사실과 함께 있었다. 진은 귀족 신분을 내세워 교장과의 직접 면담을 신청했다. 교장은 7써클 마법사로 백발에 흰 수염을 가슴 부위까지 길게 늘어 뜨린, 네카르도 궁정 마법사 자리도 겸하고 있는 중후한 인상의 노 인이었다. 진은 그에게서 산타클로스를 연상했다. '선물 달라는 소리가 나올 것 같네. 수염이 멋져요, 할아버지~ ' [............] 교장실은 사치스럽지는 않지만 무게 있게 보이는 재질의 나무로 만 든 커다란 책상과 손님들을 위해 한쪽에 마련된 6인용 탁자와 의자 가 놓여 있었고, 한 면에는 두꺼운 책들이 많이 꽂혀 있는 책장이 있었다. 창은 밖의 작은 화단의 나무들을 한 눈에 볼 수 있을 정도 로 옆으로 길게 벽이 뚫려 있었는데 보이지 않는 뭔가가 유리대신 을 하고 있었다. '저게 뭐지, 와이즈?' [마나로 막아 둔 거다. 실드 아이템이군. 고 써클 마법 유동력으로 나 가능할 일이니, 아마 저 노인이 직접 만들었나 보다.] '호오....제대로 된 유리창을 보긴 처음이다.' 방안은 소박했지만 그 길고 큰 창 덕에 진은 아주 그곳이 마음에 든다는 생각을 하며 흰 수염의 할아버지와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았다. 후작의 성으로 소개를 하자 교장은 직접 콜린스의 자질을 시험해 주려고 했지만 진은 이미 알고 있다고 말하고 이야기를 꺼냈다. "콜린스는 아주 뛰어난 자질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교장선생님. 제 가 후원하려는 이유는 콜린스가 마법을 배우고 싶어하는 갈망이 크 기 때문이지, 대 마법사가 되리란 기대 때문은 아니거든요. 콜린스 는 평민입니다만, 네카르도의 귀족 가의 추천을 받는 문제는 어렵 지 않으니 기숙사를 배정 받았으면 합니다." "신원 보증이 있다면 방을 배정 받는 거야 어렵지 않은 일이오, 영 애. 귀족영애께서 평민 신분의 소년에게 도움을 주시려하다니, 너그 러운 분이시오." "교장선생님도 평민에서 귀족이 되셨다고 들었어요. 궁정 마법사라 면 최고의 지위인데 각고의 노력이 엿보입니다. 존경을 표합니다, 교장선생님." 교장은 손녀 뻘의 어린 귀족 소녀에게 호감이 갔다. 마법사들은 대부분 예의가 바르지만 나이 들고 써클이 높아질수록 깐깐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그들 틈에서 오랫동안 생활하다 보니 손님으로 방문한 이 젊은이들은 익숙한 자신의 사무실에 신선 한 반향을 일으키는 것 같았다. 소녀의 말대로 그는 자신의 힘으로 나라의 궁성에까지 힘을 미치는 신분이 되었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도 황혼에 접어든 나이에 쉴 곳을 찾고 싶은 기분이 들던 때였다. 다른 궁성 마법사들과의 신경전에 지치는 기분이 되어서 요즘은 학 교일 에만 관여하며 화단을 가꾸는 생활을 하던 중이었다. 궁성을 들락거리는 동안 귀족들을 대하며, 비슷한 또래의 귀족 아 가씨들에게서 받던 느낌과 이 소녀에게서 풍기는 기백은 확연히 차 이가 났다. 교장은 영애와 함께 온 새파랗게 젊은 귀족 신분의 마 법사에게도 관심이 갔다. "두분 모두 보통 분들이 아닌 듯 보이오. 내게 뭔가 달리 원하시는 일이라도 있으시오, 영애?" 진은 웃는 표정으로 산타할아버지에게 선물에 대해 말하는 기분이 되어 대답했다. "교칙을 수정해 주셨으면 합니다, 교장 선생님. 기숙사에 임자 있는 빈방이 많다고 들었어요. 쓰지 않는 방은 필요한 학생에게 가야지 요. 귀족 자제들 중에 대다수가 수도에 있는 별장이나 저택에서 통 학을 한다니. 양보를 받아 다른 학생들에게 편이가 갔으면 해서요. 어려운 일인가요?" "........저도 그 문제는 안다오, 영애. 하지만 한 두 명도 아니고 귀족 가에 일일이 허락을 받는 문제는 번거로워서 미루고 있었다오. 오 랜 전통이다 보니. 흠...기한이 끝나는 데로 권해 볼 수는 있겠지 만....."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학생인 듯한 고학년으로 보이는 소년? 청년? 이 찻잔을 올린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콜린스만 고개를 돌렸다. 그가 테이블 위에 향긋한 향기가 나는 찻잔을 놓고 한 걸음 물러나 더니 나가지 않고 서 있음을 알고 진은, 교장의 얼굴에서 눈을 떼 지 않고 있다가 그를 흘끗 쳐다보았다. ".....그렇지만 그렇게 된다면 학교 재정에 무리가 가오. 마법실습 같 은 것들 때문에, 기사학교보다도 마법학교는 막대한 돈이 들어간다 오. 운영비 문제 때문에 이제껏 조치가 취해지지 못했소. 평민학생 들에게 지금보다 더 높은 학비를 분담시키는 일은 안 될 일이고, 기부금만 바랄 수는 없다오, 영애.....챈들러. 앉거라, 서 있지 말고." "네. 교장선생님. 실례합니다. 챈들러 어슬리 라고 합니다." 진은 귀족자제로 보이는 17~18세 정도의 짙은 녹색 머리의 소년에 게 가볍게 목례를 해 보이고 교장에게 반론했다. "학교내의 마법 아이템과 가치 높은 연구 자료들이 많이 잠자고 있 다고 들었습니다. 교장 선생님. 왜 그것을 비매품으로 묶어 두시는 거지요?" ".....그것은 제 개인의 것도 아니고, 과거 네카르도 마법학교에 몸 담았던 선배 마법사들과 졸업생들의 인고의 산실이요, 영애. 함부로 처분할 수는 없으니까 그렇다오." "교장선생님. 기숙사의 비어 있는 방을 쓰지 못하는 학생들이 하교 후 힘들게 일을 하느라 학습능력을 높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 니다. 쓰이지 않는 보석은 돌멩이에 불과 합니다. 보관만 해두는 것 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선배 마법사 분들의 유산을 유물 로 취급해서야 현재 어렵게 학교에 들어와 공부를 하는 재학생들에 게 무슨 도움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교장은 진지하게 들었다. 이 검푸른 머리의 귀족 영애의 말에는 정 치가들의 웅변 력이 담겨 있었다. "보관만 해 두는 것은 손실이고 남겨 주신 선배들의 뜻이 아닐 것 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분들도 자신의 연구 결과가 후세에 빛을 발하길 기대하는 마음이 없었을까요? 평생을 연구한 마법 연구들이 묻혀 버리고만 있다면, 배우는 학생들은 항상 처음부터 스스로 터 득해야 하는 과정을 거쳐야 할텐데 그러면 마법의 발전이 더디지 않을 까요?" 와이즈는 차를 가져왔던, 제법 마법에 소질이 있었는지 4써클에 이 른 예비 마법사를 슬쩍 훑어보았다. 학생들은 모두 한쪽 팔에 교문 통과 뱃지를 부착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또한 그랬고, 마법사 겉옷 은 수놓지 않은 흰색 일색에, 허리에 두른 폭 좁은 천만이 푸른색 을 띄고 있었다. 그는 와이즈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 교장과 이 야기를 하고있는 진을 쳐다보고 있었다. '또냐.....인기 좋아 좋겠다, 진.' "....선배 마법사 님들의 뜻은 그렇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드네요, 교 장선생님. 앞으로 학교 재정에 큰 보탬이 될 귀한 아이템들을 모셔 두고만 있어서는 새로 나오고 연구되는 아이템들에 밀려나서 사장 될 수도 있습니다. 마법사가 되기 위해 공부하는 학생들이 수련에 전념할 수 있을 기회를 줄 물건들을 이용하지 않고 잘못된 뜻을 기 리고만 있어서는 하등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교장은 잘 들어 주고 있었지만 진은 반론을 듣지 못해 혼자 떠들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와이즈 옆에 앉아 있던 콜린스가 좋은 향기가 풍기는 찻잔에 신경이 쏠리고 있는 것을 알고 마시게 해 주기 위해 진은 먼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삼켜 보였다. '이게 무슨 차지? 꽃향기가 난다.' [머리를 맑게 해주는 효능의 성분을 풀뿌리에서 마법으로 추출해서 만든 거다. 고 써클 마법사들이 많이 마시지. 귀해서 시중에서는 찾 을 수 없을 거다.] 진은 한번 더 차 향기를 맡아본 후 내려놓았다. "그리고 간단한 마법물품을 학생들도 만들어서 팔 수 있게 된다면 학생 개개인에게도 좋은 실습이 될 테고 마법이 서민들의 실생활에 도 좋은 영향을 미칠 것 같은데 교장선생님의 의견은 다르신 가 요?" "실생활?" "마법은 마법사와 귀족들의 전유물이 되어서는 안되잖아요. 이곳은 배우고 연구하는 곳이고, 실생활에 필요한 자질구레한 마법용품들 을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여행 을 다니면서 마법이 실용화되지 못하고 있는 것에 안타깝다는 생각 을 했습니다. 마법을 배우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알 수가 없 더군요. 제 생각이 틀린 걸까요?" "..........." 진은 마나로 만들어진 투명한 유리창을 가리켰다. "저건 마법으로 만드신 거지요?" "그렇다오. 영애. 내가 심심풀이로 만들어 본 거요." "훌륭해요. 교장선생님. 귀족 가의 저택에서도 보지 못한 좋은 아이 템이에요. 왜 실용화시킬 생각을 하지 않으시나요?" "저건 고 써클 마법사나 가능한....." 교장은 진의 이야기에 대답하다가 먼 기억 속의 젊었을 적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마법을 배우고자 결심했던 동기가 되었던 일이 긴 세월 가려진 기억들 틈에서 삐죽 얼굴을 들어냈다. "....그랬었지....왜 잊고 있었을까..." 저도 모르게 내 뱉은 혼자 말에 교장은 자신 역시 나이에 물들어 고정적인 가치관에 사로잡혀 있었음을 깨달았다. 마법은 마법사의 전유물도, 귀족의 전유물도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한 이 귀족영애의 말이 맞았다. 전엔 분명히 알고 있었는데.....왜 잊 고 있었지? "영애의 말씀이 맞소. 써클에 상관없이 마법사는 개인의 실력 향상 에 일생을 바치오. 개인의 영달에만 매달려 있었지. 하지만 저 써클 마법사도 마법사요. 마법 아이템을 연구하는 것은 학생이라면 누구 나 거쳐야할 교과 과정이지만 대부분 마나 축적을 높이는 일에 열 을 올리다보니 연구가 미진했던 것도 사실이오." 갑자기 언성이 높아진 교장에게로 챈들러는 눈길을 돌렸다. "내가 처음 마법을 배우고자 결심을 하게 된 동기는, 어렸을 때 어 머니가 부엌에서 비를 맞아 젖은 나무에 어렵게 부싯돌로 불을 붙 이는 것을 보고, 불을 마음대로 만들 수 있다는 마법사가 되고 싶 다는 생각을 한 것이 계기였소. 지금은? 약한 파이어 마법을 용기 에 담아낼 수 있소. 조금만 연구하면 얼마든지 간편하게, 마법을 모 르는 누구나 쓸 수 있게. 왜 생각을 못했지?" 혼자 말 반. 자신에게 하는 말의 반인 교장의 대답에 진은 더 놀랐 다. '마법사들은 바보들이었나? 맨, 공격 마법만 연구하다보니 그런 건 가? 답답하네. 귀족들에게 묶여 있어서 그랬겠지. 귀족들에게 생활 용품의 개혁이 뭐 필요가 있었겠어. 하지만 개인적으로 연구하고 있는 것들도 많이 있을 거야.' "학교에서 앞장서면 되겠군요. 그렇게 하면 이미 졸업해서 마법사 의 길을 가고 있는 사람들도 굳이 전쟁터에 불려가거나 개인 호위 나 유적 탐사로 유물을 찾는 모험가들 사이에 끼일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겁니다." "그렇겠군요. 허허...참. 평민학생들의 경우엔 하교 후 따로 수련시 간이 부족한 편이었지만 그래도 우수한 학생들이 많지요. 교사들을 설득할 수 있을 것 같소, 영애. 이제껏 네카르도 마법학교에 보관되 었던 선배들의 유품을 공개해야겠구려. 모두는 안되겠지만 확실히 그 일부만 처분하고 수정 보안해서 시중에 내어놓는다면 재정엔 문 제가 없겠지요. 일깨워 주어서 고맙소, 영애." "교장 선생님의 관념의 벽이 높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스승의 자질 을 갖추신 점에 경의를 표합니다." 일에 의욕을 잃고 있던 교장은 할 일이 생겼다는, 그것도 파격적인 내용의 일을 추진코자 생기를 띄었다. "...하지만 어쨌든 이 일엔 귀족 계층의 찬성이 따라야겠지요...음. 이거 참. 이 나이에 귀족 가에 일일이 방문을 청하고 다닐 수도 없 고...." "몇 일 안으로 에릭 로체스터 백작 가에서 큰 무도회가 열릴 겁니 다, 교장선생님. 그곳에 초대받으시면 되겠네요." "로체스터 백작 가 말이오, 영애?" "네. 엘프 라하르네 블루엘 샤님께서 노래를 해 주시기로 했습니다. 저도 민트 길레스피 백작부인의 호의로 샤프롱을 약속 받아 참석할 예정이거든요. 그곳이면 학교 기숙사 문제도, 그 자리에서 소개 해 팔 수 있을 아이템들도 선보이실 수 있겠지요." "......좋은 생각이군요. 로체스터 백작 가는 평판이 좀 안 좋지만, 엘 프가 나오신다고 하면 많이들 오시겠지요. 흠." "오늘부터 민트 백작부인의 저택에 머무를 예정이니 교장선생님께 도 초대장이 가도록 귀띔 해 드리겠습니다. 민트 백작부인께서 초 대 명단에 힘쓰실 예정이니까요." 교장과의 면담은 끝났다. 콜린스는 환영받는 학생이 되었고, 바로 수업에 들어가기로 했다. 기숙사방이 준비되는 데로 배정 받겠지만 하루 이틀 정도는 통학을 해야 했기에 진은 하교시간에 맞춰 다시 마중 나오던지, 사람을 보 내 주기로 하고 교장실을 나섰다. "콜린스. 잘해 봐." "네. 열심히 공부할게요, 레이디. 챈들러 선배님이 잘 돌봐 주신댔 어요." 학교 본관 건물을 나오는데, 배웅 나온 콜린스의 옆에서 교장실에 서 만났던 녹색 머리 소년이 함께 따라와 진에게 호감을 표해 보였 고, 진은 그가 귀족자제였다는 것을 상기하고 예쁘게 웃어 주었다. [뭐하냐?] '파티에 오게 꼬시는 중. 사람이 많을수록 훔칠 것은 많다!' [......잘 해 봐라, 이 도둑아.] 그리고 너무 쉽게 일이 처리됐다는 생각에 입맛을 다시며 진은 교 문을 벗어났다. "진. 교장이 고지식하고 귀족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어서 듣는 척도 안 했다면 어쩌려고 했냐?" "학교를 털려고 했지. 그리고 몽땅 사 버릴려고 했어. 그럼 학비 문 제도 사라졌을 게 아니야. 하지만 다행이야. 학교엔 손대고 싶지 않 았거든. 교장이, 생각이 제대로 박힌 편이라 쉬웠어. 그런 분은 존 경받아도 돼. 안 그래, 와이즈?" "웃기네. 내가 뭐 하러 인간을 존경해야 하는데?" "힘없는 작은 종족이다 하는 생각으로 보지말고 인성을 봐, 와이즈. 짧게 살아도 가치 있는 삶을 사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어. 저 선생 님은 나보다 몇 배의 세월을 살았는데, 훨씬 나이 어린 손녀 뻘의 말에도 배울 점이 있다고 생각하니 받아들이잖아. 그런 태도는 훌 륭한 거야." ".............." 학교를 나오자 아침을 늦게 시작한 탓에 정오가 가까워진 시간이 되어 진은 와이즈와 아담의 가게로 아침을 먹기 위해 다시 찾아갔 다.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것으로 줘요. 아담." "알겠습니다. 레이디." 주문을 받으러 직접 오고 식사를 날라다 주던 아담에게 진은 주위 손님들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평이한 태도로, 작은 속삭임으로 아 담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담. 길드 원의 힘으로 안 되는 것도 있지요? 도와 줄게요.' '.....위험합니다. 레이디.' '걱정 말아요. 자신 있으니까. 내가 이유 없이 길드 장이겠어요?' '.............' '좀 위험하고 까다롭다 싶은 일은 넘겨도 되요. 도와 준 댔으니 확 실히 도와줄게요.' '손이 많이 필요하지요? 무도회 날짜가 잡히기 전에 준비할 것도 많을 테니.' '.....저녁에 다시 오십시오. 눈에 띄지 않게요.' '알았어요.' "와이즈.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거야?" 후식으로 나온 벌꿀을 끼얹은 푸딩을 먹으면서 진이 묻자 와이즈는 퉁명스런 투로 대답했다. "잘도 속삭인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다. 대낮에 대 놓고 밀어를 나누는 폼이 아주 영락없는 도둑이다." "와이즈......질투 쟁이. 네게도 속삭여 줄까? 귀 이리 대." "죽을 래? 저리가. 이 징그러운 여자야!" 진은 와이즈를 놀려가며 후식을 먹고 식당을 나왔다. "이제 뭐할 거냐, 진?" "하늘은 파랗고! 태양은 따스하고! 쌍둥이별은 오팔처럼 빛나는 데.....여기선 이슬 맞는 일이 주업이 되다보니 대낮에 할 일이 없네. 로체스터 백작 가에 숨어 들어가자, 와이즈." "사전 조사하려고?" "그런 것도 있고.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어." "누구?" "전 백작의 부인과 아담의 여동생 레이첼. 가자, 와이즈. 그녀들을 확인해 봐야겠어. 레이첼에 대해서 아담은 자세히 말 안 하던데 뭔 가 듣지 못한 부분이 있는 것 같거든." "..............." 여행객들은 왕 성과 귀족 가의 저택들도 구경을 다니기 때문에 그 들도 의심받지 않고 로체스터 백작 가의 성 수준의 건물을 쉽게 찾 을 수 있었다. 진과 와이즈는 높다란 담 장 너머로 보이는 저택을 흘끗대며 담 밖 줄줄이 늘어선 커다란 나무 하나에 올라가 나뭇잎 사이에 몸을 감 추고 가지에 앉아 의논을 했다. "와이즈. 낮이라 실프도 못 쓸 테고, 마법을 쓰면 아마도 성안의 마 법사들이 눈치 채겠지?" "낮이니까 활동하고 있을 테고 그럼 알 수도 있지. 용언을 쓰면 클 레이스가 간섭하러 올지도 모르고. 용언도 눈치 빠른 녀석들은 간 혹 감지한다." "몰래 들어갔다 나와야 하는데....에. 난 혼자 들어 갈 수 있는데 와 이즈 넌 여기서 기다릴래? 저 부분이 비어 있댔지?" 진은 담 장 군데군데 설치되어 있다는 마법 트랩 중 와이즈가 알려 준 보이지 않는 틈새를 가리켰다. "저택 내, 대충 어디어디에 마법이 걸려 있는지 만 알려 줘." "작은 타 종족으로 폴리모프 하면 되지. 뭐 하러 기다리고 있어?" "뭘로 변신할 건데? 뭐든 가능해?" "그럼. 내게 불가능이 어딨냐?" "그래? 그럼 너구리로 변신해라." "너구리?" "아니면 토끼나." "야생동물 모습으로 인간들의 눈에 띄어서 쫓기란 말이냐? 싫다." "그럼......." "고양이로 변신하겠다. 네가 안고 가라." "고양이? 안 돼!" 나뭇잎에 가려져 함께 가지에 걸터앉아 있던 와이즈는 용언을 쓰려 다 진의 숨 넘어가는 부정의 말을 듣고 멈칫했다. "왜? 너 고양이 싫어했냐?" "그래. 싫어. 못된 짐승이야. 죽어도 안 친해지는 종족이라고! 도둑 고양이가 뒷골목에서 쥐를 잡아먹는 것을 본적이 있어. 아주 정이 떨어지더라. 아주 못된 동물이야. 그냥 안 죽이고 엄청 가지고 놀다 가 잡아먹는다고. 그것도 쥐 머리만 남겼다가 구박하는 사람들의 집 부엌 같은데다 숨겨 둔다? 어떤 놈들은 식탁에 올려놓기도 해." 진이 이를 갈며 하는 말에 와이즈는 오랜만에 씨-익 웃었다. "좋아. 결정했다. 귀하신 몸이니까 두 손으로 잘 모셔라, 진." [폴리모프-캣.] 와이즈의 몸에 금빛 마나의 기운이 생성되다 사라지더니 황금 빛 털이 몹시 탐스러워 보이는 노란 눈빛의 성체 크기의 고양이가 와 이즈가 앉아있던 나뭇가지 위에 모습을 들어냈다. "와이즈!......야. 노란 고양이! 검은 고양이가 아니니 좀 낫다만 그래 도 싫다. 저리가. 쉿! 쉿!" [큭큭....안아라, 진. 정중하게. 안 그러면 안 도와 준다.] "젠장! 싫어." [어쭈. 날 데려가야 마법트랩들을 피해 갈 수 있을 텐데? 안 그러 면 경비들이 몰려 들 테고. 알아서 해라~ 난 아쉬울 것 없다.] 진은 노란색 고양이가 세수하는 동작으로 앞발로 앙증맞게 얼굴을 부비고 핥는 모양을 보며 부아가 치밀었다. 고양이는 한 두 번 세수를 하더니 노란 눈으로 진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 짐승이 웃고 있는 것 같아서 진은 소름이 끼쳤다. "노란 고양아~ 한 입 거리도 안 돼 보이는 구나. 한국에서는 고양 이도 먹는다더라. 콱, 약용으로 써 줄까 보다." [웃기지 말고 두 손으로 고이 받쳐 모셔라, 진. 귀하신 몸이니.] "젠장!" 진은 계속 시간 낭비를 하고 싶지 않아서 그 요물단지의 뒤 목에 엄지와 집게손가락으로 징그러운 것을 집는 동작으로 털가죽을 잡 아 올렸다. [죽을래? 제대로 못 들어?] "흥. 싫다. 고양이 와이즈야." 진은 눈여겨보아 둔 지점의 담 장 너머로 고양이를 던졌다. "캬우우우웅!" 진은 고양이의 날카로운 비명소리를 들으며 히죽 웃고 나뭇가지 밟 은 발에 탄력을 줘서 고양이를 따라 담을 넘어 들어갔다. [51] 8-5. 사랑의 메신저가 되다. 뛰어내린 곳은 담 벽과 면해 있는 정원이었다. 진은 나무 그림자에 몸을 숨기고 흰 돌과 일부 대리석을 섞어 지은 로체스터 백작의 저택을 둘러보았다. 대문에서 상당히 떨어진 본 건물은 돌을 깔아 길을 내어놓은 곳을 따라 양편에 정원사의 손길 이 느껴지는 나무와 연못들을 지나야 다다를 수 있게 되어 있었고, 저택 뒤쪽에까지 정원수가 이어져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진은 시력과 청각을 높여 주위 움직이는 인기척들을 포착했다. 고양이는 털을 세우고 갸르릉 대며 적의를 보이고 있다가 진의 가 슴께로 척. 뛰어올랐고, 진은 손으로 쳐서 떨구어냈다. [죽을래?] '내가 고양이에게 죽임 당할 인물로 보이느냐, 가소로운 것' [.....죽일 년.] 진은 다시 손가락 두 개로, 발톱을 세우는 고양이의 뒷목을 낚아채 어 집어 들고 경비로 보이는 병사들의 옆과 청소를 하고 있는 하인 들로 보이는 사람들의 곁을 지나쳐 보이지 않는 속도로 달려서 빠 져나갔다. 금새 다다른 저택의 뒤쪽으로 나무와 마구간 건물 등에 몸을 숨겨 가며 우물가에서 잡담을 하는 하녀들의 이야기를 엿듣고, 전 백작 의 부인이 유폐되어 있다는 저택의 꼭대기 방을 눈어림하고 아담에 게 들었던 레이첼의 3층 방 창문을 다시 가늠했다. 진은 눈을 감았다. 대낮 해가 환한, 드러나 있는 백작 가의 영역 내에서 사람들의 눈 길을 피할 순간을 포착하자, 다시 움직였다. "어? 얘들아. 뭔가 지나간 것 같지 않아?" "뭐가?" "대낮에 허깨비 봤니? 정신차려." 진은 커다란 주방의 사람들이 오가는 곳을, 주방기구나 식료품을 올려두고 다듬는 긴 탁자 밑을 지나치고 사람들의 시야가 닿지 않 는 사각지대들을 골라 바퀴벌레처럼 사사삭 신속한 몸놀림으로 움 직여가며 복도로 나갔다. '도둑 아니랄까봐 참 잘도 숨어서 다닌다. 아무도 눈치를 못 채네. 이 여자야! 제대로 못 들어? 그냥 콱!!' '마법 걸린 곳 있어?' [몰라.] 진은 손가락 끝에 대롱거리는 고양이를 들고 하인 두 명이 내려와 주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그들이 이용하는 저택 내의 좁은 뒤 계단을 사람들의 잦은 왕래로 자국이 남은 곳을 골라 바닥을 밟아 가며 빠른 동작으로 3층의 한, 방 앞으로 갔다. '여기가 맞지?' [묻지마!] '밖에서 볼 땐 분명히 이쯤이었어. 방이 넓은데 잘 못 찾았을 리는 없고. 안에 있나?' 진은 문에 귀를 대고 소리를 확인했다. 두 사람 분의 인기척이 감지되었다. 문에서 떨어진 곳에서 들리는 소리라는 것을 확인하는데 복도 끝에서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에 지 체하지 않고 살짝 문을 열고 들어가 소리 없이 다시 닫았다. 개인 거실로 이용되는 방 한쪽에 다른 문이 있고 그곳에서 두 여자 의 목소리가 들렸다. 진은 침실로 통하는, 열려져 있는 방문 뒤에 서서 그들의 대화를 들었다. "파티가 열릴 것 같아요. 길레스피 백작부인이 다녀가셨대요. 아씨 도 참석하라고 허락하실 지 몰라요." "......그럴까....." "안주인이 있어야 하잖아요. 로체스터 백작부인은 유폐되어 있다시 피 하는데 그럼 아씨가 나설 수 밖 에요." 하녀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질투와 건방기가 담겨있었다. '하녀가 감시도 겸하나 보군.' 늦은 아침식사를 치우는지 하녀는 달그락거리는 식기소리를 내며 레이첼의 방안에서 서성이다가 쟁반에 빈 그릇을 올려 담고 거실 쪽 문으로 나왔다. 진은 열린 문 뒤에 서서 자신의 존재를 지웠다. 진은 문이 되고, 벽이 되었다. 하녀는 바로 옆에 서 있는 진을 눈치채지 못하고 복도로 나가 사라 졌다. [저 여잔 눈도 없냐. 뻔히 보이는 침입자도 못 알아채네.] '와이즈. 내가 맨 처음 터득한 기술은 사람들의 시야에서 벗어나 모 습을 감추는 것이었어. 알 리가 없지.' [............] 하녀가 나가자 탁자에 앉아있던 레이첼이 벌떡 일어나 침실과 통하 는 드레스 룸을 열어 옷가지들을 뒤적이는 것을 문틈으로 보았다. "............." 그녀는 아담과 같은 색의 담갈색 머리에 20대 후반으로 보였다. 문 틈으로 엿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모르던 그녀는 노란색 드레스와 흰색 드레스 몇 벌을 꺼내 들여다보더니 옷가지를 부둥켜안고 중얼 거렸다. "옛날로 돌아갔으면....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오빠 미안해. 미안해.....' 숨죽인 흐느낌을 듣던 진은 손끝에 대롱대고 있던 고양이를 그가 원했던 대로 두 손위에 받쳐들고 방을 나왔다. [그냥 가냐?] '그래. 확인했잖아. 레이첼은 스스로 인질이 된 거야.' [어떻게 확신하는데?] "안주인이 되고 싶어하잖아. 그를 위해 드레스를 고르는 것을 보면 알지. 레이첼은 에릭을 사랑하고 있나봐. 아마 오랫동안 그래왔을 거야. 백작도 그 나이에 이제까지 결혼을 하지 않았 댔지. 아담에게 줄게 아니라, 레이첼에게 줘야겠군." [............] 진은 저택의 꼭대기 층에 탑처럼 돌출 되어 있는 전 백작의 부인이 거하고 있는 층으로 고양이의 지시에 따라 경보트랩들을 피해가며 곡예 하듯 계단 난간을 지나고 발을 딛지 못하는 곳에서는 높게 점 프해서 올라갔다. 백작부인의 방안은 어둔 분위기가 가득했다. 진은 창을 닫아걸어 어둡고 답답하게 느껴지는 로체스터 백작 미망 인의 방안으로 소리 없이 스며들었다. 나이 어린 하녀가 바닥에 쏟아져 있는 음식물들과 뒤집혀져 있는 그릇들을, 불만 가득한 얼굴을 숙인 채 치우고 있었다. "나가거라!" "식사를 하지 않으시면 몸에 해롭습니다, 마님." "네가 상관할 것 없다. 가서 백작에게 좀 보잔다 고나 전해라." "....바쁘시 다고 항상 말씀하시는데요." "너 마저 날 죄인 취급하는 거냐?! 어디서 말대꾸냐!" "............." 소녀는 그녀가 흐트려 놓은 듯한 탁자 위의 그릇과 바닥을 모두 치 우고 등을 돌리고 있는 부인에게 허리를 굽혀 보이고 방을 나갔다. 진은 하녀가 나간 후의 히스테릭한 미망인의 모습을 가구 뒤에 숨 어서 지켜보았다. "지겨워! 지겨워! 미칠 것 같아....벌써 몇 년째 갇혀 지내는 거야!"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백작부인은 틀어 올린 금발머리를 침대기둥 에 기대고 붉은 색 드레스 자락을 한 손으로 움켜잡고 침대에 앉았 다. "어느 신에게 빌어야 할까. 어떤 신이면 내 기도를 들어 주실까. 로 체스터. 나쁜 자식. 죽어서까지 날 괴롭히느냐! 네가 마계 지옥에 떨어졌을 거라고 확신한다! 저주를 받아라!" 진은 그녀의 방안이 어둡게 느껴지는 것이 창을 닫아걸고 있는 것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와이즈. 어둠 계열의 정령이지?' [그래. 그들은 인간의 어둔 감정을 먹고산다고 했잖냐. 누적된 앙심 이 많은 여자 군. 잘못하면 전의 그 소녀처럼 먹힐 수도 있다.] 일그러진 얼굴이었지만 진은, 그녀가 아직 젊고 아름답다는 사실을 알았다. '와이즈. 작게 말할 테니까 실프에게 부탁해서 내 목소리를 그녀가 듣게 해줘.' [.....실 * 프 ] 진은 허공에 모습을 들어낸 낯익은 정령에게 백작 부인과 대화하는 것을 도와달라는 부탁을 했다. 백작의 미망인은 침대 가에 멍하니 앉아 있다가, 귓가에 작게 스치 는 속삭임을 들었다. '도움이 필요하세요?' 그녀는 벌떡 일어나 주위를 휘둘러보았지만 방안에는 아무도 없었 다. 그 허스키 한 소녀의 목소리는 바로 자신의 귓가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말해 보세요. 부인. 신께 빌고 싶은 소원이 뭐지요?' "누구냐! 마계의 사자인가?! 물러가라! 너희의 유혹은 받지 않겠 다!" '어둠의 정령이 모여들어 있어요. 그들을 물리고 싶다면 희망을 생 각하세요. 부인.' "............" 그녀는 몇 년 동안 갇혀 지냈던 어둔 방안을 다시 둘러보았다. 절망만이 가득하고, 증오스럽던 저택의 감옥과도 같은 자신의 방. 그녀는 그 방이 너무 싫었다. "희망......." 그녀는 눈물이 나왔다. 그가 보고 싶었다. 자신을 버리고 찾아와 주 지 않는 그가 너무 미웠다. "넌 누구지? 내게 소원을 말하게 해서 무얼 하려는 거냐." '도와드리지요. 도움이 필요하지 않다면 가겠습니다.' 부인은 방안을 돌아다니며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진은 그녀가 자신이 몸을 숙이고 숨어 있는 가구 근처를 그냥 지나 치는 것을 보고 멋쩍게 웃으며 정령에게 고맙다는 웃음을 짓고 은 신을 풀었다. [실프 돌아가라.] [네. 주인님.] "부인 여기 있어요." 백작부인은 돌아보았다. 여행자 복장으로 평민들이 입는 평상복 위에 허벅지까지 오는 가죽 조끼를 끈으로 조여 묶어 입은 검푸른 머리카락의 소녀가 황금 빛 고양이를 두 손위에 얹은 이상하고 어색한 자세로 서 있었다. 고양 이는 곧 바닥으로 내려섰다. "............" "안녕하세요. 로체스터 백작부인. 처음 뵙겠습니다. 전, 진 폰 리툰 이라고 해요." 부인은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가 모습을 나타내자 방안의 칙칙한 기 운들이 벽 쪽으로 밀려나는 기분이 들었다. 진은 멍청이 서 있는 부인의 앞을 지나쳐서 굳게 닫혀 있던 창문을 열어제쳤다. "어둔 그림자들아, 나가라. 다른 먹이를 찾아봐. 너희 몫이 아니다." [.....에어 프레쉬(Air fresh)-]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부인은 눈이 부시게 느껴졌다. 빛을 등지 고 서 있는 소녀의 풍성한 머리카락은 햇살을 받아 푸른빛이 후광 처럼 드리워지고 있었다. 백작의 미망인은 가볍게 예를 갖춰 진에게 인사를 했다. ".....전 모나 로체스터입니다. 후작영애." * 에릭 로체스터는 민트 길레스피 백작부인의 방문을 받은 후 이런 저런 업무를 보는 자신의 서재에서 의자에 앉아 중얼거렸다. "짜증나는 여자네. 파티를 열고 싶으면 자신의 집에서 열 것이지 왜 남의 집에서 열라 마라 하는 거야?" 하지만 그는 민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귀족들에게 입지를 높일 수 있을 기회도 될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가문에 꼬리처럼 따라 붙어 다니던 스캔들도 잠재워질 것이다. 그 리고....자신은 벌써 35세가 넘었다. 모나 로체스터는 형의 아이를 낳지 못했으니 그는 후계자 문제까지 그 머저리 같은 형에게 물려 받아 안고 있었다. '레이첼은 안 돼. 어쩔 수 없잖아....평민 여자와 한 약속을 이제 와 서 어떻게 지켜.' 그는 냉정해 보였지만 씁쓸한 표정으로 발끝을 이용해서 책상의 다 리 부분을 툭툭 쳤다. * "그는 결혼하기 전, 소녀시절에 아버지가 붙여준 제 호위기사였어 요..... 전 나이가 열 살 이상 차이나는 선대 백작과 정략결혼을 했 지요. 전 남편과 사이가 좋지 않았어요. 제가 소문처럼 가벼운 여자 로 보이나요, 영애?" "아니요. 제가 이제까지 본 귀족 부인들은 차라리 지나치게 정숙하 게 보이기까지 하던데요." [.............] "훗. 영애는 재미있군요. 대부분은 정숙해 보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모르게 바람 피우는 경우도 있어요. 남편들은 알게 되도 모른 척 넘어가는 경우도 많지요." "안 그러면 화병 나서 어떻게 살겠어요. 신사 분들은 당연히 바람 을 피운다던데." 모나는 너무 오랜만에 웃음이 나왔다. "그래요. 저도 그랬어요. 선대 백작은 다른 귀족 남자들처럼 저택 내의 하녀가 모두 자기 여자였지요. 전 그의 아이를 낳을 수 없었 어요. 낳고 싶지도 않았지만....아트를 다시 만났지요." 모나는 옛 기억을 들추며 꿈 많았던 소녀시절을 떠올렸다. "그는 결혼 할 때 절 따라 백작 가에 들어오지 않았어요. 좀 섭섭 했었어요. 친절한 사람이었는데. 저희 집은 수도와 상당히 떨어져 있는데 그는 친정에 그대로 남아 있다가 몇 년 전 이곳으로 왔었어 요. 그가 왔다는 것을 알고 너무 기뻤지요. 그는 소녀시절을 생각나 게 했고 이곳에서는 오랫동안 너무 외로웠거든요. 다른 귀족 부인 들과 어울리는 것도, 궁정사교계도 너무 지루했어요. 남편은.....무심 했고....." 모나는 너무나 오랜만에 이야기를 나눌 상대를 앞에 두자 자신의 과거를 돌이켜가며 고백했다. "....맞아요. 솔직히 말하면 전 저희 집에서 열린 파티에서 그를 유 혹했었어요. 하지만 그와 있는 것을 들키고 남편이 얼굴이 벌개져 서 결투를 신청하자 속으로 차라리 잘 되었다고 생각했지요. 아트 는 검에 뛰어났거든요. 내세우지 않아서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는 고급에 가까운 실력을 가지고 있었어요. 지금쯤은 고급이 되어 있 겠지요. 남편이 죽어버리자 전 그가 절 데려갈 줄 알았지요. 하지 만..." "연락도 해 오지 않았어요?" "기다렸는데..... 에릭이 친정으로 가든지. 시골에 가서 사는 게 어떻 겠느냐고 협박처럼 말했지만 전 그가 데리러 올 줄 알고 여기 남겠 다고 버텼어요. 그 후 계속 갇혀 지냈지요. 그에게선 연락이 없었어 요." "먼저 그를 부를 생각은 하지 않으셨나요?" "........몇 번 편지를 써서 보냈지요. 하지만 답장도 없었고....너무 화 가 나서 마지막에 써서 보냈던 편지엔 지옥에나 가라고 써서 보냈 었지요. 그는 그냥 장난이었나 봐요. 그렇게 안 봤는데....내가 착각 한 거였어." "그렇다면. 지금 부인께서 원하는 것은 정확히 뭐지요?" "......그를 죽이고 싶어요, 영애." 진은 흐트러짐 없는 몸가짐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있는 모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원래 증오란 사랑과 종이 한 장 차이라지요. 그를 아직도 좋아하 세요, 부인?" "......그러면 뭐하나요. 날 버렸는데. 차라리 예전이 더 나았어요. 이 렇게 갇혀 살다가는 미칠 것 같아서. 이젠 더는 버티지 못할 것 같 아서 그냥 친정으로 갈까하고 생각도 했지만....아버지가 받아 주실 지 어쩔지도 모르겠어요. 한순간 정열을 못 참았다가 제 인생은 끝 장이 난 거 에요. 참 한심해 보이지요?" "그분은 기사라면 서요. 정식 결투였다지만 상대가 죽었는데 백작 가에서 방문을 허락하지 않았을 테지요. 부인께서 보냈던 편지도 전달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커요. 에릭 로체스터 백작은 새로운 스 캔들은 달갑지 않았을 테니까요." "......하녀가 자주 바뀌었어요. 저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은 해 보았 지만 도움을 청해 볼 사람이 없었어요." 진은 모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그녀에게 편지를 쓰게 했다. "그의 마음이 진심이었다면. 그리고 지금도 여전하다면 올 거 에요. 그분도 아직 수도를 떠나지 않았다니. 가능성은 있지요." ".....모험이군요." "모험이 아닌 사랑도 있던가요?" 진은 묵묵히 펜을 들어 편지를 쓰는 부인의 얼굴을 향해 미소를 띄 어 보였다. "그가 오면 따라 갈 건가요, 부인?" ".....가겠어요. 그가 불러만 준다면." "부인, 저는 대가없는 일은 안 해요. 확실한 일 처리를 바라신다면 보수를 지불하세요. 그가 장난이었다면 대신 죽여드릴게요. 진심이 남아 있다면 데리고 오도록 하지요." 모나는 방에 몰래 들어와 자신의 오래된 고백을 태연히 듣고 제의 해 오는 당찬 귀족 영애를 편지지에서 눈을 떼고 바라보았다. 그녀의 고양이는 주인에게 거절당하고는 해서 자신의 무릎 위에 올 라와 앉아 있는 형편이었다. 모나는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을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전 가진 게 그다지 없어요. 지참금이야 예전에 남편에게 모두 주 었고. 이름뿐인 귀족이에요, 영애. 하지만 한가지 이미 버렸어야 할 물건은 있어요. 이걸 받으실 래요?" 모나는 손가락에 끼고 있던 로체스터 백작 가의 안 주인에게 대대 로 대물림되고 있던 커다란 루비반지를 빼어서 내밀었다. "받겠습니다. 다 쓰셨으면 이리 주세요." 진은 모나가 자필로 쓴 몇 줄의 글이 적힌 양피지와 반지를 받아들 고 인사를 했다. "무도회 때 다시 뵙지요. 참석이 허락되지 않더라도 오시고 싶으시 면 연회장으로 내려오세요, 부인." ".....여기 있겠습니다, 영애. 귀족들은 절 구경거리 삼을 거 에요. 그 들 눈앞에서는 것은...." "용기가 필요하겠지요." 진은 고개를 끄덕이고 창가로 갔다. [밖으로 바로 나갈 거냐?] '그래. 또 그 복잡한 트랩들을 뭐 하러 피해 다녀? 기회 봐서 뛰어 내리자.' 진은 고양이의 목 뒤를 또 처음처럼 집어 올렸다. [캬악- 제대로 못 들어?!] "안녕히 계세요, 부인." ".....문은 저쪽이에요, 영애." 진은 웃어 보이고 창가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래에 작게 흩 어져 있는 사람들의 얼굴이 각자 다른 곳을 향하는 순간이 계산되 자 진은 발톱을 세우고 발버둥을 치고 있는 고양이를 들고 창턱을 짚어 밖으로 몸을 날렸다. ".......!!" 모나는 너무 놀라서 서둘러 창가로 가서 진이 뛰어 내린 창턱에 두 손을 짚고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바닥에서 그녀를 찾았다. 진은 건물 벽을 몇 번 발로 차가며 공중에서 몸을 회전시켜 하강하 는 속도를 줄여 땅으로 떨어지더니 곧 착지하는 동작을 취했다. 그리고 사라졌다. "어디로.....갔지?" 모나는 눈이 동그래져서 백작 가의 성 내부를 휘 휘 둘러보다가 정 원을 지나 대문과 떨어진 높은 담 벽에서 다시 조그마해진 검은머 리의 그녀를 발견했다. 진은 다시 위로 솟구치는 듯 하더니 깨끗이 모습을 감추었다. "......마법....마녀였나?" 하지만 마법사가 포함된 성안의 경비들의 모습은 평온해 보였다. 그 귀족영애는 그를 불러오겠다는 약속을 지킬 수 있으리라는 확신 이 섰다. 모나는 얼굴을 가리고 울음을 터뜨렸다. [52] * 진은 담을 지나쳐 처음 와이즈와 걸터앉아 모의를 했던 나뭇가지 위로 착지....하려고 하다가 허공에서 비틀거렸다. 가지 위에 앉아 있던 검은머리의 기사가, 자신의 무릎을 밟을 뻔 하 려던 동작을 멈추느라 몸을 비트는 바람에, 나무 아래로 떨어지던 진의 허리를 붙잡아 끌어 올려 옆에 앉혔다. "깜짝이야. 클레이스님..." [진. 내려놔!] 떨어뜨려지지 않았던 고양이가 진의 손끝에 매달린 채 아등바등했 다. 진은 고양이를 가지 위에 올려 주었다. 클레이스가 빙글빙글 웃으며 손을 풀지 않고 허리를 계속 붙잡고 있는 것 때문에 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허리. 23인치. 사이즈가 알고 싶으셨나 보네요. 기사 님. 가르쳐 드 렸으니 그만 놓으세요." ".......고양이를 데리고 대낮에 월 담을 하시네요, 레이디?" 클레이스는 진의 말에 눈을 좀 껌벅여 보였지만 못 들은 척 여전히 검은 눈을 반짝이며 진의 허리를 붙잡고 대답했다. '와이즈. 좀 가르쳐 주지. 능글맞은 드래곤이 죽치고 있는 줄 몰랐 잖아.' [네가 말할 기회를 줬냐? 엉? 눈이 핑핑 돌도록 흔들며 뛴 게 누군 데?! 못된 계집애! .......계속 그러고 있을 참이냐?] '떨어지고 싶어도 안 놔주고 있잖아.' [야, 바를로네시. 너야말로 대낮에 뭐 하는 짓이냐?] 클레이스는 와이즈의 씩씩거리는 음성을 무시하고 웃음 띄운 얼굴 로 코앞에 있는 진의 눈을 계속 들여다보았다. '낮에 보니까 더 괜찮네.' '곤란해~ 와이즈랑 달라서 놀림이 안 통하는 타입이라고.' [뭐 시기?] 진은 바짝 끌어 안겨져 어떻게 해야 무난히~ 와이즈가 경고했던 뒤 에 따를지 모를 보복을 피해 이 순간을 모면하나 했다. "클레이스님. 안 떨어질 테니 그만 놓으셔도 돼요." "무슨. 섭한 말씀을. 아름다운 레이디를 보호하는 일에 소홀해서는 안되지요." "파키오를 맡겼었는데 어떻게 이곳에 계실까요?" "군은 레이디 말씀대로 잘 배우더군요. 지금은 사교춤을 연습하고 있습니다. 걱정 마세요, 레이디. 열심히 하는 것을 보고 왔으니까 요." 클레이스는 당황하지 않고 또박또박 말을 하고 있는 진을 보며 '만 만치 않아. 만만치 않아~ ' 라는 생각으로 즐거워하고 있었지만 고 양이는 그들의 하는 양을 노란 눈으로 지켜보며 갸르릉 거리고 있 었다. 진은 뻔뻔한 기사에게 살포시 웃어 주며 한 손을 뒤로 돌려 내밀었다. [............] 고양이가 앞발을 턱하니 그 위에 올리자 진은 눈을 약간 찡그리고 요물덩이의 발을 잡아채서 앞으로 가져왔다. 거칠게 다뤄진 고양이는 털을 있는 데로 세우고 앞에 있는 클레이 스의 얼굴을 할퀴었다. 그 날카로운 발톱을 피하려고 클레이스가 몸을 뒤로 젖히는 바람에 진은 겨우 적대감을 이용하지 않고 그에 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진은 고양이의 겨드랑이에 끼고 있는 자신의 두 손에 두드러기가 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시침을 떼고 무릎에 앉혀 털을 쓰다듬 으며 입에 발린 사과를 했다. "저런~ 제 고양이가 실례를.....죄송합니다. 클레이스님." "............" [치사하다. 왜 끼어 드냐!] [무슨 소리냐? 고양이는 본래 뭐든 할퀴는 법이다. 난 끼어 든 적 없다.] 그르릉 거리는 소리를 내며 진의 스치는 손길 아래서 흡족한 듯 기 지개를 켜는 노란 고양이에게 클레이스는 눈총을 주다가 다시 진에 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로체스터 백작 가에는 무슨 볼일이 있으셨을까요, 레이디? 아직 무도회 날은 아닌데요." 진은 클레이스의 약점을 잡으려는 속셈을 눈치채고 진지한 얼굴로 다소곳이 대답했다. "잘 물어 주셨어요, 클레이스님. 또 기사 분의 도움이 필요할 일이 생겼지 뭐 에요. 파키오를 맡아 주신 것만으로도 지. 나. 치. 게 과 한 호의였는데, 다시 클레이스님께 도움을 청해도 될지 모르겠네 요." ".........무슨...." "아닙니다. 클레이스님을 다시 번거롭게 해드려서야 안 될 말이지 요. 떨어지지 않게 붙잡아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갈 곳이 있어서... 민트 백작부인께 저녁 늦게나 찾아뵙겠다고 전해 주세요, 기사님." 진의 가냘픈 소녀 연기에 와이즈는 소름이 돋아 털이 일어서고 있 었다. 클레이스는 다시 말려들고 있음을 뻔히 알면서도 되물을 수 밖에 없었다. "......도움이 필요하시면 기꺼이 도와야지요, 레이디. 저도 명색이 기 사입니다. 이번엔 무슨 일이신대요?" '낄낄.....꼴 좋다, 깜둥아. 계속 심부름이나 해라.' 진은 나무 아래로 먼저 내려가 받아 안으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 클레이스의 머리를 실수 인척 밟아 줄까하는 장난기가 솟았지만 당 해주지 않을 것 같아서 그의 머리 너머로 뛰어내렸다. "어이. 클레이스. 여긴 어쩐 일이냐?" 와이즈가 폴리모프를 풀고 진을 돌아보고 있는 클레이스 앞에 친근 한 웃음을 띄고 나타나자 클레이스는 실룩거렸다. '둘이 아주 죽이 딱딱 맞는군.' [그렇게 보이지 않았는데 꽤 민첩한 여자다? 담 위를 날아오질 않 나.] [좀 빠르기는 하지. 뭐 그런 정도로 놀래냐?] [안 놀랬다.] 와이즈는 낄낄 웃으며 기다리지 않고 벌써 앞서 걸어가고 있는 진 의 뒤를 따라갔고 클레이스도 인상을 쓰며 발걸음을 옮겼다. "어디로 가시는지, 레이디?" "기사 학교로요, 클레이스님. 같이 가시겠어요? 클레이스님이 도와 주신다면 굳이 다른 기사 분께 부탁을 드리지 않아도 되겠지만...." ".....함께 가지요." * 아트는 오후 검술 수업시간에 교관으로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었다. 십대가 대부분인 기사학교의 학생들은 줄을 맞춰 정렬해서 각각 기 합소리와 함께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학교내 학년 별로 배치된 여러 개의 연무장 중 하나에서 그는 다른 한 명의 교관과 함께 기사 후보생들의 검 수련을 돕고 있었다. "다음. 구호 붙여 시작!" "핫! 네카르도의 핫! 정의와 신의를 핫! 수호하는 기사가 되리라. 핫!" "저.....테이텀 경.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아트는 교관들의 시중을 들고 있는 소년이 뛰어와서 후보생들의 우 렁찬 기합소리에 움찔거리며 건넨 소식에 고개를 돌렸다. "수업시간이다. 방문은 나중에 받겠다고 전해라." "그게 저기....기사 클레이스 클레본 님이십니다." "............" 소년이 가져 온 소식에 함께 있던 다른 교관과 학생들도 눈길을 주 었다. "클레본 경이 내게 무슨 일로?" 학교 건물은 마법학교보다 오히려 조금 작았지만 교정은 훨씬 더 넓었다. 학생들은 주로 밖에서 실기 수업을 위주로 하기 때문에, 원 래 낮은 지대의 숲을 터로 삼아 공사를 해서 울창한 나무숲이 많이 남아 있는 곳이었다. 진은 교문에서 클레이스를 통해 수위에게 방문을 청하고, 달려온 시종 소년이 뛰어가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기사학교 안도 들어와 보고 싶었어, 와이즈. 여긴 학교가 아니라 수련회장 같다." "나무가 많아야 여러 가지 교과를 가르치고 배우는 게 편하겠지." "레이디께서도 검을 배우셨습니까?" 진은 버릇처럼 걸치고 있는 가는 검을 의식하고 핫핫....얼버무리며 웃어 보였지만 클레이스는 끈질기게 물어왔다. "와이즈도 기본적인 검술을 알지요. 그에게 배우셨다면 상당한 실 력이실 테고." "난 진에게 검 가르친 적 없다, 클레이스." "그래....?" "클레이스님. 여행을 하느라 위장용으로 가지고 다니는 것뿐이랍니 다." [정말 검을 못 쓰는 거냐, 저 여자? 아까 몸놀림을 보니까 무예를 익힌 것 같던데?] [검 쓰는 것 본적 없다. 일일이 물어보지 말랬지. 궁금하면 네가 직 접 도전해 봐라. 어쩌나 보게.] [웃기네. 내 상대가 어떻게 되냐? 투시를 해 봐도 말짱, 평범해 보 이는 구만.] [그거야, 모르지.] 숲의 오솔길 같은 길을 걸어 기합소리가 들리는 연무장 앞으로 가 자, 한 무리의 기사후보생들이 훈련을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소식을 전하러 갔던 소년 앞에 서 있는 짧은 귤색 머리의, 중년으 로 보이는 기사가 그들을 쳐다보았지만 다가오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 "아트 테이텀 경. 수업 중에 실례합니다." "클레이스 클레본 경. 안녕하십니까." 그는 겸손했지만 네카르도 최고라는 기사 앞에서도 당당해 보였다. "진 폰 리툰이라고 합니다. 아트 경." "전 와이즈 폰 리툰입니다." 아트는 마법사에게 목례를 해 보였고 드레스 차림이 아닌 귀족영애 에게 가볍게 허리를 숙여 보였다. 진은 그에게서 심지 굳은 기사의 면모를 보았고, 네카르도의 유명 한 미남기사와 그 못지 않은 화려한 외모의 금발 마법사와 함께 나 타난 자신에게 주위 시선이 쏠리고 있음을 알았다. '오오. 십대들 천지구나. 맨날 나이 살 먹은 아저씨들만 보다보니 신선하게 느껴지네.' [.....좋기도 하겠다.] 기사 후보생들은 대부분 남학생이었지만 일부 여학생들도 섞여 있 어서 진은 검을 휘두르거나 육체 단련 중인 그들을 호기심 어린 눈 으로 쓰윽- 훑어보았다. '좀....많이 어설퍼 보이네.' "경. 무슨 일로 찾아오셨는지." "아. 제가 아니라, 레이디 진께서 용건이 있으시다해서 안내를 한 것입니다. 테이텀 경." 진은 묵묵히 시선을 돌려 바라보는 고지식해 보이는 중년기사에게 공손한 어조로 대답했다. "수업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개인적인 심부름이라 수업 중에 전해 드리는 것이 무리가 있을 것 같네요. 방문시간을 알지 못해 실례를 범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수업시간은 아직 많이 남은 편이라 기다리시려면 지루하실 겁 니다, 레이디." "괜찮습니다. 수업참관인 셈치지요. 견학이 가능할 까요?" "가능합니다. 그럼....." 아트의 시종이 그의 지시를 받고 연무장 한쪽에 치워져 있던 교관 용 의자를 가져왔다. 진은 다른 한 명의 교관에게도 인사를 받고 의자에 앉아 그들을 지켜보았다. 시종소년이 두 개의 의자를 더 가 져 오자 진의 양편에 자리를 잡고 클레이스와 와이즈도 앉았다. "검을 배우고 싶으세요, 레이디? 제가 도와드릴까요?" "네? 음. 아니요." 클레이스의 제안에 진은 턱을 긁적이며 대답했다. "마법도 배우시지 않은 듯 한데 검에도 흥미가 없으세요?" "마법은 와이즈가 있으니까요. 지금은 배워 볼 시간도 없고. 검은.... 제가 검을 쥐게 되면 더 위험해지겠지요." "위험해 진다 고요? 물론 검은 위험하지만 자신을 지키기 위해 하 는 수련 중에 다치는 것 정도는...." [야. 투비와이즈. 재생력이 있다고 하지 않았냐?] [그녀가 위험하다고 한 말은 자신에게가 아니라 주위에게 라는 뜻 이다. 그것도 못 알아 듣냐?] [주위? 상대? 검을 쥐지 않고도 강하단 소리냐?] [.....나한테 묻지 말랬지?] 클레이스는 진의 비밀. 혹은 약점이 될 소지를 파악하기 위해 그녀 에 대해 좀더 알아야겠다는 생각으로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그때 마침 잠시 휴식을 취하던 몇 명의 학생들 중 하나가 교관에게 청하 는 것을 들었다. "기사 클레이스님과 대련하고 싶습니다, 선생님." 아트가 그들 쪽을 돌아보자 클레이스는 일어나서 진에게 한 팔을 굽혀 가슴 아래에 대고 허리를 굽혀 보이며 말했다. "허락해 주십시오, 레이디." '뭐. 그런 것에 내 허락을 받아야 하는데?' [원래 그렇다. 그것도 모르냐.] "기대하겠습니다. 클레이스님. 좋은 경기를 보게 되겠군요." '그래. 기대해라. 건방진 여자야. 보고 나서 매달리지나 말아라.' 클레이스는 경의 어린 눈을 하고 기대가 가득한 얼굴의 기사 후보 생을 상대로 간단한 소개가 끝나자 교관의 시작소리에 맞춰 대련을 시작했다. 다른 학생들도 교관의 허락 하에 훈련을 멈추고 지켜보았다. "어깨가 비었군요. 검을 너무 크게 휘두르면 허점이 많아집니다." "윽." "다리에 힘이 너무 들어갔습니다. 동작에 무리가 따릅니다." "머뭇거리면 공격시기를 놓칩니다." 클레이스는 상급생으로 보이는 제법 검술 동작이 잡힌 학생에게 지 적까지 해가며 여유 있게 검을 놀렸다. 금방 끝낼 수도 있었지만 단순히 진에게 보여 주기 위함인 듯 겉멋을 부려가며. 진은 챙챙 거리는 검이 부딪히는 소리와 그들의 움직임을 지켜보며 와이즈에게 말했다. "클레이스에게 전혀 상대가 안되긴 하네. 다른 기사들의 몸놀림도 저래?" "뭘 말하는 거냐?" "너무 단순하잖아. 좀 뻣뻣해 보여. 음. 체계가 덜 잡힌 펜싱기술을 보는 것 같다. 검이 무거워서 맞으면 위력이야 있겠지만....." 그때 진의 작은 목소리를 의식한 것인지 클레이스의 검에 탁하지 않고 깨끗해 보이는, 선명한 백색 검기가 어렸다. "오오. 검기다! 소드마스터라는 말이 정말 이었어!" "클레이스님 대단해요!" 학생들 몇몇이 외친 소리와 함께 다들 눈을 반짝이며 응원을 했고 클레이스의 검에 부딪힌 도전자의 검이 잘려서 떨어져나갔다. "졌습니다. 대련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클레이스님." "뭘요. 제가 지나쳤지 않나 싶네요." "아닙니다! 너무 영광인걸요. 성의껏 상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학생은 검이 부러졌음에도 들뜬 표정으로 마주 절을 하고 동급생들 에게 돌아갔다. "훌륭했습니다. 클레이스님. 네카르도 최고의 기사라는 이름이 아깝 지 않군요." 클레이스는 와이즈와 딴 소리를 속삭이고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하는 여자에게 검 끝을 들이대고 싶은 기분이 들었지만 매력적인 미소를 잃지 않고 대답했다. "과찬이십니다. 레이디께서도 오랫동안 산에서 수련을 하시고 실력 이 뛰어나다고 와이즈에게 들었는데요. 레이디께서 어떤 검술을 쓰 시는지 무척 궁금합니다. 전 말씀하신 대로 동작이 좀 뻣뻣한 편이 라. 하하...이거 배우는 학생들 앞에서 부끄러운 검술을 보였군요." 클레이스는 대화를 듣고 있는 주위 학생들에게 들으라는 듯이 중간 중간 낱말에 강세를 두어 말했고 효과는 금방 나타났다. "영애. 전 케이트 트랜스라고 합니다. 영애께서도 검을 다루신다면 저도 대련을 청하고 싶습니다. 클레이스님과 일행이시니 분명 뛰어 나시리라 여겨지는데 도전을 받아주십시오." [53] * 진보다 조금 더 큰 키의 늘씬한 남색머리의 여학생이 다가와 대련 을 청해왔다. 진은 검은머리 기사의 뻔한 속셈에 말려들어 호기심 과 질투가 담긴 눈으로 대련을 청해오는 한 두 살 많아 보이는 여 기사 후보생에게 웃어 보이고 일어났다. "전 검을 다뤄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호신술을 익히긴 했지요. 남 자 분이 도전해 오셨다면 감히 받아들일 수 없었겠지만 짧은 실력 으로나마 응대해 드리겠습니다." 진은 아트에게 목검을 부탁했다. 그녀는 조금 비웃는 듯한 표정으 로 하급생들이나 쓰는 목검을 들고 서 있는 진에게 맞추기 위해 자 신도 동급생들에게 건네 받아 목검을 들었다. 와이즈와 클레이스도 말리지 않았고 아트와 다른 한 명의 교관도 굳이 진 검을 쓰지 않는 승부에 관여할 이유가 없어서 말 없이 참 관했다. 진은 클레이스를 돌아보고 생글거리며 웃는 얼굴로 말했다. "클레이스님. 제가 이기면 부탁 한가지 들어 주시겠어요? 반대로 저 분이 이기면 저 분의 부탁을 들어 주시는 게 어떨까요." 케이트는 진의 말에 눈을 굴리다가 기대 섞인 표정이 되어서 클레 이스를 쳐다보았다. 클레이스는 '쓸데없는 조건을 또 거네!' 라는 생각을 했지만 웃으며 정중하게 대답했다. "영광입니다. 레이디 분들. 목을 달라는 부탁만 아니라면 못 들어 드릴 거야 없지요." '안됐다. 깜둥아. 또 말려드는 구나.' 아트는 시작 구호를 외쳤다. 그리고 고개를 갸웃거려야했다. 다른 학생들과 동료 교관도 마찬가 지였다. 진은 시작소리와 함께 대여섯 걸음 떨어져 있던 자리에서 케이트의 코앞으로 튕겨 나갔고, 목검을 든 손을 미처 다른 동작으 로 연결시키지 못하고 있던 상대의 손에서 검을 빼어내 버렸다. "............" "검이 없으니, 승부가.....계속할까요?" 진은 두 개의 목검을 양손에 들고 서 있었고, 너무 빠른 단 한번의 접근에 검을 빼앗겨 손바닥이 쓰리던 케이트는 얼굴이 빨개졌다. "계속하겠습니다. 전 아직 시작도 못 했는걸요." 진은 그녀의 검을 다시 돌려주었다. 돌려 받자마자 케이트는 망신을 준 상대에게 바로 검을 휘둘렀지만 그 자리에 그대로 분명히 서 있던 그녀는 검에 맞지 않았다. 케이트는 약간 옆으로 비켜서 있는 진의 목을 향해 다시 검을 휘둘 렀다. 맞지 않았다. 바로 한 걸음 반 거리에 서 있는 그녀의 옷깃도 스칠 수가 없었다. 진은 검을 부딪혀 오지도 않았다. "승부가 아닙니다. 피하기만해서야 무슨 승부입니까." 진은 얼굴이 빨개진 케이트에게 웃어 보였다. "그래요. 그럼 다시 공격해 보세요." 케이트는 빈틈없는 자세로 다시 검을 휘둘러 왔고 진은 그것을 움 직이지 않고 멈춰 서서 모두 맨 손 바닥으로 쳐내었다. 공격이 상체에서 다리로 내려가자 역시 한 발로 휘둘러 오는 케이 트의 목검을 모두 쳐내었다. "말도 안됩니다. 진 검이라면 이것도 승부가 될 수 없습니다." 씩씩거리는 도전자에게 진은 다시 웃어 보였다. "그럼 진 검으로 바꾸지요." 진은 목검을 버리고 가늘고 약해 보이는 허리의 검을 빼었다. 케이 트도 주위에 목검을 던져 건네 받게 하고, 진의 검보다 좀 더 폭이 넓지만 남학생들이 쓰는 두껍고 묵직한 검보다 가벼워 보이는 검을 빼어들었다. 케이트는 검을 바닥을 향해 그냥 늘어뜨리고 있는 진 에게 달려들었다. "저게....무슨 조화다 냐, 와이즈?" "보고도 모르냐, 실력 차가 너무 커서 상대가 안 되는 거 잖냐." "....저게 검술이 맞냐? 이상한 노래를 부르더니 검술도 이상하기 그 지없네." 참관하는 학생들은 쥐죽은듯이 두 여자의 결투가 되어버린 대련을 보았다. 아주 황당해 보이는 경기. 진은 한번도 칼을 맞대지 않았다. 케이트는 공격을 할 때마다 검의 사정거리를 벗어나 자신의 몸에 바짝 붙어 춤을 추듯 몸을 돌려 부 딪혀 오는 이상한 방어에 진땀이 났다. 검을 쥐지 않은 다른 손으로 공격을 시도하는 것도 전혀 소용이 없 었다. 그녀는 자신을 놀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왜! 검을 부딪히지 않는 겁니까." "왜 부딪혀야 하는 데요?" "............" "검을 왜 배우지요? 상대를 베거나 찌르거나 어쨌든 꺽기 위해. 그 리고 방어하기 위해서겠지요? 굳이 검을 쓰지 않아도 저는 그게 가 능하거든요. 이렇게요." 진은 느린 동작으로 케이트가 방어할 수 있게 검을 동그랗게 원을 그리며 휘둘러 보였다. 케이트는 직선 공격이 아닌, 그 장난 같아 보이는 공격을 차단시키 기 위해 검을 맞대었다가 진의 검에 걸려 한쪽으로 치워지고 복부 에 충격을 받았다. 진은 그녀의 검을 걷어내고 다른 손으로 케이트 의 배를 밀어 쳐서 나가떨어지게 했다. 케이트는 몸이 뒤로 약간 떠서 검을 놓치고 바닥에 넘어졌다. "승부를 인정하나요, 케이트?" "....콜록. 졌습니다. 하지만..." "검술이 아니지요. 검은 싸우는데 이용하는 무기일 뿐입니다. 아주 위험한 무기이지만, 그 이전에 원래 가지고 있는 것들을 이용해서 싸움에 임한다고 전쟁터에서 누가 반칙이라고 외치진 않겠지요." "............." 아트는 자신을 찾아왔다는 그 어린 귀족소녀에게 이제까지 자신이 가르친 검술이 완패되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놀라움과 함께 호승심이 일었다. 그 나이에 부끄럽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자신의 수업시간이었고, 그녀를 꺾어 보고 싶었다. "레이디. 죄송합니다. 저도 대련을 청합니다. 아트 테이텀입니다." ".....아트 경. 받아들이겠습니다, 하지만. 조건이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제게 지신다면 여기 학교를 그만 둬 주십시오." 학생들이 웅성거렸다. [투비와이즈. 저 여자 뭐 하려고 온 거냐?] [모나의 부탁을 받았다고 하지 않든.] [아트는 분명 백작 가의 스캔들의 주인공이긴 했지. 그 여자가 저 남자의 파멸을 사주하기라도 했냐?] [나중에 알게 될 일 아니냐. 그만 좀 물어봐라.] "....레이디께 지게 된다면 조건이 아니라고 해도 교관 직을 그만 두 겠습니다." 진은 검을 다시 옆으로 늘어뜨렸다. 멋을 부리는 게 아니라....검을 들고 설쳐보긴 처음이라 어떤 자세로 시작해야하는지 몰라서. 아트는 진과 마주 절을 하고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온통 빈틈 투 성이로 보이는 소녀에게 검을 들이대지 못하고 멈칫하다가 선공을 받았다. 진은 검을 주먹을 내지르는 것처럼 아래에서 위로 휘두르고, 복싱 기술처럼 검을 찔러 들어가다 거두고 다시 찌르고 했다. 아트는 그 공격들을 막아냈다. 발을 몇 발 떼지 못하고, 엉터리 같긴 했지만 진의 빠르게 검을 휘두르는 몸놀림과 가는 검에 실린 위력에 등이 서늘해졌다. 진은 검이 불편했다. 패싸움에서 단검을 써보긴 했지만. 쇠파이프 같은 봉을 휘둘러본 것 외에는 그렇게 긴칼을 가지고 검술 기술이 라고 할 만한 기술을 써 본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에게 맞춰 줄 수 가 없었다. 게다가 잘못하면 진짜로 베어버릴 것 같아서 마음대로 손을 놀릴 수도 없었다. '뭐. 어쩔 수 없잖아. 시험삼아 쇼를 좀....' 진은 공격을 멈추고 약간 뒤로 물러나 두 손으로 검을 잡고 발을 리듬감 있게 움직여 검도 방식으로 지쳐 들어갔다. 아트는 보도 듣지도 못한 이상한 공격을 계속 받아야했다. 머리를 두 쪽 낼 듯이 내리쳐지는 검을 막으면 바로 미끄러지듯 회 수되지 않은 검이 옆구리에서 가슴을 향해 베어오는 자세로 들어오 고는 했다. 그리고 또 휘둘러오고, 휘둘러오고 내리쳐지고....검이 공 격하는 방향이 예상이 되지 않아서 막는데 온 신경을 두어야했다. 진은 곧 한 팔을 옆으로 뻗고 스탭을 밟아가며 펜싱기술을 흉내내 보았다. 아트는 검 끝에 주공격이 실린 진의 새로운 검법에 다시 식은땀이 났다. 막을 수는 있었지만 옷이 검 끝에 걸려 여기저기 찢어지고 상처가 생겨났다. 아트의 검술. 이 세계에서의 검술에 대해 제대로 된 공격을 받지 못해 모두 알 수는 없었지만, 진은 더 끌지 않고 끝내기로 결정했 다. 부딪혀 오는 아트의 두꺼운 검에 자신의 검이 닿자 부드럽게 미는 동작으로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어 검 날로 힘이 옮겨가게 했다. 아 트의 검이 잘려나가고 진의 검도 힘을 이기지 못해서 부러졌다. 그 의 힘이 흩어지는 찰나를 잡아 진은 그의 옆머리를 향해 부상을 면 할 정도의 선에서 돌려차기를 했다. 여학생이 검이 아닌 주먹에 맞아 넘어진 것을 보았었기 때문에 진 의 남은 손에도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었지만, 아트는 잠깐 시간이 멈춘 듯 보이는 진의 회전력에 방어하지 못하고 머리를 걷어 채여 옆으로 밀려 뒹굴었다. 낙법을 시도해서 멈추기 직전. 그의 목에 닿 을 듯 스치며 부러져 길이가 짧아진 검 날이 땅에 깊숙이 박혔다. "............." 아트는 부러진 자신의 검을 들고 상대가 죽이려고 마음만 먹었다면 목을 꿰뚫었을 바닥의 검 집만 보이는 검을 내려다보며 일어섰다. "깨끗이 졌습니다, 레이디. 한번도 공격을 시도할 수가 없었군요. 실력 차가 너무 큽니다." 진은 바닥 저 만치에 부러져 떨어져 있는 검 날을 보며 대답했다. "실력 차가 아니라, 싸우는 방식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겠지요. 전 검을 쓰지 않았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아트 경의 검술은 훌륭했어요. 단지 아무리 위력 있고 빠른 검이었다고 해도 상대의 움직임을 따 라 잡지 못했기 때문이었겠죠. 전 민첩함만은 뛰어난 편이거든요." "아니요. 힘의 위력면도 차이가 컸습니다. 그런 가는 레이피어에 제 검이 나뭇가지 베어지듯 베어졌지 않습니까. 그리고.....레이디의 발 동작은...그리고 마지막 공격 역시 처음 봅니다." "제 발이요? 마지막 공격의 발 차기는 맨손 격투무술의 한가지 기 술이었고요. 음...제가 기사 분들의 몸이 뻣뻣하다고 느꼈던 것은 동 작이 리듬을 타지 못한 것 때문에 한말이에요. 어떤 방식의 싸움이 든지 신체 리듬이 바탕이 되지 못하면 허점이 생기기 마련이지요. 출발을 그렇게 해서는 발전이 더딜 거 에요." "....리듬이요?" 진은 태권 무라도 보여 줄까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더 구경거리가 될 것 같아서 생략했다. "그래요. 힘의 위력을 떠나 무기를 들고 있든 그렇지 않든 간에 리 듬을 탄 공격은 배의 효과를 내지요. 학생들은 빠르게 검을 휘두르 는 훈련으로 몸에 밴 검술 동작을 익히고 육체의 힘을 단련하는 것 도 중요하지만 먼저 댄스를 통해서라도 리듬감을 키우는 것도 좋은 방법이겠지요." ".....댄스요." 클레이스는 어이없게 보이는 경기에 멀끔히 아트와 이야기를 나누 고 있는 진은 바라보고 있었고, 와이즈는 기합이 잔뜩 들어가는 교 육을 받는 기사 후보생들 앞에서 댄스를 배우라는 충고를 하는 진 에게 피식피식 웃음을 짓고 있었다. 다른 한 명의 교관과 말문이 막힌 학생들은 모두 눈을 굴리고 자신 들의 선생을 마음대로 휘두르고 발로 걷어 찬, 비슷한 또래거나 더 어린 귀족소녀의 말을 멍청히 듣고 있었다. "영애.....리듬을 타라고요?" 가까이에서 지켜보던 전 도전자 케이트의 목소리에 돌아보며 진은 대답했다. "아. 전 검에 대해 잘 몰라요. 하지만 분명히 검만 휘두르는 것보다 는 몸도 함께 검에 맞춰 휘두른 다는 생각으로 박자를 잃지 않는 것이 나을 거라는 생각을 했어요. 여기사 분들이 더 잘해낼 거 에 요. 여자 분들이 리듬감은 더 있는 편이니까요." "............" 그녀가 눈썹을 모으는 표정을 짓자 진은 미처 한가지 생각지 못한 일을 떠올렸다. '아차. 이곳은 음악이 그 모양이었는데, 댄스가....제대로 일 리가 없 을 텐데...에이. 모르겠다. 알아서 하라지.' "아트 경. 수업은...?" ".....끝났습니다. 전 약속대로 이 시간 부로 학교를 그만 둡니다." 아트는 동료 교관과 몰려들어 있던 학생들에게 목례를 하고 돌아섰 다. "주제넘게 나서서 죄송합니다. 실례했습니다." ".....아닙니다. 좋은 대련을 보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레이디." 진은 대답하는 교관과 학생들에게 인사를 하고 아트의 뒤를 따라 연무장을 벗어났다. [난 춤도 잘 춘다고! 저런 엉터리 검술이 검술이냐?] [시끄러. 나한테 말하지마.] 학교 본 건물과 통하는 오솔길에 접어들자 진은, 앞서 가는 아트를 불러 세웠다. "아트 경. 제 볼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그는 멈춰 서서 어렸을 때부터 30년 가까이 수련한 자신의 검을 손 쉽게 깨뜨려 준 귀족 영애에게서 접혀진 양피지를 건네 받았다. "...........?" "모나 로체스터 백작부인의 부탁을 받았습니다." "...........!" 아트는 편지를 꽉 쥐었다. "그 일은 끝났습니다, 레이디. 전 정식으로 결투에 임했고 결백을 인정받았습니다." 진은 팔짱을 끼었다. "부인에게서 편지를 받은 것이 처음이세요?" ".....한번 받은 적이 있었지요." "무슨 내용이었는데요?" "저주를 받으라는 내용이었지요. 이해합니다. 남편 되시는 분이 제 게 당해 돌아가셨으니." 진은 웃음이 삐져 나왔다. '나이가 몇이요? 둘 다. 정말 사춘기 소년 소녀 저리 가라네!' "편지를 이 자리에서 읽어 주셨으면 합니다, 아트 경." 그는 얼굴이 붉어져서 머뭇거렸다. "전 부인과 약속을 했답니다. 그래서 지금 바로 아트 경의 의사를 알아야합니다." 아트는 접힌 양피지를 펴서 읽어내려 갔지만 표정에 변화가 없었 다. "......읽었습니다. 레이디." "전 편지를 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방문을 청하는 내용이라는 것 은 알지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로체스터 백작 가에서 영원히 발길을 끊어 달라는 경고를 받았 습니다. 결투가 끝나고 에릭 로체스터가 작위를 받은 다음, 제가 제 일 먼저 그 가문에서 전해 받았던 것은 떠나라는 말이었지요." "그런데 아직까지 떠나지 않고 계셨네요?" "............" 진은 와이즈를 돌아보았다. "와이즈. 이 주위 소리를 차단시켜 주겠어? 나무가 우거져 있어서 멀리까지 들리지는 않겠지만 혹시 듣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니까." 클레이스와 나란히 서 있던 와이즈는 주문을 주어 섬겼다. "소리여. 발길을 멈춰 잠시 머무르길 희망합니다. 바람도 때론 휴식 을 취하는 법. 소리를 실어 나르는 일에 제약을 둡니다. 음향차단." [너 재미있게 사는구나.] [시끄러.] "아트 경. 부인께 부탁 받은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 "부인의 마음을 전하는 거였지요. 편지는 예전처럼 제 구실을 못할 수도 있을 일이라 자세히 쓰지 않으셨을 겁니다. 부인께서 사신 노 래를 들려드리지요." 진은 엇갈린 두 연인의 마음을 이어주기 위해, 저 닫힌 마음의 기 사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그의 앞에서 그들을 위해 만들어진 듯한 가사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다정했던 사람이여 나를 잊었나, 벌써 나를 잊어 버렸나 그리움만 남겨놓고 나를 잊었나, 벌써 나를 잊어버렸나 그대 지금 그 누구를 사랑하는가. 굳은 약속 변해버렸나 예전에는 우린 서로 사랑했는데, 이젠 맘이 변해버렸나 아 이별이 그리 쉬운가. 세월 가버렸다고 이젠 나를 잊고서 멀리 멀리 떠나가는가. 아 나는 몰랐네, 그대 마음 변한 줄 난 정말 몰랐었네. 아 나 너 하나만을 믿고 살았네 그대만을 믿었네. 네가 보고파서 나는 어쩌나. 그리움만 쌓이네" [오오. 괜찮은 노래다.] [네게 불러 주는 게 아니다 바를로네시. 왜 좋아하냐?] [뭘~ 내게도 부르게 하면 되지.] '진드기 같은 놈.' "........부인이....." 아트는 얼굴이 더욱 붉어져서 눈까지 빨갛게 보였다. "곧 로체스터 백작 가에서 무도회가 열립니다. 전 민트 길레스피 백작부인의 댁에 머물 예정이니 절 찾아오십시오, 초대장을 받지 못한다해도 파트너로 참석하실 수는 있겠지요." "레이디의 파트너로요?" "네. 전 경을 데려가겠다고 약속했으니 그 방법을 쓰는 것이 좋겠 지요. 가시겠습니까?" "............." [파트너는 내게 부탁해야지.] [너 자꾸 시끄럽게 할래?] "대답하시지요. 아트 경. 가시지 않겠다면 전 부인과 한, 다른 약속 을 지켜야 합니다." "무슨....?" "경을 죽여야 하거든요." 그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손에 든 편지를 여러 번 접는 시늉을 하 던 아트는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승부에서 레이디께서 죽이지 않고 살려주신 기회를 그냥 버리면 안되겠지요. 아직은 죽고 싶지 않으니 가겠습니다. 사표를 내고 주 변정리가 되는 데로 찾아뵙겠습니다." 진은 소극적인 태도의 사춘기 소년의 행동을 하는 중년 기사에게 웃음이 나와, 앞에서 마구 웃어주고 싶었지만....꾹꾹 눌러 참았다. 교문 쪽 길을 찾아 돌아가는 그녀의 뒤에서 아트가 중얼거리는 소 리가 들렸다. "감사합니다. 영애." [54] 와이즈와 클레이스 * "레이디. 정말 낭만적인 분이시네요. 아트 경과 모나 백작부인과의 일은 아직도 심심찮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곤 하지요. 두 사람 을 이어 줄 생각을 하신 것을 보면 그분들의 사랑을 이해하고 계신 듯 하네요." ".....클레이스님." "네." "5살 먹은 어린애도 알 일인데 모르는 게 이상하지요. 클레이스님 은 이제껏 모르셨어요?" 클레이스는 접근의도로 시작한 말에 되물어 오는 진의 질문에, 몰 랐다고 하면 그녀의 말처럼 5살 먹은 어린애도 되지 못하게 되어 버릴 테고, 알고 있었다고 하면, 알면서 다른 귀족들처럼 재미 삼아 구경만 했던 태도가 되어버릴 것 같아 대답을 바로 하지 못했다. ".......알고 있었다고 해도 남의 사생활에 함부로 관여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진은 와이즈와 클레이스의 호위로 기사학교를 나왔다. "클레이스님은 남의 사생활과 많이 얽혔을 것 같은데요? 호호호... 농담입니다." ".............." '이 여자를 콱!' '꼬시다. 계속해라, 진. 큭큭큭....' "클레이스님께 승부와 관련해서 한가지 부탁을 드리겠다는 이야기 를 드렸었지요." "......그랬었지요." '그냥은 안 넘어가네. 그래, 뭐냐?' "절 호위해 주시는 호의에 정말 감사 드립니다만, 제가 앞으로 하 는 일을 아시더라도 관. 여. 하지는 말아주십시오, 클레이스님. 목을 달라는 청도 아니니 그 정도의 부탁은 들어주시겠지요?" ".......무슨 일을 하시든 입을 꼭 다물어 드리지요, 레이디." "감사합니다." 와이즈는 낄낄대었고 클레이스는 그를 노려보고 인상을 쓰며 진을 따라갔다. "콜린스 수업이 거의 끝났겠는데? 기다렸다 같이 갈까, 와이즈?" "뭐 하러 기다려? 사람을 보내지. 그런 일에 쓸데없이 왔다갔다하 기 싫다." "저희 집으로 가시지요. 마법학교와 가깝거든요. 파키오군도 쉬고 있을지 모르고요." "댁으로 데려가셨나요? 길레스피 백작부인 댁이 아니고요?" "숙소와 가까워서 저희 집으로 갔었지요. 레이디. 저녁 초대에 응해 주시겠지요? 블루가 가꾼 정원은 아주 아름답답니다." ".....엘프 블루님이 가꾼 정원이라면 꼭 보고 싶네요. 저녁 초대 감 사합니다. 오래 있지는 못하겠지만." [진. 흑룡의 소굴로 제 발로 들어가려는 거냐?] '왜? 저렇게 애써서 꼬시는데 좀 불쌍해 보이잖아. 밥 먹여 주겠다 는 데, 얻어먹어 주지 뭐.' '너나 먹히지 말아라.' 와이즈는 한숨을 쉬고 클레이스의 집으로 진과 함께 안내되어 갔다. * 민트는 후작영애와 그녀의 마법사가 클레이스 클레본의 집에서 저 녁을 먹기로 했다는 연락을 받고 초조해졌다. '어떡하지? 클레이스는 식사가 끝나도 바로 안 보낼게 뻔해. 그냥 쳐들어갈까? 예의 없게 굴면 블루님은 더 싫어하실 지 모르는데. 아이 참. 그 귀족영애는 오란다고 순순히 따라가냐? 클레이스는 완 전 바람둥이라고! 사교계 데뷔를 앞두고 잘한다. 흥.' 기다릴까했지만 몇 분되지 않아서 민트는 자리를 박차고 다시 일어 났다. '그 잘생긴 바람둥이에게 먹힐 걸 뻔히 알면서 샤프롱을 약속했는 데 가만 보고 있으면 안되지.' 민트는 블루 때문이 아니라고 자신을 속이고 저녁 만찬에 어울리는 붉은 색 드레스를 차려입고 서성거렸다. '뭔가 핑계 댈 만한 일이.....' 민트는 어제 함께 있었던 후작 가의 후계자를 떠올리고 부리나케 저택을 나섰다. * 진은 후회 막급이었다. '깜박했어. 젠장. 또 드레스냐.' 아담하고 소담스런 클레이스의 집은 아름다운 정원에 둘러 쌓여 작 은 숲 속의 별장 같은 곳이었다. 응접실로 안내되었다가, 만찬을 위 해 옷을 갈아입으라고 강압적으로 집어넣어진 방에서 진은 하녀의 시중을 받아가며 드레스로 갈아 입어야했다. 이제까지 보아왔던 어떤 드레스보다 복잡해 보였다. 속바지와 어깨 끈 없는 짧은 속치마 위에 두벌의 길이가 다른 스커 트를 층층으로 겹쳐 입어 풍성하고.....결과적으로 움직이기가 더 불 편했다. 가장 나중에 걸친 드레스는 무릎까지 오는 길이로 어깨를 드러내고 가슴부분에서 시작된 드레스였다. 진의 고운 피부가 검은 색 드레스에 더 두드러져 보였고, 목덜미가 서늘하게 느껴졌다. 허리에 보통 두르는 폭 넓고 깔깔한 천 없이 등뒤에서 접힌 부분을 끈을 엇갈려 조여 매어 입게 되어 있었다. 어깨가 모두 드러나서 머리는 올리지 않고 그대로 풀어 내린 채로 두게 했다. '클레이스. 날 잡아먹으려는 수작이구나. 뻔히 다 보인다. 검은 드래 곤 아니랄까봐서 옷장에 검은 색 드레스 일색이네. 총각 집에 웬 드레스가 이렇게 많냐?' 마중 나온 클레이스가 문을 두드리자 하녀가 문을 열고 허리를 굽 혔다. "아름다우시네요, 레이디." 클레이스는 빙글빙글 웃으며 하녀를 물렸다. 그리고 들고 왔던 보 석상자를 열어 보였다. "보석을 빌려드리지요. 마음에 드실 겁니다." 진은 백금의 정밀한 세공 바탕에 흑 진주가 중간에 몰려져 만들어 진 목걸이와 귀걸이 셋트에서 번져 나오는 은은하고 우아한 빛깔에 눈을 굴렸다. "인간이 세공 한 것이 아니군요. 드워프 작인가요? 그렇게 짙은 색 의, 큰 크기의 흑 진주는 처음 봅니다." "보석 보시는 눈이 있으시네요. 레이디. 드워프가 세공 한 것이죠." "감사합니다만, 전 부담스러워서 못하겠습니다. 지나치게 귀한 보석 이네요. 제 팔찌와도 어울리지 않아 보이고요." '아니. 보석 마다 하는 여자도 있었나? 하라면 할 것이지. 준다는 것 도 아닌데 튕길래, 너?' "하고 계신 귀걸이도 아름답지만 한쪽뿐이니 바꿔하십시오. 부담 가지실 필요 없습니다. 진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제 귀걸이는 그냥 귀걸이가 아니라 서요. 못. 뺀. 답니다. 제 장신 구와 그 목걸이는 격이 너무 차이가 나 보여서 감히 사양합니다, 클레이스님." '네 귀걸이가 격이 낮다는 거냐, 내 목걸이가 낮다는 거냐?' 진은 문을 가로막고 있는 클레이스의 옆을 지나가려고 했다. 클레이스는 이 건방진 여자의 오만 불손함에 화가 치밀어서 팔을 홱 잡아챘다. 아니....잡아채려고 했는데 허공을 쳤다는 것을 알았다. 진은 문을 향해 당당한 걸음으로 걸어나갔다. '어, 피해? 저 여자 정말 열 받게 하네!' 클레이스는 보석 상자를 '딱' 소리가 나도록 거칠게 닫았다. 진은 상자가 닫히는 소리와 함께 등뒤에서 밀려오는 거센 해일 같 은 기운에 한 두 걸음 앞으로 떠밀리는 기분이었다. '무시무시하네. 조심....난폭해지겠다.' 블루는 손님이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정원을 돌보는 일을 계 속하다가 손에 묻은 잔가지와 흙을 툭툭 털고 쭈그려 앉았던 자세 에서 일어났다. "...........!" 그리고 저택 내에서 발산되는 블랙 드래곤의 기운을 감지하고 주춤 했다. 누군가 클레이스의 기분을 건드린 모양이었다. 결코 익숙해지 지 않는 그 검은 파괴의 기운에, 나무와 풀과 벌레들까지 움츠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아가씨인가....?' 블루는 잔잔한 음정으로 허밍과 휘파람을 섞어 소리 죽인 작은 생 명들에게 다듬어 보듬는 듯한 위로를 보냈다. 존재를 부정케 하는 거대한 살기에 순간 숨을 멈췄던 친구들이 다 시 안도하며 생명의 순환을 시작했다. 블루는 정령을 불러 몸을 씻고 의자에 올려둔 하프를 들었다가 다 시 내려놓고 묵묵히 악기를 향해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그 인간 소녀는....무언가 이상했다. 엘프의 눈으로 본 그녀는 순리에. 이치에 맞지 않았다. 엘프의 근본 인 '조화'에 해당하지 않거나. 반대로 지나치게 조화롭게 보이기도 했다. 그녀는 누구일까? 블루는 엘프에게는 가장 견디기 힘든 기운을 발산하는 블랙 드래곤 에게 붙잡혀 지내는 동안 인간의 도시에 머무르면서 그들에 대해 많이 알았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가 느낀 인간에 대한 생각은 그녀를 만나 그녀의 노래를 듣고 궤도를 수정해야했다. 가장 조화롭지 못한 종족인 줄 알았던 인간은 반대로 가장 조화로 운 종족인 줄도 몰랐다. 엘프는 숲이다. 숲은 자연의 한 부분이며 그렇기 때문에 엘프는 그 소녀의 말대로 자연에 가장 가깝다. 하지만 인간은 숲을 파괴하고 이용하고 버린다. 그들은 무모하고 모순된 존재들이다. 그리고 지나치게 번성했다. 그들은 자신들과 친구가 되고 싶어하지만 친구가 되어지지 않았다. 그런 줄 알았는데. 엘프임을 잊지 않고 여행을 하던 중의 지금에 이르러서는 이제까지 가지고 있던 생각들이 어디선가부터 어긋난 것은 아닌지 의심이 되었다. '단순히 그 감성을 울리던 노래를 들어서일까. 아니면 그녀 자체가 그 노래와 같다는 느낌 때문일까. 그것을 소리로 표현해 내었기 때 문일까.' 블루는 하프를 집어들어 팔에 끼고 정원 테라스를 벗어나 손님들이 모여있는 응접실을 향해갔다. * "파키오. 댄스연습 했다며? 콜린스. 다녀왔어?" "네. 레이디." "네. 와- 정말 예뻐요. 레이디! 아니. 아름다우세요, 레이디." 파키오는 말투를 고쳐서 다시 말했다. 와이즈는 파키오와 콜린스와 함께 소파에 앉아 있다가 두 소년이 일어나 진을 반기는 것을 보았지만 그대로 자리에 앉아있었다. 진의 뒤에 서 있는 클레이스의 모아진 눈썹을 보고 와이즈는 키득 웃음이 나왔다. '맘대로 안되지? 꼴 좋다, 깜둥아. 너라고 별 수 있었겠냐.' 파란 머리의 엘프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진은 고개를 돌렸지만 두 드래곤은 무시했고 소년들은 알아채지 못했다. 진은 블루가 인간이 아닌 엘프라는 것을 다시 실감했다. 그의 소리는 '인기척'이 아니라 '엘프의 기척'이라고 해야 맞을 듯 했다. 진은 선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파란 눈의 엘프에게 눈인사를 했다. "블루님. 저녁식사를 하기 전에 블루님이 가꾸신 정원을 구경해도 될까요? 클레이스님이 아주 아름다운 정원이라는 말씀을 하시던 데." "그럼요. 레이디." "신사 분들은 같이 가지 않으실 래요?" [투비와이즈. 잠깐 남아라.] 와이즈는 사양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저어 보였다. 파키오가 가겠다고 말하려는데 콜린스가 재빨리 말을 가로막고 대 답했다. "저흰 나눌 이야기가 있거든요, 레이디. 블루님. 나중에 보게 해 주 세요." 진은 블루를 따라 정원 테라스로 가기 위해 응접실을 나갔다. '야! 왜 네 멋대로 결정 하냐.' '웃기지마. 레이디께서 먼저 부탁하시는데 우리까지 뭐 하러 따라가 냐. 넌 눈치도 없냐? 레이디께선 이유 없는 일에 부탁 같은 것은 안 하신 단 말이야. 마법사 님도 가만 계시잖아.' '겨우 몇 일 먼저 알게 되었다고 되게 잘난 체 한다, 너?' '그 몇 일 동안의 일을 네 녀석은 상상도 못할 거다, 임마.' '난 너와 많이 다르다? 레이디께서 우릴 후원하는 방향이 전혀 다 르다는 거 알지?' '웃기고 있네! 주제를 좀 알아라.' "마법사님. 클레이스님. 저흰 잠깐 밖에 다녀오겠습니다." "그러세요, 콜린스." 콜린스는 아무래도 담판을 지어야겠다고 생각하고 파키오를 끌고 응접실을 나갔다. * "뭐냐. 클레이스." 클레이스는 둘만 남게 되자 두꺼운 가죽을 씌워 양털을 넣어 만든 푹신하고 긴 소파 한쪽에 앉아 있다가 건너 편 옆자리의 금발머리 마법사를 쳐다보았다. "다 불어. 와이즈. 숨기는 게 있지?" "뭘? 나보고 네게 고. 백. 을 하라고?" "웃겨서 넘어가려고? 뭔가 많이 이상하단 말이야. 저 여자." "네 기운에 영향을 안 받아서? 이상할 거 없다. 내 기운에도 영향 받는 꼴을 못 봤으니까." 클레이스는 목에 주먹을 가져가 툭툭 쳤다. "분명. 인간이 맞지?" "그래." "그런데 영향을 안 받는다고?" 와이즈는 장난에서 한 단계 올라간 관심을 보이는 저 끈질기고 바 보 같은 드래곤 때문에 머리가 아파 왔다. 처음...진과 정보 교환을 할 때 드래곤에 대해 평한 그녀의 말이 생 각났다. 자신은 말도 안 되는 일로 치부하고 슬쩍 넘어갔지만 저 검은 드래곤은 어떻게 대답했을까. 블랙 드래곤들은 가진 힘의 특성상 레어 주위에 풀조차 자라지 않 는다. 그들은 사는 환경자체가 어떤 종류의 드래곤보다 생명체와 접촉할 기회와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한다. '저 녀석이 사소한 것에 집착하고 유달리 끈질긴 것은 그런 환경 때문인지도 모르지.' ".....클레이스. 그 인간 여자와 나누었던 이야기 중 네 궁금증과 관 련된 이야기를 해 주마. 이번뿐이다. 다시는 날 붙잡고 늘어지지 좀 마라. 더는 안 참는다. 네 유희와 내 유희는 별개라는 사실을 좀 구 분해 줘라." "............." "그것이 이성을 갖추게 된 이후 내게 드래곤에 대한 기막힌 표현을 했었다." "뭔데?" "드래곤은 외로운 존재라고 하더군." "맞는 말이 구만." "뭐?" "............." 클레이스는 인상을 쓰며 와이즈의 되묻는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와이즈는 소파에서 힘을 빼고 늘어지듯 몸을 폈다. "네가 그걸 인정한다니 더 놀랍다....그렇다고 해도 다른 종족도 아 니고 인간 앞에서 어떤 드래곤도 그런 이야기에 긍정은 하지 않겠 지." ".......다른 건?" "그 여자는 다른 인간들이 우릴 느끼는 것처럼 비슷하게 느낀다. 어찌할 수 없는 힘을 가진 초월한 존재로 보긴 하지. 하지만 인간 으로서의 자부심도 그만큼 크다. 개미가 떼를 지으면 인간도 잡아 먹는 것처럼. 쥐가 떼를 지으면 인간의 도시를 초토화시킬 수 있는 것처럼 인간도 드래곤을 상대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 확신한 다. 드래곤도 신의 피조물이니 동등하게 여긴다는 뜻의 말을 했었 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가진 가치관 그대로 세상을 살더군. 자신 을 가로막는 것이 신이라면 신조차도 죽이겠다는 생각을 했던 걸로 안다." "......확실히 기가 막히긴 하네." 클레이스는 포갠 다리의 발끝을 까닥이며, 시선을 돌리고 소파에 한 팔을 걸치고 앉아 있는 마법사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네 신발은?" "뭐?" 와이즈는 아차 했지만 태연히 대답했다. "가죽을 변형시켜 만든 거다. 괜찮아 보이냐?" ".............." "알았다. 솔직히 말하면 내 아이디어가 아니다. 됐냐?" 클레이스는 특이해 보였던 와이즈의 가죽 부츠도 진이 생각해 낸 것으로 알아들었다. 특이한 노래에. 특이한 검술에. 특이한 사고 에.... '온통 특이하네.' "와이즈. 너 괜찮은 상대를 잡았구나. 유희가 재미있을 것 같은데. 나도 끼워주면 안 돼냐?" "클레이스...." "끼워 줘라. 아니면 마법을 가르쳐." 와이즈는 점점 골치가 아파 왔다. "뭐 하러?" "수명을 늘리라고. 9써클이면 드워프 이상은 살 수 있겠지. 인간은 아무리 잘나도 너무 짧게 살잖냐." "클레이스. 너 머리가 좀 이상해졌구나. 왜 그리 집착하는데?" "너도 집착하고 있잖아." "정말....해 보자는 거냐. 이 진드기야!" 클레이스는 실실 웃음을 짓고 눈빛이 노란색과 파란색을 오가고 있 는 마법사의 얼굴을 외면하며 속으로 뇌까렸다. '아직 끝난 게 아니다, 노란 드래곤아. 기회는 언제든 만들면 되는 것이고. 뺏기기 싫으면 간수 잘해라~ ' 와이즈는 한마디 해 주려고 입을 열려다가 정원 쪽에서 마법이 시 행됨을 알고 고개를 돌렸다. "어라? 엘프가 먼저 채가네. 아니, 그것이 간이 부었나?" "......클레이스. 진이 시킨 걸 거다. 저녁이니, 약속시간이 다 되었군. 오늘 저녁밥은 좀 늦게 먹게 되려나 보다." "안 잡아와?" "뭐 하러?" "도망가는 거 아니냐?" "그러게 도망을 왜 가는 건데? 일 보러 가는 걸게다." ".......끼워 주라." "시. 끄. 러!" 하인이 들어와 방문객이 있음을 알려왔다. [55] 8-7. 엘프와 데이트를. 엘프가 가꿨다는 정원은 멋있었다. 인위적인 느낌이 드는 인간의 정원과는 달리, 나무와 꽃들은 자연 스럽게 제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자신을 뽐내고 땅에 뿌리를 박고 있는 느낌이었다. 달빛이 진해지고 있는 정원에 서서 진은 그들과 같은 공기를 마시고자 심호흡을 했다. "정말 아름답네요. 더 없이 훌륭한 정원사시네요, 블루님은." "엘프는 모두 정원사지요." "다른 엘프들도 모두 음유시인이기도 하나요?" 블루는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모두 노래를 하긴 하지요. 전 하프를 들고 인간 세상에 여행을 나 왔기 때문에 음유시인인 셈이고 마법사 복장으로 나왔다면 마법사 인 셈이겠지요. 엘프는 그냥 엘프랍니다." "엘프는 노래도 하고 마법도 모두 뛰어나고....들으니까 육체 능력도 뛰어나다고 들었는데 그런가요?" "인간이 보기에는 그렇겠지요. 엘프 마을에선 그다지 특출한 능력 은 아닙니다. 인간들 사이에서 뛰어난 사람이 있는 것처럼. 엘프들 사이에서도 노래를 더 잘하거나, 마법에 더 소질이 있거나, 활의 명 수가 구별되고 검을 배우는 엘프도 있지요. 공통적으로 인간에 비 교해 수명이 길고 체력이 있고 숲과 가까운 종족이라는 점이 다르 지요." 진은 정원을 구경하던 자세 그대로 블루와 나란히 서서 계속 질문 했다. "그렇다면 엘프도 개개인의 가치관이 모두 각양각색인가요?" "가치관이라고 하면 너무 범위가 포괄적이게 됩니다만, 인간과 비 교하면 엘프들 개개인의 생각은 훨씬 평이하다 할 수 있겠지요." "마법은 몇 써클이세요, 블루님?" "저는 7써클입니다. 엘프들은 대부분 마법에 소질이 있지요. 하지만 인간 마법사처럼 수련에 많은 공을 들이지는 않는답니다. 인간보다 오래 살기 때문에 자연히 써클이 높아지는 셈이지요." 진은 달빛 받는 나무와 잎새들 사이에서, 맑은 엘프의 목소리가 자 신의 목소리와 확연히 구별되어 울리고 있는 것에, 그 특유의 노래 를 듣고 있는 듯해서 현실 감각이 무뎌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심문처럼 되어 버린 자신의 질문에, 물으니 대답한다는 당 연한 태도의 답변들에 웃음이 나왔다. 진은 얼마나 대답이 지속되는지 계속해 보기로 했다. "정령과도 가깝다고 들었어요. 엘프는 모두 정령사인가요?" "물과 바람의 정령과는 친숙하지요. 그 외 숲에 속하는 작은 정령 들과도 친숙합니다." "땅의 정령과 불의 정령은 부르지 못하나요?" "부를 수는 있습니다만. 땅과 불의 정령은 드워프와 더 친숙하지 요." ".......블루님.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는데요." "네. 이제까지 묻고 계셨는데요?" 진은 속으로 씨익- 웃고 다시 질문을 던졌다. "엘프는 이성교제를 어떻게 하지요? 엘프들의 결혼 풍습과 성문화 가 궁금해요." ".....엘프는 평생 한번 결혼합니다. 결혼하지 않고 카르마(윤회)로 돌아가는 엘프도 많은 편이지요. 180살이 넘어 성년이 되면 반려를 택할 수 있게 되고 결혼은, 선택하거나 선택받는 경우 서로의 동의 하에 엘프의 신께 허락을 구하는 것으로 성혼이 성립되지요. 청혼 기간이 인간들에 비해 길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성교제라면 청혼기 간을 일컫게 되고 성문화라고 하면 엘프 부부 사이에서 성립됩니 다." '어? 당황을 안 하네? 순진한 게 아녔나?' "인간을 반려로 택하는 엘프도 있다고 들었는데요." "드물지만 있었지요. 그래서 하프 엘프도 있는 거니까요." "이상하네요." "네?" "민트 백작 부인 말이에요. 블루님을 무척 따르는 듯 하던데 그분 께 마음이 없으셔서 피하시는지. 미망인이기 때문에 피하시는지 말 씀하시는 내용이나 대답하시는 태도에 비춰서 어느 쪽인지 구별이 안되네요." ".....이성을 좋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요. 그런데 엘프들은 그 점에 있어 인간과 사고방식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생각 에 동화되기 어려운 점이 있거든요." "정확히. 동화되기 어려운 생각이 무엇인데요?" "......부인의 호의를 표현하는 방식이 부담이 되기 때문이지요." 당할 뻔했다는 말을 할 수가 없어서 블루는 곤혹스러웠다. 엘프 사회에서는 있을 수도 없을 일에 표현하기가 너무 애매했다. "부인이 덮쳤어요? 푸하하하.....아. 실례.....쿡쿡...." 블루는 검은 드레스를 입고 푸른 달빛을 검은 머리카락에 받아 이 고 있는 인간 소녀에게 미소를 지었다. 순수하게 궁금증을 표현했 다는 것을, 가식 없는 물음이었다는 것을 알자 거부감이 사라졌다. "전 인간을 알고 싶어서 여행을 시작했었지요. 아가씨는 엘프를 알 고 싶으신가보군요." "그럼요. 알고 싶지요. 엘프 만이 아니라 드워프도, 다른 멸종 위기 라는 유사인종들도 모두 만나고 싶어요. 그러고 보니, 블루 님의 나 이가 어떻게 되시는 지? 저는 16살입니다." "503살입니다." "켁." 진은 웃음기가 남아 있던 얼굴에 당혹 감이 일었다. "아, 저런. 와이즈의 나이보다 더 현실감 있게 느껴지네요. 죄송합 니다. 나이 드신 분께 버릇없이...이런. 동방예의지국이라는 곳에서 예의를 배운다고 배웠었는데....엘프는 나이를 짐작 할 수 없는 종족 이었군요." 이번엔 블루가 웃었다. "정말 엘프에 대해 모르시네요." 진은 그들에 대해 조금 더 이해가 된 듯했다. 엘프가 추구한다는 '조화' 란 자연과의 조화인 듯 했다. 자연스러운 것과 진실과 선의의 조화. 그들은 숲이고 나무이고 자연과 가장 가 까운 종족이었다. 하지만 그들도 이성과 감성이 있는데....완벽한 조 화란 있을 수 있는 것일까. 진은 의문이 들었지만 더 생각지 않았다. 저녁시간이 되었으니 식 사가 시작되기 전에 아담을 만나고 음유시인들과의 약속도 지키러 가야했다. "저도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여쭤도 될까요?" "네. 블루님. 물으셔도 돼요. 하지만 지금은 시간이 부족하니까 잠 깐 미루고 절 좀 데려다 주시겠어요? 어제 갔던 그 식당 근처로 사 람들의 눈을 피해 가려는데, 드레스 차림이라 불편해서. 블루님이 도와주셨으면 해요." "일행 분께 말씀드리지 않고요?" "금방 올 거 에요. 음유시인들께도 가겠다고 했거든요. 어려운 부탁 인가요?" "아닙니다.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는 다면 괜찮겠지요. 약속은 지켜 야하니까요. 모셔다 드리지요." 진은 블루와 아담의 가게 근처로 워프 했다. "블루님 여기서 기다리실 래요? 오래 걸리지 않을 거 에요." "네. 궁금하지만 비밀인 듯 하니 말씀에 따르지요." 진은 '아아. 엘프는 너무 착해' 라는 생각으로 웃으며, 밟히지 않게 드레스 자락을 모아 잡고. 아담의 여관 뒤뜰과 면한 낮은 담을 향 해 일직선으로 튕겨 나갔다. "?........!" 블루는 진이 드레스 자락을 걷어올리는 것에 당혹해 하다가 갑자기 사라진 방식에 눈을 말똥거려야했다. 엘프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음과 놀라움을 함께 참았다. * 진은 아담의 아지트로 가서 기다리고 있던 몇몇 아담의 심복들과 인사를 나누고 그들의 계획과 역할 분담에 대해 들었다. 당일이 아 니면 그다지 자신의 손이 필요 없을 것 같은 판단에 진은 듣고만 있다가 몇 가지 건의를 하고, 개인 적인 일로 설명하고 한 가지 부 탁을 했다. "그 정도야 어려운 일은 아니지요. 아가씨. 그런데 파티 중에 나오 셨나요?" "에? 아니요. 만찬에 초대받았다가 몰래 나왔어요. 걱정 마세요. 눈 에 띄지 않게 왔고, 제 일행은 알고 있으니까요. 문제 될 소지는 없 어요, 아담." "............" 아담은 중년이었지만 함께 모여 있던 남자들은 대부분 청년들이라 검은 드레스 차림의 소녀에게 가는 관심을 완전히 감추지 못했고, 그렇다고 정장한 귀족 레이디를 어둔 지하실 구석에서 도대체 어떻 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들이어서 진은 웃음이 나왔다. * 블루는 달빛이 가려진 어둔 건물 그림자에 자신을 동화시키고 있었 다. 지나가는 행인들은 하프를 들고 건물 사이에 서 있는 파란머리 의 엘프를 알아보지 못했다. 몇몇 안면이 있는 사람들도 발견할 수 있었지만, 그들도 말을 걸어 오지 않았고. 블루는 어두운 하늘, 달빛 때문에 제 빛을 발하지 못 하고 있는 푸른색 아우별 주위의 별을 골라 하나하나 눈길을 주고 있었다. "미안합니다, 블루님. 오래 기다리셨지요?" 한 걸음 앞에 서서, 드레스 자락을 잡은 손을 풀며 매무새를 살피며 하는 진의 말에 블루는 조금 놀랐다. ".......아니요. 엘프는 시간 개념이 인간과 다르니까요. 갑자기 사라 지시더니 갑자기 나타나시네요." "아, 하하...에? 엘프도 몸이 빠르다고 들었는데요?" "그렇긴 하지요. 하지만 주로 숲 속에서 두드러진 특성이지요. 속도 문제를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라. 아가씨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했습 니다." "지금 온 것인데요?" "............" 블루는 바로 전까지 자신이 서 있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지켜보았던 자신이, 반대의 입장에 한 순간 처했 었음을 알았다. 블루는 다시 눈 여겨 검푸른 머리의 소녀를 주시했다. '어라? 왜 그렇게 뚫어지게 보는데요, 파란 엘프?' 진은 사람들의 생김새에 편견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블루를 볼 때마다 자꾸 뾰족한 귀 쪽으로 눈이 쏠리는 것 때문에 문득 장 난기가 솟았다. '예쁜 드레스도 입고 있는데. 나이도 있고 너그러우니까. 착한 것 같으니 조금 장난 쳐도 받아 주겠지?' "블루님....." "네?" 진은 턱 아래 두 손을 깍지 끼고 달에 소원을 비는 양, 연극 대사 를 읊는 것처럼 말했다. "전 블루님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너무 너무 해 보고 싶었던 일이 있었거든요. 무례한 일이 될 것 같아서 참고 참았는데, 전 여행 중 이고 여행 중에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꼭 해 보리라 마음먹었었지 요. 지금 기회가 왔으니 꼭 해 보고 싶은데요. 해도 될까요?" "네? 무엇을 요?" "귀 말이에요!" "네?" 진은 허락을 구하지 않고 조금 키를 높여서 블루의 양 귀에 손을 가져가 잡아당기다 놓았다. "............!!!!" "에. 사람 귀랑 똑 같네. 길기만 한 거 였구나. 음하하. 드래곤의 보 석더미에서 수영도 해 봤고. 엘프 귀도 만져봤고. 이제 드워프 침대 를 붙여 잠만 자보면 일단 생각나는 일들은 다 하는 셈.....어라?" 블루는 방금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이 착각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얼 굴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곧 새빨개져서 진이 잡아당겼던 귀를 감 싸쥐느라, 하프가 바닥에 떨어지려는 것을 진이 한 발로 가볍게 걷 어 차 올려 받아 주었다. "......아픈가요? 세게 안 잡아 당겼는데...." 블루는 더듬거리며 말을 했다. "아픈 것이 아니고......" 진은 실수를 한 것임을 알고 얼른 사과를 했다. "죄송합니다. 귀에 손을 대면 안 되는 것이었나요?" "그게......" 블루는 점점 얼굴이 달아올라서 귀까지 멍멍할 지경이 되었다. 진이 미안함과 이유에 대한 호기심을 담은 얼굴로 말끔히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자, 블루는 한숨을 쉬고 귀에서 손을 떼고 차분해 지 길 기다려 대답했다. "엘프 마을에서 엘프가 친구들에게 결혼 소식을 알릴 때 쓰는 속어 가 있습니다. 청혼을 받아들인 쪽은 '귀를 잡혔다'고 하고 반대의 경우에는 '귀를 잡았다'라고 하지요." "에........" "엘프는 다른 유사인종의 생김새와 비교해서 귀의 생김새가 유독 다르기 때문에 귀에 얽힌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리고 실제 부부사 이가 아니면 보통 귀에 손을 대지 않지요." "에......." "여행을 다니면서 인간 아이들이 순수한 호기심으로 잡아당기거나 만지게 해달라고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아시다시피 엘프와 인간 은 성장 속도가 다르기 때문에 인간 아이들에게도 선선히 만지게 하기엔 복잡한 사정이 있습니다. 그리고 드워프의 주거환경은 침대 를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에......." "......모르고 하신 일이니 제가 너무 당혹해 하면 오히려 더 미안해 하시겠군요. 괜찮습니다. 아가씨." "에.....요. 용서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블루님. 죄송합니다. 큰 실례 를...." 진은 웃음이 터져 나와서 입을 틀어막아야 했다. "아니, 저. 괜찮습니다. 실수이신 걸요." 뭔가 착각한 듯한 블루의 말에 진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하.....아. 죄송. 하하하하....이런...웃음이 안 멈추네....하하하.... 엘프를 책임져야 할 뻔했네! 이런 날벼락이! 하하하....악. 죄송....하하 하하..." 블루는 진의 웃음에 눈이 동그래졌다가 그녀의 말에 다시 얼굴이 붉어졌다가, 나중엔 쓴웃음을 지어야했다. 진이 웃기 시작하자 사람들이 그들을 발견하기 시작했고, 블루는 행인들에게 발목이 잡힐 것 같자 돌아가는 시간을 당기기 위해 세 레니프 광장으로 워프 할 준비를 했다. 진은 블루가 마법을 사용하려는 것임을 알고 웃음을 멈추지 못하는 와중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하...아. 죄송합니다, 블루님. 한번 웃기 시작하니까 영 안 멈춰 지네요. 쿡....아무튼 고맙습니다. 오랜만에 웃어 본 기분이에요. 얼 마 전에 와이즈 때문에 화장실 문고리를 잡고 웃었을 때 보다 더 재미 있.....죄송합니다. 또 실례된 말을...." "아닙니다. 웃음은 좋은 거니까요. 기분을 밝게 해주고 긍정적이 되 게 하지요....그런데 저. 그 골드... 일행 마법사님이...재미있게 해 주 셨다고요?" 진은 블루의 질문에 다시 웃음이 플러스되어 세레니프 광장 한쪽에 서서 나무를 붙잡고 웃음을 눌러야 하는 고문을 당했다. * 진은 세레니프 광장에 서서, 낯익은 음유시인들이 숙제로 내어 준 노래 만들기에 도전하고 있는 것을 보며 블루와 서 있었다. 약간 어색해 보였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노래에 즐거워하고 있었고 노래를 듣고 있는 사람들도 평소보다 훨씬 많았다. 진은 그들이 블루와 자신을 발견하고 화단의 바윗돌에서 일어나려 는 것을 보고 손을 저어 저지했다. 그들의 노래는 사람들의 장래 희망이나 흰 빵에 대해서나 마을 처 녀의 사랑 이야기등을 주제로 표현되고 있었다. 진은 달리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없을 것 같아 손을 흔들어 주고 그곳을 떠나려고 했다. 차례가 아니어서 쉬고 있던 시인 중 한 명 이 목소리가 들릴 거리까지 걸어와서 묵직한 목소리로 인사를 했 다. "감사합니다. 레이디 진.....벙어리 하프가 되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 다." 진은 그에게 웃어 보이고 블루와 함께 클레이스네 정원으로 다시 이동해 갔다. * "레이디. 찾으러 갈까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클레이스님. 다들 많이 기다리셨나 봐요." 정원에는 클레이스가 마중 나와 있었다. 왜 밖에 나와 있나 했다가 응접실로 가서야 이유를 알게 되었다. 민트 백작부인은 초조해 하는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가 클레이 스가 정원 어딘가에서 행방불명(?)된 블루와 진을 데리고 들어오자 소파에서 일어났다. 릭페르도 와 있었고, 진은 부인과 인사를 나누고 드레스 차림이라 거절 할 핑계를 대지 못해 간지럽게 느껴지는 손등의 키스를 기사 에게 받아야했다. "어? 콜린스. 파키오. 얼굴이 왜 그래? 싸웠어?" "아니에요. 레이디. 함께 넘어졌지 뭐 에요." 콜린스는 그렇게 대답했지만 한바탕 한 것으로 보이는 눈 주위 멍 자국들과 둘 사이에 오가는 눈싸움에 진은 또 웃음이 나왔다. 민트 백작부인은 서로 인사가 끝나자 엘프에게 찰싹 달라붙었고, 그 때문에 당혹해 하는 블루를 보니까 또 웃음이....몸을 돌려 얼굴 을 감추려고 해도 사방에 사람들이 있어서 어찌해 볼 도리가 없어 표정관리에 너무 힘이 들었다. "레이디 어디 불편하십니까?" "앉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레이디 진." 클레이스와 릭의 신경 써 주는 말에 진은 웃음이 더 추가되었다. "진. 얼굴이 왜 그래? 무슨 일 있었냐?" "푸-웃-!" ".....너 웃는 거냐, 우는 거냐? 한가지만 해라." "푸우우...욱. 죄송...여러분 귀 좀 막아 주세요. 도저히 못 참겠다. 푸하하하하......" 다들 마구 웃기 시작하는 진을 각기 황당해 하는 표정들로 쳐다보 았고 소년들의 웃기게 보이는 얼굴 때문인가 하다가 갸우뚱하며 이 유를 묻는 얼굴로 블루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더 놀라워했다. 엘프는 얼굴이 새빨개져 있었다. [56] 8-8. 카르마, 그리고 아낌없이 주는 나무. [진. 무슨 일이냐?] '쿡쿡...와이즈. 너 때문이야.' [뭐가?] 진은 폭소의 흔적이 남아 있는 얼굴로 식탁 배정된 자리에 앉아 전 채 요리에 포크를 가져가 찍어대고 있었다. '네게 장난이 먹히니까, 긴장이 풀려서 충동적으로 그만.....' [누가! 장. 난. 하래?!!.....뭔 장난을 했는데?] 진은 신사들의 호기심 어린 눈초리를 블루와 번갈아 가며 받고 있 었다. '블루 귀를 잡아 당겼거든. 너무 착하고 평화롭게 보이는 얼굴이라 놀래는 것을 좀 보고 싶어서. 그런데 효과가 지나쳤어.' [......엘프 귀를 '잡았다' 고?] 와이즈는 옆자리를 클레이스에게 뺏기고 진의 건너편에 앉아 있었 다. 진이 엘프의 귀를 잡아당겼다는 말을 알아듣고 와이즈는 열이 뻗쳤다. '클레이스 놈 막아 주고 있었더니 뭔 짓을 하고 온 거냐. 도대체! 저 여자 머리 구조가 어떻게 된 거냔 말이다.' [너 정신 나갔냐? 평생 엘프에게 쫓기고 싶냐?] '엉? 쫓겨? 실수였는데? 블루도 괜찮다고 했어.' '그게 아니지.' 와이즈는 한숨을 쉬었다. [엘프란 족속들은 이성에게 무감각한 편이지만 한번 의식하고 선택 하게 된 상대에게는 몇 십년, 몇 백년을 쫓아다닌다. 모르는 것은 병이다. 이 바보 같은 여자야.] '헉. 그렇게 끈질겨?.....저런~ 어쩔 수 없게 되면 책임지지 뭐. 큭큭 큭.....' '저것이 정말!' '하지만 뭐 그런 정도로 선택받게 되기야 하겠어?' [.............] 클레이스는 진과 와이즈가 지네들끼리 속닥대고 있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옆자리에 앉아 진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자잘한 식사 시 중을 도맡아 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도 한숨짓기는 마찬가지였다. '내가 뭔 짓이다냐. 쳐다보지도 않는 인간 여자에게 비위맞춰가며, 자존심이 아주 뭉게 지는 구나.... 저 뾰족 귀 녀석. 도대체 뭔 일을 하고 왔길 래?' [야. 블루. 무슨 일이 있었는데?] 블루는 눈을 접시에 내리깔고 있다가 블랙 드래곤의 음성에, 음성 전달 마법을 써서 대꾸해 주어야했다. '아가씨께서....장난삼아 제 귀를 당기셔서 그렇습니다. 클레이스님.' [.............] '정말 웃기는 여잘세.' 콜린스와 파키오는 뒤늦게 블루가(시키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는 기 꺼이.) 시행해 준 치료마법을 받고 말짱해진 얼굴들이었지만, 자신 들 때문에 진이 체통을 잃게 된 것인가 하는 생각에 지극히 얌전하 게 식사에 몰두하고 있었다. 민트는 볼이 퉁퉁 부어서 삐쳐 있었다. 릭페르는 식탁 위 식기 부딪히는 소리를 들으며 너무 조용한, 그러 나 소리 없는 소음에 빠진 듯 한 분위기의 만찬 석에서 어떤 태도 를 취해야할지 막막하게 느꼈고, 오늘 하루 전해 받게 된 두 가지 일에 대해서 생각했다. 모두 레이디 진에 대한 이야기였다. 하나는 제베르타 백작 가에 가 있던 여동생이 귀가한다는 통신과 덧붙인 내용으로, 친구 진 리툰이라는 영애에 관해서 였고, 다른 하 나는 기사학교에 졸업반으로 있는 남동생이 학교에서 있었던 대련 에 관해 전해 준 이야기였다. 릭은 사교술에 정통하지는 않았지만, 예의 바르고 실력 있는 기사 로. 거기에 높은 신분의 귀족 자제로 수도에서 귀족 가문과 영애들 에게, 사윗감으로 신랑감으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어디서든 환 영받는 입장이기도 했다. 그런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성격상 클 레이스처럼 사교적이지 못해 평상시엔 의식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 는데. 시장 가에서 처음 보았던 검푸른 머리의 소녀를 알게 된 후로 번번 이 느끼고 있는 자괴감과 소외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미르나는 분명 친구라고 했는데.....왜 아는 척을 하지 않으셨을까.' 진은 주 요리가 나와 앞에 차려지기 시작했는데도 여전히 식탁 분 위기가 묘하게 돌아가고 있음에 멋쩍어져서 먼저 말을 꺼냈다. "블루님. 묻고 싶은 것이 있다고 하셨지요?" "네. 그랬지요....식사 중인데, 너무 무거운 주제가 될 것 같아서 다 음으로 미루려고 했습니다." "무슨 주제에 무슨 질문이신대요? 들어 보고 어울리지 않을 주제라 면 미루지요. 말씀해 보세요, 블루님." 죄는(?) 자신이 지었는데 벌을 받는 것은 엘프인 것 같은 생각에 진은 미안해졌다. 블루는 고기 요리를 즐기지 않는지 식탁에 올라와 있는 오리구이나 스테이크 등에는 그다지 손을 대지 않고(먹기는 했다.) 야채와 과일 이 많이 섞인 음식들을 먹고 있었다. 시중드는 하인들이 있었지만 주인의 친구로, 혹은 두 명의 주인 중 하나로, 그들의 손을 빌리지 않고 근처에 엘프를 위해 가깝게 놓여 진 요리들을 직접 가져다 담아 먹는 것에 모두 익숙한 듯 보였다. "......카르마에 관한 것이지요." "카르마요? 업보. 윤회. 운명의 수레바퀴 말인가요?" "네, 레이디." "네. 카르마가 왜요?" 블루는 갑작스레 꺼낸 동떨어진 주제의 이야기에 그렇지 않아도 주 시 받고 있었던 상황에, 진과 자신의 대화조차 주목받게 되었음을 알았지만 관심의 성격이 다르게 느껴졌기 때문에 겨우 평상시로 돌 아갈 수 있었다. "레이디의 생각을 알고 싶었습니다. 7신을 제외한 세상의 모든 것 은 카르마의 지배를 받지요. 카르마는 신으로 모셔지지는 않습니다 만, 모든 이성을 갖춘 종족의 가치관과 일상생활에 깊숙이 자리하 고 있지요. 그리고 그 카르마는 인간들의 의식에서 태어났지요. 그 이유를 알고 싶었습니다." 모두 생각에 잠겼다. 카르마라..... 블루는 말을 이었다. "더 뛰어난 종족과 비교가 가능하지 않는 존재들도 이 대륙엔 함께 존재하는데. 세상 모든 것을 관리하는 그 존재가 왜 다른 많은 종 족을 제쳐두고 인간들 사이에서 나게 되었는지 궁금했습니다. 제가 마을을 떠나 여행을 시작하게 된 근본 이유이기도 하지요." "여행을 하시면서 답을 찾지 못하셨나요?" "알았다는 생각이 들었다가도, 다시 알 수 없게 되고는 했습니다." 진은 다른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세요? 토론으로 블루님의 의문을 풀어드리지 요. 와이즈, 어떻게 생각해?" "인간의 숫자가 가장 많고 가장 세대가 자주 교체되기 때문이 아니 었냐?" 진은 대답하지 않고 다음 차례로 옆자리에서 가끔 손이나 팔을 부 딪혀 오고 있던 클레이스에게 고개를 돌렸다. "클레이스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카르마는 업보를 뜻하기도 하니, 가장 잦은 윤회와 가장 죄를 많 이 짓는 인간에게서 생길 적절한 관리자가 아니었는지. 레이디." "릭페르님?" "......신께서 그리 정하신 것이 아니었나요? 창조신께서 인간을 향해 '부름'하셨다고 배웠습니다. 레이디 진." "민트 백작부인. 어떻게 생각하세요?" "인간의 짧은 수명을 신께서 동정하셔서 힘을 주신 게 아닐까요? 영애. 그런 생각이 드네요." 그들은 모두 돌아가며 대답하면서 시험 구두 답안을 말하는 기분이 들었다. 진을 채점자로 두고. "콜린스. 어떻게 생각하니?" "인간이 카르마를 가장 무서워하고 두렵게 여기기 때문이 아닐까 요? 잘 모르겠어요. 레이디." "파키오?" 파키오는 마지막 차례가 되자, 웃으며 대답했다. "할머니께서 말씀해 주셨는데요. 카르마는 인간이고 인간이 카르마 라고 했어요, 레이디." "그 말은?" "인간이 카르마라는 존재와 가장 가깝기 때문이라고요." "훌륭하다 파키오. 역시 넌 자질이 있어. 블루님. 파키오의 답과 다 른 분들의 대답도 모두 맞다고 생각해요. 이해가 가시나요?" 블루는 한숨을 지었다. 자신이 잘못 본 것일까? 저 소녀라면 가르 쳐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레이디." 진은 블루가 다른 사람들과 있는 자리에서 자신을 '레이디'라고 부 르고, 주위를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자리에서는. 귀족들이 없는 자 리에서는 '아가씨'라고 부르고 있음을 깨달았다. 진은 이해가 가지 않는 다는 그의 말에 웃었다. "블루님. 신사 숙녀 분의 대답이 모두 맞다고 생각해요. 왜 '인간들'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부분에 집착하세요? 카르마로 돌아가면 어떤 존재든 윤회에 따라 돌멩이로 나무로 엘프로 정령으로 다시 태어나 겠지요. 그러면 그 인간을 벗어난 존재들의 카르마(윤회)에는 '인간' 의 자리가 없었을까요? 제가 보기엔 모두 카르마의 지배를 받는 다 면, 모두 인간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해요. 모두 엘프이고 모두 정령 이고 모두 드래곤이지요. 처음 시작이 인간들의 의식에서 생겨난 것은 파키오의 말처럼 인간들이 가장 카르마에 가깝기 때문일 거라 는 생각이 드는군요." ".......죄송합니다, 레이디. 엘프는 이해력이 부족한가 봅니다." 말투를 생략하고 들으면 빈정대는 소리 같이 들릴 블루의 대답은 전혀 그런 느낌을 주지 않았다. 진은 겸손하고 이해를 해 주지 못 해서 미안하다는 투의 엘프의 말에 웃음이 나왔다. "인간의 희망이 가장 빛나고, 인간의 소망이 가장 애타고, 인간의 사랑이 가장 감동적이고 격렬하며, 인간의 증오가 가장 어둡고 격 렬하며, 인간이 가장 이기적이며, 인간이 가장 선하며, 인간이 가장 어리석으며, 인간이 가장 내세를 두려워하고 열망하기 때문입니다, 블루님." "......인간의 감정이 가장 강하기 때문이라는 말씀이신 가요?" "그래요, 블루님. 인간은 짧게 살기 때문에 가장 탐욕적이고 가장 파괴적이고 혼란스런 삶을 살기 때문에 생이 불꽃에 비유됩니다. 그래서 카르마는 인간으로부터 시작되었겠지요." "............." "블루님은 엘프지요. 전 블루님을 뵙고 엘프는 나무를 연상시키는 존재라는 것을 느꼈지요. 좀 더 이해가 가실 수 있도록 이야기하나 를 들려드릴게요. 직접 자신과 비슷한 비유의 대상의 이야기는 때 로 훨씬 이해를 돕기도 하니까요. 들려 드릴까요, 여러분?" 모두 거절할 이유가 없었기에 진은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었다. * Once there was a tree........and she loved a little boy......... 옛날에 나무가 한 그루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나무에게는 사랑하 는 소년이 있었습니다. 매일 같이 그 소년은 나무에게로 와서 떨어 지는 나뭇잎을 한 잎 두 잎 주워 모았습니다. 그러고는 그 나뭇잎으로 왕관을 만들어 쓰고 숲 속의 왕자 노릇을 했습니다. 소년은 나무 줄기를 타고 올라가서는 나뭇가지에 매달려 그네도 뛰고 그리고 사과도 따먹곤 했습니다. 나무와 소년은 때로는 숨바꼭질도 했지요. 그러다가 피곤해지면 소 년은 나무그늘에서 단잠을 자기도 했습니다. 소년은 나무를 무척 사랑했고.....나무는 행복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은 흘러갔습니다. 그리고 소년도 나이가 점점 들어갔습 니다. 그래서 나무는 홀로 있을 때가 많아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년이 나무를 찾아갔을 때 나무가 말했습니다. "얘야. 내 줄기를 타고 올라와서 가지에 매달려 그네도 뛰고 사과 도 따먹고 그늘에서 놀면서 즐겁게 지내자." "난 이제 나무에 올라가 놀기에는 다 커 버렸는 걸. 난 물건을 사 고 싶고 신나게 놀고 싶단 말이야. 그리고 돈이 필요해. 내게 돈을 좀 줄 수 없어?" 하고 소년이 대꾸했습니다. "미안하구나. 내겐 돈이 없는데." 나무가 말했습니다. "내겐 나뭇잎과 사과밖에 없어. 얘야. 내 사과를 따다가 도회지에 팔겠니? 그러면 돈이 생기겠고, 그러면 너는 행복해질 수 있을 테 니." 그리하여 소년은 나무 위로 올라가 사과를 따서는 가지고 가버렸습 니다. 그래서 나무는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떠나간 소년은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고.... 그래서 나무는 슬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른이 된 소년이 돌아 왔습니다. 나무는 기쁨에 넘쳐 몸을 흔들며 말했습니다. "얘야. 내 줄기를 타고 올라와서 가지에 매달려 그네도 뛰고 즐겁 게 지내자." "난 나무에 올라 갈 만큼 한가롭지 않단 말이야." 하고 소년이 대 답했습니다. 그는 또 말하기를. "내겐 나를 따뜻하게 해 줄 집이 필요해. 아내도 있어야겠고. 어린 애들도 있어야겠고. 그래서 집이 필요하단 말이야. 너, 나에게 집 하나 마련해 줄 수 없니?" "나에겐 집이 없단다." 나무가 말했습니다. "이 숲이 나의 집이야. 하지만 내 가지들을 베어다가 집을 짓지 그 러니. 그러면 행복해 질 수 있을 거야." 그리하여 소년은 나무의 가지들을 베어서는 자기의 집을 지으러 가 지고 갔습니다. 그래서 나무는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떠나간 소년은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그가 돌아오자 나무는 하도 기뻐서 거의 말을 할 수가 없 었습니다. "이리 온, 얘야." 나무가 속삭였습니다. "와서 놀자." "난 너무 나이가 들고 비참해서 놀 수가 없어." 나이든 소년이 말 했습니다. "난 여기로부터 나를 먼 곳으로 데려갈 배 한 척이 있었으면 좋겠 어. 너, 내게 배한 척 마련해 줄 수 없겠니?" "내 줄기를 베어다 배를 만들렴." 하고 나무가 말했습니다. "그러면 너는 멀리 떠날 수 있고.....그리고 행복해 질 수 있겠지." 그리하여 소년은 나무의 줄기를 베어내서 배를 만들어 타고 멀리 떠나버렸습니다. 그래서 나무는 행복했으나..... 그리고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노인이 된 소년이 다시 돌아왔습니 다. "얘야. 미안하다. 이제는 너에게 줄 것이 아무것도 없구나....사과도 없고." "난 이가 나빠서 사과를 먹을 수가 없어." 소년이 말했습니다. "내게는 이제 가지도 없으니 네가 그네를 뛸 수도 없고." "나뭇가지에 매달려 그네를 뛰기에는 난 이제 너무 늙었어." 소년 이 말했습니다. "내게는 줄기마저 없으니 네가 타고 오를 수도 없고....." "타고 오를 기운이 없어." 소년은 말했습니다. "미안해." 나무는 한숨을 지었습니다. "무언가 너에게 주었으면 좋겠는데.....하지만 내게 남은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단다. 나는 다만 늙어버린 나무 밑 둥일 뿐이야. 미안 해...." "이제 내게 필요한 건 별로 없어. 앉아서 쉴 조용한 곳이나 있었으 면 좋겠어. 난 몹시 피곤해." 소년이 말했습니다. "아. 그래." 나무는 안간힘을 다해 굽은 몸뚱이를 펴면서 말했습니 다. "자. 앉아서 쉬기에는 늙은 나무 밑둥이 그만이야. 얘야. 이리로 와 서 앉으렴. 앉아서 쉬도록 해." 소년은 시키는 대로했습니다. 그래서 나무는 행복했습니다. * 블루는 파란 눈동자에서 눈물을 만들어 떨구고 있었다. 민트는 진에게 내내 원망스러운, 때로 표독스러운 시선을 보내고 있었는데. 진의 따뜻하고 가라앉은 목소리의 이야기에 어느 샌가 눈가가 붉어져서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얼굴이 굳어져서 모두 말이 없었다. "뒷 이야기가 남았습니다. 블루님." "네........" "소년은 나무 밑 둥에 앉아 자신의 생을 돌이키겠지요. 그리고 자 신의 업보를 알게 됩니다. 그는 수명을 다하고 윤회로 돌아가지만 그의 육신은 썩어 땅에 양분이 됩니다. 나무는 늙었지만 새 싹을 틔울, 새 뿌리를 땅에 박을 힘을 소년으로부터 얻게 됩니다. 나무 역시 윤회로 돌아갑니다. 다음 생에선 나무가 소년이 되고 소년이 나무가 될지도 모르지요. 아니면 다시 소년은 소년으로 나무는 나 무가 될지도 모릅니다. 나무는 소년을 알지 못했다면 식물인 채 였 겠지만 소년을 만나 '나무'가 되었고 카르마를 가집니다. 그 소년은 인간이었습니다. 그것이 카르마입니다. 블루님. 그래서 카르마는 모 든 동기가 되는 인간에서 태어났을 것입니다." 감성이 풍부한 엘프는 눈물을 펑펑 쏟고 있었다. 아무도 웃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무슨 뜻이었는지. 왜 였는지 알겠습니다. 아가씨. 고 맙습니다." [젠장!] 울고 있는 블루를 보며 와이즈는 불길한 예감에....저도 모르게 용언 으로 말을 내뱉었다. [투비와이즈......부탁하마. 나도 끼워 주라.] [너까지 신경 긁을래? 확 엎어버린다?!!] [너까지?] [............] [아항~ 엘프에게 뺏길 것 같아 보여서? 푸흐흐흐.....잘 지켜라, 와이 즈.....큭큭큭.....] 와이즈는 살기가 표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관자놀이에 손가락을 대 고 꾹꾹 눌러가며 눈을 감고 있었다. 소년들은 처음 진의 노래를 들었을 때처럼 말문이 막힌 표정으로 눈을 부비고 있었고, 클레이스는 옆자리의 진의 얼굴을 향해, 몸을 비틀어 이야기를 듣던 자세 그대로 흥미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 었다. "레이디 진. 그 이야기는...." 릭페르의 어떻게 물어야할지 모르겠다는 뜻의 질문에 진은 웃으며 대답했다. "제가 지어낸 이야기는 아닙니다. 너무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라 기 억해 두고 있었지요. 저도 들은 이야기입니다. 릭페르님." ".......여행을 많이 하셨나 보네요, 레이디. 정말 아름답고 가슴 아픈. 인간으로서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고 깨닫게 해 주는 이야기네요.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레이디 진." ".....영애. 영애는...." 릭페르는 복잡한 표정이었고, 민트는 말을 꺼냈다가 잇지 못하고 입술을 잘근잘근 씹더니 눈물을 한 두 방울 흘려 내렸다. ".....영애는 자격이 있어요...." "예?" ".............." 민트는 후식에 손도 대지 않았고 그 후 블루에게 했던 관심을 표하 는 행동들을 깨끗이 거뒀다. *쉘 실버스타인의 '아낌없이 주는 나무' [57] 8-9. 카르마, 그리고 진의 꿈. '훌륭하다, 파키오. 역시 넌 자질이 있어.....' 콜린스는 진이 파키오에게 했던 말이 계속 귀속에 맴돌아 시무룩해 있었다. 그때 이후로 계속 이겼다! 라는 표정으로 싱글거리고 있는 저 남색머리의 뻔돌이가 미워서 죽을 지경이었다. 만찬이 끝나고 다시 응접실로 자리를 옮겼다.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않고 울던 엘프 블루님도 진정이 되어 귀족 분들과 함께, 레이디께서 하셨던 나무 이야기를 섞은 주제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콜린스는 이제껏 지금과 같은 대우를 받아본 적이 없었다. 자신은 저 뻔돌이가 말한 대로 평범한 평민 가정의 촌놈에 불과했 고, 내세울 만한 특기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레이디의 호의로 시작할 수 있었던 자신의 꿈은. 마법사님과 레이 디 진과 함께 한, 몇 일의 여행으로 정말 사소하고 이기적인 꿈으 로 퇴색되고 있을 정도였다. 콜린스는 꿈에도. 저렇게 아름다운 사람들과 저렇게 신분이 높은 사람들과 한 자리에 앉아 밥을 먹게 될 줄은. 동등한 대우를 받아가며 대화에 끼일 수 있음이 가능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하지만 귀족자제나 입을 수 있는 고급 옷감에 수까지 놓여진 현재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이나, 학교에서 첫날부터 귀족 신분의 선배에 게 받았던 관심과 배려도, 아빠 후크의 식당에서 15세 평생 보지도 못했던 진귀한 요리들과, 귀족들 틈에 섞여 누리고 있는 지금의 모 든 것들이 현실이었다. 그 모든 것은 저 고운 목소리. 고운 얼굴의 고국과 가장 먼 나라의 '왕녀'님 때문에 일어난 일들이었다. 한 살 많다는 것은 알고 있었 지만, 네얀에서 비슷한 또래의 여자 애들과는 천지차이의 '한살' 이 었고 '신분'이었다. 아무리 높게 꿈을 꾼다고 해도, 아무리 자신이 마법을 갈고 닦아 성공할 수 있다고 해도, 저 분은 너무나 거리가 먼 분이었다. 그런데.....저 망할 놈은 단 한번의 기회에 왕녀 님을 택하는 천인공 노 할 짓을 저질렀다. 인상 좋은 것에 속아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이 가르쳐 주는 바람에 저 녀석은 기회를 잡게 되었다. 빌어먹 을 자식! 콜린스는 갈수록 화가 나고 억울한 기분이 들어서 얼굴이 점점 아 래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나도....그렇게 말할 걸....' "콜린스." "예?!" 콜린스는 여신이. 아니, 왕녀 님이. 아니, 레이디 진께서 자신을 부 르는 음성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레이디께선 모두 알아! 다 안다고! 바보 같으니라고....' "기분이 안 좋아? 파키오랑 아직도 사이가 좋지 않아서 어째? 아까 는 또 왜 싸웠니? 아주 치고 박고 했던 모양이던데.....쿡...." "............." 콜린스는 응접실의 긴 소파 가장자리에 파키오와 마주 앉아있었는 데, 한자리 건너 뛰어 건너편에 릭페르님과 클레이스님 사이에 앉 아있던 레이디의 웃음기 담긴 물음에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레이디. 콜린스는 절 질투해요. 저보고 정신 좀 차리라고 자꾸 시 비를 건답니다. 흑. 정말 나쁜 친구에요. 친해지고 싶어도 화만 내 니 제 매력으로도 저 녀석만큼은 어찌할 수가 없지 뭐 에요." 레이디는 웃었다. "그래, 파키오. 네 매력으로 안 되는 일도 있었어? 계속 노력해 봐. 콜린스 한 명 정도도 네 편으로 못 만들어서야 어떻게 성공을 하겠 니?" "......네에." 파키오는 장난스런 투로 콜린스를 비난했다가 레이디의 말에 다시 수그러들었다. "콜린스. 레이디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시잖아. 잘못했다니까. 뭘 잘 못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흠. 무조건 잘못했어. 그러니 좀 친해보자." '웃기지마, 이 자식아! 또 속으로 딴 생각 중일게 뻔할 놈이!' "콜린스. 파키오가 마음에 안 드는 게 나 때문이니?" 콜린스는 얼굴이 달아올라서 고개를 숙였다. "콜린스군은 레이디께 후원 받아 학교에 들어간 것으로 아는데, 파 키오군과의 갈등이 레이디 때문이라니요?" "아, 클레이스님. 콜린스는 제가 제일 먼저 도움 주고자 했던 소년 이지요. 콜린스는 마법을 배우고 싶어했어요. 그런데 콜린스. 지금 은 생각이 바뀌었니?" ".....아니요. 레이디. 전 마법을 배울 거 에요." "그럼? 파키오와 다른 꿈을 꾸잖아. 다른 길을 가려는 사람과 자신 의 꿈을 비교할 필요는 없잖아." "레이디. 아니에요. 제게 베풀어주신 은혜는 지금으로도 너무 과해 요. 전 마법사가 될 거 에요. 파키오와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은 알아 요. 죄송해요. 걱정 끼쳐 드려서." "영애께서는 평민 소년에게도 너무나 너그럽군요." 옆자리에 앉아 있던 붉은 드레스의 백작 부인이 은근히 레이디가 아닌 자신을 두고 비꼬는 듯한 말에 콜린스는 더 우울해졌다. "콜린스. 넌 십대잖아. 미성년이기도 하고. 꿈은 높게 꿀수록, 많이 꿀수록 좋은 법이야. 마법사가 되겠다는 꿈을 이룰 수 있게 조건이 갖춰졌으니 또 다른 꿈이 생겨도 돼. 왜? 누가 뭐라고 할까봐? 꿈 꾼다고 누가 뭐라고 하겠니. 다른 꿈이 또 생겼니? 오늘 날 웃겨주 었으니 한 번 더 기회를 줄게. 뭐가 부족하니, 콜린스?" 콜린스는 레이디의 말을 들으며 귀까지 빨개졌지만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난.....저 뻔돌이 같은 용기는 없어. 난 그렇게 배은망덕하지 않다 고.....' "진, 그만해라. 당황해 하는 것 보는 것을 너무 좋아하다간 언젠가 큰 코 다칠 거다." "와이즈. 왜 당황하는 데? 콜린스는 그저 조금 부끄러워하는 거야. 난 알지~ 콜린스의 새 꿈을. 쿡쿡...." 콜린스는 짓궂어진 레이디의 말에 얼굴이 더 빨개졌고 마법사님의 곁에 앉아 있던 블루님이 고개를 뒤로 젖혀 동정(?)과 호기심 섞인 얼굴로 자신을 보는 것을 알았다. "콜린스. 기분이다. 너도 내 신랑감 후보에 넣어 줄게. 그럼 됐지? 그럼 파키오와 과정은 다르지만 목표는 같아지잖아. 이제 그럼 싸 울 필요도 없겠고. 어라? 아닌가? 라이벌이라고 또 싸우려나?.....싸 워라~ 선의의 경쟁은 좋은 거야, 암." "............." "콜린스? 대답." "네. 레이디. 열심히 배울게요. 꼭 좋은 마법사가 되겠어요." 콜린스는 기쁨으로 얼굴이 환해졌다. 입을 삐죽이고 있는 저 주제 도 모르는 녀석과 동등해졌다! 물론 이뤄지지 않을 꿈이라는 것은, 꿈으로 그치리라는 것쯤은 너무나 잘 알지만. 저 분은 결코 자신과 같은 계층의 사람들을 우습게 보고 거짓말 같은 것은 하지 않으시 니까. '.....아니, 그럼. 나도 주제를 모르게 되네....' 그런 생각이 들긴 했지만 콜린스는 그 생각 자체를 꼭꼭 접어 밀쳐 두었다. * 모두 진의 말에 기가 막힌 표정들이었다. ".......농담이시겠지요. 레이디 진?" 진은 릭페르의 말에 웃어주었다. "전 사람들의 희망을 가지고 농담 따윈 하지 않습니다. 릭페르님." "............." 클레이스는 눈을 깜박거려야 했다. 와이즈는 코웃음을 치고 먼 산을 보는 시늉을 했고, 블루는 몇 십 년, 아니 평생을 두고 깨우치지 못했던 의문을 단 몇 분만에 이해 시켜 준. 뚜렷한 인상을 심어준 인간 소녀가, 소년에게 한 말을 듣 고 머뭇거려야했다. "영애.....영애의 가치관은 유달리 독특하군요. 항상 예상을 깨주시는 탓에 어떤 교육을 받고 자라셨는지 다시 궁금해지네요. 여행 중이 시라는 것은 알지만 아직 어리신 데 부르시는 노래도, 음유시인들 과 나눈 이야기도, 블루님께 들려 주셨던 이야기도, 평민 소년을 대 하는 관대함도, 제 지식과 상상이 전혀 미치질 못합니다. 영애의 이 야기를 듣고 싶네요." "에. 그건......" "레이디. 저도 궁금했어요. 콜린스에게 들었는데 레이디께선 아직 성년이 되지 않으셨다 고요. 그런데 저희 할머니의 인생관을 넘어 서시는 걸요. 저도 많이 배우고 싶지만 레이디께서 하신 일들을 듣 고는 자신이 없어졌어요. 1년 후 제 자신을 짐작해 보아도 레이디 처럼 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아요." "미성년....이시라고요?" 릭페르는 미르나와 같은 나이로 알고 있다가 한방 맞은 얼굴이 되 어서 진의 앞에 놓여있던 와인 잔을 슬며시 거둬갔다. "저도 궁금하군요. 어떻게 배우시면 그 나이에 레이디처럼 사고하 게 될까요?" "제 생각도요, 레이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혹시 레이디 부모님 중 한 분은 엘프가 아닐까 생각했었어요. 대륙정세나 풍습은 잘 모 르시지만 그 외엔 모두 너무 박식하시고...무예도...." 빙글거리는 웃음으로 클레이스와, 진의 선심에 용기를 얻었는지 콜 린스까지 말을 해 왔다. 주변사람들의 시선이 대 놓고 자신의 얼굴 로 향하게 되자 진은 곤혹스러워졌다. "나이가 중요한가요? 제 나이는 와이즈가 가르쳐 주었지요. 사람 만나고 친구가 되는 것이나 개개인의 가치관 문제는 나이에 구애받 지 않는다고 생각하는데. 안 그래 와이즈? 혹시 내 나이가 잘 못 된 것은 아니야?" "네 나이는 분명 16세가 못됐다. 성년식이 3달이 못 남았다고 말해 줬잖냐. 친구로 이름 불러달라고 했던 것은 너다, 진. 나와의 나이 차를 염두 하지 않고 맞먹는 것은 네 의견이지. 내 탓은 아니다." 도움을 청했는데 불만이 쌓였는지 와이즈는 알아서 하라는 태도를 보였다. '야. 와이즈. 대충 입을 맞춰줘야지. 확 불어버린다?' [불어라....오늘 밤 드리얀은 브레스를 맞겠구나.] '......밴댕이 소갈머리하고는.....' [죽을래?!] ".....친구가 되는 것에 나이는 상관이 없지요. 하지만 저도 아가씨의 성장과정이 궁금합니다. 비밀인가요?" "비밀은 아니고요. 블루님. 아니, 비미...." "그럼 말해주셔도 되겠군요, 레이디. 저도 정말 궁금합니다." "저도....궁금하네요. 실례가 될 질문이 아니라면 레이디 진의 신상 을 알고 싶습니다." 사람들과 엘프와 드래곤의 흥미가 가득한 반짝이는 눈들이 떠나갈 줄 모르고 은근히 독촉해 오자 진은 턱을 긁적여야했다. "전....간접경험을 많이 했거든요." "간접경험이요?" "네. 클레이스님. 책이나 사람들의 상상이 가미된 아주 많은 이야기 들을 보고 들었지요." "이해가 가지 않는 군요. 영애. 책을 통해 배우는 거야, 귀족이라면 누구나 하는데요." '잘한다. 한번 말해봐라, 진. 드디어 거짓말하는 것을 보게 되겠네. 큭큭...' 와이즈는 고소하다는 듯이 진과 마주 앉은 자리에서 느긋하게 와인 잔을 입에 가져다 대었다. "전 사실 어렸을 때 백치였습니다." 진은 그냥 벗어나지 못할 것 같자, 한 숨을 쉬고 와이즈를 째려본 다음 말을 꺼냈다. '이런 것을 업보...아니 인과응보라고 하는 건가.' "백치...였다고요, 영애?" 혼란스러운 얼굴로 되묻는 민트에게 진은 멋쩍게 웃으며 한 번에 끝내고자 하는 생각으로 줄줄 말을 이어 내려갔다. "네. 지성도 의지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지요. 백치의 상태에서 인성을 갖추게 된 경계에서 전 꿈을 꾸었습니다. 아주 길 고 지나치게 현실감 있는 '꿈'을 꾸었지요. 그 꿈이 지금의 절 있게 했습니다. 전 하프 엘프가 아니고 분명히 인간입니다, 부인." ".............." "꿈속에서 저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였습니다. 저는 고아였고 유괴되었지요. 몇 년간 제 보호자가 된 사람의 밑에서 비참한 생활 을 했습니다. 아이들은 어릴 때 겪은 경험이 인성에 큰 영향을 끼 치게 되지요. 저는 감정이 묶여있었습니다. 모든 것을 이성적으로 객관적으로 보는 시야를 처음부터 갖게 되었지요." 진은 지나치게 열심히 듣기 시작하는 사람들과 엘프에게 웃음이 나 왔다. "저는 죄를 짓게 되었고 죄 갚음을 하기 위해 꿈속에서의 평생동 안, 속죄하는 방법으로 사람들을 도우는 일을 했습니다. 누구든. 기 본적인 인격을 갖추고 희망을 찾는 사람의 경우, 제게 도움을 청하 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게 조치해 주었지요. 다행이 꿈속에서의 저는 능력이 따라서 그것이 가능했었습니다." 왜 사람들은 과거를 알고 싶어하는 걸까. 말하면서 진은 그런 생각 이 들었지만 자신은 더 했다는 것을 깨닫고 쓴웃음을 지었다. 뭔가 일을 추진하기 위해서 사람들의 뒤를 철저하도록 헤집곤 했던 일이 떠올라 다시 '인과응보'라는 단어를 인정했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자꾸 지치게 되고, 제 자신에게 무언 가 결핍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자 저는 그것을 채우기 위해 친구를 만들어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비로소 인간이 될 수 있었지요. 제 가 그 먼 꿈속의 여행 중에 인간으로서의 행복과 '꿈'을 가지게 되 자 저는 백치를 벗어나 현실로 돌아왔습니다. 주위를 둘러보았을 때, 가장 먼저 절 찾아 준 대상은 와이즈였지요. 그리고 지금은 그 에게 들은 대로 제 신분을 알아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는 중입니 다." [와이즈. 저 말 사실이냐?] [....내게도 분명 저렇게 얘기했다. 나한테 묻지 말랬지?] "꿈을 꾸어서 그런 지식과 사고와 힘을 가질 수 있을까요, 레이 디?" "클레이스님 인생은 꿈입니다. 드래곤의 유희와 비슷하지요. 전 지 금 여기에 앉아있는 이 현실이 '꿈'인지. 꿈속의 인생이 '현실'인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양쪽이 모두가 너무 생생합니다. 그 꿈도 저 였고, 이곳의 저도 '저'입니다." 와이즈는 클레이스에게 핀잔을 주기도 했지만 진의 말에서 거짓을 탐지하지 못했다. '어째서! 다른 차원의 과거를 '꿈'으로 표현하는데, 그것이 진실일 수가 있느냐고!......마법이 잘못되었나?' 진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와이즈는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정말 인간은 믿을 수 없는 존재라니까.' 와이즈는 기필코 진의 머리를 열어보리라 재차 다짐했다. "아가씨...감정이 묶여 있었다는 말씀은......." "블루님. 저는 기계...아니 감정이 없는 에고소드와 비슷했다는 말입 니다. 보고 듣고 겪는 모든 것들이 간접 경험 밖에 되지 못했었지 요. 하지만 그 탓에 아주 많은 것들을 습득하게 되었습니다. 그 상 태에서 친구를 얻고 마음을 열자 그 지식들은 제 직접경험으로 다 가왔고 저는 그때서야 가슴이 아픈 것도, 눈물을 흘리는 것도 경험 할 수 있었습니다." "....어릴 때의 비참한 경험이라 하시면...." "릭페르님.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이니 말을 꺼내기가 곤란하군요. 죄송합니다." ".....무슨 죄를 지으셨는데요, 영애?" 민트가 다시 질문해 오고 진은 사람들(?)의 의문이 잦아들지 않자 다시 턱을 긁적이고 한숨을 쉬었다. "살인을 했습니다." "............" "레이디 진. 기사들은 아니, 사람들은 상황에 따라 혹은 전쟁터에서 모두들 살인을 합니다." "릭페르님. 전 병사가 아니었고, 전 살인을 한 사실을 절 유괴해서 맡고 있던 이에게 누명을 씌웠었습니다." "......그것은....충분히 죄가 되었겠군요." 목이 막힌 목소리의 엘프에게 진은 웃어 보였다. "네. 그래서 그 후 전 신께 버림받지 않고자 노력했습니다. 저 자신 은 누릴 수 없었지만 타인들이 행복해지는 것을 힘닿는 한 도와주 었었지요. 하지만 인간은 아무리 잘나도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전 자신을 보호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선택한 직업으 로, 손해를 끼치거나 파멸시킨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카르마(업보) 란 벗어날 수 없는 수레바퀴지요. 그 때문에 전 가장 사랑했던 친 구들을 잃어야했습니다. 그래서 절망하고, 신을 증오하고 신을 반대 했습니다. 그때,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했을 때 신이 절 찾아 받 아주셨지요. 그 후 꿈에서 깨어 백치를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블루는 진의 '꿈' 이야기가 처음 들었던 그녀의 노래와 나무이야기 를 연상시켜서 다시 눈이 빨개졌다. "어떤 직업을 가지셨는데요, 레이디?" '어째 드래곤들은 질문도 똑 같이 하냐.' [저 바보와 나를 비교하는 거냐!] "제 직업은 도둑, 소매치기, 공갈사기범, 자선사업가, 투자사업가, 음유시인, 학생, 그리고 살인청부업자였습니다." "................." 모두 말문이 막힌 표정들이었다. "답이 되었겠지요, 클레이스님? 제 과거는 더 묻지 말아주십시오. 새 인생을 살려고 하는 희망을 가지고 있는 경우. 자꾸 들추게 되 는 기억은 곤혹스럽습니다." "레이디. 현실에서도 말씀처럼 충분히 '꿈'은 가능할 테지요. 레이디 와 같은 꿈을 꾸고 싶네요." '능글맞은 검은 드래곤 같으니라고.' 하지만 진은 웃어주었다. [58] * 밤이 늦어 클레이스는 민트가 진을 데리고 돌아가겠다는 말을 하기 전에(그럴 눈치였음으로) 모두에게 귀한 손님들로 당연히 머물러야 함을 강조하고 하인들을 시켜 방을 마련케 했다. 민트는 처음에는 블루를 의식해서 진을 기어이 데려가려 했었지만, 식사를 끝내고선 클레이스의 손길에서 거둬주려고 데려가려고 했었 지만, 진이 미성년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에는 '클레이스님. 아직 성년도 되지 않은 소녀에게 딴 생각 품진 않으시겠지요?'하고 클레 이스에게 속삭여 주고, 그의 청에 따라 클레이스의 저택에서 머무 르기로 했다. 진은 거추장스러운 귀족 가의 품위인지 예의인지를, 저택을 바꿔 다시 겪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게다가 숙소를 바꾼다고 해도 검은 머리의 기사는 핑계를 대서라도 따라올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클레이스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모두에게 인사를 하고 콜린스와 파키오에게 잘 자라고 손을 흔들어 주고 진은, 피곤하다는 말을 하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클레이스 의 안내를 받아 방으로 갔다. 인사를 하고 문을 닫으려는 데 문을 잡고 있는 클레이스 때문에 진은 쓴웃음을 지어야했다. "레이디. 아직 자정이 되지 않았으니, 피곤하시면 좀 쉬시고 나중에 다시 뵐 수 있을까요?" "아침에 뵙지요, 클레이스님." "블루의 정원은 이른 새벽 무렵에 가장 아름답지요. 모처럼 제 집 에 오셨으니 직접 안내해 드리고 싶네요. 넓은 편이라 모두 돌아보 지는 못하셨을 테니. 거절하지 않으시겠지요? 찾아뵙겠습니다." 뻔뻔한 검은 눈의 기사는 진이 대답하기 전에 코앞에서 문을 닫아 버렸다. '아니, 저 능구렁이 드래곤이 이제 아주 대 놓고 속셈을 드러내내. 웃겨~ ' * 진은 하녀의 시중을 받아 3층의 손님 용 방에서 씻고 옷을 갈아입 었다. 잠옷은 바닥에 질질 끄는 길이의 가운을 허리에 달린 폭 좁 은 천을 둘러 묶어 입게 되어있었다. 더 없이 공손한 태도였던 하녀가 나가고 진은, 귀족들이 사교시간 이 끝난 듯 조금 어수선해진 인기척들이 아래층에서 희미하게 감지 되자 큰소리(?)로 속말을 외쳤다. '와이즈! 내 말 들려?' '와이즈야~ 노란 드래곤아~ 내 말 안 들려어?!!' [......너 정말 죽어 볼래?] '쿡쿡....와이즈. 민트 방이 어디야?' [바쁘구만....뭐하게?] '여자들끼리 밀담을 좀 나누려고.' [......2층, 계단 지나서 첫 번째 방이다.] '너는? 3층으론 사람이 안 올라오는 것 같던데.' [다들 2층이다. 너와 블루와 클레이스만 3층이던데? 내 방은 제일 구석이다. 웃기는 깜둥이 자식. 제길...이건 또 뭐야?] '....그래? 고마워, 와이즈. 잘 자~ ' [............] 창가로 가서 커다란 창문을 열어 작은 테라스로 나가서 진은, 난간 에 몸을 기대고 아래층 민트의 방 테라스를 확인했다. 잠잘 준비를 끝낼 시간을 대충 가늠해서 흘리고, 질질 끌리는 흰 가운 자락을 말아 올려 잡고 아래로 뛰어내렸다. 한 층 높이이긴 하지만 방이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징검다리 밟듯 다른 방 테라스 난간을 밟고 민트의 방인 듯한 곳으로 내려섰다. "내가....방금 뭘 본거지?" 릭페르는 정장 겉옷과 신을 벗고 하인이 가져온 물에 세수를 하고 물기를 닦다가 반쯤 열어 놓은 창문으로 보였던 하얀 물체에 어안 이 벙벙했다. 테라스로 나가보니 옆방의 콜린스와 파키오도 뭔가가 지나가는 것 을 보았는지, 문을 활짝 열고 나오고 있었다. "릭페르님? 방금 그거 설마 정령은 아니겠지요? 도둑인가?" "..........." 소년들과 반대편 옆방은 민트 백작부인의 방이었지만 달빛이 비치 는 그곳 테라스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잘못 봤겠지. 레이디 진께서 잠옷 차림으로.....다리를 드러내고....테 라스가 한참 떨어져 있는데 날아다니시는 것은 아닐 테니....그럴 리 가.....없겠지....?' 릭페르는 고개를 갸웃거리고 파키오와 콜린스에게 잘 자라고하고서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휴...들킬 뻔했네. 이런....장난기가 자꾸 솟으니까 허점이 생기잖아. 위험해....내가 왜 이리 긴장이 풀리는 거지?' 진은 상희에게 간지럼을 당하던 기억을 떠올리고 쿡쿡 웃었다. '아니야. 원래 그랬었어. 그렇지 상희야? 웃음이란 전염성이 강해.' 진은 민트의 방 테라스에서 어둔 구석에 몸을 최대한 웅크리고 은 신했던 것을 풀었다. "아가씨?" '에그머니!' 블루는 진이 깡총거리는 동작으로 한참 떨어진 저택 2층 테라스를 건너 넘어가는 것을 정원 안쪽에 서 있다가 보았다. 하얀 옷차림의 소녀는 갑자기 사라졌고 보이지 않는 진을 찾아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기사와 소년들의 두런거리는 소리도 들었다. 다시 모습을 나타낸 곳은 사라졌던 방의 테라스 위였고, 엘프는 나 무사이를 지나 그 아래로 가서 올려다보았다. "블루님? 안 주무세요?" "......예. 자야지요. 생각할 게 있어서요.....아가씨 방이 아닌데요?" "민트 백작부인을 뵐 일이 있어서요." ".......부인은 주무실텐데요." "예?" 진은 창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민트는 잠이....그것도 깊게 들어있었다. '젠장. 클레이스. 마법을 걸었나보네. 아주 계획적으로 노는 구나, 마음에 든다. 음. 그렇지. 플랜은 중요한 거야.' "이런...어쩌나. 도망갈 곳이 없....있구나." 진은 블루의 옆으로 사뿐히 뛰어내렸다. 블루는 미소지었다. 아가씨는 클레이스의 마수(?)에서 도망가고 있는 중인가 보았다. 그것도 맨발로. "클레이스님은 곧 방으로 돌아가실 겁니다. 만찬 뒤처리와 손님 접 대가 끝나셨을 테니까요." "그러게요. 블루님, 그럼 전 이만. 안녕히 주무세요." ".....저와 계시겠어요, 아가씨?" "예?" 진은 파란머리의 엘프에게 고개를 돌려 약간 붉어진 얼굴의 그를 쳐다보았다. "클레이스님은....좀 어려운 존재니까요. 피하기 힘드실 지도." 진은 손등으로 입을 막고 웃음을 가렸다. '엘프는 안 돼. 귀 좀 만졌다고 성혼이 어쩌고 하는데, 큭큭...책임질 일은 못 만들지~ ' "괜찮아요. 블루님. 걱정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 "와이즈에게 가 있지요, 뭐. 그가 제 보호자이니까요." ".......네." 얼굴이 다시 빨개진 엘프에게 진은 웃어 보이고 와이즈의 방이 있 는 방향으로 사라졌다. 블루는 진이 떠난 자리에서 잠시 서서 한숨 을 내 뱉고, 몸을 돌려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가는 길에 블루는 클레이스와 마주쳤다. "클레이스님!" "왜?" "아니, 저......" "너 방해하려는 수작이지? 까불지 마라, 엘프. 못 본 척 해라." 그냥 가려는 그를 쫓아 블루는 약간의 거리를 따라 붙어 다시 말을 했다. ".....클레이스님. 그 아가씨는 아직 성년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게 무슨 상관인데? 금방 성년이잖냐." "하지만....." "네 나이로 따져도 인간은 죽을 때까지 미성년일 거다. 무슨 성년 운운하는 거냐? 비켜." ".............." 블루는 어쩔 수 없이 비켜서야 했다. * '와이즈~! 자니?' [......안 잔다.] '들어가도 돼?' [뭐 하러?] '클레이스가 작정을 했나 봐. 좀 숨겨 줘, 와이즈.' [......기다려.] 진은 달빛 아래 정원 가에 서서 와이즈의 방 창문 테라스를 올려다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거 원. 줄리엣도 아니고, 로미오가 되어야 하는 입장이라니.' [.....그건 또 뭐냐?] '그런 게 있어. 뭐해? 빨리 열어.' [기다리라니까!] 진은 불편한 가운 끝자락을 잡고 가까운 정원수 위로 점프해서 올 라갔다. 나뭇가지에 몸을 지탱하고 진은 창문을 향해 연극 조로 속 말을 했다. '오오. 줄리엣! 사랑스런 나의 줄리엣. 창문을 열어주오오~ ' [.....뭔 짓이냐?] '연극 대사. 쿡쿡....뭐 하는 건데? 빨리 열어. 그 검은 드래곤이 오 는 것 같다.' [젠장. 복잡하기도 하네.....다 됐다.] 갑자기 뭔가 찢어지고 부서지는 이상한 소리가 나더니 헝클어진 머 리의 와이즈가 벌컥 창을 열어 젖혔다. "레이디. 밤중에 웬 나무 위에....." 클레이스는 빠르게 걸어오던 걸음으로 하던 말을 멈추어야했다. 창문이 열리자마자 진이 잽싸게 날아들어 안으로 쏙 들어가더니 바 로 문이 탕 닫혀버렸기 때문이다. "이런....정말 죽이 잘 맞네." 클레이스는 눈앞에서 진을 놓치고 다 된 밥(?)을 노란 드래곤에게 차려줬다는 생각이 들어 부아가 치밀었지만, 급하게 설치하긴 했어 도 방 전체에 겹겹이 걸어두었던 트랩들을 해제하고, 진이 들어가 자 다중으로 결계를 치는 와이즈 때문에 웃음이 삐져 나왔다. [와이즈. 안을 거냐? 내가 조언해 줄까? 너보단 아무래도 내가 더 낫....] [꺼. 져.] '그래~ 토끼가 도망을 가야, 사냥꾼이 쫓게 되는 거지~ 열심히 도망 해 봐라. 인간아.' 클레이스는 쿡쿡 눌린 웃음소리를 내며 돌아 걸어갔다. * "갔어?" "그래." 진은 맨발로 날고 뛰어다녔던 탓에, 더러워진 발 때문에 꽁지발로 가구가 넘어지고 깨지고 한, 엉망이 된 방안을 가로질러 세면대로 갔다. "뭐야. 마법을 걸어 두었었나봐?" "보면 모르냐. 젠장. 성질 나 죽겠네." "안 치워?" "뭐 하러 치워, 내가?" 와이즈는 그 긴 생 머리를 쓸어 올리고 침대 가에 주저앉았다. 진은 와이즈가 쓰지 않고 그냥 둔 수건을 물에 적셔 발을 닦았다. 그리고 씩씩하게 걸어가 침대로 냉큼 들어갔다. "............." "레이디 퍼스트. 하지만 바닥에서 잘 순 없으니까, 자!" 진은 피식피식 웃으며 안쪽에 누워 옆자리를 툭툭 치며 누우라는 손짓을 했다. "자장가 안 불러 줘도 돼지? 난 잘 거야, 와이즈. 하루가 너무 길 어. 피곤해 죽겠어. 트집 안 잡을 거지?" "............" "잘 자. 내 친구 드래곤아~ " 진은 이불을 말아 돌돌 돌리고 잠잘 준비를 했다. '뻔뻔한 여자 같으니라고!!' "저 만치 가. 이 징그러운 인간아! 이불 안 내놔?!" "쿡쿡....." ".......내일은 뭐 할거냐." ".....무도회가 몇일 남았잖아. 놀러가자, 와이즈. 수도에선 할 일도 없는데 근처 지리를 알아보고. 가까운 곳으로....미르나네 집에도 가야하는데......" 진은 잠이 들었다. 와이즈는 옆으로 누워서 겁이라고는 없는, 아니 둔하기 그지없는 아니....도대체 어느 쪽인지 짐작이 안 되는, 눈을 감고 있는 진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네 어미를 만나 계약을 했을 때 알았어야 했는데....인간에게 이렇 게 휘둘리고 있다니. 아버지가 알게 되기라도 하면 얼마나 웃으려 나.......쳇.' [59] 9. 새로운 일행. [진, 일어나라.] "......해 떴어?" "뜨려고 한다. 하인들이 일어나고 있으니 돌아가라. 클레이스도 자 고 있는 것 같으니까." 진은 부스스해 진 머리를 긁적이며 일어나서 하품을 했다. "좋은 아침. 와이즈.....더 자야겠어. 나중에 봐." 잠이 덜 깨서 약간 불안한 걸음으로 가운 자락을 질질 끌고 진은 방을 나갔다. '팔자야....' 와이즈는 진이 베고 자던 베개를 손으로 쳐냈다. 진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조심하며 계단을 밟아 방으로 갔다. 넓은 정원에 둘러 쌓인 저택은 새들의 지저귐 속에 아침을 맞고 있 었다. 진은 윤기 나는, 금박으로 무늬가 새겨진 큰 창을 조금 열어 두고 곧은 햇살이 비치는 창가 침대로 들어가 다시 잠을 청했다. "......저, 아가씨?" "응? 왜요?" 시중을 들어 주던 하녀가 들어와 방안을 왔다갔다하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대로 베개에 얼굴을 묻고 있던 진은, 허리를 굽혀 말을 걸어오는 젊은 하녀를 올려다보았다. "....클레이스님께서, 저...아침 산책을 하지 않으시겠는지 여쭈라고 하셔서요." "......몇 시쯤 되었어요?" "8시가 조금 못됐습니다, 아가씨." 진은 다시 베개에 엎어졌다. "더 자고 싶은데." "......기다리시겠다고 하셨는데요." "으......" '안 나오면 쳐들어오겠다는 건가? 거 참, 그 놈의 능구렁이가.' 진은 어기적거리며 일어나서 세수를 하고 가방을 가져오게 했다. "아가씨. 드레스를...." "아침 먹고 나갈 건데 다시 갈아입는 것은 불편하니까요. 아침 준 비는 빨리 될까요? 산책 후에 바로 먹었으면 좋겠는데." "네. 준비토록 하겠습니다." 진은 흰색의 무릎까지 오는 두꺼운 질감의 원피스형 평상복을 입고 식물의 즙으로 염색해서 푸른 기운이 도는 가죽 조끼를 묶어 입었 다. 날씨가 따뜻하긴 했지만 하던 데로 종아리까지 천을 대어 끈 달린 샌들을 올려 묶어 신을 신고 방을 나갔다. * "평범한 차림도 아주 어울리시네요, 레이디. 좋은 밤 되셨는지?" '좋은 밤? 그렇다. 속 까만 드래곤아. 아주~ 잘 자고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클레이스님. 덕분에 편히 쉬었습니다." 클레이스는 카키색 평상복 위에 검은 색 가죽으로 만든, 양 허리에 고리를 걸어 두른 폭 넓은 벨트의 편해 보이는 옷을 입고 있었다. 이곳 사람들이 입는 옷들은 색상이 다양했는데 염색은 대부분 식물 의 즙을 이용하는 것 같았지만 귀한 원료인지, 평민들은 주로 흰색 옷들을 입는 게 보통이었다. "............" 아침 햇살을 받으며 정원 테라스에 서 있던 클레이스가 손을 내미 는 것 때문에 진은 눈썹을 찡그려야 했다. "클레이스님. 죄송합니다. 귀족의 예의가 정말 익숙해지지가 않네 요. 인사는 나누었으니 됐고. 부축은 필요 없을 것 같으니 사양하겠 습니다." 클레이스는 실망스럽다는 듯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좋은 인상을 드리지 못했던 것이 안타깝군요, 레이디. 가실까요?" '어라? 그냥 넘어가네. 속 차렸나?' 하지만 그는 또 오른 팔을 굽혀 내밀고 잡으라는 시늉을 했고 진은 점잖게 손가락 끝으로 팔뚝의 옷을 집어 잡아주었다. ".......쿡쿡..." 클레이스는 블루가 내어놓은 오솔길 같은 길을 걸어, 정원을 두루 구경시켜 주었다. 달리 수상한 짓을 하지 않아서 진도 경계를 조금 늦추고, 어제는 어둡고 시간이 없어서 제대로 보지 못했던 정원 구 석 구석을 다녔다. '오. 오. 다람쥐다. 아니, 토끼까지! 이게 정원이냐? 숲이지.' 진은 키 작은 숲의 작은 생명체들의 움직임을 포착하고 눈을 반짝 였다. "블루는 휘파람을 불곤 하더군요. 그러면 작은 동물들이 모여들지 요." 진도 휘파람을 길게 한번 불어 보았다. 작은 새 몇 마리가 날개 짓을 했고, 감지되었던 작은 기척들이 오 히려 물러나는 것이 느껴지자, 진은 휘파람에 경쾌한 노래의 리듬 을 실어 다시 불러보았다. 블루에게서 노래를 듣는 것이 익숙해서 인지 몇 몇 토끼와 다람쥐가 모여들었다. '오-옷-!' 진은 클레이스의 옷을 잡고 있던 손을 놓고 튀어나가 가장 가까운 거리의, 긴 귀를 풀 숲 사이에 삐죽 내민 토끼 한 마리를 낚아챘다. 다가왔던 작은 동물들이 허겁지겁 모습을 감추었다. "이런.....도망가버리네." 진은 발버둥을 치는 토끼의 귀를 잡고 서서 중얼거렸고, 클레이스 는 맨 손으로 토끼를 잡고 당연한 소리를 하는 귀족영애를 흥미 있 게 쳐다보다가 진이 잡은 토끼를 내려다보며 침을 삼키는 것을 보 는 바람에 눌린 웃음소리를 내었다. "그걸 먹으려고요? 블루의 친구일텐데." "에. 예? 아, 그렇구나. 먹으면 화내시려나....처음으로 잡아 본 건데. 아까워라." 클레이스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한 마리쯤은 괜찮겠지요. 안 그러냐, 블루?" 진은 클레이스의 말에 비로소 근처로 걸어오고 있던 블루를 발견하 고 당황했지만, 토끼를 잡고 있던 손을 놓지는 않았다. '이거....도둑질하다 들킨 기분이네.' "......식전이라 사냥을 하셨나보네요, 아가씨." "죄송합니다, 블루님. 여기....놀랬을 테니 달래 주세요. 블루님의 친 구라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습니다." 블루는 약간 허탈한 표정으로 진이 귀를 잡고 엉덩이를 받치며 건 네는 토끼를 받아들어 쓰다듬더니 땅에 내려놓았다. 토끼는 블루의 발치에 그대로 웅크리고 있었고 진은 그런 토끼를 내려다보며 미안함과...솔직히 말하면, 아쉬운 기분을 느꼈다. "사냥을 하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닌걸요. 필요한 만큼 하는 것은 순 리이기도 합니다, 아가씨. 미안해하실 필요는 없답니다." "......그래요. 흠. 사실은 배가 고파서 라기 보다는 충동적으로 잡았 습니다. 잡고 보니 배가 고프더군요. 그런 경우는 먹어도 되는 건가 요?" ".......애매하군요." "하지만 뭐. 클레이스님 댁 식품저장실이 비었을 리는 없을 테니 굳이 블루님의 친구를 잡아먹을 필요는 없겠군요. 가지요~ 밥 먹으 러. 먹는 얘기했더니 배가 더 고프네요." 진은 앞장서서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뭐 하러 끼어 드냐?] '아침 산책은 저도 매일 하는 걸요, 클레이스님.' [하루쯤 빠지면 나무들이 다 시들기라도 하냐?] '..............' [.....재밌지 않냐? 살아있는 토끼를 보고 침 흘리는 귀족 여자는 첨 본다.] '...............' 와이즈는 창가에서 혀를 차고 있었다. * "다들 부지런하시네. 안녕, 파키오. 콜린스? 안녕하세요, 릭페르님? 백작부인은....?" "안녕하세요, 레이디." "좋은 아침이네요, 레이디 진. 부인은 아직 기침하지 않으신 듯 합 니다." 콜린스는 학교에 가기 위해 간단한 아침식사를 하고 있었고 덩달아 파키오와 릭페르까지 이른 조반을 앞에 두고 있었다. 자리를 잡고 앉자 와이즈도 들어왔다. [원래 아침을 이렇게 이른 시간에 저렇게 많이 먹는 거냐, 아니면 너 때문이냐, 와이즈.] [원래 저렇게 먹는다. 식성 좋은 게 왜 내 탓이냐.] [흠. 어제도 실패했냐?] [웃기지 좀 말아다오, 엉?] [쿡쿡쿡.......] "콜린스. 잘 갔다와." "네, 레이디. 다녀오겠습니다." 콜린스는 마법 학교에서 받은, 학생임을 증명하는 문양이 그려진 가죽 가방을 들고 저택을 나갔다. "차라리 콜린스에게 학교 가까운 곳에 집을 사주는 게 나으려나." "쓸데없는 일에 돈 쓰지 마라, 진." "미성년이고 학생이니 보호자가 있어야 할겁니다. 방학이 되면 머 물 곳도 있어야 할 테니까요. 저희 집에 맡기시지요, 레이디." "클레이스님 호의는 감사합니다만 곧 수도를 떠나신다고 들었어 요." 진은 떠난다는 말에 억양을 좀 넣어 주고 릭페르를 쳐다보았다. "릭페르님. 콜린스는 기숙사에 들어갈 건데 추천서가 필요하거든요. 후작 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요?" "추천서 정도야 어렵지 않지요. 써 드리겠습니다, 레이디 진." "감사합니다. 릭페르님." ".......그것 보다, 묻고 싶은 것이...." 릭페르는 내내 물어야 하나 말아야하나 갈등했던 문제를 꺼내기로 했다. "네. 뭔 데요?" ".....미르나를 알고 계시지 않으세요?" "알지요. 네얀에서 만났었는데. 통신을 받으셨나요?" "네." 진은 고개를 끄덕이고 후식으로 차를 마셨다. 릭페르는 다음에 당연히 설명이 있으리라 생각했다가, 진이 파키오 에게 수도 근처에 구경 할 만한 곳이 있느냐고 묻는 질문에 조금 당황했다. "진. 예의가 아니잖냐." "어? 뭐가?.......릭페르님께?" "미르나와 친구라고 들었습니다. 아니었나요?" "맞아요. 미르나와 친구지요." "그런데...." 진은 미처 신경 쓰지 못했던 문제를 상기하고 웃었다. "아. 제가 릭페르님을 뵈었을 때, 미르나의 집안 분이라는 것을 알 고도 얘기를 드리지 않았던 것을 말씀하시나보군요." "..........." "음. 그것도 가치관 문제겠군요. 미르나와는 친구가 맞습니다만 릭 페르님은 처음 뵈었으니까요. 친구의 가족도 친구는 될 수 있겠지 만, 소개해 주는 당사자가 곁에 없었으니 전혀 별개의 만남이 되지 요. 처음 뵈었을 때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제까지 미루고 있다 가 말씀드리는 것을 잊었네요. 사실은 콜린스의 보증을 부탁하고자 방문을 청했었는데 추천서를 써 주신 다니 굳이 방문을....." "약속은 지키셔야 지요, 레이디 진." 릭페르는 조금 화가 났다. "......그래야 지요." 진은 슬며시 입을 가렸지만 릭페르는 진의 눈이 웃고 있음을 알고 얼굴이 약간 달아올랐다. "파키오. 내 방에 가서 편지를 좀 가져다 주겠니? 내 여행 가방 안 에 있을 거야." "네. 레이디." 파키오가 나가자 진은 팔짱을 끼고 숨을 내뱉으며 변명을 했다. "확실히 어찌 보면 무례가 된 일이었겠군요. 미르나에게도 신분을 제대로 밝힌 것은 아니었으니까요. 하지만 누차 말씀드렸다시피 풀 네임은 제게 그다지 의미가 없답니다, 릭페르님. 친구를 만드는데 가문의 성은 필요 없으니까요. 미르나와는, 그녀가 친구가 되길 원 했고 저도 미르나와 마음이 맞아 친구로 받아들이기로 했지만, 릭 페르님의 소개 말을 듣고 제가 아는 척을 하지 않았던 것은 연줄이 라고 해야하나....그런 것을 사적 관계와 연결시키지 않는 탓이지 요." 진은 릭페르의 얼굴이 굳어지고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눈 하나 깜 짝 하지 않고 계속 설명을 했다. "친구의 친구가 내 친구는 아니니까요. 