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 호 : 7315 / 10423 등록일 : 2000년 05월 08일 21:57 등록자 : ZPTGATE2 조 회 : 425 건 제 목 : [카드 게임 판타지]『 카드 마스터(Card Master) 』#001 카드 게임 판타지(Card Game Fantasy) 카드 마스터(Card Master) 1. 눈부시게 비추는 햇빛은 태양과 빛의 신 마스트의 축복을 하늘과 대지의 신 오파 투스의 권능이 미치는 영역에 전해주고, 그 축복 속에 자연과 생명의 여신 네트 릴리아의 영혼들은 무럭무럭 피어오른다. 가끔 바람과 순환의 신 위넨스의 손길 이 닿으면 그 손길 따라 하늘하늘 춤을 추며 공간의 속의 환희를 희롱한다. 마스트의 축복이 잘 닿지 않는 어느 공간. 부유함의 극치에서 한계를 넘어서 버 린 무식한 저택 뒤쪽이 그런 공간이었다. 물론 네트릴리아의 영혼들에 가려서, 그 리고 무식한 저택에 가려서 그런 것이다. 그렇기에 태양과 빛의 신 마스트는 인 내심 있게 저 하늘에서부터의 축복을 그곳을 향해 언제나 뿌려주고 있었다. 하늘과 대지의 신 오파투스가 땅과 하늘을 만나게 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산. 커 다란 저택 뒤에는 작은 동산 수준의 산이 서있었다. 네트릴리아의 영혼들이 오파 투스의 영역에 뿌리를 깊이 박고 그 굳건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쪽 면 에 박혀 비스듬히 자라버린 삐뚤어진 한 영혼이 아래를 향해 길게 늘어뜨린 팔 아래로 단단하게 닫힌 철문이 보인다. 인간이 만들어낸 금속 중에 가장 유용하면 서 쓰임새가 많다는 철로 만들어진 이 문. 크기 면에서 보면 큰 저택에서는 곧잘 볼 수 있는 크기다. 저택의 크기로 보자면 이것보다 두 배는 더 커야 어울릴 듯 싶다. 그리고 그 철문 앞에, 제복을 차려입고 손에는 긴 창을 든 두 명의 남자가 자신 들의 어깨에도 오지 않는 한 소년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좀 들여보내 달라니까요." 소년이 두 남자에게 다시 한번 부탁했다. 소년의 긴 금발이 움직이면서 나뭇잎 사이로 쏘아져 들어오는 햇빛에 부딪히자, 밝은 빛을 사방에 흩뿌리며 찰랑거렸 다. 그 눈부심 사이로 본 소년은 수려한, 이제 15세, 16세 정도로 봐지는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이목구비가 제자리에 제대로 박혔고 어디 하나 흠 잡을 데 없이 깨끗했다. 그야말로 귀족적인, 그러면서도 나이에 맞지 않는 위엄이 풍겨져 나오 는 용모를 가진 소년이 그의 깊은 푸른색의 눈을 반짝이며 두 남자를 번갈아 쳐 다보았다. "아… 아무리 그러셔도……." "제발요오." "하 참……." 상황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이 소년이 저 철문 안으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부탁하 고 있는 상황인 듯하다. 두 남자는 이곳을 지키는 경비병일 테고. 모자를 삐딱하 게 쓰고 있던 한 경비병이 난처한 기색을 내비치며 다시 말했다. "태자 저하께서 아무리 그러셔도 국왕 폐하의 허락이 없으면 이곳에는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태자 저하께서 말씀하셨다시피, 이곳은 왕궁의 비밀 창고니까 말입 니다." 경비병의 단호한 말에 소년이 울상을 찌푸리려고 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애원을 해보려는 듯 손을 들었다가, 갑자기 태도를 돌변시켰다. "정말 들여보내 주지 않겠다는 말이냐?" 갑자기 변한 소년의 태도에 두 경비병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들도 이미 익히 들 어 잘 알고 있었다. 훼이드리온 레이틴 라시엔트 태자 저하께서는 태자의 위엄을 다룰 줄 아신다고. 보통 때는 또래의 여느 소년들과 다를 바 없지만, 태자의 모습 이 필요할 때는 180도 사람이 바뀌어버린다는 것을.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때였다. "내가 국왕 폐하의 허락을 받지 못해서 너희들에게 사정을 하고 있는 것인 줄 아 느냐?" "그, 그건 아니옵고……." 그 경비병은 소년 앞에서 머리를 조아렸다. 상대방은 자신이 제대로 우러러 보지 도 못할 신분이기 때문에, 오히려 방금 전까지의 태도는 충분히 사형에 처할 수 도 있었던 태도였다. 필사적으로 그는 소년에게 말했다. "다만 저희들은 국왕 폐하의 명을 받들어……" "닥쳐라!" 소년의 입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박력이 튀어나오자 두 경비병들 은 드디어 식은땀까지 흘리게 되었다. 오늘로서 이 자리를 물러나야 하는 거 아 닐까, 괜히 개겼나, 자식들은 어떻게 먹여 살리지, 하는 생각들이 그들의 머리 속 에서 핑핑 돌아다녔다. 그런 그들에게 훼이드리온이 다시 한번 기회를 부여했다. "다시 한번 묻겠다. 날 저 안으로 들여보내 주겠느냐?" 날카로운 눈을 뜨고 내뱉는 태자의 말에 그들은 도저히 방법이 없음을 깨달았다. 반항은 죽음이다, 라는 공식이 그들의 머리 속에 떠올랐다. "네, 넷!" 황급히 한 명이 철문 쪽으로 달려가고, 남은 경비병은 고개를 숙인 채 태자의 말 만을 기다렸다. 훼이드리온이 흡족히 웃었다. "고마워요, 아저씨들." 이미 소년은 예전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와 있었다. '사, 살았다…….' 식은땀을 닦으며 경비병도 어색하게 웃자 훼이드리온이 그 수려한 용모에 어울리 는 미소를 다시 지어 보였다. 그는 이제 정말 괜찮구나, 하는 생각에 다리까지 풀 릴 지경에 이르렀다. "이, 이봐! 모시고 와!" "아, 알았어!" 후들거리려는 다리를 붙잡으며 경비병이 훼이드리온을 이끌었다. 소년은 자신의 신분에 맞지 않게 방방 뛰어오르려는 기세로 쪼르르 철문 쪽으로 달려갔다. 거대한 철문 밑으로 작은 쪽문이 열려있었다. 그 앞에 꼿꼿이 바로 선 자세로 소 년을 기다리고 있는 경비병이 있었다. 훼이드리온이 다가오자 경비병의 등 쪽에 커다란 식은땀이 한 방울 맺혀 흘러내렸다. "드, 들어가시죠!" "고마워요. 다음에 제가 꼭 보답할 게요." 그 경비병은생긋 웃고는 꾸벅 인사를 하고 안으로 들어가는 훼이드리온을 보다가 모습이 사라지자 뒤따라온 동료에게 넌지시 물었다. "벌써 바뀐?" "그렇지, 뭐. 아무튼 태자 저하는 저럴 때는 괜찮은데 자각만 하신다면 너무 무섭 다니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그에게서 문 쪽으로 시선을 돌린 경비병은 뭔가를 생각 하다가 목덜미를 긁적이며 돌아섰다. "뭐, 괜찮겠지?" 모자를 고쳐 쓰던 동료가 대답했다. "그렇겠지. 태자 저하가 저 안에서 뭘 훔쳐 가실 거도 아니고. 저 안에 있는 건 손짓 한번에 가지실 수 있는 분이잖아." 그들의 말대로 한 나라의 태자라는 신분에게는 뭣하나 어려울 것이 없는 일이었 다. 저 창고 안에 들어가려는 것도 그저 심심한 차에 호기심이 일어서일 테지, 하 는 생각에 그들은 자신들의 자리로 몸을 돌렸다. "자자, 일이나 하자고." "그러지." 훼이드리온이 창고 안으로 들어와 처음으로 맞이한 건 또 하나의 거대한 문이었 다. 자신이 짐작하는 바로 아무래도 이 왕궁 안에 있는 작은 동산 안으로 다 파 내 거기다 창고를 지었나보다. 총 네 개의 문. 모두 다 자신의 키보다 세 배는 크 게 치솟아 있어서 올려다보는 게 목이 아팠다. 잠시 뻣뻣해진 목을 주무르다가 제일 왼쪽에 있는 문으로 다가갔다. 마법의 등이 밝혀준 문의 상단에는 'DROWS'라는 문자가 새겨져있었다. '드로우스… 무기 창고인가?' 연상되는 거라고는 그거 밖에 없었다. 'DROWS'. 먼 고대의 언어로 '검'을 뜻하 는 말이다. 끼이익. 문은 예상외로 쉽게 열렸다. 조금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기는 했지만 다른 어떠한 제재도 없이 훼이드리온은 안으로 발을 옮겼다. "우와아……." 그 안은 검의 천지였다. 역시 비밀 창고의 무기고라서 그런지 어떤 검도 명검의 범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10년 가까이 검을 쥐고 검을 보면서 살아온 소년의 눈이 마구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 이건!" 당장 처음 눈에 띄는 것부터 훼이드리온을 놀라게 만들었다. 바스타드 소드의 황 금빛이 도는 긴 검신, 살짝 비틀어져 올라간 가드. 거기에 사용자의 부담을 최대 한으로 덜어주도록 설계된 손잡이. 그리고 가드 부분에 새겨져있는 검의 이름에 소년은 기겁을 하며 뒤로 넘어갈 뻔했다. "가, 가스테온?" 명검 가스테온. 아니, 명검이라는 말조차 무색하게 만드는 엄청난 검, 가스테온. 가스테온은 100년 전, 대륙 제일의 검사였다고 전해지는 라시엔트 왕국의 금안 기사단 148대 단장 베르도 폰 헤이스티론의 검이었다. 베르도가 죽은 후, 이 검은 국가의 소유가 되었다고 하는데, 그 검이 이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이었다. '대, 대단해! 존경하는 검사의 검을 여기서 만나게 되다니!' 베르도는 훼이드리온이 가장 존경하는 검사였다. 생전에 그는 기사도에 충실하고 항상 정의롭기로 이름이 높았는데, 적에게까지 너그러웠던 그의 언행은 많은 이 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고 한다. 소년은 그런 베르도를 닮는 게 꿈이었다. '그분 때문에 우리 라시엔트 왕국은 마법왕국임에도 불구하고 기사 양성에 힘써 왔다. 그렇기에 지금의 부강한 우리나라가 있을 수 있었던 거야.' 100년 전부터 존재해왔을 오래된 명검을 들고 훼이드리온은 오랜 시간 감상에 젖 었다. 검은 그의 손에서 쉬이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얼마 후, 훼이드리온은 번쩍 떠오르는 생각에 황급히 눈을 떴다. "그래, 어쩌면 그 검도 있을지 몰라." 자신의 머리 속에 떠오른 영상. 솔직히 이 바스타드 소드는 자신이 사용하기에 무리가 있다. 아니, 많다. 첫 번째로 키부터 검이 더 길다. 검을 똑바로 세우면 가드 부분이 자신의 이마에 닿는다. 손잡이는 키를 넘어서 버리는 것이다. 참고로 이 명검 가스테온의 주인 베르도는 키만 해도 2리치(=2m)가 넘어서는 장신이었다고 한다. 거기다 두 번째로 무게도 만만치 않다. 길이와 재료 때문에 투핸디드 소드를 넘 어서는 무게인 만큼 소년이 들기에는 절대적으로 무리였다. 훼이드리온은 롱 소 드를 들어본 게 고작이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가스테온을 알게 된 당시부터 꿈만 꾸었지 사용할 생각은 하지 도 않았다. 그리고 그건 가스테온을 만난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세상에 명검이라고 불리는 건 가스테온 만이 아니다. 훼이드리온은 자신 이 알고 있는 또 하나의 명검에 기대를 걸었다. '공간을 가르는 마스트의 검, 마스트소드.' 태양과 빛의 신 마스트의 이름을 빌린 검, 마스트소드.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마스트소드는 명검 중에서 최고라 칭해질 정도로 성능이 좋다고 알려진 검이다. 마스트소드의 날카로움은 공간을 가를 정도라 베지 못하는 것이 없고, 검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광휘는 적의 사기를 제압한다, 고 전해지는 그 검을, 소년은 지금 찾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느 명검이 그렇듯이 마스트소드도 세상에 나온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마스트소드의 주인인 '검의 현자 샤렌 하르트'가 사라진 이후로 그 검은 영영 모 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라시엔트 왕국의 건국을 도왔다고 전해지는 샤렌 하르트 였기에, 어쩌면 그의 친우이며 라시엔트 왕국의 건국왕인 '대마도사 페인트 라시 엔트'에게 그 검을 맡겼을 지도 모른다. 그 사실을 어렴풋이 추리하고 짐작하고 있던 훼이드리온이었기에, 소년은 꼼꼼히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반시간. 넓디넓은 무기고 안에서 검 하나를 찾기가 힘든 건지, 아니면 이 안에는 없는 건지, 마스트소드는, 아니 그와 유사한 검조차 눈에 띄지 않았다. 전부 다 명검이라고 불리는 것들이었지만 마스트소드만을 원하는 훼이드리온에게 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휴우… 그렇게 쉽게 찾을 리가 없지." 결국 포기하고만 소년은 터덜터덜 문밖으로 걸어나왔다. 마스트소드를 찾지 못했 으니, 이제 이 안에는 볼 일이 없었다. 훼이드리온은 아까 그 장소로 돌아왔다. 네 개의 문 중, 방금 나온 무기고의 문을 제외하고 올려다보자, 'METI', 'YRARBIL', 그리고 남은 하나의 문에는 아무 것 도 새겨져있지 않았다. '메티… 도구들이고, 이라르빌… 중요한 도서들인가. 저건 뭐지?' 아무 것도 새겨져있지 않는 문에 관심이 갔다. 그리고 또 특이한 건 그 문 위에 만 마법의 등이 달려있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마치 아주 중요한 곳이라고 티라도 내는 듯이. 소년은 의문 띄운 얼굴로 문 가까이로 다가갔다. 육중한 무게를 지닌 문. 마법의 등이 부서졌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어두운 문 앞에 서서 잠시 숨을 쉬던 훼이드리온은 손잡이를 잡아 살짝 돌렸다. 탁. 순간 느껴지는 이상한 위화감. '뭐지……? 마치… 몇 백년만에 열리는 것 같은 느낌이잖아.' 그냥 보통 문이 열리는 소리일 뿐이고, 그저 보통 문이었다. 아까 전에 열었던 무 기고의 문과 별로 다를 바도 없었다. 그런데, 문을 여는 느낌이 이상하게 달랐다. 아니, 생각해보면 별로 다를 것도 없었다. '우우… 머리가 이상해지는 거 같아. 그냥 들어가자.' 결국 고민하기를 포기한 훼이드리온은 문을 빼꼼히 열어 안을 들여다보았다. 마 법의 등 불빛이 안에서 빛나고 있어서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침묵이 공간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 정적 속에서 안을 둘러보던 소년의 푸른 눈에 책장 하나가 잡혔다.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그 책장을 살피기 시작했다. '…고대어들이잖아?' 책장에 꽂혀있는 책들의 제목은 거의 다가 고대어로 적혀있었다. 고대어, 500여 년 전에 대륙 공통어가 만들어지기 전에 쓰여진 것으로 생각되는 문자. 전문가들 도 해독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닌 고대어를 이제 15세를 한달 앞둔 소년이 알 리가 없었다. 다만 조금 전처럼 간단한 단어들을 보고 들어서 알고 있을 뿐이었다. 결국 훼이드리온은 손을 들었고 별로 볼 것도 없는 곳이라고 생각하고 지루함을 느끼며 빠져나 오려고 했다. "응?" 문을 향해 몸을 돌리는 그의 시야에 책장 옆 작은 책상 위에 올려져있는 작은 물 체가 스쳐지나 갔다. 다시 눈을 돌려 그곳으로 다가갔다. 조금의 먼지도 묻어나지 않는 책상 위에 얹어져있는 그것. 안에 문어가 네모난 것이 들어가 있 는 갈색 주머니였다. 주둥이 부분을 끈으로 조이는 식의 흔히 볼 수 있는 주머니 는 마치 훼이드 리온이 집어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그곳에 올려져있었다. 소년도 무언가에 홀린 듯이 아무런 거 리낌없이 주머니를 향해 손을 뻗어 그것을 집어들었다. 제법 무게가 느껴지는 두툼한 주머니였다. 들자마자 주머니 안의 네모난 형태가 옆으로 기울여 지며 무너지는 걸로 봐서, 아무래도 카드 종류인 것 같았다. 훼이드리온은 주머니 의 끈을 풀어 안을 들여다보았다. '카드?' 예상대로 카드였다. 그리고 연속으로 떠오르는 의문. '무슨 카드지?' 당연한 의문의 답을 구하기 위해서 소년은 그 많은 카드 중에서 맨 앞에 있는 카 드 하나를 꺼내 들었다. 카드는 훼이드리온의 손바닥만한 크기였고, 두께는 잘 휘어지지 않을 정도로 두 꺼운 정도였다. 뒷면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은 원, 사각형, 별 모양 등등 온갖 기하학적 무늬들이 마구 그려져 있 어서 눈이 핑핑 돌아갈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앞면에는 타오르는 불꽃의 형상을 한 도마 뱀을 나타낸 그림과 그 밑의 자잘한 글씨들이 적혀있었다. '샐러맨더?' 불꽃의 도마뱀의 이름은 알고 있었다. 이 세상 어느 곳에도 존재한다는 정령들 중, 불의 정령 중에 하나인 샐러맨더. 그런데 샐러맨더의 모습이 왜 이 카드에 그려져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훼이드리온은 그림 밑의 글을 읽었다. '불의 정령 샐러맨더. 공격력 17. 방어력 6. 마법검에 취약. 반대 속성은 물.' 간단간단하게 적혀있는 그 글에서 유추할 수 있는 사실은 한가지 밖에 없었다. '게임 카드?' 흥미가 생긴 훼이드리온은 샐러맨더 카드를 주머니에 도로 집어넣고 곧장 창고 안에서 빠져나왔 다. "샘, 그거 알아?" 아직도 모자를 삐딱하게 쓰고 있는 경비병 하나가 동료 경비병 샘에게 물었다. 샘은 근질거리는 몸을 참지 못하고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뒤돌아보았다. "뭘?" "왜, 창고 안에 열리지 않는 문 있잖아." "아, 그 문? 왜?" 샘이 묻자, 품에서 담배를 하나 꺼내들면서 말했다. "내가 들었는데 말이야. 그 문이 대마도사의 봉인이 되어있다고 하더라고." "대마도사? 라시엔트 왕국의 건국왕이신 대마도사 페인트? 라시엔트 님의?" "그래, 그분의 봉인.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그 봉인은 자신과 같은 능력자 가 아니면 열 리지 않는다고 하더라고. 대체 어떤 보물을 숨겨놨길래 그런 봉인은 해둔 걸까?" "훗, 미크, 그래서 그 문을 열어라도 보겠다는 거야?" 샘이 그의 동료에게 슬쩍 미소를 띄웠다. 미크는 어림도 없다는 듯이 손을 내두 르며 담배에 불 을 붙였다. 그리고 한 모금 깊게 들이마시고, "후우……"하는 소리와 함께 허공에 그 연기를 뱉 어냈다. 담배 연기는 한동안 천천히 허공을 배회하다 곧 위넨스의 손길에 의해 사라졌다. 샘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물었다. "그런데, 무슨 능력?" "글쎄, 그건 나도 모르지. 그분에 대해서는 워낙 알려진 게 별로 없잖아. 정말 건 국왕이 맞기는 한 건지 의문이 갈 정도로 말이야. 어쨌든 특별한 능력인 것만은 분명하겠지." 사실 그랬다. 대마도사 페인트 라시엔트는 건국왕임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자 료나 기록이 별 로 없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혹자는 페인트가 자신의 기록을 남기기 싫어해서 모두 모아 태워버렸다고 하기도 하고, 또 다른 역사가는 페인트가 봉인 해둔 곳에 그에 대한 기록이 모두 모여있다고 하기도 한다. 어찌됐든 이미 500년 전의 인물이기 때문에, 그에 대해서 전해지는 가운데 꽤나 어긋난 곳이 많 아서 근래에 와서 그것을 바로 잡으려는 운동이 많이 일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한가지 분명한 건, 그분은 정말로 위대한 분이라는 거… 앗, 나오셨습니까, 태자 저하!" 비스듬히 벽에 기대서 담배 연기를 내뿜고 있던 미크가 샘의 고함성에 후다닥 담 뱃불을 비벼 껐 다. "나오셨습니까!" 거수 경례는 붙이는 그들에게 훼이드리온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아, 네. 수고하세요." 타다닥, 어딘지 바빠 보이는 훼이드리온의 모습에 미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샘 에게 물었다. "왜 저러시지?" "내가 어떻게 알아." "뭐라도 훔쳐 가시는 건가?" "훗, 태자 저하가 너 같은 줄 알아?" 샘의 말에 내심 찔리는 게 있는지 미크가 머리를 긁적이며 돌아섰다. 쪽문을 닫 으며 안을 한번 들여다보고 다시 예의 자세로 돌아가며 다시 담배를 한 개피 꺼냈다. 곧 그의 입 안에서 흰색의 담배 연기가 뿜어져 나왔고, 샘은 왕성 쪽으로 힘차게 달려가는 태자를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뭐, 그럴 리는 없겠지." ----------------------------------------------------------------- ----------------------- 안녕하십니까. 아틀란티스, 라는 괴악한 소설을 쓰고 있는 TEAM입니다 제가 이번에 동시에 두 개의 소설을 쓰게 됐습니다 아틀란티스도 열심히 쓰고 있구요, 마찬가지로 카드 마스터도 열심히 쓸 겁니다 카드 마스터...는 제 나름대로 최초로 시도되는 거라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굳이 구분하자면... 적어놓은 대로 카드 게임 판타지...정도가 될까요 어떤 카드 게임인지는 소설을 진행하면서 다 밝혀질 거구요 주인공은 이미 아셨겠지만 저 훼이드리온 레이틴 라시엔트, 라는 태자입니다 처음 표현해보는 성격이라, 무진 애를 먹고 있는 중이에요(^^^) 카드 게임은 3편 정도 되야 나오겠습니다 이거 만든다고 머리 쥐어뜯으면 게임 방식을 만들고 카드를 설정하고... 골이 빙빙 도는 줄 알았습니다, 그려. 어찌됐든 이런저런 고생 끝에 내놓게 된 카드 마스터 많은 감상과 비평, 그리고 보너스로 추천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럼...(꾸벅) 어둠의 기사 DARK KNIGHT TEAM... 번 호 : 7367 / 10423 등록일 : 2000년 05월 11일 02:59 등록자 : 암음기사 조 회 : 351 건 제 목 : [카드 게임 판타지]『 카드 마스터(Card Master) 』#002 카드 게임 판타지(Card Game Fantasy) 카드 마스터(Card Master) 2. 두 경비병의 믿음을 뒤로하고 목적지를 향해 다리를 열심히 놀리고 있는 훼이드 리온은 왕성이 이다지도 넓다는 사실에 대해 속으로 투덜거리고 있던 참이었다. '누님께 빨리 가서 이걸 보여 드려야할 텐데. 아직 한참은 더 가야하잖아.' 훼이드리온이 빠져나온 저택 뒤쪽, 그러니까 왕궁 뒤쪽 비밀 창고에서부터 누님 이 계시는 곳까 지는 직선 거리로 500리치 가량. 대륙의 무식한 크기와 참으로 잘 어울리는 왕성 의 넓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거기다 이리저리 둘러서 가다보면 족히 1헬리치(=1Km)는 나올 정도 이니, 내궁을 향 하여 달려가는 훼이드리온에게 왕성의 넓이는 정말 저주를 퍼붓고 싶을 지경이었 다. 내궁으로 통하는 길로 드디어 접어든 훼이드리온은 잠시 숨도 고를 겸 천천히 멈 추어 섰다. 그 와중에서도 "급히 달리다 멈출 때는 단번에 정지하지 말고, 천천히 속력을 줄이 다가 멈추어 서 십시오."라는 스승의 말씀은 결코 잊지 않았다. 앉을 만한 곳을 찾아 두리번거리던 소년의 눈에 어른 두 명도 앉을 수 있음직한 널찍한 평면형 의 바위 하나가 눈에 띄었다. 그 바위는 높게 세워진 담장을 가리며 숲을 이룬 나무들 앞에 삐 쭉 솟아 나와있었다. 훼이드리온은 경쾌한 발걸음으로 달려가 그 위에 걸터앉았 다. "휴우……." 정체 모를 카드가 들어있는 주머니의 끈을 오른손 검지에 걸고 빙빙 돌리면서 소 년은 기분 좋게 불어오는 바람을 느꼈다. 위넨스의 손길은 이제 15세를 맞이하는 소년 태자의 몸 을 휘감으며 그 에게 시원한 청량감을 선사했다. 아직 머리 위에는 마스트의 눈이 내리쬐고 있지 만, 이 순간만 큼은 소년은 그의 영역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런 훼이드리온을 향해 누군가가 슬며시 곁으로 다가왔다. 그가 훼이드리온을 향해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건넸다. "마스트의 눈은 축복의 빛, 위넨스의 손길은 정화의 바람.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태자 저하." 눈을 감고 바람을 느끼고 있던 훼이드리온은 부드러운 목소리에 눈을 떴다. 소년 의 눈앞에는 낯 익은 인물 하나가 그를 향해 허리를 굽히며 인사를 하고 있었다. "축복의 빛은 마스트의 눈, 정화의 바람은 위넨스의 손길. 안녕하세요, 헤이스티 론 경." "물론입니다." 훼이드리온의 예절 바른 인사에 그는 여전히 부드럽게 대답했다. 바이마크 폰 헤이스티론. 그의 성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중년의 남자는 훼이드리 온이 존경하는 검사, 베르도 폰 헤이스티론의 자손이며 그와 마찬가지로 현재 라시엔트 왕국 금 안 기사단 단장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자다. 단정히 빗어 내린 갈색의 긴 머리와 코 아래 두툼히 난 콧수염이 그를 상징하는 것들 중 하나였다. 그리고 머리칼 색깔과 같은 색깔의 눈동자에서 는 중년이면서 도 청년 기사들과 비교해도 지지 않을 안광이 흘러 넘친다. 그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라시엔트 왕국의 제1기사였다. "저기……" "네, 말씀하십시오." 한동안 대화가 끊어진 상태에서 훼이드리온이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좀 비켜주시겠어요? 햇빛이 가려서……." "아, 네. 죄송합니다, 태자 저하." "아니에요." 오랜 단련 기간만큼이나 건장한 바이마크의 체구로 인해 광합성을 크게 손해를 본 훼이드리온이 었지만, 그냥 웃고 넘어갔다. 소년은 그런 사소한 일에 신경 쓸, 그런 속 좁은 위 인이 아니었 다. 옆으로 몸을 옮겨 태자 저하께서 햇빛을 정면으로 받으시도록 배려를 한 바이마 크가 같이 하늘 위를 올려다보며 소년에게 물었다. "어디 가시는 길이십니까?" "네, 누님께요." 기분 좋은 미소를 띄우며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소년에게 잠시 눈길을 돌리던 바 이마크가 같은 곳을 향하게 시선을 돌리며 지그시 얘기를 이어갔다. "좋은 일이 있으신가 보군요." "네?" 훼이드리온이 고개를 들어 그의 옆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바이마크의 입이 미소 를 짓는 형태로 변해갔다. "얼굴이 좋아 보이십니다." "아… 그래요?" 훼이드리온은 괜시리 볼을 긁적였다. 바이마크가 고개를 숙여 소년에게 따뜻한 미소를 던졌다. "언제나 왕성 안은 재미없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래서 그런지 언제나 좋은 표정이 아니셨 습니다만, 지금은 얼굴에 생기가 도시는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인지 저도 알 수 있 을까요?" 마지막을 물음으로 끝낸 그에게 훼이드리온은 쑥스러운 미소로 응답했다. "에… 스승에게 밝히지 못할 건 없지만… 다음에 말씀드릴게요. 좀… 쑥스럽군요. 하하하." 어색하게 머리를 긁으며 웃는 훼이드리온에게 바이마크는 빙그레 웃음을 띄웠다. "그러십시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시간 늦지 말고 나오십시오." "네, 잘 가세요, 헤이스티론 경." 바이마크는 정중하게 오른손을 배 부분에 대고 허리를 굽혀 기사의 예를 다했다. 훼이드리온은 앉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신분 차를 생각하면 그건 당연한 것이었다. 거기서 좀 더 예를 차렸더라면, 오히려 바이마크가 껄끄러워 했을 것이다. 라시엔트 왕국 금안 기사단 공식 제복이 햇빛에 반사된 환하게 빛났다. 그 깨끗 한 하얀빛을 살 짝 훔쳐보던 다람쥐도 다시 나무 위로 후다닥 올라갔을 무렵, 훼이드리온은 자리 를 떨치고 일어 섰다. "음… 햇빛이 너무 따스해서 뭘 하려했던지 까먹을 뻔했잖아."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그만큼이나 넋을 놓은 채로 그저 바람과 햇빛을 느끼며 앉아있었던 것이다. 훼이드리온은 갈색주머니 끈을 한 손에 잡고 바위에 서 살짝 뛰어내 렸다. 너무 시간이 지체되었다는 것을 아는 소년은 바쁜 걸음으로 걸어가 이내 내궁 앞 에 도착했다. 저 밖에 우뚝 서있는 거대한 왕성과 비교하면 처절할 정도로 작은 저택. 하지만 이곳이 훼이드 리온의 누님, 라시엔트 왕국의 공주 메이린느 헤언 라시엔트만을 지어졌다는 사 실을 생각하면 대단한 크기이다. 붉은 벽돌을 차곡차곡 쌓아올린, 꼭 인형 집 같은 아기자기한 풍의 내궁 주위에 는 메이린느 공 주가 직접 가꾼 정원이 넓게 펼쳐져 있다. 지금 훼이드리온이 걸어온 내궁 정문 으로 통하는 좁 은 길을 제외하고는 바깥과 경계지어진 담장까지 모두 메이린느의 정원이었다. "누님은 언제 이걸 다 가꾸는 건지. 역시 존경스러운 분이야." 옅은 바람에서 느껴지는 상큼한 꽃향기를 잔뜩 들이마시고 다시 내궁을 향해 발 길을 옮겼다. 곧 밝은 흰색으로 칠해진 문이 그의 앞에 성큼 다가왔다. "어서 오십시오, 태자 저하." 희끗희끗 백발이 섞인 머리를 단정히 옆으로 빗은 집사가 어떻게 알았는지 문을 열며 걸어나왔 다. 훼이드리온은 잠시 놀란 표정을 짓다가 의문을 섞은 눈빛으로 물었다. "어떻게 안 거예요?" 집사는 외눈안경을 벗으며 사람 좋은 미소를 띄웠다. "어제 궁정마법사 디바이어 경께 도움을 받아서 마법을 펼쳤습니다. 누군가 들어 오면 저에게 신 호가 오게끔 되어있죠." 훼이드리온은 집사의 설명에 이해가 되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상 세한 설명은 아 니었지만 마법왕국의 태자인 소년이 그 정도를 이해하지 못할 리는 없었다. 비록 소년이 마법보 다는 검술에 소질이 있다고 해도 말이다. "들어가시죠." 집사는 정중히 손을 뻗어 내궁 안으로 훼이드리온을 이끌었다. 2층 높이까지 솟 아있는 둥근 아 치형의 홀 지붕을 올려다보며 들어선 소년은 의식적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메이린느의 성격 답게 아주 소박하면서도 기품이 느껴지는 디자인으로 꽉 채워진 홀 안을 누비던 소년의 눈길이 마지막으로 집사의 얼굴에서 멈췄다. "누님은요?" "2층 방에 계십니다." 즉각 대답한 집사에게 훼이드리온은 목례로 인사를 해 보이고 계단 위를 뛰어올 라갔다. 뒤쪽에 서 집사의 충고가 들려왔다. "태자 저하, 체통을 지키셔야지요." "폐하께 이르지 않을 거죠?" 쾌활하게 대답한 훼이드리온이 집사의 대답도 듣지 않고 2층으로 사라졌다. 집사 는 흐뭇하게 미 소지으며 외눈안경을 그의 왼쪽 눈가에 고정시켰다. 집사의 주름진 입가의 근육이 한껏 당겨졌다. "물론입니다." 2층으로 올라온 훼이드리온은 왼쪽 복도로 조금 걸음을 옮기다가 이내 어느 문 앞에 멈춰 섰다. 푸른 눈 속에 담겨진 순백색의 문은 언제 찾아와도 그 모습 그대로 소년을 반겨 주었고, 지금 이 방안에 있을 그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훼이드리온은 공주 메이린느를 가장 좋아했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겨우 두 살 차이밖에 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언제나 어머니처럼 훼이드리온의 뒤에 서서 소년이 자 라남을 지켜보 고 도와주었다. 소년과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사람도 그녀였고, 그만큼 소년을 잘 알고 있는 사람도 그녀였다. 이 두 남매의 우애 좋음은 수도 널리 퍼져 남의 귀감을 얻고 있었다. '또 언제나처럼 그 밝은 미소로 날 반겨주시겠지.' 훼이드리온은 메이린느의 아름다운 미소를 머리 가득히 떠올렸다. 17세 소녀에게 서는 나오기 힘 들어 보이는 기품과 우아함, 그러면서도 때묻지 않은 순수함을 자랑하는 그 미소 에, 소년은 언 제나 편안한 안식처를 얻곤 했다. 지루하기 짝이 없는 왕궁에서의 일상도 그녀와 함께 지내며 지루함을 지을 수 있었다. 그녀는 훼이드리온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한 존재였다. 똑똑. 조용한 가운데, 시종들조차 지나다니지 않는 복도에 홀로 서서 훼이드리온은 메 이린느의 방문을 두드렸다. 그 소리는 작으면서도 큰 울림을 가지고 복도에 울려 퍼졌다. 조금 후, 그 울림을 깨 끗이 지워버리는 청초한 목소리가 방안에서 흘러나왔다. "들어오세요." 그녀는 누구에게나 존대를 사용했다. 비록 그것이 미천한 시종일 지라도. 훼이드 리온은 그녀의 그런 점까지 모두 좋아했다. 소년은 누님의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메이린 누님, 저예요, 훼이." 훼이드리온의 눈앞에는 아름다운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활짝 열린 테라스 밖으 로부터 소년이 이곳으로 오면서 느꼈던 꽃향기 섞인 바람이 하늘하늘 실내로 불어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테라 스 앞에, 편안한 의자에 다소곳이 앉아서 책을 펼쳐놓고 사색을 즐기고 있던 메 이린느가 있었 다. "훼이 왔구나." 메이린느는 문 앞에서 자신을 향해 인사를 하는 훼이드리온을 향해 그 아름다운 미소를 지어주 었다. 밝은 햇빛이 그녀의 곱게 기른 금발에 맞닿아 차마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 운 광경을 내비 치고 있는데, 거기에 그녀의 아찔할 정도의 미소가 곁들여지자 그 장면은 자연과 생명의 여신 네트릴리아가 강림했다고 착각할 정도의 그림으로 완성되었다. 그 어떤 화가가 이런 아름답고도 성스러운 그림을 그려낼 수 있을까. 장님은 그녀 앞에서 '시각'이라는 축복을 하 사 받지 못함을 억울하게 생각해야했다. 훼이드리온조차 잠시 그 광경에 취한 듯 정신을 잃었다가, 이내 눈빛을 제자리로 돌려 그녀 가 까이로 다가갔다. "독서를 즐기고 계셨나요?" "훗, 응." 가볍게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에게 시선을 향한 채, 훼이드리온은 메 이린느의 반대편 에 앉았다. 넓은 의자의 편안함이 전신을 통해 흘러 들어왔다. "무슨 책이에요?" 훼이드리온의 시선이 책표지를 향했다. 메이린느가 그 모습이 귀엽다는 듯이 입 가를 가리고 작 게 웃으며 대답했다. "식물 도감 같은 거야. '미어츠'를 키워보려고 해." "'미어츠'요? '미어츠'는 사막에 사는 식물 아닌가요?" "응, 맞아. 그래서 이곳 중부 기후에는 잘 맞지 않지. 그래서 디바이어 경께 도움 을 받아보려고 해." '피어츠'. 사막에 사는 주민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식물이다. 이 꽃은 평소에 물을 잔뜩 머금고 있어서 물이 부족한 사막인들에게 일용한 수분을 제공하기도 하고, 그 꽃을 뿌리 째 뽑아내 약초 로 쓰이기도 한다. 이리저리 이용가치가 높으면서도 시각적으로 좋은 구경거리를 주기 때문에 메이린느는 이 꽃을 꼭 키워보고 싶었다. 하지만 중부의 따뜻한 기후는 사막의 더운 기후와 잘 맞지 않아서 '피어츠'를 키 우기가 쉬운 게 아니다. 그래서 그녀는 궁정마법사인 필로윈 셀 디바이어에게 도움을 받아보려는 것이었다. "그래, 어쩐 일이니?" 잠시 도감에서 '피어츠'에 해당하는 부분을 펼쳐 그림을 보여주던 메이린느가 그 제야 생각이 났 는지 페이지를 덮으며 훼이드리온에게 물었다. 훼이드리온은 미안한 표정이 되어 되물었다. "제가… 방해가 된 건 아닌가요?" "아니, 우리 훼이가 찾아왔는데 방해라니. 당치도 않은 소리야." 작게 도리질을 치는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도 귀엽게 느껴지는 훼이드리온이었다. 잠시 우물쭈물거리고 있는 동생을 바라보고 있던 메이린느는 작게 입을 열었다. "뭔가 할 말이 있나보구나." "아… 네." "그럼 속 시원히 말해봐. 누나가 뭘 도와주면 되겠니?" 그녀는 훼이드리온이 뭔가 부탁할 게 있으면 항상 이렇게 우물쭈물거린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소년은 누님의 배려에 새삼 고마움을 느끼며, 드디어 마음을 잡았다. "저기 여쭈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그런데요." "물어보렴." 또 다시 고민하는 표정이 되어버린 훼이드리온을 향해 메이린느는 애정 어린 시 선을 던졌다. 정 말 많이 커버린 동생이지만 이런 점만은 아직도 변하지 않았다. 점점 남자로 성 장해가면서도 순 수한 마음 한구석을 지키고 있는 동생이 정말 대견스러웠다. "저기…" 훼이드리온이 갈색주머니를 메이린느에게 내밀었다. "제가 이런 걸 찾았거든요." "이게 뭐니?" 갈색주머니를 받아든 메이린느는 끝을 느슨하게 풀어내 안을 확인했다. 그리고 훼이드리온의 행 동과 같이 손가락을 집어넣어 하나를 꺼내들었다. "카드?" 우연찮게도 그녀가 꺼내든 카드도 불꽃의 도마뱀, '샐러맨더 카드'였다. 한참을 카드를 살펴보 는 그녀를 훼이드리온은 눈빛을 빛내며 기다렸다. 이윽고, 그녀가 샐러맨더 그림 을 세 번째로 뒤집었을 때, 그녀의 작은 입술이 열렸다. "'마스터 카드(Master Card)'구나." "'마스터 카드'……요?" 처음 들어보는 생소한 단어에 훼이드리온은 의식적으로 메이린느의 말을 되풀이 했다. 그녀는 주 머니 안에 있던 카드를 모두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고 보니 훼이는 처음 들어보겠구나." "네." 호기심 가득한 어린 아이의 눈으로 변해버린 훼이드리온의 두 눈을 보면서 메이 린느는 작게 웃 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곧 귀여운 동생을 위해 이 카드에 대한 설명을 해주어 야하는 사명을 깨닫고, 본래의 단정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녀가 방금 들었던 '샐러맨더 카드'를 다시 집어들고 설명을 시작했다. "'마스터 카드'란, 일종의 게임 카드란다." "게임 카드요?" "그래. 주로 서민층에서 유행하는 게임인데, 언제부터 이 게임이 시작되었는지는 잘 몰라. 단 하나, 이 카드를 가장 먼저 만든 사람이 바로 대마도사 페인트 라시엔트라는 것 은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야." 훼이드리온의 눈이 번쩍 뜨였다. "건국왕님께서 이 카드 게임을 만드셨다구요?" "그렇다고 할 수 있지. 벌써 약 600년이 되어 가는 전통 있는 게임이야. 서민층에 서 즐기는 거 라 사실 우리 같은 높은 신분들은 잘 접하지 못해서 나도 잘 알지는 못해. 다만, 오래 전에 이 마스터 카드에 관한 얘기를 듣고 책을 구해 읽은 적이 있어. 흥미는 있었지만, 좀 그렇잖니. 일 국의 공주가 그런 미천한 놀이를 한다면, 귀족 가문이나 주위의 사람들이 뭐라고 보겠니." "음… 그렇군요." "마스터 카드…라. 그런데 이건 어디서 찾은 거니?" 움찔. 훼이드리온은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동시에 소년의 등 으로 식은땀 한 방울이 내달렸다. 서늘함을 느끼며, 소년의 목소리가 기어 들어갔다. "왕성 비밀 창고… 에서요오." "어머, 거기를 들어갔단 말이니?" "네에." 메이린느가 놀라서 다시 물었고, 훼이드리온은 풀이 팍 죽어버린 채 고개만을 끄 덕였다. "네 태도를 보니, 폐하의 허락 없이 들어간 거구나. 맞니?" 끄덕. 다만 고개를 끄덕이면 침묵할 뿐이었다. '이것 때문에 말하려던 걸 머뭇거린 거였다구. 누님은 화나면 무서운데…….' 고개를 숙인 훼이드리온의 귀로 누님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잇따라 들 어오는 조금 올 라간 목소리. "왜 그랬니. 또 태자의 모습을 이용한 거니?" "…잘못했어요." 아무리 태자의 모습을 자유로이 사용할 수 있는 훼이드리온이라고 해도 공주 메 이린느 앞에서는 다만 동생일 뿐이었다. 기운 빠진 강아지 마냥 축 늘어진 동생을 안쓰럽게 쳐다 보던 메이린느는 그만 화를 거두었다. "왜 그런 거니?" 화가 풀린 듯한 누님의 목소리에 훼이드리온은 조금 고개를 들어 대답했다. 여전 히 목소리는 기 어 들어갈 듯 말 듯 하고 있었다. "심심했어요. 검술 이외에는 할 일도 없고 공부도 예전에 다 해버려서… 그러다 가 비밀 창고에 흥미가 가서 그만……." "휴우……." 고개를 들지 못하는 훼이드리온. 메이린느는 한숨을 쉬었지만, 결코 동생이 나쁜 뜻으로 그곳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다만 그녀가 화가 나는 건 동생이 태 자라는 신분을 너무 함부로 사용한다는 것이었다. "한가지만 약속해주겠니?" "…뭔데요?" "전에도 얘기했지만, 태자라는 자리는 함부로 다루는 자리가 아니란다. 너도 충분 히 알고는 있 을 거야. 일국의 태자라는 자가 그렇게 함부로 권한을 이용하면 어떻게 되겠니. 일단 우리들이 본보기를 보여야 사람들도 따라오는 법이란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지?" 훼이드리온은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았으면 됐어. 앞으로 그러지 않을 거라구, 이 누나는 믿을게. 그만 고개 를 들어. 장차 이 나라의 왕이 될 몸이, 그렇게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야 되겠니?" 메이린느의 따스한 말에 훼이드리온은 당장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는 이미 환하 게 미소를 띄우 고 있는 메이린느의 모습이 있었다. 그 미소에, 너무 고마운 나머지 훼이드리온은 눈물이 다 나 올 뻔했다. "저런. 남자가 그렇게 쉽게 눈물을 보여서야 되겠어?" '아니에요, 메이린 누님. 다시는 그러지 않을 게요. 정말이라구요.' 손가락으로 눈물을 훔쳐주는 누님의 따스한 손길을 느끼며, 그런 말이 목구멍까 지 차 올랐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내뱉을 수가 없었다. 입술이 강력한 봉인이라도 되어버린 듯 그 렇게 떨어지지가 않았다. 얼마 후, 훼이드리온이 진정이 될 때까지 그녀는 어깨를 다독여주며 동생을 달랬 다. 이제 한 달 이 지나면 정식 후계자로 인정을 받고 수련을 떠나야할 나이가 됐음에도 불구하 고, 여전히 눈물 이 많은 동생. 그녀는 그런 동생이 걱정이 되었다. 언제까지고 자신이 돌봐줄 수 는 없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면 안타까운 마음만이 들뿐이었다. 훼이드리온이 흘리지 않으려고 애쓰다 몇 방울 떨어뜨려 버린 눈물을 닦고 자세 를 정비했다. "이거… 또 울어버렸네요. 헤헤." "이제 괜찮니?" "네." 아까의 밝은 모습을 되찾은 훼이드리온은 누님에게 그 증거로 한껏 미소를 띄어 보였다. 메이린 느도 작은 미소를 지어 답해 보였다. "우리 나갈까?" 하늘하늘 불어오는 바람결에 잠시 테라스 밖으로 시선을 던지던 메이린느가 말했 다. 훼이드리온 은 단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 뒤뜰로 나가자꾸나. 내가 마스터 카드 게임에 대해서 더 많이 가르쳐줄게. 재밌을 거 야." "고마워요, 누님!" 메이린느는 해변에 내리쬐는 햇빛의 그것처럼 눈부시게 빛나는 금발을 쓸어 올리 며 밝게 웃었 다. ----------------------------------------------------------------- ----------------------- 이틀...? 시간상으로는 사흘인가요? 아무튼 그정도 시간이 걸렸습니다 비축분도 날아간 상태에서 새로 쓰려니 머리 아프군요. 오늘 깨닫고 보니 쓰기 란을 가로를 꽉 채워서 써지더라구요. 그래서 그렇게 넓 었던가. 아하하, 어지됐든 2편 올라갑니다! 어둠의 기사 DARK KNIGHT TEAM... P.S. 질문은 멜이나 메모로... 감상 추천 비평 모두 환영입니다! P.S.2 아틀란티스 써야하는데... 새로 써야하다니! 으아악! 번 호 : 7561 / 10423 등록일 : 2000년 05월 16일 21:04 등록자 : 암음기사 조 회 : 289 건 제 목 : [카드 게임 판타지]『 카드 마스터(Card Master) 』#003 카드 게임 판타지(Card Game Fantasy) 카드 마스터(Card Master) 3. 메이린느와 훼이드리온은 나란히 뒤뜰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정원에 만발한 화 려한 꽃들의 향 연을 존중하기 위해서인지 오솔길은 두 사람이 걸어다니기도 힘들 정도의 넓이를 가지고 있었 다. 그 길을, 둘은 정답게 얘기를 나누며 정원 한가운데에 있는 정자로 향했다. "차는 준비되었습니다." 어느새 집사는 정자로 차를 준비해와 있었다. 훼이드리온은 이 집사의 예상치 못 한 재빠른 행동 에 언제나 놀라곤 했다. 그게 다 20년의 경력 때문이라며 웃는 집사를 보며 존경 의 눈빛을 보낸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고마워요, 집사님." "아닙니다.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집사는 차와 쿠키를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정리를 하고는 인사를 하고 다시 저택 을 향해 걸어갔 다. 메이린느는 집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하며 미소를 띄웠다. "참 성실한 분이시지?" "그렇네요. 좋은 분이세요." 그들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고, 집사도 언제나 진심으로 그들을 대했 다. 정자 주위로는 넓은 정원이 펼쳐져 있고, 개방된 곳이라 꽃향기가 넘실넘실 날아 와 그들의 주위 를 맴돌았다. 아치형의 둥근 지붕과 네 개의 기둥으로 지탱된 정자는 다섯 명은 움직일 수 있을 만한 크기를 제공했다. 그 공간에 하얀 색의 테이블이 놓여져 있고, 지금 그곳에 서 둘은 담소를 나누고 있던 것이다. 메이린느가 찻잔을 두 손으로 가지런히 잡고, 입을 갖다댔다. 코로 스며드는 향기 가, 익숙한 감 각을 깨우쳐주었다. "'디오느' 차구나. 향이 참 좋지?" "네. 이게 '디오느' 차군요? 향뿐만 아니라 맛도 좋아요. 앞으로 이걸로 바꿔볼까 요?" "그렇게 하려무나." 메이린느는 고개를 끄덕였다. "쿠키도 먹지 그러니?" "누님께서 아직 드시지 않으셨잖아요." 훼이드리온은 먼저 먹을 수 없다는 단호한 표정을 그녀에게 지어주었다. 그녀는 동생의 모습에 서 또 하나의 즐거움을 찾고는 기쁘게 그것을 표현해내며 집사가 준비한 쿠키를 입이 쏙 넣었 다. 크기가 아주 알맞았다. 바삭바삭 씹히는 느낌. '이건 레미의 솜씨네.' 메이린느는 쿠키 굽는 솜씨를 칭찬해주었던 시종 한 명을 머리에 떠올렸다. 수줍 은 미소만큼이 나 여린 소녀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그녀는 쿠키를 참으로 잘 구웠다. 바삭바삭 한 느낌이 사라 지지 않으면서도, 또한 건조하지도 않게. 그 중간쯤의 찰나를 아주 잘 잡았다. 메 이린느는 혀 위에서 감도는 맛을 음미하며 '디오느' 차로 흥을 돋구었다. "마스터 카드를 이리주렴." 훼이드리온은 손에 들고 있던 주머니를 내밀었다. 유연한 손길로 그것을 집어든 메이린느는 주 머니를 풀어 그 속의 카드들을 모두 꺼내어 훼이드리온과 자신의 중간쯤에 가지 런히 올려놓았 다. 카드가 만들어낸 작은 탑을 보며 그녀는 말했다. "마스터 카드는 만들어진지 아주 오래된 게임이란다. 그만큼 여러 계층의 사람들 이 공통적으로 즐기는 게임 중에 하나지. 하지만 서민이 즐기는 미천한 놀이, 라고 해서 도도한 높으신 계층의 분들은 눈살을 찌푸리기 일쑤란다." 메이린느도 자신이 '도도한 높으신 계층'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조금 씁쓰레하 게 웃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오늘 이렇게 즐길 기회가 왔으니, 운이 좋구나." "헤헤헤." 쑥스럽다는 듯이 동생을 따스한 눈길로 바라보던 메이린느는 시선을 돌려 카드를 모두 집어들었 다. "마스터 카드는 게이머 중 한 사람이 '이야기의 시작' 카드를 들고 '시작'을 외치 면서 시작된단 다. 일단 지금은 그런 절차는 없애고, 간단하게 30장씩 나눠 가질까?" "장수를 다르게 나눠도 되나요?" "응. 그렇단다. 게이머들끼리 합의를 해서 50장식, 혹은 카드가 많으면 100장씩 가질 수도 있 어. 단, 게임에 사용되는 카드는 자신의 카드 밖에 쓸 수 없단다." 메이린느는 카드를 적당히 섞어 30장씩 두 묶음을 뽑아냈다. 그리고 그 중 하나 는 자신이 가지 고, 나머지 하나는 훼이드리온에게 건네주면서 다시 규칙 설명을 덧붙였다. "지금 같이 연습이 아니라 실전에서는 서로가 서로에게 카드 중 반을 골라주어야 해. 자신의 반 을 뽑고, 상대방이 반을 뽑아주는 거지. 여기서 어떤 카드를 뽑든, 그건 자신의 자유야." 훼이드리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카드를 점검했다. '정령사' 카드, '전사' 카 드 등등, 일 일이 나열하기도 귀찮은 카드들 중에, 특히 테미(Temi: 도구)에 관련된 카드들이 많았다. "원래 테미 카드가 많은 건가요?" 동생의 물음에 메이린느는 즐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테미 카드는 풍족하게 모으는 것이 좋아. '전사' 카드나 '마법사' 카드 같은 '유 저' 종류의 카 드는 방어력이 떨어질 때까지 계속 사용할 수 있지만, 테미 카드는 거의 다가 일 회용이니까 말 이야. 그것도 테미 카드의 종류가 많은 이유 중 하나이지." 훼이드리온은 이해가 된다는 듯이 고개 짓을 하고, 마지막 카드까지 카드를 하나 씩 모두 살폈 다. 그동안 메이린느는 이미 자신의 카드를 모두 점검하고, 60장을 뽑아내고 남은 카드 묶음을 두 개로 나누기 시작했다. "다 됐니?" "네, 누님. 그건 뭐 하는 건가요?" "먼저 이걸 이렇게 놓고… 너의 카드는 이 오른쪽이란다." 메이린느는 두 개의 카드 더미를 중앙에 나란히 옆으로 놓고 자신의 왼쪽, 훼이 드리온 쪽에서는 오른쪽에 위치한 카드를 가리켰다. "마스터 카드 게임에서 재밌는 부분이 바로 이 카드란다. 아까 내가 뽑아준 30장 의 카드를 '손 에 든' 카드라고 해서 '든' 카드라고 하고, 여기 이 카드는 '내려놓은' 카드라고 해서 '내린' 카드라고 불러. '내린' 카드는 일종의 도움 역할이야." "도움 역할요?" "그래. 먼저 이것부터 설명해야겠구나. 마스터 카드의 공격 방법은 크게 세 가지 로 나뉜단다. '전사' 계열 카드나 '마법사' 계열 카드 등이 단독으로 공격하는 방법, 그리고 그 공격에 테미 카드를 적용시켜서 공격하는 방법, 마지막이 마스터 카드 게임의 매력인 '태크닉' 이라고 불리는 '비술'이야." 훼이드리온의 얼굴에 '흥미'라는 글자가 떠올랐다. "태크닉은 또 뭐죠?" 재촉하는 동생에게 미소를 지어 보인 메이린느는 자신의 카드를 뒤적거리며 설명 을 해나갔다. "'태크닉'이란, 여러 카드가 모여서 하나의 '비술'을 발생시키는 것을 가리켜. 예 를 들어서… 으음, 여기 있구나." 메이린느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카드 중에서 세 개를 뽑아들고 하나씩 테이블 위 에 놓아 펼쳐 보였다. 첫 번째 카드는 건장한 체구가 돋보이는, 손에 든 바스타드 소드와 방패가 포인 트인 그림이 그 려져 있는 붉은 색의 '전사' 카드였다. "'전사' 카드도 네 종류로 나뉘는데, 이건 '불의 전사' 카드란다. 기본 공격 카드 라고 할 수 있 어." 이어서 내려놓는 카드는 검은 색의 기운이 만발한 가운데 서있는 검은 피부의 여 자가 그려져 있 는 카드였다. "'흑정령사'. '정령사' 카드 중에 유일하게 어둠의 속성을 지닌 카드야." 훼이드리온은 누님의 몸에서 마치 신비로운 광휘가 뻗어 나오는 듯한 착각을 받 았다. 마스터 카 드를 하나씩 내려놓으며 설명하는 메이린느의 모습은 마치 경건한 의식이라도 진 행하는 듯한 신 성함이 흘러나올 정도였다. 훼이드리온은 입이 떨어지지 않아 한마디도 하지 못 하고, 그녀가 마 지막 카드를 내려놓으며 말을 마칠 때까지 넋이 빠진 듯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마지막 '분노의 정령 퓨리' 카드. 흑정령사가 분노의 정령 푸리를 소환해 전사의 의식 에 빙의시킨다. 이로서 태크닉 완성, 비술 '버서커'." 피에 미친 전사의 모습. 그의 칼은 허공을 꿰뚫어 적의 몸을 단 칼에 두 동강을 내버린다. 그의 방패는 이미 또 하나의 무기. 거칠게 휘두르는 그의 방패에 적의 몸은 산산이 부 서져 내린다. 핏빛의 폭풍. 몸이 파고들 때마다 뼈까지 스며드는 고통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못한다. 오로지 피만을 생각하며, 피만을 갈구하며, 온몸을 내던져 적을 파괴해나가는 피에 미친 전사, '버서 커'. 훼이드리온의 머리 속에, 그동안 한번도 본 적 없었던 광분한 버서커의 모습 이 떠오른 것 은 우연한 착각이었을까. '헉.' 갑자기 제 정신이 돌아온 훼이드리온은 식은땀이 얼굴을 질주해 내려감을 느낄 수 있었다. 갑자 기 차가운 바람이 스며드는 듯 온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일까. '누님이 '비술 버서커'라고 말하는 동시에 떠오른 그 환영은 대체…….' 잠시 간의 충격으로 인해 멍해져버린 의식을 도로 되찾았을 때, 눈앞에 보인 건, 세 장의 카드 를 가지런히 놓고 훼이드리온이 정신을 차리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누님, 메이린 느의 모습이었 다. "이제 괜찮니?" "아… 네. 대체 뭐죠, 이건?" 메이린느는 입가를 아름답게 말아 올렸다. "그게 바로 마스터 카드의 마력이란다. 게임의 진행이 머리 속에 그대로 투영하 듯이 영상으로서 보여지게 돼. 아마도 이 카드를 창조한 사람이 '대마도사 페인트 라시엔트'이기 때문이겠지." 대마도사 페인트 라시엔트. 대체 그의 위대함은 어디까지일까, 하는 생각에 다시 한번 그를 존 경하게 되는 훼이드리온이었다. "누님, 태크닉은 이것뿐인가요?" "아니, 태크닉은 아직 무궁무진하게 많아. 오랜 시간이 흘러오면서 많은 태크닉이 발생했고 쓰 여졌지. 하지만 아직 남아있는 태크닉이 더 많다고 보는 게 정석일 거야." 그녀는 싱긋 웃고 못 다한 설명을 끝냈다. "내린 카드는 이런 태크닉이나 공격, 방어를 도와주는 역할을 해. 만약 든 카드 중에서 태크닉 이 완성되지 않는다면, 내린 카드의 제일 윗장을 단 한 장만을 뽑아낼 수 있어. 뽑은 카드로서 태크닉을 완성시킬 수 있다면 좋겠지만, 뭐, 다 운 아니겠니. 한마디로 내린 카드 는 게이머의 운을 시험해보는 카드야. 이제 알겠니?" "네!" 힘차게 대답하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동생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이며, 메이린느 는 카드를 다시 정리했다. "그럼 한번 해보자꾸나." 둘은 마스터 카드 게임을 시작했다. 훼이드리온은 배우는 입장에서 아주 성실하 게 가르침을 흡 수했고, 그로서 가르치는 입장인 메이린느를 기쁘게 했다. 그 와중에 게임이 진행 될수록, 훼이 드리온은 점점 이 게임에 빠져 들어가는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그동안의 훼이드리온의 생활은 아주 단순한 패턴으로 진 행되었다. 먼저 아침에 일어나면 아침을 먹자마자 마스터 카드를 들고 메이린느에게 한달음 으로 달려간다. 그때부터 오후까지 질리지도 않고 마스터 카드 게임을 한다. 메이린느도 용케 질 리지도 않고 동 생과 놀아주었다. 어쩌면 자신도 마스터 카드에 흠뻑 빠진 것일 지도 몰랐다. 그리고 점심을 그곳에서 먹고 바이마크에게 검술을 배우기 위해 수련장으로 간 다. 검술을 열심 히 연마하고 자신의 궁으로 돌아와 깨끗이 씻은 다음, 여태까지 배운 지식들은 잠시 복습을 통 해 머리 속에 떠올리고, 또 다시 마스터 카드를 손에 잡는다. 이때부터 잠들 때까 지 혼자서 게 임을 하거나, 태크닉을 연구해보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그것이 하루일과였다. 마스터 카드라는 새로운 요소가 끼어 들자, 언제나 40대 중 년의 권태로운 삶 같았던 훼이드리온의 일과가 이렇게나 활기를 띄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훼이드리온의 검술 스승이자 라시엔트 왕국 금안 기사단 단장 직 을 역임하고 있 는 바이마크의 눈에도 확실히 드러났다. 파아아앗. 날카로운 검 끝이 대기를 찢어발기며 번쩍인다. 파공음이 사라지기도 전에 강력 한 쇳소리가 공 간을 송두리째 뒤흔들며 퍼져나간다. 캉! 두 검의 부딪힘에는 한치의 오차도 없다. 조금의 망설임도, 조금의 방심도 없이 두 개의 검은 서로의 해후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격렬하게 부딪혀나갔다. "많이 좋아지셨군요." "물론이죠!" 건장한 체구의 중년 사내가 아들 뻘 정도 되는 소년과 진검으로 대련을 펼치고 있었다. 드넓은 수련장. 기사 스무 명이 구르고 굴러도 전혀 불편함이 없을 넓은 수련장을 단 둘 이서 사용하면 서도, 마치 기사 스무 명이 일제히 대련을 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한 긴 장감을 표출해 내고 있었다. 금안 기사단 단장 바이마크 폰 헤이스티론 경은 어린 태자의 스승의 역할을 자처 했다는 사실에 상당한 만족감을 느끼고 있는 상태였다. 태자가 검을 처음 들었었던 10년 전에 기대했던 성과 이상을, 그의 제자는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갑니다." 이번엔 바이마크의 공격. 순식간에 수비에서 공격으로 바뀌는 그의 검날은 일말 의 사정도 두지 않고 태자 훼이드리온에게로 날아들었다. 하지만 이미 소년 태자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롱 소드를 다부지게 잡고 그의 검을 막아냈다. "윽." 손바닥에서 밀려들어오는 고통을 약한 신음과 함께 뱉어내기도 모자랄 시간, 그 찰나의 순간에 훼이드리온의 검에 막혀 진로를 변경했던 바이마크의 검은 역시나 또 다시 소년 을 노리고 허점 으로 매섭게 파고 들어왔다. 바이마크는 원래 바스타드 소드 사용자였다. 허나, 제 아무리 10년 동안 검을 잡 아온 훼이드리 온이라고 하더라도 그의 무게 있는 바스타드를 받아내기에는 대단한 무리가 있기 에, 대련을 할 때에는 가벼운 롱 소드를 사용했다. 소년 태자에게는 그것조차 버거운 일이지만 말이다. '마, 막아야해!' 바스타드 소드를 다루던 자가 가벼운 롱 소드를 다루게 되면, 검의 빠르기는 예 상을 초월할 지 경이 된다. 그것도 라시엔트 왕국 제1기사로 불리는 훼이드리온의 스승 바이마크 라면 더더욱. 스승의 간단한 공격을 막아내고 힘에서 밀려버려 완전히 옆구리가 노출되어버린 상태에서, 그곳 으로 스승의 검이 날아든다면… 결과는 참담했다. '주, 죽었다!' 멈출 줄 모르는 기세로 쏘아져 들어오는 날카로운 흰빛을 그저 멍하니 바라보는 수밖에 없는 훼 이드리온은 결국 눈을 질끈 감아버리려고 했다. 멈칫. 그 순간, 허점을 노리던 바이마크의 검이 거짓말처럼 우뚝 허공에서 멈춰 섰다. 잠시 간 의 정적 끝에 훼이드리온이 바닥에 풀썩 주저앉아 버렸다. "하아… 졌어요." "많이 느셨습니다." 검집으로 검을 회수한 바이마크가 손을 내밀었다. "일어나십시오. 한 나라의 태자이신 분께는 이런 흙바닥이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냥 놔두세요. 수련은 '이런' 흙바닥을 구르면서 하는 것이라면서요." 그건 바이마크가 기사들의 수련을 감시할 때 쓰는 말이었다. 훼이드리온이 대체 그 말을 어디서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아주 유용하게 써먹고 있는 것이었다. 바이마크는 난처하다는 듯 이 웃어버리고는 자신도 그냥 옆에 앉아버렸다. "어떤가요?" "많이 느셨습니다." "아니, 그런 거 말구요. 어떠한 점이 늘었고, 어떤 점이 아직 부족한지. 구체적으 로 말씀해 주 셔야죠." 꼼꼼히 따져대는 성격은 아니지만, 검술에 있어서 만큼은 훼이드리온이 대단한 의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바이마크는 하나하나 지적을 해주었다. "아직 실전을 겪지 않으셔서겠지만 찌르기 공격을 할 때, 오른쪽 어깨가 너무 일 찍 열립니다. 웬만큼 검을 잡아본 검사들이라면 어떤 공격이 들어올지 미리 예상을 해버리고 말 것입니다." 끄덕끄덕. 훼이드리온은 양반다리로 꼬아 앉고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상태에서 진지하게 눈빛 을 빛냈다. 바이마크는 제자의 열성적인 자세에서 은근히 즐거움을 맛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요즘 운동을 게을리 하는 건 아니십니까?" 뜨끔 찔려버리고만 훼이드리온. 사실 요 일주일 새, 마스터 카드에 정신이 팔려 바이마크가 지 시했던 하루 운동량을 한번도 채우지 않았다. 위에서 밝혔던 일과를 봐도, 바이마 크에게 검술을 배우는 시간말고는 따로 운동을 하는 시간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훼이드리온의 표정에서 답을 읽어내고만 바이마크는 가볍게 한숨을 지으며 다시 한번 강조했다. "검술은 단순히 검을 휘두르는 기술만으로 실력이 판가름나는 것이 아닙니다. 기 술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기초체력을 탄탄하게 다져야지만, 완벽하게 검술을 발해낼 수 있는 것입니다. 아시 겠습니까?" 충고하는 어투. 높으디 높아서 쳐다볼 수조차 없는 신분인 태자의 자리에 있는 훼이드리온에게 는 써서는 안될 말투임에도 불구하고 바이마크에게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건 당연한 것 이었으니까. 훼이드리온도 검술을 전수 받을 때에는 신분을 초월하여 그를 스승 으로 모셨고, 스 스로 제자의 도리를 다했다. 어느 누구도 이런 관계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네. 명심할 게요." 잘못을 뉘우치며, 앞으로 운동도 해야겠다고 다짐하는 훼이드리온을 보면서 바이 마크는 문득 떠 오른 사실을 확인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얼마 전부터 궁금해하던 것이었지만, 미처 묻지 못한 것 이었다. "요즘 즐거운 일이 많으신가 보군요." "네?" "전에도 말씀드렸던 사실이지만, 얼굴색이 좋아 보이십니다. 처음 검술을 배우기 시작했을 때의 모습 같다고나 할까요." 바이마크는 10년 전의 일들을 떠올렸다. 훼이드리온이 이른 나이에 검을 잡기 시 작했을 무렵, 숏 소드를 하루종일 휘두르다가 구르기도 하고 지쳐 쓰러지기도 하면서도, 끝끝 내 검을 놓지 않 으려 했던 그때. 붉은 기운이 퍼지기 시작하는 하늘을 향해 팔을 크게 벌리고 뻗 어버린 채 지었 던 미소가 요즘 훼이드리온의 얼굴에서 자주 보였다. 훼이드리온은 자신의 롱 소드를 끌어와 두 허벅지 위에 올려놓으며 어색하게 "하 하하." 웃어댔 다. "그게… 그러니까……. 아하하." 말하려니까 괜히 부끄러워졌다. 또 한번 그런 질문을 던져올 것이라고 예상하고 부지런히 답을 준비해두었는데, 막상 정말 물어오니 생각해두었던 답이 머릿속에서 제 멋대로 뒤엉켜버림을 느 끼며, 훼이드리온은 한동안 침묵하며 그 생각을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 잠시 간의 정적이 그들의 주위를 흐른 후, 훼이드리온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물 론 그동안 바이 마크는 웃음을 잃지 않고 제자가 고개를 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그 날, 마스터 카드라는 게임을 알게 됐어요. 그런데 그 게임이 정말 재 미있어서 요즘 완전 푹 빠져서 사는 중이에요. 아마도… 얼굴색이 좋아 보이는 건 그 때문이겠 죠. 사실 제가 생각해도 요즘의 왕궁 생활은 너무나 재미있거든요. 헤헤헤." 포도주라도 몇 잔 한 듯이 달아오른 볼을 하고 멋쩍게 웃는 훼이드리온을 향해 바이마크는 아들 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따스하게 웃어주었다. "다행이군요. 태자 저하께서는 무엇보다 이 왕궁 생활에 재미를 붙이시는 게 필 요했는데, 제가 챙겨드리지 않아도 이제는 괜찮겠습니다." "물론이죠!" 자신 있게 주먹을 불끈 쥐며 훼이드리온이 의지를 표명했다. 이제 "심심하다.", " 밖으로 나가고 싶다." 등등 지루한 왕성 생활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던 모습은 보이지 않을 것이 라는 듯. "그럼 오늘은 그만 하겠습니까?" "어, 그래도 돼요?" "네. 기사 후보생들 교육을 실시할 시간이 되어서 말입니다." "그럼 가보셔야죠." 둘은 흙을 털어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격렬한 대련 중에 흘러내렸던 땀도 어 느새 말라버려 찐득찐득 불쾌한 느낌만을 선사했지만, 항상 있는 일이라 그렇게 신경 쓰이지는 않았다. "그럼, 오늘도 좋은 하루 되십시오, 태자 저하." "안녕히 가세요, 헤이스티론 경. 오늘의 가르침, 잊지 않겠습니다." 바이마크는 정중히 기사의 예를 취해 보였고, 훼이드리온도 예의에 어긋나지 않 게 정중히 인사 를 해냈다. 인사를 끝내고 훼이드리온은 뒤 돌아서서 롱 소드를 검집에서 다시 꺼내들었다. 하늘 위에서 내 리쬐는 마스트의 빛은 소년 태자의 검을 하얀 색의 광채로 빛나게 배려해주었다. 쉐에에엑. '기본 자세 100번씩!' 항상 수련을 끝내고 나서 정리운동 겸 수련으로 하는 연습을 다시 시작했다. 조 금 쉬었던 덕분 인지 대련으로 인해 느려졌던 근육과 관절의 움직임도 많이 회복되어, 앞으로 내 지르는 검 끝에 는 '일격필살'이라는 강력한 힘이 잠재되어있는 듯했다. "하아앗!" 훼이드리온의 입에서 세찬 기합 소리가 터져 나와 넓은 수련장에 울려 퍼졌다. '열심히 하십시오.' 훼이드리온이 시작한 정리운동의 조금을 보고 바이마크는 등을 돌렸다. 뒤에서 들려오는 우렁찬 기합에 속으로 가볍게 격려를 보내며 그는 남은 일정을 따라 행동하기 위해 기사 수련장으로 향 했다. 한발 한발 내딛는 그의 발자국 속에는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기운과 또한 힘이 담겨있었다. ----------------------------------------------------------------- ------------------------ 아... 비축분도 없이 시작한 글이라 한편 한편 쓰는 게 뼈를 깎는 고통입니 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다 제 팔자인걸. 그래도 조회수가 60이나 되니 참으로 좋은 걸요. 아하하. 이번 편에 드디어 마스터 카드 게임이 나왔습니다. 게임 방식이 단순할 수도 있 지만, 역시 이 게임의 진면목은 '태크닉'이죠. 캬하하. 아직 많은 게임이 남았고, 많은 태크닉도 나올 것입니다. 마구마구 떠오르고 있는 중! 그럼 4편도 기대해주십사~~~하면서 물러갑니다!! 어둠의 기사 DARK KNIGHT TEAM... 번 호 : 7989 / 10423 등록일 : 2000년 05월 30일 22:05 등록자 : 암음기사 조 회 : 276 건 제 목 : [카드 게임 판타지]『 카드 마스터(Card Master) 』#004 카드 게임 판타지(Card Game Fantasy) 카드 마스터(Card Master) 4. "오늘 훈련은 이만! 각자 정리운동 후 해산!" "옛!" 우렁찬 기사들의 함성 소리와 함께 오늘의 정해진 일정은 모두 끝이 났다. 금안 기사단 단장 바 이마크는 단상 위에서 내려와 수련장 출구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가 향하는 방향에서 수련 을 하던 기사들은 그가 지나갈 때 검을 멈추고 거수경례로 예를 갖췄다. "신경쓸 거 없다. 계속 수련에 임하라." "네!" 갈색 머리를 한 기사 한 명의 경례를 받으면서 바이마크가 손을 내저었고, 그 기 사는 두꺼운 갑 옷을 정리하고는 다시 검을 이리저리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의 수련을 지나가는 눈으로 보던 바 이마크는 넌지시 그에게 충고했다. "찌르기 중에 검 끝이 흔들린다." "시정하겠습니다!" 그 즉시 그의 찌르기에서 흔들림이 사라짐을 확인하고 바이마크는 고개를 다시 돌려 출구로 향 했다. "단장님!" 뒤쪽에서 들려오는 부름에 바이마크는 다시 가던 길을 멈춰야했다. 그를 부르는 목소리의 주인 은 단숨에 바이마크의 앞까지 달려와 탁 멈춰 섰다. "무슨 일인가, 제2대장 나이트 슈란가트." "네. 금안 기사단 시가 후보생들의 수련 성과에 대해서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 다." "그래? 가는 길에 듣도록 하지." "네." 기사 후보생들의 수련을 책임지고 있는 제2대장 나이트 슈란가트는 실력으로 따 지자면 바이마크 바로 다음이었으며, 실무 능력도 그에 못지 않게 대단했다. 단단해 보이는 근육에 서 우러나오는 힘과 날렵함을 두루 갖춘 인물이라, 바이마크는 그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는 나이트 슈 란가트를 신임했으며, 나이트 슈란가트도 그에게 진심으로 충성했다. 둘은 수련장을 빠져나왔고, 얼마쯤 걸어가자 슈란가트가 자신의 이마에 맺힌 땀 을 손으로 훔친 뒤 보고를 올렸다. "기사 후보생 수련 47일이 지난 오늘 아침까지, 탈락자는 7명으로 수련이 끝나는 80일까지 더 이상의 탈락자는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현재 진행 중인 후보생들 간의 대련 성적에서는 … 23번과 53번, 그리고 아드님이신 67번 하이마크 폰 헤이스티론 님, 이 세 명이 전승으로 1위 를 하고 있습니다." "23번과 53번은 누구인가?" 바이마크의 물음에 슈란가트는 들고온 서류를 뒤적이다 대답했다. "23번은 미츠힐 자작 가문의 차남인 리가엣 미츠힐이고, 53번은 쾰리오틴 공작 가문의 장남인 베이오드 쾰리오틴입니다. 나이는 각각 18세, 21세입니다." "흠……." 바이마크도 부모인지라, 역시 자신의 아들이 먼저 떠올랐다. 돌잔치 때, 제대로 잡지도 못하면 서 애써 롱 소드를 잡아 올려 사람들을 놀라게 한 일화가 유명한 그의 아들이 훌 륭한 성적을 내 고 있자 아주 흐뭇해졌다. 실제로 하이마크의 나이는 태자의 나이와 같은 15세이 기에, 그의 성 과에 더더욱 흡족해하는 것이다. 이대로 계속 성장을 한다면 장래에 큰 기사가 될 것이 분명한 일이었다. "그밖에 다른 사항은 없는가?" "에… 다른 사항은 없습니다. 모두들 잘해주고 있어서 기쁠 따름이지요." "나도 그렇네. 그럼 자네도 수련을 하러 가보게나." "넷!" 정중하게 거수경례를 붙인 슈란가트는 빠른 걸음으로 다시 수련장을 향해 달려갔 다. 그의 뒷모 습을 잠시 지켜보던 바이마크도 곧 돌아서서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수련장은 왕성 뒤쪽, 그러니까 왕성 안에 자리하고 있는 작은 산 위에 마련되어 있었다. 그곳으 로 올라가는 길은 그리 멀지 않았기에 바이마크는 곧 산 아래에 모습을 드러냈 다. 그가 지금 향하는 곳은 그의 친구가 있는 집무실이었다. 그의 친구와는 아주 오 랜 인연으로 묶 인, 흔히들 말하는 '불알친구'였고, 그렇기에 그들 사이의 우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두터 웠다. '흠… 다 와가는군.' 느긋하게 집무실을 향해 걸음을 옮기면서 바이마크는 옛 기억을 회상했다. 추억 은 언제나 그를 흐뭇하게 만들었다. 실로 중년을 지난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젊은이 못지 않 은 혈기를 가진 것도 어쩌면 이런 성격이 한몫 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의 눈에 왕궁이 보이기 시작했다. 언제 봐도 왕궁은 그에게 커다란 의미로 자 리 잡고 있었다. 그 큰 위용은 마법왕국 라시엔트의 위력은 유감 없이 보일 수 있는 하나의 상징 적인 것이었기 에, 그는 왕궁을 보면서 언제나 자부심을 느꼈다. 하지만 한편으로 마음 한구석이 불편한 것도 사실이었다. 국민들의 피와 땀과도 같은 세금을 저 런 건물 하나에 투자를 했다는 사실이, 그를 불편하게 하는 것이었다. 바이마크는 머리를 흔들 며 조금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왕궁의 동쪽 문으로 들어간 바이마크는 빠른 걸음으로 2층에 도착했다. 그의 친 구의 집무실은 이 왕궁 2층에 자리잡고 있었다. 붉은 융단이 깔린 복도를 성큼성큼 걸어가며 그의 눈에 들어오는 수많은 동물들 의 박제를 스쳐 지나, 그는 집무실 앞에 도착했다. 필로윈 셀 디바이어 왕성 수석마법사. 그의 친구가 가진 이름과 직책이었다. 똑똑똑. 낮은 노크 소리가 문을 울리자, 곧 그 안에서 중년 남자의 대표적 음성이 낮게 들려왔다. "들어오시오." 바이마크는 흰색의 고풍스러운 무늬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눈에 가장 먼저 잡힌 것은 밝게 빛나고 있는 하얀 색, 큰 창문이었다. 발코 니 형식으로 만 들어진 큰 창문 앞에, 밖에서 투과해 들어오는 빛을 고스란히 받고 있는 책상이 있다. 그 책상 위에는 여러 서류들과 책, 그리고 마법물품들까지, 과연 왕성 수석마법사의 집무 실이라고 생각 될 여러 가지 것들이 널려있었다. 그리고 수석마법사는 책상 앞의 의자에 앉아서 바이마크를 지그시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자네로군. 반갑네, 그려." "음… 일하는 중이었나?" "그렇다네. 잠시만 거기 앉아서 기다려주겠나? 곧 끝날 터이니." 필로윈은 그렇게 말하고 점검 중이던 서류로 다시 눈길을 돌렸다. 바이마크는 오 래된 친구의 일 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책상 앞에 마련된 소파에 조심스레 몸을 맡겼다. 소파 앞 의 테이블 위에 는 때마침 '마법 입문'이라는 책이 올려져있었고, 그는 가벼운 호기심으로 그 책 을 들어 페이지 를 넘겼다. 딸깍. 문이 열리는 소리. 바이마크는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눈길을 돌렸고, 그의 눈에 왼쪽에 붙어 있는 문에서 한 소녀가 쟁반을 들고 걸어나오는 모습이 잡혔다. 소녀는 짙은 붉 은 색의 머리칼 을 뒤로 단정히 묶고, 작은 미소를 띄운 채 테이블로 다가왔다. 그때 탁, 하는 소리와 함께 필로윈이 서류에 서명을 끝내고 고개를 들었다. "아, 로위나. 이 서류를 루윈에게 전해주거라. 그리고 차를 준비해줬으면 좋겠는 데… 자네는 뭘 들겠나?" 자리에서 일어난 필로윈은 로위나로 불린 소녀에게 방금 전까지 들여다보고 있던 서류를 건네주 고 바이마크 반대편 소파에 앉았다. 필로윈의 물음에 바이마크가 지체 없이 대답했다. "그걸로 부탁하네." "음, 로위나. 피어츠 차, 두 잔 준비해주렴." "네, 아버님." 붉은 머리칼의 소녀는 아버지 필로윈에게 다소곳이 두 손을 모아 인사를 하고 조 용한 걸음으로 들어왔던 문으로 다시 사라졌다. 시선은 소녀의 사라지는 모습을 향한 채 바이마 크가 책을 내려 다놓으며 입을 열었다. "언제 봐도 조용하고 차분한 성격이군 그래. 올해로 열 여섯인가?" 필로윈이 웃음을 띄운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네. 이제 슬슬 신랑감을 물색해볼 때지." 아마도 그의 딸이 이런 얘기를 들었다면 귀까지 벌겋게 달아올랐을 것이다. 로위 나는 그런 성격 은 가진 소녀였다. 필로윈이 그런 딸의 모습을 생각하며 짓궂은 웃음을 떠올렸다. "자네 아들은 어떤가?" "음? 뭘 말인가?" 장년을 바라보는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왕성 수석마법사의 장난기는 예전보다 더 심해지는 듯했 다. "모르는 척은. 자네 아들, 하이마크 폰 헤이스티론을 내 사위로 할 생각이 없냐고 묻는 걸세." "흠… 자네 같은 사돈을 두고 싶지는 않네만." "예끼, 이 사람!" 허허허, 바이마크와 필로윈은 오랜만에 농담을 나누며 그동안 서로 바빠 만나지 못한 시간을 채 웠다. "그래, 우리 사위는 요즘 어떻게 지내나?" "자네, 예상외로 집착이 심하군 그래." "허어, 이 사람 보게. 40년을 넘게 지내온 우정이면서, 아직도 그걸 모르는 건가? 난 한다면 하 는 성격이네." "흠, 그렇긴 하지만 이번만큼은 막고 싶군." 그칠 줄 모르는 농담으로 둘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렇게 꽤나 시 간이 흘렀을 무렵. "그래, 요즘 태자 저하께서 혈색이 좋다고?" 로위나가 들고 온 피어츠 차를 즐기며 서로의 제자들 자랑을 늘어놓고 있던 둘의 얘기에서 훼이 드리온이 소재로 떠올랐다. 바이마크가 옅은 웃음을 떠올렸다. "그렇다네. 얘기를 들어보니, 요즘 검술말고 다른 것에 재미를 붙이셨다고 하네. 검술말고는 재 미없다고 하시던 분이셨는데 말이야." "그거 다행이군 그래. 난 또 태자 저하께서 11대 마법왕 미첼리안 휜 라시엔트 님처럼 왕성의 지루함을 이겨내지 못하고 뛰쳐나가실 줄 알았는데." "솔직히 말해서 나도 그렇게 생각했네만, 뭐, 잘 되지 않았나." "그렇군." 필로윈은 피어츠 차를 다시 한 모금 머금고 맛을 음미하다가 문득 그것을 목구멍 으로 넘겨버리 고 바이마크에게 물었다. 찻잔을 입에 가져가며 바이마크의 시선이 친구를 향했 다. "그럼, 그 재미를 붙이셨다는 게 뭔가?" 바이마크는 차를 한 모금 삼키고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무슨 카드 게임이라고 하셨는데……" "카드 게임?" "그렇다네. 얼마 전에 알게 되셨다고 하셨다네. 그런데… 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 는군 그래." 워낙 일생을 검을 휘두르고 살아온 그라, 검술 이외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 렇기에 태자 저 하의 말임에도 불구하고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카드 게임이라……." 바이마크가 조금 남은 피어츠 차를 마지막 한 모금으로 다 비우는 사이, 친구의 말을 곱씹고 있 던 필로윈이 '혹시나' 하는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혹시 말이네. 마스터 카드…라는 이름 아니었나?" "마스터 카드? 으음, 그런 이름이었던 거 같군. 아는 게임인가?" "하하, 이럴 수가." 친구에게서 게임의 이름을 확인한 필로윈은 조금 황당하다는 듯이 이마를 짚으며 중얼거렸다. 바이마크는 친구의 그런 상태를 보며 영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고, 필로윈 은 그제야 허망 한 웃음을 멈추고 친구에게 설명을 해주었다. "마스터 카드 게임이란 건 말일세. 라시엔트 마법왕국의 건국왕이시자, 위대한 마 법사들의 우상 이신 대마도사 페이트 라시엔트 님께서 직접 창안하신 게임일세." "음?" "실제로 만들어진지가 라시엔트 왕국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게임이고, 체스 다 음으로 대중적으 로 오래도록 인기를 모으고 있는 게임 중에 하나지. 다만, 체스와는 달리 천한 게 임으로 분류되 어서 귀족층에서는 잘 즐기지 않만 한번 빠지면 중독성은 대단하다고 하네. 그런 게임에 태자 저하께서 맛을 들이신 거야." "호오, 그런가?" 놀랍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는 바이마크. 필로윈은 주름이 잡힌 입가를 말아 올리 며 재미난 듯 이야기를 계속 이었다. "그렇다네. 그리고 대마도사께서 만드셨으니 당연히 마법사들에게는 거의 필수로 알려져 있는 상태라 나도 한번 만져봤다네. 거기다 직접 카드를 만들어보기도 했고 말일세. 꽤 재밌더군. 허 허." "카드를 만든다고?" "그렇네. 마법사들이 자신이 직접 카드를 만들 수도 있다네. 다만, 위험이 없는 환영마법 종류 의 마법밖에 카드에 걸 수 없지. 이 환영마법은 게임 필드가 펼쳐졌을 때, 실제 전투를 벌이는 듯한 환영을 보여준다네." 메이린느와 훼이드리온이 간단하게 게임을 할 때 '이야기의 시작' 카드를 언급했 던 적이 있다. 필로윈의 설명과 메이린느의 설명의 차이는 그 카드로부터 시작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이야기의 시작' 카드를 들고 게이머가 "시작."을 외친다. 그럼 카드 안에 담겨있 던 마력들이 뭉쳐 허공에 하나의 공간, 즉 게임을 진행해나가면서 벌어질 전투를 환영으로 보 여줄 수 있는 '필드'가 펼쳐지게 된다. 만약 게이머가 전사 카드로 공격을 한다면 필드 위에 전 사의 모습이 하나 나타나 전직을 향해 공격해 들어가는 장면이 연출되게 된다. 상대편에서 방 어를 한다면, 또한 그 모습도 필드 위에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직접 게임을 진행하는 게이머 들은 그 전투가 정말 눈앞에서 펼쳐지는 듯한 착각을 받고, 관중들은 필드에서 그 게임의 진행을 구경할 수 있 는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의 시작' 카드를 사용하지 않고, 간단하게 시작했다면, 훼이드리온 이 경험한 버 서커의 환영 같이, 머리 속에만 떠오르게 된다. 게임 진행의 두 가지 방식은 그 차이인 것이다. "…아무튼, 태자 저하께서 그 게임을 하고 계신다니 한번 찾아가 봐야겠군 그래." "그렇게 하게나." 필로윈은 모든 마법사들의 공통적인 습성이라 할 수 있는 '설명을 하는 데에서 오는 쾌감'을 오 랜만에 만끽한 즐거움에 기분 좋게 미소를 떠올렸다. 하지만 그 반대로 바이마크 는 쓴웃음을 띄 울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필로윈의 설명을 반의 반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 다. 그냥 속으 로 '하이마크도 알까?'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날은 어느새 점점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두 잔째 비우고 있던 피어츠 차의 향 기도 이제 실내 에서 흐릿해져가고 있었고, 즐겁게 대화를 해나가던 두 중년의 남자들의 얘깃거 리도 또한 떨어 져가고 있었다. 필로윈은 이제 본격적인 이야기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먼저 주위에 아무도 없나 마력을 풀어 주의 깊게 살펴본 다음, 혹시나 하는 생각에 아예 방음마법까지 실 내에 쳐버렸다. 무슨 이야기이길래 이렇게도 신경을 쓰는 것일까. 바이마크는 자신의 친구가 갑자기 마력을 개방한 탓에 움찔 놀란 표정으로 친구 를 바라보았다. 친구는 결국 마지막 작업까지 끝낸 후, 조용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한참을 그렇게 서로 노려보듯 쳐다보다가, 이 이상한 분위기를 참을 수 없던 바 이마크가 드디어 먼저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인가?" 필시 어떤 할말이 있기에 이런 준비를 하는 것이 분명하다. 바이마크는 그렇게 물어놓고 필로윈 의 대답을 기다렸다. 필로윈은 잠시 친구의 눈을 쳐다보다가 몸을 일으켜 책상 쪽으로 다가갔 다. 그리고 쌓여있던 서류 더미에서 서류철 하나를 꺼내들고는 침묵을 지킨 채 자신 제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그때까지 바이마크는 물론이고 실내에는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방음마 법 탓에 바깥에서 들려온 작은 소음조차 이 공간을 흩뜨리지 못했다. 필로윈은 굳게 다문 입술처럼 막힌 움직임으로 가져온 서류철을 바이마크에게 넘 겼다. 바이마크 는 잠시 의문을 떠올렸다가 이내 그 서류철을 받아들였다. 일단 이것이 무엇인지 확인해볼 필요 를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류를 한 장씩 넘기는 그의 손길도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눈에 흔들리 는 감정이 포착 되었다. '이, 이것은!' 경악에 가까운 신음을 흘리며 바이마크는 그의 친구에게로 날카로운 눈빛을 돌렸 다. 필로윈은 그의 담담한 눈빛으로 그의 눈을 마주하며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지그시 입을 열 었다. 크지도 않고, 그렇다고 작지도 않은 그런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는 확실히 큰 울림이 담 겨있었다. 필로윈의 개성 없는 목소리가 조용한 공간에 또박또박 흘러 들어갔다. "자네는… 국민이 먼저인가, 왕이 먼저인가." 바이마크는 자신의 저택이 바로 앞까지 다가올 때까지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한 채 오로지 본능적 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오셨어요, 여보." 바람과 순환의 신 위넨스의 이름을 본 따서 이름을 지었다는 바이마크의 부인, 위네시스 폰 헤 이스티론 부인이 남편을 반겼다. 그는 부인의 인사에도 무표정하게 그저 고개를 끄덕여서 위네 시스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었다. "…애들은?" "각자 방에 있어요. 하이마크는 저녁 수련을 하고 씻고 있고요. 당신, 무슨 일 있 는 거예요?" 부인의 물음에 바이마크가 그저 쓴웃음만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일은 무슨. 나 서재에 있겠소." 흔들리는 듯한 그의 걸음에서 위네시스는 의아함을 느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언제나 진실한 남편이었기에 곧 사정을 말해줄 것이라고 생각하며 자신을 달랬다. "조금 있다가 차 가지고 갈게요." "고맙소……." 뒤에서 들려오는 부인의 목소리도 잘 들어오지 않는 상황에서 바이마크는 서재로 발걸음을 옮겼 다. 저택으로 올 때와 마찬가지로 거의 본능에 가까운, 그동안에 몸에 베인 움직 임대로 가고 있 는 것이었다. 그만큼 지금 그의 마음은 엉망진창이었다. 도착한 서재. 문을 열고 들어가자, 곧 마법의 등 불빛이 실내를 비추었다. 그는 터덜터덜 몸을 옮겨 의자에 몸을 푹 묻었다. 어지러운 마음만큼이나 신체도 힘들었다. 왕궁에서 여기까지 오는 것이 마치 하루종일 수련을 한 것처럼. 그는 담배를 피지 않는 자신이 왠지 불쌍하게 여겨졌다. 담배는 백해무익이라는 신념 아래 거들 떠보지도 않은 세월이 벌써 30여 년. 오늘만큼이나 그런 자신이 원망스러워지는 때도 없었다. 그는 괜시리 손가락으로 팔받침대를 툭툭 치며 혼란스러운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 를 썼다. 바깥은 이미 어두웠다. 마스트는 이미 눈을 감아버렸고 운명을 좌우한다는 여신 하실루스의 상 징만이 은빛의 색을 띄운 채 어두운 하늘 중간에 걸려있었다. '하실루스… 달과 운명의 여신이시여. 오늘밤만큼 당신께 잘 어울리는 밤도 또 없구려…….' 가만히 창문 밖으로 달을 바라보던 바이마크의 입에 피식 미소가 걸쳐졌다. '하실루스의 장난은 주로 달이 빛날 때 이루어진다…….' 하실루스를 모시는 신관들이 주로 입에 담는 말을 되새겨보는 바이마크. 그는 진 지하기만 했던 친구 필로윈의 눈빛을 떠올렸다. 그는 정말 진심으로 그런 말을 했다. 자신의 도 움을 요청하면 서. '하지만……' 필로윈이 그 말을 꺼낼 당시에도, 하늘에는 하실루스의 상징인 달이 은빛을 뿜어 내고 있었다. '…반란이라니.' ----------------------------------------------------------------- ----------------------- 안녕하십니까, 팀이올습니다. 정말 사정없이 늦어버린 4편이군요. 죄송합니다. 작가의 개인 사정으로 인해 독자 분들을 기다리 게 한 잘못... 죽어 마땅합니다.(그럼 죽엇!! 퍽! 으아악~!) ...흠흠. 그리하여 오늘은 4편을 올립니다. 개인적으로 꽤 신나게 써갈긴 편이었습 니다. 그렇다 고 몇십분 만에 쓰여진 것은 아니지만, 맘에 드는 편이었습니다. 아마도 이번 편 에 배경적인 사 건은 나타난다고 봐야겠죠. 사실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여기서 밝힐 것인지, 말 것인지. 구성을 하면서도, 글 을 쓰면서도 결정을 못내리고 있었지만, 결국 밝혀버리고 말았습니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단지 배경적인 사 건일 뿐이니까요. 그렇다고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건 아니지만 말입니다. 에... 이번 편에는 그러고 보니 주인공이 나오지 않았군요. 거의 두 사람이서 모든 걸 다 이끌 어갔으니... 아하, 조금 재미없는 편이었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래도 중요한 부분 이기에 열심히 적었습니다. 음... 괜히 잡담이 길어졌군요. 그럼 이만 마치겠습니다. 아, 그리고 '아틀란티스'...는 당분간 연중입니다. 리메에 들어갈까 생각중이구요. 그리고 '절대 암흑 숲 속의 작은 마을 이야기'...라는 꽤 긴 제목을 가지고 있는 소설도 많은 사랑 부탁합니다. 그럼 이만. 꾸벅. 어둠의 기사 DARK KNIGHT TEAM... 번 호 : 8408 / 10423 등록일 : 2000년 06월 11일 03:15 등록자 : 암음기사 조 회 : 305 건 제 목 : [카드 게임 판타지]『 카드 마스터(Card Master) 』#005 카드 게임 판타지(Card Game Fantasy) 카드 마스터(Card Master) 5. 익숙한 공간. 이곳은 마법왕국 라시엔트의 공주가 사용하는 그녀의 방이었다. 언 제나 그렇듯이 방안에는 화사한 공기가 감돌았고 창 밖에서 비치는 밝은 햇살로 인해 한층 더 화사한 분위기를 고조 시켰다. 그리고 고조되고 있는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불의 전사 카드와 물의 전사 카드로 페어 공격." 금발의 소년, 훼이드리온의 입에서 나지막이 말이 튀어나오며 손을 움직였다. 소 년의 두손에 의 해 테이블 위에 올려진 붉고 푸른 두 장의 카드를 내려다보던 반대쪽의 소녀, 아 니 숙녀라고 할 수 있는 메이린느는 작은 미소를 머금으며 천천히 자신의 카드를 내려놓았다. "프리스트 원 페어로 공격 방어. 그리고 반격." 훼이드리온은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에서 불길한 예감을 받았다. 그리고 그 예감은 어김없 이 적중했다. 메이린느는 우아한 손길로 하나하나 카드를 테이블에 올려놓기 시작했다. 그 손 길이 더해갈수록 훼이드리온의 얼굴에는 패색이 점점 짙어져 가는 건 어쩔 수 없는 결과였다. 그녀가 선보인 카드는 '불의 용사' 카드와 '동대마법사' 카드, 그리고 '글로리 프 리스트' 카드, 마지막으로 '백소환사' 카드. 이렇게 4개의 카드였고, 그것들이 뜻하는 것은. "불타오르는 정열을 잠재한 용사와 동쪽의 대마법사, 그리고 선택된 신의 사자 글로리 프리스트 와 정령왕 소환의 백소환사. 이 4명의 파티로, 태크닉 완성. 비술 '드래곤 슬레이 어'." '허엇!' 당했다, 라고 생각하는 그 순간, 예외 없이 훼이드리온의 머리 속에 거대한 환영 이 일어나기 시 작했다. 붉은 비늘의 뜨거운 열기를 가진 최강의 생물, 드래곤! 그리고 그 앞에서 용감하 게 드래곤에 대 항하는 4명의 용자들. 용사의 검에서 하얀빛이 뿜어져 드래곤을 베고 지나가면 고통에 몸부림치 며 드래곤이 포효를 내지른다. 그러나 그에 굴복하지 않고 백소환사가 불의 정령 왕 '이프리 트'를 소환하고, 그와 동시에 마법사의 궁극주문이 빛을 발한다. '크와아아아아아아아!' 머릿속을 울리는 거대한 드래곤의 포효 소리가 훼이드리온의 뇌를 강타했다. 그 와 동시에 글로 리 프리스트의 신법, 불의 정령왕 이프리트의 공격, 마법사의 궁극주문, 마지막 일격이 용사의 검에서 펼쳐지자, 드래곤의 몸은 힘을 잃고 바닥으로 추락한다. 그렇게 거대하고 모든 생물체를 압도하는 힘을 지닌 위대한 생물체가… 4명의 용자의 손에 쓰러진다. 몇 번의 꿈 틀거림 끝에 결 국 드래곤은 숨을 거두고 만다. '드래곤 슬레이어!' "허억!" 머릿속에서 지어진 실재 같은 환영을 체험한 훼이드리온이 숨을 몰아쉬며 이마에 흐르는 땀을 연신 닦아내었다. 벌써… 2주일동안 이 게임을 해오면서 그래도 계속 놀라게 되 는 것이 바로 이 환영 때문이었다. 너무나 실재 같이 뇌를 침투해 들어오기에 한번 당하고 나면 전신의 힘이 쏙 빠져나가는 듯한 나른함까지 느끼게 되는 것이다. "생명력 모두 소멸이야. 그래서, 이번 게임도 내가 승리네?" 메이린느는 카드를 내려놓고 손수건으로 동생의 땀을 닦아주었다. 그런 누님의 모습을 바라보며 훼이드리온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오늘도 지고 만 것이다. 푹신한 소파에 몸을 깊게 묻으며 훼이드리온은 고개를 휙휙 내저었다. "아아… 누님은 정말 잘 하세요. 어떻게 한번도 이길 수가 없는 거죠?" 메이린느는 자신을 칭찬하는 동생에게 수줍은 미소를 비추었다. "잘 하기는… 나 정도 실력을 가진 게이머는 얼마든지 있단다. '마스터'라고 불리 는 게이머들 실력에는, 난 발끝도 따라가지 못해." "마스터요?" "응, 마스터. 일정한 실력 이상을 가지면 마스터라는 칭호를 부여한단다. 마스터 중에는 늙은 사람도 있고, 아직 앳된 끼를 벗지 못한 이들도 있어. 마스터는 겉보기로 판단할 수가 없는 거 야." 훼이드리온이 놀랍다는 뜻을 얼굴에 띄워 보였다. 동생의 가장된 몸 동작에 메이 린느는 가만히 웃음 지을 따름이었다. "소문을 듣기로는 너… 정도의 소년이 마스터에 올랐다는 얘기를 들었어. 15세 정도라고 하던 걸? 검은 옷을 잘입고 언제 나타났는지 언제 사라졌는지도 모를 만큼 은밀하게 다닌다고 해. 그 래서 모두들 그 소년을 '흑의 마스터'하고 부른단다." "15세!"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훼이드리온이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소년은 이제 2주일 뒤면 15세다. 그 런데 경력은 이제 2주일. 그에 비하여 그 '흑의 마스터'라는 소년은 같은 15세임 에도 불구하고 마스터의 칭호를 받은 엄청난 실력의 소유자이다. 훼이드리온은 갑자기 기묘한 감정이 피어오름 을 깊이 느낄 수 있었다. '질 수 없다! 같은 15세다. 태자라는 신분을 제외한다면, 차이가 나는 부분은 거 의 없을 것이 다. 그렇다면! 나도 그렇게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실로 오랜만에 피어오르는 승부욕이었다. 이런 감정을 느껴본 건, 10년 전 검을 처음 잡았을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달라진 것이라면, 검이라는 무생물에 대한 도전 의욕이 아닌, '흑의 마스 터'라는 실존 인물에 대한 도전이라는 것. 일단 목표 설정을 하자, 지금까지 마스 터 카드 게임 에서 느꼈던 흥분이 배가 되어 부풀어오름을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드디어, 가슴이, 의욕이 끓어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 혼자서 상념에 빠지더니 갑자기 주먹을 불끈 쥐고 무서운 눈빛을 띄기 시 작하는 동생을 바라보며, 메이린느는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내가 말을 잘못했나?' 조심스레 추측을 해보자면 자신과 똑같은 나이의 소년이 마스터의 칭호를 받았다 는 사실에 대 한, 어떠한 투쟁심 비슷한 감정일 것이다. 질투도 일어날 만했지만 그녀는 자신의 동생에게 그 런 감정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에 비해 남에게는 잘 보이지 않는 투 쟁심은, 없는 질 투심만큼 곱절로 많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훗… 귀여운 우리 동생…….' 그녀는 헤어지면 과연 어떻게 될까 생각해보았다. 저 귀여운 동생을 두고 어떻게 다른 곳으로 시집을 갈 수 있을까. 한 나라의 공주라는 신분으로 인해 필시 다른 나라의 태자 나 왕과 혼인을 할 것은 분명하지만, 그때는 서로 헤어져서 잘 지낼 수 있을까. 그녀의 맘속에서 '걱정'이라는 감정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아직 먼 미래의 일이기에 그녀 는 애써 그런 감정을 지워버리고 다시 미소를 띄웠다. '지금은… 이 시간을 즐기자.' 긍정적으로 살아온 메이린느의 생각이 결론을 내렸을 즈음 혼자 투지를 불태우고 있던 훼이드리 온이 냉큼 그녀에게 소리쳤다. "누님! 한번 더 해요!" "응, 그러자꾸나." 화사한 미소를 띄워 보이며 고개를 끄덕이는 메이린느. 훼이드리온은 그녀의 맘 에 감추어진 걱 정은 알지 못했기에, 그저 그녀를 따라서 기분 좋게 웃을 따름이었다. "자, 그럼 이번엔 훼이가 카드를 섞어보겠니?" "제가요? 으음… 네." 흔쾌히 대답한 훼이드리온은 테이블 위의 카드를 모아 가지런히 정리한 다음, 빠 르게 손을 놀리 기 시작했다. 왼손에 카드 뭉치를 잡고 오른손으로 밑의 카드 몇 장을 꺼내 위에 올리고 다시 카드를 꺼내 위에 올리고 하는 식으로 몇 번을 반복하여 카드를 섞었다. 2주일 동안 카드 섞는 실력도 늘어서 처음과 같이 카드를 밑으로 떨구거나 날려버린다든지 하는 일들은 더 이상 일어 나지 않았다. "여기요." 다 섞인 카드를 메이린느에게 내밀자, 거부하듯 카드를 훼이드리온 쪽으로 지그 시 밀어주며 그 녀가 말했다. "네가 해보렴. 마스터가 되고 싶다면, 이런 것도 잘해야하잖니." 뜨끔 하는 소리가 울려 퍼질 정도로 훼이드리온의 태도는 분명했다. 완전히 맘을 들켜버린 소년 은 발개진 얼굴로 손을 움직이며 메이린느에게 우물쭈물 물었다. "어, 어떻게… 아셨어요?" "누나가 동생의 맘을 모르면 어떡하겠니." 그 한 마디에 모든 걸 이해한 훼이드리온은 머리를 한번 긁적이고는 작업에 집중 했다. 밤마다 태크닉 연구를 하면서 세어본 결과, 훼이드리온이 비밀의 방에서 찾아낸 카드의 수는 총 125장이었다. 메이린느의 말을 빌어서 말하자면 이 정도 수의 카드는 꽤 경력이 되는 사람이 모 으는 정도와 비슷하다고 한다. 훼이드리온은 운 좋게도 그만한 숫자를 한번에 가 지게 된 것이 다. 125장의 카드를 62장씩 나누고, 나머지 한 장인 '이야기의 시작' 카드는 한쪽에 밀어두었다. 게 임이 시작되면 전혀 필요 없는 카드이고, 연습삼아 하는 것이기에 "시작"을 외치 는 과정은 생략 해도 별반 문제는 없기 때문이다. "어느 쪽 하실래요?" 양손에 카드 뭉치를 든 훼이드리온이 메이린느에게 물었다. 그녀는 동생의 물음 에 가만히 두 카 드 뭉치를 둘러보더니 이내 오른손 쪽으로 손을 움직였다. "이쪽." "그럼 전 이쪽이네요." 각각 자신의 카드를 손에 쥔 둘은 누가 뭐라고 할 새도 없이 순서를 진행해 든 카드 15장을 골 라냈다. 그리고 남은 카드를 서로에게 건네주어 나머지 반 15장을 골라내었고, 이 로서 각자 내 린 카드 32장, 든 카드 30장을 가지게 되었다. "먼저 시작하세요." 훼이드리온이 승자의 권한을 메이린느에게 요청했다. 승자의 권한이란, 게임에서 이겼을 경우 그 다음 게임에서 선공을 할 수 있는 권한을 말한다. 메이린느는 희미한 웃음을 머금은 채 든 카드를 한번 쑥 훑어보았다. 탁월한 눈 썰미를 가지고 있는 그녀의 머릿속에 카드 하나 하나의 의미와 모양 등등이 겹쳐지면서 전략을 구성해가기 시 작했다. 극히 짧은 시간동안 대충 전략을 완성한 메이린느는 먼저 선공을 펼치기 위해 카드를 두 장 뽑아들었다. "물의 전사와 땅의 전사 카드 페어 공격." 붉은 색과 푸른 색의 전사가 각각 검을 치켜세우고 기합을 넣는 듯한 모습이 그 려져 있는 두 장 의 카드가 테이블 위에 나란히 놓였다. 그와 동시에 훼이드리온의 머리 속에 두 전사가 검을 세 우고 자신을 향해 돌격해 들어오는 환영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이런 단순한 공격에서 나타나는 환영쯤은 익숙해졌기 때문에 아무런 흔들림 없이 두 장의 카드 를 뽑아내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내려놓았다. "두 장의 프리스트 카드로 방어." 훼이드리온의 입에서 그 말이 떨어지자, 곧 메이린느가 호흡을 깊게 삼켰다. 그녀 의 머리 속에 는 공격해 들어가던 전사 두 명이 갑자기 나타난 백색의 프리스트 두 명의 방어 에 막혀버리는 장면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서 훼이드리온의 반격이 시작됐다. "적기사 카드로 단독 공격." 붉은 갑옷을 갖춰 입은 당당한 체격의 기사가 순식간에 나타나 프리스트와 대치 중이던 전사들 을 일격에 해치운다. 붉은 피가 허공에 치솟아 오르고, 전사들의 몸은 서서히 기 울어져 결국 바 닥으로 무너진다. 이내 그들의 몸은 공기 속으로 가루가 되어 사라진다. '음… 확실히 대처법이 많이 늘었는데?' 메이린느는 자신의 물의 전사 카드와 땅의 전사 카드가 생명력을 잃고 무용지물 이 되어버리는 과정을 보면서도 아쉬움보다는 작은 행복을 느꼈다. 자신의 동생이 이주일 동안 많은 발전을 했 기 때문이다. 그 느낌은 어쩌면 제자의 수련 성과를 보며 기뻐하는 스승이 느끼 는 그것과 비슷 한 것일 지도 모른다. 메이린느는 게임을 진행시켰다. 카드의 위쪽 모서리를 유려하게 흐르던 그녀의 손가락이 이윽고 두 장의 카드 위에 봉착했다. 그녀는 가만히 미소를 지어 보이며 생각했다. '일단, 기선 제압이 중요할 테지.' 어느 게임, 아니 전투에서도 초반의 게선 제압이 중요하다는 건 거의 정석으로 통하는 전략이 다. 총명한 그녀가 그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녀는 그런 전략을 충실히 따라 두 장의 카드를 꺼내들었다. 먼저 첫 번째 카드의 방향을 돌려 훼이드리온에게 그림이 보이게 했다. "백기사 카드와…" 하얀 갑옷이 찬란히 빛나는 기사의 위용. 그것을 느낄 새도 없이 훼이드리온의 시선은 누님이 두 번째로 꺼내드는 카드로 향했다. "몬스터 카드 중, '와이번' 카드. 이로서 태크닉 완성. 백색의 기사가 창공을 질주 하는 바람의 날개를 가진다. 비술 '드래곤 나이트'." 공중을 마음대로 날아다니며 적을 유린하는 드래곤 나이트. 요즘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종류의 기사이지만, 그 옛날 마법왕국 라시엔트 건국 당시에는 수많은 전투에서 그 위력 을 발휘했던 전 설의 기사였다. 그리고 그 위력은, 당연히 마스터 카드 게임에서도 유감 없이 발 휘되는 것이다. '드, 드래곤 나이트!' 기사라면 누구나 한번쯤 꿈꾸어볼 창공의 기사, 드래곤 나이트. 주인에게 충실한 와이번을 타고 검광을 뿌려대는 바로 그 모습이 훼이드리온의 머리 속에 서서히 피어오르기 시 작했다. 프리스트의 보호를 받으며 적진을 향해 돌격하던 붉은 갑옷의 적기사가 갑자기 허공에서 찔러 들어오는 검에 밀려 바닥에 넘어진다. 그와 함께 공기를 찢어발기는 파격적인 파 공음과 함께 프 리스트들의 목이 몸과 분리되어 피를 뿌린다. 그러나 그것을 미처 확인할 새도 없이 또 다시 적 기사를 노리는 은빛 광휘! 적기사는 반격 한번 해보지 못하고 드래곤 나이트의 검에 단번에 몸 이 갈려버린다. 신음조차 토하지 못하며 적기사는 숨을 거두어 버리고 만다. '대, 대단해!' 실로, 정말 대단한 모습이었다. 같은 기사라도 적기사 백기사보다 공격력이 앞선 다. 그러나 그 차이도 와이번이라는 몬스터로 인해 소용이 없게 되어버린다. 드래곤 나이트가 된 백기사의 검 은 용서가 없이 적기사를 해치워 버린 것이다. 미처 방어할 새도 없는 빠른 공격. 역시 드래곤 나이트의 위력은 대단한 것이다. 프리스트 둘과 적기사가 드래곤 나이트에게 당해버린 후에도 드래곤 나이트의 생 명력의 손실은 거의 없었다. 흔히 방어나 반격을 하고 나면 반 이하로 저하되기 마련인데 말이 다. 훼이드리온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비술은 보통, 생명력과는 거의 무관하게 사용할 수 있다. 저 드래곤 나이트를 없 애려면, 그 이 상의 공격력을 가진 공격을 해야한단 말인가.' 그런 것이다. 마스터 카드 게임에서는 공격이나 방어를 할 때 이동에 생명력을 소진한다고 보면 이해가 쉽다. 그럼 본래 카드가 지니고 있는 생명력에서 적당량이 소진되는 것이 다. 그러나 비 술로서 공격 혹은 방어를 할 때에는 이동에 드는 생명력이 극히 줄어들게 된다. 그렇기에 비술 을 이룬 태크닉을 깨기 위해서는 비술의 생명력을 능가하는 공격력으로 공격해야 하는 것이다. '어쩌면 좋지? 잔잔한 공격들로는 저 드래곤 나이트에게 당하기만 할 뿐이다.' 아쉽게도 최고 레벨의 공격 카드가 아니면 단독이나 합동으로 드래곤 나이트를 없애기가 쉬운 게 아니다. '검성' 카드와 '대마도사' 카드, 혹은 검성 카드와 '글로리 프리스트' 카드의 조합 정도 되지 않으면, 드래곤 나이트에게 당하기 일쑤이다. 상대는 기동력과 공격력 으로 두루 갖춘 창공의 기사이다. 그 차이를 뛰어넘을 수 있는 공격을 해야하는 것이다. 훼이드리온은 카드를 빠르게 훑어보았지만, 아무리 이리저리 맞춰보아도 뚜렷한 공격 방도가 나 오지 않았다. 시간은 흐르고 소년 게이머의 마음은 계속 다급해져가기만 했다. 그 모습을 메이린느는 무척 즐거운 듯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필사적이구나, 이기기 위해서. 그래, 그게 바로 성장해 가는 과정이야.' 마스터 카드 게임. 이것은 훼이드리온에게 게임의 수준을 넘어서 한 단계 더 성 장해 가는 수단 으로서 자리를 잡은 것이다. 그것은 실로 하나의 전쟁이었으며, 하나의 시험이었 다. 게임 중 닥 쳐오는 시련들을 이겨내 가면서 몇 번의 전투로 쌓아질 경험을 한꺼번에 축적시 키는 것이다. 훼 이드리온은 지금 또 하나의 시련을 겪으면서, 또 한번 성장해갈 것이다. 그녀는 그것을 기대하 고 바라고 있었다. 골똘히 든 카드를 가지고 이리저리 생각하고 있던 훼이드리온은 시간 제한이 없 다는 사실에 잠 시 안도를 느끼며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 시선의 끝에는 자신의 몫이 60여 장 의 반, 내린 카 드가 차곡차곡 테이블 중앙쯤에 쌓아져있었다. '턴 한번에 한 장씩. 내린 카드에서 가져올 수 있다. 단 한 장만.' 그것은 기회일 수도 있고, 혹은 시간 끌기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과정이 마 스터 카드에서 의 운을 시험해 볼 수 있는 독특한 방식이기 때문에 결코 없어질 수 없는 과정으 로 자리잡은 것 이다. '그래, 운을 시험해보는 거야. 나의 운이 대체 어느 정도인지.' "휴우우……." 긴장을 풀기 위한 심호흡을 길게 하고, 잠시 누님을 쳐다보았다. 너무 많은 시간 을 끌었지만, 그녀는 아까 그 자세로 훼이드리온이 공격해오기 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밑쪽 테이블에 는 와이번 카드와 백기사 카드가 햇빛을 받으며 당당히 올려져있다. 훼이드리온은 내린 카드로 손을 가져갔다. 천천히 움직이는 그 손을 따라 메이린 느의 시선도 이 동되어 갔다. 마치 햇빛이 테이블에 부딪히는 순간의 침묵처럼 그 공간은 잠시 간의 정적에 휩 싸여 들어갔고, 그 정적은 소년의 손가락이 내린 카드에서 카드 한 장을 들어올 릴 때까지 계속 되었다. 삐비리리, 삐리리. 비록 지워지지 않았을 새 소리가 이제야 새삼스럽게 둘의 귀로 날아 들어왔다. 하지만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지는 않았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둘 다 긴장되기는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어떤 카드일까. 어떤 카드가 내 손가락에 이끌려 따라온 것일까.' 떨렸다. 그 동안 마스터 카드를 하면서 이렇게 떨린 적은 또 처음이었다. 생각해 보면, 그 동안 의 게임에서 비술을 막기 위해 비술로 반격을 해본 적은 처음인 것 같았다. 한 마디로 이런 상 황까지 온 게 처음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니 안 떨릴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소년의 손목이 점점 비틀어졌다. 그에 따라서 카드의 그림이 점점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누 님도 미소 띄운 얼굴에 긴장감이 약간 묻어나는 느낌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 다. '후우…….' 속으로 내뱉는 한숨과 함께, 카드를 뒤집었다. '!' 훼이드리온의 얼굴에 떠오른 격정의 표정. 메이린느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뭐가 나온 걸까? 드래곤 나이트를 능가하는 비술을 완성할 수 있는 카드? 아니 면 검성이나 대 마도사 카드라도?' 쉽게 구분할 수는 없었지만, 분명히 뭔가 대단한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러 나, 실상은 그 렇지 않았다. '뭐야, 이거. 이 카드가 왜 여기서 나온 거야!' 소년의 얼굴에 나타났던 격정적인 감정은 '기회다!'가 아니라. '제기랄!'이었다. 최악까지는 아 니더라도, 지금 상황에서는 전혀 필요 없는 카드가 자신의 손에 들려있던 것이다. 특수 카드로 분류되는 '협상' 카드. 훼이드리온의 손에 들려있는 바로 그 카드였 다. '최하 레벨에서만 먹혀 들어가는 카드가, 지금 나타나면 어쩌겠다는 거야. 에잇!' 운이 없었다. 하필 뽑혀도 이런 카드가 뽑히다니. 아까 카드를 고를 대도 별로 필 요 없을 거 같 아서 내려놓은 카드였는데, 이런 중요한 순간에 뽑힌 것이다. 훼이드리온은 일단 협상 카드를 든 카드 속에 포함시키고 속으로 한숨을 푹푹 쉬어댔다. 그리고 일단 되는 데까 지 드래곤 나이 트의 생명력을 소진시켜야한다는 생각에 기사급의 카드 두 개를 뽑으려했다. 그 순간, 소년의 눈에 띄는 예상치 못한 카드 하나. '그, 그렇지! 그런 수가 있구나!' 이건 정말 예상하지 못한 방법이었다. 밤늦게까지 마스터 카드를 잡고 태크닉 연 구를 하면서도 발견해내지 못했던 방법이, 지금 이 순간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 것이다. 협상 카 드의 출연으로 말이다. '…이게 바로 나의 운이구나!' 결론적으로 협상 카드가 뽑힌 것은 운이 나쁜 것이 아니라 운이 좋은 것이었다. 훼이드리온이 기쁜 마음에 협상 카드를 가벼운 몸짓으로 뽑아들어 테이블 위에 탁 내려놓았다. 아주 발랄하면 서도 즐거움에 가득 찬 움직임이었고, 만면에 웃음이 떠올라있었다. "특수 카드인 협상 카드. 협상을 하겠습니다." '뽑은 것이 이 카드였나?' 메이린느는 웃음이 났다. 고작 협상 카드로 뭘 하겠냐고 그녀는 생각한 것이다. 협상 카드는 특 수 카드임에도 불구하고 최하 카드 이외에는 효력이 발휘되지 않는, 그야 말로 쓸모 없는 카드 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웃음을 숨기지 않고 동생에게 물었 다. "그걸로 뭘 하려고 그러니? 알겠지만, 협상 카드는 드래곤 나이트에게는 영향력 이 없는걸." 그러나 그녀의 동생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 뭔가 믿고 있는 구석이 있다는 것이 다. "네, 저도 알아요. 물론 드래곤 나이트 자체에게는 통하지 않겠죠. 하지만." 딱 말을 끊은 훼이드리온은 자신의 카드에서 또 하나의 카드를 뽑아들었다. 소년 의 말투에서는 자신감이 철철 흘러 넘치고 있었다. "이, 이 카드는……?" 동생이 내려놓은 카드를 확인하며, 메이린느는 황당함에 빠져 허우적댈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방법을, 훼이드리온이 발견해낸 것이다. 그건 일종의 충격이 었다. "네. 제가 협상할 대상은 백기사가 아닌, 바로 와이번입니다. 그것도 테미 카드인 이 '포플러 향수' 카드로 말이죠." 승리의 미소 같은 의기양양한 미소가 훼이드리온의 입가에 걸쳐졌다. "와이번이 좋아하는 포플러 향기로 와이번을 유혹해 드래곤 나이트의 균형을 깨 뜨린다. 이로서 비술 드래곤 나이트, 무효. 방어 성공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적기사로 백기사를 공격. 백기사 소멸." "하아……." 마치 모든 기를 소모한 듯한 흐느적거리는 몸짓으로 메이린느가 허탈하게 웃어버 렸다. 정말… 이건 완벽하게 한 방 먹은 것이다. 설마 별거 아닌 포플러 향수 카드와 협상 카 드로 드래곤 나 이트를 완벽하게 깨버릴 줄이야… 상상도 못한 방법이었다. 그녀는 머리 속에서 주인을 버리고 포플러 향기를 따라 날아가 버린 와이번의 모 습이 영사됨을 느끼며 이마에 손을 짚었다. 황당할 정도로 간단하고 확실한 방법으로 비술을 무 효화시킨 동생 의 실력에 탄복해버려 칭찬을 해주고 싶을 지경이었다. "…정말 많이 늘었구나. 대단한 실력인걸?" "헤헤, 뭘요. 다 운인 걸요." "아니,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냐. 와이번이 포플러 향기를 좋아한다는 점에서 착안한 거니?" "네. 언젠가 스승님께 들은 적이 있어서요. 와이번은 포플러 향기에 매우 민감하 게 반응해서, 와이번이 있는 지역에서는 포플러의 씨를 말려야할 정도라고 말이죠. 어차피 이 것도 다 운에 운 이 거듭된 거 아니겠어요?" 메이린느는 동생의 말에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결코 그렇지 않아. 넌 정말 대단한 실력까지 성장한 거야. 다른 사람이면 그냥 넘어갔을 그런 카드들로 비술을 막아냈잖니. 마스터 카드에서는 운도 실력이란다. 너 그 운을 실 력으로 잘 소 화해낸 거야. 난 그런 네가 정말 자랑스럽구나." 진심이 담긴 그녀의 말에 훼이드리온은 한 순간 천국 위를 걷는 기분이 들었다가 곧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지금은 게임 중이었던 것이다. 언제까지 이렇게 시간을 끌고 있을 수는 없었다. "자, 누님! 어서 하시죠!" "응." '나도… 좀 더 분발해야겠는걸?' 놀랍게 발전해버린 동생의 실력에 메이린느는 자신을 채찍질했다. 언젠가는 자신 을 뛰어 넘어버 릴 것이 분명할 훼이드리온의 실력을 기대하면서. 그렇게 긴장되는 게임의 시간은 흐르고 또 흘렀다. 검술 수련 시간이 가까워옴에 따라 훼이드리 온은 점점 더 빨리 카드를 내기 시작했고, 메이린느도 빨리빨리 게임을 진행했다. 그러나 팽팽 한 긴장감은 조금도 풀리지 않았다. 그때, 들려오는 낯익은 목소리. "어이쿠. 이거 제가 잘못 들어온 건가요?" 해가 하늘의 중간을 지나 서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어서 발코니에서 들어오는 햇빛 은 극소량이었 지만, 주위 사물을 분간하기에는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메이린느는 고개를 돌 려 문 쪽을 바 라보았다. 푸른색의 로브를 두른 장년의 남성이 그곳에 서서 인사를 하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공주님." 그제야 훼이드리온도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고, 메이린느는 화사한 미소를 띄우 며 인사했다. "어서 오세요, 디바이어 경. 그는, 왕성 수석마법사 필로윈 셀 디바이어였다. ----------------------------------------------------------------- ----------------------- 안녕하십니까. 지렁이, 굼벵이, 거북이 작가의 대명사 팀올습니다. 드디어 5편을 가지고 독자님들을 찾아뵙게 됐군요. 시간이 얼마나 되었죠? 잘 기 억도 나지 않는 군요. 하아, 이래 가지고 불성실 작가로 낙인 찍히겠는데요.(벌써 찍혔어!) 흠흠, 어찌됐든 이번편은 좀 깁니다. 길어봤자 100줄 조금 더 차이가 나는 거 같 은데 뭐 그 정 도도 차이는 차이입니다. 전에 아틀란티스 연재 할 때는 200줄 넘는 게 고작이었 는데 요즘은 거 의 400줄이 넘고 있으니 말입니다.(비록 5편 밖에 안 올렸지만...) 자자, 이런 작가의 수고를 어여삐 여기셔서, 추천이나 감상 올려주실 분 안계십니 까? 한번 투정 도 부려볼까 생각하고 있는데.(히죽) 아아, 비평도 괜찮습니다. 그것들이 전부 작 가의 경험치를 올려주는 점수들이니까요. 6월 5일이 시험이었습니다. 연재가 늦은 첫번째 이유지요. 그리고 다음 주까지가 거의 대부분의 수행평가 마감일이 모여 있는 주입니다. 정신없이 바쁜 나날이 되겠죠. 이래서 한 국의 학생은 정말로 힘든 겁니다. 한국의 학생 여러분! 모두 파이팅! 아잣! 우리에겐 내일이 있다! 있어요! 6월 6일,현충일 날, 여자 친구를 만나고 왔습니다.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지친 몸 에 활기를 불 어넣은 날이라고 할까요. 그 말로만 듣던 원거리 교제이기에 오고가는 게 힘들기 는 하지만, 역 시 기분은 100% 만족감입니다. 이대로 빠른 연재라는 과제까지 해치워야할 텐데. 한편씩 얘기를 몰아넣는다고 분발하고 있는 작가를 위해, 독자님들. 응원 부탁합 니다! 자자, 그럼 이만! 꾸벅 어둠의 기사 DARK KNIGHT TEAM... 번 호 : 8569 / 10423 등록일 : 2000년 06월 16일 00:11 등록자 : 암음기사 조 회 : 272 건 제 목 : [카드 게임 판타지]『 카드 마스터(Card Master) 』#006 카드 게임 판타지(Card Game Fantasy) 카드 마스터(Card Master) 6. 사실 필로윈이 이곳에 도착한 것은 한참 전이었다. 문밖에서 예의 바르게 노크를 하여 들어가려 는 의사를 밝혔지만, 들려야할 허락의 음성이 전혀 들려오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실례를 무릅 쓰고 손잡이를 돌려버렸다. 그리고 문을 열자마자, 지금까지는 느껴보지 못한 격한 투쟁의 장소를 목격해버 리고 말았다. 그 것도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곳, 마법왕국 라시엔트의 하나뿐인 공주의 처 소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 듯한 긴장감을 뿜어내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자, 뭐 라고 말을 꺼내 기가 어려웠다. 우스갯소리로 말 한번 잘못해서 이 분위기를 망쳐버린다면 자신 의 직책이 상당 히 위험할 것 같다는 생각에, 그는 가만히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역시 방문객으로서 환영을 받지 못한 점에 씁쓸함을 느낀 그는 드디어 입 을 열어 자신을 알렸다. "어이쿠. 이거 제가 잘못 들어온 건가요?" 그제서야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는 공주에게 필로윈은 신하의 예를 올렸다. 정중하게 두 손 을 배 부분에 대고 허리를 구부렸다. "안녕하십니까, 공주님." 필로윈은 마법사였다. 마법은 신에 도전하는 성질을 가진 것이기 때문에 신의 이 름을 담은 인사 는 마법사에게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렇기에 '마스트의 눈은 축복의 빛, 위넨스의 손길은 정화 의 바람.' 같은 인사는 입에 담지 않는다. "어서 오세요, 디바이어 경." 메이린느는 그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그녀 앞에 앉아있던 태자 훼이드리온도 곧 고개를 들어 그에게 인사를 했다. "두 분께서 무엇을 그렇게 열심히 하시는 거죠?" 대충 짐작은 하고 왔다. 그러나 모르는 척 그는 그렇게 물었고, 메이린느와 훼이 드리온은 손에 들고 있던 그것들을 테이블 위에 뒤집어서 놓고 살짝 웃었다. 역시 남매다 보니, 웃는 모습이 상당히 비슷함을 느낄 수 있다. 필로윈은 테이블로 다가갔다. "흠, 마스터 카드인가요?" "어, 아시나요?" 태자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오름을 확인하고 필로윈은 약간 당황해버렸다. 더듬거 리며 그가 훼이 드리온에게 물었다. "제가 마스터 카드를 알고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십니까?" "아, 아니, 그게 아니고요… 그게 그러니까… 으음……." 순식간에 혼돈의 도가니에 빠져버려 변명거리에 대한 심각한 고찰을 수행하기 시 작하는 태자를 보다가, 필로윈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바이마크에게도 지어 보인 적이 있었던, 예의 그 장난 기 섞인 미소. "괜찮습니다. 그렇게 애써 변명하지 않으려고 하셔도, 왜 그런 의문을 가지시는지 잘 알고 있으 니까요. 앉아도 되겠습니까, 공주님?" 한 의자의 등받이를 살짝 잡으며 필로윈이 메이린느를 바라보자, 그녀는 생긋 화 사한 웃음을 띄 웠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든지요, 디바이어 경." "선처, 감사 드립니다." 정중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는 그에게서, 오랜 세월동안 왕성에서 지내오며 굳어버린 예법 의 흔적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자신보다 높은 신분에게 그에 따른 예를 차렸고, 비록 낮은 신 분이라고 하더라도 결코 무례하게 굴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보면 마법왕국 라시 엔트의 제1기사 바이마크와 오랜 우정을 나는 친구라는 사실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조용히 의자를 끌어내 테이블의 한 자리를 차지한 그가, 혼란함에서 깨어나 자신 을 응시하고 있 는 태자에게 고개를 돌렸다. 곧 그의 입이 열리며 '설명'이 줄줄 흘러나오기 시작 했다. "마스터 카드는 원래 마법사들의 게임입니다. 그것이 일반인들에게 전파되면서 전 대륙적인 게 임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죠. 마스터 카드의 창시자가 누구인지, 혹시 알고 계신가 요?" "네, 건국왕이시며 대마도사이신 페인트 라시엔트님이시죠." "그렇습니다. 그렇기에 마스터 카드가 저희 마법사들의 게임이라고 말하는 것입 니다. 실제로 마 스터 카드가 마법사들의 손을 거치면서 더욱 다듬어지고 발전해왔다는 사실은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공주님?" 필로윈의 시선이 그의 설명을 경청하고 있던 메이린느에게로 옮겨졌고, 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는 사실입니다. 관련 서적에 그런 문장이 명시되어 있는 것을 본 기억이 있네요." 그리고 연속하여 떠오른 한 가지 사실을 덧붙였다. "저자명이… '마법왕국 라시엔트 왕성 수석 마법사 필로윈 셀 디바이어'였던 것 같은데요." "흐음……." '당했군.'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약한 신음을 흘리는 필로윈을 보며 메이린느가 조 금은 짓궂은 듯이 보이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훼이드리온을 잠깐이라도 놀린 대가를 고스란 히 돌려준 그녀. 어쩌면… 그녀는 상당한 강적일지도. 태자와 공주가 장난기 섞인 눈빛을 서로 주고받을 무렵, "몇 년 전에 마스터 카 드에 대한 책을 썼던 기억이 나는군."이라며 중얼거리던 필로윈이 헛기침으로 분위기 환기를 시 도했다. "흠. 어쨌든 그런 이유로 전 어렸을 때부터 마스터 카드를 대해왔기 때문에, 마스 터 카드에 대 해서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와아, 그럼 게임도 하실 수 있겠네요?" 훼이드리온의 감탄 섞인 어조에 필로윈은 꾸밈없이 웃었다. "네, 물론입니다. 사실, 그것 때문에 오늘 여기에 온 것입니다." "네?" "제 친우인, 바이마크에게서 들었습니다. 태자 저하 자랑이 이만저만이 아니더군 요. 검술 실력 이 부쩍부쩍 늘어나서, 정말 뿌듯하다고 말입니다." "헤에… 그래요?" 태자는 아직 어린 티를 벗지 못한 증거로, 쑥스러움을 과하게 느낀 탓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 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역시 메이린느는 그 모습을 즐기듯 동생을 사랑스럽다는 눈길로 응시하 며 즐겁게 웃고 있었고 말이다. 괜한 카드를 만지작만지작 대면서 부끄러움을 영 감추지 못하는 훼이드리온에게 필로윈은 빙그 레 웃어주었다. "그리고 또 요즘 굉장히 활기차고 생기 있어 지셨다고 하더군요. 그 원인이 바로 이 마스터 카 드라고 들었습니다만, 맞는지요?" "음… 네."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하는 훼이드리온. "하하, 역시 그렇군요. 저도 그것 때문에 흥미가 생겨 이곳으로 오게 됐습니다. 혹시… 저와 한 게임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어, 정말요?" "그럼, 정말이지요. 마스터 카드를 하지 못한 시간이… 벌써 2년 정도가 되어서 예전 실력이 나 올지 모르지만, 훗, 혹시 모르는 것 아니겠습니까. 2주일 경력의 태자 저하와 저 의 실력은 거의 동격 아닐까요?" "으으……." 왠지 모르게 밀리는 듯한 느낌이 드는 훼이드리온. 그 이유는 역시 마스터 카드 를 다뤄온 경력 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임이 분명하다. 정확한 나이는 알지 못하지만, 필로윈의 나이는 장년을 바라보는 나이. 하지만 소년은 이제야 성인식을 치를 나이가 되었을 뿐이다. 거기 다 경력은 겨 우 2주일. 벌써 몇 십 배의 차이를 보이는 경력에 훼이드리온은 질려버릴 것 같 았다. '그렇다고 물러서지는 않는다. 2주일동안 누님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고, 또한 강 해졌다고 인정 까지 받았다. 이제… 누님이 아닌 다른 상대를 찾아볼 시기가 온 거야.' 결심은 확고했고, 그에 따른 행동도 신속했다. "네, 좋아요." "감사합니다, 태자 저하." 흔쾌히 수락하는 태자에게 필로윈은 감사히 미소를 띄웠고, 그에 따라 훼이드리 온의 얼굴은 긴 장으로 굳어져갔다. 뭔가… 웃음의 의미를 독특하게 해석해버린 것은 아닐까. "그럼 하시던 게임 마저 끝내십시오. 기다리지요."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관중의 태도의 정석을 만들어 가는 필로윈의 행동이 이루지기도 전 에 메이린느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카드를 그의 앞에 놓으며 입을 열었다. "아, 아니에요, 디바이어 경. 훼이와 게임 하세요." "그래도 되겠습니까? 아직 게임이 끝나지 않았는데, 그냥 제가 기다려도 괜찮습 니다만." 메이린느는 좋아하는 기색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그의 사양에 헛웃음이 나올 뻔했 지만 꾹 참고 대답했다. 부드러운 미소가 자연스레 입가에 스며들었다. "왕성 수석마법사라는 자리가 그렇게 한가하지는 않은 걸로 알고 있어요. 양보할 때 즐기시는 게 좋을 텐 데요, 디바이어 경." 싱긋. 또 한번의 웃음으로 마무리짓는 그녀의 말에 필로윈은 "하하."하고 덧없이 웃어버렸다. 속마음을 여지없이 들켜버린 것이다. 더 이상 사양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다는 생각에 그는 이 내 메이린느의 말을 받아들였다. "그럼, 더 이상 사양하지 않고." "그러세요. 전 관중의 입장에서 게임을 관람하도록 하죠." 필로윈의 입에 맺힌, 더 이상 숨기지 않는 흐뭇해하는 미소를 바라보며 그녀는 속으로 키득키득 웃을 수밖에 없었다. '나이만 드셨지… 속은 훼이와 비슷해.' 마치 한 명의 나이도 적은 동생과 한 명의 나이만 많은 동생과 놀고 있는 듯한 기분에, 그녀는 스스로 우스울 따름이었다. "그럼, 태자 저하. 제가 섞어도 되겠습니까?" 훼이드리온의 카드까지 모두 모아 두꺼운 카드 뭉치를 두 손으로 잡으며 필로윈 이 물었고, 태자 는 고개를 끄덕이며 간단하게 "네."라고 대답했다. 일단 허락이 나자 그는 왕년에 날렸던(?) 실 력을 십분 발휘하여 빠른 속도로 카드를 섞어나갔다. '호오… 빠르다.' 훼이드리온의 감상. 절대 자신은 흉내내지 못할 고수의 움직임에 입이 절로 벌어 짐을 느꼈다. 누님도 저 정도로 빠르지는 않았다. 일단 여자이기에 손이 작은 탓도 있겠지만, 그래도 엄청난 차이인 것이다. "게임 진행 방식은… 다 아시겠죠?" 그 말에 훼이드리온은 발끈해버려 퉁명스레 툭 대답했다. "피이. 경력 2주일이라서 미안해요." "아, 아니 그게 아니오라… 하아 참, 죄송합니다. 이거 오늘 사과할 일이 너무 많 군요." 난처한 듯이 하하하, 어색하게 웃어 보이는 필로윈의 모습 때문에 훼이드리온은 그냥 화를 풀어 버렸다. 지금은 재밌게 게임을 즐길 시간이고, 이 자리에서 악한 감정은 절대 어 울리지 않았다. "그럼 이것 반을… 여기 있습니다." "고마워요." 필로윈이 내미는 카드 뭉치의 반을 받아드는 훼이드리온. 언제 카드의 수를 센 것인지 소년의 손에는 정확히 62장의 카드가 들려있었다. 감탄사를 내뱉으며 훼이드리온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 다. "와아, 언제 개수를 새어보신 거예요?" 태자의 물음에 필로윈은 빙그레 웃음 지으며 답했다. "마법을 쓰면 간단합니다." "마법으로 그런 것도 되요?" "물론이지요. 마법은 예상외로 쓰임이 다양하기 때문에, 마법사의 의지만 있으면 어떠한 일도 가능하답니다. 다만 마법사의 자질에서 제한을 받겠지만 말입니다." "호오? 그런 거예요?" "네." 놀랍다는 뜻을 얼굴 전체에 띄워 보이는 태자에게 그는 아까의 미소를 유지하며 간단히 답했다. 그런 그의 얼굴에 약간의 씁쓸함이 스며 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마법왕국의 태자가… 어찌 이리도 간단한 마법의 원리를 모른단 말인가.' 필로윈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마법왕국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내세우는 나라의 태자가 어떻게 마법에 대해 이다지도 문외한일 수 있단 말인가.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아도 지극 히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그것은, 왕성 수석마법사의 자리에 있으면서 도저히 참을 수 없고 이해할 수 없 는 일들 중 하나였다. 어쩌면 이런 사실이… 그를 더욱 부추기는 것일지도. "그럼… 준비 되셨습니까?" 그런 걱정을 하는 와중에도 그는 부지런히 손을 놀려 훼이드리온과 게임을 할 모 든 준비를 끝마 쳤다. "…네." 허겁지겁 카드를 손에 드는 태자의 대답. 필로윈은 방금 전의 수심 섞인 미소를 싹 지우고 슬쩍 고개를 돌려 그런 태자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먼저 시작하시지요." 선공을 양보하는 것은 초보자에 대한 배려일 것이다. 훼이드리온도 거부할 뜻이 없었기에, 준비 하고 있던 카드를 뽑아 테이블 위에 펼쳤다. "적기사 카드 페어 공격." 한 차례 자신의 카드를 훑어보던 필로윈은 여유 있게 태자의 공격에 응수했다. "프리스트 카드 페어 방어." 점점 게임에 열중해 가는 태자와 왕성 수석마법사. 그리고 그들의 옆에서 조용히 관중의 역할을 이행하고 있는 공주. 가끔씩 약한 비명과 감탄 섞인 말들이 오고 가면서, 그렇게 오전 시간은 즐겁게 흘러가고 있었다.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까. 훼이드리온의 카드와 필로윈의 카드가 거의 절반 이하 로 뚝 떨어졌을 무렵, 수석마법사는 자신이 들고 있는 마스터 카드에서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 다. 아니, 이질 감을 느꼈다고 해야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요즘 만들어지는 재질이 아니잖아?' 시간이 지날수록 고개를 쳐드는 의문이었다. 손에서 느껴지는 매끄러운 감촉. 얇 은 코팅이 되어 있는 것도 아닌데 카드의 겉면에서는 반짝이는 빛이 있다. 거기다 모서리까지 완 벽하게 처리하 여 반영구적인 환경을 최대한으로 살린 구조. 필시 단순한 마법사가 만든 카드가 아님이 분명하 게 드러나는 사실이었던 것이다. 이 즈음에서, 필로윈은 머리 속을 헝클어지게 만 드는 또 하나 의 고민거리가 생김을 직감했다. '대체 이런 카드를 어디에서 구했단 말인가.' 분명히 요즘 마스터 카드를 제작할 때 쓰이는 재료는 제법 두꺼운 종이인 '플라 트닉'이다. 종이 임에도 불구하고 단단하고 방열성, 뒤틀림 방지성 등등 여러 면에서 많은 효과를 보이고 있는 재료라, 많은 마법사들이 애용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 플라트닉의 겉에 무늬를 그리고 그림이 나 기타 설명들을 기입하고 해당하는 환영마법을 걸고, 마지막으로 마법을 사용 하여 가공을 끝 내면, 한 장의 마스터 카드가 완성되는 것이다. 그러나, 태자의 소유인 이 카드는 전혀 보지 못한 재료로 만들어져있었다. 전문가 는 아니었지 만, 마스터 카드를 만들어본 경험이 있기에 질 좋은 플라트닉을 구별해낼 만한 능력은 있었다. 그 능력으로 판단한 결과, 자신이 만든 카드는 거의 1급 수준의 플라트닉으로 만 들어졌는데, 이 재료는 1급 플라트닉을 훨씬 능가하는 재질을 지니고 있었다. '알 수가 없군.' 결국 그는 본인에게 묻기로 작정했다. "하나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태자 저하?" "네, 얼마든지요. 뭐죠?" 필로윈은 잠시 카드를 접는 게 좋다고 생각하고, 카드를 뒤집어 테이블 위에 올 려놓았다. 그 행 동에 훼이드리온도 마찬가지로 반응하여 자신의 앞에 카드 뭉치를 내려놓았다. "실례가 될 지도 모르나… 이 카드들, 어디서 구하셨는지요?" 정중한 어조로 물어오는 필로윈의 물음에 훼이드리온은 겉으로 표나게 당황해버 리고 말았다. "음… 그게 그러니까 말이죠……" 다행히도 필요할 때 잘 돌아가 주는 머리를 지닌 소년은 감정을 숨기는 데 익숙 하지 못해 혼자 서 허우적대다가는 사태 수습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 하에, 누님에게 구원요 청을 보냈다. 메이린느는 그 구원요청을 거부하지 않고 지그시 필로윈을 바라보았다. "그건 왜 물으시는 거죠?" "아, 네. 별 거 아닙니다. 그냥 이 카드에 궁금한 점이 있어서 말입니다." 즉각 대답하는 필로윈의 말을 듣고 메이린느는 넌지시 동생에게 눈길을 보냈다. 그리고 필로윈 을 향해 말했다. "아무에게도 말씀하지 않으신다면, 말씀드릴 수 있어요." 그 말에 필로윈은 아까보다도 더 즉각적으로 반응하여, 호탕하게 자신의 가슴을 탕탕 두드렸다. 두드릴 때마다 나는 소리로 보아, 그의 체구가 상당히 왜소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물론입니다. 절 믿으십시오. 마스터 카드 게임 중에 한 약속을 설마 저버리겠습 니까." 그의 말에 난처함 가운데에서도 훼이드리온은 의문을 떠올렸다. 자신을 믿으라는 말속에, 왜 마 스터 카드 게임이 언급되는 것일까. 그러나 곡 현재 상황을 직시하고 '나중에 누 님께 여쭤봐야 겠다.'고 생각하는 소년이었다. "훼이야, 말씀드리렴." 누님이 자신의 애칭을 부르는 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난 훼이드리온은 잠시 내용 정리를 하다가 입을 열었다. 새로운 사실에 대한 탐구를 즐기는 마법사의 본능에 충실한 필로윈 은 태자의 말에 더욱 귀를 세워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는 집중을 보여주었다. "그러니까 이 카드는 제가 지난 번 왕성 비밀 창고에 갔을 때, 그곳에서 찾아낸 거예요. 할 일 이 없어서 지루한 참에 우연히 비밀 창고가 생각나서 경비병들의 허락을 구해 들 어갔다가 어느 문을 열었는데, 그 안에 이게 있더라구요." '비밀 창고? 어느 문?' 필로윈의 두뇌는 훼이드리온의 말속에서 필요한 사항들만 즉시 골라내어 의문형 을 바꿔버렸다. 자연스레 떠오르는 의문. '어느 문… 이라는 게 혹시 그 문인가?' 도저히 가만있을 수가 없어서, 재차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생긴 문이었죠? 아, 아니. 어느 쪽에 있는 문이었습니까?" 비밀 창고 안의 문들은 모두 똑같이 생겼다는 것을 깨달은 그가 중간에 질문을 바꿨고, 훼이드 리온은 그 날을 회상하듯 눈동자를 굴리며 대답했다. "맨 오른쪽 문이었을 거예요. 아무 것도 적혀있지 않았던 문." '아무 것도 적혀있지 않은 문!' 필로윈의 눈이 보통 때보다 두 배로 커져버리자 훼이드리온과 메이린느가 동시에 움찔 놀래버렸 다. 안 그래도 보통 사람들보다는 조금 큰 눈을 가진 그가 눈을 더 크게 만들어 버리자, 눈알이 쑥 빠져나올 듯한 형상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리고 그 모습이 또 이상하게 웃음 을 자아내는 우 스꽝스런 모습이라, 둘은 순간적으로 웃어야할지 놀래야할지 혼란을 느껴버렸다. 그러는 와중에도 필로윈의 눈은 줄어들지 않았다. '이럴 수가. 그 문으로 들어갔단 말인가! 대마도사 페인트 라시엔트 님의 강력한 봉인이 걸려있 는 그 문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문은 마법이라는 오묘한 진리에 일생을 바쳐온 자신 조차도 열지 못 한, 그만큼이나 강력한 봉인이 걸려있는 문이었다. 어떠한 충격이 있어도, 어떠한 해제마법을 사용하더라도 꿈쩍도 하지 않던 문이 마법에 '마' 자도 모르는 저런 어린 소년의 손으로 열려버 리다니! 마법사 길드에 연락한다면, 당장에 "연구 대상이다!"라며 최고 원로들이 달려올 사건이 었다. "그, 그 안에서 발견하셨다는 건가요?" "네. 책상 위에 올려져있던 걸요?" 이 태자는 그 문의 진실을 모르는 듯하다. 그렇다면 그곳이 어떤 방인지도 당연 히 모를 것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진위를 알고 있는 자도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비 밀 창고'라는 이름을 심심해서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 이상. "아, 네. 감사합니다. 참고가 됐습니다." "도움이 된 건가요? 잘됐네요." 좋은 일을 했다고 생각했는지 훼이드리온은 흐뭇하게 웃었다. 필로윈도 마주 웃 었지만, 그 웃음 의 속뜻이 전혀 달랐다. 물론 그 의미는, 오직 그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자, 그럼 계속 할까요? 각오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더 이상 봐드리지 않을 테니 까요." "하아, 여태 봐주셨다는 건가요? 그럼 저도 최선을 다하도록 하죠!" 질 수 없다는 의지가 분명히 드러나는 훼이드리온. 둘은 또 다시 한 명의 관중을 두고 치열한 게임의 세계에 빠져 들어갔다. 아니, 게임에 완전히 빠진 것은 태자뿐이었다. 장 년의 수석마법 사는 속으로는 다른 생각에 잠겨있었기에. '봉인이 걸려있는 방.' 훼이드리온이 오랜만에 비술로 그를 공격해왔다. 머리 속에 펼쳐지는 영상을 무 시하며, 그는 결 심을 굳혔다. '그곳은 대마도사의 흔적이 모두 모여있는 곳.' ----------------------------------------------------------------- ------------------------ 안녕하십니까. 팀입니다. 웬일로 제가 이렇게 일찍 나타났습니다. 5일...이라면 결코 빠른 시간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저번보다는 향상된 빠르기 아닙 니까? 전 그 사실에 매우 기쁜 마음입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이번 편은 분량이 조금 작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점, 양해해주시길. 이번엔 고마운 분들이 많으십니다. 차례대로 말씀드리죠. PHM526님 응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님에 응원으로 이번 편을 빨릴 끝낼 수 있었습니다. DEADWI님 나우누리에 이어 판츠에까지 추천을 해주시다니... 정말 감사합니 다. 아, 그런데 님께서 부탁하신 카드의 종류...는 조금 어려울 듯도 하군 요. 사실 마스터 카드...라는 설정이 제가 감당하기에도 벅찰 정도로 방대 하기에 대충 정해놓은 카드 만도 하더라도 숫자를 세기가 심히 곤란하거든 요. 거기다 마스터 카드는 계속 만들어지고 있는데... 전 정말 죽을 겁니 다(---) 그래도 일단 컴퓨터로 옮겨 적고 있으니 언젠가는 올릴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음... 그때까지 과연 기다려주실지 의문이군요. A850704님 아틀란티스를 추천해주셨더군요. 감사합니다. 비록 연중 중이지만, 리메를 하려는 의지를 더욱 북돋아 주셨습니다. 위에분들 다시 한번 정말 감사드립니다. 꾸벅(___) 이번 편을 쓰다가, 어쩌면 이 소설에서 가장 사악한 사람이 필로윈일 수도 있겠 다는 생각이 들 었습니다. 과연 그의 친우인 바이마크가 반란에 동참할 것인가. 많은 기대 부탁드 립니다. 감상 추천 비평 등은 계속 환영입니다. 다음 편은 좀 더 빨리 들고 나타나도록 하겠습니다. 공평한 밤의 안식이 그대들의 삶에 깃들기를... 어둠의 기사 DARK KNIGHT TEAM... 번 호 : 8665 / 10423 등록일 : 2000년 06월 18일 20:08 등록자 : 암음기사 조 회 : 265 건 제 목 : [카드 게임 판타지]『 카드 마스터(Card Master) 』#007 카드 게임 판타지(Card Game Fantasy) 카드 마스터(Card Master) 7. 그는 그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주 손쉬운 일을 의뢰 받은 그는, 입가에 떠오르는 기분 좋은 미소를 도저히 지 울 수가 없었 다. 의뢰 받은 일의 난이도에 비하여 대금은 가히 상상을 불허할 정도의 높은 가 격이었기 때문 이다. 보통 5번 정도의 일을 의뢰 받고 성공해야만 받을 수 있는 만큼의 대금을 이 한번에 벌 수 있다니. 이건 그야말로 '한탕'이었다. 그는 이 일을 시작하고 나서부터 언제나 한탕을 꿈꿔왔다. 동료들 중에는 일을 하다가 우연히 엄청난 보물을 발견해 그것을 팔아 한탕을 한 녀석도 있었고, 이번 일과 같이 갑 부들의 의뢰를 받아 일을 처리해 한탕을 하는 녀석들도 있었다. 자신은 언제나 그런 일들을 공 경해오고 꿈꿔왔 는데, 오늘 드디어 한탕을 할 기회가 자신에게도 온 것이다. '바람과 순환의 신 위넨스여. 당신께 처음으로 감사를 드려보는군요.' 운은, 돌고 도는 바람처럼 한 자리에 있지 못하고 순환하는 것. '이 기회를 제대 로 잡아서 꼭 한탕을 이루고 말겠다!'라는 의욕에 불타올라, 그의 움직임이 보통보다 두 배 정 도는 민첩하고 교묘해 보인다. 사실 의뢰인이 지목한 장소는 절대 쉬운 장소가 아니었다. 처음에는 "차라리 드 래곤 레어로 들 어가지, 내가 미쳤다고 그곳에 들어가겠소?"라고 딱 잘라 거절을 해버렸다. 그러 나 의뢰인은 그 의 실력을 익히 들었는지 포기하지 않았고, 이내 상상을 불허하는 대금을 제시하 며, 또한 그곳 까지 가는 가장 안전한 경로까지 상세히 가르쳐주며 일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의뢰인이 내놓은 정말 자세하게 그려져 있는 지도를 내려다보며 약간은 황 당한 표정을 지 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동시에 떠오른 의문. '혹시 날 잡으려고 일부러 함정에 빠뜨린 것이 아닐까?' 하지만 곧 말도 안 되는 그 의문을 머리 속에서 지워버렸다. 아무리 그가 이 바 닥에서 잘 나가 는 인물이라고 하더라도 그를 잡기 위해 이런 수고를 할 필요는 없었다. 혹여 그 렇다고 해도, 능수 능란하게 빠져나올 수 있는 실력을, 그는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는 흔쾌히 이번 의뢰를 받아드렸다. 엄청난 대금 또한 그의 결정에 한몫 했음은 말할 필요도 없 다. '모르긴 몰라도. 이번 일을 성공한다면 나의 지지도가 엄청 올라가겠지? 으하핫!'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건만, 그의 마음은 일을 성공한 사람의 그것보다 더욱 들 떠있었다. 그의 몸이 본격적으로 어둠 속에 녹아 들어가기 시작했다. 검은 옷으로 무장한 그가 최대한 호 흡을 낮추며 바닥에 기듯이 최대한 몸을 구부린 채로 건물들이 만들어낸 그림자 밑을 재빨리 움 직였지만 그 누구도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없었다. 시간은 늦은 새벽. 마스트의 눈이 어두운 밤하늘을 비추어 푸른색을 부르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 이었다. 마스트가 쏘아보낸 눈빛의 가루라고 전해지는 별들이 검은 흑판에 점점 이 박혀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있는 그 아래, 그는 드디어 1차 관문이라 할 수 있는 곳에 도착했 다. ……. 무음. 무동. 소리조차 나지 않고, 그 어떤 것도 움직이지 않을 듯한 공간에서 그 의 검은 모습이 드러났다. '이곳이지? 자, 그럼 시작해볼까?' 그의 품속에서 검은 머리끈이 하나 튀어나왔다. 지체 없이 머리에 질끈 동여맨 그는 놀라운 속 도로 1차 관문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1차 관문, 그것은 라시엔트 왕성의 외곽 성벽이었던 것 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가 무사히 성벽을 기어오를 수 있는 것일까. 그 해답은 바로 그 가 품속에서 꺼 내 머리에 묶은 검은 머리끈에 있다. 머리끈은 의뢰인이 전해준 것이었다. "그려진 경로대로 가면 마법이 걸린 곳을 두 번 만날 것이 오. 바로 이곳과 이곳. 이곳에 가까이가면 잊어버리지 말고 이 머리끈을 착용하시 오. 만약 내 말을 잊어버리거나 무시하고 간다면 아침해를 다시는 보지 못할 터이니, 잘 새겨 듣길 바라 오."라는 의미 있는 충고와 함께 말이다. 그렇다. 성벽은 대대적으로 마법이 걸려있는, 일종의 트랩이었다. 정확한 마법의 정체를 말하자 면 전기가 발산되는 전격마법. 미확인된 어떤 물체가 성벽에 붙으면 즉시 전격을 발산해 그 미 확인 물체를 단번에 태워버린다. 일말의 용서도 없이. 뭐, 마법에 용서를 구한다 는 것 자체가 모순일 것이다. 이런 위력을 가진 성벽을 기어오르면서도 그가 까맣게 타지 않을 수 없는 이유. 그것이 바로 머 리끈의 능력이었다. 머리끈에도 마법이 걸려있는데, 그 마법은 성벽에 걸려있는 전격마법을 피 할 수 있는 능력을 그에게 부여하는 것이었다. 부연설명을 곁들이자면, 머리끈에 걸려있는 마법 은 머리끈을 매는 순간부터 효력을 발휘하여 성벽과 그를 완벽하게 동화시켜버리 는 것이다. 그 렇게 되면 아무리 전격마법이 걸려있다고 하더라도 성벽과 동화되어버린 그를 찾 지 못하고 동시 에 마법도 무용지물이 된다. 머리끈은 그런 효과를 보이는 것이다. '신통하다니까. 나도 마법이나 배워볼까.' 마법을 배우면 분명히 일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그에 따라 벌어들이는 돈도 많아질 것 이고. 헤벌쭉 벌어지려는 입을 간신히 수습한 후 위를 올려다보자, 곧 성벽의 끝 이 보이기 시작 했다. 타다다닥. 필수 메티인 '흡착 장갑'과 '흡착 장화'로 단숨에 성벽을 기어올라온 그는 성벽 위에 소리 없이 착지했다. 그리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달빛과 별빛이 만들어낸 성벽 위의 그늘 속으로 몸을 숨겼다. 마침 지나가던 경비병 하나가 머리를 긁적이며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하 품을 늘어지게 한번하고는 그 자리를 떠날 뿐이었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두 눈으로 성벽 위를 주시하고 있던 그는 '지금이다!'라고 직 감적으로 느껴 지는 그 순간, 지체 없이 성 안쪽으로 몸을 날렸다. 달빛으로 하얗게 변색된 성벽 위를 빠르게 이동하는 하나의 그림자. 그러나 성벽 위를 지키고 있던 그 어떤 경비병도 그를 발견하지 못했 고, 그렇기에 그를 막을 존재는 아무 것도 없었다. 공기를 가르는 소리조차 사라 져버린 그의 움 직임이 끝난 곳은 성 안쪽의 성벽이었다. '훗!' 간단하게 내부로 잠입한 그. 일류라고 떠벌리고 다녀도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움직임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기에 이 장면을 보는 자가 있다면. 흡착 장갑과 흡착 장화를 사용하여 거미조차 움츠리게 만드는 움직임으로 바닥에 발을 디딘 그 는 주위를 몇 번 둘러보고 나무숲으로 몸을 움직였다. 나무들이 만들어낸 어두운 그늘은, 그에 게 아주 잘 어울렸으며 좋은 휴식처가 되어주었다. 그곳에서 잠시 숨을 돌린 그 는 다음 장소를 향하여 어둠 속을 질주해나갔다. 마찬가지로, 그 누구도 알아채지 못할 은신술을 사용하여. '여기군.' 큰 저택의 아래쪽에 만들어진 정원의 수풀에서 호흡을 멈춘 채 은신하고 있던 그 는 어둠 속에서 눈만 위로 치켜 떠 목표가 있을 방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검기만 한 그곳에 하 얀 눈동자만이 빛을 내며 공중에 떠있는 듯한 모습은, 어찌 기괴해 보이기도 했다. '크기도 하군. 이런 곳을 태자 혼자 사용한단 말이야? 돈이 썩어나는가 보군, 그 래.' 그는 혀를 끌끌 찼다. 지금 이 왕성 밖의 국민들은 어떤 고통을 당하는지 관심도 없다는 태도처 럼 보이는 큰 저택. 순간 한 나라의 지배계층이라는 족속들에 대하여 극심한 분 노가 타올랐다. 하지만 일단은 일을 모두 끝마친 후 투덜댈 것을 투덜대자는 생각에, 말라버린 입술을 혀로 살 짝 핥아 촉촉하게 만들어준 후 슬쩍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그 수풀에 더 이상 두 개의 눈동자 는 찾아볼 수 없었다. 바람과도 같은 몸짓은 바람과 순환의 신 위넨스의 가호를 입은 듯이 자유로웠으 며 거침이 없었 다. 희대의 암살자라고 불리는 '검은 옷의 소년'과 비교하면 아직 미숙한 점이 많 으나, 그는 오 늘 자신의 컨디션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다. 우연찮게도 오늘이 이번 달 들어 몸 상태가 가장 좋은 날이었던 것이다. '내 참. 이 길이 바깥에 알려지면 왕성은 끝장이겠지. 우리 동료들에게는 좋은 일 이지만, 보수 공사라는 명목 아래 세금을 더 거둘지도 몰라. 그럼 죄 없는 국민들이 또 힘들뿐 이지. 알려지지 않는 게 좋아.' 참으로 기특한 생각을 하면서 그는 의뢰인이 가르쳐준 경로를 따라 어느 새 태자 가 거주하고 있 는 저택 안으로 진입했다. 들은 바로는 침입자 경계를 위해 마법이 발동한다고 했었지만, 머리 끈 덕분에 역시 아무 소용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그는 기특하다는 듯 자신의 이 마에 고이 매여 져있는 그것을 툭 건드려보았다. 역시나 아무 소리 없는 움직임으로 계단을 통해 3층으로 올라온 그. 검은 눈동자 로 사방을 둘러 보던 그의 시야에 드디어 목표물이 있는 방이 들어왔다.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물 씬 풍겨나는 무 늬가 어둠에 익숙한 그의 눈에 확인되었고, 의심 없이 자신의 결정에 따라 그 문 으로 다가갔다. 모두 잠들은 듯 조용한 저택 안이었기에 아까처럼 그렇게 서두를 필요는 느끼지 못했다. 느긋한 움직임으로 문으로 다가간 그는 일단 한번 주위를 경계한 후, 손잡이를 향해 손을 움직 였다. '흠!' 최대한 작게. 최소의 움직임으로. 문 열리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신경을 모조리 그쪽으로 쏟아 부으면서 문을 연 보람이 있는지 문은 소리 없이 열려주었다. 하지만 그건 워낙 관리가 잘되어 서이지 그의 노력 여하에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걸 그는 모르고 있었다. 만약 알게 된다면 상 당히 억울해할 것이 틀림없다. 그런 숨겨진 비화는 제쳐두고 그는 '문을 열었으니, 들어가야지.'라는 당연한 생 각으로 몸을 조 금 수그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발을 딛자마자 느껴지는 푹신한 융단의 느 낌. 어떤 무늬 인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어쨌든 이 상황에 융단이라는 존재는 쌍수를 들고 환 영할 만한 일이 었다. 대단한 집중을 쏟지 않아도 웬만한 소리는 융단이 다 흡수해줄 테니까. 다시 소리가 나지 않도록 신경을 쓰면서 문을 닫고 나자, 방안은 무거운 침묵 속 으로 가라앉았 다. 이런 침묵을 즐기는 편인 그는 오히려 맘이 편해짐을 느끼며 등을 곧게 펴보 았다. 곧 방안 의 풍경이 그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방은 정갈한 편이었다. 매일매일 시종들이 힘들게 청소할 것이 분명하기에 깨끗 하지 않다면 그 게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아무튼 그 정갈한 방은 그가 서있는 곳을 중심으로 앞 쪽에는 커다란 발코니가 나있었고, 현재 발코니에는 은빛 달빛이 하얗게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 에 태자가 잠들어있는 커다란 침대가 자리해있었다. '이 태자는 운치 있는 것을 좋아하는 건가?' 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그는 침대로 다가갔다. 네 명 은 그 위에서 굴릴 수 있을만한 크기의 침대를 혼자 차지한 채 이불 속에 파묻혀 잠들어있는 태자. 가만히 잠 들어있는 태자의 모습은 그 나이 또래와 별반 다를 게 없는 소년 그 자체의 모습 이었다. 그는 수려하고 잘 생기고 왕족이라고 소리치는 듯이 생긴 태자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 다보다가 자신의 얼굴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훗, 나도 잘생긴 편인데 말이야.' 검은 복면으로 눈 아래 부분은 가리고 있었기에 그의 생각을 증명할 길은 없었지 만, 그도 증명 할 생각은 없는지 이내 고개를 돌려 방안을 다시 훑어보기 시작했다. '어디부터 뒤져봐야 할까.' 자신이 찾고 있는 목표물은 필시 이곳에 있을 것이다. 의뢰인이 그렇게 말했기에 그는 굳게 믿 고, 일단 첫 번째 검색 대상을 책장으로 잡았다. '뭐, 뭐야, 이것들은.' 책장 앞에 서서 가만히 훑어보던 그는 황당함으로 얼굴을 물들이고 말았다. 책장 에 가지런히 정 리되어있는 책들은 저 나이의 소년들에게는 결코 어울리지 않을 것들 밖에 없었 다. '나라를 잘 다스리는 법. 훌륭한 작전을 구사한 역사 속의 위인들. 한 대륙 역사 기행… 이거 전 부 10권은 족히 넘어가는 것들이잖아?' 한두 권으로 끝나는 책은 이 책장에 끼일 자격이 없다는 뜻인지, 책장의 책들은 온통 10권은 가 볍게 뛰어넘는 분량이었다. 그는 발전해 가는 생각에 더욱 황당해질 수밖에 없었 다. '그럼 저 나이에 이것들을 다 익힌단 말야?' 평소 '애들은 놀면서 커야한다.'는 신조를 가지고 살아온 그는 갑자기 태자가 불 쌍해지기 시작 했다. 열심히 친구들과 뛰어 놀며 자라야할 나이에, 친구 하나 없을 이런 답답한 왕성에서, 저 런 어려운 책들과 씨름하며 살아야하다니. 동정심이라 불리는 감정이 무궁무진하 게 솟아오름을 가슴 깊이 느끼며 그는 책장 조사를 끝마쳤다. 어쨌든 일은 끝내야하는 것이다. '이쪽에는 없고. 침대 주위에 있으려나?' 여리게 비추고 들어오는 달빛이 시야를 트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는 하얀 빛을 받으며 테 이블과 책장, 옷장 등의 조사를 모두 마치고 고개를 침대 쪽으로 옮겼다. 그곳에 는 약간 몸을 옆으로 비튼 태자가 조금 어지러운 얼굴을 하고 곤히 잠에 빠져있었다. 누가 납 치를 해버려도 모를 정도로 깊이. '조용하군. 왕성이라서 그런가.' 이쯤부터 점점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하는 시내의 정경과는 너무나 다른, 깊게 가 라앉은 침묵이 왕성 안을 가득히 뒤덮고 있었다. 괜히 숨이 막힐 듯한 그런 침묵이, 그렇게. 이 런 분위기에는 영 취미가 없는 그는 어서 이곳을 빠져나가자는 생각에 침대 옆 작은 서랍장을 향해 스르륵 몸 을 이동했다. 서랍장조차도 돈 많다고 티를 내는지 보통이 아니었다. 깊게 세공 된 갖가지 무 늬들과 덧칠되어 있는 색상은 달빛을 받아 은빛으로 반짝반짝 빛이 났다. 선뜻 만질 수도 없게 만 들어버리는 서 랍장의 모습에 그는 또 한번 혀를 끌 찰 수밖에 없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화 가 나는 실정이 니. '한번 뒤져볼까.' 첫 번째 칸에서는 작은 노트와 펜, 두 번째 칸에서는 몇 가지의 작은 책들만이 발견되었고, 정 작 자신이 노리는 물건의 귀퉁이조차 보이지 않았다. 방안을 온통 다 뒤졌는데도 찾을 수 없다 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는 곤하게 자고 있는 태자의 귀여운(?)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방안에 누군가가 침입했다는 사 실도 모르고 이렇게 무방비 상태로 자고 있다니. 그러나 곧 '내 실력이 워낙 뛰 어나니까.'하는 생각에 머리를 한번 흔들고 이불 속으로 불쑥 손을 집어넣었다. 그러니까 그의 생각은, '아마도 이 태자가 가지고 자고 있을 것이다!'라는, 어처구니 생각이었다. 이불을 들춰보고 꽃무늬 비슷한 무늬가 그려진 잠옷도 슬쩍 내려보면서, 온갖 행 위를 다 해보았 지만 역시나 침대에는 없었다. '가지고 잤다'는 생각부터가 틀린 것일 테지만. '쳇, 없군. 그럼 결론은 하나인 것인가.' 몇 번 머리를 굴려보면 아무리 안 좋은 머리라도 결론을 쉽게 돌출 시킬 수 있 다. 그는 목 부분 을 긁적거리며 긴장을 놓아버렸다. 순전히 이번 일은 실패라는 것에 대한 아쉬움,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 어마어마한 대금을 받지 못한다는 안타까움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불러일으킨 여파는 상당히 컸다. "…으음?" '!' 인기척을 느끼고 수면상태에서 곧바로 빠져나온 태자가 번쩍 눈을 뜬 것이다. 달 빛의 영향이 미 치지 않는 구역에 서있던 그의 모습을 알게 모르게 감지한 태자의 감각. 태자는 누군가 이 방에 있다는 느낌에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려했다. 그러나 그곳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 "…누군가 있었는데? 흐음, 아닌가?" 눈을 비벼보며 어두운 방안을 한번 스윽 훑었지만, 아까 전에 느꼈던 인기척의 정체는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영 꺼림칙한 것이 기분이 좋지 않았다. 분명히 있었다. 자는 중이었지만 십 여 년 동안의 수련으로 어떤 '존재감'을 느끼는 훈련은 거의 완벽했기에 잘못 느 낄 확률은 극에 가깝도록 낮았다. 태자는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기에, 이 상황에 대한 결론을 한 가지로 정의했 다. '도망갔군.' 태자는 간단 명료하게 한 문장으로 축약시켜버리고는 따뜻한 이불 속으로 또 다 시 파고 들어갔 다. 그리고 얼마 안가 그 공간에는 새근새근 숨소리만이 정적을 밀어내고 있었다. 그는 이미 성벽에 도달해있었다. 저택으로 숨어 들어갈 때와는 판이하게 다른 무 시무시한 속도 의 원인은, 너무나 놀란 그의 가슴 때문이었다. 갑자기 깨어난 태자 때문에 아무 리 격하게 움직 여도 제 속도를 유지하던 심장도 이번만큼은 터져라 뛰어대고 있었던 것이다. 성벽 밑에 도착한 그는 어둠 속에서 숨을 몰아쉬었다. '젠장할! 하필 거기서 긴장을 풀어버리다니! 내 인생 최대의 실수다!' 도적 생활에 크나큰 오점을 남긴 그는 속으로 '죽어버려! 왜 사냐! 그래 가지고 일류라고 부르 짖을 수 있는 거냐고! 앙!'과 같은 욕설을 자신에게 퍼부었다. 돈을 받지 못한다는 심각한 타격으로 평소에는 하지 않을 실수를 해버린 그는 태 자가 놀라운 감 각으로 잠에서 깨어나자 그 즉시 은신술로 어둠 속에 자신을 은폐시킨 채 발코니 를 이용해 아래 로 뛰어내렸다. 실로 발코니의 큰 창문을 열었다는 것조차 태자가 알아채지 못했 을 정도로 빠르 게 대처한 그 행동은 일류라 칭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의 수준이었다. 그러나 그 런 것도 지금 그 에게 전혀 칭찬이 되지 못했다. 근본적으로 먼저 실수를 하지 않았다면 좀 더 여 유 있기 나올 수 있었을 테니 말이다. '쳇, 일단 의뢰인한테 말은 전해줘야겠지. 그리고 이 일에서 손떼겠어. 좀 더 수양 이 필요해.' 충격을 받은 탓인지 그는 간만에 훈련을 다시 재개할 필요성을 느끼고 성벽을 기 어올라 단숨에 왕성 밖으로 빠져나갔다. 한동안 그늘 속을 질주하며 숨조차 내쉬지 않던 그는 어느 뒷골목의 허름한 집 앞에서 속력을 늦추어 멈춰 섰다. 멈추고 있던 숨을 가득히 몰아쉬자 달려오면서 알아채지 못한 심장이 운동하 는 느낌이 가슴속을 울리기 시작했고, 그것을 느끼며 문을 열었다. 낡은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올리고 양손을 가지런히 깍지껴 모아 그것으로 이마 를 지지해 심각 한 분위기를 그려내고 있던 의뢰인이, 그가 들어오자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갈색의 후드를 뒤집어쓰고 의뢰인의 모습을 보며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실패했소." 갈색후드 속에서 걸걸한, 뭔가 꽉 막힌 듯한 느낌의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의뢰인 이 물었다. "이유는?" 테이블로 이동한 그가 의뢰인의 반대편에 앉자, 곧 의뢰인도 자리에 앉아 그의 답을 기다렸다. 그는 끄응 하는 신음을 약하게 내뱉고 대답했다. "그곳에 없더군요. 당신이 잘못 가르쳐준 거 아니오?" "그럴 리가. 분명히 있을 텐데. 당신이 제대로 잘 못 찾은 거 아니오?" "흥, '레이트의 도적'이라고 불리는 내가 그런 간단한 것도 못할 줄 아는 거요?" 레이트. 대륙 남부의 숲에 산다는 소수부족 중의 하나인 레이트 부족을 일컫는 말이다. 그들은 몸놀림이 굉장히 빠르고 보통 사람의 시선으로는 따라잡지 못할 정도의 빠르기를 가진 이도 있 다고 한다. 또한 눈도 좋아서 어둠 속에서도 10헬리치(=10Km) 바깥의 사물을 확 인할 수 있다고 한다. 그는 그런 부족의 이름을 별명으로 가질 정도로 대단한 빠르기와 시력을 가진 도적이었던 것이다. "흠, 그럴 리가 없는데……." 후드로 가려져 있어 그 의뢰인의 표정을 알 수는 없었지만, 그도 꽤 난처해하는 듯한 태도였다. 그런 모습을 확인하면서 레이트의 도적은 간단히 입을 열어 부정의 뜻을 표했다. "이번 일은 포기하겠소. 다른 사람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뜻을 번복할 생각은 없었다. 그는 슬 그머니 의자를 밀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나 뚜벅뚜벅 문밖으로 나갔다. 그때까지도 의뢰인은 어두 운 분위기와 절 묘하게 잘 어우러지는 갈색후드 속에서 고심하고 있는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그럼 어디로 가볼까? 예전 그곳으로 가는 게 좋겠지?' 오랜만에 일을 쉬면서 좀 더 훈련을 할 생각을 가지고, 그는 짐을 챙기기 위해 집으로 향했다. 골목길은 어두웠고, 또한 적막했다. 어느 도시의 뒷골목도 절대 벗어나지 못할 똑 같은 분위기 속에서 그는 외길을 따라 터벅터벅 걸어갔다. '……?' 이런 어두운 골목길에는 맡지 않은 희한한 광경을 목격하고 만 레이트의 도적. 약간 산발의 검 은색 머리를 목 밑 부분까지 기르고 옷조차 검은 색 일색을 하고 있어 완전 어둠 에 동화된 듯한 모습의 소년이 그의 앞에서 걸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은 애들이 다닐 시간이 아닌걸?' 그 검은 옷의 소년은 소리도 나지 않는 발걸음으로 그에게로 천천히 다가와 결국 그와 교차해 뒤쪽으로 지나쳐갔다. 그는 소년의 뒷모습을 멀뚱히 한번 쳐다보았다가 다시 고 개를 앞으로 돌 렸다. 그리고 그는 바닥이 자신을 향해 덮쳐오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신기하군.' 그 순간에도 생각을 하던 그는 곧 자신의 상태를 깨달을 수 있었다. 놀랍게도 머 리를 지탱하고 있어야할 몸이 머리 위쪽에 있었던 것이다. 눈을 치켜 뜬 그는 피가 흘러내리고 있는 몸통 쪽을 바라보다가 곧 그 뒤쪽으로 사라지고 있는 소년의 모습을 응시했다. 소년의 손에 는 파리한 날이 날카롭게 빛나고 있는 단검이 들려있었다. 그는 이제야 무슨 일을 당했는지 이해가 될 것 같았다. 그러나 더 이상 생각이라 는 것을 이어갈 수는 없었다. 생각이란, 살아있는 존재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므로. 달빛조차 오기를 꺼려하는 도시의 뒷골목. 습하고도 기분 나쁜 그곳에서 도적계 에 이름을 떨치 던 '레이트의 도적'은 목과 몸통이 갈리는 장면을 스스로 목격하고, 그렇게 숨을 거두었다. 소년은 방금 저 세상으로 떠난 '레이트의 도적'이 나왔던 문 앞을 지나쳤다. 갈색 후드의 의뢰인 이 밖으로 나오며 소년을 한번 쳐다보자, 소년이 말했다. "처리." 품속에서 꺼낸 사탕의 껍질을 벗겨 입에 넣으며, '검은 옷의 소년'은 어두운 골목 길로 사라졌 다. ----------------------------------------------------------------- ------------------------ 네, 팀은 미쳤습니다. 글쎄 3일만에 나타난 것입니다. 6편 올린 것이 16일이고 오 늘이 18일... 헉, 이틀이었잖아? 이런 기적이! 이틀이었습니다, 이틀! 이틀만에 완성한! 정말 신 기하지 않습 니까? 팀이 정말 미친 것이 아닐까 걱정하고 계시는 분들. 괜찮습니다! 다만 의욕 에 넘칠 뿐! 우하하하하핫! ...네, 이번편을 보시고, "이거 대체 뭐야?"라고 하실 분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쩝, 하지만 지 금 어떻게 말씀 드리겠습니까. 꾸준히 의문을 쌓아놓으시고 제 소설을 읽어주시 길. 이것도 다 하나의 전략이랄까요?(우하하핫~) 네, 그럼 팀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8편은 언제 올릴 수 있을까... 괴악한 상황이 라 글 쓰기 쉽지 않을 듯 합니다. 수행평가의 파도가 몰려오고, 다음 주면 시험 기간인 것이 죠. 에휴. 이래 저래 힘듭니다. 하하, 아무튼 팀은 분투하겠습니다! 그럼! 어둠의 기사 DARK KNIGHT TEAM... P.S 감상 비평 추천. 다 환영인 거 알고 계시죠? 번 호 : 8810 / 10423 등록일 : 2000년 06월 23일 00:25 등록자 : 암음기사 조 회 : 267 건 제 목 : [카드 게임 판타지]『 카드 마스터(Card Master) 』#008 카드 게임 판타지(Card Game Fantasy) 카드 마스터(Card Master) 8. 날이 밝았다. 간밤에 오랫동안 마스터 카드를 잡고 낑낑댔던 훼이드리온은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곤히 잘 수 있었지만, 새벽녘에 자신의 방으로 들어온 이름 모를 침입자 때문에 조금은 잠을 설쳐버려 약간 기분이 언짢은 상태였다. 그렇대도 바로 잠들어버려서인지 그렇게 피해가 심한 것은 아니었고, 그래서 항상 일어나는 시간에 눈을 뜰 수 있었다. "하암……." 여전히 날씨는 맑아서 기분 좋게 개인 푸른 하늘은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훼이드 리온의 눈 또한 푸르게 만들었다. 소년의 푸른 눈은 한참동안 창 밖 하늘을 유랑하며 흘러가는 구름에 가있었 고, 조금 뒤 정신을 차리고 침대에서 주섬주섬 기어 내려왔다. "으아아아……!" 확실히 국내 최고의 기술자가 만든 침대라서 그런지 자고 일어나면 상쾌함이 온 몸을 뒤덮었다. 뼈마디마디에서 즐거운 비명소리가 들려왔고 근육 구석구석에 힘이 팍팍 들어가, 오늘 하루도 보람되게 보낼 수 있는 준비를 모두 끝마치고 있는 상태였다. 그렇기에 소년은 상당히 기분이 좋았다. 기지개를 펴고 온몸을 뒤틀어보는 운동으로 신체 상태를 확인하며 흐뭇함을 느끼 고 있던 훼이드 리온의 머리에 어젯밤, 정확히 오늘 새벽의 일이 슬그머니 고개를 치켜올렸다. 그 즉시 소년은 심각한 포즈로 돌입했다. '대체 누구일까. 왜 내 방에 온 거지? 암살자? 도적? 암살자라면 나를? 도적이라 면 간 크게도 왕성을 털 리가 없잖아? 아냐, 어쩌면 동료들 사이에서 인정받기 위해 그런 일을 했을 수도. 아 니아니, 근본적으로 어떻게 이곳에 들어왔을까 하는 것이 문제인데? 으아아아!' 점점 엉망으로 꼬여 가는 생각에 스스로 혼란함을 유발하고 있던 태자는 머리가 띵해옴을 느낄 수 있었다. 아무리 좋은 머리라고 해도 막 잠을 깬 시간에 정상적으로 가동하기 란 상당히 힘든 것이다. 결국 훼이드리온은 잠시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아침에 해야할 것들부터 하기로 마음먹었 다. 일단 자신의 방에 딸린 작은 세면실로 가서 깨끗하게 머리까지 감은 소년은 수건 으로 완벽히 수 분 제거를 한 후, 방으로 돌아왔다. 테이블 위에는 언제나 그렇듯이 소년이 자는 중 시종이 들 어와 꺼내놓은 잘 개어진 옷이 올려져있었다. 살짝 미소를 띄우며 다림질까지 완 벽하게 마무리 되어있는 옷을 들러올리던 찰나. "태자 저하, 기침하셨습니까." 문밖에서 발생한 익숙한 목소리가 훼이드리온의 귀로 스며들었다. 태자가 거처하 는 저택의 갖가 지 사무를 맡고 있는 집사 아르 스미스였다. 매일 아침 태자의 기침을 확인하는 것이 그가 맡은 하루 분의 일들 중 처음이었다. "네, 일어났어요. 들어오세요." "감사합니다." 정중하게 인사하는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아마도 허리도 굽히고 있을 거야.' 라고 평소 아르 집사의 성격을 잘 알고 있던 훼이드리온은 생각했고 키득 웃어버렸다. 그러나 소 년의 웃음은 집 사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자 곧 그칠 수밖에 없었다. "간밤에 좋은 일 있으셨습니까?" "아, 아니에요." 아르 집사의 입매에 의아함이 떠올랐다가 곧 사라졌다. 들어왔을 때 허둥지둥 이 상한 태도를 보 인 태자의 행동에 의문을 품었지만 곧 지워 보이고 예의 상냥한 미소를 떠올려 보였다. 아르 집 사는 그렇게 늙지 않아서 이제 30대 중반의 나이를 가지고 있었다. 외모 또한 약 간은 탄 듯한 황갈색의 피부와 생기 넘치는 두 눈으로 인해 더욱 젊어 보였기에, 밖에 나가면 20대 중반까지 도 충분히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그런 그가 미소를 띄우자 꽤나 멋진 광경이 되어버렸다. 멋진 미소를 띄운 아르 집사가 정중한 어투로 막 꽃무늬 잠옷을 벗고 평상복으로 갈아입기 시작 하는 태자에게 말했다. "국왕 폐하께서 아침을 같이 하자십니다." "폐하께서요?" "네." 그러고 보니, 온 가족이 함께 모여서 식사를 해본 것도 오래됐다는 생각이 들었 다. '국정을 살피시느라 여가 생활도 하지 못하시는 폐하께서 시간을 내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라, 대부분 어마마마와 단 둘이서만 식사를 하는 경우가 많으셨지. 아아, 정 말 오랜만이잖 아?' 흐뭇하게 미소를 띄우며 얼굴 앞으로 흘러내리는 머리칼을 넘기며 마지막 팔을 소매 속으로 끼 어 넣고 있던 태자의 머릿속에 한 가지 실수가 떠올랐다. "어, 그러면 이 옷 입고 가면 안 되겠네요?" 훼이드리온은 이미 입어버린 평범한 흰색 계통의 평상복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고 민하기 시작했 다. 그때 아르 집사의 집사 같지 않은 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습니다. 폐하와 왕비께서도 편하게 입고 나오실 테니까요." "음, 그런가? 그럼 믿겠어요, 아르 집사." "네, 감사합니다." 예의 바르게 대답하는 아르 집사. 집사가 갖추어야할 요소들을 고루 갖춘 그를 보면서 훼이드리 온은 누님 메이린느의 저택을 책임지고 있는 하론 스미스 집사를 떠올렸다. 아르 집사는 하론 집사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2대가 왕성에서 집사로 봉사한다는 건 흔히 있는 일 이 아니었기에 그 이야기는 왕성 안의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고 있었다. "가시기 전에 뭔가 요기를 하시겠습니까?" "아뇨. 가서 먹을 텐데 벌써 배를 채울 필요는 없잖아요?" "그럼 나가보겠습니다. 준비하시고 내려오십시오." "네, 나가서 일 보세요." 아르 집사는 오른팔을 배에 대고 허리를 굽혀 꾸벅 인사를 하고 조용히 문을 열 고 사라졌다. 그 가 방에서 나가자, 훼이드리온은 서둘러 바지도 갈아입고 머리 정돈의 시간도 잠 시 가져보았다. 뭐, 대충 매만진 것뿐이지만. 하지만 누군가의 도움도 받지 않고 대충 매만졌음에 도 불구하고 소년이 서있는 곳에서 환한 빛이 밝혀진 듯한 착각을 느끼는 건, 순전히 본래부 터 잘생겼던 소 년의 외모 때문이리라. "흠, 이만하면 됐겠지." 마지막으로 거울을 보며 옷 정리도 끝낸 훼이드리온은 곳곳으로 시선을 던져 확 인을 하고 방에 서 빠져나왔다. 푹신한 융단의 느낌이 끝나자 얇은 천 같은 느낌의 융단이 깔린 복도가 나왔고, 지나다니는 시종들의 인사를 일일이 웃음으로 받아주며 밑으로 내려갔다. 거대한 현관 앞에는 아르 집사가 시종들에게 이것저것 지시하고 있었다. 그는 소 년이 내려오자, 곧 고개를 돌려 문밖까지 훼이드리온을 배웅했다. "천천히 가셔도 늦지 않으실 겁니다. 즐거운 시간 보내고 오십시오." 다소 사무적인 어투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훼이드리온은 그것이 진심이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태자는 "그럼 다녀올게요."라는 말과 함께 간단한 인사를 끝내고 국왕과 왕비가 거처하고 있는 저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날씨가 맑았다. 화창하게 개인 푸른 하늘, 태자의 눈보다 진하지만 나름대로의 미 를 가진 그런 색상을 가득히 띄운 하늘이 머리 위에 펼쳐져 있었고 곳곳에 하얀 조각들이 멋을 더하고 있었 다. 위넨스의 손길은 언제나 그렇듯이 부드럽게 훼이드리온의 몸을 어루만졌고 가는 걸음걸음 디디는 곳마다 펼쳐진 하늘과 대지의 신 오파투스의 두 번째 영역은 소년을 반갑 게 맞았다. 물론 오파투스의 영역에 뿌리내리고 자라는 네트릴리아의 영혼들도 향긋한 내음 을 위넨스의 손 길을 따라 흩뿌리고 있어 평화로운 정경은 거의 극에 다다랐다. 평화로운 정경. 약 500년으로 계산되는 시간동안 평화로운 정경은 이곳만이 아니 라 전 대륙적으 로 계속되고 있었다(일부는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전쟁으로 인해 시끄러운 곳도 없었고 도적 떼가 나타나 국민들을 불안에 떨게 하는 일도 없었다. 거기다 고대에는 한 세대에 꼭 하나 씩 있었다고 전해지는 '세계 정복의 꿈을 꾸는 마도사'나 '세계를 멸망으로 이끌 기 위해 분투하 는 자'들도 마법왕국 라시엔트가 건국되어진 후로는 영 소식이 드물다. 특히 둘 중에 후자는 '마왕'으로도 불렸으며 그를 막는 역할로 그려지는 용사 또 한 같은 시대에 는 꼭 배출되었기에 국민들의 이야깃거리는 그침이 없었다.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하던 그들도 웬 일인지 '최후의 전쟁'이라 일컬어지는 '라시엔트 건국전쟁' 이후로 나타나지 않 아, 음유시인들 이 입맛만 쩝쩝 다시게 만들고 있는 중이었다. 아무튼 역사가들 사이에서 '평화의 시대'로 불려지는 이런 시기를 지나는 중인 지금이라 대륙은 상당히 조용할 수밖에 없고, 그에 비례해 또한 평화로웠다. 너무나 지겨울 정도 로. 터벅터벅. 국왕이 머무는 저택으로 향하는 길은 굉장히 조용했다. 간간이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나 바람이 풀잎을 스치는 소리를 제하면, 침묵의 공간 속에 홀로 빠져들어 걷는 듯한 느낌 까지 받게 할 정 도였다. 훼이드리온은 그 이유를 추측해보았다. '전부 대궁전으로 몰려갔나?' 이제 2주일만 지나면 자신의 15세 생일 겸 성인식 날이었다. 아마도 그 준비로 인해 그쪽으로 사람들이 다 몰려가서 이렇게 조용한 듯싶었다. 대궁전은 대대로 중요한 행사나 식이 있을 때 왕의 허락으로만 사용할 수 있는 곳이었다. 왕성 안의, 또 각지에 흩어져있는 사람들을 몽땅 수용하기 위해서 대궁전은 정말 컸고 거대했다. 들 리는 일설로 공사를 돕던 마법사 한 명이 완공이 되는 즉시 과로로 쓰러져 숨졌 다는 소문도 있 었다. 의지로 마법을 쓰는 마법사가 쓰러질 정도의 대단한 공사였다는 점을 깨우 치게 만드는 이 야기이다. 긁적. 뺨을 긁적이며 훼이드리온은 저택으로 계속 걸음을 옮겼다. 코로 들어오는 희미 한 꽃향기가 기 분을 한층 더 좋아지게 만들었다. 얼마쯤 걸어가자 익숙한 갈림길이 눈에 띄었다. 오른쪽으로 가면 왕의 저택이 나 오고 왼쪽으로 가면 왕궁이 나온다. 훼이드리온은 자신이 가고자하는 곳으로 방향을 틀었다. 아 니, 틀려고 했 다. "어, 누님!" 오른쪽으로 시선을 던지려던 훼이드리온의 눈이 왼쪽의 어떤 것을 먼저 잡아내어 방향을 바꾸게 만들었던 것이다. 시선이 잡아낸 '어떤 것'은 새하얀 바탕에 하늘빛의 레이스와 레몬 색상이 골 고루 조화를 이루고 있는 드레스를 차려입고 시녀의 안내를 받으며 조금 기울어 진 경사를 걸어 올라오고 있는 누님 메이린느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익숙한 부름에 고개를 살짝 들어올렸다. "아, 훼이구나. 지금 오는 길이니?" "네!" 씩씩하게 대답한 태자는 빠른 걸음으로 타다닥 걸어가 누님의 옆에 나란히 섰다. 당연히 그녀의 팔을 부축하면서. "오랜만이네요, 폐하와 왕비마마와 같이 식사를 하는 것도. 그렇죠?" "바쁘시잖니. 아무리 평화의 시대라고 하더라도 국외나 국내로 할 일들이 태산 같으실 테니 말 이야." 메이린느는 달래는 듯한 어조로 말하며 빙긋 웃었다. 그녀의 얘기를 충분히 수긍 하는 훼이드리 온도 별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그 갈림길에 도착한 둘은 걸음을 조금 빨리 하여 저택으로 향했다. 보기 좋 은 관목들이 주 욱 늘어선 오솔길 분위기의 길이 오른쪽으로 조금 휘어져 들어가자 곧 저택의 정 문이 둘의 눈에 들어왔다. 제복을 차려입은 두 명의 경비병들이 지키는 정 사이로 오랜만에 보는 저택은 예전에 도 그랬듯이 그렇게 그곳에 자리하고 둘을 맞이하고 있었다. 아담하지만 세련된 분위기. 메이린느나 훼이드리온의 저택 같이 벽돌을 쌓아올려 외관을 장식했 지만, 차이점이 있다면 지붕에 몇 개의 첨탑이 지어져 하늘을 향해 뻗어나가는 형상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건국왕 페인트 라시엔트의 의도로, "마법이라는 것이 원래 신에게 도전하 는 특성을 지니고 있기에, 신을 상징하는 하늘을 향해 솟아있는 첨탑을 만들어 우리 마법왕국의 위상을 떨쳐 보이겠다!"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런 건국왕의 의도 때문 인지 왕성 안 의 주요 건물들은 거의 다가 이런 형식을 취하고 있다. 아무튼 둘은 경비병들과 간단한 목례(경비병들은 거수경례)로 인사를 나눈 후, 저 택 안으로 들 어갔다. 왕비의 취미 생활 또한 메이린느와 같은 정원 가꾸기이다. 그래서 메이린느의 저 택처럼, 저택의 담장 안에는 꽃이 만발한 풍경이 가득히 펼쳐져 있었다. 저택 내 시야가 닿는 곳 이라면 온통 꽃 천지였고, 그 중간에 직선으로 현관까지 나있는 길의 왼편에는 작은 연못과 분수, 그리고 오른 편에는 메이린느의 저택 뒤뜰에서도 볼 수 있는 작은 정자가 자리해있었다. "언제 보아도 그 모습 그대로군요." "응." 주위를 둘러보며 정원의 정경에 잠깐의 감탄을 표하는 찰나, 둘은 저택의 현관으 로 들어섰다.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문은 자동으로 열려 둘을 맞아들였다. "어서 오십시오. 태자 저하, 공주 저하." "안녕하셨나요, 스티븐 집사." "안녕하세요." 가장 먼저 둘을 반긴 인물은 이 저택의 집사 스티븐이었다. 그는 흰머리와 두 눈 밑으로 깊게 파인 주름이 말해주듯 나이가 일흔을 넘긴 노년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집사의 자리에서 물러나 지 않고 여전히 정정한 건강 상태로 이 저택의 관리를 맡아오고 있는 중이었다. 어쩌면 왕성에 서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이가 이 사람일지도 모른다. "폐하와 왕비마마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팔을 살짝 들어올려 저택 안으로 안내하는 집사의 움직임을 따라 움직이면서 훼 이드리온이 그에 게 물었다. "몸 건강히 계시죠?" "물론입니다, 태자 저하. 제가 정성껏 모시고 있으니까요." "집사님만 믿을게요." "걱정 마십시오." 그는 믿음직한 미소를 머금었고 왕의 아들인 태자는 안도한다는 표정으로 작게 웃어 보였다. "자, 들어가시죠." 현관 앞 홀에서 왼쪽으로 돌아서 얼마쯤 걸어가자 곧 갈색의 칠이 도색 된 큰문 이 하나 나왔다. 스티븐 집사는 그 앞에서 멈춰 몸을 돌렸다. 그가 문을 열자, 안의 정경이 훼이드 리온과 메이린 느의 눈앞에 펼쳐졌다. "이제 오는가, 태자와 공주." 흰색으로 칠해져있고 광이 나게끔 코팅이 되어있는 6인용 테이블 가장 안쪽에서 금발을 세련되 게 뒤로 넘긴 중년이 훼이드리온을 향해 웃어 보였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폐하." 태자와 공주가 문 앞에서 예의를 갖추자 왕과 왕비가 흐뭇한 듯 진한 미소를 지 었다. "우리야 언제나 그렇지. 자, 이리 오너라." "네." 스티븐 집사는 문을 닫고 사라졌고 태자와 공주는 테이블로 걸어가 자신들의 자 리를 찾아 앉았 다. 훼이드리온은 왕의 오른편에, 메이린느는 그 반대편 왕비 옆에 각각 소리 없 이 앉자, 기다 렸다는 듯이 벽 한쪽의 문이 열리면서 요리사들이 음식을 들고 줄줄이 걸어나오 기 시작했다. 요리사들이 손수 식탁 가득히 들고 나온 요리를 진열시키는 가운데 오랜만에 모 인 가족들의 정 겨운 대화가 오고가기 시작했다. "폐하, 몸은 어떠신지요?" "하하, 태자가 걱정할 필요도 없이 건강하다. 그러는 태자는 요즘 어떤고?" "저야, 많은 사람들의 관심 때문에 좋지 않으려고 해도 그럴 수 없다는 거 아시 지 않습니까. 잘 지내고 있습니다." "공주는?" "저도 마찬가지이옵니다, 폐하." 금발의 가녀리디 가녀린 듯한 이미지를 주는 약한 모발을 길게 땋아 왼쪽 어깨를 통해 가슴 쪽 으로 내리고 있던 왕비 에스린느 미이 라시엔트가 입을 가리고 작게 웃었다. "훼이야, 존칭을 생략하자꾸나. 당신도요." 그 말에 국왕은 조금 더 젊어 보이게 하는 기분 좋은 웃음을 가득히 만면에 띄웠 다. "흠, 그럴까? 나도 조금 불편하게 생각하고 있던 참인데 잘 말해주었소, 부인." "뭘요." 오랜만에 보는 것임에도 여전히 사이가 좋은 두 부부를 보면서 메이린느와 훼이 드리온은 행복감 을 느꼈다. 평생 에스린느 한 명만을 보고 살아온 국왕 카드리온 에이틴 라시엔 트나, 마찬가지 로 카드리온 한 명만으로 보고 지금껏 살아온 에스린느나, 부부의 귀감이 될 만 한 인물들인 것 이다. 그들은 요리사들이 아침 동안 노력에 노력을 더하여 만든 맛좋은 요리들을 하나 씩하나씩 천천히 음미해가며 평화로운 한때를 보냈다. 역시 같은 왕성 안에 살면서도 오랜 시간동 안 만나지 못한 탓인지 나눌 얘기가 너무 많았고, 태자의 넘쳐나는 호기심 또한 그 시간을 만족 하게 해주는 또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국정에 관심을 보이는 태자의 모습에 국왕 카드리온은 새 삼 흐뭇함마저 느꼈다. 그가 아내가 만져준 머리를 가만히 쓸어 올리며 태자에게 얘기를 꺼내려고 할 때, 분위기를 깨 는 노크 소리가 정중히 들려왔다. 그와 함께 들려오는 목소리는 여기에 있는 모 든 사람들이 잘 아는 목소리였다. "국왕 폐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왕성 수석마법사 필로윈 셀 디바이어 경이었다. "무슨 일이지? 들어오게, 디바이어 경." "감사합니다." 좋은 분위기를 망쳤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국왕은 약간 심기가 불편함을 느끼며 허락했고, 필로 윈은 왠지 바빠 보이는 손길로 문을 열고 들어왔다. 눈썹을 찌푸리며 국왕이 그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길래 이 좋은 시간을 방해하면서 온 것인가." "황송하오나, 급히 드릴 말이 있어서입니다." 훼이드리온은 사뭇 진지해 보이는 필로윈의 태도에 어제 같이 마스터 카드 게임 을 즐겼던 그의 언행을 다시 떠올려보았다. 같은 인물임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다른 모습에 '어른 이 되면 저렇게 변하는 걸까,'하는 작은 의문을 품어 보면서 그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말해보게." "네. 어제 새벽, 아니 정확히 마법력 1414년 4월 28일 새벽에 왕성으로 누군가 침 입한 것 같습 니다." "뭐시라! 누군가가 침입했다니, 그게 무슨 망언인가!" 필로윈은 낭패한 표정이었지만 계속 말을 이었다. "새벽에 이상한 기운을 느껴 잠에서 깼습니다. 그리고 곧 왕성 전체 걸려있는 침 입자 감시 마법 에 무언가를 감지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계속 조사를 해오던 차에 이 제야 이렇게 보고를 올리는 것입니다." "…현재 조사 진행은 어떠한가." 화기애애하던 식탁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아 심각한 분위기로 돌입해버렸 다. 그런 분위기 에 휩쓸리듯 훼이드리온은 필로윈의 말을 들으며 한가지 사실을 굳은 표정으로 계속 곱씹기 시 작했다. '침입자…….' 필로윈의 말이 들려왔다. "침입 경로는 왕성 서쪽 성벽이고, 도주로도 그와 동일합니다. 침입자는 성벽을 기어올라와 성 안으로 침입해 어떤 일을 행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새벽 내내 깨어있었다던 경 비병 중 어느 한 사람도 침입자는커녕 수상한 기척조차 느끼지 못한 것으로 보아, 1급에 가까운 실력을 가진 자 로 판명됩니다." "성벽이라고 했나." "네, 그렇습니다." 카드리온은 아버지의 훈훈한 모습이 아닌 위엄 있는 국왕의 표정을 지었다. "성벽이라면, 자네의 마법이 걸려있는 곳 아닌가." "저도 그 점을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마법은 아무 이상이 없었지 만, 침입자는 그 마법을 뚫고 당당하게 들어와 당당하게 나갔습니다. 어떤 특수한 메티를 사용한 것이 아닐까 추 측해보았지만, 너무 광범위하여 짐작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필로윈은 평소 자신의 마법에 대해 대단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마법사 길드 의 최고 원로 13명중에 속하는 인물답게 엄청난 마법실력을 가지고 있는 그였기에, 어디서든 당당하게 그런 사실도 밝힐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침입자는 그런 필로윈의 마법을 뚫고 왕성 안 으로 침입한 것 이다. 이건 마법사로서 씻을 수 없는 수치였다. 국왕이 다시 질문했다. "목적은 무엇이라 여겨지는가." "현재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좀 더 시간을 투자하여 조사해보며 곧 밝힐 수 있으리라 생각됩 니다." 가만히 얘기를 듣고 있던 훼이드리온은 지금이 적격이라고 생각되어 입을 열었 다. 자신이 알고 있는 침입자의 목적을 말하기 위해. "제가 알고 있습니다." "응? 태자, 목적을 알고 있단 말인가!" "네, 폐하." 그들은 어느새 가족이라는 관계가 아닌 존칭을 쓰는 불편한 관계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새벽에… 인기척을 느끼고 잠에서 깨었습니다. 제 방에 누군가 들어왔던 것입니 다." "태자의 방에? 어디 다친 데 없는 거니?" 에스린느는 모성애를 발휘하여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왕비의 체면은 이 자리 에서 불필요한 것이기에 저만큼 던져버린 것이다. 훼이드리온은 그런 어머니의 걱정을 없애드리 기 위하여 웃으 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괜찮습니다, 왕비마마. 제가 빨리 깨어난 탓에 침입자는 곧 달아나 버렸으니 까요." "하아… 다행이구나." 왕비가 힘이 빠진 듯 늘어지면서 가슴을 매만지자 메이린느가 그녀의 어깨를 부 축하며 도왔다. 그녀는 공주에게 "괜찮다."고 웃어주며 공주를 안심시켰다. 자신의 가슴은 너무 놀란 탓에 급격 한 운동을 하는 중이었지만. "그럼 목적이 태자의 목숨이었다는 말인가!" 국왕이 흥분하여 소리를 질렀다. 이것은 명백한 도발이었다. '감히 태자에게 손을 대다니, 어떤 녀석인가!' 하지만 필로윈은 잠시 태자의 말을 곱씹어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미약하게나마 다른 가능성도 있는 듯하옵니다. 태자 저하의 방에 있는 어떤 물 건을 노린 것일 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과연 그렇다고 왕성 안으로 침입을 감행할까요?" 훼이드리온이 의아함을 띄운 얼굴로 물었다. 직접 일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국 왕보다 훨씬 침 착한 모습이었다. "침입자는 저의 마법과 삼엄한 경비를 뚫고 들어올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습니 다. 아마 문제 없다고 생각했는지 모르지요." "그렇대도 의문은 또 남아있잖아요. 그 정도의 실력을 가진 자가 왜 하필이면 제 가 인기척을 느 끼게 한 거죠?" "글쎄요. 그 점에 대해서는 저도 뭐라고 할 말이 없습니다. 좀 더 조사를 진행시 켜봐야겠지요." 진지한 표정으로 필로윈이 눈살을 찌푸렸다. '어렵다'라는 표정을 그가 짓고 있을 때, 국왕이 위엄이 가득한 목소리로 그에게 지시했다. "지금부터 그 일에 대한 모든 권한을 그대에게 위임하겠다. 왕성 수석마법사 필 로윈 셀 디바이 어 경은 정확하고 빠르게 조사에 임하여 신속하게 진상을 규명해 내야할 것이야. 알겠나? 필요 하다면 나의 이름 아래 인원을 동원하도록 하라." "네, 폐하. 지시한 일을, 꼭 완벽하게 마무리짓도록 하겠습니다." "좋은 결과는 기대하겠네. 그리고… 또 무슨 할말이 있는 건가?" 용건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그 자리에 서있는 필로윈을 향해 카드리온이 눈을 부라렸다. 필로윈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다름이 아니오라… 저번에 올렸던 서류를… 서둘러 처리해주셨으면 합니다만." "아, 그거 말인가. 알았네, 알았어. 곧 처리하도록 하지. 그럼 이만 나가주겠나?" 국왕의 태도는 '귀찮다'라는 뜻이 역력했지만 따지고 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기에 그냥 돌아설 수밖에. "…알겠습니다. 그럼 좋은 시간 보내십시오." 필로윈은 화가 치밀어 오름을 느낄 수 있었지만, 말없이 삭이면서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그 화 를 터뜨리기에 자신의 신분은 너무나 미약한 것이었다. 필로윈이 식당에서 나가자, 국왕은 약간은 험악했던 표정을 풀고 가족을 둘러보 았다. 새벽에 그 런 놀랄 일을 당했음에도 침착한 태자가 대견스러웠고, 어머니를 걱정하는 공주 도 기특했다. 제 대로 신경을 써주지 못했지만 너무나 잘 커주고 있어서, 또한 기쁠 따름이었다. "방해꾼 때문에 즐거운 시간을 너무 많이 잡아먹었구나. 식사를 계속 해야겠지?" "네, 아바마마." 훼이드리온은 전혀 그늘 없는 얼굴로 자신의 푸른 눈을 왕의 푸른 눈과 마주쳤 다. 역시 부자관 계인 것인지 그 눈길 한번에 모든 걱정과 수심은 싹 사라져버렸다. '괜찮은 것이냐.' '염려 마세요.' 환하게 웃어주던 훼이드리온의 귀로 어머니 에스린느의 하이톤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기운을 되 찾았는지 꽤 들떠있는 목소리였다. "여보, 훼이에게 알려야하지 않아요?" "아아, 맞아맞아. 내가 잊어버리고 있었군, 그래. 그렇지 않아도 말하려던 참이었 는데, 디바이 어 경이 들이닥쳐서 말이지. 잠시 잊고 있었어. 고맙소, 부인." 왕비는 메이린느와 비슷한 화사한 미소를 띄워 그녀가 메이린느의 어머니임을 다 시 한번 확인시 켜주었다. 그 모습은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미란, 그녀를 두고 말하는 듯했다. "뭔데요?" 훼이드리온의 눈이 커졌다. 의문이 가득 담긴 눈길에 국왕은 한껏 웃음을 띄워 보이면서 입을 열었다. "너도 곧 15세가 되지?" "네, 5월 12일 되면요." 카드리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15세가 되면 성인이 된다는 것도 알겠구나." "아아… 아바마마, 그것이군요?" 눈치 빠른 메이린느는 간단한 대화 속에서 이미 모든 것을 파악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대화의 주인공은 정작 이야기의 꼬투리조차 잡지 못한 상태였다. "대체 무슨 이야기죠?" 태자의 가족들은 모두 짓궂은 표정을 띄우기로 작정을 했나보다. 덕분에 그 시선 속에 자리하고 있는 훼이드리온의 혼란스러움은 그 정도를 더할 분이었다. "하하, 이제 이야기해주마." "네!" 카드리온은 아내에게, 그리고 딸에게 시선을 한번식 던지고 드디어 입을 열었다. "신성제국 하쉴로츠에서 혼담이 들어왔단다." ----------------------------------------------------------------- ------------------------ 팀입니다.(___) 5일만에... 돌아왔습니다. 8편을 들고서요(헤죽) 기다리셨습니까? 기다리셨다면 축복받으실 겁니다. 그대의 인생에 가득한 축복인 깃들기를! 네, 이번 8편에서도 역시나 꽤 충격적인 내용이 있죠? 캬하하~ 훼이드리온에게 혼담이 들어왔습 니다. 신성제국 하쉴로츠. 쿡. 나중에 국가설정에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아니, 소설 중에 설 명이 있겠군요.(키득) 아, 그리고 추천해주신 님...(아이디를 까먹었어요...ㅠㅠㅠ) 감사합니다(___) 네, 이로서 점점 이야기는 재미있어져( ---)가고 있는 듯 합니다. 기대해주세요. 그럼, 이만.꾸벅(___) 어둠의 기사 DARK KNIGHT TEAM... P.S 추천 감상 비평. 환영입니다요~ 번 호 : 9050 / 10423 등록일 : 2000년 06월 30일 23:32 등록자 : 암음기사 조 회 : 308 건 제 목 : [카드 게임 판타지]『 카드 마스터(Card Master) 』#009 카드 게임 판타지(Card Game Fantasy) 카드 마스터(Card Master) 9. 마법은 소위 '선택된 자들의 능력'이라고 일컬어진다. 왜냐고 물으면, 그 대답은 '마력'이라는 마법의 원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한다. 마력이란, 이 세상을 지탱하는 제2의 힘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것 을 단순히 '힘'이라고 정의 내리기에도 또 무리가 있다. 마력이라는 존재는 그것을 다루는 방법인 마법이 발견되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마법사들의 공통적인 연구 주제이기 때문이다. 그 오랜 시간동안 셀 수 없이 많은 마법사들이 마력에 대해 평생을 바쳤지만, 그 정체를 정확하게 알아낸 인물은 한 명도 없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각광받는 이론이 한 가지 있다면, '의지'와 '마력'을 동 격으로 놓고 설명한 대마도사 페인트 라시엔트의 '마력의지론'이 바로 그것이다. 페인트는 생전에 마력에 대해 이렇게 정의 내렸다. "마력이란, 이 세상이 움직이려고 하는 의지이며, 인간이 세상을 움직이려고 하는 의지이며, 신 이란 존재들이 이 세상을 움직이려고 하는 의지이다." 실제로 이 이론을 뒷받침하듯, 마법은 마법사의 의지로써 발현된다. 마법사가 마 력을 느끼며 자 신의 의지를 강하게 표출할 때, 마법은 마법사의 의지를 따라 발현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누구나 할 수 있을 만큼 쉽게 보이는 것이 바로 마법이다. 그렇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앞서 말했다시피 마법은 의지로써 마력을 움 직이는 방법이 기 때문이다. 간단한 어구지만, 이것 때문에 수많은 마법사 지망생들이 마법의 길 앞에서 무릎 을 꿇었다. '의 지로 마력을 움직인다'는 것이 말처럼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닌 것이다. 의지만 있다면, 사막 한가운데에서 비가 내리게 할 수도 있고, 한 여름에 눈을 보 게 할 수도 있 는 것이 마법이지만, 그 의지를 다루는 것은 죽기보다 어렵고 힘든 일이다. 세상 에 퍼져있는 마 력을 한데 모아 원하는 형태로 마법을 발현시키기 위해서는, 그것을 강하게 염원 하는 의지가 필 요하다. 간단하게 생각될 수도 있지만 화상을 입기 전에는 불의 진정한 뜨거움을 알 수 없듯이, 의지를 느끼는 것도 그와 비슷하다. 대부분의 마법사들은 죽음을 직감하는 순간, 마력을 움직이는 것에 성공한다. 죽 음을 느끼면서 '죽기 싫다'는 의지가 강하게 표출되어 마력을 움직이는 것이다. 물론 그 후에 얼 마간 또 다시 마력을 움직이기 위해 분투해야하지만, 벌써 한번의 성공을 경험한 후라 진도는 물찬 제비처럼 쭉쭉 뻗어나가게 된다. 아무튼 죽음을 경험하기 전에는 성공하기 어려운, 이런 '의지로써 마력을 움직인 다'라는 최악의 코스에서 많은 사람들이 절망을 맛보기 때문에, 마법이 '선택된 자들의 능력'이라 고 불리는 것 이다. 그런 어려운 마법을 국가의 표상으로 삼은 나라, 마법왕국 라시엔트. 그 국가의 현 태자 훼이드 리온은 현재 개인 수련장에서 검술을 연마하고 있는 중이었다. 마법왕국의 태자 가 마법보다는 검술을 더 열심히 연마한다는 것은 왠지 맞지 않는 사실 같지만, 오랜 시간이 흐 르면서 마법왕 국이라는 단어는 그저 상징적인 역할만을 할 뿐이라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는다. 슈우욱. 수련장이 허공을 가르며 쏜살 같이 움직이는 검의 소리로 가득 찬다. 숨조차 가 눌 수 없는 긴장 감이 그 공간을 지배하는 동안, 그 긴장감을 창출하고 있는 주인공인 훼이드리온 은 쉴새없이 허 공을 베었다. 느낌이 좋았다. 허공을 벨 때, 아무 것도 없는 곳을 베고 지나가는 느낌이. 아니, 정확하게는 그곳에 존재할 공기를 반으로 가르는 듯한 느낌이 좋았다. 그 느낌을 조금이라도 더 느끼기 위 하여 훼이드리온은 더욱 수련에 빠져드는 것이다. 번쩍. 은색의 검광. 마스트의 빛이 검날에 닿을 때마다 검에서는 공간을 가른다는 마스 트소드 못지 않 은 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 빛은 파공음과 함께 수련장을 가득 메우며 소 년의 수련 의지 를 더욱 북돋아주는 역할을 했다. '하앗!' 소리 없는 기합을 내지르며 검이 가로로 베어진다. 그리고 다시 위로 솟구쳐 오 르고, 밑으로 그 어 내려진다. 대지를 반으로 쪼개버릴 듯한 거대한 기세가 소년을 '소년'으로 생 각하기 힘들게 만들어버린다. 바이마크는 태자의 수련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수련장으로 왔다가, 수련에 열중하는 모습에 감탄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지켜보고 있었다. 저 모습을 보고 누가 과연 소년이라고 하 겠는가. 검만 잡으면 검사인 줄 아는 그런 미천한 녀석들 따위보다, 이제 성인이 되는 저 소년 하나가 더 강할 것이다. 바이마크는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훌륭하십니다." 진심을 담아 그렇게 칭찬하자, 이제야 바이마크의 존재를 느낀 훼이드리온이 수 련장의 입구 쪽 으로 고개를 돌렸다. 소년의 시야에 건장한 기사와 소년보다 조금 큰 체구를 가 진 비슷한 나이 의 소년의 모습이 잡혔다. "안녕하세요, 헤이스티론 경. 아드님하고 같이 오셨네요?" "네. 한번 뵙고 싶다고 조르는 바람에 말입니다. 자, 인사드려라." 바이마크는 자신의 아들을 재촉했다. "네? 아, 네. 처, 처음 뵙겠습니다, 태자 저하! 하이마크 폰 헤이스티론이라고 합 니다!" 씩씩한 인사가 훼이드리온의 머리에 강하게 각인됐다. 소년은 아버지를 많이 닮 은 모습을 하고 있어서 마치 바이마크의 옛 시절을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짙은 갈색머 리가 단정하게 정리되어있고 아버지의 어깨까지 오는 키와 조금은 큰 체구가 영락없는 '바이마 크 10대 소년 형'이었다. 훼이드리온은 벌게진 얼굴로 인사를 끝마친 소년에게 작게 미소를 지 으며 검을 집으 로 밀어 넣었다. "반가워요. 제 이름은 알고 있으니, 소개할 필요 없겠죠?" "네, 넷! 물론입니다!" 태자보다 큰 사람이 태자를 내려다보며 긴장한 표정이라니. 훼이드리온은 어색한 하이마크의 태 도에 쿡하고 웃어버렸고, 그것은 하이마크를 더더욱 당황하게 만들어버리기에 부 족함이 없었다. 바이마크가 둘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태자에게 물었다. "개인 수련 중이셨습니까?" "네. 아직 시간이 남아서요. 얼마 후에 치를 제 성인식 때문에 누님이 바쁘셔서… 오늘은 시간 이 많이 남네요." 메이린느는 그 날 입을 훼이드리온의 의상을 자신이 만들어싶다면서, 얼마간 자 신의 저택으로 출입을 금해버렸다. 졸지에 마스터 카드 파트너를 잃어버린 훼이드리온에게 갑자 기 혼자 지낼 시간이 늘어나 버렸고, 마스터 카드를 만지작대다가 결국 무료한 시간을 참지 못 하고 이렇게 수 련을 하러 나온 것이다. 적어도 검술 수련 중에는 지루함 따위를 잊어버릴 수 있 으니까. 빙긋 웃는 훼이드리온에게 바이마크가 한 가지 제안했다. "그럼… 수련에 들어가기 전에 제 아들 녀석과 대련을 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대련이요?" 태자의 눈이 반짝 빛났다. 대련, 대련이다. 10년의 수련기간 동안 대련을 해본 건 손가락에 꼽 힐 만큼 적었다. 나이가 적었던 이유도 있었지만, 태자라는 신분이 크게 작용했던 탓이다. 대련 을 하다가 상처를 입히면 그 뒷일을 누가 책임질 수 있을까. 물론 훼이드리온 본 인으로서는 조 금 다쳐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상처 입히는 자의 입장으로서는 결코 같 은 의견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훼이드리온과의 대련을 꺼려했고, 바 이마크와 검을 나눌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었다. 훼이드리온은 내심 걱정되는 그 점을 입 밖으로 꺼냈다. "저기… 괜찮을까요? 제 신분 때문에 저와의 대련을 대부분이 피하는데……." "괜찮습니다, 태자 저하. 이 녀석은 자신이 먼저 뜻을 밝혔으니까요. 사실 여기에 데리고 온 것 도 바로 그 이유 때문입니다. 태자 저하께서 허락만 해주신다면 아무 문제없을 겁니다." "그, 그렇습니다!" 강조라도 하듯 하이마크가 딱딱하게 굳어있는 채로 그렇게 내질렀다. 훼이드리온 은 피어오르는 기쁜 마음을 억눌러 자제하며 한마디했다. "지금 바로 할까요?" 허락의 의미. 하이마크의 표정이 순식간에 환해지기 시작했다. 훼이드리온은 단순 한 면을 가진 소년을 바라보며 지그시 웃을 수밖에 없었다. 태자의 대답에 바이마크가 자신의 아들을 향해 시선을 내렸다. "가능하겠니?" "넷!" 우렁찬 함성으로 대답하는 하이마크에게 웃음을 띄워보내는 바이마크. 그는 둘을 수련장 중앙쯤 으로 데리고 가서 마주 세웠다. "위험한 지경까지 가기 전에 '대련의 규율'을 숙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어떤 것 인지 알고 계 십니까?" "물론이죠. '생명을 위협하는 공격은 자제하고 수련의 발전 과정으로 생각한다.' 맞죠?" "네, 잘 알고 계시는군요, 태자 저하." 바이마크는 자신의 가르침을 아직까지 잊지 않고 있는 태자를 향해 싱긋 웃고는 아들 하이마크 에게 고개를 돌렸다. "잘 할 수 있겠지?"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바이마크는 어쩌면 자신의 아들이 태자보다 정신연령이 낮은 것이 아닐까하는 고 민을 잠깐 해보 았지만 이내 그곳에서 물러났다. 서로 마주보게된 훼이드리온과 하이마크. 둘은 잠시 침묵한 채 눈빛을 교환했다. 바람이 한차례 그 자리를 훑고 지나가고, 한 사람의 아버지이며 한 사람의 스승 인 바이마크가 적당한 자리를 찾아 등에 차고 있던 검을 옆에 놓고 걸터앉을 즈음 태자 쪽에서 먼저 입을 열었 다. "헤이스티론 경에게서 얘기는 들었어요. 기사 후보생 중에서도 강하다던데." "아… 그, 그냥 다른 후보생들보다 잘하는 것뿐입니다. 태자 저하의 실력에는 미 치지 못합니 다." "훗, 겸손인가요, 아부인가요?" 짓궂게 몰아붙이는 훼이드리온의 말에 하이마크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당황함에 파닥거렸다. 사실 소년은 하이마크가 너무 긴장하고 있는 탓에 좀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농담 을 던진 거였는 데 예상외로 당황해버려 오히려 자신이 황당할 정도였다. '솔직한 성격이네.'라고 평을 내린 훼 이드리온은 표정을 싹 고치고 말했다. "이제 할까요?" 자신의 허리에 당당히 매여져있는 롱 소드의 손잡이를 지그시 눌러 잡는 태자의 손을 힐끔 바라 보다가 하이마크가 뒤로 한발자국 물러났다. "…사정은 두지 않겠습니다." "마찬가지예요." 둘은 검을 뽑아들었다. 번쩍이는 백색의 두 검날이 잠시 교차하며 살짝 부딪혔다 가 서로의 주인 의 간격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둘은 서로를 살피며 적에 대한 탐색을 해 나가기 시작했 다. '아직은 하이마크가 모든 면에서 앞선다. 태자 저하께 좋은 경험이 되겠지.' 멀리 떨어진 곳에서 편안히 앉아 두 사람의 대련을 기다리고 있던 바이마크는 그 렇게 간단히 상 황을 정리했다. 아무리 검술에 소질을 보이고 있는 태자라고 하더라도, 기사 후보 생들과의 대련 을 여러 번 거친 하이마크와는 판연하게 실력 차이가 날 것이 분명하다. 거기다 검술에 대한 소 질로만 따지면, 하이마크도 태자에게 결코 뒤지지 않는다. 누가 뭐래도 제1기사 바이마크의 아 들이니까. 굳어져 가는 공간을 놀리듯 바람은 자유로웠고 햇살은 따뜻했다. 움직이는 자연 물이 만들어낸 하나의 아름다운 광경 속에서 두 소년 검사의 검들은 허공을 향해 곧추세워진 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불과 열 몇의 나이를 지닌 두 검사에게서는, 잔뼈가 굵은 검사만큼의 투 기가 거칠게 솟 아올랐다. 살기가 섞이지 않은 순수한 투기. 번쩍이는 섬광과 함께 두 소년 검사의 검이 부딪혔다. 챙! 익숙한 쇳소리가 귀가 찡할 정도로 울려 퍼졌지만, 훼이드리온이나 하이마크가 그런 소리에 신 경을 쓸 위인들이 아니었다. 왕가의 상징색인 금색이 손잡이부터 가드까지 찬란 하게 도색 되어 있는 훼이드리온의 검이 맨 처음의 부딪힘과 동시에 유려하게 충격에서 헤어 나 와 하이마크의 허점을 노리며 거세게 돌진해 나갔다. 아무리 둘 다 간단한 갑옷을 속에 챙겨 입었다고 하더라도 까딱했다가는 목숨이 날아가 버린다. 그것이 바로 진검 대결의 위험이었다. 훼이드리온의 지금 공격도 하이마크의 숨을 간단하게 끓을 수 있을 정도의 위력 을 발휘한다. 그 러나 거기에 쉽게 당할 하이마크가 아니었다. 금색의 꼬리를 가진 빛줄기가 자신 의 왼쪽 옆구리 를 향해 찔러 들어오는 것을 눈치챈 하이마크의 몸이 순식간에 오른쪽으로 이동 되었다. 허공을 찌른 훼이드리온의 검이 다시 제자리를 찾아가기도 전에 하이마크의 검이 공기를 갈랐다. '위험하다!' 구경하고 있던 바이마크의 머릿속에 본능적으로 경고음이 울려 퍼졌다. 태자의 몸에 상처를 내 기 전에 하이마크의 검은 분명히 멈출 것이다. 그러나 완전히 비어버린 곳으로 공격이 들어가는 그 순간, 온몸의 근육이 팽팽하게 긴장해버린 건 오랜 세월 검을 다뤄온 '검사'이 기 때문일 것 이다. '쳇!' 공격이 허망하게 허공을 갈라버리고 쉴 틈도 없이 들어오는 하이마크의 공격을 검을 끌어들여 위로 올려치는 움직임으로 막아낸 훼이드리온은 올려치는 기세를 이용해 몸을 빙 글 돌려 처음의 자세를 잡았다. 태자가 대련을 해본 경험은 바이마크와의 대련이 전부였다(그밖에 대련들은 대련 이라고 불릴 가 치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들이라 굳이 언급하지 않는다). 그것도 바이마크가 충분 히 사정을 두는 상태에서 벌이는 것이라 그렇게 실력 향상에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단지 약점이 나 고쳐야할 점 을 하나 둘 발견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하이마크도 최선을 다하여 자신을 공격해 들어오고 있고, 자신도 그럴 의무가 있었다. 훼이드리온은 가슴속에서 뭔가가 불끈 솟아오름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하앗!" 다시 한번 공격을 펼친다. 세로로 그어지는 검은 하이마크가 피하는 방향에 따라 가로로 베어 들어가고 기사 후보생의 검에 가로막히자 다시 방향을 틀어 쉴 새 없이 공간을 파고든다. 무자 비하게 이리저리 공격해 들어오는 훼이드리온의 검을 하이마크는 그저 물 흐르는 듯 유연한 움 직임으로 거뜬히 막아내고 있었다. 검과 검의 부딪힘이 거세질수록 손목으로 흘러 들어오는 충격 또한 만만치 않게 가중되었고, 그 것은 대련을 하고 있는 둘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너무… 흥분하셨는걸.' 바이마크는 자신에게는 한없이 느리게만 보이는 훼이드리온의 검이 그리는 궤적 에 따라 눈을 움 직이며 태자의 상태에 대해 그렇게 판단했다. 아무래도 처음으로 제대로 된 대련 을 하다보니 뜻 하지 않게 자신을 주체하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보통 때라면 절대 저런 실수를 하지 않을 테지 만. 아무튼 바이마크는 흡족하게 웃을 수 있었다. 제자가 새로운 깨달음 하나를 얻을 것이 분명해지 자, 그에 따라서 아주 흐뭇해졌기 때문이다. '이제 그만하거라, 하이마크.' 그의 생각이 통한 것일까. 바이마크의 아들의 입가에 그와는 약간 다른 뜻의 미 소가 어리는가 싶더니 이내 양손으로 손잡이를 부여잡고 위에서 거세게 내려꽂히는 검날을 강하 게 후려쳤다. '어엇!' 하이마크에게서 갑자기 터져 나온 강한 힘에 미처 대응하지 못한 훼이드리온의 몸이 기우뚱 기 울어졌고, 필연적으로 전신의 허점이 군데군데 드러나 버렸다. 하이마크의 검은 공중으로 솟구쳤다가 그대로 원만한 호를 그리며 방어 불능이 되어버린 훼이드 리온의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도저히 막을 수 없는 상황. 태자는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아마 도 마법사들이 의지를 깨닫고 마력을 움직이는 순간이 바로 이런 순간이 아닐까. '으윽!' 탁. 머리 속에 최악의 상황이 그려지고 있을 때, 목을 향해 돌진해오던 검이 완벽 하게 정지해버 렸다. 불과 목젖까지 5엘리치 정도의 거리를 남겨두고. 뒤늦게 밀려오는 바람이 오만상을 찌푸 린 태자의 얼굴을 한번 훑고 지나간다. "…제가 이겼군요, 태자 저하." 아직도 눈을 뜨지 못하고 있던 태자가 자신의 귀로 들어오는 목소리를 감지하고 바들바들 떨리 는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올려 턱 쪽으로 눈동자를 내렸다. 파리한 검이 끝을 목 을 향해 겨눈 채 주인의 손길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검의 주인은 곧 검을 회수해 검집에 밀어 넣었다. "좋은 대련이었습니다." 바이마크가 다가왔다. 그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걸쳐져있는 것은 지극히 당연 한 일. 훼이드리온도 그제야 제대로 자세를 추스르고 검을 집어넣었다. 하얀 검날이 완 벽하게 모습을 감추자, 훼이드리온은 고개를 들어올려 앞에 서있는 하이마크를 쳐다보았다. 솔직 히 지금 바이 마크가 다가왔다는 것도 태자는 모르고 있었다. "고마워요, 하이…마크." 호칭 선택에 약간 곤란을 겪었지만, 그렇게 인사를 끝마쳤다. 그와 동시에 태자에 게서 감사의 인사를 받는 황송한 입장이 되어버린 하이마크는 좀 전의 대련에서 보였던 정확 하고 날카로운 몸짓은 저쪽으로 던져버리고 허둥지둥 대기 시작했다. "아, 아니요, 저, 저야말로 감사 드려야 마땅합니다!" 어쨌든 말을 끝마친 하이마크의 얼굴로 한 방울의 땀이 질주해 내려갔다. '제대 로 한 걸까?'라 고 걱정하는 그에게는 재미있다는 듯이 아무 참견도 하지 않고 지켜만 보는 아버 지의 시선이 참 으로 밉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니에요, 정말 고마워요." 급기야 고개까지 숙이려는 태자 훼이드리온. 하이마크는 허겁지겁 뜯어말렸다. "괘, 괜찮습니다! 태자 저하께서 고개를 숙이시다니요! 아버지, 뭐라고 말씀 좀 드 려주세요!" 설마 아들의 구조 요청을 무시할까, 라는 희망과 일말의 불안이 교차하는 순간. 바이마크가 빙 그레 미소지었다. "태자 저하. 하이마크도 인사를 받아들였을 겁니다. 더 이상 하셨다가는 제 아들 녀석이 너무 불쌍해지지 않겠습니까?" "네? 아아… 그렇군요." 훼이드리온은 그제야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반성하기 시작했다. 너무나 격렬하고 즐거웠던 대련 을 제공해줘서, 인사라도 해야겠다는 일념 때문에 뜻하지도 않게 아랫사람을 당 황하게 만들어버 린 것이다. 너무 감정에 솔직한 단세포 같은 점이 투기를 내뿜던 검사의 모습을 잊어버리게 만 든다. "그럼, 평을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하이마크는 사정을 두었으니 그냥 넘어가겠습 니다. 그러나, 태자 저하." "네, 네." 긴장. 지난 10년 간의 시간을 겪어오면서 자신의 스승의 성격에 대해서 한 가지 확실하게 깨달 은 것이 있다면, '정확'한 것을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제대로 이행 하지 못한 경 우가 불러오는 후환은 15세의 소년에게는 실로 무시무시한 것이었고, 특히 저런 굳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볼 때에는 반사적으로 긴장할 수밖에 없다. "먼저, '정확한 자세'가 아직 잡히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1주일 전에 지적을 해드 렸던 걸로 기 억하고 있습니다만, 전혀 발전하지를 않았군요." "아… 그러니까 그게…" "하지만, 예전보다는 정말 좋은 움직임을 하고 계십니다. 조금 더 노력해주십시 오." 뭔가 변명거리를 찾고 있을 때 갑자기 말을 끊고 들어와 기겁을 할 뻔했지만, 의 외로 좋은 내용 이 들려와 훼이드리온은 기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흥분은 금물이라는 것, 잊으셨습니까?" "아니요, 잊은 건 아니지만……" 뒷말을 잊지 못하는 태자의 태도에 바이마크는 굳어있던 표정을 살짝 풀었다. 그 의 미소가 더없 이 온화해 보인다. "이해합니다. 대련에서 어느 검사가 흥분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 흥분을 잘 제어하는 것이 훌륭한 검사인 것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음, 네."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이는 태자에게 바이마크도 그의 아들도 웃어주 었다. 저 표정 을 보고 있으면 세상에 이루지 못할 일이란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 이 두 부자의 똑같은 감정이었다. 바이마크는 몇 가지 더 제자에게 충고를 해주고, 자신의 아들에게도 가르침을 내 렸다. 둘 다 진 지한 표정으로 주억거리며 받아들이는 모습이 그에게는 더할 수 없는 행복감을 느끼게 만들었 다. '지금 왕이 이렇다면… 필로윈이 그런 생각을 하지는 않았을 텐데.' 씁쓸한 고민이 또 다시 떠올랐지만 애써 지워버렸다. 일단 이것은 아무에게도 알 려지면 안 되는 내용이었기에 그로 인한 표정 변화도 용납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얼굴을 '미소' 란 가면으로 철 저하게 덮어씌웠다. "언제부터 수련을 시작하셨습니까?" "음… 점심 먹고 바로 나왔는데……" 셋이 올려본 오파투스의 영역의 중앙을 질주하는 눈부신 빛은 서녘을 3분의 2 정 도 남기고 있었 다. 바이마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잠시 쉬시는 게 좋겠습니다." "네, 그래요." 둘의 대련을 지켜볼 때 앉았었던 그 널찍한 바위로 둘을 안내한 바이마크는 자신 이 중앙에 앉고 훼이드리온을 오른쪽, 하이마크를 왼쪽에 앉혔다. 생김새만 비슷했다면 아마 부자 (그리고 형제) 관계라고 해도 믿을 만한 광경이 그 바위 위에 연출되었다. 문득 뭔가 생각났는지 바이마크가 태자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러고 보니 잊고 있었군요." "…네?" 불어오는 바람결에 몸을 내맡기고 시원함을 즐기고 있던 태자가 그 푸른 눈동자 로 바이마크를 바라보았다. 그 푸른빛 속에 의문이 떠오르자 바이마크는 슬쩍 웃어주었다. 그때 하이마크가 자 신도 생각났는지 벌떡 일어서며 소리치기 시작했다. "죄, 죄송합니다. 저도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에?" 멍한 소리를 내는 훼이드리온. 뭔가 벌이라도 받는 자세로 하이마크가 계속 소리 를 질렀다. "하쉴로츠에서 들어온 혼담에 응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아아… 그거……." 뭐니뭐니해도, 태자는 15세의 '소년'이었다. 그 나이에 역시 '혼담'이라는 단어는 쑥스러운 것 이었다. 소년은 사정없이 뒷머리를 긁어대며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금방이라도 머리 위로 수증 기가 뿜어져 나올 듯한 모습이었다. "옳은 선택이셨습니다. 이제야 신성제국과의 연을 맺게 되었군요." '옳은 선택이라.' 바이마크의 말에 훼이드리온은 조금 씁쓸하게 웃었다. 그리고 잠시 이틀 전의 일 을 떠올려보았 다. 신성제국 하쉴로츠. 대륙 북부를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신의 나라. 국가 전체가 신의 영지로 취급되 기에 그 나라의 국민이 아닌 한, 실정을 제대로 알 수 없는 나라. 건국된 시기조차 불명확할 정도 로 오래된 역 사를 지닌 나라. 그 오래된 역사를 지나면서도 바깥 세계에 결코 자신들의 명확 한 모습을 알린 적이 없는 나라. 그런 곳이 바로 신성제국 하쉴로츠였다. 달과 운명의 여신 하실루스를 받드는 하실루스교를 국교로 하고 국민 전체가 하 실루스교의 신자 들이다. 철저하게 '신의, 신에 의한, 신을 위한' 곳이라고 풍문에는 들리는 나라이 기에, 바깥 세계와의 교류는 일체 일어나지 않았다. 물론 암암리에 일어나는 활동까지는 그 범주에 포함되 지 않지만 역시 공식적인 교류는 전혀 없는 것이다. 500년 전, '최후의 전쟁' 때에도 중립적인 위치에서 침묵만을 고수하던 그 나라가 오랜 침묵을 깨고, 자신들을 세상에 알린 것이다. 그것도 혼담이라는 목적으로. 그 목적의 목표물(?)이 된 훼이드리온은 멍한 표정으로 자신의 아버지를 올려다 보았다. "믿지 못하겠느냐? 사실 나도 처음에는 단순한 장난인 줄 알았단다. 하지만 국명 을 걸고 장난을 친다면, 그건 신의 나라로서 행할 일이 아니지 않느냐. 그래서 그 혼담을 받아들 인 것이란다." 아직도 상황 접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태자를 대신하여 공주 메이린 느가 카드리온에 게 질문했다. "혼담의 주인공은 누구죠?" 그 대답은 왕비 에스린느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신성제국 하쉴로츠의 성녀라고 하더구나. 아, 성녀란 공주를 말하는 것이라는 구 나." "우와, 그래요? 이름은요?" 에스린느는 잠시 생각하는 포즈를 취하더니 이내 남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여보, 이름이 뭐였죠?" "아이린 하이 하쉴로츠. 올해 15세로 훼이와 같은 나이이고, 은빛 머리카락과 투 명한 눈동자가 아름다운 소녀라더군. 이만하면 며느리 삼아도 정말 괜찮지 않소?" "물론이에요. 거기다 성녀다운 교양과 지식도 갖추었을 테니, 전혀 아무 문제가 없어요." 두 부부는 정해지지도 않은 미래의 일을 마치 확실한 사실인 양 들떠서 며느리에 대한 토론을 즐겁게 나누기 시작했다. "요리도 잘하면…", "외모도 매우 아름답다고 그러지 않 았소.", "네 네, 맞아요. 후훗." 그 외 기타 등등. 그러나 정작 혼담의 또 다른 주인공은 아직도 혼란 속에서 헤매고 있었다. '혼담? 혼담이면 결혼이라는 얘기잖아. 결혼? 누구하고? 하쉴로츠의 성녀, 공주? 그 신비로 둘 러싸인 신성제국 말이야? 그곳의 공주랑 내가? 이제 성년식을 치르는데? 또 후계 자 수련도 나가 야하잖아?' 물음표가 붙은 숱한 의문들이 태자의 머리 속에서 엉망진창으로 얽히고 설키는 가운데, 부인과 의 즐거운 토론에서 며느리에 대한 환상을 잔뜩 품어버린 채로 기다리고 있던 카 드리온이 참지 못하고 아들을 다그쳤다. "훼이야. 어떻게 하겠느냐. 이 일은 단순히 너의 장래만을 위한 일이 아니란다. 이 마법왕국 라 시엔트, 아니 나아가서 대륙 전체에 영향을 끼칠 지도 모르는 일이야. 그만큼 중 요함을 띄는 일 이지. 너의 현명한 판단을 기대하겠다." 말은 그렇게 해도 눈은 이미 억압적인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받아들여! 이쁜 며 느리가 기다리 고 있단 말이다!' 훼이드리온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나쁜 일은 아니었다. 아버님께서 말하신 내용들이 사실이라면 결혼해도 전혀 문 제될 것이 없는 완벽한 조건이니까. 국가에 이익이 된다면 태자로서 거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 다. '그렇지만…….' 가슴이 조금 쓰라렸다. 이미 맘은 굳힌 상태였지만, 역시 마지막까지 아쉬운 것이 있기에. '나의 배우자는… 내가 찾고 싶었는데.' 그건 소년으로서의 순수한 희망이었다. 깊이 사랑하여 일생은 같이하는 언약을 맺는 것만큼 아 름다운 일이 또 있을까. 만약 훼이드리온이 그저 어떤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평 범한 소년이었다 면, 같은 마을에 사는 어느 소녀와 그런 사랑을 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소년 은 '라시엔 트'라는 성을 가진 '태자'였던 것이다. 훼이드리온은 가만히 입을 열었다. "네, 받아들일 게요." "허허허, 역시 훼이구나!" 왕은 기분 좋게 웃었고, 왕비도 또한 입을 가린 채 덩달아 즐거워했다. 다만 공주 만이 태자의 기분을 아는 듯 의미 있는 눈빛을 보내주었다. 그게 이틀 전이었다. 자신의 결혼을 그렇게 간단하게 정해버린 날이. "성인식 때, 친히 성녀께서 이쪽으로 오신다더군요. 그래서 왕성 여러 곳이 아주 시끌벅적합니 다." 기분 좋은 듯이 웃는 바이마크. 하이마크도 뭐라고 말하며 아버지와 같이 웃었다. 훼이드리온의 귀에는 전혀 들리지 않았지만. 태자는 자신의 배우자가 될 소녀를 상상해보았다. 은빛의 머리카락. 성녀만이 가 진다는 아름다 운 투명한 눈동자. 해맑은 웃음 또한 아름답다고 했다. 비록 정확한 것은 아니지 만, 그래도 상 상 속의 소녀는 아름다웠다. 소년은 웃었다. 그 정도면… 자신의 희망을 이루지 못한다고 해도 그렇게 나쁠 것은 없다. 어차 피 성인식 날, 약혼식도 같이 올리게 될 거고, 후계자 수련을 끝내고 돌아오면 곧 바로 결혼하여 부부가 될 것이다. "괜찮으십니까?" 그런 태자의 심중을 알아차렸는지 바이마크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태자는 밝 게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래. 난 이 나라의 태자. 내 욕심만으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순순히 즐겁게 받아들이자.' 태자는 긍정적으로, 그렇게 받아들였다. ----------------------------------------------------------------- ------------------------ 안녕하십니까. 셤 기간에 태연하게 9편을 올리고 있는 속 편한 고1 팀입니다(___) 드디어 따끈따끈한 9편이 올라왔습니다. 처음부터 갑자기 마법관 소개가 나와서 조금 당혹스러 우셨을지도. 어쩌면 "정말 편한 마법관이군."이라고 돌을 던지실 지도 모르겠군요 (---) 아무튼 이 세계의 마법관은 이렇습니다. 주문이고 뭐고 필요 없습니다. 마법은 의 지입니다. 그 유명한 대마도사 페인트 라시엔트 님의 말에 의해서. 우헤헤헤. 네에, 또 추천이군요. 감격입니다(ㅠㅠㅠ) 멋진용사님 저번에 제가 아이디를 까먹었어죠(...;;;) 감사합니다(___) 열심히 할게요. YIMSY419님 추천 감사합니다. 추천연재란에... 꼭 올라가도록 하죠(---!!) 열의에 불타오르는 팀입니다(---) GFMASTER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약간의 감상까지(___) 다음 주 화요일이면 시험이 끝납니다. 그 후에는 아마도 열혈 연재모드에 돌입하게겠죠. 연재 속도 향상을 위해서(>.<) 네에, 9편을 적는데 약간의 에피소드가 있었다면. 저희 누님께서 제가 글을 열심 히 써갈기고 있 는데 갑자기 난입하셔서 저를 밀어내셨습니다. "야, 저장하면 되지?" "어.(우띠 ㅠㅠㅠ)" "헉!" "뭐, 뭐야?(---?)" "저장안함 눌렀 어..." 네에, 한편이 고스란히 날아가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이번 연재가 늦어버린 이유 인 것입니다. 약간의 의욕상실을 겪고 나서 다시 적었습니다. 눈물을 머금고. 잡담이 너무 길었군요(긁적) 그럼, 시험 끝나고 10편에서 찾아뵙겠습니다. 이제 내용상 1장이 끝나가는군요(후훗) 그럼, 이만(___) 어둠의 기사 DARK KNIGHT TEAM... P.S 추천 감상 비평 해주신 분들은 일생 동안 행운이 붙어다닌다는 소문이...;;; 번 호 : 9165 / 10423 등록일 : 2000년 07월 04일 22:42 등록자 : 암음기사 조 회 : 221 건 제 목 : [카드 게임 판타지]『 카드 마스터(Card Master) 』#010 카드 게임 판타지(Card Game Fantasy) 카드 마스터(Card Master) 10. "네?" "공주님께서 오늘 저택에 들르라고 하셨습니다." "누님께서요?" "네." 아르 집사는 공손히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태자의 방에는 다시 훼이드리온 혼자 남게 되 었다. "무슨 일이시지?" 태자는 디오느 차를 한 모금 입에 머금고 혀를 통하여 느껴지는 감미로운 차 맛 을 음미했다. 입 안을 청량하게 씻어내 주는 듯한 느낌이 정말 상쾌해 요즘 식후에는 항상 이 차 를 마시고 있었 다. 발코니를 향해 자리 잡고 있는 둥그런 테이블. 창 밖에서 쏘아져 들어오는 맑디 맑은 햇살에 반 사되어 테이블 위의 유리가 반짝 빛을 발했다. 마치 화사한 소년의 누님처럼. "뭐, 가보면 알겠지." 대충 짐작은 할 수 있었다. 그동안 그녀가 하던 일의 진행 속도를 고려하여보면 결론은 금방 돌 출 되는 것이다. 훼이드리온은 서둘러 가보자는 생각에 남아있던 차를 모조리 입 안에 흘러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마스터 카드를 들고 가야겠지?" 오랜만에 가는데 빠질 수 없는 물품이었다. 훼이드리온은 어제 저녁에 사용한 후 잘 정리해 주 머니에 넣어둔 마스터 카드를 찾았다. 언제나 그렇듯이 침대 옆 서랍장 위에 갈 색주머니가 얌전 히 올려져있었다. 소년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냉큼 그것을 집어들고, 허리춤에 묶었다. '또 들고 갈 게 없을까?' 하는 눈길로 방안을 휙휙 둘러보던 훼이드리온은 이내 옷을 몇 번 털 고 밖으로 향했다. "아, 태자 저하. 나가십니까?" 복도로 나오자, 빨래감인 듯한 천들을 들고 서둘러 달려가고 있던 시녀 하나가 꾸벅 인사를 해 왔다. 훼이드리온은 자신보다 키도 작고 나이도 적은 그녀에게 웃으면서 "응."이 라고 대답했다. 그 후에 시녀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는 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사항일 것이다. '왜 그러지?' 순진한 태자는 갑자기 얼굴색을 바꾸고 서둘러 복도 끝을 향해 냉큼 달음질을 치 는 시녀의 뒷모 습을 보면서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었다. 소년은 자신의 외모에 대한 자각이 전혀 없기 때 문에 가능한 행동이었다. 아무튼 목을 긁적거리며 밑층으로 내려가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웃고 있는 아르 집사가 문 앞에 서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지금 가십니까?" "네. 그럼 다녀올게요." "안녕히 다녀오십시오." 문을 열어주며 배웅하는 아르 집사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훼이드리온은 햇살이 눈부신 저택 밖 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메이린느의 전언을 들은 것이 점심을 먹고 난 직후의 일이니, 지금 시각은 대충 정오에서 조금 지났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하루가 지나려면 아직도 한참 멀었다. 훼이드리온은 이마에 손을 짚어 그늘을 만들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늘은 구 름조차 보이지 않는, 정말 청량한 하늘이 시선의 끝에 있었다. 벌써 2주일 가량 비도 내리지 않 고 맑은 날의 연속이라서 이제 질릴 때도 된 듯하지만, 소년은 맑은 날을 선호하는 편이기에 기분만 더 좋아 졌다. 메이린느의 저택으로 향하는 길을 들어서며 태자는 생각했다. '어떻게 만드셨을까. 원래 가정적인 분이시라 믿고 있지만.' 아무래도 메이린느가 오늘 저택으로 부른 이유는 성인식 날 입을 의상 때문일 것 이다. 한번 일 을 잡으면 마칠 때까지 두문불출하면서 완성하고 마는 성격을 가지고 있는 그녀 라 오늘쯤이면 이미 거의 완성되었을 것이다. 또 실력 또한 특출할 정도로 훌륭해서 은근히 믿 음까지 가고 있 었다. 그녀는 누구보다 훼이드리온을 잘 아는 사람이니까. 내궁으로 가는 길은 항상 그렇듯이 즐거웠다. 거기다 그동안 보지 못했기에 그 즐거움은 배로 늘어나 있는 상태였다. 날씨도 맑고 누님도 볼 수 있고 해서 상당히 즐거운 걸음 으로 내궁까지 한달음에 달려갔다. 수련의 덕택으로 체력은 일반 소년들보다 훨씬 좋은 훼이드리온이 조금 숨이 찰 무렵 언제나 지 나치는 오솔길로 들어섰다. 이 길을 지나 큰문을 하나 지나치면 메이린느의 저택 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태자는 두 다리에 더욱 힘을 주었다. "와아… 여전하네, 이곳은." 순수하게 감탄하며 넓게 펼쳐진 정원을 둘러보았다. 마치 이곳만 다른 세계인양 '환상'적인 모 습에 잠시동안 취한 듯 바라보고 서 있다가 이내 다시 걸음을 옮겼다. 저택은 성 큼 소년 앞에 다가왔다. 흰색이 칠해진 밝은 현관 앞에 서자, 역시 자동으로 문이 서서히 열렸다. 그곳에 서 하론 집사가 외눈 안경을 고쳐 쓰며 걸어나왔다. "오랜만입니다, 태자 저하. 그간 안녕하셨는지요." 정중하게 안부를 묻는 그에게 훼이드리온은 미소를 지었다. "네, 별일 없었어요. 뭐, 시끄러워도 시끄럽지 않은 듯이 느껴지는 곳이 이곳 아 니겠어요?" "네, 그렇군요. 들어오시죠." 수긍하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던 하론 집사는 태자를 저택 안으로 인도했다. 고풍 스러운 디자인 이 돋보이는 홀이 깔끔하게 정리된 모습으로 훼이드리온 앞에 나타났다. "공주님께서는 2층 의상실에 계십니다." "네, 고마워요." "아닙니다. 올라가 보시죠. 기다리실 겁니다." 훼이드리온은 금발이 살짝 움직일 만큼 고개를 끄덕이고 2층으로 올라갔다. 계단 을 지나 2층 복 도에 도착할 때까지 지나다니는 시종들에게 인사를 받으면서. 의상실은 메이린느의 방과는 반대쪽 방향에 있었다. 소년은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누님이 있 을 의상실로 향했다. 계단에서 오른쪽으로 세 번째 방. 그 곳이 의상실이었다. 똑똑. 타인의 방을 방문할 때 예의의 기본인 노크 소리가 가볍게 울려 퍼지자 방안에서 청아한 느낌을 가진 목소리가 들렸다. 메이린느, 그녀였다. "훼이니? 들어오너라." '어, 어떻게 아신 거지?' 노크 소리가 남들과 틀릴 리는 없을 것이다. 아무리 차이가 있더라도 그런 극소 한 차이가 구별 이 될 리 없다. 아무리 섬세한 성격을 가진 누님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훼이드 리온은 고개를 잠시 갸우뚱거려보다가 이내 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안녕하셨어요, 누님." "응, 물론." 왼편에는 붙박이 형식의 옷장들이 한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고, 그 앞에 재단에 이용되는지 옅 은 아이보리색의 테이블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문과는 반대편 벽면의 창문 옆 에서 메이린느 가 밝게 웃으면서 훼이드리온을 반기고 있었다. 그녀의 손은 아직 미완성인 듯한 모습을 갖추고 있는 훼이드리온의 성인식 의상 위에서 바쁘게 돌아다녔다. "조금만 더 만지면 되니까 거기 앉아 있겠니?" "네. 천천히 하세요." 빙긋이 웃어 보이는 메이린느에게서 눈길을 떼지 않으며, 훼이드리온은 재봉틀이 놓여있는 선반 을 지나 창문 앞에 마련되어져있는 작은 테이블과 의자들로 향했다. 미리 준비해 두었는지 테이 블 위에는 작은 소쿠리 안에 여러 모양의 쿠키들이 준비되어있었다. 소년은 자신 의 의상을 만들 고 있는 누님을 구경하며 쿠키를 하나씩 입에 물었다. 조금 시간이 흐르자, 메이린느가 "후……"하는 한숨을 길게 내뱉더니 이마를 손으 로 훔치며 훼 이드리온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이쪽으로 와주겠니?" "네? 아, 네." 손에 들고 있던 하트 모양의 쿠키를 어떻게 처리할까 순간적으로 고민에 빠지고 만 훼이드리온은 그냥 한 입에 쏙 넣어버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맛있니?" 끄덕끄덕. 입에 든 쿠키 처리에 힘을 기울이던 터라 뭐라고 대답은 하지 못하고 그저 주억거렸 다. "자, 이거 한번 입어보렴." 이빨로 잘 분쇄되고 침으로 충분히 녹아 내린 쿠키가 훼이드리온의 목을 통하여 위장으로 넘어 가자, 타이밍도 좋게 메이린느가 소년에게 그 미완성 의상을 내밀었다. 두툼한 옷 거리에서 벗겨 진 옷을 받아든 훼이드리온은 양손으로 옷의 어깨부분을 잡고 잠시 감상을 해보 았다. 전체적으로 정장의 형태를 이루고 있었는데 목 부분은 턱 아래 부분까지 오도록 넥을 세웠고 양 쪽이 완전한 대칭을 이루도록 완벽하게 재단되어있었다. 그 재단선 또한 약간의 흔들림도 없이 끝까지 주욱 이어져 있었다. 직접 손으로, 그것도 혼자서 했음에도 불구하고 메이 린느는 이런 밑바탕 의상을 근 7일만에 만들어낸 것이다. 그런 누님의 솜씨에 훼이드리온은 진심으로 감탄했 다. 밋밋한 흰 바탕이 나중에는 어떻게 변해있을지, 벌써부터 기대가 됐다. 메이린느는 잠시 뒤로 돌게 해서 옷을 껴입기 시작했다. 입고 있던 옷의 상의는 벗어서 기본적 인 속옷 상태로 만들고 그 위에 흰 정장을 입었다. 그리고 바지도 마찬가지의 과 정을 통하여 입 었다. "다 입었니?" "네, 이제 돌아서셔도 되요." 그 말에 메이린느는 가볍게 몸을 돌려 동생을 바라보았다. 훼이드리온이 단추를 단단히 다 채우 고 넥을 바로 세우자, 메이린느가 아래위로 천천히 훑어보면서 물었다. "불편한 부분 없니?" "음…… 아니오. 편해요." "어디 봐." 훼이드리온이 양팔을 들어올리자 메이린느가 직접 손으로 옷과 몸의 틈을 확인하 고 재단선의 방 향 등등을 일일이 확인했다. 그렇게 꽤 긴 시간이 지나가고 들어올린 팔 때문에 태자가 어깨가 뻐근해지는 느낌을 받을 즈음에 메이린느가 드디어 고개를 들었다. "으음, 치수는 그럭저럭 됐고 길이도 적당하고. 이제 치장만 하면 끝나겠어. 이제 벗어도 돼." 다시 메이린느가 뒤로 돌고 주섬주섬 옷을 벗으며 훼이드리온이 물었다. "어떻게 치장하실 건데요?" "훗, 그건 비밀. 미리 밝혀버리면 재미없지 않겠니? 우리 귀여운 훼이가 일생에 한번 있는 성인 식 때 입을 건데 말이야." '역시 가르쳐주지 않으시는구나.' 누님께서는 자신의 기뻐하며 놀라는 얼굴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훼 이드리온은 나름 대로 수긍하며 다시 옷을 챙겨 입었다. 옷을 다 갈아입고 성인식 의상을 메이린느가 다시 옷걸이에 걸어두는 사이 소년 은 아까 그 테이 블로 돌아왔다. 바깥에서 들어오는 햇빛으로 인해 훈훈하게 데워진 의자 위에 앉 으려던 소년은 누님이 또 일을 시작하려하자 급히 말렸다. "지금 시작하시려구요?" "응? 아아, 빨리 끝내는 게 좋잖니." "그래도 오랜만에 제가 왔는데…… 잠시 쉬다가 하시는 게 어떠세요?" 필시 저 옷을 만들면서 꽤나 무리를 했을 것이다. 어쩌면 밤에 제대로 잠도 자지 못하고 말이 다. 훼이드리온은 충분히 그럴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누님을 걱정하여 철저하게 쉬는 쪽으로 기 울어지게 만들었다. '투정'이라는 무기로. 예전부터 이 공주는 동생의 투정에는 절대 이기지 못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 지였다. "그럼 그럴까?" 빙긋 웃는 메이린느에게 훼이드리온이 고개를 끄덕여줬다. 그녀는 곧 테이블로 다가와 동생의 반대편에 앉았다. "이제 6일 남았구나." "그거 밖에… 남지 않았나요." 훼이드리온의 15세 생일이면서 성인식인 날이 이제 6일 남았다는 사실이 메이린 느의 마음을 무 겁게 짓눌렀다. 성인식이 끝나고 나서 훼이드리온은 전통에 따라 후계자 수련을 떠나야하는 것 이다. 목적하는 바를 이루기 전까지는 돌아올 수 없는 여행을. '이제 15세인데, 아직 내가 돌봐 줘야할 게 더 많은 나이인데… 괜찮을까?' 스스로 자문해봤자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이 짙게 내려앉았다. "걱정되시나요?" 메이린느의 표정으로 그녀의 심중을 읽어낸 훼이드리온이 물어왔다. 그녀는 살짝 고래를 끄덕였 다. "조금. 안될 리가 없잖니." "그렇겠죠. 하지만." 그녀가 훼이드리온의 푸른 눈을 바라보았다. 소년이 말을 이었다. "믿어주세요, 누님. 저 그렇게 나약하지 않아요. 여행을 떠난다는 사실에 그저 흥 분되기만 하는 걸요. 전혀 두려운 마음은 들지 않아요." "하지만 여행이란 건 매우 위험한 것이란다. 아직 훼이가 알지 못하는 것이 더 많아." "네, 알아요." 소년의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 푸른 눈이 빛을 내기 시작한다. "그렇긴 때문에 더 흥분되는 거예요. 제가 알지 못하는 세상을 경험한다는 것만 큼, 더 가슴 뛰 는 일이 있을까요? 차라리 전 일부러라도 그곳에 뛰어들고 싶은 걸요. 그게 여행 의 목적을 이루 는 데는 도움이 될 거구요." 소년은 여유로웠다. 걱정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얼굴로 누님에게 그렇게 말했다. 메이린 느는 걱정스러웠다. 저 모습을 잃으면 어떡할까. 하지만 믿고 싶었다. 동생의 눈 이 그렇게 말하 고 있었다. '절대 져버리지 않아요, 누님의 믿음을.' 그녀는 동생을 믿기로 했다. 동생은 자신이 해야할 일을 정확히 알고 있었고 또 어떻게 해야할 지 알고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 운명 앞에 당당했다. '…변했다?' 그랬다. 소년의 모습이 변화를 겪고 있었다. 태자의 위엄을 사용하지 않으면 전혀 보여지지 못 했던 당당한 모습이 지금은 자연스레 느껴질 정도로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 었다. 두 눈은 푸르렀고 그 모습 또한 곧았다. 어떤 일이 있어도 굽혀지지 않을 만큼. 무엇이 소년 훼이드리온은 당당한 태자의 모습으로 변화하게 한 것일까. 메이린 느는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완전히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여행 목적을 무엇으로 정했니?" 아까보다 한결 부드러운 표정으로 누님이 물어오자, 훼이드리온도 이내 다시 귀 여운 동생의 모 습을 돌아가 버렸다. "헤에… 그러니까 말이죠." 소년이 주섬주섬 허리춤에서 뭔가를 풀어 들었다. 갈색주머니, 마스터 카드가 들 어있는 갈색주 머니였다. "마스터 카드를 쫓아보려고 해요. 다행히도 후계자 수련에는 기간 제한이라는 것 이 없어서, 이 번 기회에 마스터 카드라는 신비로운 게임의 모든 것을 알고 돌아오겠어요." 메이린느는 그렇게 놀라지 않고 다만 담담히 웃어줄 뿐이었다. 자신도 왜 놀라지 않는지는 이해 가 되지 않았지만 슬며시 짐작은 할 수 있었다. 어쩌면 이미 예상하고 있었는지 도 모른다. "그래, 어떤 방법으로?" "흐음. 사실 그것 때문에 걱정이에요. 일단 나중에 왕성 서고로 가서 필요한 자료 들을 찾아볼 거예요. 그리고 나머지는 그 후에 생각해보죠, 뭐." 아직 6일이나 남았다는 생각에 태자는 여유가 있었다. 차근차근 여행 계획을 세 워나갈 생각이었 던 것이다. 메이린느가 한가지 제안을 했다. "마스터들을 만나보면 어떻겠니?" "마스터들이요?" "그래, 카드 마스터들. 마스터 카드 게임에서 마스터라는 칭호를 얻었다면 마스터 카드에 따른 지식도 있지 않겠니? 도움이 될 것이라고 봐." "아아, 그렇군요. 고마워요, 누님." "천만에." 둘은 마주보며 빙그레 웃었다. 남매라서 그런지 웃는 모습이 정말 똑같았다. "꼭 목적을 이루고 돌아오렴." "에이, 누님. 그런 작별인사는 그때 가서 해도 되잖아요? 지금은 그런 말하지 마 세요." "후훗, 그럴까?" 잠시 떠난다고 생각하면, 훼이드리온도 가슴이 아팠다. 다시 돌아올 테지만 그때 까지 얼마나 그 리워할까. 그런 마음 때문에 훼이드리온도 스스로 울적한 기분을 눌러왔던 것이 다. 이것도 소년의 달라진 점이었다. 불과 몇 주전만 하더라도 감정이라고는 숨길 줄 모르던 그런 철부지였었다. 하지만 이젠 감정을 조절할 줄 알게 된 것이다. 비록 지금은 음울 하고 울적한 감 정을 숨기는 게 고작이지만, 나중에는 과연 어떻게 달라져있을까. '기쁨, 노여움, 그런 감정들까지 스스로 통제할 수 있지 않을까?' 지금까지 그렇게 노여워해 본 적은 없지만, 딱 한 경우, 마스터 카드 게임에서 지 려고 할 때 그 런 기분이 들었었다. 너무 실력이 모자라다라는 걸 깨닫고 정말 자신에게 화가 났던 것이다. 그 때는 자신의 저택으로 돌아와서 혼자서 분을 풀었다. 덕분에 검에 의해 베여진 커튼이나 이불을 교체한다고 시종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녀서 좀 미안해했던 기억이 있었다. '그때 참 놀랐었지. 나에게도 이런 감정이 있구나, 하고 말이야.' 진정으로 화를 내본 적이 없던 지금까지의 모습이 이상하게 생각될 정도였다. 기 뻤다. '노여 움'이라는 감정을 깨달았다는 것이. 언젠가는 이 노여움도 제어할 수 있지 않을 까. 태자는 자신 의 가능성에 대해 너무나 기대를 하고 싶었다. "아참, 쉬는 김에 마스터 카드 게임을 즐기는 건 어떠세요?" "마스터 카드? 으음, 그럴까?" 긍정적인 메이린느의 반응에 훼이드리온이 즐겁게 갈색주머니를 풀어서 안에 가 득 들어있는 마 스터 카드를 몽땅 테이블 위에 꺼냈다. 많이 다뤘는데도 손떼 하나 묻지 않고 깨 끗한 마스터 카 드들이 옆으로 스르륵 쓰러지며 재미있는 형상을 만들어냈다. "그동안 실력을 많이 늘었니?" 손을 뻗어 카드를 정리하던 메이린느가 웃음을 띄우며 물었다. 그녀가 두문불출 을 시작한 이후 로 대전을 전혀 하지 못한 훼이드리온의 실력이 조금이라도 오를 턱이 없었지만, 의기양양하게 소년은 대답했다. "물론이죠! 쉽게 이기지 못하실 걸요?" "훗, 과연 그럴까?" 둘 다 이번 게임이 서로 마주 보고 할 수 있는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성심 성의껏, 발휘할 수 있는 최대의 기량을 발휘하여 공격하고 방어하고 비술을 펼쳐 나갔다. 한 장 한 장 펼쳐놓는 손짓도 어느 때보다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였고, 한번씩 차례가 지날 때마다 이 마에 맺히는 땀방울의 개수도 늘어갔다. 그래서 더없이 즐거운 게임이었다. 뜨겁게 달아오르는 열전 속에서 시간은 즐겁게 흘러갔다. ----------------------------------------------------------------- ----------------------- 안녕하십니까, 오늘 드디더 시험이 끝나서 홀가분할 대로 홀가분한 팀입니다(___) 약속드릴 대로 오늘부터 열혈 연재 모드 돌입입니다(불끈) 단숨에 1장을 끝내고 2장으로 들어가 야겠죠. 아아, 쓰고 싶어서 근질근질하는 것을 참고 있습니다. 일단 이분들께 감사드려야겠죠. 추천해주신분들. 젤라니아님. 추천 감사합니다. 더 열심히 쓰도록 하겠습니다(___) 마도여왕님. 마찬가지로 추천 감사합니다. 훼이를 좋아하시나보죠? 하핫, 제 자식을 사랑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___) NEOGEO99님. 추천 감사합니다. 더욱 더 건필하겠습니다(불끈) JOONO418님. 추천 감사합니다. 개인적인 질문인데요. 혹시 이름이 주노이십니 까?(---) 아니라면 죄송합니다. 아무튼 더욱 더 열심히 해서 마음에 드는 글 을 쓰도록 하겠습니다(___) 추천해주신분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일생동안 행운이 따라다닐 겁니다. 아 마도. 건필건필(---!!) 이제 10편을 넘었습니다. 아니 11편이 되야지 넘은 건가? 그럼 절망하고 말 거예 요. 지금 추천해주시려는 분들. 조금만 참으셨다가 11편이 올라오면 해주시길. 신 추 천규정을 보니 연재수가 10편을 넘겨야한다더군요. 우우. 그말 듣고 뒤집어졌습니다. 벌써 받은 추천 8개가 고 스란히 날가버리다니. 하지만 추천해주신 분들. 정말 감사합니다. 열혈 연재모드로 더욱 좋은 글을 쓰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이만(___) 어둠의 기사 DARK KNIGHT TEAM... P.S 추천 감상 비평 언제나 기억하고 있겠습니다. 번 호 : 9233 / 10423 등록일 : 2000년 07월 07일 00:08 등록자 : 암음기사 조 회 : 201 건 제 목 : [카드 게임 판타지]『 카드 마스터(Card Master) 』#011 카드 게임 판타지(Card Game Fantasy) 카드 마스터(Card Master) 11. 어둑어둑한 하늘. 너무 맑아서 질릴 정도였던 하늘인지라, 밤하늘도 맑아서 쉼터 로 미처 돌아가 지 못한 구름들의 행진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훼이드리온은 그런 하늘을 우러러보며 한발한발 앞으로 내딛고 있는 중이었다. 잘 포장된 길이 라 삐죽 튀어나온 돌부리 같은 건 일부러 찾으려고 눈에 불을 켜고 찾아도 찾을 수 없기에 목을 완전히 뒤로 꺾은 채 돌아다녀도 상관없었다. 다만 방향감각이 제 기능으로 작동 되고 있어야한 다는 조건이 있을 뿐. "아아, 너무 늦었나." 확실히 늦은 시간이었다. 본래 계획으로는 땅거미가 드리우기 전에 메이린느의 저택에서 나와서 왕성 서고를 들러 자신의 저택으로 가는 것이 올바른 행로였는데, 완전히 시간이 엉망이 되어버 렸다. 지금은 땅거미는커녕 간간이 구름의 진로에 걸려 빛을 잃고 마는 하실루스 의 상징이 저 어두운 오파투스의 영역의 한 중간에 달려있는 시간이었다. "너무 많이 놀아버렸네." 계속 시선은 하늘을 향해 둔 채로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러다가 곧 두 손을 깍지 끼고 그것을 머 리 뒤쪽에 대고 지탱하는 포즈를 취했다. 역시 이 자세가 편했다. 오늘이 후계자 수련을 떠나기 전 메이린느와 마스터 카드를 할 수 있는 마지막이 라고 생각하니, 메이린느나 훼이드리온이나 쉽게 헤어질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한번 더?", "딱 한 번만 더 하 자."라고 계속 헤어짐을 미루다가 결국 이 시간에 저택을 나오게 된 것이었다. 뭐, 시간이 늦었다고 해서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후계자 수련을 떠나면 오랜 시 간동안 보지 못 할 텐데, 그만큼 추억을 더 만들어서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꽤나 오랜만에 느껴 보는 밤바람이 훼이드리온의 기분을 한층 더 격양시켜주었다. 오솔길을 다 내려와서 큰길로 접어들었다. 하나의 작은 마을을 형성하고 있는 왕 성 내에는 이처 럼 큰길, 작은 길들이 여기저기로 뻗어있었다. 그 뻗은 가지들도 좀 복잡해서 훼 이드리온도 자 주 다니는 길만 겨우 외우고 있는 수준이었다. 왕성에 사는 사람들 중에서 길을 모조리 다 외우 고 있는 사람은 아마도 왕성 수석마법사 필로윈과 그 외 몇 명뿐일 것이다. 훼이드리온은 자신의 저택으로 가는 길을 머릿속에 떠올려보다가 곧 생각을 바꾸 었다. "조금 멀리 가면 되니까, 그냥 왕성 서고에 들렀다갈까?" 이 큰길로 계속 걸어가다가 처음 나오는 왼쪽으로 갈라지는 길을 따라서 내려가 다 보면 왕성 서 고가 나온다. 자신이 기억하는 몇 안 되는 길인 왕성 서고 가는 길을 떠올리며 훼이드리온은 앞 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어렴풋이 갈림길이 눈에 들어왔다. '여행갈 때 책 하나 들고 가는 것도 좋겠지? 심심할 때 읽으면 되니까 말이야. 아니, 무겁지 않 을 만큼 들고 가야겠다. 시간도 넉넉할 테니, 뭐.' 때마침 허리춤에 묶인 갈색주머니가 다리의 움직임에 맞춰 흔들리더니 훼이드리 온의 허벅지를 가볍게 쳤다. 소년의 시선이 갈색주머니를 향했다. "그래, 대마도사에 관한 책을 들고 가볼까? 도움이 될 지도 모르는데." 마스터 카드의 창안자가 바로 그 대마도사이니, 가져가면 언젠가 필요할 때가 있 을 지도 모른 다. 훼이드리온은 있다면 그 책을 가져가기로 스스로 결정을 지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이런저런 사색에 빠져 어두운 길을 걸어가고 있던 훼이드리온 의 시야에 흐릿 한 빛의 흔적이 잡혔다. 고개를 들어 빛이 발하는 곳으로 눈동자를 돌렸다. 층마 다 아직도 마법 의 등이 하얗게 빛을 뿜어내고 있는 도서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각 층마다 세 개의 방이 있고, 3층까지 솟아있다. 어두워서 그런지 어떤 색깔을 지니고 있는지 는 구분하기 어렵다. 다만 주변에 높은 나무가 없어서 달빛을 그대로 받아, 마치 뭐라고 설명하 기 어려운 고고한 분위기를 자아낸다는 것말고는 특별히 설명할 거리도 없어 보 인다. 어느 지역 의 서고와 그렇게 틀리지 않은 건물이었다. "어?" 그 서고라는 가치와 상당히 잘 어울리는 고고한 분위기를 가진 건물의 현관을 향 해 걸어가던 훼 이드리온의 눈에 낯익은 인물의 모습이 잡혔다. 어두운 배경에서 더욱 눈에 띄는 푸른빛이 도는 머리칼과 노란 빛을 머금은 큰 눈. 바로 필로윈이었다. "디바이어 경?" 땅을 내려다보며 뭔가 끼어 들기 거북한 장면을 생성해내고 있던 그의 걸음이 느 려지더니, 이내 고개가 들렸다. 허공에서 노란 눈과 푸른 눈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아니, 태자 저하 아니십니까?" 반가운 것인지, 아니면 아닌 것인지 쉽게 구분이 가지 않는 어조였으며 음성이었 다. 어쨌든 오 랜만에 만났다는 이유로 태자는 가볍게 미소를 띄우며 답했다. "안녕하세요 디바이어 경. 어디 가시는 길이세요?" 필로윈이 다가왔다. 어느새 그의 얼굴에는 방금 전의 아리송한 태도는 지워져 흔 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낮 동안 국가에 정성을 쏟았으니, 이제 가정에 정성을 쏟을 시간이지요. 늦어서 바삐 이 길로 가는 중이었습니다. 태자 저하께서는 서고에 가시는 길이십니까?" 필로윈의 눈이 서고로 향했다. 태자가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다시 그가 물었다. "혹시 도움이 필요한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필요하신 책이 있으시면 찾아드리겠 습니다. 왕성 서 고 안의 책이라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니까요." 마법사는 탐구하는 자다. 탐구라는 과제를 수행하는 데 있어서 문헌 정보만큼 중 요한 것도 또 없다. 그런 이유로 필로윈은 이미 왕성 서고 안의 책들을 한번씩 다 봤다고 하더 라도 과언이 아 닐 독서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훼이드리온은 고민하는 표정이 되었다. "그럼… 대마도사 페인트 라시엔트 님에 대해서 서술한… 그런 책은 없나요?" "대마도사님에 대해서 말입니까? 글쎄요. 아시겠지만, 그분에 대한 자료는 말소되 다시피 해서 있는 게 희귀할 정도라서요. '마법왕국 라시엔트 건국기' 같은 국사기록서적을 조 사하시면 필요 한 정보를 찾으실 수 있을 지도 모릅니다만, 갑자기 마법에 흥미라도 생기셨습니 까? 갑자기 대 마도사 페인트 님에 대해 관심을 보이시다니요." 그렇게 말하는 필로윈의 얼굴에서 태자는 비릿한 위화감을 느꼈다. 절대 눈앞에 있는 이 사람에 게는 어울리지 않을 법한 느낌. 그러나 곧 지워져버려서, '착각이겠지.'라고 덮어 버렸다. "헤, 그런 게 아니구요. 사실 후계자 수련의 목적을 '마스터 카드에 대해서 조사' 로 정했거든 요. 창안자에 대해서 알면 좀 더 쉬울 것 같아서요." "아… 그러십니까." 필로윈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훼이드리온은 그 웃음에서 방금 전에 감지했던 위 화감은 착각이 었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아참." 그때, 태자의 머리 속에 잊고 있던 사실이 떠올랐다. "디바이어 경도 마스터 카드를 다룰 줄 아셨죠?" "하하, 네. 그렇습니다." "그럼, 마스터 카드에 대해 잘 아시겠네요?" 필로윈은 노란 눈동자를 반쯤 눈꺼풀로 가려버리는 눈웃음을 짓고는 미안한 듯 자세를 풀었다. "글쎄요, 게임 방식이라면 책을 썼을 정도로 해박하긴 하지만, 저 역시 그 게임에 대해서 자세 히 알지는 못합니다. 그저 창안자와 대충 따져본 역사 정도가 다입니다." "음… 그런가요." 시무룩한 표정이 되어버린 태자에게 필로윈은 빙긋이 웃어 보였다. "실망하실 것 없습니다. 밖으로 나가시면 마스터 카드에 대해서 많은 지식을 쌓 은 자가 틀림없 이 있을 테니까요. 카드 마스터들도 있고, 아니면 '카드의 현자'를 찾아가셔도 충 분히 많은 것 을 얻으실 수 있을 겁니다." "카드의 현자?" 낯선 단어에 훼이드리온은 귀가 솔깃해졌다. 카드의 현자. 척 들어도 카드에 대해 서 뭔가 많은 것을 알고 있을 듯한 분위기. 거기다 현자라고 불릴 정도니 할말 다했다고 해도 괜찮을 것이다. "네. 현재 마스터 카드 게이머 중 마스터의 칭호를 받는 사람들 중에 최고령으로 서, 실력 또한 최상위라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거기다 '카드의 현자'라는 칭호에서 알 수 있듯이 일생을 마스 터 카드 연구에 다 써버린 분이라고 합니다." "와아, 그럼, 그분만 찾으면 되겠네요?" 태자의 얼굴에 눈에 띄게 회색이 돌았다. 운 좋게도 수련은 물론이고 지적 호기 심 또한 쉽게 채 울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태자를 내려다보고 있는 필로윈의 표정은 그리 밝 지 못했다. "허나… 대부분의 현자들이 그렇듯이 그분도 '은둔자'라는 별칭을 있으실 정도로 세상에 나타나 지 않으십니다. 제가 뵈었던 때도, 벌써 10년은 더 되었군요. 아직 건강을 유지하 신 채 이 대륙 어딘가에서 마스터 카드를 연구하며 살고 계실 거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정확한 행적은 밝혀진 바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태자 저하." 필로윈은 사과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은둔자'라는 단어가 그의 입에서 튀어 나왔을 무렵부 터 이미 태자의 얼굴은 실망감으로 도배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그는 거듭 죄송하 다며 고개를 숙 였다. 훼이드리온이 고개를 좌우로 작게 흔들었다. "아니, 아니에요. 미안해하실 필요 없어요. 일단 한가지 희망은 생겼으니 됐어요. 마지막 수단 으로 생각하고 있을게요. 카드의 현자…의 성함이 어떻게 되죠?" 필로윈은 잠시 생각하는 표정이 되었다가 곧 대답했다. "'쇼너 히브리드'입니다." '쇼너 히브리드.' 훼이드리온은 그 이름을 머리 속에 단단히 박아두었다. 도저히 일이 풀리지 않을 때는 카드의 현자가 마지막 희망이 될 것이 분명하니까. 훼이드리온이 그렇게 이름을 되새기고 있을 때, 문득 약한 콧소리를 내면서 필로 윈이 말했다. "흠… 그럼 후계자 수련 때 지금 가지고 계신 마스터 카드를 들고 가실 계획이십 니까?" 너무나 당연한 말이기에 태자는 간단히 고개만을 끄덕였다. 푸른 눈이 필로윈의 말을 기다리면 서 출렁인다. "그럼 전에 말씀드리지 않은 이야기가 있는데… 이 자리에서 해야겠군요." 그의 표정이 더없이 진지해졌다. 항상 장난기 섞인 미소를 지으며 나이를 잊고 지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그였지만, 진지할 때는 세월의 연륜을 무시하지 못할 모습을 보여 준다. 진지하게 격양된 얼굴로 그가 진지하게 말했다. "태자 저하께서 가지고 계신 마스터 카드를 비밀 창고에서 찾았다고 하셨지요?" "네, 그랬었죠." 태자는 필로윈이 메이린느의 저택에 찾아왔을 때 그에게 해주었던 이야기를 떠올 렸다. "그때 한가지 알아낸 사실이 있었습니다. 말씀드리지 않아도 큰 영향은 없을 듯 해서 지나쳤었지 만, 이젠 말씀을 드려야할 것 같군요." "무슨 이야기인데요?" 훼이드리온의 얼굴도 덩달아 진지해졌다. 사방은 고요한 정적 속에 둘러싸여 간간이 불어오는 밤바람만이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 려주고 있었다. 필로윈이 개성 없는 자신의 목소리에 '걱정'을 실어 입 밖으로 내보냈다. "마스터 카드는 대마도사님께서 직접 만드신 것입니다." "네?" "설명해드리자면, 비밀 창고의 네 번째 문, 그 방에는 대마도사의 봉인이 걸려있 었습니다. 지금 껏 500년 동안 아무도 그 문을 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문을 태자 저하께서 열고 들어가셔 서 그 카드를 가지고 나온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아시겠습니 까?" "아아, 잠깐만요. 그러니까, 제가 그 봉인을 풀어버렸다는 건가요?" 필로윈의 고개가 작게 움직였다. "영구적이 아니라, 일시적이라는 것이 아쉽지만, 그렇습니다. 태저 저하께서 잠시 동안 그 봉인 을 풀어버리신 것입니다." "그게… 가능한 것인가요?" "그 점은 저도 모르겠습니다. 대마도사님의 마법은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마법과 는 무엇이 다른 것인지 어떠한 의지로도 풀리지 않았습니다. 전해 내려오는 말로는, '언젠가 나와 같은 자가 그 문을 열 것이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훼이드리온의 눈이 번쩍 뜨여진 건 절대 무리가 아닐 것이다. 필로윈의 말속에는 그만한 위력을 지닌 구절이 있었으니. "그렇다면 제가 대마도사와 '같은 자'라는 건가요? 어떻게 같다는 거죠?" 태자의 의문과 놀라움이 섞인 외침에 필로윈이 깊게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건 앞에서도 말씀드렸다시피 알 수 없습니다. 아무튼 지금은 그 점을 넘어가 기로 하고,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입니다. 대마도사가 왜 그런 봉인을 걸었다고 생각하십니 까?" 훼이드리온은 진지한 자세로 곰곰이, 아주 곰곰이 생각하다 대답했다. "뭔가 아주 중요한 게 있기 때문 아닐까요?" "네, 그렇습니다. 실제로 그 봉인이 걸린 방에 대마도사님께서 생전에 남기신 저 서가 물품들이 보관되어있다고 합니다. 그분이 자신의 기록이 남겨지는 걸 싫어하셨다는 것은 잘 알고 계시 죠?" "물론이에요. 그럼 제가 들어가서 봤던 그 책장에 정리되어있던 책들이 건국왕께 서 남기신 저서 라는 건가요?" "하, 정말 있었단 말입니까? 이거 정말 군침 도는 일이 아닐 수 없군요." 역시나 마법사의 본성을 이기지 못하고 딴 길로 새려고 하는 필로윈. 곧 정신을 차리고 흩어지 려는 이야기를 바로 세웠다. "흠흠. 네, 그러니까 그 안에 있는 것은 모두가 대마도사님께서 직접 만드신 것들 입니다. 그러 니 그 마스터 카드들도 당연히 그분께서 제작하신 것들 중 하나인 것이죠. 그래 서 말입니다, 태 자 저하." "그래서요?" 본의 아니게 서론이 너무 길었다고 생각한 필로윈은 서둘러 본론을 꺼냈다. 훼이 드리온의 푸른 눈이 노란 눈동자를 향해 고정됐다. 태자의 손은 어느새 절대 놓지 않으려는 듯 이 갈색주머니를 꽉 잡고 있었다. "밖에 나가시면, 마스터 카드를 소중히 다뤄주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대마도사님 께서 남기신 물 품입니다. 정말 소중히 다뤄주시기 바랍니다. 부탁드립니다." 너무나 정중한 말투였다. 마치 이 마스터 카드에 모든 것을 걸었다는 듯이. 태자 는 순간 뭐라고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갈팡질팡하다가, 얼마 후, '내가 왜 이러고 있지?'라는 의 문이 떠올랐 다. 생각해보니 전혀 허둥댈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필로윈의 태도가 너무나 정중 하고 진지했던 탓일까. 훼이드리온은 웃었다. "당연하잖아요. 이 마스터 카드는 저한테도 특별한 것이라고요. 마구 다룰 만한 담력이 저한테 는 없어요. 그 무엇보다 우선으로 치고 움직일 생각이었는걸요." 갈색주머니에 담긴 네모난 각진 물체들의 느낌을 즐기며 훼이드리온이 즐겁게 웃 었다. 필로윈은 이제야 안도했다는 표정으로 긴장 때문에 얼룩진 얼굴을 풀어 보였다. "감사합니다, 태자 저하." 거의 직각으로 굽어진 채로 인사하는 필로윈. 태자는 목례로 답을 하여 밝게 웃 었다. 필로윈이 자신을 믿어주었다는 생각에 절로 웃음이 나올 정도로 즐거웠다. '남에게 믿음을 받는다는 것이 이렇게 즐거운 것이었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간다. 기분이 좋아진 둘은 잠시 미소만을 서로에게 띄워보냈다. 왕족이라는 신분에서 오는 필연적인 가식이 짙은 미소가 아닌, 정말 소년 그 자체의 순수한 미소를 띄운 훼이드리온. 자신의 뜻을 알아준 소년에게 기쁘게 미소를 지어주는 필로윈. 둘은 한참동안 말없이 그렇게 웃고 서있었다. 조금 후, 그런 둘을 일깨워주려는 듯이 한동안 불지 않았던 밤바람이 길을 따라 불어 올라오면 서 둘의 몸을 가만히 쓸고 지나갔다. 그 서늘하지만 기분 좋은 느낌에 정신을 추 스르며 필로윈 이 입을 열었다. "이거 태자 저하의 시간을 너무 잡아먹었군요.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저도 좋은 시간이었어요. 디바이어 경의 부탁, 꼭 제대로 수행할게요." "감사합니다, 태자 저하. 아, 책을 가지고 가셔야하지 않나요?" "아, 맞어맞어." 정말 새까맣게 그 사실을 잊어먹고 있던 훼이드리온은 시간이 많이 흘렀다는 것 을 깨닫고 서둘 러 서고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뒤에서 필로윈이 소유한 중년의 대표격 목소리가 들려왔다.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아니에요, 먼저 가세요! 가정에 정성을 쏟을 시간이 많이 지났잖아요!" "하핫." 그냥 한번 해본 말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태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필로윈은 생각했다. '후계자 수련, 잘 다녀오십시오. 감사합니다, 태자 저하. 그리고.' 훼이드리온의 모습이 왕성 서고의 현관을 통해서 완전히 사라졌다. "죄송합니다." 그밖에 의미를 모를 한마디가 밤의 공간 속에 녹아들기도 전에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의하여 깨끗하게 소멸되었다. 하실루스가 밤하늘에서 항상 그렇게 웃고 있는 밤이었다. ----------------------------------------------------------------- ----------------------- 안녕하십니까, 팀입니다(___) 지금 시각은 12시 2분(제 컴 기준). 이틀...을 넘겨버 렸군요. 에구, 죄송합니다. 이틀 한편 연재라고 해놓고서는...긁적. 그래도 빨리 왔으니 봐 줘요~ 네네?(^^^) 메일을 보내주신 분이 계십니다. VEALLENA님. 쥐샐러드...라고 자신을 밝히셨군요. 감사합니다(___) 아틀란티스도 봐주셨다니...(ㅠㅠㅠ) 묘사가 많아서 지겨우시다구요? 에에... 긁적. 사실 그 점을 체 친구에게도 지적을 받았다는. 아틀란티스보다 묘사에 치중하며 썼더니 이런 결과가 나오네요. 콱, 묘사를 제외시켜버릴까(---!) 하하, 농담입니다. 고치도록 노력하겠습니다(___) 추천해주신 분은 안 계시네요. 네네, 또 들어오겠죠, 뭐. 어쨌든 이제 제대로 추천 수를 매길 수 있는 연재 편수 10편을 넘었으니 말입니다! 꺄아~(>.<) 그럼 12편도 빨리 가지고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꾸벅!(___) 시프 마스터 Thief Master TEAM... P.S 1 어둠의 기사에서 전직했습니다. 언제 다시 돌아올지 모름(---) P.S 2 추천 남발하셔도 아무말 안하겠습니다!(...;;;;) 감상 비평도 환영이에 욧!(>.<) 번 호 : 9293 / 10423 등록일 : 2000년 07월 08일 14:27 등록자 : 암음기사 조 회 : 216 건 제 목 : [카드 게임 판타지]『 카드 마스터(Card Master) 』#012 <1장 ' 카드 게임 판타지(Card Game Fantasy) 카드 마스터(Card Master) 12. "…멋지구나. 역시 내 아들인걸?" 마법왕국 라시엔트의 왕비는 자신의 하나뿐인 아들이 하나뿐인 딸이 만든 정장을 말쑥하게 차려 입은 모습을 보고 작게 경탄을 했다. 성인식 기념으로 단정하게 정리하여 빗어 넘긴 금발이 목 을 덮는 넥을 가진 흰색의 정장과 어우러져, 마치 한편의 아름다운 그림을 완성 시킨 느낌이었 다. 왕가의 상징색인 금색의 테두리 또한 그림의 묘미를 살리는 요인으로 작용했 다는 건 일일이 설명할 필요도 없는 사실. 이 정장의 제작자인 메이린느에게 감탄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제작자 또한 동생의 모습을 보고 눈을 빛냈다. "와아, 이렇게 어울릴 지는 정말 몰랐어요." "헤헤… 그, 그래요?" 과장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너무나 기뻐하는 누님의 모습을 거울로 비춰보며 훼이 드리온은 멋쩍 음을 느꼈다. 거울 속에 있는 하얀 정장의 소년. 푸른 눈과 금발이 정장과 멋들어 지게 조화를 이루어 그야말로 광채를 불러들이는 멋진 모습으로 서있는 그 소년이, 정말 자신 인지 의심이 갔 다. '역시… 옷이 날개구나.'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상식은 잠시 머리 속에 떠올려보는 훼이드리온은 손을 움 직여 넥을 바로 세우고 미세한 먼지들을 정장에서 털어 냈다. 옷을 건드릴 때마다 금색으로 수 놓여진 테두리와 왕가의 상징 '금성'이 햇빛과 부딪혀 사방으로 금빛을 뿌려댔다. "아아, 훼이의 예복 차림까지 볼 수 있었을 텐데… 안타깝구나." 왕비가 '정녕 안타까운 일이도다!'라고 웅변하는 듯한 사실적인 표정을 지어 보이 자, 훼이드리 온은 그만 쓴웃음을 머금고 말았다. 원래 예정대로라면 성인식이 끝나고, 훼이드리온과 신성제국 하쉴로츠의 성녀와 의 약혼식이 거 행되어져야했다. 그에 따른 준비도 모두 끝마치고 이제 주인공들만이 참석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 불과 어제 그 문제가 생겨버리고 만 것이다. 어제 5월 11일 아침. 내일이 약혼식이라는 기대감과 오늘 도착하는 예비 며느리 에 대한 생각에 흥분한 표정을 짓고 업무에 충실하고 있던 국왕 카드리온은 실망스런 서신을 받 았다. 정중하게 예를 취하는 사자에게서 받은 서신에는 아래와 같은 내용이 명시되어있 었다. '…저희나라의 하나뿐인 성녀, 아이린 하이 하쉴로츠 님의 건강상의 주요한 문제 로 인하여 약혼 식 시기를 후계자 수련 후로 연기하였으면 합니다…' 치장하고 꼬아놓은 미사어구들을 모조리 제외하고 최대한으로 간추려보면 이와 같은 내용이 되 는 서신을 본 직후, 국왕 카드리온은 잠시 모든 대신들을 물러가게 하고 조용히 (?) 발악을 시도 했다. 그러나 타이밍도 기차게 서신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집무실로 들이닥친 왕 비 에스린느에 의해 저지 당하고, 지금은 조용히 아쉬움을 달래고 있는 중일 것이다. 아무튼 어머니에게서 그 소식을 전해듣고, 서신과 함께 동봉된 성녀의 자필 편지 를 읽은 훼이드 리온은 그저 담담하게 침을 삼켰다. 가슴 한구석에는 '다행이다.'라는 생각도 들 었다. 에스린느는 위로 틀어 올려 단단히 고정한 긴 금발을 거울을 보며 잠깐 매만지다 가 아쉬움을 털 어 버리려는 듯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태연한 척해도, 남편 못지 않게 아들의 약 혼식을 기대했 었는데, 이렇게 연기되어버리니 아쉬운 마음을 금치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결정된 일. 그 녀는 메이린느와 닮은 화사한 미소를 머금으며 돌아섰다. "자, 그럼 얼른 준비하고 내려오려무나. 메이린, 우리 먼저 내려가자꾸나." "네, 어머니." 짐짓 고개를 얌전히 숙여 보이고 왕비의 뒤를 따르는 메이린느. 훼이드리온은 잠 깐 고개를 돌려 응원의 미소를 보내주는 그녀에게 마찬가지로 미소로 답변을 하면서 두 사람이 방을 나가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잠시 소란스러웠던 두 명의 방문자가 사라지고 익숙한 정적이 훼이드리 온을 감쌌다. 소 년의 눈동자는 잠시 동안 거울 속의 소년을 훑었지만 이내 테이블 쪽으로 옮겨갔 다. 편지. 성녀라고 칭해지는 자신의 약혼예정자에게서 온 편지. 훼이드리온은 테이블 로 다가가 그 편지를 집어들었다. '또박또박 글씨는 잘 쓰네.' 친절하게도 라시엔트어로 쓰여진 그 편지의 내용은 '안녕하세요, 라시엔트의 태자 저하. 성인식 을 축하드립니다.'가 전부였다. 그러나 온갖 붙일 수 있는 모든 수식어를 갖다 붙 여 길게 쓰여 진 편지보다는 편지 같은 것을 써본 경험이 별로 없는 것이 분명히 티가 날 정도 로 간단한 이런 편지가 훼이드리온에게는 더 맘에 들었다. 생각해보자면, 그만큼 그녀는 꾸밀 줄 모른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소년의 누님 메이린느의 영향 때문에, 소년은 그런 타입의 여성상 을 지니고 있 었다. 하얀 색의 편지를 품속에 갈무리한 후, 훼이드리온은 의자 하나를 차지하고 앉아 있는, 여행용 배낭을 내려다보았다. 어제 밤에 골머리를 앓으며 챙겨 넣은 것들이 배낭 안에 두툼하게 들어가 있었다. 어깨에 매면 꽤나 무게를 느낄 듯한 크기. 하지만 이것도 많이 줄어든 상 태이다. 어머 니 에스린느의 지극한 아들 사랑으로 인해 거의 두 배 가까이 부피가 늘어날 뻔 한 위기를 모면 한 배낭의 모습이 바로 지금의 모습인 것이다. 훼이드리온은 에스린느가 집어넣은 옷가지들을 다시 꺼내고 개인 세척기구까지 여러 개 집어넣 으려는 것을 간신히 뜯어말리던 장면을 떠올리며 웃어버렸다. 이제 한동안 어머 니의 그런 아들 사랑도 잠시 접어야한다는 생각에 씁쓸해졌던 것이다. "후우……." 어찌됐든 이제 길은 정해졌다. 자신이 정한 길은 자신이 걸어야하는 법. 훼이드리 온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당당히 이 방과 이별을 선언했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잘 있어라.' "훼이드리온 레이틴 라시엔트 태자 저하의 성인식을 거행하겠습니다!" 정식으로 식의 개정을 알리는 서기관의 목소리가 대궁전을 울렸다. 영구적으로 음성증폭마법이 걸려있는 곳이기에, 작은 소리도 대궁전 내부를 구석구석 울리고 다녔다. '나갈 차례인가. 후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였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전에 긴장으로 심장부터 두 근거려왔다. 보 나마나 왕성 안에, 거기다 외부에서 온 귀족이란 귀족들도 다 모여있을 텐데 이 렇게 떨고 있는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었다. 태자는 깊은 심호흡 끝에 눈빛을 달리했다. 떨렸지 만, 떨 수 없었 다. "나오너라, 태자여." 국왕의 근엄한 목소리가 자리에 앉아있던 태자의 귀에 들렸다. 당당해지자, 라는 의지와 함께 마법과도 같이 떨림이 멈추었다. '당당함'이라는 마스터 카드를, 태자는 머리 속 에서 들어올렸 다. 단상 위로 올라섰다. 국왕 카드리온이 짙은 중후한 웃음으로 아들을 반겼다. 당당 한 걸음걸이로 훼이드리온은 카드리온의 옆에 가서 섰다. 뒤에서 느껴지는 시선은 아마도 메이 린느와 에스린느 의 기대가 가득 담긴 것이라고 생각됐다. '후우…….' 속으로 마지막 남은 긴장을 떨치며 대궁전에 모인 여러 사람들의 모습을 푸른 눈 동자를 돌려 훑 어보았다. 큰 행사가 있을 시에만 쓰는 대궁전이지만 그 관리상태는 왕궁 못지 않게 최상이 었다. 색유리를 이용하여 여러 무늬를 새겨 넣은 돔 형식의 지붕이 머리 위에서 햇빛을 받아들여 색색깔로 반짝 이고 있고 그 빛은 대각선을 만들며 단상 왼쪽 벽에 부딪혀 또 하나의 아름다운 그림을 만든다. 양쪽 벽에도 색유리로 갖가지 모양의 그림이 새겨져있고 하나 같이 약속이나 한 듯 아름답기만 하다. 색유리창들 사이마다 자리한 곧은 기둥들은 무거운 지붕을 받히며 500년을 버텨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강직한 모습 그대로였고 그 기둥들의 중앙에 마련된 커다란 홀 에는 지금 각지 에서 몰려온 귀족들이 마련된 테이블에 착석해있었다. 모두들 저마다의 눈빛을 빛내며 훼이드리 온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아, 많다.' 어이없게도 막상 올라서서 모인 사람들을 내려다보니, 드는 생각은 그것뿐이었다. 그런 자신의 생각에 스스로도 황당함을 느끼고 있을 때, 카드리온의 목소리가 음성증폭마법의 효과를 동반하 여 대궁전 안을 다시 휘젓기 시작했다. "정식으로 인사시키겠다. 짐의 아들, 마법왕국 라시엔트의 마법왕 자리를 이을 유 일한 현 후계 자 훼이드리온 레이틴 라시엔트 태자. 잘 생기지 않았나?" "폐, 폐하." 옛말에 자식 자랑 아끼는 부모 없다고 했다. 아무리 한 나라의 왕일지라도 부모 라는 틀에 매여 그런 공식을 전혀 벗어나지 못한 것인지, 무심결에 아들 자랑을 하고만 카드리온 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를 무시하느라 애써 헛기침만 몇 번 해댔다. 이윽고 대궁전 안이 잠잠해지자 다시 입을 열었다. "흠, 모두 오늘 이곳에 왜 모였는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오늘이 태자의 15번째 생일이자, 라 시엔트 왕가의 정통인 성인식이 치러지는 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가지 경사 스런 일이 더 있 었지만 그것은 후를 기약하게 되었으니, 이상 없기를 바라고. 그럼 지금부터 식을 거행하도록 하겠다." 언중에 힘을 느끼게 만드는 것은 마법왕 대대로 내려져 오는 특징일까, 하는 생 각이 훼이드리온 의 머리를 스쳤다. 자신의 아버지만 보더라도 방금 전같이 근엄하지 못한 행동을 하다가도 필요 할 때는 듣는 이가 따르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모습을 변모시킨다. 핏줄 속에 그런 면이 녹아드는 것이라면 자신에게도 저런 면이 있을 터였다. '태자의 위엄을 가진 모습… 그것일까.' 아마도 그렇지 싶었다. 하지만 훼이드리온은 더 이상 그런 이중적인 면을 가지기 싫었다. 메이 린느에게서 꾸중을 들었던 한달 전부터 생각해오던 목표. 본연의, 스스로의 이 모 습에서 자각한 다. 그것이 궁극적인 목표였다. 지휘자의 손짓 하에 왕성 악단의 연주가 은은히 대궁전 안을 퍼져 나갔다. 선율 하나하나에 세 상의 모든 미를 응집시키려는 듯 악사들의 손놀림에는 정성이 가득 담겨있었다. 그 은은한 선율 사이로, 국왕의 목소리가 훼이드리온의 두뇌를 깨우쳤다. "가까이 오너라, 태자." "네, 폐하." 은근한 미소를 잔잔히 얼굴에 띄운 카드리온은 어느새 훌쩍 자라버린 듯한 아들 을 가까이로 불 렀다. 단상 앞으로 다가간 훼이드리온에게 카드리온이 지시했다. "앉거라." 태자는 천천히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고 왼쪽 다리는 무릎을 굽혀 꿇어앉았다. 그리고 왼쪽 무 릎 위에 두 손을 깍지껴 모아 단정히 올렸다. 그 자세에서 자연스레 엄숙함이 묻 어 나온다. 악단의 연주도 점차 변화의 폭을 줄여 더욱 더 조용히 대궁전 안을 울렸다. 필로윈이 단상 위로 올라와 카드리온 옆에 다가섰다. 대궁전 안의 모든 사람들이 잠시 떠올렸던 모든 잡념들을 지우고 또 한 명의 성인이 태어나는 과정을 숨죽이며 지켜보기 시 작했다. 기다림 속에서 카드리온의 입이 열리며 침묵을 깼다. "성인의 의무를 말해보거라." "성인의 의무는, 첫째, 나이가 적은 자를 이끌고, 둘째, 나이가 많은 자를 공경하 며, 셋째, 나 라에 충성하며, 넷째, 의무에 충실한다, 입니다." "잘했다. 그럼 다시 묻겠다. 태자 훼이드리온 레이틴 라시엔트는 성인의 의무를 정직히 이행하 여 부끄럽지 않은 성인이 될 각오가 되었는가?" 고민할 필요도 없는 물음이라고 태자는 생각했다. "네." 단호하면서도 각오 어린 답변에 카드리온은 흡족한 웃음을 띄웠다. 자신의 아들 이 이제 성인의 의무를 따질 나이까지 자란 것이다. 빠른 세월, 유수와 같이 멈춤이 없는 세월의 흐름을 실감하 면서 그는 필로윈에게서 나뭇잎과 나뭇가지들을 엮어서 만든 독특한 모양을 지닌 관을 받아들었 다. '리스코프의 관.' 성인이 된 자의 머리에 씌우는 관, 리스코프의 관은 곧은 절개의 상징인 '리스코 프 나무'의 잎 과 가지로 만들어진다. 수명이 다할 때까지 사시사철 절대 그 모습이 변하지 않 는 특성 때문에 나무 자체가 곧은 절개를 상징하게 되었고, 또 그것은 성인이 리스코프 나무의 모습을 배워 숨 을 거둘 때까지 의무를 지켜 나가라는 뜻에서 관을 만들어 씌우게 되었다. "고개를 들어라, 태자." 말없이 훼이드리온은 숙이고 있던 고개를 살며시 들어 국왕이 관을 씌우기 편하 게 만들었다. 카 드리온이 두 손으로 리스코프의 관을 잡고 훼이드리온의 머리를 향해 다가갔다. "이 관을 쓰게 되면, 태자는 이제 한 명의 성인으로 다시 태어나게 될 것이다. 앞 으로 성인의 의무를 잘 지켜나가는, 그런 모범적인 성인이 되기를 바란다." 리스코프의 관이 훼이드리온의 머리와 만났다. 그와 동시에 대궁전 안이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 로 가득 넘쳐나기 시작했다. 이곳저곳에서 터져 나오는 박수 소리와 이따금 한마 디씩 들려오는 격려 비슷한 음성들. 그 중앙에 위치한 훼이드리온은 머리에서 느껴지는 무게감 에 눈물이 솟구 쳐 올라올 듯했다. 이제 성인이 된 것이다. 한 명의 성인으로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 점이 막 소년의 탈을 벗은 태자의 마음 속을 꽉 채우고 들어왔다. 기쁨. 환희. 그런 것들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을 만큼, 훼이드리온의 마음은 행 복감에 젖어들 었다. 짝짝짝! 아직도 이어지고 있는 거센 박수소리들과 리스코프의 관이 태자의 머리 위에 얹 어진 그 순간부 터 삭 분위기를 바꾼 악단의 신나는 음악이 어우러져 마치 파티가 한창 열리고 있는 듯한 광경 을 만들어냈다. 그런 파티와 같은 즐거움 속에서 국왕도, 왕비도, 공주도, 여기에 모인 모든 사람 들이 한마음으 로 막 성인이 된 그의 앞길을 축복했다. 소년이었던 태자 훼이드리온은 성인이 되었다. "어서 가봐야겠군." 벽 한쪽에 장식된 리스코프의 관을 벅찬 가슴으로 바라보고 있던 훼이드리온은 테이블 유리에 반사된 햇빛이 눈을 따갑게 만들어서 겨우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당장 배낭을 들쳐 매고 밖으로 향했다. 마지막으로 방의 풍경을 눈에 담고, 조심 스럽게 문을 닫았다. 밑층 현관 앞 홀에는 아르 집사를 비롯하여 훼이드리온의 저택에서 생활하고 있 는 시종들이 모 두 모여 태자의 배웅을 준비하고 있었다. 계단을 내려오다가 우글우글 모여있는 그들을 보고 훼 이드리온이 약간 일그러진 표정을 지었다. 아르 집사가 다가왔다. "몸은 어떠십니까?" "괜찮아요. 좀 들떠있는 듯한 느낌이 있기야 하지만, 괜찮아지겠죠." 시종들이 주루룩 일렬로 서있는 그 앞을 지나가면서 훼이드리온은 시종들의 모습 도 기억하려는 듯 한번 천천히 훑어보았다. 전에, 자신의 인사를 받고 얼굴이 벌개져 도망갔던 그 시녀도 당연 히 끼어있었다. 마지막으로 아르 집사의 눈으로 시선을 정지시킨 태자가 빙그레 웃었다. "제가 올 때까지… 잘 부탁해요." "건강하게 빨리 돌아오십시오, 태자 저하." "건강하게 돌아오세요!" "빨리 오세요, 태자 저하!" 아르 집사의 인사에 시종들도 너도나도 소리 높여 훼이드리온에게 외쳤고 그는 미소로 답을 해 주었다.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그럼 이제 가볼게요. 모두들, 잘 있어요." 짧은 인사. 훼이드리온은 그가 서있는 곳에서만 광휘가 일어난다는 착각을 불러 일으키게 할 정 도로 밝게 웃어 보이며 저택을 나섰다. 날씨는 그의 마음처럼 참으로 맑았다. 듬성듬성 떠다니는 구름이 마치 훼이드리 온의 앞으로의 여정을 표현하는 것 같았고, 간간이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도 긍정적인 태도를 보 여주는 듯했다. '아아… 좋군, 정말.' 발걸음도 힘차게 훼이드리온은 왕성의 북문을 향해 움직였다. 후계자 수련 중에는 한가지 율이 있다. 그것은 후계자 수련 중에는 '절대 신분이 노출되어서는 안 된다.'라는 것인데,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왕성을 나설 때부터 사람들 눈에 띄면 안 된다. 그런 조건에 가장 알맞은 출입구가 바로 북문인 것이다. 북문으로 가는 길을 따라 부지런히 걸어가자, 곧 굳건한 성벽의 위용이 눈에 들 어왔다. 그리고 쭉 뻗어있는 길 끝에 갈색의 커다란 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저기 와요!" 북문 앞에서 훼이드리온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메이린느가 동생의 모습을 확 인하고 손으로 가리켰다. 곧 그곳에 모여있던 모든 사람들이 훼이드리온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 었다. 이미 하얀 정장을 벗고 간단한 여행복 차림을 한 훼이드리온은 배낭을 매고 천천 히 걸어오고 있 었다. 허리에는 빠질 수 없는 갈색주머니가 대롱대롱 매달려 그의 움직임에 따라 흔들렸다. "기다리고 계셨던 건가요?" "그렇단다." 국왕 카드리온이 아들에게 미소지었다. 훼이드리온은 '이럴 줄 알았다면 조금 일 찍 나오는 건 데.'라고 멍청히 시간을 끌었던 자신을 질책했다. "제대로 다 챙긴 거니?" "네, 물론이에요, 어머님." 그렇게 대답하면서 태자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을 주욱 둘러보았다. 아 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누님. 그들 뒤에는 스승과 왕성 수석마법사도 눈에 들어왔다. 문득 스승이 자신에게 무 언가를 준다고 했던 말이 기억났다. 마음을 읽은 것인지, 바이마크가 훼이드리온에게 다가왔다. 그의 손에는 태자가 수련용으로 사 용하던 검과 비슷한 길이의 롱 소드가 들려있었다. "받으십시오. 제가 특별히 준비한 것입니다." 훼이드리온은 말없이 그 검을 양손에 받아들었다. 금색과 흰색이 절묘하게 조화 를 이룬 검집과 손잡이. 살짝 날을 빼보았다가 반사된 햇빛에 심히 눈이 따가워 금방 닫아버렸다. "고마워요, 헤이스티론 경. 잘 쓸게요." "부디 조심하시기를." 이별을 짧은 게 좋다는 말이 있다.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훼이드리온은 북 문으로 걸어갔 다.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작은 문은 이미 열려 있는 상태였다. "잘 다녀오너라." "몸 건강히, 빨리 돌아와. 알았지?" "널 믿는다, 아들아." 어머니, 누님, 아버지의 순서대로 인사를 받고, 바이마크와는 눈빛을 교환했다. 그 리고 필로윈 에게는 가만히 허리춤의 갈색주머니를 꽉 잡아 보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한발을 문밖으로 내밀었다. 땅을 디디고, 다시 남은 발을 문밖으로 빼냈다. 그 시 간이 왜 그리 도 긴 것인지. 훼이드리온은 일부러 뒤를 보지 않고 문을 닫았다. 끼익, 비음악적 인 소리를 길 게 내면서 문은 완전히 닫혀 왕성 안과 바깥의 세계를 분리시켰다.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던져준 인사와 눈빛. 그는 하나씩 그것을 되새기며 고개를 들었다. 왕성 안의 하늘과 같은 모습의 하늘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그래, 저 안이든 밖이든, 어차피 같은 하늘 아래. 뭐가 다르겠어.' 희미한 웃음을 머금으며 발길을 밑으로 돌렸다. 내리막길을 따라 그는 걸음을 내 딛었다. 마법력 1414년 5월 12일. 훼이드리온은 기약 없는 여행의 첫발을 내딛었다. <1장 '왕성' 完> ----------------------------------------------------------------- ----------------------- 안녕하십니까, 팀입니다(___) 팀이 드디어 미쳤는지, 벌써 글을 올려버리는군요. 1 장 완결입니 다. 씨익. 아아, 힘든 시간이었죠? 독자분들이나 저나. 아하하. NEOGEO99님 헤에, 추천해주셨군요. 감사합니다(___) 한편의 영화라...;;; 그런 과언의 말씀을... 소인,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 다(___) 앞으로도 많은 사랑 부탁 드립니다. 에에, 오늘 새벽에 완성하고, 바로 잠들어버렸습니다. 그랬던 것입니다. 학교도 가 야하는데 1장 완결을 꼭 보고야 말겠다는 의지로 결국 다 써버린 것입니다. 덕분에 학교에서 꽤나 졸았습니다 (---). 하암. 2장 첫편도 가능한 빨리 올리겠습니다. 열혈 연재모드에서 열혈 집필모드로 업그레이드! 꾸벅(___) 어둠의 기사 DARK KNIGHT TEAM... 번 호 : 9351 / 10423 등록일 : 2000년 07월 09일 22:13 등록자 : 암음기사 조 회 : 168 건 제 목 : [카드 게임 판타지]『 카드 마스터(Card Master) 』#013 카드 게임 판타지(Card Game Fantasy) 카드 마스터(Card Master) 13. 마법왕국 라시엔트의 수도, '라시안트'는 동부, 서부, 남부, 북부 중에서 북부에 속하는 지역에 자리해있다. 그래서 대륙북부의 신성제국 하쉴로츠와의 교류가 쉬운 이점이 있는 방면, '기사왕 국 카즈캐스커'와는 거리가 멀어 교류하기가 어려운 단점을 지니게 됐다. 이렇게 수도가 카즈캐스커와 멀리 떨어진 까닭은 라시엔트가 카즈캐스커에서 반 란으로 만들어진 나라이기 때문이다. 라시엔트의 건국왕 페인트 라시엔트는 원래 기사제국에 속해 있던 시민이었 으나, 한참 부패와 비리가 심해 왕실이 욕을 먹던 당시 검의 현자 샤렌 하르트와 손을 잡고 마 법사 길드의 도움을 받아 반란을 일으켰다. 그 반란은 결국 성공하여 광활한 카 즈캐스커의 영토 의 3분의 1일을 얻었다. 그는 그곳에 왕국을 세워 하나의 나라로 발전시켜 나갔 는데, 그것이 바 로 마법왕국 라시엔트인 것이다. 그런 이유로 카즈캐스커와의 사이는 그렇게 좋은 편이 못되었다. 하지만 오랜 시 간이 흐른 지금 은 서로 교류를 하며 서로를 국가로 인정해주고 있는 상태였다. 아무튼 중앙에 가까운 북부에 자리잡은 수도에서는 태자의 성인식이라는 큰 행사 를 맞이하여 상 당히 떠들썩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행사가 있는 날임에도 불구하고 수도에 사 는 시민들에게 는 어떠한 영향조차 있지 않다는 것이다. 며칠 전부터 이곳저곳에서 높으신 분들 이 몰려와서 무 슨 일이 있는지 생각해보는 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신경조차 쓰지 않고 자기 할 일에만 몰 두하고 있었다. 막 수도의 서쪽으로 향하고 있는 훼이드리온은 그 점이 의아스러웠다. '분위기가… 정말 다르네.' 솔직한 마음을 토로하자면 이곳저곳에서 자신의 성인식에 대해서 이런저런 말들 이 많을 것이라 고 내심 기대했었다. 하지만 성문을 나와 느낀 첫 번째 감정은 그저 의문스러울 뿐이었다. 그들 의 모습은 항상 그렇다는 듯 평범했다. 좌우 일렬로 쭉 늘어서 있는 각종 상가들. '렌의 의상실'이나 '금색 별 제과 본점 '과 같은, 왕 성 안에서만 생활하여 바깥 세계에는 영 무지한 훼이드리온에게는 온통 신기한 것들밖에 없는, 이른바 시장이라는 곳을 그는 지나고 있었다. 왕성에서 들은 바로는 시장은 사람 들의 활력을 느 낄 수 있는 공간이라고 할 만큼 사람들이 북적대는 곳이다, 라고 알고 있는데, 아 직은 이른 시 간인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돌아다니지는 않았다. 오히려 왕성 안처럼 한산해 보였다. 금발을 가만히 옆으로 쓸어 넘기며 아쉬워하는 훼이드리온의 눈에 '금색 별 제과 본점'의 진열 대에 놓여있는 쿠키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연속적인 현상으로 머리 속에 누님 이 챙겨준, 손 수 구웠다는 쿠키가 떠올랐다. '심심한데.' 입이 심심함을 느끼면서 배낭을 앞으로 돌려 주머니를 뒤졌다. 왼쪽 주머니에서 봉지를 찾아낸 훼이드리온은 흡족한 표정으로 다시 가방을 고쳐 맸다. 부스럭거리면서 열어본 봉지에서 에타로코크(Etalocohc: 쵸콜렛)향이 진득이 풍겨 져 나왔다. 가 장 좋아하는 맛인 달콤한 맛의 상징인 에타로코크가 주재료로 쓰여진 갈색의 쿠 키. 보자마자 입 안에 단맛의 침이 맴돌기 시작했다. '으음… 역시 맛있어.' 메이린느의 저택에는 레미라는 쿠키를 잘 굽는 시녀가 한 명 있다. 메이린느의 쿠키는 거의 다 가 그 시녀가 굽는데, 그 교묘한 실력에 탄복하여 메이린느는 그녀에게서 쿠키 굽는 법을 전수 받았다. 물론 가르치는 동안 시녀의 얼굴에 긴장이 보이지 않은 날은 하루도 없 었다. 아무튼 그런 가르침의 끝에 이런 명품을 탄생시킨 누님의 실력에 훼이드리온은 속으로 찬사를 표하고는 다시 하나를 입에 물었다. 한 입에 들어가는 적당한 크기를 가진 쿠키 의 달콤한 맛과 향이 입안에서 한데 어우러져 행복감에 젖어들게 만들 때, 문득 피부에 와 닿는 낯선 시선을 느 꼈다. 누구일까, 하는 의문과 함께 주위를 둘러본다. '?' 저쪽 구석. 으슥한 골목에서 대여섯 살 정도의 꼬마아이가 이쪽을 향하여 눈을 빛내고 있었다. 훼이드리온은 꼬마의 위치를 확인하고 꼬마의 눈이 향하고 있는 자신의 가슴 쪽 을 내려다보았 다. 에타로코크 향을 피워 올리고 있는 작은 봉지가 시선의 끝에 자리하고 있었 다. '이거? 쿠키가 먹고 싶은 걸까?' 훼이드리온은 잠시 멈춰 서서 꼬마를 향해 다시 한번 안력을 돋구었다. 짙은 고 동색 머리가 마 구 헝클어진 상태로 멋대로 삐죽삐죽 서있는 무질서한 헤어스타일에다가 옷 또한 걸레로 사용되 던 것을 걸치고 나온 것처럼 허름하고 더러웠다. 도저히 눈뜨고는 봐주지 못할 모습이었지만 어 딘가 애처롭게 느껴졌다. '배가 고픈 걸까.' 쿠키를 하나 쥐어주는 것으로는 아쉬움이 커질 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어주기 위해서는 다른 뭔가가 필요했다. '아, 제과점이 있었지.' 아무래도 처음으로 금전 거래를 하게 될 듯한 예감이 든다. 훼이드리온은 꼬마가 알아들을 지는 의문스러웠지만 일단 기다려달라는 뜻을 담아 빙그레 웃음을 던져주고 재빨리 제 과점으로 다가 갔다. "어서 옵쇼!" 서두르자는 생각에 주인의 얼굴을 확인할 새도 없이 진열대의 빵을 골라잡았다. 얼마나 사야지 자 꼬마에게 적당한 양일지 잘 모르기 때문에 주인에게 "저 꼬마가 먹을 만큼만 적당하게 주세 요."라고 주문할 수밖에 없었다. 제과점 주인은 종이봉투에 집게로 집어낸 몇 개의 빵을 담으며 창 밖을 향한 훼 이드리온의 손가 락 끝을 주시했다. 누구든지 척 봐도 가난한 집의 자식이라는 것을 한번에 알 수 있을 만한 몰 골을 한 그 꼬마를 확인한 주인은 빵을 담은 종이봉투를 건네주며 훼이드리온에 게 물었다. "혹시 저 꼬마에 사줄 생각인 거요?" "그런데요?" 