가족이시라는 것은 알지만 전 이곳 수도에 잠깐 지나치는 길이었고, 일부러 예의 갖춰 인사를 드릴 여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미르나는 친구입니다만. 전 그녀를 친구로 받아들였지, 미르나의 가문이나 가족 분까지 덩달아 친구로 여기지는 않았거든요." ".....지금도 그렇습니까?" "릭페르님. 지금은 미르나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고도 마주 앉아있 지 않나요? .....이해하시기 힘드신가 보네요. 정직하게 말씀드리자 면, 제가 연줄을 이용해 먼저 접근하는 경우는 대부분 '일'에 해당 하므로 '인간관계'로 시작할 수 없게 됩니다. 제가 미르나의 이름을 거론해서 릭페르님께 아는 척을 했다면, 처음부터 릭페르님은 '이 용' 당하게 되는 입장이 될 수도 있었지요. 그러는 편이 좋았을 까 요?" ".............." "저기. 여기 가져 왔는데요, 레이디." 파키오는 굳어진 식탁 분위기에 약간 머뭇거리며 미르나의 편지를 내밀었고, 진은 고맙다고 말하며 받아들었다가 봉인 된 양피지를 릭페르에게 넘겼다. "미르나는 도움이 필요할 경우, 그 편지를 가지고 오빠들을 찾아가 라고 하더군요. 그녀는 호의였지만 제가 '도움'을 청하는 입장이라 면 분명히 뭔가의 '계획' 때문이여 야 했겠지요. 하지만 그럴 정도 의 일은 생기지 않았고, 추천서를 받는 정도의 일로 친구의 편지를 사용할 필요까지는 없다고 여겼기 때문에 미뤘었습니다만, 미르나 의 통신을 받고 아시게 되었으니 안부인사 전달 겸 드려야겠군요." "..............." 릭페르는 편지를 읽기 시작했고 대화가 잠시 중단되자 클레이스가 말을 걸어왔다. "친구의 친구는 친구가 아니라고요, 레이디?" "클레이스님. 내 친구는 친구지만, 내 친구의 친구가 어찌 그냥 내 친구가 될까요. 친구란 가장 기본 단위로 보게 되면 개인과 개인입 니다. 내 친구의 친구가, 친구의 친구와 친구가 되고 싶다면 친구가 되는 시간을 가져야합니다. 한 친구를 사귀었다고 해서 그 친구의 가족과 집안과 예전 친구들까지 저절로 마음이 맞게 될 리는 없지 않을까요? 물론 완전한 타인보다는 훨씬 호의를 갖고 시작할 수는 있겠지만, 최소한 '소개' 정도의 자리는 있었어야했지요. 이 경우에 는 그것이 없었고 저는 바빴으니까요." "그렇다면 저도 정식 교제를 청합니다, 레이디. 와이즈와는 별. 도. 로 말이지요. 친구가 되어 주시겠지요, 레이디?" '웃기네. 깜둥이 자식. 내가 언제 너와 친구였냐, 임마.' 와이즈는 눈썹을 치켜 떴고, 진은 피식 웃었다. "친구라는 개념을 잘 아시고 하시는 교제신청이라면 물론 받아들입 니다, 클레이스님." '어.......라?' '바보 같은 놈. 제 꾀에 제가 넘어가는 군. 큭큭큭.....' 편지를 모두 읽고 다시 접어 손에 쥐고, 툭툭 탁자를 치고 있던 릭 페르는 클레이스가 멈칫하자 진을 향해 단호하게 들리는 투로 말을 했다. "레이디 진. 콜린스군의 보증과 보호까지 저희 훼이른 후작 가에서 맡겠습니다. 원하신다면 파키오군도 맡도록 하겠습니다. 레이디께서 바라시는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철저히 배려하겠습니다. 하지만 저도 조건이 있습니다." "에......." "레이디께서는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 주시는 일을 하시더군요. 소 년들에게서 듣자하니 여기서의 일은 아무것도 아닌 모양이었습니 다. 안타깝게도 전 도움을 받아야 할 정도로 부족한 것이 없지만 대신 레이디께 도움이 될 일을 조금 드리고 반대급부를 바랍니다." 진은 모처럼 이마에 땀이 맺히는 기분이 들었다. '조용해 보이는 저런 사람이 제일 상대하기 힘든데. 젠장. 방심했 다.' [..............] "....뭔가요, 릭페르님." "레이디의 여행 일정에 함께 하겠습니다." ".............." "허락하셔야 할겁니다. 훼이른 가는 네카르도에서 꽤 영향력 있는 귀족 가거든요. 라돈에서의 노예 영주의 일 같은 경우도, 저희 가문 에서 반대하게 된다면 그 기사 분은 네카르도의 비중 있는 귀족들 에게서 인정받기 힘들게 될 겁니다, 레이디 진." '망할! 미르나....뭐라고 쓴 거냐.' [..............] "생각해 보겠습니다, 릭페르님." "지금 대답하시죠, 레이디. 레이디의 '꿈' 이야기와 소년들에게서 들 은 이야기와, 제가 직접 보고 들었던 것들을 참고한다면. 보통 귀족 영애의 사고를 넘어서는 레이디의 지혜라면, 이 자리를 벗어나게 되면 전 기회를 놓치게 되겠지요." 릭페르는 물러서지 않겠다는, 아주....결의까지 차 있었고 진은 턱을 벅벅 긁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고지식한 기사 오빠라 더니. 오빠들 때문에 약혼자를 맘대로 정할 수 있었다고 했었지....젠장.' "......전 제 여행에 어떤 간섭도 원치 않습니다, 릭페르님." "간섭하지 않겠습니다, 레이디 진."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전 기사입니다, 레이디." "전 드리얀으로 갑니다. 네카르도와 가장 먼 나라입니다." "전 수련 여행을 아직 다녀오지 않았습니다. 마침 남동생이 곧 졸 업하게 되니, 좋은 기회지요. 몇 년이 걸리더라도 상관없습니다." 진은 와이즈를 흘끗 보았지만 마법사는 다른 방향으로 눈길을 향하 고 있었다. 진은 한숨을 쉬고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릭페르님. 하지만 콜린스와 파키오의 후원으로는 부족 합니다. 조건을 더 달겠습니다." "......말씀하시지요, 레이디." "판 타이 남작은 동료가 필요할 겁니다. 훼이른 후작 가는 그를 지 지 해 주셔야 합니다." "확실히 지지하겠습니다." "제 상인들의 대륙 진출에 따르는 편의를 봐 주시길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로체스터 백작 가에서 열릴 무도회에서 일어나게 될 일에 대해서 진상을 알게 되시더라도 묵인해 주십시오." "묵인하겠습니다." '졌소이다. 기사.' '잘한다, 잘 해.' 와이즈는 속으로 투덜거렸지만. 이 여행의 주체는 자신이 아니었다. "약속을 지키신다면. 일행이 되신 거지요." "감사합니다. 레이디." 릭페르는 서글서글한 갈색 눈동자에 웃음을 담았다. * 블루는 아침 식탁에 오가는 말들을 내내 말 없이 듣기만 하고 있었 다. 저 아가씨는..... 살아 있는 토끼를 보며 입맛을 다시던 진에게서 클레이스는 흥미를 느낀 모양이었지만, 블루는 이질감을 느꼈다. 자신은 엘프였고, 그래서....그녀의 나무 이야기에 비춰본다면 그녀 는 죽을 때까지 나무를 상처 입히게 될 소년인지도 몰랐다. 그녀는 너무 여러 가지 면을 보여주고 있었다. 극과 극을 달리는 인성은 엘프인 자신에게는 감당하기 벅찰지도 모 른다. 아직 16세도 되지 않았다는 인간소녀에게서 블루는 감성을 자극하는, 아주 강렬한 느낌들만을 골라 전해 받아야했다. 존경. 고독. 사랑스러움. 잔혹함. 정직함. 강함. 자애. 포용력...... 어떻게 해야할까. 저 소녀는 자신의 마음을 두 번. 적어도 두 번은 뒤흔들어 놓았다. 진의 노래는 아직도 귀에 울리는 듯 했고, 잔잔하게 책을 읽듯 이 야기 해 주었던 이야기는 아직도 가슴이 아팠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을 정말 '나무'처럼 보는 듯 했다. 기사 릭페르는 화가 난 듯 보였다. 아가씨의 이야기는 매몰차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아마 그도 인간들 사이에서 신분 높은 귀족 자제로 이제까지 저런 타입의 귀족 아가씨는 본 적이 없을 것이다. 엘프인 그 자신도 그 런 것처럼. '친구'에 대해 클레이스에게 하는 진의 이야기에 블루는 공감했다. 보통, 사람들은 엘프는 모두 선의의 종족으로 보는 경우가 대부분 이었고 어느 정도는 사실이기도 했지만. 엘프만큼 친구를 사귀고 선택하는 데 까다로운 종족이 있을까. 모두 예의가 바르고 모두 친절한 편이지만, 모두 그런 편에 속하기 때문에 오히려 인간들처럼 '특별'히 구분되는 친구 사이는 많지 않 았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모두 친구였으니까. 블루는 진과 '친구'가 되고 싶었다. 아니...... 그녀가 장난으로 귀를 잡아 당겼던 일이 떠올라 블루는 다시 얼굴 이 따금거려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대는 데. 기사 릭페르의 조건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가슴 안쪽에 무언가 치고 지나가는 것을 분명 히 느껴야 했다. 그 때문에. 엘프의 심장이 반응함을 알자 블루는, 근래 남청색 눈을 가진 소녀 를 만난 후 어지럽게 소용돌이치던 생각을 겨우 정리할 수 있었다. "레이디. 친구로 받아 주신 다니, 저도 당연히 함께...." "앗!!! 깜박했네. 백작부인께 드릴 말씀이 있었는데. 지금쯤 일어나 셨을 테니,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잠시 실례합니다." 진은 클레이스의 말을 못 들은 척 벌떡 일어나 잽싸게 도. 망. 갔 다. '와이즈. 그 검은 드래곤은 네 몫이야. 네가 알아서 해!' [.............] [60] 9-2. 붉은 드레스 "그렇게 하지요, 영애. 초대 명단에 몇 사람 더 추가한다고 큰일나 는 것은 아닐 테니." 민트는 자리에서 일어나 흰 나이트 가운 차림으로 붉은 머리카락을 장식 없이 늘어뜨리고 탁자에 앉아 진의 주문에 답했다. 그녀는 무방비 해 보였고, 진은 실연 당해 기운이 빠진 것처럼 보 이는 미망인에게 동정이 갔다. "블루님을 포기하신 거 에요, 부인?" 민트는 새침하게 웃어 보였다. "글쎄요. 영애에게 상대가 되지 않지 않나요? 승산 없는 싸움에 시 간 낭비하고 싶지 않았어요." "전 블루님을 표적 삼지 않았는데요?" 민트는 가벼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렇다고 해도, 블루님은 영애만큼은 다르게 볼 거 에요. 안 그런 가요?" "......글쎄요." "영애 때문만은 아니에요. 그분은 엘프고 저는 인간이지요. 블루님 의 마음을 얻는다고 해도 행복해지지만은 않을 거 에요. 저는 금방 나이 들게 될 테고 그분은 여전히 아름다운 엘프겠지요. 욕심이었 지만, 잠시만이라도 내 사람으로 하고 싶었어요. 엘프에겐 그게 불 가능한 일인 줄 알면서도 말이에요. 저는 미망인이에요, 영애. 영애 라면....제 입장을 아시리라 생각이 되어요. 아닌가요?" "이해 할 수는 있지요. 부인. 전 혼돈의 땅에서 살았답니다." "......그래요. 영애는 인생을 아시는 것 같았어요. 여자 분이시니 가 장 오래 묵은 인간들 사이의 성차별 문제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셨 을 거 에요." 민트는 나이 어리고 아직 성년도 맞지 않은 소녀에게 자신이 무슨 이야기를 하나, 하고 생각이 들긴 했지만 진은 겉보기와 달랐다. 항상, 보이는 모든 면이 달라 보였다. '말이 통할 거야. 해도 되겠지. 이 소녀라면.' "전 블루님이 엘프라서 더 욕심이 생겼지요. 하지만 인간과 엘프는 수명이 너무 차이가 나요. 그게 너무 억울했는데, 영애를 알게 되고 서는 영애라면 뭔가 다를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전 자유로운 편이라 애인을 만들어도 손가락질 당하지는 않아요. 아주 운이 좋 은 편이지요. 전 사랑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타입이 아니에요. 하지 만 블루님에겐 진심이었어요." "엘프라서 욕심이 생기셨다 고요, 부인?" 민트는 말 없이 진의 남청색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제 이야기를 해 드릴까요, 영애?" "하신다면 듣지요." 민트는 묶은 자국에 약간 웨이브 진 붉은 머리를, 하나로 쓸어 다 듬어 내리고 고개를 숙였다. "전 권세도 부도 그저 그런 귀족 가의 막내였어요. 아버지는 절 길 레스피 백작 가의 후계자에게 시집 보냈지요. 소녀시절엔 지금보다 더 나았거든요." "지금도 아름다우신 데요?" "그래요. 지금도 전 젊어요. 영애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용기가 나네요." 민트는 고개를 들고 웃어 보였다. 진은 마음 한쪽 구석을 내어 보여주려는 젊은 미망인에게서 따뜻한 느낌을 전해 받았다. ".....작고한 길레스피 백작은 사윗감을 물색하던 제 아버지의 계략 에 걸려서 사교파티에 잔뜩 꾸미고 나타나곤 하던 저에게 청혼했었 지요. 그 사람은 저보다 5살 많았는데 괜찮은 편의 남자였어요. 전 성년이 지나고 1년쯤 되었을 때 그를 만나 결혼했지요." '빨리도 했네.' "제가 시댁에 가서 3~4년 동안 짧은 결혼생활을 하며 느꼈던 것은 '화' 였어요. 영애." 민트는 손으로 얼굴을 한번 쓸었다. "전 그다지 총명하지는 않았지만, 제가 여자라는 사실 때문에 그때 까지 당연했던 대우들이 결혼 생활을 하며 당연해서는 안 된다는 사 실을 깨달았어요. 여식들은 지참금이 필요해요. 왜 일까요? 결혼해 서 평생 같이 살아주고 아이를 낳아주고 키워주는 일에 왜 지참금 이 필요한지 이해할 수 없었어요. 여자들은 결혼 전에는 오빠들과, 특히 아버지의 지배를 받지요. 보호자가 없이는 집 밖으로 나가지 도 못해요. 여자들은 갇혀 살아요. 저는 그게 당연한 줄 알았어요." 민트는 손가락 위의 루비 반지를 돌리며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결혼해서도 내게 반했다며 청혼을 했던 남편은 다른 귀족 남자 들처럼 부인인 저와 방을 따로 썼지요. 그는 바람기가 심한 것도 아니었고, 기사이기까지 했어요. 전 운이 좋은 편에 속했어요." 민트는 잠시 말을 멈췄다. 진은 좀더 털어 버리고 후련해지길 바라는 마음에 거들어 주었다. "여성은 아이나 어른이나 제약이 많긴 하지요. 어릴 때는 생각이 미치질 못하고 상황도 갖춰지지 못하잖아요. 세상을 겪은 다음에야 깨닫는 게 보통이고요. 그래서 나이 어린 소녀들이 신랑감 찾는 일 에 열을 올리는 것이 아니었나요?" 민트는 맞장구를 쳤다. "맞아요. 영애. 여자들은 무지하지요. '보호'라는 명목으로 집 안의 화초처럼 자라는 대부분의 여식들은 그것을 몰라요. 안다고 해도 '나만큼은 아니겠지' 하고 생각하지요. 저도 그랬어요. 남편이 성실 한 편이었지만 그래도 저는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세상 은 여자가 아닌 남자들이 만들어 가지요. 여자들은 죽을 때까지 부 속품이에요. 무언가 해 보려고 해도 이미 때늦은 경우가 많고, 아이 라도 낳게 되면 남편 다음으로 아들에게 생을 의지해야하지요." "부인의 생각이 바뀐 것에 계기가 있었나요?" 민트는 입을 가리고 웃었다. "시어머니 때문이었어요. 영애. 다른 누구도 아닌, 지참금이 적다고 신혼 때부터 절 마땅치 않게 여기고 쌀쌀 맞았던 시어머니가 일깨 워주셨지요." 민트는 천장을 바라보며 손가락으로 탁자를 톡톡 두드렸다. "돌아가신 길레스피 백작부인도 일찍 시집와서, 보통 귀족 마나님 생활을 하고 후계자로 아들들을 두었었지요. 전 그분이 절 미워하 시는 줄 알았어요. 병이 들어 침대에 누워 계시는 동안 전 그분 머 리맡을 지켰지요. 며느리라고는 그때는 저 하나뿐이었거든요. 까다 롭게도 하녀의 시중을 받지 않으시려고 해서 제가 직접 병간호를 했었어요. 어느 날 그 분이 곁에서 졸고 있던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민트. 미안하다. 아들들을 잘 키우지 못해서 너도 나처럼 살겠구나' ......" "............" 민트는 눈가가 붉어졌다. "시어머니는 절 보시곤 자신을 돌이켜 보셨나 봐요. 시어머니는 시 아버지와 나이 차가 많았어요. 시아버지는 나이가 많이 들었었지만 그때까지도 첩이 있었어요. 시어머니는 겨우 40이 넘는 나이에 병 을 얻었지요." 진은 충실한 자세로 진지하게 들어주었다. 그녀는 속생각을 털어놓을 상대가 흔치 않았을 것이다. "그 분은 돌아가시기 전에 제게 이것저것 한탄을 하시고는 했어요. 다시 젊어지게 된다면 절대로 결혼 같은 것은 하지 않겠다든지. 다 시 신혼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남편을 독살할 치밀한 계획을 세워서 실행하시겠다 든지. 아들들을 키우면서 젊음을 바치지 않고 도망이 라도 가겠다든지. 아니면 아들들에게 여자들을, 여자로 보지말고 인 간으로 보게 키우시겠다 든지....그런 말씀들을 하셨지요. 그리고 저 에게 그래도 자식이니까, 살다가 화나게 만들어도 독살은 시키지 말아달라고 하셨어요." 민트는 눈가를 꾹꾹 누르며 쓰게 웃었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정정하신 줄 알았던 시아버지도 곧 돌아 가셨지요. 남편은 상이 지나고 얼마 되지 않아 나갔던 사냥에서 사 고로 죽었어요. 전 그때까지 아이가 없었기 때문에 백작 칭호는 남 편의 형제에게 갔지만, 저는 시동생의 간섭을 받을 필요가 없었어 요. 돌아가실 때 유언으로 시어머니께선 당신의 재산을 아들들이 아닌 제게 모두 물려 주셨거든 요. 그렇지 않았다면 저는 시동생의 '보호' 라는 명목아래 또 갇힌 생활을 했거나, 재혼해서 다른 남자 의 그늘 아래 들어가야 했었을 지도 모르지요. 세상은 참 요지경 아닌가요? 시어머니는 병이 들기 전에는 절 구박한 편이었는데 말 이에요." 민트는 잠깐 말을 끊었다. "....빨간 드레스 이야기가 생각나네요." "빨간 드레스요?" 진은 팔짱을 끼고 기억을 더듬어 언젠가 언뜻 책에서 보았던 이야 기에, 기억이 따르지 않는 부족한 부분을 꾸미고 각색해서 이야기 해 주었다. "평민 가정 이야기에요. 현모양처로 소문났던 부인이 병이 들었지 요. 그 분은 며느리들을 불러 놓고 자신의 드레스 이야기를 해요. 남편이 바람을 피우는 것도, 무시당하는 생활을 했던 것도 아니었 지만. 그녀는 남편을 사랑해서 결혼했고 행복하다고 생각했지요. 하 지만 나이 들수록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서 만 살았다는 것을 깨달아요. 너무 입고 싶었던 붉은 색 화려한 드 레스를 큰 맘 먹고 샀지만, 몇 년 동안 한번도 입어보지 못한 이야 기를 합니다." '민트의 드레스도 붉은 색 계통이 많았지. 재미있는 우연이야.' ".....남편의 시중과 아들들의 시중을 들어 주느라 그 드레스를 입어 볼 기회를 얻지 못하고 살다가 어느 순간 입을 수 없게 된 나이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그리고 아들들이 커서 며느리들에게 당연한 듯 배려만을 바라는 생활태도를 보고, 자신이 먼저 아버지인 남편에게 헌신만 했기 때문에 며느리들도 요구만 받는 생활을 하게 됨을 알게 되지요. 아들들은 아버지를 본 받으니까요." "그래서요?" "화가 치밀어서 병에 들지요. 그녀는 며느리들에게 그렇게 말해요. '내가 병이 들어 다 죽어가니까 네 시아버지가 내게 그러더 구나. <당신 없으면 난 이제 어떻게 산단 말이요.> 그 말을 듣고 내가 감동하리라 보니? 너흰 그 말이 지당하다고 보니? 난 너무 화가 난 다. 평생 수발만 들어 주었더니 이젠 죽는 것도 맘대로 하지 마란 다. 내가 없으면 네 시아버지는 빵을 구울 줄도 모르고, 옷도 만들 줄도 모르고, 옷을 혼자 입을 줄도 모르고, 집안은 난장판이 되겠 지. 도와주지 마라. 네 남편들이 당연하듯 받아먹는 그 사소한 일들 을 해 주지 마라. 나처럼 하고 싶은 일 하나 못해보고 입고 싶었던 드레스 한번 걸치지 못하는 생활이라면 지금이라도 내 아들들을 버 려버려라." 민트는 농담처럼 이야기하는 진의 말투에 쿡쿡 웃었다. "그것은 영애의 꿈속에서의 이야기인가요?" "그래요. 부인. 세상은 어딜 가나 다 마찬가지 에요. 어딜 가나 그 렇더군요." 민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 그래서 블루님을 얻고 싶었어요. 엘프는 배신을 몰라요. 선택한 상대에게는 죽을 때까지 헌신한다고 들었어요. 그 분은 인간 여자 들에게 가질 수 없는 '꿈' 같은 존재에요." "도와드리고 싶어도. 하필이면 엘프라....." 진이 중얼거리는 것을 듣고 민트는 유쾌한 웃음소리를 내었다. "그러게요, 영애. 블루님은 엘프라서 별별 방법을 다 써봐도 안되더 군요. 오히려 더 절 피하시기만 했어요. 인간과 달라서 인간의 처세 로는 통하지가 않더군요." "인간이라면 마음을 조종하는 것도 잘만 하면 가능할 텐데.....엘프 라는 것이 문제로 군요. 음...." 민트는 속눈썹을 깜박이며 눈을 굴리고 있는 진을 웃음 띈 얼굴로 찬찬히 쳐다보았다. "고마워요. 영애. 도와주겠다는 생각을 해 주신 것만으로도 기분이 나아지는 걸요. 영애가 참 마음에 들어요. 블루님을 양보해도 될 거 라는 제 생각이 틀리지 않을 거 에요." "에....전 양보 받고 싶은 생각은 없는데요, 부인?" 민트는 다시 웃었다. 그리고 자신이 진에게 샤프롱을 약속했으니 참견을 해도 되겠다며, 진의 주변 남자들에 대한 평을 하기 시작했다. "영애 곁에는 미남들만 우글거리더군요. 그 마법사님도 너무 아름 다운 분이세요. 영애와 말씀 나누는 것을 들어보면 예의 없게 보이 기도 하지만, 영애에게만 유달리 허물없게 대하는 것을 보면 특별 히 여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지요. 그분이 더 나을지 몰라요. 같은 인간이니까요. 릭페르님도 괜찮은 분이에요. 사교계에 잘 나오시지 는 않지만, 귀족 영애들에게 꽤 인기 있는 편이지요. 그 파키오란 소년도 호감은 가지만 평민이니....하지만 클레이스님은 안 돼요, 영 애. 그분은 아주 바람둥이고 못 됐어요....." '제 마법사도 인간이 아닌데요, 부인.' 진은 클레이스의 흉을 보기 시작하는 민트의 이야기를 들으며 피식 거렸다. 민트는 다시 활발해졌고 단순한 성격의 그녀가 진은 귀엽 다는 생각이 들었다. '캐서린 때문이야. 여자들은 다들 비슷한 경향이 있다니까.' 하지만 민트는 캐서린과 달리 혼자서도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았 다. 9-3. 피크닉. 민트는 무도회 준비를 돕기로 했었기 때문에 늦은 아침을 대접받고 곧 돌아갔다. 릭페르는 저녁 만찬에 참석하겠다는 약속을 진에게 받아내고 파키 오를 데리고 훼이른 가로 돌아갔다. 아마 릭은 돌아가서 바삐 할 일이 많을 것이다. 잠시 잠깐 자리에서 사라졌던 클레이스가 얇게 철을 펴서 만든 가 벼운 원피스형 갑옷의 기사 복장에, 양어깨에 고리를 걸어 뒤로 두 른 검은 망토를 입고 앞을 가로막고 서자 진은 한숨이 나왔다. 블루는 무늬 없는 흰색의 발끝까지 오는 긴 옷차림으로 하프를 든 채 클레이스에게 이끌려 진과 와이즈를 따라나섰다. "레이디. 블루도 마법을 쓰니까요. 워프하는데 무리 없을 겁니다." '와이즈. 안 떼어내 지나봐?' [찰거머리다. 낸들 어쩌냐.] 진은 클레이스와 블루와 와이즈와 함께 아담의 가게에 들러 도시락 을 부탁하고 수도와 떨어진 거리의 커다란 폭포가 있다는 오니가라 공국으로 워프하기 위해 성문을 나섰다. 성문 밖에서 와이즈는 블루가 마법진을 그리는 것을 내버려두었고, 진은 딴청을 피우는 와이즈에게 핀잔을 주었다. "좀 도와드리지 그래, 와이즈?" "난 5써클이다, 진. 블루님이 더 써클이 높으니 우리 모두를 이동 시키는 거야 어렵지 않은 일인데 뭐 하러 내가 나서? 도와드려요, 블. 루. 님?" "아닙니다. 그냥 워프하긴 무리지만 마법진을 이용하면 어렵지 않 습니다, 아가씨." "그래요. 그럼 부탁드릴게요. 블루님." '엘프에게 괜히 웬 심술이야, 와이즈?' [.............] 진은 높은 성벽 밖에서 블루가 마법진을 그리는 것을 보며 이동할 때마다 성밖으로 나와야하는 이유를 물었고, 클레이스가 대답했다. "마법으로 성안으로 바로 워프하면 성내 마법사나 경비들이 알게 되지요. 작은 영지의 성도 마찬가지입니다, 레이디. 출입허가를 받 지 않고 오가는 것은 법을 어기는 것이 되니, 전시 중이 아니라고 해도 적국의 스파이나 도망자로 오해받을 수도 있으니까요." 네카르도는 현재 분쟁 지역이 아니었지만, 주변 국가들 중에는 전 쟁 중인 곳도 있다고 들었기 때문에 진은 수도를 떠난 후 다음 목 적지에 대해 고민해야했다. '전쟁터를 피해 가야할까, 아니면 찾아가야 할까.' [전쟁터?] '그래. 가고 싶진 않지만, 가봐야겠지, 와이즈?' [알아서 해라. 네 여행 아니냐.] 진은 생각을 미루고, 손을 내미는 클레이스에게 손 대신 옆에 놓여 져 있던 피크닉 바구니를 쥐어주고 일행과 함께 완성된 마법진에 올랐다. [61] 피크닉 * 오니가라 공국은 호수와 강을 끼고 있었다. 울창한 숲과 무엇보다도, 아주 큰 폭포가 있었고 폭포 주위 경관이 매우 빼어났다. 마법진의 울림이 멎자 진은 멍멍하도록 귀청을 때리는 폭포소리에 잠시 사고회로가 멈췄다. "와~! 대단하다." 나이아가라를 연상시키는 거대한 폭포의 소음과 피어오르는 물안개 에 가려진 웅장한 폭포의 물줄기를 지켜보며 진은 감탄했다. 소리가 너무 우렁차서 목청껏 외쳐야했다. "블루님. 폭포와 가깝게 워프했네요. 이곳 지리를 잘 아세요?" "네, 아가씨. 전에 와 봤거든요. 아름다운 곳이죠."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어쩐지 엘프는 굳은 표정으로 주위를 돌아 보았다. 진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곧 널려져 있는 바위무더기 위 에 올라가서 낭떠러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폭포의 폭은 물안개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아서 정확하게 가늠이 되 지 않았지만 꽤 크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진은 그 무겁게 낙하하는 물줄기와 천둥 같은 소리에 머리에서 발 끝까지 꽝꽝 울리는 기분이었다. "신이여~! 센스 없다고 한 말 취소할 게요~!" '센스 없는 신?' 클레이스는 폭포 소리에 가려진 진의 음성을 구분해서 듣고 피식 웃었다. "나이아가라보다는 훨씬 작지만 아주 멋진 폭포다, 와이즈." [나이아가라?] 폭포의 물소리에 꽥꽥 고함을 지르는 것이 싫었는지 와이즈가 음성 을 전해왔다. "이곳 이름이 오니가라 랬지! 나이아가라의 원래 이름이야. 오니가 라! '천둥소리를 내는 물' 이라는 뜻의 인디언 말이야. 이곳에 원주 민들이 아직 사는 걸까?" 진은 두 팔을 벌리고 습기 찬 공기를 들이마시며 저쪽 세계와 발음 이 같은 단어를 찾은 기쁨에 감격했다. [자리를 옮기자, 진. 시끄러워서 산만하다.] '센스 없는 것은 드래곤이었구나.' 와이즈는 금새 딴 곳을 쳐다보고 있는 진에게 쏘아보는 시선을 던 지고는 앞장서서 내려가기 시작했다. 클레이스도 고함 질러가며 체통을 잃기는 싫었는지, 진이 올라가 있던 바위 아래서 내려오라는 손짓을 했다. 그들은 물줄기를 따라 하류로 내려갔다. 지형이 점점 완만해 지고 여러 갈래로 나뉘는 강 물줄기는 흐르고 흘러 바다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폭포를 따라 가장 큰 강줄기를 따라 오니가라 호수를 향해 걸으며 진은 가슴에 '충만'의 기운이 차 오르는 것을 느꼈다. 너무 맑은 물, 맑은 물소리. 짙푸른 녹음. 간혹 수달처럼 보이는 동물이 후다닥 자리를 피하는 것도 보였고, 화려한 깃털의 크고 작은 새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작은 새들 중 몇 마리가 근처에서 맴돌다가 블루의 어깨에 앉는 것 을 보고 진은 감탄과 부러움이 일었다. '나무인지 아는 구나. 집을 지으려 하지는 않나?' 그런 생각을 했다가 진은 블루의 머리와 어깨에 새집이 올려져 있 는 것을 상상하고 쿡쿡 웃었다. 오니가라 호수는 블루의 머리색처럼 파랗고 맑고 투명했다. 산들바람에 잔잔한 물결이 일어 작은 파도를 만들어 내고 있었고, 주위 짙푸른 녹음에 둘러 쌓여 이 차원에 처음 왔을 때 느꼈던 별 천지 같다는 느낌을 다시 받았다. 나무 숲 저 너머로 오니가라 공국 공작 성의 뾰족한 세모꼴 원형 지붕이 보였다. 그들이 서 있는 호수 반대편에 조그맣게 보이는 사람들이 모여 있 는 것을 보고 진은 경치를 감상하며 호숫가를 따라 그 곳으로 걸어 갔다. "호수가 꽤 큰데, 물이 너무 맑아서 물고기가 없는 걸까? 나룻배도 안 떠 있네." 블루가 머뭇거리며 무언가 말하려고 했지만 기회를 놓쳤다. 진이 걸음을 멈추고 손을 들어 가리키며 와이즈에게 물었기 때문이다. "저거, 뭐 하는 거야?" "글세. 제를 지내는 건가? 난 사람들의 풍습은 잘 모른다고 했잖냐, 진." "제사를 지내는 겁니다, 레이디." 진은 좋았던 기분에 얼음물을 뒤집어 쓴 기분이 되었다. 호숫가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사제 복장을 하고 있는 사람이 끼어 있었고, 작은 나룻배에 흰옷을 입은 소년과 소녀를 태우고 호수 안 쪽으로 밀어 보내고 있었다. 그것뿐이었다면 문제가 없었을 테지만....나룻배는 가라앉고 있었다. "와이즈! 마법으로 어떻게 할 수 없어?" "제를 방해하려고?" 의논하고 있을 시간도 없었고 너무 먼 거리라 5써클 마법으로 제약 이 따르지는 않을까 해서 진은, 정령을 불러 달라는 말을 하려다가 그것도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데, 마법사에게 정령사임을 알리게 하는 일이 될 것 같아서 블루에게 외쳤다. "블루님! 실프와 운디네를 불러서 제게 빌려 주시겠어요?!" "빌려...요?" "불러만 주세요, 어서요!" "....실*프, 운*디*네." [네. 주인님.] [네. 부르셨어요, 주인님?] "이 아가씨의 부탁을...." "운디네! 저 배에 탄 사람들을 건져낼 수 있어요?!" [이미 가라앉았는데요, 아가씨. 저 운디네는 물 위로 띄울 수는 있 습니다.] "그럼. 그렇게 해 주세요!" 운디네는 호수로 사라졌다. "실프! 절 나룻배 쪽으로 데려다 줄 수 있어요?!" [데려다 드릴 수는 있습니다만, 거리가 멀군요. 매개물이 있으면 더 빠르게 오갈 수 있습니다. 아가씨.] "클레이스님. 실례......" 진은 클레이스 앞에 척 나타나 그의 검 집에서 날이 잘 선 검을 재 빨리 빼어내서 가까운 곳에 서 있던, 두 손으로 안아야 할 굵기의 나무를 단숨에 베었다. 나무는 진의 허리 부분의 높이에서 검 날이 관통되었지만 그대로 서 있었고, 진은 반대편으로 넘어지도록 검을 내리쳐 도려내어 홈을 파고 두 손으로 밀었다. 나무는 가지와 잎을 털썩대며 쓰러졌다. [와이즈. 뭐 하는 거냐, 저 여자?] [보면 모르냐, 판자를 만들고 있구만.] "마법사님. 아가씨는 친화력이 굉장히 높으시군요. 별다른 설명도 없이 정령과 의사 소통이 가능하군요." "친화력이 있었나 보지요." "..........." 진은 나무를 베고 난 후 몇 번 검을 휘둘러 판자를 만들어 물에 던 지고 클레이스에게 검을 다시 던졌다. "............." 클레이스는 허락 없이 진이 빼갔던 자신의 검을 받아들어 검 집에 넣고, 그녀의 행동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진은 실프에게 의지해서 서핑 보드를 타는 것처럼 판자 위에 자세 를 잡았고, 실프는 진이 올라간 나무판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진은 쏜살같이 물 위를 미끄러져 갔다. "이미 늦은 것 같은데, 아가씨...." 블루는 진이 운디네에 의해, 가라앉았다가 수면으로 떠 오른 소년 과 소녀를 끄집어 올려 다시 육지 쪽으로 정령의 도움을 받아 다가 가고 있는 것을 보고, 안타까운 마음에 중얼거리며 일행과 그 곳으 로 뛰어갔다. '와이즈! 숨이 멈췄어! 진행을 멈추게 하는 마법 없어?' [동결시키면 돼지. 하지만 숨이 멈췄으면 죽은 건데 뭐 하러?] '남자애 동결시켜!!' 진은 양팔에 축 늘어져 있는 소년과 소녀를 하나씩 끼고 물에서 나 와 땅에 반드시 눕히고 목 뒤에 납작한 돌을 받쳤다. 벌꿀 색 머리카락의 어려 보이는 소녀의 입안을 열어 안에 이 물질 이 있는지 확인하고 코를 쥐어 소녀의 입에 깊게 들이마신 숨을 불 어 넣으며 인공호흡을 시작했다. 진이 죽어버린 소녀의 맥을 살피고 다시 입에 입을 대고 숨을 불어 넣고 하는 것을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모두들 내려다보고 있었다. [쟤 지금 뭐 하는 거냐, 와이즈?] [...............] "아가씨....이미 숨졌어요. 그만하세요...." 사람들이 달려오고 있었고 블루의 목소리를 듣긴 했지만, 진은 계 속 소녀의 가슴을 누르고 숨을 불어넣어 심폐 소생을 시도했다. "진. 그만해라. 죽었......" ".....콜록....." 삼켰던 물을 왈칵 토하며 심장이 멈췄던 소녀가 반응을 하자 진은 그녀를 일으켜 토하게 했다. "회복시켜 주세요, 블루님. 와이즈, 마법 풀어." "............" 진은 소년에게도 인공호흡을 시작했고, 웅성거리며 달려 와 주위에 서서 진이 하는 일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죽었던 소년이 되살아남을 목격해야 했다. "당신들 누구요! 제를 망치는 거요?!" "이봐, 그것 보다! 죽은 사람을 살려내다니! 흑 마녀인가?!!" 소년이 물을 왈칵 뿜어내고 기침을 하며 의식을 찾자 몰려들어 있 던 사람들은 혼란에 빠졌다. 진은 소년을 와이즈에게 회복 마법을 받게 하고, 입술을 훔치고 일 어섰다. 모르면 병이 아니라 죄다!! 진은 너무 화가 났다. 미개척지. 무지한 사람들.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나 그들은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제사를 지내고 있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살리지 못했겠지. 눈앞에서 사람이 사람들 손에 살해되는 꼴을 볼 뻔했다! 진은 이 세계로 돌아온 후 오랫동안 겪지 않아도 되었던 '살인' 충 동을 느꼈다. 소란스러움이 가라앉았다. 사람들은 엘프와 기사와 마법사와 함께 나타나 나무 판자에 의지해 물 위를 날아가서 재물이었던, 마을 소년과 소녀를 건져 살려낸 검 푸른 머리카락의 얼어붙어 버릴 것 같은 짙은 남청색 눈의 소녀를 숨죽여 주시했다. 소녀에게서는 살기가 무럭무럭 솟고 있었다. 그들은 검도 모르고 마법도 모르는 평민들이었지만 그것은 분명 전 사들에게서나 볼 수 있는, 자신들의 생명과 의지에 가장 가혹한 벌 을 주려하는 두려운 기운임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누가 책임자야! 너야?" 진은 사제 복을 걸치고 있던 두 명의 사람 중 나이가 많아 보이는 50대 남자의 목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리 키가 크지 않았던 그는 발이 땅에서 떨어졌다. "켁...아. 아닙니다...전 사제가 아니라....이. 이 옷은 빌린 겁니다. 놓. 놓아 주십시..오..." 목 졸린 목소리로 잔뜩 주눅든 그가 어렵게 말하자 진은 그대로 손 을 뿌렸다. "너도 사제 복을 빌려 입은 거냐?!" "....네? 네. 저. 저흰 모두 평민입니다...." "얘들아!!"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한 아주머니가 눈물이 범벅이 된 얼굴로 사 람들을 헤치고 나와서, 공포와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로 손을 붙잡 고 있던 소년과 소녀에게 다가가 부둥켜안았다. 진은 그들이 울음을 터뜨리는 것을 내려다보다가, 차갑게 경직된 얼굴로 모여 서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 하나 돌아가며 눈을 주 었다. 그 어둡고 깊은, 목이 졸리는 느낌의 살벌한 기세에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숙였다. "설명해! 제대로 된 설명을 하지 못하면 모두 병신으로 만들어 주 겠어. 말해!!" "............" * 오오. 이럴 수가. 이렇게 재미있다니! 클레이스는 생각했다- 진과 와이즈가 수도와 꽤 떨어진 오니가라 공국으로 외출한다고 들 었을 때 단순한 피크닉이면 어떠냐 싶어 호기심과, 진을 꼬여볼 속 셈으로 와이즈의 눈총을 싹 무시하고 그들을 따라 나선 지 얼마 되 지도 않아서. 클레이스는 참으로 보기 힘든 광경. 아니, 처음 보는 광경을 목격해 야 했다. 이미 죽어 버린 인간을 살려냈다. 죽은 생명체를 되살리는 일이야, 흑 마법이나 금지 주문을 이용하 면 가능하기는 했지만 저 인간 여자는 마법이 아닌, 처음 보는 방 법으로 멈췄던 심장을 소생시켰고. 영악하기 그지없으며 말주변이 좋은 경우를 여러 번 보았고, 자신 도 당하고는 했지만. 여태 예의 바르기만 했던 말투조차 화가 났는지 온순함이 싹 날아 가 버린, 협박과 노기 띈 명령 투의 말에 클레이스는 더 없이 흥미 로웠다. 그 건방진 인간 여자는 자신에게 마저 오싹 오싹. 찌릿한 느낌을 주는 귀여운 살기를 발산하기까지 했다. * 나무를.....단 칼에..... 블루는 다시 놀래야했다. 마나를 이용한 것도 아니고, 물론 클레이스님의 검은 아주 좋은 검 이었지만 나무를 베어내는 진의 동작을 보았던 블루는 그녀의 잠재 된 힘이 훨씬 많은 부분 드러나지 않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 다. 그리고 정령과의 친화력이 엘프와 맞먹었다. 아니, 자신 보다 높 은 것 같았다! 그녀는 인간인데.... 그리고 그녀는 멈춘 인간의 심장을 다시 뛰게 만들었다. 수....순리에 어긋난다. 아니, 아닌가? 알 수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순리에 따르지 않은 소생이라면 엘프인 자신이 되살아난 인간 소년 과 소녀에게서 '무언가' 어둔 기운을 느껴야했지만 그들은 지극히 정상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살기는......블루는 심장이 죄어 옴을 느 꼈다. '그러지 말아요, 아가씨. 그러지 말아요.....' 그녀는 제물로 산인간을 쓰는 제사에 격노하고 있었다. 블루는 진의 노여움이 전해져와서 숨이 막히고 눈물이 나올 것 같 았다. * '젠장! 넌 폭탄이다, 진! 네 말대로 폭탄이야! 죽은 사람을 살려내면 어쩌라는 거냐?' 와이즈는 진이 뿌리고 있는 살기에 눌렸는지 가슴 부분을 붙잡고 눈을 글썽이고 있는 엘프와, 특히 저, 검은 눈을 반짝이며 사람들 앞에 서 있는 진을 열심히 쳐다보고 있는 클레이스 때문에 골치가 지끈거리고 있었다. [62] * 오니가라 폭포엔 전설이 있었다. 원래 그 곳은 엘프의 영역이었다고 한다. 꽤 큰 규모의 엘프 마을 이 있었는데, 하류 평지대에 정착하게 된 사람들은 그들과 이웃이 었다. 하지만 그들은 계절이나, 기상에 따라 폭포의 울림이 다르게 들리는 것을 무지로 인해 미신으로 받아들였고, 신의 노여움을 풀 기 위해 엘프를 사냥했다. 잡힌 것은 성년이 되지 않은 나이 어린 두 명의 엘프였고, 인간들 은 그들을 제물로 제사를 지내고 마나를 차단시킨 마법 오라에 묶 어 폭포에서 떨어뜨려 익사시켰다고 한다. 엘프들은 인간들의 흉계와 배신으로 그 곳을 떠났다. 진은 겁에 질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블루가 오니가라 폭포를 굳은 얼굴로 둘러보던 것을 떠올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 "...이. 이곳은 물이 풍부하고 토지가 기름져서 농사가 잘됩니다. 그 래서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어 영지가 되었지요. 그 전설은 아주 오 래 된 이야기입니다. 그 후 엘프가 떠나자 이곳은 인간의 영역이 되었고 네카르도에 속한 땅이라, 이 삼 백년 전부터 공작님의 영지 로 공 국이 되었지요. 이 호수는 아름답기는 하지만 물고기도 잘 잡히지 않고 해서 생활용수로 쓰고 있는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그 후 해년 마다 인신 공양을 했던 거야?" 진은 점점 더 화가 치밀었다. "....아. 아니요. 최근 들어서입니다. 마을에 쥐들이...." "쥐? 제대로 말해." 진은 여전히 화가 가라앉지 않았고, 그들은 모두 잔뜩 주눅이 들어 서 블루를 흘끔대고 더듬거리며 답변했다. "엘프는 떠났고 그 후 몇 번 성년이 되지 않은 소년과 소녀를 제물 로 받쳤다고 들었습니다만, 폭포의 소리는 그대로였고.... 그래서 사 람들은 제를 지내는 것을 그만 두었다고 들었습니다. 잘못 된 미신 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후 이웃나라와의 침략 전쟁이 아니 라면 이곳은 평화로웠지요. 한데 몇 년 전부터 오니가라 호수 주변 을 시작으로 쥐가 들끓기 시작했습니다. 마을까지 옮겨 번지고 농 사를 망치게 되었지요. 그래서...." "신전은? 공작은?" "공..공작님은 농노나 평민들의 탄원에 별거 아니라는 반응을 보이 셔서...이. 이곳은 치료의 신이며 의술의 신인 메디컬아트를 모십니 다. 몇 번인가 돌림병이 돌았지만, 사제 님들 덕에 큰 피해는 없었 지요. 하지만 해가 갈수록 쥐가 너무 많아지고 있고, 얼마 전부터 밤에 호수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래서, 저. 저희들 은...." 정오가 지나고 있었다. 진은 살기를 눌렀다. 호수 안에 무언가 있는 모양이었다. 공작의 성에 속한 고써클 마법사가 증언했고, 정령사도 있어서 물 안을 조사했지만, 정령과의 친화력이 부족했는지 의사소통이 제대 로 되지 않아서 뾰족한 원인을 알려 주지 못했지만. 분명 '무언가' 있었고 사람들은 공포에 질렸다. 제를 지내는 일에 신전의 사제들은 반대했고, 공작은 뒷짐을 지었 다. 평민들은 삶의 터전이 되는 그 곳에 몇 년 사이에 갑자기 들끓 는 쥐 떼의 소동으로 쥐와 전쟁 중이다시피 했고, 견디다 못한 그 들은 옛 전설을 기억해 내었고, 공양의 효력이 다한 것으로 판단하 고 마을에서 제물이 될 소녀를 택해 돈을 모아 그들 부모에게서 사 들여 해 뜨는 시간에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 후 몇 일 동안은 호수에서 들리는 이상한 울림....무언가 부르는 듯 하고, 뭐가 필요하다고 하는 듯한 뚜렷하지 않은 그 '무언가'의 소리가 사라졌다고 한다. "하지만 다시 그제부터 그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밤만이 아 니라, 낮에 도요. 저. 저흰 제물이 한 명이어서 그런 줄 알고.....공작 님은 이 큰 호수의 물을 모두 퍼 낼 수도 없고, 기사 분들도 방법 을 몰라서....신전 측에서는 신성력으로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하는 통에.... 저 남매를 다시 공양하던 중이었습니다." "지금은 낮인데?" "예에....아이들이 알고 도망을 가는 바람에...." 진은 화가 치미는 것을 꾹꾹 눌러 참고 싸늘하게 명령했다. "가서, 공작을 불러오도록 해. 사제들도 불러! 나오지 않으면 직접 찾아가서 목을 비틀어 버리겠다고 해! 내 이름은 '진'이다." 그들은 묶인 사슬이 풀어졌다는 듯이 바삐 자리에서 벗어나 흩어져 달리기 시작했고, 그중 나중에 자리를 뜬 몇 명에게 클레이스가 덧 붙였다. "이봐. 오니가라의 공작에게 수도의 클레이스 클레본도 함께 있다 고 전해라." ".....네. 기사님." 제물이 될 뻔했던 남매를 부둥켜안고 있던 아주머니는 계속 훌쩍이 고 있었다. "그만 울어요. 듣기 싫으니까." "....딸국...예에...죄. 죄송합니다." 진의 말에 아주머니는, 정체 불명의 소녀....흑 마녀가 엘프와 함께 다닐리 없으니, 신분이나 직업도 무엇인지 알 수 없고. 하지만 자 신의 아이를 구해준 은인인데 감사의 말도 꺼내지 못하고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진은 근처의 바위에 걸터앉아서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 살기를 지우 며 블루에게 물었다. "블루님. 뭔가 알고 계신 것 있으세요? 이 곳 전설과 관련 된 일인 것 같은데." ".....천년 정도 전의 일입니다, 아가씨. 저희 샤 마을과 다른 이름의 엘프 마을이 이곳에 있었지요. 끔찍한 일로 엘프들 사이에 간혹 오 르내리는 이야기라 전에 한 번 들러 보았습니다. 제가 태어나기 전 의 일이고, 그 일을 아는 엘프도 모두 윤회로 돌아갔기 때문에 정 확히 알지는 못합니다.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만 알지요." 진은 와이즈에게 고개를 돌리고 올려다보았다. "와이즈. 호수 안에 뭐가 있는지 알 수 없어?" 사람들의 이야기를 함께 듣고 있던 와이즈는 진의 날선 명령에 허 겁지겁 마을 사람들이 뛰어가 버리자, 호기심에 호수 안을 투시해 보고 있었지만, 너무 넓어서 뒤지는 데 시간이 걸리고 있었다. "기다려라, 진. 확인 중이니까." "............." 블루는 도우려는 생각인지. 호숫가에 멀뚱히 서 있는 것처럼 보이 는 와이즈의 옆으로 가서 운디네에게 안을 조사해 달라고 하고 마 법을 시전 했다. "모든 것을 비추는 마법의 거울이여. 진실을 보여 주십시오. 제가 찾는 것은 선의의 반대이며 순리를 벗어난 존재 일 수 있습니다. 수. 중. 탐. 사." "뭔가 있긴 하네." 와이즈의 중얼거림에 진은 속말로 물었다. '뭔데?' [뱀이다.] '...........' 운디네가 돌아왔다. [주인님. 주인님과 비슷한 기운을 가진 생물이 있는 듯 합니다. 움 직이지 않고 있어서 무엇인지 잘 모르겠어요.] "고마워요. 운디네. 어디쯤인가요?" 정령은 호수 중앙을 가리켰다. 블루는 정령을 돌려보내고, 진과 클레이스에게 돌아섰다. "제 마법의 방향이 잘못 되었나 봅니다. 탐사되지 않는 것을 보면 악의를 가진 생물은 아닌 듯 합니다." 진은 이곳이 동화의 나라, 판타지의 나라임을 상기하고 턱을 긁적 였다. '분명히......' "블루님. 엘프의 육신은 인간과 다른가요?" "......엘프의 피와 살은 인간과 다르지요. 드래곤 하트에 비할 봐 못 되지만, 영약으로 취급되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에게 사냥 당하는 경우도 있었지요." "..........." 천년 전 엘프의 공양. 물고기가 잡히지 않는 호수와 강. 갑자기 늘 어난 쥐들. 호수 안의 뱀...... 진은 한숨을 쉬었다. 숙였던 얼굴을 들고일어나 블루에게 고개를 숙이고 사과를 했다. "죄송합니다. 블루님. 인간들의 잘못이군요. 선조 엘프의 죽음이 부 른 결과 같네요. 엘프에게 했던 이곳 사람들의 무지 어리고 잔인한 잘못을 대신 사과 드립니다." 블루는 당황했다. 진은 진심으로 사과하고 있었다. 그녀의 잘못이 아닌, 벌써 천년도 전의 그 자신도 말로만 들었던 타인의 죄에 대신 고개 숙이고 있었 다. ".....아닙니다, 아가씨. 아가씨의 잘못이 아닌걸요." 블루는 엉겁결에 함께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재미있어, 와이즈.] [시끄러.] 진은 호숫가에 서서 파란 수면을 바라보았다. "와이즈. 불러낼 수 없어?" "..........." [사람들이 오기 전에 용언을 써 주마. 뒷일은 알아서 해라.] '고마워, 와이즈. 강압적으로 말고 유도만 해 줘. 악의는 없다지만 확인해 봐야하니까.' [...........] 와이즈는 그들의 대화와 하는 양을 지켜보며 땅바닥에 그대로 주저 앉아 있던 남매와 그들의 어머니에게 슬립 마법을 걸었다. 그리고 진의 옆자리에 서서 드래곤의 기운을 풀어 호수 안으로 퍼 뜨려 넣었다. [난 골드드래곤 투비와이즈다. 호수의 주인은 부름을 받으라.] 진은 와이즈의 기운이 사방으로 퍼지지 않고 호수 안으로 가라앉고 있음을 느꼈다. 블루는 드래곤의 기운에 압박감을 느끼는지 양손을 엇갈려 겹쳐 팔을 감쌌다. [야. 너 그렇게 막 용언마법 써도 되냐?] [다 아는데 뭔 상관이냐? 참견 마. 너도 기사인 척 하며 내 방에 조 잡한 마법 트랩들을 잔뜩 깔았잖아!] '짜식. 채갈까 봐서 불안했나 보지? 큭큭....' 호수의 수면에 파장이 생겼다. 그리고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진과 일행이 있는 쪽으 로 그 무언가가 다가왔다. 그리고 몇 미터 앞 수심이 낮은 곳에서 불쑥 '그것'이 머리를 쳐들었다. [누구야, 날 부른 게.... 너니?] 진은 등줄기에 소름이 쫙 끼쳤다. 하늘색 거대한 물뱀 대가리가 수면 위로 솟아 혀를 날름거리며, 인 간의 언어와 다른. 하지만 정령의 언어처럼 이해가 가는 '언어'로 말을 했다. "아니, 저 버릇없는 놈 보게...." 와이즈가 자신을 향해 반말을 하고 있는 돌연변이 생물에게 어이가 없다는 투로 말을 했다. '누구누구랑 닮았군...' 와이즈는 진을 겨우 찾게 되었을 때 그녀가 내 뱉기 시작했던, 그 지없이 버릇없던 말투를 떠올렸다. "너, 예의도 모르냐? 어디서 새파랗게 어린 물뱀 한 마리가 상대가 누군 지도 못 알아보고 겁도 없이 구는 거냐?!" [....나보다 나이가 많아? 그럼 형이야?] 클레이스가 낄낄거렸다. 와이즈는 순진한 아이 말투의 거대 뱀의 말에 비틀거리는 듯 하다 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하늘이 아름답고 땅이 너그러운 것은 신이 주신 사랑입니다. 가르 디아엘 저희 신의 축복으로 숲의 속삭임과 생명력을 그대들과 나누 고자 합니다. 저는 샤 마을의 라하르네 블루엘 샤라고 합니다." [......그거 인사하는 거야? 아니면 날 놀리는 거야?] "......인사입니다." 블루에게 옆으로 찢어진 눈을 돌리며 혀를 날름거리는, 머리 지름 이 성인 남자의 키와 대조해서 두 배가 넘는 뱀 대가리를 보며 진 은 본능적으로 싫은 느낌이 드는 '뱀'이라는 인식에서 벗어나야 함 을 깨달았다. '그것'은 악의가 없는 듯 했다. 아나콘다. 보아 구렁이. 동양의 이무기를 연상시키는 그 물뱀은 생 김새는 영 아니었지만, 비늘의 빛깔은 고운 하늘색이었다. "이봐, 안녕? 난 진이라고 해. 내가 불렀어. 이름이 뭐니?" [.....이름?] "이름 없어?" [없는데.....] 진은 그 거대 뱀이 이지는 가지고 있지만 '아이' 수준임을 알 수 있 었다. 와이즈에게 했던 첫 마디부터, 그 후 들은 몇 마디의 말을 참 고로 진은, 그 괴물인지 영물인지에게 인간 아이에게 하듯 다정하 고 타이르는 투의 말로 대화를 시도했다. "내 이름은 진이야. 날 대신해서 널 부른 저 마법사는 와이즈라고 하고 검은머리의 기사 분은 클레이스. 여기 이 분은 엘프 블루님이 야. 모두 이름이 있어. 이름이 없으면 부를 수가 없잖니. 내가 이름 을 지어 줄까?" [이름.....지어 줄 거야?] 진은 화들짝 놀라고 싶었다. 조금 떨어져 있던 그 뱀 대가리가 쓰-윽 고개를 내리고 진의 코앞 으로 머리를 숙였기 때문이다. "그....래. '보아'라고 부를게. 그래도 될까?" [.....보아.....] 지켜보고 있던 클레이스가 와이즈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뭐야?] [재미있어서, 와이즈.] [혼자 재미 있어해라! 난 왜 건드려?] 구렁이는 머리를 약간 갸웃거리는 듯 하더니 맹렬히 혀를 날름거렸 다. [보아. 보아! 내 이름이야?] "그래. 그렇게 부를 게, 보아. 얘기를 나누고 싶어서 불렀어. 친구하 는 거지?" [......엄마가 아니야?] "어....엄마?" 진은 진땀이 났다. 와이즈까지 낄낄대기 시작했다. 클레이스는 속으로 웃던 것을 누르지 못하고 입을 주먹으로 누르며 눌린 웃음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블루는 안절부절 했다. 일그러진 웃음을 지으며 그 배-암에게 진은 대답했다. "엄마가 갖고 싶었니?" [.....난 엄마가 없어. 아무도 없어. 나 혼자야.] "그럼 요즘 호수 안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던 것이 친구를 찾는 네 목소리였니, 보아?" [.....응. 그런데 몇 일전 먹이만 주고 아무도 안 왔어. 넌 내 목소리 를 알아듣네? 저것들을 먹이로 가져온 거야?......필요 없는데....] 진은 마을 아주머니와 그녀의 아이들이 누워 있는 쪽으로 머리를 향하는 구렁이의 말에 진상을 확신했다. 진은 찡그렸던 얼굴을 풀고 삐-익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먹이로 가져 온 것 아니야, 보아. 좋아! 기분이다. 말 잘 듣는 착한 아이가 된다면 내가 엄마가 되어 줄게." [.....되어 줄 거야? 같이 놀아 줄 거야?] "그래. 착하게 굴면." [난 착해! 나쁜 짓 안 했어.] "그래 보아. 두 번째, 내 아이로 받아줄게." [...........] 보아는 그 가는 눈이 더 가늘어져서 언뜻 잘못 보면 살벌해 보이기 도 했지만, 웃음소리로 느껴지는 공명 음을 내었다. 블루의 노래가 나무에 대기에 살며시 산뜻하게 스며들던 것처럼. 진이 서 있는 호숫가에, 그 쉭- 쉭- 하는 바람 샌 휘파람 소리 같 은 것이 한동안 울렸다. 블루는 당황했다. 돌연변이...아무래도 천년 전 자신의 동족의 육신 을 먹고 비정상적으로 긴 수명과 몸체를 키우고 이지를 갖게 된 듯 한 생물에게 진은 호의 어린....아니, 악의가 없는 생물이니 괜찮을 지도....그래도...인간이...16세도 안 된 소녀가 천살 먹은 물뱀의 엄마 가 돼...? "두 번째?" 클레이스는 웃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피식거리며 웃는 중에도 진의 말을 잘 알아들은 와이즈가 되물었지 만 진은 날름거리는 보아의 갈라진 혓바닥이 얼굴에 닿는 것을 피 하느라고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진은, 소풍을 나갔다가 양자를 입양했다. [63] * "와이즈. 보아도 천년을 살았는데, 인간의 모습으로 변할 수는 없을 까?" "......마나는 충분한 것 같으니, 가능하겠지. 바보만 아니라면." 진은 그 큰 대가리를 자꾸 등에 부비고 있는(소름이 쫙쫙 끼쳤다.) 보아에게 권했다. "보아야. 너무 크니까, 작게 변신해 볼래? 마법사님이 도와주실 거 야." [난 작게 변할 수 있어. 하지만....사람 모습으로는 안 해 봤는데....] "와이즈. 가르쳐 줘라. 너무 커서 부담스러워." ".......내가 뭐 하러?" "와이즈. 애잖아. 좀 친절해 봐라." "별걸 다 시키네! 내 애냐?!" 하지만 결국 와이즈는 진의 집요해진 요청에 투덜거리며 마나 유동 과 사용법에 대한 조언을 보아에게 해주기 시작했다. 보아는 와이즈의 도움을 받아 인간의 모습으로 폴리모프했다. 보아는 천년을 산 영물답게 와이즈의 말을 쉽게 알아들었고, 하늘 색 단발머리에 하늘색의 옆으로 찢어진 실눈을 하고 얇은 입술을 가진, 대 여섯 살 정도의 키를 한 인간아이의 모습이 되었다. 진이 자신의 가죽 가방에서 평상복 한 벌을 꺼내 입혀주자 보아는 펄쩍 펄쩍 뛰며 좋아라 했고, 클레이스는 데굴데굴 구르지만 않았 지. 거의 그런 모양으로 계속 눌린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혼자 할 수 있어. 가르쳐 줬으니까, 이제 혼자 진 엄마처럼 변할 수 있어. 저 형 좋은 사람.....사람이 아닌데? 저 검은머리 아저씨도 그렇고." "그래. 사람이 아니지만 그도 너와 같은 계열이니까 완전 타 종족 은 아닌 것 같다, 보아. 하지만 비밀로 해야 해? 알았지?" "응. 진 엄마." 클레이스는 드디어 나무를 붙잡고 껄껄 웃기 시작했고, 와이즈는 버르장머리 없는 돌연변이에게 피식피식 웃던 웃음을 멈추고 폴리 모프하는 것을 도와 주었다가 진의 말에 머리가 땡. 울리는 기분이 되었다. "내가....그 물뱀과 같은 계열이라 고오?!" "어? 와이즈. 드래곤도 파충류 아니야? 그렇게 보이던데. 색깔은 달 라도. 그럼 동족이지 뭘 그래?" 와이즈는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기분이 되었고, 블루조차 얼굴을 돌리고 웃음을 참아야했다. '이거. 뒤죽박죽이 되었네. 드래곤이라는 것을 언급 안 할 수가 없 잖아. 음.' [.............] 진은 키가 작아 자신의 허리 끈 없는 평상복을 발목까지 오게 입은 보아를 무릎에 앉히고, '저 형과 저 형은 괴팍하니까 신경 건드리면 안 돼, 보아. 큰일난다?' 하고 말했고 보아는 말 잘 듣는 애처럼 고 개를 끄덕였다. 와이즈는 삐죽였고 클레이스는 자지러졌다. * 공작의 성과는 거리가 꽤 되어 보였고. 원래 사제나 귀족이나 엉덩이 무거운 것은 다반사였으니, 자리를 떠났던 사람들이 돌아오는 데 시간이 걸릴 것 같아서 진은 먼저 보 아에게 그동안의 사정을 물어 듣게 되었다. 보아는 폭포와 호수를 오가며 천년동안 먹고 자고 먹고 자고 했다 고 한다. 몸집이 커져서 강을 타고 폭포로 가기 힘들게 되자, 꽤 오 래 전에 호수에 정착했고. 몇 년 전에 갑자기 '언어'를 말 할 수 있 게 되었다고 한다. 간혹 수면 위로 올라오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개 달이 없는 한밤중의 일이라 사람들 눈에 띄지도 않았고, 충분히 눈 에 뜨일 만 할 때에도 움직이지 않고 있어서 인간들은 그를 알아보 지 못했다고 한다. "난 혼자서 말하는 거 배웠다, 엄마? 똑똑하지?" "그래, 보아.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었는데 나쁜 짓도 안 하고 참 착하구나." 보아는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진의 손길이 기분이 좋은지 펜으로 한 줄씩 곡선을 그린 듯한 눈을 했다. "그럼. 호수에서 물고기만 잡아먹었니?" "응. 많이 먹고 한참 자고 나면 또 물고기가 많아지고 했어. 그런데 말을 할 수 있게 된 후로는 배가 안고파서 먹지 않았는데 잠도 안 오고 심심해서....혼자 중얼거리고는 했어." "쥐들이 모여들던?" "응. 아주 작은 동물들이 찍찍거리며 집 주위에 모여들어서 쫓아버 리고는 했어. 그런데 얼마 전에 인간 여자가 죽어서 가라앉았어." "그거 먹었니?" "응. 그거 먹고 몇 일 잤어..... 먹으면 안 되었던 거야?" "아니, 보아. 죽은 것은 먹어도 돼. 하지만 엄마와 같은 종족이니까 앞으로는 함부로 해치거나 먹으면 안 돼?" "응." "그럼 지금은 호수 안에 물고기가 많겠네? 그 동안 안 먹었으면." "응. 지금은 많아졌어." 클레이스는 조금 떨어진 자리의 바위에 걸터앉아 연실 웃음을 흘리 고 있었고, 와이즈는 호수 수면을 향해 눈을 껌벅여 보이고 있었다. 블루는 당혹 감에서 벗어나 하프를 만지작거리며 진과 보아의 옆에 서서 그들의 대화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보아. 쥐들을 불러들일 수 있어?" "그럼. 뭐든 작은 먹이가 되는 동물은 부를 수 있는 걸? 에헴- 옛 날부터 할 수는 있었지만 호수 안의 물고기만으로도 충분했거든." "정말 착하다, 보아. 너무 이쁘다.....그런데, 지금은 먹이를 먹으면 안 되는 거야?" "아니? 먹으면 좋지. 하지만 많이 먹으면 잠이 오는 걸." "보아. 엄마가 되었는데, 보아에게 뭘 좀 먹게 해 주고 싶어. 그리 고 쥐들이 많아서 엄마와 같은 종족의 사람들이 곤란해하고 있거 든? 불러서 먹어 줄래?" "응. 먹을게. 그런데 쥐들이 너무 많아져서 다 먹지는 못할텐데..." "괜찮아. 과식하면 해롭지. 먹을 수 있을 만큼만 먹어, 보아." 클레이스가 계속 낄낄대었다. "그럼 엄마는 내가 자고 있을 때 옆에 있어 줄 거야?" "보아. 많이 먹게 되면 얼마나 자게 되니?" 보아는 머리를 갸웃거리다 대답했다. "말할 수 있게 되기 전엔 배부르게 먹으면 몇 년, 몇 십 년씩 잤어. 하지만 그 작은 죽은 사람을 먹었을 때는 한 10일 쯤 잤어. 배가 부를 정도는 아니었거든? 이 근처의 쥐를 먹을 만큼 먹으면 더 오 래 자야할 거야. 하지만 예전처럼 많이는 자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음. 한 3달쯤? 4달쯤? 잘 모르겠는데....." 진은 맑은 하늘 색 보아의 머리를 부벼 주었다. 눈이 크고 둥글지는 않았고 입술도 얇은 편에 좀....음험해 보이는 인상이었지만, 보아는 착했다. 진은 양자가 된 천년 묵은 물뱀이 귀 엽게 느껴졌다. "보아. 사실은 엄마는 여행 중이거든? 그래서 지금 보아를 데려갈 까 했는데, 보아가 잠을 그렇게 오래 잔다면, 3~4달 후에 엄마의 나 라로 돌아가서 보아가 있을 만한 곳을 알아보고 데리러 올게. 그동 안 먹이를 먹고 잠을 자면서 기다려 주겠니?" 보아는 잠깐 생각하는 듯 하더니, 무릎에 앉아 있던 자세에서 진의 허리를 붙잡았다. "진 엄마. 난 물을 벗어나서는 오래 못 버텨. 하지만 조금 큰 웅덩 이만 있으면 물을 불릴 수는 있을 거야. 내 집을 마련하면 꼭 불러 줄 거지?" "그래, 보아. 꼭 부를게. 어.....불러? 데리러 와야하는 거 아니고?" 보아는 그 가는 실눈을 더 가늘게 하고 웃더니 귀 뒤를 만지작거리 다가 진에게 하늘 색 원형 모양의 세모꼴 비늘 한 장을 내밀었다. "이거 먹어, 엄마. 그럼 내가 엄마 있는 곳을 알 수 있어. 내 이름 을 여러 번 부르면 금방 어디 있는 지 알고 찾아 갈 수 있어. 자고 있을 때에도 들을 수 있어." ".......콜록." 꽤 크기가 커서 목에 걸릴 것 같았지만 진은 그것을 집어 들었다. "괜찮아. 삼키면 천천히 녹을 거야. 엄마는 약한 것 같지만....아닌 것도 같고. 삼키기만 하면 조금씩 녹아 들 거야. 제일 연한 비늘이 거든." 진은 양자가 된 아들네미의 기대를 묵살할 수가 없어서 물뱀의 비 늘을 입안에 넣었다. ".....저기. 아가씨. 괜찮으세요?" 삼키지 못하고 납작한 플라스틱 조각의 촉감이 드는 그것을 입안에 머금고 있으니까 블루가 걱정스러운 듯이 물어왔고, 클레이스는 아 예 몸을 돌리고 어깨를 들썩였다. 진은 블루에게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양 볼이 조금 튀어나와서. "보아....씨버도 되는 거니?" "응." 입안이 가득 차서 발음이 이상하게 나온 진의 말에 보아는 흔쾌히 대답해 주었고 진은 으드득거리며 물뱀의 비늘을 깨물어 씹기 시작 했다. 너무 단단해서 잇몸이 아파 왔다. 와이즈가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웃음인지 뭔지 모를 묘한 표정이 되 었고, 클레이스는 웃음을 멈추고 우득. 오독. 우득. 하는 진의 씹는 소리에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래? 좀 단단하긴 하지만 씹히기는 하구만." ".....네가 인간이냐, 진. 천년이면 성체를 앞둔 드래곤의 비늘과 강도 가 비슷할 지도 모르는데 그걸 씹냐?" "그런가....? 핫. 핫. 이가 워낙 튼튼하다 보니 말이야. 뭐 어때, 제일 연한 거래잖아." "............" [무서운 여자네. 와이즈, 잡아먹힐지도 모르겠다. 조심해라. 큭큭 큭...] '썩을 놈. 지는 해당이 안 되는 줄 아나? 진의 말에 비춰보면 네 놈 도 파. 충. 류. 다, 자식아. 웃음이 나 오냐?' * 지면에서 말발굽의 어지러운 진동이 전해져 왔다. 진은 보아의 머리를 부벼 주고, 이마에 키스해 주었다. 보아는 진이 입맞춰 준 이마를 손바닥으로 쓸며 헤헤. 거리며 웃었다. "보아. 물로 들어가서 기다릴래? 내가 말하면 쥐들을 부르고, 먹으 라고 하면 그때 먹어 줘." "응. 진 엄마. 나중에 꼭 불러 줄 거지?" "약속할게. 보아." 보아는 다시 한번 진에게 볼에 입맞춤을 받고 깡충 깡충 뛰며 물로 들어가 하늘 색 기운에 휩싸였다가 원래의 모습이 되더니 수면 위 를 헤엄쳐갔다. 호수 물이 보아의 S 자형 움직임에 파도를 만들어, 사라지는 길고 긴 물뱀의 모습을 보였다 가렸다 했다. "길다....." "뱀이니까 길지." "푸웃--" 진은 대꾸하는 와이즈의 말을 흘려 듣고 호. 탕. 하게 한번 웃어 보 였다. "파핫핫핫.....엄마가 되다니! '진'의 동생이 생겼다." "뭔 소리냐?" "저쪽....내 '꿈' 속에서 한 갓난아이에게 내 이름을 물려주었었거든. 부모의 부탁으로 그 애의 대모가 되었었어. 하지만...음. 그러고 보 니 그 앨 한 번도 안아주질 못했어... 미안하다, 작은 진! 대신 보아 를 많이 이뻐 해 줄게." "............" 기사단과....사제로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호수 가의 좁은 오솔길 을 따라 나타나고 있었다. "와이즈. 저들 잠 깨워." 진은 다가오는 그들을 보며 전투(?) 자세에 돌입했다. "한 몫 단단히 챙겨주마. 아주, 꽉꽉 쥐어 짜 주겠어!" ".............." * 오니가라의 알렉카스 폰트 오니가라 공작은 성의 집사를 통해 들 은, 소작농과 평민들이 찾아와 흑 마녀가 어쩌네. 엘프가 어쩌네. 죽은 사람을 살려냈네 어쩌네. 하는 헛소리를 무시하려 했다가, 수 도에서 소드 마스터로 이름 있는 기사 클레이스 클레본이 함께 있 다는 소리에 자초지종을 직접 다시 듣게 되었다. 그는 서둘러 호위기사와 보유하고 있던 공 국의 최고 실력의 기사 들을 골라 집합시켰다. 메디컬아트의 사제들이 흑 마녀일지도 모를 여자가 죽은 사람을 살 려냈다는 소리에 공작의 성으로 달려왔고, 공작은 혼란에 빠진 사 제들과 성의 마법사들을 함께 데리고 오니가라 호수로 중무장을 하 고 달려갔다. 갑자기 성안이 들쑤셔진 탓에 소란스러운 와중. 공작의 공녀와 공자가 돌아가는 상황을 전해 듣고, 바삐 자신들의 애마에 올라타 뒤쫓아가는 것을 성의 주민들은 목격했고, 그들도 이웃이 준 소식에 호기심이 더해져서 따라나서기 시작했다. * 진은 제물이었던 소년과 소녀와 그들의 어머니 근처 바위에 걸터 앉아 있었다. 블루와 와이즈는 진의 곁에 서 있었고, 클레이스는 열 을 지어 두두두하는 소리로 말을 달려 다가 온 기사단과, 호위를 받고 나타난 공작의 앞에 섰다. "안녕하십니까. 오니가라 공작 각하. 클레이스 클레본입니다." ".....오랫만에 뵙는 구려. 클레이스 경. 작년 국왕폐하의 탄생기념일 에 훌륭한 검술 시범을 보여 주어서 고마웠소." 진은 클레이스와 비슷하지만 두껍게 보이는 갑옷차림에 눈과 코와 입만을 드러낸, 투구를 쓴 40대로 보이는 중년 기사가 말에서 내리 는 것을 지켜보았다. 다른 기사들과 함께 말을 타고 온 사제들도 마법사들과 정령사와 함께 내려섰다. 사제들의 흰색 옷의 허리 두르개에는 은실로 '메디컬아트'라는 글씨 가 새겨져 있었고 마법사들의 써클을 증명하는 무늬는 금색으로 수 놓아져 있었다. 공작은 인사를 해 오지 않는 마법사와 엘프....와 검푸른 머리의 여 행자 복장의 소녀를 흘끗거렸다. ".....클레이스 경. 보고는 받았지만 이해 할 수가 없소. 저들은 누구 며 이곳에서 일어났던 일을 설명해 주시오." 클레이스는 자신의 차례가 된 것에 속으로 신이 날 지경이었지만, 우아하고 절도 있는 자세를 잃지 않고 대답했다. "저흰 수도에서 이곳 폭포를 구경하러 제 동료 엘프의 도움으로 피 크닉을 왔습니다, 공작님. 호수에서 마을 주민들이 사제 복을 빌려 입고 산인간을 제물로 바치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지요. 제가 호위 중이던 레이디께선 힘과 지혜가 뛰어나 그들을 구할 수 있었습니 다. 그리고 레이디께선 제를 지내던 사람들에게서 사정을 듣고 이 곳의 전설과 다시 시작 된 인신공양에 화를 내시게 되었지요. 그래 서 마을 주민들을 통해 기별을 드린 겁니다." "......이해 할 수 없소. 클레이스경." 공작은 중얼거렸고 메디컬아트 신전의 최고위 사제들로 보이는, 그 들 중 사제 장으로 보이는 나이 든 할아버지가 곁으로 와서 목청을 높였다. "그렇소, 기사! 이해할 수 없소. 죽은 자를 살려냈다고 들었소! 그것 은 카르마의 반대고 순리에 반대되오. 흑 마법을 쓴다면 흑 마녀인 데 버젓이 대낮에 우리 오니가라 주변을 맴돌고 있다니, 묵과할 수 없소!" "사제님. 저 소녀와 소년이 흑 마법에 소생된 것으로 보입니까? 의 심스러우시면 직접 확인해 보시지요." 클레이스의 말에 그들은, 확인 절차는 분명히 거쳐야 할 문제였고 또한 호기심도 그 만큼 강해서 우르르 진의 옆쪽에 주저앉아 있는 소년과 소녀에게 다가가, 각자 신성력과 마법과 정령을 불러 그들 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공작은 기다렸다. "....마기가 느껴지지 않는 군요." "제 마법으로도 의심스러운 점은 탐지되지 않습니다." "제 마법으로도 그렇습니다...." "제 물의 정령의 말로도 사악한 기운은 없다고 하는 데요." "............." "그럼.....어떻게? 숨이 끊긴 것이 아니었을까요?" "경. 숨이 완전히 멈췄던 것이 아니었나요?" "분명히 심장도 멈추고 숨이 끊겼었습니다. 사제분들. 마법사님들. 정령사님. 제가 호위하는 레이디께 진실을 물으시지요. 레이디께서 하신 일이니까요." 모두 진을 쳐다보았지만 진은 그들을 향해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뒤늦게 따라 온, 갓 성년을 넘긴 듯한 가벼운 가죽 보호대를 한 차 림의 소년과 누나로 보이는 화려한 보석으로 치장한 노란 드레스 차림의 아가씨가 백마를 타고 공작의 한쪽 옆에 나란히 말을 세웠 다. "뭐 하러 왔느냐, 공녀. 공자." "아버님. 클레이스님이 오셨다고 들었어요. 인사를 드리고 싶어서..." "아버님. 저도 성년인걸요. 전투가 있을지 모른다고 해서, 수련에 도움이 되고자 따라 왔습니다." 그들은 말에서 내려 자신의 아버지 곁에 섰다. 둘 다 수려한 외모에 금발머리의 귀티가 흐르는 귀족자제였다. 아니 공주와 공자였다. 그들의 신분을 알게 되자 진의 눈이 한 순 간 번뜩였다. 공녀는 17세 정도로 보였고, 클레이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 었다. 공자는 진과 비슷한 나이에 곱게 컸는지 검을 차고는 있었지 만 애송이....라는 느낌을 팍팍 주고 있었다. 그는 아름다운 외모의 일행과 함께 있는 진을 발견하고 눈을 조금 크게 떴다. 진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공작을 향해 한 손을 배에 대고 허리를 굽 혔는데 머리는 숙이지 않았다. 그 인사는 모두에게 그녀가 공작을 조롱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게 했다. "전 드리얀의 진 폰 리툰이라고 합니다. 오니가라 공작님. 제 일행 마법사는 와이즈 폰 리툰이며 그리고 이곳에서 천년 전에 사. 냥. 을 당해 제. 물. 이 되었던 후손 엘프 블루님이십니다." 블루는 미리 소개 인사를 생략해 달라는 진의 부탁에 가만 서 있다 가 그녀가 자신을 소개하는 말에 무슨 표정을 지어야할지 곤란해 하는 얼굴이 되었다. "난 오니가라 공국의 알렉카스 폰트 오니가라요, 영애. 내 목을 비 틀겠다고 했던 걸로 아는데, 이유를 듣고 싶소. 엘프 분의 복수를 하러 왔다면 잘못 짚었소. 그때 내 선조는 이곳에 발조차 딛지 않 았으니까." 진은 건방지게 보이도록 그의 앞에서 팔짱을 꼈다. "엘프의 복수를 하러 온 것이 아니며, 전 우연히 이곳을 택해 소풍 을 나왔을 뿐입니다. 공작나리. 하지만 전 안타깝게도 이곳에서 벌 어지고 있는 일에, 오니가라의 최고 지배자로 공작 나리께서 책임 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으로 판단했고, 감히 지적해 드리기 위 해서였지요." "언행을 삼가시오, 영애!" 호위 기사가 외쳤지만 진은 무시하고 계속 말을 했다. "공작님은 이곳의 최고 권력자이며 최고의 힘을 가진 분이지요. 공 작님을 믿고 있는 공작님의 수족들은 기사도 마법사도 아닙니다. 그걸 아십니까?" "무슨 소리요. 기사가 내 수족이 아니라면 누가 내 수족이요, 영애." "공작님의 보물 창고를 불려 주고, 그걸 지키는 기사들의 월급을 주고, 성의 식료품 저장실과 포도주 저장실을 채워주는, 기사나 마 법사 이전의 수족이라 할 수 있는 존재는 다른 누구도 아닌 공작님 의 소작농과 노예와 평민들입니다. 그걸 모르셨단 말입니까?" "......알고 있소. 그래서? 내게 그것을 지적해야할 사람은 네카르도 의 국왕뿐이오, 영애." 진은 그런 소리를 타국의 후작 가의 새파랗게 어린 영애에게 들을 이유가 없다는 소리로 받아들였다. "천상천하. 공작님은 네카르도의 국왕폐하의 명만 받드는 기. 사. 분이신가 보군요. 그렇다면 제게 목이 비틀리기만 할 뿐 아니라 다 리도 분질러 져야합니다." "무엄하오!!" "공작 각하는 오니가라 공국의 공왕이시오! 예를 갖추시오, 영애!!" 진은 기사들의 반발을 다시 무시했다. "기사의 맹세에는 주군만 모시는 것이 아니라 약자를 보호하겠다는 맹세의 말이 들어가 있습니다. 공작님은 세상을 단 한. 사. 람의 주 군만을 위해 사시나보군요. 그렇다면 그분 곁에 가셔서 호위를 하 시지요. 이. 곳. 에서 하층민들이 피 땀 흘려 일해 바치는 곡식과 돈을 받아 사리사욕을 챙기시면 안되지요! 그것은 당연히 공작님의 것이라고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요. 그들 없이 공작님은 가족 과 부하들을 먹여 살릴 수 있습니까?" 말을 타지 않고 다리로 직접 뛰어 따라오기 시작했던 공작의 영지 민들이 계속 모여들고 있었고 진의 일행과 공작의 일행을 에워싸고 있었다. 진은 멀리 잘 들릴 수 있게 성량을 높여 큰 소리로 또박또 박 말을 했다. "공작님이 가지신 모든 것은 그들의 피와 땀이니 공작님의 것이 아 니라 그들의 것입니다. 그것을 받아먹고 사신다면 그에 따른 의무 와 책임을 져야합니다. 그들을 보호하고 그들에게 일한 만큼의 대 우를 베푸는 것이 인지상정이며 가장 기본적인 카르마(업보)의 율 법입니다. 공작님." "난 그들을 보호하고 있소. 난 농노를 쥐어짜는 귀족이 아니요. 영 애!" 공작은 점점 화가 났다. 이 무례하고 겁 없는 타국의 어린 영애는 점점 말이 심해지고 있었다. 뭘 믿고? 클레이스가 소드 마스터라고 해도 이 많은 기사들을 한꺼번에 상대하는 것은 무리다. 어쩌려고? 마법사? 그보다 더 나을 고 써클 마법사가 적어도 세명. 엘프? 엘 프가 전투에 끼게 된다고 해도 차이가 큰 전력이다. 혹시...이 소녀 는 인간의 피가 진한 하프 엘프인가? 그렇다고 해도 승산 없는 시 비이다! "아니요. 공작님은 보호해야 할 그들을 무시했습니다. 그들의 가장 기본이 되는 생존권을 지켜주지 않았습니다. 왜 그들이 푼 돈 모아 이웃의 아이들을 사서 제물로 쓰는 것을 막지 않았습니까! 인간이 인간을 제물로 쓰는 것은 가장 어리석고 가장 크고 가장 악한 죄입 니다. 왜 공작님의 주민들이 죄를 짓게 그냥 두셨지요?" "내가 영애에게 그런 말을 들어야 할 이유가 없소! 그들은 어리석 어 소용없는 일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제멋대로 벌인 일이 요. 그런 것까지 어떻게 내가 막는 단 말이오, 영애!" 진은 한 걸음 물러나서 호수를 향해 외쳤다. "보아! 보아! 그. 것. 들을 불러 줘." [응. 엄마.] 공작과 기사들과 그 외 모든 사람들은 각자 약간씩 다른 의미의 소 리로 알아들었지만 순간. 쉬-익--하는 긴 휘파람 소리 같은 울림을 분명히 들었다. 그리고 다시 식-식-식--식-..... 마을 주민들이 말했던 그 이상한 울림을 계속 듣게 되었고 두려움 이 감돌았다. "....당신이 흑 마녀가 아닌 것이 확실하오, 영애?" 진은 굳은 목소리가 더욱 딱딱해진 공작의 물음에 대답했다. "전 마법을 할 줄 모릅니다, 공작님. 하지만 공작께서 심려치 않으 셨던 평민들의 애로사항과 탄원이 얼마나 큰 것인지. 얼마나 무서 운 것인지 직접 보여드리지요." "......뭘 보여 주겠다는 거요?" "까아악-아아아악...." 호수와 가깝게 있던 쥐들 몇 마리가 먼저 사람들이 모여 있는 호숫 가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리고.....계속. 계속. 모여들었다. 풀을 헤치고 나무를 타고 사람들의 발등을 지나 계속. 계속. 계속.... "마. 맙소사...." 쥐들이 얼마나 빠른가. 그들은 때로 말보다 더 빨리 달린다. 그들은 곧 새까맣게 모여들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 작은 쥐들이 무리를 지어 모여드는 것에 공포를 느꼈다. 사제들은 신성력으로 보이는 오라를 발산하며 자신과 주위 몇 몇 사람들을 감쌌고, 마법사들은 실드를 펼쳤고 정령사는 실프를 불러 땅에서 조금 솟아올랐다. 기사들의 말들은 놀래서 히힝거리며 솟구치고 고삐에서 벗어나려고 요동을 치기 시작했고, 공작은 자신의 발등을 밟고 지나가는 쥐들 의 움직임에 경직되었다. 그의 아들은 새파랗게 질려 쥐들을 향해 검을 내리치고, 딸은 비명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진은 여전히 팔짱을 끼고 공작과 마주 서서 시간을 흘렸다. [진 엄마. 다 불렀어.] "잘했어. 보아! 기다려 주겠니?" [응.] 그들은 낮인데도 눈빛이 번뜩이는 수천, 수만...아니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검고 회색 빛이 나는 거무튀튀한 쥐들에게 온통 둘러 쌓이게 되었다. 진은 더 기다려 주었다. ".............." "이 쥐들은 모두 공작님의 영토에 있는 쥐들입니다. 멀리 있는 것 들은 오지 못했겠지요. 가까운 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많군 요. 자. 그럼. 하층민들의 곤란을 아시겠습니까, 공작님? 공작님이 머무시는 방에는 쥐가 없었나 보지요. 하지만 공작님의 식료품 저 장실을 지키는 하인은 밤낮을 쥐들과 싸웠을 겁니다. 평민들과 농 노들은? 그들은 농사를 짓고 세금을 내고 남은 곡식을 뺏기지 않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야 했겠지요. 그런 그들이 자신들을 보호한다는 공작님께 탄원을 했던 일을 왜 모른 척 하셨습니까. 제대로 보호하 시지 못하셨군요." ".....쥐를 부른 것이 영애요. 아니면 호수의 그 '무언가'요! 대답하시 오!" "대답하면? 공작님. 어느 쪽이든 쥐를 불러 공작님의 잘못을 증명 해 드렸습니다. 어떻게 하시겠는지? 호수 안을 조사하는 것은 능. 력. 이 딸리셔서 못하셨나 보더군요. 분명 호수 안에는 '무언가' 있 더군요. 자. 제물을 바쳐야 하겠군요. 그 '무언가'를 달래야 하지 않 겠어요?" 진은 움직였다. 검을 들고 망연히 서 있던 공자의 복부에 주먹을 내질러 기절시켰 다. 그리고 그의 뒷 목덜미를 잡아채고, 기절할 듯 하얗게 질린 공 녀의 뒤쪽 허리두르개를 잡아, 호숫가의 제법 큰 바위 위에 꼼짝하 지 않고 있는 쥐들을 발로 쓸어내며 올라섰다. 그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움직임....공작은 바로 곁에 서 있던 자 신의 자녀를 진에게 납치 당했다! 미처 저항의 동작을 취해 보지도 못했다. "!!!........." "공주님! 공자님!!" 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빼어 들었다. "공작님의 자녀들도 어리니 아직 순. 결. 하겠군요. 그럼 제물이 될 가치가 있지요. 당연히 하층민들의 봉사로 이제껏 잘 사셨으니 그 들의 어려움에 반대급부를 주셔야 지요. 안 그렇습니까?" "무슨 짓이오! 내려놓으시오. 영애! 무사하리라 보오?!!" 공자는 키도 더 작은 진에게 덜미를 잡혀 기절한 채 축 늘어져 있 었고, 공녀는 자신의 상태가 아직 이해가 가지 않는지 멍청이, 진의 손에 매달려 있었다. "공작. 귀족만 사람은 아닙니다. 당신도 당신의 아이들도 피 흘리는 하층민과 똑 같아야 합니다. 왜 그것을 이해하고 인정하지 않습니 까! 저 소년과 소녀는 제가 구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되었을 겁니 다! 보아!! 장난감이다!" [장난감?] "그래, 보아. 죽이지만 말고 가지고 놀아!" [응. 엄마. 고마워~ 장난감이다 아~] 진은 호수 안쪽으로 공자와 공녀를 번갈아 던졌다. 모여들어 숨죽이며 쥐 떼들을 경계하며 얼싸 안거나 부들부들 떨고 있던 주민들은. 검을 빼어들고 무기 없는 귀족영애에게 공격을 가 해야 하나, 말아야하나 망설이던 기사들은. 쥐들이 물러나 주위를 넓게 에워싸느라 신성력과 마법과 정령을 거두고 서서, 진과 공작 의 대화를 듣던 이들은. 흥미를 띄운 얼굴의 클레이스와 팔짱을 끼 고 구경하던 와이즈도, 하프를 쥐어뜯으려는 동작을 하던 블루도. 그 모든 사람과 오니가라 공작은! 호수에서 쏴-아아--하는 물보라와 함께 솟구친 그. 것. 에게로 눈 을 돌려야했다. 쉭- 쉭- 소리와 함께 호수 수면에서 거대한 하늘 색 뱀이 진이 공 던지듯 호수 안쪽으로 던져버린 공작의 아들과 딸을 머리로 받아.... 공중으로 튕기기 시작했다. "꺄아아아아아-......" "....!!...아버지이-!!!" ".........!!!" 사람들은 모두 다리에 힘이 빠져서 바닥에 주저앉아 비명을 지르거 나 비명을 막기 위해 입을 틀어막았다. "괴물이다! 괴물 몬스터야!! 으아아아악-!" "저주받았어! 오니가라는 저주받은 거야!!" 진은 공작의 앞에 다시 섰다. "자. 어떻게 하시겠는지, 오니가라 공작님. 공자와 공녀의 목숨도 공작나리의 변변찮은 평민과 같은 상황이 되었네요. 자녀들의 안전 을 무시하고 제 지시를 따르는 저 뱀에게 조종되는 쥐 떼들과 전쟁 을 벌이실 것인지. 아니면 저 뱀을 무찌를 시도를 하시겠는지. 아니 면 저와 제 일행과도 함께 싸우시겠는지. 아. 니. 면. 제 제안에 따 라 이 일을 수습하시겠는지!" "............." 정신을 차린 공자와, 그와 반대로 기절한 공녀는 공중으로 튕겨 올 라갔다가 다시 받아지고 다시 튕기고...있었다. 물이 첨벙 첨벙...물보라가 심해서 수면이 파도로 철썩대었다. 사제들은 하얗게 질려 있었고,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주민들도 모두 겁에 질려 있었지만 오니가라 공작의 눈앞, 검푸른 머리의 검게 타는 듯한 남청색 눈의 소녀와 그녀의 일행만은 침착 해 보였다. 공작은 드리얀....그 먼 타국의, 딸과 비슷한 또래의 영애가. 43세로 고급 검 실력. 소드마스터를 앞두고 있는 자신의 무예와, 국 왕 다음으로 네카르도에서 가장 큰 권력을 누리고 힘을 가진 공 왕 이라는 자신을, 이 전투 아닌 전투에서 월등히 능가하고 있다는 것 을 겨우....깨달았다! [64] 9-4. 오니가라와의 협상. "....제안이 무엇이오, 영애." 공작은 한동안 굳은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고. 숨죽이며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듯한 호수 주변의 검은 쥐 무리와, 공포에 질려 있는 영지 민들과, 몸부림을 치다 주인들의 진정시키 고자 한 노력들로 겨우 고삐에서 벗어나지 않고 푸르르 거리고 있 는 전투 말들과, 쏴아- 철썩- 철썩- 하는 소리로 물장구를 치며 자 식들을 가지고 노는 거대 뱀의 움직임으로 비명을 지르는 공자의 외침을 들으며....말했다. "협상을 하시겠습니까, 공작님?" "영애의 행동은 충분히 선전포고요. 공국의 공주와 공자가 인질이 된 마당에 휴전협상을 시도하지 않을 수 없지 않소. 먼저 저 뱀의 행동을 멈추게 하시오, 영애." 진은 적대감을 거두고 고개 돌리지 않고 말했다. "보아. 그만하고 이리 데리고 오렴." [응, 엄마. 재미있었어.] 스르르....물 위를 헤엄쳐 보아는 머리에 두 명의 인질을 얹고 진이 서 있는 쪽으로 다가왔고 수면 가에 모여 있던 쥐들이 양쪽으로 후 다닥 비켜섰다. 보아는 대가리를 숙여 공자와 공녀를 진의 발치에 떨어뜨렸고 진은 팔에 부벼오는 보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공작과 그 외 모든 사람들은 그 모양을 보고 모두 숨을 삼켰다. 아. 물론 진의 일행만 빼고. "............." 공작은 기사들이 공녀와 공자를 구출하고자 하는 움직임을, 손을 들어 멈추게 했다. "설명 해드리지요, 공작님. 이 뱀은 '보아'라고 합니다. 돌연변이지 요. 천년 전 이곳에 정착했던 사람들의 카르마(업보)입니다. 그들이 배신하고 제물로 삼았던 엘프의 육신을 먹고, 그 육신을 먹은 수중 생물을 먹고 오니가라 폭포와 강과 이 호수에서 천년을 살았지요. 오니가라는 보아의 것입니다. 인정하십니까?" ".............." 공녀는 여러 번 의식을 차렸다 다시 까무러쳤다 하다가 보아의 놀 이가 끝나자 기절한 채 진의 발치에 널브러져 있었고, 새파랗게 질 린 공자는 보아의 낼름거리는 혓바닥 아래에 손으로 바닥을 짚고 굳어 있었다. "엘프의 수명을 채운 보아는 몇 년 전 영물로 거듭났습니다. 이곳 에서 정착해 살았던 사람들은 보아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습니 다. 그는 엘프의 선의까지 먹어서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는 존재가 아니었으니까요. 보아는 친구가 필요했습니다. 저는 일행이신 엘프 블루님의 도움으로 보아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제가 보호자가 되어 주기로 약속했습니다." 블루는 눈을 깜박대다 와이즈를 쳐다보았지만 아가씨의 마법사는 무시했고 블루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거짓은 아니지만....' "보아는 악의를 가진 생물은 아닙니다만 근본은 뱀입니다. 저에게 적대하시는 것은 그를 적대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니 그의 분노를 피 하시려면 제를 지낼 것이 아니라 제 제안을 무조건 받아들이셔야 할겁니다, 공작님." "......제안이 무엇이오, 영애." 공작은 다시 물었다. "노예와 하층민들의 인권. 지배자로서의 당연해야할 선정. 그리고 공작님의 사유재산의 절반을 원합니다." "..........." 공작과 진의 협상은 모든 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진행되었다. 공작은 진이 내건 마지막 사항만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타협이 가능할 조건으로 판단했지만 자리를 옮기길 청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여전히 인질은 그녀와 그녀의 뱀 아래 있었고, 쥐들 도....또한 그의 주민들은 이 영애가 내 놓은 제안에 기사들보다도 더 숨죽이며 듣고 있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더 설명드리지요, 공작님. 공작님의 자녀와 마찬 가지로 평민이든 노예든 같은 인간입니다. 신분은 차이가 나도 그 들 역시 고통이 무엇인지, 행복이 무엇인지, 생각할 줄 아는 이성과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의 왕이시니 그들을 위해 주십시오.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닫지 마십시오. 공작님의 '약자'이니 가족을 보호하시는 것처럼 그들도 보호해 주시길 바랍니다." "......난 한다고 했으나 작은 허물이 이토록 큰 문제가 되었으니 다 시 생각할 이유는 충분히 되오. 영애의 제안이 아니라고 해도 그렇 게 할 것이오." "감사합니다. 공작님." 진은 기본을 약속 받았다. 미처 검을 회수하지 못하고 있던 기사들 은 말 없이 자신들의 검 집에 검을 집어넣었다. 진은 계속 말했다. "공작님의 사유 재산이라 하면 오니가라 전체지요. 보아가 허용했 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이곳 주변을 일구셨으 니 전부를 달라고는 할 수 없는 일이지요. 땅을 달라는 것이나 영 지민과 기사들을 달라는 것은 무리이니 돈으로 환산해 주십시오. 빚을 낼 필요는 없지만 공작님의 보물 창고와 포도주 창고를 기준 삼아 계산해 주시지요." 공작은 허무해 졌다. 이 영애는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그건 약탈이나 다름없소, 영애." "아니오, 공작님. 쓰지 않고 모아 둔 재산은 가치가 없습니다. 먹지 못하는 보석 역시 사치품 일 뿐이지요. 저장해 둔 양식을 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네카르도엔 분쟁 또한 없으니 당장 큰돈이 필요한 일도 없지요. 공작님과 공작님의 가족들이 가진 보석과 공국이니 분명히 있을 비자금에서 오니가라의 재정에 타격이 크지 않는 선에 서 죄다 내 놓으시면 됩니다." 오니가라 공작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영애는 날 벗겨 먹으려 오셨나보구려." "소풍을 나왔다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공작님. 제를 지내는 것이 제 눈에 띄지 않았다면 저는 호숫가에서 놀다가 공작님의 영지에서 기념품이나 사 가지고 돌아갔을 것입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진은, 자신이 평소 하던 대로라면 분명. 왜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지 않는 지 알아봤을 것이라는 생각에 보 아와의 만남은 필연이었으리라 생각했다. 공작은 그 큰 머리를 검푸른 머리의 소녀의 팔에 부비고 있는 영물 과 여전히 지시를 기다리듯 꼼짝 않고 사람들을 포위하고 있는 쥐 들을 둘러보아야 했다. "내가 내 보물 창고의 보석과 금화를 타격이 크. 지. 않는 선에서 영애에게 협상금으로 지불한다면 앞으로 다시 같은 협박이 있어서 는 안 되오. 그것을 약속할 수 있소, 영애?" "약속 할 수 있습니다, 공작님. 분명히 계. 산. 해 주신다 면요. 보 아는 천년 동안 사람들에게 해 끼치지 않고 모습도 드러내지 않았 으니 별다른 위협이 없다면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 늘어난 쥐들은, 적어도 이곳에 모여 있는 저 쥐들은 보아와 제 일행이 처리해 드릴 수 있지요." "............" 진은 공작의 입장에서는 손해만 보일 협상이라, 그의 약속을 받아 쐐기를 박기 위해 양념을 치는 기분으로 다시 제안했다. "협상금을 내 놓으신 다면 오니가라 호수와 강에서 나는 물고기도 드리지요." ".....호수에서는 물고기가 잘 잡히지 않기로 유명하오, 영애." "앞으로는 잡힐 겁니다. 아주 많이요. 또한 보아는 오니가라의 진정 한 주인이지요, 공작님. 오니가라에 분쟁이 있게 된 다면 그의 존재 가 힘이 될 것입니다." "그 말은...." "공작님의 전력은 되지 않겠지만 이곳은 그의 영역이니 그가 인정 하지 않은 사람들은 발붙이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이지요. 상징이 되는 존재라고 해도, 인간들에게는 큰 힘이 되겠지요. 보아는 천년 을 살았습니다, 공작님." "....그 말이....영애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말로 들리는 것은 내 착각 이오?" "착각 아닙니다. 눈치가 있으시네요, 공작님." ".............." 자신을 칭찬하는 것 같은 말이 섞여 있음에, 보아는 진의 몸에 머 리를 더 부비적거렸고 그것을 몇 걸음 앞에서 보고 있던 공작은 거 절할 상황이 아니라는 것과, 생각키도 싫은....검을 뽑게 될 경우 발 생하게 될 희생을 감수하고 협상을 깰 명분을 만들 수 없었다. 그는 결정을 내렸다. "....영애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소." 진은 미소를 지었다. * [끝내 준다. 와이즈.] '깜둥아.....그만 좀 재미있어해라. 엉?' 진은 보아에게 조금 물러나도록 하고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공자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미안합니다, 공자님. 많이 놀라셨나 보네요." "아......" "오늘의 일을 낱낱이 기억 해 두십시오. 차기 공작이 되실 분이시 니 오늘의 일을 경험으로 생각 깊은 지배자로, 공자님의 지위와 앞 으로 얻게 될 힘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시고, 백성들 의 입장에서 그들을 위해 권력을 누리고 휘두를 교훈으로 삼아 주 셨으면 합니다." "아....." 공자는 적이었던. 겨우 자신과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소녀가 하늘 같았던 아버지를 상대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쟁취한 승리에.... 그리고 그녀의 말에 약간 고개를 숙였다. 공작은 그런 아들을 씁쓸함과 복잡한 표정으로 지켜보며 기사들에 게 부축할 것을 지시했다. 기사들이 다가와 공자와 쓰러져 있는 공 녀를 호위하고 부축해서 데리고 갔다. 공작은 자녀들에게 고개 돌리지 않고 진을 그대로 주시하고 있다가 그녀의 말에 약간 휘청거렸다. "보아, 쥐들을 먹어 줄래? 익혀 줄까?" [아니, 날 것이 더 맛있는데?] "그래? 그럼. 보아. 먹어 주겠니? 그리고 다 먹고 남은 것은 한군데 에 몰아주겠니?" [응. 진 엄마.] 쉭- 쉭- 그 묘한 울림이 진의 말과 함께 어우러져 몇 번 울리더니 아찔한 광경이 펼쳐졌다. 그 거대한 하늘 색 물뱀이 근처 호숫가에 있는 가장 큰 바위에 턱 을 올리고 아. 가. 리를 벌였다. 그러자 쥐들이 떼를 지어 최면에 걸린 것처럼 그 끔찍한 괴물의 입 속으로 제 발로 달려들어가기 시 작했다. "웁...." 몇 명 그 광경을 보던 주민들이 토악질을 했다. 그리고....모두 다시 사색이 되었고 입을 틀어막거나, 머리를 쥐어 뜯어야했다. 공녀는 마법사의 도움으로 겨우 정신을 차렸다가 그 꼴을 보고 다시 기절했다. 공작과 기사들 역시 다시 뻣뻣이 굳어버 렸다. '으....식성 좋은 아들네미구나. 그래, 보아. 내 아들답다.' [......그래, 좋겠다. 너랑 참 많이 닮긴 했다.] '와이즈...너도 몬스터 잡아먹을 때 저렇게 먹어?' [.....물뱀을 나와 비교해서 어쩌자는 거냐? 난 저렇게 더티하게 안 생겼다!] '와이즈. 어떻게 먹든 상관은 없는데 말이야. 인간은 먹지 말아 줘 라.' [.............] 블루는 조금 창백해 져서 몸을 돌리고 못 본 척 하고 있었고, 클레 이스는 웃음을 참느라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한참을 줄을 지어 들어가던 쥐 떼의 무리가 잠시 멈추고 입안에 가 득 찬 쥐를 '꾸울꺽~ ' 소리와 함께 보아는 삼켰다. 그리고 다시 턱 을 바위 위에 대고 아가리를 벌였다. 쥐들은 또 뒤뚱거리며 먹이가 되기 위해 줄을 섰고 담이 약한 사람들은 기절하기 시작했다. 여러 번 그 일은 반복되었고 사람들은 꼿꼿이 서서 눈을 떼지 못하 고 얼어있었다. [푸하...! 더 못 먹겠어. 진 엄마.] "잘했어 보아. 너무 고마워." 그 많은 쥐들의 2/3가 보아의 배속으로 들어갔고 보아는 거대한 해 마...처럼 배가 불뚝 해져서 물 안으로 들어가 머리만 내 놓고 있었 다. 남은 쥐들은 비켜선 사람들 때문에 공간이 생긴 호숫가의 한 자리에 밀집해서 작은 심장을 벌떡거리고 있었다. "와이즈~ 쥐 잡자!" '....팔자야.' 와이즈는 5써클 한도에서 쓸 수 있는 선에서 불덩이들을 만들기 시 작했고 쥐들은 태워지기 시작했다. 블루는 하프를 만지작대며 쥐의 학살을 도와야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망설이다가, 진이 나뭇가지를 구해와 최면에서 풀려 도망가는 쥐들의 꼬리를 착착 밟고 쿡쿡 찔 러 죽이는 것을 보자 한숨을 쉬고 와이즈를 돕기 시작했다. "............." 그 광경을 사람들은 머리를 벅벅 긁어 대며 지켜 보아야했다. "흠....레이디. 도와드리고 싶지만 검으로 쥐를 잡는 것이 좀....우스꽝 스럽게 느껴지네요." "에. 클레이스님. 손이 필요할 정도는 아니니 괜찮습니다. 재미있는 피크닉이지요? 무료 관람은 없는 법인데. 흠....앗. 어딜 피하니, 목 숨을 내 놓도록 하여라, 이. 쥐! 야!" '...조것이!!' '잘한다, 진. 그렇지. 공짜가 어디 있냐, 깜둥아. 잘못하면 너도 밟혀 죽겠다. 조심해라. 큭큭큭....' 질린 얼굴로 서 있던 공작은 자신의 마법사들에게 돕기를 명했고 그들도 합세하기 시작했다. 거의 다 잡아 죽이게 되자 정령사가 실 프로 타거나 덜 탄 쥐 시체들을 쓸어모아 언덕을 쌓았고 마법사들 은 남김 없이 그것을 태워버렸다. 블루가 부른 실프는 바람으로 털 과 고기 냄새가 진동하는 주위 공기와 연기를 하늘 높이 실어갔다. "보아. 잠 오니?" [응......] 수면 위로 대가리를 삐죽이 드러내고 진이 하는 일을 구경하던 보 아는 잠이 묻은 대답을 했다. "보아, 고마워. 착한 아가. 자장가 불러 줄까?" [정말?] "그럼~ " [불러 줘. 진 엄마. 나 자러 갈게. 나중에 꼭 불러 줄 거지?] "꼭꼭 부를게, 보아." [응....당분간은 잠에 취하면 엄마 목소리를 들어도 못 일어날지도 몰라. 하지만 꼭 부를 거지?] "그래, 보아. 약속할게." 보아는 쉭--식- 쉭-시익- 호수 전체가 울리는 공명음을 내며 진에 게 다시 다가와 다짐을 받고 그 큰 대가리를 진에게 숙였다. 진은 쓰다듬어 주고, 구분이 안 되는 보아의 볼 부분에 용기를 내어 키 스해 주었다. 천년 묵은 물뱀은 하늘색 느낌이 드는 공명음을 내며 호수 안으로 사라지기 시작했고 진은 오니가라 호수를 향해 차분하 게 여러 번 반복해서 휘파람으로 이루어진 짧은 노래를 불러 주었 다. (*김광석의 자장가) ".........." "아가씨의 휘파람은.....잔잔하기는 하지만 아가씨의 노래처럼 곡조 가 슬프고 아름답네요." "아. 그래도 자장가는 자장가에요, 블루님. 그리고 제가 부르는 노 래는 모두 들은 노래에요. 제가 지은 것은 아니니 그렇게 감탄하실 필요는 없어요....보아는 잠들었겠지요?" "그렇겠지요...." * 진의 휘파람은 두려움과 역겨움이 남아 있던 호숫가에 정화 작용을 한 듯 했다. 진은 씩씩하게 사람들의 시선을 받아가며 다시 공작 앞에 섰고 사제들은 헛기침을 하고 그런 진의 옆을 지나 공작 측에 섰다. "자. 공작님 이제 약속을 지켜 주세요." "그 뱀은...아니, 영물은..." "보아는 오랫동안 잠을 자게 될 겁니다, 공작님. 새 집을 원하게 되 면 떠난다고 해도 이곳이 고향이니 가끔 들르게 될지도 모르지요. 지금 잠든 듯 하지만 언제든 제가 부르면 헤엄쳐 올 착한 녀석이니 제 전력엔 이상 없습니다." 공작은 한숨을 쉬었다. "잘 잡히지는 않지만 이 오니가라 호수에서는 금빛과 은빛을 한, 약재로 쓰일 정도로 귀한 물고기들이 서식하고 있다는 것은 아오, 영애. 호수의 주인이 배를 띄우는 것에 화를 내지 않을 것이 확실 하오?" '에...? 그랬나? 그럼 더 뜯어낼 걸 그랬나?' [욕심은 화를 부른 다며?] '그냥 해본 소리였어, 와이즈.' "화 내지 않을 겁니다, 공작님. 잡으셔도 되요. 강과 호수에 좋지 않은 영향을 주지 않는 선이라면 어떤 위험도 없을 겁니다, 공작 님." "............." "영애. 저희의 의문에도 답해 주시겠소? 분명 그 뱀에게서 사기나 마기가 느껴지지는 않았습니다만...." 진은 메디컬아트 사제들에게 드디어 눈을 주었다. "사제님. 저 소년과 소녀는 분명 심장이 멈췄었고 저도 조금만 늦 었으면 되살리지 못했을 겁니다. 이곳은 물이 많은 곳이니 앞으로 도 익사자가 생길 수 있겠지요. 알아두시는 것이 좋을 듯 하네요. 익사의 경우 뿐 아니라 감전이 되거나해서 갑작스레 심장이 멈춘 경우라면, 외상과 내상으로 인한 죽음이 아니라면 소생시킬 방법이 있기는 합니다. 알려드릴까요?" ".....그것이 순리에 반대되는 일이 아닌 것이 확실하오, 영애?" "사람이 최대한 생명을 부지하고자 하는 노력은 순. 리. 입니다. 노 환으로 죽거나 부상으로 죽은 경우가 아니었으니까요. 저들은 아직 어리고 수명이 다하지 않았었습니다, 사제님. 카르마에 반하는 일이 아니라 무지로 인해 죽음을 맞을 뻔했던 경우이지요." "듣고 싶소, 영애." 진은 피식....웃었다가, 다시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사제님들. 마법사님들. 정령사님. 제 사전에 무료란 없습니다. 제가 아는 의학 지식은 대단치 않습니다만 그냥 알려드릴 수는 없군요. 메디컬아트 신은 의술의 신이시니 제가 알려드리면 전 대륙에 퍼지 겠지요. 전 사제가 아니니 대가 없는 지식 전수는 하지 않겠습니 다." "영애. 하지만 저흰 신전의 사제들이요. 드릴 것이 그다지 없소." 진은 머뭇거리는 나이든 할아버지 사제 장에게 삐쭉 웃어 주었다. "왜 없습니까, 사제님. 의술의 신을 모시는 신전이니, 다른 신을 모 시는 신전보다 힐링포션과 같은 치료 아이템이 아. 주. 많을 텐데 요. 그것을 주십시오. 쥐들 대부분은 잡았으니 당장 돌림병을 걱정 할 일도 없을 테고, 물론. 조금 전까지 이곳은 쥐들의 제국이었으니 소독하는 후속 조치가 있어야하겠지만, 신전에서 보유하고 있는 힐 링포션 중 여유 분을 몽땅 주시면 됩니다." "............" "또 만들면 되지 않습니까. 사제님들이시니." "의논해 보겠소, 영애." 진은 이제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는 공작에게 다시 손만 내밀지 않 았지 빚 독촉하는 빚쟁이처럼 다시 요구했다. "공작님? 협상금을 주셔야 겠는데요?" "......성으로 안내하지요, 영애." * 공작의 명으로 영지민들은 우루루 몰려 돌아가기 시작했고, 진의 일행을 위해 양보 받은 말 몇 마리가 앞으로 나왔지만 진은....말을 타 본적이 없었다. 머리를 긁적이며 와이즈를 돌아보았지만 그는 딴청을 피웠다. "승마를 못하세요, 레이디?" 클레이스의 질문에 진은 곤란한 얼굴로 대답했다. "네. 클레이스님. 말을 타 본 적이 없습니다." "영애....영애의 가문에서는 승마를 가르치지 않는가요?" 공작의 호기심 어린 반문에 진은 턱을 긁적이며 변명했다. "에....제 보호자이고 친구인 마법사에게 물어보시면 아시겠지만. 전 깊은 산 속에서 어렸을 때부터 수련 중이다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여행을 시작한지 몇 일 되지 않았거든요, 공작님." "흠. 야생마가 없는 산 속에서 자라셨다면 말을 타 볼 기회가 없었 겠군요. 그렇다면 마차를...." "오니가라 공작님. 마차를 부르려면 시간이 더 지체될 테니 호위하 는 제가 함께 태우고 가....." "진. 블루님이 도와 주실 거다. 뛰어가거나 날아가거나 해라." 와이즈는 공작의 마법사들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 5써클 마법을 쓸 만큼 썼고, 당장은 남은 마나가 그다지 없을 것으로 알고 있을 테 니, 자신이 마법을 쓰는 대신 클레이스의 속셈을 무산시키기 위해 블루를 내세웠다. 툭. 던진 투로 처음으로 입을 연 마법사의 말에 시선이 집중되었지 만 와이즈는 먼 산 보듯 딴청을 피웠고 클레이스는 쿡쿡 웃었다. 공작은 오니가라를 대상으로 전쟁을 시도했다가 휴전한 적군(?) 파 티의 상호관계를 조금 눈치챈 듯 빙긋 웃었고, 마법사의 도움으로 겨우 제정신을 차린 공녀는 돌아가는 상황을 늦게 야 파악하고 있 다가, 그렇지 않아도 억울하고 부끄럽고 모욕감으로 노여운 판에. 진에 대한 억하심정이 잔뜩 쌓이고 있었다. 진은 공작에게 먼저 출발하길 권하고 일행과 함께 뒤따라가겠다고 제의했다. 공작은 왔던 모습 그대로 공녀와 공자를 데리고 말을 달 려 먼저 오니가라 성으로 출발했다. * "아. 아. 효자 아들네미 둔덕에 몇 시간만에 한 몫 단단히 잡게 되 는 구나. 보아, 기특한 것. 후후후..." "공녀가 아주 이를 가는 것 같던데 상관없냐?" "어떻게든 되겠지 뭐." 진은 미소 띈 얼굴로 나란히 걷고 있는 클레이스에게 흘끗 시선을 던지고 대답했다. 클레이스는 매력적인 웃음으로 대꾸 삼아 물었다. "레이디. 그런데, 레이디께선 공비가 되고 싶었나요?" "에....?" "재산의 반을 달라고 하셨으니 공비가 되겠다는 소리로도 들리던데 요? 공작부인은 오래 전에 별세하셨지요." "그런 문제....가 있었군요. 흠. 설마, 공작님도 청혼으로 받아들이지 는 않았겠지요." "네 식욕을 보면 정 떨어 질 테니 걱정 마라, 진." "....그냥은 못 가겠지, 와이즈? 릭페르님께 만찬에 가겠다고 약속했 는데." "성으로 가서 통신을 취하시지요, 레이디. 내일로 미룬다고 큰 일 나겠습니까. 공작께서도 재물만 챙기고 그냥 가겠다는 말씀을 받아 들이지는 않으실 테 고요." "그렇겠지요....흠." 진은 잡담을 나누며 오니가라 성으로 일행과 걸어갔다. 블루는 늦은 오후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호숫가를 벗어나 진의 뒤 를 따라가며 오늘 하루 낮 시간 있었던 일의 무게와 부피에....한숨 을 쉬었다. [65] * "아버님. 용납할 수 없습니다. 너무 하십니다! 저희에게 그런 모욕 을 준 그 어린 계집에게 어떻게 그런 약속들을 하실 수 있습니까!" "공녀. 너도 보지 않았느냐. 난 졌다." "억울하지도 않습니까, 아버님. 이제 더 이상의 위험이 없지 않습니 까. 지금이라도 잡아들이시면 되지 않나요." "난 기사이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패배를 인정하고 협상을 했는데 약속을 깨란 말이냐. 적어도 너희가 인질이 되지 않았다면 그렇게 쉽게 타협할 생각은 없었지만, 어쩔 수 없지 않았느냐." 먼저 성으로 돌아와 기사단들이 물러가고 손님 접대를 위해 부하들 과 집사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던 공작은 붉힌 얼굴의 딸에게 변명 해야했다. 곧 도착할 그들을 위해 하인들은 연회 준비를 하고 있었고, 삽시간 에 퍼진 소문으로 수군대며 바쁘게 움직이고 있음을 공작과 공녀와 공자는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의 주인은 자신들이었지만, 부리는 모 든 사람들은 손님들에 대한 호기심과 호감으로 관심이 비껴나 있었 고 잔뜩 들떠 있는 표정들이었다. 공자는 말 없이 서재 소파에 앉아 누님이 아버지에게 발을 동동 구 르며 하소연하는 것을 듣고 있었다. "아버지는 공왕이십니다. 저는 공주고 세미얀은 차기 공왕입니다. 어떻게 네카르도와 가장 먼 타국의 기껏 후작의 여식에게 이런 취 급을 받아야합니까! 전 너무나 부끄럽고 노여워 살고 싶지도 않습 니다, 아버님." ".....미아레나. 난 분명히 그 어린 영애에게 졌다. 그것은 검을 마주 대지 않은 승부였고, 설사 국왕이라고 해도 그런 상황에서는 한 수 접어야했다. 그만 하거라. 아비의 과실을 붙들고 늘어진다고 해서 이제 와서는 어찌할 수도 없는 일이다." "아버님!" "미아레나. 그 영애는 너와 다르다. 여식이긴 하나 전사였고 대왕의 군사와 다름없었다." "아버님. 그 계집을 가만 두고 보시겠다면 저라도 나서겠습니다!" 공작은 한숨을 쉬고 아들의 건너편에 주저앉았다. 갑옷을 벗고 예복을 갖춰 입었지만 여전히 그 무거운 철 갑옷의 무 게 감이 남아있었다. "미아레나. 넌 그 영애의 상대가 되지 못할 거다. 그녀는 여왕 감이 었다. 나도 상대해서 그 짧은 시간 이토록 큰 패배를 했는데, 후환 이 두렵구나. 그녀의 뱀은 영물이다. 드래곤을 등뒤에 포진시키고 있는 것과 다름없단 말이다. 그리고 드리얀은 골드 드래곤의 수호 를 받는 나라지. 멀리 있다고는 하나 그 정도의 인물이면 장기적으 로 봐도 오니가라는 상대가 되지 않을 수 있다, 공녀." 공녀 미아레나 폰트 오니가라는 눈에서 불꽃이 튀겼다. 노기 띈 얼굴로 아버지 앞에 서서 조르다시피 처벌을 하게끔 유도 한 일이 소용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 한심하고 부끄러운 꼴을 다른 누구도 아닌 클레이스님 앞에서 보여야했다. 미아레나는 이를 갈았다. '죽여 버리겠어. 검은머리 계집. 감히 날 누구로 보고. 난 공주다! 제 까짓게 뭐가 잘났다고! 감히 오니가라의 반을 내어놓으라는 수 작을 한단 말이냐.....아버지도 남자군요. 흥.' ".....아버님. 그런 어린 계집에게 휘둘리는 모습을, 더 이상은 보지 못하겠습니다!" "............" 공녀는 몸을 돌려 서재를 나가려고 했지만 공작의 말에 다시 펄쩍 뛰며 돌아서야 했다. ".....공녀. 네 패물들을 모두 가져오너라." "아버님!" "난 분명히 약속했다, 공녀. 그 영애의 말대로 먹지 못하고 쓰이지 않는 보석은 돌보다도 가치가 없다. 네게 네 어머니의 유산으로 물 려진 보석들이 많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일이니 협상금에 보태야할 게 아니냐. 아끼는 몇 개만 빼고 모두 가져오도록 하거라. 이건 명 령이다, 공녀 미아레나." "............" 공녀는 지참금이 될 자신의 패물이 돌 취급을 받고 있음에 머리가 하얗게 비어버렸다. '죽여버리겠어! 나 보다 더한 수치를 주고 죽여버리겠어! 나쁜 계 집!' * ".....아버님. 죄송합니다. 제 불찰이었습니다." 공녀가 서재를 나가자 세미얀은 바르게 앉은 자세에서 약간 얼굴을 내리고 공작에게 말했다. 공작은 아들에게 한숨을 쉬어 보였다. "글쎄다. 세미얀. 네 잘못이겠느냐. 난 그 영애의 몸놀림에 눈만 껌 벅대고 있었다. 그녀는 검을 들지도 않고 아비와 내 가장 실력 있 는 기사들 앞에서 너흴 납치했다. 설사 너희가 자리에 없었더라도 전투를 벌여 어떤 결과가 나왔을지 장담을 못하겠구나." ".....그 영애는 그 영물이 아니더라도 강하겠지요?" "그런 것 같더구나. 생각해 보거라. 천년 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 았던 그 뱀을 찾아 수하로 삼을 정도라면 수완이나 담력이 보통이 었겠느냐. 그 일행 파티는 강한 편이지만, 같은 인간이니 두려울 것 없었을 테지. 하지만 그 쥐들은...." 공작은 한숨을 쉬었다. "하마터면 쥐들에게 물어뜯기는 기사들을 보게 될 뻔했다. 그런 작 고 약한 생물도 떼를 지으면 어떤 몬스터보다도 무섭더구나. 하물 며.... 그 영애가 말한 대로 내 지배 하에 있는 하층민들이 농기구를 들고 반란을 꾀한다고 생각해 보려무나." "......끔찍하겠지요." "그래. 난 미처 생각지 못했다. 그 영애의 말이 맞지. 검을 들지 못 하는 변변찮은 소작농이라도 화를 낼 줄은 안다. 그 분노가 쌓여 일어날 수도 있을 일을 미리 본 것 같아서 난 두렵구나. 공자. 그 영애의 말을 새겨들어라." ".......네." * 공작의 성은 이제까지 본 귀족의 성 중 가장 크고 견고해 보였다. 네카르도의 수도에서 왕성을 구경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니가라 공 작의 성과 비교할 수 없었던 진은 일단 가장 큰 힘을 가진 귀족의 성으로 낙찰을 봤다. 성문을 통과해서 미리 마중 나온 성의 집사와 하인과 하녀들이 현 관까지 양편에 줄을 지어 늘어서서 허리를 굽히고 있었고, 그 사이 로 일행과 지나가면서 진은 얼굴이 무척이나 따끔거렸다. 지성 있어 보이는 외모의 40대의 집사가 마중 나와 깍듯이 허리를 굽혀 절을 했다. "오니가라 공왕의 성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쉬실 곳을 마련해 두었으니 예에 따라 시중을 들어드릴 하인들의 안내를 받으시지요. 공작님께서 연회에 초대하셨으나 아직 시간이 있으니 예복을 갖추 시면 응접실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래. 공왕이지. 젠장. 얼마나 복잡 하려나.' [잘해 봐라, 진.] 진은 일행과 뿔뿔이 흩어져 성의 3층 손님 용 사실로 안내 받아갔 다. 진이 안내 된 방은 화려하고 우아한 침실과, 개인 응접실과 커 다란 드레스 룸과 휘황 찬란하게 느껴지는 마법이 덕지덕지 깔린 화장실과, 흰 돌로 다듬어진 수도꼭지 없는 목욕 욕조가 놓여져 있 는 욕실까지 있었다. 진은 최대한 공작의 성에 머무는 시간을 단축시키기 위해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쥐 잡느라 찜찜했던 느낌을 재빨리 씻어내고 드레스 룸에서 촤르륵거리며 시녀가 걸린 옷들을 보여 주자 냉큼 가장 입 기 수월하고 활동하기 편해 보이는 드레스를 골라(그래 봐야 거기 서 거기였지만.) 시중 받아 가며 걸쳐 입었다. 진이 택한 드레스는 자신의 눈 색과 비슷한 밝은 남색 드레스였고 소매 없이 옆으로 누운 큰 리본이 어깨에 달린, 목 둘레가 네모로 파인 칼라에 나시 형식의 상의에 높게 두른 허리 두르개 아래 주름 이 많이 잡혀 발등까지 종 모양으로 넓게 퍼진 드레스였다. 끝자락에는 폭 넓게 은실로 테두리가 수 놓아져 있었고, 네모로 패 인 목 둘레에도 은실로 꽃 모양의 수가 놓아져 있었다. "단순한 스타일의 드레스인데도 너무 어울리시네요, 영애. 아름다우 세요." "고마워요." "머리를 먼저 했어야 했는데..." 대충 생략하고자 건너 뛴 일에 시녀들은 그럴 순 없다는 듯이 서로 의논하더니 진의 머리를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시녀들은 깔끔하고 아름다운 긴 드레스 차림에 언행까지 품위가 배 어 있어서 귀족 아가씨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단정해 보였다. 처음 대하는, 오니가라를 벗겨 먹으러 온 귀족아가씨인 것을 알 텐 데도 개인적으로 보이는 호의까지 비치고 있어서 진은 계속 웃어 주고 있어야했다. 머리 모양을 다듬는 데 쓰이는 것인 듯한 젤 같은 액체를 손바닥에 펴 바른 시녀가 진의 머리를 펴고 잡아당겨 양쪽에 가는 실로 묶어 매고 푸른 구슬 장신구로 장식했다. 몇 가닥 짧은 머리카락을 물결 모양으로 이마와 양 귀 옆에 붙이고(?) 양쪽으로 묵었던 머리를 나 눠 돌돌 말아(캔디의 이라이자 헤어) 늘어뜨렸다. "공녀님 보다 더 아름다우세요, 영애." "......고마워요. 다 되었지요? 이제...." "손톱과 발톱 소지도 안 하셨는데요. 드레스를 먼저 입으시는 게 아 니었는데...화장도 하셔야하고." "안 해도 전 이뻐요. 그렇지요? 그만 가지요. 전 공작님께 받아야할 게 많거든요." "예에. 영애.....훗..." '젠장. 드리얀으로 돌아가면 매일 이래야 하는 건가. 죽겠네...' * 공작성의 응접실은 연회장처럼 넓고 화려했다. 바닥에 두터운 양탄자가 중앙을 중심으로 둥글게 깔려 있었고 세심 한 세공의 커다란 원탁이 두 개 놓여져 있었다. 금색 수가 놓여진 검은 색 정장으로 바꿔 입은 클레이스가 허리를 숙이고 진의 손등에 입을 맞추며 우아하게 인사를 했다. "아름다운 레이디. 호위하게 되어서 영광이네요. 눈이 부십니다." '그래. 많이 부셔해라. 눈이나 멀지 말아라, 이 응큼 한 드래곤아.' [.............] 손을 너무 꽉 쥐고 짙게 하는 키스에 진은 속으로 빈정대었지만 어 쨌든 대답은 했다. "과찬입니다. 감사합니다, 클레이스님." 공작은 응접실 커다란 낮은 원형 탁자의, 크기와 세공이 구별되는 묵직해 보이는 의자에 앉아있었다. 진은 공작에게 와이즈가 컨닝 시켜주는 지시에 따라 허리를 굽히고 정식으로 인사를 하고 나머지, 공자 세미얀 폰트 오니가라와 공작 의 심복으로 보이는 호위기사들과 마법사들과 정령사와도 모두 일 일이 인사를 나누었다. "안 주인이 부재라 불편하게 해 드려 미안하오, 영애." "아닙니다. 공작님. 신세지러 온 것이 아니니까요." "흠...곧 돌아가겠다는 말로 들리는 군요, 영애." "네. 공작님. 피크닉이 길어져서야 안 될 말이지요." "영애의 잠시 잠깐의 피크닉은 참으로 대단하지 않소?" "그러게나 말입니다, 공작님." 공작은 갑옷과 투구를 벗고 옅은 금발 머리에 맞춰 윤기 나는 흰색 의 발등까지 오는 정장 위에 테두리 전체에 화려한 수가 놓인 황금 색의 여밈 없는 긴 가운을 걸치고 있었다. 모두 정장 차림으로 바꿔 입었지만 기사들의 복장에는 검 집이 빠 지지 않았고, 마법사들과 블루와 와이즈의 차림새는 그대로였다. 진이 클레이스가 빼어 낸 의자에 앉길 기다리던 신사들은 진의 말 에 눈 둘 곳을 찾아야했다. "공작님. 시간은 금입니다.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을 까요?" "..........." "죄송합니다, 공작님. 진은 산 속에서만 살아서 귀족의 예의범절에 어둡습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이해 해 드리리다, 리툰 마법사." 공작은 너털웃음을 짓고 자리에서 일어나 집사를 불렀다. 진은 공작의 지시로 날라져 오는 궤짝들과 포도주 통을 턱을 긁적 이며 보고 있었다. '생각 보다 많네. 저걸 어떻게 가져가지?' [다~ 들고 가라, 진. 힘 뒀다 뭐하냐.] '와이즈. 수도로 옮기면 네 레어로 워프 시켜 두자. 빌린 돈 갚는 셈 쳐도 한참 남으니까 맡겨 둘게. 나중에 옮겨 줄 거지?' [....그래라.] "마법으로 이동하시면서 여행 중이시라 던데, 어떻게 가지고 다니 실 생각이시오, 영애?" 빙글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중년 공작 아저씨가 한 말에 진은 헛기 침을 했다. 부피 문제로 고민해야 했던 것은 성의 마법사가 내 준 마법이 걸린 자루 덕에 해결되었다. "경량화 마법을 걸어 두었습니다, 영애. 유한 자루이기는 하나 큰 언덕 한 두개쯤은 들어가지요." "감사합니다. 마법사님." '야. 와이즈. 이런 것이 있으면 진작 내어놓을 것이지.' [이제까지는 필요 없었잖냐. 유한 주머니 가지고 유세는...] 7써클로 소개받은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공작 성의 마법사는 웃으 며 반문했다. "그럼. 저흰 값을 치뤘습니다, 영애. 사제님들께서도 저녁 연회에 오시기로 하셨으니 영애의 의학지식을 나눠도 되겠지요?" 진은 웃어 주었다. 정령사 청년도 찬스를 잡았다는 얼굴로 자루에 금화와 보석과 포도 주 통을 담는 일을 자청했고 실프를 불러 일을 시켰다. 진은 오니가라 공국의 재정이 작은 나라와 맞먹는 다는 것에 회심 의 미소를 지었지만....조금 미안한 기분이 들어서 공작이 내 놓은 금화와 보석들이 가득 든 궤짝들을 반으로 나누고, 계속 날라져 오 는 포도주 통의 운반을 멈추게 하고 적당량만 남기고 돌려주었다. "정직 하셨으니 까요, 공작님. 오니가라를 통째로 먹는 기분이라 채 할 것 같으니 반만 받겠습니다. 포도주도 이 정도면 충분하고요." "......그냥 통째로 가지시지 그러오, 영애." "에...." 여유를 찾은 듯한 공작의 말에 진은 땀이 나는 것 같았다. "섭섭하구려. 난 젊고 아름다운 영애에게서 받은 프로포즈가 꽤 마 음에 들었는데 말이요. 오니가라 공국의 면적은 한 나라에 비할 정 도로 넓은 것은 아니지만 부유한 편이고 영애의 영물이 허락한 호 수의 물고기도 앞으로 재정에 큰 보탬이 될텐데 욕심나지 않소?" "아버님! 저...." "흠. 뭐, 나와 나이 차가 많아 싫으시다 면 공자는 어떻소, 영애." 세미얀은 아버지가 다르게 내 놓은 제안에 더 당황해서 얼굴이 붉 어졌다. [쿡쿡...뺏기겠다, 와이즈.] [시끄러.] "공작님. 진은 드리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게다가 아직 성년이 되 지도 않았지요." "리툰 마법사. 성년이....아니라니....난 하프 엘프인가 했는데." "그렇게 안 보이는 것은 제 탓이 아닙니다. 공작님. 그런 질문을 많 이 받고 있지요. 진은 인간입니다." "허허...참. 흠. 그렇더라도 내가 본 영애 정도의 인물이라면 성년이 든 아니든 부모님의 영향 아래에 있지는 않을 것 같은데... 내 생각 이 틀리지 않을 것이라고 보오. 영애." 농담처럼 말하지만 분명 진담인, 공작의 대답을 기다리는 말에 진 은 일이 너무 크게 번졌음에 얼굴이 따가워졌다. 파키오와 같은 생각은 권력계층에서 더 빈번할 수 있을 테니. 공작의 호위기사들과 마법사들과 정령사는, 진이 어떤 대답을 할 것인지 눈을 빛내고 있었고. 블루는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하프를 만지작거렸고, 공자는 얼굴이 붉어지긴 했지만 시선을 돌리지 않고 있었다. 유독 와이즈만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공작님. 너무하십니다. 레이디께 제가 가진 호의가 얼마나 간절한 데 공작님께서 먼....." '엇. 저 검은 드래곤이 올가미를 씌우려 하네.' "공작님. 너무 영광된 제의이오나, 전 부족한 게 너무 많아 감히 사 양하고자 합니다. 제 무례에 부디 목은 치지 마십시오." 비슷한 투로 농담처럼 대답하는 진에게 공작은 빙긋 빙긋 웃었다. "내가 목을 치려해도 안 대 줄 것 같으오, 영애. 성에 들어와 느끼 지 않았소? 영애는 내 보물 창고만 턴 것이 아니라, 내 주민들의 신임까지 거둬갔는데 말이오. 난 손해가 너무 커서 심히 가슴이 아 프오." '이 아저씨. 꽤 끈질....생각이 있네. 음. 공왕 할 만 하다. 인정하지.' [좋겠구나, 진. 그래 공자비 해라. 그 정도도 괜찮은 자리지.] 딴 곳 보며 빈정대는 와이즈에게 진은 눈을 찌푸려 주고 대답했다. "공작님. 현명하십니다. 절 묶어 두시면 분명 오니가라에 해 되는 일은 없겠지요. 하지만 전 여행 중이고 여행을 그만 둘 생각이 없 습니다. 귀향을 미루거나 그만 둘 형편도 아니지요. 공작님과 공자 님을 두고 택하라고 하신다면 물론 전 공작님을 택하겠지만 이곳에 서의 제 자리는 제가 원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제의는 감사하나, 정 중히 사양하겠습니다." [너. 중년 취미가 있었냐?] '와이즈. 그만 해. 정신 사나워. 봐, 공자는 십대잖아. 십대가 더 무 서운 법이야.' [....무서워?] '더 까다로워진다고.' [...........] 공자는 얼굴이 더 빨개져서 눈을 내리깔았다. "그것 참....." 아들보다 자신을 택하겠다는 말에 눈을 껌벅대다, 어쨌든 거절이 분명한 말에 공작은 다른 수가 있나 생각하려 했지만. 그 생각은 곧 차단되었다. "미아레나 폰트 오니가라 공녀님이십니다." 집사의 조용한 알림 말과 함께 응접실로 공녀가 들어왔다. 상복 같은 느낌을 주는, 보석 장신구를 뺀 검은 드레스를 입고 금 발 머리를 여러 갈래로 세심하게 땋아 머리를 장식한, 그 언뜻 눈 에 띄지 않는 치밀한 단장이 깔린 공녀의 분위기에서 진은, 자신에 게로 향한 어설프게 가려진 적대감을 쉽게 캐치했다. '공주님. 무서워라~ 죽이지만 말아주세요.' [............] [66] 9-5. 말괄량이 길들이기. 모두와 인사를 나눈 후 미아레나는 정령이 진의 마법자루에 옮겨 담아 한쪽에 치워둔 노획물과 수거되지 않은 궤짝을 힐끗 보고, 싸 늘한 표정으로 문가에 대기 중이던 자신의 시녀에게 '그것'을 가져 오라고 지시했다. 시녀는 하인들에게, 문 밖에 두었던 가로 1미터 길이의 보석 궤짝을 응접실 안으로 옮기게 했다. "이것은 제 돌아가신 어머니가 제게 물려주신 어머니의 체온이 담 겨 있는 유. 품. 입니다. 비록 먹지 못해 돌에 불과하다는 취급을 받게 되었지만 영애께서는 오니가라의 반을 요구 하셨으니, 제 어 머니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유산임에도 제가 가지고 있어서는 안되게 되었군요. 받으시지요. 승전을 하셨으니 전리품으로 챙기셔 야 지요." "누님!" "공녀야....." "제 말이 틀렸습니까? 그것도 전쟁이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아 버님. 아버님이 지셨다니 승전한 영애께서는 당연히 전. 리. 품으로 오니가라의 어떤 것도 요구하실 수 있지요. 협상금이라는 허울 좋 은 명목을 거론할 필요가 뭐 있습니까. 이 패물들은 모두 제 지참 금이 될 것으로 물려받은 것들입니다만. 오니가라 전체를 빼앗겨 이름뿐인 공주가 되는 것보다는 낫겠지요. 아니, 오히려 이 정도로 봐 주신 것을 감사히 여겨야 하는 건가요?" 진은 옅은 갈색 눈동자를 활활 태우며 예의를 갖춰 싸움을 걸어오 는 공녀에게 친절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공녀님." "............" 진의 거침없는 대답에 말문이 막힌 공녀는, 진이 발치에 놓여 뚜껑 이 열린 채 무지개 빛을 뿌리고 있는 장신구를 들여다보다가 짙푸 른 사파이어 목걸이를 하나 척 꺼내어 목에 걸려고 하는 것을 보고 폭발할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제가 도와 드리지요, 레이디." 빙글빙글 웃으며 클레이스가 진의 목 뒤에서 고리를 걸어 주었고, 그 모양을 보며 미아레나는 눈에서 불똥이 튀는 것 같았다. "영애께서는 북 대륙 야만족 출신인가요?" "미아레나 공녀. 언행을 삼가 하거라!" 진은 억눌린 공녀의 질문에 다정하게 들릴 정도로 부드럽게 대꾸했 다. "아닙니다, 공녀님. 저는 동 대륙 드리얀 출신이지요." 흔쾌히 대답하는 진에게 미아레나는 다시 머리가 새 하얗게 비는 느낌을 받았다. 싸움을 걸고 있는데! 모두가 보는 앞에서 모욕이 될 말을 노골적으로 뱉고 있는데 진은 응수하지 않았다. "동 대륙의 드리얀국의 영애들은 모두 얼굴이 두껍 나 보군요." "누님." "세미얀! 넌 자존심도 없느냐? 검 한 번 마주 대지 않고 무슨 패전 이란 말이냐. 난 인정 못하겠다. 그런 비겁한 방법으로 치욕을 준 상대에게 고개 숙이진 못하겠다. 그 괴물 뱀이 천년동안 오니가라 에 해를 끼치지 않았는데. 이제 와서 무슨 해를 끼칠 것이라고 모 두 이 영애의 말에 벌벌 떤단 말이냐!" "누님...누님은 혼절하셔서 모두 보시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예의가 아니에요. 진정하세요." "기분이 좋지 않으시면 가셔서 쉬십시오, 공주님. 충격이 크셨을 테 니..." 동생과 동생의 호위기사의 말에 미아레나 공녀는 점점 얼굴이 붉어 졌다. 진은 고개를 숙이고 손등을 펴서 손톱을 들여다보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별다른 감정 표현을 하지 않는 진을 보고 공작은 딸 을 말리려는 시도를 중단하고 원형 탁자의 상석에 앉아 묵묵히 그 들을 지켜보고 있었고, 모두들 안 그런 척 하며 흥미를 띈 얼굴로 공녀와 타국의 레이디를 주시하고 있었다. 공자와 블루만....허둥대는 표정이었다. 진은 그런 응접실의 신사들을 의식하고 속으로 투덜댔다. '그래. 여자들 싸움 보는 것이 흥미로운 일이긴 하겠지.... 와이즈. 공짜를 너무 좋아하다간 대머리 된다는 말을 좀, 이 검은 드래곤에 게 전해줘라.' [클레이스. 공짜 너무 좋아하다간 대머리 된단다. 큭큭큭....] [.............] "미아레나 공녀님. 제가 방으로 모셔다 드릴까요? 안색이 좋지 않 으시니 쉬시는 게...." "클레이스님! 너무 하세요. 제가 여러 번 초대장을 보냈는데, 한번 도 와 주시지 않다가 어쩜, 우리 네카르도와 전혀 상관없는 타국의 귀족 영애를 호위하시고 비중도 없는 작은 소풍에 함께 하실 수 있 나요. 정말 너무 섭섭합니다." "에......" 화살이 갑자기 자신에게로 향하자 클레이스는 멈칫했지만, 공녀는 겨우 말 걸어 준 검은머리의 기사 때문에 용기를 얻었는지, 다시 진에게 표독스럽게 말했다. "도대체 그 많은 재물을 어디에 쓰시려는 지요, 영애. 드리얀은 드 래곤의 수호를 받는다더군요. 드래곤에게 바칠 공양물입니까? 한심 하군요. 이곳에서는 영물을 조종하시지만 자국의 나라에서는 드래 곤에게 어쩔 수 없이 허리를 굽혀야하나 보군요. 아니면 대왕쯤 되 는 거물에게 시집가시고자 지참금 마련을 위해, 타국의 나라에서 약탈을 감행하고 계시는 지요." 진은 와이즈를 흘끗 보고-그는 자신을 거론하는 말에 피식거리며 공녀에게 시선을 꽂고 있었다.-점잖게 대답했다. "공녀님. 저로 인해 받으신 마음의 상처에 심심한 사과를 드립니다. 무조건 잘못했습니다." 공녀는 씨알도 먹히지 않는 싸움에 점점 화가 났다. "잘못을 아신다면 이 우스꽝스러운 일을 뉘우치셔야 하지 않습니 까. 영애?!" 진은 한숨을 쉬었다. 공녀는 싸움을 그만 둘 생각이 없었다. 진은 드레스 자락을 잡고 샌들 신은 발을 약간 내밀어 발치에 놓여 있던 궤짝을 한 쪽으로 밀어 차냈다. "탕-!" 진에게 채인 보석이 가득 든 무거운 궤짝은 응접실 저 끝 벽까지 밀려가 벽에 부딪혀 소리를 내고, 뚜껑이 열려 있었던 탓에 몇 개 의 작은 장신구들이 튀겨 바닥으로 떨어졌다. 기사들은 눈을 깜박이는 정도였지만, 마법사들은 움찔했다. 마나 유동이 느껴지지 않았다. "............." "제가 잘못했다고 사과 드린 말은 다른 게 아닙니다, 공녀님. 공녀 님을 이용하여 수치를 준 점에 사적인 사과 드린 것이지. 오늘 있었 던 일에 잘못을 떠올릴 수 없군요. 전쟁에서는 비겁한 방법이란 있 을 수 없지요. 어떤 수단도 정당화될 수 있습니다. 제겐 가장 빠르고 효율적인, 최선의 전개였지요. 첫 질문부터 대답해 드리지요, 공녀 님. 한번만 말씀드릴 테니 잘 들으세요." 진은 의자에 앉았다. 미아레나는 진이 발로 가볍게 찬 듯한 궤짝이 저 멀리 밀려나자 조 금 놀랐지만 그녀의 마법사가 마법을 쓴 것으로 이해했는지 당당하 게 진의 맞은편에 앉았다. 신사들도 자리에 앉았다. 진은 원형 탁자에 미아레나를 바로 쳐다보고 가르치는 교사처럼 성 실한 말투로 대답을 시작했다. "전리품이라는 말씀은 지당합니다, 공녀님. 전 분명히 오니가라를 대상으로 전쟁을 시도했고 이겼지요. 공정하신 분이라 다행이 공작 님은 약속을 지키셨고 그 정도면 충분하리라 생각했지만, 그렇게 주고 싶어하시니 어머니의 유. 품. 이라 할지라도 기꺼이 받아드려 야지요." 미아레나가 발끈해서 입을 열려고 했지만 진은 기회 주지 않고 계 속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전 분명히 얼굴이 두껍습니다. 도대체 무서울 것이 없는 편이지요. 드리얀의 다른 여성분들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짐작이 지만, 저 하나에 한정된 그 말씀은 인정합니다. 공작님과 공녀님께 서 협상금으로 주신 재물들은 분. 명. 히. 제 쪽이 승전했으니 패전 측의 권리란 있을 수 없습니다.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든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지요." 공작의 표정이 클레이스와 비슷해지고 있는 것을 느끼자, 진은 골 치가 아파 오려고 했다. "이 많은 재물을 어디에 쓰려고 하느냐는 질문에 참고될 답을 드리 지요. 제가 지금까지 배운 것 중 세상살이에 가장 유용할 만한 것 을 고르라면 '돈' 버는 법과 쓰는 법입니다. 전 금화와 보석의 가치 를 압니다. 이용할 방법 또한 너무나 잘 알지요. 가진 사람의 입장 에 서게 되었으니 환원시키는 방법 또한, 이제까지 그래왔던 것처 럼 실행할 것입니다. 전 오니가라에서 전리품으로 챙긴 재물들을 제 힘이 미치는 한, 빈부의 격차를 줄이는데 쓸 겁니다. 답이 되었 습니까, 공녀님?" "......기가 막히군요. 영애는 자신을....." "한가지 빠졌군요, 공녀님. 오니가라를 통째로 챙길 수도 있었습니 다. 자리에 안 계셔서 듣지 못하셨지만 결재를 받은 후 공작님의 제의가 아니었다고 해도, 제가 그러기로 결정했다면 오니가라 쯤은 통째로 삼킬 수도 있었습니다. 이름뿐인 공주로 남지 않게 되었음 을 다행으로 여기셔도 됩니다." 미아레나는 발끝까지 화가 치밀었다. "영애는 자신을 뭘로 생각하시나요?! 하층민들의 권리를 운운하시 던데 그들에게 금화를 나눠준다고 해서 그들이 귀족과 같아진답니 까? 아버님이 인질이 된 저희를 구하고자 영애의 요구에 어쩔 수 없이 응한 것에, 어찌 그런 허황 된 자신감을 가질 수 있답니까! 정 말 세상 무서운 것 모르시는 분이시네요!" "공녀님. 잘못 알아들으셨네요. 한가지 물어보지요. 공녀님의 어머 니의 귀중한 유품을 어디에 쓰실 생각이셨습니까?" "그것은 유품입니다, 영애. 어머님의 유지나 다름없단 말입니다. 어 머님의 유산이라는 것을 내세우지 않는다 해도, 오니가라를 약탈하 는 영애의 행동은 정당하지 않습니다!" 진은 뼈 속까지 귀족인 공녀의 반응에 한숨이 나왔다. "공녀님. 유품이니 간직해야 한다는 말씀은 기특한 생각이지만, 몸 을 단장하고 치장하는 데만 쓰신다면 어머님의 유품에 그야말로 돌 보다도 못한 취급을 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금 화와 보석을 얻길 열망하는 것은 그 색이 아름답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으로 빵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공작은 시종이 앞에 놓고 가는 포도주 잔을 들어 입술을 축였다. 공자도 벌컥...마셨다가 사레가 들렸는지 숨을 멈추고 참느라 얼굴 을 붉히고 있었다. 와이즈는 클레이스 때문에 신경이 거슬려서 진의 연설(?)에 예전과 같은 재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엘프는 인간사의 일에 끼일 수 없음에 눈을 내리고 방관하고 있었다. 그 외 공작성의 근무 자들은 묵묵히 경청하고 있었다. "귀족이란 시중을 받고 좋은 드레스를 입고 손등에 키스를 받아야 하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그것은 허례허식일 뿐이고, 부와 권력이 보장되는 계층이라면 당연히 그에 따른 의무가 따라야합니다. 공녀 님. 태어나서 지금까지 공주로서 우러름 받고 존중받아 온 생활을 하셨다면, 공녀님도 그런 그들에게 무언가 돌려주었어야 했습니다. 지금껏 무슨 일들을 하셨나요?" 미아레나는 노기가 가라앉지 않았다. 체면이고 예의고 모두 던져버리고 이 건방지고 잘난 체 하며 주제 도 모르는 계집애의 따귀라도 올려붙이고 싶었지만, 꾹꾹 눌러 참 아야했다. 감히 이 예의 없는 계집애는 자신에게 오히려 가당치도 않는 잘못들을 지적하고 있었다. "난 배웠습니다, 영애. 농노와 같은 입장이 아닙니다. 난 순수 귀족 혈통이란 말입니다! 난 존재하는 것으로도 의무를 다합니다. 지참금 의 의미를 아시는지요. 부군이 될 분의 힘이 될 것입니다. 오니가라 는 제 미래란 말입니다! 어찌 날 하층민과 비교하는 모욕을 주는 겁니까." 진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공녀님은 지참금이 없으면 시집도 못 갈 정도입니까?" 미아레나는 벌떡 일어났다. 기사들이 한 템포 늦게 따라 일어났지만 클레이스를 비롯한 진의 일행과 그녀의 가족은 일어나지 않았다. 미아레나는 눈을 질끈 감고 다시 앉았고 기사들도 자리에 다시 착 석했다. 진은 한숨을 쉬고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공작을 비롯한 신사들의 주목을 받고 있는 이 바보 같은 대화에, 진은 짜증이 났다. "공녀님께서 배우실 수 있었던 것은 공녀님이 귀족 부모님을 두었 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공녀님은 그것이 당연한가 보군요. 하층민 들은 배우고 싶어도 배울 수 없는 입장에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도 끼니를 때워가며 어떻게든 배워가려 애씁니다. 그들은 그것들을 자 신들의 직접 노력으로 일궈 가지요. 하지만 공녀님은 귀족 아버지 를 둔덕에 스스로의 육체 노동 없이 가정교사를 두고 시중을 받습 니다. 결코 그것은 당연한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영애는! 그렇다면 영애는 혼자 힘으로 세상을 살고 배웠습니까?!" "네. 전 제 힘으로 살아 남았습니다. 공녀님." "........이...." 진은 이 엇갈리고 있는 얻을 것 없는 싸움을 빨리 끝내고 싶었지 만, 해 줄 말이 많은 아가씨라는 생각에 마무리가 쉽게 되지 않았 다. "지참금이라..... 도대체 지참금을 염두하고 청혼하는 귀족에게 시집 을 갈 생각을 왜 하십니까, 공녀님. 인간으로 대우받고 싶은 생각이 없으신 가요?" "영애!" "공주님. 배우셨다면 배우신 것을 배우지 못한 이들에게 쓰셔야 합 니다. 무얼 배우셨는지요. 교양? 수예? 승마? 파티 여는 법? 사교계 에서 우아하게 자신을 어필하는 것? 댄스? 부군이 될 분을 위해 하 는 신부 수업? 그런 것들은 살아가는데 필수 불가결한 배움이 될 수 없습니다, 공녀님. 허식에 불과 하...." "네가 감히!!" 진은 말이 끊기고 대화로서는 아무래도 이해시키기 힘들겠다는 생 각이 들자 공작에게로 눈을 돌렸다. "오니가라 공작님. 협상금에 하나 더 추가하고자 합니다. 반드시 주 셔야 겠습니다." "......무얼 말이요, 영애." "공자님이나 공작님 보다 더 가지고 싶은 것이 생겼네요. 미아레나 폰트 오니가라 공녀님을 주십시오. 전리품으로 챙기겠습니다." 미아레나는 새빨개진 얼굴로 다시 벌떡 일어났다. 신사들은 진의 당찬 요구에 멍해하다가, 헛기침들을 하고 늦게 야 공녀를 따라 자리에서 우수수 일어났지만 몸둘 바를 모르겠다는 표 정들이었다. 공작은 순간 경직되었다가 진에게서 적대감이나 악의가 없다는 것 을 알았고, 어렴풋이 그녀의 의도를 눈치 챘는지 비실 웃음을 흘렸 다. "드리리다, 영애. 오니가라를 몽땅 드리겠다는 데도 철없는 딸만 원 하시니 오히려 섭섭하외다. 버릇없게 굴어도 부디 목은 치지 않으 시길 바라오." "아. 버. 님!!" "네가 그러지 않았느냐, 공녀. 영애는 승전했고 오니가라의 어떤 것 도 요구할 수 있지. 내가 내어놓은 보물들의 반 이상을 되돌려 주 었으니, 대신 답례로 널 넘기겠다. 이 순간부터 네 주인은 진 폰 리 툰 영애시다. 오니가라의 공녀로서 공왕의 명을 받아들여라!" 공녀는 기절할 것 같은 기분에 휘청거려야했다. 오늘 도대체 몇 번을 기절했을 까! 미아레나는 기절하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말도 안됩니다! 어떻게 그런 허무맹랑한 요구에 아버...." "이제 넌 공녀가 아니다. 네 신분은 영애가 결정할 것이다." 공작은 서릿발처럼 명령했고, 미아레나는 수치와 경악으로 얼굴에 핏기가 전혀 남지 않게 되었다. "공작님. 감사히 받겠습니다. 오니가라가 점점 좋아지는 군요." "다행이구려, 영애. 난 지금 최대한 잘 보이고 있는 거라오." 진은 콧 등를 찌푸리며 훗훗. 웃었다. 그리고 공작의 선언이 끝나자 자리에 앉아야 하는지 말아야하는지,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 굴로 허둥대는 신사들을 무시하고 뻣뻣이 서 있는 공녀에게 말해 주었다. "공녀님. 공녀님의 신분은 이 순간부터 노예입니다. 노예에게 공녀 라고 부를 순 없는 일이지요. 이름을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진은 탁자를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되도록 잡고 있는 공녀에게 의 젓하게 명령했다. "노예는 상석에 귀족과 함께 앉을 수 없겠지요, 미아레나... 자리에 서 물러가도록!" "아버님!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습니까!!" "가능하다. 패전 한 측은 더한 일도 겪는다. 오늘의 패전으로 오니 가라는 약간의 재물과, 너 하나로 수습이 되었으니 다행이지 않느 냐." 미아레나는 눈앞이 캄캄해 졌다. 진은 공작의 집사를 불러 부렸다. 미아레나는 조금 전까지 자신이 부리던, 공왕의 명을 받은 하녀들에게 끌려가다시피 해서 응접실을 나가야했다. 말문이 막혀 입만 뻥긋대는 그녀의 뒤를 따라 복도까 지 나갔다가 진은, 집사와 문 밖에 서서 수군거리며 모의를 했다. ".....레이디, 그건...." "집사님. 제 노예임을 공왕께서 증언 하셨잖아요? 제 말대로 해 주 십시오. 공녀님에 대한 권리는 제게 있으니 제 뜻에 따라주시길 바 랍니다. 오니가라의 안주인 아닙니까? 제대로 가르쳐야지요." ".......알겠습니다." 집사는 공작의 성에서 47평생. 진의 요구에 따라, 상상도 못할 일을 추진하기 위해 머뭇거리며 복 도를 벗어났다. * "흠. 영애. 참....딸까지 약탈당하니 정말 허무하구려." "위로해 드리고 싶어도 그럴 이유가 없을 것 같으니 생략합니다, 공작님." "무서운 분이시군요, 영애. 뭐 더 필요한 것 있으시면 말씀하시지 요. 마법자루하나 가지고는 후환이 있을 것 같아서 두렵네요." "에....감사합니다. 마법사님. 주신 다니 받아야지요. 전 마법이나 마 법 아이템에 대해 무지 하니 가지고 계신 것 중에서 쓰지 않고 보 관 중에 있는 아이템이 있으시면 주시지요." "허허허....." 농담 삼아 말을 꺼냈던 성의 마법사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지만 호 의적으로 나왔다. 진은 내친김에 수도의 훼이른 후작 가에 통신도 부탁했다. 메디칼아트 신전의 사제 장과 고위 사제들이 도착하고 진은 일행과 함께 만찬을 위해 연회장으로 옮겨갔다. [와이.....] [시끄럿!!] [...........] '좀생이 노랑 드래곤 같으니라고...' 블루는 탁자에 의자인 듯 존재 감 없이 앉아 있다가 두 인간 여자 의 다툼이 기상천외하게 끝나게 되자, 한숨을 쉬어야할지 갸웃거려 야할지 미소지어야할지 갈등하며 일행과 함께 연회장으로 따라갔다. '아가씨는 순리인가요, 역리인가요....엘프의 시야로는 구별할 수 없 군요....' [67] * 미아레나는 수치심에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결코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단 몇 분전에 공 녀의 신분에서 노예로 추락했다. 공왕의 추상같은 명에 따라, 방금 전까지 자신의 하녀이고 하인들이었던 자들 앞에 누더기 같은 옷을 걸치고 신을 빼앗겨 맨발로 서야했다. 미아레나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그 모든 모욕에 버티고 서서 가만 두지 않겠다는 으름장을 놓았다가, 채찍을 맞았다. 맙소사! .....그녀는 공주였는데! 자신의 하인들이었던 자들에게 채. 찍. 을 맞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겪은 그 모진 일은 오기와 노여움을 불러 일으 켰지만, 단 몇 십 분의 매질에 쉽게 의지가 꺾여버렸다. "죄송합니다. 공...아니 미아레나. 다른 노예들과 같은 취급을 하지 않으면, 그 영애께서 호수에 저희 모두를 그 뱀의 먹이로 던져 버 리겠다고 협박하셔서." "모두가 짰구나! 더러운 것들! 너희의 주인이 그 망할 계집이더냐?! 내가 누구냐! 난 오니가라의 공주다!" 대답 대신 채찍이 다시 날아왔고, 미아레나는 얼굴을 치켜들거나 입을 열 때마다 피하지 못할 그 매질에 엉망이 되어갔다. 미아레나는 증오와 원망과 배신감으로 돌아버릴 것 같았지만, 등에 내리쳐지는 채찍이 너무 아프고 두렵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울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었고 만찬이 거의 끝나 가는 연회 장으로 후식을 나를 것을 명령받고는 악에 받쳐 저항했지만, 끌. 려. 가야했다. * 진은 소란스러운 복도에 신경 두지 않고 계속 말했다. "....인공호흡법은 응급조치에 불과합니다만, 시술이 가능한 경우에 는 가장 효과적인 처치 법이지요. 모두에게 배우게 하셔야합니다. 제가 알려드린 몇 가지 방법은 간단하지만 연습을 하지 않으면 막 상 시술이 필요할 때 오히려 도움이 되지 않고 해가 될 수 있으니 확실히 배우도록 지도하십시오. 숨이 멎은 후 1분 안이라면 대부분 소생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성공 확률이 낮아지고 5분이 지나면 방도를 찾지 못하게 됩니다. 이해하시겠지요?" "흠. 그렇군요. 폐에 공기가 들어가지 못해 심장이 멈춘 것은 죽음 이 아니라 '가사' 상태라...." "인간의 몸은 연구할수록 신비롭지요, 사제님. 죽은 줄 알았던 사람 이 갑자기 소생하는 경우도 찾아보면 있을 겁니다. 마계와 계약한 경우가 아니라, 인체의 밝혀지지 않은 의학 측면에서 부활이 가능 한 일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낡고, 종아리 길이의 짧은 드레스 차림으로. 맨발과 드러난 팔의 채찍 자국과 단장했던 머리가 풀려 엉망이 된 미아레나가 끌려들어와, 연회장의 시중을 들어주고 있는 시종들 옆 에 섰지만, 진은 쳐다보지 않았다. "병을 치료하고 상처를 치료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병의 발발을 예 방하는 노력이 우선 되어야합니다, 사제님들. 청결은 중요한 문제지 요. 부인들의 출산 시 산파가 손을 씻지 않고 아이를 낳는 것을 돕 는 것은 치명적인 감염의 위험이 될 수 있습니다. 하수처리가 제대 로 되지 않거나 방치하는 일들에도 신경 쓰셔야 합니다. 전염병이 란 그런 것들에서 발생하게 되니까요." "콜록....." 사제들은 나이 어린 귀족 아가씨가 출산 과정까지 거론하는 것에 조금 당황해 했다. "사제님. 병은 씻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곳은 물이 많은 곳이니 쥐가 아니라도 돌림병을 걱정해 볼만하지요. 물 도 오염원으로 감염원이 될 수 있으니까요. 환자들을 돌볼 때도 반 드시 끓여서 써야합니다." 미아레나의 일을 미처 알지 못한 사제들은 단시간에 엉망이 된 공 녀를 알아보지 못하고 진과 열심히 대화를 나누고 있었지만, 공작 과 그 외 신사들은 벽에 붙어 서서 새파랗게 질려 있는 공녀를 의 식하고 안절부절 하거나 헛기침을 하거나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저. 레이디....." 공작의 심복이 머뭇거리며 입을 열고 눈치를 주었지만 진은 새침하 게 딴전을 피우다 비로소 발견했다는 듯이 미아레나를 쳐다보며 말 했다. "공작님의 성에서 신세를 지게 되었는데 받기만 해서는 미안하지 요. 내 일손으로 충분히 도움을 드렸나요?" ".....내...가..." 미아레나는 살심이 동해 눈이 뒤집힐 지경이라 얼른 대답을 하지 못하고 말문이 막혀 있었지만, 진은 기다려주지 않고 다시 지시했 다. "아직 부족하군요. 돌아가서 일을 거들도록 도와주세요, 집사님." ".....네, 레이디." 미아레나는 아버지를 간절히 바라보았지만, 공작은 눈도 주지 않았 고 공자도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 끌려나갔다. "흠. 좀 심한 것은 아니오, 영애? ....귀하게만 자랐다오." 진은 협상금으로 사제들에게서 챙긴, 포도주잔 옆의 힐링포션 병들 이 가득 담긴 상자를 톡톡 두드리며 대답했다. "공작님. 전 매질을 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노예와 똑. 같. 이. 대우하라고 했지요. 이곳 노예들도 매질을 당하는 생활을 하나 보군요. 오니가라에서 공작님께서 약속하신 노예와 하층민들의 인 권이라는 것의 의미를 다시 새겨주시길 바랍니다." 공작은 한숨을 쉬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소, 영애. 노력하리다." 사제들은 공왕과 진이 나누는 대화를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웃거 렸다. 진은 일부 굳어진 만찬 석 분위기에 아랑곳없이 후식으로 나 온 고급 케익과 과일즙을 얼려 만든 사각거리는 아이스크림까지, 맛있게 먹어 치웠다. '와이즈. 이 정도로 먹어주었으니 공작도 더 대시할 생각 않겠지? 보아랑 비슷해 보여?" [비슷한 게 아니라 똑같다. 이 엽기적인 여자야.] * 미아레나는 노동을 해야했다. 채찍을 맞을지언정 결코 하지 않으려고 버텼지만, 그녀는 끌려간 지하 감옥의 고문실 입구에서 무시무시해 보이는 고문기구들이 눈 에 들어오자 끝내 굴복해야했다. 미아레나는 자신의 성이었던 그곳. 커다란 주방으로 가서 감자껍질 을 깎고 설거지를 해야했다. 들리지 않는 수군거림과 겉도는 주위 의 눈초리에 수치감으로 죽어버리고 싶었지만 허락되지 않았다. 용병으로 보이는 하인과, 성의 죄수를 다루는 지하감옥의 간수가 채찍을 들고 곁에 함께 미아레나의 곁을 따라다니고 있었다. 성에서 체류하는 사람들의 방에서 수거된 화장실의 요강을 비우고 씻는 일이나 마구간의 배설물을 나르는 일이나, 충분한 데도 일을 시키기 위해 물지게를 지게 하여 물을 떠오게 하는 그 천한 일들을 거부할 수 없었다. 눈이 핑핑 돌 것 같았다. 그녀는 단 한순간도 그 후진 일들을 하는 입장에 서 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자신의 성에서. 자신의 노예와 하인들 앞에서 다리를 드러내고 맨 발로 서서 평소 쳐다보지도 않았던 일들을 해야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엉망이 되어서 연회장으로 불려갔을 때, 항상 아 버지가 겸양해야함을 언질 하셨던 것을 기억하고, 잠깐 벌을 주시 는 것으로 이해해 보려 했지만. 사람들의 태도가 공녀를 대하는 것 이 아닌, 노예를 대하는 것으로 바뀌어 있었고.... 잠시 잠깐 몸을 멈추면 내리쳐지는 채찍의 주인도 감시하는 하인도 그녀의 시녀와 경비기사들도 모두 그녀를 외면하고 있었다. 그곳에 있지만 그녀를 보지 않았다. 공녀는 사라지고 천한 노예여 자만 존재했다. 그녀의 편이.....없었다. 모두 그 검푸른 머리의 계집 명을 받고 있었다. '죽여버리겠어! 죽여버리겠어! 흐으....' 미아레나는 자존심 때문에 울지도 못하고 입술에 피가 나도록 깨물 고 채찍을 피하기 위해 생채기가 생겨 피가 배어 나오는 발을 절뚝 이며 이리저리 불려 다녀야 했다. 그들은 그녀를 '새로 온 노예.' '새 노예 처녀' 라고.....불렀다. 성안의 일꾼들과 기사들과 영지민들은 '명'을 받았다. 그들은 결코 공녀 미아레나를 알아채지 못한 듯 행동해야했다. 그들은 각자의 생각에 빠져 곁눈으로 자신들의 공주를 지켜보고 있 었다. 만찬이 끝나고 자리를 옮겨 이야기를 나누던 사제들이 돌아가는 길 에, 무게를 지탱하지 못해서 비틀거리며 물지게를 지고 걸음을 옮 기던 미아레나를 발견하고 쯧쯧 혀를 차며 신성력을 써 주었다. "............" 그들은 공녀를 알아보지 못하고, 성의 새로 들어 온, 길들여지지 않 아 감시 받는 노예로 착각한 듯 했다. 자신이 공녀라는 것을.....알아보지 못했다! 사제장은 미아레나의 등과 손과 발의 상처를 치료해 주고, '너무 절 망 말거라. 성실하고 착하게 살면 신도 외면하지 않으실 게다.' 라 고 말하고 얼어붙어 있는 미아레나를 남겨두고, 동료사제들과 레이 디 진과의 대화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며 멀어져갔다. 미아레나는 그들을 불러 세울 수도 머뭇거릴 수도 없었다. 위협용으로 바닥을 치는 채찍소리를 듣고 이를 악물며 내려놓았던 물지게를 지고 주방으로 통하는 하인들이 쓰는 뒷문으로 가야했다. 걱정이 되어서 손님들과의 사교자리에서 사제들의 배웅을 이유로 들고 살짝 빠져나와, 그 광경을 본 세미얀은 얼굴과 눈이 붉어져서 고개를 숙였다. * "공작님. 할 일이 생겼으니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내가 있으면 불편하시겠소?" "공작님. 아무리 성왕의 자질이 있는 지배자라 할지라도, 부모 된 입장은 모든 타인과 다를 바 없습니다. 제게 패하신 원인이기도 하 지 않습니까. 보셔서 심려만 드리게 될 일이 될 테니 권하지 않겠 습니다." 공작은 사제들이 떠나고 마법사들과 정령사도 숙소로 돌려보낸 후. 공자와 호위기사들과 함께 진과 그녀의 일행과 찻잔을 마주 두고 있다가, 아들이 잠깐 나갔다 들어와서 내내 고개를 쳐들지 않고 있 는 것을 의식하고 슬슬 걱정이 더해지기 시작했다. '매는 빨리 맞는 것이. 빨리 끝내게 하는 것이 좋은 법이지...' 공작은 진의 말에 대답했다. "내가 자리를 비켜드리리다, 영애." 공작은 인사를 받고 호위기사들과 함께 응접실을 나갔다. 세미얀은 공왕이 자리를 뜬 후에도 그대로 서 있다가 진이 묻는 시 선으로 쳐다보자 제법 단호하게 들리는 투로 대답했다. "저는 남아있겠습니다, 레이디. 누님이 겪는 일은 저 또한 겪어야 할 일입니다. 누님이 아니라 제가 겪어야 할 일이지요. 지켜보기만 하겠습니다." 진은 공왕이 될 과정을 수련 중인 공자에게 약간 웃어 보이고 묵인 했다. "아가씨...공녀님껜 너무 가혹한 징계가 되지 않을는지. 상처가 되실 지도...." "블루님. 징계가 아닙니다. 가르쳐 주는 거지요. 미아레나 공녀님은 받아들일 겁니다. 인간은 상처 입지 않고 어른이 되는 방법을 찾기 가 쉽지 않답니다." "..........." "레이디. 레이디껜 성년이란 잣대를 적용하는 세상관념이 오히려 실례가 되는 듯 하군요." "......클레이스님. 전 꿈속에서 8살에 첫 살인을 했을 때 이미, 아이 로서의 자리를 포기했습니다." "..........." 와이즈는 말 없이 빈 찻잔을 주시하고 있었다. * 미아레나는 지치고 아프고 수치심조차 바닥나고 있었다. 더 성을 낼 일을 찾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적어도 성안에서 노예 와 하녀가 하는 궂은 일은 모두 한번씩 직접 해 보아야했다. 불과 몇 시간 전 시작된 그 더럽고 끔찍한 '노동'은 자정이 되어 가 는 시간까지 피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늦은 아침에 나왔던 식사에 손을 대지 않았음을 떠올렸다. 성안이 갑자기 들쑤셔지고, 클레이스님이 오셨다는 말에 바삐 몸 단장을 하고 말에 올라타야 했기 때문이었다. 클레이스....그도 자신의 편이 아니었다. 아니, 편이라고 할 만한 입 장도 되어 주지 않았다. 그는 그 나쁜 계집애에게 눈을 떼지 못하 고 있었다. 작년. 성년을 맞아 참석했던 국왕의 탄생기념일 기념연회에서 그를 보고 한 눈에 반했었지만, 이제까지 기회조차 잡지 못하고 있었는 데. 오늘. 그 앞에서 망신을 당하고 노예가 되는 꼴을 보여야했다. 연회장에 엉망이 되어 끌려갔을 때 그는 자신을 모르는 사람 보듯. 아니, 하녀를 보는 시선으로 아주 잠깐 쳐다보았었다. 미아레나는 모든 것을 잃었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은 '노예'의 신분이 되었다. 그 계집이! 그 계집이! 자신을! 노예로 만들었다....뭔가 잘못되었다. 이럴 수는 없다... 미아레나는 입술을 꼭 깨물고 물에 퉁퉁 부은 손으로 짚을 뭉쳐 그 릇을 닦다가 '주인'의 부름을 받았다. 그녀는 다시 응접실로 끌려갔다. * 미아레나는 자신의 인생이 가장 밑바닥으로 추락했던 바로 그 곳 에. 원수의 앞에 다시 섰다. 그녀는 동생이나 손님들에게 눈길 주지 않고 진의 얼굴만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굳게 다물고 서 있었다. "미아레나. 신분이 바뀌게 되어 체험해 보신 일들에 뭐든 하실 말 있나요?" "..........." "17세 평생 배웠던 것이, 사람들의 생계에 가장 기본이 되는, 기초 적인 일상에 도움이 되던가요?" "..........." "노예들은 처음 팔리게 되면 3일간 먹지 못하고 말을 듣지 않으면 계속 매질을 당한다고 하더군요. 하루 종일 먹지 못했을 텐데, 배고 픔이 무엇인지 알았나요?" "..........." "호위하고 지켜주던 기사들과 부리던 하인과 하녀들과 보호해 주던 가족의 그늘에서 벗어나, 원래 그 당연하게 주어져 있던 것들이 사 라진 상태에서 겪는 서러움을 느꼈나요?" 미아레나는 대답을 하고 싶지도 않았고, 할 수도 없었다. "아직도 혈통을 중시하는 생각을 버리지 못했다면. 똑 같이 붉은 피가 흐르는 그들을, 신분 차이를 내세워 자신과 다르게 보신다면. 지금부터라도 생각을 달리 해 보세요, 미아레나." "..........." 대답 없이 증오를 담은 눈으로 뻣뻣이 서 있는 노예 공녀에게 진은 한숨을 쉬고, 앉아있던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부족한가 보군요. 그럼 더 체험해 봐야지요." 미아레나는 더 이상 남은 것이 없다고 생각했던 자존심 한 자락을 가슴 깊은 곳에서 긁어모아, 몸을 휙 돌려 나가려고 했지만....그럴 수 없었다. "미아레나. 노예는 노동만 하는 게 아니랍니다. 하루 일이 끝나면 주인의 잠자리 시중도 들어야지요." 미아레나는 일그러져 경직된 얼굴로 진을 돌아보았다. 진은 최대한 진지했다. "아쉽게도 전 동성 취향을 미처 키우지 못해서...흠. 제 일행 신사분 들의 시중을 들도록 하세요. 다행이 전 페미니스트라 선택권 정도 는 드릴 수 있지요. 어느 분을 모실래요?" 새로 날라져 온 와인 잔을 기울고 있던 클레이스는 사레가 걸렸고, 와이즈는 입안에 술이 들어가 있지는 않았지만 클레이스처럼 켁켁 대고 싶었다. 블루는 허둥대야했고, 공자는 벌떡 일어나려다...다시 주저앉았다. 그들은 모두 페미니스트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지만 진 의 말의 의미는 이해했고 각자, 충분히 놀랬다. "날....나를....." "당신을 노예로 부리고 있습니다. 분명히." 미아레나는 수치심으로 다시 혼절하고 싶었다. "저런. 꽤 잘생긴 분들인데. 흠. 미아레나에겐 마음에 차지 않나 보 군요. 이해합니다. 나도 그렇거든요." 와이즈. 클레이스. 블루. 세미얀은. '.............................' "그럼. 다른 신사 분들께 빌려 드려야 겠네요. 에... 그것도 싫으세 요? 하지만 노예의 인력을 그냥 놀리고 있으면 안되니... 그럼. 성에 머무는 동안 친절을 받기만 해서 미안했는데 저기, 제일 부지런했 던 시종의 시중을 들도록 하세요, 미아레나. 주인의 빚은 노예가 갚 는 법이니까요." 미아레나는 이성을 잃었다. 그녀는 의자에 앉아 있는 진에게 달려들었지만 코앞에서 다리가 채 여 나동그라져야 했다. 쓰러졌다가 그녀는 다시 일어서 진의 머리 채를 잡으려고 했다...하지만 다시 저지 당했다. 미아레나는 팔목이 진의 손에 뒤로 잡혀 돌려 세워졌다. "주인에게 대들다니, 벌을 받아야겠군요. 고분고분하지 않은 노예는 모두 그렇답니다." 진은 새파랗게 질려 집사와 함께 벽에 붙어 서서 대기 중이던 시종 들에게 말했다. "성이니 감옥이 있겠지요? 죄수들에게 위로하는 의미로 내 노예를 주도록 하지요. 데려다...아니, 부르는 게 나을라나? 일단 간수를 불 러 오도록 하세요....안 들려요?" 새파래진 시종이 차갑기 그지없는 진의 기세에 엉겁결에 응접실을 뛰쳐나갔다. "죽여버리겠어! 이 망할 계집. 네년을 죽여버리겠다!" "미아레나. 난 당신의 주인이고 당신은 내 노예지요. 죽이고 싶어도 힘이 따르지 않으니 어쩌실 생각인지?" "내가 죽어 마계의 원혼이 되어 네년의 얼굴을 파먹어 주겠다!" 관객들은(?) 모두 끽 소리도 내지 않고 지켜보고 있었다. "흠. 그럼 먼저 죽어야겠군요. 미아레나." 진은 붙잡고 있던 팔목을 가볍게 밀어냈다. 미아레나는 몇 걸음 앞 으로 밀려 바닥에 넘어졌다. 복도에서 서성이던 채찍을 들고 있던 간수가 들어왔다. "자결을 하실 기회를 드리지요. 뭘 빌려드릴까요. 검? 독? 밧줄? 말 만 하세요." "이......" 진은 간수의 허리춤에 꽂아 있는 단검 몇 자루를 보고 달라는 의미 로 손짓을 했고, 그는 머뭇거리다가 두 손으로 그것을 내밀었다. "자요. 미아레나. 자결하시지요." 미아레나는 넘어진 채 진이 내민 단검을 보고 눈빛이 더 사나워져 서 빼앗듯이 집어들어 진을 찌르려했다. 하지만 다시 손목이 붙잡 혀 무기를 빼앗겼다. 진은 일어날 줄 모르고 바닥에 넘어진 채 있는 미아레나를 내버려 두고 의자에 다시 앉아 단검 손잡이를 탁자에 톡톡 쳤다. 일행과 공자의 뚫어지게 꽂히고 있는 시선을 싹 무시하고 진은, 꼿 꼿이 서 있는 험상궂은 얼굴의 간수에게 재고의 여지가 없게 들리 는 목소리로 확고한 의사표현을 했다. "내 노예를 죄수들에게 베풀지요. 데리고 가세요." ".......에...." 미아레나는 참고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며 악을 썼다. "난 노예가 아니다! 난 노예가 아니얏!!" 진은 블루가 눈물을 흘리는 것을 감추느라 손으로 얼굴을 가리는 것을 알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맞아요. 미아레나. 모두 그렇게 생각해요. 노예임을 부정하고 농노 임을 부정하고 그들과 별 차이 없는 생활을 하는 평민들도 자신의 신분을 부정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개개인으로는 힘이 없어요. 지금 미아레나가 그런 것처럼, 저항할 수 없단 말입니다. 그것을 아셨어 야했어요. 지배자란 그런 그들을 이끄는 존재 에요. 귀족이란 그런 그들을 동정하고 다독이는 존재여야 합니다. 그들 희망의 구심점이 되어야해요. 그렇지 못한 귀족은 귀족이 아니에요. 제물이 된 소년 과 소녀의 마음을, 그들의 입장을 헤아려 주셨어야 했습니다." ".....흐으으윽...윽...." "선택하세요, 미아레나. 기회를 한번 더 드리지요. 진짜 노예가 되 어서 감옥으로 가셔서 죄수들의 놀이 감이 되실 것인지. 아니면 내 가 초대한 손님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실 것인지." ".............." [무서운 여자다.....] [....시끄러.] 블루는 창백하게 질려서 손바닥으로 눈 주위를 더듬고 있었고, 공 자는 말문이 막혀 두 손을 꽉 맞잡고 있었다. [68] * 담당하고 있던 일을 끝낸 성안의 일꾼들이 우루루 응접실로 들어왔 다. 미아레나는 눈물을 깨끗이 훔치고 굳게 일어서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평민으로 성에서 일하는 브루조아(성벽 안에 거주하 는)였지만, 허름한 차림새로 비슷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었다. 진은 의자에 앉은 자세로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오늘 오니가라 공녀님은 제 전리품으로 노예가 되었습니다. 몇 시 간에 불과했지만 여러분이 평소에 하시는 일들을 몸소 직접 해 보 셨지요. 미아레나는 지금 이 시각에도 여전히 노예입니다. 여러분들 의 공주님이셨지만 지금은 아니지요. 그동안 성에서 일하고 지내시 면서 17년 동안 공주님이 커 가는 것을 지켜보셨을 겁니다. 17년 동안 공주님께 섭섭했던 일이나, 바라고 싶었던 일이 있으셨다면 기회를 드릴 테니 지금 말하세요." "..........." 그들은 모두 머뭇거렸다. 미아레나는 진의 말에 얼굴이 붉어졌다 파래졌다했지만 고개를 늦 추진 않았다. 그들은 낯익은 일꾼들이었다.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지 만 어릴 때부터 성안에서 가끔씩 보았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여러분. 말하지 않으면, 요구하지 않으면, 어떤 주인도 미리 알아 차리고 배려해 줄 수 없습니다. 원하고 바라는 것들이 있다면 입을 열어 요청해야합니다. 그것이 기본이지요. 가진 자의 입장에 있는 사람들은 여러분의 기분과 꿈과 마음을 언급 없이 저절로 헤아려 줄 수 없습니다. 겪지 못하기 때문에 모른단 말입니다. 이제까지 여 러분의 주인에게 무언가 해 달라고 목소리 높일 수 없었다면, 지금 기회가 왔으니 말씀하세요." "..........." 그들은 고개를 숙였다 들었다 옆을 보았다 하며, 말 없이 허둥대었 고. 진은 피곤하고 잠이 와서 빨랑빨랑 진행코자 한번 더 입을 열 었다. "한사람 앞에 무조건 한 가지씩 말하십시오. 옛 미아레나 공녀에게 서 얻었던 어떤 느낌이나 생각도 좋습니다. 말하지 않는 분이 한 사람이라도 계시다면 미아레나는 노예신분을 벗지 못할 겁니다. 그 녀를 주인으로 여기시고 다시 공녀의 신분으로 복귀하게 되시길 바 라신다면 모두 한 마디씩 하셔야합니다. 입을 열지 않는 분이 계시 면 그녀가 그대로 노예인 채 여생을 살게 되길 바라시는 것으로 알 겠습니다." 미아레나는 눈을 감았다. 그들은 입을 열기도 막막하고, 그렇다고 침묵할 수도 없게 되었다. 한동안 정적이 감돌았다. 가장 먼저 말문을 연 것은 공녀의 방 청소담당 하녀였다. "....저는...." 공녀와 비슷한 나이의 소녀에게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녀는 얼굴이 붉어져서 눈을 좀 내리깔았지만 중얼거리듯 말을 꺼냈다. "전 2년 동안 공녀님 방을 청소하고 몸종으로 일을 했습니다. 공녀 님은...저...제가 하는 일은 당연합니다. 일거리를 주신 점에 항상 감 사드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 저는..." "후환 없을 테니 말하세요. 아가씨." 그녀는 밝은 남색 드레스를 차려입고 남청색 눈동자에 관대함을 담아 되묻는 진을 붉어진 얼굴로 바라보다 다시 용기를 내는 표정 으로 입을 열었다. "제 이름은 애니나입니다. 2년 동안 공녀님은 제 이름을 한번도 묻 지 않으셨습니다. 저는....무언가 시키실 때 이름을 불러주셨으면 하 고...." 미아레나는 그녀보다 더 얼굴이 붉어졌다. 진은 와이즈의 눈길이 잠깐 천장을 향했다가 돌아오는 것을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다음 분?" 다시 잠깐의 침묵이 지나고 중년의 나이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말을 꺼냈다. "전 주방에서 잔일을 돕고 있습니다. 공녀님은 저기 식성이...아니 입맛이..아니...." "품위 있는 말 고를 필요 없어요. 알아들으니까. 그냥 말씀하세요, 부인." 그녀는 '부인'이라고 불러주는 진에게 눈물을 글썽여 보이고 대답 했다. "언젠가 공녀님 아침식사에 나갔던 요리에 벌레가 씻겨지지 않고 섞인 일이 있었습니다. 야채를 씻는 일을 했던 저는 그 날 모. 몹시 야단을 맞고 주급으로 받아야했던 일삯을 받지 못해서...몇 일 동안 아이들을 굶겨야했습니다. 죄. 죄송합니다. 공녀님. 사과를 드리고 싶었지만...저기..만나 뵐 수도 없었습니다." 미아레나는 얼굴이 더 빨개졌다. "다른 분?" "....저는 마구간 지기입니다. 오랫동안 말을 돌보는 일을 하고 있습 니다. 예전...공작부인께서 돌아가시기 전, 공작님께서 새로 구입한 말들을 구경오셨다가 공녀님께서 조르셔서 안장을 얹어드린 일이 있습니다. 공주님은 그때 어리셔서 큰말을 타기엔 좀 위험해서 순 한 말을 골라드리려 했는데...기다리지 않으셨다가 길들여지지 않은 말의 발굽에 채일 뻔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벌을 받고 3일 동안 갇혀서 반성해야했습니다. 죄..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었지 만...." 미아레나는 눈까지 빨개졌다. "저는....흑..." 10대 후반으로 보이는 하녀는 마구간 지기의 말이 끝나자 입을 열 었다가 울음을 삼켰다. "말씀하세요, 아가씨." "....저는 언젠가 공녀님께서 꽃구경을 가실 때 따라 간 적이 있습니 다. 공녀님의 머리카락이 나뭇가지에 걸려서 다시 다듬어야 했기 에...제 리본을 빌려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전 공주님께서 제 리본을 다신 것을 보고 기. 기뻤습니다. 돌려주지 않으셨지만. 공주님 마음 에 드신 것으로 알고 친구들에게 자랑했었지요. 하. 하지만 그 리본 이 공주님의 방에서 치워진 쓰레기에 섞여 나온 것을 보고....흑...그. 그것은 제 어머니께서 성년식 때 푼 돈 모아 사주셨던 것..이었는 데. 그 후 바로 돌아가셔서...제겐 몹시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전..." 미아레나는 얼굴이 파랗게 되었다. "저는 집이 좀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1~2주에 한번 집에 다니러 가지요. 몇 주전 공작님께서 집사님과 함께 성을 비우셨을 때... 저 는 집사람이 진통이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공작님과 공자님이 계시지 않아서 일을 쉬고 말을 빌리는 것을 허락 받기 위해 공녀님 을 뵙길 청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날 공녀님은 바...쁘셔서 만 나 뵐 수가 없었습니다...저는 아내에게 아이를 낳을 때 꼭 옆에 있 겠다고 약속했는데...지킬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진은 더 이상 독촉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들은 돌아가면서 한가지씩 공녀로 인해 가슴 아팠던 일상들을 들 춰 목소리를 내었고 미아레나는 딱딱하게 굳어 얼굴이 질려 있었 다. "저는. 영애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하인 남자의 말에 진은 열심히 졸음을 쫓으며 듣고 있다가 잠이 번 뜩 깨었다. "에..... 말씀하세요. 목 안 칠 테니까요." 웃음이 감돌았다. 그는 머리를 꾸벅 숙이며 대답했다. "전. 성에 있는 마법이 걸리지 않은, 일꾼들을 위한 식료품 저장실 을 지키고 있습니다. 쥐를 없애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가씨. 아니, 레이디. 정말...고맙습니다. 그동안 저흰 잠을 거의 자지 못했습니다. 오늘 레이디께서 오신 후로 쥐가 완전히 사라져서.... 모두들 너무 고맙고 기뻐서...사실은 모두 그 말을 드리기 위해 집사님이 부르신 다고 하시길래 왔습니다. 정말...고맙습니다." "공작님께 사례로 두둑이 받아 챙겼으니 그렇게 고마워 하지 않아 도 됩니다. 고마워 해 주시니 양심이 좀 찔리네요." 넉살 좋게 대답하는 진에게 모두 웃어 보이며, 감사를 담아 고개를 까닥였다. 미아레나는...비참했다. 그녀의 17년의 결과는 부끄러움과 죄스러움 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하인이고 하녀였다. 그들의 마음을, 그들의 입장을 생각할 시도조차 못했었다. 지금...그들은 자신으로 인해 마 음 아팠던 일을 털어놓고 있었다. 미아레나는 알지 못했다. 그들도 사람이었는데. 그 당연한 일을 생각해 내지 못했다. 하지만 저 여자는....만 하루도 되지 않은 시간동안 오니가라에 머물 고 있는데 자신과 반대로 '감사'를 받고 있었다. 미아레나는 고개를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마지막 한 사람이 남았다.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그녀는 하녀라기 보다는 시녀로 보였다. 깔끔하고 단정한 드레스 차림에 묵묵히 동 료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마지막 차례가 되어서도 입을 열지 않고 있음에 시선이 집중되었다. "아가씨는 공녀님이 다시 돌아오길 원치 않으신가 보군요." "..........." 그녀는 얼굴이 붉어 졌다. "저는....공녀님께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벌을 받아야할 쪽은 제 쪽 이니까요." "....뭐, 말못할 죄라도 저지르셨어요? 이런 기회가 또 오리란 장담 은 못 드려요. 잘못한 게 있다면 이번 기회에 면죄부를 받는 셈치 세요. 오니가라 성에서 미아레나 공녀님을 다시 보고 싶지 않다면 굳이 이야기하실 필요는 없겠지만 요." "저. 저는...." 그녀는 붉어진 얼굴을 손으로 가리고 주섬주섬 말을 꺼냈다. "저도. 공녀님이 아니라 영애께 드릴 말씀이...." ".....말씀하세요." 공자가 헛기침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대답 했다. "공작님이 더 좋....아니, 공작님께서 영애께 청혼을 하셨다고 들었 습니다. 저는..." 진은 눈 사이즈를 조금 키웠다가, 웃음이 삐져 나와 얼굴을 돌려 표정관리를 해야했다. "에...아가씨에 대해 여기 계신 분들은 모르나요?" ".....알고 있습니다만.." "제가 들을 이야기가 아니네요. 전 공작님의 제의를 받아들일 생각 이 없으니까요. 전 내일 오니가라를 떠날 겁니다. 제 보복이나 처분 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요, 아가씨." 그녀는 얼굴이 더 빨개져서 더듬거렸다. "그. 그럼 공주님께 사죄를...." "사죄라니? 대상이 틀렸네요. 성년도 지난 자식이 부모의 사생활에 간섭하긴 좀...그렇지 않나요? 공작님과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세요." "예에..." 그녀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고개를 숙였다. '후후...재밌는 곳이라니까.' [............] 진은 미아레나를 향해 말했다. "미아레나. 모르고 하신 일은 죄가 되지 않지만, 오늘 인권 없는 노 예 신분으로 몇 시간 보내시고 이분들의 이야기를 들으셨으니, 미 아레나 당신이 할 일을 이제 아시겠는지요." 미아레나는 얼어붙어 서서 그들의 이야기를 끝까지 묵묵히 듣고 있 다가, 진의 말에 움찔했다. '내가 할 일.....' 미아레나는 조금 전까지 '그들' 이었다. 아니 그들 보다 못했다. 그녀는 무엇이 잘못 되었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바로 자신이...잘못 되어 있었다. 가슴속에 뭔가가 치밀어 올랐다. 미아레나는 모여 서 있는 그들을 향해 드레스 자락을 잡고 깊게 허 리를 숙였다. "....미안합니다. 미안....했습니다." 자신들의 주인에게, 절을 받고 사과의 말을 들은 그들은 다시 허둥 대었다. 공녀의 몸종과 하녀들이 앞으로 나와, 펴지 않고 숙이고 있 는 공녀의 몸을 일으켰다. "아니에요. 공주님. 괜찮습니다." "그래요. 괜찮아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저희들의 공주님이신 걸요." "우시지 마세요...." 미아레나는 하녀들의 위로 말을 듣자, 참지 못하고 소리내어 울음 을 터뜨렸다. 미아레나는 다시 공녀로 받아들여졌다. * 묵묵히 서 있기만 하던 집사가 일꾼들을 물렸다. 그들은 모두 허리 굽혀 인사를 하고 응접실을 나갔다. "앉으세요. 공녀님." "............" 미아레나는 눈물 자국으로 얼룩이 진 얼굴로 원탁, 진이 빼어내 준 옆자리에 마주 앉았다. 미아레나는 진의 얼굴에 시선을 향하지 않 았다. 동생과 손님들을 향하지도 않았다. "사과 드릴게요. 공녀님. 주제넘게 공녀님의 가치관에 관여해서 모 두가 보는 앞에서, 두고두고 모욕이 되고 가슴 아픈 일들을 겪게 한 것을 요. 그들은 모두 제 지시에 따라 '명'을 받드는 입장이었으 니 공녀님께 매질을 한 것이나 모른 척 한 것이나 귀족으로 대우하 지 않았던, 조금 전 몇 시간의 행동을 잊어 주시길 바랍니다." 미아레나는 일그러진 얼굴로 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전 그런 일들을 겪은 적이 없습니다. 영애." "감사합니다." 미아레나는 눈을 감았다. 이 여자는 누구일까. 그녀는 오니가라를 하루 나절 온통 뒤흔들었 다. 자신의 운명까지도 수월하게 손아귀에 쥐고 비틀었다. 미아레나는 그녀를 상대로 아버지보다 더 큰 참패를 했다. 부끄러움과 원망과 배신감 수치심 후회 고통 모멸감 증오..... 그 모든 어둔 감정을 덮어씌우듯 느끼게 해 준 그녀가 너무 미웠 다. "미아레나 공녀님. 이해합니다. 제 방법이 좀 과격했지요. 시간에 쫓기다보니 약초가 아닌 독초를 편법으로 썼습니다. 잊으시려고 해 도, 제가 드린 악감정은 쉽게 지워지지 않을 겁니다." 진은 간수에게 받아 탁자에 올려 두었던 단검의 자루 쪽을 공녀에 게 내밀었다. "..........." "화는 쌓아 두면 병이 되지요. 전 이곳에서 원한을 만들어 방치해 두고 싶지 않습니다. 다시 카르마(업보)에 당하는 것은 결코 사양하 고 싶으니까요. 찌르셔도 됩니다, 공녀님." ".....찌르라고요?" 블루와 세미얀 공자는 다시 안절부절 했다. 조롱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는지 일그러진 얼굴의 공녀에게, 진은 다 시 말했다. "복수하셔도 된다고요. 대신. 저로 인해 가지신 원한은 이 시간 부 로 깨끗이 버려주십시오. 빚을 남겨두고 가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청산하는 의미에서 공격 기회를 드리지요. 피하지 않겠습니다." 미아레나는 손에 쥔 단검을 내려다보았다. 찌르고 싶었다.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 "근성 없는 공. 주. 님. 이신가요?" 진과 마주 앉은 자리는 무릎이 스칠 정도로 가까웠다. 미아레나는 의자에 앉은 자세 그대로 서슴없이 진의 배에 단검을 찔러 넣었다. "누님!" "아가씨!" ".........." '우....근성 있으시네....으...하필이면....' [............] 미아레나는 혼란스러웠다. 정말 피하지 않았다. 악의 어린 충동으로 단검을 든 손에 힘을 주었을 때. 미아레나는 부엌에 끌려가서 해 보지 않은 일 한가지를 떠올릴 수 있었다. 그녀는 사람은커녕, 요리되지 않은 동물의 살에도 칼을 대어 본 적 이 없었다. 하지만 '푹'하고 박힌 검은 고기 살을 찌르는 느낌을 주 었다. 그녀는 자신이 한 일을 깨닫고 벌떡 일어났다가 진의 배에 꽂힌 단 검 자루를 보고 아득해져서....그 날, 마지막으로 혼절했다. "어....다짐을 받아야했었는데...또...기절하시네...콜록.." 진은 블루가 경악에 찬 얼굴로 옆에 서서 단검을 빼내려는 것을 손 을 내저어 저지했다. 공자도 원탁을 돌아와 기절한 누이를 부축하 고 하얗게 질려 진을 쳐다보았다. "공자님. 공녀님을 방으로 데려가셔서. 큼. 쉬시게 하세요. 오늘 사 교모임은 이것으로 끝내도록. 하지요." "진. 안 빼냐?" 와이즈의 물음을 무시하고 진은, 넓은 응접실을 불안한 걸음으로 가로질러 창가로 가서 섰다. "뭐 하는 거냐?" '말시키지 마. 아프니까...' [...........] 진은 단검자루를 잡고 조심스럽게 심호흡을 하고, 최대한 빠르게. 박혔던 길을 따라 뽑아내었다. '윽....' 피가 터져 나와 드레스를 적셨다. 진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욕지기를 참았다. "아. 아가씨. 치료를...." 블루가 치료마법을 시행하려고 하는 것을 다시 손을 내저어 물러나 게 했다. 그리고 기다렸다. "치료를! 아가씨. 치료를 받으세요!" 엘프는 계속 마법을 거절 당해야했다. '.....됐다.' 찢어진 내장과 피부가 재생되었음을 느끼자 진은 열린 창문으로 솟 구쳐 나갔다. [어디 가냐?] '토하러 가! 위장을 찔렸어. 잔뜩 먹었는데, 제길....' [.............] "마. 마법사님...." 블루는 새파랗게 질려서, 진이 피를 뿌려두고 떠난 창가에 서서 허 둥대다가 와이즈를 돌아보았다. "괜찮을 겁니다. 검이 배에 박혀서 구토를 느끼나 봅니다." "치료를...." "..........." 블루는 진이 사라진 방향으로 플라이 마법을 써서 날아올랐다. 세미얀은 어리둥절하고 당혹스럽고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가 와이즈의 권유로 겨우 정신을 수습하고 고드름처럼 굳어 있는 시종들을 불러 공녀를 옮기게 했다. * 기운이 쫙 빠져서 터벅거리며 블루와 함께 돌아와 방으로 가는 진 을 알고 있었지만, 클레이스와 와이즈는 응접실에 앉아 내다보지 않았다. 진이 흘린 피는 치워졌고 엘프의 도움으로 치료를 받은 것 으로 해두었다. 시종들을 물리고 둘만 남아 기다리던 그들은 서로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기분이 참 묘하네...." "난 자러 간다." 와이즈는 일어나 문을 향해 걸어갔다. ".....분명히, 죽이지 않고 때리지만 않으면 되는 거지?" 와이즈는 복도로 나가 문을 '꽝' 소리가 나게 닫았다. * 진은 블루의 배웅으로 방으로 돌아와 기다리고 있던 시녀들의 시중 을 거절하고, 블루가 불러준 정령에게 씻겨서 희미한 얼룩만 남은 드레스를 벗어 던져놓고 탈진해서 쓰러졌다. 진은 위장이 요동치고 뒤집히는 것을 눌러 참고 잠이 들었다. [69] 9-6. 천둥을 부르는 소리. "그래서. 영애는 지금 잠이 들었는가?" "네. 공작님." 알렉카스 폰트 오니가라는 공왕의 침실에서 집사에게 보고 받은 일 들에 허탈해졌다. "....대단하지 않은가? 그 나이에 말이야." "대단...하다고 표현하는 것도 부족해 보였습니다, 공작님." "그렇지....참. 내 이제껏 이룬 일이 부끄럽게 느껴질 정도니...하루 동안 그 영애가 오니가라를 뒤집어 버린 일들에 경의까지 드는 군." "......그냥 보내실 겁니까, 공작님?" 알렉카스는 오랜 시간 그림자처럼 자신을 보필해 온 '집사'라는 이 름의 가장 가까운 심복에게 너털웃음을 지어 보였다. "능력이 딸리네. 세미얀은 그 영애를 감당하긴 어리고, 지금으로선 상대도 안 될 것 같고...나도 자신 없네. 날 택한다고 했던 말은. 아 마도 세미얀에게 기대를 주지 않으려는 생각에서 일거야. 미아레나 는 클레이스 경을 마음에 두고 있었지. 그애가 그렇게 화를 낸 것도 그 탓이었을 텐데...두렵다는 생각까지 드네. 글쎄. 설사 국왕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일거라는 생각이 드는군. 누군가의 수족으로 부려질 인물이 아니야. 자신이 원했다면 오니가라를 통째로 삼킬 수도 있었 다고 했었지...그건 허풍이아닐 거란 생각이 들어." "............." "그 영애의 신분이 의심스러워. 후작 가의 영애가 맞을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요. 공작님. 전, 드리얀에서 오래 전에 왕가의 스캔들로 뒤숭숭했던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혹시..." "....버려진 왕녀? 흠. 알 수 없지. 나이로 따지면 가능성이 있는 이 야기야. 하지만 사라진 그 왕녀는 장애가 있었다고 들었네." "대륙, 왕족들의 입방아에 오르던 그 일은 시간이 많이 지났습니다. 사람은 변할 수도 있으니까요. 게다가.... 드리얀은 왕녀에게도 왕위 계승 권을 주는 나라입니다." 알렉카스는 소름이 돋았다. "그렇지. 어쩌면. 정말 그렇다면 대륙 전체가 뒤집어질 수도...." 그리고 점점 생각이 불려졌다. 알렉카스는 망상이라고 치부할 수 없는 짐작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오니가라로는 안 돼. 그 영애는 어떤 신분을 가지고 있든 원한다 면 어떤 나라도 먹어 치울 수 있을 걸세. 적으로 만들면 안 될 가 장 요주의 인물이군." "............." 공왕은 결정을 내렸다. "그 영애의 이상은 '옳은' 것이었네. 능력 또한 있지. 오니가라는 그 녀에게 우호적이 될 걸세." "알겠습니다, 공작님." 알렉카스는 한숨을 쉬었다. 자신이 조금만 젊었으면...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진 폰 리툰은 실제 로 오니가라를 통째로 집어삼키게 되었다. 공왕은 자신의 성과, 자신의 영토의 이름. 폭포와 호수의 이름. ....오니가라의 오래 묵은 옛 의미를 떠올렸다. '천둥을 부르는 소리.' * 진은 늦잠을 잤다. 정오가 다 되어 일어나서 울렁이는 느낌이 가라앉았지만 소화시키 기 좋은 묽은 스프로 아침을 먹고, 드레스를 입히려고 하는 시녀들 을 요리조리 피해 여행 복 차림을 하고 방을 나섰다. "몸은 괜찮으세요, 아가씨?" "네. 괜찮습니다, 블루님. 흠. 지저분한 꼴을 보여서 쑥스럽네요. 하 하하....잊어주시길..." 블루는 진이 성과 가까운 숲까지 뛰어가 나무를 붙잡고 웩웩. 토하 던 광경을 떠올리고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자신의 도움이 필요 없었다. 자신의 마법으로 치명상을 치료한 것으로 성안의 사람들은 알고 있었지만, 그는 마법을 쓸 필요가 없었다. '어떻게 인간이...순리를 벗어난 그런 능력을 가지게 된 것일까...' 블루는 응접실에 함께 있던 와이즈를 의식했고 생각을 접었다. "레이디. 좋은 아침...정오네요. 잘 주무셨나요?" "네. 클레이스님. 와이즈, 잘 잤어? .....뭐 안 좋은 일 있어? 기분이 안 좋아 보이네?" 와이즈는 대답하지 않고 밤에 불을 밝히던 마법등이 있는 천장으로 눈을 돌렸다. "흠. 레이디. 해명해 주실 일이 있지 않나요?" 진과 일행을 위해 응접실에는 시종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자리하 지 않고 있었다. 진은 원탁에 척 앉았다가-클레이스가 의자를 빼어 주는 일을 포기한 것 같아서 직접.- 클레이스의 말에 눈을 깜박여 보였다. "해명이요?" "레이디. 호의는 고마웠습니다만. 저희에게도 '모욕'이 될 발언을 하 지 않으셨던가요?" 진은 턱을 긁적였다. "모욕....이었나요? 그렇다면 사과를 드려야지요. 죄송했습니다. 칼에 다시 찔리고 싶지 않으니 무조건 잘못을 빕니다." 진이 세 명에게 돌아가며 꾸벅거리며 하는 말에 블루는 미소 지었 고, 클레이스는 눈썹을 치켜올렸고, 와이즈는 못 본 척 했다. "에.....사과가 부족한가요?" "부족하지요. 레이디. 진심으로 하는 것 같지 않은데요?" 진은 클레이스의 말에 블루에게 척 얼굴을 돌리고 진심을 담아 다 시 사과했다. "블루님. 죄송합니다. 엘프에게는 정말 실례가 된 발언이었겠지요. 정말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아가씨. 아가씨의 '계획'이나 '작전'이었겠지요. 실제 제 게 무슨 피해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으니까요." "용서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블루님." 와이즈와 클레이스는 비슷한 표정으로 서로 고개를 마주 끄덕이는 둘에게 눈썹을 모아 보였다. 진은 그런 두 드래곤을 모른척했다. '저게 정말 죽으려고 안달이 났나?!' 와이즈는 부아가 치밀었지만 자신이 나서지 않아도 바보 깜둥이가 나설 것 같았기 때문에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레이디. 저희에겐 미안하지 않은 이유를 들어도 되겠습니까?" 진은 웃음을 지우지 않고 태클을 걸어오는 검은머리의 기사에게 순 진한 표정으로 마주 웃어 보였다. "클레이스님. 정말 '모욕'이었다면 사과 드립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 지 않습니까? 두 분은 '꿈'을 꾸고 계시고 충분히 상황이 흥미로웠 을 것 같은데...아닌가요? 모욕이라기 보다는 '자존심' 문제에 가깝 지 않을까 짐작되는데. 전 무모하고 앞 뒤 없는 성격이라, 두 분에 게만큼은 처세에 부족함을 채우지 못해서 보인 한 단면이었습니다. 해명드릴 말을 찾기가 모호하네요. 하지만 아무튼 죄송했습니다." "............." 블루는 무슨 표정을 지어야할지 심각하게 고려 중이었다. [그러니까...'유희' 중이고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란 거냐?] [............] 와이즈는 '그것만이 아니고! 그 뒷말도 말이다!' 하고 말하고 싶었 지만 진의 말대로, 가진 자존심상 다문 입을 열지 않았다. '와이즈~ 미안해~ 미안. 말실수 했나봐. 짜증이 났었거든. 화 풀어 라.' [............] '날 잡아서 족쳐야겠군. 망할 계집애.' 클레이스는 버르장머리 없는 인간 여자에게, 제법 흥미 있었던 여 러 광경을 구경시켜 준 대가로 타협해 주기로 했다. "레이디. 이해하는 것이 지금으로선 어려운 것 같지만, 더 이상 언 급은 않지요. 대신 한가지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무얼요?" "레이디의 버릇 말입니다. 곤란하거나 곤혹스러운 일에 항상 턱을 만지시더군요. 버릇이야 이유 같은 것이 없을 수도 있지만 궁금했 거든요." 진은 무의식적으로 턱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가 다시 얌전히 탁자에 두 손을 올렸다. "에....별거 아닙니다. 턱을 다친 적이 있거든요." "어떻게 다치셨는데요?" ".....턱이 깨진 적이 있습니다. 낫는 동안 무척 가려웠지요. 완쾌가 된 후에도 그 느낌이 남아서 버릇이 되었지요. 신경이 곤두서거나 하면 그때의 느낌이 되살아나서요." 진은 부상 원인에 대한 호기심으로 눈을 반짝이는 타 종족들을 패 주고 싶었다. "어쩌다 다치게 되셨는데요, 레이디? 레이디 정도의 무예를 가지신 분이 그렇게 큰 부상을 당하다니 상황이 궁금하네요." "......사고였습니다." 와이즈는 씨-익 웃었다. 드디어 조것이 거짓말을 하는 구나! 괜히 통쾌한 기분이 들어서 캐묻고 싶었지만 진은 노크 소리와 함 께 집사에게 안내 받아 들어오는 공작과 공자에게 홱 고개를 돌리 고, 일어나서 씩씩하게 인사를 하더니 이미 지나간 화제로 삼아 버 렸다. '뻔뻔한 것 같으니라고. 두고 보자.' * "미안하오, 영애. 공녀가 철이 없어 저지른 일이오." "공작님. 그럴 만 했으니까요. 게다가 제가 부추긴 일이었습니다. 미안하실 것 없지요." 진이 넉살 좋게 웃으며 하는 말에, 공작은 다른 속셈도 섞인 불상 사였음으로 짐작하고 피식 웃었다. 진은 일행과 함께 공작과 세미얀 공자와 함께 이런저런 담소를 나 누고 차를 마셨다. 여행 이야기를 꺼내 네얀과 라돈 영주 이야기와 훼이른 후작가를 거론하고 무언의 협조를 약속 받았다. '오니가라가 아니라 네카르도를 통째로 먹는 구나. 그 물뱀 이상의 식욕이다. 돌연변이 몬스터 같은 여자야. 흥.' 은근 슬쩍 호기심과 호감을 유도하는 진의 화술에 와이즈는 속셈이 뻔히 보여 입을 삐죽였다. 진은 피크닉이 끝났음을 알리고 수도로 돌아가는 일을 허락 받았 다. 성의 정원 딸린 커다란 마당에 공작과 공자와 성의 마법사들과 기사들이 나와 배웅해 주었다. "언제든 방문을 환영하오, 영애. 오니가라는 피크닉 오기 좋은 곳이 니, 또 오셔서 약탈하는 것을 허락하리다." "감사합니다. 공작님. 그럼 부지런히 창고를 채워 두어 주세요." "허허... 참." 진은 호수에서 만났을 때 조롱조의 인사가 아닌, 정중한 태도로 허 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네카르도가 평화로운 것은 공작님과 같은 분이 지배자로 힘을 행 사하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저의 무리한 요구와, 여러 가지 무례가 된 행동들을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니가라가 항상 평화롭고 풍 요롭기를 보아와 함께 기원 드립니다." "...고맙소, 영애. 오니가라는 수호영물을 얻은 셈이구려." "레이디 진. 저희를 일깨워 주신 모든 것들. 결코 잊지 않고 새기겠 습니다. 그리고 수도의 로체스터 백작 가의 무도회 참석하기로 했 으니 작별 인사는 미루겠습니다." '동작 빠르네. 공자.' 모두와 인사를 나누고 돌아서려는데 화려하지는 않지만 단정한 차 림으로 무뚝뚝한 표정의 미아레나 공녀가 걸어와 손에 들고 온 보 석상자를 내밀었다. "돈 쓰시는 법을 잘 아신 다니. 가져가 쓰세요, 영애. 전 지참금 없 이도 시집 갈 수 있습니다." 미아레나의 눈에서 남아 있는 악의를 찾을 수 없었다. 진은 그녀 어머니의 진짜 유품이 분명할 미아레나의 보석상자를 척. 받아들고 눈을 마주치지 않고 있는 그녀의 볼에 냉큼. 입술을 가져다댔다. "영애!" "이미 많이 챙겼으니 키스 값으로 이건 돌려드릴게요, 미아레나." 진은 뻣뻣이 굳어 있는 미아레나가 손을 내밀지 않자 세미얀에게 상자를 받게 했다. "잘 지내요, 내 노예 아가씨." "정말! 당신이란 사람은....!" 진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있는 공작과 공자와, 얼굴이 달아올라 또 기절할 것 같아 보이는 미아레나를 남겨두고. 쿡쿡. 웃음소리를 내며 일행과 성을 나갔다. "레이디...동성 취향이셨나요?" "에...쿡쿡...그랬나 보지요, 클레이스님." "............." 성문을 나서는데, 어제 진에게 협박을 받았던 주민들이 소식을 듣 고 달려와 인사를 했다. 제물이 되었던 아이들의 어머니도 자식들 을 데리고 와서 어제하지 못한 감사의 말을 했다. 진은 그들의 인사에 일일이 답해 주고 웃어 주었다. * 오니가라 호수는 낮 햇살을 받아 파랗게 반짝이고 있었다. 블루가 마법진을 그리는 동안 진은 호수를 향해 드라마 주제곡을 떠올려 노래를 불렀다.(정일영의 Love is) 춤까지 나오려고 하는 것을 주위를 의식해서 자제하느라 바위 위에 앉아서 불렀다. 오늘은 슬프지만 내일은 다를 거야 이 세상을 산다는 게 다 그런 거잖아 언젠가는 내 마음 알아줄 날 있겠지 아파했던 만큼 커다란 사랑 안겨 줄 거야 때로는 모두 잊어보려 달아나지만 어느새 길들여진 나의 지친 가슴은 그리움 너머 너에게로 달려가고 있는 걸 이런 게 바로 사랑인 걸까 사랑은 그런 것 모든 걸 주어도 아직 다 주지 못한 맘에 잠 못 드는 것 이 세상 누구도 알 수 없는 내일 그 누가 뭐라 해도 너 하나만 사랑할거야 너만 바라보다가 잠이 들 수 있다면 정말 내 모든 걸 버려도 행복할 텐데 끌리는 내 마음은 운명이라 하지만 어긋난 저 길을 따라서 멀어져만 가는 너 때로는 모두 잊어보려 달아나지만 어느새 길들여진 나의 지친 가슴은 그리움 너머 너에게로 달려가고 있는 걸 이런 게 바로 사랑인 걸까 사랑은 그런 것 모든 걸 주어도 아직 다 주지 못한 맘에 잠 못 드는 것 이 세상 누구도 알 수 없는 내일 그 누가 뭐라 해도 너 하나만 사랑할거야 항상 널 사랑한다 말하면서도 아픈 니 마음 하나 이해 못했어 다시 한 번만 나를 믿어주겠니 너를 위해 내 모든 삶을 바칠게 사랑은 그런 것 모든 걸 주어도 아직 다 주지 못한 맘에 잠 못 드는 것 이 세상 누구도 알 수 없는 내일 그 누가 뭐라 해도 너 하나만 사랑할거야 "......아가씨 그 노래는...." "에...블루님. 기분이 좋으니까 경쾌한 노래가 생각나네요. 흠. 뭐 남 녀의 사랑을 주제로 한 노래긴 하지만 애들에겐 밝은(?) 노래 불러 주는 게 좋고, 듣기도 좋잖아요." "네...." "듣기 좋긴 하네요, 레이디. 가사도 재미있고요." [.............] 진은 호수를 향해 양아들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보아. 보아. 엄마 간다. 착한 아가. 꼭 부를게. 부르면 냉큼 와야 해? 잘 자~!" [.......응....] 진은 맑은 피리 소리 같은, 호수 안쪽에서 울려나오는 보아의 대답 을 들으며 전리품을 들고 마법진에 올라, 네카르도-네카르도로 다 시 워프 해 갔다. * 진은 아담의 가게에 들러서 와이즈에게 블루와 클레이스를 떠맡기 고 따로 속닥거리다가 훼이른 가를 찾아갔다. 후작가의 저택은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견고한 성이나 다름없었고, 내부에 유독 기사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파키오는 가정교사를 두고 교양과 정치학 역사학 군사학 무슨, 무 슨 학 등등을 과목으로 수업을 시작하고 있다고 했다. 성안의 분위기가 조금 묘하게 느껴져서 진은 머리를 긁적여대었다. "후작님과 다투셨나봐요, 릭페르님?" 릭페르는 진과 일행을 맞아 헛기침을 하고 대답했다. "사소한 의견대립인 정도입니다, 레이디 진. 약속을 지키는데 엔 문 제 없을 겁니다." ".............." '어제 만찬 초대를 미룬 것이 잘된 일이었는지 모르겠네.' 후작은 외출 중이었고 후작 부인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진은 한바탕 한 것으로 보이는, 아마도 릭페르의 승리 쪽으로 기울고 있 는 결과들을 체험해야했다. 후작가의 무뚝뚝한 후계자가 관심을. 아니, 개인 호위 일로 수련을 시작하게 될 거라는 소식으로 진은 호기심과 선망과 질투 어린 시 선을 기사들과 하인들과 하녀들에게서 받아야했다. 훼이른 가는 유달리 사람이 많아 보였고, 진은 구경거리에 가까운 시선을 늘상 의식해야했다. 다행이 릭페르는 정장을 하길 권하지 않았기 때문에 진은 잊은 것 처럼 슬쩍 그 성가신 치장을 피할 수 있었고, 격식이 많이 생략된 저녁식사를 검소하게 누릴 수 있었다. "콜린스. 파키오. 공부 할 만 해?" "네. 레이디. 모든 게 순조로워요. 콜린스와도 화해했어요." "잘됐네. 콜린스는 내일부터 기숙사에 들어가기로 했지?" "네. 레이디." "레이디. 후작 부인께서 편찮으시다니 불편하실 것 같은데 저희 집 으로 가시지요." 진이 대답하기 전에 릭페르가 정중하게 가로막았다. "안될 말씀입니다, 클레이스 경. 저희 집은 댁과 거리가 머니 숙소 를 옮기시는 게 오히려 불편할 일이지요." "저도 레이디께 검술 자문을 구하고 싶습니다. 학교에서 아트 경과 의 대련을 보지 못하고 말로만 들었거든요. 머무시길 청합니다, 레 이디 진." 릭페르와 판박이처럼 닮은 남동생까지 합세해서 클레이스의 의견은 묵살되었다. "저. 흠. 내일 저녁에 무도회가 열릴 텐데 길레스피 백작 가에 가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아, 제가 민트 백작부인께 양해를 구해 두었습니다, 레이디 진. 부 인께서 내일 정오에 준비를 돕기 위해 저희 집으로 오실 겁니다." ".............." "그럼. 저와 블루도 돌아가기 불편하니 후작 가에서 신세를 져도 되겠는지요." ".....그러시지요. 클레이스 경." '무도회 끝나면 떠날 건데, 백작 부인 댁엔 못 가보겠네.' "후작님께선 귀가가 늦으시네요. 성을 비울만한 일이 수도에 있는 건가요?" 후식을 먹으며 묻는 진의 말에 릭페르는 대답했다. "어제 수도에 계시지 않아서 듣지 못 하셨지요. 갑자기 도둑이 들 끓어서 그렇습니다, 레이디 진." "도둑이요?" 진은 짐짓 처음 듣는 다는 무난한 태도로 되물었다. "수도에 있는 귀족 가에 어제, 그제. 계속 도난 사건이 발생하고 있 습니다. 아버님께선 친분 있는 귀족 가에서 도움을 청하셔서 조사 차 나가셨지요." "도난 사건에 불려 가실 정도라니. 손해가 큰가요?" "손해 라기 보다는 위신문제지요. 대대로 물려지고 있는 가문의 가 보들을 도난 당해서 소란스럽습니다. 게 중엔 값으로 따질 수 없을 정도로 귀한 물건도 있지만 대부분 상징적인 의미의 가보들이라... 어쨌든 그 일로 수도가 꽤 시끄러운 편입니다." "훼이른 후작 가는 피해가 없으셨나요?" 릭페르와 그의 동생 네페르는 여유 있게 웃어 보였다. "훼이른 가는 하인들조차 모두 기사계급일 정도입니다. 아무리 간 큰 도둑이라고 해도 저희 집에 숨어 들 배짱은 없겠지요. 그렇다해 도 혹시 모르니 경비는 더 강화하고 있습니다.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레이디 진." "게다가 저희 가문의 가보는 훔칠 수 있는 물건이 아니거든요." '그래? 명단에선 뺏지만 골탕 좀 먹여 줄까나?...에고소드라고 했지. 흠. 훔치는 게 불가능하면 구경이라도...' [.............] 진은 무리하지 않기 위해 배속에 음식을 담는 것을 자제했다. 진의 식성을 몇 번 보았던 릭페르는 진이 가볍게 보일 정도로 적은 량으로 식사를 마치자, 신경이 쓰였다. "레이디. 입맛에 맞지 않으세요?" "에? 아니에요. 아주 맛있었습니다, 릭페르님. 음. 오늘은 많이 먹어 도 소화를 못 시킬 것 같아서 적당히 먹는 겁니다." ".....오니가라 공작 성에서 무슨 일이 있으셨나요?" 블루는 한숨을 쉬었고, 와이즈와 클레이스는 못 들은 척 했다. 진은 웃음으로 얼버무렸고 릭페르는 눈썹을 찌푸렸다. [70] 9-7. 에고소드 훼이르. 훼이른가의 가보는 마법 검이었다. 그리고 보통 다른 귀족가의 가보처럼 은밀한 곳에 숨겨두는 물건도 아니었고, 공개된 편이었다. 진은 식후 네페르의 검술 자문인지 뭔지의 질문에 대충 대답했지만 검술이라고 할만한 정리된 이론이 부족해서, 다음날 연습삼아 대련 해 주겠다는 말로 질문을 피했다. '훼이르'라는 후작가의 성과 비슷한 이름의 에고소드에 대한 화제로 진은 사전조사차, 그리고 말로만 들었던 자아를 가진 검에 대한 호 기심으로 릭페르에게 관람을 청했다. "훼이르는 주인을 택하는 검이지요. 초대 훼이른 선조께서 성 건축 이 끝난 얼마 후에 소유권을 후대에게 양도했는데, 그 후 항상 원 래의 자리에 놓여있습니다. 저희 성도 그 검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는 말이 전해지지요." 파키오와 콜린스는 숙제가 있다고 해서 공부방으로 보내고 진은 릭 페르의 안내로 일행과 함께 성의 옥상에 올라갔다. 훼이른 성은 네모나게 지어져 있었고, 뾰족한 지붕 대신 학교 건물 처럼 넓은 공터 같은 옥상한편에 ㄱ자형 작은 칸막이 같은 돌담 아 래 그 검은 놓여져 있었다. "방치해 둔 것처럼 보이네요, 릭페르님." "방치가 아니고 처음부터 저곳에 그대로 있는 상황이지요. 비바람 을 막을까하고 간단한 공사를 몇 대전 선조께서 해 두시긴 했지만, 기상에 영향을 받는 것도 아니고 옮길 수도 없으니까요." 그 검은 생김새는 별다른 특징 없이 평범해 보였지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손질되어 있는 것처럼 깨끗해 보였고 얇고 중간 폭의 검은, 그림 같아 보이는 글씨가 얕게 전체 검신에 새겨져 있었다. 손잡이에는 훼이른 가의 문양으로 사자갈기가 무늬로 박혀 있었다. 릭페르의 설명으로 검의 유래를 들었다. 4백년 전 자유기사였던 훼이른가의 시조가 여행 중, 마법사의 던전 을 발견하고 그곳에서 취한 검이라고 한다. 후 네카르도가 휘말린 여러 분쟁에서 그 검은 이름을 날렸다. "저희 가문은 이곳 수도말고도 영지가 본가와 떨어져 있는 편이지 요. 옮기려고 해도 성 자체를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하니 이곳에 거 주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처음 검의 주인이었던 선조께서는 성을 지을 때 견고함을 우선했고, 그 탓에 시간이 꽤 지났지만 지금까지 성은 보수할 필요가 없었을 정도로 튼튼한 편이지요. 클레이스님의 저택처럼 세련되진 않지만, 본가를 이전하는 문제는 훼이르 때문에 미루고 있습니다." 초대 훼이른은 자국의 분쟁과 타국과의 전쟁에서 공을 세워, 남작 의 지위로 시작하여 백작의 지위까지 국왕에게 하사 받았고, 성이 완공된 후 어느 날 자신의 성 옥상에 올라 검을 버려....아니, 내려 놓았다고 한다. "시조께서는 검의 주인을 후계로 인정하겠다고 하셨지만, 그 분이 훼이르를 손에서 놓으신 후로 아무도 저 검의 주인이 될 수 없었습 니다. 시조의 유지이기도 하고 저희 가문의 가보이긴 하지만 사용 할 수 없는 물건이지요." "그럼 훼이른가는 정통 후계자가 나오지 않은 셈이네요?" 클레이스의 지적에 릭페르와 네페르는 쓴웃음을 지었다. "따지고 보면 그렇습니다만, 초대 훼이른 선조는 백작의 지위였지 요. 그 후 몇 대 후에 후작으로 지위가 높아졌습니다. 훼이른 가의 후계문제는 아무도 저 검에게서 선택받지 못했기 때문에 관례상 장 자에게 물려지는 것에 따르고 있지요." "릭페르님과 네페르님도 검에게 선택받지 못했나요?" 진의 질문에 릭페르는 조금 어색하게 대답했다. "후계자가 아닌 후작가의 자제라면 누구나 한번씩 도전해 봅니다 만, 모두 실패했지요. 훼이르는 손을 댈 수는 있지만 이상하게 들어 올릴 수는 없는 검이지요. 에고소드라는 것도 기록에 있는 이야기 이고 보존되고 있는 상태를 보면 진실임이 분명하지만. 검의 주인 인 시조에 대해서도 전해지는 이야기가 거의 없습니다." "에고소드라고 해서 말을 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보네요. 검의 의사를 들은 사람은 없었나요?" "저도 검에 손을 대 보았지만 의사라고 할만한 검의 소리를 듣지는 못했습니다. 분명히 검인데, 바위 한 부분을 잡는 기분이더군요. 언 젠가 대마법사가 저희 가문을 방문하셔서 확인해 보시고는 검이 원 하는 만큼 잠을 자도록 내버려두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클레이스는 호기심이 일었다. "릭페르 경. 후작가의 사람이 아니더라도 시험해 볼 수 있을까요?" "....그렇게 하시지요. 클레이스 경. 후작가의 사람이 아니면 계승 문 제는 별도지만, 금지된 일은 아니니까요. 4백년 가까이 주인을 택하 지 않은 검이니 이제쯤 변화를 기대할 수도 있는 문제지요. 사용 되지 않는 검은 고철에 불과하니까요." 클레이스는 은근히 해 볼 테면 해 보라는 투의 릭페르의 말에 점잖 게 웃어 보이고 몸을 숙여 훼이르의 검 손잡이를 잡았다. "............." 검의 자아는 숨어. 아니 봉인되어 있었다. 클레이스는 봉인을 풀어보고자 블랙드래곤의 기운을 손을 통해 조 금 흘려 넣어 보았다. [야. 소환.] "..........!" 그는 들어올리지 못했다. 그러면 그렇지...하는 표정으로 릭페르는 주먹으로 입을 가리고 헛기침을 했다. 기묘한 표정을 짓는 클레이스에게 와이즈는 호기심이 생겨 물었다. [뭐냐? 기껏 마법 몇 개 걸린 검으로 보이는데. 소리를 지른다? 영 혼이 깃들였냐?] [웃긴다, 이 검. 여자야... 되게 까탈스럽네.] [...........] "리툰 마법사님. 시도해 보시겠습니까? 마법사이니 혹시 가능할지 도..." "아닙니다. 전 검에 그다지 욕심이 없으니까요. 그리고 이미 마법사 도 여러 번 시도 해 보았겠지요. 진. 네가 한번 해 봐라." 진은 드래곤도 거절하는 그 검에 호기심이 생겼다. "저기...하지 않으시는 게...." 블루의 말에 모두 돌아보았다. 시선이 집중되자 난처한 표정으로 블루는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클레이스님이 검을 잡으셨을 때 싫어한다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검이란 파괴를 상징하기도 하고, 상처입고 어둡게 느껴 지는 반응이라. 그냥 쉬게 두는 것이 좋을 듯 해서요." 진은 호기심이 더 생겼다. 의지를 가진 검. 감정을 가진 검이라니. 진은 헛기침을 한번하고 릭페르와 네페르에게 양해를 구했다. 그들은 흔쾌히 허락했고, 진은 옥상 돌 바닥 위 반쪽 지붕 아래 버 려져 있는 듯한 그 검의 손잡이에 손을 대어 보았다. "헉!" 갑자기! 진은 비명소리를 들었다! 찢어지는 그 절규는 뇌와 심장에 검 끝이 꽂히는 기분이 들게 했 다. 검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 이었다. 진은 검의 의지에 잠식되어 갔다. 훼이르의 과거가 검은 바람처럼 머리 속에 밀려들어와 진은 무릎을 꿇고 의식하지 못한 새 눈물을 쏟았다. "아가씨. 손을 떼세요!" ".....미. 미안합니다. 해칠 생각은 없었어요. 미안합니다." 굽혔던 몸을 내려 바닥에 손을 짚고 무릎을 꿇고 중얼거리는 것을 모두 눈을 껌벅이며 쳐다보았다. 진은 검에 딱 붙어 버린 듯한 손 을 어렵게 떼어냈다. 여운이 남아 진은 계속 눈물을 흘렸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아....예. 블루님." 대답하면서 진은 빨리 돌린 영화의 필름 같은 훼이르의 기억을 되 새겼다. 손을 대었을 때 검의 자아는 비명처럼 자신의 기억을 이전 했다.... -그녀는 마법을 배우고 싶었다. 그녀는 흑마법사에게 제자로 받아들여졌다. 그녀는 마녀가 되었다. 그녀는 배신당했다. 그녀는 의지가 묶여 육체를 잃고 검에 갇. 혔. 다. 도망갈 수 없었다. 외로웠다. 굳은 심성의 남자가 그녀에게 약속했다. 그와 계약했다. 후회했다. 그녀는 날이 된 자신의 몸으로 살인을 했다. 살인. 또 살인. 또 살인....끝이 없게 느껴지는 피의 감촉은 영혼을 피폐시켰다. 자신의 몸이 붉은 피와 살과 내장을 가르는 공포와 죄 스러움과 욕지기에 미쳐갔다. 계속 반복되었다. 계약은 올가미...휴식은 짧고 저주스런 학살은 계속 되었다. 베어지는 것은 몬스터. 그리고 인간. 전해지는 그들의 감정과 고통 이 그녀를 상처 입게 했다. 그리고 약속했던 그는 자신을 버렸다.... 저리가! 저리가! 왜 날 깨우는 거야! 그가 한 '약속'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어. 난 '날'이 아니야! 난 사람이야! 난 여자야! 손대지마! - 와이즈는 진이 느끼는 감각이 지나치게 어지러워 마음을 읽는 것이 힘들었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진은 '안타까워' 하고 있었다. "...어. 어떻게 하지?" "레이디 진. 괜찮으세요? 훼이르의 음성을 들으셨어요?" 진은 걱정과 호기심을 담은 눈을 하고 자신을 보고 있는 기사와 마 법사와 엘프를 둘러보았다. "검을 집으면 제가 가져도 되나요?" "예? 아....그건." 릭페르가 머뭇거리자 진은 와이즈에게 속으로 물었다. '와이즈. 영혼이 담겼어. 분리해 낼 수는 없을까?' [....시간이 너무 지났는데? 빼낸 다고 해도 영혼이 지쳤다면 다른 그릇에 다시 담기 힘들 거다. 그 검의 의지에 따라 다르겠지만.] '검을 부러뜨리거나 녹이거나 하면 안 되는 거야?' [지친 것 같아 보이는데, 그렇지 않다고 해도 잘못하면 소멸된다.] 진은 난처한 표정의 릭페르와 네페르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다시 검에 손을 대었다. <저리가! 저리 가란 말이얏!> 검의 음성은 소리가 아니라, '의지'였다. 진은 그것에 정면으로 부딪 혀갔다. '어떻게 하고 싶어요, 아가씨? 도와 줄게요. 돕게 해주세요!' <거짓말! 너희가 하는 약속은 '약속'이 아니야! 난 또 속지 않아!> '아가씨가 바라는 데로 약속해 줄게요...생각을 멈춰 주겠어요? 머리 가 너무 아파요.' <넌.....> 잠들어 있던 훼이르는 드래곤의 기운과 그의 부름에 깨워져 자아를 의식했다가, 스스로 가둔 봉인에서 풀려났었다. 무서운 기운은 물러 났다. 그리고 같은 '인간'. 비슷한 느낌의 인간 소녀를 느꼈다. 그녀는 울었다. 그녀와 동화된 진도 눈물을 흘렸다. 블루가 곁으로 가려는 것을 와이즈가 저지했다. 모두 검 손잡이에 손을 대고 고개를 떨구고 울고 있는 진을 내려다 보았다. <난 벗어나고 싶어.> <난 카르마로 돌아가고 싶어.> '도울게요. 어떻게 도와야 하나요?' <약속. 지킬 거니?> '지킬게요.' <나와 계약해 줘. 날 사용하지 않겠다고 약속 해줘. 아니, 내 그릇 이 되어 줘.> '내 의지는?' <금방 나갈게. 네가 밀어내 줘. 날....죽여 줘.> 진은 조금 갈등했지만 그녀를 돕고 싶었다. 그녀는 혼자 힘으로 죽 지 못한다. 소멸되는 것은 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상처 입어 위험하다. 하지만 진은 할 수 있을 거라고, 그녀를 설득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공격하는 입장에서 상처받았고, 진은 그녀와 반대의 입장이었던 적이. 있었다. "훼이르. 당신과 계약하겠습니다. 그릇이 되어 줄게요." <나. 계약을 받아들인다. 내 이름 훼이르.> 진은 상처받은 보라색 기운에 검과 함께 휩싸였다. "아. 아가씨! 손을 떼...." 탁한 기운이 진의 몸으로 사라졌다. "..........." 그녀는 진의 기억을 읽었다. 검에서 손을 떼고 '그녀'는 스-윽 일어 났다. 진의 남청색 눈동자는 보랏빛으로 바뀌어 있었고 표정이 사 라졌다. '그녀'는 진의 몸으로 자리에 서서 주위를 인식했다. "훼이른." "..........!" "널 증오한다. 너와의 계약은 끝났다. 복수하겠다!" 그녀는 앞에 서 있던 릭페르의 목덜미를 잡아채고 뒤에 서 있던 네 페르의 목에도 손을 뻗었다! 클레이스가 진의 허리를 붙잡아 멈추게 하려고 했지만 그녀는 너무 빠르고 잡혔음에도 영향 받지 않았다. 릭페르는 목이 졸리고 목뼈 가 부서질 엄청난 힘에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네페르도 잡혔다! 슥- 잔상도 남기지 않는 빠른 공격에 블루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어떤 마법을 써야할지 미처 결정 못하고 있을 때 두 명은 동시에 말했다. [진. 뭐하냐!] '훼이르. 안 돼요. 내 '약속'과 틀려요.' 그녀는 마법사...드래곤의 음성과, 공존하는 진의 음성에 힘을 늦췄 다. 빈틈이 생기고, 정신을 차린 릭페르는 '그녀'의 손목을 잡아 뒤 로 꺾었고 네페르도 풀려났다. "콜록. 콜록...어떻게 된 거지요? 레이디 진이. 콜록. 의지가 먹혔나 요? 훼이르가 마검이었나?" "콜록. 눈이 보라색으로....마족이 된 건가요? ....형! 꽉 잡아. 힘이 보통이 아니었어!" 릭페르와 네페르의 외침을 들으며 진은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한편에 웅크리고 훌쩍거리고 있었다. 진은 뒤로 꺾여져 릭 페르에게 잡힌 팔목에 힘을 실어 몸을 최대한 축소시키고 팔을 뻗 어 줄넘기하듯 앞 쪽으로 몸을 통과해 뜀뛰기를 했다. "어...?" 릭페르는 손을 놓지 않고 있다가 진을 뒤에서 안은 모양이 되었다. "놓아도 됩니다, 릭페르님." "앗. 죄송합니다." 황급히 몸을 떼어냈지만 릭페르는 진의 뒤통수에서 눈을 떼지 않았 다. 진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고 말 없이 서 있었다. "레이디?" "모두들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클레이스와 그 외 모두 멈칫 했다. 진은 구석에 숨어 버린 그녀와 의사소통을 시도했다. "그가 한 약속과 당신이 이해 한 약속은 틀렸어요." <....알아. 나중에 알았어. 난 내가 검이라는 것을 의식 못했어. 검 이 되어 본적이 없었어. 난 흑마녀였지만 마구 사람을 죽이진 않 았단 말이야!> "잊어버려요. 과거잖아요. 당신의 업보가 아니에요." <.....네 기억을 읽었어.> "괜찮아요. 저도 당신의 기분을 전해 받았어요." <....흑.....> "지금 와선 복수는 의미가 없어요. 그는 죽었어요. 그도 어디선가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잖아요." <난.....> "카르마로 돌아가요, 훼이르. 도와 줄게요. 잊어버려요." <....그래. 도와줘. 난 너무 지쳤어. 잠을 자도 소용없었어.> 진은 의식 한편을 차지하고 있는 '그녀'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날 기억 해 주겠어?> "기억할 게요. 또 하나의 나. 당신과 기억을 함께 했고 당신을 이해 해요." <고마워.> 독백으로 들리는 진의 말을 들으며 지켜보던 이들은 그것을 보았 다. 진의 몸에 스며들었던 보라 빛 기운이 몸밖으로 발산되고 있었 다. 릭페르와 네페르는 주춤했다. "잊어 버려요, 훼이르." 진의 몸에서 빠져나가던 그 빛은 서서히 백색으로 바뀌었다. <...고마워. 진....신을 만난 소녀. 고마워.> "천만에요." 진은 한 두 걸음 밀려나 웃으며 대답했다. 훼이르의 영혼은 푸른 달빛이 가득한 대기에 흩어져 사라졌다. 진은 눈물 자국이 남아 있는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쌍둥 이별을 올려다보았다. 달빛. 어떤 대지 위에도 존재하는 그 푸른 빛. "진. 다 끝났냐?" ".....응." 엄청난 양의 수학 문제를 푼 기분이 되어서 진은 대답했다. 머리 속이 허전한 기분도 들었다. "레이디 진. 그건...." "훼이르는 검에 갇혀 있던 영혼이었어요. 원래 이름은 그게 아니었 지만 검이 된 후 스승이었던 흑마법사에게 '이름' 지어졌나봅니다. 초대 후작과 계약을 하고 검으로 지낸 시간으로 지친, 인간의 영혼 이었어요. 인간은 절망하고 지치면 어둔 기운에 영향 받지요. 영혼 이 백색으로 바뀌었으니 그녀는 카르마로 돌아갔을 거 에요." "약속이...틀렸다고...." 진은 바닥에 놓인 더 이상 자아를 가지고 있지 않은 마법 검을 내 려다 보며 대답했다. "....'그녀' 였어요. 스승에게 이용당해 검에 갇혔지만 쓰여지지 않고 방치되어 자신이 검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초대 후작가의 시조를 만나 계약을 했는데 그의 약속을 잘못 받아들였지요. 검은 전쟁에 쓰이지요. 그녀는 그것을 견디지 못했어요. 흑마녀였지만 영 혼은 보통 인간이었어요. 그가 검을 이곳에 내려 두자 스스로 묶여 있었나봐요. 원하는 데로 윤회로 돌아가게 되었으니 잘 된 일이지 만.....릭페르님 검을 들어보시겠어요?" 진은 얼굴을 닦아내며 후작가의 후계자에게 권했다. 릭페르는 생각하는 듯 하더니 허리를 굽혀 검의 손잡이를 잡았고, 어떤 저항도 받지 않고 들어올렸다. "............" "훼이른 가의 가보를 얻으셨네요. 하지만 더 이상 에고소드는 아니 니 사과해야할까요?" 릭페르는 황당한 일을 겪어 말문이 막혔지만, 에고소드든 마법 걸 린 마법검이든 자신이 훼이르를 집어들었음을 깨달았다. "....아닙니다. 레이디 진. 전 실제 훼이른 가의 2대 주인이 되었군 요. 감사 드립니다." 목을 다쳐 갈라진 음성으로 대답하는 그에게 진은 고개를 약간 끄 덕여 보이고 몸을 돌렸다. '와이즈. 클레이스에게 고맙다고 전해 줘. 그가 깨운 셈이니까.' [.............] "어제, 오늘. 수난의 연속이네....쇼는 끝났네요. 돌아가지요, 신사 분 들." "............." 모두 복잡한 표정들로 뒤늦게 진을 따라 좁은 계단을 내려갔다. "형.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내가 집었어도 되었겠네?" "네페르. 마차 떠났다." "좋겠네, 형. 아버지도 이제 뭐라 못하시겠고. 어머니도 할 말 없으 실 테니." "후훗..." 밤바람이 스치는 텅 빈 옥상은 달빛이 내리고 있었다. [뭐야. 괜히 깨웠나 보네.] [...마차 떠났다지 않냐, 클레이스.] [............] * 초대 후작 이후 아무도 주인이 될 수 없었던 가보를 들고 릭페르가 손님들과 함께 내려오자 후작가는 밤중에 발칵 뒤집혔다. "훼이르를 얻었다고?" "네. 아버님. 그런 고로 전 훼이른 초대 백작의 정통 후계자입니다. 더 이상 제 의사를 아버지도 반대하시지 않으시겠지요? 어머니도 그렇고요." "..........." 후작 부인은 아들이 수련 여행으로 너무 멀고 길게 잡은 것에 반대 했고, 후작은 진이 릭페르에게 내건 조건 일부의 이행에 반대했지 만. 훼이르가 에고이든 아니든 상관없는 일이었고, 아들이 자신보다 서열이 까마득하게 높아져 버린 탓에 어쩔 수 없 는 일이 되고 말았다. 진은 쉬고 싶었지만 귀가한 릭페르의 아버지와, 꾀병을 부리고 있 던 후작 부인과의 미팅으로 방을 안내 받을 수 없었다. 미르나와 닮은 후작 부인이 응접실에 모두와 앉아 있는 진에게 이 것 저것 캐묻기 시작했고, 아들들과 닮은 후작은 질문을 부인에게 미뤘지만 탐색하는 시선으로 진의 짤막짤막한 대답을 관심 있게 듣 고 있었다. '잘못했나 보다...훼이르를 해방시키는 걸 미루고 나중에 슬쩍 훔쳐 갈 걸.' [마차 떠났다, 진.] '............' [71] 9-8. 승마를 배우다. 호의적이 된 후작 부인의 배려로 진은 4층의 미르나의 방으로 안내 되었다. "불편한 것 있으면 말하세요, 영애." "아닙니다, 부인. 미르나의 방까지 내어주실 필요는 없는데." "미르나도 좋아할 거 에요. 영애와 친구라는 말은 들었지만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해서 이름만 아는 정도인 줄 알았지요. 수 도에 와 있다고 릭이 말을 전하니까, 귀가를 서두르겠다고 했다던 데. 좀 더 머물렀다가 미르나를 만나고 가는 건 어떤가요, 영애?" "그건 좀 힘듭니다, 부인. 시간이 너무 지체되었거든요. 릭페르님이 일행으로 가게 되었으니 이동이 더 늦어질 지도 모르고, 그러면 시 간이 더 부족해질지 모르니 최대한 단축해야합니다. 호의 고맙습니 다, 부인." "호호...미르나와 친구인데, 부인이라고 부를 필요 없어요, 영애. 어 머니라고 불러도 됩니다." ".....에에." 진은 아기자기하게 파스텔 톤으로 꾸며진 미르나의 침실에서 후작 부인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땀이 나는 기분이 되었다. '외모는 아니지만 타입이....한국의 아줌마...스타일이구나. 조심하지 않으면 잡히겠다.' 후작 부인이 하녀들과 함께 인사를 나누고 방을 나가자, 진은 와이 즈를 불렀다. '와이즈! 와이즈야~ 내 말 들리지?' [.............] '아직도 삐져 있어, 와이즈? 대답해.' [.............] '.......흠. 어쩔 수 없군. 클레이스가 기어들어 오기라도 하면 어쩌나.' [.............] 진은 걸터앉아 있던 침대에 몸을 던지듯 누웠다가 뒹굴었다. '드래곤을 어떻게 이기나. 마법이라도 걸면 꼼짝없이....' [............] '뭐, 그냥 먹혀줘야겠네. 그 정도면 꽤 미남인....' "우악." 미르나의, 리본이 덕지덕지 달린 귀여운 잠옷을 입고 의도적으로 중얼거리며 침대에 엎드려 있던 진은, 등에 한때 자신의 것이었던 부츠에 밟혔다. "어? 미안하다. 흠. 이야기 중이라 얼른 못 왔다. 너무 가깝게 워프 했군. 왜 불렀냐?" '이게.....' 펄쩍 뛰어-진은 반동으로 켁. 소리를 내야했다.-바닥으로 내려간 와이즈의 손에는 술잔이 쥐어져 있었다. "아직도 떠들고 있는 거야?" "그런 셈이지. 2대 백작. 아니 후작인가? 가 나왔는데 조용하겠냐?" "남자들이 수다는 더 떤다니까." "....난 빼라." 진은 일부러 그런 것이 분명한 와이즈의 이동마법으로 놀랜 등을 손등으로 비비다가 참아주자는 생각에 그냥 넘어갔다. "결계 좀 쳐 줘, 와이즈. 편히 자게. 자면서도 신경 곤두세우고 싶 지 않으니까." "내가 왜 그런 일까지 해 줘야 되는데?" "네 친구잖아. 아니, 친구가 아니라 아는 정도의 사이래도 그 정도 는 도와주는 셈치고 막아줘도 되잖아..... 아니? 결계 쳐도 소용없는 거야?" "소용이 왜 없냐?" "그럼 쳐 줘." "싫다." 폭 큰 청동 술잔을 들고 서서 와이즈는, 우아한 동작으로 소리 없 이 잔에 남아있던 와인을 마셨다. "그럼. 블루에게 부탁하면...." "엘프가 드래곤을 어떻게 이기냐? 7써클 결계 정도야 어렵지 않게 파괴하지. 엘프가 알아도 그녀석이 으름장 놓으면 소용없을 텐데?" '다른 소용이야 있겠지. 7써클 결계가 부서질 정도면 후작가의 마법 사도 알아챌 테니. 흥. 하지만 가르쳐 줄 필요는 없겠지.' 와이즈는 말하면서 고소하단 생각에 속으로 삐죽거리며 웃었다. '그래서. 어쩌란 거냐, 바보 드래곤아. 빌기라도 하라는 거냐?' [...........] 와이즈는 척. 몸을 돌리고 방을 나가려고 했다. 진은 내버려두었다. 문을 열고 나가려는 데도 진이 아무 말 없자, 그는 그냥 나가야하는지. 진이 굽히길 조금 기다려줘야 하는지 잠 시 헤맸지만. 자존심으로 산 세월이 4000년이었다. 와이즈는 나갔고 진은 한숨을 쉬었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넘겨짚은 것인지도 모르고....' [...........] * 밤새 밖이 꽤 소란스러웠지만 진은 짐작과 달리 방해받지 않고 잠 을 잘 수 있었다. 하녀가 방 점검을 위해 들어오자 진은 꾸물거리 던 잠자리에서 일어나 아침을 맞았다. "일찍 일어나시네요, 아가씨. 미르나 아가씨의 드레스를 준비해 드 릴까요?" "아니요. 네페르님과 연무장에서 용건이 있으니 여행 복 차림을 할 게요." "여기사 복장의 옷도 있는데 가져다 드릴까요?" 진은 기사학교에서 보았던 여기사 지망생들의 옷이 그다지 무겁지 않고 간편해 보였던 것을 떠올렸다. "그럼. 민트 백작부인이 정오에나 오신 다니 그동안 빌려 입을 게 요. 아, 그리고 아침을 지금 먹을 수 있을까요?" "네. 아가씨. 릭페르님께서 미리 지시하셔서 준비하고 있으니 곧 가 져오겠습니다. 음. 주인어른과 기사분들은 모두 일어나지 못하실 테 니, 방에서 드시는 게 좋겠군요." 이야기를 들어보니 후작을 비롯하여 호위기사들과 후작가에 몸담고 있는 기사들까지, 밤새도록 술을 마셨다고 한다. '클레이스도 와이즈에게 잡혔었나? 와이즈가 부추긴 것은 아닌지 모르겠네. 도와 줄 거면서 괜히 고집 부리고 딴 소리를 하나.' 진은 느긋하게 미르나의 간이 테이블에 앉아 막 구운 부드러운 빵 과 우유와 치즈. 야채볶음과 과일 푸딩으로 아침을 먹고 갈색 긴 가죽조끼를 조여 입고-하녀가 가져다 준 여기사 복장이라는 게, 기 사 후보생들이 입었던 가죽 섞인 옷이 아니라 정식 갑옷이었기에 거절했다.-방을 나섰다. "우...." 하인들이 치웠거나 치우고 있기는 했지만, 응접실이고 연회장이고 복도고 술 냄새가 진동을 했다. '기사들이 많은 가문이라 술을 퍼도 보통과 다른가 보네.' "일찍 일어나셨네요, 레이디. 안녕하세요?" "안녕히 주무셨나요, 레이디 진." "네. 모두 안녕하세요? 와이즈. 잘 잤어?" "............" "아. 저흰 밤을 샜지요. 술내기를 하는 통에 조금 전까지 술을 마셨 는데....흠. 릭페르 경. 주량이 보통이 아니네요." "............" 블루는 내려오지 않았는지 보이지 않았고, 클레이스와 와이즈는 말 짱해 보였지만 릭페르는 얼굴이 영 안되어 보였다. 진은 피식 웃음 이 나왔다. 술내기에 된통 당한 것 같았지만, 릭페르는 오기를 부리 고 있는 듯 했다. "블루님도 술을 마시나요?" "마시지요. 엄청 약하긴 하지만. 몇 병 먹고 골아 떨어졌지요." "몇 병....먹은 게 엄청 약한 편이면. 다른 기사님들은 얼마나 마신 거래요?" ".....말하면 뭐 합니까, 레이디 진. 저희 집 포도주 창고가 하룻밤 사이에 거덜났는데요." "진. 아쉽냐? 너도 한 주량 하는데 빠져서 안됐다." "에? 레이디 진은 미성년인데요?" "흠. 보호자로 한번 마시게 허락해 준 적이 있었지요. 술 주정이 보 통이 아니던....." "와이즈. 술 주정은 네가 했지. 내가 했어? 아침부터 왜 시비야?" "............." "술 주정을....." 진은 릭페르의 술 덜 깬 띄엄띄엄한 물음에 대한 답을 생략했다. 네페르도 골아 떨어져 있다고 해서 진은 산책이나 나가 볼 요량으 로 겨우 앉아 있는 릭페르에게 쉬라고 말하고 밖으로 나갔다. 클레이스는 와이즈에게 발이 걸려서 진을 따라 나가고자 했던 시도 가 막혔고, 진은 그런 그들의 신경전을 못 본 척 응접실을 빠져나 갔다. 후작가는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돌 깔린 길이 무척 넓은 편이었다. 정원은 넓게 퍼져있지 않고, 두세 군데에 사람들이 거주하는 건물 이나 본성과 다른 여러 건물에 밀려나 있었다. 마구간도 여러 개에 굉장히 커 보였다. 진은 연무장으로 가볼까 하다가 말을 구경하고 승마를 시도해 볼 요량으로 가까운 마구간 건물을 택해 걸어갔다. 낯설지만 낯익은 느낌이 드는 냄새. 진은 고층 빌딩이 있는 도시에서 살았다. 가끔 뉴욕 근교로 버스나 리무진을 타고 나가본 적도 있고, 서울에 서도 친구들과 놀이동산 같은 곳에 가서 관람용, 기념사진 찍기용 말들을 보기도 했지만. 그렇게 규모가 큰, 시골 풍의 마구간은 처음 보았고. 동경에 가까운 기분이 들었다. 영화에 자주 나오던, 말들이 양편에 줄줄이 늘어 서서 푸르릉거리고 있는 그곳에 발을 딛자. 처음 와 보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익숙한 옛 고향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마른 짚 냄새. 여물 냄새. 말에게서 풍기는 체취. 오래 묵은 나무 냄새. 그리고 완전히 불쾌하지마는 않은 말의 배설물 냄새. 진이 입구에 서 있자 청소를 하고 말의 여물을 통에 붓거나 솔로 갈기를 손질하고 있던 하인 몇 명이 돌아보았다. "아가씨. 말을 보시게요?" "네. 구경해도 되나요?" "그럼요. 들어오세요." 밤색과 갈색 말들이 많았다. 백마도 있었고 흑마도 있었고. 안에 들어가니 굉장히 넓은 그 곳에 말들이 두꺼운 판자로 칸막이 가 되어 있는 곳에 둘이나 셋씩 배정 받은 자신들의 방에서 푸르릉 거리다 지나가는 진에게 주둥이를 벌름거리며 내밀고는 했다. "정말 많네요..." "그럼요. 기사가문인걸요. 말은 재산이지요. 좋은 말들이 많답니다." "흠. 주인 없는 말 있나요? 타보고 싶은데...." 마구간지기 중 고참으로 보이는 아저씨는 선뜻 주인의 허락이 필요 하지 않은 말들이 있는 쪽으로 진을 데려갔다. "어떤 말로 드릴까요? 아가씨 얘기는 저희도 들었지요. 전투 말을 드릴까요?" "에...사실은 전 말을 타 본적이 없거든요. 순한 말로 권해주세요." "타 본적이 없으세요?" "이 사람아. 뭐 그런 걸로 그러나. 말과 친하지 못한 사람도 있는 법이야. 여기 이 말 어떠세요, 아가씨. 아주 순하고 착한 녀석이에 요." 다른 하인이 얼쩡거리다가 소개 해 준 말이 진은 마음에 들었다. 눈이 까맣고 맑고 큰, 고운 밤색 암말이었다. 특징 없이 평범해 보 였지만 하인에게 이끌려 걸어오는 동작도 차분해 보였고, 진의 앞 에 서자 긴 머리를 숙여 보였다. 쓰다듬어 주길 바라는 것 같아서 진은 말의 긴 콧등을 슬슬 부벼 주었다. "타도되니? 잘 부탁할게. 신세 좀 지자. 승마를 배워둬야 할 것 같 아." "푸르르르......" 진은 안장을 올리고 고삐를 잡은 하인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말을 훈련시키는 공터는 연무장보다 더 넓었고, 성의 뒷문에는 말 들의 산책로로 오가는 입구가 따로 있었다. "드레스를 입으셨으면 옆으로 앉아 타야했겠지만 여행복 차림이시 니 바로 타시는 게 좋겠네요." 진은 권유대로 부축 없이 발을 딛고 말 등에 가볍게 뛰어올랐다. 느낌이 묘했다. '이거...불안하게 느껴지네. 떨어질 것 같애....' "괜찮아요. 아가씨. 허벅지를...험. 아니 다리를 딱 붙이세요. 항상 붙이고 있으면 좀 힘이 들지만 버릇이 되면 괜찮아요. 허리를 펴시 고 고삐는 멈출 때나 방향을 바꿀 때 적당히 잡아당기시고요. 고삐 와 함께 다리와 발로 조여서 멈추게 하거나 방향을 바꿔도 됩니다. 발로 가볍게 차면 전진. 빠르게 달리고 싶으시면 좀 세게 차세요. 전속력으로 달릴 때는 몸을 말 등에 숙이시고요." 이것저것 기본 승마자세를 듣고 폼을 잡았다. 진은 허리를 편 자세에서 살짝 발로 말의 배를 찼다. 이름을 얻지 못한 주인 없는 말은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말 근육의 움직임이 전해져와, 진은 생명력으로 느껴지는 생소한 느낌을 받았다. 마구간 지기 아저씨가 일러 준 대로 조금 속도를 높이고자 한번 더 세게 차자 말은 걸음을 빨리 하더니 뛰기 시작했다. "우왁-" "아가씨 몸을 바로 하세요. 숙이지 마시고요. 다리를 붙이고 말의 움직임과 맞춰보세요!" 그렇게 했다. "휴...깜짝이야. 떨어질 뻔했네." 잔뜩 긴장하며 둥근 나무 울타리 안에서 몇 바퀴 맴을 돌고 익숙해 지기 시작했다. 시험삼아 고비를 잡아당기며 '워. 워.'하자 착한 녀 석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 "핫핫. 말 탔다!" "하하...잘 타시네요. 처음 타신다는 데." "고맙습니다, 아저씨. 순한 말이어서 겠지요. 달려 봐도 될까요?" "그럼요. 후작가 영지는 넓은 편이에요. 시내로 나가지 않고 안에서 만 달려도 연습은 될 겁니다. 혹시 모르니 제가 따라가 드릴까요? 아니면 누구 기사 분을 불러드리든지. 혼자서는 위험해 질 수도 있 으니까요." "아저씨가 같이 가 주세요. 기사분들은 모두 숙취로 고생 중 일 테 니." "네. 영광입니다. 아가씨." 만약을 위해- 진의 말이 폭주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 길을 막고 앞서 달리는 마구간지기의 말을 따라 진은 승마를 했다. 따각거리는 말발굽과, 얼굴을 치고 가는 바람도, 익숙해지지 않은 말 근육의 움직임도, 모두 새롭고 재미있었다. 한가지. 마찰로 인해 피부에 생채기가 나서 쓰렸지만 중간 중간에 멈춰 서서 회복시키며, 진은 꽤 오랜 시간 후작 성 근처 듬성듬성 한 나무숲과 말 목장들을 지나치며 말을 탔다. "괜찮으세요, 아가씨? 익숙하지 않으면 다리가 아프실 텐데. 근육통 도 무시 못하거든요." "괜찮아요. 금방 낫고.... 마법사가 동료인 걸요." 성안으로 통하는 다듬어진 길을 따라 돌아오며 진은 기운차게 대답 했다. "레이디. 제게 말씀하시지. 도와드렸을 텐 데요." "클레이스님. 이 분이 도와주셔서 어렵지 않게 탈 수 있었어요. 고 마워요, 아저씨." "천만의 말씀이십니다, 아가씨." 진은 씩씩하게 높은 말 등에서 바닥으로 착. 하고 착지했다. 마구간 지기 아저씨는 웃으며 인사를 하고 말을 끌고 돌아갔다. "와이즈. 나 말 탔다! 너무 기분 좋은 것 있지. 핫. 핫. 승마를 했다. 영화 찍는 기분....큼." "......좋겠다." 클레이스를 따라 나왔던 와이즈는 시큰둥했고, 마법으로 회복을 받 았는지 훨씬 안색이 좋아 보이는 릭페르도 처음 말 탄다는 소리에 염려했다가 진의 활기 찬 모습에 웃음을 띄었다. "마음에 드시면 가지세요, 레이디 진. 좀 더 좋은 말도 있으니 고르 셔도 됩니다." "아니에요, 릭페르님. 승마를 배운 것뿐이고. 말을 타고 이동할 것 은 아니니 데리고 갈 수는 없으니까요." 네페르가 찾아와 잊지 않고 약속한 대련을 청해와서 진은 말을 처 음 타본 기분에 취해 싱글거리며 연무장으로 따라갔다. * "검 없이요?" "네. 전 검을 사용하지 않거든요. 단검 정도는 사용해 보았지만, 아 트 경과의 대련은 눈속임이었어요. 주먹 대신 검을 사용하려니 오 히려 불편하더군요. 위험하기도 하고요." "맨 손 격투를....에. 그렇게 하지요." 진은 연무장 한편에서 네페르와 마주서서 인사를 하고 공격해 오길 기다렸지만. 어떻게 공격해야 하나 망설이는 그에게 먼저 척. 다가 갔다. 네페르는 들은 바가 있어 바로 방어 자세를 취했고, 진은 그 의 움직임에 태권도로 상대해 주었다. 검은 띠였던 진에게 네페르는 쉽게 저지 당하고 채이고 해서 금방 대련이 끝났다. 그 후. "한번 더..." "그러지요." 유도 기술로 바닥에 팽개치기..... "한번 더 청합니다. 레이디 진." "넵." 레슬링 기술을 인용해서 목조르기.... "켁. 한번 더요." "............." 킥복싱 기술로 주먹과 쭉쭉 뻗은 발로..... "....죄송합니다, 레이디 진. 한번 더 청합니다." "네. 네." 발에 리듬 실어 권투로..... "미치겠네. 엇. 죄송합니다." "후후..." 온갖 잡기로..... "졌습니다." 와이즈와 클레이스와 릭페르와 언제 나왔는지 후작까지. 그리고 점점 모여드는 기사들과 구경하는 사람이 많아지자, 진은 처음에는 네페르를 향해 정감 있는 야유를 보내다가 반복되는 진의 승리에 눈이 커지고, 벌어진 그들의 입을 다물 게 해 주기 위해 대 련을 마쳤다. '이런...기분이 좋다보니. 너무 지나쳤나? 이상하게 생각하겠다.' 흙투성이가 된 네페르는 인사를 나누기 위해 일어났다. "엉터리가 아니었어. 그렇지, 와이즈?" "난 엉터리라고 한적 없다. 네가 그랬지." "대단하군요. 검술은 아니지만 맨 손 격투에 저렇게 다양하고 위력 있는 기술이라면 검 이전에 아니, 검이 필요 없겠네요. 주먹 대신 단검만 쥐어져도..." "나도 저런 몸놀림은 생전 처음 본다. 릭." 진도 한 걸음 물러나 네페르와 마주 섰다. "맘껏 패 주셔서 감사합니다, 레이디 진." "네에....푸웃..." 스피드와 힘을 그다지 실지 않고 대련했지만 기술에서 너무 차이가 난 네페르는 완벽하게 패했고. 인사를 하며 돌아서면서 왜? 왜? 하 며 중얼거리기는 했지만, 도움이 많이 되었다고 고마워했다. 몇 명 대련을 청하는 기사들이 있었지만 진은 시간이 더 없음을 핑 계로 자리를 떴다. "영애. 그냥 우리 가문에 눌러 앉으면 안 되겠소? 원하는 지위와 보수를 드리리다." 연무장을 벗어나 함께 걷던 후작의 제의에 진은 정중하게 거절했 다. 블루는 연무장이 내다보이는 복도의 창에 서서 진의 대련을 지 켜 보았다. '아가씨의 꿈은....꿈 세계가 어디였을 까요. 대륙의 미래에 다녀 오 셨을 까? 아니면 미지의 별 달에 가셨었을까....' 블루는 한숨을 쉬고 성안으로 들어오는 그들을 맞기 위해 내려 갔 다. * 진은 땀을 조금 흘려서 블루의 정령 덕을 보고, 늦은 아침을 먹는 기사들 틈에 끼어 점심을 먹었다. 민트가 도착했다. [72] 9-9. 무도회에서 생긴 일. "영애. 왜 그렇게 어색하게 손을 내밀어요? 안 물어뜯어요. 아니? 음. 영애 정도라면 물어뜯으려고 하는 신사분도 있겠지만...." "..........." 민트는 삐죽대며 클레이스를 흘끗댔다. 진은 민트가 가져오고 후작 부인이 내어놓은 수 십 벌의 드레스를 번갈아 입어보고 온갖 치장을 하고, 미르나의 드레스룸과 방을 오 가며 검사를 받고 몸가짐에 대해 참견을 아니, 조언을 받고 있었다. "민트 백작부인. 더 꾸미셨다간 저흰 모두 눈이 멀겠습니다. 레이디 께서도 지쳐 보이는 데 그만 하셔도...." 클레이스는 민트의 살벌한 눈초리에 말꼬리를 흐렸다. 진은 일행을 위해 좀 큰 탁자가 옮겨져 그곳에 앉아 구경하고 있는 와이즈와 블루와 클레이스와 릭페르에게 좀 말리라는 의미로 눈짓 을 했지만 극성인 민트의 행동을 막아낼 남자는 방에 없어 보였다. "그러게 신사분들이 왜 나서서 시간을 지체하게 하시는 거 에요? 아래에서 기다리실 일이지...." '민트는 인형놀이 하는 게 재미있나봐. 무도회 한번 가보기 정말 힘 드네. 웬 격식에 이렇게 복잡하담.' 결국 몇 벌 골라놓은 드레스를 하녀에게 모두 챙기게 하고-무도회 는 이틀 간 열린다고 하니, 갈아입을 옷까지 포함하여- 민트의 '비 켜'하는 몸짓의 걸음을 뒤따라 진은 마차에 올랐다. "신사분들은 뒤의 마차나 말을 타세요. 가는 길에 아트경을 태울 테니 저희만...." 민트는 잘 차려입고 따라나서는 모두를 당연한 태도로 세 개의 마 차 중 가운데 세워져있는 마차에 밀어 넣고 진을 데리고 하녀의 부 축을 받아 앞에 대기 중인 마차에 올랐다. "부인. 기세가 대단하세요." "호호...영애. 많이 오실 거 에요. 제가 영애의 장신구 이야기를 했 더니 부인들의 눈이 뒤집히더군요. 딸들을 잔뜩 치장해서 데리고 올 텐데. 다른 괜찮은 신랑감 후보들에게도 기회를 줘야지요. 클레 이스님은 아무래도 영애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는 듯 하던데, 안되 지요~ 내게 맡겨요, 영애. 다 알아서 해 줄게요." '부인. 신랑감 고르러 가는 게 아니라, 훔치러 갑니다만...' 진은 마차 안에 앉아서 민트의 초대 명단에 대한 수다를 들으며 속 으로 피식거렸다. 진은 광택 있는 깔깔한 천의 유달리 부푼 소매의 검은 드레스를 입 고-속옷을 얼마나 겹쳐 입었는지 몸이 무겁기까지 했다.-칼라가 넓 게 네모로 파여 드러난 목에 와이즈에게 빌린 드워프 가공의 거창 한 에메랄드 목걸이를 하고 있었다. 머리카락은 전체를 다듬어 올 려 묶고, 손질에 쓰는 끈적끈적한 액체(젤이라고 부르겠다.)를 발라 윤기 있는 검푸른 머리카락을 일부는 이마와 뺨에 꼬불거리게 늘어 뜨리고 뒤에서 세심하게 땋아 또아리를 틀어 가는 푸른 색 리본으 로 묶은 부분을 가리고 있었고, 색이 맞지 않아 팔에 걸치고 있던 진주 팔찌는 따로 보관했지만 한쪽 귀걸이는 그대로 하고 있었다. 진은 어스름이 깔린 수도 시내를 마차를 타고 달리다 로체스터 백 작가 근처에서 아트 테이텀 경을 태우고 무도회가 열리는 백작가 정문을 통과했다. 무도회에 참석하기 위해 저택이 가까이 있는 귀족들이 먼저 도착하 고 있었다. 마차에서 내리는 귀부인들과 영애들과 말을 맡기는 기사들을 둘러 보며 진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아담스의 가게 지하에서 보았었던 일부 청년들이 시종이나 하인의 신분으로 스며들어 있는 것을 확인 했다. 일일이 신분 확인 차 초대장을 내민 귀족들은 따로 안내 받 아 무도회장으로 가고 있었다. 아트 경은 진의 손을 잡고 현관으로 인도하다가 로체스터 가문의 집사에게 잠깐 제지받았지만, 민트와 클레이스와 릭페르의 무언의 압력에 별다른 무리 없이 연회장으로 안내 받을 수 있었다. 파키오도 귀족 자제처럼 차려 입고 와이즈와 블루와 함께 따라 들 어왔다. "콜린스도 데리고 올걸. 이런 볼거리를 놓치다니. 기억해 두었다가 이야기 해 주렴. 파키오." "모두 머리에 담고 있어요, 레이디. 와- 정말 대단하네요." 로체스터 백작가에 숨어들었을 때 뒤뜰과 하인들이 오가는 구석 계 단들만 찾아다녔던 진은 무도회를 위해 호화스럽게 꾸며진 넓은 연 회장과 정원으로 통하는 테라스등을 흥미롭게 둘러보았다. 여러 가지 빛을 뿌리는 마법등이 천장과 벽에 불을 밝힐 목적으로 줄을 짓거나 원을 그리거나해서 장식되어 있었다. 무도회장 정 중앙 천장에는 상들리에처럼 두 주먹만한 둥근 마법등 이 붉은 색과 푸른색, 백색으로 커다랗게 원을 그리며 올려져 있었 다. 천장 가까이 둥둥 떠 있는 그 빛은 현란해 보이기까지 했다. 사각형의 연회장 내부는 차분하고 고운 색의 주름 잡은 천들로 벽 과 둥근 기둥이 장식되어 있었고, 한쪽에 ㄱ자형 길게 이어 붙여 하얀 식탁보로 씌워진 곳에는 간식과 포도주 잔이 놓여있는 곳과, 식사를 하는 손님들을 위해 뷔페식 식단이 차려져 있었다. 식탁과 반대편에는 엘프의 공연을 위한 무대도 마련되어있었다. 에릭 로체스터는 들어오는 손님들에게 연회장 입구에 서서 일일이 인사를 하고 있었고, 진도 아트와 함께 그에게 인사를 받았다. 검갈색 머리의 에릭 로체스터는 형식적인 인사말을 했다가 아트를 알아보고 눈썹을 찡그렸지만, 민트가 진을 소개하는 말에 시선이 옮겨왔다. 그의 예절바른 표정 뒤에 무언가 감을 잡은 눈치에 진은, 아담이 막았던 통신을 그도 받았음을 알 수 있었다. 눈여겨보기는 했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진은 평범한 인 사를 하고 사람들 틈으로 들어갔다. 레이첼은 파티 용 드레스를 차려입고 방에서 울고 있었고, 모나 로 체스터는 초조하게 방안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아담은 나이든 마부로 변장하고 주인들의 시중을 위해 연회장 한쪽 구석에서 대기 중인 하인들과 밖에 따로 마련된 하인들 틈에 섞여 오가고 있었다. 손님들이 들어오느라 혼잡한 틈을 타서 시종이나 하녀의 신분으로 함께 오거나 몰래 들어 온 도둑 길드원들은 각자 맡은 일들을 시행 하기 위해 슬쩍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고 있었지만, 아무도 그런 그들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아담스. 문제가 생겼어요.' 지나치며 속삭이는 수하의 말에 아담은 고개를 약간 끄덕였다. * 귀족들이 속속히 모여들어 연회장을 가득 채웠다. 마법학교 교장과 그와 함께 만났던 챈들러 어슬리와 기사 학교에서 클레이스에게 도전했던 기사후보생과 진에게 도전했던 여기사 후보 생 케이트 트랜스와 그 외 아트와의 대련을 지켜보았던 귀족자제 몇 명과 그들의 부모 형제 등등. 안면 있는 네카르도의 대부분의 귀족들과 일일이 짧은 인사를 나누고 그 중 몇 명에게 진은 둘러 쌓여 있었다. 릭페르는 말 걸어오는 영애들에게 무뚝뚝하게 들릴 정도로 정중하 게 대화를 거절하고 진의 곁에 붙어 서 있었고, 파키오는 민트를 통해 물색해서 녹여버리라고 귀띔 한, 자작 가문 노부부에게 접근 할 기회를 탐색하고 있었다. 클레이스는 시종 여유 있는 표정으로 아가씨들의 관심을 받고 있었 고, 와이즈는 예의 바른 태도로 영애들의 질문에 대충 대꾸하고 있 었다. 포위되다시피 해서 당황해 할 줄 알았던 블루조차도 상냥해 보이는 미소로 젊거나 나이든 아가씨들과 부인들에게 일일이 대답 해 주고 있었다. 마법학교 교장이 귀족들을 만나고 다니면서 마법 아이템 이야기와 쓰지 않는 기숙사 방을 돌려 받는 문제를 상의하고 있었고, 모델 삼아 들고 왔던 몇 가지 마법 아이템을 구경시켜 주고 있었다. 민트는 부지런히 자신이 초대한 귀족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와이즈는 상대하기 귀찮아졌는지 실례하겠다고 한마디 던져두고 부 인들과 영애들의 사이를 빠져나와 진의 근처로 왔다. "재미없어, 와이즈?" "정신만 사납다." "난 재밌어. 사람들이 엄청 모여 있잖아. 다들 자~알 꾸미고 왔네. 훗- 사람 구경하는 게 제일 재미있는 법이야, 와이즈." '이런 일은 캐서린 몫이었는데.' [...........] 파트너로 함께 온 아트 경은 묵묵히 진의 곁에 서 있기만 했고, 진 은 응원군이 될지 방해꾼이 될지 알 수 없었지만 참석해야할 인물 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음에 그에게 어떤 언질도 하지 않고 있었다. 초대장에 명시되어 있던 9시 정각 무도회 시작 시간이 어림되자, 에릭 로체스터 백작은 연회장 입구에서 몸을 돌리고 백작가의 집사 에게 지시했다. 그는 헛기침을 한번하고 큰 소리로 말을 했다. "레이디 앤 젠틀맨. 로체스터 가의 에릭 로체스터 백작님이십니다." 모두 하던 이야기를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다. 집사가 한 걸음 옆으로 물러나자 에릭은 무도회 시작을 알렸다. "저희 로체스터가의 연회에 와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 드립니다. 안주인의 부재로 불편을 드린 점 양해 바라며, 성의껏 준비했으니 좋은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진은 참석한 귀족들을 이모저모 살펴보며 최대한 얌전을 떨며 보통 귀족 영애들처럼 보이도록 노력했다. 영애들은 무도회 시작을 알리는 말에 개인적인 사교시간을 접고 각 자 보호자나 샤프롱 부인들의 손에 이끌려 소개받고 소개하고 있었 고, 식탁에 앉아 식사를 하는 귀족들과 로체스터 백작가에서 미리 초빙한 음유시인들의 하프 소리에 춤을 추기 시작하는 귀족들도 있 었다. 릭페르와 클레이스의 수비로 진은 일행을 포함한 신사들의 댄스신 청을 받지 않아도 되었다. 댄스를 즐기는 귀족들의 춤은 음악에 맞춰지고 있었다. 하프 연주는 때로 높낮이가 있게 들리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 잔잔 한 편이었고, 함께 연주되는 탬버린처럼 생긴 둥근 악기와 반들반 들 윤이 나는 피리를 이어 붙인 것 같아 보이는 제법 큰 악기의 연 주소리에 맞춰, 레이디와 신사들은 손을 맞잡고 빙글빙글 돌아가기 도 하고 멈춰 서서 블루스처럼 천천히 옆으로 움직이기도 하고 드 레스 자락을 휘돌리며 아가씨들이 제자리에서 몸을 돌리기도 했다. 파티는 간편한 식사와 음주와 가지가지 주제의 대화와 댄스와 함께 점차 무르익고 있었다. 파키오가 드디어 기회를 포착하고, 나이든 자작부인이 잠깐 놓쳐 떨어뜨린 부채를 정중하고 호감 가는 태도로 집어들어 건네며 인사 를 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파키오에게 먹이로 지목해 준 자작 부부는 후계가 없다고 했다. 인 척들이 많겠지만, 진은 후작가의 후원을 받고 있는 남색머리의 평 민 소년이 그들에게 호감을 얻어내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슬며시 웃음을 지었다. 파키오는 그들에게 자신과 비슷한 나이의 손녀딸이 있다는 정보를 이미 알고 있었고, 진의 권유에 씨-익 웃으며 기회를 노려 접근 해 갔었다. '저 녀석. 클레이스에게 맡기는 게 아니었나? 아니지....안 그랬어도 저랬을 거야. 바람둥이 되겠네.' 진은 일행과 모여 서서 잡담을 나누고 말 걸어오는 신사들에게 손 등을 내밀어 인사를 받고, 민트가 쥐어 준 흰색 천으로 세모꼴로 만들어진 부채를 들고 있다가-무도회가 끝나면 기념으로 가지고 간 다고 한다-쟁반에 와인 잔을 올리고 앞을 지나치는 말쑥한 차림의 시종에게서 길드 측과 약속했던 몇 가지 의사표현 방식 중 하나를 보았다. 그는 거둬진 빈 술잔을 쟁반 위에서 약간 들었다 기울이더 니 다시 올렸다. '문제가 생겼음. 도움 바람.' 진은 부채를 가볍게 반대편 손바닥 위에 접어 쳤다. "레이디. 댄스 신청을 받지 않으시게요?" "클레이스님. 대화만으로도 충분히 즐겁네요." 진의 부채에는 끈이 달린 분필 보다 얇은 연필 심 같은 필기도구가 매달려 있었고, 춤을 신청하는 신사들의 이름을 차례로 적게 되어 있었다. 에릭 로체스터의 눈길을 몇 번 받았기에 진은, 먼저 그를 상대하기로 했다.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여러분." 진은 시종 말이 없던 아트에게 호위를 부탁하는 의미로 손을 내밀 고 그와 함께 일행을 벗어났다. 정원으로 통하는 테라스 중 한 곳을 택해 파트너인 아트 테이텀과 걸어가던 진은 에릭 로체스터의 인사를 받았다. "레이디 진. 제게 잠깐 시간을 내 주시겠습니까?" "그러지요, 백작님." 진은 사교적인 웃음을 지으며 아트에게 시선 주지 않고 말 걸어오 는 백작에게 손등을 내밀었고, 그는 손등에 가볍게 키스하고 아트 가 자리를 피해 주길 기다리는 몸짓을 했다. "아트님. 일행과 기다려 주시겠어요?" "....알겠습니다, 레이디 진." 진은 파트너를 바꿔 로체스터 백작과 사람이 없는 테라스로 나갔 다. "레이디. 네얀을 경유하셔서 오셨습니까?" "네. 여행 시작해서 처음으로 들른 도시지요." "수도에 오신지 몇 일 되셨다고 들었는데, 미리 마중 나가지 못해 죄송합니다. 연락을 하시지 그러셨나요." "네? 전 로체스터 백작가에 친분을 갖지 못했는데요? 하지만 이렇 게 성대한 무도회에 참석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백작가의 정원이 아름답다는 말에 민트 백작부인께 부탁했던 것이 다행이었네요. 아, 저기 연못도 보이는 군요." 핀트가 맞지 않는 대화와 시작이었다. 에릭은 곰곰이 달빛을 받고 서 있는 귀족 소녀를 살펴보았다. 통신 은 어딘가 잘못 된 것 같았다. 그녀는 어리고 외모가 조금 더 눈에 띄기는 했지만, 보통 귀족영애들과 다를 바 없는 느낌이 들었다. "아트 테이텀 경과는 아는 사이셨나요? 일행 분들이 대단한 신사분 들이신데, 파트너로 테이텀 경을 택하신 것을 보니 친분이 있으셨 나보네요." "아. 기사 학교를 견학 갔다가 그분과 대련을 했지요. 딱딱해 보이 는 인상이라 골려 주고 싶어서 속임수를 써서 이겼는데, 직장을 그 만 두시려 해서 미안한 마음에 청했지요. 무도회에 오시면 새 직장 을 얻으실 수도 있을 테니까요. 그분에게 무슨 문제라도 있는 가 요?" ".....아닙니다. 상관없는 일이지요. 수도에 오신지 얼마 되지 않아 못 들으신 게 차라리 제겐 다행이군요. 테이텀 경과의 대련을 승리 하시다니 검 실력이 뛰어나신가 봅니다." "호호...실력이라기 보다는 요령이겠지요. 아트 경은 기사분이신데 제게 전력을 다하실 수는 없었을 테 고요." 에릭은 난간에 기대고 서 있는 진에게 계속 탐색하는 시선을 했다. "...요 몇 일 수도의 도난 사건에 대해 아시나요, 레이디?" "훼이른 후작가에서 신세를 지며 듣긴 했지요. 로체스터 백작가에 서도 가보를 도둑 맞으셨나요?" "저와는 상관없습니다만....평민 식당에서 노래를 하시고 식사를 하 셨다고 하시던데, 수도 상황에 대해 알고 계시나요?" 진은 어설프게 보이도록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 여행 중입니다. 백작님. 수도에 분쟁이 있다는 소리는 못 들었 는데요? 질문의 요지를 잘 모르겠어요." 에릭은 패를 내 보여야 할지 말아야할지 갈등했다. 돌려 묻는 말로 는 이해하지 못할 머리인가 보았다. "레이디께서 굉장히 부자라는 말을 전해 들었지요. 그리고 네얀에 서 신분을 증명하는 패를 양도받았다고 들었습니다." ".....어머. 백작님. 도둑길드와 관련 있으셨어요?" 에릭은 멈칫했다. 이 귀족 소녀는 머리만 나쁠 뿐 아니라 조심성도 없었다. 다행이 주위엔 엿듣는 사람은 없었다. 진은 심각해진 얼굴로 생각을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곳에서 재미 삼아 약간의 투자를 하기는 했지요. 그 과정에서 기념품 삼아 받긴 했는데, 쓰일 일은 없더군요. 전 길드 조직을 이 용하지 않아도 충분히 부자거든요. 여행을 하면서 재미있는 일을 찾아다니고 있습니다만, 친하게 된 귀족 분들을 이끌고 가서 식사 한 곳은 음식이 그다지 특별한 편은 아니더군요. 평민식당에 가서 식사를 한 것이 귀족여식으로 해선 안 될 일었을 까요? 다른 분들 께 흠이 잡히게 될 일이려나....사실 전 귀족의 예의 범절에 어두운 편이거든요." 부채를 흔드는 동작과 허영 끼 있게 들리는 진의 대답에 에릭은 머 리 속이 조금씩 정리되었다. 약간...석연치 않은 면도 있었지만. 그 녀의 일행.... "그 정도야 무슨 흠이 되겠습니까. 그보다 수도에서도 투자를 하시 는 것은 어떤가요, 레이디. 이곳에서의 수익이 훨씬 기대할 만 할겁 니다." "그렇겠지요? 하층민에게 투자하는 것 보다, 귀족들에게 투자하는 것이 훨씬 수익이 되긴 하겠지요. 흠. 제안하실 것이 있나요, 백작 님?" 눈을 반짝이며 말하는 진에게서 에릭은 단순히 돈 좋아하고 특이한 것 찾아다니는 귀족 여자라는 느낌을 다시 받았다. "왜 없겠습니까, 레이디. 사업을 추진하시려면 동업자를 잘 택하셔 야지요. 제 정원을 보고 싶으셨다니, 영광입니다. 신경 써서 파티 준비하고 저택을 정돈한 보람이 있군요. 안내해 드리지요." "로체스터 백작님. 손님이 오셨다는 군요. 레이디의 호위는 제가 대 신 하겠습니다." 팔을 굽혀 내밀던 에릭은 테라스로 나오며 하는 클레이스의 말에 돌아보았다. "손님이요?" "네. 백작님을 찾으시던데요." 백작가의 집사도 따라 나왔다. "백작님.....손님이 오셨습니다." 그는 양해를 구하고 일단 자리를 떴다. "댄스 신청합니다, 레이디. 거절만 받는 게 너무 가슴 아프네요." '진득이로세. 일하러 가야한단 말이오, 가짜 인간 기사.' "클레이스님. 무리네요. 전 할 일이...있거든요." "무슨?" "화장실에 가야해서요. 실례...." 빙글빙글 웃으며 입구를 막고 있던 클레이스는 헛기침을 하더니 슬 쩍 빠져나가려던 진의 팔꿈치를 잡았다. "호위해야지요, 물론." "............" * 연회장과 약간 떨어진 숙녀 용 화장실 근처에서 클레이스는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대어 있었다. '뭔 일을 하는 지 구경해 주어야지. 암~ 도망가게 둘까보냐.' 화장실이라고 들어간 곳은 확실히 '화장'을 고치는 곳이었다. 소파나 의자에 앉아 귀족 영애와 부인들이 하녀들의 시중을 받아 매무새를 고치고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진이 들어가자 돌아보던 여자들이 모두 호들갑을 떨었다. "아. 영애. 잘 오셨어요. 이리 오세요. 용변이 급하세요?" "아, 저...." "영애. 그 목걸이 말이에요. 드워프가 세공 한 것이지요? 제것도 드 워프 세공이긴 하지만 크기가 비교도 안되네요. 정말 아름다워요. 귀걸이도 드워프 작이지요?" "저도 너무 부러워요. 보석 이야기를 바깥양반이 달갑지 않게 여기 시니 연회장에서 묻고 싶은 것을 참았지 뭐 에요." "영애 소유인가요? 파실 생각은 없으세요?" 진은 정신 없이 물어오는 몇 몇 부인과 부러움과 질투가 섞인 영애 들에게 예의 바르게 몇 마디 대답해 주고, 귀족 여자들에게 가려져 있는 하녀들을 쓱 둘러보다 눈이 마주친 한 아가씨의 눈짓을 받았 다. 진은 목걸이를 풀었다. "구경 하실래요? 전 용변을 좀...." 그들은 눈을 좀 크게 뜨고 숨을 삼키며 진이 내민 묵직한 에머랄드 목걸이를 조심스럽게 받았다. "그래도 될까요, 영애?" "네. 나중에 돌려주시면 되지요." "호호..영애. 너그러우시네요. 고마워요." "급하시다니 어서...걱정 마세요. 상처 내지 않을게요." 진은 양해를 구하고 그 하녀의 곁을 지나 안쪽에 여러 개의 문이 나란히 있는 진짜 화장실 쪽으로 갔다. 귀족부인들과 영애들은 머리를 모으고 있었다. '뒷문으로....오른쪽 천막 뒤로 가보세요.' 진은 뒤따라와서 열어주는 화장실 문손잡이를 쥐고 있는 길드원의 속삭임에, 열린 문으로 가려진 몇 걸음 앞의 문을 조용히 열고 사 라졌다. [73] * 안에 들어오지 못하고 밖에 대기 중인 마부들을 위해 뒤뜰에는 천 막이 쳐져 있었고, 아담은 간단한 식사와 간식. 그리고 약간의 술을 공급받아 잡담을 나누고 있는 그들 근처 정원수 그늘에 몸을 숨기 고 있었다. 톡톡. 어깨에 떨어지는 덜 익은 나무 열매 때문에 위를 올려다본 아담은 곧 나무 위로 올라갔다. "......뭔가 지나가는 것 같긴 했는데." "저도 도둑인 걸요, 아담. 그보다 무슨 문제인데요?" 진은 일부러 검은 색 드레스를 택해 입었었다. 달빛이 가려진 어둔 나뭇가지 사이에선 간간이 부는 바람에 나뭇잎 이 사각사각 소리를 냈고, 진과 아담스의 낮은 속삭임을 효과적으 로 가리고 있었다. "명단 입수에 실패했습니다. 에릭이 눈치를 챘는지 옮겨버렸더군요. 회유된 길드원들을 통해 원본이 있는 곳을 알아내긴 했는데 접근이 불가능합니다." "어디 있는데요?" 아담은 2층의 한 창문을 가리켰다. "서재로 통하는 비밀 입구를 알아냈는데 마법 트랩들이 잔뜩 깔려 있더군요. 통과하는 것도 힘들고 통과한다고 해도 감지 마법에, 서 재 전체가 결계에 둘러 쌓여져 있습니다. 흔적 없이 빼내오는 것이 지금으로선 불가능합니다." "내부 길드원의 도움은 기대할 수 없나요?" "회유된 길드원은 소극적입니다. 이쪽과 에릭을 저울질하고 지켜보 고 있는 상황이지요." '마법....젠장. 취약점인데. 와이즈에게 부탁하는 것은 좀 그렇고....다 른 방도를....' "레이첼은요?" "....그 아이는 포기했습니다. 고집이 세서." "............" 진은 궁리를 했다. 아직은 타이밍이 아니었다. 몰래 숨어들어 빼돌 리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진은 아담과 간단히 의논을 나누고 가장 손쉬운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효과적인 방법이긴 하지만 먹혀들지 않을 경우엔 모두 헛수고가 됩니다, 아가씨." "그렇다고 다른 묘책도 없잖아요. 다음 기회로 미루기엔 시간도 없 고, 오늘 보다 더 복잡해지겠지요.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제가 따로 준비한 쇼도 있으니 에릭을 몰아세워 보지요, 아담. 그에게 사 람을 붙여 감시하고 계획대로 진행하세요. 설사 잘못해서 명단이 유출되더라도 최대한 막아볼게요." ".....그렇게 하지요." 진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왔던 길을 되돌아갔고, 아담도 자리에서 사라졌다. * "영애. 정말 아름다운 목걸이에요." "파실 생각은 없으세요? 제값을 쳐 드릴게요." 부인들은 아쉽다는 표정으로 화장실에서 나와 걸어오는 것으로 보 이는 진에게 다시 목걸이를 건넸다. 진은 잠깐 받아들었다가 가장 깐깐해 보이고 거만해 보이는, 더불어 욕심으로 유난히 얼굴이 들 떠 있는 30대 중반의 귀족 마님에게 그것을 다시 내밀었다. "빌려드릴까요, 마담?" "네?" "너무 무거워서. 바꿀까했거든요. 저보다 부인께 더 어울리시겠네 요. 파티가 끝나면 돌려 주셔도 되니, 그동안 빌려드리지요." "아. 정말 뭐라 말해야할지...그래도 될까요?" "그럼요. 어려운 일도 아닌걸요." 그녀는 눈을 빛내면서 자신의 루비 목걸이를 풀어 진의 목걸이와 교환했다. "호호...호의 고마워요, 영애. 제 목걸이도 영애께 어울릴 거 에요. 드워프 작은 아니지만 이 루비 목걸이도 꽤 고급이니까요." 다른 부인들과 영애들은 부채질을 하며 부러움의 눈을 했고, 진은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화장실을 나왔다. '부인. '목걸이' 이야기를 아실까요? 허영을 근면으로 바꾸는 데는 10년의 세월이 걸린답니다. 보석을 바꿔 호의를 비춘 것이 아니라 부인의 허영심을 실속과 바꾸는 일에 호의를 드리지요.' "바쁘시네요, 레이디." "클레이스님. 모른 척 해 주시기로 하셨지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가시지요." 진은 클레이스의 팔을 잡았다. "....장신구를 바꾸신 것도 이유가 있나요?" 진은 클레이스에게 잡담처럼 '목걸이' 이야기를 해주며 연회장으로 돌아갔다. 연회장 분위기는 자리를 비웠던 때와 다른 의미로 웅성거리고 있었 다. 진이 개인적인 일로 아담에게 부탁했던 것은 모나 로체스터의 친정 부모에게 기별 아닌 기별을 전하는 것이었다. 초대장이 가지 않을 명단 중 한 귀족가였음으로 진은 길드원을 통 해 간접적인 방법으로 모나의 연로한 아버지에게 딸의 소식을 접하 게 했고, 올지 안 올지 알 수 없었지만 여느 부모와 다름없다면 충 분히 체면치레 버리고 발걸음 하리라는 계산에서 모나의 자작 아버 지를 충동질하게 했다. 그는 초대장 없이 파티 장에 나타나 에릭 로체스터와 말다툼을 벌 이고 있었다. "내 딸이 바보 같은 일을 저지른 거야. 나도 할 말 없네. 하지만 피 붙이란 말일세. 언제까지 얼굴도 못 보게 할 텐가. 이제 더는 방관 하고 있지는 못하겠네. 백작. 그 앨 만나게 해 주게." "예의가 아니십니다. 손님들도 계시는데 어찌 이런 날을 택해 방문 을 하실 수 있습니까. 잠깐 나가셔서 이야기를...." 진이 클레이스와 연회장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입구에서 아트를 찾 는 것을 알고 와이즈가 말해왔다. [근처에 있을 거다, 진. 밖으로 나갔어.] "더 할 이야기 없네, 백작. 모체스터 백작 가와 연을 끊어주겠다지 않은가. 그 애가 어떤 취급을 받고 있는지 풍문으로 들었지만, 정말 일거라고는 생각 못했네. 내 영지와 수도는 기사들을 대동하고도 열흘이 걸릴 거리일세. 고용한 마법사들을 독촉해서 겨우 왔네. 로 체스터 백작가는 계속 방문을 거절해 왔었지 않은가. 이런 날이 아 니면 난 들어오지도 못했겠지. 초대장 없이 온 것은 미안하네만. 내 가 백작가와 완전히 타인도 아니지 않은가." 아트는 모나의 아버지이자 전 고용주인 자작이 왔을 때, 연회장 안 의 여러 문 중 하나를 통해 밖으로 피신해 있었다. 진은 중앙계단 앞에 서 있는 그를 보고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아트 경...." 그는 진을 돌아보지 않고 계단 위를 보고 있었다. 모나 로체스터는 계단 난간에 한 손을 올리고 흰 드레스 차림으로 감시 역으로 보이는 하녀와 함께 서 있었다. 약간 질린 얼굴로 서 있는 모나에게 아트는 계단을 올라가지 않고 그 자리에 한 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와이즈. 에릭과 모나의 아버지를 데리고 나와.' [.............] "모나. 전...오랫동안 제 자신을 속이고 있었습니다. 저는 작위 없는 귀족가 자제로 영지 없는 평범한 기사 신분일 뿐이었습니다. 그래 서 자작가에 고용되어 만나게 된 부인께....연정을 가졌지만. 호위하 는 입장에서 청혼하는 것이 가당치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와이즈!' [왔다. 뒤에 다 나와 있잖냐.] 와이즈가 밖으로 유인해서 데리고 나온 로체스터 백작과 모나의 아 버지와 그 외 호기심으로 슬쩍 고개를 내밀었다가, 무릎 꿇은 아트 테이템을 발견한 몇몇 사람들의 수군거림으로 연회장 밖은 곧 사람 들이 서성거리게 되었고, 그런 그들에게 상관하지 않는 태도로 아 트는 벽에 가려 모습이 보이지 않는 미망인에게 계속 이야기를 하 고 있었다. "행복하시리라 생각해서 전 부인을 생각하는 일을 포기했었습니다. 하지만 자작가에서 계약기간이 끝나고 수도에 와서 다시 뵈었을 때, 결혼하시기 전 항상 얼굴에 떠나지 않았던 웃음을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전..." "테이텀 경. 지금 무슨 짓인가?!" "로체스터 백작. 조용히 하시오. 아트는 우리 가문의 자유기사요. 그가 누구에게 청혼하든 백작이 상관할 바 없지 않소! 아트. 위에 내 딸이 있는가?" 진은 제 3자로 빠졌다. 호기심과 흥미로 웅성거리는 사람들 사이를 클레이스와 지나가며 눈여겨보았던, 피부에 직접 닿지 않고 장식되어 있는 귀족들의 보 석 몇 개를 슬쩍해서 연회장으로 들어갔다. 그중 몇 개를 시종이 들고 있는 쟁반 위의 마시다 만 와인 잔에 집 어 넣었다. 도움 요청 신호를 했던 길드원이 평이한 태도로 지나치 다 진이 새 잔을 쟁반에서 들어올리길 기다려 주었다. 나머지, 부로치나 장식 단추로 쓰이는 큼직큼직한 보석들을 잔에 집어넣고 넘치려고 하는 술을 마시고, 바로 다시 시종이 내미는 쟁 반에 그것을 올려주었다. [와이즈. 이 여자 도둑질을 한다? 네가 시켰...을리는 없고.] [입 다물고 있겠다고 했잖냐, 클레이스.] [...........] "클레이스님. 와인 드릴까요?" "...전 이가 레이디만큼 튼튼하지 않아서....콜록. 사양하지요." "아가씨...?" "블루님. 큼. 보셨어요?" 진은 시종을 물리고 안에 그대로 있던 엘프의 의문에 대답했다. 릭 페르를 비롯한 일행 몇이 가까이 왔다. "....보진 못했지만. 있던 게 사라지더군요." "눈감아 주세요, 블루님. '계획'이에요." "............" "아트 경께서 복도에서.... 청혼을 하고 계시나요?" "그렇더군요. 릭페르님." "와. 정말 보기 드문.....아니. 낭만적인 일이네요, 레이디." "파키오. 잘 돼가?" "문제없어요, 레이디." 파키오는 입구 쪽에 가 있는 자작 노부부를 보며 씨익 웃었다. 말주변 없는 아트의 고백은 촌스럽게 들리기도 했지만, 의사 전달 은 충분히 되었다. 로체스터 백작가는 다시 스캔들에 시달릴 기미 를 보이고 있었다. 모나는 눈물을 글썽이며 계단을 내려와 아트 앞에 마주 쪼그려 앉 았다. "말씀하시지 그러셨어요. 전 몰랐습니다. 전 귀족가의 다른 여식들 처럼 부모님이 정해 준 상대와 결혼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지 요. 하지만 당신이 절 마음에 두고 있는 줄 알았다면 다르게 생각 해 볼 수도 있었을 텐데...." "그때나 지금이나 제 마음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부인.....제 청혼을 받아주시겠습니까?" 모나는 눈에 눈물을 가득 담았다. 그 영애는 그를 데려왔다. 그가 정말 찾아왔다. 이렇게 구경거리가 되고 있는데...짐작하지 못했던 지나버린 시간까지 돌이켜 고백 해 주었다. 자신은 방탕한 귀족여자가 아니었다. 그녀의 기다림은 그의 고백과 청혼으로 충분히 보상되었다. 모나는 대답했다. "네. 아트. 지금의 저라도 괜찮다면 당신을 따라가겠습니다." 에릭 로체스터는 더욱 얼굴을 찌푸렸다. 파티 참석자들의 수군거림이 잠깐 멈췄다가 더 심해졌다. '저 여자! 이 속셈으로 테이텀을 데려왔었나? 어수룩한 게 아닌 듯 한데...?' 아트는 모나의 손등에 키스하고 함께 일어서서 사람들 앞으로 걸어 왔다. "죄송합니다, 자작님.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아버지...." 자작은 딸의 붉어진 눈을 들여다보고 시집가기 전 호위로 붙여 주 었던 아트 테이텀을 다시 돌아보았다. "내 허락은 필요 없을 걸세, 아트. 이 앤 이미 출가했으니까. 부족 한 여식일세. 자네와 관련이 있든 없든 흠 있는 여자이니, 거둬 준 다는데 내가 반대하겠는가. 잘 부탁하네....로체스터 백작의 허가가 있어야하겠지만...." 에릭은 그들을 쫓아낼까 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도 머물렀다 가는 것을 따갑게 의식했다. '젠장. 왜 하필 오늘!' "오니가라의 세미얀 폰트 오니가라 공자님이십니다." 어수선한 분위기에 공작가의 자제가 도착했음을 알리는 집사의 말 로 잠시 모두의 관심이 현관으로 쏠렸다. 입구에 서 있던 사람들은 예를 갖추기 위해 다시 들어오기 시작했다. "제가 조금 늦었는데. 에. 이렇게 많은 분들이 몸소 마중을 나와 주 실지는 몰랐네요. 서둘러 온다고 왔는데 무례가 되었나요, 로체스터 백작님?" "....아닙니다. 무례라니요. 어서 오십시오, 공자님." 진은 길이 터져 늦게 도착한 참석자의 얼굴을 확인하자, 몇 걸음 앞으로 나와 드레스 자락을 잡고 다른 귀족여자들처럼 인사를 했 다. "세미얀 공자님. 안녕하세요?" "레이디 진. 반갑습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제게 죄송할 것은 없지요. 하지만 조금 늦으신 탓에 아주 낭만적 인 장면을 놓치시게 되어 운이 없으시네요." "무슨 장면인데요?" "제 파트너 아트 경께서, 글쎄 절 버리고 모나 부인께 청혼을 하셨 지 뭐 에요." "모나 부인이라면...." "로체스터 백작 가의 미망인이시지요." "뭐. 어쨌든 축하드릴 일이네요. 좋은 일 아닌가요?" "그렇지요? 모두들 부러워하실 거 에요." "제가 운이 없는 게 아니라 좋은 거로군요. 파트너를 잃으셨으니 제가 대신 호위해도 될까요, 레이디 진?" "영광입니다. 공자님." 진은 착. 세미얀의 팔을 잡았고 에릭은 머리가 어지러웠다. 괘씸한 저 여자는 오니가라와 까지...친분이 있었다. "아니, 저런. 공자님. 예약이 있습니다만." "클레이스님. 영애의 의견을 존중하셔야 지요. 호호...영애는 저 못 지 않게 발이 넓으시네요. 세미얀 공자님을 알고 계시다니." 진은 얼굴을 펴지 못하고 있는 에릭에게 사랑이야기에 들뜬 소녀 같은 얼굴을 하고 말했다. "로체스터 백작님. 가문의 체통도 중요하지만. 너그럽게 받아들여 주시는 것이 어떨까요. 두 분은 서로 사랑하고 계시는 듯 한데, 함 께 미래를 준비하는 것을 막을 이유는 없지 않을까요? 반대하시는 분도 안 계시는 듯 하구요." "....저도 반대는 하지 않습니다, 레이디. 다만...." "어제 전 훼이른 후작가에서 특별한 일을 겪었지요. 훼이른 가의 가보 에고소드 훼이르를 아시나요?" ".....알고 있습니다." "훼이르의 자아는 '여성'이더군요. 전 그녀와 같은 동성이었던 탓인 지 검의 이야기를 전해들을 수 있었지요. 초대 훼이른 선조와의 이 루지 못한 사랑 때문에 슬퍼하고 황폐해진 영혼이었지요. 저렇게 오랫동안 서로를 못 잊고 있는 커플의 결합을 반대하는 것은 비슷 한 경험을 하는 연인을 다시 만들지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군요." "............." 진은 훼이르를 이용하는 것이 조금 미안했지만 핑계거리로는 안성 맞춤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인용했다. "레이디 진. 훼이르와 저희 선조가...에...연인이었다고요?" "릭페르님. 자세히는 모릅니다만, 선조께서 하신 약속의 의미를 훼 이르는 검이 아니라 여성의 마음으로 받아들였지요. 처음부터 어긋 난 사랑이었다고나 할까요." "영애. 그 이야기 들어도 될까요?" "민트 백작부인. 지나간 남의 사적인 일을 거론하는 것은 실례가 될 것 같아요." "음....그건 그렇군요. 저도 아트 경과 로체스터 백작 부인의 일은 찬성하고 싶어요. 같은 미망인의 입장인데, 애정으로 청혼하는 분에 게 신분이 낮다고 반대하는 것은 좀 그렇네요, 로체스터 백작님." ".............." 에릭은 신분상의 이유를 들어 반대하는 것이 일찌감치 차단되었다. "두 분 다 성인이시고 결혼하시겠다는 데 반대하실 이유는 없으실 거 에요. 하지만 로체스터 백작가에서는 모나 부인에게 지참금을 주셔야하지 않을까요? 부인은 로체스터 성을 쓰시니." "맞는 말이에요, 영애. 로체스터 백작가에서 재가하는 상황이니 에 릭 백작님께서 뒤를 봐 주시겠지요. 백작님은 너그러운 편이시니 빈손으로 재가시킬 일은 없을 거 에요. 호호...." "제 생각도 그래요. 로체스터 백작님은 두 사람을 인정하시는 게 좋겠군요. 물론 지참금 문제도 그렇구요." "............." 진은 미리 언질하지 않았는데도 척척. 말을 맞춰주는 민트와 목걸 이를 빌려 주었던 부인의 맞장구에 미소를 지었다. 와이즈는 삐죽대며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았다. 진은 일을 꾸미고 안면 몰수하고 소매치기를 하고, 세미얀 공자를 비롯한 귀족들의 응원을 등에 업고 에고소드의 사랑을 운운해서 아 트의 청혼을 받아들이게 하고, 여자들의 압력을 끌어내서 에릭에게 지참금까지 약속 받고 있었다. '그래. 진. 넌 훌륭한 사기 공갈범이다. 아니, 모사꾼인가? 상황 한 번 잘 만들어내서 잘도 이용해 먹는구나.' 에릭은 추호도 인정하고 싶어하지도. 지참금까지 딸려 모나를 재가 시키고 싶어하지도 않았지만.-그가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 뱉는 양 이 와이즈는 웃겨 보였다.-모두가 동정과 흥미로 부추기는 바람에 지켜보는 눈이 많은 지라 화를 내지도 못하고, 진과 민트 외 부인 들의 속없게 들리는 권유에 어쩔 수 없이 긍정하고 있었다. 자리가 정리되기 시작했다. 에릭은 초대받지 않은 입장이라 돌아가려는 모나의 아버지를 화해 를 청하는 의미로 붙잡아야 했다. 공개된 자리에서의 아트 테이템 과 형수의 결혼 소식으로 가문이 다시 입방아에 오르느니 모두에게 정식으로 발표해서 뒤 소리를 줄여야함을 택했다. 행인지 불행인지 연회장에는 네카르도의 가장 입심 있고 권력 있는 귀족들이 모여 있었다. 모나는 귀족 부인들과 영애들에게 호기심 어린, 그리고 질투 어린 시선을 받았고 아트는 신사들에게 비난 섞인 축하 인사말을 듣고 있었다. "두 분의 결혼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블루님의 노래를 청해 듣는 것 이 어떨까요, 여러분?" 진의 엘프 공연을 거론하는 말에 다시 사람들의 기대가 한 곳으로 쏠렸다. 실상 오늘의 빅 이벤트였으니까. "제가 나갈 차례인가 보군요, 아가씨." 진은 멋쩍게 웃었다. "블루님. 무섭게 느끼시는 무도회인데. 그래도 약속은 해 주셨으니 노래를 듣길 청합니다. 무리한 부탁인가요?' "아가씨의 흉내를 내어 본 거랍니다. 불러야지요. 저도 아트님과 모 나 부인의 결혼을 축하드리고 싶은 걸요. 미처 인사드리지 못해 죄 송합니다. 부인. 하늘이 아름답고.....라하르네 블루엘 샤라고 합니 다." "감사합니다. 라하르네 블루엘 샤님. 엘프의 노래를 축가로 듣다 니...무엇보다 큰 선물이네요." 모나는 행복으로 붉어진 얼굴로 아트의 팔에 손을 얹은 채 블루의 인사를 받았다. 블루는 무대로 가서 하프를 고쳐 잡았다. 에릭은 갑자기 일어났다 처리 된 형수의 일로 네얀에서 건너건너 다른 도시를 통해 받은 통신의 '진 리툰' 아니 '진 폰 리툰'이라는 네얀의 길드장에 대해 의구심을 가졌고, 엘프의 연주가 시작되어 사람들의 관심이 엘프에게로 모이자, 손님들 사이에서 일행과 함께 경청 자세를 하는 진에게 시선을 한번 주고 자리를 벗어났다. 진은 부채로 얼굴을 부쳐가며 자리를 옮기는 틈틈이 무대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귀족들에게서, 값비싼 장신구들을 소매치기해 부푼 드레스 소매에 집어넣기 시작했다. 진의 곁을 지나는 대부분의 귀족여자들은-게 중 둔해 보이는 신사 들도 포함하여- 모르는 사이 장신구들을 도난 당하고 있었지만 엘 프의 공연에 신경이 쏠린 그들은 알아채지 못했다. 에릭이 연회장을 벗어나는 것을 알고 진은, 도둑질에 가리개로 유 용하게 쓰던 부채로 얼굴을 반쯤 가리고 빙긋 웃었다. '이 여자. 영락없는 도둑이잖아.' 세미얀의 팔에서 손을 떼고 걸어가며 벌이고 있는 일을 뒤에서 지 켜보며 클레이스는 진의 감쪽같은 소매치기 솜씨에 호평(?)을 했다. [74] * 에릭은 수하 길드원을 불러 경비를 강화시키고 2층으로 올라가 서 재의 옆방에서 마나 유동의 변화를 감지하고 있던, 세 명의 마법사 들에게 문제가 있는지 확인을 했다. 마법 학교 교장이 선 보였던 마법 아이템의 시범 사용으로 판단된 마나 유동 외에 어떤 마법사용도 없었다는 증언을 듣고, 그는 다시 방을 나왔다. 레이첼이 있는 3층으로 올라가 볼까 하다가 에릭은 발걸음을 잠깐 멈췄다. '뭔가 이상한데?' 저택내의 분위기가 묘했다. 귀족이지만 그도 길드원이었고 책임자 였으므로 라이벌인 아담스를 경계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요 몇 일 동안 있었던. 자신의 통제 하에 일어난 일이 아닌, 수도의 도난 사건에 에릭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하인이나 경비로 아래층에 섞여 있는 수하들의 존재말고도 저택내 의 이곳 저곳에는 만약을 대비한 경계가 철저히 이뤄지고 있었다. 그는 확인 차 3층의 레이첼의 방으로 올라갔다. "에릭....." 레이첼은 눈물 자국이 남아 있는 얼굴을 훔치고 들어오는 백작을 맞아 일어나서 손을 맞잡았다. "....그렇게 파티 장에 내려오고 싶어? 모두 널 내 정부로나 볼 거 야." "사실이잖아." "..........." 에릭은 짜증이 났다. 어떻게 하란 말인지. "아담에게 연락은 없었어?" 레이첼은 땋아 내린 담갈색 머리 묶음을 만지작거리며 머뭇거렸다. "....오빠와 다투지 않으면 안될까, 에릭?" "난 싸움 건 적 없어. 불만을 갖은 것은 그잖아." "하지만....에릭이 백작이 된 후로 거리의 아이들도 친구들도 모두 더 쪼들리고 있어." "잠깐 뿐 이랬잖아." "에릭. 난 귀족처럼 살고 싶은 생각은 없어. 그러니까...." "널 위해서가 아니야. 내 집안 일인데 그대로 몰락하는 것을 두고 보란 말이야?" 레이첼은 고개를 숙이고 침묵했다. "그렇게 참석하고 싶으면 내려와도 돼." "내려가도....돼?" "호위는 못 해줘, 레이첼." "............" "모나가 스캔들을 일으켜서 형을 죽인 작자에게 청혼을 받았어. 분 위기 상 허락해 줬으니 네가 내려와도 관례처럼 업신 여기지만은 않을 거야. 내려오고 싶으면 내려 와." 레이첼은 설움 같은 것이 고개를 쳐들어 다시 눈물이 나오려고 했 다. "....요 근래에 검푸른 머리의...아니, 좀 특이한 귀족 여자의 방문이 나 만남을 가진 적 없어, 레이첼?" "...없는데? 난 방에만 있었잖아, 에릭." "아담과는?" "............" "연락 받았었어?" "조금 전에...." "젠장!" 에릭은 주춤하는 레이첼을 내버려두고 다시 서둘러 서재로 내려갔 다. 마법사들을 불러 잠김 마법을 풀게 하고 잠시 결계를 거두게 했다. 마법사들은 에릭의 허락이 있어야 해제가 가능하게 걸어 놓 은 마법 결계와 알림 벨을 해지했다. 뒤에서 수하들의 멈칫거리는 반응을 보지 못한 에릭은, 그들을 문 밖에 남겨두고 서재의 벽 가훈이 새겨진 나무 액자 뒤의 비밀 금고 를 확인했다. 이상은 없었지만...뭔가 영 석연치 않았다. '지니고 있어야 할까? 안 돼. 아담 측 길드원들이 숨어들어 있다면 날치기 당할 수도 있으니....' 에릭은 금고 안의 명부가 그대로 있음을 확인만 하고 다시 닫았다. 그는 몰랐지만 서재로 그가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투명마법이 걸 린 마법 아이템을 둘러 쓴 보이지 않는 침입자가 스며들었음을 수 하 마법사들은 알아챘지만 묵인했다. 에릭이 다시 결계를 치길 지시하자 마법사들은 원래와 다르지만 그 의 명령에 따라 간단한 결계를 쳤고, 에릭이 경계를 당부하고 심복 마법사들을 믿고 아래로 내려가자 그들은 다시 슬그머니 서재 근처 에 마법을 시전하고 조건을 걸지 않은, 마나를 적게 실은 옅은 결계 를 해지했다. '고맙소.' '천만에요. 저희 이름이나 지워주시지요.' '모두 지울 거요.' 아담은 서류가 아닌 정보 저장용 두 주먹만 한 마법 구슬을 깨뜨리 려고 했지만, 협조자로 돌아선 마법사 도둑 길드원들의 도움으로 - 구슬이 몇 분 안에 제자리에 돌아가지 않으면 경보가 울린다고 해 서-자료만 추출해 내고 다시 금고 안으로 집어넣었다. 아담은 가지고 왔던 물건들을 서재 책상 아래 두고 영업에 쓰이는 길드의 고급 아이템을-비록 짧게 시간 제한이 있는 아이템이지만 급할 때 쓰기 아주 좋은, 시중에 나와 있지 않은 마법 아이템 중 하나였다.- 다시 둘러써서 모습을 감추고 서재를 나갔다. 마법사들은 서재 문 앞에 백작이 간 후 근처에서 감시 중일 경비들 의 눈을 속이기 위해 걸어 두었던 착시 마법을 풀고, 문이 열리면 해제되는 타임을 건 가벼운 트랩을 설치하고. 흩어져서 저택을 빠 져나가기 시작했다. 아담 측의 길드원들은 로체스터 백작의 사실상의 힘을 쥔 명부의 도난을, 회유가 가능한 적들만을 골라 빠른 속도로 퍼뜨렸다. * 진은 블루의 노래를 사람들과 함께 서서 듣다가 간식이 놓여있는 곳의 탁자로 가서 비스킷처럼 납작하게 구워 크림을 얹은 과자를 집어들었다. '와이즈. 눈치채지 못하게 마법 쓸 수 있어? 옮겨 줄래?' [알았다.] "레이디. 말씀하시지. 가져다 드렸을 텐 데요." "세미얀 공자님. 친절 고맙습니다. 하지만 앉고 싶어서요." 세미얀은 따라와서 진에게 의자를 빼어 주었다. 엘프의 노래를 듣 다 여느 때처럼 잠이 온 클레이스도 옆에 와서 앉았다. 와이즈는 의자에 앉기 위한 척 진을 슬쩍 지나치며 클레이스의 눈 초리를 무시하고, 진의 드레스 소매 안에 모아져 있던 자신이 빌려 준 목걸이가 포함된 보석 장신구들을 용언을 써서 레어로 워프시켰 다. '용언마법도 마법인데 마법사들은 왜 눈치를 못 채는 거야?' [주의하지 않으면 눈치 빠른 녀석들은 간혹 알아챈다고 했잖냐. 인 간은 힘이 너무 큰 차이를 보이는 경우엔 오히려 느끼지 못하는 법 이니까.] '의식을 못하니까? 돌풍이 될 수도 있지만 평상시에는 느끼지 못하 고 당연하게 인식하는 공기...처럼?' [그런 셈이지.] '엘프가 나무라면 드래곤은 그런 존재구나.' [무슨 존재?] '너무 큰 힘을 가져서 인간의 감각에 담아지지 않는 존재.' [............] 릭페르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레이디 진은 꿈속의 직업을 버리 지 않았나 보았다.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던 탓에 이치에 맞지 않 는 주위의 반복되는 일들로, 그는 진이 하는 일을 알아챘지만 '간 섭'하지 않기로 약속했었다. 하지만 한숨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 었다. 탁자에 앉자 그녀의 마법사의 마법인지, 약간 쳐져 보였던 레이디 진의 소매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있었다. '파악이 어려운 분이라니까...' 블루는 아트와 모나를 축복하는 짧은 노래를 부르고, 연이어 진에 게 들었던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조사 하나 틀리지 않고 노래로 만들어 부르고 있었다. '엘프는 머리도 좋구나. 한번 듣고 다 외우네.' [...........] 피키오가 건강을 염려하며 걱정스런 얼굴로 노 자작 부부를 인도해 서 진의 일행이 있는 곳으로 와서 앉았고, 진은 블루의 투명한 느 낌의 하프 연주를 들으며 파키오를 통해 그들과 인사를 나눴다. "파키오 군의 원래 후견인이시라고요, 영애." "네. 부인. 자질이 있는 소년이라 배우게 하고 싶었지요. 전 네카르 도에 머무를 수 없어서 파키오를 훼이른가에 맡기게 되었습니다. 총명한 소년이지요?" "그렇더군요. 영애.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주름이 펴지는 기분이 들 더군요." "주름이라니요. 아직도 아름다우신 데요, 부인?" "호호...그런 말을 젊은 아가씨에게 들으니 나이 들어 속없이 기쁜 생각이 드네요....고마워요, 영애. 영애의 제의라고 들었어요. 엘프의 노래는 참 마음을 위로해 주는 군요." "나도 고맙소, 영애. 집에만 있다가 모처럼 나와서 젊은 사람들과 어울리니 기분이 나아지는구려." "제게 고마울 게 뭐 있겠어요, 자작님. 저도 블루님의 노래를 좋아 하는 걸요. 좋은 노래는 여럿이 함께 듣는 게 더 좋지요....무도회가 끝나더라도 적적하시면 파키오에게 자주 말상대를 하도록 부르세 요, 부인. 후작가에서는 성년이 아니더라도 파키오에게 자율을 줄 테니까요." "호호...그럴까요? 우린 파키오군이 마음에 들거든요. 보기 드문 청 년이 될 거 에요." 진은 그들과 대화하며 의젓하게 미소를 띄고 나이 든 자작부인이 먹기 좋을 만한 연한 간식거리를 가져다 시중을 들어 주고 있는 파 키오에게 속으로 응원해 주었다. '파키오. 열심히 구워 삶아봐. 잘하면 양자도 될 수 있을 거야. 자작 가문을 통째로 녹여버려. 후훗...' [............] 에릭이 들어와 거의 끝나가고 있는 엘프의 노래를 잠깐 듣더니 자 리에 앉아있는 진과 일행 쪽으로 걸어왔다. "좋은 시간 되시나요, 여러분?" "오. 로체스터 백작. 그럼요. 감사 드리고 있습니다. 앉으세요." 자작 부인의 권유에 에릭은 진을 마주보고 앉았다. 블루의 아름다운 선율의 하프 연주가 끝나고, 사람들이 감탄과 함 께 박수를 치며 무대에서 내려오는 엘프를 맞아 슬프고 가슴 저린 노래 가사에 대해 묻고 있었다. 에릭은 막 내린 공연에 잠깐 눈길을 주고 진을 떠보기 위해 입을 열려고 했지만, 갑자기 울린 낮은 비명으로 다시 고개를 돌려야 했 다. 진과 목걸이를 바꿔했던 귀족 부인은 블루의 노래가 끝나자 눈물을 글썽이며 무심결에 목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가, 있어야할 보석이 잡히지 않음에 어지러운 사람들의 발 아래에 고개를 내리고 떨어뜨 린 것을 찾다가 비명을 질렀다. "맙소사! 목걸이가 없어졌어!" 블루와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들과 그 외 목을 축이기 위해 탁자로 몸을 돌리던 사람들은 모두 돌아보았고, 하나 하나 도난 당한 물건 이 있음을 깨닫기 시작했다. "내 브로치도 없어졌어요!" "어라? 내 보석 장신구도....조금 전까지는 있었는데...." "내 귀걸이도요!" "꺄악- 내 목걸이는 드워프 제인데! 도둑이야!" 소란은 번져 나갔고, 에릭은 실내를 재빨리 둘러보다 진에게 의심 스런 눈을 하고 돌아보았다. 진은 눈을 말똥거리다 루비로 바꿔 걸 은 자신의 목걸이를 확인하는 척 했다. "에....제건 그대로 있는데...." 무도회장은 아트와 모나의 일에서 있었던 소란과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어수선해졌다. 가장 값진 보석들로 아마도 엘프의 노래에 정 신이 모아져 있던 사이, 주로 부인들과 영애들의 장신구가 상당량 없어졌다! 에릭 로체스터는 순진한 표정을 짓고 놀라워하는 진에게. 그리고 태평스럽게 보이는 그녀의 일행과 의외로, 몇 주전 성년을 맞아 궁성 연회에 참석해서 만났던, 어설픈 정의감으로 '애송이'라 는 판단을 내리게 했던 공작의 자제까지. 그들의 무감각해 보이는 모습에 의심의 눈초리를 떠올리는 것을 누 르지 못했다. 에릭은 일단 파티의 주체 측으로 손님들을 진정시키 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석 몇 개 가지고 웬 소란이람." "그러게요, 클레이스 경. 그 정도는 오니가라가 털린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콜록. 죄송합니다. 레이디 진." 진은 눈을 과장스럽게 떠 보이며 웃으며 대꾸했다. "저런. 오니가라도 도난 당한 것이 있었나요, 공자님?" "에. 엄격히 말하면 도난이지요. 레이디 진. 오니가라의 사람들의 마음까지 모두 훔쳐 가셨지 않습니까." "도대체 피크닉을 가셔서 무슨 일이 있으셨는데요. 레이디 진?" "릭페르님. 때로 모르는 게 나은 일도 있습니다." "저만 따돌리시니 섭섭하네요. 일행이지 않나요?" 거론할 자리가 아니라는 생각에 와이즈는 진을 조금 도와 주었다. "릭페르 경. 나중에 기회가 닿으면 진도 이야기 해 드릴 겁니다." "알겠습니다. 마법사님." 진은 부채로 입을 가리고 에릭의 곤란을 구경했다. 로체스터 백작가는 가문의 가보가 아니라 신용을 도난 당하고 있었 다. 머뭇거리며 혼란스런 연회장으로 호위 없이 들어오는 레이첼을 발 견하고 진은 릭페르에게 그녀를 데려오도록 부탁했다. 레이첼은 아이보리색 바탕에 분홍 허리두르개를 하고 긴 머리를 땋 아 내리거나 올려서 장식한 헤어스타일로 정숙해 보이는 분위기 였 다. 진은 10살 이상 연상인 그녀에게 오히려 언니처럼 따뜻해 보이 는 미소로 의젓하게 반겨주었다. "안녕하세요, 부인. 이리 앉으세요." "네에....감사합니다." 진은 호기심 어린 신사들의 시선을 접어두고, 피해자가 아닌 귀족 들이 긴 테이블로 가서 자리에 앉는 것을 보며, 에릭이 얼굴이 달 아오른 귀족들을 안심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을 보았다. 에릭은 난처했다. 자신의 저택에서,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가문의 새로운 인식과 부흥을 꾀해 보기 위해 손님으로 애써 불러모은 귀족들의 놀라움과 노여움은 무도회 주체자로, 당장 도둑을 잡아내든지. 변상을 하라는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심증이 가는 인물은 네카르도의 가장 쟁쟁 한 귀족들의 비호를 받고 있었고, 자신의 이중 신분을 아는 다른 도시의 길드장이기도 했다. 에릭은 울화가 치밀었다. "어쩌나요, 영애...제가 넋을 잃고 있느라 영애의 목걸이를 잃어버렸 어요." "그건 제....걱정 마세요, 부인. 기사분들도 많고 나라 일을 하시는 관리분들도 계시니 찾아낼 수 있을 거 에요." 얼굴이 거의 파래지기까지 한 목걸이를 교환했던 부인의 사과에 진 은 안쓰럽고 미안한 기분이 되었지만, 안면 몰수하고 약간의 동정 과 태연함을 가장해서 위로했다. 긴 탁자 한쪽에 놓여져 있던 여러 개의 술잔 중 하나를 집어들어 수색을 자청하고 선동하던 50대 귀족 관리가 벌컥벌컥 와인을 마시 다가 술을 뿜어냈다. "켁켁...." 단순히 사레가 걸린 줄 알았던 그는 목에 걸렸던 루비 브로치를 뱉 어냈다. "여기! 보석이!" 연회장은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연회장 안이나 저택 내에 도둑이 있는 게 틀림없소! 로체스터 백 작. 하인들을 모두 부르시오!" 에릭은 도둑을 잡아내고자 하는 귀족들의 직접적인 시도를 막을 수 없었고, 연회장은 몇몇 궁정 관리직에 있는 귀족들과 기사들의 통 제에 놓이게 되었다. 연회장을 들락거리던 시종들과 하녀들이 먼저 몸수색을 당했다. 밖에서 대기 중이던 손님들의 마부나 하인들과 저택 경비들까지 모 두 불려와 수색을 당했지만 발견된 것이 없어 한쪽에 모두 멀뚱거 리며 대기하고 있어야 했다. "몸에 지니고 있을 리가 없지 않소. 이미 내 기사들이 도망갈 만 한 곳에 진을 치고는 있지만 아직 저택을 빠져나가지 않았거나 어 딘가 숨겨 두었을 지도 모르오. 수색을 허락하시오. 백작." "제 집에서 일어난 일에 사과 드립니다. 하지만 결례입니다." "지금 그게 문제인가요? 도난 당한 보석들은 보통 물건들이 아니란 말입니다, 백작." 지켜보던 세미얀은 쓴웃음을 지으며 진에게 양해를 구했고, 진은 흔쾌히 동의했다. "여러분. 여기 모이신 귀족들 중에서 도벽이 있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제 생각엔 시종들이 아니라 손님 중에 범인이 있 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공자님..." "귀족도 사람입니다. 저들만 수색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제가 먼저 체면 버리고 수색 당하지요. 그러면 되겠지요?" "............" 귀족들은 모두 머뭇거렸지만 가장 신분이 높은 공작가 후계의 제안 에, 불려져 온 일꾼들을 모두 연회장 옆방에 들어가 대기하게 하고 모두에게 양해를 구한 뒤. 레이디와 신사들로 나눠져 먼저 수색 당해 결백을 증명한 신사들과 부인들이 차례로 몸수색을 해서, 걸치고 있거나 품에서 나온 보석 이 도난품인지 아닌지를 확인했다. 진도 일행과 흩어져 레이첼과 함께 부인들과 영애들 틈에 끼이게 되었다. 진의 일행과 아트와 모나도 레이첼도 기사 후보생들과 마 법학교 교장등등도 모두 어안이 벙벙하며 차례가 되자 수색을 당했 다. 진의 목걸이를 잃어버린 부인이 여자들 중에선 가장 수색에 열 을 올리고 있었다.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건 가욧!" "부인. 참읍시다. 우리가 먼저 결백을 증명해야 저택을 수색하는 것 도 정당해 지겠지요. 정말 어이없는 일이에요." "마법도 쓰이지 않았다니 멀리 가진 못했을 테고. 블루님의 노래 전 후로 연회장을 벗어난 사람도 몇 없어요. 이 안에 있을 수도 있 는 일이지요. 참아봅시다." "잡히면 누구든 가만 두지 않겠어! 이런 모욕을 주다니!" 곳곳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고 분위기에 눌려 울음을 터뜨리는 영애 들까지 나왔다. 에릭은 머리가 아파 왔다. 진은 나서지 않아도 재물에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눈치 채지 못했 음에 분해하는 귀족들의 선처(?)로 구경만 하면 되었다. 연회장 안의 음식 속까지 샅샅이 뒤졌지만 처음에 발견되었던 브로 치 외의 도난품은 발견되지 않았다. 귀족들에게서도 자신의 것들 외의 도난 당한 보석들은 나오지 않았 다. [정말 웃기는 일이다. 이런 일을 겪다니. 웃어야 하나?] [웃는 쪽이 건강에 좋다더라, 클레이스.] [쿡쿡...저 여자 갈수록 맘에 들어, 와이즈. 저 감쪽같은 얼굴 좀 봐 라.] [............] 블루는 황당해 하다 참으로 재미...아니 흥미로운 광경에 입을 막고 웃음을 참았다. 인간귀족들은 망가지고 있었다. 범인이 분명한 아가 씨는 보통 영애들처럼 열난다는 표정으로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모두 화가 치미는 지 와인을 거듭 청하고 목을 축이고 있었다. "도망가버렸을 까요?" "그런지도 모르지만....백작. 우리는 체면치레 버리고 모욕을 참아가 며 몸수색을 허락했소. 저택을 모두 수색해도 되겠지요? 하인들이 그런 것이 분명하오. 아니면 수도의 가보들을 훔치던 괴도라도 방 문했는지 모르지." "그래요. 어쨌든 저택 내도 모두 수색 해 봐야해요. 꼭 찾아야 한다 고요!" "진정하십시오, 여러분. 제 일꾼들이 그런 몰상식하고 바보 같은 일 을 저질렀겠습니까? 여기 계신 분들은 대부분 기사들이시고, 뭔가 특별한 인물이 아닌 이상 모두를 속이고 이런 일을 꾸몄을 리는 없 습니다. 차분히 조사를...." "시간이 지날수록 도둑은 잡기 힘들어지오! 여기 있는 사람은 하인 이든 귀족이든 모두 확인했으니 레이디들은 쉬게 하고 모두 흩어져 찾아봅시다!" "저도요! 저도 수색하겠어요." 수색 대상이 연회장 밖의 저택 전체로 확산되었다. 로체스터 백작가는 때아닌 수난을 겪어야했다. 릭페르는 황당하기 이를 데 없는 일들에 눈을 껌벅대다, 다시 간식이 놓여있는 탁자에 앉는 진과 일행들을 보고 따라 앉았다. "레이디 진. 제게 조건으로 걸었던 '진상'과 관련이 있나요?" "흠. 릭페르님. 아직 진상은 밝힐 때가 아니네요. 기다려 보지요." "............" '와이즈 엿듣는 사람 없지?' [없다.] "역시 레이디 진께서 벌이신 일이세요? 오니가라를 약탈하시고 누 님의 첫 키스를 훔쳐 가시더니 이번에는 무슨 계획을 실행하고 계 시는지." "누님의....뭐요? 아. 죄송합니다. 공자님." "하하...리툰 마법사님의 말씀대로 나중에 레이디께 꼭 여쭤보세요. 훼이른 경." 진은 블루의 감춰둔 사탕을 숨기고 몰래 먹을 때의 어린애 같은 미 소를 보며 물었다. "블루님. 오늘은 웃음이 유달리 장난스러워 보이네요. 엘프의 미소 로 안 어울려 보여요." "아. 그런가요, 아가씨? 죄송합니다. 전 감정 표현을 위장하는 것이 서툴러서..." "전 그냥 장난말이었는데....죄송하실 필요 없어요. 블루님." 파키오는 충격 받은 자작 부인의 시중을 들며 위로하고 있었고, 아 트와 모나는 손을 놓지 않고 잡은 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진은 빙글거리는 클레이스의 시선과 와이즈의 삐죽임과 세미얀과 릭페르 의 염탐 섞인 시선들에 부채질을 하며 시종일관 순진한 표정으로 모른 척 했다. 레이첼은 에릭의 곤란을 보며 안절부절 해 했지만 도움이 될 입장 이 되지 못해서 진의 옆에 붙들려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일행의 대화를 듣고 자신을 뚫어지게 보자 진은 헛기침을 했다. "레이첼. 선물을 드릴까요?" "네?" "로체스터 백작이 어떤 신분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있어요. 그는 함정에 빠질 거 에요." ".........." "그대로 두면 그는 파멸합니다. 하지만 위해 주는 친구가 한 사람 만 있어도 재기 할 수 있겠지요. 그의 편에 서겠어요, 아니면 다른 사람들처럼 그를 외면하시겠어요?" 레이첼은 이 귀족 영애의 애매한 말을 알아들었다. 그녀는 오빠와 관계가 있나보았다. 자신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에릭의 정부 이상은 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고, 그가 약속했던 것과도 달랐다. "전 그가 귀족이길 바라지는 않아요. 평범한 정도면 족해요. 그를 처벌할 건가요?" "처벌 권을 레이첼에게 드리지요." 진은 와이즈에게 맡겨 두었던 반지를 받기 위해 손을 내밀었고 마 법사는 품에서 수색을 당할 때, 에릭이 보지 못하게 내밀어 확인시 켰던 커다란 루비반지를 꺼내 진의 손위에 올려주었다. 진은 그것을 레이첼에게 내밀었다. "로체스터 백작가의 안주인에게 대대로 물려지는 반지라 더군요. 상처가 많아 크기에 비해 제 값을 받지 못해 재산으로의 의미는 별 로 없지만 '안주인'의 의미가 있는 반지지요. 받으시겠어요?" 모나가 얼굴을 진 쪽으로 향하고 약간 웃어 보였다. 레이첼은 그것을 집어들었고 진은 부채로 입을 가렸다. "....오빠는 대가 없는 일은 없다고 항상 그랬어요." "네. 물론이지요. 차례가 될 때까지 가만히 계시면 되어요. 레이첼." "알겠습니다." '모두 해결. 마지막 하나 남았다.' [....빨리 끝내라, 진. 지겹다.] [75] * "하아- 영애의 사교계 데뷔 무도회는 정말 엉망이 되어 버렸네요." "괜찮아요, 민트 백작 부인. 신경 써 주시고 배려해 주신 것만으로 도 너무 고마운데요. 부인의 노력이 좀 아깝기는 하지만요." "호호..." 민트는 별거 아니라는 미소를 지으며 같은 탁자의 클레이스가 빼어 준 의자에 앉았다. "밖은 난리가 나고 있나 보군요. 밤을 꼬박 새고 있다니...참 성대한 파티라고 해야할지..." 민트의 중얼거림을 들으며 진은 릭페르의 할 말 많아 보이는 시선 에 윙크라도 해서 놀려 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참았다. '그만 좀 쳐다보시오, 기사. 얼굴에 구멍나겠네.' * 에릭 로체스터는 철저히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알았다. 양팔 격이었던 믿을 만한 수하들의 방에서 크기 작은 도난품들이 발견되었고, 설상가상으로 길드원 수하 마법사들의 배신으로 서재 의 문까지 손을 대어 거침없이 열고 들어간 귀족들에게서 수도에서 요 몇 일간 도난 당해 없어졌던 귀족가의 가보들이 발견되었다. 재확인 차 열어 본 금고의 서류 저장용 마법 구슬에도....변화가 있 었다. 에릭은 흉계로 인해 피할 수 없는 도둑의 입장에 서게 되었다. 귀족 신분이었기에 상황은 더 나빴고 대처를 하기도 애매해 졌다. 그 많던 수하들이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게 되자 일부만 남고 모 두 사라진 것도 알았다. 연회장으로 돌아 온 그들은 보석이 발견 된 방의 주인들을 연회장 옆방에 대기 시켰던 일꾼들 중에서 골라내어, 모두 수색을 담당했 던 귀족들 앞에 꿇어 앉혀졌다. "백작! 당신이 주도해서 벌인 일 아니요! 증거가 이렇게 확실한데 계속 부정하시려오?" "제가 아닙니다! 함정이라고요!" "누가? 뭣 때문에 백작을 이런 파렴치한 함정에 빠뜨린 단 말이오! 하인들이 많이 도망 간 것으로 보이는 데 그 것만 봐도 틀림없지 않소! 이 일을 어떻게 책임질 테요!" "제 목걸이는 발견되지 않았어요! 내어놓으시지요, 백작." "제가 아닙니다. 전 엘프가 하프를 연주하고 있을 때 자리에 없었 지 않습니까!" "그래서 더욱 의심스러운 것 아니오, 백작!" "이실 직고하시지요. 더는 못 참겠습니다! 우릴 뭘로 보시는 겁니 까!" '명단만 그대로 있었어도....저 계집애와 아담을 협박할 수 있었을 텐데! 도대체 언제?....그때? 아담이 직접 왔었나? 빌어먹을!' 에릭은 부정하는 말로는 사태가 해결되지 않을 것임을 인정하고 도 망간 하인들이 꾸민 일로 치부해야했다. 하지만 책임은 그에게로 돌아왔다. 규모가 큰 일이 되어 버려서 그들은 귀족들 사이에 확인 되지 않은 도둑들의 조직까지 떠올리고 있는 판이라 에릭은 서둘러 무마 시켜야했다. 에릭은 길드 장으로 몇 년 간 모은 재물과 백작 가의 재산들을 발견되지 않은 보석들의 보상금으로, 가보들의 피해 보상금으로 내어 놓아야했다. 몇 몇 귀족들은 화를 누르지 못하고 백작가와 인연을 끊을 것을 선 언하고 돌아갔지만, 대부분은 연회장에 남아있었다. 보상을 해 주는 문제로도 완전히 해결되지 않을 일이라는 것을 에 릭은 잘 알았다. 그는 파산했을 뿐 아니라 귀족 계층에서 매장되고 있었다. 돈이야 다시 모으면 될 일이었지만 그는 형보다도 타격이 큰 스캔들을 일으키게 되었고 부흥시키고자 했던 가문의 일이 거꾸 로 진행되어 권력 계층에 가장 중요한 신용을 잃었다는 것을 알았 다. 그는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서 일을 주도 한 것이 분명한 검푸른 머리의 계집애에게 걸어갔다. "제 집에서 일어난 불미스러운 일에 다시 한번 사과 드립니다. 하 지만 분명히 모략입니다, 여러분. 전 오늘 아침 사업차 교류 중이던 네카르도의 한 영지에서 통신을 받았습니다. 바로 진 폰 리툰이라 는 귀족 영애가 네얀의 도둑 길드의 장이라는 정보였지요. 수도의 가보 도난 사건도 오늘 저희 집에서 일어난 일들도 모두 이 영애와 관련 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변명하시겠소, 영애?" 귀족들은 에릭의 말에 엘프에게 노래 가사를 이야기 해 주었다던, 그를 초대하기도 했던 타국의 귀족 영애에게 눈을 모았다. 진은 일행과 그대로 앉아 있다가 눈을 크게 뜨고 세상 모르는 어린 소녀의 말투로 대답했다. "어머, 백작님. 분명히 몇 시간 전에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전 네얀 에서 하층민들에게 투자를 했고, 더 이상 도둑질을 할 필요가 없던 그들이 감사의 뜻으로 기념품 삼아 도둑 길드 장의 패를 제게 선물 로 주기는 했습니다만. 전 그것을 이곳에서 사용한 적이 없답니다. 그리고 장식이 아름다운 것도 아니고 해서, 수도를 관광하던 중에 지나가던 사람에게 주어 버렸었지요. 하층민들이 기. 념. 품. 으로 준 것에 책임과 죄까지 따르는 것이었나요?" '이 아저씨. 이성이 나갔나? 물에 빠져도 같이 빠지겠다는 건가? 길 드장 감이 아니었다니까. 아담이 훨씬 낫지.' "어수룩한 척 하지 마시오, 영애. 당신이 꾸민 일이 아니오!" 클레이스는 진에게 빚을 지울 기회가 왔음을 알았다. "로체스터 백작. 말씀을 삼가시지요. 레이디 진이 네얀에서 하층민 들에게 인기를 얻어 떠받들어져서 조직의 패를 기념품으로 줬던 사 용하라고 줬던. 몇 일 호위하며 레이디를 알게 된 저는 그 일이 하 나도 문제가 있어 보이지 않습니다. 게다가 수하도 없을 수도에서 도난 사건이 일어나고 있을 때 레이디께선 저와 블루와 함께 오니 가라 영지에 가 있었지요." "오니가라에...말입니까, 공자님?" 클레이스의 말에 귀족 한 명이 세미얀에게 되물었다. "네. 오니가라에 오셨었지요. 저희 오니가라에 아주 깊은 인상을 심 어 주시고 하층민들의 신임과 오니가라의 재정 일부를 선물로 받아 가시기까지 하셨지요. 거기다 제 아버님의 청혼까지 받고 있었으니 수도의 도난 사건과는 무관할 겁니다." 진은 부채질을 했다. "수도의 도둑들과 연계하고 있었을 게 틀림없습니다. 수도를 비웠 다고 해도 알리바이가 충분치 않습니다!" "참 이상하군요. 어떻게 그런 정보를 상인들의 사업 상 교류 중에 백작님께선 아시게 되셨을까요. 상인들 중에 도둑이 있었나?" 클레이스의 중얼거림에 다시 더한 의심이 에릭에게 향했다. 에릭은 낭패스러웠다. 증거가 없고 심증만 있게 된 일에 자신의 정 체를 드러내 증명할 수는 없었고, 의심의 화살이 더 커져서 다시 자신에게 돌아와 있음에 경솔했음을 후회했다. 에릭은 모두 잡아 놓고 진을 추궁하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백작님. 오해로 하신 말씀이시니 더 이상 거론하지 않는 것이 좋 겠네요. 네카르도의 한 도시에 투자한 대가로 이곳에서 도둑들이 벌인 일의 책임을 지고 싶지는 않네요." "............." 진은 상냥한 태도로 지켜보고 있는 귀족들에게 말했다. "여러분. 제 생각으로는 로체스터 백작님이 벌이신 일이라는 생각 은 들지 않는군요. 아무리 재물에 눈이 먼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신 의 저택에서 손님들을 상대로 도난 사건을 주도하고 상징적인 의미 밖에 되지 않는 가보들을 수고스럽게 훔쳐서 집안에 숨겨 두었을까 요? 누군가 백작가에 앙심을 품었거나 일꾼들이 오랫동안 대우받지 못함에 벌인 일이 겹친 것이 아닐까요? 보상을 약속하셨다니 더 이 상 백작님께 죄를 묻는 것은 너무 한 일 같은데....그렇지 않나요, 공자님?" "그렇긴 하군요. 나온 증거들이 너무 확실한 것은 오히려 의심스러 운 일이지요. 모두들 불쾌한 마음만 잊어주신다면 로체스터 백작님 을 동정하실 수도 있겠네요." ".............." 진이 타협을 걸어오는 것을 에릭은 알았고, 부아가 치밀었지만 그 는 받아들여야했다. 귀족들은 오가는 대화를 듣다가, 흥분해서 자신들도 지나친 행동을 했던 것을 떠올리고 헛기침을 했다. "우리는 모두 보상을 약속 받았으니 이 일의 조사와 마무리는 백작 의 권한이겠구려." "......폐를 끼치게 되어 정말 죄송합니다." "일꾼들의 대우를 조금 개선시키는 것이 좋겠소. 백작. 이런 일이 일어난 원인 같은데...." 모나의 자작 아버지의 말에 다른 귀족들은 자신들의 고용인들을 떠 올렸다. 수선스런 분위기로 어색하게 서로 사과를 주고받던 그들은 이틀 간 열리기로 했던 무도회의 폐막을 받아들여 돌아가기 시작했 다. 모나의 아버지도 마법학교 교장도...모두 돌아갔다. 억눌렸던 일꾼들도 모두 에릭의 지시로 제자리를 찾아갔다. "영애...미안해요. 영애의 목걸이는 돈으로 환산하긴 엄청나고. 백작 은 제 책임도 있고, 원래 주인이 아니라면서 다른 사람들과 달리 제대로 된 보상을 해주지 않았어요." "부인....곤란한데요." 그녀는 지친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몸수색을 할 때 진은 민트에게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넌지시 물었 었다. 모 백작가의 한 갈래로 작위 없는 인척들 중 한 집안이었다. 작위가 없다는 말은 관리하는 영지를 자신의 명의로 가지지 못한 남편을 두고 있다는 말이었고, 그 말은 그다지 부유하지 않다는 소 리 일 수도 있었다. "부인. 그 목걸이는 대단히 값진 보석이긴 하지만 저는 부유한 편 이라 잃어버려도 타격이 크지는 않답니다. 하지만 부인의 잘못 만 은 아닌 줄은 아나, 드워프제 목걸이는 다른 장신구와 너무 큰 가 격 차이에 희소성까지 있어서 무시할 수가....." 그녀는 한숨을 쉬면서 대답했다. "알아요, 영애. 차라리 교환하지 않고 내 목걸이를 가지고 있다 잃 어버렸다면 이렇게 부담이 크지는 않았을 텐데....저와 남편은 그렇 게 부유한 귀족은 아니에요. 남편이 몸이 좋지 않아서 저 혼자 다 른 부인들을 따라서 블루님의 노래를 듣고자 온 것인데 이렇게 큰 일을 겪게 되다니...." "이렇게 하지요, 부인." "네?" "부인의 목걸이와 제 목걸이를 정식으로 교환하는 셈치지요. 그러 면 부인은 빚이 생기지 않겠지요." "그런....영애. 너그러우신 말씀이지만, 값어치가 너무 달라요." "편차는 다른 것으로 받을게요, 부인." ".....무엇으로?" 진은 레이첼을 소개했다. "에릭 로체스터 백작님과 장래를 약속한 분이세요. 그런데 평민 신 분이지요. 백작님은 이제 이름뿐인 귀족이 되어버린 셈이지만 레이 첼양은 지참금으로 백작님이 재기하시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거 에요. 레이첼양을 도와 부인들의 내조와 집안 일을 지휘하는 등의 조언을 해 주시겠어요? 전 아트님과 모나 부인의 일을 보고 레이첼 양에게도 좋은 일이 있었으면 하고 생각했거든요." "아......" 그녀는 뜻밖의 호의 어린 진의 제안에 무겁게 얹힌 기분이 내려가 는 것 같았다. 와이즈는 한숨을 쉬고 천장을 올려다보았고 다른 일 행들도 비슷한 반응들을 보였다. "어려운 일 아니지요. 전 영지 관리자 남편을 두었기 때문에 집안 일에 따르는 일들을 직접 해보기도 했어요. 양초 만드는 일이나 옷 감 짜는 일들도 알고, 하녀들에게 가르치기도 했지요." "부인. 대단히 유용한 기술을 배우셨네요." 그녀는 이제 한 시름 놓여서 웃기까지 하며 대답했다. "이름뿐인 귀족은 자존심을 버려야 할 때도 많고, 보이지 않는 곳 에서 고생도 꽤 하는 편이니까요....이 아가씨에게 그 외 귀족의 예 의 범절 같은 것을 가르쳐 주면 되는 건가요?' "그녀의 입장을 이해하셨네요. 그렇게 해 주세요. 고맙습니다. 부 인." "제가 고맙지요. 정말 미안해요, 영애. 괜히 남의 것에 욕심내었다 가...." 힘있고 부유한 귀족을 부러워하고 흉내내려다가 호되게 후회한 셈 이니 그녀는 다시 욕심부리는 일에 재고 할 경험이 되었을 것이다. 인사를 하고 그녀는, 타고 왔던 친척의 마차에 타기 위해 연회장을 나갔다. 연회장에는 진 일행만 남게 되었다. 진은 차갑게 굳어져 살기까지 은연중 풍기고 있는 에릭이, 손님들 을 배웅하고 수하들을 이끌고 연회장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그가 입을 열기 전에 진은 사교용으로, 위장으로 짓고 있던 표정을 거두고 허스키 하지만 또렷한 어조로 먼저 말을 했다. "타협하시겠습니까, 백작님. 아니면 뒤 끝 없도록 완전히 파멸시켜 드릴까요?" "..........." 에릭은 이 남청색 눈의 귀족 여자에 대한 자신의 판단이 여러 번 잘못 되었음을 깨달았다. * "레이첼. 이리 와." 머뭇거리며 일어나려는 그녀를 진은 팔을 잡아당겨 다시 주저 앉혔 다. "인질로 쓰시게요? 인질의 의미가 없지 않나요, 백작님?" 에릭은 이를 갈고 싶었다. 남아 있는 귀족들은 한 명 한 명이 만만히 볼 인물들이 아니었다. 자신의 지배하의 길드원들은 대다수 도망을 갔고, 남아 있는 자들 도 불만이 쌓이고 있음을 모르지 않았다. 눈앞에 있는 자들말고도 그녀의 뒤엔 실제 권력이 넘어 간 아담까 지 버티고 있었다. 에릭은 신중해져야 했다. "무얼 타협 해야하오, 영애. 난 이미 잃을 대로 잃었는데 말입니다." "패를 정식으로 넘기셔야 지요. 그래야 깨끗이 해결되는 것 아닌가 요? 원래 제 목적이기도 하지요." "날더러...이젠 목숨을 위협받아 쫓기는 입장까지 되란 말이요? 왜 내가 그래야 하는 게요?" "왜냐면 에릭. 당장 목숨을 위협받고 있으니까." 에릭은 낯익은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수하들은 아담스의 부하들에게 제압 당해 밖으로 끌려나가기 시작했고, 에릭은 노인으로 변장한 마부차림의 아담에게 얼굴을 일 그러뜨려 보였다. 일행 중 민트만 벌떡 일어났다가 반응 없는 신사 들에게 고개를 갸웃거려 주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모나 부인. 이게 무슨 일이래요?' '모른 척 하는 게 좋겠어요, 백작 부인. 영애의 일인가 봐요.' '그래요. 모른 척 하는 게....좋겠군요.' "내가 뭘 잘못 했다는 거...." 에릭이 이름을 밝힐 것 같자 아담은 말을 끊었다. "우린 노예가 아니니까. 우리들의 '일'도 생활을 위해 하는 '일'이고, 한 개인을 위해 구걸을 하고 영업을 하는 것은 사양하고 싶으니까. '친구' 인 줄 알았는데 계급이 다름을 잊어주지 않아 우리의 신임을 이용하고 배신했으니까, 에릭. 패를 넘겨. 넌 자격을 잃었다." '도둑 길드의 세력 다툼인가 보군요, 공자님.' '그런가 보네요. 릭페르 경. 하지만 '도둑'이라는 단어는 한번도 나 오지 않네요. 후후....' "날 처벌 할 거냐?" 에릭은 승산 없게 된 이 싸움을 몇 년간 쌓인 스트레스와 함께 모 두 집어쳐 버리고 싶었다. 지겨웠다. "규칙이다. 배신자는 처형이라는 것은 피차 알고 있잖아." "배신당한 것이 내 쪽이 아니고?" "네가 한 배신의 결과를 알지 못한다면 그야말로 배신이지. 구질구 질하고 끈질긴 우리 같은 계층들은 몇 년 쯤 굶고 착취당해도 아무 렇지도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 진은 나서지 못하게 잡고 있던 레이첼의 팔을 놓았다. 자유로워진 레이첼은 일어나서 겨우 지나다닐 정도의 공간의 탁자 사이를 가로질러 에릭에게 갔다. 아담은 눈을 찌푸렸다. ".....에릭을 그냥 내버려 둬 줘. 실수한 거라고 생각해 줘. 봐. 이걸 받았어. 백작가의 안주인에게 물려지는 거래." "..........." "날 봐서...그냥 제명시키는 정도로 처벌하면 안 될까....?" 아담은 진에게 눈을 주었다. "저와 백작님은 타협 중이었지요....에릭 로체스터 백작님. 패를 원 래 주인이었어야 할 사람에게 넘기시고 레이첼의 신분을 의식하지 말아 주시고 모나 부인께 약속하신 지참금을 주시고 모임에서 깨끗 이 손을 떼도록 하시는 게 어떨까요. 타. 협. 입니다." 에릭은 돌아보지 않고 대꾸했다. ".....내게 약속되는 것은 뭐요, 영애." "귀족과 가문의 이름에 연연할 필요 없을 심적 자유. 하나 남은 백 작님의 아군. 차후 신변에 대한 어떤 위험도 없을 것. 새 출발할 기 회. 같은 것이지요." 에릭은 방관자에 구경꾼이 된 진 일행의 눈길과, 아담과 그의 얼굴 을 가린 심복들 사이에서 오래 갈등하지 않았다. 지친 기분으로 그는 길드장 자리를 아담에게 양도했다. 아담스는 네카르도를 대표하는 도둑 길드의 장이 되었다. * 에릭은 위층으로 올라갔고, 지쳐 보이고 굳은 얼굴의 그를 레이첼 은 동정 섞인 얼굴로 다독이며 따라갔다. "모나 부인. 별장이 아니라 이 저택을 받으시지 그러셨어요?" 모나는 미소지으며 진의 말에 대답했다. "전 이 집이 싫어요. 좋지 않은 기억이 많아서요. 그 별장은 수도와 떨어져 있긴 하지만 친정과는 차라리 가깝고 경치도 좋은 곳이에 요. 전 조용히 살고 싶어요....고마워요, 영애." "보수를 받은 일이니 고마워 하실 이유는 없겠지요. 행복하세요, 부인." 모나는 소녀처럼 보이는 웃음을 지었다. 아트는 얼굴이 약간 붉어 져서 천장을 쳐다보았다. "음. 로체스터 백작이 안 되 보이는 군요. 저택만 남은 백작이라니." "세미얀 공자님. 괜찮을 거 에요.... 당분간은 수도에서 감시를 받게 되겠지만, 레이첼 양이 그에게 힘이 될 테니 모두 잃은 것은 아니 지요." 부하들에게 저택 내의 반대파 길드원의 잔당 처리를 지시하던 아담 은 다시 연회장으로 들어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진과 일행에게로 와서 진의 메달을 건넸다. "이건 말씀하신 대로 기념품의 의미 밖에 되지 못할 수도 있지요, 레이디 진. 하지만 저에겐 도움이 되었고 빌려 주신 점 감사 드립 니다." 진은 마르카 사제의 메달을 받아들었다. "다른, 한가지 더 약속한 도움도 드리러 갈게요." 나이 든 마부는 고개를 끄덕이고 연회장을 나갔다. "다른 한가지 도움이요?" "아. 예. 릭페르님. 실제 그들에게 돌아간 것은 '통제권' 뿐이니까요. 자금이 많이 필요할 거 에요." "............" 진은 일어났다. "여러분 곧 해가 뜨겠네요. 무도회는 끝났으니 쉬고 다시 뵈어요." "영애. 백작가엔 하인이나 하녀도 몇 남지 않아서 불편할 텐데 돌 아가지 않으시게요?" "민트 백작 부인. 하루쯤 시중 받지 않고, 방도 직접 골라 보고 싶 지 않으세요? 무도회 준비로 방들도 많이 준비되어 있을 테니, 이 시간에 힘들게 돌아가느니. 신세지고 내일 돌아가는 게 좋겠어요." 일행들은 모두 우수수 일어났다. 손님용 방들도 수색 때문에 한번씩 뒤집어져 있었지만 쓰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에, 모두들 데리고 온 하녀와 마부까지 불러 서 주인의 허락 없이 백작가의 방들을 골라잡아 차지했다. 진은 보물찾기하는 기분으로 흩어지는 그들 모두와 인사를 나누고, 2층. 3층. 4층. 5층을 누비며 수난의 잔해들을 구경했다. '귀족들의 저택은 방이 많아서 좋다니까 재밌네.' 진은 3층에서 슬그머니 복도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 레이첼의 방문에 바짝 귀를 대어, 혹시나 무슨 불상사가 있지는 않은지 엿듣 다가....헛기침을 하고 돌아서는데. 부딪힐 뻔 했다. "깜짝이야....클레이스님." "남의 방을 엿보는 취미까지 있으시네요, 레이디?" "큼. 그게요...혹시나 해서요." 진은 레이첼 방문 앞에서 클레이스에게 가로 막혔다. 떠들고 있을 장소가 아니었던 탓에 진은 클레이스의 호위(?)로 레 이첼의 방문 앞을 벗어났다. '이런...꼬리가 잡혀 버렸네. 도망 갈 기회를...와이즈가 잡고 있는 줄 알았는데....와이즈~! 와이즈?...?...' [76] 10. 블랙 드래곤의 독. 와이즈는 화가 잔뜩 나서, 클레이스가 밀어 넣은 블랙드래곤의 결 계 안에 갇혀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빌어먹을 자식! 가만 두나 봐라! 젠장. 풀려면 시간이 너무 걸리는 데 이거...젠장! 본체로 돌아갈 수도 없고. 밖에서 누가 도움을 줘 야...망할. 전음도 되지 않는데. 엘프 녀석은 못 알아채나?! 야! 파란 머리 엘프 녀석아!" ....대답이 없었다. 와이즈는 초조해서 좁아 터진-하지만 이질적인 공간이라 벽이 없어 끝이 보이지 않는 결계 안에서 혼자 성질을 부 리고 있었다. 와이즈는 취침인사를 하고 일행들이 흩어질 때 1층 복도 한 공간에 서 클레이스의 함정에 걸려 마법에 빠졌었다. * "레이디. 몇 일간 좋은 구경시켜주셔서 고마웠습니다?" "예에...." 클레이스는 와이즈가 방심한 찰나를 몹시 유효 적절하게 포착해서 함정에 빠뜨리고, 진을 쫓아갔다가 드디어 둘만 있게 된 기회에 웃 음이 슬슬 나왔다. 일행들이 차지한 방이 없는 2층 복도에서 클레이스는 도망 못 가게 벽 쪽에 진을 몰아세워 두고 있었다. "고백할 기회가 없어서 얼마나 안타까웠던지, 레이디." "예에....." "아니. 무서울 것이 없다던 분이었는데, 머뭇거리는 모습이 신선해 보이네요. 제가 무섭나요?" "에에...." 진은 본색(?)을 드러내고 있는 가짜 인간 기사에게 박치기를 먹여 주고 싶은 기분이었지만....키 차이가 났다. 그리고 도대체 빈틈이 보이지가 않았다. "와이즈는 친구로 여기시는 것 같던데 저는 동료가 될 수 없나요, 레이디?" "클레이스님. 위협이 되는 대상에, 위협받는 상황에서 어떻게 친구 나 동료가 될 수 있을까요?" "흠. 레이디께서 말씀하셨던 친구의 개념은 뭐지요?" "존중이지요." "....그렇다면 약간 의미가 다른 단어를 청해야겠군요. 연인은 어떤 가요, 레이디?" "핫. 핫." "작은 도움이나마 드렸으니 저도 작은 호의 정도는 받아도 되지 않 을 까요? 항상 무료란 없다고 말씀하셨으니 말입니다." "핫. 핫. 그게...." * 결계를 거두려는 여러 노력에도 불구하고 진전이 너무 느렸다. 와이즈는 급한 마음에 자꾸 조급해져서 실수가 나오고 있어서 시간 을 더 잡아먹고 있었다. "그 비겁한 자식! 누가 블랙 아니랄까봐! 유희 끝나간다고 막 나온 다 이거지! 손만 대봐라! 내 거란 말이다. 자시..." 결계 밖에 반응이 있었다. 와이즈는 치미는 화를 누르고 결계를 풀 어보려고 하는 밖의 움직임에 맞춰 '해제'를 시도했다. * "무엇으로 보답하실 생각이신 지 레이디? 시간이 없으니 빨리 받고 싶네요. 후후...레이디의 보호자와 내 동료 엘프가 곧 쫓아 올 것 같 으니 알아서 받아야겠네 요." 진은 클레이스에게 가로막혀 피하지 못하고 있던 자세에서 손목을 잡혔다. '웃...힘이...' 그리고 키스 당했다. 벽에 밀어 붙여져 꼼짝없이 당하고 있던 진은 눈을 굴렸다. '에...키스 잘하네. 이게 아니고....밀어서 안되면 당겨야지.' 진이 저항을 멈췄지만 클레이스는 손의 힘을 늦추지 않고 더 바짝 붙으며 준비했던 것을 진의 입안에 넣....건물 벽의 거세게 흔들리는 진동과 함께 와이즈와, 뒤 따라 블루가 워프 해 왔다. 준비했던 것을 진의 입안에 넣다가 클레이스는 신음소리를 내 뱉고 얼굴을 떼어내야 했다. 그리고 이어 더 큰 충격을 받았다. 진은 클레이스의 혀를 잘리지 않을 정도로만 콱. 깨물어주고, 그가 반사적으로 물러나 공간이 생기자 확. 실. 하. 게. 무릎을 힘껏 올려 차! 주었다. 진은 팔목이 붙들려 클레이스의 머리에 얼굴이 가려져 있다가 그가 고개를 숙이자 씨-익 웃으며, 노려보고 있는 와이즈와 울 것 같아 보이는 블루를 쳐다보았다. "핫. 핫. 뉴욕의 여자들이라면 다 아는 치한 퇴치 술이지! 에...그런 데 뭔가 삼킨 것 같네....?" 클레이스는 잡고 있던 진의 팔목에 몸무게를 실어 지탱해, 어깨를 숙이고 신음해야했다. 그는 이를 뿌득 갈며 용언마법을 썼다. [현혹! 최면!] 와이즈는 분노와 웃음 중 어느 것이 표출되어야 할지 결정하지 못 해서 얼굴이 일그러졌다. 블루는 워프와 동시에 서너 걸음 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당황 하다....클레이스가 당한 일을 깨닫고 '푸웃-' 눌린 웃음소리를 내었 다. "아프냐, 클레이스? 네 마법을 써도 안 나을 정도냐? 저런~ 안됐 다." '@@$%#@&@....리커버리.' 클레이스는 진의 손목을 놓고 물러나 구겨진 자존심을 여실히 체험 하며, 혀를 다쳐 입에서 흘러나왔던 피를 손등으로 닦고 인간의 몸에 가해진 갑작스런 통증으로 이마에 솟구친 땀을 쓸어내는 손짓을 했 다. 진은 본능적으로 손목에 든 멍을 쓱쓱 문질렀다. "거참...인색하신 레이디시네. 피장파장이 되었으니 사과는 않겠습니 다, 레이디. 보답은 다시 따로...." "웃기지 마라! 클레이스. 내 보답은 안 받을 생각이냐!" 와이즈는 웃음을 미루고 화를 내기로 결정했다. 클레이스의 코앞으로 척. 나타난 와이즈는, 있는 데로 쌍심지를 켜 고 클레이스를 노려보았다. 드래곤 아이. 드래곤 피어가 여과 없이 검은머리 기사에게 집중되었다. "흠. 미안하게 됐다. 편법을 쓰지 않을 수 없었지 않냐, 와이즈. 내 일 떠난다며? 아니 오늘인가? 해도 뜨고 있으니." "그래서? 분명히 넌 약. 속. 하지 않았었냐?!" "와이즈. 탐나는 것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게 내 족보의 특성 아니냐. 일행에 끼어 주기만 해도 될 일을 가지고 네가...." "클레이스님! 마법사님!! 아가씨가....!" 와이즈는 살기로 죽일 듯 노려보던 클레이스의 얼굴에서 눈을 돌려 야했다. 블루는 웃음을 못 참고 입 주위를 감싸고 웃다가. 골드드래 곤의 기운에 경직되었다가. 진에게 생긴 '이상'을 느꼈다. 아가씨는 방금 전까지 팔목에 손을 대고 있었는데....멍하니 두 팔을 늘어뜨리고 동공이 풀려있었다! 와이즈는 바로 옆에 서 있는 진의 변화를 알아보고 헛기침을 하는 클레이스의 멱살을 잡았다. "치료마법을 쓰는 줄 알았더니, 진에게 마법을 걸었었군. 풀어!!" "흠....네가 풀어도 되잖냐." "웃기지 마라. 네 술책인데 함정이 있으리라는 것을 모를 것 같냐?! 당사자가 풀어야지. 뭔가 있을게 뻔해! 어서 풀어!" "간단해. 네가 풀어도 돼." "골탕을 먹여도 한 두 번이지. 계속 부아 돋굴래, 이 자식아?!!" "아...현명하고 정의로운 누구누구가 인간 여자 하나 때문에 막 나 가는 구나." 와이즈는 눈에서 노란 불꽃을 튀기며 공격마법을 케스팅 했고, 클 레이스는 실드 마법을 케스팅했다. -왜 용언마법을 쓰지 않느냐고? 건물을 몽땅 날릴 수는 없지 않은 가. 와이즈가 이성적인 존재임을 감사하자.... "클레이스님! 마법사님! 아가씨가 이상해요!" 블루는 쓰러지는 진의 몸을 받쳐들고 싸움을 벌이려고 하는 두 드 래곤에게 외쳤다. * 릭페르와 세미얀은 바닥이 흔들리는 진동에 4층에 자리잡았던 자신 들의 방에서 나왔다. 그들은 복도에서 마주쳤다. "아. 공자님. 주무시지 않으세요?" "네. 릭페르 경. 방금 전에 건물이 흔들려서." "공자님도 느끼셨어요? 저도 무슨 일이 있나 싶어서 나와 봤는데... 위험스런 일은 아닐지....이거 저택이 너무 넓으니 레이디들께서 어 느 방에 있는지 알 수가 없네요." "혼자 계신 것은 민트 백작부인과 레이디 진. 뿐이실 테니...콜록. 흠. 찾아보지요. 뭐, 전속 마법사가 계시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 하지만..." 파키오도 5층 방에서 나와 내려오다가 그들과 마주쳤다. 그들은 진의 방도 민트부인의 방도 알아낼 수가 없었다. 사람이 있 는 듯한 방을 찾아도 노크 할 수 없는....경우라는 짐작이 들어 얼굴 을 붉히고 돌아서야 했기 때문이다. 하인들이 방 하나를 택해 가져다 놓은 일행의 짐 중에 진의 짐과 클레이스 경의 짐이 그대로 있었다. 레이디 진의 마법사와 엘프는 짐을 가져오지 않았었고... "이것 참...방을 아직 정하시지 않으셨나..." "함께 계시는 게 아닐까요, 릭페르님. 공자님?" "......피곤하실 텐데. 무슨 일이 있는 걸까요?" 릭페르는 세미얀과 파키오와 함께 4층 계단을 밟고 내려가다가 아 래에서 올라오는 음산한 기운...? 살기? 에 멈칫했다. "!." "...뭐지요?!" "오. 오싹해요." 릭페르는 아래로 뛰어내려갔다. 세미얀과 파키오는 식은땀이 나는 기운에 주춤하다가 서로 얼굴을 마주 쳐다보고 따라 내려갔다. * "블루님?" "아. 릭페르님...." "무슨 일이지요? 방금 뭔가..이상한 느낌이..." "아. 제. 제가. 아니 그것이...저...에...." "블루님?" "아. 공자님. 파키오군. 저기..." "무슨 일이지요?" 아트까지 급하게 옷을 걸친 모습으로 검을 들고 뛰어내려왔다. 블루는 골드 드래곤의 살기를 감지하고 달려온 인간 일행들의 뒤처리를 자신에게 떠맡기고, 진을 데리고 2층 복도에서 가까운 옆방으로 들어가 버린 두 드래곤 때문에. 거짓말을 하지 않는 엘프의 성격상, 더듬거리고 있어야했다. * "왜 깨어나지 않는 거지?" ".....낸들 아냐." "....진이 마지막 한 말에. 뭔가 삼킨 것 같다고 했었지....클. 레. 이. 스. 너, 독을 쓴 거냐?!" "에....." 와이즈는 1층과 가까운 방이라 수색을 처음 당한 편에 속해서 마구 가구가 뒤집어져 있는 방을 대충 손을 휘둘러 마법으로 치우고 길 을 내서, 진을 침대 위에 눕히고 클레이스를 닦달했다. "제대로 말 안 해? 무슨 독이야! 독과 용언으로 현혹. 최면마법을 같이 쓰다니. 인간인데, 잘못하면 정신 세계가 뒤집히잖아! 빨리 해 독 안 해?!" "밖에 기사녀석들이 와 있잖냐, 와이즈. 진정해라." "네가...그런 말을 하고 있을 형편인 줄 아냐? 넌 지금 약. 속. 을 어겼다는 것을 알고 나 있는 거냐? 용언이 아닌 약속이라 해도 동 족과 한 약속이다!" 클레이스는 헛기침을 하며 굴러다니고 있던 의자 하나를 대강 끌어 다 앉았다. "난 분명히 죽이지 않고 때리지 않겠다고 했지. 아. 그래. 공격하지 않는다는 의미란 말이지? 난 공격 안 했다. 조금 편법을 쓴 것 뿐 이야. 고것이 자주 쓰는 그 편법 말이다. 사실 맞은 쪽은 나지....여 자에게 거길 걷어 채여 보긴 내 생애 처음이었다. 정말이지...." "첫 경험 축하한다." 클레이스는 비아냥거리는 와이즈의 말에 실룩였다. "홧김이었지만, 마법은 풀었잖냐. 독도 치명적인 것도 아니야." "무슨 독인데?!" "...미약 종류다." 와이즈는 머리가 빙글 돌았다. 독에 정통한 블랙드래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을 미. 약. 이란 말이지? 온 몸에 퍼져 중독 된 드래곤의 독이라면 치명적인 독이 아니라고 해도 인간은 해독이 거의 불가능할 테고, 엘프도 해독하는 것은 꽤 나 시간이 걸릴 일이 되겠지만. 