흰 수염이 멋들어지게 비틀어진 형상을 하고 두툼한 볼 살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가게 주인은 그 풍만한 얼굴에 비판하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소용없을 거요." "네?" "근본적으로는 아무런 도움도 못 준다는 거요, 내 말은." 주인의 말에 훼이드리온은 부연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이 되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거요. 지금 손님이 이 빵을 저 애에게 준대도 이 방은 한 끼, 많이 먹어 도 하루면 사라질 텐데, 그렇다면 그 후에는 저 애는 다시 굶어야하지 않겠소? 내 말이 바로 그 말이오. 나라에서 저들을 위해서 보조를 해주지 않는 한, 그런 악순환이 계속 반 복될 뿐이지." 이 나라의 태자인 훼이드리온은 상당히 착잡한 마음으로 수긍했다. 일단 값을 치 르고, 값보다 빵을 더 많이 넣어준 주인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면서 제과점을 나와 꼬마에게 다 가갔다. 꼬마는 흠칫 놀라는 듯이 골목의 어둠 속으로 몸을 숨기려했지만, 어느 정도에서 멈추고 다가오는 그를 멀뚱히 올려다보았다. "배 많이 고프지?" 웃음 지으며 물어보는 훼이드리온의 맘을 안 것인지, 꼬마는 크게 주억거렸다. 그 는 웃음을 지 우지 않은 채 종이봉투를 꼬마에게 건넸다. "가지고 가서 먹으렴. 이 형이 너에게 주는 거야." 그 말에 조금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종이봉투를 받아든 꼬마는 다시 빼앗으려는 기색이 전혀 느 껴지지 않는 훼이드리온의 미소를 보고 크게 활짝 웃었다. 깨끗하게 정돈된 얼굴 이었다면 꼬마 의 웃음은 더욱 빛을 발했을 테지만, 이렇게 추잡하고 지저분한 몰골에서 떠올린 웃음이었기에 태자의 마음을 아리게 만들었다. 꼬마는 고맙다고 인사를 땅에 박을 정도로 깊게 하고는 냉큼 골목길 사이로 사라 져버렸다. 어디 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황당할 정도로 빠르게. 타다닥 달려가는 꼬마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을 즈음, 훼이드리온은 꼬마와 눈높이를 맞춘다고 굽혔던 허리를 곧게 바로 폈다. 어 깨에 느껴지는 묵직한 배낭의 느낌이 새삼스러웠다. '흐음.' 일단 빵을 주기는 했지만, 제과점 주인의 말을 들은 직후라 영 개운치가 않았다. 지금 자신이 제대로 하기는 한 건지, 옳은 일을 한 것인지 영 분간이 가지 않는 게 꽤나 혼란 스러웠다. '좀 더 나라 안 사정에 신경을 쓴다면 좋을 것을.' 왕성 안에 사는 사람들 중에 꼬마와 같은 비참한 꼴을 한사람은 한 명도 없다. 그리고 이런 생 활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누구도 말해주지 않았다. 책을 봐도 그런 얘기는 자세하게 언급 되어있지 않았다. 그렇기에 꼬마를 발견하기 전까지 훼이드리온은 저렇게 생활하 는 사람은 소설 속에서만 나오는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정확히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지금 자신과 같은 세대를 살고 있는, 어엿한 현실 의 사람인 것이다. 절대 다를 게 없다. 단지 이 라시엔트라는 나라의 영토에 귀속 되어있을 뿐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는 같은 인간인 것이다. 같은 땅 위에 살면서 한쪽은 잘 살고 한쪽은 못 사는 게 이치에 맞는 일이란 말인가. 현명한 머리를 지닌 훼이드리온은 주먹을 불끈 지었다. '바꾸겠다. 저런 생활을 하는 이들이 다시는 나오지 않도록, 반드시 바꾸겠다.' 곧은 의지와 당당함. 그리고 순수하게 남의 아픔을 같이 할 수 있는 깨끗한 마음 자세. 훼이드 리온은 왕성에서 나온 지 얼마 안되어 겪은 작은 사건으로 인해 깨달은 자신의 의무를 다시금 상기했다. '바꾼다.' 허리에 매여있는 검과 갈색주머니를 두 손에 각각 쥐었다. '이 검과 마스터 카드를 걸고.' 그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때마침 그가 걸어가고 있는 대로로 기어 나온 에슴 (Esuom: 쥐)의 눈에 그 장면이 투영됐다. 의무를 상기하면서 잡은 갈색주머니가 순간 약한 금색을 띄며 빛을 발했다가, 곧 언제 그랬냐는 듯 꺼졌다. 특별할 것 없는 그냥 갈색주머니로 어느새 돌아가 버린 갈색주머니가 그저 대롱대롱 흔들릴 뿐, 더 이상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훼이드리온은 수도에서 빠져나오면서 뭔가 굉장히 중요한 것을 빼먹고 여행을 시 작했다고 여겼 다. 하지만 그 빠져먹은 그 뭔가가 대체 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딘가로 이어져있을 작 은 등성이 길을 따라 부지런히 걸으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얼마 후, 여행에 대해서는 지식이 거의 없는 초보자만이 할 수 있는 실수를 범했 다는 것을 알아 챌 수 있었다. "이런, 계획을 전혀 세워두지 않았잖아." 순간 허탈해짐을 느끼며 멍청한 짓을 한 자신을 질책하는 훼이드리온. 하마터면 아무런 계획 없 이 그저 세상을 떠돌 뻔(?)한 것 아닌가. 맞아도 싸다고 생각하며 스스로 머리를 꽁 쥐어박고는 배낭을 다시 뒤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깊숙이 넣어두지는 않았는데, 라고 중얼거리며 배낭 속을 뒤지는 그의 손 길 끝에 낯익은 감각이 포착됐다. 매끈한 종이의 질감. '그러고 보니, 이걸 주머니에 넣어두는 게 더 편하지 않 을까?'하는 생각과 함께 배낭에서 그 종이를 꺼내들었다. "흐음, 어디 보자." 다른 나라의 땅까지는 알 필요 없다는 생각에 간단히 라시엔트의 모습만 그려져 있는 지도를 가 져왔다. 하지만 그만큼 라시엔트의 세세한 구석까지 비교적 정확하게 나타나있어 매우 흡족했 다. 먼저 수도 라시안트를 찾았다. 붉은 색으로 눈에 띄게 표시되어있음에도 불구하 고 금방 찾지 못 해서 한참을 헤맨 자신이 바보가 되는 느낌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수도를 찾아서 서쪽으로 조금 씩 눈동자를 옮겼다. "그런데 내가 서쪽으로 나온 게 맞나?" 그저 발길 따라 수도를 빠져나와 버려서 방향 감각을 믿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시장에서 생긴 그 작은 사건 때문에 머리 속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움직였기에 의구 심은 더더욱 증 가되었다. 그 와중, 수도를 나타내는 붉은 점 가까이에서 반가운 표식을 발견했다. "응? 이정표?" 이정표 모양의 표식이 붉은 점 가까이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주변에 방향을 나타내주는 이정표가 있다는 건…데라고 생각하고 있는 와중에 보 이는군." 아무래도 여행하는 동안 혼자서 중얼거리는 버릇이 생길 듯한 불길한 예감을 감 지하며 저 앞에 우뚝 서있는 이정표를 향해 걸어갔다. 나무 판자를 단단하게 박아서 그 위에다 글씨를 몇 자 적 어놓은 이정표에는 '서쪽 루비네, 동쪽 라시안트'라고 정확히 기입되어있었다. "제대로 나왔네." 그냥 고개를 몇 번 끄덕거려보고 지도를 고이 접어 배낭 앞 주머니에 집어넣었 다. 그리고 자신 이 향해야할 마을이 있는 서쪽으로 뻗은 길을 유심히 관찰했다. 조그만 등성이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쭉 뻗은 길이 앞으로의 행로를 새삼 기분 좋게 만들어주 었다. 훼이드리온은 지나가는 사람도 없는 외로운 길을 한 발 한 발 지그시 밟아 주며, 첫 번째 목적지 '루비네'로 향했다. 많은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이유로는 대표적으로 '밝기'를 들 수 있다. 빛과 태양 의 신 마스트가 지배하는 시간과 달과 운명의 여신 하실루스가 지배하는 시간은 그 밝기의 차이 가 아주 확연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끝없이 이어진 길을 부지런히 걸어가고 있던 금발 머리의 여행자가 문득 하늘을 올려다본 시간 은, 그중 후자에 속하는 하실루스가 지배하는 시간이었다. 하늘에는 구름에 살짝 가려진 하실루 스의 상징이 은은한 은빛을 내뿜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거지?" 왕성에서 출발한 것이 정오에 조금 못 미치는 시간이었다. 지금은 달이 거의 중 천에 다다른 시 간이기에, 최소 10시간은 흘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대충 현재 시각을 짐 작한 훼이드리 온은 금발 머리를 매만지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벌서 그렇게나 지난 건가." 아직 여행의 시작에 지나지 않았다. 어떤 만남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수련의 목적 은커녕 마스터 카드도 한번도 꺼내지 않았다. 그렇지만. "지루하네, 이거." 수도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로 향하는 도중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인간의 형상을 지닌 존재를 만난 적은 전혀 없었다. 가끔 이런 들판에서 생계를 꾸려 가는 티바르(Tibbar: 토 끼)나 미치루 같은 작은 짐승들만이 눈에 뜨일 뿐, 사람이라고는 눈 빠지도록 둘러봐도 보이지 않았다. 새로 운 만남에 대해서 기대를 하고 있던 훼이드리온으로서는 무척이나 실망스럽고 지 루했던 시간이 아닐 수 없었다. "빨리 이 길이 끝나기만 바랄 수밖에." 작은 등성이들만 있는 들판에 많은 사람들이 다니면서 자연히 생겼을 이 길. 훼 이드리온은 배낭 을 고쳐 매며 그 길을 따라 다시 한번 앞으로 눈길을 던졌다. 아직 희미한 마스 트의 기운이 남 아있고, 하실루스의 빛도 더해져 그렇게 어둡지는 않았다. 그리 경사가 가파르지 않은 등성이를 따라 길을 올라가자, 시야가 트이는 그곳에 반가운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루비네! 드디어 도착했다!' 등성이 위에 서있는 이정표에도 확실히 '루비네'라고 쓰여있었다. 기쁜 마음에 당 장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쿠키말고는 먹은 것도 없고 오랜 시간을 걸 어서 체력 소비가 심해 달리기를 할 에너지가 비축되어있지 않은 것이었다. 그래 도 반가운 마음 에 일단 걸음의 속도를 더했다. 루비네 마을은 정말 '마을' 수준으로 사람들이 모여 만든 작은 촌락의 형태를 지 니고 있다. 인 구도 그리 많지 않아 한적한 모습이 대부분이었고 분위기 자체가 느긋한, 그런 마을이었다. 등성을 빠른 속도로 내려온 훼이드리온은 빠르기를 늦추지 않고 마을로 진입했 다. 띄엄띄엄 지 어져있던 집들이 점점 그 사이를 좁혀감에 따라 사람들도 점점 늘어갔다. 그중 몇몇은 루비네에 처음으로 들리는 듯한 어린 금발의 여행자를 보고 흥미로운 시선을 보내기도 했 지만, 거의 다가 자신의 할 일에만 몰두했다. 일단 잘 곳이 있어야한다는 생각에 훼이드리온은 빨리 걸어온 탓에 흘러내려 눈 을 가린 금발을 가만히 쓸어 올리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마을 사람 아무나 잡고 물어보면 되겠지, 하는 생각을 하며 가장 가까이에 있던 긴 붉은 머리를 두 가닥으로 땋은 소녀에게 다가갔다. "저기, 말씀 좀 묻겠는데요." 소녀는 낯선 이가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자 쭈뼛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즉시 훼이드리 온의 수려한 용모와 에메랄드 빛 눈동자에 전신의 열이 얼굴 쪽으로 확 쏠림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소녀의 얼굴이 예쁜 다홍빛으로 익어버렸다. "무, 물어보세요." "여관은 어디로 가야하나요?" "여, 여관요?" 소녀는 솔직히 좀 놀랬다. 기껏해야 자신과 비슷한 나이인 듯이 보이는 소년이 다가와서는 묻는 다는 게 여관의 위치라니. 행색을 보아하니 여행자인 것은 잘 알겠지만 그래도 조금 충격이었 다. 이 소년의 부모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부모가 없을까, 하는 물음이 머리 속을 날아다녔지만 소녀는 손가락을 마을 안쪽으로 가리키며 차분히 대답했다. "이쪽으로 쭈욱 가시다보면, '전사의 노래'라는 간판을 가진 이층집을 보실 수 있 을 거예요. 거 기가 우리 마을의 유일한 여관이니까 잃어버리지 마시고 잘 찾아가세요." "아, 감사합니다." '쉽잖아? 괜히 물어봤네.'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싱긋 웃었다. 그리고 멍하니 서 있는 소녀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소녀가 가르쳐준 방향으로 부지런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때 까지 소녀는 뭔 가 충격적인 것을 본 듯한 표정으로 멍하니 서있었다. 곧 소녀와 친분이 있어 보 이는 한 아저씨 가 지나가면서 소녀를 툭 건드려 겨우 정신을 수습한 소녀는 "무슨 일 있냐?"라 는 아저씨의 물 음에 고개를 크게 도리질 쳤다. 가슴이 쿵쾅쿵쾅 뛰는 게 발가락까지 느껴질 정도로 박동이 컸다. 도저히 진정이 될 것까지 않 은 가슴을 움켜잡고 소녀는 집까지 달음질을 쳐버렸다. '이, 이러면 안 되는데……!' 오늘 훼이드리온은 애꿎은 소녀의 잠을 설치게 만들었다. 한편 아무 것도 모르는 채로 소녀가 가르쳐준 대로 걸어가 '전사의 노래' 여관을 찾은 훼이드리 온은 나무문을 열고 생전 처음 여관이라는 곳을 들어갔다. "어서 오세욧!" "아…네, 네." 연한 갈색의 머리칼과 미소가 돋보이는 젊은 아가씨가 부리나케 훼이드리온에게 로 달려왔다. 익 숙하게 안으로 안내하는 그 아가씨의 기세에 눌려버린 것일까. 훼이드리온이 정 신을 차렸을 때, 이미 식당을 가로질러 카운터 앞에 서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내, 내가 언제 여기 온 거지?' 그런 의문을 떠올리기도 전에 아가씨의 질문 공세가 시작되었다. "혼자세요?" "네? 네." "아직 어리신 것 같은데, 여관은 처음이시지요?" "네……." "호홋, 역시 그렇군요. 그럼 특별히 싸게 해드릴게요. 원래 첫 여행에서 처음 들 르는 여관을 잘 잡아야지 여행이 쉽다고 하잖아요? 호호호홋!" 정말 그런 말이 있을까, 하는 의문이 채 머리 속에 떠오르기도 전에 그녀는 다시 질문을 통째로 훼이드리온에게 덮어 씌어버렸다. "얼마나 머무르실 거죠?" "하, 하루요." "1인실?" "…네." "일반실과 특실이 있는데, 일반실은 그저 그런 방이고, 특별실은 그 안에 화장실 이 마련되어있 는 거예요. 어느 쪽으로 할래요?" "어…" "아참! 숙박비는 일반실이 하루 3쎈(=12000원)이고, 특실은 하루 반 쎌(=20000원) 이에요. 자, 어느 걸로 할 거예요?" 뭔가 속에서 부르륵 받쳐 오르는 느낌이었다. 왕성 안에는 이렇게 말을 빨리 하 고 많이 하는 타 입의 사람은 없었기에 왠지 모르게 거부감이 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 기서 화를 낼 수는 없는 노릇. 빨리 벗어나자는 생각에 서둘러 대답했다. "특실로 주세요." "넷! 오랜만에 너무나 잘 생기신 손님이시니, 특별히 더 깎아드리죠! 딱 잘라서 4 쎈만 내세욧! 호호호홋!" 서둘러 주머니를 뒤져 4쎈에 해당되는 돈을 꺼내 카운터 위에 올려놓자, 아가씨 는 곧 열쇠를 꺼 내주었다. 그리고 뭐라고 얘기하면서 붙잡아둘 것 같아 주머니를 현재 발휘할 수 있는 최대한의 힘을 사용하여 2층으로 뛰어올라갔다. "으윽, 저런 여자와는 절대 결혼하지 않을 거야." 마지막 계단을 밟는 훼이드리온의 인상을 찌그러질 때로 찌그러져 있었다. 저런 여자와 결혼했 다가는 도저히 견뎌낼 수 없을 거야, 라는 생각에 자신의 약혼자라고 할 수 있는 여인이 '성 녀'라는 것이 너무나 다행스럽게 여겨졌다. 신성제국의 공주인 성녀라면 저렇게 시끄럽지는 않 을 테니까 말이다. 훼이드리온은 겨우 그녀에게서 벗어나서 안도하는 뜻으로 한 숨을 내쉬었다. "으음, 몇 호실이지?" 열쇠를 내려다보는데 새삼 여관이라는 곳이 처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들어올 때는 그 런 느낌을 전혀 받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그 의문은 금방 해답을 찾을 수 있었 다. '훗, 주인에게 감사해야겠는걸.' 그 아가씨가 주인인지는 모르겠지만 카운터를 맡은 걸로 보아 주인이라고 칭해도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튼 훼이드리온은 열쇠에 적혀있는 객실로 발을 옮기며, 익숙하게 자신을 안내하 고 여관이라는 곳의 어색한 감각을 깨끗하고 말끔하게 씻어준 그녀에게 감사를 표했다. 누가 뭐래도 그녀는 프로였던 것이다. "4호실. 여기인가?" 특실이라고 나타내는 것인지 금색 도금이 되어있는 판에 '4'라는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 훼이드 리온은 잠시 심호흡을 거친 후, 열쇠로 문을 열고 손잡이를 잡았다. 끼이익. 비음악적인 소리와 함께 문은 열렸고 그는 안으로 들어섰다. 비교적 정리가 잘 되어있는 방이 눈에 들어왔다. 정면에는 걸터앉아도 충분할 창 틀을 가진 창문 이 한쪽만 열려있었고 그 오른쪽에 1인용 침대가 방금 갈아 끼운 듯한 하얀 시트 를 덮어쓴 채 자리하고 있었다. 왼쪽으로 옮긴 시선의 끝에는 문이 하나 있었는데, 거기가 특실 에만 있다는 화장실인 듯했다. "헤, 정말 화장실만 추가되어있네." 문을 닫고 방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먼저 배낭을 침대 옆에 내려두고 침대 위에 털썩 걸터앉았 다. 왕성의 자신의 방에 있는 침대만큼은 아니더라도 자는데 불편함은 없을 정도 의 푹신함이 느 껴졌다. 일단 씻고 보려는 생각에 침대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세면대와 변기라는 참으로 간단한 구조를 가진 화장실에서 대충 얼굴을 닦고 나오자, 그제서야 본래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는 '허 기'가 느껴졌다. 주인 아가씨의 공세에 순간 배고픔마저 까먹고 만 것이다. 훼이드리온은 잠시 훗 하고 웃어보는 시간을 가지고 방을 나섰다. 문을 잠글까, 말까 하다가 혹 시나 하는 생각에 단단히 잠그고 1층 식당으로 향했다. '그런데, 또 그 아가씨가 주문을 받으면 어쩌지?' 아까의 장면이 마스터 카드에서 비술에 당했을 때처럼 머리 속에 투영되었고, 갑 자기 한기가 전 신을 지배했다. 제발 주문을 받는 사람이 따로 있기를, 하는 작은 걱정을 안고 식 당으로 이어져 있는 계단을 밟아 내려가기 시작했다. ----------------------------------------------------------------- ------------------------ 안녕하십니까, 팀입니다(___) 하암, 일단 13편, 2부가 시작되었습니다. 아아, 하루종일 잡고 있으니 한편 완성이 되긴 되는군요. 새벽까지 열심히 적고 잔다고 지금 잠 이 좀 모자라는 실정이지만, 그래도 역시, 글 적는 건 즐거운 것이에요.히힛. 추천해주신 분이 계시는데... 이런, 또 아뒤를 까먹어버렸군요. 죄송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다음 편에 꼭 아이디 띄우고 인사드릴게요. 오늘은 봐주 세요오. 자까는 눈이 나빠서 의자에 편하게 앉아 모니터를 쳐다보면 글자가 보이지 않습 니다. 그래서 안 경을 쓰지만, 안경 쓰는 것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습니다. 오래 끼고 있으면 머리 가 짓눌리는 듯 한 고통이 느껴지거든요. 긁적. 그래서 공부하거나(학교 수업) 글을 쓰지 않는 한, 절대 안경을 쓰지 않습니다. 그게 더 편해요오. 우헤헤. 지금은 쓰고 있습니다. 잡담을 적고 있 으니(씨익) 아아, 그럼 앞으로 많이 사랑해주시구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꾸벅(___) 어둠의 기사 DARK KNIGHT TEAM... P.S 추천 감상 비평 눈 빠지도록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P.S 2 조회수가 내려가고 있는 이유가 뭐지... P.S 3 다음 편 예고. 캬아~ 마스터 카드 게임 한판!(...끄, 끝인가 예고가...) 번 호 : 9430 / 10423 등록일 : 2000년 07월 11일 21:55 등록자 : 암음기사 조 회 : 145 건 제 목 : [카드 게임 판타지]『 카드 마스터(Card Master) 』#014 카드 게임 판타지(Card Game Fantasy) 카드 마스터(Card Master) 14. 문과 가까운 구석진 테이블에 자리를 잡은 훼이드리온은 주문을 받으러올 때까지 기다리며 차근 히 여관 안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으음, 왕성 안의 생활과는 역시 뭔가 다른 거 같아.' 저녁 시간이 다 되어가서 그런지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여행자 같지는 않아 보이고 거의 다가 이 마을 사람들인 듯했다. 가족끼리 외식 나온 사람들, 친구와 같이 술이라 도 한잔하기 위 해 모인 사람들 등등, 여행자 차림을 한 일행이 즐겁게 식사를 하고 있는 모습 같은 여러 종류 의 형태의 사람들이 이 식당에 자리해있었다. 모두들 저마다의 사연은 있겠지만 다들 즐거운 표 정이었다. '뭐랄까. 살아 움직인다고 해야하나.' 확실히 왕성과는 다르다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지금껏 왕성 안 에서만 생활해온 그에게는 예상외의 충격이었다. 왕성은 멈춰있다. 언제나 그렇듯이 항상 그렇다. 어제가 오늘이고 오늘이 내일일 것이며 내일이 평생이 된다. 간간이 일어나는 행사들이 없다면 지루함에 못 이겨 미쳐버릴 지도 모를 정도다. 훼이드리온도 그 지루함에 하루하루를 근근히 살아가고 있던 타입이었다. 한 나 라의 태자라는 신분에 눌려 제대로 기를 뻗어내지도 못하는 생활의 연속이었고, 그것을 잠시나 마 벗을 수 있는 시간은 검술 수련을 할 시간뿐이었다. 너무나 지루하고 지겨운 생활에 숨이 막힐 지경에, 그가 찾아낸 것이 바로 마스터 카드였다. 마스터 카드는 그를 이 식당에 모인 사람들 과 같이 생활에 활력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들었다. '살아있어. 이런 것이 살아있다는 느낌.' 왕성 안의 숨막히는 생활과는 전혀 다른 느낌에 훼이드리온은 살며시 미소를 떠 올렸다. 그저 지 켜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무척이나 좋아지고 있었다. '그래, 내가 왕이 되면 이런 나라를 만드는 거야. 국민 누구나 저렇게 웃을 수 있 도록. 그렇게 만드는 거야.' 라시안트에서 느꼈던 의지와 일맥상통하는 의지가 떠올랐다. 어디까지나 왕이 된 다는 전제 하에 가능한 일이지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흡족한 기분이 들었다. 저 웃음들을 꼭 지 켜주고 싶다. 저 싱그럽게 살아있는 웃음들을 사라지게 할 수는 없다. 왁자지껄한 시끄럽지만 기분 좋은 분위기 속에서 홀로 테이블에 앉아 웃음 짓고 있는 훼이드리 온에게 주인 아가씨가 다가왔다. 쟁반에서 물이 담긴 잔을 들어 테이블 위에 내 려놓으며 그녀가 말해왔다. "어머, 무슨 좋은 일 있어요? 잘 생긴 얼굴이 한층 더 밝아졌네요?" "아… 아니요, 아무 것도 아니에요." 긴장이 됨을 느끼며 싱긋 웃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물어왔다. "주문은 뭐로 할래요?" 아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 어딘가 전혀 새로운 분위기에 훼이드리온은 잠시 그 녀를 관찰하는 시간을 가졌다. 갈색의 머리카락. 입가에 진하게 묻은 미소. 틀린 점은 없었다. 그 런데 왜 다른 사람인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일까. 너무나도 달라진 분위기 때문이라고 간단히 결 론 내린 그는 웃으며 되물었다. "뭐가 있는데요?" 왕성에서 특급의 실력을 가진 요리사가 만든 각종 산해진미를 취급하던 입이지 만, 그는 그렇게 깐깐한 인물이 아니었다. 맛만 있다면 천하게 여겨지는 비빔밥도 맛있게 먹을 수 있기 때문에, 은근히 이런 여관에서 만들어지는 '서민의 요리'도 기대가 됐다. "잘 모르신다면, 간단하게 저녁 정식으로 하는 게 어떠세요? 크림 수프와 갓 구 운 마늘 빵, 그 리고 함박스테이크. 샐러드도 추가하실 수 있고요, 입가심으로 저희 '전사의 노래 ' 여관이 자랑 하는 음료인 '다이사'도 나온답니다. 저녁 정식으로 하시겠어요?" "으음, 뭐, 그걸로 주세요." "네에, 계산은 나중에 해주세요. 그리고 나오는데 조금 시간이 걸리거든요? 기다 려주실 수 있 죠?" 아마도 식당 안을 가득 매워버린 손님들 때문이리라. 훼이드리온은 당연하다는 듯이 미소지으며 주억거렸다. 그녀는 싱긋 웃음으로 답하고 몸을 돌려 카운터로 향했다. '흐음, 그럼 기다리는 동안 마스터 카드나 가지고 놀아볼까?' 테이블 사이로 익숙한 몸놀림으로 지나가는 그녀의 등을 바라보다가, 허리 쪽으 로 시선을 내렸 다. 갈색주머니는 아직도 허리에 매달려있었다. 훼이드리온은 끈을 풀러 주머니를 테이블 위로 올렸다. 묵직한 느낌. 안에 담긴 카드의 무게가 손목을 통해 느껴졌다.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입구를 조이고 있던 끈을 느슨하게 만들고 마스터 카드들을 테이블 위로 쏟아냈다. 테이블 위에 흩어진 카드들. 네모난 그 모양을 눈으로 확인하자 왠지 안심이 되 면서 살짝 미소 가 걸쳐졌다. 누님과의 일전, 필로윈과의 일전이 머리 속에 새록새록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 즐거웠던 나날들. 평생 그렇게 살아도 아깝지 않을 만큼 즐거웠었는데, 이제 어쩌 면 접어야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쉽거나 슬프지는 않았다. 이 여행에서, 마스터 카드의 뒤 를 쫓는 이 여 행에서 반드시 새로운 게이머들을 만날 것이고 그들과 대결을 바라는 것은 아무 런 문제도 없는 당연한 것이다. 새삼 가슴이 두근거림을 느끼며 카드들을 한 데로 모았다. 그때, 들려오는 정정함이 담긴 노인의 목소리. "허허, 마스터 카드 아닌가." 뒤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훼이드리온은 뒤로 돌아보았다. 마스터 카드를 가지 고 무언가를 하 려던 것을 본 게 틀림없었다. 그의 시야에 적게 쳐도 60은 넘긴 나이를 지녔을 법한 노인의 모 습이 들어왔다. 노인의 키는 훼이드리온과 비슷한 정도였고, 하얗게 샌 머리가 길어서 귀찮았는 지 뒤쪽으로 묶 고 있었다. 꽤나 신세대적인 분위기라고 할까. 하지만 노인의 눈에서는 생기가 넘 치는 안광이 번뜩였고 전체적인 분위기로도 이 마을의 활력과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세월의 연륜이 쌓여서인지 많은 지식을 내포한 듯 보이는 미소가 아주 자 연스러웠다. 의미가 있을 법한 미소가 노인의 입가에 짙게 떠올랐다. 그의 눈은 훼이드리온의 손으로 향해있 었다. "초면에 실례지만, 합석해도 되겠나?" 노인이 물어왔다. 훼이드리온은 "네, 앉으세요."라고 맞은 편의 의자를 끌어내어 자리를 마련했 다. 노인은 작게 "고맙네."라고 인사하고 자리에 앉았다. 뭔가를 물어 봐야할 것 같은 심리적 압박감을 느끼고 있던 훼이드리온과 노인 특 유의 유유자적 한 미소를 머금은 그 노인의 테이블로 때마침 반가운 이가 다가왔다. "어, 숀! 호호호홋! 오늘도 또 왔어요?" 주인 아가씨, 그녀였다. 또 다시 바뀐 성격으로 시끄럽게 인사하는 그녀에게 숀이 라고 불린 노 인이 익숙한 것인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허, 내가 여기 아니면 들를 곳이 어딨나. 평생 장가 한번 못 가서 혼자 사는 이 노인네가 말이 야." "호홋! 제가 같이 살아드릴까요? 숀이 생을 마감하는 그 날까지 잘 부양해드리 죠!" 역시나 시끄러운 그녀. 훼이드리온이 약간은 찡그린 표정을 지은 반면 숀의 얼굴 에는 지워지지 않는 미소가 여전히 떠올라있었다. 아가씨가 또 한번 "호호호호홋!"이라는 여운이 긴 웃음을 식 당이 떠나가라 웃어젖혔다. "여어, 지나! 내 청혼은 거절했잖아! 그런 늙은이가 나보다 좋단 말야?" 낄낄대는 장난스러운 웃음이 섞인 우렁찬 목소리가 주인 아가씨, 지나의 등뒤에 서 날아왔다. 지 나는 획 몸을 틀더니 "흥!"하는 코웃음을 치고 거칠게 대꾸해줬다. "당신 같은 작자보다는 숀이 더 매력 있다구!" "숀은 늙었잖아! 난 숀의 나이의 반도 채 안 살았다구! 내가 더 가능성 있는 거 아냐?" 저쪽 어느 구석 테이블에서 지나와 소리치며 놀고 있는 남자의 친구로 보이는 이 들은 배를 잡고 뒤로 넘어가고 있었다. 훼이드리온은 뭔지는 몰라도 꽤나 즐거운 상황이라 슬그 머니 미소가 입 가에 떠올랐다. 어느새 자신도 이곳에 동화되어 가고 있는 듯했다. 남자의 되물음에 지나는 여전히 당당하게 가슴을 폈다. "호호홋! 어림도 없어! 이 지나 님의 남편으로서는 부족해! 숀이 훨씬 낫지! 안 그래요, 숀?" 숀은 그저 난처하다는 듯이 허허 웃을 따름이었다. 지나는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또 다시 기다 랗게 웃어버리고는 들려오는 그 남자의 외침에 다시 열심히 큰소리로 대꾸했다. "시끄러, 힌! 술이나 마시라구! 사랑스러운 숀의 주문을 받아야하는데 네 녀석 때 문에 숀이 배 고파하잖아!" 남자는 호탕하게 껄껄 웃고는 또 다시 왁자지껄 잡담 판을 벌렸다. 분위기는 더 더욱 무르익었 고, 그 와중에 훼이드리온은 숀에게 의미 있는 눈길을 보내주었다. '인기 많으시 네요.' 숀은 즐 겁게 웃었다. "그래요, 숀. 늘 드시던 것으로 드릴까요?" 지나의 친절한 물음에 숀은 "그렇게 해주게나."라고 대답했다. "훗, 그럼 잠시만 기다려욧!" 그녀가 활발하게 대답하고는 돌아서서 카운터로 걸어가며 방금 전까지 같이 놀던 남자의 뒤통수 를 쟁반으로 그대로 강타해버렸다. 남자가 "윽!"하는 소리와 함께 테이블에 머리 를 박았다가 2 차 충격을 받고 벌떡 일어나서 지나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지나는 익숙하 게 또 되받아 치며 한바탕 소란을 피웠다. 고개를 돌려 그 모습을 관전하던 숀은 마치 이런 장면을 처음 보는 눈빛을 띄고 있는 맞은 편의 어린 여행자에게 고개를 돌렸다. 금발의 머리를 부드럽게 흘러내려 귀를 조금 덮 고 있고, 푸른 눈동자에는 호기심이 가득하다. 귀족 출신인지 생김새에서부터 예사롭지 않은 분 위기가 풍겨오 는 그 어린 여행자에게 그가 말했다. "시끄럽지 않나?" "네? 아, 아니요. 오히려 보기 좋은 걸요." 훼이드리온은 부담 없는 얼굴을 하고 물어오는 노인에게 대답하다가 문득 무언가 를 깨달았다. '부담감이 없다.' 이런 곳은 분명히 처음이다. 훼이드리온에게는 약간은 거북스러울 정도의 밝은 분위기를 가진 이런 곳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왠지 부담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곳을 처음 들어왔을 때도 저 지나라는 쾌활하고 시끄러운 여자 때문에 어색함 을 느끼지 못했 는데. 하아…….' 아무래도 이 마을 사람들은 방문객의 부담을 덜어주는 데에 남다른 소질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조차 들었다. 그만큼 이곳은 훼이드리온에게 놀라운 곳이었다. 왠지 충만해지는 기분에 훼이드리온은 그만 미소를 짓고 말았다. 하지만 숀은 그 저 담담히 기품 있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여행자인가?" "네. 그럼 셈이죠." "아직 어린 듯한데 대단하구먼, 그려. 나이가 몇인지 물어도 되겠나?" "물론이요. 전…" 숀이 말허리를 자르고 들어왔다. "아니, 내가 맞춰보도록 하지." 그리고 끊김 없이 대뜸 주장했다. "15세 아닌가?" "어, 어떻게 아신 거죠?" 솔직히 정말 놀래버린 훼이드리온은 경이로운 눈초리로 연륜이 깊게 파인 숀의 얼굴을 응시했 다. 척 보기에도 '아주 유식하고 머리 좋은 사람'이라고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이미지를 가진 노인은 정말 그런 것인지 간단하게 설명했다. "그저 추측한 것뿐이라네. 외모를 봐서는 아직 어린 티를 벗지 못했는데 홀로 여 행을 하고 있다 는 것은 성인식은 거쳤다는 이야기가 되지. 그래서 성인식이 가능한 가장 적은 나이를 말한 것 뿐이야. 그렇게 놀랄 거 없네." 숀의 친절한 설명에 훼이드리온은 "그렇구나."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끄덕댔 다. "흐음, 그리고 말일세." "왜 그러시죠?" 노인은 훼이드리온의 밑, 테이블 위로 시선을 깔았다. 훼이드리온의 눈이 따라서 아래쪽으로 향 하고 곧 노인이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 깨닫게 되었다. "자네 마스터 카드 게이머인가?" '마스터 카드 게이머라… 왠지 거창하게 들리는걸.' 그래서 조금 부담스러웠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은 아니니까. "네, 그렇…다고도 할 수 있네요." 역시 그렇다고 대답하기에는 쑥스러운 감정이 허락해주지 않았다. 그래도 겨우겨 우 그렇게 대답 을 이어냈고, 숀은 기대했던 대답이었는지 한껏 주름진 입가의 근육을 양쪽으로 당겨 보였다. 본인으로서는 기쁨을 표현한다고 한 것이지만, 그것을 지켜보는 입장인 훼이드리 온에게는 왠지 모르게 우스꽝스러워 웃음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그러나 나이 많으신 어른 앞에 서의 예절이 어 떤 것인지 몸에 배기도록 배운 그였는지라, 실례를 범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말일세." 무슨 할말이 있는 듯 먼저 그렇게 서두를 꺼내놓고 훼이드리온의 관심을 끌었다. 그리고 소품이 필요한지 걸쳐 입고 있던 회색의 조끼 안으로 손을 쿡 집어넣었다. 금방 무언가 가 나올 것이라 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무슨 문제가 생겼는지 옷을 뒤적뒤적 대기만 할 뿐 어떤 것도 나올 기미 가 보이지 않았다. 이윽고 숀이 "분명히 여기에 넣어뒀는데……."라고 투덜대면서 하체 쪽으로 손을 내렸고, 무언가 잡히는 것이 있었다. "허허, 미안하네. 나이가 먹으니, 기억력 감퇴가 진행되는 가보이. 이해해주게나." "아니요, 괜찮아요. 그런데 뭘 꺼내시려는 거죠?" 나이가 먹었다고 해도 이미 노인의 얼굴에서 젊은이 못지 않은 정정함을 읽어낸 훼이드리온은 고개를 가로젓고 물었다. "아, 흠. 그러니까 말일세. 마스터 카드 게이머라면, 혹시 나와 게임 할 생각 없는 가? 별다른 바쁜 일이 없다면 말일세." '마스터 카드 게임?' 숀의 손에 들려 올라온 것은 훼이드리온의 것과 비슷한 크기의 회색주머니. 생김 새도 끈으로 입 구를 조이는 형식이라, 색깔만 바꾸면 훼이드리온의 주머니와 거의 똑같았다. 다 만, 낡아서 회 색 빛이 많이 바래졌다는 것만 제한다면. 아무튼 그 주머니 안에서 나온 건 숀의 말과 일치하는 마스터 카드였다. 훼이드리온의 얼굴에 놀라움이 채색됐다. "어르신께서도 마스터 카드 게이머이신 건가요?" "허, 반가운 반응이군, 그래. 내가 게이머임을 밝히면 거의 다가 그런 표정을 짓 는다네." 금새 미안한 표정이 되어버린 금발의 어린 여행자에게 숀은 괜찮다는 뜻으로 웃 어주었다. 속으 로 '괜찮은 젊은이이군.'이라고 중얼거리며. "괜찮네. 이제 익숙해졌으니. 그래, 나도 마스터 카드 게이머라네. 이 나이가 될 때까지 아직 게임에서 손을 못 뗀 주책 맞은 늙은이이지. 허허허." 정말 아무렇지 않은 듯이 스스로를 늙은이라고 놀려대는 숀에게 훼이드리온은 좋 은 인상을 받았 다. 상대방의 부담을 없애주는 능력이 참으로 대단한 것 같았다. "어떤가, 한번 해볼 텐가? 혹시 늙은이라고 상대해주지 않는 건 아닐 테지?" "설마 그럴리가요. 마스터 카드 게이머라면 나이는 상관없는 거잖아요? 안 그래 도 요즘 게임을 하지 못했는데, 제가 오히려 감사 드려야 하겠네요." "그럼 감사히 받도록 하지." "훗, 감사합니다, 어르신." 나이를 초월한, 세대를 초월한 만남. 하지만 서로 마스터 카드 게이머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어 서인지 그 만남에서 어색함이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훼이드리온은 마스터 카 드의 새로운 장 점을 또 하나 찾아낸 것 같아 기분이 무척 달아올랐다. 서로 게임을 동의한 가운데 천천히 게임 준비를 진행시켜 나갔다. 먼저 자신의 카드를 충분히 섞은 다음, 50장으로 든 카드의 수를 정한 그들은 남은 카드들을 가지런히 쌓아 서 테이블 중앙 쯤에 놓고 자신의 손으로 25장을 골라냈다. 훼이드리온이 신중하게 골라내는지 조금 시간을 끌 었지만, 숀은 별로 상관없다는 여유 있는 표정으로 기다리다가 곧 카드를 교환해 나머지 25장을 골라내기 시작했다. 훼이드리온이 숀에게서 받은 카드의 뒷면만을 살피며 13장쯤 골라내고 있을 때, 앞쪽에서 "으 음."하는 약한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 살피자, 그 소리가 자신의 카드를 유심히 들여다 보고 있는 노인의 입에서 흘러나온 소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말을 꺼내기가 미안할 정도로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던 숀은 문득 고개를 들더니 훼이드리온의 푸른 눈동자와 마주했다. 노인의 짙은 갈색의 눈동자가 지적인 호기심을 자극한 물결을 출렁이 고 있다. "이 카드… 어디서 구했는지 물어도 되겠나?" "네? 아, 네." 갑작스런 물음에 덜컥 놀라버린 훼이드리온의 머리가 또 다시 혼돈 속으로 가라 앉으려하고 있 었다. 대체 어떻게 대답해야지 잘 대답한 것이 될지 어지러웠다. 솔직하게 "왕성 비밀창고에서 대마도사의 봉인을 풀고 들어가 발견한 것입니다."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결국 대충 거 짓말로 때우기로 한 훼이드리온이 들킬까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대답했다. "저, 저희 집에서 오래 전부터 있던 거예요.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제가 마스터 카드를 좋아해서 여행 나오면서 같이 챙겨 나온 것이죠." '들키면 어떡하지?' 아까 전 자신의 행색을 보고 나이를 알아 맞춘 노인이었다. 어쩌면 거짓말을 한 다는 것을 알아 챌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열리지 않는 노인의 입을 쳐다보는 훼이드리온의 맘은 쿵쾅쿵쾅 뛰기 만 했다. 하지만 다행히 그가 우려하던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흠, 그래서 그런가……." 약간은 실망한 듯한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다시 시선을 내리까는 숀을 보며 안도 반 호기신 반 이 마음을 차지하는 훼이드리온. 약간이라도 남아있을지 모르는 후환을 없애기 위해 대뜸 노인 에게 물었다. "뭐 때문에 그러시는 거죠?" "음? 아니, 뭔가 이상하게 있어서 그러네. 아무래도 이 카드가 요즘 만들어진 건 아닌 거 같아 서 말이야. 내 추측으로는 마스터 카드가 생긴 초기쯤에 만들어진 듯하이. 하지만 그렇게 여기 기에는 카드가 너무 깨끗하단 말일세." '초기는 몰라도 오래 전에 만들어졌다는 건 맞아요. 디바이어 경도 그랬으니까. 그리고 깨끗한 건 오랜 시간동안 봉인 당해서 누구도 만지지 않아서 그런 것이죠. 하지만 이 모 든 걸 말할 수 없는 저를 용서해주세요!' 뭔가 복잡한 표정을 짓는 숀의 얼굴을 차마 바로 볼 수 없는 훼이드리온은 속으 로 연신 죄송하 다며 고개를 숙였다. 후계자 수련의 율과 관계된 일이기에 거짓말을 해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라, 그렇게 속으로라도 용서를 비는 수밖에 없었다. 꽤 시간이 흐르고, 소란스럽던 식당의 분위기도 점점 가라앉고 있을 무렵, 숀이 서둘러 카드를 마저 골라내어 돌려주며 말했다. "일단 지금은 게임을 즐기세. 남은 의문은 나중에 풀어보도록 하지." 그렇게 오랜 상념에 잠겨서 실컷 고민해놓고도 아직 의문이 남아있단 말인가. 숀 은 의문은 다 풀지 못한 안타까움 때문인지 약간 찡그리고 있던 미간을 다시 풀었다. 곧 온화 하고도 지적인 미소가 그의 만면에 떠올랐다. "그럼 이제 준비도 다 됐으니, 시작해볼까?" "네, 그러도록 하죠. 먼저 하세요." "허헛, 그럼 사양하지 않겠네." 어느새 주위에 모여든 사람들. 테이블을 중심으로 무슨 일인가 싶어 모여든 사람 들의 눈길 속에 서 숀이 '이야기의 시작' 카드를 오른손으로 들고 작게 외쳤다. "시작." ----------------------------------------------------------------- ------------------------ 부지런하여 기특한(자화자찬...;;;) 팀올습니다(___) 14편을 올리게 되는군요. 요즘 자까가 너무 부지런하지 않습니까? 처음부터 이렇 게 연재했더라 면 벌써 20편은 넘어겠군요. 훗. 다 미천한 저의 잘못입니다.(당연하지!!) 네에, 저번에 추천을 해주신 분이신데 아이디를 까먹었었죠. IKARET님. 아이디 까먹어서 죄송했습니다(___) 더더욱 저의 작품을 사랑해주시구요. 감상도 남발해주세욧!(>.<) ...점점 뻔뻔해져가는 자까... 아, 아무튼 예고가 틀렸군요. 이번 편이 이렇게 길 줄 은 몰랐습 니다. 어쨌든 마스터 카드 게임을 시작하기는 했는데. 에휴. 자자, 그럼 15편을 향하여 힘차게 달려볼까요!(BGM: 크라잉 넛 '말달리자') 꾸벅(___) 어둠의 기사 DARK KNIGHT TEAM... P.S 추천과 감상과 비평에 목마른 불쌍한 작가에게 구원의 손길을... 번 호 : 9543 / 10423 등록일 : 2000년 07월 14일 21:05 등록자 : 암음기사 조 회 : 146 건 제 목 : [카드 게임 판타지]『 카드 마스터(Card Master) 』#015 카드 게임 판타지(Card Game Fantasy) 카드 마스터(Card Master) 15. 숀의 노인이지만 결코 걸걸하지 않고 똑똑한 목소리가 간단하게 튀어나오자, 그 의 오른손가락에 의지하여 꼿꼿이 허공을 향해 서있던 이야기의 시작 카드를 중심으로 둥근 파문 이 일어나기 시 작했다. 노란색, 아니 녹색. 틀렸다. 붉은 색이었다. 그러나 그 역시 아니었다. 둥 근 원을 그리 며 밖으로밖으로 점점 퍼져나가는 색의 파문은 찰나마다 색깔을 자유분방하게 바 꾸었다. 너무나 도 아름다운 그 광경에 숀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그것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감 탄사만을 남발 했다. "오오, 이럴 수가." "아름다워……." 신기한 광경. 거기다 아름답기까지 하다면, 그것은 '신기'를 뛰어넘어 '신비'에 가 까워진다. 카 드를 중심으로 일어나는 물결 같은 공간의 신비로운 일렁거림은 점점 더 넓게 원 의 지름을 확대 시켜나가더니, 곧 식당의 천장을 향해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머, 멋있어…….' 홀로 아무렇지 않은 숀이 자신의 얼굴을 보고 작게 너털웃음을 흘리고 있다는 것 조차 모른 채, 훼이드리온은 하염없이 카드가 만들어낸 파문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렇게 일렁거리던 공간은 어느새 각진 형태로 변화해나가더니 성인의 평균 키 만한 높이에서 직육면체의 공간을 형성했다. 투명하게 반짝이는 직육면체의 공간. 훼이드리온은 슬슬 호기심이 솟구쳐 오름을 느낄 수 있었다. "이게 뭐죠?" 허공에 떠있는 네모난 공간을 가리키는 훼이드리온의 손가락. 숀은 다른 사람들 과 마찬가지로 그 공간을 올려다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마스터 카드, '이야기의 시작' 카드가 만들어낸 가상 공간이네. 마스터 카드 게 임 용어로는 '드레이프(dlief)'라고 하지. 마스터 카드에는 환영을 보여주는 능력이 부여되어있 다는 건 잘 알고 있을 거네. 하지만 다른 카드들과는 다르게 이야기의 시작 카드는 저런 가 상 공간을 형성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서, 만약 이야기의 시작 카드를 사용하고 게임을 진행한 다면 환영이 아 닌 영상이 저 공간 내에서 펼쳐지는 것이네. 게이머가 아닌 관중들을 배려한 마 법이지. 자네는 처음 보는가보군?" "네, '이야기의 시작 카드'는 사용해본 적이 없어서요." "흠, 확실히 이 카드는 1대1 대전용인 마스터 카드 게임으로서는 그렇게 사용할 기회가 많은 건 아니네만, 그래도 한번씩 해보는 것도 좋지. 환영을 체험하는 것과는 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거 든." 말을 끝내고 웃는 숀. 훼이드리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식당의 마법의 등에 의해 번쩍이며 자신의 존재를 주장하고 있는 가상 공간, 드레이프를 잠깐 올려다보았다. '마스터 카드는… 역시 심오하구나.' 그가 마스터 카드에 대해서 또 한가지 알았다는 사실에 흡족해할 때, 숀이 훼이 드리온에게로 넌 지시 눈길을 돌렸다. "그럼,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고 하니, 시작해 보세나. 내가 먼저지?" "네, 시작하세요." 손에 잡히는 두툼한 카드의 느낌을 상기하며 훼이드리온은 숀이 어떤 공격을 해 올지 예측했다. 보통 선공은 기본공격으로 해온다. 아마도 그럴 가능성이 가장 높기에 미리 신관 카드를 준비했 다. 숀의 손가락이 든 카드를 한번 훑더니 두 개의 카드가 손가락에 의해 뽑아졌다. 그동안 마스터 카드를 다뤄온 경험을 말해주듯 노인의 손놀림이 물 흘러가듯 자연스러웠다. 저 런 주름잡힌 까 칠까칠한 손에서는 도저히 나오기 힘들다고 여겨지는 움직임에 훼이드리온은 작 게 신음을 내뱉 었다. '왠지 쉽지 않겠는걸.' 하지만 쉬운 게임이라면 재미도 없는 것이 당연지사. 훼이드리온은 옅게 미소지 으며 숀의 입이 열리길 기다렸다. 카드 두 장을 한꺼번에 테이블 위로 올리며 숀이 말했다. "물의 전사 카드와 북마법사 카드로 합동 공격." 훼이드리온은 솔직히 놀랬다. 선공치고는 꽤 세게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전사 카 드와 마법사 카드의 조합은 상호 간의 조화를 잘 이루기 때문에 공격력이 상승하게 된다. 거 기다 물의 전사 와 북마법사는 동일한 속성을 지녔기에, 또한 공격력의 증가를 가져온다. 이래저 래 보통보다 얼 마정도 올라간 공격력 때문에 프리스트 카드 하나를 교체하고 내밀었다. "프리스트 카드와 하이 프리스트 카드로 방어." 신관 카드에서 1레벨인 프리스트와 2레벨인 하이 프리스트로 방어가 가능했다. 뭔가 공중에서 번쩍 하는 느낌에 훼이드리온은 카드를 테이블 위로 올리다가 말고 드레이프로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야에 잡힌 모습은 너무나도 신기한, 마법이기에 신비한 그런 광경이었다. "와아! 멋있다!" 어디선가 들어본 여인의 고음의 목소리. 뒤에 따라붙는 "호호호홋!"이라는 웃음소 리가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훼이드리온이 정체를 깨닫게 해주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녀 를 향해 쏟을 신경이 현재 남아있지 않았다. 아름다운 하실루스의 눈빛에 홀린 듯 드레이프만 을 응시하고 있 었기 때문이다. 아니, 정확히 그 눈은 드레이프 안의 영상을 비추고 있었다. 드레이프 안, 숀 쪽에 돌연히 나타난 청색의 갑옷을 입고 검을 든 전사와 푸른 로브를 걸치고 지팡이를 든 마법사. 비록 크기는 작았지만 모인 사람들의 입에서 감탄사를 끌어 내기에는 부족 함이 없었다. 모두들 저마다 말을 주고받을 때, 이번엔 훼이드리온 쪽에서 하얀 색의 나풀거리 는 신복(신관들이 입는 옷)을 걸친 신관 둘의 모습이 출연했다. 전사가 검을 치켜 세우고 공격해 들어가자 앞서있던 프리스트가 신법으로 방어벽을 친다. 검이 은색의 벽을 강하 게 내리침과 동 시에 뒤에서 마법사의 마법이 시전 된다. 북마법사의 전신에서 피어오르는 푸른 물줄기. 길게 꼬리를 뒤로 빼내며 물줄기는 프리스트의 방어벽을 몽땅 녹여버릴 기세로 허공을 가로지르기 시 작한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하이 프리스트가 움직여 한층 더 강한 방어벽을 생 성해내 마법을 막는다. 물줄기 힘없이 허공 속으로 방어벽을 뒤덮으며 땅 속으로 스며든다. 전사 도 마법사도 뒤로 물러서 프리스트들과 대치한다. 드레이프 안을 감도는 전장의 향기. 떠도는 긴장감. 고정되어버린 바람. 묻어나는 치열한 열전 에 모든 사람들이 숨을 죽인 채 그 작은 전투를 지켜보았다. 마치 실재로 일어나 는 느낌을 주는 움직임에 모두 혀를 내두르며 그 안으로 들어갈 듯이 눈을 크게 떴다. 아무도 떠 드는 사람이 없 었다. 그렇게 시끄럽고 활기 넘치던 식당 안이 어느새 고인의 명복을 비는 자리 보다 조용해졌 다. 이따금 사람들의 목으로 타액이 넘어가는 소리가 울릴 뿐, 어느 것도 소리를 허용하지 않았 다. 그런 정적 속에서 훼이드리온은 간신히 눈을 뗐다. 실감나는 드레이프 안의 전투 에 넋을 빼앗겨 버려 응시하고 있다가 이제 정신을 차린 것이다. 직후,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어깨를 으쓱 이며 훼이드리온의 차례라는 듯 손을 들어 보이는 숀의 모습이었다. 훼이드리온 은 아직도 약간 은 몽롱한 상태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공격 카드를 뽑아냈다. "와이번 카드와 백기사 카드. 백색의 기사가 창공을 질주하는 날개를 가진다. 이 로써 태크닉 완 성. 비술 드래곤 나이트." 저쪽에서 세게 나오면 나도 되받아 친다, 라는 생각으로 처음부터 드래곤 나이트 를 발동시켰다. 드레이프 상공에서 흰색의 갑옷을 걸치고 검을 높이 치켜세우며 와이번을 타고 등장하는 드래곤 나이트의 모습이 나타난다. 천천히 상공을 배회하던 와이번은 어느 순간 세차게 허공을 꿰뚫고 전사를 향해 날아든다. 이어지는 은색 검광의 점멸. 가로로 그어지는 드래곤 나이 트의 검에 물 의 전사는 특별한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몸과 목을 분리 당한다. 드래곤 나이트 의 검은 쉬지 않 고 빛을 뿌린다. 그 빛에 당한 마법사의 가슴에서 선혈이 솟구쳐 오르고 마법사 는 고통스런 비 명을 지르며 쓰러진다. 완벽한 드래곤 나이트의 승리. 훼이드리온은 "흠!"하고 힘 찬 기합 비슷 한 소리를 내질렀다. 이제 드레이프 안에는 훼이드리온의 카드들만이 남았다. 그러나 숀의 표정에는 여유가 가득했다. 초반이라서 그러는 것일까. 그렇게 신경 쓰지 않는 듯 하는 노인의 표정에 훼이드리온은 불안한 기색을 내비쳤다. 이윽고 숀의 손이 든 카드 위를 떠돌다가 두 장의 카드를 뽑아들어 내밀자, 그 불안함이 정확히 들어맞았다는 뜻에서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자네가 비술로 나온다면, 나도 비술로 상대하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겠나? 허, 남마도사 카드 와 흑정령사 카드와 분노의 정령 퓨리 카드. 흑정령사가 분노의 정령 퓨리를 소 환해 남마도사의 정신에 빙의 시킨다. 이로써 태크닉 완성이네. 비술 '매드 매지션'." 그 순간 드레이프 안에서 커다란 빛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것의 근원지는 바로 숀이 만들어낸 매드 매지션. 광기에 젖은 두 눈에서는 살육의 본능만이 느껴질 뿐이다. 터져 오르는 분노와 광기에 모든 것 을 내맡긴 남마도사. 그의 몸을 중심으로 커다란 불줄기가 솟아오른다. 하늘을 향 하여 승천하는 용의 기운. 8갈래 갈라지는 불줄기는 곧장 드래곤 나이트와 프리스트들에게 덮쳐 든다. 반항은 용서치 않는다. 아니, 반항할 시간도 없다. 방어도 소용없다. 모든 것을 태워 삼킬 가공할 위력 을 느끼게 해주는 불줄기의 붉은 기운이 모여있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웃음을 사 라지게 만든다. 그들의 얼굴에 붉은 빛이 넘실댈 즈음, 드디어 불줄기는 드래곤 나이트의 머리 위에, 프리스트 들의 방어벽을 뚫고 그들의 몸을 한줌의 재로 변모시킨다. 찰나의 순간에 흐르는 억겁의 시간. 미친 마도사의 가공할 위력을 지닌 불줄기는 한동안 그 일대를 넘실대면서 느껴 지는 모든 존재 를 말살한다. 이제 드래곤 나이트와 프리스트들의 존재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불줄기는 그들의 재까지 소멸시킨다. 남은 건, 불줄기를 터뜨린 미친 마도사의 광기 넘치는 숨소리뿐. "헛!" 어느새 그 난폭하고도 아름다운 광경에 넋을 빼고 있던 훼이드리온이 미처 깨우 치지 못한 정신 을 이제야 추스르기 시작했다. 이건 정말 머리 속에 비치는 환영 이상이었다. 눈 을 통해 직접 들어오는 모든 광경은 그 자체보다 배로 증가된 박력으로 그에게 다가왔다. 도저 히 눈을 뗄 수 가 없었다. 비록 지금 자신이 당하고 있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게임을 포기하듯이 쳐다보고 있을 수는 없다. 훼이드리온은 현 재 상황을 인식 했다. '이대로 있으면 내 생명력에 직접 영향을 끼치게 된다.' 드레이프 안의 자신의 카드가 모두 소멸된 이상 저 미친 마법사, 매드 매지션을 막지 못한다면 생명력에 직접 피해를 끼칠 것이 분명하다. 그러기 전에 강한 공격으로 저 매드 매지션을 제지 해야했다. '방어도 필요 없다. 직접 공격이 우선이다.' 그렇게 결심한 훼이드리온의 눈과 손에 부지런히 든 카드를 누빈다. 두 번째 공 격에 이렇게 위 기를 맞게 될 줄이야 상상도 못했지만, 마스터 카드라는 것이 원래 일정한 흐름 이 없는 게임이 라 그대로 수긍해야했다. 묵묵히 눈에 힘을 주어 마땅한 카드를 찾았다. 이윽고 그의 눈에 이 상황에 알맞은 카드가 발견되었다. '이것이라면!' 하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다른 것이, 다른 것이 필요했다. 애타게 파고 들어 가는 가슴을 부 여잡고 카드를 뒤지는 그의 노력에 빛을 보여주듯 그는 드디어 마땅한 카드를 발 견해낼 수 있었 다.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침묵한 채 게임을 지켜보고 있는 관중들의 기대를 한 몸 에 받으면서 훼 이드리온의 손이 움직였다. "그럼 저도 비술로 상대하죠. 북대마법사 카드와 '기상이변' 카드와 '수룡의 여의 주' 카드. 북 대마법사가 수룡의 여의주로 기상이변을 불러일으킨다. 짙게 깔린 먹구름에서 날 카로운 비가 떨 어진다. 이로써 태크닉 완성. 비술 '수룡의 눈물.'" 훼이드리온의 입이 다물어지며 회심의 미소를 짓자마자 드레이프 상단에 짙은 먹 구름이 끼기 시 작했다. 어느 모로 보나 구름의 형태. 금방 비를 뿌릴 듯한 먹칠을 한 그 구름이 한쪽에서부터 뭉게뭉게 상단을 장악해나가더니 이내 드레이프를 꽉 채웠다. 그 아래 푸른색의 여의주를 한 손 에 쥐어들고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들고 떠있는 북대마법사의 모습이 보인다. 비가 내린다. 드레이프 가득히 낀 먹구름에서 비가 폭우처럼 쏟아져 내린다. 모든 것을 태워버 릴 듯하던 불줄기도 비의 기세에 눌려 조금씩 약화되더니 이내 흔적도 없이 자취 를 감춰버린다. 매드 매지션에게서 피어오르던 불도 비로 인해 꺼져버린다. 이제 드레이프 내 어 딘가에도 불의 기운은 찾아볼 수 없다. "오오오오!"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이 환호하기 시작했다. 그중 가장 목소리가 큰 건 이곳의 주인 아가씨, 역 시 지나였다. "우와아아아아아! 대단하다아아! 이거 정말 진짜 같아! 마스터 카드라고 하는 게 이런 거였다 니, 숀! 나도 가르쳐줘욧! 숀의 부인이 되려면 이런 것도 잘해야하겠죠? 그러니까 나도 가르쳐 주는 거예욧!" "허허……." 매드 매지션의 효력이 사라지는 것 때문인지, 아니면 지나의 말 때문인지 조금은 아리송한 허탈 한 웃음을 짓는 숀. 그러나 아직 훼이드리온의 공격은 끝난 것이 아니었기에, 허 탈한 웃음은 조 금 이른 것일 지도 모른다. 훼이드리온의 푸른 눈동자가 기묘한 빛을 띄며 숀에 게로 향했다. "아직 남았어요." "음……?" 훼이드리온의 얼굴은 자신감으로 가득 차있었다. "전 아직 방어밖에 하지 않았는걸요. 그렇죠?" 생각해보니 그랬다. 훼이드리온은 비를 내려 자신을 위협하던 불길을 껐을 뿐, 아 직 이렇다할 공격행동을 보인 적은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을 진행시키던 숀. 갑자기 주름이 져 게슴츠레 반 쯤 감긴 그의 눈이 두 배로 커졌다. "혹시……!" 끝내 말을 잇지 못하며 경악하는 표정만을 짓는 숀에게 훼이드리온은 친절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네, 맞아요." 둘만이 이해 가능한 대화 때문에 무슨 소린지 알 길이 없는 사람들의 시선에 의 문이 묻어날 때, 전세를 역전시킬 기회를 얻은 금발의 여행자가 테이블 위에 내려놓지 않았던 북 대마법사 카드와 수룡의 여의주 카드를 그제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아마도 그때, 자신감이 넘쳐나는 눈빛으로 입을 여는 훼이드리온의 눈에서 푸른 에메랄드 색이 아닌 기묘한 다른 색깔을 본 자는, 비단 숀 뿐만이 아닐 것이다. 훼이드리온이 말했다. "북대마법사 카드와 수룡의 여의주 카드. 북대마법사가 수룡의 여의주로, 여의주 의 본 주인을 부른다. 이로써 태크닉 완성. 비술 '수룡소환.'" 숀의 혈색이 눈에 띄게 참담해졌다. 완전히 당해버린 것이다. 북대마법사의 손에 들린 여의주가 허공을 향해 들린다. 이내 그 여의주에서 신비 한 느낌의 푸른 빛이 은은하게 퍼져 나오기 시작한다. 마치 촛불처럼, 아지랑이처럼 흔들리며 구 름을 향해 피어 오르는 푸른 기운. 사람들은 또 다시 그 모습에 취한 듯 드레이프를 응시했다. 무언가 구름 속에서 꿈틀거렸다. 이윽고 구름 사이로 간간이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낸다. 물로 만들어진 듯한 미끈한 몸체의 그것. 북대마법사의 손에 의해 여의주가 땅에 서있 는 남마도사에 게로 향하자, 구름 속에서 움직이던 그것이 드디어 바깥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용. 그것은 물로 만들어진 용이었다. 드래곤과 같은 비늘을 지녔지만, 도마뱀보다 는 뱀의 형상 처럼 길고 매끈한 몸매를 가진 전설 속의 영수. 날카로운 이빨. 부리부리한 눈. 커다란 콧구멍. 그리고 머리 뒤쪽으로 솟아오른 굳건한 뿔. 머리부터 꼬리 끝까지 이어져있는 깃 털 같은 비늘. 그것은 사람들이 말로 듣고 글로 읽어온 용의 모습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었다. 수룡이 남마도사를 향해 허공을 꿰뚫었다. 거센 수룡의 공격. 수룡의 포효와 함께 수룡의 입 속 으로 남마도사가 삼켜진다. 그와 동시에 수룡의 몸체가 다시 먹구름을 향해 날아 오른다. 승천. 승룡. 장관일 수밖에 없는 그 모습에 관중들의 입이 약속이나 한 듯 반쯤 벌어져 버린다. 검은 구름으로 빨려 들어간 수룡은 좀 전처럼 다시 먹구름 사이를 돌아다니며 즐 겁게 노는 듯하 더니, 이내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그와 비슷한 시간에 먹구름이 점차 걷히는 듯하 더니, 비도 그 치고 이내 평범한 상태의 드레이프로 돌아왔다. 사람들의 눈에서 뭔가 좀 아쉬운 빛이 감돌 때 남마도사는 천천히 고도를 낮추더니 바닥으로 내려섰다. 비술이 모두 끝나고 말끔하게 청소된 드레이프를 올려다보다가, 훼이드리온의 시 선이 아래로 떨 어졌다. 맞은 편에 앉아있는 숀의 얼굴을 살피려는 행동이었다. 이내 그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분명히 지금 상태라면 뭐라도 씹은 표정을 하고 있어야 정답이었다. 그러나 숀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일그러진 표정이 아닌 미소였다. "이거… 오랜만에 즐거운 게임이군 그래… 허허허." 어떠한 거짓도 묻어나지 않는, 진정 즐겁다는 웃음에 훼이드리온은 머리를 강하 게 내리치는 충 격을 받았다. 뭔가… 근본적으로 틀려버렸다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 '뭔가'가 대체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심리적으로 일어나는 혼란 속에서 숀이 빙긋이 웃었다. "자네, 정말 좋은 카드를 많이 지니고 있군, 그래. 이렇게 강한 비술들을 다 사용 할 줄 알고 말 이지. 허허, 요새 마스터 카드 게이머도 뜸해서 그만둘까 생각 중이었는데, 고맙 네. 또 다시 나 에게 마스터 카드의 재미를 가르쳐준 거야, 자네는. 그러니." 말을 잠시 끊은 숀의 얼굴을 힐끔 바라보며 훼이드리온은 불길한 느낌이 엄습해 옴을 확연하게 감지할 수 있었다. 전율. 그것은 마스터 카드 게이머만이 느낄 수 있는 전율이었 다. 숀의 손가락을 타고 두 장의 카드가 올라온다. 노인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훼이 드리온에게는 더 없는 패배의 상징처럼 느껴졌다. "선배로서 가르침을 주도록 하겠네. 특수 카드 '반전' 카드와 '드래곤 피어' 카드. 먼저 반전 카드로 수룡의 여의주를 지닌 남마도사를 뒤집어 소멸시킨다." 그와 동시에 드레이프 안을 혼자 지키고 서있던 푸른 로브의 마도사가 흔적도 없 이 사라져버렸 다. 이제 남마도사 카드와 수룡의 여의주 카드는 효력을 잃어버렸다. 숀의 말을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드래곤 피어. 드래곤의 포효 소리에 담긴 공포로 인하여 턴 두 번 휴식." 훼이드리온의 수려한 용모가 일그러졌다. 나름대로 매력이 있는 얼굴이 되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경력의 차이, 경험의 차이로 인해 패배의 수렁 속으로 빠질 참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훼이드리온의 두 번의 휴식으로 말미암아 두 번의 공격을 펼칠 수 있게 된 숀은 예상이나 했다 는 듯이 아주 평온한 얼굴로 든 카드에서 카드들을 뽑아들었다. 모두 붉은 색의 빛깔을 띄는 카 드들. 꽤 숫자가 많았다. "불의 용사 카드와 남대마법사 카드, '화정령사' 카드와 메티 카드 '에립 드로우 스' 카드와 '불 의 로드' 카드, '불의 정령 샐러맨더' 카드까지. 불의 검을 든 용맹한 불의 용사 와 불의 로드로 천하를 호령하는 남대마법사와 타오르는 거대 도마뱀의 비호를 받는 화정령사가 힘을 합쳐 하늘 을 붉게 태워버린다. 이로써 태크닉 완성. 비술 '화염천'" 숀의 공격을 막을 카드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방어할 수도 없다. 저 공 격은 훼이드리 온의 생명력을 고스란히 갉아먹을 것이다. 아니다. 비술 화염천의 공격력은 생명 력을 갉아먹는 정도가 아니었다. '불의 속성을 지닌 공격 카드, 거기다 불의 가호를 받은 메티를 하나씩 다 가졌으 면 공격력은… …!' 번쩍 고개를 들어 드레이프를 쳐다보았다. 붉게 넘실대는 불길 속에서 용사와 마 법사, 정령사의 모든 최상위 공격이 펼쳐지고 있었다.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점점 훼이드 리온 쪽의 드 레이프벽이 붉게 물들더니 이윽고 금방이라도 깨져버릴 유리처럼 달구어지기 시 작했다. 그 와중 드레이프 전체가 내뿜고 있는 붉은 빛에 어린 게이머의 표정이 좀 전 숀 의 표정보다 더 더욱 어두워지는 것을 구경꾼들은 발견하지 못했다. 발견한 자는 상대자였던 숀 뿐. 비참한 표정으로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하게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훼이드리온 을 향해 숀이 충고하는 어투로 말했다. "자네도 검을 쓸 줄 아는 것 같으니, 잘 알 수 있을 걸세. 마스터 카드는 흔한 게 임이 아니라, 그 자체가 작은 전쟁이라네. 전쟁에서는 결코 서두르면 안 되는 법이지. 기회를 노려 가장 적당 한 공격만으로도 충분히 승리할 수 있네. 하지만 자네는 처음부터 너무 강한 비 술을 남발하면서 서둘렀네. 오늘의 패인은 바로 그것이라네." 달궈졌던 벽을 시작으로 드레이프 전체가 산산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유리 같이 깨어져나가더 니, 후에는 마치 모래처럼 가루로 흘러내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모래들은 공기 속으로, 바람 속으로 흔적도 없이 스며들어버렸다. 그 모습조차도 아름다웠기에, 관중들은 또 다시 감탄을 내 지르기 시작했다. 오직 한 명만 남겨두고 모두들 축제 분위기인양 즐거워했다. 그 한 명은 아직도 허공에서 시선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지나가 다가왔다. "끝난 건가요?" 스스로도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지나의 달아오른 볼을 보면서 숀이 고개를 끄덕 였다. "그렇다네. 이제 식사를 해보도록 하지." "네, 준비해올게요." 지나는 얌전한 분위기로 또 바뀌어있었다. 젊은 주인답게 매력적인, 익숙한 미소 를 떠올리며 숀 의 뒤로 사라지는 지나. 숀은 물을 한 잔 마시고 물 컵을 내려놓으며 맞은 편의 금발의 소년을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조금 기다려야겠구먼." 어깨를 으쓱하며 이해한다는 듯한 웃음을 떠올리는 숀의 손길은 테이블 위의 카 드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 ------------------------ 꾸벅(___) 하루 늦어버린 팀올습니다. 이런이런, 이틀 한편 연재라고 해놓고 늦어 버렸네요. 죄송합니다. 요즘 잡을 제대로 못자서인지 피곤해서... 그만 잠이 들어버린 것이었 습니다. 그리 하여 오늘에야 완성하고 이렇게 올리게 됐습니다. 요즘 조회수가 떨어지고 있죠. 헤에, 네 그런 것이죠. 역시 제 글은 재미가 없는 거군요...... (ㅠㅠㅠ) 그렇지만서도 꿋꿋이 올려볼랍니다. 완결을 봐야죠. 그렇죠? 어저면 이 편이 올라가고 나서 조회수가 오를 수도...(키득) 오랜만에 나온 마스터 카드 게임 대결이었습니다. 엄청나게 빨리 끝나버렸죠. 비술이 펑펑 터지고, 드레이프라는 것도 새로 나왔 습니다. 헤에, 드레이프. 여기서 밝힙니다만, 팀의 고대어 체계는 상당히 쉽습니 다. 그래서 이 미 아시고 계시는 분도 계실지도. 검의 경우, 영어로 SWORD이죠. 카드 마스터의 고대어로 한다 면 DROWS입니다. 드로우스. 거꾸로 읽는 거죠. 우헤헤. ( ---) 아, 아무튼 이 미천한 작가는 또 다시 글을 적으러 가겠습니다. 앞으로도 열화 (...;;)와 같은 성원을 많이많이 보내주시길(^^^) 그럼, 꾸벅(___) 어둠의 기사 DARK KNIGHT TEAM... P.S 추천 감상 비평. 받아요, 받아. 해주셔도 상관 없다니까요~ P.S 2 난 이 후기가 너무 재밌어(---!!) 번 호 : 9650 / 10423 등록일 : 2000년 07월 16일 18:04 등록자 : 암음기사 조 회 : 139 건 제 목 : [카드 게임 판타지]『 카드 마스터(Card Master) 』#016 카드 게임 판타지(Card Game Fantasy) 카드 마스터(Card Master) 16. "여기요, 숀. 맛있게 드세요." 지나는 생긋 웃으며 테이블 위에 주문한 요리들을 진열하고 돌아갔다. 숀은 온화 한 웃음을 머금 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출출한 배를 채우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쇠고기 수프. 가장 좋아하는 수프였다. 단백한 맛이 일품이면서 이 '전사의 노래' 여관의 수프 중에서 최고의 맛을 자랑하고 있기에, 믿고 먹을 만하다. 숀은 스푼 가득히 수프 를 떠올려 입에 머금었다. 혀 위로 유들유들한 수프의 감촉이 스쳐지나갔다. 식사에 들어가기 전에 위장을 달래는 기능을 하는 수프를 반쯤 비웠을 때, 숀은 문득 같은 테이 블에 앉아있는 이름 모를 어린 게이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아까 자신이 말한 대로 15세 정도의 소년. 아니, 성인식을 치렀다고 하니 이제 소 년으로 불릴 나이는 지났다. 하지만 아직 외모로서는 성인보다 소년 쪽에 가까웠기에, 그는 ' 금발의 소년'으 로 부르기로 결정했다. 금발의 소년. 역시 그 소년에게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흘러내릴 듯한 윤기를 지 닌 금색의 머리 칼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금색이라고 해도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그런 금발을 소 년은 지니고 있었다. 어둡지도 너무 밝지도 않은 가장 적당한 금색이 있다면, 바 로 이 색이 아 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리고 다음으로 눈에 띄는 것은, 마치 푸른색의 보석을 박아놓은 듯한 빛을 보 이는 에메랄드 색의 눈동자였다. 모든 것을 담아버릴 것처럼 한없이 깊고 깊은 눈동자. '그렇지. 기묘한 빛을 띄었었던 눈이… 바로 저 눈동자였지.' 아직 초점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아 흐릿한 저 푸른 눈동자를 보며 생각해보면 왜 그런 느낌을 받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마스터 카드를 손에 들고 자신만만하게 말할 때 훼이드리온 자신 은 몰랐겠지만, 그의 눈에서 기묘한 빛을 발견한 것이었다. '신기하군. 인간의 눈동자가 다른 빛을 뿜어내다니.' 그 빛은 노인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일이었다. 사실 아주 잠깐 나 타났던 탓에 대 체 어떤 색이었는지는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그 이유 때문에 더욱 더 호기심이 가중되었다. 생 각해보면 어떤 형태를 취한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아주 아리송한 그 문제 때문에 숀은 어 느새 자신의 시선이 향하고 있던 푸른 눈동자에 힘이 들어왔음을 발견하지 못했 다. 훼이드리온은 자신이 얼마나 멍하니 있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쨌든 뭔가 머리 속을 강타하는 느낌 때문에 정신을 추스를 수는 있었지만, 아직도 머리 한 구석이 텅 빈 듯한 느낌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넋을 챙긴 훼이드리온의 눈에 가장 먼저 뜨인 것은 어느새 테이블 위에 올려진 요리들이었다. 아까 지나라는 주인 아가씨가 말한 메뉴들이 빠짐없이 자신의 앞 에 놓여있었다. 따뜻한 감이 많이 사라진 것으로 보아, 멍하니 있었던 시간이 꽤나 길었음을 직 감했다. '휴우… 일단 배나 채우고 보자.' 복잡하기도 하고 시원하기도 한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머리에서 잠시 신경을 끊고 본능적인 욕구 를 충족시키기 위해 스푼 손잡이에 손을 갔다댔을 무렵, 그는 문득 시선을 느꼈 다. 살펴볼 요량 으로 눈동자를 굴리기도 전에 그 시선의 근원지를 알게 됐다. 근원을 향해 훼이드리온이 작게 입을 열었다. "저어… 어르신?" '어르신'의 눈빛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음? 아, 돌아왔는가." "네?" 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훼이드리온의 눈이 동그래졌다. 사실 숀의 잘못이 크다. 멍하니 쳐다 보고 있다가 정신을 차리더니, 난데없이 "돌아왔는가."라니. 훼이드리온은 자신이 제대로 알아 듣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책감에 빠져 들어갔고, 뒤늦게 자신이 범한 실수 를 깨달은 숀이 서둘러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아니, 내 말은, 그러니까 말일세. 혼자만의 세상에 빠져서 멍하니 있다가 이제야 현실로 돌아 왔는가, 라는 의미로 말한 것이네. 미안하네, 미안해." "아, 네."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안도감에 작게 한숨을 내쉰 훼이드리온. 그 후로 둘 사 이에 잠시 정적 이 흘렀다. 시끄러운 식당 안에 비해 그 공간만 침묵 속에 빠져드는 기묘한 장면. 그 정적을 깬 것은 금발의 소년 쪽이었다. "저기…" "음? 뭔가?" 어색한 침묵을 깨기 위해 나름대로 할말을 만들어내고 있던 숀이 반갑게 응답했 다. 훼이드리온 이 쑥스러운지 뒷머리를 슬쩍 긁으면서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감사하다니, 나에게 감사할 게 뭐가 있는가." 숀은 진정으로 모르겠다는 어조로 되물었다. 훼이드리온의 얼굴이 이윽고 붉게 변색되어갔다. 게임 중에 나타났던 그 자신감에 가득 찬 얼굴이 이렇게도 바뀔 수 있다는 사실 에 대해서 숀이 속으로 '호오.'하고 감탄을 해버렸다. "가르침을 주신 것 말이에요. 사실 항상 '서두르지 말자, 서두르지 말자'라고 되 새겨도 막상 게 임에 들어가게 되면 나도 모르게 흥분을 해버려서 게임을 망치기 일쑤였거든요. 하지만 이젠 정 말 고칠 수 있을 것 같아요. 정말 감사합니다, 어르신." 정말 간단하게 패배한 충격이 예상외의 효과를 불러일으킨 듯하다. 숀도 그 점을 깨달았는지 아 주 흡족한 상태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정말 다행이네. 나로서도 장래가 유망한 게이머를 도왔다는 생각을 하 니 정말 기쁘구 먼." 허허허, 기분 좋게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숀에게 훼이드리온은 거듭 고개를 숙이 면서 감사를 표 했다. 마스터 카드 게이머로서 또 한번 성장을 하게 해준 숀에게 어떻게 감사한 마음을 표현해 야할지 몰라 그냥 계속 인사만을 되풀이했다. 숀이 손을 휙휙 내저으며 웃었다. "허허, 이거 참. 계속 그러면 내가 오히려 불편하지 않나. 적당히 하게, 적당히." "네? 아, 죄송합니다." 훼이드리온은 또 한번 내려가려는 고개를 들어올리며 이번엔 사과를 했다. 유쾌 한지 소리내어 웃는 숀은 오랜만에 즐거운 기분을 만끽하며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먹게."라고 순진한 소년에 게 말하는 것도 잊지 않고. 훼이드리온은 일단 그렇게 인사를 하고 나니, 비어버린 듯하던 머리도 말끔히 정 리되었고 마음 도 평소 때처럼 가볍게 무게를 덜 수 있었다. 꽤나 상쾌한 기분에 한껏 웃어보고 나이프와 포크 를 양손에 들어 새콤한 향을 피우는 소스가 듬뿍 뿌려진 스테이크를 공격하기 시 작했다. 마스터 카드 게임을 하느라 잊고 있던 허기가 한꺼번에 밀려와 스테이크는 제법 빠른 속 도로 그 형상을 잃어갔다. '허, 배가 많이 고팠나보구먼.' 식사 속도로는 빠른 움직임을 보여주는 훼이드리온의 모습에 숀은 작게 웃는 중 에서도 관찰할 건 다 관찰하고 있었다. 노인의 눈동자가 여기저기 훼이드리온의 몸을 더듬었다. '저 용모는 아무리 봐도 귀족가의 자제 같은데. 검도 상당한 장인의 솜씨를 엿볼 수 있고. 게다 가…' 숀의 눈의 최종 종착지는 훼이드리온의 빛나는 금발이었다. '저 금발. 저런 색을 띌 수 있다는 것은… 허, 그럴 지도 모르겠군.' 노인의 뛰어난 지능을 가진 머리는 단숨에 한가지 결론을 도출시켰다. 확인되지 않은 결론이었 지만 여러 증거들로 미루어보아 가장 확률이 높은 것이었다. 숀은 마늘 빵에 수 프를 소스처럼 묻히면서 은근슬쩍 훼이드리온을 향해 말했다. 확률을 확신으로 바꿀 수 있는 마 지막 증거 획득 을 위한 작업이었다. "그러고 보니, 통성명도 안 했구먼." "아." 이제야 깨달은 훼이드리온도 짧은 음성을 내뱉었다. 숀이 말했다. "내 이름은 아까 들었을 테니, 말 안 해도 되겠지만. 그냥 숀이라고 부르면 되네." "네, 어르신." "숀." "네?" "어르신이 아니라 숀이라고 부르라고 했잖은가. 어르신이라는 말, 늙어 보여서 싫 으이." 훼이드리온은 조금은 황당한 기분을 느끼며 "하하."하고 어색하게 웃어버렸다. 그 럼 이 노인은 자신이 늙었다고 생각하지 않는 걸까. 어쨌든 훼이드리온은 노인이 원하는 대로 '어르신'이란 단어를 빼버렸다. "그럼 그렇게 부를게요, 숀." "허허, 고맙군, 그래. 자네 이름은 뭔가?" "네, 제 이름은……" 숀의 물음에 가볍게 대답하려던 훼이드리온은 일시적으로 뇌 기능이 마비되었음 을 감지했다. '이, 이런.' 자신의 이름, '훼이드리온 레이틴 라시엔트'를 그대로 밝힐 수 없는 노릇 아닌가. 사실대로 말 했다가는 후계자 수련의 율을 어기는 것이 되고, 그것보다도 미친 놈 취급을 받 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훼이드리온의 머리가 급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새로운 이름을 만들어내 야 했다. "훼…온 레이엔트입니다." "허, 그 이름을 말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뭘 그렇게 뜸을 들인 건가."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리는 숀을 보며 일단 위기를 넘겼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 을 내쉬어보았 다. '훼온 레이엔트…라. 급하게 생각해낸 거지만, 그럭저럭 맘에 드는걸.' '훼온 레이엔트'라는 이름 자체에서 오는 밝은 느낌이 맘에 들기는 했지만, 더 중 요한 이유는 자신의 본이름을 완전히 숨기지는 않았다는 기쁨 때문이었다. '훼온 레이엔트'는 '훼'이드 리'온' '레이'틴 라시'엔트'로 조합한 이름이다. 머리를 긁적이며 마지막 스테이크 조각을 입에 넣었을 때, 숀이 다시 물었다. "그럼, 훼온이라고 부르면 되는 것인가?" "…네. 그렇게 부르세요." 한동안 어색할 지도 몰라, 하고 생각하는 훼이드리온을 쳐다보면서 숀은 확신했 다. '15세. 첫 여행. 금발. 검. 거기다 막 지어낸 듯한 이름까지. 거의 완벽하군, 그래.' 이 머리 좋은 노인은 그 증거들로 '15세가 되어 비싸 보이는 검을 차고 처음 여 행을 나온 금발 이 아름답고 막 지어낸 듯한 이름을 가진' 여행자의 신분을 완벽하게 파악해버린 것이다. 하지 만 밝힐 생각은 없었다. 이런 인연으로 만났다는 게 재밌기도 하였고, 그런 신분 을 가진 여행자 에게 피해가 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숀은 그 사실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아무 것도 모른 다는 듯이 그냥 웃어 보였다. 그 모습이 훼이드리온에게는 상당히 이상하게 비춰졌다. '왜 갑자기 웃는 거지?' 혹시 들킨 건가, 하고 걱정을 해보았지만, 설마 하는 생각이 걱정을 덮어버렸다. 그는 '설마가 사람 잡는다'라는 말을 모르는 것이 분명하다. "첫 여행이라고 했던가?" "네, 첫 여행이죠." "어디로 갈 예정인가? 내가 도울 수 있는 거라면 돕겠네." 숀의 친절을 훼이드리온은 감사히 여기면서도 말하기가 껄끄러운지 입을 열기를 주저했다. 하지 만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현재 어디로 가야할지 목표가 전혀 잡혀있지 않은 상태니까 말이 다. 조금은 부끄러운 상황이었다. '모르겠다. 일단 그대로 말하는 수밖에.' 결국 결심을 한 훼이드리온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말했다. "사실… 어디로 가야할지 정하기 못했거든요." "허?" 황당함을 담은 숀의 음성이 튀어나오고 훼이드리온의 얼굴이 달아오르며 다시 입 을 열었다. "여행의 목적과 방법은 대충 생각해놨지만, 어디로 가야할지 잘 몰라서요. 첫 여 행이다 보니 정 보가 많은 것도 아니고 해서." 제대로 끝을 맺지 못한 부끄러운 말에 고개를 숙여버렸다. 확실히 어리석은 짓임 을 잘 알고 있 기에, 어떠한 대답이 들려올지 생각하기도 싫었다. 웃을 게 뻔해, 라는 생각을 하 며 열심히 손 가락으로 뒷머리를 긁어댔다. 역시 숀은 웃었다. "허허허! 이거 재미있구먼, 그래!" 감정에 충실하게 숀은 한동안 계속 웃어댔다. 작게 킥킥거리기도 했고, 급기야 터 져 나오는 웃 음을 참지 못해 폭소를 터뜨리기도 했다. 숀의 웃음에 조금은 기분이 상하기 시 작한 훼이드리온 이 퉁명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렇게 웃을 것까지는 없잖아요, 숀." "…헐, 미, 미안하네. 하, 하지만 말이야. 여행인데 목적지도 없이 간다는 건 이상 하지 않은 가?" "실수였다고요, 실수. 여행 초보인데 그럴 수도 있는 거죠." 만난 지 채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마치 오랜 시간 같이 지내온 사람들처럼 대화하는 정겨 운 상황에서 숀이 또 다시 웃음을 터뜨려 버렸다. 아무래도 이 노인은 이 상황을 즐기는 듯하 다. "…그, 그러면 말일세." 이제야 넘어가는 웃음을 멈춘 숀이 잠시 숨을 고르는 시간을 가지고 입을 열었 다. 뭔가 제안을 해주는 걸까, 하고 훼이드리온이 퉁명한 표정을 풀고 주의를 기울였다. "목적이 뭔지 가르쳐주지 않겠나? 내가 필시 도움을 줄 수 있을 게야." 확실히 훼이드리온보다는 오래 살았고 아는 것도 많아 보였다. 하지만 숀은 방금 보여준 행동 때문에 훼이드리온에게서 상당한 믿음을 잃은 상태였다. 그렇기에 미덥지 못하다 는 표정을 잠시 떠올리는 훼이드리온. 하지만 이 외에는 그리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 곧 입을 열었다. "마스터 카드에 대해서 알아보고 싶어요. 어떻게 변해왔고, 어떤 일들을 겪었는지 하는 그런 것 들. 그래서 카드 마스터들을 만나보려고 했는데, 어디로 가야하지는 알고 계시나 요?" "흠, 물론이네." 훼이드리온의 물음에 숀이 문제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훼이드리온의 앞날 에 서광이 비춰 지는 것일까. 초보여행자의 얼굴이 환해졌다. "어디로 가야하죠?" "카드 마스터들을 만난다면, 마법사들의 도시 '에코'로 가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 네." 마법사들의 도시 '에코'. 대륙 전체에 사는 마법사들 중 3분의 2가량이 살고 있다 는 도시였다. 이곳은 500년 전, 페인트가 일으킨 카즈캐스커에서의 반란을 도와준 마법사 길드 가 있는 곳이 다. 원래는 카즈캐스커에 있었지만, 라시엔트 영토 내로 옮겨와 에코에 새로이 마 법사 길드를 만들었던 것이다. 지금도 그 공로를 치하하여 마법사들에게 필요한 환경이 거의 모두 다 갖추어 져있다. 그런데 숀은 왜 에코로 찾아가라는 것일까. "에코에서 마법사 길드 주최로 '마스터 카드 대회'가 열린다네. 거기에 많은 사람 들이 참가할 텐데, 그 중에 카드 마스터들도 상당수 있을 테지. 아마도 그곳으로 가서 마스터 카드 대회에 참가한다면 마스터들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네." '와아!' 말없이 피어오르는 기쁨이 훼이드리온의 얼굴에 떠올랐다. 숀이 고개를 끄덕거리 며 웃음 지었 다. "감사합니다, 숀!" "허, 아니네, 아냐. 또 아까처럼 인사만 해댈까봐 겁나는구먼." 아까 전의 일을 상기한 훼이드리온.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몇 번이고 고개를 숙 이며 인사를 해 버렸다. 어쨌든 그는 감정에 충실한 타입이었기에. 숀은 주름진 눈을 옆으로 돌려 자신의 마스터 카드를 하나 들었다. 반들반들한 감촉이 신경을 타고 손가락 끝에서 뇌로 올라왔다. 훼이드리온도 하던 인사를 멈추고 노인의 행 동을 조용히 지 켜보았다. 왠지 조금은 쓸쓸하게 보이는 장면이 잠시 이어지고, 이윽고 숀이 입을 열었다. "왜 마스터 카드에 대해서 알고 싶은 건지 물어도 되겠나?" 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본 훼이드리온은 노인의 눈 속에서 깊은 감정을 느꼈다. 그것은 아련한, 아린 추억을 나타내는 듯이 안타까웠다. 그는 노인의 감정을 같이 느끼는 듯이 어두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마스터 카드…는 저에게 아주 중요한 것이에요. 제 생활에 변화를 가지게 해주 고 흥미를 느끼 게 해준 두 번째 존재죠. 아, 참고로 첫 번째는 얘고요." 왼쪽 허리에 매달려있는 검을 툭 건드리고, 훼이드리온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서 마스터 카드라는 것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 싶은 거예요. 아주 고마운 존 재에 대해서. 알고 싶은 거죠." 이만하면 됐을까, 올바른 대답이 됐을까, 의문과 함께 걱정이 동반되었다. 숀의 표정이 너무나 진지했기 때문에 대답하는 것조차 거북스러웠다. 그러나 이 이상의 대답을 할 수 가 없었다. 다 른 말을 다 제하고 가장 중요한 말만을 했다. 이제 숀의 대답만이 남았다. 숀은 잠시간 침묵했다. 그 침묵이 지금까지의 시간보다 더 길게 느껴지는 훼이드 리온은 한쪽에 치워져있던 마스터 카드를 주머니에 넣기 시작했다. 기다리는 시간동안 심심하지 않으려는 행동 이었지만, 그것이 필요 없게 되었다. 노인이 드디어 입을 열었기 때문이었다. "…중요한 것이기에, 라는 건가." 들릴 듯 말 듯한 혼잣말에 가까운 숀의 음성을 들은 훼이드리온이 작게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숀은 웃었다. 몹시 흡족한 듯이. 그리고 무언가 해결되었다는 듯이. 아주 밝은 미 소였다. "좋은 대답이었네. 덕분에 내 고민도 풀린 것 같구먼." 어떤 고민인지는 묻고 싶지 않았다. 다만 홀가분한 숀의 표정이 기쁠 뿐이었다. 작은 도움이라 도 줬다는 것에 의미를 두기로 했다. 어느새 식사는 끝났다. 배속을 채우는 기분 좋은 포만감을 느끼며 숀과 훼이드리 온은 마주 보고 웃었다. 때마침 지나가 다가왔다. "호홋! 쇼온! 치울까요?" "그래 주게." 시끄러운 성격으로 다시 돌아가 버린 지나는 곧 쟁반을 가져와 테이블 위의 접시 들을 모두 챙겨 갔다. 흔들림도 없이, 조금의 위태로움도 없이 접시를 차곡차곡 쌓아서 가져가는 그녀를 보며 훼이드리온은 '장인정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훼이드리온이 '전사의 노래'의 유명한 음료인 다이사를 마시며 달콤한 맛을 음미 하고 있던 중에 숀이 밖을 살피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 밖의 마을은 착 가라앉은 어둠을 띄 고 있었다. 꽤 시간이 지난 듯하다. "이거 들어가야겠구먼. 미안하네, 자네하고 더 이야기를 하고 싶네만." "아니에요, 이제 들어 가셔야지요." 따라서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훼이드리온은 손짓으로 제지한 숀은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내일 아침에 날 찾아오게나. 에코까지 가는 길을 알려주겠네." "네, 숀. 안녕히 들어가세요." "허허, 고맙네." 숀은 문을 밀고 나가면서 식당 안의 모든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작은 마을 인 탓인지 모두 들 친해 보였다. 작은 의문인 생긴 훼이드리온은 숀을 배웅하고 돌아오는 지나에게 물었다. "숀은 친분이 좋은가보네요." "호호홋! 당연하지! 숀은 여기 촌장인걸!" '그렇구나.' 훼이드리온은 흰머리를 길게 길러 뒤로 묶은 스타일의 지적인 노인을 떠올리며 남은 다이사를 한 입에 넘겼다. 내일은 숀을 찾아가 봐야했다. ----------------------------------------------------------------- ---------------------- 팀입니다. 긁적. 이거 글이 영 안적힙니다. 힘드네요. 오늘 내로 한편을 더 쓰려고 하는데 이렇 게 글발이 안오르다가는. 뭐, 전 밤에 글발이 오르는 체질이기 때문에 잘 될수도 있구요. 헤에 네, 간만의 추천이군요(ㅠㅠㅠ) 푸우다양님 감사합니다. 좋게 봐주시다니, 기뻐요(^^^) 마스터 카드 설정은 현재 작업 중입니다. 세세하게는 아니더라도 곧 올라갈 예정입니다. 물론 시간이 되면요(---) VEALLENA님 또 메일을 보내주셨네요(ㅠㅠㅠ) 감사합니다(___) 열심히 쓸게요. 하아, 이런 분들 때문에 제가 먹고 삽니다(?). 아무튼 앞으로도 더 발전한 글을 올리도록 하겠 씁니다. 지속적인 관심 주세요 그럼, 이만. 꾸벅(___) 어둠의 기사 DARK KNIGHT TEAM... 번 호 : 9801 / 10423 등록일 : 2000년 07월 19일 01:50 등록자 : 암음기사 조 회 : 162 건 제 목 : [카드 게임 판타지]『 카드 마스터(Card Master) 』#017 카드 게임 판타지(Card Game Fantasy) 카드 마스터(Card Master) 17. 햇살이 침대에 누워 곤히 자고 있던 훼이드리온의 상기된 볼을 두드린다. 그 기 분 좋은 타격에 서서히 수면의 늪에서 떠오르는 그의 정신은 곧 수면에 도달하여 머리를 들이밀 었다. "…흐음." 정리되지 않은 금발이 산란하게 얼굴을 가리고 귀찮게 했다. 손으로 머리 뒤쪽으 로 머리칼을 넘 기고 상체를 들었다. 배까지 덮고 있던 하얀 이불이 스르륵 떨어져 내려갔다. 풀린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훼이드리온. 이곳은 15년 동안 자신이 눈을 떴 던 그곳이 아님 을 직감했다. 그래도 당황하거나 비슷한 징조를 보이지는 않았다. 수면에서 방금 깨어난 부작용 으로 인해 뭔가 빈 듯한 느낌의 두뇌로도 충분히 이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하암, 일어나 볼까."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산뜻한 햇빛으로 보아 아마도 항상 일어나는 시간인 듯 했다. 환경이 달 라졌어도 신체시계는 이상 없이 작동하는가보다. 침대에서 내려선 훼이드리온의 몸에는 잠옷으로 애용하고 있는 꽃무늬 잠옷이 걸 쳐져있었다. 꽃 무늬 잠옷은 누님인 메이린느가 선물해준 것이라 여행에까지 가지고 온 것임이 분명하다. 왕성 에서 생활한 탓에 생활복과 잠옷을 정확하게 구분하여 입는 것일까. 아무튼 그 잠옷을 입은 채 로 흐느적흐느적 화장실로 들어갔다. 잠옷 목 부분이 약간 젖어버린 것만 빼고는 별 사건 없이 세면을 마쳤다. 그 시 간 내에 사건이 있다는 게 더 이상할 지도 모른다. 밖으로 나와서 우선 옷을 갈아입고 잠옷을 곱게 개켜 배낭에 집어넣었다. 마스터 카드가 들어있 는 갈색주머니와 스승 바이마크가 직접 건네준 검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제 가봐야 하는 건가." 이곳에 있다고 마땅히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현재는 여행 중이라서 이 마을 을 지나 다음 마을로 가는 게 더 흥미 있었다. 그리하여 꽉꽉 채워진 배낭을 등에 짊어지고 방 에서 나왔다. 열쇠로 단단히 문을 잠그고 식당으로 내려오자, 곧 익숙한 고음의 목소리가 귀를 두드렸다. "호호홋! 일어났어요?" "…아, 네." 오늘부터 저 목소리를 안 들어도 된다는 생각에, 어째 맘 한구석이 시원해짐을 느끼는 훼이드리 온이었다. 그런 감정은 일단 접어두고 아침을 먹고 서둘러 출발하기 위해 적당히 테이블을 잡고 앉았다. 그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편이라, 이 시간에 식당에 있는 사람은 지나 한 명뿐 이었다. 그녀도 주인으로서 카운터를 지키고 있었던 거라, 결과적으로 손님은 한 명도 없었다. 아침이라 지난 저녁과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에 식당 안으로 둘러보며 혀를 내두 르고 있던 훼이 드리온에게 지나가 문득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아, 맞아! 숀이 자기 집에 와서 아침 먹으라고 하던걸? 아까 찾아왔었어!" 느낌표가 팍팍 찍히는 강렬한 음성에 고막에 무리가 가지 않았을까, 하는 작은 걱정을 한번 해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우연히 눈에 걸린 벽 한쪽의 꽃이 그려진 그림을 주시하 고 있던 시선을 거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작은 문제가 있었다. "저기." "응? 왜요?" 카운터에서 명부를 뒤적거리고 있던 지나가 얼굴을 볼 수 있게 들었다. "그 집이 어디 있죠?" "누구? 아, 숀 말이에요? 가르쳐줄 게요, 따라나와욧!" 지나는 성큼성큼 훼이드리온을 지나쳐 문으로 향했다. 훼이드리온은 여전히 생기 발랄한 웃음을 지으며 문을 향하는 지나의 뒤를 말없이 뒤따랐다. 둘은 여관 밖 마을의 거리로 나갔다. "자, 저기 보이죠? 과자점." "저기 붉은 간판요?" "네, 거기요! 뒤쪽으로 돌아가면 집이 하나 있는데, 거기 숀이 살아욧!" 옆에 서있는 훼이드리온으로서는 한마디 부탁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제발, 말끝마다 느낌 표 넣지 말아주지 않을래요?' 그러나 역시 그냥 인사를 꾸벅하고 돌아서는 훼이드리온. 차라리 자신이 불편을 무릅쓰지 그런 종류의 말은 잘하지 못하는 것이 그였다. 아무튼 열쇠도 념겨주고 뒤에서 들려오 는 지나의 고음 의 배웅을 들으면서 과자점으로 향했다. "잘 가요, 잘생긴 손님! 다음에 또 와욧!" 어제 저녁 방으로 올라가는 훼이드리온을 붙잡고 게임이 재미있었다며 두 손을 잡고 난리를 쳤 던 모습과 상당히 비슷하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훼이드리온은 고개를 저었다. 급히 마을로 들어온다고 자세히 살피지 못했던 마을의 정경을 둘러보았다. 아무 래도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을 중심으로 양쪽에 주택이나 상점들이 들어선 듯하다. 전체적인 배치 가 그랬다. '그 럼 이 길은 어제도 줄곧 걸어왔던 서쪽으로 향하는 길인가?'라는 잡념을 떠올리 며 전방으로 시 선을 돌렸다. 그리고 눈에 누군가 들어왔다. 그 누구는 연한 갈색의 머리칼이 햇빛에 부딪혀 찬란히 나부끼는 것을 손으로 단 정히 정리하며 훼이드리온을 향해 매력적인 미소를 머금어 보였다. "어, 지금 가는 거예요?" 지나. 지나 그녀였다. 훼이드리온을 뒤쪽으로 고개를 돌려 방금 나온 여관을 쳐다 보았다. 여관 문 앞에는 아직도 손을 흔들며 방방 뛰고 있는 생기발랄한 지나, 그녀가 있었다. '그럼 내 눈앞에 이 여자는 뭐지?' 눈앞에 서있는 지나의 품에는 긴 바게뜨빵이 밖으로 삐죽 튀어나와 있는 큰 종이 봉투가 들려있 었다. 아침준비를 하기 위해 사온 것이 분명하다. 그럼 카운터를 지키고 있던 또 한 명의 지나 는 누구일까. 훼이드리온은 잠시 명상의 시간을 가짐으로써 그 의문을 쉽게 풀 수 있었다. '쌍둥이.' 더 이상의 완벽한 해답은 있을 수 없다. 도플갱어 따위가 아니라면 해답은 그것 밖에 없다. 눈앞의 지나가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훼이드리온을 향해 손을 내밀어 어 깨를 쳤다. "저기… 괜찮아요?" "네? 아, 네. 물론이에요. 아무 이상 없어요." "다행이네요. 난 또 내가 너무 예뻐서 정신을 잃은 줄 알았어요." 그녀는 자신이 한 농담이 썰렁하다는 것을 알았는지 어색하게 웃어 보이고는 말 했다. "농담이에요. 그렇게 황당한 표정 지을 건 없잖아요." "…네, 네." "지금 가는 거예요?" "네. 숀 집에 들렀다가 여행을 계속해야하니까요." 그녀는 생긋 웃으면서 종이봉투에서 작은 포장지에 쌓인 빵을 하나 꺼내 훼이드 리온에게 건넸 다. "출출하면 먹어요." 훼이드리온은 고맙게 그것을 받아들고 인사했다. "고마워요. 감사히 먹을게요." "위넨스의 손길이 언제나 순하기를." 그녀는 여행자들에게 행운을 비는 어구로 웃으며 인사를 하고 훼이드리온을 지나 쳤다. 그도 즐 겁게 고개 짓으로 그녀를 보내고 다시 과자점으로 향했다. 뒤쪽에서 지나와 쌍둥 이 그녀가 나누 는 정겨운 대화가 들려왔다. "시나, 다 사왔어?" "응. 빠짐없이. 겐 아저씨가 크림빵도 주셨어." "꺄아! 겐 아저씨 멋져! 호호호홋!" 결국 마지막 가는 길까지 저 웃음을 듣고 마는 훼이드리온이었지만, 떠나는 마당 이라서 그런지 그렇게 거부감이 들지는 않았다. 결국 그냥 작게 미소지으며 발걸음을 계속 옮겼 다. 지나가 가르쳐준 방향으로 부지런히 걸어가자 곧 붉은 간판의 과자점이 보였고 뒤쪽으로 들어가 는 골목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 과자점은 숀이 운영하는 건가?'라는 가능성 없 는 생각을 떠올 려보면서 밝은 색을 띄는 골목 양쪽의 벽을 따라 얼마쯤 걸어 들어가자 곧 그의 푸른 눈동자에 기와지붕을 하얀 기둥과 벽이 받히고 서있는 고전적인 풍의 집이 투영됐다. 왠지 숀의 분위기와 반대가 되는 듯하면서도 어울리는 집. 훼이드리온은 "쩝." 소리를 내고 대문으로 향했다. 진한 고동색의 대문 손잡이를 잡고 두어 번 두드렸다. 툭툭. "누구시오?" 훼이드리온은 목청을 가다듬듯이 목을 어루만지고는 크게 대답했다. "훼온입니다!" "아, 자넨가? 잠시만 기다리게나!" 반가움이 묻어나는 어조로 맞이하는 숀. 훼이드리온이 문 앞에서 조금 기다리자, 서둘러서 문을 열어주었다. "자, 들어오게나." "고맙습니다." 웃는 얼굴로 인사를 하고 들어간 숀의 집. 그곳은 거실이었다. "거기 배낭을 내려놓고, 이쪽으로 오게." 숀은 의자 하나를 가리키고 부엌 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훼이드리온은 묵직한 배 낭을 어깨에서 내려 흔들의자 같이 보이는 곡선이 주를 이루고 만들어진 의자 위에 올려놓았다. 잠시 흔들리는 의자에서 시선을 옮겨 거실 안을 둘러보았다. 전체적으로 착 가라앉았지만 따뜻한 느낌을 주는 디자인으로 채워진 거실. 한쪽 벽에는 작은 액 자들이 걸려있었고, 액자마다 각각 특이한 그림들이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다른 벽에는 천장까 지 닿는 높은 책장이 수많은 종류의 책을 소유한 채로 당당히 자리하고 있었다. 책을 꽤 좋아하 는 편인 훼이드리온은 가까이 가서 살피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그때 숀의 부름이 들려왔다. "여어, 빨리 들어오게!" "네, 네!" 아쉬운 눈길로 책장에게 시선을 한번 던지고 오른쪽의 열린 문으로 들어갔다. 들 어가자마자 가 장 먼저 훼이드리온을 반긴 존재는 맡는 즉시 입안 가득 군침이 도는 향기로운 내음이었다. "여기 앉게." 테이블의 의자 중 하나를 끌어내어 주고 자신도 반대쪽에 가서 앉은 숀은 훼이드 리온이 앉자 곧 식사를 시작했다. "혼자 사느라 반찬은 변변치 않지만, 그래도 맛있게 들기 바라네." "아니요, 이만하면 충분해요." 왕성에서의 식사와는 정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판이하게 차이가 났지만, 왠지 이렇게 수수한 쪽이 더 마음에 드는 훼이드리온이었다. 거창한 닭찜 요리보다는 통째로 불에 구 운 듯한 냄새를 뿜는 닭구이 쪽이 정성이 더 느껴졌다. 숀도 이런 만찬(?)은 오랜만인지 입에 미소를 띄고 스푼을 들었다. "허허, 혼자 살면서 느는 건 이 요리 솜씨밖에 없더구먼. 일류 요리사까지는 아니 더라도 해가 되지는 않을 것이네." 웃음기 섞인 숀의 말을 들으며 따끈한 김이 피어오르는 수프를 한차례 떠 입에 품었다. "닭고기 수프네. 내가 가장 좋아하면서 자신 있는 요리지." 혀 위를 흐르는 닭고기 특유의 담백한 맛이 기분 좋게 식욕을 돋구었다. 숀이 빙 그레 웃었다. "좋은 표정을 지어주니 고맙구먼." "정말 맛있어요. 실력이 대단하신 걸요?" "허허." 그들은 아주 간단히 아침을 뚝딱 해치웠다. 원체 숀의 음식 솜씨가 좋았고 닭구 이라는 최고까지 는 아니더라도 전통 있는 메뉴가 추가되어서, 거기다 서로 나이를 초월한 맘이 통하는 친구 같 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테이블 위의 접시를 몽땅 비우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은 필요치 않았다. 일단 대충 접시만 치워놓고 거실로 나와 테이블 앞에 앉았다. 나무를 깎아 겉에 광택이 나는 코 팅을 씌워 투명하게 빛나는 고풍스런 분위기의 테이블 위에 뜨거운 물이 담긴 잔 이 하나씩 놓이 고 둘은 얘기를 시작했다. 그 전에 훼이드리온은 배낭에서 메이린느가 챙겨준 디 오느 차 티백을 꺼내 물에 담그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래, 마스터 카드 대회에 참가해보겠나?" 입가심으로 녹차를 마시고 있던 숀이 훼이드리온에게 물었다. 훼이드리온은 당연 하다는 듯이 간 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흠, 그럼 행로를 대충 가르쳐주겠네." 숀의 손이 테이블 밑으로 들어가더니, 곧 서랍에서 잘 접어놓은 큰 종이를 꺼냈 다. "라시엔트 지도라네. 자, 여길 보게나." 지도가 오래되었는지 군데군데 헐고 색이 바랬지만 그렇게 큰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다. 훼이드 리온은 숀의 손가락이 머무는 수도 라시안트를 나타내는 붉은 점을 응시했다. "여기가 수도이고, 서쪽으로 이렇게 길이 쭈욱 나있다네. 흔히 '서가도'라고 불리 는 길인데, 이 길을 따라서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간단하네. 중간에 대륙 최대의 강인 '셀라 드리엔'을 배를 타고 건너고, '게이트' 산맥은 낮은 편이니 쉽게 넘을 수 있을 거네. 그렇게 게이 트 산맥을 넘 으면 바로 마법사들의 도시 에코가 보일 것이네." 훼이드리온은 중간에 거치게 되는 마을들을 하나씩 머리에 외워두는 듯이 찬찬히 살펴보고 마지 막으로 에코까지 눈을 훑었다. 라시엔트의 중앙쯤에서 서부를 가로질러 가는 여 정. 거의 평원이 라서 그렇게 힘들지는 않을 듯했다. "얼마쯤 걸리죠?" 그의 물음에 숀이 잠시 지도를 내려보더니 곧 대답했다. "대략 보름쯤 걸린다고 생각하면 되네. 중간에 갈림길이나 뜻하지 않게 생기는 사건들만 조심한 다면 대회 날짜에 여유 있게 도착할 수 있을 걸세." 오늘이 5월 13일이었다. 보름쯤이라면 5월 28일쯤이면 에코에 도착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물론 하루 이틀 정도는 차이가 날 수 있겠지만 그 정도야 여행에서는 당연한 시간차라 고 훼이드리온 은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아직 모르는 정보가 있었다. "대회가 언제 시작되는 데요?" "대회는 6월 1일 시작이라네. 하지만 그 전날에 등록을 마쳐야하니, 5월 30일까지 는 도착해야한 다는 이야기가 된다네." '늦어도 5월 30일까지는 도착해야한다라…….' 조금 빡빡한 일정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곧 문제없다는 듯이 웃을 수 있었다. 중간에 큰 일이 일어난다는 보장도 없으니 시간 내에 도착하는 건 에타로코크 쿠키 먹는 것보다 쉬운 일이니까 말이다. 안심이 되는 마음으로 훼이드리온이 웃고 있을 때, 숀이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 나더니 자신의 서재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올 때, 그의 손에는 작은 편지봉투가 하나 들려있었다. 숀은 그 봉투를 훼이드리온에게 내밀었다. "자, 받게. 인장으로 봉인되어 있으니 뜯지는 말고." "이게 뭐죠?" 숀은 대답할 말을 찾는지 턱을 가만히 쓰다듬다가 이내 대답했다. "일종의 추천장이라고 해두는 게 설명이 쉬울 듯하구먼." "추천이요?" "그렇다네. 대회에 출전을 많이 했더니, 내 이름을 아는 이들이 있거든. 대회 참 가 신청할 때 내게나. 그럼 대우가 좋을 것이네." 훼이드리온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추천장이 왜 필요할까, 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마스터 카드 대회가 오랜 세월동안 열려져오면서, 뭐랄까, 경험자 우대식으로 변 질되어버렸거 든. 처음 성격과는 많이 달라졌다는 게 사실이네. 그래서 처음 출전하는 자들은 일부러 고약한 심술을 부릴 때가 많지. 그때 효력을 발휘하는 것이 이 추천장이네. 이름이 알려 진 이가 추천하 는 자라면 일단 기대는 해보면서 대우가 바뀌거든. 씁쓸하지만 지금 상태가 그러 니 어쩌겠나." 숀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훼이드리온은 가슴속에서 무언가 터 지는 듯한 느낌 을 받았다. 초보를 더 우대해서 실력을 키워주지는 못할망정, 초보를 찍어 내리누 른다는 소리 아닌가. 그의 가치관과 성격으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해괴한 행패였다. 하지만 일단 추천장을 받아놓기로 했다. 숀의 성의를 무시할 수 없다는 것도 이 유가 되었지만, 직접 뭔가를 하려면 이 추천장이 필요하리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감사합니다, 숀." "감사는 무슨. 어쨌든 행운을 비네. 좋은 성적 거두고, 목적도 이루길 바라네." 응원 섞인 숀의 말에 빙긋이 미소를 지어 보이고 추천장을 품속에 갈무리했다. 숀이 지도를 챙 겨서 테이블 밑으로 다시 밀어놓는 사이 훼이드리온은 이제 시간이 되었다는 것 을 느끼고 자리 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만 가볼게요." "아, 가는 건가?" 아쉽다는 감정이 가득히 묻어는 어조로 대답하는 훼이드리온이 자신에게도 해당 이 드는 미소를 짓고 배낭을 들었다. 묵직한 감각이 오랜만에 어깨를 짓누르고 숀도 일어나 문밖 으로 걸어나왔 다. "일단 서쪽으로 계속 걸어가게. 오늘 내로 '케롯'에 당도할 수 있을 것이네." 숀의 집을 나와 사람들이 차츰 눈에 띄기 시작하는 거리에서 훼이드리온을 배웅 했다. 이렇게 헤 어지면 다시 언제 만날지 모르는 일이기에 훼이드리온은 이 나이 지극한 친구의 얼굴을 조금이 라도 더 담기 위해 그를 응시했다. 숀도 시선을 느끼고 그저 빙긋 웃었다. "어서 가보게나. 위넨스의 가호를." "…감사합니다." 진심이 담긴 배웅에 알게 모르게 눈물짓는 훼이드리온은 완전히 터져 버리기 전 에 서둘러 돌아 섰다. 잠시 만난 것이지만 여행이라는 특수한 환경이 주는 '인연'은 생각보다 상 당히 강하다는 것을 몸소 체험하는 중이었다. 일단 첫 발걸음을 내딛었다. 루비네를 벗어나 마법사들의 도시 에코로 향하는 최 초의 한 걸음. 단단히 발을 지탱해주는 대지의 듬직함이 새삼스럽게 두뇌에 인식되고, 뜻하지 않게 용기를 얻 은 훼이드리온이 마지막으로 뒤로 돌아보며 소리쳤다. "꼭 다시 들를게요!" 숀은 그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한 것이다. 멀어져 가는 금발의 어린 여행자의 배낭을 응시하는 그의 눈길이 이윽고 마을 밖 으로 사라지는 그곳에서 고정되었다. 굳게 닫혀진 채 희미한 웃음만을 머금고 있던 입이 작게 열렸다.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그가 중얼거렸다. "자네와는… 다시 만날 듯하니, 그때까지 인사는 미뤄두겠네." 들릴 리는 없지만, 때마침 그때 훼이드리온은 다시 한번 마을 쪽으로 시선을 던 졌다. 여행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날씨라고 한다면, 아마도 이런 날씨가 아닐까 싶다. '선선한 바람. 뜨겁지 않은 햇빛. 적당한 따뜻함. 하아, 여행할 기분 팍팍 나는걸.' 좋은 날씨 때문에 조금 전의 이별로 인해 가라앉았던 기분이 다시금 두둥실 떠오 름을 느낄 수 있었다. 여행 내내 이런 날씨라면 좋겠다는 소망과 함께 저 앞으로 길게 뻗은 길 을 바라보았다. 등성이를 따라 곧게 나있는 길을 따라 걸어가 그 위에 올라섰다. 주변 지형보다 높아서 저 앞 등성이까지는 시야가 막힘 없이 뚫려 길을 잘 관찰할 수 있었다. '서가도…라고 했던가? 이 길은 구부러지는 것도 없네.' 정말 약간의 구부러짐도 없이 직선으로 쭉 뻗어있었다. 지도를 봐도 완만한 곡선 뿐이라 이렇게 실재로는 직선과 다를 바 없는 길만 있는 것이다. 어쨌든 훼이드리온은 다시 걸었다. 다음 마을인 케롯까지는 약 하루거리. 에코까 지 가는 길목에 있는 거의 모든 마을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하루 정도 거리를 두고 떨어져있기 때문에 시간을 맞춰서 가야지 여유 있게 도착할 수 있었다. 띄엄띄엄 나무들이 서있는 것말고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허허벌판. 산보다는 평원이 훨씬 많 은 영토를 차지하는 라시엔트라서 조금 지루하기 시작했다. 대체 얼마나 걸었는 지, 아직 케롯은 '케'도 보이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선선한 바람과 눈으로 들어오는 여러 정겨운 광경만을 즐기 는 것도 퍽 지겨운 일이었다. '뭐가 없을까.' 뒷머리를 긁으며 골똘히 생각해보던 훼이드리온의 머리에 좋은 묘안이 떠올랐다. 묘안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 배낭을 뒤지기 시작하는 훼이드리온. 배낭을 불룩하게 만들며 여 기저기 찔러보던 그의 손에 두꺼운 책 하나가 뽑혀 올라왔다. "그래, 이거야." 흐뭇한 미소를 띄우며 배낭을 고쳐 매고 책을 두 손에 들었다. 회색과 푸른색의 중간쯤 되는 아 리송한 색깔을 겉에 뒤집어쓰고 이리저리 꼬인 선으로 사각형을 이루고 있는 공 간 안에 필기체 로 제목이 휘갈겨져있다. '마법왕국 라시엔트 건국기' 필로윈의 추천으로 대마도사 페인트 라시엔트의 기록이 남아있는 얼마 없는 서적 중의 하나를 왕성 서고에서 가져왔는데, 그게 바로 이 책이었다. 서고에서 책을 고르면서 대충 훑어본 결과, 이 책이 가장 맘에 들었던 관계로 여행동안 들고 외어버리기로 결심했다. '뭐, 보면서 가도 괜찮겠지.' 뒤를 봐도 앞을 봐도 눈에 걸리는 건 나무와 풀과 길 뿐. 책을 보면서 길을 가더 라도 방해될 건 하나도 없다. 훼이드리온은 피식 웃음을 띄워보고 페이지를 넘겼다. 한참 책에 빠져들면서 길을 가고 있는 훼이드리온. 내용은 역시 그의 맘에 쏙 드 는 것이었다. '…페인트는 반란을 도와주고 후에 검의 현자라고 불리게 될 샤렌 하르트를 마법 의 숲에서 만났 다. 마법의 숲 주위에서 들리는 얘기로는 처음 그들이 만났을 때 큰 전투가 일어 났다고 한다. 마법의 숲의 공간이 일그러진 이유가 그때 일어난 전투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그런 점에서 미 루어 검의 현자 샤렌 하르트의 힘도 대마도사 페인트의 힘과 대등할 정도라고 유 추해볼 수 있 다. 반란을 주도한 인물들이 페인트와 샤렌 하르트였다면, 뒤에서 그들을 뒷받침해준 전력은 전설 속에만 존재한다는 <붉은 오거 족>이다…' 검은 글자를 주시하고 있던 훼이드리온의 눈이 반짝였다. '붉은 오거 족?' 보통 '오거'라고 불리는 몬스터들의 생김새는 성인의 두 배를 뛰어넘는 거대한 덩치와 온몸이 근육으로 불끈거리고 화끈하게 벗겨진 대머리는 햇빛에 빛난다. 몸 색깔은 짙은 고동색이 보통. 이것이 평범한 오거의 생김새이다. 하지만 전설 속의 종족인 붉은 오거 족은 말 그대로 몸이 붉은 색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시뻘 건 붉은 색. 다른 신체는 평범한 오거와 다를 바가 없다. '그들이 반란을 도왔단 말이야?' 점점 흥미를 더해 가는 내용에 훼이드리온은 정신 없이 책에 몰두해 들어갔다. 너무 집중한 나 머지 길가에 세워진 이정표도 보지 못하고 지나칠 뻔한 것을 겨우 알아채서 두 개의 갈림길 중 오른쪽으로 가야한다는 것을 확인하고 그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물론 눈은 책에 서 절대 떨어지 지 않았다. 책을 보며 길을 가는 그가 사라진 이정표 앞. 한 나무꾼 같이 보이는 남자가 우 락부락한 근육을 뽐내 듯이 걸어가던 중, 이정표를 발견했다. 그의 얼굴에 기묘한 의문이 떠올랐다. "어라, 이게 왜 이 방향으로 돌려져있는 거지?" 남자는 탄탄한 근육에 어울리는 힘으로 땅에서 이정표를 쑥 뽑아내 화살표를 왼 쪽으로 향하게 했다. 이제야 제대로 됐다는 듯이 씨익 웃고는 다시 가던 길, 루비네 마을 쪽으로 걸어가기 시 작했다. 그의 휘파람이 참으로 경쾌하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나뭇잎을 몇 개 날려 이정표에 부딪혔다가, 다시 바람에 실려 날아갔다. 그 나뭇잎들은 보았다. 이정표에 새겨진 글을. '왼쪽 케롯' 훼이드리온은 오른쪽으로 나있는 길로 현재 부지런히 발을 옮기고 있는 중이었 다. 그가 가는 길 저 앞에는, 어둡게 채색되어있는 거대한 숲이 자리잡고 있었다. '오른쪽 마법의 숲. 접근을 삼갈 것.' ----------------------------------------------------------------- ------------------------ 네에, 팀입니다. 이런 늦은 시간에 글을 올리게 되는군요. 빨리 올리고 자야겠어 요. 하암. 크릭에 비평을 한번 부탁해볼 생각입니다. 15편도 넘었으니 되겠죠. 아하. 결과 나오는 게 무어 서워서리... 으음. 훼이드리온이 책을 보다가 영 엉뚱한 방향으로 향하게 됩니다. 마법의 숲. 내용 중에 이 숲에 대한 설명이 나올 겁니다. 아마도. 아마도 말이죠. 아하하( ---) 그리고 전개 속도 말인데요. 상당히 느릴 겁니다. 약 20일간의 여행 이야기인데, 하루하루 넘어 갈 거거든요. 중간에 한 이틀 정도 휙 지나간다든지 하는 거 빼고는 하루하루 차 근차근히 갑니 다. 게임은 서두르면 안되는 거예요. 아하하. 자자, 그럼 마법의 숲에서의 만남을 기대헤주시면서, 이만 물러갑니다요. 꾸벅(___) 어둠의 기사 DARK KNIGHT TEAM... P.S 추천 감상 비평. 뜸하네요. 환영입니다(---!!) 번 호 : 9902 / 10423 등록일 : 2000년 07월 20일 22:46 등록자 : 암음기사 조 회 : 154 건 제 목 : [카드 게임 판타지]『 카드 마스터(Card Master) 』#018 카드 게임 판타지(Card Game Fantasy) 카드 마스터(Card Master) 18. '…붉은 오거 족의 서식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분분하다. 아니, 그 종족 이 정말 존재 하느냐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부터 여러 가지다. 말 그대로 그 종족은 전설 속에 서만 나타나는 종족이고 대륙에 모습을 드러낸 적은 기록상으로는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이 책을 쓰는 필자, 나의 입장에서는 그들은 분명히 존재한다고 본다. 사실 마법왕국 라시엔트가 아무리 성공적으로 반란을 마무리지었다고 하더라도 기사왕국 카즈캐 스커와 막상막하의 영토를 가지기는 어렵다. 대마도사 페인트 라시엔트와 검의 현자 샤렌 하르 트를 도운 이들은 카즈캐스커의 강압정치에 못 이겨 반기를 든 일부 영주들이나 마법사 길드가 유일한 전력이었다. 군사강국인 카즈캐스커에서의 반란을 성공시키기에는 역부족 이다 못해 가능 성 0의 전력인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반란을 성공시켰고 카즈캐스커의 영토를 반이나 빼앗아 대륙을 세 개의 나라로 만들어버렸다. 대체 그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난 그 이유를 '붉은 오거 족의 도움'이라고 결론 내리고 싶다. 전설에 나타나는 붉은 오거 족의 특징이 사실이라면, 반란 성공에는 어떠한 무리도 없으니까 말이다. 북부지방의 설화 '붉은 오거' 이야기나 잘 알려진 전설 중에 하나인 '태고의 지 혜' 이야기와 같 은 전설 속에 등장하는 붉은 오거들의 특징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무한의 수명을 가졌다. 그들은 자신이 죽는 날짜를 스스로 정한다고 한다. 다르게 말하 면, 죽는 날을 정하지 않는 이상 절대 죽지 않는다는 말이 된다. 둘째, 모든 종족을 통틀어 태고의 지혜를 유일하게 가진 종족이다. 지금은 사라지 고 남아있지 않은 드래곤들도 그들의 지혜를 따라가지는 못한다. 셋째, 평화로운 것을 좋아하지만, 전투력은 최강이다. 그들은 절대 먼저 싸움을 하지는 않는다 고 한다. 단, 자신들의 평화가 해를 입었다고 판단될 시 그들의 왕 '오거 로드'의 명령 하에 전 투를 벌인다고 한다. 전설 '태고의 지혜'에서는 신들이 붉은 오거 족에게 싸움을 걸었다가 오히 려 된통 당하고 돌아간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로, 그들의 전투력은 상상을 불허 한다. 넷째, 충성심과 정이 많다. 오거 로드에게 바치는 충성은 그 어떤 기사들보다 강 하고, 또한 인 간보다 더 정이 두터워 한번 맺은 인연은 배신을 당하더라도 버리지 않는다고 한 다. 그밖에도 많은 점을 들 수 있지만, 대표적으로 몇 가지만 들었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들은 인 간으로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능력을 소유했다는 사실이다. 자아, 그럼 최강의 종족이라 칭하여도 부족함이 없는 종족이 반란을 도왔다면, 대 륙 전체를 차 지하지 못했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아마도 평화를 사랑하는 그들이기에 반 란을 성공시키고 다시 숨어버린 것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이제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발만 앞으로 내밀고 있는 훼이드리온. 여태까지 커다 란 사고 없이 잘 걸어왔다는 게 신기할 정도다. 물론 본인은 책에 빠져 제대로 걷고 있든 말든 신 경 쓰지 않지 만, 한번쯤은 신경을 썼어야했다. 책에 완전히 빠져 도저히 다른 곳으로는 시선을 던질 여유가 없다는 듯이 페이지 만 파고들고 있 는 훼이드리온의 모습이 위태로워 보인다. 휘청. 발에 돌이 걸려 넘어질 뻔했다. 그러나 그는 주춤주춤 자세를 바로잡고 언제 그 랬냐는 듯 다시 앞을 향해 나아갔다. 그 와중에도 접착제라도 사용한 것처럼 눈은 책에서 결코 떼지 않는 것을 보아, 그가 얼마나 책을 좋아하는지 알 수 있다. 여하튼 그런 사실을 알 수 있다고 하더라도 현재 그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마치 이 책이 없다면 살 가치가 없다는 듯이 그의 눈동자는 집요하게 페이지를 탐색했 다. '…가장 현실성 있고 주목받는 견해는 <마법의 숲>이 그들의 서식지라는 의견이 다. 붉은 오거들 을 지휘했다는 샤렌 하르트를 페인트가 만난 곳이 마법의 숲이었다는 사실 때문 에 그 의견은 더 욱 두드러지고 있는 실정이다… 어?' 책에 집중하고 있는 와중에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훼이드리온은 고개를 들 었다. '벌써 날이 저문 건가? 왜 이리 어둡지?' 주위 배경이 언제부터 이렇게 어둡게 변해버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전신 을 감싼 이 야 릇한 어둠이 의아하게 생각되는 훼이드리온이었다. 그렇게 많이 걸어왔다고는 생 각되지 않는데, 그것도 책에 정신이 팔려있어서 믿을 만한 의견은 아니기에 주위를 살펴볼 수밖 에 없었다. 일단 하늘에 과연 어떤 것이 떠있나 살피기 위해 고개를 뒤로 젖혔다. 밝은 햇빛 이 따사롭게 얼 굴에 와 닿았다…라는 게 현실성 짙은 일이겠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내려앉은 어둠. 기묘한 꿈틀거림. 피부를 통해 전해오는 진득한 느낌에 훼이드리 온은 정신이 번 쩍 들었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 그것은 방금 전까지 보던 모습이 아니었다. 사방으로 탁 트 인 벌판은 어 디로 가고 거무튀튀한 색으로 도배가 된 나무들만이 자리를 잡은 것인가. 똑바로 뻗은 길은 어 디 가고 이리저리 비틀리고 꼬인 길만이 놓였단 말인가. '…이런.' 실수였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아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쓴맛이 입안을 맴 돌고 방금 전까 지 관심의 대상이었던 책을 배낭 속으로 집어넣었다. 그 대신 앞 주머니에서 지 도를 꺼내들었 다. "어디서부터 엇갈린 거지?" 분위기도 꺼림칙한 것이 기분이 정말 안 좋았다. 어두운 나무들. 어두운 수풀. 어 두운 길. 거기 다가 이 숲 전체적으로 깔려있는 이상한 진득한 느낌까지. 모든 것이 맘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일단 마음을 진정시키고 지도를 살피기 시작했다. "이곳 갈림길. 분명히 오른쪽으로 가라고 되어있었는데." 갈림길의 오른쪽으로 손가락을 움직이자, 곧 녹색의 커다란 그림에 도달했다. 손 가락 끝에는 마 법의 숲이 자리잡고 있었다. '뭐야.' 분명히 이정표는 오른쪽을 향하고 있었다. 책에 완전 빠져있었다고 하더라도 그 런 것을 착각할 만큼 두뇌 용량이 모자란 것도 아니었다. 그럼 대체 어디서 잘못된 것일까. 물론 훼이드리온은 이정표의 방향이 잘못되어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어쩔 수 없지. 이왕 들어와 버린 거, 서둘러 나가는 길을 찾을 수밖에." 긍정적으로 중얼거려보고 다시 한번 지도를 살폈다. 하지만 엎친 데 덮친 격이라 고, 거대한 녹 색의 숲만이 표시되어있을 뿐 숲 내부의 길 같은 건 취급하지 않았다. 숲의 분위 기에 걸맞게 어 두워진 훼이드리온의 얼굴. 머리가 띵해져왔다. 아무 필요 없는 지도를 배낭에 넣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빽빽이, 작은 틈도 허용 치 않는 듯 빽 빽하게 자라난 나무들만이 그의 시선을 반가워하고 있었다. 먼저 한숨을 푹 내쉰 후, 뒤로 돌아 방금 전까지 걸어왔던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 기 시작했다. 왔던 길을 그대로 밟으며 따라가면 숲 밖으로 나갈 수 있으리란 생각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계속 되는 길. 아직까지는 별다른 사건 없이 순조롭게 걸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조금 마음을 놓 으며 상념에 잠겼다. '지도에서 보면 이곳이 마법의 숲이라는 얘긴데… 훗, 잘하면 붉은 오거 족도 만 날 수 있겠는 걸?' 긴장이 조금씩 풀리자, 그런 쓸데없는 생각도 해보는 훼이드리온 앞에 절망적인 상황이 들이닥 쳤다. 첫 번째 고비, 갈림길이었다. 훼이드리온은 멀뚱한 눈으로 두 개의 길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둘 다 수풀 저 뒤 쪽으로 이어지 는 길이라, 언뜻 봐서는 가야할 방향이 어느 쪽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일단 기억을 더듬어보았 다. 그리고 조금 후,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가슴 저리게 깨달을 수 있었다. '이런. 책보면서 온다고 어떻게 왔는지도 전혀 기억나지 않잖아.' 약간의 오류를 지적하자면, 두뇌에 저장되지도 않은 일은 '기억나지 않는다'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는 책에 빠져서 마법의 숲으로 들어오는 길을 전혀 저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억이 날래야 날 수가 없다. "휴우……." 이제 여행을 떠난 지 하루. 아무래도 어제 왕성을 떠난 시각이 지금쯤 되지 않았 을까 싶었다. 많이 걸어서인지 배도 슬슬 고파오기 시작해서 결국 "칫!"하고 짜증을 표하고는 그냥 갈림길 앞 에 주저앉아버렸다. "일단 배나 채우고 보자." 지나, 아니 그녀의 쌍둥이 시나가 준 빵을 꺼냈다. 포장지에 잘 보호되고 있어서 인지 배낭 속에 서 이리저리 치였음에도 불구하고 빵의 형태는 크게 변함이 없었다. 조심스럽게 두 손으로 잡고 한 입 베어 물었다. 냠냠. 배가 고파서인지, 아니면 원래 빵이 맛있어서인지 빵은 그야말로 순식간에 손에서 사라졌 다. 공간이동마법이라도 쓴 듯이 감쪽같이 배속으로 사라진 빵이 주는 행복한 포 만감에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하자, 약간은 아이러니한 생각이 들었다. 분명히 지금은 여행을 계속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길목에 놓여있고 심하게는 목숨이 달린 일 이기도 한 상황에 처해있다. 그렇지만 이 솔직한 정신과 신체는 포만감에 느슨하 게 풀어져서 긴 장감이라고는 찾으래야 찾을 수가 없지 않은가. 그런 생각에 훼이드리온은 피식 웃어버리고 말 았다. 어쩐지 하루만에 여행에 적응해버린 듯한 자신의 모습에 괜한 웃음이 나왔 다. '그래도 뭐. 즐거운걸.' 그랬다. 지루한 왕성보다 이런 위기도 있는 여행이 훨씬 즐거웠다. 숀과의 만남 같은 인연들도 왕성 안에서는 이룰 수 없는 것들이라 그 즐거움은 더욱 배가되었다. 훼이드리온은 허리춤을 더듬었다. 곧 익숙한 감촉의 갈색주머니가 잡혔다. 그도 모르게 입가에 진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자, 그럼 다시 가볼까?"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숲 전체의 분위기는 어두웠으나 그의 마음은 결코 어둡지 않았다. 온몸 을 감싸는 이상하고 기분 나쁜 진득함도 변함 없었지만, 오히려 반비례하여 더욱 밝았으면 밝았 지, 반대는 아니었다. 눈앞의 갈림길. 어디로 가야할까, 라는 고민은 아주 잠시동안 머리 속에 자리를 잡았지만 이내 간단히 지워졌다. 고민할 필요도 없다고 느낀 것이다. "그럼 왼쪽으로." 말과 함께 행동으로 옮겼다. 당당한 걸음걸이로, 누군가가 보면 분명히 이상하게 생각할 웃음을 띄우고 왼쪽 수풀 뒤로 사라지는 길을 걷기 시작했다. '…붉은 오거 족은 그들의 왕 <오거 로드>에게 절대적인 충성심을 보인다. 전설 <태고의 지혜> 에서 나오는 오거 로드에 대한 설명은 이렇다. [드래곤의 권능과 엘프의 지식과 인간의 욕망이 어우러진 존재] 분명 이것은 신을 능가하는 능력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전설에 서도 오거 로 드는 세상을 지우려는 신에 대항하여, 신을 물리친 존재로 그려진다. 이렇듯 강력 하고 절대적인 힘을 지닌 오거 로드는…' 검은 숲. 마법의 숲을 그렇게 부르는 이들이 있다. 그 이유라면 생각할 것도 없이 '숲 자체가 그렇기' 때문이다. 깊고 깊은 심연을 표현하는 듯이 검은 숲은 대륙 중앙에 자리잡고 모든 것을 수 렁 속으로 빨아 들일 기세로 퍼져나갔다. 한때 마법의 숲이 대륙 전체를 집어삼킬 번도 했었다는 이야기가 있지 만 그렇기 신빙성이 짙은 이야기는 아니다. 아무튼 마법의 숲은 대륙을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았을 시, 마치 커다란 구멍 같 이 보일 정도로 어두웠다. 아니, 검다고 하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그래서 사람들은 마법의 숲을 검은 숲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것이다. 이 마법의 숲은 분위기도 요상하고 가끔 알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기도 해서 사 람들의 접근이 거의 없다. 500년 전의 마지막 방문객이 대마도사 페인트 라시엔트라면 이미 할 말 다 한 것이 다. 하지만 그렇기에 태고적의 모습을 가장 잘 간직한 곳들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우우웅. 표현할 수 없는 움직임. 조금 전부터 이 마법의 숲이 오랜 침묵을 깨고 움직이고 있었다. 아니, 움직인다고 하는 표현은 알맞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 외에는 달리 이 움 직임을 나타낼 말이 없었다. 숲은 그야말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은 어떤 거대한 흐름. 마치 계곡의 물이 일정한 흐름을 따라 흘러가다가 흐 름을 막고 있는 커다란 바위를 하나 치우면 그곳으로 갑자기 모이는 현상과도 같은 흐름이었다. 그럼 대체 무엇 이 흐른단 말인가. 흐름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은, 바로 마법의 숲을 뒤덮고 있는 강력한 마력이었다. 마법의 숲이 라는 이름이 괜히 붙여진 것이 아니었다. 세계의 어느 곳이라도 일정하게 퍼져있 다는 마력의 속 성을 철저하게 무시하고 숲을 중심으로 뭉쳐있는 마력이 바로 그런 이름을 만들 어낸 것이다. 고 대의 마법사들이 주로 이 숲에서 실험을 벌인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 설명이 가능 하다. 하지만 지난 평화의 시대 500여 년 동안, 대마도사와 검의 현자의 거대한 전투가 치러진 후 지 금까지 줄곧 이 숲은 침묵하고 있었다. 마력의 어떠한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고, 특별히 시끄러 운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평화의 시대'와 어울리게, 그냥 그렇게 조용했다. 그런 숲이 왜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일까. 멈춰있던 마력이 왜 또 다시 흐 르는 것일까. 마법의 숲 가장 깊숙한 곳. 그곳에서 숨쉬는 거대한 생명체는 억겁의 세월을 보 내오며 느꼈던 얼마 되지 않는 '호기심'이라는 감정을 오랜만에 깨우치며 눈을 떴다. 붉은 눈동자. 그 생명체의 시각을 담당하는 기관은 그야말로 붉은 색이었다. 어떤 붉은 색도 이 것보다 붉은 색답지는 않으리라. 마치 태고의 가장 먼저 존재하던 붉은 색인양, 눈동자는 붉은 안광을 쏟았다. 순식간에 그 생명체가 존재하는 공간이 밝아졌다. 어떠한 조명기구도 없다. 빛이 라고는 생명체 의 눈에 흘러나오는 붉은 빛 뿐이었다. 그 빛만으로도 그 공간을 밝히기에는 충 분했다. 생명체는 앉아있었다. 거대한 단상 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있었다. 다시는 움 직이지 않을 거 대한 동상과도 같은 모습으로 앉아있는 생명체가 그곳에 있었다. 그 모습은 이 세상에 절대 어울리지 않을 장대한 모습이었다. 몸집은 말 그대로 거대했다. 까마득하기만 한 높이에 머리로 추정되는 부위가 있 었고, 두 어깨 는 넘을 수 없는 산과도 같이 단단하고 굳세 보인다. 두 팔은 지축을 흔들 수 있 을 만큼 강인했 고 가슴은 신도 상대할 수 없을 만큼 두터웠다. 다리는 또 어떤가. 저 다리가 이 땅을 딛고 걸 어다닌다면 금방이라도 깊은 심해로 잠수해버릴 것 같다. 강인함의 표상인 듯한 생명체. 근엄하게 입을 다물고 어떤 일에도 초연해 보이는 당당함을 갖춘 그 생명체는 '오거 로드'라고 불렸다. 오거 로드. 몇 백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일에도 눈을 뜨지 않고 침묵하던 그가 눈을 떴다는 것은 결코 쉽게 설명할 사건이 아니다. 아직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오거 로드가 존 재하는 것으로 보아 분명히 있을, 그를 따르는 충실한 붉은 오거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기 쁨에 경악을 금치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의 왕이 깨어났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오거 로드는 정말 오랜만에 뜬 눈을 몇 번 깜빡거려보았다. 그의 눈꺼풀이 움직 임과 같이 마치 공간의 틈새에 끼어있다는 '아공간'과도 같은 그 공간도 함께 '밝아졌다 어두워 졌다'를 반복했 다. 신체가 움직인다는 감각을 오랜만에 느껴보는 오거 로드는 잠시 자신이 있는 공 간을 둘러보는 듯 그 붉은 눈동자를 움직이다가 가만히 고개를 위로 치켜들었다. 그를 눈을 뜨게 만든 움직임. 마법의 숲을 뒤덮은 거대한 마력의 흐름이 정확하 게 피부에 와 닿 았다. 평생 이 숲과 함께 한 그는 마법의 숲 자체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기에 그 흐름을 정확하 게 파악할 수 있었다. 마력들이 한곳으로 모이고 있었다. 오거 로드는 생각했다. '…반가운 방문객인가.' 실로 몇 백년만의 방문객이 이 마법의 숲을 찾은 것이다. 마법의 숲 깊숙한 곳에 있는 오거 로드의 존재를 당연히 모르는 '몇 백년만의 방 문객'은 현재 자신의 어리석음을 또 한탄하고 있는 중이었다. 여행을 떠나고 나서 벌써 몇 번 째인지, 아니 이 숲을 들어오고 나서도 얼마나 자신을 질책했는지 세기도 귀찮았다. 슬슬 화가 치 솟아 오르려고 하고 있었다. '책을 보는 게 아니었는데!' 투덜거리면서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무심하게도 이번에는 무려 다섯 갈래로 나 뉘어지는 갈림길 이 그의 앞에 존재하고 있었다. 훼이드리온은 한숨부터 푹 내쉬었다. '움직이면 어떻게 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네.'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이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었다. 이곳은 누가 뭐래도 마 법의 숲. 공간이 일그러졌다는 말까지 있는 극악의 숲인 것이다. 이런 곳에 제 발 로 걸어들어 와놓고 순순히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오류일 것이다. 훼이드리온은 머리를 긁으며 대책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무턱대고 또 움직였다가 는 미로처럼 꼬 이고 꼬인 길을 헤매게 될 것이 분명하기에 이번에는 제대로 된 방법을 생각해봐 야 했다. '이거 참. 길도 모르는데, 게다가 방향감각까지 잃어버렸으니. 큰일인데, 이거.' 단순히 큰일 정도로 치부해버릴 일이 아니었지만, 더 불길한 말을 입에 담기는 싫었다. 어찌됐 든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사고를 해야 긴장도 없고 대책도 생길 것 같았다. '그런데 이 이상한 감촉은 언제 없어지려나.' 평범한 공기에서는 절대 느껴지지 않을 진득한 느낌이 아까부터 점점 더 진해지 고 있는 것 같아 기분이 상당히 나빴다. 정체를 알 수 없어서 한동안은 소름까지 돋으며 질색을 했지만, '마법의 숲이니까.'라는 말로 모든 것이 해결되어버렸다. 마법의 숲이라면 그럴 수도 있었 다. 별별 일이 다 일어난다고 하니까. 무게와 진득함을 더해 가는 공기를 떨치기 위해서 배낭을 한번 움직여볼 때, 훼 이드리온의 예리 한 감각이 의문의 시선을 잡아냈다. '!' 생각해보니 저 시선을 꽤 오랜 시간동안 받은 것 같았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 지 알 수 없지 만 직감이 그랬다. 그와 동시에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이런 숲 속에… 인간이 있을 리는 없고, 몬스터인가?' 그 즉시 허리춤의 검을 잡았다. 어떤 기척이라도 있으면 단숨에 뽑아낼 만만의 준비를 하고 주 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분명히 이 주위에 어떤 존재가 있다. 그게 몬스터인지, 인간인지, 아니면 마법의 숲에만 사는 특별한 생명체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것만은 틀림 없는 사실이었 다. 검을 잡은 손에 긴장으로 인한 땀이 베어 나왔다. '누구지? 누구야? 왜 날 주시하고 있는 거지?' 노골적으로 눈빛을 보내고 있어서, 마치 감시를 당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마법의 숲에 허 락도 없이 들어와서 누군가가 화를 내는 것일까, 하고 생각해보았지만, 과연 누가 화를 낼까. '아니다. 있다. 붉은 오거 족!' 마법의 숲에 산다고 알려진 붉은 오거 족. 확인된 사실은 아니었지만, 아니라는 보장도 없었다. '만약 그렇다면… 난 싸워야하는 것인가? 이길 가능성은 전혀 없는데?' 최강의 전투력을 지닌 붉은 오거와 이제 성인이 된 훼이드리온의 대결. 결과는 볼 것도 없이 확 신이 가능하다. 훼이드리온 쪽에는 승산이 전혀 없다. 그래도 한가지 다행인 점은 시선에 살기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수련으로 인해 살기를 감 지하는 능력이 발달한 훼이드리온은 그 시선이 단순히 '쳐다보기'만 하는 것이라 고 판단했다. 절대 자신을 해하려는 감정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걱정은 남아있다. 대체 이 마법의 숲에서 누가 자신을 주 시하고 있는 것 일까. 그리고 왜 쳐다보고 있는 것일까. 눈동자를 굴려 어디 있을지 모를 시선의 근원을 찾아보려고 애썼다. 그러나 소용 없는 짓이었다. 그 존재는 마치 이 어둠과 동화라도 해버린 듯 위치를 쉽게 들켜주지 않았다. 훼이드리온의 머리가 점점 더 엉켜들어갔다. 이 숲에서 빠져나가는 것만 해도 골 치가 아파 오는 데 뜻하지 않은 방해꾼까지 나타난 것이다. 절로 나오는 한숨을 쉬려고 해도 딱 딱히 굳은 입술 은 열리지도 않았다. '움직일 수가 없다!' 언제부터인가 온몸이 딱딱히 굳어있었다. 검을 잡은 모습 그대로, 긴장으로 굳어 버린 얼굴 그대 로 길에 서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감각은 여전했지만 신경이 마비된 듯 전신이 명령에 따라주 지 않는 것이다. '쳇!' 시선은 아직도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전혀 움직일 생각이 없다는 듯이 그냥 그 렇게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 와중에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도 느껴지지 않았다. 숲은 여전히 어두웠기에, 시간조차 정지 해버린 듯 그저 고요하고 적막했기에 대강 어림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이래저래 방도가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알 수 없는 시선. 움직일 수 없는 몸. 기묘한 감각. 멈춰버린 시간. 온통 알 수 없는 이상한 상태에서 공간은 멈춰버렸고, 그곳에는 땀을 한 방울씩 땅으로 떨어뜨 리는 훼이드리온만이 서있었다. 마법의 숲은 겉에서 보기에는 언제나처럼 침묵하고 있었다. ----------------------------------------------------------------- ------------------------ 안녕하십니까. 부지런한 연재의 대명사(...;;;) 팀입니다(___) 헤에, 18편을 가지고 이렇게 찾아뵙게 됐군요. 아하하, 장하다 팀(---!!!) 지금 컴 상태가 영 이상해서, 불안해요, 불안해(---) 네에, 추천입니다. 그런데 같은 분이시네요. NEOGEO99님. 또 해주셨네요(___) 감사합니다. 관심 보내주셔서 너무너무 감사해 요(___) 앞으로도 응원해주시길(---!!) 아, 인터넷의 스토리문학관, 이던가? 아무튼 그런 이름의 웹진에서 연락이 왔습니 다. 메일이 왔더군요. 초대받았어요...(ㅠㅠㅠ) 오오, 내가 이런걸 다 받다니... 라면서 엄청 행복 해 했습니다. 더 열심히 써야겠죠!(---!!) 자, 크릭에 비평 의뢰도 했으니, 재판의 그날까지 더 열심히, 건필!(^^^!!) 그럼, 꾸벅(___) 어둠의 기사 DARK KNIGHT TEAM... P.S 이렇게 열심히 쓰는데 추천 감상 비평 안해주면... 연재주기를 확 늦춰버릴... ...이라고 이 미천한 자까가 어떻게 투정을 부리겠습니까(---) 아무튼 추천 감상 비평 기다리고 있습니다요! 번 호 : 10509 / 10551 등록일 : 2000년 07월 29일 12:19 등록자 : 암음기사 조 회 : 59 건 제 목 : [카드 게임 판타지]『 카드 마스터(Card Master) 』#019 카드 게임 판타지(Card Game Fantasy) 카드 마스터(Card Master) 19. 붉은 오거 족은 마법의 숲에 존재한다. 그것은 그들의 왕 오거 로드가 마법의 숲 깊숙한 곳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증명되고 남는다. 마법의 숲은 그들의 거대한 집이다. 마법의 숲을 터전으로 지금까지 오 랜 시간을 살아오면서 그들은 마법의 숲의 '거주자'가 되었고, 동시에 마 법의 숲을 지키는 '수호자'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것은 대마도사의 방 문이 있은 후에도 변함이 없다. 그 수호자의 주요한 임무 중 하나가 '마법의 숲 정찰'이다. 이는 마법의 숲에 사는 수많은 몬스터들의 질서를 바로 잡고 뜻하지 않게 이곳으로 들어오게 되는 인간들이나 이종족들을 숲 밖으로 인도하는 것이 주 활동 이었다. 수많은 몬스터들이 미지의 상태로 남은 채 살아가는 곳이기에 그 들 수호자들의 역할은 참으로 중요하다. 그런 뜻에서 오늘도 수호자의 역할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붉은 오거 족의 정찰 담당 킬과 클. 둘은 이름에서부터 티가 나는 형제로서 500년 전까지는 오거 로드가 가장 신임하는 부하들 중 두 명이었다. 정찰에 대 한 긍지도 대단했고 능력 또한 다른 붉은 오거들보다 두각을 나타냈기에, 오거 로드가 눈을 감은 그때부터 정찰 담당이 되었다. 거대한 몸집을 소유한 붉은 근육질의 생명체 킬과 클이 숲을 거닐고 있 었다. 감추어놓은 마력 또한 완전히 개방하여 숲 자체에 동화시켜 어떤 일이 어느 곳에서 일어나도 단숨에 향할 수 있을 만큼 만만의 준비를 한 상태로 그들은 잡담을 나눴다. 입술 사이로 툭 튀어나온 아래쪽 송곳니가 돋보이는 키가 큰 형, 킬이 클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오늘로 몇 일째지?" 당연한 얘기겠지만 붉은 오거들에게는 그들만의 언어가 있었다. 인간들 보다 더 높은 지능과 지식을 가진 그들이기에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형보다 키가 작지만, 나름대로 큰 덩치를 가진 클이 미끈거리는 대머리 를 손을 덮어 쓰다듬다가 혀를 내두르고는 대답했다. 혀를 내두르는 행동 은 그의 버릇이었다. "18000일은 넘었나? 확실하게는 계산을 해봐야 알겠어." 클의 대답에 킬이 고개를 움직여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18000일이라… 그리 길지도 않은 시간이지만, 아직 그 날의 흥분을 잊 지 못하겠어." "흠, 인간들이 대마도사라고 부르는 자의 나라를 세운, 그 전투 말이 야?" 킬의 고개가 아래위로 움직였다. "그래, 그 전쟁. 너는 그렇지 않아?" "형 성격 또 드러나는군. 전투의 쾌감을 아직 잊지 못하는 거야?" "잊지 못하는 게 아니야. 몸이 기억하고 있는 거라고. 대답해봐. 넌 어 때?" 클의 대답은 간단했다. "아니." 동시에 클은 형에 대해 이렇게 생각했다. '정말 생긴 그대로라니까.' 형 의 두터운 입술 위로 삐쭉 솟아 나온 송곳니로 시선을 던져보며 부연 설 명을 곁들였다. "오거 로드 님의 명령으로 전투에 참가한 거지, 내 자의로 참가한 건 아 냐. 평생 전투를 안 해도 살 수 있어, 난." 형 킬은 호전적인 붉은 오거 중에서도 특출 날 만큼 과격한 성격을 지 니고 있었고, 동생 클은 붉은 오거답지 않게 호전적이지 못했다. 그야 피 를 속일 수는 없어서 몇 번 실수를 한 적은 있었지만, 대부분은 냉정을 잃지 않고 일을 처리했다. "하지만 아무리 너라고 해도 참지 못한 적이 있었지." 킬의 지적에 클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요한 숲의 길을 걸으며 클 은 잠시 그때를 회상하듯 눈빛을 흐렸다. "오거 로드 님의 손에 들린 투명한 광채의 검… '칼'. 오거 로드 님께서 그 검을 들고 호령하시면, 나도 주체를 할 수 없었지. 따라야했어. 우리의 숙명이며 신이신 오거 로드 님을 위해서." "정확히는 오거 로드 님의 친우를 위해서이지." 500년 전 그 날, 오거 로드는 정의로운 대마도사의 성품에 감동하여 그 의 친구가 되었고, 그가 하려는 일은 돕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오거 로 드의 뜻에 붉은 오거들은 당연히 군말 없이 따랐고, 대마도사는 원하던 바를 이루었다. 결국 대마도사의 뜻은 오거 로드의 뜻이었던 것이다. "흠, 지금 그때를 떠올려봤자 쓸쓸해지기만 할 뿐이야. 오거 로드 님께 서는 아직 정적 속에 존재하고 계시고, 500년 전 그 날이 다시 올리는 없 으니." 직분에 충실하자는 뜻을 함축하고 있는 동생의 발언에 킬이 쩝, 소리는 내어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시야가 미치는 곳은 아직 아무 변화 없이 조용했지만 마력을 통해서 느껴지는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간단 하게 눈치챌 수 있었다. 킬이 마찬가지로 마력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클에게 고개를 돌렸다. "동쪽에서 '고블린'과 '빅랫'들끼리 싸움이 일어난 거 같은데?" "나도 느꼈어. 일단 그쪽으로 가보자." 클의 고개가 끄덕여지자, 어느새 그들 주위의 배경이 순식간에 바뀌었 다. "가보자."라고 말하는 순간 이미 그곳에 도착한 것이다. 공간이동. 어 떠한 제지도 없이 간단하게 공간을 뛰어넘어 이동한 그들은 익숙한 듯이 약간 흔들리는 정도에 그친 후유증을 감당하고 눈앞의 상황을 바라보았 다.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숲에서 용케도 약간의 공터가 만들어졌고, 그 곳에서 지금 '고블린 대 빅랫'의 일대 대결이 벌어지고 있었다. 킬은 자신 이 좋아하는 싸움을 조금이라도 구경하기 위해 행동을 늦췄지만, 동생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클은 자신의 임무에 충실한 성격이었다. "그만해." 간단한 한마디가 클의 입에서 튀어나와 허공 중에 파문을 일으키자, 치 고 박고 싸우고 있던 고블린과 빅랫의 행동이 금새 뚝 멈췄다. 둘 다 잠 시 굳어버리더니, 이내 슬그머니 킬과 클 쪽으로 눈동자를 돌렸다. 클이 빙그레 웃었다. "이리와." 킬이 주위를 정리하고 클은 두 마리의 몬스터들을 달래는 역할을 맡았 다. 아직 다 크지 않은 미성숙 몬스터들이라 그런지 풋내가 물씬 풍기면 서 여간 귀여운 게 아니라, 클은 미소까지 띄우며 꼬마 몬스터들을 달래 기 시작했다. "그래, 어쩌다가 싸운 거니?" 코가 크고 녹색 옷이 그럴 듯한 꼬마 고블린이 빅랫 꼬마를 가리키며 울먹거렸다. "내, 내가 찾은 버섯을 먹어버렸단 말이에요… 훌쩍." 수염이 멋들어지게 자라있는 빅랫 꼬마는 고블린 꼬마의 발언에 당장 이마의 핏줄을 발끈 세우며 단단한 앞니를 움직여댔다. "아니에요! 이 녀석이 먼저 먹었다구요!" 둘은 나름대로 앙칼지게 눈을 부라리며 서로를 흘겼지만, 클에게 그 모 습은 여간 귀여워 보이는 게 아니었다. 커다란 손으로 둘의 머리를 감싸 쥐고 슥슥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미소를 떠올렸다. "너희들, 친한 친구지?" 울먹거리며 서로를 노려보면서도 꼬마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또 귀여워서 클은 정신 없이 머리를 쓰다듬고는 말했다. "그럼 서로 용서를 해줘야지. 맞지? 친한 친구라면 싸워서는 안되고, 싸 워도 용서해줄 줄 알아야하는 거야. 자, 서로 용서해 줘." 클의 제안에 두 꼬마는 쭈뼛거리며 힐끔 눈치를 볼뿐이었다. 쉽게 용기 가 나지 않는 것이라 생각하고 조금 기다리자, 곧 슬그머니 돌아서더니 금방 화해를 해버렸다. "미안, 내가 먹는 게 아니었는데." "아냐, 내가 잘 못했어." 꼬마들 특유의 천진난만한 행동을 펼치며 숲 어디로 사라지는 꼬마들을 살피며 클의 입가에 미소가 걸쳐졌다. 이 평화로운 마법의 숲이 영원히 지속되면 좋겠다는 바램 과 함께 굽혔던 무릎을 펴고 일어서자, 주변 정리 를 모두 끝내고 돌아온 킬의 모습이 보였다. "어때?" "뭐, 그렇게 피해는 없어. 꼬마들이 뒹굴어봤자 얼마나 뒹굴겠어. 부러진 가지들이나 밟혀버린 꽃들 좀 재생시켰어." 클이 확인 차 주변을 둘러보았다. 형의 솜씨를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 만 망가진 곳을 제대로 고쳐주지 않으면 쉽게 그 모습으로 돌아가지 못 하기에 신중을 기해야했다. 얼마 후, 예상했던 대로 완벽하게 원래 모습 으로 돌아갔다고 판단하고 돌아섰다. "한바퀴 더 돌아보고 들어가자." "그래." 이미 숲을 4바퀴 정도 돌았으니 정찰의 임무는 완수한 거나 다름없지만, 클은 신중에 신중을 기하고 또 기하는 타입이었기에 다시 움직였다. 킬도 동생의 그런 성격을 잘 알고 있어서 별 투정 없이 그 뒤를 따랐다. 스르륵. 그때였다. 이 마법의 숲이 소리 없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킬과 클, 두 형제의 눈에서 기묘한 광채가 떠올랐다. 붉은 오거들만이 가진, 심연의 형체를 파악할 수 있는 '심연의 눈'이 바로 이 순간 발동된 것이다. "…역시 뭔가 있지?" 클의 조심성이 묻어나는 말에 킬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여행자인가." "보통 여행자는 아니지." "그렇겠지. 이렇게 마법의 숲 전체의 마력이 반응을 할 정도의 인물은, 그 자말고는 없었으니까. 이번 방문객도 보통이 아니겠는걸." 그들은 소리 없이 이동했다. 조금 전, 마법의 숲 서쪽에서 동쪽으로 단 숨에 이동해왔던 것처럼 그렇게 잠시 사라졌다가 당연하다는 듯이 나무 가 빽빽이 서있는 어떤 좁은 공간에 나타났다. '어떤 좁은 공간'이라고 밖 에 표현할 수 없는 이유가 이 마법의 숲은 워낙에 나무들이 많아서 거기 가 거기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태고의 그때부터 수호자 역할 해온 붉은 오거들이 아니라면 제대로 구분조차 할 수 없는 구조였다. 아무튼 그들이 나타난 곳은 방금 전의 위치보다 더욱 동쪽으로 향한 곳 이었다. 마법의 숲 동쪽 외곽쯤 되는 곳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느꼈던 이 상한 마력의 움직임이 고조되고 있음을 알아챌 수 있었다. 킬이 심연의 눈을 돋구어 주위를 살치고 있을 때, 클이 그런 형의 어깨 를 툭 치고는 앞을 가리켰다. "저쪽을 봐봐." 마법의 숲에서도 꽤 커다란 크기를 자랑하는 아름드리 나무가 시야를 가로막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장애물이란 소용이 없었다. 심연의 눈 으로 보지 못할 것은 없었다. 킬의 심연의 눈이 능력이 더욱 증폭되면서 앞쪽으로 희미한 붉은 안광 을 폭사했다. 그리고 그 안광이 미치는 부분에 한하여 모든 사물을 투과 하여 원하는 방문객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금색의 머리칼. 커다란 배낭에 여행복. 여행자는 맞는 거 같군. 그런데 어려 보이는데?" 클이 대꾸했다. "첫 여행이겠지. 그렇지 않다면 이곳에 들어올 리가 없어. 그것보다 몬 스터들이 아직까지 가만 내버려두는 게 이상하네. 저곳은 '플로우(Flow: 늑대)'의 영역 아니던가?" "느껴봐. 숲의 움직임을." 킬의 충고에 클은 잠시 마법의 숲의 마력에 동화되어 흐름을 느꼈다. 그 리고 곧 킬의 뜻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런 건가?" "그래. 반가운 방문객이지." 클의 고개를 주억거렸다. 만약 이 숲의 마력이 저 방문객을 향해서 흐르 고 있는 게 맞다면, 저 인간은 분명히 그였다. 환생이라고 하기에는 그렇 고, 후손 정도일까. 클은 형에게 의견을 물었다. "어떻게 할까?" "글쎄." 킬도 그렇게 마땅한 방안이 생각나지 않는지 계속 그 여행자의 움직임 을 주시하면서 머리를 굴려보았다. 그러다가 결국 한가지 방법을 생각해 냈다. "오거 로드 님께 가보자." "깨어나셨을까?" "중요한 순간인데, 깨워야지. 무례한 행동이겠지만, 깨우지 않는 것보다 는 나을 거 아냐. 그리고 오거 로드 님이라면, 벌서 깨어나셨을 지도." 클이 수긍하는 빛을 내보이며 고개를 돌렸다. 여행자는 이제 갈림길에서 무언가를 고민하고 있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아마도 어느 쪽으로 가 야할지를 결정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럼 내가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 형이 갔다와." "그래." 킬이 금방 그곳에서 사라져버렸다. 다시 공간이동으로 오거 로드가 있는 그곳을 향한 것이었다. 설명하지 않아도 다 알고 있는 클은 잠시 쉬어 가는 의미로 편안하게 주저앉아 다시 심연의 눈을 발동시켰다. 갈림길 앞에서 많은 고민을 하고 있는 금발의 어린 여행자의 모습이 보였고, 어깨를 으쓱해보고는 심연의 눈에 또 한가지의 능력을 실었다. '속박의 눈'을. 몇 시간째일까. 시간조차 굳어버린 곳에서 이렇게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됐는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이 마법의 숲의 시간은 흐르는 것도 아니고 흐르지 않는 것도 아닌 아주 모호한 상태라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머리 속에 떠올랐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는 그 어떤 영향도 끼치 지 못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왜 움직이지 못하냐는 것이다. '쳇, 할 수 없는 건가. 이렇게 가만히 있는 거,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분명히 신경을 통해 '움직이기'를 명령하고 있었지만, 그동안 아무런 반 발 없이 잘 따라주던 팔이나 다리도 지금만큼은 무언가에 묶인 듯 반응 조차 없었다. 마치 강력한 힘에 의해 '속박' 당한 듯이 말이다. 훼이드리온은 이런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실컷 몸을 움직이는 것을 더 선호하는 편이라, 가만히 앉아서 진행해야하는 마스터 카드 게임을 좋 아하는 것도 신기할 정도였다. 그런 그가 가만히 서서 움직이지 못하는 것을 좋아할 리가 만무했다. 거기다 아까부터 느껴지는 이 이상한 느낌들. 분명히 숲에 들어왔다는 것을 눈치챈 그 시점에서부터 느껴지던 그 진득한 느낌이었다. 지금은 아 예 농도를 더해서 진득함을 넘어 억압에 가까워지고 있다. '싫어.' 너무나도 거부감이 드는 상황만이 겹치는 이곳에서 훼이드리온은 실망 에 실망을 금치 못했다. 자신이 생각하던 여행은 이런 게 아닌데, 시작한 지 하루밖에 안됐는데 이런 일이 생기다니. 여행이란 것이 언제나 즐겁고 좋은 사건만 생기는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지만 막상 이런 일을 당하고 나니, 차라리 그렇게 생각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떤 방법도 생각나지 않는 이 상황에서 더 무얼 할 수 있겠는 가. 훼이드리온은 결국 포기해버리고 무식하게 애를 쓰는 짓을 멈췄다. 차라리 이 상황을 즐기는 것도 좋을 듯싶었다. '훗, 그러고 보니 이렇게 움직이지 못한 적이 있었지.' 그건 아주 어렸을 때 일이었다. 바이마크에게서 검술을 배운지 얼마 되 지 않아 검을 부러뜨린 적이 있었다. 그것도 검술 수련 중에 일어난 일이 아니라 검을 아무데나 놔두고 신경도 쓰지 않아서 부러뜨린 것이라, 뭐라 고 할 변명거리도 없었다. 결국 검사의 가장 기본적인 수칙, '검사의 생명 은 검이다'를 제대로 지키지 않은 벌로 기본 자세 반나절을 선고받았다. 검을 양손으로 거머쥐어 가슴 높이까지 들어올리고 왼발을 앞으로 내민 자세가 바로 기본 자세인데, 보기에는 쉬워 보여도 전체적인 무게중심이 나 검 끝이 흐트러지면 안 되는 것이라 굉장히 어려운 자세이다. 게다가 그 당시 훼이드리온은 겨우 6세 정도였다. 6세의 아이에게 기본 자세로 반나절이나 가만히 있는 형벌은 가혹하다 못해 처참할 정도였다. 훼이드리온은 그런 기억을 떠올리다가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지금은 그 자세로도 충분히 버틸 수 있지만, 어째 이 상황은 그때보다 더 나아진 것이 아닌가. 그때가 더 고통스러웠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때 지켜봐 주는 이가 있었는데.' 그렇게 벌을 받으면서 반나절을 보내고 있을 때, 메이린느가 몸소 찾아 온 것이다. 동생이 고통스러운 벌을 받고 있는데 걱정이 되어서 저택에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비록 벌을 중지시키지는 못하더라 도(바이마크는 스승으로서 벌을 내렸다) 옆에서 격려를 해줄 수는 있는 것이니까. 훼이드리온은 누님의 격려와 스스로의 신념으로 결국 반나절의 벌을 모 두 마치고 바로 쓰러져버렸다. 이틀 후, 그가 깨어났을 때 바이마크는 그 에게 담담히 미소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훌륭하셨습니다." 그 짧은 말에 담긴 스승의 배려로 훼이드리온은 더욱 용기를 얻어 수련에 전념했다. 정다운 얼굴들이 하나씩 떠오르자 훼이드리온은 그만 감정이 북받쳐 오 르는 느낌을 받았다. 자신이 쓰러지자 곧바로 눈물부터 흘렸던 누님 메이 린느, 깨어날 때까지 옆에서 자리를 지키셨다는 어머님 에스린느, 비록 국정으로 인해 직접 찾아오지는 못했더라도 역시 가슴 졸이며 깨어나기 만을 기다렸을 아버님 카드리온. 그리고 날카롭지만 부드러운 스승 바이 마크. 모두가 그립고 보고 싶은 얼굴들이었다. '왕성을 떠난 지 이제 하루밖에 안 지났는데, 벌써부터 보고 싶으면 어 쩌란 말야.' 스스로 그렇게 타이르고 마음을 다잡았다. 어차피 여행이 끝날 때까지 만날 확률은 거의 없으니, 그리워 해봤자 손해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 에 신경 쓸 시간이 있으면 차라리 이 사태를 타개할 방안이나 찾는 것이 더 효율적인 시간 관리법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열심히 눈동자를 굴리고 있는데, 문득 몸이 자유롭 다는 것을 눈치챘다. '어, 어라? 언제부터 이랬었지?' 너무나 자연스럽게 팔이 움직이고 다리가 움직였다. 그는 자신의 팔과 다리가 움직이는 것이 신기하다는 듯이 한번씩 다 움직여보고 감탄을 내 뱉었다. "히야, 말도 되네?" 턱도 만지작거려보고 몇 번 움직여도 보았다. 여태까지 단단히 굳어서 반응도 하지 않던 것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잘만 움직이자 조금은 황 당하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다. "뭐, 움직이니까 된 거지." 아주 긍정적으로 그냥 넘어가 버리는 훼이드리온은 이마에 흐르던 땀을 닦아내고 다시 갈림길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몸집의 붉은 색 몬스터 두 마리가 그의 앞에 모습을 나타낸 것 이 바로 그때였다. 마법의 숲 깊숙한 곳에 존재하는 아주 큰 동굴. '미궁'이라고 불러도 손 색이 없을 정도의 규모를 가진 그 동굴에 바로 오거 로드가 산다. 정확하 게는 그곳을 통해 오거 로드에게로 갈 수 있는 것이지만. 킬은 클과 헤어져 금방 오거 로드의 거처에 도착했다. 마법의 숲 안에서 붉은 오거들이 행하는 공간이동에는 제한이 없기 때문에, 아무리 아공간 속에 존재하는 오거 로드의 거처라고 하더라도 전혀 무리가 없었다. 어느 순간 갑자기 그 공간 안에 나타난 험상궂은 인상의 킬은 삐죽 튀 어나온 송곳니를 연신 씰룩거리며 아공간의 문을 열었다. 물에 손을 집어넣으면 잔잔하던 수면에 작은 파문이 이는 것처럼 그렇 게 공간이 흔들리더니 점점 입을 열었다. 붉은 빛이 일렁거리는 안으로 킬은 문을 통해 걸어 들어갔다. 문은 다시금 일렁거리며 예전의 모습을 되찾아 본래의 공간으로 돌아갔다. "…깨어나셨군요, 오거 로드 님." 들어가자마자 자신을 향하는 붉은 눈동자를 향해 킬은 공손하게 무릎을 꿇었다. 경건함이 느껴지는 그 모습을 지그시 응시하는 붉은 눈동자의 주 인공, 오거 로드는 그 거대한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다." 이미 짐작하고 있어서 그렇게 놀라지는 않았다. 마법의 숲 그 자체인 오 거 로드가 숲에 들어온 범상치 않은 방문객의 존재를 모를 리가 없는 것 이다. 그렇기에 킬은 중간 설명을 거치지 않고 바로 물음을 던졌다. "어떻게 할까요." 오거 로드의 눈이 어느 곳으로 향했다. 동쪽. 그 방문객이 있는 곳이었 다. 오거 로드는 굳게 다물어져있던 그 입을 다시 열어 위엄이 담긴 중후 한 목소리로 말했다. "데려오너라." "네." 킬은 그곳에서 곧장 공간이동으로 클의 옆으로 이동했다. 붉은 안광을 빛내며 여행자를 주시하고 있던 클은 속박의 눈을 풀고 킬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나타났지만 당연한 듯이 놀라지도 않는 그였다. "깨어나셨어?" "들어가니까, 깨어나 계셨어. 데려오래." "그래?" 클은 엉덩이를 털며 일어섰다. 여행자는 아직 갑자기 속박이 풀려서 이 상한지 팔이나 다리를 이리저리 흔들어보면서 혼자 난리를 부리고 있었 다. 클은 왠지 재밌어져서 쿡 웃어버리고 형에게 말했다. "가보자, 그럼." 그래서 둘은 훼이드리온의 앞에 나타났다. ------------------------------------------------------------------ 네에, 팀입니다(___) 편집 방식을 달리했는데, 맘에 드시는지. 일단 읽기는 편할 것이라고 생각은 됩니다만, 제 입장으로서는 이렇게 맞추는 건 상당히 중노동이라서요. 삽질입죠(___) 일단 추천해주신분들에게. ESIRY님. 꺄꺄~ 레이야, 고마워(>.<) YJHW164님. 헤에, 감사합니다(___) 더 열심히 적을게요. 음, 18편에서 19편 사이. 조금, 아니 괘 시간이 걸려버렸네요. 자까가 서울에 갔다온다고 그동안 글을 쓰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글은 어제 완성했는데, 이넘의 고물 에디에셀이 말을 안들어서 접속을 못했 습니다. 그리하여 글은 오늘 올리게 되는군요.(ㅠㅠㅠ) 늦었다고 미워하지마요... 7월 31일까지, 3일동안 폭주를 해보겠습니다. 하루에 한편. 꺄꺄~ 과연...;;; 그럼, 붉은 오거들의 기다림을 무시하지 못하기에, 자까는 이만... 꾸벅(___) 어둠의 기사 DARK KNIGHT TEAM... P.S 추천 감상 비평, 모두 다 고맙습니다(___) 환영이에욧(^^^) P.S 2 크릭, 금어울님. 감사합니다(___) 번 호 : 10551 / 10551 등록일 : 2000년 07월 29일 23:05 등록자 : 암음기사 조 회 : 1 건 제 목 : [카드 게임 판타지]『 카드 마스터(Card Master) 』#020 카드 게임 판타지(Card Game Fantasy) 카드 마스터(Card Master) 20. '……!' 훼이드리온은 또 다시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잠시 눈을 돌렸다가 다시 갈림길을 쳐다보았을 때, 원래 거기에 있었던 것처럼 서있는 두 마리의 몬스터. 우러러보면 목이 아파 오는 키를 지니고, 그 높은 곳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붉은 피부의 몬스터들을 발견하는 순간, 완전히 굳어버 렸다. 그것도 방금 전보다 더 심하게 사고조차 정지되어버렸다. 눈이 풀려버린 방문객을 지그시 내려다보며 두 마리의 붉은 몬스터들은 서로 알 수 없는 대화를 나누었다. 멍하게 흐려진 시야를 잠시 돋구며 훼 이드리온은 제 정신을 차렸다. 옛말에 '드래곤의 둥지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하지 않았던가. 지금이 바로 그런 순간이었다. 꿀꺽. 긴장을 다시금 상기시켜주는 단 침이 목으로 넘어가고 그는 움직 이지 않는 목 관절을 애써 움직여 몬스터들의 행동을 살폈다. 키가 작은 몬스터가 송곳니가 무시무시해 보이는 키 큰 몬스터를 향해 뭐라고 중얼거렸다. 물론 훼이드리온이 알아듣기는 만무한 언어였다. 과 연 그게 언어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렇다고 생각됐다. 두 몬스터는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형, 역시 닮았지?" "어. 정말 닮았어." 그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 훼이드리온에게는 그저 "어떻게 먹을 까?" 정도로밖에 짐작이 되지 않는 대화를 나누고, 훼이드리온을 향해 고 개를 돌렸다. 움찔, 놀래는 훼이드리온을 향해 키가 작은 몬스터가 손가락을 들었다. '에, 에?' 당황함에 빠진 훼이드리온을 향해 그 몬스터가 말했다. 놀랍게도 몬스터 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인간의 언어, 그것도 놀랍게도 '라시엔트어'였 다. "방문객이여." "…네, 네?"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둘러 대답하는 훼이드리온의 태도에서 놀라움 과 당황함이 묻어나자 송곳니가 무서운 몬스터가 피식 웃었다. 하지만 훼 이드리온에게는 전혀 웃음이라고 생각되지 않았기에 더욱 움찔 놀래며 공포를 느낄 뿐이었다. '난 이제 죽었다!'라고 맘속으로 절망을 느끼며 외 치고 있을 때, 살벌한(?) 미소를 짓고 있던 그 몬스터가 상당히 불쾌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여어, 무서워할 거 없어." 그러나 그와 동시에 떠오른 미소에 송곳니가 반짝거리자, 더욱 무서워질 뿐 전혀 효과가 없는 발언이었다. 그런 형의 판단 없는 단순함에 클이 책 망하는 투로 킬의 옆구리를 찔렀다. "형, 인간들은 우리들의 미소를 무서워한다고. 웃지 않는 게 좋아." "아, 그런가?" 당연히 잊고 있었던 킬이었다. 클은 들리지 않을 만큼 작게 한숨을 내쉬어보고 다시 방문객에게로 고 개를 돌렸다. 움직임 하나하나에 움찔대며 반응을 하는 것을 보니 상당히 긴장을 하고 있나보다. 먼저 저 긴장부터 푸는 게 순서일 듯싶었다. "긴장하지 않아도 돼, 방문객." '그, 그렇다고 해도…….' 도저히 몬스터의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훼이드리온. 생각해 보라. 자 기보다 두 배는 더 큰 몸집을 가진 거대한 몬스터가 살벌하지는 않아도 충분히 위압이 되는 눈길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그 어느 누가 오 그라들지 않겠는가. 긴장하지 않아도 된다는 건, 지금 훼이드리온에게는 맨발로 불 위를 걸으라고 하는 것보다 무리인 일이었다. 얼굴에 경련까지 일어나는 눈앞의 소년을 향해 클은 다시 한번 한숨을 쉬고 말했다. "널 해치려고 온 게 아냐. 우리는 단지 명을 따라서 널 데려가려고 온 거다." "…며, 명?" 간신히 떨어지는 입으로 질문을 해보자, 조금은 편해지는 느낌이 들었 다. 그 기세를 몰아 훼이드리온은 재차 입을 열었다. "명이라니요?" 방문객의 긴장이 풀리는 것도 같아 흐뭇한 마음으로 클이 대답했다. "일단 우리들 소개부터 할게. 들어본 적이 있을 거야. 우리들은 보다시 피, 붉은 오거 족이야. 난 클이고, 이쪽은 나의 골칫덩이 형인 킬." "야, 거기 골칫덩이라는 수식어는 왜 붙는 거야?" "맞잖아. 부인할 거리 있어?" "쳇." 할 수 없이 수긍하는 킬의 행동을 보면서 훼이드리온은 혼란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붉은 오거 족. 전설의 종족. 분명히 마법의 숲에 산다고는 했었다. 아니, 정확히 확인된 바는 아니니, 그렇게 추측되고 있다는 것이 더 옳은 표현이다. 하지만 이제 확연해졌다. 그들은 이 마법의 숲에 산다. '왜? 내 눈앞에 있으니까.' 머릿속으로 뭔가 필요 없는 정리를 하고 있는 훼이드리온. 그래도 그렇 게 정리가 되자, 뭔가 마음이 놓이는 듯했다. 책에 적힌 것이 사실이라면 이들은 평화를 사랑하는 종족이라고 했다. 생긴 건 이래도 이성이 뛰어나 고 감성에 좌우되지 않는 종족이다. 그러니, 지금 하는 말도 믿을 수 있 을 것이다. 그것이 훼이드리온이 내린 결론이었다. "네, 네."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하는 훼이드리온을 다시 움찔대게 만드는 살벌 한 미소를 지으며(무의식중에 미소를 띄워버렸다) 클이 다시 말을 이었 다. "믿어주니 다행이네. 그럼 우릴 따라와 줄 수 있겠어?" "어, 어디로 가는데요?" 당연한 물음에 클은 조금 고민하는 표정이 되었다. 그 표정에 또 다시 덜컥 심장이 내려앉는 훼이드리온은 슬쩍 한발 물러서면서 눈앞의 몬스 터의 대답을 기다리려고 했다. 클은 버릇대로 혀를 한번 내두르고 입을 열었다. "일단 그냥 가주면 안될까? 가면 알게 될 텐데." 그렇지만 클이 방문객을 바라보았을 때, 방금 실행된 클의 버릇에 크나 큰 정신적 피해를 입은 훼이드리온은 붕어처럼 입만 뻥긋뻥긋 대며 백지 화 상태에 돌입해있었다. 뒤에 서있던 킬이 긴 한숨을 쉬며 동생의 어깨를 건드렸다. "야야, 너 그 버릇 좀 고쳐라." 형의 핀잔에 클이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거… 어쩌지? 이젠 완전히 돌이 되어버렸는걸." 뒤로 한발을 물러서고 손을 가슴께로 들어올린 아주 엉거주춤한 상태에 서 완전 석화 되어버려 불어오는 바람에 풍화현상을 일으키고 있는 방문 객을 향해 입맛을 쩝 다셔보고는 고개를 도리질 쳤다. "할 수 없지." 킬은 이미 클의 의중을 알아차리고 한발 앞서 물었다. "그냥 데리고 가려고?" "어쩔 수 없잖아. 완전히 정신이 나가버렸는데." 허공을 향해 멍한 시선을 던지며 정신을 잃어버린 방문객의 꼴이 꽤나 웃음을 짓게 만들었지만, 그렇다고 웃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애써 웃음을 참으며 둘은 방문객의 양옆에 섰다. "넌 이 녀석이 잡아. 내가 할 테니." 클의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을 확인하고, 킬은 곧바로 공간이동을 실행했 다. 단숨에 공간을 뛰어넘어, 숲 동쪽에서 중심부로 이동된 그들은 아까 전에 킬이 왔었던 동굴 안에 도착했다. 탁, 소리와 함께 땅에 내려서는 동시에, 갑자기 훼이드리온이 비명을 질 렀다. "으아아아아아아악!" 목청도 좋게 엄청난 고음의 비명이 동굴 안을 메아리쳐 긴 여운을 남겼 고, 킬이 흥분한 표정으로 다시 그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야, 이 자식아! 시끄러워!" "헉!" 훼이드리온은 고막이 찢겨져나갈 듯한 엄청난 음성이 귀를 강타하자, 이 제야 정신을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잠시 기억을 더듬어보고 나서 눈을 통해 들어오는 정보를 끼어 맞추자 금방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끄, 끌려온 건가?" "이왕이면 데리고 온 거라고 해주겠어?" 클이 퉁명하게 대꾸하고는 설명을 곁들였다. "네가 정신을 잃어버려서 할 수 없이 그냥 데리고 온 거야. 불쾌했다면 미안하지만, 시간을 지체할 수가 없어서 말이지." "아, 아니 불쾌한 건 아닌데요……." 그저 조금 황당할 뿐이었다. '대, 대체 언제 온 거지? 내가 정신을 잃었었나?' 너무 충격이 큰 나머지 자신이 정신을 잃었다는 것도 잊어버린 훼이드 리온이었다. 그는 잠시 자신이 있는 이곳을 둘러보았다. 어두운 동굴… 한눈에 동굴 임을 직감하게 만드는 모습을 하고 있는 동굴 안에 자신이 서있었다. 울 퉁불퉁한 바닥이나 역시 울퉁불퉁 이리저리 솟아있는 벽면. 전체적으로 둥글게 원을 그리고 있긴 했지만, 그렇게 규칙적인 모양새는 아니었다. 그러나 처음으로 동굴이라는 곳을 들어와 봤다는 사실은 깨닫자, 또 다 시 공포를 호기심이 지배하기 시작했다. '헤에, 이렇게 생겼구나, 동굴이란 건.'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스스로에게 '참 속 편한 녀석이구나,'라는 결론을 내렸다. 방금 전까지는 당황에 황당에 공포까지 겹쳐 정신까지 잃어놓고 선 지금은 동굴을 구경하기에 여념이 없다니.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꽤 황 당한 녀석이 아닐 수 없었다. 자신의 색다른 일면을 발견하고는 놀라워하는 방문객의 심중을 알리 없 는 붉은 오거 형제는 자신들의 임무에 충실하기 위해 방문객을 재촉했다. "여기까지 왔으니까, 우리를 따라와 줄 수 있겠지?" "흠, 네. 그럴 게요." 벌써 여기까지 왔는데 더 이상 도망칠 구석은 없다는 것을 깨달은 훼이 드리온은 몬스터들을 믿어보기로 했다. 사실 적대감과는 거리가 먼, 차라 리 친근감이라고 부르는 게 더 어울릴 듯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기 때문 에 지레 겁을 먹어버린 자신이 한심하기도 했다. 그들은 동굴 안으로 발길을 옮겼다. 결코 어둡지 않은 동굴은 사방에서 옅은 붉은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붉은 빛이 아주 포근하게 그들을 감싸주었기 때문에, 훼이드리온은 마지막 남은 걱정마저 깨끗이 떨쳐낼 수 있었다. '이들은 날 해치지 않는다.' 그것은 일종의 믿음이었다. 계속 안으로 들어가던 셋은 어느 지점에서 멈추었다. 어디까지 들어왔는 지 알 길이 없는 훼이드리온은 그저 '동굴 끝인가 보다.'라고 짐작만 해보 았다. 앞서 걸어가던 붉은 오거들 중 왼쪽의 키가 작은 오거가 형을 향해 고 개를 올리면서 말했다. "문 열어, 형." "에? 야, 난 아까 전에도 열었단 말이야. 힘들어." "하지만 문 여는 건 형이 더 잘 하잖아. 꼭 서툰 내가 열어서 해를 가하 고 싶은 거야?" "쳇쳇, 알았어, 열면 될 거 아냐." 동생의 꽤나 살벌한 말에 킬은 뭐라고 입 속으로 계속 궁시렁대면서 오 거 로드가 있는 아공간으로 들어가는 문을 여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 사 이에 훼이드리온은 그 형제를 가만히 관찰해보았다. '커다란 덩치에 근육질. 험악한 인상이지만 예상외로 이성적이야. 거칠지 도 않고. 저 붉은 색 피부로 보거나 생김새로 봐서, 분명히 붉은 오거는 맞는데 말이야.' 이상하게도 웃음이 나왔다.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입을 가리고 쿡, 하고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어째, 그동안 생각하고 있던 이미지들이 다 깨져버리는 거 같네.' 사실 책에서 나오는 내용을 보면서 나름대로 붉은 오거에 대한 이미지 를 잡아놓고 있었다. 아마도 이들을 만나지 못했다면 죽을 때까지 그 이 미지를 보관하고 살았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들은 단숨에 훼이드리온 이 생각하고 있던 이미지를 산산조각 내버리고, 자기들끼리 떠들고 있었 다. 아무래도 붉은 오거라고 하더라도, 인간과 그렇게 다를 바는 없는 것 같 았다. "여, 다 됐어." "빠르기도 해라. 역시 형이야." "흠, 이 정도야 약과 중에 단 약과지." 그들 앞에 아공간으로 통하는 문이 열렸다. 아래위로 긴 둥근 타원형으 로 만들어진 문은 내부에서 뿜어져 나오는 듯한 붉은 빛을 일렁거리며 그들을 향해 손짓했다. 문의 상태를 확인한 클은 뒤에 서있는 방문객을 향해 말했다. "자, 우릴 따라서 들어와." 생각해보니, 저들은 처음부터 자신에게 존대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것이 전혀 걸리지 않는 훼이드리온이었다. 왠지 존대를 했다면 오히려 그 게 더 이상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훼이드리온은 발을 들어 문을 넘어섰다. 붉은 빛은 마치 하나의 살아있는 기운이라도 되는 듯이 그렇게 그 공간 전체를 뒤덮고 술렁이고 있었다. '아니, 이 공간이 그런 거구나.' 자세히 살펴보니 이건 무슨 방도 아니고, 그야말로 '공간' 말고는 설명할 단어가 없는 그런 곳이었다. 붉은 기운이 사방으로 넘실대고 밑도 끝도 위도 처음도 없는, 드넓게만 느껴지기도 하고 한없이 좁게 느껴지기도 하 는 그런 아공간에 훼이드리온은 발을 디뎠다. "후우……." 이유 없이 해보는 심호흡이 끝나기도 전에 동굴의 어두운 모습이 보이 던 문조차 닫혀버리고, 이제 바깥과는 완벽하게 차단되었다. 훼이드리온 은 모르겠지만, 이제 붉은 오거들의 도움이 없으면 밖으로 나갈 확률은 전혀 없었다. 위기라면 위기인 이런 상황에 대한 자각은 전혀 없는 훼이드리온은 자 신을 데리고 온 두 붉은 오거가 무릎을 꿇고 앉는 게 이상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 의아함도 곧 들려오는 묵직한 위엄이 서린 중후한 음성에 금 방 날려버릴 수 있었다. "왔는가." 마치 그 세 음절의 말이 하나씩 가슴속에 박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뭐, 뭐지?'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목소리. 만약 저 목소리로 명령을 한다면, 절대 반항할 수 없으리라. 그렇다. 그 목소리에는 거부할 수 없는 '절대'가 담 겨있었다. 그때 훼이드리온의 뇌리에 화살처럼 스쳐 가는 단어 하나. '오거 로드!' 오거 로드. 붉은 오거들의 왕. 붉은 오거들의 지배자. 아니나다를까. 멀뚱히 서있는 훼이드리온의 앞에서 정중하게 무릎을 굽 히고 있던 킬과 클의 두 입에서 동시에 같은 말이 튀어나왔다. "그렇습니다, 오거 로드 님." 정말이었다. 드래곤을 능가하는 최강의 생명체. 태고부터 존재했다는 그 최고의 생명체가 지금 훼이드리온의 눈앞에 있는 것이다. 그는 믿지 못하 겠다는 눈초리를 하고 연신 주위를 살폈다. 대체 오거 로드는 어디에 있 는 것일까. 다시 오거 로드의 음성이 들려왔다. "여기다, 소년." 머리 위쪽이었다. 훼이드리온은 흠칫 놀래며 머리를 들었다. 시선 저 끝 에 부드러운 빛의 붉은 색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 말조차 나 오지 않았다. 다만 멀뚱히 서서 계속 오거 로드의 눈만을 바라볼 뿐이었 다. 거대한 몸집과 부드럽게 빛나는 붉은 안광을 가진 붉은 오거들의 왕, 오 거 로드가 자신의 다리쯤에서 고개를 들고 올려다보고 있는 금발의 작은 여행자를 향해 시선을 내렸다. 역시나 익숙한 얼굴, 그리고 익숙한 느낌이었다. 마치 500년 전의 그 날 과 같은 만남이 긴 시간을 뛰어넘어 여기서 다시 재현되고 있는 듯했다. 오거 로드는 멍하니 자신을 올려다보는 작은 소년의 모습을 관심 깊게 주시했다. 하늘하늘 흘러내리는 금발은 그와 같았다. 깎아지른 듯이 유려 한 곡선을 그리는 얼굴형도 그와 같았다. 그리고 몸 속에 내재된 지나칠 수 없는 기운도 그와 같았다. 소년은 그의 후손이었다. 참을 수 없는 기쁨이 오거 로드의 가슴속에서 터져 나왔다. 그는 잠시 공간을 분리시켜 크게 광소를 터뜨렸다. 웃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다. 유쾌했다. 정말 유쾌한 기분이 전신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렇게 기쁨을 마음껏 표출시키던 오거 로드는 곧 감정을 다스리고 다 시 시선을 내렸다. 목이 아프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로 소년은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런 소년이 불쌍한 기분이 들어 잠깐 방법을 찾다가 간단히 실행했다. 화아악. 붉은 빛의 무리. 갑자기 오거 로드의 전신에서 터져나오는 붉은 빛에 훼 이드리온은 정신을 차리고 뒤로 후다닥 물러났다. '뭐, 뭐지? 뭐야! 무슨 일이!' 두 붉은 오거는 태연하게, 그 자세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혼자 놀 란 것이 머쓱해지기도 했지만 그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눈앞에서 터지는 붉은 빛의 파도에 그는 모든 시선을 빼앗겨버렸다. '아름답다…….' 아름다웠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붉은 색'들 중에서 단연 아름다웠 다. 그 아름다운 붉은 빛은 거대한, 훼이드리온에게는 하나의 산과도 같은 오거 로드의 전신에서 강하게 발광했지만 눈이 아프거나 다른 피해는 전 혀 없었다. 다만 그 붉은 빛에서 따뜻함과도 비슷한 기운이 느껴질 뿐, 다른 부정적인 면은 전혀 있지 않았다. 스스스스. 빛은 점점 오그라들어, 한없이 작아져버릴 듯이 축소되어갔다. 누가 설 명도 해주지 않아서 이 상황에 대해 스스로 이해하려고 노력 중인 훼이 드리온은 잡다한 생각을 집어치우고 이렇게 결론 내렸다. '날… 배려하는 것일까?' 자신 있는 결론은 아니었지만 가장 확률이 높은 의견일 것이다. 공포라거나 위압감 같은 것이 전혀 느껴지지 않으므로, 안심을 해도 괜 찮을 것 같았다. 차분히 마음을 놓으며 자세도 바로 잡았다. 옷도 매만져 보고 배낭도 다시 매고 있을 때, 오거 로드의 모습을 가리고 점점 작아지 던 붉은 빛이 어느 정도에서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리고 이내 그 빛이 꺼 졌다. 두 붉은 오거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제대로 허리를 펴고 섰다. 그 중간에 서 훼이드리온은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 건장한 한 명의 인간을 바라보았 다. 붉은 장발과 함께 붉은 색의 코트를 입은 그는 훼이드리온을 마주 보며 친근감이 드는 미소를 얼굴에 떠올렸다. "잘 왔다. 두 눈에 금색의 별을 품은 소년이여." -------------------------------------------------------------------- 꾸벅(___) 팀입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오늘 폭주입니다요(___) 아니, 3일동안은 이럴듯 싶습니다. 힘내서 2장도 완결을 시켜야죠. 아무래도 2~3편 내에 2장은 완결이 될 것입니다. 새로운 만남 또한...키득. 그렇게 할말은 없군요. 아무튼, 나름대로 열심히 적은 20편도 잘봐주시구요. 이만 팀은 물러갑니다(___) 그럼, 꾸벅(___) 어둠의 기사 DARK KNIGHT TEAM... P.S 추천 감상 비평. 환영인 거 다들 알고 계시죠? P.S 2 분투에 분투, 건필에 건필(>.<) 번 호 : 10668 / 10682 등록일 : 2000년 07월 31일 21:58 등록자 : 암음기사 조 회 : 13 건 제 목 : [카드 게임 판타지]『 카드 마스터(Card Master) 』#021 카드 게임 판타지(Card Game Fantasy) 카드 마스터(Card Master) 21. 붉은 장발은 매끈하게 흘러내려 그의 허리까지 내려왔다. 광택이 나는 붉은 머리칼과 함께 특수한 재질로 만들어진 듯한 붉은 색의 코트는 놀 라운 조화를 이루며 그의 미를 돋구어주었다. 그는 붉었다. 몸 자체가 원래 그랬던 것처럼 붉었다. 피부도 붉은 기가 감돌았고 머리도 눈썹도 옷도 장갑도 신발도, 모두가 붉었다. 마치 붉은 색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병에라도 걸린 것처럼. 그러나, 훼이드리온은 그가 누군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 붉은 색들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는 붉은 오거들의 왕, 오거 로드였으니까. "소년이여. 그대의 이름을 알 수 있겠는가." 그의 음성을 듣고 과연 누가 거부를 할 수 있을까. 훼이드리온은 무언가 에 홀리기라도 한 듯이 입을 열었다. "훼이드리온 레이틴 라시엔트." 여행을 떠난 후 처음으로 밝혀보는 본명이었지만 어쩐지 실수를 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본명을 밝히는 게 당연한 것처럼. 오거 로드는 붉은 청년의 모습을 한 채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 또한 아찔할 정도로 붉게 느껴졌다. "그런가. 역시 그대는 페인트의 자손이었나." 훼이드리온은 생각했다. 눈앞의 이 미청년의 모습을 한 오거 로드가 언 급한 '페인트'는 자신의 조상이며 역사상 유일하게 대마도사라고 불린 페 인트 라시엔트를 말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역시'라고 말하는 걸로 보아, 이미 그 사실을 짐작하고 있었다 는 것인데.' 언제부터 날 알아차리고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떠올리고 있을 때 오거 로드가 자연스럽게 흩날리는 코트의 깃을 내버려두고 손을 앞으로 내밀 었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붉은 빛이 잠시 그들의 중간에 스치더니, 당 연하게(?) 테이블과 의자가 나타났다. 오거 로드는 중후한 중년의 미소를 품고 손을 내밀었다. "앉게나." 갑자기 나타난 붉은 색의 쇼파에 약간은 얼떨떨한 상태에서 훼이드리온 은 서둘러 고개를 끄덕이고 주춤주춤 쇼파로 다가갔다. 오거 로드가 먼저 자리에 앉았고, 훼이드리온도 살짝 쇼파 위에 걸터앉았다. 푹신한 느낌이 감촉 좋게 엉덩이를 받혔다. "뭐라도 마시겠나?" 오거 로드의 배려 섞인 말에 훼이드리온은 그제야 입안의 침이 메말랐 다는 것을 깨달았다. 디오느 차를 마시고 싶었지만, 그냥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그의 시선 끝에 위치한 오거 로드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라있었다. "그럼." 오거 로드의 시선이 지그시 아래로 내려갔다. 그의 시선에 따라 같이 눈 을 내린 훼이드리온의 시야에 놀랍게도 붉은 테이블 위에 놓인 붉은 찻 잔이 들어왔다. '어, 언제 나타난 거지?' 과연 오거 로드의 능력은 무한이란 말인가, 경탄의 경탄을 금치 못하고 있을 때, 오거 로드가 차를 권했다. "입맛에 맞았으면 좋겠군." 가만히 찻잔을 들고 입으로 가져갔다. 입술에 느껴지는 따뜻한 찻잔의 느낌. 방금 데우기라도 한 듯이 생생한 따뜻함이 느껴지고, 입안에 차를 조금 흘려 넣었다. '에?' 황당함. 차 맛을 뒤로 미뤄두고 정말 황당했다. "디오느 차인가요?" 오거 로드의 고개가 끄덕여지며 아찔할 정도로 매력적인 미소가 다시 한번 떠올랐다. 훼이드리온은 동그란 눈으로 차를 내려다보았다. 붉은 찻 잔 색으로 인해 디오느 차 원래의 색은 보이지 않았지만, 향으로 보나 맛 으로 보나 분명히 디오느 차였다. '그럼 내 마음을 읽었다는 건가?' 오거 로드 앞에서는 함부로 쓸데없는 생각은 떠올리지 말자고 결심하는 훼이드리온을 지그시 바라보는 오거 로드의 시선. 그 시선에 일종의 경외 감 같은 것이 서려있었다. '입맛까지 똑같은가보군, 그래.' 왠지 흐뭇해지는 마음을 내비치지는 않으며 오거 로드는 고개를 돌려 아직 그 자리에 서있는 붉은 오거 둘에게 명령했다. "나가보거라." "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둘의 모습은 그곳에서 사라졌다. 오거 로드는 이 제 찻잔을 내려놓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소년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할말이 있는가." 할말이야 많았다. 다만 뭐부터 꺼내야할지 우선 순위가 정해지지 않아서 말을 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런 훼이드리온의 맘을 깨달았는지 오 거 로드는 친구라도 대하는 듯한 다정다감한 목소리로 말했다. "천천히 하게. 어차피 이곳에서 시간이란 무의미한 것. 서두를 필요 없 네." 오래 살아온 자의 여유일까. 그런 느낌이 묻어나는 어조에 훼이드리온은 덩달아 풀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게 또 나쁜 감각은 아니어서 약간은 즐기는 분위기로 정리를 해나갔다. 조금 후, 우선 순위가 어느 정도 정해지자, 차를 마시며 느긋하게 기다 리고 있는 오거 로드를 향해 질문했다. "왜… 절 이리로 부르신 거죠?" 숲에서 붉은 오거들을 만났을 때부터 가져온 의문부터 먼저 풀어놓았다. 오거 로드는 입안에 든 차를 가볍게 삼키더니 천천히 찻잔을 내려놓고는 웃었다. "그러고 보니 그걸 밝히지 않았군, 그래. 미안하네." "아, 아니에요." "훗, 긴장할 거 없네." 오거 로드는 자신의 침착한 태도가 미안할 정도로 긴장을 해버리는 소 년의 태도를 넌지시 도와주고 말했다. "그대는 실로 500년만의 방문객이라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에게 는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지.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그대가 이 숲에 들어온 후, 숲이 그때와 같이 반응을 했다는 거네." "그때…라니요?" 언제를 말하는 것일까. 오거 로드의 입가에 살짝 걸쳐진 진한 미소가 왠지 모르게 익숙한 훼이 드리온이었다. "500년 전, 나의 친우인 페인트가 이 숲에 처음 들어왔을 때, 그때를 얘 기하는 것이네." 500년 전, 페인트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이 숲으로 들어왔을 때, 마법의 숲의 마력은 지금과 같이 반응했다. 같은 핏줄이라는 이유 때문인지 이 소년에게도 마법의 숲은 환영의 의사를 표했다. 하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마법의 숲을 '마법의 숲'이게 한 장본인인 대마도사의 후손이니. "그, 그렇다면……?"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는 훼이드리온에게 오거 로드는 차를 한 모금 마 시며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주었다. 그 시간동안 소년의 뛰어난 머리는 세차게 돌아가서 결국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 경악스러울 만큼 짐작도 하지 못했던 사실. 그러나 진실에 가까워, 아니 그것이 바로 진실이었다. 오거 로드는 웃었다. "알았나보군." "저, 정말인가요?" 훼이드리온의 두 눈이 흔들렸다. 만약 정말이라면, 자신은 역사적인 인 물을 대면하고 있는 것이었다. "제대로 소개하도록 하지. 오거 로드의 모습일 때는, '라이안'이라고 불 린다네. '지배자'쯤 되는 이름이지. 그리고… 인간일 때는, 특히 이런 모습 을 하고 있을 때는." 그는 자신의 차림새를 한번 내려다보고는 지체 없이 말을 이었다. "페인트가 지어준 이름이네. 샤렌 하르트. '믿을 수 있는 자'라는 뜻이라 고 하더군." 검의 현자, 샤렌 하르트. 그의 모습을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대륙의 역 사를 통틀어서 가장 강했고 가장 완벽했던 검사로 알려져 있었다. 그리고 마법왕국 라시엔트 건국 당시, 친우인 대마도사 라시엔트를 도와 금안 기 사단의 1대 단장이기도 했던 자. 훼이드리온은 정말 역사적인 인물과 마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 기절할 거 같아…….' 비록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베르도 폰 헤이스티론'이라고 하더라도, 검 의 현자라고 불리는 자를 만났는데 어찌 진정을 할 수 있겠는가. 터지려 는 가슴을 애써 부여잡으며 훼이드리온은 입술을 달싹거렸다. 뭐라고 말 을 꺼내고는 싶었지만 오늘따라 신체가 제대로 명령에 따라주지 않았다. "많이 놀랬나보군. 진정하게." 혼자 여유 있는 오거 로드, 아니 샤렌 하르트의 모습이 어째 밉기도 한 훼이드리온이었지만, 일단은 신체기능을 원활하게 움직이는 것에 전력투 구하기로 했다. 조금 후, 간신히 입을 뗀 그는 샤렌 하르트에게 질문했다. "정말… 검의 현자 샤렌 하르트가 당신인가요?" "검의 현자? 그런 칭호도 붙었는가. 하하, 역시 인간들은 이름 붙이기를 좋아하는 종족이군. 검의 현자는 모르겠지만 동명이인이 없는 한 샤렌 하 르트는 내 이름이 맞네." "하아……." "왜 그러는가." 알 수 없는 숨을 내뱉는 훼이드리온의 행동에 샤렌 하르트가 의문을 표 했다. "아, 아니요. 그냥, 제가 500년 전의 인물을 만났다는 게 어쩐지 현실감 이 없어서 말이에요." "훗." 작은 웃음을 터뜨리며 샤렌 하르트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인간 세계에 나갔다면 여러 여자 울리고 다녔을 말끔한 미모와 매력적인 미소가 조화 롭게 어우러지며, 그가 말했다. "현실감이 없는 일이라면 나도 마찬가지라네. 500년 동안 다른 종족의 방문은 전혀 받아본 적이 없었는데, 500년만의 방문객이 그의 후손이라 니. 나에게는 정말 현실감이 없는 일이지." '그렇기도 하겠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훼이드리온. 샤렌 하르트는 지그시 회상에 잠 겼다. "그도 그대와 같았네. 눈이 따가울 정도로 빛나는 금발과 깊은 푸른빛이 도는 눈동자는 한없이 아름다웠지. 그리고 그 속에서 반짝이는 금색의 별. 카드를 움직일 때마다 반짝이는 금색의 별에 난 반해버린 거였어. 훗, 나이가 들어 아저씨가 되었으면서도 말하는 거나 생각하는 건 아직 어린 티를 벗지 못한, 그래, 순수한 거였지. 내게서는 이제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는 순수함. 난 그것에 끌렸던 것이 아닐까. 알 수 없는 일이야. 아직도 이렇게 생생한데, 자네가 이곳에 없다니……." 훼이드리온은 감상에 도취되어 혼자 주절대는 샤렌 하르트의 마음을 이 해할 것도 같았다. 오랜 시간을 지내온 자의 애환이랄까. 사라진 자에 대 한 깊은 그리움이 자신에게까지 전해지는 듯한 느낌에 덩달아 기분이 가 라앉는 것 같았다. 샤렌 하르트는 곧 정신을 차렸다. "허, 이거 혼잣말만 늘었군. 미안하네, 앞에 앉혀놓고 지루하게 한 것 같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샤렌 하르트는 편한 소년의 분위기에 옅게 미소지었다. 지금이라도 만나 고 싶은 친우를 대신하여 그의 후손을 대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조 금이라도 더 잡아두고 싶은 감정이 솟구쳐서 제어하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지만, 그는 기분 좋게 그냥 웃었다. "그대는 그와 닮았군. 얼굴은 많이 다르지만, 분위기나 느낌이 비슷해. 침착하기도 하고, 약간은 어벙한… 훗." "네, 넷?" 순간 발끈하려는 훼이드리온을 샤렌 하르트는 웃음으로 무마시켰다. 결 코 악의가 있어서는 아니었기 때문에 훼이드리온은 그저 입안으로 궁시 렁대면서 다시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러고 보니……." 뭐라고 말을 꺼내려던 붉은 빛의 청년은 가만히 훼이드리온의 전신을 훑었다. 소년의 몸 어딘가에서 느껴지는 익숙한 기운이 샤렌 하르트의 신 경을 돋구었다. 너무나도 그립고 너무나도 반가운, 그런 익숙한 기운. 이 윽고 그의 눈동자는 훼이드리온의 오른쪽 허리부근에서 멈추었다. 갈색주머니. 샤렌 하르트의 눈에 반가움의 빛이 떠올랐다. "…그 갈색주머니를 나에게 보여주겠나?" 훼이드리온은 밑을 내려다보았다. 언제나 그곳에 있는 익숙한 갈색주머 니. 평범한 갈색주머니가 어떻게 위대한 오거 로드이며 검의 현자라고 칭 송 받는 이의 시선을 끌었는지 의문이 들었지만 일단 줄을 풀어내 그에 게 건넸다. 받는 즉시, 샤렌 하르트의 매끈한 얼굴에 환희가 떠올랐다. 마치 아주 중요한 선물이라도 받은 것처럼 기뻐하는 그의 태도에 훼이 드리온은 섣불리 뭐라고 말도 꺼내지 못하고 그냥 멀뚱히 앉아있을 수밖 에 없었다. 붉은 빛의 청년의 주위에는 무슨 결계라도 둘러져있는 듯이 완전 다른 공간이 형성되어버려 순식간에 할 일이 없어진 방문객은 어깨 를 으쓱해보고 그때까지도 벗지 않고 있던 배낭을 쇼파 옆에 풀어놓았다. 샤렌 하르트가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연 게 그때쯤이었다. "…페인트가 만든 것이군." 훼이드리온은 후계자 수련을 떠나기 전, 도서관 앞에서 만난 필로윈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그도 그런 말을 했었다. 검의 현자까지 같은 말을 하니, 저 카드는 정말 대마도사가 직접 제작한 것이 틀림없다. "훗, 게임…인가. 그렇군." 혼자서 중얼대는 샤렌 하르트. 문득 고개를 들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소년에게 질문했다. "여행에도 가지고 다닐 정도면, 이 게임을 좋아하나 보군. 그런가?" "네, 물론이요. 정말 좋아해요." "페인트가 만들어서인가." 훼이드리온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런 이유도 있기야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가 있어요. 저한테 는 소중한 거니까, 좋아해요. 마스터 카드를." "마스터 카드라… 훗, 어울리는군. 그럼 카드 마스터라는 것도 있나." "카드 마스터, 네, 있어요. 일정 실력 이상을 갖추면 마스터라는 칭호를 내린대요. 그것이 저의 목표죠." 그 말에 샤렌 하르트는 약간 떨떠름한 표정이 되었다. 그 매끈한 얼굴에 어색한 표정이 떠오즈자 왠지 모르게 훼이드리온의 웃음을 자아냈다. "그럼, 마스터가 여러 명이란 말인가." "여러 명…이겠죠. 저도 정확하게는 모르지만요." "허, 이럴 수가." 샤렌 하르트는 풀었던 끈을 다시 졸라 묶은 다음 주머니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면서 고개를 가로 저었다. '말도 안 돼'라는 식으로. 훼이드리온 의 얼굴에 의문이 떠오르고 샤렌 하르트는 눈앞의 방문객을 똑바로 쳐다 보았다. "그대라도 정확하게 알아주게." "네? 무엇을요?" "카드 마스터. 진정한 의미의 마스터는 페인트뿐이라는 것을." '진정한 의미의 마스터?' 샤렌 하르트는 한숨쉬며 말을 이었다. "어쩌다가 그 의미가 변질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카드 마스터의 의미는 원래 그런 것이 아니었어. 정확하게 밝힐 수는 없네. 페인트의 부탁이기 도 하니. 다만 이것만은 알아주게. 이 세상에 카드 마스터의 칭호를 받을 수 있는 자는 오로지 페인트 뿐이야. 알겠나?" 끄덕. 훼이드리온은 일단 납득한다는 의미로 고개는 끄덕여보았지만 이 해가 되지는 않았다. 진정한 의미의 마스터는 페인트 밖에 없다, 라니. 그 게 대체 무슨 말일까. 그럼 지금 마스터의 칭호를 받은 사람들은 전부 가 짜라는 것인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라, 훼이드리온은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가르쳐주시면 안될까요?" "뭐?" "진정한 의미의 마스터, 그것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시면 안될까요? 이건 저에게 중요한 사실이에요." 메마른 입에 차를 한잔 머금어 수분을 공급해주고 다시 말을 이었다. "저희 라시엔트 왕가에서는 대대로 후계자 수련이라고 해서, 성인식을 치른 태자가 여행을 떠나야해요. 그때 한가지 목적을 가지고 여행을 떠나 게 되는데, 저의 목적은 마스터 카드에 대한 모든 것을 알아보는 거예요. 제발 가르쳐주세요. 아니면 작은 힌트 같은 것이라도. 네?" 간절하게, 아주 간절하게 샤렌 하르트에게 부탁했다. 마스터 카드에 관 련된 것이라면 이 여행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요소다. 하물며 마스터 카 드의 창시자의 친우가 하는 말은 그 중에서도 순위가 높다. 절대 놓칠 수 없었다. '이런.' 약간의 낭패를 맛보고 있는 샤렌 하르트는 눈빛을 빛내며 부탁해오는 훼이드리온의 진심 어린 태도에 순간 친우와의 약속이 흔들릴 뻔했다. 하 지만 페인트가 진지한 얼굴로 부탁했던 일이라 약속을 깨버릴 수는 없어 서 혼란을 겪어야했다. 친우의 약속을 지킬 것인가, 아니면 친우의 후손 을 위해 밝혀야할 것인가. 너무나도 혼란이 되는 상황이라 샤렌 하르트는 정말 고민했다. 그러다 결국 결심을 하고 입을 열었다. 친우와의 약속을 깨지고 않고, 그의 후손도 도울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을 생각해낸 것이다. "미안하지만 결코 밝힐 수는 없네. 이것은 비단 친우와의 약속 때문만은 아냐. 스스로의 걱정 때문이기도 하니 이해해주게. 허나." 뒷말에 대한 기대로 훼이드리온의 몸이 앞쪽으로 조금 이동됐다. 인간의 모습을 한 오거 로드는 한번 더 생각해보고 말했다. "힌트는 조금 주도록 하겠네. 이 정도면, 그대라면 충분히 해답을 찾을 수 있겠지." "네, 뭔데요?" "마스터. 마스터의 의미가 무엇인지 찾아보게. 그럼 자연스럽게 알 수 있을 테니." 더 이상 말할 수 없다는 단호한 의지를 빛내는 눈을 하고 샤렌 하르트 는 쇼파에 몸을 기댔다. 이제 이 소년은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 가.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해도 더 이상 말할 생각이 없는 그라 그냥 입을 다물고 있기로 했다. 사뭇 소년의 표정이 진지해지자 어쩐지 즐거운 생각 도 들었다. '마스터의 의미.' 샤렌 하르트의 말을 곱씹어보는 훼이드리온은 그가 의도하는 것이 무엇 인지 대충은 알 것도 같았다. '여행을 통해서 직접 알아보라는 건가.' 어차피 그럴 생각이었지만 어쩐지 허탈한 감도 들었다. 주로 이용하던 지름길이 공사로 막혀버렸을 때의 느낌이랄까. 그런 감정을 느끼며 훼이 드리온은 머릿속에다 또 하나의 과제를 저장시켰다. 이 여행을 끝날 때, 꼭 이 과제의 해답을 찾고 말겠다는 의지와 함께. "후, 고마워요." "아니, 고맙기는. 모다 다 가르쳐주지 못해서 미안할 따름이네." 친근하게 생긋 웃어보이며 훼이드리온은 차를 말끔히 비웠다. 이제 슬슬 둘의 얘기는 끝나가고 있었다. 문득 훼이드리온의 머리 속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저기, 부탁드릴 것이 하나 있는데요." "뭔가, 말해보게." 샤렌 하르트가 긍정적인 분위기를 내보여 훼이드리온은 안심하고 부탁 했다. "마스트소드를 볼 수 있을까요?" "마스트소드?" "네, 마스트소드요." 샤렌 하르트는 두 팔을 팔짱 낀 채 진지한 포즈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한마디했다. "그게 뭔가?" "…네?" 마스트소드. 검의 현자 샤렌 하르트의 명검. 그런데도 그 주인이 검읜 현자가 모를 리가 없다. 훼이드리온은 다시 한번 말해다. "마스트소드 말이에요. 검의 현자의 검, 샤렌 하르트." 샤렌 하르트는 그제야 뭔지 알겠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 하하, 내 검의 이름이 인간들에게는 마스트소드라고 붙여진 건가? 훗, 어울리는 이름이군. 빛과 태양의 신의 이름을 빌린 검이라. 하지만 내 검은 그런 거창한 이름이 아니라네. 그냥 '칼'이라고 부르지." "칼?" 엄청 간단한 이름이네, 라고 생각하며 훼이드리온은 자신의 말을 정정했 다. "그럼 그 칼을 좀 보여주시면 안될까요?" "안될 것 없지. 여기 있네." 앞으로 내민 샤렌 하르트의 손에는 어느새 붉은 검집에 쌓여있는 검이 들려있었다. '갑자기 나타나는 것'에는 아예 면역이 되어버린 훼이드리온 은 아무렇지 않게 그 검을 받아들고 살피기 시작했다. '무, 무지 가볍다…….' 그렇게 바라고 바라던 전설적인 검, 마스트소드를, 아니 칼을 받아든 첫 감상은 그것이었다. 정말 롱 소드라고는 생각도 못할 정도로 가벼웠다. 길이는 훼이드리온이 지니고 있는 검보다 긴데도 불구하고 무게는 약간 과장해서 솜털을 든 것 같이 가벼웠다. 정말 이 검을 사용한다면 손목에 무리가 가고 싶어도 가지 않을 듯했다. '한번 뽑아볼까?' 붉은 색으로 도색 된 검집과 손잡이를 잡고 약간 힘을 넣었다. 스르릉, 하는 검날이 검집에 긁히는 소리가 잠시 나더니 이내 새하얀 빛이 눈부 시게 쏟아져 나왔다. 새하얀 광채. 검날 자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 빛은 그 공간을 다스리고 있던 붉은 색조차 눌러버릴 정도로 강하게 발광했다. 그야말로 태양의 빛. 마스트소드라는 이름이 붙은 것도 결코 무리가 아님이 입증되는 순간 이었다. '우, 우와아…….' 칼을 잡고 입을 다물지 못하는 소년의 행동을 관심 있게 지켜보던 샤렌 하르트는 문득 입을 열었다. "가지게." "……." 그러나 그의 말은 정신이 팔려버린 훼이드리온의 귀로 침투하지는 못했 다. 머쓱해진 샤렌 하르트는 아까보다는 커진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가지게나." "……네?" 한 박자 늦게 반응을 나타낸 훼이드리온은 샤렌 하르트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귀에 이상이 생겼나, 라는 의심도 해보며 방금 그가 말한 말을 되새기다가, 이내 크게 소리 질렀다. "네에에! 가, 가지라고요?" "그래, 가지게." "이걸요?" "그렇다네." "제가요?" "가지라니까." 계속 확인을 해오는 훼이드리온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는 샤렌 하르트 는 질문마다 성실히 대답해주었다. 이런 명검을 선뜻 내주는 게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그러고 싶었다. 부디 받아주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며 다시 한번 단호하게 말했다. "그 검, 칼을 자네에게 주겠네. 가지게." "아……." 소년의 멍한 얼굴도 꽤나 볼만했다. 하지만 감상을 하고 있을 때는 아니 라서 다시 관심을 돌리게 만들었다. "싫다면 할 수 없지만." "아, 아니요! 감사합니다!" 샤렌 하르트는 작게 웃어버렸다. "훗, 좋네." "네, 네……." 뭔가 순식간에 일어난 일로 인해 잠시 상황 정리를 해보는 시간을 가진 훼이드리온은 한가지 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칼을 받는 것까지는 좋은데, 이미 자신에게는 검이 하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샤렌 하르트는 간단히 해결해주었다. "이만하면 되겠나?" 훼이드리온은 원래 자시느이 소유였던 검과 방금 샤렌 하르트에게서 받 은 칼이 하나로 합쳐지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해버리고 말았다. 역시 오거 로드의 힘은 한계가 없었던 것이었다. 샤렌 하르트는 감탄을 금치 못하는 훼이드리온에게 여전히 붉은 빛을 띄고 있는 검을 돌려주며 웃어 보였다. "이렇게 하면 그 검을 준 스승의 배려도 잃지 않고 칼을 소유할 수 있 겠지." "가, 감사합니다." 루비네 마을에서 만난 숀에게나, 샤렌 하르트에게나, 오늘 감사할 일도 참 많은 훼이드리온은 즐겁게 웃을 수 있었다. 이로서 또 하나의 인연이 생긴 것이 아닌가. 그 인연은 이 칼이 사라지는 그 날까지 계속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아쉽게도 잠시간의 만남을 끝내야하는 시간이 왔다. "허, 미안하게 됐군." "아, 아니에요. 할 수 없죠, 뭐." 사실 오거 로드는 지금 눈을 떠서는 안됐다. 수면과도 같은 상태에서 1000년을 지내야하는데, 훼이드리온이 숲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무리해서 깨어난 것이었다. 그런 사정을 들은 훼이드리온은 서둘러 배낭을 매고 나 갈 준비를 했다. 샤렌 하르트는 아공간 밖에 있던 킬과 클을 불러들였다. "부르셨습니까." "이 소년을 숲 외곽까지 배웅하라." 샤렌 하르트에게서 갈색주머니를 건네 받아 허리춤에 묶고 있던 훼이드 리온을 가리키며 그렇게 지시하자 킬과 클은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 했다. "네, 알겠습니다." 두 붉은 오거가 대답을 하자 훼이드리온과 샤렌 하르트는 살며시 자리 에서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쇼파와 테이블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공간 은 다시 붉은 빛이 일렁이는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버렸다. 훼이드리온은 배낭을 매만지며 두 붉은 오거의 중앙에 섰다. 샤렌 하르 트는 친구를 대하는 듯한 따스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마지막 인사를 그에 게 건넸다. "반가웠네." "저두요." 둘은 마주 보고 웃었다. "즐거운 여행이 되기를." 샤렌 하르트의 마지막 인사와 함께 그의 붉은 장발과 코트가 한번 휘날 리는 듯 싶더니, 곧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아니, 정확히는 셋이 아공간에서 빠져나온 것이었다. '아쉽다.' 그런 감정이 너무나도 강하게 들어서 입맛을 쩝 다셔보았지만, 할 수 없 었다. 이별은 고통스럽지만, 그렇기에 소중하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 었다. "이 길로 쭈욱 가면 숲 서쪽으로 나가게 돼." 클이 정면으로 나있는 길을 가리키며 말했다. 좌우로 짙게 우거진 수많은 나무들. 그 중앙에 뻗어있는 작은 오솔길. 그것을 보며 훼이드리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볼게요." "그래, 잘 가라." 킬이 여전히 송곳니를 번뜩이며 인사를 했다. 그 모습이 아까와는 다르 게 전혀 무섭게 느껴지지 않는 훼이드리온은 가볍게 미소지으며 응답했 다. "네, 고마워요. 두 분도 잘 계시고요." 점점 멀어지는 서로에게 손을 흔들었다. 잠시 만나는 것도 인연이라고 하면 인연이라 조금 감상적이 되어버린 마음을 가다듬으며 훼이드리온은 완전히 몸을 돌렸다. 앞으로 뻗은 오솔길이 왠지 넓게 보였다. 허리춤에서 느껴지는 무게들이 새삼 그를 즐겁게 만들었고, 그래서 환하게 웃었다. '샤렌 하르트. 고마워요.' 그가 준 칼은 지그시 잡아보며 훼이드리온은 다시 걸었다. 샤렌 하르트 의 여행의 축복을 위해서도,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도, 그리고 앞으로 있 을 인연을 위해서도 당당하게 앞으로 발을 내딛었다. <2장 '인연' 完> 번 호 : 10733 / 10754 등록일 : 2000년 08월 02일 19:00 등록자 : 암음기사 조 회 : 21 건 제 목 : [카드 게임 판타지]『 카드 마스터(Card Master) 』#022 카드 게임 판타지(Card Game Fantasy) 카드 마스터(Card Master) 22. 생각해보면 마법의 숲도 그렇게 나쁜 곳은 아니었다. 어쩌다가 이곳에 대해서 그런 해괴망측한 소문이 퍼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숲의 실상이 거짓없이 퍼진다면 여러 학자들이 찾아올 지도 모르는, 그런 중요한 곳이 었다. 클이 가르쳐준 길을 부지런히 걷고 있던 훼이드리온은 숲에 있는 동안 느꼈던 미끈거리는 진득함 느낌에 익숙해져 가는 자신을 발견하고 있는 중이었다. 처음엔 갑갑하고 굉장히 불쾌해지는 느낌이라 질릴 정도로 싫 어했는데 면역이 되었는지 이제는 그렇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던 것이 다. 숲에 있었던 것도 별로 오래되지 않았는데 어쩐지 아주 익숙한 느낌 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모르겠단 말이야.' 고요한 숲 속을 홀로 걸어가는 중인 그는 책도 읽지 못하니 특별히 할 일도 없고 해서 계속 그 소재를 머리 속에 떠올려보았다. 가장 먼저 생각 해볼 수 있는 의견은 '대마도사의 후손'이라는 것이다. 역사상 유일하게 대마도사의 칭호를 가진 자의 후손이니 마력이 익숙하게 느껴지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도 500년의 시간차를 고려하면 그리 가능성 있는 의견이 아니다. 지금 시점에서 가장 가능성 있는 의견은 바로 '칼' 때문이라는 것이다. 원래 가지고 있던 자신의 검과 하나가 된 샤렌 하르트의 검, 칼. 어쩌면 이 칼의 영향으로 숲에 익숙해져 가는 것일 지도 모른다. 정확한 이유인 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이 의견이 가장 가능성이 높다. 이런저런 상념에 빠진 채 길을 걸어가고 있던 훼이드리온은 문득 자신 의 기사도를 자극하는 사건을 마주치게 된다. 신호는 아주 상투적인 '여 성의 비명'이었다. "저리 가아아아아!" '으, 뭐지?' 그래, 난 이런 것을 원하던 거였어, 라는 분위기에 맞지 않는 생각을 떠 올린 그는 잽싸게 다리를 놀려 외길을 달려갔다. 숱한 영웅들의 이야기에 서 들었던, 그와 비슷한 만남이 이루어지려는 찰나라 가슴속에는 희열이 라고 칭해질 수 있는 감정이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먼저 타오른 것은 100년 전의 기사, 베르도에게서 배운 기사도였 기 때문에 그는 떨리는 가슴으로 숲을 달렸다. 묵직한 배낭이 상당히 불 편한 순간이었다. "이이이이!" 나름대로의 분노를 담은 그 여성의 비명이 다시 한번 들리자, 무작정 앞 을 향해 달리고 있던 훼이드리온이 방향을 수정하여 그곳으로 정확하게 향할 수 있었다. 약간 길을 벗어난, 숲의 외곽에 아주 근접한 지역인 듯 했다. "키케케케케." "크키키." 괴상한, 쇳소리도 아니고 그렇다고 가래 끓는 소리도 아닌 괴상망측한 또 하나의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거대한 나무 하나를 옆으로 피하자 수풀 중간으로 작은 틈새가 보였다. 그곳으로 뛰어들어 막 자라기 시작하 는 작은 나무를 얌전히 돌아 들어가자, 드디어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현 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멈춰!" 상황은 이랬다. 흰색 계통의 여행복과 작은 가방을 어깨에 맨 소녀가 나 무를 등진 채 작은 몬스터들을 향해 손가락을 내지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고, 그 앞에서 세 마리의 몬스터들이 나뭇가지를 들고 장난을 치고 있었다. 막 한 녀석이 직접 건드려보려고 앞으로 다가가는 찰나, 예상하 지 못한 금발의 소년 하나가 난입한 것이다. 훼이드리온이 순식간에 몬스터들과 소녀 사이에 뛰어들어 파리한 검날 을 뽑아들었다. 햇빛이 잘 들지 않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칼의 광채는 햇 빛보다 찬란했다. 번쩍이는 하얀 광채와 붉은 문양이 절묘한 조화를 이룩 하며 세차게 빛을 발하자, 몬스터들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 다. "크키키?" "케크크." '고블린인가?' 자신의 허리까지 밖에 오지 않는 키에다가 큰 머리통, 마찬가지로 큰 코 가 그들이 주로 숲에서 서식하는 몬스터 고블린임을 나타내주고 있었다. 훼이드리온은 뒤에 여전히 훌쩍이고 있는 소녀를 놔두고 칼을 든 채 몬 소블린들과 대치하기 시작했다. 세 마리의 고블린은 서로 무언가를 얘기 하기 시작하더니, 이내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갑작스런 시선에 놀란 그가 검을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고 얼굴에는 필사적인 긴장이 넘쳤 다. 그러나 고블린들은 이내 시선을 거두고 수풀 사이로 한 마리씩 사라졌 다. 재미있는 장난감을 놓친 어린 아이의 아쉬움과 비슷한 감정을 안은 채. 의외로 고블린들이 쉽게 물러가자, 훼이드리온은 잠시 한숨을 쉬어보고 칼을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붉은 검집으로 귀환한 칼을 고맙다는 뜻으로 툭 건드려보고 뒤로 돌아섰다. 윤기가 흐르는 검은머리를 가진 소녀는 쭈 그리고 앉아 울먹이고 있었다. 그는 무릎을 굽혀 자세를 낮추고 소녀의 얼굴이 보이도록 눈높이를 같 이 했다. 검은 머리카락은 반짝이는 윤기가 아름다울 정도로 짙었고 허리까지 길 게 내려와 쭈그리고 앉은 상태에서는 땅에 닿으려고 할 정도였다. 왜소한 체격은 아니고 약간은 살이 붙은 적당한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 나이를 가늠해보자면, 15, 16세 정도밖에 되지 않을 듯했다. 훌쩍이고 있어서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많이 놀랐는지 쉼 없이 손으로 눈물을 훔치는 소녀의 행동이 안쓰러워서 일단 배낭에서 손수건 을 꺼내 건네주었다. "여기요. 이걸로 닦아요." 소녀는 힐끔 손수건을 쳐다보았다가 조심스럽게 받아들고 눈물을 닦았 다. 점점 그쳐 가는 눈물이 완전히 마르길 기다리며 훼이드리온은 아예 배낭을 풀어내 옆에 내려놓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훌쩍." 마지막임을 암시하는 듯한 소녀의 훌쩍임이 들리고 더 이상 어깨를 들 썩거리는 않았다. 그쳤나, 라고 생각하며 훼이드리온이 넌지시 소녀에게 물었다. "이제… 괜찮아요?" 끄덕끄덕. 진정이 된 움직임을 보이며 소녀가 고개를 들었고, 그 순간 훼이드리온은 아찔할 정도로 충격을 받고 말았다. 여태까지 그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하면 자신의 누님인 메이린느 밖에 없다고 생각해왔다. 그녀의 화사한 미소를 이길 수 있는 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라고 그렇게 자부심 비슷한 감정을 느껴왔는데, 지금 이 순간 그 자부심이 완전히 산산조각 나버림을 가슴 깊이 느낄 수 있었다. 검은 머리칼과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화음을 연출하는 이목구비. 깊은 검은색을 띄고 있는 눈동자는 초연하게 빛났고 오뚝하게 서있는 코도 모 양새가 흐트러짐이 없었다. 아주 적당한 크기의 다홍빛 입술은 앙 다물어 진 채 예쁘게 씰룩거리고 있어서 까딱하면 이성을 잃어버릴 것 같았다. 게다가 그런 이목구비는 물이 오른 연한 살색의 피부 위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한마디로 그에게는 충격으로 다가오는 '미녀'였던 것이다. 멍한 눈빛으로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그의 눈빛이 거북스러웠는지 소 녀가 퉁명하게 물었다. "왜 쳐다보는 거야?" "에, 네? 아, 아니에요." 당신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어버렸어요, 라는 낯뜨거운 말은 절대 하지 못하는 훼이드리온이라 당황하며 더듬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 모습에 소 녀는 키득, 하고 작게 웃어버렸다. '생긴 건 정말 잘 생겨놓고 의외로 순진한걸.' 훼이드리온이야 그 수려한 용모를 모두가 인정하는 편이라 더 이상 설 명할 것도 없었다. 소녀는 소년의 푸른 눈동자가 너무나 맘에 들어서 다 시 한번 웃어 보이고 손수건을 건넸다. "고마웠어." "네? 아, 네." 소녀의 미소에 다시 한번 정신을 빼앗길 뻔한 그는 간신히 버티고 손수 건을 받아들였다. 소녀는 훼이드리온이 손수건을 받아 이내 자리를 털고 일어나려 했다. 그러나. "앗!" 곧 다시 주저앉아버리고 마는 소녀. 소녀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왼쪽 발목을 감싸쥐었다. "어디 다쳤어요?" 황급히 소녀에게 묻는 훼이드리온. 소녀는 잠시 고통이 진정되자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발목을 삐었나봐. 아야……." "많이 아파요?" "괜찮아. 치료하면 돼." 결코 괜찮아 보이지 않아서 훼이드리온은 내심 걱정이 되었다. 이렇게 예쁘게 생긴 소녀가 고통스러워하는 건, 별로 보고 싶지 않았다. 소녀는 발목을 한 손으로 지그시 누르더니, 다소곳하게 눈을 감았다. 훼 이드리온은 치료를 한다던 소녀가 갑자기 눈을 감아버리자 의아해하면서 도, 왠지 건드릴 분위기가 아니라 그냥 지켜보기로 했다. '하아…' 발목을 누르고 있던 소녀의 손에서 하얀빛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어어?' 그 광경을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구경하고 있는 훼이드리온. 그러나 소녀 의 손에서 나오던 하얀빛은 이내 삭으러들고 말았다. 그가 아쉬움을 담은 눈길을 소녀의 손을 향해 보내고 있을 때, 소녀가 이럴 리가 없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걸. 왜 안되는 거지?" 이상했다. 발목을 삔 것을 치료하는 간단한 것은 이미 어릴 적에 다 깨 우쳤다. 그런데 그런 간단한 것을 펼칠 수가 없다니. 그 짧은 시간에 벌 써 여러 번 시도해보았지만, 약하게나마 능력이 발휘된 건 방금 단 한번 뿐이었다. '이럴 리가 없는데.' 잠자코 소녀의 행동을 보고 있던 훼이드리온이 조심스럽게 소녀에게 물 었다. "뭐가 잘못 된 거예요?" 그러나 소녀는 뭔가를 고민하고 있는 눈치였기에 물음은 무시당하고 말 았다. 잠시 후 소녀가 그에게 물었다. "혹시… 여기가 마법의 숲이야?" "네, 맞아요." 긍정의 뜻으로 고개까지 끄덕여 보이자 소녀는 그제야 고민하던 표정을 풀었다. 해답을 찾아낸 것이다. "그럼 그렇지. 그래서 그렇구나." "뭐가요?" "아, 아니. 아무 것도 아냐." 훼이드리온은 알 필요 없다는 소녀의 태도에 조금은 뚱해졌지만, 곧 기 분을 원상복귀 시켰다. 쓸데없이 호기심을 표현한다고 해서 이 소녀가 가 르쳐줄 리는 만무할 것 같았다. '그나저나, 그럼 이 숲에서 나가야지 치료가 되겠는걸.' 하지만 이런 발목으로 어느 세월에 이 숲을 빠져나갈지 막막했다. 어쩔 수 없이 또 눈앞의 소년에게 신세를 져야할 것 같았다. "저기 말이야." "네?" "미안하지만… 이 숲을 나가는 데까지만 날 업어주지 않을래? 원한다면 보상도 할게." 업어주는 거야 별로 어렵지 않았다. 자고로 여성을 보호하는 것이 기사 도의 첫째가는 원칙. 기사도에 충실한 훼이드리온으로서는 절대 거부할 리 없는 부탁인 것이다. "보상은 필요 없어요." 간단하게 대답하고 웃어준 그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 배낭을 앞으로 둘 러맸다. 허리 부분이 조금 거북하긴 했지만 그렇게 신경 쓸 정도는 아니 었다. 그렇게 정리를 끝내고 소녀에게 등을 보인 채로 다시 앉았다. "자, 업혀요." "고마워." 아무 의심 없이 친절한 이 소년이 어쩐지 맘에 드는 소녀는 아름다운 미소를 머금으며 천천히 일어나서 소년의 등에 자신을 의탁했다. "부탁해." "거, 걱정 말아요." 등을 통해 소녀의 따뜻한 체온이 전해지자 어쩐지 얼굴이 붉게 타오르 는 듯한 느낌을 받는 훼이드리온은 말까지 더듬고 말았다. 소녀의 허벅지 를 양손으로 붙잡고 일어서는 데까지, 꽤나 많은 시간이 흐른 것도 같았 다. '우와, 가볍다.' 물론 그럴 리는 없겠지만, 자신의 배낭보다 가볍게 느껴지는 소녀의 몸 무게에 훼이드리온은 혀를 내둘렀다. 그야말로 바람이 불면 날아갈 듯해 서 괜히 불안하기도 했지만, 일단 발부터 움직이고 보았다. 어깨를 통해 서 넘어온 소녀의 가늘고 하얀 팔뚝으로 시선이 가는 것을 애써 돌리면 서. "아니아니, 이쪽이야. 내가 온 쪽으로 가는 게 더 빨라." 클이 가르쳐준 길로 돌아가려는 훼이드리온의 움직임 저지하면서 소녀 가 오른쪽을 가리켰다. 그는 몸을 오른쪽으로 돌려서 소녀의 지시대로 움 직였다. '하아, 이런 수풀을 헤치면서 들어왔단 말이야?'라는 생각이 들만큼 수풀 을 헤치며 걸어가자 그에게 업혀있던 소녀가 문득 물어왔다. "저기…" "네?" "무겁지 않아?" 왠지 그 물음이 우습게 느껴지는 훼이드리온. 이 소녀는 자신의 몸무게 를 걱정하고 있었다. "전혀요. 너무 가벼워서 무게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인걸요." 그건 사실이었다. "피이, 거짓말." 김빠지는 소리를 내면서도 어쩐지 이 소년에게서 그런 말을 들었다는 것이 흐뭇해지는 소녀였다. 즐겁다는 뜻인지 연신 입술 끝을 둥글게 말아 보이며 이리저리 방향을 가리키고 있던 소녀의 눈에 멀리 익숙한 빛이 발견되었다. "아, 저기." 탄성 섞인 소녀의 말에 훼이드리온이 소녀의 손가락 끝을 주시했다. 숲 바깥의 밝은 빛이 그 끝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다리에 더욱 힘을 실어 그 빛을 향해 나아갔다. "아! 나왔다!" 숲을 빠져나오는 순간, 머리 위에서 뜨거운 빛이 쏟아져 내렸다. 고요함 과 어둠에 둘러 쌓여있던 숲에서의 탈출. 그리고 너무나도 그리던 푸른 하늘과 뜨거운 햇볕과의 만남은 그들의 마음을 더없이 기쁘게 해주었다. 마스트의 눈과 오파투스의 영역. 아직도 그들은 건제했다. 숲에서 빠져나와서 얼마쯤 걸어가 훼이드리온은 소녀를 땅에 내려놓았 다. 물론 아주 조심스럽게 말이다. 그의 배려에 편히 바닥에 앉은 소녀는 곧 치료를 시작했다. '믿습니다.' 발목으로 가져간 소녀의 손에서 곧 아까 보았던 그 신기한 하얀빛이 새 어나왔다. 그 빛은 마치 살아있는 듯이 손에서 약해졌다 강해졌다를 반복 하더니, 이내 사라졌다. 치료가 끝났는지 소녀가 상쾌하게 웃으며 손을 뗐다. "아, 이제 편하네." "다 끝난 거예요?" "응." 소녀의 미소에 훼이드리온이 궁금하던 것을 물었다. "숲에서는 치료가 안 되는 건가요?" "아니, 마법의 숲이라서 그래. 보통 숲이라면 괜찮겠지만. 마법의 숲은 신법을 싫어하거든." "어, 그럼 방금 그게 신법?" 신의 힘을 빌어 능력을 발휘한다는 신법. 자신이 따르는 신에 대한 신앙 심을 이용하는 신법을 이 소녀가 사용한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 훼이드리 온이었다. 그의 동그래진 눈을 미소를 띈 표정으로 바라보던 소녀가 대답했다. "응, 난 신관이거든." "와아, 그럼 어떤 신을 따르죠?" 신의 종류는 알려진 것만 해도 여러 종류이기 때문에 훼이드리온은 소 녀가 어느 신의 신관인지 궁금해졌다. 소녀는 곧 대답했다. "난 달과 운명의 여신 하실루스의 신관이야." "아아." 달과 운명의 여신 하실루스. 국교가 없는 마법왕국 라시엔트라서 여러 종교가 들어와 번성하고 있었다. 비록 크지는 않지만 나름대로의 영향력 을 갖추고는 있었고, 국민들도 각자의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아마도 이 소녀는 그 중에서도 하실루스교를 따르는 신도인가보다. '어쩐지 어울리는 것도 같은데.' 소녀의 이미지를 보고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훼이드리온에게 소녀가 물 어왔다. "여행 중이야?" "네. 어제 시작했어요." "헤에, 별로 안됐네? 어디로 가는데?" 훼이드리온은 담담히 대답했다. "에코, 마법사들의 도시 에코로 가는 중이에요." "에코? 와아, 신기하다. 나랑 같네?" 우연하게도 소녀도 에코로 가고 있는 중이었다. 문득 머리를 스치는 생 각에 훼이드리온이 소녀를 향해 말했다. "그럼 혹시 마스터 카드 대회… 때문에 가는 거예요?" 소녀의 표정이 한층 더 밝아졌다. "응! 너도야? 와아, 정말 신기하다! 게이머였어?" "네, 저도 참가해보려고 가는 거였는데. 하하, 신기하네요." 훼이드리온과 소녀는 신기한 인연에 즐겁게 웃었다. 그러다가 소녀가 제 안했다. "그럼 말이야. 같이 가지 않을래?" "네?" "목적지도 같으니까 같이 다니자고. 사실 혼자 여행하려니 지루하던 참 이거든. 어때?" 그 말에 훼이드리온도 찬성했다. 하루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혼자 하는 여행은 정말 지루하다는 걸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좋아요. 저도 마침 동행이 필요하던 차였거든요." "헤헤, 그럼 좋아! 내 이름은 '아이 네드런'이야. 아이라고 불러주면 돼. 잘 부탁해!" '아이라…… 훗.' 훼이드리온도 즐겁게 웃으며 이름을 밝혔다. 물론 가명을 말했다. "훼온 레이엔트, 라고 해요. 잘 부탁해요." "훼온? 웅, 발음하기 어렵잖아." 귀엽게 표정을 짓는 아이는 곧 머리 속에 마땅한 이름을 찾아냈다. 소년 의 머리칼과 너무나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서, 아주 흡족했다. "그럼 팀이라고 부를게. 불만 없지? 몇 살이야?" 훼이드리온이 황당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15살인데… 저기, 팀이라니……." "15살? 그럼 나랑 동갑이네? 말놔, 팀!" "그러기는 하겠는데, 제 이름은……." "그래, 고마워, 팀! 잘 지내자!" "저, 저기……." 웃는 얼굴로 자신의 말을 숱하게 무시해버리는 아이를 훼이드리온은 질 리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어쩐지 같이 동행하겠다고 한 자신의 판단이 아주 어리석은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 팀! 그럼 가자!" 아이는 벌떡 일어나서, 그 찰랑찰랑한 검은머리를 바람결에 흔들어 보이 며 걸어가기 시작했다. 끝까지 팀이라고 불린 훼이드리온은 결국 포기할 지경에 이르렀다. '팀이라… 에휴, 할 수 없지.' 아이라고 불리는 소녀는 굉장히 자기 멋대로인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 같았다. 한숨과 함께 검은머리의 소녀에게서 '팀'이라고 불리게 된 그는 배낭을 챙겨 매고 아이에게 따라붙었다.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훼이드리 온에게 생긋 웃어주는 아이는 앞을 향해 발랄하게 걸어갔다. 지도를 확인하고 주섬주섬 배낭 속에 집어넣던 훼이드리온이 문득 생각 난 의문에 뭐가 그리 즐거운지 즐겁게 웃고 있는 아이에게로 고개를 돌 렸다. "물어볼 게 있는데 말이야." "응? 뭔데?" "팀…이라는 이름은 대체 어떻게 생각해낸 거야?" 자신의 이미지가 '팀'이라는 단어와 어울릴까 하고 생각해보았지만, '팀' 이 대체 어떤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소녀는 귀엽게 생긋 웃으며 간단하게 대답했다. "내가 키우던 금색고양이 이름." 고개를 돌려버리는 아이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훼이드리온은 생각했다. '물어보는 게 아니었는데.' 낭패감을 맛보며 그는 힘 빠진 걸음걸이로 걸 어가기 시작했다. 골치 아픈 동행과 함께, 다음 마을은 저녁쯤에나 도착할 거리에 있는 '케롯'이었다. -------------------------------------------------------------------- 네에, 팀의 계략이 여실히 드러나는, 속보인 22편이었습니다(...;;;) 괴악한 자까는 저런 식으로 소설 속에 등장하는 거죠. 우하하.( ---) ...봐줘요(ㅠㅠㅠ) 네에, 추천이어요(>.<) NEOGEO99님 항상 관심을 가져주시는 고마운 독자님(ㅠㅠㅠ) 언제나 카마를 사랑해주시길... NEWARK님 제 마음대로 님의 아이디를 니와크라고 읽고 있긴 합니다만... 어쨌든 추천해주셔서 감사합니다(___) 부족한 점, 꼭 고치도록 노력할게요(___) TRCARD님 에에, 혹시 아이디 뜻이 타롯카드, 인가요? 아하하. 감사합니다(___) 더 열심히 적을 게요(___) 네에, 추천 수가 10개 쌓였습니다. 꿈의 숫자였었는데...(ㅠㅠㅠ) 감사합니다, 독자님들(___) 더욱 분투하셔서 절 추천연재로...;;;; 죄, 죄송합니다. 요즘 가끔 폭주하는 일이 발생해서요...;;; 지난 21편에 컴이 미치는 바람에 잡담을 남기지 못했었죠. 아니, 후기인가. 어쨌든요. 이번 편에 해명을 하려고 했습니다. 지난 번에 추천해주셨는데 이번 편에 감사드리는 분들. 다시 한번 더 감사드립니다(___) 우움, 자 그럼 새로운 캐릭터도 등장하고 했으니, 더 열심히 써야겠죠? 아자아자, 추연란이 날 부른다아아!! 오옷!! 꾸벅(___) 어둠의 기사 DARK KNIGHT TEAM... 번 호 : 10832 / 10835 등록일 : 2000년 08월 04일 21:42 등록자 : 암음기사 조 회 : 14 건 제 목 : [카드 게임 판타지]『 카드 마스터(Card Master) 』#023 카드 게임 판타지(Card Game Fantasy) 카드 마스터(Card Master) 23. "조금만 더 가면 되는 거지?" 몇 번째인지 모를 아이의 물음에 훼이드리온은 점점 짜증이 느껴질 것 같았다. 그래도 끈기 있게 그 물음에 대한 답을 해줬다. "응." "흐음, 그런 대답을 듣는 것도 꽤나 오래 됐는데, 왜 케롯은 안 보이는 거냐구." 아이는 연신 투덜대면서 훼이드리온의 귀를 귀찮게 했다. 동행한지 하루 도 되지 않아서, 훼이드리온은 점점 혼자 여행하던 그 시절(?)이 그리워 지고 있었다. 해는 이미 서쪽으로 넘어간지 오래였고, 붉은 석양조차 한 조각도 찾아 볼 수 없는 시각이 왔다. 그렇기에 주위는 많이 어두워져있었다. 이제 여 행길을 밝혀주는 건 마스트의 눈이 아닌 하실루스의 상징인 달이었다. 은 은하게 땅에 부딪히는 은색의 빛은 차츰 음산해져 가는 벌판의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밝게 만들어주려 애쓰고 있었다. "아름답지?" "응?" 묵묵히 걸어가고 있던 둘. 아이가 밑도 끝도 없이 그렇게 물어오자 훼이 드리온이 멋도 모르고 반응했다. 그녀는 살짝 웃고 있었다. "달빛이 말이야. 아름답지 않아? 난 세상에서 저 달빛을 가장 좋아해. 뜨거운 햇빛과는 달리 은은한, 왠지 모를 부드러움이 내재되어있는 거 같 거든. 헤헤, 그래서 내가 하실루스의 신관인 건가?" 그래서 그런지, 아이의 얼굴은 훼이드리온이 보기에도 밝아 보였다. 하 얀 달빛이 닿은 생기 있는 그녀의 얼굴에는 그칠 줄 모르는 미소가 떠오 른 채 여행길을 밝혀주고 있었다. 그는 곧 고개를 돌려버렸다. 오래 쳐다보고 있으면 괜히 맘이 싱숭생숭 해질 것 같아서였다. 그만큼 아이의 표정은 매력적이고 생기 있었다. "어, 저기 아냐?" 가벼운 몸짓으로 팔을 앞뒤로 휘두르며 발랄하게 걷고 있던 아이가 문 득 멀리 시선을 던졌다. "저기 보이는… 케롯 맞지?" "어, 어?" "얘는. 어디에 정신을 팔고 있는 거야. 저기 말이야, 저 앞에." 그제야 아이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방향으로 눈길을 돌리는 훼이드리 온. 아무래도 두근거리고 있는 심장이 진정되지 않아서 고생인가보다. 아 무튼 그는 지도를 한번 떠올려보고 대답했다. "맞아. 저녁쯤에는 도착하는 곳이니까." 마법의 숲 서쪽으로 빠져나와서 케롯까지 직선 거리로 한나절. 마법의 숲을 통과하는 바람에 더 오래 걸릴 줄 알았지만, 정말 정확한 시간에 도 착한 것이다. 훼이드리온은 속으로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빨리 가자." "응!" 아이도 밝게 웃으며 뛰듯이 걸어갔다. 케롯을 발견한 기쁨에 속력을 가해 걸어간 보람이 있는지 마을은 그들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루비네 마을보다는 훨씬 크고 많이 발전한 마을인 지 해가 사라진 저녁인데도 마을 안은 꽤나 시끌벅적했다. 마법의 등으로 인해 저녁에도 '빛'이라는 축복을 선사 받은 마을은 시끌벅적함에 특유의 살아있는 생기까지 더해 처음 이곳으로 온 여행자들을 즐겁게 만들었다. "와아." 아이가 입을 벌리고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훼이드리온도 그렇게 다 를 바는 없었지만 대놓고 표현하지 못하고 그저 힐끔힐끔 눈동자만 굴릴 뿐이었다. "무슨 날일까?" "글쎄. 나도 잘 모르겠는데." 확실히 보통 마을의 저녁 시간과는 다른 것 같았다. 나와있는 사람들의 표정도 누구 하나 다를 바 없이 즐거워 보였고, 어쩐지 마을 전체가 어떤 특이한 분위기에 휩싸인 듯한 느낌이 들었다. 눈동자를 굴리며 이리저리 궁리를 해보던 아이가 옆에서 여관을 찾고 있던 훼이드리온에게 말했다. "축제일까? 나 축제 같은 거 좋아하는데." "아, 찾았다." 물음과는 전혀 상관없는 대답을 한 그가 기쁜 감정이 드러나 있는 얼굴 로 아이를 돌아보았다. "여관 찾았어. …어, 왜?" 그러나 그의 눈앞에는 불퉁하게 볼을 잔뜩 부풀린 소녀의 웃긴 얼굴만 이 들어왔다. "칫, 너 방금 내 말 안 들었지!" "뭐, 뭐라고 그랬는데?" 당황함에 가득한 훼이드리온의 말에 아이가 크게 코방귀를 뀌었다. "흥! 필요 없어!" "아, 아니 난 여관을 찾는다고……." "흥흥! 가기나 해!" 뭔가 단단히 삐쳐버린 아이. 당연히 그 이유를 모르는 훼이드리온으로서 는 당황함에 허우적댈 뿐이었다. 성큼성큼 화났다는 몸짓으로 몇 발자국 앞으로 걸어간 아이가 돌연 고개를 뒤로 휙 돌리더니 냉큼 소리쳤다. "팀! 안 갈 거야?" "아, 아니. 가야지. 가야하고 말고." 여자의 마음은 갈대니라, 라는 옛 명언을 떠올려보며 훼이드리온은 고개 를 끄덕였다. '옛말에 틀린 말 없다'는 말도 불현듯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 다. '휴우, 뭐지. 방금 전까지는 기분 좋아놓고.' 아무래도 이 여행이 끝날 때까지도 저 소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을 받으며, 서둘러 아이의 옆으로 다가갔다. '여행자 환영!'이라고 커다랗게 써 붙인 현수막이 눈에 띄는 여관이 점점 그들 앞으로 다가왔다. "보통은 저런 현수막 안 걸려있지 않아?" "그렇다고 생각해." 노란 바탕에 붉은 글씨가 그려져 있는 그 현수막을 올려다보며 그들은 의견을 나누었다. 마을 안의 왠지 들떠있는 분위기로 보나, 보통이라면 절대 걸리지 않을 현수막이나, 아무래도 아이가 말했던 '축제'가 열리고 있는 것도 같았다. "일단 방부터 잡자." "응." 훼이드리온이 앞장서서 나무문을 밀고 들어갔다. 끼이익, 하는 소리가 약간은 귀를 거슬리게 만들었지만 곧 왁자지껄한 여관의 소음에 묻혀버 리고 말았다. 노란 마법의 등이 천장에서 내리쬐고 있는 가운데 널찍한 식당에 자리 잡고 있는 10개 남짓의 테이블에는 각각 사람들이 모여앉아서 신나게 떠 들고 있었다. 우락부락한 근육을 가지고 있는 털보 아저씨, 어디선가 대 판 싸우고 왔는지 솜으로 콧구멍 하나를 막고 있는 아저씨, 그 옆에 앉아 있는 아주머니는 왼쪽 눈에 시퍼런 멍이 들어있는 걸로 보아 둘이서 부 부싸움을 했나보다. 참으로 신랄한 식당의 정경을 보며 훼이드리온과 아이는 안으로 들어갔 다. 루비네 마을의 '전사의 노래' 여관보다 두 배는 더 시끄러운 이곳 분 위기도 썩 거슬리지 만은 않는 게, 나름대로의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어서 옵쇼!" 어디선가 들려오는 중년 여인의 외침에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린 둘은 동시에 흠칫 놀래고 말았다. 그들로서는 15년 동안 인생을 살아오면서 맹 세코 본 적이 없는 거대한 체구를 가진 볶은 머리의 아주머니가 맹렬히 돌진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묶고 가시려구?" 훼이드리온이 보기에 아이의 두 배, 아니 세 배는 될 듯한 굉장한 부피 의 얼굴을 들이대면서 그 아주머니가 물어왔다. 그 거대한 기세에 눌려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인 훼이드리온은 눈을 크게 치켜 뜨고 깜빡거릴 수 밖에 없었다. "이쪽으로 오시구랴." 테이블 사이를, 그 거대한 몸으로도 용케도 유연하게 빠져나가는 아주머 니는 카운터에서 큰 장부를 꺼내더니 둘에게 내밀었다. 뒤따라서 카운터 로 온 둘은 장부를 받아들고 신상을 기입하기 시작했다. 대표로 훼온이 이름과 나이를 쓰고 나서 간단히 서명을 갈기자, 큼직한 손이 장부를 빼앗아갔다. 그 대신 작은 열쇠 하나가 훼이드리온을 향해 날아왔다. "웃." 겨우 떨어뜨리지 않고 잡아내자, 열쇠가 하나뿐이라는 걸 깨달았다. "어, 방 하나밖에 없어요?" "그렇소. 축제 기간이다 보니 여관마다 여행자들로 꽉 찼다우. 아마도 방 하나 남은 것도 기적일 거야. 싫다면 나가서 노숙이라도 해보시구려." '갈 테면 가라'라는 태도로 나오는 아주머니의 뱃살에 뭔가 할 말을 잃 은 훼이드리온은 힐끔 아이를 쳐다보았다. 그 눈길에 아이가 대뜸 입을 열었다. "왜?" "아, 아니, 방이 하나 밖에 없다는데?" 훼이드리온의 걱정 섞인 물음.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간단했다. "그래서?" 아이는 어깨 앞으로 넘어온 긴 검은 머리칼을 유려하게 뒤쪽으로 넘기 더니 다시 말했다. "뭐가 문젠데?" 이쯤에서, 당황해야할 사람은 오히려 훼이드리온이 되어버렸다. "난 남자고, 넌 여자야. 그런데 방은 하나라고. 그런데 문제가 안 되는 거야?" 어쩐지 화가 나는 듯한 감정은 조금 표출하며 그렇게 따졌지만, 아이의 대꾸에 훼이드리온은 난처해져버렸다. "너 나 덮칠 거야?" "…뭐? 그럴 리가 없잖아!" 대체 저런 말은 이다지도 간단히 할 수가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 그 였다. 보통 여자라면 얼굴이라도 붉어지는 게 당연하건만, 이 소녀는 가 슴을 벌리고 아주 당당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가 다시 한번 말했다. "그런데 뭐가 문제라는 거야? 날 덮칠 거도 아니면서. 그냥 하루 쉬고 가는 거잖아. 안 그래?" "그렇긴 하지만……." "그럼 빨리 올라가자. 난 좀 씻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보면 틀린 말도 아니었기에, 훼이드리온은 결국 수긍하고 말았다. 뭔가 이치에 맞는 것 같으면서도 이게 아니라는 생각도 구석에 남아있었 기 때문에 꽤나 머리 속이 혼란스러웠지만, 본인인 그렇게 말했으니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자제하면 되는 거잖아.'라고 생각하면서 그는 그 거대한 아주머니를 불렀다. '그런데 뭘 자제한다는 거지?' "아, 이제 끝나셨수? 묶고 가시는 거유?" "네, 이 방 쓸게요." "좋군, 그래. 후불이니까 떠나는 날 값 치르면 되요."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좋은 시간 되시구랴." 아주머니는 씨익 미소를 띄워 보이고 다시 테이블 사이를 누비고 다니 기 시작했다. 이리저리 고래고래 소리도 질러가면서 주문을 받는 모습이 꽤나 인상적이나 아이와 훼이드리온은 키득 웃어버리고 2층으로 올라가 는 계단으로 향했다. "아." "응? 왜?" 갑자기 탄성 비슷한 소리를 내뱉는 아이. 훼이드리온이 의문을 표했다. "씻는 곳이 어딘지 안 물어봤어." 귀엽게 미간을 찌푸리며 고민하는 표정이 되어버린 검은 머리칼의 소녀 를 대신해서 훼이드리온이 미소를 떠올리며 마침 가까운 테이블에서 주 문을 마친 아주머니를 불렀다. "저기, 아주머니!" "에? 왜 그러슈?" "씻는 곳이 어디예요?" "2층에 올라가셔서 복도 끝으로 가슈. 여자, 남자 둘 다 있으니." "네, 고맙습니다." 아주머니가 돌아서 가버리자 그가 고개를 돌려 아이를 쳐다보았다. "들었지?" 아이가 밝게 웃었다. "응! 고마워. 헤헤." "훗." 아이가 웃는 것이 왠지 기분이 좋은 훼이드리온. 둘은 나란히 서서 계단 을 통해 위층으로 올라갔다. "몇 호실이야?" "음… 15호." "저기다." 아주 간단하게 찾아낸 방으로 그들은 천천히 다가갔다. 나무로 지어진 복도는 단단하게 보수라도 했는지 발바닥에서 느껴지는 감촉도 안심이 됐다. 문도 새로 칠을 했는지 반짝이는 게 여관을 제대로 고른 것 같았 다. 하얀 푯말에 '15'라고 기입되어있는 것을 확인하고 열쇠로 자물쇠를 열 어 손잡이를 돌렸다. 소리 없이 문이 열리고 그들은 방안으로 들어갔다. 탁. 문이 닫히자, 아이가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와아, 2인실이었네?" 하얀 시트가 깨끗해 보이는 침대가 양쪽 벽으로 두 개가 놓여있었다. 그 중간에 창문이 자리하고 있었고, 침대마다 각각 작은 서랍장이 딸려있었 다. 전체적으로 루비네 마을의 여관방과 그렇게 다른 점은 찾지 못했다. "난 이쪽." 오른쪽 침대로 빠른 걸음으로 다가간 아이가 풀썩 주저앉았다. 그러더니 곧 상체가 뒤쪽으로 기울어지고 완전히 침대 위로 누워버렸다. "아아, 편해라." 시트에다가 온몸을 부비적대면서 이리 뒹굴, 저리 뒹굴 거리고 있던 아 이에게 반대쪽 침대에 배낭을 내리고 있던 훼이드리온이 핀잔을 주었다. "시트 더러워져. 먼저 씻기부터 해." "흥! 내가 무슨 걸레인 줄 알아?" 입술을 삐쭉거리며 대꾸하면서도 수긍은 했는지 일어서서 가방을 풀어 냈다. 뭐가 들어있는지 훼이드리온으로서는 알 수 없는 그 가방은 서랍장 위에 올려놓고 문 쪽으로 발랄한 걸음걸이로 걸어가던 아이는 휙 뒤돌아 서더니 칼과 주머니를 풀고 있던 훼이드리온을 향해 손가락을 척 하고 들었다. "팀, 내가 씻고 올 때까지 어디 가지마. 알았어? 가방 안에 중요한 건 다 들었으니까 잘 지키고 있으라고." 안 그래도 그럴 참이었던 훼이드리온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아이는 흡족히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훼이드리온은 가만히 한숨을 쉬어보았다. 침대 위에 털썩 걸터앉아서 앞으로의 여행길을 상상해보았다. 동행이 생 겼다는 건 참으로 좋은 일이다. 비록 에코까지만 같이 동행하는 것이라고 해도, 대회에 참가해서 여러 카드 마스터들을 만나게 된다면 여행 목적은 거의 달성하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테니, 여행 내내 같이 다니는 것과도 같다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조금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오늘만 보더라도 얼떨결에 팔자에도 없는 '팀'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됐고, 방을 같이 쓰게 되었어도 별로 상 관하지 않는, 자신과는 참으로 상반되는 사상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설 명하자면, 세상을 참으로 자유롭게 살아가는 소녀라고나 할까. 아무튼 같 이 다니게 되면 꽤나 골머리를 썩힐 듯한 타입의 소녀였다. "그래도 뭐. 헤에." 또 어벙한 소리를 흘렸다는 것도 모르고 그는 소녀의 아름다운 미소를 떠올려보았다. 신관답게 왠지 모르게 성스럽고 깨끗한 그녀의 이미지. 소 녀의 미소는 그런 아름다움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었 다. 그 미소를 대하게 되면 아무 생각도 나지 않게 되는 게, 같이 다녀도 크게 상관없을 것도 같은 느낌까지 들었다. '신법도 쓸 수 있으니까 도움이 되겠지. 거기다가 마스터 카드 게이머잖 아?' 아직 아이의 실력을 보지는 못했지만, 마스터 카드 게이머라는 사실이 굉장히 흡족한 훼이드리온이었다. 여행 중간 중간에 연습삼아 게임을 할 수도 있으니, 이 얼마나 축복 받은 여행길인가. 어쩌면 달과 운명의 여신 하실루스가 내린 장난일 지도 모르는 것이다. '헤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어쨌든 같이 다니는 게 좋다는 거지, 뭐.' 결국 결론은 그것이었다. 한편 문을 열고 들어온 아이는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수려하게 생긴 자 신의 동행이 침대 위에 앉은 채 혼자 뭐라고 중얼거리며 망상에 빠져있 더니 이젠 실실 웃기까지 하는 것 아닌가. '전혀 그럴 것 같이는 생기지 않았는데 말이야. 아… 아니지. 잘 생긴 귀 족 집안 애들은 멍청할 수도 있는 법이니까.' 아이는 훼이드리온의 깨끗하고 수려한 용모를 보고 어느 귀족 집안의 자식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배운 것도 없으면서 검 실력 하나만 믿고 여행을 시작한 그런 철없는 소년. 하지만 왠지 모르게 저 소년이 끌 렸고, 또 친절하기도 하고 마스터 카드 게이머라는 점 때문에 동행하길 결심한 것이다. '훗. 그래도 꽤 귀여운걸.' 어쩐지 헤헤, 거리고 멍하게 웃는 그 모습이 싫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어, 언제 온 거야? 다 씻은 거야?" "물론이지. 이제 눈치챘어?" 가증스럽게도 둘은 서로의 생각을 일체 밖으로 드러내지 않은 채 하하, 헤헤, 하고 웃기만 했다. "팀은 안 씻어? 내 동행이라면 잘 씻기나 하라고." "씻을 거야. 먼저 내려가 있을래?" "그럴까?" 둘은 훼이드리온이 씻는 동안 아이가 내려가서 저녁을 시켜놓는 걸로 합의를 보고 필요한 것들을 챙겨서 밖으로 나왔다. 물론 단단히 문을 잠 그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럼 내려가 있을게." "응." 마스터 카드가 든 갈색주머니와 붉은 검집이 돋보이는 칼을 허리에 걸 치고 세면실로 향하는 훼이드리온의 등을 바라보던 아이는 이내 고개를 돌려 식당으로 향했다. 사람들이 빠져나갔는지 조금은 한산해진 식당에는 거대한 아주머니가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접시들을 치우고 있었다. 아이는 계단에서 가까운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아주머니를 불렀다. "아주머니! 여기 정식 두 개만 주세요!" "정식 두 개요? 네에이이!" 재미있게 끝을 늘리는 아주머니의 대답에 아이는 싱긋 웃어버리고 훼이 드리온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계단 바로 앞이라 누가 내려오는지 훤히 잘 도 보였다. 탁탁탁. 왠지 바쁘게 내려오는 발걸음소리에 테이블 바로 옆에 붙어있던 작은 그림을 관찰하고 있던 아이가 계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쳐졌다. "빨리 왔네?" "세수만 하고 왔으니까. 시켰어?" "응. 정식 두 개. 괜찮지?" 때마침 가져다주는 물잔을 들어올리며 훼이드리온이 간단히 고개를 끄 덕였다. 두 손을 깍지껴 그 위에 턱을 넌지시 올려놓으며 아이가 방금 생 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참, 팀. 마법의 숲에서 헤매지 않았어?" 궁금함에 초롱초롱 빛나는 아이의 검은 눈동자를 지그시 눈길을 돌려 외면하면서 입을 열었다. "헤매기는. 뭐, 별로." 원래는 엄청 헤맸지만, 별로 그런 말을 하고 싶지는 않은 훼이드리온. 아이는 "호오."라는 아리송한 음성을 남기며 의미 있는 시선을 그에게 던 졌다. 그는 애써 시선을 무시하며 식당 분위기에 대한 고찰을 수행했고, 소녀는 끈질기게도 빤히 그를 쳐다보는 것이었다. "아, 알았어. 많이 헤맸어, 많이 헤맸다고. 됐어?" "쿡, 그럴 줄 알았어." 아이의 끈덕짐에 두 손 들어버린 훼이드리온이 그렇게 진실을 토했고, 그녀는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며 살짝 웃었다. 그녀가 재차 물었다. "그럼 하루는 그 안에서 헤맨 거야?" "그 정도는 되지 않은 거 같은데." "누가 알아? 마법의 숲은 숲의 마력으로 인해서 어긋난 공간 때문에 시 간이 다르게 흐를지. 팀은 아니라고 생각돼도 이미 하루가 흘렀는지도 모 르잖아." "에, 설마." 아이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럴 수도 있는 것 같았다. 샤렌 하르트가 있던 그 아공간에서 샤렌 하르트는 이렇게 말했었다. "어차피 이곳에서 시간이 란 무의미한 것." 공간마다 시간이 다르게 흘러갈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훼이드리온은 급해지는 마음에 서둘러 날짜를 확인했다. 어쩌면 날짜가 확 지나버려, 이렇게 여유를 떨고 있을 시간도 없을지 몰랐다. "오늘이 몇 일이지?" "웅… 아까 장부 보니까 14일이라고 되어있었어." 아이가 방금 전의 기억을 떠올리고 대답하자, 곧 훼이드리온의 얼굴이 '에에!'하는 기겁하는 표정으로 바뀌었다가, 천천히 먹구름이 끼어갔다. "어, 뭐가 잘못된 거야?"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어오는 아이의 말을 잠시 무시하며, 훼이드리온은 깊이 생각해보았다. 마법의 숲에서 헤매다가 벌써 하루가 지나버렸다. 13 일에 케롯에 도착해야하는데, 14일이 되어버린 것이다. 분명히 여정에 작 게나마 피해를 미치는 일이었다. '원래부터 여유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하루 정도는 괜찮지만, 에휴, 그 래도 이거 참 떨리네.' 비로소 마음을 가다듬고 시선을 회복했다. 덩달아 어두워져버린 아이의 어여쁜 얼굴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뭐가 잘못된 거야?" 훼이드리온은 괜찮다는 듯이 씨익 웃어주었다. "아니, 괜찮아. 계획에 조금 차질이 생길 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크지는 않으니까. 걱정할 거 없어." 아이는 그제야 안도하는 표정으로 작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곧 밝게 미소지었다. "그래? 그럼 다행이고. 팀은 계획을 다 세워놓고 다니는 거야?" 훼이드리온은 쑥스럽다는 듯이 웃었다. "자세히는 아니고. 그냥 마을을 지나면서 날짜 확인하는 정도지. 거의 다가 한나절 거리에 있으니까." "음… 그렇구나." 몰랐던 사실을 새롭게 알게된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활짝 웃었다. 그 웃음에서 약간의 안도하는 빛을 발견할 수 있었다. "헤헤, 난 그냥 무턱대고 에코로 향하는 거였는데. 다행이다, 거기서 팀 을 만나서." 아이는 진심을 담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약간 옆으로 뉘었다. 깍지낀 두 손위에 올려져있는 고개가 기우뚱 옆으로 기울어지며 미소까지 보이 자 훼이드리온은 화악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옆으로 돌 려버렸다. 도저히 마주 볼 수 없게 만드는 미소. 아이의 미소는 그런 것 이었다. "너, 넌 왜 마법의 숲에 들어간 거야?" 분위기 쇄신을 시도하며 그가 묻자, 아이는 손을 내리고 그 대신 머리카 락을 손가락으로 비비꼬면서 헤헤 웃었다. "배가 고파서, 뭐, 열매라도 따먹을까 해서." "…에? 마법의 숲에?" "피이, 마법의 숲인지 몰랐단 말이야. 알았다면 굶주린 배를 움켜잡고서 라도 포기하고 말았지, 내가 왜 들어갔겠어." '그런가.' 훼이드리온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나름대로 고개를 끄덕였고 아이는 쑥 스러운지 홍조를 띄우며 연신 웃음을 흘렸다. 그때 때마침 아주머니가 주 문한 요리를 들고 나왔다. "자, 맛있게들 들어요." 거대한 몸집을 이끌고 아주머니가 저만큼 테이블을 돌아 사라지자 둘은 요리를 내려다보며 군침을 흘렸다. "맛있겠다. 그치?" "응." 아이가 물어볼 때, 이미 훼이드리온은 수프를 입으로 떠 넣고 있었다. 그녀도 질 수 없다는 듯이 곧 스푼을 들고 담백한 향의 수프를 먹기 시 작했다. "아, 맞아. 혹시 에코에 도착할 때까지 시간 여유 있어?" 문득 아이가 물었다. 훼이드리온은 잠시 생각을 하듯 눈동자를 위로 굴 리더니 곧 대답했다. "응. 2, 3일 정도 있을 거야, 아마. 왜?" 그의 말에 아이가 환하게 웃어 보이며 즐겁게 소리쳤다. "와아, 정말? 그럼 우리 축제 구경하고 가자!" "축제?" "응! 저 주인 아주머니도 그러셨잖아. 축제라고. 우리 구경하고 가자, 응? 티이이임∼" 너무나도 앙증맞게, 정말 그녀에게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애교를 떨면서 훼이드리온을 몰아붙였으니, 순진한 그가 허락을 안 할 리가 없다. 그는 행복함에 취한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았어. 보고 가자." "꺄아, 팀, 멋져!" 뭐가 멋지다는 건지도 모르면서 훼이드리온은 "하하하." 웃어댔다. "그럼 내일 아침에 나가보는 거다?" "응, 알았어." 아이의 기쁘다는 미소를 바라보면서 그는 다른 뜻으로 행복함에 젖어들 었다. 꽤나 고생이었던, 그러나 끝에 가서는 너무나 행복하게 된 여행의 둘째 날은 그렇게 저물어갔다. ------------------------------------------------------------------- 꺄꺄, 팀입니다. 팀이에요. 훼이가 아닌, 오리지날 팀입니다(___) ...전 절대 잘생기지 않았습니다. 다 알고 계시겠죠.; 그저 소설 속에 한번 등장하고 싶어서 저런 편법을 써본 것입니다.; 맘에 안드신다...고 하셔도 이미 저질러버렸으니, 어떻게 할 수가 없...; 네에, 자까는 사악한 것입니다... 씨익.; 요즘, 대화방에 들어가면 절 알아보는 이들이 많이 있어서 움찔움찔 놀 랜다는.; ...에에, 왠지 무서워요(>.<) 그렇게 인기 있는 것도 아닌 제 작품을 알고 계신다니... 그것만으로도 감지덕지입죠.;;(___) 하암. 어쨌든. 오늘의 잡담은 이만, 하고 물러가겠습니다. 23편, 잘 봐주시구요, 24편도 기대해주셔야해욧(---!!) 어둠의 기사 DARK KNIGHT TEAM... P.S 요즘 추천이... 줄어들고 있어요...(ㅠㅠㅠ) 이잉.; 추천 감상 비평 해주시는 독자님들. 사랑해욧(>.<) 꺄아~(>.<) P.S 2 앙, 그리고 말이죠. (---) <-- 전 삼지안 일족의 마지막 후손이랍니다.; 눈 세개는 결코 오타가 아니어욧(>.<) 번 호 : 10967 / 10973 등록일 : 2000년 08월 06일 22:26 등록자 : 암음기사 조 회 : 12 건 제 목 : [카드 게임 판타지]『 카드 마스터(Card Master) 』#024 카드 게임 판타지(Card Game Fantasy) 카드 마스터(Card Master) 24. 창문으로 쏘아져 들어오는 빛이 사각형의 창문 모양을 바닥에 하얗게 만들자, 그 빛을 느낀 훼이드리온이 미간을 잠시 찌푸리더니 이내 실눈을 뜨며 잠에서 깨어났다. 여행을 떠난 후, 정확하게 세 번째로 맞이하는 아침. 분명히 날짜는 3 일을 지났지만 마법의 숲 안에서 흐른 하루는 훼이드리온으로서는 전혀 자각하지 못한 시간이었기 때문에, 그에게는 두 번째 아침이 된다. 그런 약간의 시간 오차를 넘겨두고서라도 그에게 오늘 아침은 굉장한 이유를 갖는다. "흐음." 정신을 차리기 위해 눈을 비비며 시야를 회복하자, 곧 그 '굉장한 이유' 가 눈에 들어왔다. 반대편 침대에서 아직 곤하게 잠들어있는 소녀, 아이. 자는 중에 뒤척였 는지 왼쪽으로 몸을 누이고 있어서 그 얼굴이 그를 향해 적나라하게 모 두 비춰졌다. 그렇다고 그녀의 얼굴에 맞지 않게 엽기적으로 자고 있던 건 아니다. 아주 곤하게, 정말 평화로운 표정으로 그녀는 잠에 푹 빠져있 었다. 훼이드리온은 가만히 침대에 앉아서 그녀를 한참이나 관찰했다. 찰랑이 는 검은 머리칼은 대부분 등 쪽으로 넘어가 있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얼 굴 쪽으로 넘어와 있는 몇 가닥의 머리카락은 유연한 곡선을 그리며 그 녀의 연한 살색의 얼굴을 매혹적으로 가려주고 있었다. 꿀꺽. 침을 넘기고 나서 훼이드리온은 당황하고 말았다. 아이의 얼굴을 보면서 자신이 왜 침을 넘기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였다. 설마 순간적이 라도 저 아름답고도 어딘가 매혹적인,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관인 탓인지 어딘가에서 묻어나는 성스러움을 담은 모습을 보면서 떠올려서는 안될 생각을 떠올린 것은 아닐까. 그는 자신의 이성에 대해 정상적인 믿음이 발동되지 않아서 한참을 고민해야했다. 결국 결론은 '설마 그럴 리가.'로 내려졌다. 다시 눈길을 아이에게로 돌렸다. 그리고 또 다시 잠들어있는 그녀의 모 습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확실히 아름답다. 자는 모습에서는 평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성스러움 이 묻어날 정도로 아름다웠다. 여자라 원래 이런 걸까. 자신의 누님을 떠 올려보고 '아름다운 여자'라면 원래 이런 건가보다, 라고 판단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고운 머릿결을 따라서 흐르던 그의 시선이 문득 뭉툭한 입술 위로 머리 카락이 지나는 부분에서 멈췄다. 분홍빛 입술. 지금은 비록 조금은 말라 덜하지만 보통 때는 정말 생기 있게 보이는 곳이다. 저 조그만 입으로 음 식도 먹고 말도 한다. 여자란 정말 신기한 동물이라고 훼이드리온은 생각 했다. 꿀꺽. 또 한번 침이 넘어가고, 훼이드리온은 더 이상 그 문제에 대해 거 론하지 않기로 했다. 결국 본능이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얇은 이불은 허리 정도까지 올라와 있었다. 두 팔은 가슴 앞에 모으고, 마치 아기가 뒤척이다가 우연히 취하게된 자세 같은 그녀의 모습에 그는 진하게 미소를 피어 올리고 자리에서 슬그머니 일어났다. 그녀에게로 가 까이 다가가자, 어제 저녁 자기 전에 감았던 머리에서 향긋한 향수의 내 음이 느껴졌다. 왠지 모르게 맘 속 깊은 꽉 막힌 곳이 트이는 듯한 상쾌 한 그 향에 다시 한번 웃고는 뒤척이는 사이 밀려버린 이불을 향해 손을 뻗었다. "뭐해?" "이불 좀 정리해주려고." "괜찮은데. 안 해줘도 돼." "힘든 것도 아닌… 엇!" 들려오는 물음에 본능적으로 대답하고만 그는 뒤늦게 상황을 인식하고 뒤로 후다닥 물러났다. 어느새 잠에서 깨어난 아이가 장난스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침대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의 홍수가 그녀의 머 리로부터 쏟아져 내려 미소에 아름다움을 더했다. "친절하네, 팀은." "아니, 뭐, 그냥, 그러니까… 에에……." "쿡. 뭘 그리 당황해하는 거야.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아이는 작은 입을 벌리고 왼손으로 입을 가리며 귀엽게 하품을 했다. 그 리고 한 차례 크게 기지개를 켜더니 이불을 걷어내고 완전히 일어나 침 대 위에 앉았다. "잘 잤어?" "에… 흠. 응, 그럭저럭." "다행이네. 나도 잘 잤어." 싱그러운 아침 햇살에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미소를 띄우는 그녀의 얼 굴. 창문 밖에서 창문을 투과하여 들어오는 햇살 사이로 쳐다보는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은 훼이드리온에게는 과연 어떤 식으로 다가갈까. 두근. 한 차례 격한 운동이 가슴에서 일어났다. 그는 자신의 몸의 정직 한 반응에 깜짝 놀랐지만 애써 내색하지는 않았다. 조금 후, 심장은 고이 본래의 운동 속도로 돌아갔다. "음, 이제 일어나 봐야지?" 아이가 침대에서 일어나더니 마지막 남은 일말의 잠 기운을 떨치기 위 해 다시 한번 크게 기지개를 폈다. 그 모습을 보면서 훼이드리온은 자세 를 바로 갖추고 괜히 헛기침을 해보았다. 남이, 그것도 여자가 행하는 기 지개를 정면에서 쳐다보고 있다는 것은 꽤나 곤혹스러우면서도 민망한 일이란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어디다 눈을 둬야할지 모르는 그를 향해 기지개를 마친 아이가 상쾌한 얼굴로 물었다. "오늘, 약속한 거 잊지 않았지?" 오늘이 어떤 날인지 잘 알고 있기에 그녀가 환하게 웃으며 훼이드리온 에게 재차 어제 저녁의 약속을 확인했다. 훼이드리온은 고개를 옆으로 돌 린 채로 머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기억하고 있어." "헤헷, 그럼 됐어. 나 먼저 씻고 올 테니까, 정리 좀 부탁해!" 아이는 웃으면서 방문을 빠져나갔고 그는 홀로 남은 방에서 가만히 서 있다가 어깨를 한번 으쓱해보았다.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 애라니까.' 훼이드리온의 손은 아이가 잠을 청했던 침대의 시트를 가장 먼저 정리 하고 있었다. 마법의 숲에서의 작은 노동 때문이었는지 오늘은 조금 늦게 일어난 듯 했다. 식당으로 내려와 시간을 확인하자, 몸에 길들여져 있었던 기상 시 간을 훨씬 초과해 아침 식사시간도 지나있었던 것이다. 아이와 훼이드리 온은 서로 놀란 얼굴로 쳐다보았고, 행동을 빨리 했다. "아주머니, 여기 아침 좀 주세요!" "알았수! 조금만 기다려요!" 주방 안에서 들려오는 어제의 그 거대한 아주머니의 우렁찬 목소리가 텅 빈 식당을 웅웅 울리며 그들에게로 전달됐다. 아이는 시끄러운지 작게 인상을 찌푸려 보이며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시원한 느낌이 식도를 타고 배 안으로 사라져갔다. "그럼 또 정해야지?" 아이가 웃으면서 그렇게 묻자, 훼이드리온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허 리춤을 매만졌다. 곧 그의 손에 들려 갈색주머니가 올라왔다. "어제하고 똑같이 하는 거다." "알았어." 어제 저녁. 서로 저녁 값을 내겠다고 다투던 둘은 결국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아이가 마스터 카드 게이머답게 카드 로 결정하자고 해서 훼이드리온이 고개를 끄덕였더니, 제안한 방법이 지 금 시작하려는 바로 이것이었다. 먼저 훼이드리온이 자신의 마스터 카드 중 일부만을 꺼내 익숙한 손놀 림으로 그것들을 섞었다. 이제 그도 제법 자세가 갖춰진 게이머이기에 카 드를 섞는 모습에서도 여유를 찾아볼 수 있었다. 카드 섞는 것도 긴장하 던 처음의 모습을 상상해보면 참으로 대단한 발전이지 않은가. 그렇게 카드를 섞은 다음, 그림이 보이지 않게 뒤집은 채로 테이블 위에 쭈욱 늘어놓는다. 그리고 늘어놓은 마스터 카드들에서 맘에 드는 하나만 을 집어드는 것이다. 그렇다고 카드를 봐서는 안되고 가만히 덮어놓은 채 로 기다려야한다. 승패는 카드를 뒤집었을 때 공격력이 높은 쪽이 승리하게 된다. 물론 메 티 카드보다 유저 카드가 우선이고, 저레벨보다 고레벨이 우선이다. 이 방법은 그저 심심해서 한번 해보는 마스터 카드의 응용게임 정도이 다. 또 게이머들 사이에서는 간단한 유흥거리로, 또는 내기거리로 즐겨 사용되는 방법이기도 했다. 아이는 신중하게 카드들을 훑어보더니 단숨에 하나를 자기 앞으로 끌어 서 가져왔다. 곧 훼이드리온도 하나를 뽑아서 자신의 앞으로 가져갔다. 약간의 긴장이 교차하는 순간. 둘은 약속이나 한 듯이 동시에 카드를 돌 렸다. 아이의 카드는. "메티 카드. 수룡의 여의주." 훼이드리온의 카드는. "동마법사 카드." 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헤헤, 내가 이겼어. 아침은 내가 사는 거다?" "이런, 지다니. 쩝." 카드를 돌려주며 아이는 아쉽다는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고, 훼이드리온 은 돈을 내게 됐는데도 뭐가 그리 즐거운지 연신 웃어대며 카드를 정리 했다. 상대방을 위하여 내가 희생을 하겠다, 라는 정신이 너무나 투철한 것인지, 둘은 이기는 쪽이 돈을 내는 것으로 합의를 본 것이다. 아무튼 당사자가 좋으면 다 좋은 것 아닌가. 그들은 승패에 만족하며 즐 겁게 아침 식사를 기다렸다. 곧 따끈따끈한 온기와 구수한 향을 가진 아침이 나왔고 둘은 서로에게 한번 웃어주고는 식사에 임했다. 마늘빵에 남아있던 수프를 발라 입으로 가져가던 아이가 훼이드리온에 게 물었다. "근데 오늘 어디 갈 거야?" 기술적으로 스푼만을 사용하여 수프를 깨끗하게 비운 그가 마늘빵으로 손을 가져가며 대답했다. "글쎄. 이 마을 축제에서 뭘 하는지 모르니까 일단 나가봐야지." 그렇구나, 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 옆 테이블을 치우고 있 던 아주머니가 그 이야기를 들었는지 대뜸 그들에게 물었다. "축제 구경하실 거유?" 아이가 붙임성 있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 그럴 건데요? 혹시 추천할 만한 곳 없으세요?" "음, 글쎄," 아주머니는 걸레를 들고 잠시 고민하는 표정이 되더니 다시 걸레로 테 이블을 닦기 시작하며 대답했다. "잘 모르겠수다. 원래 이 축제는 우리 마을 특산주를 알리기 위해 벌리 는 거라, 다른 것은 별로 알 수가 없거든. 직접 돌아다니다 보면 재밌는 거라고 발견할 수 있겠지." 거기까지 축제에 대한 정보 아닌 정보를 알려준 아주머니는 더러워진 걸레를 보며 얼굴을 한번 찡그리고는 주방으로 들어갔다. 훼이드리온이 그쪽으로 시선을 한번 던져보더니 이내 아이를 바라보면서 어깨를 으쓱 했다. "뭐, 그냥 다녀보자." "으응." 뭔가 아리송한 아이의 반응이었지만, 그는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고 말았다. 그의 눈이 다시 자신의 몫으로 배당되어있는 요리를 향했을 때, 그녀는 방금 전의 아주머니의 말을 되새기며 그녀만이 진위를 알 수 있 는 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느새 식사는 끝나고 그들은 포만감으로 인하여 묘하게 나른해지는 느 낌을 받았다. 그렇다고 그 느낌 그대로 있을 수는 없는 이유가 있었기에 마지막으로 물을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마워요!" "잘먹었어요, 아주머니!" 미리 정해두었던 대로 훼이드리온이 아침 값을 치르자 아이가 환하게 웃으며 그를 재촉했다. "빨리 가자, 티임∼" "알았어, 알았다고. 서두르지 않는다고 축제는 끝나지 않아." "그래도 빨리 나가야지 더 많이 보지!" 어린 꼬마의 투정을 그대로 본 딴 듯한 아이의 행동에 그는 "하하." 웃 음만 터뜨리며 밖으로 향했다. 그녀의 애교 가득한 행동은 그를 즐겁게 해주는 또 하나의 요소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듯했다. "와아!" 문을 나오자마자, 탄성부터 지르고 보는 아이. 훼이드리온이 햇살에 눈 이 따가운지 손을 들어 빛을 가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과연 어제 저녁 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밖으로 나와있었다. "가자, 팀!" "응. 아아, 끌지 마!" 기분 좋은 미소를 짓고 있는 아이에게 팔을 붙들린 훼이드리온은 마스 터 카드가 든 주머니와 칼이 떨어지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축제 구경을 위한 힘찬(?) 발걸음을 옮겼다. "아앗, 끌지 말라니까!" "자, 아… 해봐." "아." 무심한 표정으로 벌린 훼이드리온의 입 속으로 작은 쿠키 하나가 쏙 들 어간다. 아이가 자신의 입에도 쿠키를 하나 쏙 집어넣고는 입술을 오물거 리며 맛있게 씹어먹기 시작했다. "음, 달콤하다. 그치?" "응." 역시나 무심한 대답을 하며 쿠키를 넘기던 그가 이내 손에 들고 있던 책을 제자리에 내려다놓았다. 그 모습에 그녀가 기쁜 표정을 지으며 그의 앞에 얼굴을 들이댔다. "와아, 이제 가는 거야?" "어? 음, 그럴까?" "그럴까, 라니! 벌써 한 시간째란 말이야!" "벌서 그렇게 됐어?" "치!" 토라진 듯이 상당히 불만인 표정으로 고개를 휙 돌리는 아이. 훼이드리 온은 당황하여 사태 수습을 위해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서점 주인에 게 허리 굽혀 인사하고 괜히 심통을 부리는 아이를 끌고 서점 밖으로 나 오기까지 그에게는 억겁의 시간이 흐른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에휴. 축제 구경하자고 해도 무슨 고집이야." "흥! 쿠키 한 봉지 사주고 서점에서 한시간이나 보낸 게 누군데 그래?" 그렇다. 여관에서 나온 둘은 축제 구경을 시작할 명목으로 일단 가까운 과자점에서 쿠키를 샀다. 여관 아주머니와 누가 더 비만인지 내기라도 하 듯이 거대한 과자점 아주머니가 하는 말("루비네 마을의 과자점도 털렸 다고 하던데.")을 듣고는 그리운 숀의 얼굴을 떠올려보면서 길을 걷다가 서점을 발견한 것이다. 훼이드리온, 그는 책에 대한 관심이 정말로 높은 관계로 무작정 그 안으 로 들어가 시간을 보냈다. 순간적으로 동행인 아이 또한 기억에 놓친 것 이다. 책을 붙들고 혼자만의 세계로 빠져있는 그를 일깨우기 위해 쿠키를 먹 이기도 하고 별 장난을 다 해보았던 아이는 이윽고 삐쳐버렸다. 훼이드리온은 미안하다는 표정을 만면에 떠올리며 웃을 수밖에 없었다. "한번만 봐줘. 응? 오늘 해달라는 거 다 해줄 테니까." "흥! 그렇게 돈이 많으면, 책이라도 왕창 사서 읽지 그래?" 아무래도 이번에는 쉽게 풀릴 것 같지 않았다. 아이는 지금 자신의 심정 을 가장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자세를 취한 채 고개를 휙 돌려 훼 이드리온을 외면해버렸다. 그로 인하여 훼이드리온은 더더욱 당황할 수밖 에 없었다. '으휴, 내가 왜 책에 빠져있었던 거지.' 누가 뭐라고 해도 오늘은 아이의 부탁으로 축제 구경을 나온 것이었다. 그러니 아이의 말을 따라주어야 하건만, 자신의 이 무신경한 호기심은 서 점 쪽으로 깃대를 세워버린 것이다. 그는 혼자만 들을 수 있게 뭐라고 중 얼거리고는 아이의 두 팔을 덥석 붙잡았다. "자자, 가자. 여기서 계속 티격태격 하고 있다가는 축제 끝나겠다." 나름대로 귀여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아이를 재촉하자, 전혀 통할 것 같 지 않았던 그녀도 할 수 없다는 듯이 그의 손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갔다. 그러다 결국은 화가 풀렸는지 나란히 서서 즐겁게 웃고 떠들게됐다. "축제의 주역에게 가봐야 하는 거 아닐까?" "축제의 주역?" 아이의 웃음기 섞인 말에 훼이드리온이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대꾸했다. 그녀가 한 차례 찡긋 윙크를 해 보이더니 말했다. "특. 산. 주. 축제잖아. 마땅히 가봐야 하지 않겠어?" 그가 다시 대꾸했다. "뭐, 가봐야 마실 것도 아니잖아. 그리고 난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고." "티임∼ 해달라는 거 다 해준다고 했잖아." 그러고 보니, 토라진 아이를 달래기 위해서 그런 말을 내뱉었었다. 그런 사실을 기억해낸 훼이드리온은 순간 가벼웠던 자신의 입을 탓하며 천천 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가 환호성을 지른 건 그것과 거의 동시에 일어 난 일이었다. 룰루랄라, 발걸음도 가볍게 특산주 코너로 향하고 있는 아이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는 그녀의 심리를 아주 잘 반영해주고 있었다. 어딘가 장난기 가 서린 그 미소를 보며 훼이드리온은 생각했다. '뭐, 손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지도.' 원래부터 손익을 철저히 계산하면 산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냥 가볍 게 웃어넘겼다. 오늘 하루 즐겁게 지내면 그만 아닌가. "빨리 와, 팀!" "천천히 좀 가." 뭐가 그리 바쁜지 아이는 서두르는 걸음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래서 느릿느릿 구경할 거 다 구경하면서 걸어오고 있는 훼이드리온이 참으로 못마땅했다. 큰 축제도 아니기에 별로 볼 것도 없는, 다른 마을들과 크게 다를 바도 없는 모습들을 마치 처음 보는 신기한 구경거리라도 되는 듯 이 눈빛을 빛내는 그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팀, 처음 보는 것도 아니면서 뭘 그렇게 보고 오는 거야?" "처음 보는데." "뭐? 너희 마을은 무슨 숲 속의 숨겨진 땅굴이야?" 훼이드리온은 못들을 소리라도 들은 듯이 미간을 좁히며 대꾸했다. "말을 해도 꼭 그렇게 해야겠어?" "그럼 뭐야? 빨리 안 오고." "알았어, 갈게, 가면 되잖아." 할 수 없이 그는 속도를 빨리 하여 아이의 곁으로 다가갔다. 군말 없이 그가 자신을 따라오자 아이도 곧 기분을 회복하고는 목적지를 향해 발걸 음을 옮겼다. 지나다니는 남자들, 여자들, 특히 성인식을 치른 지 3년도 채 지나지 않 은 듯한 연령을 가진 소년소녀들은 여행자로 추측되는 수려한 용모의 소 년과 아름다운 미모의 소녀에게 한번씩 시선을 던지며 부러워하고 시기 하기도 했다. 역시 그들은 어딜 가나 시선을 모으는 외모였던 것이다. 점차 심해지는 그 시선들에 아이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훼이드리온에게 속삭였다. "지금 우리가 주목받고 있는 거 맞지?" "음… 그런 것 같아." "거북한데. 왜 쳐다보는 거지? 너의 그 붉은 검 때문 아냐?" "칼이 왜. 검을 차고 다니는 여행자는 많단 말이야." "그런데 왜 그러지. 우웅……." 고민하는 표정이 되어버린 아이. 그들은 자신의 외모에 대한 평가를 어 떻게 내리고 있는지 참으로 궁금해지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아, 저기다!" 널찍한 광장 같은 곳으로 걸어나오자, 아이의 눈에 반가운 코너가 발견 됐다. 기다란 장대에 '케롯의 특산주! '피아드 주' 시식회!'라고 그려진 긴 현수막이 걸려있었고, 그 아래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웅성대고 있 었다. 아무래도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광장 분수대 앞에서 시식회를 열어 사람들을 많이 끌어 모으는 전략에 충실한 중인 듯했다. 시식회 담 당인 듯한 건장한 키의 남자가 큰소리로 부르짖으며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모았고, 축제를 즐기고 있던 사람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시식회에 참여하여 한잔씩 걸치고 지나갔다. 아이의 눈이 호기심으로 그득하게 차기 시작했다. 광장 입구에 서있는 그들에게까지 바람을 타고 날아오는 피아드 주의 향긋한 내음. 그녀는 혀 를 지배하는 달짝지근한 느낌에 참을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드디어 오 래 전부터 생각해오던 일을 해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일단은 옆에 있는 이 방해꾼부터 제거해야했다. 이 녀석은 자신이 계획 을 실행하려고 하면 뜯어말릴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녀가 그런 생각 을 가지고 골똘히 궁리하는 표정을 짓고 있을 때, 금발 머리에 수려한 용 모를 가진 푸른 눈의 방해꾼은 그녀의 시선을 느끼고는 물음표를 띄우며 물었다. "왜? 가보고 싶은 곳에 왔잖아." "아니, 팀은 가보고 싶은 데 없나 싶어서." 본심은 철저히 숨긴 채 그녀가 배려하는 어조로 그렇게 묻자, 훼이드리 온은 웬일인가 싶어 헛웃음을 터뜨렸다. "야아, 내 걱정을 해주다니. 기쁘다고 해야하나?" "기쁘면 기쁘다고 해. '기쁘다고 해야하나?'는 대체 뭐야?" "훗, 그래, 기뻐." 순순히 응답한 그는 광장을 둘러보았다.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이곳까지 오면서 지나쳤던 사람들의 수를 훨씬 능가하는 수였지만 그렇게 분주하 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모두들 천천히 광장 안을 돌아다니며 축제를 틈타 여러 가지를 즐기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광장이 축제가 벌어지 는 주요 장소였던가. 그가 살펴보기로 분명히 그런 것 같았다. 그때, 때마침 그의 기대에도 부흥하고, 아이의 소망에도 도움을 주는 것 이 그의 눈에 포착되었다. "나 저기 있을게." "응, 어디?" "저기 보이지? 무기상점. 저기서 구경하고 있을 테니까, 볼일보고 와." 아이는 일부러 머리를 쓰지 않아도 알아서 자리를 피해주는 훼이드리온 이 너무나 고마웠다. 그녀는 속으로 외쳤다. '고마워! 내가 사랑해줄게!' 물론 나중이면 다 까먹을 말들이었다. "으응, 알았어. 잘 가∼ 천천히 구경해∼" "응, 너도." 손을 높이 들고 파닥거리며 인사하는 아이에게 훼이드리온도 가볍게 손 을 흔들어주고 무기상점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러다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쟤가 왜 저렇게 열열한 반응을 보내는 거지?' 다시 한번 고개를 돌려보자, 아이는 아직까지도 손을 세차게 흔들고 있 었다. 팔이 아프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로. 그는 어색하게 미소지으며 손을 들어주고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모르겠다.' 그는 간단하게 생각하고 무기상점을 향해 다가갔다. 한편 무기상점 쪽으로 점점 멀어지는 그의 등을 바라보며 기쁨에 차있 던 아이는 완전히 멀어지는 기미가 보이자, 후다닥 손을 내리고 동작을 빨리 했다. 냉큼 시식회 쪽으로 달려가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자, 곧 그녀를 향해 시큼하면서도 달콤한 향을 풍기는 피아드 주가 열렬히 그녀 를 환영했다. '아아! 내가 드디어 술을 마셔보는구나!' 그녀의 가슴속에 환희가 피어올랐다. 몇 년을 억압 속에서 눈물로 날을 지샜던가. 드디어 그 고통의 시간동안 참았었던 울분을 터뜨리며 감동의 날을 맞이할 때가 도래한 것이다. 사실 이렇게 과장되게 말할 가치도 없는 사소한 일이었지만, 그녀에게는 충분히 기쁨에 물결이 파도칠 사건이었다. 술. 그녀에게는 거의 금기와도 같은 존재. 그러나 이제 '여행'이라는 자유의 물결을 타고 그 금기를 깨뜨 려버릴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사회자 역할인 듯한 콧수염 사내가 피아드 주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었 다. "…에, 익히 아시는 사실입니다만, 올해 피아드의 수확은 예년과는 큰 차이를 보이며 풍년을 거두었습니다. 겨울동안 잘 견뎌주었던 피아드 나 무에서 채취한 열매를 건조시켜 잘게 간 다음, 그것을 증류수에 타 그 상 태로 증발시켜 생긴 이슬을 모아놓은 것이 바로 이 피아드 주입니다. 여 러분들은 한잔씩…" 사내 한 명이 컵에 피아드 주를 따라 한잔씩 돌릴 때부터 사회자의 설 명은 더 이상 아이의 귀로 들어오지 못했다. '이, 이게 술이야!' 아이는 자신의 손에 들린 종이컵 속에 들어있는 연한 녹색의 액체를 보 고 감격의 눈물을 흘릴 뻔했다. 시큼한 듯하면서도 달콤한 특유의 향을 뿜는 연한 녹색의 술, 피아드 주. 그녀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컵을 입으로 가져갔다. 마치 성스러운 의 식과 같은 움직임. 작게 출렁이는 피아드 주는 아이의 입안으로 소리 없 이 흘러 들어갔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 아아, 팀인 것입니다. 어김없이 이틀 한편 연재의 규칙을 지키기 위해 이렇게 카마, 라는 괴악한 글의 24편을 들고 찾아온 것입니다. 아악, 비상상태 경보 발동인가요? ...중얼.; GHAST님. 아아, 오래간만의 추천. 너무나도 감사드리구요(ㅠㅠㅠ) 웃음소리..가 참으로 맘에 들었습니다. 아하하...( ---) 에에, 한분 밖에 추천을 안해주시...훌쩍, 주륵...(ㅠㅠㅠ) 전 아직 덜된 자까라서 추천수에 아주 연연해한답니다. 지금 소망이 두가지가 있는데, 한가지가 추연란에 올라가보자! 이거든요.; 아무튼, 뭐, 추천하고픈 맘이 생기지 않는 건 다 미천한 자까의 모자란 실력 때문이겠지요. 그렇기에 더더욱 분투를 하여야겠습니다. 우움! 자자, 분투하자고!! 그럼, 이만!(___) 어둠의 기사 DARK KNIGHT TEAM... P.S 추천 감상 비평 환영합니다! 모두 축복 받으세욧! 번 호 : 11082 / 11091 등록일 : 2000년 08월 08일 21:38 등록자 : 암음기사 조 회 : 15 건 제 목 : [카드 게임 판타지]『 카드 마스터(Card Master) 』#025 카드 게임 판타지(Card Game Fantasy) 카드 마스터(Card Master) 25. "와아, 검 천지네." "어서 오세요." 아이와 잠시 헤어져 무기상점으로 온 훼이드리온은 사방에 걸려있는 온 갖 종류의 검들에게 시선을 빼앗긴 채 연신 감탄을 자아내며 구경을 하 고 있었다. 장인의 솜씨가 깃 든 바스타드 소드에서부터 세밀한 세공 솜 씨가 돋보이는 작은 대거까지. 여러 색깔의 검들이 일제히 빛을 발하는 그 광경에 그는 눈이 두 배로 커져버리고 말았다. "구경하시겠습니까?" 주인은 무기상점에 참으로 잘 어울리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터져나갈 듯한 근육은 왕년에 잘 나가던 용병이라도 되는 것 같았고, 화끈하게 벗 겨진 대머리는 어제 보았던 마법의 숲의 붉은 오거를 생각나게 했다. 검 은 색의 소매 없는 티가 팽팽하게 늘어나도록 부풀어올라있는 엄청난 근 육에 훼이드리온은 남자로서 잠시 낭패감을 맛보았다. 그러나 곧 그런 생 각을 떨쳐버리고 대답했다. "네. 그래도 될까요?" "하하, 물론이죠. 축제니까요." 생긴 거와는 달리 굉장히 사람 좋게 웃어 보이는 주인의 태도에 그는 나름대로 안도함을 느끼며 고개를 검들이 전시되어있는 벽 쪽으로 돌렸 다. 주인은 그의 옆에 서서 그가 움직이는 데로 고개를 같이 돌리며 만반 의 준비를 갖추었다. "저건 무슨 검이죠?" 훼이드리온의 눈을 잡아끄는 검이 하나 있었다. 광택이 나는 칠흑 같이 검은 색의 검집과 손잡이. 그리고 손잡이 끝에 박혀있는 하얀빛의 보석 같은 돌이 이질감을 더하며, 묘하게 검이 가진 분위기를 증폭시키고 있었 다. 주인이 반가운 질문이라는 듯이 웃으며 대답했다. "오오, 안목이 좋으시군요. 저건 명검에 속하는 검으로, 순위를 따진다면 아마도 10위 안에 들어갈 아주 질 좋은 검입니다. 이름은 '디클레이드'이 고, 이름은 잘 모르겠지만 카즈캐스커의 어느 유명한 기사가 쓴 검이라더 군요. 보시겠습니까?" "그래도 될까요?" "잠시만요." 훼이드리온은 손댈 수도 없는 높은 곳에 있는 그 검을 향해 손을 든 주 인은 아주 쉽게 그 검을 벽에서 떼어 내렸다. 주인의 팔 근육에 힘이 들 어가는 모습을 보자, 괜히 긴장하고만 훼이드리온은 주인이 검을 내려 땅 에 쿵하고 내려놓자 흠칫 놀라고 말았다. "왜 그러시죠?" "아, 아뇨." 주인은 그의 반응에 그냥 훗 하고 신경을 꺼버리고 검 손잡이를 잡아 땅에 세워놓은 채 다시 설명하기 시작했다. "디클레이드는 투핸디드 소드로, 그 중에서도 굉장한 무게를 자랑하는 검입니다. 사실 저도 이렇게 들 수만 있지 휘두르지는 못해요. 흔히 하는 말로 이 검이라면 드래곤이라도 잡을 수 있을 거라고 하더군요. 뭐, 지금 세상에 드래곤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으니 확인할 수는 없지만요. 들어 보실래요?" "아, 아니요. 괜찮아요." 이 엄청난 근육의 남자도 드는 것밖에 못하는 것을 그가 어떻게 들 수 있겠는가.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도리질치는 훼이드리온에게 주인은 피 식 하고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디클레이드를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응차."하는 기합과 함께 벽으로 돌아간 디클레이드는 조금 전과 같이 조 용하게 벽에 안주했다. 훼이드리온은 곧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 무기상점은 큰 편은 아 니었지만, 볼만한 검은 꽤 많이 있었다. 명검 중에서 유일한 대거라고 하 는 '광'으로 주인이 약간의 시범을 보이자 감탄을 금치 못했고, 명검에 들 뻔했지만 세공의 문제점으로 인해 안타깝게 낙제 당한 롱 소드 '카키드' 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가슴 깊이 안타까움을 느끼기도 했다. 그렇게 온갖 종류의 검들에게 시선을 빼앗긴 채 열심히 눈알을 굴리고 있는데, 주인이 문득 훼이드리온에게 물어왔다. 주인의 시선은 훼이드리 온의 왼쪽 허리로 가있었다. "호오, 아름다운 검이로군요." "네? 아, 칼이요?" "그 검의 이름이 칼입니까?" "네. 하하." 훼이드리온은 붉은 색의 디자인이 어느 때보다 강렬해 보이는 칼을 내 려다보며 왠지 모를 흐뭇함을 느꼈다. '역시 그래도 칼이 최고야.' 마스트소드라고 알려져 있는 최고의 명검이 바로 이 칼이다. 500년 전, 검의 현자 샤렌 하르트가 썼다는 전설의 검. 갑자기 샤렌 하르트의 모습 이 머리 속에 떠올라 괜히 콧잔등이 시큰했다. 잠깐의 만남이었지만 그의 붉은 이미지는 너무나도 강렬했다. 감상에 빠져 조금 슬픈 마음이 든 그의 귀로 주인의 굵직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그는 정신이 번쩍 들면서 주인에게 되물었다. "네?" "잠시 볼 수 있을까 해서요. 그 칼이라는 검을." 훼이드리온은 잠시 칼을 내려다보다가 이내 허리춤에 끌러 손에 들었다. 주인에게 칼을 내밀자 주인은 "오오?"라는 소리를 내며 반갑게 칼을 받 아들었다. "아, 감사합니다. 보통 검사 분들은 자신의 검을 잘 보여주지 않는데, 당 신은 다르군요." "…그, 그런 건가요?" "뭐, 사람마다 다르죠. 하지만 대부분의 검사들은 쉽게 자신의 검을 내 주지 않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특히, 이런 좋은 검을 가지고 있는 분들 은 더 심하죠." 주인은 빙긋이 웃으며 검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 훼이드리온은 나름대로 자신의 정신 상태에 대해 반성을 하기 시작했다. '검사들은 자신의 검을 잘 내주지 않는다. 아아, 맞는 말이야. 너무 나태 해졌는걸.' 정신무장을 새로이 해야겠다고 다짐할 무렵, 주인이 믿을 수 없다는 감 탄을 터뜨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아, 이럴 수가." "…에, 왜 그러시죠?" "저기 말입니다. 이 검을 어디서 얻으셨는지 알 수 있을까요?" 주인의 물음에 훼이드리온은 조금 난처해져버렸다. 그런 물음의 대답은 미리 준비해놓지 않은 것이다. "검의 현자가 줬는데요."라고도 대답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는 그냥 생각나는 대로 대답해버렸다. "스승님께서 주신 건데, 왜 그러시죠?" 그렇게 말하고 나니, 제법 괜찮은 대답이었다고 생각되어 기분이 좋아졌 다. 주인이 얼굴에 나타난 놀라움을 두 배는 진하게 변화시키며 대답했 다. "세상에, 무기상점을 운영해온 20년 동안 이런 명검을 정말 처음 봅니 다. 어떤 장인이 만들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이건 정말 여간내기가 아닌 데요? 하얀 검날은 정말 바위라도, 아니 철이라도 자를 수 있을 만큼 날 카롭고 평범한 철인데도 불구하고 강도는 다이아몬드에 버금갈 것 같습 니다. 물론 정확하게 조사를 해봐야 되겠지만요. 어쨌든 정말 굉장한 검 입니다. 내 생애 이런 명검을 볼 줄이야. 하하." '마스트소드니까요.' 그렇지만 차마 대답할 수는 없어서 그냥 따라서 웃어버렸다. 주인은 보 여줘서 감사했다며 칼을 돌려주며 밝게 웃었다. 훼이드리온도 따라서 히 죽거렸고, 다시 그전처럼 검에 대해서 묻고 대답하는 문답이 한동안 이어 졌다.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흘러서 훼이드리온이 무기상점 안에 있는 모든 검에 대해서 질문을 던져 더 이상 물어볼 것도 없을 정도가 되었을 때, 주인이 이마에 땀을 닦으며 밖을 내다보았다. 훼이드리온은 단검을 만지 작거리며 이리저리 살피고 있는 중이었다. 밖을 향해 시선을 던지고 있던 주인이 문득 중얼거렸다. "…조금 시끄럽네." "네?" 훼이드리온이 반문하자, 주인이 대머리를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훔치며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하, 아닙니다. 그저, 밖이 시끄러워서." "밖이요?" "시식회 하는데 문제가 생겼나봅니다. 조금 소란스러운 걸요?" "흐음, 그래요?" 그는 천천히 시식회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또 어떤 사람이 술을 마시고 난동을 피우는 건지, 꽤나 웅성거리고 있었다. 뭔가 여인의 비명 소리 같 은 것이 들리기도 하고, 남자들의 외침도 들리는 거 같고, 아무튼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은 아니었다. "훗." 훼이드리온은 가볍게 웃어버리고 다시 단검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때, 머릿속을 스치는 예리한 한줄기 빛. '서, 설마?' 연이어 머리 속에 떠오르는 아이의 열렬한 인사. 그때 느꼈었던 그 이상 한 불안한 느낌. 그것이 맞아 떨어질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훼이드리온은 밖으로 내달렸다. 뒤에서 들려오는 주인의 당황한 외침에 도 아랑곳하지 않고 무작정 시식회 쪽으로 달린 것이다. 빠른 속도로 시 식회 안으로 뛰어든 그가 사람들 사이를 파고 들어가자, 곧 그의 눈에 굉 장하고 황당 그 자체인 현장이 목격되었다. "하암… 술, 술 더 가져와! 냠, 쩝." 양 볼이 벌겋게 상기된 채, 한 손에는 초록색의 병 하나를 쥐어들고 술 을 엎지르기라도 했는지 가슴 가득히 젖은 흔적이 보이는 것이, 아무래도 꽤나 오래 이 난리를 피운 것이 분명했다. 훼이드리온은 완전 질린 듯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내려다보다가, 술에 취해 술 주정을 부리고 있는 그 사람에게 달려들었다. "아이!" 흐릿한 시선 사이로 왠지 낯익은 얼굴이 보이자, 아이가 "이헤헤헤, 딸 꾹!"이라는 상당히 이상한 소리를 내보이고 웃으며 소리쳤다. "와아! 팀이다아! 웬일이야, 팀? 한잔할래애……?" 혀가 꼬이지는 않았는디 대체적으로 발음은 정확했다. 그러나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마셨는지, 주위 사람들 의 상황 설명이 필요했다. 훼이드리온이 계속 입으로 술병을 가져가는 아 이의 손을 저지하며 옆에서 혀를 차고 있는 남자에게 물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죠?" 그 남자가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대답했다. "맛있다면서 계속 한잔만 더 달라잖아. 우리도 웬 이쁘장한 소녀가 주는 대로 덥석 술도 잘 마셔서, 신기해서 계속 줬지. 그러다가… 결국 이렇게 되어버린 거지, 뭐." 훼이드리온은 황당했다. 그런 시답잖은 이유로 술을 줬단 말인가. "그렇다고 술을 계속 주면 어쩌자는 거예요!" "어허! 잘 마시니까 준 거지!" "이곳이 시식회지, 술집이에요! 젠장!" 정말 오랜만에 욕설을 내뱉은 훼이드리온이 터져 나오는 분노를 참지 못해서 아이를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넌 정말 어쩌자고 술을 마신 거야! 거기다 이렇게 되기 전에 자제를 했 어야지!" 우렁찬 그의 외침이 광장을 울렸고, 주위에 있는 사람들도 인상을 찌푸 리며 뒤로 물러섰다. 왠지 모르게 저 소년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옆으로 다가가기에 거북스러울 정도였다. 씩씩대는 훼이드리온. 정말 화가 많이 났는지 잔뜩 구겨진 인상은 아직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내심 아이에게 소리를 질렀다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렸다. 아무리 술을 많이 마셨다고 하더라도, 여린 소녀이 며 또 동행이 아닌가. 조금 점수가 깎였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금식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는 기분이 좋기만 했다. "이헤헤헤, 팀, 화났네? 으헤, 딸꾹! 화 푸러어어어∼ 우앙!" 술주정조차 애교 넘치게 하는 아이. 훼이드리온은 그만 헛웃음이 나버렸 다. 분명히 아직 화는 풀리지 않았지만, 어째 더 이상 화를 내고 싶지는 않았다. 아이의 풀린 모습. 술로 인해 상기된 얼굴도 꽤나 볼만하다는 장 난스런 생각에 그는 작게 키득거리고 그녀를 달래기 시작했다. "휴우, 자, 여관으로 돌아가자. 술병도 내려놓고, 길바닥에 주저앉아서 뭘 하는 거야." "우웅∼ 티이이임∼ 에헤헤!" 진한 술 냄새가 풍겨오면서 그녀가 괜히 달라붙었다. 사람들이 그 모습 을 보면서 수군거리기 시작하자("어머어머, 저것 봐요!", "민망스러워 라."), 본의 아니게 당황하면서 그녀의 어깨를 밀어냈다. 그러나 무슨 고 집인지 아이는 계속 그에게 달라붙어서 볼을 부비부비되는 것이 아닌가. '허어어, 얘, 얘가 왜 이러는 거야?' 아이는 술에 의해 완전히 사고가 정지되어, 자신이 무슨 행동을 하는지 알 리가 없었다. 한마디로 지금 하는 짓을 그냥 본능에서 나온 움직임인 것이다. "우하하, 나 어버줘, 티임∼딸꾹! 히히." "…아하하. 나 참." 너무나 황당해서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사람들도 그런 아이의 말이 귀엽다는 듯이 자기들끼리 쿡쿡 웃으며 소란스럽게 수다를 떨었고, 훼이드리온은 뒷머리를 긁다가 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자고로 술 취한 사람의 고집은 왠만하면 말리지 못하는 것이다. "자, 업혀." 두 번째 업어보는 것이라 그렇게 어색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뒤로 돌아 서 등을 내밀자, 아이가 "우와앙!"하며 잡아먹을 듯이 그의 등을 덥쳤다. 갑작스런 힘에 잠시 기우뚱해버린 그였지만, 한 아저씨가 넘어가는 것을 막아줬기에 제대로 일어날 수 있었다. "아, 감사해요." "괜찮아. 잘 데리고 가기나 해." "헤, 네." 훼이드리온은 모여있는 사람들에게 소란 피운 것을 용서해달라는 의미 로 꾸벅꾸벅 인사를 했고, 사람들도 저마다 웃고 떠들며 둘을 배웅했다. 아무래도 이 일은 이번 축제가 끝나기까지 두고두고 사람들의 입에 오를 것 같았다. 아니, 분명한 일이다. "휴우. 대체 몇 시야." 꽤나 소란을 피워서 많은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약간 공복을 느끼며 아이를 업은 채 터덜터덜 발길을 옮기는 훼이드리온. 아이는 어느새 그의 등에 얼굴을 묻고 잠들어있었다. 새근새근 들려오는 그녀의 옅은 숨소리에 훼이드리온은 훗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남은 자기 때문에 이렇게 고생이던, 속 편하게 잠에 빠져있다니. 뭐, 속 에 있는 것을 식도를 통하여 분출시키지 않아 준 것은 감사해야할 일인 가.' 이미 일은 저질러버린 것. 내일 아침 일어나서 크게 고생을 한다면 앞으 로 술 가까이에도 가지 않겠지, 하는 생각에 그래도 안심하게 되는 그였 다(사실 그도 똑같은 일을 겪어봐서, 잘 알고 있다). "와아! 대단하다! 마스터 카드로 이런 것도 할 수 있어요?" 어디선가 들려오는 젊은 소년의 목소리에 훼이드리온의 귀가 번쩍 트였 다. 그 소년의 말속에 들어있는 아주 익숙한 이름. 순식간에 아이의 일은 그의 마음속에서 사라져버리고, 모든 신경이 그쪽으로 쏠리게 됐다. 그는 고개를 움직여 주위를 둘러보았다. 남자가 여자를 업고 가서 그런 지, 방금 전까지도 느껴지던 자신을 향한 시선이 고개를 돌림에 따라 하 나씩 사라져갔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마스터 카드? 게임 할 만한 곳은 없는데?'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마스터 카드 게임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찾을 수가 없었다. 혹시 건물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인지도 몰랐지만, 방금 들 려온 그 목소리로 추측해본 결과로는 이것을 길가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그때, 다시 한번 그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대단하다! 다 맞추고 있어!" '맞춰? 맞추다니?' 뒤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에 비치는 것. 그것은 10살 남짓한 소년소 녀가 손을 꼭 부여잡고 한 여자에게 인사를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어라?' "감사합니다!" 둘은 서로를 향해 아주 애정 어린 미소를 웃어 보이고는 냉큼 어딘가로 사라졌다. 그 모습을 길옆에 작은 탁상을 놓고 앉아 있던 여자가 끝까지 바라보다가 생긋 웃으며 다시 눈길을 밑으로 내렸다. 그녀의 손이 탁상 위의 카드를 정리했다. "마스터 카드?"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저 여자가 가지고 있는 것. 그것은 마스터 카드였 다. 그럼… 저 여자는 마스터 카드로 점을 보는 것이란 말인가? 훼이드리 온은 생각지도 못한 일에 잠시 황당해져버렸다. 검은 로브로 전신을 감싼 채로 보이는 거라고는 하얀 손과 얼굴, 그리고 목 밖에 없었다. 눈에 띄는 것은 진한 보랏빛의 긴 머리카락이었다. 등까 지 내려오는, 아이보다는 조금 짧은 머리카락이었지만, 색으로 치자면 정 말 눈에 띄었다. 점을 보는 직업 때문인지 몰라도 그녀의 전신에서 느껴 지는 왠지 신비로운 분위기도 예사롭지 않았다. 훼이드리온은 침을 꿀꺽 삼켜보고 점점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아, 이제야 오시는군요." "……?" 대뜸 그녀가 훼이드리온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방긋 웃었다. 마치 올 것 을 예사이라도 했다는 듯한 그녀의 말. 그의 표정이 기묘하게 변했다. "그런 표정 짓지 말아요. 직업상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거예요." "…네." "일단 거기 앉으세요." 작은 의자. 탁상 앞에 높인 의자 두 개를 내려다보다가, 훼이드리온은 난처한 표정이 되었다. 자신의 등에는 고이 잡고 있는 아이가 업혀있는 것이다. 보랏빛 머리칼의 그녀도 아이를 보고 생긋 웃어보이더니 입을 열 었다. "할 수 없네요. 그냥 서있으세요." 그래서 조금은 엉성한 자세로 그녀와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훼이드리온 은 그녀를 내려다보면서 물었다. "마스터 카드로 점을 치는 건가요?" "네. 이 신비한 카드는 가끔 특별한 인간에게 예지의 힘을 부여하기도 하죠." 생긋 웃어 보이는 그녀. 왠지 모르게 그 신비한 분위기가 더욱 증폭되는 것 같았다. 잘 살펴보니 눈동자 또한 연보랏빛을 띄고 있었다. 그래서 그 런지 그녀는 전체적으로 조금 성숙한 티가 났다. 물론 나이도 이미 20대 를 넘긴 듯이 보였고 말이다. "훗, 태자님께서는 남의 얼굴을 관찰하는 것을 좋아하시나 보군요." "!" 훼이드리온의 얼굴에 경악이 드러났다. 서둘러 누군가가 들은 사람이 없 는 둘러보는 그에게 그녀가 장난스럽게 훗 웃고는 말했다.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았어요. 그리고 저만 아는 거니까, 안심하도록 해 요." "어떻게 알았죠?" 그의 얼굴에 경계의 빛이 보였다. 갑자기 나타나서 자신의 신분을 폭로 하는 이 여자를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저 웃음만 띄 우며 대답을 피했다. 그 대신 마스터 카드를 하나씩 탁상 위에 내려다놓 았다. '뭘 하는 거지……?' 그녀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태자님께서는 마스터 카드에 관심이 많으시죠." "…네, 그런데요." "어쩌면 이것도 운명일지도 모르겠군요. 내가 여기서 태자님을 만난 것 이 말이에요." 훼이드리온은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운명이라니. 그 러나 그녀는 조용히 미소만을 지으며 그 작업을 완성할 뿐이었다. 탁상에 10개의 카드가 차례대로 놓이자,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태자님을 위해 점을 쳐드리겠어요. 그것이 지금 여기서 제가 할 일이에 요." "점이요?" "네. 돈은 받지 않아요. 이건 제가 마땅히 해드려야 할 일이니까요." 그리고 그녀는 눈동자를 지우며 생긋 웃어 보였다. 뭐라고 항변할 수 없 는 힘이 담긴 그 신비한 웃음. 훼이드리온은 멋도 모르고 고개를 끄덕였 다. 그녀는 보랏빛의 머리카락을 잠시 다듬더니 카드를 하나씩 뒤집기 시 작했다. 모두 다 특별할 것 없는, 훼이드리온에게 익숙한 카드들이었다. '붉은 전사 카드. 프리스트 카드. 에립 드로우스 카드. 물병 카드. 반전 카드……' 그녀는 10개의 카드를 찬찬히 훑어보더니, 조금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그렇지만 곧 입을 열어 카드가 말하는 대로 훼이드리온에게 알리기 시작 했다. "간단하게 말씀드릴게요. 가까운 날에 태자님의 인생에 큰 전환점이 생 길 거예요. 어떤 형태인지는 잘 알 수 없지만, 좋은 쪽인 건 확실하네요. 그렇지만 작은 시련 정도는 각오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뭐, 당연한 거 아니겠어요? 일단 이 카드가 나타내는 건 그 정도네요. 정확한 건 더 깊 이 있게 점을 쳐야겠지만 마스터 카드로 치는 점은 거기까지가 고작이거 든요." 말을 마치고 그녀는 생긋 웃었다. 훼이드리온은 그녀의 말을 잠시 곱씹 어보며 하나하나 되새겨보았다. 점을 믿는 쪽은 아니었지만, 무시하는 것 도 별로 좋은 태도는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이건 마스터 카드로 친 점이다. 신경이 안 갈래도 안 갈 수가 없는 메티인 것이다. '전환점이라…….' 정확히 뭘 뜻하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마음 속 깊은 곳에 그 단 어를 저장시켜두었다. 막상 그 날이 오면 오늘을 떠올리며 감탄을 할지 도 모르니까 말이다. "아, 그리고." 뭔가 잊어버렸는지 그녀가 고개를 들더니 뭔가 장난스런 눈초리를 그에 게 보냈다. 괜히 식은땀을 흘려보는 훼이드리온. 그녀는 씨익 웃었다. "동행을 소중히 하세요." "…네?" "그냥 그렇게 알아두세요. 여행은 동행이 중요하잖아요?" 비단 그것만을 뜻하는 것도 아닌 것 같았지만, 더 이상의 말은 하지 않 고 그녀는 다시 카드를 회수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에 차곡차곡 쌓이는 마스터 카드들을 보면서 훼이드리온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점을 치는 사람들은 원래 다 그런 건지, 도저히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등으로 느껴지는 묘한 술 냄새와 온기를 잠시 자각해보았다. '동행 을 소중히 하세요.' 알 수 없다는 듯이 그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탁상 위를 모두 정리한 그녀가 고개를 들어서 훼이드리온에게 인사했다. "반가웠어요, 잘생긴 태자님." "아… 감사합니다." "뭘요. 당연히 해야하는 일인 걸요. 직업이기도 하고요." 분명히 아이를 업고 있지만 않았다면 뒷머리를 긁었을 것이다. 그녀는 미소를 떠올리며 목례로 다시 한번 인사했다. "안녕히 가세요. 심심하면 놀러오시고요." "하하… 네, 그럴 게요. 그럼." 장난기가 다분한 그녀의 인사였지만, 훼이드리온은 그냥 인사만 꾸벅 하 고 그녀의 앞을 벗어났다. 그녀에게서 들은 이야기들이 조금씩 그의 머리 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전환점이라느니, 시련이라느니, 동행을 소 중히 하라느니. 자신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고, 결코 이해되지 않을 말들 을 들어서 그런지 조금 머리가 아파 오기도 했다. '어서 여관으로나 가자.' 그는 여관으로 향하는 발걸음에 힘을 실었다. 아이는 잠시간의 흔들림에 그의 등을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 태자가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고 있던 보랏빛 머리카락의 그녀는 갑자기 허공으로 고개를 들더니, 아무도 없는 그 허공에다 말을 걸었다. "나오세요, 이제. 전 누군가가 절 지켜보는 걸 싫어하거든요." 분명히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있었다. 그녀는 다시 고개를 내 려 앞을 바라보았다. 길 반대쪽, 건물들이 만들어낸 그늘 사이에 누군가 가 서있었다. 그녀가 다시 말했다. "저도 나름대로 노력하는 거예요." 그녀의 웃음은 결코 지워지지 않는, 마치 석고상의 얼굴에 띄워져있는 미소와도 같았다. 어두운 그늘 사이에 서있던 그가 말했다. "재밌다." 그녀가 반문했다. "뭐가요?" 전혀 들리지 않을 작은 음성이었지만, 그는 용케도 알아듣고 대화를 성 립시켰다. "마법사 길드 최고원로 중에 한 명인 유리, 당신이 점을 쳐준다니. 그게 재밌다." 소년의 음성이었다. 그러나 아무런 감정도 묻어나지 않는 말투와 어둠 속에 완벽하게 녹아든 그 은신술이 예사롭지 않은 소년임을 보여주고 있 었다. 그녀가 말했다. "우리로서도 기대하고 있으니까요. 과연 필로윈의 말이 맞는지 말이에 요. 당신은 아닌가요?" "그렇다." "그럼 잘해주세요. 명성에 흠집이 가면 안되겠죠?" "흠." 그는 묘한 음성을 남긴 채 그곳에서 사라졌다. 세라는 보랏빛 머리카락 을 로브 뒤로 넘기고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녀는 금발 머리에 순한 미소를 짓는 태자를 떠올렸다. '당신도 참 불쌍해요.' 항상 떠있는 미소였지만, 이번에는 왠지 의미심장해 보였다. 그녀는 생 긋 웃어서 약간이나마 떠오른 그 감정을 완전히 지워버렸다. 분명히 훼이드리온이 모르는 일은 그렇게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 캬아. 오늘도 변함없이 카마를 들고 나타난 팀입니다.(___) 요즘 더운 날씨에 잘 살고 계시는지. 자까야 옆에 선풍기 켜놓고 빈둥 빈둥 놀고 있으니, 참으로 좋을씨고~입죠.; 아무튼 이 더운 여름. 건강 해치지 마시고 모두 달 잘 지내셨으면 합니다. 꺄꺄~ 추천 러시인가요?(>.<) 푸우다앙님. 에에, 재추천인가요? 중얼. 아무튼 감사합니다(___) 더 열심히 쓸게요(>.<) 멋진용사님. 꺄꺄, 고정독자분 중 한명이시죠? 감사합니다아~ 더욱 더 분투하겠습니다(---!!) 라이츄01님. 혹시 동생이 피카츄? ...농담이었구요. 추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ZPTBLF님. 허허, 제가 아는 분이시네요. 감사(>.<) LJH8273님. 82년 7월 3일 출생이 아닐까, 하고 조심스럽게 추측해봅니다만. 착각이었다면 죄송합니다(___). 추천해주셔서 감사하구요. 더 분투하도록 하죠(>.<) 아, 그리고 메모 보내 주신 KIM2199님. 감상도 써주셨죠? 감사합니다(___) 이상으로 추천 감사를 마치겠습니다. 헥헥, 간만에 길었다.; 이상으로 추천수가 16개...인가요? 헤에, 4개 남았습니다. 자자. 독바님들! 더욱 분투하시길! 우워어어어어! <-- 폭주 모드.; 그러고 보니 벌써 25편이네요. 하하. 굉장하죠? 연재 시작한지 두달인가. 그리 성실한 연재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카마는 완결을 향해서 더욱 열심히 뛰어갑니다! 아자자자잣!! 그럼, 꾸벅(___) 어둠의 기사 DARK KNIGHT TEAM... P.S 추천 감상 비평 시시때때로 받습니다. 우오오오!! P.S 2 단편 올렸어요. '세스 - 上' 단편란에 있고요, 하도 곧 올라갑니다. P.S 3 헉. 잡담이 너무 길었다.; 번 호 : 11160 / 11182 등록일 : 2000년 08월 10일 19:05 등록자 : 암음기사 조 회 : 69 건 제 목 : [카드 게임 판타지]『 카드 마스터(Card Master) 』#026 카드 게임 판타지(Card Game Fantasy) 카드 마스터(Card Master) 26. "으음……." 어제와 같은 햇살이 창문으로 쏘아져 들어오는 훼이드리온과 아이의 연 관 방. 훼이드리온이 넋을 잃고 쳐다보게 만들었던 그 모습 그대로 잠에 빠져있던 아이가 눈을 비비며 정신을 차렸다. "…우웅… 머리 아파……." 누군가 머리 속에서 경종을 울리는 듯한 느낌이 그녀의 머리를 강타했 다. 그래서 그녀는 일어나려다 말고 베개를 붙잡고 침대 위에서 뒹굴기 시작했다. "으으으으윽!"이라는 괴상한 비명을 지르며 말이다. 그리고 얼마 후, 그렇게 계속 움직였다가는 오히려 고통만 더할 뿐이라 는 것을 간신히 깨달은 그녀는 베개를 지그시 옆으로 밀어놓고 천천히 상체를 들었다. 부스스 그 자체인 그녀의 모습에 웃음이라도 들려올 줄 알았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자 그녀는 감고 있던 눈을 살짝 떠보았다. "…어?" 한 마디 하자마자 머리가 또 울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지끈거리는 머리 를 부여잡고 호흡을 깊게 들이마시다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조금은 진정 이 된 것도 같았다. '…그러고 보니 내가 언제 여기로 온 거지?' 분명히 기억의 마지막은 광장에서 시식회에 참여한 그 일이 장식하고 있었다. 정말 맘에 드는 맛을 가진 피아드 주에 흠뻑 빠져 주는 대로 받 아 마셨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침대 위에 누워있는 거 아닌가. 그녀는 바 닥에 발을 디딘 채 이마에 손을 괴어 지탱한 후 골똘히 생각해보았다. 앞 으로 흘러내려 시야를 가리는 머리카락이 괜히 귀찮아졌지만, 치울 기력 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니까, 완전 정신을 잃었다, 이건가?' 총명한 그녀의 머리로 짐작해보건대, 그렇게 술을 퍼마시다가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필름이 끊긴' 상태로 돌입하고 나서 누군가에 의해 이리로 옮겨진 것이 분명했다. 그럼 그 누군가는 누구일까. '팀이겠지, 뭐.' 아닐 리가 없었다. 그 말고는 누가 이곳을 알고 있을까. 그러고 보니, 술 에 취한 다음에 대체 무슨 일을 벌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완전히 만취한 상태에서 그에게 엄청나게 이상한 행동을 했다면?' 그녀의 얼굴을 그 즉시 붉게 타오르고 말았다. '으아악! 웬 창피야, 그게!' 또 다시 머리는 자신의 임무를 망각하게 한 그녀에게 복수라도 하듯이 크나큰 고통을 선사했고, 그녀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쥔 채 한가지 결 심을 하게 됐다. '내가 술을 또 마시면, 성을 간다, 갈아. 으윽.' 인생의 큰 진리를 터득한 그녀를 향해 마스트도 따스한 눈길을 보내주 고 있었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되자, 슬슬 다음 궁금증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햇살을 통과하여 시선을 던진 반대편 침대. 그곳의 주인은 어디로 간 것일까. 비 어있는 침대가 왠지 껄끄러웠다. 혹시 어떤 추태라도 부린 건 아닐까, 하 는 걱정에 그녀는 슬쩍 그의 행적이 궁금해졌다. '설마 그대로 떠나버린 건 아니겠지?' 그럴 리는 없었지만 지은 죄가 찔리는 까닭에 그런 걱정까지 조심스럽 게 해보는 그녀였다. 다행히도 서랍장 옆에 놓인 훼이드리온의 가방이 그 녀의 눈에 띄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만들었다. 일단 시원하게 머리라도 감아보자는 생각에 비적비적 침대에서 일어났 다. 참으로 나른한 움직임으로 문을 나선 그녀는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들 려오는 머리 속의 비명에도 굴하지 않고 열쇠로 단단히 문을 잠근 다음, 세면실로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우우… 아파.' 견딜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충분히 괴로울 만큼 고통을 선사하는 만취의 후유증으로 인해 그녀의 찌푸린 인상은 펴질 줄을 몰랐고, 그녀는 내심 자신의 어리석음을 통탄했다. 그리고 아까의 다짐을 한번 더 확고히 다졌다. 세면실에는 사람도 없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텅 빈 공간만이 그녀를 환영했고, 그녀는 느릿하게 세면대로 걸어가서 세수부터 시작했다. "푸하아……." 시원한 물이 얼굴에 끼얹어지자 조금은 나아지는 것도 같아서 기분이 좋아졌다. 거기다 시원하게 머리도 감고 나오자,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 들어서 상쾌한 기지개도 켤 수 있었다. 머리를 닦던 수건은 대충 세면실 안에 던져버리고 신법을 사용했다. 아 무리 후유증이 심하다고 해도 따르는 신에 대한 믿음까지는 해칠 수 없 기에 신법은 그녀의 의지에 따라 자연스럽게 발동됐다. 신법으로 손의 열을 비정상적으로 증폭시킨 그녀는 손가락으로 벌려서 머리카락을 빗어내려 미처 마르지 않은 수분까지 완벽하게 제거해 뽀송 뽀송한 상태로 만들었다. "아아, 개운해라." 말을 해도 뒤따라서 따라오는 고통의 여파도 크지 않았기에 부담 없이 몸을 움직여 식당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역시 방안에서보다 훨씬 더 몸 이 가벼웠다. 아이가 짐작하는 시간대는 아침 시간이 조금 지난 후였다. 식당으로 내 려와서는 그 생각에 더욱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아주머니의 증언을 토대 로 완벽하게 사실로 굳혀버렸다. "벌써 아침 시간이 지났는데, 이제야 일어난 거유?" "헤헤, 네."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는 듯한 아주머니의 표정에 어제 훼이드리온과 앉 았던 그 테이블에 다시 앉던 그녀의 얼굴에 수줍음이 번져갔다. 그 표정 으로 "아침 좀 주세요."라는 아이의 말에 아주머니는 웃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방으로 향했다. 아주머니의 큰 등을 쳐다보던 아이는 문득 그녀에게 큰 소리로 물었다. "저기, 제 동행은 어디 가셨는지 모르세요?" 확실히 크게 소리를 지르니, 조금 여파가 컸다. 찡그린 그녀가 손으로 이마를 주무르자, 아주머니는 이해한다는 표정을 짓고 답했다. "머리 아플 게 분명하다면서 약 사러 갔어요. 조금 전에 나갔으니, 조금 있어야 들어올 거유. 꿀물 좀 타드릴까?" "그렇게 해주시면 감사하고요. 서비스예요?" 방긋 웃음을 지어 보이는 그녀가 맘에 드는 아주머니는 "당연하쥬!"라며 크게 웃고는 주방에서 꿀물을 만들어 가지고 나와서 그녀에게 내밀었다. "쭈욱 들이켜요." "감사합니다, 아주머니." "뭐, 이 정도야." 아주머니에게는 어린 아들이 하나 있었다. 그녀는 눈앞의 이 소녀가 자 신의 며느리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지만, '내 아들이 조금 만 더 컸으면 소개시켜주는 건데.'라고 생각하면 안타까워할 수밖에 없었 다. 아주머니의 아들은 이제 5살이었다. 꿀꺽꿀꺽. 아이는 단맛의 꿀물을 거침없이 마셔버렸다. "…하아… 시원하다. 여기요." "그랴, 조금만 기다려요. 곧 아침도 내올 테니까." 아이는 웃음을 띄우고 아주머니에게 목례를 했고, 그녀의 인사를 받은 아주머니는 즐겁게 주방으로 사라졌다. 그녀는 식탁 위에 팔꿈치를 대고 손으로 턱을 받친 채 방금 전에 나갔 다는 자신의 동행을 떠올렸다. 자신은 팀이라고 부르는 훼온 레이엔트라 는 이름을 가진 소년. 아니, 15세이고 여행도 하는 것을 보니 분명히 성 인식을 치렀을 것이 분명하기에 소년이라고 부르기에는 무리가 있다. 하 지만 그 모습이 소년이 아니면 뭘까. 그녀는 그의 순수한 미소를 떠올려 보며 생긋 웃었다. '나를 위해서 약을 사러나갔다, 라……. 기특한걸.' 기분이 점점 더 좋아지려는 그녀였다. 그렇게 여러 가지로 기분이 좋은 아이가 아침을 기다리고 있을 때, 문득 여관 문이 스르륵 열렸다. 그녀는 손님인가, 하며 무심결에 뒤를 돌아보 았다가 기겁을 하고 말았다. 갑자기 시끄러운 소리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슬그머니 돌리는 그 손님. 아이를 보자마자 그의 얼굴에 반가움의 빛이 떠올랐다. "오, 여기 계셨을 줄이야. 제가 제대로 찾은 거죠?" 그녀의 비명이 이어졌다. "사, 사르덴!" 그리고 아이는 그 즉시 머리 속으로 밀려드는 거대한 고통의 해일로 인 해 머리를 부여잡고 한참을 끙끙대야했다. 그 사이 사르덴이라고 불린 그 남자는 천천히 그녀가 앉아있는 테이블로 다가와 맞은 편에 털썩 걸터앉 았다. 그는 대체적으로 건장한 중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양어깨 쪽에서부터 내려오는 하얀 선이 돋보이는 남색의 로브를 걸친 모습은 마법사를 떠올 리게 했지만, 딱 벌어진 어깨에 다부지게 단련된 몸이 그의 정체를 헷갈 리게 만들었다. 깔끔하게 다듬어진 턱선과 뚜렷한 이목구비가 굉장히 남 자답게 생겼고, 진한 고동색의 눈동자는 진지한 빛으로 아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르덴, 그가 싱긋 미소를 띄우며 입을 벌렸다. "오랜만이죠? 그동안 별고 없으셨는지요. 아니, 오늘 별고가 있는 것 같 군요." 아이는 찌그러진 표정으로 손으로 한쪽 머리를 지탱한 채 사납게 그를 노려보았다. 다 알면서 찾아온 게 분명하면서도 능청스럽게 미소를 짓고 있는 남자, 사르덴. 그녀는 속으로 온갖 욕설을 그에게 퍼부었지만, 겉으 로는 딱 한 마디만 내뱉었다. "난 안 가." 그는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어딜 가시나요?" "어차피 그거 때문에 온 거잖아!" 아이는 안 그래도 머리도 아파서 미치겠는데 이 남자가 왜 이리 사람 속을 긁어놓는 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어서 속에서 열불이 터졌다. 그의 성격이 원래 그런 건 잘 알고 있지만, 다시 겪어봐도 너무나 열받는 성격 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는 그제야 싱긋 웃어댔다. "지금 돌아가도 늦지 않는데요." "싫어." 그녀는 다시 한번 단호하게 외쳤다. "돌아가지 않아." 어제 무리를 해서 그런지 일어나는 것이 쉽지가 않았다. 그렇지만 항상 그렇듯 신체는 이미 모든 신진대사를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하며 깨어 났고, 정신도 서서히 맑아지는 통에 그는 슬그머니 침대에서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하아암……." 작게 입에서 빠져나오는 하품. 나른해지는 기분을 돋구며 침대에서 내려 와 발을 디디자, 곧 본능적으로 기지개부터 하게 되었다. 몸을 쭉 펴며 늘어지게 기지개를 하고 나자 구석구석에 남아있던 잠의 기운들도 싹 달 아나서 한층 더 개운한 기분이 되었다. 문득 어젯밤부터 옅게 신음 소리를 내던 아이가 걱정되어 훼이드리온은 반대쪽 침대로 다가갔다. 햇살이 만들어낸 창문의 형상을 거쳐서 눈을 돌 리자, 미간에 작은 주름이 잡히긴 했지만 간밤의 상태보다는 훨씬 호전된 채 곤하게 잠에 빠져있는 그녀를 볼 수 있었다. '괜찮은가 보네. 다행이다.' 작은 안도감을 느끼며 빙그레 웃어보고는 이불을 말끔히 정리하여주었 다. 그녀가 작게 뒤척이는 모습을 보며 다시 한번 하품을 했다. '우선 세수부터 하고.' 세면실로 가서 차가운 물에 얼굴을 담갔다. 내친 김에 머리도 물에 축여 마구 흔들어보았다. 어릴 적에 왕성에서 했었던 물장난이 생각나 동심으 로 돌아간 마음으로 즐겁게 웃고는 시원해진 머리를 느끼며 세면실에서 빠져나왔다. 수건으로 닦았지만 완전히 마르지는 않은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밑으로 내려오자, 아침 식사시간인 식당의 분주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밝은 햇살이 비치는 창문 쪽에 테이블 하나가 남는 것이 보였고, 냉큼 그곳으로 달려가 자리를 차지하고 앉자, 곧 아주머니가 다가왔다. 훼이드 리온은 반갑게 인사를 하며 아침을 주문했고, 그녀는 바쁜 와중에도 잊지 않고 주문을 챙겨 주방으로 향했다. 훼이드리온은 물을 한 모금 머금어 입안에서 굴려보다가 꿀꺽 삼켰다. 단체 손님이라도 되는지 세 개의 테이블에서 사람들이 동시에 벌떡 일어 나서 계산을 한 후, 우르르 몰려나갔다. 조금은 신기한 그 광경에 훼이드 리온이 훗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움직이자, 테이블을 정리하기 시작하 는 아주머니가 그에게 물었다. "뭐, 좋은 일 있으슈?" "아니요, 그런 건 아니고요. 그냥 우르르 몰려나가는 게 재미있어서요." 아주머니는 차곡차곡 접시를 하나씩 쌓더니 양손에 동시에 20개 정도의 접시를 들고는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그런 거유? 난 또 뭐라고. 단체손님이거든. 매일 아침 저렇게 몰려와서 같이 밥을 먹고 일하러 간다오." "아, 그렇군요." 친절하게 설명을 마치고 아슬아슬하게 접시를 든 채 주방으로 들어가는 그녀를 보면서 '진정 장인정신은 놀라운 것이야'라는 깊은 깨달음을 얻은 훼이드리온은 혀를 내두르며 다시 한 모금 물을 마셨다. 시원한 느낌이 머리까지 전해져왔다. 곧 아침을 가지고 나온 아주머니가 테이블에 접시를 진열하며 훼이드리 온에게 말했다. "그, 여자 손님께서는 일어나셨수?" "아직 수면 중이에요. 그렇게 마셔댔으니, 쉽게 일어날 리가 없죠." "허허, 고생이겠수. 그나저나 완전 만취 상태였으니, 일어나면 머리가 심 하게 아플 텐데, 약이 필요하지 않겠수?" 훼이드리온이 되물었다. "약이요?" "그래요, 약. 때마침 약방에서 숙취에 좋은 약을 판다고 하던데, 가서 좀 사오시는 게 어떻수?" "음… 약이라." 그는 조금 생각해보는 표정이 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필요할 거 같네요. 약방이 어디죠?" 아주머니는 마지막 접시를 내려놓고는 손을 들어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에, 나가셔서 왼쪽으로 쭈욱 가시면 광장이 나오죠? 거기서 왼쪽 첫 번 째 길로 다시 들어가시다 보면 왼쪽에 기와집이 하나 보일 거요. 거기가 약방이라우." "네, 고마워요, 아주머니." "허, 천만에." 훼이드리온은 그녀가 가르쳐준 길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식사를 하는 동안 내내 그것을 떠올렸고, 그러던 중 어느새 아침을 다 먹어버리고 말 았다. 평소 속도보다 두 배는 빨리 아침을 해치운 그는 아주머니께 꾸벅 인사를 해 보이고 여관을 나섰다. '그러고 보니, 아주머니는 참 헷갈리는 말투를 사용하신단 말야.' 여관을 운영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대해서 그런지 대체 종잡을 수 없는 그녀의 말투를 생각하면서, 그는 그녀가 일러준 대로 움직였다. 광장 쪽으로 열심히 걸어가면서 아침부터 움직이는 사람들의 활기를 느 낄 수 있었고, 광장에 도착해서는 분수대 앞에 널브러진 술 취한 이들에 게 혐오감을 느낄 수 있었다. 거기다 덤으로 아침부터 보는 사람이 민망 하게 놀고 있는 즐거운 연인들을 보면서 속으로 부러움을 느끼기도 했다. 하여튼 그렇게 광장으로 도착해서 왼쪽을 보자, 세 개 정도의 길이 나있 었다. 저 앞에는 어제 들렀던 무기상점의 문도 열리고 있었다. '인사나 하 고 갈까?' 하다가 그냥 고개를 돌려 가야할 길이나 찾아보았다. 지금은 아이에게 줄 약이 중요했다. 첫 번째 길로 들어서서 다시 부지런히 걸었다. 머리 위에서 비치는 따스 한 마스트의 눈길과 시원하게 온몸을 쓸고 지나가는 기분 좋은 위넨스의 손길. 여행길에는 이것들만 있어도 즐겁다는 말을 떠올리면서 그 말에 속 으로 맞장구를 쳤다. '옳은 말이야.' 계속 왼쪽을 주시하며 걸어가고 있던 그의 눈에 붉은 색의 벽돌이 쌓인 기와집이 보였다. '저 집일까?'라는 의문이 들기도 전에 그의 눈에 들어본 검은 글씨의 간판. '만병통치 약방'. 정말 고전적인 향기가 풀풀 풍기는 그 간판에 훼이드리온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주체하지 못하며 다가갔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런 그를 이상하게 쳐다보았지만, 금방 흥미를 잊고 제 갈 길을 가기 시작했다. 그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계세요?" "어머?" 그의 눈에 낯익은 색깔의 긴 머리카락을 가진 여인이 들어왔다. 보랏빛 의 신비로운 머리색깔. 자신이 아는 사람 중에 저런 머리칼을 가진 인물 은 한 명밖에 없었다. 그녀가 반갑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여기서 뵐 줄은 몰랐네요." 어제 길가에서 마스터 카드로 점을 쳐주던 점쟁이, 그녀였다. 훼이드리 온도 미소를 띄우고 인사했다. "여긴 어쩐 일로 오신 거예요?" 그녀가 묻자, 훼이드리온은 대답보다는 의문부터 생각났다. "혹시 여기가 집?" 그의 되물음에 그녀가 생긋 웃더니 입을 가리고 쿡쿡 댔다. 그녀가 곧 대답했다. "설마요. 전 그냥 떠돌이인데 집이 어딨겠어요. 그냥 여기는 자주 들리 는 약방일 뿐이에요. 할아버지, 손님이에요!" 그녀가 익숙하게 안에다 데고 크게 소리치자, 곧 하얀 백발을 기른 노인 이 문을 열고 걸어나왔다. 구부정하게 구부러진 그 노인의 허리가 세월의 연륜을 흠뻑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노인이 훼이드리온을 쳐다보더니, 주름진 입술을 달싹거리며 말했다. "뭘 원하나." 꽉 막힌, 조금은 듣기 거북한 노인의 목소리였지만 훼이드리온은 예의를 차리고 말했다. "숙취에 좋은 약이 있다고 해서 왔는데요." "음… 기다려보게나." 노인은 느릿하게 문안으로 걸어 들어가더니 곧 작은 봉지를 손에 들고 나왔다. 군데군데 하얀 수염이 돋아있는 턱을 한번 쓰다듬더니 봉지를 훼 이드리온에게 내밀었다. 하지만 시선은 멀뚱히 서있는 보랏빛 머리칼의 그녀에게로 가있었다. "자네, 아는 사이인가?" "네? 이 분과요?" 훼이드리온은 그녀를 한번 쳐다보면서 어떻게 대답해야할지 난감해졌다. 분명히 얼굴은 익혔지만, 그렇다고 아는 사이라고 정확하게 말할 수 있는 사이는 못되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가 대답을 생각하고 있던 중에 그녀가 웃으며 대뜸 대답했다. "네, 잘 알아요." "그래? 그럼, 돈은 받지 않겠네. 유리가 아는 사이라는데, 받을 수는 없 지." "네에?" 그가 황급히 외쳤다. "그래도 값을 치르지 않을 수는……." "됐어. 괜찮네." 노인은 훼이드리온의 말허리를 자르고 들어가 그가 할말이 없게 만들었 다. 훼이드리온은 조금 난처한 표정으로 그녀, 유리를 쳐다보았고, 그녀는 그저 생긋 웃을 따름이었다. 할 수 없이 그는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했 다. "그럼… 감사히 받겠어요."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하는 그. 노인은 그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 다. 훼이드리온이 약방 밖으로 걸어나오자, 유리도 따라서 밖으로 나왔다. 그는 유리를 향해 인사를 해 보였다. 그러자 그녀가 그 여전한 웃음을 떠 올리며 문득 물었다. "오늘 떠나죠?" "…네, 그런데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한 그녀의 표정에 훼이드리온은 약간은 거북스 러움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리는 다시 한번 생긋 웃으며 말했다. "조심하세요." "고맙습니다." 마지막으로 서로 목례를 해 보이고, 훼이드리온은 그곳을 떠났다. 점점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에 유리가 보랏빛의 눈동자가 고정되어있을 때, 노 인이 약방에서 천천히 걸어나오더니 그녀와 같이 그의 걸음을 바라보았 다. "저 소년인가." "그래요. 잘 생겼죠?" "듣던 대로군." 노인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고, 유리는 다시 한번 생긋 웃었다. 자신도 이제 이곳을 떠날 때가 되었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다음에 또 들를게요." "그러게나." 유리는 예의 바르게 허리를 굽혀 꾸벅 인사를 하고 천천히 훼이드리온 과는 반대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그녀의 보랏빛 머리카락과 검은 색의 로브가 멋들어지게 공중에 휘날리더니, 이내 그녀의 몸으로 착 가라앉았 다. 그녀는 다시 뒤를 돌아보고는 거의 사라진 훼이드리온의 등을 향해 입 을 열었다. "정말 조심하세요." 그 말은 깊은 뜻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었다. ------------------------------------------------------------------- 중얼. 팀입니다(___) 으핫핫! 추천수 20개죠? 기분 좋습니다!! 크핫핫!! ...이었는데 말이죠. 운영자분의 말씀에 따르자면, 에, 17라는군요. 흠. 씁슬하죠, 좀. 왜 그렇게 되었느냐. 중복추천해주신 분들이 많다는군 요. 쿨럭.; 앞으로 중복추천은 자제를 해주십사, 라는 마음이 듭니다. 우선, 그래도 추천해주신분들께 감사를(>.<) 게임MAN님. 아, 아는 분이시네요. 감사합니다(___) 천사84님. 오오. 맘에 드는 아이디군요. 천사라...중얼. 아무튼 감사드립니다(___) YBK118님. 에구. 제 소설을 추천해시다니. 감사합니다요(>.<) JLTSH님. 아이디 쓴다고 고생을 좀...;;; 멍청한 작가입죠.; 앞으로도 분투하겠습니다(___) 과학창고님. 어허. 엄청난 지식의 소유자일 듯한 이미지가...;;; 마찬가지로 추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BERINGER님 베린저...라고 제 맘대로 읽고 있는 아이디를 가지신 분.; 네에, 앞으로도 더욱 열심히 쓰겠습니다(___) 추천해주신분들. 다시 한번 감사드리구요. 아직 추천하지 않았지만, 에잇, 귀찮아~하고 계시는 분들도 어서어서.;; (점점 투정의 정도가 심해져가고 있..;; 콜록.;;) 한번 추천20개의 맛을 들여서 더욱 기다려지는군요. 정식으로 심사조건에 맞출 수 있는 그 날이, 그리고 심사통과하는 그날이. 추연란에 만약 갈 수만 있다면 더 열심히 해야겠죠. 에헤... 김칫국부터 마셔보는 팀이었습니다. 그럼, 모두들 좋은 하루 되시기를(___) 어둠의 기사 DARK KNIGHT TEAM... P.S 자자, 추천 감상 비평 모두 다 받습니다! 특히 추천! 3대 남았어요(>.<) P.S 2 ...이러면 안되는데.;; [번 호] 11238 / 11342 [등록일] 2000년 08월 13일 01:05 Page : 1 / 28 [등록자] 암음기사 [조 회] 182 건 [제 목] [카드 게임 판타지]『 카드 마스터(Card Master) 』#027 ─────────────────────────────────────── 카드 게임 판타지(Card Game Fantasy) 카드 마스터(Card Master) 27. 붉은 검신의 칼이 걷는 리듬에 따라 허벅지를 툭툭 치는 느낌을 은근히 즐기며 훼이드리온은 광장으로 향했다. 바깥으로 나온 만큼 다시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건 당연한 이치이므로, 광장까지 이어진 길을 서두르지 않 고 천천히 걷는 그의 모습에서 여유가 묻어난다. 문득 얼굴로 그늘이 짐을 느끼고 고개를 들어보았다. 왠지 모르게 오랜 만인 듯한 오파투스의 첫 번째 영역인 하늘에는 순수한 하얀색을 가진 구름이 그와 같은 마음가짐으로 바람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구름.' 하늘에서는 빠질 수 없는 그 존재를 올려다보다가 그는 괜히 웃음을 피 식 흘렸다. 또 몇 명의 여인이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진다. 어느새 광장에 도착한 훼이드리온의 눈에 세찬 물을 뿜어 올리는 분수 대의 모습이 들어왔다. 광장의 중심에 설치된 원 모양의 분수대 중앙에 세워진 신성한 여신의 모습의 동상의 손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 빛 은 영롱하게 밑으로 떨어지며 그 잠깐의 생기를 마감했지만 하나가 되어 뭉쳐져 더욱 큰 존재가 되었다. 훼이드리온은 그 분수대를 향하여 걸어갔다. 털썩. 분수대 앞에 마련된 앉을 수 있는 공간에 몸을 맡긴 훼이드리온은 물소 리와 함께 느껴지는 희미하게 선선한 공기를 즐기며 뒤쪽으로 몸을 기울 였다. 물론 넘어져서 물에 풍덩하고 빠지는 불상사가 없도록 팔로 지탱하 는 것도 잊지 않았다. 찬란하게 쏟아지는 햇빛. 그 아래에 펼쳐진 활기찬 마을. 그리고 마을 전체의 시원함을 한데 모아놓은 듯한 분수대가 있는 광장. 그곳에서 돌아 다니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약속이나 한 듯이 밝은 표정이 떠올라있었다. 그는 굳이 자신이 다스리게 될 국민이라는 이유가 아니더라도, 그저 저 표정들이 좋아서 단순하게 웃을 수 있었다. '응?' 잠깐 훼이드리온의 표정에서 긴장감이 묻어났다. 아니, 놀랐다고 하는 것이 더욱 적절할 것이다. 그는 고개를 움직여 광장 안의 모든 곳을 훑어 보았다. 상가들, 그리고 지나다니는 사람들. 건물 사이의 어두운 틈새. 그 러나 자신이 방금 느꼈던 그 이질감 넘치는 시선의 근원은 아무래도 찾 을 수가 없었다.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다시 한번 눈동자를 굴리다가 금 방 예의 즐거운 표정을 되찾았다. '잘못 느낀 거겠지.' 분수대에 앉아있는 한 소년을 누군가 쳐다본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 으니 말이다. 그는 나름대로 그렇게 수긍해버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이가 일어났을 지도 모르니, 슬슬 여관으로 움직여보는 게 좋을 것 같았 다. 자신이 방금 빠져나온 길로 시선을 던져보자, 보랏빛의 머리칼은 어디에 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항상 미소를 떠올리고 있는 신비스러운 분위기의 그녀를 한번 떠올려보면서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남긴 마지막 인사가 무 심결에 떠올랐다. '조심하세요.' 생긋 웃으면서 말하는 그녀. 생각해보니, 어쩐지 그 말의 뜻이 궁금해졌 다. 여행을 하면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조심해라는 것인지, 아니면 당장 일어날 어떤 사건에 대해서 조심하라는 것인지, 조금 머리가 복잡해 지기 시작했다. 괜히 어렵게 생각한 건가, 하고 지우려고도 해보았지만 한번 소재로 등장하고 나니 어쩐지 정말 걱정이 되고 있었다. 훼이드리온은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복잡해…….' 하여튼 깨닫는 거라고는 인생은 복잡하다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새로운 진리를 터득하여 득도의 경지에 한 걸음 다가서게 된 훼 이드리온이었지만 그런 사실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지라, 그저 여관으로 향하는 길을 선택해 그곳으로 진입할 뿐이었다. '!' 이질감이 그의 몸을 엄습했다. 마치 멀리서 날아온 화살이 그의 머리통 을 관통하는 듯한 역한 감정이 요동치자,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돌렸다. 그의 눈빛이 번뜩이는 순간, 그 감정은 또 다시 증발하여 사라졌다. '…뭐지?' 수상한 기운. 분수대 앞에서도 느꼈던 그 이질적인 시선. 다른 이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과는 다른, 정확하게 말해서 한 동물이 그저 지나가 다가 자신에게 던진 시선과 같은 무감정이 그 시선에 실려있었다. 그렇 다. 아무 감정이 실려있지 않은, 그냥 쳐다볼 뿐인 시선. 그 시선은 그렇 게 자신을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온몸의 신경이 자연스레 긴장하기 시작했고 머리끝까지 타고 오르는 그 긴장은 검사로서 단련해온 그의 본능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그의 목으 로 쓰디쓴 침이 넘어갔다. '고수다.' 어떤 의미에서든 그 시선의 주인공은 굉장한 고수임에 틀림없었다. 어떤 존재에 대해서 시선을 보낼 때, 그 시선에 아무런 감정도 싣지 않는다는 것은 보통 수련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것도 단순히 스쳐 지나가는 시 선이 아닌, 아주 노골적인 시선이라면 더더욱 힘들다. 훼이드리온의 마음에 그 존재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과 함께 적의가 솟 아올랐다. 엄청난 수련의 정도는 존경함이 마땅했지만 그런 노골적인 시 선은 오히려 경계심을 자극한 것이다. '왜 나를 주시하는 것일까.' 그의 마음 속에 당연한 의문이 떠올랐다. 자신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 길래 알아차리기를 바라는 듯이 노골적으로 시선을 보내는 것인지 쉽게 판단할 수가 없었다. 결국 이쪽에서 먼저 움직이기로 결심한 그는 천천히 멈췄던 걸음을 다 시 걸었다. 여유 있게, 애써 여유를 가장하여 걷는 그의 모습은 과연 그 시선에 어떻게 비추어질까. 노골적인 시선에서 이제 아예 '노골적'이라는 수식어까지 지우게 만드는 시선을 훼이드리온에게 보내고 있는 그는 천천히 한 발자국씩 앞으로 내 딛기 시작하는 그의 행동을 관심 있게 지켜보았다. 수도를 떠나는 그 순간부터 그를 따라다니며 지켜본 결과로는 생각하는 게 아직 어린애 같다는 것이다. 지금도 그런 수준밖에 되지 않는 머리를 굴려 찾아낸 어떤 방법을 행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는데, 여러 일을 겪어 본 그로서는 어떤 일을 할 것인지 훤히 들여다보였다. 그는 어둠 속에 녹아든 은신술로 건너편 건물의 어둠 속으로 이동했다. 건물들이 만들어낸 그늘은 참으로 좋은 이동수단이 된다. 그렇지만 태어 나면서부터 그런 것을 이용해온 그라 별로 고마움을 느끼지는 못했다. 그 에게 어둠이란 그저 수단일 뿐이니까 말이다. 그는 들고있던 봉지에서 쿠키를 하나 꺼내들면서 다시 다른 어둠 속으 로 이동했다. 전혀 흔들리지 않는 움직임. 쿠키를 씹어먹으면서도 그 존 재감을 절대 들키지 않는 실력. 어느 모로 보나 그는 굉장한 실력자였다. 훼이드리온이 말한 고수급의 실력을 갖춘 자인 것이다. 그는 쿠키가 들린 봉지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가 문득 그 속이 비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새 다 먹어버린 건가, 라고 생각하던 그의 손에 들려있 던 봉지가 바닥에 툭 떨어졌을 때, 그는 이미 품속에서 다른 쿠키 봉지를 꺼내들어 다른 곳으로 이동한 후였다. 완벽하고도 깨끗한 움직임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 실력의 그가 뒤에서 따라오고 있는지는 전혀 알지 못하는 훼이드 리온은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기 위해 눈동자를 움직였다. 이마에서 흐르 던 땀은 얼굴을 흘러내려 바닥으로 떨어진지 오래고, 핏줄이 터질 정도로 꽉 쥐어진 주먹은 땀으로 인해 습한 느낌이 그를 괴롭혔지만, 전신을 뒤 덮은 긴장은 끊어질 줄을 몰랐다. 그의 정성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그의 행동이 안쓰러워 걱정이 된 신의 뜻이었는지, 그의 눈에 적당한 장소가 눈에 띄었다. 조금 넓은 골목을지 나서 건물을 지어놓으려고 마련해둔 터가 그의 눈에 발견된 것이다. 신중 하게 보지 않았다면 절대 발견할 수 없었을 그 공터를 향해 훼이드리온 은 발길을 옮겼다. 꿀꺽. 단침을 삼키며 골목을 지나가서 방향을 옆으로 틀자, 곧 사람도 없고 한적한 공터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정말 아무 것도 없는 마음에 드는 공간. 어쩌면 일어날 지도 모르는 전 투에 대비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공간인 것이다. 안으로 천천히 걸어들어 간 그는 공터의 중간쯤에 멈춰 서서 몸을 돌렸다. 그의 눈동자가 공터 안을 한번 스윽 훑었다. 다시 한 방울 흘러내리는 땀이 그의 긴장감을 더욱 돋구어줄 무렵, 그가 작으면서도 강하게 입을 열었다. "나오시죠." 없다면 더 좋지만, 있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그런 기분 나쁜 사실을 안 이상, 분명히 지금 해결을 해놓아야 앞으로가 편할 테니 말이다. 하지만 확신은 없었다. 그런 노골적인 시선을 느꼈다고 하더라도 정말 그 시선이 자신을 따라다니는 거라고는 보기 어려우니 말이다. '하지만 분명하다.' 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시선은 자신을 감시하 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나오시죠." 다시 한번 말하고 훼이드리온은 곧 침묵했다. 정적이 둘러싸인 그 공간 에서 그는 가만히 상대방의 반응을 기다렸다. '역시.' 공터 안까지 따라 들어온 그는 쿠키를 입안에 집어넣으며 고개를 끄덕 였다. 자신의 생각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는 더 단순한 행동이 그를 왠 지 기쁘게 만들었다. 저런 단순한 인간이 세상에 또 있을까, 하는 생각에 괜히 웃음이 나왔지만 그저 묵묵히 그 무표정을 유지했다. '나가줘야 하겠지.' 안 그래도 오늘쯤에는 한번 움직이려고 생각하고 있던 중이었는데, 저쪽 에서 먼저 이렇게 초대를 해주니 고마웠다. 그는 은신술을 풀고 쿠키 봉 지를 손에 든 채로 어둠 속에서 걸어나왔다. 그곳은 훼이드리온의 뒤쪽 건물이었다. 그러나 아직 존재감을 풀지는 않았기에 훼이드리온은 아직도 앞만을 바 라보고 있었다.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이미 습관이 된 터라 그는 작게 입을 열었다. "여기다." 갑자기 들려오는 낮은 미성에 훼이드리온은 후다닥 물러서며 뒤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곳에는 아무리 많이 봐줘도 16살 아래의 나이를 가졌을 법한, 그야말로 소년의 얼굴을 한 이가 한 명 서있었다. 머리에 숱이 많은지 목까지 내려오는 진한 검은색의 장발이 붕 떠있었 다. 거기다 머리 정리와는 영 인연이 없다는 듯이 완전 산발 그 자체인 머리 꼴과는 달리 온통 검은색으로 통일한 단정한 의상은 소년의 전체적 인 이미지를 좌우하고 있었다. '서, 설마.' 분명히 외양만을 따져서는 소년이었다. 나이도 자신과 비슷해 보이는 그 런 소년이었지만, 검은 색 일색을 한 모습에서 뿜어지는 묘한 분위기는 결코 소년의 그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분명히 자신의 앞에 있는데도, 마 치 존재하지 않는 듯이 존재감이 없는 것도 소년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 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검은 옷의 그 소년은 훼이드리온을 그저 바라보고 있었다. 간간이 손에 들린 쿠키 봉지를 뒤져 입에 넣고는 천천히 씹어먹는 모습 외에는 어떠 한 움직임도 없었다. 물론 훼이드리온이야 쿠키를 씹어먹는 와중에서도 느껴지지 않는 존재감 때문에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어서 다른 행동을 할 기회를 잡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고 말이다. 둘 다 그렇게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은 채 시간이 흘렀다. 묵묵히 서 로 쳐다보며 눈빛만을 교환하고 있던 중에 검은 옷의 소년이 마침내 쿠 키 봉지를 끝장내고 입맛을 다시며 봉지를 아무 데나 툭 던졌다. 그 틈을 타 훼이드리온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누구시죠?" 약간은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고 다시 입을 다물자, 검은 옷의 소 년은 무언가를 찾는 듯 자신의 옷을 만져보면서 대답했다. "알 거 없다." 아무런 감정도 묻어나지 않는 차가운 말투에 훼이드리온은 다시 침을 삼켰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왜 저를 감시하는 거죠?" 검은 옷의 소년은 결국 자신의 몸 탐색을 포기한 듯이 손을 놔버리고 팔짱을 꼈다. 고개를 들어 비슷한 눈높이에 있는 훼이드리온을 향해 자신 의 검은 눈동자를 움직이는 그의 행동에 훼이드리온은 지그시 긴장을 몸 전체로 흘려보냈다. 검은 옷의 소년은 한동안 그렇게 쳐다보다가 묵묵히 말했다. "알 거 없다." 맥빠지는 똑같은 대답. 훼이드리온은 왠지 허탈해지는 감정을 느꼈다. 그러나 뭐라고 말할 새도 없이 이번에는 검은 옷의 소년 쪽에서 먼저 입 을 열었다. "마스터 카드를 내놔라." "…네?" 훼이드리온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면서 되물었다. 그러나 검은 옷의 소년 은 다시 말할 이유는 없다는 기세로 그저 가라앉은 검은 색의 눈동자만 을 가만히 빛내고 있을 뿐이었다. 훼이드리온은 한숨과 함께 눈을 감았다 가 소년을 향해 다시 눈을 떴다. "왜죠?" "알 거 없다." 소년의 대답에 훼이드리온은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이봐요. 타인의 것을 가지고 가려면 적절한 이유를 말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요?" 그러나 소년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 참으로 일관성 있는 행동이 아닐 수 없었다. "알 거 없다." 결국 훼이드리온은 터져 오르는 화를 주체할 수가 없어서 조용히, 그러 나 힘있게 검은 옷의 소년에게 선포했다. "그럼 능력껏 빼앗아가세요. 절대 줄 수 없어요." "그런가." 훼이드리온은 천천히 칼을 뽑아들었다. 붉은 손잡이가 손안에 들어오는 감촉이 은근히 그를 흥분되게 만들었고, 눈부실 정도로 하얗게 빛나는 검 날이 그의 자신감을 북돋았다. 손잡이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와라.' 따지고 보면 제대로 된 첫 전투였지만, 떨리지는 않았다. 마스터 카드라 는 지켜야할 것이 있어서인지 오히려 자신이 생겨났다. 훼이드리온의 푸 른 눈이 단단한 의지를 보였다. '좋은 자세.' 검은 옷의 소년은 전투에 임하는 훼이드리온의 자세에 대해 순순히 평 가를 내리고는 계획대로 흘러가는 일을 즐겨보기로 했다. 상대편이 초보 임을 감안하여 적당히 봐주기로 하면서 팔짱을 풀었고, 그 즉시 소년의 몸은 그곳에서 사라졌다. 휙. 무언가 스쳐 가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훼이드리온은 본능적 으로 직감하고 왼쪽으로 검을 날렸다. 무언가 검을 강하게 강타한 다음, 다시 사라지는 감각이 검을 통해 전해져왔다. 눈으로는 확인되지 않는 엄 청난 빠르기로 검은 옷의 소년이 왼쪽으로 파고 들어와 단검을 날린 것 이다. '막았다!' 그러나 방심할 수는 없었다. 자신이 맞붙고 있는 검은 색 일색의 소년은 엄청난 고수였다. 방심은 곧 죽음인 것이다. 그는 모든 감각을 새로이 일 깨웠다. 피할 수 없는 전투에 임하는 그의 얼굴에 약간의 희열이 스쳐갔 다. 다시 무언가가 자신을 향해 돌격해옴을 느낀 훼이드리온이 뒤로 돌아서 며 가로로 칼을 베었다. 그러나 허망하게 허공을 베었고, 이번에는 다시 뒤쪽에서 낌새가 느껴졌다. 훼이드리온은 손을 벌려 가로로 베는 그 힘을 그대로 이어서 완전히 한바퀴 돌아버렸다. 스으으윽. 하얀 원을 그리며 움직이는 검날, 그러나 이번에도 느껴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검은 옷의 소년은 이미 다른 곳으로 사라진 것이다. 훼이드리온은 슬쩍 오른쪽 허리를 내려다보았다. 익숙한 갈색주머니가 아직 그곳에 매달려있었다. '그 소년이 노리는 것은 저것이다. 하지만 뺏길 수는 없다. 지켜야해.' 손잡이를 잡은 손에서 느껴지는 습한 땀의 느낌을 떨쳐내며 감각을 사 방으로 펼쳤다. 검은 옷의 소년의 움직임은 눈으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기에 오로지 감각만으로 움직여야했다. 스승, 바이마크의 가르침이 새 삼스럽게 머리에 떠올랐다. '가끔, 일생에 한번쯤은 엄청난 실력의 고수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대부 분은 움직임을 예측할 수 없을 만큼 빠른 몸놀림을 가진 이들이죠. 만약 그런 자들을 만나면, 눈은 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때, 훼이드리온은 그에게 물었다. '눈을 버리다니요? 보지 말라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그럴 때는 오히려 눈은 방해만 될 뿐, 어떤 도움도 주지 못 합니다. 믿을 것은 자신의 감각.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본능만이 활로를 열어주는 유일한 방책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웃어 보이는 바이마크의 모습을 잊을 수 없었다. 특히 이 렇게 그의 가르침이 생각날 때는 더욱 더. 훼이드리온은 그의 말을 다시 곱씹었다. '눈을 버려라.' 믿을 것은 감각뿐이었다. '오른쪽!' 그 감각. 훼이드리온이 펼쳐놓은 감각의 공간 안으로 검은 옷의 소년의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그는 가차없이 오른쪽으로 어깨를 움직이며 칼을 휘둘렀다. 공기를 매섭게 가르는 칼끝에 뭔가 걸리는 느낌이 들더니, 이 내 가볍게 사라졌다. 목표물은 또 다시 어느 곳으로 사라진 것이다. '어디지.' 그는 다시 칼을 잡고 자세를 고치며 눈동자를 굴려 경계 태세를 갖추었 다. 어디로 공격이 오더라도 방어할 수 있도록 결코 긴장을 늦추지 않았 다. 한편, 공터 안을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던 검은 옷의 소년은 초인적인 체력답게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모습으로 자신의 오른쪽 소매를 쳐다 보았다. 약간이긴 하지만, 옷이 베어져있었다. '제법이다.' 재미있는 전투를 할 수 있게 해준 누군가에게 작게 감사를 표한 소년은 다시 두 손에 쥔 단검을 얼굴 앞으로 들어올렸다. 오랜만에 이 정도로 피 해를 입게 해준 상대방에게 약간의 상처를 줄 참이었다. '조금 더.' 그의 움직임이 방금 전과는 판이하게 다르게 빨라졌다. 슈우욱. '정면!' 긴장하고 공격에 대비하고 있던 훼이드리온의 감각이 위험을 알렸고, 그 즉시 몸이 반응했다. 정면에서 들어오는 검은 옷의 소년을 향해 검을 그 대로 내리쳤다. 제대로만 들어간다면 완전히 승세를 굳힐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생각이 순전히 혼자만의 착각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극히 찰나의 시간이 지나서였다. 휘이익. 칼을 머리 정도의 높이까지도 내려치지 못한 시점에서 이미 검은 옷의 소년의 공격은 온몸을 훑고 지나가고 있었다. 너무나 생생하게 느껴지는 그 느낌에 훼이드리온은 칼까지 멈추고 말았다. 마치 거센 바람이 잠시 스쳐 지나간 듯한 느낌이 들자마자, 곧 공격을 뒤따라온 강한 바람이 그 를 때리고 지나갔다. 그리고 어느새 베어져버린 팔과 다리 몸통의 곳곳에 서 피가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고통조차 느낄 새도 없었다. 너무나도 순식간에 일어난 공격. 방어조차 못한 자신이 갑자기 허탈해짐을 느꼈다. 하지만 적은 그런 것도 신경 써주지 않고 곧바로 다시 공격해 들어왔다. 뒤쪽에서 느껴지는 강한 느낌에 주춤했던 칼을 다시 한번 뒤쪽으로 날렸 다. 허리를 돌려서 어깨를 움직이는 동시에 칼을 대각선으로 베어 내리려 고 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적은 한 수 위였다. 칼이 미처 돌아가지도 못한 상황에서 이미 모든 일은 종결되어있었다. 훼이드리온은 두 손으로 칼을 높게 잡은 상태에서 자신의 목을 겨누고 있는 단검을 내려다보았다. 어느새 자신의 품안으로 뛰어들어온 이 검은 옷의 소년은 또 다시 자신의 몸에 숱하게 상처를 낸 다음, 맨 마지막으로 목을 그을 참이었는지 단검을 목젖 앞에 멈추고 있는 것이다. 침만 꿀꺽 삼켜도 예리한 단검의 날에 목이 당할 정도의 거리에 위치한 단검에서 시선을 뗀 훼이드리온은 단검의 주인을 향해 눈길을 돌렸다. 무 표정한 얼굴의 소년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은 탄 듯한 갈색의 피부와 진한 검은 색의 눈썹과 눈동자. 이토록 어려 보이는 소년임에도 불구하고 실력은 그야말로 장난이 아니었다. 아 주 깨끗하게 당해버린 것이다. 한때 '이길 수 있다'라는 마음을 가졌던 자 신이 어리석게 느껴졌다. 이렇게 차이가 나는 수준을 생각하지 못하다니. 수치스러웠다. 첫 패배. 그러나 그 패배는 바로 죽음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훼이드리온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들고 있던 칼도 내렸다. 체념한 듯한 그의 표정을 가만히 쳐다보던 검은 옷의 소년은 가볍게 입 을 열었다. "훌륭하다." 역시 감정이 묻어나지 않았지만, 내용은 분명히 칭찬하는 뜻을 담고 있 었다. 훼이드리온은 깜짝 놀라며 눈을 떴다. 목 가까이에서 꿈틀대고 있 던 단검의 차가운 느낌도 어느새 사라져있었다. 검은 옷의 소년은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소년의 손은 어느새 아무 것도 들려있지 않은 빈손이 되어있었다. 훼이드리온은 이상함을 느끼며 목을 어루만지다가 자신도 칼을 집어넣 었다. 스르릉 검집 안으로 몸을 숨기는 칼을 느끼면서 소년에게 물었다. "…왜 단검을 거두는 거죠?" "알 거 없다." 왠지 오랜만에 들어보는 그 차가운 대답에 훼이드리온은 왠지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눈앞의 이 소년은 "네 성별이 뭐냐?"라고 물어도 "알 거 없다."라고만 대답할 것 같았다. 다시 침묵이 이어지려고 하는지 둘은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한차 례 전투를 치르고 난 후에 상대방에게 느끼는 묘한 동질감 같은 것이 그 들을 지배하고 있는 듯했다. 검은 옷의 소년에게서 입은 상처들이 따끔거리며 신경을 자극했다. 참을 수 있는 정도였지만, 워낙에 많은 상처를 입은 터라 고통은 조금 그의 신 경을 긁어놓았다. 그가 얼른 치료를 해야지 병균이 안 들어갈 텐데, 라는 지극히 현실적이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소년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음성은 지극히 평화로웠다. "오랜만에 즐거웠다." 훼이드리온이 의문스런 눈빛을 점차 띄워가자, 소년이 다시 말을 이었 다. "합격이다." "…뭐?" "알 거 없다." 마지막까지 중요한 것들은 모조리 속으로 숨겨버린 소년은 그 말을 마 지막으로 그곳에서 사라졌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지만, 훼 이드리온은 그렇게 당황하지는 않았다. 이미 방금 전의 전투로 인해 소년 의 움직임에는 익숙해졌으니까 말이다. 공터에 홀로 남은 훼이드리온은 문득 허리춤을 내려다보았다. 분명히 목 적은 이 갈색주머니였을 텐데, 소년은 결국 이것은 건드리지도 않고 사라 진 것이다.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잠시 머리를 굴려보자, 흐릿하게 짐작되 는 것이 있었다. '…시험인가?' 합격 운운하는 것을 보니, 방금 그 전투는 시험의 일종일 것이라는 생각 이 들었다. 하지만 명확하게 소년의 의도는 파악할 수 없었다. 순전히 검 술 실력을 알아보는 시험일리는 없을 테니 말이다. 결국 머리만 복잡해지고만 훼이드리온은 신경질적으로 뒷머리를 긁으며 몸을 움직였다. 움직일 때마다 전신에서 고통이 느껴졌다. 배낭에 간단한 의약품이 있으니, 그걸로 치료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골목을 빠져나 왔다. 여관까지 가는 길에서 과자점이 털렸다는 이야기가 들려왔지만, 그의 흥 미를 끌기는 어려웠다. 그저 그의 머리 속에는 여러 가지 생각들이 겹쳐 서 난동을 부리고 있었다. -------------------------------------------------------------------- 아아. 팀입니다. 우핫핫. 드디어 추천수가 20개를 돌파했습니다. 심사를 받을 수 있는 100-20 조건에 맞추어진 거죠(>.<) 꺄아~(>.<) 그럼, 추천수 쌓기의 역군들에게 감사를(>.<) 아린77님. 어, 아는 분이시다. 요즘 아는 분들이 참 많이 해주시네요. 감사합니다(>.<) WINDSOULER님. 멋있는 아이디에 감탄하고 있는 자까입니다. 추천 감사합니다(>.<) A2740님. 어쩐지 세련되어 보이는 아이디라고나 할까요. 감사합니다(>.<) 유령12님. 오오, 이것도 제맘에 드는 아이디군요. 항상 사랑해주세요. 감사합니다(>.<) NEOGEO99님. 언제나 제 소설을 사랑해주는 분(>.<) 또 추천해주셨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아렌님. 어허. 아는 분이 두분식이나. 감사해욧(>.<) A850704님. 아이디가 생일이신 건가요? 하핫. 아무튼 감사드립니다(>.<) 트리장식님. 독특한 아이디에욧(>.<) 앞으로도 열심히 할게요. 감사합니다(>.<) 로우나님. 한번에 다읽으셨다구요? 아아,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해요(>.<) 그리고, 매직 더 개더링, 은 제가 소설 구상하고 난 다음에 알게 된 거예요. 카드의 여왕, 이라는 만화책이 있는데 거기서 모티브를 따온 거랍니다. 이제 궁금증이 풀리셨는지? 추천해주신 모든 분들께, 축복있으라! 오늘은 새벽에 올리네요. 조금 늦었습니다. 글발이 안올라서 고생 좀 했죠. 그래도 여러분의 열화와 같은 성원에 힘입어 이렇게 왔습니다. 하핫. 검은 옷의 소년, 중요한 역할을 하는 존재이죠. 개인적으로 맘에 들어 하는 캐릭입니다. 가장 좋아하는 캐릭은 아이구요(>.<) 역시 난... 아, 아무튼. 28편도 기대해주시길(>.<) 어둠의 기사 DARK KNIGHT TEAM... P.S 추천 감상 비평. 언제나 환영합니다! P.S 2 어헉, 역시나 후기가 너무 길었다..;; 번 호 : 11419 / 11421 등록일 : 2000년 08월 16일 21:34 등록자 : 암음기사 조 회 : 29 건 제 목 : [카드 게임 판타지]『 카드 마스터(Card Master) 』#028 카드 게임 판타지(Card Game Fantasy) 카드 마스터(Card Master) 28. 모든 식사를 마친 아이는 눈앞의 사내를 맘에 들지 않는다는 눈초리로 노려보았다. 머리도 아픈데 왜 이렇게 사람 신경을 건드리면서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신법으로 가능하다면, 제일 먼저 이 사내의 성격부터 개 조하고 싶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에게 빙긋이 미소를 짓고 다시 아침 식사에 진력 하는 사르덴을 지그시 노려보면서 그녀는 옛 기억을 떠올렸다. 정말 어릴 때. 그녀의 나이가 채 5세도 되지 않았을 때, 그녀는 그와 만 났다. 맨 처음 인상은 그저 넉살좋은 나이 많은 오빠쯤으로 생각하고 그 를 따랐지만, 시간이 점차 흐를수록 그의 성격이 엄청나게 요상하다는 것 을 깨닫게 되었다. 흔히 말하는 변태보다는 강도가 조금 약하고, 그렇다고 일반인과는 너무 나도 판이한 그의 난해한 성격에 그녀는 일찍이 인간이란 엄청 무서운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떻게 생각하면 그가 그녀의 일생에 도움을 준 것은 바로 그 점뿐일 지도 모른다. 아무튼 여행을 떠나면서 한동안 그에게서 벗어날 수 있어서 기뻤는데, 이곳에서 이렇게 만나버리다니 정말 황당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아이는 더욱 매서운 눈을 하고 사르덴을 노려보았다. "할말 있으십니까?" 아이는 그의 웃음이 참으로 능글맞다고 생각했다. "응, 있어." "무엇이죠? 말씀해보세요." 그는 경청할 준비가 됐다는 듯이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아내고는 정자세 를 취한 후, 또 다시 빙긋 웃었다. 그녀는 가느다랗게 "휴우." 한숨을 쉬 고는 그에게 말했다. "왜 돌아가지 않는 거지?" "하하하." 그는 당연하지 않느냐는 듯이 호탕하게 웃어보고는 대답했다. "합당한 대답을 듣지 못했으니까요." "그러니까, 난 그 합당한 대답을 해줄 맘이 없다고!" 날카롭게 내지르는 그녀의 비명 섞인 대답. 그러나 사르덴은 그저 능글 맞게 웃고 있을 뿐이다. 그가 간단하게 대꾸했다. "그럼. 계속 있어야죠." "…대체 뭘 바라는 거야!" "말씀드렸다시피, '돌아가겠다'는 그 한마디면 됩니다." "크윽……." 대체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난해한 성격을 그대로 표현해내고 있는 미 소를 방실방실 띄워 보이며 응수하는 그의 여유에 아이는 할말을 찾지 못한 채 자세를 무너뜨렸다. 테이블에 고개를 박은 채 뭐라고 계속 궁시 렁 대는 그녀를 즐기는 듯한 눈빛으로 쳐다보던 사르덴은 그녀가 자세를 바꿀 기미를 보이지 않자, 어깨를 으쓱해보고 나머지 식사를 끝마쳤다. 그가 익숙한 말투로 아주머니에게 "요리를 잘하시는데요? 혹시 요리사 로 취직할 생각 없으세요?"라고 물었다가, "싫수. 난 이곳이 좋아."라고 대답하는 아주머니에게 간단히 당해버리고 있을 때, 아이가 이윽고 고개 를 들어서 그를 바라보았다. "누가 시킨 거야?" "누가 시키다니요? 누굴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버님과 어머님은 이 여행을 허락하셨단 말야! 그럼 대체 누구야? 대 신관 님? 아니면 주교 님이?" 아이의 악이 받힌 물음에 그는 여전히 방실방실 능글맞은 웃음으로 응 대하며 대답했다. "물론 그분들의 부탁도 있으셨습니다. 신을 모시는 신관이 마법을 기초 로 사용하는 카드를 가지고 노는 것이 못마땅하셨나보죠. 게다가 이제 대 회까지 참가하러 가신다니, 얼마나 놀라셨겠습니까." "그럼, 대체 왜 날 데려가려고 하는 건데?" 아이의 두 눈에 열이 받았다는 듯이 불꽃이 일었다. 평소 같이 장난으로 대답한다면 톡톡히 대가를 치를 것 같은 분위기에, 사르덴은 미소의 농도 를 약간이나마 풀었다. "순전히 제 고집 때문입니다, 라고 말씀드리면 어떡하실 작정이시지요?" "한대 팰 거야." 그녀의 간단한 대꾸. 사르덴은 언짢은 표정이 되었다. "맞아야겠군요." "그건 나중에 하고, 남은 설명이나 마저 해." "네, 그러도록 하죠. 제가 언제부터 아가씨를 모셨지요? 제 생각으로는 10년은 된 것으로 기억됩니다만, 맞습니까? 네, 정확하군요. 그럼 아가씨 는 그 10년 동안 절 어떻게 보신 것입니까. 전 아가씨의 제 2의 보호자입 니다. 저에게 허락을 받지 않고 여행을 떠나시다니, 너무 하신 처사라고 생각되지 않으십니까?" "…그건 미안해." 찔리는 구석이 있는 아이의 목소리가 조금은 작아졌고, 그에 비해 찔릴 것 없이 당당한 사르덴의 목소리는 조금 커졌다. "그럼 설명이 된 것이죠? 허락을 얻지 않은 아가씨의 잘못입니다. 돌아 가시죠." "아니." 그의 진한 눈썹이 일그러졌다. 아이의 눈이 당당하게 빛났다. "수긍했다고 해도 따르지는 않을 거야. 난, 절대 돌아가지 않아." 너무나도 단호하게 말하는 그녀의 표정에 사르덴은 순간적으로 할말을 잃고 말았다. 그가 대해온 지난 10년 간의 아가씨와는 너무나 판이하게 다른 모습. 당돌하고 쾌활의 극치를 달리는 성격을 가진 그녀였지만, 솔 직히 자신의 의견을 굽힘없이 피력할 정도는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도 조금 밀어붙이면 곧 전처럼 넘어올 거라고 생각하고 이렇게 그녀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하지만 이 모습은 무엇인가. 사르덴이 바라보는 아이의 검은 눈동자에는 어떤 굽힘의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너무나 당당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그 눈빛에 그는 오히려 자신이 밀리는 듯한 느낌까지 받았다. 사르덴이 그렇게 당황함을 느끼며 할말을 잃고 있는 틈을 타 아이가 또 다시 공격을 가했다. "아직 마스터 카드 대회에는 근처도 가지 못했어. 날짜도 충분히 남았다 고. 높으신 신관 할아버지들이 어떻게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마 스터 카드 대회에 꼭 참가할 거야. 그게 이 여행의 본 목적이었으니까. 내가 마스터 카드를 얼마나 좋아하는지는 알고 있지?" "……." 그녀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음… 말하기가 좀 그런 이유지만……. 흠. 난 여행이 재밌어. 결코 여기서 돌아갈 수는 없다고. 동행을 만나서 같이 걷는 것도 즐겁고, 여러 가지 일들과 여러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즐거워. 집에서는 절대 느 껴본 적 없던 일들이 가득하단 말이야." 아이는 눈을 깜빡여서 다시 사르덴을 쳐다보았다. 말없이 자신을 쳐다보 는 그의 시선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난 돌아가지 않아." 더 이상 거론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듯한 그녀의 눈빛. 사르덴은 그녀 를 말릴 수 없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이 여행에 대한 그녀의 관 심, 기대, 그런 감정들이 얼마나 큰지 잘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걸리는 단어가 있단 말야.' 그녀의 말 가운데에서 그저 스쳐 가는 정도로 언급됐던 '동행'이란 단어 가 왜 이렇게 뇌리에 깊이 새겨지는지 그는 알 수가 없었다. 마법사 특유 의 직감적인 감각인 듯도 했지만, 그 직감이 뭘 뜻하는지 알아차리기는 무리가 있었다. 그는 뇌리에 새겨진 동행이란 단어를 한번 곱씹어보며, 절대 움직이지 않을 태산과 같은 기세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아이에게로 눈길을 돌렸 다. "그런… 이유인 것입니까.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제가 더 드릴 말은 없 는 듯하군요. 하지만 이대로 돌아가지는 않겠습니다." "뭐야, 더 남은 거야?" '한번 붙어볼까!'와도 비슷한 그녀의 표정이라 사르덴은 내심 긴장해버렸 다. 서둘러 그는 뒷말을 이어 그녀의 화를 가라앉혔다. "그것이 아닙니다. 단지 여행길이 걱정이 되니, 지켜보기만 하겠다는 것 입니다. 동행을 원하는 것도 아닙니다."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안심을 했다가, 문득 떠오른 의문에 고개를 갸 웃거렸다. 그의 말 중에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동행하지 않고, 날 어떻게 지켜주겠다는 거야?" "간단합니다. 그저 마력으로 주의만 기울이고 있으면 되니까요. 지금과 같은 편안한 여행을 즐기실 수 있습니다." 그녀의 눈이 게슴츠레 반쯤 감기면서 자신을 바라보자, 사르덴은 왠지 모르게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아이는 그렇게 한참 그를 응시하다 가 이내 눈을 제대로 뜯고 턱을 움직였다. "흠. 좋아. 믿어보겠어." "아하하, 감사 드립니다." "뭐, 감사할 거까지야. 에헤헤." 둘 다 서로의 갈등이 풀려서인지 표정이 한층 밝아졌다. 아이도 사르덴 이 더 이상 귀찮게 하지 않는다고 하자 앞으로의 여행에 대한 기대감이 다시 맘 속 가득히 부풀어올랐고, 사르덴도 그녀의 허락으로 한숨 놓았다 는 듯이 웃을 수 있었다. 둘이 앉아있던 테이블이 험악하던 분위기에서 옆집 아저씨와 얘기를 나 누는 편안한 분위기로 변하자, 아주머니가 슬금슬금 다가왔다. 할 일이 없어서 옆 테이블에 앉아 그들의 다툼을 지켜보고 있던 중에, 이제야 끼 어 들 기회를 잡은 것이다. "저기 말이유." "네?" 한동안 잊고 있었던 두통이 고개를 돌림과 동시에 다시 머리 안을 이리 저리 뛰어다니기 시작하자, 그녀의 미간이 확 좁혀졌다. 사정을 아는 사 르덴이 걱정이 담긴 눈빛을 그녀에게 보냈고, 아주머니도 그와 다를 바 없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말씀하세요." 그래도 전보다는 많이 나아진 건지, 아니면 흥분으로 인하여 두통기가 확 달아나 버린 건지, 금새 표정을 회복한 그녀가 다시 입을 열자, 아주 머니가 테이블 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치워두 되겠수?" "아아, 네. 다 먹었어요." "음. 고맙구랴." 아이의 싱긋 웃는 얼굴에 아주머니도 화알짝 웃어주고 접시를 차곡차곡 높게 쌓더니, 한번에 모조리 들고 가버렸다. 그 엽기적이고도 신기한 광 경에 사르덴이 아연실색하며 눈빛을 멍하니 만들고 있을 때, 그래도 본 회수가 더 많다고 적응이 된 아이가 의기양양하게 입을 열었다. "헤에, 완전 곡예 수준이지?" "…그, 그렇군요." 사르덴은 그녀를 요리사로 초빙하는 것에 대해서 다시 한번 진지하게 고민해보기로 했다. 그러던 중에 그는 있어야할 사람이 이곳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이곳에 온 것도 꽤 시간이 지났는데도 있어야할 그 사람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사르덴은 의문을 띄운 표정으로 아이에게 물었다. "저기, 동행 분은 지금 어디 계시는 건가요?" "웅? 팀은 왜?" "팀? 그 분 성함이십니까? 어디서 많이 듣던 이름이군요." 아이가 장난스럽게 웃어 보였다. "사르덴도 알지? 내가 옛날에 키우던 금색고양이 이름이었잖아, 팀. 이 미지가 너무 어울려서 내가 그렇게 이름을 붙여줬어." 그 일에 대해서 너무나도 뿌듯함을 느끼는지 그녀는 한껏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르덴도 따라서 웃어줬지만, 어쩐지 이 소녀의 성격이 차츰 더 황당해지고 있는 것이 아닌지 걱정이 될 뿐이었다. "그럼, 그 분께서는 이름이 없는 건가요?" "아니, 이름이 왜 없겠어. 훼온 레이엔트, 라고 하던데, 발음하기 귀찮아 서 내가 팀이라고 부르고 있는 거야. 우헤헤." 아이는 "팀. 팀팀. 팀팀팀."이라고 혼자서 중얼대며 히죽히죽 웃어댔고, 사르덴은 아직 보지는 못했지만 앞으로 이 소녀와 같이 여행을 다니면서 숱한 곤욕을 치를 것이 분명한 그 팀이라는 동행에게 진심으로 애도를 표했다. '제발 그대의 앞길에 빛이 있기를.' 아주머니가 입가심으로 내준 다이사를 깨끗이 비운 후, 사르덴은 자리에 서 천천히 일어났다. "흠. 가보겠습니다." "가는 거야?" "왜요, 아쉬운가요?" "그럴 리가 없잖아? 쌍수 들고 환영할 일이지. 얼른 가라고." 아이는 너무나도 천진난만하게 웃어버려 그가 뭐라고 대꾸할 말도 찾지 못할 지경이 되도록 유도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잘 가." "…하아, 안녕히 계십시오." "뭐지, 그 한숨은?" "한숨이라니요, 조금 숨이 거세게 나온 것뿐입니다." 그는 평소처럼 능글맞게 웃으며 은근슬쩍 넘어가 버리고는 아주머니에 게 아침 값을 치르고 문으로 향했다. 아이도 일단은 예의상 일어나서 문 밖까지 배웅해주기로 하고 같이 움직였다. 사르덴이 문손잡이를 잡았다. "그럼." 그러나 그는 문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그 대신 갑자기 자신을 공격해오 는 문에 정확하게 이마를 들이받고 식당 바닥에 드러누울 수 있는 행운 을 얻을 수 있었다. "사르덴! 팀!" "…어라?" 멍한 음성을 남기면서 훼이드리온이 문을 열며 들어온 것이다. 그는 황 당한 표정으로 아이와 사르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복잡한 머리와 온몸에서 차츰차츰 신경을 갉아먹고 들어오는 고통으로 인해 풀어진 표정으로 문을 여는데 뭔가가 부딪히는 느낌이 들었고, 고개 를 내려다보니 그곳에는 마법사 같은 남색의 로브를 걸친 사내가 이마를 매만지며 뻗어있는 것이 아닌가. 쉽게 상황 파악이 되지 않은 가운데, 멍 하게 아이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야?" "아, 이, 일단!" 순간적으로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판단이 서지 않은 아이는 빨갛게 변한 이마를 문지르며 일어서려는 사르덴의 어깨를 잡아 일으키는 것을 우선 으로 했다. 그는 대충 몸을 일으키자, 괜찮다면서 애써 그녀에게 웃어 보 였고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켰다. "이쪽이 더 심한…데요?" "응? 아, 팀! 뭐야, 이 상처는! 어디서 다친 거야? 야!" 이제야 자신의 상처를 본 아이에게 훼이드리온은 희미하게 웃어주다가 이내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그리고 기울어져 가는 그의 몸. 아이는 기겁을 하며 그를 받아냈다. 그녀의 품안에서 그가 조용히 중얼거리는 소 리가 들렸다. "…힘이 빠졌어……." 뒤이어서 흘러나오는 그의 힘없는 웃음에 아이는 서둘러 사르덴에게 외 쳤다. "얘, 얘를 빨리 우리 방에 좀!" "네? 아, 알았습니다!" 붉게 색이 오른 이마는 일단 뒤로 제쳐놓고, 그는 아이의 명령대로 움직 였다. 아이에게서 일단 훼이드리온을 받아서 등에 업자, 아이가 소리쳤다. "2층!" 사르덴은 훼이드리온의 허벅지를 강하게 잡고 벌떡 일어나 계단을 향해 뛰었다. 아이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 뒤를 따랐다. '대체 어디서 다친 거지? 피도 엄청 많이 나잖아?' 어떻게 된 건지 피는 멈출 생각을 하지 않고 훼이드리온의 밝은 색 옷 을 군데군데 물들이고 있었다. 예리한 암살자의 단검에 베였으니 당연한 상처지만, 사정을 모르는 아이로서는 두 손을 꼭 잡고 그를 걱정하는 수 밖에는 없었다. 뒤에서 아주머니가 크게 소리쳤다. "의사를 부를까?" "아니요, 괜찮아요!" 아주머니의 친절을 미안하게도 물리친 그녀는 계단을 재빨리 뛰어올라 갔다. 훼이드리온의 다리, 팔, 등에서 그 범위를 확대해 가는 붉은 색의 액체를 주시하며 그녀가 소리쳤다. "저기요!" 서둘러 열쇠로 문부터 열자 곧장 사르덴이 방안으로 뛰어들어가 오른쪽 침대에다가 훼이드리온을 눕혔다. 이제 정신까지 잃어버렸는지 그는 아무 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사르덴이 훼이드리온의 상태를 살피며 아이에 게 소리쳤다. "어서 치료부터요! 출혈이 심합니다!" "으, 응!" 그녀가 재빨리 훼이드리온에게 달라붙었다.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 은 피가 그녀를 애타게 했지만, 마음을 다잡고 우선 할 것부터 하고 봐야 했다. 그녀는 훼이드리온의 배꼽 위 허공에 손을 들어서 조용히 눈을 감 았다. '…믿습니다. 제발!' 너무나도 간절한 그녀의 믿음에 하실루스는 빛을 내려주었다. 뛰어서 그 런지 머리를 짓누르는 고통 속에서도 그녀는 자신의 신법을 유감 없이 발휘해내기 시작했다. 그녀의 믿음이 하실루스와 통하는 순간, 그녀의 손에서 조금씩 빛이 새 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달빛과 같은 은색의 빛은 은은하게 훼이드리온의 전신으로 퍼져나가더니, 이윽고 그를 따스하게 감싸안았다. 보기만 해도 성스러운 빛에 도취될 듯한 아름다운 모습에 사르덴도 이마의 고통을 잊 은 채 넋이 나가버렸다. 아이는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정말 간절하게 "믿 습니다… 믿습니다…"를 연신 중얼거렸다. "…으음……." 약한 훼이드리온의 신음에 아이는 하마터면 극도로 집중하고 있던 믿음 을 흐트러뜨릴 뻔했다. 그러나 단숨에 마음을 다잡고 다시 신께 기도를 올렸다. 그녀의 손에서 흘러나오는 은빛의 광채는 점점 더 그 밝기를 더 해갔다. "…하아." 사르덴은 뒤에 서서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멋도 모르고 입을 열고 말았 다. 말로 표현하는 것에는 무리가 따를 너무나도 아름다운 장관에 그는 눈물까지 흐를 것 같았다. 이것이 바로 신관의 능력, 신법이란 말인가. 그 는 이 어린 소녀의 능력에 진심으로 탄복했다. '…제발, 제발!' 그녀의 이마에 땀이 맺히자 사르덴은 천천히 이마를 만지며 방에서 빠 져나왔다. 더 이상 자신이 있어봤자 도움이 될 것도 없고, 또 괜히 방해 만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복도로 나와 조용히 문을 닫고는 식당으 로 내려왔다. 마법으로 이마의 고통을 치유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주머니가 헐레벌떡 그에게 다가왔다. "어, 어떻게 됐어유? 의사 안 불러도 괜찮은 거예요?" 사르덴은 빙긋이 웃으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괜찮습니다. 그렇게 큰 상처는 아닌가봐요." 자잘한 상처들이라서 치명적이지는 않았다. 다만 출혈이 심해서 그의 정 신상에 충격이 가해졌던 것이다. 그는 아주머니의 안심하는 표정에 맞춰 다시 빙긋 웃어주며 여관 밖으로 나왔다. 화창한 날씨. 그는 고개를 들어 2층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괜찮을 겁니다. 그렇게 걱정해주는 당신이 있으니, 아무 일도 없을 거예 요.' 상처를 치료하는 건 아이에게는 별로 힘든 일도 아니었지만, 그녀는 너 무나도 필사적으로 동행을 치료했다. 사르덴은 그 모습에 어쩐지 껄끄러 움을 느꼈지만, 애써 거부하려했다. 그러나 거부하려하면 할수록, 그 걱정 은 점차 그의 머리를 지배해가기 시작했다. '아가씨가 동행에게… 다른 맘을 품게 된다면…….' 아마도 정말 그렇게 된다면, 상당히 귀찮은 일이 생기지 않을 리가 없었 다. 그렇기 때문에 사르덴은 자신의 예감이, 마법사로서의 독특한 직감이 이번만은 틀리기를 간절히 바랬다. "…응?" 치료를 모두 끝내고 규칙적인 숨을 내뱉으며 잠든 훼이드리온에게 이불 을 덮어주던 아이는 어느새 사르덴이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주위를 둘러보다가 직감적으로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막 신법과는 다른, 상 당히 이질적인 느낌이 드는 기운이 한곳으로 응축되더니, 이내 한꺼번에 사라져버리는 느낌이 들었다. 아이는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그 일의 정 체를 알 수 있었다. '사르덴… 잘 가요.' 조금 자신을 곤란하게 만들었지만, 그래도 정을 뗄 수는 없는 고마운 그 에게 아이는 미소를 띄워보냈다. 하늘이 새삼스럽게도 밝아 보였다. 아이는 밝아진 얼굴로 훼이드리온 가까이로 다가갔다. 침대 밑에 구비된 작은 의자를 끌어내어 걸터앉은 그녀는 두 팔을 가지런히 겹쳐서 놓고 그 위에 고개를 올려놓았다. 어디서 이렇게 다친 걸까, 라는 의문도 있었지만 일단은 접어두기로 했 다. 그것이 문제가 아니니까. 작은 숨소리를 내며 잠든 훼이드리온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그녀는 이윽고 안도의 미소를 얼굴 가득히 띄었다. '다행이야…….' 약간(?) 소란스러웠던 아침은 그렇게 끝나가고 있었다. -------------------------------------------------------------------- 아하. 팀올습니다. 카마 28편이 이제야 나왔군요. 기다려주신분들께 진심으로 죄송하다는 말씀을 올립니다. 마산에 다녀온다고 너무 늦었군요 그럼. 그새 추천해주신 분들께 감사를(>.<) NEOGEO99님. STELL123님. RODA님. INYONGH님. 외솜다리님. 싸코님. 시르슈님. 유리화살님. 에에. 모두 감사드립니다(>.<) 추천분들에게 일일이 다 쓰지. 한없이 길어지더군요. 그래서 이정도로 자제하기로 했습니다. 아아. 죄송스럽군요...;; 추연란심사를 기다리고 있는데. 대체 언제야 결과가 나올지... 차라리 빨리 팍 떨어지고픈 마음입니다. 이렇게 두근대면서 기다리는 것. 별로 건강에 안좋을 거 같아요(---). 움. 그럼. 3장도 얼마 남지 않았고, 그 동안 쉰 것도 있으니 매일 연재에 돌입해보고픈 맘이 있습니다. 그 꿈이 가능하도록 빌어주시길(>.<) 그럼! 어둠의 기사 DARK KNIGHT TEAM... P.S 추천 감상 비평. 언제든지 주시기만 해요!(>.<) 번 호 : 11514 / 11562 등록일 : 2000년 08월 21일 04:38 등록자 : 암음기사 조 회 : 131 건 제 목 : [카드 게임 판타지]『 카드 마스터(Card Master) 』#029 카드 게임 판타지(Card Game Fantasy) 카드 마스터(Card Master) 29. 여관을 나서면서 훼이드리온과 아이는 아주머니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 다. 지난 이틀 간 편하게 머물 수 있게 해준 고마움의 답례라고 할까. 아 주머니는 역시나 호탕한 웃음으로 둘의 여행길을 배웅했고, 둘은 웃음을 머금고 케롯 마을의 서쪽으로 향했다.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던 아이가 심각한 굳은 얼굴의 훼이 드리온의 얼굴을 주시하다가 살며시 입을 열었다. "정말 괜찮아?" 조금 앞서 가고 있던 그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갈색의 후드 가 애교스럽게 달린 소매 짧은 여행복으로 갈아입은 그가 그녀의 마음을 읽고는 애서 표정을 풀어보았다. "걱정할 것 없어. 난 괜찮으니까." 그러나 그 말에 안심할 아이가 아니었다.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걸. 깨어나서부터 미간에 진 주름이 펴지고 있질 않단 말이야." "…그, 그런가?" 떨떠름한 훼이드리온의 표정에 아이가 얼굴을 가까이 갖다댔다. 비슷한 키이기에 눈높이도 거의 같은 둘. 그는 찔끔 놀라며 뒤로 물러섰고, 그녀 는 잠시 눈을 흘기더니 말했다. "약 사러 나가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지나다니는 사람들. 마냥 평온하고 평화로운 분위기의 마을. 그 어느 곳 하나, 이 평화를 방해하는 티끌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아주 자연스러운 이 마을 어딘가에 그 검은 옷을 입은 소년은 자신을 주시하고 있을 것이 다. 그런 생각에 훼이드리온은 또 다시 머리를 털어 낼 수밖에 없었다. 불길한 생각이 또 머리 속을 뒤흔들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응?" 그리고 현재의 문제는 눈앞에 까만 눈동자를 들이댄 채 의심의 빛을 유 감 없이 뿌려대고 있는 검은머리의 소녀였다. 그는 괜히 배낭을 고쳐 매 며 시간을 끌었지만, 다시 걷기 시작했으면서도 그녀의 눈초리는 끊이지 않았다. "무슨 일 있는 거지? 그렇지?" 연달아 물어오는 아이의 물음에 훼이드리온은 난처함을 느꼈다. 과연 이 걸 말해야할까, 말했다가 어떤 피해를 입으면 어쩌지, 라는 걱정과 의문 들이 무수하게 그의 머리를 차지했고, 그는 뒷머리를 긁으며 애써 그 물 음을 무시하려고 했다. 그런 태도가 아이의 신경을 건드린 것일까. 급기야 그녀가 그의 앞으로 달려가 딱 멈춰 서더니, 손가락을 내지르며 소리쳤다. "야, 너! 날 동행이라고 생각은 하고 있는 거야! 네가 그렇게 다쳐서 피 를 철철 흘리면서 들어와서 얼마나 놀랬다고! 그런데도 한마디도 안 해 주고! 너무해!" 갑자기 커다란 소리가 들려오면 사람들은 한번쯤은 그쪽으로 시선을 주 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현상은 지금도 어김없이 일어났다. 훼이드리온은 아이의 커다란 목소리에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일순간 자 신들을 향해서 집중되어지자 당황하고 말았다. 아이는 그런 사소한 문제 는 신경 쓰지 않고 여전히 그를 향해서 눈을 부라리고 있었고, 씩씩거리 며 거칠게 숨까지 내뱉고 있었다. 이 상황을 어떻게든 수습을 해야하는 훼이드리온은 결국 두 손을 들고 아이에게 매달렸다. "알았어, 알았다고. 얘기해줄 테니까, 이 마을부터 벗어나고 보자, 응?" "흥. 정말이야?" "그래." 훼이드리온은 아이의 등을 떠밀며 서둘러 그곳을 벗어났다. 주위의 사람 들은 소란스러운 분위기의 그들을 힐끗 흘겨보다가 저마다 하던 일에 다 시 열중하기 시작했다. 훼이드리온은 파닥거리는 아이를 달래며 케롯의 서쪽으로 후다닥 밀고 가다가 사람들이 주변에서 뜸해지자 한숨과 함께 그녀의 등에서 손을 뗐 다. '마을 외곽쯤이군.' 그렇게 생각하며 훼이드리온이 주위를 둘러보고 있을 때, 아이가 의기양 양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그의 앞에 섰다. 어쩐지 그의 표정이 두려운 듯 일그러졌다. "자, 이제 말해봐." "…으음." 뭘 잘못 먹었는지 아주 껄끄러운 표정이 훼이드리온의 얼굴에 떠올랐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아이의 날카로운 시선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느낄 수 있었다. '어쩔 수 없다.' '휴우.' 일단 주위를 둘러보았다. 띄엄띄엄 지어져있는 건물들. 지나다니는 사람 들도 극히 적다. 하지만 이 한적한 어느 곳에서도 그 소년은 자신을 지켜 보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괜찮겠지. 나도 죽이지는 않았는걸. 물론 충격이 커서 정신을 잃기는 했 지만.' 그는 자신이 잠에서 깨어나서 온몸에서 흘러나온 출혈량을 발견하고 얼 마나 놀랐는지 회상해보았다. 아이도 "죽는 줄 알았잖아!"라고 화를 내서 조금 떨떠름한 상태로 시간을 보냈었던 아까 전의 상황. 하지만 분명히 죽지는 않은 것이다. 그 소년이 자신에게 입힌 상처 중에서도 치명상은 전혀 없다. 아마도 얘기해도 괜찮겠지, 라는 것이 그의 결론이었다. "가면서 말할게." 훼이드리온이 걷기 시작하자, 아이도 곧 그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스쳐 가는 바람이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을 허공에 수놓자, 내리쬐는 햇빛 이 그 검은 장막에 부딪혀 산산이 부딪혔다. 훼이드리온은 자신의 목을 간질이는 아이의 머리카락을 피해 약간 옆으 로 걸음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나도 확실한 것은 몰라. 그것 때문에 너한테 말해도 될까, 하고 고민한 거고. 그리고… 내가 이야기를 하면 너한테 어떤 피해를 줄지도 몰라서 말이야." "피해?" "응. 봤잖아, 많이 다쳐서 들어온 거. 네가 피해를 입을 수도 있어. 그래 도 괜찮겠어?"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하고 있는, 그런 간절한 표정으로 자신의 눈동자를 바라보는 훼이드리온에게 조용히 눈빛을 보내던 아이는 조금 후 옅게 훗,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나 걱정해주는 거야?" "…당연하잖아." "흠… 고마워라. 사정을 얘기해주면 더 고마워할 텐데." 그녀가 장난스럽게 생긋 웃었다. 어쩐지 그 웃음에 안심을 느끼게 된 훼 이드리온도 담담히 미소를 지어보고는 드디어 조금 전 외출을 했을 때 일어났던 일을 그녀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의 설명을 들으면 서 같이 놀라고 흥분했고, 그 반응은 설명자의 입장인 훼이드리온의 마음 을 따뜻하게 만들어주었다. 훼이드리온이 비교적 짧게 얘기를 마치고 한숨과 함께 뒷머리를 긁적이 고 있을 때, 아이가 이해를 한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흐음. 뭔가 복잡한 거네. 정말 그 배후에 있는 자가 누군지 모르는 거 야?" "알 리가 없잖아. 난 왜 당해야하는 건지 지금도 얼떨떨하다고." 대꾸하는 그의 표정을 바라보다가 그녀는 묵묵히 입을 다문 채 걸음을 옮겼다. 얘기를 들은 후부터 뭔가 고민하는 표정을 풀지 못하는 그녀의 옆모습을 그는 가만히 주시하다가 이내 앞으로 눈길을 돌렸다. 같이 고민해주는 그녀의 얼굴이 어쩐지 더 예뻐 보였다. '고마워.' 겉으로 뱉어내기에는 조금은 쑥스러운 그 말을, 훼이드리온은 가볍게 웃 음 지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렇게 침묵한 채 길을 따라 걷자, 어느새 마을 밖으로 나와 이정표까지 지나쳤다. 옅은 붉은 색을 띄고 있는 이정표에 새겨진 굵은 검은색의 글 자는 서쪽으로 계속 길을 가다보면 '아크릴 영지'가 나온다는 사실을 명 시해주고 있었다. 잘 볼 수 없었던 진지한 표정으로 생각하고 있던 아이가 길게 풀어내린 머리카락을 매만지면서 드디어 입을 열었다. "어렵네." 훼이드리온이 간단하게 반응했다. "응. 어려워." "네 말에 따르면, 전혀 감이 잡히지 않잖아. 고민해봐야 헛수고라는 뜻 이 되겠네." "그래서 나도 머리에서 슬슬 지워보려고." 영양도 없고 이득도 없는 생각을 계속하고 있어봤자 지금 상황에 영향 을 미치는 어떠한 단서도 발견해내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에, 그녀 의 말대로 그 고민을 떨쳐버리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분명히 자신을 둘러싼 어떤 일이 자신도 모르게 일어나고 있는 것만은 명확한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그 사건의 정체에 대해서는 어떠한 것도 알 수가 없는 것 이다. 훼이드리온과 아이는 우연하게도 눈이 마주쳐 잠시동안 서로를 바라보 다가 동시에 씨익 웃었다. 그들은 어느새 말하지도 않고 뜻이 통하는, 그 런 깊은 관계가 되어버린 것일까. "왜 웃어?" 아이가 먼저 물었다. "그냥." 훼이드리온의 간단한 대꾸가 이어지고, 그녀는 다시 한번 싱긋 웃어버렸 다. "너도 참 썰렁한 애야." "하하. 그런가?" 어색한 농담. 서로에 대해서 그렇게 깊이 알고 있는 것이 없는 관계로 눈빛만으로도 생각이 통하는, 그런 신비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이는 그녀의 깨끗한 신관용 여행복만큼이나 깨끗한 미소를 화사하게 지으며 한차례 크게 기지개를 켰다. 가슴이 앞으로 내밀어질 때, 훼이드 리온의 시선이 평야를 방황하며 갈피를 잡지 못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 는 일이다. "좋아. 그럼, 확실한 단서가 나타날 때까지, 이 일은 덮어두자. 그리고." 그녀가 다음에 이어지는 말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듯 접속사로 말을 끊 자, 훼이드리온이 초점을 잡지 못하고 헤매고 있던 눈을 그녀의 검은 눈 동자에 모았다. 그녀의 아름답게 빛나는 미소. 그의 푸른 눈동자가 작게 파도쳤고 그녀 의 검은 눈동자는 깊은 심연처럼 빛났다. "고마워." 두근. 간단한 그 한마디에 멍해지려는 두뇌에 충격이라도 가하려는 듯이 크게 박동 하는 심장이 느껴졌다. 그리고 급속도로 얼굴 쪽에 열이 가해 지는 것을 눈치챈 그는 서둘러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려버리며 나오지도 않는 헛기침을 해댔다. "처, 천만에." 그 모습을 아이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왜 그래?" "아, 아무 것도 아냐." 한쪽 밖에 보이지 않는 볼의 붉은 기가 이상하게도 진해져있는 그가 손 을 휙휙 내젓는 모습은 그녀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그녀는 정리된 하나의 고민을 머리 속에 깊숙이 파묻어 놓고, 자 신의 작은 가방 안에 손을 집어넣어 뒤적거리더니 작은 책자를 꺼내들었 다. 짙은 파란색의 표지가 눈에 띄는 그 책자를 펼치는 그녀. 몇 장을 휙 휙 넘기던 그녀의 손길이 딱 멈춘 곳은, '야드' 평원에 대한 설명이 나와 있는 부분이었다. "팀." 아직 회복되지 않은 얼굴색을 그녀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훼이드리온은 등에 맨 배낭을 만지는 척 하면서 대답했다. "왜?" "다음 목적지가 '아크릴 영지'이지?" "응. 그 전에 야드 평원을 지나야해." 아이의 시선은 야드 평원에 대한 간단한 설명 부분에 고정되어있었다. 그런 그녀의 표정이 어쩐지 심각해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도보로 3일?" "빨리 가면 2일. 그런데 왜?" 저 멀리 펼쳐져 있는 지평선과 그 끝에 흐릿하게 자리잡은 산맥이 보일 지경일 만큼 편평한 대지, 야드 평원 위에 난 길을 따라 걷고 있는 그들. 그런 이유 때문에 아이의 얼굴을 더욱 굳어졌다. 대체 무슨 일인지 알 길이 없는 훼이드리온이 걱정과 의문이 뒤섞인 표 정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뭔데 그래? 거기, 이상한 거라도 적혀있어?" "너, 검술 잘해?" 훼이드리온의 물음에 대한 대답은 완전히 무시해버리고, 느닷없이 그에 게 묻는 아이. 그가 조금은 찌푸린 얼굴로 대답했다. "못한다는 소리는 못 들어봤어." "그럼, 약간은 안심이 되네." "무슨 일이야?" 그가 재차 묻자, 그녀가 책자를 살짝 덮더니 작게 한숨을 쉬었다. 조금 전보다는 많이 완화된 긴장이 엿보이는 얼굴의 그녀가 아직 색이 완전하 게 없어지지 않은 볼을 한 그를 향해 간단하게 입을 열었다. "피말라." 훼이드리온이 되물었다. "피말라?"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피말라." 훼이드리온이 멍하네 앞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이 평원. 피말라. 두 개의 단어가 하나로 합쳐지는 것. 아이가 그의 표정을 이해한다는 듯이 혀를 찼다. 그때, 그가 다시 그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멍한 음성. "그게 뭔데?" 그 후, 아이는 완전히 화난 얼굴로 저녁이 될 때까지 한마디도 입을 열 지 않았다. 훼이드리온이 당황한 음성으로 떠들어댔다. "아이! 내가 무슨 잘못한 거야? 말해 줘! 말해주면 고칠게!"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훼이드리온. 순수한 건지 멍청한 건지 구분할 수 없게된 지경에 이른 그의 상태에 아이가 입술을 질끈 깨물며 속으로 소리쳤다. '바보! 멍청이! 해삼! 말미잘! 촌닭! 그리고 기타 여러 가지 지능이 딸리 는 숱한 생명체와 무생물들!' 결국 아이의 마음 속에서 훼이드리온은 지능 떨어지는 생명체, 혹은 무 생물로 결정되어버렸다. "미, 미안해……." "여행에 대한 계획은 그렇게 잘 짜놓고서는, 그런 기본적인 지식도 갖추 지 않았다니. 말이 돼?" "그, 그러니까 생각도 못했다니까……." "바보!" "윽." 뭐라고 반박할 말이 궁해진 훼이드리온은 그 잘생긴 얼굴을 잔뜩 찌그 러뜨리며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그 옆에서 아이가 크게 코방귀를 뀌 며 고개를 휙 돌려 그의 애처로운 모습을 단번에 무시해버렸다. 한참을 걸어, 여전히 야드 평원의 길이었다. 3일 거리, 빨라도 2일 거리 라는 야드 평원을 가로지르는 것은 정말로 오랜 시간을 요구하는 작업이 아닐 수 없었다. 너무나도 똑같은 풍경의 연속과 질릴 듯이 이어져있는 길. 혼자 이 길을 걸었다면 정말 미쳐버릴 지도 모를 모습들이었다. 그런 점에서 같이 떠들 수 있는 동행이 있다는 점은 참으로 축복 받을 만한 일인 것이다. 오파투스의 첫 번째 영역에는 서산으로 넘어가는 마스트의 눈의 붉은 빛이 그 중앙을 가르며 마지막 광휘를 발하고 있었고, 동쪽의 낮은 하늘 에는 하실루스의 상징이 은빛의 머리를 빼꼼 내보이고 있었다. 그 밑에서 오파투스의 두 번째 영역, 대지 위에 자리잡은 네트릴리아의 고귀한 생명들이 자라있는 모습들을, 이제는 아무런 감흥조차 느끼지 못 하고 바라보고 있는 두 명의 여행자의 모습이 있었다. 아이가 동쪽에 떠오른 은빛 달에 시선을 던지고 속으로 간단히 기도를 마칠 때, 훼이드리온이 입을 열었다. "…이제 야영 준비를 해야겠는데." "그 전에, 아까 전에 내가 가르쳐준 피말라에 대해서 말해봐." 마치 전수해준 가르침을 확인이라도 하는 스승의 표정으로 아이가 그렇 게 말하자, 그가 한숨과 함께 말하기 시작했다. "피말라는 성인 남자쯤 되는 체형을 가진, 지상형 몬스터로서 오징어와 흡사한 모습을 하고 있다. 주 서식지는 야드 평원이며 땅에 굴을 파고 작 은 진동을 느끼면 밖으로 튀어나온다. 주로 밤에 활동하는 야행성이며 특 기는 땅굴 파기. 좋아하는 것은 종족을 망라한 체액이다. 이상 끝." "와아. 다 외웠네?" 아이의 감탄에 훼이드리온은 조금 머쓱해짐을 느끼며 뒷머리를 긁었다. 그녀가 기쁜 표정을 지으며 그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진작에 그렇게 알고 있었으면 내가 화 안내도 되잖아." 핀잔을 주는 투였지만 그녀의 음성은 이미 보통 때처럼 활발하게 변해 있었다. 모든 화가 풀렸다는 것을 알게된 훼이드리온이 "헤헤."라고 작게 웃고는 시선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완전히 해가 지기 전에 야영할 곳을 찾자. 피말라는 진동을 느끼고 달 려드니까 밤 동안 크게 움직이지만 않으면 될 테지." 아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같이 야영지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이내 가까운 곳에 적당한 곳을 발견한 그들은 그곳으로 빠르게 다가가 야영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아, 나 모포 없는데?" 차림새만큼이나 간편하게 여행 준비를 한 아이였기에 모포 같이 큰 물 품을 챙겨올 리가 없었다. 배낭을 한쪽에 치워두고 잔가지를 모으고 있던 훼이드리온이 자신의 배낭을 쳐다보면서 상체를 들었다. "모포는 하나밖에 없는걸." "커?" "큰 편이야." 그의 대답에 아이가 상큼하게 웃었다. "그럼 괜찮네. 같이 덮고 자자." "뭐, 뭐?" 아이의 눈이 멀뚱멀뚱 그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검은 눈에 수많은 물음 표들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뭘 그렇게 놀라? 같이 덮고 자자고." 이 소녀는 자신이 한 얘기가 대체 어떠한 파급 효과를 불러일으킬지 상 상이나 하고 있을까. 여자로서 그런 말을 입에 담았다는 것이 알려졌다가 는 앞으로 치러야할 혼사 문제에 커다란 장애물이 생김은 물론이요, 나아 가 집안 전체의 명예를 더럽히는 일로 치달을 수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 고, 소녀는 훼이드리온의 황당한 표정이 뜻하는 의도가 무엇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는 얼굴을 하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훼이드리온은 생각했다. '역시 얘는 상식이 통하지 않아.' 케롯 마을의 여관에서 일어났던 수많은 사건 중 초기의 사건을 떠올리 며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라면 불가능한 일은 아닌 것이다. "…알았어." 결국 훼이드리온은 그렇게 수긍하고 말았고, 아이는 허락했다는 사실 하 나만으로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그 미소를 보면서 훼이드리온은 '될 대 로 되라.'라고 체념해버리고 말았다. 그만큼 그녀의 미소는 약효가 대단한 것이다. 야영 준비는 빠르게 진행됐다. 모포를 바닥에 깔고 일부는 접어서 덮는 용도로 쓰였다. 그리고 모아놓은 잔가지는 한데 쌓아놓고 아이의 신법을 이용하여 불을 붙였다. 보통은 모닥불을 보고 모여든 야생짐승들을 주의 해야하는 법이지만, 이 야드 평원은 피말라라는 몬스터의 영향 때문인지 티바르나 미치루 같은 작고 온순한 초식동물 외에는 거의 존재를 찾아보 기가 힘들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안심하고 모닥불을 피웠다. '…믿습니다.' 의지로써 발동되는 마법과도 같이 믿음으로 발동되는 신법으로 영원히 꺼지지 않을 모닥불을 피어 올린 아이가 서둘러 모포 속으로 들어왔다. 이미 그 안에 들어가 있던 훼이드리온이 자리를 옮겨주자 생긋 웃으며 모포를 다리 위에 덮는 그녀. 시간은 이미 은빛 달의 공간으로 바뀌어있 었다. 하늘에 떠있는 별들을 침묵 속에서 관찰하고 있던 둘. 아이가 작게 하품 을 했다. 타닥타닥 피어오르는 붉고 노란 모닥불의 은은한 빛 속에서 보 는 그녀의 얼굴에 도취될 뻔한 훼이드리온이 서둘러 딴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피곤하면 자. 내가 보초를 설 테니까." "우웅." 귀엽게 도리질을 치는 그녀가 시선을 돌렸다. "피곤하기는 한데 왠지 자고 싶지는 않아. 정신은 말짱하단 말이야. 그 리고 내가 잠들면 팀이 심심해할 테니까, 싫어." 훼이드리온은 아주 가까운 곳에 위치해있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씨익 웃어버렸다. 자신을 배려해주는 어떤 존재가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어쩐지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그 행복함에 어깨를 통해서 전해지는 그녀 의 온기가 얼마만큼 차지를 하는지는 의문이지만 말이다). 그러다가 문득 그녀가 한가지 제안을 했다. "우리 마스터 카드 게임이나 한번 할까? 그럼 쉽게 잘 수 있을 지도 몰 라." "흐음. 그러고 보니, 만난 이후로 카드 게임을 한 적이 없구나. 좋아, 한 번 할까?" "헤헤, 좋아." 모포 옆에 배낭과 함께 치워둔 자신의 작은 가방을 뒤져 마스터 카드가 든 주머니를 꺼내는 그녀의 얼굴이 모닥불의 빛에 더욱 밝아 보였다. '훗.' 훼이드리온도 자신의 왼쪽에 놓아둔 배낭 위에 칼과 함께 올려져있는 갈색주머니를 가져왔다. 오랜만의 마스터 카드 게임. 어쩐지 너무나도 두 근거리는 가슴이 느껴졌다. 그들은 어쩔 수 없는 마스터 카드 게이머들이었다. --------------------------------------------------------------------- 하아. 힘든 29편이었습니다. 일단 인사드립니다. 팀입니다.(___) 어째, 예상치도 못하게(원래 그런가.;;) 슬럼프라는 괴악한 상황이 찾아와 지 미천한 자까를 괴롭히고 말았습니다. 이젠 좀 회복이 된듯 하군요. 기다려주신분들께, 진심으로 죄송하다는 말을 올립니다. 추천해주신분들의 힘이 컸드랬죠.(^^^) ATTERST님. LUCY73님. PRIMEJIN님. WJDDHRMS님 ATTERST님은 약간 친분이 있으신 분이고요. LUCY73님은 전에 메일도 보내주 셨더랬죠. 28편이었는데, 감사드리지 못해서 이 자리를 빌어서 감사드립니다. 추천해주신 모든 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슬럼프라는 것이. 정말 괴악한 것이죠. 전에 아틀란티스를 쓸 때도 한번 흐 름이 끊기더니 결국 회복하지 못하고 그만두고 말았죠. 지금 리메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다음 연재는 리메 아틀란티스가 될 듯하군요. 그 다 음은 아틀란티스2.(2도 있어요. 씨익.;) 그리고 그 다음도... 비밀 프로젝트 가 가동중입니다. 씨익. 앞으로도 팀의 작품, 많이 봐주세요. 그럼. 슬럼프 탈출을 지향하는 팀의 발악은 계속 될 것입니다. 분툿!(>.<) 모두들. 평안하시길.(___) 어둠의 기사 DARK KNIGHT TEAM... P.S 추천 감상 비평. 역시나 받고 있습죠. 환영입니다.(>.<) P.S 2 그러고 보니. 다음 편이 30이군요. 하하.; 번 호 : 11555 / 11581 등록일 : 2000년 08월 23일 18:23 등록자 : 암음기사 조 회 : 77 건 제 목 : [카드 게임 판타지]『 카드 마스터(Card Master) 』#030 카드 게임 판타지(Card Game Fantasy) 카드 마스터(Card Master) 30. 타닥타닥. 조용히 소리를 내며 타 들어가는 모닥불의 향기도 익숙해질 무렵, 그들 은 모포 하나를 덮고 딱 붙어 앉아서 서로의 카드가 상대방에서 보여지 지 않도록 경계하며 게임을 진행시켜나갔다. 솔직히 아이의 실력을 조금은 얕봤던 훼이드리온이었지만, 예상외로 그 녀의 실력에 탄복하고 놀라면서 제대로 정신을 차려 대응했고, 그녀도 그 의 실력이 만만치 않음을 직시하고는 주의를 기울여 카드를 움직였다. 밤은 깊어가고 주위는 고요했다. 밤하늘의 빛나는 건 별과 달, 그들의 은빛 반짝임이 은은하게 땅 위에 떨구어지고 있을 때, 문득 훼이드리온이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고개를 평원의 어느 곳으로 돌렸다. "하암……." 작은 하품 소리가 그의 귀를 살짝 두드리자, 의미 없는 시선을 평원으로 보내고 있던 그가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이가 처음보다 숫자가 많 이 적어진 든 카드 중에서 몇 장을 막 뽑아내고 있었다. "검성 카드와 글로리 프리스트 카드로 공격." 가벼운 유흥으로 시작한 게임이었기에 그렇게 긴장감이 도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평소처럼 비술 남발도 일어나지 않았고 그저 조용조용 게임을 진행시키던 중이라서 그런지 그녀의 목소리가 묘하게 피곤해 보였다. "적기사 카드 페어와 백기사 카드 페어로 반격." 아이의 공격을 막고 몇 장밖에 남지 않은 든 카드에서 네 장의 카드를 꺼내 반격을 가한 그가 걱정이 묻어나는 어투로 그녀에게 넌지시 말했다. "피곤하면 이만하고 자. 하루종일 걸어서 피곤할 텐데." "우웅… 하루종일 걸은 건, 팀도 마찬가지잖아." 훼이드리온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카드를 스스로 정리하기 시작 했다. 그녀도 더 버틸 재간은 없었는지 다시 한번 하품을 터뜨리고 눈을 비볐다. "난 남자잖아. 그리고 어릴 적부터 수련으로 체력은 많이 길러뒀어. 내 일도 많이 걸어야하니까, 얼른 자." 따뜻한 말투였다. 아이는 훼이드리온의 말에서 느껴지는 그 따뜻함을 읽 어내고 왠지 안심이 되는 마음으로 미소지었다. 붉은 모닥불의 빛이 그녀 의 미소에 반사되어 더욱 밝아졌다. 훼이드리온이 그녀의 카드를 모두 회수해 정리하여 건네주자, 그녀는 주 머니에 그것을 넣고 가방 안에 다시 밀어 넣었다. 그리고 또 다시 밀려나 오는 하품을 참지 못하고 입을 손으로 가렸다. "먼저 잘게, 그럼." "응. 잘 자." 피로로 인해 풀린 눈으로 끝까지 버티다가 기어코 모포 속으로 기어 들 어가는 아이를 지그시 내려다보면서 훼이드리온이 빙긋이 웃었다. 그 모 습이 어쩐지 꽤나 귀여워 보이는 그녀였다. 자신 쪽으로 몸을 돌리고 두 손을 모아 머리를 받힌 채 웅크린 자세로 잠에 금방 빠져버리는 그녀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에는 따뜻함이 넘쳐 났다. 새삼스럽게 두근거리며 박동하기 시작하는 심장을 느끼며 훼이드리 온은 천천히 손을 들었다. '…….' 모닥불이 춤을 추는 소리밖에는 없는 정적의 공간 속에서 아무도 방해 하지 못할 성스러운 의식을 행하는 것과도 같은 움직임으로 그는 아이의 얼굴로 넘어와 있는 그녀의 짙은 검은색의 머리카락을 귀 뒤쪽으로 넘겨 주었다. 모닥불의 영향인지 홍조를 띄고 있는 듯한 생기 있는 볼. 앙 다 물어진 작은 입술이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훼이드리온은 곧 조심스레 자세를 바로잡았다. 더 이상 무슨 짓이라도 했다가는 아무래도 큰일날 일을 벌일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기 때문이었다. '맘을 잡자. 맘을 잡자.' 두근거리는 심장도 곧 진정이 될 것이다. 그러면 예전처럼 그녀를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이건 모닥불과 달빛이 어우러져 만들어진 하나의 마법일 뿐이다. 그 마 법에 잠시 도취된 것뿐이다. 곧 괜찮아질 것이다.' 한 나라의 태자로서, 그리고 앞으로 혼사라는 큰일을 앞둔 남자로서 후 회할 일은 남기지 말아야했다. 비록 지금은 작은 감정일지라도 어떻게 번 져버릴 지도 모를 일이니까 말이다. 그는 고개를 크게 도리질 쳤다. 심장 도 서서히 박동을 작게, 천천히, 예전과 같은 상태로 돌리고 있었다. 새근새근. 고요하게 잠에 빠진 그녀는 그의 마음도 모르고, 그저 평안해 보였다. 그녀의 얼굴에는 아침에 당했던 숙취의 피로도, 정체 모를 괴한 에게 당한 훼이드리온의 대한 걱정도, 하루종일 걸어서 피로한 신체의 고 통도, 아무 것도 나타나있지 않았다. 언제나 그녀의 행동과도 같이 모든 것을 떨쳐버리고 평화롭게 수면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훼이드리온은 다시 한번 그녀의 얼굴을 향해 시선을 내렸다가, 이번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실루스의 상징이 약간 구름에 가려진 채로 은 빛의 사랑을 온 세상에 뿌려대고 있었다. 그 빛을 잠시동안 느끼며 그는 생각했다. '당신이 좋아하는 운명의 장난. 전 사양하겠습니다.' 복잡한 사정과 함께 그는 뇌까렸다. 자신에게 아이라는 소녀의 존재는 우연하게도 같은 여행을 가게된 동료, 동행일 뿐이라고. 그는 그렇게 하실루스의 장난을 거부하고 싶었다. "헉. 헉. 빠, 빨리!" "가, 같이 가! 으아아악!" "파, 파쉬온!" 이번엔 뒤에서 따라오던 파쉬온 자식이 몬스터에게 당하고 말았다. 그 기다란 촉수에 휘말려서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 제길. 끔찍해서 더 이상 볼 수가 없다. 무작정 앞으로 뛰었다. 이 드넓은 평원은 대체 언제 끝나는 것인지. 그리고, 저 오징어 같이 생긴 몬스터의 추격은 대체 언제 쯤에나 벗어날 수 있을지. 휘이익. 툭. 뭔가가 뒤에서 날아왔다. 저만치 눈앞에 떨어지는 동그란 물체. 난 금방 눈을 감아버리고 그것을 지나쳐 뛴다. 마지막 감기 전에 내 동공에 잡힌 그 물체는. 제기랄. 주황색 머리가 예쁘다고 마을 처녀들에게 항상 호감을 사던 지 엔 자식의 고통에 질린 머리였다. 붉은 색의 피가 범벅이 되어버려 더 없 이 끔찍한 머리통. "으아아아악!" 괴성이 터져 나옴을 막을 수가 없었다. 눈에서 흐르는 이 뜨거운 액체도 막을 수가 없었다. 앞으로 눈물은 없다고 맹세했는데. 어머님께서 돌아가 시던 그 날. 오열하면 그렇게 맹세했는데! 눈물을 닦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저주받을 몬스터, 이름이 피말라였던가. 그렇게 주의를 기울였건만. 저 자식이 우리 일행의 숫자를 반으로 줄여버 렸다. 전체적으로 커다란 오징어 같이 생겼다. 그런 사치스러운 어류를 내가 여러 번 본 적은 없지만, 확실히 모양새는 기억하고 있다. 10개의 다리 역할을 하는 촉수. 그 중에 두 개는 팔의 기능을 하나보다. 기다랗고 허 연 고무 같은 모양을 하고 쭉쭉 잘도 늘어나는 촉수를 이리저리 휘둘러 우리 일행의 아무나 집어간다. 그리고 다리 밑으로 쑥 집어넣으면, 남는 건 완전히 말라비틀어진 시체. 온몸의 체액을 완전히 다 빨아먹는 녀석의 습성 때문에 저 몬스터의 이름이 '피말라'로 붙은 것이다. 젠장. 생긴 건 오징어면서 육상형이라서 그런지 빠르기도 더럽게 빠르 다. 씨발! "서둘러 도망쳐! 곧 마을에 들어설 거야!" 나의 입은 그렇게 외쳤지만, 글쎄. 정말 곧 마을에 도달할 수 있을 지는 미지수다. 정해진 길에서 벗어나 이리저리 도망친지 오래돼서 방향감각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마냥 앞으로 달릴 수밖에 별 다른 도리가 없다. 무기도 없는 우리 일행이 저런 몬스터를 당해낼 리가 없으니까. 정말, 이럴 줄 알았으면 영지에서 도망치는 게 아니었다. 아무리 영주의 억압이 참기 힘들었다고는 하지만, 다른 마을에 도착하기도 전에 몬스터 에게 당해버리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을 텐데 말이다. 아니면 차라리 서쪽 으로 방향을 잡는 거였는데. 휘이이익! "위험해, 파커슨!" 뭐, 나? 젠장! 무언가가 내 귀를 스치고 지나갔다. 짜릿한 고통과 함께 튀어 오르는 붉 은 피. 오른쪽 귓불이 완전 날아가 버린 건가. "크윽!" 숨도 쉴 수 없을 만큼 끓어오르는 심장은 아예 터질 것 같았다. 어느 곳 이 탈출구인가. 어디로 가야지 저 빌어먹을 오징어 자식의 촉수에서 벗어 날 수 있단 말인가. 끓어오르는 분노와 열. 그 두 가지로 인해 머리를 새하얘져가고 고통조 차 이젠 무감각하다. 그저 달릴 뿐. 뒤에서 들려오는 요란한 소음마저 무 시한 채 그저 앞으로 달릴 뿐이다. 다시 뒤쪽으로 시선을 돌려보았다. 우리 마을 청년회에 중에서 가장 크 다는 내 키 만한 높이에 커다란 두 개의 눈이 달리고 그 밑으로 달린 몸 통은 절묘하게 흐느적거리면서 땅 위를 긴 촉수들로 달려오고 있는 몬스 터, 피말라. 그 앞에는 나같이 죽어라 달리는 녀석들밖에는 보이지 않았 다. 마을에서 끌고 왔던 마차도, 각자의 등에 짊어졌던 짐들도 사라진지 오래다. 이젠 이 몸뚱이마저도 벗어 던지고 싶을 지경이다. "헉, 헉." 땀이 흐른다. 아니, 눈물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알 수 없는 그 액체는 얼굴선을 따라 흘러 입술을 살짝 축이더니 이내 침과 함께 바닥으로 떨 어져 내렸다. 짧은 여행이다. 나도, 저 물방울처럼 이 나이에 짧은 인생을 마감하는 것은 아닐까. 그것도, 저 오징어 같이 생긴 빌어먹을 몬스터에게 피를 빨려서! 씨이이이이바아아아알! "으아아아아아악! 크아아아아!" "뛰기나 해, 이 새꺄!" 무슨 상관이야! 이 지랄 맞을 상황에 소리라도 지르지 않으면 어떻게 버 티라고! 공기를 가르고, 정말 죽도록 뛰고 있다. 이틀 동안 열심히 걸어왔으니, 그리고 이만큼이나 뛰었으니, 그럼 곧 마을이 나올 것이다. 케롯 마을이 던가? 케롯 마을에 경비대 정도는 있겠지! 아무리 저 지랄 맞을 몬스터라 도 경비대에게는 어림도 없을 거다! 으핫핫! 피말라! 네 녀석은 너에게 안식을 줄 존재들을 그렇게 죽도록 쫓아오고 있는 거야! 으핫핫! 이제 내가 뭘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정말, 새하얗다. 눈은 뜨고 있는 건지, 숨은 쉬고 있는 건지, 다리는 제대로 움직이고 있는 건지, 도대체 구분할 수 있는 감각이 아무 것도 없다. 모두 감각을 이미 오래 전에 상 실한 듯한, 그런 허전하고 허탈한 느낌이 온몸을 지배한다. 몸이 무겁다. 점점 꼬꾸라진다. 땅이 다가온다. 넘어지는 걸까? 어헛. 그 래도 지구력에는 굉장히 자신 있는 편이었는데. 이 파커슨 님도 이걸로 끝이란 말인가? 아직 케롯 마을 근처에도 못 왔는데. 세리나에게 사랑 고 백도 못했는데! "…세리나아아아아아!" 넘어질 수 없다! 대지를 굳건히 즈려밟고 있던 다리에 또 다시 힘을 가했다. 근육아! 파 열해라! 차라리 파열해버려라! 그럼 이 고통 속에서 해방될 테니! 그러기 전에는! 이 주인님은 너에게 가혹한 형벌을 계속 가하겠다!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달리자, 달리다 죽어버리자. 세리나의 연두색의 아름다운 눈동자가 생각나기 전에 모든 것을 태워버리자! 나의 몸 속 깊 은 곳에 담긴 단 하나의 감정까지도! "세리나아아아!" 너의 사랑 파커슨은! 이렇게 쉽게 죽지 않아! 꼭! 꼭! 너에게 돌아가겠 다! 츄아아아악! 위험신호가 울려 퍼졌다. 뒤에서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 본능적 으로 느껴졌다. 또 그 촉수 공격이냐! 지겹다, 이제! 오른쪽으로 몸을 날렸다. 화끈한 고통이 왼쪽 어깨를 후벼팠다. 제길! 날 카롭기도 하군! "커헉!" 어깨를 감싸쥐었다. 따뜻한 감각이 손을 타고 두뇌로 번져왔다. 나의 피, 나의 끓는 피. 아직 따뜻하다. 난 죽지 않았다. 고로, 난 계속 달린다! "으아아아아아아!" 고요함이 흐른다는 표현은 아마도 지금 이런 상황에서 써야할 것 같다, 라고 훼이드리온은 생각해보았다. 내려앉은 어둠은 하늘과 대지를 가볍게 포옹하고 있었고, 그 속에서 모 든 생물과 무생물들은 평화로운 안식에 젖어들었다. 다시는 없을 것 같은 고요한 분위기에 그는 살며시 미소를 떠올렸다. 이런 정적도 오랜만이었다. 어쩐지 왕성 안의 조용한 밤을 생각나게 해 서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도 같았지만, 참을 만했다. 무엇보다 지금은 혼 자가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이런 정적 속에서 아이는 편하게 자고 있었다. 가끔 뒤척이면서 훼이드 리온 쪽으로 몸을 바싹 붙여와 그를 당혹스럽게도 만들었지만, 그렇게 싫 지는 않아서 가만히 그 자리를 지켰다. 그럼 그녀는 아예 볼을 부비적대 기도 하면서 규칙적인 숨을 작게 몰아쉬었다. 타닥타닥. 정적을 유일하게 방해하는 존재는 바로 모닥불이었다. 잔가지를 모아서 아이의 신법으로 불을 붙여 만든 작은 모닥불. 두 사람의 시야를 밝히기 에는 더없이 부족함이 없는 그것을 훼이드리온은 지그시 바라보았다. 너울너울 흔들리는 모닥불의 불길은 어쩐지 불안하기도 했지만 결코 꺼 지지는 않았다. '역시 신법인가.' 한가지 의문이 들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바로는 마법적인 불은 보통 생 각할 수 있는 연소과정을 정상적으로 거치지 않는다고 했다. 산소 대신 세상에 퍼져있는 마력으로 그 불길을 유지한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신법 은 어떻게 저 불을 유지하는 것일까. 마법은 의지로 실현되고, 신법은 믿음으로 실현된다는 것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마법은 마력이라는 에너지가 있지만, 신법은 특별한 에너지가 있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한 것이다. '믿음을 태우는 걸까.' 그렇게 가볍게 생각을 떠올려보다가 훗, 하고 웃어버렸다. 너무나 조용 하고 할 짓이 없어서인지 별 생각을 다한다고 자신에게 핀잔을 주었다. 그만큼이나 조용한 밤이었다. '잠시 일어나 볼까.' 그냥 가만히 앉아있는 것도 불편해서 일어나려 했다. 잠도 자지 않는 판 국에 그렇게 편안히 앉아있는 것도 이상해 보이기도 했고 말이다. 모포를 살며시 들어서 다리 하나를 밖으로 꺼내고, 이어서 남은 다리를 꺼내면서 몸도 살며시 밖으로 움직였다. 그의 다리 위에 올라가 있던 아 이의 팔이 그의 움직임에 따라 스르륵 떨어져 내렸다. 그 순간, 그녀가 깰까봐 심장이 두 배는 확장되어버린 그는 그녀가 작은 뒤척임만 일으키 고 계속 잠을 자고 있자, 안도의 한숨과 함께 완벽하게 몸을 일으켰다. 모포를 정리하고 완벽하게 일어서자, 허리 쪽이 뻐근했다. 작게 인상을 찌푸려보고 허리를 툭툭 쳐서 고통을 없앴다. 허리를 치는 그 소리가 어 둠 속으로 사르륵 녹아 들어갔다. …아아아. "응?" 고요한 적막을 깨트리는 또 하나의 방해꾼. 그 방해꾼의 등장에 같은 역 할을 하고 있던 모닥불이 기쁜 한번 강하게 흔들렸다. 그러자 그 소리가 다시 한번 그의 귀를 강타했다. "…아아아아!" 사람의 목소리, 분명히 남자의 목소리였다. "뭐지?" 직감적으로 위기를 감지한 그는 서둘러 배낭 위의 칼을 집어들었다. 찰 캉 하는 소리와 함께 검신이 한번 흔들렸고, 그 날카로운 소리에 곤하게 자고 있던 아이가 살며시 눈을 떴다. "…으음, 뭐야……?" 여전히 피로한 기색이 묻어나는 그녀의 물음. 훼이드리온이 고개를 두리 번거리다가 자신들의 뒤쪽에 시선을 고정시키더니 그녀에게 소리쳤다. "아이! 일어나!" "무, 무슨 일이야?" 지금까지 언성을 높인 적이 한번도 없었던 그였기에 아이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사태가 뭔가 심상치 않다는 것도 그 즉시 알아챌 수 있었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서 그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곳으로 고개 를 돌렸다. 은빛의 흐릿한 달빛 사이로, 그들이 짐작하고 있는 사태가 그들을 향해 거세게 돌진하고 있었다. 하실루스의 신관답게 밤눈이 밝은 그녀가 뭔가를 발견하고 전방으로 손 가락을 뻗었다. 그리고 소리쳤다. "피말라야! 피말라가 웬 사람들을 쫓고 있어!" "뭐?" 잠의 기운은 완전하게 빠져나간 아이의 또랑또랑한 외침에 훼이드리온 이 칼을 뽑아들었다. 달빛 속에서도 강하게 빛나는 하얀 검신이 모습을 드러내었고 잠깐의 반짝임이 허공에 하얀 실을 그었다. "위험해! 저 사람, 아주 위태하다고!" "도와줘야겠어! 아이! 신법 가능해?" "물론이야! 그런데 어떻게 하려고?" 그녀의 강한 물음에서 당혹한 감정이 묻어났다. 그가 애타게 말했다. "나도 몰라! 하지만 저대로 둘 수는 없어!" 훼이드리온이 검을 쥔 손에 강하게 힘을 주더니 앞으로 무작정 달려나 갔다. 목표는 당연히 피말라. 아이가 당황하여 뒤따라 달리며 소리쳤다. "바보야! 뭘 어떻게 하려고!" "우선 저쪽에 빛이나 밝혀 줘! 가능해?" 아이는 하늘 위에 두둥실 떠있는 은색의 달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녀 의 검은 눈동자가 한없이 빛나 보였다. '…믿는다고요!' 신앙심의 어처구니없는 표현에도 불구하고 하실루스는 그녀의 믿음에 반응했다. 그녀가 원하는 환한 빛을 그녀에게 내려준 것이다. 아이의 표정이 환해졌을 때, 그와 동시에 어둠 속에서 갑자기 환한 빛이 터져 나왔다. 공중에 마법의 등이라도 생긴 듯이 갑자기 환해지는 그곳에 서 그들이 감지한 위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런!" 약간은 붉은 기가 도는 오징어 모양을 한 몬스터 한 마리가 다섯 명의 청년들의 뒤를 무지막지하게 쫓고 있었고, 몬스터의 기다란 촉수를 이리 저리 피하면서 청년들이 죽을힘을 다해 돌진해오고 있었다. 멀리서 그곳 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둘에게까지 그 피를 말리는 위기감이 느껴질 정 도로 사태는 긴급했다. "일단 저 피말라의 진로를 막아야해!" 훼이드리온은 그렇게 외치면서 안타까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쓸 수 있는 것은 검술뿐이다. 검술은 무슨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근접전 인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원거리로 떨어져있으면 마법말고는 소용이 없 는 것이다. 검을 들고 있는 손아귀에 더욱 더 강하게 힘이 들어갔다. 그때, 아이가 뒤에서 외쳤다. "걱정 마! 내가 막아볼게!" "신법으로 가능해?" '신법으로 공격이 가능하단 말인가?' 그가 의문을 제기하자, 그녀가 강하게 소리쳤다. "믿음으로 실현된다! 그게 신법이야!" 아이는 즉시 손을 모아 간절하게 기도했다. 자신이 믿고 따르는 달과 운 명의 여신 하실루스에게. 저 하늘에 떠있는 하실루스의 상징을 향해서 간 절한 신앙을 표현했다. '믿습니다!' 화아악! 간절한 그녀의 믿음은 신법을 실현시켰다. "쿠와아악!" 괴상한 울부짖음을 남기며 피말라가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아이가 뛸 듯이 기뻐하며 손가락으로 피말라의 앞을 가리켰다. "성공했어! 처음이야!" "잘했어!" 훼이드리온이 다리에 더욱 힘을 넣고 달려나가며 그녀를 칭찬했다. 신법은 공중에 거대한 불덩이를 실현시켰다. 그리고 그 불덩이는 여지없 이 허공을 갈라 날아가 피말라의 몸통에 직격한 것이다. 사방으로 터지는 불줄기가 멋있게 허공을 수놓으면서 주위가 확 밝아지자, 피말라는 돌진 하던 그 기세 그대로 뒤쪽으로 밀려난 것이다. 거기다 타격도 상당히 큰 모양이었다. "우허허헛?" 피말라에게 쫓기고 있던 청년들도 갑작스런 불덩이에 놀라 넘어질 뻔한 위기를 감수하면서 둘을 향해서 달려왔다. 한 명이 황당한 듯이 뒤를 바 라보면서 소리쳤다. "갑자기 무슨 일이야!" 그의 외침이 훼이드리온의 귀에 생생하게 들릴 정도로 그들의 거리는 가까워졌다. 훼이드리온이 먼저 소리쳤다. "괜찮으세요?" 신법으로 탄생시킨 빛 속에서 발견한 그 청년의 모습은 말이 아니었다. 오른쪽 귀에서는 연신 피가 흘러내려 목을 더럽히고 있었고, 손으로 감싸 쥔 왼쪽 어깨에서도 많은 출혈이 계속되고 있었다. 게다가 땀과 피가 범 벅이 되어서, 금방 전쟁이라도 치르고 온 사람의 몰골을 하고 있었던 것 이다. 그가 달려오던 속도를 천천히 늦추더니 이윽고 멈춰 서서 훼이드리온을 쳐다보았다. 여전히 그의 가슴을 요란하게 들썩거리고 있었다. "네가, 헉, 한 거냐?" "와악! 저 자식 아직 살아있어!" 훼이드리온이 질문에 채 대답하기도 전에 다른 청년의 목소리가 어둠을 갈랐다. 뒤따라 뛰어온 아이가 피말라가 일어서고 있는 곳을 쳐다보더니 다시 한번 손을 가슴 앞에 모았다. '믿어요! 이번엔 더 큰 거!' 화르르륵! "우와아!" 방금 전의 불덩이는 장난이었다는 듯이 피말라의 머리 바로 위에 거대 한 불덩이가 탄생했다. 이글거리며 피어오르는 불덩이는 그대로 피말라를 향해서 낙하했고, 곧 거대한 폭발이 공간을 뒤흔들었다. 쿠가강! "…이번엔 정말 끝이겠군." 훼이드리온의 앞에 서있던 청년이 솟아오르는 불길을 감상하면서 한마 디 던졌다. 그렇게 자신들을 고생하게 만든 몬스터 치고는 끝이 꽤나 간 단해서인지 그의 말에서 왠지 모를 허탈함이 느껴졌다. 갑작스런 달리기에 놀란 신체를 진정시키며 훼이드리온이 아이의 어깨 에 손을 올렸다. "수고했어." "헤헤, 수고는 뭘." 그녀가 혀를 내보이며 생긋 웃다가 곧 표정을 바꾸고 청년을 쳐다보았 다. 청년은 사방으로 흩어진 자신의 일행을 손짓으로 불러들이고 있었다. "괜찮아요, 상처는?" 자신 쪽으로 다가오는 일행에게서 시선을 뗀 그가 걱정을 담은 눈길을 자신에게 보내고 있는 아이를 쳐다보면서 어깨를 가볍게 문질렀다. "괜찮을 리가 없지. 많이 아파." 그래도 표정이 그렇게 어두워 보이지는 않았다. 훼이드리온이 다시 한번 아이를 쳐다보았다. "치료할 수 있겠어?" "믿으면 된다니까 그러네." 핀잔하는 투로 생긋 웃어 보인 그녀는 그 청년의 일행이 모두 모이자, 한 명씩 상처를 치료해주기 시작했다. 그녀의 믿음으로 발현된 하얀빛이 그녀의 손에서 뻗어 나와 상처를 어루만지면 모두 고통이 빠져나간 시원 한 표정으로 점점 바뀌어져갔다. 왼쪽 어깨가 완전히 관통된 그 청년의 상처까지 깔끔하게 치료를 한 아이가 이마에 맺힌 땀을 손으로 훔쳐내고 끝냈다는 의미로 훼이드리온에게 미소를 보냈다. "수고했어." "흠, 조금 힘든걸." "쉬고 있어." 아이의 신법으로 말끔하게 치료된 자신들의 신체를 내려다보며 눈을 둥 그렇게 뜨고 있는 다섯 명의 청년들과 같이 자리에 주저앉는 훼이드리온. 그리고 그의 옆에 앉는 아이. 청년들의 시선이 그 둘에게로 즉시 모아졌 다. 훼이드리온과 가장 처음 만난 그 청년이 인사했다. "고맙다, 얘들아. 여기서 이런 도움을 받게 될 줄은 몰랐군." 짙은 고동색의 짧은 머리카락과 뺨을 가르는 거대한 상처가 굉장히 인 상적인 그 사내가 호탕하게 웃어댔다. 방금 그런 큰일을 당하고 나서 나 오는 반응으로서는 뭔가 어색한 것도 사실이었지만, 나머지 청년들도 비 슷하게 그저 웃고 있었다. 훼이드리온은 멋쩍은 듯이 뒷머리를 긁어보았 다. 열나게 달려와서인지 온몸의 체력이 바닥을 기고 있는 다섯 명의 청년 들이 피로한 얼굴로 각각 인사를 했다. 훼이드리온과 아이도 자신의 이름 을 밝히자, 대번에 그들의 사이가 친밀해져버렸다. 그것은 순전히 파커슨 이라는 이름을 가진 상처가 인상적인 남자의 특유의 붙임성 좋은 성격과 아이의 활발한 성격 때문이었다. "허어, 일단 너희들이 노숙하고 있는 곳으로 데려다줄 테냐? 저 뒤에 널 브러진 저 몬스터 녀석이 타는 냄새가 조금 역겹구만." "어허, 찬성이야, 파커슨." 파커슨의 일행 중의 한 명인 트카르라는 이름을 가진 사내가 그의 의견 에 동감했다. 사실 10명을 넘던 인원에서 이렇게 다섯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에 가장 슬퍼하던 그였지만, 어느새 파커슨의 분위기에 휩쓸리고 있 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로서도 그런 기억을 서둘러 지워버리고 싶었다. 파커슨은 호탕하게 웃었다. "으핫핫! 그래, 움직이자고, 친구들!" 뻑적지근한 근육과 관절을 다시 한번 움직여 몸을 일으키는 그들의 모 습이 상당히 힘들어 보였다. 훼이드리온은 그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 까, 내심 짐작이 되어서 마음이 씁쓸해졌다. 그리고 동시에 한가지 의문 이 들었다. '왜, 아무도 없는 이런 평야에서 그들이 피말라에게 쫓기고 있었던 것일 까.' 스스로는 풀 수 없는 의문이었기에 나중에 꼭 물어보자고 생각하고 아 이의 손을 잡아 같이 일어섰다. 구르르르릉. '!' 어떤 이질적인 존재에 대한 위기를 알리는 훼이드리온의 예리한 감각. 순식간의 주위의 공기가 얼어붙는 듯한 차가움이 그들의 공간을 장악해 가기 시작했다. 온몸을 짓누르는 무거운 요기. 그 요사스러운 기운이 그 들의 얼굴에서 웃음이라는 표정을 싹 지워버리게 만들었다. 대신 긴장감 이라는 감정만이 그들의 얼굴에 떠올랐다. "젠장. 우린 지금 걸을 힘도 부족하다고." 파커슨이 입술을 잘근 씹으며 토로했다. 불안한 무엇인가가 그들을 엄습 하고 있었다. 훼이드리온 옆에 서있던 아이가 흔들리는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중 얼거렸다. "…하실루스 님은 밤에 치는 장난을 좋아해." 그 말 그대로, 달과 운명의 여신의 고약한 장난은 그들의 분위기를 한순 간에 차갑게 얼어붙게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퍽! "크아악!" "쉐인!" 아직 허공에 떠올라있는 하얀빛의 구가 비추는 장면은 너무나도 끔찍했 다. 땅 속에서 솟아오른 알 수 없는 어떤 붉은 기둥이 쉐인이라는 사내의 가슴을 그대로 뚫고 공중으로 들어버린 것이다. 훼이드리온은 서둘러 아 이의 시야를 가려버렸다. 그녀도 반응이나 하듯이 그의 몸 뒤로 숨어버렸 다. "제길, 피말라다! 한 마리가 주위에 숨어있었어!" 그 말에 반응이라도 하듯이 쉐인의 피가 떨어지는 땅이 균열을 일으키 며 갈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세모난 모양의 무엇인가가 천천히 땅을 뚫고 올라오고 있었다. 그것은 그들에게 절망이라는 이름으로 다가 오기에 충분한, 육상형 거대 오징어 몬스터 피말라였다. "칫!" 훼이드리온이 칼을 가슴 앞으로 들어올렸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검신을 뽑아 막 솟아오르는 중인 피말라의 머리부분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빛나 는 반짝임이 허공을 가르며 피말라의 머리를 향해 돌진했다. -------------------------------------------------------------------- 하아. 슬럼프에서 벗어나여 발버둥 치고 있는 팀군입니다. 리메를 하게 되다면, 가장 먼저 고치고 싶은 30편. 꺄아. 힘들었어요.;; 으흠. 역시나 추천해주신분들의 명단입나다.(>.<) MARINIEL님. SIPHLIEN님. 다물열제님. 모두 감사드립니다. 특히 SIPHLIEN님이 적어주신 평은, 정말 깊이 새겨듣 겠습니다. (___) 으흠. 이틀 연재로 회복하는 것이 쉽지가 않군요. 오늘 올리고 내일 올리 면 어떻게든 연재 갯수는 잡아질 것 같지만, 중얼중얼, 조금 힘들군요. 이제 곧 방학도 끝나는데 그전에 3장은 끝내야죠. 두편만 더올리면 3장도 끝나게 되니까요. 아하하. 분투입니다. 그나저나. 심사결과는 언제 나올까나요. 두근두근거리는 심장이 언제쯤 진 정이 될지. 아하... 떨리는 것입니다, 그려. 하아. 그럼 팀군은 이만 가보겠습니다. 31편도 곧, 빠른 시일 내로 회복해 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럼.(___)(>.<) 어둠의 기사 DARK KNIGHT TEAM... P.S 추천 감상 비평. 환영이에요, 환영.(>.<) P.S 2 그리고. 카드 마스터, 가 원제입니다. 제발 카드마스터,로 붙여서 읽지 마세요...(ㅠㅠㅠ) 번 호 : 11741 / 11749 등록일 : 2000년 08월 26일 22:21 등록자 : 암음기사 조 회 : 21 건 제 목 : [카드 게임 판타지]『 카드 마스터(Card Master) 』#031 카드 게임 판타지(Card Game Fantasy) 카드 마스터(Card Master) 31. "하앗!" 날카로운 기합이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오고 모두 피말라의 머리를 꿰뚫 는 그의 칼을 떠올렸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의 착각이었다는 것이 밝혀지 기까지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훼이드리온의 칼이 직선으로 피말라의 머리를 향해 쇄도해 들어갔다. 바 위라도 한번에 깨부술 듯한 위력과 그에 걸맞는 파공음이 공간을 두드렸 다. 그의 칼이 땅을 갈라버리며 삐죽 솟아 나오고 있는 세모난 머리에서 부터 불과 1엘리치(=1m) 남지 않은 곳까지 날아왔을 때. "이런!" 갑자기 그의 칼이 흰 곡선을 그리며 아래로 뻗어 내려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무언가를 강하게 베어버리며 옆으로 몸을 날렸다. "뭐야?" 저 뒤쪽으로 일단 피신하고 상황을 지켜보려던 아이와 파커슨 일행은 갑자기 훼이드리온이 옆으로 몸을 던지자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어졌다. 그때, 파커슨이 무언가를 발견하고 소리쳤다. "저, 저기! 피말라의 촉수가 또 솟아 나왔어!" 그의 외침에 멀리 도망가고 있던 일동의 시선이 피말라의 앞, 훼이드리 온이 달려들던 그곳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땅을 뚫고 꿈틀꿈틀 대고 있는 또 하나의 붉은 촉수가 솟아올라와 있었다. 그리고 방금 훼이드리온의 공 격에 당했는지 약간 피를 흘리고 있었는데, 그 피가 몬스터라서 그런지 녹색이었다. 아이가 인상을 찡그렸다. "으으, 피가 녹색이잖아?" 파커슨도 덩달아 고개를 흔들었다. "왠지 엄청 악취가 심한 거 같아." "동감이에요." 어쩐지 모르게 동질감이 생기는 그들이었지만. 지금은 그렇게 여유를 부 리고 있을 상황이 아닌 것이다. 갑작스런 피말라의 공격에 칼을 움직여 촉수를 베어버리려고 한 훼이드리온이었지만, 본능적으로 옆으로 피하는 동시에 휘둘렀기 때문에 힘이 제대로 실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결국 작은 상처를 남기는 것으로 첫 공격을 마무리지어야만 했다. 다시 몸을 일으켜 피말라를 향해 칼을 세운 훼이드리온이 아이를 향해 크게 소리쳤다. "어서, 그 사람들을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키고! 나 좀 도와줘!" "아, 알았어!" 다급한 그의 목소리를 느낀 것인지, 아이의 움직임 빨라졌다. 사실 지금 이러는 중에도 피말라의 몸은 계속 땅을 뚫고 올라오고 있는 중이라, 여 유를 부리고 있는 그들이 이질적인 것이다. 체력적으로 엄청난 해를 입은 파커슨 일행들을 피말라에게서 멀리 떨어지게 하기 위해 아이가 훼이드 리온과 자신의 야영 장소로 데리고 가려고 하는데. 파커슨이 발악했다. "난 아직 싸울 수 있다고!" 화가 난 아이가 빽 소리쳤다. "헛소리하지 말아요! 무기도 없고, 거기다 힘 빠져서 다리까지 떨고 있 는 사람이 무슨 말이에요! 저기 모닥불 있는 곳으로 피하기나 해요!" "그런 건 상관없어! 자고로 사나이란, 열혈과 근성이야!" 어두운 야드 평원에 파커슨의 통쾌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제대로 걷 지도 못해서 이리 꼬이고 저리 꼬이고 있는 그의 다리를 내려다보면서 아이는 답답해서 그를 한 대 패주고 싶을 지경이었다. "귀찮게 하지말고, 빨리 가요! 난 팀을 도와줘야 한다고!" 주먹을 불끈 쥐며 매섭게 눈을 부라리자, 파커슨도 입을 꾹 다물게 되어 버렸다. 생각해보니, 이 소녀는 신법인가 뭔가 하는 것으로 단 두 방에 피말라 한 마리를 날려버렸지 않은가. 그는 침을 꿀꺽 삼키며 생각했다. '개김은 죽음이다.' "여, 여어! 우린 위험할 때는 대비해서 체력을 비축하자고!" "그, 그러지! 핫핫!" 어째서 이 일행은 하나 같이 똑같은 건지, 아이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라 생각했다. 역시 세상에는 여러 가지 유형의 인간 있는 것이라는 진리 를 몸소 터득하게 되는 그녀의 귀로 훼이드리온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됐으면 빨리 와!" 번개 같이 고개를 돌려보자, 피말라의 몸은 어느새 거의 다 땅위로 빠져 나와 있었고, 촉수에 끼우고 있던 쉐인이란 남자의 처참한 시체도 어느새 사라져있었다. 벌써 처리한 것일까, 라는 생각을 해보면서 그녀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어쩌면 방금 같이 여유를 부린 것도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 득 들었다. 하지만, 그런 불길한 마음을 접으면서, 아니면 접기 위해 크게 소리질렀다. "지금 갈게!" 그녀의 외침이 신호가 되었는지 훼이드리온의 몸이 다시 한번 쏜살같이 피말라를 향해 날아갔다. 허공을 꿰뚫는 날카로운 하얀빛. 그러나 아슬아 슬한 차이로 또 다시 피말라의 촉수에 막히고 말았다. 그는 그 즉시 칼을 회수해 피말라의 촉수의 사정거리 밖으로 대피했다. 무언가 부딪히는 날카로운 소리에 아이는 시력을 돋구어 훼이드리온과 피말라의 대결을 바라보다가 분함을 느끼고 말았다. 다리 몇 개만 빼고 완전히 땅 위로 올라온 피말라는 자유롭게 꿈틀(?)대는 촉수를 이리저리 휘두르며 훼이드리온을 가지고 놀고 있었던 것이다. 그 모습은 마치 커다 란 어른이 작은 꼬마애를 어르고 달래며 놀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 으켰다. 훼이드리온을 향해 달려가면서 그녀가 손을 모았다. 그리고 하늘에 떠있 는 달을 향해, 그녀가 믿고 따르는 신을 향해 또 다시 간절하게 기도하기 시작했다. '믿습니다. 이토록 간절하게!' 그녀는 조금 전에도, 마스터 카드를 다루면서 익힌 4원소 중 가장 강력 한 파괴력을 지닌 불을 구현해내어 피말라를 향해 공격했다. 이번에도 그 녀는 그 불덩이를 만들어내기 위해 간절하게 신에게 기도한 결과, 또 다 시 거대하게 타오르는 불덩이가 허공에 실현되었다. "가!" 뜨겁게 타오르는 불덩이는 "화르륵!" 타는 소리를 내면서 공기를 가로지 르며 피말라를 향해 날아갔다. 마치 드레이프를 만들어낸 마스터 카드 대 전에서 불의 속성을 마법사의 공격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좋았어!" 조금 전에 단 두 방의 불덩이를 맞고 나가떨어진 피말라를 떠올리면서 훼이드리온이 주먹을 불끈 질렀다. 저 불덩이를 맞고 피말라는 한동안 공 격을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럼 그 와중에 잽싸게 달려들어 세모난 머리를 날려버리면, 간단하게 몬스터를 처치할 수 있을 것이다. 잠깐 그런 계획 을 세우며 그는 손잡이를 더욱 강하게 쥐었다. 그렇게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 검의 현자 샤렌 하르트가 준 그의 검 마스트소드, 또 다른 이름 칼 의 진정한 모습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그러나 사태는 그들을 위해서 그렇게 쉽게 풀어지지는 않았다. 허공을 찢으며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불덩이를 향해 피말라가 세모난 머리에 달린 두 눈으로 잠시 쳐다보는가 싶더니, 엄청나게 잽싼 움직임으 로 옆으로 샤사삭 피해버린 것이다. 불덩이는 허망하게 피말라를 지나치 더니 애꿎은 땅에 부딪혀 폭발할 지경이 되어버렸다. '안 돼!' 직감적으로 위기를 느낀 아이가 다시 손을 모아 신법을 실현했다. 그 즉 시 불덩이는 그 거센 위력을 완전 잊어버린 듯이 사라져버렸다. 그야말로 그 곳에서 없어져버린 것이다. "위험했어. 하아……." 오징어 같이 생긴 저 몬스터에게 학습능력이라도 있는 건지. 불덩이가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잽싸게 피해버린 피말라를 향해 아이가 분통을 터 뜨렸다. "이이잇! 나쁜! 놀랬잖아!" 언젠가, 마법의 숲에서 들었던 그녀의 괴성을 귀로 받아들이며 훼이드리 온은 약한 안도감을 느꼈다. 그녀가 급히 불덩이를 없애지 않았다면, 주 위에 있던 피말라에게 진동을 느끼게 해서 다른 위험을 불러올 여지가 있었던 것이다. '후우. 감사는 나중에 해야지.' 한숨을 내쉬면서, 그는 다시 한번 검을 다잡았다. 일단은 저 잽싼 피말 라 녀석을 없애야했다. 여행이 시작된 지 아직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여 기서 허망하게 죽을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힘에 부쳐도 해보는 데까지는 해봐야지 않겠는가. "간다!" 훼이드리온이 다시 한번 공격을 감행했다.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빠 른 움직임을 보여주는 피말라 녀석이 아이의 신법에 당해줄 리는 만무하 다고 그는 생각했기에, 자신의 검술로 상대해야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공기를 뚫고 피말라의 붉은 촉수가 날아왔다. 훼이드리온은 머리 위로 칼을 들어 채찍처럼 내리치는 그 촉수를 막았다. '찌이이잉' 울려오는 손 목과 팔. 신음이 흘러나올 것 같았지만, 악착같이 목구멍을 삼켜버리고 그대로 칼을 세워 돌진해 들어갔다. '공격은 촉수 두 개! 나머지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지!' 확신은 아니었지만, 약간의 경험과 지식으로 내린 결정이었다. 아이가 들고있던 책자도 그렇고, 자신이 봤던 모습도 그렇고, 피말라는 특출 나 게 긴 촉수 두 개 외에는 쓰지 않는 것이다. 그는 지금가지 대결 중에서 가장 재빠른 움직임을 보이며 피말라의 사정거리 안으로 쇄도해 들어갔 다. 슈우욱. 뭔가가 뒤에서 다가오고 있다는 감각이 그의 두뇌를 두드렸다. 정말 본 능적으로 고개를 즉각 숙인 그의 머리 위로 세찬 바람이 스윽 훑고 지나 갔다. 그의 전신에 소름이 쫘악 끼쳐버렸다. '좋아!' 그는 오히려 기회라는 생각에 고개를 들면서 그대로 칼을 피말라의 몸 통에 찔러 넣었다. 푸욱! 반쯤 들어가자 그대로 위로 그어 올려버리자, 녹색의 피가 한순간에 그 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 '이잇!' 훼이드리온은 당황하여 칼을 올린 그 기세를 그대로 몸에 실어 뒤로 몇 번 굴러버렸다. 촤아악, 하는 소리와 함께 녹색의 액체가 그의 앞에 뿌려 졌다. 그는 기겁을 하며 몇 발자국 뒤로 더 물러나 버렸다. "와아!" 멀찍이 서있던 아이가 환호성을 질렀다. 재빠른 공격이 드디어 성공을 거둔 것이다. 이미 청년들은 멀리 대피한 후였다. 훼이드리온을 그 점에 다시 한번 안 도감을 느끼며, 다시 칼을 세웠다. 칼날은 녹색의 피가 묻기는커녕 오히 려 전보다 더 세차게 하얀빛을 내뿜고 있는 듯했다. 그는 자신감을 얻고 피말라를 바라보았다. '다시 한번 간다!'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움직이려는 찰나였다. ……! 무언가 알 수 없는 파동이 피말라로부터 쏟아져 나왔다. 입이 없는 피말 라로서는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 있다면 괴성이라도 힘껏 질렀 을 그 감정이 아이와 훼이드리온, 심지어 멀리 도망가있는 상태인 파커슨 을 비롯한 청년들에게까지 그 감정이 전달되었다. 공간을 뒤흔드는 조용한 파동. 그것은 몬스터이기에, 본능에 이끌리는 몬스터이기에 더욱 절실하게 느낄 것이 분명한 '분노'라는 원초적이고 감 정이었다. ……! '화, 화났어!' 아이는 순간적으로 그 파동에 눌려 머리가 멍해질 것 같았다. 몬스터의 사념이 이렇게 강할 줄이야, 그녀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녀의 표정 이 완전히 일그러져 버렸다. 그녀의 뺨을 타고 떨어져 내리는 한 방울의 땀이 앞으로 전개될 사태에 대한 갈피를 잡지 못하는 그녀의 마음을 대 변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상황은 훼이드리온도 마찬가지였다. 이건 정말 예상 밖의 사건인 것이다. 이토록 강한 파동이 전해질 줄 예측이나 했을까. 눈앞의 오징어 몬스터는 거칠게 포효하고 있었다. 철썩철썩 내리치는 분노에 찬 촉수는 땅에 균열을 만들 정도로 강대했다. '…이, 이길 수 있을까?' 전투가 시작된 후 처음으로 그의 마음 속에 불안감이 싹텄다. 자고로 분 노란 감정은 모든 족속의 경계를 초월하여, 존재를 강하게 만드는 대표적 인 '힘'인 것이다. '해보는 수밖에.' 목숨을 걸어야할 것이다.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어차피 죽는 것. 죽기 전에 발악이라도 해보자는 마음으로 그는 칼을 다시 고쳐 잡았 다. 그때. 피말라의 몸이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했다. "티임!" 쿠구궁. 지축을 울리며 피말라가 훼이드리온을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움찔 놀라 면서도 훼이드리온은 옆으로 재빨리 피하면서 한바퀴 돌아 다시 자세를 잡았다. 아니, 잡으려고 했다. 휘리리릭! 무언가 휘감겨 날아오는 소리가 그의 귓전을 때리자마자 그는 본능적으 로 오른쪽으로 다시 몸을 날려야만 했다. 피말라의 촉수 하나가 허공을 날아 그를 향해 공격을 시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자리에서 피해버렸 으니, 그 촉수는 강하게 땅을 내리쳐 먼지가 일어나게 만들었다. 동시에 피말라의 녹색의 피가 허공에 솟아오르다가 철퍽 소리와 함께 땅에 떨어 졌다. "티임!" "괜찮아!" 갑작스럽게 땅바닥을 구른 탓에 그의 허리에서 약간의 뻐근함이 느껴졌 지만, 그녀를 걱정하게 만들 수는 없었기에 애써 표정은 굳히며 고통을 감수했다. 그러고 보니, 피말라의 몸통에 가려서 그의 위치도 그녀에게는 확인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입맛을 쩝 다시며 다시 칼을 피말라를 향 해 세웠다. '잡념은 금물이다!' 그가 피말라를 향해 뛰어갔다. 피말라도 그의 공격을 눈치챈 것인지 순 식간에 몸을 돌려 촉수를 길게 뻗었다. 붉은 색의 징그러운 촉수가 날카 롭게 찔러 들어오자 훼이드리온은 다급하게 고개를 숙이며 머리 위로 칼 을 휘둘렀다. 사캉, 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베어지는 느낌이 손목을 통해 전해오는 동시에 뜨거운 액체가 그의 등을 두드렸다. '으, 피말라의 피인가?' 다시 날아오는 또 다른 촉수를 피해서 몸을 움직이자 어느새 그의 뒤에 아이가 와있었다. 그녀가 그의 등을 물들인 초록색의 액체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으, 불쾌해!" "돕기나 해!" "하지만, 어떻게!" "그러니까, 생각해봐!" 훼이드리온은 다시 날아오는 촉수를 칼로 쳐냈다. 워낙에 몬스터의 힘이 강한 지라 이번엔 팔뚝까지 그 고통이 아련하게 전해졌다. 그러나 고통을 참을 여지도 없이 또 다른 촉수가 날아와 그를 노렸다. 너무나도 빠른 피 말라의 공격에 그는 차츰차츰 뒤로 밀렸고, 피말라는 그를 향해 계속 다 가오고 있었다. '이런! 물러서다가는 뒤의 아이도 위험해!' 어쩌다가 이런 위치가 되어버렸는지, 훼이드리온은 급히 사태 파악을 시 작했다. 더 이상 물러섰다가는 그녀조차 촉수의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가 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기 전에 무슨 수를 써야했다. 그렇게 최대한 방어적 태세를 갖추고 피말라의 공격을 하나하나 막아내 고 있을 때, 아이가 급히 소리쳤다. "촉수! 저 촉수를 잘라내!" "…그, 그렇군!" 촉수가 문제라면, 촉수를 잘라내면 되는 것 아닌가. 그런 간단한 것을 왜 자신이 여태껏 생각하지 못했는지 훼이드리온은 멍청한 자신의 머리 를 질책했다. 그리고 재빨리 그것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파고든다!' 두 개의 촉수가 교묘하게 엇갈리며 공중으로 들리는 그 찰나, 훼이드리 온이 칼을 비스듬히 세워 피말라의 몸을 향해 거세게 파고들었다. 이런 전투에는 익숙하지 않은 아이의 눈에는 단지 그의 허상만이 보일 뿐, 정 확한 움직임을 확인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정도의 굉장한 빠르기였다. 지금 이 순간, 10년 동안 수련한 그의 검술이 빛을 발하는 것이다. '온다!' 전신의 감각이 새로이 일깨워지는 상쾌하고 짜릿한 기분과 함께 위험경 보가 머리에 울렸다. 그 즉시 훼이드리온은 오른쪽으로 날쌔게 빠지며 자 신의 허리쯤 높이로 칼을 거칠게 휘둘렀다. 슥! 피말라의 굵은 촉수의 뿌리가 끊어지는 듯한 유쾌한 느낌이 그의 두뇌 를 강타했다. '성공한 건가!' 환희의 표정을 띄우며 촉수를 베고 지나간 힘을 그대로 실어 피말라의 옆구리를 강하게 긋고 지나가자, 깊게 베인 상처에서 피가 소나기 오듯 터져 나왔다. 그는 거기서 공격을 멈추지 않고 이번에는 피말라의 뒤에서 오른쪽 위 에서부터 대각선으로 칼을 휘둘렀다. 예리한 상처가 생기면서 또 다시 녹 색의 액체가 몸에서 터졌다. 이쯤 되자 이제 피말라도 사태를 파악하고 발광을 하기 시작했다. 공격 용 촉수가 하나는 완전히 끊어져버렸으니, 남은 하나를 휘두르며 몸을 돌 려 훼이드리온을 가격하려했지만, 이미 그는 피말라의 낌새를 눈치채고 다시 몸을 낮춰서 아이가 있는 쪽으로 자리를 옳긴 후였다. ……! 다시 한번 피말라로부터 강한 파동이 퍼져 나왔지만, 이제 그런 것에 움 찔 놀라지는 않았다. 비록 치명상을 입히지는 못했지만, 그의 마음 속의 자신감이 한층 더 커져있었다. 자신의 칼이 저 몬스터에게 상처를 입히고 있는 것이다. "아이! 저 녀석의 행동을 제어할 수 있어?" "뭐? 어떻게?" "그러니까, 멈추게 할 수 있냐고! 못 움직이게!" "해, 해볼게!" 고통으로 미친 듯이 발광하고 있는 피말라의 움직임을 제어하는 것이 라… 아이는 오늘 조금 무리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지체 없이 손을 모았다. 이번엔 신법으로 저 몬스터의 정신을 파고들어 모든 동작을 멈추게 만들 어야했다. 하지만, 하나 남은 촉수로 발악하는 피말라의 공격을 훼이드리온이 막고 있는 그 시간동안, 한참의 기도 끝에도 신법은 몬스터에게 먹혀들지 않았 다. 그녀는 경악하는 표정을 띄우며 힘들게 이리저리 칼을 휘두르고 있는 훼이드리온에게 소리쳤다. "신법이 실현되질 않아! 피말라의 분노가 너무 강해서 지배할 수가 없 어!" "그런! 그럼 다른 방법이라도!" 분노에 찬 피말라의 촉수는 전보다 더욱 강해져있었다. 파고들어서 칼을 휘두르기는커녕 촉수의 공격을 막는 것만으로도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였 으니까. 훼이드리온은 어금니를 깨물어서 막 자신의 머리를 향해 낙하하 는 촉수를 향해 칼을 들어올렸다. "잘려버려!" 그러나 그의 소망을 무참히 깨트리며 붉은 촉수는 약간의 상처만을 입 고서 다시 휘리릭 말려서 회수됐다. 훼이드리온이 잠깐 앞으로 발을 옮겨 전진의 기회를 잡기 위해 움직일 때, 피말라가 낌새가 영 수상해졌다. 그 리고 그가 그것을 눈치채고 자세를 잡으려고 하는 찰나, 피말라가 무식하 게 그에게 달려오기 시작했다. 구구구구구. 8개의 촉수를 다리처럼 놀려 달려오는 피말라의 달리기 실력에 예상외 로 놀라고 말았다. '잽싼 것은 눈치챘지만, 이렇게 빠를 줄은!' 위험을 느끼고 아이를 안고 옆으로 몸을 날렸다. 갑작스럽게 훼이드리온 의 품에 안기게된 아이가 "끼아…"하는 작은 비명을 질러보았지만, 그런 세세한 것에 신경 쓸 여지가 없는 훼이드리온이었다. 결국 그는 아이에게 "미안해."라고 작게 말하고는 벌떡 일어나서 아직 몸을 돌리지 못한 피말 라의 등에 다시 한번 공격을 가했다. 그와 함께 아이의 정신을 일깨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서! 방법을 생각해내!" "나, 나보고 어쩌라…" 그녀도 애가 타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훼이드리온이 그런 맘을 너무 몰라주는 것 같아 조금 화가 나려고 하던 찰나에 갑자기 그녀의 머리 속 에 어떤 영상이 스쳐지나갔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입가에 걸린 환한 미 소가 왠지 의미심장해 보였다. "생각났어, 팀!" 살짝 뒤로 눈동자를 뒤로 돌린 그는 아이의 밝은 얼굴을 보고, 날아오던 촉수를 강하게 쳐서 떨궈버리고 재빠르게 그녀의 옆으로 다가왔다. "어떻게?" "일단 도망가! 쫓아오게 만드는 거야!" "왜?" "어서!" 다짜고짜 훼이드리온의 팔을 잡고 달려가기 시작하는 그녀. 그리고 그 동시에 그녀가 손을 모아 다시 한번 신법을 펼칠 준비를 했다. 훼이드리 온도 뭔가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하고는 칼을 든 채로 뒤를 경계하며 같이 뛰기 시작했다. 뒤에서 피말라의 추격이 시작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분노해서 평소보다 더 힘이 세진 듯한 피말라의 달리기는 정말 굉장히 빨랐다. 금방 따라 잡 힐 것 같은 위기 상황에 아이가 드디어 신법을 실현시켰다. '믿어요!' "갈라져라!" 믿음이 하늘에 닿는 동시에 그녀의 일갈이 입에서 터져 나오자, 피말라 와 그들 사이의 땅이 갑자기 구구궁 소리를 내면서 갈라지기 시작했다. 평원 전체가 아니고 아주 일부분만, 피말라가 빠지기 적당한 크기 정도만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한 것이다. 그녀가 생각한 것이 그런 것이었을까. 그녀가 멈춰 서서 피말라를 마주 보았다. 촉수가 하나 잘려나가고 온몸 에 자신의 녹색 피를 뒤집어쓴 처참한 몰골임에도 불구하고, 불굴의 의지 로 뒤를 쫓아오고 있는 몬스터에게 그녀가 생긋거리며 웃어주었다. 그야 말로 약을 올려보겠다는 속셈인 것이다(통할 지는 의문이지만). "잡아보라고!" 서서히 입을 열기 시작하는 그 지점에 피말라가 올라서자마자. 쿠구구궁! 뿌연 흙먼지와 함께 피말라는 그 균열을 완전히 망가뜨리며 땅 속으로 꺼져들고 말았다. 피어오르는 흙먼지 속에서 시야가 흐릿했지만, 어떤 상 황인지는 충분히 눈치챈 훼이드리온이 칼을 잡고 그 속으로 뛰어들었다. 시야가 많이 가렸지만, 상관없었다. 피말라는 하반신(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이 완전히 땅 속에 묻혀버린 채 허둥대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는 손잡이를 두 손으로 잡고, 자신의 가슴 높이에 있는 피말라의 세모 난 머리통을 그대로 갈라버렸다. 그리고 가로로 세차게 휘둘러 아예 몸통 과 그것을 분리시켜버리는 것도 빼먹지 않았다. 터져 나오는 녹색의 피. 그 피가 흙먼지를 씻어내듯이 허공으로 퍼져 오 르자, 절대 피로 샤워할 생각이 없는 훼이드리온이 즉시 몸을 던져 사정 거리 밖으로 빠져나왔다. "끝…난 거야?" 아이가 총총히 다가와서 풀밭 위에 뻗어있는 그의 옆에 쭈그리고 앉았 다. 어쩐지 그녀의 표정이 어두워 보였다. "그런 거 같아." "죽었겠지?" "그렇겠지. 머리를… 날려버렸으니까." 아이는 피말라에게 눈길을 보내지 못하고, 땅바닥만을 내려다보면서 말 했다. 조금은 슬픈 듯이. "…죽는다는 건 슬픈 거야. 그게 어떤 존재인지는 초월해서." 그녀는 가만히 두 손을 기도하듯이 모으고 눈을 감았다.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이었지만 자신들에게 당해서 죽은 피말라에게 애도를 표하는 것 일까. 훼이드리온은 덩달아 착잡해진 마음으로 피를 흘리고 있는 피말라 의 몸통을 바라보았다. 붉은 신체에 녹색의 피가 흘러내리는 장면은 그렇 게 볼만한 모습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눈을 피하는 것도 왠지 거북했 다. 피말라의 몸이 서서히 땅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아이가 하는 일일까, 하는 생각과 함께 올려다본 그녀의 얼굴에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 었다. 그는 조용하게 몸을 일으켜서 그녀 앞에 앉아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으로 훔쳐주었다. 그녀는 아는지 모르는지 손을 모으고 계속 기도를 올 릴 따름이었다. 전투의 흔적이 완벽하게 지워진, 그 정적에 잠긴 평원 위에서 소녀는 흐 느끼며 기도를 올렸고, 소년은 그런 소녀를 측은하게 바라보며 그녀를 위 로하고 있었다. 밤은 언제나 그렇게 조용히 흘러가고 있었고, 하늘에 둥그렇게 달린 하 실루스의 상징, 은빛 달은 그저 그렇게 그곳에 존재하고 있을 뿐이었다. '…믿습니다.' -------------------------------------------------------------------- 하아... 팀군입니다.; 너무 늦었군요. 사과의 말씀 올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___) 요즘 너무 글 적기가 힘들군요. 슬럼프의 구덩이는. 그렇게 쉬운 게 아닌가봅니다. 우선 추천해주신 분들. GLING2님. RUSIPEL6662님. 단 두분이시지만, 감사합니다. 힘드는 작업을. 그래도 힘내게 해주셨습니 다. 다ㅅ 한번 감사드립니다. 이제 3장도 한편 남았습니다. 32편이 끝나면. 4장이군요. 서둘러 가야겠습니다. 핫핫. 그럼. 어둠의 기사 DARK KNIGHT TEAM... P.S 추천 감상 비평. 항상 기다리고 있습니다. 번 호 : 11977 / 11981 등록일 : 2000년 09월 02일 22:40 등록자 : 암음기사 조 회 : 10 건 제 목 : [카드 게임 판타지]『 카드 마스터(Card Master) 』#032 카드 게임 판타지(Card Game Fantasy) 카드 마스터(Card Master) 32. 조용히 두 눈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던 아이가 손가락으로 천천히 눈물 을 훔치고는 고개를 들었다. 아직 눈가에 맺혀있는 옅은 기운의 눈물 때 문에 그녀의 표정이 너무나도 측은해 보였다. 훼이드리온이 가볍게 미소 를 지었다. "괜찮아?" "으응. 미안해, 너무 감상적이 되어버렸네." 희미한 미소로 그의 미소에 답한 아이는 아직 남아있는 물기를 완벽하 게 손가락으로 제거하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제 슬슬 흐릿해져 가는 신법으로 만든 불빛 아래로 처절했던 전투의 흔적은 이미 땅속으로 스며 들어 사라진지 오래였다. 그녀의 기도로 인해, 땅에서 살았던 몬스터는 다시 땅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살포시 웃었다. "생각해보니 말이야." 훼이드리온이 지나가는 바람과도 같은 투로 입을 열었다. 아이가 시선을 그의 얼굴로 살짝 옮기며 눈을 깜빡거렸다. 그의 푸른 눈동자는 방금 전 까지 피말라가 빠진 채 버둥대고 있던 그 지점에 향해있었다. "땅이 갈라질 때, 그 진동을 느끼고 다른 피말라가 왔었을 수도 있었던 거였어." "…에, 헷?" 생각해보니 정말 그랬다. 진동에 민감한 피말라가 그 정도의 진동을 느 끼지 못할 리도 없으니 말이다. 설마 이렇게 편하게 쉬고 있는 와중에 어 딘가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그녀의 표정이 사뭇 다시 굳어졌다. 그 모습에 훼이드리온이 부드럽게 미소를 떠올려 보였다. "걱정할 것 없어. 왔다면 진작 왔겠지. 안 그래?" "그, 그런가?" "그렇지." 그의 확신에 찬 대답에 아이가 한동안 좌우로 눈동자를 굴려보다가 이 내 긴장을 풀었다. 그의 말이라면, 믿을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그러던 중, 아이는 잠시 자신의 변화에 놀라고 말았다. 언제부터 이렇게 이 소년을 믿게 된 걸까. 항상 자신에게 당하고, 믿을 구석이라고는 잘생 긴 얼굴 하나밖에 없을 것 같았던 소년을 말이다. 방금 전에 겪었던 한 차례의 전투 때문일까. 죽음을 넘나드는 전투를 거치면서 동료들 사이에 서 쌓이는 동지애 같은 것일까. 아이는 제법 서늘하게 느껴지는 평원의 밤바람을 느끼는 듯이 그렇게 편한 자세로 앉아있는 훼이드리온을 들키지 않게 스윽 훑어보고는 다시 생각해보았다. '그렇게 단순한 것은 아니야.' 차라리 동지애라고 간단하게 정의 내릴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녀의 감 정은 그것을 완강히 거부하고 있었다. 자신의 이성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다른 이유가 분명히 있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정작 그 이유가 무엇인지 는 알 길이 없었다. 결국 그녀는 아까 와도 비슷하게 헝클어진 머리 속을 정리하는 것에 신 경을 더 쓸 수밖에 없었다. 영원히 풀리지 않을 것 같은 수수께끼로 다가 오고 있는 그 문제는 힌트를 찾을 때까지 잠시 미뤄두기로 하고. "일어나자. 그 사람들, 기다릴 거야." 훼이드리온이 칼을 챙겨 손에 들면서 몸을 일으켰다. 아이도 가볍게 고 개를 끄덕여 답하고는 일어났다. 먼저 앞장서서 걸어가는 훼이드리온의 등을 응시하고 있던 아이가 미간 을 찌푸리며 그에게 물었다. "기분 나쁘지 않아?" "응?" 그가 의문을 띄운 눈빛으로 뒤로 고개를 돌렸고, 그녀가 그를 향해 손가 락을 들어 보였다. "등. 피말라의 피가 묻었잖아." "아아." 그제야 이해가 됐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조금. 아무래도 옷을 갈아입어야겠어." "갈아입을 옷 있어?" "여벌옷은 한 벌 있어. 난 축복 받은 신관의 여행복 같은 것이 없으니 까, 미리미리 준비를 해야지." 언젠가 그에게 말한 적이 있던 자신의 신관용 여행복의 능력을 언급하 는 그 말에 아이가 미안한 듯 미소를 지었다. 훼이드리온도 빙긋이 웃고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들은 조용하게 자신들이 피워둔 모닥불의 빛이 보이는 곳으로 걸어갔다. 필사적으로 달려온 그 시간보다 약 두 배의 시간이 소요된 후, 둘은 모 닥불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붉게, 그리고 노랗게 흔들리고 있는 모 닥불의 빛 사이로, 처절한 도피행각을 벌인 청년들의 신랄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5명 중, 누워있지만 눈은 뜨고 있는 자가 1명이었고 뻗어서 세상 모르 게 곯아 떨어져있는 자들이 4명이었다. '피말라가 떼거지로 몰려와도 내 알 바 아니다.'라는 의지를 강하게 피력하는, 굉장히 정석적인 '대자로 뻗 기' 자세로 자고 있는 그 4명을 향해 훼이드리온이 조금은 황당함을 담은 눈길을 보내고 있을 때, 정신을 차리고 있는 마지막 한 명이 슬그머니 상 체를 일으켰다. 뺨에 새겨진 거친 상처가 눈에 띄는 파커슨이었다. "여어. 살아 돌아왔군." 반가움인지, 아쉬움인지 판단할 수 없는 묘한 그의 말에 아이가 간단하 게 대꾸했다. "걱정했나요?" "물론. 당연한 것을 말하면 입만 아픈 거 아니겠어." 훼이드리온은 모포 위에 앉아 칼을 배낭 위에 올려놓으면서 생각했다. '그렇게 길게 말하는 당신의 입이 아픈 건 당연하겠군요.' 아이가 원래 자리를 찾아, 그의 옆에 붙어 앉자 모닥불 반대편에 앉아있 던 파커슨의 눈빛이 조금 전의 그의 말처럼 묘하게 변했다. 그 눈빛을 알 아챈 훼이드리온이 떠듬떠듬 입을 열었다. "왜, 왜요?" "흐음. 그렇군. 그랬던 거였어, 역시." 아이가 훼이드리온과 똑같이 꺼림칙한 표정을 감추지 않고 드러내며 그 에게 재차 쏘아붙였다. "역시, 라니. 뭐가 역시, 라는 거예요?" "하하하. 역시 나의 눈치는 정확하단 말씀이야." "그러니까, 뭐가요!" 그녀의 크게 울려 퍼지는 고성에 파커슨이 능글맞게 빙그레 웃더니, 장 난기 다분한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너희들의 관계." 그의 입가에 지어진 미소에서 둘은 굉장히 심한 정신적 타격을 입고 말 았다. 뒤이어 나올 말이 무엇일지 직감적으로 알아채 버린 것이다. "너희들. 연인, 맞지?" 파커슨의 참으로 유쾌하다는,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가 섞인 말에 훼이드 리온과 아이는 동시에 굳어버렸다. 그 반응에 더욱 유쾌해지는 기분을 느 끼며 그는 자신의 생각을 완벽하게 정설로 받아들이고 말았다. 눈앞의 금발의 미소년과 흑발의 미소녀는 상당히 잘 어울리는 연인이다, 라고 말이다. 그는 거기서부터 출발에 자신의 생각에 온갖 상상력을 동원하여, 하나의 드라마를 완성시켜갔다. 그들의 만남에서부터, 그 사랑의 끝까지. 급기야 근친상간의 불륜에까지 손을 대려고 하는 그가 멍청하게 보일 법도 한 황홀한 표정을 무의식중에 떠올리고 있을 때, 훼이드리온의 거친 목소리 가 그의 뇌리를 강타했다. "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어? 아? 뭐가?" 다음은 아이의 차례. "연인이라니요! 대체, 뭐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신 거죠?" 불게 달아오른 그들의 얼굴을 빙글빙글 웃으면서 응시하던 파커슨이 노 련미가 묻어나는 눈길을 둘에게 잠시 보냈다. 둘이 괜히 찔끔하며 화를 목구멍으로 넘기고 있자, 그가 능글맞게 입을 열었다. "그렇게 강력하게 부인하는 것을 보니, 더욱 의심이 가는데?" "아, 아니라고요!" "맞아요!" 그러나 그는 가볍게 피식 웃어버리고는 다시 말했다. "지금 붉어진 그 얼굴이, 모닥불 때문일까, 아니면 흥분 때문일까. 그것 도 아니라면… 다른 어떤 이유 때문일까?" 무언의 압력. 파커슨, 그는 지금까지의 모습과는 판이하게 다른 날카로 운 눈빛을 빛내며 둘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은, 진정으로 '어른'인 것처럼 그들에게 비쳐졌다. 그래서 그들은 멍하니 시선을 그에게로 향한 채, 아 무 말도 하지 못하고 말았다. 뭔가, 자신들은 자각하지 못하고 있던 '정곡'을 그는 정확하게 찔러버린 것이다. 한동안 적막만이 그들을 감싼 채 서로 바라만 보고 있던 그들. 파커슨이 먼저 턱을 쓰다듬으며 씨익 웃어버렸다. "뭐, 내 착각이라면 미안한 일이지만 말이야. 뭘 그렇게 심각한 거지? 장난이야, 장난." "…네에, 네." 마지못하고 대답하는 듯한 훼이드리온과 가만히 옆으로 고개를 돌리고 마는 아이의 행동이 파커슨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아무래도 자신이 실수 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해보았지만 그냥 지워버렸다. 사랑이라 는 것은, 자신이 경험한 바로는 솔직하고 일찍 깨달아버리는 게 서로에게 좋은 것이었으니까. 한마디로 자신은 아주 옳고 올바른 일을 했다고, 그 는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빙글빙글 웃던 그에게 분위기 쇄신을 노린 훼이드리온의 물음이 날아들 었다. "왜… 피말라에게 쫓긴 거죠?" 가장 궁금하기도 했던 이야기를 꺼내자, 파커슨의 웃음이 그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의 머릿속에 그 피말라에게 당한 이들의 모습이 하 나씩 떠올랐다. 그와 함께 그의 고개가 숙연히 바닥을 향해 숙여져갔다. "휴우." 인생의 찌든 무게가 담겨있는 듯한 그의 한숨 소리에 훼이드리온의 눈 은 한층 더 커졌다. 그를 만난 지 채 한시간도 제대로 넘기지 않았지만, 갑자기 무거워지는 그의 분위기가 왠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 지만 뭔가 건드릴 수 없는 느낌이 들어 그의 대답이 들려오기를 가만히 기다렸다. 그러던 와중, 당황하여 떨리던 가슴도 차츰 진정을 찾아갔다. "뭐랄까. 너희에게 이런 얘기를 해도 될지 모르겠는걸." "…털어놓으면, 나아질 지도 몰라요." 파커슨이 꺼내려는 말이 어떤 내용인지는 모르지만, 그는 일단 그렇게 말해 그의 결심을 재촉했다. 이런 밤에, 피말라에게 쫓겨 일행을 많이 잃 어버린 저 사내의 입에서 과연 어떤 말이 흘러나올지, 자못 기대가 되는 순간이 아닌가. 훼이드리온은 본래의 마음을 잃지 않고 그의 입이 열리기 를 끈질기게 기다렸다. 그의 옆이 앉아있는 아이는 아까부터 미동조차 하 지 않고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그래, 조금은 후련해질지도 모르지. 들어주겠어?" "네, 말씀해보세요." 파커슨은 방금 전까지 자신들이 걸어오던 그 방향으로 지그시 시선을 던진 채 한동안 잠시 입을 다물었다. 훼이드리온도 그의 시선을 따라 저 멀리 어둠 속을 바라보았다. 저쪽 어딘가에 무언가가 있는 걸까, 하는 생 각을 하기가 무섭게 그가 입을 열었다. "야드 평원 위의 서가도를 따라 가다보면 '아크릴 영지'가 나와. 알고 있 지? 난 거기서 도망쳐 나왔어. 물론 이 친구들과 같이 말이야." 자신의 뒤에서 뻗어버린 채 곤하게 잠자고 있는 친구들과 피말라에게 당해 목숨을 잃은 친구들을 하나씩 회상해보면서 그가 차근히 말을 이었 다. 훼이드리온은 조용히 침묵하며 그의 말을 경청했다. "우리는 마을에서 영주 몰래 비밀스럽게 조직된 청년회의 일원들이야.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 경비병들을 때려눕히고 야드 평원으로 도망쳐 나왔어. 한가지 임무를 가지고." "…어떤 임무요?" 파커슨이 조금은 우울한 눈길로 훼이드리온을 바라보았다. "우리가 왜 영지에서 '도망'쳐 나왔겠어." 훼이드리온이 뜨악한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맞아. 영주의 억압이 너무나도 심해졌기 때문에, 우린 그 실태를 왕성 에 직접 보고 하기 위해서 위험을 무릅쓰고 도망쳐 나온 거야." 경악하는 표정으로 훼이드리온이 서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어둠 속 어딘가에 있을 아크릴 영지에서, 영주가 주민들을 억압하고 있단 말인가! 이 마법왕국 라시엔트 안에서! 말도 안 돼!' 앞으로 자신이 다스리게 될 나라였다. 그리고 억압받는다는 그 모든 주 민들도 라시엔트의 국민이었다. 자신의 나라에 살고 있는 국민이 고통을 받는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훼이드리온의 두 눈에 잠 시 불길이 일었다. 그것은 기사도에 의한, 인륜에 의한 순수한 분노였다. 하지만 그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파커슨은 낮게 눈을 내리깔며 계 속 말을 이었다. "그러다가 한 녀석의 실수로 땅 속에 있던 피말라에게 위치를 들켜버린 거지. 죽자살자 도망쳤지만, 결국 남은 인원은… 이거 뿐이야." 그의 음성이 젖어들고 있다고 훼이드리온은 생각했다. 호탕한 성격의 그 였지만, 역시나 친구를 생각하는 마음은 한결같이 진심이었던 것이다. 훼 이드리온은 씁쓸하게 미소지으면서도 그의 그런 마음씨에 찬사를 보냈다. "왕성에… 가시는 건가요?" "당연히. 마을에서는 우리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을 거야. 꼭 왕성까지 가서 이 소식을 알려야만 해. 되든 안되든 노력은 해봐야지." "…꼭 이루시길 바랄게요." "훗. 말만 들어도 고마워." 훼이드리온은 억지 웃음 같은 미소를 입가에 띄워보았다. 물론 고개를 숙이고 있던 파커슨은 그 미소를 보지 못하고, 그냥 감사만 표했을 뿐이 다. 그는 시선을 서쪽으로 고정시키고 생각했다. 이런 이야기를 들었는데, 과연 자신은 어떻게 행동해야할까. 비록 신분은 숨기고 있지만, 한 나라 의 태자로서 어떤 행동을 해야지 올바른 것일까. 그는 눈동자를 가늘게 떨면서 고민했다. 하지만, 어차피 결론은 하나밖 에 없는 것 같았다. '가자, 영주를 만나러.' 후계자 수련을 나온 태자로서, 어쩌면 나라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첫 번 째 일인 것 같다는 생각 하에, 훼이드리온은 그렇게 결심하고 말았다. 그가 태자로서의 투지를 불사르고 있을 때, 파커슨이 잠긴 목소리로 다 시 입을 열었다. "영주 님도… 원래는 그렇지 않으셨는데. 원래는 영지 안의 주민들을 자 신의 몸처럼 걱정하고 아껴주시는 분이셨는데. 왜, 어쩌다가 사람이 변해 버린 걸까……." 분명히 분했다. 뭔가 이유가 있을 거라고는 해도, 그렇게 주민들을 억압 하고 고통받게 했던 그 영주에 대한 분노는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어 딘가 이상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렇게 온화하고 부드럽던 영주가 어느 순간부터 단숨에 사악하게 바뀌어버리다니. 주민들이 모르는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알 수가 없으니.' 어쨌든 지금 자신의 일은 왕성에 이 사실을 고하는 일. 사소한 정으로 주민들 모두의 기대를 져버릴 수는 없는 노릇. 파커슨은 영주를 향한 일 말의 정을 깊숙이 묻어버렸다. 일이 끝나면, 한번쯤 다시 들춰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잘 있을까.' 파커슨이 천천히 고개를 하늘을 향해 들었다. 여전히 구름에 살짝 가려 있는 둥그런 은빛 달 주위로 퍼져있는 작은 빛의 파편들이 그의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그렇지만, 왜일까. 그 빛들이 이상하게 흐릿하게 눈앞에서 퍼지는 이유는. '세리나……,' 자신이 사랑하는, 술집 비아르 영감의 딸, 세리나. 다소곳하고 맑게 웃는 모습에 첫눈에 반해버린 이후로 절대 빗나가지 않고 지켜왔던 사랑이 지 금 다시금 그의 가슴을 두드렸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지금 자신이 이렇게 고향을 떠나있는 중에 무슨 일이 있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그의 마음에 고개를 들이밀었다. '괜찮을 거야, 괜찮을 거야…….' 흡사 주문처럼, 그는 그렇게 '괜찮을 거야.'라는 문장을 계속 되뇌었다. 훼이드리온은 묵묵히 감상에 젖어있는 파커슨의 모습에서 눈을 떼고 나 름대로의 상념에 빠졌고, 아이는 조금 전 상태 그대로 침묵한 채 무언가 를 계속 고민하고 있었다. 유일하게, 아니 유사하게 속 편한 인물들인 청년들이 몸을 뒤척이지도 않고, 그야말로 쥐죽은듯이 자고 있는 풍경이, 지금 그들의 모습이었다. 서서히 동쪽 하늘에서부터 마스트의 빛이 뻗어 나오고 있는 시각이었다. 보통 때라면 아무리 일찍 일어나는 훼이드리온이라도 곤하게 잠에 빠져 있을 시간이었지만, 오늘만은 예외였다. 어제 밤에 한번 거하게 치렀던 그 전투의 후유증으로 인해 온몸을 찍어누르는 피곤이 그의 정신을 혼미 하게 흩으려놓으려 했지만, 그 특유의 오기와 비슷한 의지로 몸을 일으켰 다. '…으음.' 허리를 한번씩 움직일 때마다 관절이 비명을 질렀다. 오랜만에 힘들게 휘둘렀던 칼 탓인지 팔 쪽에도 근육이 뭉쳐버린 것 같았다. 그렇지만 밤 에 결심했던 것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는 지금 반드시 일어나야 했기에 강하게 숨을 들이쉬며 모포를 걷어냈다. 툭. 손에 걸리는 물체에 훼이드리온이 순간적으로 움찔 놀라버렸다. 그 리고 곧 살짝 고개만을 내려 그 물체를 바라보았다. '깨워야겠지만, 조금 더 자게 놔둬야지.' 무슨 생각 때문인지(조금 예상이 되기는 하지만) 어제 밤늦게 잠이 든 그녀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최대한 조용하게 몸을 일으켰 다. 작게 찡그린 그녀의 얼굴에 수면 상태에서도 불구하고 작게나마 수심 이 묻어나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는 무겁게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일어났군?" 아직도 타고 있는 모닥불 너머로 훼이드리온이 시선을 던졌다. 그 시선 의 끝에 밤새 자지 않았는지 입을 크게 벌리며 피곤함을 뿜어내고 있는 파커슨의 모습이 들어왔다. "안 주무셨나요?" "…아암. 응? 아, 안 잤어." 그리고는 또 다시 하품을 터뜨리는 파커슨. 훼이드리온이 모포에서 완전 히 벗어나 일어나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괜찮아요? 그렇게 고생했는데, 잠도 안 자고." "괜찮아, 괜찮아. 나의 체력이야 우리 마을에서도 알아준다고. 걱정할 거 없어. 그나저나." 파커슨도 자리에서 일어나며 화제를 바꾸었다. "넌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난 거냐?" "아. 일찍 출발하려고요. 오늘 하루종일 빨리 걸어가면 밤늦게 도착할 수 있을 테니." 파커슨도 아침 운동처럼 굳어있는 몸을 하나씩 풀어보며 물음으로 대화 를 이어갔다. "밤늦게라. 작정하고 빨리 가면 도착할 수 있을 거야. 그런데, 왜 일찍 가려는 거지?" 그의 의구심이 담긴 물음에 훼이드리온이 밝은 빛이 떠오르는 동쪽으로 시선을 던진 채 어깨를 풀며 간단하게 대답했다. "해야할 일이 있으니까요." "더 이상 물어보면 안 되는 영역인가?" "그렇게 해주시면 감사하고요." 파커슨은 어깨를 으쓱하며 씨익 미소를 떠올렸다, 지난밤보다 정말 많이 밝아진, 본래의 자신으로 돌아간 모습이었다. "그래, 남자라면 역시 말못할 비밀 하나는 가지고 있어야지. 암, 그렇고 말고. 으하하." 굉장히 썰렁하게 혼자 웃어대는 파커슨 주위로 잠시 서늘한 아침의 바 람이 스쳐 지나갔다. 훼이드리온이 그의 과장된 웃음에 키득 실소를 해버 리고 마지막으로 가슴을 쭉 폈다. 상쾌한 평원의 아침 공기가 그의 가슴 을 시원하게 뚫어주는 것 같았다. "깨워보죠, 이제." 파커슨은 살짝 고개만을 끄덕이고는 자신의 친구들을 흔들어 깨우기 시 작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흐느적거리는 그들을 일일이 소리 지르고 어깨를 잡고 흔들며 깨우는 열성을 보이는 그. 훼이드리온도 곧 구부리고 앉아 자신의 옆에서 잠을 청한 아이를 깨우기 시작했다. "아이, 일어나. 일찍 출발해야해." "으응……?" "빨리 일어나." 그녀의 작은 어깨를 잡고 흔들어서 깨우는 그의 목소리에서 조심스러운 감정이 묻어났다. 어제 그런 얘기까지 들었더니, 조심하지 않으래야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아이는 눈을 뜨자마자 훼이드리온의 얼굴이 보이자, 순간적으로 심장이 멈춰버리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곧 평상심을 되찾고 아무렇지 않 은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왜 놀라는 거지?' 그러나, 이미 잠시 그녀의 얼굴에 떠올랐던 감정을 읽어버린 훼이드리온 이었다. 훼이드리온과 같이, 아이도 파커슨의 이야기를 같이 들었다. 그리고 더 심하게 동요한 것은 오히려 그녀였다. 그와 동시에 적잖은, 아니 매우 큰 충격을 받은 쪽도 그녀였다. 혼란스러워진 머리와 감정 때문에 침묵에 빠 질 수밖에 없었던 어젯밤. 아이는 그렇게 긴 침묵의 시간동안 혼자서 괴 로워해야만 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그런 고민 때문에. '그래서 내가 팀을 믿었던 거였을까.' 나오는 건 한숨이고 느껴지는 건 복잡한 감정. 그렇게 불편한 가운데 잠 들었다가 눈을 떠보니 눈앞에 훼이드리온의 얼굴이 있는데, 어떻게 놀라 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아이는 그냥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훼이드리온이 주춤거리며 자리를 비 켜주었고, 신법으로 간단히 세면을 하는 그녀를 바라보다가 다시 일어났 다. 그의 얼굴에 '모르겠다'라는 뜻이 떠올라있었다. 그들은 해가 다 뜨기 전에 간단한 식사와 준비를 모두 끝냈다. 그렇지 않아도 부족한 말린 음식들을 7명의 인원이 나누어 먹으려니 누구 하나 만족할 양을 먹지는 못했지만 그러려니 하면서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자, 이제 헤어지자." 모든 짐을 꾸리고 야영한 흔적을 모두 없앤 후, 그들은 서가도 한가운에 마주 보고 섰다. 파커슨이 씨익 미소를 지으며 훼이드리온과 아이에게 인 사를 건넸다. "아크릴 영지까지 조심히 가고, 아크릴 영지에서도 아무 일 없기를." "괜찮을 거예요." 훼이드리온이 싱긋 웃었다. "꼭 성공하시길 빌게요." "저도요." 아이가 맞장구치자 파커슨과 그의 동료들의 얼굴에 밝은 미소가 떠올랐 다. 그들은 말은 하지 않고 잠시 웃어보았다. 그리고 조금 후, 가볍게 목례를 한 후, 각각의 방향으로 돌아섰다. 말하 지 않아도, 뭔가 통한 그들에게 거추장스러운 인사조차 필요 없었던 것일 까. 점점 멀어지는 파커슨과 청년들을 느끼며 훼이드리온은 앞을 바라보았 다. 아침 햇살 사이로 비치는 긴 서가도 저쪽에 있을 아크릴 영지를 떠올 리며 그는 생각했다. '가보자.' 의지에 찬 그의 눈빛을 향해 아이가 검은 눈동자를 깊게 빛내고 있다는 사실을 그는 알지 못했다. 아침의 하늘에 떠오른 맑은 마스트의 눈이 주시하는 가운데 훼이드리온 과 아이는 아크릴 영지로 향하는 길을 한발자국씩 나아가기 시작했다. -------------------------------------------------------------------- ...하아. 팀군입니다. 안녕하세요. 굉장히 오랜만이네요. 힘든 하루입니다. 글적는게 어째 이렇게 힘든 건지. 이런 느낌도 꽤나 오랜만인 듯한 생각이 드는군요. MJJYMG님. 메일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힘이 됐어요.(^^^) 3장 '동행'이 끝났군요. 네에. 내일부터는 4장에 들어갑니다. 그렇게 할 말은 없군요. 하고 싶은 기분도 아니구요. 휴우. 조금 힘든 시간이기도 합니다. 원하던 일들도 잘 되지 않고. 중얼. 응원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싱긋. 그럼. 평안한 하루되시길. 어둠의 기사 DARK KNIGHT TEAM... P.S 추천 감상 비평. 해주신다면, 많은 힘이 될 것입니다.(^^^) P.S 2 자자, 힘을 내자. 그럼. 평안한 하루 번 호 : 12130 / 12141 등록일 : 2000년 09월 06일 20:33 등록자 : 암음기사 조 회 : 30 건 제 목 : [카드 게임 판타지]『 카드 마스터(Card Master) 』#033 카드 게임 판타지(Card Game Fantasy) 카드 마스터(Card Master) 33. "조금만 더 힘을 내라고. 거의 다 왔어." 파커슨은 계속 뒤로 처지고 있는 동료를 격려하며 한발씩 앞을 향해 걸 어가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 피곤이 가득 서려있었다. 바쁜 마음에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쉬지도 않고 달리고 걸어온 탓에 그를 비롯한 청년들 의 몸은 또 다시 거대한 피로가 짓누르고 있는 중이었지만 누구 하나 발 을 멈추는 자는 없었다. 시각은 이미 하실루스의 상징이 지배하는 때. 그것도 이제 깊은 하늘의 한중간을 달리고 있을 때였다. 아침 동이 트고 얼마 되지 않아서 야드 평 원을 떠난 그들은 정말 오직 '걷는 것'만을 생각하며 이를 악문 결과, 방 금 전에 수도 라시안트의 서쪽에 세워져있는 이정표를 지나칠 수 있었다. 그것을 보자마자 그들의 얼굴에서 잠시나마 웃음이 떠오른 것은 설명하 지 않아도 될 사실이었다. 선두에서 쥐어짜듯 힘을 내어 다시 한 걸음 내딛던 파커슨의 눈에 드디 어 기다리고 기다리다 지쳐 쓰러질 것만 같은, 바로 그 '수도 라시안트'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수, 수도다!" "뭐, 뭐? 정말?" 두 팔을 마구 앞을 향해 흔들며 소리지르는 파커슨에게 나머지 3명의 청년들이 달려가더니, 트카르가 그의 옆에서 냅다 크게 외쳤다. "으아아아아아아아!" "시끄러, 이 자식아! 웬 괴성이야!" 당연히 파커슨은 그에게 또 다시 고래고래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트 카르는 다시 한번 크게 입을 벌려 숨을 들이쉬고는. 한번에 내뱉었다. "조오오오오 아아아아서어어어!" "닥쳐!" 결국 그는 파커슨의 분노와 정의가 담긴 주먹에 일격을 얻어맞고 옆으 로 나가떨어졌다. 길 한구석에 조용히 처박히는 그를 향해 눈을 한번 지 그시 흘겨준 파커슨이 주먹을 쓰다듬으며 한마디 내뱉었다. "너만 좋은 게 아니라고." 그와 함께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우하하하하하하하!" "크하하하하하핫핫!" "으핫핫핫핫핫!" 미친 듯이 터뜨리는 광소는 꽤나 그 여운이 오래가지만, 파커슨의 화끈 한 일격에 당한 트카르가 드디어 정신을 제대로 수습하고 일어날 즈음에 그 광소들은 이미 다 사라져있었다. 벌떡 일어선 그가 파커슨을 향해 손가락을 내질렀다. "이 자식! 그 엿 같은 버릇 언제 고칠 테냐!" 파커슨이 두 팔로 단단히 팔짱을 끼고 의기양양하게 대꾸했다. "바랄 걸 바래, 임마." "크윽……." 더 이상 본연의 모습으로 회귀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트카르는, 파커슨이라는 사내와 관계를 가지게 되어버린 그 억울한 20년 전부터 가 져왔던 그 마음을 다시 한번 다잡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참자.' 파커슨, 그는 기쁜 일이 있을 때, 옆에 있는 누구나 한 대 패는 습관이 있었던 것 이다. '어젯밤에 저 자식한테 맞은 턱이 아직도 얼얼한데, 또 같은 곳을 때리 다니.' 어젯밤. 훼이드리온과 아이가 피말라를 쓰러뜨리자 너무 기분이 좋아진 파커슨의 버릇이 또 다시 발동, 급기야 체력이 바닥이었던 세 명의 턱을 가격해 그대로 기절 상태로 모셔버린 것이었다. 한마디로 그들은 곯아떨 어진 것이 아니라, 아침까지 기절해있었던 것이다. '쳐 밟아 죽여버릴 자식 같으니라고.' 실행으로 옮기기에는 너무나 위험수위가 놓은 일을 생각하며 트카르는 자신의 턱을 어루만졌다. 소리를 질러서인지 고통이 조금 오래 갈 것도 같았지만, 20년 동안의 단련은 장난이 아닌 것이기에 그리 걱정하지는 않 았다. "자, 그럼 다시 힘내서 수도로 들어가자구." 방금 전까지 지쳐있었던 그들이었지만, 눈앞의 수도의 모습이 거짓이 아 니라는 것이 인식되자 힘이 나기 시작했다. 파커슨이 다시 앞장서서 걸어 갔고 3명도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얼마 후, 그들은 별다른 일없이 마을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수도라 면 마을 입구에서 조사나 검열 같은 거라도 할 줄 알았는데, 마을 외곽에 자리잡은 약간은 퇴폐적인 듯한 분위기의 술집들의 불빛말고는 그들을 반겨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단지 땅을 밟아 가는 그들의 발자국 소리와 앞쪽에서 불어오는 서늘한 밤바람만이 그들의 수도 입성을 환영해줄 뿐. "뭔가 썰렁하군, 그래." 트카르가 주위를 연신 둘러보며 말하자, 파커슨도 어리둥절하다는 표정 으로 짧은 머리를 긁었다. "뭐, 외곽이라서 그렇겠지. 밤이기도 하고." 트카르가 고개를 끄덕였고, 그들은 다시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문득 트 카르 옆에서 파커슨을 따라가고 있던 사내 하나가 입을 열었다. "파커슨." "어, 왜, 잘츠." 간단하게 뒤를 돌아보는 그의 눈앞에 과묵하지만 은근히 괴짜라고 소문 이 나있는 친구가 먼 곳으로 시선을 던진 채 입을 움직이고 있었다. "왕성에서 지금 우리를 들여 보내줄까?" "흐음, 글쎄. 할 수 없잖아. 우린 지금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한시가 급 하니까. 힘으로라도 밀고 들어갈 수밖에 없지 않겠어?" 트카르의 한숨 섞인 대답이 이어졌다. "이봐, 파커슨. 수도의 병사를 상대로 힘을 쓴다고? 여긴 시골 마을이 아니라, 마법왕국 라시엔트의 수도, 라시안트라고. 알고나 있는 거냐?" 그 말에 파커슨의 짧은 머리카락이 잠시 흔들리면서 그의 미간이 찌그 러졌다. "나도, 여기가 어디인지는 알고 있어." "그러면서도 그런 멍청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거냐?" 아직 아무 말도 꺼내지 않는, 이 일행의 가장 막내인 겔린 녀석에게 고 마움을 느끼면서, 동시에 그는 짜증을 냈다. "하기 전에는 모르잖아, 이놈들아! 어쨌든 우리는 그 방어를 근성과 열 혈으로 뚫고 들어가서, 왕에게 비참한 우리의 현실을 고할 의무가 있다 고!" "…다 좋은데 그 근성과 열혈은 뭐죠?" 드디어 겔린이 입을 열었지만, 그 말이 결국 파커슨의 이성을 잃게 만든 키워드가 되어버린 것을 누가 말릴 수 있었을까. 그들은 조금 후, 길 한중간에서 난리를 부리기 시작하는 파커슨을 말리 기 위해 근성과 열혈을 발휘해야만 했다. "이거 놔아! 이 자식들아!" "말려, 말려!" 오직 한가지의 생각으로 똘똘 뭉친 트카르, 잘츠, 겔린은 아주 익숙한 행동으로 파커슨의 발광을 하나하나 진압해나가기 시작했다. 앞으로 뻗어 나가는 주먹을 팔을 감아 멈추게 하고 그대로 등 쪽으로 꺾어버려 팔 하 나를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리고, 이어서 무식한 힘으로 밀어붙이는 그 몸 통은 남은 두 명이 우악스럽게 잡아채 땅바닥에 엎어버린다. 모락모락 피 어오르는 흙먼지 사이에서 그들은 동네 꼬마들이 노는 듯한 형상으로 엎 치락뒤치락 거리며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흐에엑! 항복!" "됐냐?" "항복이다!" "좋았어! 자, 놔주자!" 이윽고 온몸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하루종일 걸어온 피로조차 잊어버린 채 그들은 한참을 바닥에서 구르다가, 파커슨의 항복선언으로 그 처절한 (혹은 까리한) 전투의 최후를 마쳤다. 어딘지 모를 바닥에 모두 드러누워 버린 채 숨을 씩씩대고 있을 때, 겔 린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기 말이에요." "에? 뭐?" 파커슨의 지친 기색이 역력한 짤막한 대답. 겔린이 상체를 일으켜 시야 를 멀리 돋구더니 한차례 주위를 훑었다. "…사람들이 쳐다보고 있거든요?" 그의 약간은 어두운 말이 끝나고 나서야 그들은 현재 자신들이 처한 상 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주위에 지어진 허름하고 낡고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한 가게, 건물에서 술에 취한 사람과 색기 어린 표정의 여성과 푸짐한 몸매의 아줌마와, 아무튼 그런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나와서 동정 어린 시선으로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쯧쯧. 아직 젊은 것 같은데.' 그들의 시선 속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그런 것이었다. 그나마 그 중에서 가장 이성적인 잘츠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이상 적이고 이성적인 행동(과묵하게 입다물기)을 시도했고, 그 다음으로 현실 적인 성격을 가진 트카르는 바닥에 정자세로 앉은 채 은빛의 아름다운 달이 둥그렇게 걸려있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어울리지 않는 시를 중얼거 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동료들의 어이없는 행동을 바라보던 겔린은 자신도 저렇게 현실도피를 강행해야하는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해야만 했 다. 결국은 가장 정상적인 인간이라고 판명이 난 파커슨이 벌떡 일어나며 동료들의 머리를 한번씩 갈겨버렸다. 그리고 가득 언성을 높여서 소리를 질렀다. "야 이 잡것들아! 뒤늦게 모르는 척하면 넘어갈 줄 알았냐!" 단순히 그도 자신에게 한 해코지에 화가 난 것뿐이다. 어쨌든 그들이 한동안의 난장판을 끝내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 주위에 모인 이들을 향해 공손히 인사를 해 보이자, 그들도 사정을 이해하고(세 명의 청년들이 정신병을 가진 파커슨을 치료시키기 위해 수도에 왔다가 갑자기 발작을 일으킨 그를 진압한 것으로)각자의 본분으로 돌아갔다. 어 느 착한 아주머니는 파커슨을 향해 진심 어린 격려의 말을 남겨주었다. "세상도 그렇게 나쁘지 않다오. 나도 이렇게 잘 살고 있잖소." 파커슨은 자신이 왜 그런 말을 들어야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 상당 히 난해한 기분이 되었지만,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렇게 한번의 소동을 거친 후에야 그들은 다시 예의 모습을 갖추고 수 도 중앙의 왕성을 향해 나아갈 수 있었다. 이미 불꺼진 집들이 대부분이고, 상가 쪽에도 슬슬 문을 닫고 있는 분위 기였다. 확실히 늦은 시각이긴 했다. 네 명은 나란히 서서 길을 걷다가 문득 마법의 등의 빛과 비슷한 느낌의 빛을 발견하고 일동 그곳으로 시 선을 모았다. 파커슨이 멍하니 입을 열었다. "…과연." 일정한 간격을 두고 점점이 떨어져서 밝게 광채를 뿌리고 있는 마법의 등. 잘못 보면 허공에 붕 뜬 상태로 빛을 발하고 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저 마법의 등은 지난 번 왕성에 누군가가 침입한 후로 성벽 의 방어를 강화하는 차원에서 달아놓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 빛이 보인다는 것은 왕성의 성벽에 다다랐다는 것을 알려주는 셈이 되는 것이 다. 그렇다고 해도 파커슨이 그 사실을 알고 입을 연 것은 결코 아니었다. "왕성이라서 그런지 돈도 많군." 그는 마법의 등의 색에 따른 가격의 차이 정도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흰색의 마법의 등. 누런 색의 마법의 등의 세 배를 넘는 호화상품이라 지 아마?" 트카르가 그 뒤를 이어 불평을 늘어놓았다. "우리는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도 힘들어죽겠구만, 저것들은 저 안에서 편히 앉아 놀면서도 저런 흰빛의 마법의 등을 달 수 있다니. 저 정도면 크기도 크겠지? 쳇쳇, 참으로 불공평한 세상이라고 생각되지 않냐?" 그의 물음에 과묵하게 입을 다물고 있던 잘츠가 간단히 대꾸했다. "그게 세상이지." 겔린은 그저 놀랍다는 눈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파커슨이 고개를 흔들 더니 다시 앞장서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자자, 얼마 안 남았어. 배고프고 춥고 피곤하지만, 할 일은 많으니, 억 울해서 미칠 지경이지만 해야할 일은 해야하잖아?" "옳은 말씀." "춥고, 는 아닌 거 같은데요?" 그 순간, 겔린은 단숨에 자신에게로 모이는 6개의 시선에 찍혀 죽어버릴 것 같은 아픔을 느꼈다. 겔린에게로 모은 시선을 거두는 그들의 눈에 절묘한 타이밍으로 그들이 원하는 것이 발견되었다. 바로 저곳으로 들어가기 위해, 그들은 아크릴 영지로부터 위험한 탈출을 감행했던 거고, 파커슨의 표현을 빌려 빌어먹 을 피말라에게 쫓겨서 동료들을 잃어야했던 거고, 빈속에 피곤에 지친 몸 을 이끌고 여기까지 왔던 것이었다. 한마디로 그들은 감동을 못 이겨 치를 떨며 소리를 지를 것 같은 기분 이었다. 이 시점에서, 수도를 발견했을 때 그들의 반응을 떠올려보는 것 도 좋으리라. "…여기는 시내, 거기다 일부 불량스런 녀석들 빼고는 웬만한 꼬마들은 잠들어있을 시간이야. 소리 지르는 건 뒤로 미루자고." 트카르의 이성적인 판단 아래, 그들은 그저 파커슨에게 한 대씩만 얻어 터지고 감동을 수습할 수 있었다. 외적으로는 아픔을 참으며, 내적으로는 억울함을 참으며 한발씩 자신들이 기다리고 기다린 그곳을 향해 걸어갔 다. 굳게 닫혀있는 거대한 검은 색의 성문이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어이. 이봐, 파커슨." "어? 왜?" 여전히 '난 과묵하다'라는 의지를 입으로 표현하고 있던 잘츠가 왼쪽 끝 에서 걸어가고 있던 파커슨을 불렀다. 잘츠는 자신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친구의 얼굴에 나있는 큰 상처가 어두운 탓에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말했다. "넌 뒤쪽으로 빠져있어. 그리고 겔린이 부탁하도록 해." "에, 왜?" "제가요?" 동시에 터져 나오는 의문이 그득한 두 남정네의 목소리. 트카르는 동의 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지적을 받은 사내들은 받아들일 수 없다 면서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내가 왜 뒤로 빠져야하는 건데. 여기까지 와서 리더인 나보고 뒤로 빠 지라고? 아까 전에 나를 그렇게 괴롭혀놓고 그런 말이 나오기는 하는 거 냐? 겔린을 시켜? 이 어리숙한 녀석을?" "저, 저는 못 한다구요. 뽑히기는 했지만 처음부터 여기까지 따라올 생 각도 없었는데 파커슨 씨가 일부러 끌고 온 거잖아요. 그리고 그렇게 중 요한 일을 저에게 맡겼다가 큰일나면 어쩌려고요? 그리고 파커슨 씨. 전 어리숙하지 않아요!" 성문에 거의 다다를 때까지 계속되는 그들의 열변에 잘츠는 입을 다물 고 있다가 조용히 하나하나 반박해나가기 시작했다. "먼저. 파커슨 네 녀석의 얼굴에 있는 그 커다란 상처가 경비병들에게 어떠한 위화감을 조성할지 알 수가 없는 것이기에 너는 뒤에 있으라는 거다. 그리고 네 녀석이 우리를 한 대씩 팬 걸로 괴롭힌 것은 복수가 되 었다고 여겨지는데." 그의 말은 마치 계곡에 흐르는 물 같이 막힘이 없어 듣는 이로 하여금 굉장하 당혹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다음, 겔린. 언제까지 그렇게 우리 뒤를 쫓아다니기만 할거냐. 너도 아 크릴 영지 청년회의 당당한 회원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말이 잘도 나오는 군. 잔말말고 시키는 대로 해. 경험을 해보는 것도 좋은 거야. 게다가 우 리 중에 너같이 어리게, 그리고 순하게 생긴 녀석이 있냐?" 도저히 반박할 수 없는, 완벽한 요점 정리까지 동반한 그의 말솜씨에 파 커슨은 더 이상 할말을 잃고 말았고, 겔린도 전의를 상실한 병사처럼 고 개를 툭 떨구고는 수긍하고 말았다. 트카르가 '역시 잘츠.'라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고, 그는 오랜만에 긴 말을 해서인지 잠시 길게 숨을 내쉬 어보고는 다시 과묵하게 입을 닫았다. 어느새 그들은 성문 바로 앞에 당도했다. 굳건하게 닫힌 문은 '내 앞에 서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문지기의 허락 없이는 들어갈 수 없다'라는 강 대한 의지를 내뿜고 있어서 왠지 그것을 우러러보는 네 명의 의지를 약 간 삭으러 들게 만들었다. "자자, 일단 부딪혀보자구." 그렇게 말하면서 파커슨은 겔린을 앞으로 슥 밀어버렸다. 얼떨결에 앞으 로 밀린 겔린이 뭐라고 말을 하려고 했지만 파커슨은 이미 뒤를 돌아서 서 수도 내의 생활에 대한 고찰을 수행 중이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주 먹을 불끈 쥐며 성문에 붙은 작은 쪽문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가서 문을 두드려봐. 경비병이 나오겠지." 겔린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쪽문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꽤나 축 처진 그 모습에 트카르가 걱정하는 얼굴로 그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똑똑. 크지도, 작지도 않게 겔린이 쪽문을 두드렸다. 곧 그 안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소리 없이 말끔하게 쪽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모 자를 삐뚤하게 쓰고 있는, 나른한 눈매의 경비병 하나가 창을 집고 걸어 나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명백하게도, 그 경비병의 얼굴에는 귀찮아하는 기가 서려있었다. 겔린은 약간은 찔끔하는 기분을 느끼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저어……." "네, 말씀하시죠. 이런 늦은 시간에 성문을 두드리신 이유가 무엇이죠?" 경비병의 뒤쪽에서는 문안에 있는 경비병들이 빨리 보내고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려왔고, 겔린의 뒤에서는 말없이 눈빛으로만 응원을 보내는 두 사내의 시선이 번뜩였다. 겔린이 그 순한 입매를 움직이며 말했다. "…국왕 폐하께 호소할 일이 있습니다." 경비병의 눈매가 다소 일그러지는 모습이 겔린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생각했다. '아아, 싫다고 했잖아요…….' "흐음." 의미 없는 음성을 남기는 갈색의 장발머리 남자에게 노란색 눈동자를 가진 중년의 사내가 희미하게 미소를 띄웠다. 어딘가 모르게 중년으로서 는 어울리지 않는 장난기가 있는 그 미소. 우람한 몸을 자랑하는 그 갈색 장발의 남자가 의문을 표해보았다. "…뭔가, 필로윈." 필로윈은 그냥 빙그레 웃어버렸다. 그 의미 없는 음성의 이유를 이미 알 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민되나? 만용을 부릴 수 없다면, 거절해도 상관없네. 이건 명백하게 만용이니 말일세." 배려 섞인 친우의 말에 바이마크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자네의 뜻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네. 문제는 아직 내 마음이 제 대로 갈피를 잡지 못했다는 것뿐. 조금만 더 기다려주게나." "자네가 그렇다면 기다려주기야 하겠지만, 나도 시간이 별로 없다네. 그 것만은 명심해두게." 바이마크는 두툼하게 자란 콧수염을 잠깐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전, 필로윈의 집무실에서 얘기를 나눈 뒤로 혼란스럽던 머리는 더 욱 복잡해져버렸다. 물론 한달 전에 필로윈으로부터 그 이야기를 들었던 후보다는 충격은 덜했지만, 여전히 위험성이 다분한 계획인 것이다. 필로윈, 그는 500년 전의 대마법사가 이 라시엔트를 세웠을 때처럼 반란 을 일으키려 준비중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제자들, 그리고 마법사 길드의 협조 하에 모든 것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것으로도 충분할 테지 만, 그는 더욱 신중을 기하기 위해, 금안 기사단의 동참을 바라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이었다. 금안 기사단의 명예는 국왕에게 바치는 충성 으로서 지켜줄 수 있는 것. 아니, 정확하게 더 본질을 꿰뚫자면 라시엔트 전 국민을 위하는 것이 바로 금안 기사단의 명예이다. 본질을 따르자면, 이 반란에 동참하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기사는, 그것도 금안 기 사단의 기사라면 국왕에게 충성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그래서 그 는 현재 많은 혼란을 겪고 있었다. 물론 강직하고 단단한 그의 성격상 그 런 고민을 누구에게도 털어놓은 적은 없지만, 내적으로는 벌써 수많은 기 력을 소비한 것과 다름이 없었다. 바이마크, 그는 국왕과 국민, 그 두 가지의 중간에서 난해하기 이를 데 없는 고민에 빠져있는 것이다. 결국 그렇게 오늘도 결론을 내지 못한 그들은 기분이나 풀 겸, 밖에 나 가 주점이라도 가자고 합의를 보고, 이렇게 '서문'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 었다. "저기 서문이 보이는군." 필로윈의 지나가는 투의 말에 상념에 잠겨있던 필로윈이 지그시 고개를 들어올렸다. 왕성을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성벽 아래로 필로윈의 마법에 의해 단단하게 닫혀있는 성문의 위용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지 않은가?" 바이마크의 말에 필로윈이 미간을 찌푸리면서 시력을 돋구었다. 곧 그도 그 사태를 알아챌 수 있었다. "그렇군. 가보세나." 어둠에 녹아드는 검푸른 로브를 착용한 필로윈의 걸음이 빨라지자, 바이 마크도 묵묵히 그 뒤를 따랐다. 무거운 투핸디드 소드를 착용하고 있었지 만, 결코 필로윈에 뒤지지 않는 빠르기였다. 단숨에 성문 밑으로 다가간 그들에게 나른하게 바닥에 퍼져있던 경비병 두 명이 허겁지겁 일어나 그들에게 거수경례를 시행했지만, 바이마크는 불쾌하다는 듯 인상을 가볍게 찌그려 뜨려 그들이 앞으로의 생계수단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게 만들었다. 필로윈이 쪽문이 열려있는 것을 발견하고 다가갔다. 얼마 가지 않아 그 의 귀로 우렁찬 한 사내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조금이면 된단 말이오! 그것도 안 된다는 거요?" "그러니까, 국왕 폐하께서는 지금 침소에 드셨다니까요!" 그 소리에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필로윈이 뒤쪽에 서있던 바이마 크에게 눈길을 던지자, 곧 그가 터덕터덕 걸어와 문밖으로 나갔다. "무슨 일인가." 조금, 아니 꽤나 허술한 차림을 한 네 명의 사내와 맞서고 있던 경비병 이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가, 깜짝 놀라며 재빨리 경례 를 했다. "무슨 일인가?" 다시 한번 똑같은 물음을 던지는 바이마크. 경비병이 자신을 향해 뜨거 운 눈초리를 던지고 있는 네 명의 사내를 힐끔 쳐다보고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리고 그것을 들은 바이마크가 간단하게 이야기를 축소시킬 즈음에 필로윈도 쪽문으로 빠져나왔다. "그러니까, 저 사내들이 국왕 폐하를 알현하고 싶다고 한다는 건가?" "네, 그렇습니다. 이 밤에 찾아와서 어찌나 난동을 피우는지…" 그러나 그 경비병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질 수 없었다. "우리가 언제 난동을 피웠다고!" 절대 그런 일 없다는 명백한 주장을 가득 담은 눈빛과 행동으로 소리치 는 짧은 머리카락의 남자를 향해 고개를 돌린 바이마크가 담담히 입을 열었다. "왜, 국왕 폐하를 알현하려고 하는지 물어도 되겠는가?" 그러자 그 사내가 어둠 속에서도 희미하게 비치는 뺨에 난 커다란 상처 를 씰룩이며 대답했다. "직접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사내의 눈빛이 단순한 장난이 아님을 확인한 바이마크가 넌지시 필 로윈을 돌아보았다. 그제야 필로윈이 앞으로 나섰다. "폐하께서는 이미 취침에 드셨다네. 수면을 방해할 수는 없네만." 그러자 이번에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던 맨 왼쪽의 남자가 입을 열었 다. "하지만 저희는 지금 정말 바쁩니다. 서둘러 뵈어야 하는데요." 필로윈이 난감하다는 뜻을 얼굴에 떠올려 보였다. 그에 따라 4명의 사내 의 얼굴도 따라서 침울해져버렸다. 그때 바이마크가 간단하게 말했다. "우리에게 말하게." "네?" 굉장히 열혈한 성격을 지녔을 것 같은 짧은 머리의 사내가 되묻자, 바로 옆에 서있던 사내가 다시 언성을 높이며 물었다. "당신들이 누구인데, 우리가 말해야하는 겁니까?" 필로윈이 빙긋 웃으며 바이마크의 가슴 부분을 가리켰다. 네 명의 시선 이 모두 그곳으로 집중되자, 그가 말했다. "난 왕성 수석마법사 필로윈 디바이어라고 하고, 이 사람은 금안 기사단 단장이면서 마법왕국 라시엔트 제1기사인 바이마크 폰 헤이스티론이라고 한다네. 이제 되겠나?" 진정으로 놀라버렸다는 뜻이 두 눈으로 표현하는 4명의 사내에게 필로 윈이 다시 한번 웃어 보이자, 그들은 그제야 밝은 표정이 되었다. 바이마크와 필로윈은 주점으로 가는 길에 그 4명을 동행시켰다. 얘기를 들어보니 야드 평원에서 큰일을 당해 돈은커녕 오늘 하룻밤을 지낼 돈도 없다는 그들이 불쌍하여 여관을 잡아주고 영양분 섭취까지 해주기로 한 것이다. 주점에서 적당히 테이블을 잡고 주문을 한 다음, 바이마크와 필로윈은 그들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뺨에 큰 상처를 가진 남자가 자신을 파 커슨, 이라고 소개하고 나서 대표로 이야기를 해나감에 따라, 바이마크와 필로윈의 표정은 점점 그 색을 잃어갔다. 그리고 파커슨의 마지막 말이 끝나자, 더 이상 그들의 얼굴에 '표정'이란 개념 자체가 사라져있었다. 완전히 굳어버린 얼굴로 바이마크가 조심스럽게 입을 움직였다. "…그게 정말인가?" 침통한 표정을 하고 있던, 과묵해 보이는 사내가 입을 열었다. 그의 이 름은 잘츠, 라고 했었다. "물론입니다. 거짓말을 하려고 이렇게 수도까지 생고생을 하면서 왔겠습 니까?" "흐음……." 이 시점에서 필로윈은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아크릴 영주가 다스리는 영지라면, 그가 영주가 된 지난 10여 년 간 어떠한 불만이 들리지는 않았던 걸로 기억하고 있네만." 그의 의문에 찬 물음에 가장 순해 보이는 청년, 겔린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내가 답했다. "분명히 저희는 풍족하지는 않지만, 별다른 불편 없이 지냈어요. 다 영 주님의 배려 덕분이었는데, 2년 전인가? 맞나요, 트카르 씨?" 겔린의 물음에 마침 술을 한잔 따라 입에 털어 넣고 있던 트카르라는 사내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겔린은 계속 말을 이었다. "네, 2년 전부터 이상하게 영주님께서 폭정을 하기 시작하셨어요. 처음 엔 세금을 갑자기 두 배로 올리기도 하고, 경작한 수확물을 모조리 빼앗 아가기도 한 것이 지금은 더욱 심해졌죠. 당연하게 주민들의 생활은 어려 워지면서 살길을 찾게 된 거죠." 파커슨의 설명에 거의 축약판이 된 겔린의 설명을 들은 바이마크와 필 로윈의 표정이 한층 더 심각해졌다. 그들의 설명에 따르면 2년 전부터 아 크릴 영주가 갑자기 폭정을 시작했다는 건데, 그렇다면 대체 이유가 무엇 일까. 필로윈이 알고 있는 바로는, 남작의 신분을 가지고 있는 아크릴 영주는 온화한 성품을 가졌고 가족과 자신의 영지에 사는 주민을 감싸줄 줄 아 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갑자기 돌변한 이유가 무엇일까. "무슨 이유가 있는 것 같지 않던가?" "저희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만." 필로윈의 노란 눈동자를 바라보며 트카르가 대답했다. "그 이유라는 것이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 영 잡히는 것도 없고요. 그저 2년 동안 이상하게 아크릴 영주님의 저택을 드나드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는 거 말고는." "드나드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파커슨이 살짝 고개를 끄덕인 후 말을 이었다. "네, 마법사도 있었고 신관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금방 영지를 떠났기 때문에 무슨 이유로 그들이 저택을 들렀는지 알아낼 수는 없었습니다." 낭패라는 감정이 떠오른 필로윈의 얼굴로 잠시 눈길을 돌린 바이마크가 술잔에 담겨있던 술을 단숨에 목 뒤로 넘겨버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의 의도를 알아챈 필로윈도 곧바로 그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이마크가 무게가 실린 저음의 목소리로 네 명에게 말했다. "자네들은 여기서 머무르고 싶을 때까지 머무르게. 우리가 알아서 해결 을 해주도록 하겠네." "네? 그게 정말이십니까?" 트카르가 두 눈을 두 배는 확대시킨 채로 바이마크에게 되물었고, 바이 마크는 묵묵히 고개만을 끄덕였다. "맡겨두게. 괜히 단장 자리에 오른 것이 아니고, 괜히 왕성 수석마법사 에 앉아있는 게 아니니." '믿을 수 있을까?'라는 시선으로 서로에게 시선을 던지기 시작하는 네 명. 그러나 곧 그들도 고개를 지그시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 현재로 서는 저들을 믿는 수밖에는 다른 방도가 없으니까. 게다가 지금은 왠지 졸음까지 몰려오고 있는 터라, 더 움직이기도 싫었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파커슨이 공손하게 고개까지 숙이며 부탁하자, 나머지 세 명도 그를 따 라 고개를 숙였다. 필로윈과 바이마크는 희미한 미소를 띄운 채 살짝 고 개를 주억거리고 주점을 빠져나왔다. 그들의 등에 네 명의 시선이 오래도 록 머물렀다. 밖으로 나와서 성문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바이마크의 뒤를 따르며 필 로윈이 물었다. "지금 갈 것인가?" 그러나 그의 친우는 대답은 하지 않고 엉뚱한 말을 꺼냈다. "약속하겠네." "…무엇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단호한 음성과 함께 바이마크가 말했다. "지금 가서 국왕 폐하께 이 사태를 말씀드리겠네. 취침을 방해하는 처사 지만, 지금은 그래야 할 것 같아." "흐음, 그래서?" "그리고 폐하의 반응에 따라 결정하겠네. 자네의 뜻에 따를지, 따르지 않을지." 필로윈은 조금 걸음을 빨리 하여 친우의 옆으로 다가가서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약간은 분노에 찬 기운이 느껴지는, 그렇지만 결코 굽히지 않을 신념이 깃 든 단호한 얼굴이었다. 필로윈은 왠지 자신이 계획하는 거대한 일이 손쉽게 풀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분명히 이 마법왕국 라시엔트의 나태한 현 국왕은, 필로윈이 바라마지 않는 반응을 보일 것이 당연했기 때문이다. "……." 필로윈은 은은한 달빛의 교묘한 어둠 속에서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을 정도로 작게 웃었다. 그 날. 바이마크는 국왕의 침소에서 문전박대를 당하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필로윈에게 약속했던 대로, 금안 기사단이 반란에 동참하기로 선언 했다. 그도 지금가지 겪어왔던 이 나태한 국정을 더 이상 바라볼 수 없었 던 것이다. 충성에 어긋나더라도 국민을 먼저 위하는 것이, 진정한 기사 의 도리라고 그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마법왕국 라시엔트의 근 500년 간의 평화의 시대. 드디어 놀라운 일이 일어날 듯한 예감이 서서히 고조되기 시작했다. ----------------------------------------------------------- 아아. 팀군입니다. 영락없이 늦어버린 33편이군요. 그래도 양은 꽤 되는 것 같아서 조금은 다행입니다. 학교를 개학한 탓에 글을 적을 시간이 현저하게 줄어들었습니다. 거기다 집안에서의 억압까지 거쳐, 이래저리 힘든 상황이군요. 그래도 팀군은 꿋꿋이 글을 적어나가겠습니다. 기다리는 독자분들이 계시는 한은요. 아니, 저 스스로의 길을 위해서라도요. 금안 기사단이 드디어 반란에 동참하면서, 필로윈의 계획은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그는 대체 무엇을 계획하고 있을까요? 핫핫. 이거 무슨 영화 예고 같다는.;(---) 뭐, 기대해주세요. 언젠가는 밝혀질 테죠. 핫핫. 그럼. 게으름 자까, 팀군은 오늘도 분투하며, 이만 마치겠습니다. 꾸벅.(___) 어둠의 기사 DARK KNIGHT TEAM... P.S 추천 감상 비평. 항상 기다리고 있습니다. 못난 자까에게 힘을... 번 호 : 12220 / 12227 등록일 : 2000년 09월 10일 22:02 등록자 : 암음기사 조 회 : 22 건 제 목 : [카드 게임 판타지]『 카드 마스터(Card Master) 』#034 카드 게임 판타지(Card Game Fantasy) 카드 마스터(Card Master) 34. 주점에서 경영하는 여관에 바이마크의 배려로 방을 잡은 네 명은 각각 의 개인 방에서 이제야 슬슬 일어나고 있는 중이었다. 척 봐도 가장 건실 한 청년인 듯한 겔린이 가장 먼저 잠의 마수에서 빠져나왔고, 그 다음이 잘츠, 트카르 순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파커슨은 역시나 이 중에서 잠이 가장 많은 사나이었다. "드르러어어어어엉! 퓌휴우우우우." 노골적이면서 아주 신랄한 소리를 내면서 그의 가슴이 규칙적으로 부풀 어올랐다가 가라앉는다. 어젯밤에 술 파티까지는 아니더라도 충분히 취기 가 오른 상태에서 잠에 빠졌기에 그의 소음은 보통 때보다 더욱 굉장했 다. "……." 파커슨의 입에서 들려오는 엄청난 소음이 고스란히 복도로 새어나가는 가운데, 그가 잠들어있는 방 앞에는 겔린과 트카르가 나란히 서있었다. 그들의 시선은 군데군데 낡은 티가 나는 검은 색의 문에 고정되어있었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그들. 트카르가 입을 열어 둘만의 침묵을 깨뜨렸다. "일어날 가망성이 없어." 겔린이 파커슨의 코고는 소리에 묻히지 않기 위해 일부러 음성을 높이 며 내며 말했다. "그래도 손님이 오셨는데……." "깨웠다가 무슨 짓을 당할지 몰라." "……." 파커슨의 잠을 깨우면 어떠한 사태에 직면하게 되는지, 20년 지기 친구 인 트카르에게서 아주 잘 들은 겔린은 결국 입을 다문 채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트카르가 뼈까지 아파 오는 기억이 떠올랐는지 눈을 파르르 떨며 약간의 몸부림까지 치더니 휙 계단 쪽으로 몸을 돌렸다. "깨울 거냐?" "…아니요." 고개를 거세게 젖는 겔린에게서 눈을 뗀 트카르가 계단을 따라 밑층으 로 내려가고, 겔린도 들려오는 거대한 코고는 소리에 인상을 찌푸린 채 그의 뒤를 따라 서둘러 내려갔다. 아직 개장하지 않은 탓에 한가한 주점의 테이블 하나를 자리잡고 앉아 있는 기사제복과 거대한 검을 구비한, 건장한 중년의 사내와 흑청색의 로 브를 두르고 있는 중년의 남자가 시선을 계단 쪽으로 돌렸다. 그에 따라 둘과 같은 테이블에 앉아 혼자서 식사를 하고 있던 잘츠도 고개를 돌렸 다. 잘츠가 입에 있던 빵을 전부 씹어 삼키고 말했다. "역시?" "그렇지, 뭐."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는 트카르가 테이블로 다가와 의자에 앉고 겔린도 소리 없이 자리에 앉자, 잘츠는 그제야 바이마크와 필로윈의 눈동자에 의 아함이 떠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물로 식도에 청결한 시원함을 전해주고 그가 입을 열었다. "파커슨 녀석은 한번 곯아떨어지면 스스로 일어나지 못하는 한 일어나 지 못합니다. 게다가 깨우는 건 오늘로서 생을 마감하겠다는 뜻의 왜곡 표현이라고 인식되어있기 때문에, 그냥 일어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죠." 바이마크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고, 필로윈은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지 었다. 트카르가 뺨을 긁적거리며 인사했다. "죄송합니다. 이렇게 일부러 와주셨는데." "아, 아니네. 신경 쓸 거 없다네. 우리 스스로의 의지로 온 것이니, 심려 치 말게나." 트카르는 안심하는 표정이 되어 잠깐의 숨을 내쉬다가 다시 입을 열어 바이마크에게 물었다. 잘츠와 겔린의 눈동자가 자연스레 바이마크에게 향 했다. "어떻게 됐습니까?" 바이마크는 가만히 팔짱을 끼고는 천천히 입을 뗐다. 겔린의 침을 넘기 는 소리가 그의 귀까지 들려왔다. "일단은, 잘되었네. 아마 며칠 내로 감찰사가 아크릴 영지로 향할 것이 네." "아아… 다행이군요." 트카르가 맘이 놓인다는 표정을 얼굴에 띄우며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이 제 조금 있으면 자신의 고향 문제도 금방 해결될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그 말은 꺼낸 바이마크의 표정은 그렇게 밝지 못했다. 잘츠가 그의 표정에 의문을 표했다.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필로윈이 지그시 바이마크의 옆구리를 건드렸다. 잠시 멍하게 의식을 놓 고 있던 그가 움찔 놀래며 황급히 정신을 수습하며 대답했다. "아니, 아니네. 간밤에 잠을 잘 이루지 못해서 말이네." "하하, 그렇게 저희 영지의 일이 걱정되신 것이셨습니까?" 트카르가 이제는 완전히 미소가 번져있는 얼굴로 바이마크에게 말했다. 바이마크는 잠시 아무 말 없이 침묵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라시엔트 안의 일이니, 걱정하지 않을 수가 있겠나." 그렇게 말하며 그는 걱정이 떠있던 그 표정을 완전히 미소로 묻어버렸 다. 절대 들킬 수 없는, 들켜서는 안될 걱정 따위는 지금 이 시간에 필요 할 리가 없으니. 그는 마지막으로 잠시 머리 속으로 그 생각을 떠올려보 며 저편으로 걱정을 밀어 넣었다. 그때, 필로윈이 주점 주인이 내준 이름 모를 향긋한 차를 한 모금 마시 고는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우리가 조금 생각을 해보았는데 말이네." "네, 말씀하시지요." 테이블에 모여 앉은 좌중의 표정을 하나씩 점검하듯 둘러보던 필로윈이 이내 노란 눈동자를 옅게 빛내며 자신들의 대화에서 얻어진 결론을 털어 놓기 시작했다. "자네들의 말에 따르면, 아크릴 영주는 2년 전에 갑자기 급박한 변화를 맞았네. 그 전에는 온화하고 부드럽고 또한 정직한 영주였지만, 2년 전부 터는 난폭한 폭정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였지. 그리고 그때부터 영 주의 저택에는 마법사와 신관 같이 보이는 자들이 많이 드나들었고 말일 세. 내 말이 맞는가?" 세 명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필로윈이 "흠…"이라는 작은 음성을 남기며 다시 말을 이었다. "헤이스티론 경과 내가 서로 이야기를 나눠본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었네. 아크릴 영주의 신변, 혹은 그의 가족의 신변에 크나큰 영향을 끼친 일이 일어났다고 말이지." "…병, 말입니까?" 잘츠의 물음에 필로윈이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뒤이어 바이마크가 찻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설명을 이었다. "단순히 병으로 밖에 볼 수 없는 것은 아니네. 저주나 금단의 마법 같은 것에 당했을 수도 있는 법이니까. 만약 저주라면 그것은 신관의 축복으로 이겨낼 수 있을 것이고, 금단의 마법이라면 마법사로서 간단히 이겨낼 수 있네. 현재 의술로서는 고칠 수 없는 병에 걸린 것이라면 신관이나 마법 사가 고쳐낼 수도 있으니." "그래서 우리는 그런 결론을 내렸던 것이네." 필로윈의 마무리 문장에 잘츠와 트카르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상당히 일리 있는 말이었다. 분명히 그렇게 보는 것도 전혀 무리가 없다. 그 사 실을 받쳐주는 근거가 또 하나 있으니까. "신관과 마법사를 개인이 호출하려면, 마땅한 대가를 치러야하네. 마법 사는 원래 금전에 대한 개념이 투철하게 세워진 족속들이고, 아크릴 영주 같은 어떠한 신도 따르지 않는 자라면 신관을 초청하기 위해 그 신전에 합당한 대가를 내기 마련이지. 헌금이라는 이름으로." "그것 때문에 아크릴 영주는 폭정을 시작한 것이라고 여겨지네. 워낙에 정직한 사람이라 비리를 통한 비자금 같은 것은 모아둘 턱이 없으니, 턱 없이 돈이 부족했겠지.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양심을 저버리면서까지 주 민들을 억압한 것일 게야." 필로윈의 말에 바이마크가 이어서 설명을 하자, 세 명의 표정이 여실히 굳어져버렸다. 그동안 자신들이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을 이들은 단 하룻 밤 내에 거의 완벽하게 추리해낸 것이 아닌가. 어쩐지 부끄러워지는 것도 같은 기분에 그들은 얼굴을 붉힐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그런 변화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필로윈이 문득 생각났다는 얼 굴로 트카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참, 혹시 아크릴 영지에 여행자들은 많이 들르는 편인가?" 허탈한 표정으로 목을 긁고 있던 트카르가 황급히 손을 내리며 대답했 다. "아, 네.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니지만, 야드 평원을 지나 셀라드리엔 강 쪽으로 가는 길의 중간에 세워진 곳이라 여행자는 끊임없이 들르는 편입 니다. 아, 겔린. 파커슨이 우리가 만난 그 애들도 아크릴 영지로 간다고 했었지?" "네, 그랬어요." 필로윈의 물음에 대답을 하던 도중에 생각난, 야드 평원에서 만나서 자 신들을 구해준 소년과 소녀의 이야기를 떠올린 트카르가 확인 차 겔린에 게 물었고, 합당한 답을 얻어냈다. 그가 "흠."하는 헛기침 소리와 함게 말 을 마무리지었다. "네, 어제도 오는 중에 그런 애들을 만났고요." 바이마크의 표정이 기묘하게 변했다. '혹시?'라는 뜻이 담겨있는 얼굴로 필로윈을 향해 시선을 돌린 그의 눈에 이미 또 다시 입을 연 친우의 모 습이 들어왔다. "애들?" "네. 우리가 야드 평원에서 피말라에게 쫓기고 있었는데, 마침 근처에서 야영을 하고 있던 두 명의 애들이 저희를 구해줬거든요. 정말 한숨 돌릴 수 있었죠." "생김새가 어땠는지 물어도 되겠나?" "어려울 것 없죠. 일단 남자 쪽은… 아직 성인식도 치르지 않았을 것 같 은 금발 머리에 매우 잘 생긴 소년이었고요, 여자 쪽도 소년의 또래로 보 이는 나이에 검은 머리카락이 매우 길고 아름다운 소녀였습니다. 뭐, 아 주 잘 어울리는 연인 정도?" 트카르가 재밌는 인연으로 만난 그 어린 연인의 모습을 잠시 떠올려보 다가 씨익 웃었다. 남자 쪽이든 여자 쪽이든 서로에게 전혀 부족함이 없 는, 그런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연인도 흔치 않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 다. 물론 그는 파커슨의 주먹 선사로 인해 기절에 빠져있었기 때문에, 파 커슨과 연인(?)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 한편 겔린은 눈앞에 있는 이 높으신 신분을 가진 분들이 왜 갑자기 황 당함이 진득이 묻어나는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 얘 기가 그들에게는 꽤나 충격으로 다가서는 것일까. 그가 떠오르는 의아함 으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 마침 바이마크의 입이 열렸다. "…이름은 알고 있는가?" 트카르는 거침없이 대답했다. "소년은 훼온 레이엔트, 소녀는 아이 네드런이라고 했습니다." "…으음." 필로윈과 바이마크의 얼굴에 동시에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표정이 떠 올랐다. 트카르가 자신의 말이 저들에게 그렇게 심려를 끼치게 하는 말이 었는지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잘츠와 겔린도 그 점에 대해서는 그와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훼이드리온 레이틴 라시엔트.' 트카르의 말 중에서 필요한 키워드만을 골라내어 조합해본 결과, 나오는 단어는 그것 외에는 없었다. 금발의 잘생긴 외모. 게다가 이름이 '훼온 레 이엔트'라니. 이 세상에 그런 조건을 충족할 수 있는 사람이 또 있을까. 바이마크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결코 간단하고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았다. 그때, 순간적으로 주위의 시간이 정지해버렸다. 바이마크가 흠칫 놀래며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주위에는 어떠한 변화도 일어나 지 않았다. 잘츠에게 뭐라고 귓속말을 하려는 듯 트카르가 입에 손을 대 고 있는 자세 그대로 멈추어있었고, 겔린도 물을 마시며 눈동자를 돌리는 모습 그대로 굳어있었다. 바이마크는 의문과 당황을 가득 담은 눈으로 주 위를 연신 둘러보던 중에 멈추어진 공간 속에서도 유일하게 자신을 향한 눈빛을 찾아냈다. 자신의 왼쪽 아래, 필로윈이었다. 자신이 만들어낸, '시간'이란 흐름이 멈춰버린 '공간'을 둘러보던 그의 눈 길이 벌떡 일어난 바이마크에게로 향한 것은 그렇게 오래 지나지 않아서 였다. 어차피 이 공간에서는 시간이란 개념이 사라졌기 때문에 얼마든지 시간을 끌어도 상관없었지만, 현재 자신의 감정은 변함 없었기 때문에 일 단 사태는 수습하고 봐야했다. "앉게나." 짤막한 친우의 말에 바이마크는 금새 의문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자네가 만든 건가?" "그렇지, 내 의지로서." 테이블 맞은편에 앉은 채 멈추어있는 이들을 향해 잠시 눈길을 던져본 바이마크가 곧 자리에 앉자, 필로윈이 곧 말을 꺼냈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분명히 저들이 만난 소년은 태자 저하가 분명하네. 순조롭게 서쪽으로 이동을 하고 계시는 것으로 보이는군." "그렇지. 하지만 문제는 그 소녀 아닌가. 아이 네드런이라고 했었지? 큰 일이지 않은가. 아무리 저들의 착각이었다고는 해도 연인으로 보일 정도 로 친해지는 것은 그렇게 좋은 상황이 아니네." 필로윈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감이야. 어차피 우리의 계획에서는 이미 아무런 힘을 끼치지 못하는 태자 저하시지만, 이미 신성제국 하쉴로츠와의 혼담이 이루어진 상태인데 다른 여자가 그 중간에 개입한다는 것. 태자 저하로서나 그 여자로서나 결코 좋은 끝은 보이지 못할 것이야." 은빛의 머리카락과 투명한 눈동자, 고금에 다시없을 미모와 고고한 품격 을 지녔다고 알고 있는 하쉴로츠의 성녀 아이린 하이 하쉴로츠와 정체를 알 수 없는 태자의 동행인 그녀. 필로윈과 바이마크는 그 순간 공통적인 생각을 떠올렸다. '큰일이야.' 특히 필로윈의 걱정은 더 깊었다. 현재는 중요하지 않은 존재인 태자였 지만, 이 계획의 끝에는 그 어느 존재보다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자가 바로 태자였기 때문이다. 물론 이 점은 바이마크도 모르고 있었다. 오직 자신과 마법사 길드 최고 원로 중 몇 명에게만 알고 있는 사실인 것이다. 어쨌든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젓다가 다시 바이마크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을 느낀 바이마크도 그의 눈동자를 마주했다. "방법이 없는 건가." "어찌할 방법이 없잖은가. 지금에 와서야 우리가 나서서 강제로 둘을 헤 어지게 한다고 하더라도, 적당한 이유조차 없는데. 태자라고 밝힐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흐음……." 괴로움이 묻어나는 어조로 옅은 신음을 남기는 바이마크. 한가지 고민을 해결하자 또 다른 고민이 날아 들어온 것 아닌가. 그는 무겁게 가라앉은 어조로 입을 열었다. "운명이란……." 달과 운명의 여신 하실루스가 관장하는 인생의 한 면에 대한 깊은 의문 을 담은 그의 목소리가 시간이 멈춘 공간 속에 울려 퍼졌고, 아무리 둘러 봐도 어색한 그 공간 속에서 움직이는 오직 둘뿐인 존재 중 하나인 필로 윈이 그의 말을 이었다. "…게임과도 같지." 바이마크가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지만, 필로윈은 그냥 빙그레 웃어버렸 다. 바이마크는 한동안 그런 그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같이 마주 웃어버리 고 말았다. 친우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알아챈 것이다. 운명은 게임과도 같다.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것. 어 쨌든 그 게임을 풀어 가는 존재는 자신들이 아닌 것이다. 자신들은 그 게 임의 배경 사건을 담당하는 관조자와도 같은 신분일 뿐. 비록 반란이라는 초유의 사건을 계획하고 있기는 하지만, 태자의 여행까지 신경 쓸 계제는 아니었으니까. "운명은 게임과도 같다. 좋은 말이군." 바이마크와 필로윈은 조용히 웃었다. 게임의 숨겨진 마스터는 빙그레 웃 었다. 그리고, 어젯밤. "조, 조금만 쉬다가자, 티임……." 게임의 플레이어 중 한 명인 검은 머리카락의 소녀가 후들거리는 다리 를 애써 끌어 앞으로 내딛으며 힘 빠진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조금만 더 가면 돼. 조금만 더 힘을 내봐, 아이." 마지막 플레이어인 금발의 소년이 단호한 음성으로 말하며 전신의 힘을 쥐어짜 다시 한번 앞으로 발을 내딛었다. 발바닥에서 느껴지는 괴로운 고 통도 뒤로하고 그는 계속 앞으로만 걸어갔다. "티이이이임……." 아침부터 지금까지 단 한차례도 쉬지 않고 계속 걷기만을 반복해온 그 들. 아이도 이젠 지칠 대로 지쳐서 더 이상 말할 기운도 나지 않았다. 훼 이드리온은 어려서부터 수련을 통해 쌓은 체력이라도 있다고 해도. 아이 는 또래의 소녀들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체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가 무 식하게 걷기만 하는 훼이드리온을 지금까지 놓치지 않고 따라온 것도 용 할 정도였다. 애원을 하는 아이에게 잠시 고개를 돌린 훼이드리온은 잠시 아이가 따 라오기를 기다렸다. 초췌하고 피곤하고 더럽고, 아무튼 원래 그녀의 모습 에서는 도저히 발전 가능성이 없는 모습만을 골라서 이루어낸 그녀의 모 습에 훼이드리온은 잠시 죄책감을 느꼈다. 그리고 고마웠다. 제대로 설명 도 하지 않았지만, 이만큼이나 자신을 따라와 준 그녀가 정말로 고마웠 다. 훼이드리온이 그녀의 팔을 잡아서 자신의 옆으로 끌고 왔다. 힘이 없는 그녀는 이내 그의 몸에 자신을 맡겨버리고 거의 무너져 내릴 듯한 포즈 로 그에게 기댔다. "많이 힘들어?" 입술을 뗄 힘도 없는지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훼이드리온의 얼굴에 죄책감이 떠올랐다. "미안. 나 때문에." "…아냐아……." 뒤쳐져서는 안될 것 같은 어떤 강한 느낌 때문에 그녀는 그의 뒤를 필 사적으로 따라온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 대한 어떠한 미움의 감정 도 일어나지 않았다. 지금 그녀의 마음 속에는 얼른 힘을 내서 그의 품에 서 벗어나자는 생각 밖에는 없었다. 안 그래도 복잡한 머리 속이 그의 따 뜻함으로 인해 더욱 증폭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아이는 애써 두 팔에 힘을 주어 몸을 일으켰다. 전신에 감각이 돌아오면 서 가라앉는 피로감이 그녀를 엄습했지만, 물러서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가자아. 조금만 더 가면 된댔잖아." "…응." 훼이드리온은 그런 아이를 불안한 눈길로 쳐다보았지만, 이내 자신도 일 어섰다. 이럴 때, 자신이 마법이라도 쓸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훼 이드리온은 자신의 머리를 한 대 치고는 아이를 부축했다. 그녀가 깜짝 놀라며 그를 바라보았지만, 훼이드리온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려버렸 다. 아이의 왼쪽 겨드랑이에 손을 집어넣고, 그녀의 오른쪽에서 그녀를 부축 하고 있는 훼이드리온. 아이는 힘이 빠지는 다리를 이끌고, 그의 부축을 받으며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갔다. 저 앞에 보이는, 서쪽으로 이미 많이 기울어진 하실루스의 상징인 은빛 달이 지상에 따뜻한 눈길을 보내주고 있었다. 그 밑으로 훼이드리온과 아 이의 눈에 드디어 반가운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아크릴 영지. 영지를 둘러싼 굳건한 성벽의 칠흑 같은 색이 둘의 시야를 가로막으며 그렇게 평원 한 가운데에 서있었다. ----------------------------------------------------------------------- 팀군이 돌아왔습니다. 역시나 35편도 늦었군요. 이거 점점 게을러져 가는 것 같은.;;; 어서 원래의 페이스를 찾아야될 텐데요. 핫핫핫. 추석입니다. 시골에 가신 분들도 계시고 사정상 아직 안가신분들도 있으시 겠죠. 자까는 할머니 할아버지와 같이 살기 때문에 안 가도 된답니다. 뭐, 외가에는 갈지도 모르겠군요. 핫. 아무튼 모두들 즐겁고 멋진 한가위 보내시길 바랍니다. 그럼. 팀군은 이만. 어둠의 기사 DARK KNIGHT TEAM... P.S 추천 감상 비평. 항상 기다리고 있습니다. P.S 2 추석 때. 글을 쓸 수 있을까... 번 호 : 12332 / 12341 등록일 : 2000년 09월 15일 22:40 등록자 : 암음기사 조 회 : 17 건 제 목 : [카드 게임 판타지]『 카드 마스터(Card Master) 』#035 카드 게임 판타지(Card Game Fantasy) 카드 마스터(Card Master) 35. 검은 색의 성벽은 평원 한가운데 우뚝 솟아난 채 평원의 고요함에 당당 하게 맞서고 있었다. 바람을 타고 쉬지 않고 밀려드는 그 적막과의 사투 에도 전혀 굴하지 않는 그 기백이, 사뭇 훼이드리온이 성벽을 올려다보게 만들었다. 왕성말고는 성을 쌓아놓은 곳을 볼 수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한 훼이드리온은 새로운 감회를 느끼면서 성벽을 올려보다가, 손끝에서 타고 오르는 미약한 흔들림을 느끼고 서둘러 정신을 수습했다. 너무나 약한 체력으로도 자신을 따라온 아이가 완전 탈진해버린 모습으 로 자신에게 부축을 받고, 아니 아예 매달려있었다. 헉헉, 대는 소리를 내 는 것조차 힘든 것인지 숨도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남아있는 힘을 끌어내 성문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평소에는 만만했던 배낭의 무게와 가 볍기 그지없던 아이의 몸무게가 합쳐지고, 전신에 퍼져있는 피곤함까지 합류하자 그의 전신을 짓누르는 무게는 정말 장난이 아니었다. '…가자…….' 그의 머리 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그것 하나밖에 없었다. 자신이 이루려 는, 알 수 없는 의무감과 걱정으로 범벅이 된 그 일을 이루기 위하여 그 는 아크릴 영지로 가자는 생각밖에는 없었다. 드디어 성문에 다다랐다. 왕성보다 1.5배는 더 커 보이는 문 앞에서 훼 이드리온은 잠시 숨을 몰아쉬었다. 이제 이 문만 통과하면 아크릴 영지인 것이다. "조금만 참아, 아이……." 간신히 자신에게 매달려 이동하고 있는 그녀를 향해 걱정을 담은 눈길 로 격려를 해주고 난 후, 성문 오른쪽 밑의 쪽문으로 걸어갔다. 어쩐지 메케한 냄새가 그의 코를 찔러대 자연스레 인상이 찌그러졌다. '아니지, 불쌍한 모습으로.' 걸어오면서 나름대로 연습해본 '불쌍해 보이는' 표정을 본격적으로 얼굴 에 띄우고 쪽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웅성대는 소리가, 정확히는 불평에 가득 차 중얼대는 목소리가 점점 그들 가까이로 다가오더니, 쪽문이 끼 익, 소리와 함께 입을 열었다. 그곳에서 어두운 색 계통의 제복을 대충 걸치고 수염을 지저분하게 기른 남자 하나가 불쑥 머리를 밖으로 내밀었 다. "이 밤중에 대체 누구야?" 바지를 추스르고 있는 모양이, 방금 전까지 즐기고 있었던 것일까. 귀찮 다는 기색이 역력한 그 남자를 경비병이라고 판단한 훼이드리온은 최대 한 눈매를 선하게, 그리고 불쌍하게 변화시키면서 입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가도 될까요?" 하루종일 온몸을 땀으로 샤워를 하면서 걸어온 그들이라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게다가 소년에게 매달려있는 소녀(로 보이는 아이)는 무슨 병 에라도 걸렸는지 축 늘어져있으니, 경비병의 눈에는 그들이 좋게 보일 리 가 없다. 지저분한 턱을 만지작거리던 경비병은 속으로 잠시 치사해져볼까, 생각 하고는 씨익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가 손바닥을 펴서 자신의 앞에 내밀자, 훼이드리온이 의문스런 눈길로 물끄러미 그 손을 바라보았 다. 경비병이 벌컥 화를 냈다. "몰라? 이런 늦은 밤에 들어오려면 돈을 내야할 거 아냐!" "…네, 네?" "싫음 밖에서 아침이 될 때까지 기다리던지." 경비병은 자신은 상관없다는 듯이 고개를 홱 돌려버리고 코방귀를 한차 례 날렸다. 훼이드리온이 다소 황당하다는 빛을 띈 얼굴로 그를 관찰하다 가, 결국 허리춤의 주머니에서 서너 개의 동전을 꺼내 그의 손에 쥐어주 었다. '여행 경비가 이렇게 지출되다니…….'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 쓴 침은 계속 목을 타고 넘어갔다. 저 남자 도 영주의 억압에 피해를 입은 자들이라 돈이 궁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 에, 결국 그냥 적선하는 셈으로 넘기자고 그는 생각했다. 번쩍이는 깨끗한 색의 동전을 보면서 경비병이 씨익 웃었다. 오늘도 이 렇게 수입을 올린 것이다. 빌어먹을 영주에게 뺏기지 않아도 되는 자신의 수입에 그는 흡족한 마음으로 쪽문 안으로 들어왔다. 아직 문밖에 서있는 그들에게 "들어와."라고 일러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돈만 준다면, 그도 한없이 너그러운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네, 감사합니다." 간단히, 아무 감정이 담기지 않은 어조로 인사를 하고 아이를 부축해 영 지 안으로 들어왔다. 경비병은 나름대로 따뜻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여관 이 있는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켜준 다음,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성문을 이렇게 비워놓아도 되는 걸까, 라는 의문과 동시에 우리 왕성의 경비병들 도 이런 건 아니겠지, 라는 걱정이 드는 것을 막지 못한 훼이드리온은 씁 쓸히 미소를 지으며 메마른 입술을 혀로 핥았다. 아이가 고개를 들어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풍경에 의문스럽게 입을 열었다. "…온 거야?" "응. 이제 여관에 가자." 완벽하게 바깥 평원과 고립되어있는 이 아크릴 영지의 성안의 잘 닦여 진 길을 따라 그들은 천천히 걸어갔다. 일단은 평원의 몬스터, 피말라의 위협에서 벗어났다는 생각에 잠시 안도를 할 수 있었지만, 곧 다른 생각 으로 긴장을 해야만했다. '여관.' 방금 성문을 통과할 때도 약간의 소란을 겪었는데, 이 밤중에 여관을 찾 았다가 또 어떤 일을 당하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그의 표정이 걱정스 럽게 굳었다. 파커슨에게서 들었던 이 영지의 사정을 고려하자면 아니라 는 보장도 없으니까. 작은 불안을 안고 주위를 살피면서 걷고 있던 그가 '아크릴 여관'을 찾 아낸 것은,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은 거목을 올려다보다 돌맹이를 밟아 넘 어질 뻔한 위기를 겨우 모면한 다음 거목의 밑으로 우연히 시선을 내렸 을 때의 일이었다. "뭐, 뭐야……." "글쎄, 뭘까."라고 시답잖은 농담을 던질 시점이 아님을 잘 알고 있는 훼이드리온이 아이를 부축한 자세를 고치고 팔에 다시 힘을 넣으면서 그 녀의 귀에 속삭였다. "미안. 잠시 한눈을 팔았어." "…조심하란 말이야." 핀잔의 뜻이 담겨있었지만, 목소리에 그만큼 힘이 없어서 그를 안타깝게 만 할 뿐이었다. 훼이드리온은 서둘러서 여관에 다가갔다. 3층의 목조건 물인 여관은 군데군데 낡아 보이는 기미가 있었지만 그럭저럭 튼튼해 보 였다. 그 정도에서 감상을 마친 훼이드리온은 여관 문을 두드렸다. 한두 번 두 드리는 것으로는 지극히 모자랄 것 같아서 아예 안에서 무슨 기척이 들 릴 때까지 대놓고 두드리기로 마음먹고 주먹을 문에 댄 찰나. "…누구세요?" 문안에서 여린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훼이드리온은 움찔 놀래며 뒤 로 물러났다가, 멍하니 문을 바라보았다. 천천히 문이 열리면서 어두운 여관 안의 정경이 살짝 그의 눈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더 눈에 띄는 건, 약간은 경계하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 는 소녀의 모습이었다. "…여관이라면, 들어가도 될까요? 여행자인데." "아… 네, 들어오세요." 여행자라는 말에 경계의 눈빛이 풀린 소녀는 서둘러 문을 활짝 열었다. 그리고 쪼르르 달려가 마법의 등에 마력을 불어넣는 스위치를 눌러 1층 의 빛을 밝혔다. '흠… 늦은 밤에 소녀 혼자만 여관을 지키고 있다?' 미묘하게 맞지 않은 상황에서 훼이드리온은 아이를 데리고 여관 안으로 들어와 가까운 테이블에 앉혔다. 그녀는 이제 약간은 체력이 돌아온 모양 인지 스스로 자세를 잡아서 그대로 테이블 위로 쓰러져(?) 숨을 몰아쉬었 다. 훼이드리온도 테이블 위에 짐을 올린 후, 한숨을 푹 쉬었다. 일단은 여관에 도착한 것이다. 역시나 이 여관도 다른 곳과 같게 식당을 겸하고 있나보다. 설마 저 소 녀 혼자서 이 여관을 경영하는 것은 아닐 테고, 아마도 잠이 안 와서 홀 에 내려와 있는 것이라고 그는 추측했다. 마침, 그의 시선이 머물고 있던 소녀가 장부를 들고 그들에게로 다가갔 다. 조금은 어두운 붉은 색의 머리카락을 양 갈래로 단정히 땋아서 뒤로 넘기고, 소녀 티가 팍팍 나는 수줍은 미소를 띈 그녀가 장부를 테이블 위 에 올리며 훼이드리온에게 물었다. "2인실 드릴까요? 그편이 더 싼데." "아… 네." 피곤이 서려있어서 무방비한 그의 미소에 소녀가 얼굴을 붉혔다. 역시 이런 미소년에 약할 나이 또래의 그녀라 훼이드리온의 미소는 정말 치명 적인 작용을 하는 것이다. 소녀는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장부와 펜을 내밀었다. "여, 여기 서명해주세요." 훼이드리온이 움직이는 것조차 버거울 만큼 무거움이 느껴지는 팔을 올 려 장부에 이름을 기입하자, 소녀도 장부를 안고 카운터 쪽으로 걸어갔 다. 배낭을 들어달라고 소녀에게 말할까, 하고 고려해보다가, 무거운 짐을 저런 여린 소녀에게 맡길 수 없다는 기사도가 타올라 결국 좀 전처럼 자 신의 어깨에 모두 짊어지고, 마지막에는 아이까지 왼쪽에 부축했다. "오세요." 열쇠를 한 손에 든 소녀가 2층으로 걸어 올라갔고, 훼이드리온도 아이를 데리고 계단을 올라갔다. 힘이 없어서 축 늘어진 아이 덕택에 2층까지 올 라가는 시간이 꽤나 오래 걸리기는 했지만, 결국 소녀가 안내해준 방안에 진입할 수 있었다. 아이를 조심스레 한 침대에 눕히고 있을 때, 훼이드리온이 눈치채지 못 할 정도의 미약한 눈빛으로 아이를 노려보고 있던 소녀가 말했다. "더 필요한 거 있으세요?" "아… 세면실이 어디죠?" "세면실은 2층 복도 끝에 가시면 있어요. 다른 것은?" "아니요, 이제 없습니다." 간단히 요기할 거라도 달라고 할 생각이었지만, 먹어도 바로 잠들면 위 에 부담이 갈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그냥 고개를 저었다. 간단히 씻고 피로부터 푸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럼, 편히 쉬세요." 소녀는 생긋 웃어 보이고는 문을 닫고 나갔다. 물론 괜히 아이를 질투하 고 있는 그녀의 마음은 표현하지 않은 채. 아이를 침대 위에 눕히자, 그녀가 살며시 눈을 뜨고 훼이드리온을 쳐다 보았다. "팀……." 일어나서 배낭을 벗고 있던 훼이드리온이 그 부름에 서둘러 고개를 돌 려 그녀에게 다가갔다. "아, 왜? 쉬어, 힘들 텐데." "그 전에… 약속해……." "뭘?" 아이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훼이드리온의 물음이 그녀의 귓가에 아련히 퍼져나갔다. "왜 이렇게… 서둘러왔는지……." "아아…" 완전히 눈을 감은 아이가 이내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에 빠져버렸다. 땀 에 절은 옷의 불편함 따위는 그녀의 수면을 절대 방해할 수 없었다. "…응." 힘든 노동 뒤에 편히 잠든 그녀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면서 훼이드리온 은 잠시 간의 상념에 잠겼다. 말해야할까. 말해야할 것이다. 하지만 어떻 게 말해야할까. 태자라는 것을 말할 수도 없지 않은가. 이 여행의 마지막 까지 후계자 수련의 율은 지켜져야 하니까. '억지스럽지만.' 훼이드리온은 천천히 침대 위에 몸을 누이면서 내일 아이에게 해야할 변명을 머리 속으로 정리했다. 정확한 진실을 밝힐 수 없는 자신의 처지 를 잠깐은 비관하면서 생각하던 그의 상념이 채 끝을 맺기도 전에, 무겁 게 내리누르는 눈꺼풀의 힘을 이기지 못한 그는, 결국 수마가 이끄는 대 로 깊은 수면의 늪 속으로 천천히 잠겨갔다. 그들은 거의 오후가 되어서야 눈을 떴다. 우연찮게도 동시에 눈을 떠서 동시에 몸을 일으키고 동시에 눈을 만지다가 동시에 서로를 마주본 그들 은 잠깐 즐겁게 웃음을 터뜨려 보고는 완전히 기상을 했다. "아아, 기분 좋다. 정말 푹 자버렸는걸?" 여행을 시작한 이후로 이만큼 푹 깊게 잠이 든 적이 없었던 것으로 기 억하고 있는 아이는 가뿐하게 기지개를 펴면서 밤새 굳어버린 몸 구석구 석을 마사지했다. 말끔하게 피로를 씻어서 그런지 기분도 날아갈 정도로 가벼웠다. "샤워라도 하지 그래?" 어젯밤 땀에 절은 채로 잠이 들어버린 아이의 모습을 기억해낸 훼이드 리온이 그녀에게 말했고, 그녀도 눈동자를 굴리다가 즐겁게 고개를 끄덕 였다. "팀도 해." "네가 하고 오면." 결국 그들은 교대로 깨끗하게 샤워를 하고 옷도 깨끗한 것으로 갈아입 어 보송보송한 상태로 식당으로 내려왔다. 물론 아이의 신관용 여행복은 그녀의 간단한 신법으로 깨끗하고 하얀 모습으로 다시 복귀되었다. 본래의 모습을 찾은 둘이 식당으로 내려가자, 얼마 되지 않는 손님들의 시선이 모두 그들에게로 쏠렸다. 아이는 당연스럽게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발랄하게 테이블에 앉았고 민감한 훼이드리온은 머쓱하게 뒷머리 를 긁으면서 그녀의 맞은 편에 앉았다. 사람들의(여자, 남자를 막론하고) 시선을 완전 빼앗고 있는 주범인 아이 가 그 아름답고 깨끗한 모습으로 한껏 미소를 짓고 소리쳤다. "이 식당에서 제일 맛있는 걸로 2인분 주세요!" "네에!" 훼이드리온이 자신의 귀에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힐끔 고개 를 돌렸다가, 그 붉은 단발머리의 소녀임을 알고 목례로 인사를 하자 소 녀도 마주 보고 미소지으며 인사했다. 아이가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후 이드리온에게 뜨거운(?) 시선을 보냈다. "오호. 내가 잠든 사이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무슨 일은." 훼이드리온은 피식 웃으며 그녀의 말을 받아넘겼다. 그녀도 그냥 생긋 미소를 짓고는 딴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곧 이틀만에 구경하는, 제대로 된 행색을 갖춘 요리가 테이블 위에 올라 왔고, 아이와 훼이드리온은 물밀 듯이 밀려오는 감동을 조미료 삼아 요리 를 아낌없이 배로 밀어 넣었다. 그렇다고 게걸스럽게 먹었다는 것은 아니 고, 지금까지 배워온 왕성 예법에 맞추어 우아하게, 그러면서도 빠른 속 도를 식사를 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아이도 웬만큼 식사 예절이 잡혀있는데?' 식사 예절이라 봤자 그렇게 다를 것도 없어서 금방 그 의문을 잊어버렸 다. 신관이라고 했으니 신전에서 배웠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훼이드리온은 다시 요리를 음미하면서 차곡차곡 영양분을 보충해나갔다. "아아, 잘 먹었다." 훼이드리온이 먼저 식사를 마치고 물을 마시고 있자, 뒤이어 식사를 끝 마친 아이가 포만감에 만족한 얼굴을 한 채로 기분 좋게 소리냈다. 그가 빙긋이 미소지으면서 물잔을 내밀자, 그녀가 반갑게 그것을 받아들고 웃 었다. '말할 타이밍인가?' 훼이드리온이 어젯밤에 생각한, 결국은 생각하다 자버린 변명을 다시 머 리 속으로 떠올리면서 정리를 하고 있을 때, 때마침 물을 다 마신 그녀가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말해줘, 이제." "으음." 미리 기다리고 있었던 터라, 그렇게 당황하는 기색 없이 훼이드리온이 말했다. "영주를 찾아갈 거야." 먼저 그렇게 서두를 꺼내자, 아이가 당연한 반응을 나타냈다. "왜?" 이젠 본격적인 설명을 할 차례인 것이다. 그가 목을 가다듬고 설명을 시 작했다. "야드 평원에서 만난 파커슨 씨의 이야기, 기억나지? 이 영지의 주민들 이 지금 영주에게 억압을 받고 있다는 이야기 말이야." "응. 기억 나." "그 이야기 때문에 난 영주를 찾아가겠다는 거야." "어째서?" 표현방식만 다르지, 앞서 꺼낸 물음과 뜻이 일맥상통하는 물음을 다시 던지는 아이. 그가 작은 한숨과 함께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말이야. 난 영주를 만나서 직접적으로 물어볼 걸 거야. 대체 왜 그러는 것인지. 그리고 담판을 지을 거야. 그것이 이 영지 주민들을 구하는 일이 되겠지." 아이가 다소 굳어버린 얼굴로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예쁜 얼굴 에서도 저런 표정은 가능한 것이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되지 않는다고는 생각지 않아." 그녀의 한숨. 그녀는 보기에는 굉장히 총명해 보이고 믿음직스런 훼이드 리온이 어째서 이렇게 어리석게 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조금만 생각해보라고, 이 바보야. 대체 왜 그렇게 단순한 거야? 그게 말이 돼? 팀이 무슨 수로 영주와 맞서겠다는 거야? 지나가는 여행자일 뿐인 자의 말을, 그런 영주가 듣기나 할 것 같아? 오히려 귀찮다고 감옥 에 집어넣어 버릴걸? 그 아저씨의 말이 전부 사실이라면, 그런 짓을 하더 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사람이란 말이야." "그렇지만." "그렇지만, 이라니." 조금은 화난 듯이 보이는 표정이 그녀의 얼굴에 떠올랐다. 하지만 그녀 는 진심으로 그에게 화가 날 것 같은 마음을 애써 참고 있는 중이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간단한 일이잖아. 불가능해, 절대 가능하지 않은 일 이야." "찬성이에요." 어디선가 들려오는 또 다른 목소리. 훼이드리온과 아이는 금새 그 목소 리의 주인공을 알아채고 시선을 옮겼다. 테이블 옆에 쟁반을 가슴에 안고 서있는 소녀가 있었다. 붉은 단발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소녀가 말했다. "얘기를 들어보니까, 대충 상황이 이해가 가네요. 그렇게까지 완전 탈진 이 되도록 온 이유가 영주님을 설득하기 위한 것이었어요? 그렇다면 정 말 착각하신 거네요." 소녀의 말투는 다소 차갑게 들렸다. 그만큼, 그녀는 이미 모든 것을 포 기했다는 이야기였다. "왜죠?" 훼이드리온이 무표정하게 물었다. "파커슨 오빠를 만나신 모양인데요. 그렇다면, 오빠의 성격은 대충 아시 고 계시겠네요. 파커슨 오빠와 청년회 회원들이 몽땅 영주님의 성으로 처 들어갔던 때가 있었어요. 영주님을 만나겠다고 말이에요. 하지만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요?" 그들이 알 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부지런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소녀가 깊게 숨을 내뱉고 말을 이었다. "몽땅 다 감옥에 잡혀버렸어요. 약 일주일 동안 그 안에서 고생을 하다 가 나왔죠. 그리고 그 후로 영주님을 만나서 해결 짓겠다는 생각은 절대 하지 않았어요." "……." "이제 아시겠어요? 마을 청년회가 몰려가도 안 되는 일이에요. 그런데 고작, 지나가던 여행자가 하는 말에 영주님이 귀라도 기울일 것 같아요? 전 당신을 정말 뜯어말리고 싶군요." "하지만……" 소녀가 단호하게 훼이드리온의 말을 끊어버렸다. "하지만, 이 아니에요. 전 또 여행자가 당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아 요. 영주님은 요즘에 여행자들까지 손을 대고 계세요. 그러니 이렇게 있 는 이 시간도 당신들에게는 위험해요. 그런데 아예 드래곤의 입에 머리를 들이밀려고요? 일찍 마음을 고쳐먹기 바랄게요. 그게 현명한 방법이에 요." 자신의 말을 모두 마친 듯이 소녀는 몸을 돌려 카운터로 걸어가 버렸다. 그 뒷모습을 허망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훼이드리온. 아이가 지그시 그를 바라보다가 작게 입을 움직였다. "포기해."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대충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그녀 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소녀를 향해 간단한 음료를 주문했다. 소녀도 방 금 전의 차가운 모습과는 달리 영업용 스마일을 환하게 띄워 보이며 고 개를 끄덕였다. 잠시 침묵이 흐르는 사이, 식당의 웅성거리는 분위기가 어느 정도 사라 져 조용해진 분위기 속에서 갑자기 훼이드리온이 몸을 일으켰다. 아이의 눈이 동그랗게 변한 채 그에게 향했다. "아직도 포기하지 않은 거야?" "아니." 그가 조용하게 입을 뗐다. "구경이나 하면서, 정리나 하려고." "여행자는 위험하다잖아." "걱정 마. 내가 쉽게 당할 것 같아?" 아이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다녀오라는 뜻. 훼 이드리온이 희미하게 웃으면서 그녀의 옆을 지나쳐 식당 문으로 향했다. 그러다가 문득 고개를 돌리며 그녀에게 물었다. "뭐, 필요한 거 있어?" 그의 물음에 아이가 잠시 눈동자를 굴리면서 생각하는 포즈를 취하다가 간단히 대답했다. "식량. 거의 없잖아." "아, 그렇군. 뭐로 사올까?" "그냥 도시락이나 건포 같은 거 사와. 신법으로 축복을 내리면 될 테니 까." "응. 그럴 게." 정말 완전히 맘을 잡은 건지, 훼이드리온은 일상적인 여행에 관련된 이 야기를 꺼냈다. 아이도 그 모습에 안심할 수 있었다. 그동안 파악한 훼이 드리온의 성격으로 봐서는, 절대 거짓말을 하면서 저렇게 태연하지는 못 할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조심히 다녀와." "응." 간단히 대답하면서 훼이드리온은 여관을 나왔다. 여관 옆에 서있는 고동 색의 거목이 거대한 그림자를 만들어 여관 앞을 완전히 검게 가리고 있 었고, 사이사이로 비치는 햇빛만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문을 닫고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며 신세한탄을 해보는 시간을 가 졌다. '어쩐지. 배워서는 안될 걸 배워버린 것 같네.' 거짓말을 하면서 아무런 표정 변화도 일으키지 않았다니. 예전의 그의 모습에서는 절대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인 것이다. 이 얼마나 굉장한 발전 (혹은 퇴보)인 것인가. 그는 마스터 카드 대전을 하면서, 좋은 카드를 가 졌어도 표정으로 나타내지 않는 법을 터득한 탓이라고 생각했다. 아무튼 그가 믿고 행하려는 일에는 도움을 주는 결과가 되었지만. '그래도 누군가가 하지 않으면 안될 일 아닌가. 그리고 일국의 태자로서 국민이 고통 받고 있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는 없어.' 훼이드리온은 저쪽에 보이는 중년의 아저씨를 향해 다가가 말을 걸었다. "저기." 아저씨는 금방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고, 그는 조용한 음성으로 용 건을 꺼냈다. "영주의 성으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하죠?" 그가 의지를 가지고, 신념을 가지고 행하려는 일에는 절대 포기란 있을 수 없다. -------------------------------------------------------------------- 아아. 팀군입니다. 감기버젼 팀... 아파요. 추석에다가, 어째어째 얻어버린 감기 때문에 주간연재가 되어버리고 만 카마입니다. 독자분들께 너무나도 죄송하다는 말을 올림과 동시에. 조금은 봐주십사, 하는 말을 드리고 싶군요.; 자까는 너무나 건강한 나머지 겨울에 반팔 반바지, 심하면 민소매도 걸치고 돌아다 니기도 한답니다. 감기도 거의 걸리지 않는 편이지요. 하지만 한번 걸려버리면, 지금까지 앓지 않았던 것까지 모조리 한꺼번에 앓아버려서, 굉장히 강도가 심합니다. 후기를 쓰고 있는 지금도 어질어질해요. 아아아. 그런 이유로. 후기도 이만 마치겠습니다. 빨리 약먹고 자야겠어요. 36편은 감기에서 쾌차한 모습으로, 분투해서 빨리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어둠의 기사 DARK KNIGHT TEAM... P.S 추천 감상 비평 주시면 감사드립니다.(___) P.S 2 혹시 목감기에 잘 듣는 음식 같은 거. 아시는 분 있으세요?(ㅠㅠㅠ) 번 호 : 12512 / 12515 등록일 : 2000년 09월 19일 21:44 등록자 : 암음기사 조 회 : 30 건 제 목 : [카드 게임 판타지]『 카드 마스터(Card Master) 』#036 카드 게임 판타지(Card Game Fantasy) 카드 마스터(Card Master) 36. 혼자 남은 아이는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간 식당을 한 차례 쭉 훑어보았 다. 군데군데 칠이 벗겨진 낡은 벽. 이제 바꿀 때도 된 듯한 커튼들과 테 이블, 의자들. 그래도 식당의 창들은 꼼꼼히 닦는 것인지 바깥 풍경을 거 스름 없이 투과시켜주고 있었다. 한동안 그 창문을 통해 보이는 하늘에 시선을 두고 있던 아이의 눈에, 보통 하늘과는 다른 무언가가 포착되었다. '먹구름… 비가 오려나?' 여행을 떠난 후, 처음 맞는 소나기구름인 것 같았다. 시꺼멓게 물기를 잔뜩 머금은 먹구름들이 서쪽에서 차츰차츰 아크릴 영지를 향해 허공을 유영해오고 있었다. 창공을 흘러가는 바람을 타고 다가오는 먹구름을 보 면서, 어쩐지 이상한 느낌을 받고만 그녀. 살짝 고개를 도리질 치며 걱정 을 떨구어 보았다. "걱정 있으세요?" 아이의 행동을 카운터에 앉아서 모두 지켜본 여관의 소녀. 붉은 단발머 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그녀가 아이에게로 다가오며 물었다. 훼이드리온과 있었을 때에는 차마 떠오르지 못한 걱정의 빛이 현재 그녀의 얼굴에 떠 올랐음을 읽어낸 것이다. 여관 카운터를 맡아오면서 터득한 표정으로 손 님의 마음을 읽어내는 능력을 탁월하게 발휘한 소녀는 자신을 쳐다보는 긴 검은머리의 미소녀의 깊은 검은색 눈동자를 향해 빙긋이 웃어주었다. 아이는 잠시 소녀를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그녀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을 이유가 없으니까. 그리고 소녀는 그녀의 심정을 이해 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의 반대편에 앉았다. "앉아도 되죠?" 이미 자세까지 다 잡아놓고 묻는 소녀를 향해 아이는 아무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무표정 그 자체의 시선을 쏘아줄 뿐이었다. "이렇게, 한번 바쁘고 나면 얼마동안 한가해서 지루할 정도가 되어버리 죠.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다 영주님이 변하고 나서부터 이렇게 되 어버린 거예요." "…그걸 왜 저한테 말하는 거죠?" 아이가 다소 차가운 어투로 말했다. 그러나 소녀는 무적의 스마일을 입 가에 피어 올리며 그녀의 말을 깨끗하게 무시해버렸다. "전 피아 스터커, 라고 해요. 이름이 뭐예요?" 소녀, 피아는 붙임성 좋은 자신의 성격을 십분 발휘해 그녀에게 말을 걸 었다. 그녀도 잠시 피아의 눈을 바라보며 신관으로서 그녀를 판단해보다 가, 이내 눈길을 거두었다. 그녀의 의도는 별 다를 게 없는, 그저 순수한 '호기심'이었을 뿐. '저 나이 때의 소녀들은 다 그렇지, 뭐.'라는 생각을 떠 올리며 그녀는 표정을 풀었다. 아이는, 자신도 '저 나이 때'에 들어간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다. "아이 네드런. 아이라고 불러요." "아이라. 예쁜 이름이네요." "그래요? 고마워요." "천만에요." 간단간단한 대화가 두 소녀 사이로 오갔다. 이제 통성명까지 했으니 슬 슬 둘 사이에 감도는 왠지 모를 어색함 정도는 날리는 것도 좋으련만, 어 째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싱긋 웃는 것조차도 어색해보였다. 무언가 근본적인 물음을 배제하며 시간을 끄는 듯한 모습. 아이는 눈앞 의 소녀의 모습을 그렇게 판단했다. 한숨과 함께 그녀가 먼저 말을 꺼냈다. "묻고 싶은 게 있나요?" 피아는 잠시 자신의 단발머리를 매만지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 가 자신의 심정을 알아챘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당황해하는 기색도 없이 말이다. 아이는 어쩐지 이 소녀의 성격이 '종잡을 수 없다'라는 말로 축약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 와중에 피아의 질문이 그녀의 정신을 일깨웠다. "…네?" "저희 마을 청년회를 만났냐구요." "아, 만났어요." "만났을 때의 모습을 들을 수 있을까요?" 그렇게 말하는 피아의 목소리가 어쩐지 떨리고 있었다. 아이는 그 날의 기억을 회상하듯이 위를 향하여 눈동자를 들어올린 채로 지그시 입을 열 었다. "흠. 그저께 밤이었어요. 팀이랑, 아, 팀은 제 동행이에요. 팀과 같이 야 영을 하다가 전 깜빡 잠이 들었죠. 그런데 조금 시간이 지나자 팀이 갑자 기 급히 절 깨우는 거예요. 그래서 일어나 보니, 멀리서 뭔가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더라고요. 달려가 보니, 피말라 한 마리가 5명의 청년의 뒤를 쫓고 있었어요." "피말라요?" 피아는 피말라, 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었다. 아이는 약간은 귀찮 은 기색을 내비치며 말을 이었다. "피말라는 야드 평원에 주로 서식하는 몬스터의 종류예요. 오징어 같이 생겼고, 사람의 피를 무지 좋아하죠. 아무튼 그런 녀석에게 그들이 쫓기 고 있었어요. 그래서 팀과 제가 그들을 구했죠." "와아, 정말이요?" 붉은 단발머리의 소녀는 생기 있는 미소와 함께 놀랍다는 뜻을 표해냈 다. 아크릴 영지 청년회의 남자들은 거의 다가 보통 사람 이상의 완력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수도로 향하는 임무를 부여받고 야드 평원으로 나간 이들 중에는, 그 위험성을 고려하여 꽤 실력을 인정받은 이들이 많이 껴 있었다. 파커슨, 트카르, 잘츠가 그런 부류에 속했다. 그런데 보는 것만으로는 이렇게 여리고 약하게 생긴 미소녀, 미소년들이 어떻게 그런 무시무시한 몬스터를 물리쳤단 말인가. 피아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인 것이다. "정말 그 몬스터를 해치우고 저희 오빠들을 구하신 거예요?" "이봐요. 우리가 왜 그런 거짓말을 해야하는 거죠? 아무런 실력도 없이 팀과 나, 달랑 둘이서 여행을 어떻게 계속 할 수가 있겠어요." "아아… 그렇군요." 은유적인 표현이지만, 충분히 그럴 실력은 있다, 라고 그녀는 말하고 있 었다. 피아는 어쩐지 화가 나있는 목소리인 그녀를 향해 겸연쩍은 듯 살 짝 인사를 하여 용서를 구하고는 뒷말을 재촉했다. "그래서요?" "뭐, 그리고 얘기를 나누다가 이 영지의 사정을 알게 된 거예요." 조금 불쾌함을 느껴버린 탓인지, 아이는 더 길어질 이야기를 그 정도 선 에서 가차없이 잘라버렸다. 그녀의 차가운 태도에 피아는 속으로 찔끔해 버릴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자신이 저지른 일이니, 뭐라고 불평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아무리 종잡을 수 없는 그녀라고는 해도, 이성적인 판 단을 내리는 것에는 아무런 하자가 없었다. 피아는 마지막 물음이라는 맘으로 입을 열었다. "…5명이었다고 했나요?" "뭐가요?" "평원에서 만난 인원이요." "네, 5명 맞아요. 아." 아이는 자신이이 빠뜨린 사실이 한 가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최종적으로 4명이에요." "네?" 놀란 기색을 내비치는 소녀에게 그녀는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난 탓에 찡그린 얼굴로 답했다. "피말라와 싸우던 중에 한 명이 죽어버렸어요. 피말라의 촉수에 당해 서." 건장한 사내의 가슴을 완벽하게 뚫고 솟아 나온 피말라의 촉수. 뿜어져 나오는 피. 바닥으로 낙하하는 핏방울. 생각하지 않으려고, 일부러 담담하 게 넘기려고 최선을 다하여 기억을 제지하고 있던 그녀였기에, 막상 생각 이 나자 가슴이 아려왔다. 누군가 자신의 앞에서 죽었다. 지키지 못했다. 신관으로서, 그런 비극적인 장면은 별로 좋은 효과를 주지는 못한다. 그리고 그녀의 발언에 별로 좋지 못한 효과를 받은 것은 피아도 마찬가 지였다. "서, 설마 파커슨 오빠는 아니겠죠?" 하얗게 질리기 일보 직전의 그녀의 얼굴. 아이는 갸웃거리는 고개를 바 로 잡으면서 기억을 떠올렸다. 파커슨…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내라면 분 명히 얼굴에 커다란 상처가 있었던 그 남자였다. 원체 잊으래야 잊을 수 없는 큰 상처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 바보일, 그런 남자. 아이는 고개 를 가로 저었다. "아니에요. 잘 생각은 안 나지만, 분명히 파커슨이라는 사람은 끝까지 살아남은 걸요. 그 외에도 잘츠, 트카르, 겔린이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들 이 있었어요." "아……." 뭔가 굉장히 안심을 함과 동시에 얼굴에 떠있던 모든 수심이 한번에 날 아가 버리는 피아의 반응을 살피던 아이는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누가 봐도 똑같은 판단을 할, 객관적인 결론을. "파커슨 씨를, 좋아하시나요?" "네? 에, 아니, 그게, 저어, 그러니까……" 가만히 놔두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접속사들이 총 동원될 것만 같은 불길한 기운을 감지하며, 아이가 손을 들어 그녀를 제지했다. 그녀의 주 특기인 화사하고 아름다운 미소가 얼굴에 떠올랐다. "괜찮아요. 어차피 전 스쳐 가는 여행자인 걸요. 털어놓으셔도 되요." "……." 피아의 고개가 천천히 아래로 숙여졌다. 비어있는 식당의 정적과 여관 밖의 약간은 소란스러운 분위기, 그리고 하늘을 덮기 시작하는 먹구름이 절묘하게 조화로운 선율이 되어, 둘의 공간을 감쌌다. 이윽고 재차 날리 는 아이의 미소에 수줍은 타는 소녀의 입이 간신히 떨어졌다. "…좋아해요. 이룰 수는 없지만, 그래서 더 간절하게." 제대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듣는다면 결코 듣지 못할 정말 작은 목소 리로 말하는 피아를 향해, 아이는 따스한 웃음을 지었다. 순수한 소녀의 순수한 사랑 감정만큼 세상에 아름다운 것은 또 없으리라. 또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했다. 자신의 마음 속에서 요동치고 있는 알 수 없는 감정 덩어 리로 인해 알게 모르게 골머리를 썩고 있는 자신보다는 확실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이니까. 그녀는 다른 의미에서 다시 한번 웃어버리고, 물 었다. "왜 이룰 수 없다는 거죠?" 그녀의 말 중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을 짚은 아이가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어쩌면 아픈 곳을 건드려버린 것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 를 도와주고 싶은 게 아이의 마음이었다. "파커슨 오빠에게는…" 피아가 드디어 입을 열자, 아이의 시선이 즉시 그녀의 숙여서 보이지 않 는 얼굴 쪽으로 향했다. 그녀의 볼 근육이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이미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것도 제가 잘 아는… 언니죠." 그녀의 아픔이 전해져왔다. 아릿한, 아려한 아픔. 그러나 너무나 깨끗하 고 순결한, 그런 사랑의 고통이었기에 아이는 감정의 공명을 거부하지 않 았다. 신관으로서 느낄 수 있는 이런 공명들은 하나의 좋은 수련임과 동 시에 인격 수양에도 좋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나랑… 비슷한 상황인걸.' 따지고 보면, 그녀도 비슷한 상황에 처해있었다. 아직 혼란스럽기만 한 자신의 감정에 대한 판단이 제대로 서지 못했다는 것은 틀리지만, 어쨌든 '해서는 안될 사랑'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둘의 마음은 공명하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 그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멋대로, 첫 여행에서 만나 는 첫 동료에게서 느끼는 그런 단순한 동경심 같은 감정일 뿐이라고 생 각했다. 그리고 그것이 확실하다고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해서는 안될 사랑'이라는 것도, 어쩌면 자신이 만들어낸 작은 환상에 불과할 지도 모 르는 일. 답답한 집에서의 생활보다는 지금 생활이 더욱 살아있고 즐겁다 보니, 말도 안 되는 감정이 생겨난 것이라고, 그녀는 그렇게 정리했다. '휴우, 일단은.' 이제는 조금씩 흐느끼고 있는 소녀를 달래는 것이 먼저일 듯싶었다. 아이는 그녀의 감정에 공명하는 마음을 유지시키면서 따스하게 입을 열 었다. 신관으로서 내릴 수 있는 축복의 언어와 같은, 그런 말을 시작했다. "잘 될 거예요. 당신이 아파하지 않게, 당신의 순결한 마음이 상처입지 않게. 모든 것은 다 잘 될 거예요. 달과 운명의 여신 하실루스님은 모든 이들에게 공평하세요. 당신의 운명이 아픈 만큼, 이후에 당신의 운명에 축복이 있을 거라고 믿으세요. 믿으면, 이루어진답니다." 그녀의 말 하나 하나에서 빛이 났다. 아니, 그건 피아 혼자만의 착각일 까. 너무나 아름답고 신성함이 느껴지는 말들. 그녀는 어느새 고개를 들 어 아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걱정 말라는 듯이 생긋 웃는 검은 눈동자. 피아가 멍하게 물었다. "…신관이셨어요?" "네. 하실루스를 모시는 신관이에요." 피아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자신이 신관을 만났다는 것도 신기 했고, 게다가 축복까지 받았다는 생각을 하니 모든 일이 정말 잘 풀릴 것 만 같은 예감이 든 것이다. 그녀의 기뻐하는 표정을 보면서 아이는 자신 의 축복의 언어가 보람되었음을 느꼈다. '그나저나.' 아이의 시선이 천천히 창 밖을 향해 이동했다. 갑갑하게 파란 하늘을 가 득히 메워오는 먹구름의 행진이 그녀의 시야에 잡혔다. 별로 좋은 풍경은 아님이 확실한 그 장면을 보면서 그녀의 마음 속에 걱정이 떠올랐다. '얘는 어디로 간 거지?' '멀군.' 밖에서 성을 바라볼 때도 꽤나 크다고는 생각했지만, 영주의 저택으로 가는 길을 걷다보니 새삼 넓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는 훼이드리온이었다. 허리에는 어디를 가나 빠질 수 없는 필수 준비물, 칼과 갈색주머니를 단 단히 묶고, 불어오는 바람에 소리 없이 흩어지는 머리카락을 부지런히 정 리를 하면서 걸어가는 그의 모습은 마치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아서, 보는 이들의 시선을 모조리 잡아끌고 있었다. 문제는 본인은 그런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거침없이 그런 행동을 반복 하고 있는 점이다. "하아." 터져 나오는 한숨 섞인 음성과 함께 그가 고개를 들었다. 어쩐지 아까 전부터 피부에 느껴지는 따뜻한 기운이 대폭 감소되었다고 생각했었는데, 구름이 해를 가리고 있었다. 빛과 태양의 신 마스트의 눈의 강렬한 빛을 가리고 있는 검은 구름. '먹구름.' 서쪽에서 모여드는 먹구름 떼가 그의 푸른 눈동자를 가득히 채웠다. 화 창한 날씨를 좋아하는 그로서는 저런 비를 몰고 오는 먹구름이 좋게 보 일 리가 없었다. 자연스레 그의 미간이 좁아졌다. 비가 오기 전에 여관으로 들어가자는 마음에 훼이드리온의 걸음이 빨라 졌다. 그가 멀어질수록 그를 바라보고 있던 영지의 많은 소녀들의 안타까 움이 깃 든 탄성이 울려 퍼졌다. '아, 저기 보이는군.' 드디어, 여관 밖에서 만난 아저씨가 일러준 영주의 성이 보이기 시작했 다. 훼이드리온은 천천히, 그리고 빠르게 박동하기 시작하는 심장을 느꼈 다. 흥분. 전율. 그런 감정이 그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저 영주의 성에서 단판을 벌려야하는 것이다. 흘러나오는 한숨을 목구멍으로 삼키면서 천천히 대문으로 다가갔다. 영주의 저택은 왕성에서 본 저택들과 흡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큰 담장이 저택의 주위를 빙 둘러싸고 있고, 철문이 굳게 닫혀 밖과 안의 경 계를 확실하게 나타내고 있었다. 어쩌면 저 담장 안에 정원이 있을 지도 모르는 일. 훼이드리온은 어쩐지 누님 메이린느의 저택이 생각나, 큰 결 전을 앞두고 감상적이 되어버렸다. 어쨌든 나무가 우거진 오솔길 분위기의 길을 걸어 저택의 대문 앞에 도 착하자, 한적한 공간이 그를 맞이했다. 그리고 그 앞에는 무거워 보이는 갑옷을 받쳐입은 경비병 둘이 커다란 창을 들고 문 양쪽에서 살벌하게 보초를 서고 있었다. 무척이나 딱딱하고 정석적으로 보이는 그 모습이 영 지를 들어올 때 보았던 성문을 지키는 경비병과는 극과 극의 이미지를 풍겨댔다. '저게 군기가 제대로 잡힌 경비병이야.' 훼이드리온은 일단 오른쪽에 서있는 경비병에게로 다가갔다. 영주를 만 나려면 이 문을 통과해야하고, 이 문을 통과하려면 경비병에게 허락을 구 하는 것이 순서일 듯 싶었으니까. 두리번거리던 웬 미소년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알아챈 그 경비병이 색 바랜 은빛의 투구를 벗으며 그를 맞이했다. 투구를 쓰고 있는 것이 꽤 나 더운 것인지 그의 얼굴을 땀으로 번들번들했다. 콧수염을 타고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훅 불어서 떨쳐버리고는 그 경비병 이 훼이드리온에게 물음을 던졌다. "뭐냐?" 초면에 반말부터 하고 보는 그 경비병의 태도에 훼이드리온은 팍 기분 이 상함을 느꼈다. 하지만 일단 참아보기로 하고 차근차근 또박또박 용건 을 설명했다. "영주님을 만나고 싶습니다." 경비병의 답은 간단했다. "왜?" 반대쪽에 서있던 경비병도 투구를 벗고 후덥지근한 열을 식히며 훼이드 리온 쪽을 살피고 있었다. 훼이드리온도 간단히 답했다. "영주님께 드리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경비병은 한동안 훼이드리온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이내 피식 웃어버 렸다. '가소롭다'는 뜻이 너무나도 명백하게 드러나는 노골적인 웃음. 