자신이 해독하면 어려울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문제는 저 깜둥이 자식이 이성과 육체에 동시작용을 하는 독과 함께,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고 사고하도록 현혹마법과 최면마 법까지 걸었다는 것이다. 독과 마법이 믹스돼서....육체가 아니라 의 지에, 의식에 침투한다면....와이즈는 서둘렀다. 최대한 빨리 해독을. 시간이 이미 많이 지났다! [큐어포이즌!] (* 독 전문 치료 마법) [리커버리] [회복!] "....와이즈. 미약은 해독 방법이 아주 간단..." "시끄럿!" 진의 손목의 멍이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블랙드래곤의 독은 몸 안에 남아 있지 않고 모두 해독되었지만, 의 식에 침투해 있는 듯 했다. 그녀의 회복력이 육체에 머무르지 않고 정신에 몰려가 있는 것을 알았다. 진은 깨어나지 않았다. "젠장! 늦었어." "흥분 할 필요 없잖냐, 와이즈. 정신력이 약한 여자가 아니니 큰 위 험은 없을 거다. 그 여자가 슬쩍 돌려 말하곤 하던 자신의 이야기 가 궁금하지는 않냐? 물어보면 다~ 대답할 텐데. 신경 써서, 감추고 있는 감정까지 끌어내 보이도록 만든 약이거든." "너. 두고 보자." "아~ 아까워라. 깨워봐라, 와이즈. 달라붙어 올지도 모르잖....큭." 클레이스는 마나로 뭉쳐져 날아 온 주먹 세례를 받고 코뼈가 부러 졌다. '젠장. 노랑이 녀석...리커버리.' 와이즈는 어떻게 해야할지 갈등했다. 미약은 종류에 따라, 성관계를 하면 자연 치유가 되는 경우도 있지 만. 의식에 침투한 미약이라면 성격이 바뀔지도 모른다. '엄청 밝히는 여자가 될지도 모르잖아. 젠장. 저 빌어먹을 깜둥이 자식!' 블루가 풀이 팍 죽어서 울 것 같은 얼굴로 들어왔다. "....뭐냐, 블루. 우냐?" "거짓말을 하고, 선의가 아닌 마법을 썼습니다. 클레이스님." "그래서? 그럼 죽기라도 하냐?" "아니요....아가씨는 괜찮은 가요?" 클레이스는 의자에 앉아 다리를 쭉 뻗고 침대 가에 걸터앉아 있는 인간 마법사 복장의 금발머리 동족을 힐끗 보았다. 블루는 그의 곁으로 걸어가서 잠자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진을 내 려다보았다. "주무시나보네요. 머리 모양이 불편하실 텐데...." [운*디*네.] 와이즈와 클레이스는 엘프가 정령을 불러 진의 땋아 올린 머리를 풀고 씻게 하는 것을 보며 일그러진 얼굴을 했다. "블루야. 태평한 엘프야. 시중 들어 주는 게 재밌냐? 걔가 자고 있 는 것으로 보이냐?" "예? 아닌가요?" "몰라. 걔 보호자에게 물어봐라." 블루는 와이즈를 쳐다보았지만 그는 손으로 머리카락에 붙은 것을 거칠게 털어 내는 동작을 했다. 대답해 주지 않음에 블루는 이상이 남아 있는지 알기 위해 진을 깨웠다. 잠에서 깨게 하는 마법을 썼지만, 진은 바로 눈을 뜨지 않다가 어 렵게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진의 남청색 눈동자는 검게 타들어 가 듯 짙어져 있었고 공허해 보였다. "아가씨?" ".....파란 꽃." "예?" 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곱슬머리가 정령의 물기 때문에 곧게 펴 져 뺨에 달라붙었다. 진은 납덩이처럼 무거운 머리 때문에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실례가 될 것 같아서, 혹은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굳이 표현할 이유가 없어 떠올리지 않고, 말로 꺼내지 않았던 것들 이 입에서 두서 없이 튀어나왔다. "파란 꽃이야. 있을 수 없어. 존재하지 않아. 꽃이 파란색을 가지면 다른 파란색을 가져야할게 색을 잃잖아!" "....에. 예?" "와-아아-" 블루의 어리둥절한 반문을 듣지 못한 듯. 진이 허공을 쳐다보며 탄 성 비슷한 감탄사를 내뱉었다. 모두 '왜?'하고 묻고 싶었다. "왜?" 역시나 클레이스가 물었다. "이제까지 본 영화의 배드씬이 죄다 보인다. 봐! 봐봐. 쿠후후....애 기 같은 니콜라스...뻔뻔하게. 웃기지 마~?" "..........." ".....배. 배드 씬...이요?" "영화? 마법 영상을 말하는 건가? 미약의 효과...인가? 구별이 안 되네." "...클레이스님. 미. 미약...이요?" [진! 정신 차려라!] 진은 귀로 들리는 소리가 아닌 음성에 와이즈를 돌아보고. 소리쳤다. "노란색! 황금색!!" 진이 손가락까지 쳐들어 자신을 향해 하는 말에 와이즈는 머리가 아파 왔다. "말할 줄 아는 백치가 되었나? 최면과 미약에 당한 반응치곤 참. 특이하기도 하네." 클레이스에게 진은 고개를 돌리고 언성을 높였다. "검은머리! 검은 눈!" "그래. 뭐? 나 검게 생겼다." 진은 드레스 자락을 밟아가며 클레이스에게 뛰어가 그를 끌어안았 다. ".......!!" "내 친구들은 모두 검은머리야. 모두 검은 눈이야. 보고 싶어. 보고 싶었어." "이. 이것 참....." 진은 눈물을 흘렸다. 와이즈는 벌컥 화가 치밀었지만 무릎을 굽히고 클레이스의 가슴팍 에 매달려 있는 진이, 우는 것을 알고 멈칫했다. 블루는 황당하고 당혹스런 여러 일들에 머뭇거리다....울기 시작하 는 진의 '슬픔'이 전해져 와서 가슴이 아팠다. "저. 저기...마법사님. 클레이스님...아가씨 피부가...." 진의 드러난 피부색이...어두워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야. 너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며 산 거냐? 내 독이 기억을 건드렸 나 본데?" "......난....." 진은 대답이 되어 나오지 않았다. 대답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머리가 너무 너무 무거웠다. 진의 피부색이 까맣게 되었다. 검푸른 머리. 검은 눈동자. 검은 피 부에 검은 드레스를 입고 있는 진은. 검은....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의식에 침투한 독이 밖으로 표출되어 빠져나오나 싶어서 와이즈는 다시 용언을 썼다. [해독.] 진의 피부가 희어지다가 다시 검어졌다. [....큐어포이즌.] ......다시 검어졌다. 진은 검은 눈물을 흘리면서 잡고 있던 클레이스를 놓치고 바닥에 눌린 듯 쓰러졌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정말...나도 이 여자 머리를 해부해 보고 싶어졌다. 와이즈." "..........." 어둠 계열의 정령이 모여들고 있었다..... [77] 10-2. 마계의 문. 진은 엉킨 기억 속에 빠져있었다. 인간을 우습게 아는 검은 드래곤. 체면을 버리지 못해 낙오 된 에 릭. 목걸이. 그리움만 쌓이네. 파키오의 야망. 천둥과 사는 보아. 노 예 공주님. 붉은 드레스. 자아가 지친 검 훼이르. 훼이르를 얻은 릭. 파란 나무 착한 엘프. 노래하는 시인들. 실프, 바람의 정령. 물의 정 령. 강한 남자 판. 유쾌한 카일. 가여운 레아. 어둠의 정령. 비. 비... 해녀들. 마법을 배우고 싶어한 콜린스. 레어. 아름다운 타 종족, 드 래곤.......신. 신! 상희! 니콜라스! 상민. 샘...캐서린. 한국. 쌍둥이의 어머니가 항상 불을 밝히고 기다려주던 아파트. 학교. 친구들....하와 이의 푸른 하늘. 푸른 바다. 뉴욕. 뉴욕. 뉴욕... 데이먼...데. 이. 먼!! 진은 시간을 거슬러 갔다. 8살로. 7살로. 6살로.... 진은 증오스럽고 두렵고 외롭고 고통스럽던. 굶주렸던 그 방. 그 집. 쾨쾨한 곰팡이 내와 바퀴벌레 약 냄새가 사라지지 않던 그 방. 마음 깊이 묻어 두고 잊으려던 그곳. 할렘가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배웠던. 그로 인해 배웠던 맨 처음 인간으로의 감정은 외 로움과 '증오'였다. 진은....자신의 트라우마-영혼에 새겨진 상처.-를 되살렸다.... * 블루는 너무나 당황했다. 아가씨는 피부색이 검게 변해서 바닥에 쓰러졌다. 침대로 옮기자 곧 검은 땀을 흘리기 시작했고, 흰 시트가 검게 물들어갔다. 그리고 부정한 것. 탁하고 탐욕스럽고, 증오. 공포. 애증. 어둔 감정 을 먹는 것. 들. 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엘프의 선의 표출에 밀려, 드래곤의 기운에 밀려 사라졌지만. 다시 몰려들었다. 몰아내면 또 몰려들고 다시 오고 다시 오고... 방안은 그들의 악의 가득한 눈의, 검고 탁한 그림자로 가득했다. "클레이스님! 마법사님!" "그만 불러라, 엘프. 상황파악은 우리도 한다." "이. 이를 어쩌나...." 진이 흘리는 검은 땀방울은 누워 있는 곳 주위를 검게 물들여가고 있었고, 점점 확산되고 있었다. 진은 마계에 속한 존재들을 부르고 있었다. 아니 그들이 진에게 이끌려 나오고 있다는 표현이 맞을 것 이다. 블루는 새하얗게 질렸다. 물질계에 가장 흔한, 마계에 속하는 존재인 어둠계열의 정령이 문 제가 되지 않을 일이....벌어지려고 하고 있었다. "젠장. 마계의 문이 열리려고 한다." "축하한다. 바를로네시. 인간의 역사에 길이 남을 흑마녀를 만들어 냈구나." "............" 진이 신음을 내뱉기 시작했다. 와이즈는 서둘러 정령들을 몰아내고 방 전체에 결계를 쳤다. 클레이스도 블루도 2중. 3중으로 결계를 쳤다. 진을 중심으로 마계 의 것인 보랏빛 마법진이 그려지고 있었다. "젠장. 뭘 부르는 거야!" "부르는 게 아니라 이끌려 오는 거다. 바보 같은 놈아." "아. 안돼요. 그들이 나오면. 많은 사람이 죽어요. 서로 해치고. 증 오하고, 병들고. 공포에 시달리고. 피를 부르는 전쟁이...." "막아. 바를로네시. 네가 벌인 일 아니야." "어떻게? 이미 문이 생기고 있는데 이제 와서 기억을 지워도 소용 없고. 죽이면 안 된다며? 아니면 다시 백치로 만들어? 효과가 있을 라나?" ".....식인귀들이다." 진이 흘린 검은 땀이 스며든 침대 표면에서, 악귀들이 불쑥불쑥 머 리를 쳐들고 있었다. [나. 골드 드래곤 투비와이즈. 마계의 생물, 너희에게 명한다. 물러 가라.] 징그럽게 느껴지는 번들거리는 보랏빛 눈동자들. 악의에 찬 그들의 눈이 꾸물거리는 머리와 함께 드래곤의 기운에 솟아나는 것을 멈추 고 다시 눌려 들어갔다. ".....때리지 마." 진의 중얼거림에 모두 검게 일그러져 검은 눈물을 계속 흘리고 있 는 그녀의 얼굴에 시선을 모았다. "때리지 마, 데이먼. 잘못했어. 아파....아파...아니야! 내 엄만....아니 야!! 때리지 마! 나도....내 엄마를 만나면 욕 해 줄 거야. 나도..엄마 를 만나면, 침 뱉어 주겠어. 하지만 욕하지마....널 증오해. 나도 내 가 미워. 널 죽일 힘이 없는 내가...개자식. 개자식!! 아파! 때리지 맛!" "아. 아가씨....흑..." ".....배고파." "..........." 블루는 진이 내뿜는 살기와 분노와 절망과 고통의 느낌에 심장이 아프게 조여왔다. "....궁금증이 풀려서 후련하겠다, 바를로네시?" ".....학대받았나?" "지금 그게 문제냐!....또 나온다." "...고위 마족이다. 제길." 마법진의 보라색이 짙어져갔다. 결계 안의 보라색으로 물든 공기에 또 다른 이 계의 존재가 몸을 일으키듯 모습을 드러냈다. [나. 블랙드래곤 바를로네시. 너희의 소환에 취소를 명한다. 어둠을 먹는 마족이여. 물러가라.] <....물질계 최강의 종족이여. 우리의 영역입니다. 날 부른 것은 인 간의 증오. 당신들께 허락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보라색으로 빛나는 마계의 마법진에서 스르륵 몸을 드러낸 그. 것. 은.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보라색 머리카락을 발등까지 흩뜨 리며 흰 피부. 아름답고 퇴폐적으로 느껴지는 보랏빛 눈동자의 고 위 마족은 악의 기운을 스멀스멀 검은 옷 주위에 아지랑이처럼 피 어 올리고 있었다. "헉...." 어둠. 어둠. 공포. 고통. 탐욕. 애증. 그 폐를 찢는 기운에 엘프는 버 티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난 골드드래곤 투비와이즈. 그녀와 거래 중이다. 내 소유다.] <육체가 죽은 다음이겠지요. 드래곤이여. 당신들이 있는 물질계의 거래와 우리의 계약은 성격이 다릅니다.> [난 그녀의 어미와도 계약했다. 네가 끼어 들 자리 없다. 물러가라.] 유혹. 탐욕을 자극하는 웃음을 지으며 마계의 존재 마족은, 두 마리의 에 이션트 드래곤에게 고개를 갸웃거려 보였다. <본인과 직접 한 계약이 아니며, 우리가 하는 계약과 성격이 다르 므로 이중 계약이 가능하지요. 드래곤이여. 그녀의 마음을 계약금으 로 약속 받았나요?> [............] '골치 아픈 놈들...' <저와 싸우시겠습니까? 물질계에서의 힘이야. 당신들과 비교도 되 지 않겠지만, 전 마계에 속한 존재. 이곳에서의 죽음은 죽음이 아닙 니다.> [물러가라. 너희와 타협 할 생각 없다.] 마족이 뿜어내는 기운은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바닥에 벽에 천장에 드래곤과 엘프의 결계로 인해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결계의 표면에 달라붙어 칙칙하고 불결한 그. 것. 들이 결계 를 파먹어 가고 있었다. 아름다운, 사기를 뿜어내는 마족은 매력적인 웃음을 짓고 진의 허 리 근처에 무게 없이 서 있다가 침대에 걸터앉았다. 신음과 욕설을 중얼거리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있는 진의 검 푸른 머리카락에 손을 가져다 대는 것을 보고, 와이즈는 그에게 마 나를 집중 방출했다. 블루는 마족의 악의와 드래곤 피어의 충격으로 기절할 것 같았다. 고위 마족은 드래곤의 공격에 형체가 일그러졌다가, 다시 제 모습 이 되었다. 그는 와이즈의 살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진의 머리카락 을 한 줌 쥐어 고개를 내려 키스했다. <강하고 아름다운 인간 소녀. 우리 것인. 가장 순수한 '증오'의 감 정을 '힘'으로 승화시킨 인간. 주문도 없이 우릴 불러들일 정도로 강렬한 감정을 알고, 강한 의지를 가진 인간. 물질계 최강의 수호자 를 둔 인간 소녀. 이렇게 맛있는 먹이를 포기할 수는 없지 않습니 까, 드래곤이여.> 머리카락을 잡고 있던 마족의 팔목이, 얼굴을 가리고 있던 진의 검 은 손에 붙잡혔다. "데이먼!" <저와 계약하시겠습니까? 그를 죽일 수 있습니다.> "이미 죽었어! 이미 죽였어! 카르마. 카르마...다시 태어나라! 다시 죽이겠다. 다시!" [진. 정신 차리라니까! 마족에게 조종당하고 싶냐?!] "내 친구들....니콜라스....많이 아프니? 럭비를 할 수 없게 될 거야. 미안해. 미안해...상희야...상희야..." 와이즈는 저 존재가 곁에 붙어 있을수록 일이 복잡해질 것을 알았 지만 진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 방법으로 물리칠 방법이 마땅치 않 았다. 아니....? [엘프. 기도해라.] "네?" [기도하라고. 네 신을 부르라고. 엘프들에게도 마계 문이 열려서야 좋을 일 없을 게 아니냐. 엘프는 선의를 추구하는 종족. 저들과 반 대의 의지를 가졌지 않냐.] 블루는 바닥에서 몸을 추슬러 꿇어앉았다. "가르디아엘. 저희 엘프의 신이며 저흴 보호하고 인도하며 사랑을 주시는 분이여. 라하르네 블루엘 샤입니다. 저들을 물리소서. 이곳 에 있어서는 안 될 그들의 존재를 돌려보내...." <아. 싫어라. 예의를 갖춰 대해드렸는데...저희가 있어야 할 곳인데 요? 오랫동안 우리들은 외롭고 심심했답니다. 저희도 존재가치는 있지요. 후후....> 보라색 눈에 비웃음을 가득 담고 블루의 노랫가락 같은 기도를 듣 던 그는, 진이 되새김하며 빠져있던 감정의 늪을 자신의 힘 안에 흡수해 공유하는 일을 끝냈다. 진은 그의 팔목을 잡았던 손을 풀고 늘어뜨리더니 더 이상 소리를 내지 않고 검은 눈을 감았다. 방안. 결계 안에 음산한 정적이 감돌았다. 가각. 가각. 소리를 내며 결계를 파먹던 마물들도 숨을 죽였다. 블루는 엘프의 귀를 틀어막았다. 와이즈와 클레이스는 서로 얼굴을 마주 쳐다보았다. <늦었네요, 어쩌나. 훗. 저는 다리 역이었답니다. 이런 좋은 기회를 주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물질계의 최강의 생물들이여..하계. 감정 을 가진 모든 생물들은....경..배 하라...소환 합니...다...주..인....> "바를로네시!" "알았다. 젠장." 보랏빛의 마법진이 강렬하게 빛났다. 그 빛이 진을 삼키고 솟구치 려고 했다. 고위 마족은 소환 제물로 자신을 스스로 소멸시키고 있 었다. 그리고....어마어마한 악의. 사기의 기운이, 진. 짜. 가 나오려 고 하고 있었다! 와이즈는 검은 스파크가 튀고 밀어내는 흑마법의 마나를 헤쳐, 무 리하게 진의 팔에 손을 대어 침대에서 잡아 끌어내렸다. 손이 까맣 게 타들어 갔다. 바닥으로 끌어낸 진을 기절할 듯한 블루의 옆에 두고 용언마법 최강도의 실드를 겹겹이 쳤다. 클레이스는 블랙 드래곤의 파멸의 기운인 드래곤 피어. 소멸시키는 용언마법. 문을 봉쇄하는 봉인 마법. 관련 있을 만한 모든 수단을 나. 오. 려. 고 하는 보라색 마법진을 향해 표출하고 마나를 방출했 다. 공기가....대기가 폭음과 같은 초음파에 거칠게 진동했다. 블루의 결계가 부셔지고 와이즈의 결계 안쪽, 클레이스의 결계에도 금이 쩍쩍 갔다. 마물들이 파삭- 타들어 가고. 동료를 방패로 살아 남은 놈들은 흩어지다 다시 모여, 금이 간 결계 틈새로 몰려들었다. 운용하던 마법진의 빛이 잦아들었다. "야. 투비와이즈. 봉인이 안 돼. 매개물이 그대로잖아. 걔 봉인시키 던지. 소멸시키던지 해. 젠장...이게 무슨 꼴 이람. 마왕이 나오려고 하다니. 4대 마왕 중 누구야?" "누군지 알아도 무슨 도움이냐. 물질계가 진짜로 뒤집어진다. 진은 강하단 말이다. 난 계약을 했어. 죽일 수 없어. 2천년 전, 사제 출신 흑마법사에게 소환된 마왕 때문에 대륙의 인간들이 멸망 직전에 갔 던 것 잊었냐? 대충 처리하다간 그 꼴 날 수 있다." "그럼 어떻게 하자고?" "최대한 막고 있어. 진을 깨우겠다." ".....키스 한번에 이런 중노동을 시키다니. 대단한 여자라니까." 와이즈는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진의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 "데이먼. 그만 때려....밖에 안나갔어. 집에만 있었어. 오늘은 먹지도 않았단 말이야." "이 계집애가! 건방진 그 눈이나 고쳐라. 성질 돋굴래? 분수도 모르 는 계집애. 비켜!" 진은 무릎에 이상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허락이 떨어졌음에 발길 에 다시 채이기 전에 서둘러 한쪽 다리를 끌며 기어서 자리를 비켰 다. 오늘은 주먹도 아니고 벨트도 아니고 배트에 얻어맞았다. 너무 아프고....억울하고...무서웠다. 데이먼은 기분이 몹시 좋지 않아 보였다. 드물게 술까지 취해 있었다. 조심하지 않으면 다시 맞을지 도 모른다. 팔이 다친 것이 겨우 나은지 몇 일 되지 않았는데...무릎이 펴지지 않았다. 진은 침대로 쓰는 낡은 소파 위에 작은 몸을 어렵게 일으 켜 올라가 웅크리고, 왼쪽 무릎을 손바닥으로 감싸고 통증을 참아 보고자 했다. 머리에서 나던 피는 멈췄다. 다른, 몸 여기 저기의 타박상은 무릎의 통증에 가려져 잘 느껴지지 않았다. 걸을 수....없게 되는 걸까. 절뚝이게 될까? 진은 자꾸 일그러지려고 하는 얼굴 표정을 가다듬어야 했다. 데이먼이 보면 다시 화를 낼게 뻔하니... 그는 찬장을 뒤지다 술이 반쯤 남아있던 위스키 병을 찾아내어 욕 설을 뱉으며 빈 잔을 찾고 있었다. "야! 이 계집애가? 재워주는 값을 해야 할게 아니야! 쫓겨나고 싶 냐? 잔이 없잖아!" ".....데이먼. 네가 다 깼잖아. 그냥 두면 다칠 것 같아서 치웠는데..." "너. 자꾸 그 건방진 말투로 대꾸할래? 재수 없게 비상금까지 몽땅 잃어 기분도 더럽구만. 덜 맞았냐?" "..........." "어쭈. 이게! 대답 안 해?" 넌 미쳤어. 미쳤어. 개자식아. 데이먼이 던져두었던 배트를 집어들고 검은 구두를 뚜벅이며 다가 왔다. 진의 눈은 두려움과 공포로 흔들렸다. 오늘은 정말 죽을지도 몰라. 죽고 싶지 않아. 어떻게 하지? "!!" 진은 데이먼이 휘두른 배트에 맞지 않으려고 본능적으로 방어하는 몸짓을 하다 잘못 맞았다. 아니...어디를 맞든 잘못이었겠지만. 진은 턱뼈가 부서지는 것을 느꼈다. 야구공처럼 얻어맞고 소파에서 밀려나 바닥으로 굴러 정신을 잃었다. 켜 두었던 TV 의 지지직거리는 소리가 방안에 남았다.... 흐흐..흑....나쁜 자식. 뭐가 보호자냐. 네가 어떻게 내 주인이냐. 개자식. 신의 저주를 받아라. 넌 몇 주 동안 빵 하나 사주지 않았 어. 먹여 살렸다는 말하지마. 알지도 못하는 내 엄마, 아빠 욕하지 마. 모욕하지 마. 때리지 맛! ........... 내 친구. 상희. 니콜라스....샘. 상민....얼마나 가슴 아플까. 미안해. 구하지 못했어. 미안해. 나 때문이야. 믿어 주었는데. 미안해... -괜찮아, 진. 울지마. 최선을 다했잖아. 괜찮아, 진.- 상희야...? 상희야? 어딨지? -같이 있잖아. 약속했잖아, 진.- [ㅈ.......!] 어....? [진. 일어나!] * 진은 눈을 떴다. 낯선 방...낯선 이 세계. 아니, 고향... "....wise?" "그래." "....내 엄만 창녀가 아니야, 그렇지?" ".....아니다! 무슨 소릴 하는 거냐!" 진은 사물을 인식했다. 방...아니, 이상한 공간에 있었다. 엘프...아름다운 파란 나무. 블루가 신음하며 곁에서 몸을 일으키고 있었고, 와이즈는 자신의 목 뒤에 팔을 걸치고 이마에 오른 손바닥을 대고 있었다. 클레이스는 침대 위에 양반 다리를 하고 앉아있었다. 그의 힘이 응 축되어 침대 주위에 머물러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가 깔고 앉은 탁한 색을 띄는 자리의 보라색 그림...원 안에 각진 별 모양의 마법진이 크게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먼지조차 남지 않은, 원래 방인 듯한 그곳. 주위 보이지 않는 막에 둘러 쌓인...그 막에 빌붙어 거머리 같은 검 은 존재들이, 다닥다닥 불규칙하게 그어 놓은 줄 같은 곳에 잔뜩 달라붙어 있었다. 공포. 증오. 고통. 악의....그것들이 자신들을 인식한 진에게 일제히 '눈'을 돌렸다. "상황파악이 되냐? 네가 불렀다. 마계에서 마족을 따라 뛰쳐나왔다. 저것들은 의지에 반응한다. 감정에 이끌려와. 쫓아보내라, 진. 네가 해야해. 네 감정에 반응한다." "....너는?" "소모전이다. 널 죽일 순 없잖냐. 마계 마법진이 거둬지지 않고 있 다. 클레이스가 막고 있지만 소환되고 있는 것은 보통 놈이 아니니. 널 보호하기 힘들다, 진. 네가 물려라." "어떻게?" 와이즈는 기운 없이 늘어져 검은 눈물을 계속 흘리고 있는 진의 검 은 얼굴을 쓸어 주었다. "기도해라, 진. 넌 신의 세례를 받았지 않냐. 증오에 반대되는 것은 사랑이다. 네 신에게 도움을 청해라. 사제를 부르러 갈 수 있는 형 편이 아니니, 네가 직접 해. 사제라도 보통 정도로는 도움이 안될 테고." "난 사제가 아니야." "인간의 감정이 가장 격렬하다며? 네 감정이, 네 기억이 부른 위험 이니 네가 할 수 있을 거다. 마계의 문이 열리면 물질계는 세계대 전이 일어날 거다. 네 동족이 네게 씌인 악의로 네 손에 무차별로 죽어가길 바라냐?" "............" 진은 와이즈의 팔을 붙잡고 몸을 일으켰다. 뭔가...무시무시한 것이 '위협'이 되어 가까이 오는 것이 느껴졌다. "빨리 해라, 인간아. 소환 의식이 끝난 것을 억지로 붙들어 매고 있 다. 인간의 몸이니 오래 못 버텨." 진은 상황이 모두 이해가 가는 것은 아니지만...자신으로 인한. 불길 한 기운. 위험....을 똑똑히 느꼈다. 진은 자신이 문. 통로. 제물....이 라는 것을 깨달았다. '안 돼....상희야. 눈감아. 귀 막아. 느끼지마.' [...........] 무거운 뇌리 안을 뒤적여 어린 기억 속의 네이 할머니의 성경. 머 리 속에 저장 된 문장들을 기억해 내고 진은 읊기 시작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이름 거룩하사 주님나라 임하시고 뜻이 이루 어지이다. 일용할 양식 주시고 우리들의 큰 죄 다 용서 하옵시며 또 시험에 들게 마시고 악에서 구원하소서 대개 주의 나라 주의 권 세 주의 영광 영원히 아멘." "......더 해라, 진. 효과가 없다."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여호와여 주의 분으로 나를 견책하지 마옵시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긍휼히 여기소 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나의 영혼도 심히 떨리나이다 여호아여 어느 때 까지니이까..." "아가씨....흑..." 보랏빛 마법진이 진동을 했다. 클레이스는 맞 부딪혀 오는 흑마법 의 위력에 벌컥 죽은피를 뱉어냈다. 블루는 핏기 없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진과 와이즈 곁에 주저앉아 눈물을 떨구며 굳어있었다. 진은 몸이 점점 짓눌리는 기분에 바닥에 손을 짚고 무릎을 꿇었다. 와이즈는 검게 탄 왼손으로 진을 부축하다 실드가 흔들흔들 위험에 대한 경고를 보내는 것에 얼굴을 찡그렸다. "나오려고 한다. 기도 말만하면 무슨 소용이냐. 이름을 말해야 할게 아니냐! 여호아란 신은 없다!" 클레이스의 지적에도 진은 방법을 알지 못해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 로 계속 읊었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주께 피하오니 나를 쫓는 모든 자에게서 나를 구하여 건지소서. 건져낼 자 없으면 저희가 사자같이 나를 찢 고 뜯을 까 하나이다.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 여호와여 정직함을 들으소서. 나의 부르짖음에 주 의하소서. 거짓되지 않은 입술에서 나오는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 소서. 나의 판단을 주 앞에서 내시며 주의 눈은 공평함을 살피소 서..." "이름을 말하라니까!"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 의 반석이시오 나의 요새 시오 나를 건지시는 자시오 나의 하나님 이시오 나의 피할 바위 시오 나의 방패 시오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신성이로다..." "이름!!" "...이름....신의 이름 몰라!" "아무거나 대라, 진....주신 세레니프이스. 바다의 여신 다이네프. 그 신들이 가장 확률이 높으니까. 그 신의 이름을 불러라." 진은 자신이 이름에 연연했던 걸까 생각했다. 물론 '불러'주길 바랬 었다. 하지만 반드시 정식 '이름'을 불러야하나? '신'이란 '이름'이전 에 '믿음'이리라. "내가 믿는 신은 야훼도 여호아도 아니야....하지만 주신인지 바다의 여신인지도 모르겠어." "자신이 믿는 신의 이름을 헷갈리는 바보도 있었냐? 으... 빨리 해." 와이즈는 자신의 실드가 마계 정통흑마법의 충격파로 마나의 금빛 기운이 어둔 기운에 탈색되는 것을 목격했다. 클레이스의 검고 긴 머리카락이 살아있는 것처럼 솟구쳐 휘날리더 니 다시 울컥 붉은 피를 토했다. 블루는 기절했다... 진은 와이즈의 팔을 붙들어 무너지지 않게 버티며 목청을 돋궈 갈 라진 음성으로 간절히. 진. 심. 으. 로. 외쳤다. "신이여....당신을 내 신으로 인정했습니다! 난 내 의지로 살 것을 맹세했습니다! 필요할 때 부르겠노라, 도움이 간절할 때 기도하리라 다짐했습니다! 그래도 당신의 아이라 했습니다. 저들에게. 저 검은 악의에 지배당하길 원치 않습니다!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를. 신을 만났을 때 그의, 그가 준. 원래 있었던. 어디에나 있 는 그의 '사랑' '아가페' '무조건 적인' 신의 사랑을 떠올렸다. "....도와 주세요!" 피부와 눈빛이 원래 색으로 돌아왔다. 와이즈는 진에게서 방출되는 기운에 밀려 실드 벽에 부딪혔다. 진의 몸에서 눈이 멀 것 같은 백색 빛이 터져 나왔다....... [78] 10-3. 신 탁. 같은 시각. 동대륙 주신 세레니프이스 주 신전에서는 아침미사를 끝낸 사제들 이 신전 식당에 삼삼오오 늦은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 모여들고 있 었다. * 신을 모시는 사제들이 있는 신전은 대륙 어디든 존재한다. 가르디아엘과 니이카초우를 모시는 엘프와 드워프들은 크거나 작은 마을 단위로 숲과 산맥에 흩어져 살아, 신상을 모시는 신전을 곳곳 에 지어 예배를 드리지는 않았지만. 그들도 인간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신전을 가지고는 있었다. 인간을 포함한 소수 유사인종의 신인 주신 세레니프이스에서 파생 된 많은 신들은 대륙에 넓게 퍼져 모셔지고 있었고, 그들과 주신을 모시는 신전 또한 오랜 세월. 전도사제들을 통해 널리 퍼져있었다. 신들이 하계를 떠날 때 버려진 신의 유적지 또한 대륙 곳곳에 존재 했다. 주신 세레니프이스는 자신의 힘이 나눠져 태어난 하급신들을 데리고 신계로 돌아갈 때, 대륙 한 곳을 가리키며 '그곳에 날 두어 라' 하였다. 인간들은 그 말을 받들었다. 대륙을 사등분하여 동대륙에 속하는 그가 가리킨 대지에는 주신의 결계가 이루어져 라이벌이며 적인 카를로네데빌의 힘이 미치지 못 하는 곳이 되었다. 오랜 세월. 까마득한 세월이 지나 그 힘이 자연소실 되어 처음 생 성되었을 때의 신성력과 같지는 않았지만, 지금도 그곳엔 신의 축 복이 남아있는 곳이었고. 주교가 있는 대륙의 가장 큰 주신전이 존재했다. 종교의 힘은 막강하다. 그곳은 오랜 세월 인간의 왕이 통치하는 곳이 아닌, 신의 사제가 지배하는 곳이 되었고. 면적은 한 나라에 비할 바 못되었으나 '신성 왕국'으로 불릴 정도로 다양한 신전들이 밀집되어 있는 곳이었다. 그곳 주신전 세레니프이스에서는 3년마다 세례를 받아 정식사제로 신성력을 허락 받는 전통의례가 있었다. 견습사제로 수업을 마치고 준사제로 세례식을 거쳐 신성력을 갖추 면 정식 사제로 인정받게 되며 자의에 따라, 혹은 선배 사제들의 권유에 따라 대륙 곳곳의 신의 유적을 찾아 경배 드리고 몸담을 신 전을 찾아가거나 홀로 수련을 하거나 그대로 주 신전에 머무르거나 했다. 왕국의 궁성에 비견 될 정도로 크고 견고하게 대리석으로 지어진 주 신전에서는 고위 사제들과 평사제 준사제(세례식을 앞둔 사제) 견습사제(수업 중인 사제)들이 일출과 함께 일상을 시작하여, 찾아 온 사람들을 치료하고 위로하고 귀족이나 왕족의 방문을 받고, 때 로 양식을 얻기 위해 밭을 갈고 기도하고 신전과 신의 가르침을 수 호하기 위해 검 수련을 했다. * 주교 브란티오 쿤은 나이 50세에 주교가 되어 11년 간 동료사제들 과 선 후배사제들을 대표하는, 대륙의 신전을 대표하는 신관으로 일했다. 그는 젊고 어린 사제들이 무리 지어 식사를 하러 가는 것을 주신의 신상이 모셔져 있는 강당 예배 실에서 문 없는 커다란 창을 통해 내다보고 있었다. "주교님. 식사를 이리 가져다드릴까요?" "아니다, 티나르. 생각이 별로 없구나." "식사를 하지 않으시면 해로워요. 건강도 좋지 않으신데...." 브란티오 쿤은 이미 신성력을 갖추고 있지만 나이가 어려 자신의 시중을 들며 신전에서 수양을 하고 있는 소년 티나르를 돌아보았다. "괜찮다. 인간은 나이 들면 모두 기력이 쇠하는 법이니까." "아직 정정하시면서 꾀병 부리시려고요, 주교님? 오늘도 일거리가 많이 밀려있어요." "허허...내가 꾀를 쓰고 있는 것을 잘도 확신하는 구나, 이 녀석아." 티나르는 요 몇 일간 안색이 좋지 않은 주교 할아버지가 안쓰럽고 걱정이 되었다. "어제도 꿈을 꾸셨어요?" 주교는 낮은 창턱에 걸터앉아 눈처럼 흰 사제복에 주름을 주었다. 은색머리카락은 노화로 백발의 기운이 섞여있고, 완고하게 보이지 만 따뜻해 보이는 회색 눈에 그는 그늘을 담았다. ".....그러게 말이다. 이해 할 수 없는 꿈에, 그 내용조차 분명치 않아 근심이 되는 구나." "꿈일 뿐인데요, 주교님. 주신께서도 아무 말씀 없으시니 별일 아닐 거 에요." "그럴까...." 티나르는 뒤로 묶어 하나로 땋아 앞으로 내리고 있는 자신의 머리 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사실은 어제 저도 이상한 꿈을 꾸었어요, 주교님." "....무슨 꿈이었느냐?" "그게...." 티나르는 헛기침을 한번 했다. "불길한 꿈이었느냐?" "아니요. 아니, 불길한 것 같기도 하고...." 주교는 활발한 성격의, 시종이자 후배 사제이자 장래가 촉망되는 총명함까지 갖추고 있는, 나이 15세의 어린 소년 사제의 꿈에 궁금 증을 보였다. "주교님의 꿈에선....저. 신상이 움직이고 눈물을 흘렸다고 하셨지 요?" "그래." "저는...그게요..." "네 꿈엔 어떠했느냐, 티나르." ".....신상이 무릎을 꿇었어요." "뭐?" 티나르는 괜히 말을 꺼냈나 싶어서 놀란 주교 할아버지에게 머리를 긁적여 보였다. "대상은 확실하지 않지만...주신의 신상이 사람처럼 허리를 굽히는 것을 보았어요. 주위 풍경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요..." "허허...그것 참." "불길한 꿈일까요? 제가 느끼기엔 어둔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었는 데요." "글쎄다, 티나르. 세레니프이스님 아래. 그 분을 무릎 꿇릴 대상이 있더냐?" "하하..아무래도 개꿈..아니, 죄송합니다. 주교님." "...티나르. 그 꿈은 잊도록 하거라." "네...주교님. 죄송합니다." "............" 티나르는 사죄하면서 주신의 신상 뒤에 색 없이 그려진 벽화를 흘 끗 보았다. 창세기....잊혀진 신. 카오스.... 멋쩍어하면서 말도 안 되는 꿈이라고 변명하며, 식사를 가져오겠다 고 인사를 하고 자리를 비키는 소년의 뒷모습을 보며 주교는 얼굴 이 일그러졌다. '내 꿈도 그랬다. 티나르....그 꿈이 정녕 뜻하는 바가 있단 말인가! 주신과 대적할 자는 마신 뿐이다. 대륙에 위험이 오고 있다는 예지 일까...' 그는 확신 할 수 없고 알 수 없는 내용의 꿈으로 누적된 한숨을 쉬 며, 창 밖의 하늘을 향해 기도문을 중얼거렸다. 애써 평온한 마음으로 임하고자 경건함을 기억하며 고개를 내리던 그는....종소리를 들었다. 신전의 가장 높은 탑. 뾰족한 지붕아래 매 달려 있는, 하루를 시작하고 끝낼 때와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울 릴 리 없는. 이 시간에. 자신에게 알려지지도 않고 누군가 줄을 잡 아 당겼을 리도 없는....그는 어리둥절했다. 그리고. 신단에 온 변화를 느꼈다! 브란티오 쿤은 잘못 느끼고 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착각이 아니라 는 것을 깨닫자. 나이든 몸을 퉁기듯 바로 하고, 예배 실 강당 앞 흰 대리석으로 깎아 세워 둔 성인 남자 세배의 키를 가진 신상과 반들반들 윤이 나는 대리석 신단 앞으로 가서 무릎을 꿇었다. 신단과 신상에서 신성력이....백색 빛이 스며 나오고 있었다. "오..오...신탁이다! 주신께서 직접 내리신 신탁. 이럴 수가!" 신단에 백색으로 글이 쓰여지기 시작했다. 주 신전은 벌집 쑤시듯 소란스러워졌다. 식사를 하고 있거나 하려고 준비중인 사제들도. 방문객들에게 신성 력을 쓰고 있던 사제들도. 오전 검 수련을 마치고 해산하던 성기사 들도. 모두 종소리를 들었고 '신탁' 이 있음을 느꼈다.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멀뚱거리며 쳐다보다가 벌떡 벌떡 일어나 주 예배 실로 우루루 뛰어갔다. 예배 실을 나가던 티나르와 고위사제들이 먼저 도착했다. 그들은 신단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주교를 알아보고 탄성을 지르 거나 두 손을 마주 포개고 모두 무릎을 꿇었고, 따라 들어온 사제 와 성기사들도 모두 무릎을 꿇었다. 신성력이 갖춰지지 않은 견습사제와 준사제들도 무슨 일인가 싶어 서 따라 들어왔다. 그리고 그들 모두는 신상에서 신의 마법을 의미 하는 순수 백색 신성마법이 진행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신의 계시가 내리고 있었다. 모두 무릎을 꿇었다. 주교는 써지는 글을 읽으며 눈이 왕방울만큼 커졌다. "고위신관들만 남고 모두 물러가게!" 잠깐 소란이 일었다. "주교 쿤님. 저희도 느꼈습니다. 알고 싶습니다." "그렇습니다, 주교님. 저희 모두에게 내려지는 신탁이 아닌가요? 청 하지도 않은 신탁이 개인에게가 아니라 모두에게 내려...." "아직 밝힐 때가 아니네! 그리하라 쓰여지네. 물러가 있게!" "..........." 그들은 머뭇거리며 일어나 어정거리다 고위 사제들이 일어나 통제 하여 자리에서 물러가 있도록 지시하자 웅성거리며 예배 실을 나가 기 시작했다. 티나르도 대상에 포함되었기에 일어나 나가려고 했지 만, 주교가 멈춰 세웠다. "티나르는 남거라." "예에. 주교님." 주 신전을 대표하는 고위사제들과 시종인 준 사제 티나르만 남자, 주교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미안하네. 후배들에게 거짓말을 했네. 와서들 보게나." 사제들은 신단 앞으로 가서 예를 취하고 신의 글을 보았다. 나. 세레이프이스. 너희에게 이른다. 운명에서 벗어났던 자. 가장 긴 수명을 사는 이에게 수호 받는 자. 모든 카르마에 영향 주리라. 부정한 존재가 고개 들리라. 대지가 울리고 산이 노하고 바다가 몸부림하리라. 바람이 일어나리라. 신을 청하게 하라. 신의 이름을 찾게 하라. 신이 정한 운명을 받아들이게 하라. 백색 글씨는 곧 서서히 사라졌다. 주 신전에서는 이례적인 방법으로 그 날 '신탁'을 받고, 의미하는 바를 정확히 규정하기 위해 몸살을 앓았다. * 세리아스 왕비는 정사에 바빠 시간을 낼 수 없어 함께 아침을 먹지 못하던 다른 오전과 달리, 모처럼 남편인 국왕과 함께 늦은 아침을 먹고 있었다. "식욕이 없소, 왕비?" "아. 아닙니다, 폐하." "딴 생각 중이구려. 날 폐하라 부르는 걸 보니." 세리아스는 식사를 끝내면 만나기로 되어 있는 신하들을 위해 예복 을 갖춰 입고 맞은편 탁자에 앉아 있는 남편에게 미소지었지만, 대 답하지는 않았다. "흠...요 몇 일 당신이 사치를 한다는 소문이 있더오." "아. 네...." 국왕 페르티온 세르제 라이어스 D 는 농담을 걸려고 했던 말에 죄 지은 표정을 짓는 세리아스에게 되려 웃음이 나왔다. "농담이오. 당신이 사치를 하면 얼마나 하겠소. 오히려 그동안 너무 검소했지 않소. 이유가 있나 싶어서 꺼낸 말이오, 왕비." ".........." 세리아스는 골드드래곤의 방문을 받은 이후 계속 그들의 딸에 대한 미뤄왔던 이야기를 해야 할 것인지, 더 미뤄야할 것인지 갈등했다. "....제르티아의 성년이 다가옵니다, 폐하." "............" 페르티온 세르제는 들고 있던 은식기를 내려놓았다. "그건 나도 알고 있소....제르티아의 소재를 아오?" 세리아스도 식기를 놓고 두 손을 식탁 아래 내렸다. 정식 만찬 석은 아침 식사를 하기엔 너무 넓고 커서 세리아스는 아 침식사가 아니라 해도, 공적인 만찬이 아니라면 항상 방에서 식사 를 했다. 사적인 대화를 배려해서 시종과 시녀들과 호위들도 밖에 서 대기 중이었다. "알고 있습니다, 폐하." "............." 대답하지 않았었다. 항상 그랬었다. 벌써 10년도 전에 딸을 잃고 귀궁 했던 왕비는 왕녀의 일에 남편이 며 왕인 자신에게도 입을 열지 않았었다. 그때는 헤런 왕비가 살아 있을 때였고, 3살 난 왕녀가 이지가 부족 하다는 것을 페르티온도 알고 있었다. 그는 이해했었다. 어디...신전에라도 맡기지 않았을까 생각했었다. 소문처럼 아이를 버릴 여자는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후 오랫동안 왕비는 자신에게도 숨겨 가며 마음 아파하 고 있는 것도 눈치채고 있었고, 그로 인한 소문에 시달림도 알고 있었지만 그녀의 의사를 존중했다. 세리아스는 여신의 사제였다. "폐하. 죄송합니다. 지금은 모두 말씀드리기 힘들지만. 그 아인 곧 돌아올 겁니다." "..........." "강하게 컸다고.....들었습니다." "강하게...말이오? 아름답게가 아니고?" ".....네." "흠." 국왕은 왕비를 아꼈다. 그녀의 단순한 언어선택에- 어떤 의미로 말 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페르티온 세르제는 생각했다. 강하게와 아름답게의 차이가 있는가? 물론 있다. 왕녀는 계승권을 가지고 있다. 비록 이제까지 왕가에서 여왕이 나 오지는 않았지만, 10년을 넘게 왕궁 밖에서 자라 돌아온다면... 현재 그도 눈치채고 있는 왕궁 내 세력 다툼에 이용될 지도 모를 일이다. 여아인데 왕비는 그것을 걱정하는지 모른다. 헤런 왕비의 마지막 남은 3왕자. 현재 1왕자가 된, 자신의 이름을 물려준 페르티온 라와 세리아스의 2왕자 뤼시엔은 라이벌이었다. 라 왕자와 달리 뤼시엔이 아직 성년을 맞지 못해 왕의 자질을 시험 받으러 가는 것을 미루고 있는 판이지만. 첫째 왕자파 대신들과 귀족들은 오래 전부터 드래곤의 증표를 얻기 위한 여행을 승인 해 달라는 청을 계속 해오고 있었다. 이런 시기에 왕녀가 돌아온다면? 성년을 맞은 정통 계승권을 가진 다른 왕족이 생기면 라 왕자는 드 래곤을 찾아 갈 명분이 되고, 그러면 뤼시엔에겐 기회가 가지 않을 지도 모른다. "왕비. 왕녀가 돌아온다면 내가 미룬다고 해도 뤼시엔이 성년이 되 기 전이나 된 직후엔 왕의 증표를 얻기 위해 산맥으로 보내야 할게 요. 뤼시엔은 아직 어리오. 총명한 왕자지만 당장은 페르티온 라 왕 자의 상대가 되지 못하오. 내가 노쇠한 것은 아니지만 후계 문제의 결정에 대한 압력을 계속 받을 것이오." "폐하...폐하의 딸입니다." "아오. 오랫동안 보지 못한 딸이지. 그 앨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소 리가 아니라, 뤼시엔이 아직 준비가 부족하다는 말이오." 세리아스는 약간 고개를 숙였다. 그가 자신의 친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어하는 것을. 그것이 자신을 위하는 일임으로 알고 있는 것도 알고 있었다. 세리아스는 사실을 모두 말해야할까, 하지 말아야할까. 다시 갈등했 다. "폐하. 전, 전부터 생각해 왔습니다. 드리얀의 왕은 왜 반드시 드래 곤의 시험을 받아야 할까요?" ".....그건 왕비. 그만큼 강한 존재의 그늘이라 왕권 다툼에 피를 부 를 위험이 적기 때문이오. 그 존재가 없다면 오히려 지금의 뤼시엔 은 위험하오." 세리아스는 정권 다툼도 정사 문제에도 그다지 관여하지 않았다. 그녀는 귀족 신분이 아니라 사제신분이었다. 자연히 대신과 귀족을 대하는 시간보다 궁성 안이나 밖의 시민들을 만나는 시간이 더 많 았다. 누가 왕이 되든 상관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페르티온 라 왕자가 왕이 된다면, 어쩌면....처음 왕 비가 되었을 때. 헤런왕비가 살아있을 때 겪어야했던 위협과 불안 을 아들, 딸과 함께 다시 느껴야 할지도 몰랐다. 제르티아는 왕녀이다. 드래곤의 시험에 통과했다는 사실을 밝혀도 페르티온 왕자와 그를 지지하는 대신들은 인정하지 않을 지도 모른 다. 하지만 300여년 동안 어떤 왕족도 통과하지 못했던 시험에 통 과한 그 '자질' 이라면. 혹시 제르티아는....정말 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문득 욕심이 들고 있다는 생각에 세리아스는 얼굴이 붉어졌다. "왕비. 너무 심각하게 이야기 했나보오. 걱정 마시오. 10년이 넘어 성장한 왕녀가 무사히 돌아온다는데 어느 아비가 싫어하겠소. 성년 식을 기대하여 그동안 갑자기 사치한다는 말을 듣고 있었나보구려. 왕녀인데 그동안 못해 준 것을 해주고 싶어하는 어머니로의 마음이 야 충분히 이해하오. 걱정 마시오. 내가 곧 죽을 것도 아닌데, 왕권 다툼이 치열해 지기야 하겠소....나도 빨리 보고 싶구려. 당신을 닮 았다면 분명 아름답게 자랐을 거요." '아름답게...자랐겠지요. 그리고 강하게. 누구보다 강하다 하였습니 다.' 세리아스는 드래곤이 강하다 인정했다면 정말 강할 것이라 생각했 다. 그리고 그때....그 아이를 데리고 어린 시절부터 몸을 의탁해, 사 제가 되기까지 지냈던 여신의 신전에 신탁을 받으러 갔을 때....아무 도 듣지 못했던. 자신만이 들었던 그 '신탁' 내용이 떠올랐다. [네 뱃속의 아이를 지키려거든 네 딸을 버리거라.] 여신이...실수 하셨을 것이다. 세리아스는 분명. 여신께서 잘못 계시 하였을 거라는 생각을 감히 했다. 제르티아만 돌아온다면, 드래곤의 시험을 이미 받은 것을 알린다면. 괜찮으리라 생각하면서도. 불안해졌다.... * 블루는 의식을 잃고 있었다. 일어나려는 노력을 하는데, 아주 따뜻하고 환한, 축복, 성스러움. 선 의. 사랑....을 느꼈다. 엘프는 마음으로부터의 경의와 존경을. 경배 를 올렸다. '가르디아엘. 저희 엘프의 신이여...' <날 불렀느냐, 아이야.> '네. 아가씨가....' <라하르네. 그 아인 무사하다.> 블루는 가슴이 아프도록 기뻤다. 신이...몸소 찾아와 주셨다.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엘프의 신. 자애로운 그분이 직접. '...감사합니다. 가르디아엘님.' <내가 구한 것이 아니다.> '그럼....' <그 아이에게 물어보려무나....선택하겠느냐?> '......네.' <가여운 내 아이야. 그 아인 인간이다.> '당신께서 주신 심장이 선택했습니다.' <그 아이의 '나무'가 되겠구나> '....네. 가르디아엘님. 그녀의 '나무'가 되고 싶습니다. 허락해 주십시 오.' <엘프는 선택에 자유롭다. 후회되고 가슴 아플지라도 절망하지 말 거라> 성력이 거둬짐을 느끼며 블루는 슬픈 미소를 지었다. * "야. 이 녀석 기절해 있으면서도 웃네? 엘프들은 도대체 바보인지, 전천후 순둥이라 그런지. 못 말린다니까." ".....클레이스님?" "정신이 들었으면 일어나라, 블루. 내가 들어 옮기리?" 블루는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살폈다. 결계는 거둬지고 방이었던 그 곳은, 마법진을 방패로 한 장식 기둥 이 사라진 침대만 남아 있는 텅 빈 공간이 되어 있었다. 아가씨는 기운 없이 마법사님께 안겨 들려 있었다. "괜찮으세요, 아가씨? 저기. 그것은...." "마계 문은 닫히고 흔적 하나 남지 않고 깨끗이 사라졌으니, 방만 옮기면 문제없습니다, 블루님. 문을 막고 있으니 비켜주시지요." ".....네에." "와이즈. 말 좀 좋게 해. 블루님도 타격이 컸을 텐데..." 진은 힘없이 작은 목소리로 무뚝뚝한 와이즈의 말에 핀잔을 주었 다. "구경만 하던 엘프가 무슨 타격? 타격은 내가 다 받았지." "웃기네. 클레이스. 너 조심해. 한번만 더 내게 그따위 짓 해봐라. 가만두나." 블루는 눈을 깜박였다. 클레이스는 상황종료 후 와이즈에게 사건의 전모에 대해 대충 듣 고, 처음으로 자신을 향해 말하기 시작하는 진의 말투에 쌍심지를 켰다. "......이제 아주 막 말하는구나, 인간아. 내가 참아..." "참아라, 클레이스. 넌 백 번 참아도 부족하니까 앞으로 99번 세어 가며 참아. 내 몫까지 199번 참아라." 눈을 부라리는 와이즈 때문에 클레이스는 헛기침을 했다. "흠....너희들 말이야. 아니, 와이즈. 너 말이야. 내가 보기엔 아무래 도 일방적인 것 같거던?" "죽어 볼래? 뭔 소리냐!!" 클레이스는 실실 웃으며 다시 살기에 찬 눈초리를 하는 와이즈를 외면하고 먼저 방을 나가 옆방으로 옮겨갔다. 와이즈가 진을 안고 따라와 침대에 내려놓자 진은 심적 타격을 크게 받은데다가 너무 큰일을 당한 것에 기운이 다 빠져나가 털퍼덕 드러 누웠다. "레이디. 힘없어 보이는 모습이 오히려 더 아름다워 보이시네요. 어 째 더 성숙해 보이는데...? 안 그러냐 와이즈?" "레이디. 좋아하네. 이제까진 기사래서 존대해 줬지만 더는 대우 못 해주겠다, 까만 드래곤아. 능글거리지 마." "............" 클레이스는 화를 낼까 말까 궁리하다, 받아주기로 했다. 그것도 괜찮게(재미있게) 느껴졌으니까. 진이 반말을 하기 시작하자 한가지 깨달은 것도 있었다. 와이즈와 동류? 동격? 그 비슷한 느낌 이 들었다. 그는 진이 누운 침대 가에 착. 걸터앉아, 빙글빙글 그 특유의 여자 꼬실 때의 눈웃음을 지었다. "그래. 말 내리는 걸 허락하마, 건방진 인간아. 넌 다른 인간들과 좀 다르니 특혜를 줘도 되겠지. 그렇다면 앞으로 나도 네 이름을 불러주마. 고마워 해라." 진은 눈썹을 한번 모아보더니 천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네가 말한 존중하는 친구가 되어보도록 하지. 그럼 나도 동료...켁." "네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구나, 이놈아. 정말 죽어 볼래?!" 와이즈가 뒤에서 클레이스의 목덜미를 잡아 성대를 꽉 눌렀다. 진은 그들의 하는 양을 보며 힘없이 탈진해 있는데도 웃음이 나오 려했다. "괜찮으세요, 아가씨?" 파란머리의 엘프의 걱정스런 얼굴에 진은 웃어주었다. "괜찮아요. 잠이 오는 것 말고는요." 블루는 눈물이 나왔다. 아무 도움도 되지 못했다. 엘프가 파란 눈에서 눈물을 방울방울 떨어뜨리자 진은 눈을 굴렸 다. "위로해 드릴 기운이 없어서요, 블루님. 에...너무 잘 우시는 것 같 네요." "아. 미안합니다, 아가씨." "아가씨는 무슨? 나도 반말 듣는데 엘프에게는 존대한다, 너? 아니, 진?" 진은 한숨을 쉬었다. 너무 피곤하고 말하는 것도 힘들었다. "아. 제게도 낮춰 말하셔도 됩니다, 아가씨. 저도....이름을 부르고 싶 은데. 저기...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실례 아니에요, 블루님. 누구랑 다르게 인격도 갖추신 분이, 나이 도 훨씬 어린 저에게 이제까지 낮추지 않으신 게 더 어색했어요. 내킨 김에 모두 말 내리지요. 저도 존대 말을 배워 쓴지는 얼마 되 지 않아서 불편했거든요. 말 내려도 되나요?" "그럼요." 블루는 웃었다. 클레이스는 '누구랑 다르게' 라는 진의 말에 다시 눈썹을 모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와이즈는 한바탕(?) 소란이 끝나고 돌아가는 상황이 영 마음에 들 지 않았다. 클레이스 자식을 기회 봐서 두드려 주고 싶은데, 타이밍 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뭐, 일방이라고? 망할 깜둥이 자식. 엘프 놈은 걸핏하면 눈물을 쏟 는 군. 엘프가 원래 저렇게 자주 울었나? 웃기는 일이지.' "쉬세요, 아가....진." "아, 잠깐 좀 물어보자, 진." 클레이스는 뻣뻣이 서서 팔짱을 끼고 있는 와이즈 옆에 있는 탁자 의 의자를 끌어다 침대 가에 앉으며, 블루가 처음으로 시도하는 이 름 부르기 일에 대한 여운을 끊어주었다. 진은 뭐냐고 물을 기운도 없어서 그냥 쳐다보았다. "그 데이먼이란 자 말이다..." "그만 두지 못해, 클레이스?!!" "그래. 알았다. 그건 넘어가고...그럼 말이지. 네가 살았던 그 곳은 도대체 어떤 곳이었냐?" "클레이스님. 저기..." 진은 한숨을 쉬었다. 다 바보들 같아 보였다. "....내가 살던 곳은....힘을 가진 사람들이 드래곤의 키보다 높은 건물들을 숲의 나무들처럼 빽빽하게 만들어 놓고 그 속에서 낙오 되지 않기 위해, 서로가 서로를 물어뜯고 넘어뜨리며 떨어 뜨리는 곳...그들 그림자에 가려진 골목골목에선. 인생의 낙오자들이 술 에 절어 마약에 취해 나락으로 떨어지고....돈 몇 푼 훔치기 위해 지나가는 사람들의 목을 칼로 따고. 조각 살인범들이 태연한 얼굴 로 사람들 틈에 숨어살고. 재수 없으면 길을 가다 연쇄살인범을 만날 수도 있어." 블루는 다시 눈시울이 뜨거워져 머뭇거렸다. 와이즈는 잠깐 엿본 진의 기억을 떠올리며 묵묵히 들었다. 진은 낮은 목소리로 기억을 더듬듯 계속 말했다. "그곳 골목의 어둠은, 드래곤 피어보다 무서워. 돈 때문에 남편이 아내를 죽이고, 아내가 남편을 죽이고. 온갖 추하고 더러운 일은 다 찾아볼 수 있지. 공기는 더럽고 물도 오염 돼서 그냥은 마실 수 없 어. 사람들이 개미떼처럼 많고 모두가 희망과 절망과 상처를 안고 살아...." "..........." "농담 하냐?" "농담 아니야. 드래곤보다 더 큰 힘을 가진 인간들이 살아. 하루아 침에 대륙 전체가 불바다가 될 수도 있고, 회복 할 수 없게 파괴시 켜버릴 힘을 가진 자들이 날마다 쥐어뜯고 싸우며 투쟁하며 발악하 며 살아." "............" "그곳에서 살아남았어. 그 곳은 꿈이야. 더 묻지마." "좋다. 그럼. 아까 그건 뭐였지? 그건 인간이 발휘할 수 있는 신성 력 수준이 아니었어." 그 질문은 와이즈도 하고 싶었다. 어느 신이지? 어떤 신이 인간에게 그런 힘을 빌려주는 거지? "몰라. 그게 신성력이었나?" "그럼. 아니고 뭐냐." "다시 해보라면 못 해. 내가 신성력을 쓸 수 있을 리가 있나. 사제 들은 아무 때나 신성력을 쓰는 것 같지만 난 아니야. 기운이 없어 서 그러나...? 아마도 그 때는 너무 큰 위기였고 다급함을 아셨는지 신도 도움을 주셨나 보지.... 하지만 쓸 수 있다고 해도 안 써.." "왜?" 진은 자고 싶었다. 이 놈의 검은 드래곤은 참 끈질기기도 했다. "뭐 하러 써? 난 사제가 아니라니까. 난 분명히 도움이 필요할 때 만 기도하겠다고 했어. 아무 때나 아무 일에나 신을 찾는 어리광 바보가 되란 거야?" ".....흠. 그건 그렇군. 그럼...." "클레이스. 쉬게 둬라." "그래. 그래. 그만 하지....한 가지만 더. 진. 여행에 나도 끼.....핫! 피 했지~ 약 오르냐, 와이즈?" 와이즈는 이를 뿌득 갈았다. 더는 도저히 못 봐 줄 것 같았다. 진은 정신이 없고 기운이 없어서 예의 그 독설을 쓰지 못하고 넘어 가는 것 같지만. 말짱한 정신인 와이즈는 쌓인 게 많아 더 이상은 괘씸해 마지않는 깜둥이 드래곤을 가만 두고 볼 수가 없었다. "바를로네시! 한판 뜨자." "에....야. 나도 지금 마나를 너무 써서 쉬어야 하잖아. 봐 주라." "시끄러. 따라와." "하루만 기다려 주던지." "내가 돌았냐?" "블루야. 얘가 날 죽이려나 봐. 말려봐라." "............" 클레이스는 딴 곳을 보는 블루와 혀를 차는 눈을 하는 진의 시야에 서, 와이즈에게 멱살을 잡혀 워프 당해 사라졌다. 그 두 마리 에이션트 드래곤....드래곤은 나잇살 먹어 모두 저런 상 태일까 하는 생각에 진은 고개를 젓고 싶었지만, 기운이 없었다. 블루는 옷자락을 쥐고 만지작거리며 서 있다가 그들이 워프하자 진 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무섭고 아픈 과거는 모두 잊어버리세요, 진." 진은 이름만 부르고 말투는 그대로인 못 말리게 예의 바르고 착한 엘프에게 웃어 보였다. "네. 아니, 응. 고마워, 블루. 정령 불러서 나 좀 씻겨 주겠어? 검은 땀을 흘렸대서 찜찜해." 블루는 곱게 웃었다. 진은 블루의 운디네에게 도움 받아 씻고 실프의 도움으로 블루가 가져다 준 짐 더미에서 나이트 가운으로 갈아입기까지 하고, 그동 안 그가 어디선가 가져온-직접 만들어 온 듯 했다.-좋은 냄새가 나 는 스프까지 먹고 잠을 잤다. 블루는 곁에 계속 붙어 앉아 잠들어 있는 진을 지켜보았다. [79] 10-4. 안녕. 샘. 그들은 남 대륙 경계 황무지에 있었다. 본체로 돌아가 와이즈, 아니 투비와이즈는 바를로네시를 사정없이 마음껏 두들겨 주었다. 폴리모프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지만, 클 레이스는 옷을 부를 여력이 없어 맨 몸으로 여기 저기 깊게 패인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썩을 놈...." "흥. 꼴 좋다." 와이즈는 심통이 나서 중얼거리는 블랙드래곤 앞에, 우아한 포즈로 마법사 겉옷을 탁탁 털며 낄낄댐을 참고 위엄 있게 대꾸해 주었다. 저 뻔돌이 참견쟁이를 패주게 되다니. 통쾌하기 그지없었다. 힘이 비슷해서 그동안 꼴 보기 싫은 경우에도 소모전이 싫어 타협 하고 넘어 간 일이 몇 번 있었다. 하지만 오늘의 일로 묵은 스트레 스까지 해소하게 되자 와이즈는 비실비실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좋아. 내 잘못도 분명히 있었으니 이 일로 더 뭐라고 하진 않겠다, 빌어먹을 놈아. 하지만...." "그래. 잘 생각했다. 가서 잠이나 자라. 내 유희에 더 참견할 생각 말고. 바보 같은 놈아." ".....말도 못하게 하네." "옷이나 입어라." "유혹적인가 보구나." "웃기지 좀 마라. 재밌냐?" 클레이스는 피식거리며 아무래도 그 인간 여자의 부아 돋구는 논리 적인 화술을 좀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말이야, 와이즈. 내가 더 유리하다는 것 아냐? 걔 취향은 검은머리 검은 눈인 것 같던데?" "웃기지 좀 말아라, 엉?" 클레이스는 낄낄거리며 옷을 불러 입었다. 석양이 지고 있었다. 클레이스는 땅 바닥에 드러누워 주홍빛 노을을 구경했다. 대지도 대기도 높은 하늘도 그 빛에 물들어가고 있었다. ".....와이즈. 걔 말이 맞아. 드래곤은 외로운 존재야. 너보다 내가 더 그런지도 모르지. 난 지긋지긋하다. 레어에 있지 않고 틈만 나면 대 륙을 돌아다니는 것도 성가신 생각이 드는 것을 잊어보려고 하는 거지." "안됐다만 계속 그래라. 누가 도와 주냐. 원래 그렇게 생겨먹지 않 았냐." "그러는 넌? 너나 나나 다른 드래곤이나 차이가 있으면 얼마나 있 을까 싶다. 그 인간 여자는 겨우 16년을 살았는데, 내가 4000년. 헤 츨링 때 빼고 3500년 간 간간이 겪고 본 인간들을 하나로 뭉쳐 놓 은 것처럼 보이더라. 인간은 짧게 살지. 그 결점만 아니라면 사실 최강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 하찮다 한 인간을 다시 보게 됐 다....고룡들도 때로 그런 비슷한 이야기를 하지 않던." "............." "시간은 넘칠 정도로 많고, 사는데 뭔가 재미있어 보이는 표적이 생겼다는 것이 나쁘지마는 않을 거야. 그게 인간이라고 해도 말이 지....겨우 몇 일이었지만 정말 재미있었어." 와이즈는 소매 사이에 엇갈려 손을 집어넣고 그가 보고 있는 붉게 어두워 가는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미안하지만. 빚은 갚았으니, 포기는 못해주겠다. 와이즈." 와이즈는 얼굴을 돌리지 않고 향하고 있던 하늘 언저리에 쏘아보는 눈을 했다. 클레이스는 흰색바탕의 금색 수가 놓인 인간 마법사 옷 에 마지막 남은 노을 빛이 머무는 것을 흘끗 보았다. "약속대로 수도를 떠날 때 나도 유희를 끝내겠다, 와이즈. 피곤하기 도 하고. 회합이 있을 때까지 잠을 자두겠어. 몇 년 정도니 다시 만 날 수 있겠지. 다시 유희를 시작하는 문제는 별개니까 말이다....걔 도 좀 더 크면 지금보다 더 괜찮아지겠지. 그땐 고것의 바램대로 신사적~으로 상대 해 줄까 해." "웃기지 마라. 네 버릇 와이번 주냐? 성격이 그 모양인데 어련히 바꾸겠다. 말해두지만 지금이나 후에나 내 유희다. 참견 마." "그래. 그래. 잘 지켜라만. 훗. 보호자니 뭐니 했으니 넌 제약이 많 이 따를 테니, 계속 일방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데? 그리고 난 여자 고르는데 너처럼 까다롭지는 않거든~ 아. 노려보지마. 무서워, 와이즈. 또 때리려고? 때리지 마~ " 와이즈는 빙글거리며 진이 중얼거리던 말을 흉내내는 빌어먹을 놈 을 다시 걷어차 주고 싶었다. "요는 말이지. 난 그것을 생각을 해 본적이 있거든. 엘프랑 같이 어 울린 적이 몇 번 있어서 말이야. 인간은 약하고 터무니없이 짧게 살지만, 긴 생애. 한쪽 귀퉁이든 어느 한 부분이든 차지 할 자리를 내어주는 것이, 꼭 바보 같은 일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어. 그만 한 가치가 있다면 말이지. 모르고 의미 없이 늙느니, 만년의 세월 중 단 100년이라 해도 색다른 경험을 할 시간을 가진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 "그런 점에서 네가 먼저 찍은 것이 좀 유리하다만. 난 블랙드래곤 이다. 와이즈. 난 걔가 마음에 들어." '썩을 놈의 자식!' 와이즈는 대꾸할 수 없었다. 하기 싫었다. 생각다운 생각이라고는 할 줄도 모르는 바보인 줄 알았는데 자신도 인간을 상대로 해보지 못한 생각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자신을 알고 인정한다는 것은 교만을 줄이는 일. 최강의 생물인 드래곤에게도 적용되고 있는 것을 보고 있었다. 답지 않게 그는 자신에게 마음을 터 놓고 웃기는 라이벌(?) 선언까 지하고 있었다. "꿈도 꾸지 마라, 클레이스. 내가 만만해 보이냐?" "응." "죽. 을. 래?" "쿡쿡....." "거기서 그렇게 계속 혼자 웃고 있어라, 자존심도 없는 뻔뻔한 놈 아. 난 먼저 가겠다. 너랑 이야기하다간 내 머리까지 이상해 질 것 같으니까." "야. 데려가야지. 난 지금 힘 하나 없단 말이다." "혼자 집도 못 찾아가는 바보냐? 알아서 해라. 난 네 보호자가 되 고 싶은 생각 없으니까." 다시 성질이 나기 시작해서 와이즈는 잔뜩 빈정거리는 말을 해주 고, 그를 황무지에 그대로 내버려두고는 휑하니 돌아...워프 해 버렸 다. 아마 마나가 회복되려면 만 하루정도는 있어야할 테니 깜둥이 녀석이 수도에 돌아올 때 즘엔 이미 자리를 뜰 수 있으리라는 계산 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야! 데려가라니까....좀생이 같은 놈..." 클레이스는 태양의 빛이 모두 거둬진 어둔 하늘. 빛나기 시작한 별과 푸른빛이 진해진 달을 바라보며 대자로 누워 서 빙글~ 웃음 지었다. * 와이즈는 수도를 떠나지 못했다. 진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민트와 세미얀 공자와 릭페르와 파키오는 진이 잠에서 깨지 않는 이유에 걱정을 했지만 계속 로체 스터 백작가에 머무를 수 없어 진을 민트와 하녀들에게 시중 들게 하여 옷을 입히고 길레스피 백작가로 숙소를 옮겼다. 진은 민트가 신경 써서 장식하고 가꾼 저택의 가장 산뜻하고 아름 다운 5층 꼭대기 층 방으로 옮겨져 계속 잠을 잤다. 세미얀은 계속 수도에 있을 수가 없어서 편지를 남기고, 데리고 왔 던 소수 호위를 데리고 마법진에 올라 오니가라로 돌아갔다. 릭페르는 서둘러 추진 한, 진과의 약속 이행에 좀 더 신경 쓰기 위 해 파키오를 데리고 후작가로 돌아가 있었고, 블루는 민트가 강력 히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겠다는 주장을 함에 머뭇거렸지만. 자신에게 당혹함을 주었던 예의 그 행동들이 이미 사라졌었고, 그 사실마저 잊은 듯한 태연한 백작부인의 권유에 고맙다는 말과 함께 와이즈와 신세를 지게 되었다. "뭘요, 블루님. 고마우실 필요까지야. 이런 방법이 있었네요. 진작 써먹을 걸. 후훗. 경계하지 않으셔도 되어요, 블루님. 이젠 포기했으 니까요." ".....죄송합니다, 부인." "마음을 얻는 문제는 마음대로 안 되는 거 에요, 그렇지요 블루님? 야속하셨지만 잊어드릴게요. 블루님 보다 더 좋은 사람은 찾아보면 또 있을지 모르니까요." 블루는 미안함과 감사를 담아 미소지었다. 민트는 자신에게 보여주 는 엘프의 미소에 진이 너무 부럽다는 생각을 다시 했다. 모나와 아트는 모나의 친정인 자작가의 영지로 인사를 하기 위해 떠났다. 가는 길에 결혼식을 올릴 거라고 했다. 그들은 행복해 보였 다. 행복할 것이다. 로체스터 백작가를 나올 때 에릭은 긴장이 조금 풀린 얼굴로 적이 었으며, 무례하기 그지없던 손님들을 별 말 없이 레이첼과 함께 서 서 배웅했다. 진이 잠들어 있던 며칠간 수도에선 뒷이야기가 많았다. 마법학교에서는 평민 학생들 중,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 순서로 기 숙사를 배정 받기 시작했고 콜린스는 학교의 스타가 되었다. 파키오는 노부부 자작에게 언제든 찾아오라는-사실은 수업이 끝난 후 오후 여유시간에 매일 오라는-권유를 받았다. 레이첼은 귀족 부인을 샤프롱으로 가정교사로 두고 공부를 시작했 다. 재미있는 일이지만, 기사학교에서는 학과목에 교양으로 댄스과 목을 넣는 일을 심각히 고려하고 있었다. 그리고 거리는 은연중 좀더 활기 차 지기 시작했다. 시인들은 한 두 명만 남고 수도를 떠나 방랑여행을 시작했다. 와이즈가 황무지에 버려 두고 왔던 클레이스는 다음 날 오후 느긋 한 얼굴로 길레스피 백작가를 찾아왔다. 찌푸리는 민트에게 그는. "부인. 전 수련여행을 갈까합니다. 아쉽게도 레이디 진께 동행을 허 락 받지 못해서 혼자가게 되었습니다만, 저택을 세를 내었으니 머 물 곳이 없네요. 옛 정(?)을 생각해서 머물게 해 주시지 않으시겠어 요? 지난 일에 대한 사과도 드리고 싶네요. 레이디 진께 작별인사 도 하고 싶고요." 민트는 밉지만 매력이 철철 넘치는 미소를 짓는 수도 최고 미남 기 사를 내몰지 못하고, 방문하여 신세를 지는 것을 허락했고. 와이즈는 열 불이 났다. 진의 방에 얼씬도 못하게 하자 클레이스는 헛기침을 하고. "안 잡아먹는다, 와이즈. 누구누구는 속 좀 타겠네. 자기가 인간임 을 잊었나? 독 좀 먹었다고 며칠씩 자게?" "독만 먹였냐, 자식아? 그리고 알고 있었지? 네 수작임이 뻔해!" "흠. 미안하다고 했잖냐. 일어나면 불러라. 그동안 블루하고나 놀.... 아니, 블루는 안에 있잖아." ".....죽어도 옆에 있겠단다." "훗. 잘 지켜라, 와이즈. 고집 부리는 엘프는 만만치 않다?" "시끄러." 클레이스는 낄낄거렸고, 민트랑 잡담이나 하겠다고 행선지를 밝히 고 와이즈의 눈총을 받아가며 아래로 내려갔다. 와이즈는 잠든 진의 곁을 지키고 있는 애절해 보이기까지 하는 엘 프의 기다림을 보기가 싫어서, 옆방으로 배정 받은 자신의 방에 들 어가 틀어박혔다. * 진은 맹렬한 허기를 느끼며 세상 모르고 자던 잠에서 드디어 깼다. 천장을 향한 눈길이, 인기척에 방향을 돌리다 블루의 파란 눈과 마 주쳤다. "..........?" "괜찮으세요, 진?" "네. 아니, 응. 배가 고픈 것말고는. 내가 너무 오래 잤어? 엄청 머 리가 멍한 기분에 나른하기까지 하네." "많이 잤지. 꼼짝도 않고 몇 날 며칠을 잤다." 의자를 끌어다 앉아있던 블루 옆에 갑자기 나타난 와이즈는 무심한 얼굴로 짜증 섞인 대답을 블루 대신 했다. ".....실컷 잤나 보네." 진은 비칠거리며 일어나 방을 둘러보았다. "왜?" "화장실." ".........." "그리고 배고파. 밥 먹자, 와이즈." 블루는 쿡쿡 웃었고, 와이즈는 부아가 돋아서 몇 마디 남기고 방을 나갔다. "멀쩡한 것 같으니 가 있겠다. 블루님은 시중 들어주는 것을 좋아 하나 보니 그에게 부탁해라, 진." 쌀쌀 맞은 와이즈의 태도에 진은 '쟤 왜 저런데?' 하는 얼굴로 블루 를 돌아보았고, 그는 머뭇거리는 미소를 지었다. 소식을 받고 릭페르가 다시 방문했다. 중무장은 아니었지만 여행 하는데 불편함 없을 간편한 복장으로-평상복 위에 가볍고 단순한 부분 갑옷차림으로, 갈색 망토를 두르고 훼이르를 걸치고 배낭을 맨 모습으로 찾아왔다. 진은 오랜만에 폴로네오와 통신을 하고 세미얀이 남기고 간 편지를 피식피식 웃거나, 머리를 긁적이거나 곤란해하는 표정으로 읽고 궁 금해하는 일행들이 보지 못하게 태워버렸다. 늦은 오후 콜린스가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 들르자 진은 민트의 볼 에 작별 키스를 해주고-그녀는 눈을 좀 크게 뜨더니 방긋방긋 웃으 며 호호...웃었다.-수상쩍은 인간 보듯 쳐다보는 릭페르와 클레이스 의 시선을 무시하고, 소년들에게 '신랑감 후보 1, 2 순위들. 잘 해봐 라~' 하는 말과 함께 다시 키스를 해주고 -콜린스는 얼굴이 빨개졌 고, 파키오는 생글생글 웃었다.- 길레스피 백작가를 나와 아담을 찾 아 갔다. 귀족들을 털어 생긴 불로소득은 장물이라 수도에서 처분하기 힘들 것 같아서, 진은 와이즈에게 대충 금화로 환산 받아 아담에게 레이 첼의 지참금으로 일부를 나누고 약속했던 자금으로 건네 주었다. 아담은 말 없이 그것을 받았다. "아담. 공짜는 없지요?" 아담은 쓴웃음을 지었다. "뭘 해드리면 되나요, 레이디 진. 당장은 어렵지만 기한을 주시면 돈은 따로 갚겠습니다." 진은 그에게서 익숙한 느낌을 다시 받았다. 아담의 가게는 임시 휴업 중이었고, 닫힌 여관 식당 문 안쪽에서 진은 와이즈와 릭페르와 블루와 클레이스와 함께 아담과 앉아있었 다. 진은 릭페르를 나중을 위해서 잠깐 떨어뜨려 놓으려 했지만. '묵인합니다. 묵인.' 하며 그는 따라 들어왔었다. "네얀과 라돈의 통신을 참고만 하세요, 아담. 내 상인들을 이용하는 문제야 제가 말하지 않아도 아담이라면 알아서 받아들이겠지요. 가 는 곳마다 너무 아는 척하는 길드원이 생기면 부담될 수 있으니까. 통신은 따로 더 해 주지 않아도 돼요." ".........." "그 돈은 갚지 않아도 돼요, 아담. 원래 당신들 것이었으니까요. 대 신...내 이야기를 들어 줄래요, 아담?" ".....이야기요?" 진은 피부색도 다르고 눈빛도 다르고 생김새도 너무나 다른 그에게 서 샘을 연상했다. 며칠간 깨지 못할 잠을 자게 한 그 일이 없었더 라도, 그는 특별한 느낌을 주었었다. "잠깐만 다른 사람이 되어줘요. 아담. 내가 편히 말 할 수 있게요." "....그러지요." 진은 그의 담갈색 머리에서 눈을 내려 그의 눈을 보며 이야기했다. "꿈을 꾸었어요, 아담. 아담은 내 꿈속에서 '샘'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과 비슷했어요. 직업도 성격도 아담과 비슷했어요. 난 8살 때 아담-샘. 당신을 내 보호자로 결정했어요. 샘은 받아주었지요. 그는 어린 날 동등하게 대해 주었지요. 우린 주고받는(give and take) 관 계였어요." ".....주고받는 관계요?" 클레이스는 눈을 반짝이며 듣고 있었고, 와이즈는 눈썹을 찌푸리지 않으려고 애써 안면에 신경 쓰고 있었다. 릭페르는 다시 듣게 된 진의 '꿈'이야기에 담담히 듣는 태도를 했고, 블루는 진이 문제가 되었던 그 과거에 대한 언급을 자진해서 하는 것에 하프를 든손에 약간 힘을 주고 고개를 숙였다. "네. 아담. 그는 날 보호해 주었고, 난 그의 일에 도움이 되어 주었 지요. 독립 할 정도가 되어서는 믿을 수 있는 거래자가 되었어요. 내가 일손이 필요하면 샘은 기꺼이 도와주었고, 난 보답으로 그에 게 있는 문제들을 손 봐 주었어요. 그가 손이 필요하거나 정보가 필요할 땐 나도 그의 보호에 대한 대가로 원하는 도움을 주고는 했 지요. 난 샘 덕에 성공할 수 있었고. 그도 내 덕에 훨씬 힘을 행사 하게 되었었지요. 난 그에게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보답을 했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아니었어..." "........." "내가 한 일은 계산에서 나왔지만, 그는 말로는 항상 얼마 내 놓아 라. 뭐가 필요하다. 공짜는 없다. 했지만 사실은 내게 줄 수 있는 것은 모두 내 주었어요. 그는 날 강하게 키웠어요. 타인처럼 대하고 '꼬마'라고 부르며 애송이 대하듯 했지만. 내게 해 줄 수 있는 모든 배려를 해 주었어요. 돌아 갈 집을 만들어주고...그는. 샘은 내게 아 끼던 아들까지 주었어요." "............" 클레이스는 갸웃거리며 와이즈를 보았지만 그는 무시했다. 릭페르는 낮게 헛기침을 했고 블루는 하프를 손톱으로 긁었다. "고마워요. 샘. 그리고 미안해요. 피붙이를 맡긴 믿음을 지키지 못 하고, 사죄하지도 않고 도망한 날 용서해 줘요....상민을 부탁해요. 그 앨 돌봐주세요. 샘은 훌륭한 보호자. 후견인. 동업자. 아빠....였어 요. 사랑으로 돌봐주어서 고마워요, 샘. 잊지 않을게요." "............" 진은 고백했다. 그에게 하지 못했던 말. 다시 볼 수 없을 그를 대신 해 아담을 향해. 마리와 찰스까지 떠오르자 진은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블루가 눈물을 감추는 것을 느끼고 애써 참았다. 그리고 말하고 한숨 돌리고 나니, 왠지 우스꽝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진은 말 없는 아담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여관을 나섰다. "....레이디 진. 좋은 여행되시길." "네....별난 이야기, 들어주어서 고마워요, 아담. 잘 지내요." "천만에요, 레이디 진. 아주 수월한 빚 청산 일이었는데요." 진은 웃었다. '정말 고마웠어. 고마워, 샘....안녕?' [.............] * 진은 클레이스와 블루의 배웅으로 마차를 타고 수도 성문까지 나왔 다. 와이즈가 마법진을 그리지 않고 먼 산을 보고 있자 진은 의아 해 했고 블루는 말을 꺼내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다가 클레이스에 게 떠밀렸다. "진. 블루를 데리고 가라. 7써클 마법사니 이동하는데 도움이 될 거 야. 따라가고 싶어하니 안 된다고 하면 울 거다. 엄청 울보 아니냐. 난 돌아가겠지만 언젠가는 다시 또 만나겠지. 근데 나한텐 작별키 스 안 해 주냐? 아. 알았어. 알았어. 와이즈. 무섭게 노려보지마. 농 담이었어....다시 보자, 진?" 릭페르는 어느 샌가 180도 홱 바뀌어있던 그들의 말투에 앞서 그랬 던 것처럼 다시 눈을 찌푸렸다. 진은 익숙해져 버린 검은머리의 가짜 인간 기사의 빙글거림에 마주 빙글거리며 웃어 보이고, 깔아뭉개는 어조로 대답했다. "역시 보답이 뭔지 안다니까. 계산은 확실해야 좋지. 암. 내 노예를 떠밀어 주었더니 내겐 엘프를 떠미네. 난 너와 좀 머리 구조가 다 르니 모. 욕. 받을 것 없이 감. 사. 히. 호의를 받아 줄게. 고마워, 클레이스~?" ".....얼른 마법진 그려라, 블루. 나 성질 나기 전에. " "예에...." '미안해, 블루. 이용해서. 기분 나빠?' '아니요. 진. 모욕 아닙니다.' 블루는 웃어 보였다. 속삭이는 그들에게 와이즈는 코웃음을 쳤고, 클레이스는 재밌게 느껴져서 와이즈에게 피식 웃어 보였다. 진은 찌푸리고, 약간 웃음기도 섞인 얼굴의 릭페르와-그는 오니가 라에서의 일을 진이 잠든 사이에 블루에게 캐물어 들었었다. (죄지 은 게 있었던 블루는 물론 다~ 말해 주었다.)-먼 산 보는 와이즈와 함께 블루가 그린 마법진에 올랐다. 클레이스의 '두고 보자아~?'하는 표정의 빙긋거림에 진은 혀를 낼름 내밀어주고 다음 목적지로 워프..... [야. 블루. 너 감시 역이다? 잘 지켜라~] '.............' .....워프 했다. 네카르도-네카르도는 석양이 지고 있었다. [80] 10-5. 야 영. 진은 일행과 함께 남하했다. 서대륙 제일 위 서쪽 끝의, 네카르도에서 동대륙 드리얀을 향해 사 선 방향으로 뚜렷한 목적지 없이 전진했다. 블루가 일행을 워프시킨 곳은 네카르도의 국경을 넘어 이웃나라인 디메토르의 영토에 해당하는 숲이 가까운 평지였다. 진은 그 곳에서 인가를 찾지 않고 장거리 워프로 쉬어야하는 블루 에게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바로 와이즈를 시켜 더 이동하려고 했 지만 문제가 생겨서...야영을 해야했다. 진은 잔뜩 찡그리고 모두에게 따라올 생각도 마라고 성질까지 부려 가며 야영할 곳을 물색하는 그들에게 엄포를 놓고, 숲 안쪽으로 사 라졌다. "왜 저러시죠?" "..........." 릭페르의 질문에 와이즈는 한숨을 한번 쉬더니. 생각해 보니 웃기 다는 듯 삐질거리며 웃었고, 블루도 눈치를 챘는지 조금 얼굴이 붉 어졌다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릭페르만 영문을 몰라했다. 곧 돌아 온 진은 인상을 있는 대로 쓰고 짜증을 냈다. 비가 올 때를 대비해 나무가 우거지고 바닥에 부드러운 풀이 깔려 덜 딱딱한 평지에, 마른 풀을 쓸어모아 넓게 깔아두고 잠자리를 준 비하던 릭페르는. 살기까지 떠올리고 큼직한 돌 위에 앉아 있는 진 에게, 왜 그러는지 물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궁금증을 못 참고 질문 했다가 얼굴이 빨개졌다. "생리통이라서요, 릭페르님." 블루는 땔감으로 쓸 나뭇가지를 잔뜩 구해와서 모닥불을 지피고 있 었고, 와이즈는 저녁을 위해 손수 사냥을 가야하나 말아야하나 미룰 까 하고 있다가 뻔뻔하게 들리는 진의 대답에 고개를 돌렸다. "죄. 죄송합니다, 레이디 진. 실례를...." "....실례 아닌데요." "............." 도망가고 싶다는 얼굴 표정의 릭에게 진은 찡그린 웃음을 지으며 제안했다. "미안한 생각이시라면 릭페르님. 한가지 부탁을 해도 될까요?" "네?....무엇을요?" "일행도 되셨는데 말 내리는 게 어떨까요. 릭페르님에게만 말을 올 리려니 불편해서요." "그거야....좋은 제안이네요, 레이디." "당장은 쉽지 않으실 것 같지만 이름이라도 부르세요, 릭. 레이디란 말이 참...먼 나라 호칭 같아서 거북했거든요." 릭페르는 서글서글한 웃음으로 기꺼이 동의했다. 릭은 만약을 위해 양념으로 쓸 소금과 향신료와 간단한 식기까지 준비해 왔고, 말린 고기와 치즈 같은 여행 시 비상식량도 배낭에 들어 있어서 저녁을 위해 따로 사냥을 할 필요는 없었지만. 진이 답지 않게 내어놓은 음식에도 손을 대지 않고 계속 끙끙대더 니 아예 모포를 칭칭 감고 드러눕자, 블루는 통증에 쓰는 약초를 구하러 숲으로 들어갔고, 릭도 보기 민망한지 제대로 된 식사를 준 비해 보고자 사냥을 하러 엘프를 따라갔다. 와이즈는 턱을 괴고, 입술을 잘근잘근 물어뜯으며 웅크리고 있는 진을 바위에 걸터앉아 구경하다, 일행들이 숲으로 사라지자 피식대 며 물었다. "진. 네 회복력이 적용이 안 되는 경우도 있었냐?" "....난생 처음이야. 생리통을 겪는 것은. 빌어먹을, 클레이스 자식. 이런 휴유증을 주다니. 다음에 보자고 했지? 나야말로 다음에 꼭. 봐. 주. 마....몇 대 패주는 건데. 나쁜 놈." "고마워 해라. 내가 꼬리뼈가 어긋나도록 밟고 늘씬하게 두들겨 주 었으니까." "꼬리뼈? 본체로 싸웠어?" "그럼. 인간의 모습으로 싸웠겠냐?" 진은 입맛을 다시며 아쉬워했다. "좋은 구경을 놓쳤네. 난 또 파키오랑 콜린스처럼 싸운 줄 알았지. 드래곤끼리 싸우는 것은 영화에서도 못 봤는데, 아까워라." ".....구경거리인 줄 아냐?" 진은 아파서 찡그리는 얼굴로 비실. 웃어 보였다. "구경하면 구경거리지 뭘 그래? 네 유희 방식이잖아. 이제까지 내 하는 일을 실컷 구경해 왔으면서 딴 소리는." ".........." "대신 화내줘서 고맙지만 와이즈. 날 위해서 동족과 싸우기까지 하 다니. 내가 그렇게 좋아?" "너도 맞아 볼래?" "죽인다는 말 보다 더 무섭네." "..........." 말실수를 했다 싶어서 와이즈는 잠깐 멈칫했지만 진은 의미를 두고 한 말은 아닌 것 같았다. 와이즈는 피곤하게 느껴져서 눈을 감고 뒤 목덜미를 마사지했다. 잠깐 엿본 진의 기억은 회색과 붉은 색과 검은 색을 뭉뚱그려 놓 은, 눈이 아픈 느낌을 주었었다. 솔직히 말하면 안쓰러웠다. 자존심 세우지 않는 클레이스 녀석의 방식이 더 요령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인정할 이유가 없다 생각했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동족 이 끼어 들어 흐트려 놓은 그 짜증나는 며칠 간의 일들 탓에. 와이즈는 살아오면서 인간을 상대로 가능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던 느낌들을 받았다. 그 기분에 분명한 의미를 규정지어 주고 싶 지는 않았지만 비슷한 의미로 돌려 말하면 '소유욕'이었다. 와이즈는 짜증스런 얼굴로 투덜거리는 진을 그녀가 말한 대로 늘 하던 대로 구경거리 삼아 쳐다보며, 깜둥이 자식 때문에 쓸데없는 생각이 드는 거라고 자신에게 변명해 주었다. "엘프는 어쩔 거냐?" ".....지나치게 친절해 보여. 아무래도 선택 당한 걸까?" "나한테 묻지 마라." 진은 턱을 긁적이는 버릇을 고쳐야겠다고 생각했다. "릭도 끼었으니 당분간 위장으로라도 블루의 마법이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동행을 받아들였지만. 네가 말한 대로 엘프가 선택한 대상 에게 맹목적이라면 떼어두고 온다고 바뀔 것 같지는 않아서 말이 야. 괜히 그렇게 착한 사람....아니, 엘프를 고생시킬 것 같아서 함께 오긴 했는데...부담되네." ".....너도 엘프에겐 특별히 친절해 보이던데?" 와이즈는 그런 물음을 하는 자신이 좀 싫어졌다. "친절에 친절로 맞서 줘야지 그럼. 그리고 난 블루가 마음에 들어. 나무잖아. 나무 싫어하는 사람도 있어?" "............" "난 병들지 않은 풀이나 나무가 많은, 오염되지 않은 환경에서 지 내 본적이 드물어서 말이야. 블루 옆에 있으면 산림욕하는 기분이 들어. 상쾌한 여행길~ 좋은 일 아니야?" "좋겠다만. 여기 저기 딴 생각 품는 이성을 만들어 두고 다니는 게 재밌냐?" "응." '뻔뻔한 것 같으니라고!' "그러다 호되게 당할 날이 있을 거다, 진. 조심해라." "그러게. 클레이스 같은 녀석이 또 없으리라는 법은 없겠지...젠장. 너무 아프다....생리통이라니. 캐서린이 기뻐하겠네." "아픈 걸 기뻐해? 사이가 안 좋은 여자였냐?" 진은 숨을 몰아쉬고, 힐링 마법도 듣지 않아 으슬으슬 떨리기까지 하는 몸을 추스르며 웅크렸던 것을 조금 펴 보았다. "내가 보호해 주던 여자야. 날 우상 시 했어. 단지 엄마뻘이어서 말 이지. 내가 보통 여자 애랑 다른 것에 걱정했을 뿐이야. 엄마 흉내 를 내주고 싶어했지만. 좀 터무니없이 약한 여자였어....근데. 너나 블루는 말 안 해도 아는 눈치더라?" "후각이 인간과 다르니까 그렇지." "그렇군. 좀 남사스럽네." 진은 몸이 아프니 어딘가 기대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지속적인 통증을 겪어본지 꽤 오래 되었다. 아프면 어떤 인간도 약 해지는 법이라는 것을. 자신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에 진은 한숨을 쉬었다. "와이즈. 아픈데 계속 그렇게 못마땅해 하고 있지 말고 친절해 질 수 없어? 릭도 블루도 동행시킨 게 마음에 안 들어도 봐 줘라. 도 움이 되었으면 되었지. 방해는 안될 게 아냐. 여행길이 유쾌해야지. 그렇게 꽁해 있으면 보기 흉하고 불편해." "꽁한 적 없다." "그래. 그럼, 든든한 내 보호자. 좀 안아줘라. 불쌍하게 봐주는 셈 치고." 와이즈는 눈을 멀뚱거리면서 생각했다. -어째서 쟤는 저렇게 뻔뻔....순진? 그건 절대 아니고! 이성에 대한 거리감이나 거부감이 없는 걸까. 아무리 타 종족이라고 해도 자신 을 이성으로는 볼 생각도 않는 이유가 뭘까. "도대체 네 사고방식은 이해가 안 간다, 진. 그곳에서는 남녀 구별 이 없었냐? 동성에게도 걸핏하면 키스를 하질 않나." "에....하하...구별이 없을 리가 있겠어. 단지 그곳에선, 나라마다 풍습 과 관습이야 각기 다르기도 하지만. 내가 살던 곳에서는 키스가 생 활 화 된 곳이었거든. 가벼운 포옹이나 입맞춤 정도야 누구하고든, 인사나 호의를 보이는 정도의 의미로 표현되어서....난 거기서 살 때 는 오히려 딱딱하기 그지없었는데, 이곳에 와서 없던 버릇이 생기 고 있나봐. 나쁜 현상은 아닌 것 같은데. 이곳 풍습과 달라서 이상 해 보이나 보군...." 모닥불이 스러질 것 같아서 와이즈는 나무를 더 던져두었다. 불꽃이 날렸다. "....아니다. 이곳에 와서가 아니고, 한국에서 살 때 친구들의 영향으 로 시작된 것 같다. 그래. 분명히. 상희랑도 간지럼을 태우고 놀곤 했으니까." "....이해가 안 간다." "에이. 몰라. 아파서 설명도 제대로 못하겠다." "대륙 대부분에 속하는 인간들의 문화와 다르다는 것은 알겠다만. 그럼 그곳은 성년식을 어떻게 하냐?" "성년식?" 수다를 떨면 괜찮아 지려나 했지만 진은 별 차이가 없고 더 심해 지는 것 같아 끙끙대며 되물었다. 와이즈는 엘프가 돌아오다 멈칫하는 것을 알았지만 무시하고 진의 말을 들었다. "성년의 날은 있지만 이곳처럼 큰 의미는 두지 않는데? 비슷한 행 사일까나...관련 있는 풍습이라면 여자 애의 경우엔 초경을 하게 되 면 엄마들이 케익을 구워주지. 여자로 다시 태어난 것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말이야." "뭘 축하해?" "2차 성장기 말이야. 아이를 낳을 수 있게 되잖아. 그럼 성인이 될 준비라는 뜻 아니야." "참....부끄럼도 모르는 세상일세." "...그게 왜 부끄러운데? 뭐, 그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구만. 어떤 엄 마는 그런 때, 학교에 가는 딸의 가방에 피임약을 넣어주는 친절한 엄마들도 있는데." "뭘....넣어 줘?" "피임 약. 잘 안 들려? 배가 아파서...큰 소리를 못 내겠어. 으..." "돌겠네." 진은 뭔가 잘못 받아들인 것 같아서 다시 덧붙여 설명했다. "문화가 달라. 풍습차이잖아. 그 곳은 성이 개방되어 있어. 하지만 엄마들이 어린 딸들에게 충동질하는 의미로 약을 챙겨주는 것이 아 니고, 불순을 막아주려고 신경 써주는 거야. 부모로는 당연한 배려 지. 1년 가까이 살았던 한국에서는 또 아주 달랐지만." 와이즈는 정말 돌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그거나 저거나 어쨌건...이 아닌가. 인간들의 풍습이야, 전에 유희 나왔을 때와 비교해서 달라졌으면 얼마나 달라졌겠는가. 그래서 대 륙도 곳에 따라, 믿는 신에 따라 풍습이나 가치관이 천차만별이라 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진이 다녀온 차원의 풍습 문제가 아니라, 그 사실을 멋쩍어 하지도 않고 나불대는 진 때문에...머리가 띵. 했다. '야. 넌 네가 왕녀의 신분이라는 것을 아는 거냐, 모르는 거냐?' 하고 말하고 싶었지만, 진이라면 분명. '그게 무슨 상관인데?' 할 것 같아서 와이즈는 그냥 넘어갔다. 대화 중이라 기다려 주는 것인지 엿듣고 있는 것인지-와이즈가 알 고 있다는 것을 그도 알 테니, 엿듣는 것은 아닌지도.-구별이 애매 한 엘프 녀석도 아마 난감한 기분이 아예 없지는 않을 것이다. "너는? 그 캐서린이라는 엄마 흉내를 내려 했다는 여자도 네게 그 걸 주던?" "와이즈. 캐서린은 말이야. 내게 이것저것 해 주고 싶어했지만. 내 가 언제 그걸 시작했는지 알아차리지도 못했어. 게다가 난 그녀의 도움이 필요 없을 애였거든. 갑자기 시작 된 일이었다 해도 그 정 도 당혹 감이야, 내겐 도움이 필요할 정도의 일도 아니었고. 보통 여자 애들은 엄마에게 이것저것 충고를 듣고 축하를 받고 했지만... 나중에 캐서린이 말 안 해 줬다고 울기까지 했었어. 흠...참. 곤란한 동업자였다니까." "............" 진은 캐서린에 대한 기억 때문에 웃고 싶었지만, 아파서 웃음이 잘 만들어지지가 않았다. "이곳의 성년식은 어떻게 하는데?" "블루님에게 물어봐라, 진. 인간세상을 여행한지 꽤 되어서 나보다 더 잘 알 것 같으니까." 진은 모르고 있다가 와이즈의 톡 쏘는 말에 머뭇거리며 걸어나오는 엘프를 알아보고, 통증으로 찡그리고 있던 얼굴을 풀지 못하고 구 겨진 웃음을 웃어 보였다. "미안합니다. 엿듣게 되었네요." "아니, 뭐. 큰 비밀도 아니었으니 상관은 없는데...피장파장이네, 블 루. 나도 엘프의 성문화가 알고 싶다고 무례한 질문을 했었으니까." 진은 존대를 버리지 못하는 블루에게 혼자 반말을 하기가 미안한 기분이 들어서 자꾸 말이 엉켜 나올 것 같았다. 와이즈는 진의 답변에 '그렇게 까지 놀렸었냐?' 하는 의미로 인상을 써 보였다. 블루는 머뭇거리다 캐어 온 약초를 모닥불과 정령들을 이용해서 조제하기 시작했다. "릭은?" "곧 올 거 에요, 진. 토끼를 잡았는데, 손질 해 오겠다고 물가로 가 셨어요." "이 숲은 위험하지 안나봐? 몬스터도 없는 것 같고." "네. 평화로운 곳이더군요." 진은 주눅이 들어...아니, 소극적으로 보이는 블루의 태도에 엘프에 겐 너무 충격적인 이야기였나 싶어 헛기침을 했다. 그건 그렇다 치고.-아파서 길게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몸이 너무 시렵고 아파서 진은 다시 와이즈에게 동정표를 구했다. "와이즈야. 몸이 으슬거려. 안아 주던지, 뭔가 마법을 써 주던지 좀 해줘라." "............" 와이즈는 허둥거리는 엘프를 의식해서 진의 몸 주위를 마법으로 따 끈 따끈하게 덥혀 주었다. "됐냐?" "응. 고마워, 와이즈. 훨씬 낫다." "미안해요, 진. 제가 해드리고 싶었는데. 마나가 아직 회복이 안 되 어서." "에. 괜찮아, 블루. 약을 지어준 것만도 고마운데. 금방 나을 거야." '엘프 녀석 보란 듯 안아줄걸 그랬나?' 와이즈는 속으로 삐죽였다. 릭페르가 굽기 좋게 털가죽을 벗기고 내장을 발라 다듬은 토끼고기 를 가지고 돌아와서 소금과 향신료를 뿌려 모닥불에 구워 저녁을 먹게 되었다. 약초가 효력이 있는지 통증이 조금씩 가시기 시작하자 진은, 나뭇 가지 사이로 언뜻 보이는 달을 간간이 올려다보며 릭이 잘게 썰어 준 토끼고기를 집어먹었다. 식사가 끝나고 진의 혼자 하는 생각을 엿보고 와이즈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 치실이 그리워라.' 블루가 마음이 차분해지는 낮고 잔잔한 노래를 불러주었지만-진짜 자장가인 듯 했다.-진은 너무 실컷 잤던 탓에 잠을 청할 수가 없었 다. 릭은 코를 골거나하는 잠버릇 없이 바른 자세로 모포를 덮고 가방을 베고 조용히 잤고, 와이즈는 회복을 위해 잠을 청하는 블루 에게-엘프는 이불이 필요 없다며 모포 없이- 인계 받아 진의 말동 무가 되어 주어야했다. 진의 잠이 안 와서 하는 잠투정에 가까운 말상대로. 클레이스를 다시 만나면 어떻게 복수를 할 것인지 궁리하는 것에 와이즈는 인심 써서 조언 비슷한 것을 해 주며 함께 새벽까지 앉아 있었다. 모닥불의 온기와 와이즈가 유지해 주는 마법의 도움으로 진은 새벽 잠을 잤다. 잠은 잘수록 오는 것이라는 생각을 어렴풋이 하면서. 와이즈는 모포를 칭칭 감은 채 조금씩 미끄러지더니 아예 자신의 무릎을 베고 자는 진을 내버려두고, 모닥불이 잦아드는 것을 막기 위해 간혹 나뭇가지로 툭툭 치고, 나무를 더 넣으며 불꽃과 재가 날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 아침이 되자 진은 깨끗이 낫지는 않았지만 끙끙 앓을 필요는 없게 되었다. 지겨운 곳이었다며 될 수 있으면 멀~리 가자는 진의 말에 블루는 디메토르를 거의 가로질러 네카르도와 반대 쪽 이웃나라와 의 국경 근처 영지로 일행을 워프시켰다. 도착한 곳은 다시 숲 근처 평지였다. 지도를 보고선 어디인지 정확 히 구별이 되지 않아, 사람들이 지나간 흔적이 있는 길을 찾아 계 속 남하하는 쪽을 택했다. "블루. 괜찮아? 혼자 마법 쓰게 해서 미안해." "괜찮아요, 진. 만일을 대비해서, 어제처럼 무리하진 않았으니까요." "흠. 내 교통수단이 하도 뻣뻣해서 말이야. 무~서~운 몬스터라도 나 오면 힘 남아도는 와이즈가 해결 해 주겠지. 그럼, 블루. 나랑 와이 즈와 릭 뒤에 잽싸게 숨는 거야. 좋은 생각이지?" "......좋은 생각이네요." "숨을 필요가 있나요, 진?" 블루는 진의 말에 째려보다 코웃음을 치는 와이즈를 의식하고 어색 하게 웃으며 대답했고, 릭은 아직 말을 모두 내리는 게 어색한지 블루와 비슷한 투로 존대를 섞어 말했다. "릭. 난 연약하고 힘없는 가련한 여주인공이야....흠. 그렇게 눈에 힘 안 줘도 돼, 릭. 와이즈. 농담이었어." 아침햇살이 따뜻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 가는 길에 진은 다른 방향에서 오는 여행객들과, 피난민으로 보이 는 아이와 여자들이 포함된 일행을 보았다. 진은 지쳐 보이는 그들 네댓 가구의 사람들의 뒤를 따라, 성벽 밖 성문이 열리기를 기다리 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무리에 섞이게 되었다. 정오가 지난 시간이 되어서야 성문은 겨우 열렸다. [81] 11. 디메토르-매니스. 매니스 영지는 타국과 국경을 마주한 영지라 보통 영지보다 성벽이 높고 견고했다. 성벽을 경계로 깊게 땅을 파서 성밖의 영토와 성 안이 분리되어 있었다. 성문은 양옆으로 열리거나 위에서 끌어올리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니 고, 두꺼운 사슬이 달려 드르륵거리며 위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 들 앞으로 다리가 되어 내려왔다. 성문 통과절차가 까다로워서 진은 일행과 차례를 기다려야했다. 성문지기들 뿐 아니라, 갑옷 차림의 기사들도 다리를 건너 나와 성 문 통과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통제 겸, 경계 감시하고 있었다. 진은 성문이 열리길 기다리고 차례를 기다리면서, 난민으로 보이는 허름한 차림의 주민들이 서로 이야기하거나 다른 곳에서 온 여행자 들의 질문에 답하는 것을 들었다. 그들은 디메토르의 이웃나라 사키리온의 주민들로 몬스터들의 극성 스런 침입 때문에 와해 된 영지의 주민들이었다. 굳이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로까지 찾아온 것은, 자국의 가까운 영지에서 더 이상 주 민들을 받을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다음으로 가까운 매니스를 찾아 온 것으로 보였다. 그들은 건강한 편이었고, 오는 길이 험한 편이 아니어서 큰 희생 없이 도착한 것으로 보였지만. 몬스터들이 휩쓸고 간 고향 영지에 서 디메토르 매니스와 사이에 있는 사키리온의 다른 영지로 피신한 주민들의 소식에 대해서는 비관적인 평을 했다. 진은 차례가 되어 일행과 함께 여행자 신분으로 신고하고 매니스 영지 방문을 허락 받았다. "성문이 늦게 열리네요?" "아, 네. 국경너머 사키리온에서 요즘 피난민들이 꽤 들어 왔거든 요. 정비작업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가씨." 진은 성문 지기의 대답에 그럴 만 하다는 생각을 하며 다리로 둔갑 한 사슬 달린 성문을 건너갔다. 탁한 물 냄새에 섞여 뭔가 비릿한 냄새가 올라와서 아래를 내려다 본 진은 인상을 써야했다. "저게 뭐야, 와이즈?" "육식성 수상 몬스터다." "..........." 성안 사람들의 하수 인 듯한 2/3쯤 고여 있는 더러운 물의 수면에 꾸물거리고 있는 생물들이 보였다. 이구아나처럼 생긴 것들이 탁한 색의 번질거리는 피부를 물 위로 잠깐씩 내보이다 잠수하고 있었다. "이구니군요." "정 떨어지게 생겼다, 릭. 꽤 크네. 침입자를 막기 위해 풀어놓은 건가?" "그런 셈이겠지요. 저것들은 물 밖으로 나오지 못해요. 하지만 꽤 사나우니 성문을 내려주지 않으면 허락 없이 성안으로 들어가기 어 렵겠네요." "진. 네 아들과 닮았다." "....오니가라의 그 물뱀 말이지요?" 릭의 질문에 블루가 긍정해 주었고 릭은 아래를 흘끗거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제 얼굴에 침 뱉기야, 와이즈. 너도 비슷하게 생겼잖아.' [난 저렇게, 그렇게 더티하게 안 생겼다고 했잖냐!] 진은 무시했고 와이즈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언제는 아름답다고 괴성을 질렀던 주제에...' "국경부근 영지라 저런 몬스터를 위협용으로 전시하나 보네. 원래 이렇게 더러운 물에서 사는 건가?" "글쎄요. 저도 책에서 그림으로 보고 약간의 설명을 읽은 게 다 라..." "더러운 물에 넣어두니까 더러운 물에서 살지. 원래 빛깔은 녹색인 데 물색 때문에 탁한 색이 된 거다, 진." 진이 너무 몸을 가까이 하고 숙이고 있는 것에, 주시하고 있던 성 의 경비 기사가 불안 해 보였는지 다가왔다. "위험합니다, 아가씨. 뛰어오르는 놈도 있으니 물러서 계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꽤 큰놈이 진의 발치로 튀어 올랐다. 릭과 주의를 주던 기사가 검을 빼들었지만, 냄새나는 그 괴물 이구 니는 진이 위협거리까지 올라오면 밟아주려고 경계하고 있는 것이 소용없게, 다리까지 이르지 못하고 크게 벌렸던 입을 다물고 갈라 진 혀를 날름거리며 곧 아래로 다시 떨어져 내렸다. "괜찮으세요, 진?" "이상 없어, 블루. 점프력이 별로네. 기분 나쁜 녀석일세. 눈빛이 마 음에 안 들어. 다들 같이 있는데 왜 날 공격 하냐, 너?" "네가 만만해 보였나 보지." "보는 눈이 없는 녀석이군. 아닌가...?" 와이즈는 태평하게 대답했지만 성의 기사는 겁이 없는, 경솔한 여자 보는 듯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위험합니다, 아가씨. 체구가 작은 녀석은 더 높이 뛰니까요. 육식 성이라 사납습니다. 몸을 내밀면 안돼요. 아까 그 놈 같은 경우엔 인육을 먹어 본 놈이니 더 위험하지요." 성의 기사의 말에 진은 얼굴을 찌푸렸다. "인육을 먹여요?" "....사형수를 주기도 하니까요." ".........." 진은 불쾌한 기분이 들어서 더 이야기 나누지 않고 성안으로 들어 갔다. 릭은 훼이르를 집어넣고 진을 따라가는 블루와 와이즈를 뒤 따라 걸음을 옮기다, 진을 가리킨 기사의 질문에 피식 웃었다. "하프엘프인가요?" "...인간입니다." "..........." 진은 점심을 먹기 위해 식당을 먼저 찾았다. 디메토르 매니스는 네카르도와 큰 차이 없는 생활풍습을 가지고 있 었다. 다만, 국경인근의 영지라 다른 곳 보다 치안이 더 잘되어 있 었고. 주민들의 통제도 더 질서정연 해 보였다. 여행객들이 많아 여관을 겸하는 식당들은 대부분 만원이었고, 진은 릭이 자진하여 몇 군데 들러 빈자리를 물색 해 오자, 짐 가방을 들 고 릭을 따라 식당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엘프 분이 계시다 길래 자리를 마련했다우." 진은 블루 덕을 보는구나 싶어서 빙긋 웃었다. 여관 주인은 30대 후반 부부였다. 진 일행을 맞아 준 것은 풍채 좋 은 여주인이었는데, 수련기사의 일행 언급에 엘프만을 기대하고 있 다가 함께 들어오는 아가씨와 마법사에게 눈을 둥그렇게 떠 보였 다. "방도 예약하고 싶은데 빈방은 없나요?" "없어도 만들어야겠수, 아가씨. 이렇게 아름다운 분들이니 우리 여 관 이름이 더 번쩍이지 않겠어요? 우리 여관에 머무시구랴." "여관에 이름이 있어요? 간판에는 안 쓰여 있던데요." "후후...우린 글을 몰라서요. 하지만 간판 모양이 백합 꽃 모양이잖 수. 그렇게 안 보였수? 다시 만들게 해야 하나..." "듣고 보니 그렇네요. 백합여관이에요?" "그렇다우. 앉으세요." 진은 사투리 섞인 말투의 여주인의 안내로 와이즈와 블루와 릭과 함께 사람들의 테이블 사이를 지나쳐 안쪽 네 개의 의자가 준비 된 탁자에 앉았다. "엘프 분은 음유시인이라니 나중에 노래 한곡 불러 주시겠수? 난 엘프를 본게 처음이라서 말이유. 노래를 잘한다고 하던데..." 블루는 투박하지만 순박하게 느껴지는 그녀의 말에 부드럽게 웃으 며 어려운 일 아니니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주인 아주머니는 잠깐 기다리라고 하고, 추가 주문을 받기 위해 다 른 자리로 갔다. "좋겠네, 블루. 와이즈. 백합이란다. 음. 외모에는 어울리긴 하네." 블루는 싱그럽게 느껴지는 미소를 지었지만, 와이즈는 자신을 겨냥 한 말인 듯 한 '외모에는..'이란 말에 조금 눈썹을 치켜 떴다. "진에게도 어울리는 데요?" "릭. 난 잡초야. 내가 꽃일 리가 있어?" "자신을 안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진. 릭페르님. 검푸른 백합 은 없답니다." "....그렇긴 하지만." "와이즈. 내 미모에 질투하는 구나." 와이즈는 말려들까 봐 진의 말을 못 들은 척 했다. 여관식당은 꽤 넓었고 여주인이 공동 경영을 하는 곳이라 그런지 깔끔한 분위기에, 잘 시들지 않는 붉은 나무 열매가 달린 나뭇가지 들로 벽과 입구를 장식해 두어 좋은 인상을 주려고 애쓴 흔적들이 보였다. 돌아 온 주인 아주머니는 앞치마에 손의 물기를 닦으며 말했다. "방도 다 차서 여러 개는 못 드리는 데. 괜찮겠수. 아가씨?" "너무 좁지만 않으면 괜찮아요, 아주머니. 그런데 항상 여긴 이렇게 여행객이 많은 거 에요?" "보통 때도 많은 편이긴 하지만, 요즘은 사키리온의 영지 몇 곳이 몬스터들 때문에 험해서 상인이나 여행자들이 길을 돌아오는 편이 라우. 그래서 더 많지요. 매니스가 디메토르의 입구인 셈이어서 호 황을 누리는 거 고요." 진은 몇 가지 더 짧은 질문을 하고, 아침을 먹지 않고 출발해서 고 픈 배를 채우기 위해 넉넉히 주문했다. 주인 아주머니는 엘프의 식사비는 받지 않겠다며-블루는 소식가였 으니 큰 인심은 아니었지만- 진과 일행의 주문을 받아들고 주방으 로 들어갔다. 엘프를 직접 맞기 위해 잠깐 교대를 했었는지, 남편으 로 보이는 아저씨가 손님들의 심부름을 하는 종업원 소년을 거들기 위해 주방에서 다시 나왔다. "사키리온은 몬스터들이 많은 곳일까? 영지들이 파탄 날 정도면." "진. 사키리온은 몬스터의 숲이 속해 있어요. 아마 그 근처 가까운 인간들의 영지겠지요." "그럼, 몬스터와 인간의 영토 분쟁인 셈인가? 가 봤어, 블루?" "몬스터의 숲에 들어가는 일은 위험해요, 진. 약초를 구하러 들어 가 본적은 있지만, 안쪽으로 깊이 가보지는 못했어요." "흑마법사의 충동질이 아니라면 몬스터는 필요 없는 영토 싸움은 안 하는 편이다, 진. 식량을 구하기 위한 오크 떼나, 영역을 침범하 는 인간들을 쫓아내려는 이유가 아니라면 큰 싸움은 걸지 않지. 인 간은 땅에 욕심이 많으니 아마 그게 원인일 거다." '그곳에 대해 알아, 와이즈?' [몇 년 전에 가 본적이 있다. 그때는 인간과 몬스터의 영역이 구별 되어 있었다.] '지금은 아닌 건가?' [모르지. 몇 년 전 일이니 크게 달라졌겠냐마는. 인간들은 워낙 지 형을 빠르게 변화시키곤 하니까 그들을 자극했을 수도 있지.] 진은 갸우뚱했다. 성 밖에서 난민들이 하던 이야기에서 받았던 느 낌을 생각하면 뭔가 어긋나게 여겨졌다. 몬스터가 아무리 무섭다고 해도 인간이 그렇게 호락호락했나...? "그런데 이상하네. 보통은 그런 경우 용병들을 많이 고용해서라도 몬스터들과 싸우지 않나? 거의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땅을 내 준 것처럼 이야기하던데..." 와이즈는 진을 찾으러 돌아다니던 중 갔었던 곳이란 말을, 둘만 있 는 자리도 아니고 체면도 생각해서 제외시키고 말했다. 그런데 진 의 의문에 대해 뭔가 석연치 않은, 놓친 것이 있는 듯한 생각이 들 어서 잠깐 눈을 굴렸다. 하지만 곧, 준비에 시간이 걸리지 않은 요리들이 먼저 나오기 시작 하자 와이즈는 식사에 신경을 돌렸다. 릭은 진과 엘프 블루님과 리툰 마법사가 신분을 떠나 주목을 받는 유형들이라는 점을 상기했다. 식당을 들어서서부터 식사나 가벼운 음주를 하고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일행에게로 모아져 있었다. 릭은 평범한 복장으로 수도를 돌아다니고는 했었지만, 귀족 신분을 밝히지 않은 상태에서 그런 집중적인 시선을 평민들에게서 받아 본 경험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생소한 기분이 들었다. 귀족이라고 하면 그들은 오히려 눈을 마주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었 으니, 몇몇은 아주 드러내 놓고 쳐다보는 바람에 릭은 뒤통수가 따 갑게 느껴졌다. 엘프에 대한 사람들의 호기심을 이용해 주인 여자의 호의를 끄는 것에 효과를 봤지만, 부작용이 있을 것임을 미처 염두 하지 못했었 다. 하지만 진도 블루님도 마법사님도 그런 그들의 시선에 전혀 괘 념치 않는 태도였고, 릭은 모두가 강한 편이니 사고가 생겨도 큰 일은 없으리라는 생각에 경계를 조금 늦추었다. 신경을 곤두세우고는 여행이 편하지 않을 것 같았으니까. * "아, 배부르네. 그만 먹을 래. 여기 음식 맛있다." "정말 많이 드시네요, 진." "음....흉해 보여, 릭?" "흉할 것까진 없지만. 처음에 아담스의 가게에서 드시..먹는 것 보 고 놀랬었지요." "블루. 나만 보고 웃지마. 와이즈가 더 먹었어. 저 봐. 앞에 뼈다귀 쌓인 거." "마법사님은 이해할 수 있으니까요." 와이즈는 모른 척, 못들은 척 턱을 짚고 고개를 돌리다 옆 좌석의 여검사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얼굴이 조금 붉어져서 시선을 돌 렸다. '참 쳐다보는 인간도 많네. 뭘 그렇게들 보냐?' "오후 시간이 꽤 남았는데 어떻게 하겠어, 다들? 난 검을 사러 가 볼까 하는데. 시장 구경도 하고." "진. 필요한 줄 알았으면 드렸...주었을 텐 데요." "음...릭의 집엔 무기 창고도 있었지. 괜찮아. 위장용으로 쓸 거니까, 아주 좋은 검은 필요 없어. 그리고 웬만하면 말 내려, 릭. 말하면서 도 자꾸 헷갈리는 것 같아 보여서 듣는 내가 불안하게 느껴져." 릭은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당장은 힘들 것 같네요. 그냥 하던 데로 존대하겠습니다, 진. 이름만 부르는 게 좋겠어요." "편할 대로 해, 릭. 하지만 난 한번 말 내렸으니 다시 못 올려." "..........." "릭페르님. 손해나는 거래네요." "기사로 교육받고 이제껏 지내셨는데요. 쉬운 일이 아닐 거 에요, 릭페르님." 릭은 와이즈의 말과 블루의 위로에 약간 쓴웃음을 웃으며 진을 따 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외로 블루는 외출하지 않고 일행들의 짐을 받아들고 예약한 방으 로 올라가 있겠다고 했다. 진은 이동마법을 연이어 쓴 것 때문에 쉬려는 생각인가하고, 별 말 없이 짐 가방을 블루에게 맡기고 음식 값을 계산 한 후. 릭과 와이즈와 함께 식당 밖으로 나갔다. 거리엔 사람들이 많았다. 여행자들도 많고 용병들과 있는 상인들도 보였고, 아이들도 많았다. 외부인을 대상으로 몇몇 소매치기를 하는 소년들도 눈에 띄긴 했지 만, 늘어난 인구가 많은 곳임에도 빈곤 해 보이지 않고 활기차 보 였다. 경비로 보이는 무사들도 곳곳에 긴장감 없이 섞여있는 것도 볼 수 있었다. 진은 무기를 취급하는 상점인 듯, 문에 방패 모양으로 깍은 나무를 못질 해 놓고 손잡이가 검처럼 생긴 곳을 찾아 들어갔다. "이곳 사람들은 센스가 있네. 간판이나 문 모양으로 상점의 구별이 확실하잖아." "여행자가 많은 곳이라 그러나 보네요." "관광수입을 아는 영주인가 봐." "그럼요. 아가씨. 우리 영주님은 훌륭한 분이시지요. 타지에서 흘러 들어 온 사람들도 정착하는데 문제가 없도록 여러 가지 신경 써 주 시기도 하고, 세금도 적당히 받으시지요." 자랑하듯 말하는 가게 주인의 말에 진은 웃어 주었다. 여행객 외에 피난민들로 갑자기 주민이 늘어난 영지인데도 식량이 나 물자가 부족하거나 물가가 비싸지도 않았었다. "매니스 영지는 강하군." 무기를 취급하는 상점은 또 있었지만, 진이 들어 간 곳은 방패와 검, 철퇴, 단검, 갑옷등 다양한 무기가 벽과 바닥에 정리되어 있었 고 경기 탓인지, 원래 그런 것인지 수입도 좋은 것 같아 보였다. 진은 가늘지만 강도가 뛰어나다는 중간 폭의 비교적 가벼운 검을 골라 사 가지고 무기 가게를 나왔다. "검이 제련이 잘 되어 있는 것 같아. 무기 종류도 다양하고 수량도 많아. 매니스만 그런 건지, 디메토르 전체가 그런 것인지 모르겠 네." "그 정도는 네카르도 수도에서도 볼 수 있는 데요, 진?" "릭. 수도와 비교하면 안되지. 난 네카르도에서 머물렀던 곳이 몇 군데 되지 않아 비교가 정확하지는 않겠지만....네얀은 북대륙과 교 류하는 상업도시였고, 에요타 산맥의 덕을 보고 있었던 경우이고 타국과 면해 있지 않아서인지 이곳보다 군사력이 떨어졌었어. 라돈 은 가난한 편이었고. 그곳과 이곳만 보고는 모두를 판단 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이곳 매니스는 영주를 잘 만난 것 같아." 진은 상점 건물과 지나치는 토박이로 보이는 사람들의 표정을 가늠 하며 말했다. "경제력도 있어 보이고. 무기시장을 봐도 군사면에 신경 쓰고 있는 것이 보이잖아. 농노들이 재산임을 알고, 흘러들어 온 사람들을 강 제 억압하지 않고 스스로 눌러 앉게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생각이 있는 영주겠지. 국경부근이라 능력 있는 귀족에게 통치권이 부여된 것 같은데. 그럼 디메토르의 지배계층도 생각이 있는 귀족일 수 있 다는 뜻이고." "..........." "별다른 특산품은 없는 것 같지만 갑자기 늘어난 인구를 수용하는 데 부작용이 없는 것을 보면 지원을 받고 있거나, 영주가 경영력이 뛰어나 인력 활용을 잘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 미리 준비하고 있었 는지도 모를 일이고....통제가 아주 잘 되고 있잖아. 신전도 둘이나 되니 신성력을 기대할 사제들도 확보해 두고 있는 듯 하고." 릭은 진을 따라나서서 자국을 벗어나 처음으로 오게 된 이 도시를. 국경 인근 영지라 여행객이 많은 지역으로 인식하는 정도였는데. 미처 생각지 못했던 일을 거론하는 그녀의 말에 주위를 다시 둘러 보게 되었다. "흠. 듣고 보니 그렇군요. 디메토르는 네카르도와 쌍벽을 이루는 나 라지요. 분쟁이 있었던 적이 있었지만 막상막하였습니다. 하지만 사 키리온이 몬스터 난으로 골치를 앓고 있어 주민들이 타국으로까지 이주하고 있는 실정이라면...." "단순히 디메토르는 주변 국가를 견제하려는 노력을 하는 것인지도 몰라, 릭. 하지만 여기 매니스는 국경과 면해 있어서 군사력에 신경 쓰는 문제는 별도로 봐도 하층민들의 민심을 얻으려는 노력도 많이 보이니, 은근히 사키리온을 의식하고 있는지도 모르지. 이번 몬스터 난을 겪고 있으니 디메토르-매니스엔 기회 일 수도 있고 말이야." 릭은 선 자세에서 손으로 턱을 받쳤다. 약해진 사키리온을 디메토르 가 정복한다면. 아니, 모두는 아니더라도 그 일부의 영토라도 얻게 된다면 이 나라는 더 강해질 것이고....그러면 네카르도에 위협이 될 요지가 충분히... "...하지만 디메토르는 호전적인 나라는 아닌데요, 진?" "글세? 성 밖 경비로 몬스터를 키우고 인육을 먹이고 있는데 국민 성이 온순하지만은 않을 것 같은데? 이곳에 한정된 일일까? 그렇다 고 해도 이곳 영주는 꽤 힘깨나 있는 귀족일 것 같은데. 그렇다면, 디메토르 수도에서도 영향력이 있을 것이라 짐작되고...네카르도도 디메토르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으니 경계는 하고 있었겠지? 하지만 비슷한 힘이라면, 유비무환이 뭔지 아는 쪽이 더 유리하고 강한 법 이야, 릭." "............" 잘도. 그런 평범한 것에서 정치적인 문제를 끌어내는 구나 싶어서 와이즈는 속으로 삐죽였다. 릭은 심각해져 버렸다. 진이 그냥 해 본 소리라며 말을 바꾸었지만 그는 간과할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헛기침을 하고 숙소로 돌아가 있겠 다고 했다. "통신하러 가나 보군." "....릭도 네카르도의 지배계층이니 당연히 반응이 나와야지." "군사정보가 될지도 모를 이야기를 대낮에 길거리에서 잡담처럼 말 하는 구나, 진." "뭐, 어때. 주위 깊게 듣는 사람도 없는 것 같은데. 네 얼굴에 넋이 나가 보이는 여자들은 보이지만." '남 말하네.' "통신하러 가는 게 옳지. 자국의 일이 아니라고 태평해 하다간 큰 코 다칠 수도 있을 테니까. 하지만 주시하고 경계를 게을리 하지만 않으면 네카르도는 큰 염려하지 않아도 될 거야." "왜?" "내 상인 덕에 경제력이 더 나아질 테니까. 군사력은 경제력과 상 호관계니. 네카르도에 인물이 없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오니가라가 생각나네. 보아는 잘 자고 있을까나...." "..........." 진은 새로 산 검을 살피다 휘둘러보는 것을 그만 두고, 허리 검 집 에 집어넣었다. "하지만 릭을 도와주는 셈치고, 매니스의 경제를 조금 축내 주자, 와이즈." "뭘 하려고? 또 부자 집을 털 거냐?" "아니, 쇼핑하자는 소리야, 와이즈. 수요가 많아지면 당연히 물가가 올라야하는 법. 이곳 영주는 분명 뭔가 준비해 온 것이 분명해. 공 급에 차질이 없고 물가 변동도 없었다는 것을 보면 말이지. 금화는 못 먹어~ 지금은 추수하는 계절도 아닌데 이런 경기라면 정당한 방 법으로 조금 챙겨가도 무리는 없겠지. 정말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 면 조금 방해하는 의미로. 반응이 있을지도 몰라, 와이즈." ".....챙겨만 간다고?" 진은 후후...웃었다. "물론 영주 측에서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되 팔 수도 있지." "그거나 저거나 뜯어낼 속셈 아니냐." "그럼 안 돼? 가진 자는 없는 자와 나눠가져야 하는 게 인지상정이지." "웃기네. 네가 없는 자 쪽에 속하냐?" "흠...와이즈. 싫으면 혼자 한다?" ".........." 진은 사람이 북적거리는 시장을 찾아가면서 와이즈에게 무한 마법 자루를 레어에서 불러 빌려주길 부탁했다. [82] * 진은 시장을 돌아다니며 여한 없이 쇼핑을 했다. 와이즈까지 덩달아 재미를 붙여 물건들을 사서 마법자루에 집어넣 기 시작했다. 진은 의. 식. 주에 해당하는 기본 생활용품 위주로 물건을 사들였 다. 가장 많이 구입한 것은 식량으로 밀가루와 치즈를 비롯하여, 말 린 과일과 생 과일, 육포, 양념거리와 향신료 등. 시장에 나와 있는 것들의 과반수를 차지하는 식료품이었다. 와이즈가 물건값을 부르는 대로 점잖게 계산하는 것에 진은 '바보 냐?' 하는 말로 부아를 조금 돋군 후, 수경과 쌍둥이 어머니에게서 어깨너머로 배웠던 것을 응용해 시범을 보여주었다. 진은 남자주인에겐 미인계를, 여자 주인들에게는 아첨이나 와이즈 를 이용해서 띄워주기까지 하며 최대한 가격을 깎아가며 각 상점의 물건이 바닥나지 않는 선에서 쇼핑을 했다. 이 상점에서 밀가루를 몽땅 사고, 저 상점에선 육포와 훈제고기를 모조리. 건너편에서는 질도 괜찮은 편에 가격도 비교적 싼 편인 4 계절용 옷감을 몽땅. 대장간에 가서는 망치와 못을 모조리. 다른 대 장간에서는 군용으로 쓸 정도로 커다란 식기들을 대거 구입....그런 식으로 몇 번 시장을 오가다 보니 진과 와이즈는 환영받아마지 않 는 손님이 되었다. "아니, 아가씨. 도대체 집이 얼마나 크길래 살림살이 장만을 그렇게 거창하게 하시오?" "에....." "신혼 아니유? 옷감만 사오? 만들어져 있는 드레스나 잠옷도 있는 데 좀 보시려오?" "핫. 핫..." "아가씨. 그렇게 깎으면 어떻게 해요. 지금 나오는 과일이 귀해서 더 비싸게 받아야하는데....음. 미남 마법사님 봐서 덤으로 드리는 방향으로 팔게요. 제 값 주세요." "그럼, 덤으로 많이 주세요, 부인." "포도주는 안 사오, 젊은 부부?" "에에. 부부 아닌데요?" "뭘? 맞구만. 아니면 같이 다니면서 뭐 하러 그렇게 많이 사는데 요? 아까는 따로 사 길래 일행인지 몰랐지만." "신랑 주량 늘려주고 싶겠나, 이 양반아?" "아가씨. 그 자루 마법자루요? 계속 들어가네." 주목을 지나치게 받기 시작하자 진은, 싹쓸이하듯 물건을 사들이는 것에 제동을 걸어 속도를 늦췄다. 반대편 상점을 돌던 와이즈는 커다란 바구니에 향신료를 가득 담고 소금자루를 하나 들고 돌아오고 있었다. "와이즈. 군것질하자." "해라. 내 돈 아니니 막 써도 상관없지." "와이즈. 우리가 부부래. 그 말은~ 네 돈이 내 돈이고, 내 돈이 내 돈이란 소리지." 와이즈는 코웃음을 치려다 진의 말이 이상하게 끝나는 것을 깨닫고 눈을 부라렸다. 진은 낄낄 웃으며 수레에 요리 된 먹거리를 파는 사람들 앞으로 자리를 옮겨갔다. "이런 자루가 많으면 상인들이 이동하는데 아주 편하겠는데? 하지 만 쉽게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겠지?" "쉬울 리가 있냐. 유한 자루는 만들 수 있겠지만. 고써클 마법사나 가능하다. 한가하게 그런 것 만들고 있는 마법사도 드물 테고. 부르 는 게 값인 아이템이다." 진은 밀가루 반죽에 야채와 고기를 버무려 쪄낸 납작하고 둥근 음 식과, 껍질을 벗긴 나뭇가지에 고기를 끼워 짭짤한 소스를 발라 구 운, 먹거리들을 시장통에 서서 사 먹었다. "맛있네. 만들어져 있는 것 다 싸 주실래요?" "예에. 감사합니다. 아가씨." "아가씨. 마법사님. 우리 것도 드셔보시고 사주세요. 멧돼지 구이에 요. 양념과 향신료가 배어들어서 아주 맛있답니다." 진은 기꺼이. 수레에 재료들을 실어 돌아다니며 파는 사람들의 간 식과, 한 곳에 자리를 잡고 장사를 하는 사람들의 먹거리를 또 몽 땅 사들였다. 덤을 외쳐가며. '와이즈. 나중에 음식들에 마법 걸어 줄 거지?' [안 걸어도 된다. 안에 들어가 있는 것들은 모두 자동으로 보존 마 법이 걸리게 되어 있으니까. 그렇지 않으면 안에서 다 찌그러지 게?] '역시 마법이란 좋은 거야~ 고마워, 와이즈.' [....공짜는 없다며?] "맛있는 것 사주고 있잖아. 너도 쇼핑 재미있어 했으면서 뭘 그래? 인색하게 굴지마, 와이즈." "............"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돌아오지 않는 것이 걱정이 되었는지 블루는 릭과 함께 시장을 찾 아 나왔다가, 장사하는 주민들에게 열렬한 작별 인사를 받으며 또 오라는 뜻으로 성의껏 남은 상점 물건들을 얹어주는 것들을 받아들 며 돌아오는 진과 와이즈를 만날 수 있었다. "....쇼핑을 하셨어요, 진?" "응. 블루. 엄청 사들였어." "순찰 경비들이 뛰어가는 것을 봤습니다, 진. 싸움이라도 난 줄 알 았습니다." "릭. 날 뭘로 보는 거야? 난 평화주의자야." 와이즈는 마지막 남은 꼬치구이의 고기를 빼 먹으며 삐죽였다. "사고뭉치가 아니셨던가요?" "무례하군. 기사." "후후...." 진은 자루를 릭에게 떠넘기고 와이즈가 버리려는 나뭇가지를 받아 드는 블루와 함께 시장을 벗어났다. "돈주고 샀으니 뭐라고는 못하겠지만...하룻밤 사이에 만들어 낼 수 없는 물건들은 가격이 좀 뛰겠네. 매니스 영주의 귀에 들어가면 어 떤 반응이 있을까나...기대 되네." "진. 또 무슨 계획을 실행 중이세요?" "핫. 핫. 아니야, 블루. 시험삼아서....음. 물건값을 깎는 게 재미있었 거든." "....돈을 얼마나 쓰셨는데요?' 진은 릭의 물음에 와이즈를 쳐다보았다. "몰라. 안 세어봤다, 진. 네가 계산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하다 말았지...." 진은 쿡쿡 웃으며 '그러게 네 돈이 다 내 돈이라니까.' 하는 말로 와이즈의 살벌한 눈총을 받으며 숙소로 돌아갔다. 릭은 도대체 돈이 얼마나 많으면, 얼마나 썼으면. 남은 돈이 얼마인 지 얼마를 쓰고, 계산이 나오지 않을 정도인지 갸우뚱했다. * 순찰 경비대장은 여행객으로 신고하고 들어 온 일행들이 매니스의 시장 물건을 거의 쓸고 있다는 보고를 여러 번 받았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평민을 비롯한 하층민들의 동향이나 여행 객들의 움직임이나 인원파악 등등을 그날그날 시간대별로 모두 고 해야 하는 규칙을 주의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바로 상부에 보고 했었고, 두 세 다리 건너 매니스 영주 아밀리한 매니스. 개명이전 이름 아밀리한 위즈덤 백작에게도 그 소식이 전해졌다. 백작의 보좌관은 매니스 영지, 영주의 성 백작의 서재에서 그 사실 을 다른 보고 내용과 구분하여 중요 사항으로 언급했다. 백작은 영지 일을 보는 서재에서 보좌관의 보고를 받고, 그의 지적 이 아니라고 해도 충분히 특이하고, 어쩌면 첩자소행일 지도 모를 일로 여행객의 쇼핑을 거론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재기 한 것들은 모두 생활용품에 식료품입니다, 백작님. 내일 당 장 시장을 원래대로 정상화시키려면 성의 창고 비축 분을 일부 푸 셔야 할겁니다." "그들이 누구지?" "물건을 산 것은 드리얀 출신의 '진' 이라는 이름의 여자와, '와이 즈'라는 이름의 5써클로 신고한 마법사입니다. 나머지 그들 일행들 은 수련 여행 중이라는 네카르도의 자유기사와 엘프입니다." "강한 파티군. 첩자일 가능성이 있나?" "다분히 있습니다. 드리얀은 먼 나라지만, 네카르도 국적을 가진 기 사가 끼어 있으니까요. 엘프는 인간세상을 여행해도 인간들의 정치 적인 문제엔 관여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니, 그 부분이 좀 걸립니다 만. 다른 일행은 신분이 확실한 것도 아니니, 귀족들일 수도 있습니 다. 국적을 정확히 신고 했는 지도 알 수 없고요." "단순히...돈을 쓰고 다닌 것치고는 너무 많이 샀군." "너무 많이 샀습니다." "....알았다. 직접 봐야겠군. 경비를 강화시키고 탈출구를 봉쇄해 놓 도록 하게. 마법사를 부르고." "알겠습니다. 백작님." * 진은 마법자루를 와이즈에게 레어로 돌려놓게 하고 일행과 백합여 관의 식당에 앉아 골든벨을 울렸다. 아, 물론 표현이 그렇다는 거 다. "여러분~ 오늘 전 신나게 쇼핑을 해서 기분이 아주 좋답니다. 매니 스는 음식도 맛있고 거리도 깨끗하고 사람들도 친절하고 참 좋은 도시더군요. 돈 쓴 게 하나도 아깝지 않았어요. 하지만 포도주는 부 피가 커서 사 가지고 가기가 불편해서 팔아 줄 수가 없더군요. 대 신 여러분들께 대접하는 뜻에서 오늘 백합여관의 술값은 제가 내겠 습니다. 드시겠어요?" 저녁을 먹기 위해 들어왔던 여행객들과 일부 평민들은, 예쁘고 부 자이기까지 한 아가씨의 호쾌한 인심에 물론 모두 환호했다. 백합여관의 포도주 저장실에서 술통이 날라져 왔고 진은 씨-익. 웃 으며 자리에 앉아 일행들에게도 술을 권했다. "진. 저희 집 비어버린 포도주 저장실이 생각나네요..." "저. 저도...." "....돈을 막 쓰는 구나, 진." "취할 정도로 마시라는 것 아니야, 릭. 블루. 파티를 구성했으니 친 목을 도모를 해야지. 어젠 내가 아파서 못했지만." 여관 여주인 아주머니가 매상 올려 준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작 은 나무통에 담아진, 산에서 난 나무열매로 직접 담근 과일 주를 다른 술잔과 구별되는 작은 청동 술잔 네개와 함께 내어왔다. "고마워요, 아주머니." "뭘요, 아가씨. 제가 고맙구랴. 오늘은 요리를 안 해도 되겠네. 다들 술을 마실 분위기니." "저흰 필요한대요.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식단으로 좀 주실래요? 괜찮을까요?" "그럼요. 기다리시구랴." 진은 '미성년이 신데...'하는 릭의 중얼거림을 무시하고. 작은 청동 잔에 붉은 빛깔의 과일 주를 따라, 향긋한 냄새가 나는 과일 주를 한 모금 마셔보았다. "과일 주스 같다. 하지만 알콜 농도는 꽤 높은 것 같네." 와이즈도 블루도 릭도 포도주 대신 산열매 과일 주로 가벼운 음주 를 했고, 진은 고맙다는 말을 하며 손을 들어 인사하는 사람들에게 짧은 답례 말을 했다. 진은 여관 근처에서 전해 듣고 공짜 술을 마시기 위해 들어오는 사 람들을 눈여겨보았다. 대부분 평민과 여행자들이었다. 백합여관은 사람으로 꽉 찼고 의자가 부족해서 다른 여관에서 빌려 오기까지 했다. "여~ 아가씨. 통이 크시네요. 잘 마시고 있습니다. 부자신가 본데, 좀 더 쓰시지 그러시오. 핫. 핫. 좀 뻔뻔한가?" "더 써요? 술은 아직 많은데요?" "아니, 저. 용병을 고용하시진 않나 싶어서 하는 소리요, 아가씨. 일 행 분들이 강한 것 같지만 수가 적어 보이니까..." 진은 고맙다는 말은 했지만 웃으며 정중히 사양했다. 진은 새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밖의 일에 대해 지나치듯 이야기하는 소식과, 매니스의 영주와 신전에 대한 설명들을 사람들에게 잡담처 럼 물어 들었다. 포도주 향기가 식당 안을 떠돌고 사람들은 기분 좋게 떠들며 술통 을 비워갔다. "정말입니다. 진은 약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용병을 고용할 필요가 없습니다." "기사양반 말이 정말이요, 아가씨?" "에....." "흠. 기사양반의 말이 맞는지 확인을...." "그보다, 저희 일행 엘프의 노래를 듣는 게 어떤가요? 주인 아주머 니도 부탁하시던데요." 돈 있는 부잣집 아가씨로 비춰졌는지 다시 반복된 인력 고용 문제 에 대한 릭의 답변으로, 진은 자칫 힘 겨루기라도 하게 될까봐 피 해보고자 블루를 내세웠다. 진이 내 놓은 의견은 흔쾌히 받아들여졌다. 블루는 대충 자리를 비킨 사람들 때문에 공간이 생긴 일행의 탁자 근처로 안내되었다. 블루는 하프를 고쳐 잡고, 기대가 가득한 사람 들 앞에서 고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강하고 곧은 마음을 가진 이는 신의 사랑을 받습니다. 사랑으로 가득한 바다- 그 자애로움을 희망으로 이야기합니다. 바다의 사랑을 대지에 나누고 자유를 갈망하는 이에게 구원을 포부를 가진 자에게 기회를 갈망하는 자에게 사랑을 방황하는 이에게 깨우침과 삶의 길을 제시합니다. 그이는 여행자입니다. 여행이란 바람과 숲을 벗삼아 대지를 걷는 것....." 블루의 노래는 음유시인이 많지 않아 여행 중에도 노래를 듣는 것 이 드물었던 사람들에게, 사람의 노래보다 더 듣기 힘든 엘프의 노 래로 청아하고 따뜻하게 스며들고 있었다. 밤이 내린 거리의 어둠이 열린 문을 통해 들어와, 벽에 고정 된 받 침대 위에서 흔들리고 있는 작은 횃불의 빛을 더욱 두드러지게 하 고 있었다. "블루님의 노래는 진을 가리키는 것 같군요." "....좋겠다, 진?" "와이즈. 질투하지 마라니까. 너도 착한 일을 해봐. 엘프의 칭송을 받게 될 지도 모르잖아." "받아서 뭐하게?" "그럼 가만있던지. 릭. 블루도 콜린스에게 모두 들었었나 봐?" "블루님은 말을 걸게 만드는 분이니까요." "..........." [그 꼬마는 왕녀라는 것은 말하지 않았다, 진. 하지만 내 존재를 아 니 눈치채고 있는지도 모르지.] '....상관없겠지? 블루는 입이 무거웠어.' 와이즈는 턱을 고이고 진과 마주한 자리의 탁자를 따라 옆으로 얼 굴을 돌렸다. 진도 엘프의 노래를 들으며 주위를 의식했다. 블루가 노래를 부르려는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들어왔던 경비기사들 이 유독 신경이 쓰였다. 여행자들과 평민들 틈에 몇 명되지 않은 부류의 사람들이라 더 의식되었는지도. 그들의 시선이 다른 이들과 달리 블루에게 머물지 않고 있음에 진 은 경계했다. 짙은 자주색 머리카락을 양 귀에서 한 가닥씩 가늘게 땋아, 목 뒤 에서 땋은 머리로 돌려 묶은 머리형의 평범한 외모의 경비기사의 얼굴표정이 부자연스럽다는 느낌을 받고 진은 그를 주목했다. 그는 진과 일행을 살피고 있었는지. 먼저 고개 돌린 와이즈와 눈이 마주쳤고, 무심하게 느껴지는 아름 다운 마법사의 눈에서 아무것도 읽을 수 없어, 일행 여자와 얘기를 나누던 기사에게 시선을 주었지만 소득이 없다는 생각으로 다시 진 에게 시선을 주었다. 진은 자신에게로 옮아 온 그의 시선에 화사하게 웃어 보였지만...여 전히 표정이 없어 보였다. '와이즈. 저 사람 얼굴표정 이상해.' [왜? 네게 반해야 정상이냐?] '와이즈. 구별해. 일이야.' [....착시 마법이다. 본 얼굴이 아니야.] '그럼, 그렇지. 내 미모에 안 넘어 올 리가.' [일이래 매?!] '누가 뭐래?' '.....뻔뻔한 것.' 잠깐 사람들의 어깨에 가려져 있던 그 경비기사의 얼굴이 다시 보 이자, 진은 그가 시선을 돌리지 않고 있었음을 알고 변화 없는 그 의 얼굴에 대고 찡긋 한쪽 눈을 감아 보였다. "............" 진은 와이즈의 째리는 시선을 몬 본 척 다시 블루에게로 시선을 돌 렸다. 릭은 리툰 마법사가 이유 없이 진을 노려보자 또 뭔가 일어 나고 있는 기분이 들어서 블루에게서 눈을 떼고, 진과 일행주위로 신경을 돌렸다. 블루의 노래가 끝나자 소란스럽고 거친 사람들이란 이미지를 주었 던 사람들이 내내 조용히 듣다가 온순한 태도로 감탄을 보냈다. 몇 몇은 박수를 치기도 했지만 모두들 좋은 노래를 듣게 해 줘서 고맙 다는 말들을 헛기침을 하며 했고, 몇몇은 엘프가 내는 공명음에 취 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소수 여자손님들이 노래를 더 청했지만 블루는 사양했다. "제 노래보다 더 좋은 노래를 부르시는 분이 계시는 데요. 죄송합 니다, 여러분." "어머. 일행 마법사님도 노래를 잘 하세요?" "제가 아닙니다. 제 일행 아가씨지요." 블루는 비워두었던 와이즈의 건너편 의자에 다시 앉았다. 진은 호기심과 무언의 압력과 기차 화통 삶아 먹은 듯 큰 목소리로 노래를 청하는 사람들과 말을 잘못 꺼냈나 싶어 미안해하는 블루와 곤란을 주어 보려고 심술을 부린 와이즈...그 모든 사람들 탓에, 다 시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불러야 했다. "제가 부르는 노래는 여러분도 따라 하실 수 있어요. 여러분들에게 어울릴 것 같네요." 진은 술이 곁들어진 자리에, 그리고 듣는 사람들의 취향에 딱 맞을 것 같은 노래를 택해 약간 가사를 고쳐, 손뼉을 치고 탁자를 쳐서 박자를 맞춰가며 씩씩하게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멋들어진 친구 내 오랜 친구야 언제라도 그곳에서 껄껄껄 웃던 멋들어진 친구 내 오랜 친구야 언제라도 그곳으로 찾아오라던 이왕이면 더 큰잔에 술을 따르고 이왕이면 마주앉아 마시자 그랬지 그래 그렇게 마주 앉아서 그래 그렇게 부딪혀 보자 가장 멋진 목소리로 기원하려마 가장 멋진 웃음으로 화답해 줄께 오늘도 목로주점 흙바람 벽엔 희미한 마법등이 그네를 탄다 주말이면 주급 타서 로프를 사고 연말이면 저축 깨서 낙타를 사자 그래 그렇게 산에 오르고 그래 그렇게 사막에 가자 가장 멋진 내 친구야 빠뜨리지마 한 다스의 깃털 펜과 양피지 한 묶 음 오늘도 목로주점 흙바람 벽엔 희미한 마법등이 그네를 탄다 그네를 탄다 그네를 탄다 - 삑삑거리는 휘파람 소리며 안주로 나온 마른 육포로 탁자를 두드리 기까지 하며 호응하는 사람들이 나왔다. 진은 그들이 노래 중간부 터 손뼉을 치며 박자를 맞추던 것을 부추기긴 했지만, 반응이 너무 나 떠들썩함에 웃음을 누르지 못했다. "너무들 좋아하네." "여행자에게 너무 어울리는 노래네요, 진." "...들은 노래야, 블루. 감탄하지 않아도 돼. 내가 만든 노래도 아닌 걸." 진은 사람들의 앵콜을 들으며 의식하고 있던 경비기사들이 일부 밖 으로 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들 탁자에는 자주색 머리의 남자와 그의 동료로 보였던 경비만 남았고, 밖으로 나갔던 다른 경비가 마법사를 데리고 들어왔다. 그는 마법사에게 손짓으로 무언가 지시하더니(마법을 풀게 하는 것 같았다.) 곧 그들 모두는 여관식당을 나갔다. 진이 의식하고 있던 경비 기사도 자리에서 일어나 동료들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진은 고개를 갸웃-하고 예상한 반응과 다름에 와이즈와 의논을 해 볼까 하는데, 식당을 나가던 그 자주색 머리의 경비기사가 마법을 해제한 본 얼굴로 진을 돌아보았고..... "......일 났다, 와이즈." "뭐가?" "맹수를 건드렸다. 젠장." 젊어 보이기는 했지만 평범한 인상이던 그는 20대 중반쯤으로 보이 는 꽤 호남형 얼굴에 차갑게 느껴지는 인상으로 바뀌어있었고...진 을 돌아보며 그녀가 했던 것처럼, 찡긋 윙크를 하더니 약간 웃음을 띄운 얼굴로 몸을 돌려 나갔다. 여관 입구 근처에 있던, 여행자가 아 닌 평민들이 그를 알아보고 허리를 굽히며 절을 하는 것이 보였다. 블루와 와이즈는 입구 쪽에 등을 돌리고 있었기에 보지 못했지만, 릭은 진과 나란히 앉아 주위를 경계하고 있다가 떠들썩하게 술을 마시고 진의 노래 구절을 흉내내고 있던 사람들 중, 유일하게 밖으 로 나가는 일행에게로 눈길을 향했다가 진과 함께 그것을 보았다. 진은 매니스 영주에 대해 들었던 단편적인 정보들과 직접 받은 느 낌과 공짜 술을 마시기 위해 들어왔던 사람들이 지나치는 말로 이 야기했던 것들을 머리 속에서 정리하고 결론지었다. "포위되었어." [83] 11-2. 매니스 영주 아밀리한. "진. 포위라고 하셨지만, 밖은 검사로 보이는 자가 몇 보이지 않는 데요?" 진은 만류하는 사람들에게 쉬어야함을 이야기하고 일행과 방으로 올라 와, 릭이 창 틈으로 밖을 살펴보며 하는 말에 대한 답변에 뜸 을 들이고 방을 둘러보았다. 방은 건물 바깥이 면해 있는 벽이 한곳이 아니라 두 곳이었고, 그 에 따라 창문도 밖과 면해 두 개가 있었기 때문에 창을 열면 달빛 으로 꽤 환할 것 같았다. 와이즈는, 가구를 최소한 줄여 공간을 넓히고 간이 침대가 옮겨져 네 개의 잠자리가 준비되어 있는 방안에 들어서자. 정면으로 달빛 이 들어 올 창 쪽 자리를 차지하고, 걸터앉았다. "레이디 퍼스트으! 와이즈. 그 자리 양보해라." "....싫다." "와이즈. 양보해." "안 해." "해라." 블루와 릭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릭은 인상을 쓰며 자리다툼을 하고 있는 진과 와이즈를 한 대 쥐어 박고 싶다는 얼굴이 되었고, 블루는 마법으로 불을 밝히다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 마법사의 자리와 가장 먼 가장자리 침대로 가서 하 프를 내려놓았다. "앗. 블루. 그 자리 내가..." "그러세요, 진." "누구누구랑 너무 다르다니까! 콱 자면서 나이트 메어나 찍어라." "죽어 볼래?!" 진은 와이즈에게 자리를 빼앗지 못하고 궁시렁거리며 블루의 자리 로 옮겨왔다. 릭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어떻게 저렇게 태평할 수가 있을까. "아, 릭. 미안. 내가 한 말은 병사들로 포위 당했다는 말이 아니고, 영주의 의도에 포위 당했다는 말이야. 뭐, 그 말이 그 말이지만. 밖 에 꽤 대기하고 있을 거야. 호위만 거느리고 왔는지도 모르지만 말 이지. 성문 쪽에 병사들이 도열해 있다는 말을 아까 누군가 했었잖 아. 탈출구는 이미 봉쇄되었어." 릭은 진의 설명에 다시 여관 정면 창가로 가서 확인하려고 했지만, 리툰 마법사가 달빛이 들어오게 하려고 창문을 열어제치자 벽에 붙 어 몸을 가려야했다. 진은 블루가 방으로 들어왔을 때 마법으로 만 들어 낸, 빛을 뿌리는 구체를 없애게 했다. 릭은 밖에서 올 위험을 예방하기 위해 벽에 붙어 이동해 창가로 가서 밖을 내다보았다. "....기사단인가 봐. 세게 나오네." "진짜 포위군요." 진은 멀리서 들리기 시작한 말발굽 소리를 들으며 턱을 긁적...이려 다 말았다. "이로써 분명해졌네. 매니스 영주는 전쟁을 염두하고 있었던 게 분 명해. 반응 한번 확실하네." ".........." * "어떻게 할까요, 백작님? 첩자라면 그렇게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잘 못 짚었는지도." "아니야." "네?" "첩자 수준의 인물들이 아니야. 더 위험한 인물들이다." 아밀리한은 여관을 나와 달빛을 받고 서서 주위에 은신 해 있거나 행인처럼 서성거리고 있는 자신의 기사들을 둘러보며 미소지었다. "내가 더 유리하지. 이곳은 내 홈이라고. 맹랑한 아가씨." "..........." 아밀리한는 19세 때 매니스의 영주로 임명받았다. 매니스를 일군 지 7년이 되었고, 그동안 많은 사람들을 접해 보았 지만 그 파티를 이룬 이들은 정말 드문 타입들이었다. 특히 그 검 푸른 머리의 어린 아가씨는, 의외로 그들 일행의 핵심이었다. 아밀리한은 자신의 짐작이 맞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디메토르의 위즈덤 공작가의 한 갈래였다. 직계 가족이 아니 었기 때문에 가운데 성을 물려받지는 못했지만, 10년 전 수 많은 인척 귀족들 중 공작의 눈에 띄어 능력을 인정받아 국경 부근의 영 지와 백작 칭호를 사사 받았었다. 그는 매니스에 뿌리를 내리고 있던 주신 세레니프이스 신전 외에 공작가에서 우대하는 성공과 승리의 신 더배틀을 모시는 신전을 짓 게 했던 일을 떠올렸다. 더배틀은 유사시에 전투와 전쟁의 신 어배틀이 된다. 아밀리한은 권력욕이 있었다. 공작가의 먼 친척으로 단지 귀족 자 제로의 신분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던 그는 다행이 머리가 좋았고 검 실력도 뛰어났으며 다방면에 재능이 있었다. 사람들을 휘어잡는 지도력까지 갖추고 있었고, 위즈덤 공작은 그런 그의 자질을 파악 하자 공작가의 부흥과 디메토르의 부흥을 위해 인재로 등용하고 미 래를 대비하게 했다. 그는 자신에게 따르던 파렴치한 소문을 무시하고 기회를 준 공작에 게 기꺼이 이용하도록 스스로를 내어 주었었다. 그는 수도와 멀리 떨어진 매니스에 와서 6~7년 간 매니스를 정비하 고 가꾸고 기회를 엿보았다. 그리고 사키리온이 그 기회를 주는 듯 했다. 그런데 시작도 하기 전에 우연인지 필연인지, 흘러 들어 온 여행자들에게 방해를 받게 되었음을 알았다. 그들은. 특히 그 여자는 보통 인물이 아니었다. 사재기를 한 이유가 짐작한 대로라면, 그 과정에서 주민들의 호의 를 이미 심어 두었고. 단시간에 가지각색의 여행자들을 한꺼번에 매료시키는 그 요령인지 능력인지를 보아도. 적이라면 가장 버거운 상대가 될 것이고 아군이라면 누구보다 큰 힘이 될 것이다. '게다가. 강심장이었어. 후후...' 아밀리한은 내렸던 명령에 따라 기사단과 마법사들이 속속히 모여 들고 있는 것을 보며 백합모양의 나무 간판이 걸린 여관 건물을 냉 정해 보이는 얼굴에 웃음을 피워 올리며 바라보았다. "적이 될 건가. 아군이 될 건가, 아가씨?" * "보통 인물이 아니군요. 그 젊은 나이에 정말 정복전쟁을 추진하고 있었다니." "몸소 행차 할 줄은 몰랐어. 하긴. 하층민 다루는 솜씨를 보면 보통 귀족은 아니었어. 릭. 릭도 후작인데, 매니스 백작과 비교하면 어떨 것 같아?" "전 22살입니다, 진." 릭은 약간 찌푸린 얼굴로 대답했지만 큰 문제로 대두된 된 진의 쇼 핑에 놀라고 있었다. 순찰경비 복장을 하고 있었던 그는 매니스의 영주였고, 진의 말대로 꽤 오래 딴 생각을 하고 뭔가 준비중이었던 것이 분명해 보였다. 블루님의 노래로 그들 일행-레이디 진에 대해 가늠했을 수도. 아니,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않았다고 해도. 잠깐 머무는 부평초 같은 거친 여행자 무리들을 몇 시간만에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것 을 목격했으니. 그리고 자신의 존재에 대해 정확히는 아니었지만 구별해 내어 파악함을 알고, 가장 신속하고 확실한 대응을 보여주 고 있는 것들이...릭의 눈엔 그가 정말 보통 인물이 아님으로 비춰 지고 있었다. "릭. 라돈의 노예 영주 판 타이 남작도 22살이었어. 하지만 산전수 전 다 겪었지. 그는 강해. 조금만 배우면 더 강해 질 거야. 하지만... 음. 매니스 영주는 확실히 지금까지 봐 온 귀족들 중에서 제일 나 은 것 같아. 그가 매니스로 오기 전 어떤 생활을 했는지는 다들 모 르고 있었어. 뭔가 남다른 사연이 있는 것이 분명해....물 샐 틈 없 는 경계 수비. 철통같은 공격 준비라는 말은 저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겠지?" "..........." 릭은 와이즈와 함께 여관 정면을 향한 창문 옆에 몸을 숨기고 붙어 서서, 건너편 다른 창문에 비슷한 자세로 은신해 밖을 엿보는 진과 나누는 나직한 대화가. 바로 아래 도열해 있는 기사단들에게 들릴 것 같은 불안에 신경이 바짝 곤두서고 있었다. 그들은 거리를 촘촘히 채우고 있었다. 옆 건물 지붕 위에도 그림자 들이 감지되었고, 진은 철저하게 포위되고 있음에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블루는 가슴이 불안으로 죄어 왔다. 오니가라에서와 비슷한 상황이 다시 재현되고 있었다. 그 때와 달 리 반대의 입장에서. 블루는 도움을 청하고 싶은 기분이 되어서 와 이즈를 바라보았고, 그는 창에서 떨어져 침대에 걸터앉아 태평한 얼굴로 진을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할거냐, 진?" 진은 벽에서 떨어져 블루가 양보해 준 가장 자리 침대에 앉아, 샌 들을 벗고 다리를 감았던 천을 풀어 내리며 잠잘 준비를 했다. "자야지. 뾰족한 수가 있나. 난 아직 몸이 좋지 않다고~ 쉬어야 해." "진...." "저기..." 와이즈는 당황하고 머뭇거리는 릭과 블루를 내버려두고 마법사 겉 옷을 벗어 벽에 걸고 역시 잠잘 준비를 했다. 진은 멈칫거리고 있는 옆 침대의 블루에게 운디네를 불러 손발과 얼굴을 씻게 해 달라고 부탁했고, 엘프는 진의 부탁이 때와 장소에 맞지 않는 청으로 들림에도 별다른 저지 없이 정령을 불러 주었다. "블루. 결계를 쳐주겠어? 도둑 방지용 가벼운 결계면 돼. 밤 공기가 서늘하니 좋고, 달빛도 좋으니까 가리지 말고." ".....네." "진. 가벼운 결계라니...무슨 생각이십니까?" 인상을 쓰고 있는 릭 때문에 진은 쓴웃음이 나왔다 "릭. 결계는 시위용이야.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 아니겠 어? 상대를 안 해 주면 어쩔 것인데? 우린 죄지은 것 없어." 릭은 상황 파악을 못했는지 소용없어 보이는 결계 마법을 시행하는 엘프를 보며 어둔 탓에 짙어 보이는 자신의 짧은 갈색머리를 쓸어 올렸다. "뭔가 생각이 있으시겠지요, 진? 잘못하면 첩자에 반역자가 될 수 도 있을 상황으로 보이는 데요." "증거 있어, 릭?" "그거야....." "협박할까? 우길까? 민심에 신경 쓰는 영주가? 흠. 뭐, 그럴 수도 있지. 어쨌든 방법은 이래. 1.무시하기, 2.오리발, 3.투항, 4.정면돌파, 5.~척하다가 도주. 어떤 게 마음에 들어, 릭?" "....모두 마음에 안 드는데요, 진." "그렇지? 나도 그래. 그러니 잠이나 자자고. 젤 편한 방법으로 1번 을 택할 수밖에." 와이즈는 황당하단 표정의 기사의 얼굴에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공격 해 오기라도 하면 그때 대응하면 돼. 만약 그렇다면 오히려 쉬운 상대겠지. 긴장 풀어, 릭. 우린 여행 중 우연히 매니스에 들른 것 뿐이야. 잠이나 자자." ".........." 진은 정말로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을 잤다. "리툰 마법사님. 레이디 진의 심장이 강철로 만들어지지 않은 것이 확실할까요?" "릭페르님. 해부해 보기 전이지만 피가 흐르는 심장임은 확실하지 요. 하지만 저도 간혹 의심이 들더군요." 릭은 빙긋거리며 대답하는 와이즈의 말을 당연히 농담 섞인 대답으 로 받아들이고 혼자 생각에 빠졌지만, 블루는 잠든 진의 뒤통수를 보며 그녀의 옆 침대에 앉아 있다 와이즈의 말에 약간 창백해 졌 다. "블루님은 낮에 쉬셔서 잠이 오지 않으신 가요?" "네?....아닙니다, 마법사님. 낮잠을 잔 게 아니고, 마나 축적을 했지 요." 와이즈는 눈썹을 치켜 떴다가 속으로 혀를 찼다. 마법 써클 올리는 수련을 했다고? 힘에 그다지 욕심이 없어 선천적 으로 가진 마법능력을 갈고 닦는 면이 부족하던 엘프가? '어지간히 잘 보이고 싶은 모양이군. 흥.' 블루는 진의 여행길에 좀 더 도움이 되고자 시작한 마법수련이 드 래곤의 비웃음을 받는 기분이 들어서 얼굴이 조금 붉어져서 고개를 숙였다. 와이즈는 서성거리는 릭페르를 무시하고 어제 자지 못한 잠을 자 볼까하고 이불을 끌어 올렸다. * "백작님....어떻게 할까요?" 아밀리한은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웃음이 새어 나오는 것을 참아야 했다. 그들은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백합여관에서 자정까지 공짜 술을 마시던 여행객들과 매니스 주민 들은 진이 약속한 시간이 지나자 주인 아주머니에게 술통을 빼앗겼 고- 그래도 실컷 마셨다는 포만감에, 취한 동료들을 어깨에 걸쳐 매고 진에게서 배운 노래를 고래고래 부르면서 자신들의 숙소나 백 합여관 안의 방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아밀리한은 그들을 저지하거나 붙잡아 둘 마땅한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기분 좋게 취한 그들은 여관을 둘러싸고 도열해 있는 기사 단들을 발견하고 눈을 껌벅거리더니. "웬일이시유. 기사양반들~ 공짜 술 파티는 끝났는데. 늦었구랴~ " "누가 쳐들어오기라도 했나? 몬스터인가? 아니면 전쟁?" 하는 혀 꼬인 말들로 중무장한 기사단들의 주위를 뱅글뱅글 돌고 게 중엔 '목로주점' 노래를 뻣뻣이 서 있는 기사들의 귓가에 고래고 래 소리를 지르며 불러대더니, '어떻소. 나도 음유시인 할 만 하지 요? 음하하하...' 했다..... 백합여관 앞은 일그러진 얼굴의 기사단들과 취해서 상황파악을 못 하거나 알아도 분위기에 취해, 범 무서운 줄 모르고 기사들에게 집 적대는 취객들로 한동안 소란스러웠다. 그들을 물러가게 한 후에도 2층 한 방에 쳐졌던 마법 결계에는 어 떤 변화도 없었고, 아밀리한은 자신의 마법사들에게 결계를 해제 시키도록 해야하는지. 뭘 하는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스스로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지. 웃음기 어린 심각함으로 고민해야했다. "이거야, 원.....달밤에 체조시키는 것도 아니고. 매니스를 휘저어 놓 았으면 책임을 져야할 게 아니오, 아가씨. 대응을 안 해 주면 어쩌 란 말인지. 쿡쿡쿡...." 백작의 보좌관은 30이 넘는 나이로 아밀리한이 성년이 지나 공작의 눈에 띄었을 때부터 그의 오른 팔로 그의 곁에서 10년을 지내오면 서 한번도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것을 보고 들었다. 아밀리한 백작은 어떤 경우에도 방법이 없다는 뜻의 말을 한 적도, 저렇게 보통 청년처럼 웃는 웃음을 보인 적도 없었다. 그는 잔뜩 기합이 들어가 있는 기사단 앞에서 머리를 긁적이고 싶 은 기분이 되었다. "백작님. 그냥 쳐들어가면 되는 것이 아닌가요?" "그러면 내 쪽에서 먼저 '적'임을 인식시키는 것이 되고, 그들은 정 말 '적'이 된다. 뭐. 훈련한 셈치지. 감시 몇 만 남기고 모두 물려 라." "....네. 백작님." 아밀리한은 팔짱을 끼고 그들이 있는 어둠에 쌓인 방 창문을 올려 다보며 냉정함이 뚝뚝 흐르는 말투로 중얼거렸다. "오늘은 비겼소. 아가씨. 내일 봅시다." * 릭은 진의 권유에도 당연히 긴장을 풀 순 없었지만, 자정이 지나 새벽이 되어 가는데도 아무런 위협도 접촉도 있지 않음에. 혼자 깨어 있는 것이 미련스럽게 느껴져서 늦게나마 잠을 청하기 위해 자리에 누웠다. 그는 후작가의 자제로. 어릴 때부터 받았던 교육과 검 수련과 그녀 의 덕이긴 하지만, 훼이르를 얻어 인정받게 된 후작가의 정통 후계 자라는 위신들이 여행 시작한지 이틀만에 '허울'이며 '겉치레'가 될 수 있음을 체험할 뻔했다. 개인의 힘으로 방어 할 성격의 일이 아 닌 것을 레이디 진은 태연히 해내고 있었다. 무엇이 다른 걸까. 릭은 곁에 두었던 마법검 훼이르를 집어 누운 채 허공에 휘둘러보 았다. 검을 수련해 실력을 쌓는 것을 모두로 알았다. 기사가문에서 가장 중요하게 가르치는 것은 '힘'이다. 하지만 그녀는 검을 들지 않고도 '힘'을 행사했다. 블루님에게서 들은 오니가라에서의 일도 그렇고, 수도의 도둑길드 의 일이었던 무도회가 그랬다. 그녀의 방법은 기상천외하고 섣불리 흉내낼 수도 없는 것들이었다. 릭은 포진하고 있던 기사단들의 말발굽소리가 멀어지고 있음을 들 으며 어렸을 때 교양과 군사학를 가르쳤던 선생의 말을 생각했다. '릭페르님. 기사가 되실 겁니까, 귀족이 되실 겁니까.' 당연히 그는 '기사'가 될 것이라고 대답했었다. 릭은 진과 자신의 차이가 거기에 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이름에 연연하지 않는다지만 그 때문에 '귀족'이었다. 귀족이란 기사들의 보호 아래 지배자의 위치에 서게 된다. 하지만 기사가 먼저가 아니 라 귀족이 먼저였다. 여동생의 확언과 자신의 개인적인 의도를 제쳐두고라도. 그는 세상을 배우기 위해. 경험을 쌓기 위해. 가장 좋은 본보기를 따라 최상의 수련 여행 중임을 인정했다. 릭은 훼이르를 다시 내려놓았다. [84] * 아침이 되었다. 진은 눈을 떴지만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창문을 두드리는 비소리 를 들으며 꼼지락거렸고, 와이즈는 블루의 엷은 실드같은 결계에 막혀 안으로 들이치지 못하고 결계 표면을 타고 흐르는 빗방울을 구경하고 있었다. '와이즈. 워프 해도 추적되겠지?' [그래. 잔뜩 경계하고 있는데, 모르겠냐?] '상대하기 어려운 자야, 무슨 방법 없겠어?' [나한테 묻지 마라, 진. 네 일이잖냐. 나더러 정체를 드러내라고는 하지 마라. 성가신 건 싫다.] '그래도~ 드리얀으로는 가야잖아? 여차하면 너만 믿어, 내 보디가 드~' [..........] 진은 비가 오고 있어서 젖으면 불편할 것 같아 종아리에 천을 대는 것을 생략하고 샌들 끈을 올려 묶어 신고,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갈 색 조끼를 여며 입었다. 블루도 일어나 결계를 거두고 평범하게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자세 로 명상에 들어갔고, 릭도 잠에서 깨어 사재기했던 간식거리를 펼 쳐두고 아침을 먹고 있는 진과 와이즈에게 아침인사를 했다. "밤사이 '안녕' 하셨네요." "릭도 안녕. '오늘도 무사히' 야. 아침 먹어." 릭은 여전히 태평한 그들에게 한숨을 쉬어 보이고 진이 내민 과일 파이를 받아들었다. 블루도 명상을 짧게 끝내고 와이즈의 침대에 함께 걸터앉아 아침부 터 군것질 같은 아침식사를 했다. "진과 다니면 살 찌겠네요." "어...엘프도 살이 쪄, 블루?" 블루는, 잘 마른 큼직한 호두알을 침대 모서리에 탁탁 쳐서 깨뜨리 려 알맹이를 골라 먹고 있는 진에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많이 먹으면 살이 찌는 게 순리 아닌가요?" "생각도 못해 봤네. 엘프도 살이 찌는 구나." 진은 이곳에 와서 꽤 많은 사람들을 봤지만, 풍채 좋은 사람은 봤 어도 비만한 사람은 없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여기 사람들은 모두 날씬한 편이야. 두끼만 먹는 생활이라 그런 가? 부지런해서 그렇겠지?" "날씬하지 않은 사람도 있었지 않냐?" "흠...귀족들이야, 노동을 하지 않아서 그렇겠지. 하지만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와이즈. 전의 그곳에선 일부 사람들에게 비만이 사회 문제가 될 정도로 심각하기도 했어. 너무 살이 쪄서 계단도 못 올라갈 정도에, 소파에 한번 앉으면 혼자서 일어나지도 못하게 몸이 부는 사람도 있었는걸." "....끔찍하네요, 진." "그렇게 까지요? 그건 순리가 아니라 역리로군요." ".........." 진은 잡담을 메뉴에 넣어 식사를 하고, 평화롭게 느껴지는 아침시 간을 보냈다. 짐을 챙기고 방을 나서며 진은 릭에게 당부했다. "릭. 함부로 검 빼면 안 돼." "..........." * 진은 일행과 식당으로 내려갔다. 아침이라 손님이 자리할 시간은 아니었지만, 한산한 식당 내부엔 문제의 손님들이 버티고 있었다. 주인 부부는 보이지 않았고, 청소 를 위해 의자가 탁자 위에 엎어 올려져 있는 한쪽 편. 입구를 가로막은 긴 탁자에 그들은 앉아있었다. "..........." 진은 자주색 머리의 젊은 영주가 사교적인 얼굴로 무언의 압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에 다시 턱을 긁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그들은 50대 중반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마법사 둘과, 초록색의 단 순한 종아리길이의 원피스를 입은 앳돼 보이는 소녀와, 은색으로 번쩍이는 갑옷 차림에 투구를 벗어 탁자 위에 올려 두고 있는 성기 사 한 명과, 흰색 평상복 위에 어깨와 가슴을 가린 가죽 보호대를 한 매니스 영주였다. "비켜 주시겠어요? 입구를 막고 계시네요." 5써클 이상임을 증명하는 금색 수의 허리두르개를 한 20대 후반의 마법사가, 가장자리에서 헛기침을 하며 일어나 탁자를 돌아왔다. "전 매니스 영주 성의 5써클 마법사 프루노입니다. 이분은 7써클로 매니스 영주님의 개인 마법사 카둔님이시지요. 그리고 어리지만 정 령사 엘모양입니다. 토플러님은 더배틀 신전의 성기사이십니다. 소 드마스터이시기도 하지요. 그리고...매니스 영주. 아밀리한 매니스 백작님이십니다. 여러분과 면담을 하시고자 직접 오셨습니다." 진은 터놓고 신원과 실력까지 밝히는 그의 인사에 피식 웃고, 지극 히 예의 바른 태도로 맞 소개를 했다. "제 이름은 진이라고 합니다. 마법사 와이즈와 엘프 블루님. 자유기 사 릭페르라고 합니다. 좀 더 정확한 소개를 원하신다면, 6써클 유 저 마법사 와이즈 폰 리툰. 8써클 유저 마법사이며 음유시인이며 정원사이신 라하르네 블루엘 샤님이시고, 네카르도의 중급기사이기 도 한 릭페르 폰 훼이르 후작님이시며, 전 드리얀의 진 폰 리툰이 라고 하며 팔방미인이지요. 매니스 백작님의 면담신청을 영광되게 받아들입니다." "..........." 아밀리한은 컵은 찬장 위 오른 쪽에. 포크는 아래서랍에. 냅킨은 식 탁 위에 있다는 투의 진의 말에 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하지만 만 만히 봤다간 데일 거라는 경고성의 의미에 눈빛이 더 날카로워졌 다. 와이즈는 간만에 속으로 낄낄거렸다. 릭은 자신의 신분을 여과 없이 발설하는 진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 고 싶은 기분이 되었고, 블루는 '팔방미인'이라는 자화자찬에 경직 된 공기가 흐트러지는 느낌이 들어 웃음을 눌러야했다. 영주 측 손님들이 헛기침을 하며 부스스 일어났다. 아밀리한도 일어나 진에게 손을 내밀었다. 진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딴전 피우듯 얼굴을 모로 돌리고 거만하 게 손등을 내밀었다. -'그래, 키스해라~'하는 태도로. 아밀리한은 장난 반 무례 반인 진의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앞 자리에 끌어 앉혔다. "인사는 했으니, 레이디. 용건으로 들어가지요. 밤새 뵙길 기다리다 지친 탓에, 무례한 점이 있더라도 양해바랍니다." 진은 그가 잡아당기자 빼어져 있던 의자에 사뿐히 앉아 주며 최대 한 화사하게 웃어 보였다. 비가 내려 어둠침침한 아침. 우중충한 실내에선 젖은 나무냄새와 습기 찬 공기에 희미한 포도주 향기가 떠돌고 있었고, 방음이 부실 해서 선명하게 들리는 밖의 빗줄기에도 실내의 소리가 두드러지게 느껴졌다. 아밀리한은 사교적인 얼굴 표정을 거두고 딴청을 피우고 있는 남청 색 눈의 여자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그녀는 동료 엘프가 일일이 아밀리한 자신의 마법사들과 신전의 성 기사 토플러에게 엘프의 긴 인사말을 하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다. 이런 타입의 여잘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이런 타입의 적을 본적이 없었다. 아밀리한은 아군이 아니면 적일 수밖에 없다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 군도 적도 되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힘으로 굴복시킬 수 없는 타입이며, 회유가 가능하지도 않는 타입이었다. 자신과....동류였다. 어떻게? 겨우 16~17세 정도로 보이는 나이에 그 가 26년 간 이루고 쌓아 온 성벽에 '어? 좀 단단하네?'하는 태도를 보일 수가 있는 걸까. 아니지...신분도 나이도 때로 그다지 중요한 것이 될 수 없다는 것 을 아밀리한 자신도 알고 있었다. 그가 그랬으니까. 젊음이란 유사 시 가장 큰 무기가 될 수도 있음이다. 모두 자리에 앉아, 그녀가 영광되게 받아들인다고 했던 면담이 시 작되길 기다리고 있음에 아밀리한은 입을 열었다. "매니스에 오셔서 여행은 즐거우셨나요, 레이디?" 진은 요점으로 바로 들어가는 그의 질문에 예의 바른 미소로 답했 다. "물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백작님. 무척 즐거웠지요." "비가 오는데 일정엔 변화가 없나요?" "비를 맞으며 하는 여행길도 운치 있지요." 아밀리한은 진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날씨에 어울린다는 느낌을 받 았다. 그는 잠시 침묵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여행을 시작하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친구와 약속을 했지요, 백작님." 릭은 귀향 여행이라는 설명과 다른 진의 대답을 의식했지만, 언제 든 검을 뽑을 태세로 마주하고 있는 성기사에게 팽팽한 긴장감으로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었다. "약속 내용이 기밀에 속하나요?" "아니요." ".....친구 분과 어떤 약속을 하셨나요, 레이디." "좋은 것만 보고, 맛있는 것만 먹고, 좋은 사람들 많이 만나고, 행 복해지기로 했지요." 아밀리한은 팔짱을 끼었다. 모두 숨을 죽이고 가려진 의미로 가득하게 느껴지는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자신에게 담당된 상대를 어림하고 있었다. "...행복하던가요?" "일한 만큼 행복해 지더군요, 백작님. 백작님은 행복하신 가요?" 아밀리한은 어깨에 맨 배낭을 내려놓지도 않고 앉아있는 깊은 바다 색 눈의 여자를 향한 눈길을 비껴내고 싶었다. 그녀를 비웃고 싶었지만, 그녀가 말하는 허상에 비웃을 수만은 없 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습기 찬 여관 식당의 공기가 답답하게 느껴졌다. "행복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지요, 레이디." "맞는 말씀입니다. 성취가 행복이 될 수도 있겠지만, 백작님. 부디 자신의 행복을 위해 무지한 사람들의 소소한 행복에 타격이 될 일 은 하시지 않길 바랍니다. '힘'이란 행사하는 방법에 따라 행복을 줄 수도 뺏을 수도 있을 테니까요. 진심이 아닌 선정은 자기 만족 일 뿐, 행복으로 정의 될 수 없습니다. 권력에 관한 한 어떠한 명분 도 따지고 보면 정당과는 거리가 멉니다. 훌륭한 통치를 하시나, 사 욕이 있다면. 알면서도 외면하신다면 카르마(업보)가 따르는 것이 순리입니다." "....난 사제가 아닙니다만." "저도 아닙니다. 다른 이들처럼 저도 매 순간 잘못을 저지릅니다. 하지만 인간은 나아가려고 하지 제자리걸음 하려하는 사람은 없으 니까요." 협상은 결렬되었다. 그녀는 여전히 아군도 적도 아니었지만, 자신의 영향을 받지 않겠 다는 의사를 완곡하게 표했고. 그녀와 아밀리한 자신과의 길이 별 개임을 은연중 말하고 있었다. 또한....자신의 야망이 그릇 된 것일 수 있음을 지적까지 했다. 옳은 충고다. 하지만 그 충고를 받아들이는 것은 봉사하는 생활을 하는 사제가 아닌 이상 불가능하지 않은가. 예외....엘프의 노래. 희망과 기회와 사랑을 주고 다닌다던 이. 그녀인가? 아밀리한은 탁자 위의 유일한 대화를 묵묵히 들으며 검푸른 머리의 동료 아가씨의 말에 존경...의 눈빛까지 띄우고 있는 엘프를 흘끗 보았다. "도덕 강의를 들은 기분이네요, 레이디. 하지만 난 현실을 삽니다. 난 매니스이지요. 매니스를 떠나 비를 맞는 여행을 시작하고 싶으 시다면 먼저 이 탁자를 넘어가야 할겁니다." "그럼 넘어가야 겠네요." 그들의 날선 대화가 끝났음을 깨닫자. 영주 측 인물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주의 마법사들은 몸을 일으키며 각자 앞에 앉아 있는 자신들의 몫으로 주어진 대상에게, 응축시키고 있던 마나를 발산. 공격했다. 정령사 소녀는 실프와 운디네를 가는 목소리로 불렀다. 블루는 경계를 늦추고 있다가 캐스팅 없이 압박해 온 기습적인 고 써클 마나 세례에, 의자 채 뒤로 밀려났다. 와이즈는 5써클 마법사의 순수 마나 공격에 대응해 비슷한 강도로 맞 받아쳤고, 성기사는 일어나 릭페르를 향해 결투 직전 예의로 검 을 빼어 가슴 앞에 세웠다. 블루가 뒤늦게 실드를 치고 온 몸을 때린 마나의 공격에 내상을 입 었는지 고개를 돌리고 붉은 피를 뱉어내며, 실프와 운디네를 불렀 다. 검에 손을 가져다 대며 진의 반응을 보던 아밀리한은 시야에서 표 적이 흔들림에 역시 검을 빼어들었다. 릭이 소드마스터로 소개받은 30대 성기사의 결투시작을 받아들이기 위해 훼이르를 빼들고 일어났지만 진에게 팔이 잡혀 도로 주저 앉 혀졌고, 무릎에 무게를 느끼며 건너편에서 감지되는 살의에 대한 본능적인 방어로 훼이르를 곧추세웠다. 마법검의 무늬가 선명해지 며 백작의 검이 훼이르의 실드에 부딪혔다. "컥." ".....!" 블루를 향해 공격 마법을 캐스팅하던 7써클 마법사는 릭의 무릎에 올라타 탁자를 짚고 쭉 뻗어 휘두른 진의 검 집 끝 부분으로 목에 타격을 받아, 순간. 유동시키던 마나가 흩트려져 부상과 내상을 동 시에 입고 쓰러졌다. 진은 검 집을 회수하면서 14~15세로 보이는 정령사 소녀를 투기가 사라질 정도로만 후려치고. 코앞을 지나치는 진의 무기를 걷어내고 팔을 잡으려는 성기사의 시도를 피해, 릭의 무릎에서 뛰어 내려오며 훼이르의 실드에 막혔다 다시 지쳐 들어오 는 아밀리한의 검을 아슬아슬하게 걷어냈다. 소녀가 불렀던 정령의 형체가 흔들 하더니, 사라졌다. 선배 마법사가 곁에서 갑자기 쓰러지자. 소개 말을 했던 5써클 마법사 프루노는 당황해 했고, 와이즈는 여 유 있는 동작으로 의자에 그대로 앉아 그가 한 것처럼 마나를 조금 (?) 응축시켜 던져주었다. 그는 실드를 치지 못하고 머리에 공처럼 마나 덩어리를 맞고 뒤로 나가떨어져 여관 문에 부딪혀 쓰러졌다. 블루는 쓰러진 마법사들과 정령사 소녀에게 마법오라를 만들어 던 져두고 자신에게 치료마법을 시전 했다. 릭페르는 방금 분명 진이 자신의 무릎 위에 올라 검을 휘두르고 제자리로 간 것이 착각이 아님을 알았지만, 그 민첩함에 얼떨떨해 졌다. 아밀리한은 공격 시도가 사전 차단 된 마법사와 정령사를 날 카로운 눈으로 훑어보고, 검을 빼지 않고 검 집 채 들고 서 있는 진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공정하시게도 동등한 상황을 만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백작님. 하지만 전 변수라서요. 계속 하시겠습니까?" 아밀리한은 예를 생략하고 바로 찌르기 공격과 올려 긋기 공격을 시도했지만, 진은 찔러 들어오는 검 날의 흐름을 거꾸로 타듯 몸을 휘돌리고 허리를 비틀어 뒤로 젖혀 피했다. 진은 낮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머리색 보다 더 짙은 자줏빛 눈동 자의 매니스 영주 앞에서 검을 빼어들었다. "기사가 아니셨네요." "그렇습니다. 레이디. 전 기사라기보다는 용병이지요." "...릭. 바꾸자." "네?" "소드마스터와 싸울 거야? 아밀리한은 찡그린 웃음을 지었다. 진은 릭을 영주에게 밀쳐두고 탁자위로 뛰어올라가 성기사에게 검을 크게 휘둘렀다. "깡-!"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식당 구석구석까지 퍼졌다. "저도 기사는 아니라서요. 성기사 토플러님. 일행 대신 결투 신청 을 받아들입니다. 진이라고 합니다."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레이디. 전 여성분과 싸우지 않..." 다시 무기가 충돌하는 강한 마찰음이 났다. 진은 검을 흘려버리려 는 기사의 의도를 받아주지 않고, 뚝뚝 끊는 느낌으로 쇠파이프를 휘두르듯 검을 휘둘렀다. 옆에서 릭이 아밀리한을 상대로 훼이르를 맞대며 챙챙 소리를 내었다. 토플러는 마나를 싣지 않은 자신의 검에 부딪혀 오는 위력에 등골 이 서늘해졌다. 결코 어린 아가씨가 낼 수 있는 힘이 아니었다. 몇 번 검을 맞대지 않았는데 검을 잡은 손을 타고 팔꿈치, 어깨까 지 시큰해져 왔다. 머리를 두 쪽 낼 듯 사정없이 내리쳐지는 진의 검을 팔꿈치를 구부 려 막던 토플러는 복부에 지쳐 들어오는 위협을 감지하고 반사적으 로 몸을 비틀었다. 진은 다시 발을 바꿔서 옆구리를 걷어차려다... 그의 아래로 향한 검이 가로로 휘둘러오는 방향과 속도가 예상되자 다리를 접고 검이 올 길에 미리 자신의 검을 가져다 놓으며, 유일 하게 무장되지 않은 기사의 안면에 검을 잡은 오른손과 엇갈리게 왼주먹을 내질렀다. "-철컹!" 탁자 위로 올라가 신장 차를 바꾼 진의 마지막 주먹 공격에 토플러 의 갑옷이 벽에 부딪혀 소리를 냈다. 진은 탁자 위에 있던 그의 투 구를 집어들어 밀리고 있는 릭을 돕기 위해 아밀리한을 향해 직선 으로 던졌다. 아밀리한은 탁자 끝 식당 구석에서 릭과 검을 부딪히다 위협이 되 어 날아오는 뭔가를 피하기 위해 뒤로 물러나야 했다. "텅-!" 성기사의 금빛 투구가 흙벽에 부딪혀 먼지를 우수수 피어 올렸다. "......" 눈이 팽팽 돌도록 빠르게 벌어지고 있는 검투에 경직되어 서 있는 블루 곁으로 진은 내려섰다. 넘어졌던 성기사가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와이즈는 위장용 짧은 주문을 읊조려, 그의 갑옷에 마법을 걸 어 자석처럼 벽에 붙어 그대로 눌려있게 했다. 아밀리한은 검을 들고, 상대였던 릭페르가 아닌 진을 쳐다보고 있 었다. 진은 곤봉을 내리치듯 검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쾅!" 협상 테이블이 박살이 났다. 진은 두 조각나 부서진 나무 탁자에 검을 꽂았다. "매니스 백작님. 말씀하신 대로 길을 텄습니다. 지나가도 될까요?" "......" 아밀리한은 차갑고 단단하지만 열기에 녹는 성질을 가진 얼음. 남청색 얼음 같은 눈동자로 표면적인 허락을 구하는 진의 낮은 울 림의 말이, 머리 속에 차갑게 와 박히는 기분이 들었다. 대기 중이던 백작의 호위기사들이 벌컥 문을 열고 비와 함께 들어 왔다. [85] 11-3. 뒤바뀐 아이. "....휴전." "받아들입니다, 영주님." 아밀리한의 지시로, 네 명의 호위기사와 금색 자수의 마법사가 실 내로 들어오지 않고 입구에 서서 대기했다. 진은 검을 집어넣고, 겁에 질려 울고 있는 정령사 소녀에게 가서 쭈그리고 앉아 눈높이를 맞췄다. "때려서 미안해요, 다쳤나요?" ".........." "정령을 부르는 것은 대단한 일이에요. 아가씨가 부러워요. 사람을 해하는 데 쓰지 말고, 돕는 데 쓰는 것이 어떨까요." 소녀는 진에게 얻어맞은 가슴팍을 감싸고, 블루가 던진 마법오라에 묶여 넘어져 있다가. 상냥한 어조로 말을 걸어오는 진에게 눈을 들 었다. "저도...엘프님께 공격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영주님께 서 견제만 하면 된다고 하셔서...." "전투에 끼기엔 너무 어려요. 몸조심해요?" ".........." 진은 블루에게 그들의 포박을 거두게 했다. 토플러는 와이즈가 견제 목적으로 가볍게 걸은 마법의 유지 시간이 지나 마나가 흩어져 느슨해지자 철컹거리는 소리를 내며 일어났다. 진은 무뚝뚝한 그의 얼굴에 미안함을 담아 말했다. "기사란 점을 이용해 공격한 점 사과 드립니다. 토플러님." "....그렇지 않았어도 패하지 않았을 거라는 확신이 들지 않는 군요, 아가씨." 블루는 기절한 5써클 마법사에게 치료마법을 시술하고, 자신을 공 격하다 진에게 부상을 입고 신음하고 있는 고써클 마법사의 상태를 점검했다. "블루. 목을 다쳤을 텐데. 회복이 가능할까?" "....진. 성대를 다쳤어요. 치료는 가능하지만, 후유증으로 말을 못하 게 될 수도....내상 쪽이 더 크네요. 요양을 하셔야 할 거 에요." 진은 일어나지 않고 의자에 그대로 앉아 부서진 탁자를 앞에 두고 있는 와이즈를 흘끗 보았다. [알았다.] '고마워. 와이즈.' 블루가 그에게 고써클 치료마법 리커버리를 시행하는 중간에, 와이 즈는 다친 목 부위에 용언을 써 주었다. ".....고맙소." "....요양을 하셔야 할겁니다. 마나가 흐트러져서 당분간 마법을 쓰 시기가 힘들 테고, 무리하시면 다시 위험해 지실 수 있으니까요." "알고 있소. 부작용 없이 치유해줘서 고맙소, 엘프." ".........." 블루는 와이즈가 치료를 도운 것을 알았지만, 그에게나 진에게 고 개 돌리지 않고 침묵했다. 아밀리한은 검을 허리 검 집에 집어넣고 팔짱을 낀 채 릭페르의 견 제를 받으며, 적병을 위로하고 부상을 치료해 주고 있는 진과 그 녀의 일행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무리 휴전인 상태라고 적이었던 자들에게 마음을 써 주는 이유가 무얼까. 종전도 아니고 분명 휴전인 상황에서. 아밀리한은 자신의 손발이었던 자들이 전투 의욕을 완전히 잃어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의 패배였다. 적어도 2차 전은 말이다. 1차 전은 비겼다고 쳐도...하지만, 3차 전이 타당한가? 토플러가 무언의 압력을 보내오고 있는 것을 의식하며 아밀리한은 한숨을 쉬었다. "레이디. 다시 면담을 청해야겠군요. 자리를 옮기는 것을 동의 해 주시겠습니까? 백합 여관의 손님들을 막고 있을 주인 부부도 힘에 겨울 테 고요." "그들은 제 편이 될 수도 있을 전력인데요, 백작님?" "....무지한 사람들의 소소한 행복에 신경 쓰시는 것이 아니었나요?" "하지만 방어의 노력은 해야하니까요...백작님. 전 매니스에서의 여 정이 끝났습니다. 원하신다면 가는 길에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지 요." "........." 아밀리한은 호위 기사 한 명에게 부상자들을 성으로 옮기는 일을 맡기고, 토플러에게 구원병 일이 끝났음을 알렸다. 토플러는 진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 먼저 여관을 나갔고, 아밀리한은 진에게 다시 손을 내밀었다. 진은 떨궈두었던 짐 가방을 매고, 내민 손 대신 그 의 팔뚝을 붙잡고 열린 여관 문을 나섰다. "릭페르. 와이즈. 블루. 데이트야~ 방해하지마~" "..........." 진은 인상을 쓰며 따라오는 일행과, 백작의 호위들을 꼬리처럼 달 고, 아밀리한과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맞으며 앞장서서 걸었다. "흠. 뒤통수가 몹시 따갑네요, 레이디." "무시하세요, 무시." 아밀리한은 해석이 애매한 휴전 상태로. 내리는 빗줄기 사이를 영지 민들의 시선을 받으며 걷고 있는 자신 의 현재 형편에 웃음이 나왔다. "짧은 시간이지만 제가 보고 겪기로, 레이디와는 의도한 다툼이 불 가능하군요. 제가 지금이라도 기사단과 마법사들을 다시 불러 총력 전을 펼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백작님. 얻을 것 없는 전투입니다. 전력 낭비 아닌가요?" "전력 낭비를 시키지 않는 타입의 전투를 하시지 않나요?" "타협의 여지가 남아 있어서겠지요, 백작님." 아밀리한은 진과의 대화 내지 협상이, 이제까지 척하는 귀족들과 나누었던 바보 같은 대화와 구별됨을 다시 한번 의식했다. 가려진 의도를 동반한 핵심을 말하는 화법. 군더더기 없는 의사표 현....말이 통하리라는 확신. 아밀리한은 비를 맞고 있어서인지 아가씨와 걷고 있어서인지 긴장 이 조금씩 풀려서 전시 외교가 아닌, 그녀가 말한 '비를 맞는 여행' 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어떤 삶을 사셨는지 무. 척. 궁금해지네요. 하지만 저와 비슷하게 투쟁으로 점철된 생활이었을 것이라는 것은 알겠습니다." "저도 백작님의 과거가 무척 궁금하네요. 하지만 들어서 기분 좋을 소리는 아닐 것 같으니 일부러 묻고 싶지는 않네요." "....묻지 않으니 더 말하고 싶은데요? 매니스에 오기 전의 일에 대 해선 제 측근들도 잘 모르지만 말입니다." 비를 맞아 곧게 펴진 머리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진은 견제 목적으로 잡았던 그의 팔을 놓고 얼굴에 달라붙어 시야 를 가리는 머리카락을 쓸어냈다. 탈모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비. 건물 지붕을 치는 투두둑거리는 낮은 빗줄기 소리는 여름을 부르고 있는 것 같았다. 진에게 물건을 팔았던 시장 주인들 중 한사람이 그녀를 알아보고 손을 들어 아는 체 하려다가, 일행과 백작의 호위기사들을 멀찌감 치 뒤따르게 하고 함께 걸어가고 있는 자신의 영주를 알아보자 허 리를 굽히는 것이 보였다. "어떤 과거를 가지고 있든, 좋은 영주님이 아니신 가요? 시민들의 신의와 존경을 받고 있으니 그것으로 되었지 않나요, 백작님?" "제가 귀족이며 용병이라는 점을 상기해 주시지요, 레이디. 신의를 받고 있는 대상이 다른 부류에도 있으니까요." "용병은 고용인이지요. 맹세를 목숨처럼 여기는 기사가 아닌 이상 약속은 상황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고 약해질 수도 있지 않나요? 부 류를 나눠 생각할 이유가 있을까요? 하지만 하시던 대로, 목적하신 대로 이루실 일에 결단코 반대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백작님 께 믿음을 주신 분도 지배자겠지요. 그렇다면 그 분도 따르는 사람 과 받들어 주는 사람들을 위할 책임을 가지고 있지요." ".........." "귀족 부류만이 꿈을 가지고 행복을 희망할 이유는 없습니다. 권력 자는 권력에 따르는 희생을 줄여가야 함이 옳지. 힘과 권력을 행사 하는 일에 집착해선 바람직하지 않으리라 생각되네요." 아밀리한은 내세울 수 있는 명분과 현실에 대한 이해를, 주지시킬 수 없는 상대와의 대화에 한숨이 나오려고 했다. 성벽, 성문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보통 이렇게 적으로 돌릴 수도 없고, 아군으로 돌릴 수도 없는 상 대와의 협상에선 택할 수 있는 방법이 두 가지 뿐이지 않나요, 레 이디?" "....청혼은 거절합니다, 백작님. 지금도 너무 많이 받고 있어서 무안 스러우니까요." "저런. 전 레이디의 윙크를 받고, 화려한 일행 분들의 존재에도 불 구하고 희망이 있는 줄 알았는데요?" "후회 막심하고 있습니다, 백작님." "후후...." 성문이 내려지고 있었다. 진은 멈춰 서서 어제와 다르게 방문자들의 출입허가를, 비를 피해 성벽 안의 간이 천막에서 받도록 배려하고 있는 성문지기들의 움직 임을 지켜보았다. 아밀리한은 호위들과 마법사에게 가까이 오는 것 을 저지했고, 진의 일행도 그들과 멈춰서 있게 되었다. "레이디 진. 여행길 여담으로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릴까요?" 시내로 향하는 길을 표시하고자 길게 놓여져 있는 돌무더기에 앉아 말을 꺼내는 아밀리한에게 진은 고개를 돌렸다. 그는 담담하게 비가 내리는 진의 얼굴 앞 허공을 응시하며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했다. "위즈덤. '지혜'라는 의미의 성을 가진 공작 가문의 한 갈래의 자작 가문에서 26년 전, 묘한 일이 있었지요." 진은 그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려하는 것을 알았고, 아밀리한의 변 화 없는 얼굴 표정에도 불구하고 먹구름이 이유가 아닌. 말하는 이에게서 풍기는 짙고 깊은 어둔 상처...흉터의 느낌을 받았 다. "....자작부인과 그녀의 몸종이었던 하녀가 같은 날, 비슷한 시각에 아들을 낳았습니다." 아밀리한은 매니스 영지의 방문을 심사 받고 있는 여행자들과 몇 몇 난민들에게로 눈을 돌렸다. 진은 비를 맞아 김이 피어오르는 그 의 팔과 다리를 쳐다보았다. "자작 부인은 후계자를 낳았고 축하와 축복을 받았지요. 하지만 그 녀의 하녀는 부정 타 하여 갓난아이와 소외된 채 울어야했습니다. 그녀는...한 밤중 휴식을 취하는 주인의 방에 자신의 아이를 들고 몰래 들어갔지요." "........." 진은 떨어져 있는 일행. 와이즈가 비를 피하기 위해 실드를 유지한 채 아밀리한처럼 돌무더 기에 걸터앉는 것과, 청각이 예민한 엘프가 고개를 돌리는 것을. 진과 영주를 향하고 있던 시선을 갑자기 돌리는 일행을 의아한 듯 쳐다보는 릭과, 견제하며 함께 있던 호위들과 영주의 마법사가 그 런 그들을 릭과 같은 표정으로 주시하는 것을 잠시 돌아보았다. "...갓난아이를 안고 좁은 밀실로 돌아 온 그녀는 들고 있던 아이의 목을 졸랐습니다." 빗줄기가 거세게 느껴졌다. 진은 그의 얼굴에 빗물이 흐르는 것을 보고, 가슴이 저려오는 느낌 을 받았다. 아밀리한은 진의 얼굴에서 시선을 비낀 채 말을 이었다. "아이를 살해한 어미로 그녀는 그 후 11년 간 감옥에 갇혀 살았지 요. 자작가의 후계자는 10살이 지나던 어느 날, 지하 감방의 밖으로 통하는 작은 쇠창살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 "그녀는. '손을 잡아도 될까요, 도련님? 한번만 안게 해 주세요.' 했 지요. 아이는 미친 것 같아 보이는 죄수여자를 피해 도망갔습니다. 그리고...냉정하던 어머니의 태도와, 자신의 생김새에 수군거리는 하 녀들과 하인들의 말을 이해하기 시작했지요." 이밀리한은 고개를 숙였다. "...그 아이는 아버지에게 11세 생일 선물로 유모를 달라고 했고, 아 이의 자작 아버지는 그 날...성의 죄수들을 모두 사형시켰습니다. 아 이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그 광경을 봐야 했지요." 그 아이는 눈에 무엇을 담았었을까. 무엇을 결심했을까. 그 어린 남 자아이는 단숨에 어른이 되었을 것이다. 진,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아이의 시간이 끝났음을 알아야했으리라. 요점만 간추린 단편적인 그 이야기만으로도 진은, 그가 걸어와야 했던 외로움과 절망과 투쟁의 시간들이. 판의 이야 기를 들었을 때처럼. 어렵지 않게 짐작되었다. "그 아이는 닥치는 데로 배우고 사람들을 포섭해 갔지요. 성년이 되던 날, 왕보다 더 큰 힘을 가졌다는 사람을 만났고 그에게 발탁 되었지요. 그는 능력을 증명했고, 자작가문의 성을 버리고 제 힘으 로 새 성으로 개명하고 인정받았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비에 섞여 습기처럼 여운이 되어 퍼지고 있었다. 진은 그를 다독여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말로 대신했다. "위로가 필요한 가요, 백작님? 아니면 저도 이야기를 들려드려야 할까요." ".....들어서 좋은 기분일 것 같지 않으니 묻지 않는 것이 좋겠군요, 레이디 진." 아밀리한은 냉정하게 들리는 말의 표면적인 의미와는 다르게 따뜻 하게 느껴지는 진의 낮은 목소리에 위로를 받은 기분이 되어 그녀 의 말을 인용해 대답했다. "다행이네요. 날도 궂은 데 제 이야기는 매니스의 하늘을 더 침침 하게 할 테니까요." 아밀리한은 자주색 머리카락을 타고 흐르는 빗방울 사이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보통 여성분들이 가진 모성본능 조차 초월하셨나요? 미인 계조차 통하지 않는 상대라니. 저도 꽤 괜찮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 는데 말이죠." "워낙 잘난 일행과 다니다 보니 눈이 높아져서 그렇습니다. 백작님. 백작님 정도면 최상급이지요." 아밀리한은 이제 쿡쿡 눌린 웃음소리를 내었다. 진은 도움이 필요하지만 도움이 필요 없을 남자에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빗줄기가 피곤하게 느껴졌다. 와이즈가 짜증이 나는지 젖지도 않은 머리카락의 물기를 짜내는 동 작으로 머리를 잡아당기는 것이 보였다. 블루는 또 울음을 참고 있는 것은 아닐까나.... 진은 면담을 끝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전 드리얀으로 가야합니다, 백작님. 가는 길에 백작님의 의도에 제 동이 걸릴 일을 하지 않겠다는 확답은 드릴 수 없습니다....전 제 힘 으로 바르다고 생각되는 변화를 줄 수 있는 일에는 외면해 오지 않 았고, 가진 힘에 대한 책임으로 앞으로도 그럴 것 같습니다. 미안합 니다." 아밀리한은 일어나서 진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백작의 호위들이 다가왔고 릭과 블루도 와이즈와 함께 상대편을 경 계하며 걸어왔다. 아밀리한은 영주로 돌아갔다. "아가씨의 이상은 더 없이 훌륭하고, 뜻을 이룰 힘과 용기까지 갖 추셨지만, 난 디메토르의 귀족이며 매니스의 영주입니다. 아가씨와 일행 분들을 포섭하는 것을 실패하였지만 책임자의 위치로, 언젠가 막강한 적이 될지도 모를 상대를 그냥은 보내 드릴 수 없는 입장입 니다." 아밀리한의 양옆에 마법사와 기사들이 호위로 섰다. 진은 릭과 와이즈와 블루가 옆에 와 서는 것을 돌아보지 않고 신분 을 생략하는 백작의 다음 말을 기다려 주었다. "첩자의 일을 하셨을 것이 분명하나 체포에 따를 희생이 너무 크고 대화에서조차 증거를 잡지 못했음에. 방법을 바꿔 증거가 있는 죄 를 물을 까 합니다." "죄목이 무언가요, 백작님." "매니스의 시장에서 금화를 뿌려 영주민들에게 허영을 심어주고 매 니스 성의 창고를 축낸 혐의와, 기사들을 상대로 농과 조롱을 일삼 도록 여행자들을 부추긴 혐의와, 평민 여행자 신분으로 감히 영주 이자 백작인 귀족에게 추파를 던지고 희롱을 한 점등을 이유로....." "....이유로?" 진은 비실 웃음이 나왔다. 릭과 와이즈와 블루의 반응에도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매니스 영주의 권한으로, 내 영지 안의 일로 내 영향권 안에 있으 니 처벌을 하겠습니다. 여행자 진양과 마법사 와이즈. 엘프 블루. 자유기사 릭에게 사형을 언도합니다." 릭이 검을 빼들었다. 백작의 호위들도 검을 뺐다. "릭. 함부로 검 들지 마라고 했잖아." "진. 말도 안 되는 판결 아닌가요?" "가만있어." ".........." 릭은 빼들었던 훼이르를 검 집에 넣지 못하고 바닥으로 늘어뜨렸 고, 안절부절 하는 블루의 곁에서 와이즈는 코웃음을 치며 먼 산을 보았다. 아밀리한은 진의 일행 남자들의 반응을 훑고 나름대로 판단했다. 대항하려는 기사-나이에 비해 괜찮은 실력과 기사도를 갖추고 있지 만 아직 그녀의 상대로는 부족. 머뭇거리는 엘프-아름답고 강하고 연륜 있지만. 선의의 종족. 인간 에게 이용당하기 좋아 자멸의 위험을 안고 사는 종족. 남의 일 보듯 하는 마법사-식당에서 있었던 소규모 전투 때 가장 태연했던. 지금의 사형 언도에도 여전히 태연하기 그지없으며 엘프 못지 않은 외모에 젊기까지. '마법사가 가장 큰 걸림돌이군.' 와이즈가 돌아보았지만 아밀리한은 질문을 받아, 시선을 진에게로 다시 돌렸다. "매니스에선 사형수를 성 밖 몬스터에게 준다지요?" "....보통은 사형 후 먹이로 주지만. 아가씨. 극악무도한 죄수들은 비 오는 날 매니스의 다리를 산책 삼아 걸어야합니다." "제 쇼핑이 극악무도하기까지 했네요." "흠. 절 꼬신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지시겠다면 그 혐의는 빼드리지 요." "죄목을 줄여 형이 가벼워지길 바라지 않으니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지요." 진은 쿡쿡 웃었다. 릭은 어거지로 갖다 붙인 죄목으로 이해했다가 다시 언급되는 말 에, 진이 보지 못한 새 또 무슨 짓을 했나 싶은 생각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와이즈는 코앞에서 수작을 벌이고 있는 진과 영주란 녀 석을 걷어차 주고 싶었다. 블루는 고개를 숙이고 하프에 비가 덜 맞도록 하려는 듯 꼭 끌어안고 있었다. "요즘 일도 많이 시키고 있는데, 수고스럽게 부하들에게 형틀을 준 비시키고 싶지 않네요. 자진해서 매니스의 판결을 받으시길 바랍니 다." "고맙습니다. 매니스 영주님." 릭은 머뭇거리며 검을 집어넣었다. "사형언도를 하고 죄수에게 고맙다는 말을 들어보기는 난생 처음이 네요." "저도 사형을 언도 받고 고맙다는 말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 네요, 백작님." 아밀리한은 호위들에게 성문 앞 통과절차가 끝나 흩어지는 사람들 을 통제하고 데드 맨 워킹을 준비토록 지시했다. 진은 사형수가 되어 백작의 인도로 성문을 향해 나란히 걸어가며 일행의 눈총을 따갑도록 받았다. "물론. 살아남기 위한 저항을 해도 되겠지요, 백작님?" "부디 해 주시지요, 죄수 아가씨. 숫자가 늘어나 다루기가 점점 힘 들어졌거든요? 특히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이면 뚜껑을 제때 덮지 않으면 사상자가 생기기도 했지요." "죄수 인력까지 그냥 버리시지 않고, 활용을 너무나 잘하시네요." "과찬의 말씀을." 진은 성문이 내려지는 것을 멈춰 서서 바라보다, 비가 내리고 있는 모든 매니스를 향해 작별인사로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아밀리한은 한번도 제 입으로 말로 만들어 꺼내 본 적 없던 어린 시절이 포함된 과거를 말하게 만든 타국의 레이디를 붙잡고 싶었지 만. 그녀는 바람처럼. 잡을 수 없는, 잡기 힘든 존재라는 것을 인정 했다. 하지만 그는 미소지었다. "내가 기사라기 보다는 용병이라는 말을 했었지요, 진? 용병은 자 유롭지요. 진의 말처럼, 얼마든지 선택의 길을 달리 할 수 있습니 다. 지금은 다른 방향을 향해 길이 엇갈리더라도 살다보면 언젠가 다시 만나는 지점도 있을 테지요. 그 때는 제가 먼저 윙크를 하도 록 하지요. 여성분이 하는 행동으론 오해받기 십상일 테니까요." 진은 아밀리한이 이름을 부르며 하는 말과 릭의 째리는 시선에 핫. 핫.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영주의 지시를 받은 성문지기들과 기사들의 위협으로 진은 일행과 내려진 성문 다리 쪽으로 성벽을 지나쳐 걸어나갔다. 아밀리한의 웃음을 담은 자주색 눈동자가 육중한 소리를 내며 내려 오는 비상용 2중 성문에 가려졌다. [86] 11-4. 몬스터 "에그머니나." "흡." "....위협으로부터 위험으로부터 저희를 보호하고자 합니다. 실. 드." ".........." 비가 와서 불은 물 때문에 괴물 이구니들이 나오지 못하게 덮어두 었던, 성문이 내려오는 곳 다리를 사이에 두고 덮개가 치워져 있었 다. 점프력이 떨어지던 이구니들은 높아진 수면 때문에 어렵지 않 게 다리 위로 올라서고 있었다. 꾸역꾸역. 우글우글.... "블루님께서 릭페르님을 데리고 건너시지요." 몬스터들이 막혔던 천장이 없어지자 위로 뛰어오르거나 기어올라 왔다가, 그들을 발견하고 꿈틀거리며 서로 다투듯 달려들어 블루의 실드 벽에 부딪히고 있었다. 블루는 날카로운 이구니들의 이빨과 꼬리가 실드에 부딪히는 것을 보며, 와이즈의 말에 따라 릭의 손을 잡고 플라이 마법을 써서 가 늘어지고 있는 빗줄기 사이로 날아올랐다. "와이즈. 꿍꿍이가 있어 보여?" 진은 블루의 실드가 사라지자 본격적으로 달려드는 이구니들을 다 리와 높이가 별 차이 없는 물 안으로 걷어 차 넣으며 의심스럽게 물었다. "진. 네가 벌인 일이고, 네가 한 타협의 결과다. 그러니 알아서 해 라. 혼자서 다리를 못 건너 올 것도 아니니, 굳이 내 도움이 필요 없겠지? 난 간다. 이구니들과 잘 놀아봐라. 워프." 와이즈는 고소하단 표정을 지으며 건너편에 다다른 블루와 릭의 곁 으로 워프 해 갔다. "와이즈. 기사도를 좀 배워라~ 좀생이-!" "버림받았네요, 아가씨? 구해 드릴까요?" 진은 성벽 위에서 들리는 아밀리한의 목소리에 올려다 볼 수도, 대 꾸해 줄 수도 없었다. 성인 남자 체구 만한 괴물 이구니들이 혼자 남은 진에게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마구 달려들고 있었기 때문 이다. 진은 발길질을 하며 검을 빼들고 기사가 전쟁터에서 검을 높 이 들고 외치는 양, 소리쳤다. "동물 애호가 여러분. 죄송합니다! 엄밀히 말하면...기다려!...엄밀히 말하면 동물이 아니고 몬스터이니 살육하는 것을 눈감아 주세요~! 야. 너희들! 감히 인간을 먹으려고 떼로 달려들다니. 버릇을 고쳐주 마!" 진은 튀어 오르는 이구니들의 목을 긋기 시작했다. 릭은 와이즈가 딴전 피우는 얼굴로 방해를 하는 통에 진을 도우러 돌아갈 수가 없었다. "마법사님!" "릭페르님. 진이 제대로 싸우는 것을 보고 싶지 않으세요? 괜찮을 겁니다. 구경이나 하세요. 하지만 기사 분이시니 가만 계실 수는 없 을 테니, 어쩔 수 없을 이유를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와이즈는 얼렁뚱땅 대충 지은 마법주문을 외워 릭의 다리에 석화 작용을 하는 마법을 걸어 움직이지 못하게 땅에 고정시켰다. "마법사님!" "블루님. 마나를 상당히 소비하셨지요? 유사시를 대비해 마나를 아 끼세요. 저와 릭페르님께 덤벼드는 몬스터나 막아주시지요." "...정령이라도..." "쉬시라니까요. 진은 도움이 필요 없을 겁니다." "............" 블루는 은연중 가만있지 않으면 가만 두지 않겠다는 와이즈의 어감 에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어, 수가 많은 먹이 쪽으로 달려들기 시작 한 이구니들을 막기 위해 굳어서 서 있는 릭페르와 와이즈를 포함 시켜 실드를 만들었다. "와이즈! 의리 없게 굴래?" "시끄러. 남아도는 체력 아니냐! 죽을 것 같거든, 그때나 불러라." 아밀리한은 성벽 위 초소에서 성벽에 몸을 기대고 아래에서 벌어지 고 있는 몬스터와 인간의 전투에 휘파람을 불다가, 끙끙대야했다. 진은 녹색 피가 질펀한 이구니들의 시체들을 밟고 유일하게 공격이 가능한 먹이로 판단하고 몰려드는 몬스터들의 습격에 혼자서 대항 하고 있었다. 비릿한 수상 몬스터의 체취와 더 비릿한 녹색 피비린 내가 성벽 위까지 올라오고 있었다. 식당에서 토플러와 싸울 때 검끼리 부딪혀 울리던 강한 파열음에 완력이 보통이 아닐 것이라 충분히 짐작되었고, 민첩함 역시 타의 추종을 불허함을 가늠했지만. 진이 벌이고 있는 몬스터와의 전투 는....전투라기 보다는 학살이었다. "이런....내 몬스터 병사들을 다 죽이겠네. 쿡쿡...." 진은 망설임 없이, 달려드는 몬스터의 배를 가르고 목을 베고 한 걸음씩 전진하고 있었다. 녹색 피가 왈칵 왈칵 솟구치고 사방으로 튀었다. 진은 그 냄새나고 부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색깔의 피를 뒤 집어쓰며 인상을 있는 대로 쓰고 주먹과 발과 검을 휘두르며, 이구 니의 머리통을 깨부수고 걷어차서 뼈를 부러뜨리고 단단하게 느껴 지는 가죽에 검을 찔러 넣고 있었지만. 그녀의 동작이 거의 눈에 포착되지 않고 있었다. 끅끅대는 괴성을 지르고 나뒹굴고 목이 잘려 풍덩 풍덩 물에 빠지 는 몬스터들의 반향으로, 그녀가 어떻게 검을 휘두르고 머리를 부 수고 있는지 짐작해야했다. "....대단하네요, 영주님." "토플러가 제대로 상대해서 싸웠더라도. 확실히, 승부를 확언하기 힘들었겠군." "..........." 진은 살육이 진행되고 있는데도 두려움을 못 느끼고 계속 달려드는 이구니들에게 소름이 끼쳤다. 냄새도 지독해서 아주 불쾌했다. 빗줄기도 약해져 있어서 뒤집어쓰고 있는 몬스터의 피가 씻겨지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도대체 성벽 주위에 얼마나 키우고 있었길래 죽이고 죽여도 크고 작은 이구니들의 이빨 공격이 잦아들지 않는지. 그들은 열린 뚜껑에서 계속 다리 위로 올라오고 있었고, 많은 수로 사방에서 덤벼들어 미처 방어하지 못한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 공격 에 팔과 정강이에 긁히고 얕게 찢긴 상처들이 생겨났다....사라졌다. "바퀴벌레를 죽이는 기분이다! 하나도 안 미안하다! 첫 인상부터 우리 어긋났었지? 입이나 다물어라. 정 떨어진다, 이놈들아!...릭! 안 도와 주는 거야?" "....진. 간섭하지 말라면서요?" "그래. 계속 간섭 마!" 릭은 투명한 블루의 실드 너머로 사투를 벌이고 있는 진과,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는 매니스 영주를 바라보았다. "진도 대단하지만. 저 남자도 정말 대단하군요. 저렇게 많은 놈들을 다루고 있었다니." "..........." "안쓰러운 분이셨어요." "....안쓰럽다고요, 블루님?" 블루는 머뭇거리며 대답하지 않았고, 와이즈는 못 들은 척 했다. 다리는 이구니들의 시체와 그것들을 물어뜯어 먹고 있는 중간크기 의 이구니들로 가득해졌다. 공격하는 녀석들의 체구가 작아져 힘이 덜 들게 되자 진은 빨리 끝내고자 부지런히 검을 휘둘렀다. 어깨가 아파 왔다. "동족을 먹냐? 식성이 대단들 하구나. 못 봐주겠다. 이지 없는 녀석 들아." 맛 좋은 먹이에 직접 달려들 기회를 성체 이구니들에게 빼앗겼지만 뜻밖에도 성찬이 주어졌음에, 주저 없이 번들거리는 동료의 가죽과 살을 물어뜯고 있는 이구니들을 잔당 처리 겸. 진은 눈에 띄는 족족 모두 머리를 쪼개고 목을 따주며 몬스터들의 시체를 밟아 다리를 건너갔다. "전멸시키면 어떻게 합니까, 진." "영주님. 인육을 먹이는 일은 그만 두세요.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납니다. 인간의 살을 먹게 해서 좋을 게 뭐가 있나요?" "이젠 그럴 필요도 없게 만들어 주시고선, 할 말은 다하시네요?" 진은 성벽 초소까지 잘 들리도록 목청껏 외쳐야했다. "물이나 정화시키세요! 미관상 위생상 좋지 않아요!" 아밀리한의 웃음소리가 작게 들렸다. 진은 녹색 피로 범벅이 된 몸 과 머리카락에 불쾌함을 감추지 못하고 일행의 앞으로 갔다. "괜찮으세요, 진?" "안 괜찮아, 블루....와이즈?" "뭐?" "이렇게 하면 괜찮아 질 것 같아." 진은, 골탕 먹였다는 듯 비실비실 웃고 있는 와이즈를 와락 끌어 안았다. "야!" 그리고 부벼 주었다. "떨어져! 더럽게!!" 와이즈는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히죽 웃는 진을 기겁하며 밀어냈지 만, 묻어난 이구니의 피로 깨끗하던 마법사 복장이 녹색으로 온통 얼룩져버렸다. 릭은 묘한 얼굴로 그들을 보았고, 블루는 웃는 것인 지 우는 것인지, 표현이 뒤섞인 표정을 지었다. 아밀리한의 웃음소리가 조금 더 크게 들렸다. "자. 매니스는 이제 안녕이다. 가자~ 블루는 마법을 여러 번 썼으 니, 힘 남아도는 와이즈가 마법진 그려 주겠지?" 진은 화통하게 말했지만 와이즈는 더러워진 옷을 마법으로 정화시 키며 이를 갈았다. 진은 와이즈가 마법진을 그리는 동안 블루의 정령에게 샤워를 여러 번 부탁했고, 실프에게 물기를 말리는 서비스도 받았다. 진을 노려보는 일을 계속하던 금발머리 마법사가 그린 마법진에 올 라 그들이 워프 해서 사라지자, 아밀리한은 추적을 언질 해 두었던 성의 마법사에게 물었다. "어디로 갔지?" "사키리온 쪽입니다, 영주님. 매니스와 가장 가까운 사키리온-권티 로 가고 있습니다." 아밀리한은 팔짱을 끼었다. "날 방해하러 가는 게 될까요. 도우러 가게 되는 걸 까요. 적도 아 군도 아닌 아가씨." 비를 뿌리던 구름이 물러가고 흰 구름 사이로 태양이 얼굴을 내밀 고 있었다. 매니스는 개인 하늘, 오후 햇살에 번쩍 번쩍 빛이 나는 것 같았다. "어느 쪽이든 무슨 상관이람. 후후..." 아밀리한은 맑게 개인 하늘을 향해 미소지었다. 그는 부하들에게, 여러모로 실용적으로 쓰일 몬스터 이구니들의 가 죽을 벗기고 사체를 태울 것을 지시했다. * "떨어져서 걸어라, 지저분한 여자야. 냄새가 아직도 난다." "와이즈. 또 안아줄까? 말만해." "저리가!" "....피곤하진 않으세요, 진?" "피곤해, 블루. 삭신이 쑤시고 잠이 와서 죽겠어." 진은 사키리온에 해당하는 영토로 워프해서 블루가 시술해준 회복 마법을 받고, 매니스와 가장 가깝다는 사키리온-권티 영지를 찾아 벌판을 걷고 있었다. "매니스에서의 일로 뭔가 교훈을 얻지 않았나요, 진?" "릭. 물론 얻었지. 다시는 진짜 얼굴을 모르는 상대에겐 윙크하지 않을 거야." ".....그 정도뿐입니까?" 훈계하고 싶어하는 기사에게 진은 배시시 웃어주며 가까워지는 권 티 성벽을 바라보았다. 숲처럼, 무성한 키 큰 나무들이 성안과 밖의 주위에 우거져 있었다. 숲을 벌목해서 터를 만들어 성을 지은 것으 로 보이는 작은 영지였다. 성벽 성문 앞에는 난민들이 성문 앞을 서성이며 통과를 기다리며 줄을 서거나, 주위 땅바닥에 가재도구를 실은 수레 곁에 주저앉아 있었다. 진은 일행과 줄의 끝에 가서 차례를 기다렸다. * 진이 간 사키리온-권티는 국경지역이었지만, 숲을 개척해 영지로 승격 된지 얼마 되지 않은, 농업보다는 수렵을 위주로 하는 소규모 영지였다. 이웃 영지인 사키리온-메르사에서 몬스터의 난을 피해 도망 온 농노들과 평민들로 권티는 몸살을 앓고 있었다. 진은 오후 시간이 점점 지나고 있는데 성문 통과가 지연되고 있어, 기다리는 사람들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늘어나고 있는 것에 한숨 을 쉬었다. "그렇게 많지도 않구만. 느리네. 배도 고픈데...." "...영지에서 수용 할 인원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겠지요. 여행객들도 있지만 옆 영지에서 피신해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도망 온 농노 들도 있는 것 같으니. 심사를 하나봅니다." 릭의 말을 들으며 진은 사람들의 무리를 다시 훑어보았다. 마법사와 사제들로 보이는 사람들도 섞여있었고, 보통 흔히 볼 수 있었던 검을 찬 여행객들과 용병들도 보였지만. 허름한 차림새로 지쳐 보이는 농노인지 평민인지 구별이 가지 않는 사람들의 무리가 가장 많았다. 늦게 도착한 사람들은 뒤쪽에서 수 레에 싣고 온 살림살이와 보따리를 헤쳐 제일 좋은 옷으로(그게 그 거였지만) 갈아입거나, 굶주림과 피곤함으로 칭얼거리는 아이들을 달래거나 다치거나 병들어 짐과 함께 수레에 실려 있는 가족들을 위로하고 있었다. 사제 한 명이 그들 사이를 돌아다니고 있었지만, 그도 지쳤는지 신 성력을 쓰고 있지 못했다. "이렇게 통과에 시간이 걸리고 진전이 없다는 말은. 저들이 받아들 여지지 않고 있는 것으로 봐도 될까, 릭? 이미 며칠씩 성문 앞에서 머문 듯한 사람들도 보이는 데." "....마법사와 사제와 용병길드에 속해 있는 검사들은 통과할겁니다, 진." 진은 블루의 회복마법도 소용이 없는지 다시 피곤한 기분이 되어 서, 와이즈에게 레어로 옮겨 맡겨두었던 힐링포션 병을 일부 받아 들었다. 라돈에서 여관과 부자 집들을 털 때 수거해서 작은 자루에 담아 옮겨두었던 8개의 힐링포션 병을, 와이즈는 배낭에서 꺼내는 것처럼 레어에서 불러 와 진에게 건네 주었다. 진은 사용법을 듣고 가까운 곳에 있는 병자와 부상자들에게로 걸음 을 옮겼다. 수레에 실려 있는 50대 중 장년 남자는 한쪽 다리가 부러져 있었 다. 진이 힐링포션 병이 든 자루를 들고 가까이 가자 그의 가족들 이 돌아보았다. "치료 해 드릴게요. 경계하지 않으셔도 돼요." ".....저....저흰 돈이 별로 없습니다, 아가씨." "무료에요." "..........." 블루가 와이즈와 릭과 함께 곁으로 왔다. 진은 부어 올라 있는 부러진 다리를 내려다보며 아픈 기억이 고개 드는 것을 애써 눌렀다. 진은 가족들에게 그를 수레 밖으로 옮기게 했다. "진. 그냥 포션을 쓰면 불구가 되요. 뼈를 먼저 맞춰야 겠네요." 부은 다리에 손을 대었지만 부상자가 아프다고 소리를 질러서 블루 는 머뭇거려야했다. 진은 포션 병을 하나 꺼내 바닥에 내려놓고 무슨 일인가 싶어 가까 이 다가 온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블루를 물러나게 하고, 무릎 아래 정강이에 손을 가져다대고 살펴보았다. 아저씨는 진의 손이 닿자 눌린 신음소리를 냈다. '와이즈. 단순 골절이지?' [그래. 뼈가 조금 부서지긴 했지만 포션을 쓰면 나을 거다.] 와이즈는 아직도 삐친 듯 했지만 툴툴거리는 투로 대답은 해 주었 다. 진은 부러진 양쪽 다리 뼈 부분을 잡고 단숨에 뼈를 이어 맞췄 다. "악!" 진은 비명을 무시하고 움직이지 못하게 무릎 위를 누르고, 포션을 부상부위에 골고루 부었다. 무지개 빛을 뿌리는 병에서 은색 가루가 섞인 것 같은 액체가 변색 된 피부에 스며드는 것을 확인하고, 진은 통증을 참고 있는 아저씨 의 입에 포션병을 대주고 마시게 했다. 그는 통증으로 일그러진 얼굴이었지만, 효과가 빠른 힐링 포션의 치료가 시작되고 있는 것을 느끼며 감사의 빛을 띄며 진이 내민 병 의 포션을 한 모금 마셨다. 병 밑바닥에 조금 남은 포션을 진은 거둬들였다. 정말 치료를 해주는 것을 보고 수상스런 여자 보듯 하던 눈빛을 바 꾼 그의 아들이 짐을 뒤적여 건네 주는 나무로, 진은 부목을 대어 천으로 감아 묶어주었다. "잘 하시네요. 진. 뼈 맞추는 게 쉬운 일은 아닌데요." "아. 몇 번 맞춰 봤거든, 릭." "............" "너무 많이 썼네요, 진. 반만 써도 되었을 텐데." "그래? 처음 써봐서 말이야. 효과 좋다. 다리 색이 바뀌고 있어." "뼈도 곧 붙을 거다. 요양을 해야 할 테지만." "힐링포션. 정말 좋은 약이네. 대단하다." "약의 개념 정도가 아닙니다, 진. 귀한 이유가 따로 있겠습니까." 릭은 호기심에 다가왔다가 진이 들고 있는 병과 자루에 눈빛을 달 리하는 몇 명의 사람들을 의식하고 말했다. "부상치료에만 쓰는 거야, 와이즈?" "내상이나 부상에 잘 듣지. 병에는 효과가 반감한다. 병에는 병에 맞는 치료를 해야지." 치료를 받은 사람은 가장으로 딸과 아들부부와 손자들을 데리고 피 난해 오던 길에, 실수로 구덩이에 빠져 다리를 다쳤다고 했다. 그들 은 계속 주억거리며 감사해 했고. 다른, 병을 앓고 있거나 다친 사람들의 가족들이 머뭇거리며 다가 오자 진은 다시 상대를 바꿔서 아이와 노약자와 부상자들 몇 명에 게 포션을 써 주었다. 릭은 방해되지 않게 사람들이 너무 가까이 다가서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다. 성문 쪽에 몰려 있던 사람들의 행렬에 변화가 생겼다. 진은 급해 보이는 환자들을 블루와 함께 와이즈를 닦달해 포션과 마법을 병행 해서 모두 치료해 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례가 되어 성문 통과 허락을 받던 사제가 다가와 인사를 했다. 그는 모험가 일행을 따라 수행 중이라고 했다. "제가 해야 할 일이었지만 몸이 좋지 않아 도울 수 없었습니다. 고 마우신 분들이시네요." ".........." 피곤해 보이는 그에게 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빈 병과 남은 세 개의 포션이 담긴 자루를 지갑벨트 옆 고리에 걸어 묶었다. "고맙습니다. 아가씨. 귀한 것인데 저희 같은 것들에게....이건..사례 로는 터무니없이 적지만....받으시겠어요?" 진은 제일 먼저 다리 치료를 받았던 아저씨가 비상금 일부를 모아 건네는 동전들을 물끄러미 내려다 보다 받아들었다. 받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릭페르는 눈을 깜박였다. "성의 같으니 받겠습니다. 하지만, 성문을 통과해서 받아들여지기 힘들 것 같은데 앞으로 어떻게 하실 계획이세요?" "..........." 늦은 오후 햇살이 지고 있었다. 진은 자신을 쳐다보거나 고개를 숙이며 곤란해하고 울먹이는 그들 에게 다시 한숨을 쉬었다. "여기서 기다려 주시겠어요? 방법을 알아볼게요." "............" 진은 그들을 남겨두고 일행과 함께. 성안에서 나와 사람들을 골라 들여보내고 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모여 있는 사람들 쪽을 쳐다보고 있는 성문지기들에게 걸어갔다. [87] 11-5. 난민들 "에. 사키리온-권티입니다. 성함과 신상을...." 진은 새치기로, 소용없는 기다림을 하고 있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 성문지기들 앞에서 협박을 담은 눈을 하고 대답했다. "진 폰 리툰. 5써클 마법사. 7써클 엘프. 중급 기사. 통과됩니까?" "네. 토. 통과되지요. 귀족 분이시고. 엘프분도 계시는데요. 권티에 잘 오셨습니다." "성문지기 책임자와 만나고 싶은데요." ".........." 40대의 중무장을 한 갑옷차림의 기사가 성벽 위 초소에서 내려왔 다. 그는 투구를 쓰지 않고 있었고, 위에서 진과 일행이 하는 일을 지켜보고 있었는지 딱딱해 보이는 표정으로 진과 일행에게 인사를 했다. "권티 성의 기사 주이슨이라고 합니다. 용건이 있으시다 고요, 레이 디." "성안에 더 이상 사람들을 수용할 수 없나요? 저들은 갈 곳이 마땅 치 않은데요." "....권티는 작은 영지입니다. 현재 수용하고 있는 사람들만으로도 문제가 많습니다." "그렇다고 난민들을 받아주지 않으면 저들은 어떻게 해야합니까. 영주님은 뭘 하고 계시지요? 마법사나 용병이나 사제들은 받아들이 면서 저들만 차별하는 이유가 뭡니까?" 차갑기 그지없고 건방지기까지 한 진의 말투에 그는 인상을 조금 찌푸렸지만 대답은 했다. "....영주님은 현재 권티에 계시지 않습니다. 도망친 농노들을 받아 들이는 것은 나중에 메르사와 문제가 생길 수 있는 일이고, 국법에 도 위배되기 때문에 몇 일전부터 영주님의 지시로 심사를 하고 있 습니다." "그렇다면 영주님은, 저들과 이미 안에 들어 가 있는 사람들을 고 향영지로 되돌려 보낼 노력은 하고 계신가요?" ".........." 권티의 초대 영주이기도 한 권티 자작은 45세의 나이였고, 8년 전 권티로 부임해 와서 성을 지었지만 권티에 머물지는 않았다. 그는 사키리온 권티 외 원래 가지고 있는 자작가문 영지에 가 있었고, 권티의 관리를 위해 성안에 그려진 마법진을 통해 오가는 생활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럼. 현재 권티 영지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은 그의 보좌관인가 요?" "..........." "대리가 없어요?" "계십니다. 영주님의 사위 되시는 분이 총괄하고 계십니다만..." 진은 직접 성안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무뚝뚝하고 답답하게 느 껴지는 성의 기사를 남겨두고 성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진. 전 저 사람들과 있을 게요." "응. 블루. 안심시키고 있어 줘." "네." "나도 남아 있겠다, 진. 릭페르님과 갔다 와라." 진은 릭과 함께 성안으로 들어가,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말끔해 보였던 성벽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눈에 들어오자 침울해졌 다. 권티는 디메토르 매니스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다지만 규모가 작았다. 이곳 사람들은 숲이 우거진 한편에 터를 내고 성을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개척된 농지가 많지 않았고, 농업보다는 수렵을 위주로 생활하는 듯 했다. 성안은 성 밖 보다 못할 정도였다. 수용의 한계를 벗어나, 영지민들 과 이웃 영지 메르사에서 피난을 온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고, 한 결같이 지쳐 보이고 굶주려 있었다. 주민들은 통제가 되지 않고 있 었다. 여기 저기 싸움을 하고 있거나 말다툼을 벌이고 있는 사람들 과 방치된 난민들이 거리 곳곳 건물 사이사이 웅크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해가 지고 있었고, 진은 그렇지 않아도 몬스터 이구니를 상 대하고 피곤한 몸이 더 무겁게 느껴졌다. 몇몇 영주의 성을 향해 욕을 하거나 주먹질을 하는, 거지로 보일 정도로 초라한 몰골의 사람들도 보였다. 진은 더 볼 것 없다는 듯이 몸을 돌려 다시 성벽과 성문을 책임지 고 있다는 기사 주이슨을 찾아 성벽 초소로 올라갔다. "사람들을 성안으로 들여보내 주십시오. 어두워지고 있고 곧 밤이 되는데, 안의 사람들이나 밖의 사람들이나 저대로 둘 순 없는 노릇 아닌가요." "....영주님의 명령이십니다. 레이디. 받아들인다고 해도 뾰족한 방법 도 없을뿐더러...." "방법을 찾을 노력은 하고 있었나요? 영주님이나 영주대리님은 도 대체 뭘 하고 있답니까. 여긴 당장 사람들이 모두 굶어 죽게 생겼 지 않나요? 굳이 성의 기사님들의 도움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용병 들도 꽤 보이고 일거리가 필요해 보이는 난민들도 남자 분들이 많 으니 제가 모두 고용해서 방법을 찾아보겠어요." "..........." 주이슨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도 명령에 절대 복종한다는 기사라 그런지, 진의 말에 따르려는 생각이 없어 보였다. 진은 짜증이 나서 꽉 막힌 기사란 작자의 갑옷을 일그러뜨려 주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진. 무리에요. 귀족은 어디서든 귀족이지만, 영지내의 문제에 영주 의 동의 없이 깊게 관여하는 것은 문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권티 영주께서 부재중이시라면 더 그렇지요. 소수 인원의 사람을 고용하 는 것 정도는 상관없겠지만. 게다가 타국의 귀족이니...." 릭의 주의에 진은 답하지 않고 발끝으로 서서 키 크고 나이 든 기 사의 코앞에 얼굴을 들이대고 비웃음 실린 말투로 말했다. "권티 영주 대리님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영주가 아니니 내가 사람 들을 고용해서 당장 시급한 문제들을 해결 해 주는 일에 항변할 입 장도 신분도 되지 않을 것 같은데요?" "진...." 무례하기까지 한 진의 단도직입적인 태도에 릭이 진정시키고자 했 지만 그녀는 계속 말을 했다. "같은 나라 난민들과, 책임지고 있는 자신의 영지민들 마저 외면하 라는 지시만 내려놓고 영지를 떠나 있는 영주님의 처사가 옳다고 봅니까?" "저흰 권티 성의 기사입니다, 레이디." "기사라...당신들이 머리 있는 기사가 맞습니까?" "진!" "....무례합니다." "기사 주이슨님. 검의 위협에서 주군과 영지민을 보호하는 것 못지 않은 위험을 두 눈 뜨고 보고 계시는 데, 꿋꿋하게 잘못 된 명령을 수행하고자 하는 열렬한 충성심이 참으로 갸륵하시네요." "............" 진은 공복과 피곤함과 짜증이 겹쳐 험한 말이 나올 것 같아, 석상 같이 느껴지는 권티의 기사에게서 눈을 돌려 권티 영지 내부의 혼 란을 다시 돌아보았다. 보이는 모든 아이들이 수확 없는 일을 하는 도둑이었고 거지였고, 집을 배정 받지 못하거나 미처 짓지 못해 거리 여기 저기에 가족들 과 함께 비참한 모습으로 웅크리고 있는 사람들. 식량과 생활필수품의 거래에 시비가 붙어 치고 받고 있는 사람들. 권티는 신생 영지라 신전도 아직 없었고, 수련 중으로 방문한 사제 들도 몇 없었기 때문에 치료가 필요한 사람들이 다수 방치되어 있 는 것도 보였다. 아마 길드들도 아직 자리 잡지 못했을 것 같았다. 나무가 많아 수려한 경관인데 아담한 성 내부는 엉망이었다. 영주대리란 인물이 어떻게 생겨먹었든 시민들의 신임을 기대할 수 없고 능력 없는 귀족일 것은 보지 않아도 뻔했다. 진은 초소에서 내려 와 멀지 않은 곳 난민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서, 보채는 아이들을 다독이고 있는 허름한 차림의 아주머니에게 말했다. "성안에서 생활이 어려우실 것 같으면 밖으로 나오세요. 도와드릴 게요." "....밖으로요?" "네. 권티에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어려우신 분들이나 정식 체류 를 허가받지 못한 사람들과 함께 나오세요." "............" 진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뻣뻣이 서 있는 권티의 기사 앞을 지나 며 또박또박 말해 주고, 릭과 함께 다시 성문 쪽으로 향했다. "어차피 안에선 통제 못할 상황이니 밖으로 되돌아 나오려고 하는 사람들을 막지는 않으시겠지요? 골치 썩을 일 없고 편해지실 텐데 수용시킬 능력도 없으면서 굶주린 그들을 억류하신다면, 권티 영지 의 아사 직전인 하층민들에 대한 영주와 기사들의 무정한 처우를 사키리온 뿐 아니라 여행 다니면서 주변 국가들에게 조롱받도록 마 음껏 소문내 드리겠습니다, 기. 사. 님." "............" 진은 한숨을 쉬는 릭을 뒤따르게 하고 성 밖 마법사와 엘프와 함께 있는 난민들에게로 걸어갔다. 쌍둥이별이 짙은 푸른빛으로 낮게 떠서 둥근 몸을 내밀고 내려다 보고 있었다. * 진은 와이즈에게 매니스에서 구입한 물건들을 담아 맡겨 두었던 무 한 마법자루를 되돌려 받았다. 간식거리로 샀던 조리가 필요 없는 음식들을 자루에서 꺼내 웅성거 리며 다가 온 사람들에게 나눠주기 시작했다. "드세요. 많이 있어요. 일단 먹고 야영할 준비를 하지요." "....야영이요? 성안엔 들어 갈 수 없는 건가요?" "안은 이곳 보다 더 험하더군요. 숲이 가까워서 위험할지도 모르지 만 모두와 있으니 괜찮을 거 에요." 그들은 말 없이 진과 블루가 자루에서 계속 꺼내 건네주는 먹거리 들을 받아들고 가족과 함께 모여 땅바닥에 주저앉아 저녁을 먹었 다. 대부분 굶주리고 있었기 때문에 식사시간은 큰 소리 없이 조용 했다. 진도 나무그루터기에 걸터앉아서 와이즈와 블루와 릭과 함께 그 날 두 번째 식사를 겨우 시작할 수 있었다. "이번엔 권티를 뒤집을 생각이냐, 진?" "....비슷해." "...뒤집어요?" 진은 딸기처럼 생긴 아이 주먹만한 물기 많고 당도 높은 붉은 과일 을 먹으며, 제 몫을 다 먹고 손가락을 빨며 쳐다보는 아이 몇 명을 손짓으로 불러 먹거리를 더 나눠주었다. 그들은 욕심껏 음식을 받 아들고 가족들에게로 뛰어갔다. "매니스 영주에게 침략전쟁을 하지 말라고 했지만 권티는 정복당해 도 할 말 없어. 영주는 사위를 믿고 맡기고 있나 본데. 안 봐도 삼 천리다. 능력 없고 속없는 자일 게 뻔해. 사람들을 매니스로 보내 야겠어." "진....." "릭. 나라사이의 분쟁은 나라님들의 일이고, 당장 이곳은 통제가 필 요해. 매니스 백작은 인품도 있고 능력도 있어. 자국에서마저 버림 받고 있는 난민들에게 살아갈 터전과 좋은 영주를 만나게 해 주는 일인데, 반대해?" "하지만." "설사 권티가 매니스 백작의 손에 들어가더라도 이 정도의 영지로 네카르도가 위험에 처할 일은 없을 거야." "하지만 사키리온의 길목입니다, 진." "피곤해서 설명해서 설득하기 힘들어, 릭. 매니스 영주에게 전쟁을 부추기고자 하는 게 아니야. 간섭하지 않기로 했지?" "............" 진의 권유를 전해 받은 사람들이 성벽에 올라 성 밖에서 저녁을 먹 고 있는 그들을 확인하자, 밤이 되어 닫힌 성문이 다시 열리고 성을 나오는 사람들이 생기고 있었다. 진은 식사를 대충 끝내고 나눠주었던 것들을 모두 먹고 멀뚱거리고 있는 사람들을 임시 캠프를 위해 일거리를 배당해 분류했고, 그들 은 조금 머뭇거렸지만 진의 말에 따라 움직였다. 무한 자루 안의 물건과 가재도구를 싣고 온 난민들의 수레가 동원 되어 성 밖에는 아궁이가 만들어지고 천막이 쳐졌다. 의지할 곳 없던 그들은 포션을 써주고 도와주겠다는 말을 해주고 생계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는, 귀족 신분으로 들은 아가씨를 중심 으로 달빛을 받으며 작은 마을을 만들어냈다. 블루는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치료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진에 게서 받은 포션과 마법을 병행해서 치료를 해 주고 있었고, 진의 독촉과 째림을 받고 용언으로 투덜거리기는 했지만 와이즈도 사람 들 사이를 누비고 있었다. 릭도 땔감을 구하러 가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숲으로 갔다. 성문이 닫혔다 열렸다 몇 번 반복했지만 10시경이 되자 더 이상 열 리지 않았다. 진은 성안에서 나온 제법 많은 수의 사람들에게 남은 간식거리를 나눠주고 캠프 일을 함께 돕게 해서 밤늦게나마 다시 제대로 된 식사를 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들은 말 없이 묵묵히 스프를 떠먹거나, 연신 고맙다는 말을 하거 나 사례로 무얼 해야하는지 물어오곤 했다. "쉬세요. 내일 이야기하고요. 이미 보수는 받았으니 사례는 하시지 않으셔도 돼요. 많이는 못 도와 드리고 굶지 않을 정도의 일밖에 못해드려요." "굶지 않게...." 성안에서 밖으로 나오라는 말을 진에게 직접 들었던 아이들의 어머 니는 진의 말에 눈을 비볐다. 진은 나뭇가지에 천을 걸쳐 임시로 지은 천막에 그들을 재우고 불 침번을 정해 만약을 대비하게 하고, 일행과 돌을 쌓아 임시로 만들 어 쓴 아궁이 앞에서 자꾸만 우울한 기분이 드는 것을 잊어보고자 모포를 칭칭 감고 누워서 잠을 청했다. 엘프의 차분하게 느껴지는 청명한 하프 소리가 성 밖 천막 주위를 맴돌다 퍼지고. ....잠이 든 진은 꿈에 상민을 보았다. [88] 상민 (외전) 겨울 방학이 끝나가고 있었다. 상민은 개학을 하면 치러야 할 시험과 밀린 숙제를 위해 귀국 후 계속 집 근처 대학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하고 있었다. 집엔...있고 싶지 않았다. 엄마는 날마다 울었고, 진과 상희와 함께 살던 일상의 추억들이 너 무 많아 집에서는 견디기 힘들었다. 도서관 문이 닫히는 시각이면 친구들이 함께 기다렸다가 데리러 오 곤 했다. 친구들과...함께 있는 것도 버거운 기분이라 피하고 싶었지 만. 그들은 오고 가는 일에 항상 한 두 명씩 따라 다녀주곤 했다. 오늘은 학철이가 유영이와 함께 도서관 안의 멀찌감치 떨어진 자리 에서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책을 보는 척 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상민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서둘러 책가방을 싸 가지고 곁으로 왔 다. "...숙제 다 했어, 오빠?" "응." "빨리 가자, 상민아. 어머니가 또 나와서 기다리실 지도 몰라. 늦었 어." 상민은 책가방을 메고 그들을 따라 도서관을 나왔다. 자정이 지난 거리는 겨울이 남아 있어서 숨이 하얀 색으로 뿜어 나 왔다. 상민은 눈이 녹지 않고 건물 사이사이 구석진 곳에 쌓여져 있는 것과, 상점 건물의 네온등을 의미 없이 쳐다보며 터벅거리며 걸어갔다. "..........." 유영이도 학철이도 말을 꺼내는 것을 애써 참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상민은 침묵했다. 진의 것이었던. 이젠 엄마와 자신의 집, 아파트 단지 입구가 보였지 만 상민은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묵묵히 걷기만 했다. 유영이는 또 울먹이려고 했고 학철은 한숨을 쉬었다. ".....자고 갈래? 날마다 택시 잡아타고 돌아가자니 용돈 꽤나 깨졌 을 텐데." "그걸 이제 알았냐, 자식아. 난 앞으로 3개월 간 용돈 없다, 임마!" 학철은 울화통이 터진다는 듯, 하지만 안도하는 투의 말로 상민의 어깨를 쳤다. 유영은 울지 않으려고 입술을 꼭꼭 깨물고 있었다. "...유영이도 같이 가서 집에 전화해라. 혼자 가긴 그러니까. 엄마도 허락해 주실 거야." "응. 오빠." 상민은 학철과 유영이를 데리고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최 아저씨가 와 계셨다. 엄마는 친구들과 들어오는 상민을 붉어진 눈으로 맞아 주셨다. "상민아. 저...." 상민은 울음을 참느라 말을 잇지 못하는 엄마의 얼굴에서 눈을 떼 고 무슨 일인지 묻는 얼굴로 최 아저씨께 고개를 돌렸다. "...진양과 상희의 사체가 발견되었다는 구나." ".........." 거짓말일 것이다. 상민은 등 뒤 숨을 참는 학철의 인기척과 울기 시작하는 유영의 흐 느낌을 들으며 생각했다. 아마, 샘이. 진의 흑인 친구 아저씨가 무언가 손을 썼겠지. 자신과 엄마를 위해서. 이젠 묻어야 할 일로. 가슴이 짓눌리는 슬픔에서 벗어나 일상으로 돌려보내려는 샘 아저 씨의...아니, 진이. 진의 배려겠지. 상민은 다시 눈이 뜨거워졌지만 이미 너무 많이 울어 항상 붉은 눈 의 가엾은 엄마를 위해 괜찮다고, 괜찮을 거라고...말했다. 최 아저씨는 우는 엄마를 다독이며 쉬게 하기 위해 방으로 데려갔 다. 상민은 신을 벗고 집안으로 들어가서 잠시 둘러보았다. 반들거리는 마루 무늬 바닥. 넓은 거실. 새것이나 다름없는 기품 있 는 원목가구. 커다란 TV. 크리스탈 술잔과 찻잔과 그릇들이 정리 되어 있는 반짝이는 장식장. 방문에 매달아 놓은 '엄마 방' '내 방' '오빠 방' '진의 룸' 이라고 적힌 만화 캐릭 푯말. 화려하고 고급스 런 빛을 뿌리는 아담한 상들리에와 조명등. 우아한 부엌. 차분한 색 깔의 커튼들. 집 안 속속히 배어나는 동생과 진의 체취, 그림자들. 상민은 그것들을 등뒤에 놓고 학철과 유영에게 들어오라고 말했다. * 씻고 나오는 데 최 아저씨가 통화를 끝내며 수화기를 놓고, 거실 소파에서 빌려 준 옷들로 갈아입은 유영과 학철과 함께 상민을 돌 아보았다. "보험 처리가 될 거라는 구나." ".........." 진은 얼마나 대단한 애였던가. 상민은 뉴욕에 있던 동안 그 사실을 뼈저리게 체험했다. 그녀의 힘이 얼마나 큰 것인지. 얼마나 큰 인물이었는지. 상민은 한 국에서 함께 지내며 알게 되었던 그 애에 대한 것으로는 미처 가늠 못할 정도로 대단한 친구였다는 것을 알았었다. 상민은 뉴욕에서 그 일 전 후. 철저하게 보호, 경호되었었다. 아무도 듣지 못한, 상민만이 들었던 동생의 들뜬 목소리가 사라진 후 바다엔 바람이 불었었다. 비바람과 거친 파도를 동반한 폭풍이 인근 바다를 휘몰아쳤고, 예 보되지 않았던 기상이변은 왔던 것처럼 삽시간에 사라졌다. 상희를 납치했던 자의 사체가 발견되자 샘 아저씨는 수색을 중단했 고, 진이 약속했던 병의 진단과 검진을 받도록 바로 조치했었다. 상민은 울고 있을 틈이 없었다. 샘 아저씨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최 아저씨는 통역이 되어 상민 옆에 항상 붙어 있었고, 미국에서도 거물이라고 부르기 손색없을 사람들과 진과 친분이 있다는 가지각 색의 사람들이 상민을 방문했었다. 그들은 진에게 하지 못했던 진이 듣지 않았던 감사의 말과, 사고에 대한 유감과 위로의 말을 상민에게 와서 했다. 상민은 진이 어떤 생활을 하고 어떤 일들을 하며 살았었는지 본인 에게서 들은 것은 너무나 단편적인 것이었다는 것을, 그들의 길거 나 짧은 이야기들로 알 수 있었고...자신이 얼마나 큰 행운과 함께 살았었는지. 다시 한번 깨달았었다. 진과 함께 살았었다는 캐서린이라는 아줌마는 진의 이름을 물려 받았다는, 막 걸음마를 하기 시작 한 붉은 머리의 여자아이를 안고 영국인 남편과 함께 찾아왔었다. 뉴욕에서 상민은 진이 구하고 배 려하고 도움을 준 거의 모든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에게서 진을 보 았다. "진양이 너희들과 하와이로 출발하기 전에 국제 여행 보험을 들었 더구나. 모두에게 말이다. 진과 상희의 이번 일로...보험처리가 될 거란다." 그 애는 얼마나 철저한가. 상민은 소파에 앉아 두 손을 맞잡았다. 상민은 진의 부탁이라는 말 한마디로 흑인 백만장자의 지원을 받아 혈우병 치료를 죽을 때까지. 완쾌시킬 의술이 나오면 가장 먼저 치 료받는 사람 중 끼게 될 것을 약속 받았다. 영국과 유럽 등지에 퍼져 있는 그녀의 친구들에게는 언제든 방문을 환영한다는 진심 어린 말과 강압적이도록 확고한 권유와, 언제든 가능한 모든 부탁이나 도움도 주겠다는 FBI의 약속까지 받았다. 샘 아저씨가 허락하여 최 아저씨를 보호자로 귀국했을 때....진이 엄 마와 한 취업계약서의 내용을 알았고, 성인이 되면 쓸 수 있다는 자신과 상희의 신탁 예금이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리고 이젠 보험금까지.... "오빠. 이거 진즉 주려고 했었는데...." 유영은 사진 한 묶음을 내밀었다. 상민은 하와이에서 찍은 사진들. 상희와 진이 찍힌 사진들을 받아 한 장씩 돌려보았다. 진은. 너무 예쁜 진은. 너무 예쁘게 상희와 자신을 포함한 주 멤버 친구들과 웃고 있었다. "아저씨. 진은 죽지 않았어요. 상희와 함께 있을 거 에요. 상희가 그렇게 말했거든요. 진과 여행 갈 거라고요." ".....그래." 그녀는 죽지 않았다. 웃는 얼굴로. 상희를 데리고. 나쁜 계집애들이 둘이서 걸핏하면 자신만 따돌리고 방안이나 거실 을 뛰어다니며 깔깔거리던 것처럼. 지네들끼리만 또 재미있게 놀러 다니고 있을 것이다. 상민은 불만의 표현으로 턱에 주름을 잡으며, 그들이 항상 살아 있 음을. 쫓아 갈 수 없을 곳에, 누구도 침범할 수 없을 자신과 그들을 아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사진 속에서 처럼 웃고 있을 것임 을. 걱정의 눈빛으로 자꾸만 엄마 방 방문을 흘끗거리는 최 아저씨 를 쳐다보며 확신했다. [89] 11-5. 누구의 잘못인가 해가 뜨자 진은 일어나 있는 사람들에게 이른 아침 식사준비를 하 게 했다. "저...아가씨. 이렇게 많이요? 저녁거리까지 어림 잡아도 너무 많은 데요?" "이것으로도 부족할지 몰라요. 식량은 충분하니까 걱정 마시고 조 리해 주실래요? 음식 솜씨 있으신 분 요리 솜씨 덕을 좀 보지요." 메르사에서 식당을 했다는 아저씨와 아주머니의 주도로 사람들은 성벽 밖에서 진이 내어놓은 식료품으로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다. 릭은 사냥 경험이 있는 남자들을 데리고 숲으로 들어갔고, 블루도 마나를 아끼라는 진의 말에 상처나 병이나 회복에 쓰일 만한 여러 가지 약초를 채취하기 위해 말귀 알아듣는 또랑또랑한 아이들을 몇 명 데리고 릭을 따라 숲으로 들어갔다. "몬스터가 나올지도 모르는데 위험하진 않을라나.." "숲에 대해 잘 아는 엘프 분과 갔으니 괜찮을 거 에요. 아이들도 따라 가고 싶어하는 것 같고, 제 몫을 하는 법도 배우고 알아야하 니까요. 걱정 마세요, 아가씨." "........." 아궁이가 더 필요했기 때문에 진은 적당한 크기의 돌을 주워 나르 며 사람들에게 이것저것 부탁을 섞어 지시를 했다. "와이즈. 혼자만 놀고 있으면 어떻게 해?" "그럼 뭘 하냐?" 집 없는 사람들의 임시 캠프가 일사분란 하게 돌아가는 모습을 구 경하고 있던 와이즈는 진이 맡긴 일거리에 쌍심지를 켰다. "나더러! 빨래를 하라고오?!"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 라는 말 몰라?" "안 먹는다. 그럼 됐지?" '와이즈. 도와줘. 쉬운 일이잖아.' [웃기지 마라. 할게 없어서 나더러 빨래를 하라는 말이냐?] '내 청바지는 세탁해 줬잖아.' [그때와 상황이 같냐?!] '네가 하면 훨씬 효율적이잖아. 여럿 고생시키지 않아도 될 테고, 할 일도 없으면서!' [그냥 생긴 대로 사라고 그래라. 뭐 그런 것까지 챙기는 거냐?] '와이즈. 혼자만 흙 안 묻히고 고고한 척 하는 게 우아해 보이는 줄 알아? 그 쉬운 빨래 하나 못해?' [엘프 오면 정령 불러서 시켜!] '블루 돌아오길 뭐 하러 기다려?! 그 정도 도움도 안 되면 어떻게 해?!' [목숨에 위협이 될 정도로 시급한 일이냐, 그게?!] '더러운 옷은 충분히 위험해! 전염병이라도 생기면 네가 다 치료해 줄 거야?!' 진과 일행 미남 마법사가 불꽃 튀는 눈싸움을 한동안 하는 것을 곁 눈으로 지켜보던 사람들은, 결국 진이 사람들 짐에서 수거한 산더 미 같은 옷가지들을 마법사가 인상을 쓰며 받아드는 것을 보자, 반 죽을 하거나 야채를 썰던 그들은 얼굴을 돌리고 웃음을 참았다. 여자들은 킥킥거리며 웃었고, 남자들은 쓴웃음을 지으며 못 본 척 했다. "잡혀 사시겠네요, 마법사님. 쿡쿡..." '젠장!' '경험으로 생각해, 와이즈. 재미있는 유희지?' [웃기지 마라!] 와이즈는 이를 갈며 숲으로 들어가 나무들에 인간들의 이목이 가려 지자 멀리 워프 해 가서, 보자기에 싸 가지고 온 옷가지들에 클리 닝 마법을 공격마법처럼 쏟아 붓기 시작했다. 나무에 앉았던 새들이 푸드득거리며 놀라 날아올랐다. 와이즈는 망할! 변변찮은! 심부름을 시킨 진을 머리 속에서 부지런 히 씹어(?)주며 산뜻해진 인간들의 구질구질한 옷가지들을 앞에 놓 고 바위에 걸터앉아 턱을 괴었다.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이냐. 인력낭비라고? 용력이다 이것아. 도대체 날 뭘로 보길래! 간뎅이 부은 계집애. 가만 두나 봐....어라?" 와이즈는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광경이라 진의 기척을 놓치 지 않을 정도의 선에서 멀리~ 산 속으로 워프 했는데, 근처에 먹이 들이...몬스터들의 무리가 지나가고 있는 것이 감지되자 갸우뚱했다. 오크와 오우거와 고블린이 섞인 무리들이 서로 싸우는 것이 아니고 행진 비슷한 것을 하고 있음에 와이즈는 호기심이 생겼다. "저놈들이 뭐 하는 거야? 소풍이라도 가나? 사이좋게 떼지어서?" 그들이 권티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자 와이즈는 화풀이 할 대상이 생겼음에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스트레스 해소 겸, 호기 심 풀이 겸 가까운 그들의 기척을 향해 워프 해 갔다. * 진은 깊고 큰 군용 냄비에서 김이 올라오는 것을 보며 조리가 되길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사키리온의 몬스터 난에 대해. 메르사를 떠나게 된 자초지종을 물어들었다. 메르사는 몬스터 숲에 가까이 있는 영지였는데 사람들의 출입이 불 가능한 그 숲 근처는 동식물이 풍부했고, 몬스터들을 피해 조금만 들어가면 희귀한 약초나 귀한 과일 열매 등을 특산물로 구할 수 있 어서 부유한 영지였다. 몬스터 숲 가장자리에는 주로 오크나 고블린들이 서식했고, 트롤이 나 오우거들도 간혹 인간들과 마주칠 정도로 가깝게 번식하고 있었 다고 한다. 숲이라기 보다는 영토라고 표현해야 할 정도로 넓고 다 양한 몬스터들이 분포되어 있는 곳이었고,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희 귀 몬스터들이 많이 우글거리는 곳으로 자원이 풍부했지만 인간들 에겐 일부 실력 있는 모험자들이 아닌 이상 접근이 금지 된 땅이었 다. 메르사 영지는 간혹 침략해 오는 오크 떼들이나, 심마니들이나 사 냥꾼들에게 덤비는 몬스터들이 아니라면 몬스터들의 문제로 영지가 흔들릴 정도의 일은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들이 갑자기 대량으로 침략을 한 거 에요?" "갑자기는 아니었지요. 처음엔 영지 주변의 작은 마을이나 더 깊숙 이 면해 있는 다른 영지가 먼저 당했어요. 오크떼들의 습격만이 아 니라, 고블린이나 오우거들도 쳐들어오곤 했지요. 숫자가 갈수록 늘 어났었어요. 흑마법사 소행이 아닌가 했지만. 확인되지 않았고요." 메르사 영지의 영주는 상거래를 장려했고, 그곳은 상인들이 많은 영지이기도 했다. 몬스터들이 인간들의 침략을 흉내내는 모양으로 영지를 침략하기 시작하자 당연히 영주 측에선 토벌대를 조직했지 만, 출정 전에 취소되었다고 한다. "왜요?" "....글쎄요. 저희들에게 설명해 주시는 귀족 분들은 없었으니까요. 다만, 먼저 당한 니소아 영지에 기사 분들이 도움을 주고자 찾아가 셨다가 생존자로 보이는 몇몇 사람들을 데리고 온 적은 있습니다. 그 후 영주님은 성안을 정리하시더니 기사들을 데리고 수도쪽으로 떠나셨지요." "영주님이 성을 버리신 게 언제였지요?" "작년입니다. 아가씨. 저흰 애써서 일군 땅이고 특산물을 얻을 수 있는 좋은 땅이라 저희들 끼리만이라도 지켜보고자 했지만. 관리해 주시는 분들이 안 계시고 상인들도 하나 둘씩 떠나고 해서..." "뭔지 모르지만. 승산이 없는 싸움이었나 보네요. 그럼 니소아 영지 나 메르사는 현재 아무도 남아있지 않나요?" "니소아는 몬스터들이 장악했다고 들었습니다. 메르사에선 몬스터 들이 겨울동안은 습격이 뜸해서 괜찮았는데, 봄이 되자 다시 쳐들 어오기 시작해서 저희들도 급하게 탈출을 했었지요. 아마 지금쯤 거의 비었을 겁니다." 뭔가 이상했다. 뭔가 빠진 것이.... "니소아가 붕괴된 것은 언제쯤인가요?" "1년이 조금 못 되었습니다. 니소아는 저희 메르사보다 더 먼저 공 격당했어요. 처음엔 몬스터의 수가 적어 방어할 수 있었다던데, 그 놈들이 식량을 내 주고 생활용품을 거의 다 내어 주어도 계속 쳐들 어왔다고 들었습니다. 니소아는 몇 달을 저항하다 사람들이 많이 죽고, 영주와 기사들도 수도로 철수했었지요. 그 다음으로 메르사였 지요." "....그럼. 메르사 다음은." ".........." 니소아 영지 근처 작은 마을들은 가장 먼저 쑥대밭이 되었고. 니소아와 가까운 메르사의 주변 마을들도 마찬가지 상황에, 메르사 는 별다른 대응 없이 방어만 조금 하다가 영주가 기사들을 이끌고 바삐 도망을 갔고. 그 후 영지 민들끼리 성안에 갇혀 겨울을 나고 봄이 되어 다시 위협을 받게 되자 흩어지기 시작한 것으로 정리되 었다. 진은 가지고 있는 지도로는 그들의 진행 방향을 정확히 가늠하기 힘들어서-이곳 사람들은 일부러 지도를 자세히 만들지 않는 것 같 았다.-상인들을 따라 수도로 가 본적이 있다는 한 아저씨에게 몬스 터의 숲과 니소아와 메르사를 땅바닥에 대충 그려 위치를 알려주길 부탁했다. 그리고 니소아와 메르사 근처 몬스터의 숲과 가깝다고 할 수 있는 영지를.... "권티도 위험지대네요?" "...사키리온 전체가 위험지대일 수도 있지요. 그 놈들이 성을 빼앗 는 것에 재미를 붙였는지 니소아에 만족하지 않고 메르사도 침략했 었으니까요." "사키리온은 도대체..." "....아직 두 세개의 영지 일이라 국왕의 군대가 조직되었다는 소리 는 듣지 못했습니다만..." "하지만 시간을 끌다가는 피해가 더 커질텐데." ".........." 그들은 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기사는 귀족을 먼저. 귀족은 제 몸을 먼저. 당장 위급하지 않는 일 에 자신들의 영지 군력을 다른 영지에 파견해 줄 정도로 위기를 느 끼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왕은? 가장 늦게 정보가 전달되는 편일 수 있고, 어쩌면 몬스터들에게 영지를 내 주게 된 영주들이 체면상 침묵하는 탓에 더 늦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들은 버림받은 것이다. "왜 몬스터들이 인간들의 땅을 침범하기 시작했는지의 이유에 대해 서는 전혀 짐작하지 못하는 것인가요?" 스프가 끓기 시작해서 간을 맞추기 위해 한 두 명이 일어났고, 서 로 얼굴을 흘끗거리며 머뭇거리던 어른들 틈에서 소년도 아이도 아 닌 12세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냉큼 대답했다. "전 알아요. 누나. 소문을 들었어요." "얘야....." "무슨 소문?" 진은 누나라고 말하는 것 때문인지 아니면 그 소문 때문에 그러는 지 구분이 가지 않았지만, 꼬마의 아버지로 보이는 아저씨의 저지 를 묵살하고 다시 물었다. "드래곤 때문이래요! 드래곤이요, 몬스터들을 이끌고 사키리온을 쳐 들어와서 귀족아저씨들이 도망을...아얏!" "드래곤?" 말을 가려하지 않는다는 꾸지람으로 꿀밤을 맞은 아이는 머리를 부 볐고 진의 되물음에 아이의 아버지가 대신 대답했다. "그냥 소문입니다. 아가씨. 니소아에서 메르사로 도망 온 사람들에 게서 처음에 나온 이야기입니다만. 확실한 것은 아니고 몬스터들이 드래곤과 함께 쳐들어 온 것도 아니었으니까요...몬스터의 숲에 드 래곤의 레어가 있는 것도 아니고요." "하지만. 메르사의 영주님은 소문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나 보군요." "모르지요. 영주님은 상인기질이 있고 겁이 좀 많긴 했지만....드래 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사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드래곤이 몬스터들을 데리고 인간들을 정복한다는 말은 저희에게도 좀 웃기 게 들리고...그 소문은 조금 떠돌다가 흐지부지 되었었지요." 진은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그게...드래곤에 대한 소문이 나기 시작한 게 언제쯤이지요?" "들은 바론...2년쯤 전에. 니소아가 몬스터에게 침략 당하기 시작할 때쯤 니소아에 퍼진 소문이라고 하더군요. 드래곤이 니소아 근처 몬스터의 숲 안에서 숲을 태우고 날아오르는 것을 봤다는 심마니들 의 이야기가 시작이었지요." 진은 머리가 띵-하고 울리는 기분이 되었다. 진은 몇 년 전 몬스터의 숲에 가봤었다는 와이즈의 말을 떠올렸고- 필시 자신을 찾으러 갔으리라.-빨래 감을 안고 와이즈가 사라졌던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고 한숨과 함께 인상을 썼다. * 릭은 권티 영지 사람들에게 위협을 많이 받아서 인지, 잡을 만한 사냥감들이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버린 것 같아 사냥이 어려웠지 만. 엘프 블루의 도움으로 멧돼지 한 마리를 추적해서 잡을 수 있 었다. 함께 갔던 난민 청년들은 새총처럼 생긴 어수룩해 보이던 무 기로 새 몇 마리를 잡은 것을 들고 릭과 함께 돌아왔다. 블루가 아이들과 약초를 가득 담은 바구니를 들고 돌아오자, 진은 그에게 실프를 부르게 하고 음식 냄새를 성안으로 실어가도록 부탁 했다. 사람들은 포만감이 들 정도는 아니지만 넉넉할 정도의 요리 된 음식 일부를 나눠 먹었고, 진은 아궁이의 불을 꺼뜨리지 않고 김이 나는 것을 유지시켰다. "성안 사람들을 불러내려고 하는 거 에요, 진?" "응. 블루." 릭도 진이 정령을 이용해 하는 일에 쓴웃음을 지었다. "검을 들지 않은 전쟁이군요, 진." "그러게. 의식주 중 가장 절실하고 기본이 되는 무기 아니겠어? 난 민들만이 아니라 토박이 영지민들까지 나오려고 하면 어떻게 될까. 보호할 주민 없는 기사들만 있는 성. 무얼 지킬 건가요, 주이슨 기 사." "..........." 진도 와이즈를 기다리는 것을 건너뛰고 블루와 릭에게 음식을 권하 며 아침식사를 했다. "...진. 마법사님은?" "빨래하러 보냈어, 블루." "...빨래..요?" '오기만 해봐라.' 진은 재료가 이미 잘게 썰어져 씹을 필요 없는 스프를 꼭꼭 씹어먹 었다. 성문은 정오가 되어서야 열렸다. 토박이가 아닌, 정식 체류허가가 나지 않은 난민들과 방문자였던 여행자들이 쏟아져 나왔다. 실프의 노고로 성밖의 상황-돼지 바베큐가 꼬치에 끼어져 돌아가 고, 커다란 식기들에서 김이 나고, 팬에서 구워져 나온 팬 케익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져있고, 귀해 보이는 제철 생 과일들까지 바구니에 담아져 있는 것 들-을 성벽 위에서 내려다 본 그들은 아침부터 성 문을 올리라는 요구를 하며 성안 성문 앞에서 농성 중이다가, 겨우 열린 문으로 일행과 가족들과 함께 나오기 시작했다. 우루루 나오는 사람들 무리 뒤로 기사들에게 가로막힌 권티 영지민 들이 항의하는 것이 보였지만 성문은 곧 내려졌다. 진은 덮치듯 혹은 머뭇거리며 다가오는 그들을, 이미 배를 채우고 일행과 함께 기다리던 사람들에게 통제하도록 해서 줄을 세우고, 신상확인 절차 없이 모두에게 스프 그릇과 팬 케익을 나눠주게 했 다. 릭은 아프거나 다쳐서 치료가 필요한 사람들을 구분해서 블루 앞 에서 식사를 하며 차례를 기다리게 했고, 블루는 아이들과 캐어 온 약초를 조제해서 그들을 진단하고 치료했다. 웅성거리는 소리는 음식이 쥐어지고 곪은 상처를 치료받는 과정에 서 점차 가라앉았다. 그들은 먼저 나와 진의 지시를 받던 사람들에 게서 진과 일행에 대한 것을 물어 들었고, 머뭇거리거나 눈물을 훔 치거나 묵묵을 일관하거나했다. "아가씨. 난 용병이오. 용병길드에 소속 될 실력은 아니라 정식 용 병은 아니지만, 검을 가지고 있습니다. 권티 영지 내에선 물가가 너 무 비싸고 하도 더러...험해서, 오늘 나오려고 했습니다만. 동료를 고쳐주시고 밥까지 얻어먹었으니 뭔가 보답을 하겠소. 우린 여행자 지 난민은 아니니까 말이오." 여행자 무리의 사람들 중 한 아저씨가 무뚝뚝한 어조로 말해오자 진은 선뜻 대답했다. "밥 한끼에 보답하실 필요까진 없습니다만, 고용인이 필요했는데 제게 고용되어 일거리를 받으실 의향은 없으세요?" "....우린 용병이고 모험가요, 아가씨. 보수만 적당히 주신다면야 마 다 할 이유는 없지요." 진은 실력을 불문하고 검을 가진 사람들을 모두 고용했다. * 와이즈는 머리를 쥐어뜯고 싶었다. 참지 않고, 저 바보. 버러지 같은 냄새나는 놈들 앞에서 체면 버리 고 정말 그렇게 하고 싶은 기분이 울컥 울컥 솟았다. "야! 이 멍청이 같은 놈들아! 내가 언제 그랬냐? 엉?!" "하. 하지만...그륵. 위. 위대한. 그륵. 분이시여. 그륵. 부. 분명..그 륵...." "시끄럿! 그륵 대는 소리 진절머리가 난다! 열 받아 죽겠네!!" "........그륵.." '내가 미쳐! 내가 돈다!!' 와이즈는 오우거와 고블린이 섞인 오크 무리를 가로막고 나타나, '야. 느네들 뭐하냐?'하는 물음을 던졌다가, 인간인 줄 알고 덤벼드 는 오우거와 고블린과 일부 오크들을 아작 내주고, 호기심을 채워 보고자 정체를 밝혔다가 날벼락 같은 소리를 들었다. 진을 찾으러 미친 듯 대륙을 헤맸던 몇 년 전. 아니, 최근 그녀를 찾기 전까지 투비와이즈는 대륙을 샅샅이 뒤지고 다녔었다. 2년 전쯤인가 서대륙. 지금 있는 곳 저 너머에 있는 몬스터들의 땅 을 지나치다가 혹시나 하고 들어갔었을 때, 본체의 모습으로 갑자 기 나타난 그에게 몬스터들이 겁을 집어먹고 짜~악 피하고 도망가 는 꼴에 괜히 부아가 솟아. [다 모여!]하고 말하고, 사시나무 떨 듯 엎드려 벌벌 떠는 그들을 발로 지근지근 밟으며 진에게 걸었던 추 적마법을 확인하고 기척을 찾아 숲을 뒤지다가 역시 없다는 것을 알자 솟구치는 짜증을 누르지 못해 홧김에 아무 대나 대고 브레스 를 날렸었다. 그때 고블린인지 오크인지 뭔지 모를 놈 하나가 벌벌 떨며 왜 화를 내시냐는 같잖은 질문에 [네 놈들 꼴이 한심해 보여서 그런다!]라고 말하고 곧장 날아오르며 [이 버릇없는 인간 꼬마를 잡기만 해 봐 라!]하고 성질을 부리며 날아갔던 것까지는 사실인데....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고. 갑자기 에이션트 골드드래곤의 드래곤 피어를 고스란히 받고, 숲이 태워지고 육포가 되어 뒹구는 동족들 틈 사이에서 살아남은 그 놈들은.... 투비와이즈가 인간 하나 찾아다니며 그 발악을 하는 자신을 두고 감히 묻는 몬스터의 의문에 열이 받아 괜히 화살을 그들에게로 향 했던 것이... 드래곤의 공격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그 자리에 있던 이지를 조금이라도 가진 몬스터들은 하늘같은 몬스터의 대왕(?)에게 받은 지적을 목숨을 걸고 지켜야하는 사명으로...뭐 그런 것으로 받아들 이는 어리석은 짓을 하게 되매... 한심해 보이지 않기 위해. 드래곤은 당연히 자신들처럼 인간을 미 워하시니(인간 꼬마 어쩌고 했으니) 이 땅에 인간들을 내 몰아야 함을 공동 목표로 세워 인간들의 영지를 침략하게 되었으니...그러 다 성을 하나 차지 하니 또 욕심이 들어 다시 침략을....그리고 기고 만장해져서 또.... '내가 돈다....' 와이즈는 진이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쥐어짜려나 하는 생각에 정 말 돌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 "늦었네, 와이즈?" ".........." 와이즈는 깨끗이 세탁한 옷가지들을 천막 안에 던지며 성에서 새로 나 온 사람들을 먹이고, 용병들을 고용해서 캠프촌의 여기저기에 경비병으로 세우고 있던 진이 건네는 말을 못 들은 척 했지만... "와이즈. 달링~ 빨~래~ 좀 시켰다고 삐지면 어떻게 해에? 상으로 맛있는 것 줄까?" ".........." 너무 다정하게 들리는 어조에 사근거리기까지 한 표정으로 말하며 다가오는 모양을 보자 와이즈는 등골이.... -그럴 리가! 인간에게 눌 리다니! 이럴 순 없어! 조것이....벌써 알아버렸구나....- 와이즈는 도망가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블루는 화상 입은 사람의 다리에 조제한 약초를 붙여주다가, 릭은 질긴 넝쿨로 작은 동물을 잡는 덫 만드는 법을 배우다가 무슨 일인 가 싶어 둘을 쳐다보았다. "와이즈. 나랑 면담 좀 하자?" "..........." "아가씨. 빨래 너무 잘 해 오셨는데요? 바가지 긁을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후후.." "핫. 핫. 그런가요? 늦었으니까. 흠." "손톱 조심하세요, 마법사님. 그거 무시 못해요. 엄청 쓰리거든요." "............" 진은 그새 친해진 사람들의 우스개 소리 같은 놀림을 받으며, 딴청 을 피우려고 하는 와이즈의 팔을 꽉 붙잡아 숲 쪽으로 이끌고 갔 다. "진...." "릭. 밀회 좀 하고 올게~ 방해하지 마." 언행을 좀 조심하라는 말을 하려던 릭은 말문이 막혔고, 블루는 약 초를 그만 붙여도 되지 않느냐는 환자의 질문을 받아야했다. [90] 권티 탈환 "글세, 내가 시킨 게 아니라니까!" "시켰던 아니던 네 영향이잖아!" "내가 왜 그 지능 낮은 것들이 지네들 맘대로 넘겨짚어 한 일에 책 임을 져야하는데?!" 청각이 뛰어난 블루를 의식해서 진과 와이즈는 캠프와 멀리 떨어진 곳까지 들어가 드래곤의 살기와 인간의 살기를 주위 나무숲과 허공 에 번갈아 흩뿌리는 말다툼을 해서 생태계를 마비시키고 있었다. 와이즈는 배짱으로 나왔고, 진은 눈에서 불꽃을 튀겼다. "와이즈!" "뭐?!" "죽어볼래?" "웃기고 있네! 죽일 수 있으면 죽여봐라." "오호~ 내가 미처 직업으로 고려하지 않았던 것 중에 드래곤 슬레 이어라는 것도 있었지. 한번 해 볼까나?" "해라~ 누가 말리냐?" 진은 눈을 활활 불태우며 회를 뜰 것 같은 눈초리가 되었고, 와이 즈는 그냥은 넘어가지 않을 것이 뻔한 결론이 나지 않는 말싸움이 지겨워져서 타협을 시도해 보고자 했다. "애초에 말이다. 네가 갑자기 사라지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 을 테니, 네 책임도 있지 않냐?" "와이즈. 바보야? 5살짜리 백치 어린애에게 책임을 묻는 거야? 잘 못이라면 화풀이를 하고 다닌 네 책임이거나, 착오인지 뭔지를 일 으켜 날 놓친 신이거나 하지. 그것도 구별 못해?" "그러게! 원인은 네 신이거나 너 맞잖냐! 왜 내 잘못만 있다는 거냐 고!" "와이즈. 우길 걸 우겨?" ".....정말 돈다." 말은 그렇게 해도 와이즈도 자신으로 인한 문제란 것쯤은 구분했지 만...그걸 가지고 드래곤인 자신을 단죄라도 하려는 양 책임 추궁을 하는 진이 환장하게 얄미워서. 또한 인간에게 당하고 있는 자신의 꼴이 너무 자존심 상해서 드디 어 못 참고 머리를 쥐어 뜯....아니 털 듯이 마구 쓸어 넘겼다. "그래. 좋다. 내 실수가 섞였던 것은 인정하지. 그래서? 나보고 뭘 어떻게 하라는 거냐?" 그만하겠다는 듯 돌출 된 나무 뿌리 위에 털썩이며 앉는 와이즈 앞 에 서서 진은 팔짱을 꼈다. "사람이 많이 죽었어." "그래서?" "죽지 않아도 될 사람들이 죽고 비참해지고 버림받았단 말이야." "그래서?" "와이즈. 인간은 쉬운 존재가 아니야. 날 봐. 나 하나만의 일로도 대륙이 위험에 처할 뻔했잖아." "그거야. 네가 내 계약 물이었고, 다른 인간들보다 강하니까 그렇 지." "아니야, 와이즈. 누구나 강해. 감정이란. 인간이든 아니든 감정을 가지고 있는 존재들은 모두 강하단 말이야. 드래곤은 강해. 그 영향 을 받는 몬스터들도 인간들도 모두 강하단 말이야. 그들은 어리석 었지만 그들 입장에선 최선이었을 지도 몰라. 쓸모 없는 생명은 없 어. 쓸모 없는 감정은 없단 말이야." 와이즈는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존중'을 말하고 있었다. 그녀의 기척을, 바를로네시와 마주하고 있다가 자신의 레어에서 감 지하게 된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 짧은 며칠동안 4000년 세월동안 생각거리로 거론조차 하지 않았 던 것들로 인한 강하고 뚜렷한 느낌들을 얼마나 자주 받았으며, 인 식을 달리했던가. 그녀의 말이 맞겠지. 하찮은 것은 대륙에, 세상에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모두 드래곤이고 모두 인간이고 모두 엘프며 몬스터라고 했던 카르 마에 대한 그녀의 의견은 '실천'과 '인성'이 없는 자의 말이었다면 그야말로 웃기는 헛소리였겠지만, 진은 그것을 몸으로 증명하고 다 녔다. 자신과 클레이스만 해도, 드래곤과 인간의 차이를 아랑곳하지 않고 동등한 입장으로 끄집어내리지 않았던가. 진은 인간들에게 항상 말하던 것처럼. 힘을 가진 자의 책임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 어쨌건 답을 내야하지 않냐, 진? 날 더러 뭘 어떻게 하란 말이냐? 몬스터들에게 사과라도 하랴? 먹을 것도 아니면서 죽였다 고? 그들에게 죽은 인간들의 제사라도 지내랴?" "지나버린 일은 어쩔 수 없잖아, 와이즈. 하지만 실수를 인정하고 그런 잘못이 가능했던 자신의 가치관에 대한 인식을 다시 해봐야하 지 않아? 그래야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을 것 아니야." "....실수라는 것 알고 있다. 변명 같지만 난 악룡 소릴 들으며 살지 않았어. 금제의 위협이 아니었다면 그런 저런 앞 뒤 없는 행동들을 뭐 하러 하고 다녔겠냐?" 진은 인상을 썼다. "또 뭐, 다른 일 벌인 게 있어?" "낸들 아냐. 이번 일도 예상 못한 날벼락이었는데." 진은 한숨을 쉬었다. 앞으로 드래곤이 거론되어, 그의 영향으로 다 시 비슷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면 어쩌나 싶은 생각과, 그의 말대 로 자신의 존재 자체가 실수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어쨌든 와이즈. 벌어진 일은 수습하자. 그대로 둘 순 없으니까. 그 리고 앞으로 말 좀 잘 들어. 툭하면 버팅기고 삐지지 좀 말고." 와이즈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말 좀 잘 들어...라고?! 내가 네 시종 내지 노예냐?!' 하고 말하고 싶었지만. 일단 확인을. "그게 반대급부냐?" "엉?" "뭔가 대가를 치러야하지 않느냐고. 이제껏 네 방식대로라면 말이 다." 시간이 이미 많이 지나서 캠프가 걱정되어 돌아가자는 말을 하려다 가 진은, 인상을 쓰고 나무에 기대고 있는 와이즈를 다시 내려다보 았다. 그리고 웃었다. "조건 아니야. 와이즈. 참고만 해. 친구잖아. 친구의 작은 허물-네게 는 작으니까.- 정도야 덮어 줄 아량은 가지고 있어. 일부러 그런 것 도 아니고 모르는 새 일어난 일이니까. 어차피 인간이나 몬스터나 항상 대립하고 싸우는 거야 어쩔 수 없었던 일이고. 우리 책임만은 아니지." ".........." 와이즈는 잠깐 말문이 막혔다. 친구니까....그냥 넘어간다고? '네'가 아니라 '우리' 책임이라고? 공짜는 없다고 항상 말하고, 사소해 보이던 허물에도 있는 힘껏 상 대방의 과실을 물고늘어지고 쥐어짜고 뒤집어주곤 하던 그녀가? 친구니까...공동 책임이란 말인가...? 와이즈는 가슴이 충족...감 비슷한 것이 비집고 들어오는 것을 거부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물론 생각뿐이었다. 클레이스는 드래곤이 외로운 존재라고 한 진의 말을 인정했었다. 그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인정 할 수밖에. 그녀에게 '친구'가 얼마나 큰 의미를 두는 존재인지, 이 대륙에서 종족을 불문하고 그 자신만큼 잘 아는 이도 없을 것이다. 진심을 엿보는 때때로 너무나 다정하고 아프게 떠올리곤 하던 그녀 진의 공기가 되었다는 친구. 이젠 만날 기회도 없을 타 차원의 친 구에게 하던 사과의 말. 클레이스의 독에 당해 무의식 세계에서도 가슴을 치며 미안해하던 대상, 그녀의 친구들. 그녀가 말하는 '친구'로 대하고 있음을 알게 하는 말 몇 마디에, 지 나왔던 시간의 무게. 기나긴 시간 그 의미 없던 시간. 보지 않으려 하고 덮어두려 했던 '필요'에 대한 갈망. 외로움으로의 정의. 그 가 장 견고했던 둑 안의 것이.... 와이즈는 막혔던 둑이 터지듯 색 없게 여겨지는 자신의 '시간'이. 진이 전해준 짧지만 강렬한 느낌과 구별됨을 확연히 느꼈다. "하지만 권티나 메르사나 니소아 문제를 해결하는데 네가 나서면 수월할 것 같아. 몬스터들을 돌려보내지 않고 묶어두었다고 그랬 지? 그들을 이용하자. 도와 줄 거지, 와이즈?" ".....맘대로 해라." "가자, 와이즈. 시간이 꽤 지났어. 사람들이 오해하겠다." 진이 몸을 돌려 나무 숲 사이로 걸어 돌아가는 걸음을 지켜보며, 마음의 긴장을 완화시키는 가슴에 번지는 그 온기의 느낌을 분석하 고 누리던 와이즈는 순간. 충동적으로 용언을 썼다. "읍....뭐야!" ".........!" 진은 잘못을 이미 알고 있는 상대에게 더 이상 물고늘어질 이유도, 이미 저질러진 일에 추궁하고 있느니. 뒤 수습에 신경을 쓰고자 캠프로 돌아가던 발걸음에 갑자기 바닥이 없어지고 와이즈가 시전 한 이동마법으로 그에게로 돌아갔다. 돌아....간 것까지는 좋은데, 나무뿌리 위에 앉아 있던 와이즈의 품 에 갇혀 키스를 당하고 있는 것을 깨닫자, 진은 버럭 성을 냈다. "시. 실수다." ".....호오." 화들짝 놀란 와이즈는 -키스는 지가 했으면서- 무릎 위에서 끌어 안고 있던 진의 몸을 던지듯 내려놓으려고 했지만, 진은 와이즈의 목덜미를 콱 붙잡았다. "드래곤들은 다~ 치한들이었구나아~ 와이즈~ 내가 그렇게 좋아? 아 무리 그렇다고, 친. 구. 사이에 의사도 안 묻고 기습을 하다니, 비신 사적이야~" 와이즈는 땀이 삐질 거리며 나올 것 같았다. 진은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처벌을...생각하고 있는 듯 했다. 벌떡 일어난 그의 목에 대롱대며 매달려서. "실수라니까! 놔!" 진은 철봉에서 턱걸이하는 것처럼 와이즈의 목을 붙잡고-와이즈는 진의 허리를 잡고 떼어내려고 했지만(그녀의 힘이 보통 힘인가) 떨 구기 전에-상체를 끌어 올려서 와이즈의 귓불을 꽉 깨물어 주었다. "@@#$$%%@" 진은 움칫하는 그의 목에서 손을 떼고 바닥에 내려서서 호탕하게 웃었다. "도둑키스를 하다니. 허락도 없이. 감히 위대한 인간에게 하찮은 드 래곤 주제에 말이야. 음하하.... 흠. 아파, 와이즈? 그냥 아까 그 아 저씨가 말했던 것처럼 할퀼 걸 그랬나? 시간이 한참 지났어. 영락 없이 오해받게 생겼네. 그걸로 넘어가 줄게, 와이즈. 담부턴 먼저 무릎부터 꿇고 '키스해 주세요, 위대한 인간 진님.'이라고 해라, 와 이즈~? 먼저 간다?" 진은 말하고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 와이즈의 눈을 피해 느긋하게 도망....돌아갔다. "내가....진정 돌은 게지..." 치료마법을 시행하며 와이즈는 일그러진 웃음을 지었다. "성안은 난리인가 봐요, 아가씨." "음. 영주대리란 자는 정말 엉덩이가 무겁네. 나와 볼 생각을 안 하 다니." 성벽 안쪽에서 들리는 폭동에 가까운 소란스러움이 바람을 타고 전 해져 왔다. 진은 노려보는 릭의 시선과 머뭇거리는 블루의 얼굴과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는 사람들의 눈짓을 사그리 무시하고, 당당하게 골목대장 처럼 성벽을 향해 허리에 두 손을 얹고 의젓하게 말하고 있었다. 어깨에 떨어진 핏자국을 없애고 뒤따라 숲에서 나온 와이즈는 호기 심의 시선이 일제히 자신에게로 옮겨오자 인상을 써 보였고, 사람 들은 모른척하기로 하자는 무언의 합의를 서로 주고받더니 한결같 이 진이 보고 있는 성벽과 성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법사님...." 아. 두 사람. 아니, 기사와 엘프만 빼고. "별일 아닙니다, 릭페르님. 블루님. 사소한 의견대립으로 조금 다퉜 습니다." ".........." 릭은 궁금증으로 입이 근질거리는 것을 참아야했고, 블루는 원망 섞인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뭐냐, 엘프. 너까지 날 갈구려고 하냐?] '............' 블루는 오해를 했나 싶은 생각에 다시 표정이 밝아졌고, 와이즈는 속으로 삐죽였다. * 늦은 오후가 되자 성문이 열렸다. 진은 남은 음식으로도 저녁거리는 충분했지만 식료품을 더 내 놓고 또 조리를 하게 했다. 사람들은 마법자루에서 아침에 나와 먹혀지 지 않아 시들기 시작하는 과일들을 조리용으로 쓰며, 남은 고기의 내장과 뼈들로 탕을 끓이고 야채와 훈제고기들로 아침과 다른 메뉴 로 요리를 했다. 진은 부산한 캠프를 지켜보다 성문이 열리고 말을 타고 나오는 기 사단과 성의 마법사들과 영주대리로 보이는 보석이 주렁주렁 달린 호화스런 차림의 귀족 남자를 일행과 맞았다.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얼굴에 개기름이 흐르는 느낌으로 태평스런 인상의 그는 말에서 거추장스러운 동작으로 내려 와, 전혀 우아해 보이지 않았지만 우아한 귀족의 예의로 손을 내밀어 키스를 청했 다. 진은 살찐 그의 손을 못 본 척 했다. 모욕을 받았다는 듯이 그는 얼굴이 조금 붉어지더니 헛기침을 하며 인사를 했다. "전 권티 영지의 차기 영주 오하미 이지스라고 합니다, 레이디." "그런가요?" "....레이디께서 식료품과 실생활 용품을 대거 지참하지고 저의 영지 에 오신 것을 모르고, 레이디의 청을 거절한 권티 영지 기사의 무 례를 용서하십시오." "그렇군요. 그런데요?" "...후작가의 영애신데 이런 누추한 곳에 계실 순 없지요. 제 성으로 모시겠습니다." 느글거리는 웃음을 매력으로 착각한 듯한 그의 태도에 진은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전 이곳도 좋은데요? 살만한 곳이 아닌가요?" "권티 영지는 숲이 우거져 경치가 좋고 살만하지요. 하지만 요즘 몬스터들의 문제도 있고 하니, 밖은 위험합니다. 권티 성은 안전하 고 더 편하실 겁니다. 제 초청에 응해 주시겠지요?" "글쎄요?" 그는 많이 참았다는 듯이 이젠 얼굴을 붉혔다. 오하미 이지스는 감히 나이도 어린 계집이 얼굴이 좀 반반하다는 것을 믿는지, 거렁뱅이 같은 도망 농노들을 데리고 기사단을 앞세 운 자신의 앞에서 은근히 무례한 언행을 하고 있음에 보통 여자들 에게 하듯 손찌검을 해 주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진은 그가 희망 없음을. 제 밥그릇만 챙기고 능력도 없으면서 신분만을 내세우는 개뿔도 없 는 귀족으로 단정했다. 자신의 위아래를 탐욕 섞인 눈으로 훑어 보 는 모양으로도 어떤 인간인지 대번에 파악했고, 뉴욕거리에서 배우 지 못하거나 배웠어도 갖추지 못한 인격으로 약자들에게-특히 여자 들에게-폭력을 일삼는 가장이나 남자들의 눈빛과 비슷한 분노를 보 임에. 진은 그의 반응과 인물됨을 직접 확인 한 후 실행하고자 세워 두웠 던 몇 개의 계획 중 하나를 선택했고. 실행코자, 화사하게 미소를 지었다. "영주님. 초대는 제가 하지요. 성의 요리사 보다 못하겠지만, 요리 에 능숙한 하층민들이 성의껏 만든 음식이랍니다. 함께 저녁을 드 시고 제 캠프에서 머무시겠어요?" "에예? 아, 물론. 감사합니다. 하지만 전 야영을 해 본적이 없는 데...." "하루쯤 달을 보며 밤을 새 보는 것도 운치 있답니다. 거절하시게 요? 섭섭하네요." 나긋나긋한 태도가 된 진을 사람들과 릭은 눈을 껌벅이며 쳐다보았 고, 블루는 다시 머뭇거리며 하프를 만지작거렸다. 와이즈는 당할게 뻔한 살집 많은 그에게 동정이 갔다. 그는 권티에 끌어들일 속셈으로 진의 초대에 응했다. 진이 기사분들의 식성에는 맞지 않을 거라는 돌려 말하는 의도에 쉽게 걸려, 기사단을 떨어져 있게 하고 호위 둘과 마법사들만 데리 고 진이 마련하게 한 두툼한 천을 깔은 자리에서 저녁을 대접받길 기다렸다. 진은 요리담당 아주머니에게 지나치는 어조로 몇 마디 속삭였고, 그녀는 얼굴을 숙이고 웃었다. 저녁 식사자리는 화기애애했다. 영주대리만 빼고. 영주대리는 그의 호위기사와 마법사와 진의 일행들과 다른 식사를 대접받았다. 엄청난 맛의 고기스프와 과일로 걸쭉하게 만든 떠먹어 야하는 후식 같은 짜디짠 주 요리와 납작하게 팬에서 구워 낸 매운 맛이 강한 빵과 밀가루로 빚어 튀겨낸 과자에 쓴 맛 투성이의 시럽 을 끼얹은 것과 흙이 섞인 포도주를 먹어야했고, 덤덤하게 식사하는 부하들과 다른 메뉴라는 것을 알자-하층민들은 원래 그런 식단으로 먹는 줄 알았는지 반응이 늦었다.-영주대리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졌다. "저런. 역시 하층민들이 먹는 음식으로는 무례만 된 것 같네요. 전 여행을 다니다보니 웬만한 음식들은 모두 먹을 만 하게 느껴지던 데, 차기 영주님껜 실례가 되었나보네요." "....날 우롱하는 처사가 아니오, 레이디?" "그렇게까지 느끼셨어요?" 그는 둔해 보이는 동작을 민첩하게 움직였다는 듯이 벌떡 일어났지 만, 와이즈가 용언으로 건 마법으로 도로 주저 앉혀졌고, 마나 유동 을 감지하지 못한 마법사들은 그런 그를 의아한 듯 쳐다보았지만 곧 엘프에게로 시선을 돌려 마법에 관한 문의를 계속했다. 기사들은 진이 식사하는 것을 도와주겠다며 굳은 그에게 찰싹 달라 붙자 귀족남녀의 수작으로 판단했는지 예의 상 고개를 돌렸다. 오하미 이지스는 생애 가장 지독한 식사를 해야했다. 진은 와이즈의 마법으로 굳어 있는 상태에, 그의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목 위 부분을 뒤 목덜미에 댄 손으로 고정시키고 친절한 태도로 입에 살벌한 맛의 그의 몫의 음식을 구겨 넣어주며, 억지로 삼키도록 살짝 살짝 목을 쓰다듬는 것처럼 보이는 동작으로 눌러주 었다. 블루는 못 볼 것 본 것처럼 얼굴을 모로 돌리고 웃음을 참았고, 릭 도 아예 자세를 다른 방향으로 향하고 식사를 빨리 끝낸 척 노을을 보며 포도주를 홀짝였다. 와이즈는 담담한 표정으로 속으로만 낄낄거렸다. 영주대리는 기가 막혔다. 옆에 있는 부하들이 자신이 당하고 있는 일을 전혀 눈치를 못 채고 있었다. 아니, 원래 정면으로 쳐다보는 것을 싫어하는 평소 그의 지시로 그들은 그의 곤란에 무감각한지도 몰랐다. 음식 맛이 문제가 아닌 일이 닥쳤다는 것을 알자 그는 구 원을 청하는 눈빛을 했지만 진에게 뒤 목덜미가 잡혀서 움직일 수 가 없었다. "잘 드시네요.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우리만 먹어서는 안되지요. 저 녁시간인데 성안의 영지민들도 아직 먹지 않았다면 대접하고 싶네 요, 차기 영주님. 전 돈 뿌리고 다니는 것을 좋아하거든요. 괜찮겠 지요?" "무....흡." 진은 앞 목덜미를 강하게 쥐었다. 그는 얼굴이 파래져서 음식이 남아 있는 입을 허하고 벌렸다. 진은 손을 조금 늦춰 입을 다물게 하고 그의 호위에게 영주대리의 지시를 전했다. 그는 기사단들에게 가서 상부의 지시를 전달했고 말을 타고 갈 필요가 없을 정도로 가까운 성문 쪽으로 기사 한 명 이 말을 달려서 성문을 올리고 사람들을 내보내라는 말을 외쳤다. 진은 눈치를 챘음직도 하건만, 말 없이 진이 전한 영주대리의 명령 을 행하는 호위기사에게 웃어 보였다. 성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성안에 부유 계층의 주민들은 꽤 남아있었지만, 안에서 생활이 어 려웠던 주민들은 대부분 가족들을 이끌고 진의 캠프로 와서 용병들 과 먼저 자리 잡은 사람들의 통제로 식사를 대접받고 치료를 받기 위해 줄을 섰다. 여행자 신분으로 방문을 허락 받았던 실력이 있는 편으로 구분되어 억류되어 있던 마법사들과 사제 몇 명도 섞여 있었 다. 와이즈는 마법을 해제했고, 진에게서도 풀려난 영주대리는 한동안 식사를 했던 자리에서 몸을 돌리고 풀 위에 웩웩거리며 강제로 먹 었던 것을 토하다가 노발대발하며 기사들에게 진과 일행을 모두 잡 아들이라고 고함을 쳤다. "저런~ 맛없는 식사를 대접한 정도로 그렇게까지 모욕을 받으시다 니 정말 송구스럽네요, 차기 영주님." 진은 빈정거렸고, 그는 재고의 여지도 없다는 듯이 기사들에게 체 포를 명하고 성으로 돌아갈 의사를 표했다. 기사들은 주춤거리고 있었다. "내 말이 말 같지 않은가?!" "..........." "또 내가 주군이 아니라는 이유를 댈 것인가?! 좋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 장인께서 오시기로 했으니 직무태만으로 모두 강등시켜 주겠 다!" 펄펄 뛰며 하는 그의 말에 진은 인상을 썼다. "거 참. 엄마 치마폭도 아니고, 장인 치마폭에서 사나보네. 장인 치 마폭...이런 표현도 있나?" 릭은 진의 중얼거림에 웃음을 더 참아야했다. 영주대리는 끌고 온 자신의 말안장에 부축 받아 올라, 이미 음식을 배급받아 먹고 있는 영지민들에게 성으로 돌아갈 것을 명했지만, 그의 호통소리에 아무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이것들이! 내 말이 안 들리느냐? 일어나라!" 이젠 비웃음 소리까지 여기 저기에서 새어나왔다. 그는 기사들에게 말을 듣지 않는 자들을 패서라도 일어나게 하라고 했지만, 신경질적인 그의 명령에 머뭇거리는 기사들을 보자 진은 다시 나섰다. "차기 영주님. 성안이나 성밖이나 권티인데 굳이 성안에 들어가서 살아야할 이유가 없지 않나요? 성밖의 주민들까지 돌보기엔 능력이 안 되시나보군요." "보자보자 하니까, 점점 말이 심해지오! 영애의 가문이 정말 귀족가 문이 맞소?! 그럴 리가 없지! 난 이제껏 당신같이 위아래 모르고 행실이 천한 귀족여자는 처음 봤소! 엘프와 있어서 귀족으로 믿었 지만, 귀족 사칭이 분명해!" 진은 기사단 앞으로 피신해서 캠프와 대치하고 있는 얼간이 같은 귀족에게 씨-익 웃으며 또렷하게 대답했다. "제 일행 엘프는 인간의 신분에 제약받지 않습니다. 엘프가 귀족하 고만 어울린다고 누가 그러던 가요? 교양수업시간에 퍼져 졸은 모 양이군요." "무례하다! 넌 귀족일 리가 없어! 잡아들이라니까!" 기사들은 한숨을 쉬었다. "제가 한 일이 귀족이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나요, 차기 영주님? 굶주린 자들에게 동정으로나마 먹게 해주고 서로 싸우지 않게 통제 해 주고 다친 상처를 치유해 주고 전염병이 돌지 않게끔 청결을 유 지 시켜주고, 무엇보다도 의지할 대상과 나뭇가지 아래지만 몸을 쉴 수 있는 잠자리를 마련해 주는 일이 결코 귀족이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나요?" "내 말이 안 들리느냐! 뻣뻣이 서서 무얼 하느냐! 너희들이 기사가 맞느냐? 들어야할 명령에 귀머거리 흉내를 내느냐! 난 영주대리고 권티 영주의 인척이다!" 진은 기사들의 반응하기 전에 언성을 높였다. "영주대리님이야말로 그 나이 되도록 무얼 배웠으며, 귀족의 지위 로 해 오신 일이 뭐가 있습니까? 혼자서 말에 올라타지도 못하는 그 대단한 무예? 돌봐야할 책임이 있는 사람들을 업신여기고 등한 시 한 처사? 잘 돌아가지도 않는 머리로 귀족 예의범절이나 흉내내 는 품위? 당신이야말로 귀족일 수 없습니다." "저. 저것이..." "오하미 이지스 경. 진은 분명 귀족입니다. 제가 증명하지요. 난 네 카르도의 릭페르 폰트 훼이른 후작이오. 말씀을 삼가시오. 지금까지 의 언행으로도 충분히 귀족 레이디의 명예를 훼손하셨소." ".........." 그는, 평범한 가죽무장의 여행 복 차림이라 당연히 평민기사일 것이 라고 생각하고 인사를 나누지도 않았던 릭페르의 말에 얼굴이 더 붉어졌다. "하지만. 영주님이 안 계시니 저흰 명령받은 대로 이지스님의 지시 를 따라야합니다. 타국의 귀족분이시니 권티 내에서 너무 큰 문제 를 일으키시는 것은 자제해 주십시오." 진은 기사들 사이에 섞여 내내 말이 없던 낯익은 중년기사에게 냉 정하기가 서릿발같은 어조로 말했다. "주이슨 기사님. 당신이 귀족으로 모시는 분을 안락한 성안으로 모 시고 가시지요. 당신은 더 머리가 굳고 어리석은 자입니다. 성으로 가셔서 무얼 지켜야 하는지, 누구를 위해서 기사가 되어 검을 드셨 는지 잘 좀 생각해 보시지요." "..........." 어둠이 깊이 내려앉았지만 유난히 달빛이 푸르렀다. 한동안 영주대리 혼자 방방 뛰며 삿대질까지 하며 잡아들이라고 언 성을 높였지만-그는 릭페르도 귀족 사칭을 하고 있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기사들은 기사단장의 동의가 없어 머뭇거려야했고, 배를 채우는 와중에도 영지민들과 난민들은 진이 영주대리와 기사 들에게 하는 말을 처음부터 놓치지 않고 모두 숨죽이며 듣고 있었 다. '와이즈. 더 기다려야 해?' [다 왔다.] 영주의 사위이자 형식이나마 영주대리인 그가, 진과 일행을 체포하 라는 말을 악을 쓰며 하는 통에 더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쉬며 검을 빼들고 다가오던 몇몇 기사들은. 뒤쪽 평지와 멀리 어두워서 짙어 보이는 숲에서, 검게 꾸물거리는 형체가 무엇인지 달빛의 도움으로 먼저 알아 챈 캠프촌 사람들의 벌떡벌떡 일어나 외치는 말과, 성벽 위 초소에서 외치는 소리에 경직되었다. "몬스터다! 몬스터 떼야!" * "흥. 하늘도 시덥잖은 동정심을 가진 가짜 귀족을 단죄하려는 모양 이다. 잘해 보시오, 가짜 귀족들. 몬스터들에게 잡아먹힐게 무서우 면 무릎 꿇고 애걸해 보시구려. 뭐, 그 정도 생겼으니 하녀 일 정도 는 줄 수 있으니까 말이지." 오하미 이지스는 덜컥 겁이 났지만 몬스터들의 무리는 아직 멀리 있고, 성문도 가까우니 다행이라는 생각에 진과 일행에게 야유를 퍼붓고 도망치듯 기사단들에게 회귀를 명했다. "병신..." "큼. 못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진." "쿡쿡..." 블루는 방어를 위해 결계를 치더라도 범위가 넓고 사람이 너무 많 아 안전이 보장되지 않을 게 뻔한 캠프를 돌아보며 진의 욕설에 쿡 쿡거리며 웃고 있는 와이즈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진도 와이즈도 너무 느긋해 보임에 한숨을 쉬고, 올라가고 있는 성문으로 부리나케 달려가는 불쾌한 느낌을 준 인간 귀족을 바라보았다. "이지스님! 주민들을 대피시켜야....!" "시끄럽다! 내 명을 들은 체도 않던 더러운 것들에게 뭐 하러 신경 쓰냐! 다들 몬스터도 못 먹을 돼지죽이나 끌어안고 죽으라고 그래 라!" "하지만..." 소요가 일고 있는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해 몸을 돌리려던 릭은 저 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개자식이네...앗. 죄송합니다." "못들은 것으로 할게, 릭." "쿡쿡...." 기사단은 말머리를 돌렸다. 주민들은 모두 당황하고 겁에 질려서 어쩔 줄 몰라하며 우왕좌왕하 기 시작했다. 몇몇은 다시 기사들을 따라 성으로 들어가기 위해 가 족들의 손목을 잡아끌고 아이들을 업고 고함을 지르고, 무기가 될 만한 것들을 찾는 사람들과 울음을 터뜨리는 사람들로 삽시간에 캠 프촌은 혼란스러워졌고, 진은 블루의 실프를 다시 이용했다. "진정하세요. 위험하지 않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진의 낮지만 힘있는 목소리는 캠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귀에 바 람을 타고 또렷하게 전해졌다. 사람들은 실프에 실려 모두의 머리 위에 내려앉는, 따뜻하게 안심시키는 목소리에 잠깐 동작을 멈췄다. 진은 서둘러 고용 용병들과 일행들을 전진 배치해서 성으로 뛰어가 려는 사람들을 막게 하고 모두를 자리에 그대로 앉게 했지만, 너도 나도 성문쪽 방향을 가로막고 있는 진과 일행 앞으로 밀려와 항의 를 해왔다. "아. 아가씨..." "괜찮아요. 지켜드릴게요. 아이들은 아직 다 먹지 못했으니 더 먹이 세요. 걱정 마시고요." "하지만 몬스터에요! 우리는 다 죽을 거 에요." "맞습니다. 저 용병들로는 무립니다!" "안타깝지만 맞는 말입니다. 우리들로는 택도 없는 일입니다, 고용 주 아가씨." "아가씨! 저흰 3~4써클밖에 안됩니다. 엘프분이 계셔도 이 많은 수 를 다 어떻게 저들에게서...." 와이즈는 인간들에게 가장 강렬한, 생의 욕구에 의한 다급하고 간 절한 외침들이 한꺼번에 머리 속을 비집고 들어오는 바람에 유지하 고 있던 진실탐지 마법을 중단했다. "영주대리의 말 못 들으셨어요? 성으로 들어가 봐야 여러분의 안위 를 염려해주는 대우는 받지 못할 거 에요." "하지만!" "하지만 여기선 희생이 더 큽니다, 레이디. 주민들을 들여보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사제님의 말씀대로 해 주세요!" "이곳이 더 안전해요. 이곳에 계세요. 꼭 지켜드릴게요." "....살고 싶어요." 진은 사람들 틈바구니에 끼어 갓난아이를 안고 두려움으로 일그러 진 얼굴의 젊은 부인에게 위로하는 투의 말로 사정을 했다. "저도 두려움이 무엇인지 알아요, 부인. 저도 살고 싶어요. 다치지 않고 살아남아 사람답게 살게 해 드릴게요. 한번만 믿어주세요." "하. 하지만...." "꼭. 반드시. 약속을 지킬게요. 믿으셔도 돼요. 부탁입니다." "..........." 되돌아가던 기사들 중 이탈자가 생겼다. 성안으로 이미 들어갔던 몇몇도 말머리를 돌려 다시 나와, 캠프 앞 몰려있는 사람들 앞을 가로 막고있는 진과 일행에게 달려왔다. "위험합니다, 레이디. 저희가 막고 있을 테니 주민들과 함께 대피 하십시오." 진은 캠프 앞 7~80미터 전방에 다다른 몬스터 떼들을 흘끗 쳐다보 고, 2~30명 정도의 무장한 기사들에게 경의를 담아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돌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사님들. 하지만 여기 있겠습니다." "레이디!" "진. 결계를 치게 하지 않으세요?" "블루. 안 해도 돼." "....전투 준비는요, 진?" "안 해도 돼, 릭." "......뭔가 생각이 있으시겠지요?" "응. 기다려. 블루와 함께 고용인들과 사람들을 통제해 줘. 안심이 안될 게 뻔하니까." 릭과 블루는 후방이랄 수도 없을, 바로 한 걸음 앞의 용병들을 선 두로 한 사람들에게로 몸을 향했다. 블루는 가사 없는 엘프의 노래. 안심시키고 위로하는 기운을 담은 공명음을 입을 다문 채 허밍으로 내기 시작했고....사람들은 가족들 과 부둥켜안거나 주먹을 꼭 쥐었다. 진은 몰려 온 몬스터 떼들이 성벽과 캠프 앞 4~50미터 전방에서 인 간의 군대처럼 도열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사람들은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귓가에 울리는 맑고 잔잔한 엘프의 노래를 들으며 굳은 얼굴로 전방을 주시했다. 몬스터들은 진의 곁에 서 있는 와이즈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기사들은 성문 쪽으로 가는 길을 확보하기 위해 방어진을 구축하다 가 떼를 지어 몰려오던 무리들이 공격을 하지 않고 멈춰서는 것에 의아해했다. 오크들 중 가장 몸집이 큰 놈 하나와 고블린 중 한 마리가 인간들 에게서 탈취한 것으로 보이는 두껍고 폭 넓은 검과 도끼를 들고 닫 힌 성문을 무시하고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캠프 앞으로 왔다. 진은 기사들의 외침과 저지를 헤치고 전투말 곁을 지나 그들 앞으 로 나갔다. "그륵. 네가. 인간의 대장 그륵. 인가?" "네. 진이라고 합니다. 권티를 함락하기 위해 오셨나요?" "....그륵. 그렇다, 인간 여자. 그륵."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성에서 버림받았습니다. 병사들도 아 니고 검을 쥐어보지도 못한 약한 인간들이 대부분입니다. 우린 싸 우길 원치 않습니다." ".....그륵." "여기 있는 사람들은 빼앗길 것이 있다면 목숨뿐입니다." "....검을 가지고 있는 그륵. 인간들도 있다. 그륵." "저분들은 버림받은 저희들을 지키고자 유일하게 목숨을 건 분들입 니다. 우리가 공격당하지 않는 한, 저분들도 여러분을 공격하지 않 을 것입니다." ".....그륵." 모두 입을 벌리고, 진이 몬스터들을 대상으로 시도하는 말도 안 되 는 협상을 지켜보았다. 기사들은 기가 막혔다. 몬스터들이 먼저 대화를 청하기 위해 걸어 나온 것도. 그것에 응하고 있는 귀족 영애도 믿을 수 없고, 다시 볼 수 없을 희귀한 광경임에 검을 빼들고 있는 손이 갈 곳 없는 기분이 되었 다. "우린 바보가 아니다. 그륵. 우린 강하고 용맹. 그륵. 하다. 인간들 은 그것을 비웃는다. 하지만 그륵. 우린 증명했다. 인간들은 그륵. 우리를 이기지 못한다. 그륵." "맞는 말씀입니다. 당신들은 바보가 아니지요. 적어도 여기 있는 사 람들은 당신들을 이길 수 없습니다. 비웃었던 인간들을 대신해서 사과 드립니다. 하지만 침략에 방어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몬 스터인 여러분도 강하지만 인간도 강합니다." "....그륵. 강한 인간이 있다는 그륵. 것은 우리도 안다. 그륵." 진은 뒤에 서 있는 와이즈를 의식하고 있는 그들의 심리를 염두하 고, 반감과 공격의 빛을 숨기고 있는 그들의 눈을 보며 계속 말했 다. "몬스터와 인간들이 서로 대립함이야 오랜 세월 어쩔 수 없었다지 만. 잠깐의 욕심으로 황폐해질 것이 뻔한, 인간들이 힘들게 개척한 땅을 차지하기 위해 계속 필요 없는 살육을 일삼는다면. 당신들을 비웃고 속이던 인간들보다 훨씬 못하게 됩니다." "...우린 그륵. 쓸데없는 싸움은 안 한다. 그륵." "다행이군요. 저흰 싸우지 않겠습니다. 지켜야 할 성도 없는데 가진 목숨마저 잃을 위험은 피하고 싶으니, 현재로선 더 강한 당신들에게 항복하는 것을 택하겠습니다." 기사들은 모두 머리가 띵. 하고 울렸다. 쳐다보고 있던 주민들은-블루는 협상이 시작되자 노래를 멈췄지만 그들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일이 이상하게 돌아감에 입을 벌 렸다. "항복을 말하는 것을 믿을 수 없다. 인간은 교활하다." 키가 작고 음흉해 보이는 얼굴의 털 복숭이 고블린이 하는 말에 진 은 웃었다. "맞습니다. 인간은 교활하지요. 앞으로도 유념하십시오. 하지만 저 와 이곳에 있는 사람들만큼은 당신들과 싸우지 않겠습니다." "..........." "우린 당신들에게 내 놓을 것이 목숨뿐이라고 했습니다. 그것마저 뺏으려고 한다면 물론 투항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 니까?" "....사과해라. 우릴 업신여기고 살 가치도 없다고 조롱하던 말들과 돌아서서 비웃던 행동을 사과한다면 살려주겠다." "사과합니다. 몬스터 여러분." 진은 허리를 깊게 숙였다. 와이즈는 진과의 밀회(?) 후 캠프로 돌아왔다가 그녀의 부탁으로 잠깐 자리를 비웠었다. 꼼짝 말고 있으라고 했지만 안심이 되지 않아 제자리에서 맴돌게 만드는 최면마법을 인용한 결계 안에 가둬두었던 그들은, 곧 죽을 지 모를 불안으로 웅크리고 있거나 변화 없는 주위 풍경에 속아 열 심히 제자리에서 도망치고 있었고. 다시 돌아 온 몬스터 대왕 앞에 넙죽, 혹은 잽싸게 엎드려서 엄한 지시를 받았었다. 와이즈는 그들에게 권티로 쳐들어가는 것을 허락(?)하긴 했지만, 공 격하기 전에 성밖의 인간들의 대표와 이야기를 할 것과 그의 말을 들을 것을 명했었다. 그들은 와이즈 자신을 알아보았지만 감히 시선을 향하지 못하고 지 시했던 대로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다, 진이 허리 굽혀 사과하자 당 황해 했다. 그들도 인간에게서 인격적인 대우라 할 존대나 사과를 받아 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진이 자신을 대신 해서 사과하는 의도도 있음을 알고 와이즈는 속 으로 투덜거렸다. 캠프 촌 사람들은 허둥거렸고, 대표로 나온 몬스터들의 뒤에서 도 열해 있던 오크떼와 고블린 무리와 3미터는 되어 보이는 키의 오우 거들도 지네들끼리 웅성거렸다. 진은 허리를 펴지 않고 계속 굽히 고 있었고, 노려보는 금발머리 마법사를 조심스럽게 흘끗거리던 그 들은 엉거주춤 대답을 했다. "....알았다. 살려주겠다. 여기 있는 인간들은 공격하지 않겠다." "그륵. 우리 오크들도 약한 인간은 그륵. 공격하지 않는다. 그륵." "감사합니다." "하지만..." 진은 와이즈를 의식하고 머뭇거리는 그들을 도와주었다. "성과 성밖의 문제는 다릅니다. 성안은 제 책임이 아닙니다." 그들은 진의 허락을 드래곤의 허락으로 받아들였는지-그 대화 자체 가 드래곤이 자신들을 인정한 것으로 받아들였는지도.-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보이는 괴상한 얼굴로 무리에게로 돌아갔다. 진도 캠프 앞, 사람들에게로 다시 와서 굳어 있는 사람들을 안심시 키려는 의도로 농담 섞어 말을 했다. "진...." "릭. 백기나 준비 해. 커~다란 것으로. 캠프 앞에 세워두고 우린 덜 먹은 밥이나 먹던지, 구경이나 하자." "...어떻게 된 거지요?" "흉내낼 생각은 안 하는 게 좋겠어, 릭. 나한텐 비밀 병기가 있어서 가능했던 거야. 방금 것은 쇼였어....위험한 놈들이야." "비밀 병기가 뭡니까, 진?" "비밀이야." "........."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집중된 사람들의 시선에 진은 자못 심각한 어 조로 말했다. "여러분. 우린 투항자이니 섣불리 움직이면 안 됩니다. 그들이 물러 갈 때까지 캠프에서 멀리 떨어지지 마세요." "........." 가장 황당하고 당황한 것은 기사들이었다. 그들은 성을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는 몬스터 떼를 보며, 어떻게 해야하는지 갈팡질팡했다. "기사님들. 성안의 고귀와 거리가 먼 귀족들을 지키기 위해서나, 가 난한 사람들의 피와 땀을 착취해서 제 배불리는 데만 열을 올리던 사람들을 목숨 걸고 지키셔야 한다면 돌아가십시오. 나오지 않고 안에 있는 분들 중에도 보호해야 할만한 사람들이 많겠지만 제 힘 으로는 여기까지입니다." "..........." "....친구가 안에 있습니다, 레이디." "저는 아내가 안에 있습니다." "저도 가족이 안에...." "전 사적으로 지킬 사람은 없지만 성의 기사입니다." 진은 말에 올라 타 있던 그들이 말머리를 돌리기 전 허락을 구하는 말에 격려하는 투로 대답했다. "저들은 총공격을 할 것입니다. 안에 있는 주민들로는 그들을 막을 수 없을 겁니다. 전쟁에서 기사는 검이지만 방패로 이용되는 것은 하층민들지요. 그들이 거의 모두 밖에 있으니 부자들도 영주대리도 직접 검을 들고 대항해야 할겁니다. 지켜야 할 사람들이 있다면 가 셔서 데리고 나오십시오. 탈출구를 만들어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저흰 기사입니다." "기사칭호는 다시 받을 수도 있는 문제이지만, 기사님들의 생명과 가족들의 생명은 한번 잃으면 되돌릴 수 없습니다." 그들은 귀족레이디와 가장 약자인 영지민과 난민을 보호하기 위해 남아야하는지. 되돌아가서 기사인 자신들 마저 깔보던 귀족을 보호 할 것인지 선택해야 했다. "....기사란 명예입니다, 레이디. 한번 버린 명예는 되돌릴 수 없습니 다. 하지만 전 제 명예보다 가족들의 목숨이 더 중요합니다. 기사칭 호를 버리겠습니다." 대답한 기사는 말에서 내려 검을 버리고 투구를 벗었다. 진은 굳은 얼굴로 동료를 바라보는 기사들에게 다시 말했다. "패할 것을 뻔히 알면서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것은 진정한 용기라 고 볼 수 없습니다. 이 분은 명예를 버린 것이 아닙니다. 어떤 약자 는 지키고 어떤 약자는 지키지 않아도 되다는 말은 맹세에 없을 것입 니다. 검을 버렸다고 해도 이 분은 기사입니다. 이곳에 있는 약자와 책임이 있는 저 안의 약자를 모두 구하려는 옳은 행동이 아닐까요?" "..........." 기사들은 자신들을 쳐다보는 난민들과 영지민들을 묵묵히 둘러보 고, 몬스터들을 돌아보았다. 그들은 한 명씩 말에서 내려 진의 발 앞에 들고 있던 검을 버리고 투구를 벗어 내려놓았다. "전 모셔야 할 주군을 잘못 택했음에 기사직을 버리겠습니다." "전 지켜야 할 영지민이 이곳에 있음에 성의 기사직을 포기 하겠습니 다." "저희가문의 가훈은 '융통성'입니다, 레이디. 잠깐 휴직이라고 생각 하겠습니다. 성안에도 보호가 필요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들을 구 하러 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기사님들. 안에 억류되어 있거나 도움의 손이 가장 먼 저 가야할 사람들을 부탁드립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레이디." 숙연한 그들의 모습을 성벽 위에서 전투 준비를 하던 동료들이 내 려다보고 있었다. 진은 성문이 열릴 리 없을 것으로 예상하고, 기사들을 실프와 블루 와 와이즈와 몇몇 영지민들과 함께 나왔던 여행자 신분의 마법사들 에게 부탁해서 성벽 안으로 모두 돌려보내고. 블루에게 와이즈와 의논하게 해서 캠프 안쪽에 탈출용 이동 마법진 을 그리게 했다. 그리고 탈출자들을 위해, 성안으로 들어간 기사들 과 약속했던 성 안쪽 장소에 실프를 대기시켰다. 몬스터들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권티 성벽에 부딪힌 몬스터들의 함성과 고함소리가 달빛 아래 대기 를 찢듯이 울렸다. 쌓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깔끔하던 성벽이 몬스 터들이 달라붙어 그들의 그림자로 검게 얼룩지기 시작했다. 진은 아이들이 다수 포함된 주민들을 배려 해, 캠프 뒤로 사람들을 대피시켜 가슴 서늘한 전쟁의 장면을 보지 못하게 조치하고 용병 들에게 호위하게 하고 통제시켰다. "와이즈. 이쪽은 블루 혼자 할 수 있을 테니, 성안으로 가서 입구가 될 마법진 그려 줘. 릭?" "함께 가야지요. 혼자선 위험할 테니까요." "고마워." "당연한 겁니다, 진." '와이즈. 혹시 권티 영주가 와 있으면 성안에 있다는 마법진 없애고 그 아저씨 좀 잡아다 줄래? 희생이 커지기 전에 부탁해. 없으면 대 리라도 잡아와 줘.' [참고만 하라 더니 막 부리는 구나, 진.] '전쟁통에도 그런 소리가 나와?' [....알았다.] 와이즈는 릭을 데리고 성벽 안 엘프의 정령이 있는 곳으로 워프 해 갔다. 진은 몬스터들의 기괴한 함성소리를 들으며 달빛 아래 치러지고 있 는 인간과 몬스터의 전쟁을 지켜보았다. 밧줄 달린 갈퀴 같은 무기를 성벽너머로 던지는 오크들. 그것을 타고 기어오르다 위에서 던진 단검에 찔리거나 돌에 맞아 떨어지는 오크들. 성벽에 사다리를 걸치고 재빠르게 기어올라가는 고블린들. 목이 잘리고 배에서 피를 뿜으며 다시 성밖으로 떨어지 는 고블린들. 그 사이 인간 병사와 기사들이 간혹 팔이 잘리고 다 리가 잘려 따로 따로 분리된 채 성벽 아래로 떨어지는 것. 키 큰 거인을 연상시키는 오우거들이 인간들의 공성무기로 성문을 공격하며 내는 둔중한 소리. 성안의 마법사들의 공격 마법에 몬스터들이 타들어 가고. 얼음 화 살에 배가 뚫리고. 급히 조달한 끓인 물이 부어지고 바위가 떨어지 는 광경들....성벽아래에 우글거리고 있는 몬스터들의 피해가 컸다. 성문은 아직 견딜 만 해 보였지만 성벽 위의 병사들로는 오래 버티 기 힘들 것 같았다. 몬스터들의 고함소리에 섞여 사람들의 고함소리와 비명소리가 들려 오는 와중에 블루가 곁으로 와서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진....." 진은 엘프를 돌아보지 않았다. 몬스터들에게 성에 대한 책임이 없다는 말을 했을 때부터, 그가 울 것 같은 얼굴을 했던 것을 진은 알고 있었다. "....블루. 어쩔 수 없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정도야. 와이즈를 시켜 저들을 돌려보내 문제가 깨끗이 해결된다면 그렇게 했을 거 야. 하지만 아니잖아. 우리가 이곳에 오지 않았더라면 우리를 믿고 떨고 있는 저 사람들이 가장 먼저 희생되었을 거야." "하지만. 몬스터들도...병사들이나 귀족들도 살아야할 이유는 있을 거 에요." "그래. 그래서 최대한 희생을 줄이는 방향으로 갈 거야. 어차피 기 사들과 병사들은 싸우기 위해 검을 들고 있었으니 저항해야 해. 그 게 직업인 걸. 안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부자들의 노예나 하인들이 겠지. 투구를 벗은 기사들은 특권층이 아닌 그들을 구해 올 거야." 진은 성벽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약간 숙였다. "...남은 이들은 한번쯤 저들과 같은 상황에 처해봐야 해. 우리가 이 곳에 오지 않았다면 몬스터들을 돌려보냈더라면, 저들은 이 전쟁에 서 선택받지 못할 자들에게 계속 인간 취급받지 못하는 생활을 해 야했겠지. 생명의 무게는 모두 같아. 더 가진 사람이라고 더 귀한 목숨이 아니야." ".........." 진은 얼굴을 손으로 쓸었다. "그리고...난 인간이야, 블루. 이지를 가진 종족이라 가능한 최대한 존중은 해야겠지만. 난 인간이야...인간을 더 위할 수밖에 없어." "..........." "인간과 몬스터는 어쨌든 서로 싸워. 아까 그들의 눈 봤지? 그들에 게 가장 두려운 존재가 지켜보고 있는데도 할 말은 하고, 요구할 것은 했어. 저들의 투심은 본능이야. 달래는 것도 한도가 있고 권티 만이 아니라 메르사와 니소아까지 돌려 받으려면 이곳에서 결론을 내야 해." "...메르사와 니소아까지요?" "인간이 가꾼 땅이잖아. 그들은 농사를 짓는 것도 아니고 성이 필 요가 없어. 숲에서도 충분히 생활했잖아. 약탈만 하고 가꾸는 법을 모르는 그들에게 맡겨두는 것은 효율적이지 못해. 원래 저들의 고 향이고, 터전을 잃은 사람들이니 가능하다면 돌려주어야 하니까... 어쩌면 이 일을 계기로 공존할 길을 열 수 있을지도 모르지." 블루는 달빛을 받아, 밤인 데도 푸른 기운이 도는 진의 검은머리를 내려다보았다. 외면한 채 말하는 진에게 얼굴을 향해 달라고 말하 고 싶었다. 속눈썹의 그늘로 눈동자가 가려져서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잘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분명 그녀는 우울할 것이다. 블루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리고 그녀는...다툼의 소리에 귀 기울 이고 있는 것 같아 보였지만 미래를 보고 있었다. "진..." "왜?" "....무리하지 마세요." ".........." 진은 새벽이 가까워진 밤 공기에 실려오는 매캐한 연기 냄새와 피 비린내를 맡으며 권티 성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실프가 돌아왔다. 블루가 넓게 그려 놓은 탈출용 출구 마법진의 웅웅거리는 소리가 났다. 짧은 거리지만 이용할 수 있는 인원에 한도가 있어서 마법진은 여 러번 가동되었다. 하인. 하녀. 발목에 끊긴 쇠사슬을 단 노예. 병자. 노부. 노모. 피난 민 모습의 평민. 그들의 가족. 용병. 죄수. 여행자.... 그들은 도착하는 데로, 침착해진 캠프 주민들의 도움으로 공포와 불안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하고 있었다. "블루. 몸은 괜찮아? 마나를 너무 쓴 것 아니야?" "괜찮아요, 진. 정령석을 이용했거든요. 마나가 그다지 소모되지 않 아요." "정령석?" "네. 제게도 하나 있었는데, 마법사님이 하나를 더 주셔서 마법진의 발동력으로 썼어요." 블루가 가리키는 둥근 마법진의 중앙엔 묘한 빛깔의 작은 돌이 은 은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와이즈에게 받은 통신용 마법구슬 안에 들어있던 것 보다 더 크고 약간 다른 빛을 띄고 있는 데다 색도 선 명했다. "귀하고 비싼 것 맞지?" "엄청 귀하고 몹시 비싸지요, 진." 블루는 진의 물음에 웃으며 대답했다. 진은 성벽 쪽으로 신경을 돌렸다. 상황은 몬스터들의 우세로 기울고 있었다. 두꺼운 철판의 성문은 이미 한쪽이 부서지고 일그러져 안으로 비집고 들어 갈 공간이 생 기고 있었고, 몸집이 작은 고블린들이 그곳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오우거들은 고블린들과 자리를 바꿔 그들의 사다리를 이용해 올라 가서 성벽 위로 그 큰 몸집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점프력을 보이며 성벽 안으로 사라지고 있었고, 가장 수가 많은 오크들도 병사들의 저항을 뚫고 성벽 위로 넘어가는 놈들이 늘고 있었다. "와이즈. 빨리 좀 와라." 익숙해진 웅웅거리는 소리가 다시 들리자, 진은 나무들에 가려진 캠프 안쪽에 자리한 마법진으로 갔다. 모습을 드러낸 사람들은, 성안으로 들어갔던 기사들 중 일부의 견 제를 받으며 나타난. 함께 저녁식사를 했던 호위들을 데리고 온 오 하미 이지스였다. 진의 눈에 총기가 더해졌다. "레. 레이디. 저...무례를 사과 드리러 왔습니다." 진은 그를 무시하고 투구를 쓰지 않은 기사들에게 안의 상황을 물 었다. "전세가 불리합니다, 레이디. 대피가 가능한 주민들은 대부분 옮겼 습니다만....릭페르경께서 이지스경을 보내셨습니다." 그 살집 많은 몸에 전시인데 갑옷도 걸치지 않고, 여전히 번쩍거리 는 보석들을 주렁주렁 매단 차림의-옷 안쪽이 두툼한 것으로 보아 귀중품을 챙겨 도망치는 폼이 분명한-영주대리는 새파랗게 질려 있 었다. "차기 영주님. 사과를 받아들이지요. 용건이 끝나셨으면 지휘해야 할 병사들에게 돌아가시지요." "고. 고맙...아니, 저...권티영주는 장인이시고, 이미 장인께서 전군을 통솔하고 계시기에...저. 제 힘은 그다지 피. 필요가...." 그와 함께 온 호위들은 호위가 아니라 죄수를 연행해 온 표정들이 었고, 투구를 벗은 기사들도 그를 알아 본 뒤쪽 주민들도 모두 비 웃음과 경멸이 가득한 눈으로 옛 주인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곳은 대적할 힘이 없어 몬스터들에게 투항한 사람들의 캠프입니 다만 안전하지요. 목숨을 구걸하러 오셨나요?" "..........." "하지만. 아무리 생명을 부지하고자 몬스터들에게 항복했다고 해도, 제 몫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이곳에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차기 영주께서도 이곳에 피신해 계시려면 다른 분들과 마찬가지로 일을 하셔야합니다." "네. 네. 물론이지요. 영지민들을 통솔하겠습니다." 여기 저기 야유와 비웃는 소리에 그는 다시 모욕 받았다는 얼굴이 되어서 뒤를 돌아보았다. "기사단을 데리고도 성을 지휘해서 지키지 못하셨던 분이, 아무 힘 도 없는 주민들을 어떻게 몬스터들에게서 보호한답니까?" "그. 그럼. 손님으로라도....사례는 하겠습니다. 여기..." 진은 웃기지도 않는다는 표정으로 고용 용병들을 불렀다. "내게 하녀 일자리 정도는 주시겠다고 하셨지요? 그렇게 관대한 호 의에 답례를 하지 않아서는 예의가 아니지요. 돌아가실 의향이 없 으신 듯 하니 이곳에서 하인 일이라도 하시며 그 귀한 생명을 부지 할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전 시종도 하인도 필요 없으니 주민들의 심부름을 하고 시중을 드십시오." "레. 레이디!" "우리에게 투항한자입니다. 캠프주민들의 하인이 되었으니 그에 걸 맞는 대우를 하십시오." "넷. 아가씨." "여. 영애!...이보게! 난 귀족일세!" 그의 반발은 묵살되었고, 그 자리에서 보석 달린 겉옷이 벗겨지고 챙겨 온 보석과 금화를 빼앗겼다. 그는 용병들에게 잡혀 발버둥을 치며 호위들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그들은 눈도 주지 않았다. 호위기사들은 진의 발치에 검을 던졌다. "저희도 권티 성의 고용 기사직을 버리겠습니다, 레이디." "환영합니다." "레이디..." 그들은 딱딱한 얼굴에 주름이 가도록 표정을 구기며 어렵게 입을 열었다. "...말씀하세요." "기사도 사람입니다. 동료들과 부하들은 죽음을 향해 가고 있습니 다....그들도 구해주십시오." "최대한 구할 것입니다. 그리고 살기 위해 투항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기사님. 자신의 가치를 달리 이용하는 것이지요. 살 아남으면 재기할 수 있을 기회는 얼마든지 다시 붙잡을 수 있으니 까요." "...그들도 알고 있을 겁니다, 레이디." 그들은 기사다. 아무리 명예로운 칭호에 얽매이고 있다고 해도 눈앞에 벌어지고 있 는 일에 대해 한가지 길. 주입과 비슷한 교육을 통해 얻은 신분과 입장에 대한 가치관만으로 세상을 살리는 없으리라. 그들도 때로 가진 이념에 반기를 들 줄 아는, 감성의 영향을 깊게 받는 이성을 가진 '인간'이다. 오하미 이지스는 평상복 차림으로 눈을 반짝이고 있는 주민들에게 끌려갔다. 진은 영지민들에게 수모를 당하기 시작하는 그에게서 눈 을 떼고, 혼란스런 전쟁의 여파. 피 바람이 일고 있을 보이지 않는 성벽 너머를 조급한 마음으로 돌아보았다. 성은 몬스터들에게 함락되어 가고 있었다. "와이즈..." 진의 중얼거림에 대답하듯 와이즈의 목소리가 드디어 들렸다. [진. 네가 오는 것이 좋겠다. 엘프에게 마법을 쓰는 척 하게 해라.] "블루. 이동마법 써 줘!" "네. 진." 블루가 마나를 유동시키기 시작했고, 진은 기사들과 용병들에게 캠 프를 맡기고 곧 자리에서 사라졌다. * 권티 성 내부는 아수라장이었다. 목이 잘리고 배에 구멍이 나고 불타고 있는 몬스터들의 시체와, 전 투에 참가한 평민들의 시체. 병사들의 시체. 마나가 고갈 된 마법사 들의 시체도 보였고, 성문과 성벽을 넘어 온 몬스터들과 치열한 접 전을 벌이고 있는 기사들과 병사들의 비명과 고함소리가 병장기 부 딪히는 소리와 함께, 달빛으로 푸른 기운이 도는 성안에 어지럽게 메아리치고 있었다. 진은 투명마법을 시전하고 있는 와이즈 곁으로 워프했다. "와이즈?" "옆에 있다, 진." 진은 곁에 와이즈의 기척을 확인하고, 서있는 성벽 초소 담 위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몇 미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릭은? [기사들과 마법진을 지키고 있다.] '권티 영주는?' [저기 기사들이 에워싸고 있잖냐. 그도 도망가려나 보다. 마법진은 이미 없앴으니 본성으로 가 봐야 소용없겠지만.] 나이 지긋한 화려한 은색 갑옷의 귀족은 열 두어 명의 기사들에게 둘러 쌓여, 몬스터들을 헤치며 본성 쪽으로 돌아 갈 퇴로를 확보해 주는 기사들의 호위를 받고 있었다. '영주의 가족들은 피했어?' [상황이 불리해 지기 전에 마법진을 없앴다. 성의 마법사들이 다시 그리고 있겠지만, 장거리용이라 시간이 꽤 걸릴 일이니 아마 남아 있을 거다.] 점점 죽어 가는 몬스터와 인간이 늘고 있었다. 진은 보이지 않는 와이즈의 기척에 대고 급히 말했다. "영주를 잡을 테니까 타이밍 맞춰서 몬스터들을 멈추게 해 줘. 와 이즈." [알았다.] 진은 걸치고만 있던 검 집에서 검을 빼들고 영주의 호위들을 공격 하고 있는 몬스터들 사이로 점프해서 뛰어내렸다. 기사들을 향해 던지려던 몬스터의 도끼를 든 팔이 진의 검 손잡이 에 쳐내졌다. 근처에 몰려있던 몬스터들은 갑작스럽게 나타난 진의 공격으로 배를 걷어 채이고 검을 든 손이 비틀리고 어깨로 받은 힘 에 밀려서 나가 떨어졌다. 진은 주먹과 발과 검 손잡이를 최대한 이용해 온 몸으로 춤을 추듯 맹렬히 움직여 영주를 호위하고 있는 기사들로 향하는 길을 텄다. 상대하고 있던 몬스터들이 길을 비켜 주듯 우수수 넘어지며 나가 떨어지고, 몬스터의 생김새와 구별되는 인간의 형체가 눈에 잡히자 기사들은. 적들이 있던 방향의 우방에게 내리치려던 검을 급히 회 수했다. 진은 시간을 아끼기 위해 다시 달려드는 몬스터 두 놈에게 발 차기를 하며 자신의 모습을 확인한 기사들의 뒤에 있는 영주에 게 소리쳤다. "진 폰 리툰이라고 합니다. 권티 영주님이십니까?!" "....그렇소." 기사들이 옆으로 한 걸음 물러서 진과 영주를 마주 보게 했다. 진은 가장 먼저 저지 당했다가 일어난 오크의 공격을 다시 내치며 말을 이었다. "영주님의 기사들과 병사들의 시체를 밟고 도망가시는 중입니까?!" "무례하오, 영애! 지원을 부르기 위함이오!" "모두 죽은 다음 부르는 지원으로 저들이 되살아납니까? 아직 죽음 당하지 않은 병사들은 어떻게 해야하는데요?! 지원병이 어디에서 언제 옵니까?! 사람구실도 못하는 인척에게 돌봐야할 영지를 떠맡 기시더니, 이젠 지켜주던 자신의 검 마저 버리십니까?!" "방법이 없잖소! 이야기는 들었소. 영지민들을 모두 빼돌린 영애의 탓이 아니오!" 진은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몬스터가 떨어뜨려 뒹굴고 있는 도끼를 발등으로 걷어 올려 검과 바꿔 잡고, 도끼 날 등으로 달려드는 몬 스터들을 몸을 여러 번 회전시키며 시간차를 두어 끊어 치듯 후려 쳤다. 영주의 뒤와 옆을 보호하고 있는 기사들은 마주하고 있는 몬스터들 에게 계속 검을 휘두르고 있었지만, 진의 앞은 몬스터들이 짧은 반 원을 그리며 모두 넘어지고, 도미노처럼. 그들 뒤의 몬스터들도 동 료의 몸에 부딪혀 전진하던 발걸음이 저지 당했다. 진은 영주의 지적에 대답했다. "그들이 있었으면 가족과 더 안전하게 도망가실 수 있었겠지요. 참 안된 일이네요. 하지만 이젠 늦었지 않습니까?" "무례하오!....마법진이 사라졌다고 들었소. 영애의 짓이오?!" "내 짓이든 아니든 코앞에 죽음이 와 있는데 무례나 따지는 교양 높은 영주님. 가족과 아직 살아 있는 부하들만이라도 구하고 싶으 시면 투항하십시오!" "무슨 망발이오! 몬스터들에게 투항하느니 자결하겠소!" "그럼. 자결하십시오!!" "..........." 몬스터들은 빠르고 높은 그들의 오가는 대화 중에도 영주의 뒤쪽에 서 계속 공격을 하고 있었고 기사들은 그들을 막고 베고 있었다. 진은 고함을 지르며 다시 달려드는 몬스터의 검을 막고 밀어내며 옆쪽에서 기사가 휘두른 검에 목이 잘리고 팔이 떨어져 튀기는, 이 지를 가진 몬스터의 붉은 피에 머리카락과 어깨가 물들어갔다. 스러져 가는 달빛을 받으며, 갑옷도 입지 않은 채 몬스터를 상대로 놀라워 보이는 싸움을 하고 있는 귀족영애의 서슴없이 내뱉는 자결 하라는 말에, 주름지기 시작한 50대 권티 영주의 얼굴이 더 일그러 지고 굳어졌다. 진은 시간을 더 지체할 수 없다는 판단으로 뜸들임을 그만두고 마 지막 통첩 같은 느낌의 살벌한 어투로 다시 외쳤다. "자결도 못하시고! 도망갈 곳도 없습니다! 몬스터들에게 체면상 항 복도 못할 일이니. 그렇다면! 제게 투항하십시오!!" 진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몬스터를 막던 몸을 영주에게로 향하고 검을 휘둘렀다. 권티 영주는 지쳐 들어오는 진의 검을 한번도 막지 못했다. 나이 들고, 수련을 하는 생활을 오래 전에 그만두었는지 그 는 동작에 민첩함도 기운도 없었다. 그의 갑옷은 옆구리와 배 부분을 공격한 진의 검에 땅. 땅. 소리가 나고 여기 저기 일그러졌고, 영주는 충격에 비틀거렸다. "레이디!!" 진은 몬스터들을 상대하고 있던 호위들의 외침에 아랑곳하지 않고, 휘청이는 영주의 다리를 걸어 앞으로 넘어뜨리고 그의 투구를 발끝 으로 걷어차 벗겨냈다. 진은 엎어져 있는 그의 목 부분을 발로 꽉 밟고 머리에 검을 꽂는 동작으로 들이댔다. "권티 영지의 총책임자가 잡혔네요. 전투를 멈추십시오!" "레이디!!" 진은 기사들의 반발을 다시 무시하고, 적을 공격한 이상한 인간-그 러고 보니 낯익은 인간. 진을 공격해야하나 말아야하나 잠시 멈칫 하고 있던 몬스터들을 향해, 그 뒤 모든 몬스터를 향해. 목청을 최대한 높여 소리를 질렀다. "몬스터 여러분! 성밖에서 투항했던 진. 입니다! 잠깐만 멈춰주세 요!" [멈. 춰. 라.] 진의 목소리는 공포와 악에 받쳐있는 병사들과 투심이 최대한 올라 있는 몬스터들의 귀에 들어갈리 없었지만, 인간들과 구분해서 음성 전달 마법을 쓴 와이즈의 음성. 드래곤의 음성은 몬스터들의 머리 속에 똑똑히 전달되었다. 하지만 전투는 금방 멈춰지지 않았다. 진은 멈칫거리는 적들에게 검을 휘두르는 기사와 병사들을 막기 위 해 이어 고함을 질렀고, 와이즈는 실프를 불러 지시했다. "권티 영주는 사로잡혔다! 모두 공격을 멈추지 않으면 영주의 머리 에 구멍을 내주겠다! 살 기회를 주기 위함이다. 몬스터와 목숨을 내 걸고 싸우는 것을 인생목표로 하고 있는 자가 있다면 얼마든지 기 회를 만들어 주겠다! 지금은 멈춰라!" 진은 같은 뜻의 말을 여러 번 외쳤고, 와이즈의 실프는 진의 목소 리를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달빛 아래 성벽 주위에 퍼뜨렸다. 진의 협박을 담은 저지는 바람을 타고 어두운 성안 곳곳으로 흘러 갔다. "권티는 패했다. 모두 멈춰라!!" 몬스터들의 공격과 병사들의 저항도 드래곤의 명과 진의 명령으로 움직임이 잦아들어 갔다.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가 사라지고 침묵이 내려앉았다. 아니, 부상자들과 죽어 가는 몬스터들과 사람들의 신음 소리만 남았다. 오크무리의 대장과 몇 남지 않은 오우거 중 하나와 대표가 바뀐 고 블린 하나가 검을 내려뜨린 기사들의 견제를 받으며 영주의 목에 발을 올리고 있는 진에게 모여들었다. "인간 여자. 그륵. 성안은 네 책임이 아니라고 그륵. 했다." "그랬었습니다. 하지만 동족이 계속 죽어감에 너무 안타까워서 성 의 대장을 사로잡았습니다. 이자도 여러분께 투항할 것입니다." "....믿을 수 없다. 받아들일 수 없다. 우리의 동족이 더 많이 죽었 다." "침략에 저항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않습니까, 고블린님. 이 사람 들의 항복을 받으시면 목적한 권티 성을 동료를 더 잃지 않고 함락 할 수 있게 됩니다. 졌음을 인정하고 투항 한 사람들을 계속 공격 하는 것은 의미 없는 복수이며, 악한 전투 욕으로 살육이 될 뿐입 니다." "그륵...." "저들은 우리의 적이다. 인간 여자, 진. 저들은 네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내 생각도 그렇다." "제 말을 듣도록 만들겠습니다. 기다려 주세요." ".........." 진은 주위를 경계하며 드래곤의 모습을 찾으며 살기와 투심을 발산 하고 있는 몬스터들이 보는 앞에서, 발에 힘을 한번 준 후. 눌린 신 음소리를 내는 권티 영주의 두 손을 뒤로 꺾어 잡고 일으켜 세웠 다. "검을 버리시지요. 기사님들. 당신들을 방패로 도망가려는 귀족의 신상에 목숨걸어야할 이유가 있습니까? 계속 병사들과 동료들을 희 생시키겠습니까?" "레이디! 우린 기사입니다!" "단지 기사란 부름 말로 맹목적인 충성이 옳습니까, 기사로의 길에 필요한 의식 있는 덕망이 타당합니까! 패전으로 가고 있는 상황에 서. 함락될게 뻔한 상황에서. 한사람이라도 더 살릴 궁리는 안 하시 고 전멸로 가게 하는 일이 진정 기사의 도리입니까?! 주군의 명에 목숨을 걸었다면! 그렇다면! 항복을 의미하는 주군의 명도 받드십 시오!" 진은 잡고 있던 권티 영주의 손목을 한 두 번 거칠게 흔들었다. "권티 영주. 난 드리얀의 진 폰 리툰이다! 전쟁통에 끼어 들어 널 사로잡아 인질로 쓰고 있지만. 이곳은 정당함을 내세울 수 없는, 어 떤 비겁한 방법도 용납되는 전쟁터이다! 네가 가진 권티의 모든 소 유권을 양도받겠다! 몬스터들에게 항복하지 못하겠다면. 내게 투항 하라!" 진의 허스키하고 높은 목소리는 살기와 힘을 실어 모두의 가슴을 서늘하게 했다. 그녀는 권유가 아닌, 전사로 승전 자로 '명령'을 하 고 있었다. 상대하고 있던 몬스터들에게서 신경을 떼지 않고 있었 지만 기사들과 병사들은 거칠게 뛰는 심장소리를 누르고 누르며 대 치 휴전상태의 전쟁터에서 유일한 여성의 목소리에 귀를 바짝 세우 고 있었다. "내게 투항하겠는가, 권티 영주. 아니면 패전 측 대표로 즉결되겠는 가!" 권티 영주는 딸 뻘 밖에 되지 않는 여자의 작게 느껴지는 손에 뒷 짐진 팔목이 휘어 잡혀 눌리고 흔들리며, 그 저항이 불가능한 힘에 놀라움과 두려움이 고개 들었지만. 자신이 겪고 있는 수치와 입장에 일그러지고, 그녀의 일방적인 말 에. 그녀의 압박감을 주는 고함소리에. 믿을 수 없게 단 한 명, 그 것도 기사도 뭣도 아닌 귀족여자의 요청으로 휴전 된 전투에. 당장 이라도 다시 검과 도끼를 휘두를 태세를 하고 있는 살인집단에. 지 켜보는 부하들의 원망과 탄원하는 눈빛에...그녀가 하는 말의 의미 에 점점 처참한 표정이 되었다. 릭이 기사들과 계단을 밟아 몬스터들과 병사들 사이를 가로질러 달 려 오는 것이 보였다. 영주의 뒤쪽에 서 있던, 이젠 억류된 영주와 진의 뒤쪽에 서 있던 기사가 진의 목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영주의 반대편 진의 오른쪽 에 있던 기사 중 한 명도 검을 내리쳤다. 진은 위험을 감지하고 방어했다. 들고 있던 검에 힘을 실어 옆에서 지쳐오는 검을 향해 팔을 강하게 내뻗고, 어깨를 숙이고 머리를 휘 저어 뒤에서 공격한 검을 피하며 검을 휘두른 뒤쪽 기사의 목 부분 을 향해 조절되지 않은 완력으로 발 차기를 했다. "까-앙-" "빠각." 진이 휘저은 검은 옆에서 공격했던 기사의 검을 부러뜨리고 이어 그의 갑옷으로 보호되지 않은 어깨 아래 부분 팔을 자르며 지나가 겨드랑이 밑 갑옷을 일그러뜨리고 충격음을 냈다. 피해 버린 표적에게 다시 검을 내리치기 위해 팔을 들었던 뒤쪽의 기사는 무장의 틈새인 이음새 부분. 목 부위를 뚫고 들어 온 진의 뒤꿈치에 목뼈가 부러지는 소리를 내며 나가떨어졌다. 권티 영주는 진의 몸무게를 손목에 잠깐 느꼈지만 여전히 잡혀있었 다. "진...!" 릭이 기사들과 곁으로 와서 다시 공격과 저항이 있을지 모를 영주 측 기사들을 견제했다. 진은 즉사했을 것이 분명한 뒤에서 나뒹구는 기사를 무시하고, 피 를 내뿜는 잘린 팔에 왼손을 가져가는 고통스러워 보이는 주이슨 기사의 얼굴을 경멸과 분노와 살기로 타오르는 눈으로 노려보며 말했다. "도주를 불가능하게 만들어 드려서 미안합니다, 주이슨 기사? 몬스 터들에게 굽히는 것은 싫으실 테고, 평생 모신 인덕 부족한 귀족나 리를 충심으로 모시고자 부하들을 버리고 빠져나가게 되지 못할 상 황을 만들어 드린 것에 사과 드리지요." "....도주하려던 것이 아니오!" "당신은 개입니까, 기사입니까?! 굶어 죽어 가는 사람들을 명령이라 는 이유로 외면하더니! 지배자의 탈을 쓴 이기적이기만 한 주인의 안위가 어찌 동료와 부하와 주민들의 목숨보다 중요할 수 있습니 까! 당신의 목숨이 그 정도 가치뿐이라면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기 꺼이 처분하는 것을 도와드리지요!" "........" "다른 기사님들도 머리가 있다면 열심히 굴려서 판단하십시오! 난 적대에 적대로 대응합니다!" "........" 진은 죽어 넘어져 있거나 연기를 내고 있는 시체들과, 비참한 표정 의 기사들과 압도적으로 많은 수의 적을 지척에 두고 절망을 거둬 달라는 말없는 탄원을 보내고 있는 다수의 병사들을 돌아보고. 다 시 영주를 잡은 손을 흔들며 외쳤다. "선택해라. 권티 영주! 내게 항복하겠는가. 아니면 마법진을 이용하 지 못해 도망가지 못하고 남아 있는 가족과 성밖으로 도망 나온 사 위와 함께 처형당할 것인가! 말해두지만 난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다!" "........" 진은 찡그린 릭의 옆얼굴과 파랗게 질린 주이슨 기사와 그의 후배 나 동료기사 앞에서. 그녀의 순식간의 방어와 공격에 고개를 갸웃 하며 진의 살기 어린 목소리를 듣고 있는 몬스터 대표들 앞에서. 권티 영주에게 강압적인 선택의 기회를 다시 주었다. "....투항하면 나와 내 가..." 뒷일에 대한 약속을 받으려는 의미의 말에 진은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다. -사람이 이렇게 죽어 넘어져 있는데! 자신의 방패와 자신 의 검이 자신이 보호해야할 그들이 죽어갔고, 피할 수 없는 죽음과 맞서고 있는데!- 진은 그의 다리를 감싼 갑옷의 이음새 부분인 무릎 부위를 강하게 걷어찼다. "억!" "진!" 다리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낮게 들리고 충격을 받아 일그러진 갑옷 이음새가 영주의 살과 부서진 뼈에 박혀 들어감을 알자 기사들은 더 경직되었다. 릭 마저 가슴이 서늘해졌다. "내게 전권을 위임하고 투항하겠는가, 권티 영주!" "....위. 임...한다..." 진은 손을 풀었고 그는 부상당한 다리 때문에 바닥으로 무너졌다. 진은 부축을 하려는 그의 호위들의 움직임을 묵인하고 기사들에게 다시 말했다. "난 이제 권티의 주인이다. 내 명을 따르겠는가! 아니면 잔당처리 대우를 받겠는가!" "....우린 권티 성의 권티 영주의 기사입니다. 주군으로의 맹세를 한 기사가 아닌, 병사들과 기사들은 새 영주를 뵙니다." 진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은 기사는 말하며 무릎을 꿇었고, 일부를 제외한 다른 기사들과 지켜보던 병사들도 물결이 넓게 퍼지는 모양 으로 고개를 숙여 나갔다. 진은 팔에서 계속 피를 쏟고 서 있는 주 이슨 기사를 비롯한 몇몇 영주의 호위기사들을 돌아보았다. 신음하는 영주를 부축하던 기사는 진의 눈길에 투구를 벗으며 대답 했다. "주군이 항복하셨으니 저항은 의미가 없습니다. 저희도 항복합니 다." 진은 릭의 한숨 소리를 들으며 몬스터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이제 전 권티 성을 책임지는 대표이기도 합니다. 전 여전히 당신 들과 싸우지 않겠습니다. 다시 투항합니다." [받. 아. 들. 여. 라.] 몬스터들은 보이지 않는 드래곤의 음성에 움찔거리며 대답했다. "그륵." ".........." "....받아들인다, 인간대장. 진. 살려주겠다." 진은 다시 그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권티 성은 진에게 탈취되었다가 몬스터들에게 다시 넘어갔다. 동녘이 밝아오고 있었다. 진은 들고 있던 무기를 어깨에 걸치거나 바닥에 꽂고 있는 몬스터 무리의 주시를 받으며 본성에 남아 있는 사람들을 릭과 기사들을 보내 연행하거나 보호해 오도록 하고, 권티 영주와 포로가 된 기사 들을 병사들에게 호위 시켜 성벽 밖으로 내보냈다. '와이즈. 성안에 사람의 기척 있어?' [...없다.] 실프가 실어간 진의 권티 성 패배와 투항에 대한 말은 대부분에게 잘 전해졌고, 권티 성안의 모든 살거나 죽거나 부상당한 인간들은 성에서 철수되었다. 진을 마지막으로 문이 없어진 성문을 통해 모 든 인간들이 밖으로 나가자, 권티 성은 몬스터들이 일제히 내지르 는 귀가 멍멍한 승리의 함성에 묻혔다. 진은 몬스터들의 자축으로 성벽에 부딪혀 메아리가 되고 있는 소리 를 들으며 성밖으로 나가 캠프촌 앞에 모여 있는 성 없는 권티를 둘러보았다. 그들은 부상병들을 부축하거나 전우들의 시신을 가족에게 돌려주거 나 묵묵히 서 있거나 울먹거리고 있었고, 한결같이 자신들의 운명 을 맡긴 한 사람에게 한 명의 귀족에게 신경과 눈길을 집중하고 있 었다. 진은 목을 가다듬어 의지함에 망설임 덜도록. 희망을 갖도록. 힘을 실어 목청을 돋궈 말했다. "주. 민. 여. 러. 분. 여러분은 가진 것도 남은 것도 없게 되었지만, 주저앉을 필요는 없습니다. 물질은 잃어도 다시 얻을 수 있지만 한 번 잃으면 되돌릴 수 없는 가장 중요한 것은 아직 남아있습니다. 여러분은 살아 있고, 잠시 놓쳤던 꿈도 신념도 다시 키울 수 있습 니다. 기운을 내어 용기를 찾아 먼저 시작하는 자가 더 빨리 더 높 게 도약합니다. 희망을 잃지 마십시오. '희망'은 언제든 어디서든 존 재합니다. 여러분은 할 수 있습니다. 도와드리겠습니다." 진의 짧은 연설은 팽배해 있던 패배감과 앞날에 대한 불안과 부상 으로 신음하는 사람들의 사이를 비집고, 몬스터들의 잦아드는 함성 속에서 기원의 힘을 담아 퍼져 나갔다. -네. 믿어요. 아가씨를 믿을 거 에요.- 진은 자신을 향해 고개를 주억거리거나 숙이는 사람들에게서 실프 가 미풍에 실어다 주는 갸날픈 소리처럼, 울먹이는 그들의 마음의 소리를 들은 기분이 되었다. 블루와 릭과 투명마법을 해제하고 캠프로 워프 한 와이즈가 곁으로 왔고, 진은 정비작업에 들어갔다. * 상인 베니키는 몬스터들이 극성이라는 사키리온을 경유하지 않고 디메토르로 향하던 길에 디메토르의 국경을 앞둔 벌판에서, 지나오 던 나라와 도시에서 교환하고 사들인 잡다한 상거래 물을 실어 나 르던 나귀들이 지쳐 운행이 더디고, 그 중 한 두 녀석이 돌부리에 걸려 다리를 삐는 바람에 벌판에서 밤을 새게 되었다. 그는 디메토르의 관문인 매니스로 향하던 마차를 수레가 뒤집혀 훼 손 된 물건을 빠른 시간 안에 처분하고자, 아직 몬스터 난의 소문이 없는 사키리온의 권티로 여정을 고쳐 잡고 고용한 용병들과 함께 이른 아침 야영한 곳에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가는 길에 합류한 몇몇 여행자들과 도착한 그는, 하루 밤사 이 몬스터 떼에게 성을 뺏기고 투항해서 살아남은 성 밖 사람들과 마주쳤고. 그들의 대표로, 피곤으로 흐려 보였지만 아름다운 남청색 눈의 아가씨와 면담을 하고 운반하고 있던 물건들과 말과 마차까지 모두 팔았다. 두둑한 돈 자루를 가지고 호위 용병 몇 사람만 데리고 그녀의 부탁 과 지시로 베니키는, 그녀의 엘프 마법사가 그려 준 마법진에 올라 디메토르 매니스의 영주에게 전하는 전보를 받아들고 워프 해 갔 다. * 땅거미가 질 무렵. 성 밖 캠프촌은 겨우 정돈되어 자리를 잡았다. 오니가라의 의술의 신 메디컬아트 신전에서 받았던 일부 포션의 도 움과 마법사들과 사제의 도움으로 부상자들의 치료도 마무리가 되 어갔고, 주민들은 진의 무한 마법자루와 권티를 방문한 상인에게서 구입 해 전담 받은 식료품과 생활용품으로 임시 잠자리를 만들고 음식을 만들어 나르고 세탁과 수선이 필요한 옷가지들을 모두에게 서 받아들고 일감으로 썼다. "레이디. 장례 준비가 끝났습니다." 진은 먹고 있던 저녁 식사용 잡탕 스프를 둘둘 마저 마시고 자리에 서 일어났다. 캠프 건너편 성벽과 약간 떨어진 나무가 드문 평지에 는 성벽 주위에 널브러져 있던 몬스터들의 사체를 모아 묻은 무덤 과, 동료나 가족들의 작별인사가 끝난 병사들의 주검이 장사를 지 내기 위해 한쪽에 모아져있었다. 진은 장례의 주관을 맡긴 세레니프이스 사제와 동료 병사들과 사망 자 가족들이 모여 기다리고 있는 그곳으로 걸어갔다. 하던 일을 멈 추고 일행과 다른 주민들도 대부분 일어나 따라 나섰다. 장례식이 시작되었다. 시신들은 하나 하나 일행과 있는 진의 앞을 지나쳐, 사제 앞에서 신성력을 풀어 넣은 성수에 손끝을 담았다가 뿌리는 물방울을 얼굴 에 맞고 기도문을 들으며 구덩이 안에 놓여졌다. "...당신들의 인생은 값진 것이었습니다. 당신들의 희생으로 당신들 의 가족들과 동료들이 살아남았습니다. 물질계에서의 짧은 삶에 따 르는 모든 미련과 원한을 버리고 카르마(윤회)로 돌아가길 빕니다. 주신 세레니프이스의 이름으로. 생에 따른 모든 무게에 안식을 기원 합니다." 진은 넷. 다섯. 열둘. 열아홉. 스물 셋. 서른. 서른 일곱... 마흔 여 덟...일흔... 수를 세고 있었다. 길게 느껴지는 반복되는 사제의 기도 는 달빛이 강해진 어둔 주위에 침묵하거나 훌쩍이는 사람들의 귓가 를 스치고 지나갔다. 비참한 모습의 마지막 차례의 시신이 놓여지자, 주위에 서 있던 사람들은 흙을 한줌씩 쥐어 구덩이 안으로 던졌다. 사제의 허락으로 곧 흙이 덮여졌다. 땀방울을 닦으며 일꾼들이 매장을 끝낸 무덤 가에서 물러나자, 모두 고개를 숙이고 각자 마지막 기도를 올렸다. 스산하고 애증 가득한 단체 장례 절차가 모두 끝나자 사람들은 다 시 캠프로 돌아가거나, 일행과 서 있는 진을 돌아보았다. 달빛 아래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진은, 새 흙이 덮여져 진해 보 이는 넓은 무덤 가를 한 걸음 한 걸음 짧은 문장을 또박또박 중얼 거리며 걷기 시작했다.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아들을 잃거나 남편을 잃거나 동료를 잃거나 부하를 잃은 사람들은 진의 행동에 주춤하다가 얼굴을 돌렸다. 몇몇의 눌린 울음소리가 다시 새어나왔다. 와이즈는 죽은 자들 한사람 한사람에게 일일이 말하고 있는 진의 사죄의 말에 얼굴을 찌푸렸다. 릭도 굳은 얼굴로 무덤 가를 돌며 계속 뇌까리고 있는 진의 말과 걸음을 지켜보았다. 블루는 하프를 들고 있지 않은 두 손을 꽉 맞잡고 심장 부위에 손 을 가져가지 않으려고 애쓰며 눈물을 참았다. 진은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지만, 걸음걸음 고행을 하듯 핏방울을 떨구는 느낌으로 다리를 움직이고 입을 열어 말하고 있었다. 권티 성벽 안에 있는 모든 식료품과 저장실의 포도주를 퍼다, 부어 라 마셔라 하고 있던 몬스터들은. 경계를 위해 성벽 초소에 자리를 잡고 있던 동료들에게 항복한 인간들이 모여서 무언가 하고 있다는 말을 전해 듣고, 하루 종일 연 술 파티에도 취하지 않았거나 덜 취 한 놈들이 성벽에 모여 고개를 빼고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만해라, 진." "진. 그만하세요. 됐어요. 그분들도 모두 들었을 거 에요." "진." "레이디..." "아가씨. 아니, 영주님. 괜찮습니다. 아들녀석은 원통해 하지 않을 거 에요. 기사가 되고 싶어했던 녀석이니, 오히려 제일 용감했다고 자랑스러워 할겁니다." 진은 시신의 수만큼 걸음을 걷고 말을 멈췄다. 그리고 애도와 사과 를 담아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당신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내 카르마(업보)가 될 당신들의 죽음이 어떤 형태로 오든 피하지 않고 성의껏 맞서겠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몸을 돌리는 것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쉬는 사람들 앞에서 진은 조 금 떨어진 몬스터들의 무덤으로 다시 걸어갔고, 엉거주춤하며 사람 들은 조용히 따라나섰다. 진은 몬스터들이 묻혀 불룩해진 땅에 대 고 다시 허리를 깊게 숙였다. "미안합니다. 당신들도 이지를 가진 존재지요. 인간과 다른 타종족 으로 우리의 적이었지만 당신들의 죽음에도 책임이 있음을 인정합 니다. 애도를 표합니다. 당신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노력하겠습 니다. 당신들의 죽음 역시 내 카르마로 언젠가 대가를 치루게 될지 모르나 역시 회피하지 않고 맞서겠습니다. 윤회로 돌아가 새 생을 맞길 빕니다." 성벽 위의 몬스터들도 진의 행동의 의미를 알았고, 몇몇 청각이 뛰 어난 놈들은 그녀가 하는 말소리도 약하게나마 알아들었다. 그들은 갸웃거리거나 웅성거림을 만들었고, 진은 부서지고 찌그러 져 떼어낸 성문 일부 조각을 비석으로 세울 것을 지시하고 달빛 가 득한 대기를 가로질러 캠프로 돌아갔다. 진은 경비병을 세우고 사람들을 모두 쉬게 하고 온기가 남아 있는 아궁이 앞에서 모포를 두르고 잘 준비를 했다. "진. 영주와 그의 가족들과 포로들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내일 얘기 해, 릭. 그들도 쉬게 해. 놓치면 안되니까 감시 철저하 게 해 줘." "그러지요." 블루가 잠자리를 다시 봐 주었고, 진은 습기가 올라오는 것을 막아 주는 야영용 깔개 위에서 피곤에 절은 몸을 눕히고 잠을 청했다. 옆에 앉아있던 블루는 잠든 진의 얼굴 위 흐트러진 머리카락에 손 을 가져가다가 차갑게 느껴지는 기운이 엄습함에 흠칫하며, 마법사 들의 천막을 향해 가며 지나치는 와이즈를 올려다보았다. "...머리카락이 불편하실 것 같아서요." "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블루님." 블루는 변명 같아진 자신의 말에 얼굴이 약간 붉어져서 다시 진의 얼굴로 고개를 내렸다. 와이즈는 잠든 진과 엘프를 뒤에 두고 약간 찡그린 얼굴로 천막을 제치고 들어갔다. 지친 캠프촌은 밤이 내려앉아 풀벌레 울음소리와 함께 깊어만 갔 다. * 진은 늦잠을 잤다. 늦은 아침은 사람들의 움직임으로 분주했다. 성을 잃었어도 집을 잃었어도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든 마음만 먹으 면 금방 적응해 낸다. 진은 부산한 발자국 소리와 조리기구에서 피 어오르는 음식 냄새에 물먹은 솜처럼 잔 잠자리에서 깨어 일어났 다. "잘 주무셨어요, 진?" "...응. 블루. 다들 바쁘네." "바쁠 수 밖 에요. 일거리를 잔뜩 주셨잖아요. 진이 제일 게으름 피 우고 있어요." 진은 고개를 숙여 하품을 하고, 블루의 미소 띈 말에 멋쩍게 웃으 며 일어나 덮었던 모포를 털었다. "괜찮으세요, 진?" "응? 아, 괜찮아. 블루. 다시 하루해가 떴으니 새롭게 시작해야지." "다행이네요, 진. 기운이 있으시다니. 교대를 해주시든 포로들 처리 를 결정하시든 해 주세요. 밤새 잠 한숨 못 잤네요." 릭이 다가오며 투덜거리는 말에 진은 계속 부려먹은 일행들에게 미 안해 져서 헛기침을 해 보였다. "와이즈는?" "저 대신 포로들에게 가 계십니다. 블루님은 마음이 약해서 감시 역으론 맞지가 않아서요. 귀마개를 드리고 마법사님께 부탁드렸지 요." "누가 제일 말이 많아?" "흠. 