훼 이드리온은 순간 발끈할 뻔했지만, 뒤이어 나오는 경비병의 굵직한 목소 리에 막혀버리고 말았다. "돌아가." "…네?" "척 보니, 영지 내에서는 본 적 없는 미소년인데. 여행자인가 보지? 그 렇다면 이 영지 일에는 신경 쓰지 말고 그냥 떠나. 그 뭐도 안 되는 정의 감, 혹은 기사도 때문에 아무 상관도 없는 일에 목숨 걸고 나서지 말란 말이야." 경비병의 얼굴에는 뭐라고 판단 내릴 수 없는 표정이 떠올라있었다. "너 아니라도 영주와 담판을 짓겠다고 덤빈 녀석은 많았어. 하지만 모두 하나 같이 죽기 싫어 영지에서 도망가버렸다고. 그게 뭘 뜻하는 건 줄 알 아? 너 같은 녀석 100명이 덤벼도 영주를 설득할 수 없다는 거다. 알겠 냐? 그러니, 돌아가." 충고, 혹은 걱정. 아니면 그 둘 다일 수도 있는 경비병의 이야기에 훼이 드리온은 더욱 결심이 굳어짐을 느꼈다. 대체 아크릴 영주는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것일까. 여관의 그 소녀도 분명히 비슷한 말을 했었다. 대체 영주가 어느 정도길래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하는 걸까. "아니요, 전 영주님을 만나야합니다." 본래의 의지에서 이젠 오기 같은 힘까지 합쳐져 그의 눈빛이 단호하게 빛났다. 경비병이 골치 아프다는 듯이 이마를 누르며 무언가 말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훼이드리온이 먼저였다. "저보다 앞선 사람들이 실패를 했다고 하더라도, 저도 그렇게 되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리고, 전 그렇게 쉽게 이곳을 스쳐갈 생각이 없습니 다. 이 일은 저에게도 중요한 일이고, 이 영지의 주민들에게도 중요한 일 입니다. 들어가게 해주십시오." 의지에 빛나는 눈과 힘있는 말. 훼이드리온은 자신이 처음으로 어미가 '…다'로 끝나는 말을 사용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채 경비병을 똑바 로 바라보았다. 그의 또 한번의 성장이 그를 더욱 크게 만들었다. 경비병의 표정에서 '이번은 쉽지 않겠는걸.'이라는 마음을 읽어낼 수 있 다. 이 정도하면 조금은 물러서는 기미를 보였던 게 지금까지 여행자들의 반응이었는데, 어째 최연소자인 듯한 이 소년은 한치의 물러섬도 없이 자 신을 바라보고 있는가. 경비병은 마음 속에서 피어오르는 야릇한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 소년이면 어쩌면.' '영주를 본래의 모습으로 돌려놓을 지도 모른다.'라는 생각은 차마 머리 속에 떠올리지 못하고 안타까워하고 있을 때, 뒤편에서 상당히 깔끔하고 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철문 안. 아니, 정확하게는 어느 문에나 달려 있는 쪽문에서 나오는 소리였다. "무슨 일이지?" 쪽문이 열리며 한 건장한 남자가 걸어나왔다. 검푸른 머리카락이 단정하 게 빗어 내려 여린 것도 같은 날카로운 얼굴 선과 교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얼굴이었다. 이목구비도 상당히 뚜렷하게 생겨서 그야말로 미청년 수준의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냥 스쳐지나가듯이 보면 어느 귀족집에서 고이고이 받들어지며 자라 온 자제 같아 보이지만, 그의 등에 걸려있는 바스타드 소드 크기의 검을 본다면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된다. 그의 신체 어느 부분에도 결코 군살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고 전부 탄탄하게 닦여진, 그야말로 검사의 몸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누가 봐도 명확한 사실이었다. '야아.' 역시, 검사의 눈을 가진 훼이드리온도 당연하게 그의 신체를 바라보고는 감탄을 그지 못했다. 자신의 스승 이외에 이렇게 잘 닦여진 몸을 보리라 고는 생각도 못해본 그였다. "무슨 일인가." 그가 다시 한번 입을 열자, 훼이드리온은 움찔 놀래 정신을 되찾았다. 그의 말에서는 그 어떠한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케롯 마을에서 만났던 그 의문의 소년, 암살자와 같은 단검술을 쓰던 검은 옷의 소년의 말투와도 비슷한, 아무튼 듣는 이로 하여금 하염없이 차가움을 느끼에 만 드는 음성이었다. 괜히 훼이드리온이 움츠러들 때, 경비병이 서둘러 자세를 바로 잡으며 그에게 설명했다. "이 소년이 다짜고짜 영주님을 뵈어야겠다고 해서 말리고 있는 중이었 습니다." 솔직히 다짜고짜, 는 아니었지만, 날카로운 그의 인상에 기가 눌려 그냥 입을 다물고만 훼이드리온. 그가 천천히 훼이드리온에게로 시선을 돌렸 다. 머리색과 같은 푸른빛이 감도는 흑색의 눈동자가 금발 소년의 푸른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마치 무언가를 읽어내는 것 같은 기분. 훼이드리온은 알 수 없는 오한과 함께 몸을 떨었다. "소년." 그의 간단한 음성이 자신을 부르는 것이라고 깨닫기까지, 조금 시간이 걸린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네, 네?" 단정함, 깨끗함, 기사도 등등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는 그가 작은 바람 에 흘러내려 시야를 가려버린 유려한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쓸어 올리 며 말했다. "영주님을 뵈려면, 서류가 필요하다. 이름과 현재 있는 곳을 밝히도록. 내가 서류를 작성하여 올리도록 하겠다." 극히 사무적인 말투. 그에게 너무나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면서 훼이드리 온이 대답했다. "이름은 훼온 레이엔트, 이고요. 현재 여관에 머물고 있는데, 여관 이름 이… 에, 그러니까……." '이, 이런.' 낭패였다. 생각해보니 어젯밤에 보이는 여관에 그냥 들어가 버린 탓에 여관 이름은 보지 않았던 것이다. 대답은 해야겠고, 이름은 모르고, 참으 로 난감한 사태가 그를 엄습했다. 식은땀이 삐질 그의 이마에 맺혔고, 일 단 이 사태를 타개해보고자, 그가 떠듬떠듬 입을 열었다. "…생각이 안 나는데요…" "위치가 어디인지는 아나." 그의 물음에 훼이드리온은 재빨리 답했다. "커다란 거목 옆의 여관입니다." "'고목나무 아래 여관'이군. 알았다. 돌아가 보도록. 영주님께서 승낙하시 는 즉시 알려주겠다." "…네." "감사합니다."라고 인사를 해야할까, 하고 잠시 고민을 한 훼이드리온을 뒤로하고 그는 곧바로 등을 돌려 쪽문 안으로 사라졌다. 경비병 둘이 서 둘러 그의 등을 향해 인사하는 와중에, 그는 쪽문을 닫아버렸다. '차갑네.' 이미지 그대로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그를 향해 간단한 평가를 내리면 서 훼이드리온은 돌아섰다. 물론 경비병들에게 인사를 하는 것도 잊지 않 고 말이다. '일단, 말해뒀으니 연락이 오겠지. 올 때까지 기다려야하는 건가. 흐음.' 훼이드리온은 어쩐지 불길한 기분이 들려는 것을 뒷머리를 긁적이며 털 어 보려 애썼다. 그리고 마을로 향하는 길을 다시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 했다. 아크릴 영지 상공에서는 꾸역꾸역 먹구름이 몰려들어 서서히 지배세력 을 넓혀가고 있는 가운데, 그는 걸음을 옮기며 슬며시 마음 속에 떠오르 는 걱정을 입 밖으로 꺼내보았다. "아이에게는 말 안 해도 괜찮겠지." 이제 영주의 저택으로 오는 길에 보았던 '세리나의 식료품점'에 들러 부 족한 여행물자를 입수하면 이 산책 아닌 산책도 끝나게 된다. 어쩌면 굉장한 짓을 해버린 산책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는 그만 피 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 냐아. 시험이 코앞에 다가왔음에도 불구하고 룰루랄라 집필에 몰두하고 있는 허접 자까 팀군입니다. 하이스들요.(^^^) 몸 컨디션이나 이러저러한 일들로 36편도 많이 늦었습니다. 정말 사과드 립니다. 현재 무언가를 계획 중에 있습니다만, 아직 확실하게 말씀을 드리 지는 못하겠구요. 정확하게 확실시 되면, 그때 공지라도 올리지요.(^^^) 아, 그리고 유니텔로 KIRUEL님께서 퍼가주시기로 하셨습니다. 드디어 카마가 유니텔까지 진출을... 그것 게시판 더럽히는 것은 아닐지.; 아아. GENIUSUP님. 오랜만에 추천이군요. 감사합니다.(^^^) 흠. 여기저기서의 격려로 힘을 얻고 있는 팀군입니다. 일단은 학생으로서 본분을 다하기 위해 금요일까지는 공부를 해야겠죠. 그리고 그 다음부터 는... 글쎄요. 훗훗. 또 글을 적어야겠죠? 하하. 그럼, 허접 자까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좋은 하루 되시길! 어둠의 기사 DARK KNIGHT TEAM... P.S 추천 감상 비평. 자까에게 많은 힘이 된답니다. 싱글싱글. P.S 2 이번 4장에.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시던 마스터 카드 대전이 나온 답니다.!(>.<) 번 호 : 38 / 40 등록일 : 2000년 09월 28일 00:52 등록자 : 암음기사 조 회 : 336 건 제 목 : [카드 게임 판타지]『카드 마스터(Card Master)』#037 카드 게임 판타지(Card Game Fantasy) 카드 마스터(Card Master) 37. 아크릴 영주는 자신의 서재의 모든 불을 끄고, 책상 위에 놓인 하얀 마 법의 등의 불빛만을 은은하게 밝혀놓은 채 술잔을 들어올렸다. 케롯 마을 에서 이번 년도에 만들어진 피아드 주가 그 술잔에서 외롭게 출렁이고 있었다. 연한 녹색의 액체가 향긋한 향기를 뿜으며 그의 입안으로 스르륵 사라진다. 시큼하면서도 달콤한 맛을 느끼게 하는 그 액체를 입에 머금고 조용히 맛을 음미하던 그는 이내 그것을 삼키고 술잔을 다시 채워 넣었 다. 깊게 패인 두 눈에는 진득한 피로가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었고, 얼굴을 말도 못하게 거칠고 또한 야위어있었다. 지금 현재 아크릴 영주의 위명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봤다면, "몰락 귀족 가문의 가주가 무식하게 자존심 만 내세우다가 저런 꼴이 되었다."라고 말할 지도 모를 만큼 심각하게 타 락한 모습이었다. 그는 가득 채워 넣은 피아드 주를 잠시 바라보더니 이내 한번에 잔을 비워버렸다. 아무리 도수가 그렇게 높지 않은 피아드 주라고 해도, 한꺼 번에 중간 크기 정도의 잔 한잔을 단숨에 넘겨버리면, 위에 꽤나 무리가 간다. 모르긴 몰라도, 그는 내일 아침에 침대에서 결코 제대로 일어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는 그런 것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기계적인 움직임으 로 술잔을 채우고 입안에 털어놓고, 다시 술잔을 채우고 입안에 털어 넣 은 행동을 느릿하게, 그리고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죽으려고 작정'한 사람 같아 보일 지경이었다. 퀭하게 뜨여진 눈은 멍하게 한 지점만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초점이라는 것은 찾고 싶어도 찾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힘이라고는 술잔을 들어올리 는 팔 외에는, 마찬가지로 찾아볼 수 없었고, 그건 그 방 전체의 분위기 를 좌우하고 있었다. 아크릴 영주의 모습에서도 느낄 수 있는 분위기. 전체적으로 전부 축 늘 어지고 어두컴컴하고 음침하고 암울한 기운이 서재 전체에 스며들어있어, 서재에 정리되어 있는 수천 권의 책들이 뿜어내는 향기로운 책의 내음조 차 거북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렇게 어둡고 음침한 가운데, 아크릴 영주는 한 영지의 영주로서는 절 대 볼 수 없는 꼴을 한 채 넋이 나가있었고. 그 모습은 아크릴 영주를 따 르는 아크릴 영지 경비대장 뮤트리드에게 뼈아픈 고통으로 자리잡았다. 그는 이 아크릴 영지 출신으로 그의 아버지도 아크릴 영주 가문에 충성 한 자였다. 그도 전대 아크릴 영주의 심성에 매료되어 크게 되면 아버지 의 뒤를 이어 아크릴 가문에 충성을 다하겠다고 결심했고, 건장한 청년이 되어 그 꿈을 스스로 실현시켰다. 그리고 지금은 영지 경비대장으로서 그 임무를 충실히 이행하고 있는 것이다. 뮤트리드는 문밖에 서있었다. 그의 손에는 방금 작성한 깨끗한 서류 한 장이 들려있다. 조금 전에 정문에서 만난 훼온 레이엔트라는 이름을 가진 금발의 깨끗한 외모의 미소년이 부탁한 용건을 아크릴 영주에게 제출하 기 위해 작성한 것이었다. 그는 깊게 한숨을 토해냈다. 사실, 이런 서류를 작성하여 제출해봤자, 아 크릴 영주의 반응은 똑같았다. 지난 2년 동안의 그 모습처럼, 완벽하게 망가진 모습으로 종이를 찢어서 날려버릴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형식을 지켜서라도 실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뮤트리드는 그런 뜻에서 다시 한번 한숨을 몰아쉬었다. 무거운 분위기가 그의 어깨를 짓눌렀고, 그와 함께 그의 무표정하고 차가 운 포커페이스에 잠시나마 걱정의 빛을 띄는 기운이 떠올랐다가, 이내 사 라졌다. 그는 이곳이 왜 이렇게 되어버렸는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2년 전에, 충 성을 맹세한 자신의 주군과의 약속 때문에 입을 다물고 버티고 있었다. 영지 내 마을 주민들에게 어떠한 욕을 들어먹는다고 하더라도, 영주의 고 통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지금까지 꾸욱 참아왔다. 하지만 그도 인간인지라 가끔 벗어나고 싶기도 했지만, 어린 날의 맹세 와 함께 더욱 표정을 차갑게 굳혀갈 뿐이었다. 뮤트리드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영주가 있는 서재의 문손잡이를 잡았다. 빛 바랜 금색의 손잡이가 기묘한 마찰음을 남기며 돌아가자, 안에서부터 침침하고 무거운 기운이 문틈으로 조금씩 밀려나오기 시작했다. '역시나 침침한 분위기.'라는 생각에 침을 꿀꺽 삼키고 안으로 들어선 그 의 눈에 커튼까지 쳐서 서재 안을 온통 어둡게 만들어놓고, 흐릿한 마법 의 등 불빛에 의지하여 술을 마시고 있는 자신의 주군의 모습이 들어왔 다. "…길튼 님." 깔끔한 인상의 목소리가 뮤트리드의 입에서 흘러나왔지만, 아크릴 영주 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술잔을 다시 기울였다. 그 모습에 가볍게 한숨지은 뮤트리드가 천천히 책상 뒤쪽으로 걸어가 답답하게 쳐져있는 커튼을 걷기 시작하자, 그제야 아크릴 영주의 목소리가 그의 귀로 스며들 었다. "…놔두게." "하지만. 계속 그렇게 계시다가는 건강을 헤치시고 말 겁니다." 3일 밤낮을 소리지른 탓에 쉬어버린 목과 같이 꽉 막히고 듣기 싫은 소 음까지 섞여 새어나오는 아크릴 영주의 목소리였지만, 뮤트리드는 단순히 걱정의 표정만을 지은 채 커튼을 모두 걷어버렸다. 비가 오려는지 하늘 가득히 먹구름이 끼어있었지만, 영주는 인상을 찡그린 채 뮤트리드에게 명령했다. "커튼을 치게," "길튼 님." "치게. 난 마스트의 축복을 받을 자격도, 오파투스의 영역을 우러러볼 자격도 없네. 날 그렇게 욕보이고 싶은 건가." 탁한 음성이었지만, 뮤트리드로서는 거부할 수 없는 단호한 기색이 박혀 있는 목소리. 뮤르티드는 이제 한숨조차 내쉴 기운도 없다는 듯이 가라앉 은 얼굴로 천천히 커튼을 쳤다. 우중충한 짙은 갈색의 때탄 커튼이 창문 을 가리자, 마침내 서재는 또 다시 어둠 속으로 잠겨들었다. 잠시 간의 침묵이 그들을 휘어잡았다. 무겁고 진득하게 가라 앉아버린 침묵 속에서 뮤트리드는 영주의 뒤에 우두커니 서서 그의 왜소해진 뒷모 습을 내려다보았다. 따뜻하고 당당하고, 또한 밝았던 주군의 모습이 지금은 왜 이렇게 변해 버렸는지 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자신의 모습. 그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어 솟아오르려는 역한 감정을 짓눌렀다. 참아 야한다. 참아야했다. 주군이 제 모습을 찾을 때까지, 그때까지 이를 악물 고 참아야했다. "…여행자가 영주님을 뵙고 싶어합니다." 뭔가 거북하게 새어나오는 목소리로 그가 말하며 책상 위로 가지고 들 어온 종이를 올려놓았다. 신청자 이름과 현재 있는 곳, 용건만 간단하게 기록되어있는 그 종이를 향해 잠깐 시선을 보내는 듯하던 영주는 곧 눈 을 감고 술잔을 내렸다. 술잔의 반쯤 차있는 피아드 주가 가느다랗게 파 문을 일으키며 흔들렸다. "……." 긴 침묵. 뮤트리드는 조금 후,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아크릴 영주의 명령이 무엇인지 애초부터 알고 있었기에 그는 천천히 문을 향해 걸어갔다. 책상 위에 올려진 종이는 영주가 잘 처리할 것이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탁.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서재에는 또 다시 아크릴 영주 혼자만이 남았 다. 그는 감은 눈을 유지하다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멍하게 흐 릿해진 어두운 눈동자가 책상 위에 올려진 종이 위로 향하자,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그 위에서 천천히 기울였다. 주르륵. 연한 녹색의 액체는 중력의 법칙을 이기지 못하고 책상 위로, 책상 위에 올려져있는 종이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술을 머금고 점점 색 깔이 이상하게 변해 가는 종이. 검은 잉크와 같이 퍼져 가는 연녹색은 책 상의 색까지 투영되어 굉장히 불쾌한 색깔이 되고 말았다. "…크크… 큭……." 조용한 광소가 영주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미친 듯이 웃어젖히는 광소가 아닌, 아련한 광기가 묻어나는 조용한 광소. 들썩이는 어깨와 함께 아슬 아슬하게 그의 손끝에서 흔들리는 술잔. 길튼은 표현할 길 없는 답답한 마음을 혼자서, 고통스럽게, 광기 어린 광소로 표현하고 있었다. "갑자기 쏟아질 건 뭐야, 대체." 훼이드리온은 여관문으로 뛰어들어오면서 투덜댔다. 다행스럽게도 여관 에 거의 다다라서야 빗방울 굵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에 그렇게 많이 젖은 것은 아니었지만, 옷에 스며든 물기는 그렇게 좋은 기분을 들게 하지는 못했다. 젖은 탓에 축 늘어진 금발을 툭툭 털며 물기를 없애던 그의 곁으로 아 이가 다가왔다. "여기 수건." "아아, 고마워." 친절히 수건을 건네는 아이에게 빙긋이 웃어주고 감사히 수건을 받아서 머리를 닦기 시작했다. 수건으로 이리저리 머리를 문지르는 동안, 붉은 머리 소녀가 총총히 걸어왔다. "지금 오신 거야?" "아, 응. 피아, 따뜻하게 마실 거 있어?" 피아가 어머니의 부름을 받고 주방으로 뛰어들어가기 전까지 앉아서 수 다를 떨고 있던 카운터 앞 테이블로 같이 걸어가며 아이가 피아에게 묻 자, 그녀가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디오느 차가 있을 거야. 드세요?" 수건을 내리며 훼이드리온이 얼굴 가득히 반가움을 띄웠다. "디오느 차가 있어요?" "네, 있죠, 물론. 드릴까요?" "주시면 감사하죠!" 디오느 차, 디오느 차였다. 누님께서 즐겨 드시던 탓에 자신까지 전염되 어버린, 추억의 디오느 차가 있다는 사실에 그는 기쁜 마음이 되었다. 피 아가 "잠시만 기다리세요."라고 말하며 주방으로 들어가자, 테이블에 앉 으며 아이가 훼이드리온을 불렀다. "팀." "응? 왜?" 뭐가 좋은지 싱글거리고 있던 그가 채 미소도 지우지 못하고 아이의 눈 동자를 바라보았다. "뭐가 그렇게 좋아? 디오느 차에 대한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거야?" 궁금해하는 표정을 아이를 향해 그가 빙그레 웃더니 곧 입을 열어 사연 을 이야기했다. "디오느 차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누님이 즐겨 마시는 차야. 뵙지 못한 지가 벌써 일주일이 다 되어 가는데, 막상 디오느 차라는 말을 들어서 누 님이 생각나서 그래." "흐음… 누님이 있구나?" "응. 아름다우신 분이지." 회상하는 눈빛이 되어 상념에 잠기려는 듯 훼이드리온의 표정이 살짝 풀리려고 할 때, 아이가 잠시 고개를 돌려 시선을 딴 쪽으로 향하게 하더 니 짧게 한마디 내뱉었다. "좋겠다, 팀은." 아직 누님의 영상이 눈앞에서 지워지지 않은 탓에, 훼이드리온은 무심하 게 대답했다. "뭐가?" "형제가 있잖아." 어쩐지 그녀의 목소리가 쓸쓸하게 느껴진 탓일까. 급하게 누님의 영상을 머리 속에 밀어 넣고 그녀에게로 고개를 돌린 훼이드리온의 귀에 다시 한번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혼자 컸거든. 언니나 동생. 난 없었어." 아무 것도 없는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투명한 검은 눈동자 사이로 적적함이 스쳐 지나감을 훼이드리온은 느낄 수 있었다. 어릴 적부터 누님 이란 존재가 곁에 있어온 그로서는 쉽게 알 수 없을 그런 감정을 그녀는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는 방금 전까지 누님을 생각하며 기뻐한 자신의 행동이 어째 미안하게 느껴졌다. "미안해." "괜찮아. 팀이 미안해할 거 없어." 다시 회복하려는 계기를 만들기 위해, 아이는 생긋 웃으며 고개를 흔들 었다. 잘게 물결치는 검은 머리칼이 그녀의 등뒤에서 하늘거리는 모습이 훼이드리온의 눈에 들어왔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웃고 있었다. '씩씩해.' 그것이 아이의 가장 멋진 장점일 것이다. "자아, 디오느 차가 나왔어요." 잠시 서로를 보며 웃고 있던 그들의 미묘한 균형을 깨는 발랄한 목소리. 훼이드리온이 마지막으로 들었던 차가웠던 목소리가 아닌 발랄한 목소리 로 피아가 다가왔다. 그녀는 쟁반에서 디오느 차 두 잔을 테이블 위로 내 려놓으며 자신도 의자에 앉았다. "드세요." "네, 고마워요." 다른 이들이 보았으면 한번에 볼을 붉게 물들였을 미소를 짓는 훼이드 리온이었지만, 피아는 그냥 마주 미소지을 뿐 별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았 다. 그녀에게는 이미 마음 속 깊이 자리 잡은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그 의 수려한 용모조차 통하지 않는 것이다. "물어볼 것이 있는데." 훼이드리온이 산책을 나간 사이, 이러저러한 일로 아이와 말을 놓게된 피아가 그녀에게 말했다. "뭔데?" 되묻는 아이. 피아가 똑같이 찻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가는 아이와 훼이 드리온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대뜸 한마디했다. "연인이야?" "풋!" "흡!" 즉각 나타나는 반응에 피아는 황급히 의자를 뒤로 물려 달아났다. 그러 나 다행히 그녀가 우려하던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고, 입안에 머금었던 차 가 밖으로 튀어나올 뻔한 위기를 간신히 넘긴 그들이 수건을 찾아 입가 를 닦는 동안 다시 테이블에 붙어 앉았다. "아니에요?" 이번엔 훼이드리온을 향해 묻는 그녀. 훼이드리온은 이 생기발랄한 소녀 가 던진 과격한(?) 질문을 어디선가 들었던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고개 를 저었다. "아니에요." "아냐?" 이번에는 아이를 향해 확인하는 피아. 아이도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냐. 말했잖아. 팀과 나는 서로 여행하던 중에 만나서 우연히 동행하 게 되었다고." "흐음. 그래?" 피아의 말투는 어딘가 모르게 '아쉽다'라는 감정을 담고 있었다. "보통 그렇잖아. 여행하다가 서로를 사랑하게 되어서 나중에는 결국 결 혼을 약속하게 된다는, 그런 흔한 이야기. 흔한 만큼 동경하던 이야기였 는데." 입맛까지 쩝 다시는 피아를 향해 아이는 옆구리를 쿡 찔러주고 살짝 훼 이드리온을 쳐다보았다. 그때, 타이밍도 기막히게 아이의 눈을 향해 시선 을 보내려고 하던 그와 눈이 마주쳐버렸고, 왠지 모르게 화끈 달아오르는 얼굴을 느끼며 시선을 딴 쪽으로 돌려버렸다. 훼이드리온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옆으로 고개를 돌리면서 머쓱해짐을 느꼈다. 결국 서로 회피해버린 것이다. '왜 계속 이런 물음을 받아야하는 건지.'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이상하게도 복잡한 감정이 드는 탓에 훼이드리 온은 이제 그런 물음에 기분이 나빠질 것 같았다. 뭐라고 형용할 수 없 는, 잊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한 감당할 수 없는 그런 감정 때문에 골치 아팠던 적이 몇 번인지. 일일이 이렇게 상기시켜주지 않아도 되는 것을 운명은 요상하게 둘을 꼬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하실루스의 장난일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다시 하실루스의 신관인 아이 를 쳐다보았다. 어색함을 지우기 위해서인지 피아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가 한번씩 그를 훔쳐보고 있던 그녀는 그의 시선이 자신을 향할 낌새를 보이자 곧 신경을 끊은 듯 피아만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달과 운명의 여신 하실루스의 신관, 아이.' 무슨 상관 관계가 있는지는 불명확한 탓에 그냥 뒷머리를 긁적이며 지 워버렸다. 사실, 말도 안 되는 이론이었으니까. 피아를 제외하고, 테이블 위에 떠도는 이상한 분위기 속에서 훼이드리온 이 어색함을 이겨내려 분투 중이던 그때, 갑자기 여관 문이 벌컥 열리며 갈색 제복을 차려입은 자가 물을 뚝뚝 흘리며 걸어 들어왔다. 피아가 벌떡 일어나 앙칼지게 물었다. "누구시죠?" 그동안 당한 게 많은 탓에 제복을 입은 자라면, 먼저 경계부터 하고 보 는 그녀였다. 제복을 입은 사내가 빗물을 툴툴 털어 내며 식당 안을 둘러 보다가 훼이드리온을 향해 시선을 굳혔다. "훼온 레이엔트. 맞지?" "…네에, 맞는데요?" 훼이드리온은 제복을 입은 사내가 자신을 찾는 이유를 '전혀 모르겠다' 라는 뜻을 강경하게 얼굴에 비춰 보이고는 자리에서 머뭇머뭇 일어났다. 아이와 피아가 의문을 띄운 얼굴로 둘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영주님께서 거절하셨다." "…네?" "거절하셨다." 그리고 자기 할 말이 끝나자 싹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버리는 그 남자. 훼이드리온은 미처 뭐라고 하지도 못하고 그가 여관 밖으로 사라지는 것 을 막지 못했다. '이, 이런.' 설마 이렇게 빨리 와서 알릴 줄이야, 생각지도 못한 일을 당해버려 그는 잠시 멍한 상태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비가 옴에도 불구하고 그 빗속을 걸어와서 한마디 툭 던지고 가다니. 그는 닫혀진 문을 바라보며 침을 꿀 꺽 삼켰다. 무언가 굉장히 부정적인 뜻과 감정을 담은 눈길이 자신의 양쪽 볼을 찌 르고 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팀." 착 가라앉은 저음으로 자신을 부르는 아이의 목소리에 훼이드리온음 흠 칫 놀래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아이의 얼굴이 아닌 비가 내리는 창 밖 을 향해. '야아, 비가 많이 오는걸.' 아이가 결코 빠르지 않은 움직임으로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피아도 문을 향하고 있던 눈길을 슬그머니 훼이드리온을 향해서 움직이기 시작 했다. 훼이드리온은 생각했다. '…만난 지가 언젠데, 왜 이리 죽이 잘 맞는 거지!' 아이의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쪽을 봐, 팀." 아무런 감정도 담겨있지 않은, 그래서 이 상황에서는 더욱 섬뜩한 그녀 의 목소리에 그는 속으로 마스트에게 기도를 올렸다. 제발 이 사태를 무 사히 넘기게 해달라고. 비록 지금은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더라도 마스트 에게 기도가 닿기를, 간절하게 빌고는 눈동자를 옆으로 움직이고 마지막 으로 얼굴도 돌렸다. 깊게 가라앉은, 모든 것을 꿰뚫어버릴 듯한 강한 눈빛을 발하는 검은 눈 동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으음…….' "말할 게 있지?" 저 말을 하면서 미소라도 띄었다면, 더욱 무서웠으리라. 그 점에서 일말 의 안도를 느끼며 그가 고개를 가만히 주억거렸다. 그녀가 다시 입을 열 었다. "말해." 산책으로 위장한 음모의 진실이 밝혀지는 순간이 드디어 찾아온 것이다. -------------------------------------------------------------------- 냐아. 여러가지 일이 있었던 파란만장한 일주일이 지나가고 이렇게 팀군이 돌아왔습니다.(결국 일주일이나 연재를 안했단 거잖아! 퍽퍽!!) ...죄송합니다. 워낙 바빠던 일주일이어서.;; 아시는 분들은 아시리라 생각되지만.; 일단 밝히겠습니다. 카마가 출판을 예정으로 하게 됐습니다. 출판사는 청어람이고요. 현재 수정 원고가 넘어가있는 상태이지만, 몇번은 더 수정을 가해야할 것 같군 요. 그래서 책은 시험이 끝난 후쯤이 되어야겠습니다.(^^^) 삭제 공지는 확실한 이야기가 들리는 데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지금 현재 카마를 퍼가시는 두분. 아이디가....;;; 죄송합니다, KIRUEL님은 생각나는데 한분이 생각나지 않는군요.; 아무튼 두분은 저에게 집 주소를 알려주시 바랍니다. 카드 마스터 1권을 보내드리 도록 하겠습니다.(^^^) 게다가. 또 하나의 경축할 일이. 카마가 추연란에 입성했다는 것이죠!(>.<) 데네브님 이후로 최초의 10대 추연란작가...라던가요? 또 최연소라던데. 허어.; 추연란 입성도 명예로운데, 그런 부가적인 일들까지.; 멋져요.! 에헤. 그럼. 앞으로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카마. 많이 사랑해주세요.(^^^) 꾸벅.(___) 어둠의 기사 DARK KNIGHT TEAM... P.S 추천 감상 비평. 추연란에 올라와서도 받습니다! 으하하! 번 호 : 39 / 40 등록일 : 2000년 09월 30일 23:27 등록자 : 암음기사 조 회 : 314 건 제 목 : [카드 게임 판타지]『카드 마스터(Card Master)』#038 카드 게임 판타지(Card Game Fantasy) 카드 마스터(Card Master) 38. 편안하지 못한 맘으로 든 잠이라 아이는 자는 중에도 귀가 바짝 서있었 다. 아니, 온 신경이 곤두서있어서 선잠을 잘 수밖에 없었다. 편안하게 잠 을 이루지 못한 적이 없는 그녀로서는 첫 경험이라 할 수 있는 선잠에 수면의 달콤함보다는 노동의 괴로움을 띈 얼굴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 다. 조금은 이른 아침이었다. 비는 잠시 그친 것도 같았지만 방안에서 소리 가 들리지 않을 뿐, 부슬부슬 얇은 비는 끊임없이 땅으로 떨어지고 있었 다. 그런 와중에 아이는 뭔가 수상한 낌새를 느끼고 번쩍 눈을 떴다. 빗 소리를 느낄 만큼 민감한 귀가 아니었기에, 그녀가 정신을 차린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티, 팀!" "어, 일어났어?" 순식간에 침대에서 일어난 아이가 황급히 훼이드리온을 불렀다. 칼을 챙 기고 마스터 카드가 담긴 갈색주머니를 허리에 묶고 있던 그가 태연하게 그녀에게 말하자, 그녀가 금방 울상을 지었다. "저, 정말 가는 거야?" 훼이드리온이 이내 고개를 돌려 주머니를 단단히 허리에 묶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확고한 의지가 담긴 간단한 대답과 허리에 매달린 선명한 붉은 색의 칼, 그리고 검은 색 계통의 어제 구입한 여행복이 기묘한 조화를 이루며 아 이를 더욱 짓눌리게 만들었다. '팀이 언제부터 이렇게 크게 보였던 거지?' 어제부터 훼이드리온의 말에 이상하게 힘을 잃어버리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부터'가 아닐 지도 모른다. 희미하게 잡히는 기억너머의 그것에 그녀는 다시 한번 훼이드리온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 젠 문을 향해 돌아선 채로 옷을 다듬고 있는 옆모습을 그녀에게 보여주 고 있었다. 기묘한 정적. 창 밖의 빗소리조차 귀에 거슬릴 정도로 시끄럽게 느껴질 만큼의 정적을 참지 못한 아이가 답답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일부러 감정을 억누르는 듯한 그녀의 목소리. "…정말 갈 거야?" "응." 태연하게, 그냥 평범하게 미소를 띄우는 훼이드리온의 얼굴이 왜 아련하 게 다가오는 것인지 아이는 이해할 수 없었다. 뭘까, 이 감정은. 그녀는 고개를 옆으로 움직여 훼이드리온의 신체 한군데도 보이지 않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훼이드리온이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의미 있는 웃음을 지었다. 과연 무 슨 의미가 담겨있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그는 모든 준비가 끝 났다고 생각되자 이내 몸을 움직였다. "다녀올게." 결코 쉬운 길을 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말은 친구 집에 놀러가는 이의 말투와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너무나도 평온하여 일의 중요성마저 잊어버릴 것 같은 말. 그는 그렇게 아이에게 인사하고 방을 나서려했다. 그때. 차마 그와 시선을 마주 하지 못하고 있던 그녀가 작은 목소리를 내었다. "잠깐만." 문손잡이를 잡고 있던 훼이드리온이 문득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에 뒤 를 돌아보았다. 수그리고 있던 고개를 든 그녀의 눈에 복잡한 감정이 꿈 틀대고 있었지만, 그는 넌지시 입을 열어 물어볼 뿐이었다. "왜?" 그녀는 자신의 침대 머리맡으로 가더니 그녀 소유의 마스터 카드가 들 어있는 주머니를 꺼냈다. 그녀와 어울리는 하얀 백색의 때묻지 않은 신비 로움이 느껴지는 주머니에서 그녀가 카드 한 장을 꺼내들었다. 푸른색을 배경으로 검은 테가 쳐진 그림은 아름답게 장식되어있는 거울의 형상이 었다. 거울에 관련된 카드인 것일까, 하고 내심 생각해보는 훼이드리온의 눈에 카드 전체를 뒤덮고 있는 은빛의 안개가 느껴졌다. 보인 것이 아니 라 '느껴진' 것이다. "내가 가장 처음 얻은 카드야. 마스터 카드 중에서, 자신의 손에 가장 먼저 발견된 카드가 무엇을 뜻하는 지는 알고 있지?" 훼이드리온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카드 중, 가장 먼저 얻은, 혹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카드를 지니고 있으면 게이머의 일생에 행운과 축복을 부여한다는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나도 샐러맨더 카드를 가지고 있지.'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그는 다시 아이를 향해 시선을 빛냈다. "수정거울 카드. 나도 아직 한번도 써본 적이 없는 카드야. 처음 얻은 카드니까, 당연한 거겠지만." 양손으로 소중하게 카드를 잡고 중얼거리듯이 말하던 그녀가 살짝 고개 를 들어 훼이드리온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손을 그에게로 천천히 내밀었 다. "가져가." "…응?" "행운을 줄 거야. 가져가." 훼이드리온이 잠시 황당한 표정이 되었다가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럴 수는 없어. 소중한 거잖아, 너에게." "괜찮아." "그래도." 고개를 저으며 사양하는 훼이드리온의 태도에 잠시 생각을 해보던 아이 가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가져가. 안 그럼, 보내지 않을 거야." 묘한 뉘앙스를 풍긴다고 생각하는 건 훼이드리온 뿐이었을까. 그는 아이 가 무심코 내뱉은 말에 속으로 얼굴을 붉히면서도 겉으로 난처하다는 듯 이 웃었다. 보내지 않을 거야, 라니. 아이 입에서 그런 말이 튀어나올 줄 은 정말 몰랐던 그였다. 난처하다는 듯이 웃고 있는 훼이드리온을 향해 그녀가 다시 한번 선언 했다. "가져가." 아까 전부터 똑같은 대사를 몇 번이나 되풀이하고 있지만, 그녀는 진지 하기만 했다. 이 카드를 들고 가지 않는다면, 큰일이라도 난다는 듯이. 훼 이드리온은 할 수 없이, 그러나 기쁜 마음으로 수정거울 카드를 받아들었 다. "지니고 있어. 알았지?" 걱정한다는 감정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묻어 나오는 말투에 훼이드리 온은 어째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것 같았다. 그런 심장을 잡듯이 카드를 손에 들고 지그시 가슴에 댄 그가 말했다. "응. 돌아와서 돌려줄 때까지, 가지고 있을게." 그녀는 그제야 안심한 듯이 미소를 지어주었다. 굳어있던 그녀의 진지한 얼굴이 풀리자, 그도 여러 가지 의미에서 미소를 지었다. "다녀올게, 그럼." 다시 손잡이를 잡아서 돌리며 훼이드리온이 말했고, 아이는 보일 듯 말 듯하게 살짝 고개만을 끄덕이며 그를 배웅했다. 자리에 가만히 선 채로, 카드만으로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안타까운 시선을 보내고 있는 그녀를 향해 마지막으로 미소를 지어둔 그는 천천히 문을 열어 복도로 나갔다. 이윽고 문은 방안에 그녀를 남겨두고 닫혔다. "휴우……." 방에서 훼이드리온이 사라지자, 어쩐지 텅 빈 허망함이 느껴진 아이는 침대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푹신한 침대의 감각은 첫날은 그녀를 기쁘게 해주었지만, 지금은 별로 신경 쓸 계제도 아니었다. 가슴속에서 요동치는 복잡 미묘한 감정들로 인해 답답해서 터지기 일보직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간밤에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한 후유증과 복잡한 마음으로 인 해 침대 위에 바로 엎어져버렸다. 이대로 그냥 잠이 들었으면 얼마나 좋 을까. 하지만 정신은 이상하게도 말짱했다. 너무나 깨끗해서 앞으로 잠을 자지 못하는 게 아닐까, 걱정스러울 정도로. 그녀는 손에 들린 흰 주머니를 응시했다. 자신의 보물인 마스터 카드. 그 중에서도 정말 소중한 첫 번째 카드, 수정거울 카드. 어떻게 그것을 훼이드리온을 위해 선뜻 내어줄 수 있었을까. 아니, 그전에 근본적으로. '왜 팀을 막지 못했을까.' 아이는 엎드린 채로 어제를 회상했다. 신나게 비가 퍼붓기 시작했을 때, 제복을 입은 경비대원 한 명이 이 여관으로 난입한 후 아주 조금의 대화 끝에 사라진, 그 다음의 일들을 차례차례 머리 속에 떠올렸다. 시간은 한나절을 거슬러올라간다. "…일단 앉아." "흠." 훼이드리온이 조용한 얼굴로 자리에 앉자, 아이와 피아도 곧 의자를 찾 아 앉았다. 그리고 잠시 정적이 그들 사이로 흐르고 이윽고 훼이드리온이 입을 열었다. "일단 사과할게." "당연히 사과해야지." "…미안해." 아이의 표정은 조금도 풀리지 않았고, 그건 피아도 마찬가지였다. 자신 들의 충고를 제대로 듣지 않았다는 사실이 기분이 나쁜 것인지, 그녀들의 표정은 간단하게 풀릴 수준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내심 한숨을 쉬며 자책하고는 다시 말했다. "산책한다고 나가서, 영주의 저택으로 갔어." "허어." 황당하다는 듯이 터져 나오는 아이의 감탄사로 분류 가능한 음성. 하지 만 그는 말을 끊지 않고 조심스럽게 이어나갔다. "거기서 경비병들에게 영주를 만나고 싶다니까, 들여 보내주지 않더라 고. 그러다가, 어떤 남자를 만나서, 그에게 영주를 만나고 싶다고 얘기하 니까 얘기해준다고 했어. 그래서, 여관으로 돌아온 거지." "뮤트리드 님이시군요." 피아의 말에 둘은 그녀에게로 시선을 모았다. 그녀가 훼이드리온의 말 속에서 발견한 익숙한 이름에 대해 설명했다. "대대로 아크릴 영주 가문을 섬겨온 기사 가문인 비아트 가문의 현재 장남이에요. 아크릴 영지 경비대장이면서, 현 아크릴 영주 길트 님에게 충성을 맹세한 기사이죠. 기사도가 투철하고, 또 실력도 대단해서 마을 여자들이 동경하는 남자들 중 대표적인 인물이고요. 뭐, 그 잘생긴 얼굴 도 한몫 하겠지만." 피아는 자신과는 다른 세계의 이야기라는 듯이 물 흘러가듯 설명을 끝 냈다. 사실 그녀로서는 이미 사랑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뮤트리드 정도 의 미청년이라고 하더라도, 마음을 흔들지 못하는 것이다. 아마도 훼이드 리온이 처음으로 이 여관을 찾았을 때 얼굴을 붉혔던 건, 잠시 실수를 한 것임이 분명하다. "흐음. 아무튼 그러니까. 방금 그 남자가 한 말은, 팀의 요청을 영주가 거절했다는 거야?" "그, 그런 거겠지." 대답하는 그의 말이 떨릴 정도로 아이의 표정은 새삼스럽게 굳어있었다. 그녀가 "흐으응."하는 의미심장하고 기묘한 콧소리를 내더니 훼이드리온 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안됐네, 이제 포기해, 라고 말하고 넘어가 줄 수도 있지만, 그렇게는 못 하겠어." 그녀는 다시 한번 날카로운 표정이 되었다. "왜 우리를 속인 거야?" 강렬한 눈빛을 동반한 그녀의 날카로운 질문에 훼이드리온은 뜨끔하면 서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이렇게 된 바에야 처음 마음먹었던 대로 다 밝 히고 나서 당당하게 다음으로 넘어가는 게 좋겠다고 여기고는 답했다. "만약 내가 밝혔으면, 막지 않았을 건 아니잖아." 아이가 간단히 대꾸했다. "당연하지." '위험하잖아, 영주를 만나는 건.'이라는 말은 속으로 삼켜버리고, 그녀는 그의 말을 기다렸다. "그러니까, 속일 수밖에 없었던 거야. 난 나의 신념대로 해야하는데, 너 희들이 그걸 막으니까." "위험하다고 했잖아요. 그리고, 무의미한 짓이라고도 했고." 피아가 다시 한번 냉정한 모습을 비추며 훼이드리온에게 말했지만, 이젠 거기에 눌릴 그가 아니었다. 그는 담담히, 그리고 단호하게 말했다. "위험하다고, 무의미하다고 해도, 꼭 해야만 하는 일이 있는 법이야. 나 에겐 이 일이 꼭 해야만 하는 일이고. 누군가 막는다고 하더라도 내 신념 대로 하는 게 옳다고 생각했어. 그 뿐이야." 여태까지 그가 비추었던 모습들과는 너무나도 판이하게 다른 모습에 아 이는 가슴까지 뛸 정도였다. 전투에 임하는 장면 외에는, 그가 저렇게도 단호하게 의지에 넘치는 눈빛을 보였던 적이 있었던가. 언제나 순수하게 웃고, 약간은 멍하게 행동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는데 말이다. 그녀는 갑작 스런 훼이드리온의 변화에 심장 박동까지 새롭게 느껴졌다. 훼이드리온은 또 한번 성장한 것이다. 자신이 믿는 것을 행하기 위하여 신념대로 움직이는, 그런 의지를 배운 것이다. 비록 타인을 속여서 행한 것이기는 했지만, 그것조차 못했던 예전보다는 매우 성장한 것은 틀림없 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의지는, 속임을 당한 자에게조차 전해져 스스로 수긍을 하게 해버리는 결과까지 낳았다. "신념대로……." "그래, 신념대로. 난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아. 옳은 일을 한 건지 도 잘 모르겠지만, 최소한 후회는 없어. 내 의지대로 움직였으니까." 그는 그 사실에 대해서 일말의 후회조차 가지지 않는 얼굴로 그녀에게 말했다. 그녀의 마음이 다시 한번 크게 울렸다. 너무나 큰 울림이라, 가슴 이 아련하게 아파 오는, 그런 고통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후, 대체 뭘 생각하는 건지 모르겠군요." 피아가 한숨과 함께 골치 아프다는 듯이 이마에 손을 짚으며 중얼거렸 다. 그녀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며 냉정하게 그에게 충고했다. "어차피 이제 갈 수도 없을 테니까 안심이기는 하지만, 혹시나 모르니까 미리 말해두는데요. 아니, 다시 말해주는 거죠. 쓸데없는 짓은 하지 않도 록 해요. 아무 것도 안 되는 여행자가 날뛴다고 해봤자, 이제 와서 바뀔 영주님도 아닐뿐더러, 잘못했다가는 여기에 사는 주민들까지 피해를 입는 다고요. 아셨어요?" 뭔가 굉장히 불쾌하다는 표정을 잔뜩 지으며 피아는 몸을 홱 돌려 주방 으로 들어가 버렸다. 동작 하나 하나에서 짜증이 묻어나는 것으로 봐서, 훼이드리온의 행동에 어지간히 열이 올랐던 모양이다. 그는 잠시 멋쩍게 뒷머리를 긁다가 다 식어버린 디오느 차를 단숨에 삼 켜버렸다. 미지근한 기운이 식도를 타고 사라지자, 그제야 뭔가 정리되는 느낌에 상쾌하게 머리를 털 수 있었다. 피아라는 저 소녀가 저렇게 말한다고 하더라도, 그는 계획대로 움직일 거니까, 상관없었다. 어리석은 판단이라고 하더라도 할말은 없었다. 기필 코 성공한다는, 출처 불명(아마도 기사도에 기인한 것이 가장 유력한)의 자신감만이 그의 신념을 이끌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훼이드리온을 잠시 바라만 보고 있던 아이가 조금은 복잡 한 얼굴로 디오느 차를 한 모금 마시고 고개를 들었다. "어떡할 건데?" "응? 뭘?" "거절했다잖아, 영주가." "아아. 그거." 그는 이제야 이해가 되었는지 고개를 끄덕이다가 간단하게 답했다. "내일 다시 가지, 뭐." 너무나도 평온한 어조라 순간 따뜻한 차와 함께 담소를 나누는 장면을 떠올려버린 아이는 스스로도 황당해서 들키지 않게 쿡쿡 웃고는 다시 훼 이드리온을 바라보았다. 때마침 그가 다음 말을 잇고 있었다. "피아를 피해서 일찍 일어나 가면 될 거야." "위험하지 않을까?" "그렇다고 해도, 할 수 없잖아. 그리고." 훼이드리온은 싱긋 웃었다. "해낼 거야, 난." "…으음." 뭔가 거역할 수 없는 느낌을 그의 말에서 느껴버린 아이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아래로 떨구었다. 보내서는 위험하다. 보내면 안 된다. 보내서는 절대 안 된다. 하지만 막을 수가 없었다. 자신의 의지로서 움직이려는 저 소년을 막을 수가 없다. 왜일까. '난 왜 평소처럼 "가지마."라고 명령할 수 없는 걸까.' 저 소년 앞에서는 왜 할 수 없는 걸까. 훼이드리온이 다시 한번 빙그레 웃었을 때, 그녀는 황급히 고개를 숙여 버렸다. 애써 지우고, 억누르고 있었던, 평원에서 느꼈던 복잡한 감정이 또 다시 그녀의 마음 속 틈을 비집고 일어나려 하고 있었다. 아이는 그때의 감정이 지금까지 자신을 괴롭히고 있다는 점을 알고 있 었다. 무시하려고 해도 무시할 수가 없지 않은가. 그 감정은 잠을 자는 중에도 자신을 괴롭혔고, 결국 악몽까지 꾸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피곤해.' 확실히 피곤했다. 너무나도 지친 정신 상태라든지, 그에 따라서 무거워 진 몸 상태라든지, 지치고 피곤해서 생각하는 것도 점점 귀찮아져갔다. '자자. 조금만 자자.' 피곤에 찌들어버린 정신을 쉬게 해줄 요량으로 그녀는 차분히 마음을 진정시켜나갔다. 조금씩 안정되어 가는 숨소리가 그녀의 수면 곡선을 알 려주듯 공간 속으로 스며들어갔다. ------------------------------------------------------------------- 냐아. 팀군입니다. 추연란에 올라온지 두 번째 글이군요. 나름대로 감회 가 새로운.(^^^) 이번 편은 분량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좀 짧군요. 으음. 현재 출판 문제도 있고 해서 집필에 더욱 힘을 고 있는 중이니까. 조만간 4장도 끝나겠죠. 그러면 2권 분량은 나올 것 같습니다. 아하하. 열심히 써봐야 알겠죠? (^^^) 요즘 보아에 미쳐 살고 있는 팀군은, 팬픽까지 쓰고 있답니다. 보아 팬클 소설방에 가시면 제 글이 있습니다.(홍보?) 보고 싶으신 분은 한번씩 보셔도 그렇게 무리는 없을 듯..;; 앗핫핫.; 네에, 그럼. 팀군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좋은 하루들 되세요.(^^^) 어둠의 기사 DARK KNIGHT TEAM... P.S 추천 감상 비평. 받는 거 다 알고 계시죠?(^^^) 번 호 : 40 / 43 등록일 : 2000년 10월 13일 17:45 등록자 : 암음기사 조 회 : 240 건 제 목 : [카드 게임 판타지]『카드 마스터(Card Master)』#039 카드 게임 판타지(Card Game Fantasy) 카드 마스터(Card Master) 39. "우산을 써야겠지." 여관 밖에서 들려오는 속삭이는 빗소리를 느낀 훼이드리온이 작게 중얼 거리며 다시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곧, 그의 손은 허 공에 멈춘 채 정지했다. '…그냥 맞고 가지, 뭐.' 차마 다시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은 탓이었다. 그는 마치 손에 넣지 못 할 보석을 포기하는 듯한 움직임으로 안타깝게 주먹을 쥐며 손을 거두었 다. 가볍게 한숨지으며 돌아서는 그의 행동에서도 마찬가지로 안타까움이 묻어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문득 손에 들린 단단한 감각의 종이재질이 느껴진 훼이드리온은 가만히 그것을 눈앞으로 올렸다. 은빛의 안개가 감싸고 있는 듯한 신비로운 느낌 의 수정거울 카드. 그가 느낀 아이의 이미지와도 신비한 조화를 이루는 카드였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어쩐지 그는 그녀가 지금 곁에 있는 것만 같은 착각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왠지 굉장히 안심이 되고 있는 그였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구름이 잔뜩 끼어 해가 떴는지 안 떴는지도 잘 모르겠지만, 대충 따져서 상당히 이른 시간이라고 그는 판단했다. 과연 이 시간에 피아가 일어났을까, 하는 걱정을 해보면서 최대한 발소리를 낮 춰 밑층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밑층, 식당은 적막에 쌓여있었다. 부슬부슬 내리는 빗소리마저 천둥처럼 크게 들릴 정도로 그곳은 조용했다. 훼이드리온은 조심스럽게 테이블 사이를 걸어서 여관 문으로 향했다. 한 손으로 떨어뜨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거머쥔 카드가 그의 허벅지 옆에서 유유히 흔들린다. 어쩐지 안심이 되는 기분. 그녀의 분신이 같이 있기 때문일까. 훼이드리 온은 본인 스스로도 알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힌 채 여관을 나왔다. 그리 고 문을 닫는 동시에 이번엔 강한 의문에 사로잡혀야했다. '…어느새 아이가 곁에 있는 게 당연해져버린 것인가.' 여관의 지붕으로 인해 비의 세력이 닿지 않는 지점에서 잠시 대기 중이 던 훼이드리온은 귀속을 살며시 파고드는 빗소리와 시야를 가득히 메우 는 빗방울들의 행진 속에서 손가락에 힘을 넣었다. 더욱 짙게 신경을 자 극하는 카드의 촉감. 매끄러운 듯 하면서도 손에 딱 잡히는 기분 좋은 감 촉. 그는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내뱉고 말았다. "앞으로도 영원히……." 그리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흠칫 놀라고 말았다. 이 무슨 망언이란 말 인가. 정해진 상대도 있는 녀석이 다른 여인을 대상으로 그런 말을 입에 담다니, 그는 아랫입술을 질끈 씹으며 자신을 질책하기 시작했다. '정신 차리자, 정신 차리자, 훼이드리온.' 그녀는 결국 헤어질 인연이니까. 점점 굵어지는 빗방울을 풀려버린 시선으로, 아무 것도 담겨있지 않은 공허한 눈동자로 바라보며 깊게 한숨을 쉬는 그의 모습에서 짙은 고뇌가 느껴진다. 피할 수 없는 운명과 함께 차마 완전히 억누를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는, 여전히 그의 마음을 할퀴고 할퀴어 그를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떨궈낼 수 없는 그 사실들이 더욱 그를 아프게 만드는 것이다. 수정거울 카드를 다시 한번 내려다보았다가 허리춤에 걸려있는 주머니 의 입구를 벌려 밀어 넣었다. 그 카드가 있기에 맘이 진정되는 건 거부할 수 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에, 그 카드를 자신의 마스터 카드 속에 소중히 보관할 참이었다. 이윽고, 천천히 움직이는 손길이 멈추고 질끈 동여맨 끈이 입구를 세차 게 조여 막자, 고개를 천천히 왼쪽으로 돌렸다. 비가 내리는 이른 아침의 마을 풍경은 생각 외로 꽤 운치가 느껴졌다. 이 한 장면만으로 평가를 한 다면, 왕성에서 보았던 장면보다 더 평화로울 듯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은 게 문제겠지.'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자신이 움직이는 것 아니겠는가. 위험을 무릅쓰 고, 주위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훼이드리온이 영주의 저택이 있는 곳을 향해 잠시 눈길을 돌렸다. 여관 에서는 건물들과 나무들에 가려 보이지 않는 곳을 향해 의미 있는 눈빛 을 보내던 그는 머리가 젖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후드를 덮어쓰고 비속 을 달리기 시작했다. 얼굴에 부딪히는 차가운 빗방울의 느낌이 새롭게 정신을 일깨우고, 비에 맞아 젖어 들어가는 옷의 느낌이 불편하기는커녕 오히려 당연하게 받아 들여질 무렵, 비로 인하여 급격히 쇠퇴한 그의 시야에 흐릿한 저택의 모 습이 들어왔다. 푸른 에메랄드빛에 담긴 고요한 저택의 모습이 새삼 그를 긴장하는 표정으로 변하게 만들었지만, 그는 부지런히 뛰어 계속 저택으 로 다가갔다. 그러고 보니, 약간 오르막길이라 뛰어서 올라가는 것도 조금씩 부담이 되고 있었다. 체력적인 면에서는 꽤 자신이 있는 그였지만, 비를 맞으면 서 비속을 돌파해온 탓에 조금 귀찮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어쨌든, 그는 저택 앞, 큰 철문 앞에 당도했다. 천천히 발걸음을 늦춰 전방을 바라보았다. 근엄한 자세로, 어제와 같이 두 명의 경비병이 철문 앞을 살벌하게 지키고 있었다. 갑옷을 아래위로 완벽하게 갖추고, 투구와 큰 창까지 든 모습, 어제와 같은 사람일까, 하는 생각을 떠올리며 훼이드리온이 그들에게 다가갔다. 갑옷을 우비로도 활용 할 수 있다는 새로운 사실을 몸소 실천하고 있던 경비병들이 얼굴을 덮 고 있던 투구를 열어서 다가오는 금발의 소년을 응시했다. "넌 그 녀석 아니냐." 흔히, 상호간의 유대감이 철철 넘쳐 흘리고 다닐 만큼의 친분을 쌓은 사 이에 주로 쓰이는 칭호로 훼이드리온을 지칭하는 경비병은, 역시나 어제 그와 만난 적이 있는 그 경비병이었다. 훼이드리온은 그나마 아는 얼굴을 만났다는 사실에 약간의 안도를 느끼고 그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지, 또?" "어제와 같은 용건입니다." 경비병은 무심히 대꾸했다. "그 건은, 거절된 걸로 알고 있는데?" 그러나, 금발 미소년의 표정에는 한치의 물러섬도 없다는 것을 경비병은 잘 알 수 있었다. 단호한 눈빛과 표정.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전 납득할 수 없거든요. 꼭 영주님을 만나야겠습니다." 경비병은 무거운 갑옷과 창만 아니었더라면 볼까지 긁었을 거라고 생각 하며, 현실의 제약을 충분히 감안하여 난처한 표정만을 떠올리고는 물끄 러미 소년을 바라보았다. "네가 납득할 수 없다고 해도 이미 결정은 그렇게 내려졌는데, 뭘 어쩌 려고?" "이방인 주제에."라고 덧붙이려다가, 그냥 삼켜버리는 경비병. 그는 속으 로 '난 너무 인자하단 말이야.'라고 혼자 콧대를 높여보고 있었다. 훼이드리온이 거침없이 대화를 이어나갔다. "안 된다면, 직접 만나러 들어가는 방법도 고려해보고 있습니다." "직접? 우리를 쓰러뜨리고 들어가기라도 하겠다는 거냐, 지금?" "필요하다면요." 당돌하기까지 한, 실제로 당돌한 그의 발언에 경비병이 금방 "헛."하고 헛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가 손을 내저으며 한마디 툭 내뱉었다. "얼른 가. 다치기 전에." 하지만 훼이드리온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고개를 저었다. "싫습니다." "…다쳐도 몰라. 여기서 계속 이렇게 소란 피우다가 어떻게 되는 줄 알 아?" "어떻게 되는데요?" 경비병은 굳게 부여잡은 큰 창을 다시 제대로 세우며 간단하게 대꾸했 다. "감옥." 의문을 띄울 수밖에 없는 훼이드리온. 그 심정을 이해하는 건지 경비병 은 차근히 기억을 떠올리며 설명했다. "지금까지 이렇게 귀찮게 군 여러 여행자들은 거의 다가 거기로 들어갔 어. 저택 지하에는 간단하게 감옥 구실을 하는 곳이 있는데, 편의상 감옥 이라고 부르는 거지." "…왜 감옥에 가는 거죠?" "시끄럽게 했으니까. 영주님의 명령이지." "…그리고는요?" 약간 불안한 기색을 내비치는 훼이드리온에게 경비병은 씨익 웃었다. "돌아갔지. 하루쯤 감옥에서 푸욱 쉬다가 말이야." 경비병의 웃음이 단순히 '푸욱 쉬다가' 정도가 아닌 듯한 느낌을 받으면 서 훼이드리온은 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리 굳게 단단하게 다짐을 했어도 조금의 두려움은 일어나는 것이다. '휴우.' 그래도 역시나, 신념에 찬 결심이 마음 속에서 우선을 차지했다. 훼이드 리온은 다시 일어선 강한 눈빛으로 경비병을 똑바로 응시하기 시작했다. "아니오, 그래도 전 만나겠습니다." "…고집이 세군." '그런가?'하고 나름대로 수긍해버리는 훼이드리온은 후드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이 조금 더 굵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경비병의 두터운 갑옷에 부딪혀 사방으로 날리는 빗방울의 양도 그만큼 더 많아졌다. 경비병의 얼굴에는 귀찮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비 오는 날에 이렇게 가 만히 경비를 서는 것도 피곤한데, 웬 고집 불통인 꼬마 녀석이 와서 자신 을 귀찮게 하고 있는 것 아닌가. 그는 다시 한번 굵직하게 경고했다. "좋은 말로 할 때 가거라." 약간의 화를 동반한 목소리는 꽤 살벌하게 들릴 법도 했건만, 훼이드리 온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대꾸했다. "들여보내만 주시면, 뒤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경비병의 화가 드디어 폭발해버렸다. 깊게 파인 골이 주민들과 아크릴 영주의 사이를 갈라놓은 건 그렇게 오 래 전의 일은 아니다. 2년 전, 괴로움에 못 이겨 결국 독단으로 내린 결 정에 모든 것을 걸어버린 아크릴 영주는 스스로 자신을 망쳐가며 지금껏 지내오고 있었다. 청렴결백 그 자체였던 그로서는, 그것이 죄를 사하는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했던 것이었다. '막을 수 없었다.' 그 모든 것을 아크릴 영주 옆에서 지켜본 뮤트리드. 그의 괴로움도 만만 치 않게 컸다. 거리에 나서면, 포악한 영주 편에서 그를 돕는 잔인한 자 식이라는 말을 서슴없이 듣는 건 아무렇지 않았다. 그가 고통스러운 건, 2년 만에 완전히 폐인이 되어버린 자신의 주군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다. 제대로 다하지 못한 아버지로서의 그가 무너지는 동시에, 그는 지금까지 쌓아놓은 모든 것을 팔아서라도 무너진 탑을 다시 세우려했다. 그렇지만, 달과 운명의 여신 하실루스의 장난 때문이었는지 뜻하는 대 로 이루어지지는 않고, 지금까지 시간을 끌어왔다. 더욱 악화되지 않았다 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휴우……." 감출 수 없이 흘러나오는 한숨을 혼자 있을 때만 표현하는 그의 감정이 다. 그는 망가진 영주를 대신하여 완벽해야했다. 언제든지 매사에 냉철하 게 처리해야하는 경비대장, 그것이 자신이 이루어야하는 과제였다. 그런 모습이기에, 그에게는 한숨이란 행동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혼자 있을 때만 한숨을 행했다. 가슴을 그득히 메우는 감정을 한꺼 번에 실어내려는 듯이 아주 깊고 길게. "웃기지 말라고, 이 자식아!" 언제나처럼 해가 채 뜨지도 못한 시간에 일어난 뮤트리드는 완벽하게 제복을 갖추고, 그 위에 우비를 걸친 모습으로 저택 내를 세심히 주의하 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경비대장으로서의 하루를 시작하는 첫 일과인 탓 에 정말 신경을 기울여 둘러보던 그의 귀로 잘 아는 목소리가 날아들었 다. 조금 전에 저택 정문을 지나왔기 때문에, 그는 몸을 돌려 뒤쪽을 바라보 았다. 짙은 먹구름이 끼어있는 하늘까지 닿을 듯이 높게 자라있는 나무들 에 부딪히는 빗소리 사이로 흐릿하게 보이는 정문. 철창의 형태까지는 알 아볼 수 없는 그곳에서 퍼지는 소리라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었다. "우리는 물로 보이냐? 한 대 패면 날아갈 녀석이 어디서 개기는 거냐 고!" 꽤나 화가 난 듯한 목소리였다. 뮤트리드는 굵직한 음성에서 경비병 차 넬이 내지르는 소리라는 것을 알아채고 걸어가는 방향을 바꾸어 정문으 로 향했다. 축축이 젖은 땅이 주는 스펀지 같은 감각이 다시 한번 느껴지 고 곧 정문에 도착했다. "뭐지?" 비로 엉망이 된 땅바닥에 넘어진 채 차넬을 무서운 눈초리로 쏘아보고 있는 금발의 소년과 조금 난처한 기색을 보이며 서있는 차넬을 한번씩 쳐다본 뮤트리드는 완전히 감정이 사라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우비에 가 로 막혀 사방으로 분산되는 빗방울이 가끔 그의 얼굴을 때려 조금 귀찮 았다. "어제 찾아온 그 소년이군. 무슨 일이지?" 훼이드리온은 옷에 묻은 흙들은 신경도 쓰지 않고 벌떡 일어나 그에게 크게 외쳤다. "영주님을 만나고 싶습니다!" 차넬을 한번 흘겨보는 소년의 눈빛에 모든 상황을 이해해버린 뮤트리드. 하지만 더없이 사무적인 얼굴로 대답했다. "그 건은 거절된 걸로 아는데." "하지만, 전 만나봐야겠습니다." 그는 잠시동안 물끄러미 금발의 소년을 바라보았다. 비에 푹 젖어버린 모습이라 조금 애처롭게 보이기는 했지만, 깊은 푸른색의 눈동자는 더할 수 없이 강하게 빛나고 있었다. 한마디로 결코 쉽게 물러날 맘은 없다는 것이다. "꼭 끝까지 가야겠나. 비도 오는데 돌아가." 조용하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약간의 감정이 느껴졌다. 훼이 드리온을 지그시 응시하는 그의 어두운 눈동자는 찬찬히 그의 전신을 훑 기 시작했다. '훼온 레이엔트, 라고 했던가. 귀족적인 생김새로 보면 여행과는 별로 어 울리지 않는데. 하지만 매우 의지가 강하군.' 뮤트리드는 이런 평화로운 세상 분위기 때문에 잘 찾아볼 수 없는 스타 일을 한 어린 여행자가 맘에 들었다. 눈빛에서부터 깨끗하고 단단한 의지 와 신념이 느껴지는 이는 그렇게 많지 않기에. 하지만 생각 없는 호기는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에 대해서 깨닫게 해줄 필요가 있었고, 아크릴 영 주나 자신에게도 환영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단호하게 결정을 내릴 수밖 에 없었다. "정말 가지 않을 건가." "네. 꼭 만나야겠습니다, 저는." 너무 강한 의지도 때론 좋지 않다. 뮤트리드는 속으로 '훗.'하고 웃고는 경비병에게 지시했다. "감옥." 갑자기 내려치는 천둥소리. 번쩍이는 빛 속에서 아이는 감았던 눈을 다 시 떴다. 어느새 잠이 들어버린 걸까. 눈을 비비며 잠을 털어 보는 그녀 는 순간 떠오르는 사실에 벌떡 몸을 일으켰다. '시,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거지?' 멍한 정신을 한번에 확 일깨워주는 생각에 아이는 지체 없이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방을 뛰쳐나갔다. 거세어진 빗방울이나 짙게 깔린 구름 때문 에 어림짐작으로 시간을 재는 것도 불가능한 상황. 그녀의 걸음은 더욱 빨라졌다. "피아!" "어, 왜?" 아직 한가한 시간일까. 식당 안에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피아도 한적 함을 마음껏 누리며 카운터에 비스듬히 앉아 하드커버의 책을 읽던 중에 계단으로 시끄럽게 뛰어내려오는 아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지금 시간이 얼마나 됐어?" "저기." 그녀가 테이블 하나를 차지하고 식사를 하다가 난데없는 소음에 멈추어 버린 손님들을 향해 시선을 한번 던졌다가, 난처하다는 듯 아이를 쳐다보 았다. "조금만 조용히 해줄래?" "응? 아아. 미안." 마지막 계단을 내려서면서 손님들에게 인사로 미안하다는 뜻을 전한 그 녀가 카운터로 재빨리 다가갔다. 피아는 그새 책을 덮고 대충 시간을 재 고 있었다. "얼마나?" "으음. 이제 곧 정오야." "벌써?" "응, 그래. 그러고 보니, 그 팀이라는 분은 아직 안 깨셨어?" 아이의 표정이 잠시 경직되어버린 건 결코 의도한 바가 아니었다. 순간 느껴버린 긴장으로 인한 안면근육의 반응을 미처 막지 못한 그녀는 서둘 러 표정을 수습하며 대답했다. "으, 응. 아직." "흐음. 아직 비 맞은 것 때문인가?" 눈치채지 못한 눈치인 피아를 살짝 훔쳐보며 아이는 속으로 안도의 한 숨을 쉬었다. "그런 가봐." 피아에게 뭔가 요기를 할 것을 주문하고 가까운 테이블에 자리를 잡은 그녀는 창 밖으로 내리는 비를 망연히 쳐다보기 시작했다. 멍한 그녀의 눈빛. 그 눈빛에서 조심스러운 걱정이 묻어난다. '그러고 보니 괜찮을까? 어제 비를 맞고 들어왔는데. 참, 오늘도 비맞고 간 거잖아?' 나갈 때 분명히 우산이나 우비, 아무 것도 가지고 나가지 않았다. 또 비 를 맞으면서 영주의 저택으로 갔다는 것이다. 아이는 급격하게 그를 걱정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어쩌려고, 대체! 그러다 아프기라도 한다면!' 신경질적으로 미간을 좁히는 그녀는 진정으로 그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 의 몸이 아프기라도 한다면, 그의 몸이 아프기라도 한다면. 그녀의 심장 이 세차게 박동을 시작한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차가운 물방울, 비. 이 순간처럼 비라는 중요한 존재 가 증오스럽게 느껴지기는 처음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팀!' -------------------------------------------------------------------- ...하아, 엄청나게 간만인 팀군입니다. 너무나도 연재를 질질 끌어버린 죄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하고, 상큼하게 모니터에 머리를 박아봅니다. 아아 흐르는 이 피... 싱긋 웃으면, 완전 호러영화 수준이로군요. 컬럭.; 에, 헛소리는 그만하고요. 각설하고. 공지에서 밝혔다시피 아이디가 일시 정지를 먹어버린 것입니다. 이제야 회복을 한 거죠. 그동안 추연란에 입 성하면 연재가 늦어진다는 이상한 공식을 생각하신 분이 계시다면, 제 발 그런 생각을 지워주세요.(ㅠㅠㅠ) 현재 출판사 쪽에서 원고 OK싸인이 떨어지지 않은 탓에 가슴을 졸이고 있는 팀군입니다. 너무나도 떨리는 군요, 이런 시간도. 하아.; 어서 빨리 책을 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앗핫핫.; 그럼. 40편에서 뵙죠.(^^^) 어둠의 기사 DARK KNIGHT TEAM... P.S 추천 감상 비평. 받아요, 받아!(>.<) 번 호 : 41 / 43 등록일 : 2000년 10월 13일 17:45 등록자 : 암음기사 조 회 : 337 건 제 목 : [카드 게임 판타지]『카드 마스터(Card Master)』#040 카드 게임 판타지(Card Game Fantasy) 카드 마스터(Card Master) 40. "…춥군." 차갑게 식은 바닥과 뼈를 스칠 정도는 아니라도 충분히 차가운 바람에 맴도는 공간 속에서 훼이드리온은 난생 처음 '얼음장같은 추위'를 경험해 보고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날 때마다 이렇게 중얼거리기도 했다. "추운 건 싫어. 추운 건 싫어." 왕성에서 지낼 때는 저택의 완벽한 보온시설과 왕성 수석마법사 직위를 가지고 있는 필로윈의 마법으로, '추위'라는 것이 사전에만 나오는 단어로 여길 정도였다. 그러나 여행을 나온 이상 이런 날도 있는 것이다. 물론 그도 따뜻한 날만이 지속되면서, 밝은 햇살 아래에서 여행을 계속 할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건 정말 아니다. "…세상에는 이런 곳도 있었던 거야." 훼이드리온은 몸을 더욱 움츠려보며 감옥 안을 눈으로 한번 스윽 훑었 다. 차갑고도 차갑게 보이는 짙은 암회색의 벽. 제 기능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암녹색의 얇은 모포 한 장은 대체 왜 깔아놓았는지조차 의심 갈 정도였다. 또한 먹구름 때문에, 안 그래도 조악한 감옥 안에는 일말의 빛 조차도 들어오지 않았고, 굵은 빗줄기로 인해 열이 식어버려 피부가 닿는 곳곳마다 얼음에 버금가는 느낌을 전해주고 있었다. 이런 극악한 구조 속에서 다른 여행자들은 하루를 버텼고, 자신은 이렇 게 몇 시간동안을 견디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조금 한기가 돈다 싶더니, 무슨 마법이라도 걸어버린 듯 급격 히 냉동(?)되어 가는 감옥 안의 온도 때문에 굉장히 놀라버렸다. 그럭저 럭 일정 온도에서 하강을 멈췄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인 걸까. 아무튼 그는 지금 굉장한 위기감을 맛보고 있었다. '난생 처음 감기에 걸릴 것 같은데.' 추위로 인한 감기는 다행히 몇 일 푹 쉬면 낫는다지만, 그 몇 일 동안은 여행을 전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현재 여행 일정이 빡빡하게 밀려서 제 시간에 에코에 도착할 수 있을지 의문인데, 여기서 더 밀려버 렸다가는 정말 위험한 지경에 다다를 지도 모른다. 그러나, 간단히 사태를 타개할 비책이 있었으니. '…아이가 신관이었군.' 그는 그 점을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다. 믿음으로서 기적을 일으키는 존 재들, 신관. 감기 따위는 신관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훼이드리온 은 지금껏 자신이 해온 고민이 모래가 되어 바람에 흩날리는 듯 사라지 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허탈함이 밀려왔다. 그는 스스로에게 냉정한 평가를 내려버렸다. '바보.' 어찌됐든 한가지 고민이 해결되자 그의 근심이 조금은 덜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상황에 결코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훼이드리온의 관점으로, 그 잘생긴 미청년이 경비병에게 "감옥."이라고 말하자,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경비병이 우악스럽게 그를 잡아채 이 곳으로 끌고 와 거의 집어던지다시피 밀어 넣고는 사라졌다. 덕분에 그는 젖은 옷을 어떻게 해보지도 못하고 이 추운 곳에 갇힌 채 당장 감기에 걸려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상황에서 지금까지 몸을 떨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아이가 신관이라는 것도 감기가 걸린 후의 이야기지, 지금 현 재의 상황을 바꿔줄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라는 것이다. 훼이드리온은 압수 당한 칼이 떠올라, 괜히 허전한 마음에 다시 몸을 움 츠렸다. 이렇게 있으면 조금이나마 따뜻한 기분이 들어 추위가 약간은 가 시는 것 같았다. '휴우, 차라리 수련으로 생각하고 견뎌볼까.' 이런 수련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하지만, 난생 처음 겪어보는 무식한 추위에 그도 정말 애를 먹고 있었다. 하다 못해 이 축축한 옷만이 라도 말리고 싶지만, 원래 이 감옥에는 간수조차 없는 건지 사람이라고는 발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이다. "에취!" 갑작스럽게 터져 나오는 재채기. 훼이드리온은 스스로 꼴불견이라고 생 각하면서도 두어 번 재채기를 하고 나서야 겨우 진정할 수 있었다. 아무 래도 예감이 굉장히 불길하다. '제발 누구라도 좀 나타나달라고!' 자신이 왜 여기에 갇혀야하는지도 이제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다른 여행자들처럼 어서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끼익. 정말 조그맣게 들려오는 비음악적인 음향. 그렇지만 지금 이 순간, 훼이 드리온에게는 천상의 음악보다 더욱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소리였다. 그가 서둘러 고개를 들어 단단히 닫혀진 감옥문의 작은 창을 노려보자, 곧 그 곳에서 낯익은 얼굴이 나타났다. 훼이드리온을 이곳에 밀어 넣은 장본인, 뮤트리드였다. 그는 아무 감정 이 담겨있지 않은 눈으로 창살 틈을 통해 훼이드리온을 지그시 바라보더 니 이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첫마디. "안 괜찮아 보이는군." "…그렇다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생전 처음으로 사용해보는 듯한 '비꼬는' 어투를 한껏 살린 뉘앙스로 훼 이드리온이 말하자, 뮤트리드가 가벼운 조소를 머금었다. 분명히 비웃는 태도라고 생각되었지만, 왜 이 미청년은 그 모습마저도 아름다운 것인가. "별로." 간단하게 대꾸해버리고는 다시 한동안 침묵하는 뮤트리드를 향해 훼이 드리온은 절대적인 적의감을 불태웠다. 생긴 걸로 봐서는 결코 악당 캐릭 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하는 짓은 하나하나 전부 악당의 짓이라니. 아 마도 지금 시대에 이런 사람도 결코 쉽게 볼 수 없는 타입일 것이다. "원하는 게 있나." "궁금한 건 있습니다." 원하는 건 무지 많았지만, 뮤트리드의 아니꼬운 태도에 괜한 오기가 동 하여 억지로 표정을 돋구어보는 훼이드리온. 뮤트리드는 훗, 하고 조소를 머금으며 시선을 소년의 푸른 눈동자와 마주했다. 역시나, 그 눈동자는 전혀 수그러들지 않는 깨끗한 빛으로 번쩍이고 있었다. '좋군.' 그가 반문했다. "뭐지?" "제 칼은 어떻게 됐죠?" 훼이드리온의 물음. 뮤트리드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금방 대꾸했다. "잘 있다." 어떻게 '잘 있다'라는 건지 이해하기가 굉장히 난해했지만, 더 할 말은 없다는 듯이 입을 다물어버리는 그의 기세에 훼이드리온도 질문할 마음 을 꺾어버렸다. 검사이면서 설마 남의 검에 무슨 짓이라도 하려고, 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나중에 다시 오지." 뮤트리드는 그렇게 감정 없는 말을 남기고 감옥을 나가버렸고, 다시 홀 로 남은 훼이드리온은 뭐라고 연신 중얼거리며 문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문이 무슨 잘못이 있으랴. 그는 곧 고개를 떨구어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 기 시작했다. "내일까지는 안 놓아줄 생각인 거 같은데. 휴우, 마스터 카드를 가져가 지 않은 게 다행이군." 비적비적, 현재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려 고 힘쓰는 훼이드리온은 이 시점까지 겪었던 그 수많은 사건들 중에서도 허리를 붙잡고(?) 끝까지 매달려있던 갈색주머니의 노고를 치하하며 그것 을 풀어냈다. 옷을 입은 채로 욕조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온몸이 푹 물에 젖어있음 에도 불구하고, 신기하게도 갈색주머니에는 조금의 물기도 묻어나지 않았 다. 감옥 안의 채광도가 그렇게 좋지 못한 관계로 어두운 갈색으로 보였 지만, 다른 이상은 전혀 없는 처음 모습 그대로였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 주머니를 들고 다닌 지가 한 달이 넘어가지만, 주머니는 상한 곳이라 고는 눈을 씻고 안경을 쓰고 봐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깨끗했다. 그야말 로 원형 그대로의 모습. 훼이드리온은 내심 속으로 이 주머니를 만든 제 작자에게 경의를 표했다. "자아, 그럼 놀아볼까." 그 이상하게 아니꼬운 경비대장이 오기 전까지 시간이라도 보낼 생각에 겸사겸사 마스터 카드를 땅에 늘어놓기 시작하는 훼이드리온이었다. 지하 감옥에서 지상으로 올라와 저택의 계단을 오르고 있는 인물은 다 름 아닌 아크릴 영지의 경비대장 뮤트리드였다. 뛰어난 검사답게 걷는 걸 음 하나하나에 기백이 흐르는 그의 모습을, 만약 금안 기사단 단장 바이 마크가 본다면 당장에 그를 데려가려고 난리를 피울 지도 모른다. 소년은 그림자 속에서 완전히 은신한 채 그의 뒤를 따랐다. 결코 들키지 않는 은신술이 웬만한 암살자들도 울고 갈 만한 실력이었다. 전신이 어둠 속에 녹아 들어갈 듯이 검은 소년. 누가 뭐라고 해도 소년은 지난번에 훼 이드리온을 습격한 전과가 있는 그 암살자 소년이었다. 그런데, 이 소년이 이번엔 왜 뮤트리드의 뒤를 따라가고 있는 것일까. 아무리 굉장한 실력을 가진 검사인 뮤트리드라고 할 지라도 소년의 은 신술을 파악해낼 수는 없었는지, 그 소년이 뒤를 따라오고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계속 자신의 목적지를 향해서 전진만 하고 있었다. '…….' 무음.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그들은 부지런히 걸음만 옮겼다. 하늘에 짙게 깔린 구름 속에서 들려오는 강력한 파열음조차 신경 쓰지 않고 무 표정하게 앞만을 바라보며 걷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둘은 확실히 닮은꼴이었다. 뮤트리드가 멈춰선 곳은 어제도 들렸던 그곳, 아크릴 영주의 서재였다. 어두운 색의 문이 굳게 닫힌 채 밖과 안을 완벽하게 갈라놓고 있었지만, 그는 한번의 깊은 호흡과 함께 문을 열어 두 공간을 하나로 이어버렸다. "실례하겠습니다, 영주님." 문이 닫히기 직전, 정말 찰나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는 그 순간에 자신 의 등뒤를 지나가는 서늘한 바람의 기운을 느끼지 못하고 뮤트리드는 문 을 닫았다. 그만큼 소년의 몸놀림은 재빨랐다. 소년은 어두컴컴한 서재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깊은 어둠 속으로 녹 아 들어가 의자에 삐딱하게 앉아있는 영주를 감시하기 시작했다. 영주의 손에는 뮤트리에게도, 그리고 소년에게도 익숙한 물체가 들려있 었다. '마스터 카드.' 이미 알고 있었는지 소년은 숨을 죽인 채 그저 사태를 관망하고만 있을 뿐이었다. 검은 눈동자는 빛조차 흡수해버렸는지 빛나지도 않고 아크릴 영주와 뮤트리트 사이를 부지런히 오갔다. 뮤트리드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마스터 카드로군요." 조용한 음색. 일전에, 정상적인 모습이었던 아크릴 영주가 맘에 든다고 했던 그런 조용한 음색의 말이었다. 마스터 카드 한 장을 손에 들고 지그 시 바라보고 있던 아크릴 영주 길튼이 절대 열릴 것 같지 않던 입술을 움직여 천천히 '말'이라는 것을 해나갔다. "나에게 남은, 단 하나의 즐거움이지." 뮤트리드는 주군의 말속에서 베어나는 쓸쓸함과 아련함을 상기하며 잠 시 침묵을 유도했다. 조금이라도 민감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 이곳에 있었 다면 아마도 숨이 막힐 것 같은 이런 깊은 적막에 못 이겨 뛰쳐나가 버 릴 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 방에 존재하는 그 누구도 인내심의 극에 달할 정도의 경험이 있기에, 그런 사태는 벌여지지 않았다. 점점 깊어지는 침묵 속에서 들리는 것이라고는 길튼의 손가락이 마스터 카드와 마찰을 일으키는, 극히 미세한 소리뿐이었다. '차라리, 그렇게 좋아하시던 마스터 카드라도 하신다면.' 그렇다면 지금보다는 상황이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뮤트리 는 들키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주군은 카드 마스터의 칭호를 받 을 정도의 실력을 가진 게이머였다. 하지만 2년 전부터 마스터 카드와는 완전히 손을 놓아버렸고, 가끔씩 찾아오던 게이머들의 발길도 끊어진 이 후로는 이따금 마스터 카드를 꺼내놓고 만지는 것 외에는 절대 상종도 하지 않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력을 가슴 깊이 자책하면서 다 시 입을 뗐다. "그 소년은 어떻게 할까요." 의무적이라고 해도, 영주에게 처리 사항을 묻는 건 당연한 것이었다. 길 튼은 조금의 간격을 두고 대답했다. 여전히 가라앉은 칙칙한 목소리. "…적당히 해서 돌려보내게." "네." 간단한 대답과 함께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한 뮤트리드는 조용히 서재에 서 나갔다. 그의 몸이 완벽하게 복도로 사라지고 문이 다칠 때까지 지켜 본 소년은 빛이 들어오지 않는 그늘과도 맞먹는 어둠이 깔린 곳에서 조 용히 앉아있는 길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심히 그를 지켜보던 소년은 감옥 안에 잡혀있을 훼이드리온을 잠시 떠올려보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재밌겠군.' 소년은 자신에게 의뢰를 한 그를 떠올렸다. 그는 여기까지 다 예상하고 있었던 것일까. 훼이드리온의 행적을 미행하는 소년이었지만, 그 자의 목 적이 무엇인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한편, 다시 지하로 향하고 있던 뮤트리드는 주군의 명령을 이행하기 위 해 필요한 능력을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으로서는 그렇게 사용하고 싶지 않은 능력. 기사인 자신에게는 그렇게 필요가 없는 능력임에도 불구하고, 선천적으로 타고난 그 능력으로 지금까지 그는 많은 여행자들을 마을 밖 으로 몰아낼 수 있었다. 원하지 않는 유혈 사태까지 번지지 않아도 손쉽 게 끈덕진 여행자들을 떨쳐낼 수 있었기에 제법 쓸모는 있는 능력이었지 만, 그렇다고 해도 싫은 건 싫은 것이었으니까. 그가 머리 속으로 영상을 띄워 잠깐잠깐 능력을 점검해보는 사이, 어느 새 지하 감옥에 당도해있었다. 두꺼운 철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꽤 서늘한 기가 그의 주위를 맴돌며 체온을 빼앗아갔지만 그는 상관하지 않 고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오른쪽에서 세 번째 문. 철을 주재료로 사용하고 단단한 각나무로 보완 한 구조의 문 앞에 도착한 뮤트리드는 열려있는 작은 창 사이로 안을 들 여다보았다. 추위에 떨다가 결국 포기하고 정신을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 슬그머니 걱정이 되기도 했는데, 그는 안을 보다가 그만 훗, 하고 웃어버 리고 말았다. 그 당당한 눈빛을 하고 있던 금발의 미소년이 바닥에 무언가를 늘어놓 고 상당히 고뇌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것이다. 그 모습은 이 감옥과는 너무나 상반된 모습이라, 장소를 잘못 찾았나하고 스스로 기억을 더듬어 보게 만드는 위력을 발휘할 정도였다. 자신은 제대로 들어왔고, 장소와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는 저 소년이 자신이 볼 일이 있는 그 소년임을 새삼스레 깨달은 그는 열쇠 를 꺼내 문을 열어 안으로 들어섰다. 때마침 카드 한 장을 땅에 내려다놓 고 있던 소년의 고개가 들려 그를 바라보았다. 다시 보아도, 깨끗하게 빛나는 푸른 눈동자를 잠시 바라보던 뮤트리드는 자연스럽게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어두워서 평소보다 시야가 세배는 좁 아졌을 테지만, 그는 훼이드리온의 손에 들린 작은 물체의 정체가 무엇인 지 알 수 있었다. "…마스터 카드?" 훼이드리온이 자신의 손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 의문을 띄우고 있다가 되물었다. "아시나요?" "물론. 게이머인가." "뭐, 그렇다고 할 수 있는데요." 결코 좋은 어조는 아니었지만 뮤트리드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소년 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으므로. 그리고 그에게 지금 현재 중요 한 것은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어쩌면, 잠시라도 영주를 예전의 상태로 돌릴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그의 머리 속에 자리잡기 시작했다. '마스터 카드. 이 소년이 게이머라면. 잠시라도 영주님이 즐거워하실지 도 모른다.' 마스터 카드에는 죽고 못사는 아크릴 영주의 예전의 모습을 생각하며 뮤트리드는 심각하게 고민했다. 과연 이 소년을 영주님께 데려다줘도 괜 찮을 것인가. 다른 일이라도 벌어지면 어떻게 할 것인가. 훼이드리온이 마스터 카드를 챙겨서 주머니에 넣고 있을 동안, 그는 수 없이 떠오르는 여러 가능성들을 하나씩 고려해보다가 결국 한가지 결론 을 내리고 입을 열었다. "잠시 동안만 기다려라." '여기서 내보내주지 않는 이상, 언제나 기다려야하는 걸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훼이드리온은 "왜요?"라고 물었다. 뮤트리드가 몸 을 돌리며 간단히 대꾸했다. "제안할 게 있으니." "제안?"이라고 다시 되물으려던 그의 의지는 허망하게 허공 중에 흩어 져버리고, 그의 눈길은 문을 닫고 사라지는 뮤트리드에게로 향해 있었다. 뭔가 바쁜 일이 생각난 건지, 서둘러 방을 나서는 모습이 심상치 않아 보 였다. 칼 같이 사무적인 태도였다가 두 번째로(첫 번째는 아까 전의 조 소) 감정을 내비친 것 아닌가. 훼이드리온은 그가 돌아오기를 기대하면서 무슨 제안일지 조심스럽게 추측해보기 시작했다. 뮤트리드는 거칠게 계단을 뛰어올라가 서재로 단숨에 달려갔다. 그리고 그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르며 멈췄다가 예의바르게 들어가겠다는 의사 표 시를 한 다음, 문을 열어 안으로 들어갔다. 어둠 속에 숨어있던 소년의 몸이 더욱 깊숙이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영주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그는 계속 말을 이었다. "지금 감옥에 있는 훼온 레이엔트라는 소년이 마스터 카드 게이머라고 합니다." "…그런데?" "영주님께서 마스터 카드를 하지 않으신 지도 2년이 다 되어갑니다. 오 랜만에 한번쯤 즐기시면서 심신의 피로를 푸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마스터 카드라는 말에 길튼의 고개가 드디어 뮤트리드를 향했다. 탁하게 변색되어버린 듯한 눈동자에서 오랜만에 작은 빛이 도는 것을 뮤트리드 는 알 수 있었다. "…게이머라고 했나. 그 소년이." "네, 그렇습니다." 긍정적인 대답을 기대하는 뮤트리드. 잠시라도 주군이 짐을 덜 수 있다 면, 그로서는 그 정도로 기쁜 일도 또 없을 것이다. 길튼은 잠시 입을 다물고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 다. "저녁을 먹을 때, 데려오게." "…알겠습니다." 뮤트리드의 표정이 환하게 변하며 날아갈 듯이 가벼운 몸짓으로 밖으로 뛰어나갔다. 소년은 그의 그런 모습을 지켜보다가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 는 다시 길튼을 주시했다. 여전히 마스터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그였 지만, 조금 전보다는 왠지 밝아진 듯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 소년은 잠시 의문을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그나저나.' 의문을 지워버리고, 뮤트리드를 떠올리는 소년. 아무래도 그 자가 말한 일이 정말 그대로 일어나려는 듯이 착착 흘러가는 상황이 소년은 꽤나 황당했다. 감정을 원체 드러내지 않는 얼굴이라 겉으로 보이는 표정 변화 는 전혀 없지만, 그래도 황당해하고는 있었다. 그 자는 정말 어디까지 알 고 있는 것일까. 그 소년도 신기한 인물이었지만, 소년이 떠올리는 그 자야말로 궁극적인 신비함을 지닌 인물이라고 소년은 생각했다. 오늘은 평소보다 더 많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뮤 트리드는 서둘러 지하 감옥의 문을 열었다. 두꺼운 철문이 힘차게 열리자 곧바로 훼이드리온이 잡혀있는 방으로 향한 그가 더 이상 제할 것도 없 이 단도직입적으로 제안했다. "영주님과 마스터 카드 대전을 하도록. 그동안 영주님과 대화할 시간을 주겠다." "…에, 네?" "말 그대로다." 어쩐지 말 자체에서 들뜬 기분이 묻어났지만, 훼이드리온은 갑작스런 파 격적인 제안에 약간 정신이 없는 상태라 눈치채지 못했다. 그가 복잡해지 는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해 안간힘을 쏟고 있을 무렵, 뮤트리드가 다시 한번 단호하게 물었다. "어떻게 할 텐가." 그 말이 '받아들여라.'라고 들리는 건 훼이드리온의 착각이었을까. 안 그 래도 그럴 참이었던 그였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적인 답변을 했다. "좋아요." 뮤트리드의 표정이 드디어 선명하게 확인이 될 정도로 밝아졌다. 지금까 지의 표정 중 가장 직접적인 변화인 것이다. "나중에, 저녁때 데리러오겠다." "네." 뮤트리드는 의미 있게 멋진 미소를 띄우더니,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포와 배부르게 먹을 만한 양식까지 넣어주고 돌아갔다. 이왕이면 감옥에서 꺼 내주면 좋으련만, 하고 훼이드리온은 생각했지만 이미 뮤트리드의 모습은 사라져버렸기에 결국 모포가 꽤 두껍다는 사실에서 만족감을 느껴야했다. '아크릴 영주님도 마스터 카드 게이머인가?' 잘생긴 경비대장의 말에서 생각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다. 그렇지 않 으면, 굳이 아크릴 영주와 마스터 카드 대전을 해달라고 말하지는 않을 테니까. 어쩌면 그가 카드 마스터일 가능성도 있다. '호오, 그러면 이건 기묘한 인연이군?' 엄청난 위기로 몰렸다고 생각했는데, 엉뚱하게도 마스터 카드 게이머와 의 인연으로 엉킬 줄이야. 인생은 살아봐야 안다, 라는 진리를 몸소 터득 하고 있는 훼이드리온이었다. 그는 가슴까지 씌운 모포 속에서 주머니를 지그시 잡았다. 한 손 가득히 잡히는 딱딱한 감촉으로 느껴지는 마스터 카드의 느낌. 새삼스럽게 느껴 지는 그 감촉이 또 다른 인연을 예감하게 해주는 것 같았다. -------------------------------------------------------------------- 냐앙. 40편입니다. 카마 연재 사상 처음으로 2연참이라는 것을 날리는 날 이군요? 꽤 힘들게 작업했지만, 나름대로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아. 이렇 게 아이디도 회복시켜놓고 보니까, 글을 쓸 의지도 한층 더 늘어나는 것 같은 느낌도 들구요. 냐앙. 출판사에서 연락이 좀 늦고 있습니다. 많이 바쁘신가봐요. 조만간 온다 고 생각은 하고 있지만, 그래도 좀 초조하군요. 어서 빨리 해치워야.... 핫.; 그럼, 이만 쓰고, 팀군은 물러가겠습니다. 41편은 더 빨리 올리도록 노력 하겠습니다.! 그럼.!(___) 어둠의 기사 DARK KNIGHT TEAM... P.S 추천 감상 비평. 받는 거 다 알고 계시죠?(^^^) 번 호 : 42 / 43 등록일 : 2000년 10월 17일 00:48 등록자 : 암음기사 조 회 : 171 건 제 목 : [카드 게임 판타지]『카드 마스터(Card Master)』#041 카드 게임 판타지(Card Game Fantasy) 카드 마스터(Card Master) 41. 어둡게 깔린 하늘에서 떨어지는 비는 아직 그칠 생각이 없나보다. 그동 안 지상을 방문하지 못한 시간을 한꺼번에 보상이라도 받겠다는 기세로 떨어지는 그 빗방울들을 지그시 응시하고 있던 아이의 눈빛은 아무런 빛 도 띄지 않은 채, 그저 멍한 상태였다. 방금 어머니와 금전 관리에 대해 심도 있는 격렬한 논쟁을 벌여 극심한 체력을 소모한 피아는 카운터 의자에 앉아 축 늘어져있었다. 잠시 자세를 바꿔볼 요량으로 비적비적 상의를 일으킨 후, 신체 휴식에 대한 가장 최 선의 자세 선택을 하여 그대로 실행했다. 카운터 위에 그대로 엎어져버린 것이다. 그녀의 눈에 힘이 들어가 있지 않는 시선을 창 밖으로 던진 채 침묵하 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녀의 깨끗한 흑색 눈동자는 조용히 가라앉아 고요했지만, 피아는 그 속에 담긴 애절한 감정을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었다. '고민하네.' 그녀도 저런 모습을 한 적이 있었기에 아이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세리나를 사랑하는 파커슨을 좋아하게 되어버린 후, 울었던 경험이 몇 번 이고 홀로 고민하던 적도 몇 번이었던가. 결국 그 모든 고통들은, 그를 사랑한다는 것을 인정하자마자 깨끗하게 사라졌다. 피아는 깨달을 수 있었다. 감정이란 건, 결코 이성으로서 움직일 수 없 다는 것을. 그리고 자신이 깨달은 그 진리를 아이가 조만간 깨닫게 되리 라는 것도 어렴풋이 짐작하고, 또 빌었다. 그녀는 홀로 상념에 잠겨버린 그녀의 정신 세계에 난입을 해볼까 말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혼자 고민해보고 터득하는 진리는 그 깊이에서도 확 실하게 차이가 나는 것이니까. 그녀는 훗, 하고 작게 웃어보고 카운터 밑 서랍에 밀어 넣어두었던 하드 커버의 책을 꺼내어 덮어두었던 페이지를 찾아 차근차근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피아는 자신을 바라보는 누군가의 시선을 느껴 잠시 눈길을 피아 쪽으 로 돌렸다가, 독서삼매의 경지에 빠져들고 있는 그녀의 상태만을 확인하 고 다시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심란한 마음은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거칠어질수록, 식당 안을 떠도는 고요함이 점점 깊어질수록 그 정도를 더해가고 있었다. 전에도, 기억에 존재하는 마지막 때부터 지속되어온 이 기분은 안타깝게 훼이드리온을 보낸 뒤 더욱 가속화되고 심층화되었다. 너무나 혼란스러워 차마 한숨조차 쉬지 못할 지경이 되어버린 머리를 감싸쥐며 그녀는 비스듬히 테이블에 기대어있던 상체를 들어올렸다. 비도 오고, 한참 바쁠 시간도 지난 탓에 식당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카운터에 앉아있던 피아조차도 독서에 열을 올리고 있던 탓에, 그 어떠한 존재도 그녀의 움직임에 반응하지 않았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의자를 테이블 밑으로 밀어 넣고 계단 쪽으 로 움직였다. 아무래도 공간이 너무 넓어 혼자 있기도 거북했다. 그리고 지금의 마음 상태라면, 혼자만의 공간에서 혼자서 고민해보는 게 더 나을 거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나무로 만들어진 계단을 천천히 밟고 올라가 2층에 도착, 그리고 자신의 방으로 향하는 그녀의 걸음걸이는 왠지 힘이 들어있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힘없이 문을 열고 방안으로 들어간 아이는 방안의 물품들에 는 전혀 신경도 쓰지 않고 침대에 바로 엎어져버렸다. 털썩, 하는 소음이 잠시 방안을 흔들었다가 잠잠해졌다. 엎드린 채 힘겹게 숨을 쉬는 그녀의 소리만이 조용한 방안에 울려 퍼졌다. '언제 팀을 만났었지.' 아이는 조심스럽게 기억을 더듬어 올라가며 회상에 잠겼다. 지금부터 거의 이주일 전, 태어나면서부터 절대 벗어나지 않았고, 벗어 남이 허락되지 않았던 그곳을 떠나 용감히 여행을 떠난 아이는 길을 잘 못 들어버려 어느 숲에서 길을 잃어버렸다. 사방을 둘러봐도 방향조차 감 지할 수 없었고, 이상한 감각이 온몸을 억누르는 그 이상한 공간에서 한 참 발을 동동 구르던 그녀 앞에 고블린들이 나타난 건, 어느 한적한 지점 에서 잠시 쉬어갈 요량으로 털썩 주저앉은, 바로 그때였다. 달과 운명의 여신 하실루스의 경전에는, 몬스터들의 운명도 하실루스가 담당하기 때문에('은은한 달빛 아래의 모든 생명체는…'이라는 구절) 모두 동일한 존재들이라고 명시되어있다. 그리고 그녀 또한 그런 가르침을 받 고 자라서 몬스터라는 존재들에게 그렇게 거부감을 들지 않았다, 라고 스 스로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정식으로 부딪히자 상황은 영 반대였다. 그녀는 고블린들 을 향한 무한한 거부감을 온몸으로 표현해버리며 결국 소리를 지르고 말 았던 것이다. 그녀도 나중에, 당시 모습을 생각하며 '참 추했어.'라고 중얼 거렸다. 아무튼 그것이 훼이드리온을 만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굉장히 멋진 타이밍으로, 때마침 근처를 지나고 있던 그가 비명 소리에 금방 반응하여 달려와 그녀를 구해준 것이다. 하실루스의 신관인 탓에 어떤 존재에 대한 진실을 꿰뚫는 것에 일가견이 있는 아이는, 그가 들고 있던 새하얀 검신 이 인상적인 검 때문에 몬스터들이 싸우지 않고 돌아섰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아이가 훼이드리온을 만난 때가 일주일. 정확한 시간인지는 그녀 도 계산해보지 않아 잘 알 수 없었지만, 대략 그 정도의 시간을 같이 보 냈을 것이라고 생각됐다. 아이는 베개에 완전히 얼굴을 묻어버렸다. 깜깜해진 두 눈에 압박감이 전해지며 숨이 막혀오기 시작했지만, 상관하지 않고 계속 그 자세로 시간 을 흘려보냈다. 이렇게 하면 조금은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을까. 만난 지 일주일밖에 되지 않은 훼이드리온. 그녀는 그가 나간 후, 온 머 리를 장악해버린 그의 대한 생각들에 묻혀 제대로 된 이성을 지탱하기가 힘들다고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어떤 구조로 이루어진 머리인지, 주인의 의도와는 맞지 않게 무수하게 그의 모습을 재생하고 그의 목소리를 들려 주는 통에, 그녀는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해버릴까, 도 생각했다. '차라리 헤어지는 것이 좋지 않을까.' 이대로 가다가는 그녀 자신조차도 그 끝을 예측할 수 없었다. 혼란스러 움의 극치로 치닫고 있는 감정과 이성은 무수한 전쟁을 계속했고, 결코 끝은 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중간에 서있는 그녀는 그 전쟁의 원인조차 제대로 파악을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녀도 알고 있을지 모른다. 그녀는 생각했다. '난 정말 모르고 있는 걸까.' 스스로 떠올리는 그 의문에 그녀는 피식 하고 웃어버릴 수밖 에 없었다. 왠지, 그렇게 자신을 향해 물음을 던지는 모습이 너무 바보 같았기 때문에. 그만 하자, 라고 자신에게 타일러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어차피 그 런 생각을 떠올리고 난 후, 채 숨을 들이쉬기도 전에 다시 그의 영상이 머리 속에서 자리잡아버리니까 말이다. 인정하기 싫었다. 하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더욱 문제 는, 그녀가 그런 사실조차 제대로 감을 잡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사 랑이란 감정을 난생 처음으로 가져보는 그녀이기 때문에 더욱 그랬던 것 이다. 점점 차오는 숨을 쉬기 위해 베개에서 얼굴을 들었던 조금을 붉게 상기 된 얼굴을 옆으로 돌려 창 밖을 바라보는 그녀의 검은 눈동자가 조금은 젖어있는 것도 같았다. '비.' 무의식적으로 되뇌어보는 존재, 비. 빗속을 뚫고 훼이드리온은 과연 저 택을 잘 찾아갔을까. 시간이 꽤 많이 흘렀는데,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을 까. 영주와 만나서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아니면……. 또 다시 그의 대한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멈출 수 없게 연쇄적으로 떠오르는 수많은 생각과 의문들. 아이는 애써 정리하려하지 않고 힘이 빠져버린 듯 눈을 감아버렸다. 검게 변한 시야에 훼이드리온의 금색 미소가 환하게 각인되었다. 그녀는 생각했다. '정말… 좋아져버린 걸까.' 어디까지나, 능동형이 아닌 수동형의 표현을 쓰는 그녀는 깊게 한숨을 쉬어버렸다. 계단을 차근차근 밟고 올라가면서 훼이드리온은 앞서 가는 뮤트리드에 게 아크릴 영주에 대해서 물었다. 뮤트리드는 그를 향해 잠시 눈길을 돌 렸다가 예전과 같은 차분하고 사무적인 어조로 천천히 대답하기 시작했 다. "아크릴 영주님은……" 하지만 곧, 대답하기 굉장히 곤란하다는 듯이 그의 얼굴이 굳어버렸다. 진지하게 대답을 기다리고 있던 훼이드리온은 궁금한 눈빛으로 그의 얼 굴을 집중하다가, 갑자기 시선을 자신에게로 돌리는 그의 행동 때문에 움 찔 놀래며 뒤로 물러섰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에서 정색을 하는 놀라운 표정 연기를 보이며 간단 히 말했다. "직접 확인하도록." 왠지 대답을 회피하는 기색이 다분한 그의 대답이었지만, 굳게 닫혀버린 그의 입술이 다시는 열리지 않을 것 같아, 훼이드리온은 그냥 포기해버렸 다. 어쨌든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해보면 그의 진의도 제대로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다부진 표정으로 뮤트리드의 뒤를 따라 어두운 계단 을 걸어 올라갔다. 가끔씩 바깥에서 번쩍이는 번개의 빛이 굉장히 환했다. 무심코 눈길을 돌려 창 밖으로 보자, 벌써 세상은 어둠에 잠겨버린 것인지 마을 곳곳의 작은 마법의 등 불빛뿐, 보이는 것이라고는 거의 없었다. 가끔씩 천둥소 리를 동반한 번개가 한번 번쩍이면 마을의 윤곽이 대충이나마 보이기도 했지만, 그래도 굉장히 어두웠다. '먹구름 때문일까.'하고, 일찍 날이 져버린 이유를 떠올리던 그의 푸른 눈동자에는 창 밖에서 내리는 비가 한껏 비추어지고 있었다. 검은 하늘 색의 물감이 흘러내리는 듯이 대지를 향해 수없이 떨구어지는 그 존재들 을 향해 잠시 시선을 보낸 그의 머리에서 연속적으로 한 소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검은 눈동자. 항상 총총하게 빛을 내는 검은 눈동자를 가진 소녀. 지금 의 하늘색과는 판이하게 다른 밝은 검은 색을 가진 칠흑의 머리칼이 너 무나도 잘 어울리는 소녀. 훼이드리온은 아이를 생각했다. '지금쯤이면… 뭘 하고 있을까. 날 기다리고 있을까. 아니면…….' 자신이 걱정되어 그녀가 우는 모습을 잠시 떠올리려고 애를 써보았지만, 썩 잘되는 않았다. 그만큼 그녀는 우는 것보다 웃는 것이 더 어울렸다. 칙칙한 분위기를 한번 날려버릴 수 있는 힘을 지닌 환하고 밝은 웃음. 그 래서 그 반대의 이미지들은 그녀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고, 상상도 되 지 않았다. 그는 가만히 그녀를 생각하다가 훗, 하고 웃어버렸다. 조금 있으면 막중 한 임무를 띈 일을 하게 될 텐데, 한가하게 그녀를 떠올리고 있다는 사실 이 너무나도 한심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하지만 그도 느끼고 있었다. 떨 리는 이 순간에 그녀를 생각하자, 마음이 많이 진정되었다는 것을. 그리 고 힘을 얻었다는 것을. '위험해.' 경보는 이미 예전부터 울리고 있었지만, 그는 애써 모르는 척 귀를 막아 버렸다. "여기다." 때마침, 혼란스러워지는 머리를 탈피하기 위한 무언가가 궁해졌을 때, 타이밍도 알맞게 뮤트리드가 걸음을 멈추며 말했다. 무의식적으로 그의 뒤를 따라온 훼이드리온은 급히 정신을 차리며 주위를 살폈다. 방금 전까 지 계단이었던 곳이 어느새 짙은 갈색의 융단이 깔린 복도가 되어있었고, 그는 칙칙한 색의 진수를 보여주는 문 앞에 서있었다. 뮤트리드는 조심스럽게 노크를 두어 번하더니, 그 안에 있을 아크릴 영 주에게 들어가겠다는 뜻을 밝히고 문을 열었다. 희미한 노란 마법의 등 불빛 아래에 펼쳐진 식탁. 6인용으로 보이는 간 단한 그 식탁 끝에 눈을 감고 깊은 고뇌를 띄운 얼굴로 앉아있는 중년의 남자가 아크릴 영주라는 것을, 훼이드리온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어쩐지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이미지와는 굉장히 빗나간 모습이 라 조금 당황해버렸던 것도 사실이다. 훼이드리온이 안으로 들어서자 뮤트리드는 조용히 문을 닫았다. 바깥에 서 희미하게 들어오던 빛이 완전히 차단되자 실내는 더욱 어두워져버렸 다. '어두운 곳에 오래 있는 것은, 시력 저하에 주요한 원인이 된다던데.' 라는, 이 상황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 걱정을 해보며 살며시 주위를 경계 하는 훼이드리온. 그때, 정지된 움직임으로 앉아있던 아크릴 영주가 지루하게 느껴질 정도 의 느릿느릿한 움직임으로 눈을 떴다. "…앉지." 호의가 담긴 말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적의를 가진 말도 아니었다. 그래 서 훼이드리온은 또 놀라고 말았다. 분명히 자신이 어떤 목적으로 가지고 왔는지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분명히 약간의 감정이라도 내 비치기 마련인데, 저 남자는 딱딱한 경비대장의 주군답게 감정이 실리지 않은 음성으로 말을 한 것이다. 지금까지 들었던 이 영지의 사정으로 미 루어볼 때, 분명히 이상한 일이었다. 사실, 그런 이질감은 이 저택에 들어섰을 때부터 느껴오던 것이었다. 바 깥에서 원망을 들을 만큼 억압을 하고 착취를 해갔다면, 분명 저택은 호 화의 극치를 달리고 있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막상 안으로 들어와 보니, 과연 주민들의 말이 진짜인지 의심해야할 정도로 저택의 꼴은 말이 아니 었다. 마법의 등도 잘 못간 건지, 전체적으로 어두컴컴했고, 분위기조차도 침침한 게, 한 겨울에 들어오면 추워서 동사하기 딱 좋은 모습을 하고 있 었던 것이다. 게다가 호화는커녕 가난의 극치를 달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할 정도의 수준에 훼이드리온은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그것은 아크릴 영주의 본 모습에 대한 의문으로 발전되어갔다. 그는 곧 조심히 걸어가 맞은 편 의자에 앉았다. 친절하게 뮤트리드가 끌 어내 준 의자에 편안하게 안주한 훼이드리온은 정면으로 아크릴 영주를 바라보았다. 아크릴 영주, 길튼은 깊게 가라앉아 진의를 파악할 수 없는 그의 눈동자 로 소년을 응시했다. 귀족적으로 생긴, 상당한 미소년으로 분류할 수 있 는 외모에서부터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가장 눈에 띄는 의지가 담긴 푸른색의 두 눈동자. 그는 소년의 푸른 눈동자에서 예 전의 자신의 모습을 회상할 수 있었다. 믿는 바를 행하고, 옳지 않은 일을 절대 행하지 않던 의지를 가질 수 있 었던 그때의 모습. 너무나도 더렵혀지고 추악해진 지금 현재 자신의 모습 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밝았던 그 나날들이 애처롭게 그의 눈앞을 흘 러감에 따라, 그는 가슴을 후벼파는 고통을 느껴야만했다. 그러나, 결코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그저 차갑게 소년을 응시할 뿐이었다. 뮤트리드가 문 옆에 서서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은 지도 꽤 시간이 흘 렀을 무렵, 길튼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마스터 카드를 다룰 줄 안다고." 그의 관심사는 그것뿐이었나 보다. 훼이드리온은 지체 없이 대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다'로 끝나는 존대가 어색하지 않았다. 만약 쓰게 된다면, 굉장히 어 색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말이다. 그는 자신의 말투에 스스로 놀라워하 면서 뒷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길튼은 조용한 눈빛으로 다시 훼이드 리온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다시 적막으로 사라지려는 이야기의 흐름을 잡아채며 훼이드리 온이 아슬아슬하게 다음 말을 이었다. "…제 용건을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길튼의 대답은 의외로 빨리 튀어나와, 그가 움찔 놀라게 만들었다. "이미 다 알고 있네, 무엇을 말하려는지." 훼이드리온은 내뱉으려던 말을 삼키고 길튼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어 두운 탓에 제대로 형체를 알아볼 수 없던 탓에 대충 눈이 있는 위치(?)로 시선을 보내고 있었지만, 아크릴 영주는 그런 소년의 눈을 잘 알아볼 수 있었다. "많은 여행자들이 나를 찾아와서 헛소리를 늘어놓고 돌아갔다. 대부분 뮤트리드의 '사안(邪眼)'으로 겁을 먹고 도망간 것이지만, 그깟 환상으로 내빼는 녀석들은 처음부터 글러먹었다는 소리와 같은 것이겠지. 자네도 전과 같은 전처를 밟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일로, 이렇게 귀찮게 만나고 싶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내 말은. 다만, 자네가 마스터 카드를 다 룰 줄 안다는 말에 조금은 선심을 쓴 것뿐이네. 그러니, 애초부터 말도 꺼내지 말게." 중간에 나온 '사안'이라는 단어에 잠시 뮤트리드를 힐끔 쳐다본 훼이드 리온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는 그의 모습에 금방 흥미를 잃고 반박할 말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영주의 말은, 소용없으니 말도 하지 말라, 아닌가. "아니오, 전 영주님을 만나기 위해서 아침 일찍 일어나 비를 맞으면서 이곳에 왔고, 경비병에게 밀려서 흙탕물에 옷을 적셔보기도 하고, 난생 처음 감옥이란 곳도 들어가서 추위에 떨어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겨우 영주님과 만났는데, 제가 해야할 말은 하고 가야겠습니다." 물러설 수 없다는 단단한 의지가 담긴 말에 길튼은 말없이 소년을 바라 보았다. 푸르게 빛나는 눈동자가 너무나도 눈에 띄어, 소년의 모든 이미 지를 지배하고 있었다. 맑으면서도 순수한, 그래서 더욱 확고한 의지를 가진 소년의 모습. 단순히 연약해보이는 미소년은 아니라는 것을 확실하 게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길튼은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 기에 더더욱 표정을 굳혀버렸다. "뻔하겠지만, 들어보기는 하지." 명백한 무시의 발언이었지만, 그것만이라도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훼이드 리온은 천천히 맘속에 정리해둔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뒤쪽에서 서있던 뮤트리드도 아무 관심 없다는 표정을 한 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아실 지 모르겠지만, 지금 영주님에 대한 원성이 거의 하늘을 찌르고 있습니다. 일부에서는 포기할 수준에까지 이르렀고요. 일찍이 마법왕국 라시엔트 내에서 이런 정도로 폭정을 한 영지는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어떤 사소한 이유이든, 혹은 공적인 이유이든, 절대 용납할 수 없 는 일입니다. 영주라면, 당연하게 영지 내의 주민들이 불편함 없이 살아 갈 수 있도록 자신을 희생해야지, 자신이 잘 살기 위해 주민들을 희생해 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올바른 지도자의 역할입니다. 그 정도는 아시고 계실 거라고 여깁니다만." 길튼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지만, 훼이드리온은 그대로 말을 이었 다. "지금 영주님의 행동은 올바른 지도자의 행동에서 크게 벗어나 있습니 다. 제가 들은 바로는, 벌써 2년 정도가 흘렀다고 하더군요. 이 지경까지 왔다면, 그 어떤 이유라도 이제는 받아들일 수 있는 시기가 지나버렸습니 다. 정식으로, 영주님께서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시고 주민들에게 사과를 한 다음, 합당한 대가를 받으셔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틀린 말을 한 것입니까?" 한꺼번에 생각하고 있던 모든 것을 털어 버렸다는 생각에 조금은 후련 함을 느끼면서 훼이드리온은 똑바로 길튼을 쳐다보았다. 뒤쪽에 뮤트리드 가 서있다는 사실도 겁나지 않았다. 이 순간, 그는 그 누구보다도 당당했 다. 아크릴 영주는 소년이 한 말 중, 한가지 짚어줄 것이 있다는 것 빼고는 크게 이의를 가지진 않았다. 소년의 말은 모두 맞는 사실이었으니까. 그 도 자신이 하고 있는 이 짓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을 알 고 있기에, 이렇게 폐인처럼 지내는 것이고 말이다. 그는 목이 조금 따갑다는 것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한가지, 정정해주고 싶은 곳이 있군." 훼이드리온은 '무슨 헛소리를 하려는 것일까.'하는 표정으로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영주가 폭정을 하는 영지는 잘 없다고 했던가. 훗, 아직 여행 초기인가 보군, 그래. 대륙을 돌아다녀 보게. 아니, 이 라시엔트만이라도 모든 지역 을 여행해보게. 이미 이 나라는 썩어 들어가 버렸어. 권위를 잃어버린 왕 성은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는, 다른 나라의 이야기일 뿐이지. 아 무런 영향력도 없다는 사실이네. 보게나, 이 영지만을 봐서도 이미 할말 은 다 해버린 것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그는 자신의 영지를 예로 들면서, 마법왕국 라시엔트에 숨겨진 비리를 낱낱이 고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을 듣는 훼이드리온은 자신이 큰 착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거대한 충격에 몸을 가누지 못할 정 도가 되어있었다. 아버님, 국왕 폐하께는 그 어떤 말도 듣지 못했다. 나라 안, 모든 국민들이 편안하게 잘 사는 줄 알고, 단순히 그렇게 믿고만 있 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크릴 영주가 말한 이 사실은 그로서는 전혀 들어 보지 못한 그런 이야기 아닌가. 훼이드리온은 어느새 불끈 쥐어버린 두 손에서 땀이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너무나 흥분해있었다. "알겠나. 자네가 알고 있는 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거야, 내 말은. 자세한 내막도 모른 채, 멋대로 뛰어들지 말도록 하게. 목숨은 소중한 것이지." 그 말에서 어떠한 뼈를 느낀 훼이드리온이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길튼 을 노려보았다. "위협인가요?" "위협, 경고라고 할 수 있지. 어리석은 행동이 어떠한 결과를 낳게 되는 지 말일세." 도발하는 어투라고 훼이드리온을 판단했다. 명백하게 자신을 깔보고 있 는 듯한 조소 섞인 그의 표정. 훼이드리온은 순간 오기가 터져 오름을 확 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정말, 썩어버렸군요. 최소한 자신의 편의를 위해서 돈을 쓰지는 않는 것 같아 기대를 했는데." 그도 자신의 입에서 이렇게 노골적인 증오를 담은 말이 나올 줄은 정말 몰랐다. 왕성 안에서 아무 걱정 없이 살 때에는 절대 볼 수 없었던 모습 들. 요즘 들어 심심찮게 놀라게 되는 사실에, 여행은 사람을 변하게 한다, 라는 명언을 다시 떠올려보는 그였다. "…기분이 심히 나쁘군." 마찬가지로 길튼의 목소리에도 결코 좋은 감정이 담기진 않았다. 하지만 뒤로 물러설 수 없다는 일념으로 훼이드리온은 똑바로 그를 쳐다보았다. 길튼도 마찬가지로 그 어두운 시선을 훼이드리온의 푸른 눈동자로 향했 다. 두 시선이 만나는 지점에서 불꽃이 한번 팍 하고 일어나는 듯한 착각 조차 들 정도였다. "오랜만이군, 이런 더러운 기분. 훌륭하다, 소년이여." 꽤나 잔인하게 들리는 그의 말. 훼이드리온은 눌리지 않으려는 듯이 두 눈에 더욱 힘을 주었다. 길튼이 걸걸하게 음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글자 하나하나에 또박또박 힘을 넣는 그의 음성에는 확연한 '분노'가 스 며들어 있었다. "재미있는 일을 해볼까." "…무슨…" "목숨을 건 마스터 카드 대전. 내가 지면 자네의 말에 따르지. 하지만, 자네가 진다면, 여기서 목숨을 내놓고 가야할 거야." 훼이드리온이 뭐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그의 말을 끊고 잔인한 말을 내 뱉는 아크릴 영주를 향해 그는 황급히 뭐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길튼은 다시 한번 간단히 입을 열었다. "선택은 없다. 자네의 상황을 생각하게나." 더없이 잔인한 말. 어두운 눈동자 아래에서 번뜩이는 광기는, 마치 모든 것을 포기해버린 사람의 그런 것이었다. ------------------------------------------------------------------- 아아. 팀군입니다.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그녀를 기다리면서 41편을 적 었군요. 랄라. 그런데, 정작 그녀는 아직 안들어왔습니다.(ㅠㅠㅠ) 흐음. 출판 기념, 이벤트 비슷한 것을 해보겠습니다. 에에, 기한이 언제까 지 될 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표지 뒤에 들어갈 '축전'을 모읍니다. 꽤 양이 될 테니, 골라서 넣을 거구요. 선택을 당한 축전이 표지에 실리겠습 니다. 핫핫.; 마닥님이 쓰신 뮤2000이나 포키님의 소설 은의 왕국, 표지 뒤에 보면 소 설 출판이나 글에 대해서 칭찬이나 축하를 해놓은 것 보셨죠? 네에, 그렇 게 보내주시면 되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두세 줄로 해주시고요. 아이디나 닉을 꼭 써주시기 바랍니다.(^^^) 자아, 그럼. 팀군은 목숨을 건 마스터 카드 대전을 쓰러 가겠습니다. 멋있는 축전, 많이 보내주시기를.(>.<) 꾸벅.(___) 어둠의 기사 DARK KNIGHT TEAM... 번 호 : 44 / 45 등록일 : 2000년 10월 21일 03:48 등록자 : 암음기사 조 회 : 114 건 제 목 : [카드 게임 판타지]『카드 마스터(Card Master)』#042 카드 게임 판타지(Card Game Fantasy) 카드 마스터(Card Master) 42. 어둠 속에 녹아든다는 표현을 자주 쓰게 만드는 소년은, 역시나 어둠 속 에 몸은 안주한 채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사실 벌써 몇 시간 전 에 아크릴 영지의 동정을 살펴보고 보고를 하기 위해 수도로 떠나야했지 만, 훼이드리온이 어떤 일을 하게 될까 궁금하여 계속 지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로서는 정말 몇 년만에 생겨난 '호기심'이라는 감정이었고, 또 한 수도까지야 하룻밤도 걸리지 않는 시간에 도착할 수 있었기에, 그렇게 상관하지 않고 계속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소년은 말 그대로 매우 흥미를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예 상이나 했다는 듯이 자신을 이리로 보낸 그 자에게 다시 한번 경외심을 가져보며 상황을 관망하고 있는 소년은 하나하나 세심하게 사태를 지켜 보았다. 일단 저 문 앞에 굳게 박혀있는, 마치 다시는 움직이지 않을 단단한 석 고상이라도 되는 듯이 굳은 얼굴로 서있는 이름 모를 미청년은 신경 쓰 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 완전히 관심 밖으로 밀쳐버렸고, 남아도는 여유 를 한껏 이용하여 남은 두 명에게 집중하기 시작했다. 아크릴 영주는 아주 거만한 자세에서 천천히 마스터 카드를 테이블 위 에 올려놓고 있었고, 그에 비해 훼이드리온은 식은땀이 금방이라도 떨어 질 것 같은 얼굴로 갈색주머니에서 카드를 주섬주섬 꺼내고 있었다. 소년 의 시선이 문득 그 갈색주머니로 모아졌다. 케롯 마을에서 그 자의 명령으로 저 주머니를 노리고 훼이드리온을 공 격한 적이 있었다. 그때 그는 필사적으로 그 주머니를 사수했고, 소년은 이내 물러나 사라졌었다. 소년은 그 기억을 떠올렸다. 주머니를, 아니, 그 안에 들어있는 마스터 카드를 아끼는 그의 마음은 잘 알 수 있었기에, 그 렇게 쉽게 물러난 것이었다. 소년은 갑자기 그 기억이 왜 떠오르는 것인지 잠깐 알 수 없는 기분이 되었다가, 이내 문 앞에 서있는 미청년과 같은 신분으로 그 기분을 강등 시켜버리고는, 다시 마스터 카드 대전이 준비되고 있는 현장으로 관심을 기울였다. 그런 소년의 정체를 모르는 길튼과 훼이드리온은, 뮤트리드라는 관중 아 닌 관중으로 선택된 사내가 지켜보는 가운데 대전 준비를 끝마쳤다. 솔직히 훼이드리온은 무척 떨리고 있었다. 오랜만의 마스터 카드 게임이 었기에, 그 떨림은 흥분이라고 판단 내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눈앞에 앉아있는 무시무시한 영주의 얼굴을 보게 되면, 그 떨림은 두려움 이라고도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복잡 미묘한 기분에 사로잡힌 채 천천히 카드를 정리해나가는 훼 이드리온. 식은땀이 그득한 손바닥을 옷에 문질러 닦고 있을 때, 정면에 서 들려오는 아크릴 영주의 목소리가 그의 뇌를 진동시켰다. "각오는 됐겠지." "큭큭."이라고 웃어버렸다면, 소름이 온몸을 달렸을 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렇지 않아도 목소리 자체가 갈라지고 가라앉아, 듣기 거북한 목소리인데, 내용도 그렇고 웃음까지 첨가되었다면, 참지 못했을 것이다. 훼이드리온은 잠시 대답을 미루며 테이블 위를 바라보았다. 무너진 마스 터 카드의 탑 중간에, 우연찮게도 아이가 준 수정거울 카드가 삐죽 튀어 나와 그의 시야를 가득히 잡아버리고 있었다. 수정거울 카드. 행운을 빌어주겠다는 아이의 소망. 안타까움에 가득 찼 던 배웅. 그리고. 돌아가겠다던 약속. "다녀올게, 그럼." 훼이드리온은 수정거울 카드 주위로 날아오르는 은빛의 이미지를 내려 다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 모습을 아크릴 영주가 기 묘한 시선으로 바라본 것도 당연했지만, 당사자는 그런 사실을 전혀 깨닫 지 못한 채 그저 카드만을 애정 어린 눈빛으로 내려다보고 있었을 뿐이 다. 소년은 훼이드리온이 주시하는 카드를 쳐다보았다가 한가지 사실을 기 억해냈다. '은빛의 막. 분명하군.' 소년은 무엇을 알아차린 걸까. 훼이드리온의 눈동자가 조용히 감기더니, 이내 다시 뜨였다. 그리고 깊 은 빛을 내는 푸른 눈동자에는 더 이상 망설임의 기미는 찾아볼 수 없었 다. "시작하죠." 난 돌아간다, 그는 다짐했다. '아이에게로. 반드시.' 푸른 에메랄드의 눈동자가 청아하게 빛나는 모습. 청색의 빛과 함께 새 어나오는 그가 알지 못하는 어떤 느낌이 그 공간을 휘어잡았지만, 소년을 제외한 누구도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무언가, 진지한 어떤 것이 꽉 찬 느낌이 되어버린 실내를 빛이 없는 눈 동자로 한번 훑고 다시 훼이드리온을 향해 시선을 내린 소년이 중얼거렸 다. '신기한 녀석.' 두고두고 자신의 흥미를 돋굴 녀석이라고, 소년은 그렇게 훼이드리온을 판단했다. 잠시 간의 정적 속에서 아크릴 영주와 훼이드리온은 서로 시선을 교환 했다. 뮤트리드가 아닌, 누군가 상황에 민감한 이가 있었다면 알 수 없는 오한으로 기침을 해버렸을 지도 모를 정도의 분위기였지만, 둘 중 누구 하나도 눈을 피하지는 않았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는지 감도 잡지 못할 만큼 무의식적인 침묵이 계속되고, 그 가운데 천천히 막혀오는 긴장감으로 인해 그들의 몸은 차차 달구어지기 시작했다. 격정적인 음악이라도 흐른다면 더욱 완벽했을 분위 기 속에서 천둥소리가 거대하게 한번 천지를 울린다. 우르르릉. 이어서 번쩍이는 날카로운 하얀빛. 번개의 외침은 세상 끝까지 퍼져나가 고 어두웠던 실내를 잠시나마 밝게 만들었다. 그것이 시작의 신호가 되었던 것일까. 아크릴 영주가 지그시 입을 열었 다. "카드를 나누도록 하지." 조용히 입을 다문 채 훼이드리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의 의미를 표 했다. 그리고 천천히 자신의 카드를 들어 자유롭게 섞으며 물었다. "몇 장이죠?" "50장 정도면 적당하겠군. 그리고." 어느새 자신의 카드는 다 뽑았는지 두툼하게 탑을 쌓아놓은 길튼의 입 가에는 기묘한 미소까지 어려있었다. 훼이드리온은 그를 한번 쳐다보았다 가 그 미소를 발견하고는 말없이 자신의 카드를 향해 시선을 내렸다. 결 코 오래보고 있을 수 없는 장면이었기 때문이었다. "한 사람의 생명력이 모두 소멸될 때까지 하기로 하지." 미소의 의미는 이런 것이었나, 라고 그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크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새 대전에 들어갈 모든 준비를 끝마치고 가지 런히 자세를 잡았다. 왠지 굉장히 장기전이 될 것 같은 예감에 커튼에 가 려 보이지 않는 바깥으로 눈을 돌려보는 훼이드리온. 자연스럽게 그의 망 막에 한 얼굴이 투영되었다. '서둘러 돌아갈게.' 다시 길튼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먼저 하시겠습니까?" 아크릴 영주는 기묘한 미소에서 한층 더 깊이 있는 오묘한 미소를 띄우 며 대답했다. "보통, 하수에게 양보하는 법이지." 기분이 팍 상하는 말이었지만, 수긍할 수밖에 없는 말이었기 훼이드리온 은 입을 다물고 든 카드를 손에 쥐었다. 경비대장에게 전해들은 말에 따 르면 아크릴 영주는 카드 마스터였다고 했다. 그렇다면, 지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실력을 가진 건 당연한 것이다. 그는 수긍해야만 현실에 조금은 비참함을 느끼며 카드 두 개를 뽑아들었다. "적기사 카드와 남마법사 카드로 합동 공격." '이야기의 시작' 카드를 사용하지 않은 게이머 중심의 게임 방식으로, 드 디어 훼이드리온의 생명이 걸린 마스터 카드 대전이 시작되었다. 아이는 거칠게 하늘을 울리는 천둥소리에 깜짝 놀라며 눈을 떴다. 잠이 들었던 것일까. 그녀의 눈가에서부터 완만한 곡선이 시작되어 볼을 거쳐 서 눈물자국을 만들고 있었다. 흘러내리는 빗소리 사이로, 그녀는 흐느끼다가 지쳐 잠이 들어버린 것이 었다. 덕분에 부어오르는 눈이 그녀를 더욱 애처롭게 만들었다. 금방이라 도 눈물이 떨어질 듯이 축축이 젖어버린 눈동자를 비가 내리는 창 밖으 로 던지는 아이. 또 훼이드리온의 얼굴이 떠오르고 말았다. '…훼온…….' 처음으로 애칭이 아닌 그의 본명(?)을 중얼거렸다는 것도, 지금의 그녀 로서는 눈치채기 무리였는지도 모른다. 그녀의 시선은 계속 창 밖에 고정되어 있었다.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고 흘러가기만 했다. 훼이드리온은 놀라울 정도의 집중력을 보이며 그 어느 때보다 신중하게, 게임에 임했다. "와이번 카드와 백기사 카드로 태크닉 완성. 비술 드래곤 나이트." 창공의 기사, 드래곤 나이트가 발동되었다. 두 사람의 머리 속에서 동시에 환상이 일어난다. 순식간에 전장의 기운 이 감돌며 지상에 서있던 적기사의 눈이 하늘로 올라간다. 그 순간, 강렬 한 느낌이 적기사의 머리를 때린다. 뇌를 찌르고 들어오는 피할 수 없는 위기. 질풍과 같은 바람이 적기사의 머리 위를 지나는 순간, 적기사의 뒤 를 맡고 있던 두 명의 프리스트들의 비명이 들려온다. 적기사가 몸을 돌 렸을 때, 프리스트들은 가슴에 커다란 혈흔을 남긴 채 바닥에 쓰러져가고 있다. 그러나, 바람은 다시 적기사를 향해 머리를 돌린다. 본능적으로 검 을 들어 공격을 막아보는 적기사. 하지만 역부족이다. 바람은 하얀빛이 되어 적기사의 전신을 훑고 지나가고, 이내 적기사의 몸 곳곳에서 시뻘건 액체가 분출되며 천천히 몸을 기울여져간다. 털썩. 바닥이 붉게 물들었을 때, 바람이 땅 위로 내려앉는다. 뾰족한 뿌리와 같은 입을 가지고, 커다란 날개를 펼친 채 괴성을 내지르 는 와이번 위에 당당하게 검을 들고 서있는 백기사. 전장에 감도는 피의 향기가 한층 더 진해진다. 머리 속에서 펼쳐지는 그림과 같은 세밀한 영상에 훼이드리온은 잠시 취한 듯 감상해보았다. 야드 평원 위에서 아이와 나누었던 대전을 마지막 으로 제대로 잡아보지도 못한 마스터 카드라서, 환상을 보는 기분 또한 새삼 달랐다. 그는 침을 꿀꺽 삼키는 것으로서 긴장감을 조금 완화시켜보 며 내려놓은 백기사 카드와 와이번 카드에서 손을 뗐다. 그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 보였다. "훗." 가벼운 조소가 길튼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카드 마스터로서의 여유일까, 하며 조심스럽게 그를 바라보는 훼이드리온의 눈동자에 천천히 몇 장의 카드를 뽑아내는 아크릴 영주의 모습이 들어왔다. 느릿느릿하게 전혀 긴 장감이 없는 모습. 그가 입을 열었다. "판단력은 괜찮군. 그럼, 이쪽에서도 정식으로 나가볼까." 그는 카드를 뽑아들어 테이블 위에 소리 없이 내려놓았다. 두 개의 푸른 색 카드. 훼이드리온은 드래곤 나이트를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유 있는 그의 모습에서 불안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마스터 카드 중에는, 단순한 조합만으로도 비술을 간단히 상회하는 공 격력을 지닌 카드가 있지. 잘 보게나. '제10대 마스터 카드' 다음 가는 공 격력을 가진 종류의 카드이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내 말을 이었다. "백소환사 카드와 '물의 정령왕 에리피느' 카드. 정령왕을 소환할 수 있 는 백소환사가 물의 정령왕을 소환하여 태초의 힘을 지난 물의 힘을 보 여주지." 순간, 훼이드리온의 머리 속이 새파란 기운으로 가득 차기 시작한다. 그 중앙에 흰색의 로브를 걸치고 소환사들의 상징인 두꺼운 소환서를 들고 있는 백소환사의 모습이 보인다. 백소환사의 손이 천천히 허공으로 들린 다. 그와 함께 새파란 기운이 백소환사의 중심으로 모여들더니, 서서히 회오리의 형상을 만들며 회전하기 시작한다. 점점 거세어진다. 그 중앙에 서 백소환사는 공중으로 손을 든 채, 끊임없이 무슨 말을 중얼거린다. 푸른 기운이 둥근 공의 형태로 모여들더니, 이내 아래위로 길쭉하게 늘 어난다. 새파란 광휘와 함께 푸른색의 공이 어떤 형상을 취해간다. 그것은 푸른색의 여인이었다. 물의 색과도 같은 청아하고 밝은 푸른색의 머리칼과 피부와 눈동자.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태초의 모습 그대로의 신성한 자태에 훼이드리온은 진이 빠져버릴 것 같았다. 너무나 신성한 모 습에 오히려 그는 눌려버리고 만 것이다. 백소환사가 무엇이라고 지시를 내리자, 물의 정령왕 에리피느의 시선이 창공으로 비상 중인 드래곤 나이트에게로 향한다. 신성한 기세에 눌리지 않으려는 듯 기를 쓰며 인상을 구기고 있던 백기사가 와이번을 조종해 그녀를 향해 허공을 질주해 나간다. 두 장의 카드로 이루어지는 비술 중에서도 높은 공격력을 자랑하는 드 래곤 나이트. 하지만, 비술이 아닌, 단순한 조합만으로 이루어지는 백소환 사와 물의 정령왕에게는 이길 수 없다. 정령이란 존재들은 태초부터 이어 지는 자연의 능력을 발휘하는 존재들이기에. 그리고 드래곤 나이트가 상대하는 존재는 그런 정령들의 왕, 정령왕이란 존재인 것이다. "역부족이지." 같이 환상을 즐기고 있던 길튼이 그렇게 말했지만, 훼이드리온이 들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는 이미 마스터 카드의 환상에 빠진 채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으니까. 드래곤 나이트가 허공을 가로지르며 검을 쇄도해 들어간다. 에리피느는 무심한 눈길로 그것을 쳐다보고 있다가, 느린 동작으로 움직이듯이 손을 들어올린다. 어느새 그녀의 주위에는 푸른 기운이 가득 차, 숨이 막힐 것 같은 긴장감을 제공하고 있다. 기운이 폭사된다. 그리고 그것은 거칠게 뿜어져 나가 물의 형태로 변환 되어 드래곤 나이트를 때린다. 엄청난 속력으로 날아온 가공할 파괴력의 공격을 미처 피하지 못한 드래곤 나이트는 쾅, 하는 느낌과 함께 따로 떨 어져 저 멀리 날아가 버린다. 와이번의 괴성, 백기사의 비명이 허공에 울 려 퍼지며, 드래곤 나이트는 소멸된다. 길튼은 훗, 또 다시 조소를 머금었다. 눈앞에 소년은 충격을 받았는지 멍한 눈길을 뒤집어진 자신의 카드로 보내고 있었다. 손수 카드까지 뒤집어주는 선처를 베푼 길튼은 생생한 영상으로 드래곤 나이트를 날려버린 자신의 '물의 정령왕 에리피느' 카드를 내려다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물론,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섬뜩함을 느끼게 만드는 타 락한 미소였다. 그도 한때는 따스한 미소를 가졌던 적이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단 순히 모든 것을 포기하고 순간의 즐거움이라도 찾아보려고 발악하는, 타 락한 한 인간의 불과한 뿐인 것이다. '훗.' 스스로에게 보내는 비웃음. 훼이드리온의 정신이 돌아왔다. "…대단하군요." 솔직한 감상을 토로하는 그에게 아크릴 영주가 슬그머니 화를 돋구었다. "이제 자네가 반격할 차례이지. 하지만, 가능하겠는가?" 대놓고 무시하는 그의 태도에, 훼이드리온은 예상대로 발끈하고 말았다. 하지만 애써 속으로 화를 삭히며 침착함을 잃지 않고 카드를 고르기 시 작했다. 물의 정령왕 에리피느의 공격력은 예상을 초월해버렸다. 드래곤 나이트 가 저렇게 맥없이 깨져버리다니. 그것도 방어도 없는, 순수한 반격만으로 단 한번에 날려버리다니. 훼이드리온은 허망했지만 한눈 팔고 있을 시간 이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아직 카드는 많이 남아있다. 그러니, 서두를 것 없다.' 루비네 마을에서 만난 노인, 숀의 가르침대로 따르는 훼이드리온. 예전 보다 훨씬 승부에 있어서 침착해진 그의 모습에서 그가 많이 성장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고민은 끝날 수가 없었다. 대체 정령왕의 공격력을 넘을 수 있는 공격이 어떤 것이란 말인가. 수치상으로는 따져지지 않는 마스터 카드들의 공격 력은 본능처럼 게이머가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에 맞게 카드를 고르고 조합하여 게임을 해나가는 것이다. 하지만 '물의 정령왕 에리피느' 카드는 대체 공격력이 얼마나 되는 건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너무나 큰 충격을 받으면 오히려 담담해져버리듯, 정령왕의 공격력은 그런 식으로 그를 누른 것이다. 훼이드리온은 쓴맛을 느끼고 말았다. '좋아, 도전이다.' 자신이 알고 있는 가장 강한 공격력을 가진 비술을 펼치기 위해, 훼이드 리온은 하나씩 카드를 뽑아내기 시작했다. 묵직하게 들고 있던 든 카드에 서 하나씩 카드가 빠져나오는 것을 흥미 깊은 눈으로 지켜보던 길튼이 웃든 말든, 그는 조용하게 자신의 생각을 행동으로 이행시켰다. 총 여섯 장의 카드. 모든 붉은 색을 머금은 카드들이었다. "불의 전사 카드와 적기사 카드, 불의 용사 카드와 검성 카드. 그리고 메티 카드, 에립 드로우스 카드 두 장. 불의 속성을 지닌 전사 계열의 유 저 카드들이 마찬가지로 불의 속성을 가진 두 개의 메티의 도움을 받아, 태크닉 완성. 비술 '적기사단' 발동." 거센 화염이 일어난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새 전장에 나타난 불의 혈기 를 가진 네 명의 전사들 주위로 넘실거린다. 붉게 타오르는 검을 든 검성 과 용사. 붉은 갑옷과 어우러진 불꽃과 불의 검은 그들의 기세를 한층 더 돋군다. 뜨거움이 이루어진 공간. 한순간, 잠시 간의 정적 속에서 그들의 몸이 앞으로 폭사된다. 불길이 따라붙는 공간 속에서 물의 정령왕 에리피 느도 기분이 나쁜지 표정을 구긴다. 물은 불의 반대되는 속성. 그녀는 무엇보다 불에 약했다. 하지만, 길튼의 미소는 지워지지 않았다. "부족해." 실내 어딘가의 어둠 속에서 긴장감이 흐르는 대전을 지켜보고 있던 소 년은 아크릴 영주가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적기사단 으로 에리피느를 상대하는 것은 부족하다는 것인가. 소년도 정령왕 카드에 대해서는 그렇게 아는 것이 없었다. 얼마 되지 않 는 카드라는 것만을 알 뿐, 그 정확한 공격력이나 방어력도 밝혀진 바가 극히 드물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신기한 건, 아크릴 영주가 그 정령왕 카드 중 하나인, 물의 정령왕 에리피느 카드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었 다. '대체.' 마치 뭔가를 바라는 듯이 훼이드리온을 궁지로 몰아가는 사태에 한편으 로 이상함을, 한편으로 재미를 느끼며 소년은 다시 게임에 집중했다. 불길이 치솟으며 물의 정령왕을 공격해 들어간다. 검성이 휘두르는 검에 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기운이 불꽃을 타고 허공을 꿰뚫는다. 자신감이 가득 깃 든 검이 휘두르는 적기사단 모두의 혈기는 불 같이 뒤끓는다. 에리피느는 거세게 자신을 향해 돌진해 들어오는 네 명의 전사를 보면 서도 전혀 동요하지 않는다. 마치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이. 지그시 눈동자를 굴리던 그녀가 다시 손을 든다. 물 흐르듯이 유유자적한 움직임. 검성이 뿜어낸 붉은 기운이 가장 먼저 그녀를 향해 날아 들어온 다. '됐다!' 환상을 체험하며 훼이드리온은 소리쳤다. 통할 지도 모른다, 라고 생각 하는 순간. 퉁. 에리피느의 주위에 푸르스름한 막에 불길이 가로막혀 그녀에게는 조금 도 영향을 주지 못한 채 사라지고 만다. 어느새 정령의 힘으로 방어벽을 친 그녀는 백소환사와 자신을 같이 보호하며 적기사단 전체를 노려본다. 다시 그녀의 손에서 푸른 기운이 폭사된다. 훼이드리온은 잊고 있었던 것이다. 물의 속성을 지닌 카드들은 다른 카 드들보다 월등히 방어력이 높다는 사실을. 한마디로 그녀에게 치명상을 입히려면 저 강력한 방어막부터 부셔야하는 것이다. 그는 절망을 느꼈다. 이대로 간다면 승률은커녕, 목숨까지 위험한 판국 이 되어버릴 것이다. 에리피느의 힘에 모두 당해버린 적기사단 전체의 카드는 모두 뒤집혀버 렸다. 비술 적기사단의 소멸. 그것은 훼이드리온의 생명의 마지막을 암시 라도 하듯 그의 가슴 한구석을 후벼 파버렸다. '졌다. 졌다. 져버렸다. 실력의 차이가 너무 난다. 이것이 카드 마스터인 가!' 자책감과 함께 밀려드는 자기 혐오감. 일생일대의 위기를 느끼며 그가 고개가 땅으로 낙하할 듯이 숙여진다. 길튼은 여전히 조소를 머금은 채로 쓰디쓴 침을 삼켰다. 눈앞의 소년의 모습이 이상하게 그의 마음을 아리게 만들고 있었다. '안 되는가. 무리였던가.' 그것은 무척이나 안타까운 외침이었다. 그는 마음 속으로만 되뇌는 그 말을 더욱 깊게 곱씹으며 눈빛을 지워버렸다. 다시 공허한 상태로 돌아온 어두운 눈동자. 잠시나마 걸었던 기대가 사라진 지금, 더 이상 저 소년에 게는 볼 일이 없었다. 그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다시 잔인해지기로 했다. "자비란, 없네." 지금 상황에서는 더없이 잔인한 말을 내뱉으며 그는 네 장의 카드를 꺼 내들었다. 와이번 카드 두 장과 바람의 용사 카드 두 장. "비술 드래곤 나이트. 페어." 또 다시 환상이 둘의 머리 속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물의 정령왕 에리피느가 신성한 자태와 함께 천천히 몸을 앞으로 움직 이고 있을 때, 그녀의 뒤편에서 괴기한 소리가 들려온다. 두 마리의 와이 번이 내지르는 비명 아닌 비명. 드래곤 나이트 둘의 출현이다. 백소환사 와 에리피느를 호위하듯 창공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며 적진을 향해 천천 히 나아가는 모습이 마치 적의 실력을 얕잡아보며 놀리는 모습 같이 보 인다. 훼이드리온은 참혹하게 마음이 쓰라림을 느꼈다. 절망에 다시 절망이 겹 치는 모습. 일말의 인정도 없이, 저 아크릴 영주는 드래곤 나이트 페어까 지 발동시켜 자신을 압박해 들어오고 있었다. 더 이상 어떻게 할 방도가 없었다. 든 카드, 아니, 내린 카드 중에서 하나를 뽑아내더라도 이제는 무 리다. 이대로 죽는가. 이대로 생명을 잃어버리는가. 지금 이곳이 마지막 자리 인가. 머리 속을 가득히 채우는 두려운 환영들이 질릴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그가 든 카드를 손에서 내렸다. 자포자기. 절망은 더없이 그를 뒤흔들고 있었다. 그는, 차라리 눈을 감아버리는 것이 나을 듯해 그렇게 했다. 천천히 손을 움직여 내린 카드를 하나 집어들었다. 그저 그런, 기대조차 들어있지 않은 죽어버린 움직임으로 들어올린 카드를 얼굴 앞으로 가지 고 왔다. 이 카드가 무엇이든지 간에, 이 사태를 타개할 수는 없을 것이 다. 하지만. 하지만. '기대를 버릴 수는 없어.' 아크릴 영주의 비웃음 속에서, 뮤트리드의 무표정한 시선 속에서, 소년 의 기대 어린 눈길 속에서, 그 가운데에서 훼이드리온은 천천히 카드의 그림이 보이도록 돌렸다. 은빛 막. 어느새 익숙해진 감각이 일깨워진다. 그의 표정이 눈에 띄게 환해져갔다. 자신의 손에 들린, 방금 내린 카드 중에서 뽑은 그 카드가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그는 여관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아이를 생각했다. 행운의 증표까지 자신에게 건네주며 안타깝게 자신을 보냈던 그녀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 녀에게 깊이 감사했다. 그녀의 마음, 그녀의 걱정, 그녀의 모든 것이, 지 금 이 순간 그는 모두 느낄 수 있었다. "고마워……." 그는 어딘지 모르게 마음 속에 응어리진 것이 사라졌다고 생각하며 조 심스럽게 "고마워."라는 말을 입에 담았다. 그리고 상체를 펴며 카드를 두 손에 들었다. 달과 운명의 여신 하실루스가 벌인 운명의 장난. 그것은 기적이었다. ------------------------------------------------------------------ 헤에, 42편입니다. 이제 드디어. 4장이, 2권 분량도 한편이 남은 것이군요. 훼이가 든 카드가 무엇인지, 다 눈치채셨죠?(^^^) 핫핫핫. 오랜만의 마스터 카드 대전이라,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이거, 앞으로 대전 이 많이 남았는데... 힘들어요, 힘들어.(어쩌다가 이런 글을...) 축전을 보내주세요.라고 했는데, 아무도 보내주지 않으시네요... 인기가 없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이다지도 없었을 줄이야...(ㅠㅠㅠ) 뭐, 아직 시간은 많으니, 천천히 보내주시기를.(^^^) 자아, 그럼 팀군은.; 학교에 가기 위해 자러 가겠습니다.;; 현재 시각 새벽 3시 40분.; 컬럭.; 제대로 일어날지 의문이군요.;; 하암, 그럼. 꾸벅.(___) 어둠의 기사 DARK KNIGHT TEAM... P.S 추천 감상 비평 받습니다아아아. P.S 2 연재를 느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핫핫.;; 번 호 : 45 / 45 등록일 : 2000년 10월 21일 21:19 등록자 : 암음기사 조 회 : 18 건 제 목 : [카드 게임 판타지]『카드 마스터(Card Master)』#043 카드 게임 판타지(Card Game Fantasy) 카드 마스터(Card Master) 43. "……." 시간은 그녀가 알아차리지도 못하게 빨리 흘러갔지만, 그녀의 상태는 전 혀 호전되지 않고 있었다. 멍함. 허함. 공허함. 어쩌면 아무 것도 생각하 지 않으려는 듯이,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 작정을 한 사람처럼 보이기까지 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가슴 깊은 애절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저녁. 피아는 아이가 내려오지 않자 그녀가 걱정되어 방으로 올라왔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녀는 침대 위에 우두커니 앉아서 세상과는 너무나 도 동떨어졌다고 생각될 만큼 허전한 모습으로 창 밖으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피아는 생각했다. '이 정도였나?' 정작 당사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피아는 직감적으로 상황을 파악했다. '…결국 가버린 건가.' 우연찮게도 아이가 쳐다보고 있던 방향이 영주의 저택이 있는 곳과 비 슷해서 아리송한 마음으로 고개를 갸웃거려본 피아는 조용히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자신이 도와줄 것은 없었다.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그녀, 아니 그 둘의 문제일 테니까 말이다. 다만, 속으로 작게 응원을 해줄 뿐. '잘 될 거야.' 언젠가, 피아가 파커슨을 떠올리고 울어버렸을 때, 그녀를 위로해주며 아이가 입에 담았던 말이었다. 어쩐지 자신이 그런 말을 하니 신빙성이 많이 떨어진다고 느끼며, 피아는 머리를 긁적여버렸다. 그녀가 다녀간 지도 이미 한나절만큼의 시간이 흘렀던 시점이었다. 훼이 드리온이 아이의 곁을 잠시 떠난 지 하루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구름 때 문에 날의 밝기가 제대로 판별이 되지 않는다 뿐이지, 시간이 얼마나 되 었는지는 충분히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아이는 눈가를 슬그머니 훔쳤다. 눈물은 이미 말라버려 더 이상 나올 기 미조차 보이지 않았지만, 의식적인 행동일 뿐이었다. 그녀는 언제부턴가 초점을 잃어버린 눈동자로 지그시 창 밖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흐리멍텅하게 비어만 있던 그녀의 눈동자에 차츰차츰 빛이 돌아온 건, 빗소리가 점점 약해져갈 때였다. 한번 반짝 빛이 돌아오자 그것을 기폭제 로 사용하여 완벽하게 초점을 되찾은 그녀의 눈동자는 어떤 의욕에 잔뜩 불타오를 준비를 하고 있는 듯해 보였다. 그녀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진지해 보이는 그녀의 표정. 무엇인가 를 결심한 듯이 앙다문 입술. 그녀는 두 주먹 불끈 쥐고 무엇인가를 선언 하듯 비장하게 입을 열었다. "찾아가 보자." 이미 결심한 일에 결코 머뭇거림은 있을 수 없다. 아이는 얼굴을 한번 쓸어내려 피로함을 지워버리고 문밖, 복도로 뛰어나갔다. 뭔가, 위에서 쿠당탕거리는 소음이 들려와서 막 잠을 깨고 피곤한 얼굴 로 카운터로 나오던 중이던 피아가 '어느 예절 없는 사람이 이른 아침부 터 저렇게 소란이야?'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계단 쪽으로 돌렸다가, 놀란 표정을 짓고 말았다. "아이?" 어제 저녁때까지만 해도 죽기 직전의 모습을 하고 있던 그녀가 무슨 일 인지 힘차게(?) 움직이며 달려 내려오는 것이다. 놀란 얼굴로 그녀를 부 르는 피아. 그녀가 피아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한마디 던졌다. "영주의 저택으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해?" 피아의 표정을 두말할 거 없이 구겨졌다. "이번에 너야?" 그 금발의 미소년이 겁도 없이 기어코 영주를 찾아간 것도 황당한데, 이 번에는 아이까지 이런 말을 하다니. 피아는 뭐라고 말해주려고 숨을 쉬었 다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말리지마." 아이는 그녀가 뭐라고 말을 하기도 전에 입을 막아버렸다. 그리고 잠시 틈을 준 상태에서 다음 말을 이었다. "난 갈 거야." 검게 빛나는 눈동자. 검지만 너무나 깨끗하고 밝게 빛나는 그 눈동자에 서, 피아는 아이의 동행에게서 느꼈던 그 '의지'를 똑같이 느끼고 말았다. '닮았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그녀는, 아이의 동행에 이어 이번에도 자신 의 힘으로는 그녀를 말릴 수 없다는 사실도 수긍하고 말았다. "…뭘 하려는 거지?" 아크릴 영주는 깊은 한숨과 함께 훼이드리온이 내민 카드를 내려다보았 다. 은빛의 실크가 쳐져있는 듯이 신비로운 분위기의 카드. 카드 마스터 의 칭호를 얻기 전, 그리고 얻은 후를 통틀어서도 처음 보는 카드였다. 어느 마법사가 새롭게 만들어낸 카드인가, 하고도 생각해봤지만, 보통 새 로운 카드가 만들어지면 마법사 길드에 신고하여 널리 알려지기 때문에, 그런 사례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저 카드는 무엇인가. 어떤 능력을 가진 카드인가. 그는 고개를 들어 이상하게도 평정을 유지하면서 살짝 미소까지 곁들이 고 있는 훼이드리온을 불안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저 여유 섞인 웃음. 맘 에 들지 않았다. "뭘 하려는 거지?" 똑같은 물음을 다시 내뱉는 중에도 머리 속에는 아직 에리피느와 드래 곤 나이트 페어가 기세 등등하게 전진을 계속하고 있었다. 저런 카드 하 나로 막을 수 있을 만큼 만만한 공격력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소년은 웃고만 있었다.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는 듯이 말이다. 불안했다. 한편으로는 뿌듯하기도 했다. 그러나 또한 두려웠다. 지금까지 버텨왔던 모든 것이 모두 쓰러져버리는 것은 아닌지, 무너져버 리는 것은 아닌지, 불안하고 두려웠고, 동시에 뿌득했던 것이다. 이상한 감정.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그런 요상한 감정 속에서 아크릴 여 주는 세 번째로 똑같은 질문을 입에 담았다. "뭘 하려는 거지?" 그의 동요를 즐기기라도 하듯이 미소지은 채 침묵하고 있던 훼이드리온 이 카드를 집어서 둘의 시선이 교차하는 부근까지 들어올리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수정거울 카드. 저도 얼마 전에 얻은 거라서,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 지는 모릅니다." 길튼의 표정이 황당하게 구겨진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그는 상관하지 않고 여전히 미소를 지우지 않고 설명을 이었다. "그러나, 그런 건 별로 문제가 되지 않겠지요. 조금 전에." 푸른 눈동자. 아크릴 영주의 맘에 들었던 그 눈동자가 다시 빛나고 있었 다. "능력을 알아버렸거든요. 갑니다. 수정거울 카드로 방어." 환상이 다시 일어난다. 게이머들만이 느낄 수 있는 그 전장의 현장에서 에리피느와 드래곤 나이트 페어가 드디어 공격을 감행한다. 에리피느가 백소환사의 명대로 하늘로 날아오르더니, 직접 물로 화하여 지상으로 내 려 꽂혀간다. 그 주위를 빙글빙글 돌면서 드래곤 나이트 페어도 거세게 돌진하기 시작한다. 그 순간, 허공에 은빛의 기운이 흐르기 시작한다. 공기를 타고, 바람을 타고, 공간을 유영하듯 흐르던 은빛의 기운은 투명한 막을 형성하며 한 지점에 모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순간, 화악 주위로 확산되 더니 거대한 거울을 만들어버린다. 당황하는 에리피느와 드래곤 나이트 페어. 그 거울에는 그들과 똑같이 생긴 존재들이 보인다. 또 하나의 드래 곤 나이트 페어와 물의 정령왕 에리피느. "시작입니다, 이제." 갑자기 은빛의 수정거울이 번쩍이더니, 거울 속에 비치던 에리피느와 드 래곤 나이트 페어가 튀어나온다. 거짓이 아닌 실재. 또 하나의 물의 정령 왕 에리피느와 또 하나의 드래곤 나이트 페어가 나타난 것이다. 그것들은 공격해 들어오던 적의 모습을 그대로 따라하며 돌진하기 시작 한다. 적이 오른쪽으로 움직이면 그들은 왼쪽으로, 아래로 내려가면 따라 서 아래로 내려간다. 마치, 거울 속의 움직임처럼 말이다. 점점 거리를 가까워진다. 본래의 에리피느와 드래곤 나이트 페어는 당황 하며 다가오는 복제들을 피하려고 하지만, 피할 수 없다. 복제들은 그야 말로 거울 그 자체이니까. 급속도로 가까워지는 그들의 거리. 발버둥을 치지만, 소멸되지 않기 위 해 본능적으로 발악을 해보지만, 피할 수 없다. 결국 그들은 서로 부딪힌 다. 귀를 울리는 굉음과 천지를 뒤집어 엎어버릴 듯한 충격이 거세게 전 장에 휘몰아친다. 뿜어져 나오는 푸른 기운과, 흔적조차 남지 않을 드래 곤 나이트 페어. '이, 이것이란 말인가!' 카드 마스터라는 칭호를 가진 이후로 자주 접해보지 못한 긴장과 두려 움을, 아크릴 영주는 지금 느끼고 있었다. 수정거울 카드라는 것이 이다 지도 엄청난 위력을 가진 카드였다니. 상상도 하지 못한 결과에 그는 식 은땀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물의 정령왕 에리피느와 드래곤 나이트 페어는 소멸하고, 모든 카드는 뒤집어졌다. 허무하게 사라져버리는 카드들을 생각하며 길튼은 이마를 손으로 짚었 다. 깊은 탄식을 담은 한숨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이런 반전이 있다니. 수정거울 카드의 능력은 절대 방어… 였던가.' 절대적인 방어능력. 수정거울 카드는 모든 공격을 막아낼 수 있는, 그런 경이적인 능력을 가진 카드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훼이드리온의 미소는 아직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남았습니다." 의미심장한 훼이드리온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머리 속을 차지하고 있던 환상이 또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푸른 기운이 걷히고, 먼지구름과 굉음 또한 지워지자 모든 것이 끝난 듯 이 보인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다. 언뜻언뜻 보이는 어떤 존재들이 끝이 아님을 암시해준다. 물의 정령왕 에리피느와 드래곤 나이트 페어의 복제. 수정거울 속에서 튀어나온 그 복제들은 소멸되지 않고 남아있다. 그리고 그것이 뜻하는 것 은. 훼이드리온이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수정거울 카드를 손으로 짚으며 여 유가 담긴 눈빛으로 웃어 보였다. 그가 말했다. "수정거울 카드의 능력은 방어가 아닌, 공격력을 그대로 반사시키는 것 입니다. 한마디로, 방어임에도 불구하고 반격의 능력까지 갖추었다는 것 이죠. 자, 갑니다." 훼이드리온을 궁지로 몰아넣었던 물의 정령왕 에리피느 카드와 드래곤 나이트 페어 카드. 하지만 이번엔 똑같은 능력을 실은 그 복제들이 아크 릴 영주를 압박하고 있었다. 그리고, 길튼에게는 방어할 기회조차 있지 않았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훼이드리온의 '방어'에 추가되는 특별한 능력 이었으니까. 에리피느와 드래곤 나이트 페어가 거세게 적진을 향해 돌진한다. 그리 고, 그들의 공격을 막을 존재는 전장에 남아있지 않다. 카드 마스터 길튼, 그는 자체 생명력에 결코 회복될 수 없을 만큼의 피 해를 입고 만 것이다. "제, 제길……." 신음을 동반한 아크릴 영주의 목소리. 욕지기를 내뱉으며 고통을 참아내 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훼이드리온은 통렬함과 상쾌함, 동시에 불쌍함도 느꼈다. 하지만 마스터 카드의 세계는 냉정한 법. 모든 것이 실력으로 판 가름나는 것이기 때문에 자비의 마음을 가질 필요는 그는 생각했다. '이제 마지막이다.' 이번 공격이 끝이었다. 아크릴 영주는 게임에서 졌으니 자신의 요구를 들어줘야 하고, 그는 게임에서 이겼으니 목숨을 건진 것이다. 마스터 카 드는 신의의 게임. 약속을 저버린 자는 게이머로서의 가치를 잃어버리게 된다. 훼이드리온은 가볍게 몇 장의 카드를 뽑아내어 바닥에 하나씩, 천천히 내려놓았다. "불의 용사와 남마법사. 프리스트와 풍정령사가 만나서 태크닉 완성. 비 술 드래곤 슬레이어." 많이 사용되는 비술 중에 하나인 드래곤 슬레이어가 발동되자, 길튼이 가지고 있던 모든 생명력이 소멸되어버렸다. 극의 극에 달하는 반전을 남 기고, 훼이드리온의 생명을 건 대전은 그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어둠 속에 있던 소년이 훗, 하는 웃음과 함께 그곳에서 사라지고, 조심 스럽게 들어온 부하에게 어떤 말을 듣고 밖으로 나간 뮤트리드가 문을 닫는 소리가 들려올 때까지, 길튼과 훼이드리온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길튼은 굉장히 괴로운 자세로 테이블을 내려다보며 얼굴을 손으 로 가지고 있었고, 훼이드리온은 멀뚱히 창 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커튼이 가리고 있었지만, 분명히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빗소리도 그친 것 같이 바깥은 조용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수정거울 카드를 들어올려 얼굴 앞으로 들고 왔다. 은 빛 막은 여전히 카드를 감싸고 있었다. 그는 그 누구라도 보았다면, 한눈 에 반했을 법한 멋진 미소를 띄우며 천천히 카드를 입술에 가져갔다. 연인에게 키스라도 하듯, 그는 카드에 입을 맞추었다. '고마워, 아이.' 수정거울 카드의 원 주인에게 속으로 진심을 담은 감사를 표한 훼이드 리온은 여전히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카드를 내리고, 이제 아크릴 영주 쪽 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는 굉장히 괴롭다는 표현을 온몸으로 뿜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약속은 약속이었기에, 훼이드리온은 그에게 말했다. "약속을 지키십시오. 분명히 제 요구를 들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마을 주민들에게 사과하시고, 그들의 말을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마스터 카드를 챙겨서 주머니에 넣고 허리춤에 묶을 때까지 길튼은 아 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훼이드리온은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단호한 어조 로 강하게 경고했다. "당신은 나에게 졌습니다. 마스터 카드가 신의의 게임이라는 것은 잘 알 고 계시겠지요. 그러니, 약속을 꼭 지키십시오." 카드 마스터의 칭호를 가지고 어떻게 마스터 카드의 율을 어길 수 있을 까. 훼이드리온은 비록 비겁하게 보이는 그였지만, 꼭 약속을 지킬 것이 라고 믿으며 문을 나서려했다. 그때, 탁한 아크릴 영주의 목소리가 그의 귀속으로 날아 들어왔다. "…갈 수 없다." 훼이드리온은 우뚝 멈춰선 채 그 말에 반문했다. "무슨 뜻이죠?" "보낼 수 없다는 말이다. 훗, 이렇게 날 모욕해놓고 그냥 가려고 했나?" 조소, 비겁함. 그리고 치사함. 훼이드리온은 가슴 속에서 꿈틀거리는 경 멸이란 감정 때문에 숨쉬기도 곤란할 지경이 될 것 같았다. 아크릴 영주, 그는 근본부터 삐뚤어져있었다. "…비겁하군요. 약속을 했으면서." "약속? 훗, 그런 건 개나 주라고 해. 상관없어. 나에겐…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으니." 길튼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문 앞에 서있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소 년의 얼굴에는 기묘한 의문이 떠올라있었다. "…물러날 곳?" "큭. 그래, 물러날 곳. 네 녀석 같은 자식이 뭘 알겠느냐? 놀고 먹는 여 행자 주제에 뭘 알겠느냐는 말이다!" 분노를 담은 노성이 그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조금이라도 겁이 많은 사 람이 들었다면 바로 주저앉아 오줌을 지려버렸을, 그런 목소리. 하지만 훼이드리온은 그 목소리 안에서 평소였다면 눈치채지 못했을 감정을 알 아차렸다. 마스터 카드 대전을 한 바로 직후라, 감각들이 예민해졌기 때 문일까. 씩씩대는 아크릴 영주를 향해, 훼이드리온은 서두르지 않고 느릿하게 입 을 열었다. "…무엇이 당신을 그렇게 궁지로 몰고 가는 거죠?" "……!" "대체 무슨 일입니까? 갑자기 바뀐, 당신의 평판에 관련된 이야기입니 까?" 불끈 크게 떠진 두 눈동자를 진정시키지 못하고 길튼을 할 말을 잃어버 렸다. 소년은 마지막으로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무엇이 당신을 변하게 한 거죠?" 결론적으로, 단도직입적이며 논점을 정확하게 파고드는 질문이었다. 질 문한 자신조차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 말로 바로 나오고 있다는 사실에 훼이드리온은 놀랄 뿐이었다. 그러나 애써 냉정하게 표정을 유지 하며 아크릴 영주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길튼은 고개를 떨구었다. 무엇이 자신을 변하게 했는가. 무엇이 자신을 이렇게 궁지로 몰고 간 것인가. 그 해답은 알고 있었다. 알고 있지만, 밝 힐 수는 없었다. 결코 밝힐 수 없었다. 2년 동안… 2년 동안 지내왔던 그 모든 시간들이 사라져버리는 순간이 바로 그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것이 두려웠다. 결국 그는 혼란을 느끼며 자리에 다시 털썩 주저 앉았다. 머리 속에 각인되어진 두 개의 푸른 눈동자. 더렵혀지지 않은 순수한 눈 빛을 담은 두 개의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그것조차 고 통스러웠다. 훼이드리온은 느껴지는 바가 있어, 천천히 생각을 곱씹었다. 그는 밝히 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분명히 그랬다. 저렇게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그런 이유인 것이 정확했다. 그렇기 때문에, 더 이상 그를 괴롭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냉정함을 지우고, 따뜻하게 말하기로 작정하고 입을 열었다. 아크 릴 영주, 그도 한 명의 나약한 인간이란 생각이 들었다. "방금… 마스터 카드 대전을 기억해보세요. 전 당신의 실력에 밀려 완전 히 궁지에 몰렸죠.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다는 생각에 스스로 절망해버렸 습니다. 그렇지만, 희망을 버리지는 않았죠. 전 결국 이겼습니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시겠어요?" 아크릴 영주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지만, 그는 남은 말을 이었다. "당신에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말 은 해줄 수 있지요." "……." "희망을 버리지 마세요. 분명히, 절대 희망은 찾아옵니다. 당신 자신이 포기하지 않는 이상, 말이죠. 절망으로 가득하더라도 다른 길로 빠지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더욱 자신을 망가뜨려 버리는 결과를 가지고 오니까요. 지금 당신의 모습처럼." 한숨과 함께 말을 끝낸 훼이드리온은, 더 이상 할말이 남아있지 않자 문 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뭔가 후련함이 느껴지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아 크릴 영주가 걱정되기도 했다. 과연 자신이 제대로 말을 한 것인가, 실수 를 해서 오히려 화를 돋구어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머리 속을 날 아다녔지만, 이상하게 기분은 상쾌했다. 그리고 몸 상태 또한 어느 때보 다 좋은 것 같았다. 하루를 새어버린 거나 마찬가지임에도 불구하고 말이 다. 방안은 조용했기에, 훼이드리온은 금방 걱정을 떨쳐버리고 움직이기 시 작했다. 우선 빼앗긴 칼을 찾아야했기 때문에, 그 미청년 경비대장을 찾 아야했다. 아까 전에 나갔는데,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저택 밖으로 일단 나와본 그의 눈에 익숙한 얼굴 이 목격되었다. "…아이?" 윤기가 흐르는 너무나 아름다운 검은 머리카락. 검게 빛나는 두 눈동자. 그리고 아름다움, 그 자체인 외모. 어느 모로 보나, 그것은 아이였다. "…팀?" 아이 쪽에서도 저택의 문을 열고 나오는 훼이드리온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순간 터져 오르려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또 다시 울어버 린 그녀는 서둘러 그의 곁으로 달려갔다. '밤새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 겠지? 아무 일 없는 거겠지?'하는 생각이 그녀를 더욱 재촉했다. "티, 팀! 괜찮은 거야?" 걱정이 가득 담긴 얼굴로 달려온 아이가 서둘러 묻자, 훼이드리온은 그 녀의 눈가에 고인 눈물을 손으로 훔쳐주며 따뜻하게 웃었다. "응, 괜찮아. 걱정했어?" 아이의 표정은 또 다시 울상이 되어버렸다. 울먹이는 그녀의 음성. 훼이 드리온은 더 이상 그녀에 대한 감정을 거부하지 않기로 마음먹었기에 그 모습이 너무나 예뻐 보였다. "당연하잖아… 흑, 얼마나 걱정했다고……." 다시 울어버리려는 그녀를 달래며 훼이드리온이 즐겁게 웃었다. 그녀의 두 눈이 붉게 충혈 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밤새 많이 울었던 것 같았다. 그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위로하다가, 천천히 자신의 품으로 그녀 를 끌어안았다. 따스했다. 밤새 느꼈던 긴장이나 피로를 모두 풀어버릴 듯이 그 따스함 이 온몸으로 스며드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이도 갑작스런 포옹에 놀란 탓에 눈물을 멈추고 경직되어 굳어버렸다. 작은 숨소리만을 내는 그녀를 느끼며 훼이드리온은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미안해, 걱정하게 해서." "…아, 아니야……." "그리고, 고마워." "…뭐가?" 아이를 안은 훼이드리온의 두 팔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그냥 여러 가지로." 따뜻함. 복잡했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 너무 편안해졌다. 그 리고 온몸에 가득한 따뜻함이 그를 너무나 행복하게 만들고 있었다. '내 옆에 있다, 아이가. 아이의 곁으로 다시 돌아왔다. 다시… 다시 돌아 온 거야, 난.' 그 사실에 그렇게 안도를 해버리는 그였다. 조금 더 지속된 포옹 끝에 훼이드리온이 팔을 풀었다. 아이는 조금 달라 오른 얼굴을 감싸쥐고 그에게서 물러나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은 여타 다른 소녀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모습이라, 훼이드리온으 또 다시 웃 을 수 있었다. "나와있었군." 귀에 익은 목소리에 훼이드리온은 고개를 돌렸다. 아이가 걸어온 방향에 서 뮤트리드가 다가오고 있었다. 아이를 저택 내로 들여 보내주고, 보관 하고 있던 칼을 가지고 오던 차에 그들을 발견했던 것이다. "아, 그것은?" 뮤트리드는 손에 들고 있던 붉은 검집의 칼을 훼이드리온에게 내밀었다. "당연히, 너의 검이다." 칼을 받아든 훼이드리온은 잠시 손으로 그것을 쓸어보다가, 곧 허리춤에 묶었다. 물론 고맙다는 인사도 빼놓지 않았다. "영주님은?" 뮤트리드는 주군의 안위가 걱정되어 서둘러 그에게 물었다. 그는 잠시 저택을 올려다보다가 싱긋 웃어버리고는 대답했다. "가보세요. 결과가 어떤지는… 저도 잘 모르겠네요." 마지막 말에 잠시 의아함을 띄워보던 뮤트리드는 곧 둘에게 인사를 하 고 저택으로 뛰어들어가 버렸다. 훼이드리온은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주 군에게 충성하는 기사의 모습의 전형을 보는 것 같아 매우 흡족한 기분 이 되었다가, 곧 고개를 아이 쪽으로 돌렸다. 멀뚱히 서있던 그녀는 갑자 기 그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움찔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참." 훼이드리온은 문득 생각나는 사실에 서둘러 갈색주머니를 뒤져서 카드 한 장을 꺼냈다. 바로, 그녀가 그에게 행운의 증표로 준 수정거울 카드였 다. "이거." "……아." 아직까지 포옹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아이는 그가 내미는 카드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때, 때마침 구 름을 뚫고 햇빛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축축하게 젖은 땅위에 내리쬐는 깨끗한 마스트의 눈빛. 축복을 받은 그 따뜻함이 그들 위로 내려앉자 수정거울 카드는 더욱 은빛을 발했다. 훼이드리온은 미소를 지으며 카드를 내밀었다. "고마워, 다 이것 때문이야." 마스트의 눈길을 받으며 미소짓는 훼이드리온의 모습. 아이는 그 순간, 두근거리는 마음이 깨끗하게 사라짐을 느꼈다. 이 소년을 거부할 수 없 다. 이 소년을 향한 마음을 돌이킬 수 없다. 그녀는 이상하게 편안해지는 마음을 느끼며 그 카드를 두 손에 받아들었다. "…고마워." 그가 웃었고, 그녀도 웃었다. 촉촉하게 젖은 공간 속에서 아침 햇살의 축복을 받으며 만들어낸 그들의 미소는,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다웠고, 또 아름다웠다. 몸을 돌리며 훼이드리온이 경쾌하게 말했다. "아이, 혹시 피곤해?" "응? 왜?" "여행 일정이 너무 늦어버렸잖아. 오늘 내로, 다음 마을까지 가야할 것 같아서 말이야." "그래?" 되묻는 그녀를 뒤돌아보며 그가 다시 한번 묻는다. "괜찮겠어?" 대답은 이미 정해져있었다. 아이는 한껏 미소를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응, 훼온." 달과 운명의 여신 하실루스의 장난은, 이로서 서서히 끝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새로운 시작이 그들 앞에 다가왔다. <4장 '위기' 完> -------------------------------------------------------------------- ...네에, 끝났습니다.(>..<) 오늘 잡담은 짧게 하겠습니다. 46편을 기다려주세요.(^^^) 꾸벅.(___) 어둠의 기사 DARK KNIGHT TEAM... P.S 추천 감상 비평. 받습니다, 받아요.(>.<) 번 호 : 48 / 48 등록일 : 2000년 10월 27일 23:34 등록자 : 암음기사 조 회 : 16 건 제 목 : [카드 게임 판타지]『카드 마스터(Card Master)』#046 카드 게임 판타지(Card Game Fantasy) 카드 마스터(Card Master) 46. 소년은 슬슬 갈 시간이 되었다고 생각 중이었다. 날이 밝아온다면 이렇 게 숨어있는 것도 힘들 터이고, 또 오늘 내로 수도까지 갔다와서 다시 훼 이드리온의 뒤를 쫓아야하기 때문에 이렇게 여유를 부리며 개기고 있을 시간은 아니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어버린 것이다. 인생의 연륜으로 보나, 마스터 카드의 연륜으로 보나 게임이 될 것 같지 않은 두 사람의 마스터 카드 대전은 점점 약해 보이는 금발의 미소년 쪽 으로 승세가 기울어지고 있었다. 모두 다 저 소년이 가지고 있던 수정거 울 카드 때문이었다. 그 한 장이, 완벽하게 승세를 바꿔서 아크릴 영주에 게는 크나큰 패배감을, 소년에게는 생명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깨닫는 기 회를 준 것이다. 소년은 그 카드의 정체를 대충 알고 있었다. 수정거울 카드라고 불리는 그 카드는 절대 방어력을 지니고 있어 어떠한 공격력이든, 설사 그것이 마스터 카드 중에서 최강의 카드라고 일컬어지는 '10대 마스터 카드'의 공격이라고 해도 완벽하게 방어하여, 시전자에게 그대로 공격력을 돌려준 다. 절대 방어, '공격 반사'의 능력이 바로 그 카드에 실려있는 것이다. 저런 종류의 희귀한 카드로는 '정령왕 카드'라든지 '대소환사 카드', 그리 고 '10대 마스터 카드' 등이 있는데, 이것들은 대륙을 온통 뒤지고 다녀도 둘이 찾아질까 말까할 정도의 희귀성을 자랑한다. 특히, 대마도사 페인트 라시엔트가 가장 최초로 만든 카드라고 알려져 있는 '10대 마스터 카드' 는 10장 모두가 대륙에 단 하나 뿐이고,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 을 지경이어서 게이머들 사이에는 전설의 카드로 통하고 있는 실정이다. 대소환사 카드 또한 같은 길을 걷고 있었고, 그나마 정령왕 카드가 흔한 (?) 종류였다. 수정거울 카드는 그가 어렸을 때, 정말 기억도 희미할 정도로 어렸을 때 한번은 본 적이 있어서 기억하고 있었다. 어떤 여성 게이머가 들고 있었 는데, 그녀가 펼치는 마스터 카드를 목격한 것이 소년이 최초로 마스터 카드를 접한 일이었다. 아무튼 소년은 추억 어린 수정거울 카드를 들고 반격에 나서는 훼이드 리온의 모습을 보면서 침을 꿀꺽 삼켰다. '이겼군.' 속으로 중얼거리며 우연히 돌린 소년의 검은 눈이 커튼 사이로 옅은 빛 이 새어져 들어오는 것을 발견했다. 날씨가 개이면서 점점 아침이 밝아오 고 있다는 것은 직감적으로 알아챌 수 있었다. 암살자란 직업에게 태양은 그렇게 친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소년은 절망하고 있는 아크릴 영주를 향해 시선을 한번 던졌다가 바깥으로 몸을 날렸다. 어둠 속에서 튀어나와 커튼 뒤로 숨어들어 창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서 다시 창문을 닫고 저택 아래로 뛰어내렸음에도 불구하고, 방안의 인원들 중 누구도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마치 스쳐 가는 바람이라고 밖에 느끼지 못할 움직임. 과연 암살자 중에 서도 최고의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검은 옷의 소년'이라고 불릴 만한 가 치가 충분히 입증되는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소년은 저택 아래로 우거진 수풀 속으로 소리 없이 뛰어들어 그늘 속에 몸을 숨겼다. 숨소리까지 완벽하게 죽여 존재감을 없앤 그 모습이 진정한 숙련자의 모습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었다. 일단 주위를 경계하며 눈동자를 굴린 소년은 간밤에 내린 비가 묻어 축 축이 젖어 들어가는 옷이 마를 정도의 빠르기로, 몸무게와는 전혀 상관없 이 사는 사람인 듯한 빠르기로 해를 바라보며 쏘아져나갔다. 검은 선의 흐름. 온통 시커먼 소년의 모습을 누군가가 발견하기라도 했다면(불가능 하지만), 그렇게 표현했을 것이다. 검은 선은 곡선으로 구부러지거나 직선으로 곧게 뻗어져나감을 번갈아 반복하며 저택 안을 달려서, 이윽고 저택의 동쪽을 수호하고 있는 벽을 만났다. 그러나 잠시 주춤하는 기세도 없이 그대로 위로 솟구쳐 오르더니 간단하게 허공을 날아 가뿐하게 높은 벽을 넘어 저택 내에서 사라졌다. 그 벽은 성인 남자 20명과 맞먹는 높이로, 올려다보기만 해도 목이 아파 올 정도였지만, 소년에게는 그런 높이쯤이야 너무 간단해서 하품이 나와 도 할 말 없는 그런 것이었다. 그렇게 간단하게 저택에서 사라진 소년은 지체하지 않고 아침의 거리를 달리다가 곧 늘어선 집들의 지붕 위로 올라갔다. 한번 다리가 지붕 위를 밟을 때마다 소년의 몸은 10리치(=10m)는 간단하게 뻗어나갔고, 시간이 지날수록 속력은 점점 더 빨려져만 가는 것 같았다. 보통 사람이 만약 저 지경을 달린다면 100리치(=100m)도 못 가서 지쳐 쓰러져버릴 테지만, 암살자인 소년으로서는 땀 한 방울조차 흘리지 않았 다. 어리게만 보이지만 암살자로서의 능력은 얼마나 대단한지, 그리고 얼 마나 노력을 했는지 알 수 있는 좋은 예였다. 서서히 걷히는 구름들과 그 구름들을 비집고 지상에 발을 내리는 햇빛 의 세력이 점점 더 강해질 무렵, 소년은 무표정한 얼굴을 한 채 발 밑으 로 지나가는 아크릴 영지의 성벽을 무심하게 지나치고 있었다. 최소한 50 리치(=50m)는 넘어 보이는 그 높디높은 성벽을 단 한번의 도움닫기로 넘 어버린 소년은 그에 따른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하고 사방으로 펼쳐진 야드 평원을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대지를 밟고 쏜살같이 돌진하는 소년의 몸. 몸은 가볍기만 하고, 전신에 는 아직 힘이 남아돈다. 암살자의 체력이란 상식을 초월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이다. 만약을 위하여 약간은 체력을 비축해둘 요량으로 속력을 평준화시킨 소 년의 기세는 걸어서 3일 거리라는 야드 평원을 한 시간만에 주파해도 믿 어줄 정도였다. 그리고 실재로 소년은 야드 평원을 반시간만에 돌파해본 적도 있었기에, 별 거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역시 평범한 인간으 로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소년인 것이다. 잠시 눈을 감은 채 공기의 흐름만을 느끼며 달려가던 소년의 감각에 이 상한 요기가 느껴졌다. 공기를 타고 흐르는 따가운 전투의 기운. 소년은 눈을 떠 앞을 바라보았다. 고속으로 다가오는 장면들을 모두 눈으로 이해 하면서, 소년은 저 앞에 피말라라고 불리는 몬스터가 숨어있다는 것을 쉽 게 알 수 있었다. 어떻게 할까, 생각할 틈도 없이 무언가가 불쑥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할 수 없지.'라고 중얼거리는 소년의 손에 의해 이미 단검은 모습을 드러 내어 있었다. 일할 때라면 바닥을 밟아도 소리가 나지 않게 다니겠지만, 넓디넓은 평 원 위라서 마음놓고 대지를 밟았더니 이런 결과가 생기고 만 것이다. 소 년은 솟아오르고 있는 피말라의 세모난 머리를 향해 무심하게 단검을 날 렸다. 슥. 다른 표현도 필요 없었다. 소년의 움직임은 지극히 간단했고, 결과도 지 극히 간단하게 끝을 맺었다. 질풍 같은 속력으로 피말라를 지나치면서 단 검 두 개를 가로로 눕혀 세모난 머리 밑을 그어버리자, 단검을 피말라의 피부를 뚫고 들어갔다가 반대쪽으로 튀어나왔다. 완벽하게 반을 갈라버린 것이다. 하지만 피말라는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계속 꾸역꾸역 땅 위로 기어올라오다가, 소년의 몸은 이미 멀리 사라져버린 후 움직임을 멈췄다. 땅에 박힌 듯한 형상이 되어버린 피말라의 몸 옆에는 원래 녀석의 머리 였던 세모난 무엇인가가 녹색의 액체를 잔뜩 묻히고 덩그러니 놓여져 있 었다. 너무나도 간단하게 처리한 탓에 운동도 되지 못한 피말라 사냥을 끝내 고 여전히 달리고 있는 소년의 눈에 또 한차례 무엇인가가 들어왔다. 하 지만 이번에는 몬스터나 그런 것이 아닌 네 명의 사람이었다. "이제 완전히 그쳤나본데요?" "파커슨, 비 오는데 꼭 이렇게 일찍 가야했던 거냐?" "시끄러, 트카르. 난 세리나가 걱정되어서 미치겠다고. 네 녀석이 사랑을 하는 사나이의 마음을 알기나 하냐?" "몰라, 자식아. 지금 내가 중요한 건, 우산이 없었다면 네 녀석을 어떻게 만들어버렸을까, 라는 주제로 고찰을 해보는 거야." "많이 컸구나, 네 녀석." "싸, 싸우지들 말아요." "넌 가만히 있어, 겔린!" "겔린의 말이 맞다. 이미 출발한 거 가지고 트집잡지 말고 걸어라, 트카 르." "오오, 잘츠. 넌 나의 마음을 이해하는구나!" "이해는 무슨. 이미 두 손들어서 그런다……" 아무도 듣는 사람이 없어서 그런지 큰 소리로 떠들고 있는 그들의 목소 리는 멀리서 그들을 지나친 소년의 귀에 다 들리고 있었다. 물론 청력이 비상식적으로 좋은 소년의 특징도 한몫 했지만 말이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지만, 자신의 눈에 점점 마을의 형태가 보이는 것으로 봐서 한 시간쯤은 흘렀나보다, 하고 소년은 생각했다. 케롯 마을. 저곳에서의 기억이라면, 과자점에서 약간의 과자를 들고 나 왔던 것하고 시험하는 셈치고 훼이드리온과 한판 붙었던 것이 있었다. 그 때, 마스터 카드를 지키려는 그의 모습이 맘에 들어서 일찍 물러나 준 소 년은 괜히 그때 먹었던 이레브워츠 과자가 생각나서, 마을을 지나던 길에 전의 그 과자점에 들러 과자를 들고 나왔다. 그리고 하나씩 맛을 음미하 면서 조금은 언덕이 진 길을 또 다시 달려나갔다. 저 멀리 마법의 숲이 보이는 서가도를 지나서 루비네 마을의 지붕 위를 날아가듯이 넘어 수도를 향하는 소년의 모습에는 거칠 것이 전혀 없었다. 경쾌하면서도 안전하고, 그러면서도 신속한 움직임. 바람이 때리고 지나 가는 느낌에 기분이 좋아질 것도 같아서 소년은 더 속력을 내보려했다. 그러나, 소년의 그런 순수한 의도를 가로막기라도 하듯 수도 라시안트의 모습이 벌써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역시나 여기까지 오는데 채 세 시 간도 걸리지 않은 것이다. 마스트의 눈이 떠오르기 시작할 즈음에 아크릴 영지에서 출발한 기억을 살려보며 소년은 수도로 뛰어들었다. 수도답게 높은 지붕 위를 이리저리 뛰어 왕성 가까이 접근한 소년은 그 자가 준 마법을 피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머리끈을 꺼내 머리에 묶고 성벽을 달려 올라가기 시작했다. 수직으로 서있는 성벽을 타고 달려 올라 가는 비인간적인 일을 너무나도 손쉽게 해낸 소년이 왕성 안으로 진입해 서 그 자를 만날 때까지는 그렇게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소년은 사치의 극을 달리고 있는 엄청난 크기를 자랑하는 저택으로 향 하여 소리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가끔씩 시종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지나 다니기는 했지만, 그 누가 소년을 눈치챌 리는 만무했다. 소년은 절약적 인 움직임으로 계단을 타고 위층으로 올라가, 그 자가 일하는 방으로 들 어갔다. 역시나 소리라고는 일체 나지 않는 희한한 기술로 안으로 들어간 그가 한쪽에 모습을 드러내자, 그 자는 책상에서 무슨 서류를 붙잡고 열심히 낑낑대고 있다가 낯익은 존재감에 고개를 들었다. 그 자의 푸른색이 묻어나는 머리칼과 노란 색의 눈동자를 가진 장년의 모습은 왕성 수석마법사 필로윈 셀 디바이어와 완전히 똑같이 닮아있었 다. 아니, 그는 실재로 필로윈이란 이름을 사용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소년 이 '그 자'라고 지칭했던 자가, 바로 필로윈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한곳에 서있는 소년을 향해 담담한 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어서 오게. 꽤 일찍 왔군." 대답을 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이는 소년. 필로윈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이 웃고는 두 손을 깍지껴 책상 위로 올리면서 본론으로 들어갔다. "보고할 것은?" "아크릴 영주의 딸의 상태 확인. 당신의 추측이 맞았다. 그리고 아크릴 영주와 태자와의 마스터 카드 대전. 태자의 목숨을 건 대전에서 태자가 승리하였다. 태자 일행은 곧 셀라드인을 향해 출발할 것 같다." 소년은 지금까지 살아온 가운데 가장 많은 말을 한 것 같다고 생각하며 입을 다물었다. 보고 할 때마다 말을 하기는 하지만, 오늘처럼 이렇게 많 이 한 적은 없었던 것이다. 필로윈은 모든 보고를 끝냈다는 듯이 서있는 소년을 잠시 기다리게 하 면서 잠시 상념에 빠졌다. 아크릴 영주의 딸, 이름은 라일리라고 기억하 고 있다. 과연 그 전설에 따라 라일리는 저주로 인한 병에 걸린 것이 확 실해졌다. 어쩌면 지금쯤, 신법을 사용한다는 태자의 일행인 소녀가 그것 을 알아내고 해결방안까지 세워버린 후, 태자가 나서서 그것을 맡겠다고 자처하고 여행을 서두르고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필로윈은 자신의 생각대로 진행되고 있다는 생각에 피식 웃음을 띄웠다. '자, 그럼.' 그는 소년을 다시 바라보았다. "계속 수고해주게." 끄덕, 하고 고개를 움직인 직후 쥐도 새도 모르게 그곳에서 사라져버리 는 소년을 느끼고, 필로윈은 잠시 숨을 내쉬며 의자에 등을 기대어 앉았 다. 레이트의 도적 처리를 의뢰한 인연으로 지금까지 태자의 여행을 보고하 는 역할을 도맡아하고 있는 소년이 의외로 일을 잘해줘서 꽤 맘에 든 상 태였다. 가끔 생각지도 못한 일을 벌여서 긴장하게도 하지만, 나름대로 생각이 있어서하는 일이겠지 싶어 그냥 놔두었다. 어쨌든 소년도 자신의 계획에 관련되는 것들은 성실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이니까 말이다. "흠?" 왕궁 전체에 흘려놓은 마력의 그물에 익숙한 느낌의 무엇인가가 포착되 었다. 필로윈은 그것이 누구의 느낌인지 이미 직감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 기 때문에 선선히 웃으며 그를 맞을 준비를 하였다. 다시 서류를 뒤적이는 필로윈. 그가 보고 있는 서류의 첫 장에는 '금안 기사단 소속 기사 목록'이라는 글자가 정확하게 명시되어있었다. 필로윈이 그의 느낌을 느낀 것도 별로 지나지 않아서 곧 그의 집무실에 노크소리가 울렸다. 무겁게 두드리는 세 번의 노크. 그는 친절하게 답했 다. "들어오게나." 끼익 문이 열리면서 금안 기사단 제복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풍채 좋은 기사 한 명이 걸어 들어왔다. 두툼하게 자라있는 콧수염과 단정하게 빗어 내린 짙은 갈색의 머리카락이 그가 마법왕국 라시엔트의 제1기사, 바이마 크 폰 헤이스티론이라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조용히 문을 닫은 그가 쇼파에 뭄을 묻자, 필로윈도 빙그레 웃으며 보고 있던 서류를 들고 그에게 다가갔다. 그의 옆, 쇼파에 앉은 필로윈이 테이 블 위에 서류를 올려놓고는 그에게 말했다. "흐음, 간밤에 잘 지냈는가?" "그럭저럭." 그렇게 대답하는 친우의 모습에서 필로윈은 조금 씁쓸함을 느꼈다. 원래 부터 조금 무뚝뚝한 성격을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반란에 동참하기로 결 정한 이후로는 그 성격이 더욱 깊이 있기 진행되어 같이 있어도 그렇게 즐겁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필로윈은 씁쓸함을 속으로 삼켜버 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 금안 기사단 전원을 모이게 할 생각인가?" "그럴 생각이네." 마법사 길드의 승낙은 이미 받아놓은 상태이고, 이제 금안 기사단의 승 낙 유무만을 남겨놓은 상태였다. 바이마크는 기사단 전체의 결정을 위해 서라도 한번은 전체 모임을 가져야한다고 필로윈에게 말하였고, 필로윈은 그것은 그의 책임이라고 하여 모든 것을 맡겼다. 필로윈은 바이마크의 결 정이라면 금안 기사단 전체가 따라와 줄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기 때문 이다. "기사들 목록은 이미 준비해두었네."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서류. 꽤 두툼한 굵기를 자랑하는 그 서류를 지그 시 내려다보는 바이마크의 입은 굳게 닫혀있었다. 필로윈은 그런 친우의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그를 이 렇게 힘들게 만들다니. '나중에 모든 벌을 받을 테니, 지금은 날 따라주게.' 지금 할 수 있는 속죄는 그렇게 되뇌는 것밖에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미소를 띄운 상태에서 낮게 말했다. "나중에 저녁에 가도록 하겠네." "…알겠네." 바이마크가 무겁게 대답했다. 피아는 울 것만 같았다. "오, 오빠!" "여어, 피아. 아직 살아있었구나?" 진지하지 못한,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 사나이에게 긴 머리를 어울리지 않는다는 구시대적인 발상을 고수하듯 짧게 자른 머리. 그리고 남들은 흉 하다고 말하지만 자신에게는 그저 멋있게만 보이는 커다란 상처. 파커슨 그가 마을로 돌아왔다. 피아는 눈물이 글썽한 얼굴로 울먹이며 말했다. "괘, 괜찮은 거예요?" "아아, 물론이지. 이 파커슨 님이 어디 다치기라도 했겠어?" "얼마나 힘들었는지 다 알고 있다고요."라고 말하기도 전에, 그의 천진 난만한 웃음소리에 결국 눈물을 떨구고만 피아는 가슴 깊이 감사하다고, 감사하다고 끊임없이 말했다. 그녀는 파커슨이 건강하게 돌아온 것이 너 무나 감사했다. "야, 피아? 우는 거냐? 왜 울어어어?" 갑자기 울음을 터뜨려 버리는 귀여운 동생을 달래는 것에는 너무나 소 질이 없는 파커슨은 이렇게도 저렇게도 못하다가, 결국 그녀의 작은 몸을 자신의 품으로 끌어들여 안아주었다. 그의 넓은 품속에서 피아는 그동안 걱정을 눈물로 흘려버릴 것처럼 엉엉 울어댔다. 수도로 떠났던 청년회가 돌아왔다는 말에 사람들이 모두들 고목 나무 옆 여관으로 모여들었다. 집으로 일단 돌아갔던 잘츠와 트카르, 겔린도 여관에 도착하자 그들은 사람들에게 수도에 도착하기까지의 일들을 상세 하게 설명해주었다. 함께 떠났던 이들이 피말라에게 당하여 죽었다고 말 하자, 모두 침통한 표정을 지어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내었고, 몇몇들은 피말라들을 찾아내 뿌리를 뽑아버리자는 말도 안 되는 의견을 내기도 했 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 의견을 비웃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파커슨들은 굉장히 충격적인 이야기를 피아를 통해서 듣게 되 었다. "뭐? 그 녀석이 정말 해냈다고?" "네, 정말이에요. 우리들 아무도 생각지도 못했는데, 그 애들이 떠난 후 에 영주님께서 직접 마을로 나와서 사과를 하셨어요. 흙바닥인데도 절까 지 하시면서 용서해주지 않으면 절대 일어나지 않겠다고 하니, 어쩌겠어 요. 그리고 사정을 들어보니, 확실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도 되고요. 그 래서 마을 사람들도 영주님을 용서해드리기로 한 거예요." "허, 허어 참." '그 영주가 직접 절을 하면서 사과를 했단 말야?'라는 의문을 띄우며 장 면을 상상해보는 파커슨들. 아무리 생각해도, 지난 2년 간의 악행을 생각 하면, 도저히 떠올려지지 않는 장면 아닌가. 황당하다는 뜻을 온몸으로 표현해내고 있는 그들에게 마을 사람들을 돌 아가며 그때의 이야기를 분주하게 늘어놓았고, 그들은 믿을 수도 안 믿을 수도 없는 지경이 되어버렸다. "정말 못 믿겠으면, 내일이나 영주님을 찾아가 봐. 저택도 다시 개방되 어서 아무 때나 드나들 수 있으니까." "허, 정말이냐, 파카?" "응, 물론." 파커슨은 자신의 동생의 대답을 들으면서 황당하게 볼을 긁었다. 뺨의 흉터가 근질근질 거리는 게, 궁금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사실 마을 사람 들의 열렬한 말들로 인해 아크릴 영주가 예전처럼 돌아갔다는 것은 믿을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가 궁금한 것은 그런 결과가 아니라, 결과가 나오도록 유도한 과정이었다. 야드 평원에서 만난 그 애들이 아크릴 영주를 만나서 대체 무슨 일을 했기래, 2년 동안 꿈쩍도 않던 그의 마음이 열려서 마을 사람들에게 사과 를 한 것일까. 분명히 평원에서 만났을 때부터 뭔가 심상치 않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 런 일까지 해낼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던 그였다. 게다가 마을 사람들이 찾아오기 전에 자신은 아무 것도 모른다는 듯이 떠났다지 않은가. 파커슨은 떠들썩한 축제 분위기 속에서 피아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오 랜만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시끌시끌한 식당 안을 힘차게 누비고 다 니면서 여기저기로 술과 음식들을 돌리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들은 대부분 그녀가 해준 이야기들이었다. 고로, 모든 내막을 알고 있는 자는 당사자들에게 직접 이야기를 들은 그 녀뿐이라는 것이다. '언제 한번 둘이서 진지한 담소를 나눠봐야겠는걸?' 그는 주방으로 사라지는 피아의 뒷모습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 든 그 애들은 마을의 은인과도 같은 존재. 꼭 한번은 다시 이 마을에 들 려줬으면, 하는 게 그의 바램이었다. "야, 파커슨. 건배하자고!" "어? 아, 좋지!" 오늘 같이 잔 가득히 담긴 맥주가 참으로 맛좋게 보이는 때도 자주 없 다. 파커슨은 잔을 높이 같은 테이블에 앉아있던 마을 청년들과 소리 높 혀 "건배!"를 외쳤다. "건배!" 시원하게 목을 쓸어주고 내려가는 맥주의 상쾌함. 수도까지 다녀오면서 쌓인 모든 피로감까지 씻겨져 내려가는 듯한 기분이 들어 정말 정신이 맑아졌다. 다른 테이블에서 소리치는 이들에게 잔을 들어 응답해주면서 그는 어둑 한 창 밖을 바라보았다. 그 애들이 지나갔다는 영지의 서문 쪽. '서쪽으로라면… 셀라드인, 인가? 지금쯤이라면 충분히 도착했겠군.' 파커슨은 남아있는 맥주를 시원하게 삼켜버리고 "카아아아!"하고 괴성을 남기며 입을 닦았다. 그가 씨익 웃으며 다시 서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바람과 순환의 신 위넨스의 가호가 있기를.' 신의 이름을 빌린 세련된 축복을 훼이드리온과 아이를 향해 보내는 그 의 모습이 꽤 멋져 보인다. "여어, 세리나!" ……. --------------------------------------------------------------------- 하핫. 46편입니다. 400줄을 넘기는, 평소의 분량대로 회복이 되었군요. 잡담은 길게 적기 않겠습니다. 봐주시는 독자 분들께, 관심 가져주시는 모든 분들께 행복이 깃드기를.(^^^) 자아, 그럼. 47편은 새로운 무대, 셀라드인입니다! 어둠의 기사 DARK KNIGHT TEAM... P.S 추천 감상 비평. 환영입니다.(>.<) 번 호 : 49 / 50 등록일 : 2000년 10월 31일 00:07 등록자 : 암음기사 조 회 : 154 건 제 목 : [카드 게임 판타지]『카드 마스터(Card Master)』#047 카드 게임 판타지(Card Game Fantasy) 카드 마스터(Card Master) 47. 휙. 스쳐 가는 바람소리를 들으면 꽤 기분이 좋아지는 법이다. 시끄럽지 않 고, 그저 존재만을 알릴 뿐인 바람소리. 그 바람을 들을 수 있는 조건은 두 가지가 있다. 바람이 불거나, 아니면 스스로 움직이거나 하는 게 그것 들이다. 소년의 귀로 들려오는 날카로운 바람소리가 발생하는 요인은 후자 쪽에 속했다. 그것도 굉장히 강도가 높은, 공기 자체를 찢어발길 것만 같은 그 런 소리가 소년의 귀를 스치고 지나간다. 필로윈에게 간단한 보고를 끝낸 후 곧장 서가도를 달리기 시작한 소년 의 빠르기는 실로 가공할 수준이었다. 아크릴 영지에서 수도로 향할 때도 '엄청난' 속력이었지만, 돌아오는 그 빠르기는 '엄청난'에서 두 배는 더욱 가속된 것이었다. 생명체 중에서 가장 좋은 시력을 가지고 있다는 뱀파이어의 눈으로도 소년의 움직임은 판별되지 못할 것 같았다. '흠.' 기합도 아닌 것 같은 짧은 기합을 속으로 외치며 소년의 발이 땅을 한 번 강하게 굴렸다. 케롯 마을을 벗어나고 있던 몸이 순간적으로 사라지는 듯 빨라지더니 어느새 야드 평원을 내달리고 있었다. 소년이 밟았던 땅은 마치 무형의 힘이 짓누르기라도 한 것처럼 움푹 파이고 말았다. 다시 서쪽을 향하여 쇄도해 나가는 소년의 모습이 일순간 주춤하더니 크게 방향을 틀어 위로 솟구쳐 올랐다. 아크릴 영지의 성벽을 뛰어넘는 듯한 거대한 높이의 점프. 도움닫기만큼이나 엄청나게 솟구쳐 오른 소년 은 포물선의 정점에 도달하자 팔다리를 쭈욱 펴 바람의 영향을 최대한 많이 받도록 설정하고는 서서히 활공을 하듯이 바람을 탔다. 펑퍼짐하게 입은 옷이 바람의 영향을 더욱 극대화시켜주었기에 뛰어난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하늘에 오른 그 찰나의 시간, 땅에서 올려다보면 검은 점으로 밖에 보이 지 않을 소년은 눈 위에 손바닥을 펼쳐 햇빛을 막은 채 시력을 돋구었다. 저 멀리 있던 사물들이 무섭게 소년의 두 눈을 향해 날아 들어왔다. '아직 멀리 가지 않았군.' 무엇을 본 것인지, 소년은 갑자기 몸을 잔뜩 웅크려 바람의 저항을 줄이 더니 거의 내려꽂히는 기세로 평원을 향해 낙하, 아니 추락했다. 전체적으로, 거세게 뛰어올라 유유히 허공을 유영하다가 다시 무섭게 내 려앉은 소년은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발생된 흙먼지가 제대로 피어오르기 도 전에 그 속을 뚫고 또 다시 돌진하기 시작했다. 근처에 있던 피말라가 갑자기 느껴진 커다란 진동에 잠을 자다가 벌떡 땅을 뚫고 솟아올라왔지만, 보이는 것은 바람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사라 져 가는 흙먼지뿐, 진동의 근원은 알아낼 수 없었다. 피말라는 본능적으 로 아쉬움을 느끼며 다시 땅으로 꺼져 들어갔다. 검은 선이 되어 달려가고 있던 소년은 어느새 아크릴 영지에 다다라있 었다. 돌아갈 것인가, 가로질러갈 것인가에 대해서 잠시 생각을 해본 소 년은 곧 결론을 내리고 가속을 더했다. 그렇지 않아도 식별이 불가능할 정도의 빠르기이던 그의 몸이 결국은 스쳐 지나가는 잔상조차 남기지 않 고 사라졌다. 바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 아크릴 영지의 성벽이 일정 거리 이내로 들어오자, 소년은 조금 전 하늘 로 솟구쳐 올랐던 그 기세만큼이나 강하게 발을 굴려 창공으로 날아올랐 다. 실재로는 높이 뛴 것이 불과했지만, '높이 뛰는 것'도 정도가 있는 것 이라 소년의 행동은 오히려 '나는 것'에 가까웠다. 그렇게 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소년을 본 자들도 몇 있었지만, 모 두들 '지나가던 새이거니.'하고 신경을 끊고는 제 할 일로 돌아갔기 때문 에 마을을 가로지르는 큰 길 중앙에 내려앉는 무언가를 눈치챈 이는 하 나도 없었다. 발바닥에 딱딱한 감촉이 느껴지자마자 재빨리 발목을 돌려 근처 그늘로 몸을 숨긴 소년은 잠시 숨을 고르는 시간을 가졌다. 서둘러 달려왔더니 드디어 이마에 땀이 맺혔던 것이다. 소매로 단 한 방울이던 땀을 닦아낸 소년은 건물들이 만들어낸 그늘 사 이를 빠르게 이동하여 금새 서쪽 성벽에 도착했다. 평원에서의 질주처럼, 비슷한 빠르기를 내지 못했기에 단 한번으로 뛰어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다고 판단, 잠시 생각을 해보다가 최선의 방법을 찾아냈다. 바로 성벽 달려 올라가기. 소년이 알고 있기로는, 이 가공할 짓을 할 수 있는 자는 세상에 단 세 명뿐이었다. 자신과 길드 마스터와, 그리고 생각 하기도 싫어하는 그 누군가. 일부러 이름조차 떠올리지 않는 소년은 갑자 기 한기가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는 표정으로 몸서리를 쳐보고는 정신을 다시 되돌렸다. 엉뚱한 망상에 시간을 뺏길 이유는 없었다. '…….' 성벽 밑으로 걸어가, 따사롭게 빛을 내려주는 마스트의 눈이 지켜보는 가운데 지극히 평화로운 몸짓으로 성벽을 올려다보던 소년은 가볍게 몸 을 웅크리더니 다리에 갑작스런 힘을 줌과 동시에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제자리 뛰기였지만 3층 건물 높이를 상회하는 높이에 도달한 소년은 성 벽에 발을 디디자마자 미끄러지기 전에 다른 발을 붙여 힘을 주었다. 소 년의 몸이 직각으로 서있는 성벽을 달려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것은 수도 라시안트의 왕성의 성벽을 달려 올라간 일보다 더욱 힘든 것이었다. 그때는 그래도 도움닫기를 할 여유가 있었지만, 이번에는 성벽 과 건물들이 거의 붙어있어서 그럴 공간조차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소년은 너무나도 간단하게 성벽을 달려 올라가 그 위에 서서는 지그시 앞을 바라보는 여유까지 부렸다. 정말 '인간의 한계'라는 것을 다 시 생각해보게 만드는 자가 아닐 수 없다. 서가도가 뻗어있는 길을 확인하던 소년의 시선에 금방 그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아크릴 영지 전에 확인했던 그들의 위치와 그렇게 달라질 게 없는 차이라는 것을 확인한 소년은 성벽에서 뛰어내려 착지한 후, 조금은 힘을 줄여서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멀리서 그들을 지켜보기로 하고, 존재감을 완벽하게 지운 채 그들의 뒤를 따랐다. 입이 심심하다고 느꼈는지 어느새 소년의 손에는 케롯의 과자점에서 가 지고 나온(?) 이레브워츠 과자 봉지가 들려있었다. 비 온 뒤의 밝게 개인 하늘에서는 마스터의 축복이 뜨겁게 내리쬐고 있 었다. 슬슬 여름이 다가오는 시점이라 태양은 하늘 높게 치솟고 있어서 여행길이 조금은 힘들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바 람과 순환의 신 위넨스의 가호로 인해 제법 시원한 걸음을 옮기고 있었 기에 그럭저럭 웃음을 띄우며 땀을 닦아낼 수 있었다. 이마에 흐르던 작은 땀방울을 손으로 훔쳐내는 훼이드리온의 손으로 옅 은 바람의 기운이 느껴질 때, 아이는 그보다 약간은 뒤쳐져서 걸어오고 있었다. 그동안 꽤 길어서인지 눈앞으로 흘러내려 귀찮게 구는 앞머리를 쓸어 올리던 그는 문득 뒤따라오는 아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잠시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이 훼이드리온 쪽으로 날리고, 그는 그녀의 향기를 느끼며 싱긋 웃었다. 때마침,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아이가 그의 시선을 느끼고 눈을 들었다가 그의 미소를 보고 말았다. 순간적으로 두 볼을 빨갛게 물들이며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왜, 왜 웃는 거야?" "글쎄?" 짓궂게 웃어버리는 그를 향해 조금은 인상을 지어 보이는 그녀였지만, 오히려 더 귀엽게 느껴지는 훼이드리온이었다. 이번에는 그가 물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응? 아아, 조금 궁금한 게 있어서." "궁금한 것?" 훼이드리온이 걸음 속도를 늦춰서 그녀의 옆에 섰다. 어쩐지 눈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듯한 느낌을 느끼면서 그녀를 바라보는 그를 향해서 그녀 가 고개를 들었다. "…얼굴 가까이 대지마." 그리고 즉시 고개를 떨구었다. 그 반응에 그는 이해할 수 없는 미안함을 느끼면서 조금 그녀에게서 떨어지며 사과했다. "아, 미안. 됐어?" "…응." 표정을 수습하고 다시 그에게로 고개를 돌린 아이가 지금껏 생각하고 있던 의문점을 털어놓았다. "아크릴 영주의 딸, 기억 안 나는 건 아니겠지?" "물론. 라일리 말이야?" "응. 그 꼬마. 걔가 저주에 걸렸잖아. 직통 혈연으로 내려오는 핏줄에 관 련된 저주를." "네가 다 설명했던 거잖아. 그런데 그게 왜?" 다시 되묻는 훼이드리온을 바라보는 아이의 표정은 '아직 모르겠어?'라 는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내가 궁금해하는 건, 아크릴 가문의 핏줄에 걸린 그 저주가 대체 '왜' 걸렸냐는 거야." "아, 그러고 보니, 그렇네?" 아크릴 가족들과 대면을 하고 있던 당시에는 간과하고 있었던 사실을 이제야 깨닫게된 그는 덩달아 아이와 같은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셀라드리엔 강의 시원한 기운을 담은 바람이 야드 평원을 가로지르며 지나갔고, 그에 따라 훼이드리온의 어두운 색 여행복과 아이의 하얀 신관 용 여행복도 따라서 흔들렸다. 그러나 둘 중 누구도 그것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는 채로 발을 움직였다. "지금 돌아가서 묻는 건 어리석은 일이겠고. 신법을 썼을 때 뭔가 느낄 거 없었어?" 그의 물음. 아이가 대답했다. "원래 저주라는 게, 다른 사람의 의뢰를 받고 행하는 때가 많아서 말이 야. 그렇기 때문에 시전자 자신이 원한이 없다면, 저주에서는 별다른 의 지가 느껴지지 않아. 라일리의 저주도 그런 유형인가 봐." "흐음, 그래?" 뭔가 힌트를 얻을 수 있을까 했지만, 결국 아무 소득도 없이 문답은 끝 나고 말았다. "어쩔 수 없는 거네." "응?" 그녀의 말에 골똘히 생각하고 있던 훼이드리온이 의문을 띄우며 반응했 다. "우리가 생각해봤자 알 수 없는 사실이잖아. 분명히 아크릴 가문에 관계 된 일일 테니까. 그러니, 이만 생각은 끝마쳐볼까?" 아이는 자신의 생각에 만족을 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면서 바람으로 인해 잠시 헝클어졌었던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겼다. 머리칼들이 깨끗하게 정리됨과 동시에 그녀의 얼굴에서 '고민'이라는 단어는 바람과 함께 사라 지고 말았다. "자자, 셀라드인까지는 얼마나 남았지?" 완벽하게 활짝 핀 얼굴이 되어버린 그녀. 감정 변화의 현란함을 자랑하 는 그녀를 바라보며 훼이드리온은 헛웃음을 웃어버렸다. 생각해보니, 혼 자서 있었더라면 고민하고 또 고민했을 그럴 일들도 그녀는 간단하게 웃 음으로 무마시켜버리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우선으로 삼고 있었다. 그 런 고민들 따위는, 미소 한번으로 날려버린 듯이 말이다. 그는 결국 아이의 분위기에 휩싸여서 빙그레 웃어버리고 표정을 풀었다. 어느새 그는 그녀에게 동화되어가고 있는 듯한 분위기였다. "으음, 부지런히 걸어왔으니까 반쯤은 왔을 거야. 이쯤에서, 미리 점심 먹고 갈까?" 허허벌판만이 펼쳐져 있는 주위를 잠시 둘러보던 아이는 그의 반가운 말에 활기차게 대답했다. "응!" 그녀의 미소는 언제나 훼이드리온의 마음을 기쁘게 만들어주기에 조금 도 부족함이 없었기 때문에, 그는 즐거운 마음을 숨기지 않으며 주위를 둘러보다가 적당한 자리에 모포를 펼쳤다. 아크릴 영지를 기준으로, 서쪽 의 야드 평원은 동쪽보다 더욱 파릇파릇한 풀들이 자라있어 대지를 뒤덮 고 있는 초록의 농도가 더욱 진하고 맑았다. 향긋한 풀내음과 가끔씩 느껴지는 시원한 바람의 상쾌함. 기분 좋고 평 화로운 그 속에서 아이와 훼이드리온은 아크릴 영지에서 사온 도시락을 열어 조금은 이른 점심 식사를 시작했다. 오랜만에 보는 쌀로 만든 '밥'이라는 음식에 대한 진지한 토론을 나누며 즐겁게 식사를 하던 중에 문득 훼이드리온은 훗, 하고 웃어버렸다. 아이가 의문스럽게 눈을 동그랗게 뜨는 건 당연한 반응이었다. "왜?" 도시락에 끼어온 일회용 젓가락으로 밥을 집느라 애를 쓰고 있던 자세 그대로 묻는 그녀의 행동이 또한 우스워서 그는 결국 크게 "하핫."하고 웃음을 터뜨리면서 대답했다. "아니, 한번 생각해봐. 분명히 난 오늘 아침까지 생명의 거대한 위기를 느꼈는데, 지금은 너무나 평화롭게, 이렇게 식사를 하고 이야기를 하고 있잖아. 그게 왠지 우스워서 말이야." "흐음, 그런가?" "응, 그렇잖아. 큰 위기가 지나가니까, 원래부터 별 거 아니었다는 듯이 웃고 있다니. 조금은 이상한 기분이 들어." 좋은 변화인지, 나쁜 변화인지 모호한 상황이라 훼이드리온은 반찬 그릇 에서 쇠고기 조림을 집으며 씁쓸하게 웃었다. 마찬가지로 같은 것을 노리 고 있던 아이가 그가 먼저 목표를 공격한 탓에 잠시 차례를 기다리며 말 했다. "난 좋은 거라고 생각해." "흠?" 훼이드리온이 쇠고기 조림을 입으로 넣자마자 젓가락을 움직이는 그녀 의 행동과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투가 너무나도 지극히 평화로워서, 내용 과의 차이에서 빚어지는 이질감을 오히려 무색케 만들었다. 적당한 크기의 조림을 찾는 듯 젓가락으로 이리저리 뒤적이면서 그녀가 말을 이었다. "생명을 건진 후에 느끼는 이 평화로움. 당연한 휴식이 아닐까? 그 정도 의 위기를 겪었는데 휴식을 취하는 건 당연한 거잖아. 아니라면, 훼온은 분명히 사서 고생하는 타입일 꺼야." 물론 아이는 '훼온은 당연히 사서 고생하지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훼이드리온은 그녀의 말이 왠지 엄청난 설득력을 지녔다고 느꼈다. 자신이 생각하기로도 자신은 '사서 고생하는 타입이다'라고 자각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젓가락을 잡은 손으로 뒷머리를 긁적거리고 있는 사이, 아이가 고 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살았으니까 됐잖아? 더 고민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중요한 건 살아서 현재 이 평화로움을 누리고 있다는 거지, 또 다시 닥칠 위기를 걱정할 필요는, 지금 현재는 없어. 동감해?" "…으음, 조금은." 별로 시원하지 못한 훼이드리온의 대답이었지만, 남은 부분을 메꿀 수 있는 아이의 환한 미소가 밝혀졌다. "괜찮아. 훼온은 살아서 이렇게 내 곁에 있고, 우리는 지금 굉장히 평화 롭게 여행을 하고 있는 거야. 그리고 다른 건 필요 없어. 이만하면 됐지? 더 필요해?" 미소를 띄운 그녀의 얼굴을 보면서, 차츰 그의 표정이 풀려나갔다. 그녀 의 미소가 갖는 마력. 그는 이윽고 고개를 끄덕이며 만만찮게 매력적인 웃음을 환하게 띄웠다. "아니, 이대로 충분해." "나도 마찬가지야." 의미 심장한 대사 속으로 흘러가는 감정의 물결은 둘만이 느낄 수 있는 작은 동조를 불러일으켰다.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다.'라는 어구는 이 때를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며 훼이드리온은 싱긋 웃었다. 어느새 그의 머리 속에는 후계자 수련을 끝낸 후에 벌여질 일들 에 대한 걱정은 싹 사라지고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나도 궁금한 것이 있어." "웅, 뭔데?" 마지막 남은 밥을 입안으로 집어넣기 전에 대답하는 아이. 곧 입안으로 들어간 밥을 우물우물 씹으면서 검은 눈동자를 동그랗게 뜨는 모습이 또 다시 훼이드리온의 남자 근성을 자극하고 있었다. "으음, 그러니까 말이야." 아크릴 영주의 저택에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녀를 껴안은 후로부 터 별로 지나지 않은 시간이 지나는 중에서도 가끔씩 터져 나오는 그런 욕구들. 이번에도 어김없이 솟구쳐 오르는 욕구를 서둘러 누르면서 심히 불편한 어조로 그가 말했다. "아크릴 영주님에게서 들었지? 10대 마스터 카드, 라는 것 말이야. 어떤 건지 알아?" "10대 마스터 카드? 글쎄, 나도 자세히는 모르는걸." "알고 있는 것만 말해봐." "흐음.……." 손으로는 도시락을 정리하면서, 그녀가 무언가를 생각하는 표정을 지으 며 답했다. "10대 마스터 카드란 건 말이야, 대마도사로 불리는 페인트 라시엔트가 마스터 카드를 창안할 당시, 가장 먼저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카드야. 그 이름에서 느껴지는 이미지처럼, 마스터 카드 중에서 가장 강력한 공격력 을 가졌는데 한 장만 있어도 단 한번에 상대방의 생명력을 모조리 소멸 시킬 수 있을 정도로. 한마디로 무적이라는 거지, 뭐. 그래서 그런지는 몰 라도, 대륙을 다 뒤져도 찾을 수 없다나 봐." "왜?" 아이는 난감한 표정이 되었다. "거기까지는 나도 잘 몰라. 하여튼, 내가 아는 지식은 거기까지야." 그녀의 말이 끝나고, 훼이드리온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뭔가를 생각하는 듯 하더니 그녀에게 인사했다. "고마워." 아이는 생긋 웃어 그 인사에 답하고는 도시락을 정리를 완료하여 봉지 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친절하게도 그가 먹은 도시락까지 정리를 해주었 다. "아, 내가 할게." "괜찮아, 간단한 건데, 뭐." 그녀의 은근슬쩍 완강한 태도에 훼이드리온은 난처하게 뒷머리를 긁적 이며 웃다가 그녀가 일어나자 모포 정리를 맡았다. 그러면서 아이의 설명 을 곱씹으며 머리 속에 한가지를 기억시켰다. '10대 마스터 카드에 대해서 알아본다.' 애초의 목적이었던 마스터 카드에 대한 의문은 아직 제대로 풀린 것이 없는데, 또 다시 하나가 더 늘어나니 조금은 부담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곧 웃으면서 그 부담감을 지웠다. 시간은 아직 남았고, 목적지에는 근처 도 오지 못했기 때문에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가자." 모포 정리도 끝나고 도시락도 봉지에 싸서 가방에 집어넣은 후, 그들은 다시 움직였다. 점심을 먹은 탓인지 발걸음은 더욱 가볍게 앞으로 내딛어 졌고 셀라드인까지는 예상보다 더 일찍 도착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정말 일찍 셀라드인에 도착하게 되었다. "셀라드리엔 강을 사이에 두고, 강을 건너는 나루터 역할을 하면서 성장 해온 쌍둥이 도시 중 하나가 이 셀라드인이야." 서가도로부터 뚫려있는 도시의 입구를 지나치면서 설명하는 훼이드리온. 아이는 그의 설명을 들으면서 감탄을 연발하고 있었다. "와아, 그래서인지 정말 크다아!" 그 말에 훼이드리온 자신이 뿌듯함을 느끼는 이유는, 이곳이 자신이 다 스리게될 영토에 속하기 때문일 것이다. 강을 끼고 발달한 곳이라 그런지 공기부터 상쾌하게 느껴지는 것 같았 다. 5층 정도 되는 고층 건물들이 심심찮게 눈에 들어와 지평선을 헤치고 있었지만, 그야 말로 강바람 덕분에 답답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돌아다 니는 사람들도 많았고, 모두의 얼굴에 생기가 도는 모습이 보기 좋아서 훼이드리온과 아이는 자연스럽게 얼굴에 미소를 띄웠다. 잠시 입구에 서서 사람 구경을 하다가, 아이가 먼저 훼이드리온에게 물 었다. "이제 어디로 가야해?" "나루터 쪽으로 가서 강을 건너는 배편을 알아봐야 해. 되도록 가장 빠 른 걸 찾아야지 시간이 덜 소요될 텐데. 흐음." 건물들로 가렸지만, 분명히 강이 있을 방향으로 시선을 던지는 훼이드리 온. 그녀가 먼저 앞장서서 걸어갔다. "그럼, 빨리 가자!" "아, 응."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 물어서 나루터를 정확하게 찾아가는 그들은 이 도시에서도 확실히 시선을 끌고 있었다. 하얀 여행복과 검은 머리칼에 아 름다운 미모를 가진 아이와 금발을 찰랑거리며 멋진 미소를 짓고 있는 미소년 훼이드리온은, 셀라드인이란 큰 도시에서도 그렇게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인물들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나루터로 가는 길에 꽤나 많은 인 기를 끌게 되었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서로의 이야기에 빠져 전혀 눈치채 지 못했다. 그렇게 거리에 보이는 화려한 간판들과 향기로운 냄새들을 눈으로 보고 코로 느끼면서 즐겁게 걸어가고 있는 그들에게 드디어 멀리 푸른 물결리 출렁이는 강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 저기 강이 보여." "야아, 정말이네?" 대륙 최대의 강이라 일컬어지는 셀라드리엔 강. 게이트 산맥 북부에서부 터 시작되는 지류가 굵고 굵어져 대륙 남부까지 타고 내려가는 이 강은 그 크기와 길이에서 대륙 최대로 기록되어져있다. 그리고 효율적인 수송 로로서의 가치도 톡톡히 하고 있어서 전 대륙적으로 중요성이 높은 그런 곳이었다. 훼이드리온과 아이는 재빨리 달려가 강이 한눈에 꽉 차 보이는 지점까 지 달려갔다. 시원하게 뺨을 스치고 지나가는 강바람. 상쾌하게 코로 들 어오는 강물의 내음. 지금까지 계속 땅 위를 걸어왔던 여행에서는 느낄 수 없는 그런 느낌이 그들을 주체할 수 없이 즐겁게 만들었다. "와아아." 아이가 솔직한 감탄을 담은 음성을 남기며 끝없이 펼쳐져 있는 듯한 착 각을 일으키는 푸른 강물을 둘러보았다. 옅게 출렁이면서 천천히 흘러가는 강물. 흘러흘러 바다에 닿기까지 쉬지 않고 달려가는 강물의 모습을 바라보며 훼이드리온은 참고 있던 숨을 터 뜨렸다가 깊게 들이쉬었다. 가슴 가득히 들어오는 강의 상쾌한 향기가 쌓 였던 먼지들까지 모두 쓸어내 주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한동안 그들은 말없이 강을 바라보았다. 희미하게 보이는 강 반대편의 윤곽들을 보기도 하고, 강 위를 떠다니는 작은 배와 큰배들을 구경하기도 하면서 그렇게 잠시 여유를 부렸다. 아무리 여행이 급하다고 해도 이런 멋진 광경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말이다. 강물만큼이나 푸른 눈동자에는 공경의 눈빛이 담겨있었고, 밤하늘만큼이 나 까만 눈동자에는 신기함이 간직되어있었다. 대자연 앞에서 그들은 그 렇게 멍하니 감탄만을 할 수 있을 뿐이었다. "…하아, 멋지군." "…동감." 겨우 제정신을 차린 훼이드리온이 한마디하자, 뒤따라서 아이도 맞장구 치며 깨어났다. 더 보고 있었다가는 유혹되어 강물에 빠져버릴 지도 모른 다는 장난스러운 생각을 해보면서 그들은 발길을 돌렸다. 물론 쉽게 떨어 지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강을 따라 조금 걸어가자, '나루터'는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일단 배편을 알아볼 수 있는 '승선소'에 들러 승선권을 사야하기 때문에, 주위를 두리 번거리다가 곧 3층의 목조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큰 간판으로 그곳이 승 선소임을 알리고 있는 그 건물로 향하여 안으로 들어갔다. 꽤 큰문을 밀고 들어가자, 이내 주위에서 시끌시끌한 소음들이 날아 들 어왔다. 이 승선소에서는 배가 출발하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하여 숙 식을 제공하고 있었던 것이다. 1층 로비에서는 차를 마시면서 쉴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음, 어디지?" 승선권을 살 수 있는 곳이 어딘지 알 수 없어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살피고 있던 훼이드리온의 소매를 아이가 잡아끌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오른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저기 있어." "어디? 아, 저기 있구나." 빨리 찾아준 아이를 향해 기특하다는 듯 웃음을 떠올리면서 그는 그곳 을 향해 다가갔다. '매표소'라고 적힌 간판을 걸고 있는 그곳에는 깨끗한 인상의 남자가 정장을 단정하게 입고 그들을 맞았다. "어서 오세요, 배를 타실 건가요?" 카운터에 팔을 올리고 선 훼이드리온이 대답했다. "네. 셀라디안으로 가는 가장 빠른 배편이 있나요?" "흐음,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그가 서류를 뒤적거리는 듯 싶더니, 곧 고개를 들어 대답했다. "오늘 마지막 배가 남아있군요. 지금 나루터에 정박 중이니, 승선권을 구입하시고 승선하시면 됩니다." "와아, 잘됐다!" 놀라운 타이밍이라고 생각하며 아이가 기쁜 듯이 소리쳤고, 훼이드리온 도 다행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등에 메고 있던 배낭을 풀어 주 머니를 뒤적거렸다. 곧 익숙한 주머니의 감촉이 느껴졌고, 그것을 꺼내며 승선권을 주문했다. "두 장 주세요." "네, 4쎌(=16만원)입니다." 4쎌. 평민에게는 지극히 사용하기 까다로울 정도의 금액이었지만, 훼이 드리온은 왕족이었다. 그는 아무렇지 않다는 얼굴로 주머니에서 1쎌 금화 4개를 꺼내어 그에게 주고 승선권을 받아서 아이에게 건넸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고맙습니다." 공손하게 인사하고 돌아서면서 배낭을 정리한 훼이드리온은 다시 등에 메며 아이를 바라보았다. 승선권 두 장을 이리저리 구경하면서 매우 신기 해하고 있었다. '훗, 귀여운걸.' 잠시 그녀의 표정을 감사하다가 이내 웃으면서 고개를 돌린 훼이드리온. "응?" 뭔가 그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익숙한 감각이 들었다. 아주 잠깐, 극히 찰나의 순간 동안 자신의 두 눈을 스쳐지나간 그 모습. 훼이드리온 은 즉시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지만, 자신이 원하는 그 모습은 거기에 없 었다. "왜 그래?" 그의 이상한 행동에 아이가 승선권 구경을 마치고 바라보고 있었다. 훼 이드리온은 뒷머리를 긁적이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냐, 아무 것도. 잘못 봤나봐." "흐음?" 아직 의문이 남아있는 그녀의 얼굴이었지만, 그가 먼저 걸음을 옮기는 탓에 서둘러 뒤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훼이드리온은 잠시 더 생각해보다가 이내 기억을 지워버렸다. 그 사람이 라면 좋겠지만, 이런 곳에서 만날 만큼 인연이 따라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 사람은… 필로윈으로 인해 왕성에서 쫓겨난 사람이니까 말이다. '잘못 봤겠지…….' 한숨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훼이드리온은 생각했다. --------------------------------------------------------------------- 자아, 47편입니다. 본격적으로 배로 오른 후, 이제 이 5장의 이야기가 펼 쳐집니다. 핫핫, 궁금하신가요?( ___) 희소식이 하나 있습니다. 카드 마스터 팬클럽이 이번 주 내로 개설된다고 하더군요. 핫핫.; 이거 참. 카마 팬클이라니.; 정말 생각도 못한 기쁜 일 이라 혼자서 웃고 난리가 아니랍니다.; 아하하.; 개설이 완료되면 바로 공지를 띄우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잡담은 이만 마치고, 팀군은 물러갑니다.(>.<) 꾸벅.(___) 어둠의 기사 DARK KNIGHT TEAM... P.S 추천 감상 비평. 환영이에요, 환영.!(>.<) 번 호 : 50 / 50 등록일 : 2000년 10월 31일 22:15 등록자 : 암음기사 조 회 : 34 건 제 목 : [카드 게임 판타지]『카드 마스터(Card Master)』#048 카드 게임 판타지(Card Game Fantasy) 카드 마스터(Card Master) 48. 하늘의 중앙을 통과한 마스트의 눈은 서서히 식어 가는 열기를 간직한 채 서쪽의 게이트 산맥을 향해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 밑으로 펼쳐 진 푸른 강물의 움직임. 넘실대는 그 물결 위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두 명 의 그림자. 아직은 건재한 마스트의 축복이 수면에 반사되어 작은 알갱이 로 분산되어 터지고, 강물 위로 부는 위넨스의 손길은 가볍게 모든 것을 훑고 지나간다. 너무나 평화로운 모습. 절대 깨어질 것 같지 않은 그 장관을, 지금 훼이 드리온과 아이는 커다란 배의 갑판 위에서 구경하고 있었다. "배 위에서 보니까, 더 멋진 거 같아." 솔직하게 감상을 토로하는 아이의 목소리는 마구마구 들떠있어서 듣고 있던 훼이드리온마저 기분 좋게 만들고 있었다. 그녀의 설명으로는, 그녀 는 줄곧 집에만 틀어박혀 살아서 바깥 세계 구경은커녕, 이번이 처음 나 온 것에다 강이라는 것을 보는 것도 처음이라고 하였다. 따지고 보면, 지 금까지 지나쳐온 그 모든 것들이 그녀에게는 첫 경험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잠시만 생각에 잠겨보면, 훼이드리온보다는 아이 쪽이 여행에 적 응을 더 잘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관점으로 그는 그녀에게 물음을 던졌다. 그러자 그녀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여행 전에 여러 가지로 조사를 많이 해서 그래." 맞는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은 그녀의 대답이었지만, 그는 '그런가 보다'하고 수긍했다. 승선권을 사고 곧바로 나루터로 나온 그들은 정박 중이던 배에 올라타 고 지금 막 갑판으로 올라온 참이었다. 그러다가 갑판에서 바라보는 강의 모습이 사뭇 다르다는 것을 알아버린 그녀가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또 다시 감탄하기에 여념이 없어서, 결국 훼이드리온도 옆에 서서 강을 구경 하게 되었던 것이다. '저렇게 좋을까.' 너무 좋아하는 아이의 얼굴을 살짝 훔쳐보면서, 어릴 때 셀라드리엔 강 쪽으로 여러 번 놀러왔었던 기억들이 짐짓 원망스러워지는 그였다. 출렁이는 강물의 흐름을 가로지르며 강 반대편의 도시 셀라디안을 향해 방금 출발한 이 배의 이름은 '셀라디느 호'. 고대에는 존재했지만, 현재는 종파가 사라져서 믿는 이를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강과 흐름의 여신 셀라 디느의 이름을 따와 지은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배의 크기가 일반 여객 선들의 두 배 정도는 되었고, 갑판이나 선실 할 것 없이 초 호화판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 덩치에 어울리게 승선자 전원에게 객실이 주 어졌고, 그들은 행운인지 불행인지 2인 객실을 배정 받게 되었다. "아이." "…으응?" 어지간히 빠져있는 수준이 아니었던지, 그녀의 반응은 한 박자가 느렸 다. 훼이드리온은 싱긋 웃으면서 객실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가리켰다. "일단, 객실에 짐을 풀고 나서 다시 올라오자. 응?" "……아, 으응." 아쉬운 듯 고개를 돌리면서도 자신의 뒤를 따라 움직이는 아이가 참 기 특하게 생각되어서 '나중에 상이라도 줄까?'하고 영양가 없는 헛생각을 해보는 그였다. 셀라디느 호는 총 6층으로 구성되어있고, 짐칸과 일반인들에게는 공개되 지 않는 구역을 제하면 1층에서 4층까지 손님들을 위하여 쓰인다. 그중 1 층은 식당과 여러 가지 편의시설들이 마련되어있고, 남은 2층에서 4층이 객실로 이용되고 있었다. 그리고 1층위가 바로 갑판이었다. "아이는 셀라드리엔 강이 만들어진 이야기, 알아?" "이야기?" 가슴 앞에 두 손을 모으고 강의 정취를 다시 한번 떠올리고 있던 아이 는 갑자기 물어오는 훼이드리온에게 반문했다. 그가 계단으로 이어지는 문안으로 들어가면서 싱긋 웃었다. "그러니까, 셀라드리엔 강에 얽힌 신화 같은 거라고 할까? 모르지?" "응, 해줘, 해줘!" 열광적인 반응과 함께 소리치는 그녀의 목소리로 인해 계단이 쩌렁쩌렁 울렸다. 사람이 없어서 망정이지, 있었다면 무척이나 부끄러웠을 거라고 생각하며 그가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신들의 종류는 알지? 먼 옛날에, 우리가 고대라고 부르는 시대보다 훨 씬 전에는 대륙에 신들이 인간들과 같이 살았었대. 물론 강과 흐름의 여 신 셀라디느도 말이야. 그런데 어느 날, 모든 신들 중에서도 우두머리 격 이던 빛과 태양의 신 마스트가 신들을 몽땅 소집했어. 셀라디느가 인간 남자를 사랑하게 되어버린 거야." "호오?" 흥미가 담긴 눈빛을 보내오는 아이와 함께 훼이드리온은 3층으로 내려 가는 첫 계단을 밟았다. 이야기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모인 신들은 셀라디느와 그 인간 남자를 세워두고 진지하게 회의를 진 행했어. 하지만 신의 위엄을 무시하고 미천한 인간을 사랑한 셀라디느를 용서할 수 없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어서, 마스트도 어쩔 수 없었던 거야. 그는 셀라디느의 편이었는데도 말이야. 아무튼 결국 회의의 결과는 셀라 디느와 그 남자가 헤어지는 것으로서 결정이 나버렸지." "저런……. 그래서, 헤어진 거야?" "셀라디느는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신들의 방해로 인하여 둘은 만나지 못했어. 결국 인간 남자는 수명이 다해 죽어버렸고, 셀라디느는 그것을 비관한 나머지 신으로서의 모든 권위를 버리고 게이트 산맥에 숨어버렸 대. 그리고 몇 날 몇 일을 울음으로 지새웠어. 그때 흘린 셀라디느의 눈 물이 바로 이 셀라드리엔 강이야. 강 이름도 바로 거기서 따온 거고." 그의 이야기가 끝나자, "그렇구나……."라고 중얼거리던 아이의 눈빛이 조금은 슬퍼졌다. 아름답게만 보이던 셀라드리엔 강에 그런 이야기가 있 었다니, 그녀는 절로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그것으로 인한 슬픔은 그녀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약간은 침울하게 변해버린 둘 사이의 분위기를 환기시키려는 듯이 훼이 드리온은 승선권에 표시되어있는 층인 4층에 발을 디디면서 일부러 소리 를 강하게 내보았다. 탁. 아이가 한 계단 위에서 그를 바라보았다. "이야기일 뿐이야. 그렇게 슬퍼하지 않아도 돼. 아이는 강의 아름다움을 보면서 기뻐해 주기만 하면 돼." 그의 위안은 이상하게도 그녀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준다. 그녀는 금 방이라도 눈물을 떨굴 것 같이 흔들리던 눈빛을 조금씩 진정시켜가며 살 짝 미소를 피어 올렸다. 그 모습이 그가 보기에는 약간 애처로워 보이기 도 했지만 그녀의 표정은 많이 나아지고 있었다. '의외로 감상적이라니까.' 제멋대로 살아가는 사고방식 같이 느껴질 만큼의 자유분방함을 주장하 던 그녀의 다른 모습들과는 사뭇 대조적인 그녀의 성격에, 훼이드리온은 보이지 않게 웃어보았다. 처음과는 정말 다른 감정이 그의 마음을 지배하 고 있어서 그도 많이 당황했지만, 사실을 사실이었기에 마음을 다잡기 시 작했다. 어쨌든, 훼이드리온은 아이를 좋아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럼, 객실로 가자." "응." 짧게 대답한 아이가 손에 들고 있던 승선권을 살펴보다가 왼쪽을 가리 켰다. 복도 천장에는 객실의 번호를 대략적으로 가르쳐주는 간판이 가는 쇠줄에 대롱대롱 매달려있었다. "왼쪽이야." 그녀의 손가락이 일러주는 방향으로 몸을 움직이면서 훼이드리온은 객 실번호를 확인했다. 승선권에 적힌 번호는 417호와 418호. 방금 410호가 옆으로 지나갔다는 것을 눈치챈 그는 곧 자신들의 방이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417호, 418호가 새겨진 하얀 색의 문이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 다. "……." 찾긴 찾았지만, 그들은 잠시 문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침묵에 잠겼다. 하 얀 색의 문은 고귀한 분위기를 풍겨내었고, 금색으로 테두리를 만든 문양 들은 고풍스러움 중에서도 화려함을 제대로 나타내고 있었다. 그리고 마 찬가지로 금색을 이용하여 새겨진 객실번호 또한 잘 어울렸다. 그러나 문제는 문의 디자인이 어떠한가, 가 아니었다. 문의 상단의 중간쯤에는 '417'이라는 숫자와 '418'호라는 숫자가 나란히 나열되어 금색을 찬란하게 뿌려대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가 황당하다는 뜻을 내포한 눈빛을 승선권을 향해 마구마구 뿌려주 면서 입을 열었다. "2인 객실이었어?" 당연히 1인실인 줄 알고 있었던 터라, 그것은 꽤나 충격적이었다. 게다 가 2인실을 쓰는 것도 감정을 깨닫기 전의 일이지, 지금의 두 사람 관계 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둘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각각의 승선권을 노려볼 대로 노려보았다. '으윽, 어쩌란 말야!' 2인실이라는 것을 깨달을 순간부터 훼이드리온의 가슴은 크게 요동치고 있었다. 케롯 마을이라든지, 아크릴 영지에서 같은 방을 쓰면서 지내던 그때와 지금은 정말 사정이 다르다. 같은 2인실이라고는 해도 선상인 관 계로 극히 좁을 것이며, 또한 지금의 둘은 엄청나게 미묘한 관계가 아닌 가. 이 상태에서 같은 방을 쓴다, 라고 하면. '…일을 저지를 지도 몰라. 일? 무슨 일? 일이라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아니, 아니야. 정말일 지도? 그때도 주체하지 못하고 아이를 안아버렸잖아. 일을 저지르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어. 으아아, 어떡하지? 어떡해야하는 거야? …그런데 난 아까부터 무슨 일을 말하고 있는 거지?' 훼이드리온은 지금 자신의 상태는 '심각한 정신적 충격으로 인한 일시적 인 자아 분열 상태'라고 정의 내리고 싶어졌다. 스스로의 생각을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만큼 그는 내적으로 굉장히 복잡한 지 경이었다. 한편, 복잡한 머리는 아이도 마찬가지였다. 훼이드리온에 대한 감정을 받아들인 것도 얼마 전이었는데, 갑자기 이런 상황이 닥치다니 말이다. 너무 황당해서 할 말이 없어져버린 채 그년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안간 힘을 썼다. 그러다가 문득 훼이드리온을 쳐다보았다. 엉뚱하게 그들을 휘어잡은 적 막이 어색하지 않을까, 하고 걱정했지만 그도 만만찮게 복잡한 얼굴을 하 고 있어서 왠지 모를 안도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러다가 결국 허탈하게 웃어버렸다. "…뭐어… 할 수 없나?" 마치 포기했다는 듯한 어투로 입을 여는 아이의 목소리에 훼이드리온은 자신을 짓누르고 있던 생각의 더미에서 탈피해 그녀에게로 시선을 돌렸 다. 그녀가 난처한 듯 긴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비비꼬면서 말했다. "갑판에서 잘 수는 없잖아. 게다가 이 방은 우리가 아니면 쓸 사람이 없 을 테고. 한마디로… 쓰긴 써야한다는 거야." 어쩐지 정리가 덜된 그녀의 말이었지만, 그런 것을 눈치챌 상황이 아닌 훼이드리온은 잠시 멀뚱히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은 이 상황에서 대단한 설득력을 발휘한 것이다. 그 또한 자포자기라는 듯이 뒷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그냥… 그렇게 할까?" "그렇게 하지, 뭐. 밤이 되기 전에 도착할 건 분명하고, 그러니 여기서 하루를 자야하는 건 더더욱 아닐 테니까." 중요한 건, 하룻밤을 이 방에서 보낸다는 것이 아니라, '둘만 있다'라는 그 자체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아이의 물음에 그는 웃으면서 그 의견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물음을 다시 한번 하겠는데 말이야." "응." "훼온, 나 덮칠 거야?" "……." 훼이드리온은 미소를 띄운 채로 객실 문을 열었고, 뒤에 서있던 아이도 붉게 달아오르려는 두 볼을 감싸쥔 채 헤헤, 하고 웃었다. 예상대로 객실은 꽤 좁았다. 분명히 두 명이 들어갈 수는 있었지만, 이 안에서 뛴다거나 하는 그런 일은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그는 판단 내렸 다. 마스터 카드 게임 정도 밖에, 그 외의 다른 유희들은 애초부터 생각 지 않는 것이 옳을 것 같았다. 어느 곳을 가나 변함 없는 하얀 시트를 가진 침대 두 개가 벽에 고정된 채 양쪽에 배치되어 있었고 그 중간에는 역시 하얀 색의 작은 탁자 겸 서랍장이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일어서서 다니기에도 거북할 만큼 좁 은 곳이었다. "으음, 짐만 내려놓고 밖으로 나갈까?" 훼이드리온의 제안에 아이는 전적으로 찬성하는 듯 고개를 아래위로 흔 들었다. 그리고 그가 배낭을 벗는 것을 도와주면서 일을 서둘러 진행시키 고는 먼저 복도로 싹 빠져 나가버렸다. 그녀가 복도에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하아, 안에 있는 것도 갑갑한 것 같아." "동감이야." 배낭을 왼쪽 침대에 올려놓고 승선권을 다시 챙긴 그는 승선권을 체크 하던 승무원이 일러주는 대로 서랍장 위칸을 열었다. 거기에는 예상대로 객실 열쇠가 들어있었다. '흐음?' 문득 눈을 돌린 정면에서 재미있는 것을 발견한 훼이드리온은 킥킥 웃 으면서 일어났다. '알람 서비스. 승무원에게 말씀해주시면, 목적지에 도착 하는 대로 깨워드리겠습니다.'라고 적혀있는 쪽지가 서랍장 위의 벽에 붙 어있었던 것이다. '이런 서비스도 있구나.'하는 생각을 하며 그는 객실을 빠져나왔다. 문을 잠그는 것까지 깔끔하게 마치는 그를 기다리다가 아이가 다급하게 말했다. "훼오오온, 빨리 나가자, 빨리. 응? 강보고 싶단 말야아아." 나름대로 애교를 뿌리며 훼이드리온을 재촉하는 그녀를 향해 참을 수 없는 기쁨을 싱긋 미소로 표현한 그는 그녀의 어깨를 살짝 감싸쥐며 앞 장섰다. "응, 가자." "으응." 어깨에서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따뜻한 온기에 아이는 또 다시 얼굴이 달아올라버림을 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아침의 포옹도 그렇고, 이상하게 행동이 점점 대담해지는 그의 태도에 아이는 조금 당황함을 느꼈지만, 그 것도 그렇게 싫지는 않은 느낌이어서 잠자코 있기로 했다. 그러나, 그녀가 알지 못하는 문제가 있었다. 아이의 어깨를 감싸쥐어 그 녀를 당황의 수렁에 빠뜨려버린 장본인은 정작 아무런 의도도 없이 한 행동이었다는 것이, 바로 그 문제였다. 한마디로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불 구하고 그런 대담한 행동을 벌였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게 더 문제일 수도 있는 일이지만. 천천히 계단을 올라와 다시 갑판으로 나온 그들을 가장 처음으로 반긴 것은 시원하게 불어오는 강바람이었다. 강의 습한 기운을 가득히 머금고 얼굴을 훑고 지나가는 그 바람에 둘은 바깥으로 나왔다는 느낌을 확실하 게 받을 수 있었다. "저기로 가자, 우리." 선수 쪽을 바라보고 있던 아이가 훼이드리온의 소매를 끌면서 선수루로 끌고 갔다. 단단한 나무로 판을 만들고 철로 단단하게 고정시킨 전형적인 형태를 가진 갑판을 밟는 느낌은 굉장히 재미있어서 그녀는 그 위를 총 총 뛰어다니듯이 경쾌하게 걸어갔다. 선수루 갑판 위에서는 승무원들이 간단한 음료수를 팔면서 강의 경관을 구경할 수 있도록 서비스하고 있었다. 아이는 선수루 갑판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빠르게 뛰어올라가 그 위에서 훼이드리온을 향해 손짓했다. "빨리 올라와, 훼온! 여기 엄청 시원해!" 훼이드리온은 긴 팔이긴 하지만 굉장히 얇은 신관용 여행복은 시원함을 넘어서 차가움을 선사하는 강바람에는 어쩔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녀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신관용, 이 라는 이름이 괜히 붙었겠는가. 겨울에 신관용 여행복 하나만 입고 나가도 별 어려움 없이 돌아다닐 수 있을 정도로, 그것은 성능이 좋다. 다 신의 축복이 내린 옷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춥지는 않으니까, 뭐.'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며 훼이드리온도 선수루 갑판으로 올라갔다. 연인 들로 보이는 사람들이나 가족으로 보이는 이들이 선수루 갑판에서 강을 바라보며 감탄을 연발하고 있었고, 아이도 어느새 음료수 두 개를 손에 든 채 사방으로 펼쳐진 광경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천천히 구경해." "응? 아, 응. 알았어!" 훼이드리온 자신이 보기엔 그렇게 다를 바 없는 풍경이었지만 그녀에게 는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아이의 손에 들린 음료수 중 하나를 건네 받고 여유 있게 갑판에 기대선 그는 음료수 한 모금과 바람 한줄기를 느끼며 시간을 즐겼다. 옆에서 환희에 찬 눈빛으로 강을 바라보고 있는 아이의 모습. 꾸미지 않 은 그 순수한 모습에 훼이드리온은 빙그레 미소지으며 달달한 맛의 음료 수를 한 모금 더 목으로 넘겼다. 톡 쏘면서도 달콤한 이 맛은 아무래도 다이사 같았다. 문득 조금 전의 일이 생각났다. 승선소에서 본 그 잠깐의 모습. 잘못 봤 다고 생각했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분명히 두 눈에 들어왔었다고 그는 생 각했다. "휴우……." 강바람에 실어보내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그는 옛 기억을 떠올렸다. 왕성 수석마법사 필로윈에게는 아끼는 수제자가 한 명 있었다. 그의 이 름은 카를레오 폰 이흐리트. 그의 이름에 많은 사람들이 그를 귀족으로 오인하기도 하지만, 그때마다 그는 친절하게 그들에게 대답해주었다. "제 이름의 폰은 고대어로 VON이 아니라 PHONE입니다. 전 무능력한 귀족 이 될 생각이 전혀 없거든요."라고 말이다. 그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거짓이 없고 꾸밈이 없으며 언제나 순 수한 의도로 남을 대했다. 그런 탓에 그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었고,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던 것이다. 필로윈은 그 중에서 후자에 속했다. 분명 카를레오의 실력 때문에 수제 자로 두기는 했지만, 마법사다운 영악함이 그에게는 없었고, 또한 어느 때나 거짓없이 살아감을 목표로 하는 카를레오의 행동에는 마법사로서 필요한 자질이 많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필로윈의 집무실로 찾아온 카를레오가 왕성에서 나가겠 다고 선언했다. 이유는 훼이드리온이 후계자 수련을 떠난 목적과도 비슷 한 마스터 카드를 깨닫기 위해서. 단지 훼이드리온은 마스터 카드를 '알 기' 위해서였고, 그는 '깨닫기' 위해서, 라는 차이 뿐이었다. 필로윈은 그것을 허락했고, 카를레오는 그 날 미련 없이 왕성을 떠났다. '벌써 5년 전인가, 그게.' 훼이드리온과 카를레오의 사이가 좋았다는 사실은 왕성에 사는 누구라 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카를레오가 떠났다는 말을 들은 그 날, 어린 마음에 상처를 입은 훼이드리온은 태자로서 지키던 자존심도 잊어 버리고 눈물을 쏟으며 울었다. 그만큼 그는 훼이드리온의 많은 부분을 차 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그를 잘못 봤을 리가 없었다. 무슨 일이 있는지는 모르겠지 만 카를레오, 그는 분명히 승선소에 나타났었고, 놓쳐버렸지만 훼이드리 온은 그를 분명히 보았다. 아니, 훼이드리온 스스로는 그렇게 믿고 싶었 다. 물빛과도 같은 밝은 푸른 색 머리카락과 언제나 순수하게 빛나던 눈동 자. 조금은 학자풍의 분위기를 내고 싶다고 무테의 안경을 쓴 채로 밝게 웃음 지어주던 카를레오의 모습이 불쑥 기억 속에서 솟아나자, 그는 눈이 흐리멍텅하게 부풀어오르는 것 같았다. "휴우." 다시 한번 한숨을 쉬면서 가슴을 메우고 있던 답답함을 조금이라도 벗 어보려는 그는 눈을 비비며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그 탓에 시선이 자연 스럽게 선수루 아래 갑판으로 향했고, 그는 충격으로 음료수가 든 잔을 떨어뜨릴 뻔했다. 갑자기 세게 불어오는 강바람 덕분에 길게 기른 푸른색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수습하며 난처하게 웃는 한 남자의 모습. 무테의 안경을 쓴 채 난 처하면서도 순수하게 웃는 그를 보는 순간, 훼이드리온은 둔탁한 무기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느꼈다. 그였다. 훼이드리온이 기다리던 바로 그였던 것이다. "…레오?" 어릴 때 즐겨 부르던 애칭을 중얼거린 훼이드리온. 놀랍게도 그가 그 소 리를 알아들었는지 무언가를 찾는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우연찮게 선수루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그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푸른 눈동자 의 시선을 발견해버리고 말았다.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태자 저하……?" 갑자기 거세진 강바람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람들의 소음 속에서, 둘은 침묵을 지킨 채 서로를 향해 시선을 고정시키고, 그렇게 적막을 흘 려보냈다. --------------------------------------------------------------------- 매일 연재의 불씨를 당기면서, 48편입니다.(^^^) 잘들 지내고 계시죠? 하이스들요, 팀군입니다. 아아, 서둘러 연재를 해서 빨리빨리 3권을 완 성시켜야할 것 같습니다. 어찌된 일인지, 저희 학교에서 기말고사를 11월 초에 국수영.을 치고 11월 말에 남은 것들을 친다고 정해버렸더군 요. 이럼, 11월말이 마감인데 크나큰 피해를 입고마는 것입니다. 으허어. 배가 나왔습니다. 몇 가지 이해 안되시는 용어가 있을 지도 모르겠네요. 선수 - 뱃머리를 뜻합니다. 선수루 - 선수 부분에 갑판보다 높게 만들 어 배가 나아가는 방향을 쉽게 구경할 수 있는 곳이죠. 선수루 갑판 - 말 그대로 선수루의 갑판입니다. 흐음. 새로운 캐릭터이죠? 카를레오 폰 이흐리트. 조금은 성격 표현이 힘 든 녀석이기는 하지만, 열심히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의 여정 에 많은 영향을 끼치리라 기대되는 녀석이라서. 아하하. 자아, 그럼. 49편에서 뵙겠습니다.(>.<) 꾸벅.(___) 어둠의 기사 DARK KNIGHT TEAM... P.S 추천 감상 비평. 주시면 감사하옵니다.(___) P.S 2 이로서. 10월달 10편 연재 완성.(---!) 번 호 : 51 / 52 등록일 : 2000년 11월 01일 23:45 등록자 : 암음기사 조 회 : 135 건 제 목 : [카드 게임 판타지]『카드 마스터(Card Master)』#049 카드 게임 판타지(Card Game Fantasy) 카드 마스터(Card Master) 49. "…여긴 어쩐 일이세요?" 객실층 1층에 마련된 식당. 사람들이 적은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훼이드 리온과 아이, 그리고 카를레오가 한 테이블에 착석해있었다. 살구 색의 연한 디자인과 함께 놓여진 하얀 식탁보가 깔끔해 보이는 식탁, 그리고 세련된 곡선을 가진 의자들. 식당 전체에 울려 퍼지는 차분한 선율이 고 요함을 더욱 가중시키며 그들의 분위기를 이끌고 있다. 오랜 침묵이 이어지는 동안 아이가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여 온몸으로 그것을 표출해내고 있을 때, 바닥까지 닿을 정도로 긴 짙은 청색의 장발 만 빼면 전형적인 학자의 모습을 하고 있는 카를레오가 조용히 입을 열 었다. 앞서 신분을 밝히지 말아달라는 훼이드리온의 부탁은 충실히 이행 하고 있었다. "…여행 중이야." 단순한 여행은 아니었지만, 태자의 나이를 알고 있는 카를레오는 단숨에 여행의 진면목을 깨닫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 틈을 타 훼이드리온이 질문 은 던진다. "그러는 레오는 어쩐 일이야?" "저도 뭐, 비슷해요. 여행 중이죠." 어깨를 으쓱하면서 말하는 그의 태도는 지극히 일상적이었다. 그리고 이 들 사이에 흐르는 대화도 또한 평범하였기 때문에, 누구도 그들은 5년 만 에 만난 인물들로 보기는 어려웠다. 물론 아이도 그것을 알지 못했다. '대체 어떤 관계지?' 아이는 또 다시 침묵해버리는 안경 낀 남자와 훼이드리온은 한번씩 쳐 다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기 식당에 내려올 때까지도 둘은 한두 마 디 외에는 대화를 나누지 않았고, 이곳에 와서도 이렇게 침묵을 지키고 있던 것이었다. 근본적으로, 아이는 이런 분위기를 싫어했다. 하지만 자신이 뭐라고 말을 꺼내기에는 어째 둘 사이에 흐르는 분위기 가 교묘하게 경직되어있는 탓에 섣불리 말을 꺼내는 것은 자제하고, 대신 둘의 관계를 짐작해보기로 했다. 이 둘이 만난 건 바로 조금 전이었다. 그녀가 한참 셀라드레인 강의 정 경을 감상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을 때, 옆에서 훼이드리온은 다이사를 마시며 깊은 상념에 잠겨있었다. 무슨 일일까 물어보고 싶었던 그녀였지 만 어쩐지 관계해서는 안될 영역인 것도 같아서 잠자코 풍경 감상에만 눈을 쏟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불어오는 바람에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휘날리는 머 리카락을 제어하기 위해 손으로 마리를 감싸며 어쩔 수 없이 돌아섰고, 그가 갑판을 향해 멍한 시선을 던지는 모습을 목격했다. 그래서 자연스럽 게 그의 시선을 따라 눈동자를 이동시키자, 그곳에는 자신보다 더 긴 머 리카락을, 게다가 짙은 청색을 가진 머리카락을 바람에 날리고 있는 한 남자가 서있었고, 그 남자가 바로 눈앞에 있는 이 학자풍의 남자였다. 무언가 굉장히 사정이 깊은 사이인지 둘은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하더니, 이내 청발의 남자가 선수루 갑판으로 올라와 훼이드리온에게 고 개 숙여 인사를 했다. 그것도 존댓말을 사용해서. 더 놀라운 것은 그의 태도가 지극히 당연하다는 것처럼 반말로 인사를 받는 훼이드리온의 모습이었다. 지금까지 같이 지내오면서 자신말고는 그 누구도 반말로 대하지 않던 그였기에, 아이는 둘의 관계가 더욱 미묘해짐 을 알 수 있었다. 뭔가 단순한 사이는 아닌 것이 분명했다. '가장 확률이 놓은 것은, 레이엔트 가문에 잠시 종사했었던 자…라는 건 데 말이야.' 그래도 그녀는 제법 진실에 근접한 가설을 세우고 있었다. 검은 눈동자를 두 명의 남자 사이로 쉴새없이 굴리며 열심히 추리를 하 고 있는 아이의 상태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그들의 침묵도 다시 입을 연 훼이드리온의 말에 의해 깨어졌다. "어떻게 지냈어?" 한참만에 나온 질문조차도 정말 일상적이었다. 카를레오는 손가락을 이 용하여 안경을 위로 치켜올리며 잔잔한 미소를 띄웠다. "곳곳을 여행하고 다녔어요. 대륙 최남부에 살고 있다는 레이트 족도 한 번 만나봤고, 서쪽 끝의 낭떠러지에도 가봤고요. 뭐, 대륙을 이리저리 돌 아다니면서, 그렇게 지냈는데요. …훼온 님은?" 극존칭이 아닌 어투로 봐서는 둘 사이가 꽤 가깝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아이는 짐작하고 있던 사실을 확인하고 더욱 눈동자를 빠르게 굴 렸다. "나야… 늘 그렇게. 크게 달라지진 않았어, 여행을 떠나기 전까지는." "흐음, 그래요? 여전히 검술에 밖에 취미를 두지 못하고 계시는 건가 요?" 왕성에서의 생활, 그 중에서 유일하게 태자의 마음을 잡아끈 것이 검술 이었다는 것은 카를레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태자를 항상 걱정하던 그였기에, 오랜만에 만난 훼이드리온에게 던진 질문은 당연한 것이었다. 훼이드리온은 왕성 안에서의 생활이 생각났는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마스터 카드…라고 알아?" "마스터 카드요? 물론이죠. 잘 알고 있어요. 그런데 그게 왜?" 반문하는 그를 잠깐 바라보던 푸른 눈동자는, 웃으면 눈이 사라져버리는 카를레오의 얼굴에 잠시 머물렀다가 한번 깜빡이더니 진정을 찾았다. "얼마 전에 마스터 카드라는 것을 알게 됐어. 그리고, 검술 이외의 것에 도 내가 흥미를 붙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지금 이 여행의 목적지도 마스터 카드 대회가 열리는 마법사들의 도시 에코야." "호오, 그래요? 대회에 출전하시는 건가요?" "응." 간단히 고개를 끄덕이는 훼이드리온과 뒤이어서 "마스터 카드라면 저도 꽤 아는데…"로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하는 카를레오. 얼핏보면 화기애애 한 분위기의 대화가 진행되어간다고 생각하기 쉬울 그런 장면들의 연속 이었지만, 그 속에 흐르는 기묘한 긴장감은 대화를 구경하고 있는 아이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이상해.' 확실히 둘 사이에 무엇인가, 앙금 비슷한 것이 있다고 그녀는 추측했다. 훼이드리온의 웃는 얼굴이 저렇게 어색하게 보일 때도 따로 없었고, 그에 응수하는 청발의 남자의 미소조차 어딘가 모르게 비어있었다. 결론적으로 둘은 중요한 어떤 것을 계속 피하면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 던 것이다. 그녀는 답답했지만 마땅히 끼어 들 타이밍을 잡지 못하여 애꿎은 음료 수 잔만 손으로 가지고 놀았다. 잔에는 오렌지색의 액체, 한마디로 오렌 지 주스가 담겨져 있었다. '이게 아닌데…….' 가끔씩 띄우는 미소로서 좋은 분위기의 대화를 이끌어나가고 있던 훼이 드리온은 속으로 한숨과 함께 자괴감을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분명히 평 상시의 대화처럼 그렇게 말하고 있었지만, 분명히 이 이상한 분위기를 알 고 있었다. 그런데도 무엇이 문제인지 섣불리 본론을 꺼내지는 못하고 주 위만을 배회하고 있는 것이다. 자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행동하지 못 하는 것. 거기서부터 그는 혼란을 감지했다. 무엇일까. 무엇이 그가 그 간단한 질문을 하는 것을 이렇게 방해하는 것 일까. 훼이드리온은 웃는 것도 참으로 힘들다고 생각하며 카를레오의 질문에 대답했다. "마스터 카드는 게임밖에, 그 외의 지식은 거의 전무해." 마스터 카드에 대해서 알기 위해 떠난 여행이니, 훼이드리온의 대답은 당연한 것이었다. 카를레오도 수긍이 가는지 또 다시 흘러 내려온 안경을 밀어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짤막한 대답. 카를레오도 껄끄러움을 느끼던 차라 대답을 길게 하지 않 았다. 이 어색함을 사라지게 한다면 태자와 즐거운 대화를 더 이어나갈 수 있었겠지만, 그전까지는 자연스럽게 웃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 증거로, 웃으면 사라져버리는 자신의 눈이 긴장으로 피로함을 토로하 고 있었던 것이다. 카를레오는 자신의 긴 머리카락이 바닥에 닿은 것은 아닌지는 않았는지 걱정하듯 의자 밑으로 시선을 내렸다가 다시 올렸다. 덕분에 불편한 분위 기가 더욱 가중되어버렸다. 그는 오렌지주스를 홀짝이며 동그랗게 뜬눈으 로 태자와 자신을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는 소녀에게 시선을 한번 던졌다 가 다시 태자를 바라보았다. 잠시 마주쳤던 시선을 급히 회피하는 태자의 모습이 그의 가슴을 아련 하게 울렸다. 그러고 보니, 보기에는 즐거운 대화를 나누었던 것 같지만 한번도 눈을 마주쳤던 적은 없었다. '전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5년 전. 왕성을 나오면서 어린 태자에게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던 것 이 이런 결과는 낳게 될 줄이야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 당시, 마스터 카 드에 의문을 품고 본래의 학자적인 연구욕이 타올라 왕성을 나오면서 어 린 태자를 생각해 말도 없이 그냥 떠났던 것이다. 다시는 만날 일은 없을 거라고 예상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지금, 15세의 나이로 성장해버린 태자는 이렇게 그의 앞에 앉아 있었다. 어린 티가 남아있기는 하지만 여러 모로 상당히 발전한 모습으 로. 하지만 역시 거북했던 것인지 제대로 된 이야기는 하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었다. '모두 나의 잘못이다.' 카를레오는 진심으로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죄송하군요. 제 잘못이지요." 차분한 어조로, 그러나 죄책감이 확연하게 묻어나는 어조로 말을 꺼내는 그의 태도에 훼이드리온은 고개를 번쩍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잠시 입을 다물어 호흡을 가라앉히더니 이내 다시 말했다. "아무 말 없이 옆을 떠난 것. 모두 저의 잘못이지요. 훼온 님의 생각은 하지 못하고 혼자만의 욕심을 위해서 말도 없이 떠난 것… 죄송합니다." 훼이드리온은 그가 진심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고개 를 옆으로 조금 돌린 채 입술을 깨물 듯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목소리 까지 가끔 떠는 그 태도가 거짓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카를레오의 말에서는 때묻지 않은 순수한 '진심'이 묻어났다. 역시 그다운 사과였다. "…아니야." 뭔가 막혀있던 게 터져 나오는 듯이 흘러나오는 한마디에 훼이드리온은 이상하게 가슴이 진정됨을 느꼈다. 뭐라고 차마 설명할 수 없을 것처럼 막혀있던 그것이 한순간에 깨끗이 씻겨지는 감각은 꽤 멋지고 아름다운 경험이었다. "이제… 괜찮아. 처음에는 조금 섭섭했지만, 지금은 아냐. 지금은 그때보 다 훨씬 컸고 생각하는 것도 많이 변했으니까. 섭섭하지 않아, 이제." 그리고 그는 질문을 던질 준비를 갖추었다. "다만, 궁금한 게 하나 있어." "…무엇이죠?" 카를레오의 얼굴이 사뭇 긴장되어 보였다. 훼이드리온은, 이번에는 전혀 힘들이지 않고 얼굴 가득히 엷게 미소를 번지게 하고는 질문을 던졌다. "그때, 왜 아무 말도 없이 떠난 거야? 왜 그랬던 거야?" 지금까지 이 질문을 하지 못해 그렇게 빙 둘러왔던 것이었다. 어색한 가 운데 즐겁지 못한 대화를 나누고 불편하게 웃었으며 요지를 빗겨가느라 힘들었던 기억들이 허망하게 느껴지면서 그는 다시 한번 빙긋 웃었다. 이제 답을 기다릴 시간이었다. 카를레오의 답을 기다리는 시간은 길어도 상관없다고 그는 생각했지만, 의외로 대답은 빨리 들을 수 있었다. "마스터 카드… 그것 때문이었어요, 제가 떠난 건." 아이와 훼이드리온의 시선이 동시에 그를 향했다. 그는 평온한 어조로 말을 잇고 있었다. "그 당시 전 스승님이 제작하기 시작하신 마스터 카드 관련 서적을 위 한 자료 조사를 행하고 있었죠. 그래서 여러 곳에 문의를 해보고 정보 길 드에 의뢰도 해보고 해서 상당량의 자료를 수집할 수 있었어요. 그러나 그것들을 정리하기 위해 하나씩 살펴보는 과정에서 의문이 생겼죠." 필로윈을 아직 '스승님'이라고 지칭하는 카를레오. 훼이드리온은 문득 그 가 필로윈의 제자로서 마법을 수련하던 그때의 모습이 떠올라 속으로 웃 고 말았다. 그때는 정말 이런 만남을 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는데 말이다. 그는 자신의 앞에 놓인, 조금도 비우지 않은 오렌지주스를 들어 목으로 삼켰다. 시원한 감각과 함께 다시 정신을 차리고, 그의 이야기를 경청하기로 했다. "마스터 카드라는 게임에는 여러 가지로 어색한 부분이 많았던 것이에 요. 게다가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것들도 있었고 말이죠. 그 부분에서 저는 연구욕을 느꼈던 거예요. 제가 본래 학자 지망이었던 것, 기억하시죠?" 카를리오의 물음에 훼이드리온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긍정의 뜻을 표 했다. 순전히 '학자에게는 안경이 어울린다.'라는 지론 아래, 눈도 나쁘지 않으면서 안경을 만들어 쓸 정도로 학자가 되고 싶어했던 그를 잘 알고 있는 훼이드리온은 뒤에 이어지는 그의 말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전 생애 최초로 스스로 연구해보고 싶은 일이 생겼다고 직감했죠. 그래 서 서둘러 연구를 위한 자료를 찾아 나서기 위해 스승님께 떠나고 싶다 고 말씀을 들렸고, 스승님께서는 의외로 쉽게 절 보내주시더군요. 전 정 말 기뻐서, 그 마음이 식어버리기 전에 모든 준비를 재빨리 끝마치고 길 을 나섰던 거죠." 하지만, 훼이드리온이 원하는 궁극적인 의문의 답을 풀리지 않고 있던 터라, 그는 카를레오를 지그시 응시했다. 대답을 요구하는 무언의 메시지. 카를레오는 안 그래도 말하려고 했다는 듯이 빙긋이 눈으로 웃고는 말했 다. "물론 훼온 님에게 먼저 말씀드리고 떠나야하는 건 아닐지 생각했습니 다만, 이내 그냥 맘을 놓아버렸어요. 아무래도… 훼온 님을 뵈게 되면 길 을 떠날 수 없을 것 같아서……." 그의 눈빛이 약간은 어두워지면서 태자를 바라보았다. 그때와는 너무나 도 달라져버린 태자는 그때와 같은 순수하게 빛나는 푸른 눈동자로 자신 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5년 동안 속앓이를 해오던 그 사실을 털어놓게 되었다. "…훼온 님이 상처받으실 것 같아서, 그래서 말도 없이 떠났던 것입니 다." 한마디로, 근본적으로는 훼이드리온을 걱정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어쩔 수 없이 떠났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것이 어린 태자에게 오히려 상처를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한 것이었다. 훼이드리온은 막상 이유를 듣고 보니, 너무나 카를레오다운 이유라서 뭐 라고 할 말도 없어져버렸다. 모든 것에 순수하게 대처하는 그는 마지막까 지 그의 방식답게 판단했던 것이다. 그것을 그 누가 책할 수 있겠는가. '하하… 간단한 것이었잖아.' 고민했던 모든 것들이 완벽하게 풀려나가자, 그는 마음이 한결 더 상쾌 해짐을 느꼈다. 이제야 예전 같이 즐거운 대화를 해나갈 수 있겠다는 생 각에 그는 기쁘게 웃음 지었다. "…이제 다 끝난 거야?" "응?" 예상하지 못한 음성에 훼이드리온은 괜히 당혹스러워하며 옆을 쳐다보 았다. 어느새 다 비워버린 음료수 잔을 한 손에 들고 흔들고 있던 아이가 싱글싱글 무섭게(?) 웃고 있었다. "나는 완전히 없는 사람 취급하면서, 둘 사이에 흐르던 오해를 모두 풀 었냐는 말이야." "아, 아니, 저기, 아이. 그런 게 아니고 말이야." 그녀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물론 '그런 게' 아니었겠지. 설마 훼온이 한 일이 '그런 게'에 속하겠 어?" "이, 일부러 한 게 아니라니까……" "당연히 '일부러' 한 게 아니었겠지. '일부러' 한 거라면 내가 가만히 있 겠어?" 식은땀은 뻘뻘 흘리면서 뭐라고 변명을 해보려는 훼이드리온과 웃음이 지워지지 않는 석고상 같은 얼굴로 간단하게 응수하는 아이. 역시, 아이 를 상대하기에는 훼이드리온의 능력은 너무나도 미약하고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아, 아이… 고의가 아니었어, 용서해 줘…" "아아, '고의'가 아니었던 거야? 난 또 '의도적'으로 그런 건 줄 알았지." 끝도 없이 이어질 식은땀과 무시무시한 미소의 이야기. 대화는 참으로 오묘한 어휘선택의 연속으로 가고 있었다. 상황을 모두 겪어보지 않은 자 들이 들었다면, 언어유희를 즐기는 이들의 영양가 없는 대화인 줄 알 것 이 분명했다. "하하하." 도망칠 수 없는 아이의 미소에 사로잡혀서 곤욕을 당하고 있는 훼이드 리온에게 천상의 구원이 깃 든 웃음소리가 들렸으니, 그 웃음소리의 주인 은 바로 카를레오였다. "그러고 보니, 이쪽 숙녀 분은 모르는 분이시군요?" "네, 저도 그쪽은 모르는 분이세요." 단단하게 심통이 난 것인지, 아이는 카를레오에게조차 삐딱하게 미소지 었다. 카를레오는 생각지도 못한 반격을 가해오는 그녀의 반응에 헛기침 을 삼키며 당황해버렸다. 5년 동안의 여행 중에 만난 사람들 중 그 누구 도 이런 반응을 보인 적은 없었기에, 새로우면서도 뭔가 당혹스러웠다. 카를레오는 머리카락을 긁적긁적 만지면서 어색하게 웃었다. "저, 저기 훼온 님? 소개 좀 해주시겠어요?" 결국 구원의 요청은 다시 훼이드리온에게로 이어지고, 아이의 살벌한 반 응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던 그는 서둘러 둘을 소개했다. "아, 이쪽은 카를레오 폰 이흐리트…라고 하고, 예전에 나의 스승이었어. 여러 가지 학문을 가르쳐주었지. 그리고 이쪽은 아이 네드런이고, 현재 여행 동료야. 인사해." 급히 소개하는 가운데에서도 자신의 신분이 들킬 여지는 충분히 없애고 말한 훼이드리온의 노력으로 아이는 둘의 관계에 아무런 의심을 갖지 않 고 카를레오에게 인사했다. "인사가 굉장히 늦었지만, 처음 뵙겠어요, 이름은 방금 들으신 대로 아 이라고 해요." "아, 네. 카를레오… 레오라고 불러주시면 돼요. 안녕하세요." 그러나, 가지고 있던 의문은 풀었지만 상한 속은 제대로 풀리지 않은 것 인지 그녀의 말은 여전히 뼈를 가지고 있었고 아름다운 미소에서도 예리 한 감이 느껴지고 있었다. 카를레오는 훼이드리온과 마찬가지로 생성되는 땀을 손으로 훔쳐냈다. 보다못한 훼이드리온이 귓속말로 아이에게 소곤댔다. "혼자 놔둬서 정말 미안해애. 그러니까, 이제 그만 화 풀어, 응? 레오는 정말 오랜만에 만난 사람이란 말이야. 언제 헤어질지도 모르는데 좋은 인 상을 주고 싶다고." "호오, 그래? 그럼 내가 가지는 인상은 상관없다는 거야?" 카를레오는 알아서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고, 훼이드리온은 그런 그에 게 고마움을 느끼면서도 아이 때문에 당황하여 말했다. "그건 절대 아니고. 아무튼 나중에 다시 둘만 남으면 확실하게 보상해줄 테니까, 지금은 화를 풀어주면 안될까? 응, 아이?" 참으로 힘들다는 듯이 열심히 그녀를 달래고 있는 태자의 모습을 살짝 눈동자만 돌려 확인하는 카를레오는 속으로 그에게 속삭였다. '여행길이 힘드시겠어요, 태자 저하.' 카를레오의 마음은 언젠가 아이를 찾아왔었던 의문의 마법사, 사르덴과 같은 맥락을 가지고 있었다. "정말? 어떻게 보상해줄 건데?" "…어떻게 해주면 돼?" 좋아하는 여인에게 미움을 받는다는 것은 정말 슬픈 일이기 때문에, 화 를 풀려는 훼이드리온의 몸짓은 처절하기까지 했다. 그녀가 맘을 풀어주 기만 한다면, 나중에 무슨 일을 해도 상관없다는 게 지금 그의 진정한 심 정이었다. 그런 그의 마음이 통한 것일까. 냉랭하게 침묵하던 그녀의 검은 눈동자 에 따뜻한 기가 감돌았다. "걱정 마, 그냥 장난이었어." "…에에?" 황당하다는 뜻을 잔뜩 내포하고 있는 그의 음성에 아이는 장난스럽게 빙긋 웃었다. "나만 혼자 내버려둬서 조금 심술이 났어. 그래서 조금 골려주려고 했던 건데. 이렇게 당황해버리면 내가 미안해지잖아." "그, 그랬던 거였어?" "응, 그랬던 거였어. 자신이 얼마나 잘못을 한 건지, 잘 알겠지?" 정말 장난이었던 건지 본래의 아름다운 미소를 얼굴 가득 떠올리는 그 녀를 바라보며, 훼이드리온은 헛웃음을 터뜨려 버렸다. 이렇게 바로 당할 줄이야, 정말 생각도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워할 수가 없다니까.' 그녀의 미소와 마주하여 같이 웃어준 훼이드리온. 둘의 얼굴은 모든 갈 등이 풀린 탓에 시원한 물 한잔을 마시고 난 후의 청량감을 경험하는 느 낌 그대로였다. 훼이드리온과 아이의 분위기를 은근슬쩍 살피던 카를레오는 둘 사이에 흐르던 긴장이 사라짐을 알아채고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끝나셨나요?" "아, 응, 레오. 이제 됐어." "잘됐군요." 카를레오와 훼이드리온, 그리고 아이는 처음으로 모두 같이 웃음 지을 수 있었다. 이제야 진정으로 즐거운 대화를 풀어나갈 수 있을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그때, 마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는 듯이 아이가 카를레오를 향해 입을 열었다. "마스터 카드 연구를 하셨다고 하셨죠?" 그가 고개를 돌린 탓에 조금 흩어져버린 머리카락을 정리하면서 대답했 다.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끝이 안보이더군요. 그런데 그것은 왜 물으시죠?" "…아, 저도 마스터 카드 게이머거든요. 그래서 마스터 카드에 흥미가 많은데, 혹시 지금까지 연구하신 것들을 들을 수 있나해서요. 될까요?" 잠시 카를레오의 짙은 청색의 장발에 눈길을 빼앗겨버린 아이가 제 정 신을 챙기면서 의도를 밝혔다. 그녀의 말에 훼이드리온도 눈이 반짝거리 며 카를레오를 응시하기 시작했다. '얘기해 줘!'라는 강렬한 그의 의지가 카를레오의 안면을 따갑게 만들 정도였다. "…흐음, 그렇게 안 보셔도 돼요. 얘기해드릴 테니까요. 숨길 이야기도 아니고 연구가 종료되면 어차피 세상에 모두 밝힐 건데요, 뭐." "와아, 고마워, 레오!" "고마워요." 열렬하게 반응하는 훼이드리온과 기쁘게 웃는 아이. 카를레오는 둘이 어 쩐지 많이 닮은 것 같아서 "하하핫."하고 소리내어 웃어버렸다. 오랜 여 행을 한 동료들은 서로 닮는다는 이야기를 어디서 들어본 것도 같았다. "그런데, 혹시 '마법왕국 라시엔트 건국기'라는 책 아시는지요?" "그건 왜요?" 아이의 물음에 카를레오가 눈이 없어져버리는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답 했다. "그 책에 꽤 많은 이야기들이 나와있어서요. 설명이 쉽거든요." "나, 그 책 있어." 훼이드리온이 희망한 어조로 말했다. 아이와 카를레오의 시선이 동시에 그를 향했다. "어, 정말?" "응. 여행 중에 읽으려고 들고 왔거든. 지금 가서 가지고 올게." 그는 "빨리 와!"라고 소리치는 아이의 배웅을 받으며 서둘러서 식당 문 을 열고 달려나갔다. 들어오려던 손님들이 갑작스런 그의 돌격에 조금 주 춤했지만, 이내 문을 닫고 식당 안으로 들어와 식탁을 찾아 앉았다. "참 밝은 분이시죠?" "네? 아, 훼온 말인가요?" 카를레오가 빙긋이 웃으며 그녀에게 물었고, 그녀는 잠시 반문을 했다가 즐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굉장히 밝은 애죠." 전적으로 동감한다는 듯이 말하는 아이. 카를레오도 똑같이 고개를 끄덕 였다. 그의 머리 속에는 어린 시절 훼이드리온의 모습이 떠올라있었다. "그 얘기 들었냐?" 문득 방금 들어온 식당의 손님들의 이야기 소리가 들렸다. 식당 안에 사 람들이 별로 없는 관계로 웬만큼 작게 하지 않으면 식당 끝까지 목소리 가 들렸다. 그런 탓에 아이와 카를레오는 그 어떠한 제약도 없이 다른 식 탁에 앉은 이들의 대화를 본의 아니게 들을 수 있었다. "이 배에 '흑의 마스터'가 승선했다던데?" "허어, 뭐? 그게 정말이야? 마스터 카드 게이머들이 많이 탔다는 이야기 는 들었는데, 설마 흑의 마스터까지 승선할 줄은 몰랐는데?" "나도 놀랬다니까. 운 좋으면, 흑의 마스터의 얼굴도 볼 수 있지 않겠 어?" "어디까지나 운이 좋으면, 이지만 말이야. 하핫, 신기하군, 그래." 그쯤에서 카를레오가 놀랍다는 얼굴로 멍하니 입을 열었다. "흑의… 마스터가?" "흑의 마스터…라면, 그 카드 마스터 중 최연소인 그?" 아이도 놀라움을 숨기지 않고 여실히 드러내며 중얼거리듯이 물음표를 붙였다. 카를레오의 끄덕임에 자신의 지식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이윽고 황당하다는 듯이 "헤에."라는 기묘한 음성을 남겼다. '모습을 거의 드러내지 않던 흑의 마스터가 이 배에 탔다고?' 아이는 흑의 마스터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서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이 배에 탔다는 이야기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흑의 마스터. 온통 검은 색으로 무장해있다는 그는 마스터 중 최연소이 면서도 그 어느 누구도 정체를 알지 못한다는 인물이잖아. 그런 자가 이 배에 탔다니?' 아무래도 헛소문일 가능성이 농후했지만, 그래도 흥미가 끌림을 막을 수 없는 이유는 그녀도 마스터 카드 게이머 중 한 명이었기 때문이었다. --------------------------------------------------------------------- ...49편입니다. 매일연재 3일째. 허억.; 제대로만 된다면 대망의 50편을 내 일 올릴 수도 있는 거로군요.(+ + +) 50회 이벤트로. 축전 이벤트.를 이어갈까 합니다. 가난한 이유로, 게다가 부상으로 드릴 것도 없어서 단지 축전을 실어드립니다.로 끝나지만.;;; 참여 좀 해주세요.(+ + +) 아, 그리고, 보내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감상 써주신 스파니아님. 감사합니다. 건필하게요오옷.(>.<) 그럼 50편을 쓰기 위하여 팀군은 서둘러 가겠습니다. 모두들, 좋은 하루들 되세요.(>.<) 어둠의 기사 DARK KNIGHT TEAM... P.S 추천 감상 비평. 기다리고 있어요오오옷.(>.<) P.S 2 50장부터 마스터 카드 대전이 있을 예정입니다.(+ + +) 번 호 : 52 / 52 등록일 : 2000년 11월 02일 22:19 등록자 : 암음기사 조 회 : 29 건 제 목 : [카드 게임 판타지]『카드 마스터(Card Master)』#050 카드 게임 판타지(Card Game Fantasy) 카드 마스터(Card Master) 50. 흑의 마스터의 출현에 대한 심도 있는 토론을 벌일 준비를 하고 있는 아이와 카를레오의 사정을 알 리가 전무한 훼이드리온은 식당에서 뛰쳐 나와 계단을 통해 4층으로 내려가고 있던 중이었다. 지금 그의 마음은 가 볍기 그지없었기 때문에, 그 움직임에도 무거움이란 손을 씻고 뒤져봐도 찾을 수 없었다. 카를레오, 그를 믿었던 것이 올바른 선택이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게 되자, 예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그런 슬픈 기분도 완전하게 떨쳐낼 수 있 었다.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으며, 게다가 요즘 들어서는 정말 생각도 못 하고 있던 슬픈 마음이 그를 뜻하지 않게 만나게 되어서 슬금슬금 마음 을 차지해나가고 있었던 참이었는데, 그의 솔직한 대답이 그 마음을 한번 에 풀어주었다. 훼이드리온은 옛 기억을 회상해보며 다시 그 시절로 돌아 갈 수 있음을 너무나도 감사하게 생각했다. 어린 시절, 누님 메이린느와 공부 선생이었던 카를레오만이 그를 이해해 주는 유이한 이들이었다는 사실을 그는 새삼스럽게 떠올려보며 히죽 웃 었다. '마스터 카드에 대한 이야기라니!' 그리고 거기다가 정말 생각지도 못한 우연으로 카를레오가 그동안 여행 을 하면서 마스터 카드를 연구한 결과를 알려준다고 하지 않는가. 그것은 훼이드리온의 후계자 수련의 목적과도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 이야기라, 그는 이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다. 여행을 하면서 가졌던 마스터 카드에 대한 모든 의문들을 이 한번에 다 풀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기에, 카를 레오가 필요하다던 책을 가지러 뛰어가는 그의 움직임은 더욱 빨라졌다. 타다닥. 탁! 4층으로 통하는 계단의 마지막 5개는 그냥 뛰어내려버리고는 종아리를 타고 무릎을 거쳐 머리까지 올라오는 충격을 참아내는 것도 잠시, 서둘러 배낭을 놓아둔 객실로 뛰어갔다. 417호. 혹은 418호. 아무튼 자신들에게 배정된 객실 앞에 도착한 훼이드 리온은 숨을 고르기도 무섭게 주머니를 뒤져 열쇠를 찾았다. 수고스러울 것도 없는 작업이라 눈을 한번 깜빡거리기도 전에 주머니에 있던 열쇠는 이미 그의 손에 쥐어져있었다. 잽싸게 열쇠를 꺼낸 그 동작 그대로 문을 여는 훼이드리온. 급한 마음 때문인지 열쇠 구멍을 찾지 못해 조금 헤매었지만, 곧 문을 열 수 있었 다. 벌컥, 문을 열어제쳐 객실 안으로 뛰어든 그는 시선을 바로 왼쪽 침대로 돌렸다. 침대 위에 놓아두고 간 배낭은 기특하게도 아직 그 자리를 지킨 채 얌전히 앉아있었다. 그는 기쁜 얼굴로 배낭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 손은 곧 허공에서 정지해야만 했다. '……!' 뇌리를 깊숙이 파고드는 예리한 감각의 외침. 그것은 일순간 훼이드리온 의 몸 전체에 퍼진 신경을 자극하여 근육들을 긴장 상태로 몰아넣었다. 한마디로 그는 손을 어정쩡하게 공중에 든 상태에서 완전히 몸이 경직되 어버렸다는 것이다. 흔히, 의도하지 않은 상황에 갑자기 맞닥뜨렸을 때 보통 인간들이 보이는 반응이었다. 시선. 지금 훼이드리온의 전신에 퍼져있는 검사로서의 감각이 깨우쳐주 는 기괴한 섬뜩함의 정체는 바로 시선이었다. 누군가가 자신보다 일찍 이 방에 들어와, 그것도 올 줄 알았다는 듯이 아이의 침대 위에 앉아서 기다 리다가 때마침 문을 열고 들어오자 물끄러미 시선을 보내오고 있는 것이 다. 그렇게 몇 가지의 생각을 해보자, 그는 다시 한번 섬뜩해졌다. 곧 신체 의 모든 신경이 반응하여 근육이 움찔거렸다. 어쩌면 이 시선을 보내오고 있는 자가 자신의 반응을 보고 웃고 있는 지도 모를 일이다. '시선?' 그러고 보니, 이런 종류의 시선은 한번 느낀 적이 있었다. 어떠한 감정 도 들어있지 않으면서도 노골적으로 보내오는 그런 시선. 그는 기억을 더 듬어 올라간다, 라는 거추장스러운 작업 없이도 자연스럽게 그 기억을 되 살릴 수 있었다. 이건 케롯 마을에서 뜻하지 않게 겪었던 전투에서 만난 그 검은 옷을 입은 암살자 소년의 눈빛과 같았다. 이런 무감정한 시선은 분명히 그 소 년이었다. 누군지 모를 불한당의 정체를 알게 되자, 어쩐지 경직되어있던 근육들이 차츰 이완되어 간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확실히, 한번 만나본 적이 있는 자라서 그런가. 훼이드리온은 그 시선에 더욱 빠른 속도로 적응해나 갔다. 그러나, 온몸을 붙잡고 있던 긴장이 풀려나가는 것도 잠시, 다시 그의 머리 속에는 불길한 생각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 소년은, 케롯 마을에 서 자신에게 단검을 들이대다가 죽이지 않고 그냥 돌아가지 않았던가. "합격이다."라는 이해할 수 없는 말만을 남긴 채 말이다. '그렇다면, 혹시 지금 찾아온 것이 나를 죽이기 위해서라면, 처리하지 못 한 일을 마저 처리하기 위해 온 것이라면, 과연 나는 어떻게 대처해야하 는가.' 살기 위해서는 뭔들 못해, 라는 말은 들어본 적이 있지만, 지금 상황에 서는 그런 간단한 논리조차 적용시키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분명 그때의 전투는 소년이 봐준 것이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훼이드리온은 거의 완 벽하게 패배했다. 한마디로 지금이라도 소년이 마음을 먹는다면, 간단하 게 그의 목을 따고 유유히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훼이드리온은 또 다시 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허공에 떠있는 팔 근육이 슬슬 비명을 지를 때가 다가온다는 것은 알았지만, 섣불리 어 떤 행동을 나타낼 수도 없었다. 잘못했다가는 소년을 자극해버려서 이 세 상과 이별을 해야할 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저 위에는 아이가 있는데. 5년 만에 만난 카를레오도 있는데.' 새록새록 떠오르는 그들과의 추억들 때문에, 그의 마음은 더욱 조급해졌 다. 여기서 죽을 수는 없는 노릇, 그 어떤 저항이라도 해봐야한다고 그는 다짐했다. 혹시 그것이 무의미한 일로 변모해버릴 지라도. 조심스럽게 온몸의 힘을 뺐다. 근육이 굳어있으면 재빠른 행동을 할 수 없고, 그에 따라 검을 뽑는 시간도 훨씬 더디게 된다. 지금 순간에는 그 무엇보다도 '발검의 속도'가 중요하다. 그는 왼쪽 허리춤에서 묵직하게 자신을 알리고 있는 칼의 무게를 새삼 스럽게 깨우쳤다. 빨갛게 타오르는 업화와도 같은 깊은 색깔을 가진 칼집 안에 숨겨진 새하얀 순수의 칼날의 영상이 그의 눈앞에 선명하게 떠올랐 다. '할 수 있다, 난 할 수 있다.' 살기 위해서는 숨겨져 있는 능력까지 끌어내야 할 상황이 바로 지금이 었다. 조용한 복도. 조용한 방안. 조용한 공기의 흐름. 공간과 시간 자체가 멈 춰버린 듯 아무 것도 움직이지 않았다. 팽팽하게 조여져있는 듯한 공기를 느끼면서도 소년과 훼이드리온은 어느 쪽도 먼저 행동을 개시하지는 않 았다. 무엇보다도 소년 쪽은 아까 전부터 완벽하게 침묵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기묘한 정적이 흘렀다.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굳어있는 공기는 다시는 움 직이지 않을 것 같았고, 이마에 흐르는 땀을 주체할 수 없는 훼이드리온 의 긴장도 차츰 한계를 향하여 치닫고 있었다. '대체, 대체 뭘 어쩌자는 거지? 내가 먼저 행동하길 바라는 건가!' 참을 수 없는 폭발과 함께 훼이드리온의 손이 육안으로 식별이 불가능 할 정도의 빠르기로 칼의 손잡이를 향해 날아갔다. 곧 칼집 사이로 새하 얀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더니, 카강, 하는 작은 소음과 함께 그의 칼 이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돌진해 날아갔다. 멈칫. 그러나 소년은 그곳에 없었다. 분명히 있다고 느꼈던 아이의 침대에는 아무런 흔적도 없었고, 눈으로 확인한 지금도 아무도 없었다. 훼이드리온의 푸른 눈동자가 완전히 드러나며 놀라움을 떠올렸다. "…어?" 소년은 그곳에 없었다. 아니, 처음부터 없었다는 것이 아니다. 단지 어느 새 자리를 훼이드리온의 뒤로 이동했을 뿐이었다. "여기다." "헛!" 난데없이 등뒤에서 들려오는 낮은 미성의 목소리에 훼이드리온은 움찔 놀래며 후다닥 앞으로 나서며 뒤로 돌았다. 그러나 그 목소리의 임자에게 서 멀리 떨어진다는 것은, 객실의 크기상 별로 여의치 못하여 손만 뻗어 도 닿을 곳으로 움직였을 뿐이었다. 훼이드리온과 소년은 금방 마주 바라보게 되었다. 소년의 옷차림은 전과는 조금 달라져있었다. 어차피 검은 옷이었겠지만, 이번에는 짙은 검은 색의 로브를 두르고 나타난 것이다. 머리가 산발인 것은 여전했고 검은 눈동자도 침묵하며 깊게 가라 앉아있는 것도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소년은 전의 모습 그대로 훼이드리온 앞에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느껴지는군.' 검은 로브만 빼고는 똑같은 모습이었지만, 느낌이 달랐다. 전에는 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눈으로 직접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존재를 느낄 수 없었지만 지금은 앞에 있다는 것을 확연하게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 은 소년이 거리낌없이 존재감을 해방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소년은 그 가라앉은 눈동자로 물끄러미 훼이드리온을 바라보더니, 이내 천천히 아래로 시선을 이동시켰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훼이드리온의 손에 들린 칼에서 눈을 고정시키더니, 또 다시 침묵했다. 그러한 소년의 행동에 결과적으로 그는 무안해져버렸다. '칼을 집어넣으라는 뜻인가?' 여전히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을 하는 소년의 모습에 훼이드리온은 크게 숨을 들이키고 칼을 칼집으로 밀어 넣었다. 생각해보면, 소년이 맘 만 먹었다면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자신을 죽여버릴 수 있는데도 아 무런 짓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기만 했다. 그런 점을 고려하며, 소년은 자신을 죽이러온 것은 아닌 것 같았기 때문에 안심할 수 있었다. 칼이 완전히 모습을 감추자, 소년은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들면서 로 브 안의 팔을 움직였다. 덕분에 훼이드리온은 꿈쩍 놀래며 또 다시 칼을 꺼내들 뻔했지만, 소년의 손에 의해 모습을 드러낸 것은 다름 아닌 이레 브워츠 향을 진하게 피어 올리는 쿠키였다. 와삭. 한 입에 쏙 들어가는 크기를 가진 쿠키를 입안에 집어넣고 화끈하게 씹 어버리는 소년의 행동을 지켜보면서 훼이드리온은 전투를 벌인 그 날을 떠올렸다. 그때도 소년은 쿠키를 먹으면서 모습을 드러냈었다. 그는 소년에 대한 여러 가지 평가 중에서 하나의 결론을 얻어낼 수 있 었다. '과자를 좋아하는구나.' 어쩐지 직업에 상당히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입맛을 가진 소년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쿠키를 하나씩 먹어 가는 소년의 행동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훼 이드리온은 뭔가 상황이 맞지 않다는 것을 드디어 깨닫게 되었다. 이렇게 서로 바라보며 침묵을 지킬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상하게 차분한 소년의 태도에 그도 모르게 휩쓸려버린 것이다. 카리스마 를 묘하게 이상한 곳으로 뿜어대는 소년이었다. "저, 저기 말이에요." 소년은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그는 용건을 물을 권리와 의무가 있었다. "에, 그러니까. …왜 여기 계신 거죠?" 일단, 남의 방에 들어온 곳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기로 했다. 암살자란 직업에게는 문이란 무의미한 것이니까 말이다. 그는 뒷머리를 긁으면서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혹시 알 거 없다, 라고 대답하는 건 아니겠지?' 마침 입에 넣었던 쿠키를 마저 씹고 삼킨 소년이 지그시 입을 열었다. 달콤한 이레브워츠의 향이 날아들었다. "그렇군." "……?" 또 다시 혼란을 느끼는 훼이드리온. 정신 공격도 상당한 수준에 이르러 있는 소년의 능력에는 도저히 당해낼 재간이 없는 그는 소년의 심오한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마구 뒤엉키는 생각을 진정시켜야만 했다. 그러나 뒤이어지는 소년의 말에 그는 정신적으로 다시 한번 타격을 받 아야만 했다. "흠." 때에 따라서는 엄청나게 심오한 뜻을 함축할 수 있는 단 한자의 음성에 훼이드리온은 머리가 아파 왔다. 이번 충격은 멋진 데미지를 그에게 남겼 던 것이다. "…이번에는 무슨 용건인 거예요?" 지끈거리려는 머리를 잡고 고통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않으면 다시 묻는 그는 스스로도 자신의 인내심에 탄복하고 싶었다. 이내 무언가를 생각하 는 듯이 입을 다무는 소년의 태도에 이번에는 답을 들을 수 있겠구나, 라 는 희망적이 꿈을 꾸어보는 훼이드리온. 곧 소년이 대답했다. "알 거 없다." 훼이드리온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핼쑥해져버렸다. 무슨 망언이란 말인 가, 라는 뜻으로 눈을 부릅뜬 그가 뚫어져라 소년을 쳐다보았다. 소년은 전혀 꿀리지 않는 눈빛으로 그의 눈을 마주 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농담이다. 용건은 있다." '그래, 역시 농담이었어.'라고 스스로 위안을 해보아도 전혀 위안이 되지 않는 이 상황에 비관을 느끼면서 훼이드리온은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지금이라도, 용건을 말해줄 것 같으니 잘된 셈이라고 해야 옳을 까?' 분명히 옳지 않아도 저 소년은 상관없어할 것이기 때문에, 그는 그렇게 수긍하기로 마음먹었다. 자고로, 현실적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면 쓸데 없는 걱정은 없다고 했다. "뭔데요?"