이지스경의 부인과 첩들이지요." "저런~ 와이즈 안됐다." "불쌍하게 여기시면 가서 구해 주시지요, 진." 피곤해 보이는 기사에게 진은 웃어 보였다. "좀 쉬어, 릭." "너무나 감사한 말씀. 그럼." 릭은 빈 천막을 택해 이삼일을 꼬박 자지 못한 잠을 자기 위해 들 어갔고, 진은 블루의 정령이 모아 준 물에 세면을 했다. 통제가 필요 없이 잘 돌아가는 캠프 상황을 다시 한번 점검하고 진 은 권티의 기사들을 불러모았다. "안녕하세요, 기사님들." "네. 레이...영주님." 진은 건물을 짓기 위해 벌목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곳을 피해 캠프와 떨어진 숲 안쪽 평지가 있는 공간에 모인 모두를 앉게 하 고, 뒤쪽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얼굴과도 마주할 수 있도록 약간 큰 바위 위에 걸터앉았다. "성도 없는 영주네요. 격식 차리실 것 없습니다. 편하신 데로 부르 세요. 이름을 부르셔도 되고요. 편히 앉아서 이야기하지요. 전 기사 가 아니라 신사 분들의 예법에 둔하니 이해해 주시고요." 진은 여전히 침울해 있거나 굳은 얼굴의 그들을 돌아보며 우스개 소리라도 해줘야 할까 고민했지만, 일거리를 주는 것이 가장 좋으 리라는 생각에 머리 썩히고 있을 문제를 단도직입적으로 꺼냈다. "전 사키리온에 호적을 두지 않은. 권티를 탈취해서 몬스터들에게 성을 넘긴 무지막지하고 도리에 어긋난 타국의 귀족입니다만, 여러 분과 주민들을 책임지게 되었으니 권티의 앞날을 결정해야합니다. 밤새 기미가 끼도록 잠을 못 이루신 것 같은데 생각들은 해 보셨겠 지요?" 기사들은 신생영지에 한자리씩 하고자 자발적으로 모이거나 초빙되 거나해서 권티에 머무른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이거나, 권티 영주 의 가문에서 이직해 온 기사들로 대부분 젊은 축이었다. 평민출신 도 있었지만 귀족가의 작위 없는 귀족자제들도 많이 섞여 있었고, 출신을 불문하고 고등교육을 거친 신분들이라 진이 하는 말의 의미 를 모두 알아들었다. 갑옷을 벗고 안에 받쳐입은 얇은 가죽보호대 차림의 기사들 중, 가 장 지위가 높은 편인 기사 한 명이 헛기침을 하며 말을 했다. "경황이 없어 소개조차 드리지 못했던 점 사과 드립니다. 전 사키 리온의 유로카 백작가의 카즈 유로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카즈님. 전 드리얀의 진 폰 리툰이라고 합니다." 기사들을 모아 두고 진은 신랑감 고르는 미팅이라도 하는 것처럼 들뜨게 들리는 어조로 대답했고, 기사들은 고개를 약간씩 숙이고 그녀의 전혀 상관처럼 들리지 않는 말투에 새어나오는 웃음을 감추 었다. 기사들은 저마다 간단한 소개를 했고, 진은 일일이 인사를 나 누고 본론으로 다시 들어가게 했다. "말씀하신 대로 상황이 무척 미묘하지요. 국법에 따라 이 경우 분 명 레이디께선 사키리온을 침략한 셈이 되고 적으로 간주됩니다. 그런 레이디께 권티의 양도를 묵인하고 따르기까지 했으니, 저희들 은 반역자가 된 셈이지요. 수도나 가까운 다른 영지에 알려지면 수 복하기 위한 사키리온 측의 제제를 받게 될 것입니다. 물론 그전에 성을 점령한 몬스터들의 문제가 앞서지만요." 진은 새로운 곤란에 직면해 있는 그들의 입장을 잘 알았다. 몬스터 들을 물리지 않고 그들을 충동질했던 근본 이유중 하나이기도 했 다. 진은 입을 열었다. "이제 와서 수도에 도움을 청해 몬스터들을 몰아낸 다고 해도 저는 권티 영주와 식솔들까지 인질로 붙잡아 둔 상태이고, 여러분의 자 질 문제가 분명 거론될 테니 어떻게든 불명예스런 입장에서 벗어나 기 힘든 상황이지요. 그렇게 만든 점 죄송합니다." "...괜찮다고 말씀드리기도 뭐하고, 아니라고 하기도 뭐하네요, 레이 디." 블루는 형식상이나마 진의 호위로 패전한 기사들과 마주 앉아, 처 음과 달리 경직되었던 분위기가 많이 호전되어 감에 미소를 띄며 머 리 위쪽에서 들리는 진의 다음 말을 들었다.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일을 먼저 말씀드리지요. 그에 따라 여러분 의 앞길 역시 정하시길 바랍니다. 전 기사 분들만이 아니라 주민들 에게도 선택권을 주겠다고 말해 두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그들을 보호할 여러분의 결정에 따라 달라지게 될 테니, 기사님들의 동의 가 필요합니다." "듣도록 하겠습니다, 레이디." 진은 숨을 한번 몰아쉬고 또렷한 어조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며칠이면 됩니다. 몬스터들은 성안의 술과 음식을 모두 바닥내게 될 테고 생산에 소질이 부족한 그들은 캠프와 접촉을 다시 시도할 겁니다. 전 그들과 협상하겠습니다. 그들은 적대적인 전투 없이 우 호적으로 철수하게 될 겁니다. 저는 그들에게서 메르사와 니소아까 지 돌려 받겠습니다." "...불가능합니다, 레이디." "가능하게 만들겠습니다." 기사들은 침묵했다. 그리고 그 중 한 명이 옆의 동료에게 의견을 구하는 말에 모두 약간씩 그쪽으로 고개를 향했다. "가능할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이 내 머리가 잘못 되어 가는 증거는 아닐까?" "레이디 진이라면...말이지? 흠. 죄송합니다. 저흰 몬스터들이 놀랍 게도 공격 전에 먼저 타협을 시도해 왔던 것과, 전투 중에 레이디 의 요청에 의해 불가능한 휴전이 이루어졌던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보통. 소수로 이루어진 몬스터 무리와는 협상이 가능하기도 하지 요. 작은 마을이나 여행 중 만나는 오크 같은 몬스터와는요. 사키리 온은 몬스터 숲과 면해 있기 때문에 그들과 접촉해서 거래하는 주 민들도 꽤 있는 편이었습니다. 이번, 갑작스런 몬스터들의 대거 침 략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지요. 흑마법이 사용되지 않았다는 증언 은 여러 번 들었으니까요. 하지만 성을 점령한 놈들은 이제까지와 는 다른 행동들을 보이고 있고, 수가 너무 많아서 확신할 수 없는 문제일 수 있습니다, 레이디." 진은 총명한 그들에게, 그리고 블루의 것이 아닌 너울대는 실프에 게 각각 미소와 찡그림을 동시에 주고 싶었지만. 그것이야말로 불 가능하게 여겨졌다. 진은 듣고 있을 와이즈를 의식해서 엄숙하지만 기운차게 대답했다. "제가 특별히 매력 있어서 몬스터들도 무조건 검을 휘두르지는 않 았나 봅니다. 또 그럴 수도 있지요." [자화자찬이 도가 지나치면 손가락질 받는다, 진.] 기사들에게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어쨌든 전 몬스터들에게서 평화적으로 세 곳의 영지와 성을 돌려 받겠습니다. 권티는 작은 영지지만 메르사와 니소아까지 합하면 꽤 넓은 영토가 되지요. 여러분은 아직 대부분 젊으시니 야망이 없다 고 하면 전 거짓말이라고 하겠습니다. 메르사와 니소아를 원 주인 들에게 돌려주지 않고 여러분에게 드리겠습니다." "레이디. 그것도 불가능하게 들립니다." "지금으로선 불가능하지요. 하지만 다른 영지나 다른 나라로 빠져 나간 주민들을 대신할 사람들과 황폐해 졌을 영지를 회복시키는데 필요한 물자와 자금과 경영력과 든든한 방어력까지 가진 인물을 소 개해 드리겠습니다." "누구를..." "디메토르의 매니스 영주입니다." "...레이디!" 진은 자신이 내뱉은 의미의 말에 벌떡 일어나는 기사 몇 명에게 앉 으라는 눈짓을 했다. 그들은 친목도모 같은 분위기였던 것이 삽시 간에 다시 경직되고 있음을 알았고, 또한 그녀가 친숙하게 대하고 는 있지만 동급이 아닌 상사. 지배자로서 이야기하고 있음을 깨달 았다. 그녀의 힘이 얼마나 믿을 수 없는 것이었는지는 지나간 전투 에서 충분히 느꼈었다. 그들은 자리에 앉았다.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전 권티에 오기 전에 매니스에 들렀었습니 다. 이곳에 온 이유가 되기도 한 영지이지요. 매니스는 아니, 디메 토르는 정복전쟁을 준비하고 있더군요." "....정복이라고요, 레이디?" "네. 이번 몬스터 문제가 사키리온 전체에 퍼졌다면, 아니 권티만 두고 보더라도 매니스는 몬스터 토벌을 빌미로 국경을 넘어올 이유 가 충분히 되었을 겁니다. 설사 권티가 몬스터들을 막아내었다고 해도 약해진 사키리온 국경 부근은 쉽게 점령당했을 겁니다. 전 그 곳에서 조금이나마 전쟁을 늦추게 하기 위해 사고를 치고 도망 왔 지요." "사고. 도망이요?" "네." 진은 현재 캠프에서 풀어지고 있는 식료품과 생활용품의 출처에 대 해. 그리고 아밀리한에 대해. 그의 인품과 경영력과 군사력에 대해 설명했다. "전 디메토르도 사키리온도 아니지만 나라 이름과 왕의 이름만 달 랐지,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들끼리 검을 부딪히는 일은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참견하게 되었네요, 그 점도 죄송합니다." "그 점은 오히려 고마운 일로 보입니다, 레이디." "전 매니스 영주를 권티와 메르사와 니소아에 끌어들일 참입니다. 그는 전쟁 없이 국경을 가진 네 개의 영지를 가지게 될 테고, 여러 분이 동조해 주신다면 디메토르와 사키리온의 귀족들로 구성된 공 국을 만들 수 있겠지요." 그들은 진의 말에 대부분 입을 굳게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말의 의미를 잘 알아들었다. 그녀는 영지를 정상화시키는 문제가 아닌, 작은 나라를 세우는 일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불가능합니다, 레이디." "가능합니다. 요는 여러분이 그를 받아들이느냐 아니냐하는 문제입 니다. 주민들은 누구를 지배자로 두든, 먹고살게 해 주고 위해주는 통치자라면 나라의 이름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몬스터들을 물리고 영지를 돌려 받는 일에 여러분의 검이 동원될 필요도 없습니다." 기사들은 혼자서도 영토 수복을 할 수 있다는 진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또한 저는 영지와 자국의 주민을 지키고 통솔하지 못한 사키리온 에게 권티외 영지를 돌려주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몬스터의 숲 과 면해 있어 피해를 입고 버려진 영지와 주민들을 사키리온에서 도려내겠습니다. 야심 있고 능력도 있는 매니스를 끌어들인다면 양 국에서 인정하는 공국으로의 발 돋음은 몇 년 걸리지 않을 것입니 다." 블루는 나무처럼 풀처럼 존재 감 없이 앉아 있다가 그들의 대화와 그 의미에 돋아있는 풀을 뽑으려는 자신의 손을 깨닫고 주춤했다. "저희들이 반대한다면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레이디. 이미 사절을 보낸 것으로 압니다만. 사절이라는 것은 지금 알았지만요." "여러분의 결정에 따라 권티에서 일을 마무리해 버릴 수도 있지요. 단지 식료품만 매니스에서 구입하는 선에서 말입니다. 그렇게 된다 면 메르사와 니소아는 여전히 몬스터들의 영역으로 남아있게 될 테 고, 여러분은 반역자 취급정도는 아니라고 해도 불명예를 안게 될 것이 뻔하며 권티는 사키리온의 다른 귀족에게로 넘어 가거나, 만 반의 준비를 하고 시도해 올 디메토르와의 전쟁에서 사키리온의 길 목으로 가장 먼저 정복당하겠지요." "무서운 분이시네요, 레이디." "그런 말을 자주 듣는 군요. 무섭게 생겼습니까?" 아무도 웃지 않았다. "왜 직접 하시지 않습니까, 레이디." 진은 카즈 유로카에게 끝까지 책임질 입장이 아닌 점에 미안한 표정 이 되어 대답했다. "전 여행 중입니다. 모국으로 돌아가야 할 피치 못할 사정이 있습 니다. 그래서 이곳에 머물 수가 없습니다." "매니스 영주에 대해 확신을 하시는 이유가 계십니까? 저희들로도 가능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닐까요?" 다른 질문을 해 오는 기사에게 진은 고개를 돌렸다 "여러분의 힘으로는 세 곳의 영지를 사키리온 내부의 간섭 없이 통 제가 어렵고 여전히 위협이 사라지지 않을 디메토르를 견제함에 시 간도 힘도 부족합니다." "........" "그에게 주군으로의 맹세 또한 선택할 수 있습니다. 직접 겪고 판 단할 사항이지요. 그가 데리고 올 사람들과 그의 기사들과 여러분 은, 이곳의 주민들과 함께 동등합니다. 디메토르나 매니스에게 흡수 당하는 것이 아니라, 식량과 무기와 통치력을 가진 인물을 초빙하 는 것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여러분의 인맥도 있을 것이니 두 나 라 사이에서 생각해 내고 시도할 수 있을 외교상의 문제로 이곳은 면적은 작지만 강한 나라가 될 수 있지요." 기사들은 나무그늘 아래 앉아있었지만 가려진 태양의 빛에 눈이 부 신 기분이 들었다. "그가...레이디의 의도대로 권티와 메르사와 니소아를 통치하리란 확신이 정말 있으시단 말씀인가요?" "네." "몬스터들에게서 영지들을 돌려 받을 확신도 있다는 말씀이고요." "네. 투항이란 구실이었습니다. 그들에게도 돌아가는 것이 있어야했 기 때문이지요. 전 캠프에서 그들에게 전리품을 내주진 않았지만 그들은 심리적인 만족과 긍지를 저와 한 협상에서 받아갔습니다. 매니스 영주의 능력은 몬스터 숲을 상대로도 발휘될 것입니다." 진은 갈등과 혼란에 빠져 있는 기사들을 설득했다. 그들은 소풍을 나와 간식을 먹는 자리에서 잡담을 듣는 것 같은 기 분으로 모여 앉아 자신들의 미래와 자국의 미래와 권티의 미래에 대해, 그녀가 제시하고 예측한 문제들로 깊은 생각을 했다. 쉽게 결심할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에, 진은 그들끼리 의논하고 생 각하도록 시간을 주고자 말없이 앉아있던 블루와 함께 자리에서 일 어났다. '와이즈. 엿듣는 거 재밌어?' [그럼 이 떽떽거리는 소리를 듣고 있어야겠냐? 지겹다. 와서 어떻게 든 해라, 진.] '밥 먹고 갈게.' 진은 와이즈의 실프에게 눈인사를 하고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기 사들을 남겨두고 블루와 캠프로 돌아갔다. "블루. 하고 싶은 이야기 있으면 해. 할까 말까 망설이고 있는 것 같아 보여?" 블루는 진과 벌목 당해서 밑둥만 남은 나무 위에 캠프 촌 주민들이 가져다 준 야외 식 식단을 올려놓고. 캠프촌의 천막들과 나뭇가지에서 가지로 연결되어 있는 줄에서 나 부끼는 빨래 감과 각자 일에 열중해 있거나 늦은 식사를 하고 있는 부산해 보이는 캠프 주민들의 모습을 구경하며 밥을 먹다가, 실례 가 될 말은 아닐지 갈등하던 것을 진이 눈치 채고 먼저 말을 꺼내 주자 어렵게 이야기했다. "진의 방법은 효과가 뛰어나지만. 상대에게도 진에게도 상처가 되 는 것은 아닌가 해서요." 진은 파란 눈의 엘프가 참견해서 죄스럽다는 듯이, 하지만 말리고 싶은 생각을 버리지 못했는지 둘만 있게 된 기회에 비로소 언급하 는 것에 희미하게 웃음을 떠올렸다. "내가 걸핏하면 인질을 잡고 협박하는 것 말하는 거지, 블루?" "미안해요. 내가 간섭할 일은 아닌데." "아니, 뭐. 그 정도로 미안할 것은 없어, 블루." 진은 먹고 있던 빵을 남은 스프에 찍어 식사를 마치며 대답했다. "인질극이란 나도 어쩌지 못할 편법이었거든. 시간이 없으니 한 곳 에 오래 머무를 수는 없고. 가장 짧은 시간에 누구에게든 있는 약 점이기도 한 '인정'을 노리는 사기협박이 가장 효과가 뛰어나기 때 문이야. 그걸 잘 알아. 겪어 봤거든. 넘어오지 않을 사람은 아주 드 물어." "시간에 쫓기는 이유를 물어도 될까요, 진?" 정말은 그게 묻고 싶었나 보다. 블루는 그 질문을 하고는 머뭇거리며 얼굴을 조금 붉혔다. 진은 오 백년 이상을 산 엘프 블루가 세월에 퇴색되지 않은 감성을 유지하고 있음에 엘프란 존재에 대해 다시 동경과 경의. 흠. 정직하 게 말하면 시기와 질투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인간과 비교해 너무 아름답고 강하고 선하고 자연스러운 그의 특색 은 부럽기도 하고, 괜히 괴롭혀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하기도 했다.-예를 들면, 그의 귀를 잡아당겨서 당황해하는 것을 보고 싶어 했던 충동처럼. 진은 이번엔 그의 파란 머리카락을 아프게 잡아당 겨서 찡그린 표정을 보고 싶었다.- 진은 잠시 그를 처음 보았을 때 얼이 빠져서. 아니, 아주 조금의 긴 장감도 주지 않아 눈뜨고 앞에 두고 보면서도 존재 감을 받지 못했 던 것을 떠올렸다. 그리고 일행이 되어 여행을 다니면서도 뒤에 있 는지 옆에 있는지 고개를 휘저어야 그를 발견하곤 했던 여러 번의 경험으로, 같이 다닌다고 익숙해지지도 않는 문제인 것 같았다. 블루를 쳐다보고 있으니 진은, 싫은 느낌이 가득했던 어제 그제의 일들이 잠깐 꾼 나쁜 꿈처럼 여겨졌다. 진은 정말 블루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겨 볼까 하는 생각을... "진?" "앗. 딴 생각을 했네. 미안, 블루. 블루를 두고 야한 생각을 좀....농 담이야. 말한 내가 더 부끄러워지네." 진은 삽시간에 얼굴이 빨개진 블루를 눈을 껌벅거리며 보다가 머리 를 긁적이며 늦추고 있던 질문에 대한 답을 했다. "항상 말하던 데로 성년식 때문이야. 시간 맞춰 가야한다고 와이즈 가 닦달하거든. 왜 인지는 그에게 물어 봐, 블루." "...네." "농담이었다니까, 블루. 말 한마디 한마디에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 이면 무서워서 블루에게는 마음놓고 얘기도 못하겠다." 블루는 그런 뜻이 아니고요...하고 말하고 싶었지만. 진은 이미 끝낸 식사를 거두며 일어나 포로들에게 가자는 말을 했고, 그는 자신의 미적거리는 태도가 스스로도 답답하다는 생각에 한숨을 쉬었다. * 진은 식사를 마치고 블루와 함께 캠프 안쪽에 쳐둔 포로들을 수용 하고 있는 천막으로 갔다. 나무가 우거져 해를 가린 나뭇잎의 그늘 아래 새들의 지저귐까지 선선하게 느껴지는 공기를 타고 있어서, 근처에 성은커녕 인가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그런 곳 이었다. 권티 성 주위는 전체가 그 느낌이 드는 영지였지만 진은 동화 속을 연상시키는 숲 속임에도, 블루와 식사를 하며 완화되었다고 생각되 었던 요 며칠 받은 스트레스와 지금 더 해지고 있는 스트레스로 녹 음을 감상할 여유를 계속 놓치고 있었다. "제 아버님의 다리를 다치게 하고 인질로 잡아서 더러운 몬스터들 에게 항복을 하도록 기사들을 종용한 것이 맞다고요?!" "네, 부인." "정말 놀랍군요! 어떻게 그런 몰상식하고 파렴치하고 인간으로도 보이지 않는 짓을 할 수가 있나요?!" "할 수 있어서 했고, 해야했기에 했지요, 부인." "도대체! 어떻게 영애는! 칼부림이 나는 전쟁터에 뛰어들어 여자란 점을 이용해서 신사들을 타락시키고 내게 이런 모욕을 줄 수 있단 말입니까! 아무리 경우 없기로서니 날 저 천한 여자들과 같은 취급 을 할 수가 있느냐는 말입니다!" 블루는 숲의 녹음에 녹아들 것 같은 차분한 걸음으로 진을 따라왔 다가. 나가지도 못하고 들어가지도 못하고 천막의 입구에 앉아 있 던 와이즈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냉큼 진과 자신에게 포로들 을 상대하고 있던 일을 인계하고, 천막과 멀찌감치 떨어진 나무 그 늘에서 살 것 같다는 표정으로 먼 산을 보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가. 진을 따라 천막에 들어간지 몇 분되지 않아서, 핏기가신 얼굴로 마법수련을 잊었다는 핑계를 대고 그 역시 도망 나갔다. 진은 속사포처럼 퍼붓는 이지스 부인의 쇳소리 같은 반박과 불평과 신경 건드리는 협박 비슷한 것을 받고 있었다. "모욕은 남편분과 아버님 되시는 분께 드렸지요. 그리고 여자란 점 을 이용하는 것은 부인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부인께서도 현재 부 인이라는 점을 이용해서 자신의 처지를 망각하고 계시지 않나요?" "내가 뭘 망각했다는 것인가요?! 난 태어나서 이런 취급을 받은 적 이 없습니다!" "부인이 패전 포로 측의. 파렴치한 도망자 측의, 딸이며 아내라는 점을 잊고 계시지요. 조금만 머리가 있다면 말 한마디에 목이 잘릴 수도 있는 입장이라는 것을 아실 텐데, 그야말로 배려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여자라는 점을 이용해서 내 병사들을 괴롭히고 계시지 않습니까?" 블루는 진이 앙칼진 부인의 말에 일일이 냉정한 의미로 대꾸해 주 고 있는 것을 와이즈와 약간 떨어진 풀밭에 앉아서 들으며,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는 상황이 또...라는 생각에 약간 풀이 죽어있었고. 와이즈는 이젠 남의 일이 된 곤란에, 다시 구경꾼의 입장으로 돌아 가서 피식거리며 웃고 있었다. 천막 주위에 잔뜩 깔린 마법트랩을 피해 서서 경비를 서고 있던 병 사들은 얇은 천을 사이에 두고 고스란히 들리는, 말로 하는 전쟁에 진의 무사를 기원하는 의미로 연신 헛기침을 하고 있었다. 진은 영주와 그의 사위 및 식솔들을 항복한 기사들과 함께 한 천막 안에 수용시키도록 지시했었고, 천막 안에는 칸막이를 사이에 두고 남녀로 구분되어 포로들이 수용되고 있었다. 이지스 부인과 그녀의 어린 딸 둘과 이지스의 두 명의 첩과 그녀들 중 한 명의 어린 아들로, 꽤 넓게 쳐진 천막임에도 귀족들에겐 불 편할 것이 틀림없을 이유가 원인과 핑계가 되어 연행 된 후 계속 감시를 맡은 용병들과 병사들은 시달려야 했다. 천으로 막아 둔 칸막이 옆에는 진에게 다리를 다친 영주와 팔을 잘 린 주이슨 기사를 비롯한 무장 해제된 기사들과 주민들에게 수모만 당하고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수용소로 쫓겨난 오하미 이지 스가 있었지만, 이지스 부인의 선 면담으로 전 권티 영주와 영주대 리는 진의 방문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영애도 어린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신사들에게 큰소리 치고 있는데 나라고 못할게 뭐가 있습니까?!" "요구가 정당하고 힘을 가진 입장의 큰소리와 단지 소음만 되는 큰 소리는 아주 큰 차이가 있습니다, 부인." "요컨대 나이도 어린 영애는 큰 힘을 가졌고, 두 딸을 둔 내 힘은 아무것도 아니라 그건가요?!"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마른 체형의 신경질적인 이지스 부인은 진에 게 아주 기본적인 예의만 갖추고 인신공격을 하고 있었고, 진은 그 녀의 철없고 편견 가득하고 오만하고 어리석은 사고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부인. 어머니라는 이름은 가장 큰 힘이고 무기입니다. 하지만 부인 의 자녀를 보호하시려면 자신의 처지도 인식하셔야합니다. 경황이 없어 신사 분들과 거처를 나눠드리는 일에 신경 써 드리지 못해 죄 송합니다. 그 점은 곧 시정해 드리지요. 하지만 같은 입장의 저 두 분과 함께 있지 못하시는 이유가 그들의 평민이라는 것이 이유라 면, 더더욱 이곳에서 같은 포로의 신분이나마 이제껏 받아오신 대 로 남편 되시는 분의 보호를 받으시는 것이 더 좋을 수도 있습니 다. 포로가 된 여성은 노예보다 못할 수도 있으니까요. 천하다하신 제 주민들을 얕보지 마십시오." "무슨 말입니까! 감히 그것들이 내게 해꼬지라도 할거란 협박인가 요?!" "남편 되시는 분의 얼굴을 보지 않으셨나요? 전해 듣기론 얼룩이가 되셨다고 하던데. 아. 죄송합니다." 이지스 부인은 붉어졌던 얼굴이 더욱 붉어져서 진의 비웃음이 담긴 말에 침대도 없이 잠을 잘 수가 없어 밤을 꼬박 샜던 피곤한 몸을 자존심을 조금 굽혀 타협한 탓에, 천한 하층민들처럼 바닥에 앉아 진과 마주하고 있었지만. 건방지기 짝이 없고 무모한 같잖은 영웅담을 퍼뜨린 새파랗게 어린 계집애를 할퀴고 싶은 기분을 꾹꾹 누르고 있었다. 정말 말도 되지 않은 일이지 않은가. 어떻게 저런 어린 계집애에게 지참금으로 아버지에게 졸라서 떼어 받은 영지를 하루밤사이에 뺏 길 수가 있느냔 말이다. 한심하고 파렴치한 남편의 얼굴이 뭐가 걱 정되서 확인을 했겠는가! "그런 소리를 협박으로 하는 영애의 인격이 참으로 의심스럽군요. 난 하나도 무섭지 않습니다. 감히 누가 내게 해꼬지를 한단 말입니 까! 해꼬지를 한다면 내가 해야하지요. 흥. 천한 것들이 부인 있는 귀족남자에게 온갖 꼬리를 쳐서 배은망덕한 생각을 하고 사는 것을 내가 모르고 있는 줄 압니까?!" 진은 이지스의 첩들이 눈을 흘기는 것과 유일한 남아가 그녀들의 품에 있는 것을 알고 있었고, 오로지 자신의 이기만이 시야에 가득 한 한심스런 여자와의 대화가 신물이 났다. "부인. 태어나서 지금까지 이런 취급을 받지 못하셨다고 하셨지요? 태어나서 지금까지 가진 신분과 지위로 남을 위해 하신 일이 있으 신가요? 부모나 남편의 그늘에서 편히 사셨다면 그 그늘이 없어질 때 감수해야 할 처지 역시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누구는! 저 불성실한 남자와 결혼해서 살고 싶었는 줄 아십니까, 영애?! 내가 존경하던 남편의 과실로 이런 취급을 받는 다면 이렇 게까지 용납 못할 기분이 들지는 않습니다. 말만 번지르한 거짓부 렁에 속아 제 아버지는 저런 인간에게 날 시집 보내셨지만. 결혼해 서 지금까지 지옥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원망스런 아버지와 파렴치 한 남편의 잘못을 내가 단지 가족이라는 이유로 받아들여야 합니 까?!" 칸막이 뒤에서 이지스의 것으로 들리는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영애는 운 좋게 잘생긴 남자들과 유사종족인 아름다운 엘프까지 데리고 다니는 생활에 익숙해 져서 제 처지가 우습게 보이시겠지 요! 하지만 저도 그렇게 살고 싶어서 산 것이 아닙니다!" 진은 이기적인 것이 가문의 특성이 아닐까 하는 생각과 남편과 아 내는 닮은꼴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칸막이 뒤에서 듣고 있을 영주와 영주대리의 얼굴이 참으로 궁금했다. 이런 레이디를 보호하 고 있었을 주이슨 기사는? 진은 고소한 표정이 되어 대답했다. "부인. 부인의 사적인 결혼 생활까지 참작하고 배려 해 주길 바라 시는 점 역시, 현재 부인 신상에 대한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고 있 는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나이 어리고 부모의 그늘에서 벗어날 희망을 이룰 어떤 시도도 하지 못해서 이제까지 그런 생활을 하셨 다면, 성숙해진 나이인 지금은 방법은 있지 않습니까?" "있겠지요. 영애가 우릴 풀어주면 되지 않습니까. 아버님의 영지로 가면 되지요. 잔인하게도 영애 덕에 아버님은 불구가 되셨고, 이 지 긋지긋한 권티에서 더러운 몬스터들에게 치욕을 당하고 부하들에게 까지 배반을 당했으니, 돌아가시더라도 아버님은 이곳에서 영애에 게 당한 일을 떠벌릴 일은 없을 겁니다. 그것 때문에 붙잡고 있다 면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제 그녀는 드디어 목적한 바를 이루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 는지 말끝에 호소까지 실어 말했고, 진은 바닥에 머리를 찧고 싶은 기분이 되어 속으로만 열심히 투덜거렸다. 와이즈는 진이 속으로 내뱉고 있는 욕설에 킥킥거리며 웃었고, 블 루도 진의 곤란이 이해가 되었는지 쓴웃음을 지으며 나뭇가지 사이 로 비쳐드는 오후의 햇살을 쳐다보았다. "부인은 부모님과 남편의 그늘이 지긋지긋하다고 하시더니 다시 그 그늘로 들어가실 생각 외엔 하지 못하세요?" "그럼! 무슨 방법이 있답니까!" "이혼하시지요." 천막 밖에서 성실한 구경꾼의 입장을 고수하고 있던 와이즈는 진이 한 말에 목표 없이 전방을 향하고 있던 눈을 깜박였고, 엘프 블루 는 허둥거리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경비를 서고 있던, 용병이 섞인 병사들도 진과 포로 귀족부인의 대 화를 열심히 듣고 있다가 헛기침들을 했다. "이혼하면 되지 않습니까. 이미 성이 바뀌었고 성인이시니 남편과 헤어진다고 해도 부모의 그늘을 찾아 갈 관례에 얽히지 않으셔도 되고, 더 이상 가계에 속하지 않으시니 이곳에서 무례하기 짝이 없 는 대우를 받지 않으셔도 되지 않습니까? 뜻하신 바대로 세상을 살 수 있을 텐 데요? 물론 이지스경은 가진 게 없으니 위자료도 받지 못하시겠지만. 제 힘으로 노력을 하며 사는 것이, 견딜 수 없는 포 로 생활을 감수하며 언제 죽을지 모를 위험 속에 있는 것보다는 낫 지 않을까요?" "그. 그건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영애! 영애는 도대체 어디서 살다 오셨길래!" "불가능하다면 처한 상황에 대한 불평불만을 그만 두시지요, 부인. 뼈 속까지 젖어 있는 의지하고 보호받겠다는 의타심을 버리지 못하 시는 한, 부인은 결코 행복해 지실 수 없겠네요. 아직 젊은데 안된 일입니다. 제게 '여자인 주제에' 라는 뜻의 말을 여러 번 하셨지요? 부인도 여성입니다. 같은 여성의 입장에서 스스로의 성을 그렇게 비하하고 가치 없음을 주장하시는 것은 몹시. 아주 몹시 어리석은 일입니다." 블루는 와이즈의 눈길을 잡고 뭔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듯 했 지만 와이즈는 못 본 척 계속 무시했고, 블루는 친해질 생각이 없 으니 건들지 마라는 그의 태도에 다시 풀이 죽었다. "이혼은 버림받은 여자들이나 당하는 겁니다, 영애! 다른 나라 분이 라 사키리온의 풍습을 몰라서 그런 소리를 하시나 보네요." "그럼. 체면상 이혼은 못하고 같은 신분의 가족이라 공동 책임이 될 일에도 외면하시겠다 하시고. 남은 방법은..." "풀어주면 쉬울 일 아닙니까!" 진은 씨익 웃으며 칸막이 뒤에서도 아주~ 잘 들리도록 또랑또랑하 게 말했다. "남은 방법이 더 있습니다, 부인. 이곳에서 이혼녀란 말 듣지 않고 도 포로 처지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있지요." "...뭔데요?" "미망인이 되면 되겠군요. 독을 빌려드릴까요, 부인?" 천막 안은 침묵이 감돌았다. 본 부인이 나서서 말할 기회를 주지 않음에 초조하게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이지스의 젊은 평민 신분 의 애인들은 진의 말에 피식 웃거나 눈을 빛내었다. 천막 밖에서 와이즈가 적당히 하라는 뜻인지 헛기침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블루는 아마 새파랗게 질려 있지는 않을까? 진은 낄낄거리 며 웃고 싶었다. '민트가 보고 싶네. 그녀라면 냉큼 받아들였을 텐데. 후후..' 진은 더 상대해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앉아있던 바늘방석 같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이지스경의 첩 중 하나가 말문이 막힌 부인 때문에 겨우 입을 열어 진에게 말을 걸었다. "말씀하세요, 아가씨들." 부인이라고 부르지 않음에 그녀들은 당혹 해 했다. "엄밀히 말하면 결혼하신 것이 아니니, 부인이란 호칭은 맞지 않지 않나요?" 그녀들의 얼굴에 희망이 떠올랐다. 천시 받는 입장에서, 어쩌면 죽 을 지도 모를 입장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희 색이 돌았다. "하지만 두 분이 더 나쁠 수 있습니다. 귀족에게 빌붙어 생활하는 속없고 천한 평민이라는 인식은 두 분의 경우에서 출발 할 수 있으 니까요." 그녀들은 얼굴이 빨개졌지만 '화'를 보였다. "저희도 눈이 있습니다, 영애. 저흰 자의가 아니라 팔린 셈이지요." "그럼. 지금의 신분에 미련 없으시겠군요. 짐을 챙기시지요. 이지스 경과 아무 상관없다면 이곳에서 그의 부인과 동등한 대우를 받으실 필요 없으니까요." "감사합니다, 영애." "저. 제 아이는..." 진은 그녀의 무릎 위에 안겨 있는 세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에 게 웃어 보였다. 아이는 엄마의 목에 매달려 있다가 미소짓는 진을 우방으로 인식했는지 마주 방긋 웃었다. "성을 물려받지 못할 텐데, 남겨둘 필요 없지 않나요? 아니면 아이 를 버리실 생각인가요?" "아니요. 아니요. 감사합니다, 아가씨." 진은 그녀들을 포로의 신분에서 평민으로 돌려보냈고, 편리를 봐 주도록 경비를 시켜 캠프에 전하게 했다. 억하심정이 쌓인 눈으로 천막을 나서는 그녀들을 보던 이지스 부인 은 칸막이 커텐 안쪽에서 짓고 있을 남편의 표정이 정말 궁금하다 는 생각을 하며 비웃는 웃음소리를 냈다. 진은 해결책은 주었으니 잘 생각해서 선택하라는 말을 부인에게 남 기고 천막을 나왔다. "젠장. 영주와는 한 마디도 못했네. 또 칼에 찔려야 할까봐서 무서 워 죽는 줄 알았어, 와이즈~ 블루~" "웃기지 마라. 난 네가 더 무섭다." "진. 독살을 권한 것은 좀. 콜록." "권했다기 보다는. 차단했지 않아? 갑자기 이지스경이 죽기라도 하 면 이젠 젤 먼저 부인이 의심받겠지. 남편을 챙겨야 겠네. 정 싫으 면 깨끗이 이혼하면 되지~" 와이즈와 블루는 묘한 표정과 복잡한 표정들을 했다. "어떤 남자에게 시집가려는 지 몰라도, 진. 필히 목숨 아까운 줄 알 아야 할거라는 말은 해 주마." "좀 묘한 친절이다, 와이즈. 그렇게까지 내 미래를 걱정해 주다니! 나도 남편을 살해하고 싶지는 않아. 하지만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아, 와이즈? 난 '결혼'을 인생 목표로 하지는 않고 있는데? 그럼 신랑감을 잘못 골라 독살을 시도할 모험을 해야할 일이 오히려 적 을 수 있지. 그런 눈으로 보지마, 와이즈. 음. 난 슬픈 이야기 안 했 어, 블루. 울려고 하지마." 천막 주위에 있던 대부분의 남자들은 도저히 받은 느낌을 정확히 표현해 낼 수 없음을 인정하고, 천막 안에서 오가던 대화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기로 했다. * 저녁 무렵 널판지등으로 형식적으로 막아두었던 권티의 성문이 치 워지고 몇몇 몬스터들이 캠프를 방문했다. "진. 몬스터들이 저녁식사에 초대를. 콜록. 해왔는데요." 릭은 일어나 다시 담당한 경계 일을 하다가 접촉해 온 몬스터들의 말을 진에게 눈을 껌벅이며 전해 왔다. 진은 피식거리는 와이즈에게 눈치를 주다 농담을 하며, 저녁이 되 길 기다리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역시. 내가 특별히 매력 있는 것이 분명해. 몬스터들까지 대시 해 오다니." "진. 품위를 좀 지켜주세요." "좋겠다. 몬스터에게 시집가라, 진." "마. 마법사님." '어라? 와이즈. 청혼하는 거야? 너도 몬스터잖아.' [죽을래?! 엉? 내가 어떻게 저 놈들과 같은 과가 되냐?!] 진은 킥킥 웃으며 릭에게 농담이니 제발 말끝마다 정색 좀 하지 마 라는 말을 했다. 릭은 잠든 사이에 포로들의 천막에서 있었던 대화와 풀려난 사람들 의 문제를 전해 듣고 내내 얼굴을 찌푸리고 있다가, 진의 너스레에 인상을 쓰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왜 진을 알수록 신사들을 우습게 여긴다는 느낌이 들까요?" "어? 우습게 안 여겨, 릭. 왜 그렇게 느끼는데?" 릭은 한숨을 쉬며 잘못 꺼낸 말이라며 말을 바꿨다. "포로 일부를 풀어 주셨던데요, 진." "응. 위험하지 않잖아. 그들도 피해자인데." "그게 아니라..." "그럼 뭐가?" "이지스 경의 아들도 같이 풀어 주신 특별한 이유가 있나 해서요. 정통핏줄은 아니지만, 유일한 아들이니 나중에라도..." "릭. 너무 앞서간다. 세 살이야. 친족으로 인정받지 못할 것이 뻔한 형편이라고." "하지만 아버지의 책임입니다." 진은 그가 하는 말의 의미에 얼굴을 찡그렸다. "릭." "네?" "우습게 여겨 줄게. 더 말하면 비웃어 줄 수도 있어. 그 아이의 부 모가 그 덜떨어진 아버지만 있어? 더 나을 교육을 시킬 어머니도 있잖아. 남아니까 어쨌든 신분이 있는 편이 좋다 그거야?" 릭은 가볍게 떠올린 의문을 거론했다가 말문이 막혔고. 와이즈와 블루는 천막에서의 대화를 전해 들었다해도, 자세히 듣지 못했음이 분명한 그에게 동정의 눈을 했다. 진은 남존여비사상이 깊이 박혀 있는 이 대륙 전체에 한숨을 쉬어 주고, 와이즈를 의식해 찾아 왔을 몬스터들에게 기꺼이 저녁 초대 에 응하겠다는 말을 하기 위해 막 날라지고 있던 음식을 뒤로했다. 하루 종일 진이 던져 준 문제로 의논을 하던 기사들은, 그들의 대 표로 카즈 유로카를 보내 결심한 바를 알려왔다. 진은 몬스터들의 문제가 확언한 대로 해결되고 매니스 영주를 직접 겪고 판단할 과정을 주는 선에서 그들과 쉽게 타협해 주었고. 기다리고 있는 몬스터 사절단을 따라 투항한 측에게 베푸는 몬스터 들의 너그러운 연회에 참석하기 위해 일행과 함께 약탈당한 권티 성의 성문 안에 들어섰다. 카르마의 구슬 95 -[11-7. 몬스터의 숲을 얻다] 성안은 무질서했다. 몬스터들은 매장 풍습이 없는지, 사체들이 한 곳에 모아져 방치되 어 있었다. "부패할 텐데." "사람들이 무덤을 만드는 것을 보고 저 정도도 흉내를 낸 셈일 거 다, 진. 보통은 그냥 두지." "숲에서 살기 때문일까?" "숲에선 사체 유기가 죄가 아니니까요, 진. 매장은 인간들의 풍습 중 하나고, 저들은 죽은 동료의 시신을 다른 종류의 몬스터들이나 동식물에게 먹이로 돌려줍니다." "엘프는 어때, 블루?" "천수를 다하고 죽은 엘프의 육신은 자연 정화됩니다. 친구나 가족 들에게 작별인사를 받으면 대자연에게로 돌아가지요." "천수를 다하지 않은 경우에는?" "부패에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대부분 화장하지요." 진은 엘프들의 장례 풍습에 대해 몇 가지 더 물으며 몬스터들의 대 표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본 성으로, 멀찌감치 앞서 걷는 몬스터들 의 안내를 받아 갔다. 달빛이 비치는 길을 걸어가는 길에, 여기 저기 포도주 통을 끌어안 고 있거나 길가에 널브러져 코를 골고 있는 오크들을 볼 수 있었 다. 그들은 진과 일행을 발견하고 곁에 두었던 무기들을 집어드는 놈도 있었지만, 와이즈를 알아보았는지 다시 슬그머니 내려놓고는 했다. "며칠이나 버티려나. 하루 내어 준 권티가 이런 상태인데, 메르사나 특히 니소아는 정말 엉망이겠다." "엉망이겠지요, 진." 사람 사는 성이 아닌, 몬스터들의 천국이 되어 있는 성안을 의식하 고 릭은 훼이르에서 손을 떼지 않고 인상을 쓰며 대답했다. 진은 권티에 와서 처음으로 본 성으로 들어가기 위해 거리를 가로 질러 갔다. 몬스터들의 대표들은 부하들을 시키지 않고 직접 밖에 나와 있었 다. 그들은 전투 시에도 뚜렷한 명령 계통을 확립해서 싸우지 않았 었고, 진은 인간들의 전쟁을 흉내내는 과정이 이제까지와는 구별되 는 위협이 되었기에 영지들이 쉽게 함락되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는 생각을 했다. 그들은 개개인은 강했지만 집단 생활에 필요한 통솔력이 인간보다 부족해 보였다. 와이즈의 영향이 아니었다면, 종류가 다른 몬스터들 이 뭉치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진은 약간 쳐진 발걸음으 로 뒤에서 그의 허리까지 내려오는 결 좋은 금발 머리를 한 움큼 잡아당겨 주었다. "뭐냐?" "심술이야, 와이즈." "내 미모에 질투하는 구나, 진." "창의력이 없구나, 와이즈. 내가 이미 썼던 말이야." 릭은 적의 소굴에 들어와서도 태평한 그들에게 눈살을 찌푸렸고, 블루는 달빛 받는 성의 현관에 서 있는 몬스터들에게 인사를 했다. "하늘이 아름답고 땅이 너그러운 것은 신이 주신 사랑입니다. 가르 디아엘 저희 신의 축복으로 숲의 속삭임과 생명력을 그대들과 나누 고자 합니다. 저는 샤 마을의 라하르네 블루엘 샤라고 합니다." "그륵." 오크 무리의 대장은 엘프의 인사말을 들으며 없는 머리카락을 긁적 이고 싶어하는 기분이라는 느낌을 주었다. 고블린은 엄숙해 보이는 표정으로 블루의 인사를 듣다가, 함께 있 는 와이즈 때문인지 역시 적당한 답례 말을 해내지 못했다. 오우거는 둘에게 접대를 맡겼는지, 아니면 더 공격적으로 판단되었 던 그들의 성격상 바늘방석이 될지도 모를 자리에 함께 하는 것을 거부했는지 보이지 않았다. 진은 사람들 사이에서의 사교술을 동원해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했 지만, 와이즈 덕에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다. "부. 르. 셨. 다. 고. 요. 인간들의 예절도 식생활 문화도 두 분에게 는 불편하실 텐데 무리하게 편이 봐 주실 필요 없습니다. 오. 크. 님. 고. 블. 린. 님. 정원에서 편히 식사를 대접받는 정도의 호의만 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륵." 진은 뉘앙스 실린 와이즈의 말에 그들이 안됐다는 생각을 했지만, 릭페르는 역시~ 리툰 후작가는 강심장이 가훈일지도 모르겠다는 생 각을 했다가, 몬스터들이 예상외로 순순한 반응을 보이자 훼이르의 손잡이를 의식하던 것을 멈추고 다시 눈을 껌벅였다. 그들은 권티 성에 딸린, 수림을 남겨 정원수로 쓰고 있는 풀밭으로 안내되었다. 부하 몬스터들이 와이즈의 눈치를 보거나, 혹은 진과 릭과 블루를 의식 해 당당하게 보이는 태도를 오가는 헛갈리는 태도로 조리가 거의 되지 않은 음식들을 날라 왔다. 주로. 그냥 먹을 수 있는 보존 마법이 걸린 과일과 통 구이를 한 덜 익힌 고기류와 포도주로, 그 원시적인 식단에 릭은 쓴웃음을. 블루는 피가 베어 나오는 고기 덩어리를 맨손으로 받아들고 곤란한 표정을. 와이즈는 일행의 표정에 웃음을 감추는 상황이었고, 진은 방긋 방긋 웃고 있었다. "역시, 육류. 특히 소고기는 덜 익혀 먹는 것이 제 맛이지요. 몬스 터들은 미각이 있으시네요." "그륵. 인간대장 진. 맛이 그륵. 있다니 기분 좋다. 그륵. 보통 인간 들은 그륵. 날고기를 먹는다고 그륵. 우릴 손가락질했다. 그륵." "풍습이 다른 것을 이해 못했기 때문이겠지요. 인간들은 편견이 좀 많은 편이니까요. 그리고 날고기는 인간들의 약한 소화기관에 부담 이 가기 때문에 될 수 있으면 먹지 않지요. 병에 걸릴 수도 있고 요." "우린 강하고 건강하다. 그륵." "그런 것 같네요. 하지만 약해서 인지 인간들은 자연에서 나는 곡 류나 열매들을 다방면으로 조리해서 먹을 수 있게 되었지요. 밀 하 나만 이용해서도 아주 여러 가지로 푸짐하고 영양 있는 음식을 만 들 수 있거든요." "우리도 스프 같은 간단한 음식 정도는 만들 수 있다. 인간 여자 진." 진이 이미 목적한 바를 이루고자 협상거리를 잡아 대화를 시도하고 있음을 알고 와이즈는 피식피식. 릭은 한숨 섞인 쓴웃음을. 블루는 응원하는 미소를 지었다. 고블린의 말에 진은 어투에 더욱 신경 써서 대답했다. "여러분이 요리에 소질 없다는 것을 비웃으려는 의도가 아닙니다, 고블린님. 인간들이 먹는 음식도 여러분에겐 입맛에 맞지 않을 수 도 있으니까요. 사는 환경이 다르고 풍습이 다르니 굳이 모양 좋다 고 인간의 것을 따라 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두 분의 터전에서 도 충분히 종족에게 맞는 안락한 생활을 하셨을 테니까요." 오크와 고블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인간 여자는 다른 인간들과 달랐다. 실은 전쟁을 명령해 준 몬스터 대왕에게 보고하고자, 잘 보 이고자 인간들처럼 저녁을 먹자고 불렀지만. 드래곤은 유희 중임을- 아는 체 하지 마라는 말을 언질 했었고, 그 러다 보니 전투에서도 그런 대왕의 재미거리인 인간들에게 어느 정 도로 봐줘야 하는지 헷갈렸다. 그런데 대왕이 친히 공격하지 말라고 했던 인간들의 대표는 반감을 누르고 대하는 몇 번의 기회로, 인간들에게 원래 가지고 있던 적대 감을 희석시키고 있었다. "우린 우리의 숲을 좋아한다. 그륵. 인간대장 진. 그륵. 그곳은 사냥 감도 많고 그륵. 맛 좋은 열매도 많다. 그륵." "고향을 그리고 사랑하는 것은 몬스터도 인간도 마찬가지인가 봅니 다.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없으세요?" "그륵." "우리는 전사들이다. 싸워서 이기면 당연히 적들의 것은 우리의 것 이 된다. 인간 여자 진. 우리에게 돌아가라는 말을 하는 것인가?" 진은 고블린이 오크보다는 더 머리가 돌아간다는 판단을 하며 긴장 감 없는 미소를 지어 경계를 풀어보고자 했다. "인간들도 싸워서 이기면 전리품을 챙깁니다, 고블린님. 전쟁은 누 구와 하든 슬픈 것이고 서로를 다치게 하지만, 이미 일어나 버린 일에 대한 결과물을 대가로 받는 것을 나쁘다고 볼 수는 없지요. 전 제가 고향에 가고 싶어하는 것처럼 몬스터들도 그러지 않을까 해서 묻는 말이었습니다." "그륵. 인간대장 진은 고향이 그륵. 여기가 아닌가? 그륵." 진은 그 '인간대장' '인간여자'라는 말 좀 빼라는 의견을 나중에라도 꼭 전하리라 생각하며, 무지막지하게 생긴 두 몬스터들에게 대답했 다. "제 고향은 동대륙 끝의 드리얀이라는 곳입니다. 그 곳으로 가는 여 행 중이지요." "그륵." "고향이 먼데 왜 이곳에서 다른 나라인간들을 위해 무덤을 만들고 절을 하나? 인간여자 진." 아마도 왜 몬스터들의 무덤에 대고 절을 했냐고 묻고 싶은 모양이 었지만 돌려서 묻는 말인 듯 했다. 생김새는 인간과 너무 다르지만 그들은 감정 표현이 솔직하고 단순해서 오히려 짐작하기 쉬운 면이 있었다. "같은 인간이기 때문이지요. 몬스터들 역시 생각할 줄 알고 나름대 로의 문화를 가진 종족이고. 제 일행들의 힘을 더 빌려서 전쟁을 막았다면, 제 동족인 인간들도 두 분의 동족인 몬스터들도 죽지 않 아도 되었을지 모르는데, 제 잘못인 것 같아 사과하고 애도했습니 다." 릭페르는 그럴 리가 있었겠느냐는 표정이었지만 대화를 방해하지는 않았고, 몬스터들은 진이 '제 일행들의 힘'이라고 한 말에 와이즈를 의식했다. "그륵. 우리 오크들은 용감 그륵. 했으니 죽었다고 그륵. 슬퍼하지 않을 거다, 인간대장 진." "같은 인간들처럼 똑 같이 절을 한 것에는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 다, 인간여자 진." "천만에요. 당연한 일이었고, 뒤늦게 단지 말로 사과하는 정도였습 니다." 오크 대장과 고블린은 그녀가 마음만 먹었으면 전쟁에서 이겼을지 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잠시 침묵했다. 대왕은 인간여자의 편인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몬스터들 중에도 부상자가 있었을 텐데 도움은 필요 없나 요?" "그륵." 그들은 다시 이상한 인간 보듯 진을 쳐다보았다. "우리는 약한 놈은 그륵. 그냥 죽게 둔다. 그륵. 인간대장 진. 작은 상처 정도는 그륵. 금방 낫기도 하니까. 그륵." "하지만 낫는 동안은 아플 거 에요. 그냥 두면 악화될 수도 있고요. 치료를 받으면 더 빨리 나을 텐데 치료받게 해주는 것이 좋지 않을 까요?" "숲에서는 금방 낫게 하는 풀들이 있지만 여긴 없는 것 같았다. 그 래도 우리 고블린들은 크게 다친 자는 없다." "그륵. 치료해 줄 건가 그륵. 인간대장 진?" "전 못하지만 엘프 블루님이 함께 왔으니 마법 치료를 받을 수 있 을 거 에요." 블루는 오크 대장과 고블린 대표의 시선에 웃으며 대답했다.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허락하시면 부상자들을 봐드리겠습니다." "엘프는 인간에게만 친절한 줄 알았다." "그럴리가요. 몬스터의 숲은 저희에게도 위험하고, 그 곳에 깊이 들 어가는 엘프가 드물어서 여러분과 교류가 없어서였겠지요. 마주치 더라도 공격하는 경우엔 엘프도 방어를 하니 적인 줄 아셨나 봅니 다. 다른 곳에서 만나는 몬스터와는 사이가 좋은 경우도 많답니다." "그륵." 말 없는 동의에 진은 근처에 있는 그들의 부하들에게, 블루와 그의 조수 겸 호위로 릭을 딸려 부상자들을 모아 두었다는 곳으로 안내 하게했다. * "뭐냐. 눈치 좀 그만 봐라. 잡아 먹냐?" "와이즈!" "흥." 먹이들에게 아무리 유희 중이라지만 존대하고 숙이고 있는 것이 부 아가 치미는지, 릭과 블루가 자리를 뜨자 와이즈는 두 몬스터에게 본색을 드러냈다. 한마디 던졌다가 인간여자에게 핀잔을 받고 먼 산을 보는 대왕의 모습에 오크와 고블린은 진땀이 났다. "저. 인간여자 진은. 대왕의 여자신가?" "누가 느네들 왕이냐?!" "와이즈 입다물어. 콱-그냥! 호호...아닙니다, 고블린님. 우린 그냥 친구입니다." 대왕의, 드래곤의 친구라고 라고 라. 그들은 더 기가 죽었고 진은 다 된 밥에 코 빠뜨린 와이즈를 정말 밟아 주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너도 가서 병자나 봐, 와이즈. 도움이 안되잖아." "그래~ 몬스터들이랑 맞선이나 봐라, 진." 와이즈는 그렇지 않아도 한마디하고 자리를 뜨려고 했으므로 흔쾌 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은 낄낄거리며 걸어가는 그의 뒤통수를 째려보아 주었다. "미안합니다." "그륵....그게. 그륵." "인간여자 진." "네. 말씀하세요, 고블린님." 고블린은 엘프와 인간남자가 간 방향으로 사라지는 가짜 인간과. 그의 말을 사과하는 진을 보며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털이 북숭 북숭한 작은 얼굴로 진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했다. "네가 보기엔 우리가 한심해 보이나? 다른 뜻으로 묻는 게 아니다. 넌 다른 인간과 다른 것 같아서." 진은 그들이 인간을 몰아내고자 침략을 일삼게 된 근본원인이었던 것에 대해 마음에 걸려 하고 있음을. 인간과 약간 다른 방향이지만 그들도 긍지와 자부심이 있는 종족이고 맹목적인 면도 있음에 웃으 며 대답했다. "인간과 몬스터는 다르지요. 인간의 잣대로 몬스터를 재는 것은 잘 못된 것입니다. 이제껏 여러분을 인간의 눈으로 보았기 때문에 이 성을 가진 존재임에도 친구가 되지 않고, 서로 반목하는 결과가 되 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들 중에도 여러분을 인정하고 친해지고 싶어하는 인간들도 있었을 겁니다. 한심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인간 들이 한심한 경우가 더 많은 걸요." "넌 우리를 무시하지 않고 인정하는 것 같다." "무시하지 않고 인정합니다. 욕심이 뭔지 알고 고향이 뭔지 알고 긍지가 뭔지, 동료들의 고통이 뭔지 아는데 왜 인정하지 않겠습니 까. 하지만 인간들과 서로 다른 시각과 생활에 따르는 풍습 때문에 이제까지 서로 반감을 키워오게 되었을 겁니다." "그륵." 진은 그들에게 이해함에 부담되지 않도록 천천히 또박또박 말하는 것에 계속 신경 쓰고 있었다. 고블린은 지능이 더 높은 것 같았지 만, 오크의 경우엔 빠른 말로 하는 대화엔 적응이 느린 것을 보았 기 때문에. 오크 대장과 고블린 대표는 진의 말에 머뭇거렸다. 뭔가 말하고 싶은 눈치였고 진은 생김새가 인간과 너무 달라 그들 의 표정으로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항상 품고 있던 투심과 적의가 느껴지지 않고 꽤 우호적이 되었다는 것은 알 수 있었기에 조심스 럽게 본론을 꺼냈다. "저흰 투항해서 집이었던 성을 여러분께 드렸습니다만, 인간은 약 해서 집이 꼭 필요합니다. 오다가 보니 몬스터들은 인간들의 집에 있는 침대를 사용하지 않는 것 같더군요. 제게 파실 생각은 없으세 요?" "그륵. 판다고 인간대장 진 그륵?" "네. 전리품으로 얻은 것인데 그냥은 돌려달라고 해서는 안되니까 요. 몬스터들과 공정하고 정당한 방법으로 거래했으면 합니다." 오크와 고블린은 앉은키의 차이에 연연하지 않고 서로 마주 쳐다보 았다. "금화를 준다고 해도 우리는 그것을 다시 인간들의 비겁한 방법에 속아 빼앗기게 될 거다, 인간여자 진." "그륵. 몬스터의 숲, 깊이 들어가면 그륵. 반짝이는 돌도 많다. 그 륵. 인간들은 그것을 탐낸다. 그륵. 하지만 이제까지 인간들은 그륵. 공정하지 않았다. 그륵." 진은 부드럽게 웃는 얼굴을 유지하며 그들의 당연한 의심과 불신에 변화를 주고자 노력했다. "보석은 먹지 못하는 것이고. 몬스터들이 먹지 않는 풀이나 나무 열매들은 여러분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이라도, 인간들에겐 귀한 물건입니다. 그것들을 인간들에게 교환 품으로 직접 넘기시거 나 인간들에게 채취를 허락하신다면 그에 상응하는 방법으로 식량 과 옷가지 같은 생활 용품을 받으실 수 있게 해드리겠습니다. 인간 의 마을이나 성에 목숨 걸고 쳐들어가서 빼앗지 않아도 되니, 인간 들과 적대감을 더 쌓을 필요도 없게 되겠지요." "그륵." "넌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진은 전투욕으로 무장한 것 같았던 느낌의 그들이 넘어오고 있는 징조에 안도되는 기분이 되었다. "전 돌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인간들 중에도 몬스터들과 친해지고 싶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륵. 믿을 수 있는가 그륵?" "모든 인간이 저 같지는 않을 겁니다. 배신당하지 않으리라는 확답 은 못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제가 주선하는 인간은 믿을 수 있을 겁니다." 그들은 진의 제의를 잠시 생각했다. 숲에는 기다리는 동료가 여기 있는 수보다도 많고, 암 몬스터들도 많다. "그렇지 않아도 그륵. 우린 숲으로 돌아갈까 그륵. 했다. 인간들의 음식과 술은 맛있지만 그륵. 그것을 다 먹고 나면 그륵. 또 다른 인 간들의 땅에 가서 그륵. 빼앗는 재미도 있긴 하지만. 그륵. 대왕께 서 싫어하시는 것 같고 그륵. 우린 숲이 더 좋다. 그륵. 필요하다면 도로 써라. 그륵. 하지만 술과 음식은 그륵. 가져가겠다." 진은 순박한 그들에게 키스를 해주고 싶었지만 마음뿐이었으므로 참았다. "그륵. 무기도 교환할 수 그륵. 있는가?" "인간을 해하기 위해 교환하실 생각이라면 거래 품으로 넣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숲 안쪽은 우리들에게도 위험하다. 반짝이는 돌은 안쪽 에 있고, 숲 가장자리에서 우리가 사는 것도 그런 이유다, 인간여자 진." "그렇다면 여러분에게도 제련 술이 조금 더 나은 인간들의 무기가 필요하겠군요. 한꺼번에 물자를 교환하는 것은 지금 당장은 어렵지 만. 천천히 하나씩 여러분과 서로 만족할 만한 거래를 해 나가도록 애써 보겠습니다." 어찌 보면 달빛 아래 함께 마주 앉아있는 몬스터들의 모습이 기괴 하고 두렵게 느껴질 만도 했지만, 진은 그들이 점점 마음이 동하고 있고. 인간이 아닌 상대에게 난생 처음으로 하는 설득이 먹혀들고 있다는 생각에 뿌듯한 느낌까지 들었다. "하지만 부하들은 싫어할지도 모른다. 오우거들도 어쩔지 모르고." "의논해 보세요. 다른 인간의 영지에 남아 있는 동료들과 이곳에 있지 않은 다른 동족들과는 또 생각이 다를 수도 있으니까요." "그륵. 오크대장은 나다. 그륵. 내가 도전에 져서 대장이 그륵. 바뀌 지 않는 한 부하들은 그륵. 내 말을 들을 것이다." 고블린은 진의 시선을 받고 오크에 이어 대답했다. "난 이곳에 있는 동족들의 대장이지만 몬스터 숲에는 고블린 로드 께서 계시다. 하지만 네가 말한 대로 공정한 거래를 인간들이 약속 대로 한다면 로드께서도 허락하실 거다. 우리 고블린의 결정에 반 대하고 방해하는 이웃 몬스터가 있다면 우린 싸운다." "그렇다면 두 분만 믿겠습니다. 이렇게 말이 통하고 정의로운 종족 인데 제 마법사로 있는 그 분도 생각을 달리 하실 겁니다. 아마 화 가 난 일이 있어서 여러분께 화풀이를 하셨나보네요. 너무 그 일에 마음 쓰지 마십시오." "그륵." [웃기고 있네.] '시끄럿. 대신 사과해 주잖아! 고마운 줄 알어.' 와이즈는 몬스터들을 돌보러 엘프를 도우러 가는 일도 싫고, 몬스 터들과 밥 먹는 자리도 웃기게 느껴져서 그들의 대화를 떨어진 곳 에 느긋하게 앉아 엿듣다가, 방문이 끝나 감을 알리러 일행을 찾아 갔다. 릭은 진을 몬스터들에게 혼자 남겨두고 온 리툰 마법사에게 황당하 다는 표정을 해 보이고 급히 되돌아 왔다가, 몬스터들과 상거래 약 속을 하고 있는 진을 발견하고 리툰 마법사가 자주 그러는 것처럼 먼 산을 보는 시늉을 했다. [96] 11-8. 배움의 기회 밤늦게 진은 몬스터들이 베푼 연회에서 일행과 캠프로 돌아왔다. 몬스터들과의 만남에 혹시나 그들이 뭔가 다른 요구를 해 온 것은 아닌지 호기심과 걱정으로 물어오는 주민들과, 확언했던 사항이 오 고갔는지 궁금해하는 기사들에게 진은 아무 문제없고. 희망적이니 조금 기다려주자는 말을 하고 모두를 쉬게 했다. 릭 대신 포로들의 감시 지휘를 맡았던 카즈 유로카가 남아 전해왔 다. "레이디. 이지스 부인께서 면담을 청해 오셨습니다. 이지스경께서도 요." "권티 영주께서는 말씀 없으신가요?" "권티 자작께서는 달관하신 듯 합니다." "그분께 기사 분들은 감정 없나요?" 카즈는 푸른 눈에 웃음을 담아 빙긋 웃으며 진의 물음에 대답했다. "그분의 인품에 대한 저희의 판단이 알고 싶으신가 보군요, 레이디. 권티자작께서는 상관이었고, 특별히 선정을 베푸시지도 않았지만 폭군도 아니었던 평범한 귀족 분이셨습니다." 진은 고개를 끄덕이고 밤이 늦었으니 내일 아침 찾아가겠다는 말을 전하게 했다. 릭은 캠프 순찰을 돌기 위해 진의 지정석이 된 아궁이 앞 잠자리를 떠났고, 블루도 몬스터들을 치료하느라 피곤했는지 근처에서 눈을 비비고 있었다. "블루. 쉬어. 무리하면 살빠져." 블루는 식기를 내린 아궁이 앞에 와이즈와 앉아 숯을 헤치며 하는 진의 말에 미소짓고 잘 준비를 했다. 권티 성벽 안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바람을 타고 전해져왔다. "부하들이 반대하는 걸까?" "핑계거리가 생겼으니 도전의식을 하나보다. 고블린들이야 몇 되지 도 않으니 구경이나 하고 있겠지." "흠. 오크대장이 이겨야 할 텐데. 또 설득하러 가고 싶지 않아. 인 간과 다를지 몰라서 긴장을 잔뜩 했더니 피곤했었어." 진도 자기 위해 모포를 폈다. "쉬운 방법도 있지 않냐, 진?" "아니야, 와이즈. 그들이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해야 하는 거야. 명 령으로 조종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그들에게도 인간들에게도 도움 이 안 돼. 하지만 고마워. 도와주고 싶은가 보구나?" "난 이미 충분히 도와줬다, 진." "에이~ 도와주고 싶으면서. 또 빼기는~" 빙긋거리며 웃는 진에게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머리카락을 잡아당 겨 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와이즈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좀 걸려들어라, 이 계집애야.' * 다시 권티의 아침이 밝았다. 성벽 밖 캠프에는 나무로 지어지는 집이 하나하나 늘기 시작하고 있었고, 더 이상의 위협과 불안도 남아 있지 않음에 쾌활하고 활기 찬 곳이 되었다. 진의 마법자루의 식료품도 양념거리를 제외하고는 바닥이 나서 사냥을 하기 위해 숲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많아졌 고, 블루는 그들을 돕기 위해 함께 갔다. 아이들은 엘프 뒤를 졸졸 따라다니다 철인 산열매나 산딸기를 찾겠 다며 또 그의 뒤를 따라 숲으로 들어갔다. 릭은 어제보단 편한 포로 경비 일이었다며 밤낮이 바뀐 잠자리를 조절하고자, 와이즈와 진과 함께 권티 성안에서 밤새 들렸던 몬스터 들의 소란이 계속 되고 있는 소리를 들으며 아침을 먹었다. 진은 편이를 봐주는 주민들- 집을 짓거나 사냥을 간 대부분의 남자 들이 제외된-설거지를 하거나 옷가지를 수선하며, 어려워하지 않고 진의 일행 근처에 가까이 다가와 있는 아낙네들과 잡담을 하며 간 단한 아침을 먹었다. * 진은 릭에게 쉬라고 말해 두고, 거창하게 심호흡을 하고 무서운(?) 부인과 그녀의 남편을 만나기 위해, 포로들을 수용하고 있는 천막 으로 와이즈와 함께 숲 안쪽으로 갔다. "거처를 옮기는 일을 사양하셨다고요, 부인." "영애의 충고가 빈말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지요." 천막 안은 어제와 비슷한 풍경이었지만 부인은 칸막이를 한쪽에 두 고 멍이 가시지 않은 얼굴의 이지스경과 같은 쪽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지쳐 보였다. 단정했던 갈색 머리형도 약간 흐트러져 있었 고 그녀의 어린 딸들도 익숙하지 않은 친어머니의 보살핌에 지쳤는 지 한쪽에 자리 잡고 불편한 바닥에서 정신 없이 잠이 들어있었다. "하녀를 드리지 못하는 입장이라 아이들에게 미안하게 되었네요." 부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친자식도 귀족들은 손수 수발을 들지 않 는 것이 보통이었으니 그녀도 그랬을 테고, 어머니라는 입장을 내 세웠던 것에 실제 어머니로의 일을 해보긴 처음인지라 느낀바가 있 었는지 태도가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이지스경은 진이 자신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음에 연신 땀을 닦으며 누적된 망신과 불만으로 얼굴이 굳어있었다. 와이즈는 칸막이 건너편으로 갔다. "영애." "말씀하세요, 부인. 부르셨다고 해서 왔는데, 계속 말씀이 없으시니 돌아가야 하나 싶었습니다." 그녀는 입술을 한번 잘근 씹고 시간을 많이 주지 않겠다는 의미의 말에 서둘러 입을 열었다. "아버지와 저와 제 딸들을 풀어주십시오. 전투에 패한 것 보다 더 비웃음 당할 일을 한 부군의 처리까지야 제가 뭐라 할 일은 못됩니 다만, 아버지는 나이 드셨고. 제 딸들은 아직 너무 어립니다." "부인!" 그녀는 얼굴이 벌겋게 된 남편의 항변에 눈도 깜박하지 않았다. "영애가 내 놓은 해결책은 불가능합니다. 이혼하고 싶어도 전 혼자 서는 생계를 꾸리지 못합니다. 아이들을 데리고는 더 그렇지요. 체 면을 버리는 문제로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다른 방법 은 제게만 말해 주셨다면 기꺼이 시도해 볼 수 있었겠지만, 영애는 일부러 다 듣는 자리에서 말씀하신 것 같더군요." "부인!" "시끄럽습니다! 영애에게 독을 빌릴 필요도 없습니다. 난 언제든 기 회가 오면 쓰려고 준비해 두고 있었으니까욧! 당신은 아비구실도 못했고, 남편의 도리도 지키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자신의 영역이라는 듯이 벌떡 일어나 참고 있던 화를 터뜨리려고 하는 그를, 진은 태연한 표정으로 다리를 걸고 살찐 그의 배를 가 볍게 걷어차 주었다. "윽." 오하미 이지스는 뒹구는 모양으로 몇 걸음 나가떨어져 칸막이 커텐 을 출렁이며 넘어졌다. "저런. 왜 갑자기 넘어지시지?" 이지스 부인은 간혹 위협이 되었던 손찌검을 받나 싶은 상황에서, 적인 여자의-눈앞에서 뭔가가 휙 지나갔다-행동임에 틀림없을 보 복에 눈을 말똥거리다가 피식 웃었다. 남편의 시뻘게진 얼굴에서 눈을 떼고 진에게 다시 고개 돌린 그녀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보셨지요? 전 저 사람과 더 같이 살며 내 인생을 축내고 싶지 않 습니다. 하물며 그의 식솔이라는 점으로 이곳에서 더는 수모를 받 고 싶지도 않습니다. 풀어주신다면 아버님께서도 당연히 몸값으로 사례하실 겁니다. 정 안 된다면 저와 아이들의 생활을 보장해주신 다는 약조를 해주십시오. 이혼하고 싶습니다." "부인." "그것도 안 되는 가요?" 진은 천막 밖에 경비들 외의 사람 발자국 소리에 신경이 잠깐 흐트 러졌지만, 릭의 말소리가 구별되어 들리자 경계를 풀고 이지스 부 인에게 대답했다. "아니요, 가능합니다. 하지만 전 대가없이 사람들에게 무조건 베풀 지는 않습니다. 부인께서 이혼하신다면 이제까지처럼 귀족의 생활 처럼 풍족하지는 않겠지만, 넉넉한 생활로 아이들을 손수 키우실 수 있도록 해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부인도 제 몫이 될 일을 하셔 야합니다. 더 이상은 귀족 신분을 내세울 수 없고 이름뿐인 귀족이 되실 테니까요." 부인은 얼굴이 붉어져서 다시 앙칼진 목소리로 대꾸했다. "저보고 몸이라도 파라는 겁니까, 영애?!" "아닙니다." "그럼 무슨 일을 하란 말인가요. 여자들은 할 수 있는 일이 하녀일 밖에 없습니다. 전 자작가문의 여식이라 작위 없는 귀족가의 처자 들처럼, 뭔가 생활에 보탬이 될 만한 일도 배우지 못했습니다." 오하미 이지스는 아내의 말에 '그렇지. 네가 뭐 할 줄 아는 게 있었 냐?' 하는 표정으로 비웃음을 흘렸다. 진은 나중에 꼭 그의 얼룩달 룩한 얼굴의 비계를 친절하게 빼주리라 속으로 다짐했다. 진의 속생각을 알았는지 와이즈의 눌린 웃음소리가 칸막이 저편에 서 들렸다. "글을 아시지 않습니까." "...글이요?" "모르십니까?" "압니다!" "그럼 글을 배우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배움의 기회가 절실 한 사람들에게 가르치면 되겠군요. 그 몫을 해 주시면 훌륭한 대가 가 됩니다, 부인." 이지스 부인은 말문이 막혔다. "평민들에게요? 무리입니다. 아무리 이름뿐인 귀족으로 남는다고 해도 평민 남자들과 어찌 어울린단 말입니까, 영애." "부인. 평판 문제라면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배우고 싶어하는 것은 남자들만이 아닐테니까요. 평민 여자들과 농노의 딸들을 가르치십 시오." 이지스 부인은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다시 얼굴이 빨개졌다. "이혼하시면 부인은 더 이상 귀족 계층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을 겁니다. 하층민들과 자신을 다르게 보시지 않으면 됩니다. 그들도 머리가 있고, 말씀하신대로 특히 여성들은 할 수 있는 일에 제약이 많습니다. 귀족이나 기사 분들에게 심심풀이나마 연애대상이 되려 는 이유는 그것이 그들에겐 유일한 신분상승의 기회이기 때문입니 다. 부인이 그런 그녀들을 가르친다면 그들을 업신여기실 필요가 없겠지요. 배움이란 의식을 깨우는 일만이 아니라, 미래가 보장 될 수도 있는 일입니다. 그 일을 해주시지요." "기사분들...쿡쿡..영애는 신랄하군요. 그 부분은 불문율 아닌가요?" "기사는 남자 아녔나요? 어니스트 사제도 아닌데 무슨...감춘다고 모를 정도로 둔하지 않습니다, 부인." 진은 밖에서 듣고 있을 릭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너무너무 궁 금했다. 와이즈는 누워있는 권티자작과 그의 호위기사들의 묘한 표 정에 계속 웃음을 참아야했다. 밖에 릭페르와 함께 와 있는 낯익은 기척의 인간의 표정은 어떨지 궁금했다. "제게 배우려고 할까요?" "배우려고 할겁니다, 부인. 여아들은 배우고 싶어도 남아형제들에게 기회를 먼저 뺏깁니다. 글을 배우는 것은 단순한 지식 습득 정도입 니다만, 책을 읽을 수 있다는 소리니 무식하다는 소리를 듣지 않게 될 테고 무시당하는 것이 줄어들겠지요. 기사학교나 마법학교에나 가야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됩니다. 태도를. 그들을 등한 시하고 천하게 보던 태도만 바꾸시면 됩니다. 주민들은 순박합니다. 그들에게도 좋은 점은 있으니 배우겠다는 생각으로 대하시면 적대 할 리 없습니다, 부인." "...정말 제게서 배우려고 할까요?" 아마 파악된 그녀의 성격과 언행을 두고 보면 시작이 좀 힘들지 모 르겠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진은 그 정도의 난관은 그녀도 감수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감수해야한다는 판단을 했다. "잘못하신 일이 있으시다면 사과하십시오, 부인. 부인께서는 귀족이 었기 때문에 보호받을 수 있었지만, 평민과 농노의 딸들은 같은 여 성의 입장임에도 귀족 레이디처럼 보호받지 못하고 배우지 못했음 에 밑바닥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들의 근본이 천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여. 영애. 여자들이 배워서 무얼 한답니까. 배운다면. 아니, 저기 가 르친다면 차라리 제가 더 낫..." "면담 차례가 아닙니다. 이지스 경." 싸늘한 말투에 기가 죽어 다시 찌그러진 남편을 조롱하는 눈으로 보던 부인은 다시 마음에 걸리는 일을 거론했다. "아버님이 허락하실 지. 아니..아버지는 이젠 이곳의 영주가 아니시 니..." "네. 현재 권티의 영주는 저이지요. 권티 안에서의 문제 정도는 제 선에서 이룰 수 있습니다. 이혼하시고 배우길 원하는 처자들에게 글을 가르치시겠나요, 아니면 부군 되시는 분의 일이 처리되길 기 다리시겠습니까." "이혼하겠습니다." 부인은 눈을 부라리는 남편을 싹 무시하고 시원하게 대답했다. 진은 하루 이틀 사이에 첩들에게서, 부인과 자식들에게서 버림당함 에 파랗게 질리기 시작한 오하미 이지스와 천막 안의 고요에 웃어 주었다. 와이즈는 두 레이디의 대화를 듣고 있던 천막 안 기사들의 반응을 구경하는 것을 끝내고, 밖의 인간 남자들의 표정을 구경하 기 위해 얼른 일어났다. 진이 지나치는 자신에게 왜 그러냐는 눈으로 바라보자 낄낄거리며 알려주었다. [아밀리한 매니스가 와 있다, 진.] '...이런.' 카르마의 구슬 97 -[11-9. 프로포즈] "면담 차례가 되었네요. 손님이 오신 것 같으니 시간을 지체 할 수 없네요. 용건이 있으시면 말씀하시지요, 이지스경." "여. 영애. 저는..." 진은 고소하단 표정을 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지만, 웃음이 번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는 이제 어떻게 할까. 장인의 힘과 연결 되었던 고리가 사라졌으니 완전 빛도 좋지 않은 개살구. 아니 말 그대로 이름뿐인 귀족이 되었다. "하실 말씀 없으면 가보겠습니다. 바빠서 말이지요." "자. 잘못 했습니다, 영애. 저. 무례한 언사를 해서 모욕을 드린 점 도. 저기. 영지민들을 잘 돌보지 않은 것도 대단히 죄송합니다." "그 일은 이미 사과를 받아 드린 것으로 아는데요, 이지스 경. 선정 을 베풀지 않은 것에 대한 사과는 제가 아니라 영지민들에게 하셔 야지요." 그는 붉어진 얼굴로 짐을 뒤적이고 있는 부인을 흘끗거리며 연신 땀을 닦으며 말을 이었다. "예. 사과해야지요. 저. 직무를 다하지 않고 도주한 것도 사죄 드립 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투항한 형편입니다. 이지스경의 사과를 받기엔 좀 뭐하네요. 주민들이 대부분 힘없는 하층민들이라 어쩔 수 없었답니다." "그럼..." 이지스 부인은 바르르 떨며 자존심을 팽개치고 있는 전 남편에게 신경을 뚝 끊고, 간단하게 꾸려 한쪽에 치워두었던 짐 가방에서 결 혼할 때 썼던 짧은 웨딩베일을 꺼내 진에게 넘겨주었고. 진은 밖의 경비에게 깃털 붓과 잉크를 가져오게 해서 간단한 이혼 서류를 작성해 주었다. 이지스 부인은 냉큼 다시 받아들고 두껍게 써지는, 작은 새의 깃털을 다듬어 만들어진 붓끝으로 사인을 했다. "사인하시지요, 이지스경. 부인과 친자에 대한 권리포기 각서입니 다." * 와이즈는 천막 밖으로 나갔다가, 기사 카즈 유로카와 릭페르의 무 어라 형언할 수 없다는 표정에 웃음이 더해졌지만. 이동 마법진을 그리게 하느라 함께 온 마법사와 서 있는 아밀리한 매니스를 보고 는 인상을 써야 했다. 그는 웃고 있었다. 애써 폭소를 누르고 있는 표정과 그가 들고 있 는 것에 시선을 주고 와이즈는 속으로 혀를 찼다. '정말 만만치 않은 인간일세.' * 진의 강압적인 권유에 사인을 한 이지스경은 살려달라고 빌어도 풀 어주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을 겨우 했는지 침체된 얼굴로 침묵했 고, 진은 될 수 있으면 빠른 시간 안에 포로의 입장을 정리해 주겠 다는 말을 남기고 천막 밖으로 나갔다.-아밀리한이 부디 웃고 있지 만 않으면. 하는 생각을 하며- 진은 이지스 부인과 잠든 그녀의 딸들을 다른 거처로 옮기도록 경 비들에게 지시하고 천막 밖의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진. 흠. 전 책임져야할 처자 없습니다." "누가 뭐래, 릭?" "...아밀리한 매니스 백작님이 오셨고요, 진." "응. 나도 눈 있어, 릭." 릭은 쏘아보는 눈을 하고 진의 시선을 잡으려고 하고 있었지만, 그 녀는 릭과 말하며 웃음기 어린 얼굴의 자주색 머리의 남자의 손 부 위에 눈이 가 있었다. 그는 붉은 기운이 도는 가죽 조끼 차림에 샌 들을 올려 묶어 신은, 수련 기사처럼 간편한 복장으로 몇 걸음 앞 에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레이디 진. 빨리 오지 않으면 가만 두지 않겠다는 뜻 의 편지를 받고 최대한 서둘러 왔습니다. 만나는 지점이 굉장히 가 까웠네요." "그러네요, 백작님." 아밀리한은 멀뚱거리는 표정의 진에게 쿡쿡 웃으며 다시 말했다. "전 다행히도 불문율 있는 기사가 아니라 용병 귀족이지요. 빈손으 로 올 수가 없어서 가져왔습니다. 받으시겠어요, 진?" 아밀리한은 웃음 띈 얼굴로 진의 말을 인용하며 들고 있던 장미 꽃 다발을 내밀었다. * 와이즈는 쌀쌀맞은 얼굴을 하고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진은 머뭇거리다가 한방 맞은 얼굴이더니, 한번도 보지 못했던. 그녀의 개성, 성격, 특성상 지을 리 없을 것 같았던. 생각지도 못했던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긴장이 완전히 풀리고 무 너진 얼굴로 진은 반 아름쯤 되는 봉오리 진 붉은 장미 꽃다발을 인간남자에게서 받아들고 있었다. "신사 분들에게 무례가 될 발언과 조치였을까요? 딱히 누구를 겨냥 하고 한 소리는 아니었습니다만." "누가 감히 영주에게 발언권과 판결 권이 없다는 말을 하겠습니까, 진." 진은 그의 과장 된 투의 답변에 웃으며 받아든 꽃을 내려다보았다. "고맙습니다, 백작님. 너무 예쁘네요. 아직 철이 아닌 줄 알았는데 피는 곳이 있었나 보네요. 이런...꽃을 받아본 게 얼마 만이지? 사탕 은 없나요, 백작님?" "사탕이요?" "프로포즈에 꽃과 사탕이 이용되던 곳에 있었거든요. 설탕을 뭉친 것이라고 생각하시면 되요. 하지만 꽃만으로도 너무 기쁘네요. 이럴 수가. 이런 기분이 되다니. 감동적이기까지 하네요." 아밀리한은 되려 놀랐다. 반응이 너무 좋지 않은가. 부유하지 않아 보석 선물이나 드레스 선물이 힘든 경우나, 간혹 평민들도 들꽃을 이용해 여자들의 환심을 사려는 행동을 하기도 하지만. 별 생각 없 이 가져온 장미 몇 송이에 그녀는 감동까지 하고 있었다. 아밀리한은 옅은 갈색머리 기사와 그녀의 화려한 외모의 금발머리 마법사의 표정에 다시 웃음이 나왔다. "꽃을 선물하는 신사 분이 없었나요?" "아. 예전 남자친구에게 몇 번 받은 적이 있었지만, 그땐 꽃이 이렇 게 예쁘고 좋은 기분을 주는 줄 몰랐거든요. 먹지도 못할 것을 준 다고 핀잔을 줬더니, 시무룩해서 그 후론 안 주더군요. 친구들의 생 일에 덤으로 받은 적은 있었지만..." 진은 보통 평범하고 순진한 아가씨처럼 긴장감 없는 목소리로 말하 고 있는 자신을 깨닫지 못했다. 그녀는 갑작스럽게 다가 온 불행에 가슴이 놀란 것처럼, 갑작스럽게 치미는 수수한 행복감을 느끼고 있었다. 붉고 고운 색의 꽃잎 하나 하나가 세밀하게 겹쳐져 있는 장미꽃봉오리들은, 남아 있을 것이 없으리라 생각했던 마음의 벽을 찾아 쉽게 무너뜨렸다. 진은 순수하게 자신만을 위해 피어났음을 증명하는 그 꽃들의 존재에 눈까지 비벼야했다. "너무 기뻐해 주시니 오히려 무안하네요, 진?" 웃음기 어린 아밀리한의 목소리에 진은 허공에 붕붕 떠다니던 기분 에서 다시 땅으로 내려섰다. 진은 그의 자주색 눈을 보며 웃었다. 아밀리한은 그녀의 일행 기사가 헛기침을 하는 것과, 금발머리 마 법사의 살벌한 시선이 느껴짐을 알고 있었지만 전혀 상관없었다. 그는 진심으로 내보이는, 진의 행복해 보이기까지 하는 지극히 화 사한 미소에 숨을 삼켜야했다. 그녀는 들고 있는 꽃이 비교도 되지 않을 아름다운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흠. 남자친구가 있었다고요, 진?" "하하...네. 꽃 돌려드릴까요?" "결코 사양합니다." "그럼. 답례를." 진은 꽃을 들고 있지 않은 팔을 들어 아밀리한의 목을 잡아 끌어내 려 입맞춰 주었다. 천막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나오던 이지스부인도. 곁눈으로 지켜보 고 있던 경비들도. 백작의 마법사도. 릭도...비틀거려야했다. 와이즈도 그들과 비슷한 기분에 머리카락이 뻣뻣이 서는 느낌이 들 었다. 진은 호의와 감사를 담아 다정하게 키스했고. 아밀리한은 약간 경직되었다가, 진이 목에 둘렀던 손을 풀자 새어 나오는 웃음을 다시 눌러야했다. "꽃을 자주 드려야겠네요, 진." "후훗. 한번 이상은 효과 없을 겁니다, 백작님." "그럴 수가. 제 성 정원의 꽃을 모두 드릴 테니 재고해 주시죠." "미안합니다, 백작님. 제가 좀 인색해 설랑." "흠. 그렇다면 그 사탕이란 것을 만들어야겠군요." "핫. 핫." 진은 그제야 주위를 의식하고, 잡아먹을 것 같은 릭의 눈초리와 무 표정한 얼굴의 얼음 같은 와이즈의 기운과 호기심 섞인 이지스부인 의 시선과 멋쩍은 얼굴로 부러움의 눈길을 보내고 있는 카즈 유로 카와 경비들에게 호탕한 웃음소리를 내어주었다. 진은 나뭇가지 사이로 비춰 내리는 햇살과 짙푸른 나뭇잎들이 만들 어내는 실루엣이 눈이 부시다는 생각을 하며, 들고 있는 장미꽃에 현혹마법이 걸린 것은 아닐까하는 변변찮은 의심을 했다. 진은 폐 속 깊이 스며드는 꽃향기를 맡으며 행복한 기분이 되었다. * 아밀리한은 레이디 진의 심부름이라며 매니스 성을 찾아 온 상인 베니키에게서 짧은 일회용 전보-아무것도 쓰여지지 않은 양피지 한 장이었다.-를 받았고, 베니키가 알려 준 데로 물에 담궈 잠깐 떠올 랐다 물에 녹아 사라지는 식물 즙으로 쓴 글을 읽었다. -권티를 드리겠음. 필요한 것은 의식주에 관한 모두. 영지를 채울 주민. 기사단. 늦으면 다른 사람을 찾겠음.- 아밀리한은 진의 일방적인 제의를 받았고, '이렇게 무드 없는 러브 레터라니!' 하고 농담 섞어 말은 했지만. 상인 베니키를 붙잡고 그 가 보고 듣고 알고 있는 권티에 대한 모든 일을 들었다. 아밀리한은 곧 진이 조건으로 건 것들을 채울 만반의 준비를 명했 다. 이주 할 주민들은 매니스 성의 개방 된 창고에서 나온 의식주 전반에 걸친 물건들을 호송하는 기사들과 함께 도열했고, 아밀리한 은 전투를 대비해 매니스 성의 경비를 맡은 기사와 병사들을 제외 한 병력을 총동원시켜 앞서 출발할 것을 명했다. 최선으로 움직였지만 준비하는데 시간이 걸렸고 국경을 넘어 권티 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또 시간이 소요되는 점 때문에, 그는 군대와 함께 이동하지 않고 지휘권을 보좌관에게 맡겨 보낸 후 성의 마법 사에게 이동 마법진을 그리게 했다. 마법진이 그려지는 동안 정원 근처에서 기다리던 그는 별 기대 없 이 갓 봉오리가 지기 시작한 장미를 꺾어 들었고, 마법사 한 명만 데리고 사키리온-권티로 워프했다. * 아밀리한은 권티의 성 없는 새 영주의 손님이 되었다. 진은 캠프 근처에 집을 지으며 주민들이 만든 작은 나무 탁자를, 숲 안쪽 우거진 나무 사이 빈 공간으로 옮기게 했다. 릭과 아밀리한의 개인 마법사와 기사들의 대표로 카즈 유로카가, 아밀리한과 마주 앉아 있는 진의 근처에서 감시하는 기분이 되어 그녀가 시도하는 외교를 지켜보고 있었다. 진은 그에게 권티와 메르사와 니소아 문제에 따른 모든 것들을 낱 낱이 설명했다. 투항한 권티 기사들과의 협력으로 양 나라의 인정 을 받는 공국의 가능성에 대해, 몬스터 숲을 이용할 수 있게 될 사 항과, 주민들의 희망에 대해. 진은 줄줄 읊듯이 설. 명. 만 했다. "결국 절 이용해 디메토르나 개인적으로 매니스가 추진하던 일을 미리 차단하시려는 의도네요, 진?" "어차피 백작님의 계획이 뜻대로 성공하더라도 공작 이상은 되지 못하지 않나요? 피 흘리지 않고 얻게 되는 그 이상의 지위입니다. 용병이라 하셨으니 하시지도 않았을 맹세의 신의를 반드시 지켜야 할 의무도 없고, 디메토르에게도 꼭 나쁜 영향의 일은 아니지 않나 요, 백작님?" 아밀리한은 그녀의 영지가 된 권티 성밖의 나무 숲 안에 앉아, 늦 은 오후가 되어감에 조금씩 어두워지고 있는 풍경 안에서. 검푸른 머리, 짙은 남청색 눈동자의 아름다운 아가씨와 마주 앉아 서 가볍게 거론할 이야기는 아닌 듯 한. 그 대단한 화제에 그녀가 보여 주었던 웃음을 보았을 때처럼 다시 한번 감탄했다. 매니스를 떠난 지 겨우 며칠. 그녀의 전보 내용에 관한 세부 사항 을 듣고 그녀가 그 짧은 시간 빚어낸 결과에 대해, 아무리 그라도 말문이 막힘을 인정했다. 권티 영지를 주겠다는 말은 다스릴 영토 를 늘려주겠다는 정도의 작은(?) 호의가 아니라, 부강한 공국의 공 왕의 자리를 주겠다는 말로 번져있었다. 전보내용과 상인이 가져다 준 이야기가 극히 한정된 정보였다는 것도 알았다. "거절 할 이유가 있나요, 백작님?" 시작은 이미 되어 있었고, 아밀리한 자신의 선택만 남아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제의를 받아들이면...그녀는 떠날 텐데? 진은 그에게 받은 장미를 탁자 위에 올려두고 있었고, 그것에 눈길 을 향한 아밀리한은 매니스 정원의 꽃이 아니라 서 대륙의 모든 꽃 을 줄 테니 같이 있어달라고, 함께 하자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공적인 미팅이 시작 된 후론 잠깐 보였던 그 분위 기. 그 유독 사랑스럽고 아름답게 보였던 표정이 사라져 있었고, 아 밀리한은 다시 방법을 찾지 못하겠다는 막연한 기분이 되었다. 그녀의 제의에 대한 선택의 대답을 가지고는 이용할 수 없다는 판 단이 섰다. 그녀에겐 먹히지 않을 것이다. "다 차려 준 식탁을 거절할 리 있겠습니까, 진?" "주민들을 잘 이끌어 주시겠지요?" "최선을 다하지요, 진." "감사합니다, 백작님. 아니, 이제 권티의 영주님이기도 하네요. 곧 다시 명칭이 바뀔 테고. 백작님은 성이 참 여러 번 바뀌네요." "아밀리한입니다. 저만 이름을 부르니 예의 없는 신사 소릴 듣겠네 요. 호칭을 바꿔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진." "그러지요. 아밀리한." 아밀리한은 눈을 떼지 않고 있는 기사 둘과 매니스의 마법사를 무시하고, 웃는 진의 얼굴에 손을 가져가 만져보고 싶었다. "흠. 포로였던 부인과 나누는 말씀을 들었지요. 저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었습니다. 어쩌면 다른 누구도 아닌 제 자신이 예전 에 이미 시작했어야 할 일이었겠지요. 일깨워 주셔서 고맙습니다, 진." 진은 그에 관한 다른 부분들의 대화내용도 생각나서 멋쩍어졌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되돌려 주실 일을 더 바래는 것은 무리일까요, 진? 엄밀히 따지고 보면 엄청난 일을 벌여놓으시고 수습을 떠넘기 고 계시는 게 되지 않나요?" "공왕하기 싫으세요, 아밀리한?" "싫을 리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생각하신 것 보다 제가 다스릴 영 지는 더 넓을 겁니다. 전 표면상 매니스의 영주지만 근처 다른 영 지에도 영향력이 크니까요." "잘됐네요. 잘해 보세요, 아밀리한." 아밀리한은 말하는 의도를 못 알아들은 척 빗나간 대답을 하는 진 에게 자주색 느낌이 나는 웃음을 지었다. '정공법? 아니면 떼라도 써야하나? 후후...' "진. 진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애써 얻은 개인적인 호의를 다시 놓 치게 되는 일이 될까요?" "들어서 좋을 것 없다고 하지 않았나요, 아밀리한? 좋은 기분인데 우울한 기억을 되살리고 싶지는 않네요." "앞으로 더 나을 기분을 드릴 기회는 주시지 않을 겁니까? 윙크 정 도로 매니스가 흔들렸는데, 이제 전 진에게 아주 찍혔는데요?" "또 실수를 했나 보군요. 사형 이상의 벌도 있으려나..." 아밀리한은 그녀의 일행 기사를 의식하며 다시 말했다. "째려보고 있는 저 기사분과 어쩌면 마법을 이용해서 듣고 계실지 모를 일행 마법사님의 결투 신청이나 복수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할 말은 해야겠네요, 진." * 와이즈는 아밀리한의 말대로 그들이 있는 새들의 지저귐이 가깝게 들리는 숲 안 면담자리가 아닌, 사람들이 오가는 캠프 한쪽. 밑둥만 남아 있어서 진이 곧잘 식탁으로 쓰던 곳에 앉아서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 그는 짜증을 표출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침 묵하고 있었다. '잘들 논다. 흥.' '겨우 꽃 몇 송이에 넘어가냐!' 아니, 속생각까지는 침묵이 아니었고. 블루가 숲에서 돌아와 산딸기를 가득 담은 바구니 몇 개를 함께 갔 던 아이들에게 맡겨, 저녁 준비를 하고 있는 그들의 어머니들에게 돌려보내고 가까이 왔지만. 와이즈는 무릎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괴고 있는 자세 그대로 올려다보지 않았고, 몹시 저기압인 그의 태 도에 블루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그는 사냥을 나갔다가 먼저 돌아와 있었거나 돌아오고 있는 사람들이 말하거나 듣고 있는. 경비들에게 전해 들어 수다를 떨고 있는 아낙네들 덕에 화제가 되고 있는 포로 수용 천막에서 있었다 는 몇 가지 일에 대해 알게 되었다. * "대륙에서도 손 꼽힐 지참금으로 계산 될 미래를 받고 나 몰라라 할 순 없지 않습니까, 진? 음. 제 평판을 위해서 이기도 하네요. 모 두 보는 앞에서 제게 도장까지 찍으셨으니 책임을 져 주시지요." "하하..." 진은 꽃 선물로 최고점이었던 것에 추가점을 더하기까지 하고, 이 성으로 의식하게 만들기까지 한 그가 보통내기가 아니었다는 것을 잠깐 잊고 있었던 기분이 되었다. 아마, 긴장을 덜해서였을까. 얌체 같단 생각이 들었지만 진은 그가 전혀 밉게 보이지 않았다. "흠. 아밀리한. 제 친구는 제게 미래의 부군이 될 사람에게 목숨 아 까운 줄 알아야할 거란 말을 꼭 해 주겠다고 하더군요." "목숨쯤이야 얼마든지 내 드리지요, 진." "콜록." "고향으로 힘들게 가셨다가 되돌아오실 필요 없이 부모님께 따로 사절을 보내드리지요, 진." "콜록. 흠. 아밀리한. 제가 나이가 조금 더 있었거나, 신랑감을 찾고 있는 입장이었다면 충분히 긍정적으로 검토했을 제의입니다만." "제가 유력한 기회를 붙잡고 있음은 확실하단 뜻이겠지요?" "지금은 아니라는 뜻이지요." 아밀리한은 눈살을 찌푸리며 웃고 있는 진에게 곰곰이 생각하는 태 도로 대답했다. "음. 그럼 기회를 그냥 흘리지 않도록, 평생 일군 것들과 굴러 들어 온 복을 유보시켜 두고라도 진을 따라가야 하지 않을까요?" "정신이 나갔어요, 아밀리한?" "쿡쿡...다른 의미로 정신이 나가긴 했네요, 진. 어쨌든 책임을 져 주시지요. 전처럼 그냥은 못 보내드리겠습니다." "몬스터들에게 던져 주시고는 그냥이라고요?" "확실히 그냥은 아니었군요. 제 영지자치 병력이 몰살되었으니까요. 처리하는 일에 부하들이 애먹었습니다. 그 피해 보상도 받아야겠네 요, 진." 진은 의젓하게 대답했다. "음. 전 아직 미성년이고 제 보호자인 마법사는 제가 이곳에 남는 일에 결코 찬성하지 않을 거거든요? 하지만 꼭 책임을 져야한다니, 조율한 방법으로 제 세 번째 신랑감 후보로는 넣어드릴 수 있겠네 요, 아밀리한. 안타깝게도 전 조기 결혼은 고려치 않고 있거든요? 한 십 년쯤 후에, 그때도 아밀리한이 미혼이고 여전히 책임을 주장 하신다면 다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미성년? 세 번째? 10년?" 아밀리한은 진이 말한 문장에서 단어를 추려내 의미를 되새기더니 소리내어 웃기 시작했다. * "그럼. 성년식 때문에 귀가를 서두르고 있었나요, 진?" "네." "성년식은 이곳에서도 올릴 수 있지 않나요? 더 뜻 깊을 것 같은데 요." "전 부모님을 기억할 수 없어요, 아밀리한. 너무 어릴 때부터 떨어 져 있었거든요. 귀국은 꼭 해야합니다." 아밀리한은 절망이라는 듯이 웃었다. "마법사 와이즈가 보호자라면 엘프와 릭페르경이 두 명의 후보인가 요, 진?" "아닌데요? 네카르도에 있는 귀여운 소년 둘이지요." "귀여운 소년..." 아밀리한은 웃음을 조절할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붙잡아 두긴 어려울 것 같군요. 하지만 10년은 무리입니 다, 진. 내가 30되기 전에 다시 돌아와 주시죠. 아니, 바람맞을지 모 르니. 이곳 일이 정리되고 수습되는 데로 제가 가도록 하지요. 몇 해 걸리지 않을 테니까요. 귀여운 후보들에게 밀리기 전에 부지런 히 일해 두고 찾아가야 겠네요? 이 정도로 타협해 드리면 되겠지 요, 진?" "다시 만나게 되면 신중히 검토하지요, 아밀리한." 진은 입을 가리고 호호...내숭 떠는 아가씨처럼 웃었다. 아밀리한은 생각지도 못했던 벽에 부딪혀 넉 다운 된 기분으로 충 격까지 받았다. 미성년이었다니! 젠장이다. 아직 성년도 안된 여자에게 이모저모로...세상에. 그는 계속 웃음을 흘리며 생각했다. '남자친구가 있었다고 했지?' 아밀리한은 헛기침을 하고 웃음기 어린 얼굴로 정중하게 청했다. "하지만 떠나시기 전까진 데이트 신청 정도는 받아주시겠지요, 진?" "그 정도야 뭐. 호호..." 아밀리한은 여우처럼 말하는 진의 대답에 다시 웃어야했다. * '저게 돌았나!!' 와이즈는 울화통이 터졌다. * 아밀리한은 단신인 상태에서 진에게 영주의 전권을 위임받고 권티 를 양도받았다. 늦은 오후 남은 햇살이 살갑게 내리쬐는 캠프에서 그는 진의 안내 와 소개로 기사들과 만나 면담했다. 진은 권티 자작을 설득하는 일 역시 아밀리한에게 맡겼고, 그는 그들을 다음날 만나기로 했다. 권티 자작은 그의 사람이 될 것이다. 진은 확신했다. 아밀리한은 기사들과의 면담을 길게 잡지 않았다. 그는 그들과 정 중한 인사를 나누고 간단한 자기 소개와 지내면서 판단하라는 말을 남기고, 바로 주민들에게 다시 소개되어 그들 틈에 섞여 들어갔다. 진은 머리색과 비슷한 노을 빛을 받고 있는 남자가, 사냥해 온 동 물의 가죽을 벗기고 손질하는 주민들의 일을 도우며 이야기를 나누 고 점수를 따고 있는 것을 보며. 내내 얼굴 따갑도록 노려보는 릭 과 머뭇거리는 표정의 블루. 그리고 외면하고 있는 와이즈를 의식 해야했다. 사람들은 일부러 그들이 있는 곳과 뚝 떨어져서 보이지 않는 척 하고 있었다. "다들 왜 그래? 죽을죄라도 지은 기분이네." 조금씩 떨어져서 돌부처처럼 서 있거나 앉아 있는 그들은 진의 말 에 대꾸도 하지 않았고, 진은 계속 들고 다니던 꽃 뭉치를 어떤 압 력이 있어도 버리지 않으리라 속으로 궁시렁거렸다. "버려." "싫어. 내 거야. 질투하는 거지, 와이즈? 꽃 받아 본적 없지? 메롱 이다." 와이즈는 쳐다보지도 않고 있다가 진의 속생각을 알아듣고 버럭. 아니, 엄하게 말했고. 릭은 한숨이 절로 나온다는 표정으로 서 있던 풀 위에 주저앉아 훼이르의 검 집 끝으로 땅바닥을 쿡쿡 찔렀다. 진은 와이즈와 릭에게는 배 째라 하는 태도를 고수할 수 있었지만, 상처 입은 표정으로 묵묵히 서 있는 엘프 때문에 멋쩍어졌다. "저기, 블루. 권티 자작 말이야. 그들의 처분도 아밀리한에게 넘겼 거든? 하지만 부상은 완쾌시켜 주고 싶어. 와이즈랑 같이 가서 치 료 해 주지 않겠어? 부탁할게." "네. 진." 와이즈는 내가 뭐 하러? 하는 표정으로 코웃음을 쳤고, 블루는 대 답은 했지만 걸음을 옮기지 않고 얼굴을 약간 숙이더니 파란 눈에 서 눈물 한 두 방울을 떨궜다. 릭은 묘한 눈으로 울기 시작하는 엘 프를 보았고, 진은 진땀이 났다. "진. 약혼하신 건가요?" "에. 아닌데, 블루." "모두들 진이 아밀리한 백작님과 결혼하실 거라고 하던데요." "잘못 알았겠지. 콜록. 파키오와 콜린스에게 한 말과 비슷한 말은 했지만." 블루는 슬퍼 보이는 얼굴을 더 숙였다. 릭이 그를 대신해 말했다. "진이 돌보던 주민들은 백작과 진이 결혼해서 살기 좋은 나라를 세 우고 다스려 줄 거라고 희망에 차 있던데요? 진은 사람들의 희망에 대단히 너그럽고, 존중하지 않았나요?" [난 버림받은 옛 애인이라는 소릴 들었다, 진?] 진은 릭과 와이즈가 마음 속으로 양 주먹을 맞잡고 뚜두둑 소리를 내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릭. 간섭 않겠다고 하지 않았어?" '그리고 와이즈. 옛 애인이 아니었으니 버림받았다는 헛소리에 트집 잡을 건 없잖아?' "진. 너무하시네요?" [자존심 상해서 가만 못 듣고 있겠다!] 진은 하나씩 처리(!)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먼저 릭. "릭. 분명 간섭 않겠다던 약속이 조건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지 키지 못할 것 같으면 돌아가는 게 좋지 않을까? 아니, 그럴 필요 없이 수련여행이니 이곳에 남아도 되겠네. 릭도 네카르도의 귀족이 니까 인접 국가에서 일어나는 일에, 모국에 보탬이 될 일을 찾아낼 수 있지 않겠어?"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이세요, 진?" "그럼?" "...생각해 보겠습니다." 릭은 화난 표정이 되어 벌떡 일어나더니, 풀 위를 샌들 신은 발로 뚜벅이며 걷는 것 같은 경직된 걸음으로 자리를 떴다. 다음 와이즈. "와이즈! 왜 너까지 난리야? 남 잘되는 꼴 못 보는 좀생이." "...죽어 볼래?" "못 죽이잖아? 그 소리 좀 그만 해. 자주 들으니까 지겨워." 와이즈는 금제고 뭐고 정말 죽여버릴까 하는 생각을 하며 눈에서 불꽃을 튀겼다. 진은 그런 그를 싹 무시하고 마지막 차례인 엘프에 게 눈을 돌렸다. 살벌한 분위기가 된 자리가 불편한지 글썽거리던 눈물을 서둘러 닦고 있는, 503살이 아니라 15살짜리 소년 같은 엘 프에게 진은 미안한 투로 말했다. "블루. 부탁이니 울지 좀 마. 그리고 음. 전부터 묻고 싶었는데 말 이야....날 선택했어?" "네. 진." 진은 너무 쉽게 나오는 대답에 헛기침을 했다. 빈정거리는 얼굴로 와이즈는 어떻게 대처하는지 구경해주마 하는 얼굴을 하고 턱을 괴었다. "저기 말이지. 블루. 난 블루가 좋긴 하거든? 그런데 걸리는 문제가 있어서 말이야." "....문제요?" 블루는 젖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진은 이기적인 생각이 동기가 되어 그를 여행길에 받아들였던 것이 떠올라 미안해져서, 들고 있던 장미다발을 뒤로 돌리며 간만에 턱을 만지작거렸다. "블루의 생각을 짐작은 했지만. 음. 일단 본인의 의사를 직접 듣지 는 않았으니까. 하지만 생각은 해 봤었어. 블루는 따뜻하고 선한 느 낌을 주고 옆에 있기만 해도 절로 평온해지고 차분해지거든? 블루 는 꽃이잖아. 나무이기도 하고. 분명 좋아는 하는데. 난 인간이잖아. 블루는 엘프고." "...수명 때문에요, 진?" "그래. 내가 블루의 선택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내 수명이 끝난 후 에 블루는 400년은 넘게 혼자 지내야 하잖아? 엘프가 재혼이 가능 한 종족이라면 차라리 괜찮았겠지만." 엘프가 선하다고? 인간인 그녀가 더 선하지 않은가. 블루는 혼자 남겨질 것에 대한 추측으로 처음부터 선택 대상에서 제외시키고 있었다는 진의 말에 울어야할지 웃어야할지 모르게 되 었다. "상관없는데요, 진? 엘프는 선의와 조화를 추구하는 종족이고 자연 과 가장 가까운 종족이지요. 하지만 다른 문제와 달리 반려의 선택 문제에 있어서는 어떤 종족보다 이기적이고 고집이 셉니다. 전 진 을 선택했어요. 인간의 나이로도 아직 성년이 아니라 얘기 드리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에요. 진이 받아 줄 때까지 노력하는 것이 엘프 식 조화이고 자연스러움이에요." "그게..." "진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전 어쩌면 천수를 다하도록 혼자 지내야 했었을 지도 모르는데요? 그것보다는. 주어진 1000년의 생 일부나 마 원하는 상대와 선택한 상대와의 시간을 갖고 싶어요, 진." 진은 날카로운 와이즈의 시선이 옆얼굴에 와서 꽂히는 느낌을 받으 며 한숨을 쉬고 대답했다. "미안해 블루. 난 상관 있어. 아예 없는 시간보다 잠깐이라도 있는 시간이 더 나을 수 있겠지. 하지만 난 싫어. 난 혼자 남겨지는 거 너무 싫었어. 상관없다고 하는 것은 겪지 않아서 일 거야. 그건 끔 찍한 느낌이었어. 날 좋아해서 선택했겠지? 하지만 언젠가 내가 먼 저 죽으면 블루는 남은 시간 내내 내 경우처럼 가슴 아플지도 몰 라. 엘프니까 인간인 나처럼 요령 껏 잊지도 못하고 남은 시간 내 내 아플지도 몰라. 난 절대 그런 느낌 누구에게도 주고 싶지 않아, 블루. 더구나 블루에겐 더 그러는 걸." "진. 아니에요. 아닐 거 에요. 그리고 제 몫이에요. 전 진 보다 몇 백년은 더 살았어요. 종족의 특성 때문에 여리게만 보시는 거 에 요?" "실제 여리잖아, 블루. 그리고 그 문제뿐이 아니야. 민트 때문에 생 각하게 된 것인데. 흠. 블루는 앞으로도 오래도록 젊겠지? 하지만 난 앞으로 2~30년만 지나도 나이 들게 되잖아. 혼자 늙어가게 될 텐데 싫은 느낌이 들 것 같아. 블루는 상관하지 않을지 몰라도 말 이야." 블루는 다시 눈물을 흘렸다. 엘프기 때문에, 아름답기 때문에 그동 안 아주 많은 인간 여자들에게서 구혼 받았었는데. 자신이 선택한 그녀는 그것 때문에 안 된다니. "진. 순리를 어기지 않고 수명을 늘리고, 젊음을 유지 할 수 있는 방법도 있어요." "블루. 난 아직 10대인 걸? 아직 주름살 걱정은 안 해도 될 나이고 오래오래 살고 싶다는 생각도 안 해 봤어. 나이 들어 수단 방법 가 리지 않고 젊음에 매달리고 수명을 늘리려고 하는 인간들이 싫어 보였었어." 와이즈는 수명이 이유가 되어 거절당하고 있는 엘프를 보며 혀를 차며 생각했다.-내 경우도 그런가? 아닌 것 같은데? 드래곤이 엘프 처럼 일편단심으로 알려진 것도 아니고. 도대체 내 경우는 무슨 이 유로 이성으로 보지도 않는 거지? "그럼 진은 그분을 선택하신 건가요?" 진은 괜찮다 싶은 남자라서 데이트 좀 해볼까 했던 것이, 장애물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어 쓴웃음을 지었다. 오늘 하루 두 번째 프 로포즈를 받고 있었다. "블루. 인간과 엘프는 사고방식이 다르잖아? 내가 살던 곳의 이야 기를 들었잖아. 난 결혼을 전제로 하고, 걸어다니는 이성들을 평가 하고 대하지는 않아. 하지만 모처럼 좋은 느낌을 준 사람이고 애써 꼬셔 주길 래 말이야. 음. 단순히 데이트하고 싶은 사람인데, 하면 안 되는 건가? 큰일 나?" "...아직 미성년이잖아요, 진." "그럼 성년이 되면 남자 친구 사귀어도 되는 거야? 겨우 2달 정도 남은 그 날짜가 그렇게 중요해?" "진." "몰라, 블루. 난 그때그때 감정에 충실 할 거야. 난 아밀리한이 마 음에 들어. 블루와 다른 의미로. 나중에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없을 지는 누구도 확신 못해. 세상일은 생각대로 안 되는 경우도 많단 말이야. 난 어쩌면 나중에 후회할지도 모를 일은 될 수 있으면 하 지 않고 살 거야. 이곳의 풍습과 가치관을 참고는 하겠지만 묶이고 싶지는 않아." 진은 가는 끈으로 묶은, 가시를 떼어낸 장미 줄기를 잡은 손에서 땀이 베어 나와 손을 바꿨다. 엘프는 젖어서 짙어 보이는 긴 속눈 썹 아래에서 계속 눈물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엘프의 눈물도 인간 의 눈물처럼 짠맛이 날까? 진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가 우 니까 진도 마음 한쪽이 묵직해져 왔다. "미안해. 블루. 나랑 같이 계속 다니면 마음만 상하지 않을까? 잘못 되어 되돌릴 수 있는 선택도 있지 않을까? 난 블루에게 약속 받은 것도 없고, 약속한 것도 없으니 지금이라도 선택을 달리해도 되지 않을까?" "전 엘프에요, 진." "난 인간이야, 블루." 인간-가장 배신이 잦은 종족. 짧은 생을 살며 불꽃같은 삶을 만들 어내는 종족. 이기적이고 과격하며 탐욕스럽고...사랑스런 종족. 블루는 가슴이 너무 아팠다. 너무 이르다. 그녀는 단호하고 가차없 으며 때로 대단히 잔인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자신은 엘프였다. 블루는 절망으로 머리와 가슴이 눌리는 기분이 되어 대답했다. "미안해요, 진. 진은 아직 성혼조차 하지 않았으니 어떤 거절로도 절 떼어놓을 수 없을 거 에요. 진의 잘못이에요. 진이 세레니프 광 장에서 마법사님을 통해 절 부르지 말았어야 했어요. 노래를 들려 주지 말았어야 했어요. 제 귀를 잡아당기지 말았어야 했어요. 나무 이야기를 해주시지 말았어야했어요. 물질계 최강의 존재에게조차 두려움 없이 당당한 모습을 제게 보이지 말았어야 했어요. 가진 모 든 것을 이용 해 보이는 모든 것에 배려하고 마음 써 주시는 것을 보이지 말았어야...." 파란 머리 파란 눈의 엘프는 진의 피하고 싶어하는 눈길을 붙잡고, 그 고운 목소리에 슬픔과 강요와 호소를 담아 말했다. 진은 그의 눈물이 파란색이 아닌 것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울게 해서는 아주 큰 벌을 받게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아주 많이 미안했다. "그만 해. 블루. 알았어. 청혼 생각 해 볼게. 생. 각. 만." "....네, 진. 고마워요. 엘프는 시간에 얽매이지 않아요. 기다림에 강 해요." 블루는 클레이스에게 떠밀려 그녀의 일행이 되었던 시점 이후의 그 냥 주어진 일행으로서의 시간을 닫고. 그녀가 엘프의 바램을 의식 하고 고려하기 시작하겠음을 약속함에, 흘리던 눈물을 닦아내며 웃 었다. 그녀에겐 콜린스군이나 파키오군처럼 막연한 약속과 기대를 주는 정도였지만, 블루는 오늘 하루 한 걸음 전진했다. 당장은 그것 으로도 충분했다. 와이즈는 열이 받아 돌 것 같았지만 코웃음을 치는 정도로 감정표 현을 제한시켰다. 진은 뚫어지게 쳐다보는 와이즈를 무시하고, 블루의 표정이 다시 밝아지는 것을 확인하자 냉큼 말했다. "하지만. 블루. 난 아밀리한이랑 데이트하고 싶단 말이야!" 진은 던지듯 말하고 잽싸게 도. 망. 갔. 다. 와이즈는 자신에겐 해명이나 변명다운 소리는 할 생각도 않고 뛰어 가는 진의 뒤통수를 노려보며, 미끄러지는 마법이라도 걸까 했지만 엘프 때문에 생각이 저지되었다. "마법사님." 와이즈는 '왜?' 라고 대답할 뻔했다. "마법사님이 자주 하셨던 말씀이 이해가 되는 군요." "무슨 말이 말입니까?" "...'돌겠네' 요." 블루는 멀뚱히 서서 검게 보이는 웨이브진 머리카락의 아가씨가. 서녘으로 넘어가 자취를 감춘 태양 때문에 짙어진 달빛으로 푸르 스름한 캠프를 가로질러, 자주색 머리의 인간 남자에게 뛰어가는 것 을 보며 와이즈에게 말했다. [진. 엘프가 돌겠단다.] '엘프도 돌아? 그거 큰일이네.' 꽤 떨어진 곳에서 저녁을 기다리고 있는 주민들과 이야기하던 인간 남자를 내려다보는 진의 모습을 보며, 와이즈는 걸터앉았던 나무 등걸에서 일어났다. '헹. 데이트 좋아하네. 누가 가만 두고 볼 줄 아냐?' * 와이즈는 블루를 데리고 진의 빌어먹을 부탁대로 전 권티 영주의 다리를 고쳐주러 포로 수용천막으로 갔다. 엘프의 치료마법 시행 중간에 7써클 마법으로도 회복이 어렵게 부 서졌던 무릎에 용언을 써 주고, 짧은 감사의 말을 하는 권티 자작 에게 진의 의사라는 말을 하는 엘프를 남겨두고 나오던 와이즈는. 아내와 첩들에게 버림당하고 앞날의 막막함에 옛 장인과 그의 호위 기사들과 나눠진 쪽에 앉아 의기소침해 있는 오하미 이지스를 지나 치며 한 달간 식욕을 잃게 하는 최면 마법을 걸었다. 그리고 와이즈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권티 성안으로 워프했다. * 낮 동안 도전의식을 쉬었던 오크들은 다시 대장을 결정하는 '도전' 이라는 명목의 싸움이 한창이었고. 와와. 거리고 그륵 그륵. 소리와 함성소리가 성벽 안에 시끄럽게 울리고 있었다. 맞붙어 싸우던 두 마리 오크와 구경 중이던 모든 몬스터들은 갑자 기 위에서 내리 쏟아지는 기운에 고개를 들었다가 노란빛의 드래곤 아이로 주위를 둘러보며 공중에 떠있는 드래곤을 발견하고 일시에 모두 넙죽넙죽 우수수 그 자리에 엎어졌다. 와이즈는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하나 하는 생각에 자존심에 금이 쩍 쩍 갔지만, 진과 협상했던. 도전을 받아 싸우고 있던 오크에게-그는 반복 된 도전 몬스터와의 대결로 지쳐있긴 했지만 아직 대장이었 다.-위엄 있게 말했다. "너." "그륵. 예...위. 위대하신 그륵. 존재시여 그륵." "난 바쁘다. 빨리 결정하고 인간 여자와 했던 거래를 시행하던지 말던지 좀 해라." "그륵. 그. 그렇지 않아도 그륵. 하루 동안 받을 수의 그륵. 도전자 는 모두 그륵. 이겼습니다. 이틀 그륵. 더 도전을 받으면..." "그냥 네가 계속 대장 해. 뭐 하러 이틀이나 더 싸우냐?" "....그륵. 가. 감사합니다. 위대한 그륵. 대왕이시여. 그륵." 예의 인간의 모습으로 허공에 나타났던 드래곤은 다시 왔던 것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 도전의식을 구경하고 있다가 갑자기 나타난 대 왕을 보고 배가 고파 오셨나 싶은 생각에 겁에 질렸던 고블린 대표 는, 그가 사라지자 주춤거리며 일어나 오크대장을 쳐다보았다. 그 곳에 있던 모든 몬스터들도 엎드렸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우글우글하던 몬스터 무리들 사이에 침묵이 감돌았고, 고블린 대표가 가장 먼저 입을 열어 오크에게 축하 말을 했다. "대왕께서 직접 명하신 대장이라니...축하한다, 오크대장." "그륵." 몬스터들은 몬스터의 최고봉의 존재에게 인정받은 것으로, 임명된 것으로 이해했고. 오크들은 자신들의 대장에게 축하와 기쁨의 함성 을 보내기 시작했다. * [99] 11-10. 변 화 캠프촌엔 야외용 깔개를 길다랗게 깔아두고 마법사들이 총동원 돼 공중에 떠올려 둔 마법등의 불빛 아래 사냥해 온 육 고기로 만든 바베큐 위주의 식단으로 식탁이 차려졌다. 진은 아밀리한과 블루 사이에 앉아, 맞은편 자리에 앉은 와이즈의 쌀쌀맞은 시선 속에 향신료가 베어들어 맛깔스런 맛의 고기요리를 먹었다. 매니스 성의 마법사와 권티 성의 마법사들. 장례를 주관했 던 세레니프이스 사제와 카즈 유로카를 비롯해 지위가 높은 기사들 이 한자리에 모여 앉아 있었고, 진은 풀 위에 깔린 깔개 식탁의 정 중앙에 자리하고 있었다. 진은 아밀리한이 기사들과 주민들에게 될 수 있으면 빠른 시간 안 에 받아들여지게끔 다리 역을 했었지만, 한 나절만에 그는 권티의 호의와 신임을 받아내기 시작하고 있었고 진의 도움이 더 필요하지 도 않아 보였다. 매니스의 백합여관에서 처음 본 얼굴을 보았을 때의 치밀하고 날카 로워 보였던 그의 첫인상은, 자주 짓는 웃음 때문에 훨씬 부드럽고 매력적인 인상으로 바뀌어 있었다. 릭은 저녁식사 자리에 나타나지 않았다. 아밀리한의 식사시중을 받는 진을 빈정거리는 표정으로 간혹 쳐다 보는 와이즈와, 옆자리에서 블루가 내 쉬는 한숨 소리에 그다지 마 음 쓰지 않은 탓인지. 달빛 아래 달그락거리는 식기소리와 사람들 의 얽힌 목소리를 들으며 먹는 저녁이 진은 포근하게 느껴졌다. 백색 마법등의 불빛이 잔잔하게 퍼지고 달과 먼 하늘에선 별이 너 무 많았다. 진은 기사들과 시중을 들어주며 오가는 주민들을 공평하게 대우하 며 상대하고 있는 아밀리한을 지켜보았다. 그는 세레니프이스 사제에게 권티에 머물러 작은 예배당을 짓는 일 에 협조하기로 했고, 그의 군대와 이주할 주민들과 물자도 4일 내 에 모두 도착할 것이다. 몬스터들도 큰 문제만 없다면 며칠 안에 거래에 대한 확답을 하고 물러날 것이고, 니소아와 메르사의 복구 문제 역시 계획이 잡혀있었으며 아밀리한의 통솔아래 영지의 수복 과 정비과정은 무난히 진행될 것이다. 진은 권티를 탈취하여 영주가 된지 겨우 3~4일 만에 자리를 양도한 셈이 되었고, 몇 년이나 몇 달도 아닌 며칠 후에 떠나겠다는 의사 를 표했다가 기사들과 근처에서 잔일을 하는 주민들의 항의와 원망 을 들어야했다. "아밀리한 백작님께서 하실 수 있어요. 다들 인정하잖아요?" "흠. 레이디 진. 권티 문제로 마음 쓰시고 힘드셨을 것이라는 것은 압니다만, 정비 문제가 아니라 저희들이나 주민들의 희망은 무시하 시는 겁니까?" "가능한 모든 일은 이미 했는데요, 카즈 경. 더는 무리에요." "카즈 경. 좀 더 압력을 넣어 주게. 억울해서 못 견디겠네." 아밀리한의 웃음 실린 의견에 카즈는 헛기침을 하며 유례 없이 짧 은 임기를 산 영주에게 다시 말했다. "레이디 진. 공왕이 되실 분도 눈에 안차시다니 도대체 눈이 얼마 나 높으신가요? 감추는 것 있는 저희 같은 기사들의 의견이야 죄스 러울 일이지만 억울한 기분이 들지 않는다면 거짓이겠지요. 살벌해 진 주민들의 시선이 무섭지도 않습니까? 저들은 한번 버림당했었는 데 또 그런 기분일지 모르지 않나요."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사형만 거론하지 말아주세요, 카즈 경." 진은 방글방글 웃으며 대답했고, 사람들은 친근한 야유를 보내왔다. '잘들 논다.' 와이즈는 만류하는 모든 방법을 써먹고 있는 권티에게 삐죽였다. "저. 진은 최선을 다했습니다. 귀국해야 할 날짜가 너무 촉박하니 이곳에 계속 머무르는 일은 어려운 일입니다. 양해바랍니다." 모두들 눈을 둥그렇게 뜨고 내내 말이 없던 엘프에게 시선을 모았 다. 블루는 얼굴이 빨개졌다. "블루님의 의견이 맞습니다. 전 진을 드리얀으로 데려다 줘야합니 다. 세 영지를 정비하는 일에 굳이 진과 저희들의 힘은 절실하지 않을 것 같고, 문제는 몬스터들이니 그들과 백작님이 대면하는 시 간을 가지게 되면 바로 떠나야지요." 이번엔 어둠 섞인 공간에서도 황금색으로 빛나는 금발머리의 마법 사에게 시선이 쏠렸다. 와이즈는 태연한 표정이었고, 아밀리한은 헛 기침을 했다. "진. 불안해 지는데요? 저도 버림받은 옛 애인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은 아닌가요?" "아밀리한. 그런 소리에 영향을 받으시려면 먼저 애인이 되셔야지 않나요?" 진은 와이즈를 노려보며 대답했고 사람들은 숨죽여 웃었다. "전 빨래 시켜도 화내지 않겠습니다, 진. 버리지만 말아주세요." 킥킥거리는 웃음소리 속에 진은 엄청 화가 난 듯 무표정해지는 와 이즈 때문에 불편한 기분이 되었다. '방해하려고 작정을 했구나, 와이즈.' [내가 보호자라며? 네가 왕녀란 것 잊었냐? 구설수에 오를 일을 왜 하는데?] '그게 무슨 상관이야? 시어머니처럼 굴지 좀 마, 와이즈.' '시어머니? 웃기고 있네.' 와이즈는 일행들의 의견도 중요하니 몬스터들이 접촉해 와 거래가 성사되면 떠나겠다는 말을 하는 진을 보며 비웃는 미소를 지었다. 저녁 식사자리가 끝나 가는 시각. 몬스터들이 찾아왔다. * "그륵. 우린 새벽에 떠난다 그륵. 전리품을 챙기고 그륵. 있으니 아 침이 되면 그륵. 성을 써라 인간대장 그륵." "...감사합니다, 오크대장. 주선하기로 약속했던 분입니다. 여러분을 실망시키지 않을 겁니다." 아밀리한은 기뻐하고 의기양양해 보이는 것이 분명한 표정의 오크 와 고블린과 오우거 대표에게 소개되었고, 흔쾌히 받아들여졌다.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아밀리한을 캠프를 등지고 지켜보며 서 있던 진은 와이즈의 음성에 실룩였다. [더 할 일 없지? 말했던 대로 바로 이동하는 게 좋겠다, 진?] '와이즈....' [권티자작 다리도 고쳐두었고, 뚱보도 곧 살이 빠질 거다. 할 일 더 없잖냐? 엘프에게 마법진 그리게 했으니 곧 떠날 수 있겠지. 고맙 지 않냐?] 진은 아밀리한의 앞, 혹은 몬스터들의 뒤쪽. 권티의 무덤. 인간과 몬스터들의 무덤. 자신의 업보에 눈길을 주었다. '....고마워. 내일 아침 떠나자, 와이즈.' 의외로 순순한 대답을 듣자 와이즈는 되려 눈썹을 모아야 했다. 진은 옆에 서 있는 자신에게 고개도 돌리지 않고 있었다. 와이즈는 뭔가 잘못 된 부분이 있는 것 같은 느낌에 진을 돌려세우려 했지 만, 몬스터들과 거래 약속을 끝낸 아밀리한이 그들과 인사를 나누 고 걸어오고 있어서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진. 설마 내일 떠난다는 소린 않겠지요? 아직 약속했던 데이트는 신청도 못했는데요." "내일 떠나기로 했어요, 아밀리한. 권티자작과 주이슨 기사에게 사 과하고 올게요. 데이트 신청은 제가 하면 안될까요?" "데이트마저 몇 년을 기다려야해요, 진?" 진은 아밀리한 앞을 떠나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아니요, 오늘이요." 아밀리한은 포로 수용 천막 쪽으로 걸어가는 진에게서 눈을 떼고 자신을 바라보는 얼음장같은 마법사의 시선을 받았다. * 릭은 숲으로 들어갔다가 포로 수용 천막 근처로 걸어나왔다. 천막 주위 경비들이 밝혀 놓은 횃불이 일렁이는 것이 눈에 들어왔 지만, 릭은 더 가까이 가지 않고 서 있던 자리의 풀 위에 앉았다. 그는 자괴감에 다시 빠져 있었다. 내내 생각해도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해야 그녀의 시야에 들어갈 수 있는 걸까. 모든 면에서 뒤지니 상대가 되지 않는 기분 이었다. 그녀와 사고방식이 너무 달라 따라 잡기도 힘들고, 맞추기 는 더 어려웠다. 블루님는 거절당할 것이 뻔해 보이는데 눈물을 쏟았다. 리툰 마법사도 분명 느낌에 진을 마음에 두고 있는 것 같은데 태도 가 확실하지 않았다. 그는 자존심이 너무 세 보이고 뭔지 모르지만 진에게 약점이 잡혀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진이 그를 신뢰하고 있음은 잘 알 수 있었다. 자신은? '간섭'의 범위가 너무 지나쳤다. 자신을 거절하는 말과 같 았다. 처음엔 그 정도의 의미를 가진 말은 아니었던 것으로 아는데. 진이 오늘 다른 남자에게 보였던 그 웃음은 눈이 부셔 보였다. 엘프 블루님에게도 리툰 마법사에게도 자신에게도 보이지 않았던 미소였고, 원인이 되었던 것은 겨우 꽃 몇 송이 때문이었다. 그녀는...평범해 지고 싶었던 걸까? 그렇게 대단한 일들을 해 오던 그녀도, 소박한 꿈을 가진 보통 아가씨였던가? 누가 생각했었을까. 무슨 일에도 어떤 대상에게도 눈 하나 깜짝 않 던 그녀가 겨우 꽃 선물에 마음이 흔들리리라고. 진이 캠프가 있는 방향의 숲을 헤치고 나와 천막으로 걸어가는 것 이 보였다. 그녀는 경비들에게 수고한다는 말을 건네고 천막 입구 에 걸어 둔 마법 잠김 장치의 걸림 쇠를 수동으로 제거시키고 안으 로 들어갔다. 릭은 천막에 흔들리는 진의 그림자를 구별하며 쳐다 보고 있었다. 일 이십분쯤 지나자 진은 다시 천막을 나왔다. 릭은 앉아 있는 곳이 숲의 그림자에 달빛이 닿지 않아 어둠에 묻혀 있었고, 움직이지 않고 있으니 그녀가 알아채지 못할 것이라고 생 각했지만. 진은 걸음을 옮기다 잠깐 주춤하더니 자신이 있는 쪽으 로 방향을 바꿔 걸어왔다. "릭. 저녁 안 먹어?" "생각 없네요, 진." 아직 화가 풀리지 않았다. 달을 등지고 서 있는 진의 어둔 실루엣 은 가냘퍼 보였다. "내일 아침에 떠나기로 했어. 아침이 되기 전에 결정해 줘?" 릭은 그녀의 목소리에 뭔가가 빠진 느낌이 들었다. 평소와 달랐다. 진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몸을 돌리자 릭은 가슴이 덜컹 내려앉 았다. 그녀는 떠날 것임을 말하고 있었다. 기다려 주지 않을 것이 다. 같이 가든. 남든. 돌아가든 알아서 하라는 의미였고, 릭은 위기 감 같은 것이 들었다. "진!" "왜?" "함께 가겠습니다." "알아서 해." 진은 멈췄던 걸음을 다시 옮겼다. 릭은 일어나 달빛 섞인 어둠에 녹아 사라져 버릴 것 같은 진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무슨 일이지?' * '밤중에! 낮도 아니고 달 떠 있는 한 밤중에! 데이트랍시고 남자를 만나겠다고?!' 와이즈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있었다. 자주색 눈의 인간남자는 진이 자리를 뜨자 헛기침을 하더니 뻣뻣이 서 있는 와이즈에게 정중한 어조로 말을 건넸다. "그러고 보니. 진의 일행 되시는 분들께 미처 기회가 없어 화해를 청하지 못했었군요. 백합여관에서 공격했던 점 사과 드립니다." 와이즈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밀리한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다시 말을 이었다. "진이 리툰 마법사님을 보호자라고 하더군요. 부모님 대신이니 미 혼 여성에게 청하는 데이트 허락을 마법사님께 구해야 겠네요. 레 이디 진의 명예에 손상 갈 만남은 않겠습니다." 와이즈는 아밀리한의 짙은 자줏빛 눈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보호자? 허락? 레이디? 명예? 웃기고 있네.' 그는 와이즈의 파란 유리알 같은 눈동자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반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그는 답변을 기대하지 않았는지 고개를 까 닥 숙여 보이고 몬스터들과 나눈 이야기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들 에게로 돌아갔다. '죽여버릴까?' 와이즈는 살기를 감추기 위해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해야했다. * 진은 애꿎은 사람에게 화풀이를 한 것 같은 기분이 되어 숲을 헤치 며 걷고 있었다. 하지만 '애꿎은' 사람은 아니었다. 진은 미르나가 편지에 뭐라고 썼는지 보지는 못했지만 릭페르도 자 신에게 기대하는 바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진은 이 세계에 와서 처음 만난 대상이 인간이 아니라 드래곤이었 음을 상기했다. 이곳은 환상이나 다름없는 세계였고 꿈 같은 곳이 었다. 그는 드래곤이었다. 인간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자신에게 이성으로의 기대를 하고 있음이 분명해졌다. -모르고 있었나?- 아니, 진은 알고 있었다는 생각을 했다. '난 백치야. 여전히 백치야.' 알고 있었는데, 그의 바램을 당연히 무시했다. 진은 자신이 그려놓 은 친구상에 그를 끼워 맞춰 고정시켜두려 했던 잘못을 저질렀다. 항상 그랬던 것처럼 '마음'의 문제도 조절할 수 있을 거라는 자만에 빠져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블루도 그렇고 와이즈도 그렇다. 이 세계. 고향. 불가능한 종족이 존재하는 곳. 마음을 열면 모두가 친구가 될 수 있을 줄 알았던 아름다운 곳.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나고.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상희와 했던 약속은 벽에 부딪혔다. 진은 최선을 다했지만 그로 인 해 관심 받게 됨에 대한 부작용이 오늘 일어났다. 진에게 그들이 모두 '좋은' 사람. 아니, 존재들이었다면. 그들에게 진은 '개인' 이고 '이성'이었다. 대처가 불가능하다. -장미.... '나만을 위한 것이었는데.' 그 흔한 꽃 몇 송이는 진 자신만을 위한 것이었다. 나눌 필요 없고 책임을 가져야 할 정도의 물질도 힘도 아니었다. 남과 연관 된 진이 아니라 순수하게 진에게 향한, 진에게 한정된 기쁨이었고 처음 겪는 종류의 행복이었다. 진은 그 작은 행복을 빼앗긴 기분이 되었다. 가장 믿었던 존재에게. 자신의 소원을 아는 유일한 존재에게 방해받았다. 가슴이 아팠다. 그가 인간 세상에 잠깐 놀러 온 타 종족이 아닌, 이 성일 수도 있음을 간과하지 말았어야 했다. 스스로의 욕심만 차려 서는 안되었는데. 진은 한숨을 쉬며 걸음을 멈췄다. 그는 캠프로 향하는 길목 어귀 나무에 등을 기대고 돌아서 있었다. '미안해.' "뭐가?" 진은 입으로 말하지 않은 생각에 대답해 오는 와이즈가 전에 없이 두렵게 느껴졌다. 그는 인간이 아니다. 왜 인간이 그를 두려워했지? 힘. 세월. 때문에? "놀려댄 것 미안해. 와이즈. 릭이 신사들을 우습게 여기는 것 같다 고 했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면이 있었나봐." 와이즈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마 또 마음을 읽으려고 하고 있을 것 이다.-읽을 수 있을 까? 진은 마음을 닫았다. 빗장을 질렀다. 생각을 차단했다. 와이즈는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거부당했다. "그 인간이 그렇게 좋냐?" "와이즈. 내 소원을 물은 적 있잖아." 진의 소원- 평범해 지는 것.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행복해지는 것. .....장미 꽃. 와이즈는 나무에 기댄 등을 떼고 진을 돌아보았다. "그렇다면 난 네가 얻은 그 행복이란 것을 누리는 데 장애가 될 일 을 한 거냐? 미안해서 어쩌냐? 값을 치르지. 뭘 해 줄까?" "관둬. 내일 떠나기로 했잖아." 읽을 수 없었다. 그녀는 마음을 닫았다. 진은 목을 졸라오는 느낌의 살기에 움찔했다. 와이즈는 진의 남청 색 눈에 자신으로 인해 서린 것이 분명한 두려움이 깃들었다 사라 지는 것을 포착했다. "왜? 내가 무섭냐? 별일이 다 있네. 무서운 것 없는 여자 아니었 냐?" 검은 나무들에 가려진 달빛 아래서도 흰빛이 나는 마법사 복장. 금 색으로 반짝이는 머리카락. 얼려버릴 것 같은 푸른 한기가 가득한 눈. 몇 걸음 앞에 있던 그가 이동해 왔다. 진은 그에게서 번져 나오는 적의에 눈을 감았다. 그녀는 자신이 빚어내고 만든 '친구'를 잃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 와이즈는 질투와 노여움으로 머리가 텅 비어 있었다. 그녀의 진심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처음 레어에서 수집 품으로 쓰 라고 주었던 다른 차원의 동전. 최초의 살인청부대금이라고 했던 그 작은 동전. 살인도 했느냐는 물음에 진은 마음을 읽으면서 그것 도 모르냐고 했었다.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 부분은 그녀의 성 역이었다. 마법이 미치지 않았다. 그 후 그것은 성역이 아니게 되었 었다. 하지만 지금. 와이즈는 그때 느꼈던 그 어둠에 쌓인 벽을 다 시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거부했다. 밀어냈다. '감히 날!!' 같잖은 엘프와 인간기사의 기척이 느껴졌지만 와이즈는 무시했다. "우습게 여겨 놀려대서 미안하다고 진? 말로만 하는 사과로는 부족 하지 않을까? 한 두 번이 아니었지 않냐? 수로 세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말이다." "미안해." 진심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었다. 와이즈는 더 화가 났다. "감정을 가진 존재는 모두가 강하다며? 난 원래 강하지만, 친구니 뭐니 하더니 그 자주 쓰던 '존중'을 내게 하지 않았다니. 내 감정이 어떤 식으로 표출될지 엔 걱정 없냐, 진? 대가를 치러야 하지 않을 까?" "때려도 돼." 와이즈는 실룩였다. "난 여자를 때려 본 적 없다? 벌을 주거나 죽인 적은 있어도 말이 지." 진은 와이즈가 굽힐 기회를 주고 있음을 알았다. 하지만. 그게 무슨 대단한 일이라고. 그도 자신의 장미를 함부로 했 지 않은가. 진은 눈을 가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지친 어조로 말했다. "그럼, 죽여." 배신감. 증오. 산산이 부서진 자존심. 애증. 어둠이 내려앉아 가려졌던 와이즈의 눈이 노랗게 번뜩이고 범위 좁 은 금색 안개가 와이즈의 몸 주위에 피어올랐다. * [100] 권티를 떠나며 "미안합니다, 릭페르님." "?" 들어서는, 보아서는 안될 광경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판단에 블루는 다른 방향에서 오던 릭페르의 옆에 나타나 그에게 수면마법을 걸며 말했다. 쓰러지는 그를 받아 나무에 등을 기대 앉혀 놓고 블루는 파랗게 질린 얼굴로 살기. 드래곤의 순수 광폭 함이 응축되고 있는 그 지점으로 날 듯이 뛰어갔다. 엘프는 나무. 엘프는 꽃. 엘프는 선의. 블루는 엘프의 신을 부르며 금빛 마나의 칼날에 노출되어 있는 진 을 감싸기 위해 실드에 쌓여 진과 와이즈의 사이로 뛰어들었다. 그녀는 무감각한 얼굴로 느린 듯 꿈틀거리며 쏘아져오는 골드드래 곤의 분노를 마주하고 있다 블루를 감지하자....내쳤다. 블루는 실드가 쉽게 찢어져 관통되고 오른 쪽 귀와 오른쪽 어깨와 팔의 살이 도려내지는 통증을 느끼며, 진에게 밀려 허공에 붕 떴다. 나무에 부딪혀 떨어지며 블루는 진의 몸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 를 뿜어내는 것을 보았다! 진은 와이즈의 기운이 무기가 되어 날아오는 것을 보았다. 파란...엘 프가 막아서려고 했다. 그를 치워냈다.-엘프의 피도 붉었구나. 눈앞에 그의 몸에서 튀기는 피가 허공에 멈춘 듯 선을 긋는 것을 보며 진은 생각했다. '엘프의 피는 분홍색이나 은색. 뭐 그런 것인 줄 알았어.' 진은 뼈에 붙어 있는 살들이 짓이겨지고 다져지는 것을 느끼며 천 천히 무너졌다. '대가는 치뤘어, 와이즈. 그렇지?' 진은 온통 뜨겁게 느껴지는 통증의 얼굴이 지면, 풀 위에 닿아 쓰 라리다는 생각을 하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벌은 뭘 생각했어, 와이즈?...속보여.' [..........] 진은 기절했다. *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와이즈는 피 웅덩이 속에 빠져 있는 핏덩어리. 붉은 인간의 형체에 심장이 차갑게 식었다. 질투에 사로잡혀 인간남자처럼 화를 냈다. 그녀를 공격했다. 와이즈는 진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땅에 스며들기엔 너무 많아 넘 쳐서 번지는 피가 그녀에게서 교환 품으로 받았던 부츠에 와 닿는 것을 내려다보며 묵묵히 서서 생각했다. -그녀가 뭐라고 했었지? '미안해.' 진은 거짓말을 하지 않잖아. 왜 의심했지? 마음을 닫았으니까. 왜 그랬는데? 내가...신뢰하지 않고 진실을 탐지해서 확인하려했으 니까. 또 뭐라고 그랬지? '때려도 돼.' 화내도 돼. 괜찮아. 널 믿어. '그럼 죽여.' 받을 수 있는 최선의 이름은 이미 받았다. 그 이상을 약속하는 것 은 그녀에겐 거짓이 되었을 테니까. '...벌은 뭘 생각했어, 와이즈?....속보여.' 와이즈는 그녀가 자신을 이성으로 보지 않았던 이유를 깨달았다. 진은 클레이스와 자신에게 '유희' 중인 드래곤임을 비웃었었다. 그녀는 인형이 되길. 유희거리가 되는 것을. 힘에 굴복해 의지를 상 실하게 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자신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유희를 거부했다. 드래곤의 힘을 그녀에게 대가로 주려고 했던 것을 거부했다. 그녀가 인간남자에게 받았던 장미와는 성격이 너무 다른 '거래' 가 되어버릴 테니까. 또한, 당연하게 마음을 읽는 상대와 동등한 남녀 관계가 성립될 수 없음을 알고 있었을 테니까. 그녀라면 알고 있었을 테니까. 그래서 '친구'의 자리를 주었겠지. 친구란 이름으로 진은 항상 자신에게 충실했다. 언제나 거짓 없이 마음을 내보여 주었었다. 배신은 그녀가 아니라, 내가.... 어둠 속에서도 와이즈는 진의 핏덩이가 된 몸이 재생의 노력으로 꿈틀거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피할 순간은 충분했는데 피하지 않았다. -진은 자신의 분노를 그녀의 업보로 보았을까? 그가 진에게서 무언가 잘못된 느낌을 받았을 때. 와이즈는 그녀가 인간남자와 몬스터들 너머, 어둠에 쌓여 보일 리 없는 무덤 쪽에 시선을 주고 있었던 것을 떠올렸다. "마법사님!" 오른쪽 귀를 잃고 뼈가 드러나 보이는 오른팔을 늘어뜨리고 피투성 이가 된 엘프가, 만신창이의 진의 몸 앞에 무릎을 꿇고 파랗게 질 린 얼굴을 하고 올려다보았다. 와이즈는 그를 외면했다. 죽지는 않을 것이다. 뼈와 내장은 다치지 않았을 테니까. 그녀의 재생력이라면. 죽을 정도는.... 죽어가고 있었다! 한꺼번에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 [비켜라, 엘프.] 와이즈는 일그러진 얼굴로 서둘러 치료마법을 시행했다. * 메르사나 니소아로 이주하지 않고 권티에 머무르길 결정한 주민들 이 짓고 있던 미완성의 나무 집으로 진은 와이즈에게 들려져 사람 들의 눈을 피해 옮겨졌다. 블루는 뒤늦게 치료마법을 시행하고 피 로 붉게 적셔진 곳을 땅의 정령 노움을 불러 갈아엎었다. 그도 피를 상당량 흘렸고 빈혈을 일으켜 어지러웠기 때문에 미리 릭페르의 의문을 막아보고자 몰래 잠을 깨워두고, 와이즈가 진을 데리고 들어간 캠프와 약간 떨어진 나무 집들 중 하나로 찾아 들어 갔다. 진은 와이즈가 마법으로 씻겨주어 이제 피범벅은 아니었지만, 하얗 게 핏기 가신 얼굴로 뼈만 앙상하게 남아 있었다. 진은 와이즈가 레어에서 불러 온 짚을 담아 천을 둘러씌운 나무 침 대에 흰 평상복을 잠옷으로 입고 누워있었다. "너. 계속 질질 짜면 죽여버린다." "...네. 죄송합니다." 블루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듣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묻기가 겁났다. 마법진을 그리고 있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 길래 그는 진을 죽이려고까지 한 걸까. 블루는 진실을 알기가 겁이 나기도 했다. "가서. 아밀리한에게 진이 아파서 약속을 못 지킬 거라고 해라. 릭 페르에게 짐 챙겨서 옮겨오게 하고." "네." 엘프가 텅 빈 뼈대만 있는 나무 집을 나가자 와이즈는 천막 구석에 놓아 둔 진의 침대에 등을 기대고 바닥에 앉았다. "젠장. 그만 웃어요, 아버지." 와이즈는 고룡 아이쉬페일이 그 큰 몸을 데굴데굴 굴리며 웃는 것 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 아밀리한은 바람맞았다. 정확히 말하면 바람이 아니라 진이 갑자기 쓰러졌기 때문이라지만. 영주 전용 텐트로 주민들이 애써 만들어 준 숙소를 진은 계속 사양 하고 야영을 했기 때문에 그곳은 아밀리한의 거처가 되어 있었다. 블루는 와이즈의 전언을 그에게 전했고, 아밀리한은 눈을 껌벅이다 헛기침을 했다. "병 문안을 가야겠군요.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아침 찾아뵙겠습니 다. 설마 병자를 데리고 바로 떠나시진 않겠지요?" "네. 의식을...아니, 기운을 차리셔야 할 테니까요. 마법사님께 말씀 드려두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풀이 죽고 슬퍼 보이는 엘프는 한쪽 귀가 반쯤 잘려 있었고, 아밀 리한은 그들 사이에 뭔가 문제가 있었음을 짐작했지만 침묵했다. 엘프는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급하게 처리하고 있던 서류 뭉치를-이지스 부인의 고용 계약서류나 영지에 파견 될 병사와 기사들의 증빙서류와 몬스터 숲에 관계된 상거래 서류등등-손등으로 툭툭 두드리며 서서, 아밀리한은 한숨을 지었다. "장애물이 너무 철벽이지 않나요, 진? 정말 버림받겠는데, 이거." 아밀리한은 진의 보호자라고 했던 마법사의 차갑기 그지없던 눈빛 을 떠올렸다. 진은 이른 아침, 잠에서 깼다. 짚 냄새와 벌목할 때 나는 베어낸 나 무 냄새가 났다. 블루가 의자를 구해와 곁에 앉아 있다 진이 눈을 뜨자 걱정스런 얼굴로 안색을 살폈다. "귀 낫지 않아, 블루?" "아..." 블루는 상처가 아물었지만 아직 회복이 안 된 오른쪽 귀를 만지작 거렸다. "다시 자라려면 시간이 좀 필요할 테니까요. 보기 흉한 가요?" 진은 외모에 신경 쓰는 엘프? 라는 생각이 들어 웃음이 나왔다. "나무가 가지 조금 꺾였다고 나무 아니야? 인상파 화가가 생각나 네. 그러게 뭐 하러 뛰어들어? 다신 그러지 마." 진은 블루에게 핀잔주듯 말했지만 겁도 없이-겁이 없는 것은 자신 이 더 했겠지만- 뛰어들어 자신을 감싸려 한 엘프에게서 누군가가 연상되었다. 진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몸을 일으키다 깜짝 놀랐다. "이게 무슨 꼴이야." "콜록. 무. 무리하면 살 빠진다고 하시더니 제가 아니라 진이 살이 빠졌네요." 머리가 핑글 도는 현기증 때문에 진은 다시 누웠다. 어쩐지 시트 아래 짚이 자꾸 콕콕 찌르는 느낌이 이상하다 싶었더니, 몸무게가 10킬로 이상은 빠진 것 같았다. 마른 손을 들어 얼굴을 만져보니 볼의 살도 거의 잡히지 않았다. "끙...와이즈 어디 갔어? 릭은?" "마법사님은 시장을 보러요. 릭페르님은 밖에서 검수련 중이세요." "시장? 검 수련?" "이곳은 물자가 도착하지 않아 먹을 게 풍족하지 않으니까요. 마법 사님께서 무한 자루를 가지고 어디론가 가셨어요. 릭페르님은 검수 련을 며칠 째 제대로 못하셨다고 카즈 경과 대무 중이시지요." 진은 빨래 시켰다고 성질 내더니, 자진해서 시장 보러 가면서 얼마 나 투덜거렸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웃음이 나왔다. 그러고 보니 무척 배가 고팠다. "피 한 방울에 빵이 몇 개더라? 엄청 먹어야겠네. 흠. 데이트 방해 하는 방법도 참 가지가지셔. 이 꼴로 어떻게 남자를 꼬시나..." 하지 마라는 데이트하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화가 나게 하셨나하는 생각을 했지만, 좀 지나친 짐작 같아서 블루는 다른 말을 물었다. "정말 꼬실려고 하셨어요, 진?" "블루. 별소리 아니니까 신경 안 써도 돼." 삐죽이며 웃는 진에게 블루는 그의 잘못이 섞인 일이 아닌데도 실 은 방해하고 싶은 생각이 있었던지 미안한 듯 웃었다. "블루." "네." "다시는 나 때문에 목숨 걸지 마. 나 때문에 죽으면 가만 안 둬." "진." "하지만 고마웠어. 귀 미안해." 블루는 하마터면 잃어버릴 뻔했던 그녀의 윤기 잃은 머리카락을 쓸 어주었다. * 와이즈는 사키리온의 인간들이 많이 모여 있는 도시로 가서 이른 아침 시장과 상점을 거의 쓸다시피 해서 식료품을 사 가지고 왔고. 조리가 필요 없는 것들을 진의 침대 가에 쌓아주고, 일행과 바닥에 앉아 아침을 먹고 있었다. "그래. 너 다 먹어라." "와이즈. 애써 사 온 것 맛있게 먹어 주잖아. 돼지 보듯 하면 어떻 게 해?" 진은 반쯤 누워서 지방과 열량이 많아 보이는 음식들을 골라 부지 런히 먹고 있다가 후식으로 사온 과일 푸딩을 먹으려는 와이즈에게 말 없이 손을 내밀었고, 그는 심술이 분명한 진의 요구에 응해 주 며 투덜거렸다. 진은 그에게 아무 말도 듣지 못했고 하지도 않았지만, 무언의 화해 가 이루어져 있었고. 도대체 무슨 병이면 하루 밤사이에 그렇게 살 이 빠질 수 있느냐는 계속 된 질문을 릭에게서 받고 있던 블루는 울상이 되어있었다. "무슨 병이냐면 릭. 엄청 사랑 받게 되면 걸리는 병이야." "그런 병도 있나요? 뱀파이어에게 피라도 빨리신 것 같아 보여요, 진." "콜록." 블루는 가렵게 느껴지는 오른 귀를 만지작거리며 사래가 걸려 기침 을 하는 와이즈에게 머뭇거려 보였다. 진은 뱀파이어가 진짜 있느 냐고 물으려고 했지만 아밀리한이 병 문안을 왔다는 말을 하며 문 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리자 먹던 것을 내려놓고 이불을 뒤집어썼 다. "밥 먹고 떠나자. 어디 요양할 만한 곳으로. 사람들 많이 없는 곳이 면 좋겠어. 얼굴을 못 보이겠어." 와이즈는 실룩이며 친절하게 물어주었다. "돌려보내 주랴, 진?" "작별인사는 해야지. 너무 좋아한다, 와이즈?" 릭페르와 블루와 와이즈는 먹던 과일과 빵들을 하나씩 손에 들고 문 밖으로 나갔다. 아밀리한은 미안한 표정의 엘프와 피식 웃는 얼 굴의 마법사와 안됐다는 표정의 기사에게 고개를 갸웃하고, 집안으 로 들어갔다. 안에서 들려오는 아밀리한의 목소리를 듣고, 와이즈는 샘통이다 하 는 표정을. 릭은 쓴웃음을. 블루도 웃음을 참으려다 얼굴이 이상해 졌다. "진. 원래대로 안 돌아 올 병이면 데이트 신청은 안 하겠습니다. 이 꼴이 뭐 에요!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데요?" 아밀리한은 절망이라는 표정으로 마법사에게 만들게 해서 가져온 속이 비치는 얇은 천에 싼 왕 사탕을 진에게 내밀며 소리쳤다. 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 진은 아밀리한과 이야기를 나누고 떠날 것을 허락 받았다. "고마워요. 아밀리한. 장미도 그렇고 사탕도 그렇고 너무 고마워요. 잘생기고 능력도 있고 부자 공왕까지 될 테니, 레이디들에게 대시 를 많이 받겠지요? 행운을 빌어요. 좋은 귀족이 되세요. 태생으로 귀족인 사람 보다 노력으로 귀족이 된 사람이 더 고귀하다고 생각 해요. 행복해지세요?" 아밀리한은 말라깽이가 된 숙녀에게 따뜻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진은 내게 행운이었어요. 저야말로 고맙습니다. 아무래도 벌써 채 인 것 같은데요? 하지만 후보자리는 그대로 남겨둬 주세요, 진. 목 표가 있다는 것은 성취가 더 빠를 수 있는 일이니까요. 언젠가 꼭 만나러 가겠습니다. 공국으로 인정받게 되면 진의 이름을 인용해 지을까 해요. 진이 세운 나라니까요. 괜찮을 까요?" "더 없는 영광이네요, 아밀리한. 혹시 제 이름을 구별해서 듣고 찾 아오는 사람들이 있다면 따뜻하게 받아주세요." "여부가 있겠어요, 진? 이곳엔 사람들이 많이 찾아들 겁니다." 그럴 것이다. 진은 와이즈에게 네얀에서 말했던 희망의 한 조각이 이곳에서 실현될 것을 믿었다. 아밀리한은 요양 중에 꼼짝 말고 열심히 먹기만 해서 원래대로 불 릴(?)것을 강조해서 진을 웃겼다. "흠. 사탕을 드렸으니 한번 더 키스 받을 수 있지 않으려 나요, 진?" "키스 정도야. 후후..." 진은 침대에 앉아, 미소짓는 아밀리한에게 짧은 꿈을 꾸게 해준 보 답으로 작별키스를 해 주었다. 릭페르의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릭과 블루는 그동안 친해진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러 잠깐 자리를 비웠고, 와이즈는 주민들이 찾아와 일일이 면담을 시도 받아 발목 이 잡히기 전에 떠나기 위해 집 안에 마법진을 그렸다. 기사들과 주민들과 권티의 모든 것에게 전하는 작별인사와 그들의 미래를 아밀리한에게 맡기고, 진은 와이즈에게 안겨 일행과 이동 마법진에 올랐다. 아밀리한은 내내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는 마법사 에게 쓴웃음을 지었지만, 진을 잘 돌봐달라는 부탁 말을 와이즈의 옆얼굴에 대고 했다. 진은 마법진의 울림이 시작되자 배웅하고 있던 자주색 머리의 그에 게 손을 흔들었다. [....미안했다, 진.] '나도 미안. 와이즈.' 진은 이질적인 공간에 떠 있는 기분의 마법진의 이동 속에 와이즈 의 팔에 머리를 기대며 대답했다. '나중에 괜찮은 사람 다시 만나면 그땐 데이트해도 돼?' [....맘대로 해라.] '좀 솔직해지지 그래, 와이즈? 아닌 척 하지말고.' [웃기지 좀 마라....난 말라깽이 취미는 없다.] 진은 어쩔 수 없는 '드래곤'이구나 싶은 생각에 피식 웃었다. 진은 아밀리한과 권티를 떠났다. * 101 [13-3] 여름의 문턱. "라 왕자님. 신성왕국 세레니프이스 주신전의 고위사제께서 방문을 청하셨습니다." 페르티온 라는 오전 검 수련을 끝내고 시종이 건네 주는 정사각형 모양의 흰 수건으로 땀을 닦다가, 태궁에 속해 있는 로얄궁의 관리 를 맡고 있는 집사가 찾아와서 전하는 말에 고개를 돌렸다. "주신전의 사제?" "네. 라 왕자님. 수도에 있는 주신전으로 소속이 옮겨져 드리얀으로 오셨다고 하더군요. 본궁에서 국왕폐하를 알현한 후 두 왕자분들께 안부 인사를 드리고자 태궁으로 오시겠다는 전갈을 받았습니다." "...루시엔도 함께?" "네. 왕자님." 페르티온 라는 들고 있던 수건을 자신과 대련하느라 역시 땀을 흘 리고 있는 제레미 경에게 넘겨주었다. 태궁 한편에 자리 잡고 있는 자신의 거처 옆 개인 연무장은 검술 수련을 하는 곳이라기보다는 요양을 하는데 더 어울릴 듯한 경관을 가진 공터였다. 수련용으로 쓰는 둥근 공터 주위에는 계절마다 특색 있는 향기를 짙게 뿌리는 향나무와 아담한 정원수들이 둘러져 있었고, 차분하고 아름다운 빛을 띄는 태궁의 건물 벽과 면해 있었다. 라 왕자는 맑게 개인 푸른 하늘을 향해 잠시 눈길을 주다가 땀을 닦아냈음에도 끈적이는 기분이 진하다는 느낌에 여름이 오고 있 다는 것을 실감했다. "알았다. 로얄의 접견실로 안내하거라." "네. 라 왕자님." 집사가 물러나자 라 왕자는 목덜미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떼어내 며 예복을 갖추기 위해 자신의 처소인 로얄 궁 정문으로 호위들과 함께 걸어갔다. * "형님. 어서 오세요. 동안 평안하셨는지요." 루시엔은 안내 된 1왕자 궁 접견실의 낮은 탁자에 앉아 있다, 라 왕 자가 들어오자 일어나서 깍듯이 인사를 했다. 페르티온은 가볍게 목 례로 답하고 루시엔의 맞은편에 앉았다. "안녕하십니까, 루시엔 왕자님." "네. 안녕하세요, 데이비스 경." 제레미 데이비스는 주군을 대신해 인사말을 하며 2왕자의 보좌 파 오아이와도 인사를 나눴다. 문 곁에 서 있던 시종들은 접견실 문 밖 으로 나가 대기했다. 페르티온은 이복동생의 머뭇거리는 얼굴에서 시선을 떼고 자신의 호위로 함께 온 제레미 데이비스가 곁에 서 있는 것처럼, 루시엔 옆 에 서 있는 파오아이 맥머니어에게 눈을 주었다. 그는 자신의 측근 이 될 것을 거절하고 2왕자 루시엔의 보좌가 되었다. -왜? 페르티온은 이유를 묻지도, 더 나은 조건을 내 걸지도 않았었 다. 파오아이는 29세의 나이로 백작가의 작위 없는 귀족 자제였다. 그는 기사도 마법사도 신관도 아니었지만 8년 가까이 수련여행을 빌미로 대륙을 돌아다니다 2년 전 드리얀으로 돌아왔었다. 맥머니어 백작가의 정통 후계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동생에게 후 계를 양보했었고 영지를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검술 면에 실력이 특출한 것은 아니었다지만 모든 귀족 자제들이 형 식상이나마 받는 기사칭호조차 그는 받지 않았었다. 파오아이는 귀향하여 자신의 가문의 주선으로 만궁에 거주하며 궁 성 도서관을 들락거리다 페르티온의 눈에 띄었었다. 페르티온은 만궁 도서관에서 검술에 관한 책을 찾아 돌아서다 머리 를 넘기는 책 더미를 위태롭게 들고 지나가던 그와 부딪혔었다. 파오아이는 170Cm 정도의 작은 키로 나이에 걸맞지 않게 나이 들 어 보이는 인상에, 복장마저 검을 걸치지 않고 예복이 아니었던 탓 에 페르티온은 그가 도서관 사서의 조수쯤 되는 줄 알았었다. 하지만 그는 변경백작 가문이긴 하나 꽤 입심 있는 귀족가의 자제 였고, 더구나 원래 맥머니어 백작의 작위를 이어 받아야했었을 정통 후계였다. 그는 왜 아우에게 작위를 양보했을까? 이유를 물은 적이 있었지만 그는 피식 웃으며 대답하지 않았었다. 그는 가진 지위나 명예로운 칭호는 없었지만 통치자의 훌륭한 보좌 감이었다. 페르티온은 당연히 그가 자신의 측근 내지 수족이 되리라 여기고 있었는데 다름 아닌 자신의 초대로 궁성 연회에 참석해 루 시엔을 만나고선, 그의 보좌가 되기로 했다는 일방적인 의사를 전해 받았었다. 왜? 얼마 전 국왕의 숲으로 사냥을 다녀 온 후, 안부 인사를 하러 찾아 왔었던 루시엔을 바쁘다는 핑계로 계속 방문을 거절해 왔었던 탓에. 동생과 함께 다니는 그를 오랜만에 얼굴을 대하게 되자 페르티온은 다시 이유를 묻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검 수련은 진전이 있으세요, 라 왕자님?" "덕분에." 파오아이는 짧게 자른 짙은 갈색 머리를 약간 갸웃하며 페르티온에 게 어설퍼 보이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평범해 보이는 인상과 의미 없어 보이는 표정 뒤에 숨겨진 엄청난 지식과 군사의 기질을 잘 아는 페르티온은, 자연스럽지 못한 접견실 내의 분위기를 풀어보려는 의도로 말을 걸어왔을 그에게 최대한 짧 게 대답했다. "신성왕국에서도 최고의 자부심을 가진 주신전의 고위사제의 방문 이 드리얀의 왕자님들에게 오게 된 이유를 짐작하시나요, 라 왕자 님?" "만나보면 알겠지." 자신의 성의 없게 느껴지는 단조로운 대답에도 파오아이는 전혀 동 요가 없었다. 페르티온은 어린 이복동생에게로 눈을 돌렸다. "너는 짐작하느냐, 루시엔?" 소년왕자는 말을 걸어오는 형에게 밝고 진지한 태도로 웃으며 대답 했다. "아니요, 형님. 그저...음. 우리 드리얀에 있는 주신전의 규모가 여신 들의 신전보다 작고 영향력이 적으니 포교와 활성을 위해 친선사절 목적의 방문이 아닌가 싶습니다만." 페르티온은 총명한 대답을 하는 2왕자에게 눈썹을 약간 꿈틀거렸다. 어린 나이임에도 그는 근래 들어 왕손다운 면모를 갖춰나가고 있었 다. 다름 아닌 파오아이의 영향이리라. "다음 대 왕이 될 후계에게 주신의 이름을 약속 받으려는 의도인지 도 모르지. 사제들도 이익이 뭔지는 알 테니까." 루시엔은 사제였던 어머니를 거론하는 듯한 은근한 뉘앙스가 실린 그의 말에 얼굴이 조금 굳어졌다. 제레미 데이비스는 반듯한 자세로 서서 접견실 내에 몇 마디 오가 는 대화를 듣고 있다, 그들 사이에 녹아 있는 불신과 팽팽해지는 갈 등의 느낌에 한숨이 나오려했지만. 파오아이의 표정변화 없는 얼굴 을 의식하고 참아야했다. 시종이 문을 열고 주신 세레니프이스 신전의 고위사제와 준사제의 도착을 알려 왔다. * 칠흑처럼 어둡고 더운 그곳은 간간이 천장에 맺혀있다 떨어지는 똑. 똑. 거리는 물방울 소리만이 유일하게 침묵을 깨고 있었다. 그는 긴 잠에서 깨어날 때 몸에 퍼지곤 하던 나른함을 느끼며 기지 개를 켰다. 어슬렁거리는 걸음으로 오래 된 자신의 잠자리를 누비며 맴돌던 그는 딱딱하고 따뜻한 돌 위에 다시 웅크리고 앞발에 턱을 올렸다. 코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짙은 어둠 속에 녹아 들 듯 조 용히 몸을 웅크린 그는 목적 없이 전방을 주시했다. 작은 불빛 아니, 노란 두 눈동자만 유독 어둠 속에서 빛이 나고 있 었다. * 5월도 중순에 접어들었다. 울창한 녹음 사이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너무 눈이 부시다는 느낌을 받으며, 진은 날개 짓 하는 새들의 지저귐과 싱그럽게 느껴지는 물 흐르는 소리에 들고 있던 책을 내려놓고 태평스런 기분으로 말문을 열었다. "난 살이 찌는 체질이 아니었어." "그러냐?" "많이 먹어도 배가 나오는 편도 아니었어. 그것만 봐도 알 수 있었 던 일이었는데." "그랬겠지." "먹는 게 지겨워질 줄은 꿈에도 몰랐어." "안됐다." "이게 과연 누구 탓일까?" "글쎄다." 느긋한 자세로 계곡을 타고 흐르는 바람을 맞으며 바위에 걸터앉아 성의 없이 대꾸하고 있는 와이즈를 흘끗거리던 진은, 저 만치에서 검술 연습을 하는 릭에게로 눈을 돌렸다. 릭은 계곡과 약간 떨어진 곳에서 휙-휙- 바람 가르는 소리를 내가 며 검 수련 중이었고, 블루는 초여름 날씨라 산열매가 많이 열려 있 을 거라며 입맛을 잃고 있는 진을 위해 신맛 나는 열매를 찾아 어 딘 가로 가고 없었다. 권티를 떠나 사키리온을 지나 영지와 나라의 이름을 염두 하지 않 고 작은 마을이 가까운, 풋풋한 향기가 물씬 났던 차밭과 1급수 이 상일 맑은 물이 흐르던 강변과 염색 재료가 되는 식물과 색깔 진한 꽃을 많이 재배하던 곳들을 거치며. 진은 드리얀을 의식한 방향으로 휴양할 만한 곳을 찾아 잠깐씩 머무르며 부지런히 이동했다. 지형상의 특성인지 날씨가 꽤 덥게 느껴져서 땀 흡수가 잘 되지 않 는 가죽조끼 차림이 불편해서, 진은 새로 구입한 하늘색 여름용 여 행복을 입고 있었다. 평상복의 형태는 입던 것과 같았지만 더 얇고 소매도 짧았다. 위에 걸치는 겉옷은 품이 넉넉해서 바람이 잘 통해 시원하게 느껴 졌고 풀 먹인 듯 깔깔한 천으로 만들어져서 가볍기도 했다. 나이트 가운 식이었지만 길이가 가죽 조끼처럼 허벅지까지 오는 길 이에, 뚫린 두 구멍에 팔을 끼워 넣고 앞 부분에서 겹쳐 한쪽에 달 려 있는 반뼘 폭의 남색 허리두르개 천을 돌려 옆구리 한편에서 묶 어 입고 있었다. 진은 부지런히 먹어댔지만 예전 체형으로 완전히 돌아가는데는 시 간이 더 걸릴 일이었고, 처음처럼 보기 흉할 정도는 아닌 것 같아 역 다이어트에 대한 조급한 생각을 버렸다. "완력은 별 차이 없는 듯 하지만 스피드는 더 나아졌어. 봐, 와이 즈." 진은 앉아있던 깔개 위에서 일어나, 땔감도 할 겸 죽은 나무를 상대 로 검을 휘두르고 있는(블루의 권유였다.) 릭의-바로 옆에 서 있는 다른 나무를 향해 쏘아져갔다. 릭은 분명 뭔가가 지나간 것 같은 기분에 멈칫 했지만, 진과 와이즈 가 있는 곳과 주위를 둘러본 그는 별다른 환경 변화를 발견하지 못 해 다시 수련에 열중했다. "빠르지?" "......." "전보다 더 빨라졌어. 흠. 그러면 뭐 하나. 써먹지도 못할 걸." "써먹어라. 그러면 되잖냐." "어디다 써먹어?" "아무데나." 진은 깔개 위에 다시 앉아 팔짱을 꼈다. "드리얀으로 돌아가면 대신들 지갑 터는 데나 써먹을까." "할 일 없으니 좀이 쑤시나 보구나, 진." "지겨워져서 그래, 와이즈. 인력, 능력 낭비인 것 같기도 하고. 하지 만. 모처럼의 휴가니 맘 편히 게으름 피워도 되겠지." '게으름?' 와이즈는 권티를 떠나 야영을 하거나 작은 마을에 들러 숙식을 하 며 심심찮게 인간들을 도와주고 지나왔던 지난 며칠 간의 진의 행 적을 돌이켜 보며 이죽거렸다. 그녀의 말대로 인가가 드문 곳을 찾아다녔지만 야영이 힘들어 잠을 자기 위해 들르게 되곤 하던 작은 마을들에서, 진은 잘도 도움이 필 요한 사람들을 찾아내고는 했다. 제 몸이 힘들다보니, 머리 굴려 일을 직접 추진하기 어렵게 되자 진 은 돈을 뿌렸다. 모시는 신의 이름에 구애받지 않고 재정이 힘들다 싶은 신생 신전 에 기부하고, 기사가 되고 싶어하는 소년 소녀-성년이 지난 청년까 지도-들을 릭에게. 마법사가 되고 싶어하는 아이들을 와이즈와 블 루에게 밀어주고 소질 검사를 받게 했다. 가능성이 있고 열의도 있는 아이들은 대부분 테스트를 받은 후 바 로 릭이나 진을 후견인으로 두게 되었고, 가까운 교육기관으로 보내 졌다. 그 과정에서 진은 그들을 보호하고 호위할 용병들이나 모험가 들을 고용했고, 아이들의 손을 빌리고 있어야 했을 정도로 생활이 어려운 가정을 위해 마을의 공역을 주선했다. 고아들이나 병자들을 돌보는 예배당 수준의 신전건물을 확장 공사 할 비용을 대 주었고, 징검다리 수준의 개울 길에 다리를 놓게 해 자연히 주위에 일거리가 돌아가게 하는 등등... 마른 얼굴을 보이기 싫다는 핑계를 대고 진은 그 모든 일에 일행들 을. 특히 그중 와이즈를 가만 눕거나 앉아서 열심히 부려먹었다. 릭과 블루가 잠든 다음엔 손 좀 봐줘야겠다 싶은 관리나 부자들을 추려내고 있다가 와이즈와 함께 떠나왔던 마을로 돌아가 하루에 꼭 한 두 집씩 털고는 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시간을 먹고 자고 독서하는데 다 보냈다. 5써클 마법사와 7써클 마법사가 번갈아 하루에 두 세 번씩 그려댄 마법진의 도움으로 현재 서대륙을 거의 가로질러 며칠만 더 워프하 면 동대륙에 진입하게 될 위치였다. 피로가 누적된 블루를 위해 진은 엘프에게는 가장 편할 숲을 택해 야영을 하기로 했었고, 그는 진이 자신의 귀를 잡아 당겼을 때 언급 했던 말을 기억하고 드워프 마을이 있는 곳을 의식하며 이동하다 더운 날씨에 자갈 깔린 시원해 보이는 계곡을 발견하자 잠깐 쉬어 가기로 했었다. "블루. 필요 없다니까. 뭘 그렇게 많이 따왔어?" "말려서도 먹을 수 있는 것들이에요. 겨울엔 귀한 열매에요, 진." "블루님. 그거 혹시...임산부들 입맛 돋구는데 쓰는 열매아닙니까?" "어. 그렇게 되네요, 릭페르님. 부. 불쾌하세요, 진?" "내참..." 와이즈는 푸른 나무 열매와 노란 열매들을 가득 담아 온 엘프의 바 구니를 들여다보고 있는 진과, 검 수련을 끝내고 그들과 함께 잡담 을 하는 릭페르를 쳐다보았다. "불쾌할 것까지는 없는데, 블루. 날 살찌워서 잡아먹을 궁리를 하는 거야?" "엘프는 인육은 안 먹는데요, 진." "...농담이 안 통한다니까. 릭.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 줘. 난 릭이 제일 무서워." "그것 참 영광이네요, 진." 진은 달라진 게 없어 보였지만 일행들을 의식해 겉보기만 그런 것 같았다. 그녀는 찡그리지는 않았지만 예전처럼 자주 웃지도 않았다. 와이즈에게 스스럼없이 걸어대던 장난말도 하지 않았고 모두에게 항상 고만고만한 태도를 고수했다. 블루는 진의 변화를 눈치채고 오히려 더 불안해했다. 진은 그들을 보면서도 보지 않는다는 기분이 들게 했다. 와이즈는 내내 누르고 있던 짜증이 다시 솟구치는 기분에 한숨을 쉬었다. 진은 그들 모두에게 보이지 않는 선을 조금씩 긋고 있었다. 활동량이 많던 그녀는 쉴새 없이 먹어대며 거의 움직이지 않고 잠 을 많이 잤기 때문에, 한밤중에 잠이 깨거나 아예 잠들지 못해 달을 쳐다보는 일도 갈수록 횟수가 많아지고 있었고. 이 계곡에서처럼 인가가 아예 없는 휴양지에선 하늘과 녹음만 바라 보고 물소리를 듣거나 재미없는 책에 코를 묻고 있는 일에 시간을 많이 허비했다. 블루가 아니라 진이 엘프처럼 보일 정도였다. "진. 기분은 괜찮으세요?" 진은 노란색 호두알 만한 크기의 타원형으로 생긴 나무열매를 먹어 보려다 블루의 다시 반복된 물음에 찌푸려지는 얼굴을 바로잡았다. "괜찮다니까, 블루. 자꾸 물으니 신경 쓰여. 블루가 더 걱정 돼. 너 무 무리했잖아. 회복은 되고 있는 거야?" "네, 진. 가만 앉아서 수련하는 것 보다 마나 축적에 더 도움이 되 는 것 같아요." "욱. 이거 너무 신데요?" "입맛이 돌아, 릭?" "직접 드셔보시지요, 진." "이렇게까지 해서 살이 찔 필요가 있을까? 이젠 보기 흉할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진의 한숨 섞인 말에 블루와 릭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다 헛기침을 했다. "진 보기 흉한 것이 아니고요. 전 보다 더 곤란해 졌어요." "곤란하다고?" "아니, 저. 그게 아니고..." "흠. 진. 블루님의 말씀은 전혀 16세로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살이 빠져서 어려 보이는 타입도 있지만 반대로 진처럼 성숙해 보 이는 타입도 있으니까요." 진은 눈을 깜박이다 머리를 긁적였다. "그것 참." 뒤통수에 싸늘한 기운이 와 닿는 기분에 돌아보았지만 와이즈는 시 선을 계곡 위쪽으로 향하고 있었고, 진은 다시 한숨을 쉬었다. '어쩌란 말인지...' "그러고 보니 키가 자란 것 같아. 165가 넘어 보이지? 성장기라 그 런가 봐. 너무 이뻐지면 곤란한데 말이야." "진. 체통을 좀 지켜주세요." 미소짓는 블루와 달리 릭은 무안스러워 했고 진은 웃음으로 얼버무 렸다. 늦은 아침을 먹고 진은 항해 중이라는 바쁜 폴로네오를 붙잡고 통 신하는 것도 한계가 있고, 할 일 없이 뒹구는 기분에서 벗어나 볼까 하는 생각으로 사냥을 가는 릭을 따라나섰다. "몬스터는 없는 것 같았지만 야생 동물이 많은 것 같았어요. 조심하 세요." "릭. 들었지? 조심하래." "네. 네." * "수련여행이 수련 같지가 않아서 미안해, 릭." "별걸 다 신경 쓰시네요, 진. 충분히 수련 중이니 손해보는 여행은 아닙니다. 제게 달리 하실 이야기 있으세요?" 진은 사냥해서 잡게 된 노루 한 마리를 묶어두고 땀을 식히기 위해 적당한 그늘을 찾는 릭과 마주 앉아 말을 꺼냈다.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할지 아나보네?" "뭐. 저도 눈치는 있으니까요. 진이 저흴 대하는 태도가 바뀐 것에 블루님이 불안해하시더군요. 리툰 마법사님도 말수가 많이 줄었고 요." "그러게.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어." "제가 가장 수월한 편인가요, 진?" 진은 서글서글한 웃음을 짓는 미르나의 오빠에게 피식 웃어 보였다. 아무렴. 그래도 같은 인간이니 가장 대하기 쉬운 기분인 것은 맞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습게 안 봐, 릭. 사람마다 장단점이 있는 거잖아. 와이즈나 블루 는 현실감을 떨어뜨리지만, 릭 덕에 정신이 드는 경우도 많았는걸." "칭찬인지 아닌지 헷갈리네요, 진." "칭찬이야. 세상 살기는 평범한 게 오히려 좋은 거라고 생각해. 평 범한 사람은 아니라고 하겠지만. 하지만 릭도 평범하지는 않잖아? 그 나이에 후작이니." "기억해 주시니 고맙네요, 진." 바람이 많이 불고 있었다. 나무가 우거진 산 속에서는 쏴-아. 쏴-아. 하는 바람 새는 소리가 높은 나뭇가지 위에서 멈춤 없이 계속 퍼지고 있었다. 진은 여행을 시작한 시점으로 시간을 되돌린다고 해도 뾰족한 수가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처럼 사람들 사이에 벽을 쌓고 생활해서는 그렇게 웃고 지내지 못했을 것이고, 즐겁지도 않았을 것이다. "릭. 미르나에게 부모님 영향 받지 않고 직접 신랑감을 고르게 한 이유가 있어?" "미르나가 그런 이야기도 했나요?" "더한 이야기도 했지. 얘기 나눌 상대가 없었는지 묻지도 않은 말을 죄다 하던데? 기사들의 불문율 이야기도 미르나에게서 제일 먼저 들어 알게 된 걸?" 빙글거리며 웃는 진에게 릭은 인상을 써 보였다. "다 잊으세요, 진. 미르나는 실패작이니까요. 기회를 만들어 줬는데 도 변변치 않은 귀족을 골랐어요. 전 가만 두면 클레이스 경 같은 분에게 목 맬까봐. 흠. 죄송합니다." "괜찮아, 릭. 클레이스는 마구 씹어도 돼. 쿡쿡..." 웃는 진을 보며 릭은 미소지었다. 겨우 그녀로 돌아온 듯 한 느낌에 안도하는 마음까지 들었다. "진. 항상 그렇게 웃으세요. 진은 너무 책임을 의식하는 것 같더군 요. 꼭 무얼 바라거나 얻길 바래서 진과 함께 다니며 돕는 것은 아 닙니다. 진은 어린데도-전혀 어린것과 거리 있지만-항상 베푸는 입 장에 있으니 감정적인 면에 있어서도 무리를 해서라도 채워주려고 하는 면이 보이더군요. 진만 빼곤 모두 어른이에요. 어리광 좀 피운 다고 누구처럼 책임지라고는 하지 않을 테니까요." 진은 아밀리한을 의식하고 하는 릭의 말에 다시 웃음을 흘렸다. '글세? 적어도 블루는 책임지라고 할 것 같은데. 쿡쿡...' "뭐. 책임지라고 한다고 책임지려하는 것이 더 무책임한 일이 되지 않을까요? 보통 레이디들에게는 되려 자랑거리 삼을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만." "릭은 그럼 오빠인 셈이네?" 릭은 가슴 아픈 소리라는 듯이 상의 조끼를 붙잡으며 대답했다. "그렇다고 오빠라고 부르지는 마십시오, 진. 말썽쟁이 여동생은 하 나로 족합니다." 진은 부담을 덜어주려는 의도로 짐작되는 릭페르의 말에 너무나 익 숙해져 잊고 있었던 귓불의 피어스를 만지작거렸다. 남자친구라고 있었던 녀석이 너무 애 같아서 다들 그럴 거라 은연 중 착각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릭의 말대로 그는 성인이고 블루도 몇 백년은 살았고 와이즈는 까 마득하게 살았다. 조금 이기적으로 군다고 자신에게 뭐라 하는 사람 이 있다면 모른 체 하면 그만이 아닐까. 전혀 다른 문화 자체라 할 타종족이라는 점만 잊으면 문제가 없을 것 같은데, 항상 그게 문제 가 되었다. 어른들은 돌봐주지 않아도 어른이다. 진은 답이 나오지 않던 고민을 더 하지 않기로 했다. 자신은 아직 미성년이었다. 진은 릭페르에게 존중하는 의미로, 미뤘던 이야기를 꺼냈다. "미안, 릭. 릭에게 실례가 된 일을 또 하고 있었던 것 같아. 그동안 무시 받는 기분이 들었다면 미안해. 릭은 신분이나 입장에 대해 뚜 렷한 것을 선호하는 것 같았는데 말이야." "...뭐 또 제게 숨기는 것이 있었나요, 진?" "응. 하지만 중요한 것은 아니야. 내 신분이 뭐든 난 나고, 릭은 릭 이지. 좋은 친구잖아?" "네. 네. 엄청난 소릴 듣더라도 화내지 않도록 노력해 보지요, 진. 무얼 숨기셨는데요?" "난 드리얀의 후작가의 여식이 아니고, 제르티아 진 라이어스 드리 얀이야. 왕녀래." 진이 한 태연한 투의 말의 의미에 릭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가 벌떡 일어나 예를 갖추려고 했다. 하지만 턱을 고이고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진을 의식하고 그는 도로 주저앉으며 뇌까렸다. "...어질 거리는군요." 진은 충격 주는 종족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어 비실거리며 웃었 다. 102-[잊혀진 종족] * "마법사님 진을 드리얀으로 시간 맞춰 7월 4일 전까지 데려가야 할 이유가 뭔지 물어도 되겠는지요." "...묻지마." 블루는 둘만 남게 되자 한참을 머뭇거리다 꺼낸 말에, 인간들의 예 의를 버리고 쌀쌀맞은 대답을 하는 와이즈에게 원망 섞인 눈빛을 했다. "계약 때문이라 하신 것으로 압니다, 투비와이즈님. 마족이 그렇게 말했었지요. 그럼 계약 이행을 하신 후엔..." "네가 참견할 일이 아니다, 엘프." 블루는 무모한 행동임으로 느껴졌지만 쳐다보지도 않고 있는 저 오 만한 종족에게 땀을 훔치는 기분으로 다시 말을 이었다. "진과도 거래 중이라는 뜻의 말을 들었습니다, 투비와이즈님. 이중 계약이라고. 저기..." "네 짐작이 맞다. 널 불러 주는 조건으로 죽은 후 몸을 해부용으로 내게 넘기기로 했었다. 됐냐?" 블루는 머리색처럼 얼굴이 파랗게 되었다. 자신을 불러 준 대가로? 진은 어째서 그런 철없는 약속을 한 걸까. 그가 인형으로 만들기라 도 하면 어쩌려고. 언젠가 그가 '해부해 보기 전이라...' 