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물어보는 훼이드리온을 향해 소년은 의미심장하게 (라고 훼이드리온은 생각했다) 입을 열었다. "내기를 하자." "…네?" 밑도 끝도 없이 본론으로 직행하는 소년의 말에 그는 멍한 음성을 남겼 다. 소년은 똑같은 말을 다시 한번 되풀이했다. "내기를 하자." '역시 이 소년과의 대화는 어려워…….' 속으로 한껏 투덜대면서도 일단은 평정을 유지하는 척하는 훼이드리온 은 꾸준히 물어볼 요량으로 소년을 쳐다보았다. "무슨 내기요?" "간단한 거다." "…그러니까 그 간단한 내기가 뭐냐고요." 소년은 조용히 쿠키를 입에 물고는 천천히 이빨로 분쇄해나가기 시작했 다. 저렇게 침과 함께 쿠키를 분쇄하여 가루로 만들면 다시 식도로 넘기 는 힘겨운(?) 작업을 해야할 것이다. 그리고 그 시간 또한 만만찮게 소요 될 것이다. 훼이드리온은 인상을 찡그리며 소년의 입을 주시했다. 역시나 소년은 목으로 쿠키를 삼킬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시간을 끌었다. 덕분에 그의 표정은 더더욱 가관이 되어갔다. 이윽고 소년이 그 무거운 입을 다시 떼었다. "내기에서 이기는 자가 원하는 일을 한다." 쿠키 하나를 씹어 삼키는 시간동안 소년의 말을 기다린 훼이드리온을 또 다시 허망하게 만들어버리는 대사. 질문의 요지에서 벗어나도 한참을 벗어난 소년의 대답에 그는 눈앞이 아찔해질 것만 같았다. 다리에 힘이 탁 풀리는 것이, 결국 그는 침대를 붙들고 잠시 버텼다가 이내 침대 위로 무너져 내렸다. 갑자기 침대에 앉아버리는 훼이드리온의 움직임에 따라 천천히 시선을 이동시키고 있던 소년은 자신도 반대편 침대에 앉은 다음 차분한 눈빛으 로 다시 훼이드리온을 바라보았다. 소년은 자신이 대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아아… 차라리 레오하고 함께 전문적인 지식을 요구하는 논쟁을 벌이는 게 정신건강에 더욱 좋겠어.' 그가 어릴 적에,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전문적인 말을 해대는 레오를 물끄러미 구경만 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는 차라리 아예 알아들을 수 없 었으니 자장가로도 사용했었지만, 지금은 사정이 너무나도 달랐다. 이 소 년의 말은 짤막짤막했고, 또한 자장가로 하기에는 너무 잘 들리는 말이었 기에 그럴 수가 없었다. 한마디로 여러 가지로 골치 아픈 소년의 대화법 이었던 것이다. '과연 이 소년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어쩌면 그래서 암살자가 된 건지도 몰라, 하고 추측해보면서 훼이드리온 은 침대 위에 똑바로 앉았다. 그리고 다시 마음을 단단히 잡고 소년과의 정상적인 대화를 시도했다. "내기 조건은 잘 알았어요. 그럼 어떤 걸로 내기를 할거죠?" 꽤나 대답할 수 있는 범위가 많이 줄어든 질문이라, 훼이드리온은 스스 로 자신을 대견하게 생각했다. 이만하면 맘에 드는 답을 얻을 수 있으리 라. 예측은 정확했다. "마스터 카드." 그러나, 그는 또 다시 황당해졌다. "…마스터 카드요?" 자신의 귀가 제대로 정보를 전달한 건지 의심할 수밖에 없는 훼이드리 온. 어쩔 수 없는 것이, 암살자와 마스터 카드는 아무리 이으려고 해봐도 멀리 떨어져있는, 그런 개념들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눈앞의 소년에게 는 더더욱. "그렇다." 소년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는 얼굴로 대답했고, 그래서 그는 결코 자신 이 잘못 들은 게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황당 함의 정도가 가라앉은 건 아니다. 오히려 더 증폭되었을 뿐. "…게이머예요?" "그렇다." "하아……." 한치의 오차도 없이 주저하지 않고 대답하는 소년. 소년이 마스터 카드 게이머라는 것은 거짓 없는 사실이었던 것이다. 훼이드리온은 계속 알 수 없는 방향으로 뻗어나가는 생각을 정리하고자 잠시 침묵했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갑작스런 소년의 등장에 따른 파급 효과를 겪느라 1층 식당에서 기다리고 있을 아이와 카를레오에 대한 생 각을 할 겨를이 전혀 없었다. "그러니까 지금, 마스터 카드로 내기를 하자는 건가요? 진 사람은 이기 는 사람이 원하는 일을 해야한다, 라는 조건으로?" "그렇다." 다시 반복 재생하는 소년의 건조한 대답을 들으면서 훼이드리온은 생각 했다. 소년의 실력도 제대로 모르는데 대뜸 게임을 했다가 지게 되면, 자 신만 손해는 보는 것이다. 최악의 경우, 목숨을 잃어버릴 수도 있는 일이 다. 그는 한번 더 신중을 기하는 뜻으로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제가 왜 마스터 카드를 해야하는 거죠?" 이유라도 명확하게 알자는 생각에서 나온 당연한 물음. 소년의 대답도 당연하다는 듯이 나왔다. "알 거 없다." "……." 맥이 쭉 빠져버리는 훼이드리온의 표정. 오랜만에 들어보는 정겨운 대답 이었지만, 전혀 반갑지 않았다. "이유를 가르쳐주지도 않고, 제가 게임을 하리라고 여기는 건가요, 지 금?" "대답만 해라. 할 텐가, 말 텐가." "이유를 말해주세요." "할 텐가, 말 텐가." "이유를 말해주시면 하겠습니다." "할 텐가, 말 텐가." 훼이드리온은 이대로 간다면 이 의미 없는 대화가 끝도 없이 계속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소년은 똑같은 말만 되풀이하면서 자신의 선 택을 강요하고 있었고, 또 그 선택은 이미 정해져있었다. 물론 얌전히 쿠 키를 씹어먹고 있는 유유자적한 모습의 소년이었지만, 어느새 암살자로서 의 본 모습을 드러낼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거기에 마스터 카드 게임을 하자는 진정한 이유조차 가르쳐주지 않고 있지 않은가. 여러 모로 미심쩍은 소년의 태도에 훼이드리온은 고개를 저었다. '힘없는 자여.' '그대 이름은 훼이드리온이라…….'라는 말은 너무 비참하여 속으로 삼켜 버린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좋아요, 게임을 하죠. 그 대신." "말해라." 드디어 대사가 바뀐 소년의 검은 눈동자를 마주 바라보았다. "무리한 부탁은 절대 안됩니다. 약속하세요." "좋다." 거침없이 나오는 소년의 대답. 로브 밖으로 꺼내어 먹고 있던 이레브워 츠 쿠키가 담긴 봉지가 슬그머니 로브 안으로 사라지더니, 이내 검은 색 의 주머니로 돌변하여 그 속에서 나왔다. 마스터 카드. 역시 짙은 검은 색을 지닌 그 주머니 안에 든 네모난 물건 은 소년의 소유인 마스터 카드였다. 훼이드리온도 허리춤에서 갈색주머니를 풀어낸 후, 한쪽에 서있던 탁자 겸 서랍장을 끌고 와 침대 중앙에 놓았다. 객실 천장에 달린 마법의 등의 흰빛과 동그란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의 영향으로 조명은 그럭저럭 양호 한 편이었다. "분위기는 괜찮군요." 관중이 없는 대전. 드레이프는 펼치지 않았다. 조용히 모든 준비를 끝마친 둘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다가 이윽고 자신 의 든 카드를 손에 들었다. 총 50장의 든 카드. 마스터 카드의 수는 소년 쪽이 더 많았지만, 훼이드리온은 개의치 않고 선언했다. "시작할까요?" 소년의 끄덕임. 그리고 훼이드리온의 굳은 얼굴과 함께, 또 한번의 마스 터 카드 대전은 시작되었다. --------------------------------------------------------------------- 팀군입니다. 50편...이로군요? 하핫. 드디어 카마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군요. 전체의 약 반 정도를 집필한 이 시점까지. 출판도 하게 되었고, 추연란에도 올라오게 되었고. 정말 상상으로만 하던 일들이 정말로 일어나 버린 것입니다. 그런 뜻에서 카마는, 저에겐 정말 소중한 글인 것이죠.(^^^) 이 느낌을 완결하는 그 날까지 가지고 가야겠습니다. 그럼 더욱 더 응원 해주시길.(>.<) 꾸벅.(___) 어둠의 기사 DARK KNIGHT TEAM... P.S 추천 감상 비평. 50회 기념으로?(^^^) 번 호 : 53 / 54 등록일 : 2000년 11월 05일 21:34 등록자 : 암음기사 조 회 : 154 건 제 목 : [카드 게임 판타지]『카드 마스터(Card Master)』#051 카드 게임 판타지(Card Game Fantasy) 카드 마스터(Card Master) 51. 따지고 보면 오늘 하루동안 마스터 카드를 두 번이나 하고 있었던 것이 다. 게다가 아크릴 영주와는 밤을 새면서 대전을 했고, 오랜만에 만난 검 은 옷을 입은 소년과는 배 위에서 대전을 벌이고 있는 터라, 몸의 피로는 조금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훼이드리온에게 다가왔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 지, 카드의 감촉이 두뇌를 자극할 때마다 새록새록 의욕이 피어오르고 전 신 구석구석에 박혀있던 피로들까지 밀려나는 것 같은 기묘한 기분이 들 어서 도저히 진정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신체의 피로는 무시한 채 마스터 카드 게임으로 또 다시 흥분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도 참.' 자신이 생각해도 마스터 카드라는 게임에 완전히 빠져버린 것 같다는 생각에 피식 웃어본 그는 천천히 진행되고 있던 게임의 흐름을 따라 카 드를 뽑아들었다. "프리스트 카드 페어로 방어." 바람의 전사 카드 세 장으로 동일 계열로 한층 더 상승된 공격력으로 공격해오는 것을 프리스트 카드 페어로 방어하는 훼이드리온. 대전을 시 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관계로 게임은 슬슬 리듬을 타는 분위기였다. 만 약 이 분위기를 누군가 깨게 된다면, 그때부터 본격적인 비술 난무가 시 작될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흐음. 태크닉은 저렇게 하면 되겠군.' 든 카드를 이리저리 훑어보는 와중에도 훼이드리온은 태크닉을 생각하 고 있었다. 미리 생각해두어야지 나중에 위기가 닥쳐왔을 때, 더 여유를 가지고 상대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백기사 카드와 불의 전사 카드의 연합 공격." 바람과 불은 속성이 잘 어울리기 때문에 공격력에서도 많은 이득을 취 할 수 있다. 보통의 조합에서보다 약 1.5배 가량의 공격력을 내기 때문이 다. 물론 그것은 방어력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새하얀 갑옷을 입은 기사가 붉은 색의 간단한 갑옷만을 걸친 전사와 함 께 적진을 향해 돌진해 들어간다. 검을 든 손에서는 힘이 넘쳐났고, 두 눈동자에서도 질 수 없다는 의지가 묻어난다. 소년은 "음."이라는 의도를 짐작하기 어려운 음성을 남기고는 지그시 든 카드를 내려다보았다. 소년의 입에는 여전히 이레브워츠 쿠키가 씹힘을 당하고 있었다. 부지런히 움직이는 그 턱만큼이나 부지런히 카드 위를 오 가는 소년의 검은 색의 눈동자가 참으로 진득한 여유를 간직하고 있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소년은 도대체가 긴장을 하지 않는 것 같았 다. 이윽고 무언가를 결정했는지 이레브워츠 쿠키를 품에서 하나 더 꺼내 입에 집어넣은 소년은 다시 한번 "음." 음성을 남기더니, 네 장의 카드를 차근차근히 꺼내들었다. 소년의 모습에 어울리게 뒷면이 검은 그 카드들 은 곧 서랍장 위에 하나씩 올려졌다. 탁. 탁. 탁. 탁. 카드가 놓이는 그 울림마저 건조하게 들릴 정도의 감정 없는 소년의 움 직임에 훼이드리온은 괜히 긴장하고 말았다. 머리로 스쳐 지나가는 한 줄 기 빛에 이상하게 몸이 떨리는가 싶더니, 카드를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이 흔들렸다. 소년의 마른 음성이 방안에 퍼졌다. "유니콘 카드, 피닉스 카드, 이무기 카드, 파람어 카드. 태크닉 완성. 비 술 '성수축제'." 성수들의 모임, 잔치, 혹은 파티. 훼이드리온으로서는 듣지도 보지도 못 한 비술이 펼쳐졌다. 지하에서 샘솟아 올라오는 호숫가를 거닐던 일각수 유니콘이 어디서부 터 들려오는 희미한 음성에 잠시 반응하여 고개를 들어올리더니, 굳건하 게 대지를 밟고 서있던 네 다리를 움직여 빠르게 달리기 시작한다. 바람 이라고 생각해도 될 정도로 빠른 속도로 달리기 시작하는 유니콘은 작은 숨소리만을 남긴 채 호수를 떠나 어느 곳으로 향한다. 높고 높은 화산에서 잠들어있던 불사조 피닉스 또한 자신을 부르는 음 성에 눈을 뜬다. 머뭇거리듯이 눈길을 움직이던 피닉스도 이내 불과 같이 뜨겁게 타오르는 두 날개를 퍼덕이며 분화구 위로 날아올라 한 방향으로 쏜살같이 날아가기 시작한다. 대지 깊숙한 곳에서 움직이고 있던 승천룡 이무기는 뇌리에 직접 전해 지는 희미한 울림에 땅을 뚫고 솟아오르기 시작한다. 주변의 땅들이 이무 기의 움직임에 반응하여 쿠구궁 소리를 내며 흔들리기 시작했지만, 귀가 어두운 이무기는 미끈한 황색의 몸을 돌리며 용맹하게 땅속을 뚫고 어느 곳으로 돌진하기 시작한다. 그 누구도 도달하지 못한 바다 속 깊은 곳에서 조심스럽게 숨쉬고 있던 오색찬란한 무지개의 빛의 성수, 칠색어 파람어에게도 그 음성은 들린다. 오랜 세월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심해 속에 있던 파람어는 짧게 입 을 벌려보고는 돌 틈에서 빠져나온다. 순간 심해의 검은 어둠을 밀어내며 빛나기 시작하는 무지개 빛의 비늘들. 그 빛을 흘리며 파람어는 부름이 들려오는 곳을 향해 빠르게 헤엄쳐 나아가기 시작한다. 모든 성수들이 한곳에 모인다. 성스럽게 빛나는 뿔 알리콘을 빛내는 일 각수 유니콘과 높은 하늘을 붉은 색으로 물들이며 선회하는 불사조 피닉 스, 그리고 황색의 몸으로 대지를 흔들며 솟아오른 승천룡 이무기와 무지 개 빛의 비늘이 아름다운 칠색어 파람어까지. 알려져 있는 모든 성수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서로의 빛을 개방하자, 곧 그곳은 아름다운 빛의 향연 으로 뒤덮인다. 눈을 뜨고는 도저히 볼 수 없는 그 빛의 축제. 성스러운 동물들의 축제, 성수축제. '…아름답다.' 보기만 해도 그 아름다움에 매료될 것 같은 그 빛의 축제에서 한 시도 정신을 놓지 못하는 훼이드리온은 자신의 본분을 잊고 있는 것 같았다. 이미 그의 백기사 카드와 불의 전사 카드는 성수축제의 빛에 밀려 소멸 해버렸는데도 말이다. "모든 실력을 다해야할 것이다." 소년의 중얼거림은 훼이드리온에게 들리지 않았다. 그는 머리 속에서 벌 어지는 그 빛의 향연에 모든 넋을 빼앗겨버렸던 것이다. 성수축제. 이것은 그렇게 희귀한 비술은 아니었다. 게이머라면 많은 사 람들이 알고 있었고, 또한 많은 게이머들이 시도했던 비술이었다. 하지만 거의 모든 게이머들이 소년과는 달리 '시도'에서 그칠 수밖에 없었다. 그 것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던 '성수'의 종류 때문이었다. 가장 일반적으로 알려진 성수는 일각수 유니콘과 불사조 피닉스를 들 수 있고, 게이머라면 승천룡 이무기도 알고 있다. 하지만 칠색어 파람어 까지 성수에 속한다는 것을 아는 자는 그리 많지 않다. 왜냐하면 파람어 는 고대에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많은 전설에서 사람들을 잡아가는 사 악한 마수로 흔히 표현되기 때문이다. 파람어는 깊은 심해에 살면서 간단 히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데,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배가 고프면 밖으 로 나와 사람들을 잡아먹는 마수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유니콘 카드와 피닉스 카드와 이무기 카드만을 가지고 성수축제를 발동시키려했기 때문에, 그 누구나 '시도'에서만 그친 채 성공하지 못한 것이다. 소년은 무표정하게 훼이드리온을 바라보다가 쿠키를 꺼내 다시 입에 물 었다. 오물오물 씹어서 목으로 넘겼을 무렵, 이제야 정신을 차린 훼이드 리온이 "후아……."라는 숨통 터뜨리는 소리와 함께 눈을 깜빡거렸다. '뭐,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빛의 향연은 번쩍거리며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그는 겨우 정신 을 추스르며 눈을 비볐다. 아무래도 또 마스터 카드의 마력에 휘말려 대 전 중에 넋을 놓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마스터 카드를 시작했을 때 부터 몇 번식 환상에 사로잡혀 하염없이 구경만 하고 있었던 적이 있었 다. 그래서 누님에게 항상 지적을 당하고는 했었는데 말이다. 아무튼 훼이드리온은 다시 정신을 차리고 카드를 내려다보았다. 소년은 여전히 표정 없는 얼굴로 물끄러미 시선을 훼이드리온에게 향한 채 기다 리고 있었다. "……어?" 문득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훼이드리온이 급히 서랍장 위를 훑어보다가, 자신의 카드들이 뒤집혀버린 것을 알아챘다. 순간 황당함으로 표정을 물 들이며 기억을 더듬어보던 그는 곧 환상 속에서도 이미 백기사와 불의 전사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을 알고야 말았다. 그 즉시 시선은 소년에게로 향했고, 소년은 때마침 쿠키를 목으로 삼키 고 있었다. 그의 시선을 느낀 소년은 쿠키를 꺼내려던 손길을 잠시 멈추 고 이레브워츠 향이 풍기는 목소리로 말했다. "성수축제. 능력은 공격무위." "…공격무위? 어, 어떻게요?" 소년은 로브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몇 번 꿈틀거렸다. "성수의 빛은 자연 상태로 맘을 돌린다. 그 빛을 보면 공격할 생각이 나 지 않지." 무표정하게 말을 끊고 다시 쿠키를 먹는 소년은 다시 침묵하며 훼이드 리온을 바라보았고, 소년의 말에 그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게 표정을지 어보였다. '그, 그런…….' 한마디로 성수의 빛으로 공격하려는 의지 자체를 없애버린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비술 성수축제의 능력. 그는 또 다시 앞이 난감해지는 것을 느꼈다. "반격은 하지 않고 턴을 넘기겠다. 성수축제를 소멸시켜보도록." 그나마 의도가 드러나는 대사를 남긴 채 소년은 다시 침묵했다. 시간은 얼마든지 줄 테니, 한번 자신의 비술을 깨어보라는 것이다. 그는 발끈했 지만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무엇보다도, 성수축제의 능력은 거의 완벽한 것이었으니까, 자신감을 가지는 것도 당연하니까 말이다. '휴우, 어쩌지.' 성수축제는 보기만 해도 공격 의지를 잃어버리고 소멸되고 만다. 결국 성수축제 자체를 어떻게든 소멸시켜야 다음 공격이든 뭐든 진행이 되는 것이다. 훼이드리온은 여러 가지 방도를 머리 속에 떠올려보았다. 백소환사로 물 의 정령왕 에리피느를 소환해 공격을 한다면 어떨까, 하고 꽤 가망성이 있는 의견을 생각해보았지만, 그렇게 하려면 백소환사도 성수축제의 빛을 보기 때문에 결국 똑같은 결과만을 낳을 뿐이라는 것을 금방 깨달아버려 의미 없이 손을 흔들었다. '방법이 없는 건가.' 이렇게 가다가, 지겨움을 느낀 소년이 "반격이다."라면서 공격을 해오면 어쩔 수 없이 생명력에 피해를 입어야만 하다. 지금까지 소년의 행동에서 보자면 그렇지 않은 걸이라는 보장도 전혀 없다. 한마디로 맘이 바뀌기 전에 서둘러 성수축제를 소멸시키고 얼른 다음 공격을 퍼부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수는 원래 약하다던데.' 그렇다. 성수라는 존재들은 원래 신들이 기르던 애완동물이라고도 하는 것처럼 굉장히 약했다. 공격력은커녕 자신의 몸을 지키는 방어력조차 형 편없을 정도로 약해, 순순히 생명을 이어나가는 능력만으로 치자면 모든 생명체들 중 가장 하위에 있을 존재가 바로 성수였다. 하지만 원체 세상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또한 소년이 말했듯이 그 빛을 보면 공격할 의지조차 사라지기 때문에 약하든 말든 별로 상관이 없는 것이다. '어떻게 해도 빛을 보게 되지…… 이거 참.' 차라리 유저 카드들이 모두 앞을 못 보는 장님이었다면 괜찮을 지도 몰 랐다. 장님은 앞을 못 보니, 당연히 성수의 빛도 통하지 않을 것이고, 결 국 맘대로 공격을 감행할 수 있는 것이다. 훼이드리온은 한숨과 함께 장 님인 검사가 검을 이리저리 휘두르는 모습을 떠올리다가 훗, 하고 웃어버 렸다. 소년이 묘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무료하게 쿠키를 살짝 한 입 물고는 손을 털었다. "흠." 그리고 또 다시 작은 음성을 남겼고, 훼이드리온은 움찔 놀래며 필사적 으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잠깐.' 갑자기 어떤 굉장한 생각이 들어서 훼이드리온은 순간 모든 생각을 정 지시켜버렸다. 만약 이 생각이 통한다면, 성수축제는 의외로 간단하게 깨 어버릴 수 있을 지도 몰랐다. 그는 지체하지 않고 든 카드를 뒤졌다. 언젠가 본 적이 있었다. 왕성에 서 마스터 카드의 비술을 연구할 때, 자신의 카드에서 단 하나밖에 없었 던 그것을, 지금 이 시점에서 가장 필요한 그것을 찾는 그의 손길에서는 필사적인 감정이 묻어났다. 소년은 쿠키를 와삭와삭 씹어먹으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생각난 건가.' 뭔가 방도를 찾았다는 듯이 카드를 뒤지는 그의 모습을 이리저리 눈동 자를 옮기던 소년은 들키지 않도록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가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충분히 짐작이 갔기 때문이다. 과연, 이라고 생각하는 듯한 소년의 눈길을 지그시 훼이드리온을 응시하 고 있었다. '…찾았다!' 남아있는 든 카드 서른 여장을 놀라운 속도로 뒤지고 있던 훼이드리온 의 눈에 드디어 원하는 카드가 눈에 들어왔다. 운 좋게도 든 카드 중에 있었던 것이다. 훼이드리온은 웃음이 나올 것 같았지만 애써 그것을 참아 내며 그 카드와 불의 용사 카드와 백소환사 카드를 한 장 뽑아냈다. 성수 축제를 소멸시키는 것은 이 세 장의 카드로 충분했다. 손바닥에 흐르는 땀을 옷에 문질러 닦아낸 후 불의 용사 카드를 들어 서랍장 위에 올려놓았다. 소년의 눈길이 그 카드에 머문다. "먼저 불의 기운을 지닌 용사, 불의 용사 카드. 그리고 빛 아래의 존재 들을 움직일 수 있는 백소환사." 이어서 내려놓은 하얀 색의 느낌이 인상적인 백소환사 카드가 경쾌한 소리를 남기며 서랍장에 달라붙었고 훼이드리온은 의미심장힌 미소를지 으며 남은 카드 하나를 손에 들었다. 그의 손가락 사이에 끼어있는 그 카 드에 눈길을 두는 소년이 이윽고 훼이드리온의 두 눈동자로 시선을 옮겼 고, 그가 천천히 카드를 뒤로 돌렸다. 환하게 빛나는 번쩍임이 수놓아진 카드의 앞면. 그 중앙에 작은 꼬마의 형상이 그려져 있다. 빛은 그 꼬마를 중심으로 퍼져나가는 형상이다. 마 스터 카드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이가 보더라도 "빛의 정령이다!"라고 소리칠 수 있을 그런 모습의 카드. "빛의 정령 라이트 카드. 백소환사가 소환한 빛의 정령 라이트가 존재하 는 모든 빛을 없애버리자, 불의 용사는 성수들이 뿜어내는 빛을 의식하지 못한다. 고로, 성숙축제의 공격무위능력은 무효화되고, 불의 용사의 공 격." 허공에 모습을 드러낸 빛의 정령 라이트가 본연의 능력을 사용하여 존 재하는 모든 빛을 사라지게 만든다. 빛이 사라진 공간에는 오직 성수 네 마리만이 남아있게 된다. 불의 용사가 뛰쳐나간다. 성수들이 각자의 울음 소리를 남기며 불의 용사의 검을 피하여 도망가려 노력해보지만, 피하지 못한다. 불의 용사의 붉은 검이 허공에 혈선을 남기고, 성수들은 끔찍한 피해를 입으며 쓰러지고, 떨어지고, 가라앉는다. "…음." 소년이 조금은 껄끄러운 듯이 음성을 남겼고, 훼이드리온이 빛의 정령 카드를 서랍장 위로 내려놓으며 웃음을 지었다. 자신감은 다시 그에게로 옮긴 듯한 모습이었다. 성수 특유의 흰색 피가 바닥에 뿌려지는 모습은, 그것조차 성스럽게 느 껴질 정도였다. 빛의 정령의 능력이 힘을 잃으면서 다시 빛을 되찾는 성 수들. 그러나, 이미 성수들의 숨은 미약하기 그지없었다. 그 중앙에 흰색 의 피가 묻은 검을 털고 있는 불의 용사의 모습. 백소환사가 저 뒤에서 미소짓고 있었다. "성수축제 소멸입니다. 하세요." 훼이드리온은 자신만만한 미소를 띄우며 손을 내밀었다. 소년이 조심스 럽게 품속에서 쿠키를 꺼내 물며 성수 카드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러고 보 니, 성수축제는 소멸되었는데 카드는 뒤집어지지 않고 있었다. 무언가 또 있는 것일까. 소년이 입안에 있던 쿠키를 삼키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금색." "네?" "별." "…뭐라고요?" 또 다시 알 수 없는 말을 하고 입을 다무는 소년의 태도에 훼이드리온 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소년을 주시했다. 그러나, 그 발언에 따르 는 부연설명을 할 생각은 전혀 없다는 듯이 소년은 침묵했고, 결국 그는 혼자서 고민할 거리만 또 늘어난 꼴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부족하다." "뭐가요?" "성수축제는 그것이 끝이 아니지." "…에?" 여전히 알 수 없는 말이었지만, 이번에는 소년의 말이 가진 진의를 깨닫 게 되기까지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 뭐, 뭐지?' 갑자기 성수들에게서 흘러나오는 빛이 강해지고, 불의 용사의 주위로 성 스러운 빛이 감싸기 시작한다. 성스러운 기, 오오라와 같은 그 빛은 점점 더 강해져서 불의 용사를 완전히 삼켜버린다. "성수들은 두 개의 생명을 가진다." 성수들의 몸이 차츰차츰 일어서기 시작한다. 불의 용사는 빛에 눌려 완 전히 사라져버린다. 멀리 있던 백소환사가 당황하며 빛의 정령 라이트를 다시 소환하지만, 이번엔 통하지 않는다. 빛은 차츰 더 강해질 뿐이다. "한번 죽어도, 다시 살아나지. 그리고 더욱 강해진다. 최강의 공격력, 최 강의 방어력. 성수축제는 두 번째가 진면목이지. 비술 성수축제 재발동." 훼이드리온은 완전히 멍해진 얼굴로 성수 카드들을 내려다보았다. 성수 카드가 소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뒤집어지지 않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 다. 별 거 아니겠지, 하고 넘어갔던 게 이러한 결과를 불러일으키게 될 줄은 정말 생각도 못했다. '두 개의 생명이라니…….' 성수들이 근본적으로 약하다, 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목숨이 두 개라 는 것은 정말 알지 못했다. 하지만 마스터 카드의 환상은 그에 따라서 더 욱 강해진 성수축제를 펼쳐주고 있었기 때문에 믿지 않을 수도 없는 노 릇이었다. 더욱 강해진 빛을 발하는 성수축제. 거기다 그 빛의 영역 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은 소멸시켜버리는 엄청난 능력까지 지녔다. 훼이드리온은 머리 속에 다시 펼쳐지는 아름다운 빛의 향연에 마음 속 깊이 충격을 받고 말 았다. 소년은 쿠키를 입에 넣으며 말했다. "다시 턴을 넘기지. 노력해보도록." 쿠키를 입에 넣어 씹기 시작하는 그 모습이 더없이 여유 있고 한가로운 모습이었던 것이다. "……칫." 입술을 질끈 씹어버리는 훼이드리온은 뇌를 타고 오르는 그 고통에 머 리 속이 새롭게 일깨워지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짜릿하게 퍼지는 아픔은 그에게 새로운 전의를 가지게 해주었고, 그는 머리 속에 존재하고 있는 빛의 환상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아직 백소환사도 건재하고 공격할 기회는 남아있다. 저 소년이 맘이 바 뀌지 않는 한, 성수축제를 소멸시킬 찬스는 아직 있으니까, 생각하자, 성 수축제를 무너뜨릴 최강의 공격력을 가진 비술을.' 소년은 쿠키를 씹으며 잠시 눈길을 복도 쪽으로 돌렸다. 문은 닫혀있지 만 소리로서 소년은 바깥의 모든 상황을 느끼고 있었다. '흠. 빨리 끝내야겠군.' 그와 동시에 훼이드리온과 소년의 머리 속에는 하나의 카드가 떠올랐다. 단 한 장으로서 비술을 능가하는 공격력을 발휘할 수 있는 카드. 훼이드 리온은 길이 트였다고 생각했다. '물의 정령왕 에리피느 카드.' 아크릴 영주가 선물한 그 카드가 지금 든 카드 중에 섞여있었던 것이다. '좋아, 해보자.' 훼이드리온은 소년을 향하는 시선은 침묵시킨 채 천천히 카드를 빼들었 다. 소년은 의미가 있는 건지, 아니면 없는 건지 판단할 수 없는 모습으로 쿠키를 씹으며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 ...네에, 본의 아니게 늦어버린 51편입니다. 팀군입니다, 잘들 지내시죠? 학교 축제기간이다 보니, 별 상관없는 팀군한테도 영향을 미치는 거로군 요. 팀군은 그 어떤 서클에도 들지 않은 프리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참가하고 싶지 않은 행사에 참가해서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건, 별로 좋 아하지 않아서요. 으하하. 축제 행사 기념으로 벌어진 줄다리기 대회. 부상에 눈이 멀어서 너무 열 심히 했는지 다리나 팔이나 근육이 땡겨서 꽤나 고생 중입니다. 아하하.; 이거 참, 제대로 된 몸 상태가 아닌 것이군요. 뭐, 글 적는데는 그렇게 영향을 끼치지는 않습니다만. 자아, 그럼. 52편을 작업하러 팀군은 가보겠습니다. 52편에는 그동안 베 일에 쌓여져있던 검은 옷의 소년의 실명이 공개됩니다.(+ + +) 으하하. ...아무도 안 궁금하려나? 우웅.; 아, 아무튼 그렇습니다.( ---) 그럼, 꾸벅.(___) 어둠의 기사 DARK KNIGHT TEAM... P.S 추천 감상 비평. 주세요오오.(>.<) P.S 2 아, 토닥 감상을 봐야하는데.( ---) P.S 3 카마동 개설이 얼마남지 않았습니다. 가입해주실 거죠?(>.<) 번 호 : 54 / 54 등록일 : 2000년 11월 06일 22:34 등록자 : 암음기사 조 회 : 57 건 제 목 : [카드 게임 판타지]『카드 마스터(Card Master)』#052 카드 게임 판타지(Card Game Fantasy) 카드 마스터(Card Master) 52. "이상하네." 무료한 시간 중에서 가끔 카를레오와 간단한 대화를 나누고 있던 아이 는 둘의 사이를 이어주는 매개체가 현재 자리를 비운 채 돌아오지 않자, 살며시 걱정이 떠오른 얼굴로 한마디했다. 이미 세잔 째인 오렌지 주스도 슬슬 질리려고 하던 차에 남아있던 주스를 몽땅 마셔버린 후, 다시 한번 식당 문을 향해 시선을 돌려보는 그녀. "늦는군요." 카를레오도 안경을 치켜세우며 그녀와 시선을 같이 했지만, 동시에 네 개의 눈동자의 주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식당 문은 움직일 기미가 보 이지 않았다. 아이가 짧은 한숨을 남겼다. "흑의 마스터가 나타났다는 이야기를 해주려고 했더니, 왜 이렇게 안 오 는 거지?" 의문을 표하며 검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다듬는 그녀에게 미소를 머 금은 카를레오가 말했다. "어쩌면 벌써 흑의 마스터와 조우하고 있는지도 모르죠." "설마." "모르는 일이니까요." '태자 저하라면…….'이라는 생각은 말로 꺼내지 않고 속으로 감추는 그 는 한때 마법사였던 이유 때문인지 감이 비상식적으로 발달해있는지도 모른다. 주스로는 달래지지 않는 본능적인 허기가 차츰차츰 느껴지기 시작한다 고 생각하고 있던 아이가 주스를 시킬까, 아니면 먼저 요기를 할 수 있는 음식을 시킬까, 하다가 이내 떠오르는 다른 생각에 카를레오를 향해 고개 를 움직였다. 마찬가지로 음료수가 든 잔을 들고 입으로 가져가고 있던 그가 청발을 살짝 흔들며 그녀의 시선에 반응했다. "흑의 마스터가 어떤 자인지 혹시 알아요?" "남들 아는 만큼은요. 그건 왜요?" "흠, 그냥 궁금해서요. 최연소 마스터라는 건 알지만, 다른 것들은 잘 모 르거든요." "그래요? 시간도 있으니 말씀드리죠." 눈이 위쪽으로 둥그렇게 곡선을 만들며 사라져버리는 특유의 미소를지 으며 그가 음료를 깔끔하게 비웠다. 식탁 위에 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경 쾌하게 들리면서 그가 이야기했다. "흑의 마스터는 아시는 대로 최연소로 카드 마스터의 칭호를 받은 자이 죠. 올해 나이가… 15세라고 했던가? 아무튼 그렇게 알고 있어요. 흑의 마스터는 지금까지 총 세 번 마스터 카드에 출전했는데, 첫 출전이 12세 때였어요. 12세 때 마스터 카드 대회 3위를 했었고, 13세 때, 두 번째 출 전에서 2위, 그리고 작년 14세 때 드디어 1위를 해서 마스터의 칭호를 받 았죠. 들리는 바에 의하면 첫 출전했던 그 해에 마스터 카드를 처음 시작 했다고 해요. 한마디로 타고난 재능이라고 할 수 있죠." "와아……." 아이는 자신과는 거의 별 세계의 사람인 것처럼 느껴지는 흑의 마스터 의 전적을 들으면서 감탄의 감탄 밖에 할 수 없었다. 그야말로, 그 자는 같은 또래이지만 다가갈 수 없는 경지에 이른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녀의 경탄 속에서 카를레오의 설명은 계속 되고 있었다. "흑의 마스터라는 별명이 붙은 이유는, 그가 대회에 출전한 3년 동안 줄 곧 검은 로브로 둘러싼 옷만을 입고 다녔고, 게다가 대회에 나타나지 않 으면 그 누구도 그의 행적을 알아챌 수 없어서 붙여진 별명이에요. 그의 행적은 정말 미스터리의 미궁이죠. 어느 사람들은 흑의 마스터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따로 단체까지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있던데요?" "단체까지?" "뭐, 그 정도로 흑의 마스터는 여러 가지 이슈거리가 많으니까요. 어쨌 든 그 자에 대한 이야기라면 제가 아는 것도 이 정도예요. 만약 만날 수 만 있다면 물어보고 싶은 질문이 많기는 하지만." 카를레오는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시며 음료수가 있던 잔을 들었다가 비어져있다는 사실을 그때서야 눈치를 채고, 종업원을 불러 한 잔 더 시 켰다. 벌써 다이사만 네 잔 째, 어지간히 다이사를 좋아하는 그였다. "흑의 마스터. 생각보다 더 대단한 자였군요." "만나는 것조차 힘들죠. 아, 이번 대회에도 출전을 한다던데, 운 좋으면 만나시겠군요." 아이가 싱긋 웃었다. "훗, 게임 중예요?" "그렇게 만나는 것도 인연이잖아요." 카를레오도 마주 웃으며 흑의 마스터에 대한 이야기를 그쳤다. 소문만 무성할 뿐 진정한 정체는 아무도 모르는 그런 신비한 자의 이야기보다는 지금 이 시점에서 가장 필요한 이야기를 해보려는 것이다. "정말 올 생각이 없으신가본데요?" "흐음?" 화제를 전환하는 카를레오의 의도에 맞게 표정을 바꾼 아이가 다시 식 당 문을 지그시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는 것도 이제 슬슬 끝낼 때가 된 것도 같고, 저녁을 먹을 시간도 다가오는 차에 그녀는 드디어 행동을 개시하기로 마음먹었다. '오지 않으면, 찾아가면 돼.'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행동에 물음표를 포함한 눈빛 을 보내는 카를레오에게 "데리고 올게요."라고 짧게 말한 그녀는 식당 바 깥을 향해 재빠르게 걸어갔다. 등뒤에서 카를레오의 인사가 들려왔다. "빨리 오세요." 식당 문을 나서면서 그를 향해 웃어 보인 아이는 하얀 복도를 달려 서 둘러 아래층으로 이어져있는 계단으로 내려갔다. '훼온은 뭐 한다고 안 올라오는 거지?' 책을 찾지 못해서 미련하게 배낭을 온통 헤집어놓은 후, 겨우 책을 발굴 해내어 다시 배낭을 정리하고 있는 중이라고 해도 이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지 걱정도 되기는 했지만, 그를 믿기 때문에 우선 서둘러 방으로 돌아가 보자는 게 그녀의 의견이었다. 그녀는 빠르게 계단을 딛고 내려가는 속도와는 비례하지 않게 발자국 소리는 전혀 울리지 않는 편리한 보법으로 4층 객실층에 도착했다. 잠시 숨을 고르면서 속도를 늦추어 걸어서 객실 앞에 도착한 그녀는 노크를 할까 하다가 그냥 손잡이를 잡았다. 지잉. "…어라?" 화들짝 놀라면서 손잡이에서 급히 손을 뗀 아이는 오른손을 쓰다듬으며 어리둥절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이상한 느낌이 느껴졌는데……?' 지금껏 살아오면서 들었던 모든 지식들을 총 동원하여 어휘력을 발휘해 낸다고 해도 이 느낌은 '이상하다' 외에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을 거라 고 그녀는 생각했다. 덧붙이자면, 조금은 '팽팽하다'라고나 할까. 주로 긴 장감을 표현할 때 쓰이는 그런 표현이 어울리는 느낌이 아이의 손끝에 감지되었던 것이다. '분명히 안에서 무슨 일이 있는 거야.' 신관 특유의 감각이 발휘되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방안에서 뭔 가 일어나고 있다고 짐작한 그녀는 그런 느낌이 들든 말든 다시 손잡이 를 잡아서 돌렸다. 달칵. 문이 아쉬울 정도로 쉽게 열렸다. '읍!' 전신을 엄습해오는 강렬하고도 짜릿한 쾌감이 마치 바람과도 같이 그녀 를 훑고 사라졌다. 막혀있던 둑이 터지면서 밀려나오는 물처럼, 그 팽팽 하게 당겨져 있는 이상한 느낌은 방안에서 터져 나와 복도로 사라져갔다. 그녀의 옷깃이 잠시 흔들리는 것도 같았다. "…졌군요." 터져 나오는 충격에 잠시 사태를 망각해버릴 뻔한 지경에까지 이를 뻔 한 아이의 귀로 들어오는 익숙한 목소리. 그녀는 충격에 흔들리는 이성을 부여잡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두 명이 들어가도 비좁을 것 같은 방안에는 생전 처음 보는 소년과 마스터 카드를 붙잡고 고개를 떨어뜨린 채 할 말 을 찾지 못하는 훼이드리온이 있었다. "훼온?" 그러나, 그는 아이의 말을 듣지 못했는지 온통 검은 색으로 도배를 한 소년을 향해서만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그녀는 뭐라고 한마디 더 할까, 고려를 해보았지만 어쩐지 조용히 해야할 것만 같은 분위기라서 입을 다 물었다. 훼이드리온이 굳은 얼굴로 소년에게 물었다. "설명해 주시겠어요?" "그러지." 간단히 답하는 소년의 진지한 얼굴을 바라보며 조금 긴장해버린 아이는 곧 소년이 로브 속에서 꺼내어 입에 무는 쿠키 한 조각에 다리가 휘청 풀릴 것 같은 느낌을 느껴버렸다. 도저히 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 을 하면서도 끝까지 표정을 짓지 않으면 진지하게 말하는 소년이었다. "빛의 정령 라이트를 다시 사용하여 빛을 없앤 후, 물의 정령왕 에리피 느 카드를 이용하여 공격을 한 것은 좋았다. 이 상황에서 나름대로 괜찮 은 판단이었다고 할 수 있지." 칭찬을 받으면서도 표정은 전혀 풀리지 않는 훼이드리온의 얼굴을 살짝 훔쳐본 아이는 어떻게 흘러가는 상황인지 조금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 았다. 일단 침묵한 그녀. 검은 눈동자가 조용한 소년은 오랜만에 긴 대사를 한 탓에 목을 가다듬으면서 계속 설명했다. "하지만 두 번째로 발동된 성수축제는 공격력이나 방어력에서 거의 최 강이다. 10대 마스터 카드에는 비할 바 아니지만, 정령왕, 물의 정령왕의 공격력을 충분히 막아낼 수 있지. 알겠나. 성수축제를 이루는 카드는 모 두 성스러운 동물, 성수라는 것을." 아이는 "아."하는 작은 음성과 함께 묻혀있는 기억을 들추어냈다. 성수 들은 굉장히 약한 생명체들이지만, 성스러운 동물이라는 의미답게 강하다 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강함은 한번 죽은 후, 겉으로 드러나게 된다고. 그녀는 성수축제, 라는 비술의 정체가 무엇인지 어렴풋 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에게 남은 턴을 비술 '질풍천'을 발동시켜 생명력을 소멸시켰 다. 이로서, 내가 이긴 거지." "…그런 거군요. 하아, 완벽하게 졌습니다." 아이는 대전에서 졌다고 인정하는 훼이드리온의 감정이 아쉽기도 하지 만 어쩐지 시원하다고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아챘다. 그의 표정이 바로 그랬기 때문에. "어, 아이. 언제 왔어?" 한참 정신을 팔고 있다가 이제야 그녀의 존재를 느낀 훼이드리온이 눈 을 크게 뜨며 그녀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어떻게 대답해야할까, 잠시 고민해보다가 이내 웃으면서 말했다. "방금." 그러나 생각 못한 변수가 있었으니. "좀 됐다." 바로, 검은 로브 속에서 천천히 쿠키를 꺼내들며 진실을 폭로하는 소년 이라는 존재였다. 진실을 알아버리고 쿡쿡 웃기 시작하는 훼이드리온의 행동에 아이는 급히 당황하며 소년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소년은 익숙하 다는 듯이 그 시선을 무시한 채로 쿠키를 씹으며 마스터 카드를 정리하 고 있었다. 결국 아이는 확실히 불만이 드러나는 투로 "쳇!"하고 투덜거려보고는 훼 이드리온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남은 위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여기서 마스터 카드를 하고 있단 말이 지?" 아이의 화살이 자신 쪽으로 돌려졌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한 그가 "아하하." 웃으며 변명거리를 찾아 나섰다. 그리고 가까운 곳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냈다. "이 소년하고 만나서 말이야." 맞은 편에 앉아서, 어느새 자신의 마스터 카드를 다 정리하여 로브 속으 로 집어넣은 소년이 쿠키를 한 손에 든 채로 물끄러미 훼이드리온을 바 라보았다. 의도를 짐작할 수 없는 그 고요한 시선을 마주하며, 그는 잊고 있던 것을 떠올렸다. "잠시만, 아이. 아직 용건이 다 끝나지 않아서 말이야. 끝나면 이야기해 줄게." 마스터 카드 게임을 시작하기 전에 했었던 내기. 아이가 궁금한 듯 눈을 크게 떴지만 훼이드리온의 시선은 이미 소년을 향해 다시 고정되어있었 다. '칫! 못됐어!' 또 혼자 소외될 것만 같은 분위기에 아이는 갑자기 방금까지 같이 놀고 있던 카를레오가 그리워졌다. "제가 졌으니 원하는 것을 들어드려야겠죠. 무엇을 원하시죠?" 아이가 또 한번 더 눈을 크게 확장시켰을 때, 소년이 쿠키를 삼키고 입 을 열었다. "간단하다." 이제 어느 정도, 소년과의 대화에 적응이 될 것 같은 훼이드리온이라 뒤 에 이어질 말을 끈질기게 기다려볼 생각이 들었다. 의외로 뒷말은 빨리, 그리고 앞의 말과 어울리게 이어졌다. "날 데려가라." 다시 생각해보니 앞의 말과는 그렇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훼이드리온은 생각했다. '간단하다'와 '날 데려가라'가 어떻게 어울리는 발언이 될 수 있 겠는가. "…간단하지 않은 것 같은데요?" "간단하다." 소년은 거의 막무가내로 무표정이었다. 차라리 얼굴 뻘겋게 변한 채 열 변을 토하는 자를 말리는 게 더 쉬울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훼이드리온 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여러 가지 면을 제하고 보면, 이 소년과 동행을 하는 것도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니다. 아마도 마스터 카드 대회가 열리는 에코로 가는 길에, 이왕 이면 같이 가자는 식으로 다니면 되는 것이니까. 하지만 문제는 그 '여러 가지 면'에 있다. 저 소년은 지금가지 모든 여정을 몰래 미행했으며, 심지어 케롯 마을에 서는 자신을 습격까지 한 전적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어떻게 무 턱대고 "그러세요."라고 답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훼이드리온은 '저 소년 은 뻔뻔한 성격까지 가지고 있나보다.' 라고 생각한 후 소년에게 진지한 어투로 말했다. "저기 말이에요. 당신은 절 미행했고, 그리고 습격까지 했다고요. 그런데 이제 와서 데리고 가라, 라고 하면 순순히 네, 라고 대답할 수 있겠어 요?" "에에? 그럼 이 자가 그 자란 말야?" 반응은 아이가 더 빨랐다. 케롯 마을에서 훼이드리온을 누군가 습격했다 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는 그녀였기에, 그녀는 그 즉시 소년에 대한 적의 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감히 훼이드리온에게 손을 댄 자 아닌가. 그녀로 서는 용서할 수 없는 이들 중 한 명에 속하는 소년이었다. 흥분하려고 하는 아이를 향해 지그시 손을 올려 진정을 시키는 훼이드 리온은 소년의 대답을 기다렸다. 소년은 쿠키를 하나 꺼내 입에 물고는 오물거리더니, 꿀꺽 삼킬 때까지 계속 침묵했다. 아이가 근질거리는 맘을 못 참아서 뭐라고 말을 꺼내려고 시도를 하려던 그때, 소년이 드디어 입 을 뗐다. "걱정 마라. 그때는 사정이 있었을 뿐이고, 지금은 아니니."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라고요." "간단한 게 아니라고 해도, 상관없지 않나." 소년은 조소를 머금어도 어울릴 분위기에서 무표정한 채 말했다. "마스터 카드는 신의의 게임. 약속을 어길 수는 없다." 결정적인 이유였다. 마스터 카드를 다루는 게이머라면 그 누구도 어길 수 없는 규칙 중의 하나. 신의의 게임인 마스터 카드에서 약속한 것은 파 기할 수 없는 것이다. 훼이드리온은 한숨이 짙게 퍼져 나옴을 막을 수 없었다. 이미 약속해버 린 것, 되돌리지는 못한다. 지키는 게 당연하다. "…그러죠." "훼온!" 아이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머리를 흔들며 말할 뿐이었다. "어쩔 수 없잖아, 아이. 약속을 어길 수는 없으니까." "그, 그렇지만… 위험하잖아……." 말끝을 흐리며 걱정스러운 맘을 표현해보는 아이였지만, 그녀도 이 사태 를 어떻게 바꿀 수는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약속한 이상, 지키는 건 당연하니까. 너무 당연해서 말할 필요도 없는 거니까. '그런가.' 소년은 이레브워츠 쿠키가 담긴 봉지가 슬슬 바닥을 보인다는 사실에 조금 낭패를 맛보며 두 소년소녀를 바라보았다. 예전에 충동적으로 벌일 일 때문에 자신이 동행하는 것을 몹시 꺼려하는 것 같은 분위기에 스스 로도 거북스러워질 지경이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소년도 자신이 왜 이들과 동행하고 싶어하는지 의문 이었다. 지금가지 줄곧 혼자 행동했고, 또 그게 편하다고 생각해왔는데 말이다. '…흥미가 생겨서, 이겠지.' 훼이드리온이란 소년에게서 느낀 흥미. 15년 동안 살아오면서 이렇게 자 신의 흥미를 당기는 녀석도 없다고 소년은 줄곧 생각해왔었다. 가만히 보 고 있어도 즐거워질 것 같은, 그런 성격을 가진 태자를 어쩌다가 알게 된 후부터, 어쩌면 마음 속 한 구석에서는 이런 관계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존재해왔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쨌든 중요한 건, 방금 자신이 한 발언에 대한 어떠한 후회도 없다는 것이다. 본능에 따랐고, 하고 싶은 말을 해서 오히려 시원했다. 이제 문제는 저들이 받아줄지가 문제였다. "믿어준다면 좋겠다." "…네?" 문득 입을 여는 소년의 말에 아이와 같이 복잡한 생각을 하고 있던 훼 이드리온이 한 박자 늦게 반문했다. "절대 피해는 주지 않아. 믿어 줘." 짧게 말하는 소년의 말은 그렇게 억양이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훼이드 리온과 아이는 느꼈다. 소년의 얼굴에 최초로 감정이 드러났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나이에 어울리는 얼굴이 잠시 되었다는 것을 말이다. 훼이드리온과 아이의 시선이 의도하지 않았지만 허공에서 마주쳤다. 두 시선은 똑같은 뜻을 품고 있어서, 둘은 눈빛으로 서로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둘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잖아요. 마스터 카드 게임의 약속이 있으니." '…안 되는가.' 간절한 마음이었지만 통하지 않은 것 같아서 소년은 금새 침울해져서 작게 고개만을 끄덕였다. 진심이라도 통하지 않을 때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겪게 되자 웬만한 충격이 아니었던 것이다. 낙심하여 힘이 없는 움직임으로 쿠키를 씹고 있는 소년의 귀로 훼이드 리온의 목소리가 다시 날아들었다. "이름이 뭐예요?" "……?" '그게 무슨 상관이지.'라고 묻는 듯한 눈길로 답하는 소년을 바라보는 훼 이드리온과 아이. 훼이드리온은 지그시 아이를 향해 고개를 돌렸고, 자연 스럽게 소년의 시선도 그녀를 향했다. 그녀가 밝게 웃으며 말했다. "믿어주기를 바란다면, 이름을 알려줘야겠다는 생각은 안 들어요?" 훼이드리온도 굳은 표정을 지우고 천천히 미소를 띄웠다. 잠시 어이가 없어진 소년은 갑작스런 전개에 적응하지 못한 표정으로 떠듬대다가, 곧 그들의 의도를 알아채고 다시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선 천적으로 얼굴 표정을 드러내는 것에는 익숙하지 않아, 어떻게 표현을 하 지는 못했지만 소년은 분명히 기뻐하고 있었다. 소년이 이윽고 약간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미르." 대륙 최고의 암살자다 뭐다 해도, 소년 역시 15세의 소년이라는 것이다. --------------------------------------------------------------------- 52편, 팀군입니다.(^^^) 하아. 드디어 검은 옷의 소년을 소년, 이라고 부르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 +) 미르, 미르라는 이름입죠.(>.<) 이미지하고 는 잘 어울리지 않는 이름인가? 사실 미르는 제 친구가 만들어준, 아니 제 친구의 캐릭터입니다. 녀석이 원하는 대로 만들다보니, 거기다 필요한 것을 집어 넣다보니 저런 황당한 녀석이 나왔다는 것이죠.; 어허허. 멋지지 않습니까?( ---) 자아, 그럼 53편에는 또 뭐가 밝혀지려나? 글쎄요글쎄요.( ___) 그건 자까인 팀군도 몰라요.( ---) 슈우우우우웅. 퍽! 끄아악! 어떤 넘이 짱돌을! 으, 으허억! 뭐야! 뭐야, 그 투석기는! 누구 잡을 일 있냐! 더, 던지지마! 던지지 말란 말이다! 으아아아악! 어둠의 기사 DARK KNIGHT TEAM... P.S 추천 감상 비평. 감사드립니다.(___) P.S 2 메일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ㅠㅠㅠ) 특히 NEOGEO99님. 감사합니다. 감사요오.(>.<) P.S 3 그거 아십니까? 44편부터 52편까지. 하루도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아하하하하하. 엄청 느린 진행.( ___);;; 번 호 : 55 / 55 등록일 : 2000년 11월 07일 23:50 등록자 : 암음기사 조 회 : 145 건 제 목 : [카드 게임 판타지]『카드 마스터(Card Master)』#053 카드 게임 판타지(Card Game Fantasy) 카드 마스터(Card Master) 53. 1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깔린 갈색과 붉은 색의 조화로운 융단을 차근 차근 밟으며 훼이드리온이 가뿐하게 기지개를 폈다. 옆에 있던 아이가 그 의 움직임에 약간은 거리를 두면서 계단 위로 시선을 올렸다. "놀랐어, 정말." 오래 앉아있어서인지 뻐근해진 관절들을 한번씩 풀어주면서 그가 고개 를 돌렸다. 마침 오른쪽 어깨를 주무르고 있던 탓에 목운동도 동시에 해 버리게 되었다. "나도 놀랐어. 들어가니까, 떡 하니 버티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 "역시 직업 때문인가? 정말 행동을 예측하지 못하겠어. 또 그렇게 사라 질 건 뭐람." "어디 다녀온다고 했잖아. 동행하게 해달라고 했으니, 돌아오겠지, 뭐." 훼이드리온은 아무 걱정 없는 얼굴로 싱긋 웃으며 다시 몸풀기에 전념 했다. 그런 그에게 시선을 고정해보는 아이. 그녀의 입에서 알게 모르게 작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뭘 믿고 이렇게 태평한 거지.' 미르라고 이름을 밝힌 그 소년은 분명히 훼이드리온의 목숨을 노린 바 있는 그런 암살자였다. 본인이 피해를 입히지는 않는다며 믿어달라고 했 고, 또한 그 소년의 진실한 모습으로 인해 믿어보기로 한 그녀였지만 불 안한 건 불안한 것이었다. 아무리 지금 현재가 좋다고 해도 나빴던 과거 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그런 뜻에서 아이는 훼이드리온이 상당히 걱정되었다. 지금은 자신이 이 렇게 옆에 있어서 그렇다 치더라도, 만약 없다면, 떠난다면 어떻게 될 것 인가. 간단히 상상만 해보아도 아찔할 정도라서, 그녀는 금새 생각을 떨 쳐버렸다. '괜찮을까?' 앞으로 그 무표정한 소년과 같이 다닐 생각을 하니, 약간은 앞날이 캄캄 하기도 했다. 훼이드리온의 설명으로는 도대체가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이 라고 하던데 말이다. 이름을 말한 거 외에는 그 후로 한번도 입을 열지 않은 미르의 한가지 특성을 잘 알 수 있게 되어서, 그나마 걱정을 덜었지 만. "어디 갔을까?" "만날 사람이라도 있나보지, 뭐." 별 상관없다는 얼굴을 하면서 즐겁게 계단을 오르는 훼이드리온의 얼굴 을 다시 지그시 바라보기 시작한 아이는 그가 시선을 눈치채고 자신을 향해 눈동자를 돌리기 전까지 꾸준히 응시를 해보다가, 생긋 웃으며 생각 했다. '괜찮겠지.' 자신이 생각해도 점점 훼이드리온의 성격을 닮아 가는 것 같아서 약간 은 한숨이 나올 것 같았다. 1층에 도착한 둘은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식당으로 향했다. 복도 천장 에 매달려있는 표지판을 일일이 확인할 필요도 없이 간단하게 찾을 수 있는 식당의 불투명 유리가 첨가된 문을 열고 들어가자, 배가 고팠는지 간단한 빵을 시켜 먹고 있던 카를레오가 반갑게 웃으며 인사했다. "아, 드디어 오셨군요." 향긋하게 피어오르는 아나나브(Ananab: 바나나)향의 수프와 마늘 빵. 5 년이 지나도 변할 리 없는 그의 식성은 훼이드리온이 알고 있는 그때와 역시 똑같았다. "여전히 아나나브를 좋아하나 봐." 자리를 찾아 앉으며 그렇게 웃으며 말하는 훼이드리온을 향해 그가 마 늘 빵을 수프에 푹 담그며 대답했다. "그럼요. 맛있잖아요." 눈이 없어지도록 미소를 짓는 그가 아나나브 수프가 발린 빵을 입으로 집어넣자, 아이와 몇 마디 말을 나눈 훼이드리온이 자신들의 저녁도 시켰 다. 미르의 것도 시켜야하지 않을까 했지만, 나중에 오면 시키자는 생각 에 그냥 맘을 놓았다. 아나나브 수프를 스푼으로 뜨고 있던 카를레오가 머리카락이 닿지 않도 록 손으로 정리하며 문득 입을 열었다. "참, 곧 셀라디안에 도착한대요." "벌써?" "정해진 시간에 온 거예요." 평범한 어조로 이야기하며 마지막 남은 빵을 처리하던 그가 빵을 삼키 고 나서 훼이드리온을 쳐다보았다. 마치 준비가 다 되었다는 듯이. "왜 이렇게 늦으신 거예요?" 물을 마시며 개운함을 찾고 있던 그는 카를레오의 질문을 받고 얼른 잔 을 내려놓았다. "아, 그게 말이지." 훼이드리온은 책을 가지러 내려갔을 때부터 다시 식당에 올라오는 부분 까지, 뺄 건 빼고 설명할 건 설명하면서 그에게 이야기를 해주었다. 아이 가 등장한 시점에서는 아이의 부연설명까지 받아가면서 말하자, 카를레오 는 상황을 이해하지 않으려고 해도 자연스럽게 이해가 되는 것을 체험할 수 있었다. "참, 책을 안 들고 왔잖아." 마스터 카드에 너무 빠져버려 본래의 목적을 잃어버리는 실수를 저지른 훼이드리온은 "지금이라도 가서 가지고 올까?"라고 아이에게 말했다가, "또 안 올라오려고?"라는 핀잔을 받고 조용해졌다. 그리고 결국 셀라디안 에 가서 여관을 잡은 후 시간을 가지고 이야기를 들어보자는 의견이 통 과되었다. "그 미르, 라는 소년의 옷차림을 다시 한번 말씀해주시겠어요?" 훼이드리온의 말을 곱씹어보듯 입을 다물고 있던 카를레오가 갑자기 입 을 열어 물었고, 훼이드리온은 어렵지 않게 답했다. "검은 로브를 두르고 있었는데… 뭐, 쉽게 말하자면 온통 검은 색으로 도배해놓은 듯한 모습이야. 왜, 아는 사람이야?" "검은 로브? 온통 검은 색이란 건가요?" "응." 카를레오는 황당한 얼굴이 되어서 "허어."를 계속 연발해대다가 다시 말 했다. "정말 누구인지 모르시겠어요?" "그, 글쎄?" 훼이드리온이 '암살자이면서 미르, 라는 이름은 알지만…….'이라고 생각 하며 아이를 쳐다보았지만, 그녀도 짐작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결국 카 를레오가 안경을 올리며 단호하게 말했다. "온통 검은 색의 옷차림하면, 마스터 카드 게이머들 중에서는 단 한 사 람밖에 떠오르지 않잖아요. 바로, 흑의 마스터. 혹시 그 소년이 성수 카드 를 가지고 있지 않던가요?" "그, 그러고 보니……." "흑의 마스터가 작년 대회에서 우승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그 성수 카드 때문이었어요. 성수 카드로 태크닉을 완성시켜서 발동시킨 비술 성 수축제를 누구도 깨지 못해서, 결국은 그가 우승을 한 거였죠. 훼온 님도 그 비술에 당하신 거 아닌가요?" 훼이드리온은 허망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기억을 되살렸다. 왜 처음부터 눈치채지 못한 것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한달 전, 누님 메이린느에게 로부터 15세의 카드 마스터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혼자서 라이벌 의 식까지 불태웠었는데도, 정작 눈앞에 있었는데 눈치채지 못하다니. 그는 속으로 '이 바보오오오오오!'라고 크게 부르짖었다. 사실 그가 미처 눈치를 채지 못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흑의 마스터, 라는 것을 인식하기도 전에 이미 예전에 자신을 습격했던 암살자의 이미 지가 더 강렬했으니까. 아무리 미르가 노골적으로 검은 로브를 두르고 돌 아다녔다고 해도 모르는 게 당연한 것이다. "…이따가 오면 사인이라도 받아야지……." 마찬가지로 흑의 마스터를 알아보지 못한 아이도 충격을 먹은 듯 멍한 눈초리로 그렇게 중얼거렸고, 훼이드리온도 별반 다르지 않은 상태로 헛 웃음을 웃어댔다. 카를레오가 고개를 저으며 남아있던 다이사를 비웠다. "밝히지 않은 흑의 마스터도 참 신기하군요. 나중에 만나면 인사라도 해 야겠습니다." 인사도 평범한 인사가 아닐 거라고 생각하면서 훼이드리온이 이마에 흐 르는 땀을 닦아냈다. 황당한 일을 연속으로 겪어서 그런지 지금까지 괜찮 았던 머리가 무겁게 가라앉으며 피로를 느끼게 했다. 배에서 내려 여관을 잡으면 곧바로 잠에 빠져들어 푹 쉬어야할 것 같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래도 좋으시겠어요. 흑의 마스터와 마스터 카드를 나누다니. 다른 게 이머들이 이 말을 들었다면, 부러움에 눈물을 흘렸을 거예요, 아마." 땅을 치며 통탄하고 있는 게이머들의 모습을 상상이라도 하는지 재미있 다는 듯 웃는 카를레오를 바라보며 훼이드리온과 아이도 납득한다는 듯 이 고개를 끄덕였다. 행적을 모르는 흑의 마스터와 게임을 했다니, 그건 정말 행운이라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앗, 그럼 나도 대전을 신청해봐야지." 아이가 손뼉을 치며 큰소리로 생각을 밝혔다. "앞으로 같이 다닐 거니까, 기회 봐서 해봐. 좋은 경험이 될 거야." "흐음, 그럴까?" "물론. 지는 것도 좋은 경험이니까." 당연하다는 듯이 생긋 웃으며 말하는 훼이드리온의 얼굴이 어쩐지 미워 보이는 아이는 "피이."라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작게 내보고는 고개를 돌 렸다. 어쨌든 흑의 마스터와 대전을 할 수 있다니, 벌써부터 가슴이 뛰려 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훼이드리온과 아이가 주문한 요리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었고, 둘은 허 기진 배를 달래기 위하여 빠르면서도 식사 예법을 철저히 지키며 음식들 을 하나씩 해치워가기 시작했다. 이미 저녁을 다 먹은 카를레오는 둘이 저녁을 먹는 모습을 보다가, 다이사를 한잔 또 시켜 입가심을 하기로 했 다. 다이사는 언제 마셔도 달콤하게 기분을 좋게 해준다, 고 생각하는 그 의 얼굴이 제법 행복해 보였다. '그런데… 나도 바보였던 거군. 비슷했는데 말이야.' 훼이드리온이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예전부터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 하고 깨닫지 못한 어떤 사실을 다시 상기하는 그는 비밀스러운 기억을 하나 들춰내고 있었다. 숨길 일은 아니었지만 알아도 별 이득도 없는, 지 극히 사소한 기억. 만약 그 기억에 존재하는 그 사실이 맞으면, 자신도 꽤나 인연이 많다고 여겨도 무리는 없을 거라고 생각되었다. 미소를 머금은 그의 얼굴이 다시 한번 다이사의 잔에 가려졌을 때, 훼이 드리온과 아이도 식사를 끝마쳤다. 둘은 행복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 며 생글생글 웃었고, 곧 맛있었냐고 장난스레 묻기도 했다. "나갈 시간인데요?" 빠르게 다이사를 마신 카를레오가 주머니에서 꺼낸 파란 색의 머리끈으 로 길게 늘어뜨려져 있는 자신의 긴 청발을 묶으며 둥그렇게 뚫려있는 식당의 창문을 바라보았다. 이미 어두컴컴하게 변해버린 창문이 하실루스 가 지배하는 시간으로 진입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래요? 그럼 짐을 가지고 와야겠네." 아이가 물이 든 잔을 깨끗이 비우고 아직 객실에 있는 짐들을 생각하며 말했고, 훼이드리온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의견에 동의했다. 깔끔하게 머리를 묶은 카를레오가 일어선 게 그때였다. "계산은 제가 할 테니, 내려가셔서 짐을 가지고 오세요. 갑판에서 뵙죠." "아, 내가 해도 되는데." "오랜만에 뵈었는데, 그럴 수는 없어요. 자, 어서 갔다오세요." 도저히 거부할 수 없게 만드는 순수한 미소를 지은 채로 그가 말하자, 역시나 거부하지 못하고 순순히 따르는 훼이드리온이었다. 카를레오가 카 운터에서 계산을 하는 동안 그에게 인사를 하며 식당을 나선 훼이드리온 과 아이는 서둘러서 다시 4층으로 내려갔다. "나중에 보지." 그 한마디만을 남겨놓고 훼이드리온과 아이 앞을 사라진 미르가 현재 있는 곳은 배의 선미 쪽이었다. 선수 쪽의 갑판보다는 못하지만 그럭저럭 넓은 갑판에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웅성대며 강을 배경으로 빨갛 게 사라져 가는 마스트의 눈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들이 눈치채지 못할 게 당연한 굉장히 절제된 움직임으로 선미 갑판 에 나타난 미르는 다 비워버린 이레브워츠 쿠키봉지를 아무데나 버려버 리고는 품속에 있던 새로운 봉지를 꺼냈다. 향긋한 이레브워츠의 향이 코 를 자극했고, 기분이 좋아짐을 느끼며 주위를 두리번거려 자신을 찾던 울 림의 주인을 찾으려했다.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시면 안되죠." 어딘지 모르게 이질적인 목소리가 미르의 귀로 들어왔고, 소년은 인생무 상을 철칙으로 내세운 듯한 모습으로 간단히 쿠키를 씹으며 뒤로 돌아섰 다. "그렇죠?" 잡다한 나무상자들이 차곡차곡 쌓여져 하나의 커다란 나무상자를 이루 고 있는 곳 앞에서 한 여인이 방금 미르가 버린 봉지를 한 손에 든 채 가볍게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 대답을 하지 않는 미르의 태도가 익숙한지 그 여인은 여전히 미소를 띄 운 얼굴로 봉지를 구겨서 허공에 던졌다. 간단한 손목놀림이었기 때문에 구겨진 봉지는 얼마 못 가 공중에 정지했지만, 그 즉시 그곳에 사라졌다. 마법이었다. 여인은 바람에 날리는 자신의 보라색 머리칼을 손으로 한번 쓸어 내리 며 미르에게 다가갔다. 검은 로브 사이로 언뜻언뜻 비치는 그녀의 하얀 손. 신비롭게 빛나는 보라색의 눈동자와 지워지지 않을 것 같은 미소. 마법사 길드 최고 원로 중 한 명이면서, 훼이드리온과도 어느 정도 안면 이 있는 신비로운 점쟁이 여인 유리였다. "뭔가." 그녀가 가까이 다가오자 작게 입을 여는 미르. 유리는 웃고 있는 눈매로 소년을 내려다보았다. 사람들은 이 기묘한 화음을 일으키고 있는 커플(?) 에게는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고 있어서, 조금 목소리를 낮출 뿐 다른 경 계를 할 필요는 없었다. "의외였어요." 미르의 표정은 여전히 나타나지 않았지만, 그녀는 뒤따르는 설명을 해줄 참이었다. "갑자기 태자 저하와 만나서 마스터 카드를 하더니, 동행을 하겠다니요. 케롯에서 갑자기 태자 저하를 시험해보겠다면서 대결을 버린 당신다운 황당한 행동이에요." 감정을 알아챌 수 없다는 점에서는 동일한 유리의 웃는 얼굴을 올려다 보는 미르의 무표정은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어떠한 동요도 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훼이드리온과 아이와 대화(라고 미르 자신은 생각하고 있다)를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머리 속을 울리는 익숙한 음성에 미르를 알게 모르게 놀 라고 말았었다. 유리가 이 배에 타고 있을 줄은 정말 생각도 못했던 것이 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나면 무슨 말을 할 지는 대충 짐작하고 있었기 에, 정작 그녀가 눈앞에서 직접적으로 말해와도 동요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당신이란 사람, 정말 태자 저하처럼 알 수 없는 사람이군요." 미르는 필로윈과 유리와 관련된 그 모든 이들을 생각하며 "그건 당신들 도 마찬가지지."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입안에 퍼지는 이레브워츠 향이 나 즐기기로 했다. 일일이 대꾸해주는 건 성미에 맞지 않으니까 말이다. "……." 혼자서 열심히 지껄여라, 라는 식으로 입을 다문 채 눈만 뜨고 있는 미 르의 태도에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한 그녀가 단호하게 다시 말했다. "경고하겠는데요. 아니, 해봤자 듣지 않을 거라는 건 잘 알지만, 그래도 하겠어요.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방해할 생각이 라면 일찍 손을 떼어주세요. 마법사 길드 최고 원로라는 직책은 괜히 가 지고 있는 게 아니니까요." 미소를 띈 얼굴로 단호하게 경고하는 그녀의 모습은 정말 섬뜩해 보였 다. 차라리 흉악한 표정을 지으면서 그런 발언을 했다면 더 나았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르는 여전히 쿠키만을 오물오물 씹고 있을 뿐이다. "…아시겠어요?" 제법 잔인하게 들리는 경고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 는 미르의 태도에 유리는 스마일 페이스가 무너질 것 같이 얼굴에 경련 이 일었다. 항상 웃는 낯이지만, 진정으로 화가 나게 되면 마법사 길드 서브 마스터 정도가 나서야지 진정시킬 수 있다는 전설(?)을 소지하고 있 는 그녀였다. 한마디로 여기서 화를 터뜨렸다가는 모르긴 몰라도 최소한 이 셀라디느 호 정도는 거뜬히 가루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자가 바로 유리라는 것이다. 필로윈의 당부를 기억해내며 처절할 정도로 인내심을 발휘하며 얼굴을 가늘게 떨고 있던 그녀의 고막을, 오랜만에 세상으로 나온 소년 암살자의 건조한 목소리가 두들겼다. "걱정하지 마라." 당당한 반말. 이미 유리는 그 정도는 익숙해져버렸다. "뭘 걱정하지 마라는 거죠? 당신의 행동은 충분히 우리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고요." "걱정하지 마라." 특유의 반복적인 대화 방식으로 다시 입을 여는 미르. 씹고 있던 쿠키를 목으로 삼키고 이레브워츠 향이 실린 음성으로 조용하게 그녀를 향해 말 했다. "생각이 있다." "…그러니까 그 생각을 먼저 알려주고 행동하시라고요. 그럼 우리가 불 안해하지 않아도 되잖아요." 한번 깜빡인 미르의 검은 눈동자. 감정이 없이 탁하게 침묵하고 있는 그 눈이 다시 한번 유리의 보라색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신의 머리 카락을 쓸어 내리며 새삼스럽게 긴장했다. "의뢰를 받아들일 때, 두 가지 약속을 했다. 첫째, 임무는 다하겠다. 둘 째, 그 대신 행동의 자유가 있다." 물론 그 말은 유리도 들은 바가 있었다. 그리고 미르는 그 두 가지 약속 을 성실히 이행하고 있었고, 특히 첫 번째 약속을 잘 행하고 있었기 때문 에 그녀도 그동안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너무 자기 멋대로 구는 것 같아서 한마디 해줘야겠다 고 생각했고, 결국 이렇게 대면을 하고 있는 것이었는데, 정작 당사자는 너무나 당당하게 경고를 무시하고 있었다. "그래서요?" "어떻게 하든 내 자유다." 간단한 결론. 너무나 간단해서 어쩐지 그 결론을 믿어보고 싶은 욕구까 지 솟구쳐 올랐다. "하아……." 허탈하게 한숨을 남기는 유리의 얼굴에 남아있던 미소가 조금은 흐릿해 졌다. 그 정도로 그녀는 처음 의도와는 너무나 달라져버린 사태를 느끼고 있었다. "걱정 마라. 내 임무는 다한다." 더할 말은 없다는 듯한 행동으로 단호하게 쿠키를 꺼내들어 입에 무는 미르의 행동에 유리는 결국 설득한 의향을 포기해버렸다. 저렇게 말과 행 동이 비정상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니 었기 때문에, 또한 제법 극단적인 결과를 낳기도 하는 것이다. "…좋아요. 한번 더 믿어보도록 하죠. 그 대신, 임무를 잊는다면 그땐 정 말 용서 없을 줄 알아요. 알겠어요?" "……." 알아들었는지, 아니면 여전히 못 알아들은 건지 판단하기가 상당히 애매 했지만, 유리는 그쯤에서 입을 다물기로 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미르 쪽 에서 말을 꺼냈다. "목적이 뭔가." 유리는 예전과 같은 웃는 얼굴을 만들며 소년을 바라보았다. "대답은 예상하고 있을 테죠?" "역시, 난 몰라야하는 건가." "역시 몰라야하는 거죠." 많은 것이 생략되어진 질문과 그에 따른 답변이 오갔고, 미르는 조용히 침묵했다. 의뢰를 받을 때부터 지금까지 알려주지 않는 이 임무의 목적. 궁금했지만 절대 알려주지 않는 저들에게서 그것을 듣기란 무리라는 것 은 잘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소년의 대신 다른 의문을 꺼냈다. 사라질 타이밍을 잡고 있던 그녀가 강 을 향해 있던 시선을 다시 소년에게로 돌렸다. "뭐죠?" "대회에 참가하는가." "호오. 왜요, 경계되나요? 이번 대회에서도 우승을 노리는 거예요?" 당연하지 않느냐는 듯이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는 미르의 고요한 시선 앞에서 유리는 연신 웃는 얼굴이었다. "알려드릴 게요. 이번 대회에는 이례적으로 마법사 길드 최고 원로 전원 이 참가할 예정이에요. 물론 필로윈은 수도에서 할 일이 있으니 제외되고 요. 그리고 서브 마스터도 대회 운영상의 문제로 참가하지 못하고, 그럼 남아있는 최고 원로 11명과 길드 마스터가 대회에 출전하는 게 되죠. 거 대한 인원이죠?" "흐음." "뭐, 당신 정도라면 충분히 8강까지 오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요. 태자 저하와 그 동행 여자 분은 잘 모르겠지만. 아니, 어쩌면 태자 저하는 가 능할 지도 모르겠네요. 그 분 특유의 강한 운, 알죠?" 끄덕, 소년이 간단하게 고개를 움직였다. 그리고 생략된 물음을 그녀에 게 던졌다. "…포함되는 건가, 그것도." "그럴 지도 모르죠." 신비한 느낌을 동반한 미소를 진하게 지어 보이는 유리의 얼굴을 잠시 응시하던 미르는 이내 고개를 돌려 강을 바라보았다. 차츰차츰 쌍둥이 도 시 중 하나인 셀라디안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고, 그곳 위의 하늘은 붉게 물들어버린 지 오래였다. 슬슬 나루터에 닿을 시간이군, 이라는 생각과 함께 미르는 붉게 물들어 있던 검은 눈동자를 다시 그녀를 향해 돌렸다. 마침 그녀도 소년을 바라 보고 있던 참이었다. "헤어질 시간이죠?" "그렇군." "그럼, 이만. 대회에서 만나도록 하죠." 간단히 고개를 끄덕이는 미르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해 보이던 유리는 바람에 날리는 보라색의 머릿결을 주체하지 못하고 잠시 손으로 정리를 하다가 겨우 마법으로 사라졌다. 미르는 그녀가 사라진 지점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이내 그곳에서 사라 졌다. 볼 일도 끝났으니, 이제 훼이드리온과 아이에게 돌아갈 시간인 것 이다. 객실로 갔다가 이미 문이 잠긴 채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미르는 잠시 그곳에 기다렸다. 그러자 곧 익숙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고, 계단 에서 훼이드리온과 아이가 나타난 것은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어, 미르?" "왔네?" 조금 전부터 서로 반말을 시작한 그들은 반갑게 인사를 하고는 짐을 챙 겨 다시 갑판으로 향했다. 올라가는 길에 아이가 미르를 향해 "어디에 갔 다왔어?"라고 물었지만, 소년은 묵묵부답으로 일관하여 대답을 하지 않았 다. 그녀는 결국 삐쳤다는 듯이 고개를 홱 돌려서 훼이드리온을 적잖이 당황하게 만들었다. 갑판에 도착하자, 이미 옅게 있었던 석양도 완전히 사라진 채 강변은 온 통 어둠으로 둘러 쌓여있었다. 그리고 그 어둠 중에 셀라디안 도시는 오 색찬란한 불빛을 사방으로 뿜어대며 어둠 속에서 그 위치를 밝히고 있었 다. "와아. 예쁘다아아." 아이가 감탄을 내뱉었고, 훼이드리온도 번영한 도시를 쳐다보며 입을 다 물지 못했다. 수도에 살았지만, 이런 멋진 장면을 보는 건 처음이었기 때 문이었다. "……." 그러나 역시 미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시선을 던지고 있을 뿐이었 다. "나오셨군요." 갑판 한쪽에 서있던 그들의 뒤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훼이드리온 은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간단하게 알아냈다. "응, 지금 막." "곧 있으면 나루터에 배가 닿는답니다. 약간 흔들리지 모르니까, 조심하 세요." 주의할 사항을 잊지 않고 말해주는 카를레오에게 알았다고 대답을 하던 훼이드리온이 급히 떠오르는 어떤 생각에 서둘러 말을 꺼냈다. "아, 인사해야겠지? 이쪽이 미르. 그리고 이쪽은 카를레오 폰 이흐리트 라고 해." 소개를 받은 카를레오는 눈이 없어지도록 빙그레 웃으며 정중히 고개를 숙여 자신보다 한참 작은 소년에게 인사했다. 그에 비해 미르는 당당하게 고개를 든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의 행동을 지켜보기만 하고 있었다. "인사해야지, 미르." 아이가 옆에서 작게 속삭였지만, 미르는 요지부동이었다. "괜찮아요. 인사는……." 웃음을 띄우고 미르를 바라보며 말하던 카를레오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말을 끝맺지 못했다. 잠시 적막이 그들 사이를 관통했고, 훼이드리온과 아이가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어 서로를 바라보며 눈빛으로 대화하고 있 을 무렵에 카를레오가 입을 열었다. "혹시나 했는데, 당신이었군요." "…오랜만이군." 약간은 껄끄러운 듯한 표정으로 인사하는 카를레오와 무표정하게 인사 하는 미르. '아는 사이인가 봐.' '그런 거 같지?' 눈빛을 교환하는 훼이드리온과 아이의 의문은 밤하늘처럼 짙어져만 가 고 있었다. -------------------------------------------------------------------- 하아. 팀군입니다. 정말 늦게 올리는군요. 53편입니다.(^^^) 적는데 꽤 힘들게 작업했습니다. 오늘은 영 신나게 글이 적히지 않는군 요. 덕분에 고생 좀 했는데. 하핫.; 5장도 슬슬 끝나 가는데 열심히 해 야겠습니다. 아, 그리구요. 이번 금요일. 그러니까 11월 10일에 팀군이 시험을 치릅니 다. 기말고사...라죠.( ---) 그래서 한동안 글을 못올릴 것 같습니다. 죄송해요오... 시험 끝나면 곧바로 복귀하도록 하겠습니다.(^^^) 자아, 그럼. 모두들, 좋은 하루되세요.(>.<) 어둠의 기사 DARK KNIGHT TEAM... P.S 추천 감상 비평. 환영입니다 환영.(>.<) [번 호] 56 / 58 [등록일] 2000년 11월 14일 03:20 Page : 1 / 26 [등록자] 암음기사 [조 회] 260 건 [제 목] [카드 게임 판타지]『카드 마스터(Card Master)』#054 ─────────────────────────────────────── 카드 게임 판타지(Card Game Fantasy) 카드 마스터(Card Master) 54. 날이 밝았다는 사실을 눈치채기에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 지만, 침대에서 일어나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훼이드리온 은 뼈아프게 경험하고 있었다. 그동안 이른 시간에 어떻게 그리 벌떡벌떡 잘 일어났는지, 새삼스럽게 자신을 존경하고 싶어지려는 그는 움직이기도 거북한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하루를 꼴딱 새면서 여행을 한 덕분에 배에서 내려 나루터에서 얼마 떨 어져있지 않은 '셀라디느의 강' 여관이라는 곳에 방을 잡자마자, 나란히 곯아떨어진 훼이드리온과 아이. 2인실 두 개를 잡자 여태까지 한 방을 같 이 써온 두 사람인 탓에 뭐라고 상의할 것도 없다는 듯이 한 방에 들어 가 버렸고, 얼떨결에 같은 방을 쓰게된 미르와 카를레오는 한동안 서로에 게 시선을 고정시켰다가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오직 그 둘만이 알고 있을 것이 다. 여하튼 잘 떠지지 않는 눈을 비벼 잠을 떨쳐내려 노력하던 훼이드리온 은 꿈에 물결 속에서 망각하고 있던 지난 저녁의 기억이 갑자기 되살아 남과 동시에 눈이 번쩍 뜨여버려 잠의 정령이 저 멀리 도망쳐버렸다고 느꼈다. 그리고 트이는 흐릿했던 시야. 나무로 만들어진 벽으로 둘러싸인 방안에 양쪽으로 두 개의 침대가 있 고, 그 중앙에 큰 서랍장, 그리고 한쪽 벽에 큰 옷장까지 겸비하고 있는 방이었다. 물론 햇빛이 비치기 좋게 남쪽으로 향하고 있는 창문도 큼지막 하게 생겨, 지금도 따사로운 햇빛이 끊임없이 방바닥에 부딪혀 하얀 안개 를 피어 올리고 있었다. '먼지도 아름답게 보일 수도 있는 거야.'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잡생각으로 두뇌의 활동 상태를 점검해본 훼이드 리온은 침대에서 내려서 발을 디디고 섰다. 지그시 몸무게가 발바닥을 내 리누르는 느낌이 들자, 서서히 머리 속도 맑아져서 정상적인 사고를 할 만큼의 수준까지 향상되었다. 머리가 트이자, 잠을 깨우는 결정적인 공로를 세운 생각을 다시 한번 떠 올리는 훼이드리온은 자신의 뒤쪽 벽을 고개를 돌려 한번 바라보았다. 제 대로 된 기억이라면 분명히 저 벽 너머에 미르와 카를레오가 있을 것이 다. 자신과 아이가 먼저 이 방을 점거해버렸으니, 남은 방을 둘이 사용하 는 것은 당연할 테니까 말이다. 거기서부터 그는 의문을 떠올렸다. '간밤에 무슨 일이 난 건 아니겠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는 둘의 모습에서부터 기묘한 느낌을 느꼈기 때문에, 피로에 눌려 기절하듯 자버린 이후에 무슨 일이 있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웅… 훼온, 벌써 일어난 거야?" 상념에 잠겨있던 중에 문득 들려오는 맑은 목소리에, 훼이드리온은 상념 속에 파묻혀 있던 정신을 수면까지 끌어올렸다. 다시 밝아진 시야에는 입 술로 뭔가를 옹알거리면서 몸을 일으키는 아이의 모습이 들어왔다. 검에 물결치는 머리카락이 잠시 햇빛 사이로 비춰지고, 그는 새삼스럽게 같은 방에 단 둘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처음 맞이하는 아침도 아니면서, 셀라디느 호의 객실 앞에서 느꼈던 그 긴장을 다시 한번 경험하고 마는 훼이드리온. 아이는 아직 뿌옇기만 한 정신 상태로 멍하게 풀어진 눈길을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그 는 또 다시 흠칫 놀라며 가슴을 부여잡았다. "…왜 그래애?" 이상하게 늘어지는 그녀의 음성. 뒤따라 나오는 하품과 함께 산뜻하게 기지개를 펴는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던 훼이드리온은 얼굴이 조금 씩 더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그녀와 단 둘이서, 같은 방에서, 아침을 맞이하고 있던 것이다. "아, 아니, 아무 것도 아냐. 자, 잘 잤어?" "응? 으응. 그렇게 개운하지는 않지만, 피로는 많이 가신 기분이야. 생각 같아서는 조금 더 자고 싶지만, 안되겠지?" 회복이 빠른 건지 많이 또렷해진 초점의 검은 눈동자로 그를 쳐다보면 서 침대에서 내려서는 아이에게 그는 미안한 듯한 음색으로 입을 열었다. "미안해. 피곤할 텐데, 쉬지도 못하게 해서." "아냐아냐. 훼온이 미안해할 건 없잖아. 어쩌다가 그렇게 된 것뿐인데, 뭘. 그렇지? 그러니까, 지금은 빨리 움직이기나 하자." 따뜻한 배려를 담은 싱그러운 미소와 함께 웃어 보이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도 기분 좋게 웃을 수 있었다. 일어났으니 씻고 내려가자, 라고 합의를 본 둘은 단단히 문을 잠그고 복 도로 나왔다. 갈색의 목조로 지어진 여관은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전 형적으로 지어져있었지만, 그 규모는 도시라는 이점을 이용하여 판이하게 달랐다. 총 층수는 7층. 그 중 1, 2층을 제외하여 모두 손님들을 위한 객 실로 제공된다. 게다가 한 층에 50여 개의 방이 있으니, 그 크기는 실로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셀라디느의 강 여관이라서 세면실도 무척이나 컸고, 샤워실도 따로 마련되어있었다. 샤워기라는 특이한 물건에서 따뜻한 물이 쏟아져 나온다 는 것을 알아버린 아이는 너무나 기뻐서 주체할 수 없다는 얼굴이 되어 쌩하니 샤워실로 사라져버렸고, 간단히 머리만 감으려고 했던 훼이드리온 은 미르와 카를레오가 있어야하는 방조차 비어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졸지에 쓸쓸하게 식당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그들이 묶고 있던 층은 5층. 식당은 2층에 있기 때문에 3층은 걸어 내려 가야 했다. 아직 잠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건 아니었지만,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 은 관계로 느릿느릿한 걸음일 수밖에 없던 훼이드리온은 2층에 도달하기 까지 꽤나 많은 시간을 소비했다. 그래도 2층에 도착했을 즈음에는 행동 에도 힘이 들어갈 때가 되었기 때문에 식당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빨리 할 수 있었다. 배에서 많이 본 듯한 구조로 만들어진 복도를 지나 청색의 깔끔한 문을 열고 들어갔고, 드넓게 펼쳐진 테이블의 바다를 목격한 그는 문 앞에 서 서 잠시 갈 곳을 잃어버린 강아지 꼴이 되어버렸다. 계단에서 문으로 오기까지의 짧은 복도를 제외하고는, 2층은 몽땅 식당 으로 되어있는 건지 그 크기는 정말 엄청 났다. 대충 계산해보아도 객실 50여 개의 크기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기에, 그는 침을 꿀꺽 삼키 며 고민해야했다. '어디 앉아야하지?' 나중에 내려올 아이를 고려해서라도 문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아야했다. 그런 의미에서 잠시 시력을 돋구어 테이블들을 둘러보는 시간을 가지는 훼이드리온. 때마침 그를 부르는 음성이 들려왔다. "아, 태……가 아니라, 훼온 님." 약간의 말실수를 할 뻔했지만 무리 없이 그의 고개를 돌리는 데에 성공 한 카를레오가 반갑게 둥그렇게 눈을 없애 보이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 도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며 테이블로 다가갔다. 카를레오가 앉아있던 테 이블은 식당 문에서 불과 10리치도 떨어져있지 않은 곳이었다. 훼이드리온이 자리에 앉자 뭔가를 먹고 있었는지 커다란 접시 위에 갖 가지 양념을 늘어놓은 카를레오가 입가를 손수건으로 닦아내며 빙그레 미소지었다. "많이 피곤하셨나보네요. 하룻밤을 지새며 게임을 하셨으니 그럴 만도 하지만." "어, 그 얘기를 어떻게 알아?" 방금 웨이터라고 불리는 종업원이 놓고 간 물을 마시려고 하던 훼이드 리온이 의아함을 표해냈고, 짙은 청색의 장발을 묶으려는 듯 주머니에게 푸른색의 머리끈을 꺼내면서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네드런 양이 해주셨어요. 아크릴 영지의 일을 멋지게 해결하셨다면서, 좋아하시던데요." "헤에, 그래?"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을지 조금은 궁금해지는 훼이드리온이었 다. "흐음. 미르는?" 있어야할 인물이 없다는 것을 안 그가 물었고, 익숙한 손놀림으로 머리 를 묶으면서 식당의 창 밖으로 눈길을 던지는 카를레오의 행동이 자연스 러웠다. "나간 거 같아요. 깨어보니 없었어요." '어디로 간 거지?'라는 의문을 떠올릴 생각도 없었다. 행동이 예측하지 못하니, 궁금해해도 소용이 없을 테니까. 그 대신 훼이드리온은 미르와 관련된 다른 기억을 들춰내며 말했다. "사생활일 수도 있지만, 미르와 아는 사이 같던데, 무슨 사이야?" "…바로 본론이군요?" "그런가? 궁금했으니까." 카를레오는 "흐음."하는 음성과 함께 어렵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마스터 카드를 연구하는 여행 중에, 게이트 마을에 들렀을 때 한번 만 났어요. 그렇게 잘 아는 사이는 아니고요, 그냥 얼굴은 아는 정도예요." "어제 보니, 그냥 얼굴만 아는 정도의 사이는 아닌 거 같던데."라는 말 을 해서 그를 곤란하게 만들 정도로 생각이 없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쯤 에서 그 의문은 접기로 하는 영특하고 기특한 그였다. 그렇지만 또 다른 의문을 발언하는 것은 참지 않았다. "게이트 마을? 그곳에 마스터 카드에 대한 무언가가 있는 거야?" 게이트 산맥 아래에 있고, 앞으로 여정 중에 들러야하는 마을이었기에 그의 관심을 유별날 정도로 표현되었다. 카를레오는 웃을 수밖에 없다는 듯이 표정을 만들고는, 역시나 매끄럽게 말했다. "게이트 마을에는 마법사 길드 마스터가 살아요. 아무래도 마스터 카드 라는 게 마법과 연관이 많다보니, 뭔가 단서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요." "으음… 단서?" "네, 단서요. 마스터 카드에 대한 의문들을 풀기 위한 단서죠." 훼이드리온의 눈이 더욱 초롱초롱하게 변해버렸고, 청발의 마스터 카드 연구가는 당황한 얼굴이 되어버렸다. "마스터 카드에 대한 의문이란 게 뭔데? 어제 말해주려던 그 연구 결과 들?" 카를레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스터 카드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수집하면서 생긴 의문들, 실로 5년 동안의 여행 중에 거의 3년을 소비하면서도 모두 다 풀어내지 못한 것들이에요. 현재도 그 의문을 풀기 위해 카드의 현자를 찾고 있는 중이 고요." 그쯤에서 훼이드리온의 얼굴에 드러난 의도는 알아채지 못하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을 정도로 너무나 확연해서 모르는 척하는 것조차 힘들지 경이었다. 카를에오의 뒷머리로 땀 한 방울 거칠게 굴러 내려갔다. '아하 하. 이상하게 식당이 덥군.' "…그렇지 않아도 말씀드려야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제발 너무 뚫어 져라 쳐다보지 말아주세요." "와아, 고마워!" 이러저러한 일로 어제 배에서 하지 못한 이야기를 하는 셈이니, 카를레 오는 별로 거북스런 마음도 없어서 곧 이야기를 시작했다. 훼이드리온은 이미 모든 신경을 그를 향해 쏟아 붓고 있던 중이라, 경청할 준비를 모두 끝마친 상태였다. "마스터 카드에 대한 의문은 먼저 '마스터 카드의 창안'부터 시작돼요. 그러니까, 마스터 카드를 만든 그것부터가 미스터리라는 것이죠." "어, 그래? 반란으로 분분한 민심을 잡기 위해 만들어진 것 아냐?" 훼이드리온이 말한 것은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진실'이라고 정의 내려진 이야기였다. "'마법왕국 라시엔트 건국기'를 다 보셨나요?" 두 번 도리질을 훼이드리온. 카를레오는 그에 맞춰 설명을 재개했다. "그 책에 보면, 반란의 과정을 서술하는 장에서 이런 부분이 나오죠. '대 마도사 페인트 라시엔트의 손에 들려있는 카드는 승리를 부르는 부적이 었다.'라는 구절이라고 생각되는군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아 시겠어요?" "…반란 중에서부터 이미 마스터 카드는 만들어져있었다는 거야?" "어쩌면 반란을 시작하기 전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아직은 풀리지 않았 으니 그렇다고 하죠. 아무튼 중요한 건, 지금 현재 기록되어있는 역사가 결코 사실은 아니라는 거예요." 현재 카를레오가 말하는 것은 역사가, 그리고 게이머들의 지식을 송두리 째 부정하는 연구의 소산물이었다. 다만 정확한 답은 찾아지지 않았지만, 지금의 성과만으로도 아무 의심 없이 역사를 받아들인 이들에게는 충격 적인 내용이었다. 물론 그 중에는 태자 훼이드리온도 포함되어있었고, 그에 따라 그는 무 척 충격적이라는 듯 굳은 표정으로 카를레오를 응시하고 있었다. "카드를 언급한 부분이 그 구절뿐이라는 게 상당히 아쉽긴 했지만, 제게 는 그것으로도 충분했죠. 전 그 날로 페인트 라시엔트의 고향, '리비엔'으 로 향했어요." 그의 이야기는 막힘 없이 계속 되었다. "리비엔은 기사왕국 카즈캐스커의 북부, 라시엔트와의 근접한 국경지대 에 있는 작은 마을이에요. 숲이 있어서 예부터 질 좋은 나무가 많았고, 그 마을은 특히 목각인형으로 유명해요. 알고 보니, 라시엔트 가문은 원 래 목각인형 제조를 생업으로 하던 집안이더군요. 신기한 일이었죠, 나무 를 다루던 집안에서 대마도사의 칭호를 가진 인물이 나왔다는 게. 전 그 날부터 마을 촌장의 집에서 신세를 지면서 마을에 남아있는 대마 도사에 대한 이야기들을 모으기 시작했어요. 고향이라서 이야기가 좀 있 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너무 적더군요. 필요한 만큼 모으지 못해서 결국 리비엔에서도 그렇게 소득은 없었죠. 하지만 굉장히 재미있는 이야기를 찾아냈어요." '뭔데?'라고 묻는 듯한 훼이드리온의 눈빛을 바라보며 조금 목이 타는 듯 목을 어루만지던 그가 때마침 웨이터가 가져다주는 물에 감사를 표하 며 갈증을 달랬다. 입안이 충분히 적셔졌다고 생각되자, 이젠 옛 제자의 궁금증을 풀어줄 차례였다. "마을에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 중에, 전설 속의 존재라는 드래곤과 사 신(四神)이 강림했었다는 이야기가 있더군요. 그리고 재미있는 건. 아, 사 라진 10대 마스터 카드를 아시나요?" "응, 알아." "다행이군요. 그 10대 마스터 카드들이 드래곤 카드와 사신 카드라고 해 요. 게이트 마을에 들렸을 때, 마법사 길드 마스터의 도움으로 알아낸 거 니까, 거의 확실해요. 신기하지 않아요? 10대 마스터 카드에 들어가는 존 재들이 그 이야기에 나온다는 게 말이에요. 또 한가지 재미있는 게 있는 데 그 이야기들의 공통점이, 그 이야기들에는 모두 소리가 배제되어있다 는 거예요." 훼이드리온은 잔에 담겨있던 물을 꿀꺽 삼키면서 긴장감 있게 의문을 드러냈다. "소리가 배제되다니?" "흐음, 그러니까 모은 이야기 중에서 드래곤과 사신이 등장하는 이야기 들은 모두 다 소리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어요. 심지어 간단한 구절, 예를 들어서 '드래곤이 내려앉자, 지면이 울렸다.' 같은 그런 문장조차 없 었어요. 이상하지 않아요?" 뭔가 알 것 같은 얼굴이 된 훼이드리온은 '혹시…'하는 얼굴로 조심스럽 게 입을 열었다. "…그럼 그 이야기들이 마스터 카드의 환영이 나타난 사건이 변형된 거 라는 거야?" "적어도 제 추측은 그래요.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마스터 카드는 마법왕 국 라시엔트가 건국되어진 후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최소한 대마도사가 고향 리비엔에서 살 때 만든 것이라고 생각된다는 거죠. 어때요, 이 정도 면 미스터리가 조금은 풀린 거 같죠?" 그다지 많이 풀린 것은 아닐지 몰라도, 그럭저럭 풀렸다고는 생각된 훼 이드리온은 고개를 끄덕여보았다. 그러나 어쩐지 의문이 더 늘어나 버린 것도 같아서 기분이 좀 아니긴 했다. "하지만, 거기까지 알아놓고 나서보니 한가지 더 의문이 생겼어요. 좀 더 근본적인 문제가 말이에요." 진지한 카를레오의 말투에 그는 거북스러울 정도로 밝게 빛나는 눈동자 로 그를 쳐다보았다. 카를레오의 음성이 약간 가라앉았다. "마스터 카드가 언제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의문은 그럭저럭 알아냈다고 생각된 시점에,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평화롭게 마을에서 살아가던 그가 도대체 왜 마스터 카드를 만든 것일까, 하고 말이에요. 단순히 '즐기기' 귀한 게임을 만든 것이라고 생각해도, 마스터 카드는 그렇게 간단한 생각 으로 만들어진 것 같지는 않고요. 또, 그렇게 만들지 않아도 즐길 거리는 많았을 텐데. 흐음. 마스터 카드 연구를 시작한지 5년이 지난 지금에서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에요." 연구가 제대로 풀리지 않아서인지, 조금 시무룩해진 얼굴로 말을 마친 카를레오가 자신의 푸른 청발을 쓰다듬으며 심각한 얼굴이 되어버렸고, 훼이드리온도 덩달아 침묵해버렸다. 아침 시간이라 약간은 소란스럽지만, 이곳의 특성상 작은 웅성거림만이 들려오고 있어서 상념에 빠지기에는 그렇게 나쁜 조건은 아니었다. 그런 환경 속에서 카를레오와 훼이드리온은 조용히 적막을 흘려 넣으며 입을 다물고 있었다. '5년 동안 돌아다니면서 겨우 이 정도밖에 얻지 못하다니.' 카를레오는 지난 5년 간을 돌아보며 그동안의 연구 진행 상태에 대해서 속으로 한탄을 하고 있었고. '…정말 마스터 카드는 왜 만들어진 걸까.' 대마도사, 그의 흔적은 이 시대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나마, 훼이 드리온 자신이 열고 들어갔던 왕성 비밀창고의 봉인된 방이 현재 확인된 흔적이다. 확인되었다고 해도 봉인되어 있어서 별 수 없다는 게 문제지 만. 복잡한 생각에 빠져 머리를 긁으려고 손을 서서히 머리 쪽으로 이동시 키고 있던 훼이드리온의 귀에 카를레오의 평범한 어조가 들려왔다. 즉시 고개를 들어 시선을 움직이는 그의 눈에 카를레오의 빙그레 변한 눈이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마법사 길드 마스터에게서 이런 말을 들었어요. 아직도 그 말의 진의를 파악하기는 힘들지만." "어떤 말인데?" 마법사 길드 마스터가 꽤 많은 도움을 준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 는 관심을 기울였다. 무슨 말이든, 마법사 길드에서 마스터라는 직책을 맡고 있다면 헛말을 할 리는 없다고 생각되어서였다. "대마도사는 원래 마법사가 아니었다." "…마법사가 아니었다?" "흐음. 뭔가 마스터 카드가 만들어진 이유와 관련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 하고 있긴 하지만, 정확하게 뭘 뜻하는 건지는 모르겠어요. 마법사라는 직업이 원래 의지를 깨닫기 전에는 마법사가 아니긴 하지만. 단순히 그런 뜻은 아닐 테고, 설마 그런 당연한 걸 말해줬을 리는 없을 테고." 훼이드리온은 수긍한다는 듯이 천천히 고개를 아래위로 움직였다. 확실 히 마법사 길드 마스터가 꺼낸 말이 그렇게 단순할 리는 하늘의 별이 어 느 순간 모두 다 사라져버리는 것보다 확률이 낮은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 마스터의 말은 너무나 평범해서 오히려 심오한, 그런 경지에 다다른 것이었고, 그로 인해 뛰어난 지능을 자랑하는 카를레오조차도 그 말의 수수께끼를 아직까지 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3년의 시간 이 흘렀는데도. 그렇게 다시 상념에 잠긴 채 시간은 흘렀고, 카를레오가 전해준 그 말을 조용히 곱씹고 있던 훼이드리온은 한가지 결론에 봉착할 수 있게 되었다. "마스터 카드는 역시 심오했던 거야." 카를레오와의 만남과 그의 이야기를 통해서 무언가 풀릴 것도 같아서 희망을 가졌었지만, 결국 해답을 얻은 것은 극히 소수에 불과한 것들뿐이 었고 오히려 의문만 더 늘어난 것 같았다. 대체 마스터 카드는 무엇이길 래 이렇게 꼬여만 가는 것인지, 이러다가 나중에 한번에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게 아니지, 그런 생각을 하며 훼이드리온이 조용히 카를레오와 시선 을 맞췄다.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그의 미간도 약간은 좁혀진 상 태였지만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이 웃고 있는 인상이었다. 어렵고 어려운 문제일수록 푸는 재미는 더욱 증가하는 법이다. 지금 카 를레오가 느끼고 있는 감정도 바로 그런 것이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재미있군." "풋!" 갑작스런 음성의 등장에 훼이드리온은 때마침 입술 사이로 흘려 넣으며 갈증을 달래는 역할을 하고 있던 물을 세차게 정면을 향해 뿌려버렸고, 반사신경이 그다지 좋지 못한 카를레오는 아닌 밤중에 물벼락을 맞은 꼴 이 되어버렸다. 주위의 이목이 순간적으로 그들을 향해 모였고, 일을 저 지른 당사자나 일을 당한 피해자나 원인을 제공한 자도 한동안 적막에 몸을 맡겨버렸다. 주르륵. 카를레오의 무테 안경 알에 묻어있던 물기들이 하나로 합쳐져 아래로 흘렀다. 경쾌한 미끄럼이었지만, 그는 천천히 안경을 벗어들고는 준비되어있던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아 내렸다. "…미, 미안해, 레오……." 황당한 얼굴로 얼른 사과부터 하고 보는 훼이드리온. 그런 그를 쳐다보 는 원인 제공자 미르의 얼굴은 뻔뻔하기 그지없을 정도로 아무렇지 않은 무표정이었다. 언제 옆으로 왔는지 기척조차 내주지 않은 미르를 원망하듯이 세차게 고개를 돌려 눈빛을 던지는 훼이드리온이 강한 어조로 말했다. "왔으면, 존재감부터 나타내야할 거 아냐." "…버릇이다." 그래도 조금은 죄책감을 느끼는지 미르는 흔들리지도 않는 눈동자로 열 심히 물기를 제거 중인 카를레오를 쳐다보는 배려를 발휘하였고, 카를레 오는 그런 소년의 모습에 감동보다는 막막함을 느꼈다. '변한 게 없군.' 한번 이런 일을 겪은 적이 있었다. 그때도 이와 똑같은 상황이었고, 다 만 물을 뿌린 사람이 훼이드리온이 아닌 어린 소녀였다는 게 다른 점이 었다. 어쨌든 그는 손수건으로 여기저기 묻은 물기들을 재빠르게 제거해 나갔다. 귀로 들어오는 사람들의 옅은 웃음소리가 굉장히 신경을 자극했 지만, 태자 저하가 고의로 벌인 일도 아닌, 그저 실수였을 뿐이니 화를 낼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묵묵히 손수건을 적셔갈 뿐이었다. "…정말 놀랬다고. 어디 다녀온 거야?" 걱정스럽게 카를레오를 쳐다본 훼이드리온은 그가 괜찮다고 신호를 보 내오자, 그제야 조금은 맘이 놓이는 얼굴로 미르에게 물었다. 그러나 역 시 걱정이 되기는 하는지 계속 눈길을 그쪽으로 힐끔힐끔 돌려댔다. 여전히 검은 로브로 둘러싸인 채 특색 있는 옷차림으로 일관하고 있던 미르가 존재감을 조심스럽게 풀면서 의지를 하나 끌어내어 앉았다. 훼이 드리온이 카를레오를 쳐다보던 눈길을 움직여 미르를 바라보았고, 소년은 그의 질문에 대답을 해주려는 듯 입술을 살짝 움직였다. "……." 쏙. 그러나 그 입으로 들어가는 건 로브 속에서 나온 이레브워츠 사탕. 쿠키 만 가지고 있는 줄 알았더니, 이레브워츠 향이 듬뿍 베여 나오는 사탕까 지 있었던 것이다. 훼이드리온은 질린 듯한 얼굴로 소년을 한동안 응시했 다. '이레브워츠 매니아였던가.' 조용히 이레브워츠 사탕을 입안에 넣어 혀로 몇 번 이리저리 굴리면서, 미르는 팔짱을 끼며 그렇게 침묵해버렸다. 어쨌든 어디에 다녀왔는지는 알 바 없다는 태도였으므로, 훼이드리온도 더 이상 묻는 것을 포기했다. "재미있군." 여전히 종잡을 수 없는 타이밍에 입을 여는 미르였다. 훼이드리온은 허 를 찌르고 들어오는 소년의 대화법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고 생각한 자 신이 어리석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더 수련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그리고 속으로 다짐의 다짐을 하고 있을 때, 미르가 다시 한번 더 입을 열었다. "마스터 카드의 의문이라. 그 사람을 만났던 게 그 때문이었나." "…그렇습니다." 오랜만에 나오는 카를레오의 어미 '…다.'의 종결형. 미르의 가라앉아 고 요한 시선을 마주친 카를레오의 눈동자도 이유 없이 가라앉아 작게 파문 을 치고 있었고, 그 중앙에서 적막은 다시 한번 그들을 뒤덮었다. '아아… 이 두 사람이 눈을 마주하면 왜 이렇게 조용해지는 거지?' 식당 전체가 조용해졌다는 것을 알아챈 훼이드리온이 다음에 기회를 내 서 두 사람의 관계를 다시 한번 더 캐고 들어가야겠다고 결심하며 떠올 린 생각이었다. -------------------------------------------------------------------- 하암. 팀군입니다. 너무 늦은 54편이군요. 죄송합니다. 시험에다가, 수능에 다가. 고1인 팀군과는 전혀 상관없는 수능의 이상한 영향 때문에 오늘에 야 글을 올리는군요. 번명이라 하셔도 할말없습니다.; 정말 그랬는걸요. 현재 시각 새벽 3시 10분. 서둘러 자러가야겠습니다아. 여자친구한테는 일찍 잔다고 했는데. 흐음.; 이 글을 본다면 아마도 때리 려고 할지도.;; 자자, 아무튼. 팀군은 물러갑니다.(>.<) 어둠의 기사 DARK KNIGHT TEAM... P.S 추천 감상 비평. 자아, 환영입니다.(>.<) P.S 2 아아.; STEEL123님....이시던가요? 아이디를 까먹었.;;(ㅠㅠㅠ) 메모. 감사합니다.(>.<) P.S 3 그리고. 나우누리와 유니텔 독자분들도, 감사드립니다.(___) [번 호] 57 / 58 [등록일] 2000년 11월 15일 04:03 Page : 1 / 28 [등록자] 암음기사 [조 회] 216 건 [제 목] [카드 게임 판타지]『카드 마스터(Card Master)』#055 <5장'선상 ─────────────────────────────────────── 카드 게임 판타지(Card Game Fantasy) 카드 마스터(Card Master) 55. 기묘한 침묵을 깨어준 착한 이는, 샤워를 끝내고 식당으로 내려온 아이 였다. 그녀는 산뜻한 기분으로 활짝 미소를 띄우고 검게 흘러내린 윤기 나는 머리카락을 신법으로 말려주면서 테이블로 총총히 다가왔다. "야아, 다 모여있네?" 훼이드리온의 오른쪽, 미르의 맞은 편 자리가 비어있었기 때문에 그쪽으 로 걸어가서 털썩 주저앉은 그녀의 얼굴이 굉장히 상쾌해 보였다. 하룻밤 의 피로를 잠과 샤워로 말끔히 털어 낸 그녀는 기분 좋게 웃는 얼굴로 모두를 둘러보고는 말했다. "뭐하고 있었어?" 훼이드리온을 향한 아이의 눈동자가 깨끗하게 반짝였고, 훼이드리온은 조금 전까지 있었던 적막감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사실을 인식하며 대답 했다. "뭐, 이런저런 이야기. 레오에게서 마스터 카드 연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어." "앗! 치사해, 훼온! 나 없는 사이에!" 그녀의 주장을 쉽게 수용할 수 없는 그는 그녀에게 결코 치사한 일을 한 적은 없다는 것을 밝혔지만, 그녀는 막무가내로 그를 '치사한 사람'으 로 몰아붙였다. 아침도 먹기 전에 혈기 좋게 말다툼부터 시작하는 그들을 물끄러미 관 찰하는 미르의 검은 눈동자와 카를레오의 둥그렇게 사라진 눈. 미르는 몰라도 카를레오는 방금 전까지 흘렀던 그 적막이 조금은 껄끄 러웠다. 소년과는 좋은 사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나쁜 사이 는 아니었다. 3년 전의 인연으로 그렇게 서로에게 해한 것도 없으니까 말 이다. 하지만 이상하게 소년과 마주치면 거북했고, 덕분에 어제 저녁부터 같은 방을 썼음에도 결코 한마디의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미르에게서 느 끼는 그의 느낌은 그런 것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저 두 사람이 모이자 그 적막이 사라졌고 또한 어색한 기분도 사라져버렸다. 훼이드리온과 아이, 그 두 사람의 밝은 분위기가 이끌어내는 위력은 엉뚱한 곳에서도 발휘가 되는 것이다. "…그래그래, 내가 다 잘못했어. 그러니까 이제 그만 하자." "흠. 그래야지. 이제 자신의 잘못을 깨우치겠어?" "네에." 다소곳하게 인사하면서 대답하는 훼이드리온의 공손한 어투에 아이는 그제야 만족했다는 듯이 싱글싱글 웃음을 지어 보였다. 말다툼에서는 결 코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한번쯤 버텨보고 싶다는 생각에 저지 른 행동을 뼈아프게 반성하면서, 그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한숨이야?" 뭔가 또 시비를 걸려는지 그녀가 톡 쏘아 들어왔다. 훼이드리온은 찔끔 하는 표정으로 입술 근처 근육이 경련을 일으키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서둘러 말머리를 돌렸다. "배, 배고프지 않아?" "응. 고파. 그러니까, 왜 한숨이냐니까?" '그러니까'라는 접속사로 전혀 호응되지 않는 두 문장을 이어버린 그녀 는, 감히 고단수라고 불리기에 손색이 없을 정도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 다. 아이의 가차없는 대꾸에 심장이 날아가 버린 듯한 움찔함을 느낀 훼이 드리온이 순간적으로 굳어버렸다. 그녀는 그의 솔직한 반응이 재미있는지 연신 웃음을 바꾸지 않고 살벌하게 미소지었고, 카를레오도 빙그레 띄운 웃음으로 폭소를 참아내고 있었다. 미르는 사탕만을 문 채 여전히 침묵할 뿐이었고 말이다. "으, 음. 그러니까 말이야. 내가 한숨을 쉰 이유는…" "이유는?" 재미있는 답변을 기대한다는 듯한 그녀의 표정은 풍선을 들고 뛰어다니 며 즐거워하는 꼬마의 표정과 닮아있었다. 그래서 훼이드리온은 더욱 바 삐 변명거리를 찾아내야 했다. "흠흠. 그 이유라 함은……" 엉뚱한 곳에서 궁지에 몰린 자의 모습은 참으로 처절하다. 처절할 정도로 철저하게 몰리고 훼이드리온의 눈에 적당한 변명거리가 눈에 띄었다. "…저 둘의 이상한 분위기 때문에 말이야." 순식간에 그의 '변명거리' 신세가 되어버린 카를레오와 미르의 시선이 동시에 그들에게로 고정되었다. 두 시선 모두 다 '그게 무슨 뜻?'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 "저 둘? 이흐리트 씨하고 미르 말이야?" "응. 저 두 명이 같이 있으면 어쩐지 분위기가 가라앉는 것 같아서. 그 래서 그랬던 거야." 아이의 눈이 그 두 사람을 스윽 훑더니, 다시 훼이드리온의 푸른 눈동자 로 돌아왔다. 여전히 맑게 빛나는 눈동자를 향해 그녀가 적당히 작게 말 했다. "괜찮은 거 같은데?" "너의 출현으로 인해서 괜찮아진 거야. 아까 전에는 정말 썰렁할 정도였 다니까." 슬슬 화제가 다른 쪽으로 이동되어 간다는 긍정적인 느낌이 든 훼이드 리온이 아이의 관심을 유도하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대꾸해주었고, 그녀는 그의 술수에 휘말려 점차 어색한 기분을 잊어 가는 것 같았다. 결과적으 로 그의 변명은 무척이나 성공적이었다. "확실히 어제 만날 때부터 이상하긴 했는데… 정말 과거에 어떤 복잡한 인연이 있어서인 거야?" 아이의 눈은 미르를 향해 있었기 때문에, 미르는 그녀를 향해서 시선을 돌려야했다. 사탕을 입 속에서 굴려가며 맛있게 녹이고 있는 소년은 침묵 하는 검은 눈동자로 빤히 그녀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뿐이었다. "…그래, 미르한테 무슨 대답을 바라겠어." 뒤늦게 자신의 실책을 깨달은 그녀가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려버렸 고, 미르도 자신의 뜻이 통했다는 사실에 만족감을 느끼며 제 자세로 돌 아가 정면만을 멍하게 응시한 채 이레브워츠 향과 맛 즐기기를 계속 이 어나갔다. 훼이드리온이 안도의 한숨을 쉬며 그녀를 완전히 카를레오에게 떠넘겨 버렸고, 결국 그녀의 이차적인 목표는 그가 되었다. 그의 빙그레한 얼굴 에 땀이 한 방울 흘러 떨어졌다. "무슨 사이에요?" "그렇게 잘 아는 사이는 아닌 걸요. 훼온 님께도 말씀드렸다시피, 3년 전에 잠깐 만난 것뿐인데요." 카를레오의 평범한 답변에 물러설 아이가 아니었다. 그녀는 궁금한 것에 대해서는 꽤나 끈질기니까. "그런 말로는 충분히 설명이 되지 않는 분위기가 흐르잖아요. 뭐예요, 밝힐 수 없는 그런 비운의 과거라도 있는 건가요?" "비, 비운의 과거라니, 아이……." 반응은 오히려 훼이드리온 쪽이 빨랐으나, 아이가 원하는 것은 카를레오 의 답변이었지 그의 중얼거림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의 말은 일체 신경을 끊어버리고 카를레오만을 바라보았다. "…하핫, 비운의 과거 같은, 그런 심각한 과거는 아니라니까요. 그저 한 번 만나고 나서 이야기 좀 해보았다가 헤어진 것, 그게 다예요. 심각하게 밝힐 그런 이야기는 없다고요." 속마음은 어떨지 몰라도, 그의 표정은 정말 '아무 것도 아니에요'여서, 아이는 더 물어도 기대한 대답이 나오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되었 다. 카를레오나 미르로서는 너무나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고, 훼 이드리온으로서는 지극히 불안한 일이 수밖에 없었다. 화제가 떨어지면, 자연히 자신을 향해 시선을 돌린 그녀니까 말이다. "훼온." 역시 그랬다. "…응?" 다시 생각해보면 그렇게 겁먹을 이유라고는 없는데도 그는 이상하게 몸 이 움츠러든다고 생각했다. '이건 거의 본능적인 움직임이잖아.'라는 생각 을 해보며 자신의 타락함을 질책하려고 할 무렵, 그녀가 고개를 돌려 입 을 열었다. "언제 출발할 거야?" "아아… 출발? 아침 먹고 조금 쉬었다가 움직여야지, 뭐. 서둘러 가면 미츠힐 영지를 지나서 밤늦게 게이트 마을까지 갈 수 있을 거야. 오늘은 작정하고 하루종일 걸어야할걸? 오늘이 벌써 23일이잖아. 게이트 산맥이 낮다고는 해도 쉽게 넘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에코에 도착해서도 어느 정도는 피로를 풀어야할 테니까, 적어도 29일까지는 도착해야 대회 에 전력을 다할 수 있을 거 같아. 그러니까, 오늘부터 6일의 시간이 있는 거야." 앞으로의 여정에 대한 설명을 드디어 끝마친 훼이드리온이 오랜만에 기 다란 대사를 한 탓에 목을 쓰다듬으며 갈증을 느꼈다. 웨이터를 불러 물 을 한 잔 더 시키려다가 아예 아침까지 다 주문하고 있을 때, 아이가 손 가락으로 뭔가 계산을 해보더니 고개를 들었다. "게이트 영지까지 하루에 돌파한다면, 24일부터 29일에 걸쳐서 게이트 산맥을 넘는 거야? 6일씩이나 걸려?" "흐음, 나도 얼마나 걸리는지는 잘 모르는걸." 실재로 게이트 산맥을 넘어본 경험이 없는 훼이드리온이 정확하게 알리 만무했다. 결국 뒷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할 말이 궁해진 그는 눈길을 침묵 하고 있는 카를레오와 미르를 향해 움직였다. "게이트 산맥을 넘어 에코로 향하는데 걸리는 시간을 아시는 분?" 사탕을 문 채 미르가 간단히 입을 벌렸다. "하루." "…미르의 말은 듣지마." 아이는 포기한 듯한 눈빛을 사탕을 맛있게 먹고 있는 소년을 향해 사정 없이 퍼부어 주고는, 다시 기대를 잔뜩 담은 눈빛으로 변화시켜 안경을 고쳐 쓰고 있던 카를레오에게 보냈다. 느끼지 않으려고 해도 그럴 수 없 는 그 눈빛에 그는 서둘러 안경을 쓰고 답했다.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대략 7일 정도가 걸리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좀 더 서두르신다면 6일 내에 충분히 넘을 수 있으리라고 봐지는군요." 긍정적인 그의 답변에 아이는 금방 기쁜 얼굴이 되어 "고마워요."라고 그에게 인사했다. 카를레오는 아니라는 듯 가벼운 미소만을 띄웠다. 그 사이, 웨이터가 아침을 가지고 나와서 테이블 위에 맛있게 진열해주 었고 아이는 그 기쁜 얼굴을 그대로 이어서 요리들에 대한 찬양적인 눈 빛을 발사했다. "와아아, 맛있겠다!" 식탐이 아닌 식욕에 의한 그녀의 순수한 탄사에 훼이드리온은 빙긋이 웃어주며 함께 식사를 시작했다. 부담스럽지 않게 담백한 쇠고기 수프로 위를 달래고 간단한 바게뜨 빵 으로 식욕을 채운 후, 마지막에는 잘 다져진 쇠고기를 뭉쳐서 구운 경단 으로 깔끔하게 식사를 마무리하자, 미르를 제외한 모두의 얼굴에 행복함 이 떠올랐다. 뭐니뭐니 해도 식욕은 성욕, 수면욕과 함께 인간의 3대 본 능 중에 하나이니까 말이다. "원래 이곳은 뷔페라고 불리는 곳이죠." 바나나 향이 듬뿍 묻어나는 연한 상아색의 음료로 입가심을 하면서 카 를레오의 눈이 식당의 뒤쪽으로 향했다. '무슨 말일까.'하는 시선으로 그 와 같이 움직인 훼이드리온과 아이의 눈에 커다란 테이블에 갖가지 음식 들이 진열되고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뷔페라면, 자신이 원하는 만큼 음식을 덜어가서 먹는 곳 말이야?" 훼이드리온의 물음에 카를레오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을 표했다. "네, 맞아요. 원래는 뷔페지만 요즘 들어서 이렇게 레스토랑의 방식도 병행한다고 하네요." 모든 식사를 마친 터라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고 있던 아이가 그의 친절 한 설명에 다시 뒤쪽으로 눈을 움직이며 중얼거렸다. "이런 곳도 있구나……." "응? 뭐라고, 아이?" "아, 아니야, 아무 것도." 아이가 뭐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아 훼이드리온이 되물었지만, 그녀는 바쁘게 손수건을 움직이며 대답을 회피했다. 그런 그녀의 행동에 그는 의아함을 느끼며 푸른 눈동자를 초롱초롱하게 빛냈으나, 결국 고개 까지 돌려버리고 마는 그녀의 태도에 할 수 없이 눈빛을 접어야했다. 그러나 어쩐지 꺼림칙한 기분이어서 멋쩍게 뒷머리를 긁어보았다. '흠, 머리가 많이 길었는걸.' 앞머리도 옆으로 넘기지 않는다면 눈을 몽땅 가릴 정도였고, 뒷머리, 옆 머리 할 것 없이 몽땅 길게 길어버려 약간은 귀찮게 느껴졌다. 그래도 일 단은 참아보자는 생각에 매끄러운 머리칼을 쓸어 올리면서 식사를 끝마 치는 훼이드리온. 그러고 보니 그가 가장 늦게 식사를 끝낸 것이었다. "다 드셨으면 이제 일어나도록 하죠. 게이트 마을까지 가야한다면서요." "응, 그래야지. 아이, 이제 일어나자. 미르, 너도." 입술에 뭐가 그렇게 묻었는지 아직까지 손수건을 놓지 않고 있던 아이 가 "으응…"하며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고, 또 다시 이레브워츠 사탕을 입 안에 넣으면서 미르도 의자에서 일어났다. 오른쪽의 아이가 입고 있는 흰색의 신관용 여행복과 왼쪽에 앉아있던 미르의 검은 로브, 그리고 그 중앙에 있는 훼이드리온이 걸치고 있는 회 색 계통의 여행복. 이미 일어나서 카운터로 가있던 카를레오는 미리 약속이라도 한 듯이 옷을 입고 있는 셋을 관찰하면서 슬그머니 미소를 띄웠다. 우연히 만난 것치고는 셋은 의외로 잘 어울리고 있었다. "잘 먹었습니다." "고마워요." "……." 식당을 나서면 카운터를 보는 종업원에게 친절히, 혹은 무언의 인사를 하며 밖으로 나온 그들은 지체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고 객실로 향했다. 중간에 계단을 올라가던 중에 카를레오가 훼이드리온을 향해 입을 열었 다. "서가도 위로 움직이셔야하죠?" "응, 그게 가장 빠를 테니까. 레오는?" "전 이대로 강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 봐야해요. 안타깝게도 다시 이별 을 해야하는군요." 훼이드리온의 얼굴이 금방 가라앉아 버렸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또 헤어져야하는 거야?" 아직 어린 날의 순진한 기가 남아있다고 여겨지는 태자의 얼굴이 굉장 히 맘에 드는 카를레오는 눈이 없어지도록 빙그레 웃으며 긴 청발의 머 리카락을 흔들었다. 그의 움직임에 따라 흔들리는 머리카락이 현재 그의 기분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죠. 훼온 님은 이분들과 같이 마스터 카드 대회에 참가하러 가셔야하고, 전 저 나름대로 카드의 현자를 찾아가야 하니까 요." "흐음… 그래도 조금 아쉬운걸." 풀이 죽은 듯이 음성이 작은 훼이드리온. 그의 왼쪽에서 움직임을 같이 하고 있던 아이가 나섰다. "못 만나는 것도 아니잖아. 이제 오해도 풀었겠다, 원한다면 찾아서 만 날 수 있는데 뭐가 걱정이야? 이왕 이별할 거면, 기분 좋게 해야지. 안 그래?" 언제나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밝게 웃어주는 그녀의 사고방식은 지금도 빛을 발하고 있었다. 훼이드리온은 그녀의 말에 매료되어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버렸다. "…응, 알았어. 꼭 다시 만나는 거지?" "물론이죠, 훼온 님. 부르신다면, 언제든지 찾아가겠습니다." 확신적인 어투가 강하게 담겨진 카를레오의 약속에 그는 이제 완전히 마음을 놓고 그와 이별할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결심을 하고 나자, 이번에는 다른 생각이 떠올라 입을 열게 만들 었다. "카드의 현자…라면 '쇼너 히브리드'를 말하는 거 맞지? 그 사람을 찾으 러간다는 거야?" "네, 얼마 전까지 이 셀라디안 도시의 북쪽에 있는 작은 마을에 살고 있 었다고 해서요. 그곳에 찾아가 볼 생각이에요. 그럼, 원하는 해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으음……." 카드의 현자는 일생동안 마스터 카드 하나만을 연구해온 현자로서, 현재 는 어디에 살고 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고 하는 은둔자였다. 그러나 그가 알고 있는 마스터 카드에 대한 숱한 진실들을 포기할 수는 없었기 에 카를레오는 끈질기게 그의 흔적을 추적했고, 지금은 거의 막바지에 이 른 상태였다. 이번에 들를 마을에 있을 확률이 지극히도 높았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희망을 걸어보듯이 바라고 있는 것이었다. "그럼, 저기 부탁 좀 해도 될까?" "무엇이죠?" 5층의 마지막 계단을 밟고 복도로 들어선 직후에 훼이드리온이 카를레 오를 향해 말했고, 그도 간단히 대답했다. 훼이드리온의 얼굴을 사뭇 진 지하게 변해있어서 무슨 질문이 나올지 꽤 궁금해지는 그였다. "카드의 현자를 찾으면 어떻게든 내게 알려주지 않겠어? 혹시나 하는 거지만, 나도 그를 만나볼 필요가 있을지도 몰라." 왕성에서 떠날 때부터 생각해둔 최후의 방법을 미리 준비해놓으려는 생 각에서 비롯된 부탁이었다. 카를레오는 어렵지 않다는 듯이 깨끗하게 웃 으며 고개를 움직였다. "누구의 부탁이신대요. 당연히 들어드려야죠." "와아, 고마워, 레오!" "아, 그런데." 의외로 쉽게 카를레오가 부탁을 받아들이자 활짝 웃으며 좋아하던 훼이 드리온은 그의 이어지는 말에 행동을 멈추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미르는 무표정하게 뒤에서 사탕을 씹고 있었고, 아이는 두 사람의 행동을 재미있 다는 듯이 웃으면서 바라보고 있는 중이었다. 괜한 민망함과 함께 카를레오가 말했다. "혹시 거울… 가지신 것 있으십니까?" "거울? 거울은 왜?" 밑도 끝도 없이 상황에 전혀 호응되지 않는 단어가 돌출 되자, 당연하게 훼이드리온이 의문을 제기했다. 카를레오는 안경을 치켜올리며 빙그레 웃 었다. "제가 여행을 하면서 만든 마법이 있는데, 그거라면 좀 더 편하게 이야 기를 할 수 있거든요." "서로 떨어져있어도?" "네, 물론이죠. 화상통신마법이니까요." '마법의 세계는 신기하구나.'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훼이드리온의 뒤에 있던 아이가 냉큼 손을 들며 끼어 들었다. "나, 거울 있어요. 크기 상관 있어요?" "아니오, 작은 손거울이라도 괜찮아요." "그럼, 서둘러 가지고 나올 게요!" 아이가 주머니를 뒤져서 열쇠를 꺼내 문을 열자 카를레오는 "그냥 안에 들어가서 짐을 가지고 나오세요."라면서 자신도 객실로 들어갔다. 그래서 아무 짐이 없는 미르는 복도에 덩그러니 혼자 남겨진 채 세 명은 서둘러 짐을 챙기러 객실로 뛰어들었다. 곧 아이는 작은 가방을 어깨에 둘러메고 방에서 나왔고, 훼이드리온도 커다란 배낭과 함께 칼과 갈색주머니를 잊지 않고 매달고 복도로 나왔다. 카를레오도 가지고 있던 작은 가방을 챙기고 나와 문을 닫았다. 할 일이 없는 미르는 여전히 사탕만으로 빨고 있었다. 아이가 카를레오에게 거울을 내밀었고, 그도 가방에서 자신의 거울을 빼 들었다. "화상통신마법은 실질적으로는 처음 사용해보는 거네요. 폰, 이라고 이 름을 붙여두기는 했는데." "폰?" 훼이드리온이 익숙한 단어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물었고, 그는 빙긋이 웃으며 손을 두 개의 거울에 댄 채 대답했다. "카를레오 폰 이흐리트. 중간 이름이죠." 어쩐지 필로윈을 생각나게 하는 장난기 다분한 미소를 지으며 그가 마 법을 시전하기 시작했다. 두 개의 거울 위에 올린 손을 잠시 내려다보던 카를레오는 천천히 눈을 감으며 정신을 집중했다. 마법은 의지로서 발현되며, 마법사가 의지를 가지고 있는 한 마법은 끊 어지지 않는다. 통신마법의 경우, 원할 때만 마법의 의지를 깨울 수 있는 방식으로 만들어진 것이었고 '폰'도 그것을 충실히 따르고 있었다. 다만 화상통신마법답게 거울을 이용하여 상대방의 모습까지 전한다, 라는 차이 가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손이 그의 머리색과 비슷한 푸르스름한 빛을 내뿜으며 천천치 빛나기 시작하자, 그는 '필요할 때 깨울 수 있는 마법의 의지'를 두 개의 거울에 심기 시작했다. 이제 이 거울은 시전자의 뜻에 의해 멀리 있는 상대와도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유용한 마법도구가 될 것이다. 천천히 빛나는 푸르스름한 기운이 거울 사이를 감돌며 흔들린다고 느껴 지는 것도 잠시, 곧 그 빛은 카를레오의 손으로 스며들 듯이 사라졌고, 그는 눈을 뜨며 아이에게 다시 거울을 넘겨주었다. "자, 다 됐어요. 카드의 현자를 찾으면 제가 이것으로 연락을 드릴게요. 거울이 갑자기 빛을 내면 손잡이를 잡으세요. 그럼 제 모습이 보일 거예 요." "흐음, 우리 쪽에서도 연락할 수 있는 거야?" 정말 마법이 걸린 것인지 의심스러울 만큼 본래의 모습 그대로인 거울 을 관찰하고 있는 아이를 바라보다가 훼이드리온이 물었다. 카를레오는 약간 창피하다는 듯이 어색하게 웃으며 안경을 치켜세웠다. "아니요, 아직 불완전한 마법이라 시전자 쪽에서밖에 연락을 하지 못해 요." "그래? 안타깝네, 조금." 그러나 본래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으므로 그렇게 나쁜 기분은 아니 었다. 거울들은 각자의 가방으로 들어갔고, 그들은 열쇠를 반납한 후, 두 개의 2인실의 하루 사용 값인 10쎌(=40만원)이라는 거금을 치르고는 여관을 빠 져나왔다. 바람의 방향이 그새 바뀌었는지 강의 기운이 느껴지는 동풍이 시원스럽 게 거리를 쓸어주고 있었다. 친절한 위넨스의 손길을 느끼며 카를레오가 먼저 인사했다. "가볼게요." 어디 잠깐 다녀온다는 듯한 부담 없는 인사였다. "응, 잘 가." "다음에 봐."라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은 '꼭 만날 수 있다'라는 희망을 간 직하고 있는 훼이드리온의 마음 때문이었다. "잘 가세요." 아이도 생긋 웃으며 그를 배웅했고, 미르도 무표정으로 그를 빤히 바라 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럼, 이만." 공손하게 허리를 굽혀 태자에 대한 예를 다한 카를레오는 거침없이 몸 을 돌려 북쪽으로 뚫려있는 대로를 향해 느리지도 않고 빠르지도 않은, 그야말로 평범한 걸음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훼이드리온의 눈동자에 마스터의 축복 이 살짝 부딪혔고, 그것 때문에 눈이 따가워서인지 그의 눈동자가 약간은 충혈 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곧 양손으로 얼굴을 한차례 쓸어 내리며 표정을 바꾸었다. 다시 떠오른 그의 얼굴은 밝게 미소 지은 모습이었다. '잘 가, 레오.' 오랜만에 만나 하루밖에 되지 않는 시간이었지만, 그를 이해하는 것에는 더할 나위 없는 시간이었다. 언젠가는 자신의 곁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기에, 다시 환하게 웃어줄 수 있었다. "빨리 가야지, 훼온?" "응, 그래." 과자점의 주인인 듯한 아주머니가 도둑이 들었다고 소란을 피우고 있는 모습이라든지, 옷가게를 연 젊은 여인이 열심히 유리창을 닦고 있는 모습 이라든지, 작은 꼬마가 사탕이 먹고 싶다며 엄마를 조르고 있는 모습이라 든지, 보이는 것은 활기차고 생기 있는 모습들뿐이었다. 숨을 쉬는 듯한 도시의 풍경들 속에서 훼이드리온과 아이, 그리고 미르 는 조용히 서쪽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마스트의 눈이 천천히 하늘의 중앙을 향해 움직이고 있는 시간이었다. "미츠힐 영지로 서둘러서 가자." 한차례의 이별을 겪은 후에도 그들의 표정은 그지없이 밝았고, 좀처럼 표정이 없는 미르도 그때만큼은 웃고 있는 것 같았다. <5장 '선상' 完> -------------------------------------------------------------------- 지금 시각은 새벽 3시 40분. 수능날, 11월 15일의 새벽입니다. 하아. 전국의 수험생들은 지금쯤 곤한 잠에 빠져있겠죠? 팀군의 누님께서도 이번에 수능을 치르십니다. 과연 잘 칠지는 모르겠 지만. 이렇게 깨어 있다가 나중에 깨워서 보내야해요. 흠, 잘 치셔야 하는데. 12년 간의 노력이 단 10시간만에 증명이 되어야하는 거니까요. 그런 뜻에서, 수험생 여러분들, 모두들 분투하시길 바랍니다.!(>.<) 꾸벅.(___) 어둠의 기사 DARK KNIGHT TEAM... P.S 추천 감상 비평. 모두 환영입니다.(^^^) P.S 2 5장 선상.이 끝났습니다. 선상.이 무엇인지는 아시죠?(^^^) P.S 3 내일, 어쩌면 오늘 저녁부터는 6장 시작되겠습니다아. 번 호 : 59 / 59 등록일 : 2000년 11월 17일 02:55 등록자 : 암음기사 조 회 : 121 건 제 목 : [카드 게임 판타지]『카드 마스터(Card Master)』#056 카드 게임 판타지(Card Game Fantasy) 카드 마스터(Card Master) 56. 왕성은 조용했다. 언제나 그렇지만, 수도에 사는 시민들이 생각하기로 왕성은 오늘따라 유 난히도 조용했다. 물론 누구나 그렇게 느낀 게 아니라, 예민한 감각을 자 랑하는 이들이 그렇게 느꼈다는 것이다. 아무튼 왕성은 검은 성벽이 더 어두워 보일 정도로 조용했다. 시내에 있는 가게의 문을 닫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왕성의 서문 앞을 지나던 한 남자가 피곤한 듯 하품을 해보다가 문득 그 두터운 문을 바라 보게 되었다. 단단하게 닫힌 채 그 누구의 출입조차 허가하지 않을 것 같 은 모습. 그렇지만 그는 원래부터 흥미 따위는 없었다는 듯이 고개를 돌 려버리고 가는 길이나 계속 가기로 했다. 그는 왕성이 왜 거기에 있는지도 관심 없었다. 비단, 그것은 그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대부분의 시민들이, 아니 더 넓게 생각해서 마법왕국 라시엔트 안에 살고 있는 거의 대부분 의 국민들이 그와 같은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왕성이 존재하는 것조차 모르는 이들도 있을 정도였다. 국민들의 머리 속에서 이미 왕성이란 것은 잊혀진지 오래였고, 또한 그 어떠한 가치를 두지도 않았다. 그들에게는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영주 와 촌장들이 더 가까웠으니까 말이다. 지금 이 평화의 시대의 마법왕국 라시엔트의 국민들이 생각하는 왕성은 '나라를 다스린다는 사람들이 사는 곳' 이상의 의미는 갖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왕성이 조용하든 말든, 시끄럽든 말든 전혀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오늘 팔아야할 물품량이 더 중요했고, 오늘 저 녁 반찬을 뭐로 해야할까, 라는 고민이 더 심각했다. 국민들이 생각하는 왕성의 존재 이유에 대해서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 냥 거기 있었으니까'였다. 왕궁 수석마법사 필로윈이 걱정하는 부분도 바로 그것이었다. 왕성의 권 위는 이미 사라진지 오래고, 국왕이 어떻다든지 하는 것은 전혀 그들의 이목을 끌 수 없었다. 이런 나라가 어찌 제대로 운영될 수 있겠는가. 그는 왕성의 여러 길 중, 자신이 향하는 목적지로 이어지는 한적한 길을 걸으며 깊은 시름이 담긴 한숨을 토해냈다. 작게 빛을 내고 있는 그의 노 란 눈동자가 오늘 따라 왠지 슬프게 보이고 있었고, 옅은 바람의 향기를 따라 흔들리는 로브 자락도 애처로워 보였다. 하실루스의 눈길이 차갑게 그의 어깨 위로 내려앉고 있는 시간에 그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일까. 걸음을 옮기면서 다시 한번 길게 한숨을 쉬어본 그는 똑바로 빛나기 시 작하는 눈동자로 전방을 응시했다. 누런 색의 마법의 등이 비추어주는 길 의 끝에 익숙한 건물의 형상이 언뜻 그의 눈으로 들어왔다. '다 왔군.' 약간 더 속력을 내보는 그의 행동에서는 조금 전까지 묻어나던 슬픔과 걱정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고, 그 대신 알 수 없는 묘한 단호함이 서 려있었다. 필로윈은 반란이 성공할 것은 확신하고 있었다. 밖에서는 마법사 길드의 최고 원로들이 움직이고 있고, 이 왕성 안에는 금안 기사단이 준비하고 있었다. 물론 지금 기사단들과 만나서 전체를 설득해야하는 과정이 남아 있었지만, 바이마크에 대한 그들의 충성과 신뢰는 대답할 정도였기 때문 에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정말 안 된다면 마법을 사용하는 방법도 있으 니까. '아직 더 남았지만, 거의 다된 것이나 다름없다. 이제 이 나라는 달라질 것이다. 새롭게 태어난 마법왕국 라시엔트가 되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 다.' 그는 환희와 같이 밀려드는 믿음과 확신, 그리고 성공의 쾌감을 거침없 이 받아들이며 금안 기사단이 모여있는 건물로 향했다. 기사단의 실내 수련용으로 쓰이는 그 건물은 한적한 부지에 자리잡고 있어서 엄청난 수의 기사단 전체를 수용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오로 지 기사단의 수련만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 빼어난 디자인이라든지 미 적 감각이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보기만 해도 튼튼하게 보이는 외관이 어 쩐지 기사들의 모습과 닮았음을 알 수 있었다. 필로윈은 어둠 속에 녹아들은 푸른색의 로브를 휘날리며 건물로 다가갔 다. 창문이 있어야할 곳은 모조리 무언가로 가려져 있었지만 , 희미한 빛 이 새어나와 안에 누군가 있다는 것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결정 적으로 확신할 수 있었던 계기라면. "이제 오는가." 건물 앞에는 기사 제복을 차려입고 등뒤에 커다란 검까지 짊어진 모습 으로 그를 기다리고 있는 바이마크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미안하네. 처리할 서류들이 많아서 말이야." 익숙한 일이라는 듯 웃으며 다가오는 필로윈을 향해 바이마크는 묵묵하 게 돌아서며 고개만을 끄덕였다. 필로윈이 바쁜 듯이 먼저 앞서 건물의 정문으로 향했다. "들어가세. 모두 모였나?" "그렇다네." 간단히 답한 바이마크도 그의 뒤를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약간은 웅성거리고 있던 기사단의 소리가 그들의 등장으로 인해 순식간 에 삭으러들었다. 일순간에 조용해진 기사들의 하얀 색 제복들을 훑어보 듯 눈길을 던진 필로윈은 앞서서 단상 위로 올라갔다. 성인 남자의 키보 다 높은 단상 위에 올라가자, 건물 내의 모습이 확실하게 눈에 들어왔다. 왕궁 뒤의 동산에 마련된 수련장 크기보다 조금 작은 넓이라지만, 다른 건물에 비해서는 월등히 광활한 건물 안에는 드문드문 거대한 기둥이 지 붕을 받히고 있었고, 그 밑에서 마법의 등 아래에서 하얗게 빛나는 기사 제복을 입은 늠름한 기사들이 단상 위의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라시엔트 왕가를 상징하는 금색의 휘장은 모든 기사들의 가슴에 달려있 었지만, 이젠 의미를 잃어버릴 것이 분명하다. 그것도 바로 내일부터. "…다 모인 거 같군." "그렇네." 어느새 올라온 바이마크가 필로윈의 옆에 근엄한 포즈로 섰고, 그의 눈 짓과 수많은 기사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필로윈은 의지로서 마력을 일깨워 음성증폭마법을 발현시켜 입을 열었다. "반갑네, 다들. 이렇게 모여준 데에 대해서 깊은 감사를 표하는 바이네." 기사들은 묵묵히 침묵하면서 긍정을 드러냈다. 필로윈은 조용한 그들을 다시 한번 둘러보고 말을 이었다. "다들 알고 있겠지만 소개하지. 난 왕성 수석마법사의 직책에 있으며 실 질적으로 나라를 운영하고 있는 필로윈 셀 디바이어라고 하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갑자기 건물 안이 웅성거리는 소리로 들끓기 시 작했다. 그의 말 중에 포함된 어떤 구절이 국왕을 충성으로 섬기는 기사 들의 심중을 건들어버린 것이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나라는 다스리는 분은 위대한 라시엔트의 국 왕 폐하 아니십니까!" 기사들의 가장 앞에 서있는 10명의 대장들 중 가장 급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제1대장 하가트가 성격을 이기지 못하고 대뜸 소리를 질렀고, 필로 윈이 지그시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노란 눈동자는 똑바로 하가 트를 직시했고, 고압적인 그의 눈길에 제1대장을 맞고 있을 만큼 실력이 충실한 그도 움찔 놀라며 주춤해버렸다. 바이마크가 강하게 "흠!"하고 음성을 내질러서 모두의 시선을 잡았다. 그가 필로윈의 음성증폭마법에 힘입어 천천히 말하지 시작했다. "방금 디바이어 경의 말에 모두들 놀랐을 것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중요한 말이니 잘 새겨듣도록. 지금부터 내가 할 이야기도 그와 관련된 것이다." 바이마크가 가지고 있는 특유의 강인한 느낌이 잘 스며든 강한 어조의 말에 기사들은 필로윈에게서 신경을 끊고 자신들의 기사단장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필로윈도 한발 뒤로 물러서 일선에서는 물러나고, 바이마크는 그를 향해 간단히 고개를 움직여서 그의 미소를 받아냈다. "디바이어 경의 말은 틀린 게 아니다. 실질적으로 이 왕성과 마법왕국 라시엔트 전체를 움직이는 자는 금안 기사단이 섬기고 있는 카드리온 에 이인 라시엔트 국왕 폐하가 아니라, 바로 디바이어 경이다. 이 점은 나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고, 그리고… 자네들도 모른다고는 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그는 잠시 숨을 고르듯 말을 끊고는 뒤쪽으로 눈을 돌려보았다. '잘 하 고 있는 건가?'라고 묻는 듯한 바이마크의 눈빛을 읽은 필로윈은 살짝 띄 운 미소와 함께 긍정의 답을 보냈다. 친우의 대답에 다시 자신을 얻은 바 이마크는 일어나지 않았던 확신에 자신을 가지며 다시 음성증폭마법에 굵직한 자신의 목소리를 실었다. "현 왕실의 실정은 피부로 느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왕의 나태함은 아는 사람들은 이미 아는 사실이고, 주요 정치권에 앉아있는 귀 족들조차 나라 안의 사정에는 무심하고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는 것에만 급급하다. 이곳, 수도 라시안트 밖의 지방 도시들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어떻던가. 과연 그들이 평화의 시대, 라는 지금의 시대와 맞 게 살아가고 있던가?"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고, 거대한 건물 안에는 정적만이 감돌았다. 숨쉬 는 소리조차 들려오지 않는 그 깊은 침묵 속에서 바이마크는 조용히 눈 동자를 움직이다가 다시 말했다. "그들은 그 지방을 다스리는 귀족들에 의해 핍박을 받고 있다. 벗어나려 고 해도 벗어날 수 없어서, 달아나려 해도 그들에 의해 제지당해서 계속 그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이건 귀족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근본적으로 왕실의 무심함과 국왕의 나태함이 불러일으킨 문제인 것이다. 이 의견에 동의한다고 보는데, 어떤가. 다른 의견 있는가." "없습니다." 제2대장이며 금안 기사단의 다음 단장으로 추앙 받고 있는 나이트 슈란 가트가 바이마크의 질문에 맞춰 조용히 대답했고, 그것은 기사단 전체의 의향과도 같았다. 기사들은 저마다 긴장한 표정으로 단장에게로 시선을 모은 상태에서 그의 말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바이마크는 그들의 시선을 받으면서, 뒤에 서있는 친우의 도움을 받으며 끊어진 말을 다시 이었다. "그래서 나와 디바이어 경이 뜻을 같이 하여 대책을 세웠다. 조금 극단 적이기는 하지만, 지금 현재로서는 이 방법밖에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동안의 노력과 국민들의 피와 땀을 보상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일이 라고 판단하여, 그 일을 우리들이 하기로 한 것이다. 그전에 자네들의 의 견을 들어보기 위해서 이렇게 소집을 하였다." 바이마크는 무의식적으로 필로윈을 뒤돌아보았고, 그의 시선을 받은 필 로윈이 천천히 앞으로 나와 섰다. 기사들의 시선이 일순간 누구를 향할지 몰라 방황하던 순간, 그의 말이 순식간에 귀로 기사들의 뇌리를 강타해들 어갔다. "마법사 길드의 원조를 받아, 라시엔트 왕실에 대한 반란을 일으키려고 한다. 금안 기사단이 나선다면, 실패란 있을 수 없다고 여기고 있는데, 자 네들의 의견은 어떠한가. 어떠한 이유도 묻지 않겠다. 찬성과 반대만을 표현하라." 간단하게 요지만을 정리하여 말한 그는 굳게 입을 다물어버렸고, 그때부 터 기사들이 또 다시 술렁이기 시작했다. 기사도의 근본이며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국왕에게 충성하라'의 귀감이라고도 불리는 그의 입에서 나 온 말이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충격적인 말이 아닌가. 반란이라니, 금안 기사단의 강직한 단장 바이마크는 전혀 거리낌없는 표 정으로 마법왕국 라시엔트 왕실에 대한 반란을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이 다. 기사들은 모두들 충격을 받은 얼굴로 웅성거리며 의견을 나누다 단상 위에 서있는 바이마크와 필로윈을 힐끔 쳐다본 후 다시 입을 모아 논쟁 을 벌였다.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필로윈이 팔짱을 낀 채 침묵을 지키고 있는 바이마크를 향해 묘한 미소를 띄우고 조금 다가섰다. "어떨 것 같나." "흐음, 글쎄. 제대로 나를 따라와 줄지 조금은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 네만, 이상하게 확신이 드는군. 저들이 날 따라와 준다는 것이 이상하게 당연한 것처럼 느껴지네. 내가 이상한 건가?" "아니, 자네는 저들을 믿고 있는 거겠지. 자네를 향한 그 신의를 믿고 있는 거야. 보기 좋군." "그런가." 약간은 얼떨떨한 얼굴로 친우의 대답을 천천히 수긍하는 바이마크의 얼 굴에는 어쩔 수 없는 기쁨이 조금 서려있었다. 반란이라는 위험천만한 일 에 저들이 동의해준다면, 그만큼 그들의 신의를 확실하게 확인하는 방법 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 바이마크는 지금 일종의 도박을 하는 마음으로 그들에게 직설적 인 말을 꺼낸 것이다. 진다면 그들에게서 신의를 잃는 것이고, 이긴다면 신의를 얻는 것이다. 한참을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는 그쳐도 되지 않나, 라고도 생각할 수 있었지만, 바이마크와 필로윈은 끈질기게 소리가 그치기를 기 다렸다. 기사들은 멀리서부터 말을 전달해서 의사소통을 하기도 하면서 진지하게 도박을 이끌어가고 있었다. "제5대, 완료되었어." "제7대도 마찬가지." "제3대, 결정 완료야." 금안 기사단의 10명의 대장이 단상 밑 한자리에서 모여 각자가 맡은 대 대의 의견을 듣고 수렴하여 결정을 내리고 있었다. 차근차근 들어오는 대장들의 결정 완료의 소리들. 사실상 기사단장 바로 아래의 권한을 가지고 있는 제2대장 슈란가트는 자신 외 9명의 대장들의 모든 결정을 듣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는 단상 위에서 묵묵히 입을 다문 채 기사단들을 둘러보고 있는 금안 기사단의 단장 바이마크를 올려다보며 경이롭게 눈을 빛냈다. 약간은 학 구적으로 생긴 그의 눈매가 지켜보고 있는 것도 모른 채 바이마크는 필 로윈가 이따금 뭐라고 소곤거릴 뿐, 절대 결정을 재촉하거나 그러지는 않 았다. 슈란가트는 진심으로 탄복했다. 기사 모두가 그를 따른다는 것은 잘 알 고 있었지만, 그것이 이다지도 깊은 것은 오늘에서야 확인한 것이다. 비 록 자신은 뭔가 자신이 없기는 해도, 약속이나 한 듯이 입을 모으는 기사 단의 의견을 바꿀 만큼은 아니었기에 그는 단호하게 결정을 내리자고 생 각했다. 무엇보다 마법왕국 라시엔트의 제1기사라고 불리는 바이마크에 대한 기 사들의 믿음은 그만큼이나 강하고 단단한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신의.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서 맹목적인 신의를 받는 바이마크란 기사 의 존재에 대해서, 슈란가트는 진심으로 탄복할 수밖에 없었다. "결정되었습니다." 그의 말조차 음성증폭마법의 영역 안에 들어간 것일까. 누군가 제지를 한 것도 아니었지만, 슈란가트가 한마디 내뱉자 주위는 들썩거리던 열기 는 싸늘히 식어버려 건물 안은 금방 정적으로 빠져들었다. 그 속에서 10대장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바이마크가 친우를 향해 약 간은 불안한 듯 시선을 보이다가 금방 고개를 돌려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제2대장 슈란가트를 응시했다. 기대하는 듯이 흔들리는 갈색의 눈동자. 신념과 다른 무언가가 뒤엉켜 춤을 추는 빛을 흘리는 바이마크의 그 눈동자 속에서 슈란가트는 마지막 으로 마음을 잡았다. "저희 금안 기사단 전체는, 저희들을 이끌어주신 단장 바이마크 폰 헤이 스티론을 따라, 당신이 믿는 바를 행하는 데 최선을 다하기로 맹세하겠습 니다. 이 맹세는 기사도에 따라 신성하게 받들어질 것입니다." 따르는 주군의 명에는 절대 충성한다. 기사도에 명시된 그 구절에 의거 한 슈란가트, 아니 기사단 전체의 신의는 바이마크에게 크나큰 감동을 줌 과 동시에 그의 의지를 더욱 북돋아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자신을 단순한 단장이 아닌 '주군'으로 모시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과 함께라면 할 수 있다. 이 나라를 바꾸는 것도 결코 어렵지는 않 다고 그는 진정으로 생각했다. "잘됐군, 바이마크. 축하하네. 그대의 진심이 저들에게 신의를 가져다준 거야." 필로윈의 뒤편에 서서 따뜻한 웃음과 함께 그렇게 축하를 해주었고, 바 이마크는 터져 나오는 감동을 애써 자중하면서 작게, 아주 작게 한마디 내뱉었다. 그리고 그 말은 음성증폭마법의 덕택으로 모든 기사들의 귀로 지체 없이 스며들었다. "…고맙다." "…우와아아아아!" "단장님 힘내십시오! 저희들이 있잖습니까!" "당신은 우리들의 주군이십니다!" 갑자기 기사들 사이에서 우렁찬 고함 소리가 솟아오르기 시작했고, 그것 은 순식간에 모두 기사단들의 진심을 이끌어내는 마력을 발휘하였다. 필 로윈은 갑작스런 사태에 서둘러 건물 전체에 방음마법을 치면서 흐뭇하 게 웃었다. 친우 바이마크가 이렇게도 신임을 받고 있다는 게 무척이나 즐거웠던 것이다. 앞으로 힘들고 위험한 일을 하게 될 것이지만, 그들은 그것과는 상관없이 자신들의 주군을 믿고 따르고 있었다. '신의'라는 두 글자 앞에서는 필로윈의 최면마법도 상대가 되지 않는 것 이다. '훗. 괜한 걱정이었나.' 어쨌든 이제 계획은 완벽해졌다. 금안 기사단이라면 내일 내로 왕성 안 을 완벽하게 장악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일 것이고, 그렇게 반란에 성공 하고 나면 먼저 무너진 기강부터 바로 잡아 예전의 권위 있던 왕실로 되 돌려놓아야 한다. 그리고 '그 날'이 올 때까지 완벽한 준비 또한 갖추어놓 아야 한다. "바쁘겠군."이라는 생각을 조용히 읊어보며 중얼거린 필로윈이 바이마크 의 눈길을 느낀 것은 그때였다. 마구 들뜨던 분위기는 바이마크의 제지로 어느새 많이 가라앉아 있었고, 필로윈이 앞으로의 계획에 대한 설명을 할 차례가 된 것이다. "흠, 그럼 계획을 간략하게 소개하겠네." "반란이라면, 역시 화끈하게 왕실을 엎어버리는 겁니까!" "국왕을 바꿔버리는 겁니까!" "500년 전, 대마도사의 반란처럼 말입니까!" 기사임에도, 기사도에 어긋나는 말들을 잘도 소리치는 못 말리는 그들을 내려다보면서 필로윈은 어쩐지 즐거운 기분이 들었다. 자신의 친우에게도 정확하게 밝힌 적이 없는 이 반란 계획을 말하면, 저들이 어떤 표정을지 을지 상당히 기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두 번의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은 그가 음성증폭마법과 방음마법이 제 대로 발동되고 있는지 확인한 후, 드디어 입을 열었다. "흠. 먼저 말해주고 싶은 것은, 이 반란은 500년 전에 마법왕국 라시엔 트를 건국하게 된 계기인 대마도사의 반란과는 방법을 달리한다는 것이 네. 이미 마법사 길드의 원조와 자네들 금안 기사단의 무력이 합쳐져서, 그렇게 시끄럽게 반란을 일으키지 않아도 충분히 왕실을 장악할 수 있으 니 말일세." 다시 잠잠해진 기사들의 이목은 모조리 그에게로 쏠려있었고, 팔짱을 끼 고 있던 바이마크도 처음 들어보는 반란 계획에 관심을 표하며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필로윈은 걸쳐져있는 미소를 지우지 않고 계속 설명해나 갔다. "그래서 난 처음부터 조용하게 반란을 일으키자고 생각했네. 시끄럽게 해봤자 나란 안이 뒤숭숭해질 뿐, 별로 좋은 효과는 이끌어내지 못할 테 지." 아무리 왕실에 관심이 없는 국민들이라고는 해도, 반란이라는 초유의 대 사건에는 어쩔 수 없이 흥미를 드러낼 거라는 것을 애초부터 염두 해둔 계획인 것이다. "이 반란에서 가장 중요한 건, 결코 왕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네. 그리 고 중요 정치권에 있는 귀족들도 바뀌지 않네. 정치권의 인물들은 그대로 둔다는 것이 주요한 요점인 셈이지. 이렇게 하면 시끄럽지 않게 끝낼 수 있다고 생각하네." 경청하고 있던 바이마크가 의문스러운 듯 눈을 가늘게 뜨며 질문을 해 왔다. "그럼 반란의 의미가 없는 것 아닌가." 필로윈은 그런 질문이 나올 줄 알았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젓더니, 그에 대한 명확한 답을 내놓았다. "아니. 방법이 그렇다는 것뿐이지, 이건 반란이네. 왜냐하면, 그들을 그 자리에 그대로 놔둔 후에 강압적으로 정치를 시킬 셈이니까." "강…압적으로?" "그렇다네. 왕궁에서 일하는 인물들에게 모두 기사들을 붙여서, 각자 맡 은 바에 충실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는 거지. 실로 그것이 가장 이상적 인 반란이라고 보는데, 자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가?" "흐음." 왕성 수석마법사인 친우의 뛰어난 머리를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강압적으로 정치를 시킨다고 해서 그들이 과연 따라줄 지도 의문이니까 말이다. "잘 될까?" "잘 되게 만들어야지. 그때가 바로 반란의 진정한 성공을 자축할 수 있 는 날이 될 거야. 그리고 난, 꼭 성공할 것이라고 생각하네." 필로윈의 말은 너무 당연한 듯이 들려서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일으킨다 고 여길 수도 있었지만, 그의 말을 듣는 입장인 자들은 그게 아니었다. 마법사여서 그런지 말 하나 하나가 마법처럼 모두 이루어질 것 같은 느 낌에 휩싸여버렸기 때문이다. 그가 하는 말대로 반란은 아무 성공적으로 끝날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지배했다. 필로윈은 친우를 향해 있던 시선을 돌려 기사단을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일렁이는 노란 눈동자로 천천히 그들 모두를 둘러본 그가 이윽고 천천히 입을 떼기 시작했다. "반란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네. 왕실에 반기를 든다는 것 자체부터가 이미 틀려먹은 일이라고 할 수 있지. 그렇지만, 그렇기 때문에 난 더욱 더 이런 방법을 선택했네. 국민들이 자연스럽게 왕실을 다시 믿을 수 있 도록 하는 이 방법을. 시끄럽게 할 필요는 없네. 조용하게, 조용하게 반란 을 끝내고 우리들의 성공을 축하하도록 하세. 마지막에는." 극적인 효과를 이끌어내려는 듯 그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마지막 숨을 토해내듯 한마디 던졌다. "반란은 개혁이 될 걸세." 그의 말이 파문처럼 공간 속으로 녹아 들어가 기사들의 마음 전체를 울 리고 들어갔다. 그리고 남아있을지 모르는 일말의 불안감까지 밀어내 버 리려는 듯 조용히 마음 속으로 스며들었고, 그들은 진심으로 단단한 표정 을 지을 수 있었다. '우리는 성공한다.' 그들의 표정은 그렇게 해석될 수 있었다. 기사들을 내려다보면서 반란의 주동자답지 않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고 있는 필로윈을 옆에서 바라보며 바이마크는 어쩐지 안심이 되는 것 같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한가지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친우는 진정으로 국민들을 생각하여 개혁을 바라고 있었다. '여전하군, 자네.' 왕성 안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국민들을 자기 몸 생각하듯 걱정하던 필로윈의 모습이 떠올라 그는 괜히 미소를 짓고 싶어졌고, 또 그것을 거 부하지 않았다. 그는 금안 기사단 전체의 마음을 대변하듯 오랜만에 편한 미소를 지었 다. 다음 날. 필로윈의 명을 받은 금안 기사단은 아침해가 터 오기 전 신속 하게 왕성의 곳곳으로 나뉘어져 천천히 귀족들의 저택을 장악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왕성 안에서 살고 있는 모든 귀족들의 세력을 장악했다는 소식을 전해듣게 되었고, 마지막으로 필로윈과 바이마 크가 국왕과 왕비가 기거하고 있는 본궁으로 찾아갔다.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나 아침을 맞으려고 하고 있던 국왕과 왕비는 다짜 고짜 침실로 들어오는 그들에 무엄하다고 호령을 내렸지만, 그런 소리에 물러설 그들이 아니었다. 노한 표정이 되어버린 국왕과 왕비 앞에서 필로윈은 당당하게 선언했다. "오늘부터 라시안트 왕성은 저 왕궁 수석마법사 필로윈 셀 디바이어와 금안 기사단 단장 제1기사 바이마크 폰 헤이스티론이 이끌어나가겠습니 다." 마법력 1414년 5월 23일 아침, 훼이드리온 일행이 서가도를 따라 게이트 마을을 향해 떠나던 시각의 일이었다. -------------------------------------------------------------------- 흠. 하루 늦어버린 56편이군요. 팀군입니다.(^^^) 드디어 필로윈과 바이마크가 오아성을 엎어버렸습니다. 시끄럽게 아닌, 어디까지나 조용조용히 말이죠. 필로윈은 원래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게 만든 캐릭이기 때문에, 반란조차도 약간은 황당스러운 것이죠. "뭐, 이런 시시한 반란이 다 있어!"라고 하셔도 할 말은 없습니다.;; 모든 것은 마지막의 '그 날'을 위해서 흘러가는 것이니까요. 우훗.(사악) 기말고사가 일주일 후로 늦춰질 것 같다는 담임의 말에 조금은 마음을 놓아보는 하루였습니다. 그래도 역시 수행평가의 더미 속에서 벗어나기 에는 아직 멀었지만. 분투해주세요... 학생자까는 힘든 것입니다.(ㅠㅠㅠ) 카드 마스터 팬클럽이 개설되었다는 것 알고 계시죠? 그런데 의외로 가입인들이 몰리지 않네요. 역시 팀군은 인기가 없나봅니다.( ___);; 휴우. 한번 더 알립니다. GO CAMA 로 가시면 있습니다. 모두들, 가입해주시고, 활동해주세요.(^^^) (처음 가져보는 팬클이라 무척 설레이는 중.) 자아, 그럼, 팀군은 이만 자러가겠습니다. 모두들, 좋은 밤 되시고. 내일도 멋진 하루 되시길! 흠! 꾸벅.(___) 어둠의 기사 DARK KNIGHT TEAM... P.S 추천 감상 비평. 언제나 기다리고 있다죠.:) P.S 2 축전.도 아직 받습니다. 6장이 끝날 때까지 받을 생각이니. 서둘러주세요.(^^^) P.S 3 하아. 심란한 하루의 끝이군요. 훗. 번 호 : 60 / 60 등록일 : 2000년 11월 20일 02:56 등록자 : 암음기사 조 회 : 125 건 제 목 : [카드 게임 판타지]『카드 마스터(Card Master)』#057 카드 게임 판타지(Card Game Fantasy) 카드 마스터(Card Master) 57. "나이트 슈란가트는 메이린느 헤언 라시엔트 공주님이 계시는 내궁을 지킨다. 알겠나?" "네." 임시 반란 본부가 되어버린 필로윈의 집무실에 모인 이들의 사이로 얼 음 같은 적막감이 흐르고 있었다. 물론 계속해서 말은 이어지고 있었지 만, 그 말의 '느낌'상 적막 쪽이 더 어울리는 것이다. 필로윈의 집무실에는 총 6명의 인원이 모여있었다. 필로윈은 당연히 있 었고, 바이마크도 쇼파를 하나 차지하고 묵묵히 자리해있었다. 그 외에는 네 명의 기사단 대장이었다. "자아, 이상이네. 모두들 맡은 곳을 철저하게 통제하고, 다른 대장들에게 도 한번씩 언질 해주게나." "네." 대장 4명이 단단하게 대답을 마치고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리를 숙여 기사의 예를 갖추는 그들을 향해 웃는 얼굴로 배웅을 하는 필로윈. 바이 마크는 그저 조용히 고개를 약간 끄덕여 보일 뿐이었다. "아, 제2대장은 남아있게." "네? 저 말입니까?" "그래, 제2대장 나이트 슈란가트. 아니지, 그냥 같이 나가세나." "네?" 필로윈의 말을 잠시 이해하지 못한 슈란가트는 문을 빠져나가는 기사들 의 뒤를 미처 따르지 못한 채 결국 집무실에 안에 남고 말았다. 뭔가 할 일을 잊어버린 슈란가트가 땀을 흘리며 당황해버리고 있을 때, 필로윈이 거기 있다라는 듯 손짓을 해 보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득 고개를 옆으로 돌리는 필로윈. "자네도 같이 가겠나?" 그의 시선을 받은 바이마크가 그에게로 시선을 옮겨 잠시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흠, 역시 그런가." 바이마크는 이전부터 메이린느 공주에게만은 유독하게 약했다. 여성이라 는 것도 이유로 작용했지만, 더 큰 이유가 있다면 여성이면서도 뭔가 건 드릴 수 없는 분위기를 풍기기 때문이었다. 물론 태자와 같이 있을 때는 누나로서의 따뜻함만이 있을 뿐이지만, 귀족들이나 정치 인사들과 대면했 을 때는 그 따뜻함은 오히려 알 수 없는 '어떤 것'으로 작용한다. 바이마크가 꺼려하는 것도 바로 그런 것이었다. 그런 친우의 마음을 익히 알고 있는 필로윈은 "흠." 음성을 남기며 슈란 가트를 쳐다보았다. "나가세." "네." 짧게 대답하고 밖으로 나가는 슈란가트의 뒤를 따르며 필로윈이 마지막 으로 친우를 돌아보았다. "기다리고 있겠나?" "아니, 국왕의 집무실로 가있겠네." 바이마크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필로윈을 따라 집무실에서 나왔다. 울긋 불긋한 융단이 깔린 복도에서 슈란가트는 정석 자세로 꼿꼿이 서있는 채 그들을 기다리다가, 나오자마자 몸을 돌려 계단으로 먼저 향했다. 필로윈이 문에 봉인마법을 걸어 누구도 침입하지 못 하게 해놓고 바이 마크와 헤어져 슈란가트에게 다가왔다. "제2대가 맡은 곳은 어떤가?" "아직까지는 아무 이상 없습니다. 시간도 그렇게 지나지 않았으니까요." "흠, 그래도 더 경비를 철저히 해주게. 절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네, 명심하겠습니다." 슈란가트는 속에서 우러나는 감정은 덮어버리고 간단히 답하고 입을 다 물었다. 필로윈은 그의 대답이 맘에 들었는지 슬그머니 미소를 띄우면서 내궁으로 향했다. 하늘 아래 왕성에서는 곳곳이 소란스럽고 떠들썩했지만, '조용하다'는 것 에는 크게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하늘이 높고 태양은 역시나 밝듯이, 왕 성은 언제나 그렇듯이 조용할 뿐이었다. 물론 왕성 밖의 시민들이 보기에 는, 이지만 말이다. 아침, 해가 뜨기 전에 왕성 곳곳으로 퍼진 금안 기사단은 특유의 강한 무력으로 아침 식사시간이 조금 지날 즈음에 완벽하게 왕성 안으로 휘어 잡았다. 귀족들은 기사들의 무력에 손을 들고 저택을 내주었으며, 필로윈 의 명대로 정치를 해나갈 것을 약속했다. 그것이 '목숨'이 걸린 문제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당연한 결과이긴 하지만. 어쨌든 이제 마지막, 가장 큰 문제라고 할 수 있는 내궁이 남았다. 내궁 은 메이린느 공주가 사는 저택이며, 왕성 안에서 정치권의 힘이 닿지 않 는 두 가지 구역 중 하나(나머지 하나는 훼이드리온의 저택)였다. 바이마 크가 느끼듯이 공주의 알 수 없는 어떤 힘 때문에 정치권의 인사들은 그 녀에게 어떠한 짓도 하지 못했고 물론 그녀가 사는 내궁의 일도 침범하 지 못했다. 그리고 그 후, 결국 내궁은 왕성의 '성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흠. 내궁…인가." 혼잣말로 작게 중얼거리는 필로윈. 그의 옆에서 같이 걷고 있던 슈란가 트는 그의 말을 듣지 않으려고 해도 들리는 바람에 결국 자연스레 입을 열고 말았다. "메이린느 공주님이 사시는 곳… 말씀이십니까?" 필로윈의 고개가 아래위로 천천히 끄덕여졌고, 슈란가트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보다 슈란가트가 머리 하나는 더 키가 컸던 것이다. "그렇지, 왕성 안의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유일한 자, 공주의 저택. 알고 있나?" "몇 번 본 적이 있을 뿐입니다. 그것도 멀리서밖에. 너무 아름다우신 분 이라 그것만으로도 만족합니다." "젊은 사람이 야망이 없구먼." "하하하, 야망은 무슨. 제게는 과분한 분이시죠." 아무리 금안 기사단에서 제2대장을 맞고 있다 하더라도, 고작 기사의 신 분인 슈란가트로서는 '공주'란 올라보기조차 힘든 존재였다. 기사와 공주 의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 유명한 로맨스 소설에서는 주로 쓰이는 소재 들이었지만 현실에서는 쉽게 이루어지기 힘든 것이니까. '야망'이라는 단 어조차 설명하지 못하는 크기의 꿈이라, 그는 그냥 포기하고 사는 것이 속 편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메이린느 공주의 자태를 본 사람들 중, 그 누가 그녀와의 결혼을 꿈꾸지 않았을까. 결국 허탈한 웃음을 터뜨린 슈란가트는 필로윈과 함께 곧 내궁 앞에 다 다랐다. 이미 도착한 기사 두 명이 정문 앞에 서 있다가 그들을 향해 경 례를 했고, 그들은 고개를 움직여 답하고는 정문을 거쳐 안으로 들어갔 다. 저택 현관까지 뻗은 드넓은 정원의 향기가 바람 속을 퍼져 그들에게 다 가왔다. 현란한 색깔들은 필로윈의 마법으로 인해 사계와는 관계없이 피 어있는 여러 꽃들로 인해 더욱 아름답게 뿌려져있었고, 그 중앙으로 난 작은 길을 따라 슈란가트와 필로윈은 나란히 걸어 현관으로 향했다. "언제 봐도 멋진 정원이야. 본궁에도 있지만, 확실히 내궁의 정원보다는 못하지." 솔직한 감상을 토로하는 필로윈의 입가에는 기쁜 미소가 걸쳐져있었다. 이 아름다운 정원에 자신도 일조를 할 수 있었다는 점이 아주 기쁜 얼굴 이었다. 슈란가트가 먼저 도착해 현관문을 두드렸고 어느 곳 하나 더럽혀지지 않은 깨끗한 현관문에서 자연스럽게 메이린느 공주를 떠올리고 있을 때, 문이 열렸다. 스르륵. 소리 없이 열리는 문에서 남색의 정장을 단정히 차려입은 하론 집사가 걸어나왔다. 그의 외눈 안경이 어쩐지 축 밑으로 내려가 있었다. "…오셨군요." 힘없이 안경을 끌어올려 고정시키는 하론 집사의 주름이 더욱 짙어 보 였다. 필로윈이 웃으면서 저택 안으로 들어갔고, 슈란가트도 따라 들어가 며 집사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하론 집사가 여전히 힘없이 문을 닫았고, 알아도 모르는 척 필로윈이 그에게 물었다. "메이린느 공주는?" "방에 계십니다." 곳곳에 서있는 기사들의 경례를 받으면서 계단으로 향하는 필로윈이 묻 자, 하론 집사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흐음."하고 의미 없는 음 성을 남기며 필로윈이 거침없이 2층으로 올라가 버렸고, 슈란가트도 바삐 움직여 그를 뒤따랐다. 남겨진 하론 집사가 깊은 한숨과 함께 안경을 고쳐 쓰고는 다른 곳으로 돌아섰다. 저택 어디를 가나 보이는 기사들의 삼엄한 경계. 가슴이 답답 함을 느끼며 눈앞이 흐릿해지는 것 같았다. 이제 성지도 예전의 모습을 찾기는 힘들 것 같았다. 2층으로 올라온 필로윈과 슈란가트는 멈추지 않고 메일린느의 방으로 향했다. 전부 똑같이 하얀 색의 문이었지만, 이미 방의 위치를 알고 있는 필로윈이라 찾는 데는 크게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문 앞에 선 필로윈은 조용히 노크를 하던 중에 슈란가트의 표정이 상당 히 굳어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근엄한 기사의 이미지인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부끄럼'으로 인한 근육의 경직. 필로윈이 피식 웃으며 그에게 넌지 시 물었다. "부끄러운가 보군?" "…네, 네? 아, 아닙니다." 정곡을 찔렀는지 민망하다는 듯 고개를 돌려버리는 그의 귀여운(?) 태도 에 필로윈이 장난스럽게 키득거렸다. 도저히 오늘 반란을 일으킨 인물이 라고는 보이지 않는 그 모습에 슈란가트는 강한 이질감을 느꼈다. '왠지 위험하다, 이 자는.' 본능적으로 울리는 두뇌 속에 경보가 꺼지기도 전에 뇌리를 강타하는 거대한 충격이 있었다. "…디바이어 경이신가요? 들어와요." 분명 소식은 들었을 것임에도, 전혀 동요가 없는 평온한 어조의 투명한 음성. 듣기만 해도 녹아날 것 같은 그 아름다운 목소리에 슈란가트는 두 뇌를 떠돌던 붉은 색의 경보를 말끔히 지워버리고 말았다. "알겠습니다." 여전히 소리 없이 열리는 문. 슈란가트는 세차게 박동하기 시작하는 심 장이 자신도 혈기왕성한 청년인 걸 자각했는지, 얼굴이 화끈거렸다. 문이 열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왜 그렇게 늦은 건지, 지켜보고 있기에 도 지겨울 정도의 느릿느릿함에 슈란가트는 치가 떨렸다. '빨리 좀 열려!' 그가 기대하는 대로 드디어 더 열릴 곳도 없이 열린 문. 그의 가슴이 다 시는 뛰지 않을 것처럼 뛰어댔다. 바닥에 깔린 현란한 무늬의 융단이 소리를 모조리 흡수한 결과, 발소리 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메이린느의 시선은 이미 문을 향해 있었 다. "어서 오세요, 디바이어 경." 평온한 듯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하는 메이린느는 생긋 미소짓는 얼굴 을 하고 있었다. 순간 슈란가트는 뭔가 싸늘한 기운을 느끼며 심장이 느 려지는 것을 똑똑히 느꼈다. 현재 눈앞에 있는 공주는, 예전에 보았던 따 뜻한 미소를 떠올리는 예전의 공주가 결코 아니었다. 적어도 그 미소에는 따뜻함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안녕하십니까, 공주님." "아직도 '님'이라고 하시는군요, 디바이어 경." "공주님께서도 절 아직 '경'으로 대해주시는군요." "원하신다면, 언제라도 붙이지 않을 의향은 있어요." "…감사합니다." 첫 번째 언쟁에서 간단히 패배하고만 필로윈은 얕은 쓴맛을 혀끝으로 느끼며 그녀가 손으로 가리키는 의자로 가 자리했다. 오늘처럼 이 의자가 이렇게 불편한 건 또 처음이었다. 공주는 역시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무슨 일로 찾아오셨나요?" 메이린느는 읽고 있던 두꺼운 책을 테이블 위에 놓으며 평온하면서도 예리하게 상대방을 찌르고 들어가는 질문을 했고, 슈란가트가 조용히 문 을 닫고 문 앞에 서는 소리를 들으며 입을 열었다. "한번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물론, 공주님께서 저에게 할 말이 많으실 거라고도 생각했습니다만." '할 말 있으시면 하시지요.'라는 것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의 눈동자에 잘 나타나있었다. 노란 눈동자에서 빛나는 그 뜻은 공주에게 보내는 시선 으로는 최초의 것이었다. 도전적이면서도 당당한 그의 눈빛을 마주한 메이린느. 아름다운 금발을 쓸어 올리는 그녀의 모습이 절대 동요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디바이어 경이 오기 전에는 뭔가 할 말이 많았었는데, 막상 만나니 하 나밖에 생각나지 않네요." "무엇이죠?" 그 순간, 슈란가트는 오싹함을 느껴야만 했다. 그나마 얼굴에 떠있던 그 녀의 미소로 인해 '싸늘'한 정도였는데, 미소가 지워짐과 동시에 창 밖에 서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과 지금의 계절을 무시한 한기가 몰고 들어왔던 것이다. 그녀의 얼굴은 태양과 빛의 신 마스트도 보고 물러날 만큼 차갑고 '정' 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합당한 이유를 알고 싶군요." "충분히 알고 있으리라고 봐집니다만." "아니요, 진정한 이유를 말이에요. 이런 어중간한 반란을 벌인 진정한 이유를. 그게 뭐죠?" 슈란가트은 오싹한 중에서도 필로윈의 대답을 기대했다. 필로윈은 미소 가 지워진 딱딱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꿀꺽 침을 삼켰다. 햇빛 아래 에 있으면서도 전혀 따뜻하지 않은 그녀의 얼굴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마스트의 축복 아래에서는 언제나 빛나던 그녀만을 봐왔던 그였기에 그 놀람은 충분히 가슴을 자극하고도 남았다. 뭔가 뜨끔한 감정을 감추면서 필로윈은 담담히 대답했다. "제가 원하는 건 한가지뿐입니다. 오로지 국민들이 더욱 살기 편한 나라 를 만드는 것. 그러기 위해서 이런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한 것입니다. 현 왕실은 너무 나태해서 도저히 나라를 잘 이끌어나갈 수 없기……" "아니, 그 이야기는 이미 알고 있어요." "…네?" 그런 말을 꺼내는 더없이 담담하게 차가웠고, 그녀의 말을 듣는 필로윈 은 당황한 듯이 입술을 약간 벌린 채 멍해져있었다. 메이린느는 창 밖으로 멀리 보이는 왕궁을 향해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 다. "나태한 왕실, 그 중앙에는 나랏일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 나태한 국왕이 있다는 건 저도 이미 알고 있어요. 그리고, 반란을 일으킨 디바이어 경과 헤이스티론 경의 심중도 잘 알겠고요. 그런 점에서는 저도 약간은 동감이 가기도 해요. 이렇게 억압하지 않는다면, 이 왕성은 절대 변하지 않을 테 니까." 그 나태한 국왕의 딸이 되는 이가 저렇게 태연히 내뱉을 말은 절대 아 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필로윈과 슈란가트는 신선한 충격을 받고 말았다. 언제나 따뜻하고 조용하여 일선에서 항상 물러날 있을 줄만 알았던 그녀 였는데 저렇게 정확히 문제를 꿰뚫고 있다니, 게다가 반란에 동감하고 있 다고까지 하는 그녀의 태도가 너무나도 놀라웠던 것이다. 그렇게 감탄하고 있는 필로윈을 향해 메이린느는 시선을 옮겨 그를 쳐 다보았다. 조금 전 말하는 것과는 달리 날카로운 눈빛을 띄우고 있었다. "제가 원하는 답은 그런 게 아니에요. 국민을 생각한다면, 그런 위대한 꿈을 가지고 있는 디바이어 경이 왕이 되어서 정치를 하면 되는 거예요. 하지만 당신은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왜 그런 거죠? 당신이 원하는 진정 한 목적이 무엇이죠?" 도전적인 눈빛. 이제 그것은 메이린느 눈으로 옮겨가 있었다. 부드럽던 공주의 이미지가 아닌 한 나라의 공주로서의 당당한 자세. 필로윈은 움찔 놀래면서 말을 머뭇거리고 말았다. "아… 그건……" 의심하는 듯이 가늘어지는 공주의 눈을 발견해서야 실수를 깨닫고 만 필로윈은 서둘러 헛기침을 내뱉어 실수를 무마하려고 노력을 해보았다. 그렇지만 뒤에서 슈란가트의 시선도 느껴지는 것 같아서 오히려 더 어색 해져버렸다. '실수다.' 근래에 들어서 가장 큰 실수를 해버렸다고 느낀 그 는 "큼! 흠!"이라고 다시 헛기침을 하고는 대답했다. "그 이상의 목적은 없습니다. 전 단지, 그것만을 원하고 있으니까요. 다 른 목적은 절대 없습니다." "그래도 이상한데요." "제가 생각하기로는 그것이 최선이었습니다. 왕을 교체하는 건 진정으로 나라에 도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아니라고 생각하나요?" 그녀의 예리한 물음에 필로윈은 이미 알고 있었기에 태연하게 답을 할 수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정도는 더 낮겠죠." "어차피 반란은 반란, 정도가 낮든 높든 간에 그것은 나라에 대한 도전 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이에요. 디바이어 경 같이 치밀한 자가 어떻게 그런 오류를 범할 수 있는 거죠? 아무리 변명하셔도 전 의문을 떨칠 수가 없 군요." 그녀의 태도는 일관적으로 예리했고 필로윈은 더 말했다가는 자신이 불 리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만 끊자'라는 생각에 그는 단호하게 마지막 말을 꺼냈다. "아무리 물으셔도 제가 할 대답은 그것밖에 없습니다." 메이린느도 그의 단호한 태도를 느끼고 언짢은 표정으로 의자 깊숙이 몸을 묻었다. 뭔가 걸리는 것이 있었지만 필로윈은 더 이상 말하기 싫다 는 태도였기 때문에, 그녀는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좋아요. 말하기 싫다면 할 수 없네요. 그럼 내 질문은 끝이에요. 디바이 어 경은 무슨 말을 하러오신 거죠?" 그럭저럭 사태가 진정이 되었다고 느껴졌고, 그도 자신이 하려던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다행이군'이라고 안도해보는 그가 조금 전보다는 세 게 숨을 내쉬어보며 입을 열었다. "간단합니다. 반란에 방해가 되는 일은 하지 말아주십시오. 사실 제가 제일 염려했던 것이 바로 그 점이었습니다." "정치권에는 먼 공주가 뭐가 두려워서요?" "그 대신, 가장 가깝기도 하니까요." 필로윈이 옅게 웃음 지었지만 그가 가진 특유의 장난기가 담겨있진 않 았다. 일에 관해서는 언제나 진지한 그처럼 그는 의지가 담긴 미소로 그 녀를 바라보았고, 그것은 그녀도 느낄 수 있을 만큼 강렬했다. 이윽고 메이린느는 여전히 차가운 느낌의 미소를 띄우며 답했다. "되도록 그렇게 하도록 하죠. 제가 나설 만한 일은 벌이지 말아주세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일단 답을 받아낸 필로윈은 더 볼일은 없다고 생각하고, 자리에서 천천 히 일어났다. 메이린느는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책을 집으며 그에게 담담 히 물었다. "가시나요?" "네, 용건은 끝났으니까요." "그럼 빨리 가시도록 하세요." "그러겠습니다." 끝까지 언쟁을 나누는 둘 사이에 흐르는 날카로운 분위기에 슈란가트는 멀찍이 서서도 어색함을 느껴야했다. 미묘하게 흐르는 그 감정의 틈 속에 서 홀로 다른 자였던 탓에. 어쨌든 그 분위기는 필로윈이 몸을 돌려 문으로 다가온 시점을 기해 언 제 그랬냐는 듯 사라졌고, 그는 조금 숨을 놓을 수 있었다. 필로윈이 슈란가트의 앞으로 다가와서 강하게 말했다. "단단히 지키게. 어쩌면, 이 반란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이니까." "네, 알겠습니다." 그는 다시 책을 펴고는 독서에 빠져 살던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간 듯한 모습을 연출하고 있는 공주의 평온한 모습을 잠시 뒤돌아보았다가 문을 열고 복도로 향했다. "가보겠네." "안녕히 가십시오." 문 옆에 서서 필로윈에게 인사하는 슈란가트. 고개를 끄덕이며 방을 빠 져나가는 그에게서 시선을 돌려 다시 자세를 잡으려던 그는 닫히기 직전 에 들려오는 필로윈의 작은 음성을 듣고야말았다. "…아무래도 위험해, 메이린느 공주는." 어느새 빠져버린 '님'이 필로윈의 심상치 않음을 예상할 수 있게 했지만, 그런 이론적인 것을 따지지 않아도 슈란가트는 직감할 수 있었다. '뭔가 있다.' 의미심장하게 들리지 않을래야 들리지 않을 수 없는 필로윈의 마지막 음성. 평소 들어오고 봤던 필로윈의 행동으로 보자면 결코 그냥 내뱉은 말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절대 뭔가가 있다는 것이다. 그 '뭔가'의 정체도 이미 알 것도 같지만 굳이 언급은 하지 않는 슈란가 트. 그는 심각한 표정을 지은 채 문 앞에 섰다. 아무래도 한동안 골머리 를 썩혀야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때였다. "소개나 해주시겠어요?" 책을 읽고 있던 메이린느 공주가 고개를 들어 그 화사한 자태를 그를 향해 보내준 것은. 너무 당황한 나머지, 그는 말을 더듬을 수밖에 없었다. "아, 저, 저 말입니까?" "훗, 긴장하지 말아요. 기사님에게는 아무런 감정도 없으니까요. 그보다, 소개나 해주세요. 앞으로 한동안은 꾸준히 보고 살아야할 것 같은데, 이 름도 모르면 어색하잖아요." 메이린느의 미소에는 다시 따뜻함이 떠올라있었다. 보는 이로 하여금 푸 근한 기분을 들게 만드는 그 미소에 그녀의 미모가 다시 한번 빛을 발하 는 것이 느껴졌다. 창 밖에서 쏟아져 내리는 햇빛. 슈란가트는 '배경 한번 멋지다'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아, 전 금안 기사단 제2대장을 맡고 있는 나이트 슈란가트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메이린느 공주님." "네, 반가워요." 그녀는 생긋 웃으면서 고개를 움직였다. 슈란가트는 찰랑이는 윤기를 자 랑하는 금색 곱슬머리가 그녀의 고귀함을 더욱 더 증폭시키고 있다는 느 낌을 받음과 동시에, 임무를 잊고 정신을 잃을 뻔했다. "성이 뭐예요?" 때마침 들려오는 메이린느의 다른 질문에 그는 정신의 백지화를 서둘러 막을 수 있었다. "아, 슈란가트 마카르토라고 합니다." "마카르토? 라시엔트 남부에 있는 그 영지 말인가요?" "네, 저희 가문이 다스리는 영지입니다." "아아, 그렇군요. 그럼, 잘 부탁드려요."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를 향해 다시 웃어주고는 책을 향해 다시 시선을 내리는 메이린느를 바라보며 그는 아까와는 다른 종류의 신성한 충격을 받고 말았다. '생각해왔던 이미지하고는 너무 다르잖아.' 그동안, 멀리서 보던 때에는 그녀가 도도하고 범접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해왔는데, 막상 이렇게 만나고 보니 그것도 아니었다. 도도하기는커 녕 오히려 서민에 가까웠고, 범접하기 어렵기는커녕 사귀기 쉬운 여자친 구 같은 느낌까지 드는 것이 아닌가. 그는 머릿속에 그리고 있던 메이린 느 공주의 이미지를 깨버리고 다른 것으로 교체하기로 했다. '그래도, 부담은 조금 덜겠는걸.' 메이린느 공주를 감시한다는 것에 약간은 부담을 느끼고 있던 터라 몸 이 저절로 경직이 되는 것 같았는데, 저렇게 공주 쪽에서 선뜻 다가와 주 니 맘이 놓였다. 언제까지 이 관계가 계속될 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껄 끄러운 관계는 아니라고 생각되지 이제는 경직이 아닌 저절로 기분이 좋 아질 것 같았다. 그리고 한편, 마음을 놓고 있는 슈란가트와는 달리 메이린느는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책을 보고 있어도 결국 걱정은 계속 이어지고 있으니 까. '훼이에게는… 훼이도 영향을 받았을까? 여행에 해를 입으면 안될 텐데.' 때마침 보고 있던 책 '식물도감'에서는 디오느 열매에 대한 이야기가 나 와서 더욱 더 동생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자연스럽게 시선은 창 밖을 향했고, 그 시선에는 동생에 대한 깊은 걱정 이 담겨있었다. 그녀는 안타까운 음성으로 동생의 이름을 공기 속으로 토 해냈다. "훼이……." 햇빛은 밝았지만, 그녀의 마음은 결코 편치 못했다. --------------------------------------------------------------------- ...네에, 늦은 밤. 깊어 가는 하실루스의 시간 속에서 허접 자까 팀군이 이 렇게 57편을 들고 등장했습니다. 많이 기다리셨죠? 아하핫.;; 이번 편에는 메이린느 공주가 재등장했습니다. 이제 반란에 이리저리 휩 쓸려서 뭔가를 할 것도 같지만, 글쎄요.; 우훗, 사악한 팀군이 그걸 가르쳐 줄 리가 없겠죠?(왜 말했냐! 퍽! 꿍! 끄아악!) ....죄송합니다.; 하아. 어쨌든, 3권도 이제 슬슬 양이 차오르고, 6장도 조만간에 끝을 맺게 되면 카마.가 드디어 책으로 나오게 됩니다. 여러 가지 이야기를 출판사 와 하는 중이구요. 그 중에서 가장 대두되는 것이 축전 문제하고 표지 그 림 문제인데. 냐하하.;; 표지야 뭐 그쪽에서 알아서 해주겠지요.;; 그 대신 축전은 제가 어떻게 해야하는데. 축전 보내주세요. 6장 완결까지 받겠습 니다. 아핫핫.;; 아, 그리고 GO CAMA 기억하시는 것도 잊지 마시구요.(^^^) 자아, 그럼. 팀군은 이만 학교를 위해 자러가겠습니다.(>.<) 어둠의 기사 DARK KNIGHT TEAM... P.S 추천 감상 비평. 환영합니다. 무조건요.(>.<) P.S 2 그리고. 전에 주소를 알려주세요∼ 부탁드린 분들. 한번 더 주소 좀 보내주세요.;;; 적어놨다가 맞는지 확인을 하려고 했는데.;; 메일함에 지워져버렸네요.; 냐하하.; 그래서 그런데. 수고로우시겠지만, 한번만 더 보내주시길.(___) 번 호 : 61 / 61 등록일 : 2000년 11월 21일 03:11 등록자 : 암음기사 조 회 : 122 건 제 목 : [카드 게임 판타지]『카드 마스터(Card Master)』#058 카드 게임 판타지(Card Game Fantasy) 카드 마스터(Card Master) 58. 수도 라시안트에서 최소한 200헬리치(=200Km)는 떨어진 곳에서 아이와 같이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가고 있던 훼이드리온은 누군가 자신을 부르 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고개를 돌려 뒤를 살펴보았다. 뭔가 이야기를 꺼내려하던 아이가 그의 행동에 말을 멈추고는 물었다. "왜 그래?" "누가 날 부르는 거 같아서 말이야. 아닌가?" "착각이겠지. 이 평원에서 누가 훼온을 부른다는 거야? 여긴 나하고 훼 온하고 미르 밖에 없는데." 그녀는 별 거 아니라는 듯이 손을 흔들며 싱긋 웃었고, 훼이드리온도 곧 '그런가.'하고는 잘못 들은 것으로 치부해버렸다. 확실히 그녀의 말이 타 당하기는 하니까. "그래서 그 다음은? 10대 마스터 카드가 그 이야기들하고 무슨 관련이 있는 건데?" "아아, 아까 이야기했지? 리비엔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들 중에 대 다수가 드래곤이나 사신과 같은 전설 속의 동물들이 나온다고. 그런데 10 대 마스터 카드가 드래곤 카드와 사신 카드로 이루어져있대. 신기하지 않 아?" 아이가 놀랍다는 듯이 과장된 손짓과 함께 소리쳤다. "와아아! 그럼 그 이야기들은 마스터 카드가 만들어낸 드래곤이나 사신 영상에서 발전된 이야기라는 거야?" "레오는 그렇게 생각하는 게 분명하다고 했어. 그리고 지금의 역사가 말 하는 사실은 잘못된 것이라고도 했고. 뭔가 꽤 스케일이 큰 이야기지?" "응응, 마스터 카드에 그런 미스터리가 숨겨져 있을 줄이야. 정말 몰랐 어! 다른 건? 다른 건 못 들었어?" 열렬한 반응을 비추는 그녀의 모습은 꽤나 재미있는 것이라, 동행이면서 도 멀리 떨어져서 그들을 관찰하고 있던 미르조차 웃고 싶은 충동을 느 끼게 만들었다. 무감정한 소년도 그 정도였는데 가까이서 그녀의 얼굴을 적나라하게 들여다볼 특권이 주어져있는 훼이드리온은 어떻겠는가. '귀, 귀엽다.' 점점 오르기 시작하는 두 볼의 열을 느끼며 그는 들키지 않게 손바닥을 올려 얼굴을 감쌌다. '아아, 뜨겁다.'라는 생각을 하면서 잠시 그 열에 몸 을 맡겨 마음을 진정시키……려했지만, 역시 현실은 만만치 않았다. 아이가 갑자기 손으로 얼굴을 가리는 훼이드리온의 양팔을 확 잡아챔과 동시에 다시 한번 재촉했다. "다른 건 못 들었냐니까?" '?'보다는 오히려 '!'쪽에 가까운 강세가 들어간 문장이었지만, 그녀가 나 타내려하는 것은 역시 의문이었다. 그녀의 동그랗게 뜬 검은 눈동자 밑에 깔린 무수히 많은 물음표들의 행렬을 발견한 훼이드리온이 "아하핫." 어 색하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었다. "나도 그 이상은 못 들었어. 레오도 5년 동안 추적하면서 연구하고 다녔 는데, 알아낸 건 그 정도라고 했으니까." "우웅… 그래? 그럼 진작에 말하지, 얼굴은 또 왜 가리는 거야? 어, 얼 굴이 빨갛네? 어디 아파?" 순식간에 변하는 그녀의 대사 주체는 어느새 훼이드리온에게로 넘어가 있었고, 그는 또 다시 어색한 웃음을 남발하며 서둘러 변명을 해야만했 다. "아, 아니, 날씨가 좀 덥잖아? 그래서 그런 거야. 아하하." "흐음? 많이 더운가봐? 신법이라도 쓸까?" 그녀는 두 손을 모으며 걱정스러운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이마에 흐르 는 땀이 덥다는 것이 결코 거짓말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던 터라 거절하고 싶은 생각은 그렇게 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는 그녀의 배려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 괜찮아. 미르도 잘 참고 있는데. 뭐. 그리고 여행하면서 이런 더 위쯤은 당연하잖아. 참을 수 있어." "…응." 훼이드리온의 말에 아이는 약간의 아쉬움도 느꼈지만, 그렇게 나쁜 기분 은 아니었다. 그의 말은 옳았고 또 그만큼 더 의젓한 그를 발견할 수 있 도록 해준 거였으니까. 그녀는 생긋 웃으며 돌아섰다. 문득 시야를 스쳐 가는 검은 점. 점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큰 그것은 훼 이드리온, 아이와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같이 걸어가고 있는 미르의 모습 이었다. 덥지도 않은지 새까만 짙은 검은색 로브를 뒤집어쓴 채, 보는 사 람이 더워 보이는 산발의 머리도 전혀 정리하지 않은 상태에서 땀 한 방 울 흘리지 않는 소년은 그들에게는 경이롭게 느껴질 정도였다. 아이는 이마의 땀을 닦으며 자신의 행동에 의문을 나타내는 훼이드리온 눈길은 잠시 고개를 돌려서 미르를 향해 총총히 다가갔다. 마스트의 축복 아래 데워진 오파투스의 두 번째 영역에서 솟아올라오는 열기도 그녀에 게는 그다지 영향을 미치지 않는 모습이었다. "미르, 안 더워?" "……." 미르는 그녀를 향해 잠시 눈동자를 움직였다가, 다시 전방을 주시하며 걷는 데만 집중했다. 아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하며 잠 시 걸음을 늦췄다가 다시 생각나는 의문을 가지고 빠르게 소년의 곁으로 다가갔다. 참 지치지도 않고 말을 거는 그녀였다. "미르미르, 있잖아있잖아. 미르는 흑의 마스터지?" "……." 이제 침묵은 긍정으로 받아들이자는 생각을 굳히는 아이. "마스터 카드에 대해서 잘 알아?" 훼이드리온이 뒤에서 그들을 따르듯 걸어가며 연신 질문을 해대는 아이 에게 감탄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저 무한한 체력과 인내심은 대체 어디 서 나오는 건지, 마스터 카드의 미스터리 이상으로 쳐주어도 이의 없으리 라고 그는 혼자서 결론 내리며, 둘의 작은 다툼을 지켜보기로 했다. "……조금." 아이의 열성적인 태도에 드디어 손을 들었는지 미르가 작게 대답했다. 그녀의 눈이 한순간 광채를 쏘아내며 빛났음을 훼이드리온은 알 수 있었 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떠오르는 생각. '제대로 걸린 것 같아.' "그럼, 10대 마스터 카드에 대해서도 잘 알겠네?" "…조금." "종류도 알아? 10대 마스터 카드가 무엇 무엇인지?" "…조금." "와아, 말해줘말해줘!" "…조금."이라는 미르의 말이 아이에게는 "…전부."라고 해석되어 들린 것인지, 그녀는 막무가내로 미르에게 매달려 로브를 이리저리 흔들어댔 다. 괴로우면서도 말은 절대 하지 않던 미르는 어울리지 않게 계속 그녀 의 손길에 놀아나다가, 결국은 은신술로서 벗어나 그녀에게서 멀찍이 달 아났다. 어느새 길 반대편으로 가있는 미르를 본 그녀는 멍청히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다가 다시 소년을 향해 달려갈 자세를 잡았다. 그러던 참에, 미르가 먼저 입을 여는 기행을 펼쳤다. "말하겠다. 그러니까, 제발 가까이 좀 오지 마라." 그런 말을 내뱉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고픈 미르는 속으로 생각했다. '난 여자에게 수모를 당할 인생이군.' 따라서 연상되어지는 한 여성의 얼 굴에 미르는 알게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훼이드리온이 키득거리면서 아이와 미르의 중앙에 서 둘의 다툼을 일단 막았고, 표정을 다시 굳힌 미르가 흔하지 않은 긴 대사를 입에 담기 위한 심호흡을 거친 후 입을 열었다. "10대 마스터 카드는 대마도사가 최초로 만든 마스터 카드라고 해서, 현 존하는 모든 카드들의 공격력을 훨씬 상회하는 공격력을 가지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은 찾을 수 없고 불가능하다고 하지. 종 류는 지금까지 정확하게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훼온이 말한 것처럼 드래 곤 카드와 사신 카드로 이루어져있다. 드래곤 카드로는 레드 드래곤, 골 드 드래곤, 화이트 드래곤, 크림슨 드래곤, 블랙 드래곤, 블루 드래곤 카 드가 있고, 사신 카드로는 잘 알다시피 청룡, 백호, 현무, 주작 카드가 있 다. 전부 다 익숙한 이름들일 테지." 그 긴 말은 숨 한번으로 완벽하게 다 토해낸 미르는 숨이 찬 모양인지 몇 번 소리가 나도록 숨을 쉬다가 로브를 뒤적거려 사탕을 하나 꺼내 입 에 물었다. 이번에는 알사탕이라 껍질은 벗겨서 쓰레기는 다시 로브 속으 로 집어넣는 미르가 더할 말은 없다는 듯이 멀리 보이는 게이트 산맥을 향해 눈길을 고정시켰고, 그 대화를 그대로 이어 아이가 말을 꺼냈다. "흠, 아니었네?" "뭐가?" 미르에게 가있던 훼이드리온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녀를 향해 이동된 다. "10대 마스터 카드 말이야. 내가 생각하는 카드는 들어있지 않아서." "어떤 카드인데?" "훼온은 유저 카드들의 레벨 단계를 당연히 알고 있지?" 훼이드리온은 "응."이라는 대답과 함께 전사 카드부터 신관 카드까지, 유저 카드들의 레벨 단계를 주욱 설명했다. 아이도 하나하나 확인하는 듯 이 그 말을 듣고 있다가, 그의 말이 끝나자 고개를 끄덕이며 되물었다. "뭔가 좀 이상하지 않아?" "뭐가?" "지금까지 마스터 카드를 다뤄오면서 소환사 카드의 1레벨 위인 '대소환 사' 카드에 대한 이야기, 혹시 스쳐 가는 거라도 들은 적 있어?" '대소환사' 카드. 정령사 카드에서 레벨 업을 하면 소환사 카드가 되고, 그리고 다시 레벨 업을 한다면, 마지막 단계가 대소환사 카드다. 그러나 사실 아이의 질문이 의도하는 바대로 대소환사 카드는 그런 단계가 있다 는 것만 알뿐, 누구 하나 그 카드를 소지하고 있지는 않다. 처음부터 없 었고, 굳이 대소환사 카드가 아니더라도 소환사 카드만 가지고 있다면 정 령과 몬스터는 모두 소환할 수 있기 때문에, 마법사들도 만들 필요성을 굳이 느끼지 못한 것이다. "아니, 없어." "그래, 바로 그거야. 대소환사 카드는 그 누구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난 혹시 10대 마스터 카드에 속하지 않을까 하고 기대해본 거야. 대소환사 카드나 10대 마스터 카드는 둘 다 누구도 보지 못한 카드들이잖아. 그런 데 미르의 말에 따르면, 그렇지는 않은 것 같고. 흐음, 대소환사 카드는 환상의 카드라도 되는 걸까?" 환상의 카드. 어쩌면 굉장히 어울리는 말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훼이 드리온은 피식 웃으면서 손을 들었다. 그 손은 자연스럽게 아이의 머리 쪽으로 옮겨져 천천히 쓰다듬기 시작했다. 아이는 갑작스런 훼이드리온의 행동에 깜짝 놀라며 뒤로 후다닥 물러나 이상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훼온, 요즘 이상해." "응? 뭐가?" 무안하게 들려있는 손을 거두며 '아무 것도 몰라요.'라는 얼굴을 한 채 되묻는 훼이드리온. 아이는 의심이 담긴 눈길을 더욱 더 그를 향해 보내 주었다. "아무튼, 행동이 너무 이상하단 말이야." 차마 '너무 대담해.'라고는 할 수 없는 그녀였다. "그러니까, 뭐가 이상하다는 거야?" 훼이드리온은 아이의 말이 정말 이해가지 않는 듯했다. 사실, 그렇지 않 은가. 우러나오는 애정으로 인해 '당연하다'는 듯이 행해지는 행동에 그가 일말의 다른 생각을 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는 의외로(?) 엄청 단순하니 까 말이다. "가능성은 있다." 그때, 사탕을 문 탓에 약간은 부정확한 발음으로 말하는 미르의 낮은 음 색이 들려왔다. 방금 전까지의 야릇했던 분위기는 한순간 어딘가로 날려 버리고 훼이드리온과 아이가 길가에서 세상을 초월한 듯이 걸어가던 미 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소년의 시선은 여전히 게이트 산맥을 향해 있었 다. "드래곤 카드 중에 블루 드래곤 카드와 사신 카드 중 청룡 카드는 같은 카드다, 라는 이야기도 있으니까." "어? 어떻게 그렇게 되는 거야?" 입안에 든 사탕은 굳이 알아보지 않아도 당연히 이레브워츠 사탕이었고, 미르는 그 사탕을 혀로 열심히 굴려가면서 맛을 음미하고 있었다. 표정으 로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분명히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렇게 이레브워츠 사탕의 향기는 미르가 입을 열 때마다 공기에 실려 평원의 어느 곳으로 날아갔다. "고대의 기록에 따르면 드래곤은 세 가지의 모습이 있는데, 흔히 표현하 는 도마뱀의 모습을 하고 있는 '드래곤'형과 뱀으로 표현되는 '용'형, 그리 고 마지막으로 인간의 모습인 '인간'형이 그것들이다. 이 사실에서 알 수 있다시피, 블루 드래곤이라면 용의 모습일 때는 청룡이 된다. 한마디로 사신 중에 하나인 청룡은 블루 드래곤의 다른 모습일 수도 있다는 것이 다. 그러면, 10대 마스터 카드 중에 한자리가 비는데, 그 자리가 대소환사 카드의 자리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훼이드리온과 아이는 그 순간, 중요한 미르의 말은 신경도 쓰지 않고 크 나큰 고민에 휩싸이게 되었다. 둘의 시선은 말이 끝난 미르의 입술에 못 박힌 듯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한동안 말을 안 할 생각인가?' 너무 과도한 대사 처리로 인하여 근육들이 긴장해버려서 얼마 동안 열 리지 않는 것 아닐까, 하는 영양가 없는 걱정을 떠올리는 훼이드리온과 아이는 그간의 여행이 알게 모르게 서로에게 작용하여 무척 비슷해져있 었다. 물론 당사자들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지만. "…뭐냐." 총 네 개의 시선이 뚫어져라 자신을 향하자, 미르는 아무리 극의 경지에 닿은 자신의 철면피라고 하더라도 차마 외면할 엄두는 나지 않아서 그들 과의 거리를 조금 더 벌려서 앞을 향한 시선에 더욱 집중했다. 멀리 보이 는 게이트 산맥이 '넘을 테면 넘어보시지!'라며 도발하는 듯했다. "…음, 그러니까, 블루 드래곤이 청룡과 같은 카드일 수도 있는 거니까, 10장 중에 하나가 남는다, 이건가?" 미르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소년의 침묵 속에서 이미 긍정의 뜻 을 맘대로 판단했기 때문에 크게 문제될 것은 없었다. 훼이드리온이 작게 중얼거렸다. "이것도 또 하나의 미스터리인가." "역시 그렇지?" 눈 하나를 찡긋거리며 귀엽게 확인을 요하는 아이를 향해 그는 웃으면 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 모든 대화가 끊어진 그들 사이로 평원의 바람이 가볍게 스치고 지나갔 다. 땀에 절은 여행자들에게 잠깐의 시원한 휴식을 전하는 위넨스의 손 길. 여행자들을 보호하는 바람과 순환의 신 위넨스의 마음이 담긴 배려로 한껏 기분이 상승된 훼이드리온이 기지개를 펴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태양은 노랗게 빛을 발산하며 푸른 창공의 중앙을 막 지나고 있었다. 약 간만 더 빨리 걷는다면 게이트 마을까지 도착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무 리하게 하루로 일정을 잡았지만, 희망이 생기자 이따위 땀과 피로도 간단 히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계속 가보자." 등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배낭의 무게도 새삼스레 여행의 깊이를 더해주 는 것 같아서 그는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빙그레 미소를 띄우고 있는 그 의 얼굴을 옆에서 지켜보던 아이의 얼굴에도 자연스럽게 미소가 번져갔 다. 그때였다, 미르의 모습이 흐릿하게 바람에 씻겨버리듯이 사라진 건. "미, 미르?" 아이가 얼굴 전체로 당황을 나타내며 소리칠 때, 훼이드리온은 뭔가 심 상치 않음을 느끼며 서둘러 사방을 경계하여 둘러보았다. 긴장으로 뒤덮 여 흔들리는 푸른 눈동자가 넓게 펼쳐진 평원 이곳저곳을 훑었지만, 미르 의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마법이라든지 그런 걸로 사라진 것은 아니다. 미르가 가진 암살자로서의 실력을 이용하여 어딘가로 도망을 친 것이다. '도망?' 자신이 떠올려놓고도 "헤?"라고 웃어버린 단어. 도망이란 단어가 도대체 미르에게 어울리기나 한단 말인가. 그러나 이상하게 직감적으로 그렇게 떠올려버리고 있었다. 미르는 어떤 이유로 인하여 이 자리에서 도망을 가버린 것이다. 그럼 미르를 도망가게 만든 그 '이유'는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암살자로 서 거의 극에 달해 있는 실력을 소유한 미르를 단숨에 도망치게 만든 그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몬스터? 아니다. 이곳에 몬스터가 산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어. 그럼 대체 뭐지?' 웬만한 몬스터로는 미르를 물러서게 하지는 못한다. 그리고 웬만한 몬스 터가 아니라면, 깊은 산이나 마법의 숲에만 서식한다. 결론적으로 몬스터 로는 어림도 없다는 것이다. 그럼 대체 이 평원에서 무엇이 미르를 도망치게 했느냔 말이다. "훼, 훼온! 저기 좀 봐!" "으, 응? 어디?" 나름대로 고민에 빠져서 허우적대고 있던 훼이드리온의 정신을 일깨우 는 아이의 고성이 들려왔다. 그는 즉시 초점을 잡아 그녀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지점을 바라보았다. "…에?" 멍한 음성을 남기는 훼이드리온의 입술. 그의 눈이 향하고 있는 곳에서 는 지금 무언가 황당한 것이 그들을 향해 '돌진'해오고 있었다. 아이가 넌지시 그에게 질문했다. "저게 뭐인 거 같아?" "…그, 글쎄." 발바닥에 밀착되어진 지면에서조차 느껴지고 있는 강대한 진동을 느끼 며 훼이드리온이 여전히 멍하게 대답했다. 두두두두두. 흡사 말이나, 혹은 소가 달려가는 듯한 진동에 훼이드리온과 아이는 침 을 꿀꺽 삼켰다. 어쩐지 그런 종류의 동물들보다 더 엄청난 존재일 것 같 다는 예감이 예리하게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들의 눈이 향하고 있는 곳에는 방금 자신들이 지나온 서가도의 동쪽 방향이었다. 셀라드리엔 강이 있는 방향에서 무언가 거대한 흙먼지가 피 어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흙먼지는 아래쪽으로 갈수록 더욱 진해졌고, 더욱 중요한 것은 어쩐지 계속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 이 든다는 것이었다. "…지금 이쪽으로 오고 있는 거 맞지?" 훼이드리온의 넋이 빠진 물음에 무언의 긍정을 표하며 방금 전까지 미 르가 서있던 자리를 지그시 바라보는 아이의 검은 눈동자가 고요했다. '…미르, 저 흙먼지의 정체는 뭐야?' 그러나 대답해줄 인물은 이미 어딘가로 사라져있었다. 두두두두두. 슈우우욱. 파공음까지 날카롭게 대지를 찢으며 들려왔고, 드디어 그 의문의 물체 (?)가 흙먼지를 멈추고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단숨에 무언가가 앞에 나 타났다고 생각하자마자, 훼이드리온의 시야에 방금 전까지 없던 한 존재 가 나타나있었다. 주황색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어울릴 듯한 머리는 꼬불꼬불 꼬여서 심각한 곱슬머리인 것을 가르쳐주고 있었고, 야무지게 생긴 이목구비가 꽤나 당차 보이는 인상을 남겼다. 그리고 고동색, 아니 에타로코크 (Etalocohc=초콜릿)색이라고 해야 옳은 색의 짧은 드레스 밑에 마찬가지 로 같은 색의 짜악 붙는 스판 바지를 입은 어린 소녀의 갑작스런 등장에 훼이드리온과 아이는 할 말을 잃은 채, 잠시 소녀를 관찰하는 시간을 가 졌다. 그러나 소녀는 무척 바쁜지 흙이 묻은 주황색의 곱슬머리를 털 생각도 하지 않고 앙칼지게 소리질렀다. "여기 있던 미르는 어디간 거야?" "…미르?" "그래, 미르! 방금 전까지는 여기 있었잖아!" "아… 그러니까, 방금 사라졌거든요?" 앙칼진 하이톤의 목소리를 가진 소녀의 기세에 눌린 것인지 꼬박꼬박 대답을 하는 훼이드리온. 아이는 그저 아무 생각도 없는 듯한 눈초리로 둘 사이로 눈동자를 움직이고 있었다. 부정적인 훼이드리온의 대답에 그 소녀가 갑자기 발악을 하기 시작했다. "으아아! 또 도망쳤어! 내가 오는 줄은 또 어떻게 알아가지구, 정말! 미 르으으! 잡히기만 해봐! ……아?" 소녀의 발악과 함께 터져 나오는 비명에 인상을 구기며 '그렇게 흙먼지 를 날리고 오는데 모를 리가 없지.'라고 생각하고 있던 아이가 구시렁대 며 불만을 토하려던 그때, 갑자기 소녀가 그들이 서있던 뒤쪽, 서쪽을 향 해 반가운 듯 눈을 크게 떴다. 입가에 걸리는 함박웃음. "거기 있었구나, 내 사랑 미르!" 그리고는 흙먼지의 돌풍을 일으키며 사라지는 주황색 곱슬머리의 소녀. 남은 것은 소가 남긴 말 한마디와 흙먼지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기침 을 해대는 처량한 훼이드리온과 아이뿐이었다. --------------------------------------------------------------------- ...냐하. 팀군입니다. 잠와서 미치겠어요.;;; 요즘은 계속 새벽 3시를 전후로 해서 글을 올리는군요. 얼른 자러가야 겠습니다. 꾸벅.(___) 후기는 이만. 어둠의 기사 DARK KNIGHT TEAM... P.S 추천 감상 비평. 환영입니다. 냐하하하. P.S 2 GO CAMA 번 호 : 62 / 62 등록일 : 2000년 11월 23일 00:14 등록자 : 암음기사 조 회 : 155 건 제 목 : [카드 게임 판타지]『카드 마스터(Card Master)』#059 카드 게임 판타지(Card Game Fantasy) 카드 마스터(Card Master) 59. 토닥거리는 아이의 말소리가 즐겁게 귀를 두드리면, 약간은 멍한 음색 이 깃 든 훼이드리온의 목소리도 들려온다. 오늘날까지 살아오면서 느껴 보지 못한 평화로운 기분을 지금 이 순간만은 질릴 때까지 만끽할 수 있 을 것 같았다. 듣고만 있어도 재미있는 만남과 같은 둘의 모습을 즐기며 미르의 시선 은 게이트 산맥을 향해있었다. 저 산맥 밑에 조금 아픈 기억이 있는 게이 트 마을이 있어서인지, 아까 전부터 시선을 떼기가 조금은 힘이 들었다. 게이트 산맥. 마법왕국 라시엔트 서부에 치우친 산맥으로서 대륙 전체로 따지자면 그렇게 높지는 않지만, 평원이 국토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라시 엔트로서는 대단히 높은 고도이다. 전문간가 아니라면 산맥을 넘는데 적 어도 일주일은 걸린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에, 산맥을 넘으려는 사람들은 대다수가 산맥 밑에서 하루를 쉬어 힘을 보충한 다음 산맥으로 향한다. 그들이 쉬어 가는 곳이 바로 게이트 마을이었다. 게이트 산맥의 이름을 그대로 딴 게이트 마을은 그렇게 큰 마을도 아니었고 또 도시에서 가까 운 것도 아니었음에도, 사람들이 꽤 부유하게 살아가는 곳이었다. 덕분에 마을에 단 하나 있는 여관에서도 섭섭지 않게 손님들을 대할 수 있어서 영업은 다른 마을의 여관보다 훨씬 더 잘되는 편이다. '게이트 마을.' 미르는 일부 사람들만이 알고 있는 그 마을의 비밀을 속으로 곱씹어보 며 다시 산맥을 바라보았다. 짙은 녹음이 전체에 깔려있는 굳건한 위용이 두 눈에 다 담기에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그러나 감탄하고 있을 만한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섬뜩. '……!' 세상이 만들어질 때의 이야기를 서술해놓은, 제법 인기 좋은 책 '창세서' 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태초에, 퍼져나가는 혼돈을 뒤덮는 크고 강렬한 빛이 있었으니…' 미르의 뇌리를 울리는 한줄기의 섬광이 마치 '태초의 빛' 같이 정신을 강타했다. 위험 경보가 즉시 떠오름과 동시에, 미르는 일행에게 뭐라고 설명할 시 간도 없이 은신술을 최대로 펼친 채 공간 속으로 몸을 날렸다. 시간이 없 었다. 약간이라도 방심하여 힘을 뺀다면, 당장 잡히고 말 것이 분명하니 까 말이다. 눈을 깜빡이는 시간보다 더 빠른 찰나의 순간, 훼이드리온과 아이의 곁 에는 이미 '미르'의 모습은 찾을 수가 없었다. 미르는 그들에게 최대한 피 해가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암살자로서의 기질을 극도로 끌어올려야만 했다. 암살자 길드 마스터 후계자 1순위로 지목되고 있는 소년이었지만, '위험'은 그런 것쯤 손가락 하나로 눌리고 들어올 수 있을 정도였기에. 미르도 자신이 지금 어디로 움직이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무턱대고 그 냥 달리는 것뿐이다. 극도로 뿜어낸 은신술로서 존재감을 완전히 지워버 린 채 그저 위험을 피해 필사적으로 도망가는 것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다른 방법이 있었다면, 암살자 길드에서 살아온 10여 년의 세월동안 그렇 게 당하고만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충 벗어난 건가.' 문득 스쳐 가는 시선의 끝에 흙먼지가 가라앉고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그 위험이 드디어 일행에게 당도한 것이다. 미르는 움직임을 정지하여 가 만히 위험을 주시했다. 뭐라고 큰 소리로 묻다가, 훼이드리온이 대답하자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발광을 떨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갑자기 시선을 자신을 향해 던진다. "거기 있었구나, 내 사랑 미르!" "크윽!" 잠시 멈췄던 게 화근이었다. 주황색의 머리를 휘날리며 돌진해 들어오는 위험의 손을 간신히 빗겨난 미르는 위험이 잠시 주춤하는 사이 얼른 다 리 근육의 힘을 폭발시켜 달아나기 시작했다. 소년의 머리 속에는 단 한 가지 생각밖에는 남아있지 않았다. '잡히면 끝이다.' 위험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주황색 머리칼의 소녀는, 미르에게 있 어서 정말 '위험' 그 자체였던 것이다. 어쨌든 그런 골치 아픈 생각까지 모두 집어던진 채 미르는 열심히 달리 기 시작했다. 세상이 끝날 때까지라도 달릴 수 있었고, 지금 상태라면 세 상 끝까지라도 도망가야했다. 뒤에서 쫓아오는 무시무시한 기운이 느껴졌다. 대지를 차고 위험이 다가 올 때마다 땅이 울리며 공기가 긴장했다. 공기의 흐름조차 느끼지 못할 만큼 위험에게 신경을 집중하여 달리고 있는데도 그 '위험'은 타고난 재 능을 바탕으로 시시각각 거리를 좁혀 들어오고 있었다. 미르는 얕으면서 도 강하게 "칫."이라고 불만을 내뱉어보며 세차게 몸을 돌려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미르가 말하는 '위험'은 암살자 길드에서 어릴 때부터 같이 지내온 한 소녀를 일컫는 호칭이었다. 생각조차 하기 싫어서 자기 최면 수준으로 기 억해내길 꺼려할 정도로 두려워하는 그 소녀의 이름은 에타로코크. 애칭 으로 '에타'라고 불리고, 자신이 에타로코크를 좋아한다는 이유 하나로 딸 의 이름을 이따위로 지어놓은 아버지, 길드 마스터를 무척 싫어한다. 그 렇지만 길드 마스터의 피를 이어 받아서인지 소질로 따지자면 암살자 길 드 내, 아니 대륙 전체를 따져서도 암살자 중 최강인 탓에 마스터 후계자 0순위로 지목되고 있는 엄청난 소녀였던 것이다.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그런 엄청난 소녀가 "내 사랑 미르!"라면서 10년 동안 끈질기게 쫓아다닌다는 점이다. 고작(?) 1순위 밖에 되지 않는 미르 로서는 도저히 감당해낼 수 없는 실력을 가진 0순위 에타였기에, 미르는 주황색 머리카락만 살짝 보이더라도 날쌔게 튀어버리는 생활을 지금까지 용케도 영위해왔고, 결국 암살자로서 필요한 체력과 순발력 등등만 필요 이상으로 키워졌다. 아는 사람만 아는, 무척이나 뼈아픈 과거가 아닐 수 없다. 그렇게 '휙휙'소리만 들려오는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무아의 경지로 들어서려는 정신을 애써 추스르며 미르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냈다. 길드에서 의뢰를 핑계로 도망 나온 뒤로 이렇게 땀을 흘려보는 것도 굉 장히 오랜만이라는 생각을 하며 슬쩍 뒤로 돌린 눈동자에 생긋생긋 웃으 며 따라오는 에타의 당돌한 얼굴이 들어왔다. 그렇게도 뛰어왔으면서 땀 이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이 생생한 소녀의 얼굴에서 시선을 뗀 미르가 푸르디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울부짖고 싶은 표정을 지었다. 의미 없는 추격전은 한참 계속 되었다. 그새 셀라드리엔 강을 배도 없이 한번 건넜다가(수면을 그냥 달린다), 야드 평원을 중앙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와서 강을 따라 달리기도 하는 둥, 보통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엄청난 추격을 하고 당하는 그들의 모습은 일반인들의 시각으로 는 따라갈 수 없었던 탓에 훼이드리온과 아이는 일찌감치 포기하고 있었 다. 짐을 바닥에 내린 훼이드리온이 배낭 위에 앉으려는 아이를 말리다가 두 손을 들어버리고 멀뚱히 말했다. "편해?" "응. 언제까지 기다려야될지 모르잖아. 그러니까 편하게 기다리는 게 좋 은 거야." 순식간에 의자로 용도가 교체된 자신의 배낭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훼 이드리온은 가볍게 터져 나오는 한숨을 막을 수 없었다. 저 배낭 안에는 책과 옷가지, 그리고 기타 등등의 잡다한 것들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폭풍이 지나간 뒤에 느끼는 허탈한 한적함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는 둘 은 뭐라고 할 말을 미처 찾지 못해 침묵으로 계속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기다리면 곧 오겠지.' 했던 미르도 보이지 않자, 아이는 침묵을 참지 못 하고 먼저 입을 열어버렸다. "…누굴까?" 누구를 화제로 삼은 것인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고 있는 훼이드 리온. "마지막에 남긴 그 의미심장한 대사와 갑자기 도망가버린 미르의 행동, 이 두 가지로 유추해본다면. 아무래도 그 소녀가 미르를 죽도록 쫓아다니 고 있는 상황 아닐까?" "하아, 전적으로 찬성이야." 천천히 끄덕여지는 고개와 함께 그녀가 동의를 표시했고, 다시 침묵했 다. 쓸쓸한 바람이 서늘하게 그들을 쓸고 지나가 동쪽 어딘가로 날아갔 다. 또 다시 한참 시간이 지난 후, 굳이 말을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탓에 입을 다물고 쉬고만 있던 훼이드리온이 미르가 있을 거라고 생각되는 동 쪽 방향을 대충 짐작하여 응시하면서 말했다. "이거 너무 늦는데……." "잠시 쉬어간다고 생각해. 시간도 많은데, 뭘." 하지만 그녀가 생각하는 대로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이트 마을까지 오늘 내로 갈 수 있을지도 의문인데, 이렇게 지체되면 곤란하단 말이야." "응? 늦어도 오늘밤엔 도착할 수 있다고 하지 않았어?" "어디까지나 '빨리 간다면'이었다고. 평소 속도대로 걷는다면, 미츠힐 영 지를 지나서 게이트 마을에는 닿지 못하고 노숙을 하고 말 거야. 방금 전 까지는 꽤 서둘러서 걸어왔었지만, 이렇게 멈춰버렸으니… 흠, 어쨌건 미 르가 빨리 나타나야해." 난처하게 뒷머리를 긁는 훼이드리온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아이도 불편 한 듯한 표정으로 "흐음……" 음성을 남겼다. 멈추지 않는 산들바람이 약 하게 불어와 그 음성을 쓸고 지나가고, 둘은 다시 저마다의 눈동자를 굴 리며 미르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정말 늦네." "먼저 가라." "헉!" 소리 없이 나타나는 하나의 존재에 훼이드리온은 순간 기능이 멈췄다고 느껴지는 심장을 부여잡고 후다닥 뒤로 물러났다. 덕분에 그의 뒤에서 배 낭을 의자 삼아 앉아있던 아이가 "와앗!"이라는 비명을 남기며 헐레벌떡 일어나려나 넘어질 뻔한 것을 그가 간신히 손을 낚아채 구제해주고는 사 과르르 할 틈도 없이 갑작스런 난입자를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 "노, 놀랬잖아!" "미안하다. 하지만 시간이 없으니 빨리 말하겠다." 미르의 가슴이 조금 빠르게 오르락내리락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제법 숨이 차는 모양이었다. 엄청난 소녀의 추격에서 벗어나기 위해 열심히 도 망 다녔으니 당연한 것이겠지만. 어쨌든 미르는 '태어나서 이렇게 열심히 뛰는 것도 처음인 것 같다.' 라 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정말 결사적인 달리기를 펼친 결과, 드디어 차이를 3헬리치(=3Km) 이상 벌리는 쾌거를 이룩해내었고, 그 틈을 타 이렇게 훼 이드리온에게 언질을 해주러 온 것이었다. 동행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지 만, 일행을 챙길 줄 아는 소년이다. "먼저 떠나라. 뒤따라가겠다." 말이 끝나자마자 미르의 시선이 동쪽을 향해 다시 돌아가더니, 곧 흐릿 한 잔광만을 남기며 사라졌다. 또 다시 어딘가로 도망을 가버린 것이다. 그리고 황당한 표정을 지은 아이가 시선을 채 옮기기도 전에, 검에 남아 있던 잔영 속에서 갑자기 밝은 주황색이 튀어나와 소리를 질렀다. "미르! 미르, 어디로 갔어!" "……에?" "으아아악! 또 도망갔구나!" 미처 그들이 뭐라고 입도 열기 전에 크게 비명을 지르며 발악하던 소녀 는 다시 어딘가로 사라졌고, 이번에는 주황색과 에타로코크 색이 절묘하 게 혼합된 잔광이 그들 앞에 남겨졌다. 그것도 곧 사라져서 그들 앞에는 황량한 흙먼지와 따사로운 햇빛만이 남겨졌다. "……뭔가 전개가 급박해." 간신히 목청을 터뜨린 듯이 늘여져서 나오는 아이의 음성이 훼이드리온 의 굳은 고막을 두드렸다. 그녀의 힘없지만 청아한 목소리에 잠시 멈춰버 렸던 뇌 기능을 다시 되살릴 수 있게된 그가 뭔가 '턱'하는 느낌과 함께 정신을 차리고는 주위를 서둘러 둘러보기 시작했다. 아이가 그의 모습에 옷을 털며 한마디했다. "이미 갔어." "…정말 빠르네." 미르가 빠른 줄은 잘 알고 있었지만, 알 수 없는 그 의문의 소녀까지 이 렇게 빠르다니. 어쩌면 같은 암살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그는 머리를 흔들어 다시 한번 뇌에 충격을 가했다. 그제야 원활하게 피가 통 하는 것 같았다. 바닥에 내려져서 아이의 간이 의지가 되어버렸다가, 조금 전에 겨우 그 신세를 면하게된 자신의 배낭에 묻은 흙은 잠시 감상하려던 훼이드리온 은 곧 그 흙들을 털어 내고 등에 짊어졌다. 한동안 이 묵직한 배낭을 메 고 가야한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일정이고 뭐고 조금 더 쉬고 갔으면 좋 겠다는 충동이 일었다. 하지만 그런 우유부단한 판단을 자극한 목소리가 있었으니. "자, 먼저 가자, 훼온. 미르는 알아서 잘 따라올 거야." 아이가 순백의 여행복을 잘 정리하고 어깨에 메고 있던 작은 가방도 고 쳐 멘 다음 상쾌하게 웃어 보였다. 마스트의 축복을 배경으로 그려진 그 그림만큼 더 아름다운 것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훼이드리온의 발이 앞 에 있던 그녀를 향해 자연스럽게 옮겨졌다. "응, 가자." 훼이드리온은 잠시 뒤를 돌아보며 무언가를 찾는 듯이 시선을 움직이다 가 다시 앞을 바라보고 싱긋 웃었다. 그리고 아이와 나란히 서서 멀리 보 이는 게이트 산맥을 향해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가는군.' 그런 생각과 함께 미르는 힘이 빠지려는 다리에 새로이 활력을 불어넣 은 후 또 다시 바람을 가르며 달려가기 시작했다. 뒤에서 뭐라고 '전음'을 보내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는 에타가 쫓아오고 있는 건 당연한 것이었다. 저 소녀의 끈질긴 추격에서 벗어나려면, 아마도 한동안 움직이 지 못할 각오로 도망 다녀야할 것이 분명하다. 생각해보면,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고 인연이며 팔자가 아닐 수 없는 것 이다. 대체 자신의 인생이 어떤 그물에 걸려버린 건지, 끊으려고 하면 더 욱 더 튼튼해져 버리는 운명이 머리 위에 똬리를 튼 채 붉은 혀를 날름 거리며 놀려대고 있는 것 같은 기분에 갑자기 인상이 구겨져 버렸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하면서도 제련이 자유롭다는, 사라져버린 전설 속의 금 속 '오리하르콘'으로 그물을 만들어도 이 정도로 질기지 않을 것이다(그 금속을 제련하는 것은 신과 드워프라는 종족만이 가능하다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약 10년 전. 게이트 산맥 어딘가에서 길을 잃었는지, 아니 면 부모에게서 버림을 당했는지 알 수 없는 한 꼬마의 발자국 소리가 들 렸다. 아무래도 숲 속을 많이 헤맸는지 검은 색의 옷이 뜯어지고 더럽혀 지고, 살갗에 생긴 작은 생채기들에게 붉은 색의 피가 흘러내렸지만, 꼬 마는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는 듯한 공허한 눈동자로 태연히 걸어갈 뿐 이었다. 꼬마는 짙게 깔린 나무들 사이의 어둠과도 같이 깊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그 어둠을 응시하고 있었다. 꼬마지만 꼬마 같지 않은 너무나 태연한 태도. 그 덕분에 마침 그 길(?) 을 지나가고 있던 암살자 길드 마스터는 꼬마를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칠 뻔했다. 그래도 결국 운명에 이끌린 듯 어떻게 하다가 꼬마를 발견한 마 스터는 꼬마의 세상을 초월한 듯한 그 모습에서 숨겨져 있던 재능을 발 견하고, 꼬마를 암살자 길드로 데려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꼬마는 암살자 로서 키워지게 되는데, 그러던 중 마스터의 외동딸이라는 한 소녀를 만나 게 된 것이다. 미르의 악연은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만날 때부터 뭔가 움찔거릴 수밖에 없는 느낌이 전해오는가 싶더니, 갑 자기 "사랑해!"라며 달려드는 에타로부터 도망을 다닌 지가, 다시 말하지 만 10년이 넘어가는 것 같았다. 오늘과 같은 이런 고생을 10년 동안 쭈욱 해왔다는 이야기였다. '차라리 어릴 때가 더 편했다.' 숨을 몰아쉬며, 뒤쪽에서 여유를 부리는 것 같은 포즈로 웃으며 뒤쫓아 오고 있는 에타를 경계하며, 미르는 투덜댔다. 자신의 실력은 타고난 재 능과 함께 끝없는 수련으로 닦여진 것이었지만, 에타의 실력은 그야말로 '천성' 그 자체였다. 타고난 재능과 소질만으로도 0순위로 지목 받을 만큼 이니, 커가면서 덩달아 늘어가는 실력이 어느 정도일지는 이미 파악되고 남지 않겠는가. 그런 탓에 어릴 적에 달음질쳤던 기억이 훨씬 더 편했다, 라는 생각이 들어서 괜히 투덜거리게 됐다. 어차피 지금의 상황에서 개선되는 점은 없 음에도 불구하고. "쳇." 드디어 입을 열어 불만을 표시하는 미르. 언제까지 이렇게 도망을 다녀 야하는 건지, 갑자기 자신의 신세가 매우 처량해진 것이다. 10년 간 참아 왔던 울분이 이상하게도 오늘따라 가슴을 두드리며 '해방'을 외쳐대고 있 는 듯한 느낌이었다. 미르는 등으로 가까이 다가오는, 흉기와 동급인 에타의 손을 피해 방향 을 오른쪽으로 전환한 후, 눈앞에 보이는 셀라드리엔 강의 맑은 강물 위 에 떠있는 거대한 배로 뛰어들었다. 배의 이름은 '셀라디느' 호였다. 왠지 익숙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런 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는 미르 는 서둘러 선상을 지나 내부로 들어가 버렸다. 하얀 색의 깨끗한 색깔이 칠해진 복도와 계단을 이리저리 지나다가 사람이 없는 한적한 장소를 찾 은 미르는 공기를 가르며 다가오는 에타의 기운을 느끼면서도 그곳에 멈 춰 섰다. '그러고 보니, 그 배였군.' 그제야 눈치를 채는 미르. 하지만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미이이이이이르으으으으으!" 남의 이름을 마구 늘여서 소리 지르는 주황색의 돌풍이 소년을 향해 거 침없이 밀어닥치고 있었던 것이다. 복도 끝에 서있던 소년이었지만, 그 바람은 어느새 눈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말하기도 지겹지만, 정말 무지하 게 빨랐다. '흑!' 위기를 느끼며 서둘러 옆으로 몸을 이동시킨 미르의 앞으로 '슈우우욱.' 하는 파공음과 함께 질풍이 지나가더니, 갑자기 뚝 멈췄다. 주황색의 아 름다운 선을 그리던 머리카락이 잠시 날리다가 어깨 위에 내려앉고, 아니 앉으려고 하기도 전에 에타가 고개를 홱 돌리며 손을 번쩍 들어 미르에 게 안기려 했다. "미르으!" 쾅. 그러나 역시 소녀의 손길을 피해 몸을 사리고 보는 미르. 멋지게 벽에 헤딩을 하고만 에타가 쪼그려 앉아 고통스럽게 몸을 떨다가 빨갛게 변한 이마를 부여잡고 벌떡 일어나, 소년을 향해 손가락을 마구 휘둘러댔다. "야, 너! 피하면 어떡해애! 멈췄으면 내가 안을 수 있게 가만히 있어야 지!" 어떻게 그런 논리가 성립되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미르였지만, 그냥 입을 다물고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았다. 에타는 가만히 놓아두면 자기 맘대로 화를 냈다가 다시 풀어지는 그런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 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지금처럼. "…뭐, 멈췄으니까 상관없지? 꺄아아아, 미르으!" 방금 전의 일은 이미 잊었다는 듯이 에타가 코를 찡그리며 귀엽게 웃었 다. 웃는 모습이 매우 특이하여 보는 사람들이 절로 귀여움에 치를 떨게 만들 수도 있었지만, 미르는 무표정하게 그 미소를 받아넘기고 소녀에게 질문을 던진다. "왜 왔나." "앗, 차가운 반응. 오랜만에 보는 연인인데 반갑지도 않은 거야?" '자칭'이라는 말이 떨어져나간 '연인'이라는 단어에는 동참해줄 생각이 전혀 없는 미르는 무표정하게 소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아아아앙. 보고 싶으니까 왔지이!" 살벌하게 애교를 떨며 온몸을 비비꼬는 듯한 행동을 하고 있는 에타가 전하려는 뜻은 '아이, 부끄러워.'였지만, 미르는 고개를 돌리며 표나지 않 도록 한숨을 쉬는 것 외에는 아무런 행동을 하지 못했다. 절대 주체할 수 없는 이 소녀의 행동에 동조하고 싶지도, 그럴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으 니, 당연한 것이었다. 한숨 끝에, 미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난 지금 일행과 여행 중이다. 방해하지 마라." "일행? 아까 걔들? 걔들이 일행이야? 지금 걔들 때문에 나한테 화내는 거야? 응? 미르? 정말 그런 거야? 아앗! 그러고 보니 아까 걔들 중에 꽤 이쁘장하게 생긴 여자애가 있었어! 뭐, 나보다는 아니지만. 하지만! 설마! 미르, 걔 좋아하는 거야? 그런 거야? 정말 그런 거야?" 미르는 청각이 예민한 것도 고생이라는 사실을 몸소 체험할 수 있었다. 한번 말 주머니가 터지자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에타의 이야기 행렬을 듣고 있는 것으로도 귀는 아파 오는 것 같았고, 느끼지 못했던 피로가 밀 려오는 듯했다. 눈앞에서 나름대로 처량한 눈빛을 보내오고 있는 에타를 차마 외면할 수 없어서 쳐다보고 있기는 했지만, 생각 같아서는 얼른 기절시켜버리고 도망가고 싶었다. 웬만한 것으로는 꿈쩍도 하지 않는 소녀라, 이왕이면 정신적으로 쓰러지게 만드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대답해, 미르으으으으!" 시끄럽게 비명을 빽 지르는 에타. 미르는 눈을 가늘게 떠 더러워진 정신 상태를 잠시 표현해보다가, 결국 결심을 해버리고 소녀를 불렀다. "에타." "응? 왜? 뭐야? 무슨 일인데? 대답하는 거야? 응? 응?" 저렇게 빨리 말하는 것도 분명히 재능이면 재능일 것이다. 하지만 암살 자에게는 '수다'란 재능은 별로 필요 없다. 미르는 로브 속에서 자신의 팔을 들어올려 검은 소매를 걷었다. 갈색으 로 잘 굽힌 살이 나왔고, 에타의 눈길이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향했다. '지금이다.' 미르는 소녀의 눈길이 떨어지기 전에 재빨리 로브 속에서 단검을 꺼내 그대로 자신의 팔에다가 그었다. 불안감이나 머뭇거림은 전혀 없었다. 익 숙하다는 듯이 소년이 팔을 자해했고 갑자기 생성된 그 상처에서는 붉은 색의 피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반응은 재깍 떨어졌다. "……꺄아아아악!" 셀라디느 호의 두꺼운 벽들을 뚫고 마스트의 눈을 찔러버릴 듯이 솟아 오르는 비명. 체구가 작은 소녀의 몸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커다란 소리였다. 털썩. 그리고 이어지는 작은 소리. 비명을 지른 후에 정신이라도 잃은 듯이 쓰 러져버리는 에타의 몸이 바닥과 충돌하면서 내는 소리였다. 아니, '정신을 잃은 듯이'가 아니었다. 소녀는 정말 정신을 잃었던 것이다. 미르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로브로 예리하게 상처 입은 팔을 감싼 채 재빨리 범행 현장(?)에서 탈출을 시도했다. 에타의 비명 소리를 듣고 달 려오는 사람들의 머리 위를 넘어 갑판에 도착하는 소년은 이미 나루터와 상당히 멀리 떨어진 상황은 고려하지 않고 그대로 하늘 높이 뛰어올랐다. 한동안 엄청난 높이의 고공 비행을 즐긴 소년은 곧 나루터의 어느 한적 한 공터에 '쾅!'하는 소음과 함께 착지했다. "음." 조금 전까지 무리를 한 탓인지 다리 근육에 약간은 무리가 간 것 같았 다. 하지만 뭐 어떠랴. 골칫거리이던 에타도 잠시 떨굴 수 있게 되었는데 말이다. 미르는 에타에게서 도망을 다닐 때 최후의 방법을 항상 준비해두고 있 는데, 그것이 바로 '에타 앞에서 팔뚝이나 기타 피가 잘 나오는 부위를 그어버리는 방법'이었다. 에타가 암살자로서 가장 취약한 점이 있다면, 바로 피를 보기만 하면 바 로 기절을 해버린다는 것이다. 암살자 길드에서 컸음에도 그 고질병은 절 대 고쳐지지 않았고, 피만 보면 번번이 기절을 하는 탓에 마스터도 에타 를 후계자로 하는 것을 포기했을 정도였다. 덕분에 1순위로 미르가 지목 되어있는 상태였고, 미르는 그것을 도망가는 수단으로 사용해온 것이다. 비록 뒤에 치료하는 문제가 남아있기는 했지만. 아무튼 끝이 좋으니, 다 좋은 것이다. 미르는 피가 스며 나오는 팔뚝을 한 손으로 잡은 채 잠시 숨을 몰아쉰 다음, 단숨에 서쪽으로 다시 질주하 기 시작했다. 에타가 깨어나는 시간은 예측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어쨌든 빨리 도망 가야했다. --------------------------------------------------------------------- 냐앙. 멋진 하루를 보낸 후의 팀군입니다. 하이스들요.(^^^) 미르를 쫓아다니는 의문의 소녀의 정체가 그럭저럭 밝혀진 것이로군요. 이름이 약간 황당했으리라고 봅니다.;; 냐하하. 에타로코크. 뒤집으면 초콜릿이죠. 우하하.;;;( ___);;; 뭐, 팀군의 네이밍 센스야 다 거기서 거기 아니겠습니까?;;; 하루가 늦어버렸는데, 60편은 빨리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그전에 수행평가나 해결을 해야할 텐데.) 에휴. 어쨌든 오늘도 학생자까의 운명을 벗어나지 못해 구슬피 웃어보는 팀군이었습니다.(^^^)(___) 어둠의 기사 DARK KNIGHT TEAM... P.S 추천 감상 비평. 요즘 뜸하긴 하지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P.S GO CAMA <-- P.S 추가.;; 번 호 : 63 / 63 등록일 : 2000년 11월 24일 01:35 등록자 : 암음기사 조 회 : 203 건 제 목 : [카드 게임 판타지]『카드 마스터(Card Master)』#060 카드 게임 판타지(Card Game Fantasy) 카드 마스터(Card Master) 60. 눈을 뜨자, 많은 사람들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이, 괜찮아?" "여긴 왜 쓰러져있는 거야? 이 피는 또 뭐고?" 그러나 그 중에 내가 원하는 그는 없었다. 에? 어디간 거지? ……아앗! 설마! 난 벌떡 일어났다. 내 얼굴을 정면에서 내려다보고 있던 어떤 남자와 정 통으로 이마를 박아버려 꽤 쓰라리긴 했지만,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다. 이마를 문지르며 벌떡 일어나자 괜히 화가 났다. 그래서 난 빽 소리를 지르며 달리기 시작했다. "미르으으으! 또 도망치다니이이이!" "와! 저기 앞에 미츠힐 영지가 보이는 것 같아." 서서히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하는 땀방울을 소매로 닦아내는 아이가 앞 으로 시선을 던지며 탄성과 함께 소리쳤다. 덜컥대면서 신경을 거슬리는 칼을 고쳐 메고 있던 훼이드리온이 "응?"이라고 되물으며 고개를 들었고, 곧 그의 블루 에메랄드색 눈동자에도 넓게 펼쳐진 미츠힐 영지의 모습이 들어왔다. "…저건 그냥 바위 같은데?" "그, 그래? 아니면 말구, 뭐." 샐쭉한 표정을 지으며 아이의 벌겋게 달아올랐다. 다시 보니, 보통 바위 보다 조금 더 큰 돌덩이가 그곳에 자리하고 있을 뿐, 마을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던 것이다. 그녀가 부끄러운 듯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고, 훼 이드리온이 그 모습을 짓궂게 웃으며 쳐다보다가 문득 손을 뻗어 그녀의 검은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쓸어 올렸다. 그녀가 움찔 놀래며 몸을 경직시 키는 사이, 머리카락은 검은 빗물처럼 훼이드리온의 손에서 스르륵 흘러 내렸다. 그가 머리카락을 작게 다시 쥐었다. "항상 생각해왔던 거지만 말이야." "…으, 응?" 아이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린다. "아이의 머리카락은 참 부드러워." 분명히 그녀의 두 볼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듯이 타올랐을 것이다. 하 지만 저 뻔뻔한 금발의 미소년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그저 흐뭇하 게 미소를 띄우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아이는 이대로 계속 시간이 흐른다면 언젠가는 머리가 '쾅!'하는 소리와 함께 터질 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에 땀을 흘렸다. 조금 시원 해진 것 같더니, 여행길은 너무나 더웠다. 과연 여행길이 더운 게 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흐음, 향기도 좋고 말이야. 향수라도 뿌리는 거야?" 전혀 예고도 없이 대담해지는 훼이드리온의 행동에 아이는 손을 들어 얼굴을 만져보다가 화들짝 놀라 뗐다. 이건 도대체 인간의 얼굴 온도가 아니었던 것이다. 결국 그녀는 무언가 대책을 강구하여 시행해야한다고 여겼다. "…그, 그만해, 훼온……." "응? 뭐라고 했어, 아이?" "부, 부끄럽잖아!"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두 눈을 질끈 감고 크게 소리치는 아이의 모습. 잔뜩 긴장한 듯이 경직되어있는 그녀를 바라보다가 훼이드리온이 머쓱하 게 머리카락을 놓았다. 허공에서 유유하게 흔들리다가 그녀의 등에 가서 착 붙는 부드러운 윤기의 머리카락을 한동안 바라보던 그가 뒷머리를 긁 적이며 사과했다. "미안해. 에에, 그런 반응일 줄은 또 몰랐는걸." "…조, 조심하란 말이야. 훼온, 요즘 따라 행동이 너무 이상해졌다고." "이상해졌다니?" "…아, 아무튼!" 그의 물음에 여전히 부끄러움에 어쩔 줄 몰라하고 있는 아이는 되는 대 로 크게 소리치고, 다시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가뜩이나 회복이 되지 않 는 색깔 농도가 더욱 진해져버렸다. 아이가 속으로 외쳤다. '훼온 바보! 멍청이! 멍게! 해삼! 오징어! 미생물!' 야드 평원 위에서 훼이드리온에 대해 내렸던 그 평가를 다시 한번 상기 시키며 그녀가 두 볼을 감쌌다. 여전히 따끈따끈해서 온몸이 나른할 지경 이었다. '실수한 건가.' 항상, 대담한 짓을 해놓고도 스스로는 전혀 깨닫지 못하던 훼이드리온은 이번에도 역시 그런 상태에서 그저 뒷머리만 긁으며 서있을 뿐, 다른 행 동은 전혀 하지 않았다. 아이가 왜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 이해가 되지 않 았기 때문에, 그냥 '많이 화난 건가?'라고 짐작을 해보는 정도였다. "어, 어쨌든 다음부터 허락이라도 맡고 해." 아직 수습하지 못한 얼굴 때문에 여전히 뒤로 돌아선 채 말하고 있었지 만, 그럭저럭 의사 표시는 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양손으로 두 볼 을 감싸쥐고 쿵덕대는 가슴을 진정시키면서 훼이드리온의 대답을 기다렸 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이 들려야할 대답이 들려오지 않는 것이다. 그 대신, 귀에 익은 낮은 음색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녀왔다." 그리고 그제야 기다리던 훼이드리온의 음성이 터졌다. "노, 놀랬잖아, 미르." "미안하다." 전혀 미안하지 않은 것 같은 목소리였지만, 미르는 항상 그렇기 때문에 그는 그냥 고개를 끄덕이며 사과를 받아들였다. 어찌됐든 미르의 갑작스런 귀환 때문에 대답해주지 못한 아이의 발언에 답을 해주어야할 차례였다. 하지만 이미 기회가 지나가 버린 건지, 아이는 약간 상기된 듯이 붉은 볼을 제하고는 대충 예의 모습을 찾은 것 같았다. 그래도 약간은 어색하 다는 듯이 헛기침으로 분위기를 쇄신하려는 자세가 조금은 안쓰러울 정 도였다. 결국 훼이드리온도 머뭇대며 뒷머리를 긁다가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흠흠, 그, 그나저나, 미르. 그… 여자 애는?" "……." 쉽게 대답해줄 리는 만무한 것이다. 아이는 끈질기게 재차 질문을 던졌 다. 그 시간동안 훼이드리온이 다시 옷을 정비하고 천천히 발걸음을 내딛 었다. "가면서 얘기하자." "그 여자 애는 어떻게 됐어?" "…갔다." "갔다고? 어딜?" 엄청난 추격전을 벌이던 것 같은데, 의외로 이렇게 빨리 갔다고 하니 이 상했다. 지구 끝까지라도 쫓아올 분위기였는데, 너무 쉽게 물러난 것이 아닌가. 아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계속 의문을 띄웠지만 미르는 더할 말 이 없다는 듯이 고개를 돌려버렸고, 결국 이번 질문은 그냥 포기해야했 다. "그 여자 애는 누구야, 그럼?" 당연한 질문이었다. 훼이드리온이 속도가 느려지지 않도록 그들은 안내 하면서 미르의 대답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런 와중에 미르의 입이 작게 열리며 뜻밖의 단어가 그 틈 사이로 새 어나왔다. "……친구다." 다시 입을 다무는 소년을 향해 잠시 시선을 고정시키던 훼이드리온과 아이는 자연스럽게 눈길을 마주쳤다. 방금 자신들의 귀로 들어온 단어가 정말 제대로 들린 것인지 상당히 의심이 갔던 것이다. "…분명히 지금 친구라고 했지?" "응, 나도 그렇게 들었어." "내 귀가 잘못된 건 아니구나." 안도의 뜻이 짙게 배어있는 한숨을 깊게 내쉬는 아이는 자신의 귀를 만 지작거리며 신에게 기도를 드리는 듯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훼이드리 온이 미르를 향해 눈길을 돌리는 것이 그녀의 눈동자에 투영됐다. "친구……?" 분명히 서둘러 도망가는 그 모습에서 떠올릴 수 있는 단어는 아니었고, 미르 자체로 봐도 전혀 연관이 없을 것 같은 어휘였다. 그럼에도 미르는 흔들리지 않는 자세로 일관하고 있으니, 훼이드리온은 참으로 난감한 상 황에 봉착해버렸다. "친구……라고?" "그렇다. 이상하나." 생각 같았다면 고개를 끄덕이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어서 도리 질을 쳤다. "그럼 됐다." 미르는 한숨과 함께 땀을 닦아내며 뒤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이내 아 무 일 없다는 듯한 태도로 전방을 응시했다. 훼이드리온은 특별한 의미는 존재하지 않는 듯이 보이는 미르의 행동에 조금 시선을 두다가 금방 고개를 돌렸다. 걸음은 평소보다는 빠르게, 그 리고 꾸준히 그렇게 걷고 있던 참이었다. 경쾌하지는 않더라도 힘이 들어있는 걸음으로 게이트 마을을 향해 꾸준 히 전진해나가고 있던 그때, 바로 그때였다. "미르!" 덥썩! 미르의 입장에서 느끼기에, 그것은 분명히 '느낌표'였다. 익숙한 하이톤 의 목소리. 뒤늦게 불어닥치는 세찬 바람의 손길. 날카롭게 볼을 스쳐가 는 그 바람의 칼날이 미르의 정신을 일깨웠다. 피곤, 피로, 그런 것들은 이 순간 완전히 잊어버리고 말았다. 위험, 위기, 그런 부정적인 단어들이 미르의 머리 속에 속속들이 등장하 기 시작했고, 그 모든 일들의 주범, 주황색 곱슬머리와 에타로코크 색 옷 을 나풀거리는 소녀가 하이톤의 목소리를 다시 한번 자랑했다. "또 도망을 치다니이이이이!" 화가 난 듯, 에타의 진하지 않은 주황색 눈썹이 'V'자를 그릴 정도로 기 울여져있었다. 훼이드리온과 아이가 황급히 물러서며 당황해버렸고, 미르 가 뒷덜미를 완전히 잡혀버린 진퇴양난의 사태에서 조용히 한숨을 지었 다. 이번에는 정말 확실하게 잡혀버렸다. 안심을 해버리고 경계를 늦춘 것이 실책이었던 것이다. 미르가 조용히 뒤로 돌아섰다. "흥! 또 기절시키고 도망가려고 했지?" 정확하게는 이미 도망을 쳤지만, 굳이 따질 필요는 없다고 사료되어 조 용히 입을 다물고 있기로 했다. "내가 그동안 얼마나 열심히 특훈을 한 줄 알아? 그 성과로! 봐! 피를 봐도 이렇게 일찍 깨어났잖아! 대단하지? 그러니까 이제 그런 구시대적인 발상으로 나에게서 도망치려하지 말란 말이야! 미르 넌 어차피 나의 사랑 을 받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야! 도망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되는 거 야! 알았어! 응? 알았냐구!"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는 에타 앞에서 나름대로 평온을 유지하고 있는 미르가 존경스러울 따름인 훼이드리온과 아이는 진작에 손가락으로 귀를 막고 있었다. 첫 등장에서부터 느낀 것이었지만, 정말 대단히도 시끄러운 소녀였다. 고막을 이다지도 찌르고 들어오는 높은 고음에다가, 그 높이를 얼마동안 유지할 수 있는 대단한 폐활량까지. 여하튼 감탄을 하면서도 찌릿 울리는 귀속의 아픔 때문에 그들은 인상을 찌푸리며 사태를 지켜보 았다. "대체 뭐 때문에 내게서 도망치는 건데? 응? 어쩔 수 없다니까, 정말! 우리들은 서로 사랑해야만 하는 운명이라구! 미르는 나의 연인일 수밖에 없어! 왜냐! 그렇게 정해져있으니까! 저런 이상한 계집애가 끼어 들 수 있는 사이가 아냐, 우린! 앗, 그러고 보니, 너도 여기 있었구나!" "으, 응? 나?" 공허한 미르의 태도 앞에서 마구마구 소리를 지르던 에타가 느닷없이 아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고, 화들짝 놀래면서 서둘러 대답하는 아이는 아직도 제대로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귀도 아파 오는데, 미르를 향해 서 소리를 지르다가 왜 갑자기 자신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건지 이해를 할 수 없는 것이다. 마치 이 사태를 초월한 듯 보이던 미르가 반응을 나타낸 것은 에타가 끓어오르는 울분을 참지 못하고 미르의 뒷덜미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아 아이를 향해 다가가려던 때였다. "그만해라." 평소보다 더 낮게 깔린 미르의 음성. 그 속에는 분명히 교묘히 감추어진 '화'가 숨어있었다. 그동안의 수련으로 인해 감정을 절제하는 것에는 도가 튼 소년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제대로 조절이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훼이드리온이 침을 꿀꺽 삼키고 아이가 긴장한 듯 검은 눈동자를 굴리 고 있을 때, 미르가 한발 나서며 다시 말했다. "상관없는 일이다. 난 그 누구도 좋아하지 않아." 한편으로는 조금 슬프게 들리는 말이었지만, 미르의 표정이 더없이 굳어 져있어 그 누구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의 범주에 서 벗어나는 인물이 지금 이 자리에 있었던 것이다. "흥! 누가 믿을 줄 알구? 그러면서도 은근슬쩍 좋아하는 거 아냐? 맞지? 그렇지? 응?" 두 번 세 번 물음을 강조하는 에타. 미르의 철벽 같이 굳은 태도도 '친 구'라서 그런지 이 소녀에게는 도저히 먹혀들지가 않았다. 훼이드리온은 이 소녀가 혹시 '세상에 모든 것은 나의 논리대로 돌아간다!'라는 사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무척이나 걱정이 되었다. 미르는 어려서부터 겪어오던 에타의 성격이 이런 식으로도 민폐를 끼칠 수 있는 거구나, 하고 생각하며 소녀의 관심을 돌릴 수 있는 방법을 강구 하기 시작했다. 웬만하면 방금 시도했던 방법에서 끝나기 마련인데, 이번 에는 이상할 정도로 강경해서 보통 방법으로는 통하지 않을 것 같다. '대체 어떤 논리로 내가 아이를 좋아한다는 건지.' 황당한 에타의 발언에 미르는 뜻하지 않게 당황하고 화도 냈지만, 역시 나 저 소녀의 두뇌 구조는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로 가득 차있다는 결론 밖에는 나지 않았다. 그렇게 미르에게서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로 가득 차있는 두뇌'를 가지 고 있는 소녀로 판단된 에타는 멋진 그 두뇌로 또 뭔가를 꾸몄는지 대담 하게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당연하게도 그 손가락의 끝에는 아이가 놀란 눈을 한 채로 서있었다. "야, 너!" "어? 아, 응? 나 말야?" "그래, 너! 몇 살이야?" 대뜸 물어오는 에타. 아이가 흔들리는 눈으로 훼이드리온을 쳐다보았지 만 그가 뾰족한 수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일단 묻는 말에 대답을 해주기로 했다. "15살인데?" "15살? 호오, 그래? 그럼 나보다는 언니로군? 하지만! 내가 언니 대접을 해주기를 바라는 건 아니겠지, 설마?" 당연히 그건 아니었다. 말하는 투로 보나, 태도로 보나, 아이를 완전히 '적'으로 취급하고 있는데 언니 대접을 해줄 리는 만무한 것이니까. 아이는 간단하게 대꾸했다. "당연히." "좋아좋아. 말이 통하는군! 그렇다면!" 에타의 에타로코크 색 눈동자가 번뜩 빛을 발하더니 그 조그만 입에서 우렁찬 음성이 터져 나왔다. "승부하자! 미르를 걸고!" "……뭐라구?" "승부를 하자구! 여자답게 정정당당히! 이기는 자가 사랑을 쟁취하는 거 야! 용기 있는 자가 미남을 얻는다! 솔직히 미남은 아니지만, 상관없어! 강한 자가 승리와 명예를 얻는 법이니까!" '과연.'이라는 생각 밖에는 들지 않는 에타의 성격이었다. 훼이드리온은 예고도 없이 전해지는 충격에 이마를 짚으며 비틀거려야만 했고, 웬만해 서는 절대 무너지지 않는 미르의 무표정도 한순간 '허탈하게' 변해버릴 정도였으니, 이미 할 말은 다한 셈이다. 구경꾼들이 그런데 당사자는 어떠할까. 아이는 "하, 하… 하하."거리며, 황당하다는 듯이 헛웃음만을 흘리고 있 었다. 이 이름 모를 소녀의 성격은 이미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소녀는 미 르로서 대표되는 '이상한 성격' 중 또 하나의 선두 주자였던 것이다. 그녀는 흘러내리는 땀방울 굳이 훔쳐내지 않으며 입을 열었다. '바람이 라도 불어주면 좋으련만.' 하지만 바람은 불어오지 않았다. "내가 왜 너하고 승부를 해야하는 거야?" "왜긴! 다 알면서 또 묻는 건 대체 무슨 심보야?" 그렇게 묻는 자신의 심보가 더 고약하다는 사실을, 에타는 모르고 있었 다. "그러니까, 나하고 미르하고 서로 좋아한다는, 그거 때문이야?" "역시 잘 알고 있으면서 물어보는 거였군! 그래, 확인하니까 속 시원해? 다시 한번 말하지만, 미르는 내 꺼야! 아무에게도 못 줘! 그러니까 승부 를 해서 이기는 쪽이 가지는 거다! 당연히 내가 이기겠지만, 불쌍해서 너 에게도 기회를 주는 거라구! 감사히 여겨! 꺄하하하핫!" 아이는 황당한 웃음을 흘리며 골치 아픈 듯 미간을 주무르다 다시 고개 를 들었다. 그때까지 에타는 미르를 향해 "나만 믿어, 미르!"라며 열심히 애교를 떨고 있었다. "그래, 승부는 한다고 치고. 뭐로 승부할 건데?" "…어라, 그러고 보니 뭐로 하지? 꼴을 보아하니, 검술이라고는 눈곱만 큼도 할 줄 못하겠고, 달리기는 당연히 내가 이길 거고. 어라, 어쩌지? 자 고로 승부는 막상막하에서 뒤집는 게 가장 재밌는데! 흐으으음, 어쩌지? 어쩌면 좋겠어?" 뭔가 비꼬는 투가 가득한 소녀의 말투에 아이는 신법을 써서 혼을 내주 고 싶은 마음이 갑자기 들었지만, 문득 더 효과적인 방법이 떠올라 여유 가 가득한 미소를 품은 채 응수했다. "훗, 그렇다면 말이야. 마스터 카드, 다룰 줄 알아? 미르는 할 줄 알던 데. 친구니까, 당연히 할 줄 알지?" "마, 마스터 카드?" "어? 왜? 혹시… 다룰 줄 모르는 거야? 호오, 네가 '좋아하는' 미르가 할 줄 알아서 너도 '당연히'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어? 이거 실망인걸?" 아이는 생글생글 웃음을 잃지 않으면서 할 말은 다 하고 있었다. "누, 누가 못한대! 마스터 카드는 내가 미르에게 가르쳐준 거라구!" '역시.' 아이의 예상대로, 에타라는 저 시끄러운 소녀는 무척이나 '단순'했다. "와아, 정말? 그럼 잘 하겠네?" "그, 그럼! 우리 길드에서 날 이길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구! 꺄하 하하핫!" 에타는 어디서 나오는지 모를 자신감에 가득차버린 상태에서 눈물을 머 금고 웃어댔다. 사실 소녀는 마스터 카드라고는 미르를 잡기 위해 한번 미끼로 사용해본 게 다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져버린 물, 뱉어 버린 말. 이 두 가지를 주워담을 수 있는 자라면, 그는 이미 세상을 초월 한 자일 것임에 분명하다. 물론 에타는 세상을 초월한 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당당하게 웃으며 한 말에 책임을 져야할 의무가 있었다. "자, 그럼 당장 시작해볼까?" 이상하게 아이의 웃음이 장난스럽고 사악해 보이는 건, 훼이드리온의 착 각이었을까. "아, 아이. 어쩌려고?" 아이에게 살며시 다가간 그가 귓속말로 소근소근 묻는다. 아이가 간지러 운 듯 웃으며 그와 거리를 두고 대답했다. "왜, 재밌잖아. 상대해주는 게, 저 애를 진정시키는 유일한 방법일 것도 같고 말이야." "그래도… 빨리 가야한다고 했잖아." "괜찮아, 괜찮아. 쉬어간다고 생각해." 훼이드리온이 불안한 듯 인상을 찡그리며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그저 즐거운 듯 생글거리며 웃고 있었다. 그는 결국 그녀의 미소에 꺾여 서 항복하고 말았다. 배낭에서 모포를 꺼내 서가도에서 벗어나 초원 아무데나 자리를 편 훼 이드리온과 아이가 그 위에 앉아서 에타와 미르를 기다렸다. 길 위에서 둘이서 한참 씨름을 하며 다투더니, 결국 미르가 로브 속에서 검은 주머 니를 꺼내 에타에게 주었고, 그로서 작은 다툼은 막을 내렸다. 에타와 미르가 날아오듯 모포로 다가와 반대편에 앉고, 아이가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 "준비 다 됐어?" "물론! 하기나 해!" "좋아, 그러지, 뭐." 그녀의 미소, 에타의 불안한 눈빛, 훼이드리온의 기대 어린 눈동자, 미르 의 무표정. 드넓게 펼쳐진 오파투스의 영역 위에서 네트릴리아의 생명들과 마스트 의 눈, 위넨스의 손길이 존재하는 가운데, 아이의 장난기와 에타의 무모 함이 벌여낸 마스터 카드 대전이 흥미롭게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 냐앙. 여전히 새벽에 글을 올리는 팀군입니다. 하이스들요.(^^^) 어쩌면 또 한동안 글을 못올리지도 모르겠습니다. 밀린 수행평가가 팀군을 그리워하며 아우성을 치고 있거든요. 어째어쩨 하면 될 것도 같지만. 하아, 글쎄요. 생각 같아서는 학교 때려치우고 싶지만, 그것도 쉽기 않군요.(^^^) 어쨌든 60편입니다. 이번 에타 이벤트는 그렇게 오래가지 않을 것 같 군요. 서둘러 끝내버리고 출판 준비를 하겠습니다.(^^^) 자아, 그럼. 좋은 하루 되세요.(___) 어둠의 기사 DARK KNIGHT TEAM... P.S 추천 감상 비평. 기다리고 있습니다아. P.S 2 GO CAMA. 카드 마스터(Card Master) 61. 사실. 눈길을 뗄 수 없는 뜨거운 승부의 행방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고르프 (Gorf= 개구리) 같이 가늠하기가 쉬운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훼이드리온 과 미르, 기타 이곳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은 아이와 에타가 벌이는 열 기의 현장에서 드러나는 카드들의 눈부심 다툼을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 었다, 라는 표현으로 불리기에는 지극히 무리가 있는 마스터 카드 대전이 었다. 지금 이곳에서 땀까지 흘리며 열을 느끼고 있는 자는 오직 에타, 한 사 람밖에는 없었다. 미르는 따분하다는 듯이 늘어지게 하품까지 해버리며 예전에 게이트 산맥을 향해 고개를 돌려버렸고, 훼이드리온도 모포 위에 앉아 대전을 구경하고 있기는 했지만 이미 흥미를 잃어버린 듯한 눈길이 었다. 그러나 대전을 즐기고 있는 두 게이머, 아이와 에타는 나름대로의 정열 (?)을 불태워가며 게임에 임하고는 있었다. "빨리 안하고 뭐해?" "하, 할 거야! 조금만 기다리라구!" "헤에, 소리는 왜 지른담?" 아이는 자신의 긴 머리카락이 모포까지 닿는 사실을 눈치채고 앞으로 넘겨 허벅지 위에 가지런히 정리하며 키득거렸다. 어깨를 들썩이며 재미 나게 웃고 있는 그녀의 얼굴에서는 그 누구라도 눈치챌 수 있을 장난기 가 뚝뚝 흘러 넘칠 것 같았다. 신관이라는 직업에서 느껴지는 다소곳하고 얌전한 느낌은 그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고, 그 대신 장난기와 자유분 방함이 비어있는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그녀는 신관의 능 력과 풋풋한 소녀의 싱그러움까지 갖춘, 전천후(?) 신관이었던 것이다. "하암." 미르가 진득하게 하품을 하면서 게이트 산맥에 고정되어있던 눈동자를 돌려 대전을 한번 힐끔 쳐다보았다가 훼이드리온을 향해 다시 시선을 옮 겼다. 그의 푸르고 깊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무언가 답변을 요구하는 듯한 눈빛이 된 미르. 그가 대충 상황을 추리하며 대답했다. "아직이야." "……흐음." 감정은 잘 표현하지 않는 소년이었지만, 시끄러운 에타의 영향이었는지 하품을 감추지도 않고 불편한 음색을 가진 음성도 숨기지 않았다. 에타가 그의 야릇한 신음성에 가늘게 뜬눈을 부라리며 매섭게 미르를 올려다보았지만, 예상하고 있었는지 소년의 눈길은 어느새 다시 동쪽을 향해 있었다. "이씨, 몰라! …그런데 이게 뭐더라?" 무언가 비술이라도 사용하려고 하는지 네 장의 카드를 멋있게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머리 위로 들어올렸던 에타의 입에서 어벙한 소리가 흘러 나왔다. 잔뜩 기대하는 표정으로 눈빛을 반짝이던 아이의 얼굴도 그 즉시 빛을 잃어버리며 "헤에……."라며 김새는 소리를 입에 담았다. 훼이드리온과 아이가 약속이나 한 듯이 동시에 한숨을 쉬었고, 그 중 미르가 지그시 카 드들을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비술 백기사단." "아, 맞아! 미르가 자주 쓰던 거였지? 비술 백기사단, 발도옹!" 에타가 자신 있게 바람의 전사 카드, 백기사 카드, 바람의 용사 카드, 검 성 카드, 바람의 속성을 가진 전사 카드 네 장을 모포 위에 탁 소리가 나 도록 내려놓았다. 그리고 의기양양하게 웃는 주황색 곱슬머리의 소녀. 귀 를 덮는 단발머리였지만 곱슬머리인 탓에 더 길 것이라고 추정된다. 그 머리카락이 떨리도록 마구 미소짓는 소녀의 행동에 훼이드리온과 아이, 미르는 각각의 개성 있는 반응을 남겼다. "…하…하……." "풋!" "……." 그들의 반응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리 없는 에타가 '무지 기분 나빠!'라 는 뜻이 분명히 드러난 얼굴을 하고 소리를 질렀다. "뭐야, 그 반응들은! 기분 나빠!" 평음으로 말하는 적이 거의 드문 것 같은 에타의 하이톤 음성이 다시 터져 나오고 미간을 찡그리며 귀엽게 인상을 쓰고 있던 아이가 귀를 만 지며 말하기 시작했다. "아니, 그게 말이야." "그게 뭔데!" "그러니까 지금 대답하잖아. 내 카드는 수정거울 카드란 말야. 아무리 비술이라고 하더라도 질풍천으로는 상대가 안된다구." 머리 속에서 맴도는 강력한 바람의 광기를 느끼면서도 아이는 여유가 묻어나는 음성으로 느긋하게 대답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태도에 에타 는 의문을 느끼며, 동시에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하, 하지만, 미르는 항상 이걸로 이겼단 말야……." "그거야 미르의 실력이구. 넌 지금 나한테 세 번째 패하는 거야. 알기나 해? 그 중 두 번은 수정거울 카드 때문에 졌잖아. 그런데도 역시 같은 실 수를 하는구나?" 그녀의 무척 친절한 해설을 귀에 담은 에타의 표정이 노골적으로 불안 해지고 있었다. 아주 새하얗게 질리려는 소녀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애처로운 마음을 들게 하기에 충분했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이 자리에 있 는 이들은 조금 예외에 속하고 있었다. "네 번째." 미르가 간단하게 한마디 내뱉었고, 그 말을 시발점으로 에타의 얼굴이 완전히 색을 잃어갔다. 이 네 번째 대전을 시작하기 전에 가슴을 치며 당 당히 선언한 바 있던, 그 약속이 당연하게 머리 속에 떠오른 것이다. 아이가 웃음을 애써 참지 않으며 입을 열었다. "분명히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했지? 네 입으로 말한 거니까, 불만은 없 겠지, 물론? 훗, 좋아. 네 번째 나의 승리야." 그녀의 미소가 진정으로 자신감에 넘쳐있었다. 수정거울에서 은빛의 빛이 터져 나온다. 휘몰아치는 질풍과 함께 수정거 울을 향해 달려오는 백기사단 전체의 신경을 타고 올라오는 극명한 위기 감. 본능적으로 각자의 검을 뽑아 바람을 덧씌우자, 곧 그 위기가 모습을 드러낸다. 은은한 은빛의 수정거울에서 백기사단과 똑같이 생긴 인물들이 돌진해 나온다. 당황하는 가운데에서 검성을 중심으로 진을 치는 백기사 단. 그러나 가짜 백기사단의 공격력은 본래의 공격력을 상회한다. 가장 약하게 보이는 가짜 전사에게로 검을 날리는 검성. 통할 것 같았던 검이 허공을 갈라 지나가자 검성의 몸은 이미 쓰러지고 있다. 검성이 가짜 전 사에 당한 것이다. 가짜 백기사단은 백기사단을 간단하게 쓰러뜨려 버리는 괴력을 자랑한 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최종 목표, 게이머의 생명력을 향하여 시선을 돌 린다. 목표가 확인되자 지체하지 않고 몸을 날려 검을 돌진시켜나간다. "앗!" 에타의 짤막한 비명을 끝으로 모든 환영들이 머리 속에서 걷혔다. 소녀 의 생명력이 완전 소멸하여, 게임은 아이의 네 번째 승리로 돌아갔다. 그녀가 싱글거리며 말했다. "자, 내가 이겼어. 할 말 있어?" 짓궂은 표정으로 묻는 그녀를 향해 에타는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아무 리 제멋대로 되어먹은 성격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잘못 정도는 파악할 수 있는 능력 정도는 소유하고 있으니까. 에타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와아앙!" 울음을 터뜨 리며 그 자리에서 도망가기 시작했다. 훼이드리온과 아이가 미처 고개도 돌리지 못하고 있을 찰나, 미르가 서둘러 소녀의 뒤를 따라 날아가듯 달 려나갔다. "어라, 충격 받았나본데?" 아이가 저쪽으로 흙먼지를 높이 일으키며 달려가는 에타의 화려한 뒷모 습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훼이드리온이 뒤따라 달려가는 검은 점이 된 미르를 그녀와 같은 자세로 바라보다가 뒷머리를 긁으며 모포에서 일 어섰다. "뭐, 미르가 달래겠지. 친구잖아." "…친구라……." "친구라잖아. 그냥 믿어." '훼온이 그렇게 말한다면야…'라며 고개를 끄덕여보는 아이였지만, '친구' 와 '미르' 사이에 성립되는 관계를 받아들이기가 좀처럼 힘들게 느껴졌다. 미르도 인간이니 그렇게 어색한 것도 아닌데도 말이다. '…그래도 어색한걸…….' 역시나 받아들이지 못하는 아이는 훼이드리온의 재촉에 모포에서 카드 들을 챙겨 일어나, 그의 작업에 방해가 되지 않을 지점으로 가서 각각의 주머니에 카드들을 집어넣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불어오는 바람과 하늘 위에서 내리쬐는 따뜻 한 햇빛을 느끼며 그녀가 모든 정리를 마치고 고개를 들었을 무렵, 훼이 드리온도 모포를 배낭에 우겨 넣고 단단하게 끈을 묶고는 허리를 펴고 일어났다. 아이가 자신의 가방은 어깨에 메고, 미르의 카드가 든 검은 주머니는 손 에 든 채 일어나 에타와 미르가 달려간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언제 올까?" "글쎄. 올 때쯤이면 오겠지만, 문제는 너무 많이 늦어버렸다는 거야. 그 러게 한번에 끝내지, 왜 그렇게 많이 하는 거야?" "피이, 내가 하고 싶어서 했나, 뭐. 걔가 인정을 안 하니까 그런 거잖아. 난 죄 없다구." 베에, 혀를 내밀며 밉지 않게 대꾸하는 그녀에게 미소를 지으며 그가 배 낭을 어깨에 멨다. 평원 중앙으로 닦여있는 길을 향해 걸음을 옮기며 어 깨 끈을 이제는 익숙해진 무거운 감각이 등을 누르며 존재감을 나타냈고, 그녀도 그의 뒤를 따라 움직이며 머리를 정리했다. 찰랑이는 검은 물결에 마스트의 축복이 부딪혀 그 머릿결에 반짝임이라는 축복을 부여한 후, 장 렬하게 사라졌다. "먼저 가자. 곧 따라올 거야." "그럴까?" 남쪽으로 향한 아이의 시선을 잠시 따라해 본 훼이드리온이 약한 미소 를 머금고 서가도를 따라 걷기 시작했고,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계속 시선 을 고수하고 있던 그녀도 곧 그의 뒤를 따랐다. '잘 달래고 있으려나?' 조금 심했던 것 같기도 한 자신의 행동에 미안한 듯 옅은 웃음을 떠올 리며 그녀는 돌아오면 사과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평원에서 남쪽을 향해 눈물을 흩뿌리며 달려가고 있는 에타. 철저하게 농락(?)당해버린 소녀의 가슴은 처절하게 찢어져 흔적조차 남지 않게 되 어버렸다. 물론 전적으로 소녀의 입장에서의 이야기. '우와아앙! 너무해!' 뭐가 너무한 건지는 에타 스스로도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너무했다고 소녀는 생각하고 있었다. 정당한 승부였고 인정해버린 승부였지만, 동시 에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은 승부이기도 한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물론 소녀가 자신의 입으로 내건 게임을 한 이유 때문이었다. 소녀가 이기면, 소녀가 미르를 가지고, 이름 모를 그 이쁘장한 애가 이 기면 미르는 뺏기게 된다는 약속. 기사도와는 상관없이 살아가는 암살자 의 운명이라고 하더라도 마스터 카드에 손을 댄 이상, 신의의 게임인 마 스터 카드의 율을 깰 수는 없다는 것이 소녀가 사랑하는 미르의 이야기 였기 때문에, 번복할 수도 없었다. 결국 비관하고 절망해버린 에타는 더 이상 그 자리에 있을 수 없어서 도망쳐 나왔고 이대로 어딘가로 사라져버릴 속셈이었다. 사랑하는 이를 빼앗기는(당사자들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지만, 스스로 그렇게 착각하고 있다)그런 비극적인 일의 주인공이 되었으면서도 아무렇지 않을 여인이 이 세상에 존재할까. '내 사랑 미르. 안녀어어어엉… 행복해야해…….' 그렇게 스스로를 비극의 여주인공으로 만들고 있는 에타가 상황에 맞지 않는 엄청난 속력으로 남쪽을 향해 무작정 돌진해버리고 있었고, 그 뒤를 따라 미르가 검은 선이 되어 힘겹게 따라붙고 있었다. 소질도 하늘의 축복이 부여된 채 태어난 것인지, 아까 전에 엄청난 운동 을 했으면서도 여전한 체력으로 저렇게 달려가는 에타는 대체 어떻게 된 소녀인 것일까. 저 작은 소녀의 몸은 보통 인간들과는 다른 물질로 이루 어져있는 것인지, 단순히 '소질'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능력이었다. 미르는 약간의 짜증이 동반된 구겨진 얼굴을 한 채로 다시 한번 극한의 상태까지 운동 능력을 끌어냈다. 이미 상당한 차이가 둘의 사이에 존재하 고 있었기 때문에 따라잡으려면 꽤나 무리를 해야겠지만, 비상 수단으로 '힘'을 이끌어내는 방법도 있었기 때문에 우선은 최선을 다해보기로 했다. '흠.' 다리의 근육과 몸을 지탱하는 척추에 순간 힘이 들어가는 느낌이 분명 하게 전해져옴과 동시에 미르의 몸이 앞으로 세차게 쏘아져나갔다. 에타 는 슬픈 마음을 이기지 못해서인지 속도가 들쑥날쑥이었기 때문에, 한순 간의 증폭 가속으로도 따라잡을 가능성이 많았다. 그리고 역시 그 가능성이 들어맞았다. 휙. 평원 위로 무언가 스쳐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고, 눈물을 뿌리며 달려가 던 에타도 의문을 느끼고 뒤를 돌라보았다. 그러나 그전에 미르의 로브 속에서 튀어나온 어떤 물체가 소녀의 허리를 껴안은 것이 먼저였다. "꺄아아악!" 그건 미르의 손이었다. 두두두두. 엄청난 속력에 비해 너무나 급박한 정지였던 터라, 다리나 허리, 그 외 기타 골격들에게 충격이 상당히 많이 갔지만 그럭저럭 버틸 만한 수준이 었다. 미르는 연신 시끄러운 비명을 찔러대며 자신의 팔을 떨쳐내려 안간 힘을 쓰고 있는 에타를 놓아주지 않는 상태에서 20리치(=20m) 가량을 주 욱 밀려나갔다. 물론 작은 길이 곱게 파여진 흔적이 남았다. "꺄아아악! 꺅, 꺅! 아아아악!" 이윽고, 멈춰 서기는 했지만, 에타의 비명은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었 다. 훌륭하다고 칭찬해주고 싶을 정도의 지속성을 가진 성대가 아닐 수 없었다. 두 고막의 고통이 점차 심해지는 것 같은 기분에 미르가 드디어 그 무 거운 입을 열어 한마디 했다. "…시끄럽다." "꺄! 꺄아!" "…조용히 좀 해라." 마치 전설 속의 드래곤이라도 만난 듯이 고래고래 비명을 지르고 있는 에타에게 점잖으면서도 무섭게 말하자, 드디어 소녀의 목소리가 점점 약 해지기 시작했다. 미르는 처음부터 참 힘들다는 생각을 해보며 허리를 안 고 있던 팔을 풀어 적당히 뒤로 물러났다. 소녀는 계속 흐느끼면서 손가 락으로는 눈물을 옆으로 훔쳐내고 있었다. '많이 울었나본데…….'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미안해지는 미르는 머쓱하게(소년에게도 이런 표정이 있었다!) 다른 곳으로 시선을 던지며 입술을 우물거렸다. 뭔가 말 을 해야할 것 같은데, 이런 상황은 처음이라 마땅히 떠오르는 문장이 없 었던 것이다. 꽤 많은 시간이 흐르고, 소년이 힘들게 입을 열어 꺼낸 말은 "…그거 아 니다."라는 간단한 것이었다. 훌쩍이면서 어깨를 들썩이고 있던 에타가 너무 울어 벌겋게 충혈되어버 린 눈동자에 물음표를 담고 고개를 들었다. 미르의 시선은 여전히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뭐가 아냐?" 소녀의 반분에도 시간차가 있었다. 미르가 코 아래를 손으로 문지르며 작게 입을 열었다. "난 아이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건 정말이다." "…이제 와서 그런 식으로 위로하려하지 않아도 괜찮아, 미르……. 이제 난 미르를 완전히 잊었으니까." 당연히 거짓말이라는 것을 미르는 잘 알고 있었다. 10년 동안 쫓김에 이 제 그녀의 심리 상태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아챌 정도로 수련이 되 었으니까. "에타." 소년이 조용하게 소녀를 불렀다. 소녀의 에타로코크 색 눈동자가 깊은 심연을 향한다. "날 믿지 못하는 건가." "……응? 그, 그게 무슨 말이야?" "날 믿으라는 거다. 난 그 누구도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 아이는 더욱 아니다. 그러니, 날 믿어라." 에타의 눈동자가 눈에 띄게 흔들렸다. 그리고 이윽고 무언가 뭉툭하게 불거지더니, 이내 투명한 물이 소녀의 눈동자에서부터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감동의 눈물, 생전 처음으로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는 미르의 말에 너무나 감격한 나머지 흘려버린 눈물이었던 것이다. "정말? 정말이지? 그럼 나한테도 아직 괜찮은 거지? 그런 거지? 응응? 미르, 정말인 거지?" 눈물을 닦으며 쉴새없이 터져 나오는 에타의 물음과 물음의 연속. 예전 같았으면 짜증부터 우러났을 말투였지만, 지금은 왠지 정겹기까지 했다. 미르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한번쯤은 웃어주고 싶다는 생각을 진심으로 해보게 되었다. "물론이다. 이제 됐나." 억양의 차이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 소년의 대답이었지만, 소녀에게는 그 것이 무엇보다도 기분 좋은 음성으로 들렸다. 변하지 않은 자신에 대한 미르의 태도. 여전히 조금은 차가운 말투인 것은 상관없었다. 그만큼 미 르에게 있어서 자신의 자리는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니까. 아니, 변했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긍정적인 것도 같아서 더욱 기뻤다. 좀 전의 어두웠고 절망적이었던 감정은 어느새 몽땅 사라진 채 조각도 남지 않았다. "응! 이제 됐어! 미르를 믿을게! 미르는 아이를 좋아하지 않아!" 에타는 밝게 웃으며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오목조목한 얼굴만큼이 나 귀여움이 돋보이는 모습으로. "미르는…… 바로 나, 에타를 좋아하고 있는 거야! 꺄하하하핫!" 소녀의 미소를 기분 좋게 바라보고 있던 미르는 돌부리도 없는 곳에서 하마터면 균형을 잃고 넘어질 뻔했다. 본래의 모습으로의 회귀를 기념이 라도 하듯이 경쾌한 웃음소리를 동반한 소녀의 말 한마디에 바로 충격을 먹어버린 것이다. 허탈한 웃음 밖에 나오지 않는 미르의 얼굴이 다시 굳어져버렸다. '뭔가 실수를 한 거 같아…….' 어쩐지 오늘 하루동안 쌓아놓은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와 정신을 몽롱하 게 풀어헤쳐 버리는 듯한 나른한 기분에, 소년은 조용히 깊은 한숨을 내 쉬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다. 앞으로의 인생대로도 참으로 험난하고 시끄러울 예정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에타를 달래는 것에 성공한 미르는 소녀에게 오른쪽 팔 을 제압(팔짱) 당하다가 칼로 그은 상처를 건드려서 소녀를 또 한번 기절 하게 만들었다. 물론 고의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미안한 마음에 서둘러 로 브로 지혈을 하고는 빨리도 정신을 차리는 소녀와 함께 일행이 있는 곳 으로 향했다. 본래의 장소에서 어느 정도 전진해있는 그들을 멀리서 발견한 미르와 에타는 재빨리 다가가 합류했고, 미르는 아이에게서 친절히 치료를 받아 팔을 회복시켰다. 미르의 회복에 무엇보다 좋아한 사람은 당연히 에타였 고, 아이에게 자랑이라도 하듯이 소년의 팔 하나를 낚아채 팔짱을 낀 상 태에서 당당히 혀를 내밀어 아이를 놀려댔다. 돌아오자마자 성질을 긁기 시작하는 주황색 곱슬머리의 소녀를 바라보 며 핏줄을 하나씩 돋구어보던 아이였지만, 때마침 훼이드리온이 말려주어 서 다툼은 면할 수 있었다. 에타가 아이를 놀라게 한 선언을 한 것은 멀리 보이는 미츠힐 영지를 향해 모두가 환호성을 지르고 있을 무렵이었다. "나, 게이트 마을까지 동행할래!" 아이를 비롯한 모든 일행이 놀랐지만, 에타의 태도는 완강해서 도저히 바꿀 의향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하려 결국 소녀의 말에 따르기로 하고, 아이는 한숨을 쉬며 미츠힐 영지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미르의 기억이 무엇인지 나도 보고 싶다고.' 에타가 게이트 마을에 가고 싶어하는 것은 미르가 가진 3년 전의 기억 이 무엇인지 궁금해서였다. 길드에서도 절대 얘기해주지 않던 그 기억. 에타는 천천히 미르를 올려다보았다. 무표정한 시선이 전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바라보는 것은 미츠힐 영지가 아니었다. 영지를 넘어 게이트 산 맥에 가까이 닿아있는 시선이었다. 아이와 훼이드리온의 잡담에는 신경을 쓰지 않으며 에타는 팔짱을 끼고 있던 두 팔에 더욱 힘을 주어 미르의 손을 끌어안았다. 이제 하늘도 옷을 갈아입을 시간임을 알리는 붉은 기운을 띄고 있었다. 서쪽으로 사라져 가는 마스트의 눈이 작별을 고하고, 그가 없는 시간 동 안 세상의 모든 빛을 지배할 은색의 하실루스의 상징이 뉘엿뉘엿 동쪽에 서 떠오르고 있었다. 6장<에타> 카드 마스터(Card Master) 62. "결국, 지금까지 우리가 들었던 그 모든 이야기들의 주범이 미르 너였단 거야?" 아이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문장으로 해석하자면, '당신, 정말 황당한 사람이야.'로 표현될 수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향해있는 인물, 미르는 에타의 두 팔에 여전히 꼭 붙들려 있는 팔에서 완전히 관심을 끊어버리고 아이를 쳐다보았다. 소년의 눈동 자에는 상황에 맞지 않는 의아함이 떠올라있었다. 훼이드리온과 아이는 미르의 검은 눈동자에 떠올라있는 감정을 읽어내 고는 잠시 눈빛을 교차시키며 든든한 동지애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다 시 생각하는 거지만, 미르라는 저 소년을 보통 상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지금 이들이 나누는 말과 눈빛으로 이루어진 대화의 시발점이 된 것은 미츠힐 영지를 지나면서 생긴 작은 일이었다. 도시에서 조금 못 미치는 수준까지 발전해있는 미츠힐 영지의 중앙 대로를 통과하면서 훼이드리온 이 설명 정도로 꺼낸 말이 계기가 되었다. "미츠힐 영지는 이레브워츠가 유명한 영지야. 이곳의 이레브워츠는 라시 엔트 10대 특산물로 지정되어있을 정도로 다방면에서 뛰어난 특성을 자 랑해. 사실 바쁘지만 않았으면, 미츠힐의 이레브워츠를 즐기고 갈 수도 있었는데. 사정이 안 좋은 관계로 그냥 지나 가야할 것 같아." 머리 위로 두둥실 떠오르는 중인 하실루스의 상징, 은빛 달이 지배하는 하늘은 이제 거의 다가 검게 물들어있었다. 서쪽 하늘에 남아있는 불그스 름한 기운도 자취를 감춰버린 지 오래고, 이제는 반짝이는 별이 뜨기만을 기다리려야하는 시간이 돌아온 것이다. 그런 시간대에 이제야 미츠힐 영지를 지나는 탓에, 다른 곳으로 관심을 돌릴 틈도 없이 게이트 마을까지 단숨에 돌파하는 강행군을 이행 중인 일행. 그러던 때 훼이드리온이 말을 한 것이다. 그때, 에타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빛나기 시작했다. "미르미르! 이레브워츠라는데?" "…들었다." 묵묵히 대답하는 미르를 향해서 훼이드리온과 아이가 뒤로 고개를 돌렸 다. 에타가 다시 한번 소년을 불렀다. "미르미르! 이레브워츠라면, 많을 지도 모르잖아?" "많을 지도 모른다니?"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미르 대신 소녀에게 물었다. 훼이드리온의 표정도 다를 바 없었기 때문에, 결국 모든 시선은 미르를 향해 모아졌다. 총 6개의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잘 느끼고 있는 소년은 뭔가 생각하듯이 게이트 산맥을 멀게 바라보다가 문득 고개를 아래위로 움직이며 입을 열었다. "그렇군. 잠시 다녀오겠다." 그렇게 간단히 말해놓고 그 즉시 사라지는 미르. 에타에게 붙들려있던 팔도 어떻게 했는지 교묘하게 빼서 사라진 소년의 행적이 오묘해지자, 에 타가 비어버린 자신의 두 팔 안을 천천히 내려다보다가 멍하게 두 입술 을 뗐다. "어라." 소녀의 심리가 어떤지 참으로 잘 드러나는 한마디가 아닐 수 없었다. 에타가 어색하게 팔을 내리며 "아하하."라고 웃어보는 중에 아이가 밤이 깊어 가는 미츠힐 영지를 이리저리 둘러보면서 의문을 드러냈다. "어디간 거야?" "흠. 식량 구하러." "…식량?" "응." "돌아오면 알아."라는 의미심장한 대사를 남겨놓고 에타는 입을 다물며 싱글싱글 웃어댔다. 그래서 아이와 훼이드리온의 의문은 더욱 짙어질 수 밖에 없었다. 일반적인 상식의 선에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행동 범 위를 가진 미르였기에, 추측을 해보는 것도 어려웠다. 결국 그 답을 알고 있는 에타가 답을 해주지 않는 이상 의문을 풀기는 힘든 것이다. 멈추었던 걸음을 다시 움직여 얼마 정도 걸어가자, 미르가 순식간에 나 타나 에타에게 다시 팔을 잡혔다. 시간이 꽤 걸릴 거라고 생각하고 있던 아이가 소년의 등장에 놀라워하며 물었다. "어디를 다녀온 거야?" 하지만 대답 대신에 돌아온 건, 오랜만에 로브 속에서 꺼내드는 이레브 워츠 쿠키봉지였다. 미르는 사람들의 시선을 싸악 모르는 척한 채 여유 있는 움직임으로 연분홍색의 봉지에서 이레브워츠 향이 듬뿍 묻어나는 쿠키 하나를 손가락으로 집어들어 입안에 집어넣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에타는 미르의 팔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을 뺄 뻔했고, 아이 는 궁금해하던 질문을 잊어먹을 뻔했을 정도였다. 유일하게 올바른 정신을 차리고 있던 훼이드리온이 빠른 걸음으로 계속 움직이면서도 눈치 빠르게 미르의 변화를 알아챘다. "그 쿠키 사러갔다 온 거야?" 시선은 전방을 향해있었지만, 엄연히 미르를 향한 물음이었다. 지나다니 는 사람들의 시선이 한번씩 어린 소년소녀들로 이루어진 일행에게로 쏠 리는 가운데, 미르가 또 하나의 쿠키를 입안에 집어넣으며 대답했다. "사다니." "…사다니, 라니?" 훼이드리온의 고개가 다시 뒤쪽의 미르를 돌아보았다. 미르가 그 검은 눈동자로 의문을 표하고 있었다. "사다, 라는 게 어떤 건가." "……지금 '사다'라는 게 어떤 행위인지 묻고 있는 거야?" "그렇다. 사다, 그게 뭔가." 이쯤 되자, 너무나도 태연하게 물어오는 미르의 태도에 훼이드리온과 아 이는 황당해지지 않을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사다'라는 기본적인 사회적 행위도 모르면서 저 쿠키는 대체 어디서 구한 것일까. 설마 그 새 만들어온 것은 아닐 테고 말이다. "헤에, 설명이 무지무지하게 필요한 얼굴들인데?" "……응." 아이의 입에서 나오는 대답은 역시 느렸다. 에타가 싱글싱글 웃으면서 팔짱을 끼고 있는 미르를 올려다보았다. 소년 도 궁금하다는 얼굴로 쿠키를 씹으며 에타에게로 눈길을 내리고 있었다. "미르는 말이야. 어려서 가족을 잃어버리고 길드에 들어와 살아서…에, 뭐랄까. 살아가는데 필요한, 그런 기본적인 것들은 전혀 몰라. 그러니 당 연하게 '사다'라는 행위도 모르는 거구." "그럼… 저 쿠키는? 어디서 난 거야, 대체?" 재차 질문을 던지는 아이에게 답을 구해준 건 '사다'에 대한 기초적인 의문을 해결한 미르였다. "가져왔다." 시선이 동시에 미르를 향해 모였다. "있길래, 가져왔다." "그, 그건 도둑질이잖아!" 훼이드리온이 오히려 더 당황하며 소리쳤고,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시선 이 일순간 그를 향해 모였다. 예쁘게 생긴 소년이 갑자기 길 중앙에서 소 리는 지르니, 관심이 가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수많은 시선들을 한 몸에 받아버린 훼이드리온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벌 겋게 달아올라버리다니 서둘러 다리를 움직여 그곳을 벗어났다. 나머지 이야기는 영지를 벗어나서 하기로 하고 말이다. 그렇게 빠른 속도로 미츠힐 영지를 벗어나고 게이트 마을로 이어진 서 가도에 다시 들어섰다. 그리고 어느 정도 영지에서 멀어지자 아이가 다시 그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지금까지 지나온 모든 마을들에서 스치듯 귀에 들어온 그 모든 이야기 들의 범인이 모두 미르였다는 것이 밝혀지자 아이는, 앞으로 어떤 놀랄 일이 있어도 놀라지 않을 수 있는 자신까지 생겨버렸다. 상식이 통하지 않아도 이렇게 통하지 않을 수 있다니. 정작 미르는 아무렇지 않는 모습이었다. "문제가 되는 건가." 당연한 일이었다. '사다'라는 개념을 모르듯이, '훔치다'라는 개념도 마찬 가지로 모르고 있으니까 말이다. 어디까지나 미르의 관점에서 그냥 '있길 래' 아무 생각 없이 '가지고 온 것'일 뿐이다. 아이는 투철한 '인정'을 발휘하여 앞으로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기 본 개념이라도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앞으로도 길드에서만 생활할 가능성이 높다고 하더라도, 인간 된 도리로서 그 정도는 알고 있 어야할 것 같았다. "미르.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은 잘 듣고 있어. 필요 없다고 생각되더라 도 말이야. 미르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한, 언젠가는 필요할 날이 올 '기본적'이면서도 꼭 필요한 것들이니까. 알았어?" 미르가 자기도 쿠키를 달라며 떼를 쓰는 에타의 투정을 애써 모르는 척 하며 아이를 쳐다보았다. 검은 밤하늘과도 너무나 잘 어울리는 깊은 심연 의 색을 띄고 있는 두 눈동자가 허공에서 마주치고, 그때부터 아이의 장 황한 '인간 교육'이 시작되었다. 대화법에서부터 조금 전의 일까지, 하고 싶었던 말들을 가슴이 시원해질 때까지 쏟아내기 시작하자, 여정은 순식간에 게이트 마을 앞까지 당도하 는 무시무시한 발전을 보였다. 그 사이, 아이는 스스로의 교육에 도취되 어 미르를 가르치는 입장인지, 아니면 소년에게 투정을 늘어놓는 입장이 됐는지도 모를 정도가 되어버려, 나중에 말을 마칠 때쯤이 되자 스스로도 무슨 말을 했는지 알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알겠지?" 다 끝내놓고 보니 '이게 아닌데.'라는 생각이 머리 속에 불을 피웠다. 아 이는 많은 시간 동안 자신의 잔소리를 묵묵히 듣고 있어준 미르의 조용 한 눈을 바라보다가, 순간 어색한 느낌이 들어 얼렁뚱땅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매만졌다. "끝났나." 조용한 음색. 여전히 평온한 미르의 목소리에 아이는 서둘러 고개를 끄 덕거렸다. 미르의 시선이 아이의 얼굴에서 천천히 게이트 산맥으로 향했 다. 멀리 보이던 산맥이 어느새 바로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명심하도록 하겠다." "……고마워." 거짓이 아니라, 정말 진심으로 고마운 아이였다. '하아, 바보 같아.' 아이는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뼈아프게 알고 있었기 때문에, 조신하 게 입을 다물고 있기로 했다. 옆에서는 훼이드리온이 전방을 주시하며 입 술 가 근육을 꿈틀거리고 있었고, 뒤에서는 에타가 키득대면서 미르의 팔 을 긁어대고 있었다. 결국 그녀는 창피함에 밤의 어둠을 틈타 얼굴을 붉 게 물들이고 말았다. 하실루스의 밝은 달빛 아래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게이트 산맥은 짙은 산림으로 인해 밤에는 빨려들 것만 같은 어둠을 띄고 있다. 산맥이라는 건 밤에는 절대 접근하지 못하는 영역이라서 더욱 그런 느낌이 드는 건 지도 모른다. 그 깊고 높은 어둠의 장막 밑으로 군데군데 불빛이 비치는 곳이 눈에 들어왔다. 넓게 분포되어있지는 않았지만, 검은 커튼을 배경으로 하고 있 어서 그런지, 그 빛은 더욱 밝게 느껴졌다. 훼이드리온은 조금 언덕진 곳에서 게이트 마을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저곳이 게이트 산맥을 넘기 전에 꼭 거쳐야할 게이트 마을이야. 결국 오늘 하루만에 여기까지 왔긴 왔는데?" 비록 중간에 이러저러한 사건들이 많았다고는 해도, 즐겁게 여정을 여기 까지 이어올 수 있었다는 사실에 그는 작은 안도를 느끼며 즐겁게 미소 지었다. 언덕 위에 일렬로 서게된 그들은 마법의 등으로 보여지는 불빛들을 하 나씩 살펴보듯이 마을을 관찰하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천천히 발걸 음을 내딛었다. 아이의 실수로 인해서 조금은 어색해질 뻔했던 분위기가 다시 고조되어 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여관을 잡으면 바로 잠들어버릴 것 같아. 너무 피곤해." 그렇게 말하기가 무섭게 아이의 입에서 작은 하품이 터져 나왔다. 손으 로 입을 가리며 졸음을 표시하는 그녀의 얼굴을 힐끔 쳐다보며 훼이드리 온이 말했다. "빨리 가서 여관부터 잡자. 그러는 게 최선이겠지?" "응." 그 점에서는 에타와 미르도 무언의 찬성을 했기 때문에, 그들은 걸음을 옮기는 속도를 높였다. 낮은 언덕을 단숨에 내려와서 마을로 들어서는 입 구라고 보여지는 길을 통해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늦은 시간인 탓에 마 을 주민들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고, 중간 중간 창문에서 흘러나오는 불빛만이 길을 메우고 있었다. "여관이 어디 있는지 직접 뛰어봐야 하려나?" 훼이드리온이 걱정이 스며든 음성을 내뱉으며 눈동자를 돌리는 사이, 아 직도 미르의 팔에 매달려있던 에타가 길 저편으로 시선을 던진 채 입을 열었다. "저기, 저 여관 아냐?" 역시나 하이톤의 목소리인 소녀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눈길 을 돌리자, 거의 다가 1층뿐인 단조로운 구성을 가진 건물들 사이에서 단 연 돋보이는 3층 짜리 건물이 발견되었다. "아, 저기." 에타 덕분에 쉽게 발견하게된 여관으로 향하는 일행. 피곤하다고 말하고 나자, 어쩐지 그 정도가 더 심해진 듯한 기분에 더욱 서두르게 되는 것이 다. 여관의 지붕에 달린 마법의 등이 하얀빛을 내려주었고, 그 아래에서 푸 른색의 문이 그들을 반겼다. 훼이드리온은 붉은 벽돌로 쌓아져있는 여관 을 제대로 관찰할 겨를도 없이 '게이트 여관'이라는 간판만을 확인하고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 손님이다. 어서 와요!" 에타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의 고음의 목소리가 문을 닫는 그들 에게로 날아들었다. 문과 가까운 곳에 마련되어있는 카운터에서 하얀 노 트에 뭔가를 끄덕이고 있던 조금은 통통한 여인, 아니 소녀가 늦은 밤에 찾아온 손님들을 향해 인사를 하고 있었다. 훼이드리온은 소녀에게로 다가갔다. "2인실 두 개 있습니까?" "2인실요? 네, 물론이죠. 잠시만 기다려봐요." 여관의 주인이라고 하기에는 많이 어려 보이는 소녀는 손님에 대한 존 대를 과감히 생략해버리는 대담한 말투를 구사하고 있었지만, 그런 자잘 한 것에 신경을 쓸 시간과 정신이 없는 훼이드리온이어서 대충 넘어가기 로 했다. 한동안 장부를 넘겨보던 소녀가 바깥쪽으로 멋지게 말린 단발머리를 귀 뒤쪽으로 넘기며 고개를 들었다. "아, 여기 있어요. 2층 14호실이랑 16호실." 그러면서 소녀는 카운터의 서랍을 열어 해당되는 객실의 열쇠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여기요, 열쇠. 정리는 다 되어있을 테니까 올라가셔서 주무시기만 하면 돼요. 세면실이나 화장실은 방마다 다 구비되어있고요. 더 필요한 거 있 나요?" 몸에 베인 듯이 익숙하게 방을 소개하는 소녀. 통통한 두 볼에 걸린 웃 음이 소녀의 이미지를 귀엽게 만들고 있었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밥은 어디서 먹죠?" 그러고 보니, 이 여관은 1층이 식당이 아니었다. 보통은 여관이 식당까 지 겸하고 있었지만, 게이트 여관은 약간 변칙적인 구조였다. 소녀가 친절하게 설명을 했다. "아, 저희 여관에는 식당이 없어요. 대신 이 바로 옆에 식당이 있으니까 그곳에 가셔서 드시면 돼요. 배달도 되는데, 주문해드릴까요?" "아, 아니요. 지금은 됐습니다." 훼이드리온이 정중히 거절하는 사이, 아이와 에타가 똑같은 타이밍에 빨 리 올라가자고 보채기 시작했다. 이미 사과를 하고 서로 간의 감정을 씻 은 지 오래였기 때문인지, 엉뚱하게 마음이 잘 맞고 있었다. "어라, 이 늦은 시간에 손님인 거야?" 경쾌한 느낌의 음성이 카운터 오른쪽의 작은 복도에서 들려왔다. 변성기 를 막 지난 듯한 느낌의 남성의 목소리. 그 음성의 주인공이 이내 모습을 드러냈다. "아, 나르. 잔다며?" "후시양이 제대로 카운터를 보고 있을지 걱정이 돼서 나와본 거야." "칫, 너보다는 제대로 봐." 하늘색 머리칼에 발랄한 인상인 소년이었다. 그런 소년을 '나르'라고 지 칭한 '후시'라는 이름을 가진 통통한 소녀가 마지막으로 일행에게 인사를 했다. "그럼, 좋은 밤 보내세요. 후불이니까, 열쇠를 반납하면서 값을 치르면 돼요." "편안하게 지내세요." 나르라는 소년도 친절한 미소를 띄운 채 인사를 했고, 그들의 인사를 받 으며 훼이드리온과 아이, 미르와 아이는 서둘러 카운터 옆 계단으로 후다 닥 올라갔다. 시끄러운 발소리가 손님들의 취침에 방해가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여 관 주인으로서의 전형적인 걱정을 해보던 후시의 시선이 계단에서 떨어 져 나왔고, 대신 카운터에 팔꿈치를 기댄 채 건들건들하게 서있는 나르에 게로 옮겨졌다. "나이나르, 저들이 마스터가 말한 애들이야?" 나르, 아니 나이나르가 간단히 고개를 움직이며 긍정을 드러냈다. 후시 가 뜻이 깊어 보이는 시선을 계단을 향해 다시 던졌다. "그보다, 후실리이스." "응?" "마스터가 말한 일이 정말 가능하다고 봐?" 후시는 소녀의 애칭이었고, 본명은 후실리이스였던 것이다. 소녀가 고개 를 갸웃거려보며 대답했다. "흐음, 글쎄. 필도 라시안트 왕성에서 차근차근히 준비해가고 있고, 전부 다 마스터와 필이 말했던 대로 되어가고 있잖아?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게 어쩐지 더 어색할 것 같은데." "역시, 마스터가 말한 건데, 틀림없겠지?" "응, 당연. 의심 같은 건 처음부터 하지 않았다구." 후실리이스와 나이나르는 한달 전에 소집되었던 마법사 길드 최고 원로 회에서 마스터와 필로윈이 밝힌 계획을 다시 한번 머리 속에 떠올려보다 가, 싱긋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들을 믿지 못한다면 누굴 믿겠어." 나이나르도 동의를 하는 가운데, 후실리이스는 슬슬 여관 문을 닫을 준 비를 하기 시작했다. 미르는 어둡고 조용한 곳을 좋아했다. 그런 장소 중에서 특히 좋아하는 장소가 있다면, 그건 고층 건물의 지붕이었다. 그곳에는 달과 운명의 여 신 하실루스의 상징, 달의 은은한 빛을 어떤 장애물 없이 받을 수 있었 고, 또한 어떤 소음도 들리지 않는 침묵이 제공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검은 옷의 소년이며 흑의 마스터인 미르는 지금 현재, 별칭들과 너무 잘 어울리는 어둠에 잠긴 채 지붕 위에 앉아있었다. 이미 훼이드리온과 아이는 깊게 잠에 빠져버린 시간이었다. 피곤한 중에 서도 기어코 씻을 건 다 씻고 잠든 그들의 얼굴에는 평온함이 스며있었 고, 그런 뜻에서 달빛도 어느 때보다 밝은 빛으로 게이트 산맥과 마을을 비춰주고 있었다. "……." 미르의 가라앉은 눈빛이 지그시 마을의 남쪽으로 향했다. 드문드문 켜져 있는 불빛을 제하고는 완전히 어둠에 잠겨버린 마을은 검은 커튼 속에 사라져버린 듯 모습을 구별하기가 힘들었지만, 미르의 눈동자는 정확하게 원하는 곳을 향해 있었다. 한치의 오차도 없이. 지금은 그도 잠에 빠져있을 것이다. 3년 전, 그제야 만날 수 있었던 그 는. 맘 같으면 사실 지금 즉시 달려가고 싶었다. 자신과 너무나 닮은 그 에게 달려가서 안기고 싶었다. 하지만 미르는 그것을 참고 있었다. 아직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미르미르, 안자?" 언제 올라왔는지 에타가 뒤에서 다가와 오른쪽에 소리 없이 앉았다. 미 르는 놀라지 않고 시선을 계속 유지했다. "알고 있어. 이 게이트 마을에 미르가 찾던 인물이 있다는 걸." 특유의 고음이었지만, 지금 에타의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잔잔했다. "3년 전에 이 마을을 들렀을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용 기를 내봐. 미르의 모습 그대로 다가가면, 분명히 잘될 수 있을 거야. 분 명히." 서늘하게 살갗을 스치는 위넨스의 손길 속으로 사라지는 소녀의 목소리 는 기도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미르는 조용한 눈빛으로 계속 남쪽으 로 시선을 향한 채 약한 숨만 들이쉬고 내뱉었다. 시원한 공기가 가슴속으로 스며들었다가 다시 나간다. 그때마다 정신은 조금씩 맑아지고 상쾌해지는 것 같았다. 미르는 로브 속에서 손을 움직여 오른쪽 팔을 잡았다. 어쩔 수 없이 자 해를 하여 피를 본 곳이었지만, 지금은 아이의 신법으로 인해 흉터 하나 남지 않고 치료된 부위였다. 그 지점을, 미르는 손으로 꼭 잡았다. 어쩌면… 지금이라면 그에게 다가갈 수 있을 지도 모른다. 3년 전과는 달리, '친구'라는 것을 얻은 지금은 말이다. 중요한 건 용기, 그때처럼 흔 들리지 않을 용기였다. "힘내, 미르." 에타의 응원이 다시 한번 소년의 마음을 울렸고,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미르는 고르게 숨을 쉬었다. 바람은 시원하고 달빛을 아름다웠다. 너무나 평화로워 부정적인 생각이 오히려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잘 있을까.' 역시 걱정이 되기는 했다. 3년 전에 왔을 때 같이 살고 있던 그 여자가 지금도 잘 돌봐주고 있기야 하겠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때… 그래, 그때였다.' 그를 찾기 시작한지 5년째 되던 그 날. 미르는 드물게 감정이 드러난 눈 을 한 채, 어두운 마을을 내려다보며 회상에 잠겼다. 번 호 : 66 / 67 등록일 : 2000년 12월 07일 23:52 등록자 : 암음기사 조 회 : 142 건 제 목 : [카드 게임 판타지]『카드 마스터(Card Master)』#063 카드 게임 판타지(Card Game Fantasy) 카드 마스터(Card Master) 63. 밤에 보았을 때는, 밤의 길 한가운데 우뚝 서있는 거대한 장막 같았던 게이트 산맥도 아침의 햇살에 맞춰 분위기 쇄신을 노려 완벽한 변화를 이루었다. 마법왕국 라시엔트 내에서 가장 높고 험한 산지를 이루고 있다 는 게이트 산맥의 짙은 녹림은 어두운 모습을 벗고 상쾌한 여름의 느낌 을 주는 녹색의 커튼으로 탈바꿈한 채 빛을 발하고 있었다. 햇빛이 살짝 부딪히며 풍겨 나오는 숲의 향기 속에서 게이트 마을은 평 온한 아침을 맞았다. 이르지도 않고, 그렇다고 늦지도 않은 딱 적당한 시 기. 가끔 나타나는 몇몇 여행자들과 주민들의 작은 이야기소리 빼고는 그 평온을 깨뜨리는 요소라곤 찾을 수 없어서, 마을은 더없이 평화로웠다. 훈훈한 아침 햇살에 비치는 3층의 목조 건물에도 어김없이 평화로운 시 간이 찾아들었다. 노곤하리만큼 조용한 여관 카운터에서는 어여쁠 정도의 하늘색 머리칼을 단정하게 기른 소년이 턱을 괴고 햇살이 쏟아져 내리는 창문을 말없이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던 중이었다. "후시는 언제 오려나아아." 소년의 음성에서도 지루한 시간의 느낌이 젖어있었고, 또한 기다림의 지 겨움도 깃들어있었다. 금방 온다고 하던 후실리이스가 방에 들어가더니 아직 안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여관을 운영하면서 가장 불만인 점이 바로 이것이었다. 손님이 없는 시 간대에는 별 할 일도 없이 시간을 때워야한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사랑 하는 후실리이스가 있다는 점이었지만, 혼자 있을 때는 어쩔 수 없는 따 분함이 마구 몰려들기 때문에 불만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 탓에, 이른 아침 기상해서 약간의 시간을 거친 지금, 나이나르는 무척이나 지루하다는 듯이 늘어지게 하품을 해보았다. "나르. 입 찢어지겠어." 톡톡 튀는 듯한 음색을 가진 밝은 목소리. 하품을 하고 있던 소년의 입 가에 금방 미소가 걸리며 고개를 왼쪽으로 휙 돌렸다. 카운터 뒤 작은 복 도에서 과도와 엘파(Elppa: 사과) 두 개를 쟁반 에 받쳐든 채 걸어나오고 있었다. 후실리이스가 작게 인상을 찌푸리며 나이나르 옆에 앉았다. 소녀의 통통 한 얼굴에 옅은 홍조가 피어있었다. "노골적으로 기쁜 얼굴 짓지마, 좀. 내가 부끄러울 정도야." "훗, 좋은 걸 어떡해. 냐하하." 소년의 입에 걸린 미소는 지워질 줄 몰랐고, 그 때문에 소녀는 점점 농 도를 더해 가는 붉은 기가 도는 얼굴을 한 채로 과도를 들어 엘파를 깎 기 시작했다. "결혼하지 1년이 넘어가는데, 어째 아직도 예전 그대로야?" "난 원래 그래." "원래 그런 건 알고 있었지만, 결혼한 후에도 그럴 줄은 몰랐지. 밤은 어떻게 지내는 건지 용할 정도라구, 정말." "…내 손에 뭐가 들려있는지 모르는 건 아니지?" 후실리이스가 상큼하게 미소를 지은 얼굴로 손에 들고 있던 날이 깨끗 하게 빛나는 과도를 들어 보였고, 나이나르의 얼굴이 급속도로 굳어져가 면서 입술도 같이 굳어버렸다. 결국 소년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소녀가 물려주는 엘파를 받아먹기만 했다. 스으윽. 그런 평화로운 한때를 흔들어놓는 문의 움직임. 포크로 엘파 조각을 찍 어 나이나르 입에 물려주고 있던 후실리이스의 시선이 천천히 이동해 문 을 연 장본인을 두 눈에 담았다. '꺽다리'라는 별명이 너무나도 잘 어울릴 정도로 큰 키 때문에 조심스럽 게 고개를 숙이고 들어오는 한 남자의 모습에 소녀가 반갑게 과도를 든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냐아, 뮤린! 안녀엉!" "아, 으응." 뮤린이라 불린 사내가 간신히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으며 나이나르를 향해 측은하다는 듯한 눈길을 보내주었다. 현재 소년은 후실리이스가 멋 도 모르고 흔들고 있는 과도에 얼굴을 베일 뻔한 위기를 겨우 빠져나왔 던 것이다. "늦게 왔네?" "아, 으응. 늦잠을 자서……." 키가 큰 사람은 싱겁다, 라는 옛말을 떠올리게 만드는 어수룩한 뮤린의 행동. 몸둘 바를 모르겠다는 듯이 볼을 긁고 있는 그의 뒤통수에 짧게 기 른 머리가 끈에 묶여 꽁지처럼 붙어있는 모습이 보인다. 소녀가 소년에게 열심히 고개 숙여 사과를 하면서 위를 가리켰다. "먼저 2층 14호실, 16호실 손님들부터 깨워. 아침 시간도 지나가는데 더 자면, 오히려 더 피곤할 거야." "아, 으응." 똑같은 패턴으로 대답하는 뮤린이 한심하게 느껴져 한동안 그를 쳐다보 다가, 나이나르의 재촉에 이내 눈길을 돌리는 후실리이스. 저러니 좋아하 는 여자에게 고백도 못하지, 라는 생각을 해보며 나머지 엘파를 깨끗이 깎아 소년에게 건네주었다. 뮤린은 계단으로 성큼성큼 2층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여관에서 일하여 청소와 손님들의 자잘한 서비스를 담당하는 뮤린의 업 무 중에는 손님들의 기상을 돕는 것도 포함되어있었다. 그는 후실리이스 가 말했던 2층 14호 앞에 서서 조용히 문을 두드렸다. "손니이임. 아침입니다. 일어나세요." 그러나, 저렇게 작은 목소리로 깨워봤자 곤히 자고 있는 손님이 반응을 할 리가 없다. 그도 충분히 그걸 깨닫고는 있었는지, 한숨과 함께 목소리 를 가다듬고, 동시에 꽉 진 주먹에 힘을 불어넣었다. "뭐냐." "소오오……온니임?" 괴상한 어감과 음색과 억양을 남겨버린 뮤린의 목소리가 공기 속으로 분쇄된 채 흩어지는 가운데, 그의 눈이 허망하게 오른쪽 아래로 내려갔 다. 보통 성인 남자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그의 키 때문에 상당히 내 려다 보아야할 위치가 되어버린 그곳에는 검은 로브를 뒤집어쓰고 정리 하지 않는 산발의 검은머리를 가진 소년이 감정 없는 검은 눈동자로 그 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 깨, 깨어나신 겁니까?" "그렇다. 그러니, 비켜라." 강압적인 태도였지만, 알 수 없게 누군가의 분위기를 닮은 소년이었기 때문에 뮤린은 그냥 고개를 끄덕여 사과를 표시하고는 후다닥 아래층으 로 달려 내려가 버렸다. 후실리이스에 의해 "소심해!"라는 평가를 받은 바 있는 그의 성격으로는 도저히 소년의 시선을 견뎌낼 수 없었던 탔이 다. 그가 달음질치듯 밑으로 내려가는 모습을 바라보던 소년, 미르는 오랜만 에 느껴보는 수면의 편안함 덕분에 완전히 회복된 체력을 바탕 삼아 교 묘하게 문을 열어 214호실 안으로 들어갔다. 이 안에는 에타의 억지 때문 에 또 같은 방을 쓰게 되어버린 훼이드리온과 아이가 곤하게 취침을 행 하고 있었다. 잠시 주변 배경이 빠르게 흘러가다가 멈췄고, 어느새 미르는 방안에 들 어와 있었다. 어느 여관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을 하고 있는 방. 소년의 좌 우 벽 쪽으로 침대가 있고 그 중앙에는 창문이 있다. 해가 하늘 위로 많 이 떠오른 상태라 햇빛이 그렇게 많이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대륙 어느 여관방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아침 정경이었다. 침대 위에서 조금식 뒤척이며 잠에 빠져있는 훼이드리온과 아이. 벽 쪽 으로 돌아 누워있는 아이는 얼굴이 보이지 않아 어떤 상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훼이드리온의 얼굴은 확인 가능이었기에 그쪽으로 천천히 다가 갔다. 피곤이 꽤 많이 풀린, 편안한 얼굴을 한 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미르가 한순간 숨을 멈추며 자신을 감싸고 있던 기운을 순간적으로 바꾸 었다. 파아아악. 소년의 작은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거센 살기의 돌풍. 그때까지 방안을 지배하고 있던 따뜻한 기운은 금새 살기에 밀려 사라지고, 남은 것은 차 갑고 이질적인 피의 냄새였다. 살기. 암살자가 본격적으로 살기를 뿜어낸 다면, 일반인일 경우 심장마비로 즉사하는 게 10명중의 9명이다. 하지만 살아남은 1명은 예외적인 일이기에, 거의 다 죽는다고 보는 게 옳았다. 암살자의 살기란 그런 것이다. 그럼, 그 살기를 암살자 중 최고의 실력을 가진 검은 옷의 소년이 뿜어 낸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 "핫!" 방금 전까지 이불을 가슴까지 덮고 곤히 잠에 빠져있던 훼이드리온의 눈이 번쩍 뜨여짐과 동시에 몸을 번개 같이 일으키며 침대 옆에 세워두 었던 칼을 뽑아 사정없이 휘둘렀다. 얼마나 빨랐는지 칼이 잔광이 남는 장면 밖에 겨우 확인할 정도였다. 정말 엄청난 빠르기. 그러나, 미르는 어느새 그 자리에 피해 문 앞에 멀찍이 서있었다. 칼날 같이 훼이드리온을 엄습하던 살기도 어느새 모두 지워버린 채. 훼이드리 온이 허공에 칼을 들어올린 상태에서 숨을 몰아쉬며 미르를 바라보았다. "…헉, 너, 너였어?" 끄덕. 미르가 고개가 간단히 움직이자, 그가 온몸에 힘이 쫘악 빠져버리 는 느낌을 느끼며 침대 위에 털썩 늘어져버렸다. 마치 전쟁이라도 한바탕 치른 후의 병사 같은 얼굴을 하고 말이다. "앞으로는 좀 평범하게 깨워 줘……. 한번이라도 더 당했다가는 놀라서 심장마비로 죽어버릴 것 같아." 기분 좋게 꿈의 세계를 헤매던 중에 갑자기 폐부를 찌르듯이 덮쳐오는 살기의 파동에 화들짝 놀라던 방금 전의 느낌을 상기하며 그가 몸을 부 르르 떨었다. 아닌 게 아니라, 금방이라도 소름이 돋아날 것 같았기 때문 이다. "…알았다." 미르가 조용히 대답하며 다가왔고, 훼이드리온도 "고마워."라고 인사하 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칼을 도로 집어넣고 몸을 일으키자, 반대편 침대 에서 아이가 아직 잠들어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에타라는 친구 분은?" 여전히 아이를 바라보면서 그가 물었고, 소년의 눈길이 천천히 문 저쪽 을 향했다. 훼이드리온은 소년의 행동을 분석하여 스스로 답을 끌어내야 하는 것이다. 문 저쪽에는 에타와 미르의 방이 있다. 방금 질문에 미르의 눈이 그곳을 향했다. 고로, 결론은. "…아직 자고 있다는 거야?" "……." 여전히 다물어진 입으로 고개만을 끄덕이며 대답하는 미르. 그가 "하아, 그렇군."이라며 뒷머리를 긁었다. 역시나 이 소년과의 대화는 어려웠다. "그럼, 친구 분도 깨워. 아이 깨워서 같이 나갈 테니까." 미르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방안에서 사라져버렸고, 훼이드리온이 한 동안 소년이 서있던 자리를 멍청히 내려다보다가 다시 뒷머리로 손을 가 져갔다. 이미 버릇을 굳어져버린 행동을 하면서 그는 허리를 굽혀 아이의 어깨를 천천히 흔들었다. "아이, 일어나. 어서 산을 넘을 준비를 해야지. 응? 일어나, 아이." "우웅……." 귀엽게 앙탈 부리듯이 손을 저으며 더욱 더 이불 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아이. 그는 잠시 어깨를 으쓱하며 미르를 불러와 똑같은 방법을 써볼까 고려해보았지만, 뒷감당이 되지 않을 것 같아 그냥 평범하게 깨우기로 했 다. 그래서 계속 어깨를 잡고 작게 흔들며 소리쳤다. "아이, 일어나라니까. 어서어서 일어나서 어서어서 준비해야지, 어서어서 출발해서 어서어서 도착해야할 거 아냐." "……일어났으니까, 이제 그 '어서어서'라는 말은 그만해 줘." 그녀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투덜댔다. 한발 뒤로 물러서 싱긋 웃음을 띄우는 훼이드리온. 작은 하품을 터뜨리며 침대 밑으로 발을 내리던 그녀 가 그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잘 잤어?" "응, 물론. 아이는?" "나도 뭐, 나쁘지 않았어. 침대가 너무 편하던걸."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기분 좋게 웃으며 상쾌한 기지개를 해 보이 는 아이를 향해 훼이드리온이 말없이 미소를 지어 보이다가 문득 입을 열었다. "아, 서둘러야지. 빨리 준비해서 출발해야해." "아, 맞아." 침대에서 일어나 대충 이불을 정리한 아이는 씻으러 밖으로 나갔고, 방 에 남은 훼이드리온도 옷을 단정히 정리하고 칼과 갈색주머니를 다시 허 리춤에 매어 준비를 마쳤다. 곧 그녀도 돌아와 나갈 준비를 했고, 잠시 기다려서 같이 나가자 졸린 눈을 비비며 맞은 편 방에서 걸어나오는 에 타와 만나게 되었다. 훼이드리온이 손을 들며 인사를 했다. "아… 잘 잤어요?" "……응? 하암…… 대충은." 부스스하게 허공에 붕 떠있는 주황색의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뒤적이며 대충 대답을 하고는 세면실로 걸어가는 소녀의 뒷모습을 구경하던 그가 뒤따라 방에서 빠져나오는 미르를 향해 눈길을 돌렸다. "먼저 가있어라. 데리고 가겠다." 소년이 둘을 스쳐지나가면서 남긴 말을 충실히 이행하자는 데 의견을 모은 훼이드리온과 아이는 "빨리 와."라고 언질 해주며 계단을 통해 밑으 로 내려갔다. 내려가던 중에 문득 아이가 입을 열었다. "싫어하는 것 같더니, 별로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지 않아?" "응? 누구? 미르하고 그 친구 분?" "그래, 미르하고 에타. 에타가 나타나자 마자 도망갈 정도로 꺼리더니, 지금은 또 저렇게 챙겨주잖아. 싫어한다더니, 꼭 그런 건 아닌가봐." "요약해서, 복잡한 관계인 거야." "와아, 말 된다." 미르와 에타, 둘의 관계를 순식간에 '복잡한 관계'로 정의 내려버린 둘은 금새 식당에서 먹을 아침 메뉴로 화제를 바꿨다. "잘 드시고 오세요." 카운터에서 꼭 붙어 앉아 인사를 하는 나르라는 소년과 후시라는 소녀 의 인사를 받으며 둘은 그들이 가르쳐준 대로 여관 옆 식당으로 이동했 다. 여관 주인으로는 절대 보이지 않는 통통한 소녀가 가르쳐준 대로 식당 은 여관 바로 옆에 붙어있었다. 같은 목조 건물이었지만, 기와를 얹은 형 태의 지붕이라서 독특하면서 고풍스러운 느낌이 묻어났다. 깨끗한 유리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보통 여관에서 볼 수 있는 식당 의 정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꽤 넓은 홀 안에 배치되어있는 여러 개의 둥 근 테이블 중에서 아무거나 하나 골라잡아 자리에 앉은 둘은 식당 안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을 몽땅 끌어 모으며 주위를 구경하고 있었다. "뭐, 나쁘지는 않다?" 아이가 식당의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간단한 소감을 표현했고, 훼이드리 온도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아래위로 주억거렸다. 종업원 소년이 다가 온 게 그쯤이었다. "뭐 드시겠어요?" 쾌활하게 빙그레 웃음 지으며 물어오는 소년의 헤어스타일은 꽤나 독특 했다. 푸른색이 묻어나는 흑색의 머리카락이 하늘을 향해 사정없이 뾰족 뾰족 서있는 모습이, 흔하게 찾을 수 없는 특이한 헤어스타일이었던 것이 다. 아이가 "푸훗!"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숙인 채 어깨를 들썩였고, 훼 이드리온도 웃음을 찾을 수 없어서 옆으로 고개를 돌려 키득대다가 겨우 요리를 주문했다. "…그, 그냥 정식주세요. 쿡." "…으음, 정식 두 개요?" 당연히 기분이 나쁜 소년이었지만, 차마 손님에게 화를 터뜨릴 수는 없 어서 상당히 아니꼬운 감정이 묻어나는 음성으로 되물었다. 훼이드리온이 "네, 네."라며 간신히 대답했고 소년이 자신의 뾰족머리를 한 차례 쓸어 올리며 주방을 향해 사라졌다. 소년이 저쪽으로 가버린 후, 식당을 두드리며 열심히 웃어버린 둘은 이 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낼 즈음 겨우 진정할 수 있었다. 너무나도 파격적 이면서 우스운 헤어스타일이었기 때문에, 정말 원 없이 웃어버렸다. "아하하…… 배, 배가 아파……." 아이가 고통을 호소하며 눈물을 손가락으로 훔쳐냈고, 훼이드리온은 진 정을 하기 위해 물을 한번에 다 마셔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역시 소년의 특이한 헤어스타일이 눈앞에 돌아다녀서 곤욕을 치를 수밖에 없었다. "음음… 아하하… 이, 이제 좀 참아봐야지. 다른 얘기하자, 우리. 생각이 나면 또 웃어버릴 것 같아." 그녀의 부탁에 그가 적극적으로 동감하며, 또 다시 그 모습이 생각나기 전에 서둘러 다른 화제를 꺼냈다. "그, 그러니까 오늘이 24일이지? 오늘까지 합쳐서 7일 동안 게이트 산맥 을 부지런히 넘어가야 해. 하루 정도 피로를 푸는 걸 포기한다고 하더라 도, 30일 저녁까지는 에코에 도착해야할 테니까." "29일까지라고 하지 않았어? 마스터 카드 대회참가 신청은 29일까지라 고 하던데?" "어라, 그래? 그럼 더 또 다시 6일이 되어버리는 건가? 빡빡하잖아. 이 런." 6월 1일부터 시작되는 대회였기 때문에, 참가 게이머들의 토너먼트 구성 을 위해서 하루 정도는 소모해야하는 게 당연하다는 것을 생각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면 7일에서 6일로 늘어나는 것 같더니 다시 줄어들게 되어 버리는 여정. '과연 게이트 산맥을 6일만에 넘을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슬그머니 그의 머리 속에 떠올랐다. "흐음. 6일이라… 도착할 수 있을까?" "그 이흐리트 씨도 빨리 간다면 도착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빨리 간다면'이잖아." 6일 정도로 충분히 넘을 수 있을 것 같았던 게이트 산맥이었지만 막상 산맥 아래로 오니 만만하게 볼 게 아니었던 것이다. 훼이드리온은 뒷머리 를 긁으며 골똘히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다. "가능하다." 익숙한 목소리. 아이와 훼이드리온의 고개가 동시에 들렸고, 자신들의 테이블 앞에 우뚝 서있는 미르와 에타의 모습이 보였다. 곱슬머리가 부스 스해져서 정말 보기 껄끄러웠었지만, 그나마 안전(?)하게 정돈이 되어서 귀여움이 되살아나는 에타가 서둘러 의자를 끌어내 앉았고, 식당 안의 작 은 소란과 함께 미르도 자리에 앉았다. 의자에 자리잡은 소년이 훼이드리온과 아이의 시선을 받으며 말을 이었 다. "게이트 산맥의 산세를 잘 아는 사람과 동행한다면 5일 안에도 가능하 다. 물론, 게이트 산맥의 길을 모조리 꿰고 있는 사람이어야 하지만." "하아, 그런 사람이 있을까?" "찾아봐야겠지." 가능성 있는 의견이기는 했다. 마을 주민들에게 수소문을 하면, 게이트 산맥을 여러 번 넘어 다녀 길을 잘 아는 사람을 찾을 수 있을 지도 모르 는 일이다. 하지만 그것도 희망적인 일일뿐이지, 혹시라도 없으면 어떡할 것인가. 훼이드리온과 아이가 걱정하는 점도 바로 그런 사태가 일어났을 경우였 다. 정말 그런 상황이 된다면, 괜히 시간만 낭비한 게 되는 것이니까 말 이다. "어떡하지?" 훼이드리온의 아이의 의견을 물었다. "뭐, 일단은 수소문해봐야 하지 않을까? 우린 그동안 떠날 준비를 다 해 놓으면 되고." "여관 주인에게 물어보면 될까?" "흐음, 그러고 보니 그것도 애매하네." 그녀는 다시 고민하는 얼굴이 되어서 팔짱을 꼈다. 에타가 조금 전의 소 년을 불러 주문을 하다가 한바탕 웃어버리는 소란이 벌어지는 중에, 미르 가 조용히 그것을 말리며 한마디했다. "내가 알고 있다." 미르는 한 남자를 떠올리며 약한 신음을 내뱉었다. 지금으로서는 조금 만나기 껄끄러운 상대였지만, 일행의 원활한 여정을 위해서라도, 개인적 인 문제로라도 한번쯤은 만나야하는 상대. 소년은 에타를 제대로 앉히고 훼이드리온의 시선을 받았다. "허어, 정말? 게이트 마을에 아는 사람 있어?" "…그렇다." 아이가 "아아, 맞아."라는 말과 함께 시선을 미르에게로 돌렸다. "미르 너, 게이트 마을에 와본 적 있다고 했지? 이흐리트 씨도 그때 만 난 거고 말이야." "아, 그러고 보니." 훼이드리온도 그제야 그 기억이 떠올랐는지 긍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여 대기 시작했다. 한번 와본 적이 있는 사람의 말이라면, 더욱 믿음이 가는 건 당연했다. "그게 누군데?" 아이의 눈이 반짝반짝 빛을 내며 미르를 바라보았다. 에타가 그런 그녀 의 눈을 보고 뭐라고 소리를 치려고 할 때, 일순간 실내가 잠잠해져버렸 다. 적당히 소란스러웠던 식당의 분위기가 갑자기 가라앉자, 덩달아 그들 의 테이블도 조용해졌다. 미르의 시선이 모든 소리를 단번에 없애버린 인물을 향해 옮겨져 있었 다. 소년이 작게 입을 열어 말했다. "…저 사람이다." 그래서, 훼이드리온과 아이, 에타의 시선까지 모조리 식당의 문을 향해 모아졌다. 검은 로브로 완전히 가려진 몸. 검은 산발의 머리. 그리 크지 않은 체구. 남자인 듯이 보이는 그 사람을 보는 순간, 셋의 머리에는 단 한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미르와 똑같잖아.' 옷차림, 생김새, 헤어스타일. 결정적으로 분위기까지. 같은 사람의 성인 버전, 소년 버전을 비교하는 것 같은 둘의 모습은 정말 완전히 똑같았다. 물론 생김새는 저 남자 쪽이 나이 때문인지 어른스러웠지만, 기본 골격은 거의 비슷했다. 아무나 잡고 물어봐도 "둘이 부자 관계군요?"라고 물어볼 그런 모습. 아이는 경악에 가까운 표정을 지은 채 멍하니 미르에게 물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미르는 대답하지 않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리를 찾는 듯이 식 당 안을 둘러보던 그 남자가 뒤에 따라 들어오는 키 큰 여자와 잠시 한 두 마디 주고받다가, 미르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감정이 들어있지 않은, 탁한 검은 눈동자마저 똑같았다. 순간, 그 남자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그려졌다. 미르가 입을 연 것도 그 때였다. "……아버지." --------------------------------------------------------------------- 하아. 드디어 복귀를 한 팀군이 63편을 들고 이렇게 인사를 드립니다. 그동안, 안녕들 하셨죠.(^^^) 이 미천한 자까가 시험과 그 밖의 여러 가지(?) 일들로 인해 글에 손을 대지 못하다가 오늘에야 이렇게 글을 올리게 되는군요. 하아. 한동안 끊어졌던 리듬이어서 회복시키느라 조금 힘들었습니다. 냐하하. 마지막 부분이 조금 황당했죠? 미르의 아버지입니다. 일순간, 식당 안 의 분위기를 제압해버리는. 아하하. 과연 저 아버지라는 사람은? 다음 편은 미르의 과거 회상 편입니다. 62편 마지막 기억하시죠? 지 위에서 회상에 빠지는 미르의 모습. 네에, 그것이 이어지겠습니다. 구 성상 64편이 되어버리는 거네요. 헤에.; 출판사에 보낸 사진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서둘러 도착 을 해야지 표지를 완성할 텐데. 또 권당 분량이 너무 많아서 문제가 되네요. 출판 전까지 속을 썩히는... 못난 아들입니다, 카마는. 하아. 그래 도 미워할 수 없으니. 이거 참. 뭐, 어떻게 되겠죠.(^^^) 오랜만에 글을 쓰다보니, 후기가 길어지는군요. 여기서 끊겠습니다. 모두들, 좋은 하루들 되세요.(^^^) 어둠의 기사 DARK KNIGHT TEAM... P.S 추천 감상 비평. 아직도 환영합니다아. P.S 2 GO CAMA 번 호 : 67 / 67 등록일 : 2000년 12월 10일 02:27 등록자 : 암음기사 조 회 : 116 건 제 목 : [카드 게임 판타지]『카드 마스터(Card Master)』#064 카드 게임 판타지(Card Game Fantasy) 카드 마스터(Card Master) 64. 어둠이 짙게 깔린 대지에는 빛의 조각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대륙 어디를 가나 쉽게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따뜻한 마스트의 축복이라든 지, 검은 밤하늘에 고고하게 떠오른 은빛의 하실루스의 상징 같은 건 눈 을 씻고 찾아보려고 해도, 그 '찾는다'는 행위조차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이곳이 어디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그런 어긋난 논리가 통용되는 곳이 바로 이곳인 이유로. 이곳의 존재를 아는 사람들은 흔히 이곳을 이런 이름으로 부른다. '암살자 길드'라고. 검은 밤. 아니, 원래 빛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곳이니 밤이든 아침이든 상관이 없는 곳이니, 검은 공간이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 그곳을 한 그림자가 달리고 있었다. 숲이라고 느껴지는 가라앉은 검은 안개를 헤치며 돌진하는 그 그림자에는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한치 앞도 가릴 수 없을 것 같은 어둠 속을 움직였다. 그 어둠보다 짙으면 짙었지, 결코 연하지는 않은 검은 모습으로. 뭔가 바쁜 일이 있는지 길드로 향하는 그림자는 눈으로 확인할 수 없을 정도의 빠르기였다. 그리고 뭔가 잔뜩 질린 표정으로 연신 뒤를 확인하며 달려가는 모습이, 마치 맹수에게 쫓기는 티바르(Tibbar: 토끼)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미이이이이르으으으으으!" 움찔, 온몸에 흐르는 전율에 그림자의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짙게 깔려 있는 어둠의 안개 속에서 단숨에 튀어나온 그림자는 검은 로브와 검은 머리카락을 바람에 날리며 달려가고 있는, 어느 모로 보나 어린 소년이었 다. 그것도 채 사춘기에도 접어들지 못한 듯한 그런 어린 소년. 그리고 뒤따라 안개 속에서 달려나오는 "미이이이이르으으으으."라는 외 침의 주인인 자도 앞서 나온 소년과 그렇게 나이 차이가 나지 않는 듯이 보이는 어린 소녀였다. 초콜릿색으로 보이는 팔랑거리는 옷을 입고 화려 한 주황색의 머리카락을 날리는 소녀가 가뿐한 얼굴로 소년의 뒤를 따르 며 다시 한번 '애틋한' 목소리로 소년의 이름을 외쳐댔다. "미이이이르으으으으! 왜 도망치는 거야아아아?" '네가 내 처지가 되어봐라. 도망을 치지 않겠나.'라고 생각하며, 점점 더 가까이 쇄도해오는 소녀를 피해 미르는 필사적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가면 저 끈질긴 소녀를 피해 무사히 길드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진입로가 나오기 때문에, 그때까지만 달리다 죽어버릴 각오로 달아 난다면 되는 것이다. 희망은 아직 남아있다, 라는 긍정적인 문장을 떠올리며 소년의 다리 근 육에는 근래에 보기 드물 정도로 많은 힘을 넣어 진입로를 향해 돌진했 다. 전방에 우뚝 선 바위산. 울퉁불퉁한 바위들로 이루어진 그 산밑에는 작 은 구멍이 나있고, 믿기 싫지만 그것이 길드로 통하는 유일한 입구이다. 그 입구로 들어가면, 바위산으로 위장하고 있는 길드의 본체로 들어가게 되고, 미르가 볼 일이 있는 곳은 길드의 최하층에 있는 마스터의 집무실 이었다. 필사적으로 달리는 가운데에서도 어둠에 익숙한 두 개의 눈동자는 철저 히 주위를 뜯어보며 입구를 찾았다.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만한 입구는 시간 시간마다 위치를 옮기기 때문에 결코 쉽게 찾을 수는 없었다. 이 암 살자 길드가 있는 공간만으로도 외부의 세력에 대한 충분한 방비는 되지 만, 암살자 길드 마스터는 더 신중을 기하여 이런 입구를 만들었던 것이 다. 겉으로 봐서는 단순한 바위산이었기에 도저히 길드를 연상할 수는 없 을 테니, 공격받을 가능성이 '전혀'에 가깝게 도달한다. '저기인가.' 여전히 고래고래 이름을 부르며 쫓아오는 에타에게서 오랜만에 땀을 쏟 으며 도망가던 중이었음에도 소년의 눈은 능히 길드의 입구를 찾아낼 수 있었다. 소년은 북받쳐 오르는 감동을 온몸으로 표현하며 입구를 향해 남 은 힘을 폭발시켰다. 슈우욱. 공기를 가르는 소리조차 뒤늦게 들릴 정도로 굉장한 속도가 미르의 작 은 몸에서 터져 나왔고, 미처 대비하지 못하고 있던 에타가 "앗!"하는 소 리로 놀라움을 표현할 즈음에는 이미 입구로 들어가 있었다. "치, 치사해, 미르으!" 작은 입구가 또 다시 어딘가로 사라져버리고, 곧 막다른 벽이 되어버린 등뒤에서 작게 울리는 에타의 목소리를 귀에 담으며 소년은 속으로 대답 했다. '정당방위.' 미르는 가슴을 쓸어 내리는 동작을 사용하여 노골적으로 안도해보고는 천천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에타의 추격에서도 벗어났으니 바쁘게 움직일 이유가 없었다. 급격히 움직이던 운동을 갑자기 멈췄던 탓인지 전신의 근육들 사이에 쌓여있던 피로들이 새록새록 두뇌로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고, 이마로 흐 르는 한 방울의 땀을 흘리며 소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올해 나이 12세. 보통 평범한 소년들이었다면 한창 모험에 대한 동경에 칭얼대고 있을 나이이지만, 암살업계에서도 최고의 실력으로 평가받는 소 년한테는 전혀 해당사항이 없는 이야기다. 모험이라고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일들을 숱하게 겪으며 성장해온 소년의 일생이었기 때문이다. 이젠 거의 초인적인 능력을 가지게된 미르는 '검은 옷의 소년'이라는 별 칭으로 불리면서, 방금 전까지도 대륙 남부, 기사왕국 카즈캐스커 남부 해안에서 의뢰를 수행하고 오던 길이었다. 그런데 막 암살자 길드(엄연히 말해서 길드가 있는 공간)로 들어오던 찰 나에 길가에 널려있는 사념들이 '마스터가 미르를 찾고 있다'라는 사실을 알려주었고, 그 길로 바위산을 향해 달려온 것이다. 중간에 주변에서 놀 고 있던 에타의 눈에 띄어 고생을 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이렇게 무사히 도착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나도 참 고생이지.' 어릴 때부터 겪어온 일이지만, 도저히 적응 불능의 사태인지라 신음을 흘리며 넘길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좋다고 쫓아다니는 소녀는 이젠 거의 포기해버렸으니까. 우선 바쁜 것은 마스터를 만나는 일이었기 때문에 지하로 내려가는 계 단부터 찾아야할 것 같아 사방을 둘러보았다. 겉으로 보는 것과 같이 바 위산 내부도 울퉁불퉁한 바위들로 이루어졌다. 고로, 돌아다니는 복도들 도 자연 상태 그대로의 모습에서 통로만 뚫어놓은 거친 암석의 모습이라 는 말이다. 그런 길이 걷는 게 쉬울 리가 없다. 길드 내부에 들어와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씩은 불편하다는 불만을 터뜨리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런 통로도 외부인의 침입을 막기 위한 계산을 밑바탕으로 만 들어진 것이라 뭐라고 불만을 토로할 수도 없어서, 길드원들도 '그러려 니…….'라는 생각으로 지내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었다. 울퉁불퉁하게 불규칙적인 배치를 보여주는 작은 언덕(?)들이 즐비한 통 로에 대충 익숙해진 미르는 물이 흐르는 듯한 깨끗한 움직임으로 걸어가 다, 춤을 추며 빛을 내뿜고 있는 붉은 횃불 아래에서 지하로 통하는 단 하나의 계단을 발견했다. 마스터의 세심한 머리가 돋보이는 거울 구조(통 로 좌우 벽이 똑같은 형태로 생겨 구별하기 어렵게 만든 구조)로 되어있 었던 탓에 꽤 헤매는 것을 감수하려던 소년이었기에, 일찍 발견하게 된 것은 오히려 허망하게 느껴졌다. 어쨌든 찾았으니까 된 거지만. 허리를 굽혀 구멍처럼 나있는 계단의 입구로 들어갔다. 입구만 작은 것 이기 때문에 들어가는 즉시 허리를 펴고 걸어도 될 정도로 공간이 넓어 졌다. 조금 서두르자는 생각이 들어 버릇이 되어버린 은신술로 계단을 달려 내려갔다. 나선형으로 이루어진 계단을 한참 빙글빙글 돌자, 곧 길드 최 하층에 도달하게 되었다. 계단의 끝 부분만을 밟으며 허공을 날아 바닥에 착지할 때에는 가볍게 무릎을 구부려 충격을 완화하는 게 정석. 미르는 그것을 그대로 따른 후 허리를 펴 전방을 바라보았다. 가로세로 10리치(=10m) 정도의 정사각형에 가까운 터. 소년이 서있는 지금 현재의 최하층은 그 정도였고, 소년이 바라보고 있는 단단하게 생긴 석문 안에 최하층의 존재 이유가 숨어있었다. 미르는 조심스럽게 걸어가 석문 앞에 섰다. 같은 나이 또래 아이들보다 는 약간 키가 작은 편인 소년의 두 배 가까이 되는 높이에, 소년이 팔을 쫘악 펴야지 닿을 듯한 가로 길이를 가진 석문의 모습을 흔히 말해지는 표현을 빌려 밝히자면, '절대 열리지 않으리라!'라는 강렬한 의지를 마음 껏 피력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미르가 석문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때, 석문 상단 부분에 붙 어있던 마법의 등을 반으로 쪼개놓은 형상을 하고 있던 검은 반구에서 검은 빛이 스물스물 흘러나오더니 천천히 미르의 주위를 감싸기 시작했 다. 위협적이지 않게,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면서 소년의 주위를 천천히 회전하기 시작하는 검은 기운은, 마치 바위산 밖에서 본 검은 안개와 흡 사했지만 그 규모가 작은 탓에 그렇게 존재감은 없었다. 어쨌든 한동안 미르를 관찰하듯 주위를 떠돌던 검은 기운은 반구로 스 며들어 사라졌다. 빠져나오던 속도와는 판이하게 차이가 날 정도로 빨리 사라지는 그 기운에 눈길을 한번 준 미르의 귀로 유리 같이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은 여린 음성이 들려왔다. "미르냐?" "……." "대답이 없는 거 보니까, 미르구나. 들어와라." 스르릉. 거대한 석문이 50엘리치(=50cm)는 될 것 같은 두께를 드러내며 작은 소 음과 함께 왼쪽으로 이동해 앞길을 터 주었고, 미르는 무감한 얼굴로 안 으로 들어갔다. 어두운 바깥과는 달리 암살자 길드 최하층 '마스터의 집 무실'에는 하얀 마법의 등이 곳곳에 달려 안구가 따가울 정도로 하얗게 빛나고 있어서, 아무런 장식도 없이 하얀 색만 칠해져있는 방인 것처럼 느껴졌다. 미르는 자신의 검은 옷과 상반되는 방의 색에 약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자세히 살펴보면 방안에는 하얀 책상과 의자, 책장 등등, 온통 하얀 색 으로 칠해진 물품들만이 놓여져 있다. 마치 '흰색'에 집착하는 정신병자를 위해 만들어놓은 방과 같은 느낌. 소년은 서늘한 느낌이 듬과 동시에 석 문이 닫혔다는 것을 인식했다. 익숙한 마스터의 말소리가 옆에서 들려와 고개를 돌렸다. "오랜만이야, 미르. 아니지, 본명을 부를까?" 노년기에 들어선 노인들에게만 볼 수 있는 하얀 백발. 이 하얀 공간에 스며들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하얀 백발을 엉덩이에 닿을 정도로 길게 기른 투박한 인상의 남자였다. 미끈하게 풀어 내린 백발은 약간 차가운 인상을 주었지만, 그의 얼굴이 주는 느낌과 상쇄되어 강도가 약해진다. 그의 얼굴은 여린 목소리와 맞지 않게 약간은 투박한 느낌이 들 정도로 선이 굵었다. 강인한 눈매와 위 부분이 툭 튀어나온 코, 굵은 입술, 각진 턱선. 모든 면에서 '여리다'와는 너무나 대비되는 '강인한' 인상을 주는 탓 에 이질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게다가, 옷조차 순백의 정장을 입고 있는 탓에 그 이질감은 더욱 더 커졌다. 하지만 미르는 알고 있었다. 이건 마스터의 본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본 모습을 숨기기 위해서 이런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싫다." 소년이 간단히 대답했고, 마스터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직인가.' "알겠다, 미르. 거기 앉아라." "…알았다." 누구에게도 존대를 사용하지 않는 미르는, 또한 누군가 자신의 본명을 사용하는 것조차 허락지 않았다. 암살자에게 있어서 본명이란, '약속'과도 같은 것. 정말로 신임할 수 있는 자가 아니라면 밝히지 않는다. 만약 본 명을 밝힌다면, 그건 본명을 알고 있는 모든 자들을 죽여버린다, 라는 결 의와 같은 뜻으로 해석되는 일이다. 미르에게 있어서, 마스터는 아직 '신임할 수 있는 자'가 아니었던 것이 다. 그렇다고 '죽여야만 하는 인물'도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의 말을 따라 쇼파(역시 하얀) 하나를 차지하고 앉은 미르가 뒤따라 반대편에 앉는 그를 향해 물끄러미 시선을 보냈다. '날 왜 불렀 지?'라는 의문을 담은 눈빛. 사실 암살 의뢰가 들어온다면 담당자가 적당히 시간이 비는 암살자에게 의뢰를 넘겨서 일을 처리하도록 조치하는 게 보통이지, 이렇게 마스터가 직접 부르는 경우는 드물다. 혹시 그 '드문 경우'에 오늘이 속하는 것인지 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미르는 눈빛 속에 물음표를 하나 담은 채 마스터 를 응시했다. 하얀 배경 속에서 앉아있던 그가 여전히 여린 음성으로 이야기했다. "중요한 의뢰가 하나 들어왔다. 아무래도 굉장히 까다롭고 어려운 의뢰 라서 미르, 네가 맡아 줘야할 것 같아. 괜찮겠어?" 미르는 지난 일주일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대륙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크고 작은 의뢰를 수행하고 다녔기 때문에 신체적인 피로가 느껴질 것이 라는 걸 생각하고 의견을 물어보는 마스터. 그런 마스터의 심중을 아는지 모르는지 잠시 침묵을 지키며 그를 바라 보던 미르가 대뜸 입을 열어 물었다. "목표는?" "…할거야?" "목표는?" 마스터는 짙은 한숨과 함께 말했다. "이번 의뢰는 굉장히 어려울 거야. 지금까지 의뢰와는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지. 솔직히 길드 내에서 실력이 최고라는 너도 쉽게 해내지는 못할 거라고 보는 게 내 소견이야." 그렇게 전제를 깐 후, 다시 한번 미르의 흔들리지 않는 탁한 눈동자를 바라보고는 합당한 대답을 해주었다. "이번 목표는 까다롭기로 유명한 두 가지 목표, 신관과 마법사 중에서 후자 쪽이야. 그것도 보통이 아닌, 마법사 길드 소속의 마법사들 중 현재 최고의 자리에 있는 자지." 미르는 뒤이어 나올 마스터의 말을 예측할 수 있었다. "마법사 길드 현 마스터, '루페르스 폰 에르히스트'. 그가 이번 의뢰의 목표다." "……흐음." 오랜만에 보는 듯한 미르의 거친 한숨에서는 곤란함이 스며 나왔다. 솔 직히 단순히 '마법사'라고 해도 의뢰 수행이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다. 의지로서 마력을 움직여 마법을 구현하는 마법사라는 인간들은 워낙에 육감이 예민해서 뭔가 느껴지기만 하면 마법을 사용하기 때문에, 목젖을 단검으로 살짝 베고 지나가는 간단한 동작조차 어렵게 만들어버린다. 하지만 일단, 인간의 능력을 넘어선 빠르기와 은신술을 가진 미르는 그 나마 쉽게 처리할 정도가 되지만, 다른 암살자들이 모두 미르 같은 건 아 니기에 문제인 것이다 소년은 소리를 내어 목표가 된 자의 이름을 발음해보았다. "루페르스 폰 에르히스트." "맞아, 그런 이름." 마법사 길드 현 마스터라면, 마법사 중에서도 엄청난 실력을 가지고 있 을 게 분명하다. 아무리 마법사들의 마법 발현 속도보다 더 빠른 반응 속 도를 가진 미르라도 힘들 것도 같았지만, 이상하게 곤란함보다 익숙함이 느껴지는 감정의 대부분을 차지해나가고 있었다. 알 수 없는 익숙함. 왠 지 이름이 굉장히 낯이 익은 것 같은 느낌에, 미르는 머리를 흔들었다. 어쩐지 자신이 감상적으로 되는 듯한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였다. 어쨌든 지금은 의뢰만을 생각하는 게 옳을 듯 싶었다. 지금까지 의뢰를 실패한 적이 전무한 자신의 경력을 믿고서, 그것이 전념하는 것이 지금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주의할 점은?" 다시 마음을 다잡은 미르가 마스터를 향해 질문했고, 기다렸다는 듯이 그가 대답했다. "마법사 길드 마스터라는 직책에서부터 그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충분히 유추 가능할 거야. 그러니까, 그 부분은 알아서 해주고. 마법사 길 드 최고 원로 이상의 직책을 가진 양반들이 어디에 모여 사는지는 알고 있지? 목표도 그곳에 살고 있으니까 조심하도록. 특히 목표와 항상 함께 생활하고 행동하는 마법사 길드 서브 마스터 '마기 허니아이스'라는 여자 를 조심해라. 알려진 바에 의하면, 목표와 거의 대등한 수준의 마법 능력 을 가지고 있다고 해. 들켰다가는, 의뢰는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알겠 지?" "……알았다." 미르는 단단하게 얼굴을 굳혀 보이고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 다. 볼 일이 끝났으니, 기분 나쁜 이곳에 더 있을 이유는 없었다. 서두르 는 기색이 뚜렷이 보일 정도로 뒤돌아보지도 않고 석문 앞으로 걸어간 소년이 마스터를 향해 말했다. "열어라." "그렇게 서두를 건 없는데? 의뢰자는 기한을 특별히 정하지 않았으니까 말이야." "열어라." 더 할 말은 없다는 듯이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미르의 뒷모습을 바라 보던 마스터는 "훗."하는 웃음과 함께 백발을 한차례 쓸어 올리고는 허공 에서 손을 한번 저었다. 그러자, 하얀 색으로 칠해져있던 석문이 옆으로 열어 검은 아귀를 벌렸다. 문이 열리자, 집무실 안과 대비되는 어둠을 가진 바깥을 향해 미르가 짧 은 한마디를 남기고 사라졌다. "가겠다." 석문은 곧 닫혔고, 방안은 다시 순백색의 공간으로 변했다. 두 팔꿈치를 팔 받침대에 올리고 양손을 깍지낀 채 다리를 꼬고 앉아있 던 마스터가 하얀 배경에 완전히 동화된 모습으로 앉아 있다가, 방금 미 르가 빠져나간 석문 쪽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기묘하군, 루페르스 폰 에르히스트. 10년 전에는 버리더니, 이젠 죽여주 기를 바라는 건가?" 얼마 전에 찾아왔던 마법사 길드 마스터를 떠올리면서 그는 고개를 가 로 저었다. 어느새 본래의 굵직하고 무게 있는 음성으로 돌아온 그의 마 지막 말에서는 깊은 혼란의 색이 감지되었다. "알 수가 없어… 10년 전에 버려져 암살자로 키워진 아들에게 자신을 죽이라는 의뢰를 하는 아버지라니.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가 없군……." 미르는 최하층에서 이어지는 나선형의 계단을 단숨에 뛰어올라와 울퉁 불퉁한 통로에 모습을 드러냈다. 여전히 횃불이 밝혀져 있는 거울 구조의 통로를 걸어 바깥으로 나가는 출구를 찾았다. 입구와는 달리 출구는 길드원들만이 알 수 있는 특정한 장소에 고정되 어있기 때문에, 그렇게 힘을 들이지 않고 찾아낼 수 있었다. 산 중턱쯤에 나있는 출구로 나온 미르는 여전히 어두운 공간 속에서 저 멀리까지 눈에 담을 수 있도록 시야를 돋구었다. 보이는 것은 어둠뿐이었 지만, 소년의 눈에는 모든 것이 확실히 구분되어 비춰졌다. 출구에서 바위산 아래까지, 산을 빙글빙글 돌면서 만들어진 길을 따라 걸으며 대충 방향을 잡은 미르는 지체하지 않고 산밑으로 뛰어내렸다. 순 식간에 다가오는 거대한 바위들과 돌들. 하지만 소년은 더없이 가벼운 몸 짓으로 이리저리 바위 위를 뛰어다니며 무사히 산 아래까지 도착했다. 산 아래에는 익숙한 검은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있었다. "저쪽인가." 마법사 길드 최고 원로 이상의 호칭으로 불리는 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마을, 게이트 마을로 향하는 길이라면 분명히 이 방향이 맞았다. 10 년 동안 이곳에서 살아온 소년에게 그 정도의 방향 찾기는 식은 죽 먹다 가 냉수 한잔 들이키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이었다. 잠시 검은 안개 사이로 그 방향을 노려보던 미르는 천천히 근육에 힘을 넣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들려오는 저주와 같은 하이톤의 목소리. "꺄아아아아아아! 거기 있었구나, 미르으!" 미르는 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그 목소리를 무시한 채 검은 안개 속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소년의 모습은 금새 안개 속으로 사라져버렸고, 바위산 위에서 용감하게 뛰어내려 방금 전까지 소년이 서있던 자리에 착 지한 에타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릴 수밖에 없었다. "어라, 얘가 그새 어디로 갔지?" 뛰어내리는데 집중을 한 탓에 미르의 기척을 놓치고 만 것이다. 소녀는 자신의 사랑이 또 다시 도망쳐버렸다는 비탄한 현실을 금새 깨달아버리 고는, 암살자 길드 전체가 울릴 정도로 크게 울음을 터뜨려 버렸다. "으아아아아앙! 미르으! 바아아보오오!" 청천벽력보다 조금 못한 크기로 뒤에서 아련히 들려오는 에타의 울부짖 음을 애써 거부하는 귀를 달래며, 미르는 검은 안개 속에서 전방만을 주 시한 채 질주해나가고 있었다. 이쪽 방향에 있을 게이트 산맥, 그리고 그 아래에 존재하는 마을, 게이 트 마을. 그곳에 있을 루페르스 폰 에르히스트. 그 이름이 이상하게 자신을 이끌고 있다는 것은, 미르도 은연중에 깨닫 고 있었다. 미르는 조금 피로가 느껴지는 몸을 스스로 격려해가며 한줄기 검은 선 이 되어 목적지를 향해 달려나갔다. ------------------------------------------------------------------- 흠. 64편입니다. 늦은 새벽까지 분투하다보니, 이렇게 올릴 수 있게 되는 군요. 냐하하. 인사가 늦었습니다, 팀군입니다.(^^^) 미르의 과거가 나타나는 편은 두 편 정도의 분량입니다. 이번 7장과 8장 은 교묘하게 이어지는 등장인물들의 관계가 나타나질 거고요. 이번 과거 회상도 관련이 있죠. 냐하하. 모두 주제를 향해서 달려나가는 것들이니 재밌게 봐주시길.(___) 냐하. 폴라리스 랩소디. 한꺼번에 빌린 1, 2, 3권이 옆이 놓여져있습니다. 카마도 저렇게 책의 형태로 나오게 된다는 생각을 하니, 새삼스럽게 감 동의 물결이 구비쳐 폐부를 찌르고 들어옵니다. 냐하하. 어쨌든. 팀군은 앞으로도 열심히 글을 쓰겠습니다. 지켜봐주시길! 그럼, 좋은 하루들 되세욧! 어둠의 기사 DARK KNIGHT TEAM... P.S 추천 감상 비평. 기다리고 있답니다. 냐하하. P.S 2 GO CAMA 번 호 : 68 / 68 등록일 : 2000년 12월 12일 02:23 등록자 : 암음기사 조 회 : 151 건 제 목 : [카드 게임 판타지]『카드 마스터(Card Master)』#065 카드 게임 판타지(Card Game Fantasy) 카드 마스터(Card Master) 65. 나도 게이트 산맥을 여러 번 넘어 다녀봤다. '암살자'라는 특수한 직업에 종사해온 나였기에, 대륙 이곳저곳 안 가본 곳을 따지는 게 가본 곳을 따 지는 것보다 더 빠르다. 그러므로 게이트 산맥을 넘어 마법왕국 라시엔트 극서부 지역도 당연히 수없이 발을 디뎌보았다. 그곳도 사람이 살고 땅이 있으며 물이 흐르고 바람도 부는 곳이라 그렇게 큰 차이는 없었지만, '게 이트 산맥'이라는 지역적 특색으로 인해서 생활 습관에서는 조금 차이가 난다. 게이트 산맥은 험한 산이라고 알려져 있다. 대륙 전체의 산지를 따지자 면 해발고도가 그렇게 높은 축에는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사탕을 입게 물고 다니는 동네 꼬마들의 머리에도 기억되어있는 당연한 지식이었다. 사람들은 이 게이트 산맥을 넘을 때는 넉넉히 일주일 정도의 여정을 계 획한다. 게이트 산맥 아래, 게이트 마을과 비슷한 종류의 마을에서 잠시 쉰 뒤 해가 밝자마자 길을 떠나, 험한 산길을 용감하게 돌파하여 산맥을 넘어가는 작업은 일주일을 충분히 소요하게 만든다. 가장 쉬운 길이 있는 길목에 자리잡고 있는 게이트 마을에서 출발한다고 하더라도 하루 정도 기간이 단축될 뿐, 큰 차이는 볼 수 없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걸어서 게이트 산맥을 넘는 것은 '생고생' 중에서도 고급에 속한다, 라는 것이다. 이 정도의 지식만을 두뇌 속에 소요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쯤 되자 의 문이 고개를 슬그머니 치켜드는 것을 도저히 막을 수 없어서, 이렇게 외 쳐댄다. "마법사는 괜히 있냐?" 마법사들의 전유물인 마법을 이용한 공간 이동을 뜻하는 질문인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람보다 더 고차원적인 지식을 습득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그 질문에 이런 답을 들려줄 것이다. "마법왕국 라시엔트에는 두 가지 금 역이 있다. 혹여 어떤 녀석이 이곳을 모른다고 하면, 바보 취급을 당한다 고 하더라도 도와줄 생각이 전혀 나지 않을, 그만큼 유명한 '마법의 숲'이 고, 나머지 하나는 그 반대 경우에 해당하는 '게이트 산맥'이지. 이 사실 은 그렇게 유명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개인의 바보 구별 기준에 처벌을 맡긴다." 그 말은, 게이트 산맥도 마법의 숲과 비슷한 성질을 지니고 있다는 말이 다. 그러나 확실히 마법의 숲의 위용(?)에 가려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이 사실이긴 하지만, 분명한 건 그것이 진실이라는 것이다. 마법의 숲이 공간에서 기묘하게 어긋나있는 것처럼, 게이트 산맥도 마찬 가지로 약간 어긋나 존재한다. 눈앞에 게이트 산맥이 서있어도, 실재로 그곳에 정말 있다고는 장담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마법사 에게 돈을 쥐어주면서 최대한 친절하게 "난 저 산맥 너머로 공간이동 시 켜주오."라고 말하는 것이 절대 불가능하다는 진리도 알려준다. 마법사들이 말하길, '공간이동'이라는 것은 서로 다른 두 공간을 점이라 고 치면 '공간이동'은 그 점들을 가장 짧은 길이로 연결하는 직선을 긋는 방법이라 하였다. 그리고 가장 짧은 길이의 직선은, 두 점이 하나로 겹쳐 질 때 가장 짧아진다. 결국 '공간이동'이란, 두 공간 사이에 존재하는 무 수한 '공간'들은 싸악 무시해버린 채 가장 짧은 직선을 그어 그 위를 통 과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직선 사이에 커다란 장애물이 생긴다면 어떻게 될까. 대륙 위에 존재하는 공간들을 일절 무시해버린 채 공간이동을 한다고 하더라 도, 예측할 수 없을 만큼 기묘하게 어긋나있는 공간 하나가 그 직선 중앙 에 등장한다면, 과연 어떠한 일이 벌어질까. 답은 당연하게 예측할 수 있다. 그 시점부터 '공간이동'은 쓸데없는 이론 으로 변모해버린다. 결국 게이트 산맥을 넘어서 공간이동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물론 두 공간을 잇는 직선이 게이트 산맥을 거치지 않는다면 상황은 달라지겠 지만. 그러고 보니. 내가 왜 이런 영양가 없는 생각을 떠올리면서 검은 커튼처 럼 시야를 가리고 있는 저 게이트 산맥을 바라보고 있어야하는 것인지 의문이 생겼다. "흠……." 별 의미 없는 음성. 동시에 방금 전까지 두뇌를 휘젓고 다니던 생각들은 밖으로 깨끗하게 털어 버렸다. 이제야 왜 그런 생각을 떠올렸는지 알 수 있을 것 같군. 훨씬 맑아진 정신으로 어둡고 어두운, 마치 나의 모습을 보는 듯한 게이 트 산맥을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높지 않은 언덕에 올려다보는 검은 장막 은 위엄 있게 침묵한 채, "넘을 수 있으면 넘어봐."라고 외치고 있었다. 그러니 내가, 지금 상황과는 어떠한 연계 관계도 찾을 수 없는 '게이트 산맥을 넘는 방법' 따위를 떠올리고 있었던 거지. 저 정도야 하루도 걸리 지 않아서 넘을 수 있는 나에게는 정말 말 그대로 영양가 없는 생각을 말이야. 반나절 내에 넘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부끄러울 실력을 가진 나 인데. 뭐, 지금은 게이트 산맥을 넘을 일이 없으니, 이만 잡념을 끝내고 움직 여야할 것 같다. 난 시선을 아래로 내려, 언덕 가까이 있는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완벽하 게 어둠에 둘러싸인 작은 마을. 크게 번화하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안한 것인지 분간할 수는 없었지만 이 정도가 이 마을에는 알맞다. 사람들이 더 모일 가능성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복잡한 게이트 마을은 별로 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군. 조용하게 침입해오는 방문자를 맞이하는 침묵의 마을로 향하면서, 난 마 을을 그렇게 평가했다. 은빛 달도 요람에 쌓여서 하늘에 머무는 시간. 이미 가늠할 수 없을 정 도로 깊어져버린 밤의 바다 속에서 난 어두운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가 근처의 건물 지붕 위에 착지했다. 소리 따위로는 깨뜨릴 수 없는 절대적 인 정적이 내가 있는 공간에서 퍼져나가는 중에, 난 그 중심에서 이곳저 곳을 이동해나갔다. 때마침 단층 짜리 건물들 때문에 상대적으로 엄청 높 아 보이는 3층 건물을 발견하고는 다리에 힘을 넣어 그 건물의 지붕 위 에 올라섰다. 역시, 1층 건물보다는 공기부터가 다르다. 서늘한 가을 날씨. 그에 걸맞게 상당히 낮아져있는 기온을 머금은 위넨 스의 손길이 밤의 색깔을 띤 채 내 뺨을 치고 지나갔다. 다시 새롭게 깨 어나는 뇌세포들. 난 그것들에게 정보를 전해주기 위해서 눈동자를 천천 히 움직여 마을을 훑었다. 대략적인 마을의 모습과 지도가 머리 속에 만들어졌고, 난 뿌듯한 마음 으로 지붕 한구석에 존재하는 옅은 어둠 속에 몸을 숨겼다. 일단 한숨 자 고 일어나자는 생각에서였다. 루페르스 폰 에르히스트, 라는 발음하기 귀 찮을 정도로 긴 이름을 가진 목표의 집이 어디인지 확실하게 알 수 없었 으니 말이다. 아침이 되고, 하실루스의 상징이 물러난 자리에 마스트의 축복을 뿌려대는 노란 동그라미가 떠오르면, 그때쯤이나 본격적으로 찾아 야할 것이다. 해가 떠올라도 잔존하고 있으리라고 예상되는 그늘이 있는 곳으로 몸을 숨겨 천천히 숨을 골랐다. 일단, 한숨 자고 보자. 자던 중에, 내 무의식 저편에 묻혀있었던 듯한 기억이 떠올랐다. 일종의 꿈의 형식으로. 지금의 내 모습을 크게 만들어놓은 듯이, 검은 로브와 산발의 검은머리 를 한 낯익은 남자가 나무가 울창하게 솟아있는 어느 지점에 날 잠시 놔 두더니, 곧 어딘가로 사라져버렸다. 난 익숙지 않은 곳인 탓에 날카롭게 주위를 경계하며 한 걸음 한 걸음 그를 찾아 나섰다. 그러다가 발을 헛디뎌 낮은 낭떠러지 밑으로 살짝 굴러버린 사건이 일 어나던 중에, 번쩍 밝아져오는 어떤 느낌 때문에 잠에서 깨어났다. 밖에서 아침을 맞는 건, 그렇게 낯선 경험은 아니다. 길드에서 조금 멀 리 떨어진 곳에서 의뢰를 수행하다보면 으레 이런 일이 생기니까 말이다. 그런 탓에 난 별 감흥을 받지 못한 채 그늘 속에서 몸을 일으켰다. 동쪽에서부터 천천히 빛의 조각을 날리며 떠오르는 태양의 모습은 "장 관이다!"라고 소리치며 눈물을 쏟아내도 별 달리 할 말이 없을 그런 모습 이었다. 감성적인 면이 두드러지는 성격을 지닌 자라면, 저런 감탄을 내 뱉으며 즉시 신에 대한 감사 기도를 올리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침에 일어나면 항상 하는 일이나 하기로 결심했다. 뻐근한 목과 팔, 다리 등등 각종 관절들을 시원하게 풀어주고 다시 지붕 위에 올라섰다. 바람은 시원할 정도였고 햇 살은 따스할 정도였다. 사람을 찾아 돌아다니는 데에는 더없이 알맞은 조 건을 갖춘 기후. 난 만족했지만, 미소를 떠올리지는 않았다. 이제 해도 떴고 하니 슬슬 직업에 충실하기 위한 작업에 들어가야지, 라 는 생각에 천천히 지붕 위를 배회하며 마을을 살폈다. 어차피 은신술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뭇 사람들의 시야에 포착될 일은 열 중 하나도 없 다. 난 안심하면서 여유가 담긴 눈길을 이용해 건물 밖으로 걸어나오는 사람들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음? 관찰이 시작된 후, 첫 번째 숨을 들이쉬기도 전의 일이었다. 무언가 알 수 없는 느낌이 나를 엄습해오고 있었다. 낯설지 않은, 그렇다고 익숙한 느낌도 아니다. 말 그대로, 그냥 어떤 '느낌'이 나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며 올라와 두뇌를 거세게 두드려대고 있었다. 뭘까. 뭐지. 뭐지, 이 느낌은. 느껴보지 못한 것은 아니다. 너무나 익숙해서, 오히려 당혹스러울 정도 의 느낌이었다. 계속 반복하는 것도 짜증스럽긴 하지만, '느낌' 외에는 제 대로 표현할 말이 현재 내 두뇌 상태에서는 떠오를 리 없다. 심장이 "난 이곳, 너의 가슴에 있다!"라고 외치듯이 박동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내 심장은 뛰고 있었군. 기척을 숨기는 것에 너무 익숙한 나머지, 살아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데 가장 기본적인 증표가 되 는 '심장 박동'조차 잊고 살아온 나였다. 그 잊고 살았던 것이, 새삼스레 나의 전신을 일깨워주는 원동력이 되었 다. 주먹은 쥐어지고 가슴은 벌어진다. 목 뒤가 뻣뻣해지면서 고개는 자 연스럽게 왼쪽으로 돌아간다. 버티다가 결국 반항을 포기한 나의 검은 눈 동자도 동공을 확대하며 멀리 시선을 던진다. 그리고 그곳에, 나를 이렇게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는 '느낌'을 가진 자가 천천히 큰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똑같다. 어른과 소년이라는 것만 다를 뿐, 똑같다. 검은 로브로 온몸을 가리고 산발이 되어버린 머리는 멋대로 퍼지게 놔둔 채, 전신에서 어두운 기운을 쏘아대고 있는 모습이, '나'와 똑같다. 느낌은 더더욱 강해졌다. 다리 끝에서 능글맞게 기어올라와 뒤통수를 강 타하더니, 이제는 얼굴로 넘어와 두 눈을 푹푹 찔러댄다. 그래서 눈이 아 프다. 코도 막힌다. 귀로는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오감이 온통 마 비된 듯한 상태가 되어버렸다. 그런 상태에서, 내 눈은 오로지 200리치 (=200m) 밖의 그만을 주시하고 있다. 루페르스 폰 에르히스트. 나로 하여금 이상한 기분에 휩싸이게 만들어버 린 이번 의뢰의 목표. 그의 뒤를 따라서 마스터가 주의를 요하도록 당부하고 신신당부한 여인, '마기 허니아이스'가 골목에서 걸어나왔다. 목표의 옆으로 다가가 간간이 작은 대화를 나누듯이 입술을 움직이며 걷는 그녀는, 내 기준으로 보았을 때 제법 '아름다운' 축에 속하는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목표의 머리를 훨 씬 뛰어넘는 큰 키에 어울리도록 이지적이고 날카롭게 생긴 그녀의 인상 은 마법사 길드 마스터를 옆에서 보좌하는 서브 마스터의 직책에 놀랍도 록 잘 어울렸다. 저 여자가, 목표와 대등할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인가. 난 나 도 모르게 흠칫 떨어버렸고, 거기서 야기된 거대한 혼란에 비틀거릴 수밖 에 없었다. 난 무엇에 흠칫해버렸던 것인가. 나도 놀랄 정도로 언제나 침착했던 내 가 무엇이 '흠칫' 떨었단 말인가. 마음 속으로 연신 질문의 답을 구하고 있을 때, 난 두 눈으로 진정한 답 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공허한 눈이 날 바라보고 있었다. 가던 길을 멈추고, 움직이고 있던 두 발을 멈추고 지그시 먼 산을 바라보는 듯한 포즈로, 공허한 두 개의 검은 눈동자가 날 응시하고 있었다. 빨려든다. 보고 있으면 빨려들 것 같다. 애절한 감정이 심장을 관통하며 차갑던 내 가슴에 작은 고통을 안겨주 었다. 무감정하다고 생각했던 나에게도 아직 감정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 는 여유가 있었단 말인가. 난 혼란스러워지려는 머리를 애써 지탱하며 그 를 바라보았다. 목표, 루페르스 폰 에르히스트가 은신술로 분명히 보이지 않을 나를 향 해서 시선을 보내오고 있었다. 나를 지나 뒤쪽의 하늘을 보는 것을 착각 했다고 생각할 수 없는 근본적인 이유를 설명하라고 한다면, 난 그의 얼 굴에서 해답을 알려주겠다. 희미하게 웃고 있는 입술. 그 입술이 작게 열린다. 암살자에게는 기본 교육 과목인 '독구술'도 완벽하게 터득하고 있는 난, 그 입술이 발음하는 음성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이제 왔구나." 놀라운 것은, 독구술로 이해하려하지 않아도 내 귀를 통해 잔잔한 목소 리가 스며들었다는 것이다. 난 움찔 놀래는 동시에, 흔들려버린 은신술에 고삐를 당겼다. 팽팽하게 긴장된 정신은 새롭게 은신술을 펼쳐 조금 전보다 더 완벽하게 나를 이 공간에서 감추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그는 여전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험 삼아 옆으 로 움직이자, 그의 고개도 따라서 움직인다. 그는 분명히 날 바라보고 있 었다. 옆에 있던 여인, 마법사 길드 서브 마스터 마기 허니아이스가 마스터의 이상한 행동에 흥미가 생겼는지, 그와 똑같은 방향으로 시선을 보냈다가 이내 포기하고 그의 등을 쿡 찔러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었다. 뭐라고 말하지만, 역시 여기까지는 들릴 턱이 없다. 그럼 방금 그것은 무엇인가. 그녀가 그를 향해 몇 마디 던지자, 그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것에 대한 긍정을 표시했다. 그리고 천천히 앞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짐작하건대, 그녀의 물음은 "안 가실 건가요?" 정도로 요약 가능한 이야기였으리라.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마법사 길드 마스터의 능력은 이토록 대단한 것인지, 어떻게 은신술을 최대로 펼치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또한 똑바로 쳐다볼 수 있단 말인가. 난 혼란스러운 감정으로 고개를 저을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마지막으로 그가 던진 말 한마디가 내 귀로 날아들었을 땐, 난 아픈 머리를 비벼댈 수밖에 없었다. "또 보자." 난 저 정체 모를 엄청난 능력을 소유한 마법사 길드 마스터 루페르스 폰 에르히스트를 기필코 죽여버리기로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암살을 수행 하는데, 이렇게 단호한 의지를 가져보는 것도 또 처음이라는 생각이 들었 다. 둘은 내가 올라있는 건물 바로 옆, 작은 건물로 들어갔다. 그가 사라지 자, 알 수 없는 느낌도 곧 악해졌다. 하지만, 아직 미세하게 남아있었다. 난 그의 뒤를 따라다니기로 결심했다. 그는 식당(방금 들어간 건물)에서 여유 있게 아침을 먹더니, 그곳에서 마기 허니아이스와 적당한 대화를 나누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사소하고 개인적인 것들이기에 간단하게 기억에서 삭제시켜버리고 계속 관찰해나 갔다. 그리고는 차를 한잔 마시고 다시 밖으로 나가, 둘이서 곧장 집으로 향했다. 집은 건물들이 밀집되어있는 곳에서 꽤 떨어진, 외딴 곳에 지어 진 1층 석조 건물이었다. 아기자기하게 지어놓은 그 건물에서 마기 허니 아이스는 잠시 사라져 서재로 들어갔고, 루페르스 폰 에르히스트는 뒤뜰 로 나가더니 적당히 시간을 떼우기 시작했다. 마법사 길드 마스터이면서 도 주요한 일은 몽땅 서브 마스터에게 맡기고 있는 듯했다. 한마디로, 놀고 먹는 '백수'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하루를 지내는 것이다. 신기한 점은 그 집에는 마기 허니아이스와 단 둘이 사는데, 대화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눈빛으로도 통해요, 라는 닭살스러운 표현 으로 인용되는 생활도 아닌, 일반적인 대화("뭐 드시겠어요?", "괜찮다.") 말고는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둘이 싸운 거 같은 데요?"라고 말해도 할 말 없는 그런 모습들이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날이 어두워지면, 둘은 각자의 방에서 잠을 잔다. 그리고 다음 날, 깊고 편한 수면이 주는 상쾌한 기분에 잔뜩 매료된 채 눈을 뜨고, 그 뒤는 똑같은 일을 반복한다. 적어도 내가 관찰한 그 3일 동안은 똑같은 일상의 반복이었다. 그를 관찰하는 동안, 나에게는 커다란 변화가 생겼다. 물론 외면적으로 는 드러나지 않는, 내면적으로만 알아챌 수 있는 그런 변화였다. 내 가슴은 너무나도 애절하게 그를 느꼈고, 또한 자극하면 안될 기억을 건드리듯이 가슴이 아팠다. 무언가 잊었던 것을 도로 찾아버린 듯한, 그 런 그리움이 치장된 환희와 비슷한 감정들이 줄곧 가슴속에서 소용돌이 쳤다. 아팠다. 생전 처음으로 '가슴이 아프다'라는 거대한 진리를 깨달아버린 난 '목표를 처리한다'는 것에 거부감을 일으키는 나를 이해할 수 없게 되 었다. 지금까지와는 너무 달랐다. 그를 보고 있는 것조차 어려웠다. 그런 내가 그를 향해 어떻게 단검을 휘두를 수 있겠는가. 4일째 되는 날. 난 결구 단호하게 판단을 내렸다. 아무리 나를 흔들어버 린다고 해도, 그는 의뢰의 목표일 뿐. 암살자인 이상 사소한 감정에 흔들 려서는 절대 최고의 암살자가 될 수 없다. 난 그 날 저녁, 뒤뜰에 배치된 긴 벤치에서 여전히 게이트 산맥을 올려 다보며 무료한 한때를 보내고 있는 그의 앞에 나섰다. 은신술을 모조리 풀어버린 그대로의 모습으로. 그는 마치 예상이나 하고 있었다는 태연한 모습이었다. 갑자기 그의 시 야에 나타났지만, 그는 희미하게 웃고만 있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이제와 내 앞에 나타났구나." 그건,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 혹은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가진 누군가에게 말을 건네는 듯한 어조였다. 난 순간, 터져 나오는 욕지기를 막을 수 없 는 것처럼, 단전에서부터 기어올라오는 물음을 차마 제지할 수 없었다. "…당신은 누구지?" "네가 죽여야할 사람. 의뢰의 목표." 그는 고의적으로 비꼬고 있었다. "닥치고 정확히 밝혀라. 당신은 뭐지? 당신이 뭐길래 나를 이렇게 흔들 어놓는 거냐." 원래 내 음성은 화가 나거나 흥분할수록 작아진다. 지금도 마찬가지였 다. 분노와 비슷한 감정이 담긴 목소리로 작게 말하자, 그가 여전히 미소 를 띄운 입술을 움직여 대답했다. "넌 알고 있다. 다만, 깨닫지 못할 뿐. 내가 말해주지 않아도 알고 있지 않느냐." "내가 뭘 알고 있다는 거냐." "나를. 그리고 너를. 마지막으로 우리를." 추상적인 대답이었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경험은 처음인 지금의 나로서 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래서 난, 더욱 작아진 목소리로 그에게 밝혔다. "그냥 죽어라." 내 검은 로브 속에서 흑색의 단검이 빠져나왔고, 역시나 검은 로브를 걸 치고 있는 그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저 태연하게 웃고 있을 뿐. 제발 조용히 죽어라. 난 속으로 중얼거리며 그를 향해 힘을 터뜨렸다. 앞으로 내지르는 단검.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파공음 따위를 내는 실수는 범하지 않는다. 그 리고 단검이 그의 목을 빗겨 날아가는 실수 따위도 역시 범하지 않는다. 그러나, 범하고 말았다. 방금 전까지 내가 서있던 곳에 남아있는 잔영을 내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만큼 빠르게 움직여 그의 목을 향해 단검을 그었지만, 어느새 난 본 래의 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그는 여전히 그 벤치에 앉아있었다. 어떠한 변화도 없었다는 듯이, 우리들은 조금 전의 대치 형태로 있었다. 마법인가. 느끼지도 못했는데. 의지조차 느끼지 못했는데. 하지만 그는 희미한 미소만을 띄운 채 나의 공격을 막아내고 자신의 목 숨을 살렸다. 죽이는 순간에는 사정을 두지 않는 나의 단검도 그를 죽이 지 못했다. 나태한 생활이었지만, 역시 그는 마법사 길드 마스터였던 것 이다. "마스터. 손님 오셨습니다." 문득, 뒤뜰로 통하는 나무문이 열리면서 마기 허니아이스가 걸어나왔다. 그녀는 벤치에 앉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는 마스터를 향해 그렇게 말하 다가, 그의 눈길을 따라 움직여 최종적으로 나를 발견했다. 그녀는 날카 로운 눈빛을 한 채 진한 눈썹을 움직이더니 입을 열었다. "그렇군요." "그렇군요."라는 간단한 말로 끝낼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 는 그 말을 끝으로 안으로 사라지더니 조금 전에 밝힌 '손님'을 모셔왔다. 진한 푸른색의 장발이 허리 밑까지 올 정도로 길게 기른 학자풍의 남자 였다. 그는 나를 향해 의문을 담은 눈길을 던졌다. "아, 손님이 계셨군요." 나를 향해 그가 남긴 말이었다. 루페르스 폰 에르히스트는 입가에 띄운 미소에 농도를 더하더니, 말했다. "돌아가거라. 넌 나를 죽이지 못한다." 제길. 이미 느끼고 있었다. 척 봐도 "암살자로군."이라는 평가를 내릴 수 있는 내가 단검을 들고 있는데도 전혀 긴장하지 않는 이 분위기에 내가 더 이상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루페르스 폰 에르히스트 하나만으로도 벅찬데, 거기에 마기 허니아이스 와 의문의 방문자까지. 정말이었다, 그것은. 도저히 당해낼 수 없었다. 그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똑바로 나를 쳐다보았다. "다시 찾아오너라. 그리고 그때는, 내가 만족할 수 있는 모습으로 오도 록." 따뜻한 감정이 담긴 말이었다. 분명히 느낄 수 있을 만큼의 진한 느낌. 난 순간적으로 혼란스러웠던 머리와 마음이 깨끗하게 정리될 것 같은 기 분이 되었다. "제길." 최초로, 입 밖으로 욕설을 던져보고는 난 그를 쏘아보았다. 역시 반응은 전혀 없다. "꼭 다시 오겠다." '다시 돌아와서 너를 꼭 죽이고 말겠다'라는 의지는 전혀 담겨있지 않은 탓에, 난 내가 꺼낸 말에 스스로 놀라고 말았다. 그럼 대체, 난 왜 다시 이곳으로 오겠다는 말을 꺼낸 거지? 난 그 말을 끝으로 밤하늘을 가르며 달렸다. 점점 멀어지는 그와의 거리 였지만, 등에는 여전히 따뜻한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네가 뭔데, 네가 뭔 데 나를 그런 눈으로 바라보는 거냐. 대체, 네 녀석이 나에게 어떤 존재 이길래! 울컥 눈물이 솟아오를 것만 같은 느낌을 참아내며 이를 악물었을 때, 엄 청난 거리를 무시한 그의 음성이 또 다시 들려왔다. "순수한 푸른 수면 위에 떠오르는 금색별을 가진 자와 같이 오너라." 암호 같은 말이었다. 어떻게 해석해야하는 것인지 상당히 난해한 그런 말을 끝으로 그의 목소리를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난 이미 서가도 위를 달리고 있었다. 최초의 의뢰 수행 실패. 뼈아픈 수 모였지만, 슬픈 것은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 애절한 가슴은, 자꾸만 무엇인가를 나에게 알려주려 하고 있었다. 등뒤로 자꾸만 멀어지는 게이트 산맥의 모습이 보였다. ------------------------------------------------------------------- 긁적. 미르의 회상편 끝입니다. 이것이 3년 전, 게이트 마을에서 미르가 가진 추억입니다. 아니, 기억.이라는 것이 더 어울리겠군요. 훗날, 그를 생각하던 미르는 자신의 아버지.라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게 됩니다. 그 리고 그를 다시 보는 순간, 확신을 가지게 되는 것이고요. 냐하하. 그럼 대체, 미르의 아버지 루페르스의 의도는 무엇일까요? 언젠가 밝혀질 것입니다. 후후.(퍼버버버벅!) .....으음.; 그럼 이만.;; 허접자까 팀군은 자러 가겠습니다. 좋은 밤들 되세요.(^^^) 어둠의 기사 DARK KNIGHT TEAM... P.S 추천 감상 비평. 언제나 끈질기게 기다리고 있지요. :) P.S 2 GO CAMA 번 호 : 69 / 69 등록일 : 2000년 12월 13일 22:48 등록자 : 암음기사 조 회 : 79 건 제 목 : [카드 게임 판타지]『카드 마스터(Card Master)』#066 카드 게임 판타지(Card Game Fantasy) 카드 마스터(Card Master) 66. 눈앞에 있는 '미르 성인 버전'의 사내를 향해 의문이 가득 담긴 눈빛을 보내고 있는 아이와 훼이드리온, 에타에게는 설명이라는 주요한 표현 방 법이 가장 필요한 시점이 바로 지금이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설명이라는 것을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아니 유삼한 인물들은 어느새 한 테이블에 동석한 채 묵묵히 입을 다물고만 있었고, 그런 탓에 셋은 서로를 향해 의미 없는 눈길만을 나눌 뿐, 제대로 된 말 조차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훼온." 이런 분위기는 영 질색이라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던 아이는 옆자리에 앉아있던 금발의 미소년을 친근하게 불러보며 그의 옆얼굴로 시선을 옮 겼다. 그녀와 똑같은 감정을 띄운 친근한 얼굴이 천천히 그녀에게 나타났 다. "응?" "분명히 아버지……라고 했지?" '아버지' 다음에 나온 기묘한 늘임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셋은 은연 중에 동의하고 있었다. "응. 분명히." 다시 한번 기억을 재생시켜봐도, 미르의 입에서 흘러나온 그 말은 절대 달라지지 않았다. 미르의 모습과 똑같이 생긴 저 남자가 식당 문을 열고 들어온 순간, 소년은 분명히 "……아버지."라고 사내를 불렀다. 훼이드리온과 자신의 사이에 오간 너무나 간단한 대화들로서는 도저히 만족이 되지 않는 아이는, 이윽고 맞은 편에 앉아 수프를 깨작깨작 마시 고 있는 소녀의 얼굴에 눈을 고정시켰다. 에타의 고개가 금방 들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뭐야?" "혹시 아는 거 없어?" "안타깝지만, 나도 저 단란한…까지는 아니더라도, 아무튼 저 사람들의 관계에 대해서는 아는 게 전혀 없어. 3년 전, 미르가 이 마을에 들려서 겪은 일은 절대 입 밖으로 꺼낸 적이 없거든. 잘 알잖아, 원래 입 무거운 거. 처음으로 의뢰를 실패했다고 해서 무슨 일인지 꼬치꼬치 캐물었는데 도, 절대 말해주지 않았어. 아휴, 다시 생각해도 속상해." 소녀는 검은 로브의 사내와 키 큰 미녀와 같이 건너편 테이블에 착석해 있는 미르의 뒤통수에 대고, 사정없이 눈빛을 쏘아보냈다. 소녀의 반응에 아이도 덩달아 미르의 등을 따뜻한 눈빛으로 두드려줬고, 훼이드리온은 '나도 같이 동조해야하나?'라는 근본적인 의아함으로 인하여 혼란을 느끼 며 물었다. "뭐, 뭐하는 거야?" 아이가 무심히 대답했다. "나도 몰라. 에타가 쳐다보길래 나도 똑같이 쳐다 봐주는 거야." "…그, 그렇구나." 별로 인정해주고 싶지 않은 이유였지만, 훼이드리온은 얼떨결에 받아들 이고는 건너편 테이블로 관찰 대상을 옮겼다. 미르와 꼭 닮은 사내와 날 카로운 인상의 여인과 등을 보이고 있는 미르, 셋 다 분위기가 비슷비슷 한 탓에 겉으로 보기에는 침묵을 주요 소재로 삼아 화목한 가족 같은 분 위기가 날 것도 같았지만, 결코 사실이 아니라는 것은 식당 안의 누구라 도 알고 있었다. 식당 안의 모든 시선(안 보는 척하고 보고 있는 시선 포함)이 그들을 향 해 고정되어있을 무렵, 검은 로브의 사내가 부드러운 눈매에 희미한 미소 까지 띄운 모습으로 미르를 바라보았다. 미르는 움찔 놀래며 그 사내를 마주 보았다. 루페르스 폰 에르히스트, 라는 이름을 소유한 자신의 아버지를. "3년만이구나." 만난 지 3년하고도 꽤 시간이 흐른 후였지만, 아무도 그의 말에 토를 달 지는 않았다. 그건 차분히 침묵하고 있는 여인, 마기 허니아이스나 식당 안의 여타 다른 사람들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미르가 굉장히 불편하게 변한 얼굴로, 드물게 대답했다. "그렇군." 루페르스의 미소가 진해졌다. "그래, 내가 말한 존재는?" 머리를 빳빳하게 세운 소년 종업원에게 언제나 먹던 아침을 주문하려다 가, 뜻하지 않은 합석자가 하나 늘어나는 바람에 추가되는 메뉴에 대해 진지한 고찰을 진행 중이던 마기도 미르의 대답에 귀를 기울였다. 소년이 뒤쪽으로 눈동자를 잠시 움직이더니 이내 대답했다. "저기." "흠. 정말?" 장난스러운 기운도 약간은 스며있는 말투였다. 소년은 3년 만에 다시 만 난 아버지의 모습이 어쩐지 굉장히 익숙한 탓에 속으로 '훗.'하고 웃어버 렸다. 그리고 뒤따르는 설명을 입에 담았다. "순수한 푸른 수면 위에 떠오르는 금색별을 가진 자. 보았다. 금색의 별 을. 푸른 눈동자에서." "정확하구나." 루페르스는 아버지의 따뜻한 미소를 유감 없이 드러내 보이며 아들을 바라보았다. '10년 전의 모습. 그대로구나, 아들아. 3년 전보다 훨씬 더 커서 왔구나.'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에는 뿌듯함이 그득했다. 10년 전에 의도적 으로 생이별을 하여 3년 전에 잠시간의 만남을 가졌었다. 그때는 그를 죽 이러온 암살자였지만, 충분히 원했던 말을 해줄 수 있어 행복했다. 드디어 만난 아들을 향해서 기쁨조차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아버지의 심정. 루페르스는 타고난 포커페이스로 버티기는 했지만, 당연하게 마음 이 아팠다. 하지만 그렇게 그냥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원하던 것은 부 자간의 감동적이 재회가 아닌,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이 계획의 지반을 다 지는 일이었으니까. 갑자기 그때의 감정이 떠올라버린 그는 씁쓸하게 침 을 삼키다가, 문득 들려오는 아들의 질문에 눈을 깜빡였다. "……응?" 미르는 귀찮다는 뜻이 역력한 표정을 지었다. "질문이 있다." "하거라." 기묘한 어법이 난무하는 중이었다. 분명히 아들이 아버지를 향해 사용할 수 있는 적당한 말투가 아니었지만, 루페르스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눈 치였다. 그는 물 한잔으로 입안을 적시며 미르의 질문을 들었다. "당신은, 나의 아버지인가." "느끼는 그대로이다." 무표정한 미르의 얼굴에 복잡한 기가 떠오른 것은 누구도 말릴 수 없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럼 묻겠다. 10년 전에, 왜 나를 산맥 한가운데에 버려 두고 간 거지." 미소를 머금은 루페르스의 입술이 움직이면서 내뱉은 말은 지극히 간단 한 것이었다. "이 날을 위해서." "……." 예상치 못했던 대답에 미르가 침묵을 해버렸고, 둘의 문답을 지켜보고 있던 마기도 조용히 정적에 동참했다. 마스터의 생각 정도는 이미 다 알 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대신해 대변인으로 나서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가 원하는 일을 하는 것, 그것이 마기의 신념이자 의지였다. "…웃기는군." '조금'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긴 시간차를 두고 꺼낸 미르의 말은 다소 폭력적인 면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그 정도로 루페르스의 옅은 미소를 지을 수는 없었다. 그는 따뜻한 눈길로 아들을 바라보며, 아들의 입이 또 다시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난 그 따위 답을 들으려고 다시 이곳에 온 게 아니다. 내가 당신의 말 이 가리키는 자와 같이 왔다고 해서 당신을 받아들였다고 생각한다면 오 산이다. 무엇보다도 당신은, 나에게 너무나도 큰 실수를 저질렀으니까. 제 대로 대답하라. 10년 전에, 날 그렇게 버린 이유가 뭐지." 소년이 한 말 치고는 엄청나게 길었다. 훼이드리온은 미르가 저렇게 긴 말을 쏟아내는 건, 만난 후 딱 세 번째라는 것을 깨닫고는 멋쩍게 뒷머리 를 긁어댔다. 그런 헛생각을 떠올리기에는 지금 분위기가 너무 심각하다 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루페르스의 미소는 여전히 흩어지지 않았다. "다시 물어도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정해져있구나. 이날을 위해서다." "……좋다. 그것도 시간이 흘러서야 이해가 되는 말이겠군." 미르의 날카로운 추리. 루페르스는 굳이 부정하지 않았고, 마기도 침묵 으로서 마스터의 의견에 동조했다. "그럼, 질문을 바꾸지." "흠." "3년 전. 3년 전에 나를 대했던 태도. 그리고 나에게 했던 말. 그것들이 뜻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하라." 조용한 식당 안에서 미르의 낮은 어조가 조용히 퍼져나간다. 다분히 흥 분한 아들의 음색을 이해하는 아버지는 희미한 미소를 천천히 지우며 대 답했다. "이날을 위해서다." "…지금 나하고 농담 따먹기나 하자는 건가." "설마 그런 의도겠느냐, 아들아. 다만, 지금 내가 해줄 수 있는 대답은 그거 뿐이라, 할 수 없단다." 크나큰 비밀이 뒤에 숨겨져 있을 것 같은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무엇보 다 그의 정체가 마법사 길드 마스터였기 때문에, 그 느낌은 더 진하게 느 껴질 수밖에 없었다. 미르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터져 나와, 그동안 소년을 알고 있던 세 사 람을 놀라게 만들었다. 그들이 지금까지 같이 여행을 하면서, 미르가 저 렇게 깊은 한숨을 쉬는 모습은 처음 보는 '신기한' 장면이었다. "당신이란 작자는." 루페르스의 눈이 이채롭게 빛나며 아들을 향했다. 미르는 두 번째 한숨 과 함께 말을 토해냈다. "…정말 기억의 끝에 남은 모습, 그대로군." "고마워." 잠시 후, 그는 방금 전 아들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맺어진 게 아니었던 가,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지만, 다시 관찰해본 소년의 얼굴은 무표정 하기 그지없었기 때문에 착각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버지……라고 계속 칭해도 되겠나." '착각이 아니었군.' 루페르스는 자신의 눈이 정확했다는 사실에 작은 만족을 느꼈고, 아들의 입에서 튀어나온 갑작스런 질문에 더욱 환호했다. 온화함의 극치를 달리 는 특제 '아버지의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당연히 된단다." 분위기는 순식간에 풀어져, 늘어질 정도로 따스해졌다. 미르도 아버지를 이해하고는 더 이상 뿔을 곤두세우지 않았고, 루페르스도 오랜만에 입가 의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솔직히 마기는, 마스터가 이렇게 기분 좋은 미 소를 띄는 것은 3년 전에 보고 처음이었다. 3년 전, 비록 자신을 죽이기 위해 찾아온 아들이었지만, 아들을 만났다 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즐겁게 미소짓던 마스터의 모습. 마기는 서브 마스 터로서 그를 보좌하는 가운데, 그 웃음을 다시 볼 수 있을 줄은 꿈에도 기대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3년 전과 오늘, 그는 그런 웃음을 띄운 채 아 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지로서는 0점이고, 게다가 이해할 수 없는 말만 늘어놓는 마스터였 었지만, 현재 미르라고 불리는 듯한 마스터의 아들도 만만찮게 괴짜인 탓 인지 그를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마기는 즐거울 수 있었다. 식당 가득히 내리누르고 있던 공기가 확연하게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누 그러지자, 가장 먼저 활발한 행동을 개시한 사람은 바로 빳빳이 세운 머 리가 멋져 보이는 소년 종업원이었다. "음, 여기 주문하신 요리들 나왔습니다!" 종업원다운 고단수의 활발한 미소를 가득히 만면에 띄운 모습으로 테이 블 사이를 누비는 소년의 행동에, 사람들의 분위기가 차츰차츰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 중앙을 커다란 접시와 쟁반을 묘기 부리듯 움직이며 소년이 돌아다녔다. "로스." 마기가 그 소년을 불러 세웠다. "네?" "소스 좀 주십시오." "아, 제가 깜빡 잊었나요? …여기요." 로스, 라는 소년은 냉큼 주방 쪽으로 달려가 작은 병을 들고 와서 그녀 에게 건넸다. 그녀는 무뚝뚝하면서도 예의를 갖춘 자세로 인사했다. "고맙습니다." "아하하." 로스는 자신의 단단한 머리카락을 따라 손을 쓸어 올리더니, 이내 주방 에서 들려오는 날카로운 부름을 받고 쏜살 같이 달려들어갔다. "크로스!" "응, 호연 누나!" 마기에게서 소스를 건네 받은 루페르스가 하얀 밥 위에 그 소스를 뿌리 면서 아들에게 물었다. "두 눈동자에 금색별을 가진 자는 어떤 사람이더냐?" 미르는 고개를 움직이지 않은 채 눈동자만을 움직여 한창 아침 식사에 열을 올리고 있는 셋의 모습을 살피고는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무엇보다 순수하고, 또 의지가 강하다. 그 의지 하나만으로도 모든 걸 해낼 듯이. 한편으로는 어벙한 면도 있다." "재미있구나." "물론이다, 아버지."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두 가지 어휘라고 마기는 생각했다. 하지만 마스 터를 따라 묵묵히 식사에 열중할 뿐, 다른 행동은 하지 않았다. 본인들이 조용한데, 나설 필요는 전혀 없었다. "그런데." "흠?" 스푼으로 밥을 한 숟갈 입에 넣고 있던 자세 그대로, 루페르스의 시선이 미르를 향했다. "내가 훼이드리온을 만날 것이라는 사실을, 아버지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내 추측이 맞는 건가." 아버지의 앞이라서 그런지, 미르는 평소와는 다르게 많은 말을 하고 있 었다. 밥을 목구멍으로 넘긴 루페르스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다'라는 얼굴을 하고는 대꾸했다. "그렇다고 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 "너의 인생이다. 내가 알았다고 하더라도, 크게 상관은 없지 않느냐." 입을 열지 않고 있던 미르의 고개가 천천히 끄덕여진다. 어차피 더 물어 도 대답해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에, 속으로 쌓여 가는 수많은 의문들의 산은 저 뒤로 미뤄놓았다. "인사를 나눌 때가 도래한 것으로 여겨진단다, 아들아." 아침을 먹으면서도 자신들이 앉아있는 테이블을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 는 '순수한 푸른 수면 위에 떠오르는 금색별을 가진 자'를 유심히 관찰하 면서 루페르스가 키득거렸다. 대충 상황을 짐작하고 있던 미르가 아버지 의 말에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움직이면서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 다. 몸을 돌리는 미르. 에타와 아이가 '난 절대 보지 않았다!'라는 듯이 노골 적인 동작으로 고개를 홱 돌렸지만, 미처 타이밍을 잡지 못한 훼이드리온 은 멍청한 시선으로 미르를 바라보게 되었다. 소년은 무표정하게 그의 앞 으로 걸어오더니 툭 한마디 내뱉었다. "일어나라." "……에?" 포크 끝에 달린 빵 한 조각이 수프를 뚝뚝 흘리며 흔들렸다. "인사." 루페르스와 대화할 때와는 다른, 함축성이 두드러지는 난해한 대화법으 로 돌아온 미르의 말을 해석하기 위해 열심히 머리를 돌리던 훼이드리온 은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아아, 아버지…께 나를 인사드리려고 그러는 거구나.'라는 진리를 터득하게 되었다. "인사만 할거니까, 그냥 다 데리고 오려무나." 저쪽 테이블에서 들려오는 루페르스의 낮은 억양이 담긴 목소리. 옅은 미소는 언제나 얼굴에 수반하고 있었다. 미르는 간단한 고개짓으로 긍정 을 표하고는 남은 두 명의 소녀에게도 눈길을 돌렸다. '마찬가지다.' 에타 와 아이는 각자의 손에 쥐어져있던 빵과 스푼을 조심스럽게 접시 위에 놓고는 훼이드리온을 따라 의자에서 일어났다. 정확하게 4명만 앉을 수 있을 만큼의 의자수와 넓이를 가진 테이블이라, 총 6명의 인원이 앉기에는 다소 빡빡함이 느껴졌다. 막상 그들이 테이블 에 도착해서야 깨달은 이 초유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할지 고민하고 있는 표정이던 루페르스의 지시가 떨어지기도 전에, 마기가 한발 앞서 움 직였다. "여기 앉으시길 바랍니다." 비어있는 테이블에서 의자를 두 개 끌어와 의자를 4개에서 6개로 늘려 버리는 것으로 간단히 사태를 해결한 그녀가 말했다. 딱딱한 어조였지만, 셋은 아무 말 없이 각자의 자리를 찾아 앉았다. 결국 미르와 에타가 테이 블의 한 면을, 또 아이와 훼이드리온이 한 면을 차지하고 앉는 상황이 연 출되었다. 자리가 좁은 탓에 계속 부딪히는 팔뚝으로 인해 소리 없는 신경전을 벌 이는 미르와 에타는 일단 제쳐둔 루페르스가 훼이드리온을 물끄러미 쳐 다보기 시작했다. 대놓고 쳐다보는 눈길에 익숙지 않은 '순수한 푸른 수 면 위에 떠오르는 금색별을 가진 자'는 덕분에 부끄럽다는 듯이 얼굴을 붉혀야했다. '정말인가.' 자신의 아들이 데리고온 인물이기에, 그리고 이미 이쪽으로 올 것을 예 상하고 있던 인물이기에 의심의 여지를 가지는 것은 어리석다고 생각되 었지만, '혹시나'하는 마음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다. 이날을 위해서 10 년 전부터 인연을 꼬아놓았던 그였다. 신중의 신중을 기해야할 만큼 이번 계획은 중요했으니까 말이다. "통성명부터 할까?" 즐겁다는 어투로 이야기하는 루페르스. 훼이드리온은 "네? 아, 네."라고 멍하니 대답하고는, 이어서 입을 열었다. "에… 마스터 카드 게이머인 훼온 레이엔트라고 합니다." 자신을 무엇이라고 마땅히 소개할 말이 없어서, 가장 무난한 직업을 선 택해 소개했고, 아직 정체를 알리지 않은 루페르스는 흡족한 표정과 함께 왼쪽으로 조금 시선을 옮겼다. "거기, 소녀는?" "저도 훼온과 마찬가지로 마스터 카드 게이머고요. 아이 네드런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답니다." "아이 양, 이라고 부르면 돼?" "네, 무난하네요." 아이의 싱긋 웃음에 루페르스는 진한 미소로 답했다. 그녀가 미소를지 우지 않고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저씨는요?" 어째, 당돌하게도 느껴지는 그녀의 활달한 말투였지만, 루페르스는 자신 이 '아저씨'라는 호칭에 해당하는 나이라는 것을 깨달아버려 조금 가슴이 아파졌다. 나중에 마기에게 한탄이라도 해야겠다는 결심을 해보며, 그가 헛기침과 함께 자신을 소개했다. "음… 루페르스 폰 에르히스트라고 해. 알다시피, 난 미르의 아버지이고, 에에 또…" 그의 시선이 무언가 확인을 구하려는 듯이 옆에 앉아있던 마기를 향해 옮겨졌고, 상큼한 향의 차를 마시던 그녀가 마스터의 눈길을 느끼고는 잔 을 놓으며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겼다. 그녀의 이미지에 잘 어울리 는 짧은 단발의 헤어스타일이 그녀의 외모에 아름다움을 부여했다. "루페르스 님은 마법사 길드 마스터이십니다. 그리고 전 마법사 길드 서 브 마스터를 맡고 있는 마기 허니아이스라고 합니다." "아하하, 그래." 말투나 자세나 행동으로 봐서는 도저히 '마법사 길드 마스터'로는 봐줄 수 없었지만, 인상부터가 단호한 여인이 분명히 밝혔기 때문에 믿지 않는 것도 이상했다. 그래서 '저 루페르스라는 아저씨는 마법사 길드 마스터이 다'라는 믿을 수 없는 사실을 애써 납득시키기로, 아이와 훼이드리온은 내심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밝혀도 상관없는 거였어, 마기?" "특별히 숨길 이유는 없다고 사료됩니다, 루페르스 님." "음음, 그런 거였구나. 괜히 고민한 거였군, 그래. 아하하." 대륙의 모든 마법사들이 우러러 존경해마지 않는, 그렇지만 본질은 조금 멍청할 정도로 느긋해 보이는 마법사 길드 마스터와, 자신이 모시는 마스 터보다도 더 마스터 같이 보이는 마법사 길드 서브 마스터의 어처구니없 는 대화를 경청하며 훼이드리온은 천천히 아이에게로 시선을 움직였다. 마음이 통했는지 그녀 또한 그를 바라보기 위해 고개를 움직이고 있었다. 중간에 눈이 마주친 둘. 순간, 얕은 한숨이 두 입에서 동시에 터져 나왔 다. "휴우우우." "에휴우……." 아직도 티격태격 거리는 미르와 에타, 어색하게 웃음으로 마무리짓고 있 는 루페르스와 그를 바라보며 복잡한 얼굴이 되어버린 마기. 뜻하지 않게, 대화 분위기가 영 엉뚱하게 흘러가 버리고 있었다. --------------------------------------------------------------------- 냐하하하. 66편입니다. 출판사에서 표지가 오고, 지도가 오고. 어제는 인쇄에 들어갔다고 연락이 왔더군요. 인쇄... 인쇄입니다. 그럼, 이제 책이 나올 시기가 근래에 도래했다는 이야기...가 되는 건가요? ...와하하하. 이거, 괜히 얼떨떨하군요. 이러다가 책을 받아들면 기뻐서 졸 도 해버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책이 나올 시기에 갑자기 글이 올라오지 않 는다! 라는 사태가 일어난다면. 팀군은 응급실로 실려갔는 줄로 아시길.;; 아하하.;; 그럼. 이만.!(>.<) 어둠의 기사 DARK KNIGHT TEAM... P.S 추천 감상 비평. 감사합니다아.(___) P.S 2 GO CAMA 번 호 : 70 / 70 등록일 : 2000년 12월 16일 14:26 등록자 : 암음기사 조 회 : 68 건 제 목 : [카드 게임 판타지]『카드 마스터(Card Master)』#067 카드 게임 판타지(Card Game Fantasy) 카드 마스터(Card Master) 67. "잠깐만요, 에르히스트 씨." "루페르스라고 불러 줘." "…네에, 루페르스." "그래, 뭔데?"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샛길로 빠져버릴 것 같던 분위기에 제동을 건 사람은 다름 아닌 아이였다. 그녀는 문득 떠오르는 사실에 서둘러 루페르 스를 불렀고, 결국 엉망진창이 되어가던 분위기를 제대로 잡아 돌려놓을 수 있었다. 그녀가 자신의 기억을 조금 의심해보며 물었다. "마법사 길드 마스터……라면, 결국 마법사라는 이야기죠?" "당연하지." 그는 '그런 걸 모르는 사람도 있나?'라는 얼굴이 되었다. "마스터라면, 마법에 통달한 자를 일컫는 말이죠?" "꼭 '통달한 자'라는 의미로 쓰이지는 않지만, 비슷해. 그런데 무슨 일?" "초면에 실례되는 말이지만,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기 않겠어요?" 루페르스는 아름다움의 극치를 달리는 외모를 가진 이 소녀가 자신에게 어떤 부탁을 하려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간직한 얼굴로 빙긋 미소를 띄 웠다. 그리고 "괜찮아."라는 대답을 하기 위해 입술을 벌리려할 때였다. "안됩니다." 예상치 못한 대답이 마기의 입에서 단호하게 튀어나왔다. 아이가 약간 인상을 찌푸렸고, 당혹스러운 감정을 느끼며 루페르스가 그녀를 향해 서 둘러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왜, 왜 안 된다는 거야?" "당연하지 않습니까, 루페르스 님. 오늘 오후에 에코로 출발하셔야하는 것, 잘 아시고 계시지 않습니까." "하, 하루 정도 늦추면 되잖아?" 그는 간곡하게 부탁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녀의 완강한 태도를 바꾸기 에 역부족이었다. "루페르스 님께서 늦장을 부리시는 바람에 더 늦출 수 있는 날도 없습 니다. 오늘 출발하셔야지, 늦어도 30일에는 도착하실 수 있습니다." 사무적인 태도를 취하는 마기의 말에 찔리는 것이 많은 루페르스는 얼 굴을 찡그리며 불편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뭐라고 중얼거리는 마스 터에게서 시선을 떼어 아이의 얼굴로 옮겼다. 아이의 얼굴에도 미간에도 주름이 잡혀있었다. "죄송하군요, 루페르스 님께서는 네드런 양의 부탁을 들어드리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너무 이르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무엇이 말입니까?" 아이는 마기의 태도가 맘에 들지 않은 관계로, 좋은 표정과 말투가 결코 나올 것 같지는 않다고 속으로 생각하며 대꾸했다. "제 부탁이 뭔지는 일단 들어보고 결정해야하는 것 아닌가요?" "들어볼 필요성이 느껴지지 않아서입니다. 어떤 부탁이든 간에 부탁을 들어줄 시간 같은 건 있지 않습니다." 상대방이 계속 딱딱한 존대로 맞받아 치자, 더 열이 올라오는 기분이 되 어버린 아이는 마땅히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하고 씩씩댔고, 마기는 '더 할 말은 없다'라는 표정으로 매몰차게 고개를 돌렸다. 공사의 구분이 너무나 도 확실한 타입인 것 같은 그녀. 뚱한 표정을 짓고 있던 루페르스가 그녀 를 향해 용기를 내어 마지막 선언을 시도했다. "그, 그래도 부탁이 뭔지는 들어줘도 괜찮지 않을까?" 그의 애절한 표정에 조금은 결단이 흔들려버림을 느낀 마기는 단언하지 못한 채 고민하는 얼굴이 되어버렸다. 그런 그녀의 분위기를 오랜 동거 생활에서 오는 경험으로 단번에 파악해버린 그는 그녀가 뭐라고 입을 열 기도 전에 지체하지 않고 아이에게 말했다. "말해봐, 아이 양." "루, 루페르스 님!" "괜찮잖아, 그 정도는." 허점을 찔려버린 탓에 당황하며 소리치는 마기를 향해 능글맞게 웃어대 는 루페르스의 모습에서, '이런 상황이 여러 번 있었구나.'하는 느낌을 받 게되는 아이와 훼이드리온이었다. 아이는 그들의 모습이 재미있는지 쿡쿡 대면서 입을 열었다. 머리 속에는 자연스럽게 이틀 전의 기억이 떠올랐 다. "셀라드리엔 강 동쪽 야드 평원 중심에 있는 아크릴 영지…… 아시나 요?" "물론 알아. 그곳 영주가 카드 마스터 중 한 명이지. 뭐, 2년 정도 소식 이 영 끊어져버렸지만." 훼이드리온은 허리춤에 매달려있는 갈색주머니 안에 간직되어진 물의 정령왕 에리피느 카드를 키워드 삼아 조심스럽게 기억을 들춰냈다. 감사 하다면서 자신의 카드를 주던 아크릴 영주의 모습. 한결 짐을 덜었다는 듯이 개운해 보이는 그의 얼굴이 떠올랐고, 아이가 꺼내려는 부탁이 무엇 인지도 자연스럽게 깨달을 수 있었다. 아크릴 영주와 나누었던 약속을 결 코 잊어버리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그나저나, 원래 내가 어떻게 해보기로 했던 건데.' 아크릴 영주에게 믿어달라고 부탁했던 건 그였지만, 정작 아이가 발벗고 나서고 있는 상황이어서 그는 조금 얼떨떨해졌다. 그러나 곧 '아무렴 어 떠냐.'라는 생각에 피식 웃어버리고는 아이의 옆얼굴을 조심스레 바라보 며 생각했다. '아이, 고마워.' 그리고는 다시 회상에 잠겼다. 그가 '아크릴 영주는 지금 주민들과 잘 지내고 있을까.'하는 걱정을 떠올 리고 있을 때, 아이는 루페르스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이어 가고 있었다. "여기까지 여행을 하던 중에 아크릴 영지에 들르게 되었는데, 우연한 기 회로 아크릴 영주님과 만나게 되었어요. 그렇게 긴 만남은 아니었고 그저 잠깐 만나서 담소를 나누던 중이었는데, 그러다가 우연찮게도 그분의 하 나밖에 없는 외동딸이 이상한 병에 시달리고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 죠." 그녀는 타고난 언변과 머리를 이용해, 주요한 치부를 드러내는 이야기는 교묘하게 빼버리고 말하고 있었다. "다시 소개하자면, 전 달과 운명의 여신 하실루스를 모시는 신관이에요. 그래서 하실루스께서 인도해준 인연이라 생각하고 그 애를 치료해보기로 했죠. 일단 증상을 알아보려고 신법을 사용했는데, 그러다가 발견한 거예 요." "무엇을?"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있던 루페르스가 간단한 질문으로 이야기의 흐름 을 자연스럽게 이어나갔고, 아이가 생긋 미소를 띄우며 대답했다. "그 애는 저주 때문에 아파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것도 직통 혈연 중 여 성에게만 이어지는 마법 계통의 저주." "조건저주…이군?" "네, 맞아요. 그런데 그 저주를 건 마법사가 꽤 대단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는지, 오랜 시간이 흐른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신관으로서는 해제하 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우리가 에코에 도착하면, 마법사 길 드에 부탁해서 실력이 좋은 마법사를 구해 부탁드려보기로 생각하고 있 었거든요. 아무래도 마법에 대해서 잘 아는 마법사가 저주를 푸는 게 더 효과가 좋을 것 같아서." "그러다가 지금 이렇게 마법사 길드 마스터를 만나서 부탁드려보는 겁 니다. 물론, 방금 거절당해버렸지만요." 목이 점점 간지러워질 무렵에 적절하게 뒷말을 이어준 훼이드리온을 향 해 살풋 웃음 짓는 아이. 훼이드리온도 그녀의 검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웃어주었다. "흐음, 그런 일이 있었던 건가." 루페르스는 사뭇 흥미롭다는 얼굴을 한 채 미간을 두 손가락으로 주물 렀다. 뭔가 생각에 빠질 때, 그가 주로 취하는 버릇이었다. "아크릴 가문의 핏줄로 이어져 내려오는 조건저주라… 허어, 재밌군, 그 래. 마기." 싱글 미소를 짓고 있던 그의 눈길이 갑작스레 서브 마스터를 향했고, 그 녀가 흠칫 놀란 표정을 감추며 대답했다. "네?" "뭔가 떠오르는 게 있지 않아?" "…네?" 마기는 '뭐가요?'라고 되묻는 얼굴이 되어 마스터를 바라보았고, 어느새 다툼을 끝내고 묵묵히 앉아있는 미르와 지겨워죽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 는 에타도 똑같은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훼이드리온과 아이도 그에 게 시선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테이블의 모든 시선이 루페 르스에게 고정된 상황이 일어나 버렸다. 장난스럽게 입가를 말아 올린 그가 입을 연 건, 모두의 시선 속에 담겨 있던 의문이 두 배 정도 증가되었을 무렵이었다. "마스터 카드를 다루는 게이머들에게 좋은 교훈을 주는 이야기가 하나 있거든. 시기가 언제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한 카드 마스터와 게 이머가 대전을 하게 되었어. 카드 마스터는 남성이었고, 게이머는 여성이 었는데 여성 쪽이 카드를 너무 무례하게 다루는 거야. 카드를 아낄 줄 모 르고 험하게 다뤄서 카드가 이리저리 훼손되어있기도 했고, 게임이 풀리 지 않으면 무조건 카드 탓만 하고. 아무튼 그런 게이머의 태도에 카드 마 스터는 너무 화가 나버려서 급기야 그녀에게 저주를 걸어버리게 돼. '네 녀석의 핏줄에서 태어나는 여성들은 모조리 앓아죽으리라!'라는 어마무시 한 저주였다고 하지. 아무튼, 그 여성은 처참하게 패배하고 저주까지 걸 려버려 사라졌다고 해. 어때, 이제 감이 좀 잡히나?" 루페르스의 이야기가 끝났고, 마기는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한 표정을지 었으며, 훼이드리온과 아이, 미르와 에타는 표정 자체에서 '지금 무지 황 당해요.'라는 감정을 읽을 수 있을 만한 얼굴을 만들어 보이고 있었다. "설마, 그 이야기 속의 여성 게이머가 아크릴 영주의 조상이라는 이야기 십니까?" "그건 나도 잘 모르지만, 아니라고 보기에도 너무 이야기가 어울리잖아? 게다가 정말이라면, 한 가문에 크나큰 영향을 끼치고 있으니 더 심각한 문제이고 말이야. 아무튼 그런 뜻에서, 마기." "……네?" 한층 더 능글맞은 웃음을 떠올리는 마스터의 얼굴에서 그녀는 직감적으 로 불길함을 느꼈지만, 뒤따라 나오는 그의 말을 미처 막지 못하고 말았 다. "허락해 줘." "……아아." 언제까지고 풀릴 것 같지 않던 날카로운 눈빛이 순간 흐트러져버린 그 녀가 주저앉듯이 얼굴을 감싸안았다. "어쩔 수 없잖아. 상황이 너무 기묘해. 이런 기분으로는 절대 제대로 된 여행을 떠날 수 없을 것 같지 않아? 후환을 위해서라도 그냥 해결해버리 고 나서, 떠나자. 그렇게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도 아니잖아? 어때, 허락 해줄 거지?" "제가 안 된다고 해도…… 하지 않으실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녀의 마스터는 충분히 그럴 성격을 가진 자였다. "그렇긴 하지만, 허락을 받는 게 더 안심이 되잖아. 허락해줄 거지?" "…마음대로 하십시오." 결국, 그녀는 언제나 그랬듯이 똑같은 절차를 밟아 그에게 손을 들었다. 저런 식으로 사람을 몰아붙이면 도대체가 당해낼 수가 없어서, 언제나 지 는 형편인 그녀라 '이번만은 절대 아니다!'라고 의지를 불태웠지만, 결국 수포로 돌아가고 만 것이다. 그녀는 그에게서 떨어지고 싶지 않은 자신의 마음에 스스로 탄복하면서 허망하게 입을 열었다. "지금 다녀오시겠습니까? 조금 있으면 오후가 될 텐데, 그럼 시간이 촉 박합니다." "흠? 그래, 지금 가는 게 나을까?" "그렇다고 생각됩니다." "그럼, 지금 다녀오지, 뭐. 잠깐이면 되니까." 마기와의 간단한 상의를 끝낸 루페르스는 어떠한 준비도 없이 정말 바 로 떠날 듯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에게 더 할 말이 있어서 적당한 타이밍을 예측하고 있던 훼이드리온은 예고도 없이 일어나서 떠나려고 하는 그의 행동에 당황해하며, 그를 이름을 외치려고 했다. "잠깐, 아버지." 하지만 미르 쪽이 더 빨랐다. "응?" 오랜만에 입을 여는 아들이 반갑다는 듯이 미소를 지으며, 그는 다시 자 리에 앉아버렸다. 훼이드리온이 혼자 멋쩍음을 느끼며 뒷머리를 손가락으 로 긁적거렸고, 미르의 단도직입적인 조용한 말이 흘러나왔다. "우리도 데려가라." "아크릴 영지에 가는데?" "아니. 게이트 산맥을 넘는 여정에." 말을 꺼내는 타이밍이 조금 좋지 않았던 탓에 엉뚱한 뜻으로 해석될 뻔 했지만, 미르가 두 번이나 입을 여는 수고를 한 덕분에 제대로 의미 전달 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루페르스가 마기와 잠시 눈을 마주치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물었다. "왜?" 미르는 설명을 미루듯, 훼이드리온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가 예상도 하지 못하고 전가되어버린 책임에 헛기침과 함께 말을 꺼냈다. "저희도 대회에 참가해야하는데, 29일까지 신청이 마감이더군요. 그래서 게이트 산맥의 길을 잘 아는 사람과 동행을 해야 제 시간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흠, 우리 아들도 잘 알 텐데?" 미르가 '우리 아들'이라는 말에 흔들릴 뻔한 무표정을 다잡으며 대답했 다. "나에게 길이란 건 없다." 아이가 작게 한숨을 쉰 후, 미르의 난해한 말을 알기 쉬운 풀이로 설명 했다. "쟨 산맥을 하루에 넘는다는 애예요. 우리 같은 일반인들에게는 허용되 지 않는 범위지요. 그래서, 부득이하게 길을 잘 아는 사람을 찾기로 한 건데…" "그게, 우리로 선택된 것?" "그렇죠." 루페르스가 납득할 수 있다는 의미로 고개를 아래위로 주억거리다가 마 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마스터의 눈빛에 담긴 물음을 눈치채고 는 간단하게 말했다. "괜찮습니다. 여행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와아, 고마워요!" "감사합니다!" 순식간에 두 가지 고민이 해결된 일행은 기쁨을 온몸으로 표현하며 루 페르스와 마기에게 인사를 해댔다. 이로써, 게이트 산맥을 넘어 에코에 도착하는 문제도 걱정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그 기쁨은 뭐라고 표현할 수도 없었고, 그저 자신들의 부탁을 받아준 이들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환호성과도 비슷한 소리를 지르며 기뻐하고 있을 때, 묘한 미소 로 탈바꿈한 얼굴로 루페르스가 한마디 내뱉었다. 그로 인해 분위기는 갑 자기 조용해졌고, 모든 시선이 그를 향했다. "어째, 내가 손해보는 느낌이 들거든? 그렇지 않아?" 모두 '이해되지 않아요.'라는 표정이어서, 그는 보충 설명이 시급하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었다. "난 두 가지 부탁을 들어주는데, 너희들은 나에게 해준 게 없잖아. 오는 게 있어야 가는 것도 있다고." "…쉽게 말해서, 우리도 무언가 부탁을 들어달라는 건가요?" "그렇지, 바로 그거야, 아이 양." 가끔, 자신을 능가하는 치밀함을 보여주는 마스터의 행동에 감탄하고 마 는 마기. 지금도 그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준 만큼 돌려 받는다는 계산적 인 모습. 마법사 길드 마스터는 역시 괜히 된 게 아니었다. "뭘 원하시죠? 힘든 게 아니라면, 해드리겠습니다." 훼이드리온은 루페르스의 의견에 찬성하는 태도로 긍정적인 답변을 주 었다. 어차피 계속 이렇게 신세를 지게 되면 불편할 것 같은 마음도 들었 으니까. 루페르스는 그의 말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렇게 어려운 아니야." "말해보세요." 마기는 마스터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을 것 같 았다. 상황을 자연스럽게 그 화제로 이끌어나가기 위해서는 한번쯤 거쳐 야할 과정이었다(마기는 이 시점에서 다시 한번 그의 치밀함에 감탄했 다). 그는 정말 즐거운지 미소를 지우지 않고 입을 열었다. "훼온 군, 마스터 카드 게이머라고 했지? 나와 대전 한번 해. 그게 내 부탁이야." 전혀 어렵지 않은 부탁. 내심 긴장하고 있던 훼이드리온은 거절할 이유 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이내 대답했다. 마스터 카드 대전이라면, 게이 머를 찾아다니면서 하고 싶은 그였다. "그 정도야, 제가 부탁드리고 싶은 일인 걸요." 긍정적인 답변과 함께 그가 웃었고, 루페르스도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 덕였다. "그럼, 아크릴 영지에는 언제 다녀오실 생각이십니까?" 문득 물어오는 마기에게 루페르스는 이미 생각해뒀다는 듯이 여유 있게 답했다. "일단 게임 한번하고 나서. 마기는 집으로 가서 떠날 준비 해야하고, 얘 들도 나름대로 정리할 게 있을 테니까. 그 정도 시간이면 충분해." "저희들의 짐은 이미 다 준비되어있습니다만." "아무튼." 아크릴 영지까지의 거리는 공간이동으로 무시한다고 쳐도, 저주를 푸는 데 웬만큼 시간을 투자해야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던 아이가 그의 발언 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곧 그가 보통 마법사가 아닌 마법사 길드 '마스터'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렇구나."라고 수긍하고는 살짝 미소를 머금었다. "자자, 그럼 시간 지체하지 말고 본론으로 들어가자고. 마기, 이 위에 좀 치워주겠어?" 접시들이 가득한 테이블 위에서 게임을 진행하기에는 확실히 무리가 있 었다. 루페르스의 부탁에 마기는 의자를 뒤로 물려 테이블에서 약간의 거 리를 두면서 누군가의 이름을 외쳤다. "호연. 받으십시오." 아이로서는 조금은 거부감이 들 수밖에 없는 마력의 움직임이 공기 속 으로 번지는가 싶더니, 테이블 위의 모든 물품들이 순식간에 그곳에서 사 라졌다. 마기의 마법으로 한번에 몽땅 주방으로 이동된 것이다. 그녀는 주방에 있을 호연이 안전하게 접시를 받았는지 살피다가, 호연이 보내는 신호에 답을 해주며 다시 마스터를 바라보았다. "흠, 깨끗하군." 연한 아이보리 색이 묻어나는 깔끔한 테이블을 내려다보며 흡족히 미소 를 지어 보이는 루페르스가 입을 열기 전에, 미르가 눈짓을 보내 모두 뒤 로 의자를 물리게 했다. 물론 대전자인 훼이드리온을 제외하고. 아이가 대전을 더 잘 지켜보기 위해 의자를 마기 가까이 놓고 자리하자, 루페르스가 기다렸다는 듯이 손을 움직여 허공으로 올렸다. 어떠한 변화 도 없을 것 같이 보였던 허공이 갑자기 물결을 치며 흔들렸다. 그리고 파 문들이 만들어내는 원의 중심으로 그의 손이 쑤욱 들어가더니, 나올 때는 진한 흑색의 주머니가 쥐어져있었다. 흔들리던 공간은 이내 진정하며 본 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 그건 뭐예요?" 아이가 눈빛을 반짝이며, 방금 자신이 보았던 신기한 장면에 호기심을 드러냈다. 루페르스는 주머니의 입구를 벌리며 옅은 웃음을 지었다. "마법. 내가 만들어 놓은 아공간 속에 간단한 물건을 보관해놓고, 필요 할 때마다 꺼내 쓰는 거야." "야아, 여행할 때 엄청 편하겠어요!" "물론이야." 진심으로 감탄하는 아이가 귀여운지, 루페르스는 흐뭇한 얼굴이 되어 카 드를 꺼냈다. 훼이드리온에게는 낯이 익은 뒷면 배경이 검은 카드들. 루 페르스와 미르는 부자지간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어째 카드의 생김새와 카드를 보관하는 주머니의 색깔도 똑같았다. 훼이드리온은 부자관계라는 것을 알았다고 해도 여전히 신비스러운 둘 을 힐끔힐끔 구경하면서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가 갈색주머니를 풀어냈다. 왕성 비밀창고에서 찾아낸 이후로 줄곧 들고 다닌, 특이하지는 않지만 정 이 가는 주머니. 새삼 감동을 느끼며 그 안에서 카드를 모두 꺼내 테이블 위에 놓자, 루페르스의 눈으로 '흥미'가 스쳐지나갔다. "호오." 그가 의미 있는 감탄사를 터뜨리며 훼이드리온에게 말했다. "카드 한 장만 보여줄 수 있어? 아무거나 괜찮아." "아무거나요?" 루페르스의 고개가 아래위로 움직이는 것을 확인한 후, 그가 말한 '아무 거나'에 유의하면서 훼이드리온이 고른 카드는 흔하게 볼 수 있는 물의 전사 카드였다. 훼이드리온이 건네는 전사 카드를 받아든 루페르스는 모두의 시선을 받 는 가운데 오랫동안 그것을 관찰했다. 푸르스름한 색조인 카드의 앞면에 그려진 전사의 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갑자기 뒤로 돌려 기하학적 무늬가 새겨져있는 뒷면을 살펴보는가 하면, 이젠 세로로 곧추세워서 카 드의 옆을 만지작거렸다. 그가 하는 이 기묘한 행동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리가 없는 다섯 명이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을 때, 식당의 모든 사람들 의 시선이 이내 그들에게 향했다. 심지어 주방에서 일하고 있을 크로스와 호연까지도 나와, 그들의 마스터 카드 대전을 기대하는 눈초리였다. 조심스럽게 떠오르는 그런 분위기 속에서, 끈질기게 카드를 만지작거리 며 뭔가를 골똘히 고민하고 있던 루페르스는, 기다리다 지친 에타가 뭐라 고 소리를 치려고 할 즈음에야 그 행동을 멈추었다. 그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에 모든 사람들이 의아함을 느끼며, 그런 감정이 담긴 표정을 만들어 보였다. "자, 받아. 그리고, 게임이 끝나고 나서 뭔가 할 이야기가 많을 것 같으 니까 기다리고 있길." 수수께끼 같은 말을 남기고 루페르스는 자신의 카드를 차근차근 정리하 기 시작했고, 물의 전사 카드를 돌려 받은 훼이드리온도 그의 말이 남기 는 묘한 여운은 잠시 제쳐두고 자신의 카드를 섞을 준비를 했다. 조금 후, "대회에 대비도 할 겸, 카드를 보고 고르지 말고 '무작위' 방식 으로 운에 맡겨 카드를 고르자."라는 루페르스의 제의를 받아들인 훼이드 리온은 그렇게 든 카드와 내린 카드를 나누었고, 마찬가지로 루페르스도 동일한 과정을 거쳐 대전 준비를 끝마쳤다. "관중도 많은데, 드레이프를 펼치는 게 어떨까요?" 루비네 마을에서 숀과의 대전 이후로는 펼쳐본 적이 없는 드레이프를 조심스레 떠올리며, 이번엔 훼이드리온이 제안했다. 어느새 식당 안의 대 다수가 이 테이블에 시선을 모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루페르스가 웃 음으로 동의를 표했고, 이미 '이야기의 시작 카드'를 가려놓았던 훼이드리 온이 그 카드를 집어들며 소리쳤다. "그럼 갑니다. 이야기의 시작." 마력이 흐르는 느낌이 확연하게 느껴지면서, 이야기의 시작 카드에서 작 은 사각형 하나가 튀어나왔다. 그 사각형은 점차 허공으로 떠오르더니, 어느새 직육각형의 투명한 공간을 형성했고, 느낄 수 없을 만큼 천천히 영역을 확대시켜나가, 테이블에서 1.5리치(=1.5m) 정도 높이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반짝반짝 윤기를 빛내며 자신의 존재를 자랑하기 시작했다. 투명한 색깔의 드레이프에 모든 이들의 시선이 집중되었고, 그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이 루페르스가 옅게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먼저 해."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다'로 끝나는 말투가 제법 입에 붙은 훼이드리온도 오랜만에 펼친 드 레이프에 흥분을 느끼며 날렵하게 든 카드 중에서 카드를 뽑아 올려, 테 이블 위로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았다. 탁. "불의 전사 카드와 바람의 전사 카드 페어 공격. 갑니다." 그의 푸른 눈동자에 잠시 황금색 기운이 스쳐 지나감을, 루페르스는 눈 치챌 수 있었다. -------------------------------------------------------------------- 랄라. 67편입니다. 개디에셀이 미쳐버려서, 이 글을 적어놓고도 언제 올리 게 되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연참을 하게 될 수도 있겠지만, 제가 토요일 일요일에 어디를 다녀오게 되어서요. 긁적. 어쩌면 토요일에 이 글 을 못 올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한마디로 이 잡담도 시기를 놓쳐버린 잡담이 되어버리는 것이죠. 냐하하. 어쨌든 요지는, "개디에셀! 쳐죽이기 전에 회복돼라!"인 것입니다. 아하하하. 꾸벅. 어둠의 기사 DARK KNIGHT TEAM... P.S 추천 감상 비평. 기다리고 있는 거, 모두들 다 아시죠? P.S 2 GO CAMA 번 호 : 72 / 72 등록일 : 2000년 12월 19일 23:26 등록자 : ZPTGATE4 조 회 : 130 건 제 목 : [카드 게임 판타지]『카드 마스터(Card Master)』#068 카드 게임 판타지(Card Game Fantasy) 카드 마스터(Card Master) 68. 아공간 속에서 빼낸 흑색의 주머니에 들어있던 흑색의 마스터 카드들. 미르의 분위기를 빼다 박은 루페르스인지라, 카드와 그는 묘한 조화를 이 루어 훼이드리온의 공세를 막아내고 있었다. '뭔가 이상한걸.' 줄곧 느껴지는 이상한 느낌에 훼이드리온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두 장 의 카드를 뽑아들었다. "와이번 카드와 백기사 카드, 태크닉 완성. 비술 드래곤 나이트." 게임 중반에 돼서야 조금은 위력 있는 비술을 사용해보는 훼이드리온. 루페르스는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이 되더니 아주 어렵게 세 장의 카드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다시금 카드들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내도 되는 걸 까?'하고 고민하는 얼굴을 만들더니, 이내 단호하게 테이블 위로 카드들 을 떨어뜨렸다. "동마법사 카드와 흑정령사 카드. 그리고 분노의 정령 퓨리. 흑정령사로 인해 분노의 정령 퓨리가 정신에 빙의된 동마법사의 분노! 태크닉 완성, 비술 매드매지션." 뭔가 큰일이라도 해낸 듯이 땀을 닦아내던 그는 조심스럽게 드레이프를 올려다보는 마기를 향해 싱긋 웃어주었다. 그 미소 속에 포함된 말은 '나 잘 했지?'였다. 마침 눈길을 돌리다 그 웃음을 발견한 그녀가 날카로운 인상을 순식간 에 허탈한 표정으로 바꾸었다가 다시 원 상태로 돌아왔다. '루페르스 님. 그건 아닙니다.' 자신이 뭔가 실수를 한 건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얼굴을 가득 띄워버 리고, 루페르스는 자신 있게 고개를 들었다. 드레이프 안의 상황이 그의 두 눈으로 무리 없이 흡입되었다. 동마법사의 속성은 땅이다. 흑정령사의 계략으로 분노의 정령 퓨리에게 정신 지배를 당한 동마법사는 폭주하는 마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이곳저 곳으로 자신의 마법을 발산하기 시작한다. 미친 마법사의 울부짖음. 그것 에 부흥해 지축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투명한 드레이프가 천천히 미동을 시작하더니, 어느새 눈에 보일 정도로 커다란 진동을 하기 시작한다. 드 레이프 바닥이 흙색의 땅으로 변해간다. 지진. 흔들리는 땅은 금방이라도 갈라질 듯이 요동을 쳐댄다. 허공에서 유유히 배회하던 드래곤 나이트가 밑을 바라보다가 피식 웃어 버린다. 바람의 속성을 가지고 와이번의 날개를 얻어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는 자신에게 땅의 마법으로 상대한다는 것은 대체 무슨 생각인지 이해 가 가지 않는 얼굴이다. 그런 면에서는, 드래곤 나이트를 발동시킨 게이머, 훼이드리온도 마찬가 지였다. 매드매지션을 발동한 채 할 일은 다 했다는 듯이 개운하게 웃고 있는 마법사 길드 마스터의 진의를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미간을 좁히 며 좀 더 세심하게 드레이프 안을 뜯어보기 시작했다.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지도 몰라.' 전혀 어울리지 않지만, 어쨌든 그는 모든 마법사들이 꿈꾸는 최고의 직 위, 마법사 길드 마스터의 자리에 있지 않은가. 그런 그가 이렇게 허술한 수를 쓸 때는 분명 믿는 구석이 있어서일 것이다, 라고 훼이드리온은 생 각하고 있었다. 매드매지션의 붉게 타오르는 눈이 하늘에 떠있는 드래곤 나이트를 향했 다. 와이번 위에 하얀 검을 들고 서서 이리저리 날아다니고 있는 그가 영 맘에 들지 않았던 매드매지션은 소리가 들렸다면 "크와아아아!"라고 괴성 까지 들렸을 듯한 고함을 내지르며 양손을 하늘을 위해 든다. 순간, 수많 은 기둥이 땅에서부터 무참히 솟아오른다. 위기를 느낀 드래곤 나이트는 허겁지겁 높은 하늘을 향해 비상한다. "와하, 멋진데?" 구경하던 사람들이 드레이프 안에서 벌어지는 환상적인 장면에 감탄을 금치 못하며 혀를 내둘렀다. 여러 개의 기둥이 갑자기 솟아오르고, 그 사 이사이를 드래곤 나이트가 피하는 모습은, 보고만 있어도 일프(Ylf: 파리) 가 들어갈 만한 입을 만들어줄 정도로 멋진 풍경이었다(드래곤 나이트 쪽에서 생각하면, 별로 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감탄하고 있는 건 마스터 카드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 들이기에 가능한 것.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게이머 6명은 감탄도, 그렇다 고 비하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저 묵묵히 그 모습을 관찰하며 눈빛을 빛 낼뿐. 그 중에서도, 노란 색의 앞치마를 두르고 짧은 숏커트를 치고 있는 건강 한 분위기의 여성, 호연의 눈빛은 특히 이채로웠다. 마법사 길드 최고 원 로 중에서도 마스터 카드 실력이라면 그 누구에게도 절대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는 그녀는 모든 사태를 이해할 수 있다는 듯이 살짝 미소를 품 은 채 게임을 지켜보았다. 가끔, 약간 빈 정신 상태를 가진 자만이 발휘 할 수 있을 듯한 단순한 미소를 짓고 있는 마스터를 바라보기도 하면서 말이다. '여전히 재미있는 분.' 그녀는 지그시 한 손을 올려 입가를 가리듯 턱을 감싸쥐면서, 뜻을 알 수 없는 미소를 계속 유지하며 대전을 구경했다. 드레이프 안에서는, 우후죽순처럼 가차없이 솟아오르는 기둥들로 인해 허둥지둥 도망 다니는 드래곤 나이트의 모습이 여전히 연출되고 있는 중 이었다. 루페르스의 얼굴이 밝은 것을 보아, 그가 의도했던 장면인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훼이드리온은 여전히 무언가가 찜찜했다. 현재는 약간 밀리는 듯해도 결과는 정해져있었다. 바람의 속성을 가진 창공의 기사가, 미친 마법사에게 당할 리는 절대 없는 것이다. 상황은 그가 예측한 그대로 흘러갈 낌새를 보이고 있었다. 자신이 움직일 수 있는 마력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은 채, 분노의 정 령 퓨리에 의해 무조건 마법을 남발하고 있던 매드매지션에게도 한계는 찾아온다. 몸을 아끼지 않는 마법은 지속성이 극히 짧다. 무서운 기세로 솟아올라 드래곤 나이트를 위협하던 기둥들의 수가 눈에 띄지 않을 정도 로 하나씩 줄어간다. 그 위력도 솟아올라오는 횟수에 비례하여 줄어든다. 그래서 이득을 보는 것은 드래곤 나이트. 드래곤 나이트는 기다렸다는 듯이 기둥들을 사이를 잽싸게 빗겨 날아가 며, 두 발을 땅에 디딘 채 신음을 토하고 있는 미친 마법사를 향해 쇄도 해 들어간다. 기동력이 더없이 향상된 백기사의 눈에 여기저기 혈관이 솟 아오른 매드매지션의 포악한 얼굴이 담긴 것도 잠시. 백기사의 하얀 검은 어느새 매드매지션의 허리를 반으로 가르며 지나가 버린다. 높은 하늘 위 에서 떨어져 내려온 가속력과 본래의 힘과 반동력까지 이용하였기에 허 리가 잘려서 드러난 절단면은 더없이 깔끔하다. 곧 그곳에서 피가 솟아오 르며 상체와 하체가 각각 다른 곳을 향한 채 쓰러진다. 매드매지션의 붉 은 피는 땅으로 천천히 스며들었고, 높게 솟아있던 기둥들도 잠시간의 떨 림을 이은 후, 그대로 정지한다. 다소 잔인한 장면이 있었기 때문에, 아이를 포함한 대부분은 여성들은 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남성들은 멋지게 매드매지션을 해치운 드래곤 나이트가 다시 하늘을 향해 비상해 오르자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를 쳐댔 다. 간만에 박력 있는 장면을 본 것인지 모두 만족해하며 다음 턴을 흥미 롭게 기대하는 눈빛이 되어버렸다. '…끝났네.' 손에 들고 있던 자신의 카드들을 떨어뜨릴 정도로 허탈해진 훼이드리온 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한 채 자신에게 시선을 보내는 아이에게 '나 도 동감이야.'라고 눈빛으로 대답해주고는 앞을 향해 눈길을 옮겼다. 반대 편에는 자신이 저지른 행각이 대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고 있는 중년의 게이머가 앉아있었다. "어라, 졌잖아?" "그럼 이길 줄 알았던 건가요?"라고 되묻고 싶어지는 충동을 참아내며 자신의 앞에 놓인 드래곤 나이트에 다시 손을 올리는 훼이드리온. 허탈과 함께 극히 작은 화를 동반한 그의 목소리가 드레이프를 울렸다. "드래곤 나이트 공격." 전혀 충격을 받지 않고 살아있었기 때문에 재공격은 가능했다. 드래곤 나이트는 훼이드리온의 의지대로 허공을 쌔애앵 돌진하여 검을 휘둘렀다. 하얀 잔광이 몇 번 새겨지고, 루페르스 쪽을 향해있는 드레이프의 벽면이 조금 불그스름한 기운을 띄기 시작했다. 생명력에 피해를 입었다는 것을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런이런. 이길 줄 알았는데……." 전혀 가능성 없는 말을 또 다시 중얼대는 루페르스의 얼굴에 가는 주름 이 잡혔다.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해보겠다는 결의를 다지는 건지, 그의 카드 선택은 좀 더 신중해지고 있었다. 그가 침묵을 하는 틈을 타, 호연이 간단한 차를 준비하기 위해 크로스와 함께 주방으로 들어갔고, 아이는 훼이드리온에게 말을 걸었다. "어때?" "보는 대로." "상상 밖이야, 그치?" 그는 간단히 고개를 움직이는 것으로 그녀의 의견에 동의했지만, 그의 얼굴은 심히 복잡한 기색을 띄고 있었기에, 그녀는 더 이상의 질문은 하 지 않고 관중의 의무로 돌아갔다. 그는 마스터 카드 초보자에게만 볼 수 있는 모습을 하고 있는 루페르스 의 얼굴을 향해 한껏 '의심'을 내포한 눈빛을 때려주었다. 그러나 철면피 같이 두꺼운 옅은 미소를 띄운 그는 꿈쩍도 하지 않고 자신의 카드를 이 리저리 매만지고 있었다. '대체 뭘 생각하는 거지.' 알 수가 없었다. 마법사 길드 마스터니, 당연히 마스터 카드 실력도 대 단할 거라고 생각했었던 자신이 바보 같아지는 느낌에 그는 살며시 고개 를 흔들었다. 겉보기에는 그저 느긋하게 인생을 살아가는 의욕 없는 남자처럼 보이지 만, 대화를 나누며 간간이 보여지는 모습들에서 결코 범상치 않은 인물일 것이라고 추측되어 실망하지 않고 끈질기게 그의 본모습이 보여지기를 기다릴 수 있었던 것이고 말이다. 그래서 더더욱 자신의 어리석음을 한탄할 수밖에 없는지 모른다. 아니, 확실하다. 기대했던 그가 바보가 되는 것이니까. 마스터 카드는 초보라고 스스로 자부하는 자신의 누님, 메이린느가 더 실력이 좋을 것 같다고까지 생각해보는 훼이드리온. 하지만 그렇게 생각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땅의 속성을 가진 동마법사를 미치게 만들어봤 자, 하늘 위를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창공의 기사, 드래곤 나이트에게는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은 초보자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런 실수를 이 남자는 태연하게 해내고 있지 않은가. 훼이드리온은 진득한 한숨을 쉬며 아직도 카드를 고르는 것에 모든 정 신을 쏟고 있는 마법사 길드 마스터를 힐끔 쳐다보고는 생각을 고쳐먹기 로 결심했다. '한번만 더 기다려보자. 그리고 정말 아니라면…… 이제 그만이다.' 이 여행의 목적은 오로지 마스터 카드. 그 외라면 절대 사양이다. 목적 을 이루어 국왕의 자리를 이어받을 완벽한 후계자의 모습이 되어 돌아가 야 하기 때문에 이런 대전에 더 시간을 끌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그는 자신의 머리 속에 떠오른 생각에 마음이 깊이 가라앉 는 것을 느꼈다. 돌아가야 한다, 돌아가야 한다. 언젠가는 목적을 이루고, 왕성을 돌아가야 한다. 그게 언제는 될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결과는 그 럴 수밖에 없다. 훼이드리온은 당사자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눈동자를 움직여 바라보았다. 길게 기른 흑발의 생머리, 더없이 아름다운 얼굴과 미소, 그리고 청아한 목소리까지. 어느 곳 하나 사랑스럽지 않은 곳이 없는 그녀. 어느새 깊이 좋아하게 되어버린 그녀. 왕성으로 돌아가게 되면, 그녀와의 헤어짐은 불가피한 것이다. 그에게는 결혼을 약속한 정혼자가 이미 있으니, 붙잡을 수도 없다. 붙잡을 여지도 없는 것이다. 갑자기 슬픔이 울컥 솟아올라올 것 같았다. 그녀에 대한 감정을 받아들 이면서 잊었던 그 고민이 다시 머리 속에 상기되었고, 그는 대전과는 관 계없이 힘이 쏙 빠지는 느낌을 느꼈다. 비록 겉으로는 표현하지 않았지 만, 가슴은 이미 욱신욱신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 자신의 미약한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것, 바꿀 수 없는 것, 바꿀 생각 도 허락되지 않는 것. 훼이드리온은 여태까지 느꼈던 인내심 중 가장 극 도의 인내심을 발휘하여 목을 통해 올라오는 어떤 감정을 최대한 막아냈 다. 꼴사나운 장면을 연출할 수는 없다. 언제까지나, 그녀 앞에서는 즐거 워야한다. 때마침, 그의 신경을 다른 쪽으로 돌릴 수 있는 일이 생겼다. 루페르스 가 오랜 침묵을 깨고 드디어 카드의 선택을 끝내 싱글거리며 입을 열었 던 것이다. "자아, 다시 간다." 모두의 시선이 그를 향해 모아졌고, 일부러 시간을 맞추기라도 했는지 쟁반 가득히 향기로운 디오느 차를 가지고 주방에서 걸어나오는 호연과 크로스의 발소리에 맞춰 그가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흑정령사 카드와 분노의 정령 퓨리, 그리고…" 모두가 다음에 나올 카드의 이름을 진지하게 기대하기 시작했다. 그중 몇몇은 '혹시?'하는 얼굴로 얼굴을 찡그리기도 했지만, 하여튼 그는 여전 히 싱글거리며 마지막 카드를 외쳤다. "…남마법사 카드! 태크닉 완성, 비술 매드매지션!" 그 순간, 훼이드리온은 그를 향해 남아있던 일말의 기대를 모조리 짓밟 아 버린 후, 저편으로 던져버렸다. 이 남자에게는 더 이상 기대할 게 없 다고 생각한 것이다. '대, 대체 무슨 생각인 건가.' 뭔가 마스터다운 계략이 있을 것이다, 라고 애써 생각해보려고 해도, 이 쯤 되면 '멍청이다.'라고 밖에는 결론이 나지 않는다. 대체, 속성만 바꾼 매드매지션 가지고 뭘 어떻게 하자는 것일까, 그는. "후훗. 이번엔 되겠지." 라고 무책임하게 웃으며 지그시 드레이프를 올려다보는 루페르스. 훼이 드리온은 이마를 짚으며 깊은 한숨을 지어야하지 않을까 생각해보다가, 그것도 의욕이 나지 않아 그저 푸른 눈동자를 굴리며 드레이프에 집중하 기 시작했다. 땅의 속성을 지닌 마법사의 육신이 서서히 흩어져 사라지는 모습 위로 날아가던 백기사는 갑자기 어디선가 불어오는 거친 열기에 서둘러 뒤를 돌아본다. 그리고 그의 눈에 띄는 붉은 화염. 급히 와이번을 돌리며 그가 급반전을 시도한다. 휘이익. 거대한 불줄기. 그것이 아슬아슬하게 드래곤 나이트를 스쳐 지나가면서 무시무시한 열을 뿌린다. 백기사는 옷깃을 살짝 스치고 지나가는 불줄기 를 놀란 두 눈으로 주시하다가 이내 그것이 날아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 린다. 용암 구덩이에서 튀어 오르는 그 모습 같이 뜨겁게 타오르며 넘실 대는 불길 속에서 양손을 허공을 향해 들고 광소를 토해내고 있는 매드 매지션의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온다. 단단하게 굳은 흙으로 이루어진 기둥을 만들어 자신을 공격하던 매드매 지션과는 다른 속성을 지닌 그 미친 마법사를 바라보며 천천히 창공을 날아다니던 그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맺힌다. 더 볼 것도 없다는 듯이 세 차게 검을 뽑아든 드래곤 나이트. 까마득히 높은 하늘 위에서부터 허공에 대각선을 그으며 매드매지션을 향해 돌진한다. 매드매지션도 질 생각은 없다는 듯이 손을 앞으로 내뻗는다. 그와 함께 매드매지션의 뒤에서 타오르고 있던 불줄기들이 사정을 두지 않고 드래 곤 나이트를 향해 쏘아져 날아가기 시작한다. 총 6개의 불줄기가 둥글게 원을 그리며 거칠게 공기를 가르며 날아가는 모습. 충분히 위압적이고 격 렬한 공격이다. 그러나, 드래곤 나이트에게는 땅의 매드매지션이든, 불의 매드매지션이 든 전혀 상관이 없다. 그는 창공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창공의 기사, 드 래곤 나이트. 하늘에 있는 이상, 저 정도로는 그를 이길 수 없다. 누구보 다도 드래곤 나이트 자신이 잘 알고 있는 사실. 드래곤 나이트는 자신을 향해 뜨거운 불길을 토해내며 날아오는 불줄기 를 간단하게 선회 한번으로 피하고는 더욱 가속력을 붙인다. 매드매지션 이 다급히 손을 올려 또 다시 불길을 날려보지만, 헛수고로 돌아간다. 드 래곤 나이트의 검은 이미 백색의 검광을 날리며 매드매지션의 목을 노린 다. 스윽. 너무나 간단히, 불길을 이리저리 피워 올리며 미쳐 날뛰던 매드매지션은 꺼져 가는 자신의 불을 구경하며 최후를 맞이한다. 비술 매드매지션의 카드는 뒤집어졌다. "…이것도 아닌 건가?" 안타까운 음성이 루페르스의 입에서 터져 나왔지만, 표정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그저 담담하게 상황을 관조하는 듯한 음색에 훼이드리온은 또 다 시 혼란스러워지는 머리를 붙들었다. 저건 마치, 미리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들렸던 것이다. 루페르스는 곧 굳은 표정으로 얼굴을 탈바꿈하고는 자신의 카드를 내려 다보았다. 이번에는 '이런, 최악이군.'이라는 표정. 실로 현란한 표정 변화 에 훼이드리온은 허탈에 황당까지 겹쳐 자신에게 달려오는 모습을 볼 뻔 했다. 어쨌든, 역시나 그는 아무 생각 없이 일을 저질러 결국은 똑같은 결과를 내고야 말았다. 조금 전, 땅의 매드매지션의 공격으로 인해 생명력이 약 간은 줄어들었을 드래곤 나이트를, 저런 앞뒤 거리지 않는 '멍청한' 수로 막았다가 다시 당해버린 것이다. 대체, 저 남자의 생각을 뭐라고 표현해야할지, 훼이드리온은 상당히 난 감해졌다. 그러나 곧 지금 자신이 해야할 일은 이것이 아님을 깨닫고는 천천히 카드를 빼들었다. 그가 또 다시 매드매지션을 발동하는 태크닉을 완성하는 그 순간부터 이미 다음에 이을 조합은 정해져있었다. 현재 훼이드리온이 펼칠 수 있는 최강의 공격력이 깃든 조합. 얼마 전에 헤어진 아크릴 영주를 잠시 머리 속에 떠올려보면서, 그가 색깔이 다른 두 장의 카드를 꺼내들었다. 카드들을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 입을 여는 훼이드리온. "백소환사 카드와 물의 정령왕 에리피느 카드로 공격. 백소환사가 정령 왕 중 물의 속성을 지닌 에리피느를 소환하여 공격한다." 단호하게 떨어지는 그의 말에 아이가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루페르스와 마기도 놀랐는지 서서히 두 배로 커지는 눈을 주체하지 못하고 드레이프 를 올려다보았다. 훼이드리온의 의지에 따라, 드레이프 안에서는 이미 변 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와이번 위에 우뚝 선 채, 앞으로 날아가려고 준비중이던 백기사는 맡아 질리 없는 물의 향기가 나는 것을 느끼고 사방으로 시선을 움직인다. 고 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주위를 관찰하던 그의 눈에 드레이프 중앙에서 푸 르스름한 빛이 둥근 구의 형상으로 모이는 것이 목격된다. 신선하면서도 차가운 물의 향기는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라고, 그는 자연스럽게 느 끼며 다가간다. 하얀 로브를 뒤집어쓰고 나타난 백소환사의 소환에 응한 물의 정령왕 에리피느의 모습이 천천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푸른 구는 그 모습을 변화 시켜가더니, 어느새 온몸이 푸른 여인의 모습으로 변한다. 그 모습은 너 무나 아름다워서 공간 속으로 그대로 녹아버릴 것 같다고 백기사는 생각 한다. 푸른 피부, 푸른 눈동자, 푸른 기운. 무엇 하나 어울리지 않는 것이 없는 물의 정령왕 에리피느. 그녀가 드디어 완벽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그녀는 드래곤 나이트와 잠시 눈을 마주치더니, 지체할 수 없다는 몸짓 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푸른 기운을 허공에 남기며 앞으로 전진하기 시 작하는 그녀. 공중을 미끄러지듯이, 유영하듯이 날아가는 그녀를 멀뚱히 바라보던 드래곤 나이트도 서둘러 와이번을 움직여 그 뒤를 따른다. 훼이드리온은 드레이프에서 눈을 떼고, 루페르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신 기하다는 눈을 만들어보인 채 입을 벌리고 있었다. 어디를 보나, 그저 멍 해 보이는 표정. 그는 화가 날 것 같아 속으로 외쳤다. '기대하십시오. 끝입니다.' 더 이상 이런 멍청한 대전을 계속하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껏 자신이 해 온 대전 중에서 가장 최악이며 가장 흥미 없는 이 게임을 계속 이어나갈 마음은 추호도 남아있지 않았다. 마법사 길드 마스터라면 마스터 카드 실 력도 엄청날 것이다, 라고 생각되어 가졌던 기대가 산산이 부서졌고, 배 신감까지 느끼고 있었지만 표현하지는 않았다. 여기서 끊으면, 이제 그만 일 테니까. 전혀 즐겁지 않은 마스터 카드 대전. 이제 끝낼 때가 도래했다. "드래곤 나이트와 물의 정령왕 에리피느의 합동 공격입니다." 에리피느를 중심으로 날카로운 물줄기가 뿜어져 나온다. 그리고 그것들 은 하나의 거대한 물줄기로 뭉치더니, 단숨에 옅게 붉은 빛을 띄우고 있 는 루페르스의 벽을 향해 거칠게 쏘아져 날아간다. 막을 자는 없고, 막을 수도 없다. 이미 모든 것이 늦어버린 상태에서, 물줄기는 그대로 벽을 강 타한다. 드래곤 나이트도 그 뒤를 따라 검으로 난도질을 시작한다. 허공에 남겨 진 수백 개의 하얀 검광과 함께 드레이프 벽은 점점 붉어지더니, 결국은 금방이라도 타오를 듯한 빨간 색을 머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까강!'하며, 무참하게 깨져버린다. 단 한순간도 버텨보지 못하고 가루로 변해 쏟아져 내리는 벽. 그와 함께 투명한 드레이프도 순식간에 그곳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루페르스가 "아?"라고 어벙한 음성을 남기는 사이, 훼이드리온은 냉정함 이 우러나오는 표정과 목소리로 마지막 말을 내뱉었다. "이로서, 끝입니다." 불쾌감이 가득 서린 그의 목소리에 아이는 걱정스러운 눈길로 그를 바 라보다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 냐앙. 결국은 이 아이디로 올려버리는 68편입니다. 엄청 강할 거라고 예 상했던 루페르스의 실력은 이렇습니다. 냐하하, 감상이 어떨지 상당히 궁금해지는 순간이 아닐 수 없군요.;; 으음. 카드 마스터 1권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제가 아직 받지 못했군요. 조금 시간이 걸릴 거라고 하니, 뭐 기다리는 수밖에요. 자아, 그럼. 아이디가 회복되는 대로 삭제를 하도록 하구요. 2권도 곧 나올 거라고 예상됩니다. 많이들 사랑해주세요.(___) 자아, 그럼! 어둠의 기사 DARK KNIGHT TEAM... P.S 추천 감상 비평. 기다립니다. 냐하하. P.S 2 GO CAMA 번 호 : 52 / 52 등록일 : 2000년 12월 23일 02:04 등록자 : ZPTGATE4 조 회 : 106 건 제 목 : [카드 게임 판타지]『카드 마스터(Card Master)』#069 카드 게임 판타지(Card Game Fantasy) 카드 마스터(Card Master) 69. 게임이 끝나자, 모여있던 사람들은 금방 흥미를 잊고 각자의 자리로 돌 아갔다. 물론, 식당의 주방장인 호연도 야릇한 미소를 띄운 얼굴로 다른 곳으로 새려고 몸을 움츠리고 있던 크로스의 뒤통수에 꿀밤을 먹여주고 주방으로 사라졌다. "씨이."라는 불만 섞인 중얼거림과 함께 크로스도 주 방으로 들어갔다. 훼이드리온은 조용히 카드를 정리하여 주머니에 집어넣고, 그것을 허리 춤에 매달았다. 그리 오랜 시간이 지체되지는 않았기 때문에, 다시 고개 를 들었을 때는 루페르스가 자신의 카드를 반쯤 손에 들고 있을 무렵이 었다. 제대로 정리할 생각도 없는지 주머니 속으로 아무렇게나 카드를 쑤셔 넣고 있는 그의 얼굴은 무척이나 평안(?)해 보였다. 방금 게임에서 패배 한 게이머의 모습으로는 절대, 전혀, 어울리지 않은 탓에, 훼이드리온은 혼란스러운 얼굴이 되어 그를 응시했다. '그러면 그렇지.'라는 뜻을 담은 한숨이 새어나오는 것을 도저히 막을 용 기가 나지 않는 마기가 그에게 손을 내밀어 주머니를 잡았다. "제가 정리하겠습니다." "아, 그래 주겠어? 언제나 고마워, 마기." "당연지사입니다." 마기가 사용한 단어를 순간적으로 이해하지 못한 훼이드리온은 자기도 모르게 '당연지사'의 뜻이 바뀌었는지에 대해 고민해보다가, 이내 머리 속 에서 그것을 지워버렸다. '제가 카드를 정리하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의 준말일 가능성이 다분하니까 말이다. '그나저나, 자신의 카드도 스스로 정리하지 않는 건가.' 그 점에서, 루페르스라는 게이머에게 또 다시 실망을 금치 못한 훼이드 리온은 실망감이 가득 담아 길게 한숨을 흘린 다음, 머리 속에 떠오르는 조금 전의 기억을 이야기 소재 삼아 말을 꺼냈다. "그래서, 한다는 이야기가 무엇이죠?" "응?" '나한테 하는 말이야?'라고 되묻는 듯이, 루페르스가 자신의 얼굴을 가리 켰다. 훼이드리온은 '이 마을에 머무는 동안, 한숨쉬는 버릇이 들어버릴 지도 몰라.'라는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아아…" 기억난다는 듯이 살짝 미소를 띄운 얼굴로 입을 여는 그의 말 에 모인 사람들 대부분이 뒤로 넘어갈 뻔한 충격을 받았다. "뭐였더라?" 에타는 자신의 14년 일생 최초로 미르의 허리를 껴안아보는 영광을 가 졌지만, 결코 즐거운 기분일 수가 없었다. 미르의 손에는 검은 빛을 띄고 있는 암살자 전용 특제 단검이 쥐어져있었고, 눈은 묵묵히 아버지를 바라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새 일어선 미르의 허리를 붙잡으며 소녀가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아버님! 빨리 생각해내세요!" 가만히 단검을 돌리며 무표정한 눈길을 유지하고 있는 미르에게 지그시 시선을 띄운 루페르스는, 자신을 쏙 빼 닮아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눈을 하고 있는 아들을 향해 빙그레 웃어주었다. 미르는 천천히 자리에 앉기 시작하여, 에타로 하여금 안도의 숨을 쉴 수 있게 만들었다. 아이는 세상에서 가장 힘든 것을 꼽자면 당연히 '미소짓기'이다, 라는 얼 굴로 루페르스에게 다시 물었다. "무슨 이야기인데요?" "그 전에, 한가지 물어볼 것이 있는데 말이야." 그의 눈길은 아이의 옆, 훼이드리온을 향해 있었다. 훼이드리온은 표정 으로 그 시선에 대답했다. '뭡니까?' 루페르스가 손가락으로 훼이드리온의 허리쯤을 가리켰다. "……?" "지금 말할 거야. 그 카드, 내가 생각하기로는 분명히 요즘 만들어진 카 드가 아닌데. 당연히 맞다고 말해주겠지?" 훼이드리온은 잠시 회상을 해보는 시간을 가져야했다. 이 마스터 카드는 지금으로부터 한달 전, 정확히는 한 달하고도 더 전. 우연히 열게 된 봉인된 방에서 갈색주머니 채로 발견했다. 당시에는 그저 재미있는 카드 게임인 줄 알았지만, 왕성 수석마법사 필로윈의 설명을 들 은 후, '보통 카드는 아니구나.'라고 생각은 했고, 그건 후계자 수련의 목 표로 삼을 정도로 마스터 카드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루페르스는 필로윈이 말해준 이 마스터 카드에 대한 설명과 일 맥상통하는 질문하고 있었다. 훼이드리온은 묘한 흥미를 가진 얼굴을 만 들었다. "네, 그렇게 알고 있어요." "에에, 요즘에 만들어진 카드가 아니라고?" 경악스럽다는 듯한 외침이 아이에게서 터져 나왔고, 훼이드리온이 그녀 를 향해 간단히 미소를 띄워주고는 루페르스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말을 한 건 그녀 쪽이 더 빨랐다. "그럼, 언제 만들어진 건데?" 입을 열 타이밍을 놓쳐버린 루페르스가 심각한 빛을 띄우며 그녀를 뚫 어져라 쳐다보았지만, 그녀는 그 정도쯤이야 간단히 무시해버릴 수 있는 정신 구조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탁하지 않고 빛이 난다, 라는 점에서 루페르스, 미르와 상반된 검은 눈동자를 지닌 그녀는 살풋이 띄운 미소에 농도를 더했다. "으으으으응?" "아, 하하, 그게 말이야." 필로윈이 가르쳐준 말대로 "이건 대마도사가 직접 창조한 최초의 마스 터 카드야. 그러니까 500년 전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유추해낼 수 있지." 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그 대답 후에 이어질 그녀의 물음은 뻔한 데, 스스로 무덤을 팔 수는 없는 노릇이다. 훼이드리온은 보는 이로 하여금 의심을 지울 수 없게 만드는 부정적 효 과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다분한 웃음을 웃으며, 간단히 대답했다. "나도 몰라." 아이의 얼굴이 순식간에 허탈해졌고, 그는 그쪽으로 시선을 향하지 않으 려 애쓰며 루페르스에게 말을 걸었다. "그래서, 그 다음은요?" 오른쪽 볼에 닿는 아이의 눈빛이 너무나도 따가웠지만, 무릎꿇을 수 없 는 의지로 버티며 마법사 길드 마스터의 대답을 끈질기게 기다렸다. 그와 그녀의 간단간단한 담소가 뜻하지 않은 즐거움을 준 이유로, 마기 와 같이 키득대고 있던 루페르스는(물론 마기는 그녀답게 담담히 웃을 뿐이었다) 훼이드리온의 뜨거운 눈길을 의식하게 되자 간과하고 넘어갈 수 없어서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게임하기 전에 내가 카드를 잠시 봤잖아. 어쩐지 생소한 기분이 든다고 했는데, 조금 만져보니 요즘에는 볼 수 없는 재질인 플라트닉으로 만들어 져있더라고. 플라트닉은 최소한 200년 전부터는 생산되지 않는 건데 말이 야. 그래서 물어본 거야. 그게 어떤 카드인지, 대충 짐작이 가기도 하고." 루페르스는 마지막 말은 훼이드리곤과 비밀스럽게 1대1 대담을 가질 수 있게 된 자리에서 했어야 옳았다, 라는 것을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앗, 실언이다.'라고 직감한 순간, 아름다움의 극치를 달리는 외모를 가진 검은 머리카락의 소녀의 시선이 단숨에 자신에게로 돌려졌기 때문이다. "훼온의 카드가 어떤 카드인데요?" 호기심으로 빛나는 눈이 어떤 것인지, 그는 진심으로 잘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은, 조금 후 그는 조금 전 훼이드리 온이 지어 보였던 억지 웃음을 입가에 띄우고 있었다. "……아하하하." 훼이드리온이 자신에 구원을 요청하던 눈빛과 마찬가지로, 루페르스는 자신을 보좌하는 서브 마스터에게 애타는 눈빛을 반짝였다. 마스터의 그 런 눈빛을 거부할 수 없었던 마기는, 멍청한 상관을 모시는 대륙의 모든 보좌관들이 느낄 감정을 똑같이 체험하며 수습에 나섰다. "훼온 레이엔트 님이 가진 마스터 카드의 출처는 정확하게 알아낼 수 없지만, 적어도 200년 이상의 전통을 가진 카드라는 것은 추측 가능합니 다. 그 정도의 카드는 근래 보기 드문 게 사실입니다. 루페르스님께서 하 시는 말씀도 그런 뜻입니다." "맞아맞아. 바로 그거였어." 누가 들어도 '정말?'이라고 의심하는 게 당연한 맞장구를 치면서 루페르 스는 다시 한번 웃어댔다. "하하하." 그리고, 더 이상의 질문은 사양한다 는 듯이 서둘러 이야기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아무튼, 난 그 카드의 정체를 대충 깨달을 수 있었어. 보통 전통이 아 니니, 어쩌면 가능할 지도 모르겠다고도 생각했고 말이야." '카드의 정체'라는 대목에서, 훼이드리온과 루페르스 사이에 미세한 눈짓 이 오갔다는 것을 눈치챈 사람은 마기 뿐이었다. "뭐가 가능하겠다는 건가요?" 적당한 설명도 없이 튀어나온 그의 대사에 훼이드리온은 당연스럽게 의 문을 제기했다. 그가 싱글 웃으며 대답하기를. "아까 전에, 마기와 나의 여정에 동행하기로 했었지?" 영 엉뚱한 말을 꺼내놓는 루페르스였다. "네?" "원래 예정은 게이트 마을에서 에코까지 이어진 가장 빠른 지름길을 따 라 갈 생각이었어. 29일까지는 충분히 도착할 수 있지. 너희들 네 명 정 도 동행하더라도 여정에는 크게 차질이 생기지 않아. 그런데, 그게 차질 이 생길 수도 있게 된 거야, 훼온 군의 카드로 인해서." 원체 표정이 없는 미르를 제하고, 훼이드리온 일행의 얼굴에는 공통된 감정이 떠올랐다. '이해 안 되요.' 루페르스는 빙긋이 웃으며 설명을 이었다. "게이트 산맥도 마법의 숲과 같이 금역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 개방성 의 차이는 있지만 말이야." 귀가 있어서 여러 소문들을 들을 수는 있기에, 그 사실을 모르는 인물은 하나도 없었다. 모두 약속이나 한 듯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미소를 기쁘게 미소를 유지했다. "마법의 숲은 500년 전에 벌어진 대마도사와 검의 현자의 대결로 인해, 공간이 어긋났다고 하지만, 게이트 산맥은 조금 다른 경우야. 내사 알아 낸 바로는, 게이트 산맥 내에 거대한 힘이 존재하고 있어서, 그것 때문에 공간이 어긋나 존재하는 거지." "산맥 내의 거대한 힘이라니요?" 테이블 가까이 의자를 끌어 앉은 아이의 두 눈이 호기심으로 총총히 빛 나고 있었다. "'유적'이다." "……유적이요?" 지금이 아닌, 과거의 자취가 남아있는 지역, 혹은 장소. 그것을 유적이라 고 부른다는 것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훼이드리온은 루페르 스를 향해 가졌던 불쾌함을 어느새 잊어버린 채 그의 대답을 재촉했다. "유적이라면, 고대의 유적을 말하는 것인가요? 게이트 산맥에 고대의 유 적이 남아있다는 겁니까?" "뭐, 내가 알아낸 바로는 그래." 어깨를 으쓱대던 그의 표정이 다소 심각해진 건, 그 대사의 끝 부분에서 였다. "솔직하고 정확하게 말하자면, 내가 찾은 곳이 정말 고대의 유적인지는 알 수 없어. 단순히 그렇게 생각될 뿐이지, 확신이 서지 않거든." 루페르스의 머리 속에는 유적을 찾아낸 당시의 일들이 선명하게 떠올랐 다. 옛날 일 따위야 생각하지 않고 사는 성격인 그라 언제인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았다. 그는, 어느 날 잠을 자다가 불현듯 머리 속에 떠오른 영상이 계기가 되어 게이트 산맥에 숨어있을 유적을 찾기 시작했다. 아 니, 흔적을 찾기 전까지는 자신이 찾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로 찾아다녔다는 게 더 옳은 말일 것이다. 뭔가 의욕을 가지고 돌아다니기 시작한 루페르스를 걱정 반, 흐뭇함 반 으로 주시하던 마기는 루페르스에게 동행을 요청하게 되었다. 무엇인지는 몰라도 뭔가를 열심히 찾고 있는 마스터를 조금이나마 돕고 싶은 기특한 보좌관의 마음에 그는 탄복했지만,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이건 나 만이 찾을 수 있는 거야."라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그는 다시 정신 없이 산맥을 헤매고 다녔고, 마기는 그가 끼니를 거르지 않도록 도와주는 것밖 에는 달리 할 일이 없었다. 한동안 그런 생활이 계속되었다. 아침해가 뜨기 무섭게 벌떡 일어난 루 페르스는 동거인이 차려놓은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나서, 도시락을 챙겨 곧바로 산맥으로 들어간다. 그리고는 그때부터 해가 질 때까지 산맥 구석구석을 헤집고 돌아다니는 것이다. 게이트 산맥을 뒤덮고 있는 마력 은 마법사 길드 마스터인 그의 마법조차 완벽하게 봉쇄했기 때문에 순수 한 체력만으로 움직여야할 상황이었지만, 그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운 동부족에서 비롯된 체력 저하가 그를 심히 괴롭혔으나 그는 혀를 깨물어 버리는 인내심으로 온 산맥을 뒤졌다. 그리고 많은 시간을 투자한 그는 기어코 원하던 것을 찾아내고야 말았 다. 그것은, 무려 6개월이라는 시간을 소비한 대 작업의 승리였다. 드디어 찾아낸 그것을 확인한 루페르스. 막연하게만 느껴지던 것을 눈으 로 확인할 수 있다는 희열에 차 오른 그는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 쓰면서 천천히 다가갔다. 그러나, 다가갈 수는 있었지만, 들어갈 수는 없었다. "그곳이 말로만 듣던 고대의 유적이었던 거군요." "응, 그랬던 거야." 루페르스가 말해주는 '고대 유적을 찾아서' 기행을 듣고 있던 훼이드리 온이 이해가 됐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고, 루페르스도 적절히 맞장구를 치며 말했다. "고대의 유적은 대부분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트랩이 설치되어있지. 그래서 유적 입구에서 막혀버린 난 '역시 고대 유적으로 들어가는 건 힘 들군.'이라고 여기고는, 일단 집으로 돌아왔어. 그런데, 뭔가 이상하더군." "뭐가요?" 아이가 서둘러 물었다. "내가 유적으로 들어가려 했을 때, 날 가로막던 장애물은 단 하나, '막' 뿐이었어. 강한 마력으로 뭉쳐진,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강력한 '방어막'이 말이야. 그건 실로 '보호장'('막'이 방패라면 '장'은 전신갑옷이 라 할 수 있다) 수준이었어. 하지만 이상하다는 사실에는 전혀 변함이 없 지. 게이트 산맥 깊숙이 숨어있는 그 유적은, 그 위치만 보더라도 얼마나 중요한 곳인지 짐작할 수 있어. 그런데, 입구를 막고 있는 게 '방어막' 뿐 이라니, 이상하지 않을 리가 없잖아?" 루페르스의 기다란 대답을 듣는 동안, 훼이드리온과 아이는 서로의 눈동 자를 한번 마주쳐보는 과정에서, 서로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둘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입을 연 건 훼이드리온이었다. "그렇긴 하군요. 제가 듣던 바로는 고대 유적이 발견되면 입구에서부터 엄청난 트랩이 설치되어있다던데. 방어막 하나 뿐이었다면 정말 이상하네 요. 혹시, 그 막에 다른 마법이 걸려있던 건 아닙니까?" "내 기억력을 믿어준다는 전제 하에 대답하지. 그건 입구를 막는 의지 밖에는 가지고 있지 않았어." 고대 유적의 입구를 막고 있는, 어울리지 않는 방어막. 짐짓 진지한 얼 굴이 되어버린 루페르스를 따라, 훼이드리온과 아이는 덩달아 얼굴을 굳 혔다. 그런 시답잖은 거짓말을 할 정도로 황당한 성격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적어도, 진지해야할 때는 진지할 수 있는 정도의 성격인 루페르 스. "아하하, 뭐, 나도 내 기억력은 믿지 못하겠지만 말이야." 다만, 그 진지함이 지속되는 시간이 별로 길지 못하다는 것이 그의 단점 이었다. 나름대로 무게를 가지고 있던 분위기를 단 한순간에 가차없이 파괴시켜 버린 난동자는 자신의 죄를 전혀 자각하지 못한 얼굴로 싱글 웃으며 말 을 이었다. "하지만 어쨌든, 그 유적은 꽤나 특이했어. 그래서 그 후로, 열심히 거기 를 조사해나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크나큰 사실을 깨닫게 되었지." "제 카드와 관련된 것인가요?" 훼이드리온은 허리춤에 걸려있는 주머니를 풀어야겠다고 생각했고, 루페 르스는 그의 카드를 한번 더 봤으면 좋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물론, 그래." "여기요." 루페르스의 표정을 읽은 것인지 그가 조심스레 테이블 위로 주머니를 올렸고, 갈색이 생생하게 빛을 발하고 있는 그 주머니를 지그시 내려다보 았다. 역시 들었던 대로였다. 그는 현재 수도 라시안트의 왕성에서 일을 벌이고 있을 500년만의 반란자를 생각하며 남은 설명을 해나갔다. "그 유적의 보호막은 어떤 열쇠가 있어야지 풀리도록 되어있었어. 어그 러지고 뭉치고 흩어진 마력들 때문에, 보호막의 의지를 읽는 게 결코 쉬 운 건 아니었지만, 절대 틀리지는 않아. 보호막을 통과하면서 어떤 열쇠, 혹은 증표 같은 것을 소지하고 있어야 입구로 들어설 수 있는 거야. 하 아, 힘들었다고, 정말." 미르가 자신은 전혀 모르는 이야기라는 듯이 무표정하게 아버지를 바라 보고 있는 모습을 봐서 소년이 태어나기도 전인 한참 전의 일임이 분명 했지만, 루페르스는 방금 전에 겪은 일인 듯이 이마에서 땀을 훔쳐냈다. 생각만 해도 땀을 흘리는 것을 보니, 당시 고생을 심하게 했다는 것을 쉽 게 짐작할 수 있었다. 충실한 서브 마스터인 마기가 허공에서 손수건을 만들어내 마스터에게 건넸다. 그는 그것을 고맙게 받아들어 땀을 한 차례 닦아낸 후, 숨을 크 게 들이쉬고 설명을 이었다. "그러니까, 그 고대 유적의 입구를 막고 있는 보호막을 통과하려면 어떤 특정한 열쇠가 필요한데…" "그 열쇠가 이 카드라는 말씀입니까?" "그렇지." 훼이드리온이 말 중간에 끼어 들었지만, 그는 그렇게 기분 나쁜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이 해줄 말을 대신해줘서 고맙다는 생각을 하고 있 었다. 아이가 여전히 의문이 가득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그녀의 말이 향하 는 목적지는 루페르스의 두 귀였다. "어떻게 그렇게 자신하는 거죠? 아까 전처럼 그냥 넘길 생각하지 말아 요. 정 안되면, 신법으로 카드를 읽어버리는 수도 있으니까." "…라고 하는군. 어쩌지, 훼온 군?" "그 전에 여쭈고 싶은 질문이 있습니다." 아이의 질문을 그대로 훼이드리온에게 떠넘기려는 술수가 그의 말로 간 단히 무마되었다. 루페르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테이블 위에 놓인 갈색주 머니의 끈을 당겨 가져왔다. "얼마든지." "네. 이야기를 들으면서 추측해본 것인데. 혹시… 그 유적이 대마도사와 관련된 곳인가요?" "정확해." 그는 빙글 웃으며 주머니 속에서 카드를 한 장 뽑아들었다. 모두의 시선 이 그 카드에 쏠렸다. "밝혀도 되겠어?" "…여기까지 와서 숨기는 게 더 이상할 거 같은데요." "좋아, 그럼 밝히지. 아이 양?" 아이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네." "훼온 군이 가지고 있는 카드는 말이야. 오래 전에 만들어진 카드라고 단순하게 치부해버릴 수 없어. 왜냐면 말이지." 그의 눈이 잠시 훼이드리온에게 향했다가, 다시 미소를 떠올리며 아이를 바라보았다. "대마도사 페인트 라시엔트가 만든 카드이기 때문이야." "……." "안 놀라워?" "……에에?" 너무 놀라운 일을 만나게 되면, 가끔 비명 지르는 것조차 잊어버릴 때도 있는 법이다. 아이는 충격적인 발언을 하는 루페르스에게 '정말이에요?'라는 눈짓을 보냈다. 그는 "그래."라고 친절히 대답을 해줘, 그녀가 침착하게 뒤로 쓰 러지는 것을 도와주었다. 황급히 아이를 부축하는 훼이드리온. 아찔한 순간을 경험한 탓에 하얗게 질려버린(원래 하얀 피부에서 더 하얘진) 피부를 급격히 본 상태로 돌리 며 벌떡 일어났다. "그럼, 그 유적이 대마도사가 남긴 것이란 말인가요!" "그렇다고 할 수 있지." 그녀는 흥분의 도가니에서 헤엄쳐 다니는 듯한 기분이 되어버렸다. "그럼 그동안! 대마도사의 카드와 같이 여행을 다녔다는 거잖아!" "…지, 지금은 내 소유인데……?" "어쨌든! 대마도사가 만들었잖아!" 단숨에 자신의 마스터 카드에 대한 소유권을 박탈당한 훼이드리온은 인 생에 비관을 느끼며 연신 "그럼 마법사들만이 카드의 주인이잖아……"라 고 중얼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이는 간단히 그것을 무시하고는 계속 소리쳤다. "와아, 신기해! 이렇게 가까이에 대마도사의 흔적이 남아있었다니! 아, 아차! 나 이거 만져봐도 되지, 훼온? 응? 응?" 흥분을 해버리자, 성격이 에타와 흡사해지는 그녀였다. 훼이드리온은 어 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루페르스에게서 주머니를 받아 그녀 에게 넘겼고, 그녀는 "꺄아, 고마워어!" 소리침과 동시에 박수까지 쳐댔 다. 식당 안이 그녀 하나로 인해 온통 시끄러워졌고, 에타는 자신의 과거를 전혀 모른다는 듯한 태도로 그녀를 흘겨보고 있었다. '시끄럽잖아!' 그래 도, 자신도 소리치면 더 이상의 대화가 불가능하다는 것은 알고 있는지 힘을 내 자제하고 있는 모습이 아이보다 어른스러웠다. 덕분에 미르는 오 른팔에 굉장한 고통을 받아야했다. 그런 소란 속에서, 훼이드리온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루페르스의 남은 이 야기를 들으려고 그에게 말했다. "그 고대의 유적은 대마도사 페인트 라시엔트가 만든 것이고, 그곳으로 들어가려면 그가 직접 창조한 마스터 카드, 그러니까 제 카드가 필요하 다. 그러니, 여정을 바꾸어 유적으로 가더라도 동행해주었으면 좋겠다, 라 는 말씀인가요?" "정리를 잘 하는군. 맞아, 그거야." 루페르스는 고개를 끄덕여 답하면서 시선을 멀리 돌렸다. 창문을 지나 저쪽에 서부를 극서부로 가르고 있는 게이트 산맥의 모습이 일부 그의 눈으로 들어왔다. "내 욕심일지도 모르지. 대마도사의 유적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그런 소 망 때문에 훼온 군을 귀찮게 하는 건지도 몰라. 그러니까, 거절해도 난 아무 말하지 않겠어." 마기가 의미있는 눈길을 마스터를 향해 보내고 있는 가운데, 루페르스는 빙긋이 미소지었다. 잠시 생각하던 훼이드리온은 간단히 입을 열어 그에게 답변을 알려주었 다. "좋아요. 동행할게요. 대신, 대회에는 지장 없는 거겠죠?" "무, 물론이야! 허락해주는 거야?" "네." 루페르스는 당장이라도 달려갈 태세로 몸을 뒤로 젖히며 호탕하게 웃어 댔다. 훼이드리온이 승낙해줬다는 사실이 엄청 기쁜 눈치에, 훼이드리온 도 기분 좋게 웃었다. 그가 마기를 바라보며 한마디했다. "말려야하지 않을까요?" "아." 마스터의 기분에 동조하다시피 웃고 있던 마기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루페르스에게 손을 뻗어 그가 진정할 수 있도록 도왔다. 한참을 웃어버린 그는 그녀의 손길을 따라 점점 웃음을 멈추더니, 이윽고 땀을 닦아내며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아하하, 이거 참. 근래에 이렇게 기분 좋게 웃어본 적은 또 처음이군. 아무튼, 받아들여줘서 고마워, 훼온 군." "뭘요. 저에게도 도움이 되는 일이니, 당연합니다." "흠? 훼온 군에게도?" 루페르스와 마기의 눈빛이 묻고 있었다. '그게 뭔데(무엇입니까)?' 훼이드리온은 난감한 듯이 뒷머리를 매만지다가 간단히 결심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여행을 시작하면서 마스터 카드에 대한 모든 것을 알아내겠다, 라는 목 적을 세웠어요. 그리고 여기까지 오면서 여러 의문과 지식을 쌓았고요. 환상의 카드, 대소환사 카드라든지, 10대 마스터 카드라든지 하는 것들. 아직 의문은 많이 남아있어요. 더 알고 싶은 것도 많고요. 그래서 마스터 카드에 대한 자료가 있을 법한 곳이라면 어디든지 가고 싶은 게 제 심정 입니다. 그 유적이 정말 대마도사와 관련이 있다면, 어떤 작은 힌트라도 찾을 수 있겠죠." 마스터 카드에 대한 그의 집념은 강했다. 그것은 일상의 지루함을 잊게 해준 물품에 대해서라면 당연한 것. 그는 마스터 카드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싶었고, 그렇기에 왕성 비밀창고의 봉인된 방이 아닌 대마도사의 또 다른 흔적, 유적에 가고 싶었던 것이다. "정말이죠, 그 유적?" 훼이드리온은 확인하듯 질문했다. 루페르스는 마기와 잠시 눈을 맞춘 후 옅은 미소를 띄며 답했다. "믿어 줘." 미소짓고 있지만 여전히 탁한 그의 검은 눈동자를 잠시 응시하던 훼이 드리온은 이윽고 진하게 웃어 보였다. ------------------------------------------------------------------ 냐앙. 늦은 69편입니다. 아하하.; 때려주세요.;; 카마 1권을 받았습니다. 두 분께 보내드려야 하겠죠. 늦어도 월요일까 지는 발송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냐하하. 카마 1권이 꽤 반응이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에? 헛소문 아니냐 구요? 뭐, 헛소문이라도, 팀군은 좋답니다. :) 제 이름이 적힌 책을 받아 드니, 뭘 해도 좋을 것 같은 기분이거든요. 덕 분에 아직도 헤벌쭉거리고 있습니다. 오호호홋.;;; 냐하하..; 그럼. 70편은 좀 더 빨리 가지고 오겠습니다아.; 꾸벅. 어둠의 기사 DARK KNIGHT TEAM... P.S 추천 감상 비편. 받아요, 받아! P.S GO CAMA 번 호 : 53 / 53 등록일 : 2000년 12월 25일 22:32 등록자 : ZPTGATE4 조 회 : 5 건 제 목 : [카드 게임 판타지]『카드 마스터(Card Master)』#070 카드 게임 판타지(Card Game Fantasy) 카드 마스터(Card Master) 70. "흠. 그럼, 난 서둘러서 다녀올게. 그 사이에 준비를 다 끝내라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루페르스를 마기가 뒤따르며 그의 옷을 털고 정리를 해주었다.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곧, 아이와 에타의 표정이 장난스럽게 변해갔다. "같이 사는 것 같은데, 무슨 사이에요?" "응?" 아이는 헤죽 웃었다. "단순한 관계가 아닌 거 같은 모습이라서요. 애정이 듬뿍 듬뿍 묻어난다 고 할까요?" "애석하게도 아닙니다." "그래요?" "그렇습니다." 아이가 그렇게 말하는 마기를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유를 들자면, 그녀 가 뭔가 바쁘게 시선을 돌려 루페르스를 문밖으로 밀어내고 있어서였다. 등을 떠밀며 재촉하는 마기를 이해할 수 없다는 눈치인 그였지만, 그들 에게 인사를 하는 것은 빼먹지 않았다. "준비 다 하고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줘." "네. 알겠어요." "부탁해요, 루페르스!" "맡겨둬." 싱글싱글 웃으며 대답하는 루페르스는 미르를 한번 쳐다보더니, 이내 몸 을 돌려 식당 밖으로 나갔다. 마기도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라는 인 사와 함께 그를 따라 사라졌다. 그들이 나간 후에야, 훼이드리온은 저들 이 먹은 아침 값을 치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채고는 싱겁게 웃어버렸 다. "흠, 그럼 우리도 준비하자. 루페르스 씨가 돌아오면 바로 떠나야할 테 니까." "응, 그래야지. 자, 훼온." 아이는 만지작거리기도 지칠 만큼 만져댄 훼이드리온의 마스터 카드를 주머니에 넣어 돌려주었다. 그것을 받아들며 의자에서 일어난 그가 카운 터로 가 값을 치르는 동안 아이와 미르, 에타도 테이블에서 일어나 그를 기다렸다. 그러다 문득, 에타가 미르에게 물었다. "뭐라고 말했던 거야, 아버님이?" 조금 전 미르를 바라본 루페르스의 눈빛이 평범하지 않다는 것 정도는 쉽게 알아챌 수 있는 에타. 미르는 "내 아버지가 너에게 왜 아버님이라고 불려야하는 거지?"라고 묻고 싶었지만, 왠지 뒷감당을 할 수 없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어 짧은 한마디만을 던졌다. "나간다." 할 일 없이 카운터에서 뒹굴거리고 있던 크로스라는 종업원에게 네 명 분의 아침 값을 치른 훼이드리온이 걸어오고 있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아이가 급히 고개를 돌렸다. "어딜?" "…잠시." 질문의 의도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대답을 하여 그녀를 당황하게 만 든 소년은 일말의 여유도 주지 않고 몸을 돌렸다. 소년을 잘 알고 있는 에타조차도 그 동안의 경험을 토대로 말을 걸려했지만, 이미 소년은 사라 져있었다. 마침 훼이드리온이 다가왔다. 그의 눈은 황망히 사라진 미르의 자취를 뒤쫓듯 식당의 문을 향해 있었다. "어딜 간 거야?" "몰라, 대답도 안 하고 나가버렸어. 뭐, 한두 번이어야지." 미르에 관해서는 해탈의 경지로 들어서려 하는 아이의 관조적 태도에 훼이드리온은 깊은 감명을 받아, 그녀와 공명했다. "뭐, 곧 오겠지." 에타만이 불만스러운 듯 두 볼을 크게 부풀린 채 무언의 항의를 하고 있었지만, 둘은 싱글 웃으며 식당을 나섰다. "등산하기 참 알맞은 날씨로군." 하늘을 무심히 올려다보는 루페르스의 모습은 자신의 할 일을 모두 잊 어버린 듯한 느낌을 주었다. 그가 있는 곳은 게이트 마을이 아니었다. 식당에서 나오자마자 마기와 헤어져 공간이동으로 아크릴 영지에 도착한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는 벌써 아크릴 영주의 저택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저택의 정문이 보이는 뜰에서 새삼스레 푸른 하늘에 대한 경외심을 표 현해보고 있던 루페르스의 시선이 차츰 아래로 내려오더니, 2년 전에 만 났을 때보다 한층 더 밝아진 저택의 분위기를 느꼈다. 위대한 마법왕국 라시엔트의 영광스러운 태자가 거쳐간 곳이라는 건 아주 잘 알고 있는 그는, 이윽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싱긋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정문 옆으로 날카롭게 생긴 미청년의 모습이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루페르스 폰 에르히스트님." 2년 전이나 지금이나 주군에 대한 충성심을 뚜렷하게 느낄 수 있을 정 도로 단단한 그가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는 모습에 루페르스는 옅은 미 소를 지었다. 그는 한 손을 머리 정도로 들어올렸다. "여어, 잘 있었어?" 뮤트리드는 그에게로 걸어가 그의 앞에 섰다. "2년만이군요." "그래, 그렇군. 시간이란 금새 지나가 버린다니까." 세상을 지배하는 개념들 중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시간'이라는 것 에 전혀 얽매이지 않는 성격임에도, 그는 시간을 책하는 태도로 일관했 다. 뮤트리드는 흔하지 않게 미소를 띄웠다. "길튼은 잘 있어?" "네, 잘 계십니다. 이리로 오시죠." 루페르스는 먼저 앞장서서 저택의 정문으로 향하는 그의 뒤를 따라 걸 어갔다. 오랫동안 검을 수련해온 기사답게 루페르스의 시야 정도는 간단 하게 가려버리는 그의 덩치. 루페르스는 갑자기 길튼이 무지하게 부러워 지기 시작했다. "들어오십시오." '저런 듬직한 기사가 충성을 다해 모신다면 어떤 기분일까나……'라고 한참 생각 중이던 루페르스는 뮤트리드의 말에 꿈쩍 놀래버렸다. 뮤트리 드가 "왜 그러십니까?"라고 물었고, 그는 미처 준비도 하지 않았으면서 사정없이 머리를 흔들었다. 덕분에 목뼈가 뻐근해져 한참을 주물러야했 다. "…아니시라면 상관없습니다만…… 목은 괜찮으십니까?" 뮤트리드는 루페르스의 갑작스런 과민반응에 당황하면서도 그가 걱정스 러운 듯이 물었다. 루페르스는 힘겹게 끄덕이더니 차츰 찡그렸던 인상을 폈다. 그리고 곧 다시 허리를 펴 바로 서서 뮤트리드가 안내해주길 요구 했다. 뮤트리드는 주군의 중요한 손님이신 루페르스가 걱정되었지만, 조 심스럽게 문을 열어 저택 안으로 진입했다. 그의 등을 보면서 루페르스는 새삼스럽게 마기를 생각하게 됐다. '마기라면 이때 주물러줬을 텐데…….' 자신이 생각해도 관계가 묘한, 그렇지만 아직까지도 한 집에서 살고 있 는 마법사 길드의 서브 마스터인 그녀가 떠오르자, 갑자기 그리워지기 시 작하는 루페르스. 그녀에게 가지는 자신의 감정이 어떤 것이든, 지금은 그녀의 존재가 무척이나 그리웠다. 그런 그가 심지어 "마기이!"라고 부르짖기 위해 입을 벌리려고 할 즈음, 그의 상태를 알아챘다는 듯이 뮤트리드가 몸을 돌리며 말했다. "여기입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아? 아, 알았어." 뮤트리드는 작게 고개를 숙이고는 짙은 고동색이 칠해진 광택이 나는 문안으로 들어갔다. 그 사이 루페르스는 한껏 바보 같아진 자신에게 가공 할 만한 욕을 날렸다. '돌덩이 머리를 가진 마법사!' 머리가 좋은 편에 속하는 마법사의 머리를 돌과 비교를 하는 것은 크나 큰 욕이다. 헛생각만 작작 해대고 있는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할 정도로, 그는 자신이 한심했다. 하지만 더 문제인 것을 들자면. '마기가 기다리겠군. 빨리 가야겠어.' 아무리 반성을 해봐도 금방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루페르스는 조금 전에 헤어진 마기를, 누군가 보면 몇 개월 동안 만나지 못하는 연인을 기다리는 사람이라고 생각될 태도로 그리워하며 머리를 털었다. 그러나 곧 그런 마음도 사그라들었고 드디어 장소에 어울리는 상 념이 떠오르는 순간. "루페르스 님. 들어오십시오." 그 상념을 가차없이 깨부수며 귀로 들어오는 뮤트리드의 낮은 목소리. 후다닥 정신을 수습하며 루페르스가 열린 문으로 들어갔다. 탁.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루페르스는 "호오……" 감탄하며 방안을 경이 로운 눈빛으로 둘러보았다. 태자가 이곳에서 떠난지도 별로 되지 않았는 데, 방안의 분위기는 2년 전과는 정말 판이하게 달라져있었다. 가장 쉽게 느낄 수 있는 것은, 바로 채광도. 어두컴컴해서 맘에 들었던 실내는 창문을 뚫고 들어오는 투명한 햇살을 애써 막지 않아서 상당히 밝았다. 이 방이 이렇게 밝아질 수도 있구나, 라고 생각할 정도로 말이다. 게다가, 창문에 달려있는 연한 색상의 커튼도 방의 분위기를 따스한 느낌 으로 바꿔주는데 일조하고 있었고, 깔끔한 아이보리색의 책장들과 작은 테이블도 너무 잘 어울리는 배치를 이루고 있었다. 너무나 달라진 그 모습에 탄성조차 내지를 생각을 못하고 있던 루페르 스는 자신을 부르는 낯익은 목소리에 겨우 제정신을 찾을 수 있었다. 뮤 트리드는 이미 밖으로 나가있었기에, 방안에 있을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 다. "오랜만입니다, 마스터." "흠, 그렇지? 정말 오랜만이야, 길튼." 피골이 상접한 축에는 끼지 못하는 정도만 마른 얼굴에 온화한 미소를 띄우고 있는 아크릴 영주의 본명을 친근하게 부르며 루페르스가 인사했 다. 길튼은 책상에 일어나며 보고 있던 서류를 정리하여 옆으로 치워놓 고, 책상을 돌아 나왔다. 그는 친절하게 손을 내밀어 루페르스에게 자리를 권했다. 루페르스가 반 가운 듯이 쇼파에 자리하자, 자신도 쇼파에 몸을 묻으며 말을 건넸다. "이렇게 찾아오실 줄은 몰랐군요, 정말. 연락이라도 미리 하시지요. 충분 히 준비했을 텐데 말입니다." 루페르스는 시선을 이리저리 옮기며 대답했다. "많이 변했군. 2년 전의 흔적은 정말 찾아볼 수가 없는데?" "하하, 그렇게 됐습니다." "그가 찾아왔지?" 그는 다른 곳을 향한 시선으로 물었고, 길튼은 그가 말한 '그들'을 생각 하기라도 하듯이 조금 초점을 흐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얼마 전에 마스터가 말씀하셨던 대로 찾아왔었습니다. 떠나고 나서 야 눈치를 챘지만." 길튼은 2년 전에 자신의 저택으로 불쑥 찾아온 루페르스가 했던 말을 기억해내며 슬쩍 미소를 지었다. 2년이란 시간동안 너무나 바쁘고 처참하 게 살았던 탓인지, 그가 말한 존재가 자신에게 찾아왔는데도 잊어버리고 있다가 떠난 다음에야 알아챈 사실이 조금 우스웠다. 하지만 내색은 하지 않고, 겉으로는 다른 질문을 꺼냈다. "어떻게 아셨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2년 전 그때부터 궁금했던 것을 이제야 떳떳하게 물어볼 수 있게 된 자 신의 상황을 그는 진심으로 축복했다. 루페르스는 그제야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여전히 길튼을 바라보지는 않 았고, 아직도 방안을 구경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그 상태에서 그저 그 렇게 답을 해주었다. "그냥 알고 있었을 뿐이야. '어떻게?'라고 물어봤자 대답은 '나도 몰라.' 니까 괜한 질문은 안 해도 돼." "흠, 그렇군요. 잘 알겠습니다." 비꼬는 투가 아닌, 그냥 있는 그대로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자세였다. 길 튼은 알고 있었으니까, 마법사 길드 마스터 루페르스 폰 에르히스트는 신 비스러운 점이 많다 못해 핏줄까지 신기할 정도라는 것을. "잘 했지?" 길튼이 루페르스에 대한 이런저런 소문들을 생각해보고 있을 때, 루페르 스의 시선이 갑작스레 다가왔다. 그는 서둘러 대답했다. "뭘 말씀이십니까?" "그 말이야, 그. 훼온 레이엔트. 물의 정령왕 에리피느 카드를 줬던데." 길튼은 즉각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전 고마움의 표시로 주었던 건데, 혹시 실수였습니까?" 루페르스는 고개를 저어 그의 걱정을 부정했다. 그가 금새 표정을 풀며 안정된 숨을 내쉬었다. "괜찮아. 아주 적절한 건 아니었지만, 나쁘지는 않았으니까. 그걸로 그는 더욱 강해졌을 테지." "마스터가 뭘 생각하고 계시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잘못한 게 아니 라니 다행이군요." "그래, 그래." 온몸에 뒤덮인 검은 색의 행렬과는 조금 어울리지 않는 미소를 지으며 루페르스가 또 다시 고개를 돌렸다. 금방 바뀌어버린 분위기가 그에게는 아주 산뜻하고도 재미있게 다가온 모양이었다. "그런데 어떤 일로 오셨습니까?" "뭐야, 기억 못하는 거야? 2년 전에 분명히 약속했었던 걸로 알고 있는 데." "네?" 아크릴 영주는 당황한 표정으로 열심히 머리를 굴리며 기억을 검색했다. 그의 앞에서 루페르스가 "쯧쯧." 혀를 차며 입을 열었다. "젊은 사람이, 아니 젊은 건 아니군. 아무튼, 기억나지 않아? 2년을 기다 려서 그를 만나주는 대가로 내가 라일리의 병을 고쳐준다고 했잖아. 정 말, 2년 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정확하게는 몰라도 매우 힘들게 살았나보 군." "…아아, 그렇군요. 이제야 기억이 납니다." 분명히 2년 동안 기다리는 조건으로 병을 고쳐준다는 약속을 했던 적이 있었다. 그런 중요한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던 자신의 두뇌에 또 다시 저 주 어린 경외를 표하며 길튼이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그거 때문에 여기까지 직접 와주신 거군요." "흠, 사실 부탁이기도 하지." "네?" "훼온 레이엔트. 그가 부탁하더군. 정확하게는 일행인 어떤 소녀지만, 별 상관은 없겠지? 그가 부탁했어. 아크릴 영주의 외동딸이 병으로 고생하고 있는데 고쳐달라고 말이야." 그의 말을 들은 길튼은 고마움으로 가슴이 벅찰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정말로 약속을 지켜주었던 것이다. 게다가, 마법사 길드 마스터라는 아주 유능한 마법사를 보내주다니. 길튼은 이 예상치 못한 결과에 너무나 행복 해짐을 느꼈다. 비록 2년 전의 약속이 먼저라고는 하지만, 그들이 해준 행동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속으로 진심을 다해 짧은 인사를 했다. '고맙네.' 루페르스는 길튼의 마음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야릇한 미소를 띄우더 니 몸을 일으켰다. 길튼의 시선이 그를 따라 움직였다. "자, 가자고. 지금 좀 바빠서 말이야. 서둘러 치료하고 가야돼." "아, 네. 알겠습니다." 길튼은 급히 몸을 일으켜 그를 안내했다. 서재에서 빠져나가 계단을 걸 어 한층 더 올라가서 그 층의 중간쯤으로 이동했고, 짙은 고동색이 연한 에메랄드 색의 문 앞에 도착하자 그들은 걸음을 멈추었다. "이곳입니다. 제 딸의 방은." 다른 문들과는 달리 은은하고 예쁜 색으로 치장된 그 문을 물끄러미 바 라보던 루페르스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문손잡이를 잡았다. 소음 없이 말끔하게 열리는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고, 햇살로 만들어진 이불을 덮 은 채 편안한 얼굴로 잠들어있는 어린 아이의 모습이 그의 검은 눈동자 에 투영되었다.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히 방으로 들어온 둘은 침대 옆에서 라일리를 내 려다보았다. 길튼이 조심스럽게 손을 움직여 딸의 머리카락을 베개 위로 내려주자, 루페르스가 되도록 목소리를 작게 내려고 애쓰며 말했다. "표정이 많이 좋아졌군." 2년 전, 이미 병에 시달리고 있던 라일리는 척 봐도 '심한 병이구나' 짐 작할 수 있을 만한 혈색과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픈 와중 에서도 아주 평안한 혈색과 모습을 하고 있다. 루페르스는 감탄한 듯 한 마디 더 던졌다. "평안해 보여서 다행이야." 자고로 아이들은 건강하고 즐겁게 커야한다, 라는 건 대륙의 거의 모든 성인들이 가지고 있는 관념이다. 루페르스도 그 '거의'에 속하는 인물이었 다. 비록, 자신의 자식은 관념대로 키우지 못했지만. 루페르스는 한동안 더 라일리를 내려다보다가 치료를 시작하겠다는 듯 이 로브를 걷어 팔을 꺼냈다. 딸을 걱정스럽게 내려다보던 길튼도 그의 행동에 마지못해 뒤로 물러섰다. "이 병이 무엇인지는 얘기 들었지?" "네. 그의 일행이던 소녀가 말해주더군요. 직통 혈연으로 이어지는 조건 저주…라더군요. 마법사가 아닌 저로서는 잘 이해되지 않는 말이긴 합니 다만, 마스터가 와주셨으니 별 상관은 없는 거겠죠." "확실히 그렇기는 하지만, 아버지 되는 자로서 들어는 둬야겠지?" "그렇습니다." 손을 걷어 옅게 그을린 팔을 드러낸 루페르스는 곤히 자고 있는 라일리 의 뽀얀 이마 위에 손을 올렸다. 자는 중에도 손으로 전해지는 따스한 체 온이 느껴지는지 라일리는 조금 앙탈을 부리며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 모습을 빙그레 띈 미소로 바라보며 그는 의지를 일깨워 천천히 마력 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라일리의 피에 걸린 저주를 풀려는 그의 의지에 맞춰, 공간 가득히 담겨 있던 마력들이 웅웅 소리를 냈다. 물론 그것은 마법사인 루페르스에게만 들리는 소리였다. "마법적 저주라는 것은 마법사가 부정적인 효과를 발휘하는 의지를 어 떤 것에 새겨 넣는 거지. 그건 마스터 카드에 영구한 의지를 새기는 것과 비슷해. 이렇게 새겨진 의지는 마력을 움직여 마법을 발현하고, 의지에 따라 발현되는 마법의 종류도 다르지. 영구하거나 일시적, 혹은 이 저주 처럼 조건적이라든지." 그의 손에서 퍼져 나온 하얀 색의 빛은 차츰차츰 라일리의 작은 몸 위 로 퍼져나갔다. 이불 따위는 상관없다는 듯이 차분히 마법을 발현시키고 있는 그와 라일리를 번갈아 바라보는 길튼의 표정이 다분히 걱정스러운 빛을 띄우고 있었다. 아무리 믿을 수 있는 마법사라고 할 지라도, 걱정이 안될 수가 없는 것이다. 루페르스는 온몸을 쓰다듬듯이 퍼지는 빛을 바라보며 계속 설명을 이었 다. "라일리는 직통 혈연 중 여성에게만 해당되는 조건저주에 걸려있어. 마 법적 효과라면, 물론 이렇게 시름시름 앓는 거지. 음… 저주를 풀기 위해 서는 근본적인 것, 즉 새겨져있는 의지를 없애야해. 능력이 좋은 마법사 일수록 의지가 강하게 새겨지는데, 이 조건저주의 경우에는 무지무지하게 엄청난 실력을 가진 마법사가 새긴 거야. 전에 얘기해준 이야기 속에 나 오는 마법사 있지? 공공연히 밝혀진 바지만, 그 마법사를 보고 사람은 대 마도사 페인트 라시엔트라고 하더군. 뭐, 믿든지, 말든지." 길튼의 얼굴이 창백해져버렸다. 마법사의 실력이 좋으면 좋을수록 의지 가 강하게 새겨진다면서, 그 마법사의 정체가 대마도사일지도 모른다고 그는 말하고 있는데, 어찌 편안히 있을 수 있겠는가. 그는 불안함에 루페 르스에게 뭐라고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루페르스 쪽에서 미리 눈치를 챈 듯 먼저 입을 열었다. "내 실력이 아무리 마스터 직책에 어울릴 정도라고 해도 대마도사에게 도 못 미친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애석하게도, 그건 사실이야. 나도 인정 하지, 그건. 하지만, 걱정 마. 이 저주의 의지는 다행스럽게도 많이 약해 져있으니까." 아이가 설명해준 이유대로 저주의 의지는 약해져있었다. 마법을 사용하 던 중에 그것을 알아챈 루페르스는 직접 자신 있는 표정까지 지어서 땀 을 닦아내던 길튼을 안심하게 해주었다. 길튼은 굳은 얼굴이었지만 조금 전보다는 매우 나은 상태가 되었다. "흠, 이 정도면 준비 작업은 되겠고, 이제 본격적으로 해봐야지?" 루페르스가 잠시 손을 거두어 빛을 없애더니 지그시 라일리를 내려다보 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침대 옆에 무릎을 꿇더니 라일리의 이마를 정이 담겨있는 손길로 쓰다듬기 시작했다. 쓰다듬은 보통보다 조금 오래 계속 되었다. 길튼이 저주를 풀 생각은 하지 않고 라일리의 머리를 쓰다듬기만 하는 그의 행동에 의아함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지금 뭐하시는…" 하지만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루페르스는 무릎을 털며 일어나 뒤로 돌아섰다. 개운하게 할 일을 마친 후의 사람들이 짓는 미소가 그의 입가 에 떠올라있었다. "끝났어. 이제 저주에서 해방이야." 라일리의 몸을 지배하고 있던 저주의 의지. 그것을 몇 번의 쓰다듬으로 해결했다고 말하는 루페르스로 인해, 길튼은 정신적인 혼란을 겪어야만 했고, 그가 간신히 질문을 생각해냈을 때는 이미 루페르스가 말하고 있던 중이었다. "…자네 몸에 아직 남아있는 저주의 의지도 제거하는 게 좋을 거야. 난 저주의 피해자를 고쳤을 뿐이지, 본체를 고친 건 아니거든. 실력 좋은 마 법사를 만나서 그것도 꼭 없애길 빌지." 루페르스는 빙긋이 웃으며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무언가를 발견한 듯한 그의 눈빛을 보며 벌써 몇 번째 말할 기회를 놓친 길튼은 서둘러 질문했다. "그럼, 그것도 마스터가 없애주시면 안되겠습니까?" 이제야 제대로 된 타이밍에 질문을 하게된 길튼이 일종의 성취감을 만 끽해보고 있던 중에, 다시 길튼에게로 시선을 돌린 루페르스가 김빠지는 답변을 남겼다. "내가 왜?" "네?" "난 분명히 약속대로 이행했어. 난 라일리를 치료해준다고 했지, 자네까 지 치료해준다고는 안 했다고. 내 말 틀려?" 분명히 틀리지는 않았다. 그래서 길튼은 뭔가 억울한 기분이 될 수밖에 없었다. 뭔가 아닌 것 같지만 논리적으로 허점을 발견할 수 없기에, 그 기분은 더욱 깊었다. "뭐, 이제 자네가 날 위해 해줄 일은 다 끝났다고. 그를 만난 것으로 모 두 끝났다는 거지. 알겠어? 난 어디까지나, 내가 원하지 않으면 아무 것 도 하지 않아." 자신이 생각해도 자신의 성격을 너무나 잘 표현한 어구였다고 생각되는 루페르스는 자화자찬을 하며 이야기를 돌렸다. "자, 잘난 난 이만 가보지. 그와 에코까지 동행하기로 해서 말이야. 빨리 가봐야 해. 그를 기다리게 하면 안되지. 음, 당연히 안되지." 조금 과장되게 몸을 흔드는 그를 향해 길튼이 한번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 내리고 질문했다. "하나 물어도 되겠습니까?" "음, 얼마든지. 하지만 별로 시간은 많지 않아." 짧은 숨을 한차례 쉬어보며 그는 약속이 생각난 시점부터 의문스러웠던 물음을 꺼냈다. "그는… 그 훼온 레이엔트라는 소년은 대체 누구이길래 마스터가 그렇 게 신경을 쓰시는 것입니까?" "알고 싶어?" "물론입니다." 루페르스가 장난스레 짓고 있는 미소는 길튼을 당황하게 만들었지만, 결 코 지워지지는 않았다. 그는 그 표정을 유지하며 담담히 대답했다. "지금, 왕성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알아?" "…왕성에서 일어나는 일?" "그것과 깊은 관련이 있어." 길튼은 '때려죽여도 절대 이해 못합니다.'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더 이상 의 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루페르스가 짓궂게 의문만 증가시키는 알쏭달 쏭한 대답을 해놓고는 "그럼, 이만."이라는 인사만을 남긴 채 즉시 사라 져버렸기 때문이다. 공간이동으로 그곳에서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루페르스를 허망하게 떠올 리며 길튼이 조심스레 한숨을 쉬었다. 2년 전이나 지금이나,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은 여전했고, 또한 묘한 분위기도 여전했다. 거기다 난해하기 이를 데 없는 말까지. 길튼이 미르의 존재를 알았다면, '부전자전'이라는 어휘를 진리로 받들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는 약간의 소란에도 신경 쓰지 않고 잠들어있는 딸을 내려다보았다. 라일리는 치료 전보다 훨씬 더 평온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어서, 그로 하여금 안심할 수 있게 만들었다. 새삼스레 마스터가 고마워지는 길튼 디 아크릴 영주. '마지막 질문에 정확하게 답을 해주셨으면 더 감사했을 지도 모르는 일 입니다만 말입니다.' "뮤트, 거기 있나?"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조금 크게 말하자, 문밖에서 대기 중이던 뮤트리 드가 곧 문을 열고 등장했다. "부르셨습니까." "왕성에서 근래에 무슨 일이 있는지 좀 알아봐 주게. 뭔가 중요한 일이 있는 듯하군." 비록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왕성에서 근래에 있었던 큰 일이라면 태자의 성인식 뿐이었다. 그게 루페르스와 어떠한 관련이 있는지 알 수 없는 그 는 몹시 궁금해하는 눈치로 뮤트리드에게 다시 당부했다. "이왕이면 빨리, 그리고 정확한 정보를 원하네." 뮤트리드는 그런 주군의 심리 상태에 동조하듯 단단히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 현재 시각, 4시 30분. 물론 새벽입니다.;;; 여태껏 자지도 않고 글만 쓰고 있었군요. 냐하하.;;; 개디에셀 상태가 안 좋아서 늦게 올릴 것 같습니다. 영 접속도 안되 는 게, 이거 정말 바꾸기라도 해야하는지, 원. 중얼중얼... 71편에서 뵙겠습니다.(^^^) 어둠의 기사 DARK KNIGHT TEAM... P.S 추천 감상 비평. 환영입니다. 주기만 하세요.(^^^) P.S 2 GO CAMA P.S 3 그러고 보니. 70편이었군. :) 번 호 : 55 / 55 등록일 : 2000년 12월 29일 01:08 등록자 : ZPTGATE4 조 회 : 2 건 제 목 : [카드 게임 판타지]『카드 마스터(Card Master)』#071 카드 게임 판타지(Card Game Fantasy) 카드 마스터(Card Master) 71. 때론 눈빛 하나로 모든 대화를 할 수 있다. 물론 그건 맘이 잘 통하는 사람들끼리만 가능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 눈빛만 있으면 되기에 편리하기는 엄청 편리하다. 미르와 루페르스. 두 사람도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10년 동안 헤어 져 있다가 겨우 만난 부자 관계인 두 사람은 10년이란 시간의 틈을 뛰어 넘고서 마음이 통했다. 무엇보다, 10년이란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 닮아버 린 둘의 모습이 그것을 입증할 증거가 된다. 그리고 더욱 더 확실한 증거를 들자면, 루페르스가 떠나기 전 남겼던 찰 나의 눈빛에서 그의 마음을 알아챈 미르가 현재 그가 있는 곳으로 향하 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제의 피로는 어느새 잊어버렸는지 미르의 몸짓을 가볍기 그지없었다. 대륙 동부 말로 '용'을 뜻한다는 이름을 가진 소년은 그 이름에 어울리는 움직임으로 셀라드리엔 강 서쪽의 평야를 질주하고 있었다. 세상에 자신 을 막을 것이라고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거침없이 달리는 소년의 모습 에서는 가장 깊은 희열이 느껴졌다. 온몸을 스쳐 지나가는 날카로운 바람이 들려주는 교향곡을 무심한 얼굴 로 감상하고 있던 미르는 그 음에 뭔가 새로운 것이 담겨졌다는 것을 알 아챘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바쁘게 움직이고 있던 다리를 조금 쉬 게 할 참인지 속력을 천천히 늦추면서 미르는 그것을 느끼려고 잠시 눈 을 감았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시원함'이었다. 바람의 깃털 중에서도 가 장 시원하게 쓸고 지나가는 느낌. 그리고 뒤따라 느껴지는 '상쾌함'의 이 미지도 소년을 기분 좋게 했다. 미르는 천천히 눈을 뜨며 탁한 검은 눈동자로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저 앞에서부터 순식간에 자신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 도시의 모습. 그리고 그 것을 넘어서 이어지는 시원한 바람의 깃털. 그 모든 것을 느끼면서 소년 은 다시 거세게 돌진하기 시작했다. 셀라드리엔 강의 기운을 머금은 바람 이 또 다시 소년을 지나쳐 사라져갔다. 셀라드리엔 강 유역에 자리 잡은 도시들 중 단연 크고 특색 있는 도시 인 셀라디안에 도달하자마자 잠시 멈췄다가, 이내 하늘 높이 퉁겨 올랐 다. 그리고는 고층 건물의 지붕 위를 아주 익숙하게 날아 목적지로 향했 다. 소년에게 있어서 도심 한복판을 질주하는 것보다는, 건물의 지붕을 밟고 달려가는 게 더 속이 편하고 쉬운 방법이었다. '흐음.' 별로 의미 없는 소리를 속으로 되씹으며 소년의 발이 5층 짜리 건물지 붕에 닿았다. 리드미컬하게 척추를 구부리며 간단히 충격을 흡수한 다음,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다음 건물로 이동했다. 휘이잉. 소년의 몸이 잽싸게 허공을 날았다가 다시 내려앉는다. 어제도 달리고 오늘도 달리는 중이라, 어째 이 시간을 무료해지고 있던 미르는 나루터 가까이에 서있는 고층 건물에 내려앉으면서 조심스레 조 금 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식당을 나서기 전, 아버지가 자신에게 보낸 눈길은 분명히 '따라 오너 라.'였다. 어떻게 아버지의 메시지를 알아챈 것인지는 소년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쨌든 그렇게 이해해버리고 곧 뒤따라 식당을 나왔다. 아버지 는 공간이동이라도 했는지 이미 사라져있었고, 소년은 무표정하게 동쪽을 바라보다가 이내 달려나갔다. 그리고 지금은, 어느새 셀라디안까지 와있 는 것이다. '10년 동안 헤어져있었어도, 부자는 부자란 말이지.' 아버지와 아들. 그런 뜻을 나타내는 단어를 생각하며 미르는 속으로 피 식 웃어버렸다. 10년 전에 자신을 버린 아버지. 아들이 암살자가 되어 찾 아갔음에도 전혀 놀라지 않고 웃었던 아버지. 10년 만에 제대로 다시 만 나자, 이번에는 알 수 없는 말을 늘어놓는 아버지. 대체 어떤 속을 숨기 고 있는지는 몰라도, 어쩔 수 없는 아버지였다. 죽어도 끊을 수 없는 혈 연으로 이어진 단 하나의 가족. 태어날 때부터 어머니는 없었던 터라 기 억나지도 않았다. 지금도 아버지의 옆에 있는 마기라는 여인이 가끔 기억 속에 떠오르기는 하지만, 희미할 뿐 별 다른 의미는 없다. 결국, 미르의 어릴 적 과거를 차지하고 있는 자는 아버지, 루페르스라는 이야기이다. 그러한 이유로, 미르는 자신을 발견하여 보살펴주는 암살자 길드 마스터 가 "암살자가 되지 않겠냐?"라고 물었을 때, 거절하지 않았다. 암살자가 된다면 대륙을 쉽게 돌아다닐 수 있게 되고, 그건 미르도 원하는 것이니 까 말이다. 아버지가 자신을 버린 그 시점부터 가지고 있던 의문을 풀어줄 인물은 아버지밖에는 없다. 그래서 그를 찾아야한다는 게 미르의 생각이었다. 암살자가 된 후부터 줄곧 훈련과 실전을 쌓으면서, 미르는 대륙을 돌아 다녔다. 그리고 아버지를 찾았다. 조금이라도 기억나는 생김새라든지 목 소리 같은, 단서가 될 만한 것은 기억 속에서 모조리 긁어내어 그를 찾았 다. 하지만, 끝끝내 그를 찾을 수 없었고, 미르는 포기하고 싶어지는 절망적 인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때, 마스터가 의뢰를 알려준 것이다. 마법사 길 드 마스터를 죽여라, 라는 지명을. 목표가 게이트 마을에 있다는 것을 안 미르는 한달음에 달려갔다. 자신 도 자각하지 못하는 중에, 무언가에 이끌리듯이. 그리고 그 마을에서 소 년은 발견하고 말았다. 7년 전에 헤어진 아버지를 말이다. 그러나, 그가 의뢰의 목표라는 것을 알고는 혼란스러워 하다가 결국 아 버지와 한판 붙게 되고, 미르는 금방 패배하게 된다. 실력의 차이는 어쩔 수 없었다. 아버지는 다시 찾아오라고 말하며, 수수께끼 같은 말을 남겼 다. 그리고 3년 후, 미르는 아버지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10년 분량의 기억들을 한순간 회상하고 있던 미르의 눈으로 셀라디안 나루터를 떠나 강 중앙으로 향하고 있는 대형 선박이 들어왔다. 유유히 물살을 헤치면서 나아가는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소년은 이내 자리를 털고 일어나 우뚝 섰다. 은신술의 극치에 달해있었기에 지나가는 누군가 가 보더라도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미르는 잠시 몸을 웅크렸다가 그대로 뛰어올랐다. 건물이 잠시 흔들거리 는 것 같더니 작은 먼지를 군데군데에서 피어 올렸다. 그러나 그 장본인 은 이미 하늘을 유영하여 강 중앙의 배로 날아가 버린 후였기에, 범인 찾 기는 이미 물 건너간 소리였다. 슈욱. 탁. 그 엄청난 거리를 별로 강렬하지 않은 두 개의 의성어로 표현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미르는 갑판에 발을 디디자마자, 선수루가 만들어낸 그림자 속으로 숨어 들어갔다. 사람들은 뒤늦게 불어오는 바람을 강바람으로 착 각한 채 머리카락을 넘기며 즐거워할 뿐, 소년의 등장은 전혀 알지 못했 다. 선수루 밑 그림자에서 잠시 쉬던 미르는 검은 눈동자로 주위를 둘러보 았다.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개중에는 친한 부자 사이로 보이는 남자와 꼬마도 보였다. 미르는 그들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수염이 덥수룩한 사내가 아들처럼 보이는 꼬마를 목마 태우고 같이 강 을 구경하고 있었다. 아들은 호기심 그득한 눈으로 강을 쳐다보며 소리쳤 고, 아버지는 맞장구를 치며 즐겁게 웃었다. 누가 봐도 사이 좋은 부자였 다. 미르는 자연히 자신의 아버지, 루페르스를 떠올렸다. 검은 색의 머리카 락과 검은 로브, 게다가 생김새까지. 자신과 아주 꼭 닮은, 아버지가 아니 라고 하는 게 더 어색한 모습이었다. 자신과는 다르게 조금은 어벙한 게 문제이기는 했지만, 그 정도야 마기라는 유능한 보좌관으로 인해 보충할 수 있기에 무시된다. 그들 부자와 저 부자 사이에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미르와 루페르스는 저런 기분 좋은 추억이 없다는 사실이다. 기억나지 않는 아주 어릴 적 시 절은 빼고, 10여 년 정도의 기억 속에서, 아버지를 안고 떠들고 웃는 모 습은 찾아볼 수가 없다. 기억 자체가, 추억 자체가 없는 것이다. 미르는 순식간에 어둠과 동화되어, 또한 침울해졌다. 부자라고는 하기에 는 너무 어색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그들, 미르와 루페르스. 소년은 어둠 속에서 아버지를 생각하며 눈동자를 굴렸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을까. 다시 고개를 든 미르는 그림자 밖으로 살짝 고개를 빼 배의 진행 방향 쪽, 동쪽을 바라보았다. 희미하기는 하지만 쌍 둥이 도시 중 하나인 셀라드인이 보이고 있었다. 미르는 다리에 묻은 먼 지를 툭툭 털어 내고는 지체하지 않고 배 밑으로 뛰어내렸다. 배는 강 위 로 움직이다, 라는 기본적인 사실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듯한 모습이었 다. 풍덩, 따위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대신, 찰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수면 위를 달려가는 검은 인영의 모습만이 남았다. 미르는 배에서 뛰어내려 수면에 발을 디딘 후, 물 속으로 가라앉기 전에 수면 위를 달려나간 것이다. 말이 쉽지, 실재로는 결코 쉬운 행동이 아니 었지만, 소년의 모습은 아주 자연스러웠다. 검은 로브를 휘날리며 물 위 를 달려나가는 모습, 그것은 푸른 강물과 노란 태양의 축복 속에서 하나 의 완벽한 그림을 이루었다. 단숨에 셀라드인 나루터의 구석진 곳에 도착한 미르는 도시 안으로 뛰 어들어 건물이 만들어낸 그림자 속으로 숨어들었다. 습하고 악취가 나기 는 했지만 그렇게 신경 쓸 구석은 없었기에, 발에 묻은 물기를 대충 털어 내고는 즉시 그 장소를 피해 건물 위로 올라갔다. 올라갈 때는, 일부 사 람들도 해낼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벽을 타고 달려 올라가기'를 완 성했다. 셀라디안에서와 마찬가지로 건물의 지붕을 이리저리 뛰어다니자 조금 시간이 흐른 후 도시 외곽으로 나올 수 있었다. 물론 '조금'이라는 정도가 보통 일반인들에게는 '찰나'라는 것은 특별히 언급할 이유도 없는 당연한 말이다. 셀라드리엔 강 동쪽에 펼쳐진 드넓은 평원, 야드 평원. 몇 일만에 밟아 보는 평원의 모습에 도취될 틈도 없이 소년은 달리기 시작했다. 흔적을 남기지 않는 암살자 특유의 발걸음으로 허공을 날아가는 것 같이 돌진하 는 미르. 미르는 다리를 열심히 움직이며 속으로는 많은 상념을 해내고 있었다. '나에게 아버지란 존재는 무엇일까.' 10년 동안 제대로 얼굴도 보지 못했다. 그것도 어떠한 이유로 인해 일부 러 자신을 버린 것이고, 3년 전에 드디어 만났을 때는 아리송한 말만하면 서 헤어졌다. 그렇다고 어릴 적 같이 살던 때에 특별한 추억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피로서 이어진 관계. 가장 극단적으로 단순화하자면 소년 과 아버지의 관계는 그 정도였다. 미르는 자신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고 생각했다. 다시 생각해봐도 너무 황당한 사이였고,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마법사 길드 마스터 루페르스 폰 에르히스트가 아버지라는 것은 인정했 다. 그래서 아버지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다일까. 뭔 가 부족했다. 미르는 그 부족한 점 때문에 혼란스러웠고, 또한 아쉬운 것 이다. 잠시 고개를 흔들면서 미르는 생각을 정리해보고자 했다. '루페르스. 나에겐 아버지란 존재. 비록 아버지로서 해주어야할 일을 해 준 적은 극히 드물지만, 그래도 나에게는 아버지란 존재.' 여전히 머리가 아팠다. 대체 '부자'란 어떠한 관계인 것일까. 미르는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서서히 명확해지는 시선 중앙으로 우뚝 선 성벽이 두터운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 아크릴 영지의 성이 보였 다. 그리고 그 앞에는 검은 커튼 같은 것이 길게 휘날리고 있었다. 바람도 없다. 하지만, 바람에 흔들리듯 휘날리고 있었다. 소년은 천천히 속도를 낮추며 그것에 가까이 갔다. 어느 정도 거리가 가 까워지자, 소년은 그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아버지. 아버지는 내게 대체 어떤 존재인가.' 미르의 아버지, 루페르스가 검은 로브를 손으로 벌린 채 희미하게 웃는 얼굴로 그곳에 서있었다. 마치, 미르를 환영하듯이. 숨을 들이키는 길튼을 뒤로 하고 간단하게 공간이동을 해버린 루페르스 가 나타난 곳은, 아크릴 영지에서 그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앞과 옆 으로는 여전히 드넓게 펼쳐져 있는 야드 평원이 보였고, 뒤로는 아크릴 영지의 성벽이 굳건하게 대지에 박혀 늠름한 모습을 뽐내고 있었다. 그 성벽 앞에, 루페르스는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짧게 지나쳐 가는 바람에 큰 미련을 두지 않으며 루페르스는 전방을지 그시 바라보았다. 아크릴 영주의 외동딸, 라일리에게 걸려있는 저주를 푸 는 건 그다지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미르를 기다리는 시간은 비교적 길어질 것 같았다. 식당을 떠나기 전 던졌던 그 눈빛의 의도를 아들이 제대로 이해했을지 는 알 수 없었지만, 그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들은 자신을 찾아 이곳 으로 달려올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미르는 아크릴 영지를 향하고 있었 다. 푸르게 펼쳐진 초원은 가장 물기 오른 색깔을 천지에 뿌리며 그의 발 밑에 존재하고 있었고, 그는 바람 따라 꿈틀거리는 마력을 피부로 느끼며 눈을 감았다. 태어날 때부터 다뤄왔고, 곁에 있는 게 당연했던 마력과의 교류. 루페르스는 의지로서 마력을 강제하지 않았다. 마력과의 교류를 통 하여 마력과 직접 공명하여 움직이는 것. 대마도사 페인트 라시엔트가 주장했던 '마력의지론'에 해당되지 않는 마 법사가 바로 그였다. 어찌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능력은 핏줄을 통해 흘러오는 것이었 다. 루페르스는 그것을 자유롭게 사용할 의지와 마음이 있었기에 마법사 가 된 것이고, 미르는 마법이란 것을 원체 싫어하기 때문에 알고는 있었 지만 사용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3년 전 한번 싸웠을 때 루페르스가 마법을 사용한 것을 미르 가 눈치채지 못한 것이다. 미르는 마법사를 상대하게 되면 마법사의 의지를 느끼고 마법이 발현되기 전에 공격하는 것을 기본전술로 삼는다. 하지만 마법을 사용할 때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마법을 발현하는 루 페르스에게서 마력을 일깨우는 의지가 느껴질 리가 없다. 그렇기에, 미르 는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루페르스는 온몸을 감싸고 있던 검은 로브를 펼쳤다. 양손을 벌리자 속 에 입고 있던 검은 색의 타이트한 옷이 드러났지만 별로 상관하지 않고 그 상태를 유지했다. 로브는 검은 물결이 되어 천천히 흔들리기 시작했 다. 바람이 로브를 움직이는 것이 아니었다. 루페르스의 손길에 반응한 마력들이 이동하면서 만들어낸 조그만 충격에 로브가 흔들리는 것이었다. 로브 밑에서, 한 장의 상의를 통해 느껴지는 시원한 마력의 움직임에 그 는 머리 속이 상쾌해짐을 느꼈다. 아들을 만나면서 알게 모르게 느꼈던 부담감, 그리고 중압감. 미르를 따로 만나기 위해 기다리는 지금 이 시간 에 그것들은 더욱 크게 느껴졌다. 오랫동안 헤어져있었다고는 해도 아들은 아들. 혼자서도 잘 크고 있는 그 모습을 보면서 눈시울이 뜨겁게 달아오르지 않을 아버지가 세상 천지 에 어디 있겠는가. 루페르스는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은 채 태 연을 가장했다. 아직은 이르다, 아직은 아니다, 아직 많이 남았다, 라는 생각으로 스스로 를 자제하면서, 루페르스는 옅은 미소만을 지었던 것이다. 그도 참 불쌍 한 아버지였다. 아크릴 영주와 딸의 다정한 모습을 본 후로 더욱 침울해지는 기분이던 루페르스는 간질이듯 검은 상의를 훑고 가는 마력의 재롱에 그만 훗 하 고 웃어버렸다. 로브는 계속 든 채 바람을 느꼈다. 마력이 움직이는 것을 가장 쉽게 알아챌 수 있는 공기의 흐름을 느끼는 동안, 그래도 마음이 편 하게 가라앉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덤으로 쇄도해오는 감각. 본능적으로 감지되는 그것을 향해 루페 르스는 고개를 들었다. 익숙한 느낌의 무엇인가가 점의 형상으로 달려오 고 있었다. 땅에 퍼져있는 마력이 가르쳐주는 그 물체는. '카슈미르.' 그의 아들, 본명 카슈미르 폰 에르히스트였다. 카슈미르는 단숨에 그의 앞에 도달했다. 먼거리를 한걸음에 날아와서 소 리 없이 땅에 착지하는 소년의 몸짓이 참으로 가볍게 느껴진다. 루페르스 는 침울함을 모두 지워버린 미소 띤 얼굴로 아들을 맞이했다. "잘 찾아왔네?" 카슈미르는 간단히 고개만을 끄덕이고 로브를 정리했다. 온몸을 새까맣 게 뒤덮고 몸에 착 붙어있는 검은 로브는 바람을 막아주는 기능을 함과 동시에 루페르스와 동일한 분위기를 연출해내는 데 확실한 일조를 하고 있었다. 루페르스는 아들을 친근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아들아." 카슈미르는 은근한 눈빛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응, 아버지." 못난 아버지. 혼자 커온 아들. 10년 동안 어긋난 운명으로 서로를 바라 보는 것도 오랜만인 부자는 식당에서의 시간도 잊은 채 다시 물끄러미를 서로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머리 속으로 그동안의 기억들이 하나둘씩 재생되며 스쳐지나가기 시작 했다. 죽음 직전에 많은 사람들이 경험한다는 인생의 필름. 마치 그런 모 습으로 기억들이 새로이 깨어났다. 미르가 기억하지 못하는 아기 때의 모습은 루페르스의 머리 속에 남아 있었다. 무언가를 알게된 루페르스가 게이트 산맥을 뒤지다가 유적을 발 견하게 되고, 그 한참 후. 루페르스는 마법사 길드에서 어떤 여성을 만나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여 아이를 낳게 된다. 그러나, 그 여인을 아이를 놓자마자 건강 악화로 죽게 되었고, 루페르스는 동거 중이던 마기와 그 아이를 키우게 된다. 자신의 어머니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았는지 아기는 어느새 울음을 그치 고 무표정이 되어버렸다. 소년이 표정을 잃어버린 것은 바로 그때부터였 다. 루페르스는 어두운 곳을 찾아 들어가는 아이의 행동을 보고 '카슈미르' 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대륙 동부 지역에 전해지는 말로 풀이하자면 '검은 용'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그 말은 아이의 모습에 너무나 잘 어 울리는 모습이라, 루페르스는 아주 흡족했다. 그리고 '폰 에르히스트'라는 집안의 성을 붙여 시조를 알 수 없는 기이한 집안의 후계자를 탄생시켰 다. 그때부터 루페르스는 훗날을 위하여 준비를 차근차근히 해갔다. 자신의 아들이긴 하지만, 사랑스러운 아들이긴 하지만 뼈를 깎는 고통을 감수하 며 게이트 산맥 한구석에 버려 두었고, 후에 만날 만남만을 기약하며 모 든 시간을 참아냈다. 그가 얼마나 슬프고 고통스러워했는지는 그의 보좌 관, 마기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그가 결혼을 하여 아이를 낳을 때 보다도 더 전에 그와 같이 살고 있었으니까(결혼은 어떻게 했는지 참으 로 용하다). 루페르스는 아들을 지그시 바라보며 끊임없이 떠오르는 과거의 홍수 속 에서 헤어나올 수가 없었다. 미안하고, 애달고, 또한 서글픈 감정들이 혼 합되고 흔들려서 그의 마음을 축축이 젖게 만들고 있었다. "…카슈미르……." 드디어 불러보는 아들의 이름. 그 이름과 함께 속으로 누르고 있던 모든 한과 분이 솟아올라오는 것을, 루페르스는 똑똑히 느꼈다. 표정은 풀지 않으려 애썼지만, 작게 구부러진 입가의 근육이 씰룩대는 건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다. 그는 힘겹게 신음을 참다가 이내 여유를 가장한 눈으로 고개를 돌려 평 원 저 먼 곳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가느다랗게 흔들리고 있는 검은 눈동 자는 윤기가 없어 쉽게 드러나지는 않았다. 카슈미르는 자신의 아버지를 올려다보며 로브 자락을 손으로 쥐었다. 뭐 라고 말을 꺼내고 싶었지만, 이상하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식당에서는 그렇게 쉽게 대화를 나누었건만, 이렇게 단 둘이 있으니 입을 떼기조차 힘든 것이다. 소년은 자신의 상태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에게 있어 아버지란 존재가 어떤 것인지는 답을 찾기가 어렵다. 아 버지가 없어도 지금껏 잘 살아왔고 나름대로의 생활을 가지고 있다. 꼭 마법사 길드 마스터인 아버지가 없다고 하더라도 살아가는 데는 전혀 지 장이 없다. 그렇다면, 지금 아버지를 만나서 대체 뭐가 이득이 되는 것일까. 카슈미르의 머리 속에는 온통 그 생각 밖에 없었다. 근래에 이렇게 고민 해보는 것도 오랜만이라 머리를 돌려주는 것도 좋을 듯했지만, 지금은 그 렇게 싱거운 행동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후우, 어렵군.' 정말 어려운 문제였다. 이미 아버지인 자에 대한 아버지로서의 가치를 찾는다는 것. 자아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질문과도 맞먹을 정도의 난이도 인 문제에 소년은 작게 미간을 좁혔다. 일단 만났으니 뭐라고 말은 해야할 텐데,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카 슈미르는 아버지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시선을 느낀 루페르스도 곧 고 개를 돌려 아들을 바라보았다. 두 개의 흔들리는 검은 눈동자가 각각의 심연을 들여다보다가, 허공에서 마주쳤다. 작은 통함. 작은 느낌. 작은 공명. 10년 동안 헤어져있었고, 10년 만에 서로를 '아버지', '아들,'로 부를 수 있게된 두 부자는 그렇게 눈을 맞춘 채 한참을 정지했다. 그들이 서있는 그 공간만 시간 개념을 잃어버린 듯이, 흘러야할 흐름이 끊겨버린 듯이 멈추었고, 그 속에서 루페르스와 카슈미르는 작음 숨만을 토해냈다. 때론 눈빛 하나로 모든 대화를 할 수 있다. 그래서 더욱 감동을 주는 예도 있다. 그들은 조용히 서로를 바라보았다. 루페르스의 가슴속에서 요동치고 있 던 애절하고 깊은 심란의 고통은 언제부터인지 전혀 느끼지 못하도록 진 정되어 순하게 변해있었고, 카슈미르의 머릿속을 온통 헝클어놓는 악행을 거리낌없이 자행하고 있던 의문덩어리도 어느샌가 머리 저쪽으로 굴러가 박혀버렸다. 입을 열 필요도 없었다. 둘은 그냥 단순히 바라보기만 하고 있었다. 식 당에서처럼 얼토당토하지 않는 대답을 할 필요도 없었고, 들을 필요도 없 었다. 그저 똑같은 서로의 모습을 눈으로 관찰하며 느끼면 모든 게 해결 되었다. 휘이이잉. 작은 풀잎 하나가 그들의 발 밑으로 굴러갔다. 위넨스의 손길이 알려주 는 길로 굴러가는 그 풀잎에 맞춰서 카슈미르가 약속이라도 했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는 아버지다. 더도 덜도 아닌 아버지. 있는 그 자체로서 아버지인 아버지. 그것이 루페르스, 소년의 아버지였다. "그래, 아들아." 못난 아버지였지만, 계속 '아버지' 대접을 받아도 될 것 같았다. 무엇보 다, 아들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고, 아들의 음성이 그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카슈미르는 건조한 음성이었지만, 보통 느낄 수 있는 느낌을 결코 아니 었다. "나, 3년 전보다 많이 늘었어." "그런 것 같구나." 루페르스는 아들을 보면서 싱글거리고 웃었다. 카슈미르는 아버지를 보 면서 눈동자를 깜박였다. 그리고 어느 순간, 카슈미르는 아버지를 향해 달려들었고 루페르스는 달 려오는 아들을 향해 손을 들었다. 카슈미르의 단검이 로브 속에서 뽑혀 올라와 아버지를 노렸고, 루페르스 의 손을 따라 반응하는 마력들이 이루어낸 마법이 아들을 막아섰다. 3년 만에, 헤어진 지 10년 만에 이루어진 제대로 된 대화를, 그들은 눈 빛으로 해결하고는 부자간의 변함 없는 애정을 확인했다. 조금 과격한 방 법인지는 몰라도, 그들에게는 가장 최선의 방법이었다. "아버지, 간다." "얼마든지, 아들아." 마법과 단검. 아버지와 아들. 루페르스와 카슈미르. 그들은 이상한 부자 관계였다. <7장 '부자' 完> --------------------------------------------------------------------- 남들이 보기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부자 관계. 루페르스와 카슈미르. 어차피 그들은 자신들의 세계가 확고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관연한다는 자체가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나저나, 미르의 본명이 밝혀졌군요. 카슈미르 폰 에르히스트. 애칭이 미르.라는 것은 왜 그런지 아시죠? 어차피, 암살자 길드 마스터와 루페르스.가 아니라면 본명을 알고 있을 사람은 극히 드물긴 하지만. 에르히스트 집안의 핏줄의 비밀은 다음 장에서 밝혀질 겁니다. 과연, 1장 에 나왔던 이야기를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그 이야기가 언급된다면 한 번 확인해보시길.(^^^) 이로써 7장 부자.가 끝났습니다. 부자가 父子를 나타내는 거라는 건, 다 알고 계시죠? 설마 돈 많은 사람.이라고 착각하시는 분들은 없으시겠죠? 아하하. 어쨌든, 너무 늦어서 죄송합니다. 요즘은 글 적는 게 힘들다는 것을 아주 뼈저리게 늦기고 있는 중이라서 말이죠. 막판으로 달려갈수록 구성해놓은 내용들을 점검하느라 머리 아파 죽겠습니다아. 끝까지 제대로 진행이 되어야할 텐데... 에휴. 네에, 어쨌든 72편부터는 8장으로 들어가겠 습니다. 아무래도, 8장의 제목은 뭔지 다 아실 듯.(^^^) 8장 완결편이 올라 올 때까지 마음껏 생각해보세요. 어차피 뻔하지만.;;; 자아, 그럼. 길었던 후기를 마치고, 팀군은 가보겠습니다! 휘리릭~ 어둠의 기사 DARK KNIGHT TEAM... P.S 추천 감상 비평. 기다리고 있습니다아. 훼이님. 감사합니다.(^^^) P.S 2 GO CAMA P.S 3 카드 마스터 1권, 2권이 출판되었습니다.(___) 번 호 : 34 / 34 등록일 : 2001년 01월 02일 17:18 등록자 : 암음기사 조 회 : 51 건 제 목 : [카드 게임 판타지]『카드 마스터(Card Master)』#072 카드 게임 판타지(Card Game Fantasy) 카드 마스터(Card Master) 72. 훼이드리온, 아이로 이루어져있던 기본 일행에 미르가 끼어 들었고, 그 로 인하여 얼떨결에 에타라는 소녀까지 합세했던 여정은, 현재 마법사 길 드 마스터에 올라있는 루페르스라는 사내와 마법사 길드 서브 마스터인 마기라는 여인의 안내를 받아 게이트 산맥을 (유적 방문을 1차 목적으로 하여)넘고 있던 중이었다. 게이트 마을을 떠난 지 이제 만 하루가 지난 시간. 그들이 지나고 있는 곳은 빽빽한 나무들이 좌우로 주욱 늘어선 길의 어느 곳이었다. 그 모습 이 그 모습이고, 거기가 거기 같아 보이는 이 게이트 산맥의 등산로를 정 확하게 구분해낼 능력이 없는 훼이드리온은 길을 따져보는 생각도 언젠 가부터 집어치운 채, 기계적으로 앞서가는 이들을 따라가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길 안내역인 루페르스와 마기는 가장 앞서서 걸어가고 있었고, 중간에는 미르와 에타, 그리고 가장 후미에 훼이드리온과 아이가 뒤따라 가고 있었다. 마법의 숲에서의 기억이 새록새록 피어오르는 훼이드리온은 왠지 압력 이 느껴지는 이마를 오른손으로 어루만져보았다. 약간의 물기까지 느껴지 는 건 쉬지도 못하고 산길을 걸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 점에서는 별로 불평할 점을 느끼지 못한 그는, 새로운 시각으로 지금 상황을 해석하기로 결심했다. "거기 같아." 옆에서 훼이드리온과 별반 다를 게 없는 모습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던 아이가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어디?" 그의 시선이 잠시 등 뒤편, 동쪽에 머물렀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앞서 걸어가고 있는 미르의 산발 머리카락에 고정된 시선에 아이가 다시 "응?"이라고 물었을 때, 그가 답했다. "마법의 숲." 서가도 북쪽을 뒤덮고 있는 숲, 마법의 숲. 대륙 위에 존재한다고 알고 있지만 어긋난 공간으로 인해 그것조차 불확실한 미지의 숲의 이름이 그 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그녀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아래위로 천천히 움 직였다. "그럴 수밖에 없잖아. 이곳, 게이트 산맥도 마법의 숲과 비슷한 사정을 가진 곳인걸." 루페르스가 말한 대로 금역이 된 이유는 다를 지라도, 아이가 말한 것처 럼 사정은 비슷한 게이트 산맥. 훼이드리온은 그 산맥의 일부분인 흙바닥 을 부지런히 걸어 앞으로 나아가며 아이의 말에 대꾸했다. "응." 마력이 이상할 정도로 모여있는 마법의 숲을 들러본 적이 있는 훼이드 리온은 이 압박감이 어디서 비롯되는 것인지 아주 잘 알 수 있었다. 그것 은 게이트 산맥이 금역이 된 이유와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라, 잊을래야 잊 을 수도 없었다. "루페르스는 지금 우리가 찾아가는 유적 때문이라고 했지?" 아이의 말에 어제 게이트 식당에서 그와 나눈 이야기를 떠올리다가 서 브 마스터 마기, 식당의 주방장 호연과 종업원 크로스, 게이트 여관의 주 인 후실리이스와 나이나르에게까지 생각이 미쳐버린 훼이드리온은 상념 에 틈바구니에서 겨우 헤어 나와 무작정 뻗어나가려는 생각의 줄기를 힘 들게 잡아챘다. 짧은 한숨과 함께 그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것도 대마도사가 만든 유적 때문이지. 그러고 보니, 두 금역이 전부 다 대마도사 때문에 생긴 거네?" 뜻하지 않게 공통점을 찾아낸 훼이드리온은 고개를 등뒤로 다시 돌렸다. 나무에 가려서 보이지는 않지만, 실수로라도 다시는 들어가고 싶지 않은 숲이 저 방향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그는 책에 정신이 빠져 숲 으로 들어가 버린 한심한 추억을 들추다가, 마법의 숲에서 느꼈던 그 진 득한 마력의 느낌에 온몸에 새롭게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이 게이트 산맥에 진입할 때도 그랬다. 어제, 모든 준비를 끝내자 놀라 운 타이밍으로 미르와 함께 나타난 루페르스에게 주의사항("내 뒤를 부지 런히 따라와.")을 대충 들은 다음 본격적으로 등산을 시작했을 때, 훼이드 리온은 아이로부터 이상한 눈초리를 받아야했다. 별로 춥지도 않은데 몸 을 부르르 떨어버린 것이다. 이윽고 이상하고 황당한 것으로 생각이 미친 그녀가 두렵다는 표정으로 그에게서 점점 멀어지고 있던 중에, 그는 겨우 변명을 할 수 있었다. "느 낌이 이상해서 그럴 뿐이라고. 왜 계속 뒤로 물러가는 거야!" 그녀는 그 의 말을 듣고 몸을 비비꼬며 다시 다가왔지만, 이전의 거리를 회복하는 데에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훼이드리온이 몸을 부르르 떨었던 것은 진득한 그 느낌이 너무나 피부 에 익어서였다. 마법의 숲에서 이리저리 헤매면서 질리도록 느꼈던 그 느 낌이 이곳에서 다시 느껴지자, 잠자고 있던 감각이 깨어나면서 피부가 놀 란 것이다. 그래서 갑자기 한기가 몰아닥친 듯이 몸이 떨렸다. 물론 지금 은 또 다시 익숙해져서 별 반응은 없었지만, 그 대신인지 머리가 조금 지 끈거릴 뿐이었다. 마법의 숲에서 빠져나올 때쯤에 감지되던 마력의 느낌으로 돌아간 마력 들을 손으로 이리저리 흩으러보다가, 문득 그가 입을 열었다. "우리가 만난 게… 마법의 숲이었지?" 훼이드리온의 등에 매달려있는 무겁지 않을까 걱정하다가 '들어줘야지.' 라고 결심해보고 있던 아이가 화들짝 놀라며 엉뚱하게 대답했다. "으, 응? 뭐라구?" "우리가 마법의 숲에서 만났잖아." 그녀는 그제야 긍정의 고개 짓을 해주었다. "응, 맞아. 약간은 꼴사납게 만났지."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는지 그녀가 손으로 입을 가려 귀엽게 "쿡."하고 웃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훼이드리온도 즐겁게 미소짓다가, 천천히 앞으 로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앞서가면서 팔에 매달리는 에타와 티격태격 다 투고 있는 미르의 검은 뒷모습이 그의 푸른 눈에 잡혔다. 훼이드리온은 마법의 숲에서 전설의 종족인 붉은 오거를 만났고, 그들의 왕 오거 로드까지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대마도사의 친우였다고 하 는 검의 현자 샤렌 하르트였다는 것까지 알게 되었다. 결코 밝힐 수는 없 는 사실이라 지금까지 자신도 잊어버리고 말 정도로 떠올리지 않던 기억. 게이트 산맥에 들어와 마법의 숲까지 생각이 다다르자, 자연스럽게 그들 이 떠오르는 것이다. 그는 왼쪽 허리춤에 단단히 매달려있는 검을 슬그머니 잡았다. 타오를 것 같은 붉은 색깔과 그에 상응하는 강한 기운을 머금고 있는 검, 칼. 검 의 현자 샤렌 하르트가 직접 쥐어준 칼은 많은 도움이 되었다. 특히 야드 평원에서 피말라와 전투를 벌였을 때는, 이 검이 없었다면 아마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새삼스럽게 칼이 고마워져 만지작거리던 그는 원 주인 샤렌 하르트에게 도 속으로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지금은 다시 잠들어있겠지만, 어 쩌면 자신의 행로를 이 칼로 같이 느끼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었다. 그래서 그는 작게 웃어버렸다. 그 웃음을 본 아이가 적절한 크기의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녀의 얼굴 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었지만, 표정은 매우 밝았다. "그때 기억나지?" 아무래도 자신의 웃음을 잘못 해석한 거 같아 괜히 미안해지는 훼이드 리온. 그는 그냥 진하게 웃으며 주머니를 뒤적거려 손수건을 꺼냈다. "뭐, 뭐야?" 자신의 이마로 천천히 다가오고 있는 손수건을 불길한 눈빛으로 쳐다보 던 아이가 간신히 입을 떼어 말했다. 동요로 인한 목소리 떨림을 자제하 지 못한 그녀의 음성이었지만, 훼이드리온은 빙긋이 웃으며 손수건을 그 녀의 이마에 살짝 부딪히게 만들었다. 그리고 한마디함과 동시에, 그녀의 볼은 누가 불을 지르기라도 했는지 붉게 타올라버렸다. "땀. 닦아주려고." 그는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그녀의 이마에 매달려있는 땀들을 하 나씩 제거해나갔다. 미처 다른 행동을 취하지 못한 그녀는 붉게 피어오르 는 얼굴로 고개를 푹 숙여 나름대로 그의 행동을 막아보려 했지만, 그는 앞으로 걸어가면서도 손수건을 움직여 땀을 닦아주었다. 결국 그녀의 제 지가 아무 소용이 없게 되었다. "호오, 뜨거운데?" 선두에서 걸어가고 있던 루페르스가 어느새 그 모습을 구경하며 휘파람 까지 불어대고 있었다. 마기가 점잖게 뜯어말려 다시 앞을 바라보게는 했 지만 아이의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려하는 붉은 얼굴은 한층 더 농도를 더해버렸다. "내, 내가 닦을게." 루페르스의 예상치 못한 발언에 잠시 굳어버린 훼이드리온의 손에서 손 수건을 마침내 낚아챈 그녀는 스스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앞으 로 서둘러 걸어갔다. 잠시 뒤쳐진 그도 '내가 뭔가 잘못을 한 건가.'라고 생각해보며 서둘러 아이의 옆으로 다가갔다. 아이는 훼이드리온의 손수건으로 볼 위를 흐르던 땀을 살짝 훔쳐내며 예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조금 시간이 흐른, 마법의 숲에서 처음으로 훼 이드리온을 만났을 때. 약간은 꼴사납게 만남을 이룬 그때를 생각하며 그 녀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때도 훼이드리온의 잘생긴 얼굴에 조금 두근거리기는 했다. 하지만 결 코 사랑의 느낌은 아니었기에 같이 여행을 한다고 해도 별 일은 없을 줄 만 알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전개로 흘러갔다. 같이 여행하면 할수록 감정은 곤란한 방향으로 치달았고, 결국 다시 되돌 릴 수 없는 곳에 종착하고 말았다. 후회는 없었다. 언젠가부터, 정확하게 는 아크릴 영지에서부터 이 감정을 어떻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 기에 그녀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아이는 손수건을 내리며 곁눈질로 훼이드리온을 살폈다. 그도 느끼고는 있는지 숲을 연신 불안한 기색으로 둘러보고 있었지만, 아직 발걸음에는 힘이 넘쳤다. 이대로만 간다면 루페르스가 말한 대로 모레쯤에는 유적에 당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 사랑을 하기에는 아직 모자란 나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옛말 중 하나 인 '사랑에는 나이도 국경도 없다.'라는 말을 떠올려보면, 그런 생각도 꽤 나 어리석었다, 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감정이란 건, 특히 사랑이란 감정은 뜻하지 않게 찾아오는 경우가 허다하니까. 조금 죄를 짓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이젠 상관없었다. 감정 앞에서는 이성이든 현실이든 전혀 신경 쓸 여지가 되지 못한다. 적어도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믿고 있었다.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 자, 라는 게 어느새 그녀의 삶의 지표가 되어버렸다. 아이는 근심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맑은 얼굴을 들어 훼이드리온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손에 들고 있던 손수건을 내밀었다. "자, 여기 손수선." '내가 사랑하는 사람…….' "아, 고마워." 약간은 찡그린 얼굴에서 밝게 표정을 바꾸며 손수건을 받아드는 그의 모습에 아이는 별로 안 좋은 기분에서도 미소를 띄울 수 있었다. 사실 게 이트 산맥에 뭉쳐져 있는 마력은 일반인인 훼이드리온보다는 신관인 아 이에게 더 큰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그녀는 마법의 숲에서도 증명이 되 었다시피 그 영향을 별로 느끼지 못했고, 지금 이곳도 크게 다르지 않았 다. 물론 좋지 않은 기분은 마법의 숲에서와는 달리 하루동안 게이트 산 맥 안에 있었던 관계로 계속 자극이 유지되어서였다. 그럼 점을 충분히 자각하고 있는 아이는 훼이드리온이 걱정되기 시작했 다. 그의 얼굴에 떠올라있는 불쾌한 감정이 옅은 미소로 인해 많이 지워 지기는 했지만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걱정의 감정을 담은 음성으로 그녀가 물었다. "…기분… 많이 안 좋아?" "응? 아아, 조금. 마법의 숲에서 많이 익숙해졌거든." 마법의 숲에서의 경험이 그래도 많은 도움이 되고 있어서 안심이었다. 피부를 스치고 지나가는 진득한 느낌이 소름 돋기에 충분한 조건을 마련 하는 상황이었지만, 확실히 처음에 느꼈던 거부감보다는 많이 나았다. 그렇다고 빨리 벗어났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본능상, 싫은 것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건 당연하니까 말이다. "으, 싫어! 미르미르, 언제쯤이면 여기서 벗어날 수 있는 거야?" 날카로운 하이톤의 음성이 앞에서부터 날아 들려와 작게 소곤거리며 산 길을 걷던 둘의 정신을 말끔하게 깨워주었다. 주위의 사람들의 고막 상태 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소리를 질러버리는 소녀, 에타에게로 모인 시선이 제법 따가운 것도 같았지만, 에타는 전혀 상관하지 않고 계속 소리를 질 러댔다. "이이이! 싫다고, 이런 느낌! 뭐가 이래! 찐득찐득해서 금방이라도 미쳐 버릴 것 같단 말야! 으아악! 대체 언제 벗어나는 거야!" 금방이라도 폭주해버릴 태세로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며 발광을 해대는 에타의 모습은 너무나도 처절해 보였다. 그 모습을 보며, 그 비명을 들으 며 루페르스가 헛기침을 해댔고, 마기는 노골적으로 소녀를 노려보며 발 광을 제지하려는 시도를 해보았다. 물론 소용없었지만. 이 일행 중 에타의 발광은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의 한마디가 절실 해지는 가운데, 오랜 침묵을 깨고 그 인물의 입이 드디어 열렸다. "조용히 해라." "……으앙?" "시끄럽다." 미르의 무게 있는 한마디에 에타가 금방 조용해졌고, 훼이드리온을 비롯 한 나머지 일행을 경의에 찬 눈길로 소년을 바라보았다. 미르는 훼이드리 온이나 아이처럼 게이트 산맥의 마력에 눌리는 현상은 없는지(원체 무표 정이니 알 길이 없다) 예전보다는 평온한 모습이었고, 탁한 두 눈에서는 전에 없던 따뜻한 기운까지 감돌고 있었다. 불현듯 사라졌다가 예상치도 못하게 루페르스와 같이 나타난 미르에게 서 가장 달라진 점은 바로 그것이었다. 보통 인간이라면 겉에 가기에도 무서울 정도로 뾰족하고 날카롭고 차가웠던 기운이 어제 이후로 좀처럼 보기가 힘들었다. 차가웠던 분위기는 어느샌가 사라지고 남아있는 건 보 통 소년의 분위기. 똑같이 무표정이었지만 차라리 따뜻함 쪽이 더 어울릴 정도의 느낌이 소년의 몸에 깃들어진 것이다. '신기해.' 사라진 미르가 어떻게 루페르스를 만난 건지는 제쳐두더라도,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미르에게 저런 크나큰 변화가 인 것일까. 훼이드리온 은 심각하게 고민하는 표정이 되어 소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에타에 게 팔을 하나 붙들린 채로 한 마디 한 마디 티격태격 대고 있는 소년의 뒷모습은 전과는 크게 달라 보였다. '정말 알 수가 없다니까.' 전부터 그랬지만, 바뀌고 나서 더 알 수가 없는 미르를 향해 훼이드리온 은 통탄하며 고개를 저었다. 뭔가 생각하는 표정이 된 그에게 말을 꺼낼 타이밍만 잡고 있던 아이가 그때 입을 열었다. "훼온." "응?" 아이의 부름에 훼이드리온은 뒷머리를 긁고 있던 손을 내리며 고개를 돌렸다. 앞을 보고 있던 그녀의 눈길도 그를 향했다. "이상하지 않아?" "흠, 그렇지? 나도 느끼고 있었어." 훼이드리온은 아이의 물음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메마른 입술에 침을 적셨다. 생각이 통했다는 사실이 기쁜지 아 이가 엷게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다시 눈을 돌렸다. 그녀의 검은 눈동자 에서 뻗어 나온 시선은 미르…가 아닌, 에타의 주황색 머리카락에 고정되 었다. "에타는 왜 고집을 피워 같이 따라가는 걸까?" "에?" 난데없이 예상치 못한 말을 꺼내는 그녀를 향해 황당한 시선을 보내는 훼이드리온에게 그녀는 "왜?"라고 친절히 물어주었다. 뒤늦게 자신의 실 수를 깨달은 그는 서둘러 고개를 흔들어 방금 전의 상황을 없는 것처럼 무마시켰고, 그녀의 말을 재촉했다. '미르의 변한 모습이 이상하다, 라는 게 아니었구나.'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뭐가 이상하다는 거야?" "맞잖아. 에타는 게이트 마을까지만 동행하자고 했는데, 어제 말도 안 되는 고집을 부려서 에코까지 같이 가기로 한 거, 기억 안나?" "기억에 없는 건 아니지만, 그게 그렇게 이상한 거야?" "조금 수상하다고는 생각해." 훼이드리온은 어제의 기억을 오늘에 되살려보았다. 루페르스와 미르가 도착하고 모든 준비를 끝낸 상황, 식당에서 나온 아 이는 얼마 전의 약속을 기억해냈다. 에타는 게이트 마을까지만 동행하기 로 하고 일행에 합류했던 것이다. 그녀는 미르에게서 절대 떨어지지 않겠 다는 단호한 의지를 미르의 팔에 쏟아 붓고 있는 에타를 향해 질문했다. "에타는 이제 헤어질 때지?" 에타는 '그게 무슨 소리야?'라는 듯이 눈을 가늘게 뜨고 반박했다. "싫어! 미르가 가는 곳까지 끝까지 따라갈 거야!" "헤에. 뭔가 일이 있었던 거 아니었어? 게이트 마을까지만 같이 가기로 했었잖아." "그랬지만, 같이 갈 거야! 불만 있어?" 아이는 "응, 많아."라고 대답해주려다가, 마음을 고쳐먹었다. 일단은 소녀 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말할 기회는 주어야할 것 같았다. "나도 에타가 같이 간다는 사실에 별로 불만은 없지만, 그래도 타당한 이유를 말해봐. 게이트 마을까지 동행하는 것에서 왜 바뀐 거야?" 소녀의 대답은 간단하면서도 할 말 없게 만드는 말이었다. "흥, 알 거 없잖아." 훼이드리온의 기억이 옳다면, 에타의 대답을 들은 아이는 얼빠진 표정이 되어 장시간 굳어버렸던 걸로 기억되었다. 그 뒤, 최대의 적인 아이에게서 승리를 거두었고 훼이드리온을 비롯하여 남은 일행들에게 평화적으로(보기에는) 허락을 구했다. 그녀의 평화적(?) 인 방법에 도저히 당해낼 재간이 없는 그들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면서 허락했고, 결국 에타는 에코까지 동행하기로 결정이 난 것이다. "그게 그렇게 수상해?" 다시 한번 기억을 떠올려도 훼이드리온이 생각하기로는 그렇게 이상한 부분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의문스러운 얼굴로 아이를 쳐다볼 수밖에 없 었다. 그녀가 뚱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나도 생각해보면 아닌 거 같긴 한데, 이상하게 그런 느낌이 들어. 게이 트 산맥의 마력 때문에 신경이 예민해진 건가. 우웅." 결국 자신의 생각까지 의심하는 처지가 되어버린 아이는 자신의 긴 머 리를 손가락으로 비비꼬며 심각한 얼굴을 만들었다. 그 모습에 훼이드리 온은 피식 웃어버리고는 대답했다. "뭐, 미르를 좋아한다잖아. 오랜만에 잡았는데 더 같이 있고 싶은 거겠 지. 아이는 그렇지 않아?" "으, 응?" 갑자기 이야기의 맥이 자신 쪽으로 흐르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한 표 정으로 아이가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그는 다른 뜻은 없다는 순진한 얼 굴로 싱글싱글 웃으며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더 당황하게 되는 아이. "그, 그걸 왜 나, 나한테 물어보는 거야?"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은 게 당연하잖아…….' 얼굴이 화악 달아오르는 것 같아 차마 그렇게 대답하지 못하는 아이는 다시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그런 그녀의 반응을 이해할 리 만무한 훼이 드리온은 '얘가 왜 이러지?'라는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자신이 무슨 잘못을 한 건지 골똘히 고민하는 얼굴이 되어버렸다. 요즘 문득문득 저런 포즈가 되어버리는 아이가 자신의 어떠한 행동 때문이라는 것은 다행히 자각하고 있었던 탓에, 금방 결론을 도출해낼 수 있었다. '방금 질문이 곤란했던 건가…….'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당당해 보여도 아이는 아직 소녀니까. 그런 물음은 아직 부끄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뒷머리를 긁적이며 무심했던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며 훼이드리온은 침 묵하기로 했다. 여기서 더 말을 거는 것은 그녀로 하여금 오히려 더 당황 하게 만드는 일이 될 게 분명하다. 그래서 그는 앞으로 행동이나 말에 조 금 더 신경을 쓰자는 결심을 해보며 조심스럽게 그녀의 빠르기에 맞춰 계속 걸어갔다. 앞에서는 아이가 의심하는 대상인 에타가 미르에 매달린 채 여기저기를 둘러보며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고, 놀라운 인내심의 소유자인 미르는 가 끔 대답을 해주는 듯했다. 그 앞에서 일행을 이끌고 있는 루페르스는 계 속 좁아지고 있는 길에 대해서 마기와 심도 있는 토론을 벌였다. "언젠가 도로 정리를 해야겠어." "가능하겠습니까?" "안될 건 없지, 뭐." 훼이드리온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굳이 닦으려 하지 않고 하늘을 올려 다보았다. 나무들에 막혀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나뭇잎을 뚫고 군데 군데로 스며들어오는 햇빛들로 인해 그렇게 어둡지 않았다. 금역이라고는 하지만 마력으로 인한 괴상한 느낌말고는 특별히 이상할 곳도 없어서 여 정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조용한 게이트 산맥. 특별한 일 말고는 사람들의 발길을 허락하지 않는 그 금역에 6명의 여행자가 중심부로 향하고 있는 발걸음 소리가 나지막 이 울리고 있었다. --------------------------------------------------------------------- 흐아아아. 굉장히 오랜만이 72편입니다. 연말이 이렇게 큰 타격을 줄 줄 이야. 미처 생각지 못한 틈이었습니다. 으으. 4일이 마감인 관계로 당분 간 팀군은 초극필사적집필마감모드일 것으로 사료되는군요. 과연 마감을 지킬 수 있을 것이가. 하아, 힘들어요.(ㅠㅠㅠ) 어둠의 기사 DARK KNIGHT TEAM... P.S 추천 감상 비평. 환영입니다!(>.<) P.S GO CAMA 번 호 : 35 / 36 등록일 : 2001년 01월 02일 23:28 등록자 : 암음기사 조 회 : 132 건 제 목 : [카드 게임 판타지]『카드 마스터(Card Master)』#073 카드 게임 판타지(Card Game Fantasy) 카드 마스터(Card Master) 73. "누나, 갔어요." 뻗침머리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는 크로스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한차례 쓸어 올리며 고개를 뒤로 돌렸다. 노란 앞치마에 젖은 손을 문지르며 주 방에서 나오던 여인은 창문 밖으로 시선을 던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럼 우리도 준비해야죠?" "그래야죠." 노란 원색의 앞치마를 풀어 카운터에 던져놓은 호연은 자신의 머리카락 을 손으로 다듬으며 크로스에게 지시했다. "후시와 나르에게 말하고 와요." 크로스는 호연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대답을 대신하고는 문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가 문을 열기도 전에 문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으니. "갈 필요 없어, 벌써 왔으니까." 식당 문이 스르륵 열리면서 오랜만에 마법사 길드 최고 원로 지정 로브 를 걸친 후실리이스와 나이나르의 모습이 나타났다. 약간은 붉은 기가 도 는 로브를 걸친 후실리이스의 모습은 이제야 최고 원로의 위엄이 드러나 보였고, 그건 하늘색의 로브를 걸친 나이나르도 마찬가지였다. 호연은 그들에게 생긋 웃으며 인사했다. "일찍 왔네요?" "언제는 안 그랬나, 뭐." 후실리이스는 그녀를 피식 웃어주며 식당 안을 훑어보았다. 자신의 방에 서 소환한 로브를 크로스에게 건네주는 호연과 그것을 받아드는 크로스 의 모습 외에는 사람의 모습은 전혀 없었다. 나이나르가 갈색의 로브를 걸치는 크로스를 향해 "야, 그 헤어스타일은 좀 어떻게 안되냐?"라며 핀 잔을 주고 있을 때, 후실리이스는 호연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마스터하고 서브 마스터는 벌써 출발한 거야?" "방금." 나이나르에게 "내 개성이라고요. 신경 꺼요."라고 반박하는 크로스는 무 시해버리고, 호연은 대화를 이어나갔다. 앞치마 색깔보다 짙으면 짙었지, 결코 연하지 않은 노란색을 가진 로브를 걸치면서 그녀를 후실리이스에 게 물었다. "다른 사람들은요?" 후실리이스는 아무 테이블이나 골라잡아 앉은 다음, 창 밖으로 눈길을 던지며 무심히 대답했다. "곧 오겠지, 뭐. 세라야 고향에 갔고, 유리는 대륙 어딘가에서 점을 봐주 고 있을 테고, 큐트는 어딘가에서 자고 있을 테고. 레이 보고 깨우라고 해야겠군. 아무튼 좀 있으면 올 거야. 어차피 우리야 에코에 가면 되는 거 아냐? 준비는 서브 마스터가 다 해놓았을 테니." 후실리이스는 아직 오지 않은 마법사 길드 최고 원로들을 한 명씩 떠올 리면서 볼을 만지작거렸다. 볼 살을 빼보려고 했던 게 이젠 아주 버릇이 되어버린 행동. 그래도 볼 살이 쉽게 빠지지 않는다는 것은 그녀로서는 아주 비참한 현실이었다. 그때, 식당문이 조심스레 열리기 시작했다. 천천히 열리는 문을 향해 말 싸움으로까지 진화해버린 대화를 시끄럽게 나누고 있던 나이나르와 크로 스도 눈동자를 돌렸다. 조금 성격이 급한 나이나르로서는 가슴이 답답해질 정도로 천천히 열리 던 문의 틈에서 익숙한 얼굴이 슬며시 나타났다. 처음에는 동그랗게 놀란 눈이 되었다가 다시 안심하면서 웃는 얼굴이 되는 모습. 끝이 교묘하게 웨이브 진 머리카락이 갈색 섞인 검은 색이라 예쁜 모습을 연출하고 있 었다. "아아, 모여 계셨네요." 머리카락 색깔과 어울리는 갈색의 로브를 두르고 있는 그녀의 얼굴에는 순진한 미소가 띄워져있었다. 조심조심 문을 닫고 들어오는 그녀에게 후 실리이스가 손을 들어 인사했다. "와아, 피엘. 안녕!" "아아, 안녕하세요. 후실리이스님." 대인기피증이라고까지 불리던 옛 모습과는 정말 많이 나아진 모습으로 인사하는 피엘에게 후실리이스는 싱글거리며 미소를 띄웠다. 피엘은 호연 과 크로스, 나이나르에게도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고, 그들도 웃으면서 마주 인사했다. "세라는 돌아왔어?" "아, 아니요, 아직." 작게 하품을 하다가 묻는 후실리이스의 물음에 다소곳이 대답한 피엘이 호연이 내민 의자에 앉았다. 물론 그녀에게 감사히 인사를 하는 것도 잊 지 않았다. "이 사람들이 왜 이리 안 오는 거야? 전부 늦으려고 작정을 한 것도 아 닐 텐데." "했을 지도 모르죠."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후실리이스가 뒤로 고개를 휙 돌렸다. 눈길 끝에는 보라색의 로브를 쓰고 있는 원로 하나가 어느새 의자 하나를 잡 고 앉아있었다. 마법사 길드 최고 원로가 5명이나 모여있는 이 식당에 아 무런 기척도 없이 나타난 그 여인을 향해 크로스가 혀를 내둘렀다. "아아, 유리 씨. 언제 온 거예요?" "방금요." 언제나 지워지지 않는 스마일을 입가에 매달고 대답하는 여인, 유리. 훼 이드리온도 잘 알고 있는 그녀도 마법사 길드 최고 원로 중에 한 명이었 기 때문에 오늘 약속에 빠질 수 없는 사람이었다. 유리는 이들 중 최고령자인 후실리이스를 향해 물었다. "흠, 아직 다 모이지 않은 건가요?" "응, 그래. 좀 더 기다려보다가, 정말 안 오면 직접 데리러가야 할 지도 몰라. 한달 만에 소집인데 다들 왜 이리 늦는 건지." 겉으로 보기에는 가장 연장자인 듯한 호연이 살풋 미소를 띄우며 의자 에서 일어났다. "차나 한잔하겠어요?" 거절할 리 없는 그들은 모두 동시 에 고개를 끄덕였고, 호연은 그들의 취향을 머리 속에 떠올리며 주방 안 으로 들어갔다. "보자, 일단 중간 점검을 해보자고. 지금 온 사람들, 전부 이름 말해." "야아, 후시." "여긴 공식적인 자리야. 애칭으로 부르지마." "그래, 후실리이스." 뭔가 불만스러운 듯 궁시렁대면서 본명을 부르는 나이나르를 향해 후실 리이스는 "그래, 왜?"라고 대답해주었다. "그냥 네가 둘러보면서 확인하면 되잖아. 꼭 그렇게 해야겠어?" 후실리이스는 생긋 웃으면서 따스한 어조로 말했다. "맘에 안 들면 나이나르가 대표해. 어차피 우린 나이도 같잖아? 순전히 태어난 날짜가 3일 앞서서 내가 대표가 된 거지. 왜, 지금이라도 대표 자 리 양보할까?" "그건 아니지만." "그럼 그냥 따라줘. 대표의 말은 법보다 무거운 거야." 꼼짝없이 당하고 만 나이나르는 또 다시 뭐라고 궁시렁대기 시작했다. 후실리이스가 그런 그를 향해서 사납게 눈을 치켜 뜨자, 5년여의 연애 기 간과 1년 정도의 결혼 생활에서 터득하게 된 진리를 머리에 떠올리며 서 둘러 솔선수범 하였다. '후시는 화날 땐 엄청 무서워.' "마법사 길드 최고 원로 나이나르 엘레뮤크." "흠, 좋아. 다음." 크로스는 나이나르와 같은 테이블에 앉아있다는 이유 때문에 다음 차례 가 되었다. "마법사 길드 최고 원로 크로스 더체이트." "덧붙여, 희하한 헤어스타일이지." "개성이라니까요, 시비 좀 걸지 마요!" "내가 언제 시비를 걸었다고 그래. 사실이잖아." 또 다시 티격태격 말싸움을 시작하는 둘의 모습을 애써 무시하며 후실 리이스는 한숨을 푸욱 쉬었다. 30을 바라보는 나이를 가진 나이나르가 이 제 20에 근접한 나이인 크로스와 수준 맞게 놀고 있는 모습이 아내인 그 녀의 기분을 매우 서글프게 하는 것이다. 피엘이 이해한다는 듯이 측은한 눈빛을 그녀에게 만들어 보일 때, 유리 가 입을 열었다. "마법사 길드 최고 원로 유리. 성은 저도 모르는 거, 잘 아시죠?" "흠, 물론. 그럼 이번엔 나지?" 후실리이스는 목을 가다듬듯 길게 숨을 쉬고 말했다. "마법사 길드 최고 원로 후실리이스 러블리스. 참고로, 마법사 길드 최 고 원로 현 대표이지." 마지막 말에 무척이나 뿌듯함을 느끼는지 연신 싱글거리면서 웃는 후실 리이스. 그 뒤를 이어 자기를 말하는 피엘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 다. "마, 마법사 길드 최고 원로… 피, 피엘 세레니르……." "참고로 소심한 여인이지. 건 그렇고, 언제부터 이름이 피피엘이 된 거 야?" 짓궂게 묻는 후실리이스의 말이 이해되지 않는 듯이 피엘이 약간 발개 진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아니아니, 됐어." 바로 이해할 리 없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던 자신에게 질책을 가하며 후실리이스는 다음 차례를 찾았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 남은 최고 원로 호연은 주방에서 차를 준비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녀는 과연 호연에게 들 릴지 의문이었지만, 이름을 외쳐보기로 했다. "호…" "마법사 길드 최고 원로 호연. 안 불러도 되요, 후실리이스." 부르려는 의지를 막강하게 끊어버리며 주방에서 나오는 호연을 향해 후 실리이스는 '이런 일이 언젠가 있었는데……'하는 생각을 하며 허망한 눈 길을 보냈지만, 그녀는 생긋 웃으면서 쟁반을 들어 보일 뿐이었다. 향기 를 가득 담은 찻잔들이 그 쟁반 위에 둥근 대형으로 조신하게 서있었다. "디오느 차하고 미어츠 차예요. 피아드 차도 끓이고 싶었는데, 재료가 다 떨어져버려서 못 했네요. 미안해요, 유리." "그래요? 아쉽네요, 호연 만이 만들 줄 아는 피아드 차를 고대하면서 왔 는데." 유리의 대답에 호연은 그녀 앞에 미어츠 차를 내려놓으며 미안하다고 다시 사과했고, 그녀는 웃으면서 아니라고 답했다. 호연도 마주 웃으면서 쟁반을 들고 다른 원로들에게 하나씩 잔을 돌렸다. 사람들을 기다리던 만 남의 장 분위기였던 식당은 어느새 차를 마시며 여유를 탐닉하는 휴게실 분위기가 되어버렸다. 따뜻한 디오느 차를 목으로 삼키며 행복한 표정이 된 후실리이스는 늦 게 오는 사람을 위한 무지막지한 처벌을 제의했다. "우리가 차를 다 마시기 전까지 오지 않는 사람들은, 앞으로 한달 동안 호연이 끓인 차를 마시지 못하게 해버릴까?" "호오, 멋진 처벌이야. 그럼 늦는 사람이 아무도 없겠는데?" 나이나르가 맞장구를 쳤고, 호연은 싫은 표정을 떠올리지 않고 조용히 웃었다. 차를 끓이는 실력을 칭찬해주는 말인데 누가 싫어하겠는가. 피아 드 차가 아니라는 것에 작게 실망을 한 유리도 미어츠 차에 만족감을 느 끼며 한 모금 입에 담았다. 모두들 만족한 표정으로 차를 마시고 있을 무렵, 급하게 문이 열리며 누 군가가 멋지게 뛰어들어왔다. "으아아앗! 필리스 레이 루 리베카! 등장!" 노란 금발이 발목까지 길게 자라 있는, 굉장한 장신의 여인이었다. 여성 치고는 큰 편이 마기조차 간단히 넘겨버릴 듯한 키에 엄청 밝고 시끄러 울 것 같은 이미지의 그녀는 등장부터 시끄럽더니, 뒤이어 터져 나오는 말조차 과연 엄청난 소음이었다. "우와아아! 아직 이거 밖에 안 모인 거야? 사람들이, 사람들이! 이렇게 안모이면 어쩌자는 거야? 그렇지? 나 착하지 않아? 나 이렇게 일찍 왔다 구우! 이 정도면 엘프식 사고방식도 멋지게 고친 거지? 사실 엘프 모습으 로 오려고 했다가 인간 모습으로 왔다구! 이 모습으로 오면 더 빨리 올 수 있으니까! 나 대단하지? 우헤헤헤, 다 알고 있어!" 훼이드리온이 이 여인, 레이를 봤다면 이런 말을 했을 것이다. "에타의 누나일까?"라고. 후실리이스는 들어오자마자 떠들어대는 그녀의 입에 무한한 저주를 퍼 붓고 싶은 마음을 애써 누르며 말했다. 그녀의 손이 이마를 주무르고 있 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레이를 제외한 식당 안의 모든 사람들이 공감한다 는 표정이었다. "레이, 네가 예상외로 일찍 온 것에 대해서는 경의를 표하겠는데 말이 야. 시끄러우니까 그냥 조용히 않아서 기다려. 차라도 줄까?" 그녀의 가차없는 언변에 눌린 레이는 금방 시무룩한 표정이 되어 쪼르 르 걸어와 후실리이스 옆 의자에 폴싹 주저앉았다. 장신의 여인이 다리를 흔들며 의자에 앉아있는 모습. 마기나 호연이었다면 절대 어울리지 않을 모습이었지만, 어째 천진 난만 그 자체인 레이 그녀에게는 굉장히 어울리 는 모습이었다. "일단 소개부터 해." "아, 마법사 길드 최고 원로 필리스 레이 루 리베카! 덧붙여서 대륙에 나와있는 유일한 엘프지!" 필리스 레이 루 리베카. 네 가지 이름으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엘프식 이 름을 가진 그녀는 보다시피 엘프였다. 날개 달린 작은 요정의 모습을 하 고 있는 엘프의 형태와 전형적인 인간의 형태, 엘프는 그 두 가지 형태로 변할 수 있는데, 현재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레이는 그녀 자신이 소 개했던 대로 대륙에 나와있는 유일한 엘프였다. 게다가 마법사 길드의 최 고 원로 중 한 명인 그녀. 꽤나 특이하다고 자부할 수 있는 인간들의 집 합체인 마법사 길드 최고 원로 중에서도 여러 모로 특이한 점이 많은 여 인이었다. '음미'라는 개념조차 모르는 것처럼 그 뜨거운 차를 단숨에 마셔버린 크 로스가 "꺄하하핫!"이라고 웃고 있는 레이를 향해 물었다. "저기, 큐트 씨는?" 대부분의 원로들에게 존대를 사용하는 크로스가 유일하게 반말을 사용 하는 사람이 바로 레이였다. "흠, 아직 자고 있을걸? 데려올까?" "그래주면 우리야 고맙지. 빨리 출발해야하니까 말이야." "좋아! 내가 책임지고 깨워서 데려오도록 할게!" 역시나 크게 소리친 그녀는 그 특유의 장신을 이용하여 성큼성큼 식당 밖으로 달려나갔다. 밝디 밝은 금발이 스르륵 허공에 물결치면서 햇빛에 부딪혀 멋드러진 빛 조각을 남겼다. 문밖으로 뛰어나가는 그녀의 여운 남는 사라짐을 감상하며 유리가 테이 블 위에 찻잔을 놓으며 짤막한 감상을 남겼다. "여전히 돌풍이군요." "저 모습이 정말 300살의 나이에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사람?" 나이나르가 손을 번쩍 들며 모두를 향해 물었지만, 애석하게도 따라서 손을 들어주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나이나르는 혀를 쯧쯧 차며 레이를 향해 진심으로 애도를 표했다. 찻잔에 담긴 차가 대충 3분의 1정도 남았을 무렵이 되었는데도, 모인 인 원은 6명은 넘지 않고 있었다. 금방 올 것 같던 레이와 큐트도 소식이 없 고, 여관에서 마지막 정리를 하고 온다던 뮤린도 머리카락 하나 보이지 않았다. 후실리이스는 늦게 오는 이들에게 내릴 처벌을 여러 종류로 생각 해보다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흠, 뭐야? 직접 데리러가려고?" 열기가 많이 식은 찻잔에게 아쉬운 눈길을 보내면서 나이나르가 아내에 게 물었다. 후실리이스는 로브에서 손을 꺼내 탁탁 정리하며 대답했다. "뮤린하고 루비누스는 내가 불러올게. 그동안 큐트하고 레이가 오면 잡 아놓고 있어. 아, 세라도." "네, 알았어요." 호연이 믿어달라는 듯이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후실리이스는 당당하게 로브를 휘날리며 밖으로 나갔다. 존재감이 꽤 큰 그녀가 사라지자, 식당 안에는 다시 정적이 찾아들었다. 찻잔을 양손으로 꼬옥 부여잡고 연신 불안한 듯 주위를 둘러보고 있던 피엘이 방금 마신 차가 마지막 한 모금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안절부절 못하고 있을 때, 호연이 큰누나의 따뜻한 미소를 띄우며 부드럽게 말했 다. "차, 한잔씩 더 할래요?" 후실리이스가 일찍이 남긴 명언을 염두 해두고 한 말이었다. 피엘은 그 녀의 배려에 너무나 감사를 표했고, 결국 모두에게 차 한잔씩이 새롭게 돌아갔으며 후실리이스가 남기고 간 찻잔에도 따뜻한 차가 다시 채워졌 다. 새로운 차를 마시면서 유리가 말을 꺼냈다. "마스터는 그들과 제대로 간 건가요?" 물음은 모두를 향하고 있었지만, 대답을 한 건 호연이었다. "아까 전에 출발했으니, 지금쯤 게이트 산맥을 올라가고 있을 거예요. 전에 발견한 그 유적 같은 곳에 데리고 가는 것 같던데. 아무튼 약간 아 슬아슬하긴 했어도 제대로 갔어요." 그러면서 자신이 끓인 차의 향기를 음미하는 호연의 얼굴에는 만족한다 는 뜻이 스며있었다. 자만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자신이 생각해도 차 하 나는 잘 끓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유리는 그녀의 대답을 곱씹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동안 태자 일행을 따라다니면서 많이 관찰했지만, 정말 성공할 수 있 을까요? 마스터가 말한 바로는 유적에서 어떻게 되느냐, 가 계획의 성공 여부를 가린다고 하던데 말이에요." 그 말에 나이나르가 차를 한잔 마신 후 지나가는 투로 답했다. "마스터를 믿는 수밖에. 우리한테 다른 선택은 없어. 마스터가 말한 그 대로 따르는 게 가장 최선이야. 믿음직스럽게 보이지는 않지만, 그는 대 륙의 모든 마법사를 이끄는 마법사 길드 마스터니까." 쾌활한 인상을 주는 소년의 모습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수많은 연 륜을 쌓은 경험자의 색깔이 느껴지는 나이나르. "게다가 마스터를 가장 믿고 있는 건 우리잖아?" 다 꿰뚫고 있는 듯한 미소가, 그가 왜 마법사 길드 최고 원로 중 한명인 지를 알게 해준다. 그의 말에 식당 안에 있는 모든 원로들이 납득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 였다. 그가 말한 그대로, 그들은 마스터를 신뢰하고 있었다. "그럼 대회에서 힘껏 태자를 상대하기만 하면 되는 거죠?" "그렇지. 그게 우리의 할 일이니까." 크로스는 하늘을 향해 멋지게 솟아올라있는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면서 "흠흠."하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모습을 본 나이나르가 슬그머니 치켜 드는 의문에 "그 머리 대체 어떻게 세운 거냐?"라고 묻자, 크로스는 "멋 지죠? 가르쳐드릴게요. 비결은 마법이죠."라는 싱거운 대답을 하고 있을 무렵, 또 다시 예고도 하지 않고 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 기다리고 기 다리던 마법사 길드 최고 원로 세 명이 동시에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흐아, 드디어 찾아왔어." 힘든 고전이었다는 듯이 장렬히 땀을 닦는 후실리이스는 마른 사내와 덩치가 큰 사내의 등을 툭툭 치며 재촉했다. "빨리 가서 앉아. 뭐 하러 서있는 거야." 마른 사내, 뮤린은 소심한 그 모습 그대로 서둘러 가까운 테이블에 자리 했고, 그 테이블에는 우연하게도 피엘이 있었다. '소심한 사람끼리 자리도 잘 잡았네.'라고 속으로 생각하던 후실리이스는 나이나르와 크로스가 앉 아있는 테이블에 루비누스가 앉는 모습을 확인하고는 자기의 자리로 돌 아갔다. 유리가 차를 마시다가 물었다. "힘들었던 거예요?" "물론이야. 으으, 정말. 좀 빨리빨리 움직일 것이지. 로브만 걸치고 나오 면 될 것을 뭘 그렇게 꾸물대고 있었던 거야, 대체? 누가 동거하는 녀석 들 아니랄까봐, 둘이서 똑같아요, 하여튼. 어이, 로브는 왜 아직도 안 입 고 있어?" 후실리이스의 사나운 눈매와 음성에 뜨악한 표정으로 허겁지겁 로브를 걸치는 건 뮤린이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느릿느릿한 움직임을 보여주는 사내는 루비누스였다. 그녀는 루비누스의 모습에 분통이 터져오 르는 것을 겨우겨우 참아내며 말했다. "다, 다 입었으면 빨리 소개나 해!" 그녀의 외침. 뮤린은 그녀가 또 뭐라고 할까봐 서둘러 소리쳤다. "마, 마법사 길드 최고 원로 뮤, 뮤린 맥나잇……." '으으, 저 소심한 것.' 후실리이스는 이마를 한 손으로 감싸쥐며, 자신이 대표라는 사실에 통감 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러던 중에, 더욱 더 신경을 건드리는 느릿느릿한 목소리가 들려왔으니. "마법사 길드 최고 원로 루비누스 클러릭. 원로들 중 가장 거대한 덩치 라지. 훗훗훗." 바로 거대한 덩치 만큼이나 느긋한 성격이 루비누스였다. 안 그래도 예민해진 신경을 박박 긁어대는 루비누스의 웃음에 후실리이 스는 난생 처음으로 희열을 느꼈다. '내 인내심이 이토록 대단했단 말인 가!' 나이나르는 여기서 일을 벌이면 제 시간에 출발하지 못할 것 같아서 노 력에 노력을 거듭해 참고 있는 그녀가 정말 장하다고 느꼈다. 6년 동안 그녀가 저만큼이나 참는 모습은 정말 본 적이 없었기에, 나중에 시간 내 서 상이라도 주고 싶은 심정인 것이다. "좋았어. 그럼 이제 레이, 큐트, 세라만 남은 건가? 세라만 빼고 둘 다 이종족이로군." 세라는 당연히 인간이고, 레이는 필리스 레이 루 리베카, 라는 복잡한 이름을 가진 엘프다. 하지만 큐트는 인간도 아니고, 엘프도 아니다. 그녀의 이름은 큐트 노가르드. 언젠가 갑자기 마법사 길드에 나타나서 마법사 길드 최고 원로가 되어버렸다. 당시 원로였던 사람들이 많이 반발 을 했지만, 그녀는 마스터조차 무시하지 못하는 마법 실력으로 그 발언들 을 모조리 무마시켰다. 그녀는 정말 대단한 마법 능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나이나르가 대뜸 손을 들어 질문했다. "질문 있어. 큐트가 드래곤의 마지막 후예라던데, 정말이야?" 그렇다. 마스터 루페르스의 말에 따르면, 그녀는 전설의 종족인 드래곤 의 마지막 후예라는 것이다. 고대에 멸종한 드래곤족의 유일한 생존드래 곤. 그것이 큐트 노가르드, 그녀라는 것이다. 실제로 그녀의 성인 노가르 드는 고대어로 'Nogard'라고 쓰였다. 후실리이스는 비어있던 자신의 찻잔에서 찰랑거리는 차를 지그시 내려 다보다가 이내 들어올려 목을 축였다. 조금 식은 탓에 목구멍으로 넘어가 는데 별로 무리는 없었다. "아마도 맞을 거야. 마스터가 한 말이니, 이의를 제기할 맘은 별로 없 어." 어쨌든 그들에게는, 마스터의 말은 법보다 더 무거웠다. 레이와 큐트가 나타난 건 금방이었다. 조금 전과 다를 바 없이 레이가 시끄럽게 "등장!"을 외치며 문을 박차고 들어왔고, 그 뒤를 따라 굉장히 뇌쇄적이고 육감적인 옷을 입은 졸린 표정의 큐트가 들어왔다. 검붉은 색 의 긴 곱슬머리를 가슴까지 기른 그녀는 입술에 붉은 루즈를 진하게 칠 해져있었고, 졸린 듯이 반쯤 감겨있는 눈은 그녀의 섹시함을 한층 더 높 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타이트하게 달라붙은 원피스 의상은 가슴을 아슬 아슬하게 덮었고, 다리 옆선이 골반까지 트여져있어 보는 이가 차마 눈을 고정시킬 곳을 참지 못할 정도의 노출도를 지니고 있었다. 로브는 등 뒤 로 모두 넘겨있었기 때문에, 그 사용 가치는 이미 빛을 바랬다. 결국 대다수의 남성 원로들이 차마 바라보지 못해 눈을 돌려버렸고, 큐 트는 작게 하품을 하면서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를 내며 후실리이스가 앉 아있는 테이블에 자리했다. 색적으로 변하려는 분위기를 느끼며 후실리이스가 헛기침으로 분위기 쇄신을 노렸고, 덕분에 많은 이들(특히 남성)이 겨우 정신을 차리게 되었 다. 그 점에 그녀는 크게 안도함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자아, 그럼 이제 세라만 남은 건데……. 할 수 없지, 세라한테는 내가 신호를 보내서 바로 오도록 할 테니까, 우리끼리 먼저 가자고. 반대하는 사람?" 그녀의 의견에 반대하면서 손을 드는 사람은 당연하게도(?) 없었다. 그 녀는 크게 기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아, 그럼 모두들 밖으로 나가자고. 9명이 한번에 서있을 장소도 이 식당 안에는 없다고." 후실리이스가 문을 열고 가장 먼저 밖으로 나가자, 뒤따라서 나이나르, 크로스, 피엘 등등이 나갔고, 호연을 마지막으로 식당은 문을 닫았다. 식당 바깥에 옹기종기 모인 이들을 바라보면서 후실리이스는 잠시 숨을 쉬었다. 게이트 산맥에 방해를 받지 않고 에코까지 이동하려면 적어도 3 번의 공간이동을 시전 해야하기 때문에, 미리 준비를 해두어야 탈이 없 다. 그녀는 충분히 마음 준비가 되었고, 또 의지도 다듬어졌다고 여길 수 있게 되자 입을 열어 크게 말했다. "자, 모두 모여!" 그녀의 지시에 별 불만 없이 조심조심 서로 붙어선 마법사 길드 최고 원로 9명. 대충 정리가 끝난 것 같은 생각이 들자 후실리이스는 의지를 느끼며 마력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아, 가…" 그때 "…보자고!"가 뒤따라 나와야할 찰나에 엉뚱한 음성이 끼어 들었 다. "잠까아아아안!" 응축되려는 마력을 서둘러 흩으려놓으며, 깨우려던 의지를 겨우겨우 누 르면서 후실이리스가 뒤로 돌아보았다. 모두들 황당한 표정으로 뒤를 바 라보고 있었다. 조금은 커 보이는 배낭을 메고 헐레벌떡 뛰어오는 여인. 짧은 커트로 잘 라있는 머리카락이 활동적으로 보이는 그녀를 레이가 크게 불렀다. "세라! 왜 이렇게 늦은 거야아!" "그 희귀하다는 '달바라기'를 보고 말았거든! 흥분해서 잘못 공간이동 해 버렸어!" 숨이 턱에 차도록 뛰어와서 원로들이 모인 곳에 합류하는 세라를 향해 잠시 눈을 흘겨봐 주던 후실리이스는 나머지는 에코에 도착한 다음 처리 하자고 생각하면 다시 한번 공간이동을 시전했다. "자, 가보자고!" -------------------------------------------------------------------- 73편입니다. 팀군의 폭주는 아마도(?) 계속됩니다.(---) 어둠의 기사 DARK KNIGHT TEAM... P.S 추천 감상 비평. 환영이오∼ P.S GO CAMA 번 호 : 36 / 36 등록일 : 2001년 01월 03일 16:24 등록자 : 암음기사 조 회 : 72 건 제 목 : [카드 게임 판타지]『카드 마스터(Card Master)』#074 카드 게임 판타지(Card Game Fantasy) 카드 마스터(Card Master) 74. '대마도사 페인트 라시엔트의 유적.' 훼이드리온은 루페르스의 검은 로브를 뒤에서 바라보면서 문득 그런 생 각을 떠올렸다. 점점 더 짙어지는 녹음 아래. 빈틈없이 하늘을 뒤덮고 있는 나무들로 인 해 이제는 하늘을 보기조차 힘든 지경이 되어버렸다. 그런 탓에 주위가 점점 더 어두워지는 것이 꺼림칙한 훼이드리온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루 페르스의 로브로 향했다. 어느새 대형은 바뀌어, 미르와 에타가 마지막에 가있었다. 그냥 열심히 걷기만 했기 때문에 언제, 왜 바뀌었는지는 알 수가 없었고, 알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서가도처럼 잘 닦여있지 않은 산길을 그저 걸어가는 것만 으로도 정신은 혼미할 지경이었으니까 말이다. 아이가 힘들어하는 기색이 역력하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기 때문에, 훼이 드리온은 조용히 앞서 가는 루페르스와 마기에게 뭐라고 한마디 해주어 야한다고 생각했다. 지금 이 일행에서 가장 체력이 약한 이는 어쩔 수 없 이 아이니까 말이다. 그는 아이의 거친 숨이 한번 더 귀에 들어오자, 참지 못하고 입을 열어 루페르스를 불렀다. "저기, 루페르스." 어둑한 공간 속에 녹아있듯이 걸어가던 루페르스의 얼굴이 훼이드리온 을 향했다. 주위의 어둠보다 더 어두워 보이는 그의 두 눈동자를 발견한 훼이드리온이 잠시 침을 꿀꺽 삼키는 시간이 지난 후, 말을 꺼냈다. "이쯤에서 쉬어 가면 안될까요? 날도 많이 저문 것 같고, 아이가 많이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요." 그녀가 걱정된다는 감정이 잘 묻어나는 어조였기 때문에 루페르스는 "흠."하고 인상을 쓰며 아이를 관찰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는 게 낫겠군. 안 그래도 이쯤에서 쉬어볼까 했는데 잘 됐네, 뭐. 마기, 야영할 곳을 찾아주겠어?" "네, 알겠습니다." 마기가 길 저편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는 루페르스의 걸음이 멈춤 과 동시에 일행의 흐름이 딱 멈추었다. 훼이드리온은 아이에게 다가갔다. "괜찮아?" "괜찮아, 라고 대답하는 건 솔직히 거짓말이겠지? 힘들어, 조금." 그녀로서는 이런 산길을 이렇게 장시간 걸어보는 것은 정말 처음이었기 에 힘들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고향이 산지가 많은 곳이었다고 하더라도 척 봐도 귀하게 자랐을 것 같은 그녀가 그런 곳을 이렇게 걸어본 적이 있을 리가 만무하다. 훼이드리온이 땀을 닦아주려다가 낮의 기억을 되살 리면서 그냥 손수건을 건네주는 것에서 그쳤다. "자, 여기. 땀 닦아." "아… 고마워." 손수건을 받아들면서 미소를 띄우는 아이의 얼굴이 무척 힘겨워 보였다. 훼이드리온은 가슴이 아파온다는 것을 아주 절실하게 느꼈다. "흥, 체력도 약하면서 여행을 뭐 하러 시작했대? 그냥 집에서 발 닦고 잠이나 잘 것이지." 등뒤에서 들려오는 놀림에 힘든 와중에서도 아이가 가늘게 눈을 뜨며 뒤를 노려보았다. 골치 아프다는 무표정(?)을 솔직하게 얼굴에 드러내고 있는 미르의 오른팔을 붙들어 잡고 있던 에타가 그녀를 향해 혓바닥을 내밀었다. "베에에." "하, 내가 참지, 참아……." 화낼 기운조차 모조리 소진한 그녀는 화가 나면서도 속으로 삭히며 서 둘러 고개를 돌려버렸다. '더 보고 있으면 열이 받아 졸도해버릴 지도 몰 라.' 그게 아이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많이 힘든가?" 아이의 상태가 걱정스러운지 루페르스가 물어왔다. 아이는 정직하게 끄 덕이며 대답했다. "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힘드네요. 이렇게 정리되지 않은 길은 처 음이라……. 역시 산이란 건 만만한 게 아니군요." "그럼 만만한 건 줄 알았어?" 사사건건 시비를 걸어오는 에타의 말은 이제 철저히 무시하자고 생각하 는 그녀였다. 훼이드리온에게 다시 손수건을 돌려주며 "고마워, 훼온."이라고 인사하 는 그녀에게 루페르스가 격려 섞인 말을 해주었다. "힘내. 한 이틀 정도는 더 들어가야겠지만, 쉴 때 푹 쉬어두면 괜찮을 거야. 힘내라고." "하아, 네에." 아이는 '이틀'이라는 기한이 이렇게 절망적으로 느껴지기는 처음이라는 듯이 한숨을 쉬면서 겨우 대답했다. 그때쯤 어둠을 뚫고 마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 앞에 적당한 터가 있습니다." "그래? 다행이군. 어서 저리로 가서 쉬자고." 루페르스가 재촉하듯 바쁘게 걸어가자 그 뒤를 따르는 이들의 걸음도 빨랐다. 힘들어하는 아이를 위해 손수 손을 잡아주는 훼이드리온. 애정이 느껴지 는 그 현장에 아이는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그를 따라가고 있었다. 조금 더 들어가자, 나무 한 그루가 쓰러지면서 적당한 공터가 만들어진 곳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훼이드리온은 모포를 꺼내 바닥에 깔고 아 이를 앉혔다. 이제야 편히 쉴 수 있다는 생각에 안도함을 느끼면서 풀썩 주저앉은 아이는 결국 얼마 되지 않아 훼이드리온의 배낭을 베개삼아 잠 에 빠져버렸다. 잠의 정령의 유혹에 금방 넘어가 버린 그녀를 내려다보던 훼이드리온은 혹여 춥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루페르스에게 부탁해서 작은 모포를 구하 여 그녀에게 덮어주었다. 그 모습에 아공간을 열어 커다란 모포를 꺼내 바닥에 깔던 루페르스가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사랑이 철철 흐르는군, 그래." "네? 아하하, 뭐, 그렇죠." 그렇게 부정할 생각은 없는 훼이드리온이었기에 대충 대답을 하고 그냥 웃어버렸다. 일단 아이가 편하게 잠이 든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아진 그였 다. 마기가 마지막으로 모포를 정리하자 서있던 이들이 차례차례 모포 위에 앉았다. 제법 넓어 보였던 공터도 6명이 앉고 누워버렸더니 어느새 꽉 차 있었다. "곤란하지 않았어?" 난데없는 루페르스의 물음에 훼이드리온이 반문했다. "뭐가요?" "처음 떠나는 여행에서 사랑을 만나다. 소설 속에서 흔한 이야기이지, 현실에서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 이야기잖아. 사랑을 느꼈을 때 곤란하 지 않았냐는 거지, 내 말은." 훼이드리온은 잠시 그때를 회상하다가 뒷머리를 긁으며 난처하다는 듯 이 웃어댔다. 그리고는 이내 입을 열어 대답했다. "곤란하기는 했죠. 루페르스가 말한 이유와는 조금 다를 지는 몰라도. 사랑을 느끼자 혼란스러웠고 어떻게 해야될지 모르겠더군요. 그래서 애써 거부도 해보고 부정도 해봤는데, 그렇게 해도 도저히 방법이 없더라고요. 더 깊어지기만 하지. 그래서 결국 나중에는 받아들였죠. 그러니 한결 편 해지더라고요, 신기하게." 편안한 얼굴로 잠이 든 아이를 내려다보는 그의 푸른 눈동자에서는 진 한 애정이 느껴졌다. 우연히 동행하게 되어 이젠 여행의 막바지에 다가가 는 시간 동안 사랑해버리게 된 그녀, 아이. 그는 자신의 입가에 진한 미 소가 떠올라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루페르스는 보기만 해도 아이를 향해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 알아챌 수 있을 것 같은 훼이드리온의 모습을 보면서 옅은 미소를 지었다. 지금 훼이드리온의 모습이 어쩐지 예전의 자신의 모습과 비슷해서였다. 그는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재차 물었다. "그럼… 만약 헤어지게 된다면 어떻게 할거야?" "……네?" 마치 자신의 처지를 알기라도 하듯이 정곡을 찌르고 들어오는 루페르스 의 물음. 훼이드리온은 치부를 들킨 사람처럼 불안한 기색을 내비쳤지만 순식간에 지워버렸다. 그런 일을 드러내서도 안 되는 것이니까. 그는 이 사랑을 시작했을 때부터 품어왔던 대답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슬프겠죠…… 헤어지게 된다면. 너무 슬퍼서, 울다가 쓰러져버릴 지도 모르는 일이죠." 지금의 감정이라면 정말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아이와 헤어진다는 건… 정말 생각하기도 싫은 비극이었다. "하지만." 하지만. "꼭 다시 만날 거예요. 어떻게 헤어지든, 어디서 헤어지든. 상관없어요, 꼭 만날 테니까. 다시 만나서 다시 간절히 사랑할 거니까."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 결심하고 있었다. 헤어지게 된다면, 기필코 다시 만나고 말겠다고. 15세의 소년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단호한 의지에 루페르스는 속 으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과연 이 정도면 계획을 성공하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그는 옅게 드러낸 미소만으로 그 기쁨을 표현하면서 천천히 주위 로 눈길을 돌렸다. 차츰 싸늘해지는 공기를 머금은 숲 속의 공간이 정적 으로 물들고 있는 시간. 미르에게 꼭 붙어있는 에타조차 침묵하게 만들어 버리는 그 시간 속에서 그들을 휴식하고 있었다. 문득 허기를 느낀 루페르스가 마기에게 저녁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하자, 그녀는 한치의 거부감도 없이 "네, 루페르스님."이라고 대답을 하더니 아 공간에서 꺼낸 조리기구와 재료들로 6인분의 요리를 해나갔다. 잠이 오더 라도 내일을 위해서 밥을 먹어두는 게 현명하다는 루페르스의 말에 아이 의 몫까지 만들고 있는 것이었다. "루페르스, 질문이 있습니다." 마기의 요리를 구경하고 있던 루페르스는 갑자기 입을 연 훼이드리온을 쳐다보았다. 조금 침묵하는가 싶더니, 뭔가 의문스런 눈길로 자신을 바라 보고 있는 소년에게 그는 간단히 대답했다. "뭔데?" "그냥 궁금해서 그러는데, 첫 여행이라는 건 어떻게 아신 거죠?" 루비네 마을에서 만난 노인, 숀에게서 들었던 답변이 나오려나 생각하고 있던 훼이드리온의 귀로 여유 있게 대답하는 루페르스의 답변이 들렸다. 그것은 너무나 간단했다. "그냥 찍은 거야." "……네?" 훼이드리온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루페르스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싱긋 웃으면서, 그를 위해 친절하게 한번 더 말해주었다. "그냥 찍은 거라고." "…그, 그렇군요."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에 무시하지 못할 타격을 입은 훼이드리온은 머 리 속의 모든 생각이 헝클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거대한 대답을 바란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저렇게 허술한 답변을 바란 것도 아니었 다. 그는 그동안 정리해두었던 것들이 뿔뿔이 흩어져 뇌 이곳저곳을 유영 하는 모습을 떠올리며 멍해져버렸다. 전혀 거리낄 게 없다는 표정인 루페르스는 저녁이 다 되었다는 마기의 말에 환호성까지 질렀고, 그 때문에 마기에게 또 핀잔을 들었다. "마스터 로서의 체통을 지키십시오." 그 사이 정신을 차리기로 마음 먹은 훼이드리온은 아이의 몸을 흔들어 그녀를 잠에서 깨어나게 만들었다. "아이, 일어나서 저녁 먹고 자." "우웅……." 귀찮다는 듯이 앙탈을 부리는 아이를 달래는 훼이드리온의 솜씨가 매우 놀랍고 익숙해 보이는 것은 왜일까. 억지로 잠을 깨운 아이까지 포함하여 6명은 시간 관념이 없어 저녁이 맞기는 한 건지 아리송한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마법왕국 라시엔트의 서부를 가로지르는 산맥, 게이트 산맥에서 해가 떠 오르고 달이 떠오르는 방향으로 강을 건너 평원을 지나 주욱 가다보면, 인간들이 모여 사는 거대한 도시가 나온다. 그 도시의 중앙에는 척 보기 에도 위엄이 느껴지고 광대한 성이 서있는데, 그것이 바로 마법왕국 라시 엔트의 왕성이다. 고로, 도시의 이름은 라시안트. 라시엔트의 수도인 것이 다. 루페르스가 아크릴 영지의 영주, 길튼에게 남겼던 아리송한 말의 진의를 확인하기 어렵듯이, 수도의 시민들은 왕성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기 어려웠다. 워낙에 높고 두텁게 쌓아올린 성벽이고, 워낙에 굳건히 닫혀있는 성문이었으며, 워낙에 왕성 일에는 별 관심이 없는 사람들의 사 고방식 때문이었다. 그런 현실을 아는지 모르는지(일부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왕성은 그 언 제나처럼 고요했다. 너무나 고요하여 답답할 정도로 말이다. 조용한 왕성. 그 중에서도 특히 더 공허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는 곳을 들자면, 금안 기사단 단장이며 라시엔트 제1기사로 이름 높은, 그렇지만 지금은 왕성을 흔들어놓은 반란의 주동자 중 한 명인 바이마크 폰 헤이 스티론의 저택이었다. 스쳐가듯이 건물 위를 지나가는 바람 소리가 무안해할 정도로 침묵을 지키고 있는 건물은 무거운 분위기일 수밖에 없었다. 왕성의 분위기 자체 가 그랬고, 저택 주인조차 그랬으니까. 등뒤에는 웬만한 기사들도 들기 거북할 정도의 크기인 투핸디드 소드가 장착되어있는 금안 기사단의 공식 제복을 정직하게 갖춰 입은 덩치 큰 사내가 저택의 정문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두툼한 콧수염은 하루동안의 피곤하게 진득하게 매달려 측은해 보일 지경이었다. 1층의 홀로 들어서자 그를 부르는 친근한 목소리가 있었다. "…이제 오세요?" 조금 주저하는 듯이 인사하는 그의 아내, 위네시스 폰 헤이스티론. 바이마크는 피로가 가득히 서려있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면서 힘겹게 대답했다. "조금 늦었구려……. 애들은……?" "첫째하고 둘째는 방에 있고요, 셋째는 벌써 잠들었어요. 저녁은요?" "서재로 가져와 주오……." "…네에." 피곤함이 느껴지는 남편의 말투와 몸짓. 그의 흔히 볼 수 없는 축 처진 어깨에 위네시스는 안타까움을 느꼈지만, "힘내요." 외에는 해줄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사실에 더욱 슬펐다. 왕성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녀도 충분히 들어 알고 있었고, 남편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도 알 고 있었다. 그녀는 느릿한 걸음으로 서재로 향하는 바이마크의 등을 바라보며 울음 이 터질 것 같은 기분을 애써 참으며 발길을 돌렸다. 그녀의 뒤를 따르는 시종에게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지시했다. "주방에 가서 저녁은 내가 준비하겠다고 전하거라." "네에, 마님." 주방을 향해 후다닥 뛰어 사라지는 시종의 발소리를 들으면서 위네시스 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힘들어하고 있는 남편을 위해서 그녀가 할 수 있 는 일이라고는 고작 이 정도였다. 아내의 걱정을 충분히 알고 있는 바이마크는 착잡한 마음으로 서재로 향했다. 반란을 일으킨 지 이제 겨우 이틀이었지만, 예상외로 심적, 육체적 부담 이 컸다. 국정에 관련된 서류를 훑고 있다가도 필로윈의 호출이 있으면 뛰어나가 해결하고 돌아와야 하는 생활에 제대로 피로를 풀 시간이 어디 있었겠는가. 지칠 대로 지치고 나서야 저택에 돌아올 수 있었던 탓에, 지 금도 그는 무척 피곤하고 힘든 상태였다. "휴우……." 이틀동안 모아두었던 시름과 부담을 한번에 다 털어놓기라도 하듯이, 그 의 한숨을 길게 지속되었다. 그만큼 한숨에서 묻어나는 감정은 복잡하고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제대로 하고 있다고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부담이 너무 컸다. 오래동안 정치에서 손을 떼고 있던 게으른 정치 귀족들을 뒤에서 조종하여 제대로 된 국정을 펴도록 유도하는 일은 생각만큼 그렇게 쉽지 않아서였다. 게다 가 가장 큰 골칫덩이인 국왕은 예전의 나태함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있어서 열불이 터진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오늘 해가 저물 때 정도에 그들이 이런 일을 벌이는 의도를 이해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바이마크는 오랜만에 깊은 희열이라 는 것을 맛볼 수 있었다. 이런저런 상념 속에서 걸음을 옮기던 바이마크는 무언가 익숙한 기분에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어느새 서재의 문 앞에 와 서있는 자신을 발견하 게 되었고, 별 감흥 없이 서재 문을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손잡이를 잡았 다. 항상 그 모양이 그 모양인 문이 새삼스럽게 달리 보일 이유는 지금 그에게는 전무했다. 끼익. 기름칠을 필요로 하는 작은 소음을 내면서 문이 열렸다. 마법의 등의 하 얀 불빛이 가득한 복도로 서재 안의 어둠이 쏟아져 내렸다……가 아니었 다. 