했던 말에 혹시나 하는 의심을 가진 것이었는데 사실이었다니. "단순히 지적 호기심을 채우기 위한 거래였다. 날 그 뻔뻔스런 블랙 드래곤과 똑 같이 보지 마라." "하지만. 클레이스님도 진을 살의로 공격하진 않으셨습니다." 와이즈는 딱딱한 표정으로 파란 눈의 엘프를 돌아보았다. 그는 하프를 방패 마냥 꼭 끌어안고 진이 앉았던 야외용 깔개 위에 앉아있었다. "난 해명할 이유가 없다, 엘프. 내 신경 건드려서 좋을 것 없을 텐 데?" "전 진을 선택했습니다. 그녀의 안위가 너무 중요합니다. 그녀의 미 래도요." 와이즈는 인상을 썼다. -저게 아주 눈이 뒤집혔나! 그렇지 않아도 눈에 가시 같던 녀석이니 트집잡아 이참에 포기를 하게... 와이즈는 유치한 생각이 드는 것에 신경질이 났다. "그럼 내게 허락 받아야겠다, 엘프? 걘 자유롭지 않다." "...엘프의 신께서 허락하셨습니다."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인데?" "저에겐 큰 상관입니다. 진은 투비와이즈님의 소유가 아니니 허락은 진에게 받을 문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만." "진은 자유롭지 않다고 한말 못 들었냐?" 블루는 힘겹게 눈을 비볐다. "투비와이즈님. 드래곤은 혼인 제도가 없고 게다가 유희중이십니다. 진을 마음에 들어하시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녀를 아끼신다면 그 녀의 의사를 존중해 주십시오. 진은 누구보다 행복해질 가치 있는 삶을 사는 인간입니다." "인간 여자겠지." 와이즈는 붉어지는 엘프의 얼굴을 보며 고소를 보냈다. "네. 투비와이즈님. 진은 제게 여자입니다." 물러서지 않겠다는 태도의 엘프에게 와이즈는 이라도 갈아주고 싶 은 기분이 되었다. 엘프가 고집을 부리면 산도 옮길 정도다. 그걸 모르고 있었던 것도 아닌데 닥치니 정말 부아가 치밀었다. 와이즈는 골치 좀 썩어 봐라 하는 심술로 한마디 툭 던지고 핏기가 신 엘프의 얼굴을 외면했다. "안됐다, 엘프. 걘 진작 내게 찍혔어. 내 거란다." 14. 잊혀진 종족. 사냥한 노루를 짊어지고 숲을 헤치며 앞장서서 걷는 릭을 따라 야 영지로 돌아가던 진은 뒤통수가 당긴다는 기분이 들었다. 진은 잠깐 멈춰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울창한 산림은 밀림이라고 불러야 더 어울릴 듯 빽빽했다. 이곳의 나무들은 어딜 가나 키가 높고 가지와 잎도 무성했다. 그리고 이곳 우거진 수림을 지나면 화산지대가 가깝다는 나무가 드 문 바위산으로 드워프들의 광산이 있다고 블루에게 들었었다. 서대륙에 속하는 지역이었지만 인간들의 발길이 미치지 않은 투포 겟 산맥의 한 자락으로, 인가는 찾을 수 없는 곳이었다. 거기에 안전을 염두 한 블루의 의사로 몬스터도 거주하지 않는 곳을 찾아 들어와 있었으니 달리 위험스런 곳도 아니었다. 그런데 진은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주위를 아무리 의식하고 둘러보아도 수상한 점이라고는 발견 할 수 없어서 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세요, 왕. 녀. 님?" 따라오지 않자 몸을 돌리고 묻는 무뚝뚝한 릭의 물음에 진은 멋쩍 게 웃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릭. 화났어?" "화는 무슨. 감히 공주님께." "음. 삐졌구나, 릭?" 릭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어깨에 걸치고 있던 사냥감을 고쳐 잡았 다. "막막하게 느껴져서 그렇습니다, 진. 생각 같아서는 당장 가까운 인 가로 달려가서라도 행차준비를 해야하지 않을까 싶은데 말이지요. 드리얀의 정통 1왕녀라면 왕위 계승권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들었어." "신분을 계속 감추는 것이 좋겠네요, 진. 어떤 나라에서든 전략적으 로 이용될 훌륭한 신분에, 어떤 구실도 될 수 있는 입장입니다." "어떤 구실?" "글쎄요. 모르셔서 묻는 것은 아니겠지요?" 진은 지친다는 표정의 기사에게 웃어 보였다. "별다른 생각 없었는데 릭이 그렇게 말하니까, 갑자지 내 신분이 엄 청 부담스럽네." "부담 가지세요, 진. 쉽게 생각해선 안 되는 신분이니까요." 진은 한숨을 쉬었다. 그 긴 이름이 갖는 의미는 '구속'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외자로 이뤄 졌던 '진'이라는 이름으로도 가진 책임이 너무 컸었는데, 네 마디의 이름으로 불리게 되어 짊어져야 할 책임은 또 얼마나 무거울까. "그런데 저도 이 숲이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긴 하네요." "응?" "동식물이 많은 탓이거니 했는데, 감시당하는 기분이 들거든요." "릭도 그래?" "네. 살의나 공격적인 느낌은 아닌 것 같지만. 예를 들면 저기 나뭇 가지에 앉아있는 새들도 날짐승의 탈을 쓰고 우릴 주시하고 있는 기분이랄까요?" 진은 멀뚱거리며 낮은 가지에 앉아서 날개를 다듬거나 폴짝이고 있 는 오색 깃털의 예쁜 새들을 쳐다보았다. "동물을 사랑하자고, 릭. 기분 탓에 의심하면 새들이 불쌍하잖아." 산새들에게 위협받는 기사? 진은 웃음이 나왔다. "블루는 별 소리 안 했지 않아? 너무 울창해서 그런 걸까." "진의 비밀 신분 이야기로 신경이 곤두서서 그런지도 모르지요. 몬 스터들도 없다는데 큰 위험은 없겠지요." "그래, 뭐. 무슨 일이 있겠어?" 하지만 발걸음을 옮기는 릭을 따라가며 진은 다시 고개를 갸웃거렸 다. 동식물이 풍부한 숲인데 왜 몬스터들 마저 없을까? 계곡도 있어 물도 풍부하고, 깊은 산 속이라 불화의 소지가 될 지나 다니는 인간들도 거의 없다시피 한데. 산적 일이 아니라도 살 수 있 을 것 같은 곳에 타종족이 둥지를 틀지 않고 있다는 것에 진은 '미 개척지'라는 단어를 떠올리고 어깨를 으쓱했다. * '와이즈. 블루 야단쳤어? 왜 저리 풀이 죽었는데?...?...와이즈?' 진은 계곡 아래쪽에서 사냥해 온 노루를 손질하는 릭을 쳐다보고 있는 와이즈와 그와 반대 방향으로 몸을 향하고 딱딱하게 서 있는 블루를 보고, 와이즈에게 속말로 물었지만 그는 모른 척하는 것인 지. 듣지 못했는지 반응이 없었다. "와이즈. 블루. 무슨 일 있어? 분위기가 험악해." "아무것도 아니에요, 진. 기운이 좀 나세요?" "응. 괜찮다고 했잖아. 아, 그리고 블루. 블루는 사람들의 신분에 큰 의미 두지 않지?" "네. 진은 진이지요. 릭페르님께 진의 신분을 알려드렸어요?" "응." 감 좋은 엘프가 이미 자신의 신분을 어림하고 있었거나, 전혀 상관 치 않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말에 진은 웃었다. 와이즈는 바위에 앉아 턱을 괴고 릭페르가 노루 가죽을 벗기고 있 는 것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다듬은 생고기를 릭이 가져오자 계곡 옆에 굴러다니는 돌들을 쌓아 올려 바비큐를 할 준비를 했다. 잘 타지 않는 껍질 벗긴 생나무 줄 기에 향신료와 소금 뿌린 고기를 끼워 돌려가며 굽기 시작했다. "릭. 릭이 없었으면 말이야. 야영할 때 사냥감 손질하는 거나 다듬 는 것 내가 해야했을지도 몰라." 릭은 그렇지 않아도 부려먹을 데로 부려 먹혔던 리툰 마법사가 진 의 말에 눈썹을 치켜뜨는 것과, 육식을 그다지 즐기지 않고 손질하 는 것에 서투를 것이 분명한 엘프의 미안한 표정에 웃음이 나왔다. "네. 네. 계속 고마워 하세요, 진." 느긋하게 이른 저녁을 먹고 있는데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블루는 주위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가 어느 순간 멈추고 숲에 정적 이 깔리고 있음을 깨닫자 식사하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날씨가 심상치 않은데요? 자리를 옮기는 것이 좋겠네요." "다른 곳으로 워프하는 거야, 블루?" "아니요. 금방 쏟아질 것 같은데요? 근처에 비를 피할 수 있는 곳이 있었어요." "그럼 그리로 가자. 비가 그치면 이동하고." 먹고 있던 고기와 과일등을 싸들고, 짐을 들고일어난 일행과 진은 계곡과 조금 떨어진 곳으로 앞장 선 블루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엇." 돌멩이가 머리에 떨어져 부딪히자 진은 놀라서 혹이 난 머리에 손 을 가져다댔다. 돌멩이가 아니었다. "우왓" "진, 달려요. 바로 앞이니까요." 나무 줄기와 잎사귀사이를 뚫고 우박이 내리기 시작했다. 진은 땅바닥에 반투명하고 하얀색의 큼직큼직한 우박들이 튀기고 구르기 시작하는 것을 보며, 블루가 가리킨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 다. 나무가 뿌리를 내린 땅이 가로막히고 높이 낮은 절벽 같은 곳에 이르자 안쪽에 빛이 닿지 않아 까맣게 보이는 동굴 입구가 나타났 다. 입구 근처엔 붉은 산열매가 잔뜩 달린 가시넝쿨이 우거져 있었 다. 진은 우산 모양으로 부분 실드를 쳐 준 와이즈 덕에 뒤늦게 우박의 공격에서 느긋해진 걸음으로 블루와 릭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동굴 안에서 본 바깥 세상은...흥미로웠다. "와. 난 우박 처음 봐. 말로만 들었어. 두 주먹만한 것도 있다. 인가 에 내리면 피해가 크겠는데?" "릭페르님 다치셨어요?" "괜찮습니다, 블루님. 별거 아니에요." 진은 뒤를 돌아보았다. 릭은 이마에 피가 흐르고 있었다. "진은 다치지 않았어요?" "응. 몇 개 맞았는데 크기가 작은 거였나 봐." "그게 아니고, 네 머리가 돌이라 그렇겠지." "리툰 마법사님..." "괜찮아, 릭. 나 머리 단단한 거 맞아. 핫. 핫." "얼굴도 두껍지 않냐?" "흠. 시비 걸고 싶은 이유가 뭐야, 와이즈?" 부탁하지도 않은 선심을 써주다가도 와이즈는 간혹 트집을 잡거나 빈정거리는 말을 내뱉고는 했다. 그는 키를 넘기는 동굴 입구에 서서 밖을 향해 턱짓을 했다. "꼬리를 달고 왔잖냐." "꼬리?" 투둑. 툭툭. 나뭇가지와 잡초가 깔린 땅바닥에 내리는 굵직굵직한 우박 사이로 어슬렁거리고 있는 그것이 보였다. "윽. 고양이다." 릭은 블루의 치료마법을 받고 피가 멈춘 이마를 쓱쓱 문지르며 진 의 어깨너머로 밖을 보다, 그녀의 말에 비틀거리는 기분이 되었다. "진. 고양이로 보입니까? 제 눈엔 흑표범으로 보이는 데요?" "농담이었어, 릭." 블루가 투명하게 울려 퍼지는 잔잔한 휘파람을 불었다. 동굴 안쪽에서 기척이 느껴져 돌아보자, 기상 변화를 눈치채고 먼저 들어와 숨어 있던 살쾡이와 너구리 같이 생긴 작은 산짐승들이, 블 루의 노래에 반응해 야생 눈빛을 반짝이며 움직이거나 다가오는 것 이 보였다. 내리는 우박을 고스란히 맞으며 밖에 서 있던 까맣고 커다란 흑표 범은 엘프의 초대에 응하기로 했는지, 아니면 하늘에서 떨어지는 주 먹만한 흰색 돌의 공격을 피해 보기로 했는지 꼬리 끝을 둥글게 말 고 천천히 걸어왔다. "릭페르님. 공격의사가 없으니 검을 빼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히려 경계할 거에요." "아. 그렇군요. 꼬리를 말고 있네요." 까만 윤기가 흐르는 야생 흑표범은 그 큰 몸을 느긋하게 움직여 동 굴 입구를 지나쳐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우박이 쏟아지는 밖으로 고개를 한번 향하더니 다시, 서 있는 진과 일행을 쓱- 둘러보았다. 안쪽 작은 산짐승들도 주춤하긴 했지만 겁을 먹지는 않은 것 같았 다. 진은 몇 걸음 물러서서 블루가 위험해 보이는 야생 맹수에게 엘 프의 긴 인사말을 하는 것을 눈을 껌벅이며 쳐다봤다. "치료해 드릴까요?...싫으세요?" 흑표범은 상냥하게 말해 오는 엘프의 얼굴을 은빛 눈으로 흘끗거리 더니 진과 와이즈와 릭을 어슬렁거리며 지나쳐 안쪽에 자리잡고 바 닥에 앉았다. '멋지다.' 와이즈는 호기심 실린 진의 눈빛에 코웃음을 쳤다. 진은 썰지 않은 구운 노루 고기 덩어리를, 담았던 자루에서 꺼내 들 고 표범에게 다가갔다. "이거 먹을래?" 흑표범은 진이 내민 고기 덩어리에 무심하게 눈을 주더니, 흥미와 호기심이 가득한 진의 남청색 눈에 둥근 은색 눈을 고정시켰다. 그리고... "우앗. 야! 엇. 블루. 이 녀석. 왜이래?!" 흑범은 흰 이를 드러내더니 갑자기 진의 숙인 목덜미로 달려들었다. 진은 피했다. 발목을 물려고 했다. 또 피했다. 꼬치에 끼워진 고기 덩이를 들고 있던 손목을 물어뜯으려 했다. 진은 다시 피했다. "그러게 얌전한 맹수를 뭐 하러 건드리냐?" "...악의는 없는 것 같은데요, 진. 릭페르님 검을 넣으세요. 긁어 부 스럼이에요." "그. 그래도 될까요?" 악의가 없다는 엘프의 말과, 공격임에 분명한 위협을 받고 있는데도 웬지 장난스럽다는 기분에 진은 표범의 날카로운 이빨 공격에 손을 척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 물렸다. "크르르르르...." "먹이를 주면 안 되는 거였나?" "그럴리가요, 진. 그도 진에게 호기심이 일었나 보네요." 정말 적의가 없었는지 물린 손목엔 상처가 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녀석은 놓지 않고 계속 물고늘어지고 있었고, 진은 난처해 졌다. [놓아라. 밀림의 잊혀진 종족. 왜 따라왔지?] 흑범은 물고 있던 가는 진의 손목을 놓았다. 그리고 와이즈를 향해 털을 세워 긴장하며 경계와 적의 어린 으르 렁거림을 보이기 시작했다. * "와이즈. 왜?" 와이즈는 좁은 동굴 안에 맹수의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울리자 릭페 르를 의식한 짧은 주문을 외더니 마법오라를 몇 개 만들어 표범에 게 던졌다. 피할 것을 예상했는지 연달아 사정거리일 길목이 되는 방향으로 던졌고, 흑표범은 서 있던 자리에서 밖으로 솟구쳐 올랐다 가 앞발에 보이지 않은 밧줄에 휘감겨 넘어졌다. 표적을 잃었던 마 법오라들은 방향을 바꿔 목표물을 향해 다시 날아갔다. "캬-아-악-" '와이즈. 용언 썼어? 겁먹었나 봐.' 와이즈는 대답하지 않고 한숨을 쉬더니 이끼를 피해 낮은 돌무더기 위에 걸터앉았다. "에...범을 잡으셨네요, 리툰 마법사님." "저. 원한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풀어주시는 게..." 진은 릭과 블루의 말에도 대답할 생각이 없어 보이는 와이즈에게서 눈을 떼고 온 몸이 꽁꽁 묶여 꿈틀거리며 으르렁거리고 있는 흑표 범에게 다가갔다. 소란스럽게 내리던 우박은 그치고 있었지만 해가 짧은 산 속이라 그새 어두워지고 있었다. "풀어 줄게. 공격 안 할거지? 네가 이해해라. 성격이 모난 친구라서 그래." "크르르르...." [진. 냅둬라. 이지를 가진 종족이니 구슬리지 않아도, 적어도 넌 공 격 안 할거다.] '이지를 가졌다고?' 진은 무슨 소린가 싶어 와이즈를 돌아보았고, 블루는 들고 있던 하 프를 떨어뜨렸다. 릭페르는 눈이 튀어나올 듯 놀라서 주먹으로 입을 가렸다. "블루, 릭. 왜 그래?" 엘프와 기사의 반응에 진은 어리둥절해서 다시 표범에게로 고개를 돌리려는데 옆쪽에 서 있던 릭이 잽싸게 진을 잡아끌어 눈을 가렸 다. "앗차차. 진. 보지 마세요." "왜? 왜 그러는데?" "콜록." 와이즈는 구속 마법을 거둬들였다. 헝크러진. 바닥에 끌리도록 긴 검은 머리카락을 쓸며 그는 일어났 다. 블루는 정신을 수습하고 팽개쳐 둔 릭페르의 배낭에서 품이 넉 넉한 평상복을 꺼내 그에게 건넸다. "옷을...잊혀진 종족이셨네요." "뭐야! 뭔데에? 릭. 눈 아파. 너무 세게 누르잖아." "죄송. 몇 분만 더 참아주세요, 진." 어두워진 동굴 안. 잡혀서 눈이 가려진 검푸른 머리의 여자인간과 남자인간과 엘프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드래곤에게-차가워 보 이는 은색 눈을 반짝이며 그는 피식 웃어 보였다. * 진은 분명 야생 맹수였던 그녀석이 인간형으로 변해 있는 것을 보 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푸른 윤기가 나도록 짙었던, 털 색과 같은 색의 긴 검은머리를 바닥 에 끌며 릭페르의 옷을 빌려 입고 서 있는 그는 갈라진 턱에 야성 적인 인상의 인간남자가 되어있었다. 귀가...시라소니 귀처럼 뾰족하고 끝에 가시 같은 털이 나 있었다. "...반인반범?" "잊혀진 종족이에요, 진. 인사를 다시..." "그럴 것 없다, 샤마을의 라하르네. 귀만 가렵지." "잊혀진 종족? 멸종직전이란 유사인종 중 하나인 거야?" "실례에요, 진." "아, 죄송합니다. 전 진이라고 해요." "잊혀진 종족이 아니라, 전설의 종족이라고 배웠습니다. 인사드립니 다. 전 릭페르 폰 훼이른이라고 합니다." "난 신족의 후예 낮과 밤의 종족. 마지막 자손 리퍼드 라고 한다." "신족..." 진은 인상을 쓰고 있는 와이즈를 돌아보았다. "좋겠다, 진. 소원했던 희귀 유사인종을 또 만나서." * 그들은 동굴 안에 야영 준비를 하고 끊겼던 저녁식사를 하고 있었 다. 동굴 안쪽에 있던 작은 산 짐승들은 블루의 배려로 밖으로 피해 나갔고, 낮엔 더운 편이었지만 산에 어둠이 깔리자 기온이 낮아지기 시작해서 블루는 불도 밝힐 겸. 릭페르가 날라 온 땔감을 태워 모닥 불을 피워두고 있었다. 진은 혼란스러웠다. 낮엔 범이고 밤엔 인간이라니. 그런 소재로 만 들어진 영화를 본적은 있지만. 그러면 그는 인간인 것인지 맹수인 것인지. "그만 쳐다봐라, 여자인간." "하하. 죄송. 너무 신기해서. 콜록. 죄송합니다." 반인반범 리퍼드는 따뜻한 것을 좋아하는지-고양이과라 그렇겠지- 모닥불에 바짝 붙어 느긋한 자세로 앉아, 저녁을 먹는 진과 일행 건 너편에서 흔들리는 불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함께 식사하지 않으시겠어요, 낮과 밤의 종족 리퍼드님?" "필요 없다, 샤 마을의 라하르네." "저흴 따라 온 이유가 있습니까, 리퍼드님?" 릭페르의 질문에 그는 고개를 들고 타닥거리는 불꽃 너머로 시선을 주었다. "여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레이디 진이요?" 진은 사냥을 따라 갔던 길에 느꼈던 시선이 그의 것이었나 하는 생 각을 하고 있다가, 자신 때문에 감시하고 있었다는 소리에 눈을 껌 벅이며 신기해 마지않은 반인반범을 쳐다보았다. "저. 숲의 주인이신데. 제가 숲에 해가 되는 거스린 일을 했나요?" 그만 먹을 생각인지 와이즈는 후식으로 먹던 과일을 던지듯 내려놓 았다. "여자니까 라고 하지 않았나. 배란기인 것 같은데. 아닌가?" "콜록." -이. 이놈의 세상에선 도대체 사적인 비밀이라고는 가질 수가 없나 보구나. 그런걸 그냥 안단 말이지? 진은 사레가 걸린 릭과 당황하는 블루와 우거지상을 하는 와이즈를 보며 턱을 만지작거렸다. "...번식을 인간과도 하나요?" "인간의 몸으론 인간과 하고 범으로는 범과 하지." "그럼. 태어나는 아이나 새끼는 모두 반인반범이 되나요?" "낮과 어둠의 종족은 같은 종족 사이에서 범으로만 태어난다." 릭페르는 아예 얼굴이 벌개 지도록 기침을 하고 있었다. 블루는 곤 란한 표정으로 자라기 시작하고 있는 오른쪽 귀를 만지작거렸고 와이즈는 실룩이며 진과 리퍼드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아까 마지막 자손이라고 했지요? 혼자 남았나요?" "...전 대륙을 돌아다녔지만 찾을 수 없었다. 네 말대로 멸종직전이 지." 멸종직전. 진은 그가 진실로 '천연기념물'임을 알았다. "이곳 투포겟 산맥은 '잊다' '잊혀진'이란 뜻의 이름을 가지고 있지 요. 오랫동안 타종족들에게 잊혀지고 접근이 되지 않았던 곳입니다. 원래 이곳이 낮과 어둠의 종족의 영토였나요, 낮과 밤의 종족 리퍼 드님?" "그렇다. 샤 마을의 라하르네. 동족의 기가 이곳에서 느껴져서 찾아 들었지만 발견하지 못했다. 옛 선조들의 자취가 남아 그렇게 느껴졌 는지도 모르겠다." 낮과 어둠의 종족은 반은 맹수인데 타종족이 묻는 말에 대답도 잘 해주고 예의가 바른 건가...? 아닌가...? 진은 와이즈에게 묻는 시선 을 던졌고 그는 마지못해 대답해주었다. [네가 있기 때문이라고 안 했냐. 공격적이고 배타적인 종족이다. 번 식시기라 비위 맞춰주고 있는 거다.] 진은 땀이 나는 기분이 들었다. "좀더 찾아봐라, 리퍼드. 동족의 기운을 느끼고 이곳으로 끌려왔다 면 정말 있을지도 모르지 않냐?" 소개 말도 블루가 대신 해주고, 내내 침묵하고 있던 와이즈가 예의 를 빼고 하는 건방진 투의 말에 모두 그의 얼굴로 시선을 모았다. "그리고 진은 네 아이를 낳는 일은 거절할거다." "인간 왕가의 핏줄이라서요, 마법사 와이즈님?" 피식 웃는 리퍼드의 말에 와이즈는 눈썹을 치켜 떴다. "저...리툰 마법사님?" "릭페르님. 전 그를 잡았으니까요. 우연찮게도 전 신의 유적지에서 나온 고문서를 본적이 있지요. 낮과 밤의 종족은 유사종족에게 다른 이름으로 불렸다는 기록이 있더군요. '수호자'라고 하지요. 수명이 정확히 정해져 있지 않고 개별적으로 개개인에 따라 몇 백년에서 몇 천년까지. 최고 삼 천년까지 삽니다. 짧게는 보통 맹수처럼 몇 년이나 몇 십 년을 살다 성년을 맞지 못해 인간형으로 변해 보지도 못하고 카르마로 돌아가는 경우도 있지요. 그리고 그들은 자신을 이 기거나 굴복시킨 상대에게 종속됩니다." "종속..." 500년을 넘게 산 엘프도 그들 종족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별로 없 었는지 호기심 어린 표정을 했다. 진은 릭페르가 '아, 그래서 혹시나 하고 포획하셨나?'하고 중얼거리는 것을 들으며 반인반범의 반응을 주시했다. "제 보호가 필요하십니까?" "내 명령을 듣는 것이 필요하다." "제가 주인님이라고 부르기엔 상황이 애매하다는 것을 아시나요, 마 법사 와이즈님?" 와이즈는 대답하지 않았다. 진은 눈을 껌벅대며 조금 얼이 빠져 듣 고 있는 자신이 멋쩍게 느껴져서 되물었다. "상황이 애매해요?" "포획된 것은 맞지만 내가 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맹수인 채였 을 테니까. 그럼 낮과 밤의 종족이 아니라 야생 동물의 입장을 고수 하는 것을 뜻하지. 난 그에게 잡힌 것 때문에 패배를 인정해 밤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네가 있었기 때문에 인간형이 된 거다." "그. 그것 참." "내게 먼저 손을 내민 것은 네가 아니냐?" 뭔 소리냐는 듯 반인반범을 쳐다보는 진에게 와이즈는 톡 쏘는 투 로 탓을 했다. "그러게 뭐 하러 야생동물에게 먹이 따위를 주냐, 진. 준다고 받아 먹으면 야생 동물이냐, 그게?" "그런가? 몰랐어. 내 탓이야? 먹진 않았잖아. 설마. 블루 귀를 잡았 던 것처럼 크나 큰 실수인 거야?" "진...블루님 귀는 언제 잡으셨는데요? 정말 말썽 일으키는데 일가견 이 있으시네요." 릭의 한숨 섞인 말에, 붉어졌다 부르퉁 해진 엘프의 얼굴에-정말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손들었다하는 표정의 와이즈에게, 피식거리 는 웃음을 짓는 리퍼드에게. 진은 진실로 땀이 솟는 기분이 되었다. "애매할 것 없잖아? 난 분명 흑표범에게 고기를 주었으니 흑표범과 친구가 되어야지. 이 나이에 애 낳으려고 남자 꼬신 것 일리가 없잖 아. 반인반범인지 알지도 못했는데. 내 탓만 하지 말아 줘. 그저 내 가 너무 착하고 동물을 사랑하기 때문에 생긴 일이야. 음. 그래. 그 러니 모두들 그런 눈으로 보지 좀 말아줘라." 리퍼드는,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기분으로 일행에게 변명을 하는 진 에게 고양이가 웃는 느낌의 오싹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긴 하겠지. 이미 애도 있는 판이니." "와이즈님. 출산을 한 적이 있다고요? 그럼 양보하기 힘들겠는데 요?" 진은 물론이거니와 릭과 블루도. 야생의 성 의식을 가지고 있는 듯 한 리퍼드의 말에 각자 비슷한 표정이 되어 그를 쳐다보았다. 와이즈는 진을 비꼬려다 말실수를 했다는 것을 알았다. "리퍼드님. 전 16세가 조금 못 되었지만 제 아들은 1000살이 넘는 물뱀이랍니다. 리퍼드님의 연세를 물어도 될까요?" "천 살이 넘는 물뱀? 그런 종족도 있나? 16세가 못된 인간이 어떻 게 천 살이 넘는 아들을 가지지?" "양자거든요. 아주 착한 아이지요." 시종 태연자약하고 무심해 보이던 리퍼드는 희한한 소릴 다 듣겠다 는 표정을 했다가 은색 눈을 반짝였다. "특이해 보이긴 했지만, 재미있기까지 한 여자인간이네. 빌려주시지 요, 와이즈님. 그럼 수호자가 되어드리지요." "캑." "무례합니다!" "저. 낮과 밤의 종족 리퍼드님. 진은 마법사님의 소유가 아닙니다." "그럼 누구 상대인데?" 진은 기분만이 아니라 정말 땀이 솟았다. 모닥불 열기일까? 황당함 때문일까. 동굴 벽에 어른거리는 그림자들이 유령처럼 보였다. '난 이 세계에선 시집가긴 이미 그른 것인지도 몰라.' [안됐다, 진. 좀 조신하지 그랬냐?] '끈질긴 종족이야, 와이즈?' [글세? 나도 인간형의 모습으로 직접 대면하는 것은 처음이다. 배타 적이라고 하지 않았냐. 타종족 앞에 잘 나타나지도 않고 정체를 드 러내는 것도 드물다.] '호오. 그럼 내게 고마워 해라, 와이즈.' [웃기네.] "나이를 물었었지? 난 1200살이 조금 넘었다." "에...제 아들보다 연장자시군요. 하지만 블루의 나이도 들었고 보아 의 나이도 아는데-와이즈의 나이도 아는데. 라고 속으로 덧붙였다.- 이젠 뭐 놀랍지도 않네요. 릭. 충격 받았나 봐?" 릭은 리퍼드의 나이를 가늠하고 이해하는 시간 때문에 진의 물음에 답할 타이밍을 놓치고, 밝은 갈색머리를 쓸어 넘기며 뭔가 생각하더 니 말을 꺼냈다. "리퍼드님. 그렇다면. 아직 리툰 마법사님께 완전히 종속되신 상태 는 아니시고...'수호자'를 얻는 과정에 자격이나 절차가 있습니까?" "왜? 날 꺾어보려고, 남자인간?" 간간이 미소짓던 리퍼드의 인상이 갑자기 훽. 바뀌었다. 내재된 힘이 느껴지는. 맹수의 먹이를 노리는 조용하고 깊이 있는 눈빛이 되어 그는 릭페르를 바로 쳐다보았다. 블루는 흠칫했다. 그는 맹수의 왕이었고...무자비한 전사였다. 동굴 근처 작은 벌레 소 리와 부엉이 울음소리가 일순 멈춰 침묵이 깔렸다. 반인반범. 낮과 밤의 종족은 드래곤처럼 유희를 했다. 아니, 그들 종 족의 삶은 자체가 유희일 수밖에 없었다. 낮엔 주로 범의 모습으로. 그리고 밤엔 인간의 모습으로(나이 들수록 조절이 가능했다.) 양면 의 생활을 영위했다. 집단생활을 하지 않아 어린 범(?)은 자신이 까 마득한 옛 종족의 후예임을 알지 못한 채 인간들에게 사냥 당하거 나 몬스터들에게 죽임 당하는 경우도 많았다. 무리 생활을 하지 않고 단독으로 밀림과 깊은 산 속에 숨어 조용히 사는 그들은, 순수 혈통이 될 유전자를 전하지 못해 같은 종족의 짝 을 만날 기회조차 몇 백년에 한 두 번 있을까 말까할 정도로 수가 줄어있었다. "릭페르님. 대무가 가능하지 않은 종족입니다." "적. 아니면 아군인가요?" "그렇다. 도전하겠느냐?" "......." 릭은 그의 기운을 뒤집어쓰고 경직되어있다, 와이즈의 충고에 정신 이 들어 갈등에 빠졌다. 우연의 일치일까? 훼이른가의 시조는 흑마법사의 던전에 위험을 무릅쓰고 들어가 훼 이르를 얻었었다. 2대 후계가 된 그에게도 기회가 왔다. 에고소드와 비교도 되지 않을. 과히 성체 드래곤과 맞먹는 힘을 가진 존재를 얻 을 기회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레이디 진...공주님이 지켜보고 있었다. "...도전하겠습니다." 진은 골치가 아파 왔다. * '와이즈. 저 반쪽 인간 좀 말려 봐. 릭이 이길 리 없잖아. 설마 저 반인반범이 보기와 다르게 엄청 약한 것은 아니겠지?' [그럴 리가 있겠냐? 너도 상대하기 벅찰 텐데?] '내가 1200살 먹은 범을 이길 확률이 몇 퍼센트나 되겠어?' '날 걷어찼던 일은 잊었냐, 계집애야?...얻어맞더니 철이 좀 들었나? 흥.' 블루와 함께 동굴 앞에 서서 진과 와이즈는 그들끼리 부지런히 커 뮤니케이션 중이었다. '네가 수호자 삼아. 그럼 되잖아.' [귀찮게 뭐 하러 꼬리를 달고 사냐?] '그럼 가만히 앉아 당하는 꼴 볼 거야? 릭도 일행이잖아.' [네 일행이지 내 일행 아니다. 보수 주는 것도 아니면서 부려먹을 생각만 하는 심보 좀 버려라. 엉?] '좀생이 기질은 바뀔 수 없는 특성인가 보군.' [죽. 을. 래?] 진은 쏘아보는 와이즈에게서 싹- 고개를 돌리고, 동굴 앞 나무가 드문 공간에 마주 서 있는 리퍼드와 릭에게로 눈길을 고쳐 잡았다. 잡초가 무성한 대지는 축축하게 젖어 덜 녹은 우박 알갱이와 함께 달빛이 반사되어 반짝이고 있었다. 릭은 긴장한 표정으로 마법검 훼이르를 빼들었고. 밤의 어둠보다 짙 은, 치렁치렁한 검은머리를 땋아 풀리지 않게 땋은 머리로 감아 묶 은 리퍼드는 왼손을 옆으로 약간 뻗어 뭔가 잡는 시늉을 했다. 그의 손에서 머리색처럼 검은 검 손잡이가 생겨났다. 그리고... "마나로 이뤄진 검이네요, 진. 말려야 하지 않을까요?" "어떻게? 릭은 기사잖아, 블루. 끼어 들 수 없잖아." 드래곤과 엘프와 인간을 관중으로, 기사와 낮과 어둠의 종족의 결투 가 달빛 아래 시작되었다. "둥-" 릭은 훼이르를 리퍼드의 어깨와 허리를 노리고 휘두르며 지쳐 들어 갔다. 백색 마나로 만들어진 검이 위험을 인식한 마법검의 실드와 부딪혀 특이한 파열음을 냈다... "고양이가 맞잖아. 쥐 가지고 놀 듯 가지고 놀고 있어." 리퍼드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분명 베어질 것 같은 훼이르의 실드에 힘을 싣지 않은 자신의 백색 검을 가져다 대어주고만 있었 다. 한 손으로 잡고 있던 검을 양손으로 고쳐 잡아들고 최선의 공격 을 펼치고 있는 릭의 도전은 먹혀들지 않고 있었다. "고양이과 이긴 하지. 비슷한 면이 있긴 하겠지." "지적 호기심으로 하는 말인데. 흠. 고양이과는 밀림의 왕이지. 파충 류과의 왕과 싸우면 어떻게 될까?" [죽. 을. 래. 에?!] "파이어 볼! 윈디-" 구경하던 진은 훼이르의 다른 능력을 보게 되었다. 검술로는 상대에게 타격을 주지 못하게 되자 릭은 몇 걸음 물러나 서 마법 시동어를 외쳤다. 마법검 검신의 무늬가 붉은 색으로 선명 해지더니 예전 투비와이즈가 날렸던 것과 같은-더 작긴 했지만-불 덩이가 검 주위에 생성되어 리퍼드에게 날아갔고 연이어 바람이 일 었다. 붉은 공 같은 불덩이는 바람의 도움으로 속도를 높여 리퍼드 의 코앞과 가슴팎으로 붉은 잔상을 남기며 날아갔다. 리퍼드는 땋은 머리를 출렁이며 백색 마나의 검으로 그것을 쳐내고 베어서 소멸시켰다. 훼이르의 공격은 쉽게 무산되었다. 그리고 리퍼 드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웃." 둥-두웅- 훼이르의 실드에 부딪혀 한 두 번 울리던 충격음은 곧 '파-악'하는 소리와 함께 끊기고, 냉정하고 흔들림 없는 그의 검은 가차없이 훼이르 검신과 릭의 목을 향해 휘둘러졌다. "뭐냐." "타임-!" 블루는 곁에 서 있던 진이 없어진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가 베어 진 것으로 짐작되었던 릭페르가 진에게 밀려 리퍼드의 공격 범위 밖으로 나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빠르군요, 마법사님. 전보다 더..." "......." 리퍼드는 겉옷 없이 흰 평상복차림으로 푸른 달빛을 받으며 서서 목표물이 사라져 깊게 패인 바닥을 내려다보다, 옆쪽으로 비껴나 있 는 진과 릭을 향해 으르렁거리는 느낌으로 말했다. "타임?" "낮과 밤의 종족님. 결투 중에 죄송합니다. 일행에게 할 이야기가 있어서요. 릭. 계속할거야?" "...상대가 되지 않는군요. 무덤 파는 일이 되겠지요?" "그만해. 수호자 얻어서 뭐에 쓰려고 그래?" "...도전했다 맘대로 물리겠다고? 날 우롱하는 거냐?" 진과 릭은 들리지 않는 야수의 포효를 들은 것처럼 귀가 멍멍해졌 다. 블루도 질린 얼굴로 귀를 막았다. "릭. 릭이 기사인 것은 알아. 하지만 난 동료고 친구니까 간섭하게 해 주겠어?" "...또 바꾸자고 하실 참이에요, 진?" "바꾼다기 보다는 바톤 체인지지." "바톤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고. 어쨌든 바꾸자는 말 아닌가요?" "어쨌든! 그냥 목 내 줄 거야?" 릭은 살벌한 살기를 뿜는 타종족의 기운에 사지가 굳는 기분에 빠 져 있었는데도, 진의 말에 꼬박꼬박 대꾸하고 있는 자신에게 칭찬이 라도 해주고 싶었다. "저쪽은 인간도 기사도 아닌 너무나 차이가 나는 상대인데 비겁할 것도 없게 느껴지네요, 진. 하지만 정신이 나갔습니까. 대신 죽어 주 시겠다고요?" "무슨! 내가 고양이에게 죽임 당할 인물로 보여, 릭?" 진은 릭의 손에서 훼이르를 빼앗아 와이즈와 블루 쪽으로 던지고 만약을 위해 결투 전 걸치고 나왔던 자신의 검을 검집에서 빼들었 다. "자. 덤벼보시지요. 반인반범에 풍습 차이로 예의가 부족해 보였던 덩치 큰 검은 고양이님. 난 고양이에게 악감정이 좀 있어설랑." "......." 투포겟 산맥 한 자락. 오랜 세월 그곳에 둥지를 틀고 자자손손 고향 삼아 온 토박이일 동식물들은 순간- 모조리 심장발작을 일으킬 것 같은 억센 정적에 경직되는 숨막히는 경험을 해야했다. 104 [14-2] 톰과 제리. '왜 이리 시끄럽담. 새파랗게 젊은것이 또 설치고 있나보네. 제 구역 인 줄 아나보지? 흥.' 그는 물을 싫어하는 편이었지만 지금은 괜찮았다. 뽀얀 수증기가 피 어오르는 따뜻한 물에 그는-아니 체형으로 확인 한 바 그녀는- 스 르륵 잔물결을 만들며 들어가 깊이 낮은 바닥의 돌에 걸터앉아 심 호흡을 했다. '아, 좋다. 온천물은 따뜻하고 나른해서 좋아.' 길고 긴 검은 머리카락이 뽀글거리는 기포에 실려 수면 위로 떠오 르다 가라앉고는 했다. 나긋나긋한 자태의 여인은 물에 젖어 얼굴을 가리는 머리카락을 뾰족한 귀 뒤로 넘기며 부드러운 손등으로 세면 을 했다. * "이 버릇없는 여자인간아. 안 내려와?!" "어라? 고양이는 나무를 잘 타지 않았었나? 너무 나이 들어 못 올 라오나 보군. 안됐네~ 고양이는 흔히 주제도 모르고 너무 높이 올라 가서 살려달라고 야옹거리기도 하지. 아니? 그건 새끼 고양이의 경 우인...우악." "이것이!!" "음하하. 또 피했지롱~ 잡아봐라~ 나 잡으면 용치. 암." 진은 리퍼드를 잔뜩 약을 올려가며 계속 피하고 도망 다니고 있었 다. 맨 처음 단 한번 검을 맞대었다가 있는 힘을 다 실어 내리쳤던 검이 백색 마나로 이루어졌던 리퍼드의 검에 깨끗이 잘리는 바람에 진은 단검이 된 검을 들고 부지런히 도망 다니고 있었다. 리퍼드는 진이 검에 맞지도 잡히지도 않자, 그녀에게 무기를 수거 당하고 서 있던 릭을 다시 공격했지만. 끼어 든 진이 다른 쪽으로 유인하고 몰아가는 통에 인간기사는 무사할 수 있었다. 동굴 주위는 반인반범이 흩뜨리는 살기와 위력적인 검상으로 초토 화되고 있었다. "아. 안 말려도 될까요, 마법사님?" "뭐 하러 말립니까. 잘도 피해 다니고 있는데." "에...참으로 황당한 밤이군요. 하하...흠. 죄송합니다. 블루님. 리툰 마법사님. 제 잘못입니다." 릭은 입을 뻐금대다 이젠 체념하겠다는 듯 초연한 표정이 되었고, 블루는 전투적인 낮과 밤의 종족이 쉬지 않고 뿜어대는 살기에 아 무래도 익숙해지지 않는지 지쳐 보였다. 와이즈는 처음엔 삐질거리며 웃다가 못 참고 박장대소를 했지만, 벌 써 두시간이 넘도록 진과 리퍼드의 쫓고 쫓기는 기괴한 결투 형태 에 머리를 싸매고 끙끙대고 싶은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다. "와이즈님. 수호자 되어 드린다니까요! 저 여자인간 주시지요!" "...돌겠네." 리퍼드는 진이 몸을 피하는 나무와 바위마다 검흔을 남기거나 베어 넘기고 부수며, 무차별로 검을 휘둘러 짙은 안개처럼 흰 잔상을 어 둔 대기에 현란한 추상화처럼 그리며 추적하고 있었다. "잡히기만 해봐라! 산채로 내장부터 꼭꼭 씹어 먹어주마. 이리 안 와?!" "식성까지 고양이였군! 고양이도 쥐 잡아서 머리는 제일 나중에 먹 더라!" "오냐. 네가 그 쥐였구나!" "넌 이렇게 이쁘고 큰 쥐 봤냐? 엉?" "봤다! 남대륙 밀림에 안 가본 모양이구나. 마계에도 너와 비슷하게 생긴 쥐가 살긴 하지. 대면시켜 줄 테니 이리 오시지!" "쥐 좋아하는 여자 봤냐, 고양이 아이큐야? 매너가 그 모양이니 짝 도 안 생기는 거야. 턱이 두 개나 되는 검은 고양아. 에비~" 어둠 속에 리퍼드의 왼손이 만들어내는 백색 잔상과 노기 띈 은색 야수의 눈빛이 유독 두드러졌다. "와이즈님!! 제게 달라니까요!" 와이즈는 얇은 여름용 평상복 위에 걸쳤던 마법사 복장을 탁탁 털 며 몇 마디 내 뱉고 훽. 몸을 돌려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진. 재밌나보구나. 밤새도록 술래잡기나 해라. 난 잘란다. 블루님도 릭페르님도 쉬시지요. 별일 없을 것 같으니 괜한 걱정하지 마시고 요." "하지만..." 하지만 결국 릭은 몇 십분 더 버티다 변화 없는 고양이 쥐 잡기 결 투에 하품을 하고 자기 위해 동굴 안으로 들어갔고, 엘프는 밤이슬 을 맞으며 풀 위에 앉아 동굴 주위를 계속 맴돌며 쫓고 쫓기는 리 퍼드와 진의 위태로워 보이는 결투의 마지막 참관인이 되어...꾸벅꾸 벅 졸았다. "끈질기기도 하네. 포기하시지?" "...미치겠군." 동굴 근처는 엉망이 되어 있었다. 마구잡이로 검을 휘두른 리퍼드 덕에 나무들이 들쭉날쭉 베어져 넘어져 있었고 그들은 그 억울하게 죽어간 나무 시체들을 밟고 마주보고 있었다. 리퍼드는 땋았던 머리가 모두 풀려 산발이 된 머리카락을 지치는 기분으로 쓸어 넘기며 긴 시간 유지해 쉬지 않고 휘둘렀던 탓에 팔 이 떨릴 정도였던 자신의 검을 회수했다. 그는 걸터앉기 좋게 베어 진 나무 밑둥에 엉덩이를 걸쳤다. 진도 거칠게 날뛰는 심장과 호흡을 다듬고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맞은편 베어진 나무의 단면에, 잠깐의 휴전을 겨우 붙잡아 후둘거리 는 다리를 쉬게 하기 위해 앉았다. "왜 안 잡히는 거지? 너 인간이 맞지?" "맞지." "늙어 죽을 때까지 쫓기고 싶냐? 그만 잡히지 그래?" "무슨~ 낮엔 진짜 고양이가 될 거면서." "그래. 나 고양이과다. 그래서? 내가 낮을 받아들이면 이 분통터진 일들을 잊을 것 같냐?" "낮엔 내 마법사 옆에서 잠이나 자지~ 와이즈가 누군지 알면서 겁 없이 덤비려고?" 낮과 밤의 종족 리퍼드는 1200생애 참으로 참으로 황당하고 어이없 는 일을 겪어...기가 막히기 이를 데 없었다. 그들의 도전의식은 신성한 것이었다. 유사인종 중 가장 긴 수명과 가능성을 가진(드래곤은 유사인종이 아니다.) 가장 강한 종족으로 그들 가계에서도 전설이 된 '수호자'란 이름은 인간들 사이에서의 '주군'을 의미했다. 신족의 후예인 그들의 '주인'이 될 자는 강하기만 해서도 안되고, 남다르다 해서도 안되며 어떤 면에 손꼽히는 재능을 가졌다해서 거저 주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에이션트 골드 드래곤이 고문서를 핑계대어 간단하게나마 그들에게 설명했던 것처럼 '이기는' 것으로 되는 것도 아니었고, 덧붙였던 '굴 복'의 의미로 '인정' 받아야 '주인'으로 섬기게 된다. 그리고 도전에 실패한자는 반드시 죽는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의식은 맹랑한 여자 인간 하나로 인해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다. "네가 그 드래곤의 여자라 해도, 유희 상대밖에 더 되냐? 싫증나면 신경 써주지 않을텐데 그땐 어떻게 도망 다니겠다고?" "유희 상대로 보일 수 밖에 없는 건가." "그의 여자가 아닌 거냐?" "젠장. 아니다. 와이즈는 친구야." "호오-" 진은 비웃음 실린 호기심의 표정으로 팔짱을 끼는 반인반범에게 똑 같이 마주 팔짱을 끼어 보였다. 그리고 등받이 없는 높은 의자에 앉 아있던 기분에서 비틀거리며 떨어질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그럼 내 아이를 낳지 그래?" "...장난하냐. 사양하네. 반쪽 인간. 내가 돌았냐? 지금도 머리 아파 죽겠구만 고양이의 프로포즈까지 받아야하나." "여자인간아. 그 고양이 소리는 그만하지 그러냐?" "종전하면 예를 갖춰주지. 난 싸울 땐 뵈는 게 없어지기도 하거든." "도망 다니는 게 싸우는 거냐?" "그럼? 36계만큼 효율적인 전투 방법이 어딨는데? 천연기념물이래 서 살의를 보이지 않고 있는 것도 구별 못하냐?" 새벽이 가까워지고 있을 하늘엔 달조차 없어 금방이라도 오후에 내 렸던 우박처럼 쏟아져 내릴 것 같은 별들이 은하수를 이루고 있었 다. 우박... 리퍼드는 왜 그 드문 구름의 결정체가 오늘. 종족의 자손을 남겨야 할 강박관념에 시달리던 근래 들어. 짝을 찾지 못해 욕구불만인 상태였던 수많은 오늘 중 여자인간을 발견해 대리하고자 염탐시도를 했던 몹시 드문 '오늘'에 그 우박이 내렸는지 의아해졌다. '신계가 작용했나? 그럴 리가.' 확실히 대단한 인간이긴 했다. 밤새도록 한 공격에 옷깃도 스치지 못했다. 인간이 아니라 같은 종 족이었다면 굳이 적대할 필요가 없었지만 그는 원한이 쌓일 데로 쌓여, 섬뜩한 야수의 눈빛으로 무모하기 짝이 없는 둥글둥글 말린 검푸른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인간을 주시했다. 리퍼드는 전혀 겁먹어 보이지 않고 마주 쏘아보고 있는, 어둠으로 검게 보이는 저 푸른 눈을 뽑아 수집품 목록에 넣고 싶은 생각이 무럭무럭 솟구치는 것을 참아내기가... '정말 성질 나네. 굴복하라 그건가? 망할! 4000살이 넘는 드래곤이 무슨 이유로 뭐가 아쉬워서 저 화딱지 나는 여자인간에게 붙어 있 는 거냐고!' "밤새도록 땀나게 만들지 않았다면 릭을 봐주는 선에서 타협하려고 했지. 하지만 노동의 대가라는 것도 있잖아. 내 수족이 되어 주어야 겠어?" "미쳤냐?" "내가 싫으면 와이즈는 어때? 드래곤의 수호자는 되고 싶어하는 것 같던데." "원하지도 않은데 뭐 하러? 상대가 상대이니 만큼 명분이야 있겠지 만 할 일도 주어지지 않을 허울뿐인 드래곤의 수호자가 뭐 하러 되 냐?" "그래~ 생각해 보니 나도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하는데 고양이 손까 지 빌릴 이유가 없지. 서로 좋게 타협해서 이쯤에서 각자 갈길 가는 게 어때?" 진은 단검이 된 검을 쥔 손의 땀 때문에 검을 놓칠 것 같았다. 난생 처음 가장 긴 시간 동안의 뜀박질과 잦은 '능력' 사용으로 자제가 되지 않는 심장 박동 수에 잔뜩 긴장해서 굳어있었다. 리퍼드는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기회를 노리는 것에 게으름 피우지 않고 있었다. 그녀가 시선을 고정시킨 채 검을 바꿔들고 옷에 손바 닥을 닦는 것을 보던 그는 인간의 귀에는 들리지 않을 '호출'을 했 다. "엇." 뒤쪽에서 뭔가 접근해 온다 싶은 순간이 지나자 진은 매처럼 생긴 새 몇 마리의 부리와 발톱 공격을 받았고, 신경이 흐트러졌다. "잡았...윽." 진은 두 팔이 잡혀서 앉아있던 자리에서 끌어 내려지다 그의 이마 에 있는 힘껏 박치기를 했다. 와이즈는 어수선하게 움직이던 진의 기척이 드디어 멈춘 것을 감지 하자 옆에서 잠들어 있던 릭과 밖에서 졸고 있는 엘프에게 확인 사 살(?)겸 수면마법을 걸어놓고 조용히 근처로 스며들어 그들의 대치 를 몰래 지켜보고 있다가...울화통이. 부아가. 말도 못하게 솟구쳤다. [야! 그만두지 못해!] [...겨우 잡았습니다. 당신 여자가 아니라던데요?] [내 여자다. 손 떼!] 진은 박치기 한번 한 후 여전히 팔이 잡힌 채 발등까지 밟혀 공격 이 차단되었고 리퍼드에게 베어져 뒹굴고 있던 나무들의 무성한 가 지로 털썩이며 넘어뜨려졌다. 입술을 물어뜯는 공격에 살점이 떨어지는 것을 감수하고 고개를 돌 렸더니 반인반범은 가슴 쪽으로 머리를 내리고 세운 이빨로 옷가지 를 찢어냈다. 진은 결박당해 내리누르던 힘이 갑자기 사라지고 살갗이 쓰린 기분 에서 벗어나자 겨우 정신이 수습되었다. "젠장. 당할 뻔했네." "꼴 좋다. 이 계집애야. 어지간히 좀 설쳐라!" 진은 숨을 몰아쉬고 놀라 더 빨라진 심장을 진정시켰다. 가슴이 거의 드러나서 앞섶을 추스르고 물어뜯긴 입술에서 나던 피 를 손등으로 훔쳐내며 일어났다. 교접 상대를 뺏겨(?) 더 열이 받은 리퍼드는 차갑게 굳은 표정으로 살기를 피우는 드래곤을 경계하며 서 있다 기습을 받았다. "빚은 갚아야지." 그는 턱과 복부에 강한 충격을 받고 밀려나 붕 뜨다- 쓰러져 있던 나뭇가지 사이에 발을 헛디뎌 넘어졌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다. 감히 고양이 따위가 덤비다니!" "....만물의 영장 좋아하시네. 내게도 한번 당해 볼래?" "알았어. 수정할게, 와이즈. 드래곤 빼고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닷!" 안면에 쏟아지는 잡아먹을 것처럼 노려보는 와이즈의 시선과 어둠 속에서 유난히 번뜩이는 은색 야수의 눈초리를 고스란히 받으며, 진 은 밝아오는 동쪽 하늘을 향해 엄숙하게. 턱을 긁적여 보였다. * 리퍼드는 해가 뜨자 표범으로 돌아갔고, 진은 릭페르의 옷을 입은 채 야생 흑표범으로 변해 있는 그에게 마구 비웃어 주며 덤벼드는 맹수와 한바탕 육탄전을 벌여 사로잡았다. 동굴 입구 주위에 널려 있던 가시넝쿨을 손이 심하게 찔리고 쓸리 는 것을 참고 끌어다, 앞발과 뒷발과 턱을 아주 겹겹이 꽁꽁 묶어 동굴 안으로 던져두고 잠을 잤다. "내가 돌지. 어느 누가 돌지 않으리오." 와이즈는 사나운 맹수가 묶인 넝쿨을 풀고 발광할 게 뻔해 구속 마 법을 써 주었더니, 크르릉거리는 흑표범을 베고 엉망이 된 꼴로 잠 을 자고 있는 진을 걷어차 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어이없는 기분 으로 중얼거렸다. [이 지겨운 가시넝쿨이나 치워주시지요.] [뭐 하러?] [꼴불견이니까요. 저도 누구 못지 않은 자존심 있습니다.] [내 계약 물이다. 해 끼칠 생각하다간 네 종족은 정말 멸종될 거다.] [네잇. 더는 상대도 하기 싫네요. 풀어나 주시지요.] 흑표범은 가시넝쿨 밧줄과 드래곤의 구속 마법에서 풀려나자 옆구 리를 베고 있는 진의 머리를 털어 냈지만, 진은 잠결에도 끈질기게 표범의 허리를 붙잡고 늘어졌다. [...정말 황당한 여자인간 아닙니까?] [신경 꺼라.] [후후...당신 여자라 하시더니 안지 못했나 보네요?] [안든 말든 내 맘이다. 제대로 당하고 싶으면 계속 건방 떨어라.] [인간인데 재생력이 왜 있지요?] [신경 끄라고 하지 않았냐?] 흑범은 침착하고 유연한 동작으로 인간들의 야영용 깔개 위에 앉아 다시 옆구리를 베어오는 진을 포기. 내지 무시했다. [전 이 여자인간에게 '굴복'하는 것은 인정 못하겠습니다.] [누가 하라든?] 그는 앞발 위에 턱을 올리고 햇빛이 들어오고 있는 동굴 안. 잠들어 있는 남자인간 앞의 돌무더기에 앉아 있는 골드 드래곤에게 은빛 맹수의 눈을 고정시켰다. [인간에게 종속되셨나요, 드래곤이여?] 드래곤 아이. 경고와 살의의 의미일 그 날카로운 위압감에 야생 맹 수는 답변에 대한 기대를 버리고 잠을 청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 와이즈는 잠든 그들을 노려보고 노려보다 한숨을 쉬고 신경을 너무 써서 피곤하다는 생각에 역시 자신의 잠자리에 누웠다. '한숨 자고 일어나서 확인을 해 봐야겠군.' * 모두가 늦잠을 잤다. 와이즈가 수면마법을 풀어주지 않아서 뒤늦게 졸고 있던 동굴 앞에 서 잠을 깬 블루는 해가 진 하늘을 확인하고 당황해서 기척이 느껴 지는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가 혼비백산했다. "기절할 것처럼 보인다, 샤 마을의 라하르네?" "떠. 떨어져 주십시오. 리퍼드님." "붙잡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다?" "진. 일어나세요. 진!...마법사님?" "야! 진. 안 일어나?!" 어딘가 다녀온 듯 블루 뒤쪽에 나타난 와이즈는 또다시 부아가. 울 화가. 열이 받아 소리쳤다. 릭도 겨우 잠이 깨어 동굴 안의 풍경이 눈에 들어오자 벌떡 일어났다. 피와 흙으로 더러워진 옷이 여기저기 심하게 찢어져 속살이 드러난 진은, 다시 밤을 받아들여 인간형이 된 리퍼드의 허리를 꼭 끌어안 고 쿨쿨 자고 있다가 소란스러운 소리에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렸 다. 자신이 맨몸의 반인반범의 허리를 붙들고 있는 것을 깨닫자 그 녀는 투덜거리며 팔을 풀었다. "모르고 한 일이야. 모르고. 계속 고양이로 있지 뭐 하러 또 변신했 냐, 너? 내 똘마니가 될 결심을 하셨어?" "여자인간아..." "타임. 타임! 알았어. 그만 둬. 난 더 자야겠어." "진. 옷을 갈아입으세요." 무뚝뚝하게 들리는 엘프의 목소리에 진은 손을 휘저어 보이고, 내내 표범을 베거나 안고 있다 놓게 되자 허전한 기분이 들어서 근처에 대충 손에 잡히는 짐 가방을 끌어다 부둥켜안고 다시 잠을.... "아얏! 와이즈. 발로 차냐?! 그렇지 않아도 삭신이 쑤시는 구만!" "더 맞을래. 일어날래?" "진. 종아리라도 때려주고 싶네요." "계곡으로 가서 씻으세요, 진." 진은 블루가 쥐어 준 새 옷을 들고 잠자리였던 동굴에서 쫓겨났다. * 여인은 용암의 빛으로 붉게 물들어 있는 좁은 공간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젠장 들켰나? 드래곤이 뭐 하러 이런 곳에 와 있는 거야! 그것도 에이션트 따위가. 망할." 그녀는 어깨 끈 없이 몸에 찰싹 달라붙은 광택 흐르는 검은 드레스 자락을 신경질적으로 잡아채어 반들반들 윤기 나는 바위 위에 육감 적인 다리를 꼬고 앉았다. "그 놈이 부탁이라도 했나? 쳇. 발정 난 수컷 같으니라고. 찾아내면 지가 어쩔 건데? 흥." 하지만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같은 종족 수컷의 기운을 알아채고 숨어 산지 벌써 6년이 넘었다. 끈질긴 그 수놈은 자신의 영역이었던 이 곳 투포겟 산맥에 아예 눌 러 앉을 궁리를 하고 있는 듯 했다. 아주. 곤란한 일이었다. 그녀가 피신해 있는 곳은 화산지대의 지하 공간으로 온천도 있고 비상식량으로 잡아다 저장해 두었던 산짐승 들이 몇 마리 있어서, 먹지 않아도 몇 년쯤은 살 수 있는 그녀로선 어렵지 않게 태양을 보지 않고도 지금껏 잘 버텨왔는데. 유난히 시끄럽게 굴던 어제 밤과 오늘 오전. 그 수컷의 으르렁거림 과 노여움의 기운 사이로 간혹 감지되었던 드래곤의 것으로 추측 된 기운에, 그녀는 드워프들을 쫓아내고 터를 잡았던 바위산 내부의 최대한 지하 깊숙이로 피해 있었다. 그러던 것이. 조금 전 자신을 찾는 것으로 파악 된 드래곤의 '부름' 을 들었다. 그것도 가깝게 혹은 멀리에서 여러 번 반복해서. "드래곤이 수하로 삼기라도 했나? 뭐 하러? 멍멍이 짝 지어 주려고 선심 쓰는 할 일 없는 드래곤인가? 쳇." 가만 앉아 있을 수 없게 되었다. 무시한다해도 그 끈질긴 수놈이 계 속 드래곤을 충동질한다면 얼마안가 자신을 찾아낼 것이고, 그러면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하여 그 거만하기 이를 데 없는 종족에게 된통 당할 수도 있는 일이었으니... 그녀는 기운과 기척을 최대한 억제시킬 방도로 낮을 받아들이고 피 신해 있던 지하에서 6년 만에 달이 떠 있는 밖으로 나갔다. 105 [14-3] 릴리스. 리퍼드는 다시 릭의 옷을 빌려 입고, 찢어 죽일까 말까 궁리하는 듯 한 가짜 인간 마법사의 냉정한 눈빛과 비난하는 남자인간의 눈빛과 억울하고 분하다는. 참으로 보기 힘들어 보이는 엘프의 눈빛을 무심 한 얼굴로 받아내고 있었다. "그렇게 아까울 거면 진작 안지 그러셨을까. 남자인간아. 엘프야. 와 이즈님?" "무례합니다!" "낮과 밤의 종족과 인간은 풍습이 다릅니다. 리퍼드님. 엘프는 더 다르고요." "남자인간아. 무례는 네가 했다. 도전에 실패해서 살아남은 것을 천 행으로 알고 입다물어라. 그리고 엘프야. 나도 유희를 했었다. 인간 들의 풍습이 다를 게 뭐가 있는데? 인간들은 겉만 번지르한 그 웃 기는 예의와 포장 빼면 금수보다 못하다. 엘프의 풍습이 다른 거야 인정하지. 좀 한심해 보였지만." 릭은 협박과 모욕을 받아 쌀쌀한 표정으로 입을 굳게 다물었지만 블루는 반박했다. "한심한 엘프의 풍습으로도 저흰 멸종 위기의 위험까지 이르지 않 고 가계를 잇고 있습니다, 리퍼드님. 상대를. 특히 이성의 의사를 존 중하지 않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낮과 밤의 종족의 종족유지가 위 태롭게 된 것은 단독 생활을 하며 배우자와 가족을 돌보지 않고 외 면한 처사가 이유일 수 있습니다. 보통 야생 범과 같은 이지를 가졌 다면 번성했겠지만 낮과 밤의 종족은 나이 들수록 발달한 이지를 가지지 않습니까." "그래서?" "감정을 가진 '여성'이라면 낮과 밤의 종족 남성분들의 성 의식은 거부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손들에게 교육이 되지 않았겠지요. 악순환이 계속 되었을 겁니다. 제 생각이 틀릴까요?" "틀리다. 낮과 밤의 종족의 여자들도 남자와 비슷한 성 의식을 가지 고 있다. 여자의 경우엔 더 나쁘다고 할 수 있다. 새끼를 베면 사나 워지고 낳아 기르는 일을 나누지 않고 독점하거나 새끼를 버리기도 한다." "타종족을 포함한 대상으로 설명하지 말고 네 종족 안의 일로 빼 먹지 말고 설명해라, 리퍼드. 게다가 타종족을 대상으로 한 번식은 '유희'일 뿐이지 않냐?" 와이즈의 비웃는 투의 말에 리퍼드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가 입을 막 열려는데, 와이즈는 벌떡 일어났다. '젠장.' "왜 그러세요, 리툰 마법사님?" "진에게 추적마법을 걸어 두었었습니다, 릭페르님. 멀리 가거나 위 험해 질 때를 대비해 기척 감지 마법까지요. 진이 드워프 광산 쪽으 로 빠르게 움직이고 있군요." "위. 위험한가요, 마법사님?" 와이즈는 놀란 블루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동굴을 나섰다. [야. 네 동족이 채가고 있으니 따라와.] [동족이요?] [찾으려고 안달이었던 네 동족 암놈 말이다.] [...여기에. 정말 있었다고요?] 진은 범에게 납치(?) 되었다. * "빌어먹을. 차가워 죽겠네. 블루도 남자였어. 암~ 엘프라고 다를 거 없지. 정령 불러주면 될 것 가지고 질투 나서 심술을 부린다 이거 지~ 속 좁은 남자들 같으니라고.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는 거야? 이 쁜 게 잘못이야? 좋다고 따라다니는 것은 자기들이면서. 드래곤이나 엘프나 인간이나 남자들은 어쩔 수 없어. 구제 불능이야~ 으으. 낮 엔 덥더구만 밤엔 왜 이렇게 추운 거야. 젠장. 시려워라...뼈마디가 쑤시는 구나." 진은 있는 힘껏 일행들을 흉보고 투덜거리면서, 달빛 아래 푸르스름 한 빛으로 더 춥게 느껴지는 차가운 계곡 물에 최대한 몸을 적게 담고 급하게 씻고 있었다. [온천으로 데려가 줄까, 여자인간아?] "...에?" 잽싸게 물에서 나온 진은 물기를 손으로 쓱쓱 훔쳐내고 옷을 입으 려다 경직되었다. 목욕하던 계곡 근처 큰 바위 위에 미처 눈치채지 못했던 노란 야수의 눈이 번뜩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어둠 속에 녹아 눈빛만 살아있는. 커다란 흑표범이었다. 리퍼드와 눈 색도 다르고 몸집도 더 큰 흑범이 웅크리고 앉아 자신 을 지켜보고 있었음을 깨닫자 진은 소름이 쫙 돋았다. "누...구세요?" [신족의 후예. 낮과 밤의 종족 릴리스다.] "여자 분이세요?" [그래.] "와. 반가워요. 전 진이라고 해요." [온천에 데려다 줄까?] "고맙지요~" * 진은 드워프들의 광산이었다는. 하지만 지금은 비어 있는 바위산 지 하 동굴에 있었다. 릴리스는 진을 등에 태우고 굉장한 속도로 달려 워프하는 것처럼 순식간에 자신의 보금자리로 데려왔다. 낮과 밤의 종족은 육체적인 능력이 뛰어나고 오감이 극도로 발달했 으며 숲의 짐승들을 수하로 부리고 생각으로 의사소통이 가능하며 마법은 쓰지 않았지만, 신족의 후예라는 이름에 맞게 마법을 쓰지 않아도 신성력과 비슷한 힘이 내재되어 있어서 마법에 대한 저항력 만이 아니라 목이 잘리거나 머리가 부셔지지 않는 한 웬만한 상처 는 저절로 낫고 잘 죽지도 않았다. 그들은 강했다. 나이 들수록 더욱. "호호호...너 정말 재미있구나. 그래서 그 놈을 베고 잤단 말이지?" "그러게요. 일어나 보니까. 그 파렴치한 놈이 알몸이 되어 있더라고 요. 내 꼴도 말이 아니어서 일행들이 씹어먹을 것처럼 노려보더니 쫓아내더군요." 릴리스는 진과 지하의 뜨거운 온천수에 몸을 담그고 진의 반인반범 수놈으로 인한 무용담을 들으며 깔깔대고 있었다. "음. 네 주인이 찾으러 오고 있구나. 드워프들의 광산이었던 곳이고 내가 함정을 좀 만들어놔서 길이 좀 험할 텐데. 네 일행 엘프와 남 자인간도 같이 오고 있으니 시간이 좀 걸리겠다." "와이즈는 제 주인이 아니라 친구에요, 릴리스. 그리고 걱정하지 않 으셔도 돼요. 릴리스에게 해 끼치지 않을 거 에요." "그의 유희 상대가 아니니?" 드래곤의 심심풀이 여자가 아니고 친구이며 우호적이라는 것을 설 명한 진은 릴리스의 되물음에 가슴께 까지 차 오른 뿌연 온천물 속 으로 미끄러져 물을 마셨다. "그럼 내 남자 해도 되지? 나 지금 번식기거든." "콜록. 릴리스. 음. 그 문제는 친구인 제 입장으로는 '허락'을 논할 자격이 없어요. 와이즈가 마음에 드시면 꼬시세요. 하지만. 마법으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드래곤과 밤을 받아들인 인간과의 사이에 서 태어나는 종족은. 뭐라고 해야...가능하긴 한가요?" "그럼. 왜 가능 안 하니? 인간이 태어나지. 드래곤의 폴리모프는 겉 모습만 그런 거 아니란다, 얘. 유희 중 인간과의 사이에서 태어나는 것은 완벽한 '인간'이지. 자손을 잘 남기지 않지만 말이다." "그. 그런가요? 드래곤이 인간의 모습으로 있더라도 정상적인 유전 자를 남기는 것은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용언이 보통 마법이래니? 반 창조 마법이란다, 진아." "하하. 반 신적 존재였네. 어쩌나. 내가 정말 간이 붓긴 부었었구 나." "또 무슨 일을 했었는데?" 진은 금빛 눈을 가진 완벽한 몸매의 긴 검은 생 머리를 한 몹시 아 름다운 반인반범과 물장구까지 치면서 신나게 수다를 나눴다. 진은 여행 에피소드와 일행 남자들의 흉을 예의 차리지 않고 여과 없이 나불거려 릴리스를 자지러지게 만들었다. * 바위산의 드워프들이 만들어 둔 광산 입구는 진이 감지되는 지하로 통하는 길이 아니었기 때문에 와이즈는 흑표범이 오간 흔적이 있는 곳을 찾으려 했지만 드나든 흔적이 거의 없어 시간이 지체되었다. 진에게 큰 위험이 닥친 것은 아닌 것 같았고 일행이 모두 함께 따 라 왔기 때문에 진의 기척을 따라 워프하는 문제는 보류해야했다. 엘프와 납치범과 같은 종족인 수놈과 머리를 맞대고 궁리하는데 아 이러니 하게도 입구를 찾아낸 것은 인간기사였다. "예? 간단한 것 아닌가요? 비밀 출입구를 꼭 집에 설치하란 법은 없지요. 보통 성을 지을 때도 밖으로 통하는 비밀통로 출구는 성과 떨어진 곳에 만들어 두거든요." 머쓱해진 인간 외 종족들은 바위 무더기가 시작되었던 곳으로 되돌 아가서 자연 생성된 것 같은, 잡초에 가려진 깊이가 낮아 보이는 땅 굴을 찾아 내려갔다. 바닥에 내려서니 한 명씩 겨우 비집고 들어 갈 만한 굴이 바위산 쪽 방향의 벽에 구멍이 나 있었고 그곳을 통과하 자 본격적인 던전이 시작되었다. 낮은 천장에 질퍽거리는 물이 고여있는 곳에 이르자 릭만 빼고 모 두 그곳에 있는 수분이 독 액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릭은 샌들 신은 발로 물을 밟을 뻔하다 블루에게 잡혀 뒤로 끌어당겨졌다. "어. 블루님. 보기보다 완력이 있으셨네요." "릭페르님. 저 엘프에요." 머리를 긁적이는 릭을 블루가 실드로 보호해 강한 산성 성분의 독 을 피해 조심스럽게 날아가고 와이즈도 뒤따랐고 리퍼드는 뒤로 물 러서서 천장에 닿지 않게 일직선으로 도약했다. 다음은 아무것도 없는 평범한 땅굴 안 공간이었는데, 만들었던 마법 등의 밝기가 흐려지는 것 같아 새로 하나 만들어 더 환해진 주위를 둘러보다 블루는 기겁을 했다. 릭이 미향을 마셨는지 자신에게 매달려 왔기 때문이다. "릭페르님. 정신 차리세요. 저 여자 아니에요. 더듬지 마세요!" "빠져나가지요, 블루님. 숨쉬지 마라, 리퍼...저리 안가?!" 몇 대 맞고 정신을 차린 그들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아니 리퍼드는 화를 가장한 기대 어린 소리를 질렀다. "숨바꼭질을 하자는 건가? 날 겨냥하고 풀어놓은 미향이었어! 왜 숨어 있는 거지? 빨리 갑시다." 그리고 바쁘게 서두르며 뛰어가던 리퍼드는 함정에 떨어졌다. "윽. 젠장. 범 꼬치가 될 뻔했네." "정말...야수시네요, 리퍼드님." 이름 모를 몬스터들의 날카롭고 거대한 이빨들이 바닥에 빽빽이 세 워진 곳에서 기어 나오며 투덜거리는 리퍼드에게 블루는 야유했다. 그리고 그 후 살인 개미 집단을 만나 블루와 와이즈는 파이어 마법 을 써서 청소를 해야했고, 거대 지렁이들이 땅과 천장과 벽에서 튀 어나오는 것을 조급한 마음의 리퍼드의 검이 모조리 아작을 내고, 발을 딛자 갑자기 멀쩡하던 천장이 무너져서 흙투성이가 되고, 릭은 기름을 뿌려 놓은 곳에 발을 잘못 딛어 뒤통수가 깨지고. '아~ 외로워라~' 하고 쓰인 벽의 글씨를 들여다보던 리퍼드는 몇 십 년은 묵은 듯한 썩은 물을 뒤집어쓰고.... "내 살다살다 이렇게 유치한 던전은 처음 본다. 모두 널 노리거나 약 올리려고 만들어 둔 것 같은데?" "후후후...끌어 오르는군요. 어떤 여자인지 반드시 확인 해 줘야겠습 니다, 와이즈님." 가장 많이 당한 리퍼드는 '인내해야 여자를 얻는다. 자손을 남겨야 할 막중한 사명이 있다.' 어쩌고 하는 중얼거림을 음산하게 내뱉으 며, 드디어 어둡고 좁고 축축하고 유황냄새가 나는 굴의 끝에 섰다. 문이 있었다. 커다란 가위 모양의 무늬가 새겨진 문이. 그리고 손잡이 없는 무기 그림의 문 표면엔 이렇게 쓰여있었다. <수컷에게 하는 경고 : 들어 왔다간 거기가 잘릴 걸?> 모두 얼어붙어 지상과 한참 떨어진 지하. 용암이 가까운지 뜨겁기까 지 한 그곳에서 눈발을 맞는 기분 속에 침묵했다. 그리고 열이 오를 데로 오른 리퍼드는 자신의 독오른 검을 문을 향 해 파격적으로 내리쳤다. "꽝-!" "하하하하. 아이고 배야. 하하하. 아. 내 1500년 생애. 하하하. 이렇 게 웃어보긴. 하하하. 처음이네. 하하하..." "여-어. 와이즈. 블루. 릭. 강간미수범 리퍼드. 엉큼하게 여탕엔 뭐 하러 들어와? 안 나가?" "........" 우루루 들어갔던 그들은 동굴 안 뽀얀 수증기 사이로, 육감적인 몸 매거나 날씬하다 못해 마른 듯한 몸매의 검은머리의 미녀들이 느긋 하게 온천욕을 하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오자. 붉어진 얼굴로 급히, 혹은 홍당무가 된 얼굴로 풀이 죽어 기운 없이, 또는 머리를 싸매고 체념한다는 듯. 돌아나갔다. 한 놈은 빼고. "하하하. 아. 재미있다. 너 뭐냐? 안 나가?!" "죄. 죄송합니다. 실례했습니다." 리퍼드는 더듬거리며 사과하고 뒤돌아 따라나갔다. '젠장. 한참 연장자잖아! 운이 좋은 거야. 나쁜 거야?!' * 마법등을 여러 개 띄워 환해진 그곳은 바위로 이뤄진 골방 같은 곳 이었다. 와이즈와 블루와 릭과 리퍼드는 매혹적인 검은 드레스를 입 은 반인반범과, 파란색 여름 용 여행 복을 입고 그녀에게 찰싹 달라 붙어 아양떠는 고양이처럼 보이는 진을 코앞에 두고 나란히 앉아있 었다. "왜 이렇게 불편한 곳에..." "몰라서 묻냐? 네 꼴 보기 싫어서 숨어 있었다." 진은 멀뚱한 표정의 블루와 손을 소매 속에 넣고 있는 와이즈와 절 세미인을 눈앞에 두고 넋이 빠져 보이는 릭에게 씨-익 웃어주었다. "...제가 당신 영역이었던 곳을 침범해 화가 나신 건가요?" "머리가 나쁘구나. 숫내를 펄펄 풍기고 암컷을 찾는 꼬락서니가 꼴 불견이어서 그랬다, 왜?" "말씀이 심하시지 않습니까? 전 성년 이후 지금껏 우리 종족의 짝 을 얻지 못했습니다. 몇 명인가 여자를 만난 적은 있지만 모두 강한 짝이 있었지요. 그리고 그들도 다시 만날 수 없었습니다." "다 죽었을 테니 만날 수 없었겠지. 다른 가정사까지 내가 신경 써 서 설명해 줄 이유가 없다. 얼굴 확인했으니 이제 떠나지 그러냐? 아니면 날 상대로 짝짓기 도전이라도 할 테냐?" 리퍼드는 보는 이가 있든 없든 맞장이라도 뜨고 싶은 기분이었으나 상대가 되지 않을 듯한-어미 뻘이었으니-그녀의 연륜에 한숨이 절 로 나왔다. "릴리스. 짝짓기에도 '도전'이 있어요?" "있지. 수놈들은 마음에 드는 암놈이 있으면 결투 핑계 대고 짐승처 럼 싸운단다, 진아. 짝 없이 혼자인 암놈의 경우엔 암놈이 싫다고 하면 힘으로 제압하지. 새끼를 베면 다른 암놈을 찾아 떠났다가 어 슬렁거리며 다시 돌아오곤 한단다." "여자도 강한 남자를 차지하려고 싸우는 것은 마찬가지 아닌가요? 그리고 임신 기간에 여자가 너무 날카롭기 때문에 같이 있을 수 없 는 것 아닌가요?" "그럼. 비실거리는 애 낳으려고 비실거리는 남자에게 몰리겠느냐? 임신 중에 날카로운 것은 당연하지. 배속에 새끼를 넣고 있어보지 못한 남자들이 그 기분을 어떻게 아냐? 그리고 낳은 자식이 아들이 면 죽임 당할지 모르는데 온화하겠느냐? 새끼를 낳아 본적이 없어 서 모르나 보지? 애송이 같으니라고." "아버지가 아들을 죽...인다고요, 낮과 밤의 종족 릴리스님?" 릴리스는 우아한 동작으로 고양이에게 하듯 곁에 앉혀 둔 진의 머 리를 쓰다듬으며 점점 굳어 가는 얼굴의 리퍼드에게서 눈을 떼고 릭을 향해 대답했다. "남자인간아. 우리 종족은 반은 야수이다. 야생의 법칙을 따르는 면 이 강하다." "그래서 당신은 짝짓기를 싫어하시는 건가요?" "싫어 안 한다. 종족의 너 같은 수놈들이 싫은 거지. 짝짓기를 왜 싫어하니? 바보 같은 놈아." 마법등의 빛으로 동굴 벽에 키 낮은 그림자들이 딱딱하게 굳어 있 는 것을 보며 진은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타종족의 일이라 간섭할 수 없다는 생각인지 블루는 아무 말하지 않고 듣고만 있었고, 릭은 아름다운 여인의 자태의 매혹에서 벗어났 는지 호기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주시하고 있었고, 와이즈는 눈썹을 찌푸리고 진과 릴리스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리퍼드는 대륙에 유일할지 모를 동족 이성을. 얄밉고 괘씸하기 짝이 없는 여자인간에게-혼쭐을 내 주려다 드래곤 때문에 놓친 쥐 한 마 리에게- 독점 당하고 있다는, 혹은 방해공작을 받고 있다는 울화와 욕구불만이 쌓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짝짓기를 싫어하시는 것이 아니라면 절 받아주시지요. 우리 종족이 멸종 직전이라는 것은 당신도 아시지 않습니까?" "멸종하고 나하고 무슨 상관인데?" "...종족 보존을 반대하십니까?" "반대한다." 리퍼드는 비위 맞추는 일을 포기했다. 그는 누르고 있던 살기를 은빛 눈에 담아 릴리스를 쏘아보았다. 그녀는 진을 쓰다듬던 왼손을 등뒤로 내리더니 리퍼드가 만들었던 것과 비슷한 검 손잡이를 만들어내 그의 것보다 더 길고 큰 백색 마나의 검으로, 두 세 걸음 앞의 바위에 앉아있던 리퍼드를 향해 기 습적으로 내리쳤다. "쾅-!" 리퍼드는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부서진 바위를 내려다 볼 겨를도 없이 다시 공격해 오는 릴리스의 검에 대항하기 위해 그도 검을 만들었다. 진과 일행들은 벽 쪽으로 물러서 바짝 붙었다. 좁아 터진 동굴 안에서 낮과 밤의 종족 짝짓기 도전이 시작되었고....릴리스가 이겼다. "오호호호...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이 간뎅이가 부어도 한참 부었구 나. 네가 갸르릉갸르릉(응애응애)하고 있을 때 난 이미 첫 새끼를 기르고 있었다, 이 놈아. 누구에게 감히 덤비느냐?!" "윽." 릴리스는 리퍼드의 두 손목을 뒤로 돌려 잡고 일어나지 못하게 발 로 머리를 밟고 지근지근 누르고 있었다. "릴리스. 죽이지는 마세요. 천연기념물이니." 진의 웃음기까지 실린 연극조의 과장스럽게 들리는 말에 릭은 땅바 닥으로 와이즈는 천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진은 착하기까지 하구나. 하지만 '도전' 명목의 결투에선 죽이든 살 리든 이긴 자 마음이란다. 수호자가 거론 된 도전이 아니니 반드시 죽일 필요는 없지만 말이다." "저. 낮과 밤의 종족 릴리스님. 그. 그만 하세요. 정말 죽겠어요." "샤 마을의 라하르네. 진을 선택했니?" "네? 네." "진아. 내가 충고하마. 대륙의 모든 종족을 통틀어 가장 괜찮은 배 우자는 엘프가 게 중 젤 낫단다." "아. 저. 고. 고맙습..." "푸-웃-" 진은 릴리스에게 잡혀서 뒷머리가 밟혀 바닥에 이마와 코를 찧고 있는 리퍼드와 중매(?) 서는 반인반범의 말에 얼굴이 붉어지는 블 루와 얼빠진 표정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릭과 차가운 시선이 릴리스에게로 옮겨지고 있는 와이즈를 보고...웃음이 치미는 것을 힘 들게 틀어막아야 했다. "하지만. 당신도 번식기지 않습니까! 짝짓기를 거절 할 수 없을 텐 데요?" "그~래. 해야지. 거부할 수 없는 자연의 법칙. 순리 아니더냐? 그래 서 네게 고맙다고 할 참이었다. 아니? 귀여운 진에게 고마워해야지. 고맙다, 진아." "그럼..." "여기 남자가 너뿐이냐, 바보 같은 놈아?" 릴리스는 리퍼드의 머리를 꾹꾹 밟고 있던 발을 떼고 붉은 손자국 이 난 그의 손목을 훽 놓더니, 벽 쪽에 붙어 서서 옷소매에 손을 엇 갈려 넣고 서 있던 와이즈의 목에 팔을 감고 착. 안겨들었다. "멋진 인간 마법사님. 저보다도 아름다우신 것 같네요. 질투 나요~ 하지만 저도 괜찮은 편 아닌가요? 진에게 양보 받았어요. 아이를 낳 게 해 주실래요? 잘 키울게요. 이왕이면 진 같이 귀여운 딸을 낳게 해 주세요." "......." 진은 좁은 동굴 안 경직된 풍경들에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려고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야했다. * '빌어먹을 계집애. 망할 계집애. 백치 같은 계집애...' 와이즈는 속으로 있는 힘껏 진의 욕을 하고 있었다. 릴리스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육탄공세를 퍼붓더니 용언으로 협박 을 좀 해주니까 지금은 얌전해져서 잠든 진의 무릎베개를 해주고 있었다. 동굴 안은 덥고 너무 좁아서 야영지였던 동굴로 자리를 옮 겼다. 릭과 블루는 서성이는 분위기로 한편에 앉아있었고 와이즈도 그들 근처에 앉아, 낮과 밤의 종족 수놈이 암놈에게 하는 애원에 가까운 프로포즈 장면을 구경 중이었다. "누님. 아름다운 릴리스. 제발 받아주세요. 난 마지막 자손일지도 모 른단 말입니다. 이대로 손이 끊길 순 없지 않나요." "아. 참. 귀 가려워 죽겠네. 싫다니까! 넌 도전에도 졌잖아. 그냥 깨 끗이 죽여주랴?" "릴리스 누님. 누님도 짝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유희로는 임시방편 밖에 되지 않잖아요. 제 아이를 낳아 주세요." "시끄럽다. 난 네 놈을 피해 있느라 6년 동안 제대로 된 식사도 하 지 못했어. 내가 뭐가 아쉬워서 네 새끼를 낳아주고 있냐? 나아봐야 갖다 버리지 않으면 성년이 될 때까지 백년은 넘게 나 혼자 키워야 할 걸. 그 고생을 뭐 하러 또 해?!" "식사를 하지 않으셨어요? 사냥을 해 오겠습니다. 그리고 육아는 제 가 맡을 테니 혼자 고생하지 않아도..." 릴리스는 코웃음을 치며 비웃었다. "웃기고 있네. 애든 새끼든 키워 봤냐? 앙? 택도 없는 소리하고 있 네." "릴리스. 배고파요." 아무래도 시끄러워서 잠을 잘 수 없었는지 진은 머리를 긁적이고 일어나 하품을 하며 진실로 고양이처럼 말했고, 릴리스는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오. 진아. 배고프니? 야. 너 뭐 해? 사냥해 온다며? 멧돼지나 들소 로 잡아와라." "...네에." 원수 같은 여자인간을 노려보며 대답했지만 리퍼드는 릴리스의 명 에 잽싸게 동굴 밖으로 나갔다. 와이즈는 웃음을 참는 엘프와 인간 기사처럼 그도 웃고 싶었지만 한숨만 나왔다. '저건 질투할지도 모르냐? 먹혀들 것 같아야 시도를 해 보지. 젠장.' "와이즈님~ 다시 생각해 보시는 게 어떨까요. 마법사님처럼 아름답 고 건강한 아이를 낳고 싶어요. 네에~?" "미안합니다, 낮과 밤의 종족 릴리스님. 종족이 다르고 이 나이에(?) 애 아빠가 되고 싶지는 않으니 사양하겠습니다." 진은 삐질 삐질 웃음을 참으며 리퍼드가 나가자 다시 시작 된 릴리 스의 나긋나긋한 청을 거절하는 와이즈를 외면하고 있었다. 나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리퍼드는 릴리스의 말대로 들소 한 마리 와 살 오른 멧돼지 두 마리를 턱. 잡아와 동굴 밖에서 굽기 시작했 고, 그들은 모두 동굴 입구에 앉아 진과 리퍼드의 전투(?)의 흔적이 어지럽게 남아있는 을씨년스러운 야영지에서 반인반범 리퍼드가 달 빛 받아가며 뇌물로 바비큐 요리를 하는 것을 턱을 괴고 구경했다. 리퍼드가 맛있는 부위를 죄다 가져다 날라 오자 진은 릴리스가 먹 기 좋게 잘라주는 소고기와 돼지고기를 받아먹으며 멋쩍어 하는 일 행과 함께 자정을 넘긴 늦은 시각. 저녁 식사를 했다. 릴리스도 오랫동안 먹지 못해 배가 고팠는지 우아한 동작으로 엄청 나게 많이 먹었고, 식욕을 잃었던 것이 거짓말인 듯 진도 양껏 먹어 댔다. 블루는 두 명의 여자가 먹어치우는 고기 양에 얼굴이 조금 핼 쓱해졌다. "잘 먹는구나, 진아. 왜 이렇게 귀엽니? 그냥 내 딸 삼을까?" "릴리스. 릴리스는 너무 아름답고 젊어 보이는데 딸이라고 하면 누 가 믿겠어요? 언니가 어떨까요. 전 언니라고 불러 본 사람이 없어 요." "좋지~ 언니라고 불러라, 진아. 아유. 이쁜 것." 방긋 방긋 웃으며 볼에 뽀뽀까지 받는 진을 차가운 은색 눈으로 노 려보던 리퍼드는 다음에 이어지는 대화 때문에 눈을 껌벅여야했다. "릴리스 언니. 가계를 잇고 싶어하지 않는 특별한 이유가 있으세 요?" "응?" "아이를 낳고 싶어하잖아요. 하지만 같은 종족의 아이를 낳는 일은 두려워하는 것 같아서요. 실례된 질문이에요?" 릴리스는 정중한 태도로 맞은편에서 고기를 썰어 바쳐주던 리퍼드 에게 그만 먹겠다는 손짓을 하고, 기름투성이의 손을 블루가 건네 준 냅킨(그냥 천임.)에 우아하게 닦아내며 말했다. "여자인간들의 이야기를 들었던 것처럼 내 이야기도 듣고 싶니, 진 아?" "하기 싫으면 하지 마세요, 릴리스 언니." 릴리스는 달이 사라진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곧 해가 뜰 것이다. 6년 만에 보는 태양이리라. 그 6년 전에도 그녀는 해를 똑바로 보지 못하였으니 6년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몇 백년...너무나 오랫동안. 가슴 깊이 상처가 되어 흉터가 되어 남 아있던 죄스러움과 후회 가득했던 자신의 시간. 릴리스는 눈이 따가워지는 것을 느끼며 곁에 앉혀 둔 여자인간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진아. 난 죄를 지었다." "누구나 죄를 지어요, 릴리스 언니." "내 죄는 '원죄'에 속한다. 카르마로 돌아가면 난 금수보다 못한 존 재로 태어나게 될지 모른다. 아니, 태어나지 못하고 마계에 떨어질 지도 모르지." "죄 값은 누구나 치러요, 릴리스 언니. 어떤 형태로든. 그동안 충분 히 괴로워했고 잘못을 안다면 고칠 수 있는 기회도 있잖아요." "내 죄가 무엇인지 아는 것 같구나." 진은 그녀의 이름이 '릴리스'임을 상기했다. 성경 첫 부분에서 지워지고 왜곡 된 이름. 태초 최초의 남자였던 '아담'의 첫 번째 아내의 이름. 배우자와 친딸 이브에게 배신당하고 남편과 아이들을 버리고 사탄 의 네 번째 아내가 되었던 그녀 '릴리스'. 낮과 밤의 종족의 풍습과 성문화를 보고 듣고 겪은 바 추측컨대, 분명 그녀는 남편과 아이들에게서 '배신' 당했었으리라. 진은 아름다운 금색 눈의, 가시처럼 끝이 뾰족한 시라소니 귀를 가 진 타종족의 얼굴에서 자신의 짐작이 맞다는 슬픈 긍정의 빛을 보 았다. 릴리스는 무심하게 들리는 어조로 말을 꺼냈다. "난 아이들을 위해 사냥을 나갔던 며칠사이. 성년을 갓 넘겨 철없어 욕구를 참지 못한 첫딸의 유혹을 거절하지 못하고 날 배신한 남편 과, 남편의 새끼를 밴 친딸과, 그 후 짝을 찾지 못해 내게 짝짓기 도전을 했던 내 아들들을 내 손으로 죽였다, 진아." 진은 엘프가 하얗게 질리는 것을. 눈을 찌푸리는 와이즈와 잘못 들 었겠지 하는 얼굴의 릭과 혼란스런 표정의 리퍼드를 의식했다. 릴리스는 냉정한 얼굴로. 숨긴 고통과 회한의 그림자로 가득한 목소 리로 덧붙였다. "낮과 밤의 종족의 가장 오래되고 가장 추악하며 가장 긴 시간 되 풀이되고 있던 '원죄'이지. 낮과 밤의 종족은 멸종해야한다." 야영지에 무겁게 내려앉은 침묵을 깨고 진은 입을 열었다. "릴리스 언니. 인간도 그래요. 저도 같은 죄를 지은 남자와 여자의 후손이에요. 하지만 인간은 번성했어요. 아마도 최초의 여자인간 릴 리스가 남편과 딸을 죽이는 대신 그들을 저주하고 반대하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면 인간도 애초에 지금과 다른 방향으로 번영했을지 도 모르지요." "그래. 인간도 태초엔 금수나 다름없었지. 지금도 크게 달라진 것 같지 않지만. 하지만 인간의 경우엔 여자는 약했다. 약자는 힘을 행 사하지 못하니 남자인간에게 굴복하고 종속되는 길 밖에 없었을 것 이다. 우리 종족의 여자가 여자인간처럼 약했거나 야생 범들처럼 본 능만을 가지고 감정을 가지지 못했다면 차라리 어떤 종족보다 번성 했을 것이다. 하지만 창조신께서는 우리에게 감성과 지능과 남녀에 게 비슷한 힘까지 나눠주셨다. 그래서 맥이 끊긴 것이다, 진아." 진은 딱딱하게 굳은 그녀의 몸짓과 얼굴에서. 그녀의 금빛 눈에서 절망을 보았다. 1500년의 세월이 어떤 것이었을까. 만들어지길 그렇게 만들어진 종족이었다. 인간도 다를 바 없고 인간 은 더 모순된 종족이다. 어느 한쪽이 굽히지 않았다면 인간 역시 멸 종 위기에 직면했을지도. 진은 까마득한 세월을 산 도움이 절실한 타종족 여인을 끌어안았다. "릴리스. 괜찮아요. 우세요. 약한 것은 때로 가장 강한 것입니다. 부 끄러운 것이 아니에요. 친 아이들을 제 손에 잃고 오랫동안 얼마나 가슴아팠나요. 강한 것은 당연한 것으로 치부되지만 약한 것은 위로 받아요. 위로 받아도 됩니다." 릴리스는 자신의 배로 난 자식들이 어미에게 당해 죽어가던 눈빛이 생생히 떠올랐다. 이 작은 여자인간은 자신을 찾아내었다. 천륜을 어긴 종족의 죄. 자신의 죄를 물었다. 그리고 신을 대리해 용서를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핏덩이로 보일 타종족 여자인간의 위로로 그녀의 품에서 너 무나 오랫동안. 너무나 오랫동안 누르고 참았던 울음을...울었다. 지켜보던 이들은 누구도, 어떤 소리도 내지 못했다. 별이 가득한 하늘에는 새벽이 움트고 있었다. * 릴리스는 잠이 들었다. 진은 반대의 입장이 되어 무릎을 베고 자는 그녀를 다독이는 것을 멈추고, 환한 햇살이 들어와 밝아진 동굴 안 에 여전히 감돌고 있는 정적을 깼다. "장가보내 줄게, 리퍼드. 수호자 되지 그래?" "...여자인간아..." "농담이다. 구별도 못하냐?" 리퍼드는 머리를 싸맸다. 릭은 한숨을 쉬었고 블루는 굳었던 얼굴 근육을 풀기 위해 눈과 볼을 비볐다. 와이즈는 소매에 넣고 있던 손 을 빼지 않고 동굴 밖 넘어져 뒹구는 나무들을 내다보았다. "이미 자존심도 모두 버린 것으로 보이는데 그녀가 원하는 배우자 상과 아버지상이 되어 주지 그래, 리퍼드? 그럼 간단할 거 아니야?" "반대의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여자인간아." "그래. 누가 뭐래? 그게 문제가 되었었으니. 자신과 앞으로 낳을 아 이들만큼은 교육시켜야하지 않아? 아이와 짝을 돌보지 않는 아버지 와 남편은 수놈일 뿐이지. 그녀에게 배워. 방법은 그녀가 알 테니 까." "...인간들의 '포장'과 '예의'를 배우라고?" "그래. 눈 가리고 아웅식이라도 없는 것보단 나으니까. 후손을 남기 지 못해 멸종하느니 서로 조금씩 양보하는 게 좋잖아." 리퍼드는 한숨을 쉬었다. 그들은 반은 인간이고 반은 범이었다. 릴리스의 말이 맞을 것이다. 그들은 모두 가져서 문제가 되었다. 인간은 불안정한 존재기에 번성했고 그들은 야수와 인간의 사이에 서 돌파구를 찾지 못해 퇴보했다. 리퍼드는 그들과 그녀를 마주하도록 조종되었을 기상이변이 신계와 연관 있을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확신했다. 낮과 밤의 종족 역시 타종족처럼 종족 보존의 가치가 충분히 있다. 그녀와 그는 신족의 후예였다. "알았다. 그 나이에 세상 다 안다는 듯한 그 건방진 충고를 받아들 이마, 여자인간 진아." 진은 반인반범의 시비조의 말에 삐죽이며 웃어 주고, 잠들어 있지만 듣고 있을 릴리스의 귀가에 속삭였다. "괜찮아요, 릴리스 언니.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거 에요. 말 안 들으 면 패 주면 되잖아요?" 와이즈외 모두 머쓱해졌다. 진은 리퍼드에게 그녀를 넘겨주었다. 리퍼드는 잠든 릴리스를 조심 스럽게 받아 안아들고 아무 말 없이 동굴 밖으로 나갔다. 진은 일행과 동굴 앞에서 쏟아지는 아침햇살을 받으며 걸어가는, 반 짝이는 검은머리의 잊혀진 종족 마지막 자손의 뒷모습과 그에게 안 겨있는 그의 반려를 배웅했다. 투포겟 산맥은 '에덴'으로 불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리퍼드- 무릎 꿇고 무조건 싹싹 빌어~!" 뒤에 서 있던 릭이 휘청거렸다. "자. 이제 내 잠을 방해하는 것은 아무것도. 누구도 없지? 깨우면 맞을 줄 알어." 진은 입이 붙은 듯한 일행들에게 씩씩하게 말하고 풀리지 않은 피 곤을 풀어보고자 잠을 청하기 위해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실컷 잤던 릭은 헛기침을 하고 검수련을. 블루는 마법수련을. 덜 잤 던 와이즈는 역시 자기 위해 동굴로 들어갔다. "말 안 들으면 패? 무릎 꿇고 무조건 싹싹 빌어?" 와이즈는 짐 가방을 끌어안고 얇은 여름 용 모포를 귀까지 덮고 자 고 있는 진을 내려다보며 허무하게 중얼거렸다. '콱. 덮쳐버릴까 보다. 뻔뻔스런 계집애 같으니라고.' 가도가도 끝이 없을 것 같은 길. 미로를 걷는 기분으로 와이즈는 진 과 뚝 떨어진 잠자리에 신경질적으로 몸을 눕혔다. 14-4. 가려진 사람들. "이걸 나더러 먹으라고 가져온 게냐! 날 뭘로 보는 거냐?!" "죄. 죄송합니다, 빈 로즈마리님. 다시 만들게 하겠습니다." "둬라! 만들어 봐야 그 요리가 그 요리지. 식탁보는 누가 깔았느냐! 붉은 색이라니. 아침부터." "그건...빈께서..." "시끄럽다!" 계절이 계절이니 만큼 유독 화원이 많은 동궁 주위 풍경은 화려하 게 피기 시작한 갖가지 꽃들로 향기 짙고 화사한 경치를 가진 아름 다운 곳이었지만, 그 아름다운 궁성 내부 로즈궁에서는 평탄치 못한 하루가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동궁에서는 오늘도 신경질적인 주인의 지천으로 시녀들과 시종들은 주눅이 들어 있었고, 궁의 시녀들과 시종들을 집합시켜두고 사소한 잘못들을 질책하고 있는 그녀는 로즈마리 스틸 라이어스였다. 그녀는 드리얀 국왕의 제 3 후궁으로 형제국 스타파에서 페르티온 세르제의 정통 후계자를 얻을 목적으로 후궁의 신분으로 동궁에 들 여보내졌었다. 로즈마리는 22세의 나이로 왕의 부인들 중 가장 젊었고 공작가의 공녀의 신분으로 왕비와 빈들 중 결혼 전 가장 높은 신분을 가지고 있었었다. 또한 그녀는 모국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레이디로 손꼽혔 던 경력까지 있었다. 비록 적국이자 형제국인 드리얀에 후궁의 신분으로 시집 보내졌지 만, 신혼 때만 해도 그녀는 첫 번째 왕비 헤런 사르비아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비게 된 두 번째 왕비의 자리를 차지할 자신이 있 었다. 세르제 국왕은 아버지뻘이었고 자신보다 나이가 한 살 많은 왕자조 차 있었지만 그녀는 국왕이 될지 안될지 확실하지 않은 왕자의 왕 자비 보다는 왕비가 될 가능성이 더 있는 후궁 쪽을 택했었다. 두 번째 왕비였던 세리아스는 혼인 전 왕과의 사이에 있었던 연문 으로 주변국과 스타파에까지 알려질 정도의 미모를 가진 여자였다. 하지만 그녀는 30대의 나이였기에, 로즈마리는 19세 때 왕의 마지막 부인이 되어, 외면당하고 있는 다 른 두 명의 나이 든 후궁과 다르리라고. 세리아스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도 왕의 마음을 쉽게 얻어 그녀보다 더한 지위와 권력을 가질 비가 되리란 자신감으로 아버지와 모국 스타파의 전략적 목적이었던 혼사를 받아들였었다. 하지만 그녀는 소외되고 있었다. 무려 3년 간이나. 후궁은 '아내'가 아니었다. 그녀는 비와 빈의 차이를 알지 못했다. 특히 이곳 드리얀 궁성에서의 천지차이일 그 호칭. 그녀는 식을 올리지도 못했고-그것은 다른 나라와 비슷하지만-죄지 으러 온 여자 마냥 입성한 것도 밤을 택해야했고 마중 나온 것도 부군일 왕이 아니라, 여전히 기품 있는 아름다움으로 첫날부터 불안 을 안겨주었던 왕비 세리아스였다. 드리얀은 타국과 비교해 왕권이 강한 나라였고 후계가 될 세자 책 봉에 대한 문제 역시 차별화 되는 곳이었기에, 왕손을 낳은 제 1, 2 후궁들마저도 지위나 처우는 변화가 없었다. 게다가 그녀 로즈마리 스틸은 왕자는커녕 왕녀도 낳지 못했고 가장 꽃다운 나이일 10대 후반 20대 초반의 시기를 질투와 원망과 후회 로 얼룩진 시간으로 보내고 있었다. 어제도 왕은 자신의 처소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사 개월이 넘도록 왕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있었다. "모두 나가거라! 거슬린다. 고얀 것들." 굳은 얼굴의 로즈 궁 시녀들과 시종들이 허리를 굽히고 조용히 물 러나자 아침 식탁에 혼자 앉아있던 그녀는 놓여있던 전채요리들을 노려보다 고개를 떨궜다.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어. 이렇게 살게 될지 몰랐어. 내가 원한 것 은 이런 게 아니었어. 언제까지? 언제까지...?...흑..." 그녀는 도움을 청할 아군이 단 한 명도 없는 타국. 적국의 볼모가 되어가고 있었다. * 다음 다음날 아침 진은 겨우 잠이 깨었다. "일어났어요, 진?" "...응. 블루. 너무 많이 잤나?" "맞을까봐 깨우지 못했어요, 진." "하하..." 아침햇살이 들어오는 동굴 입구에 서서, 자신의 그림자로 눈에 자극 이 될 햇빛을 가려주며 농담을 하는 별나게 보이는 엘프를 보며 진 은 멋쩍게 웃었다. "식사하세요, 진. 그리고 릴리스님이 다녀가셨어요." 진은 릴리스가 선물로 가져다 두었다는 금 덩어리들을 보고 침을 삼켰다. 릭과 블루도 안을 확인하지 않았는지 밀가루 푸대처럼 생긴 자루 안에 가득 들어있는 황금을 보고 머리를 긁적이거나 웃었다. "에. 여기 광산에선 금이 나왔나보지?" "보석 자루도 몇 개 주셨는데요, 진. 귀여운 동생 여행길에 더 마르 면 안 된다며 잘 먹이라고 주는 거라고 하시더군요." "하하..." 진도 릭처럼 머리를 긁적였다. "중매를 잘 서면 술이 세잔. 잘 못 서면 뺨이 세대라던데. 금덩이를 받고 잘못 될 경우 내 목숨은...남아나려라." "진. 그런 말도 있나요?" "응. 릭. 나도 들은 말이야. 와이즈는 어디 갔어?" "마법사님은 리퍼드님과 만나고 계세요." "에. 따로따로 온 거래?" "네." 진은 어깨를 으쓱했다. 릴리스는 나름대로 작별인사를 한 셈이었다. * 야영지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와이즈는 흑표범과 만나고 있었다. [여자인간 진에게 전해주시지요. '굴복'하는 것은 도저히 용서가 안 되고 릴리스가 임신해 있는 기간 동안 빚을 갚으러 가겠다고요. 왕 족이니 보호가 필요할 일은 있을 테니까요.] "뭐 하러? 고양이 손까지 필요 없다." [상관없습니다. 전해 주시든 아니든. 전 릴리스의 협박도 있고 빚을 남기는 것 같아 꺼림칙해서 그렇습니다.] "장가가더니 좋아 죽겠나보다? 실실거리는 맹수는 보다보다 처음 본다." [큼. 부러우시면 와이즈님도 장가드시지요.] 와이즈는 걸터앉았던 나무 등걸에서 일어나 옷에 붙은 나뭇잎을 털 어 냈다. "할 말 다했으면 난 간다." [...로마노로 가보시죠.] "뭐 하러?" [가보시면 알 겁니다. 거기라면 그 뻣뻣한 여자도 나긋나긋해질지 모르지요.] "........" 까만 흑표범은 웅크리고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나 털을 털고, 야영지 로 돌아가는 금발머리 마법사와 헤어져 신부가 기다리는 둥지로 돌 아갔다. 107 [14-5] 가려진 사람들 * "누나. 무서워." "괜찮아, 대니. 아무도 없잖아. 낮이니까 마계 정령 같은 것도 나타 나지 않을 거야." "하지만. 봐. 너무 무서워. 싫어. 가지 말자." "바보! 배 안고파? 고프지? 대니 넌 남자잖아. 기사가 되겠다고 했 잖아. 용감해야 기사가 되지. 응?" "하지만..." 소녀도 무서웠다. 하지만 그녀는 누나였다. "그럼 여기서 기다릴래? 나 혼자 갔다올게." 기가 질려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동생을 숨겨두고 소녀는 누 더기가 다 된 치마를 부여잡고 죄악을 저지르기 위해 언덕 아래로 뛰어갔다. 10살 안팎으로 보이는 굶주려서 삐쩍 마른 남자아이는 자 신의 누나가 검은 새들을 쫓으며 냄새나고 끔찍한 그곳을 향해 위 태하게 뛰어가는 것을 불안한 눈으로 쳐다보며 훌쩍거렸다. * "먼동이 터 오는 아침에 길게 뻗은 가로수를 누비며 잊을 수 없는 우리의 이 길을 파트라슈와 함께 걸었네 하늘과 맞닿은 이 길을 랄랄라 랄랄라 랄라라라랄 라랄라랄~~ 파트라슈~~~ 내가 아주 어렸을 적 아름다운 동화 있어 나를 눈물짓게 했던 그 개 파트라슈. 추억 속에 넌 있지만 언제나 내 맘속에서 따스한 꿈을 꾸었지 나의 파트라슈~ 디럼디럼 디러럼 디럼디 더럼디럼 디럼디럼 디러럼 나의 파트라슈 하루하루 늘어가는 이기적인 만남들에 한번쯤은 생각하지 그 개 파트라슈. 밑도 끝도 없는 말들 우리들을 지치게 해 확신 없는 진실들은 이젠 파트라슈~ 디럼디럼 디러럼 디럼디 더럼디럼 디럼디럼 디러럼 그 개 파트라슈 디럼디럼 디러럼 디럼디 더럼디럼 디럼디럼 디러럼 나의 파트라슈" 진은 벌판을 걸어가며 와이즈의 핀잔 어린 시선과 블루의 미소 띈 얼굴과 릭의 헛기침 소리를 들으며 꿋꿋하게 혼자 노래를 흥얼거리 고 있었다. "...노래하신 '파트라슈'가 개였습니까, 진?" "응? 응. 릭. 주인을 위해 한 몸 바쳐 희생한 멋진 멍멍이지. 플란다 스의 개 이야기 해줄까? 감동적인 이야기야." "중매 서시더니 기분이 좋으신 모양이네요, 진." '엘프야. 한몫 단단히 챙겨서 그럴 거다. 그것도 구별 못하냐.' 와이즈는 네로와 파트라슈 이야기를 해주며 걷고 있는 진의 뒤통수 를 아이스미사일로 콕. 찔러 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좋게만 보는 블루에게 속으로 핀잔을 주었다. "다음에 리퍼드 다시 만나면 친절하게 '파트라슈~'라고 불러줘야지." "언제는 고양이라며?" "고양이 '수호자'는 이상하잖아, 와이즈. 멍멍이 '수호자'는 어울려도. 형부가 되었으니 한 단계 지위 상승시켜 줘야지. 고양이보다는 멍멍 이가 낫지. 암." "다시 만날 것을 어떻게 확신하는데?" "조카를 볼 기회를 만들어야지 않겠어? 이모가 되는 건데." "잘났다." 릭은 '멍멍이 자리가 고양이보다 지위가 향상 된 것인가? 아닌가?' 하는 중얼거림으로 헛갈려했다. 진은 투포겟 산맥에서 마지막 아침식사를 하고 전리품(?)을 챙겨 산맥을 넘어 다시 워프해서 동대륙으로 구분될 서대륙 끝으로 계속 전진하고 있었다. 동대륙은 물론 남대륙과도 면해 있는 곳으로 작은 마을 단위로 이 뤄진 소규모의, 나라의 틀이 아직 잡히지 않은 약소 부족국가들이 여기저기 흩어져있었다. 그리고 진이 일행과 가는 길에 있는 영지와 마을들은 대부분 '로마 노령'에 속했다. 진은 투포겟 산맥의 현실과 동떨어졌던 느낌이 여운으로 남아, 릴리 스의 행복과 리퍼드의 무운(?)을 빌며 씩씩하게 허허벌판을 걷고 있었다. "마을이 안 나타나네? 워프를 잘못한 거 아닐까?" "8년 전에 거주하고 있던 드워프들도 떠나고 없었으니 이곳도 지형 이 바뀌었을 수 있지요. 전엔 마을이 있었는데..." "블루는 인간세상으로 여행을 나온 지 얼마나 된 거야?" "30년쯤 되었지요." "켁." 진은 블루의 나이를 잊고 있었던 기분이 되어 헛기침을 하며 계속 걸어갔다. 현실감이 다시 떨어진다는 생각을 하며. "고향에 돌아가고 싶어했지 않아, 블루?" "가고 있는 걸요." "샤 마을이 동대륙에 있었어?" "네. 신성왕국과 가깝지요. 같이 가실래요, 진?" "블루. 엘프도 꿍꿍이를...속보여~" 블루는 약간 붉어진 얼굴로 다른 방향으로 시선을 향하고 걷고 있 는 와이즈를 의식했다. "너무 정신이 없어서 깨닫지 못했는데요. 서대륙을 거의 가로질렀는 데도 생각보다 굉장히 시간이 짧게 걸렸네요. 블루님 써클이 향상되 신걸까요?" "5써클 제 마법만으로는 가능하지 않았겠지만 블루님은 대마법사 써클을 앞두고 있으니까요. 블루님께 고마워하시지요, 릭페르님." "블루님. 몸 관리 잘하세요." "고맙습니다, 릭페르님. 처음엔 무리가 되었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마나 축적에 도움이 되고 있어요. 마나를 깨끗이 비우고 다시 처음 부터 받아들이는 것이 제게는 맞는 방법이었던 것 같아요. 생각보다 빨리 8써클에 오를 것 같습니다." "축하해야겠네요. 우리 파티에서 대마법사가 나오게 되었으니." "축하해, 블루." 블루는 따가운 햇살 아래 땀을 흘리며 걷는 진과 릭페르를 위해 실 프를 부르며 부드럽게 웃었다. 정오가 한참 지나서야 진은 사람들이 터를 잡은 곳에 이르렀다. 인가가 포도 넝쿨로 뒤덮인, 포도밭 안에 조그맣게 자리하고 있는 것 같은 풍경의 포도 재배를 주업으로 하는 과수원 마을이었다. 진은 일행과 여행객 신분으로 그리프 마을의 관리인 촌장을 만났고 방문을 환영받았다. * 포도 수확이 한창이었다. 마을의 전 주민들이 나서서 포도를 따고 굵직굵직한 포도송이가 가득 담긴 바구니들이 쉴새 없이 날라져 와서 커다란 나무통에 부어지고 있었다. 진은 낮 햇살을 받으며 일하는 사람들과 떨어진 곳에 앉아 늦은 점 심을 먹으며 풍년을 거둬들이는 사람들의 표정을 구경했다. 달콤한 포도 향기가 바람에 실려 주위를 덮어가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취할 것 같네." 성벽은 없었지만 제법 큰 마을의 그곳 촌장이라는 사람이 가져다 준 그 해 첫 포도로 만들었다는 발효시키지 않은 포도주스를 마시 며 진은 중얼거렸다. "오늘은 여기서 머무르는 게 좋겠네요, 진." "그러자, 릭. 분위기 좋은 곳이잖아." 릭은 민박을 알아보기 위해 사람들에게로 갔다. 피리 소리가 길게 울렸다. 하루 수확을 끝낸 마을 사람들이 둥글고 커다란 여러 개의 나무통에 가득 부은 포도송이를 둘러싸고 하모니 카 같은 악기와 뿔피리를 불기 시작했다. 마을의 여자들이 샌들을 벗고 웃으며 통 안으로 들어가서 다듬어지 지 않은 악기 소리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하자, 진은 벌떡 일어났 다. "씻지 않은 맨발로 포도를 밟는군. 맞아. 그랬어. 발효시키려면 그래 야지. 나도 춤을..." "진. 안될걸요?" "왜?" 릭이 민박을 허락 받고 돌아오는 길에 기대 어린 진의 말을 듣고 웃으며 충고했다. "미혼 여성은 안되거든요. 큰일나려고요?" 진은 춤을 추고 있는 처자들을 부러운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는 젊 은 아가씨들을 확인했다. 블루는 안됐다는 듯. 와이즈는 쌤통이다 하는 표정을 했고, 진은 눈썹을 치켜 떴다. "차별이야~ 촌장에게 가서 부탁을..." "절대 안될걸요? 제가 진은 분명히 '미혼'이고 약혼자도 없다고 못 박아두었으니 음모 꾸미셔도 소용없을걸요? 이곳에서도 사고(?)치 면 안되니까요, 진. 미안하지만 얌전히 구경만 하세요." 진은 다시 주저앉았다. "릭. 좀생이인줄 몰랐어." "무슨 말을 해도 안됩니다요, 진." 왜 미혼 여성은 포도를 밟으면 안 되는가. 간단하지 않은가. 일하고 씻지 않은 몸을 포도즙으로 씻는 셈이 되니 포도로 얼룩진 (?) 몸이 얼마나 유혹적이겠는가. 포도를 재배하는 곳은 대부분 비슷한 풍습을 가지고 있었고, 여담이 지만 포도 밟는 여자들 틈에 끼어보려고 결혼을 서두르는 어린 아 가씨들도 많았다. 즉. 임자 없는 여자는 죄를 짓게 될 소지가 다분해지므로 미연에 방 지하고자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규칙'이라고나 할까. 진은 부루퉁해져서 킥킥 웃는 듣기 힘든 엘프의 웃음소리를 들어야 했다.-블루가 처음과 달리 많이 변하고 있다는 생각도 하며. "저기. 릭. 한시간만. 아니 30분만..." "진. 정신 차리세요. 정말 취하셨나보네요." 릭의 단호한 거절에 진은 불쌍한 표정으로 턱을 괴고 노을이 지기 시작하는 하늘 아래 깔깔거리는 여자들과 신나게 악기를 연주하는 청년들과 아저씨들을 쳐다보았다. "여- 아가씨. 포도를 밟고 싶으신가본데, 도와드릴까요?" 계속 흘끗대던 마을 청년 중 한 명이 다가와 건네는 말에 진은 일 행과 앉아있던 풀밭에서 냉큼 일어났다. "방법이 있나요?" "왜 없습니까. 저와 약혼하시면 되지요~" "무례입니다." 벌떡 일어나 물리려고 하는 릭을 척. 치워내며 진은 대답했다. "한시간 동안만 약혼자가 되어 주실래요? 그럼 정말정말 감사히 여 길게요, 기사님." "진!!" "한시간이요? 하하..." "이봐요, 아가씨들~ 여기 참신한 총각이 세 명이나 되는데 모두 약 혼자가 없대요오~" 진의 광고에 물론. 계속 주시 받고 있던 와이즈와 블루와 릭은 마을 의 처녀들에게 순식간에 둘러 쌓이게 되었다. "어머. 난 귀족으로 보인 저 아가씨의 신랑 후보들인 줄 알고 포기 하고 있었는데." "나도 그랬지 뭐니. 멋진 엘프님. 저도 포도를 밟고 싶거든요?" "저도요. 마법사님. 여행 중이시니 결혼이 안 된다면 애인이라도. 하 루만이라도요. 네?" "기사님. 어딜 가시나요~" 진은 낄낄거리며 마을 청년의 손을 잡아끌어 잽싸게 도망갔다. "내가 돈다." "저. 저도..." "저도 마찬가지네요, 리툰 마법사님. 블루님. 황당하군요. 아가씨. 목 에서 손을 좀 떼 주세...켁." 진은 임시 약혼자의 부축을 받아 통 안으로 들어가 다른 여자들 틈 에 끼어 악기 연주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했다. 발과 다리와 파란색 여행복이 포도즙으로 물들어가고 하늘도 비슷 한 색으로 물들어갔다. 진은 포도를 밟으며 마을 처녀들에게 잡혀 있는 일행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즐거운 웃음소리를 냈다. 소박하고 울퉁불퉁하게 느껴지는 리듬은, 짙은 포도향기와 함께 바 람을 타고 사람들의 웃음소리 사이로 퍼져나갔다. 포도밭을 가진 그리프마을에서 진은 일년 중 가장 풍성한 계절. 가장 큰 기대와 희망이 잠깐씩 존재하던 시기에 그곳을 방문했고 그들과 웃음을 나누고 행복에 취해- 왜 마을에 아이들이 몇 명 보이지 않는지. 노인들이 보이지 않는지. 유일하다 할 특작물인 수확한 포도가, 포도주가 어떤 명목으로 어디 로 운반되고 있는지. 주위 다른 마을들과 작은 영지에서 어떤 일들 이 있었는지. 일어나고 있는지.....알아내지 못했다. 달라붙어 오는 아가씨들 때문에 쩔쩔매던 블루는 릭이 자기 몫(?) 의 아가씨들을 물리치고 도와주자 겨우 진정되어 그를 방패로 한편 에 급하게 이동 마법진을 그려야했다. 진은 와이즈에게 붙잡혀-마법을 썼다-포도주 통에서 끌려 내려와 약속한 시간이 아직 남았다는 임시 약혼자의 항의에 미안한 표정으 로 실실 웃어 주며 마법진에 올랐다. 그리고 진은 가까워지고 있는, 자신의 카르마(업보)가 될 죄악을 향 해 워프했다. 108 [15-1] 노예가 된 블루. 진은 또 벌판을 걷고 있었다. 정오와 다른 점이 있다면 태양 없이 쌍둥이별만 떠 있고 환한 대신 어둡고 더운 대신 선선하고 땀 냄새 대신 포도 냄새를 맡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진은 투포겟 산맥을 떠날 때 보다 더 기분이 좋아있었고 일행들은 더 침체되어 있었다. "진. 드리얀으로 돌아가시면 몸가짐을 처음부터 다시 배우세요. 문 제 있으신 레이디시니까요." "핫. 핫." "너무하셨어요, 진." "미안. 미안. 블루에겐 상처가 될 일이었나? 상처씩이나!" "진. 그만 설치라고 하지 않았냐. 엉?" "춤 좀 춘 것 가지고..." 그것이 모두가 아니지 않냐는 뜻의, 인간과 엘프와 드래곤의 쏘아보 는 눈총을 받으며 진은 달빛 받아 윤곽이 보이기 시작한 인가를 향 해 의젓하게 걸어갔다. 도착한 곳은 서대륙 끝 동대륙의 관문이랄 수 있는 로마노에 근접 해 있는 작은 영지였다. 보수 중이었는지 부서진 성벽 여기저기에 건축 자재들이 널려 있었고 새로 만든 듯한 성문을 지키는 성문지 기들은 하급 병사들이 아니라 기사들이었다. 그들은 성문 통과를 신청하는 릭의 목소리에 아래를 내려다보고 곧 성문을 열고 마중을 나왔다. "로마노 령 소아니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어디에서 오셨나요?" "여행 중입니다. 드리얀으로 가고 있습니다." "먼 여행길에 편히 쉬어 가십시오. 미인 방문자들이시네요. 핫. 핫." 달리 신분과 성명에 대한 신고 없이 진은 일행과 통과 되었... "엘프는 안 되는데요?" 기사복장들을 하고는 있었지만 새로 배급받은 것으로 보였고 언행 으로 보아 기사칭호를 받은 것도 얼마 되지 않은. 정식 교육 없이 기사가 된 이들로 보였다. 진은 이제까지 보아왔던 기사들과 다른 느낌을 주는 그들이 이곳의 특색이거나, 아니면 전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성벽으로 보아 승 전한 측의 지위 급상승한 경우인가 하는 생각을 하며 열린 성문으 로 걸어가다 저지 당해 영문을 몰라하는 블루를 돌아보았다. "타종족 출입은 금지되어 있나요?" "아. 아가씨. 출입은 되지만 그냥은 안되거든요. 주인 없는 타종족은 말썽을 일으킬 소지가 있어서요. 엘프는 마법을 쓰니까요." 진은 은근슬쩍 검 손잡이에 손을 대고 가까이 오고 있는 다른 기사 들의 표정이 무엇인지 눈치채고 굳은 얼굴이 되는 블루를 잡아 옆 에 세웠다. "난 드리얀의 진 폰 리툰입니다. 저희 가문의 전속 음유시인인데 억 류될 대상에 들어가나요?" "에. 귀족이셨군요. 진작 말씀하시지. 죄송합니다. 주인 있는 경우엔 괜찮지요." "하지만 레이디. 팔찌나 발찌를 채우셔야합니다. 소아니는 로마노령 이라 로마노 법에 따라야 하거든요." 릭은 눈썹을 찌푸렸고 와이즈는 흥미로운 표정이 되어 코앞의 성벽 을 올려다보았다. 진은 약간 질린 얼굴의 블루의 팔을 꼭 쥐고 속삭 였다. "미안해, 블루. 안을 좀 봐야겠어. 연극 좀 해 주겠어?" 블루는 미안함을 담은 진의 눈을 내려다보고 웃었다. 귀족의 노예들은 구속물품도 차별되어 소속신분이 표시된다는 소아 니 기사의 충고에, 진은 그들이 가져와 보여주는 여러 개의 마나 차 단 팔찌와 발찌 중 7Cm 넓이의 금이 섞여 만들어진 가장 화려해 보이는 팔찌를 골라 높은 값을 치루고 사서 블루에게 채워주었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소아니는 영지라고 부르기엔 작아 보이는 조금 큰 마을 수준이었다. 성벽이 보수를 위해 증축되고 있는 것이 아닌, 없던 성벽을 만들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소아니 내부엔 점령한 로마노 측 기사가 된 전직용병이나 병사들이 많이 보였고 전쟁 후 당연히 보여야 할 거지나 집 없는 사람들이 의외로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여행객들이 쉬어 가는 작은 마을이었는지 신전도 없었고 로 마노 주위엔 왕권을 구축한 나라라 할 만한 국가가 없어 농사를 지 을만한 곳에 여기저기에서 흘러 들어온 사람들이 터를 잡았던 곳으 로, 로마노령이 되기 전엔 영주 대신 그리프 마을처럼 촌장이 관리 하는 곳이었다. 따라 온 기사 두 명이 평범해 보이는 몇몇 여관을 지나쳐 새로 지 은 듯한. 유독 깨끗한 여관 건물로 안내해 주었다. "영주님은 안 계시나요?" "아. 발령이 나시긴 했지만 작은 영지니까요. 지금은 기사단장님이 대리하고 계십니다만. 성벽이 증축되지도 않았고 성도 지어지지 않 은 곳이니 거주할 사람들이 모여야 들르시겠지요." 그들은 돌아갔고 진은 3층으로 지어진 고급 여관 건물 앞에서 턱을 긁적였다. "여긴 완전히 '신생' 영지네." "전쟁이 있었던 것도 아니랍니다, 진. 마을 사람들로는 병사들을 막 을 수 없었을 테니까요. 모두 농노가 된 것 같은데요? 거리가 한산 한 것을 보니 시간으로 보아 지금은 쉬고 있겠지요." 진은 릭의 설명을 들으며 여관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아직 경제가 활성화되지 않은 작은 영지인데 어울리지 않게 단아하 고 아름다워 보이기까지 한 건물이었다. "드워프가 만들었군." "드워프?" "인간의 솜씨가 아니니까." 블루도 와이즈와 같은 생각인지 다시 굳은 얼굴이 되어 달빛을 받 고 있는 은은한 건물 벽에 시선을 주었다. 진은 한숨이 나왔다. 드워프도 타종족이니 이곳에서. 아니 로마노에서 '종속' 취급을 받고 있는 듯 했다. 배타적이라고 들었던 그들이 땅 불리기 정책을 추진 중인 것으로 보이는 인간들에게 자의로 일해 주러 올 것 같지는 않 았으니까. 블루도 로마노에는 가보지 않았다고 해서 나라의 정책이 나 성격을 파악하는 데는 자료가 부족했다. "오늘은 여기서 머물고 내일 로마노로 가보자. 미안해, 블루. 소득 없는 일이 되었네." 블루는 머뭇거리며 웃었다. 특권 계층 전용인 듯한 고급여관이라 그런지 손님이 몇 없었다. 진은 블루와 와이즈와 함께 식당에 자리 잡고 저녁을 주문했고 릭 은 방을 예약하기 위해 프론트로 갔다. 개인 실을 청하는 릭에게 대답하는 여관 주인의 말에 모두 고급스 러운 인테리어의 프론트를 쳐다보았다. "노예에겐 방이 주어지지 않는데요, 기사님." "아. 그럼 저와 같은 방을..." 구속 팔찌를 하고 있는 블루를 서슴없이 노예라고 칭하는 것에 당 황한 릭의 말에 30대로 보이는 주인남자는 피식 웃으며 충고했다. "전 로마노 출신입니다만, 여관업을 하다보니 타국 분들의 풍습이 로마노와 다르다는 것은 알지요. 타국에서 노예는 주인과 함께 식사 할 수 없다지만 로마노에서는 주인의 명에 따라 가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남자 분들이 같은 방을 쓰시는 문제는 오해받으실 겁니다." "그럼 단체 석으로..." "여자 분이 낀 단체 석은 더 오해받지요." 진은 먼 고향과 비슷한 주거 문화? 풍습? 가치관을 가진 것 같은 로마노 출신이라는 여관주인의 말에 붉어지는 엘프와 기사의 표정 에 웃음이 나왔다. "릭. 내가 블루와 함께 방을 쓸게. 블루~ 책임지라고 하면 안 돼~" 블루는 불쌍하게 보일 정도로 얼굴이 빨개졌고, 와이즈는 쌀쌀맞은 표정으로 그런 엘프와 빙글거리는 진을 쳐다보다 머리를 긁적이며 식탁으로 돌아오는 릭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진은 릭의 째림과 와이즈의 살벌한 외면 속에 드워프 작의 아름다 운 내부 장식의 식당에서 맛있게 저녁밥을 먹었다. * 3층 방문 앞에서 안내 해 준 종업원을 내려보내고 릭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블루님. 레이디 진의 평판과 품위를 위해 저와 방을 쓰는 게 좋겠 지요?" "네, 릭페르님. 죄송합니다." "블루님이 죄송할 게 뭐 있겠습니까. 저희가 죄송하지요. 로마노는 타종족에게 배타적이라고 듣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네요. 죄 송합니다." "후훗. 릭과 블루는 그쪽 취향이었구나~ 잘 자~" 진은 종족차별에 대한 인간들의 잘못된 처우를 사과하거나 사과 받 고 있는 릭과 블루를 놀려주고, 와이즈의 쏘는 시선을 피하며 자신 의 방으로 들어갔다. 진은 예의 귀족가의 지나치게 화려했던 방과 비교되는 차분하고 아 름다운 방 내부에 감탄이 나왔다. "드워프가 대단한 장인들이라는 것은 인정해야겠네. 고급 호텔 스위 트 룸 같다." 달리 장식이 되지 않은 방 내부는 리스 칠한 것처럼 윤기 나는 나 무결의 무늬와 창과 문틀에 새겨진 무늬들이 빛깔 고운 목재와 어 우러져 충분히 우아해 보였고, 견고하기까지 해서 방음도 잘 되어 있었다. 화장실도 겸하는 샤워실 같은 곳에는 씻을 수 있게 준비 된 세면대와 수건들도 있었다. 여전히 포도즙으로 물들어 있는 발과 다리를 제 색으로 돌리는 것 을 포기하고-와인 색 스타킹을 신고 있는 것 같았다- 씻은 후 평상 복을 뒤집어쓰고 옆구리 매듭을 지으며 세면실에서 나오던 진은 방 에 들어와 서성거리고 있는 블루를 발견하고 눈을 껌벅였다. "아. 죄. 죄송해요, 진. 문 밖에 있을 수가 없어서..." "왜? 릭이 쫓아낸 것은 아닐텐데?" 블루는 얼굴이 파래졌다 빨개졌다 하더니 의기소침해서 대답했다. "시중을 들어주겠다며 쳐들어 온 아가씨들에게 잡혀 계세요. 전 그 분들 중 한 두 명에게 끌려나온 셈이에요." "노예 여자들이 있는 거래?" "아니요. 노예 신분이 아니라 마을 분들이셨어요." 소아니는 로마노령이 된지 얼마 되지 않은 것으로 보였지만 근접지 역이었던 탓에 예전부터 이곳 풍습이 로마노의 영향을 받고 있었던 것 같다는 블루의 설명을 들었다. "로마노는 성이 개방되어 있나 보군. 그래서 이곳에 와 보지 못했던 거야, 블루?" "그런 점도 있지만. 전엔 로마노로 불려지지 않았던 일부 드워프들 의 영역이 있었거든요." 엘프와 드워프는 원수지간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사이가 좋은 것도 아니었던 탓에. 인간들을 알고 싶어서 여행을 시작한 그의 여정에 예전 드워프들의 구역과 엘프와 풍습차이가 심한 것으로 들은 로마 노는 빠지게 되었다는 설명을 들었다. "와이즈도 같은 상황이겠지?" "...마법사님은 더 곤란하시겠지요." "그리프 마을에서 어쩐지 아가씨들이 다른 곳보다 적극적으로 보였 던 이유를 알겠네." 블루도 방문 밖에서 진이 문을 열어주길 기다릴 수 없었나 보았다. 비록 노예 팔찌를 하고 있는 엘프이나, 외모가 외모인 만큼. 진은 문을 열고 복도를 내다보았다. 두 명의 아가씨가 서성거리다 냉큼 앞으로 왔다. "어머. 귀족아가씨. 돈 달라는 소리는 안 할게요. 피곤하시면 아가씨 의 노예 분. 저의 집에서 하루 묵게 해 드릴게요." * 와이즈는 방안에 들어서자 대기하고 있었던 듯 한 세 명의 여자들 에게 둘러 쌓이게 되었고. 성문지기 기사를 애인으로 두고 있다는 친구의 귀띔으로 부유하고 미남이기까지 한 마법사에게 봉사해주기 위해, 혹은 사랑 받기 위해 여관주인에게 뇌물까지 주고 찾아왔다는 아가씨들의 애교 섞인 설 명과 유혹을 받아야했다. 와이즈의 반응은? [자 라.] 아가씨들은 시동어 없이 용언으로 건 변칙적인 슬립마법에 모두 그 자리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그는 널브러진 인간여자들을 멀리(?) 돌아 침대에 걸터앉아, 로마노 령의 작은 마을. 그리고 가게 될 로마노의 인간들의 풍습이 짐작되 어 관자놀이를 눌러야했다. "아이큐가 무슨 말인지도 모르면서 화내더니만. 바보 같은 검은 고 양이놈아. 내가 돈다. 향락의 도시로 가면 고 계집애가 나긋나긋해 질 것 같냐? 재밌어 할게 뻔하구만. 또 딴 놈에게 넘어가지나 않으 려나 모르겠네. 젠장." * 진은 그녀들을 돌려보내고 릭과 와이즈에게 도움을 주어야하는지 말아야하는지 헷갈렸다. 하지만 곧 화를 내는 릭의 목소리가 복도에 서 들리자 나서지 않아도 될 일로 결정했다. 릭은 쿵쿵거리며 아래층으로 내려가더니 잠시 후 다시 올라와서 노 크를 했다. "릭~ 한밤중에 아녀자의 방에 무슨 일로~?" 생글거리는 진에게 릭은 헛기침을 하며 대답했다. "여관주인에게 아가씨들을 더 이상 올려보내지 마라고 해 두었습니 다만. 이곳은 눈이 많더군요. 상황이 미묘하니 차라리 블루님은 여 기서 주무시는 게 낫겠습니다." "어머. 릭~ 내 평판과 품위는 어쩌고~?" "진. 그만 재미있어 하세요. 블루님은 엘프시니 진이 청혼을 받아들 이지만 않으면 상관없겠지요." "푸후후후..." "진! 웃지 마시고요. 아무리 대륙에서 가장 나을 배우자 상이라고 해도 진의 입장을 잊지는 말아주십시오." "알았어. 알았어. 안 덮칠게, 릭. 푸흐흐흐..." 릭은 투덜거리며 조용한 와이즈의 방문 앞을 지나쳐 자신의 방으로 갔다. 문을 닫은 진은 하나 있던 침대로 올라가 멀거니 서 있는 블 루에게 옆자리를 툭툭 두드려 보이며 말했다. "블루~ 저얼대 안 덮칠게. 자자~" 블루는 이제까지 보아 온 경우 중. 가장 심하게 얼굴이 달아올랐다. * 이튿날 아침이 되자 짐을 싸들고 릭은 와이즈의 방문을 노크했다. 와이즈는 잠들었던 그대로 여전히 자고 있는 여자들을 돌아 방을 나섰고, 침대를 진에게 양보하고 바닥에서 자고 일어난 블루도 준비 하고 있다 진과 함께 짐을 들고 나왔다. "와이즈~ 좋은 밤 됐어?" "...죽을래?" "흠. 리툰 마법사님 저대로 두어도 되나요?" "깨우면 일어날 겁니다, 릭페르님." 진은 머쓱한 표정의 블루와 함께 부당한 눈초리를 받으며 방문객이 있을 때 수시로 열리는 성격을 가진 성문 덕으로 아침 일찍 소아니 를 나섰다. 성벽과 떨어진 곳까지 오자 진은 블루의 팔찌를 풀어 들여다보며 갸우뚱했다. "로마노로 가면 다시 블루에게 이걸 써야할 것 같은데. 속임수 없을 까?" "건너뛰자, 진." "어?" "그렇게 하세요, 진. 로마노는 여행 코스로 빠지지 않는 곳이고 귀 족에게 대우가 좋은 곳이라고 들었습니다만. 곤란한 일이 많을 것 같네요." 진은 블루를 돌아보고 어떻게 할까 궁리했다. "타종족은 무조건 잡아서 노예로 부리는 나라인 것 같은데 건너뛰 어도 될까? 애써 찾아가는 것도 아니고 가는 길에 있는 나라를 일 부러 피할 필요까지야. 어쩌면 도움이 필요한 엘프나 드워프가 있을 지도 모르잖아." 블루가 머뭇거리며 조언해 주었다. "진. 엘프는 잡혀서 노예가 되었다고 해도 처우가 엘프에게 지나치 게 받아들여지는 경우엔 자결합니다. 아마 마법과 정령을 다루니 귀 족들의 고용인 대우를 받고 있을 거 에요. 드워프들도 자긍심이 대 단해서 건물을 짓거나 보석세공을 한다고 해도 자의가 완전히 배제 되지는 않을 겁니다." "나도 보통 다른 나라에서 노예가 된 경우엔 그렇다고 들었어. 하지 만 직접 확인 해 보지 않는 이상은 알 수 없는 일이잖아." "진. 블루님이 같은 엘프로 하는 이야기 아니냐. 인간의 일도 아닌 일에까지 구제해 주고 다니다간 올해 넘기겠다." 진은 와이즈가 뭔가 다른 의도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볼거 리가 많은 도시일 것 같아 망서려 졌다. "로마노는 꼭 가보고 싶었는데. 판이 로마노에 갔었던 이야기 했었 잖아. 흠. 와이즈. 얼굴 뚫리겠다. 그만 노려 봐." "진. 블루님께 또 노예 취급받게 할 순 없잖아요." "하긴..." 블루는 괜찮다는 말을 하려다 와이즈의 눈초리에 열려던 입을 다물 었다. 진은 일행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마나 차단 팔찌를 기념품 삼으라고 블루에게 주고, 하루 동안 마나 유동이 막혀 있어 회복이 덜 된 블 루 대신 와이즈가 이동 마법진을 그리는 것을 구경해야했다. 로마노를 가로지르는 것은 와이즈의 5써클 마나로는 부족했고, 남하 하면 남대륙에 해당 될 지역이라 너무 더울 것 같아서 북상하는 쪽 을 택해 로마노를 돌아 워프했다. * "마을이 또 안 보이는데, 와이즈?" "로마노 근처는 지형이 잘 바뀌나보다. 4년 전엔 마을이 있었어." 동쪽을 향해 막연히 벌판을 걷던 진은 서대륙 끝 부분인 이곳 지형 이 사람들이 터를 잡기엔 부족한 것이 많은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로마노는 남대륙 밀림과 가깝다고 들었지만 투포겟 산맥을 떠나서는 숲보다는 시내도 없는 허허벌판을 걷는 경우가 많았다. 진은 점점 더워지고 있는 초여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굉장히 파랗고 여전히 우주적인 느낌을 주는 쌍둥이별이 떠 있었다. 잡담을 하며 걷던 그들은 외진 곳에 홀로 서 있는 것 같은, 몇몇 작 은 나무들을 주위에 거느린 커다란 나무를 발견해 그늘에서 쉬어가 기로 했다. "그러게 로마노를 거치면 좋았잖아. 무한자루가 없었으면 꼬박 굶을 뻔했네." "굶을 일 없는데 무슨 걱정이냐. 그 안의 것 다 먹으려면 몇 달은 걸릴텐데." "릭도 틈나면 부지런히 검 수련하고 블루도 열심인데. 와이즈. 릭이 게으르게 볼 것 같은데?" 와이즈는 진과 함께 나무 그늘에 앉아, 아침을 먹은 후 검수련과 마 법수련을 하는 일행을 쳐다보지도 않고 그녀의 말을 무시했다. 늦은 점심을 한번 더 먹고 진은 가지고 있던 지도와 이동 마법진의 좌표가 기록된 책을 참고로 저녁쯤 도착할 것으로 계산 된 인가를 찾아 걸음을 옮겼다. 해가 지고 달빛이 진해진 벌판을 함께 걷던 와이즈가 걸음을 멈췄 다. 블루도 걸음을 멈췄다. 릭과 진은 굳은 얼굴의 엘프와 찌푸리는 와이즈의 표정을 확인하고 왜 그러느냐고 물으려는데 인기척이 느 껴져 돌아보았다. 듬성듬성 앙상한 가지의 검은 나무들 사이로 아이들로 보이는 형체 가 비틀거리며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저. 저..." 남루하고. 가난과 굶주림에 찌든 몰골의 9살 정도로 보이는 남자아 이와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있는 12살? 13살? 정도로 보이는 여자아 이였다. 진은 근처 인가에서 온 바람잡이 일을 하는 아이들이거나 고 아들인가 싶은 생각에 돕고자 손을 내밀려다 주춤했다. 어린 소녀는 진과 일행들을 재빨리 훑어보더니 혼란스러운 표정을 했고, 동생인 듯 한 아이의 손을 놓더니 대충 그들 앞에 넙죽 엎드 리며 말했다. "절 사주세요. 무슨 일이든 할게요. 저. 동. 동생도..." 남자아이도 누나를 따라 넙죽 엎드렸고, 진은 노예가 되길 자청하는 소녀와 아이의 행동에 찬물을 뒤집어 써 머리가 차갑게 식는 기분 이 되었다. 아이들은 전쟁 고아였다. 아니, 학살된 작은 마을의 생존자였다. 근처에 있을 줄 알았던 소규모 영지는 파편과 재만 남아 있는 을씨년 스러운 곳이 되어 있었고 인가가 아니라 전쟁터. 버려진 전쟁터였다. 진은 몸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할 정도로 마르고 굶주린 아이들을 블루와 릭에게 한 명씩 안겨주고 참혹한 광경을 대면했다. 역시 폐허가 된 이웃 마을에서 힘들게 찾아 왔지만 이미 어른들이 모두 죽어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한 그들이, 재만 남은 인가에서는 살 아갈 방도가 없어 몇날 며칠을. 시체들을 뒤져 식량 부스러기들을 찾아 먹으며 살았다는. 부서진 성벽이 있는 언덕 위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부패하고 있는 사람들의 시체가 고약한 냄새를 풍기며 널브러져 있었다. 어둠으로 그 끔찍한 광경의 끝이 어디까지인지 육안으로 정 확히 포착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을 뜯어먹고 있는 밤 보다 까만 까마귀. 까마귀. 까마귀. 전쟁터가 아니었다. 로마노령이 되는 것에 항거한 사람들의...학살 장이었다. 진은 햇빛아래서 보면 더욱 처참하고 더럽고 추악할 그 흔적들 위 에 어둠이...너울거리는 어둠의 정령들이 내려앉아 웅크리고 있는 광 경을. 두 눈에 담았다.... * 진은 한참 떨어진 곳까지 걸어가 블루의 정령에게 씻긴 대니와 그 의 누나 매기를 릭에게 맡겨 음식을 먹여 돌보게 하고, 블루와 와이 즈와 함께 다시 그곳으로 돌아갔다. "모두 봤어. 모두 머리에 담았어. 와이즈. 블루. 매장해 주겠어?" 블루가 부르는 땅의 정령 노움들로는 시간이 걸릴 것 같아 와이즈 는 진의 부탁에 별 말없이 자신의 정령들을 불러 작은 지진이 일어 나게 만들었다. 진은 나이든 할아버지처럼 쭈글쭈글한 얼굴의 고약한 인상을 가진, 상체만 땅 위에 내민 땅딸막하게 보이는 땅의 정령 노움들이 썩어 진물이 흐르기 시작한 인간들의 육신과 죄악과 탐욕의 흔적들을 흙 으로 덮고 삼키게 하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까마귀들이 깍깍거리며 일제히 날아오르고. 거대한 무덤이 만들어졌다. 와이즈는 범위 넓은 정화마법을 시전했고 어둠의 정령들은 사라졌 다. 블루는 자신의 느낌에 진의 기분이 전해져 오는 것이 더해져, 심장 근처 혈관이 아프게 뛰는 것을 의식하며 남아있는 공기 중의 불쾌한 냄새를 실프를 불러 흩어지게 하고 날아가게 했다. "고마워." 진은 다시 아이들에게로 갔다. 릭은 오랫동안 굶주린 위장에 부담이 갈 것이 뻔해, 내민 빵 부스러 기들을 빼앗듯 허겁지겁 받아먹는 아이들에게 소화시키기 좋은 것 들을 골라 조금씩 먹이고 있었다. "애들이 지쳤으니까 아영하고 아침에 로마노로 가보자." 릭과 와이즈는 반대할 수 없었다. * 진은 더 늦었으면. 더 늦게 왔거나 이곳에 그들이 아예 오지 않았다 면. 아마도 썩어 가는 인육을 먹었을 아이들의 잠든 얼굴을 내려다 보며 팔짱을 끼고 손톱을 물어뜯었다. 109 [15-2] 아. 아. 로마노. * 주신 세레니프이스 준사제 티나르는 드리얀의 수도에 있는 주신전 으로 소속을 임명받아 함께 온 고위신관 세인트가, 교체된 사제장의 지위로 이 며칠 간 바쁘게 신전 안팎을 들락거리다. 잠시 짬을 내어 자신의 개인 예배실에서 숨을 돌리고 있다는 것을 전해 듣고 찾아갔다. "세인트 사제님. 쿤님으로부터 통신이 왔어요." "무슨 내용이더냐, 티나르." 티나르는 암호로 전달된 통신을 해독한 양피지를 건네 주었다. "흠. 서대륙에서 들어온 통신들을 정리하셨나보구나." "네. 정리하시다 보니 중복되는. 아주 묘한 인물이 있대요. 전해 온 신전의 이름도 다양해요. 거리가 있어서 도움을 청한 후 도착한 날 짜와 시간은 제각각이지만..." 티나르는 땀에 젖어 불편하게 느껴지는 땋은 머리카락을 목에서 떼 었다 다시 놓으며 계속 말을 이었다. "정리하면. 서대륙 끝 바다의 여신 신전들과 어니스트 신전. 메디컬 아트 신전과 네카르도 수도의 주신전을 비롯한 여러 신전들이 보내 온 '그'에 관련된 여러 인물 언급에서도 빠지지 않았고요. 사키리온 에서 신전을 세우겠다는 한 사제가 허락을 구하는 내용의 통신에도 그 인물의 이름이 언급되었어요. 그리고 그 외에도 은혜를 입었다는 작은 신전들의 통신도 계속 들어오고 있대요." "모두...한 인물에게 몰린 내용들이구나. 그것도. 드리얀 출신이라는 귀족 레이디야." "네. 세인트 사제님. 아주 빠른 속도로 오고 있어요. 동대륙. 이곳 드리얀으로 간다는 말이 그녀의 이름과 함께 대륙에 번지고 있어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요. 알아봤지만 그 레이디의 성을 가진 가문은 드리얀에 없어요. 세인트 사제님." 15-2. 아. 아. 로마노. 로마노는 드워프들의 영역이었다는 그리 높지 않은 산맥과 남대륙 에서 파생된 밀림의 여파로 우거진 숲과 호수와 강을 끼고 있는 지 형을 가지고 있었다. 수도 성문은 보통 중소영지나 다른 나라 수도의 입구처럼 천연지형 의 도움을 받고 있었지만. 산과 호수의 경계가 되는 지역으로 수도 시내로 통하는 길목이랄 수 있는 곳에, 비교적 짧은 길이의 성벽이 둘러져 있어서 유별나게 천연 방벽의 혜택을 많이 받고 있는 나라 의 수도였다. 진은 로마노 수도 성벽이 멀리에서도 잘 보이는 지점으로 이동해 도착했다. 회복마법 시술을 여러 번 받았지만 그래도 기운 없는 아 이들을 일행과 번갈아 안아들고. 몇 십 분쯤 걸어 수도 검문소인 성 문 앞에서 귀족 신분으로 신고하여, 성문지기들의 환영 인사말을 들 으며 방문을 허락 받았다. 검문소를 통과해 로마노 수도 내부가 눈에 들어오자 진은 걸음을 멈췄다. 도시의 경관. 풍경은 아름다웠다. 수도의 지형은 평지보다는 벌목 된 산지처럼 완만한 경사를 이룬 곳이 전체의 삼분의 일을 차지하여, 그곳 돌출 된 지면과 맑은 날씨 의 도움으로 멀리까지 아름다운 외형을 가진 건물들이 유독 구분되 어 시야에 들어왔다. 숲 반대편에는 강을 사이에 두고 일부 물에 잠겨 있는 건물들과, 강 변에 면해 있거나 수면 위에 떠 있는 나룻배들이 거리로 인해 아주 작게 군데군데 눈에 띄었다. "아름다운 곳이네요." "게다가 부유한 곳이군요, 블루님. 범람하는 강변에 저택을 짓다니. 드워프 장인들의 도움을 받은 건축물들이겠군요. 하지만 영지까지 갖추고 있지는 못하는 것 같은데요? 면적이 한눈에 거의 들어올 정 도니." "수도를 이곳으로 옮긴지 얼마 되지 않았다던데 그 때문인가 보지. 네카르도 수도에 비교하면 좁아 보이긴 하다. 속은 어떨까?" "들여다보면 알겠지." 진은 해제시켜 소용없는 마나 차단 팔찌를 위장으로 찬 블루와 와 이즈와 릭과 함께 아이들을 데리고 로마노의 이른 아침 한적한 거 리를 걸어갔다. 거지나 굶주리는 자들이나 남루한 사람들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진은 고요하기까지 한 시내 전경에 의미불명의 불안함이 가슴 한편 에서 스물거리는 것을 느껴야했다. "이 도시는 뭔가 잘못 됐어." "글세요, 진. 잘 모르겠는데요. 거리도 깨끗하고 상점 주인들의 표정 도 괜찮았어요. 물가가 좀 비싼 편이었지만요." 아이들의 옷가지를 구입해 나오던 릭은 상점 앞에 서서 기다리던 진과 일행들에게 갸웃거리며 말했다. "아니야. 뭔가 이상해. 숙소부터 잡자, 릭. 애들을 쉬게 해야지." 강변과 먼 쪽에 위치한 건물들도 제법 멋스러웠다. 진은 숙소로 보이는 건물들이 밀집되어있는 곳에 이르자 소아니에 서 머물렀던 여관이 고급이 아니라 중급 정도였음을 알 수 있었다. 진은 크기도 큰 편에 속하고 고급스러워 보이는, 부유한 귀족 저택 처럼 테라스까지 있는 5층이 세모꼴로 생긴 여관을 택해 들어갔다. 1층에는 널찍널찍한 프론트와 식당과 귀족들의 사교장소 같은 곳이 모두 구분되어 있었고, 입구에서 깔끔한 인상과 복장을 갖춘 종업원 들에게 깍듯한 인사를 받았다. 프론트에서 개인실을 주문하려는 릭을 저지하고 진은 물었다. "단체로 머물 수 있는 방법이 있나요?" "그럼요, 레이디. 우리 여관도 귀족 분의 소유입니다. 드워프 작으로 가장 고급에 속하지요. 한 층을 모두 빌리시면 됩니다. 방마다 연결 된 문이 있어서 수도에 저택을 아직 짓지 못한 귀족가나 자제분들 이 파티를 여시거나 머무르기 편하시게 특실로 이뤄졌답니다." "한 층에 방이 몇 개나 있지요?" "침실은 최고 9개까지 있습니다. 일행 분의 수가 적으니 꼭대기 별 층으로 드릴까요? 마침 비어있고 응접실을 포함한 3개의 큰 룸으로 되어있지요." "그곳으로 주세요." 숙박비는 물론 비쌌다. 진은 릴리스에게 받은 보석 중 쓰려고 분리 해두었던 일부를 릭을 통해 지불하게 했고, 대우는 더 정중해졌다. 진은 방마다 침대가 네 개씩 있었기에 가운데 응접실을 공용으로 정하고 와이즈와 블루와 릭을 계단 쪽 방에 안내해 준 종업원들과 함께 들여보내고, 아이들과 안쪽 다른 방에 자리잡고 짐을 풀었다. 매기와 대니는 조금씩 기운을 차렸다. 릭이 오는 길에 구입한 옷가 지를 주고 갈아입는 것을 도와주었다. 아이들은 아사직전의 상태에 서 벗어나 있다 주춤거리며 혼란스러워했다. "매기. 괜찮아. 노예가 된 것 아니야. 할 일을 찾지 않아도 돼. 쉬렴.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하고." "저. 저..." "괜찮아, 매기. 언니의 일행들을 만나러 갈래? 엘프도 있었지? 노래 해 줄 거야. 엘프의 노래 들어봤니?" 갈색이었던 머리가 정령의 도움으로 여러 번 씻고 나니 깨끗한 선 홍색 머리가 된 매기는 주근깨 투성이의 얼굴을 저었다. 그녀는 너 무 야위어서 12세 이하로도 보였는데 곧 14살이 된다고 했다. 소녀는 내내 굳은 얼굴이었던 예쁜 귀족아가씨가 다정하게 말해오 자 야영지에서 잠을 깨어 이른 아침을 먹던 자리 이후 계속 눈치를 보고 있다가, 안심이 되는지 눈물을 훔쳤다. 누나의 팔에 손을 떼지 않고 함께 앉아있던 대니도 다시 팔리는 것 을 걱정하지 않아도 됨을 알았는지 훌쩍거리며 누나와 같은 색 머 리를 만지작거렸다. 진은 침대 가에 앉혀 둔 남매 앞에 무릎을 꿇고 눈 높이를 낮춰 아 이들의 손을 잡아주었다. "늦게 가서 미안해. 매기. 대니. 무서웠지?" 아이와 소녀는 울먹였다. 진은 진정되지 않은 아이들에게 심적 부담 을 줄까봐 미루고 있던 질문을 했다. "가족은. 모두...?" "아. 아빠와 아저씨들은 모두 죽었어요. 우린 잘 숨어있었는데...아줌 마들도 많이 죽었지만. 엄마는 마을 언니들과 친구들과 같이 기사아 저씨들에게 잡혀갔어요." 진은 성에서 끌려나가 죽어있던 것으로 보였던 시체들 중에 젊은 여자와 아이들의 시신이 그다지 없었다는 것을 상기했다. "매기. 대니. 난 너희들처럼 강하고 용감한 아이들은 보지 못했어. 잘 견뎌줘서 고마워. 도와줄게. 엄마가 살아 계시다면. 살아만 있다 면 꼭 다시 만나게 해 줄게." 진은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이성을 잃지 않고 버텨 준 아이들이 너 무 고맙고 대견한 생각이 들어 두 팔에 담아 안아 주었다. 대니와 매기는 진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울음을 터뜨렸다. 진은 아이들을 다독여 가운데 방으로 갔다. 응접실에는 침실과 달리 긴 소파와 장식 가구들과 테이블과 책장까지 있었다. 로마노는 타국의 수도처럼 귀족들이 개인 저택을 지어 거주하기보 다는 숙소로 삼는 듯한 숙박업소가 많았다. 역사가 짧은 나라인 것 이 이유인지 수도 면적은 작은 편이었지만 건물은 새것이 많았고 대부분 돌로 지어져 있었다. 하층민들이 주거 할 공간은 따로 있는 것인지, 아니면 모두 새 건물 축에 드는 건축물에 주거하는지 빈티 나는 건물은 오는 길에 발견 할 수 없었다. 진은 안정을 찾아 겨우 사물이 인식되고 있는지 호화로운 방안을 휘둥그레해진 눈으로 둘러보고 있는 아이들을 소파에 앉히고, 상비 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는 과일 바구니를 밀어 주었다. 연결된 옆 방문을 열고 나오는 일행과 8인용 테이블 한쪽에 앉아 진은 느슨해진 권 색 여행복 허리두르개의 매듭을 고치며 물었다. "종업원들에게 뭐 좀 알아냈어?" 블루와 와이즈는 릭에게 답을 미뤘고 그는 헛기침을 하며 대답했다. "하녀들이 유독 친절하더군요. 그 설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진. 그 외엔 많이는 아니지만 거리에 사람들이 없었던 이유는 알았지요." "왜 그런데?" "통금시간이 있다더군요. 시내에서는 주인과 함께 하지 않은 노예라 해도 활보가 가능하지만, 귀족들의 수면에 방해되니 해가 뜬 후 정 오 이전까지는 거리에서 큰 소리를 내면 안 된답니다." "정오 이후에 귀족들은 뭘 한데?" "밥 먹지 뭐하겠냐, 진. 낮 시간과 밤 시간에는 쇼핑이나 취미생활 이나 풍류로 바쁘다는 말을 들었다. 다른 나라와 별 차이 없게 들리 던데?" 부족했다. 진은 남향으로 더위도 잘 느껴지지 않게 만들어진 과학적이기까지 한 여관 건물 내부를 둘러보다, 소파 앞 창가로 가서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거리는 아직 한산했다. "점심을 좀 빨리 먹고 정오가 되면 나가보자." 진은 창가 벽에 붙박이 책장을 지나치다, 페이지는 얼마 되지 않지 만 종이 질로 두꺼운 책들의 제목이 눈에 들어오자 걸음을 멈췄다. -누이를사랑한기사. 가장아름다웠던여사제. 특별한취향. 왕을사랑한 시녀. 마법사의엘프.... 진은 눈길을 바꿨다. -으뜸전략전술법. 몬스터사로잡는법. 요리대백과. 보석감정법. 필수 검술응용법. 노예다루는법. 4대로마노왕의전기. 마법에대한이해와응 용법. 마계로간흑마녀. 품위를위해익혀야할필수사항. 로마노의수호신 들. 영지관리법.... 진은 의자를 끌어다 책장 앞에 두고 앉아 책을 빼들었다. 릭이 벽에 대롱대는 줄을 잡아당겨 작은 종을 울리자 잠시 후 아래 층에서 올라 온 종업원이 들어왔다. 릭은 모두를 대신해 식사를 주 문했고, 블루는 아이들에게 갔고, 와이즈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책 을 읽고 있는 진을 흘끗거렸다. 진은 책장을 빠르게 넘겨보고 차례차례 교환해서 펼쳤다. 과일을 먹고 있는 매기와 대니에게 고운 목소리로 말을 걸고 있던 블루는 진의 진지하지 않은 독서 태도에 무슨 책을 읽나하고, 책장 에 꽂혀 있는 책들의 제목에 시선을 주었다가 얼굴이 빨개졌다 하 얘졌다했다. 처음부터 눈치채고 있었던 와이즈는 한숨을 쉬며 테이블에 올렸던 팔을 들어 턱을 괴었다. 늦게야 알아챈 릭은 진이 휘리릭 넘기고 있는 야설을 빼앗았지만 그녀는 무심한 동작으로 다음 책을 다시 빼들었다. "진!" "왜?" "다른 책을 보세요. 이런. 한 두 권이 아니네. 보지 마시라고요, 진!" 진은 당황하는 릭을 무시하고 빠른 속도로 책을 읽어...아니 속독하 듯 쓱쓱 훑어 내리고 있었다. "진. 미성년이시잖아요. 여기 이 책을 차라리 보세요." "봤어, 릭. 제일 먼저 봤어. <품위를위해익혀야할필수사항> 안을 보 면 '레이디'의 신분으론 절대 보지 말아야할 1순위일거야. 읽어 봐, 릭. 재밌어." 진은 전혀 재미있다는 표정이 아니었고 장난스러운 표정도 아니었 기에 호기심과 궁금증으로 릭은 책을 펼쳐보았다. 진은 책에서 눈 돌리지 않고 블루에게 아이들을 옆방으로 데려가 주도록 부탁했다. 블루는 머뭇거리며 일어나 도착하지 않은 식사를 대신하게 하기 위해, 영양 있는 간식거리를 자신들의 방에 둔 무한 자루에서 골라와 아이들을 데리고 진의 방으로 갔다. 책의 내용을 파악한 릭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진. 다른 책을..." "마찬가지야, 릭." 릭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책들을 빼서 뒤적이기 시작했다. 블루가 다시 돌아와 테이블에 앉자 진은 책을 덮고 입을 열었다. "성이 개방되면 문제가 따르지. 그 책에는 가지가지 피임법이 적혀 있어. 거기까지는 좋아. 필수사항 맞지. 문제는. 낙태에 쓰이는 독초 제조법이 쓰여있다는 것과 남녀 공통으로 성병을 피할 방법과 귀족 레이디의 신분으로 어쩔 수 없는 경우 신전에 잠깐씩 의탁해 낳은 아이를 처리하는 방도. 등등이 적혀 있다는 거야." 릭은 머리카락을 뽑을 것처럼 쓸어 넘기더니 책장에서 떨어졌다. "<로마노의수호신들> 지능 없고 본능만 있는 동물을 신으로 떠받 드는 내용이야. 와이즈. '물소의 신'이라는 종류의 신이 있어?" "없다." "<마법에대한이해와응용법> 마법을 할 줄 아는, 노예들과 방문한 손님을 범하는 힌트가 쓰여있어. 블루. 엘프는 의식이 차단 된 무의 식 상태에서 당하는 것도 확실히 기억해 낼 수 있어?" "에...?" "릭. 왕족과 귀족들이 가문의 부를 지키고 명맥을 잇기 위해 근친 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 하지만 친아버지와 친어머니를 대상으로도 혼인이 가능해?" "...그럴 리가 없잖아요, 진." 진은 책을 쥐고 있는 손에서 진땀이 베어 나왔다. "대충 봤지만 내용은 파악했어. 요약해 줄게. 요리대백과-미약. 미향 을 조미료로 쓰는 방법이 나와 있어. 필수검술응용법-상대를 죽이 거나 사로잡을 때 효과적인 모든 비겁한 잡기가 다 들어가 있어. 노 예다루는법-어릴 때부터 세뇌 시켜 부리는 방법이 나와 있어. 영리 하기도 하지. 누구도 벗어나지 못할 거야!" 블루는 움찔거리다 유혹하던 여 종업원을 피하느라 깜박 잊고 하프 를 방에 두고 왔다는 것을 뒤늦게 떠올렸다. "보석감정법-드워프들을 우려내고 속이는 친절한 참고 글이 덧붙여 져 있어. 특별한취향-여자가 금지 된 사제들에게 동성과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야설이 내용이야. 덧붙여! 배우자를 바꿔 즐길 때 갖춰 야할 예의범절이 적혀있어. 4대로마노왕의전기-그는 아내를 죽이고 자신의 친딸일지 모를 13살 난 아이와 결혼했어!" 진은 벌떡 일어났다. "왕족은 모두 근친상간이야. 귀족도 마찬가지야. 평민도 마찬가지야. 우상을 숭배해! 사제도 이곳은 사제가 아니야. 기사도 기사가 아니 야. 모두 노예를 가지고 있어. 모든 연애소설들의 공통점으로, 타국 의 책에는 등장인물로 거론도 되지 않는 천한 노예들이. 우대! 받는 의미인지 모조리 비중 있게 거론되어 있어! 여기선 노예도 쓸만한 인간이야! 모두. 귀족 아닌 자는. 기득권 층이 아닌 자는 쓸만한 노. 예. 로 봐!" 진은 책장을 향해 들고 있던 <영지관리법>이란 제목의 책을 집어 던졌다. "이 책에는! 세금으로 영지민 신부의 첫날밤이 영주에게 바쳐져야 함이 '법'으로 쓰여있어! 로마노의 성문화와 경제와 군사력은 지나 치게 발전되어 있어. 감당을 못하고 있어. 모조리 썩었어!" 그녀는 진심으로 화가 났다. * 로마노는 서대륙과 남대륙의 경계에 있는 밀림의 아마존 여 전사들 이 세운 나라였다. 역사가 짧은 나라로 여왕이 통치를 시작했다. 아마존 부족은 힘을 중시하고 자유로운 사고방식으로 남성의 지배 를 받지 않은 여성 중심의 여 전사들로 이뤄졌던 부족이었다. 그들 이 선조가 되어 나라의 시초가 되었었다. 서대륙과 동대륙의 문화와 구별되었던 그들은 남대륙 밀림지대에서 위쪽의 서대륙으로 세력을 넓히게 되었고, 작은 부족국가와 영지들 을 쉽게 제압하여 국가로 급성장했다. 건국 200년 만에 서대륙과 동대륙에서 가장 탄탄하다할 만한 국력 을 자랑하는 나라가 된 것은 초대여왕과 그곳 아마존 부족들의 후 손들이 힘을 중시하는 건국 이념을 가지고 힘있는 자들을 우대하여, 모험가나 여행자들뿐만 아니라 타국에서 죄를 짓거나 힘을 잃어 도 망 온 귀족들과 기사들과 신관들까지 무차별로 수용했기 때문이다. 원래 가지고 있었거나 가지고 있었어야했을 이상과 바른 가치관을 타락으로 잃고 도망 온, 상류 계층이라 할 그들의 눈에 미개하게 비 친 로마노는. 왕가와 귀족들의 개방된 사고방식과 일부 쇄국 정책을 잘못 받아들 이고 비웃어 왜곡 확산시킨 그들의 실책이 발단이 되어, 대대로 퇴 폐와 무자비한 정복에 따른 죄악들을 축적시키고 있었다. 여왕이 집권을 시작했던 로마노 왕정은 겨우 3대에 이르러 와해되 었다. 여왕의 부군과 애인들 중 한 명의 배반으로 아내이자 주군이 었던 여왕은 암살되었고, 정권을 교체시킨 반왕은 명분을 위해 여왕 의 딸과 결혼하여 왕위에 올랐다. 그 후 로마노는 다른 대부분의 나라들처럼 군주(공주)가 아닌 왕자 가 왕관을 물려받아 왕이 다스리는 나라가 되었다. 현재 로마노는 드워프들의 영역이었던 푸워드 산맥 앞자락으로 천 도하여 키 작은 장인들의 영향으로 더해진 부에, 대륙 정복도 서슴 없이 성공하리란 자만심에 빠져 있는 왕족과 귀족들이 득세하고 있 었다. * "진. 책일 뿐일 거 에요. 모두 그런 책을 읽고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을 거 에요." "진. 블루님의 말씀이 맞을 겁니다. 설마. 모두가 타락했을 리는..." 진은 책장 앞 넘어진 의자를 세우고 앉아 엘프와 기사를 찡그린 얼 굴로 쳐다보았다. "문학이란. 책이란. 시대와 사람들의 인식을 대변해. '가치관'이야. 이 책들은 '권유'나 '상상'이 아니야. 소설이란 현실을 참고로 해. 단 계 없이 완벽한 '공상'이란 창작 될 수 없어. 요양하면서 보았던 논 문 식 서술 식이었던 책들과 달랐어. 문학이 발전되어 있는 곳이야. 문학은 문명. 문화나 다름없지." "진. '발전'이란 단어가 맞는 표현인가요?" 진은 쓴 표정으로 책장에서 튕겨나와 뒹굴고 있는 책들을 내려다보 며 릭의 의문에 답했다. "성문화는 중요해, 릭. 전쟁에 도움이 되지 않는 여자들의, 세상을 좌우지할 반쪽 힘이. 권위적인 남자들의 가치관과 얽혀서 잘못된 방 향으로 단시간에 지나치게 발. 전. 했어. 개인 취향으로 모아놓은 책 이 아니라 숙박업소. 그것도 기득권 층이 드나드는 고급응접실에 버 젓이 기본으로 갖춰진 것들이야. 로마노는 신들도 외면할 곳이 되고 있어." 블루는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냉정한 분석을 하는 진과 그녀의 말의 의미에 릭도 지치는 기분이 되어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거냐, 진. 모두를 교화시키는 것은 신의 힘을 빌린다해도 가능하지 않다. 보아하니 부패했을 것이 뻔한 집권층을 물갈이해 준다고 해도 말단계층과 하층민들까지 단숨에 교화시킬 수는 없을 게 아니냐." 진은 와이즈의 말에 대한 답변을 버릇처럼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는 대답도 표정변화도 없었다. 진은 아랫입술을 만지작거렸다. '언제부터지? 우연인 줄 알았는데...' "와이즈. 곤란을 겪고 있는 타종족이 있다면 돕겠어. 매기와 대니의 엄마를 찾아준다고 약속했으니 그 일을 할거야. 하지만 확인해 보고 정말 구제 불능이라면..." "구제 불능이면. 뭐?" 진은 여전히 속생각을 읽지 않는 와이즈에게 갸웃해 보이며 적당하 다 싶은 답을 했다. "인간이 인간에게 주는 가장 성의 없는 방법을 피력해 주지." "...뭔데요, 진?" "무시. 릭. 무시해 주는 것이 가장 큰 벌이야. 로마노는 가만 두어도 얼마 안가 자멸할 거야. 극한발전은 추락을 불러. 현재 주위에 있는 작은 마을 수준의 영지들은 대부분 제압했을 거야. 그럼 어디로 진 출하지? 남대륙은 지형 상 안되고 동대륙은 아주 험한 것은 아니지 만 진출에 방해 될 푸워드 산맥이 가로 막고있어. 서대륙은 만만치 않은 나라들의 국경이 시작되지." "진. 하지만..." "하지만, 블루. 로마노 수도의 금은 보화들을 싸그리 훑어주겠어. 로 마노령의 사람들은 더 착취당하게 되겠지. 쥐도 궁지에 몰리면 뱀을 물어. 폭동이 일어나게 될 거야. 아주 빠르게. 곳곳에서." "하지만. 희생이 커요, 진." 진은 샌들 끈을 너무 조여 맸나 싶은 기분이 되었다. 다리에 피하 통하지 않는 느낌으로 쥐가 날 것 같았다. "그럼? 릭. 그럼 어떻게 해? 이 도시를 몽땅 물에 잠기게 할까? 태 울까? 이곳의 사람들도 개개인으로 직접 대면해 따지면 충분히 구 제할 사람들일 거야. 죄는 미워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있 지. 난 최악의 경우가 아니면 살인은 고려 대상에 놓지 않아." "저. 진..." "블루. 인간은 태초부터. 이 대륙이 수명을 다해 죽은 땅이 되도록 '전쟁'을 멈출 종족이 아니야. 어느 시대나 어느 나라나 분쟁 없이 평화만 있는 곳은 결코 없어. 하물며 '평등'은 언제까지나 가당치 않 은 꿈일지 몰라. 인간들의 가장 오래되고 앞으로도 계속 될 죄악이 야. 당장 막는다고 해도 매기와 대니 보다 더한 일을 겪을 기회는 언제든 다시 약자들을 찾아 갈 거야...밑 빠진 독에 물 붓기야." 와이즈는 진실 탐지 마법을 쓰지 않고 있었지만 진이 해결책으로 내 놓은 방법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이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 었다. 진은 뭔가 숨기고...회피하고 있었다. "최악의 경우라면? 그러면 어쩔 거냐, 진?" 진은 한숨을 쉬며 식사를 가져왔다는 말과 함께 노크를 하는 여관 종업원들이 들어 올 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확인해 보고 결정할 일이야." 진은 와이즈가 '친구'의 대우 이상을. 혹은 그 이하가 될지도 모를 자리를 간접적인 방법으로 요구하고 있음을 알았다. 110 [15-3] 소돔. 고모라. 히틀러. 릭이 하녀들을 들이지 말라고 했는지 남자종업원만 들어왔다. "불편한 점 있으신가요?" "아니요. 너무 편해서 탈이네요." 두 명의 말끔한 차림의 종업원들은 진의 대답에 미소 띄운 얼굴로 테이블 위에 풍성할 정도의 식단을 차려주고 문 옆에 대기했다. 진은 식사시중은 필요 없다는 말을 하는 릭의 말에 곤란한 표정을 하는 그들을 보고 다시 입을 열었다. "로마노는 처음 와 봐서 이곳 풍습을 잘 모릅니다. 혹시. 팁이 필요 한가요? 아니면 뭔가 하실 말씀이라도?" "네. 레이디. 고급여관에서는 팁을 주시는 것이 원칙입니다만. 생략 하는 경우엔 밤 초대를 받는 것으로 알게 됩니다." 블루는 다시 빨개졌다 하얘졌다했고 와이즈는 재밌다는 표정을 하 다 진의 눈초리에 시선을 천장으로 돌렸다. 릭은 화난 표정으로 가 지고 있던 자루주머니에 손을 넣고 뒤적였다. 진은 일어나 아침이 차려진 블루의 옆자리로 자리를 옮겼다. "앉으세요. 묻고 싶은 것이 있거든요? 팁 외 보수도 따로 드릴게 요." 그들은 귀족 레이디의 존대 말을 의식하며 단정한 동작으로 남아있 는 네 개의 의자 중 두 개에 나란히 앉았다. "저 책장의 책들은 보급 된지 오래 되었나요?" "네? 아니지요, 레이디. 수도를 천도 한 후 우리 로마노는 아주 부 유해졌거든요. 대량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불가능해 귀한 책들이었지 만 지금은 고급여관 정도면 비축할 수 있게 되었지요." 릭은 꺼내 든 금화를 손에 쥐고 안도와 걱정 섞인 한숨을 쉬었다. "로마노에는 엘프나 드워프 같은 유사인종이 많은 가요?" "엘프는 전에는 꽤 있었지요. 주인들이 바깥출입을 제한하는 경우가 많아 잘 볼 수 없었지만, 지금은 몇 명 있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 니다, 레이디." 이번엔 블루가 불안한 표정이 되어 자신의 파란 옆 머리카락을 잡 아당겼다. 진은 그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겨 볼까하는 쓸데없는 생각 을 했던 일을 떠올렸다. "드워프들은 이곳 로마노 시내에 거주하나요? 드워프 작 건물이 많 은 것 같던데요." 대답을 동료에게 미루고 있던 다른 종업원이 말했다. "왕가와 귀족 분들의 의뢰를 받고 건축을 시작했지요. 처음엔 드워 프들이 산지와 인가를 오가며 건물을 짓고는 했는데, 그 욕심 많은 종족이 계약조건이 나쁘다며 행패를 부리고는 해서 시내 출입이 뜸 해졌습니다. 보석가게를 차린 드워프들은 아직 거주하고 있긴 하지 요." 와이즈가 비웃는 미소를 짓는 것을 진은 의식했다. 드워프들은 성실 과 근면을 추구하는 종족이라고 들었다. 깐깐하다지만 확실하다는 그들의 성격 상. 타당한 대우가 있지 않았다는 것이 분명했다. "개선 행렬 같은 것은 없나요? 오다보니 로마노령이 된 영지나 마 을이 꽤 있던데요." "있지요, 레이디. 현 로마노 국왕께서 즉위하신 후론 로마노는 대륙 에서도 가장 부자나라가 되었지요. 개선행렬은 오늘도 있을 겁니다. 축하행렬을 준비하라는 지시를 받았거든요. 성문 밖에서 정비해 있 다 정오가 되면 들어오게 될 겁니다. 축제도 있을 거구요. 안내해 드릴까요?" 자랑스런 표정을 짓는 그들에게 진은 다시 물었다. "전리품들이 어떻게 나눠지고 하사되는지 아세요?" "예? 에. 물론 공을 세운 기사 분들이나 귀족 분들에게 하사되거나 포로의 경우엔 노예시장으로 가게 되지요. 하지만 요즘 들어 개선 행렬이 뜸합니다. 이번엔 보름만에 다시 열리게 되었지요." "모두 노예시장으로 보내나요?" "아. 노예를 구입하시게요, 레이디? 노예시장은 소규모라도 날마다 열립니다. 포로로 막 노예가 된 경우보다 더 나은, 길들여진 상 등 급의 노예를 구입하실 수 있지요." 진은 식어 가는 음식들에서 피어오르는 수증기를 노려보았다. "혹시 다른 나라의 신전들과 이곳 로마노의 신전들 사이에 마찰은 없었나요?" "로마노는 여행자들에게도 관대합니다만, 이단이라며 발칙한 소리를 하는 자들이 가끔 있기는 하지요. 하지만 우리 로마노는 신전들도 골고루 많고 문제가 있다는 사제분들은 없었습니다." 진은 그의 대답이 어긋나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여행자들 사이에 낀 사제들은 수련 여행중의 사제들로, 생사의 여부 가 출신 신전에 일일이 알려질 체계는 갖춰지지 않은 듯 하고. 골고루 있다는 신전들도 정통 이름과 교리를 가진 신전들이 아닐 것이다. 언젠가 동. 서대륙은 북대륙과 남대륙과는 모시는 신들의 이름과 성격이 많이 달라 종교의 영향을 크게 받는 인간들의 문화 도 역시 다르다고 들었었다. 이곳은 남대륙에서 파생 된 나라였고...동. 서 신전들에서는 이곳을 남대륙에 속한 나라로 여기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니면. 이 단으로 외면하여 교류가 차단되어 있는 것인지도. 지형 상 가능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유하지 못한 여행자 들은 며칠 머무르지 못할 물가를 가지고 있고, 돈 좀 있는 방문자들 의 경우엔 죄를 짓고 돌아가는 경우가 다반사일 테니 침묵하거나... 눌러앉을 것이다. "길드 조직은 없나요?" "있지요. 마법사와 용병길드는 명목상이긴 하지만 있습니다. 마법사 들은 특기생이니 길드 소속이 아니라고 해도 대우가 좋지요. 용병들 도 개선 행렬에 끼면 쉽게 기사가 될 수도 있으니 역시 할만한 직 업입니다." 그들도 역시...눌러 앉을 것이다. 다른 한 명이 덧붙여주었다. "하지만 도둑길드 같은 파렴치한 길드는 없지요. 다른 곳에서 흘러 들어 온 길드원이 있다고 해도 잡히면 노예가 될 뿐만 아니라 남대 륙에서처럼 손목이 잘립니다. 보통 담으론 어림도 없지요. 치안은 잘 되고 있으니 걱정 마십시오, 레이디." 진은 잔인한 형벌에 얼굴이 찌푸려졌다. 테이블 위에 올렸던 손을 아래로 내리고 싶은 기분이 들었고, 릭과 블루와 와이즈는 제각각 긁적이거나 찡그리거나 피식 웃었다. 종업원들은 진이 로마노에 상주하기 위해 도시에 대해 묻는 것으로 이해한 듯 했다. "두 분은 노예를 데리고 있지는 않나요?" 그들은 서로 얼굴을 보더니 너털웃음을 지었다. "부릴 수는 있지만. 저희도 일을 하는데 관리가 번거로울 일이 되니 사지 않지요. 그럴 필요도 없고요." 릭이 금화를 준 손을 꿈틀거리며 따닥거리는 소리를 내는 것을 의 식하고 진은 맨 처음 물으려 했던 질문을 했다. "밤 초대를 받는 경우엔 무료 봉사인가요?" "물론 아니지요, 레이디. 하지만 주지 않으셔도..." "로마노에서 두 분의 신분은 무엇이지요?" "네? 평민 종업원이지요. 흠. 따지자면 로마노 수도에서 일하는 평 민들은 모두 귀족가계와 연관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레이디. 종업 원 일을 하지만 노예는 아닙니다." "좋은 곳이네요. 봉사하는 일을 천하게 취급받지 않는 곳이니." 그들은 여행복 차림이긴 하지만 매력적인 목소리의 미인 귀족아가 씨의 뻔한 비웃음을 눈치채지 못하고, 릭이 건네는 금화를 받아들고 밖으로 나갔다. 진은 모욕 받은 표정이 되는 릭과, 힘들어 보이는 블루의 몸짓과, 빤히 쳐다보고 있는 무표정한 와이즈에게 느낀 바를 정리해 주었다. "새로운 소득 없는 확인 절차였어. 보통 몸을 파는 일을 하는 남자 나 여자는 그 일이 좋아서 하는 게 아니야. 생계를 위해 하는 경우 가 대부분이지. 노예 신분이라도 노예가 아니라는 인권에 대한 희망 과 긍지를 잃지 않고 있다면 그들은 노예가 아니고 천하지도 않아. 하지만 그들은 노예야. 향락과 탐욕에 세뇌 된 노예지. 로마노는 귀 족 아니면 노예로군. 이곳에는 하층민들이 없나 봐. 적어도 수도에 선 모두 잘 살아." "수도 외의 로마노는요?" 릭은 계속되는 진의, 귀족 레이디의 품위와는 거리가 먼 내용의 말 에 포기한 듯 한숨을 쉬며 되물었다. "수도. 귀족 계층들을 위해 쥐어 짜지고 있겠지. 로마노령 그리프 마을에서도 소아니에서도 아이들과 노인들이 보이지 않았었어. 볼모 가 된 걸까? 매기와 대니의 엄마는 다른 젊은 아가씨들과 이곳으로 끌려와 있을 거야. 그들은 어디에서 무얼 할까?" "노예가 된다지 않던." 심드렁한 와이즈의 대답에 진은 턱을 긁적이다 일어나서 창가로 갔 다. 좁은 테라스 너머 거리는 부산해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노예가 왜 그렇게 많이 필요하지? 실제 어림되는 인구가 계산에 맞지 않아. 로마노는 수도 외의 도시는 모두 '로마노령'이라고 불러. 로마노는 남대륙과 가까워. 수도가 로마노를 대표하지. 이곳은 기사 가 아닌 전사들이 치안을....어?" 진은 판의 과거. 구경거리로나마 살기 위해 검을 배웠었다는. 죽음의 경기. 단편적인 것만 들어서 미처 떠올리지 못했던... 진은 일행을 향해 돌아섰다. "원형경기장!" * 진은 식어버린 아침식사에 손도 대지 않고-그녀로선 음식을 남기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역시 의심스러워 보여 식기를 들지도 않 았던 일행과 함께 매기와 대니를 데리고. 부디 저녁에 사교장을 방문해 달라는 여관주인, 아니 지배인의 청에 생각해 보겠다고 답한 후 개선 행렬이 지나간다는 수도 검문소와 통하는 로마노의 가장 큰 거리로 걸어갔다. 오전 한산했던 거리의 모습과 달리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왁자지껄한 소리는 커다란 북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시 끊겼다가 번 쩍이는 갑옷과 투구를 쓴 전사들의 행렬이 지나가자 환호로 탈바꿈 했다. 몇몇 여자들의 포옹과 키스를 받는 기사와 병사들과, 줄기를 짧게 자른 꽃송이를 뿌리는 사람들로 거리는 축제를 알리고 있었다. 행렬의 끝 부분에는 나귀가 끄는 수레들이 즐비했고 아이와 여자들 이 분리되어 동물 우리 모양으로 만들어진 이동식 감옥에 갇혀 실 려가고 있었다. "개뼈다귀 같은 것들. 또 염병들을 하네." 주위의 환영과 축복하는 의미의 말과 구별되는 욕지거리에 진은 고 개를 돌려 원인을 찾다가 사람들 틈에 가려진 난쟁이를 발견했다. 그는 보석 모양의 커다란 돌이 상점 문 옆에 놓여 있는, 작지만 우 아해 보이는 건물 앞에 서서 걸걸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구리빛 피부에 굵직굵직 한 주름진 얼굴에, 덥수룩한 수염이 가슴께 까지 덮고 있는 타종족. 드워프였다. "야. 이 못생긴 땅달보야. 입 조심하라고 안 그랬냐? 엉?" "시끄러. 더러운 인간 여편네야. 하던 일이나 하셔!" 이웃 상점 여주인에게 걸쭉한 욕설을 몇 마디 하더니 그는 서 있던 상점 앞에서 몸을 휙 돌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빚쟁이에게 그 쭈글쭈글하고 땅달만한 몸을 팔게 생긴 주제에 꼴 에 자존심은 아직도 남아있나 보네. 퉷. 확 망해버려라." 대니를 안고 있다 안절부절 하는 블루에게 진은 한숨을 쉬어 보이 며, 와이즈에게 흘끗거리는 일 그만두고 그냥 진실탐지 마법을 쓰라 고 말할까 말까 생각했다. 행렬의 끝까지 눈을 떼지 않고 있던 매기가, 잡고 있던 릭의 팔을 크게 흔들며 주 행렬이 지나갔음에 흩어지는 사람들 틈에서 목청을 높였다. "기사님. 엄마에요. 대니. 엄마야!" 수도 성문 앞으로 가깝게 워프 한 탓에 더 뒤쪽 떨어진 자리에서 정비 중이었던 로마노의 승전 병사들을 만나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 다. 예전과 달리 '공'이 될만한 큰 수확이 없어, 그들은 일정한 양의 전리품과 회군하는 병사들이 모이길 수도 밖에서 기다렸다 입성을 했다. 결과적으로 매기와 대니의 모친과 마을 여자들과 아이들은 오 는 길에 험한 일을 당한 경우도 있었지만, 목숨을 부지할 마지막 기 회를 얻게 되었다. * 진은 아이들을 데리고 다닐 수 없어, 블루에게 맡겨 돌보게 하기 위 해 릭을 대동해 숙소로 돌려보냈다. 만약을 위해 진은 그들이 숙소에 도착해 릭이 방을 나서면 결계를 쳐주고 돌아올 것을 와이즈에게 다시 부탁했다. 와이즈가 이동해 사라지자 진은 병사들에게 밟혀 찌그러지고 엉망 이 된, 환영에 쓰인 꽃송이들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지나치는 남자들 의 시선을 받아가며 길가에 서 있었다. "언니. 돈이 떨어졌어요? 우리 집에서 재워 줄까요?" 진은 소녀를 돌아보았다. 옅은 보랏빛이 도는 예쁜 머리색에 남색 눈동자를 가진 소녀였다. 보라색 눈은 마족으로 이해되는 곳에, 보라색 머리... "저. 마족 아니에요." "그래. 아닌 것 같다." "여행 경비가 떨어졌어요? 돈 안 받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요. 저랑 갈래요, 언니?" "호의 고마워. 하지만 친구를 기다리고 있어." 소녀는 보조개를 만들며 웃어 보였다. 귀염성 있는 외모에 키도 작은 편에 속해서 성년이 되었는지 아닌 지 구별되지 않았고, 순진하게 들리는 말투로 더욱 나이가 짐작되지 않았다. 입고 있는 옷은. 사제복처럼 발등까지 오는 흰색 겉옷에 남 색 허리두르개를 하고 있었다. "사제니?" "견습이에요. 여신을 모셔요. 로마노에 친구가 있나요? 친구 만나러 왔어요?" 진은 한숨을 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로마노에서 모시는 여신의 종류가 뭐가 있더라... "글세. 여기서 친구를 만들 수 있을지 모르겠어. 로마노의 원수가 되러 온 것 같아." 소녀는 하늘이 무너지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처럼 대꾸하는, 드물게 천연 곱슬머리를 가진 예쁜 아가씨의 농담에 맑은 웃음소리를 냈다. 동료로 보이는 젊은 여사제와 남사제가 건너편에서 그녀를 부르며 손짓을 했다. 가벼운 인사말을 남기고 뛰어가는 소녀에게 진은 지나 치듯 물었고, 듣지 못했을 줄 알았던 그녀는 대답을 했다. "...넌 행복하니?" "응. 언니." 진은 와이즈가 곁으로 다시 워프해 왔지만 쳐다보지 않았다. "...왜 그러냐?" "아무것도 아니야, 와이즈. 릭 오면 나눠서 정보를 모아보자." 와이즈는 바삐 걸어오는 인간 기사에게 고개 향하는 진의 굳은 얼 굴에, 답답한 느낌을 받으며 구겨진 소매 끝을 잡아당겼다. * 진은 타종족에 관한 사항과 상류계층에 소속된 노예들을 파악하는 일을 와이즈에게. 수도의 유명 귀족들과 왕족들에 대한 사항을 릭에 게. 자신은 거리와 노예시장과 원형경기장을 알아보는 일을 분담하 고 다시 만날 장소를 지정한 후 흩어졌다. 그리고 진은 낮 시간 내내 로마노 시내와 시장과 관광명소 등등을 잦은 '초대'를 받으며 돌아다녔다. 로마노는 생각보다 덜하기도 하고 더하기도 했다. 진은 가려지고 포 장된 죄악들을 충분히 확인했다. 매기와 대니의 엄마 외 마을 사람들은 1차로 수도 안쪽에 커다랗게 지어져 있는 웅장한 원형경기장 옆 부속 건물 같은 곳으로 보내졌 고, 그곳에서 분류된다는 것을 알았다. 아이와 여자들은 건강하고 외모가 출중한 경우 바로 근처에 합법적 으로 운영되고 있는 노예 경매가 이뤄지는 2층으로 지어진 긴 직사 각형 건물로 옮겨졌다. 나머지 노예들은 원형경기장으로 들여보내져 전사들의 죽음의 경기 이전이나 중도에, 굶주린 맹수들의 쫓김을 받으며 죽어 가는 것을 구경 당하거나...때때로 사소한 죄를 진 노예들은 인족 사냥감으로 희생당한다는 것을 알았다. 원형경기장으로 간 노예들 중 괜찮은 편으로 구분된 여자들은 노예 전사들의 위안용이나 경기장 지하의 거처에서 잡일을 했고, 튼튼한 편인 남자아이들은 경기를 위해 검을 배워야했다. 수상 건물이 없는 강변에 이르러 노을이 지고 있는 로마노의 강을 바라보며 서있던 와이즈는 터벅거리며 약속지점으로 돌아오는 진을 돌아보았다. "엘프가 몇이나 있었어, 와이즈?" "구제가 가능한 엘프는 없었다, 진." "어떤 상태인데?" "자결이 가능하지 않게 마나도 차단되고, 약물에 중독되어 인지를 거부하고 있는 형편이지. 드워프들은 자녀들이 볼모로 잡혀있거나 사기 당해 빚을 지고 남아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귀족들의 노 예들은 네 말대로 세뇌된 경우를 제외하면 모두 이를 갈고 죽지 못 해 살아 있는 형편이고." 진은 릭이 가져 올 소식도 예상과 별다른 차이가 없을 것이라는 것 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강은 폭이 넓은 것은 아니었지만 나룻배로 오가게끔 간격을 두고 운치 있게 보이는 작은 선착장들이 만들어져있었다.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할까, 와이즈?" "네가 신인 줄 아냐? 모두 구해 보겠다는 생각은 버려라. 자만이 다." 진은 푸석거리는 거친 모래를 밟고 있는 샌들 끝으로 고개를 떨궜 다. "하지만. 그래도. 살 가치 있는 사람이 더 많을 거야. 그렇게 믿고 싶어." 와이즈는 소매에 손을 집어넣었다. "할 수 없는 일은 안 해도 될 거야. 난 도저히 못하겠어. 우리가 나 서지 않는다 해도 얼마 못 갈 것 같아. 계기만 만들어 주고 떠나자, 와이즈. 도와 줄 거지?" "돕지 않았던 적이 있었냐?" "고마워, 와이즈. 부탁만 해서 미안해." "......" 해가 넘어가면 숙소에서 만나기로 했던 릭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진은 와이즈와 함께 달빛으로 푸르게 빛나는 강변을 걸어갔다. * 진은 지배인에게 피곤하다는 이유를 대고 파티가 열리고 있는 1층 사교장 방문을 미리 거절하고 5층으로 올라갔다. 릭은 와이즈가 블루의 결계 바깥쪽에 이중으로 걸어놓은 결계마법 을 블루의 것으로 이해하고 응접실 문 밖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진은 걱정과 희망으로 물어오는 아이들에게, 친구들과 엄마와 마을 언니들을 곧 만날 수 있게 될 거라는 약속과 위로를 해주고 기다려 줄 것을 당부했다. 릭은 알레르기 반응이 있는 일행이 있다는 말로 둘러대고, 문제성 없을 음식으로 저녁식사를 가져 올 것을 종업원에게 지시했다. 진은 응접실에 자리하고 있는 일행들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씻기 위 해 화장실과 따로 구분되어 있는 세면실로 들어갔다. 목욕 욕조가 있었다. 부유한 상위 귀족저택에서 드물게 보았던 욕조보다 훨씬 크고 잘 만들어진 욕조에 물이 가득 담겨있었다. 드래곤의 레어에도 없던. 몇 천 년 전엔 있었을지 몰라도 사라졌다 다시 생기고 있는 듯한 문명의 부산물. 와이즈는 700년의 세월을 레어에 틀어박혀 인간들의 풍습에 어둡다 고 했었던 말에 비춰, 그 같은 존재도 누릴 기회가 드물었을 문명의 혜택이었다. 반들거리는 돌 바닥 위에 서서 진은 고급비누로 머리를 감고 목욕 을 하며 생각했다.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장례라도 치러졌었을까? 너무나 많은 사 람들이 죽었다...진은 우울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쿡쿡 찔리는 심장 의 통증을 계속 느끼고 있었다. 낮 동안 땀을 흘리며 뛰어다녔던 탓에 시원하게 느껴지는 물로 비 누 거품을 헹궈내던 진은. 문득 육감. 본능이 꿈틀했다. 뭔가. 놓친 것...아니, 뭔가...깨. 달. 았. 다. 진은...떨리는 손으로 쓰고 놓아두었던 한 주먹 크기의, 색소까지 넣 었는지 원래 색인지 구별이 안 되는 고운 빛깔의. 이제까지 어떤 나 라의 귀족 저택에서 썼던 것보다 질이 좋았던 그 비누를 집어... 