서재 안은 바이마크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밝았다. 그는 잠시 유 추해볼 수 있는 상황을 생각했다. 결론은 간단했다. '누군가 들어와있는 건가.' 그는 별로 긴장하는 모습도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지금 그에게는 긴장하는 것조차 귀찮은 일이었다. "아… 아버님, 오셨습니까." 익숙한 목소리. 바이마크는 서재 안에 발을 디디자마자 들려오는 목소리 에게 조용히 대답을 해주었다. "여기 있었구나, 하이마크." 바이마크의 장남이며 금안 기사단 기사 수련생 중에서 단연 손꼽히는 실력을 자랑하는 하이마크였다. 아버지만큼은 아니더라도 또래 중에서 특 출나게 눈에 띄는 몸집을 가진 그가 책장 옆에 서있자, 어쩐지 상당히 어 울렸다. 바이마크는 아들의 시선을 받으면서 천천히 걸음을 옮겨 책상으로 향했 다. 등뒤로 검은 하늘이 빛나고 있는 장면이 보이는 큰 창문, 그 앞에 놓 여진 짙은 갈색의 책상. 아직 제복을 입고 있는 그의 하얀 모습이 그 중 앙에서 기묘한 배치를 이루고 있었다. 검을 풀어서 책상에 기대어 세워놓고는 불편한 제복을 벗을 생각도 하 지 않고 의자에 몸을 묻는 바이마크. 하이마크는 손에 들고 있던 두꺼운 검술 교본 책을 제자리에 돌려놓고 그에게 다가갔다. 작게 인상을 쓰고 있는 얼굴로 눈을 감고 있는 그는 금방이라도 잠들어버릴 듯이 피곤해보 였다. 하이마크는 이제부터 귀찮게 해드려야 한다는 사실에 속으로 선처를 빌 었다. "아버님." 태자와 첫 대면을 했을 때 마구 떨던 모습과도 사뭇 다른 모습을 드러 내는 그에게 바이마크는 눈을 감은 채로 입을 열어 답했다. "할 말 있으면 하거라." 자신의 서재에 미리 들어와 자신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은 간단하게 짐작할 수 있는 바이마크는 아들의 뜻마저 파악하고 있었다. 하 이마크도 아버지라면 충분히 알아챌 수 있으리라고 예상하고 있었던 터 라 별로 당황하는 기색 없이 용건을 꺼냈다. "요즘 왕성 안의 일…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가 보구나." 담담하게 답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어쩐지 처량하게 보이는 것은 하이마 크 만의 착각일 수도 있다. 하이마크는 흔들리지 않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아버님과 왕성 수석 마법사 필로윈 셀 디바이어 님이 손을 잡고 반란 을 일으켰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성공했다는 것을요. 수련생들은 모르리 라고 생각하셨던 것은 아니시지요?" "물론 아니란다." "그럼, 왜 숨기신 건가요. 수련생 전체는 아니더라도, 아버님의 아들인 저에게까지." 바이마크의 눈이 살며시 떠졌다. 깊은 애환을 담은 그의 갈색 눈동자는 잠시 아들의 얼굴에 머물더니, 이내 창 밖으로 돌려졌다. 하실루스의 상 징, 은빛 달이 창문 끝에 걸려 부분만 눈에 들어왔다. "너에게 굳이 말했다면 다른 일이 생겼겠느냐." "적어도 아버님의 고민을 덜어드릴 수는 있었습니다." "고민?" 하이마크는 다 알고 있다는 표정을 만들며 계속 말했다. "고민이 있으시다면 얘기를 해주세요, 라고 제가 몇 번이나 말씀드렸지 만, 아버님께서는 말씀해주시지 않아 지금껏 이유를 몰랐습니다만, 이제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님의 정의와 충돌하게 되는 이 반란으로 인한 고민 때문에 그동안 많이 힘들어하셨단 것, 잘 알고 있습니다. 아니라고 말씀 하시지는 않으시겠죠." 바이마크는 굳이 변명하고 싶지 않다는 듯이,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신 경 쓰지 않는 것 같은 포즈로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 을 어쩔 수 없이 내려다보던 하이마크는, 이윽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참 을 수 없는 침묵이 서재 안으로 가득 메우려하고 있던 시점이었다. 하이마크는 꺼져 가는 심연의 느낌을 닮아 가는 분위기 속에서 입을 열 었다. "아버님의 정의를 버리면서까지 반란을 주동한 이유…… 여쭈어도 되겠 습니까?" 딱딱한 어투였지만 느낌은 딱딱하지 않았다. 아버지를 생각하는 아들의 간절한 마음. 그 마음이 그대로 실려있어, 바이마크의 가슴을 쿡쿡 찔러 대는 말이었다. 침묵이 그들 사이를 흘렀다. 바이마크는 다시는 입을 열 것 같지 않은 분위기였고, 하이마크는 그가 말해줄 때까지 기다릴 분위기였다. 어느 한 쪽도 물러설 생각이 없는 듯한 대치. 결국 입을 연 것은 도로 눈을 감은 바이마크였다. "…나의 정의……. 하이마크, 나의 정의가 뭐였는지 기억나느냐?" "네. 나라에 충성하고 국왕에 충성한다. 그것이 아버님의 정의셨습니다." "그래… 그랬지……." 유난히 힘이 실리지 않은 목소리. 하이마크는 그것이 꼭 피로해서 그런 것만은 아니라고 추측했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그는 단 정한 자세로 아버지의 말을 기다렸다. "정의… 그건 개인의 생각 따라 다르다고 말해주었었지? 그리고 하이마 크, 너도 자신의 정의를 가지라고도 했고 말이다……. 이번 반란은 정의 에 어긋나는 일이었지. 나라의 충성하고 국왕에 충성한다……. 하지만 반 란은 그것을 근본부터 뒤엎는 일이니까 말이다. 그래, 맞단다. 너의 말대 로 난 반란을 시작하기 전에 힘들게 고민했고, 지금도 계속 고민하고 있 단다. 내가 생각하는 정의와 너무나 상반되는 일을 하고 있으니까." 그 말을 하는 중에도 바이마크는 고통스러운 듯이 미간을 좁혔다. 안타 깝게 자신을 바라보는 아이의 눈길도 잘 느껴지지 않는지 그는 미약한 신음까지 흘리면서 이야기했다. "정의란 건 소중한 것이다… 자신에게 있어서 그것은 절대 진리와 다를 바 없는 거지. 하지만 이런 말도 있단다. '세상에 진리란 것은 없다.'" "…진리란 없다?" "정의는 자신의 세계에서 절대 진리일 뿐, 다른 곳에서는 쓸모 없는 것 이란다. 대의를 위해 정의 따위는 접어두어야 할 때도 오는 것이고, 나의 경우 그게 바로 지금이란다." 하이마크는 아버지의 말을 차츰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자신의 정의는 중요하지만, 큰 일을 위해 뒷전으로 미뤄두어야 할 때가 있다는 말. 그는 입을 다문 채 계속 아버지의 말을 경청했다. "난 지금 힘들단다. 나의 정의와 현실이 충돌하고 있기에, 그래서 매우 힘들단다……. 그래서 아버지로서 충고해주고 싶구나, 하이마크." "네." "넌… 어떤 일이 있어도 너의 정의를 지키거라. 너의 정의를 믿거라. 너 의 정의 대로 움직이거라. 이 못난 아비처럼 정의를 어겨 혼란스러운 상 태가 되지 않게, 너의 정의로 움직이거라. 그럼 절대 후회는 없을 것이 다." '나의 정의.'라고 하이마크는 속으로 곱씹었다. 기사 수련생으로 발탁되 었을 때 아버지로부터 들었던 '정의'라는 단어. 그 단어가 가진 실로 오묘 함에 흠뻑 도취되었던 당시, 그는 '나의 정의는 무엇일까.'라고 수많은 생 각을 해보았다. 그리고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에 와서는 그것이 많이 정립이 되어, 난해 했던 개념이 하나의 뚜렷한 문장으로 그의 머리 속에 자리잡아 있었다. "난 요즘 이렇게 생각하고 있단다. 나의 정의를 조금 다르게 생각하자 고." "다르게 생각하다니요?" 계속 이어지고 있는 바이마크의 말에 그는 의문을 드러내며 침을 삼켰 다. "백성을 위해서 움직이는 것도 나라에 충성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말 이다. 그럼 나의 정의에 위배되지는 않지 않느냐. 그 때문에 힘들었던 마 음이 조금은 좋아졌단다." 결국 바이마크가 반란을 일으킨 것도 자신의 정의를 나름대로 지키기 위해서였다. 하이마크는 그것을 깨닫고 마음 속으로 크게 웃었다. 아버님 은 정의를 내던지며 행동하는, 그런 소인배들과는 다른 사람이라는 확신 이 더욱 확고해졌기 때문이었다. 비록 그것이 다른 시각으로 정의를 해석 하기는 했지만, 하이마크에게는 그 정도면 충분했다. "그럼 정의란… 때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는 것입니까?" 바이마크는 아들의 물음에 어느새 떠오른 미소를 숨기지 않고 부드럽게 대답해주었다. "자신의 정의가 가진 본질을 잃어버리지 않는 전제 하에서, 정의는 유연 해야하는 것이란다." "그렇군요……. 자신의 정의를 믿고 움직여라. 유연한 정의를 가져라. 가 르침에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아버님." 허리를 숙이며 인사하는 하이마크는 상체를 들면서 마지막 말을 남겼다. "그럼 저도… 제 정의를 믿고 움직이겠습니다." 오늘 그가 아버지를 만나 얻으려는 해답은 사실 그것이었다. 바이마크는 의문스러운 얼굴로 의자에서 몸을 들었다. 서재에서 나가기 위해 몸을 돌려 문으로 향하는 아들의 뒷모습에 대고 그가 나지막이 물 었다. "너의 정의는 무엇이냐." 문손잡이에 손을 올리면서, 하이마크는 확신에 찬 눈빛으로 입을 열었 다. "저의 정의는…" 그리고 이윽고, 그의 입술에는 아버지 바이마크와 꼭 닮은 미소가 떠올 랐다. "…아버지를 닮는 것입니다." --------------------------------------------------------------------- 으아아. 74편입니다. 새벽까지 쓰다가 이제 완성이군요. 아자자자잣. 팀군은 오늘도 달립니다! 어둠의 기사 DARK KNIGHT TEAM... P.S 추천 감상 비평. 저 그런 거 좋아해요!(>.<);; P.S 2 GO CAMA 번 호 : 37 / 37 등록일 : 2001년 01월 04일 01:49 등록자 : 암음기사 조 회 : 125 건 제 목 : [카드 게임 판타지]『카드 마스터(Card Master)』#075 카드 게임 판타지(Card Game Fantasy) 카드 마스터(Card Master) 75. 훼이드리온은 얼마 전에 기억을 떠올렸다. 루페르스의 뒷모습을 보면서 문득 떠올랐던 생각, '대마도사 페인트 라시엔트의 유적.'이 하필이면 그 때 왜 떠올랐는지, 이제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대마도사가 남겼다는 그 유적은 게이트 산맥을 마법의 숲과 같이 '금역' 으로 만들만큼의 위력을 가지고 있다. 바꿔 말하자면, 무시하지 못할 '절 대적'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의 힘이 있다는 것이다. 지금 이 일행 중에서 루페르스도 같은 조건을 갖춘 사람이었다. 훼이드 리온이 생각하기로 루페르스에게 한꺼번에 달려들더라도 그에게서 승리 를 쟁취할 수 있을 확률은 거의 없었다. 그 말인즉슨, 루페르스는 '절대 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로서 그는 유적과 비슷한 조건을 갖 추었다. 다르게 생각하면, 그렇게 골치 아프게 따지지 않아도 됐다. 루페르스는 지금 현 상태 그 자체에서 유적을 떠오르게 만드니까 말이다. 점점 더 깊이 들어갈수록 더욱 어두워지는 산길. 하지만 그것보다 더 어 두운 것은 루페르스의 모습이었다. 산발의 검은머리와 온몸을 감싸고 검 은 로브는 그들의 주위를 메우고 있는 어둠보다 더 검어, 오히려 눈에 뜨 일 정도였다. 어둠보다 더 깊은 어둠. 그것에서 자연스럽게 유적이 연상 되는 것이다. 훼이드리온은 루페르스의 등에 박힌 눈동자를 굳이 움직일 생각은 하지 않고 자신의 옆에서 걷고 있는 아이에게 말했다. "루페르스의 실력은 대단하겠지?" "응, 그렇겠지. 마력이 뭉치고 흩어지고, 제멋대로 움직이는 이곳에서도 별 무리 없이 마법을 쓰는 사람인데 보통 실력일 리가 없잖아." 비록 마스터 카드 실력은 실망의 실망을 금치 못할 정도로 형편없었지 만, 가끔씩 보여준 마법 능력은 길잡이 역할을 맡겨도 불안하지 않을 정 도로 대단한 것 같았다. 사실 마법사 길드 마스터의 마법 능력이 대단치 못하다고 하는 게 더 웃긴 일일 것이다. 아무튼 자신의 생각에 확신을 더한 훼이드리온은 무료한 '걷기'의 연속 중에서 또 하나의 재미있는 상념거리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에 안타까움을 느끼며 뒷머리를 긁어댔다. 그새 머리카락이 많이 길었는지 손에 제법 많 이 잡혔다. 산길을 걷기 시작한지 벌써 3일째. 이틀 전에 루페르스가 말한 것을 바 탕으로 추리해보면, 오늘쯤에는 유적에 도착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하지 만, 주위는 완전히 어둠으로 뒤덮인 지 오래고 이젠 각자의 시력을 믿고 걸어가는 수밖에 없을 지경이 되었는데도 루페르스는 발을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것은 아직 유적에 도착하지 못했다는 사실과 동일한 사실 이었다. 훼이드리온은 아침에 일어나 다시 걷기 시작한 후 시간이 꽤 흐른 탓에 다시 슬슬 아이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유적이 빨리 나타나주었으면, 하는 바램과 함께 그가 그녀에게 넌지시 물었다. "버틸만해? 안 힘들어?" "괜찮아, 아직까지는. 어제는 정말 밥이고 뭐고 그냥 쓰러져 자버렸으니 까 체력은 많이 비축됐어." 탈진해버린 듯이 모포를 깔자마자 잠에 빠지더니, 아침에 일어나 배가 고파 징징대던 아이의 모습이 생각난 탓에 빙그레 미소를 띄운 그는 그 렇지 않아도 좁은 길인데 그것조차 가리고 있는 풀들을 길 밖으로 걷어 내며 걷고 있는 루페르스를 불렀다. "루페르스! 아직 멀었습니까?" 어둠보다 더 눈에 띄는 검은 로브로 인해 훼이드리온의 머리 속에서 유 적과 동일시되고 있는 루페르스의 대답은 예상외로 빨리 돌아왔다. "조금만 더 가면 돼! 힘들 내!" 3일 간의 강행군(이라면 강행군)인 여정에도 전혀 지친 것 같지 않은 그 의 모습에 훼이드리온은 '역시 이 길을 많이 다녀봐서 그런가.'라고 조심 스레 추측을 해보다가, 이내 지워버렸다. 미르, 에타, 마기라는 예외의 경 우를 고려하지 않았으니 전혀 신빙성 없는 의견이었다. "벌써 그 대답이 네 번째라는 거 아세요, 아버님?" 루페르스에 대한 호칭을 완전히 굳혀버린 에타가 뒤쪽에서 크게 소리쳤 고, 루페르스는 찔끔하면서 어깨를 움츠렸다가 다시 당당하게 수풀을 치 우기 시작했다. "자아, 부지런히, 부지런히!" 그답지 않게 당황하면서 과장된 몸짓을 펼치는 그의 모습에 에타는 키 득대면서 연신 그를 공격해댔고, 소녀의 얼굴에는 장난기 그득한 표정이 떠올랐다. 미르가 에타에게 간단히 한마디 해주기 전까지 그렇게 에타에게 시달림 을 받던 루페르스는 그러던 중에도 부지런히 수풀을 헤치며 앞으로 나간 결과, 드디어 그의 눈에 유적의 모습이 아련하게 비춰졌다. "…드디어 다 왔어." "저, 정말요?" 훼이드리온을 비롯한 네 명이 단숨에 달려가 루페르스가 멍하니 보고 있는 지점을 주시했다. 그리고 잠시간의 침묵 후에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만 사흘의 고생이 허무하게 부서져 내리고 있는 얼굴을 만들어내고 있던 아이였다. "……여기가요?" 그녀의 심정이 너무나 공감된다는 표정을 하고 있는 훼이드리온도 한마 디했다. "정말 여기예요?" 의심이 가득 담긴 음성으로 그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에는 다 합당한 이 유가 있었다. 에타는 루페르스가 혹시 그 이유를 모를까봐 걱정이 되었는 지 설명까지 곁들여 그를 몰아붙였다. "아버님, 이런 말하기 정말 죄송하긴 하지만 안 하면 안 되겠어요! 두 눈 똑바로 뜨고 저 앞을 보시라고요! 아버님께서는 마법사라서 색다른 세 계가 보이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반인인 우리 눈에는 꼬불꼬불한 길 이 펼쳐져 있는 걸로 밖에 안 보인다고요! 저게 정말 유적으로 들어가는 입구라면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3단 논법을 사용하여 조목조목 따져 서 설명 좀 해주시면 아니 되는 걸까요?" 루페르스는 쉴새없이 몰아붙이는 에타의 언변에 당황한 기색이 다분한 얼굴로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저, 저기 말이야, 에타 양." "말씀하세요, 아버님." 숨이 차지도 않는 건지 그렇게 소리를 질러 넣고도 얼굴 색 하나 바뀌 지 않는 소녀를, 아이는 정말 찬양해주고 싶었다. 루페르스도 그녀와 같은 점에서 에타에게 감탄을 했지만, 현재는 더 바 쁜 일 있는 관계로 직접적으로 표현하지는 못했다. "그러니까 말이야. 게이트 산맥에 있는 유적은 대마도사 페인트 라시엔 트가 만든 거라는 이야기, 했지? 그런 그가 '내가 유적이오!'라고 표가 나 게 만들겠어? 내가 말했잖아. 유적에 들어가려고 했을 때 날 막았던 것은 방어막뿐이었다고 말이야. 허술할수록 사람들은 방심하게 마련이지. 이것 도 똑같은 거라고." 헛기침과 함께 말을 마친 그가 제대로 설명해주려는 듯 먼저 한발 앞으 로 다가 서서 자신이 "여기."라고 짚은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다 알 고 있는 마기를 제외한(그녀는 스스로 방어막을 살피고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그곳에 고정되었다. "마법사가 아니라서 난해하겠지만 말이야. 이 지점부터 방어막이 시작되 어 이 일대를 완전히 뒤덮고 있어. 정말 어마어마할 정도의 크기에다가 위력이라 난 어떻게 해제할 수가 없을 정도야. 아, 이건 얘기한 건가? 아 무튼 보이지 않는 방어막이 여기서부터 발현되어 있어서 방어막 저쪽과 이쪽을 완전히 차단하고 있는 거지. 이해돼?" 완전히는 아니지만 대충 고개를 끄덕이는 훼이드리온과 아이. 에타는 '전혀요.'라는 얼굴을 하고 있었고, 미르는 표정으로 봐서는 도저히 파악 불가능이었다. '이 정도면 알아들었겠지.'라고 마음대로 생각한 루페르스는 방어막 위를 아슬아슬하게 움직이고 있던 손가락을 거두며 허리를 들었다. 허리가 뻐 근해지는 게 나이를 무시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 새로이 자각되었다. 어찌됐든 결국 여기까지 온 루페르스는 시간 낭비를 줄이기 위해 다음 과정으로 서둘러 넘어가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자아, 그럼. 힘들게 입구까지 왔으니 이제 훼온 군 차례야." "흐음, 그런가요." 루페르스가 슬그머니 자리를 지켜주자, 훼이드리온은 허리춤에서 갈색주 머니를 풀어 손에 들었다. 두툼하게 부풀어올라있는 주머니의 형태. 그리 고 그 안에 들어있을 마스터 카드. 카드들이 이렇게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도 퍽 오랜만이라는 생각에 그는 작은 미소를 지었다. "아무 카드나 꺼내서 방어막에 대봐. 둘 다 대마도사가 만든 거니까 분 명히 거부감 없이 해제될 거야." "아무 카드나요?" "그래." 싱긋 웃는 루페르스의 얼굴에서 눈길을 주머니 끈을 벌렸다. 완전히 벌 린 구멍에서 가장 먼저 잡히는 카드를 조심스레 꺼낸 그는 긴장된 얼굴 로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모두의 얼굴을 한차례 둘러보았다. 마법사들만이 느낄 수 있는 마력의 흐름은 방어막에 가로막혀 흔들리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훼이드리온은 카드를 잡은 순간, 어쩐지 그 흔들림이 느껴지는 것 같아 방어막의 위치조차 흐릿하게 머리 속에 잡혔다. 게다가 투명한 그 형태조차. 해석할 수 없는 신기한 일이었다. 이것도 대마도사가 만든 마스터 카드 의 위력인지 궁금해지는 훼이드리온은 의문을 가슴 속 한 곳에 갈무리 해둔 후 천천히 카드를 내밀었다. 붉은 색의 불의 용사 카드는 그의 손길 에 따라 서서히 방어막을 향해 다가갔다. ……. 그 순간만은 에타도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소녀도 예민한 감각으로 긴장과 적막을 충분히 느끼고 있었다. '대마도사가 만든 유적……. 그 입구의 열쇠는 대마도사가 만든 마스터 카드. ……어라?' 마스터 카드가 방어막에 부딪히는 그 순간, 훼이드리온의 두뇌도 그것에 반응하듯이 무언가를 돌출해냈다. 지금까지 전혀 이상하게 생각지 않았던 사실이 수상쩍게 생각되기 시작한 것이다. 실로 기묘한 감정의 변화였다. "됐다!" 루페르스의 짤막한 외침. 그 순간, 방어막과 마스터 카드가 소리를 내며 진동했다. 위이이잉. 순간 떠오른 생각에 잠시 혼자만의 세계에 돌입해버렸던 훼이드리온은 그 순간 움찔 놀래며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그의 눈에도, 신관 아이의 눈에도 확연하게 보일 만큼 공간이 흔들리고 있었다. 꼭 드레이프 안에서 펼쳐지는 마스터 카드 대전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 은 것은 그들 대다수가 마스터 카드 게이머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 그랬다. 마스터 카드와 방어막의 접촉점에서 시작된 파문이 점차 그 강도를 더 해가더니, 어느새 그들의 키를 넘어설 정도로 넓게 퍼지기 시작했다. 눈 앞에서 보이는 공간의 흔들림. 눈앞에서 실제로 펼쳐지는 환상 같은 그 모습에 훼이드리온은 잠시 모든 것을 잊고 감탄해버릴 수밖에 없었다. 마스터 카드 대전을 할 때와 비슷한 느낌이 가슴을 두드렸고 목에서는 금방 환호성이 터져 나올 것 같았지만, 그 어떤 것도 겉으로 표현할 수는 없었다. 그럴 정신의 여유조차 지금 그에게는 허락되지 않고 있었던 것이 다. "와아… 멋져……." 에타의 "우와아아앗!" 함성과 겹쳐져 잘 들리지 않는 아이의 감상에 훼 이드리온의 고개는 자연히 주억거려졌다. 그것은 아주 장관이었기 때문에 한동안 그들의 눈은 모조리 그곳에 쏠 려있었다. 그래서 방어막이 완전히 사라지고 한두 명 정신을 차리기 시작 했을 때는 꽤나 많은 시간이 지나서였다. "……으, 흠. 우리 전부 다 바보가 되어버린 기분이군." 역시나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루페르스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이들을 위해 일부러 크게 소리내어 앞길을 재촉했다. "자자! 정신 차리고 들어가 보자고! 당분간은 이 길을 계속 따라가야 할 거야!" "……아, 다 끝난 건가요?" "에, 벌써요, 아버님?" 아쉽다는 기색이 역력한 훼이드리온과 에타의 말을 들으면서 루페르스 는 빙그레 웃었다. 마스터 카드를 다시 집어넣은 훼이드리온이 루페르스에게 선두를 양보 한 다음 아이의 옆으로 돌아갔고, 에타도 냉큼 미르의 옆에 붙어 다시 소 년의 팔을 붙잡았다. 잠시 흩으러 졌던 대형이 예전의 모습을 되찾은 것 이다. 정리가 끝나자 루페르스는 지체하지 않고 곧장 발을 내딛었다. 지금까지 걸었던 길과 동일하게 울퉁불퉁한 길이 이어지고 있어서 아이를 잠시 한 숨짓게 했지만, 곧 루페르스의 뒤를 따라 천천히 이동을 시작했다. 제정신으로 돌아온 훼이드리온은 아이의 옆에서 다시 걸어가며 방 금 전에 떠오른 생각을 찬찬히 되짚어보기 시작했다. 그 말을 들은 건 게이트 마을의 식당에서였다. 유적 이야기를 꺼내면서 동행을 요청하는 루페르스가 말한 이유. 그리고 그 후에도 여기까지 오면 서 여러 번 되새기고 들었던 이야기였다. 그것을 왜 지금에 와서야 의심하게 되는 것인지는 이 시점에서 별로 따 지고 싶지 않았다. 중요한 건 수상하게 생각되는 바로 그것. 훼이드리온 은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채 깊은 상념에 빠져들 었다. '얘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유일하다시피 한 말동무가 입을 다문 채 골똘히 생각에 잠기자, 심심해 진 아이가 연신 훼이드리온의 얼굴을 기웃거렸다. 건드리면 안될 것 같은 분위기여서 선뜻 말을 하기가 껄끄러웠지만, 그래도 너무나 궁금하고 심 심한 나머지 그녀는 입을 열고야 말았다. "훼온?" 하지만 자기만의 세계에 너무 깊이 몰입해있는 그로서는 아이의 목소리 가 들릴 리 만무했다. 그녀는 단호한 표정으로 얼굴을 교체시키고는 비장 하게 손가락을 들어 그의 옆구리를 쿡, 쿠욱 찔렀다. "훼! 온!" "으, 응? 앗, 그만 찔러!" "이제야 정신을 차리는군?" 아이가 사정없이 푹푹 찔러댄 옆구리를 쓰다듬으며 그가 인상을 찌푸렸 다. 그녀는 자신의 노력에 하늘이 감동했다는 둥 이해 못할 소리를 늘어 놓아 그를 혼란에 빠지게 한 다음, 다음 작전에 들어갔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 거야?" 옆구리의 고통이 아직 가시지 않아 잘생긴 얼굴을 찡그리고 있던 훼온 이 불만 가득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아 그로 하여금 허무함에 치를 떨게 만들뿐이었다. 훼이드리온은 진한 한숨을 쉬며 자신의 처지를 잠시 비관해보는 시간을 가지다가 대답했다. "조금 이상한 게 있어서 말이야. 그것 좀 생각하느라고." "이상한 것?" 고개를 작게 끄덕이는 그는 천천히 걸어가며 말을 이었다. 물론 루페르 스에게는 들리지 않을 만큼 목소리를 낮춰서. "루페르스는 유적을 만든 사람이 대마도사 페인트 라시엔트라고 했잖 아." "응, 그랬지." 아이는 식당에서 들은 이야기를 떠올리며 그의 말을 긍정했다.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아?" "뭐가?" "유적을 만든 자가 대마도사라는 것을 그가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그의 말에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잠시 생각했다. 그의 말이 맞는 것 도 같지만 아직까지는 뭔가 비는 것 같아 그냥 그의 이야기를 경청하기 로 했다. "생각해봐. 루페르스는 대마도사가 이 유적을 만들었다고 만 했지,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잖아. 마법사들은 무언가를 설명하 는 것을 좋아한다는데, 내가 느낀 바로는 루페르스도 설명하는 걸 무지 좋아하는 것 같아. 그런데도 그 이야기는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은, 좀 이상한 것 같지 않아?" "어, 그러고 보니 그런 것도 같네." 훼이드리온의 설명이 납득 가는 아이가 이해한다는 듯이 대답하고는 "흐음."하고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그의 행동과 말에서 의심 가는 부분이 많았다. 제대로 의심을 안 해서 그렇지, 한번 의심의 꼬투리가 잡히자 그것은 기억 속으로 번져 군 데군데에서 허점을 잡아냈고, 그것들을 한번씩 다 훑어본 끝에는 의심이 큰 덩어리가 되어 마음 한구석에 자리잡았다. 그녀 나름대로 생각하고 있던 중에 훼이드리온은 계속 이야기했다. "게다가 또 이상한 건, 그가 마스터 카드의 주인을 어떻게 알았냐하는 거야. 나도… 잘 아는 실력 좋은 마법사가 한참 연구한 끝에 알아낸 걸 나에게 가르쳐줘서 알게 된 건데, 그는 그걸 한번 만져보는 걸로 다 알아 냈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조용히 그의 이야기를 듣던 아이가 반론을 펼쳐보았다. "루페르스는 마법사 길드 마스터잖아. 우리가 생각하기도 힘들 정도의 마법 능력이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지, 뭐. 마법사들이 많이 하는 이야기 있잖아. 의지를 읽는다…던가? 아무튼 그런 이야기. 그 의지를 읽으면, 루 페르스 정도의 실력자라면 카드를 만든 자 정도는 금방 알 수 있지 않을 까?" "하지만 500년이라고. 그 정도면 의지를 심은 마법사에 대한 사항을 아 는 건, 아무리 대마도사에다가 마법사 길드 마스터라고 해도 힘들지 않을 까?" 마법에 대해서는 그렇게 아는 바가 많지 않은 훼이드리온이었지만, 아무 래도 자신의 생각이 맞을 것 같았다. 그는 아이에게 동의를 구하듯이 눈 빛을 보냈고, 눈썹을 찡그리며 생각해보던 그녀가 곧 입을 열었다. "아는 사람 중에 마법사가 있긴 하지만…… 뭐라고 말을 못하겠는걸, 그 건. 마법사들은 개인차가 상당히 심하다고 하니까." "흐음, 머리 아픈걸."이라는 작은 투정으로 말을 마무리한 그녀는 앞서 가는 루페르스를 바라보았다. 방어막을 해제하고 점점 더 유적 안으로 들 어가는 중이었지만 주위 배경을 그렇게 변한 바가 없었다. 정말 유적인지 도 헷갈리는 이 상황에, 그는 정말 이 유적이 대마도사의 작품이라는 것 은 어떻게 안 것일까. "루페르스는 유적에 들어와 본 적 없어." 훼이드리온의 마지막 말. 아이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부분이었기 에 그녀의 고개를 지체 없이 아래위로 흔들렸다. 그의 말에 절대 동의한 다는 의견이 분명했다. 그녀는 소매로 볼에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나름대로 정리한 생각을 이 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럼 이런 걸까? 루페르스는 이 유적에 이미 들어와 본 거야. 그리고 이 안에서 무언가를 알게 되는데, 그것 때문에 훼이드리온이 필요했고 그 래서 끌어들인 거야. 이 정도의 가설이면 대충 설명이 되지 않을까? 유적 에 대마도사가 남긴 어떤 흔적이라도 있었다면 유적을 만든 자가 누군지 정도는 금방 추리해낼 수 있을 거 아냐." 훼이드리온이 길가에서 뻗어 나온 기다란 가지 하나를 들어 그 밑으로 아이를 지나가게 한 다음, 자신도 지나가면서 입을 열었다. "흠, 그럼 정말 우연의 우연이 거듭되어서 벌어진 일이잖아? 내가 게이 트 마을에 들린 것, 거기서 루페르스를 만난 것. 그건 전부 우연인데." "세상에는 그런 일도 있는 법이야. 다 하실루스님의 뜻인 거지." 달과 운명의 여신 하실루스의 신관다운 말을 꺼내며 곱게 손을 모으는 그녀. 그녀의 등을 약하게 밀며 거리가 많이 벌어진 루페르스의 뒤를 따 라붙는 훼이드리온은 그녀의 모습을 보며 생긋 웃었다. 잠깐 기도하는 모 습을 재현한 것이었지만 그에게는 아름다운 그 자체로 보였다. 그는 자신 이 좋아하는 여인이 이렇게 아름다운 소녀라는 사실에 매우 자부심을 느 끼면서 앞을 바라보았다. 사흘동안 지겹도록 봐온 루페르스의 뒷모습에 눈동자를 고정하며 그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럼 그가 나에게 바라는 게 뭘까? 이렇게 허술하게 속이면서 날 유적 안으로 이끈 이유가." 점점 더 어두컴컴해지고, 마력의 압박감이 짙어지자 불안한 듯 팔을 감 싸안으며 그녀가 대답했다. "그건 나도 잘 모르겠어. 일단은 이렇게 따라가 보는 게 최선이니, 계속 가보자. 가다보면 알게 되고, 또 답이 나오겠지." "흐음." 점점 더 깊은 곳으로 향하고 있는 루페르스는 더욱 확연하게 자신을 드 러내는 어둠을 가지고 있었다. 그로 인하여 어두운 중에서도 그의 모습은 눈에 잘 띄었고, 그 모습은 어둡고 칙칙한 나무들에 맞춰 기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다시 보지 못한 특이한 그림 같은 느낌. 훼이드리온은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길을 걷고 있는 듯한 기분에 휩싸 이며 마지막으로 한마디 내뱉었다. "아이는 에타가 수상하다고 했지?" 조용히 걸음을 옮기고 있던 아이가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뒤에서 들 려오는 작은 발자국 소리. 귀를 간질이는 그 소리를 느끼며 그는 칼칼한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난 루페르스가 더 수상해."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마법사 길드 마스터 에게 가진 꺼림칙한 기분이 도저히 가실 것 같지 않은 훼이드리온이었다. --------------------------------------------------------------------- 75편입니다.(---) 훼이와 아이가 루페르스에게 본격적으로 의심을 품게 되는 부분입죠. 에타와 미르는 NPC화가 완전히 이루어져버린 것이군요.(---) 아무튼. 팀군의 폭주는 계속될 예정입니다.;;; 어차피 내일이 마지막이지만.;;; 어둠의 기사 DARK KNIGHT TEAM... P.S 추천 감상 비평. 랄라∼ 주시면 감사하죠.(+ + +) P.S 2 GO CAMA 번 호 : 12 / 12 등록일 : 2001년 01월 11일 04:16 등록자 : 암음기사 조 회 : 100 건 제 목 : [카드 게임 판타지]『카드 마스터(Card Master)』#076 카드 게임 판타지(Card Game Fantasy) 카드 마스터(Card Master) 76.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듯한 훼이드리온의 푸른 눈동자에 찬란한 황금 빛이 반사되었다. 가끔 그의 눈동자에서 보이던 그 황금빛이 아니었다. 그 빛은 그가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는 존재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이었다. 유적 입구에서부터 울퉁불퉁 나있는 좁은 길을 따라오던 훼이드리온은 숲도 아니고, 그렇다고 바위들이 쌓인 것도 아닌, 하여튼 엄청 이상한 곳 으로 들어와 버렸다는 것을 알아챘다. 마법의 숲 깊숙한 곳에 있는 오거 로드만의 아공간 같이, 게이트 산맥의 깊숙한 곳에 있는 전혀 다른 공간 일 거라고 추측하며 주위를 둘러보는 그 순간, 그는 발견하고 말았다. 아 니, 그곳에 있던 6명이 한꺼번에 목격하고 말았다. "……." 그것은 교차시킨 팔 위에 머리를 얹은 채 유유자적한 자세로 엎드려있 는 거대한 생명체였다. 온몸에서 발광하는 찬란한 황금색의 광휘. 눈이 부실 정도의 밝기에 모두들 넋이 나가버린 표정으로 그것을 주시했다. 말로만 듣던, 아니 말로 들은 적도 별로 없는 전설의 종족. 그 종족을 이끈다고 전해지는 황금빛의 생명체. 지그시 감은 눈에서 여유가 묻어나는 황금빛의 드래곤, 골드 드래곤이 유적 한가운데에 그렇게 존재하고 있었다. 마법의 등 정도는 간단히 능가해버리는 밝기를 가진 황금빛을 내는 커 다란 비늘. 바다에 근접한 사람들이 아니고서야 일반 서민들로서는 입에 대기도 어렵다는 물고기를 여러 가지로 요리해서 먹어본 경험이 있는 훼 이드리온은 저 비늘이 단순한 물고기 비늘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것이 라는 것을 한눈에 꿰뚫을 수 있었다. 그야말로 방패. 방패들 중에서도 가장 강력하다는 전설의 금속 오리하르 콘으로 만들어진 방패보다 더 굳건해 보이는 비늘. 그런 비늘로 뒤덮인 몸은 대체 얼마나 강하고 튼튼할까. '이 정도는 되어야지, 이 거대한 몸체를 지탱하겠지.'라는 생각을 하며, 훼이드리온은 천천히 시선을 움직여 거대한 드래곤의 몸체를 살폈다. 어림짐작으로 잡아봐도, 골드 드래곤의 몸길이는 100리치(=100m)를 넘 어가는 듯했다. 이곳이 넓이를 짐작할 수 없이 광활한 유적, 혹은 아공간 이어서 다행이지, 아니었다면 게이트 산맥 깊숙한 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금색의 빛을 보고 모험가들이 이곳으로 몰려왔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100리치를 넘는 거대한 몸에 어울리게 사방을 짓누르고 있는 무거운 중 압감, 존재감. 그것에 눌릴 듯한 표정으로 서있는 사람은 에타과 아이뿐 이었지만, 남은 4명의 인원들도 그렇게 좋은 분위기는 아니었다. 전설의 생명체. 신에 가장 가깝다고 말해지는 드래곤을 이렇게 눈으로 직접 확인한다는 것이 평생동안 살면서 가능한 일은 절대 아닐뿐더러, 그 중에서도 가장 희귀하면서 드래곤들의 수장으로 알려져 있는 골드 드래 곤을 만난다는 건 세기의 시간이 거론되는 어마어마한 일인 것이다. 그런 세기의 사건을 경험하고 있는 그들, 한낱 인간들이 어떻게 평범한 눈길과 평범한 모습으로 골드 드래곤을 대할 수 있겠는가. 역시 평범하지 않은 반응을 보이고 있는 루페르스는 자신에 비해 너무 나 작은 인간들이라서 그런지, 일행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고 계속 눈을 감고 있는 골드 드래곤을 향해 검고 탁한 눈길을 보내다가 심오한 음성 으로 입을 열었다. "살아있는 게 아니군." "……네?" 황금빛으로 빛나는 거대한 도마뱀 형상을 하고 있는 골드 드래곤의 모 습을 제대로 쳐다볼 수 없어서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아이가 그의 말에 뒤늦게 반문한다. 훼이드리온이 벌어진 입을 손으로 닫아주며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을 무렵, 루페르스는 마법사의 본성을 누르지 못하고 골드 드 래곤의 수면을 방해하기 시작했다. "아이 양이라면 지금 느낄 수 있을 거야. 저 드래곤으로 인하여 지금 이 아공간의 마력이 심하게 흔들리고 있고, 더 범위를 확대하여 게이트 산맥 전체의 마력을 불균형하게 흐르고 있다는 걸. 한마디로 게이트 산맥이 금 역화(化)된 건 바로 이 골드 드래곤 때문이라는 거지. 혹시 이 드래곤이 레드였다거나 블루였다면, 게이트 산맥이 이렇게 되지 않았을 지도 몰라. 골드는 드래곤 중에서도 엄청난 마력반응능력을 가지고 있거든." "마력반응능력 말씀이십니까, 루페르스 님?" 마법사 길드 서브 마스터, 마기도 골드 드래곤 앞에서는 인간일 수밖에 없는 탓에 포커페이스로 멍하니 금빛의 드래곤을 바라보다가 마스터에게 물었다. 익숙한 단어였다. "그래,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과 같은." "그게 뭔데요?" 루페르스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훼이드리온이 의문을 드러냈다. 루페르스 는 손을 가슴께로 들어올리더니 손가락들을 물결치듯 서서히 움직이며 말했다. "난 특별한 의지를 가지지 않더라도 마력들이 내 움직임에 반응을 하는 체질이야. 이런 걸 마력반응능력이라고 하고, 마법사로서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소질이지. 내가 마법사 길드 마스터라는 자리에 오른 것도 다 이 런 능력 덕분이야." 그리고 그 손가락들 중 두 번째 손가락을 들어 눈을 감고 있는 골드 드 래곤의 머리를 가리키며 설명의 대상을 바꾸었다. "저 드래곤이란 종족들도 그런 거지. 마법반응능력이 인간들은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데, 그 중에서도 골드 드래곤들이 특출나게 강력 해. 그래서 드래곤족의 수장 역할을 한다고 하지." 그는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계속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저 드래곤은 살아있는 게 아냐. 골드 드래곤이기에, 살아있지 않아도 엄청난 존재감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살아있는 게 아니야. 아 니, 정확히 말하자면 저 드래곤은 환영일 뿐이라는 거지. 뭐, 그렇다고 하 더라도 거대한 존재라는 것은 변함 없지만." 그때. 그들의 머리로는 도저히 형용할 수 없는 굉장하고 어마어마한 존 재감을 가진 목소리가 그들의 뇌리를 강타했다. [그런 존재에게, 인간 그대는 손가락질을 하고 있는 건가.] 거대했다. 끔찍할 정도로 무거운 중압감을 가진 목소리에 그들은 일순 간 얼어버렸고, 에타는 얼른 미르의 뒤로 숨어버리는 재빠른 움직임으로 그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경직되지 않고 움직일 수 있다는 것, 그 자체 로 소녀에게 박수를 쳐주고 싶은 지경이 그들이었다. 목소리는 또 다시 들려와 그들이 자신의 신경에게 '돌이 되어라!'라는 명 령을 내리도록 만들었다. [남자인간 셋에 여자인간 셋. 알맞은 비율로 이루어진 일행이군.] 그 목소리는 금방 불쾌한 감정을 뿜어냈다. [거기 키 큰 남자인간. 언제까지 나에게 손가락을 들이대고 있을 참인 가.] 루페르스는 자신이 지목 당했음을 깨닫는 그 순간에야 겨우 시선을 움 직여 드래곤을 마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게 실수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 전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남자인간 그대…] '안돼!' […전에 한번 본 것 같군.] 참담한 얼굴로 즉시 변해버리는 루페르스. 생각지 못한 변수가 이곳에서 작용해버렸다. 이 망할 드래곤이 얼마 전에 들린 자신을, 기억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제길, 꼬이면 안 되는데.' 차마 분을 터뜨릴 수 없는 그라 조용히 속으로 수많은 욕을 던지고 있 을 때, 마기가 그의 어깨를 잡으며 소리쳤다. "루페르스 님, 이곳에 오셨단 말입니까!" 흥분한 듯 상기된 얼굴인 그녀를 쳐다보지 않으며 루페르스는 골드 드 래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길게 앞으로 튀어나온 입. 그곳에서 삐죽삐 죽 튀어나온 금색의 이빨이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한몫하고 있었고, 그 위로 보이는 황금색의 두 눈동자는 그것을 바라보는 존재를 한번에 제압해버릴 정도로 강한 위압감을 주었다. 단순히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질릴 것 같은 골드 드래곤의 눈동자를 뚫 어져라 쳐다보는 루페르스의 침묵에 훼이드리온이 간단히 입을 열었다.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더니, 그랬던 거군요." 훼이드리온은 유적의 방어막을 통과한 후, 아이와 잠시간의 논의 끝에 내린 결론을 되새기며 루페르스를 바라보았다. 아크릴 영주를 처음 만났 을 때보다 더욱 더 차가워진 냉정한 푸른 눈동자. 많은 성장을 이룬 그의 달라진 면 중 하나가 냉정한 눈빛이었다. 원래 조금은 차갑게 보이는 푸 른 에메랄드 빛 눈동자여서 그 냉정함은 더욱 빛을 발했다. 루페르스는 그 시선을 의식하지 않았다. 지금 그의 모든 신경은 어느새 잠에서 깨어나 조금 목을 들어 자신들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는 골드 드래곤에게 쏠려있었다. 그는 질문했다. "골드 드래곤. 나를 보고 있었던 거냐." 골드 드래곤은 약간의 표정 변화도 없이 그 질문에 답했다. [대마도사가 나에게 내린 마지막 선물, 이 공간은 나의 것. 바로 나, 그 자체이다. 모를 리가 있겠는가, 남자인간이여.] 번뜩이는 드래곤의 황금색 눈빛을 똑바로 직시하는 루페르스는 자칫하 면 거만하게 보일 정도로 여유를 부리기에 이르렀다. "대마도사 페인트 라시엔트에게 봉인된 주제에, 멋진 집을 가지고 있 군." [거만한 인간, 입 조심하라. 난 대마도사에게 봉인된 것이 아니다. 이것 은 내가 원한 것. 영원을 살아가는 드래곤의 생명에 회의를 품게 된 후 만난 대마도사에게 내가 부탁한 것. 난 스스로 봉인한 것일 뿐, 대마도사 에 의해 봉인된 것이 아니다.] "그거나 그거나. 스스로를 봉인할 수는 없으니, 대마도사에게 부탁을 했 겠지. 어쨌든 대마도사에게 봉인된 거잖아. 내 말이 틀려?" 골드 드래곤은 드래곤 중에서도 가장 인자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러 나 이 루페르스라는 인간은 영원의 생명을 가진 위대한 드래곤족의 수장, 골드 드래곤의 인자한 성품을 자극하는 무시무시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골드 드래곤은 눈두덩이를 씰룩거리는 놀라운 표정 변화를 선보이며 여 전히 황금색의 광채가 나는 눈을 번뜩였다. 조금만 더 건드린다면 루페르 스는 세상과의 작별을 실천할 수 있을 지도 모르는 시점이었다. [인간. 나를 자극하는 것이 재미있는가. 더 이상 나간다면, 아무리 금성 안(金聖眼)의 후손이라고 하더라도 봐주지 않는다. 이곳은 나의 공간. 너 희 인간들이 발을 디딜 곳이 아니다.] "흠, 웃기는 것도 가지가지군." 루페르스는 선선한 얼굴로 냉소했다. 그런 그의 태도에 차갑게 그를 바라보고 있던 훼이드리온조차 흔들릴 뻔했다. 위대한 존재인 드래곤 앞에서도 전혀 굴하지 않고 대꾸하는 그의 모습은 지금까지 느꼈던 느긋한 모습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이것이 진정한 마스터의 모습이다.'란 표현이 딱 어울리는 분위 기. 여전히 냉소하고 있던 루페르스는 차갑게 굳어있는 눈빛을 한 아이를 힐끔 쳐다보다가 훼이드리온을 마주 보았다. 따뜻함이 느껴지던 예의 눈 빛이 아닌 검은머리의 소녀와도 같은 냉정한 눈빛을 한 그를 보며 너무 이른 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것. 상황은 만들어 가면 되는 것이다. 루페르스는 다시 골드 드래곤을 보았다. "그래, 나도 금성안의 후손 중 하나이지. 하지만 금성안, 아니, 대마도사 라고 하는 게 '금성안'을 모르는 이 애들에게는 이해가 빠를 것 같군. 금 성안을 가진 대마도사의 핏줄만이 통과할 수 있는 방어막은 지금 어때? 아직 남아있나?" 골드 드래곤은 아공간의 입구 쪽으로 목을 돌리더니, 잠시 침묵하다 말 했다. [사라졌군. 대마도사의 방어막이 사라지다니. 남자인간 그대에게 금성안 과 최초의 마스터 카드가 있단 말인가.] 음성은 그렇게 격하지 않았지만, 분명히 격한 음색이었다. 다시 목을 돌 려 루페르스를 내려다보는 골드 드래곤의 눈에는 끓어오르는 어떤 감정 이 간직되어있었다. 루페르스는 싱긋 웃으며 훼이드리온은 돌아보았다. "물론 나에게는 금성안이라든지, 마스터 카드라든지, 방어막을 제거하기 위한 그 어떤 열쇠도 없어. 하지만 내 일행에게는 있지. 그렇지 않나, 훼 온 군?" "……네?" 갑자기 이야기의 맥이 자신에게로 향하자, 훼이드리온은 움찔 놀래며 루 페르스를 바라보았다. 그가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훼이드리 온은 루페르스의 탁한 시선을 받으면서 슬그머니 골드 드래곤을 바라보 았다. 골드 드래곤의 황금빛 시선의 끝에 자리한 훼이드리온은 푸른 에메랄드 빛 눈동자. 골드 드래곤이라는 거대한 존재 앞에 조금은 눌려진 기색이 있었지만, 그래도 역시 당당한 그 푸른 눈동자. 그 속에 있는 금성을 발견한 골드 드래곤은 한참 후에야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500년만인가. 금성안을 가진 자를 만나게 되다니.] 골드 드래곤의 음성에서 느낄 수 있는 건 '환희'라는 경악스러운 감정이 었다. 루페르스는 진득이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그는 금성안의 후손이면서 금성안을 가진 자다. 그리고 대마도사가 창 조한 최초의 마스터 카드를 가지고 있지. 방어막을 해제할 열쇠는 모두 갖추어진 것 아닌가." [그렇군. 이제 떠날 때인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하고 있는 루페르스와 모든 것을 받아들 인다는 초연한 모습으로 말하고 있는 골드 드래곤. 그 둘만이 이해하고 있는 대화의 장에서 멀리 떨어져있는 상태인 훼이드리온과 아이를 비롯 한 5명은 서로를 한번씩 바라보면서 침묵을 나누었다. 그러다 아이가 마 기를 향해 입을 열었다. "금성안……이란 게 뭐죠?" 무서운 듯 미르의 뒤에 숨어있는 에타도 동그랗게 뜬눈으로 마기를 바 라보았다. 잠깐 사이에 많은 시선을 받은 그녀는 "흠."하고 목을 가다듬 더니 이내 간단히 대답했다. "금성안이란, 진실을 보는 눈이라고 말해집니다. 인간 중에 몇 세기에 한번씩 나타나는 능력인데, 세상에 알려진 것으로는 500년 전 대마도사 페인트 라시엔트가 마지막이라더군요." "진실을 보는 눈?" "시적으로 표현하자면, 순수한 푸른 수면 위에 떠오르는 금색별, 라고 합니다." 아이는 즉시 훼이드리온을 바라보았다. 순수한 푸른 수면. 그것은 훼이 드리온이 가진 깨끗하고 순수한 푸른 눈동자를 뜻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나오는 단어. "…금색별." 안타깝게도 지금은 훼이드리온의 두 눈동자에서 금색별을 찾을 수는 없 었다. 하지만, 아이는 확신할 수 있었다. 금성안, 순수한 푸른 수면 위에 떠오르는 금색별을 가진 자는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이 사랑하는 바로 이 소년이라는 것을. 어느새 모든 이들의 시선을 받고 있는 훼이드리온은 갑자기 모인 시선 에 당황하면서 두리번거렸다. 골드 드래곤이라 불리는 초유의 생명체의 금색 두 눈도 자신을 향해 있었다. 그 눈동자에서 그는 애절한, 무언가 깊은 감정을 느꼈다. 얼떨떨한 기분으로 그가 입을 열었다. "그럼… 제가 그 금성안을 가진 자라는 것인가요?" 누구에게 향하는 질문이지 조금은 애매했지만, 다행히도 대답은 돌아왔 다. "금색별." 약간은 동문서답격인 대답이었지만. 훼이드리온은 즉시 고개를 돌려 자신의 뒤편에 서있는 미르에게 눈길을 던졌다.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는 검은 눈동자의 소년은 아공간의 어둠 속에 녹아든 모습으로 천천히 말했다. "너와의 마스터 카드 대전에서 보았다. 너의 푸른 눈동자에 떠오른 금색 의 별을." 미르는 그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당시, 자신이 내준 과제를 풀기 위하여 마스터 카드를 부여잡고 온갖 고심을 하고 있던 훼이드리온의 눈에는 약 하지만, 정확하게 별의 형상을 하고 있는 금색별이 나타났다. 자신의 시 력을 의심하지 않는 소년은 그가 아버지가 말한 존재임을 직감했고, 동행 에 확신을 가졌다. 마찬가지로 그때의 기억이 남아있는 훼이드리온도 "아……."하는 작은 탄성과 함께 이마를 부여잡았다. '그때 그 말이 그것을 뜻하는 것이었던 가.' 모든 상황이 이해가 된 훼이드리온은 루페르스가 자신을 속이면서 이곳 까지 데리고 온 이유까지 생각이 미쳤다. 그는,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금성안을 가진 자신을 이곳에 데려와 저 골드 드래곤과 만나게 할 작정 이었던 것이다. 그는 간단히 그 이유를 생각해보았다. '뭔가 확인할 것이 있다?' 자신이 금성안을 가졌다는 사실도 오늘에야 깨달은 것이다. 대마도사 페 인트 라시엔트의 핏줄이기는 하지만, 마기의 말을 생각하면 핏줄과는 상 관없는 능력인 듯하다. 그야말로 누구도 예측하지 못하는 것인데, 루페르 스는 어떤 방법으로 그것을 대충 눈치채고,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이곳에 자신을 데려왔을 가능성이 있다. 한마디로 마스터 카드를 이용해 방어막을 제거하는 그것조차도 도박에 가까웠다는 것이다. 훼이드리온은 스스로 내린 결론에 루페르스에게 가졌던 의심이 더욱 커 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대체 무엇이길래 자신도 모르는 사실을 알고 있 는 걸까. 마법사 길드 마스터, 라는 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했다. 어쩌면 자신이 마법왕국 라시엔트의 태자라는 사실도 알고 있을지 모르는 상황 이었다. "진실을 보는 눈……. 훼온이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건, 루페르스 는 대체 어떻게 안 거죠?" 때마침 아이가 날카롭게 질문했다. 질문을 받아야하는 상황인 루페르스 는 골드 드래곤에게 향해있던 눈길을 지그시 돌려 자신의 아들을 바라보 았다. "미르가 찾은 아이야." 미르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버지가 찾아오라고 했지." 아이는 그것을 정리하여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루페르스가 조건에 맞는 사람을 찾아오라고 미르에게 시켰 고, 미르는 조건에 맞는 사람, 훼이드리온을 찾아서 아버지께 데려간 거 다?" 기분이 굉장히 나빠진 아이는 눈앞에 있는 골드 드래곤의 존재 정도는 싹 무시한 태도로, 미르를 향해 무섭게 소리쳤다. "미르! 그럼 넌 훼온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한 거였어? 한번은 습격까지 했었다면서! 정말이야? 정말 그런 거라면, 난 신관의 이름을 걸고 미르 너를 저주하겠어!" 미르는 움찔 놀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더없이 화가 난 듯한 그녀의 눈 동자 뒤로 훼이드리온의 모습이 보였다. 자신보다 더 화를 내고 있는 그 녀의 모습에 당황하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기쁨도 느끼는 듯한 표정이 었다. "무슨 말이야! 미르가 그런 치사한 짓을 할 거 같아! 남을 그렇게 함부 로 평가하지 말란 말야, 이 마녀!" "에타, 넌 조용히 해!" "베에에에에!" 영양가 없는 다툼을 하고 있는 소녀 둘은 제쳐두고, 미르는 훼이드리온 을 바라보았다. 소년의 시선을 느끼며 그도 소년을 바라보았다. 푸른 눈 동자와 검은 눈동자. 한쪽은 순수하고, 한쪽은 탁한, 두 가지의 시선이 중 간에 마주쳤고 둘만의 침묵이 생겨났다. 마기는 골드 드래곤과 뭔가 이야기를 시작한 루페르스의 곁으로 갔고, 에타와 아이가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사이 훼이드리온과 미르는 조용히 시선을 교환했다. 꼭 금방이라도 금색의 별이 솟아오를 것 같은 푸른색의 눈동자는 어둠 이 짙은 공간이라서 더욱 밝아 보였다. 탁하게 흐리지만 전보다는 따뜻해 진 검은색의 눈동자는 어둠보다 더욱 깊어 눈에 띄었다. 훼이드리온은 작게 입을 열어 아이를 만류했다. "아이, 그만해." "야… 응?" 막 에타를 향해 뭐라고 소리치려던 아이가 뭔가 방향이 어긋났다는 사 실을 깨닫고 급히 입을 다물었다. 에타도 뭐라고 응수하려다가 미르의 찌 릿한 눈빛을 받고 조용히 소년의 등으로 숨었다. 이내 조용해진 분위기 속에서 훼이드리온은 미르를 다시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미르는 죄가 없어. 그렇지?" "…그렇다." "그럼 됐어. 난 미르를 믿어." 더한 결론은 없다는 듯이 몸을 돌린 훼이드리온의 등뒤로 무표정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는 미르의 모습이 보였다. 아이가 황당해하며 훼이드리 온에게 "속은 게 아니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어?"라고 물었지만, 그의 대답은 너무나 간단했다. "믿으니까." 에타는 훼이드리온에게서 들려오는 대답에 미르가 웃고 있을 지도 모른 다는 생각에 조심스럽게 눈동자를 움직여 올려보았지만, 소녀의 기대와는 달리 소년은 웃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기뻐하고 있다는 것은 소녀도 충 분히 느낄 수 있어서, 괜히 자신도 기분이 좋아졌다. 훼이드리온은 루페르스를 향해 말했다. "당신이 저를 이곳에 데려온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일단 이 한가지는 알 수 있겠습니다. 제가 저 골드 드래곤을 만나기를 바랬던 것입니까?" 그는 간단히 대꾸했다. "그래." "대답해주셔서 감사하군요." 무표정하게 냉정한 훼이드리온은 전혀 감사한 것 같지 않았지만, 루페르 스도 별 다른 말은 꺼내지 않았다. 훼이드리온은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드리지요.'라는 마음으로 골드 드래 곤을 올려다보았다. 황금색의 무시무시한 발톱이 돋아있는 두 개의 앞발 에 머리를 올리고 있다가 조금 들었을 뿐인데도, 인간의 입장에서는 까마 득한 높이였다. 목이 뻐근해지는 듯한 느낌을 느끼며 그는 한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일단, 제가 당신을 뭐라고 불러야할지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첫 물음치고는 제법 괜찮았다. 골드 드래곤은 500년 만에 만난 금성안을 가진 소년을 지그시 내려다보다가, 위압감이 넘쳐흐르는 목소리를 냈다. [내 이름은 잊혀진지 오래다, 소년이여. 그냥 골드라고 불러라.] 골드 드래곤, 골드는 드래곤족 중에서도 골드 드래곤만을 나타내는 명칭 을 자신의 이름으로 대체시켰다. 실제로 그는 너무나 오랜 시간을 혼자서 존재해왔기 때문에 자신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훼이드리온은 골드의 요청대로 그렇게 부르기로 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골드 님은 제가 금성안이라는 것을 어떻게 아십니까?" 자신을 한번보고 금성안을 가졌다는 사실을 확신해버리는 골드의 의견 이 참으로 궁금한 훼이드리온. 골드는 잠시 눈을 감더니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500년 전 만난 페인트의 모습을 어떻게 잊겠는가. 소년 그대처럼 순수 하게 맑은 푸른 눈동자에 떠오르는 금색의 별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 가. 난 지금도 보인다. 그대의 눈동자에 떠오르는 황금빛의 별이.] 추억을 회상하며 안타까운 듯 울려 퍼지는 골드의 목소리. 훼이드리온은 그를 올려다보면서 문득 떠오르는 존재가 있었다. 게이트 산맥과 같은 금역, 마법의 숲에서 만난 인연. 아직까지도 그를 든든하게 지켜주고 있는 붉은 칼의 원래 주인, 오거 로드 라이안. 세속에 알려진 다른 이름으로는 샤렌 하르트를 말할 수 있는 그 거대한 존재는 지금 그의 앞에 서있는 골드 드래곤과 아주 비슷했다. 500년 전의 친우였 던 대마도사 페인트 라시엔트를 떠올리며 향수에 젖은 듯한 모습까지. 둘 다 초유의 존재라는 사실을 말하지 않아도 그들은 대마도사에 대해 서 너무나 닮아있었다. 눈을 감은 채 추억에 잠긴 듯한 골드가 눈을 뜨기 전에 잠시 칼을 내려 다본 훼이드리온은 정이 담긴 손길로 그것을 쓰다듬었다. 단단하게 허리 춤에 매달려 지금껏 같이 해온 칼. 이미 칼은 그에게 큰 의미를 가진 물 품이 되어있었다. [……그건 칼이군.] 훼이드리온도 회상에 잠겼을 무렵, 어느새 눈을 뜬 골드의 목소리가 들 려왔다. 그가 서둘러 대답했다. "네? 아, 네. 맞습니다." 지그시 칼을 내려다보는 시선인 골드는 한참을 그것을 바라보다가 이내 조금 눈동자를 움직여서 훼이드리온을 향했다. [오거 로드…를 만난 것인가. 마법의 숲에도 들어갔었나 보군.] '거기서 아이도 만났지.'라는 생각을 떠올리며 그가 말했다. "길을 잃고 헤매다가 만났습니다. 그리고… 여행에 약간의 도움을 주고 싶다면서 이 칼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다음에 있는 약간의 늘림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칼을 받게 된 이유가 대마도사의 후손이라는 것이기에, 여기서 말하기에는 큰 무리 가 뒤따르니까 말이다. 대충 말을 집어삼킨 훼이드리온은 다시 골드 드래곤을 올려다보았다. 작 은 소년이 오거 로드까지 만났다는 사실이 놀라운지 길쭉한 입을 꿈틀대 고 있던 골드는 나름대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그를 향해 목소리를 보냈다. [그렇다면 오거 로드에게 앞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것이 있겠군.] 마치 미리 약속이라도 했다는 듯이 발언했다는 것을 훼이드리온은 눈치 채지 못했다. 그는 여행을 시작한 거의 초기 때의 기억을 되살리면서, 그 것을 입으로 풀어냈다. "앞길에 대한 이야기……는 특별히 들은 기억이 없습니다. 일단 가장 기 억나는 이야기라면 '진정한 카드 마스터는 단 한 명, 대마도사 페인트 라 시엔트 뿐이다'라는 말이고요. 제가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니, 스스로 찾아 보라고 하더군요. 마스터의 의미를 생각하라면서."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마스터'라는 단어의 뜻을 제대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카드 마스터, 마법사 길드 마스터 등등. 마스터, 라는 명칭이 붙 은 것들은 많이 들었지만, 정작 "마스터의 뜻이 뭐냐?"라고 누군가 물어 오면 "에에, 그게 그러니까……"라고 쉽게 대답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만큼이나 '마스터'란 건 모호하고 막연한 뜻을 내포한 단어였던 것이 다. '마스터. 흐음.' 그렇게 속으로 곱씹으며 샤렌 하르트를 생각하고 있는데, 골드의 눈길이 천천히 훼이드리온의 전신을 훑었다. 뭔가 관찰되는 느낌에 오싹한 기분 으로 정신을 차리는 그는 후다닥 정신을 수습하고 경직된 자세로 드래곤 을 바라보았다. 영원히 꺼질 것 같지 않은 금색이 찬란한 골드의 두 눈에 서 뿜어 나온 빛은 환하게 그를 비췄다. 눈이 부시지만 별로 따갑지는 않은, 그런 골드 드래곤의 안광을 받으며 긴장한 채 훼이드리온이 서있자, 골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 니, 살벌하게 이빨들이 튀어 나와있는 저 입을 직접 열어 말을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마스터. 금성안을 가진 소년이여. 오거 로드가 제시한 의문에 힌트를 내가 주겠다. 나도 완벽한 답을 너에게 줄 수는 없으니 이해해줬으면 한 다.] "…말씀해주세요." 훼이드리온은 골드의 커다란 눈을 바라보았다. 금색의 드래곤은 잠시 말 을 준비하듯이 눈을 감고 있다가 앞발을 조금 뒤척이더니 다시 눈을 떴 다. 사념파와 같은 음성이 훼이드리온의 고막을 두드렸다. [마스터. 흔히 주인, 혹은 어떤 것을 통달한 자로 쓰이는 말이다. 하지만 이런 뜻이기도 하지.] 드래곤들의 수장, 골드 드래곤은 재차 입을 열었다. [깨달은 자.] --------------------------------------------------------------------- 마스터. Master의 의미는 사전을 뒤져서 찾지 않았습니다. 그저 제가 만들 어낸 그런 뜻이랍니다. 심심하신 분은 사전을 뒤져서 뜻을 알려주시길. 알만한 분들은 아시겠지만, 서울에 다녀왔습니다. 그래서 이제야 이렇게 글을 올립니다. 한동안은 폭주집필이오니, 빨리 글을 보실 수 있을 것 같 습니다. 그럼. 어둠의 기사 DARK KNIGHT TEAM... P.S 추천 감상 비평. 받습니다, 받아요. P.S GO CAMA 번 호 : 13 / 14 등록일 : 2001년 01월 11일 23:01 등록자 : 암음기사 조 회 : 110 건 제 목 : [카드 게임 판타지]『카드 마스터(Card Master)』#077 카드 게임 판타지(Card Game Fantasy) 카드 마스터(Card Master) 77. 훼이드리온의 머리 속에 떠도는 단어는 단 두 가지였다. '마스터'. 그리 고 '깨달은 자'. '마스터'는 '깨달은 자'를 말하는 것이고, '깨달은 자'는 '마 스터'로 불린다. 그런 공식이 그의 머리 속에서 조심스럽게 성립되었다. 그는 골드 드래곤의 머리를 올려다보았다. 이제 목이 아프다든지 하는, 그런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느낄 새가 없다고 말하는 게 더 옳 을 것이다. "깨달은 자, 라는 것은 무엇을 깨달았다는 것입니까?" 골드는 그의 물음에 친절하게 답해주었다. [깨닫다. 그것은 진리를 알게 되었다, 라는 말과 동일하다. 하지만 아니 기도 하지.] 아리송한 골드의 말에 훼이드리온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진리를 알게 되었다. 하지만 아니기도 하다니요?" [말 그대로다. 깨닫다, 라는 것 특별히 진리를 지칭해서 생기는 말도 아 니라는 것이다.] "카드 마스터. 그럼 그것은 '카드를 깨달은 자'인 가요?" 골드 드래곤은 천천히 목을 치켜세우며 관절을 풀어주듯 몇 번 움직이 더니 턱 하니 두 팔 위에 머리를 올렸다. 다시 유유자적한 풀어진 자세가 되어버린 골드는 더 이상 관심 없다는 듯이 무시한 어조로 말했다. [그것은 스스로 알아보아라.] 오거 로드가 한 말과 같은 말이었다. 누구도 정확한 답을 알려주지 않고 훼이드리온 스스로가 찾기를 요구했다. 거기서 그는 뭔가 꾸며진 듯한 알 수 없는 위화감을 느꼈다. 마치 오래 전부터 준비되어온 일에 자신이 쓰이고 있는 것 같은, 마치 한 연극의 주요 인물로 캐스팅 되어 움직이고 있는 것 같은 그런 불쾌한 느낌 말이다. 훼이드리온은 자연스럽게 구겨지는 인상을 애써 없애려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아예 눈까지 감아버린 골드 드래곤은 다시 입을 열지 않고 목소리를 냈 다. [이제 가줄 때군. 가라. 다시는 이곳에 들를 일도 없을 것이다.] 정말 무심한 그 목소리에 훼이드리온은 지금까지 가졌던 약간의 긴장들 이 온통 무너져 내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500년 전의 대마도사와 같은 능력, 금성안을 지닌 자를 만나 잠시 반가웠지만 이젠 더 관심이 없다는 투였다. 그는 알 수 없는 감정을 감추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아이를 위해 웃음을 띄웠다. "무슨 이야기를 나눈 거야?" "어? 다 듣지 않았어?" 그녀는 아무 것도 모르는 얼굴이었다. 훼이드리온은 저 골드 드래곤이 그새 무슨 일을 했다고 내심 짐작하며 대충 말해주기로 결심했다. "그냥 이러저러한 여행에 대한 이야기. 내가 알고 싶어하는 것에 대한 힌트를 조금 줬어." "훼온이 알고 싶어하는 것?" "응." 웃으면서 대답하는 훼이드리온. 확실히 그녀 앞에서는 화를 내기도, 불 쾌한 감정을 표현하기도 싫었다. 그녀는 훼이드리온이 알고 싶어하는 것이 뭔지 굉장히 묻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그래서 그는 한마디 해주어 그런 그녀를 진정시켰다. "나중에 말해줄게." "응응." 아이는 기쁜 듯 미소지으면서 대답했다. [어서 나가라.] 강압적인 어조로 말하는 골드 드래곤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훼이드리 온은 "네, 알겠습니다." 대답하고는 루페르스는 향해서 차가운 눈빛을 던 졌다. "당신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지만, 일단 이곳을 벗어나서 하도록 하지 요. 앞장서세요. 저희들은 길을 모릅니다." 여기서 '저희들'이란 루페르스와 마기를 제외한 나머지 4명의 인원이라 는 것을 모를 리 없는 루페르스는 피식 웃으면서 그들이 들어왔던 입구 를 향해 손을 들었다. "일단 저기로 나가. 난 이 도마뱀과 할 이야기가 좀 더 남아있으니까." 드래곤족의 수장이라고 일컬어지는 존재에 대한 일말의 존경심도 남아 있지 않은 듯한 그 목소리에 골드 드래곤이 불쾌하게 눈을 떴다. 찬란하 게 빛나는 눈동자는 여전했지만, 그 금빛에는 부정적인 감정이 가득했다. 그 눈빛을 마주하며 루페르스는 태연하게 말했다. "마기, 데리고 나가." "…네, 알겠습니다." 마기도 뭔가 아쉬운 듯한 얼굴이었지만 일단 자신이 따르는 마스터의 지시였기에 이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골드 드래곤을 무서워하던 시절은 어느새 잊어버리고 꼭 한번 만져보고 싶다고 생떼를 쓰고 있는 에타 때문에 곤혹스러워 하면서 겨우겨우 그들 모두를 입구 밖으로 데리 고 나갔다. 루페르스는 의외로 애 달래기를 잘하는 마기에게 속으로 인사 를 해주며 골드 드래곤을 올려다보았다. 둘만 남은 유적의 아공간. 불쾌하게 눈을 치켜 뜨고 있는 거대한 골드 드래곤과 그 앞에서 어둠 속에 완전히 동화된 듯이 서있는 마법사 길드 마스터 루페르스. 골드는 거만하다 못해 당돌하기까지 한 남자인간에게 한마디해줘야 할 필요성을 너무 많이 느껴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인간. 무엇을 믿고 그렇게 당돌한 것인가.] 일반인이 들으면 그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강압적인 느낌만으로도 쓰러 져버릴 것이 분명했지만, 애석하게도 루페르스는 일반인이 아닌 특별한 인간이었다. 아니, 특별한 인간 중에서도 특별한 그런 인간이었다. "골드 드래곤. 그대가 신에 가까운 존재라는 것은 나도 인정하는 바야. 하지만 그것은 그대가 살아있을 시절의 이야기. 어차피 지금 그대는 죽은 것과 다르지 않잖아. 안 그래? 영혼도 아닌 인격만이 허상으로 남아있는 드래곤." 골드 드래곤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래. 난 스스로를 봉인한 몸. 그래서 인격만이 이렇게 환영으로 남아 있지. 하지만 그렇다고 인간에게 비하될 만큼 타락하지는 않았다. 뭔가, 인간. 날 자극해서 너에게 이득이 되는 것이 무엇인가.] 루페르스는 재미나게 웃으며 태연히 지껄였다. "이득? 그런 건 없어. 그냥 커다랗고 멍청한 어느 금색의 도마뱀을 놀리 는 게 재미있을 뿐이야." 자신이 하는 말이 맘에 들었는지 루페르스는 한참을 키득거렸다. 골드 드래곤은 이 인간이 너무 마법에 빠져들다가 조금 정신이 돌아버린 건 아닌지 불쌍하게 생각되었다. 인간들이 고대라고 지칭하는 시대에 그런 존재들을 여럿 보았기 때문이 그들의 고통을 아주 잘 알고 있는 골드였 다. [인간. 예전에 비해 약해졌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나도 인간 하나쯤은 간 단히 죽일 수 있다. 그것을 알고 그런 말을 내뱉는 것인가.] "큭, 물론 알고 있지. 드래곤 중에서도 지고한 존재인 골드 드래곤, 모든 드래곤의 제왕 드래곤 로드인 너라면 인간 하나쯤은 지금이라도 가능하 겠지. 하지만." 루페르스는 여전히 웃으면서 말했다. 하지만, 그 음성은 폭풍이라도 불 러올 것 같이 차갑고 날카로웠다. "날 평범한 인간으로 취급하지 마라." [인간.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면, 그대는 무엇인가.] 골드는 의문을 드러내는 목소리로 말했다. 입구로 사라진 인물들의 사정 은 조금도 염두 하지 않는 태도로 그가 말했다. "난 금성안의 후예. 마력반응능력이 드래곤을 초월했다는 대마도사의 피 를 물려받은 인간이다. 그리고 그것을 자각하고 있는 마법사 길드 마스터 이기도 하고 말이야. 내가 방어막을 지나왔다는 것을 잊은 것은 아닐 테 지, 멍청한 도마뱀." […그러고 보니, 그댄 대마도사가 만든 방어막을 지나왔었군. 그렇다면 인간 그대가 정말 금성안, 페인트의 후손이란 말인가. 조금 전의 그 소년 도 페인트의 자손인 듯했는데.] "설명이 필요한 얼굴이군." [그렇다.] 솔직히 드래곤의 얼굴에서 표정을 읽어내기란 쉬운 것이 아니었다. 그러 니 그것은 흘러가는 상황을 고려한 루페르스의 독단적인 결론이었고, 용 케도 골드의 마음과 맞아떨어진 것이다. 그는 제자를 가르치는 스승의 자세와 비슷한 포즈를 취하며 손가락을 들었다. "대마도사 페인트 라시엔트가 건국한 마법왕국 라시엔트는 알고 있을 거야. 그에게서 이야기를 들었을 테니. 라시엔트는 대대로 왕에게 마법왕 이라는 칭호를 내려. 건국왕인 대마도사의 뜻을 기리기 위해서이지. 역대 마법왕 중에 11대 마법왕 미첼리안 휜 라시엔트라는 사람이 있어. 그는 거의 '가출왕'이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왕성의 지루함을 참지 못하고 왕의 자리를 내놓고 뛰쳐나왔기 때문이지." [흐음. 그렇다면.] "짐작하는 바, 그대로다." 꽤 충격적인 이야기를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는 루페르스는 빙긋이 웃으 며 엄지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난 그 가출왕이 세운 가문, 에르히스트 가문의 피를 이은 사람이야. 루 페르스 폰 에르히스트. 그것이 나의 이름이지." [가출왕… 마법왕의 이름을 버렸어도 피는 그대로. 그런가, 인간 그대도 금성안의 후손이었군.] "그렇지. 애석하게도 금성안은 세기의 능력일 뿐, 피로 이어지는 능력이 아니라서 아쉽지만." 루페르스는 별로 아쉬운 것 같지 않은 음성으로 말하며 턱을 만지작거 렸다. 검은 로브 속에서 뻗어 나온 팔은 타이트한 검은 색의 소매가 가리 고 있었다. 골드 드래곤은 조금 말을 바꿔야할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인간, 위대한 자의 후손이여. 그대가 나에게 바라는 것은 무 엇인가.] "그 전에 한가지 물어도 되지? 안 된다고는 못할 거야." 골드는 긴장한 침묵으로 긍정의 뜻을 밝혔다. 의지를 깨달으면서 드래곤 을 초월한 마력반응능력을 지니게 된 대마도사 페인트 라시엔트의 후손 이라면, 게다가 그것을 완벽하게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인간이라면 지금 상태로는 도저히 이길 가능성이 없었다. 본체로 회귀한다면 몰라도, 인격만이 남아있는 지금은, 그냥 수그릴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말하라.] "훼온 군, 아니 훼이드리온 레이틴 라시엔트는 '카드 마스터'야?" 골드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루페르스도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입을 다물 었다. 난해한 질문. 영원을 사는 지고한 드래곤도 그런 질문에는 섣불리 대답 할 수가 없었다. '카드 마스터'라는 것은 그만큼이나 어렵고, 또한 굉장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난감한 마음으로 열심히 고민하던 골드는 최후에 떠오른 결론에 스스로 도 한심함을 느끼며 대답했다. [그것은 나도 알 수 없다. 금성안. 그리고 최초의 마스터 카드. 마지막 남은 키워드를 그가 느낄 수만 있다면, 그는 카드 마스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 키워드?" [그렇다.] 대다수를 파악하고 있는 자신이 모르는 것이 있었던가 하는 식으로 의 아해하며 루페르스가 되물었다. "마지막 키워드라니?" 골드 드래곤은 아공간으로 들어오는 입구로 시선을 던지며 나지막이 입 을 열었다. 살벌한 입이 두 번째로 열리는 장면이었다. [대소환사.] 조금의 시간이 지난 후, 루페르스는 겨우겨우 입을 벌려 말했다. "그 누구도 보지 못한 환상의 마스터 카드, 대소환사 카드를 말하는 거 야?" [그렇다, 대소환사 카드. 실제로 대마도사와 알고 있는 나조차도 대소환 사 카드는 한번도 본 적이 없다. 그것을 만약, 그 소년이 깨닫는다면 충 분히 카드 마스터가 될 수 있을 테지.] 카드 마스터. 현재는 두 자리 수를 기록하고 있는 그것의 진정한 뜻은 카드를 깨달은 자. 오거 로드가 말하기를, 진정한 카드 마스터는 오로지 대마도사 하나 뿐이라 했다. 그리고 골드 드래곤은 훼이드리온이 대소환 가 카드를 깨닫는다면 카드 마스터가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루페르스는 마스터 카드 대전을 할 때마다 두 눈에서 금색의 별이 광채 를 띄는 훼이드리온을 떠올렸다. 500년 전의 카드 마스터의 뒤를 잇는 두 가지의 조건을 모두 갖추고, 마지막 남은 한가지로서 골드 드래곤이 기대 를 하게 만드는 소년의 모습. 그는 비릿한 미소를 감추지 않으며 골드를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높은 곳에 떠있는 드래곤의 머리를 향해 거만하게 고개를 치켜 든 그를 골드의 금빛 눈이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무엇을 생각하는 건가, 인간.] "훗, 알 거 없어. 어차피 이 유적을 벗어나면 살 수도 없는 녀석이 뭘 그렇게 알려고 그래?" [크르르…….] 사정없이 골드의 가슴을 찌르고 들어오는 루페르스의 가차없는 말에 골 드는 터뜨릴 수 없는 분노를 아주 조금이나마 표현해보면서 화를 삭혔다. 하지만 다음에 입을 열었을 때는, 어찌할 수 없는 분노가 가득 담긴 목소 리가 되어버렸다. [설마, 그가 카드 마스터가 되는 것을 막으려고 하는 것인가.] "아하하핫. 그렇다면 어떡할 건데?" [……!] 노호성을 터뜨릴 것 같이 뜨거운 화를 뿜어내는 금색의 두 눈동자. 루페 르스는 그 눈빛을 똑바로 받으면서도 능글맞게 계속 웃고만 있었다. 본심 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 웃는 얼굴로 그가 말했다. "난 마법사 길드 마스터. 마법사라는 족속들은 원래 욕망에 충실한 법이 지. 고로, 물론 나도 그래. 난 저 태자가 가지고 있는 마스터 카드를 빼앗 아서 카드를 깨달은 자가 될 거야. 그럼 500년 만에 진정한 카드 마스터 가 이 땅에 재래(再來)하는 거지. 루페르스 폰 에르히스트라는 이름으로 말이야! 으하하하핫!" 골드 드래곤은 움찔하며 눈을 씰룩일 수밖에 없었다. 이 인간은, 위대한 자의 피를 이어받은 이 작은 인간은 광기마저 느껴지려고 하는 목소리로 거대한 죄악을 꾸미고 있었다. 카드 마스터가 되려고 하다니. 그럴 자격 이라도 된다면 모르겠지만, 이 인간은 억지와도 같은 말을 지껄이고 있는 것 아닌가. [그대는 금성안이 아니다. 비록 그의 피를 이어받았다고는 하나 금성안 은 세기의 능력. 선택되어진 자가 아니면 가질 수 없다. 그런데, 금성안도 아닌 그대가 어떻게 카드 마스터가 된다는 말인가.] 루페르스는 냉소를 지은 얼굴로 오만하게 골드 드래곤을 올려다보았다. "훗, 역시 영원을 살다보니 머리가 굳었나보군. 금성안이 아니면 안 된 다는 법도 있어?" 골드는 움찔 놀래며 인간을 바라보았다. 진리로 받아들이고 있던 그것 을, 작은 인간은 간단하게 깨버리고 있었다. "카드 마스터였던 대마도사가 금성안이었던 거지, 금성안이 카드 마스터 가 된 건 아냐. 그렇지? 누구도 그런 법칙을 만들지 않았어. 그러니까, 나 도 카드 마스터가 될 수 있어. 그렇지?" [……크르르.] "시끄러워. 가래 끓는 소리내지마." 미간을 좁히며 눈을 부라리는 루페르스의 눈빛에 밀려 드래곤은 입을 다물었다. 세상에, 눈빛 하나로 전설의 종족, 드래곤이 침묵하게 만드는 자가 루페르스 말고 또 있을까. 그를 가리키는 부정적인 의견들을 다 덮 을 만큼, 그는 대단했다. 그리고 그것은 골드도 인정하는 바였다. 대마도사의 후손이어서 일까. 마력반응능력을 조종할 수 있는 힘이 있어 서일까. 마법사 길드 마스터라는 자리에 올라있는 중년의 남자인간의 전 신에서는 자신감이 흐르고 있었다. 지고한 골드 드래곤 앞에서도 거침없 이 욕설과 독설을 내뱉으면서, 오히려 드래곤의 기를 죽일 수 있을 만큼 의 자신감이. 능력이 있는 자신감만큼이나 완벽한 것은 없다. 골드는 완전히 할 말을 잃은 듯한 침체된 분위기로 아공간 속에 목소리 를 울려 퍼지게 만들었다. […이미 그댄… 내가 막을 수 있는 자가 아니다. 하지만 아주 불안한 게 사실이다. …그를 죽일 건가.]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리며 골드 드래곤의 음성을 듣고 있던 그는 "하 핫." 웃은 다음, 태연히 말을 꺼냈다. "잘 알고 있군." [……!] "하지만 뭐, 그렇게 놀랄 것 없어. 죽이는 건 어디까지나 최후의 수단이 니까. 내가 사람을 죽이는 데 쾌락을 느끼는 변태도 아니고 말이야. 나도 마스터 카드 게이머 중 한 명인데 그런 게이머답지 않은 일을 할 수는 없잖아?" 골드는 긴장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마법사 길드 마스터. 생각해 보지 않아도, 척 오는 느낌에 굉장히 마스터 카드 실력을 가지고 있을 듯 했다. 그렇다면 아까의 그 소년에게는 전혀 승률이 없었다. [마스터 카드 대전……. 그것으로 카드를 빼앗겠단 말인가?] "그렇지. 사실 이곳에 오기 전에 한번 상대했었거든. 내가 아주 형편없 는 실력으로 상대했기 때문에 지금 그 녀석은 방심하고 있을 거야. 나하 고 다시 대전해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 훗, 아무리 생각해도 그때 한번 게임을 해본 건 잘한 선택이었단 말이야." [그럼, 그가 카드 마스터가 될 자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단 말인가.] "확신하지는 않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 그것을 확인하려고 이곳 으로 데리고 온 것이고 말이야. 하핫. 이젠 그 마스터 카드를 빼앗으면 되는 거야. 금성안은 어차피 필요 없는 것. 마스터 카드를 빼앗고, 대소환 사를 깨닫기만 하면, 난 진정한 카드 마스터가 되는 거지. 정말 유쾌한 기분이군! 아하하핫!" 루페르스는 혼잣말로 떠들면서 기분 좋게 몸을 돌렸다. 황망한 표정이 되어버린 골드 드래곤이 어떻든 전혀 상관하지 않으며. 입구 쪽으로 걸어 가는 그의 등을 바라보며 골드가 마지막 말이라는 듯 깊은숨을 들이쉬고 는 입을 열었다. […카드 마스터. 결코 쉽지는 않을 것이다.] 루페르스는 경쾌하게 그 말에 대꾸했다. "누가 그걸 몰라? 다 감수하고 하는 거라고. 하하핫." 골드 드래곤의 허망한 눈길을 싸악 무시하면서 입구로 사라지는 그의 걸음걸이는 더없이 유쾌하여 보는 골드로 하여금 인상을 찡그리며 눈을 감아버리게 만들었다. ------------------------------------------------------------------- 아. 네에. 이렇게 77편인 것입니다.(^^^) 이번, 골드 드래곤 등장편에는 수많은 복선이 있습니다. 라는 건 거짓말이구요.;; 그냥 훼이드리온의 여행에 뭔가 영향을 미치는, 앞서 마법의 숲에서 만난 오거 로드와 같은 초월적인 존재가 등장하는 편입니다. 골드 드래곤. 게이트 산맥의 유적에 숨어있는 골드 드래곤의 인격이 훼이드리온에게 말해준 것. 그것은 뭐. 이제 이 이야기도 끝이 다 되어간다는 것을 암시하는 거죠. 제목이기도 한 카드 마스터.를 본격 적으로 거론하게 되죠. 냐하하. 그럼 다음 편에 뵈어요!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다 아시겠죠? (^^^) 어둠의 기사 DARK KNIGHT TEAM... P.S 추천 감상 비평. 받아요오~ P.S 2 GO CAMA 번 호 : 14 / 14 등록일 : 2001년 01월 12일 19:28 등록자 : 암음기사 조 회 : 37 건 제 목 : [카드 게임 판타지]『카드 마스터(Card Master)』#078 카드 게임 판타지(Card Game Fantasy) 카드 마스터(Card Master) 78. 그런 이유로, 훼이드리온은 분노하고 있었다. "…이럴 작정이었던 거군요." 분노로 갈피를 못 잡고 있는 푸른 눈동자를 마주 하며 루페르스는 능글 능글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하하핫. 알고 있지 않았어? 난 다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단숨에 달려가 노골적으로 놀림의 말을 지껄여대고 있는 루페르스의 면 상을 차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훼이드리온이었지만, 현재 상황이 그 를 뒷받침해주지 않고 있었다. "루페르스!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할 줄 알아요!" 루페르스의 마법으로 허공에 떠오른 상태로 허우적대고 있던 아이가 앙 칼지게 소리질렀다. 이미 포기한 듯이 여유까지 느껴지는 자세로 늘어져 있는 미르와는 달리 기필코 땅에 닿고 말리라, 라는 의지가 느껴지는 발 버둥을 치고 있는 그녀의 행세는 조금은 꼴불견이라 훼이드리온이 얼굴 을 붉히며(화가 나서일지도 모른다) 루페르스는 쏘아보았다. 그는 허공에서 들려오는 아이의 고함은 지나가는 바람 소리보다 더 가 치가 없다는 듯이 피식 웃어넘기면서 반대쪽을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마 스터의 명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는 마기가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고 있었 다. "마기. 걔들은 저쪽으로 보내버려." 마기는 루페르스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한번 쳐다보고는, 마스터가 귀찮아서 아무데나 지적한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래서 되도록 안전한 곳 을 골라 허공에 떠있는 아이와 에타, 미르를 움직였다. 그때 루페르스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아니, 거기가 아냐, 마기. 저쪽이라니까?" 그는 방금 전에 가리킨 곳으로 다시 손가락을 뻗었다. 마기는 당황하면 서 소리쳤다. "하지만 루페르스 님! 저곳은 낭떠러지잖습니까!" 그 즉시 아이와 에타가 합세하여 비명을 질러댔고, 훼이드리온도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루페르스! 저들을 죽일 작정입니까!" "아아, 어디까지나 필요해서 그러는 거야. 그러니까 소리 좀 지르지 말 라고. 내 나이가 몇인데, 벌써 귀를 먹은 줄 알아?" 정직하게 밝히자면 그도 자신의 나이를 잊은 지 오래였지만 지금 상황 에서는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니었다. 정작 문제인 것은 그의 말소리가 너 무 작아서 고함을 지르고 있는 아이와 에타의 음성에 완전히 묻혀버렸다 는 것이다. 그는 한숨과 함께 마력을 반응시켰다. ……. 물질적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마법을 당한 당사자들 을 눈에 띄게 당황하면서 자신의 입술을 더듬기 시작했다. "이제야 조용하군." 루페르스는 마법의 결과에 만족한다는 듯이 웃으면서 마기에게 다시 한 번 더 지시했다. "일단 저쪽으로 보내. 나도 다 생각이 있으니까." "하, 하지만……" "내 말에 거역하는 거야?" 자신보다 최소한 20세는 어린 소년소녀들에게는 할 짓이 아니다, 라고 생각하고 있던 마기였지만, 역시나 마스터의 명을 거역하기는 어려웠다. 그녀는 다시 표정을 다 잡고는 공중에 떠서 발버둥치고 있는 아이와 에 타, 그리고 조용히 현 상황에 적응 중인 미르를 움직여 루페르스와 훼이 드리온이 서있는 곳으로부터 10리치(10m) 정도 떨어져있는 낭떠러지로 보냈다. 두둥실 허공을 날아가는 재미난 경험을 하고 있는 그들이었지만 표정은 결코 좋을 리 없었다. "……!" "……!" 오랜만에 의견일치를 보는 듯한 두 소녀의 모습에 루페르스는 간단히 손을 흔들어주고 훼이드리온을 바라보았다.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은 루 페르스였기 때문에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못한 채 멀어지고 일행을 바라 보고만 있던 그는 루페르스의 시선에 차가운 눈길로 대적했다. 마기가 낭떠러지 위에 적당히 아이들을 멈춰 세우자, 루페르스가 기다렸 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흠, 이제부턴 너의 선택만이 남았다." 훼이드리온은 눈빛으로 대답했다. '무슨 말입니까?' "선택해라. 나에게 마스터 카드를 주고 저 애들을 살릴 테냐, 아니면 끝 까지 반항할 테냐?"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겁니까?" 예상외로 당돌하게 나오는 루페르스는 '호오…'라며 속으로 그의 대답에 귀를 기울였다. "당신에게 마스터 카드를 주지도 않을 것이며, 또한 저들도 살릴 겁니 다. 됐습니까?" 그의 말투는 한층 더 딱딱해져있었다. 겨우 10리치 밖에 떨어져있지 않 은 탓에 그들의 모든 대화를 들을 수 있는 아이는 그의 대답에 눈물이 나올 뻔한 걸 간신히 참았다. 말하는 그는 모를 지라도, 이런 상황에서 저런 당당한 말을 듣는다면 여린 소녀들은 누구나 울고 말 것이 분명했 다. '훼온!' 루페르스의 마법에 차단되어 입 밖으로 목소리를 낼 수가 없어 속으로 그를 응원하는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아이는 참으로 안타까웠다. 그래서 그녀는 행동으로도 뭔가를 보여주기 위해 응원하는 자세로 열심히 손을 흔들었다. '…쟨 뭐 하는 거야.' 응원을 받아야할 입장인 훼이드리온은 그저 황당할 뿐이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는 아이의 응원(?)을 받으면서 루페르스와 대치했다. 방금 대 답은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방법이었기 때문에 그는 만족 하고 있었다. 이제는 이 악당 마법사의 다음 말만 기다리면 되는 것이었 다. "아하하하." 대답이 상당히 맘에 든다는 듯이 루페르스가 웃어버린 것은 대답 후 그 렇게 시간이 흐르지 않은 시점이었다. 훼이드리온이 의문을 표하는 얼굴 로 그를 바라보자, 그가 웃음을 거두며 말했다. "내가 예상했던 대답이야. 역시 넌 내가 생각하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 는군." "별로 미안하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만." "미안하기를 바란 건 아냐." 능글맞은 웃음을 잃지 않으며 그가 계속 말했다. "마스터 카드를 주지도 않을 것이며 저들을 죽게 놔두지도 않겠다?" "그렇습니다." "차아아아암, 교과서적인 발언이었어." 루페르스는 과장된 움직임으로 손을 들어 박수를 쳤다. 짝짝짝. 훼이드 리온의 인상이 구겨진 건 달리 말할 것도 없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참으로 바보 같다는 것은 알려주고 싶군. 그래서 이제는 어떻게 하겠다는 거지?" "당연히 당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도망쳐야하지요." "그럼 질문이 추가되는군. 마법사 길드 마스터와 서브 마스터의 손에서 대체 어떻게 빠져나가겠다는 거야?" 훼이드리온은 정직함을 살려 표정을 굳혔다. 그 문제에 대해서 자신도 이렇다할 해결 방책을 찾지 못한 것이다. 그는 거짓없이 토로하는 마음으 로 입을 열었다. "어떻게든 되겠죠." "잘났군." "감사합니다." 루페르스는 대충 인사를 받아넘기며 손가락을 들었다. 훼이드리온의 시 선이 모이고, 마기의 시선은 버둥거리는 에타를 향할 때 그가 방법을 제 안했다. "마스터 카드 대전을 해보겠어? 뭐 결과야 뻔하지만, 일단 네가 발버둥 칠 기회는 줘야겠지." "…마스터 카드 대전 말입니까?" "두 번 말하게 하지마. 자신 있어?" 훼이드리온은 몇 일 전 게이트 마을의 식당에서 벌였던 잠깐의 게임을 생각해냈다. 그때 루페르스는 초보격인 자신이 봐도 너무나 형편없는 실 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 후에 마스터 카드에 대해서는 이 남자에게 더 이 상 기대하지 말자고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중요한 순간에 이 남자는 마스터 카드 대전을 제시하고 있 었다. 그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절대 없는, 말하자면 기회인 것이다. 훼이드리온은 자신감 있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어떻게 하는 거죠?" 기다렸다는 듯이 루페르스가 대답했다. "마스터 카드 게임을 해서 내가 이기면 너에게서 마스터 카드를 빼앗겠 다. 그리고 네가 이기면 저들을 살려주지. 어때, 공평하지?" "흠, 좋군요. 알겠습니다." 훼이드리온은 더 이상 볼 것도 없다는 듯이 허리춤에서 갈색주머니를 풀어 손에 들었다. 그리고 무언가를 찾듯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다시 그 에게 말했다. "여기서 합니까?" 골드 드래곤이 잠들어있는 아공간의 입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잡 고 있는 작은 공터인 이곳은 두 사람이 앉을 곳은 되지만, 테이블에서 벌 려야만 제 맛이 나는 마스터 카드를 하기에는 별로 어울리는 장소가 아 니었다. 주변은 어두컴컴한 나무들 천지였고 바닥에도 듬성듬성 풀이 돋 아나 있었던 탓에 그는 저절로 인상을 찌푸리며 루페르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그는 자신의 소지품 창고(?) 아공간을 열어 그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훼이드리온이 그의 행동에 의문을 느끼며 뭐라고 질문을 던지려 는 찰나, 그가 고개를 흔들며 아공간을 닫았다. "적당한 게 없군. 아무래도 집에서 가져와야겠어." 출렁거리는 검은 색의 암흑을 열고 있던 아공간이 채 닫히기도 전에 루 페르스는 자신의 집이 있는 방향인 듯한 곳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흠."하 고 짧은 숨을 내뱉었다. "……하아." 루페르스와 훼이드리온이 서있는 공터 중앙에는 어느새 나무로 만들어 진 테이블이 의자와 함께 가지런히 놓여져 있었다. 훼이드리온은 루페르 스의 마법에 의해 게이트 마을에서부터 이곳까지 이동된 테이블을 내려 다보며 마법의 편리함에 다시 한번 치를 떨었다. '마법이나 배워볼까.' "앉아. 아, 마기도 앉지 그래?" "괜찮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뭐." 마기에게 의자를 권하다가 거절당한 루페르스는 머쓱한 듯이 먼저 자리 에 앉았다. "아무리 서브라고 해도 너무 딱딱해." 작게 불만을 토로하는 그를 향해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너도 앉아. 앉아야지 게임을 하든 뭘 하든 할 거 아냐." 훼이드리온은 별 말 없이 루페르스의 반대편, 자신의 바로 앞에 있는 의 자를 꺼내 자리에 앉았다. "무작위로 카드를 고르고, 드레이프는 펼치지 않는다. 동의해?" "네, 좋습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면서 갈색주머니 속에서 자신의 마스터 카 드를 꺼내는 동안, 루페르스도 아공간의 문을 작게 열어 손을 집어넣었 다. 그리고 다시 손을 빼자, 그 손에는 그의 검은 주머니가 대롱대롱 매 달려있었다. 그가 커다란 숨을 내뱉었다. "으하아아, 하마터면 아공간 속에 흘릴 뻔했잖아." 아슬아슬하게 손가락 끝에 매달려있는 주머니 끈이 훼이드리온으로 하 여금 그의 말을 이해하도록 도와주고 있었다. 그는 아공간 속에서 주머니 를 꺼내다가 뭔가를 잘못해서 흘릴 뻔한 것이다. 아공간은 원래의 공간과 동떨어진 만큼 굉장히 불안전한 공간이다. 루페르스처럼 그것을 자신의 소지품 창고로 사용하다가 조금만 신경을 쓰지 않으면 모조리 잃어버리 게 되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다. 방금 전도 그와 비슷한 일이 그에게 일어난 것이다. 루페르스는 다시 한번 큰 한숨을 내쉬며 검은색 주머니를 양손에 꽉 쥐 었다. 아무리 형편없는 실력이라고 하더라도 마스터 카드 게이머인 이상, 마스터 카드는 굉장히, 엄청, 무지무지 등등의 수식어를 다 갖다 붙여도 모자랄 만큼 중요한 존재였다. 그의 마음을 십분 공감하는 훼이드리온은 그에게 격려의 뜻과 비슷한 눈길을 잠시 띄워주곤 다시 차갑게 시선을 굳혔다. 다시 안정을 되찾은 루페르스가 마기에게 몇 가지 당부를 한 다음, 준비 를 끝내자 훼이드리온도 그에 맞춰서 카드를 내려놓았다. 각자의 앞에서 내린 카드와 든 카드가 나눠지고, 필요 없는 이야기의 시작 카드는 한쪽 에 따로 떨어져 배치되었다. "괜찮겠습니까?" 게임을 시작하기 전, 훼이드리온은 루페르스에게 넌지시 물었다. 그는 무슨 소리냐는 듯한 얼굴로 되물었다. "뭐가?" "전에 게임 했을 때는 제게 졌잖습니까." "아하하, 그거." 그는 빙긋이 웃었다. "해봐야 알겠지." 여유가 묻어나는 그의 말에 훼이드리온은 속으로 살짝 비웃어주며 주저 없이 든 카드를 손에 들었다. "먼저 해." "그러죠. 갑니다, 백기사 카드와 와이번 카드. 비술 드래곤 나이트." 마법사 길드 마스터 루페르스와 마법왕국 라시엔트의 태자 훼이드리온 의 마스터 카드 대전 2차전이 시작되었다. 유리는 마법사 길드가 자리잡고 있는 에코의 대광장 '마법의 뜰'에 있었 다. 대회가 4일 앞으로 다가온 탓에 대광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바글바글 몰려다니고 있었고, 개중에는 그녀의 눈에 익은 사람들도 여럿 보였다. 그녀는 신비로운 보라색을 띄고 있는 눈동자를 연신 굴리며 그들의 관찰 했다. '…저 꼬마는 작년에 예선 탈락하면서 울었던 애네? 올해는 본선에 진출 하 수 있을까, 과연. 아, 저 남자는 8강까지 올라왔다가 대전 전날 과음으 로 부전패해버렸던 남자네? 올해는 과음하지 말아요, 아저씨. 음… 저 분 은 제법 연로하셨는데, 올해도 출전하시는 건가?' 몇 년 전의 기억까지 모두 들춰내며 자신의 눈에 들어온 사람들의 모든 신상을 알아내고 있는 그녀의 기억력은 참으로 비상했다. 마법으로 기억 들을 각인시킬 수도 있다고 하는데, 혹시 그녀의 기억력은 그것으로 비롯 되는 것이 아닐지 의심해볼 가치가 있다. 마법사들의 도시 에코에 걸 맞는 이름을 가진 대광장의 중심에는 마법 사 길드의 옛 이름을 상징하는 문이 대리석으로 멋지게 서있었다. 하얀 대리석이 햇빛을 받아 찬란하게 빛나는 모습은 이곳 에코가 아니면 쉽게 볼 수 없는 진귀한 장면이라 많은 사람들이 그 문 앞에서 옹기종기 모여 구경을 하고 있었다. 유리는 앉아있던 벤치에서 슬그머니 몸을 일으키며 대리석 문을 바라보 았다. 휘감기는 소용돌이 문양이 네 각에 새겨져있고, 손잡이까지 달려있 는 완벽한 문의 형상을 한 그것은 흔히 말하는 동상이었다. 그녀는 동상 의 상단 부분을 바라보았다. E. T. A. G. 고대어로 기입되어있는 마법사 길드의 잊혀진 옛 이름은 동상의 모습 그대로 '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문'이 뜻하는 바를 머리 속 에 조심스럽게 떠올려보았다. 문. 그것은 마법사들을 이르는 고대의 명칭이다. 선택된 자들만의 능력 을 지닌 그들은 이 세상의 힘과는 전혀 다른 힘을 펼칠 수 있기에, 그 두 개의 힘을 잇는, 이른바 '문'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현 평화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많은 '문' 중 최상위의 자리에 속해있 는 유리는 다시 한번 동상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지금은 바뀌었지 만, 고대에 마법사 길드가 아직까지 '에타그(Etag: 문)'라는 이름을 간직 하고 있을 때만 해도 순수한 문의 능력으로 최고 원로를 뽑았었다. 그러나 그것은 대마도사가 마스터 카드라는 이상적인 것을 창안한 후 최고 원로의 기준은 마스터 카드의 실력으로 뒤바뀌었고, 그에 따라 에타 그라는 마법사 길드 고유의 이름까지 잊혀지게 되었다. 문의 능력보다는 마스터 카드 게이머로서의 자질이 더 중요시 되어버린 것이다. '뭐, 최고 원로들의 마스터 카드 실력은 마법 능력과 동일하니 상관없는 거지만.' 최고 원로들은 모두가 카드 마스터들이다. 그리고 마스터 고유의 능력까 지 갖추고 있는데, 그것은 보통 일반 게이머들에게는 금기 시 되는 이야 기들이라 마스터들 사이에서만 말해진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마법사로서 문의 능력을 갖추고, 또한 카드 마스터 고유의 능력을 갖추게 된다면, 마법사 길드 최고 원로가 되는 것도 어려 운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대다수의 카드 마스터들은 대회 우승 을 통해 칭호를 얻은 것이기 때문에, 카드 마스터의 능력까지 얻지 못하 는 게 대다수이다(대표적으로 아크릴 영주와 미르가 있다). 카드 마스터이며 마법사 길드 최고 원로인 유리는 문 동상에서 시선을 떼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바람조차 잔잔해서 상쾌하게 몸에 부딪히는 바람을 느낄 수 없었다. 바람과 함께 온몸을 휘감는 마력의 기 묘한 느낌을 좋아하는 그녀로서는 아쉬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나, 그 래도 그녀는 얼굴에 떠있는 미소를 지우지 않고 에코의 동쪽으로 나있는 길로 향했다. 에코의 동쪽을 거대하게 막고 서있는 게이트 산맥을 가로질러 나있는 서가도. 그곳으로 향하려고 하고 있는 그녀가 막 대광장을 벗어나려고 하 자, 등뒤에서 날카로운 하이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와아아앗! 유리이이! 혼자 어디 가는 거야!" 그녀는 찔끔 놀래면서도 여전히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5층 짜리 사무 실 건물에서 뛰쳐나오던 레이가 그녀를 발견하고 무시무시한 속도로 타 다닥 뛰어오고 있었다. 역시 날렵한 엘프라는 이미지에 맞는 행동이라 유 리는 방긋이 웃으며 몸을 돌렸다. "잠시 다녀올 데가 있어서요." "마스터한테?" "아아, 역시 엘프로군요." 레이는 엘프다운 아찔한 미소를 흘리면서 웃었다. 유리도 만만치 않게 생글거리는 웃음으로 일관했고, 계속 그 상태를 유지하다가 결국 레이가 먼저 분통을 터뜨렸다. "계속 웃지마아아아! 내가 뭘 궁금해하는지 알 거 아냐?" "레이 양이 모르는 것도 있었나요?" 레이는 자신의 노란색 긴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잡아보며 대답했다. "인간의 모습일 때는 능력이 많이 떨어진단 말야. 그러니까 대답해 줘. 마스터한테 왜 가는 건데?" 유리는 그녀의 물음에 여전히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마중 나가는 거예요." "에?" "게이트 산맥의 유적 입구에서 마스터가 만나자고 하더군요. 그래서 전 지금 그곳으로 가려는 거고요." "우에?" 레이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들 투성이었다. 그녀는 나름대로 고민해보는 포즈를 취하다가 이내 포기해버리고는 재차 유리에게 질문을 던졌다. "마스터가 왜 거기로 오라는 거야?" "흠, 글쎄요. 제가 아는 건 태자 저하에게 어떤 일을 하신다는 거밖에는 없어요. 제가 그곳에 도착하면 좀 힘들 일을 해야할 거라고 하기는 했는 데, 정확히 무엇을 해야하는지는 저도 도착해봐야 알아요." 그 점에 대해서는 유리도 별로 아는 바가 없었기 때문에 어깨를 으쓱하 면서 대답했다. 레이도 입을 다물며 "우웅……"하고 작은 신음을 내더니 다시 가슴을 펴고 입을 열었다. "아무튼, 마스터는 숨기는 게 너무 많아. 그렇지 않아?" 유리는 살포시 웃으면서 신비로운 매력을 뽐냈다. "그게 마스터니까요." "헤에, 그렇긴 하지." 성숙한 여성의 형태였지만 실상은 까불기 좋아하는 꼬마와 같은 정신 연령인 레이는 "꺄하하하!" 웃으면서 생기 있게 인사했다. "언제 올 거야, 그럼?" "아마도 대회가 열리기 전에는 올 것 같아요." "응응, 좋아. 그럼 잘 다녀와!" "네에." 레이는 손을 마구 흔들며 다시 대광장 쪽으로 뛰어갔고, 유리도 가볍게 손을 흔들며 그녀에게 인사했다. 레이의 모습이 대광장을 돌아 사라지자 그녀는 다시 몸을 돌려 게이트 산맥을 앞에 두었다. 저 산맥 어딘가에 있는 유적을 찾아가야 하는 괴로 운 행로였지만, 그녀는 여전히 입가에 떠올리고 있는 미소처럼 자연스럽 게 걸음을 내딛었다. 마스터가 하는 일에 결코 불신은 없었다. -------------------------------------------------------------------- 아하하하하. 78편입니다. 유리양이 루페르스는 마중 나가는데. 대체 왜 나가는 걸까요? 냐하하.( ---) <-- 무책임 팀. 뭐. 일이 있으니까 가겠죠.(^^^) ....당연하잖아! 퍼버버버벅! ...;;;아, 아무튼.;; 다음 편을 기대해주세요.; 냐하하.;;(^^^) 어둠의 기사 DARK KNIGHT TEAM... P.S 추천 감상 비평. 받는 거 다 아시죠?(+ + +) P.S 2 GO CAMA 번 호 : 15 / 16 등록일 : 2001년 01월 13일 01:54 등록자 : 암음기사 조 회 : 103 건 제 목 : [카드 게임 판타지]『카드 마스터(Card Master)』#079 카드 게임 판타지(Card Game Fantasy) 카드 마스터(Card Master) 79.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볼까? 백기사와 와이번의 조합, 비술 드래곤 나 이트 발동." 루페르스의 입가에 걸린 진득한 미소는 훼이드리온으로 하여금 더더욱 처참한 표정을 짓게 만들었다. 바람을 거칠게 가르는 소리와 함께 백색의 검이 공간을 가르며 나타난 다. 지면에 서있던 두 명의 매드 매지션은 불길과 흙기둥으로 사정없이 드래곤 나이트는 공격한다. 모든 것을 태워버릴 듯이 쏘아져나가는 불줄 기와 난폭하게 솟아오른 흙기둥은 드래곤 나이트의 진로를 방해하며 그 를 공격한다. 하지만 드래곤 나이트의 움직임은 섬세했고, 그의 검은 예리하다. 불줄 기를 반으로 갈라버리고, 그와 함께 흙기둥까지 깨끗한 단면을 보이며 잘 라버린 백기사는 무시무시한 속력으로 와이번을 조종해 두 명의 매드 매 지션 사이로 낙하한다. 백색의 검광. 찰나의 반짝임. 두 명의 매드 매지션은 힘없이 무릎을 꿇고 쓰러진다. '!' 훼이드리온은 머리 속에 그려지는 장면들에 침을 삼키며 포효했다. 멀리서 대전을 지켜보고 있던 아이도 그의 표정으로 상황이 어떻게 돌 아가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훼이드리온이 수세에 몰린 지 벌써 수많은 턴이 지났다. 루페르스는 진땀을 빼고 있는 훼이드리온의 모습이 재미있 는지 연신 웃음을 지우지 않고 장난스럽게 말을 걸어 더 화를 느끼게 만 들었다. '대체 무슨 상황인 거야!' 루페르스의 마법은 그가 마스터 카드 대전에 신경을 쓰고 있는 중에도 변함 없이 구현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아직도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그래서 분통이 터지는 기분은 더 심층화되었고, 그런 기분을 표현하기 위 해서 그녀는 또 다시 온몸을 뒤틀었다. 그녀의 모습을 본 마기가 한마디해주려고 입을 열려고 할 때, 예상치 못 한 목소리가 그녀의 음성보다 먼저 아이의 귀로 파고들었다. "가만히 있어라." 화들짝 놀래는 표정을 과장되게 지으면서 아이가 왼쪽으로 고개를 움직 였다. 공중에서 어설프게 누워있는 듯한 포즈였기 때문에 시야가 그렇게 넓지는 않았지만 아슬아슬하게 시야 왼쪽 끝으로 미르의 모습이 잡혔다. 소년은 보통의 모습처럼 검은 로브로 전신을 감싼 모습으로 태연히 서 있었다. '……?' 눈빛만으로 의사를 표현한다는 건 상당히 힘든 것임을 모를 리 없는 아 이였지만, 지금으로서는 그 방법 밖에 생각이 나질 않아서 필사적으로 이 행했다. 그리고 그것을 용케도 알아들은 미르가 재차 입을 열었다. "가만히 있어라.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알고 있다." '하지만!' "믿으면 되는 거다." 미르는 지그시 뜬눈으로 훼이드리온의 옆얼굴을 주시하고 있었다. 긴장 으로 인해 굳을 대로 굳은 표정은 석고상 같았고 볼을 타고 흐르는 땀은 식어서 메말라버릴 정도였다. 하지만 미르는 말했다. "금성안. 우리가 알고 있는 훼온이라면, 이렇게 끝나지 않는다는 것. 누 구보다도 네가 잘 알고 있지 않나." 되는 대로 소리를 질러보겠다는 생각이었는지 입을 벌리고 아이는 조용 히 이야기하는 미르의 말에 서서히 입을 다물고 시선을 돌렸다. 시선 끝 에 나타난 훼이드리온의 얼굴은 게이트 마을에서 게임을 하고 있을 당시 와는 달리 아무 처참할 지경이었다. 대체 어떤 상황에 처한 걸까, 그녀는 걱정스러운 눈길로 그를 응시했다. 그는 굳게 다문 입술이 파르르 떨릴 정도로 힘을 쓰고 있었다. 푸른색의 눈동자는 쉴 새 없이 든 카드와 테이블 위의 카드를 오갔다. 가끔씩 손을 젖게 만드는 땀을 옷에 문질러 닦기도 하면서, 그는 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었다. 그는 아직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훼온…….'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이면서, 500년 전의 대마도사와 같은 능력을 가지 고 있는 자인 훼온. 아이는 가지런히 손을 모으며 지금 자신이 할 수 있 는 최선의 방법을 택하여 눈을 감았다. '달과 운명의 여신 하실루스여……. 신성한 기운을 닮은 당신의 자식이 기도를 올립니다. 믿습니다, 믿습니다, 믿습니다…….' 그것은 신법이 아니었다. 자신이 믿고 따르는 신께 올리는 간절한 기도 였다. 그녀는 깨끗한 마음이 되어 마지막 기도의 말을 올렸다. '…사랑하는 사람을 도와주세요…….' 이제는 공중에서 유영을 하는데 재미를 붙인 에타가 기도를 올리고 있 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갸웃거리고 있는 건, 어설프게 누워서 두 손을 모 은 자세가 웃긴 것이 아니라 잠깐 동안 그녀의 몸에서 은빛이 흘러나오 는 장면을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훼이드리온은 이상하게 몸이 따뜻해짐을 느끼고 잠시 의아해하다가 다 시 마스터 카드로 눈길을 모았다. 지금은 다른 곳에 신경을 쓰고 있을 틈 이 없었다. "뭐해? 안 해?" 비술 드래곤 나이트를 던져놓고 풀어보라는 듯이 웃고 있는 루페르스를 차마 바라보지 못하는 그는 드래곤 나이트 정도도 부수지 못하는 지금의 상태가 굉장히 고통스러웠다. 루페르스의 실력은 게이트 마을에서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아니, 정확하 게 말해서 그의 실력이 는 것이 아니라, 카드들의 능력들이 최상위보다 더 높아졌다. 알기 쉬운 예를 들자면, 지금 루페르스의 카드는 신관 카드 의 1레벨 프리스트 카드로도 전사 카드의 3레벨 용사 카드에 대적할 수 있을 정도였다. 훼이드리온으로서는 도저히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도대체, 어 느 누가, 카드들의 능력을 자유롭게 조종할 수 있단 말인가. 게이트 마을에서의 대전에서는 루페르스의 카드도 그저 그런 정도의 공 격력이었고 방어력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비술 중에서는 낮은 공격력을 가진 드래곤 나이트도 지금 상태에서는 깨기가 힘들었다. 마법사 길드 마스터의 진정한 실력은 바로 이러했다. 훼이드리온은 다시 한번 터져 오르는 분노에 "크윽."하고 신음을 터뜨렸 다. 하지만 루페르스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투로 태평하게 마기에게 말 을 걸고 있었다. "어떨 거 같아?" "네? 아… 제가 생각하기로는… 힘들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아아, 난 역시 너무 대단한 실력을 가지고 있단 말야." 그는 '난 역시 잘 났어.'라는 듯 거창하게 웃으면서 자신의 카드를 만지 작거렸다. 봐준다는 명목 하에 미리 있던 비술은 스스로 뒤집어버리고 단 하나, 드래곤 나이트만 남겨둔 루페르스. 훼이드리온은 그런 그의 태도에 조용히 삭힐 수밖에 없는 화를 느꼈다. 할 수 없었다. 결국 이 시점에서 취할 수 있는 행동은, 드래곤 나이트를 상회하는 공격력을 가진 비술로 맞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저 비상식적 으로 강한 힘의 드래곤 나이트를 부수려면… 이제 남은 건 이것 하나밖 에 없었다. '휴우, 이것조차 안 된다면…….' 거기까지 생각하고 스스로 제동을 걸어 상념을 멈추었다. 더 생각해봤자 오히려 더 나쁜 감정만 들 뿐, 결코 좋은 기분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머리 속에 떠오르는 불길한 예감들을 모조리 집어치워 버리고, 든 카드를 한 장씩 넘기며 '물의 정령왕 에리피느' 카드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가 한가지 잘못 생각한 것이 있었으니. "역시 무작위 방식은 이게 좋단 말야? 미리 계획은 세우면서 카드를 고 르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임기응변으로 게임을 진행할 수 있잖아. 아 하하하." 마치, 훼이드리온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알겠다는 어조로 말하 는 루페르스의 대사에 훼이드리온은 그만 눈을 멈춰버리고 말았다. 무작위 방식. 그렇다. 지금까지 주로 해오던 직접 카드를 고르는 방식이 아니라, 무작위로 아무 카드나 골라잡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남아있 는 든 카드 안에 물의 정령왕 에리피느 카드가 있다고는 절대 장담할 수 가 없는 것이다. 훼이드리온은 속으로 경악해버렸다. 그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되면, 마지막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것이 완벽하게 날아가 버리는 것 이 아닌가. '이, 이런!' 눈에 띄게 당황하는 훼이드리온을 내려다보면서 루페르스는 즐겁게 웃 었다. 만약 마기가 곤혹스러워하고 있는 그를 바라보는 것이 매우 유쾌하 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마스터를 보게 된다면, '마스터는 변태가 아 닐까?'하는 생각을 할 지도 몰랐다. '루페르스 님…….' 그녀는 루페르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변태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어떤 의미에서 즐거운 건지는 잘 알 수가 없었지만, 분명한 건 마스터는 남을 괴롭히며 즐거워하는 취미는 절대 없다는 것이다. 그것 하나만은, 20년 가까이 함께 살아온 그녀였기에 장담할 수 있었다. 루페르스가 웃고 있는 이유를 마기는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지금 자신의 역할에 매우 심취해있는 것이다. 훼이드리온과 그의 일행을 억압 하는 악당의 역할에 말이다. 그녀는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을 만큼 작게 한숨을 내쉰 후 자신이 조종 하고 있는 마력을 점검했다. 세 명의 소년소녀를 공중에 떠있게 하는 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 밑은 낭떠러지라서 그녀답지 않게 많은 신경을 쓰고 있었다. 게다가 마스터의 아들이라고 하는 검은 로브의 소년 은 이상하게도 마법이 제대로 듣질 않아서 더욱 신경을 기울여야했다. '흠, 역시 마스터의 아들인가.' 같은 핏줄이라면, 분명히 마력반응능력이 있을 터이다. 스스로는 자각을 못하고 있었지만 지금도 자신에게 적용되는 마력들을 반응시켜 마법을 약화시키고 있었다. 어쩌면 마력반응능력은 대가 지날수록 더 진해지는 건지도 모르겠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아무튼 오랜만에 마법에 신경을 쓰면서 대전을 구경하는 마기. 그리고 그것을 알면서도 전혀 도와줄 생각은 하질 않고 훼이드리온을 놀리는 데 만 재미를 붙인 루페르스. 그런 상황을 조금도 알지 못하고 여전히 고민 에 빠져있는 훼이드리온. 게이트 산맥 깊숙한 어느 곳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마스터 카드 대전의 분위기는 산맥의 분위기가 어우러져 멋지게 심각한 분위기를 이루고 있 었다. 유적 안. 정확하게는 유적이라고 칭해지는 골드 드래곤의 아공간. 그곳의 주인인 골드 드래곤은 500년 만에 찾아온 시끄러운 손님들이 남 긴 여운 때문에 제대로 수면에 들지 못하고 있었다. 신체, 영혼 할 것 없 이 모조리 봉인되어버리고 어찌 어찌해서 남아버린 인격이었기 때문에 특별히 할 일도 없었다. 그래서 500년 간 잠을 자고 있었던 건데, 오늘 그 수면 시간이 깨진 것이다. 골드 드래곤은 자려고 눈을 감았다가 이내 포기하고 다시 눈을 떴다. 일 렁이는 암흑인 아공간 속은 그에게는 가장 편안한 곳이기 때문에 평소에 는 절로 잠이 왔지만, 오늘은 정말 잠이 오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별로 자고 싶은 맘이 없었다. 500년 헤어진 그가, 500년 후에 자신의 앞에 나타났다. 모습은 조금 다 를지 몰라도, 골드는 훼이드리온이라는 소년이 그의 환생이라는 사실을 결론하는 것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환생. 조금은 다른 뜻일지 몰라도 상관없었다. 금성안을 가졌으며 최초 의 마스터 카드 또한 가지고 있다. 그가 정말 카드 마스터가 된다면, 골 드 드래곤은 500년 동안의 수면이 결코 헛된 것은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정말 긴 시간이었다. 영원을 살아가는 드래곤에게 있어서 그렇게 긴 시 단도 아니었지만, 골드 드래곤에게는 엄청난 시간이 흐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500년의 시간차가 이렇게 크게 느껴질 줄은 드래곤이었던 때를 생각하면 정말 신기할 정도였다. [훼이드리온 레이틴 라시엔트.] 소년의 이름을 조심스럽게 말해보는 골드 드래곤은 목을 움직여 아공간 의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지금쯤이면 그 거만하지만 위대한 인간남자가 그에게 무슨 일을 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안타깝게도 자신은 그 어떠한 일도 해줄 수 없기에 나 설 수 없지만, 그래도 속으로라도 그를 응원했다. '그는 카드 마스터가 될 자다. 그 위대한 자가 어떤 발악을 한다고 해도 그는 카드 마스터가 될 것이다. 아니, 어쩌면.' [500년 전부터…… 그때부터 정해진 것일 지도 모르지.] 골드 드래곤은 다시 한번 옛 기억을 회상하듯 눈을 지그시 감았다. 당분 간은 잠이 올 것 같지 않은 기분에, 이제는 가슴까지 두근대고 있었다. 고대에는 엄청난 마력의 집합체라고 해서 마법사들의 관심(?)을 많이 받 았다고 하는 드래곤의 심장. 거대한 몸집 탓에 심장 박동도 제대로 느끼 지 못했지만 지금은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500년 전. 봉인을 할 때 그때 느꼈던 감정과 비슷한, 그렇기에 더욱 두 근거리게 만드는 기분에 사로잡힌 골드 드래곤은 아공간에 남은 그의 기 운을 느꼈다. [카드 마스터.] 특별한 존재감을 지닌 단어를 다시 한번 뇌까려보며 골드 드래곤은 문 득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뭔가, 뭔가 일어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라고 느끼는 순간. 화아아아아아악. 골드 드래곤의 전신이 갑자기 황금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뭐지, 이건?] 금색의 빛. 자신의 몸체에서 뿜어져 나온 빛은 원래의 빛보다 훨씬 강했 다. 찬란하고 아름다운, 그러면서도 형용할 수 없는 기운이 느껴지는 환 금빛은 골드 드래곤 자신의 일생을 통틀어서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것은 너무나 아름답고 강해서, 다른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갑자기 뜨거운 기운이 내부에서부터 솟구쳐 오르는 듯한 기분이 느껴졌 다. 인격뿐인데, 이런 힘은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내부에서 터진 그 힘은 골드 드래곤의 전신을 뜨겁게 달구었다. […부르고 있다?] 어딘가에서, 의지가 흐르는 어딘가에서 무언가 골드 드래곤을 부르고 있 었다. 그것은 음성이 아니었다. 정말, 원초적인 의지, 세계를 움직이는 의 지 그 자체였다. 게이트 산맥이 공명하고 있는 듯한 마력의 울부짖음. 의지가 흐르고 있 었다. 골드 드래곤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속으로 의지가 흐르는 곳을 찾았다. 마력이 울부짖은 곳을 찾았다. 게이트 산맥 전체가 공명하는, 그 중심을 찾았다. 화아아아아악. 다시 한번 거대한 황금빛이 골드 드래곤을 감쌌다. 허상만이 남아있는 골드 드래곤은 뜨거워지는 기운을 마다하지 않으며 그 의지에 몸을 실었 다. 검은 암흑으로 흔들리는 아공간이 금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골드 드래곤이 날개 짓을 하며 떠올랐다. 허상에서는 절대 가능하지 않 는 일. 마력이 움직임에 반응하고 있었다. 거대한 바람과 함께 마력이 스 스로 반응하여 골드 드래곤을 날아오르게 하였다. 아공간이 흔들렸다. 금빛으로 물들어버린 아공간이 흔들렸다. 점점이 떨어지는 금색의 눈물 같이, 골드 드래곤의 날개 짓이 더욱 힘차 졌다. 다시 한번 황금빛이 강해졌다. 더 이상 눈을 뜨고 있을 수 없을 만 큼 강해진 황금빛 사이로 골드 드래곤의 금빛 눈동자가 살짝 스쳐지나갔 다. [……!] 골드 드래곤은 자신을 부르는 의지를 향해 같은 의지를 불살랐다. 사뿐사뿐. 유리는 게이트 산맥에 들어서서 한가로운 걸음걸이로 아직은 널찍한 산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게이트 산맥 전체를 뒤덮고 있는 진득한 마력의 느낌은 별로 나쁘지 않아서, 오히려 따뜻한 침대 위의 이불을 생각나게 만들었다. 태어날 때부터 마력을 다루었고, 의지를 알았으며, 마법을 발현했던 그 녀로서는 마력만큼이나 친근한 존재도 또 없었다. 그래서 마법사 길드에 서 마스터와 서브 마스터 다음의 실력을 가진 마법사가 될 수 있었고 말 이다. 그녀는 생각난 김에 점점 어두워지는 산길을 기념하여 마법을 발현해보 기로 했다.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어둠을 물리쳐줄 수 있는 작은 빛. 그녀는 가볍게 마력을 느끼며 의지를 일깨웠다. "자아." 마치 아이를 어르고 달래는 듯한 음색으로 유리가 입을 여는 동시에 그 녀의 하얀 손위에 작고 하얀 빛덩이가 맺혔다. 민들레꽃의 씨와도 비슷한 모양의 빛의 공은 그녀가 길을 안전하게 갈 수 있을 만큼의 충분한 빛을 전해주었다. '음음, 좋아.' 적당히 밝아진 빛으로 인하여 어두워지는 산길에 대비한 그녀는 지난 번 루페르스가 가르쳐준 길을 머리 속에 떠올려보며 발길을 옮겼다. 바람은 잘 불지 않아서 마력의 움직임은 잘 없었지만, 그래도 한곳에 진 득하게 모여있는 마력의 느낌도 꽤 좋았다. 그렇게 느끼고 있을 찰나였다. '……뭐지?' 흔히 마법사들이 말하는 '의지가 흐른다'라는 건, 마력이 움직이는 현상 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력이 강하게 움직일수록, 그 의지는 엄청나 게 강하다고 얘기한다. 그녀는 지금의 상황을 그 문장을 인용하여 정의 내렸다. '강한 의지가 흐르고 있어. 정말 엄청나게 강한.' 정말 강력하고 거대한 의지였다. 게이트 산맥 전체에 깔린 응축된 마력 들이 지난 500년의 시간을 잊어버린 채, 그 의지 하나에 맹목적으로 움직 이고 있었다. 픽. 그녀가 신경을 쓰고 있지 않던 사이에 그녀가 이루어놓은 마법이 사 라져버렸다. 거대하게 흐르기 시작한 마력에 동참하기 위해 다시 분산된 것이었다. 주위는 다시 어둠에 휩싸였다. 유리는 어느새 커다란 정적 속에 들어와 있었다. 귀로는 절대 들리지 않 으며, 마법사들만이 느낄 수 있는 거대한 정적의 흐름 속에 들어와 있는 그녀는 본능적으로 의지가 흐르는 곳을 찾았다. 어릴 때부터 마력을 느낀 그녀였다. 의지가 흐르는 곳을 찾는 건, 밥을 먹고 양치질하는 것과 비견 될 만큼이나 쉬운 일이었다. 그녀는 잠시 멈칫하는 듯하더니 이내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시선 이 향하는 곳은 게이트 산맥이 뻗어있는 북쪽이었다. "뭐지?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신경질적으로 소리친 그녀는 단숨에 뛰어가기 시작했다. 어둠 속이든 뭐 든 상관없었다. 그녀는 평소에 밤눈이 좋다고 자부하고 있었고, 또한 의 지가 흘러가는 방향을 안다면 이런 어둠 속으로 달려가는 것도 그리 어 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결국 의지를 깨워 하얀 빛덩이를 만들어냈다. 밤눈이 좋 은 것 가지고는 도저히 해결이 안 되는 문제도 있었던 탓이다. 어쨌든 루페르스가 가르쳐준, 산맥을 완전히 관통하는 지름길로 달려가 는 유리. 그녀의 발걸음은 점점 더 빨라져서, 결국 검은 로브와 함께 어 둠 속으로 녹아 들어갔다. 그리고 그 시각. 훼이드리온은 '드래곤 피어' 카드를 한손에 붙잡은 채 분노로 푸르게 불 타오르는 눈으로 루페르스는 노려보고 있었다. --------------------------------------------------------------------- 아하하하. 잡담 타임입니다. 79편. 다은 편이 80편이군요. 자까는 글로서 말합니다! 우하하하하핫!( ___) 어둠의 기사 DARK KNIGHT TEAM... P.S 추천 감상 비평. 받아요오오오오. P.S 2 GO CAMA 번 호 : 16 / 16 등록일 : 2001년 01월 13일 06:31 등록자 : 암음기사 조 회 : 102 건 제 목 : [카드 게임 판타지]『카드 마스터(Card Master)』#080 카드 게임 판타지(Card Game Fantasy) 카드 마스터(Card Master) 80. 수가 없다는 것. 훼이드리온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드래곤 나이트 정도 밖에 안 되는 비술을 무위 시키고, 또한 루페르스의 생명력까지 타 격을 입힐 수 있는 수가 없다는 것을 말이다. "하하, 더 이상 수가 생각나지 않나 보지?" 루페르스는 여전히 유쾌하게 웃고 있었다. 훼이드리온은 그 모습이 너무 나 보기 싫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의 말대로 더 이상 수가 생각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개를 떨군 훼이드리온은 마지막 희망을 내린 카드에 걸어보자고 생각 했다. 잠시 내린 카드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깊게 가라앉아 있었고, 만 약에 아이가 보았다면 굉장히 안타까워했을 것이다. 그녀의 기도가 물거 품을 화하여 사라지는 것과 같은 의미였으니까. 하지만 훼이드리온은 아직 포기하지 않았고, 그렇기에 그 희망을 내린 카드에 걸고 있었다. 내린 카드는 운을 시험할 수 있는 것. 지금까지의 대전을 생각해보자면, 그는 꽤 좋은 운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도 자 신의 강운에 이번 게임을 걸어보자고 생각했다. 확률은 어차피 반반이었다. 죽느냐, 혹은 사느냐. "내린 카드? 호오, 내린 카드에서 뽑는다고 하더라도 무슨 수가 있을 까?" 루페르스는 노골적으로 그의 생각을 비웃었다. 아예 자신의 든 카드를 내려다놓고 손목을 돌리며 여유 있게 놀고 있는 그의 모습에 훼이드리온 은 깊은숨을 들이쉬며 끓어오르는 화를 참아냈다. 아크릴 영주 이후로, 이렇게 화가 나는 것도 굉장히 오랜만인 것 같았다. 그래도 그 화를 이렇게나 참아내고 있다는 게 얼마나 대견한가. 그는 그 점에서나 스스로 만족하기로 하고 든 카드를 잡은 왼손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그리고 오른손은 천천히 내린 카드 위에 올렸다. 무엇이 느껴지는 걸까. 훼이드리온은 그렇게 올린 손을 잠시 멈추며 내 린 카드의 감촉을 느꼈다. 손가락의 피부를 통하여 전해지는 약간은 차갑 지만 정겨운 느낌. 한 달을 넘어선 생활을 같이 해온 동반자였고, 따지고 보면 친구 같은 존재였다. 그는 친구를 믿었다. 기사도에서도 친구를 믿는 것을 매우 강조해놓았기 때문에, 그는 우정이란 것을 중요시하게 여기고 있었다. '마스터 카드는 나의 친구다. 결코 나를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믿음이었고, 일종의 주문이었다. 이 암담한 상황 속에서 모든 것 을 운에 걸어야하는 자신을 위해 외우는 주문. 그 주문이 제대로 이루어 질지는 미지수였지만, 그래도 그는 속으로 계속해서 주문을 외웠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했다. 웃고 있는 루페르스는 전혀 웃지 않는 눈매로 훼이드리온의 행동을 내려다보듯 주시했고, 3명에게 마법을 시전 중이라 여유가 부족한 마기도 그의 행동에 관심을 가졌다. 허공에 붕붕 뜬 상태로 훼이드리온을 바라보는 아이의 눈에는 믿음과 애정이 있었고, 에타의 눈에는 간절함이, 미르의 무표정한 검은 눈에서도 작은 기대가 느껴졌다. '친구.' 내심 읊조리며, 훼이드리온은 내린 카드의 가장 위에 올려져있는 카드를 손가락으로 집어들었다. 천천히, 천천히, 결코 서두르지 않고 들어올리는 그의 행동에 모두들 침을 삼키는 긴장으로 지켜보았다. 조용했다. 때마침 바람까지 멈춰서 정적의 공간의 모든 소리를 지워버렸 다. 사방에서 짓누르는 기분 나쁜 마력의 느낌조차 잊어버릴 정도로 조용 했고, 침묵이었다. 카드가 훼이드리온의 손에 쥐어졌다. 루페르스의 입가에는 이미 미소가 지워졌고, 마기는 하마터면 의지를 놓쳐 아이들을 떨어뜨릴 뻔할 지도 모 른다는 생각에 가슴을 졸였다. 그들 모두의 시선은 훼이드리온이 들어올 린 카드에 가있었다. 땀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눈치챈 훼이드리온은 내린 카드를 잡 고 있는 팔을 들어 땀을 훔쳐냈다. 아이는 그가 손을 움직인 순간 움찔해 버렸다가, 땀을 닦으려고 그랬다는 것을 아는 순간 거세게 한숨을 내쉬었 다. '땀은 내가 닦아줄 수 있는데!' 지금의 현실이 굉장히 슬퍼질 뿐이었 다. "흠, 그래. 무슨 카드야?" 능글맞은 미소가 사라진 얼굴로 루페르스가 의문을 드러냈다. 턱짓으로 가리키는 것이 자신이 가진 카드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훼이드리온은 그를 쳐다보며 가시 돋친 말을 내뱉었다. "알면 뭘 하려고요?" "아, 뭐, 할거야 많지. 쓸데없는 거면 놀려줄 거고, 쓸데 많은 거라면 대 비를 해야하니까." 장난이 반을 넘게 차지하는 듯한 그의 말에는 이제 어떻게 상대해야하 는지 정도는 터득하게 된 훼이드리온은 그 진리대로 행한 후 카드를 내 려다보았다. 무시당한 루페르스가 인상을 구기며 마기를 향해 뭐라고 하 소연하는 동안, 그는 카드의 뒷면을 쏘아보고 노려보았다. 뚫어버릴 생각은 아니었는지 이내 눈을 깜빡이며 시선을 거둔 그는 가 볍게 숨을 들이쉬었다. "흠." 그리고 카드를 뒤집었다. 루페르스는 미처 그 장면을 보지 못한 것을 애석하게 생각하며 서둘러 시선을 돌렸다. 훼이드리온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 때문에 표정을 알 수 없었고, 카드는 뒷면 밖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카드인지 확인 불 가능이었다. '이번 턴에서 어떻게든 결론이 난다는 건 이미 알고 있지만, 무슨 카드 지?' 루페르스가 아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다. 대략적인, 커다란 요지들만 알 뿐 세부적인 사항들까지는 그도 알지 못했다. 그렇기에 훼이드리온이 뽑 아낸 저 카드의 정체가 궁금한 것이다. 푸른색을 바탕으로 기하학적인 무늬가 그려져 있는 뒷면. 별로 다를 바 없는 카드였기에 그가 투시라도 할 줄 모르면 알 수가 없었다. 물론 마법 을 사용하면 간단한 것이지만 마스터 카드 게임에서는 어디까지나 정정 당당해야한다, 라고 생각하기는 하는 그였기에 그런 치사한 방법을 쓰지 는 않기로 했다. '뭐냐. 무슨 카드냐. 정말 에리피느가 뽑힌 거냐? 그런 거냐?' 너무나 조용했기 때문에, 반응이 나와야할 텐데 나오지 않았기에 루페르 스의 궁금증은 커져만 갔다. 이윽고. 침묵을 지키고 있던 훼이드리온에게서 무언가 음성이 들려온 건 그가 궁금증에 절어서 땀을 흘리고 있을 무렵이었다. "……하하." "그래그래, 뭐야? 무슨 카드야?" 그는 자신이 훼이드리온의 적이란 것도 잠시 잊은 듯하다. 훼이드리온은 무심하게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세상에는 참으로 많은 일이 있고 많은 사건들이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 도 잘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내린 카드에서 뽑은 카드를 조심스럽게 든 카드에 합류시키고, 카 드더미를 손에 들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카드들이었지만 별로 상관없 었다. 게임은 끝났다는 걸, 그는 직감할 수 있었다. "갑니다, 방어는 생략하고." 든 카드들 중에서 주시하고 있던 카드부터 그는 꺼내들었다. "드래곤 피어 카드. 와이번의 정신을 교란시켜 드래곤 나이트를 흔들리 게 만들고." 그리고 그 다음 카드는 든 카드 중에서도 이제 단 한 장밖에 남지 않은 백소환사 카드. "백소환사 카드." 마지막으로 방금 내린 카드에서 뽑은 하이라이트가 남았다. "백소환사의 능력으로 소환한다. 물의 정령왕 에리피느." 푸르스름한 기운을 머금은 듯한 카드. 훼이드리온이 지금 현재 낼 수 있 는 가장 강력한 공격력을 발휘하는, 물의 정령왕 에리피느 카드였다. "이것이 저의 운이죠." 훼이드리온은 자신 있는 미소를 지으면서 머리 속에 그려지는 영상을 관전했다. 거대한 드래곤이 창공을 비상하면서 소리를 지르자, 와이번은 단숨에 기 가 죽어 그 자리에서 굳어버린다. 드래곤의 울부짖음에 담긴 그것. 피어 에 몸이 굳어버린 와이번을 제대로 조종할 수 없는 백기사는 와이번 위 에서 난리를 친다. 그때, 흰 로브를 날리며 백소환사가 허공을 향해 손을 든다. 허공에서 뭉치는 푸르스름한 기운들. 마치 물의 청량한 느낌을 생각나게 하는 그 기운들은 둥글게 모여서 일렁이더니, 아래위로 주욱 길게 늘어난 다. 그리고 조금 후, 그 기운은 한 여인의 영상을 갖추어간다. 푸른 피부에 푸른 색 머리칼. 물빛의 눈동자가 보이게 그녀가 눈을 뜨고, 푸른 기운들이 그녀를 중심 으로 회전하기 시작한다. 물의 정령왕 에리피느. "…호오, 정말 이 카드를 뽑아버렸군." 루페르스는 솔직히 놀랐다. 아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대체 이 소년의 운은 어디까지란 말인가. 조금은 예상을 했던 거지만, 이토록 강한 운이 라니. 그는 자신의 평생을 통틀어서 만난 마스터 카드 게이머들 중에서도 단연 손꼽히는 강운을 가진 훼이드리온을 극찬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 정도 운만 있으면 평생 놀고 먹는 것도 결코 꿈은 아닐 것만 같았다. '재미있는 녀석이야.' 그는 빙그레 웃으면서 머리 속의 영상을 마지막까지 감상했다. 우왕좌왕하고 있는 드래곤 나이트가 흔들리는 사이, 에리피느는 물결 같 은 기운을 남기며 가볍게 날아오른다. 그리고 가차없이 손을 들어 푸른 기운을 던진다. 시원한 물의 감각. 그러나 그것을 느낄 새도 없이 드래곤 나이트는 분열 되어 땅으로 추락한다. 차가운 시선으로 백기사를 내려다보던 에리피느는 다시 전방을 향해 눈 길을 던진다. 저 앞에 있는 그것. 게이머의 생명력 자체를 공격하기 위해 그녀는 하늘을 유영하며 날아가기 시작한다. "……끝이군." 점점 더 커지는 에리피느의 형상을 물끄러미 감상하며 루페르스는 무감 하게 그렇게 내뱉었다. 훼이드리온은 그의 말에서 느껴지는 어감이 어떻 든 이겼으니 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빙그레 웃었다. "물의 정령왕 에리피느의 직접적인 공격으로 루페르스의 생명력 소멸입 니다. 게임은… 제 승리군요." 자신 있게 띄워진 훼이드리온의 미소는 루페르스로 하여금 심란한 마음 을 드러내게 만들었다. 훼이드리온이 카드를 챙기고 있는 동안 그는 깊은 한숨을 "흐으으으으으음." 내뱉더니, 할 수 없다는 듯이 머리를 긁으며 마기에게 말했다. "뭐, 졌으니 할 수 없지. 마기, 그 녀석들 데리고 와." "네." 이상할 정도로 고분고분한 마스터의 태도에 마기는 작은 의문을 느꼈지 만 일단 그가 지시하는 대로 세 명을 가까이로 데리고 왔다. 그녀의 마법 에 따라 천천히 공중을 유영하며 다가온 아이와 에타, 미르는 입을 다문 채 눈동자만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아이는 훼이드리온의 표정이 다시 밝아져서 무척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무섭고 절박한 표정의 훼이드리온은 이제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다. 루페르스는 주머니를 벌리고 있는 훼이드리온을 향해 말했다. "게임에 이긴 거, 축하해주지. 내가 마스터로서의 실력을 발휘했는데도 이겨버리다니, 대단한걸?" 그는 별로 대답하고 싶은 마음은 없는지 묵묵히 대꾸할 뿐이었다. "마법을 풀어주시지요." "아, 그래. 그래야지." 루페르스는 마기가 마법을 풀어 그들을 안전하게 바닥에 닿게 할 때까 지 기다렸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카드를 다 챙기지도 않고 있는 훼이 드리온은 아이의 안전부터 묻고 있었다. '흠. 이제부터지.' 그는 능글맞은 미소와 함께 다시 입을 열었다. "자, 이제 됐군. 그럼, 훼온 군. 나에게 마스터 카드를 주겠어?" 웃고 있던 훼이드리온의 표정은 급속히 굳어지더니 차갑게 굳은 눈길로 루페르스를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죠?" "무슨 말이기는. 넌 게임에서 이겨서 저들의 목숨을 구했다. 그러니까 이제 나에게 마스터 카드를 넘겨줄 차례라는 거지. 내 말이 틀려?" "약속이 틀리잖습니까!" 훼이드리온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며 버럭 큰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루페르스는 손가락으로 귀를 판다면 완벽했을 늘어진 자세를 취하며 그 에게 지그시 시선을 던졌다. "뭔가를 착각하는가 본데. 난 네가 이기면 저 애들을 살려준다고 했지, 마스터 카드를 포기한다는 말은 절대 하지 않았는데? 뭣하면 그때의 기 억을 다시 보여줄까?" 그는 분명히 거짓말한 적이 없었다. 훼이드리온도 그 의견에는 찬성했 다. 게임을 시작하기 전의 기억을 계속 검색해봐도, 루페르스가 한 말은 전혀 틀린 게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건 절대 아니었다. "당신이란 사람…" "어? 내가 뭐?" "…정말 치사하군요. 애초부터 이럴 작정이었습니까?" 루페르스는 그런 그가 귀엽다는 듯이 키득대면서 웃어버리더니 어깨를 으쓱하며 대화를 이었다. "내가 뭘? 난 분명히 내 제의에 네가 동의한 후 게임을 시작했다고. 그 렇지 않아? 지금 치사한 건 내가 아니라 너라고." "웃기지 말아요, 루페르스! 훼온! 그냥 가! 더 있어봤자 우리들 수준만 떨어질 것 같아!" 그의 말을 뒤따르는 아이의 앙칼진 소리. 이젠 더 쌓일 나쁜 감정도 없 다는 듯이 시원스레 소리친 그녀는 마지막으로 혀를 내밀며 "베에에!"를 해주고는 훼이드리온을 재촉했다. "그냥 일어나라니까?" 그도 그녀의 의견에 찬성했다. 하지만, 이대로 가면 뭔가 부족할 것 같 은 마음에 의자를 떠나지 못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다시 한번 말하겠습니다. 전 게임에 이겼고, 일행들도 살렸습니다. 거기 까지는 고마운데, 절대 마스터 카드를 주지는 않을 겁니다. 당신 같이 치 사한 족속에게 내가 나의 소중한 것을 줄 것 같습니까?" 열이 받을 대로 받은 그의 입에서 드디어 욕설에 가까운 말까지 튀어나 왔다. 푸른 안광을 통해서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는 그의 마음은 지금 당 장이라도 반대편에 앉아있는 남자의 얼굴을 갈기고 싶다는 뜻을 명백하 게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긴장해야할 인물인 루페르스는 여전히 여유가 묻어나는 얼 굴로 미소를 띄운 채 그를 부드러운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때문에 더욱 열이 받을 수밖에 없는 훼이드리온은 이윽고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 르기에 이르렀다. "하하핫. 마기, 이것 봐. 훼온 군 얼굴이 완전히 붉게 변해버렸는데?" 여전히 장난치는 것 같은 음성에 훼이드리온은 결국 폭발해버렸다. "더 있지 않겠습니다! 당신 같은 족속과 게임을 했다는 게 정말 치욕스 럽군요!"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몹쓸 짓을 당한 듯한 얼굴로 돌아서는 훼이드 리온은 진심으로 루페르스라는 인간을 경멸하고 있었다. 끓어오르는 화 때문에 제대로 마스터 카드를 챙기지도 않은 훼이드리온은 대충 카드를 주머니에 집어넣고는 돌아서려다가, 테이블 위에 카드가 남아있다는 사실 을 알아채고 재빨리 그것을 집어들었다. 그때까지도 루페르스는 마기를 옆에 두고 의자에 앉은 채 여유 있게 웃고 있었다. "쳇. 안녕히 계시죠." 결코 좋은 감정을 가지지 못하는 인사를 내뱉고는 훼이드리온은 매몰차 게 몸을 돌렸다. 그 뒤를 따라 아이도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벌레를 보는 것 같은 눈길로 그를 쳐다봐 주고 돌아섰고, 에타는 움직이지 않는 미르 와 걸어가기 시작하는 훼이드리온 사이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하며 당황 했다. 미르는 아버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서 있었다. 뭔가 할 말이 있는 것도 같았지만 표정은 전혀 변함이 없어 확실치 않았다. 과연, 아버지의 치사 한 짓을 목격한 아들은 어떤 생각을 하겠는가. 한동안 시선을 아버지의 얼굴에 고정한 채 움직이지 않던 미르는 이내 몸을 돌려 일행을 뒤따라갔고, 그제야 에타도 결심을 굳혀 소년의 뒤를 따랐다. 물론 귀엽게 "메롱!"을 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테이블에서 그들이 떠나갈 때, 루페르스가 여전히 웃는 얼굴로 조용히 입을 열었다. "거기 서." 말은 조용했지만, 그 느낌은 싸늘했다. "서라고 했다." 또한 굉장한 울림을 지니고 있었다. 그를 중심으로 퍼져나간 음파는 그 일대를 뒤흔들며 모든 마력과 반응 했다. 싸늘하게 얼어붙기 시작하는 정적의 공간. 마기는 마스터가 만들어낸 마 력장에서 제외된 공간이었기 때문에 그 영향을 덜 받았지만, 차갑게 굳어 버린 마력들로 인하여 정신이 사나웠다. 말 한마디로 완벽하게 마력을 제압한 루페르스. 그는 진정 마법사 길드 마스터인 것이다. "한 발자국만 더 움직이면 세상과의 작별을 각오해야하는 사태가 올 수 도 있다." '지금도 충분히 그래.'라고 생각해보는 훼이드리온이었지만 현 상황에 그 리 도움되는 생각은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공간은 완전히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루페르스에서부터 세차게 뻗어 나온 기운은 급속도로 마력들을 얼어붙게 만들었고, 그 중심에 서있는 훼 이드리온 일행이 얼음 속에 갇혀있는 듯한 착각을 하게 만들었다. 특히 신관인 이유로 더 많은 영향을 받는 아이는 섬뜩한 기운이 온몸을 뒤덮 어버려 완전히 굳어버렸다. "…아이!" 그녀의 이름을 불러보지만, 정작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훼이드리온 은 간신히 뒤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간단한 답이 들려왔다. "닥쳐." 훼이드리온은 그 말 그대로 말을 삼켜버리고 말았다. "오랜만에 이렇게 더러운 기분이 되어보는 것 같은데. 날 이렇게 만든 게 누군데 지금 큰 소리야? 미르, 그렇게 발버둥칠 것 없다. 아들이라고 해도 봐주지는 않아." 온몸이 굳어버린 것 같은 갑갑한 기분 때문에 버둥대던 미르는 아버지 의 차가운 말에 금방 행동을 멈추었다. 그는 계속 말을 이었다. "나도 이렇게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는데. 그냥 마스터 카드를 넘겨주면 고이 보내줄 작정이었어. 그런데, 훼온. 네 녀석이 날 이렇게 자극한 거 다. 난 분명히 약속대로 너의 일행을 살려줬다. 그런데 내가 대체 뭐가 치사하다는 거지?" 그는 테이블에서 천천히 일어나 걸어나왔다. 자연스럽게 테이블은 어딘 가로 사라지고 그곳은 원래의 공터로 돌아왔다. 훼이드리온은 간신히 몸을 돌려 다가오는 루페르스를 바라보며 섰다. 물 론 절대 굽히지 않을 것 같이 당당하게 말이다. 눌리지 않는 강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작은 소년에게서 무시하지 못할 힘을 느끼는 루페르스였지만, 그는 별로 개의치 않으며 말했다. 현 재의 주도권은 그가 잡고 있었으니까. "난 너에게 해가 되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았어. 이건 모두 네가 자초한 일이야. 그냥 마스터 카드를 주고 물러났으면 끝났을 일을. 그렇지 않 아?" "헛……" "응? 뭐라고? 지금이라도 주겠다고? 아하하, 헛소리하지마. 이미 늦었어. 넌 날 화나게 했고, 그 대가를 치러야지. 물론 이번에는 마스터 카드를 반드시 가져갈 거야." 뭐라고 말하려하는 훼이드리온을 가차없이 무시하며 할 말을 해버린 루 페르스는 잔인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으며 멍청한 소년을 마음껏 비웃어 주었다. 이제 와서 후회해봤자 아무 소용없다. 그 미소는 그것을 뜻하고 있었다. "훗, 더 할 말은 없어?" 훼이드리온에게 가까이 선 루페르스는 죽음의 충동을 더욱 거세게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마력장을 굳혀버리며 물었다. 뇌리를 더욱 깊게 파고드는 기분 나쁜 이질감과 함께, 루페르스라는 인간에 대한 깊은 분노로 인하여 훼이드리온은 미칠 것 같았다. 아니, 차라리 미쳐버리면 더욱 속 편할 것 이라고 은연중에 느끼고 있었다. "이…" 악물어진 이빨 사이로 새어나오는 훼이드리온의 작은 음성. 핏줄이 돋아 나도록 세게 꽉 쥔 주먹에는 주머니에 넣지 않은 카드가 쥐어져있었다. 용케도 구겨지지 않는 그 카드. 그 카드가 갑자기 금빛을 띄기 시작했 다. 그와 동시에 훼이드리온의 목소리도 점점 더 커져갔다. "이 미……" 끓어오르는 분노.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려는 본능의 몸부림. 겁을 먹 은 아이를 느끼는 애정의 마음. 그 모든 감정들이 모아져 그의 가슴을 두드렸고, 그것을 분출해내는 훼 이드리온의 두 눈에는. "이 미친 자식!" 화아아아아아악! 금색의 별이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그의 손에 쥐어져있던 카드에서도 황금빛이 터졌다. 푸른 수면에 떠오른 진한 황금빛의 별. 그리고 대마도사가 최초로 창아 한 마스터 카드에서 터져 오르는 황금빛. 루페르스가 주춤거리며 서둘러 물러서는 그때. [쿠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하늘을 울리는 거대한 소리와 함께 금빛의 무언가가 게이트 산맥 위로 날아올랐다. 훼이드리온은 아직도 금빛의 별을 빛내고 있는 두 눈동자를 하늘로 향 해 들었다. 금빛의 눈이 닿는 그곳. 거센 바람이 불어오면서 나무들을 쓰 러뜨릴 듯이 눕혀버렸고, 순간적으로 벌어진 하늘에서는 유적 안에서 본 거대한 골드 드래곤이 비상하고 있었다. 휘이이이이잉! 주체할 수 없게 불어오는 거대한 바람 앞에서 아이와 에타는 비명을 질 렀고, 미르는 로브를 쥐며 훼이드리온과 마찬가지로 하늘을 올려다보았 다. 거대한 골드 드래곤의 비상. 미르는 확신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저 거대한 골드 드래곤은 훼이드리온의 부름에 공명하여 나타난 것이다. "…이게 무슨 일이지?" 아직도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는 카드를 금성(金星)이 떠오른 푸른 눈으 로 내려다보는 훼이드리온의 얼굴에는 황당함이 서려있었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들.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황당한 일들이었다. 아이가 놀라는 중에도 루페르스와 마기를 살피고 소리쳤다. "저, 저기 봐! 움직이질 않아, 저 사람들!" 그녀의 외침에 모두 루페르스 쪽을 바라보았다. "저, 정말이잖아? 저대로 굳어버렸어!" 에타가 아이의 말에 맞장구를 치듯 외쳤고, 훼이드리온은 카드와 그들을 번갈아 보며 여전히 황당하다는 표정을 만들었다. 그의 손에 들려있는 카 드는 드래곤 피어 카드. 능력은 공포를 느끼게 만들어 상대방의 공격을 한 턴 쉬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럼… 방금 들려온 그 드래곤 피어에 저들이 굳어버렸단 말야?' 황당했지만, 너무나도 황당했지만 그렇게 밖에는 해석되지 않는 상황이 었다. "이, 일단! 여기서 도망치고 보자! 응?" 에타가 바쁘게 소리치며 미르를 이끌었고, 그와 동시에 아이도 달리기 시작했다. 가장 마지막에 몸을 움직인 훼이드리온은 점점 사그라들고 있 는 카드의 금빛을 확인하다가 자신의 눈을 만졌다. 때마침 앞서 달려가는 미르의 뒤를 따르던 아이가 소리쳤다. "훼온! 금성안이 아직 남아있어!" 금성안. 자신의 두 눈에 들어있는 금색의 별. 훼이드리온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일단은 미르를 놓치지 않기 위해 세차게 달리기 시작했다. 등뒤로 점점 멀어지는 루페르스와 마기의 모습. 훼이드리온이 소환한 마 스터 카드 '드래곤 피어'에 당해 굳어버린 그들에게 남은 황량한 공터와 바람뿐이었다. 하늘에는 오랜만에 자유를 찾은 골드 드래곤이 저 하늘을 향해 끊임없 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 ....으아아아아. 밤을 새버린 팀군.(---) 이제. 마스터 카드의 황당한 능력(?)...이 아닌가요? 마스터 카드의 능력이라고 해야할지 금성안의 능력이라고 해야할지. ...으음.;;; 아무튼. 마스터 카드.는 단순한 게임이 아닌 겁니다. 으하핫.;; 4권 분량이 영 불안합니다. 과연 제대로 맞을지 의문... 어둠의 기사 DARK KNIGHT TEAM... P.S 추천 감상 비평. 받습니다아아. P.S 2 GO CAMA 번 호 : 17 / 18 등록일 : 2001년 01월 15일 16:54 등록자 : 암음기사 조 회 : 56 건 제 목 : [카드 게임 판타지]『카드 마스터(Card Master)』#081 카드 게임 판타지(Card Game Fantasy) 카드 마스터(Card Master) 81. 골드 드래곤이 사라진 하늘은, 이제 더 이상 밝지 않았다. 어둠이 깔린 밤하늘 밑으로 거대한 장막처럼 깔린 게이트 산맥. 그 산맥의 서쪽 어딘 가에 훼이드리온 일행이 작은 점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탁탁. 침묵이 지배하는 시간대는 아니었지만 미르를 선두로 험한 길을 뛰어서, 혹은 걷거나 기기도 하면서 산을 내려가고 있던 일행은 누구도 입을 열 지 않았다. 어쩌면 산을 내려가는 것만 해도 힘드니 입까지 열어 에너지 를 소비할 마음은 없는 것일 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그런 침묵을 동행한 채 산을 내려가고 있던 훼이드리온은 한가지 상념 에 빠져있었다. 너무나 그 생각에 깊이 빠져든 그는 몇 번이나 아이의 부 축을 받고 꾸짖음을 들었지만, 전혀 태도를 고칠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 만큼이나 그 상념은 그 자신을 붙들어맨 채 놓아주지 않고 있었다. 훼이드리온을 힐끔힐끔 쳐다보며 앞서 가는 에타의 뒤를 따라 커다란 바위를 넘어가던 아이는 뭔가 고심하는 표정으로 걸어가는 훼이드리온에 대해서'저러다 바위에 부딪히는 게 아닐까.'하는 걱정을 해보았다. 그러나 그는 그녀가 걱정을 했다는 사실이 무안할 만큼 말끔하게 바위 앞에서 정지를 하더니, 그녀가 조심스럽게 바위에서 내려와 땅에 다리를 놓았을 무렵에는 바위를 훌쩍 뛰어넘어 그녀의 곁에 같이 내려앉았다. 배낭을 메 고 있었지만 그 정도는 무게도 느껴지지 않는 것 같은 가벼운 몸짓이었 다. '괜찮은 건가…….' 아까 전까지만 해도 작은 돌부리에 넘어지고 뻗어 나온 가지에 얼굴을 부딪히는 등, 그녀로 하여금 걱정에 걱정을 끊이지 않게 하던 모습과는 달리 이젠 제법 주위를 경계하면서 걸어가는 모습이 위태하던 좀 전과는 나아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도저히 걱정을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의 미간 사이로 나있는 가는 주름들이 여전히 그녀를 심란하게 만들 고 있었다. "빨리 와! 뭐해? 안 갈 거야?" 쉼 없이 걸어가 이미 저 앞으로 나가버린 에타가 부르는 소리를 들은 아이가 얼른 대답을 해주고 훼이드리온의 어깨를 쳤다. "빨리 가자.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응? 아아, 응." 멍하게 대답을 하는 훼이드리온. 아이는 그의 대답이 영 맘에 안 드는지 조금 눈썹을 꿈틀대어보다가 이내 그의 손을 덥썩 잡아끌었다. "어서 가자니까. 그 마법사들이 언제 다시 나타날지 모른다고." 앞으로 닥쳐올 예정 없는 재앙에 대한 경계심을 나타내며 자신의 손을 세차게 잡아끄는 아이의 손길에 끌려 다시 바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그는 슬슬 상념을 정리해야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이제 곧 산을 다 내려갈 테고, 그럼 바로 에코의 모습이 보일 것이다. 도착하고도 계속 이 런 정신 상태라면 정말 멋진 일이 아닐 수 없는 지라, 그는 산에서 모든 생각의 끝을 보자고 결심했다. 여전히 손을 잡으며 그를 이끌고 있는 아이는 큰 바위를 옆으로 돌아서 이동하여 에타를 겨우 따라잡았고, 그들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속도를 늦 추고 있던 에타와 미르도 그들의 모습이 보임에 따라 다시 속력을 올렸 다. 암살자답게 보통 재빠른 몸놀림이 아닌 둘의 모습을 보며 아이는 혀 를 한번 내두르며 감탄해보고는 훼이드리온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만 놔도 돼. 내가 갈게." "어, 정신 차렸어?" 훼이드리온이 그녀의 옆으로 따라붙으며 싱긋 웃었다. "그럼 언젠 정신 잃고 있었어?" "거의 그 정도였잖아, 뭐. 뭘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 말 중간에 잠시 숨을 들이쉰 아이는 그 숨으로 조금 높은 바위 위에서 가볍게 뛰어내렸다. 잠시 몸이 주춤거린 그녀를 이미 내려가 있던 그가 잡아주며 대답했다. "난 대체 어떤 존재일까, 해서 말이야." "훼온이 어떤 존재라니?" 이번엔 반대로 그녀의 손을 잡아 이끌며 부축을 겸하고 있던 훼이드리 온은 저 앞에서 들려오는 에타의 시끄러운 목소리를 귀로 받아들이며 대 답했다. "게이트 산맥에서 너무 많은 일을 당해서 혼란스러워. 금성안에다가 골 드 드래곤. 게다가 루페르스는 우리들을 죽여서 내 마스터 카드를 빼앗으 려하지 않나, 드래곤 피어가 황금색으로 변하지 않나. 그리고 내 눈에서 는 정말 금성안이 떠오르지, 게이트 산맥 위로 골드 드래곤이 날아올라 소리를 지르지, 휴우… 이거 정말 너무 갑작스럽게 일을 많이 당해서 머 리가 어지러울 정도야." 아이는 길도 제대로 나있지 않는 산길을 바위 위로 이리저리 잘도 옮겨 다니면서도 그 긴 말을 숨 하나로 모두 말해버리는 그가 더욱 어지럽다 는 표정을 만들다가, 그에게 말했다. "금성안…… 사라졌네……?" 그녀의 검은 눈동자는 촉촉하게 젖은 채 그의 푸른 눈동자를 향하고 있 었다. 그는 눈꺼풀을 만지며 눈알의 동글동글한 생김새를 느끼며 대답했 다. "응. 바쁘게 내려오던 중이라서 눈치 못 챘는데, 어느새 사라져버렸어." 훼이드리온은 어쩌면 남아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건지 계속 눈을 만지다가 이내 손을 내렸다. 여전히 깨끗하고 맑은 푸른색의 눈동자 는 역시 그 위치에 곱게 자리해있었다. 아이가 넋을 잃고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는 동안 훼이드리온이 널찍한 돌은 하나 밟아 넘어가며 혼란한 마음을 겉으로 드러냈다. "후우……." 그의 한숨에 작게 정신을 차린 그녀의 귀로 이어지는 그의 말소리가 들 려왔다. "…정말, 난 뭘까. 여행을 떠난 뒤에 정말 여러 일을 당했고 여러 가지 를 알았지만 이렇게 혼란한 적은 처음이야." 이미 어두웠고, 나무들로 가려진 하늘에는 하실루스의 상징, 은빛 달도 둥글게 떠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아이의 눈에는 혼란스러운 심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그의 얼굴이 너무나도 확연하게 보였다. '이런 게 사랑일까.' 조심스럽게 그렇게 생각하며, 그녀는 조용히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내가 금성안이란 것…… 500년 전의 대마도사와 같은 능력을 가졌다는 것은 잘 알겠어. 그런 일까지 벌여놓고 안 믿는다는 게 더 이상하겠지. 하지만, 하지만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어. 금성안. 드래곤 피어 카드. 골 드 드래곤. 대체 무슨 관계인 거지? 골드 드래곤이… 마스터 카드로 금성 안을 가진 내가 소환했다는 거야? 그런 걸까?" 금성안. 그것은 '진실을 보는 눈'이다. 드래곤 피어 카드. 드래곤의 능력 중 하나로 적을 공포에 떨어 굳게 만드는 능력을 가진 마스터 카드이다. 골드 드래곤. 전설의 종족이라 일컬어지는 드래곤 중에서도 지고한 위치 에 있는 드래곤들의 수장이다. 훼이드리온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그렇게 대단한 존재란 말이야?" 그가 무서워하는 점은 바로 그것이었다. 마스터 카드의 능력을 현실에서 도 사용할 수 있는 능력. 그것이 금성안이 가진 능력이라는 것을 대충이 나마 짐작하게된 그는 그것이 너무 두려웠다. 이미 한 나라의 태자란 신분으로도 대단한 것이었지만 그는 그렇게 생 각하지 않았다. 단지 자신은 이제야 성인이 된 15세의 남자며, 마스터 카 드를 좋아하는 게이머이며, 검을 좋아하는 검사이며, 한 소녀를 사랑하는 것이 기분 좋은, 평범한 소년이라고 생각해오던 그였다. 그런데, 그런 자신이 유식하게 정리해서 '마스터 카드 소환사'라니. 그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사실이었다. "납득할 수가 없어… 도저히.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그렇게 대단한 존 재라는 건… 너무 어울리지 않아." 혼란스러운 마음을 모조리 한 문장에 우겨 넣어버린 훼이드리온은 한숨 쉬듯 말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침통하게 슬픈 눈이 되어버린 그는 여전히 잡고 있는 아이의 손이 오늘따라 더 따뜻하다고 생각했다. 너무 가라 앉 아버린 마음이 차가워서일 거라고 조심스럽게 추측하며, 그는 그녀의 따 뜻함을 조금이라도 더 느끼기 위해 손에 약간 더 넣으며 앞으로 걸어나 갔다. 그의 마음이 어떻든 말든, 미르와 에타는 앞으로 쭉쭉 잘도 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더 뒤쳐져서는 안되었다. "……그게 이상해?" "응?" 문득, 아이의 맑은 목소리가 들려온 것 같아 훼이드리온이 옆으로 시선 을 옮겼다.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따뜻한 눈동자를 발견하게 된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의 작은 입이 재차 열렸다. "훼이드리온이 그런 대단한 존재가 된 게 이상하냐구." "…조금. 이상해." 그의 조심스런 대답에 아이가 의아한 듯 고개를 앞으로 돌리며 혼잣말 인 듯 말했다. "그게… 이상한 걸까?" 훼이드리온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상하지 않으면?' 아이는 앞을 바라보는 시선을 고정한 채, 꿈을 꾸는 듯이 행복하면서도 약한, 그러면서도 분명한 미소를 입가에 천천히 지어 올리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마법의 숲에서 만난 이후로… 늘 같이 다녔잖아. 벌써 2주일이 되는 시 간을 우린 같이 했어." "…응." "그러면서 난 훼온의 많은 면을 봐왔어. 따뜻한 면. 순수한 면. 가끔씩은 어울리지 않는 어벙한 면이라든지, 얼마 전처럼 냉정한 모습까지. 그동안 내가 봐온 훼온의 모습은 정말 여러 가지야. 그래서 난…" "…그래서 넌?" 아이는 입가에 띄운 미소를 진하게 피워 올리며 말을 이었다. "훼온이 그렇게 대단한 존재라고 해도, 그렇게 이상하거나 어색하지 않 은 건가봐." "에?" "그럴 때 훼온은, 꽤 어벙해 보여." "그, 그래?" "응응." 즐거운지, 훼이드리온에게 잡혀있는 오른손이 아닌 왼손으로 입을 가리 고 쿡쿡 대는 그녀의 옆에서 멋쩍게 뒤통수를 긁적거리는 그. 그녀는 찔 끔한 표정으로 어색하게 웃음으로 넘기려는 그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도 곧 팔을 올린 채로 그녀에게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훼온은 그 사실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다지만, 이상하게 난 그 사실이 자연스러워. 훼온 정도라면…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 있으니까, 당연해. 훼 온은…" "난?" 조금 말을 끌자 즉각 물어오는 그를 향해 아이는 그저 싱긋 웃어버리고 는, 나오려던 말을 깊게 삼켜버렸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인걸.' "아무 것도 아냐. 아무튼, 받아들여도 돼. 난 훼온 만큼 어울리는 사람도 없다고 여기는걸. 생각해봐. 루페르스 같은 사람이 그런 대단한 능력을 지녔다면 대체 어떻게 되겠어?" "흐음… 끔찍할 것 같아." 세세한 상상은 본능이 거부를 했기 때문에, 그 정도의 이미지라도 떠올 린 것에 만족하는 그들이었다. "그렇지? 하지만 훼온이라면 그렇지 않잖아. 그러니까 있는 그대로 받아 들여. 지금의 훼온이든, 대단한 존재가 된 훼온이든, 난 훼온을 믿으니 까." 그녀는 싱긋 웃음으로 말의 마무리를 장식했다. 나름대로 결론을 내려놓고 즐겁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걸어나가는 그 녀를 바라보며 아슬아슬하게 나뭇가지를 피해 고개를 숙이는 훼이드리온 은 어쩐지 마음 속에서 몰아치던 바람이 잠잠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 다. 그래서 그녀에게 상당히 고마운 마음에 인사를 해야될 것 같은 기분 도 들었다. "아이." "응? 왜?" 그의 부름에 고개를 돌린 그녀의 눈에 좀 전에 비해 환하게 밝은 미소 를 띄고 있는 그의 얼굴이 들어왔다. 그녀도 생긋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 다. "고마워." "뭐가?" "아이의 말을 들으면, 어쩐지 편해져. 그래서 고마워." "헤에, 그래? 응응, 잘 받아서 나중에 돌려줄게, 그 고마움." 그녀다운 재치 있는 답변으로 훼이드리온의 인사를 받은 아이는 여전히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봐 주었다. '이 미소를 볼 수 있다면… 금성안이든 마스터 카드든, 어쩌면 다 포기 할 수 있을 지도 몰라.' 물론 그 뒤에 따를 그녀의 반응은 생각해보지 않아도 뻔했지만, 어쨌든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며 웃는 훼이드리온이었다. 아이의 밝은 이야기로 순식간에 환해진 분위기 중에서 나란히 손을 잡 아 의지하며 미르의 뒤를 쫓고 있던 그들의 귀로 적막한 공기를 가르는 에타의 날카로운 외침이 들려왔다. "야아아! 니들! 빨리 이리 와봐아!" '저러다가 루페르스에게 걸리면 어떡하지?'하는 걱정을 해보며, 그들은 소녀가 더 이상 소리를 지르지 못하게 서둘러 뛰어나갔다. 큰 바위 두 개를 돌고, 작은 돌들은 뛰어넘으며 기본적인 곡예를 펼친 가운데 재빨리 미르와 에타의 곁에 도착한 그들.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기 만 한 주황색의 머리칼을 가진 소녀는 다른 곳보다는 나무들이 덜 우거 진 수풀 사이를 손으로 가리키며 방방 뛰고 있었다. "저기 봐, 저기! 마법사들의 도시, 에코라구!" "응? 어디어디?" '에코'라는 말을 듣자마자 단숨에 에타와 같은 등급이 되어버린 아이의 격렬한 반응. 가끔씩 의기투합이 되어버리는 두 소녀는 이번에도 역시 서 로 손을 맞잡고 방방 뛰기 시작했다. "와아! 도착이다, 도착! 드디어 도착이야!" 정확하게 날짜를 새어보지는 않았지만, 대충 시간에 맞춰 도착할 수 있 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훼이드리온은 나무 사이로 보이는 거대한 도 시의 정경을 눈에 담다가 미르를 돌아보았다. 조용한 검은 눈동자를 한 채 일행의 뒤편에서 길을 살피고 있던 미르는 그의 시선을 느끼고 천천 히 고개를 돌렸다. "정말 제대로 도착했네?" "비교적 다니기 쉬운 길로 오느라 힘들었지만." 훼이드리온은 그동안 그들이 걸었던 길을 떠올리면서 "하하하." 웃어버 렸다. '비교적 다니기 쉬운 길'이란 건 어디까지나 저 암살자 소년의 기준 이라는 건 이미 다 알고 있었으니까. "이제 얼마나 더 가야하지?" 아이와 에타는 방방 뛰는 것을 그만두고 당장 미르를 향해 시선을 돌렸 다. 그 두 소녀의 눈빛에 담긴 초롱초롱한 기대를 차마 져버릴 수 없었던 미르는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며 시간을 재는 것 같더니 이내 입을 열어 대답했다. "빠듯할 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오늘 안으로는 간다는 거지?" 그들이 처한 현 상황에서는 '오늘'이 지나 '내일'이 된다는 것도 눈치채 지 못할 일이었지만, 그런 사소한 문제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대범한 성 격을 드러내면서 아이가 가볍게 물었다. 미르는 간단히 대답했다. "아마도." "좋아좋아. 그 정도면 돼."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는 아이 대신 에타가 쪼르륵 미르의 곁으로 달 려가 소년의 팔을 끌었다. "미르미르! 어서 가!" "…그렇게 부르지 마라." "미르미르! 미르미르!" 훼이드리온은 이내 포기하고 걸음을 옮기는 미르의 모습에 또 다시 "아 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려 버렸다. 확실히 에타에게는 못 당해내는 미르 였다. "자, 그럼 우리도 가자." 아이의 손을 잡으며 말하는 훼이드리온. 자신의 손을 감싸쥐는 그의 손 에 새삼스럽게 두 볼을 붉히며 그녀가 수줍게 웃으며 대답했다. "응, 훼온." 어두운 산길. 걷기도 쉽지 않은 길이었지만 그들은 밝은 기분으로 미르 의 뒤를 뒤쫓아 서둘러 에코로 향했다. 휑하니 불어오는 바람은 검은 로브를 거머쥐고 어두운 동굴 속을 달리 는 유리를 더욱 춥게 만들었지만, 그녀는 다리를 멈추지 않고 계속 뛰었 다. 여름이 다가오는 시간에 겨울에나 볼 수 있는 하얀 입김은 쉽게 볼 수 있는 게 아니었으나, 싸늘한 겨울만큼이나 추운 동굴 안을 뛰는 그녀 의 입에서는 규칙적으로 불어 나와 그녀의 열을 더욱 돋구었다. '이렇게 춥다면 춥다고 말을 할 것이지!' 유리는 이 동굴이 끝나는 곳에 있을 마스터를 원망하며 로브에 체온유 지마법을 걸었다. 차가운 바람만큼이나 차갑게 느껴지는 마력들이 응축되 어 검은 로브를 감싸자, 곧 로브 안이 따뜻해지는 듯한 느낌이 그녀를 황 홀하게 만들었다. 몸이 따뜻해지자 더욱 힘차게 움직이기 시작하는 다리. 유리는 평소에 운동을 별로 하지 않았지만 오랜 여행으로 제법 체력이 갖추어져있었기 때문에 장시간의 달리기에도 끄떡없었다. 최고 원로들 중에서도 세라 다 음으로 강인한 체력이었으니까, 할 말은 다한 것이다(세라는 온 대륙을 뒤지며 연구를 하러 다니기 때문에 유리보다 한 수 위다). 한참을 그렇게 뛰어가던 그녀의 눈에 동굴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동 굴의 끝은 참으로 알아보기 쉽게 '출구'라고 친절히 적힌 팻말이 가리키 고 있어 웃음을 짓게 만들었다. 루페르스 외에는 이런 짓을 할 인물은 없 었기에, 그녀는 푸훗 웃어버리고 출구로 빠져나왔다. 입구와 마찬가지로 거대한 수풀이 앞을 가로막았고, 유리는 조심스럽게 그것들을 헤치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든 당장 띄는 것이 있었으니. "마스터! 서브!" 드래곤 피어 카드의 영향으로 굳어버린 자세 그대로 아직까지 서있는 마스터 루페르스와 서브 마스터 마기의 모습이었다. 유리는 뭔지 모를 상 황에 황당했지만 단숨에 뛰어가 마스터 앞에 섰다. "마스터! 대답해봐요, 마스터!" 하지만 굳어버린 루페르스의 입이 열릴 리 없었다. 아이는 속는 셈치고 마기에게도 소리쳤다. "서브! 대답해봐요, 제발!" 역시나 말이 없는 마기. 루페르스를 쳐다보는 시선 그대로 굳어있는 그 녀의 모습에 유리는 망연자실하게 뒤로 물러섰다. 자신이 오기 전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르겠지만, 태자 일행은 어디로 가고 마스터와 서브 마스터는 이렇게 굳어버린 채 있는 걸까. 유리는 머리를 비집고 올 라오는 의문을 누르며 우선 자신이 해야할 일을 상기했다. '일단 마스터와 서브를 옭아매고 있는 마력부터 풀어야지.' 마법사 길드 마스터 자리에 올라있는 루페르스를 잡아둘 수 있는 마력 을 대체 어떻게 움직인 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우선 그녀는 마스터를 향해 손을 벌리고 눈을 감았다. 어쩌면 굉장히 힘들지도 모르는 작업이었 다. 정신을 마스터를 붙잡고 있는 마력에 기울인 유리는 겉에서부터 조금씩 마력을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범위가 넓은 마력이 아니라, 좁은 범위에 응축된 마력이었기 때문에, 해체시키는 게 여간 까다롭고 힘든 것 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 정도의 마력도 풀지 못하면 마법사 길드 최고 원로 자리를 내놓아야 마땅할 것이다, 라는 결심으로 마력들을 조금 씩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유리는 이마에 가득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내며 눈을 뜰 수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나버렸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많은 양의 마력을 깎아내었기에 성과는 충분했다. 이제 적당한 자극만 주면 마스터 스스로 마력들을 풀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흐음." 잠시 마스터를 노려보던 그녀는 한순간 주위의 마력을 끌어 모아 단숨 에 마스터를 향해 날렸다. 무겁게 날아가는 무형의 기운. 저것을 제대로 맞았다가는 마법왕국 라시엔트 제1기사라 칭해지는 바이마크라도 단숨에 갈비뼈가 으스러질 지도 모른 만큼 강력한 힘이었다. 유리는 일반인과 다 를 바 없는 신체를 가진 루페르스를 향해 그런 힘을 던진 것이다. 그러나, 역시 유리는 현명했다. 마력 덩어리가 루페르스의 마력에 닿으며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려는 순 간, 마력에 갇혀있던 루페르스가 단숨에 마력을 자신과 반응시켜 무로 변 환시켜버린 것이다. 순식간에 풀어진 마력은 가루보다 작은 조각이 되어 공간 속으로 미세하게 스며들어갔다. "후우……." 다시 숨을 쉬기 시작하는 마스터를 향해 유리가 소리쳤다. "마스터! 괜찮은 건가요!" "응? 유리? 아, 와주었군. 물론 괜찮아. 내 마력반응능력으로도 어쩔 수 없을 만큼 갑작스럽고 멋진 공격에 당해버렸지만, 이 정도로 어떻게 되지 는 않아."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는 유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마스터를 바라보 았고, 그런 그녀의 신비로운 보라색 눈동자를 향해 빙그레 미소를 띄우며 루페르스는 말했다. "일단 마기부터 풀어주고. 가면서 이야기하자고."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마기가 갑자기 풀썩 쓰러지면서 숨을 몰아쉬었 다. "…하아, 하아. 어, 어떻게 된 일이죠?" 유리는 루페르스가 마기를 억누르고 있는 마력을 단숨에 풀어버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의 실력은 이미 잘 알고 있었으나 자신이 그렇게 힘들게 풀었던 마력을 이토록 간단하게 해 체하다니. 어쩌면 마스터의 실력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를 지도 모른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비틀거리면서도 몸을 일으키는 마기를 부축해주며 루페르스가 여전히 빙그레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기억나? 금성안과 황금빛의 마스터 카드. 그리고 골드 드래곤." "…네에, 겨우 기억나긴 합니다만. 그건 대체……?" "뭐긴 뭐겠어. 내가 말한 그대로지." 그는 마기가 자세를 취할 수 있도록 계속 부축해주면서 즐거운 듯 입을 열었다. "역시 그는 진짜였어. 내가 생각한 그대로였다고. 아하핫!" 마기에게 한쪽 어깨를 빌려주고 걸음을 옮기는 마스터가 이상하게도 기 뻐 보이는 것은 결코 그녀들의 착각이 아니었다. 루페르스는 드디어 찾아 냈다는 생각에 정말 기뻐하고 있었다. "자, 일단 에코로 향하자고. 가면서 이야기해줄게." 유리는 동굴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마스터에게 야무지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그의 곁으로 다가섰다. -------------------------------------------------------------------- 네에, 그래서 81편인 겝니다. :) 일단 8장은 82편이 끝이고요. 4권 분량의 완성입니다. 어쩌면 미달일 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지만.; 아하하하. 뭐. 한번 가보도록 하죠. :) 그럼! 어둠의 기사 DARK KNIGHT TEAM... P.S 추천 감상 비평. 받습니다, 받아요!(>.<)! P.S 2 GO CAMA 번 호 : 18 / 18 등록일 : 2001년 01월 15일 20:26 등록자 : 암음기사 조 회 : 19 건 제 목 : [카드 게임 판타지]『카드 마스터(Card Master)』#082 카드 게임 판타지(Card Game Fantasy) 카드 마스터(Card Master) 82. 과연 마법사들의 도시라서 일까. 미르를 제외하고 이곳에 처음 오는 것 인 훼이드리온과 아이, 에타는 찬란하게 수를 놓은 건물들의 간판들에서 제대로 눈을 떼지 못했다. 산에서 방금 내려왔기 때문에 몰골이 말이 아닌 그들을 힐끔힐끔 쳐다 보는 시민들의 눈길도 있고 해서 서둘러 이동을 하기는 했지만 가는 곳 마다 번쩍번쩍하는 빛을 뿜어내는 신기한 간판들이 많아서 도저히 제 속 도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미르미르! 저, 저게 뭐야? 저게 뭐야아아?" 에타가 붉은 빛, 푸른 빛을 쏟아내고 있는 간판을 손가락으로 마구 가리 키며 미르의 로브를 흔들어댔다. 도저히 소녀를 막을 용기가 나지 않는 미르는 자신에게 남은 최후의 방법은 서둘러 대답하는 것밖에는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무거운 입을 열었다. "마법이다." 그리고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에타가 울상을 지으며 다시 소년의 팔을 흔들었다. "그 걸로는 설명이 부족해!" 미르는 소녀를 향해 '대체 뭘 원하나.'라는 표정을 지어 보이다가, 너무 나도 초롱초롱한 초콜릿 빛 눈동자에 질려 상세하게 대답해버렸다. "마법으로 간판에다가 각각의 빛을 내게 만든 거다. 흔히들 마법 간판, 이라고 불리는 거지." 이보다 더 자세한 설명을 있을 수 없다는 듯이 가차없이 고개를 돌려버 리는 미르. 소년을 향해 멍해진 시선을 보내고 있던 에타는 이내 다른 간 판으로 시선을 옮기고 요란을 떨었다. 게이트 산맥의 그 조용했던 분위기가 어째 그리워지고 있는 아이는 훼 온의 어깨를 툭 쳐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었다. "응? 왜, 아이?" "대회 참가 신청해야 되잖아. 늦지 않았을까?" 훼이드리온은 신중한 표정으로 "흐음…" 소리를 내더니 주위를 두리번 거리기 시작했다. "아무나 잡고 물어봐야지. 설마 끝났으려구." 그렇게 말하지만, 사실 그도 불안하기는 했다. 이렇게 힘들게 왔는데 참 가 신청을 하지 못한다면, 그건 정말 억울해서 바다에 퐁당 빠져죽을 일 이었다. 절대 죽을 수는 없다, 와도 비슷한 마음가짐으로 필사적으로 질문을 던 질 대상을 찾고 있던 훼이드리온의 눈에 마침 지나가던 평범한 사내가 들어왔다. 그는 당장 그에게로 다가갔다. "저기 말씀 좀 물어도 되겠습니까?" "애석하게도 내게는 소년이 물 수 있는 말씀이 없소." "……네?" "아니오, 농담이오. 그래, 무엇이오?" 뭔가 황당한 말을 들은 듯한 기분이었지만 그 사내가 서둘러 대화를 진 행시켰기에 이상한 기분이 되어버린 훼이드리온. 하지만 일단 물어볼 건 물어야했기에 대답을 할 자세가 된 사내에게 질문을 던졌다. "마스터 카드 대회 참가 신청을 하려고 하는데, 어디 가서 하면 되죠?" "오오, 게이머였소? 이거 참 반갑구려. 나도 게이머라오. 어디서 오셨소? 난 기사왕국 카즈캐스커의 남부에서부터 여기까지 올라왔다오. 굉장히 힘 든 여정이었지. 하지만 매년 참가해오던 대회라 안 올 수 없어서 이번에 도 두 달만에 이곳에 도착해서 방금 신청을 하고 왔소. 아, 어디서 신청 하느냐고 물었었지? 저쪽으로 바로 여기서 하오." 질문과는 전혀 쓸데없는 기다란 대사를 늘어놓던 사내의 말에서 요점을 찾아보려고 애쓰고 있던 훼이드리온이 자신이 원하는 대답이 마지막에 들려오자 정말 감동하고 말았다. 그는 속으로 '오늘 내로 답을 들을 수 있을까.'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 고맙습니다." "아니오, 천만에. 같은 게이머끼리 돕고 살아가는 게 인지상정, 당연지 사, 물론인 일. 나에게 고마워할 것 없소. 다만 대회에서 혹시 만나게 된 다면 정정당당하게 멋진 게임을 치르도록 합시다. 그래 주시겠소?" "네에, 무, 물론이죠." 훼이드리온은 어쩐지 이 사내가 두려워지고 있었다. "그럼 빨리 들어가 보시오. 나도 겨우겨우 신청했으니 시간이 빡빡할 것 이오. 그럼 난 가오리다. 대회에서 만납시다!" 손을 흔들면서 멀어지는 사내. 그 사내가 가르쳐준 마스터 카드 대회 신 청소의 건물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훼이드리온은 인생의 역경과 고난을 논하고 싶은 기분이 되어버렸다. 뒤에서 타다닥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의 어깨를 두드리는 손길이 있 었다. "그렇게 사람 보는 눈이 없어서 어떻게 살아?" 아이였다. "으으, 내가 이럴 줄 알았나. 어떻게 질문 하나에 물어보지도 않은 수많 은 이야기를 쏟아낼 수가 있는 거지?" 멀어져 가는 사내의 모습을 바라보며 훼이드리온은 온몸이 오싹거렸다. 게임에서나 일생 생활에서나 절대 만나고 싶지 않은 타입이었다. 자고로 그는 말이 많은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어쨌든 신청부터 하러 가자." 간신히 사내에 대한 공포를 떨칠 수 있게된 훼이드리온이 바로 정면에 있는 건물을 향해서 걸음을 옮겼다. 곧 뒤따라 붙는 아이가 황당하다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여기야?" "응, 그렇대." "가까운 곳에 두고 헤맸던 거잖아, 우리." 별로 상기하고 싶지 않았던 사실을 자각하게 만드는 아이의 말에 훼이 드리온은 괴로운 듯 신음을 흘리며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전체적으 로 '이곳은 사무실이오!'라고 외치는 듯한 분위기의 건물은 과연 그 안도 사무실 그 자체였다. 소리 없이 열리는 문을 향해 카운터에 앉아있던 여인이 자리에서 일어 났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미르가 문을 닫는 소리를 들으며 훼이드리오이 밝게 불이 켜진 카운터 앞에 섰다. "마스터 카드 대회 참가 신청을 하려고 왔는데요." "아아… 마감 시간이 지났는데요." "네? 벌써요?" 여인의 말에 아이가 민감하게 반응하며 앞으로 나섰다. 그렇게 힘들게 왔건만, 벌써 마감이라니. 저 앞에서 생각했던 절망적인 사태가 벌어지려 하고 있었다. 훼이드리온이 급히 소리쳤다. "방법이 없겠습니까? 저흰 여기 참가를 하려고 힘들게 왔어요!" "흐음… 글쎄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여인은 뭔가 방법을 찾았는지 잠시 생각을 해보다가 이내 누군가와 대 화를 하듯이 자연스럽게 입을 열었다. "마감 시간이 지났는데, 참가 신청을 받아도 될까요? …네, 4명이요. … 흠, 잠시 물어볼 게요." 여인의 눈이 훼이드리온을 향했다. "대회 참가가 처음이신가요?" "여기 미르 빼고는 모두 처음입니다." "아, 그러세요? 잠시만요." 훼이드리온의 답변을 들은 여인은 다시 시선을 멀게 하고 누군가와 대 화를 나누었다. 아무래도 마법이겠거니, 하고 짐작을 하고 있던 훼이드리 온이 그 틈을 타 미르에게 질문했다. "정말 미르를 모르네?" "흠." 미르의 별칭은 흑의 마스터. 도저히 행적을 알 수가 없는 카드 마스터였 다. 미르는 오랜만에 떠오르게 하는 자신의 별칭에 남다른 느낌이라도 있 는지 계속 "흠흠" 거리다가 에타에게 배를 한 방 얻어맞고 비틀거렸다. 미르가 조용해지자, 이번엔 에타가 입을 열었다. "난 참가 안 할 건데?" "응? 아, 맞아. 그랬었지?" "응, 그랬었어." 훼이드리온이 속으로 '참가 인원은 3명.'이라고 중얼거리고 있을 무렵, 마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던 여인이 다시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혹시 초청장이나 추천장 있으세요? 그게 있다면 가능하답니다." 시간에 참 까다롭구나, 라고 생각하며 훼이드리온이 배낭을 바닥에 내려 놓고 뒤적거렸다. 아이가 허리를 굽혀 그의 손길을 관찰하며 물었다. "추청장? 그런 것도 받았어, 훼온?" "아니, 추천장. 루비네 마을에서 만난 어떤 노인에게서 받은 거야. 여태 까지 잘 보관해두고 있었지. 아, 여기 있다." 배낭 속주머니에서 찾아낸 추천장을 꺼내들면서 훼이드리온의 머리 속 에는 하얀 장발을 머리 뒤로 질끈 묶은 노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루비네 마을에서 만나 자신에게 이 대회를 가르쳐준 노인, 숀. 그가 준 추천장은 과연 쓸모가 있었다. 다시 허리를 들어 카운터 앞에 선 훼이드리온은 숀의 봉인이 달린 추천 장을 여인에게 넘겼다. 그녀는 그것을 받아 봉인을 뜯고는 안의 내용을 확인하듯 눈동자를 움직였다. 그러던 그녀가 갑자기 눈알을 파르르 떨며, 동시에 떨리는 입으로 입을 연 것은 그녀의 눈동자가 추천장의 오른쪽 아래에 멈춰버린 때였다. "……숀?" "뭐가… 잘못된 건가요?" "아, 아니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아무 것도 아닌 게 절대 아닌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여인에게 한마 디 더 하고 싶은 아이였지만, 어쩐지 그녀가 난처해할 것 같아 조용히 하 기로 했다. 그녀는 추천장을 다시 봉투 속에 집어넣어 카운터 밑 서랍에 넣더니 이 내 서류 네 장을 훼이드리온에게 주었다. "이 서류를 각각 작성해주시고요. 사인까지 하셔서 가지고 오세요. 테이 블은 저쪽에 있습니다." 그녀가 손으로 안내해주는 방향에 놓여져 있는 테이블과 그 앞의 편안 해 보이는 쇼파의 모습을 확인한 훼이드리온은 서류 중 하나를 뽑아내 그녀에게 다시 돌려주었다. "얘는 참가하지 않습니다." 여인은 에타를 한번 쳐다보고 방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테이블에 옹기종기 모여 신청서 작성을 모두 끝낸 그들은 여인 에게 그것을 제출했고, 그녀는 그들이 서류를 작성하는 동안 준비한 것을 그들에게 주었다. "이것이 대회 참가 게이머라는 것을 가르쳐주는 배지입니다. 대회가 열 리는 동안에는 빼지 마세요. 참가하는 게이머에게는 여관이든 식당에서든 혜택을 드리니까요." "와아, 정말이요? 그럼 목욕탕은요?" "목욕탕도 물론입니다." 그 말은 듣는 즉시 아이의 눈이 카운터의 불빛보다 더 밝게 빛났다. 훼 이드리온은 그녀의 눈빛이 눈이 부신지(결코 그럴 일은 없지만) 약간 인 상을 찌푸리며 배지를 모두에게 나눠주었다. 들뜬 얼굴의 아이가 배지를 착용하다가 침에 몇 번 찔리는 것을 반복하자 손수 배지를 달아준 그는 배낭을 고쳐 메며 여인에게 마지막 물음은 던졌다. "여관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 밖을 가리켰다. "이쪽으로 계속 들어가시면 대광장이 나오는데, 그곳에서 가장 큰 건물 입니다. 마법 간판도 있으니 아마 쉽게 찾으실 수 있을 거예요." 그녀의 손가락을 따라 창 밖을 내다보던 훼이드리온은 이내 고개를 돌 려 그녀를 향해 멋진 미소를 띄워주었다. "감사합니다." "아, 아니요. 제가 마땅히 해야할 일인 걸요." 그의 아찔할 만큼 멋진 미소에 순간적으로 자신의 나이도 잊어먹은 채 얼굴을 붉히고 만 여인은 간신히 대답한 후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잘 생긴 것은 어느 정도 견딜 수 있었지만, 그 얼굴에 미소까지 겹쳐지자 정 말 장난이 아닌 것이다. 그녀는 달아오른 얼굴 때문에 한동안 일에 열심 인 척 해야만했다. 문을 나선 일행은 여인이 가르쳐준 방향으로 곧장 몸을 돌렸다. 직선으 로 쭈욱 뻗은 대로에는 아직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시간이 시간인 지 라 북적대지는 않았다. 하지만 대회가 열리기도 하니 낮에는 많은 사람이 돌아다닐 거라는 훼이드리온의 말에 에타는 혀를 삐죽 내밀며 벌써부터 질린 표정을 지었다. 그에 반해 아이는 아까부터 "목욕탕!"이라는 단어를 자신의 이름이라도 되는 듯이 부르짖으며 좋아하고 있어서, 에타의 나쁜 기분과는 상반된 모 습을 보여주었다. 물론 그녀를 말리기 위해 훼이드리온이 분투를 했다는 것도 당연했다. 그런 왁자지껄한 일행 가운데에서도 역시나 평온을 유지한 채 냉정하게 사태를 주시하고 있던 미르의 눈에 드디어 목표물이 잡혔다. 소년은 아이 를 진정시키고 있던 훼이드리온의 어깨를 한 대 툭 치고는 손가락으로 저 앞을 가리켰다. 훼이드리온은 누군가가 어깨를 때려서 돌아보니, 미르의 손가락이 저 앞 을 가리키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그래서 손가락 끝으로 시선을 모았 고, 그곳에서 발견했다. "……여관이군." 언젠가 한번 보았던, 셀라디안의 여관이 생각나게 만드는 모습의 여관이 그곳에 턱하니 자리하고 있었다. 대충 새어봐도 10층은 쉽게 넘어버리는 층수는 고개를 올려 최고층을 바라보려는 에타의 의욕을 꺾고 말았고, 목욕탕에 흥분하고 있던 아이를 진정하게 만들었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다시 조용해진 일행은 훼이드리온을 선두로 다시 움 직이기 시작했다. 무언가 거대한 것이 대광장 중앙에 세워져있는 것도 같 았지만 건물들이 만들어낸 그림자와 마법의 등 빛이 미치지 않아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다. 하지만 별로 아쉬움을 느끼지는 않은 일행은 서둘러 여 관을 향하여 걸어갔다. "정말 커." 에타가 고개를 들다가 말며 그렇게 감상을 토로했고, 그것에 십분 동감 하는 마음으로 훼이드리온이 유리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색색깔로 빛나고 있던 간판도 '마법사의 여관'이라는 이름의 간판을 멋지게 빛내주 고 있어서, 그 건물이 여관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었다. 일행은 방을 잡은 후, 이 여관의 특이성을 알게 되었다. 이 여관은 최고 6명의 일행을 한 객실에서 지낼 수 있도록 배려해놓았던 것이다. 한 객실 에 방이 세 개가 있고, 그 방에는 각각 침대가 두 개씩 놓여 있어서 그런 시스템이 가능했다. 제법 높은 14층의 14호실을 배정 받은 일행은 올해가 1414년인데, 객실 까지 1414호라니 묘한 우연이라고 생각하며 각 침대에 자리를 잡았다. 대회 참가 게이머였기에 여관비를 조금이나마 덜 수 있게되었단 사실에 무한한 행복함을 느끼며, 자신의 침대 위에 앉아 남은 경비를 계산하고 있던 훼이드리온은 방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를 듣게 되었다. 때마침 에타와 미르도 과자를 사먹으러 사라져버려서 문을 두드리는 자 가 누군지 뻔히 짐작할 수 있는 그는 고개를 들며 대답했다. "들어와, 아이." 살그머니 문을 열고 들어온 아이는 훼이드리온을 발견하고는 싱긋 웃으 며 그의 침대에 걸터앉았다. 주머니 속에 돈을 집어넣고 있던 그를 향해 침대 끝에 앉아있던 아이가 작게 입을 열었다. "드디어 도착했네, 훼온." "응, 정말." 그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주머니를 침대 밑에 있던 배낭 속주머 니에 집어넣었다. "나, 걱정되는 게 있어." "뭐가?" 다시 고개를 드는 훼이드리온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아이를 향했다. 어느 새 그를 향해 돌아앉은 그녀가 말했다. "루페르스 있잖아. 그도 대회에 참가하지 않아?" "…흐음, 그렇겠지." "그럼 만나게 될 텐데, 어쩌지?" 그녀의 걱정스럽지만 별로 걱정되지 않는 듯한 목소리에 훼이드리온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곧 답변했다. "피해 다니지, 뭐." "그럴까?" 빙긋이 웃는 훼이드리온과 그에 따라 싱긋 웃음 짓는 아이. 이미 둘에게 는 루페르스 정도야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녀가 다시 한번 말했다. "드디어 도착했네, 훼온." 그도 다시 한번 말했다. "응, 정말." 문밖에서는 과자점이 문이 닫혀 결국 다시 돌아오고만 미르와 에타가 방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서있었다. 에타가 궁금한 듯 미르에게 물었다. "안 들어가고 뭐해, 미르미르?" 점점 저 호칭에 익숙해져 가는 자신에게 좌절하고 마는 미르는 소녀에 대해서는 익숙해진 한숨을 지으며 간단히 답했다. "벌받는다." "……벌?" "들어가면." "……무슨 말이야?" 에타의 수준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고차원적인 미르의 발언에 에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새 미르는 문에서 멀어져 거실에 있는 쇼파에 몸을 묻었다. 커다란 발 코니 밖으로 별이 아름다운 밤이었다. <8장 '음모' 完> -------------------------------------------------------------------- 흠. 이렇게. 8장이 끝입니다. 아하하. 이게 과연 400줄이 넘을지 의문이지 만? 뭐.; 끝났으니 됐어요.:( ---) 지금 팀군의 집은 보일러가 망가져서 작동이 되질 않습니다. 방에서 하얀 입김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지금 팀군의 사정이 그렇습니다.;; 손가락을 얼었고, 발을 시려서 감각도 없습니다.; 파카까지 입고 있다죠. 추위는 잘 타지 않는 팀군이 이렇게 추운데.; 다른 분들은 얼마나 추우실 까....하고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ㅠㅠㅠ) 어쨌든 이렇게 4권 분량을 끝냈으니. 이제 팀군은 조금 쉬겠습니다. 5권 분량 정리도 해보고, 다른 작품 구상도 하고요. 쉰다고 해도 하루 이 틀 정도면 돌아옵니다. 걱정마시길. :) 자, 그럼! 어둠의 기사 DARK KNIGHT TEAM... P.S 추천 감상 비평. 주시는 분들. 부비적해드립죠.(+ + +) P.S 2 GO CAMA(천리안입니다) 번 호 : 20 / 20 등록일 : 2001년 01월 30일 03:57 등록자 : 암음기사 조 회 : 31 건 제 목 : [카드 게임 판타지]『카드 마스터(Card Master)』#083 카드 게임 판타지(Card Game Fantasy) 카드 마스터(Card Master) 83. 마법사들의 도시 에코. 그 유명한 마법사 길드가 자리잡고 있고, 마법사 길드의 잊혀진 이름 '에타그'가 유일하게 남아있는 곳이기도 한 지역. 그리고 이곳에서 전쟁이 일어난다면 전 대륙의 기사단이 모인다고 하더라도 막을 수 없는 엄청난 전력을 보유하고 있는 곳. 그런 이유로 마법사들의 도시 건설을 반대했던 이들도 있었다. 마법사 한 명이 기사 100명까지도 상대할 수 있다는 사실은 전 대륙에 퍼져있는 전술 기초 지식 중에서도 정말 기초에 속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마 법사들이 한 곳에 모여 살면서 친목을 다지고 협동심(?)을 발휘한다면, 언젠가 그들이 전쟁을 일으켰을 때 누구도 막을 수 없으니, 마법사들의 도시 같은 것은 때려 치워야한다는 것이 그들의 의견이었다. 하지만 그 말이 지금에 와서는 전혀 들리지 않는 이유를 들라고 한다면, 마법사 길드가 이동해오고 마법사들의 도시가 본격적으로 건설된 후 지 금까지, 마법사들은 자신의 도시에 옹기종기 모여 살면서 어떠한 움직임 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마스터 카드 대회라는, 전 대륙적인 거창한 행사까지 열어 방문객을 받아들이기 시작해서, 마법 사들의 도시 에코의 이미지는 초기의 부정적인 시각을 많이 덜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마법사들의 도시는 요즘 또 방문객을 받아들여 한참 분주해 졌는데, 모두 마스터 카드 대회에 참가하고 구경하려는 사람들의 행렬이 었다. 훼이드리온과 아이, 그리고 미르와 에타도 그곳에 있었다. 도착한지는 오늘로 이틀. 날짜를 따지자면 오늘은 마스터 카드 대회가 시작되는 6월 1일이었다. 전날 구경 삼아 에코를 이리저리 돌아다닌 탓에 한껏 지친 몸으로 잠에 들어 아주 푸욱 자버린 그들은 아침해가 창문을 통해서 들어오기가 무섭 게 전원 기상을 해버렸고, 기분도 아주 말끔히 상쾌했다. 일어나자마자 객실에 딸려있는 세면실에서 샤워, 혹은 세수를 하여 마지막 남은 부스스 한 기운을 떨친 그들은 옷을 갈아입고 여관의 2층 식당 층으로 내려왔다. 그래서 지금은 식당 층의 여러 식당 중, 대륙의 동쪽 아에록 반도의 유 명한 '한식'을 전문으로 하는 식당 한편의 테이블에 모여 앉아 있었다. 아침은 한식이 가장 좋다는 아이의 의견을 수긍하여 이곳에 오게된 그 들은 한식에 대해서 잘 아는 아이에게 메뉴판을 아예 넘겨줘 버린 후 선 택을 맡겼다. 그녀는 이리저리 메뉴판을 돌리며 메뉴를 고르다 적당한 몇 가지를 주문하고 다시 돌려 앉았다. 차가움을 머금은 물잔의 느낌을 느끼던 훼이드리온이 이내 한 모금을 목으로 삼키며 입을 열었다. "오늘이… 마스터 카드 대회가 열리는 날이지?" "응. 개회일이야." 밝게 웃으며 아이가 대답했다. "일정이 어떻게 되는지 알아?" 대답은 에타가 해주었다. "웅, 오늘은 예선이구, 본선은 내일부터일걸? 나 아까 안내 책지를 봐서 알아." 주황색 머리칼에서 향긋한 비누향을 뿜어내면서 소녀가 대답해주었고, 훼이드리온이 "음, 그래?"라고 대답하며 자연스레 시선을 미르에게로 옮 겼다. 역시나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지금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던 미 르는 그의 시선을 느끼고는 그를 마주 보았다. "미르는 올해가 네 번째 참가지?" "그렇다." 참으로 간단히, 미르가 답했다. 다시 입을 다무는 소년에게 훼이드리온 은 질문의 끝을 놓치지 않았다. "대회 참가자는 대충 얼마나 돼?"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 "그냥 대충." 그 정도는 간단하다는 듯한 무표정으로 대답하는 미르. "수백 명." "……그렇구나." 이젠 많이 익숙해진 탓에 별다른 거부감을 받지는 않은 훼이드리온이었 지만, 옆에서 물을 마시다 조금 흘리고 만 아이 때문에 덩달아 당황해버 렸다. 에타가 쿡쿡 웃어대는 소리가 들렸을 즈음에 겨우 진정이 된 사태 에 한숨을 쉬며, 훼이드리온은 다시금 질문을 던졌다. "마스터 카드 대회, 예선은 어떻게 하는 거야?" 고전적인 분위기를 연출해내는 원목의 디자인이 많은 식당 안에서 검은 로브를 걸치고 있는 미르의 모습은 어쩐지 이질적이었지만, 별로 개의치 않았다. 소년은 어둠이 아니고서는 어디에나 있어도 당연히 그런 느낌이 기 때문에. 세상 만물 중 단 하나를 제외하고는 별로 친하지 않은 분위기를 가진 미르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말했다. "수백 명은 결코 만만한 숫자가 아니다. 그렇기에 최소 인원으로 줄여야 만 하지. 그래서 마법사 길드가 선택한 방법은 간단하다. 제한된 시간 동 안 참가자의 배지를 빼앗아 떨어뜨리면 된다." "……빼앗는다고?" 아이가 쉽게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건 에 타도 마찬가지였고, 그래서 훼이드리온이 미르를 다시 쳐다보게 만들었 다. "빼앗는다. 이 말에서 연상되는 거라면 뭐가 있겠나." 뜨악한 표정으로 아이가 말했다. "설마, 그 많은 인원이 동시에 대전을 펼친다는 건 아니겠지?" "물론 아니다." 어쩐지 굉장히 안심이 되는 기분을 느끼는 훼이드리온. 아마 아이도 같 은 기분일 거라는 생각을 해보면서 미르에게 물었다. "그럼 어떻게?" "수백 명 중에서 본선으로 올라갈 수십 명을 추려내기란 쉬운 것이 아 니다. 대전으로 한다면 예선만으로도 몇 일이 걸릴지 모르지. 그래서 마 법사 길드는 마스터 카드 게이머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방법으로 예선을 치른다." 아이와 훼이드리온이 동시에 소리쳤다. "무슨 방법인데?" "카드 뽑기." 미르는 갈증이 난다는 듯이 목을 어루만지다 앞에 놓여져 있는 물잔을 들었다. 그새 소년이 툭 내뱉은 말을 열심히 곱씹고 있던 훼이드리온은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드디어 알게 되었다. 기쁜 얼굴로 그것을 입 밖 으로 꺼내려던 찰나. "아, 카드를 뽑아서 공격력이 높은 쪽이 이기는, 그거? 훼온, 우리도 많 이 했잖아." 아이가 먼저 말해버렸고, 훼이드리온은 갑자기 인생만사가 무의미하다는 진리를 깨달은 성인과 같은 자세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가 생긋 웃으며 고개를 돌려 미르를 바라보았다. "그거 맞지?" 미르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백 명의 게이머들이 아무나 붙잡고 카드 뽑기를 한다. 그래서 진 쪽 이 배지를 내놓게 되지. 몇 개를 모아도 상관없다. 그리고 카드 뽑기를 거절한 권리는 없다. 신청을 해오면 무조건 해야하지. 그렇게 일정 시간 후에 배지가 없는 게이머들은 탈락하게 되고, 자신의 배지를 가지고 있는 게이머는 본선에 진출하는 식이다." "뭔가… 굉장히 간단하네?" 아이가 조금 충격을 받은 듯이 멍하게 말했고, 미르는 물잔을 내려놓으 며 의자 깊숙이 몸을 묻었다. "대회 예선은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불만 같은 건 처음부터 있었지만 절대 바뀌지는 않았지. 이젠 전통이다." 희한한 전통도 다 있다고 생각하며, 훼이드리온도 아이와 마찬가지로 멍 하니 입을 열었다. "그건 거의 운으로 본선에 올라가는 거잖아. 이렇게 큰 대회의 예선을 운으로서 치른다는 게, 뭔가 맞지 않는 거 아닐까?" 아이도 "맞아."라며 훼이드리온의 말에 동조했고, 그로서 두 사람의 시 선은 미르를 향했다. 모든 대답을 다했으니 다시 침묵하고 있던 소년은 총 4개의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는 탓에 조금 귀찮은 듯이 팔짱을 껴 보이고는 다시 입을 열려했다. 어쨌든 이곳에서 대회 경험이 있는 자는 소년 혼자 뿐이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미르가 입을 열기도 전에 먼저 들려오는 음성이 있었으니, 바로 미르 옆에 꼭 붙어 앉아있던 에타의 하이톤 목소리였다. "에헤, 전에 미르한테 들었던 건데. 마스터 카드는 운이 좌우하는 게임 이라며? 그래서 그런 거 아닐까? 맞지, 미르미르?" 이젠 "그렇게 부르지 마라."라고 말할 기운도 나지 않아서 그냥 고개만 을 지그시 끄덕여주고 말았다. 한편으로는 숨을 들이쉬고 성대를 벌려 공 기를 내뱉음과 동시에 입을 열어 혀와 입술로 갖가지의 음성을 내야하는 수고를 덜어준 사실에 감사하는 마음도 가졌다. 간만에 도움이 되는 말을 한 에타가 한껏 으쓱해진 가운데, 아이가 이제 뭔가 알겠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하. 그러니까, 운이 좌우하는 게임인 만큼 예선에서 그 운을 시험해 본다는 거야?" "그런 거다." 훼이드리온과 아이는 조금 전에 동시에 말했듯이 이번에는 동시에 생각 했다. '일리 있군.' "흠. 카드 뽑기를 해서 상대의 배지를 빼앗는다. 그리고 자신의 배지는 지킨다. 약간은 잔인하지만 실용적인 방법이네." 어쩐지 이 날은 위해 1년 동안 열심히 수련을 쌓았을 많은 탈락자들에 는 미안한 말이었지만, 카드 뽑기 예선은 정말 실용적인 방법이었다. 훼이드리온은 별로 맘에 들지 않는 마법사 길드 마스터는 굳이 떠올리 지 않으며, 마법사 길드 전체에 대해서 내심 경탄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그저께 마스터 카드 대회 신청소에서 받은 배지를 내려다보았다. 배지를 받은 그때부터 절대 빼지 않았기에 배지는 오른쪽 팔 소매에 매달려있었 다. 광장 중앙에 서있는 문 동상에 새겨져있는 고대어 'E.T.A.G.'가 검은 바탕 위에 노란 색으로 그려져 있는 배지는 반구의 형태를 하고 있다. '이 배지가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었군.' 그는 배지를 손가락으로 이리저리 만져보며 예선에 대해서 조금 더 생 각해보다가, 문득 드는 의문에 미르에게 물었다. "잠깐. 마지막까지 자신의 배지를 가지고 있는 게이머가 본선에 오르는 거지?" "……." 침묵으로 그의 말에 긍정하는 미르. 훼이드리온은 자신이 그것을 어떻게 알았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의문을 가지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럼 이럴 수도 있는 거 아냐? 예선을 시작하자마자 어딘가에 숨어 있 다가 끝날 때 나타나는 거야. 그럼 자신의 배지는 지키게 되는 거잖아." "으음. 그게 과연 될까?" 아이가 의문을 표했지만, 답을 구해줄 사람은 따로 있었다. 미르는 다시 입을 열어야하는 이 비극적인 사태에 대해서 어떠한 방도를 가져야할까 잠시 생각해보다가, 결국 그냥 답을 하고야 말았다. "모두가 규칙을 준수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예선 때마다 그런 일이 있기는 하지. 그래서 마법사 길드가 생각해낸 규칙이 있다. 예선을 통과 한 게이머들이 자신의 배지 외 빼앗은 배지를 하나 이상 가지고 있어야 해. 만약 없다면, 그 게이머는 본선 진출이 취소된다." "잃어버렸거나 하는 경우엔?" "예외는 없다. 예선이 끝난 시점에 가지고 있지 않으면 무조건 탈락이 다." "헤에, 무시무시하네." 모든 본선 통과자들이 빼앗은 배지를 하나 이상 들고 있어야한다면 어 쨌든 카드 뽑기를 해야할 것이고, 그렇다면 결국 어디로 도망가서 숨어 있다가 오는 일은 자연스레 없어지게 된다. "머리 좋은걸?" 훼이드리온이 혀를 내두르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곧 아이의 대꾸가 돌아왔다. "마법사니까." 그리고 아이의 말에 맞장구치는 듯한 경쾌한 목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그렇지, 마법사니까 머리가 좋은 거야."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언제 들어왔는지 식당에는 짧은 커트머 리를 한 활동적인 인상의 여성이 그들, 특히 훼이드리온은 보면서 교묘한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향한 상대 때문인지 어쩐지 열이 받는 아이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누구세요?" "마법사 길드 최고 원로, 세라 마카르토. 희귀생물 연구가이며 현재 나 이는 27세. 아직 미혼이고, 보는 바대로 늘씬한 미모의 여성이지. 더 필요 해?" 아이는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그녀, 세라는 귀밑으로 내려온 커트머리 를 귀 뒤로 넘기면서 생긋 웃었다. 붉은 색이 스며든 검은 머리카락이 그 녀의 미소와 조화를 이루면서 그녀의 이미지를 더욱 밝혀주었다. 그녀는 어두운 붉은 색으로 칠해진 로브를 한 차례 매만지며 훼이드리온은 바라 보았다. "앉아도 되니?" "에, 네. 물론입니다만……" "입니다만?" 세라의 반문에 그는 멋쩍게 웃었다. "아하하. …의자가 없는데요?" 에타가 키득 웃는 소리가 들려왔고, 세라는 한순간 미소를 흩뜨렸다. 약 간 희미해진 미소를 머금고 주위로 시선을 옮긴 세라는 곧 뒤쪽 테이블 에서 의자 하나를 쭉 빼와 그들의 테이블 앞에 놓았다. "이러면 되겠지?" "흠. 그렇네요." 아이가 훼이드리온 쪽으로 조금 자리를 옮겼고, 세라는 끌어온 의자에 경쾌한 동작으로 자리했다. 이로써 둥근 테이블에 네 명의 소년소녀와 한 명의 숙녀가 모이게 되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본다고 해서 어떠한 불만을 가지지는 않겠지?" 훼이드리온을 쳐다보면서 묻는 것이라, 대답은 그가 했다. "네. 다만, 곤란한 질문만 아니라면요." "음. 좋았어. 곤란한 질문은 아니니까 됐어." 세라는 머리카락 색과 동일한 진한 눈썹을 움직이면서 팔을 로브 속에 서 꿈틀거렸다. 뭔가 꺼내려는 동작인 듯해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던 일행 앞에, 조금 시간이 지난 후 하얀 봉투가 등장했다. 로브 속에서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봉투를 가리키며 그녀는 다시 훼이드리온을 바라보았다. "이거, 네가 가져온 거 맞지?" 아이가 그 봉투를 내려다보며 한마디했다. "추천장인가, 그거네?" "흠. 맞아, 추천장. 제가 가져온 게 맞는데, 이상한 점이라도 있는 건가 요?" 확인을 구하는 훼이드리온의 말에 고개를 저으며 세라가 대답했다. "이상한 점이 있어서 그러는 게 아니고, 물어볼 게 있어서 그래." "물어보세요." "안 그래도 그럴 참이야." 아이는 어쩐지 시답잖은 대화가 오가고 있다는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별 말없이 침묵하며 앉아있었다. 세라는 봉투를 집어 올려 전면을 훼이드 리온을 향하게 하고는 물었다. "밑에 보이는 '숀'이라는 글자. 이것에 대해서 질문하려고 해." 그는 필기체로 휘갈겨진 '숀'을 바라보다가 의문을 닮은 눈빛으로 그녀 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히브리드 님을 어디서 만났지?" "…히브리드 님이라니요?" 세라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가 없는 훼이드리온은 그렇게 되물 었고, 그녀의 고개가 조금 옆으로 기울어져버렸다. "히브리드 님이라니요, 라니? 모른단 거니?" "그 추천장은 숀이 준 건데요. 히브리드 님…이라는 사람은 만난 적이 없어요." 세라는 '설마 그럴 리가.'라는 얼굴로 훼이드리온을 주시했지만, 그로서 는 그녀를 위하여 합당한 답을 줄 수 없음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렇게 세라와 훼이드리온은 서로에게 얻고 싶은 대답이 엇갈린 상태에 서 장시간 대화를 지체했다. 세라는 예상했던 전개와는 너무 다른 식으로 뻗어 가는 대화를 정리해야했고, 훼이드리온은 세라가 묻는 '히브리드 님' 을 어디선가 만났던가, 하는 생각과 함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숀이 '히브 리드'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가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머리 속을 강하게 치고 지나가는 어떤 생각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카드의 현자." 굳어버린 훼이드리온이 말을 할 수 있을 리 없다. 일동은 팔짱을 낀 상태로 방금 입을 열어 말을 했는지조차도 파악하기 힘든 소년을 향해 눈을 모았다. 미르는 그 시선 속에서 다시 말을 이었 다. "쇼너 히브리드." "……아, 맞아." 훼이드리온은 그제야 입을 뗄 수 있었다.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던 카 드의 현자 쇼너 히브리드. 필로윈의 말이 새롭게 떠오르면서 훼이드리온 의 표정은 경악으로 바뀌어갔다. 숀. 쇼너. 그러고 보니, 이름도 비슷했다. "서, 설마……." 그는 자신의 머리는 결코 좋은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만 하는 때가 도래했다는 것을 직감할 수밖에 없었다. 세라는 그제야 개운한 얼굴이 되어 말했다. "이제야 무슨 일인지 알겠어. 그러니까 넌 네가 만난 사람이 카드의 현 자 쇼너 히브리드 님인 줄 몰랐다는 거니?" 훼이드리온이 할 수 있는 일은 주춤거리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뿐이었다. 그녀는 생긋 웃으며 봉투를 테이블에서 다시 들어올렸다. "숀은 히브리드 님의 애칭이랄 수 있는 이름이야. 마법사 길드 사람들에 게는 잘 알려진 사실이지. 그저께 이 추천장으로 참가 신청했었지? 오늘 아침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되어서 이렇게 찾아왔어. 히브리드 님은 언제나 은둔하시고 사시는 분이라 만나기가 달빛을 지우는 것만큼이나 힘들거 든." 세라는 봉투를 다시 로브 속으로 집어넣고 그를 바라보았다. 침을 꿀꺽 삼키며 자신을 바라보는 푸른 눈동자에 살며시 속으로 감탄을 해보며 그 녀는 말을 끝마쳤다. "카드의 현자 쇼너 히브리드 님은 어디서 만났니?" 훼이드리온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 창 밖으로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왕성을 떠난 지 하루가 채 되지 않은 시간만에 가진 만남, 인연. 하얀 백 발을 길게 길러 머리 뒤로 질끈 동여맨 신세대적인 분위기의 할아버지를 떠올리면서 그는 어쩐지 감상적인 기분이 되어버렸다. 현자 같은 중후하 고 학문적인 분위기는 전혀 느끼지 못했기에 절대 눈치채지 못했고, 이제 야 알았다고 해도 새삼스러운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저 맘 좋은 옆 집 할아버지 같은 생각만 드는 숀을 떠올리며 그는 입맛을 다셨다. 곧 입을 여는 훼이드리온. "수도 라시안트에서 서가도 쪽으로 한나절 걸어가면 루비네라는 작은 마을 나와요. 아시나요?" "응. 알아. 히브리드 님이 그곳에 사시는 거니?" "루비네의 촌장이에요, 숀은." "와아, 그래? 그럼 지금도 있겠네?" "아마도… 그렇겠죠." 훼이드리온의 대답에 세라는 환하게 표정을 탈바꿈시키며 자리에서 벌 떡 일어났다. 의자가 뒤로 주욱 밀려나다가 뒤집어질 뻔한 아슬아슬한 순 간이 지나간 후, 그녀는 기쁘게 웃으며 소리쳤다. "고마워! 대회에서 봐!" 그리고는 부리나케 식당 밖으로 달려나가는 세라. 그녀의 행적을 뒤쫓아보려는 아이의 눈길은 허망하게 허공을 갈랐고, 무 관심하다는 미르의 눈동자도 이내 제자리를 찾았다. 에타는 무언가 상황 을 정리하려는 듯이 끙끙대다가 미르에게 무언가를 계속 질문하여 답을 구했다. 그런 상황 중에 훼이드리온이 "흐음."하는 소리를 내더니, 어떤 눈길을 느끼고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종업원 중 한 명이 세라가 끌어온 의자를 다시 돌려놓는 장면 앞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아이의 검은 눈동자가 보였다. 그녀의 눈동자는 무언가를 묻고 있었다. 훼이드리온은 다시 한번 "흐음." 소리를 내보고 말했다. "루비네 마을의 여관에 머물렀던 적이 있는데, 거기서 만났었어. 머리 뒤로 묶인 하얀 백발에 상당히 정정해 보이는 할아버지시지. 날 보고는 숀이라고 부르라고 해서 그냥 그런 줄 알았는데… 설마 카드의 현자일 줄은 정말 몰랐어. 아무리 봐도 현자의 이미지는 맞지 않단 말이야." 다시 생각해봐도, 정말 어울리지 않은 모습에 그는 싱글 미소를 띄웠다. 아이가 작게 입을 오므리더니 입을 열었다. "호오, 혹시 대전이라도 해봤어?" "응. 했는데, 간단하게 져버렸어. 드래곤 피어 카드, 반전 카드에 완전히 당해버렸지, 뭐." 다시금 그 날의 대전을 떠올리는 훼이드리온. 큰 비술을 남발하는 훼이 드리온은 별다를 게 없는 특수 카드들로 가볍게 제압해버린 숀에게서 마 스터 카드 게임의 대한 중요한 깨달음을 얻게된 대전이었기에 아직도 생 생하게 기억이 났다. '아하하. 정말 오랜만이네.' 그 신세대적인 어르신이 설마 카드의 현자였을 줄은 상상도 못했기에, 다시 그 기억을 떠올리는 감정도 남달랐다. 이래저래 다시 만나게 된다면 정말 할 일은 많을 것 같다고 그는 생각했다. "참, 그러고 보니." 아이가 문득 입을 열어 일행의 시선을 모았다. 그녀의 시선은 훼이드리 온을 향해 있었다. "이흐리트 씨…가 카드의 현자를 찾으러 셀라드리엔 강 북쪽으로 올라 갔잖아. 카드의 현자가 루비네에 있다면 완전히 헛고생한 거잖아?" "아, 정말. 그게 그렇게 되는 거네." 셀라드리엔 강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간 카를레오를 떠올리며 훼이드리 온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자신이 미처 눈치채지 못한 탓에 고생을 더하게 되어버린 격이 된 그에게 조금 미안한 마음을 가지기도 하면서 남은 물 을 마신 그 앞에 드디어 주문했던 메뉴들이 테이블로 올라왔다. 허기가 느껴지는 빈속과 식욕을 자극하는 한식의 향기 앞에 카를레오에 대한 걱정의 끈이 흔들리기 시작한 훼이드리온은 결국 얼마 안가 이렇게 생각하고 말았다. '에, 모르니까 된 거야.' 그도 참, 무책임했다. "하아. 이제야 도착했군." 야드 평원으로 이어진 기나긴 서가도를 걸어 케롯을 지난 여정은 드디 어 루비네 마을을 앞에 두고 있었다. 셀라드리엔 강가에 자리잡고 있는, 이름도 없는 작은 마을까지 다다랐던 추적은 그에게 작은 힌트를 던져주 었고 그것을 목표 삼아 다시 이곳까지 여정을 이어온 그는 과연 끝없는 연구가의 피를 가지고 있는 자일 것이다. 막 스쳐지나온 이정표에 '동쪽 루비네' 라고 새겨진 것을 확인한 그는 자신의 긴 머리카락을 다시 한번 질끈 동여맨 후, 힘차게 마을로 향했다. 아이보다 더 긴 장발이 바람 따라 하늘과 동화된 채 흔들리고, 도수 없 는 안경이 더욱 더 학구적인 분위기를 연출해내고 있는 남자. 카를레오는 훼이드리온 일행이 그에 대한 걱정을 차츰 잊어가고 있을 무렵, 서서히 루비네 마을로 들어서고 있는 중이었다. -------------------------------------------------------------------- 흐음. 간만의. 엄청나게 오랜만에. 83편입니다. 잊지 않으셨죠? 팀군입니다. 아하하하. 이렇게 5권 작업 시작이군요. 마지막 권인데. 과연 유종의 미를 계획대로 얻을 수 있을지 엄청 걱정입니다. 흐음. 완결을 하는 그 날까지.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작업하도록 하겠 습니다. 잘 봐주세요. 아하하하. 그럼, 좋은 새벽, 좋은 하루 되십시오들! 어둠의 기사 DARK KNIGHT TEAM... P.S 추천 감상 비평. 아직 받고 있어요. 아하하. P.S 2 GO CAMA 번 호 : 7 / 17 등록일 : 2001년 02월 16일 16:59 등록자 : 암음기사 조 회 : 95 건 제 목 : [카드 게임 판타지]『카드 마스터(Card Master)』#084 카드 게임 판타지(Card Game Fantasy) 카드 마스터(Card Master) 84. 슈란가트의 등이 보이는 곳은 왕성의 성지, 공주 메이린느의 저택이었 다. 흔히들 내궁이라고 불리는 그 저택의 공주의 방, 그 커다란 발코니에 햇빛을 등으로 받으며 꼿꼿이 서있는 슈란가트의 모습은 이제 내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 되었다. 왕성 안의 사람들에게는 성지에 최초로 침입한 기사로서 그의 이름이 드날려졌고, 일부 사람들에게는 공주의 '도발'을 막아내는 믿을 만한 기사 로서 알려졌다. 아무튼 근래에 들어 왕성에서 이래저래 시선을 많이 받고 있는 그는 지금도 그의 임무에 충실하며 공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슈란? 조금 비켜주지 않을래요? 햇빛이 가려요." "네? 아, 그렇습니까? 죄송합니다." 슈란가트가 알고 있는 여성의 기본 소양 중 하나로 들어가는 수를 놓고 있던 메이린느는 하늘에 떠있던 해의 위치가 점점 이동함에 따라, 발코니 에 서있던 슈란가트의 몸에 햇빛이 가리자 그에게 부탁했다. 그는 즉각 옆으로 이동하여 그녀의 신체에 마스트의 축복이 닿도록 배려했다. 노란 햇빛이 그녀의 하얀 의상을 치고 지나가는 순간, 슈란가트는 또 다 시 멀리 시선을 던지고 말았다. 기사의 강인한 심장은 사정없이 맥박질을 하여 가슴을 들썩거리게 만들었고, 끊임없이 뻗어나가는 뜨거운 피는 그 의 체온을 올려버려 초여름에 한여름 같은 더움을 느끼게 만들었다. 슈란 가트는 열이 얼굴까지 올라온다고 느껴지는 찰나, 서둘러 손을 들어 제복 에 땀을 닦는 시늉을 해댔다. 마침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메이린느는 한아름 묶어버린 머리카락을 만 지며 부드러운 미소를 띄웠다. "더우세요?" 어색한 기분에 턱을 만지고 있던 슈란가트는 허겁지겁 손을 내리며 대 답했다. "아, 아닙니다." "더운 거 같은 걸요?" 그녀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볼을 가리켰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행동인 지 모를 리 없는 그는 서둘러 고개를 돌리며 딴청을 피웠다. 그 모습에 메이린느는 더욱 키득대면서 짖굿게 한마디 더 했다. "더 붉어졌는데요?" "…흠, 크흠!" 아예 몸까지 돌려 자신에게 등을 보이는 슈란가트를 바라보며 메이린느 는 조금은 야릇한 미소를 띄웠다. 필로윈과 같이 내궁에 찾아온 후로 하 루도 빠짐없이, 잠시의 틈도 없이 자신을 감시(혹은 보호)하고 있는 기사, 슈란가트의 든든한 모습은 그녀에게는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되는 걸까. 그녀는 홍조를 띄워보아도 충분할 만한 미소와 함께 하얀 제복을 갖춘 슈란가트의 넓은 등을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힘들지 않아요?" "…네? 무엇이 말입니까?" 언제 들어도 단단한 느낌을 주는 그 목소리에 그녀의 미소는 한층 더 부드러워졌고, 진해졌다. 조심스레 몸을 돌리는 그를 기다리다 메이린느는 재차 말을 이었다. "저보다 일찍 일어나서 제가 잠든 후까지. 하루종일 아무 것도 하지 않 고 저와 같이 계시잖아요. 감시를 받고 있는 입장이지만, 오히려 제가 걱 정스러운 정도인데, 힘들지 않아요?" '전혀 힘들지 않습니다' 라고 생각하며 슈란가트는 조금 시간을 끌다가 대답했다. "임무입니다. 힘들어할 권리는, 임무를 받은 기사에게는 없습니다." "하지만, 힘든 건 힘든 거잖아요." '기사도 인간이에요.' 그렇게 말하는 듯한 그녀의 표정을 바라보며 잠시 넋을 잃을 뻔한 슈란가트는 다시 정신을 수습하며 적당한 대답을 찾았다. 내궁, 왕성의 성지에서 살아오면서 기사의 생활 같은 건 겪어보지 않았을 이 공주님을 어떻게 이해시켜야할지 조금은 난감했지만, 역시 있는 그대 로 대답하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기사도 중에는 상관의 명령에 충실한다, 라는 조항이 있습니다. 설사 기사도를 외우지 않더라도 자신이 기사라는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면 당 연히 알고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임무에 충실하고 명령에 충실하는 것은 기사의 올바른 도리이며 의무입니다. 그렇기에, 힘들더라도 내색을 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습니다." "흐음… 기사도…라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메이린느는 슈란가트의 대답을 이해할 시간이 필요한지 잠시 침묵했다. 그 사이 그는 메이린느의 방 발코니에서 보이는 정원 안의 정경을 감상 하는 시간을 가졌고, 그런 와중에서도 내궁 밖 이곳저곳에서 경비를 서고 있는 기사들의 상태도 점검했다. 임무는 임무, 할 일은 꼭 해야하는 것이 기에 그는 한시도 긴장을 늦추려하지 않았다. 조금 후, 그녀의 약간은 어두운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그럼… 기사도에 어긋나는 일을 하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슈란가트는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돌려 답했다. "기사도에 어긋나는 일을 했을 경우에는, 그 일의 정도에 따라서 갈라집 니다. 구분하지 않은 살인을 저질렀을 경우에는 기사 자격을 박탈당하게 되고, 거기서부터 차츰차츰 정도가 낮아지면 처벌의 강도도 낮아집니다. 만약 길거리에 침을 뱉었다고 하면 일주일간 제복을 입지 못한 채 청소 를 하게 되는 등, 각각의 처벌이 있습니다." "와아, 기사가 청소도 하게 되나요?" "처벌에 따라서는요." 메이린느는 쉽게 상상이 가지 않는 답변에 재미있다는 듯이 쿡쿡 대고 웃었다. 슈란가트는 그 모습을 행복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임무라는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그는 행복했다. 멀리서 바라볼 수밖에 없는 존재였던 공주를 이토록 가까운 곳에서 볼 수 있다니. 얘기를 나누 기도 하고, 때로는 같이 식사도 하고, 평소에는 쉽게 볼 수 없는 웃는 모 습도 자주 접할 수 있게 되다니, 정말 상상도 못한 생활이었다. 슈란가트 는 자신에게 '넌 정말 복 받은 녀석이다!'를 정확히 열세 번째 외쳐주면서 서둘러 메이린느를 다시 바라보았다. "에, 부르셨습니까?" "네, 불렀어요, 슈란." 아까와는 다른 진지한 얼굴의 메이린느가 그의 눈동자에 투영되었고, 그 는 본능적으로 움츠려들며 표정을 굳혔다. 그동안의 경험상 저런 표정을 하고 있는 공주에게서는 아주 뜨악한 발언이 나오는 것이다. "무슨… 일이십니까?" "대답해 주셔야해요, 이건. 해주실 거죠?" "질문에 따라서…입니다만, 공주님이 물으시는 거라면 얼마든지 답해드 리겠습니다." 그녀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재차 질문을 던졌다. "기사도에 가장 기초적인 항목은 무엇인가요?" 슈란가트는 메이린느 공주가 정말 책을 좋아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 다. 그렇기에 기사도도 당연히 알고 있을 것이라고 추측했고, 그래서 아 무 의심도 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기사도의 기초는 리스코프 관의 맹세, 성인의 의무와 동일합니다." "역시 그런가요?" "그렇습니다." 그는 그녀의 단아한 푸른 눈동자가 오늘 따라 유난스럽게 진지해 보인 다고 생각했다. 필로윈과의 언쟁을 벌일 때와는 또 다르게 보이는 눈동 자. 황금빛의 우아한 머리칼이라든지 신들 중 가장 아름답다는, 그래서 미의 여신이라고도 불리는 자연과 생명의 여신 네트릴리아에 버금가는 미모를 가진 그녀의 진지한 분위기는, 또한 그의 마음을 자극하여 제복이 거북하게 만들어버렸다. 제복은 옷감 때문에 통풍이 잘 안 되는 편이라 그는 혹시 양해를 얻고 벗을 수 없을까 생각하다가, 어쩐지 상황과 맞지 않는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을 속으로 질책했다. 그만큼 그녀의 표정은 그에게 많은 생각을 안겨주고 있었다. 슈란가트의 머리 속에서 수많은 생각들이 흘러가다 마지막에는 자책까 지 하고 있을 때, 메이린느는 목이 아프지 않을까 심려될 정도로 슈란가 트의 얼굴을 올려다보고 있다가 물었다. "지금 슈란이 하고 있는 일이…… 기사도에 합당한 일이라고 생각하나 요?" 슈란가트는 순간적으로 굳어버렸다. 그녀는 그가 아직도 혼란스러워하는 부분을 예리하게 찌르고 들어와 버린 것이다. "어떤가요?" 그녀는 재차 물었고, 그는 움찔 놀래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언젠 가 보았던 도전적인 눈빛이 다시 그녀의 눈동자에 스며들어있어, 도저히 눈길을 거부할 수 없게 만들었다. "솔직하게… 말입니까?" "네, 솔직하게요. 누구에게든지 밝힐 건 아니니까, 그냥 편하게 말씀하시 면 돼요. 앉을래요?" "감사합니다." 메이린느는 생긋 웃으며 맞은 편의 자리를 권했다. 얼마 전에 바꾼 아이 보리색의 쇼파에 천천히 앉은 슈란가트는 침착한 표정으로 조용히 자신 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메이린느의 표정을 읽으려했다. 그녀는 굳이 표 정을 숨기지 않으며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는 한참 후에 작게 입을 열 수 있었다. "…제가 어떤 마음인지 이미 아시는 듯합니다만." "대충은요. 슈란만 저를 보는 줄 아셨나요? 그동안, 저도 슈란을 많이 관찰한 걸요. 그러다가 든 의문이에요." 생긋 웃으며 부담을 덜어주려는 듯 배려하는 그녀의 태도에 슈란가트도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그는 잠시 창 밖으로 눈길을 돌려보았다가 그 상태 로 대답했다. "사실… 전 이 반란에 그리 찬성하는 편이 아닙니다. 저희 단장님이 찬 성하시고, 다른 대장들이 찬성하는 바람에 거의 휩쓸리듯이 동참하고 있 기는 합니다만…… 아직까지도 어떻게 옳은 것인지 구별할 수 없어서 혼 란스러운 상태입니다. 공주님의 말씀대로 기사도의 기초는 성인의 의무입 니다. 이 반란은 그 중 반만 지키고 반은 어기는, 아주 아리송한 위치에 있는 것이라 더욱 그렇습니다." "그럼 왜?"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명령이니까요. 명령으로서 주어진 임무를 망각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어쩐지, 이젠 다 포기했다는 투로 들리는 슈란가트의 말에 메이린느는 조용히 침묵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 잘 생긴 얼굴은 아니지만 기사로 서 갖춰야할 실력과 자세, 마음까지. 제1기사 바이마크의 뒤를 이을 후계 자로 손색이 없는 그였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고통스러워하고 힘들어했을 것이 분명했다. 그것을 깨닫게 되자 그녀는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가 너무나 사랑스러 워졌다. 뭐랄까. 이성에게서 느끼는 사랑이란 감정인 듯도 하지만, 한 인 간에 대한 진한 정과도 비슷한 감정에 그녀는 진지하게 굳어있던 얼굴을 풀고 살포시 미소지었다. 메이린느의 미소를 발견한 슈란가트는 부끄럽다는 듯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녀는 기사이면서도 잃지 않고 있는 그의 마음 속의 순수함에 더욱 더 진하게 아름다운 미소를 띄웠다. 오래 전부터, 슈란가트를 만나게 된 그 날부터 예감했던 거지만 그녀는 슈란가트 마카르토라는 사내가, 자신을 감시하고 있는 이 기사가 너무나 맘에 들고 있었다. 그녀는 푸근한 미소와 함께 그를 바라보았다. 한동안 그렇게 응시하는 그녀의 눈길을 느낀 슈란가트는 주춤대다 결국 다시 고개를 돌렸고, 맞은 편에 앉아있는 그녀의 깊이 있는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따뜻하면서 깨 끗한 빛이 그 눈동자에 담겨있었다. "걱정 말아요." "……네?" "비록 슈란에게 감시당하고 이 내궁에 잡혀있어서 확언을 하지 못하지 만, 잘 될 거예요." 슈란가트는 어둡게 뜨고 있던 눈을 지그시 들어 그녀를 보았다. "그냥 그럴 거 같네요. 모든 게 잘 될 거 같은, 슈란에게든 저에게든 모 두에게 잘 될 거 같은 예감이 들어요." "하하… 그렇습니까?" "네. 그러니까요, 지금은 임무에만 충실하세요. 이런 관계도 그렇게 나쁘 지는 않으니까." 메이린느는 생긋 웃으며 말을 끝마쳤다.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 녀를 바라보기만 하고 있던 그는 그녀가 "네?"하는 표정으로 얼굴을 갸 웃거리자, 그제야 간신히 입술을 움직일 수 있었다. "……용서해주시는 겁니까, 저를?" "용서라… 굳이 그렇게 말하자면 그렇겠죠. 하지만 전 단지, 이해할 뿐 이에요. 슈란의 심정, 슈란의 위치, 지금 슈란이 겪고 있을 혼란들을. 단 지 그뿐이에요."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슈란가트. 그의 마음을 이해하는 듯, 공기조차 흔 들림 없이 그들을 감싸고 있었다. "아, 그리고. 솔직하게 말할 게요." "……?" "나." 메이린느의 얼굴이 살짝 붉어져버린 건, 그렇지만 조금 전보다 더욱 더 환하게 밝아진 건 그의 눈으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다. 그의 가슴은 어느새, 그도 모르는 새 거세게 박동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윽고 희미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슈란이 좋아요." "……." 침묵의 시간은 의외로 길어서, 만만치 않게 작정을 하고 말해버렸던 메 이린느조차도 갑자기 머쓱해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슈란가트의 반응은 극적이었고, 또한 강했다. 그녀는 계속 기다릴 것인가, 아니면 이 시점에서 헛웃음이라도 지어야할 것인가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해야만 하는 상황에 도달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녀의 인생(?)을 건 고민이 채 시작되기도 전에 다시는 움직이 지 않을 것 같이 굳어있던 슈란가트의 입이 무겁게 열렸다. "……네?" "'네?'라는 건, 나보고 그런 부끄러운 말을 한번 더 하라는 건가요? 슈 란, 그렇게 보지 않았는데 꽤 짓궂은 면도 있었군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메이린느의 표정은 밝기 그지없었다. 슈란가트는 변명조로 서둘러 말했다. "아,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혹시나, 심적인 혼란을 너무 오랫동안 겪어서, 그 부담이 제 귀를 멀게 한 건 아닌지 조금 의심스러웠을 뿐입니 다. 그러니 다시 한번만… 말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흠. 역시 짓궂었던 거예요." 토라진 듯한 표정을 만들어 보이는 공주를 향해 기사는 정중히 고개를 숙였고, 공주는 입을 가리며 헛기침을 해보다가 손을 내렸다. "네, 말할 게요. 말하면 되잖아요." "감사합니다." "감사한 것도 많군요. 흥." 슈란가트는 그냥 빙그레 웃었다. 메이린느는 창 밖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그 자세에서 입을 열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지금 제가 갖고 있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 내궁에 서 평생을 지내온 한 외로운 공주가 바깥 세계에서 들어온 건장한 기사 를 봐버리고 엉뚱한 로맨스를 꿈꾼다고 생각해도 좋고, 심심한 생활을 영 위하다 막간을 이용하여 재미를 보기 위해서 장난을 치는 것이라고 생각 해도 좋아요. 어쨌든 요지는." 그는 입을 다물어 그녀의 말을 유도했고, '나답지 않게 조금 들떠버렸 어.'라고 생각하면서 그녀가 짧게 숨을 끊었다. "제가 슈란을 좋아한다는 거예요." 이번에는 미리 대비를 한 탓에 그렇게 극적인 반응을 보이지는 않는 슈 란가트였지만, 확인을 한 후에도 역시 맘이 편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다 시 한번 더 물어보기로 했다. "진심이십니까?" "그렇게 묻는 의도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지만, 대답할게요. 여성이, 그것 도 일국의 공주가 한 남자를 상대로 좋아한다는 말을 그렇게 쉽게 할 수 있을 것 같나요? 물론 진심이에요." "흐음." 저렇게 흔들림 없이 분명히 말을 하는 모습을 본다면, 마법왕국 라시엔 트의 공주이며 왕성의 성지에서 살아가며 그 어떤 귀족도 손댈 수 없는 존재인 메이린느가 분명했다. 하지만 그 흔들림 없는 말의 내용이 문제였던 것이다. 슈란가트도 싫은 건 아니었다. 기사로서, 우러러볼 수밖에 없는 높은 존 재인 공주를 바로 눈앞에서 대하는 것도 대단한 영광인데, 거기다 그 공 주가 자신을 좋아한다니. 이렇게 축복 받은 팔자가 또 어디 있단 말인가, 라고 그도 생각하고는 있었다. '기사와 공주.' 문제는 그것이었다. 금안 기사단의 현 단장인 라시엔트 제1기사 바이마크 폰 헤이스티론의 후계자로서 확실시되고 있는 슈란가트라고 하더라도, 어쨌든 일개 기사의 몸일 뿐이다. 하지만 그 반대쪽, 메이린느는 대륙의 세 나라 중, 중부의 드넓은 평지를 차지하고 있는 마법왕국 라시엔트의 하나 뿐인 귀한 공주 의 신분이다. 메이린느가 언급했다시피, 이건 정말 '엉뚱한 로맨스'에다 나올 법한 배 역 설정이었다. 슬슬 골머리가 아파 올 지경에 이른 슈란가트는 공주가 눈치채지 못하 도록 손을 들어 이마를 감싸쥐었다. 한껏 목소리를 쥐어 짜내는 듯이, 그 가 힘겹게 말했다. "아시다시피 전 공주님을 감시하고 있는 기사입니다. 신분에서부터 이렇 게 차이가 나고 상황조차 이런데, 정말 진심이십니까? 전, 공주님과 같이 고귀한 분에게는 절대 어울리지 않습니다. 오랜만에 입을 여는 슈란가트의 조금 구겨진 미간을 발견한 공주는 잠 시 난처한 기색을 내비쳤다. 하지만 역시 금방 회복된 밝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상관없어요. 제가 좋아하는 걸요." '그게 문제란 말입니다…….' 여러 가지로 공주의 이미지를 깨버리고 있는 일탈적인 메이린느를 바라 보며 슈란가트는 작게 "하아……."하고 숨을 쉬어보았다. 깨끗한 공기가 폐속에서 교환되고 정신이 맑아진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고, 그래서 그는 새로운 마음으로 메이린느에게 질문을 던졌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슈란." "네." "지금까지 고백 같은 거 한번도 안 받아봤죠?" 슈란가트는 약간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래도 금방 대답을 해주었 다. "안타깝게도 그렇습니다." "그러니 그렇죠." "……네?" 쇼파의 등받이에 몸을 기댄 메이린느는 '잘 듣도록 해요.'라는 스승의 표 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여성의 고백을 했을 경우에는 당연히 두 가지의 길이 있어요. 한쪽은 긍정, 다른 쪽은 부정. 그리고 그 두 쪽을 모두 포함하는 행동이라면 당 연히 고백에 대한 '대답'이겠지요. 자, 이제 기사님이 무엇을 해야하는지 아시겠죠?" 그녀가 읽은 슈란가트의 표정은 "매우 잘 알겠습니다."였기에, 그녀는 싱긋 웃었다. 자신이 고백하고 대답까지 요구하는 묘한 상황이 된 탓에 그녀의 두 볼에는 아직도 부끄러움의 기운이 남아있긴 했지만 그래도 그 녀는 즐거운지 연신 미소를 빠뜨리지 않았다. 슈란가트는 공주의 미소에 더욱 더 난처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곰곰이 생각을 해보기로 했다. 지금 당장은 뭐라고 확답을 할 수 없을 것 같았 다. 갑작스런 고백이었고, 또한 아직 자신의 마음이 어떤지 파악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서 그는 공주에 대한 미안함을 무릅쓰고라도 이 말밖 에는 할 도리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절… 기사일 뿐인 절 좋아한다고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라시엔트 에서 가장 고귀한 여성의 사랑을 받는 전 정말 축복을 받았다고 생각합 니다." "그래요?" "하지만." 메이린느의 눈길이 순간 흔들렸다. 슈란가트는 그것을 똑똑히 보았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하지만요?" 슈란가트는 옅은 웃음으로 그 감정을 무마하려했다. "지금은… 뭐라고 답을 드릴 수 없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말 그대로 그는 정말 '모르겠다'라는 심정이었다. 확신할 수도, 그래서 확답을 할 수도 없는 사정이라, 다만 공주의 이해를 구해보려는 것이다. 어쩌면 마음 한 구석에 자신을 이토록 이해해준 공주라면 이번에도 당연 히 그렇게 해 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애매한 그의 대답에 잠시 조용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갑작 스럽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녀 자신도 이 자리에서 설마 그런 이야기 를 해버릴 줄은 정말 모르고 있었기에, 이 감정이 너무나 즉흥적일 수 있 다는 생각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후회를 하는 건 아니다. 후회 는커녕 오히려 뿌듯했다. 이제야, 이제야 사랑을 논할 수 있는 상대를 만 났다는 사실 그 자체로도 그녀는 행복했고, 고백은 그 행복을 유지하기 위한 한 가지 수단이었다. 그런 이유로, 그녀는 그의 대답에 실망하지 않았다. 메이린느는 생긋 웃으며 밝은 음성으로 말했다. "그럼, 얼마나 기다려야하나요?" "잘 모르겠습니다." "긍정, 부정. 어떤 쪽의 대답일 것 같나요?" "역시 잘 모르겠습니다." 그녀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슈란가트는 자신을 그녀가 이해해주고 있다 는 예감이 들어 똑같이 편하게 웃어주었다. 그녀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뜨며, 그리고 동시에 고개를 살짝 아래위로 흔들며 말을 이었다. "기다릴게요. 어느 대답이든 더 이상의 질문은 없을 거예요. 부담가지지 말고 생각하다가 대답해줘요. 최상이든 최하든, 전 어느 쪽이든 괜찮으니 까." 슈란가트의 표정은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고, 그에 따라 메이린느의 미소 에도 푸근함이 더해졌다.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서로를 향해 많은 애정을 가진 두 연인의 미소라고 할 지도 모르는 상황. 슈란가트는 눈치채지 못 했지만, 그녀의 미소를 볼 때 그의 표정은 가장 밝아졌다. 똑똑. 그리 어둡지 않은 정적이 두 사람의 미소와 함께 하고 있을 때, 살짝 열 린 발코니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을 머금은 바람과도 같은 느릿한 속력으 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있었다. 메이린느는 슈란가트와의 오붓한 분위기를 방해하는 존재에 대해서 약 간은 분노를 표해보려 애썼지만 결국 실패해 버리고, 단념하는 의미에서 노크를 한 주인공을 친히 불러주었다. "들어오세요, 집사님." "감사합니다, 공주님." 외눈 안경에 연로한 몸집, 그리고 그 때문에 더욱 더 빛을 발하는 노련 미를 갖춘 왕성 내 최고의 집사, 하론 집사가 문을 열고 메이린느의 방안 으로 들어섰다. 그의 손에 들린 은쟁반 위에는 찻잔 두 개가 하얀 김을 피어 올리며 자리해 있었다. 공주는 집사를 향해 고개만을 움직여 인사를 해 보였다. "차를 가지고 왔습니다, 공주님." 하론 집사는 그녀의 인사에 정중하게 목례로 답해 보이고는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은 투명하고 섬세한 유리 테이블 위에 조심스럽게 찻잔을 내 려놓았다. 유리와 찻잔이 부딪히면서 맑은 소리가 울려 퍼졌고, 그 소리 에 맞춰 슈란가트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전 잠시 나가있겠습니다." 메이린느가 미안한 듯 웃었다. "매번 미안해요, 슈란. 조금 있다가 부를게요." "네, 기다리겠습니다." 조금 전에 기사를 향해 고백을 한 여성답지 않은 행동을 보이는 공주와 그 공주에게서 갑작스런 고백을 받은 것 같지 않게 침착한 사내는 서로 에게 빙그레 웃음 지었다. 그 미소 중앙에 서있던 하론 집사는 은쟁반은 양손으로 부여잡고 꼿꼿한 자세로 메이린느의 옆에 서서 이 상황을 어떻 게 대처해야할지 난감한 얼굴을 만들었다. 다행히 집사를 고민하게 만드는 상황을 슈란가트가 자신의 찻잔을 든 채 방에서 나가는 것으로 종결되었고, 그는 속으로 내심 안도를 하며 공 주를 바라보았다. 메이린느는 방금 전의 슈란가트가 띄웠던 미소라도 생각하는 듯이 행복 한 미소를 입가에 희미하게 띄운 채 찻잔을 들어 입가에 댔다. 은은한 미 향이 코를 통해 그녀의 뇌를 두드렸다. "녹차…인가요?" "그렇습니다. 아에록 반도에서 직수입으로 들어온 것이라 공주님께 가장 먼저 드리고 싶어서. 괜찮은가요?" "물론이에요. 아에록 반도의 녹차잎이라면 최상품 중에서도 최상품이고, 무엇보다 집사님의 차 끓이는 솜씨는 제가 배우고 싶을 정도인데요. 불만 이 있을 리가 없죠. 최고예요." "감사합니다." 하론 집사는 진심으로 감사를 표시하고는 힐끗 뒤를 쳐다보았다. 문이 닫히는 소리는 예전에 났었고 나이를 먹긴 했어도 성능은 젊었을 때 못 지 않은 두 귀로 분명히 들었기 때문에, 그것은 확인의 행동이었다. 찻잔을 내려놓은 메이린느도 그의 시선을 따라 하론 집사로 인해 가려 진 문을 기웃거리다가 다시 쇼파에 자리를 잡았다. 슈란가트는 그녀의 방 에서 완전히 빠져 나가있었다. 메이린느는 오늘도 어김없이 자신의 방에서 내몰린 슈란가트에게 여느 때와는 다른 날인 탓에 언제나 가졌던 마음보다 더 간절하게 속으로 미 안함을 표해보며 "흠."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하론 집사가 다시 그녀에게로 고개를 돌리고, 똑바로 앉은 그녀는 고개 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다시 생생하게 살아 움 직였다. "말씀하세요. 오늘은 무엇이죠?" 그녀의 말에 하론 집사는 조금 심각한 표정이 되어버렸다. 차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연한 녹색을 나타내는 액체에 은은한 향이 감도는 것으로 보아 녹차일 것이라고 추측하며, 슈란가트는 나름대로 품 위 있게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따뜻한 기운이 가슴 한 중간을 통과하며 내려가면서 그의 마음을 푸근하게 닦아주었다. 푸근함. 그는 한 여성의 얼굴을 떠올리고 말았다. 그의 주위에 남은 녹차의 은은한 향과 함께 떠오르는 그 얼굴에 슈란가 트는 괜히 혼자 부끄러워져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곧 그의 눈 에 들어온 무언가에 의해 그 이미지는 한층 더 강렬해져서 결국 그로 하 여금 눈을 감게 만들었다. '하필이면 푸른 하늘이라니.' 구름이 점점이 떠있는 푸른 하늘. 모든 것을 포용하는 넓은 마음의 상 징, 푸른 하늘이 그의 눈에 들어와 그녀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메이린느 헤언 라시엔트 공주. 방금 전에 자신을 좋아한다고 참으로 당당하게 고백해버린 대책 없는 공주. 그러나 결코 미워할 수 없는 매력적인 품위를 자랑하는 공주. 슈란가트는 한 여성으로서 그녀를 생각했다. 지식도 있고 품위도 있으며 부드럽고 외모도 아름답고, 그리고 그 외 기타 등등. 그 어떤 면을 따져 보아도 대륙 내 이토록 완벽한 신부감은 다시없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그녀는 일국의 공주였고, 그래서 슈란가트에게는 우러러보기조차 힘든 존재였다. 아무리 자신을 좋아한다고 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것. 물론 나중으로 대답을 미루기는 했지만, 솔직히 시간이 흐른다고 하더라도 마땅히 답할 말이 생각날지는 의문이었다. 싫진 않았다. 싫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이건 아니었다. 안되는 것인데 어떻게 받아들인단 말인가. 그는 복잡한 표정으로 차를 목구멍으로 넘겼다. 이 차와 함께 고민까지 모두 사라져버리면 좋겠다는 바램을 마음 한구석으로 가진 채. '후우… 메이린…….' 슈란가트는 마음 속으로밖에 부를 수 없는 호칭으로 그녀를 불렀다. 밖 으로 내뱉으면 금방이라도 부서져 공간 속으로 스며들 듯한 그 이름을. 그리고 그때였다. "슈란!" 덜컥. 슈란가트가 서있는 곳 정면의 문, 메이린느의 방문이 사정없이 열 리며 그곳에서 다급함과 분노를 혼합시킨 듯한 얼굴을 한 메이린느가 뛰 어나왔다. "죄, 죄송합니다!" "뭐가요?" "…네?" "죄송하다면서요. 뭐가 죄송하다는 거예요? 아, 일단 그건 덮어두고, 얼 른 앞장서요, 슈란." 슈란가트는 뭔가 바쁘게 돌아가는 상황 속에서 자신이 헛소리를 하고 말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리고 그 다음에 메이린느의 말을 자각했다. "어디 가십니까?" "네, 어디 가요. 그리고 그 어디가 어디인지 잘 모르기 때문에 슈란이 좀 가르쳐줘야 하겠어요. 그럴 수 있죠? 없다고 할 권리는 일체 주지 않 는다는 걸 미리 알려드릴게요." 바쁜 상황 중에서도 할 말은 용케도 다 끝내고 만 메이린느는 '어쩔래 요?'라고 묻는 듯이 슈란가트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뒤로 하론 집사가 갑작스런 공주의 행동에 당황한 듯한 눈빛으로 바쁘게 걸어나왔고, 곧 슈 란가트와 눈이 마주쳤다. 공주와 키가 머리 하나 이상 차이가 나는 그는 어렵지 않게 하론 집사의 굳은 얼굴을 발견할 수 있었고, 그래서 의문을 잠시 뒤로 접은 후 공주를 내려다보았다. "어디로 가십니까?" 메이린느는 지체할 시간이 없다는 듯이 먼저 움직이며 대답했다. "필로윈이라는 작자가 지금 현재 있는 곳. 어서요." 그녀가 한 말 중에서는 가장 험악한 말이었기에, 슈란가트는 침을 꿀꺽 삼켜버렸다. --------------------------------------------------------------------- 자아. 84편(맞나?)입니다. 메이린느와 슈란가트의 므흐흐(?)한 장면. 싱그르. 별로 므흐흐(?)하지는 않나? 뭐. 아무튼. 그런 겁니다. 우헤- 사실 이번 편은 제대로 진행이 되질 않아 무척이나 힘들었습니다. 뭔가 계속 꼬이고 글이 안 풀려서 고생하다가 겨우겨우 끝내었는데. 과연 제대로 된 건지는 의문이군요. 흐음- 그래도 뭐. 열심히 했습.(^^^) 다음 글을 준비하면서 출판사와도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출판사 쪽의 도움이 조금 필요한 글이라, 참으로 고맙죠. 아하하. 이 자리는 빌어 여러 가지 도움을 주시고 계시는 제 담당자, 누님께 깊은 감사의 말을 올리는 바입니다.(___) 자아, 그럼. 85편에서 뵙겠습니다.(^^^) 어둠의 기사 DARK KNIGHT TEAM... P.S 추천 감상 비평. 받아요, 받아∼ P.S 2 GO CAMA P.S 3 사실. 5권을 18편으로 채우려면 계속 이 분량으로 나가야하는 것입니다. 크아악. 그것이 제대로 될지는 정말 의문이군요. 번 호 : 8 / 17 등록일 : 2001년 02월 16일 17:00 등록자 : 암음기사 조 회 : 81 건 제 목 : [카드 게임 판타지]『카드 마스터(Card Master)』#085 카드 게임 판타지(Card Game Fantasy) 카드 마스터(Card Master) 85. 창 밖을 바라보고 있는 시선은 무언가를 끊임없이 갈구하는 마법사의 눈 그대로였고, 그 마법사가 갈구하는 욕망은 지금 아주 가까이에 있었 다. 흑청색의 머리카락이 단정하게 정리되어 숨소리에 맞춰 약하게 흔들 렸다. 노란 눈동자는 멀리 창문 밖으로 눈길을 던지고 있었다. 얇은 입술 은 꼬리 쪽으로 가면서 볼로 감겨 들어가 웃는 얼굴을 창조해냈다. 자신의 집무실 책상에 앉아있는 필로윈은 골치 아팠던 서류들을 모두 끝내놓고 달콤한 휴식을 가지고 있었다. 간만에 가져보는 아늑한 휴식 시 간에 몸이 나른하게 풀리는 것 같아, 매우 기분이 좋았다. 게다가 그의 기분이 좋은 건 그 뿐만도 아니었다. "술술 너무 잘 풀리는군." 오히려 불안할 정도로 잘 풀리는 계획은 그가 만면에 미소를 띌 수 있 도록 유도하는 또 하나의 이유였다. 같은 주동자인 바이마크가 어떠한 마 음 상태로 얼굴을 구기고 있는지는 잘 알고 있지만 미리부터 맘을 잡고 있었던 그로서는 그저 즐거울 뿐이었다. "멕스힐튼 가문도 완전히 제압해버렸으니, 이제 하나 남은 건가? 꼭 무 력을 쓰게 만들어서 조금 뒤집어놓기는 했어도, 훗, 반란인데 그 정도는 깨끗한 게지." 필로윈은 지나가던 개미를 아무런 생각 없이 눌러 죽여버리는 장난기 많은 꼬마의 표정과 비슷한 표정을 만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왕성 안에 거주하고 있는 정치권 귀족 중에서 아직도 반항하고 있는 마지막 가문을 찾아가 충성을 받아낼 시간이 온 것이다. 지금쯤이면 아마 바이마크도 기 사 몇을 대동한 채 이리로 오고 있을 것이다. 똑똑똑. '어이쿠, 정확하기도 하군.' 그는 빙그레 미소지으며 문밖에 있을 이를 불렀다. "들어오게, 바이마크." 필로윈이 친우의 노크 소리를 외우고 있기라도 한 듯, 문을 열고 들어선 자는 어김없이 바이마크였다. 그리고 필로윈의 추측대로 기사 몇, 정확하 게 3명을 대동하고 있었다. "나가려던 참이었다네. 시간도 딱 맞춰서 오는군." "그랬나?" 바이마크는 평조로 대꾸하며 돌아섰다. 필로윈은 그의 심리를 짐작하기 라도 하듯이 빙긋이 웃고는 책상을 깨끗이 정리한 후 그를 뒤따랐다. 문에 봉인마법을 걸어 그 누구도 열 수 없게 조치하자 거침없이 바이마 크가 복도를 걸어나갔다. 필로윈도 느릿한 걸음으로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 뒤를 따라 세 명의 기사도 늠름한 걸음걸이로 그들을 쫓았다. 거대한 왕궁의 서편 정문으로 걸어나오자 가장 먼저 반기는 건, 여름이 다가오는 시점에서 강하게 불고 있는 바람이었다. 더운 것도 아니고 차가 운 것도 아닌, 그야말로 미지근한 감촉을 느끼게 만드는 바람은 바이마크 의 장발을 날아오르게 했고, 필로윈의 단정한 흑청색 머리칼도 흩뜨렸다. 두 명의 중년은 각자의 직업과도 어울리는 모습으로 바람을 느끼다가 (바이마크는 묵묵히 바람에 맞섰고, 필로윈은 마법으로 주위의 공기를 멈 춰버렸다), 마법사답게 금방 얼굴을 바꾼 필로윈이 먼저 말을 꺼냈다. "기사는 얼마나 데리고 가는 건가? 그러고 보니 뒤쪽의 대장들의 이름 은 아직 모르네만." 그는 자신들의 뒤를 받쳐주듯 충실한 모습으로 따라오고 있는 기사들에 게 눈길을 한번 주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바이마크는 갈색 눈동자를 전방에 고정시킨 채 지그시 입을 열었다. "전에 소개는 한 걸로 기억하는데." "일일이 다 기억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자네도 알다시피 왕성 안에 서 내가 맡고 있는 업무가 얼마나 되나. 자잘한 것은 기억할 공간이 부족 하다네." 마법사는 자신에게 어울리는 웃음을 띄웠다. 바이마크는 여전히 친우를 향해 시선을 돌리지 않고 말했다. "마법사답지 않은 말이군." 필로윈은 여전히 빙그레 웃음 짓고 있었다. "삶의 지혜라고 해두게. 그나저나 소개 안 해줄 참인가?" 장난기 있는 미소와 어투로 일관하는 그에게 드디어 잠시 시선을 준 바 이마크는 이내 앞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리고 그 순간 필로윈의 눈매 가 잠시 날카로워졌다. "직접 소개하라." 무심한 어조였지만, 기사들은 단장의 명령에 충성했다. "제4대장 나이트 파엔트라고 합니다." "제5대장 나이트 켈란토입니다." "제7대장 나이트 큐힐입니다." 단장의 분위기라도 닮으려는 건지 하나 같이 딱딱한 말투로 인사를 하 자, 필로윈은 따분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마주 인사했다. "허허, 그래." 다시 고개를 돌린 그는 친우를 물끄러미 바라보기 시작했다. 필로윈보다 조금 빨리 걸어가고 있던 바이마크는 친우의 시선을 느끼고는 길을 따라 움직이고 있던 눈동자를 돌렸다. 갈색의 심연이 무언가로 아른거리고 있 었다. "오늘 따라 자네의 눈동자는 고동색의 짙어져있군." 알 듯 모를 듯, 필로윈이 말했다. 바이마크는 초연한 웃음을 "훗." 하고 작게 내뱉더니 스쳐 가는 위넨스의 손길을 느끼며 얼굴을 돌렸다. 작지만 확실한 무게를 지닌 그의 웃음 섞인 모습에 필로윈이 자신의 로브를 거 머쥐며 물었다. "어제 일 때문인가?" "……." 바이마크는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그런가 보군." 확언하며 필로윈은 로브의 단추를 잠갔다. 오늘처럼 바람이 강한 날에는 단추를 잠그는 게 활동하기에 편했다. 그는 단추를 잠근 손을 그대로 들 어 머리 뒤로 넘겼다. 목 뒤에서 두 손을 깍지 껴 뒷머리에 댄 그는 가벼 운 말투로 흥얼거렸다. "어쩔 수 없는 것 아니었나. 우리의 부탁을 그렇게도 매몰차게 거절했으 니, 그 정도는 당연했네." "하지만……." 필로윈은 말을 끊고 친우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바이마크는 똑바로 이 어지고 있었던 길이 갈림길을 만나 잠시 흔들린 후에도 입을 다물고 있 다가, 갈림길을 지나치고 나서야 겨우 말을 이었다. 그 중에 필로윈은 지 루하지 않게 시간을 활용하려는 듯 왕성 서남쪽으로 향하는 길에 서있는 가로수들과 마법의 등을 일일이 확인했다. "꼭 그래야만 했는지 의문이 드는군. 그렇게… 기사들을 움직여 무력을 사용해야만 했는지 말일세. 결국 멕스힐튼 가문의 후계자까지 다치게 만 들었지 않나." "그 대가로 우린 그들에게 우리의 부탁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할 수 있었 지. 이로서 우리가 생각한 반란은 더욱 이상적인 형태로 발전하게 된 것 이네." 필로윈의 말투는 언제나 그렇듯이 그렇게 진지성을 띄지 않고 있었고 그 자체로 보자면 평어와 다를 바가 없었다. "설득이었나? 난 협박인 줄 알았네." 바이마크의 어투는 결코 격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말속에 내재된 감정 은 필로윈도 쉽사리 읽을 수 없을 만큼 복잡했다. 어제, 왕성의 동쪽 멕스힐튼 저택. 가주 프랭클린 미토 멕스힐튼과의 실 랑이를 벌이다 결국 경비를 서고 있던 기사를 끌어들이고만 필로윈은 프 랭클린의 아들이며 멕스힐튼 가문의 후계자인 조란드로 미토 멕스힐튼을 상처 입히고 말았다. 그리고 그것을 빌미로 삼아 프랭클린에게 '정중히' 부탁하여 협조를 얻어낼 수 있었다. 다시 밝히자면, 필로윈의 입장에서 어디까지나 그것은 '정중히'였다. 하지만 필로윈과 같이 반란의 주동자인 바이마크에게는 그 일은 크나큰 기억으로 자리잡았고, 죄책감이라고도 설명할 수 있을 감정 때문에 필로 윈과의 약속으로 이렇게 나온 후에도 머리 아파하고 있었다. "이봐, 마크." 필로윈은 오랜만에 친우의 옛 애칭을 불러보았다. 바이마크고 그런 호칭 에 잠시 놀란 듯이 친우를 바라보다 다시 눈빛을 진정시켰다. 필로윈은 그에게 시선을 두다 이내 먼 하늘을 향해 눈을 돌렸다. 깍지낀 손은 여전 했고, 먼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노란 눈동자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자넨 두툼한 콧수염과 그 덩치에 맞지 않게 꽤나 소심해. 그거 알고 있 나?" 예전 같았으면 "그랬었나? 미처 몰랐었군."이라고 맞받아 쳤을 게 당연 한 바이마크였지만 지금은 그저 침묵하고 있었다. 필로윈은 옅은 미소를 가지고 계속 말을 이었다. "뭐, 20년을 넘게 기사도와 같이 살아온 기사 그 자체인 자네보고 이제 와서 대범해지라고 강요할 수는 없네. 그래서 나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있는 거야. 20년지기 친구인 내가 자네를 이해하지 않으면 누구를 이해하겠나." "고맙네." "천만에. 하지만 하나만 더 말해주겠네." 바이마크는 필로윈을 쳐다보았다. 그의 눈은 여전히 먼 하늘을 주시하고 있었다. 점점이 떠다니는 구름은 때때로 불어오는 강한 바람에 가려져 보 이지 않기도 했지만, 여전히 그곳에서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기사도라는 것은 개인마다 다르다고 알고 있네. 물론 기사도라는 것이 만들어진 이후로 여러 이름 높은 기사들의 정신을 거쳐 확립되어진 기틀 은 있을지 몰라도 세부 사항들만은 각자의 소신 따라 정해지더군. 그래서 부탁하건데, 잠시만 자네의 기사도를 접어주지 않겠나." 여전히 입을 다운 바이마크는 조용한 눈빛이었다. 필로윈은 희미한 웃음 을 진하게 화하며 입을 열었다. "지금은 반란 중이네. 그리고 자네는 나와 같이 그 반란의 가장 중심에 서있는 자이네. 이 반란의 두 세력, 마법사 길드와 금안 기사단. 그 중 금 안 기사단은 오로지 자네의 명령에만 복종하네. 그 날 확인하지 않았나. 국왕보다 자네를 선택하던 기사들의 충성심을. 자네는 그들의 주군일 수 밖에 없네." "……."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건지 알겠나?" 근엄한 중년의 기사는 잠시 눈을 감아 가라 앉아있던 갈색의 눈동자를 감추었다. 불어보는 바람에 따라 그의 장발을 흔들렸고 두툼한 콧수염에 가려진 선명한 입매는 그의 심정을 대변이라도 하듯 굳게 닫혀있었다. 잠시 조용히 흘러가는 위넨스의 손길만이 지배하던 공간은 그의 입이 열림과 동시에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알고 있네." "다행이군." 필로윈은 친우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다시 눈을 뜬 바이마크의 눈 동자에서는 아까와 같은 깊은 혼란의 감정은 많이 사라져있었다. 그리고 그 대신 반란의 첫날 국왕의 침소에 쳐들어갔을 때와 비슷한 빛이 서려 있었다. "자네가 흔들리면 안 되네. 힘들겠지만 참게나. 어차피 생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지 않나. 자각하고 있게나, 자네의 위치를. 자네는 이제 마법왕 국 라시엔트의 제1기사 따위가 아니라네. 금안 기사단의 주군, 그것이 지 금 자네의 모습임을 기억하게." 바이마크는 여전히 자연스럽고 일관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필로윈 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흑청색의 머리칼과 노란 눈동자. 조금은 큰 눈 과 세월의 연륜을 느끼게 해주는 적당한 주름. 마법사로서의 분위기에 너 무나 잘 어울리는 자신의 친우는 이 와중에서도 친우를 생각할 줄 아는 여유를 가지고 있었다. 그 순간, 그렇게 생각한 순간 그는 필로윈이란 남자를 자신의 평생 친구 로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매우 축복됨을 깨달을 수 있었다. "고맙네, 필." "헛, 자네. 내가 마크라고 부른 것에 대해서 복수하는 건가?" 필로윈이 과장된 당황함을 내비치자 바이마크는 경직되어있던 얼굴을 풀고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복수라고 할 것까지는 없고. 다만 자네가 나의 옛 애칭을 부르길래 나 도 생각나서 해본 것뿐이네. 오랜만에 부르니 굉장히 정겹군, 그래, 필." "으으, 그만하게. 내가 그 이름을 얼마나 소름끼쳐 하는지 알지 않나." 문득 젊은 날에 필로윈에게서 숱하게 당했던 기억이 스쳐지나갔고, 그래 서 바이마크는 '필'이라는 정겨운 애칭을 결코 포기할 수 없었다. "다 알고 있네. 부인께서는 아직도 필이라고 부르시는 것 같던데. 아닌 가?" "흠, 흠. 거 참, 쓸데없는 얘길……." 당황해하며 황급히 고개를 돌려 먼 산을 바라보는 시늉을 해대는 필로 윈의 솔직한 반응에 바이마크는 드디어 승리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행복 한 승리의 도취감에 빠져 빙그레 미소지은 그는 어느새 머리를 짓누르는 건 골치 아픈 문제를 잊어버린 자신의 모습을 깨닫고는 흐뭇하게 더 진 한 웃음을 지었다. "정말 고맙네." 바이마크는 짧게 그렇게 말했다. 난처한 듯이 볼을 긁으며 보이지도 않는 산을 대신하여 유유히 흘러가 는 구름의 모양에 대해서 평을 해보고 있던 필로윈은 빙긋이 미소짓고는 대답했다. "천만에." 아직 완전히 정리된 마음은 아니었지만 조금 전보다는 가벼워진 마음만 으로 만족해하며 바이마크는 발걸음에 힘을 실었다. 뜻하지 않게 잠시 소 외당했던 기사 셋도 단장의 심리 변화에 맞추어 한결 나아진 얼굴로 그 들의 뒤를 따랐다. 금안 기사단의 대장 중 세 명의 호위를 받으며, 그들보다 더 뛰어난 실 력을 가지고 있는 두 명의 중년 사내들을 이윽고 그들이 목적으로 하던 곳에 도착했다. 다른 저택들처럼 적당히 화려하고 적당히 소박하고 적당히 큰 저택. 정 치권 귀족들 중에 오늘 안으로 단판 지어야 하는 마지막으로 가문, 유로 드빌츠 가문의 저택이었다. "흠, 여기군." 이런저런 잡담으로 인해 언제 이곳까지 왔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발길이 제대로 이끌어주었다는 생각에 바이마크는 세 명의 대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기사들은 잘 배치해두었나?" "네." 푸른색의 짧은 커트 머리를 가진 제4대장 나이트 파엔트가 단단히 대답 하는 음성과 함께 바이마크는 "흠."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끊어지지 않는 발걸음은 그들을 저택의 현관으로 이끌었다. 저택의 현관을 지키고 있던 기사 두 명이 바이마크를 발견하고는 즉시 거수 경례를 붙였다. 절도 있는 그들의 모습에 바이마크도 팔을 거수해 인사했고, 필로윈은 목례로, 뒤따르는 세 명의 대장도 간단한 거수 경례 로 인사했다. 필로윈이 경비 역할을 맡고 있던 기사를 향해 넌지시 물었다. "이상 없나?" "아직은 없습니다." 그 기사의 말대로 큰 소란은 없는 것으로 보이는 조용한 저택을 한번 휘 훑은 필로윈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수고하게." "네." 바이마크가 먼저 발을 내딛었고 그 기사는 서둘러 문을 열어 그들을 안 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배려했다. 대장들까지 모두 저택 안으로 들어오고 난 후 정확하게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저기에 서있던 기사들 이 목소리 높여 경례하는 모습도 그 소리를 전후하여 들려왔다. 필로윈은 그들의 경례에 건성으로 답해줄 수밖에 없었다. 홀이라고 할 수 있는 이곳의 풍경은 정말 그의 상상을 불허할 정도로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욕지기를 겨우 참아내며 그는 한마디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많이도 처발랐군." 바이마크는 친우의 말에 깊은 공감을 나타내듯이 긴 여운을 남기는 신 음을 흘리며 손가락으로 미간을 주물렀다. 홀을 밝혀주고 있는 등은 단순한 마법의 등이 아니었다. 하얀빛의 등을 투명한 에메랄드로 장식하여 찬란한 빛을 뿌리게 했고, 벽지에 수놓아진 금빛의 실을 보며 필로윈은 그것이 순금으로 만들어진 것임을 확신했다. 게다가 여기저기 놓여져 있는 동상들과 도자기는 홀 안의 화려함을 더욱 북돋아주는 조미료가 되었고, 바닥에 깔려있는 카펫은 더 이상 말할 것도 없이 엄청난 고가품이었다. 밖에서 볼 때면 그리 별 특징을 찾을 수 없는 저택이었지만 문을 넘어 오자마자 발견할 수 있는 이 엄청난 모습에 필로윈은 스스로 분노를 자 제하지 못함을 느꼈다. '이건 해도 해도 너무 하는군.' 그는 이 홀의 정경을 한마디로 완벽하게 정의 내렸다. "여긴 일반 가정들의 1년이군." "무슨 말인가." 막 이런 홀을 꾸며놓은 유로드빌츠 가문의 가주의 머리 속이 궁금해지 는 참이던 바이마크는 그에 앞서 친우의 말에 의문을 품었다. 필로윈은 터져 나오는 한숨을 애써 숨기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으며 상세히 대답했 다. "이 홀의 있는 것들을 다 팔아서 돈으로 바꾼다면, 4인의 구성을 기본으 로 한 일반 가정이 1년 동안 살림을 꾸릴 수 있는 돈이 될 거네. 장담해, 이 사실은. 마법으로 굳이 확인해볼 것도 없어." 딱 잘라 말해버리는 필로윈의 말속에서 그의 감정을 느낀 바이마크는 심려를 담은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너무 화려하여 평범한 눈길조 차 거부하고 있는 그것들을 어떻게 바라봐 주어야 옳은 것인가, 잠시 고 민해버리는 그는 이내 화를 담은 눈길로 쏘아 봐주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그 눈빛조차 파괴해버리는 무시무시한 화려함을 자랑하고 있어서 그로 하여금 스스로 눈빛을 접게 만들었다. 그는 다른 방도를 모색했다. "유로드빌츠 백작을 빨리 만나보고 싶군." 필로윈은 어느새 걸음을 옮기며 간단히 답했다. "동감이네." 기사 한 명의 안내를 받으며 유로드빌츠 백작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는 중에서도 그들은 황당함을 금할 수가 없었다. 금실이 수놓아진 벽지는 아 마도 이 저택 전체를 도배하고 있는 듯했고, 10발자국도 채 못되는 거리 마다 하나씩 놓여있는 도자기와 동상들은 하나만 깨뜨려도 거품을 물고 쓰러질 것 같았다. 홀에서부터 시작되는 고가품의 카펫은 끝없이 이어지 는 붉은 길처럼 보였기에, 세 명의 대장은 갑자기 이 길이 황천길은 아닌 것인가, 하는 의문을 품어보아야 하지 않을까 고민하고 싶은 기분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들의 그런 의문을 품기도 전에 바이마크와 필로윈의 걸음은 멈추었고, 그에 따라 그들의 생각과 발길도 정지했다. 그들은 일 제히 기사가 안내해준 방문을 바라보았다. "루비인가, 이 장식들은." 불그스름한 문을 장식하고 있는 붉은 색 계열의 보석을 한번에 꿰뚫어 버린 필로윈은 이마를 잡으며 "끄응." 신음했다. 유로드빌츠 가문에 돈이 많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저택 하나를 이다지도 장식해놓고 살다니. 필 로윈, 그 같았으면 부담스러워서라도 차마 이렇게 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 다. 평소에 회외 때 입고 나왔던 옷과 유로드빌츠 백작의 얼굴을 생각하며 고개를 젓고 있던 필로윈은 문을 열어 방안으로 안내하는 기사의 음성에 정신을 차리고 앞을 바라보았다. 고품격과 동시에 그에 따르는 엄청난 값어치를 자랑이라도 하듯이 놓여 있는 회색의 테이블과 그에 상응하는 굉장한 돈이 느껴지는 붉은 갈색의 쇼파. 필로윈은 다른 것은 이제 눈이 거부할 것 같아서 최대한 시야를 가 리며 방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기사 네 명이 하얀 제복을 단정히 차려입고 각자의 검을 구비한 채 방 안의 네 모서리에 서있었다. 손님의 접대용으로 사용하는 듯한 그 방의 한 쇼파에는 바이마크와 필로윈이 그리도 만나고 싶어하던 유로드빌츠 백작이 기름진 얼굴을 하고 앉아있었다. "앉으시오, 디바이어 님, 헤이스티론 님." 세 명의 대장을 뒤에 세워놓고 바이마크가 가장 고민한 문제는 '이 비싸 보이는 쇼파에 앉으면 어떤 나를 내려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이 쇼파 는 라시엔트 제1기사가 앉는 것조차 겁낼 정도의 위대한(?) 쇼파였던 것 이다. 어쨌든 불편한 얼굴로 일단 앉고 본 바이마크는 옆 쇼파에 조심히 자리 를 잡는 친우도 자신과 같은 심정일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어쨌 든 그들은 20년 동안이나 우정을 교류해온 사이였다. "그래, 무슨 일로 날 보자고 하셨소?" 유로드빌츠 백작은 왕성의 사태를 전혀 모른다는 투로 둘에게 물었다. 필로윈은 금방이라도 으르렁거리며 달려들 것 같은 표정으로 그의 물음 에 대꾸해주었다. "다 알고 있으면서 묻는 건 무슨 악취미요? 허튼 수작 부리지 말고 본 론으로 들어가 봅시다." "흠, 원 사람하고는." 유로드빌츠 백작은 기름진 자신의 이마를 손수건을 정성스레 닦았다. 마 법의 등의 불빛이 반사되어 눈이 부실 정도인 그 이마에 차마 눈길을 주 지 못하는 필로윈에게 그는 손수건은 주머니에 집어넣고는 다시 말했다. "반란에 협조하란 말이오?" "물론입니다." 대답은 바이마크에게서 나왔다. 유로드빌츠 백작의 시선은 그로 이동했 고, 이번에는 그의 눈썹이 찡그러질 차례였다. "이제 당신 가문만이 남았소. 어떻게 할 작정인 거요?" 필로윈의 재촉에 유로드빌츠 백작은 불룩한 배와 벗겨진 이마에 알맞는 능글맞기 짝이 없는 웃음으로 대답했다. "당연히 협조할 것이오." 그의 대답에 필로윈은 황당한 표정이 되었다. "그럼 왜 지금까지 버텨왔던 거요?" "당연하지 않소." 유로드빌츠 백작은 이보다 더 확실할 수는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선언 했다. "나한테 더 이득이 되는 쪽을 선택하다보니 이렇게 늦은 거지. 설마 조 금 시간이 걸린다고 하더라도, 디바이어 님이 날 죽이기라도 하겠소? 그 래서 더 신중한 선택을 할 수 있었소. 한편으로는 감사해야하겠군." "잠깐잠깐. 유로드빌츠 님에게 이득이 되는 쪽이라니. 그럼 우리가 일으 킨 반란에 값어치라도 매기고 있었다는 거요?" "말하자면 그렇게 되오. 난 어떤 상황에든 나에게 이득이 오는 쪽을 선 택하거든. 그리고 오늘에야 반란에 가담하는 쪽이 나에게 이득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소. 물론 디바이어 님과 헤이스티론 님이 내가 거는 조건 에 동의해준다는 가정 하지만." 필로윈은 말을 잃어버렸다. 유로드빌츠 백작. 마법왕국 라시엔트 내에서 재력으로는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힌다고 일컬어지는 그가 돈을 밝힌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그게 이 정도였을 줄은 정말 꿈에도 생각지 못했 었다. 유로드빌츠 백작은, 나라의 운명인 걸린 이 시점에서도 자신에게 돈이 되는 쪽을 택하고 있었다. '이런 썩을 인간이 다 있나!' 필로윈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유로드빌츠 님! 당신 정말 인간이 아니군! 돈으로 도배가 되어있는 이 저택을 보고 일찍 깨달았어야하는 건데 말이오! 지금 나라의 사정이 어떤 줄이나 알고는 있는 거요?" 유로드빌츠 백작은 그의 고함이 신경에 거슬리는지 한껏 인상을 찌푸렸 다. 그러나 그것에 굴복한 필로윈이 아니었기에 그의 목소리는 한층 더 높아졌다. "당신이 저택 안에 도배해놓은 돈들을 모두 긁어모은다면, 우리 라시엔 트의 1년 예산은 더욱 풍족해질 것이오! 지금도 굶고 있는 불쌍한 국민들 은 배부르게 생활을 꾸릴 수 있을 것이오! 당신이 지금 살고 있는 곳은 바로 그런 곳이란 말이오!" "그래서 나보고 어쩌란 말이오? 그들을 위해서 내가 내 재산을 팔기라 도 해야한단 말이오? 웃기지 마시오, 제발. 그들이 그렇게 사는 게 내 탓 때문이오? 다 자기들 팔자고 자기들 운명이지! 내가 그들을 도와줘야 할 이유가 대체 어디 있단 말이오!" "그게 정치권에 앉아있는 귀족이 할 말입니까! 우리 국민들은 지금 당신 과 같은 귀족들을 믿고 살아가고 있소! 그런데도 그런 말이 나온단 말입 니까!" 유로드빌츠 백작은 오히려 황당한 표정이 되어서 필로윈을 빤히 바라보 았다. 그로서는 필로윈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 돈을 내가 쓰고, 나에게 이득이 되는 곳을 내가 선택하는데 대체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건 지. 유로드빌츠 백작은 괜히 흥분해서 씩씩대고 있는 필로윈은 더 이상 말이 통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여 기름지고 퉁퉁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냉소를 펼치며 팔짱을 꼈다. 몸은 자연스레 쇼파 등받이에 묻혀 '난 몰라' 포즈가 되어버렸다. "흥, 그래서 디바이어 님은 내가 반란에 동참하는 게 싫다는 거요?" "그건 아니지만 방식이 맘에 들지 않는 거요!" 필로윈의 흥분은 쉽게 식혀지지 않을 거 같았고, 그래서 그는 고개를 무 참히 돌려버린 후 "흥! 필요 없소! 싫으면 된 거요! 난 반란에 협조하지 않을 테니 그리 아시오!" 라고 단언해 소리쳤다. 바이마크는 속으로 유로드빌츠 백작의 현 상태를 간단하게 정리해버렸 다. '삐쳤군.' 그렇게 밖에 생각되지 않는 바이마크는 포기했다는 듯이 친우에게로 고 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는 봐버리고 말았다. 필로윈은 노란 눈동자는 호박의 노란 색을 능가할 정도로 선명해져있었 다. 굳어버릴 대로 굳어버린 표정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을 듯이 고정되 었고 주먹은 꽉 쥐어진 채로 무릎 위에서 부들부들 떨어뜨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한번만 더 건드린다면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상태였다. 바이마크는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뭔가 예감이 이상했다. "필로윈……?" "말리지 말게. 나, 오늘 여기서 사고 칠 테니까." 필로윈은 고개를 돌린 채 계속 뭐라고 중얼거리고 있는 유로드빌츠 백 작을 쏘아보기 시작했다. 쳐다보다가 아예 뚫어버릴 기세인 그의 눈빛에 얼굴이 단단해 보이는 유로드빌츠 백작도 오래 버틸 수는 없었는지 이내 눈을 돌렸다. "뭐요? 할 말이 아직 남았소?" "물론이오." 필로윈은 이상하게 차분했다. "당신. 오늘 각오하는 게 좋을 거요." "뭐?" "필로윈! 안되네!" 바이마크의 처절한 외침. 그러나 그것을 무시하고 필로윈은 유로드빌츠 백작을 향해 손을 뻗었다. 마력의 흐름. 의지가 흘렀고 마력이 흔들렸다. 공간이 폐쇄되고 공간이 개방됐다. 마법사 길드 최고 원로 중 일원인 마법사 필로윈에 의해 마법이 구현되 려하고 있었다. 그때. "그만해요." 아름다운 음색을 가진 여린 음성이 강한 힘을 가진 채 들려왔다. 이 자 리에 있는 그 누구도 예상 못한 인물이 문을 열고 방안으로 난입했고, 그 로 인해 의지가 흔들린 필로윈은 시전하려던 마법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 다. 뭉쳤던 마력이 흩어져 공간 속으로 녹아 들어갔고, 의지는 멈추었다. 필로윈은 뒤를 돌아보았다. 모두의 시선이 문 쪽으로 모였고, 그들의 눈 에는 우아한 황금빛 머리카락과 아찔한 미모를 가진 여성과 민망한 듯이 고개를 돌리고 있는 건장한 기사가 들어왔다. 여성이 필로윈을 향해 다시 말했다. "손을 내려요, 디바이어 경. 마법왕국 라시엔트의 공주 앞에서 잔인한 짓을 하려는 건 아니겠죠?" "…공주님." 메이린느는 바삐 뛰어온 탓에 몰아쉬는 숨을 참으면서 문 앞에 당당히 선 채 방안의 모두에게 시선을 보냈다. '아, 이거 참.' 아무 것도 모르고 공주를 모셔온 슈란가트는 그 중 자신이 가장 존경하 면서도 무서워하는 인물 한 명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함을 알고 방밖으로 나가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 에에. 네. 팀군인 겁니다. 이렇게 저렇게 85편이군요. 카마가 플롯의 마지 막을 향해 달려 가다보니 이런 내용도 나와버리는군요. 메이린느와 필로 윈의 두 번째 전쟁(?)입니다. 그 승부의 행방은 어떻게 될지는 물론 다음 편을 보시면 알게 될 거구요. 그럼으로 인해 다음 편도 기대해주시길. 아하하. 사실. 이 편을 적어놓고 언제 올릴지 모르겠습니다. 공지도 올렸 다시피 개디에셀이 미쳐버려서 접속이 안되는 사태가 빚어졌긴 때문이죠. 그래서 회복이 될 때까지 열심히 글을 적고 있는 팀군입니다. 자자. 그럼 힘을 내서 86편으로 달려가 보겠습니다! 어둠의 기사 DARK KNIGHT TEAM... 덧하나. 추천 감상 비평. 환영입니다. 환영. 우헤- 덧두. GO CAMA 덧석. 네에. P.S에서 바뀐 겁니다. :) 덧.은 알고 계시는 그것이고요. 하나. 두. 석.은 1,2,3의 의미인 거고요. 아핫. 우헤- 번 호 : 9 / 17 등록일 : 2001년 02월 16일 17:00 등록자 : 암음기사 조 회 : 79 건 제 목 : [카드 게임 판타지]『카드 마스터(Card Master)』#086 카드 게임 판타지(Card Game Fantasy) 카드 마스터(Card Master) 86. "제가 말씀드렸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디바이어 경." "무엇을 말입니까?" 별로 좋지도 않은 기분이라 필로윈의 대답은 무척이나 퉁명스러웠다. 메 이린느는 자신도 심기는 썩 좋지 않다는 것을 나타내려는 듯이 눈썹을 구기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명색이 공주의 눈길이라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인지 금새 입을 다물었다. 메이린느는 그가 침묵하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물었다. "기억나지 않나요? 디바이어 경이 내궁에 찾아왔을 때. 그때 제가 분명 히 말씀드린 걸로 기억하는데요, 전." "그러니까 그때 무엇을 말씀하셨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알았어요, 말씀드리죠." 그녀는 필로윈을 향해 눈을 흘기고는 말했다. "그때 디바이어 경은 절 찾아와서 말씀 했었죠. 쓸데없이 나서지 말라고 요. 그래서 전 대답했죠. 제가 나설 일은 만들지 말라고. 이제 생각나시나 요?" "네, 납니다." "그럼 제가 여기 왜 찾아왔는지 짐작하시겠군요." 그녀는 '이렇게 친절을 베푸는 데도 삐딱하게 나올 건가요?'라는 듯 필 로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필로윈은 그 눈빛에 응수하듯 '모르겠는데요?' 라는 표정을 짓다가 그녀의 눈매가 매서워지는 것을 알아채고 급히 입을 열었다. "공주님께서 이곳으로 오신 이유는 알겠습니다. 제가 공주님을 나서게 만든 일을 무언가 저지른 거군요." "아셔서 다행이에요. 그럼 다시 질문할게요. 디바이어 경이 한 일 중 어 떤 것으로 인해서 제가 이곳까지 오게 되었을까요?" 필로윈은 빙긋이 웃었다. 공주가 난입함으로 인해서 유로드빌츠 백작에 게 가졌던 살심은 많이 가라앉았지만 여전히 남아있었다. 그것을 가리기 위해서는 웃음이 가장 효과적이었다. "모르겠습니다만." "멍청하군요." 메이린느의 말은 가차없었다. 필로윈은 잠시 거센 숨소리를 내며 분을 참는 시늉을 하다가 바이마크를 돌아봤다. 친우의 시선을 느낀 그는 천천 히 눈을 돌려 메이린느가 앉아있는 쇼파 뒤에 서있는 슈란가트를 바라보 았다. 비록 그가 바이마크의 시선을 눈치채고 멀리 창 밖을 향해 눈길을 던지 긴 했지만, 그렇다고 용건을 잃어버릴 바이마크가 아니었다. "어떻게 된 건가, 나이트 슈란가트." "아, 저기 그러니까……" 슈란가트는 힐끗 자신의 밑에 앉아있는 메이린느를 훔쳐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고, 그는 이윽고 대답했다. "하론 집사님이 공주님을 만나러 오셨습니다. 매일 그렇게 찾아오시기 때문에 전 밖에 나가있었고요. 그런데 갑자기 공주님이 밖으로 뛰어나오 시더니 절더러 디바이어 님이 계시는 곳으로 데려다달라지 뭡니까. 전 영 문도 모르는 상태에서 어제 회의에서 들은 바대로 이리로 모셔온 겁니 다." 이번에 노란 눈동자가 슈란가트를 향했다. "그럼 자네는 공주님께서 왜 이리로 오셨는지 모른단 말인가?" "네, 그렇습니다." "그만하세요." 메이린느는 더 이상 이야기를 지체할 수 없다는 듯이 손을 들어 그들의 대화를 딱 잘라버렸다. 일동의 시선이 모두 그녀를 향했고, 그녀는 단 한 사람만을 쳐다보며 날카롭게 눈매를 번뜩였다. "디바이어 경. 정말 모르고 있는 건가요, 아니면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 고 있는 건가요?" "굳이 말하자면 전자에 가깝습니다." 필로윈은 굉장히 태연하게 공주의 말을 맞받아 쳤다. 메이린느는 갑자기 온화하기로 유명한 여신, 자연과 생명의 여신 네트릴리아에게 기도를 올 리고 싶은 심정이 되어 그를 노려보았다. 사납게 뜬 그녀의 푸른 눈동자 에는 그녀의 동생 훼이드리온을 능가하는 의지가 느껴지고 있었다. 과연 메이린느는 훼이드리온을 여태까지 키워온 누님이었다. "좋아요. 이해하죠. 디바이어 경은 아예 작정하고 있는 거 같으니까." "무엇을 이해하시는지는 잘 알 수 없지만, 감사합니다." 별로 고마워하는 것같이 않은 말투와 표정으로 감사를 표하는 그의 태 도에 그녀는 인내심의 한계가 툭툭 불거져 나오는 듯한 느낌을 느꼈다. 필로윈은 그 정도로 공주의 신경을 계속 건드리고 있었다. 메이린느는 자신의 성격이 이다지도 격했었나, 하는 생각을 해보며 들끓 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얼마 후 차분히 마음이 가라앉는 것을 느낀 그녀 는 깊은 호흡으로 노력을 마무리하고 필로윈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빛 은 여전히 도전적이었다. "어제 멕스힐튼 저택에서 있었던 일. 내가 모를 줄 알고 있었나요?" "아, 그것 말입니까?" "'아, 그것 말입니까?' 라고 태연하게 지껄일 상황이라고 생각하나요, 지 금이? 디바이어 경, 대체 무슨 일을 저지른 거죠?" "다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메이린느는 그런 말을 하고 있는 필로윈이 빙그레 웃기라도 했다면 당 장 주먹을 날렸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왕성의 여러 일들은 이 나이까지 들으면서 자라왔고 항상 부드러운 분위기일 수 없었던 그녀였기에 흥분 하며 꽤 무서웠다. 게다가 이렇게 진정으로 열이 받게 되면 어떻게 변할 지는 그녀 자신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엄청 더러울 것이라고 예상은 하지만 말이다. 그녀는 죽기 전에 한번만 더 참아보자, 라는 기특한 마음으로 분을 삭히 며 애써 목소리를 가라앉혔다. "그러니까 대체 어떤 생각으로 그런 일을 벌였냐는 거예요, 제 말은." "그런 일… 이라. 멕스힐튼 가의 후계자가 좀 다친 것 말이십니까? 저희 의 부탁을 잘 들어주지 않고 반항을 하시길래 조금 무력을 쓴 것 밖에는 없습니다만?" "이, 이보게, 필로윈." 바이마크는 계속 공주를 자극하는 말만 해대고 있는 친우의 의도를 짐 작할 수 없어 불안한 어조로 그를 불렀다. 하지만 필로윈은 손을 들어 친 우를 제지하고는 계속 공주만을 바라보았다. 메이린느는 드레스를 꽉 쥔 손에 핏줄이 솟아올라 벌겋게 변색되어버릴 지경이었지만, 결코 힘을 빼지 않았다. 아니 힘을 뺄 정신조차 없다고 말 하는 게 더 옳았다. 그녀는 태어나서 난생 처음으로 최악의 기분을 맞이 하고 있는 중이었으니까. "디바이어 경." 누군가 말했다. 사람이 정말 화가 나게 되면, 그 음성에는 감정조차 사 라진다고. "말씀하시지요, 공주님." "당신은 나로 하여금 증오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군요." "그런가요? 죄송합니다." "아니요. 죄송할 거 없어요. 아직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남자의 몸을 그 렇게 망쳐놓고 조금 무력을 쓴 것밖에 없다고 뻔뻔하게 말하는 당신. 그 런 당신인데 이해 해야죠, 제가." 대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얼굴인 그녀를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고민 하는 얼굴인 필로윈은 이내 빙그레 웃어버리며 그 뻔뻔한 입을 다시 열 었다. "별로 뻔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공주님도 아시다시피 지금 이 왕성은 저와 헤이스티론 경이 주도한 반란으로 진압되어있는 상태이죠. 저희는 반란의 이름 아래 왕성 안의 모든 귀족들을 휘어잡을 의무가 있 습니다. 그 의무를 이행하던 중에 불의의 사고 같은 것은 당연히 있을 수 있는 것이죠. 그거가지고 일일이 그렇게 반응하시면 처음에 하셨던 약속 이 깨질 수 있는 것입나다만?" 메이린느는 생각했다. '이 남자. 역시 보통이 아냐.' 보통 사람이라면 쉽게 내뱉을 수 없는 말을 증오스러울 정도로 빙글거 리는 얼굴로 태연하게 내뱉고 있는 그를 보며 그녀는 조금이라도 그를 올바른 사람으로 봤던 자신을 질책했다. 한때는 조금이라고는 해도 그에게 기대를 해보고 있었던 공주였지만 이 제는 완전히 생각이 바뀌었다. '이 남자도 마찬가지다. 시간이 지나면 지 금의 왕성보다 더 악한 상태로 만들어놓을 지도 모르는 남자다.' 그녀는 필로윈을 그렇게 평가해버리고 벌떡 일어섰다. "가십니까?" "네, 가려고요. 당신 앞에 더 앉아있다가는 나조차 오염될 거 같군요." 어느새 호칭은 차갑게 바뀌어버리고, 필로윈을 향해 던지는 말 하나 하 나에는 가시가 박힌 듯 따가웠다. 독설에 독설을 더하여 말하는 그녀를 바라보며 필로윈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피식 웃고는 인사했다. "내궁까지는 상당히 멀 텐데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안 그래도 그럴 참이에요. 헤이스티론 경. 잘 계세요." "네, 네, 공주님." 황급하게 서둘러 답변하고 바이마크는 얼른 몸을 일으켰다. 공주가 나가 는데 앉아있는 것은 결코 예의가 아니었다. 물론 아예 대놓고 공주를 무 시하고 있는 필로윈은 예의 같은 건 필요 없다는 식으로 일어서지 않고 있지만. "나이트 슈란가트." "네, 단장님." 공주의 움직임을 뒤쫓아가려던 슈란가트는 단장의 부름에 고개를 돌렸 다. 바이마크는 자신보다 약간 옅은 색을 가진 눈동자를 바라보며 작게 턱을 끄덕였다. "잘 모셔라." "네, 명심하겠습니다." 자신의 후계자답게 단단히 인사하며 공주의 뒤를 따르는 슈란가트의 모 습에 바이마크는 조금이라도 안도가 되는 것 같았다. 그래도 유능한 기사 가 붙어있으니 공주가 조금이라도 안전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말이 다. 그렇게 그가 안심하며 자리에 다시 착석할 때, 슈란가트가 열어준 문을 나서려던 공주가 잠시 멈춰서 말했다. "필로윈." 청아하고 아름다운 목소리. 하지만 차가웠고 그만큼 냉정했다. 필로윈은 어느새 경어를 삭제해버린 채 자신을 부르는 공주의 부름에 고개도 돌리지 않고 답했다. "네, 공주님." 그녀도 문밖을 쳐다볼 뿐, 그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그들 사이에서 슈란 가트가 난처함에 몸을 사리며 쩔쩔맬 뿐, 아무도 어떠한 반응도 하지 않 았다. 메이린느는 숨조차 막힐 것 같은 긴장 속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간단히 말하고는 사라졌다. "제가 어떻게 행동하든, 이제 당신의 제재는 받지 않아요." 슈란가트는 그녀의 말을 이해할 틈도 없이 앞서 방을 나가버리는 그녀 를 다급하게 쫓아갔다. 결국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말이다. 문이 닫힌 방안. 필로윈은 태평하게 앉아 있다가 공주가 마지막으로 남 긴 의미심장한 말에 찔끔했는지 문을 돌아보았다. 이미 사라져버린 공주 가 거기에 있을 리는 없지만 한동안 그의 눈은 그곳에 박혀있었다. "흠, 흠." 유로드빌츠 백작은 그쯤에서야 겨우 자신의 존재를 표출할 수 있었다. 기름진 이마를 손수건으로 문지르고 한번 더 헛기침을 해대자 이야기 상 대였던 필로윈의 고개가 본래 상태로 돌아왔고, 그를 향해 유로드빌츠 백 작은 잠시 끊어졌던 이야기의 고리를 걸었다. "잠시 끊어졌는데, 흠, 아무튼 할 말은 계속 해야겠소. 내가 반란에 동참 하게 된다면 나에게 이득을 줄 수 있소?" 메이린느 덕분에 유로드빌츠 백작에게 가졌던 증오가 많이 풀려버린 필 로윈은 아직까지도 그 일에 집착을 버리지 않고 있는 그를 찬양하고픈 마음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리 어렵지 않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하 고는 대답했다. "약속하오. 많이는 아니더라도 조금이라도 이득은 있을 것이오." "좋군. 알았소. 협조하지." 멕스힐튼 가문처럼 무력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여러 사건들 때문에 예 상외로 많은 시간을 소비한 협상(?)은 유로드빌츠 백작의 간단한 말로서 드디어 종결되었다. 필로윈은 그의 대답을 듣는 즉시 몸을 일으켜 문을 나섰고 그 뒤를 따라 대충 인사를 건넨 바이마크도 방을 나왔다. 유로드 빌츠 백작은 또 다시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하인 을 시켜 술을 가져오라고 하고는 혼자서 껄껄 웃어대고 있었다. 별로 듣기 좋지 않은 유로드빌츠 백작의 웃음소리를 뒤로하고 서둘러 저택을 빠져나온 필로윈은 겨우 숨을 쉴 수 있겠다는 듯이 깊은숨을 들 이쉬었다. "후우, 그냥 있는 것조차 거북한 저택이군." 바이마크가 동의한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고개를 돌려 저택의 겉 을 관찰했다. 밖에서 보기에는 지극히 정상적이었지만 안은 상상을 초월 하는 이곳, 유로드빌츠 저택. 바이마크는 이해할 수 없는 성격을 가지고 있는 유로드빌츠 백작에 대한 감상을 간단한 몸짓(고개 젓기)으로 표현해 보고는 친우의 옆을 걷기 시작했다. 필로윈이 로브를 여미며 문득 입을 열었다. "공주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나." 바이마크는 여전히 강한 바람에 꿋꿋이 맞서며 대답했다. "글쎄. 공주님의 생각은 지금까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던 터라 짐작할 수가 없네. 다만 자네에게 무척이나 화가 난 상태라서 무슨 일을 벌일지 걱정이 되는군." "그건 나도 마찬가지네만, 이런 생각도 드는군. 그렇게 뒤편에만 있던 공주가 이제 나서봤자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하는." "흐음. 그렇기도 하군." 언제나 일선에서는 물러나 있고 정치와는 거리가 먼 곳에서 살아가던 존재, 메이린느 공주. 태자 훼이드리온은 국왕의 뒤를 이을 후계자로서 여러 교육을 받았고 공주는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이런 일에는 더욱 더 어울리지 않았고 멀었다. "뭐, 그냥 잊자고. 한낱 공주가 해봤자 뭘 하겠나. 그리고 이미 우리는 성공 직전에 와있네. 흔들릴 거 없어." 필로윈은 태평하게 말하며 훗훗 웃어대다 자신만만하게 씨익 미소를 띄 웠다. 그 미소에 조금 고민하는 표정이던 바이마크는 덩달아 미소를 지으 며 훗 하고 웃어버렸다. 그렇다. 골치 아픈 것은 없었다. 그들은 왕성을 바꿀 것이고 나아가 나 라를 부강하게 할 것이다. 지금은 그 기초작업일 뿐이다. 흔들릴 건 없었 다. 그들은 오랜만에 술이라도 한잔 걸치기로 약속하고는 바이마크의 집을 향해 즐거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공주님." 하론 집사는 거칠게 내궁의 현관을 열고 들어오는 공주에게 물음을 막 던지던 참이었다. 말릴 새도 없이 거센 기세로 뛰어나간 공주에 대한 걱 정으로 식은땀까지 흘리고 있던 그는 공주가 돌아왔다는 사실에 대해서 안도의 감정을 가짐과 동시에 무슨 일을 저지른 건 아닌가에 대해서 심 각하게 고민해야만 했고, 그래서 일단 질문을 해보기로 한 것이다. 메이린느는 자신의 집사의 앞을 지나면서 그에게 이상적인 답변을 해주 었다. "……." 열이 받은 상태라 그녀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상태였던 것이다. 하론 집사는 공주가 태어난 후로 최초로 물음을 무시당했다는 충 격 때문에 조금 비틀거리다가 자신의 어깨를 잡아주는 손길에 정신을 차 렸다. 시녀 하나가 문을 닫는 소리가 들렸고, 경비를 서고 있는 기사들이 2층으로 올라가 버리는 공주를 망연자실 쳐다보고 있는 가운데, 그의 어 깨를 잡아줄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감사합니다, 슈란가트 님." "천만에요. 조심하셨어야죠." 슈란가트는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손을 놓았다. 외눈 안경을 고쳐 쓰며 하론 집사는 지그시 2층 쪽으로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디바이어 님을 만나서 가셨다가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아, 일이라……. 있기는 있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길래 저렇게 화를 내시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런 모습도 오랜만에 보는군요." "저런 모습이요?" "메이린느 공주님께서는 화가 나시면 그 누구의 말도 듣지 않으십니다. 