세면실 세면대 옆 작은 간이 찬장에는 머리를 다듬는데 쓰는 헤어 젤 같은 것도 술잔처럼 생긴, 뚜껑 있는 그릇에 담아져있었다. 진은 역시 선명한 붉은 색 헤어젤의 뚜껑을 열어서 품질 확인을... 와이즈와 블루와 릭과 아이들까지도. 방음이 잘된 드워프 작 여관 건물 응접실에서, 옆방을 근원으로 또렷하게 한순간 들린. 악! 하는 비명소리를 들었다. 잘못 들었나 싶어 갸웃거리는 릭을 제치고 와이즈는 진의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블루도 놀란 얼굴로 따라왔다. 진은 거칠게 세면실 문을 열어제치고 있었다. 하얗게. 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녀는 공포에 질려있었다. "씻어 줘! 씻어 줘! 정화시켜 줘, 와이즈!!" "왜 그러냐, 진!" 진은 물기를 닦던 중이었는지 곧게 펴진 검푸른 머리카락을 어깨에 휘감고, 얇고 큼직한 목욕 수건으로 몸을 대충 가리고 목욕탕에서 튀어나오다 턱에 걸려 넘어졌...와이즈가 받았다. "씻어 줘! 어서! 더러워! 끔찍해! 혐오스러워! 악." 진은 부들부들 떨며 비명 섞인 울음을 터뜨렸다. 로마노는 원형 경기장에서 죽어 나오는 노예들과 정복지에서 끌려 오다 도착해 죽은 포로나 팔리기 전 노예로 길들여지는 과정에서 생긴 시체들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한 마법사의 호기심으로 실험이 있었고...고품질의 비누와 머리 다듬는 젤과 염색약을 만드는 재료로 인간의 육신에서 뽑아 낸 지방이 단연 최고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시행했다. 그 후 정복지에서 쓸데없는 인력인 노년층이 우선적으로 차출되었 고, 로마노령과 수도 내에서 다른 나라들처럼 절대 없어지지 않던 거지나 노약자나 부랑아나 죄인 등등이 생포되거나. 관리들의 아량 으로 빵을 먹기 위해 모여들었다가...집단 살해되곤 했다. 정복지가 늘어갈수록 포로들과 경기장에서 죽어 나오는 노예들로 재료는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고, 사체는 유용하게 쓰인 후 버려지 고 있었다... 로마노는 미인들이 많은 곳이었다. 111 [15-4] 진 리스트 그 날 로마노는 초저녁부터 개선 행렬의 연장으로 다른 날보다 더 화려하고 흥청망청한 축제가 열렸다. 왕성 연회장에서는 승전을 치 하하는 연회가 열렸고, 곳곳의 사교장에서는 가면 무도회와 파티가 열렸다. 진은 떨림이 가시지 않아 시트를 뒤집어쓰고 침대 위에 웅크리고 있었다. 매기는 허락이 없어 방에 들어오지 못하고 있다가 저녁식사 가 왔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대니와 들어왔다. "저. 저. 아파요? 아프세요, 아가...언니?" "응. 매기. 아파. 조금 쉬면 괜찮을 거야. 대니랑 먼저 밥 먹고 잘 래?" "우린 걱정 마세요, 언니. 대니 데리고 소파에서 잘게요. 푹신했어 요." "그래. 고마워, 매기." 주근깨 투성이의 소녀는 은인이자 예전이라면 쳐다보지도 못할 고 귀한 신분을 가진 귀족아가씨의 상처 입은 얼굴을 알아보고, 위로 말까지 하고는 동생의 손을 잡고 응접실로 물러났다. 진은 여러 번 여러 번 정화마법을 시술 받고 블루의 정령으로도 여 러 번 씻고 말리고, 그만해도 된다는 와이즈의 짜증 섞인 말에 주눅 든 것처럼 기가 죽어서 내내 침묵하고 있었다. 남매가 나가자 진은 일행에게 다시 입을 열었다. "가서 저녁 먹어. 걱정시켜서 미안해." "진..." 진은 베개에 얼굴을 처박고 있다가 고개를 들고 벽 쪽에 놓여진 원 형탁자에 앉아 있는 일행을 돌아보았다. "뭐야. 옷도 못 입게 지키고 있으면 어쩌라는 거야?" 릭은 헛기침을 했고 블루는 하얗게 질려 있던 얼굴에 비로소 핏기 가 조금 돌았다. 와이즈는 한숨을 쉬었다. "진. 실프 불러드릴까요?" "아니. 소란 피워서 미안해, 블루. 걱정 안 해도 돼." "진. 서대륙 가까운 다른 나라에라도 도움을 청하는 것이 좋겠습니 다. 신전들에서도 모르고 있는 게 분명해요. 이런 도시를 그냥 둔다 는 것은 도리가 아니에요." 기사는 잔뜩 찌푸리며 말했고 진은 다시 베개에 이마를 박았다. "릭은 비누 쓸 때 누가 뭘로 어떻게 만들어 파는지 알아보고 써? 아니지? 대부분 모르고 있는지도 몰라. 눈치챈다고 해도 이미 습관 이 된 경우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될 수도 있고. 남들도 다 쓰 니 죄악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걸 거야." "그렇다고 해도. 몰라서 하는 일이라고 해도 때로 죄가 되어요, 진." 진은 다시 질린 얼굴로 말해오는 엘프에게 따금거리는 눈을 돌리며 일어나 앉았다. "그래. 맞아. 다른 나라를 끌어들일 것 없다는 말이었어. 미안해, 블 루. 이곳에서 엘프는 모르고 짓는 죄가 아닌 인간의 죄에 최악으로 희생됐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게 되더라도 너무 상심하지마. 갚 아...줄게." 엘프는 눈물이 나오는 것을 막으려고 양 눈 사이를 눌렀다. "진. 어떻게요? 어느 선에서 어떤 식으로 갚으시려고요?" "로마노의 이름은 대륙 지도에서 사라질 거야. 릭." 블루는 말문이 막힌 기사의 옆자리에서 일어나 마지막 보루 마냥 시트를 똘똘 말고 있는 진의 앞으로 갔다. "진. 진이 하려는 일은 카르마(업보)에 해당되지 않아요. 인과응보에 따른 형벌은 순리입니다. 진을 믿어요. 진이야말로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가장 강한 약자잖아요?" 진은 고개를 떨궜다. 블루는 인간의 예의를 버리고 주위를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엘프로 돌아갔다. 그는 위로와 용기가 필요한 이. 자신 이 선택한 이성을 위로하기 위해 옆에 앉아 그녀의 머리를 끌어안 고 다독였다. "괜찮아요. 저도 도울게요, 진. 울지 마세요." 와이즈는 복잡하고 미묘한 기분에 빠져있었다. 진은 다시 새로운. 지켜봤던 '그녀'로선 예상하지 못했던 표정과 반 응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는 인간인 그녀와 드래곤인 자신의 차이 를 실감하고 있었다. 세계가 달랐다. '감정'이란 가진 대상에게 결코 똑 같은 방법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인간은 약하다. 그녀도 역시 약 했다. 그와 달랐다. 그녀를 얻으려 했던 일은 어떻게 해도 '유희'로 정의 될 수밖에 없는 일일지도. 그녀를 얻지 못할지도 모른다. 가깝게는 드래곤인 자신과 비교해 차라리 훨씬 인간에 가까운 엘프 가 더 그녀의 상대로 적절했다. '기억을 지울까?' 인간기사가 진과 그녀를 안고 있는 엘프에게서 눈을 떼고 자신을 쳐다보는 것을 알았지만 와이즈는 모른척했다. 릭페르는 헛기침을 하고 일어나 응접실로 먼저 가 있겠다고 말하고 방을 나갔다. * [그만 안 떨어져?] 진은 블루가 멈칫하는 것을 느끼고 그의 팔에 대고 있던 이마를 들 고 눈을 비비며 말했다. "블루. 가서 먼저 저녁 먹어. 좀 쉬었다 갈게." 블루는 머뭇거리며 팔을 풀고 진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괜찮아. 신경을 너무 써서 그래. 와이즈랑 의논 좀 하고 한숨 자고 갈게." 블루는 무표정한 얼굴의 마법사를 잠깐 돌아보고 방을 나갔다. 진은 엘프의 목소리를 머리로 들었다. '거래는 하지 마세요, 진.' 와이즈는 음성전달 마법을 쓰고 나가는 엘프의 뒤통수를 싸늘한 눈 으로 쳐다보았다. "거래라니? 거래를 해야해, 와이즈?" "...뭘 해주길 바라느냐에 따라 다르지 않냐? 악룡 소리는 듣고 싶지 않다." 진은 피곤에 절어지는 기분이 되었다. "와이즈. 드래곤은 파괴의 힘을 쓰는 일에 카르마(업보)가 따르지 않는 거야?" "모르지." -드래곤에게 업보의 힘이 따른다해도 영향을 주면 얼마나 주겠는 가. 와이즈는 하지만 죽은 다음이라면 모를 일이지 않나. 하는 생각 을 잠깐 했다.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그녀의 영향인가? "본체로 돌아갈 필요는 없어, 와이즈. 하지만 네 힘이 필요해." 와이즈는 의자에 기대고 있던 등을 떼고 탁자에 손을 올렸고 진은 대답 없이 탁자를 톡톡 두드리는 와이즈의 손가락을 의식했다. "와이즈. 그냥 진실탐지마법 쓰지 그래?" "...상관없다면 쓰지." "그럼 쓰지 말던지." "안 쓴다." "그냥 써." "...죽을래?" '죽여라. 욕심으로 똘똘 뭉친 도마뱀아. 흑심을 못 버리는 어리석은 중생아. 성형미인아...' 반응 없는 그를 쳐다보던 일을 그만두고 진은 소란스러운 소리가 올라오는 열려진 창으로 고개를 돌렸다. "유희가 이젠 재미없어?" "재미없어지고 있다." "드래곤은 면역력이 높은가봐?" "그럼. 높지, 낮겠냐?" 진은 너무 씻어대서인지 머리가 막 가려워졌다. "그래서? 도와주겠다는 거야, 못 도와주겠다는 거야?" "도와 준다고 하지 않았냐. 다만." "다만. 뭐?" "시험에 관계되었던 네 나라의 일도 아닌 일에 무료수고는 더 이상 못해주겠다." 진은 억지를 부리고 있는 4000살 먹은 가짜인간 마법사를 향해 눈 썹을 모았다. '저게 반 신적 존재라고?' "...죽을래?" "탐지마법 썼어?" "안 썼다. 내가 바보냐? 마법 못쓰는 아무라도 흉보는 줄은 알겠 다." 진은 한숨을 쉬며 가렵던 머리를 긁적였다. "알았어. 보수 줄게. 도와줘." 와이즈는 너무 쉽게 나온 대답에 눈을 굴렸다. 확실히 해두자는 생 각에 다시 입을 열려던 그는 진이 시트로 감싸고 있던 어깨를 드러 내고 일어나 걸어오자 하려던 말이 쏙 들어갔다. 진은 와이즈의 무 릎 위에 걸터앉더니 빤히 쳐다보며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보수가 있으면 일거리가 더 늘텐데. 그래도 돼?" "...뭘 할건데?" "리스트를 작성할거야. 그리고 나머진 죽일 거야." 와이즈는 왜 자신이. 고작 인간여자 하나가 행동과 전혀 다른 내용 의 말을 하는 것에 등골이 서늘해져야하는지 의심스러워졌다. "도와 줄 거야, 말 거야?" "...알았다." 탁자에 올렸던 한 손을 내려 허리를 잡으려던 와이즈는 진이 무릎 에서 쓱 내려가자 멈칫했다. 그녀는 되돌아 걸어가며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후불이야, 와이즈. 로마노의 보석을 죄다 가지게 해줄게. 한 시간 후에 깨워 줘." 와이즈는 하찮은(?) 인간 계집애에게 한방 먹었다는(X)...속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동안 로마노 시내에서 죽은 노예와 죄수들의 사체를 어 떻게 처리했는지 알아봐 줘." 그는 창 쪽으로 모로 누워 잠을 자려고 폼을 잡는 진의 뒤통수를 뚫어지게 노려보다 관자놀이를 꾹꾹. 아주 꾹꾹 눌렀다. * 블루가 잠을 깨워주었다. 진은 푸른색 평상복에 검은색 가운 식 겉옷을 입고 일행이 기다리 고 있는 응접실로 들어갔다. "알아냈어, 와이즈?" 그는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하지도 않았다. "저녁부터 드세요, 진. 아침 이후 아무것도 먹지 않았잖아요." "응. 고마워, 블루." 진은 블루가 챙겨둔 저녁을 소파에 앉아 바삐 먹어치웠다. 쌀쌀맞거나 콕콕 쏘는 시선이 계속 됨에 진은 소파에서 잠들어 있 는 아이들을 방으로 옮겨주도록 릭과 블루에게 부탁했다. 대니를 안 고 릭을 따라가던 블루는 문을 닫아주었다. "보석 싫어하는 드래곤도 있었어, 와이즈? 보수가 적어?" "사기 당한 기분이라 몹시 불쾌하다, 진." "때와 장소를 가려 줘. 고양이 매너는 아니겠지? 로마노를 벗어나면 생각해볼게." "......." 릭이 문을 열고 돌아오자 진은 의자에 앉아 다시 물었다. "알아냈어?" "...며칠에 한번 검은 천을 씌운 수레들이 한밤중이나 통금시간에 성 문 밖으로 나간다더라." "에? 그 얘긴 저도 들었는데요, 리툰 마법사님. 쓰레기 처리이야기 하시는 겁니까?" "아닙니다, 릭페르님. 경기장이나 노예시장 지하에서 죽은 사체처리 에 관해 알아보다 연관이 있는 것 같아 하는 말입니다. 쓰레기는 날 마다 내다버리지만 천을 씌우지는 않지요." 릭과 뒤따라 들어 와 자리에 앉던 블루는 얼굴을 찡그렸다. "포로들이 한꺼번에 쏟아지던 예전에는 살아있는 죄수나 노예들도 연행되어 함께 나간 듯 합니다. 성문지기 일을 어느 정도 한 자는 내용물을 알고 있는 눈치였습니다." "왜 화장시키거나 매장하지 않은 거지요?" "릭페르님. 화장에는 나무가 많이 들고 재도 많이 날립니다. 땔감으 로 쓸 나무가 넘쳐나지는 않을 테니 비누재료에 쓰일 재의 양 정도 만 태웠겠지요. 매번 땅을 파는 일은 번거롭고 역시 인력 낭비이기 도 할 테니까요." 말을 잃은 기사 쪽을 보고 있었지만 진은 옆자리에서 블루가 얼굴 을 쓸어 내리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오다가 무덤 같은 것은 보지 못했어. 멀리 갔었을까? 아니면..." "로마노는 강이 있고 호수가 있었지 않냐." 진도 블루처럼 얼굴을 쓸어야했다. 개전 이후. 로마노 로슬로스 왕 의 즉위식 후 천연 수도 성벽이 되고 있던 로마노 호수는...수장 터 가 되었나 보았다. 진은 물 속에 가라앉아 쓰레기에 섞여 썩고 있을 수많은 주검들의 모습이 상상되는 것에 소름이 끼쳤다. 도시를 가로지르던 강의 폭이 그다지 넓지 않았었지만 아래쪽에 있 던 호수는 언뜻 보기에도 꽤 커 보였다. 하지만 그래도 물은 더러울 것이고 그 불결한 물은 다시 강이 되어 흐르고 있을 것이다. "당장 시작해야겠어. 빠질 사람 지금 말해." 사람은 릭 뿐이었지만 물론 빠지겠다는 이는 없었다. 진은 계획을 말했고 릭의 불가능하지 않느냔 우려의 말에 딱딱한 투로 일축했다. "무조건 성공시킬 거야. 시간을 들일 수 있다면 좀 더 꼼꼼하고 확 실하게 이 빌어먹을 도시를 뒤집어서 물 먹여 줄 수 있겠지만. 난 하루도 더 못 있겠어. 차마 못하겠다면 빼줄게, 릭." "절 빼실 생각은 하지도 마시죠, 진." 진은 일을 분담하고 아이들이 잠들어 있는 방에 결계를 치게 하고 축제가 한창인 밖으로 나갔다. 노예 팔찌를 한 블루와 릭을 함께 보 내고 진은 와이즈와 낮에 보았던 보석가게의 드워프를 찾아갔다. * 솔버그는 꼴 보기 싫은 인간들의 아니꼽고 더러운 축제 중에 또 취 객이라도 들어오게 될까봐 일찌감치 가게문을 닫았다. 그는 다른 인간들의 상점과 달리 상품이 진열되지 않은 좁은 가게 안, 바른편에 세워져있는 나무 칸막이 앞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의자 에 앉아 있었다. 두 걸음 옆에 굴러다니는 통나무를 흘끗거리던 그 는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 "꺼져라. 글도 모르는 무식한 것들아. 영업 끝났다는 거 안 보이 냐?!" 진은 와이즈를 말리려했지만 그는 화풀이 할 상대를 찾고 있었는지 잽싸게 닫힌 상점 안으로 위프해 버렸다. "내가 무식하다고?" 솔버그는 불의 정령 샐러맨더가 희미하게 불을 밝히고 있는 어둔 실내에 갑자기 나타난 마법사 때문에, 뒤로 벌렁 넘어지다 칸막이에 부딪혀 제자리로 돌아왔다. "너, 뭐냐! 이 도둑놈이...윽." "와이즈! 협박하지마. 가만 안 둬. 문만 열어!" 진의 협박하지 마라는 협박의 말에 와이즈는, 대롱대는 드워프의 멱 살을 잡고 있지 않던 손을 휘저어 문을 열어제쳤다. 진은 들어와 문을 닫고 내부를 돌아보았다. 붉은 색 도마뱀이 벽을 기어다니고 있는 내부는 붉은 조명을 받고 있었다. 보석상점에 보석 은 없고 도끼 몇 개만 벽에 붙어 있는 도끼걸이에 걸어져있었다. 아 니, 통나무 하나도 흙바닥 위에 뒹굴고 있었다. 썩어 가는 나무에 버섯이 돋는 것처럼 작은 꽃 두 송이가 통나무 위에 피어... "와이즈. 내려 놔. 나이든 분에게 무례하게." "나이든...뭐?" "에. 어쨌든 내려 놔. 우린 부탁을 하러 왔잖아." 와이즈는 주름진 얼굴이 하얗게 질린 드워프를 툭 놓고 그가 앉아 있던 하나밖에 없는 나무의자 위에 앉아 팔짱을 꼈다. "콜록. 드. 드래곤께서. 왜...?" 안면에 쏟아지던 살벌한 기운이 거둬지자 솔버그는 경직된 몸을 추 슬렀지만 짧은 다리가 마구 떨려오는 것은 막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성격이 삐뚤어져서 그래요. 전 진이라고 합니다. 성함 이...?" "푸워드의 솔버그다...만. 무슨 일로?" "부탁이 있어서 왔습니다, 솔버그님. 의뢰를 하려고요." "거절한다!...에. 무슨 의뢰를?" 진은 처음 대화하는 유사인종 드워프에게 간단히 요점만 말했다. "썩을! 내가 뭐 하러...에. 에..." 진은 이마에 힘줄이 솟았다. "와이즈! 너 국왕에게 가 봐!" "갔다오는 동안 이야기 끝내라, 진." 와이즈는 간격 두어 땅꼬마 드워프를 노려보던 일을 멈추고 앉아있 던 의자에서 사라졌다. 솔버그는 비틀거리며 되찾게 된 자신의 의자 에 앉았다. -맙소사. 드래곤이. 그 망할 생물이 없어 살기 좋던 푸 워드 산맥을 눈앞에 두고 깜박 죽을 뻔했다... "저게 어떻게 4000살이나 먹은 행동일수가 있담. 너무 많이 먹어서 그러나?" "너, 뭐냐! 뭔데 드래곤을 부리냐?!" "인간입니다, 솔버그님. 로마노를 부수기 위해 드워프 장인들의 도 움을 받고자 찾아왔습니다." * 로마노 로슬로스 국왕은 연회석 자리에서 용변을 보기 위해 양팔에 매달려있던 애인들에게 농담을 하고 일어나 전용화장실로 호위 받 아 들어갔다. 궁성은 화려하기 이를 데 없었고 부분부분 드워프들의 손길이 거쳐 우아한 장식이 돋보였다. 국왕의 간이화장실은 보안을 위해 이중 구조로 볼 일을 보는 곳도 넓었지만 전체로 따져도 웬만 한 룸 못지 않게 크고 화려했다. 시녀들의 시중으로 손을 씻고 호위들이 지키고 있을 바깥쪽 화장실 로 나가려던 로슬로스는 안쪽 문 앞에 홀연히 모습을 드러낸 금발 머리 마법사와 마주치게 되었다. 뒤에서 허리를 굽히고 있는 시녀들 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것에 그는 궁성에서 미처 보지 못한 마법사인가하고 누구냐고 물으려다, 그의 눈빛이 노랗게 빛나는 것 을 목격했다. 그리고 한순간 의식을 놓쳤다. "국왕폐하?" 로슬로스는 멀뚱히 서 있다 시녀들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뭔가 이상한 장면. 아니 목소리를 들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그는 술기운에 현기증이 난 것으로 알고 잊은 것이 있는지 물어오 는 시녀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오. 그래. 잊은 것이 있지." 그는 약소 귀족가문의 레이디 신분일 그녀들을 끌어안고 애교 섞인 저항을 헤치고 드레스의 허리두르개를 풀며, 내일은 원정을 준비하 고 있는 신하들과 기사들의 노고를 치하하는 의미로 어느 때보다 흥 미진진 할 경기를 직접 주체해 보고자 마음먹었다. * "내가 왜 인간들의 일에 나서줘야 하냐?" 솔버그는 드래곤 아이의 공포에서 벗어나자 한쪽 다리까지 떨며 진 의 의뢰 내용에 퉁명스런 어조로 반박했다. "로마노에 불만이 많지 않으세요? 산으로 돌아가실 생각이 없으세 요?" "불만 정도가 아니지. 하지만 너도 인간이다. 인간들끼리 그 잘 돌 아가는 간교한 머리로 지저분한 권력 투쟁을 하는 일에, 내가 왜 도 움을 주어야하는데?" "권력 때문이 아닙니다. 전 곧 이곳을 떠날 거 에요. 설득하고 있을 시간적 여유가 많지 않습니다, 솔버그님. 의뢰 비로 인질들의 자유 와 드워프 장인들의 밀린 일삯과 피해보상금까지 따르게 될텐데 싫 으세요?" 솔버그는 새파랗게 어린 인간여자를 노려보며 거친 자신의 수염을 뭉퉁한 손으로 잡아당기고 꼬았다. "브레스 한방이면 되지 않냐?" "그래도 되나요?" "...드래곤의 브레스도 맘대로 할 수 있단 말이냐?" "못할 건 없겠지요." 솔버그는 다리 떠는 것을 멈추고 깍지를 꼈다. 파란색 옷 위에 검은 색 간편한 겉옷을 걸치고 작은 가죽가방을 어깨에 매고 있는 인간 여자는 무슨 이유인지, 드워프들의 주거 공간 비슷하게 만드느라 일 부러 깔아놓은 흙바닥 위에 주저앉아있었다. 덕분에 항상 인간들을 올려다보아야 했던 그로서는 내려다보고 있는 형편이었다. "여긴 나와 내 동료들이 직접 지은 건물이 많이 있다. 아무리 인간 들이 꼴 보기 싫어도 내 손으로 만든 걸작들이 사라지는 것은 싫 다." "그대로 둘게요. 원하신다면 가지셔도 되고요." "필요 없다. 우린 침대를 사용하지 않으니까. 더러운 일에 쓰이는 꼴이 보기 싫은 거다." "성실한 사람들이 아끼고 가꾸며 살도록 해 볼게요, 솔버그님." 네가 뭔데? 하고 묻고 싶었지만 솔버그는 자신의 멋없는 손톱과 마 디 굵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동안 인간들에게 얼마나 착취당하고 속아왔던가. 개인으로 상대하면 택도 없을 히멀건 얼굴의 키만 큰 얼간이들에게 그들은 원칙을 깨고 거래를 시작했다가 꽤나 오랫동 안 후회하고 긍지를 더럽혀야했었다. 그는 드래곤과 함께 오지 않았다면 욕설이나 뱉어주고 엉덩이를 걷 어차(?) 쫓아냈을 인간여자의 귓불에 눈이 갔다. 하고 있는 진주 팔찌는 형편없었지만... "그건 어디 드워프에게 산 거냐?" "귀걸이요? 선물 받았어요. 친구의 유품이에요. 드워프 작 아니에요, 솔버그님." "거짓말 마라." "거짓 아닙니다. 인간이 만들었지요. 이곳 인간들은 못 만들지만요." 솔버그는 믿지 않으려 했지만 발 밑으로 기어오는 샐러맨더를 샌들 끝으로 툭툭 건드리는 진의 행동에...믿어야했다. '불의 정령을 보는 인간일세.' "그건 쌓아 올리며 인간노예들이 많이도 죽었지. 하지만 기초는 우 리가 세웠었다. 네 계획은 절대 불가능하다만 가능할 수도 있겠지. 드래곤을 끼고 있으니." 진은 피식 웃었다. "하지만 조건이 있다." "뭔가요, 솔버그님." 드워프 솔버그는 바닥에 뒹굴고 있는 통나무를 턱짓했다. "저기 핀 꽃들 중 진짜를 가려내 봐라. 그럼 오늘 밤 안에 일을 끝 내주마. 보는 눈이 없는 자에게 우리 드워프는 의뢰 받지 않는다." * "솔로몬의 후예셨어요?" "뭔 말이냐. 솔로몬은 내 아들이다." "쿡." 진은 일어나 통나무 앞으로 갔다. 생김새가 화려해 보이지 않아 눈 에 잘 띄지 않는 꽃이었는데 가까이서 보니 유독 빛깔이 은은하고 곱다는 것을 알았다. 꽃이라기 보다는 버섯에 가까운 종인지 꽃잎이 두께도 있어 보였고 짧은 줄기에 이파리는 붙어있지 않았다. "물론. 보는 눈을 시험하는 것이니 만지거나 향기를 맡는 것은 안되 겠지요, 솔버그님?" "잘 아네. 더 가까이 가서 보는 것도 안 된다. 향이 짙은 꽃은 아니 니 상관은 없겠지만." 진은 습기 머금어 검게 보이는, 양분이 되고 있는 통나무 위에 도마 뱀 정령의 붉은 조명을 받아 분홍빛이 도는 관리 잘 된 꽃 두 송이 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캑." 그새 돌아온 와이즈는 비어 있을 줄 알았는지, 일부러 그랬는지 의 자 위의 드워프를 깔고 앉았다가 키 작은 장인을 걷어차 냈다. "뭐 하냐, 진?" "둘 다 진짜가 아닌데요, 솔버그님?" "...에. 에." "와이즈. 예의 좀 차려라. 왜 그렇게 오만불손한 거야?" "이게 예의다. 백치 여자야." 진은 그가 드워프에게 그랬던 것처럼 걷어차 주고 싶다는 표정으로 돌아보며 넘어진 솔버그를 부축해 일으켜주었다. "어떻게 그렇게 빨리 알았지?" "아무리 빨리 피는 꽃이라고 해도 만개하려면 어느 정도 시간은 걸 렸을 텐데 너무 깨끗하니까요, 솔버그님." "깨끗해서? 내가 잘 돌봐서 그럴지도 모르잖나." 진은 그와 눈 높이를 맞추기 위해 무릎을 굽혔다. "관리를 아무리 잘한다고 해도, 흙 위에 뒹구는 썩어 가는 통나무에 서 핀 꽃이니 분명 있을 벌레나 미생물의 흔적이 줄기에조차 전혀 없으니까요, 솔버그님." 솔버그는 인간여자의 짙은 남청색 눈을 드래곤의 흥미 어린 눈초리 를 의식하며 쳐다보았다. "영리한 답이다. 네 말대로 진짜가 아니니 벌레들이 꼬이지 않지. 넌 꼬일 것 같은데?" "전 꽃이 아니라 잡초나, 차라리 벌레에 더 가까운 편이지요, 솔버 그님. 부탁을 들어주시겠어요? 자제 분을 포함한 인질들은 모두 자 정이전에 구해 질 거 에요." "의뢰라고 하지 않았냐. 받아들이겠다." "감사합니다." 와이즈는 그들이 나누는 대화로 드워프들의 어줍잖은 시험이 있었 다는 것을 알고 코웃음을 쳤다. -드래곤의 시험도 단 몇 십 분만에 통과한 인간에게 드워프의 시험이 무슨... 그런 생각을 하긴 했지만 와이즈는 감쪽같이 잘 만들어진. 자세히 보니 보석을 갈아 녹여서 만든 게 분명한 그 꽃에 눈을 반짝였다. 솔버그는 칸막이 뒤로 가서 잽싸게 연장을 챙겨서 나오다 드래곤이 느긋한 동작으로 턱을 쓰다듬으며 자신에게 보내고 있는 그 무언의 의미를 알아채고 식은땀을 흘렸다. 진은 용건이 하나 더 남아서 나 가지 않고 서 있다가 드워프의 우거지상의 원인이 와이즈로 인한 것임을 알게 되자 버럭 소리를 질렀다. "별걸 다 탐낸다, 와이즈. 향기도 없는 꽃에 웬 욕심이야?" "향기 없는 꽃은 싫어했냐?" "향기 없으면 다른데 쓰이겠지. 뻔히 조화인줄 아는데 뭐 하러...설 마 나 주려고?" "내가 돌았냐?!" 진은 벌떡 일어나 문으로 향하는 와이즈에게 고개를 옆으로 툭 떨 어뜨려 보이고, 눈을 껌벅이고 있는 드워프를 돌아보았다. "저. 솔버그님. 부탁이 하나 있어요. 어려운 것 아니에요." "무슨 부탁?" 진은 매고 있던 작은 휴대용 가방에서 양피지 한 장을 꺼냈다. "로마노에 오래 계셨지요? 동료분들과 보석을 취급하시고 대단한 장인이시니 이곳의 귀족들에 대해 잘 아실 거라고 생각해요. 꼭 살 리고 싶은 사람이 있지 않을까 해서요. 귀족 아닌 아무라도 좋아요. 구하고 싶은..." "없다." "...한 명도요?" "정말 다 죽일 셈이냐?" 진은 손을 들어 돌돌만 양피지로 얼굴을 가렸다 뗐다. 걸음을 멈추고 문 앞에 서 있는 드래곤을 흘끗거리던 솔버그는 슬 퍼 보이는.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인간여자 를 올려다보았다. "마음을 독하게 먹지 않으면 네 계획은 성공 못할 거다. 우린 거짓 말은 안 한다. 자유로운 인간들 중에 살 가치 있어 보이는 자는 내 보기에 몇 명되지 않았다. 하지만 꼭 한사람. 아니, 한 명의 하프엘 프만큼은 살려라. 그의 이름은 에르비오 그린엘 로슬로스다. 그가 살릴 인간들은 다 알 거다." 진은 릭이 가져왔던 왕가와 귀족가의 정보 중 술독에 빠져 있다는 하프엘프가 있었던 것을 기억했다. "왕족인가요?" "그런 셈이지. 외모에 속지 마라. 현 국왕의 삼촌뻘이니. 강변 수상 건물 중 제일 작은 파란색 집에 틀어 박혀있다." "감사합니다, 솔버그님." 진은 키 작은 장인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이 되었다. 그녀는 양피지를 도로 집어넣고 기다리고 있던 와이즈가 열고 나가는 문으 로 몸을 돌렸다. "저 꽃 너 가져라." "네?" "이미 탄로 난 방식을 자꾸 써먹긴 그러니까. 네가 최초는 아니었 다." "...그 분이 최초였나요?" "그런 셈이지. 제 어미의 기일에 주문했다가 마음에 안 든다고 반품 했으니까." 진은 솔버그가 버섯 따듯 똑똑 끊어 건네 주는 꽃을 받아들었다. 보 기보다 무게가 있었다. "걸작이니 조심해서 다뤄라. 그거 만드느라 시간 꽤 걸렸다." "보석으로 만들었나요?" "그럼 뭘로 만들었겠냐. 시간 없으니 난 먼저 간다. 동료들도 불러 야겠고." "수고해 주세요, 솔버그님. 감사합니다." 드워프는 약속이나 잘 지키라는 말을 남기고 잠근 가게 문 앞에서 드래곤에게 멈칫거리며 간단한 인사를 하더니 소란스런 시내를 가 로질러 쌩하니 사라져갔다. "와이즈. 가져. 이것도 보석이니 네 몫이야. 너랑 어울려." "...죽을래?" 향기 없는 꽃. 벌레조차 꼬이지 않는 꽃이 어울린다는 그녀의 말에 와이즈는 인상을 썼고, 진은 그런 그를 독촉해 강변으로 워프하게 했다. * 릭과 블루는 진이 예약해 놓은 매기와 대니의 어머니와 그 외 여자 들과 아이들을 인수받기 위해, 몇 가지 물건을 구입해 근처에 숨겨 두고 원형경기장 옆 부속 건물로 갔다. 하지만 그들만을 데리고 나올 수가 없었다. 아이들의 부탁을 받고 구해주기로 했다는 귀족 아가씨에 대한 이야기가 매기의 어머니에 게서 유출되었는지. 아직 분류되지 않았거나 이미 분류되었지만 축제 때문에 이동이 지 연되어 갇혀있던 사람들이 창살을 붙잡고 서서 울먹거리며 붙잡았 기 때문이다. "기사님. 저. 저희들도..." "엘프님. 선의를. 자비를. 저희 아이들만이라도 살려주세요." "우린 경기장으로 가고 싶지 않아요. 거기로 가면 모두 죽는데요. 제발..." "야. 조용히 못해?! 뉘신 줄 알고 이것들이 주제도 모르고!" 후한 예약금을 받은 노예들을 인도하던 간수가 들고 있던 몽둥이로 철창을 내리치며 위협하자 한 걸음 물러났던 그들은 다시 감옥 창 살에 매달렸다. 릭과 블루는 남아 있는 사람들을 데리고 나오는 것에 가지고 간 금 과 보석을 모두 써도 좋다는 진의 사전허락과 사기를 쳐서라도 한 명이라도 더 빼돌리라는 말이 있었지만, 그곳에 있는 모든 이들을 잔금을 약속하고 데리고 나가는 일은 의심받을 문제였고 시작부터 일을 그르칠 수 있는 일이라 난감해졌다. 릭은 블루에게 축제로 빠져나가 다른 때보다 몇 명 자리하지 않고 있는 곳곳에 흩어져 있는 경비와 간수들을 눈짓했지만 엘프는 고개 를 가로젓고 곁에서 감시 내지 안내를 하고 있던 간수들에게 몇 분 간 오감을 잃는 무저항마법을 속으로 주문을 외워 시전 했다. 그들이 멍하니 서 있게 되자 매고 있던 가방에서 진의 요양 중 불 면증에 보탬이 될까하고 만들어 가지고 있던 수면가루를 꺼내며 그 는 실프를 불렀다. 실프는 엘프의 나직한 의사를 전해듣고 감옥 안에 갇혀있는 사람들 을 한정으로 신호를 하면 최대한 오래 숨을 멈추라는 경고 성 엘프 의 목소리를 낮게 퍼뜨렸고 사람들은 희망 띈 얼굴로 긍정해 왔다. 먼저 나와서 숨죽이며 구원자들의 하는 양을 보고 있던 남매의 어 머니와 그 외 사람들도 정령이 전하는 말을 알아듣고 아이들까지 눈치껏 입과 코를 틀어막을 준비를 했다. '잠들지 못하는 이들의 머리맡에 잠의 요정 날개가루를 청합니다. 수면은 해되지 않으니 숨쉬는 자들에게 안개가 되어 찾아가리라. 슬 립' 열려진 작은 자루에서 뿌연 가루가 슬립마법을 타고 흩날려 창고 같은 감옥 안을 널리 퍼져나갔다. 가루는 안쪽계단을 타고 위층에서 난잡한 파티를 벌이고 있던 여자들과 담당관리들에게도 퍼져갔다. "마나를 아끼세요, 블루님." "약제와 함께 써서 별 상관없습니다, 릭페르님. 지하엔 사람이 없는 것 같으니 여기 있는 사람들만이라도 서두르는 것이 좋겠어요. 양이 부족해서 약효가 정오까지 가려나 모르겠습니다." "해뜨기 전까지만 발각되지 않으면 되니까 괜찮을 겁니다. 교대가 잦은 것도 아닌 것 같으니까요." 릭은 멍하니 서 있다 수면제를 둘러 마시고 넘어져 드르렁거리며 자기 시작하는 간수의 허리에서 묵직한 열쇠꾸러미를 빼어 자물쇠 를 따기 시작했고, 엘프는 밖으로 바로 통하는 입구를 지키고 있는 무거운 갑옷을 입은 경비들의 뒤로 조용히 다가가 다시 마법을 써 서 깊은 잠에 빠지게 하고 세워두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조용히 소리내지 말고 모두 수레에 타십시오. 어서요." "기사양반. 이 많은 수를 어떻게?" "노예로 구한 것이 아닙니다. 도시를 탈출해야하니 서두르세요." 구해온 수레에 모두를 태울 수 없다는 판단에 릭은 개선행렬에 쓰 였던 우리 달렸던 빈 수레를, 구출된 사람들과 함께 잠깐 사라졌다 끌고 왔다. 블루는 릭의 팔이 붉게 물들어 있는 것을 못 본척했다. 나이 지긋한 중년 몇 명과 소년들도 섞여있었기에 릭은 그들의 도 움으로 최선으로 적은 수의 수레에 사람들을 싣고 검은 천을 뒤집 어 씌웠다. 나귀들이 힝힝거렸다. 원형 경기장과 그 부속건물은 귀족들의 마차를 세우는 주차공간의 확보를 위해 인가와 떨어져 있었기에 그들은 조용히 건물 그림자에 숨어 수레에 탈 수 있었다. 주변의 혹시나 있을지 모를 눈을 감시하고 있던 블루는 모두가 자 리 잡고 천 아래로 들어가자 가장 앞에 세운 수레 안으로 불안에 떨고 있는 여자와 아이들 틈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감옥 안에 널브러졌던 병사들의 가죽옷을 벗겨 걸쳐 입은 소년들과 중년 몇 명을 데리고 릭은 축제가 벌어지고 있는 중심시가지를 피 해 수레를 끌기 시작했다. 서두르지 말고. 당당하게. 여유 있게. 초긴장의 상태로 그들은 멀게 만 느껴지는 수도 검문소를 향해. 걸어갔다. * 솔버그가 알려준 건물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집의 용도가 아니라 출입이 금지 된 개인 사택처럼 경비가 아닌 감 시 역으로 보이는 병사들이 둘러싸고 있었고 와이즈의 귀띔으로 내 부엔 마법사들도 진을 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창문도 다 닫혔는데 몰래 어떻게 들어가지? 워프하면 들킬까?" "널 데리고 워프하면 감지될 수 있으니까 혼자 먼저 들어가겠다. 그 는 3층에 있다, 진." "와이즈 심술이야?" "당당히 네 특기 살려 들어가라고. 여자들과 있는 것 같으니까." 진은 하프엘프는 인간에 가까운지 엘프에 가까운지 묻고 싶었지만 와이즈는 자기 말만하고 사라져버렸다. 진은 한쪽 어깨에 맸던 가방을 양어깨로 고쳐 매고 목덜미의 머리 를 툭툭쳐 올려서 부풀리고 겉옷 가운 깃을 최대한 벌려 무방비 한 웃음을 지으며 파란색으로 물들인 돌담 건물 정문으로 걸어갔다. 강물이 차 오를 것에 대비해 1층의 높이가 보통 저택의 2층 높이 가까웠고 물이 닿지 않는 곳과 이어진 작은 다리가 놓여있었다. "여기가 그 아름답다는 엘프가 있는 곳인가요?" "어- 예쁜 아가씨네. 엘프가 아니라 하프엘프라오." "거. 얼굴만 반반하면 뭐하나. 나이는 할아버지뻘이니 너무 좋아하 지 말고 우리와 어울리지 그래, 아름다운 아가씨. 안은 이미 만원이 라고." "정말이요? 음. 하지만 하프엘프는 한번도 보지 못했는데 어떻게 생 겼는지 꼭 보고 싶었는데. 아저씨가 안내해 줄래요?" 진은 야들거리는 미소를 지으며 문 옆에 가장 가깝게 서 있던 병사 에게 달라붙어 팔짱을 끼었다. "당번이라 열 받아 있었는데 이런 횡재가 있나. 이봐 잠깐 맡아 주 라. 손님접대를 해야지. 물론 안내해 줘야지, 아가씨." "지킬 것도 없는데 대신은 무슨. 나도 끼자구." 진은 생글거리며 허리를 잡아오는 옆의 다른 병사의 허리에 마주 팔을 두르고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여우같은 계집애. 얼굴 색 하나 안 변하네. 사기꾼 같으니라고.' 워프가 아니라 투명마법을 쓰고 엿보고 있던 와이즈는 부아가 도졌 다. 우아하고 풍성한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숲 속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푸른색 일색의 그 집안으로 들어서자, 진은 병사들에게 하프 엘프에 관한 정보를 캤다. 그가 6써클 마법사이며 이복 형제였던 지난대 왕의 죽음과 관계가 있다는 해 지난 의심과 반 타종족이라는 차별로 자유롭지 못하다는. 하지만 형식적인 감금생활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몇 걸음 걷지 못하고 진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계속 더듬던 손들이 옷가지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하자 더 못 참고 한 손에 하나 씩 목을 잡아채어 졸라주었다. "정보 준 대가다. 황홀하지? 목 졸려 죽는 게 젤 기분 좋다더라. 감 사히 여기셔." 무지막지한 힘으로 누르는 가는 손목을 엉거주춤 잡고 신음소리도 뱉지 못하던 그들의 눈에는. 몇 초 전과 너무나 다른 살기 어린 여 자의 얼굴이 눈에 어른거렸지만 그 시간은 덮쳐든 어둠과 함께 곧 끝났다. 진은 그들을 뒤에 나타난 와이즈에게 처리를 미루고 빠르게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래~ 마음만 먹으면 살인도 간단했던 여자였지. 성가신 일은 죄다 맡길 참이군. 쳇." 널브러진 시체를 떠맡기고 사라지는 진의 뒤통수에 대고 와이즈는 투덜거렸다. 진은 3층 중간쯤에 있는, 문이 활짝 열린 방에서 흘러 나오는 신음성과 사향냄새가 섞인 최음제 같은 냄새를 맡자 코를 막고 와이즈가 올라오길 기다렸다. 그가 길을 터주자 진은 안으로 들어가서 내부를 둘러보았다. 침대와 바닥에 마구 엉켜있는 남녀들 사이로 그 대단하다는 외모의 남자를 발견할 수 없던 진은 땡그렁거리는 소리에 돌아보았다. 그는 열린 문 뒤 끌어다놓은 소파 위 거의 벗은 몸으로 잠이 든 여 자의 옆자리에 앉아있었다. "여- 예쁜 아가씨네. 어쩌나. 내가 기력이 딸려서. 쿡쿡..." 초봄 막 돋기 시작하는 나무의 색. 숲의 색을 떠올리는 풋풋한 느낌 의 초록색 긴 머리칼의 그는 보통사람보다 귀가 약간 긴 아름다운 반쪽 인간. 하프엘프였다. 그는 풀어헤쳐진 상의로 투명한 살결의 다듬은 조각상 같은 상체를 내보이고, 떨어뜨린 청동술잔을 잘못 밟아 휘청이며 일어나서 몇 걸 음 걸어왔다. 하프엘프는 흐트러진 옷가지 위 약간 굽힌 허리에 손 을 얹고 진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나와 같은 과? 하프엘프인가, 꼬마아가씨?" "인간입니다. 시간이 없으니 용건만 말하지요, 에르비오 그린엘 로 슬로스님. 솔버그님의 추천을 받고 왔습니다. 도움이 필요하십니까. 아니면 로마노의 죄악과 함께 침몰하시겠습니까." "침몰! 두말 하면 잔소리지. 마음에 드는 아가씨네." 그는 진의 빰을 두 손으로 잡고 입술을 겹쳐왔다. 하지만 문 밖에 서 있던 와이즈의 손짓에 보이지 않는 힘이 가해졌 는지 뒷덜미가 잡힌 것처럼 떨어져야했고 그는 취중인 것으로 보였 는데도 마법을 썼다. "...어라?" 진은 그가 무슨 마법을 썼는지 알 수 없었지만 와이즈의 안면과 상 체에 쏟아지던 것들이 파삭하고 부서지며 떨어지는 것처럼 느껴졌 다. "어머~ 아름다운. 으음...가만 있어봐, 자기. 에르비오님 만큼이나 예 뻐. 봐." 진은 와이즈에게 눈짓을 했고 불쾌한 표정이던 그는 둘을 데리고 인기척이 없는 같은 층의 가장 구석진 방으로 워프했다. "좋게 말할 때 해독해라. 하프엘프. 8써클인 주제에 주정 흉내내지 말고." "에. 어라? 하하하. 드래곤? 저런. 이런. 하하하..." 진은 드래곤임을 알아채고도 태도가 바뀌지 않는 그에게 어깨라도 두드려주고 싶었지만 수많은 생명이 걸린 '시간'을 의식해 와이즈에 게 다시 부탁해야했다. 그는 해독과 함께 얼음물 한바가지도 에르비 오의 머리위로 친절하게 쏟아 부어주었다. "흠. 정신이 번쩍 드는군요. 소개를 하지요. 드물게 첩 구실을 하고 도 잘 살았던 엘프의 자식. 로슬로스 왕가의 왕족으로 인정받지 못 한 가계 중 하나로 이름은 에르비오 그린엘 로슬로스라고 합니다. 엘프의 길고 시적인 인사말과 비슷한가요? 후후..." 진은 술이 깬 얼굴임에도 짙은 녹색 눈빛에 여전히 절망의 그늘이 남아 있는. 물을 뚝뚝 흘리고 서 있는 아름다운 하프엘프를 물끄러 미 쳐다보았다. "전 진이라고 합니다. 어머니셨던 엘프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물어 도 될까요?" 그는 뒤 허리춤에 엄지손가락을 끼우고 진의 머리너머로 눈길을 돌 렸다. "무례한 질문입니다만. 흠. 운 좋게 도와주는 아들이 있어서 험한 꼴 덜 당하고 일찌감치 자결하셨다는 것 정도야 말해드릴 수 있지 요, 아가씨." 에르비오는 소개 없는 와이즈에게서 신경을 거두고 진을 주시했고 그녀는 그의 행동과 말과 몇 가지 얻은 정보로, 타인이 내준 길에 휘둘리지 않을 상대임으로 판단하고 다시 용건을 말했다. "다시 묻겠습니다. 에르비오 그린엘 로슬로스님. 살길을 열어드릴까 요. 아니면 로마노와 함께 지겨운 생을 끝내는 일에 도움을 드릴까 요. 선택하십시오." 녹색 눈에 이채가 서렸다. * "에르비오님?" 문을 열고 마법사 세 명이 들어왔다. 진은 감시 역인지 그의 숨은 아군인지 구별하지 못해 다시 하프엘프에게 고개를 돌렸다. 세 명이 모두 금색 수의 마법사 겉옷을 입고 있었고 와이즈가 한 걸음 곁으 로 다가오는 것을 봐서 써클이 높은 것이 분명해 보였다. "대답하시지요. 에르비오 그린엘 로슬로스님." 그는 싱긋 웃더니 뭐라고 웅얼거렸고 와이즈는 진을 포함시켜 실드 를 쳤다. "....이에게 죽음을." "억-" 진은 에르비오의 뒤로 다가오던 세 명의 마법사 중 두 명이 목과 허리가 각각 분리되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을. 붉은 피가 에르비오 의 등 쪽과 그의 초록색 머리카락과 뺨에 튀기는 것을 지켜보았다. "대답이오. 대군을 거느린 아가씨. 로마노를 끝내는 일에 도움이 되 었으려나?" 경악하다 골치 아픈 표정으로 이마에 손을 대는 중년 마법사. 그의 측근으로 파악된 마법사의 반응을 가늠하던 일을 끝낸 진은 가방에 서 자신의 사인이 들어간 양피지를 꺼내 그에게 건네었다. "명단을 작성하시지요. 새 나라의 초대 국왕이 되실 에르비오 그린 엘님. 늦어도 내일 정오가 되기 전에 살릴 사람을 골라 성문 밖으로 인솔하십시오. 능력이 닿는 한 모두." 진은 어안이 벙벙해 있는 40대 후반의 마법사 곁을 지나쳐 복도로 나갔다. [너 한번만 더 까불어라.] 에르비오는 검푸른 머리의 강직하고 아름다운 눈빛을 가진 아가씨 의 뒤를 따라나가던 금발머리 마법사의 경고에, 과장스럽게 팔을 저 으며 허리를 숙여 보였다. "그가 왕이 되려할지 아닐지 어떻게 확신 하냐, 진." "준비하고 있었잖아. 기회인 줄 알고 바로 붙잡았어. 야망이 없는 인간은 드무니까. 그는 엘프가 아니라 인간에 더 가까웠어, 와이즈. 설사 왕이 되려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는 책임이 있고, 그걸 알고 있 었어. 성실한 드워프가 살릴 인물이라고 했으니 값은 하겠지." "겁 대가리 없기로는 인간이 제일이긴 하지." 진은 와이즈의 이죽거림을 무시하고 구제가 어렵다고 했던 엘프가 있는 귀족 저택을 향해 다시 이동해갔다. 2 102  1/6 암초 님께서 남기신 글 카르마의 구슬 113 -[달빛을 타는 사람들] 15-5. 달빛을 타는 사람들. 릭은 날이 환해져도 성벽 위에서 그들이 눈에 띄지 않을 호숫가의 숲을 택해 들어가서, 무한자루를 매기의 어머니에게 맡기고 적어도 하루 이틀동안 숨어 있을 것을 신신 당부했다. 그리고 돕겠다고 따라나선 세 명의 소년과 두 명의 중년인과 함께 블루가 숨어 있는 빈 수레를 끌고 비교적 쉽게 통과했던 검문소를 지나쳐 다시 시내로 들어갔고, 걸음을 빨리 했다. 밤이 깊어 갈수록 축제의 열기도 한층 더해지고 있었다. 불빛이 흘러나오는 건물 열린 창가에서 간혹 눈에 띄는 외설적인 광경에 릭은 붉어지곤 했던 얼굴이 이젠 익숙해져 버린 듯 찌푸려 지다 경멸을 띄어야했다. 여행자들이 숙소로 삼는 하급 여관-하급 이라고 해도 격이 높아 보이는-에서도 술내기와 술 파티가 한창이 었고 로마노의 어둔 부분을 채 인식하지 못한 상인들과 여행자들은 쉽게 그들과 동화되고 있었다. 수련여행 중인 사제로 보이는 이가 도시 치안담당들에게 끌려가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지만 그를 돕는 문제에 나설 수 없는 입장과 '계 획'에 따른 촉박한 시간문제로 미뤄야했다. "백작가입니다. 블루님 나오세요." 릭은 성문을 통과하기 위해 잠깐 뒤집어썼던 긴 갈색머리 가발을 벗어 수레에 던져두고 산지의 가파름이 끝나는 곳에 위치한. 널따란 마당과 분수를 가진 성의 정문 근처에, 수레와 함께 온 사람들을 숨 기고 대기시켜야했다. "정면 돌파는 힘드니 블루님..." "네. 이곳에선 가장 쉬운 방법이니까요. 괜찮습니다, 릭페르님." 용병들이 입는 옷과 비슷한 말단 병사복장을 한 릭은 미안한 표정 으로 블루의 손목에 밧줄을 감고 노예를 끌고 가는 것처럼 걸어, 장 식창살로 이뤄진 우아한 정문을 흔들어 종소리를 냈다. "뭐냐?" "에. 소인은 여행 중인데 이곳에 들르려고 오다가 성문 밖에서 엘프 를 붙잡았지 뭡니까. 그런데 팔찌를 하고 있어서요. 이곳은 높은 신 분의 귀족저택이라고 하던데 혹시 이 노예의 주인이 계시지 않을까 하고. 수고비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말입니다." "어- 바보 아냐? 누가 엘프를 잃어버렸대? 처음 보는 얼굴인데?" "여기 있던 노예가 아닙니까? 참나. 다리품 팔게 생겼네. 그럼..." "야. 이봐. 그냥 갈 필요 없어. 들여보내 줄게. 안에 궁성연회에 가 지 못한 귀족분들이 많이 있으니까 가서 보여보게나. 후하게 주고 대신 사 줄 사람도 많을걸?" 릭은 고개 숙인 엘프를 잡아당기며 독촉했고 의심받지 않고 들어갈 수 있었다. 그들은 한편에서 여자들과 시시덕거리고 있었던 듯 서둘 러 돌아갔고 안내나 감시로도 따라오지 않았다. 릭과 블루는 성문과 떨어진, 층마다 활짝 열려 환한 불빛이 새어나 오는 본성의 정문으로 가는 듯하다가 기회 봐서 샛길로 빠져 정원 수에 몸을 숨겼지만. 은밀한 곳엔 빠지지 않고 남녀의 신음이 들려 와 피해 다니는데 애를 먹어야했다. "불러내는 것이 좋겠네요, 릭페르님." "네? 나올 수 있을까요?" "대우가 그렇게까지 나쁘지는 않나 봅니다. 마나 차단 팔찌를 하지 않고 있는지 정령이 움직이고 있는 같아요." 블루는 우물가 그림자에 몸을 숨기고 땅의 정령 노움을 불러 저택 지하에서 감지되는 정령의 주위에 있을 드워프들에게 도움을 주러 왔음을 전하게 하고 주선을 부탁했다. 시간이 지체되어 뭔가 잘못 되었나 싶은 불안한 생각이 들 즈음 노 움이 돌아오더니 인질로 잡혀 있던 드워프의 전언을 가져왔다. [바보 엘프구나. 여긴 정령사가 마법사와 함께 지키고 있어서 들켰 다. 하지만 덕분에 발찌와 사슬을 풀었으니 친구들을 구하겠다. 거 기서 기다리고 있어라.] 블루는 투박스런 드워프 말투를 비슷한 생김새를 가진 땅의 정령이 그대로 전해오자 쓴웃음을 지었다. 그들은 계단을 이용하지 않고 탈출용으로 갇혀있던 방의 외부와 면 한 벽에 조금씩 벽돌 틈 사이를 갉아내고 있던 곳을 정령의 도움으 로 뚫어서, 지면 위 낮은 높이의 개구멍을 만들어 빠져나왔다. 릭은 드워프와 대화하는 것이 처음인지 갈색 수염을 기른 주름 투 성이의 키 작은 할아버지들을 보자 어색하게 인사를 했고, 인간들에 게 감정이 쌓여있던 그들의 퉁명스런 대답을 들어야했다. 블루는 그 들이 내 놓은 구멍을 노움을 시켜 다시 막아 위장하게 했다. "다음은 후작가와 상인저택입니다. 여러분 도움이 필요합니다. 드워 프 인질들을 구하고 나면 노예시장의 사람들도 구해야하는데 도와 주시겠어요?" "도움은 무슨. 우리 친구들이니 우리가 구한다. 인간노예를 구하는 일은 빚을 갚는 셈치고 도와주겠다. 그나저나 우리아빠는 같이 오지 않았냐?" "아빠..." 릭이 혼란스럽다는 듯 웅얼거리는 것을 들으며 블루는 자신보다 훨 씬 어린 나이의 드워프들에게 예의 바르게 대답했다. "로마노 시내에 있는 드워프들은 모두 원형경기장으로 가 계실 겁 니다." "거긴 뭐 하러?" "저희 동료 마법사님과 아가씨께서 중심 가에서 보석가게를 하시는 드워프께 의뢰를 하셨거든요. 일을 끝내시면 역시 시내에서 철수하 실 겁니다." "아빠가 의뢰를? 인간의 의뢰를 또 받아? 뭐. 어쨌든 알아서 하시겠 지. 시험을 내고 의뢰를 받으셨다면야." "그럼. 친구들과 인간노예들을 구하고 나면 우리도 경기장으로 가겠 다. 우리가 도와주면 더 빨리 끝나겠지." 그들은 들어갈 때보다 더 쉽게 드워프들의 도움으로 백작가를 빠져 나왔다. "그런데 간수 정령사와 마법사는 어떻게?" "다 죽였다. 같이 있던 다른 간수들이랑 인간여자들에게 포개놓았 지. 지저분한 것들." 릭은 괜히 물었다싶은 무안스러움에 땀이 솟구쳤다. * 그녀가 누워 있는 곳은 촛대가 몇 개 세워져 있는 어둠침침한 골방 같은 곳의 침대 뼈대도 없는 메트리스 위였다. 진은 와이즈의 이동 마법으로 그 방에 도착하자 곧 탁한 공기 중에 떠돌고 있는 불쾌한 냄새와 눈에 들어온 광경으로 치미는 욕지기를 참아야했다. 고운 하늘색 머리의 엘프. 본래는 아름다웠을 얼굴과 흰 살결이 변 태적인 성욕의 흔적인지 심한 상처와 흉터가 가득했고 인형같이 움 직이지 못하는 그녀에게 두 명의 남자가 달라붙어 있었다. 진은 그들을 떼어내어 목을 비틀어 구석에 처박고 커텐을 찢어 감 싸 안았지만 풀린 동공은 변화가 없었다. "와이즈. 회복시킬 수 없어?" "소용없다니까. 마나도 여러 번 강제로 흩어졌고 내상이 심하다. 엘 프라 숨이 붙어있는 거지." 와이즈는 짜증을 내며 엘프에게 회복마법을 시전 했다. 그녀는 잘 들리지 않는 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또 오셨네요. 드래곤이여." "내 뜻이 아니다. 죽고 싶으면 그녀에게 허락 받아라." 그녀는 흐릿한 푸른 눈으로 진을 올려다보았다. "가지 않을래요. 죽게 해 줘요." "부탁이에요. 살아주면 안되나요? 고향에 가족이 있지 않아요?" "난 엘프에요. 엘프에겐 모두가 가족이었지요. 엘프로 죽게 해 줘요. 카르마(윤회)로 돌아가고 싶어. 비참해..." 그녀는 눈물도 말랐는지 메마르게 느껴지던 눈빛이 깊은 절망으로 다시 흐려졌다. 진은 엘프로는 견디기 힘든 일들이라는 것을 받아들 여야했다. 고통스런 시간을 끝내주기 위해 고문기구로 쓰였던 듯한 굴러다니는 쇠꼬챙이를 집어 들었고, 어렵게 입 꼬리를 들어올리는 그녀의 심장 부위를 내리찍었다. 하지만 소리 없는 저항과 함께 막 혔고 와이즈의 저지라는 것을 알았다. "왜? 방법이 있어?" 와이즈는 냉정해 보이는 진의 얼굴 뒤의 숨겨진 표정에 한숨을 쉬 며 대답했다. "내가 하마." "아니. 내 일이야, 와이즈." 진은 저항을 뚫고 엘프의 가슴에 창살을 박아 넣었다. "...옆. 방에..." "네. 말씀하세요." 진은 흉기를 뽑지 못하고 그녀의 앞 방바닥에 무릎을 대었다. "언니. 가. 있어. 이미..." 그녀는 숨졌고 와이즈는 쇠창살을 뽑아낸 엘프의 몸과 방 전체에 파이어 마법을 시전하고 옆방으로 진과 함께 워프했다. 와이즈는 엘프의 기척은커녕 생명체 반응도 감지되지 않아 지나쳤 던 그 곳에 진을 데려간 것을 후회했다. "...미치겠네." 진은 지치고 힘겹게 중얼거렸다. 블루가 그랬었다. 엘프는 천수를 다하지 않고 죽게 되면 육신이 잘 썩지 않기 때문에 화장을 한다고. 그 방엔 이미 죽었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나체의 엘 프를 탐하고 있는 금수보다 못한. 악귀 같은 인간이 있었다... * 자정이 되었을 무렵 왕성에서는 연회 참석자들이 귀가했고 로마노 시내에 왕명이 하달되었다. 내용인즉. 왕이 직접 주체하는 경기가 열릴 것이니 축제와 무도회를 끝내고 숙면을 취해 다음날 정오에 열릴 경기에 늦지 않게 참석하 라는 명이었다. 하지만 원형경기장을 운영하는 관계자들은 개인 사 택에서 파티 중에 영광되게도 연회가 끝난 궁성에 따로 초대되어 왕과 면담을 하고 머물러야했다. 로슬로스 국왕은 자신의 명을 받들어 입궐했다는 하급 관리들을 멀 뚱히 쳐다보다가 손을 저으며, 하루 푹 쉬고 자신이 직접 여는 경기 이니 자질구레한 준비는 필요 없다는 말을 하고 쉬게 했다. 그들은 왕에게 하루 동안 경기 주체에 관한 전권을 위임한 것으로 알아듣고 다른 때와 달리 관람자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초저녁부터 술과 향락에 빠져있던 대부분의 기득권 층은 명을 전해 받은 후 별다른 반응 없이 숙취 속에서도 내일에 대한 기대를 떠들 어대며 하나하나 손님들을 물리기 시작했다. 로마노 시내는 여흥이 남긴 긴 꼬리가 짙게 이어지다 차츰 침묵이 깔리고 있었다. 그런 어두운 도시 한편에서는 에르비오 그린엘에게 선택된 지배계 층들의 만남이 은밀한 곳에서 이뤄졌고, 평소엔 강압적인 권유와 명 령을 하지 않던 숨은 주군의 일방적인 뜻을 따라. 식솔들과 회유가 가능한 부하들을 각자 추려내 밤의 어둠을 가리개 삼아 도시를 빠 져나가는 행렬을 만들어 냈다. 에르비오가 측근들을 직접 부르거나 몰래 찾아가 명령을 내린 후에 가장먼저 조치한 일은 성문 검문소와 성벽지기들을 자신의 수하들 로 교체시키는 일이었고. 다행스럽게도 노예시장에서 실프의 소리 차단으로 밖의 거리에 새어나가지 않은 피비린내 나는 혈투를 치루 고, 구원 가능한 노예들을 수레에 싣고 나가던 수상스런 도시 쓰레 기 처리담당들은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후작가와 일부 부유한 상인들의 저택에서 빼돌려진 100살 안팎의 어리거나 청년인 드워프들이 감독 감시가 철저한 노예 시장에서 노 예 인간들을 구출하는 릭과 블루를 도와 일의 진척을 앞당겼다. 블루는 전멸한 내부 관계자들을 대충 숨겨두고 그 건물을 나오면서 드워프들과 의논해 굳게 닫아 걸은 1층의 문들에 주위 어디에서나 흔히 구할 수 있던 미향 재료를 이용해 손이나 몸이 닿으면 복잡하 고 머리 아픈 환상에 빠지도록 마법을 걸어 두었다. 다음은 원형경기장이었다. 드워프들은 아버지와 이웃아저씨들을 돕기 위해 경기장으로 달려갔 다. 그들과 헤어져 수레를 끌고 성밖으로 나갔던 릭과 블루는 노예 시장에서 구출해 온 사람들 중 상당수를 차지하는 소년들과 검을 쥔 경력이 있는 자들에게 숲 안 피신처의 치안을 맡기고 그들의, 혹 은 진의 병사가 될 노예전사들을 선발하고 바꿔치기 작업을 준비하 기 위해 역시 원형경기장으로 향했다. * "난 말 못하겠어, 와이즈. 꼭 해 줄 필요 없겠지?" "알아서 해라." 진은 샤마을 출신이라는. 블루의 이름을 아는 엘프의 숨을 끊어주고 나오며 선선했던 여름밤 기온이 파이어마법의 여파인지 아주 덥다 는 생각을 했다. 너무 덥고. 답답하고. 비참하고. 죄스럽고... 그는 갑부 상인을 남편으로 둔 중년 부인의 선심으로 그녀의 또래 들에게 놀이 감이 되고 있었다. 약물에 심하게 중독되어 있었고, 와 이즈의 용언으로도 정신을 차려 입을 열게 하는 것에 시간을 잡아 먹어야 했다. 진은 일이 끝나고 이곳을 떠난다고 해도. 어디를 가도 잊혀지지 않을 광경을 너무 많이 봐서. 더 끊어질 신경 도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자, 와이즈. 시간은 자꾸 가." 진은 와이즈와 함께 그가 염탐해 둔 엘프의 거처를 찾아 로마노 시 내를 다니며 그들의 뜻에 따라 모두 죽이고 화장시켰다. 대부분 돌로 지어져서 방 내부만 타고 꺼진 작은 화재가 도시 이곳 저곳에서 발생했지만 소유하고 있던 노예엘프가 마지막 힘을 모아 정령을 불러 분신한 것으로 각각의 저택 주인이나 주인 식솔들은 이해했다. 그들은 그 이상한 화재를 경사스런 축제일에 껄끄러운 소 문의 증식 원인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자신의 저택내의 일로 치부 하고 묻어버렸다. "다음은 왕성 부엌이야. 와이즈. 마법 이렇게 마구 써도 괜찮은 거 야?" "상관없다." "고마워, 와이즈. 네가 아니었으면 불가능할 일들이니." "......." '아니면...그가 없었으면. 차라리 겪지 않아도 되었거나. 적게 겪어도 될 일들이 아니었을까.' 와이즈가 진실탐지마법을 쓰지 않을 거라는 확신 때문인지 지친 신 경 때문인지, 평소엔 들지도 않던 생각이 불현듯 고개 드는 것에 진 은 더 우울해졌다. 그의 탓이 아니었다. 로마노 왕궁 내에 있는 국왕의 직속 기사단들이 거주하고 있는 기 숙사 식당의 궁성요리사 구역에는 밤을 타고 침입한 보이지 않는 적이 다녀갔다. 진은 최대한 많은 저택을 사람들의 눈을 피해 다녔다. 자정이 지나 왕명 내용을 참고한 주인들의 잠자리 준비에 따르는 일이나 성과 저택내의 일이 끝난 노예들 중, 와이즈가 걸러주는 자 들을 우선대상으로 족쇄에 달린 사슬을 끊어주고 다시 위장해 주었 다. "내일. 정오이전에는 눈에 띌 행동은 하지 마십시오. 기회 봐서 동 료들을 풀어주시고 정오가 지나 '신호'라고 단정지을만한 일이 생기 면 그 후 움직여주세요. 성문은 개방되어 있을 겁니다. 한가지 꼭 주의 할 점은. 사슬은 풀되 족쇄는 풀지 마십시오." 그들은 의미 없어질 족쇄의 착용을 권하는 말의 뜻을 알아들었다. 묶여서 생활하지 않는, 길들여진 것으로 이해되고 있던 노예들 중에 서도 진의 의사를 전해들은 이들은 많았다. 진은 사슬을 끊어준 기득권 층의 노예들에게 일일이 다짐을 했고, 그들은 굳게 입을 다물고 노예로서의 마지막 밤이 될지 모를 의미 있을 그 날 밤을 꼬박 뜬눈으로 새웠다. 그들은 정복당한 영지의 기사였던 자들과 마법사였던 자들과 귀족 레이디였던 여자들과 재수 없게 들렀던 곳에서 잡힌 가지가지 직업 의 여행자들과 하층민들이었고, 로마노에서 노예 신분이 대물림되어 응어리를 가지고 있던 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새벽이 가까워지자 진은 긴장을 유지한 채 몰래 사람들을 만나고 같은 내용의 말을 반복하고, 불가피하게 따라야했던 살인으로 인해 곤두선 신경으로 잔뜩 지치게 되었다. 일행과 한 약속시간이 되었음에 와이즈는 갈라진 목소리를 내기 싫 다는 이유로 입을 꾹 다문 진을 데리고 원형경기장으로 워프했다. 릭과 블루는 잘해내고 있었다. 그들도 지쳤고 노예전사들이 수감되 어 있는 지하로 가기 위해 그 넓은 경기장 여기저기 배치된 경비들 을 하나하나 뒤탈 없도록 인정을 배제한 죽음을 선사했다. 눈치를 챈 간수나 마법사들의 경우. 지시 받아 경기장 내 보수를 해 주러 왔다는 솔버그 외 그의 동료 드워프들이 경기장 지하와 1층 곳곳에서 감시 받으며 일하고 있다가, 릭과 블루가 당하려 할 때마 다 뒤통수를 쳐서 기절시키거나 아예 들고 있던 연장으로 절단 내 주곤 해서. 로마노의 무시할 수 없는. 하지만 무시되고 있던 '검'이라고 할 수 있는 지하. 죽음의 검투사들 과 마주할 수 있었다. "어쨌든 우릴 이용하겠다는 거 아니요, 기사양반?" "새 인생을 드리겠다는 의미입니다. 검을 쓰시니. 힘없는 다른 노예 들과 다르지 않습니까. 이곳에서 언제 죽을지 모를 구경거리로 계속 사시겠다는 겁니까?" "죽기는 누가 죽어? 새로 들어온 애송이들이나 죽지. 요즘엔 새로 들어온 노예도 몇 없고 쓸만한 녀석은 찾기 힘들더군. 애들은 검받 이 밖에 더 되나. 여기 내 동료들은 이곳에서 검을 든 후 모두 최하 2년은 살아남았네. 기사 따위가 전사를 어떻게 이겨. 웃기는 소리지. 해 볼 테요?" 릭은 온몸에 검상의 흉터가 가득한 험악한 얼굴의 40대 노예전사와 위험한 실랑이를 해야했다. 그는 언제부터인지 기억이 확실하지 않을 정도로 오래 전부터 검을 쥐고 전쟁터를 돌아다녔던 소년 용병출신이었고, 가장 오래 살아남 아 있던 전사들 중 한 명이기도 했다. 블루는 마법사들을 상대하고 계속 마법을 썼던 탓에 마나가 거의 고갈되어 자꾸만 의식을 놓칠 것 같은 몸 상태로, 사슬을 끊어주고 도움을 청했지만 배타적인 태도를 보이는 인간전사들 앞에 릭과 함 께 힘겹게 서 있어야했다. "젠장. 무슨 상관이냐고! 이 빌어먹을 도시 따윈 어떻게 되도 우린 몰라. 풀어준 건 고맙지만 귀족 기사 말은 죽어도 안 듣겠다. 비리 비리한 엘프 말은 더 못 듣겠소. 우리가 아쉬울 것이 뭐가 있느냐 고!" "그럼. 지금 떠나십시오. 무리한 도움은 바라지 않겠습니다." 그들은 어둔 지하. 오랫동안 그들의 주거지였던 곳을 환하게 밝히는 것 같은 황금색 머리의 마법사와 계단을 내려오는 귀족레이디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진은 경기장의 텅텅 비어있는, 긴 나무의자가 이어져 빼곡하게 붙어 있는 평민 좌석으로 와이즈와 워프해 와서 깨끗이 청소된 길을 따 라 관계자 외 출입금지일 지하로 향했다. 철수하던 몇몇 드워프들과 마주쳐 인사를 하고 계단을 내려가던 그 녀는 릭과 블루가 대치 중이던 노예전사의 목소리를 들었다. 진은 쉬어버려 피곤으로 회복이 늦어지고 있는 낮고 허스키 한 음 성으로 다시 말했다. "해가 뜨면 빠져나가기 힘들어 질 테니 늦기 전에 지금 성문으로 향하십시오. 개방되어 있을 겁니다." "진. 괜찮으세요?" "응. 블루. 블루도 피곤해 보이네. 릭도 그렇고. 앉아. 힘들게 서 있 지 말고." 기사와 엘프는 진에게 자리를 비켜주고 뒤에 섰다. "우리가 필요 없소, 아가씨?" 진은 일행을 회복시키고 챙기는 것을 와이즈에게 맡기고 피곤한 눈 주위를 마사지하며 대답했다. "시내에도 원한을 가진 노예들이 많더군요. 신호가 가면 그들은 검 을 쥘 겁니다. 조금 번거롭고 힘이 더 들지 모르겠지만. 경기장 내 의 통솔은 제가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해가 뜨기 전에 어서 탈출하 십시오." 그들은 머뭇거렸다. "어떻게 하겠다는 거요. 귀족아가씨? 도대체 밖에서 땅꼬마들이랑 뭘 하는지 모르겠네. 드워프들이 강하긴 하지만 몇 되지도 않을 텐 데 겨우 네 명으로 뭘 하겠다고?" "그건 저희가 알아서 할 일이니. 기회가 있을 때 움직이시는 것이 좋을 것 같네요. 아니면 확신이 필요하십니까?" "필요하지. 그럼. 나갔다가 잡혀 개죽음 당하고 싶지는 않소." "전 진이라고 합니다. 성함이?" "45세. 커티스라고 하오. 이곳 노예전사들의 대장 격이오. 저들이 나 가지 않고 있는 것은 내 뜻이 결정되지 않았기 때문이오. 한번쯤은 모두 내 도움으로 목숨을 부지한 적이 있으니." "원하시는 것이 '자유'입니까. '권세'입니까. 인간으로서의 '인정'입니 까. 전사 커티스님." 커티스는 짧게 자른 머리카락에 상의 없는 가죽 스커트 형식의 옷 을 입고 한쪽 어깨로 어슷하게 두른 가죽 멜빵을 한 차림으로 맨발 로 동료들 앞에 대표로 서 있었다. 진은 피곤으로 혼미하게 느껴지는 정신을 가다듬고 훈련 잘된 기사 단을 연상시키는, 가장 실력 있는 노예전사들이 비슷한 차림새로 계 단 위쪽에 서 있는 자신과 와이즈와 릭과 블루를 눈여겨보고 있는 것을 둘러보았다. 그는 대답했다. "당연히 모두요. 한 두 가지만 고르라면 자유와 인정이겠지. 노예를 인정하시겠소?" "당연히 인정합니다. 기사칭호를 받고 싶은가요? 고향에 가고 싶은 가요?" "말로 되는 일이 아닌 경우도 있소, 아가씨. 철이 없는 거요? 우릴 속이려는 거요?" 진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 설득에 가장 좋을 예를 들기로 했다. "여기서 오랫동안 살아남았다고 하셨지요? 혹시 '판'이라는 이름의 주홍머리 청년을 아십니까?" "판? 알다마다. 내가 검을 가르쳤는데! 그 녀석을 아오?" "제가 직접 인정하고 임명한 제 '기사'입니다." 커티스는 피곤해 보였지만 흔들림 없는 남청색 눈으로, 살인 기계들 앞에서 전혀 거리낌없는 태도를 취하고 있는 귀족아가씨를-고집이 대단했던. 자신의 운과 실력으로 자유를 쟁취해 떠났던 아들 같던 녀석의 어린 주군을-믿어보기로 했다 에르비오는 측근들에게 성밖의 후줄근한 노예들의 존재를 보고 받 았고, 그들과 합류하여 대기하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그는 낯뜨거운 무리의 출입이 금지된 자신의 서재에서 드워 프에게 주문해 쓰던 흔들의자에 앉아 궁성에서 온 초대장을 책상에 던져두고 생각에 잠겼다. 하프엘프 에르비오는 왕가의 뻔한 속셈일 초대에 드물게 협조적인 태도를 해 주기로 마음먹고 참석 할 것을 알렸다. * 로마노의 마지막 아침이 밝았다. 통금시간의 시내는 다른 때와 달리 어수선했다. 귀족들과 부유 계층 들은 저마다 국왕 로슬로스가 주체한 특별하고 푸짐한 상품까지 걸 렸다는 경기에 참석하기 위해 아침부터 수선을 떨었고, 여유가 있어 참석이 가능한 평민들까지도 들떠 있었다. 그 와중에도 로마노령 영지에 급한 일이 생겼거나 수련에서 돌아 올 가족을 마중하기 위함이라는 이유로 성을 빠져나가는 몇몇 무리 들이 있었다. "오늘 참 이상한 날이네." "뭐가 이상한데?" "언니. 거리 분위기가 말이지. 어. 무섭게 느껴지기도 하고 들뜨게 느껴지기도 해." "모처럼 큰 행사가 하명되어서 그러나 보다." 보라색 머리의 소녀는 선배이자 친언니처럼 다정한 여사제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아침 미사를 끝내고 그들의 작은 예배당 수준의 신 전을 청소한 후 나온 쓰레기를 들고 버리게 되어 있는 곳으로 걸어 갔다가, 소녀는 여전히 치워지지 않고 그대로 있는 어제의 쓰레기들 을 보며 갸우뚱했다. "어제 쓰레기 운반이 되는 것을 봤는데 우리 신전 꺼만 빠진 건 가?" "담당들도 축제에 갔겠지. 그보다 우리 신전에도 초대장이 왔대." "언니 정말? 와. 난 경기 구경은 해 본 적 없어. 하지만 난 견습인 데." "갈 수 있을 거야. 너야 로마노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이렇게 크게 열린 경기 참가 기회가 없었겠지만. 난 여러 번 가봤어. 귀족 들만 허락된 경기에도 가 봤다? 재미있었어. 이번엔 오랜만에 굉장 할 건 가봐." 사제 소녀는 이른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보랏빛 머리카락을 출렁이며, 그들의 신전에서 제일 예쁘고 친절해서 인기 있는 선배사 제의 팔을 잡고 자신의 집. 자신의 작은 신전으로 돌아가며 처음 해 보게 될 관전 나들이에 대한 기대감으로 재잘거렸다. * 진은 경기장안의 노예전사들을 암살 된 경비병들의 옷을 벗겨 갈아 입게 하고 자리배치를 했다. 빼돌린 노예 문제가 들통나는 시간을 미루기 위해 부속건물과 노예 시장에 전사들을 위장 배치해서 혹시나 있을지 모를 틈을 메꾸게 했다. 출근해야 할 관리들은 아침이 되도 나타나지 않았고 경기장 부속건물에 근무를 교대하러 왔던 경비들은 때아닌 휴가를 통보 받 고 돌려보내졌다. 노예시장에 용건이 있어 찾아온 시민들은 왕명의 거론으로 거래를 연기하는 문제를 받아들이고 돌아가야 했다. 와이즈는 짬을 내어 왕성에 다시 스며들어 왕에게. 그리고 그의 직속 신하와 호위들에게도 덤으로 암시를 걸어두고 돌아와, 진의 부탁에 마지못한 태도로 릭의 눈을 피해 블루의 회복을 도왔다. 블루는 릭과 함께 숙소로 돌아가 매기와 대니를 깨워 남매의 어머 니가 기다리고 있는 성밖으로 내보냈다. 커티스는 관리들이 경기장 내에 거하는 여자들과 하급 병사들을 시 켜 경기가 있을 때 준비하도록 하던 일들을 총괄했다. 진은 돌아온 블루와 릭에게 잠깐 눈을 붙이도록 권하고 자신도 와 이즈에게 자질구레한 일을 맡겨 두고 정오가 되기 직전, 귀족들이 저택을 떠나는 시각에 다시 움직일 것을 계획하고. 지하의 아직 교 체되지 않은 희생양 노예들을 지키는. 제거된 간수들의 간이 휴게소 에서 그들의 웅얼거림과 탄식의 소리를 들으며 잠을 잤다. 1 15-6. 무너진 로마노. 경기장으로 통하는 로마노 시내 대부분의 길에 마차와 말에 탄 신 사들과 기사들의 행렬이 줄을 이었다. 화려하고 고급스런 여행을 하는 타국 출신의 방문 귀족들과 상인들 도 섞여있었다. 로마노의 귀족들과 고급 관리들은 자신들의 부와 권 력을, 신경 써서 부풀리고 꾸민 호화로운 치장으로 위세를 자랑하며 호위들을 거느리고 경기장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참석할 신분이나 여유가 되어도 나이가 어려 제외된 아이들이 저택 이나 집 창문에 매달려 한껏 멋을 부려 사치스럽도록 화려한 그들 을 구경했다. 왕이 주체한다지만 그 때문에 여느 때보다 더 갑작스럽고 복잡한 인파로 경기장 앞 주차장은 혼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로마노의 연줄과 힘 좀 있다는 거의 모든 귀족들과 기사들과 신관 들과 마법사들을 마중하는 일을 담당한 경기장 소속 일꾼들은, 그들 의 좌석입장과 마차와 말들의 주차와 편이를 봐 주는 일에 벌써 지 쳤는지 다들 굳은 얼굴이었다. 마구간이 이미 차버려서 경기장 입구와 떨어진 곳에까지 귀족들을 따라온 하인들이 합세하여 마차와 말들을 주차시키고 이름표 단 말 들을 모아 임시로 만들어진 말뚝에 고삐를 묶어야했다. "관리들의 숫자가 왜 이렇게 적은 거람. 더워지고 있는데. 아. 짜증 나려 해." "레이디. 조금만 참으세요. 알아봤는데 노예들이 경기에 거의 모두 투입되었다고 하더군요. 국왕폐하께서 경기 종류에 준비를 많이 하 셨나봅니다." "호호. 정말 흥미로울 것 같아요, 경. 음. 부군께선..." "주군께선 친구 분을 만나셔서 인사를 나누고 계십니다. 마차 내 자 리가 불편하신 것 같은데 봐 드릴까요, 레이디?" 잘 꾸민 고급 마차의 작은 창으로 호위기사와 이야기를 나누던 귀 족부인은 그에게 눈웃음을 치며 부채를 흔들었고, 그는 아직 차례가 되지 않아 길게 늘어서 있는 앞줄을 흘끗 확인했다. 고용주 안주인의 무료와 기다림으로 인한 짜증을 달래주기 위해. 혹 은 어제 나누지 못한 밀회를 가져 볼 요량으로 그는 몸종을 내려보 내고 마차로 들어갔다. 남대륙과 가까워 초여름 달력의 날짜임에도 한여름 같은 태양의 열 기가 도시를 내리쬐고 있었다. * 로슬로스 국왕은 술이 덜 깬 것 같은 기분으로 외출 차비를 하면서 잔뜩 멋을 낸 공주와 왕자들을 불러 평소 아비로 해주지 못했던 것 이 있는지 물었고, 형식적인 소리인줄은 아나 그들은 기뻐하며 오늘 있을 경기에 자신들의 어머니를 여주인으로 데려가 주길 간청했다. "그건 어렵겠다. 모두를 데려갈 수는 없겠고. 새 왕비만 갈 것이다." 실망하는 그들에게 왕은 선심 쓰듯 다시 말했다. "신하들을 독려하기 위한 자리이니 너희들도 모두 데려가는 문제는 어렵겠구나. 주객이 바뀔 수도 있으니. 음. 하지만 원정에 참가하게 되어 있는 기사들의 대무도 있을 거란다. 우승자에게 화관을 선사할 왕손이 필요하다." "아바마마. 제가 할게요. 추억이 될 일이에요." "어머. 언니. 곧 혼례를 올릴 거면서. 저도 하고 싶어요, 아바마마." "로마노의 가장 멋진 기사들을 언니들이 독차지 할 셈이세요? 저도 참석하게 해 주세요, 아바마마." "대무가 있다면 전 직접 참가하고 싶습니다, 아바마마." 로슬로스는 왕 자녀들 중 성년이 지난 나이의 용모가 유독 수려한 공주와 왕자들을 택해서 따르게 하고, 감히 왕인 자신에게 대들곤 했던 전 왕비의 별세로 새로 들인 어린 왕비와 함께 대기하고 있던 마차에 올랐다. 왕을 호위하고 보필하기 위해 불려간 단장들과 기사들을 제외하고 나머지 왕성 기사들은 느긋하게 늦은 아침을 먹기 위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어제의 일찍 끝난 연회와 축제로 귀성한 기사들은 하루 특별휴가를 받아 기숙사식당으로 속속히 모여들어 일부 여기사들과 함께 잡담을 나누며 식사를 했다. "어? 이봐. 스프 맛이 수상~한데? 누가 내 밥그릇에 손댔냐?" "싫으면 먹지 마셔. 약으로는 이제 거기가 말을 안 듣나보지?" "무슨 그런 가당치 않는 소릴. 날 찍으셨군. 휴일인데 우리 그동안 못한 친목도모나 하는 게 어떨까요, 로마노의 여기사님." "어머~ 왕비님의 시녀에게 빠져 있더구만. 바람 맞았나보지?" 왕궁 기사단들의 아침식사에 나온 요리 메뉴는 평소와 다름없었지 만 그들 중 몇몇은 다른 때와 약간 다른 조미료 맛을 구별해냈다. 하지만 이미 익숙해져 있는 성분의 것으로 이해되어, 경기장에 가지 못한 그들에게 따로 왕이 준비한 안배가 있을 것임의 추측 성이 자 연스럽게 확신으로 바뀌어갔고 식당은 더 떠들썩해졌다. * 진은 잠깐 눈을 붙이고 일어나자 블루와 와이즈에게 권티에서처럼 성밖의 피신처로 연결될 마법진을 경기장 지하에 그리게 했다. 와이즈는 피신처로 갔고 블루는 지하 어둔 색 돌 바닥 위에 마법진 을 그리고 정령석을 이용해 경기 초반에 유흥이 될 목적으로 상비 되어 있던 노예들의 이동을 시작했다. 경기장 지하는 신속하게 탈출이 이루어졌고 곧 비게 되었다. 진은 마법진 주위에 검투사들을 배치하고 할 일을 지시했다. 관람자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귀빈석과 평민석이 나눠진 원형경기장의 좌석은 울긋불긋한 옷차림 을 한 사람들로 물결을 이루게 되었다. 곧 도착할 왕가의 사람들과 귀족들의 시중을 들기 위해 따라들어 올 시종들과 하인들의 편이를 봐주고 상대할 관리의 일을, 블루와 릭과 커티스에게 맡기고 진은 다시 워프 해 온 와이즈와 함께 로마 노 궁성으로 이동했다. "리툰 마법사님은 힘들지 않으시려나..." 블루는 7써클 마법사인 자신도 하루밤사이 마나가 고갈될 처지였음 을 상기하고 의아한 표정이 되는 릭페르에게 정령석을 이용하셨나 보다라는, 어정쩡한 대답을 해야했다. 밤에 왔을 때 보았던 로마노 궁성도 대단했지만 오전에 보게 된 그 건물은 한층 웅장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주인의 부재 탓인지 궁안은 한산하게 느껴졌다. "가자, 와이즈. 로마노 붕괴의 시작이야." 진은 경기가 있을 때 검투사들에게 주어지는 각종 무기들이 보관된 창고에서 가지고 나온 검을 들고, 와이즈에게 투명화 마법을 시전 받아 성안으로 들어갔다. 국왕의 응접실에는 불려져왔던 왕의 자녀들이 모처럼 한자리에 모 인 기회에 처소로 돌아가지 않고 남아 있었다. 그들은 경기장에 데려가 주지 않은 아버지에 대해 불평하거나 형제 들과 눈웃음을 교환하며 여기 저기 서거나 앉아 잡담을 나누고 있 다가. 문 밖에 대기시켜 두었던 자신들의 호위와 시녀들과 시종들이 내는 듯한, 신음소리와 복도 마루에 넘어지는 소리들을 들었다. "무슨 일이지? 경망스럽게." "오라버니가 나가 보세요. 대낮부터 장소도 못 가리고. 흥." 가장 나이 있는 소년 왕자가 붙어 앉아 있던 누이 곁에서 일어나 문을 열기 위해 응접실을 가로질렀다. 하지만 벌컥. 하며 드워프가 만들어 단 정밀한 세공의 마호가니 문 은 알아서 열렸고, 열린 문 뒤로 배가 갈라진 시녀와 호위기사의 몸 없는 머리통이 구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꺄악-" "뭐야! 암살자인가?!" 진은 비명을 지르며 꺅꺅대는 어린 왕녀들과 금빛 찬란한 검을 빼 어드는 왕자들을 둘러보았다. 14살이나 15살 안팎으로 보이는 외모로 모두 9명이었다. 부족했다. "와이즈. 워프 시켜." [워. 프.] 그들은 보이지 않는 낮고 허스키 한 여자의 목소리를 들었고 곧 강 제로 공간 이동되었다. 와이즈는 복도에 널브러진 인간들의 시체 처리를 자신에게 떠맡기 고 후궁들이 있을 법한 방과 궁을 찾아 자리를 떠나는 진의 뒤통수 를 향해 인상을 써 보였다. 진은 국왕의 처소와 가깝거나 먼 후궁들의 처소를 하나하나 찾아갔 다. 주인의 부재를 틈타 정오부터 불륜을 시도하고 있거나, 임신으 로 다시 불러오는 배에 시녀들에게 짜증을 내고 있던 국왕의 애첩 이나, 왕의 친형제로 궁성 안팎 왕래가 제한되어 있었지만 어제의 연회로 오랜만에 궁성출입을 하여 배정된 처소에서 술에 취해 잠에 빠져있던 로슬로스 성을 가진 이름뿐인 공작들과, 그들의 가족들 은...구분 없이 모두 보이지 않는 침입자의 방문을 받았다. "왜 그래, 자기? 갑자기 왜...꺄악-!" 불륜으로 놀이상대 중이던 시종의 등이 뚫려 입가를 타고 흘러나오 는 피를 알아채자 후궁의 신분인 그녀는 비명을 질렀고, 곧 비슷한 비명이 궁성 안 여기저기에서 차례차례 새어나오다 사라졌다. 궁성에 있던 국왕 로슬로스의 친인척들은. 전대 왕의 핏줄과 임신 중이던 국왕의 애첩과 어린 왕의 자녀들까지, 나이와 지위를 불문하 고 저항해서 죽임 당하지 않은 한 모두 경기장 지하로 워프 되었다. 로마노 궁성은 화창한 여름 하늘 아래 찬란한 햇살을 받으며 우뚝 서 있었지만, 그 내부에서는 죽음의 향기가 짙게 피어나고 있었다. 원형경기장 지하에 레이디 진의 엘프 마법사가 그려놓은 마법진에 서 빛이 생성되어 발동을 알렸다. 운용이 멎자 화려한 차림의 소년 과 소녀들이 이동되어 왔고, 그들은 자신들에게 급작스레 닥친 일을 이해하지 못해 어두컴컴하고 쾌쾌한 냄새가 나는 실내가 눈에 들어 오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최하급 옷차림을 한 노예병사들이 맨발로 다 가오자 그들은 벌컥 소리를 질렀다. "뭐냐. 도대체! 여기가 어디야?! 아까 그 여자 목소리 뭐였지?" "이 불결한 것들이! 누구에게 손을 대느냐?! 꺅!!" 족쇄를 찬 노예들은 대답 없이 그들을 움켜잡고 장식으로나 쓸 화 려한 검을 뺏어 뒤로 던지고 구타와 함께 정장으로 걸치고 있던 예 복과 드레스를 찢어내기 시작했다. "뭣 하는 짓이냐! 놓지 못할까! 악. 억..." 로마노의 공주와 왕자들은 속옷차림이 되어 우람한 체구의 험악한 인상의 노예들에게 발길질과 손찌검을 받았고, 아예 충격으로 기절 하거나 그 믿을 수 없는 일에 기가 막혀 말문을 잃어야했다. 그들은 첫 번째로 맹수들의 먹이가 될 희생양의 신분이 되어 비어 있던 대기실에 던져졌다. 그들 왕손들의 분노 어린 외침과 비명은 밖으로 새어나가지 못했다. 마법진이 다시 특유의 빛을 뿌리며 '운반'을 알려왔다. 주인들의 목을 축일만한 음료를 찾는 시종들과 하인들에게 물과 가 벼운 술을 보급하는 일을 맡고 있던 블루는, 밖의 전경이 한눈에 들 어오는 커다란 창을 가진 휴게소에서 인파로 꽉 찬 원형경기장을 둘러보았다. 좌석이 남지 않아 가장 높은 자리의 빈 공간과 의자 이 음새의 오고가는 좁은 길목에 자리 잡아 주저앉거나 입석을 택해 서성이는 평민들도 계속 늘어가고 있었다. "가르디아엘 엘프의 신이여..." 블루는 모두 죽임 당할 그들을 위해 꺼낸 기도문을, 목이 막히는 기 분이 치솟아 이을 수가 없었다. 북소리와 함께 거대한 뿔 나팔의 묵직하고 높은 옥타브의 소리가 울려 퍼지자 소란스러움이 가라앉아 갔다. 로마노 왕이 최 귀빈석으로 들어왔다. 에르비오는 공주와 왕자들과 함께 국왕이 건 최고급 상품이 되어 로슬로스의 옆자리를 배정 받았다. "국왕폐하. 안녕하신지요." "오. 반갑소, 에르비오 경. 여전히 아름다우시구려. 초청에 응해 주 어 흡족하오. 대단하지 않소? 충동적으로 든 생각으로 명하긴 했지 만 모두들 충심으로 따라주어 매우 기쁘오. 기대 이상이구려." 경기장을 둘러보며 왕의 권위를 보이는 중년조카에게 에르비오는 엘프의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저에게도 흡족한 날이 될 것 같습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로마노 국왕폐하." 목청껏 외치는 '로슬로스 국왕폐하 납시오!' 라는 신하의 목소리는 왕궁 전속 정령사의 실프에 의해 경기장에 울려 퍼졌고 우레 같은 함성이 일었다. "로마노의 신이 함께 하시길. 눈먼 왕이여." 손을 흔드는 것으로 웅변을 대신하며 자리에 앉는 국왕의 뒤를 이 어 귀빈석 의자에 앉으며 에르비오는 낮게 중얼거렸다. 약간 떨어진 곳에서 호위기사들의 편이를 봐 주고 있던 릭페르는 날씨와 너무 어울리는 초록색 머리의 아름다운 하프엘프의 입가에 비웃음이 실렸다 사라지는 것을 포착했다. 한산한 로마노 성벽 검문소는 육중한 성문이 내려졌고 도시는 폐쇄 되었다. * "부족해." "그만 해도 되겠다, 진. 숫자는 대강 맞췄잖냐." 진은 무덤덤한 어조로 말려오는 와이즈를 흘끗 쳐다보았다. 투명화 마법덕에 와이즈를 제외한 다른 이들에겐 자신의 모습이 보 이지 않겠지만 진은 보였다. 그녀의 축축한 검은 색 겉옷 아래 푸른 평상복이 붉은 피로 온통 얼룩져서 보라색을 띄고 있었다. 모두 로마노 궁성내의 왕의 혈육을 지키던 가신들과 경비와 호위들과 시녀와 시종들의 피였다. "그래. 빨리 끝내자. 시작만 하면 될 테니까. 왕성 기사들이 뭘 하고 있는지 가볼까?" 와이즈는 이 도시 인간들의 성을 참 여러 차례 오간다는 생각을 하 며 감정을 잃은 듯한 눈빛을 하고 있는 진을 데리고, 왁자지껄한 소 리의 출처인 건물로 이동해 갔다. 기사들의 숙소에 딸린 식당 안은 먼저 식사를 끝낸 기사들이 나가 지 않고 있어 교대로 식사를 하게 되어 있던 규칙이 깨어져, 검집을 두른 로마노 왕의 검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서서 스프에 찍은 빵을 먹으며 같은 소속 여기사들과 농담을 하며 집적대고 있거나, 그들을 핀잔하면서도 웃는 얼굴로 은근히 비비적 거리고 있는 여기사들과, 식탁에 턱을 괴고 깨지 않은 잠을 보충하 고 있는 기사들이나, 팔씨름을 하고 있는 기사들이나 그들을 응원하 고 있는 기사들. 요리사와 하인들을 협박해 끌어다 놓은 포도주 통 을 따고 있는 기사들...등등으로 초만원이었다. 진은 석벽의 높게 나 있는 창가에 걸터앉아 공중에 떠 있는 와이즈 에게 아래를 향해 안내하듯 손을 저으며 말했다. "와이즈. 네 차례야. 보너스로 맛있는 것 줄까?" "목이 졸리고 싶지 않으니 나중에 받겠다." "...떠보는 소리였어, 와이즈. 로리타 취향은 바람직하지 않아." "미안하다만, 네 기준을 인간들과 타종족들은 이해 못할걸?" "적어도 엘프는 이해할 것 같은데? 알았어. 째려보지 말고 빨리 해. 경기가 시작되었을 거야." 와이즈는 할 일이 더 남아있는 점을 감안해, 이미 쉴새 없이 마법을 썼고 마법을 쓸 대상의 수가 많음에 인간의 몸인 상태라면 무리가 갈 것 같아서 귀를 키워 엘프로 폴리모프했다. "낮과 밤의 종족으로는 변신 못하는 거야? 릴리스에게..." "시끄러." "릴리스는 로리타 아닌데..." "조용히 해!" 진은 자꾸 토를 다는 것이 아마도 곧 발생하게 될 일의 목격을 미 루고 싶은 속셈이 깔려서일까 생각하며, 턱을 괴고 금발머리 가짜 엘프가 마법을 쓰는 것을 구경했다. 뾰족한 귀를 한 와이즈는 허공에 떠서 부엌을 포함한 식당 전체를 범위에 넣고, 고써클 고차원 마법. 인간들의 의식세계를 표적으로 치밀한 마나 유동력을 발휘하여 시. 전. 했다. [기억해내라. 죽. 여. 라. 현혹!] 부엌에 있던 소금과 향신료와 요리에 쓰이는 각종 조미료에 교묘히 조제한 미약을 섞어둔 것은 그들이 착각하고 모여있게 하려던 계산 이 깔려있었고, 용언마법과 함께 정신에 미칠 영향을 극대화하기 위 해서였다. 이미 흡수되었을 약제의 성분은 진이 클레이스에게 당했 던 미약 종류와 비교해 육체와 정신 양면에 영향을 준다는 점은 비 슷했지만 훨씬 강도가 약했고, 바이러스처럼 잠복기간을 두고 있다 '지시'를 받아 움직이게 되어있었다. 그들이 먹은 것은 정신을 건드려 가장 감추고 싶거나 표출하고 싶 은 욕구와 탐욕을 행하도록 충동질하는, 현혹마법과 함께 위력을 발 할 골드드래곤의 '독'이었다. ....식당 내 풍경에 변. 화. 가 왔다! "어...?" 늦잠을 자서 이른 아침의 마법 수련시간을 놓치고 경기장으로도 가 지 못한 궁성의 한 중써클 마법사는 용건이 있어 기사들의 기숙사 를 방문하고 돌아가다 아래층에서 감지되는 엄청난 마나 유동에 숨 이 막혀왔다. 하지만 잘못 느낀 것처럼 그 돌풍의 느낌을 주던 힘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상하네? 로마노에 8써클 대마법사가 있었나?" 궁금증에 내려가던 계단을 급하게 밟아 걸음을 옮기던 마법사는 열 린 식당 문 앞을 지나치다 경악했다. 그는 하얗게 질려 뻣뻣이 굳은 채 서서 그 광경을 목격했다. 둥그렇게 뜬 그의 동채에는 '지옥'이 어른거렸다. 조미료로 쓰인 독을 조금이라도 먹은 기사들은 갑작스럽게 치미는 욕정과 살인충동으로 이성을 잃었다. 그들은 가장 악하고 추악한 내면의 한 부분이 건드려졌다. 곁에 잡히는, 옷을 벗어 던지는 여기사들과 체구가 더 작은 동료나 후배 기사들을 대상으로 정복 지에서 하던 행동들을 일깨웠고. 검을 빼들고 몬스터와 반드시 살해해야할 적으로 보이는 주위 동료 들을 해하기 시작했다. "아-악." "이. 이봐! 왜 그러는 거야, 다들! 정신이 나갔어?!" 식사를 하지 않았던 일부 기사들은 잠시 머리가 띵한 현기증과 무 력감을 느끼다 피가 튀기는 탁자와 바닥을 인식하고 당황해서 외쳤 지만, 압도적으로 많은 수의 동공이 풀린 동료들의 가차없는 검 날 에 두 동강이 났다. 추악과 공포와 무력감과 퇴폐로 채워진 비명과 신음과 아귀다툼이. 로마노의 멸망이 로마노의 검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식당 안은 충혈 된 눈을 부라리며 마구잡이로 검을 휘두르는 자들 과 강간당하며 괴성을 지르는 자들과 살해당하며 웃는 자들과 무작 정 도망가는 자들과 그들을 쫓아 두개골을 깨부수는 자들로...아수라 장이 되었고, 목표를 찾아 적을 찾아 추켜세운 검을 들고 충격에 빠 져 있는 입구의 마법사를 난도질하고 쓰러진 그를 밟고 밖으로 쏟 아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가까운 곳에서 느껴지는 괴물들과 먹이들을 찾아, 자신들의 상관과 하인들을 죽이고 하녀들을 범하고 짓밟고 도륙해 나갔다... 로마노 궁성의 흰 벽은 붉은 피로 페인트 되었다. 피가 튀기고 솟구치고 벗겨진 맨몸에 칼이 박히는 남녀기사와 허상 인 몬스터와 원수를 찾아 뛰쳐나가는 기사들과 동료들과 칼부림을 하는 기사들과 주방에서 식칼을 들고 멍하니 걸어나오는 요리사들 과 소리소리 지르는 하인들. 그 끔찍한 살육과 죄악의 장면을 섬뜩한 미소를 띄며 내려다보고 있던 진은 이마를 때리는 손가락에 정신을 차렸다. "너까지 현혹 됐냐?" "어. 그런가 봐. 고소하단 생각이 들었어, 와이즈." "과거에 그들이 했던 일들과 누르고 있던 살인 욕구를 되살리고 일 깨운 결과다. 살인에 재미 붙이지는 말아라, 진." 진은 처참한 시체들이 언덕을 이루고 피비린내를 풍기는 아래를 의 식하는 일을 중단했다. "궁 밖으로 확산될까?" "조미료로 조금씩 흡수된 약효니 오래가지는 않을 거다. 몇 십 분이 면 중독된 의식은 자해를 부를 테니 이곳의 일은 끝난 셈이다." "왕성 지하감옥으로 가면 안 되는데." "지하까지 뛰어갈 이유가 뭐가 있겠냐. 그런다고 해도 창살이 구실 을 해 주겠지." "그래. 그럼 경기장으로 가자. 오늘의 최대 이벤트를 개최해야지." 진은 와이즈와 함께 인간성을 잃은 자들이 날뛰고 발악하는 그 곳 을 떠났다. 붉은 피가 깊이 있는 웅덩이가 되어 번지고 감지 못한 눈을 부릅뜬 시체더미들이 차곡차곡 쌓이고 외마디 비명으로 소란 이 일고 있는 그곳 로마노 왕성. 그들이 떠난 후 그곳 널브러진 시체들의 그림자와 건물 그림자와 가구의 그림자와 어둔 구석구석에서... 형체 없는 검은 악령. 어둠과 악의와 공포와 증오를 의미하는 번들거리는 눈들이 숨죽이 며 큭큭. 마계에 속할 이질적인 웃음을 흘리며 눈뜨고...있었다. <찾았다! 닫혔던 '문'이다.> 카르마의 구슬 115 -[무너진 로마노(2)] * "에르비오님은 왜 나오지 않으시는 거지요?" "글세 말입니다. 무슨 이유로 성을 나가 있으라고 하시는 건지 원." "저들에게 물어봤지만 그들도 모른다고 하더군요. 귀족 아가씨와 그 녀의 일행들의 도움으로 빠져나와 숨어있다고 하던데..." "그 금발머리 마법사의 마법진으로 온 저들은 경기장 측 노예들인 것 같은데 전혀 입을 열지 않는 군요. 우릴 달가워하지 않는 것도 같고." 에르비오를 따르는 로마노의 신생 귀족계층들은 탁한 진 녹색을 띈 호수 가에 서 있었다. 그들은 성벽으로 가려지지 않은, 일부 적조현상이 일고 있는 호수 수면 저편에 멀리 보이는 로마노 전경을 둘러보며, 마냥 명이 하달 되길 기다리느라 불안과 무료함으로 서성이고 있었다. 매기와 대니는 다시 만난 엄마와 친구들과 함께 눈물겨운 상봉의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그들은 기사들의 호위를 받고 있는 귀족아저 씨들과 부러운 차림을 한 귀족부인들과 영애들과 귀족 자제들을. 경 계하는 일을 잊지는 않았지만 동경과 호기심의 눈으로 흘끗거리고 있었다. "물어볼 것이 있는데." "네?" 대니는 요정 같은 외모를 한, 자신과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귀족 소 년 아니 귀족아이가 귀족 자제들 틈에서 일어나 다가와서 말을 걸 자 화들짝 놀랐다. "너희들 에르비오님의 손님이라던 귀족레이디의 노예니?" "아니에요! 진 누나가 우린 노예 아니라고 했어요." "누나?" "어..." 매기가 얼른 끼어 들었다. "아가씨께서 누나라고. 언니라고 부르라고 했거든요. 죄. 죄송합니 다. 동생이 무례해서..." "흠. 그럼 우리하고 친구해도 되겠네. 어머니 괜찮지요?" 마차 문을 열어두고 작은 아들의 하는 양을 지켜보던 부인은 약간 찡그리며 웃어 보였다. 매기는 마차 안에서 그 아이 만큼 예쁘게 생 긴 소년의 미소를 발견하고 얼굴이 붉어졌다. * 원형경기장은 시작된 유흥거리로 불규칙한 고함과 함성이 벽에 부 딪혀 메아리가 되고 있었다. 자칫 반항하거나 흑심을 품은 노예들이 타고 오르지 못하도록, 흙과 자갈이 깔린 넓은 경기장 바닥과 관람석은 안전한 높이로 거리를 두어 건축되어 있었다. 여자들과 소년과 소녀와 아이들의 무리가 지하와 연결된 문이 열리 고 경기장으로 내보내졌다. 보통 노예들처럼 누더기는 아니었지만 모두 얇은 여름 속옷차림으로 속살과 체형이 다 들여다보였다. 말을 듣지 않아 매를 맞았는지 퉁퉁 붓고 멍이 든 얼굴로 절뚝이거 나 밀쳐져 넘어지며 밖으로 나온 그들은, 납치된 곳이 거대한 원형 경기장 내부라는 것을 그제서야 알게 된 듯했다. 하지만 아직도 이해할 수 없는 자신들의 처지에 몸을 감싸고 머리 끝까지 화가 나서 너도나도 목청을 높였지만 함성에 묻혀 그들의 의사는 전해지지 않았다. "꺄-악-!!" 반대편 몇 군데 있던 쇠창살이 올라가고 굶주린 맹수들이 튀어나와 달려드는 것을 보고 바꿔치기 된 공주 한 명이 비명을 질렀다. 그들은 자신들이 노예가 아닌 왕의 부인이며 왕의 직계 후계자 자 리를 물려받을 가능성이 있는 왕손 중 하나며 공주이며 왕의 삼촌 이며 왕의 누나며 왕의 어린 아들 딸들이라는 것을...잔인한 취미의 기대에 취해 있어 눈먼 관중과 그리 멀리 있지도 않은 로마노 왕가 를 상징하는 깃발이 나부끼는 최 귀빈석에. 노예로 오인되어 모욕을 받은 사실을 이해시키거나 신분에 대한 진 실을 피력하지 못했다. 그들은 곧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려오는, 보름이 넘게 굶주렸던 몬스 터과 식인맹수들의 발톱에 걸려 산채로 물어뜯기고 고통에 찬 찢어 지는 비명을 지르고 공포 가득한 얼굴로 도망을 해야했다. 도망치는 먹이들을 향해 도약해 목덜미에 날카로운 이빨을 박아 흔 들고 꺽꺽. 숨 넘어가는 소리로 피를 토하며 나뒹구는, 인간의 살점 을 물어뜯어 먹는 거대한 몸체의 얼룩무늬의 맹수들은. 이지가 부족해 보였다. "까아악! 악! 아-악!" "아바마...억. 악. 으악...!" "세상에. 우린 왕족...악!!" "하찮은 것들! 왕족이었다 해도 로마노에 포로로 오면 다 노예다. 그냥 죽이기엔 쓸만한 것들이 많은데?" 가장 가까운 좌석을 차지하고 앉아있던 하급 귀족이 하는 말에 그 주위에는 와하하하. 하는 웃음이 번졌다. 죽음의 결투 내지 사투가 시작되기 전에 전희로 베풀어지고 있는 광경에 보라색 머리의 소녀는 함께 온 여신관의 팔을 잡았다. "언니. 저 사람들 다 죽는 거야?" "저건 아무것도 아니야, 데릴라. 기다려 봐. 검투가 시작되면 더 재 미있어." "어...그래. 좀 꼴불견이긴 하다." 다시 문이 열리고 발가벗겨진 여자들과 아이들이 피로 물들어 가는 경기장으로 내보내졌다. 동시에 우리에 갇혀있던 유난히 날카롭고 큰 이빨과 발톱을 가진 으르릉 크르릉 거리는 몬스터 맹수들도 모두 쏟아져 나왔다. 몬스터들의 인간먹이들은 다시 비명을 질렀다. 로슬로스는 머리에 뿌연 안개가 낀 듯 한순간. 한순간 멍해 있다가 시작된 유흥거리에 턱을 슬슬 만지며 집중하고 있었다. 그러다...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맹수들에게 잡아먹히고 있는 노예들 은 얼마나 두들겨 맞았는지. 특히 얼굴부분은 아주 엉망이었지만 매 우 익숙한 외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지가 찢기고 등골 서늘한 세운 발톱에 할퀴어져서 내장이 쏟아지 고 목이 물리고 팔이 떨어져나가고...구경하던 왕은 갸웃거렸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할 무렵. 두 번째로 노예들이 경 기장으로 투입되어 뛰쳐나왔고 낯익은 나신들. 멀리에서도 확연한 머리색들...로슬로스는 몸에 경련이 일었다. "누가 감히 왕의 여자들을!" "왕의 여자들이었습니까, 로슬로스 국왕폐하?" 로슬로스는 옆자리에 앉아있던 하프엘프의 음성에 고개를 돌렸다. "천한 노예로 보이는데요, 로마노 국왕폐하?" "그렇지. 아니? 그럴 리가. 어. 왜 이렇게 머리가..." 에르비오는 왕 주위에 있는 고써클 마법사들의 마나유동을, 대마법 사 칭호를 받았어야했을 숨겨진 자신의 8써클 마법력으로 폐쇄했다. 레이디 진의 계획에 따라 경기장 내의 노예전사들은 바쁘게 움직였 다. 경기가 시작되자 경기 진행을 맡고 있던 검을 쓰지 못하는 여자 들과 노예들은 모두 파란 머리 엘프의 도움으로 도시 밖으로 이동 되었다. 블루는 마법진을 없앴고 노예전사들은 일부를 제외하고 모두 눈에 띄지 않게 경기장 밖으로 나가고, 남아 있던 몇몇은 바꿔치기 한 희 생양들을 무대로 밀어주었다. 그들이 당하는 시간은 몇 분 걸리지도 않았고 두 번째로 맹수들의 먹이 감으로 투입된 여자들의 악다귀에 친절히 거추장스런 옷을 벗 는 것을 도와주기까지 하고 무대로 내보냈다. 커티스는 맹수들을 모두 풀어 넣자 경기장 내 외부에 남아 있던 동 료들에게 모두 밖으로 철수하게 했다. 더럽고 잔인하고 삐뚤어진 취 향을 가진 원수들의 함성소리를 들으며 그들은 원형경기장의 밖으 로 통하는 모든 문을-정문만 빼고-걸어 닫고 빠져나왔다. 블루와 기사를 많이 거느린 귀족들을 감시하고 있던 릭과 경기 운 영을 총괄하고 있던 커티스는 유일하게 열려 있는 경기장 정문 앞 에서 진과 와이즈를 다시 만났다. 진의 차례였다. "전사들을 건물과 떨어져 있게 하세요, 커티스님. 그리고 시내를 부 탁합니다. 저도 곧 갈게요." "알겠소, 아가씨." "릭. 오다보니까 주차장에 남아 있는 시종들이 꽤 있었어. 블루와 그냥 피신처로 가 있겠어? 기사의 입장으론..." "절 빼실 생각은 하지도 말라고 했지 않습니까, 진." 진은 고집 센 기사에게 대답하는 대신 잦아들었다 다시 일고는 하 는 함성으로 희미한 진동이 느껴지는 정문 벽에 손을 대었다. "진. 에르비오님이 안에 계세요." "에르비오님은 8써클 마법사이니 빠져 나올 겁니다, 블루님. "대마법사이셨나 보네요." 블루는 피곤이 풀리지 않는 눈으로 와이즈에게 눈을 돌렸다. "지금 시작하자. 뜸들일 것 없어. 복잡해지기 전에 모두 움직여 줘. 와이즈 부탁해." 와이즈는 멀리. 아주 먼 곳을 보는 눈빛의 진에게 근력강화마법을 걸어주었다. 릭은 머뭇거리는 커티스의 팔을 잡아 이끌고 그와 함께 밀집되어 있는 마차들 사이를 지나며 마주치는 귀족가의 하인들과 밀회를 나 누고 있는 귀족 남녀들을 베며 시가지를 향해 뛰어갔다. 진은 마법을 시전 받고 와이즈와 블루와 함께 정문 안으로 걸어 들 어갔다. 몸에...힘이. 원래 가진 힘과 보통 때 낼 수 있던 힘의 몇 배 가되는 힘이 몸 안에서 기승을 부리는 것이 느껴졌다. 지나친 완력을 담은 몸이 주체를 못하도록 끓어 넘치는 기분 속에. 진은 두 팔을 벌려 손끝이 닿기엔 조금 좁게 세워진 정문 앞 한편 의 기둥에 팔꿈치를 약간 구부리고 손바닥을 대었다. 경기장 안은 마지막 죽어가던 여자의 비명으로, 혼란이 가미된 놀라 움이 침묵과 함께 깔리고 있었다. "난 로마노의 여자다! 왕의 여자란 말이닷! 반란인 줄도 모르냐! 병 신 같은 것들...! 아-아-악-!" 무대와 가까이에 있던 사람들을 시작으로 경악이 번져나갔다. 여흥의 노리개였던 노예들은 노예가 아니라. 그들의 여주인. 미래의 주군. 지나간 주군...왕의 자녀들...이었다!! "음모다! 왕이여! 로마노에 반란이!" 새로운 의미의 소요가 일었다. 데릴라는 무섭게 느껴지는 광경에 오금이 저려 화장실을 찾아 들어 갔다 나오다가, 개선행렬이 있었던 거리에서 보았던 검푸른 머리의 아가씨가 아름다운 금발머리 마법사와 파란머리 엘프와 함께 정문 에서 걸어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멀리 떨어진 거리였지만 기둥 사이로 보이는 특유의 곱슬머리와 체 형은 틀림없었다. 굉장한 미남들을 친구로 두고 있음에 부러운 생각을 하며 그녀는 그냥 모른 척할까 말까 잠시 허둥거렸다. "와이즈. 시작해." 와이즈는 경기장 내 '마나'의 흐름을 정지시키거나 혹은 유동을 방 해하기 위해 투명화마법을 쓰고 상공으로 워프해 자리에서 사라졌 다. 진은 온 몸 끌어올릴 수 있는 모든 힘을 상체에. 팔에. 손바닥 에. 옮겨 실어 기둥을 밀. 기. 시. 작. 했. 다. 블루는 진의 뒤에 서서 탈출을 준비했다. '어? 뭐하는 거지?' -드르르르.... 데릴라는 다가가다 벽이 흔들리는 진동과 깊고 깊은 곳에서 흘러나 오는 것 같은 장중한. 묵직한. 깊은. 마찰음을 들었다. 블루는 신경이 온통 앞에 서있는 인간여자의 안위에 가 있었다. 그는 진의 머리 위쪽 받침대 기둥 위에서 슬쩍 흙먼지를 떨어뜨리 며 비칠거리는 석돌을 불안한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기둥으로 옮긴 힘의 영향이. 반응이 있음을 알자 진은 맞물린 이로 인해 잇몸에서 피가 베어 나와 비릿한 피 맛을 느끼며, 눈을 질끈 감고 몸의 근육을 최대한 부풀리고 힘을 끌어 올려. 양손바닥으로 보냈다. 블루는 진의 옷소매 아래 손목과 손등이 핏기가 가셔 하얗 게 되어 가는 것과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지켜보며 다 시없을 각박한 긴장 속에 있었다. -우르르르르-릉- 와이즈는 원형경기장 중앙의 건물 키를 훌쩍 넘는 높은 허공에 떠 서 두 팔을 벌리고 정신을 집중했다. 마법을 쓰는 인간들의 탈출을 막는 것이 그의 일이었고. 그는 진의 기척이 건물 내에서 사라지는 것을 감지하자 곧 드래곤의 용언에 쓰이는 밀도 높은 마나를 풀어 아래에 퍼뜨리기 시작했다. [마법의 원천 드래곤의 마나이다. 내 영향아래. 내 힘 아래 존재하 는 마나의 흐름을 금지한다. 운용을 멈춰라.] 상공에 떠서 투명마법으로 가려진 와이즈의 몸과 눈이 황금색으로 빛났다. 그는 바람에 펄럭이고 있는 마법사 복장의 끝자락으로 눈길 을 내렸다. 데릴라는 그것을 보았다! 그녀는 건물의 주춧돌 중 하나일 한아름이나 되는 기둥을 밀어내고 무너뜨렸다! 그리고 받침대 잃은 천장이 그녀를 덮치기 전. 파란머 리의 엘프가 휘청이며 팔을 아래로 떨어뜨리는 그녀의 허리를 낚아 채서 뒤쪽 열린 정문으로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데릴라는 이해할 수 없는 그 광경에 의문을 담은 눈을 하고, 무너져 내리는 천장을 올려다보다...어디선가 날아온 돌에 머리를 얻어맞고 쓰러져 기절했다. 혼란과 분노에 빠져있던. 정문과 바로 통하는, 무대와 가까워 귀빈 석인 그곳 바닥이 먼저 흔들렸다. 드워프들이 교묘하게 기초를 축내고 위장해 놓아 이 빠진 부실공사 가 된 원형경기장은 진이 밀어내 무너뜨린 입구 쪽 붕괴를 시작으 로 도미노처럼 원형건물은 내려앉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로마노는 그들이 세운 명소의 거대한 돌들에 깔리고 내 려앉는 바닥 틈으로 추락하며 비명을 질러야했다. 하늘에서 울려야할 천둥이 땅에서 일었다. 지진이. 일어났다! "아악- 신이여. 자비를! 막아주소서!" "말도 안 돼! 이럴 수가!" "어서 피해! 마법사!" "마나 유동이 안됩니다!" 우상을 신으로 모시던 신성력 없는 사제들도. 마나의 흐름이 막혀 마법을 쓰지 못하게 된 마법사들도. 눈치가 빨라 한 발 먼저 마법을 시전 하다가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뒤틀린 마나 유동으로 내상을 입고 피를 토하는 마법사들도. 검으로 막을 수 없는 재해에 기사들도. 지배와 고귀함을 상징하는 이름을 가진 귀족들도. 돈으로 살 수 없는 행운과 권력을 잃은 상인들과 기득권 층들도. 그들을 따르고 허리 숙이던 평민들도. 동작 빠르게 앞을 다투어 문을 향해 몰려갔지만 굳게 닫힌 모든 출 구 앞의 철문을 두드리며 신을 찾는 사람들도. 영광스런 상품의 역할로 기대 어린 자리를 했던 왕손들도. 새 신부였던 왕비도. 바닥이 무너지고 천장이었던, 다듬은 바위나 다름없는 거대한 돌들 이 쏟아짐에! 비. 명. 을. 질. 러. 야. 했. 다. 에르비오는 로슬로스 국왕의 뒷덜미를 잡아채고 운용이 힘들어 쓰 기 힘들었지만 축적되어 있던 자신의 마나 중 부스러기들을 어렵게 긁어모아, 피를 토하며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하는 바닥에서 발을 떼 고 공중부양 했다. 로마노의 마지막 왕이 된 로슬로스는 하프엘프의 손에 예복을 잡혀 공중에 대롱거리며 떠서, 무너지고 있는 원형경기장. 그것에 깔려 처참하게 죽어 가는 신하들과 자신의 손님들과 백성들의 울부짖음 을 보았다. 그는 마계지옥을 목격했다. "네. 네가...아. 아니. 에르비오 삼촌. 당신이 꾸민 일입니까?!" "아닙니다, 국왕. 내가 왕의 삼촌이었나요? 전 로마노의 왕손이 아 닙니다. 노예 신분이었던 엘프의 후손이지요." 로슬로스는 겁에 질린 얼굴로 마지막 생명의 끈인 그의 손목을, 머 리 뒤로 쳐들어 올린 손으로 꼭 붙잡았다. "요. 용서를..." 에르비오는 중년의 나이인 주름지기 시작한 조카의 얼굴에서 추악 하고 혐오스러워 보이는. 목숨을 구걸하는 진실로 천해보이는 '로마 노'를 보았다. 와이즈는 마법사들이 쓰는 마나와 달라 큰 영향이 가지 않은 대자 연의 마나를 쓰는 정령을 부리는 정령사들의 바람을 탄 탈출과. 몇 몇 생명이 아닌 물건의 쓰임으로 일회용이 된-와이즈의 방해로 부 서져서-마법아이템을 써서 날아오른 자들의 뒤통수를 쳐서 다시 떨 어 뜨려주며 허공을 돌아다니다가, 꼴불견의 자세로 하프엘프에게 매달려 있는 국왕을 발견했다. 그는 계속 흩뿌리고 방출하고 있던 자신의 기운과 힘을 반쪽짜리 엘프에게 부담을 덜 줄 요량으로 약간 거둬들이며 스윽- 다가갔다. "하프엘프. 리스트에 있는 자냐?" 에르비오는 보이지 않는 드래곤의 음성에 흠칫하다 뻐근한 어깨에 손을 가져가며 대답했다. "그럴리가요, 드래곤이여. 마지막 순간은 보여 줘야할 것 같아서요. 하하하. 음. 눌려 찌그러질 것 같네요. 좀 떨어져 주십시오." "사. 삼촌! 살려 주세요!" 입가에 토혈의 흔적이 있는 하프엘프는 피비린내와 먼지가 피어올 라 탁해진 바람결에 초록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잡고 있던 마지막 로마노의 왕족. 왕손을 놓았다- 로슬로스는 발버둥을 치며 늘어뜨리고 있는 그의 손목에 매달리려 했지만 곧 미끄러져 놓치게 되었다. "더러운 창녀 엘프의 자식. 저주를..." 국왕은 말을 맺지 못하고 사지가 찢겨 피를 뿜어내며 수 십 미터 아래로 낙하되었다. 그가 떨어진 곳은 왕의 피붙이들이 맹수들에게 뜯어 먹히고 조각이 된 사체가 뒹구는, 피가 흥건한 무대 위였다. "컥-" "뭐 하러 마법을 쓰냐? 죽고 싶을 정도로 듣기 싫은 소리였..." 와이즈는 내상이 심한 몸과 정신을 지탱하지 못하고 추락하기 시작 하는 하프엘프를 잡아 올렸다. 기절한 그를 발등에 올리고 와이즈는 황금색으로 빛나는 눈을 내려 아래를 보며 투덜거렸다. "네가 뒷일을 맡아주지 않으면 곤란하거든. 이뻐서 살려주는 거 아 니다. 반쪽 엘프야." 로마노 시내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가깝거나 먼 곳에서 들려오는 지축을 울리는 진동과 강렬한 소음의 뒤를 따라온 여진을 겪었다. 놀람과 호기심으로 무슨 일인가 싶어 창에서 몸을 내밀거나 밖으로 나가는 그들의 등뒤에선 사슬을 푼 노예들이 언젠가. 혹은 어젯밤 훔쳐서 지니고 있던 검과 단도를 쳐들었다. 원형경기장에서 시가지를 향해 질서 없이 달려가는 노예무리들도 있었다. 그들은 살인기계였고. 자신들의 할 일과 원한을 알고 있었다. 원형경기장 밖. 노예 족쇄를 하지 않은 곳곳에 남아 있던 귀족들과 그들의 아이들과 귀족과 다 름없던 평민들과 그들의 아이들과 신전을 지키고 있던 사이비 사제 들은... 그들 로마노는. 노예들의 손에 학살되기 시작했다. 2 카르마의 구슬 116 -[데릴라의 기도] * 진은 가물거리는 의식을 어렵게 붙잡고 있었다. 풀 냄새가 났다. 나무냄새인 듯도 한. 블루가 받치고 있는 듯 했다. 그의 몸을 타고 뚜렷이 전해지는 땅의 진동으로 굉음의 정체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마법. 부작용이 있는 거야?" "네, 진. 근력강화 마법은 몸에 부담이 가요. 혹사시키는 셈이에요." 진은 흐릿해지는 눈의 초점을 가다듬고 전방. 자신이 일으킨 재난을 쳐다보았다. 경기장 건물은 자욱한 흙먼지를 피워 올리며 무너지고 있었다. 그녀는 이마에 따뜻한 물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느끼고 눈을 들었다. 엘프는. 흰옷을 입은 선의의 그 종족은. 낙석의 위험이 미치지 않을 거리로 피신해 바닥에 주저앉아 자신을 부축하고, 건물이 내려앉고 부서지는 굉음사이로 들려오는 -생존에 대한 갈망으로 울부짖는 인 간들의 목소리를 구별해 들으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동정할 필요 없는 죽음이야, 블루. 울지마." "진. 이제 이런 일은 하지 마세요. 그냥 두어 버리세요. 무시하는 것 이 가장 큰 벌이라고 했지요. 그들은 무시당하는 것이 더 나았을지 몰라요." "그들은 선을 넘었어. 의미 없는 복수였을까? 아니면 자격도 없이 나선 타당하지 않은 형벌이었을까?" "다른 이들이 하게 그냥 두세요. 진도 무너지고 있잖아요. 진이 감 당하지 않아도 세상은 알아서 돌아가요. 잘못했어요. 말렸어야했는 데." 뿌연 흙먼지 사이로, 밀집되어 있는 마차 지붕 위에 튀겨 떨어지는 돌들로 파괴되는 교통수단과 히힝거리며 놀라 날뛰는 묶여있는 말 들의 혼란을 지켜보며 진은 힘겹게 일어나 앉았다. 몸에 힘이 죄다 빠져나간 것처럼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글세. 날 이곳으로 인도한 것이 인간의 죄악일까. 내게 세례를 한 신의 뜻일까? 난 게임의 '말'이 아니었을까?" 무감각한 표정으로 잦아들고 있는 지진의 여파에 시선을 꽂고 있는 진의 곁에서 블루는 볼을 타고 흐르던 눈물을 닦아냈다. "진. 위로하게 해 주시겠어요?" 그녀는 닳아버린 것 같은 노여움과 막연한 대상을 향한 원망과 자 신이 벌인 일의 무게에 새삼 허탈하여 무력감에 빠져있다, 엘프의 말에 현실로 돌아왔다.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아있었다. "위로가 필요한 건 블루도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 흔들리는 파란눈동자의 엘프 블루엘은 의지를 벗어날 것을 걱정하 는지 양손을 꼭 맞잡고 있었다. "책임지라고 하면 안 돼, 블루." 웃음기 없는 농담을 하며 진은 그의 머리에 손을 가져가 숙이게 하 고 따뜻하게 입맞춰주었다. 위로 섞인 가벼운 입맞춤을 해주고 떨어 지는 진의 얼굴을 붙잡고 블루는 다시 키스했다. "부탁이에요, 진. 상처입지 마세요." 흙먼지가 내려앉기 시작하자 와이즈는 자신의 영향력을 거둬들이고 발등에 축 쳐져있는 하프엘프의 뒤틀린 마나를 제자리 하게 했다. 그는 곧 깨어났고 스스로 회복되어 진의 기척을 향해 워프하는 와 이즈를 따라 경기장의 주차장이 시작되는 지점으로 이동했다. 뻣뻣이 멈춰서있는 금발머리 마법사의 눈길을 따라갔다가 에르비오 는 인간 아가씨의 얼굴에 숙이고 있던 머리를 드는 엘프를 발견했 다. "어라? 흠..." 와이즈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자신을 흘끗거리는 초록머리 하프엘프 의 뒤통수를 쳐주고 싶은 기분으로 진을 부축해 일어나는 엘프를 노려보았다. 블루는 정식 첫 대면인 하프엘프에게 엘프의 인사를 했고 에르비오 는 연장자일 그에게 깍듯하고 상큼한 답례 인사를 했다. "에르비오님. 피신처로 가시겠어요? 아니면 잔당 처리 일에 힘을 빌 려주시겠는지요." "에. 잔당처리군요. 계속 하실 겁니까, 레이디 진?" "귀족가에 남아있는 기사들도 있을 테고. 시작한 일은 끝맺어야하니 까요. 제 마법사는 쉬어야할 것 같고 일행인 블루도 지쳐있으니 에 르비오님이 제게 회복마법을 써 주..." [회. 복.] "...써 주지 않으셔도 되겠군요." 에르비오는 그들 사이의 묘한 분위기에 녹색 눈을 빛내며 미소지었 다. 엘프 라하르네는 죽일 듯 노려보고 있는 드래곤의 시선에 애써 초연한 태도로 오리발(?)을 내밀고 있었고, 검푸른 머리의 아가씨는 살기를 띄우고 있는 금발머리 마법사를 협박? 무시? 뭔지 모를 시 선으로 흘끗거렸다. "와이즈. 난 커티스와 릭을 도우러 가야겠어. 블루는 피신처로 가있 지 그래? 마음 편할 광경이 아닐 거야. 될 수 있으면 사람들과 떨어 져 있지 말고 꼭 붙어있어. 요절하는 일행의 장례는 치루고 싶지 않 으니까." "콜록. 네, 진. 도움이 필요할지도 모르니 가 있겠습니다." 이동마법 주문을 외우며 사라지는 엘프를 죽일 듯 노려보던 와이즈 는 머리를 긁적이는 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왜 바람피우다 걸린 기분이 되는 거람." "죽고 잡냐?" "응. 죽고 싶어, 와이즈. 이곳 일이 끝나고 나면 죽여도 돼. 그럼 아 주 길게 오래 잠을 잘 수 있겠지. 힘들어. 좀 봐 줘라. 블루는 잘못 한 것 없어." "그럼 네 잘못이겠군." "...와이즈. 넌 위로가 필요 없잖아. 필요했었어?" 대답을 해 주지 않자 한숨을 쉬며 몸을 돌리는 진을 잡아채서 흔들 어주고 싶었지만, 보는 눈이 있음에 와이즈는 쥐고 있던 주먹을 소 매 속에 집어넣는 것으로 대신했다. 에르비오는 드래곤의 살인적인 기운을 등에 지고 시내를 향해 걸음 을 옮기는 여걸을 보며 오늘 경기일정에 있었던 화관 증정식을 떠 올리며 웃음을 참았다. * 진은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곳곳. 귀족가의 개인 사병일 기사들의 저항에 전진이 어렵거나, 위험에 빠져 있는 임시 자신의 검들을 돕 기 위해 망설임 없이 그들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다. 그녀가 지나간 자리에 뒹구는 새로운 시신들과 잠깐잠깐 눈에 잡히 는 몸놀림에 릭도 커티스도 구경(?) 삼아 산을 내려온 솔버그를 비 롯한 몇몇 드워프들도 합세한 하프엘프 에르비오도. 혀를 내둘렀다. "이봐. 기사양반. 아가씨가 보통이 아니었네!" "뒤나 조심하시지요, 전사 커티스님. 전투 중에 웬 잡담을...엇!" "이 정도 묘기야 보통이지. 방금 보이더구만 또 사라졌네. 판의 주 군이라 더니 이름 값을 하시네. 마법을 쓰는 줄 알았더니만. 괜찮은 아가씨야! 어딜?! 다~보고 있단다, 애송이 가짜 기사들아." -욕설과 저주와 함께 도대체 왜 학살을 자행하는지. 여자나 아이들 까지 무차별로 죽이는 미친 것 같아 보이는 그들에게 항의하듯 외 쳐오는 검을 쥔 로마노 시민들의 의사는 철저히 무시되었다. "이봐. 인간 기사야. 그 당돌한 여자 애 정말 인간 맞냐?" "솔로몬님?" "걔 애비다. 구별도 못하냐? 쯧. 보는 눈하고는." 릭은 부딪쳐오는 검과 마구잡이로 내리쳐오는 검 날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는데, 휙휙 지나치던 아군들이 한마디 씩 물어오는 레이디 진에 대한 이야기에 더 산만해져서 위험한 순 간을 자주 맞아야했다. '이거 사람이 뜸한 곳을 찾아갈 수도 없는 노릇에. 정말 집중이 안 되네.' 전쟁터에 참가한 경력이 없던 그는 심장이 벌컥거리는 위험 속에 검을 휘두르며, 호신과 비슷한 어떤 무예도 연습하는 꼴을 볼 수 없 었던 동료 아가씨를 닮지 않고 검술 연습을 꾸준히 했던 일에 안도 했다. "릭페르 후작님이라고 하시더군요. 에르비오라고 합니다. 레이디 진 께서 누구에게 검술을 배우셨는지 혹시 아십니까? 흡사 몽둥이를 휘두르시는 것처럼 보이던데. 민첩하기가. 흠. 대단하더군요." 화려한 수가 놓인 긴 예복자락을 펄럭이며 머리 위에 둥둥 떠서 태 연히 말하고 있는 하프엘프에게 릭은 땀이 흐르는 이마를 들이밀어 보여주고 싶었다. "아. 죄송합니다. 모두 바닥에서 발을 떼시고 어딘가 매달려 계세요. 여긴 제가 맡도록 하지요. 운*디*네." 그는 소수인 아군들을 지적해주고 나머지에게 물을 뿌리도록 시키 더니. 별 주문도 없이 시동어를 읊었다. "~해서 낙뢰." "으악." 감전 된 전기에 비명을 지르는 로마노 잔당들 사이로 낯익은 비명 이 들려와 릭은 깜짝 놀랐다. "에르비오님! 타 죽을 뻔했습니다. 미리 주의 주세요." "어. 죄송합니다. 레이디 진. 주의를 줬었는데 그 때는 여기 안 계 셨..." "릭. 궁성 쪽으로 가봐. 그 곳으로 가는 기사들이 있는 것 같아." "궁성엔..." "궁성은 비었을 거야. 다 죽었을 테니. 감옥의 죄수들만 남아 있을 거야. 블루에겐 구출 업무가 더 낫겠지. 그렇게 꼬리보이고 숨어있 으면 누가 몰라? 릭과 궁성으로 가, 블루. 무리한 일 하려들지 말 고." "콜록." 에르비오는 피가 질펀한 살벌한 전쟁터에서 유독 두드러지고 있는 특유의 성량 높은 목소리에 고개를 갸웃하며 미소지었다. "리툰 마법사님은...?" "와이즈는 쉬고 있을 거야, 릭." 릭은 도망치거나 골목에서 기습해 오는 사람들을 베며 궁성 쪽으로 달려갔다. 블루님도 따라왔다. 무차별적인 살인이 자행되고 있었지만 릭은 전혀. 전혀 기사의 본분 에 역행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들은 신의 벌로 영혼마저 소멸할 형벌을 받는 대신 카르마(윤회) 로 돌려 보내지고 있었다. 너그러운 판결이었다. 지진에 대한 두려움과 잃어버린 자부심으로 로마노의 기사들은 허 울뿐인 기사들로 보였다. 그들은 점점 수가 줄어갔다. "커티스님. 숨어있는 자들을 색출하지요." "좋지요~" "어이~ 꼬마여자야. 우리 도움은 이제 더 필요 없겠지?" "솔버그님. 비밀 금고들은 장인을 기다리고 있을 거 에요." 릭과 블루를 보내고 한산해진 거리에서 진은 저택 하나하나 성의껏 뒤져나가고 역시 뒤지게 했다. "대단한 것에 더하는 어휘를 '냉혹함' '결단력' '모사꾼' '치밀함' 어 느 것을 덧붙여야할까요. 어쨌든 카리스마인가요?" "......." "숨어 계셔도 압니다, 마법사 와이즈님." 투명화 마법을 쓰고 허공에 앉아 턱을 괴고 최선으로 도륙 되고 약 탈되고 있는 로마노 시가지를 내려다보던 와이즈는 대답하지 않았 다. 로마노의 시민들은 자신들이 부리던 노예들과 노예전사들과 그 들을 돕는 사람들과 드워프들과 하프엘프의 손에 숙청되었다. 그들의 비명이 저물어 가는 하늘의 노을 빛을 더 짙게. 더 처연하 게. 물들여갔다. 15-7. 데릴라의 기도. 데릴라는 눈을 떴다. 고통에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살아오면서 겪었던 어떤 통증보다 무디고 진한 고통이 느껴졌다. 팔이...짓이겨져 깔려있었고 다리에 감각이 없었다. 어두웠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시력을 잃은 것일까? 뭔가 떨어지는 것 같아 아무렇게나 쌓아져 있는 것 같은 돌과 기둥 사이로 초점을 맞춘 데릴라는 물이 떨어지는 것처럼 보인 그것이 물이 아니라 핏방울이라는 것을 알았다. 돌과 기둥들을 타고 흘러 왔을까...그녀 자신도 진득진득한 핏물 속 에 엎어져있음을 깨달았다. "왜....?" 왜?! 왜?! 왜 모두를! 그녀는 지금은 로마노령이 된, 숲과 가까운 작은 산골마을 출신이었 다. 어려서부터...마족이라는 오명을 쓰고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자 랐다. 부모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녀를 버렸다는 것만은 알고 있었 다. 데릴라는 소박한 생활을 영위하던 그 작은 그림 같은 마을에서 유일한 천덕꾸러기로 갖은 구박을 받았다. 그들. 증오스럽던 그들의 오해와 편견 속에 목숨을 구걸하고 쥐꼬리 만한 동정을 구걸하며 경멸스런 생활을 해야했었다. 굶주림에 지쳐. 희박한 아량과 동정이 그리워 할아버지뻘이었던 마 을 촌장에게 14살 때 몸을 주었다. 그리고 같은 마을 사람들의 하녀가 되었다. 데릴라는 하층민. 힘없는 그들의 오래된 울화와 노여움의 감정 받이 였다. 그녀는 동네북이었고 아무나 건드리고 걷어차도 되는 장난감 이었다. 마족이 아니라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받아주지 않았다. 그녀는 곧 18세가 되는 나이였다. 그 예쁘게 생긴 여자는 자신보다 연하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데릴라 는 언니라고 불렀다. 사람들은 숙이고 들어가면 친절해지니까. 그녀는 친구가 가지고 싶었다. 더러운 마족의 딸이라는 눈초리를 받 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굴복했다. 하지만 나아질 것 없던 암흑 같던 생활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던 그녀는 구원을 받았다. 로마노의 사제로부터. 데릴라가 태어나 살았던, 그녀를 유린했던 그 마을은 로마노의 기사 들에게 밟혔다. 데릴라는 추호도 그들을 동정하지 않았다. 정복이 이뤄지기 전에 그녀는 여신의 사제에게 걸러졌다. 마족이라는 오해를 주었던 머리색 때문에 데릴라는 그들 눈에 띄었 다. 사제가 되지 않겠느냐는 그들의 질문에 데릴라는 더럽고 천한 여자라 그럴 수 없다고 대답했었다. 그들은 괜찮다고 했었다. 괜찮다고. 데릴라는 최초로 자신을 찾아 인간으로 받아 준 그들을 따라 로마 노에 왔었다. 그리고 너무 행복했다. 겨우 두 세 달이었지만 평생을 두고 가장 행복했다. 로마노에서 그녀는 마족이 아니었다. 그들은 모두 친절했고 특이한 머리색에 오히려 관심을 갖고 대해주 었다. 그토록 원망스럽던 머리색이 예쁘다고 말해주는 남자들도 많았다. 그리고 그들은 때리거나 모욕을 주지도 않았고 선물까지 주며 친구 가 되길 희망했다. 데릴라는 자신의 이전 시간을 잊을 수 있었다. 그런데...사랑으로 가득했던. 희망으로 가득했던. 너무나 아름답고 좋은 사람들이 가득했던. 그녀의 도시를. 그녀의 친구들을....모두...모두.... "...여신님. 데릴라가 기도합니다." -데릴라. 우리들의 신을 받아주는 곳은 이곳 로마노 밖에 없단다. 그녀의 따뜻하고 작은 신전. 소박한 예배당에서 무릎꿇고 처음 들었 던 그들의 여신과 신전에 대한 설교를 떠올리며 데릴라는 기도했다. "당신의 신성력을 주십시오." -기한을 채워 정사제가 된다고 해도 신성력을 쓸 수는 없단다. 신 계에 속한 정통 이름을 가진 신이지만. 다른 신들이 주는 신성력과 우리 여신의 신성력은 성격이 다르다. 게다가 하급신으로 분류되어 있고 교리의 특성상 배척받고 있기도 하다. "당신의 종 데릴라의 기도를 들어주십시오." -하지만 일생에 딱 한번 기도를 들어주시기도 한단다. 그래서 다른 신전의 사제들은 뒤에서 우리에게 마계의 힘을 신봉하니 뭐니 하지 만 무시하거나 함부로 하지는 못한단다. "그녀의 행복을. 그녀의 친구들을 잃게 해 주십시오." -기도한다고 다 들어주시는 것도 아니고, 간절함이 닿지 않으면 여 신은 귀기울이지 않으신다. 그리고 섣불리 신성력을 청해서도 안 돼. 담보가 너무 크다. 명심하거라. 데릴라는 아득해지는 의식 속에 가까워지는 죽음의 향기를 맡으며 검게 변색되어 질퍽한 자신의 피 위에 볼을 내리며 중얼거렸다. "그녀에게 벌을 주소서. 친구 잃어 도움 받지 못하고 비참한 삶을 살게 해주십시오. 그녀를 증오합니다. 제가 잃은 행복만큼 그녀의 행복을 거둬주십시오. 로마노를 무너뜨린 그 힘을 잃고 가장 처절한 죽음을 맞게 해 주십시오. 데릴라의 피로. 데릴라의 원한으로. 데릴 라의 배신으로 데릴라의 생명을 담보로 기도합니다. 원한과 복수를 관장하는 신의 이름 리벤저리네." 그녀는 기도 말을 마치고 감지 않은 두 눈으로 형체가 모호한 자신 의 왼팔에 시선을 주었다. 그 팔에 안았던...아버지를 알 수 없었던 자신의 아이. 자신의 머리색을 물려받았던 그 아이는 어디서 무얼 할까. 아이를 데리고선 사제가 될 수 없다고 하여 로마노에 온 후 통금시 간이 끝나갈 무렵 치안병사들이 지나다니는 곳에 그 아이를 버렸었 다. 친절한 사람이 많이 사는 곳이니 어디선가 굶지 않고 사랑 받으 며 살고 있을 것이다. 거지들도 없는 깨끗하고 아름다운 거리이니...분명. 그럴 것이다. 데릴라는 감지 못한 눈으로 숨졌다. ...복수의 여신은 그녀의 기도를 들었다. * 어두웠던 하늘에 다시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태양의 빛이 들어왔다. 열린 성문으로 피신해 있던 사람들이 도시로 입성해 모든 생존자들 과 합세해, 몇 개인가 있던 광장 중 시가지 한복판에 있는 공터에 과거 로마노의 잔재를 쌓아올리고 불을 붙였다. 진은 피범벅이 된 머리카락을 쓸며 일행과 함께 죄악의 내용으로 채워진 책 가지를 땔감으로 재를 뿌리는 시체의 산과 화장을 돕는 정령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과거 로마노에 몸담았거나 수용되었거나 방문해 있다 운 좋게 살아 남은 모든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진은 너무나 지쳐 자꾸만 흐릿해지는 의식을 놓치지 않기 위해 안 간힘을 써야했다. 에르비오 그린엘은 살아남은 시민들을 솔버그의 도움을 받아 통솔 했다. 반정의 전리품이 된, 시가지의 저택을 털어 나온 엄청난 양의 금은 보화는 로마노 신전들에 배당되어 양육되고 있던 고아아닌 고 아들 앞에 쌓아져 있었다. 진은 그 아이들 쪽으로 고개 향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들 중 대다수도 그들의 귀족아비 어미의 죄를 이어받아 원한 서 린 노예들의 검에 죽임 당했다. 진은 말리지 않았다. 어린아이도 인간이다. 아이를 무시해서는 큰 코 다치리라. 그녀 자신은 5살에 세상을 인식했고 8살에 계획적인 살인을 했었다. 하지만... 우울함이 전해졌는지 블루가 매기에게 맡겨두었다 돌려 받은 하프 를 만지작거렸다. 진은 신 로마노의 검이 될 자들과 주민이 될 사람들이 이른 아침 햇살을 머리에 이고 스러지는 화장 처의 열기를 받으며 서서 하프 엘프가 아닌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것을 의식했다. 아침과 어울리지 않는 을씨년스럽고 깊게 깔린 침묵 속에 진은 입 을 열었다. "이곳은 드워프들의 땀이 서린 건물에 엘프의 눈물이 서린 곳입니 다. 인권을 차압당했던 노예였던 사람들이 되찾은 곳입니다. 여러분 이 가꾸십시오. 주인 될 자이니 신분을 나눠 고개 숙일 사람을 찾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와 제 일행은 방문자들입니다. 하지만 이끌어주 는 사람이. 통솔해주는 사람이 필요할 것입니다. 도시의 재건과 로 마노령의 영지와 마을을 되돌리는 일을 에르비오 그린엘님께 맡기 십시오. 그분 역시 여러분과 비슷한 아픔을 겪은 노예의 후손이니 여러분의 희망을 이해하시고 여러분을 인정하고 여러분의 도움을 절실히 바랄 것입니다." 시선이 옮아갔다. 하프엘프는 측근들과 서 있던 자리에서 몇 걸음 앞으로 나와 진과 일행을 향해 배에 굽힌 팔을 대고 허리를 숙였다. "로마노의 죄를 물어주셔서 감사 드립니다, 레이디 진. 저희들에겐 은혜였던 일이나 자칫 지나친 힘을 행사한 이유가 원인이 되어 업 보의 무게가 따를까 심려됩니다. 혼자 짊어지려 하지 마십시오. 어 제와 오늘의 시간이 죄로 구분된다면 저희도 나눠 가지겠습니다." 진은 그에게 다가가 기운 빠져 힘없는 손을 들어 내밀었다. 손등에 키스를 받을 때의 자세가 아닌 점에 무슨 의미인지 몰라 묻 는 시선의 그의 손을 잡아, 진은 악수를 했다. "제가 이곳에 오게 된 것은 정복에 희생되어 아사직전이었던 매기 와 대니를 위해서였습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거울입니다. 우상을 섬기던 신전에서 잘못된 길을 제시 받았을 저 어린 아이들과. 희망 과 긍지를 잃지 않고 버텨온 저들을 엘프의 선의로 이끌어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에르비오는 피곤으로 그늘져 있는 그녀의 남청색 눈을 들여다보았 다. 처음 자신의 저택. 아릿한 죄 부스러기가 떠돌던 그 방에 머뭇 거림 없는 걸음으로 들어와 서서 방탕의 현장을 둘러보던 뒷모습과 호기심으로 일부러 술잔을 떨어뜨렸을 때 돌아보던 그녀의 얼굴이 생각났다. 그때 그녀의 눈을 보고 너무나 많은 것을 담고 있는 듯 한 눈빛에 자신처럼 인간세상에서 살만큼 산 하프엘프인 줄 알았다. 그녀는 '찾고' 있었다. '희망'을. 그것은 자신도 평생을 두고 찾던 것이기도 했다. 그녀의 희망이 자신이었다면 자신에게 그녀도 희망일 수 있는데... "떠나실 겁니까?" "전 돌아가야 할 곳이 있습니다, 에르비오님. 대마법사이니 에르비 오님 한사람이 대군을 의미할 수도 있겠지요. 도시의 재건은 어렵지 않을 겁니다. 솔버그님도 계시고 여행자가 많이 들르는 곳이니까 요." 에르비오는 대답을 기다리는 진의 뒤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드 래곤과 그녀를 마음의 군주(공주)로 여기고 있는 듯한 기사와 그녀 를 선택한 엘프를 쳐다보았다. "경기에 쓰였던 방법을 썼다간 죽음이겠지요? 흠. 그냥 해 본 소리 입니다, 마법사 와이즈님. 엘프의 선택을 받은 아가씨의 바꿔치기 납치를 어떻게 성공하겠습니까. 하하." 블루는 붉어지는 자신의 얼굴에 의아해하는 릭의 시선을 느꼈고 와 이즈는 냉담한 표정으로 진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에르비오는 자신의 실프가 너울거리는 사람들을 향해 돌아섰다. "전 에르비오 그린엘 로슬로스였습니다만. 지금 이 시간 부로 에르 비오 그린엘 푸워드로 개명합니다. 로마노의 이름을 버리고 진푸워 드로 나라이름을 정하겠습니다. 반대하시는 분계십니까?" 커티스와 노예전사들은 피식거리며 웃었고 그의 측근들은 머리를 긁적였다. 나머지 사람들은 가족이나 동료의 몸에 팔을 둘렀다. "반대 안 하오, 노예들의 대장님. 단지. 에. 여자하나 붙잡지 못할 능력이라면 좀 의심스러운데...?" 농담을 하는 커티스에게 에르비오는 대처방법을 생각해 보자고 역 시 농담처럼 대답하고 말을 이었다. "진푸워드는 엘프의 신 가르디아엘과 드워프의 신 니이카초우의 교 리에 따라 선의와 성실의 조화를 나라의 이념으로 삼겠습니다. 저는 진푸워드의 초대 왕이 되겠습니다. 하지만 진푸워드의 주인은 왕이 아니라 여러분입니다. 새 나라의 시조가 되신 분들께 인사드립니 다." 사람들은 마주 허리 굽혀 절을 했다. 화려한 대관식 풍경도 아니었고 환영인파도 거창하지 않았고 화관 도 왕관도 없었지만, 하프엘프 에르비오는 모두에게 인정받아 왕이 되었다. * "누나. 정말 갈 거 에요? 우리랑 같이 안 살아요?" "대니. 미안해. 고향에 가야해." "언니. 그래도. 지금 바로 가는 거 에요? 아니지요?" 사람들은 에르비오의 지시에 자리를 정리하고 각자 맡은 일거리에 흩어지고 있었다. 진은 대관식이 끝나자 바쁘게 뛰어와 머뭇거리는 남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로마노를 멸망시킨 일이 죄였다고 해도. 미래가 될 그들을 위한 일이었으니 업보가 따른다면 또 받아야겠지. 진은 너무 피곤하고 몸이 아파 와서 주저앉고 싶었다. "바로 가긴 힘들어 매기. 언니는 좀 쉬고 싶어. 일행 아저씨들도(머 리 뒤쪽이 콕콕 쑤셨다.) 쉬어야할 테니 떠날 때 인사하고 갈게. 걱 정말고 엄마에게 가 있으렴. 멋진 집이 많은데 다른 친구들에게 선 수 당하겠다." 매기와 대니는 웃으며 평생 꿈도 못 꿀 아름다운 드워프 작 저택을 배정 받기 위해 솔버그 앞으로 뛰어갔다. "회복마법 더 걸어주랴, 진?" "와이즈. 전리품은 챙겨야지. 경기장에 묻혀버린 드워프제 보석을 포기할 거야? 그리고 호수도..." "리툰 마법사님. 회복 마법으로는 저도 힘들겠습니다. 블루님도 안 색이 말이 아닌데 대단한 체력이시네요." "에. 정령석을 이용 해..." "진!" 그들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서 있지 못하게 되었다. 진은 긴장이 풀려서인지. 위태하게 버티고 있던 신경의 마지막 심줄 이 툭. 끊어지는 것을 느끼며 흐릿해진 눈으로 바닥이 일어나는 것 을 보았다. 15-8. 스타파 그리고 에반젤린. 기사들의 나라 스타파도 여름이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나른하도록 더운 햇살이 수도에 내리고 있었고 부지 런하고 규칙적인 생활이 습관인 시민들의 하루도 궁성 성벽을 도는 순찰 경비들의 말발굽 소리와 함께 시작되고 있었다. 신분확인을 하고 입궐하는 궁성관리들의 무리도 보였다. 궁정업무와 나라의 대소사에 대한 회의가 이뤄지는 궁성회의실에서 도 이미 그 날의 업무가 진행되고 있었다. "군사. 아직 그들의 목적에 대해 파악되지 않았소?" "폐하. 예상과 다름없는 정보였습니다. 드리얀의 주신전 양성을 위 해서라고 하더군요. 정통 계승 권을 가진 두 명의 왕자와의 접견이 있었다는 것으로 봐서 다른 뜻은 없는 듯 하오나, 왜 하고 많은 나 라 중 드리얀에 관심을 표하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골드 드래곤 때문인가?" "신을 모시는 사제들이 드래곤의 영향력에 기대려 한다는 것도 어 폐가 있습니다. 그들에게서 정보를 얻는 문제는 상대가 신의 사제들 인 만큼 까다로운 일이라...우리 스타파는 최고의 기사들을 보유하고 있지만 그들은 무시할 수 없는 성기사들을 대동하고 있었고, 음모술 수가 통하지 않는 상대들이기도 했습니다. 자칫 반감을 조성할 수 있을 일이라 별다른 조치를 내리지 못했습니다, 폐하." 궁정예법이 딱딱하기로 이름난 스타파 왕실에선 오전시간 신하들과 의 국정을 논하는 자리에서 가장 민감하게 다뤄지는 나라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었다. 주변국의 군력 이동이나 왕가 내 변화에 대한 상황판단은 빠를수록 좋고 정확할수록 유리한 셈이니 심어둔 정보통과 첩자들의 보고를 참고하는 국정 운영 법은, 주변국을 경계하는데 소홀할 수 없는 스 타파에는 필수 불가결한 요건 중 하나였다. "신성왕국은 면적은 좁지만 무시할 수 없는 종교의 힘을 가지고 있 소. 경계에 만전을 기해 새로운 소식에 주목하도록 하게 하시오." "알겠습니다, 폐하. 다음 안건은..." 스타파 국왕은 세비 인상에 따른 영주들의 반발을 무효화시킬 방안 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대신들의 대화를 들으며, 힘이 배어 나오는 분위기의 국정회의장 창 밖 정원수 사이로 보이는 궁성건물에 시선 을 주고 왕좌에 등을 기댔다. 스타파의 궁성은 우아함보다는 견고함과 실용성을 토대로 하여 건 축되었다. 대륙에서 손 뽑히는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드리얀의 궁성 에 비할 바 못되었지만, 내실을 더 중시하는 국민성으로 그들은 자 신들의 나라와 그들 대표가 되는 왕성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드리얀이 여신들을 섬겨 온유하고 평화를 지향하는 풍토가 자연스 럽게 조장되었다면, 스타파는 승리와 성공의 신. 용맹과 용기의 신. 정의를 관장하는 신을 우대하는 편에. 동대륙 여러 나라들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어서 군력에 주력할 수밖에 없는 지형상의 특성으로 기 사들의 배출이 드리얀에 비해 압도적으로 우세한 나라이기도 했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주변국들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면 이 미 오래 전에 형제국 드리얀을 잠식하거나 돌려 받을 수 있었을 것 이다. 하지만 그들은 국가 재정의 막대한 예산을 군비에 충당하고 있어 주변국과의 마찰로 인한 잦은 소모전으로 근면한 국민들의 세 금이 탕진되고 있는 형편이었다. 부아 돋는 일이었지만 스타파의 노력과 자국을 지키려는 방어는 드 리얀에게 몹시 유용한 방패구실이 되는 탓에, 실제 속 알맹이는 드 리얀이 더 탄탄하다는 사실은 모두 알고 있었다. 지형이 문제였다. 초대 스타파 대왕이 반정을 일으켰을 때 서쪽이 아닌 동쪽으로 회 군하셨어야했다. 그랬다면 그 긴 시간 동안 드리얀의 병풍 노릇은 하지 않아도 되었을 일이었을 텐데. 거기에 더해 골드 드래곤의 수호가 따르지 않은 스타파 왕가는 반 정이 일어난 일로 몇 번인가 피비린내 나는 왕권다툼도 있었다. 원망스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스타파와 드리얀의 시조가 되었던 최초의 드리얀 대왕은 나라의 기 틀을 세운 후 평생 동안 자리잡히지 않은 국민들의 피땀어린 세금 을 왕가의 위엄과 권위를 세우는데 주력했고, 승하 후 같은 정통 계 승권을 가진 왕자들 사이에서 이념과 의견대립으로 나라를 양분케 할 씨앗을 남겼다. 그런 연유로. 드리얀의 그 아름다운 궁성 건물은 자국에서만이 아니 라 스타파에게도 동경과 그리움과 원망의 집약 체이기도 했다. 많은 시간이 흘러 대륙지도상에 표시되던 스타파 국경은 점차적인 변화를 겪어 동쪽으로 드리얀을 압박하며 함께 밀려난 형세였기에 그 한 많은. 옮길 수 없는 건물은 현재 스타파의 영토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은 그림의 떡. 여전히 위세 있는 웅장함으로 버티고 있는 가장 오래된 적궁이었다. 3년 전 드리얀의 1왕비가 별세했을 때, 내부로부터의 반정과 세력양 산을 꾀하기 위한 속셈으로 스타파의 최고 권력을 누리던 스틸 공 작가에서 후궁의 자리로 투입되었던 로즈마리 폰트 스틸은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다. 왕가와 공작가는 혀를 차야했다. 공녀의 안위를 포기한다고 해도 전과 다름없는 정세는 계속 유지되 고 있었고, 매 년마다 지원비 목적으로 드리얀에서 조공되던 물자는 그녀가 핑계거리가 되어 줄어들고 있는 판이었다. 스타파는 세금을 내는 평민과 농업을 주업 삼는 농노보다는 급료를 주는 계층의 분포가 국가 예산의 많은 부분을 차지했기에, 가까운 시일 내에 정복으로 인한 수확이 없다면 내실이 점점 허해질 것임 이 분명한 판국이었다. 상시 비상체계의 스타파는 그래서 요 몇 년 사이 더 경직된 분위기 로 긴장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신성왕국 사절단이 그들 스타파를 경 유해 드리얀으로 입성한 움직임을 포착하게 되었다. 그런 연유로 스타파는 그들 주신전 최고신관들의 감추고 있을지 모 를 의도와 드리얀의 대처와 변화에 촉각을 곤두세워야 했다. * 진은 몸살 감기에 걸렸다. 앓아 누워 고열에 헛소리까지 하며 개도 안 걸린다는 여름감기로 병치레를 했다. 인구가 적어 배당이 끝난 후에도 저택들은 많이 남아있었고 살림살 이도 파괴된 것은 그다지 없어서 거처 문제는 걱정 없었지만, 그들 은 진을 조금이나마 익숙한 곳으로 옮기자는 블루의 의견에 따라 로마노에 와서 머물렀던 고급여관 건물 5층을 다시 숙소로 잡았다. 블루는 정령을 불러 피로 범벅이 된 진을 씻기고 옷을 갈아 입히게 하고 땀이 솟는 이마를 닦아주며 끙끙거리는 진의 입에 처방약과 미음을 조금씩 흘려 넣어주었다. 그동안 릭은 진의 병간호를 블루에게 일임하고 진푸워드의 재건과 정비 일을 도왔다. 와이즈는 하루가 지나도 진의 몸살이 차도가 없자 떠나는 일이 지 연될 것임을 받아들이고 휑하니 밖으로 나갔다. 에르비오는 외모에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중년을 벗어난 연령의 노 련한 지배계층이었고 한 뜻이 된 주민들의 협조로 훌륭하게 새 나 라의 기틀을 잡는 일을 단시간에 이루고 있었다. 와이즈는 그런 바쁜 에르비오에게 찾아가 '내놔.' 하고 말하고는 진 이 약속했던 보수를 알아서 챙겼다. 그는 시내와 왕성 보물창고의 금은보화 중 보석과 보석장신구만 추 려 죄다 무한마법자루에 화풀이하듯 쓸어 담았고, 그의 행동에 에르 비오는 웃음을 참으며 '엘프에게 밀려서 어쩌나요, 와이즈님.' 하고 말했다가 마법이 난무하는 희대의 싸움판이 벌어질 뻔했다. 에르비오는 성의껏 실언에 대한 사죄로 뒤통수를 한 대 맞아주고 돌아서서 숨죽여 웃어야했다. 와이즈는 바로 경기장으로 가서 복구작업 혹은 사체발굴 작업을 하 던 드워프들의 머리 위에 둥둥 떠서 용언마법을 썼다. 그는 무너진 돌 틈 사이사이로 보석들만 고스란히 떠오르게 하고는 공중을 날아다니며 자루 안으로 마구 집어넣는. 드래곤의 이름이 아 깝지 않는 탐욕적인 행동을 보여주었다. 솔버그가 헛기침을 하며 못 본 척 하는 것에 와이즈는 부아가 더 플러스되었는지 회생 불가능하게 부서진 보석장신구를 골라 몽땅 던져주고는 당장 수선하라는 불가능한 주문을 협박으로 했고 드워 프는 사색이 되었다. "갈아서든. 녹여서든 뭐든 만들면 되잖냐! 못하겠다고? 엉?!" "네에. 모두 모아 하나로 만든다면. 그래도 되. 되겠습니까." "알아서 해. 뭘 어떻게 만들든 만들기나 해라. 땅꼬마야." "시. 시간은..." "그 계집애가 일어나면 떠날 거니까 그때까지 해 놔." 도둑질한(?) 자루를 당당히 어깨에 걸쳐 매고 일방적인 의뢰에 성 질을 내기까지 하며 사라지는 빌어먹을 도마뱀에게 솔버그는 뒤늦 게 주먹질을 했다. 만 이틀이 지나자 진은 잠깐 정신을 차렸다. "괜찮으세요, 진?" 매기와 대니와 함께 머물렀던 여관건물인 것은 알았지만 문들의 위 치가 반대임에 나쁜 기억이 있던 그 방이 아닌 반대편 방으로 옮겨 진 것을 알고 진은 내내 시중을 들고 있었던 듯 한 블루에게 힘없 이 미소를 지었다. "괜찮...으. 목이..." "폐렴이 될 뻔했어요, 진. 열은 내리고 고비는 지나갔으니 요양하시 면 될 것 같아요. 많이 아프세요?" "응. 아파, 블루. 아픈 건 싫은데." "안 아픈 병도 있냐?" 의자를 끌어다 침대 옆에 앉아있던 블루 곁에 나타나 퉁명스럽게 말해오는 와이즈를 올려다보며 진은 웃었다. "와이즈. 전에 이 비슷한 일이 있지 않았어?" "화장실 가라. 누가 말리냐." 진은 시비조의 대답에 쿡쿡 웃으며 블루의 부축으로 일어나, 병 부 르지 말고 쉬라는 말을 해주고 정말 화장실을 찾아 들어갔다. 문 앞에 서 있는 자신에게 인상을 쓰며 버티고 있는 드래곤에게 블 루는 머뭇거리며 말했다. "저도 좀 쉬어야 할 것 같은데. 마법사님께서 계셔 주시겠어요?" 대답하지 않는 그에게 한숨을 쉬어 보였지만 피곤한 것은 사실이라 블루는 진의 간호를 그에게 맡기고 며칠째 자지 못한 잠을 청하기 위해 응접실을 지나쳐 옆방으로 갔다. 벽을 짚어 지탱해서 방으로 들어서는데 부축해 주려는 태도를 보이 지 않는 와이즈에게 진은 인상을 써야했다. "좀 잡아 줘, 와이즈." "알아서 걸어. 엄살 떠냐?" 기운이 없어 대꾸하기도 힘들어서 문에서 손을 떼고 걸으려다 후둘 거리는 다리 때문에 다시 쓰러지려고 하자, 그는 곧 이동해 와 넘어 지려는 진을 받아서 부축해주었다. "젠장. 부리는 일에 도가 텄다니까." "업어라, 와이즈." "웃기네!" "그럼 안아." 와이즈는 갈라진 목소리로 명령조로 말하는 진을 홱 밀쳐주려다 웃 음기 어린 얼굴을 알아보고 실룩였다. "다 죽어 가는 여자를 안으라고?" "그럼 안아서 옮겨야지. 뭔 생각하는 거야?" "그래~ 맘대로 해라. 뻔뻔스런 계집애야." 투덜거리며 뜻대로 안아서 옮겨주자 진은 블루가 준비해 놓은 식은 스프와 물을 마시고 다시 잠을 청했다. 와이즈는 블루가 앉았던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잠이 막 들려하 는 진을 내려다보다 퉁명스럽게 입을 열었다. "진." "...응?" "내게 할말 있지 않냐?" 진은 감기던 눈을 억지로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왜 그를 볼 때마다 '가짜 인간 마법사' 라는 말이 떠오르는 것일 까. 편견이란 누구에게든 고집 센 벽으로 작용한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와이즈 넌 강하잖아. 도움이 필요해? 내가 '필요' 한 걸까?" 그는 맞은편 열린 창문 밖의 여름 하늘로 시선을 고쳤다. 그녀가 필요한가? 당연히 필요한 것이 아니었나? 하지만. 드래곤에 게 인간이 필요하다는 것도 우스울 일 아닌가. "...네겐 필요하지 않았냐?" "응. 와이즈. 넌 내게 필요했어. 큰 도움이 되었어. 항상 고마워." "......." "잠 와. 나중에 얘기 해." 진은 무거운 눈꺼풀의 유혹을 떨치지 못하고 다시 잠에 빠져들다... 볼을 간질이는 머리카락을 느꼈다. 따뜻한 숨결과 좀 길다 싶은 입술의 감촉. 와이즈는 고열로 거칠어 진 진의 입술에서 얼굴을 들며 말했다. "계산은 확실히 해라, 계집애야." 진은 대답대신 입을 삐죽여주고 잠이 들었다. * 진은 다시 앓았다. 하루 푹 자고 일어난 블루는 악화된 진의 상태에 당황했다. "어떻게 된 거지요? 쉬지 않으셨대요?" "쉬었습니다, 블루님. 화장실 다녀와서 밥 먹고 물먹고 계속 자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왜 열이 다시..." "그럴 수도 있겠지요. 너무 걱정 마세요, 블루님. 건강한데 겨우 감 기로 무슨 일 있겠어요." 쉬기 위해 숙소로 돌아왔다 병 문안으로 와이즈와 함께 방에 있던 릭의 말에 블루는 고개를 저었다. "폐렴은 위험할 수도 있어요, 릭페르님. 그렇지 않아도 요양이 끝나 지 않았었는데 너무 몸에 부담이 간 것일까요?" "처음보다 심한 것은 아닙니다. 고열은 아니고 열에 들떠 하는 소리 보다는 잠꼬대에 더 가까운 것 같으니까요." "잠꼬대요?" "쿡쿡. 들어보세요, 블루님. 재미 있...흠. 죄송합니다. 이거 실례인 데..." 진은 짧았던 한국에서의 학교생활을 꿈으로 꾸고 있었다. 그 날은 천고마비의 계절. 드물게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중요한 날 이었는데. "왜~ 하늘도 무심하시지. 고교시절 얍! 최대의 이벤트 엇! 추억 같 은 추억을 만들어 보고자 하건만. 잇! 비가 온다 이거지!!" "수경아. 제발. 가만히 있어. 정신 사나워." "지~인. 노래 해 주라. 후줄근한 기분으로 기차 타고 싶지 않어. 기 차가 뭐냐! 전철은 실컷 타 봤단 말이야. 수학여행쯤 되면 비행기는 타야지. 다른 학교는 그런 곳도 많은데. 가난뱅이 학교..." "커험." 담임이 헛기침을 하고 앞을 지나가자 수경은 얼른 입을 다물고 들 고 있던 우산으로 처마에서 떨어지던 빗방울을 쳐내고 때리던(?) 쓸데없는 행동을 그만두었다. "금방 그칠 거야, 수경아. 일기예보에서 그랬거든. 우리 반 차례다. 어서 타자." 상희는 먼저 올라간 반장 학철과 상민이 섞인 남학생 무리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열린 기차 문으로 우루루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제발, 수경아. 날도 궂은데 매달리지 좀 말아. 두고 간다?" "어헝. 진. 너무해. 나 용돈 쪼금 밖에 못 받았단 말이야. 부자 친구 덕을 봐야해. 진 옆에 있으면 짭짤하거덩." "알았어. 여비 보태 줄게. 놔." "하지만. 버뜨! 야들거려서 촉감이 너무 좋은 걸. 이쁜 건 죄야, 진." "상희야. 창문 열어. 던져 주자!" 상민과 학철이 자리 맡아놓은 맞은편 빈자리에 앉은 상희는 쿡쿡. 웃으며 대답했다. "수경아. 좋게 내게 넘길래. 아니면 비 오는 개찰구에 버려 질래?" "버리려면 내 사랑 디카프리오 무릎 위에 버려 줘, 상희야." "택도 없는 소리하지 말고 앉아, 수경아. 길을 막고 있잖아." 학철의 핀잔에 수경은 눈을 굴리며 진의 팔을 놓아주고 냉큼 창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안내 방송을 들으며 진은 짐을 올려두고 상희 곁에 앉았다. 재잘거림. 축축하고 차갑지만 부슬거려 다정하게 느껴지는 가을비. 기차가 출발했다... 블루는 릭페르처럼 쿡쿡. 웃기 시작했다. 와이즈는 처음 시작되었던 진의 잠꼬대의 말을 알아듣고 비실비실 웃었지만 지금은 혼자가 아니라 의연하게...웃고 있었다. 진은 간간이 중얼거리듯 뭐라뭐라 말을 하고 있었다. 내용은 주로 여자친구들과 나누는 장난이나 수다 같은 별 의미 없 는(?) 것들이었다. "그만해. 간지럽단 말이야. 그만하래도. 야-잇." "친구 분들과 사이가 좋았나 보네요." "그러게요, 블루님. 너무 뜻밖의 면이. 흠. 예의가 아닌 줄은 알지 만..." "비밀로 하지요, 릭페르님." "그래도 되려나요..." 그들은 또 진의 중얼거림이 시작되자 범죄를 저지르는 기분으로 약 속이나 한 듯 입을 다물었다. "저리가~ 제발. 손톱 세우지마, 상희야. 왜 나만 가지고 그래? 수경 이에게 알려 주면 어쩌자는 거야. 날 팔았구나. 못된 계집애들. 옷은 나둬. 찢어지겠다. 그만 잡아당기라니까." 이젠 뒤척이기까지 했다. "무슨 수학여행이 집단 희롱이야. 느네들 가만 안 둬. 하지마. 웁스. 으악. 으흐흐흐..." "주. 주무시면서 웃는 웃음소리가. 도. 독특하시네요." 웃음으로 더듬는 블루의 목소리 사이로 진의 잠꼬대는 계속 됐다. "얼굴에 장난은 왜 치는데? 재밌어? 미치겠네. 느넨 잠도 없냐? 혹 시 헐크를 보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또 시작이야!" 진은 몸을 뒤틀면서 중간중간 끊기는 웃음소리를 냈다. 시트가 말려 다리가 드러나자 블루는 다시 더듬거렸다. "더. 더 보면 안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데. 저기. 혼자 주무시게 하 는 것이..." "가서 더 쉬시지요, 블루님. 간병은 해야할 테니 누군가는 있어야지 요." 서성이던 블루는 마법사도 기사도 일어날 기미가 없자 탁자로 가서 주저앉았다. 릭은 앉아있던 탁자에 팔을 올리고 턱을 고였다. "아니, 혼숙을 해? 느네들 안 나가? 술은 또 뭐야? 수학여행은 범죄 의 온상이었구나. 선생님께 신고하러 간다, 왜? 헉. 살려줘. 잘못했 어. 이것들이 단체로. 그만해. 신고 안 해. 안 해. 우흐흐흐..." 와이즈는 꿈속에서나마 당하고(?) 있는 진의 처지가 고소하다는 생 각과 릭의 말처럼 그 나이 또래 보통 인간 여자 애들-평민 여자 애 들의 생활처럼 들리는 진의 잠꼬대에 피식거리며 웃었다. 그는 느긋하게 침대 옆 의자에 앉아 반나절 전부터 듣기 시작한 진 의 저쪽 세계에서의 평범하게 들리는 과거. 사건 같지도 않은 사건 들을 듣고 있었다. 이름들이 특이하단 생각을 하면서. "이상형? 이상형이라면 에. 물론..." 조용했던 실내였지만 갑자기 더한 정적이 깔렸다. "내가 이상형이 있던가? 생각 안 해 봤는데. 생각해 봐야하는 거야, 상희야? 모르겠는데. 이상형 만들어서 뭐 하게? 거기서 거기 아닌 가?" 와이즈는 엘프가 재채기를 참고 있는 것을 느끼며 뒤를 보이고 앉 아있음이 다행이라는...뭐가 다행인지, 원. "남자친구?" 릭페르도 숨을 멈추는 것이 느껴졌다. "있어. 거짓말을 왜 해? 별게 다 궁금하네. 해 봤다. 미성년자 관람 불가 빨간딱지다. 또 어딜 만져? 가만 안 둬. 화낸다? 수경이 네 친 인척만 아니면 아무나 괜찮아. 됐냐? 상희야. 나 좀 구해 줘. 이젠 무서워진다. 수학여행 한번만 더 가자면 학교를 불살라 버리..." 릭은 헛기침을 하며 일어나 대충 인사를 하고 급하게 방을 나갔다. 와이즈는 울고 싶다는 아니? 난처하다는 아니? 새빨개지는. 그러다 어쩔 줄 몰라하는 엘프의 혼란스런 얼굴을 보면서 처음으로 그에게 동정심이 생겼다. 진은 팔을 휘젓기까지 하며 꿈에 빠져있었다. * 성문을 담당하게 된 진푸워드의 자치 병들은 굳은 얼굴로 새 왕에 게 기별을 했다. 지금은 서거한 로슬로스 왕의 명으로 원정을 지원 하고 참가하기 위해 로마노령 영지들에서 온 기사단들이 입성 허락 을 청해왔다. 에르비오는 정권 교체 후 3일 만에 난관에 부딪혔다. 진은 겨우 열이 내렸지만 꿈을 잔뜩 꿔서 멍하고, 흠씬 두들겨 맞은 것 같은 기분으로 잠에서 깼다. 와이즈는 앉아있던 자리에 그대로 앉아있었고 블루는 주위에서 서 성거리다 진이 눈을 뜨자 머뭇거리는 모양으로 다가가 들여다보았 다. "왜 실실거려, 와이즈?" "내 맘이다. 웃지도 못하냐?" "왜 안 낫는 거지? 컨디션이 엉망이야. 허리까지 아프네." "저. 진..." "...젠장. 둘 다 나가." 휘파람을 부는 분위기로 척척 방을 나가는 와이즈의 뒤를 따라 풀 이 죽어 응접실로 들어가 문을 닫던 블루는, 화장실을 찾아가며 투 덜거리는 진의 말에 고개를 푹 숙였다. "프라이버시가 그립다. 클레이스 자식. 만나기만 해 봐라. 머리를 빡 빡 밀어 주겠어. 빌어먹을. 후유증이 겹치면 어쩌라는 거야..." 카르마의 구슬 118 -[스타파 그리고 에반젤린(2)] * 블루가 만들어다 준 약용 스프를 먹고 있는데 정비 일을 도우러 나 갔다던 릭이 돌아왔다. "몸은 괜찮으세요, 진?" "응. 게으른 일행 둬서 릭 혼자 고생이네." "미안하게 생각되시면 앞으론 조신한 숙녀가 되어주세요, 진." 무슨 소리냐는 듯 쳐다보는 진에게 그들은 헛기침을 하며 딴전을 피웠다. 계속 실실거리는 와이즈도 이상하고. 뭔가 감추고 있는 듯 해서 캐물으려 하자 릭은 얼른 화제를 에르비오의 곤란에 대한 내 용으로 바꿨다. "반발하는 거야?" "이곳의 상황을 아직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못한 것 같습니다. 에르 비오님은 호수를 이용할까하는 생각을 하고 계시더군요." "좋은 생각이야. 그들도 눈 있고 심장 있는데 보여주면 깨닫는 바가 있겠지. 하지만 앞으로 이런 일이 또 있을 것 같은데..." 진은 한숨을 쉬었다. 로마노를 바꾸는 일은 성공했다 쳐도 훨씬 많은 로마노령 사람들의 인식은 어떻게. 어느 세월에? 정복전쟁에 맛을 들이고 당연시 치부 되고 있던 침략과 약탈. 개전행렬과 개선행렬에 꽃이 뿌려지던 곳이 니 이곳의 영향을 받고 있었던 로마노령은. 에르비오의 '시작'은 다시 피를 부르게 될 일이 불가피할 지도. "어떻게 할거냐, 진?" "도와야지. 유혈사태를 다시 겪을 수는 없잖아." "더 머물겠다고?" "아니. 우리가 아니어도 에르비오는 할 수 있을 거야. 단지 그냥 떠 나긴 뭐하니 도움을 좀 주고 가자는 거지. 사태 추이를 보고 오늘 저녁이나 내일아침에라도 떠나자. 계속 누워있을 수는 없으니까." 진은 에르비오에게 보내는 전언을 릭에게 부탁하고 블루와 의논했 다. "엘프는 노래의 주제 선택에 제약이 있다고 했었지, 블루?" "듣고 싶은 노래가 있으세요, 진?" "내가 아니고. 블루가 불러주었으면 하는 노래가 있어서. 엘프의 공 명음이 필요해. 남녀의 사랑이 소재가 되는 노래인데 안 되려나?" "안 될 이유는 없지요, 진. 저. 대신 나중에 제 노래를 들어 주시..." "블루님." 진은 탁자에 자리잡고 가만 듣고 있다 험악한 인상이 되는 와이즈 에게 갸웃거렸다. 블루는 불만으로 보이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의 경 고에 고개 돌리지는 않았다. "왜 그래? 블루 노래는 여러 번 들어봤는데? 혹시 노래 주제에 얽 힌 엘프의 관례는 되돌릴 수 없는 일이 되는 거야?" 의문을 표하는 진을 무시하고 와이즈는 용언을 썼다. [너. 그 노래 부를 생각 했다간 후회하게 될 거다.] "...에르비오님을 도우려는 생각이시지요, 진? 어떤 노래를 부르길 바라시는데요?" "에. 응. 서사시인데. 가사는 모르고 줄거리만 알거든? 가르쳐 줄 테 니 노래로 만들어 불러 주겠어? 짧게 해도 돼. 시간이 별로 없지만 블루는 한번 듣고도 외우던데. 가능할 것 같아서 말이야. 사람들 앞 에서 불러야 하는데 괜찮아?" "네, 진." 성밖의 상황이 험악해지기 전에 수습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진은 블 루에게 롱펠로의 에반젤린 이야기를 해 주었다. 와이즈는 불쾌한 표 정이 되어 진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엘프를 쳐다보았다. 회복마법과 힐링마법을 여러 번 시전 받고 진은 기운을 차렸다. 더 시간을 끌 수 없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가능하다면 바로 출발하 기 위해 짐을 챙겨 일행과 함께 수도 검문소 앞에 긴장한 채 도열 해 있는 진푸워드의 병사와 주민들에게로 갔다. "레이디 진. 몸은 쾌차하신 겁니까?" "네. 덕분에 많이 좋아졌습니다, 에르비오님. 손이 많이 필요할 텐 데 도와드리지 못하고 누워만 있었네요." "별 말씀을. 바로...가실 겁니까?" "죄송합니다. 에르비오님. 전 일을 벌여놓고 떠넘기는 것이 고질병 이 되었나 봐요. 언젠가 기회가 닿는다면 꼭 다시 이곳에 찾아오려 고 해요. 잘 부탁드릴게요." "무슨. 건국 시조가 아니신 가요? 저희가 잘 부탁드리지요. 고국에 돌아가 계시면 언젠가 진푸워드의 친선사절단의 방문을 받으실 겁 니다...드리얀의 군주님." 그는 화려하지는 않지만 우아하고 소박한 푸른 색 수가 조금 놓여 있는 흰 예복을 입고 있었다. 진은 하프엘프에게도 흰옷이 어울린다 는 생각을 하며 정오의 따가워지는 햇빛으로 유난히 반짝이는 초록 색 머리카락을 바라봤다. 그는 마지막 붙인 호칭에 목소리를 낮췄지만 함께 있던 일행들과 드워프들은 들었고, 진은 멋쩍게 웃었다. "릭페르 후작께서 노래 이야기를 하시더군요." "아, 네. 하시는 일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제가 아니고 블루가 부르기로 했습니다. 혹시 음성을 저장해 반복 청취가 가능한 마법은 없나요, 에르비오님?" "음성 저장용 구슬을 사용하면 되지요. 이곳에서 엘프의 노래를 다 시 듣게 되다니. 기쁜 일이네요. 부탁드립니다, 블루엘님." 블루는 반쪽 동족. 나이로 따지자면 엘프 마을에서는 아직 아이일 그에게 미소지었다. 그도 엘프의 노래를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인간 세상에서 태 어나 인간으로 산 세월이 지금껏 인성에 크게 영향을 주었을 테니 잊었거나, 아직 터득하지 못했었을 수도. 성문이 열렸다. 진은 앞장 선 에르비오와 그의 주민들의 뒤를 따라 밖으로 나가며 매기와 대니의 어머니와 솔버그와 커티스와 노예전 사들과 안면 있는 사람들과 어지러운 인사를 나누고 작별을 예약했 다. 아이들은 밖으로 나오는 대신 안에서 기다리게 했다. 성문 밖에는 두 세 개의 로마노령 영지에서 차출된 기사단들이 개 전 행렬의 준비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편히 쉬어 자세로 입성 허락을 기다리고 있다가 성문이 열리자 자세를 가다듬고 있었다. 에르비오는 솔버그와 커티스와 몇몇 기사들의 호위로 그들 대표라 할 기사단장들과 귀족들 앞으로 가서 접선했고, 진은 일행과 주민들 앞에 서서 그들의 반응을 예의 주시했다. 그들은 반정으로 새 왕이 되었다는 옛 로슬로스 국왕의 인척 하프 엘프에게 어떤 태도를 해야할지 갈피를 못 잡는 어수선한 분위기였 고, 곧 에르비오의 권유로 끝나는 성벽 옆 탈출자들의 피신처였던 호수가로 인도되었다. "여기서. 무얼 보여주시겠다는 겁니까?" 백작으로 들은 귀족 지휘관에게 에르비오는 부를 수 있는 정령을 모두 불러 호수 안의 '것'들을 건져내게 했다. 드워프들의 노움들도 동원되었고 블루도 정령을 불러 돕게 했다. "와이즈. 빨리 떠나고 싶어했지 않아?" "쓸데없이 내가 뭐 하러? 아직 의뢰한 일이 안 끝났을 것 같은데." "뭘 의뢰했는데?" "...알 것 없다." 와이즈는 애꿎게 드워프들에게 화풀이했던 일을 비밀에 붙이고자 솔버그에게 용언을 날렸다~ [야. 땅꼬마. 만들고 있는 것 너 가져. 필요 없다.] '가. 감사합니다. 드래곤이여.' [뭘. 나중에 다시 들를지 모르지 괜찮은 것 몇 개 만들어 둬라.] '........' 솔버그는 노움들을 부리다가 우거지상이 되었다. 시간이 한참이 걸렸다. 탁한 호수 물이 심하게 출렁거리고 넘치듯 파도가 치는 와중. 그 곳 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심한 썩은 냄새와 보기만 해도 토악질이 나 올 끔찍한 죄악의 찌꺼기들을 계속. 계속. 대면해야했다. "욱." 로마노의 죄악. 원죄...가 원정을 위해 상경한 그들 앞에 펼쳐졌다. "이. 이건..." "수도 천도 후 시내의 쓰레기와 로마노의 정복지에서 끌려왔던 포 로들과 노예들과 부랑아와 거지들과 낳자마자 버려진 로마노의 사 생아들. 그들 비누재료로 쓰이고 버려진 시신들입니다. 부패하지 않 고 있는 엘프의 사체도...있군요." 그들은 비참하고 처참한. 쓰레기에 섞여 더럽고 불결하기 이를 데 없는. 썩어가거나 백골에 붙은 흐물거리는 살점의 시신들의 산. 그 끔찍한 죄악의 흔적에 말문을 잃었다. 로마노 시내에서 학살된 인간들의 사체를 화장했던 산 보다...몇 배의 키를 한 그 산. 주민들은 새롭게 솟는 분함과 억울함으로 울먹거렸다. 진은 블루에게 노래 할 준비를 하게 했고 에르비오는 하얗게 질린 멸망한 로마노의 기사단 앞에서 8써클 마법력을 보여주었다. "내 앞에 있는 모든 죽은 것들과 사라져야 할 것들에게 발화를 명 한다. 파이어 테이크(Fire take)" 시동어와 함께 주위 산소가 한곳으로 갑작스레 모여들어 사람들은 앞으로 몸이 기울다 비틀거려야했다. 수장 터에서 건져내 산을 이룬 그 시체더미들의 아래 부분에서부터 열기가 치솟았다. 에르비오는 범위 넓은 파이어마법의 시전에 집중하기 위해 모으고 있던 팔을 양옆으로 벌렸다. "...파이어 온(Fire on) 플레임(Flame)!" 거대한 붉은 불덩이가 확 타오르며 열기를 뿌렸다. 사람들은 익어버릴 것 같은 뜨거움에 뒤로 물러섰다. 궁성 지하에서 종교재판을 기다리며 갇혀있다 구출된 수련 사제들이 그 앞에 무릎 을 꿇고 자신들의 신을 부르며 사죄하고 죽은 자들을 위로했다. 현기증을 일으킬 것 같은 여름 햇살 아래 로마노의 마지막 잔재들 은 재가 되어 실프에 실려 하늘 위로 높이 날아올랐다. 침묵 깔린 진푸워드의 오후 나절. 블루는 화장을 위해 미리 나무가 없는 곳의 호수가 공터를 골라 모 여있었던 사람들 앞 풀 위에 앉아 있다가, 차례가 되었음에 하프를 고쳐 잡았다. 그는 엘프의 노래를 시작했다. 사람들 가슴에. 탐욕과 이기로 인한 전쟁에 따르는, 약한 자들 소박한 자들의 슬픔. 애환. 기원을 담은 가사의 서사시를 읊었다. "대지의 여신의 축복을 찾아 모여 사는 작은 영지가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가장 부유한 농부의 딸 에반젤린은 17세의 처녀로 집안 일을 돌보며 생활하는 착하고 아름다운 아가씨였습니다. 구혼자가 많았지만, 에반젤린은 어릴 때부터 대장장이의 아들 가브 리엘을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영주님의 호의도 기사들의 청 혼도 거절하고 그의 청혼을 기다렸습니다. 성실한 청년 가브리엘도 그녀를 사랑했습니다. 그들은 나무 그늘아래서 평생을 함께 하기로 언약했답니다. 세월은 흘러 두 사람은 반대하는 이웃들의 만류를 모두 뿌리치고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지요. 온 마을 사람이 두 사람을 축복하고 즐 겁게 잔치 기분에 취해 있을 때, 함성과 북소리가 들렸습니다. 모든 주민들은 성벽으로 달려갔습니다. 남자들은 검을. 여자들은 돌 을 가져다 날랐습니다. 하지만 검을 든 수많은 기사와 병사들을 에 반젤린과 가브리엘의 영지 주민들은, 그들의 영주님은 막아내지 못 했습니다. 성문은 쉽게 열렸습니다. 성벽이 무너지고 정복된 영지 남자들의 묶인 행렬이 강 쪽으로 줄 을 이었습니다. 강제로 배에 실려서 떠나야 했습니다. 가족이 헤어지는 경우도 부지기수였습니다. 가브리엘은 자신의 아버 지와 다른 배에 실리고, 에반젤린과 그녀의 아버지는 뭍에 남겨졌지 만. 평생 일군 것들이 불타는 것을 보고 에반젤린의 아버지는 절망 으로 혼절하여 세상을 떠났습니다. 죽은 자들의 장례를 치른 뒤, 남은 사람들도 뿔뿔이 가족을 찾아 떠 났습니다. 난민(亂民) 속에는 에반젤린도 있었습니다. 떠도는 동안 에반젤린은 가는 곳마다 가브리엘의 행방을 물었습니 다. 어떤 사람은 사냥꾼이 되었다 하고, 어떤 사람은 뱃사공이 되었 다고도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에반젤린에게 재혼을 권했습니다. 남편을 찾는 에반젤린이 탄 배와 아내를 찾는 가브리엘이 탄 배가 스쳐 지나갔지만 그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어느 초원에서 에반젤린 은 가브리엘의 아버지를 만났지만, 상심하던 가브리엘이 바로 오늘 아침 그곳을 떠났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다시 모험가들 틈에 섞여 가브리엘의 뒤를 쫓던 그녀는 북쪽 벌판 으로 갔다는 그의 이야기를 여행자들에게 전해 듣습니다. 하지만 또 그곳은 모닥불 자리만 있을 뿐, 사람은 떠난 뒤였습니다. 에반젤린은 통곡합니다. 왜 신은 그들을 만나게 하고 그토록 긴 이별을 하게 하는 걸까요. 누구 때문에 그녀는 불행할까요. 세월은 흘러갔습니다. 아름다웠던 에반젤린도 늙고 나이 들어 버렸습니다. 상인들의 이동을 따라다니며 잔일로 생계를 부지하던 그녀가 찾아 든 한 거리에는 흑사병이 번져 있었습니다. 그녀는 신전 진료소로 갔습니다. 거기에는 키 크고 쇠약한 임종(臨 終)의 한 노인이 많은 사람들 사이에 조췌한 모습으로 누워 있었습 니다. 에반젤린은 그 노인이 바로 오랜 세월 찾아 헤매던 그녀의 가 브리엘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가브리엘. 저 에요. 에반젤린이에요. 찾았어요. 계속. 만나게 돼서 다행이에요.' 가브리엘은 그녀를 알아보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결혼식 베일을 걷 어주고 함께 춤추던 그는 오랜 세월이 지나 겨우 그녀 곁으로 돌아 와 주었습니다. '당신을 사랑해요. 전할 수 있게 돼서 다행이에요.' 에반젤린의 키스를 받으며 가브리엘은 조용히 카르마로 돌아갑니 다." 그들은 붉어진 얼굴로, 로마노에 입성했다 유일하게 살아남아 돌아 서는 엘프의 노래를 들었다. 눈물과 한탄과 감동의 침묵 속에 망연히 서 있는 그들을 확인하던 진은 와이즈에게 마법진을 그릴 것을 부탁했다. "이젠 정말 가시려나 보네요, 레이디 진." "네. 녹음은 잘 하셨지요, 에르비오님? 귀한 엘프의 공명음이에요. 잘 쓰세요. 변화에 도움을 줄 거라고 생각해요." "하하. 목소리까지 무기로 쓰시네요." "마음을 움직이는 가장 큰 무기가 아닌가요? 흠. 안 되는데. 엘프의 노래에 너무 치중하면." "진이 인간의 노래도 남기면 되잖아요?" "릭페르. 얼렁뚱땅 노래 시키네?" 아이들이 뛰어왔다. 매기와 대니는 울면서 작별인사를 했고 진은 그 들에게 웃어주었다. "언니. 가방에서 빛이 나와요." "응?" 바닥에 내려놓은 가방의 약간 열린 주둥이에서 매기의 말처럼 작은 무지개가 생겨 있었다. 솔버그에게 받았던 조화였다. "아름다운 꽃이네요, 진." "하하. 그러게 블루. 예쁘네. 햇빛 아래에서 봐야 제 빛을 내는 거였 나 봐. 눈이 다 부시네." "조화는 싫다고 안 했었냐?" "누가 싫다고 했는데 와이즈? 남의 거 탐내지 마라는 소리였지. 그 리고 밤에 봤을 때는 이렇게 예쁜 줄 몰랐지. 줄까?" "너나 가져라. 너한테 어울린...안 어울린다." "말이 이상하게 들린다. 와이즈. 에르비오에게 주자. 원래 기일에 쓰려던 꽃이래니까. 이곳에 있어야할 꽃이겠지." 릭이 심부름을 했다. 에르비오 대신 솔버그가 빛을 흩뿌리는 꽃을 받아들었고 그는 진에게 인상 고약한 할아버지가 모처럼 친절하게 웃는 모양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진은 기사단들을 쉽게 감화시키고 있는 하프엘프외 진푸워드의 모 든 이들에게 작별을 고하려 했지만 일일이 인사를 나누자니 시간이 너무 걸렸다. 늦은 오후의 하늘을 의식하고 진은 말했다. "노래로 인사 대신할게요. 모두 잘 계세요." 진은 무겁기도 하고 가볍기도 한 나쁜 몸 상태에 시술 받은 마법의 효과인지 묘한 기분 속에, 수심 아래가 파헤쳐져 더럽고 탁한 색을 띄고 있는 호수가 주위에 다독이는 듯한 어조로 목소리에 간간이 힘을 실어 가며 노래를 했다. 에르비오가 미소 띈 얼굴로 블루의 노래를 담았던 것처럼 두 주먹 만한 투명한 구슬을 꺼내 마법을 쓰는 것이 보였다. "우리 처음 만났던 어색했던 그 표정 속에 서로 말 놓기가 어려워 망설였지만 음악 속에 묻혀 지내 온 수많은 나날들이 이젠 돌아갈 수 없는 아쉬움 됐네 이제는 우리가 서로 떠나가야 할 시간 아쉬움 을 남긴 채 돌아서지만 시간은 우리를 다시 만나게 해 주겠지 우리 그때까지 아쉽지만 기다려봐요 어느 차가웁던 겨울날 작은 방에 모여 부르던 그 노랜 이젠 기억 속에 묻혀진 작은 노래 됐지만 우리들 맘엔 영원히 안녕은 영원한 헤어짐은 아니겠지요 다시 만나기 위한 약속일거야 함께 했던 시간은 이젠 추억으로 남기고 서로 가야할 길 찾아서 떠 나야 해요" 진은 손을 맞잡고 눈물 범벅이 된 사람들의 환송을 받으며 일행과 마법진에 올랐다. 매기가 꼭 다시 와 달라는 말을 크게 외쳤다. 진은 언젠가 기회를 만들어 다시 찾아와 자신의 흔적. 자신이 벌인 일의 결과를 확인하리라 마음먹으며 죄스러웠던 그 곳. 새 나라 새 도시의 남은 희망들에게 손을 흔들어주며 마법진의 이 동에 몸을 맡겼다. 로마노의 이름은 대륙 지도에서 사라졌다....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