그 화가 풀릴 때까지만 일체의 이야기도 하지 않지요. 아마도 슈란가트 님께서 오늘은 조금 피곤하시겠군요." 하론 집사는 슈란가트에게 애도를 표한다는 듯이 고개를 숙이고는 물러 났다. 왼쪽의 복도로 들어가는 그의 모습을 쫓던 슈란가트의 눈은 자연스 럽게 2층으로 이어진 계단으로 향했고, 곧 그의 발길도 떨어졌다. 가끔씩 지나다니면서 인사하는 시종들의 소리 빼고는 고요하기 그지없 는 내궁 2층. 슈란가트는 평소의 고요함과는 상당히 이질감이 느껴지는 정적에 잠시 적응하지 못해 두리번거리다 메이린느 공주의 방 앞에 섰다. 굳게 닫힌 문은 안과 바깥의 경계를 뚜렷이 나타내며 그곳을 막고 서있 었다. 슈란가트는 조용히 손을 들어 문을 두드렸다. "공주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잠시 기다렸지만 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는 하론 집사의 말을 상기하 며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스르륵. 적막한 움직임을 나타내며 문은 소리 없이 방안을 드러냈다. 메이린느는 항상 앉아있는 그 쇼파에 앉아있었다. 하얀 색의 드레스가 풍성하게 그녀를 받쳐주고 있었고, 곱게 모은 두 손과 간단히 감아버린 두 눈은 그녀의 침묵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었다. 슈란가트는 순간 숨이 멎 는 듯한 긴장에 문을 닫는 손까지 떨어버렸다. 햇빛은 비치고 있었지만 방안은 그전처럼 따뜻하지 않았다. 따스하고 부 드러운 메이린느의 미소와 같았던 방안의 분위기는 냉각되어버린 공기가 굳어 팽팽하게 당겨지고 있었기에 숨쉬는 것조차 거북했다. 그런 방안에 서 슈란가트는 문 앞에 우뚝 선 채, 그리고 메이린느는 쇼파에 홀로 앉은 채 침묵했다. 정적이 흘렀고, 의지가 멈추었다. 마력조차 굳어버린 것 같은 시간이 한 참을 계속됐다. 그냥 서있는 것에는 익숙한 슈란가트는 그 시간 동안 공 주의 고백을 생각하는 등 갖가지 상념을 떠올렸고 그 대답을 생각했다. 공주의 고백. 공주의 생각. 자신의 감정. 자신의 생각. 그런 것들 속에서 슈란가트는 잠시 혼란스러워지는 것 같아 머리를 털었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머리는 스르륵 흔들렸고 그는 잠시 머리를 매만졌다. 그리고 그때 메이린느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이미 해질 녘의 붉은 기운 이 창 밖으로 지나가고 있던 시간이었다. "미안해요. 기다리게 해서." 슈란가트는 '어느새 이렇게 시간이 흘러버린 거지.'라는 생각과 함께 담 담한 어투로 대답했다. "아닙니다. 화는 풀리셨습니까?" "네, 대충은요. 이제 좀 말할 만하네요." 하론 집사의 말이 다시 한번 생각나면서, 그는 차근히 그녀에게 다가갔 다. 메이린느의 푸른 눈이 그를 향했다. 슈란가트는 그 눈 속에서 옅은 슬픔을 감지했다. 메이린느는 해가 져 가는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슈란가트는 그녀의 옆에 서서 그녀와 눈길을 같이 했다. 그녀가 말했다. "어떻게 할건가요?" 그는 말했다. "무엇을 말입니까?" 그녀가 재차 말했다. "알고 있잖아요." 그는 침묵했다. "이제 어떻게 할건가요?" 메이린느의 음색은 조금 떨리고 있었다. 슈란가트는 뭐라고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계속 침묵을 이어갔다. 그녀가 슈란가트 대신 말하듯이 말을 이었다. "슈란도 들었다시피 난 이제 저항할 생각이에요. 어떻게 될 지는 모르겠 지만 아무튼 그럴 거예요. 그러면 슈란과는 필시 적으로 돌아서게 돼요. 그건 슈란과 내가 이렇게 같이 있지 못한다는 사실을 뜻하는 것이고요." "알고 있습니다." 슈란가트는 고개를 움직여 그녀를 바라보았다. 슬픈 듯이 흔들리는 그녀 의 눈동자가 금빛 머리카락에 가려 살짝 보였기에 다시 고개를 들기는 했지만. 그는 작은 음성으로 말했다. "어떻게 해야할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전 임무를 망각할 수 없습니 다. 그렇기에 공주님께서 하시려는 일이 단장님께 해가 되는 일이라면 무 조건 막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제가 그 임무를 완수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고민일 수밖에 없는 표정으로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 조금 후, 감미로 운 목소리가, 조금은 촉촉하게 젖어있는 음성이 그를 감쌌다. "이왕이면……." 메이린느의 혼잣말인 듯했다. 하지만 슈란가트는 듣고 말았고, 그녀에게 묻고 말았다. "네?" "아니요……. 그냥……." 그녀답지 않게 말을 끌자, 슈란가트는 금방 그녀의 맘을 깨닫고 입을 다 물었다. 메이린느의 고백. 그것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고, 그의 맘을 뒤흔 들었다. 임무. 기사도. 공주. 고백. 슈란가트는 눈동자 안쪽이 지끈거리는 듯한 기분에 눈꺼풀이 구겨질 정도로 강하게 눈을 감았다. '무엇이 옳은 것인가.' 아직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많은 일들이 그를 괴롭히고 있었 다. 그는 항상 버릇대로 왼쪽 검지 손가락을 엄지로 주무르며 상념에 잠 겼다. 그 와중에서도 메이린느의 시선은 창 밖을 향해 있었다. "…그냥 내 곁에 있어주면 안되나요? 슈란? 그러면 안 되는 건가요?" 애원. 슈란가트는 그녀의 감정을 느꼈다. 애절하게 기도하는 듯한 음색 의 그녀의 애원은 그의 가슴은 때렸고 흔들었다. 이 시간, 슈란가트는 세 상에서 정신적으로 가장 괴로운 남자가 되었다. "슈란이 돌아서는 거… 원하지 않아요, 나……. 생각해줘요, 슈란. 공주 의 고집이라고 여겨줘요. 그렇게 여겨줘요." "……생각해보겠습니다." 슈란가트는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대답을 내놓고 조용히 창 밖을 바라보았다. 석양이 밀리며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빛과 태양 의 신 마스트가 눈을 감고 쉬는 동안 달과 운명의 여신 하실루스의 상징 이 세상을 지배하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땅과 하늘의 신 오파투스도 하실루스의 은빛 눈동자에 감싸져 숨을 쉬는 공간. 그 은빛만큼이나 애절 한 감정들이 왕성의 어느 곳에서 휘몰아치고 있었다. "고마워요." 메이린느는 작게 인사하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방 금 전까지 그곳에 존재하고 있던 슬픔은 깨끗이 사라져있었다. 놀라운 감 정 변화. 그녀는 뭔가를 결심한 듯이 단호한 눈빛을 만들었다. 갑자기 노크 소리가 들려왔고 슈란가트와 메이린느는 문으로 시선을 돌 렸다. 어느새 발동한 마법의 등에서 쏟아져 내리는 흰빛이 밝게 문을 방 안을 비추었고, 문이 열렸다. "공주님.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손님이요?" 이 시점에 그녀를 찾아올 인물이 얼마나 될까. 그녀는 들어오게 하라고 말하고는 드레스를 정리했다. 유로드빌츠 저택에서부터 내궁까지 달려오 듯 하면서 전혀 신경 쓰지 않았던 터라 많이 구겨져 있고 여기저기 먼지 도 묻어있었다. 하론 집사는 그녀의 지시에 잠시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왔다. 그 사 이 슈란가트는 그녀가 앉아있는 쇼파 뒤로 자리를 이동했고 그녀는 드레 스 정리를 마쳤다. "금안 기사단 단장 바이마크 폰 헤이스티론 경의 아드님이신 하이마크 폰 헤이스티론이십니다." 슈란가트는 익숙한 이름에 급히 눈을 돌렸다. 하론 집사가 문을 닫고 밖 으로 나가는 모습이 보였고, 그 앞에 슈란가트보다 조금 작지만 나름대로 다부진 체격을 가지고 있는 소년 기사가 있었다. 기가 수련생들이 입는 금안 기사단 제복과 비슷한 제복을 차려입고 허리에는 롱 소드도 구비하 고 있는 그 모습은 당장 기사가 된다고 해도 손색이 없을 만한 자세였다. "바, 반갑습니다, 공주님! 하이마크 폰 헤이스티론이라고 합니다!" 빳빳하게 굳어있는 자세로 하이마크는 거창하게 거수 경례를 올렸다. 메이린느는 처음 보는 소년을 향해 살포시 미소지었다. "하이마크 폰 헤이스티론? 헤이스티론 경의 아드님이시라. 이리 오세 요." "네, 네!" 여전히 떨이는 목소리로 대답한 하이마크는 툭 건드리면 똑 부러질 것 같은 움직임으로 걸어와 공주의 앞에 섰다. 그녀는 싱긋 웃으며 그에게 자신의 맞은 편 쇼파를 권했다. "앉으세요. 그렇게 굳은 채로 서서 무슨 이야기를 하겠어요." "가, 감사합니다!" "목청도 좋군요." 조금 전의 슬픈 여성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다시 예전의 당당하고 부 드러운 공주의 모습을 찾은 메이린느. 슈란가트는 드러나지 않게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이마크는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등이 꼿꼿이 서있었고 두 손 은 무릎 위에 올려진 자세라 '경직'에서는 도저히 벗어나지 못하는 모양 이었다. 메이린느는 싱긋 다시 웃어 보이며 말했다. "긴장 푸세요. 못 올 데 온 것도 아닌데." "아, 네, 네에……." 대답을 하며 긴장을 풀려 애쓰는 모습이 역력하긴 하지만, 성과는 별로 없었다. 그녀는 오히려 자기가 더 난처해지는 것 같아 부끄러울 지경이었 다. 그래서 그를 배려하기로 하고 물었다. "무슨 일로 오셨어요? 헤이스티론 경의 말을 전하러 온 건가요?" "네? 아, 아닙니다. 아버님과는 전혀 상관없는, 제 스스로 의지로 찾아온 것입니다." 약간은 뜻이 깊은 그 대답에 메이린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이마크는 이왕 입 연 거 '에라, 모르겠다'라는 듯이 말을 이었다. "기사들에게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공주님께서 유로드빌츠 저택을 방 문하셨던 일을. 그래서 뭔가 깨달은 바가 있어 이렇게 공주님을 찾아왔습 니다." "그 깨달은 바가 무엇인가요?" 슈란가트는 기사의 감에 뭔가가 걸렸다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존경하는 라시엔트 제1기사의 아들이며 기사 수련생들 중에서도 최상위의 실력을 가지고 있는 하이마크. 그가 뭔가 심상치 않은 이야기를 꺼낼 것 같은 기 분에 슈란가트는 내심 긴장해버렸다. 하이마크는 자신의 아버지와 굉장히 닮은 얼굴과 눈빛으로 단호하게 선 언했다. "공주님을 돕고 싶습니다." '그래, 이거였어.' 슈란가트는 자신의 감을 칭찬해야하는지 저주해야하는지 알 수 없는 기 분이 되어버렸다. --------------------------------------------------------------------- 네에, 그리하여(뭐가?) 86편입니다. 뭔가 전개가 휙휙 나가버려서 할 말은 그리 없군요. 우헤- 그냥 편하게 봐주세요. 일은 이렇게 나가는 거니까. 곧 다시 시점이 변환되어 에코로 날아갈 것 같습니다. 한편 정도는 더 있 어야하겠지만요. 아무래도 출판본에서는 편수를 바꿔야할 것 같습니다. 83편이 뒤쪽으로 당 겨져야 뭔가 독자분들이 덜 혼란을 느끼시겠더라고요. 아아. 긁적인 겁니다. 우에에에- 네에, 그럼. 좋은 하루 되세욧! 어둠의 기사 DARK KNIGHT TEAM... 덧하나. 추천 감상 비평. 부비적부비적 해드린다니까요!(>.<)/ 덧두. GO CAMA 덧석. <-- 바뀐 거 아시죠? 번 호 : 10 / 17 등록일 : 2001년 02월 16일 17:00 등록자 : 암음기사 조 회 : 78 건 제 목 : [카드 게임 판타지]『카드 마스터(Card Master)』#087 카드 게임 판타지(Card Game Fantasy) 카드 마스터(Card Master) 87. 루비네 마을. 훼이드리온이 하루 묶었던 바가 있는 여관, 전사의 노래에도 어김없이 아침이 찾아오고 햇빛이 스며들고 사람들이 박동 했다. 별로 손님이 없었던 탓에 카운터에 앉아 연신 하품을 해대며 지루함을 떨치려 애쓰고 있던 단발머리의 여인은 심심해서 잡았던 장부를 이내 툭 던져버린 후 의자 등받이가 휘어질 정도로 늘어지게 기지개를 폈다. 썰렁 한 식당의 분위기는 그녀의 기분은 한결 더 나른하게 만들었고, 그래서 그녀는 매우 심심함을 느꼈다. "아아아아, 심심해애! 오늘은 숀도 안 오고 말이야. 보고 싶어요, 쇼온!" 루비네 마을의 촌장, 숀에 대한 노골적이고 각별한 애정을 표현하던 지 나는 곧 주방에서 걸어나오고 있던 자신의 쌍둥이 언니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렇게 보고 싶으면 만나러가지 그러니?" 시나는 동생과 똑같은 단발에 쌍둥이라는 관계인 탓에 구별할 수 없는 이목구비를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이 마을에 처음 오는 사람들은 이 두 자매를 제대로 구분하는 사람이 드물었고, 그건 훼이드리온도 마찬가지였 었다. 카운터에 팔을 올려 턱을 괸 지나는 하얀 색의 앞치마를 풀어 카운터 한쪽에 걸어놓는 언니를 보며 문득 떠오르는 기억을 이야기했다. "시나. 전에 그, 미소년 여행자 기억나?" 시나는 동생의 말에 잠시 무언가 생각하는 얼굴이 되더니 이내 명쾌하 게 대답했다. "응. 기억나. 숀하고 마스터 카드 대전을 했던 그 소년 말하는 거지?" "그래, 걔." 끄덕. 지나는 고개를 움직여 답하고는 여전히 흐리멍텅한 표정으로 전방 의 문을 물끄러미 주시했다. 아무래도 오늘 내로는 절대 열릴 거 같지 않 을 듯이 닫혀있는 그 문을 의미 없이 바라보며 뜬 금 없이 그녀가 말을 이었다. "걔가 태자라면 어떨 거 같아?" "무슨 말이니?" 시나는 동생이 얼마나 심심했으면 그런 황당하고도 어처구니없는 생각 까지 하게 되었는지 걱정이 되었다. 지나는 언니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관심 없다는 투로, 무료한 눈빛 으로 말했다. "어제 이 뒷집 아줌마한테서 들은 건데 말이야. 얼마 전에 태자가 후계 자 수련을 떠났데. 그리고 서가도를 따라서 움직였는데, 들어보니까 걔가 우리 여관에 들렀던 그 시간하고 대충 맞아떨어지는 거야. 왕가의 상징은 부드러운 금발이잖아. 게다가 얼굴까지 잘 생겼었고. 그래서 대충 추측해 본 거야." 천천히 턱을 괴고 있던 손을 교체하면서 지나가 이야기를 끝마쳤고, 시 나는 동생의 말에서 뭔가를 느꼈는지 자신의 머리를 비비꼬며 잠시 생각 에 잠겼다. 하지만 상념은 그리 길지 않았고, 곧 그녀는 동생을 향해 이 런 말을 던져주었다. "많이 심심했나보구나, 지나. 장부 정리라도 다시 해보지 그러니?" "응. 무지 심심해. 심심해서 미칠 지경이야. 그리고 장부 정리는 어차피 언니가 했으니까 완벽하잖아." 시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앞치마를 손에 들었다. 그리고 친절하게 빙긋이 웃으며 동생의 의견을 물었다. "차라도 마실래?" "뭐 있는데?" "디오느 차는 많이 남아있어." 은근슬쩍 디오느 차를 강요하는 언니를 빤히 쳐다보던 지나는 이윽고 간단하게 대답했다. "에포크 차(Coffee: 커피)." "왜 물어봤니?" "흔히 말하는 예의상, 이라는 거야." 시나는 동생의 성격에는 두 손들었다는 듯이 태연히 웃으면서 주방으로 들어갔다. 곧 지나가 좋아하는 에포크 차의 감미로운 향이 주방으로 통하 는 문의 미세한 틈을 타고 퍼져 나왔고 그녀는 잠시나마 지루함을 잊은 채 그 향기를 즐겼다. 코끝을 맴도는 그 향이 천천히 퍼지는 공기의 흐름을 타고 식당 전체로 흘러가고 있을 무렵, 지나의 귀로 익숙한 소음이 들려왔다. 소음이라고는 해도 결코 기분 나쁘지 않은, 오히려 기분을 좋게 상승시켜주는 소음. 그녀는 여관 문이 열리는 소리에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기세 좋게 소리 쳤다. "어서 오세요오옷!" 조금 전까지 눈동자를 혼미하게 만들고 있던 졸음을 단번에 쫓아내기라 도 하겠다는 듯이 힘차게 외치는 그녀의 인사에 여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던 손님이 움찔 놀래며 안경을 떨어뜨릴 뻔했다. 지나는 간만의 손님에 기분이 좋은 듯 한껏 즐겁게 미소지었다. "꺄하하하핫. 죄송해요! 너무나 반가워서 말이죠!" "아… 그래요?" 웃으며 눈이 없어지는 사내였다. 청발 그 본색을 증명이라도 하듯 푸른 장발을 엉덩이 아래까지 길게 기른 그는 테 없는 안경으로 없어진 눈을 가리고 있었고, 또한 그 안경으로 자신의 학구적 스타일은 십분 살려내고 있었다. 지나는 척 봐도 머리가 좋아 보이는 이 손님을 속으로 굉장히 마 음에 들어하면서 그를 카운터로 모셨다. "묶어 가실 건가요? 얼마나요?" "네? 아, 얼마나 걸릴지는 잘 모르겠고요. 방 하나 있으면 주세요. 혹시 선불인가요?" 지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선불이에요.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후불도 가능하죠. 후불로 하실래 요?" "그렇게 할게요." "으흠, 그럼 여기에 서명 좀 해주세요오." 그녀는 보는 것도 지겨워져서 카운터 한쪽에 밀어두었던 장부를 낑낑대 며 옮겨와 펜과 함께 내밀었다. 그 사내는 고개를 숙이며 펜을 받아들어 장부에 이름을 기입하고는 다시 그것들은 지나에게 돌려주었다. 지나는 생긋 웃으면서 장부를 받아들고 그 대신 객실 열쇠를 그에게 주었다. "열쇠에 몇 호인지 적혀있죠? 4호실이에요. 요기 좀 하실래요? 준비해둘 게요."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걸로 대충 준비해주세요. 나중에 내려올 테니." "네입, 감사합니다!" 그는 웃는 얼굴을 지우지 않는 탓에 보이지 않는 눈을 한 채로 지나에 게 꾸벅 인사하고는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갔다. 지나는 한참동안 보 이는 그의 길고 기다란 청발을 한동안 응시하다가 곧 장부로 시선을 내 렸다. 장부에 적힌 이름. 지나는 그것을 또박또박 소리내어 읽었다. "카를레오 폰 이흐리트." '레오라고 부르면 화내겠지?'라는 생각에 키득 웃으며 그녀는 주방을 향 하여 크게 소리질렀다. "시나아, 손님이야! 간단한 거 아무거나 준비해줘어!" 쨍그랑. 주방 안에서 뭔가 파괴적이고 비음악적인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고 눈 을 찡그리며 뜨끔하고 있던 지나의 귀를 이어서 날아온 시나의 비명이 두들겼다. "꺄아아아! 제일 아끼는 잔인데!" 지나는 볼을 긁적이며 어떻게 할까 잠시 고민해보다가 이내 카운터 의 자에 풀썩 주저앉으며 자기는 모르는 일이라고 연신 주문을 외웠다. 그것 은 이른바 현실도피라고 불리는 비열하고도 비굴한 상황 대처 방법이었 다. 카를레오는 지나가 건네준 열쇠의 숫자를 보며 방을 찾았다. 2층에 마련 된 여러 방들 중 4호실은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고, 그래서 그는 단번에 방을 찾아내 안으로 들어갔다. 방금 간 듯이 깨끗하고 하얀 침대 시트와 서랍장. 여관이 갖추어야할 가 장 기본적인 것만 간단하게 자리잡아 있는 작은 방을 둘러보며 카를레오 는 피식 웃어버렸다. 수도에서 제법 가까운 마을이었지만 역시 마을의 크 기에 따라 여관의 사정도 달랐다. 그 간단한 논리를 생각하며 그는 방 구경을 그만하기로 하고 다시 1층 으로 내려왔다. 들어서면서부터 느꼈던 향긋한 차 향기가 그의 후각을 자 극하면서 그의 신경을 즐겁게 했다. "와앗, 빨리 내려왔네요?" "아하, 네. 그런데 지금 이 향기는 뭔가요?" 카운터에 앉아서 무언가 지나는 즐기고 있던 카를레오의 질문에 자신이 들고 있는 잔을 가리켰다. "에포크 차예요. 모르나요? 제법 유명한 차인데. 드실래요?" "지금 말고요. 요기 한 다음에 주세요." "네엣! 그럴게요!" 달면서도 쓴, 애매한 그런 향기가 매우 감미로운 느낌을 던져주었고, 그 래서 테이블은 아무거나 잡아 자리에 앉는 순간까지 그의 코를 맴돌았다. 덕분에 그는 여관에 들어서면 주인에게 물어보려고 했던 질문의 내용을 한동안 잃어버렸다. "아, 아 참." 얼마 후 겨우 생각해낸 카를레오는 차가 다 식을 때까지 에포크 차의 향을 즐기고 있던 주인 아가씨를 향해 손을 들었다. "저기 죄송하지만 여쭤볼 것이 있는데요?" "네에? 뭔데요?" 이미 미지근하게 식어버린 커피를 단숨에 마셔버릴 계획으로 먼저 약간 맛을 본 지나는 카를레오의 부름에 반응하며 잔을 내려놓았다. 카운터에 서 그리 멀지 않은 테이블에 앉아있는 카를레오는 자신의 긴 청발을 익 숙하게 묶어 올리면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마을에 혹시… 쇼너…와 비슷한 이름을 가진 이가 있나요?" "쇼너……?" 지나에게는 무척이나 익숙한 어감을 지닌 단어였다. 그녀는 고개를 몇 번 갸웃거리며 골똘히 고민하다 다시 카를레오를 바라보았다. 높게 묶어 올린 머리칼을 정리하고 있던 그는 기대하는 답변을 기다리는 얼굴로 그 녀에게 시선을 던졌다. "일단 있기는 있어요. 우리 마을에서는 아주 유명한 사람인데, 쇼너와 엄청 비슷한 이름을 가지고 있죠. 그런데 그 사람은 왜요?" 그냥 지나가는 투로 넌지시 묻는 그녀에게 카를레오는 어렵지 않다는 듯이 얼른 답했다. "아, 만나야할 일이 있어서요. 그 분을 찾아서 벌써 몇 년을 돌아다니고 있던 터라 이번에도 만나지 못하면 여행을 포기할까 생각 중이에요." "으에, 그럼 이번에 아니라면 바로 포기인 거예요?" "아마도요." 카를레오는 빙그레 웃어 눈을 없애더니 재차 그녀를 재촉했다. "말해주세요. 누구죠?" 지나는 생각 외로 그가 간절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기에 장난칠 생각 은 쏙 빼버리고 진지하게 아는 이름을 말해주었다. 자신이 이 마을에서 가장 사랑하고 좋아하는 인물의 이름을. "마을 사람들이 대부분 숀이라고 부르는, 우리 마을의 촌장이에요. 쇼너 와 비슷한 이름이죠? 그 분 외에는 우리 마을에서 비슷한 이름을 가진 이는 제 기억에는 존재하지 않네요." 루비네 마을 토박이인 지나는 마을 주민들 대다수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그 사실은 거의 확실했다. 카를레오는 그녀의 대답을 기억하 며 스스로 중얼거려보고는 확인차 되물었다. "숀…이요? 촌장이라고요?" "네, 그래요. 제가 가장 사랑하는 분이죠." 역시나, 숀에 대한 애정이 너무 넘쳐 나서 주체를 하지 못하는 지나였 다. 장난스럽게 웃어대며 에포크 차를 비워버리는 그녀를 향해 "아하하. 그 래요?" 라고 대답해준 카를레오는 안경을 밀어 올리고는 다시 그녀를 바 라보았다 "한가지만 더 물어도 될까요?" "음, 사적인 것들만 아니라면, 얼마든지요." 막 찻잔을 주방으로 나르려고 하고 있던 그녀는 의자에서 내려서며 말 했다. 그는 그녀가 귀찮아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마음을 품고 정중하게 물었다. "그 숀이라는 분의 성이 혹시 히브리드 아닌가요?" "히브리드?" 지나는 '그랬던가?' 라는 표정이 되어 볼을 긁적였다. 생각해보니, 그녀 는 숀의 성조차 제대로 알고 있지 못했다. 그 시점에, 지나가 아닌 다른 여성의 말소리가 멋진 타이밍으로 새롭게 들려왔다. "맞아요, 히브리드. 제가 기억하는 바로는 숀의 성은 히브리드가 맞을 거예요." 주방에서 흰 앞치마를 두른 여인이 불쑥 걸어나왔고, 그 순간 카를레오 는 여관 주인 아가씨가 두 사람으로 분신을 했는가, 하고 착각을 해버렸 다. 똑같은 생김새를 가진 여인이 두 사람으로 늘어나 버렸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하지만 곧 그는 그녀들의 정체를 금방 짐작할 수 있었고, 다행 히도 큰 무리 없이 그 충격 속에서 헤어 나왔다. "쌍둥이셨군요." "네, 저흰 쌍둥이예요. 주문하신 것 나왔습니다." 시나는 지나보다는 얌전함이 느껴지는 미소를 띄우며 들고 나온 쟁반에 서 접시들을 내려놓았다. 쇠고기 수프로 보여지는 것과 마늘 빵, 그리고 세 종류의 소스. 완벽한 식사는 아니더라도 대충 허기를 달래는 건 그다 지 힘들지 않을 메뉴였다. 카를레오는 웃는 얼굴로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시나도 "맛있게 드 세요." 라고 말하면 친절히 웃고는 물러났다. 그녀가 다시 주방으로 들어 가던 중에 시나가 건네는 찻잔을 받아들고 있을 때, 카를레오의 말이 들 려왔다. "어디로 가면 숀이라는 분을 만날 수 있죠?" "먼저 드세요. 다 드시면 가르쳐드릴 테니." 지나는 여전히 친절하게 미소를 띄우며 대답했다. 카를레오는 그 말속에 서 자신을 배려하는 그녀의 마음을 느끼고는 눈을 없애는 웃음으로 충분 히 보답하고는 서둘러 요리들을 처리해나가기 시작했다. 이제 곧 여행의 끝을 맞이하는 터라 그가 요리를 먹어 가는 속도는 평소의 속도를 훨씬 웃돌았고, 그런 탓에 지나가 예상했던 시간이 훨씬 못 미치는 시간에 그 는 그릇을 모두 비웠다. 마늘 빵에 마지막 남아있던 소스를 발라 씹어먹고는 물로 깨끗하게 마 무리하면서 그는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하아, 정말 맛있군요. 이런 작은 마을에서 일류 식당 수준의 요리를 먹 을 수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는데. 잘 먹었어요." 시나는 카를레오의 빠른 속력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가 간신히 미소를 지으며 대답할 수 있었다. "아하, 과찬이세요. 입맛에 맞으셨다니 저야 다행이죠. 시나, 이제 설명 해드려." 그녀는 잊지 않고 동생에게 말하고는 그릇들을 챙겨 주방 안으로 가지 고 들어갔다. 지나는 카를레오를 끌고 발랄한 몸짓으로 밖으로 나가서 숀 의 집으로 가는 길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저기 과자점 보이죠?" "붉은 간판 말인가요?" 카를레오는 눈을 흐릿하게 뜬 상태에서 그녀의 말에 대답했다. "네, 거기요. 그 뒤편으로 돌아가면 숀이 사는 집이 보여욧!" 지나는 그렇게 대답하면서 언젠가 같은 말을 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 었지만 이내 덮어버렸다. 골치 아프게 일일이 기억할 일도 아니거니와 별 로 그럴 생각도 없었으니 말이다. 카를레오는 지나가 가리킨 방향을 다시 한번 쓰윽 훑어보고는 빙그레 웃으며 그녀에게 인사했다. "고마워요. 나중에 돌아오죠." "네엣! 잘 다녀와요! 숀에게 지나가 안부 전한다고 해주시구요!" "아하하, 그러도록 하죠." 목례를 간단히 해 보이며 걷기 시작하는 그의 뒤로 지나가 손을 휘저으 며 인사했다. 안부 전하라는 말은 끝까지 잊지 않고. 그는 빙긋 웃음을 지우지 않고 과자점을 향해 걸어갔다. 완전 눈이 사라지는데도 잘 걷고 있는 모습은 참으로 신기한 것이었다. 한참을 걸어가 붉은 간판의 과자점을 돌아 들어가자, 곧 그의 눈에 기와 로 이루어진 지붕이 인상적인 작은 집이 들어왔다. 흔히 볼 수 없는 지붕 양식인 집을 조금 관찰하던 그는 곧 문 앞으로 다가가 문을 두드렸다. "계신가요?" 톡톡톡. 보통 노크 소리와는 사뭇 다른 소리가 나는 숀의 집. 그렇게 주인을 부 르고 난 후 카를레오는 잠시 대답을 기다리는 시간을 가졌다. 조금 시간 이 흐르자 집 안에서 연로한 어르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뉘시오?" 카를레오는 반가움으로 인해 활짝 핀 얼굴로 크게 대답했다. "문 좀 열어주세요! 당신을 만나려고 찾아왔어요! 카를레오 폰 이흐리트 라 합니다!" 열의에 찬 외침. 카를레오는 벌써부터 흥분해버리고 있는 자신의 정신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만나기도 전에 이렇게 흥분해버리면 될 일도 안되고 안될 일은 더 꼬이기 마련이니까. 숀도 그가 마음을 가라앉힐 시간이라도 주는 듯 잠시 침묵했다. 순간적 으로 카를레오의 숨소리만이 문 앞을 방황했고, 그것은 곧 끼익 소리와 함께 열리는 문에 의해 깨졌다. 카를레오의 얼굴에 잠깐 환희가 스쳐지나 갔다. "일단 들어오게." 조용한 음색이 들려왔고 카를레오는 열린 문을 통해 집안으로 들어갔다. 하얀 머리카락을 머리 뒤로 묶은, 생각보다 굉장히 젊은 이미지를 가진 노인이 문을 열어주고 있었다. 카를레오는 왠지 떨떠름한 기분이 되어 침 을 꿀꺽 삼켰다. 문을 닫은 숀은 자신이 먼저 움직여서 손님을 쇼파로 안내했다. 훼이드 리온과도 나란히 앉았던 바로 그 쇼파는 거실의 그 자리에 당연히 자리 하고 있었다. "앉게나." "네, 감사해요." 카를레오는 변하지 않는 말투로 인사하고는 숀이 권하는 자리에 착석했 다. 숀은 그가 쇼파에 앉는 것을 기다렸다가 지체하지 않고 물었다. "무슨 일로 날 찾아왔나." 숀은 약간은 굳은 표정으로 카를레오를 바라보고 있었다. 카를레오는 이 집에 들어온 지 얼마 안되어 두 번째 침을 삼키면서 입을 열었다. "숀…이라는 이름, 맞나요?" "그런 이름을 쓰고 있기는 하네." 카를레오의 표정을 해석하자면 '기뻐서 미칠 것 같다'였다. 그런 기쁨을 뛰어난 인내심으로 간신히 참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타는 목마름을 참아내는 것과도 비견될 수 있을 만한 초인적인 인내로 환희의 고함을 참아내며 목소리를 쥐어짰다. "당신을 찾아서 많은 시간을 헤맸습니다." 숀의 얼굴이 급격히 굳어져버린 건 아마도 그 시점이었을 것이다. 카를레오는 씰룩대는 눈두덩이를 주체하지 못한 채 말했다. "카드의 현자 쇼너 히브리드 님." ------------------------------------------------------------------ 이번 편은 줄수가 그리 길지 않습니다. 아하하. 사실 더 길게 적고 싶었 지만 더 이상 늘일 수가 없군요. 흐음. 카를레오의 완벽한 재등장과 함 께 지나와 시나, 그리고 숀까지 몽땅 등장해버렸습니다. 오랜만에 적으려 니 지나와 시나의 이름이 헷갈려서 몇 번이나 고쳤군요. 어쩐지 그 이름 고치는 데 이번 편의 대부분의 시간을 써버린 듯한 기분이 듭니다. 이거 참.(---)a 에. 아무튼. 다음 편은 8이 두 개인 88편이로군요. 어쩐지 담배 생각이 나는 건 왜일까요. :) 다음 편에 뵙겠습니다! 덧하나. 추천 감상 비평. 받습니다. 받아요. 덧두. GO CAMA 덧석. 88편. 드디어 마스터 카드 대회의 예선편입니다.(>.<)/ (엄청 돌아왔군. 컬럭;;;) 번 호 : 11 / 17 등록일 : 2001년 02월 16일 17:00 등록자 : 암음기사 조 회 : 76 건 제 목 : [카드 게임 판타지]『카드 마스터(Card Master)』#088 카드 게임 판타지(Card Game Fantasy) 카드 마스터(Card Master) 88. 아이는 막 만들어진 것 같은 순백을 자랑하는 테이블보를 물끄러미 내 려다보며 뚱하게 말했다. "적응이 안 돼." 거대한 여관에서 지하로 내려오는 그 끔찍한 길이의 계단을 생각하면서 훼이드리온이 천천히 고개를 움직였다. "동감이야." 그들 중에서 유일하게 마스터 카드 대회 출전 경험을 가지고 있는 미르 는 그 경험이 헛되지 않게 조용히 침묵하면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원체 무표정이었기에 감정을 읽을 수 없다는 것도 어쩌면 한몫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야아, 이거 맛있어!" 멋도 모르고 쿠키를 먹으며 그저 좋은 에타의 외침. 아이와 훼이드리온 이 가지고 있던 긴장한 분위기를 단숨에 깨뜨리는 무지막지한 위력을 자 랑한다. 아이는 에타를 에타에게 황당한 눈길을 던져주다가 살며시 이마를 주물 렀다. 그리고 조금 전보다는 깨끗한 표정으로 훼이드리온을 바라보았다. "여기서 예선을 하는 거야?" 훼이드리온은 이렇게 테이블마다 몰려있는 엄청난 수의 마스터 카드 게 이머들을 관찰하듯이 둘러보다가 그녀의 물음에 답했다. "응. 그런가봐." "맞아." 에타가 그의 대답에 맞장구를 치며 깨끗이 쿠키를 비워버렸다. 쿠키를 좋아하는 줄 알았던 미르는 이레브워츠 쿠키가 아니라는 점에 실망을 했 는지 쿠키에는 전혀 손을 대지 않았고, 소년에게 쿠키를 권하던 에타도 이내 포기하고는 자시 혼자서 열심히 쿠키를 먹고 있었다. 에타가 쿠키 가루만이 남아있는 그릇을 난감하게 내려다보며 어떻게 해 야될지 방도를 강구하고 있을 때, 아이는 여전히 적응이 안 된다는 표정 으로 훼이드리온이 방금 전까지 하고 있던 '게이머 구경'을 이어갔다.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가면서 검은 눈동자를 굴리던 그녀는 기다란 한숨 과 함께 입을 열었다. "후아아, 여관 밑에 이런 곳이 있을 줄 어떻게 알았겠어. 여기 위가 그 럼 그 대광장인 걸까?" 마스터 카드 대회 개회식을 위해서 만들어진 이곳은 대회 참가 게이머 들이 전용을 묶는 거대한 여관의 계단으로 들어올 수 있는 곳이었다(그 래서 구경꾼들은 일체 없고 모조리 게이머들이었다. 물론 게이머와 일행 인 에타와 같은 경우에 출입이 허용된다). 대광장이 차지하고 있는 면적 과 비슷해 보이는 이 식장의 넓이를 대충 어림짐작해서 이 위치에는 지 상에 무엇이 있는지 추측하고 있는 아이의 말에 대답을 한 건 의외로 차 맛이 맘에 들었는지 계속 홀짝대고 있던 미르였다. "여긴 아공간이다." "아공간?" 미르는 눈을 감은 듯 뜬 듯 아리송한 얼굴로 이야기를 이었다. "게이트 산맥의 골드 드래곤이 있던 아공간. 그것과 같은 거다. 아버지 가 만들어낸 아공간이지, 여긴." 그러면서 어떤 감정이 들어있는 눈동자로 주위를 한번 스윽 훑는 소년 의 행동에 아이는 "으음."하며 소년과 시선을 같이 했다. 전체적으로 어두운 분위기. 대충 수를 따져도 100개는 되어 보이는 테이 블 수가 들어갈 수 있는 굉장한 넓이의 공간. 지금 이 식당을 밝혀주고 있는 빛은 어떤 특정한 곳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이 식장 자체가 은은하게 빛내고 있었다. 어둡지만 시야를 확보할 수 있을 만큼은 충분히 밝은 테이블에 앉은 채 아이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공간이었구나. 전혀 몰랐었네." 솔직하게 감탄하면서 다시 아공간은 이리저리 둘러본 그녀는 천진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와는 달리 훼이드리온은 미르가 말한 그 후부터 영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 그를 그냥 보고 넘어갈 아이가 아니었다. "왜 그래, 훼온? 기분 나빠?" 그녀의 머리 속에 급히 떠오르는 생각은 게이트 산맥에서의 기억이었다. 아공간에서 골드 드래곤과 이야기를 나누고, 그 다음에는 금성안을 펼치 고 마스터 카드로 골드 드래곤을 소환했다. 혹시 그것이 지금 그에게 어 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 건 아닌지 그녀는 은근히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 다. 훼이드리온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고 미르가 아버지라고 해서 루페르스가 생각나버려서 그래. 아직 그곳에 있는 걸까?" 아이도 그의 표정에 전염되어버린 듯 어두워졌다. "글쎄……. 지금쯤이면 어떻게든 빠져나오지 않았을까? 마법 능력이라면 예상을 초월하는 사람이니까. 어쩌면 이 아공간 속을 관찰하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지, 뭐." 그렇게 말하고 나니 괜히 불안해지는 아이는 주위를 스윽 둘러보았다. 그럴 리도 없지만, 역시 루페르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일단 안심이라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앞에 놓인 찻잔을 들었다. 여관에서 내려오자 신기하게도 테이블 위에는 방금 끓인 듯이 따 뜻한 차들이 놓여져 있었고 의자에는 참가자 전원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훼이드리온은 이것이 지정석이라는 걸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고 그래 서 마법사 길드의 빠른 일 처리에 혀를 내둘렀다. 그는 마법사 길드의 사 람들을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이미 도착했을 거다." 미르가 문득 말을 꺼낸 건 그쯤이었다. "에? 누가?" "아버지." 특유의 무심한 어투로 대답한 미르는 뒤따르는 설명을 요구할 게 뻔한 아이의 눈빛을 받으며 앞서 입을 열었다. "이 아공간은 아버지가 만든 거다. 그러니 그 어떠한 조종도 아버지만이 할 수 있지. 이 테이블, 차, 쿠키 등. 아버지가 이미 이곳에 도착해있다는 걸 증명해주는 것들이지." "다른 사람이 했을 가능성은?" "없다." 훼이드리온은 자신의 의견이 단번에 부정되자 잠시 말을 잃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왜 그렇지?" "아공간은 창조한 자 이상의 마법능력이 있어야한다. 현 대륙에서 마법 사 길드 마스터를 능가하는 마법능력을 가진 자는 확인되지 않았다." "확인되지 않았을 뿐이지 없다는 건 아니잖아." 미르는 그렇게 말하는 훼이드리온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입을 다물려 자 신에게 시선을 던지는 소년의 검은 색 탁한 눈동자를 마주보며 훼이드리 온도 침묵해버렸다. 기묘한 압박감이 내재된 미르의 눈동자는 조용히 그 를 향하고 있었다. 이윽고, 미르가 가라앉은 아공간 속의 어둠에 어울리는 검은 색 로브 만 큼이나 조용하게 말했다. "그만해라, 훼온. 아버지가 두려운 건가." 그 말에 훼이드리온은 이상하게 가슴 한구석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 다. 그래서 곧 이어 나온 말을 급기야 더듬고 말았다. "무, 무슨? 두렵다니? 내가 루페르스를 두려워한단 말야?" "아닌가." "절대, 아냐." 단호하게 외치는 훼이드리온. 미르는 그런 그를 향해 다시 눈길을 던졌 다. 깊은 심층의 무언가를 꿰뚫는 듯한 그 눈길에 훼이드리온은 얼떨결에 긴장하면서 식은땀을 훔쳤다. "그럼 왜 그렇게 아버지의 존재를 부정하려는 건가." 미르의 질문. 훼이드리온은 서둘러(왜 서두르는지는 그도 알지 못했다) 대답했다. "싫으니까. 그런 부류의 인간은 정말 질색이니까. 만나기조차 싫어. 그 뿐이야." "그뿐인가." "그래, 그 뿐이야." "다행이군." 훼이드리온은 흐름과는 별개로 튀어나오는 미르의 대답에 새삼스럽게 소년을 쳐다보았다. 소년은 언제나 그런 모습으로 조용히 앉아서 검은 눈 만을 뜨고 있었다. "다행이라니?" 미르의 대답은 곧바로 이어지지 않았다. 그 대신 잠시 숨을 돌릴 수 있 는 시간이 제공되었고, 그 후에 미르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두려워한다면 안 좋으니까." "……뭐?" 미르 특유의 말투, '난해함'이 오랜만에 부활하는 순간이었다. 훼이드리 온은 미르와 만났던 예전 기억들을 떠올리면서 어느새 이런 미르의 말투 에 익숙해져있는 자신에게 뿌듯함을 느꼈다. 역시 경험이 진리였던 것이 다. 다시 말할 생각은 전혀 없다는 듯이 이미 입을 굳게 다물어버린 미르는 남아있는 차를 천천히 비우기 시작했고, 소년의 과제가 두뇌를 움직일 계 기가 된 미소년과 미소녀는 합세해서 그 말을 해석하려 애썼다. 그러던 중에 드디어 시간이 다가왔다. 두우우우웅. "에? 이게 무슨 소리야?" 쿠키를 집어먹는데 여념이 없던 에타도 어디선가 들려오는, 아니 퍼지는 '울림'에 반응하며 고개를 들었다. 소녀의 입가에 묻은 쿠키 가루들을 발 견한 미르가 알게 모르게 눈썹을 구겼을 때, 훼이드리온과 아이가 뒤로 고개를 돌렸다. 테이블들의 행렬 저 앞. 아공간의 앞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그곳이 눈에 띌 정도로 빠르게 화아악 밝아졌다. 그곳에는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 었던 단상이 있었고 언제 올라왔는지 색색깔의 로브를 걸친 10여명의 남 녀가 그 위에 서있었다. 총 13명의 인원 중에 정 중앙에 서있는 남자. 검은 로브로 전신을 가리 고 약간은 어벙해 보이는 미소를 띄우고 서있는 남자. 일행은 그가 누구인지 단숨에 알아볼 수 있었다. "루페르스……." 누가 그렇게 중얼거렸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이름이 뇌리에 쑤셔 박히는 걸 도저히 막을 수 없는 훼이드리온. 난생 처음 누군가를 죽이고 싶은 분 노와 증오를 느끼게 해준 장본인. 게이트 산맥에서 드래곤 피어 카드로 굳혀버렸는데 미르의 말대로 어느새 이미 이곳에 도착해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저렇게 멀쩡한 몰골로. 옆에서 단상을 향해 몸을 돌리고 있던 아이는 훼이드리온의 어깨가 가 늘게 떨리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하지만 굳어버린 그의 얼굴을 보자 뭐 라고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고 속으로 제발 진정되기만을 바랄 수밖에 없었다. 곧 음성증폭마법이라도 썼는지 루페르스의 말이 아공간 전체에 울려 퍼 졌다. "아하하. 반갑습니다. 마법력 1414년 6월 1일. 마법사들의 도시 에코의 연례행사 마스터 카드 대회에 올해도 어김없이 참가해주신 게이머들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역시 마법사 길드 마스터였을까. 수많은 게이머들을 눈앞에 두고도 전혀 흔들림 없이 말하는 그에게서 여유를 느끼고 만 훼이드리온은 무언가가 가슴 안쪽에서 꿈틀댐을 느꼈다. '뭐지.' 섬뜩함과 동시에 머리 속으로 기어오르는 그 느낌을 눌려 참으며 훼이 드리온은 루페르스의 말을 계속 들으려했다. "이 대회에 많이 참가해주신 게이머들께서는 규칙을 잘 아시겠지만 처 음 참가했다거나 혹은 기억력이 나빠 작년을 기억하지 못하는 게이머들 을 위하여 약간의 대회 설명이 있겠습니다." 루페르스는 자신의 오른쪽으로 슬쩍 눈길을 돌렸고, 그의 눈길을 받은 여인, 마기가 이어서 입을 열었다. "먼저, 6월 1일, 대회 첫날인 오늘 예선이 열리겠습니다. 예선은 게이머 들께서 흔히 알고 계시는 '카드 뽑기'로 진행되며, 지금 게이머들께서 가 지고 계시는 배지를 끝까지 지키셔야지만 본선에 올라갈 수 있습니다. 자 세한 사항은 테이블 위의 책자를 참고해주시길 바랍니다." 똑 부러지는 어투로 말하는 마기의 설명에 게이머들은 일제히 자신들이 앉아있는 테이블 위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각 게이머들 앞에 '마스터 카 드 대회 설명서'라고 적힌 책자가 홀연히 나타났다. "마법인가. 한순간에 400여 개를 넘는 책자를 소환할 수 있다니, 그것도 각 게이머들 앞에 정확하게." 아이는 감탄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정직하게 따르며 책자를 집어들었다. 대회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미르도 천천히 책자를 잡았고, 각자의 취향대 로 책자를 뒤적거리고 있는 동안 마기의 말은 계속되었다. "그렇게 본선 진출자가 가려지면 대전표가 작성되고 내일, 6월 2일부터 토너먼트식으로 본선이 치러지게 됩니다. 본선 진출 게이머들은 하루에 한 게임씩을 원칙으로 하여 대전을 하며, 본선 진출자의 수마다 대회 기 간이 달라지기 때문에 정확하게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의 대회 기간으로 미루어볼 때 4일에서 6일 가량 본선을 치르고, 본선이 모두 끝 나고 마지막날 결승전으로 우승자를 가린 후, 우승자에게 카드 마스터의 칭호를 내리면서 1414년 마스터 카드 대회는 종료됩니다. 이상입니다." 간단명료하게 설명을 끝낸 마기는 루페르스를 향해 가볍게 목례했고 부 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가 입을 열었다. "대충 일주일 정도 걸린다고 생각하시면 편합니다. 일주일 동안 게이머 들 각자의 컨디션 조절 잘 하시길 바라면서, 소식을 하나 전하도록 하겠 습니다." 게이머들 사이에 작은 웅성거림이 있었지만 곧 가라앉았다. 루페르스는 분위기가 다시 조용해지자 다시 말했다. "이번 대회에는 마법사 길드 서브 마스터이며 대회 운영자인 마기 허니 아이스 양을 제외한 마법사 길드 최고 원로 이상의 간부들이 모두 참가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대전에서 만나게 된다면 한번쯤 인사는 해주시 길 바랍니다." 사람 좋게 웃으면서 루페르스가 그렇게 말하자 게이머들 사이에서 작은 웃음들이 터져 나왔다. 그는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도 잘 이끌리지 않고 웃음으로서 잘 이끌어 나가는 마스터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루페르스의 본성을 알고 있는 훼이드리온과 아이로서는 그 모습 이 가식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의 농담조에도 별로 즐겁지 않았고, 오히려 작게 인상을 쓸 뿐이었다. "흠. 자, 그럼 지금부터 예선전을 시작하겠으니 모두들 소지품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나주시기 바랍니다." 소지품이라고는 허리춤에 차고 있는 칼과 갈색주머니가 전부인 훼이드 리온은 가뿐하게 의자를 밀어 넣고 일어섰고, 그 뒤를 따라 아이, 미르, 에타도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에타는 일어서면서도 손에 쿠키가 담긴 그 릇을 끈질기게 들고있어서 훼이드리온과 아이를 웃음 짓게 만들었다. 에타의 행동에 잠시 웃으며 분위기를 전환하고 있을 무렵, 루페르스의 말이 다시 울려 퍼졌다. "다 일어나셨습니까? 그럼 지금부터 예선전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나중에 제가 신호를 보내면 그때 예선이 끝나게 됩니다. 예선 도중 배지 를 빼앗긴 게이머 분들은 우측의 문으로 나가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게 이머의 일행으로 들어오신 대회 참가자가 아니신 분들은 지금 즉시 문밖 으로 퇴장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그곳에서 기다리시다가 예선이 끝나면 다시 들어와 주시기를." 빙긋 웃는 루페르스의 얼굴에서 조금은 둔하고 어벙한 모습을 발견하기 는 했지만, 전보다는 무척이나 성숙된 느낌이 든 것은 훼이드리온만의 착 각이 아니었다. 마스터의 직분에 충실한 순간이어서 그런지 루페르스는 능글맞았던 예의 모습을 많이 보이지 않았다. '저 정도면 변신 수준이군.' 역시 좋게 볼 수 없는 그였다. "앙, 난 그럼 나가봐야 하는 거지?" 에타가 쿠키 가루를 잔뜩 묻힌 얼굴로 말했다. 미르의 끄덕임을 확인한 소녀는 손을 흔들면서 그들을 응원하며 떠나갔다. "미르미르! 열심히 해애! 훼온도! 아이는 잘하든지 말든지, 꺄하하하하!" "저게에!" 끝까지 아이에게는 시비를 걸고 복잡한 사람들 사이로 사라지는 에타의 응원(?)에 훼온은 난처하게 웃었고 아이는 에타가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보내었던 놀림포즈("메롱!")을 상기하며 복수의 칼날을 갈기 시작했다. "대충 다 나가셨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순간, 부리나케 문밖으로 빠져나가는 주황색 머리칼의 한 소녀를 보면서 뭔가 의미심장하게 웃은 루페르스는 단상에서는 꽤 먼 곳 으로 지그시 시선을 던지면서 마지막으로 선언했다. "그럼, 지금부터 1414년 마스터 카드 대회 예선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 다." 두우우우웅. 아까와 같은 울림이 다시 아공간 속을 흔들었다. 그 즉시 마법사들은 단 상 위에서 자취를 감추었고 게이머들 사이사이에서 나타났다. 그리고 그 와 동시에 100여 개의 테이블 위에 있던 그릇들과 잔들은 감쪽같이 사라 져버렸다. 테이블들은 본래의 원목만이 남아 예선을 치를 수 있는 장소를 마련했다. 게이머들이 바삐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이 눈에 들어오자, 훼이드리온과 아이, 미르는 테이블 옆으로 나와 모였다. 훼이드리온이 둘을 번갈아 보 며 조심스럽게 다짐했다. "꼭 본선에 올라갈 테니까, 아이하고 미르도 행운이 따르길 빌게." 굳은 의지가 비치며 단단한 눈빛을 내는 푸른 눈동자. "응. 나도 꼭 통과할게." 맑은 눈빛의 검은 눈동자. "……." 말이 필요 없는 듯 침묵하는 탁하지만 차갑지 않은 검은 눈동자. 세 눈동자는 서로를 조용히 응시하면서, 그리고 의지 깊게 응시하면서 건투를 빌었다. "자, 그럼 나중에 봐!" 훼이드리온이 외쳤고 아이는 밝게 웃으면서, 미르는 무표정이지만 충분 히 느낄 수 있을 만한 마음으로 응답했다. 그들은 굳은 다짐과 함께 오로 지 '운'만이 통하는 예선을 치르기 위해 게이머들 사이로 흩어졌다. '잘해, 아이, 미르.' 금새 사라져버리는 하얀 신관복과 검은 로브를 뒤쫓으면서 훼이드리온 은 마음 속으로 그렇게 빌었다. '모두 예선을 통과하여 본선까지 오를 수 있기를.' "나와 합시다." 한 남자가 다가왔다. 훼이드리온은 갑자기 나타난 그 사내를 발견하고는 잠시 움찔 놀랬다가 얼른 대답하고는 테이블 옆에 섰다. 그는 지체할 시 간 따위는 애초부터 가지고 있지 않다는 듯이 서둘러 자신의 카드를 커 다란 두 손으로 뒤섞었다. 훼이드리온이 그의 가슴에 달려있는 배지를 슬 쩍 훔쳐보고 있던 중에 그가 테이블 위에 카드들을 내려놓았다. 작업은 이걸로 끝이었다. "뽑으쇼." 훼이드리온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가장 위의 카드를 뽑았다. 그러자 그는 심각하게 고민하는 기색으로 얼굴을 구기다가 재빠르게 중간쯤에서 카드를 한 장 뽑아냈다. "펼칠까요?" "흠, 좋소." 간단하게 협상하고 카드를 테이블 위에 탁 소리가 나도록 강하게 올려 놓았다. 아니, 떨어뜨린다고 하는 게 더 어울릴 듯싶었다. "으음…… 이런." 결과는 훼이드리온의 승리였다. 그가 뽑은 카드는 검성 카드였고, 사내 는 프리스트 카드를 뽑았던 것이다. 훼이드리온은 간단하게 첫 승을 올린 후 말끔한 표정으로 말했다. "죄송해요." 사내는 영 언짢은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운이 안 따라서 그런 게지. 자, 여기 있소." 그는 그래도 억울하기는 했는지 약간 인상을 찌푸리면서 훼이드리온에 게 자신의 배지를 건네주었다. 훼이드리온은 그것을 받아들고 미안한 마 음에 카드를 정리하여 그에게 주었고, 그는 감사의 인사를 하며 건투를 기원해주면서 사라졌다. 훼이드리온은 승리하여 처음으로 빼앗은 배지를 자신의 배지 아래 달면서 첫 승리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세상이란 게 신기한 것이라, 기분이 좋을 때 기분 나쁜 일도 겹 칠 때가 있다. 훼이드리온에게는 그것이 지금이었다. "축하해." 뒤에서 들려오는 단 한마디에 훼이드리온은 전신이 굳어버리는 듯한 충 격을 느꼈다. 뒤로 돌아서기도 거북했고 그렇다고 돌아보지 않는 것도 이 상했다. 그는 잠시 동안 굉장한 감정의 기복을 느꼈고, 갑자기 지끈거리 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리고 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슬며시 뒤로 돌아 섰다. 검은 로브. 능글맞은 웃음을 뒤집어쓴 극악한 얼굴. 탁한 검은 눈동자. "루페르스." "그래, 나야. 내가 없어도 잘 도착했군, 여기까지?" 대답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였기에 훼이드리온은 가만히 그를 노려볼 뿐이었다. 둘 사이의 분위기가 차갑게 얼어붙었고, 그 탓인지 게이머들은 둘을 그냥 지나치기만 했다. 루페르스는 여전히 능글맞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나 아직 포기 안 했어. 너의 마스터 카드 말이야." "당신이 포기를 했든 안 했든 답은 언제나 같습니다. 전 절대 주지 않습 니다." 훼이드리온의 말투는 어느샌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사사로운 감정 같 은 건 일체 묻어나지 않는, 그런 살벌한 목소리. 하지만 루페르스의 강신 경에는 별로 소용이 없는지 그는 끝까지 웃음을 띄우고 있었다. "저하고 하시려고 오셨습니까?" "아니, 그건 아니고. 우린 본선에서 만나야해. 지금 우리 둘이서 하게 되 면 곤란하게 되지. 안 그래?" "왜 본선에서 만나야한다는 겁니까?" 루페르스는 키득 웃었다. 그 후 대답했다. "그런 이유가 있어. 이것만 알아두라고. 난 절대 너의 마스터 카드를 포 기하지 않아." 훼이드리온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는 열지 않을 것 같이 입을 굳게 다문 채 그를 바라보았다. 히죽 웃어버린 루페르스는 훼이드리 온의 눈길을 거의 무시하면서 로브 속에서 손을 꺼내 머리를 뒤로 넘겼 다. "어쨌든 본선에서 보자고. 잊혀진 이름, 에타그의 이름으로 행운을 빌어 주지." 그렇게 말하고 루페르스는 돌아섰다. 훼이드리온도 그와 반대로 세차게 몸을 돌려서 서둘러 걸음을 놀렸다. 그러나 다시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 으니. "아, 잊어먹을 뻔했군." 루페르스가 다시 몸을 돌렸다. "뭡니까, 또?" 상당히 퉁명스럽게 답변하는 훼이드리온. 굴하지 않고 루페르스는 마지 막 할 말을 하고 다시 저쪽으로 걸어가 버렸다. "금성안. 금빛의 마스터 카드. 골드 드래곤의 포효. 상당히 인상적이었 어, 카드 마스터. 훗." 그의 마지막 말이 예리한 상처를 훼이드리온의 가슴에 남겼다. 카드 마 스터. 잊고 있었던 단어가 다시 생각나고, 훼이드리온은 이미 사라진 루 페르스의 모습을 찾으려고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그는 이미 게이 머들 사이로 스며든 후였기 때문에 발견할 수가 없었다. '카드 마스터……?' 루페르스가 남긴 그 말이 자신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어렴풋이 갈피밖 에 잡을 수 없는 훼이드리온은 허리에 달려있는 갈색주머니를 거칠게 움 켜잡았다. 마스터 카드 대전 중일 때 떠오른다는 금성안. 대마도사가 봉 인한 방에서 찾아낸 마스터 카드. 그리고 카드 마스터. 훼이드리온은 여러 게이머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들 속에서 혼자 버려진 듯한 느낌과 함께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루페르스, 그만 나타나면 이젠 모든 일이 혼돈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대체…….' 속으로 중얼거리는 훼이드리온. 그가 움켜잡고 있는 갈색주머니가 그 언 젠가처럼 갑자기 황금색으로 잠깐 빛나는 걸 본 사람은 애석하게도 단 한사람도 없었다. "와아! 모두 예선 통과했어!" 에타가 객실을 방방 뛰어다니면서 소리치며 좋아했다. 지금만큼은 에타 만만치 않게 소리치며 좋아하고 싶었던 아이는 소녀가 자기 몫까지 소리 쳐주길 바라면서 그것을 내버려두었다. 그렇다. 훼이드리온과 아이, 미르는 운 좋게도 예선을 모두 통과한 것이 다. 훼이드리온은 8개에 달하는 배지를 빼앗아 자신의 배지를 지켰고, 아 이는 7개, 미르는 12개라는 꽤 많은 수의 배지를 빼앗아 본선에 진출했 다. 예선 중에 약간의 트러블이 있었다면 고약한 속임수를 써서 이기던 게이머가 있었는데, 그 게이머가 아이와 카드를 나누게 되었다. 아이도 하마터면 당할 뻔했지만 우연히 그 옆을 지나가면서 게이머들을 살피고 있던 마기가 속임수를 눈치채고는 그를 탈락시켜버렸다. 그래서 그녀는 무사히 예선을 통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때는 얼마나 황당했다고." 아이는 지금 생각해도 위기일발이었다는 듯이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 었다. 축배의 의미로 다이사를 마시고 있던 훼이드리온이 문득 물었다. "허니아이스 씨가 뭐라고 안 했어?" "아니? 그냥 '에타그의 이름으로 행운을 빌겠습니다.'라고 하고는 가버리 던데?" 훼이드리온은 뒷머리를 긁적이면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큰일이 없 었다면 다행인 것이다. "자자, 우리 건배 한번 더 하는 게 어때?" "좋아! 하자, 하자!" 자기가 본선에 오른 것도 아닌데, 정작 본선에 오른 미르보다 더 날뛰고 있는 에타의 재촉과 함께 투명한 다이사가 든 네 개의 잔이 공중으로 들 어올려졌다. 그리고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동시에 부딪혔다. "건배!" 까강. 달고 톡톡 튀는 맛이 일품인 다이사를 한번에 쭈욱 마셔버린 아이는 따 끔거리는 목의 고통 때문에 한동안 켁켁거리다가 갑자기 방 쪽으로 고개 를 돌렸다. 그녀의 행동에 막 다이사를 다 비운 훼이드리온이 의문을 띄 우며 물었다. "왜? 무슨 일이야?" "아니, 잠시만 있어봐." 아이는 의아스러워하는 표정으로 잔을 내려놓고 자신의 방으로 바쁘게 들어갔다. 그리고 별로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을 때 그녀의 외침이 거 실까지 들려왔다. "훼온! 이리 와봐! 이흐리트 씨야!" 훼이드리온은 엉겁결에 맞은 편에 앉아있는 에타의 얼굴에 입안에 들어 있던 다이사를 쏟아낼 뻔했다. "레오? 레오 말이야?" "그래, 그 사람!" 누구인지 알 리 없는 에타가 미르를 팔을 붙잡고 훼이드리온과 아이가 언급하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물은 때는 훼이드리온은 이미 방안으로 뛰어들어간 후였다. 아이는 침대 옆에 놔둔 작은 배낭에서 전에 카를레오가 '폰'이라고 하는 화상통신마법을 걸어준 그 거울을 꺼내 손에 들고 들여다보고 있었다. 훼 이드리온은 침대 위로 뛰어올라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거울을 주시했다. 무테 안경에 학자풍 생김새. 익숙한 얼굴이 거울 속에 떠올라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태… 훼온님?" 훼이드리온은 잠시 가슴이 철렁했다가 진정하며 대답했다. "그래, 나야, 레오! 어디야, 지금?" "에에, 수도 라시안트 바로 옆의 작은 마을인데, 루비네… 라고 아세 요?" "물론 알아. 내가 하루 묶고 온 곳이기도 한걸. 거기까지 간 거야, 벌 써?" 카를레오는 "아하하." 거울 안에서 웃고 있었다. "음, 그렇게 되었네요. 그나저나 카드의 현자… 말인데요." 카드의 현자. 훼이드리온은 오늘 아침에 만난 세라라는 여인이 일깨워준 사실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 사실을 말하기도 전에 카를레오가 난처한 듯 푸른 머리카락을 비비꼬며 먼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영원히 찾지 못할 거 같아서요." "……에?" 미르는 에타와 함께 방안으로 들어오다가 아이와 훼이드리온이 약속이 라도 한 듯이 똑같은 소리를 내면서 한방 먹은 듯한 표정을 짓는 것을 목격하고는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소년이 왜 뭔가를 납득한 듯한 행동을 했는지 에타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훼이드리온이 급히 소리쳤다. "잠깐만! 숀…을 만나지 않았어?" "어, 히브리드 씨를 아시네요?" "물론 알아. 대전도 해봤는걸. 그나저나 숀을 만났는데도 카드의 현자를 영원히 찾지 못할 거 같다니, 무슨 말이야?" "혹시 히브리드 씨가 카드의 현자…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성도 히브리드잖아. 오늘 아침에 알았다고, 숀이 카드의 현자라는 걸." 그러자 카를레오가 아주 통쾌하게 웃어젖혔다. 덕분에 훼이드리온은 약 간의 인상을 얼굴에 나타낸 채 그를 노려보았다. "왜 웃는 거야? 나는 심각한데." "아하하, 아니요. 저와 같은 착각을 하고 계셔서 말이에요. 저도 불과 몇 시간 전까지는 히브리드 씨가 그 유명한 카드의 현자인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만나고 나서 이야기를 하고 난 후에야 겨우 알게 되었어요." 훼이드리온과 아이는 침을 꿀꺽 삼켰다. 얼굴을 거의 맞닿은 상태에서 작은 손거울을 들여다보고 있었지만 지금은 흥분 때문에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카를레오는 검지손가락을 비장하게 치켜올리더니 두 눈이 사라지는 특 유의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잘 들으세요. 히브리드 씨는 카드의 현자라고 불리는 쇼너 히브리드 님 이 아니에요." "그럼? 왜 성이 같은 거야?" "바로 그거예요. 성이 같다는 점." 아이가 빠른 눈치를 발휘해 카를레오가 이야기하려는 핵심을 금방 짐작 해버렸다. "……에, 설마?" 카를레오의 이어지는 말에 훼이드리온은 순간적으로 얼굴이 핼쑥해져버 렸다. "히브리드 씨의 이름은 숀. 바로 숀 히브리드예요. 그는 카드의 현자인 쇼너 히브리드의 동생이라고 하는군요." '숀'은 애칭이 아니라, 그 그대로 이름이었던 것이다. --------------------------------------------------------------------- 으에. 이로서 88편. 묘하게 담배를 생각나게 하는 편이 끝났습니다. 또 다 시 팀군의 사악한 장치가 드러나 버렸군요. 싱그르. 많은 분들이 숀을 카 드의 현자라고 생각하시더군요. 물어오실 때마다 글쎄요∼라고 빙글거리 며 답했는데, 아마도 이 편을 보시고 많은 항의가 들어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a 하지만 원래 설정이 그랬으니. 싱그르. :) 자자, 그럼 다음 편은 다시 시점 이동을 하여, 아니 장소 이동을 하여 수 도 라시안트와 루비네 마을이 배경인 겁니다(과연?). 싱그르. 그럼! 어둠의 기사 DARK KNIGHT TEAM... 덧하나. 추천 감상 비평. 흠. 주시지 않으시겠습...?(+ + +) 덧두. GO CAMA 덧석. <-- 이거. 꽤 재미있군요. 싱그르. :) 번 호 : 12 / 17 등록일 : 2001년 02월 16일 17:01 등록자 : 암음기사 조 회 : 76 건 제 목 : [카드 게임 판타지]『카드 마스터(Card Master)』#089 카드 게임 판타지(Card Game Fantasy) 카드 마스터(Card Master) 89. 거울을 품속에 집어넣으며 카를레오가 돌아서자 녹차가 반쯤 들어있는 찻잔에서 피어오르는 수증기 사이로 인자한 표정의 숀이 보였다. 숀은 그 가 카를레오가 대화를 끝낼 때까지 기다리다 입을 열었다. "거울을 통해서 서로의 모습을 보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니. 그런 마법은 처음 보는구먼." "하하, 제가 우연히 개발하게 된 마법이에요. 아마도 대륙에서 이 마법 을 쓸 수 있는 사람은 현재 저밖에 없을 걸요?" 카를레오는 눈이 없어지도록 웃으면서 폰으로 태자와 통신을 하기 전까 지 앉아있었던 소파에 자리했다. "그래, 훼온 군은 뭐라고 하는가." "역시 히브리드 씨를 카드의 현자로 생각하고 있었어요. 뭐, 저도 처음 엔 그렇게 생각했었지만. 뭐, 아무튼 나중에 다시 들른다네요. 꼭 듣고 싶 은 이야기도 있다고 하고요." "듣고 싶은 이야기?" "그야 저도 모르죠." 어깨를 한번 으쓱한 카를레오는 아직 남아있는 녹차를 마시기 위해 반 갑게 찻잔을 두 손을 들었다. 숀도 오랜만에 몇 주일 전 자신의 집을 방 문하고 간 금발의 미소년을 떠올리면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 추천장 때문에 아마도 자신이 카드의 현자인 줄 알았을 것이 뻔했다. 그걸 알면 서도 거리낌없이 추천장을 써 줘버렸다니, '나도 이제 늙었나.'라고 신세 대적인 노인은 잠시 생각해보았다. 형 쇼너와 자신을 헷갈리는 인물은 엄 청 많았다. 쇼너의 애칭은 숀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죄다 그의 이름 을 듣고 착각해버리니 말이다. 다시 밝히지만 숀의 본명은 '숀' 그 자체였 다. 숀 히브리드. 모든 마스터 카드 게이머들이 우러러보는 존재인 그 위대 한 자의 카드의 현자 쇼너 히브리드의 동생이 조금씩 떠오르는 형의 모 습을 회상해보고 있을 때, 그의 차 끓이는 솜씨에 감탄하고 있던 카를레 오가 넌지시 말해왔다. "계속 말해주시면 감사하겠어요." "아, 그랬었지." 지금 숀은 카를레오에게 형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고 있던 중이었다. 그 러다가 태자에게 연락을 해야한다는 생각이 불현듯 떠오른 카를레오가 잠시 말을 끊고 화상통신마법을 사용한 것이다. 숀은 자신이 어디까지 이야기를 했던가, 잠시 생각하다 이내 끊어진 이 야기를 끝자락을 기억해내고는 자연스럽게 뒤를 이었다. "흠, 그래서 난 형님과 헤어져 이 마을에 정착하게 되었네. 그 뒤로 20 여 년이 흐르고 난 이 마을의 촌장이 되었지. 그러다가 작년에 형님에게 서 편지가 왔다네. 형님은 여행을 다니면서 가끔 나에게 편지를 보냈기 때문에 난 아무렇지 않게 그 편지를 읽어내려 갔다네. 내용은 간단하더 군. 지금 어느 마을에 있는데 그리로 와달라는 거였네. 난 얼마간 촌장 대리를 세워두고 형님을 찾아갔지." 카를레오는 소리 없이 녹차를 마시면서 숀의 말을 경청했다. 한 자도 놓 치지 않겠다는 듯이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말이다. 차를 한 잔 마시고 다시 이야기를 잇는 숀은 숙연한 표정을 만들었다. 그 때문에 카를레오도 괜히 찔끔하면서 긴장하고 말았다. "내가 20년 만에 본 형님의 모습은 침대 위에서 앓아 누워있는 모습이 었네. 오랜 여행 중에 가진 지병을 제대로 치료하지 않고 돌아다니다 결 국 그 병이 발작을 해버린 것이지. 나도 어떠한 병인지는 듣지 못했지만 손쓰기에는 이미 늦었다더군. 형님은 그래서 날 부른 거였네." 여전히 침묵하고 있는 카를레오의 존재는 어느새 지워진 듯, 숀은 거의 혼잣말인 듯 이야기를 계속했다. "이틀 정도… 아마 그쯤이었던 것 같군. 이틀이 지나자 겨우 정신을 차 린 형님이 나에게 부탁하더군. 지금까지 연구한 모든 걸 내가 보관하고 있어달라고. 그리고 때가 되면, 언젠가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면 그때 세상에 밝히라고 말일세.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난 그 부 탁을 받아들였고 얼마 후 형님은 운명하셨네. 일생은 마스터 카드에 쏟아 부으며 살아왔던 카드의 현자라는 위대한 자의 마지막치고는 조금 썰렁 했지만, 아무튼 그렇게 형님은 생을 달리하셨지." 카를레오는 인자하면서 밝은 분위기였던 노인의 기분이 침울해졌다는 것에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무엇보다 가라앉은 눈동자가 그걸 말해주고 있었으니까. 그는 금방이라도 물기가 묻어날 것 같은 숀의 눈동자를 잠시 외면하여 그가 감정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주었고, 조금 후 숀의 평소 의 음색으로 돌아와 말했다. "지난 이야기는 대충 그것이 끝이네. 궁금한 거 있나?" "카드의 현자가 죽었는데, 어떻게 아무도 모르고 있었던 거죠?" "자네는 날 어떻게 찾아왔는가." 갑자기 질문의 대상이 바뀌자 카를레오가 없어져있던 눈을 드러내면서 되물었다. "저요?" "그렇다네, 자네. 자네는 마을에 갔을 때 어떤 것을 발견했길래 이렇게 날 찾아올 수 있었던 건가." "……아아, 그렇군요." 카를레오는 그제야 숀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가 태자 일행 과 헤어진 후 도착한 마을에서는 카드의 현자가 루비네 마을이라는 곳으 로 떠났다는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었다. 숀이 말한 20년 전의 사람들은 대다수가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기라도 했는지, 그것도 그 마을에서 가장 고령의 할머니에게서 겨우. 그 할머니의 말도 정확한 건 아니었지만 말이 다. "다른 이유가 있다면 그건 형님의 별칭이 '은둔자'였기 때문이겠지." "아무도 있는 곳을 몰랐기 때문에 죽었다는 사실도 알 수 없었다, 라는 것인가요?" "이해가 빨라서 좋구먼. 그렇다네." 숀은 얼굴 앞으로 자꾸만 내려오는 긴 백발이 상당히 거추장스러운 듯 이 인상을 찡그리다가 카를레오를 보고는 이내 표정을 풀었다. 카를레오 는 숀보다 두 배는 더 긴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높게 올려 묶어 정리하여 착석해있었다. 카를레오는 숀의 대답 후, 재빨리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럼… 아직도 쇼너님의 연구 업적을 가지고 계신가요?" "흐음, 물론이네. 내 서재 한쪽에 고이 보관 중이지." 숀은 자신이 순간적으로 눈썹을 찌푸린 건 긴 청발이 상당히 인상적인 이 청년의 눈이 한순간 엄청나게 번뜩였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학자풍으 로 생겨서 지식욕이 많아 보인다고 추측하고 있던 그의 생각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 순간이었다. "보여주시면 안될까요? 죄송한 말씀인 것은 알지만 전 마스터 카드를 깨닫기 위해 제 본래 직업까지 버리고 떠났어요. 제게는 카드의 현자가 남긴 연구 결과가 정말 필요해요. 제발, 이렇게 간곡하게 부탁드려요. 보 여주시면 안될까요?" 첫 문장과 끝 문장이 같은, 아주 일관성 있는 말이었다. 숀은 그가 스스 로 언급했듯이 아주 '간곡하게' 부탁하는 그의 모습에 조금 마음이 흔들 렸는지 즉시 거절하지 못하고 생각에 잠겼다. 눈을 내리까는 노인을 카를 레오는 침을 꿀꺽 삼키며 지켜보았다. 5년 동안 추적해온 마스터 카드의 연구가 엄청난 도약을 할 수 있는 기회였기에, 그는 절대 놓치고 싶지 않 았다. '제발, 히브리드 씨!' 이윽고, 숀이 카를레오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미안하네." 잔뜩 기대하고 있던 카를레오로서는 굉장히 허무하고 김빠지는 대답이 었다. "안 되는… 건가요?" "아직은 아니라고 보네. 형님의 유언도 있으니 쉽게 공개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그렇군요……." 카를레오는 미끄러져 코끝에 걸려있는 안경을 치켜올리며 실망감이 담 긴 음성을 중얼거렸다. 그런 그에게 굉장히 희망적인 말이 들려왔으니. "하지만." 그 즉시 그의 눈빛은 조금 전으로 돌아와 버렸다. 그 뛰어난 변화에 숀 은 당황한 듯 웃으며 말을 이었다. "훼온 군이 여기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겠나? 그때, 공개할 생각이 니까." "저, 정말요?" "그래, 분명히 훼온 군도 요청할 거 같으니." 숀은 인자하게 웃음을 띄우며 말했고, 카를레오는 세상을 다 얻은 듯이 행복한 웃음으로 엄청 들뜬 얼굴로 크게 소리쳐버렸다. "네! 물론 있겠어요! 몇 주일이 되든, 몇 달이 되든!" 마스터 카드를 연구하기 시작한지 5년째다. 그 정도야 약과라는 식으로 그는 우렁차게 답했고, 숀은 엄청난 반응에 난처하게 웃어댔다. 아무튼 오늘은 카를레오 그에게 굉장히 뜻깊고 기쁜 날로 기억될 게 분 명하다. "벌써 저녁이 지났는데 시장기가 이제야 도는군, 그래. 저녁 먹고 가겠 나? 별로 차릴 것도 없겠지만." "주신다면야 감사히 먹겠어요!" 여전히 느낌표가 강렬한 대답. 숀은 여전히 사람 좋고 인자한 미소를 그 에게 보내고는 손수 저녁을 만들기 위해 부엌으로 들어갔다. 20여 년 동 안 혼자서 살아오면서 닦은 자신의 요리 솜씨에 그가 새삼스레 감동하고 있을 무렵, 카를레오는 다른 의미로 감동 받고 있었다. '내가 카드의 현자의 동생이 만든 저녁을 먹을 수 있다니.' 너무 순수하면, 바보 같아 보일 때도 있는 법이다. 아무튼 약간은 소란스럽게 단란한 저녁 식사를 마치고(먹다말고 너무 감동에 겨운 나머지 눈물을 흘리고 만 카를레오를 수습하느라 숀은 오랜 만에 굉장히 진이 빠지고 말았다) 따뜻한 차가 함께 한 이야기 시간이 지나자 밤의 시간은 꽤 깊어져있었다. 오랜만에 지식 수준이 대등한 인물 을 만나서 둘은 꽤 여러 가지 이야기(여행 이야기라든지 카드의 현자의 이야기, 혹은 마법왕국 라시엔트가 더욱 발전하기 위해서 앞으로 나아가 야 할 길 등등)를 나눌 수 있었고, 그 대화에 서로가 만족을 느끼는 가운 데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빨리 돌아가야 할걸세. 시나는 괜찮지만, 지나는 밤늦게 여관에 들어오 는 손님은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 카를레오를 배웅해주면서 숀이 그렇게 충고했다. 카를레오는 어깨를 으 쓱하면서 답했다. "그리 멀지도 않은데요, 뭐. 그럼 내일도 찾아오겠어요, 숀." "그러게나. 오랜만에 즐거웠네." "저도요." 마지막으로 서로에게 편안한 수면의 축복을 전한 그들은 간단한 인사로 헤어졌다. 숀은 문을 닫고 집안으로 들어갔고, 카를레오는 골목을 서서히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어느새 이렇게 시간이 지나버린 건가. 하하하. 정말 즐거운 대화였군. 내일도 기대……되는 건 되는 거고, 이게 무슨 소리지?' 기묘하게 이어져 가는 상념의 끝에 무언가 걸리고 말았다. 카를레오는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아직 숀의 집으로부터 몇 발자국 걷지 않았기 때문 에 골목길은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밤의 세계에서는 수많 은 그늘이 생기게 되고, 그렇지 않아도 어두운 주위 배경의 도움을 받아 몸을 숨길 곳은 굉장히 많다. 카를레오는 희미하게 공기를 진동시키며 날아오는 기척에 정신을 집중 했다. 누군가가 이곳 어딘가에 '숨어'있었다. "……윽." 굉장히 희미하게 들리긴 했지만, 그것은 분명 인간의 음성이었다. 눈치 채지 못하는 사람이 바보라고 생각하면서 카를레오는 이어져야할 방법을 강구했다. 결국 그는 익숙하지 않지만 배운 대로 의지를 펼치기로 하고 잠시 숨을 가다듬었다. 스르륵. 그의 의지는 마력과 함께 사방으로 퍼져 그의 촉각, 시각, 청각 등 오감 을 보조해주었다. 공간 속으로 녹아 들어가는 것 같은 그의 의지의 끝 어 딘가에서 그만이 느낄 수 있는 마력의 요동이 일어났다. 카를레오는 그 즉시 그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뒤쪽?' 갑자기 기척이 끊어졌다. 하지만 사방에 펼친 의지에는 여전히 기운이 남아있었다. '나의 의지를 모르는 것으로 봐서 마법사는 아니다.'라고 생 각하면서 카를레오는 조금씩 그쪽으로 발을 이동시켰다. 천천히 다가가자 의지의 끝에서 일어나는 요동은 아주 미세하게 커져갔다. 누군가가 접근 하자 그것으로 인하여 긴장을 한 것이 틀림없었다. '누구죠? 이 밤에 그 어둠 속에 숨어서 대체 무엇을 하는 거죠?' 마음 속으로 그렇게 외치며 카를레오는 의지가 느껴지는 부근 근처로 극도로 다가갔다. 달빛을 과자점 건물이 가리고, 벽을 검게 뒤덮으며 만 들어진 그늘은 밤의 어둠으로 인해 더욱 깊은 수렁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달빛의 영역에 서있던 카를레오는 그 어둠 속을 바라보려 했다. 어두웠지 만 이렇게 가까이 다가갔으면 분명히 보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뭔가 보였다. 휙. 그것은 반짝임이었고, 무언가 굉장히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라고 카를레 오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 움직임이 자신의 목을 향하고 있다는 건 미처 깨닫지 못했고, 결국 그는 뾰족하고 날카로워 보이는 검날이 목에서 손 한 뼘도 떨어지 지 않는 곳에서 정지할 때가 되어서야 긴장할 수 있었다. "……으헤?" 겁에 질렸다기보다는 황당함에 물들은 음성이 튀어나온 건 그보다 한참 후였고, 덕분에 검날을 따라서 어둠 속으로 진입해 가는 카를레오의 시선 은 더욱 늦었다. 게다가 그로 인해 검날을 쥔 그 누군가의 목소리가 낮게 카를레오를 위협하는 것도 늦었다고 생각되었다. "더 이상 다가오지 마라." 굉장히 무게 있는 음성이었다. 마치 누군가를 기억나게 하는 목소리. 카 를레오는 문득 떠오르는 옛 기억에 "크흠." 하고 신음을 흘리다가 갑자기 어이없는 표정이 되어버렸다. 지금 그의 머리 속에서 떠오르는 단어는 '설마'였다. 하지만 '설마'가 사람 잡는다, 라는 말을 지금껏 굉장히 많이 들어본 카 를레오는 침을 꿀꺽 삼키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전히 '설마…….' 라 고 생각하면서. "혹시…… 슈란?" 그늘 밖으로 벗어나 있는 검날이 달빛을 받으며 파리하게 떨리는 모습 이 선명하게 보였다. 카를레오는 자신이 방금 던진 말에 검의 주인이 동 요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반응을 기다렸고, 조금 후 그 성과가 나타났다. "……레오?" "그래, 나야! 카를레오 폰 이흐리트! 네 친구!" 검은 금방 어둠 속으로 사라졌고 그 대신 거대한 체구의 사내가 그 속 에서 튀어나왔다. 그는 과자점과 뒤 건물 사이의 미세한 틈에 숨어있었 다. 그래서 눈이 어둠에 익숙해졌는데도 구별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레오, 여긴 어떻게?" 아직 검을 집어넣지 않은 것으로 보아 레오의 친구, 슈란가트는 엄청 황 당해하는 게 분명했다. 그는 기사답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자신과 비슷한 키의 친구를 바라보았다. 5년 만. 카를레오가 왕성을 떠난 후 처음 만나 는 것이었다. "나야 여행 중에 들렸지. 너야말로 여기는 무슨 일이야? 또 거기 왜 숨 어있는 거야?" 카를레오는 슈란가트의 뒤편 어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오랜만에 만 난 친구에게 물었다. 하지만 그가 대답하기도 전에 그늘 속에서 들려오는 아름다운 목소리가 있었다. "슈란, 나가도 되는 거예요?" "아, 네. 도와드리겠습니다."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놀라버리는 카를레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저 어둠 속에서 웬 아름다운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는데 그 누가 놀라지 않을까. 이 밤에, 그것도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같이 숨어있는 여인. 카를 레오는 슈란가트가 그늘 속으로 다시 들어가 누군가를 들쳐업고 나오는 것을 보고는 자연히 왼쪽으로 시선을 이동시켰다. "누구예요?" 그늘 속에서 완전히 걸어나와 달빛의 영역으로 들어선 슈란가트와 한 사내, 그리고 한 여인. 여인이 슈란가트를 향해 고개를 들며 물었고, 카를 레오는 여기저기 찢어진 옷이 애처롭게 보이지만 달빛 때문인지 보통 아 름다움이 아닌 그녀의 얼굴을 보며 기겁하고 질겁해버리고 말았다. "고, 공주님?" "저를 아세요?" 슈란가트와 함께 늘어진 사내를 부축하며 걸어나온 여인은 다름 아닌 마법왕국 라시엔트의 공주 메이린느였다. 카를레오는 그 즉시 몸이 굳어 버리는 것을 느꼈다. "당연히 알고 말고요! 저 기억나지 않으시나요? 태자 훼이드리온님의 스 승이었는데." "……아, 레오였군요!" "네, 저예요, 공주님! 그런데 이 밤중에 대체 무슨 일이죠? 지금이면 왕 성에 있어야 마땅한데." 당연히 이해하지 못할 일이었다. 태어나서 내궁을 벗어나는 일도 별로 없다고 알려져 있는 공주가 기사인 자신의 친구와 이 밤에 루비네 마을 의 으슥한 곳에 숨어있다니. 정상적인 사고와 제대로 된 정보 없이는 그 누구도 이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공주는 난처한 듯 웃으면서 슈란가트를 올려다보았다. "어떡하죠?" "레오, 혹시 이 주위에 쉴 데 없을까? 먼저 이 녀석부터 치료해야돼. 부 상이 심한 데다가 말을 타고 이 마을까지 쉴 새 없이 달려와서 말이야." 메이린느의 구조 요청 비슷한 눈빛에 슈란가트는 금새 말을 돌렸고, 카 를레오는 기사로 보이는 늘어진 사내의 상태가 갑자기 걱정되면서 서둘 러 왼쪽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죄송하지만 여기밖에는 없다.' 아무래도 공주가 왕성에서 나와 이곳에 있는 것을 보아하니, 게다가 슈 란가트의 말을 들어 생각해보니 보통 일은 아닌 것 같아서 여관으로 가 자고 할 수도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카를레오의 머리 속에 떠오른 곳은 다 한 곳뿐이었고, 그곳은 바로 방금 전에 자신이 나온 루비네 마을의 촌 장의 집이었다. "숀! 문 좀 열어줘요!" 공주를 대신하기를 자처하며 늘어진 사내의 부축을 도맡은 카를레오는 서둘러 슈란가트의 발길을 재촉해 숀의 집 문 앞으로 가 거칠게 문을 두 드렸다. 마침 숀은 자기 전에 정리할 서류가 있어서 잠에 들지 않았고 왠 지 다급하게 들리는 카를레오의 목소리에 덩달아 급하게 문을 벌컥 열었 다. "무슨 일인……가아?" 기묘하게 뒤틀려버린 어미는 제쳐두더라도 할 일은 해야했다. 카를레오 는 양해를 해달라는 듯 숀에게 눈짓을 했고 갑자기 나타난 카를레오와 의문의 두 남자 때문에 당황한 숀도 금방 눈치를 채고 그들을 자신의 방 으로 안내했다. 척 봐도 환자인 것 같은 기사가 편히 쉴 수 있는 침대가 있는 곳은 그곳밖에는 없었다. 고동색에 가까운 짙은 색을 한 머리카락을 가진 얼굴선이 굵은 기사는 아직 어린 듯 소년티가 났다. 카를레오는 '기사 수련생인가.'라고 조심스 럽게 추측해보며 침대 위에 눕힌 그를 내려다보며 상태를 관찰했다. "응급처치는 해두었지만 완벽하지가 않아." 그래도 한숨 놓았다는 듯이 조금은 개운한 표정이 된 슈란가트가 땀을 닦으면서 걱정스럽게 말했다. "어떻게 된 일이야?" 카를레오는 바쁜 김에 오랜만에 치료마법을 시전하여 어설프게 천이 매 여져있는 상처를 치료했다. 피가 잔뜩 물들은 천은 상당히 귀해 보이는 비단이었지만 이미 그 가치를 상실하고 있었다. "검에 찔렸어요. 저 대신." 슈란가트, 카를레오, 숀은 등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미간에 가늘게 잡혀있는 주름이 그녀의 고통을 알려주기라도 하 듯이 선명했다. 슈란가트는 순간 울컥하고 솟아오르는 감정에 이를 악물 었고 투명한 듯 기사, 하이마크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공주의 시선에는 죄 책감이 가득하게 들어있었다. 카를레오는 기묘한 침묵 속에서 치료를 마쳤다. 그리고 옷을 모두 벗기 고 숀이 가져온 깨끗한 붕대로 상처를 감아서 당분간 충격이 가지 않도 록 했다. 치료마법은 사용해본지가 꽤 오래 되었기 때문에 완벽하지 못한 탓이었다. 하이마크의 치료가 대충 끝나고 네 명은 전쟁이라도 치른 듯이 피로한 얼굴을 하고(특히 슈란가트와 메이린느는 그 정도가 더 했다) 거실에 모 였다. 소파에 가득 찬 인물들을 훑어보던 숀은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차라도 가져오겠다고 부엌으로 들어갔고, 남은 세 명은 계속 침묵 에 잠겼다. 뭐라고 말을 하기에도 거북한 분위기. 그 속에서 메이린느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괜찮을까요…… 하이마크는?" 카를레오는 하이마크가 누워있는 침실 쪽을 한번 쳐다봐 주고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젠 본인의 의지 문제이지만, 아마도 괜찮을 거라고 봐져요. 하이마 크…라면 제1기사 헤이스티론님의 아드님 말인가요?" "네, 아세요?" "물론요. 몇 번 만나기도 했는데요. 이제 기사로 올라갔나요?" 슈란가트가 대답했다. "아니, 아직 기사 수련생이야." "흠, 그렇군." 그들은 알고 있었다. 이야기의 흐름은 계속 어긋나고 있다는 것을.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한 카를레오가 따지듯이 입을 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슈란은 왜 여기에 나타난 거고, 게다가 공주님은 왜 왕성에서 도망친 거고, 거기다 하이마크는 왜 다친 거야? 공 주님 대신에 검에 찔렸다니?" 슈란가트는 불편한 얼굴이 되어 작게 신음을 내질렀다. 바로 옆에 앉아 있는 메이린느를 내려다보면서 뭔가 허락을 구하는 눈길을 보내는 슈란 가트. 그녀는 아까보다는 많이 펴진 인상으로 작게 고개를 끄덕여 허락했 다. "대체 왕성에서 무슨 일이 있는 거야?" 카를레오는 자신도 모르게 사태를 느끼고 있는 건지, 과거형이 아닌 현 재형을 사용하여 재차 물었다. 슈란가트는 짧은 한숨과 함께 준비를 끝내고 입을 열었다. --------------------------------------------------------------------- 에에. 그렇습니다. 89편. 카를레오와 숀. 슈란가트. 메이린느. 하이마크. 서브 캐릭터들의 대거 만남이로군요;;; 이번 편을 쓰다가 깨달은 사실인데, 카마에는 4자짜리 이름이 상당히 많 더군요. 저기 위에만 해도 벌써 4명. 게다가 루페르스. 카슈미르. 나이나르 그 외 기타 등등.을 센다면 과연 몇 명일까. 아하하. 한번쯤 세어보는 것 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 어둠의 기사 DARK KNIGHT TEAM... 덧하나. 추천 감상 비평. 받습니다 받아요오. 덧두. GO CAMA 덧석. 과연. 이놈의 개디에셀은 언제쯤 고쳐질까요. 확 바꿔버릴까. 쓰읍. 번 호 : 13 / 17 등록일 : 2001년 02월 16일 17:02 등록자 : 암음기사 조 회 : 76 건 제 목 : [카드 게임 판타지]『카드 마스터(Card Master)』#090 카드 게임 판타지(Card Game Fantasy) 카드 마스터(Card Master) 90. 메이린느는 하이마크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푸른 색 깊은 눈동자 는 빤히 하이마크를 관찰하듯이 침묵했고, 긴장 때문에 식은땀까지 흘리 며 하이마크는 공주를 마주 바라보았다. 익히 들은 바대로 아주 아름다웠다. 아니 눈앞의 이 여인은 '아름답다'라 는 말로서도 허전한 곳이 많을 정도의 미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 아름다 움에는 신성함마저 느껴질 정도였고, 그래서 사람들은 그녀의 미모를 자 연과 생명의 여신 네트릴리아에 비교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몸짓 하나하나에 깃들어있는 품위와 기품. 그것은 공주라는 신분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그녀와 완벽 한 조화를 이루었다. 하이마크는 잠시 후 자신의 입이 반쯤 벌어져버렸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는 크게 놀라버렸다. 상대는 마법왕국 라시엔트의 공주. 자신이 기사가 되어 충성을 바쳐야할 나라의 공주였다. 그런데 그런 자를 쳐다보며 불경 한 생각을 품다니, 도저히 기사도에 어울릴 수 없는 행동이었다. '연습 시간 추가.' 스스로에게 엄격했던 아버지 바이마크를 닮은 헤이스티론 가의 장남 하 이마크는 잠시나마 기사의 본분을 잊어버린 자신을 질책하면서 벌을 내 렸다. 마법왕국의 앞날은 아직 밝은 것 같다. "정말 절 도와줄 수 있어요?" "물론입니다, 공주님." 하이마크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메이린느의 표정은 좀처럼 풀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하이마크라고 했죠? 하이마크는 헤이스티론 경의 아들이잖아 요. 그것도 가문을 이어야하는 후계자. 절 돕는다면 아버님과 적으로 돌 아설 게 뻔한데… 그래도 되는 건가요?" 공주는 자기 걱정보다 남 걱정을 더하고 있었다. 하이마크는 그런 점까 지 신경 써주는 그녀에게 내심 감사했다. "괜찮습니다. 이미 아버님께는 나의 정의를 따른다고 말씀드렸으니까 요." "하이마크의 정의요?" "네, 저의 정의." 슈란가트는 문득 언젠가 들었던 바이마크의 말이 떠올랐다. 기사가 가져 야하는 두 가지의 큰 규칙, 기사도와 정의. 전자는 기사라면 당연히 지켜 야할 거대한 법칙이고 후자는 기사로서 가져야할 틀이었다. 바이마크는 그 두 가지 중 어느 것도 '더 중요함'을 따질 수 없으며 상황에 따라서 변화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기사도와 자신의 정의를 고수할 수 있는 근성과 신념. 어쩌면 기사에게는 그 두 가지 마음 이 가장 중요할 지도 모른다는 바이마크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그는 하이 마크를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메이린느를 향해 시선을 보내고 있는 젋은 기사 수련생은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기사에게는 각자의 정의가 있습니다. 일반적인 의미의 정의로 생각하셔 도 크게 상관은 없습니다만, 기사의 정의는 조금 더 무게가 무겁다고 해 야할 지도 모르겠군요. 기사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의를 벗어날 수 없 습니다. 그래서 '틀'이라고도 말해지는데, 예를 들어, 저희 아버님께서는 이번 반란으로 인하여 기사의 규칙인 기사도를 어기게 되셨습니다. 하지 만 그렇다고 아버님의 정의를 어긴 것은 아닙니다. 아버님이 가지고 있는 정의는 무엇보다 '나라를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에, 취지로 따지자면 이 반란은 아버님의 정의에 합당한 것이 되는 것이죠." "그럼 기사도보다는 개인의 정의가 훨씬 상위의 개념인 건가요?" 메이린느의 물음에 하이마크는 대답하기 곤란한 얼굴이 되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제대로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상 기사도는 공공연하 게 알려진 기사의 절대 규칙이고 정의는 개인만이 알고 있는 자신만의 절대 규칙이다. 그 두 가지는 어느 것이 크고 작다를 따질 수 없는 위치 인 것이다. "기사도와 정의, 그 두 가지는 함부로 중요함을 논할 수 없는 개념들입 니다." 난처해하고 있는 하이마크를 대신하여 슈란가트가 입을 열었다. 메이린 느는 갑자기 들려오는 정겨운 목소리에 뒤로 목을 돌렸다가 뭔가 무리가 많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그를 자신의 옆에 앉히기로 마음먹었다. 슈란가 트는 공주의 의견에 몇 번이나 거절을 표했지만, 결국 그녀의 고집에 손 을 들고는 소파에 자리했다. 물론 그녀의 옆이었다. "계속 말해요, 슈란." "네, 공주님. 기사도는 기사가 따라야하는 규칙이고 정의는 개인이 생각 하는 규칙입니다. 기사는 기사도를 따르는 가운데에서도 자신의 정의를 지켜나가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생각해야합니다. 그 중 하나가 크다 면 고민할 필요는 전혀 없지만, 그렇지 않기 때문에 고민하는 겁니다. 무 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흐음…… 그러니까, 기사도와 정의는 동등한 것이지만 다르다. 그래서 우열을 가릴 수 없다, 라는 건가요?" "비슷합니다, 공주님." 핏줄이 좋아서 그런지 동생 훼이드리온과 같이 어려서부터 영특하다는 소리를 들으면서 자라온 메이린느였지만, '기사도와 정의'에 대해서는 이 해하기가 영 쉽지 않았다. 가까스로 간신히 받아들이긴 했으나 시간을 내 서 다시 곰곰이 생각을 해봐야겠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어렵군요." "조금 그렇습니다." 부드럽게 공주를 향해 웃는 슈란가트. 공주도 살포시 웃음을 띄워 답한 후 하이마크를 쳐다보았다. 어쩐지 푸근한 분위기 때문에 긴장이 풀어지 려던 하이마크는 그녀의 시선으로 인해 단숨에 숨을 끊어버렸다. "그렇게 긴장하지 마세요. 어려운 자리도 아닌데 뭘 그렇게 긴장하시는 거예요?" 순전히 그녀만의 생각이었다. 고작 기사 수련생의 자리에 있는 그인데, 공주 앞에서 어떻게 긴장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한 달쯤 전 태자와의 만남 에서 보여주었던 그의 굳은 행동을 생각해본다면 이 정도까지 말할 수 있는 것도 거의 기적에 가깝다고 할 수 있었다. "흠, 좋아요. 기사도, 정의는 대충 이해되었으니까 넘어가고요. 고마워요, 하이마크. 절 도와준다고 이렇게 찾아와 주다니." "아니요, 공주님의 감사는 과분합니다. 아직 특별한 도움을 드린 것도 아니고 그저 기사들 사이에서 들리는 이야기를 훔쳐듣고는 결심해서 온 것이니까요." "그 이야기가 벌써 퍼진 건가요?" "기사들의 세계는 의외로 정보가 빠릅니다. 게다가 지금의 왕성은 안팎 으로 거의 완벽하게 차단된 상태이기 때문에 더 그렇지요." 메이린느는 부끄럽다는 듯이 웃으며 슬며시 고개를 돌리다가 우연찮게 도 슈란가트와 눈이 마주쳤다. 빙긋이 미소를 띄우는 슈란가트. 메이린느 는 뭔가 화아악 달아오르는 듯한 기분이 되었다가,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무언가 따뜻한 분위기다.' 머리 아프게 생각할 것도 없이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슈란 가트와 메이린느. 공주와 그녀를 감시하는 기사 사이에 피어오르는 로맨 스. 그리 현실감 있는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절대 없는 이야기도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하이마크는 속으로 크게 웃고 말았다. 현 상황과는 굉장 히 어울리지 않는 관계였기 때문이다. "그럼 정말 절 도와주는 건가요?" 다시 들려오는 메이린느의 목소리에 하이마크는 정색하면서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단호했고 힘이 들어있었다. "네, 있는 힘껏 돕겠습니다." 슈란가트는 기사 수련생이라기 보다는 건장한 기사 그 자체인 하이마크 를 보면서 의미 있는 웃음을 띄울 수밖에 없었다. '정말 닮았군.' 아들 아 니랄까봐, 그는 바이마크를 쏙 빼닮은 모습이었다. "제가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공주님?" 진심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겠다는 듯이 하이마크는 자신의 임무를 메이린느에게 물었다. 메이린느는 조금 생각하는 얼굴이 되었다가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 말은 하이마크가 아닌 슈란가트를 대상으로 하고 있었 다. "슈란." 조용한 부름. 슈란가트는 곧 고개를 돌렸다. "네, 공주님." "잠깐 나가있지 않을래요?" 그는 문득 창 밖을 내다보고 싶어졌다. 무슨 소리가 들려와서 자신의 청 력을 방해했는지 궁금해서였다. "네?" "잠깐 나가달라고요." 슈란가트는 확신했다. 밖에서 소음이 들려온 것도 아니었고, 자신의 청 력이 안 좋은 것도 아니었다. 그 말은 그대로 공주의 입에서 나오고 있었 다. 메이린느는 슈란가트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아 친절히 부연 설명까지 곁들여주었다. "슈란가트는 아직 위치가 확실하지 않잖아요. 제 곁에 있어달라는 대답 도 확실하게 하지 않았고 말이에요. 그러니 이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자 격은 아직 없어요. 나중에, 나중에 마음이 잡히면 들어오도록 해요." 슈란가트는 침묵하면서 메이린느의 말을 곱씹었다. 좋아하는 남자라고 해도 아닌 건 아닌 거다. 사고관이 확실하게 잡혀있는 그녀를 조심스레 응시하던 그는 이내 묵묵하게 굳은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하이마크의 말 이 들려왔다. "죄송합니다, 조교님." "아니, 네가 죄송할 건 없다." 그는 무뚝뚝한 대답을 하고는 문으로 걸어갔다. 그의 뒷모습을 조금은 젖은 눈길로 바라보는 메이린느.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끝나면 불러주십시오." "그럴 게요." 메이린느의 대답과 함께 슈란가트는 문을 닫고 복도로 나갔다. 왠지 메 이린느에게는 평소보다 문닫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잠시 정적이 그들을 통과했다. 테이블을 중간에 두고 소파에 마주 보고 앉아있는 메이린느와 하이마크. 하이마크는 공주가 갑자기 입을 다물어 문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자 따로 할 말을 찾지 못하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메이린느는 가늘게 떨리는 감정과 함께 조용히, 아주 조용히 닫 힌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시간이 흐른 후, 그녀는 드디어 입을 열었다. "하아, 이제 의논을 해보도록 해요." "네." "우선 제가 생각하고 있는 방법은, 현재는 한 가지 뿐이에요. 그것도 제 대로 실현될 지는 의문이고요." 하이마크는 그녀의 말을 경청하면서 자세를 고쳤다. 메이린느는 그 모습 을 보면서 빙그레 화사한 웃음을 지었다. "편하게 앉으세요." "아, 네. 괜찮습니다." 여전히 굳어있는 그의 어색한 미소에 메이린느는 할 수 없다는 듯이 웃 고는 계속 말했다. "하이마크가 할 일을 알려줄게요." 하이마크는 또 다시 굳어지는 표정을 애써 풀어보려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아직 스물을 넘기지 못한 나이인 그로서는 이런 상황에서는 조금 부담이 느껴지기 마련이다. "무엇…입니까?" 메이린느는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온다는 느낌이 들어 발코니 밖을 내다 보았다. 자신이 잠들 때까지 언제나 그곳에 있었던 큰 그림자. 슈란가트 가 있어야할 그곳에는, 오늘밤은 아무 것도 없었다. 검은 밤하늘의 중앙 에서 하얀 요람에 쌓인 채 웃고 있는 은빛 달의 모습만이 창문을 통해 보였다. 슬픈 기색을 지우며 그녀는 짧게 호흡을 끊어 말했다. "훼이를, 아니 태자를 왕성으로 데리고 오세요." 내궁의 구조상 안타깝게도 복도에는 달빛이 들어오지 않는다. 그래서 복 도 천장에 간간이 붙어있는 마법의 등이 조명 역할을 하고 있는데, 그 하 얀 빛 아래에는 지금 현재 슈란가트가 서있었다. 창문을 통해서 공주가 아끼는 뒤뜰의 모습이 보였다. 마법의 등의 하얀 빛이 창문을 통해 곳곳에서 비치는 터라 뒤뜰의 정경을 확인하는 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슈란가트는 물끄러미, 무의미하고 무표정하게 그 정경을 바라보고 있었 다. 다채로운 꽃들의 향연. 필로윈의 마법으로 인하여 절대 한 계절에 공 존할 수 없는 꽃들도 이곳이라면 가능했다. 내궁 정문에서 현관까지 이어 지는 거대한 정원에도 많은 꽃들이 있지만 이 뒤뜰만큼은 중요도가 높지 않았다. 뒤뜰에는 말 그대로 중요한 꽃들, 멸종 직전의 꽃도 있었고 이미 멸종했다고 알려져 있는 것들도 있었다. 그 종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사계 모두의 계절이 필요했고, 필로윈의 마법도 불가피했다. 메이린느는 그 점 이 상당히 불만이긴 했지만 말이다. 그래서 그는 공주의 얼굴을 떠올렸다. 처음 본 그 순간부터 잊지 못했던 아름다운 얼굴. 문득 뭔가 솟아올라오는 기분에 슈란가트는 이마를 덮은 손을 가만히 쓸어 내렸다. 그녀의 방에서 나온 지 반시간이 조금 지난 건 같았다. 그때부터 무지 복잡한 마음에 그는 연신 한숨을 짓고 있었다. 메이린느 공주. 그녀의 말은 옳았다. 도움을 줄 수 없다면 들을 자격도 없다. 그건 슈란가트 그도 충분히 자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맘이 아픈 건 어쩔 수 없었다. 뭔가 버림받은 기분이랄까. 사실은 그게 아님에도 불구 하고 슈란가트는 한숨을 끊을 수가 없었다. '하아… 어쩌면 좋은가.' 아마 이런 진행이라면 일생동안 풀어도 풀리지 않을 수수께끼와 대적하 는 것과 동일한 상태가 될 것이라고 그는 짐작했다. 차라리 바이마크와 검을 나누었으면 나누었지, 이렇게 심적으로 내적으로 부담이 되는 고민 은 영 그의 체질이 아니었다. 그는 머리 쓰기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지 만 고통이 있는 상념은 먼저 사양하는 성격이었다. "쳇." 작은 투정. 정적이 내려앉은 복도에 그다지 충격을 주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그렇게 투정한 슈란가트는 이내 등을 펴고 문을 노려보고 섰다. 단정하게 차려입은 금안 기사단 제복과 허리에 매여있는 검. 전설의 명검 이라든지 하는 것에는 그리 관심이 없는 그로서는 크게 불만이 없을 만 큼 질이 좋은 검이었다. 그는 그 검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며 필로윈이 자신에게 내린 임무를 다시 자각하기 시작했다. 시종들의 발길도 사라지고, 내궁은 침묵 속에서 존재하고 있었다. 이 내 궁 2층은 공주의 방이 있는 곳이라 시종들의 출입이 많이 일어나지 않았 고, 게다가 얼마 전부터는 슈란가트라는 건장한 기사가 버티고 서기 시작 했기 때문에 더욱 뜸해졌다. 간간이 올라오는 하론 집사와 세탁물 수거나 청소를 하러 올라오는 시종들이 아니라면 거의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런 깊은 정적 속에서 슈란가트는 사방을 경계했다. 기사로서 단련한 예민한 감각을 주위로 뻗치고 그것에 약간이라도 걸리는 것이 있다면 즉 시 반응할 수 있도록 온몸의 근육도 팽팽히 긴장시킨 상태였다. 모르긴 해도, 이런 자세인 그의 곁에 암살자라도 다가온다면 단칼에 목이 날아갈 지도 모른다(그 암살자가 웬만한 실력을 넘지 않는다면 말이다). '오늘도 조용히 넘어가는 건가.' 뻑뻑함이 느껴지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면서 피로를 푸는 동안 그의 머리 속에는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것이 단숨에 깨질 것이라는 생각은 그로서는 도저히 떠올리지 못했다. "……입니까!" "음?" 아련한 울림이 저 밑에서부터 들려왔다. 그는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음성 인 것 같아 가만히 기억을 더듬었다. "하론 집사님?" 분명히 그 늙은 집사의 노성이었다. 슈란가트는 검 손잡이를 잡은 채로 계단 쪽으로 몸을 돌렸다. "여긴 공주님이 계시는 신성한 내궁입니다! 이 무슨 무례한 방문입니 까!" 확실하다. 그 목소리는 하론 집사였다. 그것도 확실하게 노함을 띈 거친 쇳소리 같은 목소리. 슈란가트는 뭔가 상태가 심상치 앉다는 것을 직감했 다. 쿵쿵쿵쿵. 가죽신발을 통해 층의 진동이 느껴졌다. 누군가, 무언가 많은 수가 2층 으로 뛰어올라오고 있었다. 그는 오른손에 느껴지는 검 손잡이가 어쩐지 손에 탁 달라붙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이윽고 그 진동의 주범들이 2층으로 올라섰다. 척척척. 총 네 명의 인원. 모두들 하얀 제복을 걸치고 각자의 검을 메고 있었다. 그 기사들 중에서 슈란가트는 낯익은 얼굴을 찾아냈다. "제1부대장?" 이름이 뭐였는지는 제대로 생각나지 않았으나 그의 직책은 무엇인지 알 고 있었다. 기사단에서 그와 제법 친한 친분을 가지고 있는 제1대장 나이 트 하가트의 직속부관인 기사였다. "이곳엔 무슨 일인가." 기사 네 명은 그를 선두로 행진하다 슈란가트를 발견하고는 일사분란하 게 정지했다. 앞을 가로막는 슈란가트에게 누가 보기에도 '대충' 거수 경 례를 붙인 그는 역시나 건성으로 인사했다. "금안 기사단 제1부대장 나이트 보스론. 제1대장 나이트 슈란가트께 인 사드립니다." 슈란가트는 보스론의 말에 낀 미묘한 인상들 때문에 갑자기 기분이 언 짢아졌지만 부하 앞에서 쉽게 감정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그는 상관으로 서 위엄이 있는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이곳엔 무슨 일인가. 그리고 방금 그 소란은 대체 어찌된 일이지?" 친하지 않다면 기사들에게는 엄한 슈란가트였다. 단장의 모습을 언뜻 생 각나게 만드는 음성에 보스론은 잠시 입가를 꿈틀거리다가 이내 웃음을 머금었다. 너무나도 비열하게 보여서 재수 없는 인상을 자아내는 그런 웃 음을. "디바이어님께서 메이린느 공주를 잡아오라는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뭐라고?" 다시 말할 이유는 없다는 듯이 입을 다문 보스론은 슈란가트 뒤쪽의 문 을 바라보았다. "저 방입니까? 그럼 데려가겠습니다." 대충 인사하면서 세 명의 기사를 이끌고 지나가려는 보스론의 앞을 슈 란가트가 다시 막아섰다. 이번에는 보스론의 시야에서 메이린느의 방문이 완벽하게 가려졌다. "이유가 뭐지? 디바이어님도 내궁의 일은 모두 나에게 맡긴 것으로 알 고 있는데. 그리고 더 이상은 이곳에 손을 대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냐." 잠시 물러선 보스론의 얼굴에는 비웃음이 가득했다. "몰라서 묻는 겁니까? 오늘 있었던 일, 당연히 알고 계실 줄 알고 알았 는데요." "오늘 있었던 일?" "지금 왕성을 잡고 있는 분은 디바이어님이십니다. 그런 분 앞에서 메이 린느 공주가 무슨 말을 했는지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당연한 겁니다. 의미 없는 몸부림에 허비할 시간과 노력을 생각해서 디바이어님께서 먼 저 선처를 베푸신 겁니다." 슈란가트는 그 상태로 굳어버렸다. 이 말이 뜻하는 것, 공주 쪽에서 일 을 벌이기 전에 먼저 선수를 친 것이다. 그처럼 치밀하고 머리 좋은 사람 이 공주를 가만히 내버려두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자, 잠깐, 설마?' 그는 연상적으로 떠오르는 기억에 숨이 멎을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가 메이린느 공주를 감시하게 된 첫 날. 필로윈은 공주와의 언쟁을 끝낸 후, 방문을 나서면서 어떤 말을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 말은 슈란가트의 뇌리 깊숙이 박혀 지금까지 가끔 꿈틀대고 있었을 뿐이었다. '아무래도 위험해, 메이린느 공주는…….' 그 말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어쩌면 필로윈은 먼저부터 공주를 노리 고 있었는데, 때마침 공주가 일을 터뜨려 주어서 계획하고 있던 것을 풀 어내는 것일 지도 몰랐다. 아니, 슈란가트는 그렇게 확신했다. 그라면 충 분히 그럴 자였으니까. "이제 들어가 봐도 되겠습니까?" 보스론의 입가는 이제 노골적으로 비웃음을 띄고 있었다. 뒤에 서있는 굳은 표정의 기사들과는 달리 그는 감정 표현에 매우 솔직한 것이 아닐 까, 하는 시답잖은 생각이 들 정도로. 어쩐지 기분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것 같음을 느끼며 슈란가트가 그 마 음 상태 그대로 대답했다. "아니. 한 가지만 더 물어보겠다." "흠, 뭐, 마음대로 하십시오." 별로 바쁠 것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는 보스론의 태도에 슈란가트는 분함을 느꼈지만 참아냈다. 여기서 화를 낸다고 일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 었으니까. 지금은 공주가 우선이었다. "공주님을 모셔간다면… 이제 나의 임무는 어떻게 되는 거지?" 제복을 이리저리 매만지는 무성의한 행동으로 그의 질문을 들은 보스론 은 '당연한 것 아닙니까?' 라는 얼굴로 말했다. "물론 오늘로서 종료입니다. 아마도 곧 이 내궁을 떠나서 다른 배정을 받게 되시겠죠. 안되셨군요, 공주와 같이 지내다시피 했던 그 몇 일이 오 늘로서 끝난다니. 깊은 애도를 표하는 바입니다." 그 말이 진심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슈란가트는 그의 대답 중반쯤에서 이미 신경을 끊어버린 후 또 다시 나락을 걷는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오늘로서 끝이다. 이대로, 이대로 공주님을 보내게 되면 무슨 일을 당할 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끝이다. 우리의 시간은 오늘로서 끝이다.' 무언가 주문 같았다. 계속 '끝이다'를 되뇌니 벌써 그렇게 된 것 같은 착 각이 일었다. 슈란가트는 검 손잡이에서 굳어버린 손을 애써 움직여 가슴 께로 들어올렸다. "잠시 기다려라. 내가 모셔 나오도록 하겠다." 그의 마음이 어떻든 밖으로 표출하는 실수는 범하지 않았다. 십 수년 동 안 단련된 기사의 자세. 슈란가트는 조용히 몸을 돌려 문으로 다가갔다. 그의 뒤에서 어느새 건들건들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보스론의 비웃음 가 득한 말이 들려왔다. "이별의 시간입니까? 되도록 빨리 끝내주십시오. 훗." 하지만 슈란가트의 귀에는 이미 그 말이 들리지 않았다. 쿵. 문은 거센 소리를 내면서 닫혔다. 슈란가트는 문에 기대어 섰다. 차분한 공기. 푸근한 느낌. 어느새 익숙해 져버린 메이린느의 방 기운이 그의 온몸을 쓸어 내렸다. "말을 타고 서둘러 간다면…… 어, 슈란? 제가 들어와도 좋다고 허락했 었나요?" 갑자기 들어온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려 의아한 음성으로 묻는 메이린느 를 향해 대답을 해줘야했지만, 지금 그에게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그는 성큼성큼 걸어와 메이린느 앞에 멈춰 섰다. "……슈란?"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슈란가트를 의문을 띄운 얼굴로 올려다보았다. '어디 아픈 건가?' 그녀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 리가 아닌 이유를 들자면, 어쩐지 슈란가트의 얼굴이 굳은 채 군데군데 식은땀이 묻어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하이마크에게 하던 이야기를 멈춘 채 슈란가트의 손을 지그시 붙잡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잡은 손을 흔들며 말했다. "슈란? 왜 그러는 거예요?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하지만 여전히 그는 그녀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메이린느는 할 수 없이 그 눈길에 들어있는 감정을 읽으려했다. 놀랍게도 그것은 슬픔과 고뇌가 뒤섞인 복잡한 덩어리였다. 그 격한 감정의 덩어리에 순간 멈칫해버린 메이린느. 굳은 표정에는 그 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윽고 슈란가트가 입을 열었다. "공주님." "네. …슈란?" 평소의 느낌과는 너무 다른 그의 목소리에 그녀는 뒤늦게 놀랐다. 뭔가 달랐다. 확실하게는 알 수 없었지만 뭔가가 달랐다. "대답을 해드리겠습니다." "……네?" 급박한 전개라고 한다면 충분히 그렇게 표현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당 사자가 아닌 하이마크는 눈이 돌아갈 것 같은 얼굴을 한 채 당황하고 있 었고, 당사자인 메이린느도 만만치 않은 얼굴로 슈란가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대답?' 한참 위로 올라가야 볼 수 있는 슈란가트의 얼굴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그녀. 거짓이 아니다, 라는 사실만 다시 한번 재확인할 뿐이었다. '그렇다 면 아까의 고백에 대답을 해주겠다는 말이 정말인 거야?' 그녀는 난생 처음으로 긴장해보는 사람처럼 슈란가트의 손을 꽉 잡은 손에 더 잔뜩 힘을 주었다. 슈란가트는 서서히 한쪽 무릎을 굽히고 한쪽 무릎은 땅에 댄 채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이 자세가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잘 알고 있 었다. 그녀는 가슴속에 들어있던 무엇인가가 솟구치는 듯한 기분을 느꼈 다. "기사를 가둘 수 있는 자는 단 두 명입니다. 기사가 충성을 다해 따르는 진정한 주군. 그리고 기사가 사랑을 다해 따르는 레이디. 저에게는 이미 주군이 있습니다. 레이디는 지금 이 자리에서 정하려합니다. 미천한 기사 의 신분으로는 감히 범접하지 못할 위치에 계시는 레이디, 메이린느 헤언 라시엔트 공주시여. 저의 청혼을 받아드려 주시겠습니까?" 기사와 레이디간의 서약. 그것을 청혼이라 칭하는 이유는, 일생동안 어 떠한 일이 있어도 함께 하기 때문이다. 서약을 저버리는 것은 기사로의 긍지와 명예를 스스로 손상하는 짓이고, 레이디로서의 행복과 사랑을 잃 어버리는 짓이다. 슈란가트를 잡고 있던 메이린느의 손은 아직도 쥐어져있었다. 하지만 이 번엔 슈란가트의 큰손이 메이린느의 작은 손을 덮고 있었다. 청혼. 생각지도 못했던 청혼. 고백의 대답이 이런 형태로 돌아올지는, 영 특한 그녀도 미처 생각지 못했다. 그래서 기쁘기 전에 한참을 멍한 상태 에 돌입해있어야 했던 그녀였다. 그녀는 곧 정신을 차리자, 슈란가트의 손에 잡혀있는 자신의 손을 느낄 수 있었다. 가슴이 뛰었다. 얼굴은 당연히 달아올랐다. 뜨거웠다. 슈란가 트에게 쥐어져있는 손에서부터 거부할 수 없는 거센 불길이 치솟아 전신 으로 퍼지는 듯한, 형용할 수 없이 뜨거우면서도, 그리고 행복한 그런 기 분이었다. "청혼을 받아들여 주시겠습니까?" 가슴 벅찬 느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니, 이미 그녀의 푸른 눈동자는 흐릿하게 젖어있었다. '뭐라고 대답해야할까. 뭐라고 해야하지?' 혼란스러웠다. 너무 감격해서 마땅한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이 순간, 모 든 사고 능력이 사라져버린 것처럼 그녀는 그저 입을 가리고 눈물을 글 썽이고 있었다. 슈란가트는 메이린느의 손을 잡고 있었기에 그녀의 떨림을 잘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마음이 틀리지 않았다고 확언할 수 있었다. 이것이, 이것이 자신이 원하는 길이며, 정의를 관철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이것이 옳은 것이었다. "청혼을… 받아주시겠습니까?" 세 번째 물음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웃고 있었다. 결과를, 그녀의 대 답을 확신하는 듯이. 하이마크는 민망한 것을 봤다는 듯이 고개를 창 밖으로 돌렸지만 희미 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기사와 레이디의 서약, 청혼. 모든 기사들의 로 맨스이며 예비 레이디들의 꿈 같은 이야기를 이렇게 현실로 목격하게 된 다는 것은 크나큰 영광이었고, 그보다 앞선 이유는 그 모습 자체가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행복에 겨워 울음을 참지 못하는 아름다운 레이디와 그 레이디에게 사 랑을 맹세하고 있는 충실한 기사. 이보다 더한 로맨스는 찾아보기 힘들었 다. "……네, 슈란. 청혼을… 받아들일게요. 흑……." 드디어 간신히 입을 연 메이린느가 대답했다. 슈란가트는 서둘러 고개를 들어 또 다시 울음을 터뜨리는 그녀를 안았다. 품속에 들어오는 작은 몸 을 두 팔로 감싸안으며 슈란가트는 그녀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금안 기사 슈란가트 마카르토는 메이린느 헤언 라시엔트님을 평생 동 안 사랑할 것이며 충성하겠습니다." 청혼의 마지막 말이 남은 상태에서 하이마크는 휘영청 떠있는 달의 생 김새를 관찰하기 시작했고 슈란가트는 공주의 머리를 더욱 강하게 끌어 안았다. "사랑합니다, 나의 레이디……." 슈란가트와 메이린느. 공주와 그녀를 감시하는 기사의 관계에서 서로를 깊이 사랑하는 나이트와 레이디의 관계까지. 그리 오래 걸린 시간은 아니 었지만, 슈란가트는 그만큼 그녀를 강하고도 부드럽게 감싸안고 있었다. -------------------------------------------------------------------- 사실. 청혼의 마지막 말은 "이 에볼 임 이달."이었습니다. 그게 무슨 뜻인 고 하니. 에에, 고대어인데, 철자는 이렇죠. "I evol ym ydal."... 아하하하.( ---) 그런데 발음을 보니 영 이상해서 결국 저렇게 고쳐버렸습 니다. 그냥 고대어로 나가는 게 나았으려나요? 긁적긁적.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거 이러다가, 5권은 400쪽이 되어버리는 건 아닐까, 하는. 그런 무지막지한 분량이면 정말 곤란한데 말입니다;;; 음음. 분량 조절에 실패해버린 것인지. 털썩. 으으. 어쨌든 가볼 때까지 가보자, 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팀군인 것입니다. 흐으. 어둠의 기사 DARK KNIGHT TEAM... 덧하나. 추천 감상 비평. 여전히 받고 있습... 덧두. GO CAMA 덧석. 덧.을 왜 세 가지나 하는 거지?(---)a <-- 바보. 번 호 : 14 / 17 등록일 : 2001년 02월 16일 17:03 등록자 : 암음기사 조 회 : 81 건 제 목 : [카드 게임 판타지]『카드 마스터(Card Master)』#091 <9장'청혼 카드 게임 판타지(Card Game Fantasy) 카드 마스터(Card Master) 91. "그리고는 같이 도망쳐 나왔다는 거야?" "그래." 슈란가트는 쑥스러운 이야기를 한 탓에 불편한 얼굴로 대답했다. 옆에 앉아있는 메이린느도 지그시 시선을 회피하면서 이야기를 경청 중이었고 가끔 입을 열어 설명을 거들기도 했다. 카를레오는 음흉하게 보일 법도 한 웃음을 띄우다가 이내 지워버렸다. 그의 눈동자가 살짝 뒤쪽으로 향했다. "그럼 도망쳐 나오다가 무슨 일이 있었길래 저 기사 수련생이 다친 거 야?" 부끄러운 듯 홍조를 띄우고 있던 메이린느의 얼굴이 금새 빛을 잃고 어 두워졌다. 그런 공주의 어깨를 가만히 감싸며 슈란가트는 헛기침과 함께 이야기했다. "그렇게 서약을 마치고 난 상황을 설명했어."로 시작된 슈란가트의 설명 은 다음과 같았다. 본인들은 기분 좋고 남들이 보기에는 민망한 서약을 끝내고, 기사와 레 이디는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레이디의 질문("대답 해주려고 들어온 건가요?")에 상황을 다시 자각한 기사는 서둘러 레이디 에게 바깥 상황을 설명했다. 기사 네 명이 메이린느를 잡으러왔다는 말. 존칭 같은 건 생략되어버린 보스론의 말을 기억해내며 설명하는 슈란가트의 말에 그녀는 명령을 내 린 인물을 단숨에 꿰뚫었다. "필로윈인가요?" 탁월한 그녀의 머리에 경의를 표하며 슈란가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 다. "네, 맞습니다." "짐작하고 있었어요." 별로 놀라지 않는 투로 흘리는 공주. 슈란가트도 그녀의 반응에 동화된 듯 간단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의 곁에 앉았다. 이제 더 이상 어색 하거나 서먹하지 않았기에 메이린느 곁에 있는 그의 모습은 아주 자연스 러웠다. 하이마크가 말했다. "그럼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는 거 아닙니까?" 그 말에 별로 악의가 들어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걸 모를 리 없는 슈란 가트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어서 방도를 마련해야겠지. 나의 레이디를 잡혀가게 놔둘 수는 없으니." 메이린느는 상황의 위험성을 자각하고 있는 상태에서도 행복함이 느껴 지는 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었다. 슈란가트도 포근한 분위기 속에서 나름대로의 긴박감을 느끼면서 입을 열었다. "힘들겠지만 도망가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이대로 앉아있다가는 꼼짝없 이 당할 테니까요." "하지만 어떻게요? 내궁으로 오면서 보니까, 군데군데 기사들이 배치되 어있던데, 가능하겠습니까?" "흐음, 방법을 생각해봐야겠지." 내궁의 책임자는 슈란가트였다. 최소한 스무 명 정도의 기사들은 그의 명령을 따를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나이트 보스론이 데리고 온 기사들의 수였다. 지금 복도에 있는 보스론을 제외한 세 명의 기사. 그들이 전부라 면 좋겠지만 어디에도 장담할 수 있는 사실이 없었기에 맘을 놓기에는 너무 일렀다. "하론 집사님을 모셔올 수 있을까요?" 문득 메이린느가 말했다. 슈란가트는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다 는 듯이 조금 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얼른 방문으로 걸어갔다. 문을 조금 열고 복도에 몸을 내미는 슈란가트. 보스론은 여전히 건들건 들한 자세로 세 명의 기사 앞에서 시답잖은 이야기를 주절거리고 있던 차였다. "아아, 이제 나오십니까?" "아직이다. 하론 집사를 불러와 주겠나?" "왜 그래야하는 거죠?" "이별의 시간이다." 슈란가트의 묵묵한 얼굴을 살피려는 듯 눈을 가늘게 뜨던 보스론은 이 내 비열하기가 하늘을 찌를 것 같은 웃음을 띄우며 뒤의 기사에게 지시 했다. "그 늙은이 집사를 불러와." 노인에 대한 공경이라고는 눈곱만치도 느껴지지 않는 말에 지시를 받은 기사는 잠시 움찔대다가 1층으로 서둘러 내려갔다. 계단을 뛰어내려가는 기사의 발소리가 조금 들리더니 이내 끊어졌고, 그 다음에는 또 다시 쿵 쾅대는 진동이 울려왔다. 곧 계단에서 검은 정장을 차려입고 외눈 안경을 착용한 하론 집사가 갑 작스런 공주의 호출에 놀란 듯이 다급하게 뛰어올라왔다.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그는 문 앞에 모여있는 기사들을 보고 깜짝 놀라서 멈칫거리더니, 슈란 가트의 손길에 이끌며 서둘러 메이린느의 방안으로 들어섰다. 슈란가트는 그를 안으로 들여보내고 가차없이 문을 닫아 복도의 기사들을 경계하게 만들었다. "하론 집사님, 방금 몰려온 기사들이 총 몇 명이에요?" "방금…이라면 지금 복도에 있는 기사들과 같이 온 기사들 말입니까?" "네, 그 기사들요." 하론 집사는 인사도 제쳐두고 본론으로 들어가는 공주의 태도에 뭔가를 감지했는지 잠시 문 쪽을 노려보듯이 응시하고는 재빠르게 답했다. "밖의 기사들이 전부입니다. 내궁에 있는 나머지 기사들은 슈란가트님과 같이 온 분들입니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다행이군요. 가능성이 있어요." 모두의 시선이 다소곳이 앉아있는 공주에게 향했다. 그 사이 슈란가트가 낮은 목소리로 하론 집사에게 상황 설명을 짧게 해주었다. "슈란가트, 검술 실력은 당연히 좋겠지요?" "네? 일단은 기사단 내에서 단장님 다음입니다만?" 슈란가트는 그녀의 뒷말을 유추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가 말을 꺼내 기도 전에 메이린느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슈란가트가 문밖에 있는 기사 네 명을 기습해서 쓰러뜨리세요. 죽일 필 요는 없죠? 움직이지 못할 정도만, 기절 정도요. 그리고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내궁 밖으로 나가는 거예요. 뭐, 핑계는 필로윈을 만나러 가는 걸로 하면 되겠네요." "…쓰러뜨리란 말씀이십니까?" "네. 힘들면 제가 미끼가 될 게요. 제가 먼저 나가면 당연히 방심하게 될 테니까 그 새에 분투해서 기절시켜요. 하이마크도 있으니까 그렇게 무 리가 있는 건 아니겠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실력을 믿는다는 듯이 슈란가트의 눈을 올려다 보며 빙긋 웃는 메이린느의 말에 그는 잠시 멍한 표정이 되었다. 메이린 느 공주의 성격은 정말 예상외로 대범하고 화끈했던 것이다. "괜찮겠습니까?" "검 휘두르다가 나 치지나 말아요. 그리고 적당히 힘 조절 하구요. 내 저택에서 유혈 사태가 일어나는 건 별로 원하지 않는 일이니까." "명심하겠습니다." 슈란가트의 단단한 답변에 메이린느는 긴박한 사태를 잊은 듯이 상쾌하 게 웃더니 하론 집사를 돌아봤다. 그는 공주의 시선에 외눈 안경을 고쳐 끼며 그녀를 마주 보았다. "집사님은 우리가 나간 후에 시종들을 불러서 기절한 기사들을 다른 곳 으로 치워두세요. 이왕이면 묶어두시는 것도 좋을 듯하네요. 어쨌든 우리 가 안전한 곳으로 갈 때까지 시간을 끌어야해요." 하론 집사는 혹시 자기가 모르는 사이에 이와 비슷한 일을 공주가 당한 적이 있는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녀는 위급하다면 위급한 이 사태에서 도 여전히 흔들리지 않는 평온한 얼굴로 냉정하게 모든 작전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이런 그녀를 모시게된 자신의 집사 인생을 마음껏 찬양하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가, 때가 때인 탓에 서둘러 정신을 차렸다. "알겠습니다, 공주님." "좋아요. 준비는 되었나요?" 슈란가트는 하이마크를 쳐다보며 검 손잡이를 움켜잡았고 하이마크도 다부진 얼굴을 만들며 그를 바라보았다. 하론 집사만이 작은 걱정을 안은 표정을 지을 때, 메이린느 공주는 웃음 띈 얼굴을 굳은 표정으로 변화시 키며 거침없이 문을 딸깍 열었다. 복도의 빛이 보이고 그 사이로 보스론 의 보기 싫은 얼굴이 슈란가트에게 비쳐졌다. 그는 원래 그랬다는 듯 굳 은 얼굴로 메이린느 공주의 뒤를 조심스럽게 따랐다. "오호, 반갑습니다, 메이린느 공주." 공경이라고는 눈과 귀를 성수로 깨끗이 정화하고 찾아봐도 느껴지지 않 을 만한 음성으로 보스론이 인사했다. 공주의 몸을 아래위로 훑으며 구경 하다 "오호, 역시 아름다우시군요." 라는 대사를 거리낌없이 던지는 그에 게 메이린느 공주는 차갑게 말을 낮추었다. "안내하거라." "흠, 딱딱하시군요. 앞으로 자주 볼 사이가 될 텐데. 훗, 그럼 가실까 요?" 자기 딴에는 기사도를 지킬 의향은 있는지 "레이디 먼저."를 외치며 길 을 비키는 보스론. 메이린느는 자뭇 긴장한 표정으로 기사들의 중앙으로 들어섰다. 그에 따라 기사들의 몸이 일제히 슈란가트에게서 등돌려졌고, 그는 직감했다. '이때다!' 슈란가트는 단단하게 잡고 있던 손잡이가 더 딱딱하게 느껴질 정도로 재빠르게 검을 빼들었다. 어느새 허리에서 검집까지 풀어내고 있었는지 검집 채로 들려졌고, 그것은 태풍이라도 가를 기세로 맨 뒤에 서있던 기 사의 목덜미를 향해 날아갔다. 퍽.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무거운 검으로 목을 얻어맞은 기사는 신음도 흘 리지 못한 채 정신을 잃고 쓰러져버렸다. 그와 동시에 기사들이 검을 빼 들며 돌아섰다. 하지만 그들의 검이 검집에서 채 빠지기도 전에 슈란가트 의 검이 또 한 명의 목을 강타했다. 인체의 급소 중에서도 주로 애용(?) 되는 곳인 목. 그곳에 강한 타격을 받으면 관절에 충격을 받아 웬만한 장 정들도 쓰러지고 만다. "나이트 슈란가트!" 보스론의 날카로운 외침이 들려왔다. 슈란가트가 눈을 들었을 때 그는 이미 완벽하게 검을 빼들고 있었다. 슈란가트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레이 디의 안위를 살폈다. 공주는 재빠르게 벽에 붙어 안전거리를 확보하고 있 었다. 슈란가트는 여전히 검집 채로 검을 쭉 내밀었다. "슈란! 위험해요!" 공주의 다급한 일갈에 그는 무언가 날아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앞에는 보스론이 완벽한 자세를 갖춘 채 검을 뻗어오고 있었기 때문에 검의 궤도를 수정할 수 없었다. 완벽하게 당할 수밖에 없는 사태 였다. "여기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다른 검사가 있었다. 기사 수련생의 신분이지만 수련 생들 중에서도 최상의 실력을 자랑하며 기사들과 대적해도 뒤지지 않을 것이라는 평을 받고 있는 검사, 하이마크. 그의 검이 공간을 꿰뚫고 날아 들어와 슈란가트를 노리고 들어오던 기사의 검을 쳐냈다. "고맙다!" "천만에요!" 슈란가트처럼 검집에서 빼지 않은 검을 다시 한번 기사를 향해 휘둘러 거리를 벌려놓으면서 하이마크가 소리쳤다. 메이린느는 대결에 방해가 되 지 않도록 서둘러 뒤쪽으로 움직여 검의 사정거리에서 빠져나왔다. 좁은 복도에서 기사 네 명의 대결. 각자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슈란가트가 내지른 검은 보스론의 왼쪽 뺨을 스치며 지나가 그가 반격 을 할 기회를 주었다. 하지만 슈란가트는 내지른 팔을 거두지 않고 그 기 세 그대로 팔꿈치를 보스론의 얼굴에 들이댔다. 퍽. 완벽한 일격이 보스론의 얼굴에 적중했다. 아주 통쾌한 기분을 느끼며 슈란가트는 비틀거리는 그의 목덜미를 검으로 내리쳤다. 방금 전의 일격 과도 비견될 만한 경쾌한 소리가 들리며 보스론은 저만치 나가떨어져 쓰 러졌다. 슈란가트는 거품을 물고 기절하는 보스론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레이디를 향해 뛰어갔다. 그녀는 하이마크에게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하이마크도 기사를 상대로 한 대결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정식 기 사와 검을 대보는 것은 아버지 바이마크 이외에는 처음인 그였지만 예상 외로 선전하면서 결국 그를 기절시키고 말았다. 마지막 결정타는 기사가 내려치는 검을 옆으로 피하면서 그의 명치를 검으로 사정없이 찔러버린 공격이었다. 명치는 인중, 낭심과 함께 겉으로 드러나는 인체 3대 급소 중 하나로 제대로 맞으면 죽음까지 이를 수 있는 공격 부위였다. 켁켁거리다가 결국 정신을 잃고 마는 기사를 내려다보면서 하이마크는 "휴우…" 한숨을 쉬었다. 이로서 상황 종료였다. 하론 집사가 기절해버린 기사들을 넘어 세 명이 모여있는 곳으로 다가 왔다. "화끈한 대결이었습니다.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상관없는 저도 땀이 나 는군요, 이거." 그는 정말이라는 듯 두 손을 몇 번 접었다 펴면서 옷에 슥슥 문질러 닦 았다. 메이린느는 빙긋 웃으며 완벽하게 작전을 실행해준 한 명의 기사와 한 명의 검사를 치하했다. "잘 했어요. 믿었던 게 손해는 아니었군요. 자, 그럼 이제 빨리 나가야 죠? 더 있는다고 해서 좋을 건 없어요." "나가면 어디로 가시는 것입니까?" "일단 북문으로 가요. 그쪽으로 나가야지 시민들이 잘 모를 테니까." "준비 같은 건,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메이린느는 자신의 기사의 볼을 쿡 찌르면서 장난스레 말했다. "그런 건 아까 전에 말했어야 옳아요. 지금 말해봤자 이미 지나갔다고 요." "아…… 죄송합니다." 금방 미안한 얼굴이 된 슈란가트. 하이마크는 싸우는 소리가 밑에까지 들린 것은 아닌지 걱정하면서 계단 밑을 계속 살피고 있었다. 그새 메이 린느는 밝을 얼굴을 만들었다. "됐어요, 지금은 도망가는 게 더 중요하니까. 그리고 도망의 정석은 아 무 것도 준비하지 않는 거라고요." 마치 도망의 달인(?)이라도 된다는 듯이 여유까지 느껴지는 그녀의 대사 에 슈란가트는 황당하게 "하하하." 웃었다. 그의 레이디는 일찍이 짐작한 바대로 대범하면서 화끈한 성격이라는 것을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기 때 문이다. 메이린느가 하론 집사에게 아까 전에 했던 말을 다시 상기시키는 것을 마지막으로 그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1층으로 내려갔다. 그들의 얼굴은 어느새 잔뜩 굳어서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메이린느 공주가 가장 먼저 1층에 발을 디디자, 계단 양옆에 꼿꼿이 서 있던 기사 두 명이 예의 바르게 허리를 굽혔다. 그녀는 가벼운 목례를 무 겁게 하는 신기를 보이며 그들의 인사에 답했고, 그에 이어 기사들의 물 음이 슈란가트를 향했다. "2층에서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리던데, 아무 일도 없습니까?" "일은 무슨. 임무에 열중하라." 슈란가트는 냉정하게 들릴 지도 모르는 말을 그렇게 하고는 입구로 다 가갔다. 문 옆에 서있던 기사들도 정중하게 경례했다. "하론 집사님." "네, 공주님." 문 앞에서 잠시 뒤돌아선 공주가 옅은 슬픔이 느껴지는 얼굴로 하론 집 사를 바라보았다. "다녀올게요." "…안녕히 다녀오십시오." 하론 집사도 그녀와 같이 슬픈 음성으로 대답했다. 슈란가트는 그 모습이 보기 싫다는 듯 고개를 돌리며 현관을 열었다. 서 늘한 저녁바람이 문을 통해 저택 안으로 스며들었다. 메이린느가 밖으로 나가고, 하이마크도 그 뒤를 따르자 슈란가트는 문 양옆에 서있는 기사들을 살폈다. 그들도 제1대장의 눈길에 긴장하며 등을 굳게 세웠다. "잠시 디바이어님께 다녀오겠다. 경비 철저히 서고 있도록." "네, 잘 다녀오십시오." 슈란가트는 끝까지 엄숙한 표정으로 일관하면서 살며시 문을 닫았다. 기 분까지 조용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고 있을 때, 웃음기를 담은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슈란, 연기 잘하네요?" 슈란가트는 빙그레 웃으며 응수했다. "공주님도 의외이십니다." "의외는요. 나 원래 이런 성격인 걸요."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대답하는 레이디를 향해 기사는 따뜻한 웃음을 띄 워주었다. 이제 이쯤 되면 그 좋은 분위기를 방해하는 목소리가 들려올 때가 되었다. "일단 빨리 움직이는 것이 먼저이지 않습니까?" 아마도 이 세 명중에 현 상태를 가장 잘 자각하고 있는 자가 아닐까, 하 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긴장 어린 말투의 하이마크였다. 슈란가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먼저 발길을 옮겼다. 정문까지 이어지는 좁은 길. 저 정 문에도 기사들이 있겠지만 방금 전같이 행동하면 문제없었다. 메이린느 공주를 중심으로 양쪽에 슈란가트, 하이마크가 호위하는 식으 로 그들은 굳게 다문 입만큼이나 긴장된 모습을 연출하면서 내궁을 서서 히 빠져나갔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카를레오는 뭔가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렇게 쉽게 내궁을 빠져나갔는데 저 기사 수련생, 하이마크라고 했었 지? 하이마크는 왜 다친 거야?" "들어봐, 좀." 슈란가트는 숀이 이거밖에 없다면서 내온 녹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카 를레오 때문에 끊어진 이야기의 허리를 이어 붙였다. "나이트 보스론을 기절시켰긴 했는데 그게 너무 약했던 거야. 그 녀석이 금방 깨어나서 우리를 쫓아왔던 거지. 북문에 거의 다 와서 북문 근처의 마굿간에서 말을 꺼내고 있는데 기사들이 10명 가까이 몰려오더군. 한바 탕 전투가 벌어졌지. 공주님을 보호하면서, 그리고 죽지 않게 싸운다고 얼마나 힘들었는지, 나의 기사 인생 중에 단장님의 훈련 이후로 그렇게 힘든 건 처음이었어." "그럼 하이마크는 그때 다친 거야?" "그래. 내가 쳐낸 검이 진로를 잃고 뒤편에 서있던 공주님을 향해버린 거지. 내가 아차, 하는 순간에 하이마크가 몸을 날려서 그 검에 당해버렸 어. 반 이상은 이미 쓰러뜨린 상태여서 다행이지, 안 그랬다면 이미 우린 잡혀버렸을걸? 아무튼 하이마크는 심하게 다친 상태에서도 끝까지 싸우 다가 정신을 잃었고, 우리는 말을 타고 도망을 쳐 나왔지. 그리고 조금 전에 말은 돌려보내고 쉴만한 곳을 찾아다니다가 그 그늘 속에 숨어있었 던 거야." 그렇게 간단하게 말하고는 있지만 그 과정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는 설명 하지 않아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원래는 새하얗게 빛을 뿜어야지 당 연한 공주의 드레스는 여기저기 찢기고 더러워진 상태라 잠옷으로 쓰지 못할 게 분명한 모습이었고, 역시나 하얀 색이지만 흙이 묻고 피가 묻고 군데군데 더러워진 슈란가트의 제복도 더 이상 기사의 권위를 세워주지 못할 모습이었다. 카를레오는 슈란가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머리 속으로 이야기를 정 리했다. 그리고는 지금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 해답을 간편하게 줄여 떠올렸다. "그럼 에코로 최대한 빨리 가야하는 거야?" "물론. 그러기 위해서 왕성에서 도망친 거니까." 슈란가트는 피곤해보이는 메이린느를 걱정하면서 답했다. 자신의 친구가 무언가 길을 열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면서. "도와줄 수 있어." "정말요?" 공주의 표정이 활짝 펴졌다. 카를레오는 특유의 미소와 함께 답했다. "네, 공주님. 이래 보여도 전직 마법사였잖아요? 공간 이동쯤은 지금도 할 수 있어요. 두 명 정도라면 아마도 거뜬할 거라고 생각되는군요." "고마워요, 레오! 이 보답은 꼭 할게요!" "아하하, 별로 보답을 바라고 하는 일은 아닌데요, 뭐. 그저 태자 저하와 공주님을 도울 수만 있다면 그걸로도 족해요." 너무나 기쁜 나머지 맘껏 소리를 질러버린 메이린느에게 카를레오는 흐 뭇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그때 예상치 못한 목소리가 그들의 대화 중간 으로 날아들었다. "세 명입니다." 일동의 시선이 일제히 뒤편, 숀의 침실로 향했다. 검이 관통한 상처가 아직 쑤신 지 한 손으로 그곳을 누르면서 약간 찡그린 표정을 짓고 있는 하이마크였다. 붕대를 제외하면 완전 반라인 그를 차마 쳐다보지 못한 메 이린느가 급히 고개를 돌리고 있을 때, 슈란가트가 소리쳤다. "괜찮아? 아직 움직이면 안될 텐데." "상관없어요. 이 정도 통증은 충분히 견딜 수 있습니다." 하이마크는 천천히 걸어와 숀의 자리였던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 고는 단호한 표정과 음성으로 말했다. "저도 끝까지 같이 하겠습니다. 저만 놔두고 갈 생각은 하지 말아주십시 오." 절대 물러서지 않을 거라는 의지가 돋보이는 눈빛. 바이마크와 똑같은 그 모습에 새삼스레 혈연의 신비를 느낀 카를레오가 묶어 올린 머리를 매만지며 하이마크를 쳐다보았다. "괜찮을까? 내가 공간 이동을 해줄 수 있는 곳은 게이트 마을까지야. 나 도 더 이상 치료를 해줄 수는 없으니, 6일 정도는 고통을 참으면서 게이 트 산맥을 넘어야해." "괜찮습니다. 그 정도도 못 참아낸다면 기사가 되려는 꿈은 일찌감치 버 려야하겠지요." 한 마디 한 마디에 힘이 들어있는 그의 말. 메이린느는 약간은 붉힌 얼 굴로 하이마크를 바라보았고, 슈란가트도 흐뭇하게 따지고 보면 제자인 그를 응시했다. 붕대가 매어져있긴 했지만 그의 등은 굳건하게 펴져 여느 기사 못지 않은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 모습이 꼭 핏줄 탓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좋아. 같이 가자." 슈란가트의 말에 하이마크의 얼굴이 금방 환해졌다. "감사합니다!" "엄살 피우면 당장 버리고 갈 테니까, 그렇게 알아." 하이마크는 불끈 쥐어진 주먹으로 의지를 표현했다. 메이린느의 웃음과 함께 카를레오와 슈란가트도 미소를 지었다. "좋아. 그럼 오늘은 일단 여기서 자게. 공주님께서는 침대를 쓰시도록 하세요. 금방 시트를 갈 테니까.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거실에서 자도록 하세나. 이의 있나?" 어느새 부엌에서 나온 숀이 그렇게 제안했다. 하이마크는 아픈 와중에도 끄떡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고, 카를레오와 슈란가트도 별 불만이 없 는 얼굴이었다. "씻으려면 부엌 뒤의 세면실을 이용하게. 더운물은 아니지만, 찬물은 아 주 잘 나오니까 괜찮을 거야." "감사합니다, 히브리드 씨." "괜찮습니다, 기사님." 숀은 깍듯이 존대를 하며 슈란가트에게 고개를 숙였다. 슈란가트는 그런 숀의 태도가 어려운지 어색하게 웃다가 피곤한 기가 도는 메이린느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의 레이디는 이리저리 여러 가지 일로 왁자지껄한 하루 를 보낸 덕에 피로가 서린 눈을 하고 있었다. "피곤하십니까? 들어가 쉬도록 하세요. 내일 아침에 기상하기도 힘드실 텐데." "슈란은 언제 잘 거예요?" 기사를 걱정하는 레이디의 마음. 청혼의 대상을 바라보며 지그시 미소 지은 슈란가트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따뜻한 어조로 말했다. "걱정 마세요. 저도 곧 잠자리에 들 테니까." "네, 그럼 잘 자요, 슈란. 다른 분들도요." 메이린느는 많이 졸렸는지 방안으로 들어갔다. 그 뒤를 따라서 숀이 들 어갔고 방안에서는 시트를 가는 소리가 한참동안 요란스럽게 들려왔다. 카를레오는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역시나 오랜만에 만난 공주 사이에 미묘한 감정이 존재한다는 것을 쉽게 눈치챘다. 그는 쉽게 짐작해낼 수 있는 사실을 꺼냈다. "청혼?" "그렇지." 옅게 미소짓는 슈란가트. 카를레오는 그의 미소에 피로가 서려있기는 했 지만, 5년 전보다 느낌이 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청혼의 힘. 기사가 레이디에게 약속하는 사랑의 서약. 카를레오는 기사와 레이디간의 서약을 생각하며 빙글 웃었다. "나쁜 녀석이군. 대체 어떻게 공주님의 마음을 잡은 거야?" "흠, 글쎄. 어떻게 하다 보니 그렇게 됐어." "쳇, 좋겠군." 핀잔하는 말투였지만 그의 얼굴은 웃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 슈 란가트. 게다가 공주에게 청혼했다니 당연히 축하할 일이었다. "축하해, 슈란." 슈란가트는 따뜻한 눈매로 메이린느가 들어간 여전히 쿵쿵 소리가 들려 오고 있는 방의 문을 응시하며 대답했다. "고마워." 그의 눈빛은 아주 따뜻했다. <9장 '청혼' 完> --------------------------------------------------------------------- 네네. 이렇게 9장이 끝입니다. 이제 다음 편부터는 카드 마스터의 마지막 장. 10장에 들어가겠군요. 하아, 이거 마지막 장까지 오니 또 다시 감회가 새로워집니다. 카마의 집필은 5월달부터였는데, 벌써 완결까지 오다니. 아틀란티스.를 쓰고 있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의 속도로군요. 글쓰는 데에 이젠 많이 익숙해졌다는 걸까요? 오히려 더 허접해졌다면 어 쩌나 하고 맘이 불안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기쁩니다. 허접자까 팀군의 길은 아직도 멀고도 멉니다. 죽기 전까지 작가.로 업그레 이드를 할 수 있을지조차 의문인 이 자까의 행보를 끝까지 뒤쫓아와 주시 겠습니까? 그럼 정말 행복할 텐데요.(^^^) 이거 어쩐지 완결편의 후기 같군요.(---)a 뭐, 완결편이 되면 또 다시 이와 같은 이야기를 주절거릴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냥 맘 편하게 읽어주시길. (^^^) 그럼, 다음 편에서 뵙겠습니다! 어둠의 기사 DARK KNIGHT TEAM... 덧하나. 추천 감상 비평. 완결이 되도 받습니다. :) 덧두. GO CAMA 덧석. 100편까지 9편 남았습니다. :) 번 호 : 15 / 17 등록일 : 2001년 02월 16일 17:03 등록자 : 암음기사 조 회 : 77 건 제 목 : [카드 게임 판타지]『카드 마스터(Card Master)』#092 카드 게임 판타지(Card Game Fantasy) 카드 마스터(Card Master) 92. 마법력 1414년 마스터 카드 대회 본선은 마법사들의 도시 에코의 남쪽 에 지어진 정식 돔에서 열렸다. 예선전으로 총 64명의 본선 진출자가 가 려졌고, 마법사 길드는 그들을 공평하게 투표로서 대진표를 작성했다. 그 대진표는 돔 안의 게이머 대기실마다 모두 붙여져 있었고, 그래서 본 선을 치르기 위해 각자의 대기실에 도착한 훼이드리온과 아이, 미르는 손 쉽게 대진표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일행은 지금 훼이드리온의 방에 모두 모여있는 상태였다. 작은 테이블과 널찍한 소파. 침대 대용으로 사용해도 충분할 만한 포근 함과 푹신함을 가진 그 소파에 나란히 앉아서 테이블 위에 각자의 주머 니를 올려놓은 후, 그들은 대진표에 대해서 진지하게 토론을 벌이려했다. "에에, 훼온은 24번이네. 난 41번, 미르는 15번." 미적 감각은 별로 느껴지지 않는 밋밋한 백지에 검은 선과 검은 글자로 이루어진 마스터 카드 대회 대진표. 그것을 올려다보는 아이의 검은 눈동 자가 담담한 빛을 띄웠고, 그녀와 시선을 같이 하고 있는 훼이드리온은 대진표를 전체적으로 훑어보고 있었다. "아이하고 만나려면, 으음…… 둘 다 결승까지 올라가야 하겠는걸?" 아이는 훼이드리온과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고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네. 자신 있어?" "글쎄. 잘 모르겠어. 아이든 나든 이번이 처음이잖아. 어떻게 예측하기도 힘드니까." "그런가?" 24번이라는 번호가 부여된 훼이드리온과 41번이라는 번호가 붙여진 아 이는 상당히 멀리 떨어져있었기 때문에 결승이 아니라면 대전 중간에 만 날 확률은 거의 없었다. 아니, '거의'도 아니라 '아예'쪽이 가까울 확률. 훼 이드리온은 안심이 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아쉽기도 한 상황에서 귀속 으로 들려오는 아이의 산뜻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대회 기간에는 정규 대전 외에는 게이머끼리의 대전은 할 수 없으니 지금은 못 하구. 우웅, 결국 대회가 끝나기까지 기다리든지, 혹은 결승에 서 만나기를 기다려야하는 건가?" 대회 규정 중에 한 가지가 '대회 기간 중 게이머간의 사소한 대전은 일 절 금지한다.'라는 항목이 있다. 미리 전력을 탐색할 기회는 주지 않겠다 는 의미였고, 정규 대전에서의 긴박감을 더욱 늘려보겠다는 취지였다. 물 론 이 항목은 꽤 긍정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아이는 자신 있어?" 그녀가 자신에게 했던 대답을 그대로 돌려주는 훼이드리온. 아이는 등을 타고 흘러내려 소파까지 직접 닿는 검은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휘어 감 아 만지작거리며 복잡한 얼굴로 대답했다. "나도 '글쎄'라고 밖에는 대답 못하겠어. 수정거울 카드를 든 카드에 포 함시킬 수만 있다면 그럭저럭 괜찮겠지만, 무작위 방식은 그것도 안되고. 게다가 수정거울을 깰 수 있는 방법도 분명히 존재할 테니까. 아아, 머리 아파." 문득 떠오르는 걱정에 아이가 과장되게 한탄하며 그 아름다운 검은 눈 동자를 깜빡였다. 훼이드리온이 부드럽게 웃으면서 다시 대진표를 올려다 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자신의 번호에서 왼쪽으로 차츰 이동하여 미르의 위치에 서 고정되었다. 15번, 미르. 간단한 이름이 기록되어져있는 곳을 보고 그 의 고개는 여전히 검은 로브에 푹 쌓여서 조용히 앉아있는 미르에게로 향했다. "미르, 잘하면 루페르스하고 만나겠는데?" 훼이드리온의 대기실에 들어온 그 처음에 대진표를 확인한 후, 지금까지 묵묵하게 앉아있기만 한 미르의 눈은 그제야 다시 대진표를 쳐다봤다. 정 적이 돌고 있는 탁한 검은 눈동자는 아이와는 다른 빛을 띄며 찬찬히 대 진표 위를 움직였다. 이윽고 입을 연 미르. "너도 마찬가지군." 훼이드리온은 다시 미르와 루페르스의 위치를 확인했다. 15번인 미르가 연승을 하고 3번인 루페르스도 그렇게 된다면, 둘은 8강에서 만나게 되어 있다. 미르의 실력이라면 8강까지는 문제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는 지 그시 입을 열었다. "루페르스가 과연 8강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 루페르스, 그는 훼이드리온에게 두 번이나 졌다. 처음 대전에서는 뭔가 음모가 있어서 본 실력을 감췄다고 해도 두 번째에는 본 실력을 내비쳤 음에도 불구하고 훼이드리온에게 패배했다. 그 점을 염두 해두고 그가 말 하는 것임을 하는 아이는 동의한다는 듯이 "음음." 소리를 냈다. 하지만 미르의 표정은 여전히 고요했다. "방심은 금물이다." 훼이드리온과 아이는 동시에 소년을 돌아봤다. 미르는 전방의 문을 응시 하고 있던 채로 더없이 정확한 발음으로 발언했다. "루페르스의 실력이 그것밖에 안 된다고는 할 수 없다. 한번 속였다면 또 속일 수도 있는 법이다." 비장한 말이었다. 훼이드리온은 소년의 말에 공감을 느끼며 입을 다물었 다. 타이밍도 적절하게 그 순간 대기실 한쪽 모서리에 달려있는 벨이 '디이 이잉' 소리를 내며 울렸다. 훼이드리온과 아이의 시선이 물끄러미 그 벨 을 향했다. "시작인가." "응. 그런가봐." 훼이드리온은 대진표를 지나가듯이 한번 훑고는 소파에서 일어났다. 갈 색주머니를 테이블 위에서 잡아 올려 허리춤에 달고, 왼쪽에 달린 칼을 다시 고치며 그는 힘을 넣어 말했다. "가보자." 그 말에 반응이라도 하듯 아이가 자리에서 일어나고, 미르도 묵묵히 몸 을 일으켰다. 굉장한 관중들이었다. 이 도시에 사는 모든 이들이 이 돔 안에 들어온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마스터 카드 대회의 관중수는 거대했다. 입구에서 힘들게 인원수를 체크하고 있던 진행요원들은 돔의 한계인원이 초과한 다음부터는 '에라, 모르겠다' 식으로 막 들여보내던 터라, 지금 관중이 얼 마나 되는지는 측정 불가였다. 경기장을 둘러싼 거대한 인원의 관중들이 의자에 착석한 채 알 수 없는 흥분으로 들뜨고 있을 때, 그들을 둘러보고 있는 마법사 길드 마스터 루 페르스의 입은 반쯤 헤 벌려져있었다. "이거… 작년보다 더 많이 온 것 같은데?" 언제나 그의 옆에 붙어있는 마법사 길드 서브 마스터 마기가 직업 여성 의 날카로운 모습 그대로 무언가 서류를 뒤적거리다가 그의 음성에 답했 다. "관중이 작년의 1.5배정도 늘어난 것으로 추산됩니다. 이 인원이 대회 기간 동안 계속 이곳에 머문다면, 적게 잡아도 향후 2년여의 도시 운영 예산은 쉽게 확보될 것으로 보입니다." 도시 운영 예산 2년치를 단 일주일만에 벌어드린다. 그리 개방적인 도시 는 아닌 편인 에코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것은 엄청난 것이었다. 마법사들 의 알 수 없는 호기심과 연구욕, 그것을 보충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재정 이 필요하다. 보통 도시라면 쉽게 구할 수도 없고 평생 가도 제대로 손도 닿을 수 없을 만한 액수를 단 한번에 날려버리는 족속들이 바로 마법사 들이다. 그런 마법사들이 모여서 사는 곳이 바로 이곳, 에코. 들리는 소문에 의 하면 이곳의 예산은 마법왕국 라시엔트 전체 예산에 3할을 차지한다고 한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한 이야기긴 하지만 말이다. 한 달만 따져도 뜨악하고 넘어가 버릴 만한 액수가 필요한 도시 운영 예산을 2년치를 마련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엄청난 것이다. 에코의 시장 이나 다를 바 없는 마법사 길드 마스터는 흐뭇한 표정으로 돈줄(?)들을 다시 한번 둘러보았다. "뭐, 꼭 그렇게 따지지 않더라도 대회에 구경꾼들이 많으면 좋은 법이 지." 루페르스의 빙긋 웃음에 마기도 마주 웃었다. 약간은 차가운 분위기인 그녀지만, 역시나 미소는 아름다웠다. "그럼 이제 슬슬 시작해야지?" "잘 다녀오십시오, 루페르스님." "응응." 즐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루페르스가 단상 옆을 돌아 사라지고, 마기는 천천히 단상 위로 올라갔다. 경기장 안에 놓인 모든 테이블들이 한 눈에 들어오는 위치. 여기저기서 웅성거리고 있는 관중들의 소음이 일순간에 깨끗이 사라졌다. 단상 위에서 그녀는 돔 내부를 한 차례 훑어보더니 이내 음성증폭마법 을 시전하며 말했다. "지금부터 마스터 카드 대회 본선, 64강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게이 머들은 해당 번호가 기입되어진 테이블에 착석해주시길 바랍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경기장 양쪽의 문에서 수많은 게이머들이 우르르 몰려나오기 시작했다.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는 사람도 있었고, 아찔할 정 도로 심한 노출을 행하고 있는 여인도 있었다. 물론 그 여인에게 눈길을 주다가 뒷사람에게 밀려 넘어져버린 사내도 있었지만 금방 일어나 행렬 에 큰 피해를 끼치진 않았다. 노출 심한 여인의 코웃음과 함께, 그리고 뒤이어 걸어나오는 수많은 색 의 로브를 걸친 크고 작은 인물들과 함께 훼이드리온, 아이, 미르도 경기 장으로 입장했다. 어느새 그들의 가슴에는 각자의 번호가 새겨진 배지를 달고 있었다. "열심히 해." "응, 너도." "……." 각자의 테이블을 찾아가기 전, 그들은 서로에게 간단한(미르는 너무 간 단해서 아예 없는) 응원을 해주고 웃어주었다. 그것보다 더 확실한 응원 은 없었기에 그들은 맘 편히, 그리고 더욱 굳건하게 대전에 임할 자세를 갖추었다. 테이블에는 테이블 고유의 번호가 검은 글자로 확실하게 그려져 있었고, 그 바탕은 역시 하얀색이었다. 훼이드리온은 자신이 대전을 벌여야하는 테이블을 찾아 발길을 옮겼다. '일사분란'보다는 '이리저리'가 더 어울리는 움직임으로 자리를 찾아가는 게이머들의 사이를 피하여 진로를 나아가는 건 보기 보다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이윽고 그의 테이블, 12번이 눈에 들어왔다. 8 테이블씩 4줄로 배열되어 있는 테이블들. 그 중에서 12번은 두 번째 줄에 단상에서부터 네 번째였 다. "……어." 어디선가 멍한 음성이 들려오고, 훼이드리온은 어디선가 엄청 많이 들어 본 목소리라고 생각하면서 뒤로 고개를 돌렸다. 바로 옆줄의 한 칸 뒤. 그 테이블 앞에 서있는 검은 머리카락의 소녀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 "훼온, 그 테이블이었어?" 지그시 고개를 끄덕이는 훼이드리온은 속으로 재빠르게 계산했다. 아이 의 번호는 41번, 테이블은 21번이었다. 그의 테이블에서 대각석 오른쪽 뒤가 바로 그녀의 테이블이었던 것이다. "와아, 가까이에서 게임 하는 거네? 왠지 맘이 무지 놓여." "그래?" "응응." 아이는 싱긋 웃으면서 자리에 앉았다. 훼이드리온도 그 미소에 아낌없이 보답하고는 테이블에서 의자를 끌어내 앉았다. 푹신한 느낌의 등받이가 더없이 기분을 돋구었고, 더운 것도 아니고 추운 것도 아닌 그야말로 적 당한 돔 내의 기온이 그의 의지를 북돋았다. 이런 환경에서라면(게다가 가까운 곳에 아이도 있는) 미르가 경고하기는 했지만 루페르스와 다시 대전을 해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느낌이 좋아.' 일말의 자신감을 가지고 그는 테이블 반대편에 앉을 자신의 상대자를 기다렸다. 그리고 많은 게이머들이 제자리를 찾아 착석한 시간. 훼이드리온이 이러 다가 부전승으로 올라가는 건 아닌지 불안한 마음이 되었을 무렵, 어디선 가 그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호, 인연이란 참으로 기이하다는 것을 오늘에야 새삼 다시 깨닫게 되 오." 점잖은 어투에다 점잖은 음성이었다. 훼이드리온은 조금 내려 깐 시야로 어떤 사내의 모습이 들어오자, 본능적으로 목이 굳어버리는 것을 느꼈다. 이대로 고개를 들면 뭔가 큰일이 일어날 것 같은 기분이 된 것이다. 하지만 어쩔 방도가 없었기에, 그는 간신히 고개를 움직여 슬며시 시선 을 위로 올렸다. 빙그레 웃음을 띄우는 사내. 그는 바로 에코에 도착했을 때 그에게 신청소의 위치(별로 알려줄 것도 없었지만)를 알려준 그 남자 였다. "정말 대전을 하게 될 줄은 몰랐구려. 허허허, 반갑소이다." 자리에 앉으면서 그가 너털웃음을 터뜨려 인사했다. 훼이드리온은 일찍 이 그의 위력을 감상한 바 있기에 뺨으로 흘러내리는 땀 한 방울을 무시 하지 못하고 어색하게 웃어댔다. "아하하, 아, 안녕하세요." 그는 훼이드리온의 인사를 들으며 기분 좋은 얼굴을 만들었다. "더우시오? 땀을 흘리시는구려. 이 안이 좀 덥기는 하지만 그래도 땀이 흐를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되오…만, 역시 그건 사람 따라 다른 게 아니 겠소? 조금 덥더라도 참으시오. 대전이 빨리 끝난다면 이 더운 곳에 있고 싶어도 못 있을 테니까 말이오." 앉자마자 또 다시 그 후덕한 이야기 보따리(?)를 늘어놓는 그 때문에 훼 이드리온은 난처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얼굴로 흐르는 땀을 엉뚱 하게 해석하고 결론까지 내려버리는 놀라운 추진력은 말릴 새도 없었기 에 훼이드리온은 서둘러 게임을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나갔다가 는 제 시간에 게임을 시작하지 않아서 탈락해버리는 사태도 우려되었기 때문이다. "아하하. 성함은 알고 있겠지만 통성명이나 하는 게 어떻겠소?" 훼이드리온이 갈색주머니를 풀어내자 그도 자신의 주머니 속에서 카드 를 꺼내며 넌지시 제안했다. 훼이드리온은 특별히 거절한 사유도 찾지 못 했기에 "그러죠." 라고 대답했다. 그는 흐뭇하게 아저씨(?)의 미소를 떠올 리며 여전히 점잖은 어조로 입을 열었다. "본인의 이름은 '시니언 블러드' 라고 하오. 아직 25세의 젊은 나이이지 만, 말투가 이래서 주로 30대 이상으로 오해받기도 한다오. 허허허." 훼이드리온의 시니언이라는 사내의 나이를 듣고 기겁할 뻔했다. 확실히 젊어 보이기는 하지만 저 특유의 말투는 그를 '청년'이 아닌 '아저씨'로 보이게 하기에 충분한 조건이 되었으니까 말이다. "음, 그대의 성함은 무엇이오? 보아하니 어느 귀족가 자제 분이신 거 같 은데 성이나 한번 들어보고 싶구려." 시니언의 말에 훼이드리온은 잠시 긴장했다가 이내 입을 뗐다. "훼온 레이엔트입니다. 나이는 15세이고요, 올해 성인이 되었습니다." 여행을 떠난 후에 써먹고 있는 가명 소개. 많이 한 적은 없었지만 항상 머리 속에 기억하고 있던 거라 이젠 자연스러웠다. 시니언은 훼이드리온의 가명의 성을 중얼거리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레이엔트라는 귀족 가문은 들어보지 못했구려. 어디 출신이시오?" 때마침 음성증폭마법을 따라 날아오는 마기의 음성이 그들의 테이블을 갈랐다. "모두 착석하셨으면 지금부터 대전 준비를 해주시길 바랍니다. 무작위 방식으로 든 카드를 선택하며, 대회이기 때문에 드레이프를 펼쳐 게임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게이머들께서는 자신의 카드 중 이야기의 시작 카드를 옆으로 골라내 주시기 바랍니다." 이미 일찍부터 대전 준비하고 있던 훼이드리온과 시니언은 이야기의 시 작 카드만 옆으로 빼놓고 대기했다. 어느새 든 카드와 내린 카드를 모두 구분해놓은 날렵한 빠르기. 어떤 일이라도 계속 하면 손에 익는다는 사실 을 손쉽게 증명할 수 있는 장면이었다. "어디 출신인지 대답해주시지 않을 생각이시오?" 얼렁뚱땅 넘어가려던 훼이드리온의 속셈을 간파하려는 듯이 시니언은 대답을 재촉했다. 훼이드리온은 이 사태를 어떻게 타파해야할 것인지에 대해서 순간적으로 수많은 고뇌를 하다가 이내 굳힌 표정으로 그를 무표 정하게 바라보았다. "계속 그렇게 떠드실 생각이십니까?" 매섭게 뜬 푸른 눈동자. 시니언은 갑작스럽게 태도를 돌변하는 훼이드리 온의 모습에 놀란 듯이 말을 잃었다. 훼이드리온은 그렇게 차가운 분위기 를 유지하면서 계속 말을 이었다. "죄송한 말씀이시지만, 전 게임을 할 때 조용한 것을 좋아합니다. 꼭 그 렇게 해달라는 것은 아니지만 이왕이면 상대방을 생각해주시면 합니다. 그럼 지더라도 즐겁게 대전을 끝낼 수 있을 것 같거든요." 남녀를 불문하고 훼이드리온이 싫어하는 타입이 바로 말 많은 사람이었 다. 이 시니언이라는 남자는 첫 만남부터 심상치 않았고 이렇게 대전에서 만나버린 지금도 여전히 말이 많았다. 어쩌면 대전 내내 저 수다를 듣고 있을 수도 있다는 비극적인 생각에 일찌감치 먼저 못을 박아버린 것이다. 시니언은 잘 생긴 얼굴만큼이나 차갑고 냉정하게 느껴지는 훼이드리온 의 말에 얼어버렸는지 한동안 그 수다 능력을 잃어버렸다. 그동안 훼이드 리온은 숨을 고르며 주위를 살폈다. 잠깐 마주친 아이를 향해 응원의 미 소를 띄우고 웅성거리는 관중들의 모습을 살피고 있는데, 드디어 시니언 의 목소리가 들렸다. "으음, 그렇단 말이오? 이거 죄송하게 되었소. 항상 이 버릇 때문에 충 고를 많이 받는데 아직까지도 고치고 있지 못해서 말이오. 미안하오. 나 로서는 최대한 자중을 하도록 하겠소. 하지만 그래도 그대의 신경이 거슬 린다면 가차없이 다시 말해주시오. 나도 이 버릇은 고쳐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있으니." 예상외로 금방 반성하는 태도가 된 그의 모습에 훼이드리온은 어째 미 안함 마음이 되어버렸다. 출신지를 묻는 것 때문에 너무 과민반응을 한 건 아닌지 걱정이 된 것이다. "감사합니다." "아니, 천만이오. 당연히 그래야하는 것이거늘 여태까지 질질 끌어온 본 인의 잘못이오." 그래도 부드럽게 미소를 띄우는 시니언의 모습에서 훼이드리온은 어떤 느낌을 받았다. 어휘를 선택하여 한 문장으로 풀어서 쓰기에는 좀 난해 한, 그렇지만 이미지로는 확실하게 와 닿는 그런 느낌. 그가 생각하기로 는 그건 인생의 연륜으로 한 발 물러서는 여유를 아는 자의 그것이었다. '또 하나 배우는구나.' 성장. 정신적으로 성장하게 된 그는 스스로에게 흐뭇함이 느껴져 자연스 럽게 미소를 지었다. 시니언, 그도 부드럽게 웃으면서 자세를 고쳐 잡았 다. 슬슬 마기가 본선 시작을 알릴 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미르. 아이. 열심히 하자.' 슬그머니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든 카드를 잡는 그의 눈 속에서 시니언 은 금색의 별을 본 것 같았다. 금성안은 어김없이 대마도사의 마스터 카 드에 반응하여 나타났다. 시니언이 그 모습을 신기하게 보고 있던 순간. "지금부터 본선 64강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전 테이블에서 이야기의 시작 카드를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딱딱한 어조였지만 일말의 흥분이 느껴졌다. 훼이드리온은 눈짓으로 시 니언에게 신호를 보냈고, 그는 웃음과 함께 자신의 카드를 집어들었다. 모든 게이머, 64강에 올라온 64명의 게이머들 입에서 약속이나 한 듯이 한 어구가 터져 나왔다. "이야기의 시작." 1414년 마스터 카드 대회의 본선 시작을 알리는 우렁찬 함성과도 같았 다. "이거 참, 어떻게 공격해야할지 정말 난감한 일이군. 이제 나에게 남은 카드는 단 넉 장뿐인데 이것으로 저 물의 정령왕 에리피느를 어떻게 공 격한단 말인가. 호오, 난관이로다, 난관이로다." 확실히 말이 줄어든 것도 같았지만, 역시나 한번 입을 열면 대사의 양이 장난이 아닌 시니언이었다. 게다가 게임이 계속 진행될수록 이젠 추임새 에다가 영탄조까지 가미되어 거의 노래 형식으로 리듬까지 만들어지는 기세라 훼이드리온이 머리가 웅웅 울리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래서 결국 우연히도 내린 카드에서 뽑혀 올라온 물의 정령왕 에리피느 카드를 단번에 써버리고 만 것이다. "이거 정말 어쩔 수 없는 상황이로군.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물의 정령왕 에리피느를 현재 나는 절대 막을 수 없소이다. 내린 카드를 하나 뽑아든다고 해도 반격까지 갈 가능성도 거의 없소. 이런 비관적인 상황에 서 내가 더 무엇을 할 수 있겠소?" "아아, 네에, 네에." 문득 사람의 약속이란 것은 아주 허무한 것이 아닐까, 라는 부정적인 생 각이 들고 있는 훼이드리온. 시니언은 계속 무언가를 중얼거리면서 남은 네 장의 카드를 만지작대더니, 이내 무언가를 기대하듯 거침없이 손을 뻗 어 내린 카드를 한 장 들었다. 그 기세로 짐작하건데, 이 상황에서는 반 드시 '괜찮은' 카드가 나올 법도 했다. 하지만 역시나 현실은 현실이었다. "어허, 이런 변괴가 있나. 평소에는 잘만 뽑히던 카드가 본선에서는 이 다지도 운에 따라주지 않는단 말인가." 큰일이라도 당한 듯이 울상을 짓는 시니언의 모습. 그는 무언가를 숨기 거나, 특히 마스터 카드 대전에서 자신의 처지를 숨기는 것에 급격히 약 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덕분에 훼이드리온은 그가 지금 어떠한 상황 에 처해있는지 알고 싶지 않아도 아주 잘 알 수 있었다. "그냥 포기하시지요?" 정말 정중하게 권하는 훼이드리온. 시니언이 너무 안타까워하자 적의 입 장인 자신조차도 눈뜨고 못 보고 있을 지경이었다. 시니언은 훼이드리온의 정중한 권유에 다섯 장의 카드를 한 손에 모아 들고 잠시 고민하는 포즈를 잡더니 이내 카드를 내려놓고 고개를 숙였다. "내가 졌소." "…감사합니다." 게임에 이겨서 32강에 진출할 수 있다는 감격보다는 더 이상 저 수다를 듣고 있지 않아도 된다는 쪽이 훨씬 더 축복스러운 그였다. 마스터 카드 대전을 하고 있던 두 사람의 의지 중, 시니언 쪽의 의지가 사라지자 푸른색의 기운을 뿜어내며 드레이프 안에서 유영하고 있던 물 의 정령왕 에리피느는 단숨에 증발해버리고, 곧 드레이프 자체도 그곳에 서 사라졌다. 64강의 대전 중 열 번째 대전 종료였다. "수고하셨습니다, 블러드 씨." "레이엔트 군도 많이 수고하셨소.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상당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구려." "아하하, 단지 운이 좋을 뿐입니다." "마스터 카드의 실력은 운이 8할이라는 것을 모르시오? 아마도 레이엔 트 군은 게이머가 체질인가 보오. 허허허." 졌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유쾌한 웃음을 짓고 있는 시니언의 모습에 훼 이드리온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모든 게임을 끝내고 더 이상 대립의 관계에서 나누는 대화가 아니어서, 카드를 정리하면서 나누는 이야기는 아까 전보다 더 즐거웠다. 어쨌든 시니언은 말이 많은 만큼 입담도 대단 했으니까. 대전이 끝이 나면 패자는 문으로 조용히 빠져나가고 승자는 단상으로 와 기록을 하고 가야한다. 둘은 테이블에서 조용히 일어나서 잠시 마주 보고 섰다. "즐거웠소. 내년에도 만나서 즐거운 대전을 해봅시다." "네, 저도 즐거웠습니다." 마스터 카드 대전이다. 루페르스와의 대전을 제하자면 즐겁지 않았던 게 임이 없었다. 패자였지만 문으로 향하는 시니언의 미소에는 미련이 느껴 지지 않았고, 승자인 훼이드리온의 얼굴에도 승부에 대한 아쉬움은 없었 다. "12번 테이블, 승자 훼온 레이엔트입니다. 24번입니다." 단상 아래, 승자 기록을 하는 곳에 앉아있던 마기는 업무 할 때만 착용 하는 굵은 뿔테의 안경을 고쳐 쓰며 훼이드리온의 얼굴을 살폈다. 문득 입을 열며 말을 던지는 그녀. "이기셨군요." "그렇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그녀에게는 별로 감정이 없지만 루페르스의 비서격이라는 사실에 대해 서 어쩐지 거부감이 드는 훼이드리온이었다. 본의 아니게 간단명료한 말 만을 하게된 그는 대진표에 자신의 이름으로부터 굵은 선이 그어지는 모 습을 확인한 후 즉시 몸을 돌렸다. 어색한 기분에서 벗어나는 법은 많은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가까운 문으로 빠져나가자, 문 뒤편의 약간은 어두침침한 곳에서 검은 로브는 뒤집어쓰고 있는 미르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미르는 가장 먼저 게임을 끝내고 간단히 32강에 진출한 후 여기서 여태까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의리를 지킬 줄 아는 그에게 다가가며 미소를 띄운 훼이 드리온이 물었다. "어땠어?" 미르의 대답은 간단했다. "시시했다." 그래도 명색이 마스터 카드 대회 본선인데, 감상이 너무 간단한 거 아닌 가 생각하는 훼이드리온. 하지만 금방 미르의 경력을 떠올리고는 납득하 고 말았다. "넌?" 미르의 여전히 간단한 말. 훼이드리온은 잠시 뜸을 들이다 반대편 문을 바라보며 답했다. "많이 시끄러웠지." "에헤."라고 웃으며 말을 끝내는 그의 얼굴에는 만족스런 일을 하고 난 후의 보람이 느껴지는 표정이 떠올라있었다. 뭐라고 해도 시니언은 게이 머로서도 붙어볼 만한 상대였고, 또한 그만큼 재밌었던 사람이니까 말이 다. "아이는 언제 끝날까?" 미르는 "스쳐오면서 봤다. 곧 끝날 거다." 라고 답해주었다. "그럼 기다리자." 소년의 옆에 기대서면서 훼이드리온은 어쩐지 신비로운 기분이 되어버 렸다. 마스터 카드 대회에 모인 수많은 게이머들. 그들과의 만남이 아직 도 많이 남아있다는 생각을 하니, 가만히 있던 가슴이 또 다시 뛰기 시작 했다. 흥분. 희열. 아마도 이 기분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훼온! 미르! 나 이겼어!" 밝게 웃으며 자신들을 향해서 뛰어오는 아이의 모습에 그는 싱긋 미소 를 지었다. 훼이드리온과 아이, 미르가 한참 64강을 치르고 있던 시각. 대회가 열리고 있는 돔에서 북쪽으로 향하면 나오는 대광장. 그곳의 거 대한 마법사들의 여관, 1414호. 훼이드리온 일행이 쓰는 그 객실에 누군 가 들어왔다. 검은 로브를 쓰고 있어서 얼굴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전체적인 체구 를 봐서 여성인 듯 했다. 그녀는 사뿐한 걸음으로 에타와 아이가 쓰는 방 으로 들어가더니, 침대 위에 올려져있는 아이의 작은 가방을 뒤지기 시작 했다. 곧 목표로 하고 있던 물품이 나오고, 그녀는 그것을 손에 들었다. 작은 손거울. 카를레오가 마법을 걸어놓은 바로 그 손거울이었다. 그녀는 잠시 그 거울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구경하는 듯 하더니, 이내 공 중으로 휙 던졌다. 손거울은 반짝이며 한바퀴 휙 돌고 그곳에서 즉시 사 라져버렸다. 약간의 마력의 흔들림. 마법이었다. 검은 로브를 더욱 눌러쓴 그녀는 손거울이 제대로 이동된 것을 확인하 고는 서둘러 객실을 빠져나갔다. 물론 나갈 때도 마법으로 문을 확실하게 잠가 두었다. '이 정도면 명령대로 된 거겠지?' 마스터의 명령을 떠올리며 유리는 서둘러 여관 밖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그 모습을 방금 전까지 유리가 있던 1414호의 방에서 지켜보는 인물이 있었으니. 그 사람은 바로 돔에서 마스터 카드 대회를 구경하고 있으리라고 생각 되던 에타로코크, 암살자 길드 마스터의 외동딸이며 에코까지 고집을 부 려 미르를 따라온 소녀였다. -------------------------------------------------------------------- 역시. 새로운 장에 들어간다는 건 어렵습니다. 으으. 언제쯤이나 익숙해 질는지. 털썩. 에타의 심상찮은 점이 마지막에 드러났군요. 자자, 이제 이 주체할 수 없는 소녀가 무슨 일을 벌일지는 오직 팀군만이 알고 있 습니다. 명색이 자까인데 모르면 말이 안되죠.(---)a 자아, 그럼! 어둠의 기사 DARK KNIGHT TEAM... 덧하나. 추천 감상 비평. 받습니다. 받아요오- 덧두. GO CAMA 덧석. 개디에셀. 일주일 넘었습니다.(---) 이런 10 같은! 번 호 : 16 / 17 등록일 : 2001년 02월 16일 17:03 등록자 : 암음기사 조 회 : 81 건 제 목 : [카드 게임 판타지]『카드 마스터(Card Master)』#093 카드 게임 판타지(Card Game Fantasy) 카드 마스터(Card Master) 93. 돔 안의 시간은 바깥 세계와의 차별화라도 선언하고 있는 것인지, 훼이 드리온과 아이, 미르가 돔 밖으로 나왔을 때는 이미 해가 서쪽에 지평선 너머로 턱을 걸치고 있는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게이트 산맥을 지난 마 법왕국 라시엔트의 극서부의 또 서쪽은 바다가 있고, 에코에서 바다까지 는 야드 평원과도 비견될 만한 '끝없는 평원'이 펼쳐져 있다. 말 그대로, 이곳이라면 '지평선에 걸린 붉은 사랑의 석양'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끝없는 평원에서 볼 수 있는 석양에 그런 시적인 명칭을 붙인 이는 가 출왕이라 일컬어지는 11대 마법왕 미첼리안 휜 라시엔트라 알려져 있다. 그가 시인의 자질까지 가지고 있었던 것인지는 확실하게 밝혀진 바 없지 만, 아무튼 석양이 떨어지는 시간대의 모습은 그의 말과 똑같았다. 아이와 훼이드리온은 통할 수밖에 없는 감정의 끄트머리에서 서로를 마 주 보고 앉아, 지평선에 걸린 붉은 사랑의 석양빛을 받으면서 저녁을 맞 았다. 저녁에는 아이가 손거울을 잃어버렸다고 소란을 피워 간신히 진압 했고, 그 후 카를레오와의 연락수단이 없어져버렸다는 사실에 침울해지는 훼이드리온의 기분을 회복시키느라 아이가 또 진땀을 뺐다. 아무튼 이런 저런 일들과 소동 속에서 밤을 맞이하고 꿈을 받아들인 그 들은 어김없이 뜨는 해를 만났다. 어느새 하늘의 한바퀴를 돌아 게이트 산맥 위로 떠오르는 마스트의 눈은 하실루스의 상징과는 비교도 되지 않 을 따가운 눈빛을 가지고 마법사들의 도시 에코의 분주한 아침을 비추었 다. 당연하게 오늘도 열리는 마스터 카드 대회를 보기 위하여 관중들은 아 침 일찍부터 일어나 준비했고, 그에 뒤지지 않게 게이머들도 일찍 기상해 오후에 있을 32강을 준비했다. 어제는 게이머였고 오늘은 관중이 되어버 린 64강 탈락자들도 같이 온 일행, 혹은 그새 사귄 게이머 친구를 응원하 며 작은 우정을 나누었다. 그 속에서 훼이드리온과 아이, 미르와 에타는 어제와 같은 격려를 서로 에게 던져주고 게임에 임하기 위해 돔으로 향했다. 가는 중에 어제 벌였 던 마스터 카드 대전에 대한 총평을 에타가 간단히 내려주었고, 서로가 어떤 게임을 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일행은 에타의 말에 귀를 기울 였다. "훼온은 약간은 썰렁했고, 아이는 아주 히이이임들게 이겼고, 미르는 역 시 멋졌어!" 아이의 불퉁한 얼굴이 항의를 하듯이 구겨졌지만 그 정도야 금방 무시 할 수 있는 정신력을 가진 소녀였다. 에타는 단번에 "꺄하하하!" 웃으며 모든 상황을 무시해버렸고, 훼이드리온은 힘없이 어깨를 떨구는 아이의 등을 치며 그녀를 달랬다. 아무튼 그리하여 그들은 정오가 조금 지나서 돔에 도착할 수 있었다. 대기실은 어느새 32강에 진출한 게이머 수들만큼 줄어들어 있었기에, 어 제와는 대기실 번호가 달랐다. 아이가 왜 이렇게 외워야하는 번호가 많은 것인지에 대해서 작은 불만을 토로하는 것을 훼이드리온이 싱긋 웃으며 무마하던 중에 에타가 대기실이 모여있는 복도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딱 멈춰 섰다. "난 여기까지잖아." 소녀의 표정은 금방 시무룩해졌다. 훼이드리온이 입구에 붙어있는 대기 실 번호를 확인하다가 에타를 돌아보았다. "관중석에 올라가서 구경하면 되잖아." 아이가 한마디 거들었다. "그럼 에타도 참가 신청하지 그랬어? 다룰 줄 알잖아." 마스터 카드를 '다룰 줄 아는 소녀'를 무참히 4번씩이나 이겨버린 그녀 로서는 별로 할 말이 아니었다. 에타는 잔뜩 찡그린 얼굴로 아이를 노려 보다가 빽 소리를 지르고는 매몰차게 몸을 돌려 사람들 사이로 사라져버 렸다. "나도 내년에는 참가할 거야!" 의욕보다는 오기에 찬 외침이었다. 그렇게 에타를 보낸 후, 피식 웃어버리는 아이를 선두로 그들은 대기실 을 찾아 들어갔다. 게이머들의 편의를 위해서인지 경기장으로 통하는 문 가까이에 대기실이 정해져있었다. 물론 번호 순서대로. "오늘도 같이 있다가 나가자." 언제나 아이의 의견에는 이견이 없었던 훼이드리온과 특별한 일이 아니 라면 조용하기만 한 미르는 그녀의 말에 따라 문에서 가장 가까운 미르 의 대기실로 들어갔다. 대기실의 번호는 9번. 아마도 9번은 64강에서 탈 락해버린 모양이었다. 대기실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역시나 대진표였다. 대기실에 들어와 소파에 앉기도 전에 대진표로 향하는 눈길을 자중할 수 없었던 그들은 어느새 탈락자들의 번호가 싹 제거된 채 32강부터 그려져 있는 선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은 각자의 번호와 이번 대전의 상대를 확인했다. "21번. 후실리이스 러블리스?" 32강의 대전자의 성명을 확인한 훼이드리온은 그 이름 뒤에 그려져 있 는 기묘한 기호에 관심을 가졌다. 곧 무뚝뚝한 음성이 들려와 그의 의문 을 말끔하게 해소해주었다. "마법사 길드 최고 원로라는 말이다." "응?" "이름 뒤의 복잡한 기호. 의미 없는 사각형들의 구조로 이어진 그 기호 가 마법사 길드 최고 원로를 나타내는 기호다." 훼이드리온의 얼굴에 작은 긴장이 떠올랐다. "그럼… 잘 하겠네?" 미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침묵은 긍정으로 인식하기에 더 편 했다. 아이가 웃음 지으며 훼이드리온의 어깨를 툭 쳤다. "걱정 마, 훼온. 훼온은 마법사 길드 마스터까지 두 번이나 꺾은 몸이잖 아. 게다가 세기의 능력이라는 금성안의 소유자라구. 최초의 마스터 카드 까지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마법사 길드 최고 원로라고 절대 뒤질 거 없어." 오히려 자기가 더 자신 있다는 듯이 의기양양하게 그를 응원하는 아이. 훼이드리온은 그 말속에 담긴 애정을 느낄 수 있는 것인지 조심스레 긴 장을 풀어 환하게 미소지었다. 어차피 본 신분을 밝힌다면 돔 안의 모든 인원이 고개를 조아리며 무릎 을 꿇어야 마땅할 인물인 훼이드리온.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굳이 그 런 신분까지 들먹이고 싶은 생각은 없기에, 그는 그녀의 말을 마음에 담 아두고 대진표를 올려다보았다. 문득, 이미 대진표를 올려다보고 있던 아이가 입을 열었다. "미르하고 나의 상대도 마법사 길드 최고 원로인데? 미르는 14번 크로 스 더체이트, 난 43번 큐트 노가르드. 최고 원로 중에서 32강에 진출한 이들도 꽤 되는걸?" 그녀는 32강에 적혀있는 이름들을 훑어보며 지그시 고개를 끄덕였다. 일 일이 기억하기도 귀찮을 이름들 뒤에 붙어있는 복잡한 기호가 여럿 보였 다. 개회식 겸 예선전 때 단상 위에서 보았던 최고 원로들. 마스터와 서 브 마스터를 뺀다면 총 11명이었는데, 예선전과 64강에서 다수 떨어졌는 지 32강에 올라있는 수는 고작 5명뿐이었다. 앞서 말한 세 명에 필리스 레이 루 리베카라는 사람과 뮤린 맥나잇이라는 사람까지, 딱 5명. 11명중 에 단 5명만이 생존한 것이다. "마법사 길드에서 주최하는 거라고 해도, 역시 용서는 없네?" "마스터 카드는 신의의 게임이니까. 설마 속임수 같은 걸로 살아남지는 않겠지." 수긍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에게 훼이드리온은 진한 웃음을 띄워주었다. "아버지가 32강에 올라왔군." "음…… 루페르스가?" 미르의 침묵 속에 얕은 경직이 흘렀다. 굳어버린 공간 속에서 부자유한 움직임으로 고개를 든 그들의 눈에는 1번과 32강을 치르는 루페르스의 이름이 선명하게 들어왔다. '루페르스 폰 에르히스트' 그들로서는 여러 의 미에서 절대 잊을 수 없을 이름. 특히 훼이드리온에게는 경멸의 대상으로 밖에는 여겨지지 않는 자. 훼이드리온은 잠시 그것을 응시하다가 입을 뗐다. "미르. 만약, 만약에 8강에서 루페르스와 만난다면 반드시 이겨주길 바 래." 미르의 눈길이 잠시 돌려졌고, 훼이드리온은 여전히 시선을 고정한 채 딱딱하게 말했다. "저 사람하고 다시는 대전하고 싶지 않아. 그런 불쾌하고 더러운 기분은 한번으로 족해." 어쩐지 아이의 침 넘어가는 소리가 두 배 정도는 증폭되어 들리는 듯한 기분 속에서 미르는 그 검은 눈으로 훼이드리온의 옆모습을 잠시 응시하 다가, 천천히 고개를 원위치로 돌렸다. 무감정한 소년의 말이 미세하게 공기 속으로 분산되어 흘러나왔다. "나도 별로 지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건, 마스터 카드 게이머로서는 당연한 마음가짐이었다. 지이이이잉. 그리 귀에 거슬리지 않는 벨 소리가 들려왔고, 괜히 무거운 분위기 속에 서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조용히 경기장으로 발을 옮겼다. 중간 중간 에 만나는 게이머들과의 인사는 잠시 생략되어진 채, '긴장'이라고 표현될 수 있을 그런 공기 속에서 32강 진출 게이머들의 모습이 드디어 경기장 에 나타났다. 하루의 경험이 있었던 이유로 훼이드리온들은 헤매지 않고 자신이 대전 을 치를 테이블로 뿔뿔이 흩어졌다. 여전히 하얀 바탕에 검은 숫자가 아 로새겨진 테이블은 어제의 수에서 절반으로 떨어진 16개뿐이었고, 그것은 이번 32강 게임을 치를 수 있는 충분한 자리였다. 훼이드리온은 8번 테이블에 자리하여 주위를 둘러보았다. 미르는 우연찮 게도 바로 옆 4번 테이블이었고, 아이는 10번 테이블에 앉아서 그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이고 있었다. 그는 옅게 띄운 웃음으로 손짓을 보내다가, 문득 시야 끝에 걸리는 검은 색의 물체로 시선을 모았다. 검은 로브. 이미 미르는 시야 밖이었기에, 당연히 저것은 루페르스였다. 루페르스는 앞선 번호 탓에 당당히 1번 테이블에 앉아서 여유자적한 미 소를 짓고 상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경험 탓인지 아니면 유들유들한 성격 탓인지, 나름대로의 긴장이 느껴지는 돔 내의 분위기와는 전혀 매치되지 않는 얼굴을 하고 있는 그였다. 훼이드리온은 그가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눈을 돌리기 전에 먼저 고 개를 돌려버렸다. 눈을 마주쳐봤자 결코 좋은 꼴은 보이지 못할 것이다. '그나저나 후실리이스 러블리스라는 사람은 언제 오지.' 몇 일 전 게이트 산맥의 유적, 아니 아공간에서 골드 드래곤 앞에서 밝 혔던 적이 있는 자신의 본명과도 비견될 만한 가공할 만한 길이의 이름 을 소유한 게이머. 이름상으로는 여자일 가능성이 높았다. 훼이드리온은 이름으로 상대 게이머에 대한 신상을 대충 추측해보면서, 애써 시야에 계 속 걸리는 루페르스의 존재를 지우려했다. "여기지?" 발랄한 듯 쾌활한 느낌을 주는 목소리가 문득 들려왔다. 훼이드리온은 직감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느낌을 받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어라." 하는 멍청한 음성을 남기며 말을 잃어버렸다. 후실리이스는 발끝까지 닿는 로브를 한 차례 등뒤로 넘기면서 당당하게 싱긋 웃었다. 자리에 앉으면서 그녀가 반갑게 인사했다. "오랜만이죠? 붉은 기가 도는 머리카락에 붉은 빛이 묻어나는 로브. 하지만 아직은 앳 된 듯한 소녀의 얼굴. 그러나 그녀는 마법사 길드 최고 원로 중 일원이었 다. 훼이드리온은 한 방 먹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최고 원로였습니까?" "네, 그랬어요. 정말 예상도 못했죠?" 그는 천천히 고개를 움직일 뿐,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었다. 후실리이스는 여전히 생글거리는 얼굴로 말했다. "보통 다 그래요. 최고 원로 중에는 스스로 소개하지 않으면 최고 원로 인지 결코 모를 수밖에 없는 인물들이 많거든요. 나로 비롯하여, 나이나 르, 크로스, 레이 등등. 신기한 인물들은 거의 다 총 집합했다고 봐도 좋 아요." "그, 그렇군요." 신기한 인물들의 총 집합, 마법사 길드 최고 원로. 훼이드리온은 미르의 대전 상대를 힐끗 쳐다봤다가 게이트 여관 옆 식당에서 봤던 뾰족머리의 소년이라는 것에 기겁을 해버렸고, 아이의 상대자는 차마 쳐다볼 엄두조 차 나지 않았다. 살짝 눈을 돌렸을 때 발견해버린 육감적인 각선미가 그 의 '사내다움(?)'을 왕성하게 자극해버렸기 때문이다. "자자, 아무튼 이렇게 만났으니 통성명은 해야죠? 난 마법사 길드 최고 워로 후실리이스 러블리스라고 해요." "아… 훼온 레이엔트입니다." 가볍게 목만 까딱거리는 인사였지만 지금에서는 더 이상의 예를 차리는 것이 오히려 불편했다. 후실리이스는 인사하는 훼이드리온을 보고 고개를 돌려 단상에 서있는 마기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연신 게이머들을 둘러보 며 게임 준비가 마쳐졌는지 살피고 있었다. "그럼 이제 게임 준비를 해야겠죠?" "네." 훼이드리온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허리춤에서 갈색주머니를 꺼내들어 카드를 꺼냈다. 후실리이스도 로브 속에 묶어두었던 끈을 풀어 붉은빛의 주머니를 선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카드를 꺼내지 않고 갑자기 팔을 내려 편하게 의자에 몸을 묻었다. 훼이드리온이 자신의 카드를 정리하다가 그 모습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을 때, 그녀는 생글 웃더니 잠시 눈을 감았다. 변화는 곧 일어났다. 게이머 중, 혹은 관중 중에 의지의 흐름을 느낄 수 있는 자라면 분명히 그 변화를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경지장 안의 마력이 갑자기 후실리이스의 작은 몸을 중심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강한 마력이 그녀를 덮쳐 그녀의 전신에 응 축되었고, 그것이 한순간에 거대한 폭발을 이루듯이 터지자 그녀의 몸이 갑자기 크게 불어났다. 소녀의 모습에서 성숙한 숙녀의 모습으로. 10대 소녀에서 순식간에 20대 아가씨의 모습으로 탈바꿈한 그녀는 어깨까지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만지며 눈을 떴다. 돔 내의 모든 시선이 그녀를 향해 고정되어있었다. 거대한 마력의 굉음을 들은 이들 중 한 명인 최고 원로 크로스 더체이 트. 후실리이스와 등을 맞대고 있던 그 소년이 몸을 돌려 후실리이스를 불렀다. "후실리이스 씨. 웬일로 '진신(眞身)'을 드러냈어요? 어제까지만 해도 그 소녀 버전으로 대전하더니." 후실리이스는 상큼한 미소로 대답했다. "소녀의 모습으로는 상대하기 벅차니까. 내 마스터 카드 실력은 진신일 때 본격적으로 펼쳐지니까." 그 말에 갑작스런 후실리이스의 변신에 넋이 나가있던 훼이드리온이 정 신을 번쩍 차렸다. 그녀의 말은 고로, 그의 실력을 높이 평가한다는 것 아닌가. 후실리이스는 여전히 상큼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낮은 어조로 말했 다. "훼온 군의 실력은 익히 들어 알고 있어요. 마스터 카드에서는 필수적으 로 따라야하는 강운. 그 강운 중에서도 정말 강운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우리 마스터를 두 번이나 꺾은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닌 거겠죠. 그래요. 난 훼온 군을 경계하고 있어요. 그래서 이렇게 오랜만에 진신의 모습으로 대전하는 거예요." 훼이드리온의 조용한 침묵에 그녀는 상큼한 얼굴을 지우며 진지한 표정 을 만들었다. 그리고 마지막 말을 내뱉었다. "각오해요. 훼온 군을 시험해드리겠어요." 관중들 사이로 함성이 터져 나왔다. "비술 성수축제다!" 미르의 성수축제가 드디어 발동된 것이다. 성스러운 빛이 드레이프 속에 서 뿜어져 나오면서 주위의 공간을 집어삼켰다. 비술 이름 그대로 성스러 움이 그 자체로 묻어나는 순수한 빛. 그 속에서 뛰어오는 네 마리의 성 수. 일각수 유니콘, 불사조 피닉스, 승천룡 이무기, 파람어 칠색어. 그것들 이 이루어내는 오색찬란한 빛의 향연은 순식간에 돔 안을 진압하여 구경 하고 있는 관중들의 시선을 사로잡아버렸다. 훼이드리온은 고개를 돌리고픈 욕망을 겨우 억누르며 참았다. 같은 동행 으로서는 냉정한 이야기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전혀 아니었다. 만약 저 관중들과 같은 입장이었다면 그도 분명 흥분에 흥겨움까지 더해 소리 를 질러댔을 것이리라. 하지만 지금 그는 후실리이스라는 마법사 길드 최 고 원로 중 일원과 함께 치열한 마스터 카드 대전을 벌이고 있는 중이었 다. '젠장.' 왕성을 나온 후, 배워버린 욕지거리를 속으로 중얼거리며 훼이드리온은 인상을 썼다. 시험을 한다는 후실리이스의 말. 그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힘들죠? 하지만 이겨내야 해요. 마스터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거든요. 이 시험을 이겨내지 못한다면, 훼온 군은 마스터와 다시 대전한다고 해도 이길 수 없어요. 그걸 원하는 건 아니겠죠?" 그녀의 말이 훼이드리온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미르의 말과 같은 말. 루 페르스의 실력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단 말인가. 훼이드리온은 가슴속에서 무언가 뜨끔거리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뭔가 붉고 푸른 것이 솟아오를 것 같은 느낌에 숨이 턱턱 막히는 것 같았다. 무언가 있었다. 다른 게 있었다. 그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마다 계획된 무엇인가가 웅크려 앉아 도사리고 있는 듯했다. 드레이프 안에는 화염을 온 몸에 칭칭 감은 '불의 정령왕 이프리트'가 허공에 부유한 채 지옥의 염화보다 더 강력한 불길을 토해내고 있었다. 숨을 쉬는 그 숨결마다 뜨거운 열이 공기를 태웠고, 거기 있는 자체 만으 로도 뜨거운 열기가 공간을 조금씩 파먹고 있었다. 드레이프는 그야말로 붉게 가열되어 그 상태로 터지면 반경 몇 헬리치 내는 간단하게 사막으 로 화해버릴 것 같은 열을 내재하고 있었다. 저 끔찍한 불길. 훼이드리온은 찡그린 얼굴로 드레이프를 올려다보았다. 전신이 활활 타오르는 불의 형상을 이루고 있는 건장한 사내의 모습인 불의 정령왕 이프리트. 저것을 이기려면 최소한 정 반대 속성을 가진 물 의 정령왕 에리피느 카드가 있어야한다. 그래도 훼이드리온의 강운이 작용했는지 지금 그의 든 카드 중에는 물 의 정령왕 에리피느 카드가 푸른 물기를 머금은 채 존재하고 있었다. 게 다가 정령왕을 불러내기 위해 꼭 필요한 백소환사 카드도 버젓이 카드들 에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 카드를 뽑아낼 수 없었다. 문제는 후실리이스가 꺼낸 불 의 정령왕 이프리트의 공격력이 상상외로 너무나 강력했다는 것이다. 그 래서 에리피느 카드를 꺼낸다고 하더라도, 지금 상황에서는 아주 간단히 소멸되는 것밖에 다른 결론이 없었다. 결국 물의 정령왕 에리피느로도 이 번 고비는 타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하지. 어떻게 해야하지!'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뇌리를 지배하고 있는 이상한 감각과 함께 이 대전을 이겨야하는 묘수까지 생각해내야 하는 훼이드리온. 예상을 넘어서 는 정신 운동에 뇌까지 지끈 울려올 지경이었다. 문득, 조용하면서 존재감 있는 후실리이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운명이 뭐라고 생각해요?" 훼이드리온은 관심 없다는 듯이, 지금은 오로지 대전에만 집중하겠다는 듯이 입을 다물고 묵묵히 카드만을 노려보았다. 그녀는 애초부터 혼자 중얼거릴 생각이었는지 아랑곳 않고 이야기를 이 었다. "운명이란 그 어떤 것도 피해갈 수 없는 사슬 같은 거라고 해요. 그것을 만드는 것은 신이며, 일설에서는 신조차 운명의 사슬에 얽힌 존재라고도 말해지죠.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운명이 그 어떤 형태로 다가올 지는 그 아무도 모른다는 거예요. 어쩌면 그렇기에 운명은 재미있다고 말해지는 것일 지도 모르죠." 그녀는 잠시 한숨쉬고 계속 말했다. "제가 아는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해요. 인생은 게임과도 같다고. 그가 말 하길, 인생은 운명이라는 이벤트로 가득 채워진 게임이라고 하더군요. 언 제 사태가 뒤바뀔지 모르고 언제 어디서 인연이 나타날지 모르는, 그래서 그 게임이 운명이라는 것에 좌지우지되는 것일 지도 모른다고요." 훼이드리온은 머리 속으로는 계속 불의 정령왕 이프리트를 깰 방도를 생각하면서, 표정으로는 '무슨 말하는 거예요?'라는 뜻을 만들었다. 후실 리이스는 싱긋 웃음으로 답하고 흔들리지 않고 이야기했다. "훼온 군의 게임에서 이벤트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훼온 군은 어떤 운명에 이끌려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일까요." 조용한 음색이었지만 훼이드리온은 어느새 그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녀의 말. 그것이 가슴속에서 뛰어다니던 그 어떤 것 과 묘한 매치를 이루면서 갑자기 머리 속으로 상승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듯한 착각을 가진 것이다. 명확하게는, 확실하게는 말할 수 없는 무언가였다. 하지만 그 무언가는 확실하게 그의 머리를 두드렸다. 그리고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어떤 사실 을 알려주기 위해 그의 뇌세포를 연신 주물렀다. 하지만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답답함을 느꼈다. 후실리이스의 말은 계속 되고 있었다. "아마 지금 이것도 작은 운명 같은 것일 거예요. 내가 훼온 군에게 주는 시험, 이 운명을 극복해내고 더 큰 운명으로 나아갈 때, 훼온 군은 게임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캐릭터가 될 거예요. 하지만 장담할 수는 없어요. 그 게임에 과연 어떤 운명이, 어떤 이벤트가 또 숨겨져 있을지. 언제나 숨겨진 운명은 마스터처럼 있을 뿐이거든요." 대충 들으면 기분 나쁜 말이었다. 살아있는 인간을 게임 속의 캐릭터로 비유하다니. 하지만 훼이드리온은 전혀 나쁜 기분이 아니었다. 오히려 무 언가 깨달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아니, 오히려 의문이 들고 있었다. '이 여자는 나에게 이런 시험을 넘겨 놓고 왜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걸까.' '이 고비를 넘기고 나면 또 다른 운명이 있다? 닥쳐올 위기를 암시해주 는 걸까.' 머리 속이 뒤죽박죽이었다. '제길. 지금은 이프리트를 깨는 것만 생각하자. 어차피 시간은 많다. 이 여자의 말을 기억해놓았다가 나중에 생각하자. 지금은 수룡이라도 동원해 서 이프리트를 깨야…….' 순간, 그의 눈앞에 거대한 벼락이 내려꽂혔다. 강렬한 한 방이었다. 눈앞이 하얗게 변색되어버릴 정도로 그 충격은 강 대했다. 그리고 그만큼 그의 머리 속을 헤집고는 진리를 깨닫게 해주었 다. 그 방법이 있었다. 그 방법이 있었던 것이다. "인생은 게임. 게임의 앞을 알 수 없듯이 운명은 결코 알아챌 수 없어 요. 지나치고 나면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죠. 모르고 지내는 게 더 편할 수도 있지만…… 훼온 군?" 후실리이스는 갑자기 미친 듯이 자신의 카드를 뒤지기 시작하는 훼이드 리온을 의아한 듯 바라보았다. "무슨 방도라도 생각난 건가요?" 대답해줄 마음이 없는지 그는 카드 탐색에만 열을 올릴 뿐이었다. 결국 그녀는 입을 조용히 다물고 이프리트를 올려다보았다. 카드 마스터의 능 력으로 공격력을 비약적으로 상승시킨 불의 정령왕 이프리트. 억겁의 화 염이 뒤덮인 드레이프는 직접 열기가 느껴질 것 같았다. 저것을, 직접 만들어냈음에도 그 강력함에 땀이 다는 저 이프리트를 이 길 방법을 생각해냈단 말인가. 후실리이스는 정색하고 그를 지켜보았다. 그가 지금부터 펼칠 기적 같은 일들을 기대하듯, 조용히 그를 응시했다. 훼이드리온의 손길을 무척 빨랐다. 이제 익숙해진 카드의 크기, 질감. 그 것들을 느끼면서 그의 눈은 빠르게 든 카드들의 모양을 확인했다. 아까 전에 분명히 봤었다. 언젠가 한번 펼쳤었던 그 비술을 이루기 위해서 꼭 필요한 카드를 아까 전에 분명히 두 눈으로 봤었다. '……찾았다!' 기억력을 믿었고, 눈을 믿었으며 마스터 카드를 믿었다. 그래서 그는 결 국 원하던 카드를 찾아냈다. 이로써 그가 생각하는 방법을 이루어내기 위 한 조건은 마지막 하나로 좁혀졌다. 훼이드리온은 든 카드를 모두 내려놓았다. 그리고 한 손에 모아두었던 네 장의 카드만을 두 손에 쥐었다. 그것이 어떤 카드들인지 후실리이스로 는 알 길이 없었다. 마법을 사용하면 간단한 것이지만 안다고 해도 뚜렷 한 대비법이 생기는 것도 아니니. 이번에 당하면 그대로 끝인 것이니까 말이다. 그녀는 조심스레 말했다. "그 네 장…으로 이프리트를 이길 수 있는 거예요?" 작은 흥분. 그리고 기대. 그 감정들이 말속에서 묻어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훼이드리온은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며 명확한 힘이 담긴 목소리로 말 했다. "아니요. 아직 한 장 남았습니다. 그것을 이 내린 카드에서 뽑아내야죠." 후실리이스는 그의 푸른 눈동자에서 마스터가 말한 금성안을 보고야 말 았다. 뿜어져 나오는 빛이 아닌, 그야말로 그 눈동자 안에서 빛나고 있는 금색의 별. 그녀는 숨이 넘어갈 듯한 기쁨을 받았다. 그의 손이 천천히 내린 카드를 향해 움직였다. 테이블 중앙에 쌓여있는 내린 카드들. 게이머의 운에 모든 것을 맡겨버리는 최후의 수단. 확률 반 도 되지 않는 그것에 대전의 승패를 걸면서, 그리고 운명을 헤쳐나갈 방 법을 모조리 걸면서도 그는 이상하게 침착하고 자신 있었다. '유리가 말한 그 강운…인가?' 눈으로 확인해본 적은 없고 이야기만 들은 훼이드리온의 강운. 그것을 목격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에 후실리이스는 숨을 죽였다. 이윽고 그는 유려한 움직임으로 맨 위의 카드를 뽑아들었다. 그리고 확 인도 하지 않고 드레이프 안을 노려보았다. 이프리트. 붉은 화염을 입은 불의 정령왕. 눈빛만으로 그것을 소멸시킬 생각인 건지 그는 한동안 그것 을 노려보다가 이내 다섯 장의 카드를 부채 모양으로 펼쳤다. 후실리이스는 그때 훼이드리온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뭐라고 해석해 야 좋을지 난감했다. 생각하고 생각하고, 그리고 계속 생각했지만 결론은 나지 않았고, 기어코 적당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자 결국 포기하고 말았 다. 그때 훼이드리온의 낭랑하고, 당당한 말이 들려왔다. 한 장의 카드가 테이블 위로 떨어진다. "백소환사 카드." 이프리트의 불길이 미치지 않는 작은 공간에 하얀 로브를 뒤집어쓴 백 소환사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 뒤를 따라 푸른빛의 카드가 백소환사 카드 옆에 놓아졌다. "물의 정령왕 에리피느 카드. 백소환사가 물의 정령왕 에리피느를 소환 한다." 그 말은 드레이프 안에서 그대로 실현되었다. 하늘을 향해서 두 팔을 벌린 백소환사가 주문을 읊조리자 허공에 푸른 기운이 맺힌다. 그 기운은 둥글게 뭉쳤고 곧 세로로 길어져 인간의 형상 을 갖춘다. 푸른 피부를 가진 여성. 시원한 물의 기운이 느껴지는 물의 정령왕이 나타난다. 후실리이스는 불의 정령왕 이프리트와 물의 정령왕 에리피느의 대치를 바라보았다. 확연하게 드러나는 힘의 차이는 불의 기운이 물의 기운을 먹 어치우고 있는 모습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역시 공격력이 늘어난 이프리트에게 에리피느는 애초부터 무리였다. 하지만 훼이드리온의 표정은 아직 굳건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죠? 그 세 장의 카드는 대체…….' 훼이드리온, 그의 강운이 또 어떤 기적을 불러일으킬지, 후실리이스는 전율까지 느꼈다. "그리고 계속 갑니다. 먼저 북대마법사 카드." 백소환사의 옆에 푸른색의 로브를 걸치고 로드를 든 대마법사가 나타난 다. 백소환사에게 잠시 눈길을 던진 그는 곧 로브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든다. "메티 카드, 수룡의 여의주 카드." 그것은 투명한 수정 구슬, 아니, 수룡이 품고 있다는 여의주. 수룡의 여 의주가 대마법사의 로브 속에서 빠져나온다. 그는 그것을 머리 위로 높이 들었다. "수룡을 소환할 생각인가요?" 수룡의 여의주라면 그것 밖에는 없다. 수룡을 소환하여 이프리트의 불길 을 누그러뜨리고, 그 사이를 에리피느의 물이 뚫고 지나가는, 그런 작전 일 것이라고 후실리이스는 생각했다. '그래, 그 방법이라면 가능성이 있어. 하지만……' 수룡을 소환하기 위해서는 조건이 필요하다. 그것은 하늘을 검게 뒤덮을 만한 양의 짙은 먹구름. 잔뜩 물기를 머금은 먹구름이 없다면 수룡은 절 대 소환되지 않는다. 그런 생각을 한 순간, 후실리이스는 훼이드리온이 마지막까지 들고 있는 카드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설마!' 그것이었다. 훼이드리온이 내린 카드에서 뽑아든 카드의 정체는. "마지막으로 특수 카드, 기상이변 카드. 북대마법사가 수룡의 여의주를 이용하여 기상이변을 불러온다. 짙은 먹구름과 함께 떨어지는 굵은 빗방 울. 억겁의 불길을 잠재운다. 비술 '수룡의 눈물'." 먹구름이 드레이프의 상단을 채워나간다. 검고 짙은 먹구름들. 모든 것 을 집어 삼켜버릴 것 같은 암흑을 자랑하는 그 먹구름들은 한순간에 하 늘을 뒤덮는다. 어느 한 틈도 남겨두지 않고 전 하늘을 장악한 먹구름. 점차 빗방울이 하나씩 떨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곧 억수 같이 빗방울이 떨어진다. 소나기. 아니, 그것을 이미 넘어버린 거대한 물줄기들이 먹구름 에서부터 지상으로 하강한다. 마치 세상이 물로 가득 차버리는 비술 '폭 수천'과 같이.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이어서 북대마법사가 수룡의 여의주의 본 주인을 소환한다. 비술 수룡 소환." 먹구름 사이로 무언가 굵은 물줄기가 보인다. 그것은 살아 움직이든 먹 구름 사이사이로 비치더니, 이내 지상으로 모습을 나타낸다. 흉폭하게 벌 린 입이 더욱 매서운 거친 수룡의 포효. 날카롭게 솟은 뿔이 아무리 물로 이루어져있다고 해도 그것은 공포. 수룡이 나타난다. '될 수도 있다, 이 정도면! 비술 수룡의 눈물과 비술 수룡소환, 게다가 물의 정령왕 에리피느까지!' 자신이 당하는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후실리이스는 희열에 찬 소리를 내 지를 뻔했다. 궁지의 궁지로 몰렸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방법을 생각 해내 결국 해낸 훼이드리온. 게다가 그 방도를 뒷받침해주는 엄청난 강운 까지. 그녀는 마스터가 한 말을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정말 카드 마스터였어!' 후실리이스는 눈물을 흘릴 것만 같았다. 이제 이프리트가 소멸되고 자신 의 턴이 돌아오겠지만 더 이상 공격을 할 의사는 남아있지 않았다. 그녀 는 기권을 해버릴까, 라고도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리고 계속 갑니다." 그녀의 눈이 커져버리고, 훼이드리온의 입가에는 자신만만한, 정말 자신 에 찬 미소가 그려졌다. "비술 수룡의 눈물과 비술 수룡소환. 그리고 물의 정령왕 에리피느. 물 의 속성을 지닌 세 가지의 조건을 하나로 합친다. 정령왕의 기운까지 흡 수한 수룡이 자신의 눈물 속에서 환희에 찬 춤을 춘다. 비술 '폭수천룡무' 발동!" 비술로서 이루어진 최적의 환경에서 비술과 정령왕의 합체. 그것은 상상 을 초월한 위력을 이루어냈다. 실로, 그 누구도 생각지 못한 비술과 비술 의 연계 합체. 후실리이스가 언급한 바 그대로, 훼이드리온은 기적을 이 루어낸 것이다. "저, 저기 봐! 8번 테이블!" 관중들의 환호성이 들려왔다. 그 소리와 함께 훼이드리온은 드레이프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 죽을상을 짓고 있던 그가 아니었다. 승리를 확 신하고 입가에 진한 미소까지 짓고 있는 승자의 모습인 그였다. 수룡과 에리피느의 마주침. 그것은 새로운 힘의 인도. 수룡에 동화된 에 리피느의 상반신이 수료의 두 뿔 사이에 나타난다. 수룡의 뿔을 잡은 에 리피느는 점점 수그러져 가는 불의 정령왕 이프리트의 불길 사이를 거침 없이 뚫고 들어가, 마침내 이프리트의 본체를 가격해 날려버린다. 사방으 로 폭염이 치솟아 오르고 이프리트의 끔찍한 괴성이 하늘을 가른다. 억수 같이 쏟아지는 빗줄기. 그리고 그 최악의 배경 속에서 소멸되어 가는 불 의 정령왕 이프리트. 그의 소멸은 자명하다. 폭수천룡(暴水天龍)의 춤(舞)은 끝이 없다. 폭수천룡은 질주하여 그대로 드레이프의 벽에 부딪힌다. 타격음에서 이어지는 불협화음, 비음악적 굉 음. 드레이프의 벽이 차츰차츰 붉게 변한다. 폭수천룡의 돌진은 멈추지 않는다. "……폭수천룡무!" 드레이프의 벽, 후실리이스의 벽은 깨져버렸다. 난생 처음 들어보는 비술이었고, 그것은 기적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 었다. 물의 졍령왕의 힘을 받은 수룡의 춤, 비술 폭수천룡무. 후실리이스 는 멍한 얼굴로 비술의 이름을 외치고는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산산이 조 각나 사라져 가는 드레이프만이 그녀의 눈동자에 비쳤다. "……시험을 이겨냈습니다. 저의 승리죠?" 상쾌한 얼굴로 훼이드리온이 싱긋 웃었다. 후실리이스는 웃을 힘도 없다 는 듯이 의자에 몸을 묻은 채 그를 바라보았다. 숨을 몰아쉬고 있는 것은 그녀 자신이었다. "그래요… 완벽하게, 완벽하게 이겼어요." "감사합니다." "훼온 군이라면 앞으로도 있을 운명들을 이겨낼 수 있을 거예요. 오늘 내가 내린 이 시험과 같은 일들을, 그리고 닥쳐올 큰 운명까지." 무슨 말인지 모를 후실리이스의 대사였지만 훼이드리온은 아무렇지 않 다는 듯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감사해요." 천천히 카드를 정리하는 그의 모습에서 후실리이스는 마스터의 의도를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왜 최고 원로들로 하여금 대전에서 만나게 해 게임을 하게 했는지. 게임의 숨겨진 마스터는 운명을 움직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라고 그녀는 문득 생각했다가, 지워버렸다. 훼이드리온은 그렇게 후실리이스를 이겨 16강에 진출했고, 그보다 일찍 비술 성수축제로 승리를 따낸 미르도 역시 16강에 올랐다. 그리고 64강과 똑같은 패턴으로 수정거울 카드로 승리한 아이도 16강에 끼었다. 그렇게 그들은 대회 3일째, 마스터 카드 대회 본선 16강에 들어섰다. ------------------------------------------------------------------- 하아아. 새로운 비술의 등장입니다. 두 가지 비술과 함께 정령왕까지 합 쳐진 거대하고 화려하고 위력적이며 엄청난 비술, 폭수천룡무. 이름 한 번 멋지지 않습니까? 캬하아아아~(자화자찬 중) 물론 그 위력이며 10대 마스터 카드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정 령왕 중에서 공격력이 가장 강력하다는 불의 정령왕 이프리트, 게다가 마스터의 능력으로 인해 공격력이 증가된 이프리트를 단번에 소멸시켜 버리는 위력을 가진 비술입니다. 한마디로 엄청난 것이죠.(+ + +) 자자, 그럼 다음 번엔 그 누구와 붙게 되는 것일까요?(>.<)/ 다음 편에 뵙겠습니다.(^^^) 어둠의 기사 DARK KNIGHT TEAM... 덧하나. 추천 감상 비평. 받습니다아아. 덧두. GO CAMA 덧석. 네에, 어쩌면 내일 내로 에디에셀이 복구되는 겁니다!(+ + +) 번 호 : 17 / 17 등록일 : 2001년 02월 16일 17:05 등록자 : 암음기사 조 회 : 108 건 제 목 : [공지] 연재 복귀.(___) 돌아왔습니다. 드디어 돌아온 것입니다.(ㅠㅠㅠ) 밑에 보이시죠? 열편입니다. 기다려주신 데에 대한 보답(?)이라고나 할까요. 아무튼 이렇게 팀군이 돌아왔습니다. 그럼 이제 완결까지 열심히 달려가도록 하겠습니다! 어둠의 기사 DARK KNIGHT TEAM... 덧하나. 으에. 아무도 안 기다렸다면 어쩌지. 털썩. 번 호 : 18 / 20 등록일 : 2001년 02월 18일 07:35 등록자 : 암음기사 조 회 : 154 건 제 목 : [카드 게임 판타지]『카드 마스터(Card Master)』#094 카드 게임 판타지(Card Game Fantasy) 카드 마스터(Card Master) 94. "쉽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오늘은 그 본성을 다 드러내야할 걸?" "그, 그래?" 뮤린은 떨리는 목소리가 확연하게 드러날 정도로 긴장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후실리이스의 미간에는 가는 주름이 잡혔고, 그 때문에 뮤린은 더욱 더 벌벌 떨어버렸다. "대체 말이야." 그곳은 게이머들이 대전을 하기 위해 만들어진 장소인 경기장으로 들어 가는 길목의 문이었다. 쉽게 말해 경기장 입구였는데, 아직 게이머들이 대기실에서 빠져나오지 않은 시간에 32강 탈락자인 후실리이스는 16강 진출자인 뮤린을 만나고 있었다. 원래 대기실로는 대전 게이머가 아닌 이 상 들어올 수 없지만 그녀는 마법사였고, 공간 이동은 괜히 있는 것이 아 니었다. 그리고 들어올 필요성도 물론 가지고 있었다. "어떻게 생겨먹어야지 이렇게 소심할 수 있는 거야? 피엘도 이 정도는 아냐. 아니, 더 심했다가 이제 나아진 거지. 그런데 넌 나아지지도 않는 거야, 어떻게?" 뮤린은 엄청 주눅든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이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내가 어떻게 알아……." 그의 소심한 성격은 천성이었다. 그것을 아는 후실리이스는 그의 성격을 개조하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고, 그런 와중에 그와 같은 고민을 겪고 있는 피엘도 끌어들였다. 그래서 결국 피엘은 어느 정도까지 갱생시켰으 나, 어째서인지 뮤린은 도저히 나아지지가 않았다. 한때, 후실리이스는 그 이유를 이렇게 생각했다. "마스터 카드만 들면 확 돌변하는 그 성격 때문에 그럴 거야." 흔히 말하는 이중인격을 가진 자가 바로 뮤린, 그였다. 전문가가 아닌 이상, 그녀로서도 정확하게 진단을 내릴 수는 없기에 자신은 없었지만, 거의 이중인격에 가까운 뮤린의 성격 때문에 소심증은 결코 고쳐지지 않 는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뮤린, 그는 평소에는 무지하게 소심했다가도 마스터 카드 게임을 시작하 면 성격이 확 돌변해 마법사 길드 최고 원로 중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잔 악하게 변한다. 그래서 일부 마법사들 중에서는 그를 이중인격자라고 손 가락질하는 이들도 있는데, 이상한 일은 그런 말을 그들 앞에서 꺼내는 이가 그 다음 날부터는 꼭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대륙그리고 몇 일 후 대륙 어딘가에서 나타났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신기한 일인 것이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후실리이스는 아파 오는 머리를 부여잡으면서 고개 를 푹 숙이고 있는 뮤린을 내려다보았다. 키가 커도 별 상관이 없을 정도 로 낮은 앉은 키. 그녀는 다시 한번 다듬은 목소리로 재차 말했다. "그러니까 잘 들어. 이중인격 같은 그 성격에 걸란 말야. 너의 실력을 최대한 펼쳐. 그래야 이길 수 있을 거야. 봐줄 필요도 없어. 그 태자는 게 임을 거듭해나갈수록 점점 강해지고 있으니까. 마치 운명을 스스로 바꾸 듯이 말이야. 알겠어? 그러니까 너의 최대의 실력을 뿜어내도 좋다는 거 야. 몇 년간 전혀 쓰지 못했지, 그 비술? 오늘 한번 사용해봐. 태자가 너 의 시험을 이겨내는지 보자구." 사실 원래 계획은 마스터와 태자를 결승전에 만나게 하고, 그 과정 중에 태자가 대전마다 최고 원로를 만나게 하려 했었다. 하지만 인생이란 게 결코 원하는 것 그대로 될 리가 없었고, 결국 훼이드리온과 대전이 가능 한 원로는 후실리이스와 뮤린, 단 둘만 남게 되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 이 둘로서 모든 일을 다 해버려야 하기에, 태자에게는 가혹한 시험이 될 수밖에는 없었다. "알겠지? 열심히 해. 최선을 다하란 말야." "으, 응. 열심히 하, 할게." 본래부터 말을 더듬는 버릇이 있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해보고 싶을 정 도로 말을 더듬거리며 뮤린이 대답했다. 영 미덥지 못한 후실리이스는 재 차 또 강조를 하려다가, 결국 입을 다물고 말았다. 이런 모습이라고 해도 뮤린은 마법사 길드 최고 원로. 자신이 할 일은 해내고 마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다른 한 면의 성격이라면 또 강조하지 않아도 충분히 해낼 것이 분명했다. "좋아. 믿겠어. 제대로 해내." 후실리이스는 잔뜩 결의에 찬 표정을 만들어 뮤린의 어깨를 툭 치고는 공간 이동으로 사라졌다. 그녀가 서있던 자리를 떨리는 눈동자로 바라보 고 있던 뮤린은 이내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대답은 했지만 역시나 자신은 없었다. 마스터 카드로 강한 성격이 일깨 워진다고 하더라도, 과연 자신의 실력으로 태자를 이길 수 있을까. 그는 모르겠지만 여행하는 동안에 했던 대전들과 알 수 없는 강운으로 그는 엄청 강해져있었다. 운이 모든 것을 장악하는 마스터 카드의 세계에서는 당연한 결과이리라. 하지만 뮤린은 태자처럼 운이 좋질 못했다. 후실리이스가 말한 바 있는 그 비술도 써보고 싶어도 운이 없어서 카드가 뽑히질 않아 사용하지 못 한 것이다. '한번이라도 더 대전에서 그 비술을 쓸 수만 있다면…….' 마스터에 반하는 행동이었지만, 사실 그가 지금가지 해온 대전은 모두 그런 바램을 이루기 위한 발악이었다. 자신이 만들어낼 수 있는 최강의 공격력을 가진 비술. 모르긴 몰라도 그 비술을 사용한다면 상대의 공격과 방어는 물론, 게이머의 생명력까지 한번에 날릴 수 있는 거대한 일격이 될 것이다. 태자가 32강에서 후실리이스를 상대로 펼쳤던 '비술 폭수천룡 무'와 버금간 일격이 말이다. 지이이잉. 그의 귀로 16강의 시작을 알리는 벨 소리가 들려왔다. 뮤린은 떨리는 주 먹을 애써 로브 속으로 감추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든 싫든 대전이었고 최고 원로로서 할 일이었다. 언제나 품어왔던 바램을 가슴속에 갈무리하고, 뮤린은 아직도 귀를 울리 고 있는 벨 소리를 느끼면서 대기실의 문을 열었다. 차가운 복도의 공기 가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경기장의 소란스러움이 공허한 울림으로 변해 공기를, 그리고 땅과 벽을 울리고 있었다. 그는 심호흡을 했다. '가자. 가서 마스터 카드를 잡자. 그럼 변할 수 있다.' 익숙한 주문처럼 그렇게 되뇌는 뮤린. 그의 발걸음이 무거움을 느끼게 만든다. 훼이드리온은 눈앞에 있는 사내를 어디선가 본 듯하다고 생각했다. '어디서였지.' 분명히 본 것 같기는 한데, 어디서 봤는지 도저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테이블 앞에 섰을 때는 한없이 높게만 보였던 멀대같은 키, 그리고 소심 한 듯 움츠리고 있는 어깨. 막상 테이블에 앉아 마주한 지금도 제대로 눈 을 마주치지 못하고 있는 모습까지. 저 이미지는 어디선가 봤지만, 도저 히 머릿속에 떠오르지가 않았다. 어쩌면 이 사내의 존재감이 이렇게도 희미하기에 기억 속에 잔재하지 않는 것일 지도 모른다. 훼이드리온은 그렇게 몇 번 고개를 갸웃거리며 두뇌 속에 남겨진 흔적 들을 뒤쫓아 가보다가, 이내 '아하!'라는 감탄사를 내뱉고 말았다. '게이트 여관의 그 남자구나!' 스스로의 기억력에 새로이 감명 받고 만 그는 곧 충격의 물결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그럼 이 남자도 마법사 길드 최고 원로였단 말야?' 역시나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이 있는 것이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름대로 납득하고는 게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기본적으로 대회에서는 든 카드를 50장만 사용하게 했고, 그건 카드가 많 은 사람에게는 이득이, 적은 사람에게는 손해를 보게 만들었다. 하지만 거의 다가 든 카드, 내린 카드를 충분히 사용할 수 있을 만큼 카드를 가 졌기에 그다지 문제되는 사항은 아니었다. 훼이드리온은 천천히 25장을 뽑아내고, 나머지는 뮤린에게 넘겼다. 공평 하게 든 카드의 반을 대전자 둘이 각각 고른다는 것은 대회에서도 변함 없는 규칙이었다. 처음에는 말을 더듬는 버릇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궁금증이 들 정도로 떠듬거리면서 자신을 "마, 마법사 길드 최고 워, 원로 중 일원 이, 인 뮤린 매, 맥나잇이라고 합니, 니다." 라고 소개한 바 있는 그는 훼 이드리온의 움직임에 움찔 놀라더니 서둘러 자신의 카드를 꺼내들었다. "골라주세요." 친절하게 웃으며 말을 건네는 훼이드리온. 이 정도면 사람을 대하는 것 에는 이제 수준급이 되었다, 라고 자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자부심의 일말조차도 가지고 있지 않은 뮤린은 여전히 떠 듬거리며 "네, 네." 라고 고개를 일일이 숙이더니 두 손으로 카드를 받아 들어 조심스럽게 25장을 골라내어 다시 그에게 넘겼다. 이 정도라면 이제 훼이드리온이 질릴 정도였다. 소심해도 이렇게 소심한 사람이 있다니, 역 시 세상은 넓었다. '그러고 보니 내 주위에는 별로 소심한 사람이 없잖아.' 대범하고 화끈하고 대담하며 당당한 사람들만이 머리 속에 떠오르자, 이 런 성격의 사람도 산뜻하다고 생각하는 그였다. 어쨌든 연신 카드를 놓치면서도 끝까지 게임 준비를 마친 뮤린의 자세 에 훼이드리온이 평생 인연이 없을 것 같은 신에게 경배를 드리고픈 마 음이 되었을 무렵, 드디어 마기의 선언이 들려왔다. "준비 다 되셨습니까? 그럼 지금부터 1414년 마스터 카드 대회 본선 16 강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웅장한 울림이 게이머를 비롯하여 돔 내의 모든 사람에게 느껴지는 동 시에. 8개의 테이블 곳곳에서 투명한 드레이프가 펼쳐졌다. 드레이프가 펼쳐지기가 무섭게 시작되는 공격. 훼이드리온은 "이야기의 시작."을 외치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먼저 아이가 대전을 시작하고 있 는 6번 테이블, 그리고 그 다음은 미르가 있는 3번 테이블. 마지막으로 루페르스가 대전 중인 1번 테이블을 훑어본 훼이드리온은 "흠." 하면서 굳은 표정을 지었다. 모두가 진지하게(솔직히 루페르스는 제외하고 싶은 심정인 그였다) 대전 을 시작하는 중에 자신도 그래야할 것 같은 의무감 비슷한 감정으로 지 그시 고개를 들자, 카드에 손을 대려다가 그의 시선에 움찔 손을 거두는 뮤린의 모습이 보였다. 작은 한숨. 그 후, 훼이드리온이 입을 열었다. "먼저 시작하세요." "네? 아, 네. 고, 고마워요." 선공을 양보하는 건 참으로 고마운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훼이드리 온이었지만, 뮤린의 태도에 황당할 수밖에 없음을 느끼며 또 다시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과연 이런 사람이 어떤 시험을 내릴까?' 32강에서 만난 최고 원로 후실리이스가 남긴 말을 떠올리면서 그는 대 전 전에 느꼈던 긴장이 삭으러듦을 안타깝게 여겼다. 이런 상태로 게임을 계속했다가는 시험이고 뭐고 받기도 전에 먼저 이겨버릴 것 같았다. 훼이드리온은 이 돔 어딘가에 있을 그녀를 떠올리면서 든 카드를 손에 들었다. 어찌됐든 간에 16강까지 올라온 것을 보니 보통 실력은 아닐 것 이 분명했고, 그럼 최소한 지루한 게임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판단이 내려졌다. 그 정도면 만족한다는 마음으로 훼이드리온은 뮤린이 고르는 카드를 주의 깊게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얼마 후, 훼이드리온은 그런 안이한 생각마저도 철저하게 파괴됨 을 감수해야만 했다. 게임은 점점 중반으로 치달아갔다. 그럴수록 관중들의 이목은 관심 있는 게이머의 대결 속으로 빠져들었고, 돔 내에는 웅성거리는 정적이 찾아들 었다. 간간이 터지는 화려한 비술의 세계에 대하여 감탄을 터뜨리고 고함 을 질러대는 그런 관중들 사이에, 붉은 기가 감도는 로브를 걸친 성숙한 여인이 앉아있었다. 침착하게 자리에 앉아있는 그 모습에서, 그리고 로브 에 그려진 마법사 길드 공식 문장을 통해 그녀가 마법사 길드 최고 원로 라는 것을 더없이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그래, 뮤린. 그 모습이 너의 진정한 모습이야.' 후실리이스는 진신을 며칠 간 유지할 생각인 것인지 소녀의 모습으로 돌아가지 않은 채 훼이드리온과 뮤린의 대전을 관전 중이었다. 드레이프 라는 유용한 공간 내에서 펼쳐지는 카드와 카드의 격돌은 마법사의 본연 의 피를 들끓게 하는 무엇인가가 있었고, 오랜만에 보는 소심한 뮤린의 본래 모습이 그녀의 관심을 더욱 끌게 만들었다. "흑소환사 카드 유지, 그리고 몬스터 카드, 비천야차 카드 2장. 흑소환사 가 거대 몬스터, 이계의 환수 비천야차를 소환하여 공격한다." 흑소환사가 지면에 그려놓은 마법진의 중앙에서 검은 빛이 솟아오르더 니 그곳에서 날카로운 송곳니와 붉디붉은 눈동자를 가진 거대한 두 마리 의 야차가 날아오른다. 악마의 표상 같은 거대한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오 른 비천야차들은 그대로 드래곤 나이트를 향해 쇄도해 들어간다. 비천야 차라면 몬스터 중에서도 상급에 속하는 존재들. 하급으로 부류 되는 와이 번과 한 마리의 비천야차를 상대하기도 버거운 백기사로서는 도저히 상 대가 되지 않는다. 비천야차 한 마리가 날카로운 손톱이 돋아난 손을 와이번의 목을 향해 갈기며 지나간다. 녹색의 피. 꾸에엑 거리는 듣기 싫은 괴성을 남기며 와 이번이 지면으로 추락한다. 그 뒤를 따라 한 마리의 비천야차가 백기사의 뒤를 추격한다. 지면이 다가오는 와중에서도 뒤로 검을 휘둘러보는 백기 사. 그러나 그런 어설픈 휘두름에 당할 만큼 비천야차는 만만하지 않다. 간단히 검을 피해버리고 손톱으로 백기사의 등을 그어버리는 비천야차. 백기사의 등에서 검붉은 피가 터져 나오고, 드래곤 나이트는 소멸된다. 훼이드리온의 카드가 뒤집히는 것을 확인하고는 후실리이스의 입가에는 묘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저 정도로 계속 몰아붙인다면, 필시 좋은 결과 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흐뭇함이 느껴졌다. 뮤린 맥나잇. 평소에는 소심한 성격을 지녀서 아무도 예상치 못하지만 그가 가진 카드는 모조리 흑소환사와 각종 몬스터 카드뿐이었다. 그것도 잔인하고 징그럽게 생긴, 보통 사람이라면 손을 흔들며 도망가버릴 게 뻔 한 그런 몬스터들로만 치장된 그의 카드에는 아름다움이라고는 눈곱만치 도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마스터 카드만 들면 달라지는 그 성격 때문이 리라. 후실리이스는 입가에 지은 미소를 지우지 않고 계속 게임을 구경했다. 이제 이쯤되면 뮤린이 본격적으로 시험을 내릴 때가 온 듯한 예감이 들 었다. 두 마리의 비천야차가 으르렁거리며 훼이드리온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곳에는 풍정령을 소환한 풍정령사가 서있었다. 비천야차의 붉은 눈길을 받은 풍정령사가 다급하게 발을 움직여 뒤로 물러났고, 훼이드리온은 서 둘러 방법을 물색했다. 상급 몬스터인 비천야차. 재빠르고 강하기로 유명한 저 몬스터를 상대하 려면 그 이상의 기동력과 빠르기를 가지고 있어야한다. 훼이드리온은 손에 남아있는 든 카드를 뒤지면서 이리저리 카드들을 끼 워 맞췄다. 그리고 이윽고 무언가 방법을 찾아냈는지 단호한 움직임으로 다섯 장의 카드를 꺼내들었다. 언제부터인가 차분하면서도 열을 띄고 있는 눈길인 뮤린을 쳐다보면서 훼이드리온이 다섯 장의 카드를 단숨에 테이블 위로 내렸다. "검성 카드와 바람의 용사 카드. 그리고 와이번 카드 페어와 '바람의 정 령 나이아' 카드. 검성과 바람의 용사, 그리고 와이번 둘로 비술 드래곤 나이트 발동. 거기에 같은 속성을 가진 풍정령의 비호를 받아, 비술 응용 편 '바람의 드래곤 나이트'!" 검성과 용사 정도면 각각 비천야차를 한 마리씩 상대할 수 있었다. 그리 고 와이번으로서 기동력을 갖추고, 거기에 바람의 정령 나이아까지 가세 한다면 승률은 충분히 있었다. 하늘 저편에서 날아온 드래곤 나이트 둘은 나이아의 수호 아래 비천야 차들을 향해 날아간다. 치열한 전투가 펼쳐진다. 비천야차의 날개가 퍼덕 이며 날카로운 손톱이 허공을 갈랐고 드래곤 나이트의 백색 검이 비천야 차를 노린다. 한치의 양보도 없는 대결투. 공중에서 벌어지는 그 대결은 한동안 지속된다. 검성의 머리에서 피가 흐르고, 용사의 등에는 비천야차 의 상처가 생겨난다. 하지만 끈질기게 비천야차의 행보를 따라붙는 검성과 용사의 검. 나이아 의 도움을 받아 비천야차의 진로를 가까스로 막고 백색 검광이 비천야차 의 머리를 노린다. 단숨에 관통해버리는 날카로운 검날. 이마에서부터 뒤 통수까지 검에 찔린 비천야차 한 마리가 검은 히를 흘리며 지면으로 추 락한다. 그 뒤를 따라 남은 한 마리의 비천야차의 목으로 용사의 검이 파 고들고, 비천야차는 그대로 절명해버린다. "좋군. 잘 막았어." 뮤린은 어울리지 않게 히죽 웃으면서 이를 드러냈다. 소심한 모습은 온 데간데없고 징그럽고 강하기 그지없는 몬스터들을 소환해내고 있는 그의 모습에서 훼이드리온은 혼란스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후실리이스가 진정한 실력을 펼치기 위해서 진신을 드러낸 것처럼, 이 남자는 성격을 바꿔버리는 것일까. 마스터 카드를 들고 흑소환사를 부리는 뮤린의 모습은 예의 소심한 모 습과는 엄청난 차이를 보였다. 버릴 카드는 버리고, 새로운 공격력을 단 호하게 펼쳐내는 그 모습은 마스터 카드에 대한 자신감과 자부심으로 밖 에 해석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이게 진짜 모습이었던가?' 마법사 길드 최고 원로들은 신기한 인물들의 집합이라고 하였다. 뮤린도 역시 그 중 하나였던 것이다. "자, 그럼 이제 시험을 내려봐야하겠지?" 어느새 놓아버린 반말투로 뮤린이 거만하게 히죽 웃었다. 잔인하게 보이 는 그 미소에 침을 꿀꺽 삼킨 훼이드리온이 가만히 응수했다. "당신도 저에게 시험을 내리는 겁니까?"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기에 별 뜻 없는 말이었다. "알고 있을 텐데. 후실리이스가 말한 걸로 알아. 새삼스럽게 그런 말을 꺼낼 필요는 없다고 여겨진다." 훼이드리온은 작게 고개를 움직였다. 뮤린의 히죽 웃음이 다시 한번 떠 오르고 그가 든 카드 중에서 가만히 두 장을 뽑아들었다. "자. 시작이다. 흑소환사 카드와 좀비 드래곤 카드. 흑소환사 두 명이 합 세하여 좀비 드래곤을 소환하여 공격한다." 검은 로브를 휘날리면서 흑소환사 두 명이 모인다. 서로를 바라보는 시 선이 심상치 않다고 공중의 드래곤 나이트들이 느꼈을 때, 그들을 중심으 로 거대한 마법진이 펼쳐진다. 검은 색의 일렁거림으로 대체되는 공간. 그 중심에 서있는 흑소환사들은 똑같은 목소리와 속도로 똑같은 주문을 웅얼거리기 시작한다. 이윽고 마법진의 선을 따라 검은 빛이 뿜어져 나온다. 흑소환사의 머리 를 훨씬 뛰어넘어 창공까지 날아오른 그 빛이 곧 사라지고, 그곳에는 희 끗희끗 짙은 안개와 같은 형상으로 서있는 거대한 드래곤이 나타난다. 좀 비 드래곤. 다른 말로 고스트 드래곤이라고도 불리는 그것. 당연히 상급 몬스터인 그것은 독한 가스를 내뿜으며 흑소환사들의 명령에 따른다. 잔뜩 머금은 독가스가 한순간에 숨결로 화해 창공으로 쏘아진다. 역한 독가스의 공격. 닿기만 해도 살이 썩어 들어간다는 좀비 드래곤의 독가 스. 그 거친 돌격에 드래곤 나이트들은 우왕좌왕하면서 서둘러 도망친다. 하지만 비천야차와의 격투에서 많은 부상을 입고 말았기에 움직임이 현 저하게 떨어진 상태라 완벽하게 피하질 못한다. 독가스가 그들을 덮친다. 회색의 독한 가스는 와이번과 검성, 용사의 살 을 단숨에 태우고 그들의 목숨을 빼앗는다. 영혼이 날아가 버린 인간과 몬스터는 허무하게 땅으로 떨어져 내린다. 흑소환사의 비릿한 웃음. 좀비 드래곤의 포효. "좀비 드래곤!" 후실리이스는 흥분하여 소리쳤다. 옆에 앉아있던 어린 꼬마가 흠칫 놀라 면서 엄마에게 달려가 울먹거리는 동안, 그녀는 눈을 부릅뜨고 뮤린의 등 을 응시했다. "드디어 시작하는 거야, 뮤린? 흑소환사 최고의 비술을?" 한동안 전혀 보지 못했던 그 비술. 불의 정령왕 이프리트를 가지고 있는 후실리이스조차 쉽게 소멸하지 못했던 그 비술을 그가 이제야 사용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기대에 가득 찬 눈길로 드레이프를 쳐다보았다. 그 옆에서는 마스터가 게임을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에는 뮤린과 훼이드리온의 대전 밖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좀비 드래곤이라니." 처음 보는 카드였다. 저런 카드도 존재하는 것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드래곤을 좀비 상태로, 혹은 그 혼만을 빼서 형상화시킨 것이라는 좀비 드래곤. 드래곤만한 위력을 있으면서 소환사의 명령에 복종하는 이 거대 몬스터는 상대하기가 여간 껄끄러운 것이 아니었다. 입에서 나오는 독가스는 항상 그 좀비 드래곤 주위를 맴돌기 때문에 가 까이 다가갈 수도 없었다. 가까이 가기만 하면 살이 타버리니, 근접 공격 은 한낱 꿈이었다. '하지만 방법은 있다.' 근접이 안되면, 원거리가 있다. 원거리에서 공격할 수 있는 카드만 있다 면 공격은 가능했다. '게다가 좀비 드래곤에게도 약점은 있지!' 자신 있게 훼이드리온이 카드들을 꺼냈다. "비술 매드매지션!" 좀비 드래곤의 독가스가 미치지 않는 영역에 붉은 화염에 휩싸인 매드 매지션의 모습이 나타난다. 매드매지션은 단숨에 불줄기를 굵게 뭉치더 니, 지체할 시간이 없다는 듯 재빠르게 앞으로 쏘아낸다. 두꺼운 독가스 를 무로 변환시키며 뚫고 매드매지션의 불줄기가 좀비 드래곤, 아니 흑소 환사들을 노리고 날아든다. '강력한 몬스터가 소환된다면, 소환사를 노리는 것이 이득이다.' 그 간단한 진리를 명확하게 알고 있는 훼이드리온. 난생 처음 대해보는 몬스터 앞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응하는 그 모습이 새삼 그의 성장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놀란 흑소환사들이 급히 좀비 드래곤을 움직여 그 불길을 막아내지만 완벽하게는 막지 못한다. 결국 약간의 피해를 입은 불길을 소멸되고, 그 충격으로 흑소환사 중 한 명이 비틀거려 좀비 드래곤이 흐릿해진다. "좋은 공격이었어. 하지만, 이미 그 정도야 예상했지." 히죽대며 말하던 뮤린은 차갑게 얼굴을 굳히면서 입을 열었다. 싸늘한 어감의 그 말은 조용히 드레이프와 훼이드리온의 귀를 울렸다. "진짜 공격은 이것이다. 흑소환사 중 한 명이 좀비 드래곤을 다른 흑소 환사의 몸에 빙의 시킨다. 좀비 드래곤의 영혼이 스며든 흑소환사는 이윽 고 정신 붕괴를 일으켜 또 다른 존재로 환생한다." 훼이드리온은 완전 질린 표정이 되었다. 좀비 드래곤의 영상이 검은 소 용돌이가 되어 다친 흑소환사의 몸으로 빨려들고 있었다. 뮤린은 여전히 '히죽'으로 밖에는 표현될 수 없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 차가운 그의 한마디. "비술 언데드 마스터." 극악한 존재. 악마들의 중심이라고 일컬어지는 존재가 지금 드레이프에 강림했다. 검은 소용돌이를 흡수한 흑소환사의 몸이 크게 부풀어오른다. 동시에 그 의 몸에서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뿜어져 나오는 검은 죽음의 기운.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나올 것 같은 그 징그러운 느낌에 매드매지션의 미친 정 신도 올바로 돌아오는 듯하다. 드레이프 안이 금방 검은 기운으로 뒤덮였다. 거대하게 부풀어올라 눈동 자가 없는, 흰자위만 남은 눈으로 검은 기운을 쏘아대고 있는 언데드 마 스터의 모습만이 그 중앙에서 보일 뿐, 매드매지션의 붉은 불길은 검은 기운에 가려보이지 않았다. "저, 저게 대체 뭐야!" 관중들 사이에서 외침이 터져 나왔고, 그 뒤를 따라 너도나도 혐오감에 찬 비명을 질러댔다. 그 소리들을 들으면서 뮤린은 여전히 차갑게 히죽댔 다. "저런 소리가 즐겁지. 비명, 환호성. 특히 이 언데드 마스터를 사용하고 난 다음의 비명은 더더욱 짜릿하지." 훼이드리온은 순간적으로 생각했다. '변태다.' 언데드 마스터의 검은 기운이 미처 피할 새도 없이 매드매지션을 덮친 다. 단숨에 소멸하고 마는 매드매지션. 붉은 불길도 언데드 마스터 앞에 서는 소용이 없다. "마음껏 힘써봐라. 폭수천룡무라는 그 비술도 괜찮겠지." 뮤린의 말이 조롱으로 밖에는 들리지 않는 훼이드리온이었다. 폭수천룡 무는 정말 순간적으로 생각해낸 것이었고, 지금에 와서는 쓸 수도 없었 다. 무엇보다 수룡의 여의주가 내린 카드 중에서 섞여있으니까 말이다. '폭수천룡무. 물은 생명을 상징하는 것이긴 하니, 죽음의 언데드 마스터 를 상대하기에는 적합할 지도 모르겠군.' 미련을 버리지 못하면서 중얼거리던 훼이드리온의 눈이 드레이프를 향 했다. 노란 색으로 빛나고 있는 마법진 위에 서서 검은 기운을 일렁이며 부유하고 있는 언데드 마스터. 인간의 형상이지만 보통 인간보다 세 배 이상은 커다란 덩치였고, 또한 거대한 존재감을 나타내고 있었다. 물론 좀비 드래곤 소환용이었던 마법진보다는 한참 작았지만. 훼이드리온은 깨달았다. 아니, 깨달았다고 하기보다는 드디어 생각났다, 라고 하는 게 더 옳았다. 여러 책을 탐독하면서 쌓아온 지식 중의 한 가 지가 이제야 빛을 발하는 것이다. 회심의 미소라고 봐야했다. 뮤린은 문득 떠오르는 그런 생각에 아까 전 부터 등뒤에서 느껴지는 시선을 돌아보았다. 눈길 끝에 자리해있는 후실 리이스의 모습. 나이나르가 반했다고 하는 그 성숙한 자태를 보면서 뮤린 은 히죽 웃었다. '후실리이스. 정확했군.' 이미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자신은 이 게임에서 진다는 것을. "와아, 그래서 땅의 매드매지션으로 마법진을 엎어버렸단 말야?" 아이는 훼이드리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게임을 할 때는 미처 보지 못했던 장면이라 아쉽기는 했지만, 그의 설명에 뒤늦 게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응. 마법진이란 건 땅 위에 그려지는 거잖아. 흙을 덮는다고 지워지지 않는다면 엎어버리면 되는 거지. 게다가 땅의 매드매지션이라면 최소한 공격도 될 테니까." 언데드 마스터라는 초유의 존재를 그렇게 간단히 사라지게 만들다니. 아 이는 훼이드리온의 머리를 축복하고 싶었다. 운이 있다고 생각은 했는데, 거기다 적절한 지식까지 갖추고 있다니 말이다. "그래서, 그 다음은?" 저녁을 먹고 있던 에타가 시끄럽다는 듯이 눈을 흘겼지만, 아이는 상관 치 않고 훼이드리온을 닦달했다. 그가 난처하게 웃으면서 이야기를 이었 다. "그 다음은 뭐, 땅의 매드매지션으로 빙의가 풀린 흑소환사들을 공격해 이겨버렸지, 뭐. 흑소환사는 자체 공격력이든 방어력이든, 엄청 낮으니 까." "축하해, 훼온! 이로써 8강 진출이잖아!" 그는 산뜻한 얼굴로 웃으면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이도 축하해. 이렇게 가다가 정말 결승에서 만나는 거 아닐까?" "그럼 좋겠지만, 그 전에 미르하고 만나는 것부터 걱정해야하지 않을 까?" 찡긋 윙크를 하면서 대답하는 아이의 시선은 묵묵히 빵을 뜯어먹고 있 는 미르를 향했다. 특이하게도 이레브워츠 빵을 쇠고기 수프에 찍어먹고 있던 소년은 그녀의 시선에 힐끔 눈을 들더니, 한마디했다. "가능성이 없다." "에? 왜?" 미르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8강은 올라섰지만, 아버지와 만나게 되었으니까." 훼이드리온은 경직하고 말았다. 루페르스, 마법사 길드 마스터로서 자신 의 마스터 카드를 노리는 자. 미르와 후실리이스가 경고했다시피 그의 실 력은 역시나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훼이드리온은 침을 꿀꺽 삼키면서 중 얼거리듯 말했다. "그래도 미르한테는 성수축제가 있잖아?" "한가지 더 말해주지." 미르의 조용한 음색에 일동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그 침묵 속에 소년의 말이 조용히 울렸다. "아버지는 전사 카드 한 장으로 성수축제를 깰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대회 5일째. 바로 내일 본선 8강이 치러진다. 뮤린을 이긴 훼이드리온은 작년 대회에서 긴장으로 인한 복통을 호소하여 대전을 불참해 부전패했 던 게이머와 대전을 하게 되었고, 아이는 매 대회마다 4강까지는 부지런 히 들락날락 거린 여성 게이머와 붙게 되었다. 그리고 미르는 무명의 게 이머를 여유롭게 제치고 올라온 아버지 루페르스와 대전을 하게 된 것이 다. 훼이드리온은 대단히 불편한 얼굴이 되어 미르를 바라보았다. "어떨 거 같아?" "글쎄." 미르답지 않게 애매모호한 답변이었다. 소년은 나머지 빵을 입안에 넣기 직전에 대답했다. "확신할 수 없다." 훼이드리온 일행이 여관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있을 때쯤, 마법사 길드 의 초라한 사무실 최고층 마스터룸에서는 루페르스와 마기, 후실리이스, 뮤린이 모여 담소를 가장한 진취적인 토론을 나누는 중이었다. "내 말이 맞지?" 제법 진지한 얼굴로 후실리이스가 뮤린을 보았고, 그가 소심하게 어깨를 움츠리며 대답했다. "네, 네. 저, 정말 강했어요… 운도 강하고 게다가 여러 지식도 쌓여있 고." 루페르스는 즐겁게 웃었다. "그거야 이미 알고 있는 바지. 아무튼 너희들에게도 인정을 받았다는 거 지?" "네, 그래요." 후실리이스의 답에 이어 서류를 뒤적이던 마기가 입을 열었다. "루페르스님. 8강에서… 아드님과 대전하시게 되었는데, 괜찮으시겠습니 까?" 어딘지 모를, 마스터룸의 한쪽 벽으로 고개를 돌리면서 루페르스는 잠시 말을 잃었다. 하지만 곧 빙글 웃으면서 대답하는 그. "공은 공이고, 사는 사지." 지금 중요한 것은 훼이드리온이라고 생각했기에, 루페르스는 잠시 부정 을 잊기로 마음먹었다. -------------------------------------------------------------------- 아하하하. 날 샜습니다. 지금은 아침 7시 반. 이젠 잠이 오는 건지 오지 않는 건지 헷갈리는 경지에 들어서버렸군요. 냐하하하하. 아무튼. 또 하 루종일 글을 적는 겁니다. 음음. 어둠의 기사 DARK KNIGHT TEAM... 덧하나. 추천 감상 비평. 주세요옷- 덧두. GO CAMA 덧석. 그러고 보니, 복귀 후 첫편이군요. 덧넉. 과연. 3일 내의 완결이 가능할지? 번 호 : 19 / 20 등록일 : 2001년 02월 18일 21:17 등록자 : 암음기사 조 회 : 91 건 제 목 : [카드 게임 판타지]『카드 마스터(Card Master)』#095 카드 게임 판타지(Card Game Fantasy) 카드 마스터(Card Master) 95. 훼이드리온은 황당한 얼굴이 되어서 자신의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는 진행 요원에게 되물었다. "…그러니까, 뭐라고요?"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이 묻는 그의 얼굴을 보면서 진행 요원은 로브를 들추며 새로 그린 대진표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1414년 마스터 카드 대회 참가 번호 24번 훼온 레이엔트 게이머가 8강 대전자 체인 리트닝 게이머의 기권으로 4강 진출이 확정되었음을 알려드 리는 바입니다." 대진표에는 이미 훼이드리온이 4강에 올라섰다는 표시가 되어있었다. 훼 이드리온은 그래도 납득할 수 없다는 듯이 거칠게 다시 물었다. "이유는요? 8강까지 나름대로 힘들게 올라왔는데 이렇게 쉽게 올라갈 수는 없는 거라고요." "하지만 이미 부전승하신 걸 어떡하겠습니까. 대전자 분께서 복통을 호 소하시다가 결국 정신을 잃어버리셔서 도저히 대전을 할 수 없다고 연락 이 방금 전에 도착했는걸요. 기권으로 간주되어 4강에 오르시게 되었습니 다." 아이가 훼이드리온의 어깨를 툭 쳤다. 뒤늦게 그것을 느낀 그는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표정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작은 한숨을 쉬면서 그녀가 훼이드리온의 어깨를 두들겼다. "그냥 받아들여, 훼온. 4강에 진출하게 되었다니 좋은 일이잖아?" "그렇지만, 이렇게 쉽게 올라가다니 기분이 이상하다구. 8강까지는 마법 사 길드 최고 원로들도 만나면서 힘들게 왔는데, 준결승을 이렇게 쉽게 올라가다니." 대전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비관적인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시무룩 해지는 훼이드리온의 머리를 쓰다듬는 아이. 문득 누님의 따뜻한 손길이 생각나던 훼이드리온은 그녀를 보았고, 그녀는 싱긋 웃음을 지었다. "괜찮잖아. 오늘은 관중의 입장에서 구경해봐. 비록 대전을 할 수 없지 만, 동시에 3번의 게임을 구경할 수 있어서 좋잖아? 그렇다고 생각 안 해?" 훼이드리온의 푸른 눈을 바라보면서 아이는 마무리 삼아 생긋 웃었다. 그 모습에 어쩐지 억울해하던 그의 눈동자가 밝게 변하는 것을 그녀는 발견할 수 있었다. "하아… 그냥 그렇게 생각하는 게 좋을까?" "응응. 미르와 루페르스의 대전. 그리고 나의 대전. 에타하고 같이 구경 하고 있어." 훼이드리온은 이제야 수긍을 해버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뒷머리를 긁 적이면서 그가 고개를 돌려 진행 요원을 보았다. 대진표를 이리저리 정리 하면서 기다리고 있던 진행 요원은 로브 속으로 서류를 집어넣으며 시선 을 마주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럼 오늘은 대전을 쉬는 건가요?" "대전자가 없으니까요. 하루 쉰다고 생각하고 대회 구경하세요." 진행 요원은 예의 바르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더니, 대기실 밖으로 총 총히 사라졌다. 바쁘게 뛰어나가는 그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고 개를 돌린 훼이드리온은 조금 앉아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난 나가볼게. 참가자가 아니면 이 대기실에 있을 수 없으니까." "아, 응. 나중에 마중 나와." "응, 그럴 게." 따뜻하게 웃음을 띄우면서 훼이드리온이 문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아이 는 끝까지 지켜보았다. 훼이드리온은 복도로 나와 잠시 벽에 기대어 섰다. 아무리 받아들였다고 해도 역시나 대전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은 억울하고 안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이미 그렇게 정해져버렸다니 할 말이 없기에, 그래서 그는 이마를 짓누르는 안타까움을 애써 떨쳐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복도를 빠져나왔다. 게이머들만이 들어올 수 있는 방에서 문을 열고 나와 바깥으로 나가자, 곧 웅성대면서 관중석으로 들어가고 있는 관중들의 모습이 보였다. 훼이드리온은 에타가 가르쳐준 곳을 머리 속에 떠올리면서 관중의 행렬에 동행했다. 관중석으로 향하는 2층까지 올라가 두꺼운 방음문을 열고 들어가자, 곧 돔 내의 정경이 그의 눈으로 흡수되어 들어왔다. 40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크기. 그곳에 빽빽하게 들어 앉아있 는 엄청난 수의 관중들을 새삼스럽게 발견한 그는 벌어지는 입을 간신히 자제하면서 계단을 하나씩 내려가기 시작했다. '보자, 이 어디였는데.' 그렇게 생각하면서 고개를 두리번거리는 훼이드리온은 금방 에타를 찾 아낼 수 있었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화려한 주황색의 머리카락을 확실하게 눈에 띄었다. 에타의 옆으로 다가가면서 훼이드리온이 소녀를 불렀다. "에타." 소녀가 무언가를 우물거리면서 휙 고개를 돌렸다. 곧 소녀의 에타로코크 색 눈동자가 동그랗게 확장되었다. "어라라라? 훼온? 게임 안해?" 아직 게이머들이 입장하지 않은 중이라 경기장 안은 4개의 테이블만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그것들을 재미없는 눈으로 쳐다보고 있던 에타는 갑작스런 훼이드리온의 등장에 놀라는 눈치였다. 그는 빙그레 웃으면서 에타의 옆에 앉았다. "부전승으로 4강 진출이 결정되어버렸대. 그래서 오늘 난 쉬면서 구경하 는 거야." "와아, 그래?" 기분이 좋은 건지 에타가 귀엽게 웃으면서 난리를 피워댔다. 영락없는 어린 꼬마의 모습에 훼이드리온은 서글펐던 기분을 지우면서 웃었고, 때 마침 그때를 기하여 8강을 치를 게이머들이 경기장 안으로 들어왔다. "시작이다, 시작이다!" 경기를 치르는 게이머도 아니면서 게이머보다 더 흥분하는 듯 에타가 방방 뛰어대는 것을 말린 훼이드리온이 난처하게 웃으면서 경기장 쪽으 로 시선을 돌렸다. 찬찬히 경기장 안을 훑는 그는 대전을 하면서는 느끼 지 못했던 느낌을 받았다. 고요하게 흐르는 긴장은 게이머 6명들의 중앙을 통과하여 시끄러운 와 중에서도 기묘한 정적을 느끼게 만들었고, 신선한 그 느낌에 훼이드리온 은 살며시 지은 미소를 입가에 머금고 턱을 괴었다. '이런 것도 꽤 좋구나.' 게이머가 아닌 관중의 입장. 굉장히 오랜만인 거라 산뜻한 기분도 들었 다. "훼온, 미르와 아버님 중에 누가 이길 거 같아?" 에타가 어느새 사왔는지, 에라토코크 향이 진득하게 묻어나는 쿠키를 손 에 들고는 들뜬 얼굴로 물어왔다. 1번 테이블에 앉는 루페르스와 미르 쪽 으로 시선을 보내면서 훼이드리온은 잠시 생각하는 얼굴이 되었다가 곧 대답했다. "잘 모르겠어. 그동안 내가 싸워왔던 식으로 루페르스와 상대한다면 미 르가 충분히 이기겠지만, 미르의 말에 따르자면 굉장히 불안해. 어제 들 었잖아. 미르도 그렇게 자신은 없는 것 같은 모습." 그로서는 미르가 이기기를 바라고 있었다. 루페르스와는 다시는 카드를 나누기 싫었고, 미르와는 다시 한번 대전을 해보고 싶었다. 그것도 이런 공식적인 자리라면 더더욱. "미르, 이겨야해! 아버님, 죄송해요!" 루페르스가 난처하게 웃어대는 것을 보니, 에타의 응원이 거기까지 미친 모양이었다. 훼이드리온은 자신이 할 말을 대신해주는 소녀를 힐끔 쳐다 보았다가 자세를 바로 했다. 등받이에 등을 기댄 그는 차분하게 게임을 관전하기 시작했다. "1414년 마스터 카드 대회 본선 8강을 시작하겠습니다!" 마기의 외침과 함께 드디어 한 테이블이 빈 상태에서 8강이 시작되었다. "잘 지냈지?" 미르는 대답하지 않고 카드를 움직였다. 조용히 펼쳐든 소년의 손에서 떨어진 카드들은 마력을 흔들어 드레이프 안을 흔들었다. 차가운 아들의 태도에 루페르스는 어개를 으쓱하고는 드레이프를 올려 다보았다. "바람의 용사와 서대마법사, 풍정령사와 하이 프리스트. 비술 질풍천인 가?" 아주 평온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그는 이내 드레이프를 터뜨릴 기세로 불어닥치는 폭풍의 기세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질풍천으로 인해 이미 하 늘 저편으로 날아가 버린 매드매지션은 전혀 걱정되지도 않는 건지, 자신 의 아들이 펼쳐놓은 비술을 한참 구경한 그는 태평하게 웃으면서 여유 있게 카드를 꺼내들었다. "땅의 용사와 동대마법사, 지정령사와 하이 프리스트. 비술 질풍천의 형 제 중 하나인 비술 대지천 발동." 바람의 속성과 반대되는 땅의 속성. 게다가 비슷한 위력을 가지고 있는 비술 대지천이 루페르스에 의해 발동되었다. 땅이 들썩이기 시작한다. 용사와 마법사, 정령사와 프리스트가 서있는 부분의 땅이 쩍쩍 소리를 내며 갈라진다. 거대한 아귀를 벌리는 지면. 서 둘러 자리를 피해보는 그들이었지만 어느새 균열은 사방으로 퍼진다. 발 디딜 틈도 없이 흔들리는 지면. 이윽고 균열은 벌어져 대지진이 일어난 다. 풍정령사의 도움으로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그들. 하지만 질풍천의 위 력으로 여의치 않다. '또 강해졌다.' 미르는 자신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긴장을 감지하며 침을 삼켰다. 이대로 가다가는 대지천의 위력에 눌려 질풍천이 깨지고 말 것이다. 단순히 방어 를 목적으로 하는 비술임에도 불구하고 질풍천의 공격력을 뒤덮을 만큼 의 방어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원래 대지천은 이 정도의 위력이 아니었 다. 속성끼리의 강약 중에서 땅은 바람보다 약한 게 당연한데도 말이다. 어찌됐든 질풍천의 위력이 급속도로 떨어지고 대지천은 아직도 무한한 운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미르는 서둘러 카드를 뒤적였다. 여유를 머금은 표정으로 의자에 몸을 맡긴 채 앉아있는 아버지의 공세를 막기 위해서는 뭔가 다른 것이 필요하다. "훼온 군은 잘 지내고 있어?" 문득 들려오는 말소리에 미르는 잠시 손을 멈췄다. 게임과는 전혀 무관 한 이야기. 하지만 뭔가 응수해야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시선을 돌렸다. "물론." 루페르스는 능글맞은 웃음을 띄웠다. "여기서 내가 이기면 훼온 군과 싸우게 된다는 거 알고 있지?" 미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직 고민이야 사실은. 최고 원로들이 전제를 깔아줬고 이제 내가 나서 서 그 녀석에게 시험을 내려야할 텐데 말이지. 게다가 마스터 카드도 빼 앗아야하고. 아하하, 이거 할 일이 많겠는걸?" 미르가 어떤 공격을 할 지는 관심 없다는 듯이 아예 든 카드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기지개를 펴는 루페르스. 미르는 고수답게 차분한 움직임 으로 계속 든 카드를 골랐다. 루페르스가 빙그레 웃음기 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성수축제를 찾는 거야?" 잠시 주춤했던 미르의 손길은 곧 다시 움직였다. 루페르스는 머리 뒤로 팔짱을 껴 넘기고는 너무나도 태평한 음성으로 주절거렸다. "아아… 그래, 친구로서 이 아버지를 막아야하겠지. 성수축제로 결국 카 드 마스터의 자리까지 획득한 너니까 자신 있을 거야. 너의 최대 공격이 면서 비술은 성수축제." 그러나 그 다음 말은 드레이프 자체를 얼어붙게 할 정도로 싸늘했다. "하지만 과연 가능할까?" 미르는 가만히 눈길을 들어 아버지의 탁한 눈동자를 마주했다. 내려다보 는 시선으로 아들을 보는 루페르스의 시선에는 알 수 없는 어떤 감정이 꿈틀대고 있는 것 같았다. 다시 고개를 내린 미르의 귀로 루페르스의 평 범하기 그지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성수축제. 네 마리의 성수에게서 흘러나오는 성스러운 기운으로 방어하 고 공격하는 비술. 내가 알기로는 이 대륙에서 그 비술을 사용하는 사람 은 오직 미르 너밖에 없다지?" 루페르스의 표정은 맛있는 음식을 앞에 놔둔 미식가의 그것과 비슷해 보였다. "좋아. 기회를 주지. 날 막을 수 있는 기회를."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미르는 문득 느껴지는 이상한 위화감에 든 카드의 뒤쪽을 다시 훑었다. 그리고 놀란 눈으로 아버지를 향해 고개를 들고 말 았다. 네 장의 성수 카드. 불사조 피닉스와 승천룡 이무기, 그리고 일각수 유 니콘과 칠색어 파람어. 그 카드들이 든 카드에 어느샌가 섞여있었던 것이 다. 루페르스는 셀쭉, 입가의 근육을 움직였다. "자, 성수축제다. 최선을 다해 날 막아봐. 그렇지 않으면 이 아버지는 너 의 친구와 대전을 해 비참하게 마스터 카드를 빼앗아버릴 것이다." "목적이 뭐지." 무심코 터져나오는 말에 미르 자신도 놀랐다. 그러나 루페르스는 전혀 동요하지 않는 얼굴로 되물었다. "목적?" "아버지. 이런 일을 벌이는 목적이 뭐냐고 물었다." "무슨 일? 아아, 훼온 군의 마스터 카드를 빼앗는 거 말이야? 그거야 내 가 카드 마스터가 되려는 거지. 내 아들이니 이미 알고 있을 텐데?" 미르는 고개를 젓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참아내었다. "아니, 그것만이 아니라. 마법왕국 라시엔트의 왕성 수석 마법사 필로윈 셀 디바이어. 그 자도 마법사 길드 최고 원로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난 그 사람의 의뢰를 받아 태자를 미행하여 보고하는 임무를 수행 중이었다. 그 러다가 우연찮게 아버지를 만난 거다. 그러니 내가 무얼 알고 있다는 건 가." "이미 알고 있어, 그건." "?" "미르, 네가 필의 의뢰를 받아서 훼온, 아니 훼이드리온을 미행하고 언 젠가는 마스터 카드를 빼앗아서 왕성으로 가지고 가야한다는 걸. 잊었어? 난 마법사 길드 마스터야. 현재 왕성을 엎고 있는 반란의 두 세력 중 하 나를 이끌고 있는 사람이라고." 미르는 문득 수천 관중들 중에서 하나의 시선을 느꼈다. 푸른 눈의 시 선. 그러나 고개를 움직이지 않고 계속 루페르스를 응시했다. 루페르스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지금에서야 하는 이야기지만. 난 이지 몇 십 년 전에 오늘을 알고 있었 어. 그리고 그것을 따라 희망을 걸고 필을 도와주고 있는 거다. 그런 고 로, 미르 너의 사정도 이미 알고 있는 거지." "대답이 빗나갔다. 난 아버지가 원하는 목적이 뭐냐고 물었다. 태자의 마스터 카드를 빼앗아 카드 마스터가 되려는, 진정 그 이유밖에는 없는 건가." 루페르스가 정색하며 반문했다. "넌 뭐라고 생각하지?" "그것만이 아니라고 여긴다. 어쩌면 필로윈이라는 그 자가 생각하는 것 과 똑같을 수도 있겠지. 나도 무엇인지는 잘 모르지만." "모르면 됐어. 지금 네가 할 일은 아버지를 친구와 만나지 못하게 막는 거야. 지금은 그것만 생각해. 너의 모든 운과 힘을 다 쏟아부어도 역부족 일 테니." 자신감. 마법사 길드 마스터로서의 자신감이었고, 마스터 카드 실력에 대한 자신감이었다. 미르는 섬짓 떨려오는 팔을 한 손으로 지그시 잡으며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역시 보통 사람이 아니다. "어쨌든 곧 결론이 날 거야. 이 대회를 기점으로 곧 모든 결과가 드러날 거야. 그때까지 넌 너의 일을 해, 미르. 잊지 마. 너는 암살자 길드 마스 터 후계자 1순위로서, 지금은 태자의 여행을 감시하는 역할, 그리고 언젠 가는 마스터 카드를 훔쳐서 필로윈에게 바쳐야하는 역할이라는 것을." 미르는 침묵하면서, 루페르스가 마법으로 변환시킨 성수 카드들을 내려 다보았다. 루페르스는 다시 든 카드를 집어 올리며 빙글 웃었다. "자. 다시 덤벼봐. 비술 성수축제를 펼쳐보는 거야. 뒷 이야기는 나중에 모든 밝혀질 테니." 천천히 든 카드 위를 흐르던 미르의 손길이 네 장의 카드를 뽑아들었다. 루페르스는 기대하는 눈길로 드레이프를 올려다보았고, 미르는 더없이 고 요한 음색으로 간단히 입을 열었다. "원한다면." 하얀 몸체, 그리고 성스러운 기운을 담고 있는 단단한 뿔. 소용돌이 모 양으로 뒤틀려있는 그 뿔에서 오오라를 내뿜으며 일각수 유니콘이 달려 온다. 화산의 뜨거운 용암 속에서 숨을 쉬고 있던 붉은 새. 타오르는 붉은 날 개에서 뜨거운 열기를 가진 불덩이가 날개 짓마다 튀어 오르며, 불사조 피닉스의 창공을 날아온다. 대지가 거세게 진동한다. 두두둑 거리는 소리와 함께 지면에 균열이 일 고, 이윽고 거대하고 하얀 뱀의 형상이 지상으로 튀어나온다. 승천을 준 비하는 용, 승천룡 이무기가 땅을 뚫고 달려온다. 푸른 바다의 밑바닥. 심해 속에서 잠들어있던 거대한 생명체의 몸에서 일곱 빛깔의 빛이 터져 오른다. 온몸에 일곱가지 무지개 색의 비늘을 가 진 물고기, 태풍을 잠재우는 칠색어 파람어가 물결을 헤치고 나타난다. 네 마리의 성수가 한자리에 모여 각각의 성스러운 기운을 하나로 합친 다. 아름답게 뿜어져 나오는 거대한 빛줄기. 비술 성수축제가 다시 한번 드레이프 안에서 그 빛을 나타냈다. "오랜만에 보는걸?" 관중석에서 미르와 루페르스의 게임을 구경하고 있던 훼이드리온은 오 랜만에 펼쳐지는 미르의 최강 공격, 비술 성수축제를 넋을 놓고 구경했 다. 부자간의 오랜 대화를 나누는 것 같이 보이더니 다시 게임의 자세로 돌아서는 미르와 루페르스의 모습. 훼이드리온은 과연 루페르스가 성수축 제를 소멸시킬 수 있을지 궁금했다. '난 결국 깨지 못했는데.' 공격 의지를 잃게 만드는 성수들의 빛. 그 증거로 천지를 뒤엎을 것 같 던 대지천도 어느새 잠잠해져버린 것이다. 빛을 없애거나 눈을 잃지 않고 는 성수들을 죽일 수 없다. 게다가 두 개의 목숨을 지닌 성수들이기에 더 욱 힘들다. 과연 루페르스는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자못 궁금해지지 않을 수가 없 었다. "됐다." 완성된 성수축제를 올려다보고 있는 루페르스에게 미르는 넌지시 말했 다. 이어서 떠오르는 루페르스의 미소. 그가 입을 열었다. "전보다 더 완벽하구나. 위력이 확실히 늘었는걸? 역시 내 아들이야." 흐뭇한 듯, 즐거운 듯 웃으면서 루페르스는 빙글대더니 이내 카드 하나 를 뽑아들었다. 그 어느 것도 필요 없다는 듯, 그는 단 한 장의 카드를 뽑아들었다. "하지만 아들아. 아직 부족하구나. 이 아버지를 막기 위해서는 넌 결국 마스터의 능력을 깨달아야만 해. 그리고 아직 깨닫지 못한 지금은 역부족 이지. 친구를 돕고 싶은 마음은 알겠지만, 아버지도 그만큼 절실하단다. 이 게임에 지고 나면 곧 연락이 닿을 거야. 아들로서 아버지를 도와야 옳 은 거겠지?" 루페르스는 웃으면서 손에 들고 있던 카드를 테이블 위로 내려놓았다. 별로 시끄럽지 않은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미르는 안타깝게 속으로 중얼 거려야만 했다. '미안하다, 훼온.' 미르가 말한 바 있는 전사 카드. 그 중에서도 공격력으로 치자면 가장 약한 물의 전사 카드가 루페르스의 손가락 끝에 있었다. "느껴보거라. 이 아버지의 강함을." 자부심이 그득히 들어차 있는 목소리. 물의 전사가 드레이프 안으로 뛰 어들었다. 미르는 루페르스에게 졌다. 최강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비술 성수축제 가 전사 카드 중에서 가장 약한 물의 전사에게 당하고 만 것이다. "그럴 수도 있는 거야? 겨우 물의 전사잖아! 물의 전사가 어떻게 성수축 제를 이길 수 있는 거냐구!" 당사자보다 더 화가 난 듯한 에타의 반응. 훼이드리온과 아이는 미르의 대답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의 눈으로 직접 봤지만 도저히 받아 들일 수 없는 장면. 물의 전사가 성수축제 중앙으로 뛰어들어 성수들을 차례로 죽여버리고, 그것도 모자라 부활하기 전에 목을 따버리는 그 장면 을 대체 어떻게 이해해야하는지 난감했다. 침묵을 지키고 있던 미르가 모두의 시선을 느꼈는지 잔을 내려놓고 입 을 열었다. "카드 마스터의 능력이란 게 있다. 물론 예전, 진정한 의미의 카드 마스 터는 아닐지 몰라도, 현 세기의 카드 마스터의 능력이란 게 존재한다. 그 것도 현재는 마법사 길드 최고 원로들만이 가능한 능력이." "그게 뭐야?" 에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다. 미르는 여전히 조용하게, 패자이면 서도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듯한 자세로 말했다. "카드 자체의 능력을 바꿔버리는 것. 물론 고유의 능력을 벗어날 수 없 고, 그 강약을 조절할 수 있게 된다. 훼온, 알고 있겠지. 게이트 마을에서 의 대전과 산맥에서의 대전. 그 두 대전에서의 루페르스의 실력차를." 훼이드리온은 깊게 숨을 들이킨 후, "헛." 하고 입을 다물었다. 분명히, 분명히 그랬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대단하단 말이야?" "아버지는 마법사 길드 마스터다. 만약 훼온 너처럼 마스터 카드를 실체 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프리스트 카드로 나라 하나를 엎는 것도 어 렵지 않을 지도 모른다." 아이와 에타는 할 말을 잃은 듯 말이 없었고, 그건 훼이드리온도 마찬가 지였다. 더 이상 무엇을 더 말하겠는가. 미르는 물잔을 들어 갈증이 나는 듯 연거푸 물을 들이켰다. 졌다는 사실 이, 그래도 분한 것인지 그렇게 물을 마시던 미르는 문득 루페르스가 마 지막으로 던진 말이 생각났다. '이 게임에서 지고 나면 곧 연락이 닿을 거야.' 대전에서 지고 소년은 8강에서 떨어졌다. 그럼 이제 그 '연락'이라는 것 이 올 차례였다. 미르는 눈치채지 못하게 훼이드리온을 바라보았다. 대체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알게 모르게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의 중심에는 저 소년이 서있었다. 미처 본인은 깨닫지 못했다고 쳐도, 그 중심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다시 물을 마시는 미르. 잔의 모든 물을 비우자 갈증이 한결 덜어진 듯 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원론적인 갈증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의문의 의문이 연달아 일어나 꼬리를 무는 상황. 급박한 무엇인가가 흐 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일이 터질 듯이. 막상 당사자는 내일 있을 루페르스와의 대전을 걱정하는 것 외에는 아 무 것도 생각하지 못했지만, 미르는 타고난 감, 그리고 암살자로서 단련 된 감으로 상황을 감지해내고 있었다. '있다.' --------------------------------------------------------------------- 완결을 향해 달려가는 카마. 완결편을 향해 달려가는 자까 팀군. 자자. 분투하여서 완결을 하는 겁니다. 우하하하핫! 라지만, 아아아아아, 이 난해한 스토리란. 어떻게 진행해야하지. 털썩. 어둠의 기사 DARK KNIGHT TEAM... 덧하나. 추천 감상 비평. 받습니다아- 덧두. GO CAMA 덧석. <-- 이게 재밌다고 하시더군요. 냐하하- 번 호 : 20 / 20 등록일 : 2001년 02월 19일 04:01 등록자 : 암음기사 조 회 : 56 건 제 목 : [카드 게임 판타지]『카드 마스터(Card Master)』#096 카드 게임 판타지(Card Game Fantasy) 카드 마스터(Card Master) 96. 어느 상황에서나 그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다. 간단 한 예를 들어보자면, 거친 산길을 하얀 드레스를 입고 걸어가는 공주라고 나 할까. "얼마나 더 가야하는 건가요?" 메이린느는 하얀 드레스가 검은 드레스로 변색되어 가는 과정을 안타깝 게 바라보면서도 다른 방도를 찾지 못하는 자신을 책하며 선두의 뮤트리 드에게 물었다. 깔끔하게 외모만큼이나 깔끔하게 이들을 이끌고 있는 그는 살짝 뒤를 돌아보면서 대답했다. "이제 약 이틀거리 정도 남았습니다, 공주님." "그렇게나 많이요?" 메이린느는 게이트 마을에서 우연하게 만나게 된 저 기사가 자신들을 골려먹는 건 아닐까, 라는 영양가 없고 고약하기 그지없는 생각까지 떠올 리면서 고개를 저어댔다. 그 모습을 보면서 그녀의 기사는 어떻게 해야지 자신의 레이디를 도울 수 있을지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 메이린느, 슈란가트, 하이마크. 세 명은 카를레오의 도움을 받아 루비네 마을에서 게이트 산맥 바로 아래의 게이트 마을까지 한번에 공간 이동을 한 후, 무작정 산길을 올라가려 했다. 그런데 등뒤에서 그들을 불러 세우 는 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아트릴 영지의 경비대장 뮤트리드였다. 뮤트리드는 주군의 명을 받아 정보 길드에 의뢰도 하고 사안의 능력까 지 풀로 가동시켜 왕성을 조사했고, 그 결과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 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얼마 전 태자가 후계자 수련을 위해 왕 성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결과는 아크릴 영주에게 보고하자, 아크릴 영주는 루페르스가 방문하 여 남겼던 이야기를 토대로 상황을 추리해냈고, 그 결과 뮤트리드를 태자 의 곁으로 보내기로 결정을 본 것이다. 뭔지는 몰라도 태자의 신변에 큰 위험이 닥칠 것을 예견하는 주군의 명 에 충실히 따라 그 날 당장 말을 타고 마법사들의 도시 에코로 향한 그 는 강을 건너고 평원을 달려 게이트 마을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공주의 일행과 마주친 것이다. 그들은 서로 소개를 하던 도중에 목적이 일치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반란을 하루 빨리 진압하기 위해서는 서둘러 태자를 왕성으로 데리고 가 야한다는 것에 의견을 일치한다. 그리고 약간의 준비를 거쳐 게이트 산맥 을 올랐는데, 그때가 이미 5일 전이었다. "내일 저녁쯤이면 도착할 것입니다. 조금만 더 힘을 내주십시오." 뮤트리드는 냉정하게 들릴 지도 모르는 말을 내뱉고는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험악하게 생긴 지형. 빽빽이 들어찬 나무들로 인해 원래 있던 산 길마저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지경이라 그조차도 앞으로 가기가 힘들었 다. 그런데 이런 길을 다녀보는 것은 처음일 공주가 어떻게 힘들지 않을 수가 있을까. 그 점을 잘 알고는 있지만 더 이상 속도를 늦출 수는 없는 노릇이라, 그는 미안하게도 공주를 무리하게 하고 있었다. 슈란가트가 결국 걱정스러운 듯 공주의 어깨를 감싸며 한마디했다. "많이 힘드십니까?" "아니라고 말못해서 미안해요, 슈란. 무지 힘들어요. 태어나서 이런 생고 생은 정말 처음이라고요." 칭얼대듯이 말하는 그녀는 산길을 걷기 편하도록 둘둘 말아 묶어 올린 드레스가 안쓰러울 정도로 피곤에 지쳐있었다. 산길을 걸어오느라 지저분 해진 드레스와 제대로 씻지 못해서 지저분한 얼굴, 피부. 하지만 여전히 아름답기만 한 그 자태를 감상할 시간도 없이 슈란가트는 그녀의 앞에 가서 멈춰 섰다. 그리고 그녀에게 등을 내보이며 앞으로 수그려 앉았다. "업고 가겠습니다." 뮤트리드가 정지하고, 그들은 모두 쉬어가듯 발길을 멈췄다. 메이린느가 당황하면서 손을 흔들었다. "아, 아니에요, 슈란. 나, 걸어갈 수 있어요. 이것 봐요. 아직 쌩쌩하다고 요." 과장되게 팔을 흔들며 말하는 공주. 하지만 그녀의 기사는 무뚝뚝하게, 하지만 따뜻하게 말했다. "업히세요. 제 맘이 편치 못합니다." 조용한 그의 말에 메이린느는 잠시 울상이 되어 그의 등을 내려다보았 다. 어떻게 해야할지 굉장히 난감하다는 표정을 짓던 그녀는 결국 포기하 고 가만히 그의 등에 몸을 맡겼다. "응큼한 짓 하면 당장 내려올 테니, 그렇게 알아요." "네, 잘 알겠습니다." 말은 그렇게 해도 역시 슈란가트의 등은 편했다. 메이린느는 몸을 일으 켜 적당한 흔들림을 동반해 앞으로 걸어가는 그의 등에 머리를 살짝 기 대고는 자신도 모를 만큼의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행복해…….' 분명히 별로 좋지 못한 상황이었지만 행복한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누구냐!" 그녀가 행복에 만취되어 알딸딸한 상태가 되었을 때, 갑자기 뮤트리드의 대찬 고함이 그녀의 귀를 때렸다. 무슨 일인지 보기 위해 후다닥 고개를 치켜드는 그녀의 눈동자에 거대한 덩치를 가진 무언가가 시야를 가리는 모습이 들어왔다. 그 거대한 덩치가 "으허허허."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정말 이 길로 오는군, 그래?" "루비누스. 앞이 안보이잖아요." 덩치 뒤에서 장신의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두운 산 속에서도 확연 하게 그 색을 확인할 수 있을 노골적인 원색, 노란색이 확 튀는 로브를 걸친 장신의 여인은 옆의 거대한 덩치를 루비누스라 부르면서 핀잔을 주 었다. 왠지 '아줌마'라는 칭호가 굉장히 어울릴 듯한 분위기를 지닌 그녀 가 어느새 검을 빼든 뮤트리드를 향해 친절한 웃음을 띄우며 말했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여기서부터 저희들이 안내할 테니, 따라들 오세요." "당신들이 누군데, 우리가 따라가야 하는 거지?" 아무로 없는 산길에 갑자기 나타나 "따라와요." 라고 하는데 그 누가 경 계를 하지 않을까. 뮤트리드는 하얗게 빛나는 롱 소드의 검날을 두 남녀 에게 향하면서 눈을 부릅떴다. "훗훗훗, 이거 참. 그러게, 내가 말했잖아, 호연 씨. 자기 소개부터 해야 한다고 말이야." "루비누스가 언제 그런 말했었던 가요?" "아무튼. 소개부터 하고 나서 설명을 하자고." 루비누스는 마스터와도 흡사하게 능글맞은 웃음을 지어대며 입을 열었 다. "마법사 길드 최고 원로 루비누스 클러릭이라 하오. 후실리이스에게는 흔히 '덩치'라고 불린다오. 그리고 이쪽은 마찬가지로 마법사 길드 최고 원로 중 한 명인 호연. 참고로 차 끓이는 솜씨가 일품이지." 쓸데없는 이야기까지 하는 그를 잠시 흘겨보듯 눈매를 축소시킨 호연이 다시 원 상태로 표정을 돌리면서 일행을 바라보았다. "당신들의 신분은 이미 알고 있어요. 기사 두 명에 검사 한 명. 게다가 얼마 전에 왕성에서 도망친 공주 한 명. 맞죠? 이름까지 밝힐 생각도 시 간도 없으니 넘어가도록 하지요. 간단하게 묻겠어요. 저희 마스터의 명으 로 당신들을 모시러 왔어요. 저희들을 따라 에코까지 가시겠어요? 오늘 내로 도착하게 해드리지요." "마스터? 마법사 길드 마스터 루페르스 폰 에르히스트님을 말하는 건 가?" "물론이에요." 뮤트리드는 뒤를 돌아보면서 일행 중 가장 중요한 자의 의견을 물었다. "어떡하시겠습니까, 공주님." 아직 슈란가트의 등에 업혀있던 메이린느는 힐끔 호연과 루비누스를 훑 어보더니 입을 열었다. "반란의 두 가지 세력, 그 중 하나가 마법사 길드라고 했어요. 왕성 안 에서는 금안 기사단이 판을 치고 있어서 대체 마법사 길드가 무슨 도움 을 주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경계하는 게 좋을 듯싶군요." "네, 그럼 거절하겠습…" "아니오, 가겠다고 하세요." 말허리를 자르고 들어오는 공주의 발언에 뮤트리드를 비롯하여 세 명의 사내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이 되었다. 그녀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어차피 우리가 가는 곳은 마법사 길드가 있는 곳, 마법사들의 도시 에 코에요. 지금 위험하나, 아니면 들어가서 위험하나 똑같죠. 그러니 하루 빨리 훼이를 만날 수 있는 방향으로 선택해야해요. 가겠다고 하세요. 하 지만 결코 경계를 늦추지는 말고요." 메이린느의 설명을 들은 후에야 드디어 그녀의 의도를 이해한 뮤트리드 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호연과 루비누스를 돌아보았다. 루비누스가 반가운 얼굴로 물었다. "합의 봤소?" "따라가지. 앞장서시오." 방금 전보다는 많이 누그러진 목소리로 대답하는 뮤트리드. 루비누스와 호연은 잠시 서로를 마주 보다가 이내 몸을 돌려 움직였다. "따라와요. 이쪽이에요." 호연의 말소리와 함께 일행은 고요한 산길을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같은 시각. 마법사들의 도시 에코의 남쪽, 마스터 카드 대회가 열리고 있던 돔에서는 막 4강이 시작되고 있었다. 훼이드리온은 앞자리에 앉은 루페르스를 뭔가 기분 나쁜 것이라도 대하 듯이 노려보았다. 아들을 처참하게 물리치고 4강에 올라온 루페르스는 그 런 그를 보면서 여전히 능글맞게 웃고 있을 뿐이었다. 잠시 한숨을 쉰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늘도 제 마스터 카드를 놀리는 겁니까?" "아하, 물론. 당연한 것을 그렇게 물어보고 그래." "정말 뻔뻔하군요." "천성이야." 한마디도 지지 않으며 대꾸하는 그의 태도에 훼이드리온은 거친 한숨을 노골적으로 내뱉으며 든 카드를 들었다. 대마도사가 창안한 최초의 마스 터 카드. 루페르스의 눈길이 그것을 따라 움직였다. "그렇게 당해놓고도 여전히 포기를 못하는 겁니까?" 선공을 할 카드를 정하듯 든 카드를 하나씩 살피면서 훼이드리온이 쏘 아붙였지만, 역시 루페르스는 요지부동이었다. "마법사란 족속들을 뭐로 보는 거야. 그리고 어차피 너도 쉽게 포기할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을 텐데? 예선할 때 이야기했잖아. 대전에서 만나자 고. 정정당당히 싸우는 거야, 이번엔. 너도나도 똑같은 조건이니까." "이번엔 당신의 술수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이기면 결승에 올라가는 것 이고, 지면 탈락하는 겁니다. 다른 내기는 일절 없습니다." 문득, 훼이드리온의 머리 속에 게임을 시작하기 전 아이와 했던 약속이 떠올랐다. 손가락 걸고 약속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소중한 한마디. "결 승에서 만나."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지금은 쓸데없는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훼이드리온은 선공을 할 카드를 뽑아내며 차갑게 내뱉었다. "당신과 놀 시간, 여유 같은 건 없습니다. 받으시죠. 불의 용사 카드와 백기사 카드의 합동공격." 드레이프 안에 붉은 갑옷을 걸친 용사와 하얀 갑옷을 걸친 기사가 동시 에 나타났다. 그들은 하늘을 찌를 듯이 검을 높이 들고 반대편을 향하여 돌진해 들어갔다. 루페르스는 드레이프 아래로 비치는 그 모습을 힐끔 올려다보더니 게임 과는 전혀 무관한 태도로 일관했다. "나도 너하고 놀 시간이 많아서 이러는 거 아냐. 나름대로 바쁘고 나름 대로 절실하기 때문에 너한테 이렇게 매달리는 거지." 훼이드리온은 공격을 준비하는 불의 용사와 백기사에게서 시선을 돌려 루페르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사뭇 심각한 표정을 지은 채 훼이드리온을 응시하고 있었다. "무슨 말이죠?" 훼이드리온이 물었고, 루페르스는 잠시 침묵하더니 대답했다. "나 나름대로 절박 하다는 거야. 너의 마스터 카드로서 카드 마스터가 되는 것. 네가 마스터 카드를 아낀다는 건 잘 알고 있지만, 그만큼 나도 필요하지. 절대 주지 않으리라는 것도 잘 알고 있어. 하지만 난 가져야 해." "루페르스, 당신은 이미 카드 마스터잖아요?" "아니. 진정한 의미의 카드 마스터 말이야." 훼이드리온은 의문을 띄운 얼굴을 만들었다. 뭔가, 뭔가 큰 이야기가 또 다시 들려올 것 같았다. 문득 게이트 산맥의 유적에서 만난 골드 드래곤이 생각나는 훼이드리온. 골드는 카드 마스터의 뜻을 스스로 찾아보라고 하였다. 그리고 루페르스 는 그 '카드 마스터'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 하고 있다. 그의 귀가 자연스럽게 기울여졌다. "무슨 말이죠?" "그래, 지금에 와서야 뭘 숨기겠어. 다 말하도록 하지." 루페르스는 게임은 어떻게 되든 신경도 쓰지 않고 자세를 고쳐 앉아 이 야기를 시작했다. "유적에서 골드 드래곤과 이야기를 나누었었어. 그 드래곤은 네가 키워 드를 제대로 알아낸다면 진정한 카드 마스터가 된다고 했어. 그래서 난 너의 마스터 카드를 가지려고 이렇게 애쓰는 거야." 잠시 쉰 후, 그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진정한 의미의 카드 마스터란, 사실 500년 전의 대마도사 페인트 라시 엔트 밖에는 없어. 지금은 그 뜻이 변질되어버려 많은 사람들이 카드 마 스터로 불리고 있지만, 사실 '카드 마스터'란 '카드의 의지를 깨달은 자'를 뜻해. 그러니까 이런 대회에서 우승했다고 해서 쉽게 얻을 수 있는 칭호 가 아니라는 말이지." "카드의 의지를 깨달은 자? 그럼…… 게이트 산맥에서 있었던 그 일과 관련되는 겁니까?" 루페르스는 지그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금성안, 황금빛의 마스터 카드, 그리고 골드 드래곤. 금성안은 진 실을 보는 눈이라고 하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금성안으로 진실, 즉 마스 터 카드가 가진 의지를 읽는 거야. 그래서 그 의지로서 마력을 움직여 마 법을 불러일으키는 거지. 그 날, 드래곤 피어 카드의 의지를 읽어서 마법 을 구현했잖아. 골드 드래곤을 소환하여 피어를 일으켜 나와 마기를 단숨 에 제압했던 일. 생각나지?" 훼이드리온은 멍한 상태에서 그때를 떠올렸다. 금성안이 떠오르는 동시 에 마스터 카드는 금빛으로 빛났고, 유적 안에서 보았던 골드 드래곤이 날아올라 포효했다. 그리고 드래곤 피어 카드의 능력대로 루페르스와 마 기는 그대로 굳어버렸었다. 그는 손을 들어 자신의 눈을 더듬었다. 금성안. 순수한 푸른 수면 위에 떠오르는 금색별. 그것은 자신의 눈동자 안에 실존하고 있었다. "그럼 카드 마스터라는 건… 카드의 의지를 읽어내어 그 능력 자체를 현실에서 구현해내는 존재라는 겁니까?" 대충 짐작했던 사실이었지만 이렇게 확인을 하고 나니 더더욱 충격적이 었다. "그래, 그런 거야. 그리고 골드 드래곤은 그 초유의 존재, 대마도사 이후 로 없었던 그 카드 마스터를 너로 지목했어. 금성안과 최초의 마스터 카 드. 단 한 가지를 빼고 필요한 조건을 모두 갖췄으니까." "단 한가지 빠진 게 무엇이죠?" 아주 잠깐, 그것도 단 한번이었지만 그는 카드 마스터가 되었었다. 금성 안으로서 카드의 의지를 읽어 마법을 구현해내었으니까. 하지만 아직 한 가지가 부족하다니, 그게 무엇인지 당연히 궁금해지는 것이다. "마스터 카드 중에서 아직 밝혀지지 않은 카드를 알고 있어?" "……?" 루페르스의 질문에 그의 머리 속에 숱한 생각들이 떠올랐다. '사신 카 드? 드래곤 카드? 10대 마스터 카드를 말하는 걸까?' 그러던 중, 그는 불 현듯 머리 속을 스쳐 지나가는 한가지 단어에 그만 힘을 잃어버리고 말 았다. "……대소환사 카드?" 간단히 고개를 움직이는 루페르스. "정령사 카드의 최종 레벨인 대소환사 카드. 말 그대로 환상의 카드인 그 카드를 깨닫는다면 카드 마스터가 될 수 있다고 말했었어." 훼이드리온은 침묵했다. 대소환사 카드. 대마도사 이후로 한번도 대륙에 모습을 드러낸 적 없는 환상의 카드. 실로 그 쓰임이 어떤 것인지 누구도 알지 못하는 카드였다. "하지만 그 카드는 아무도 모르지 않습니까? 어떻게 생겼는지, 어디에 쓰는 건지." "그래서 나도 의문이야. 골드 드래곤이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대체 대 소환사 카드를 어떻게 깨닫는다는 건지. 사실 그 도마뱀도 잘 모르는 눈 치였어." 골드 드래곤을 도마뱀이라고 칭한 것에 잠시 기분이 나빠졌지만, 훼이드 리온은 곧 기분을 돌려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환상의 카드라고 불리는 대소환사 카드. 지금에 와서야 카드 마스터라는 엄청난 존재가 자신이라 는 것에 적응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지는 않는다. 이미 그것에 대해서 는 아이의 말로서 가슴 깊이 받아들였으니까. 이제 문제는 그 카드 마스터라는 것이 가능하냐는 것이었다. 진정한 카 드 마스터가 되는 것. 마스터 카드에 대해서 알려고, 이제는 깨달으려고 하는 그에게 그 이상의 행운은 없으니까 말이다. "대소환사가 어떤 용도로 쓰이는 것인지는 대충 알아." "네? 정말입니까?" "그래. 너도 알고 있을 거야. 대소환사 카드처럼 환상의 카드로 불려도 손색이 없을 카드들이 있다는 걸." 이어서 터져 나오는 훼이드리온의 대답에는 거침이 없었다. "10대 마스터 카드… 말입니까?" 루페르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설명했다. "드래곤 카드와 사신 카드. 그것들을 통틀어서 10대 마스터 카드라고 부 르는 거 알지? 대소환사 카드와 마찬가지로 그 행적이 묘연하다는 카드 들. 난 이렇게 생각해. 대소환사 카드는 그 10대 마스터 카드들을 다루는 카드가 아닐까, 하고 말이야." "10대 마스터 카드를……?" "그래, 백소환사는 정령왕을 소환할 수 있고 흑소환사는 몬스터를 소환 할 수 있듯이, 대소환사는 10대 마스터 카드를 소환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거야. 어때, 일리 있지 않아?" 확실히 가능성 있는 발언이었다. 루페르스는 훼이드리온이 공감하는 얼 굴을 보이자 자신만만하게 웃으면서 등받이에 등을 갖다댔다. 몸을 수그 리고 있었더니 척추가 영 뻐근한 모양이었다. "아무튼 그런 거야. 넌 골드 드래곤에게 지목 당한, 말하자면 카드 마스 터 후보이지. 그리고 난 그 후보의 마스터 카드를 빼앗으려는 자고."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는군요. 하지만 카드를 빼앗아봤자 당신은 금성안 이 아니지 않습니까." 루페르스는 골드 드래곤에게도 했던 말을 다시 이 소년에게도 해야한다 는 의무감을 느꼈다. "카드 마스터였던 대마도사가 금성안이었던 거지, 금성안이었던 대마도 사가 카드 마스터였던 건 아니니까. 언제든지 제외할 수 있는 조건일 뿐 이야, 그런 건." "결국, 제 카드를 포기하지는 않는다는 겁니까?" "물론." 단호하게 고개를 흔들며 대답하는 그를 향해 훼이드리온은 피식 웃었다. 잘못 보면 비웃음이라고 생각할 지도 모르는 그런 웃음을. "해보십시오. 이젠 저도 제 카드에 더 욕심이 생겼으니까요. 카드 마스 터라는 것. 한번 제대로 돼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거 같거든요." "훗. 좋군. 하지만 조심해. 의외로 적은 가까이에 있는 거니까." "……네?" 루페르스는 되묻는 훼이드리온의 얼굴을 무시하고 불의 용사와 백기사 의 공격을 막기 위해 카드를 꺼내들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새 훼 이드리온은 도저히 알 수 없다는 듯 복잡한 표정이 되어버렸다. 다시 불을 붙여 가는 루페르스와 훼이드리온의 게임. 한동안 둘이서 뭔 가를 쑥덕대더니 다시 예전의 라이벌(?) 관계로 돌아서는 모습에 미르는 다시 자세를 갖춰서 게임을 관전하기 시작했다. 그의 옆에는 역시나 관중 의 임무에 충실하고 있는 에타가 에타로코크 쿠키를 입에 물고는 와삭거 리며 게임을 즐기고 있었다. "누가 이길 거 같아, 미르미르?" 미르는 두 게이머 각각의 승률보다는 대답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 해서 고민하다가 조금 시간을 끌어버렸다. "알 수 없다." 역시 대답은 정해져있었다. 루페르스의 능력이 아무리 예상을 초월한다 고는 해도, 역시 훼이드리온에게는 봐주면서 할 것이다. 그리고 훼이드리 온의 그 강운은 루페르스의 능력처럼 항상 예상을 초월한다. 기껏 추측을 해봤자 헛고생일 게 뻔했다. 기왕이면 친구인 훼이드리온이 이기는 게 좋았지만, 것도 루페르스의 말 때문에 잠시 혼란을 겪고 있는 미르에게는 여의치 앉았다. 비록 지금은 친구의 입장이었지만 곧 또 다시 돌아서야 할 테니까. '그런데 대체 어떻게 연락이 온단 말이지.' 루페르스가 남긴 말 때문에 어제는 잔뜩 긴장을 하고 있었지만 마법사 길드 최고 원로라든지, 말단 마법사조차도 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마법으 로 신호를 보내온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연락을 하겠다는 것일까. 미르는 팔짱을 낀 채로, 시선을 무표정하게 루페르스의 등을 향한 채로 상념에 빠졌다. 그리고 그 상념을 깨뜨린 건 다름 아닌 미르의 자칭 여자 친구, 에타였다. "미르미르, 슬슬 준비해야지?" 알 수 없는 그 말에 미르는 어떤 불길함을 느끼면서 에타를 돌아보았다. 고동색의 쿠키를 입에 문, 귀여운 얼굴의 소녀가 화려한 주황색 머리카락 을 만지며 생긋 웃고 있었다. "왜 그래? 원래 임무를 잊은 거야? 미르는 기회를 봐서 훼이드리온의 마스터 카드를 빼앗아 왕성에 가져가야 하잖아. 그게 바로 지금이야. 곧 게임이 끝나고 돔 밖으로 훼온, 아니 태자가 나갈 때. 대충 저녁쯤이 될 걸?" 귀엽게 웃으면서 아무렇지 않게 말을 꺼내는 에타. 미르는 떨리는 목소 리가 되었다. "네가… 네가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에타는 역시나 깜찍하게 미소지었다. "에헷, 뭐야, 아직도 눈치 못 챈 거야? 미르가 태자를 감시하는 역할이 라면 난 미르를 감시하는 역할이야. 미르가 태자의 친구가 된 후 임무를 망각하지 않나, 감시하는 역할. 마찬가지로 그 잘난 마법사 아저씨가 의 뢰했어. 그리고 부탁한 게 적당한 시간이 되면 미르에게 임무를 자각하게 만들래. 그 적당한 시간이 바로 지금인 거고." "에타로코크……." "와아, 오랜만에 본명을 불러주네? 흠흠, 고맙지만 나중에 보답할게. 일 단은 아직 일하는 중이거든. 미르도 빨리 정신을 차려서 임무를 자각해주 길 바래. 안 그럼 아빠한테 내가 혼난단 말야." 철없는 딸이 아버지를 무서워하는 듯한 음색으로 말한 에타는 생글거리 면서 게임을 또 관전하기 시작했다. 미르는 큰 충격을 받고 머리 속이 공허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러니까, 훼이드리온 뿐만이 아니라 자신도 그 마법사에게 감시를 당하 고 있었던 것이다. 도저히 예상하지 못했던 인물에게, 에타에게 말이다. 소년은 소녀를 바라보았다. 아직도 순수함을 가지고 있는 듯했지만 역시 소녀는 교활한 암살자 길드 마스터의 딸이었다. 할 짓은 다 하면서, 그러 면서 즐기고 있는 것이다. 미르는 에타가 왜 중간에 나타나서 여기까지 고집을 부려 따라왔는지 알 것 같았다. 생각해보면 에타는 자신이 훼이드리온의 동행으로 합류한 바로 다음 날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평소의 모습처럼 연기하면서 지금까 지 완벽하게 임무를 완수해내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미르가 느끼는 것은 일종의 패배감이었다. 항상 어릴 거라고 생각 했던 소녀에게 완전히 당한 듯한 느낌. 그건 크나큰 충격으로 그를 엄습 했다. 허한 느낌에 취해 있는 듯 말을 잃은 미르의 귀로 에타의 발랄한 목소 리가 다시 들려왔다. "준비하고 있어, 미르. 같이 왕성으로 돌아가야지?" 소녀는 항상 그랬듯이 귀엽게 웃고 있었다. --------------------------------------------------------------------- 자아. 끝을 향해 치달아 가는 카드 마스터. 결국 에타의 본 목적까지 드 러 나면서 그 열기는 더욱 뜨겁습니다!(과연?) 앞으로 4편이 남은 거군요. 과연 그 4편으로 끝날지도 의문이지만. 아무튼 그래도. 열심히 하겠습! 마지막까지! 어둠의 기사 DARK KNIGHT TEAM... 덧하나. 추천 감상 비평. 완결이 돼도 받아요. :) 덧두. GO CAMA 덧석. 헥헥. 밤을 새는 건 힘듭니다. 털썩. 번 호 : 21 / 22 등록일 : 2001년 02월 19일 22:14 등록자 : 암음기사 조 회 : 105 건 제 목 : [카드 게임 판타지]『카드 마스터(Card Master)』#097 카드 게임 판타지(Card Game Fantasy) 카드 마스터(Card Master) 97. 엘프의 두 가지 모습. 새의 하얀 날개를 가진 작은 요정의 모습과 인간 의 모습. 지금 레이는 마스터 카드를 사용하기 위해서 요정의 모습을 하 고 있었다. "냐앙, 언제쯤에나 공격할 거야? 그 수정거울이란 카드 없어? 나 그거 잔뜩 기대하고 왔단 말야!" 아이는 자신의 손보다 약간 더 큰 몸집의 엘프를 내려다보는 것조차 지 겨운 모습으로 인상을 썼다. 대전을 시작하기 전에는 난생 처음 엘프를 본다는 생각에 솔직히 말해서 마음이 두근거려 흥분이 되었는데, 이젠 흥 분은커녕 차분히 가라앉는 기분 때문에 마스터 카드조차도 잡히지 않았 다. 등에서부터 돋아나 있는 하얀 날개는 신의 자식이라고도 불리는 존재인 엘프의 날개답게 형용할 수 없는 빛을 내고 있었다. 엘프 고유의 미모는 아이와도 우열을 가릴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그리고 작은 몸에 어울 리지 않게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몇 십 배는 큰 인간의 소녀를 대하는 모습은 오히려 소녀 쪽이 기가 죽을 정도였다. 그것 때문일까. 아이는 지금 기가 죽어있는 상태였다. "빨리빨리 하라니까아아. 얼마나 더 기다려야하는 거야아. 수정거울 카 드 없어어어? 정말 없는 거야아아아?" 늘이고 늘인 어미로 지루함을 그득히 나타내면서 레이가 투덜댔다. 자신 의 키 만한 마스터 카드 열 몇 장을 마법으로 허공에 띄워놓은 채 테이 블 위를 왔다갔다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영락없이 동네 꼬마의 모습이 었다. 아이는 필리스 레이 루 리베카라고 자신을 소개한 이 엘프에게 호되게 당하는 중이었다. 본 모습, 요정의 모습으로 변환한 후, 다른 원로들처럼 본 실력을 발휘하게 된 레이는 그 덜렁거리는 성격에 맞지 않게 세찬 공 세로 그녀를 밀어붙였고, 아이는 공격 하나하나에 겨우겨우 응수하면서 지금까지 게임을 이끌어왔다. 사실 4강까지 올라오면서 쉽게 대전을 해본 적은 없지만, 오늘따라 더 어렵게 느껴지는 건 아마도 인간이 아닌 엘프 라는 종족을 만난 탓이리라. 마력을 다루는 것에 있어서는 인간보다 뒤쳐진다고 전해지는 엘프에게 도 가끔 돌연변이 같이 마법에 재능을 가진 자가 나온다. 그리고 이번 세 기에는 그것이 이 레이라는 대책 안서는 엘프 여인이었던 것이다. 실로 300을 넘어간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훼이드리온 일행 중의 에타라는 소녀 와 대적할 만한 정신연령을 가지고 있는 레이는 마법사 길드 최고 원로 중에서도 손꼽히는 '별난' 마법사였다. "빨리 좀 해애애애애." 그런 레이는 아이의 장시간 공격을 미루고 있자 심통이 나있었다. 여전 히 어린애 같이 투덜대고 테이블 위를 우왕좌왕하던 그녀는 드디어 참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탁 멈춰 서더니, 그 작은 손가락을 펴 한참 위에 있 는 아이의 눈을 향해 대차게 들었다. "좋아! 내가 수정거울 카드를 찾아주겠어! 그걸 뽑아서 쓰는 거야, 알겠 어?" "저, 저기 그래도 되는 거예요?" 엘프는 날개를 활짝 펼치면서 두 손을 허리에 올렸다. "꺄하하하하하! 필리스 레이 루 리베카님 앞에 안 되는 게 어디 있겠어? 콱 믿고 있으라구!" 질문의 의도가 살짝 빗나가버린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레이는 거창하게 웃어대더니 곧 아이의 마스터 카드들을 노려보았다. 아이가 찔끔한 표정 을 짓는 동안 레이는 한참 그 카드를 노려보다가, 돌연 소리를 질렀다. "아앗! 뭐야뭐야!" '낭패다.' 라고 생각하며 아이가 인상을 잠시 써버렸고, 레이의 고함은 계속 이어졌다. "너, 너! 왜 수정거울 카드가 없는 거야! 어디다 빼먹고 온 거야, 대체!" '실망이야!'라는 표정으로 거침없이 소리를 질러대다가 결국 화를 참지 못하고 방방 발을 굴리는 레이를 차마 바라보지 못해 고개를 돌린 아이 의 눈길은 뒤편의 훼이드리온에게 가있었다. 방방 뛰면서 씩씩대던 레이가 문득 아이의 시선을 눈치채고는 눈을 돌 렸다. 그 눈길 끝에 자리해있는 훼이드리온과 루페르스. 그녀는 입을 다 물고 자연스럽게 테이블 위, 드레이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또 다시 비명. "저, 저거! 수정거울이잖아!" 드레이프 안에서 은빛으로 빛나고 있는 것은, 레이가 그토록 기대하면서 대전에 임했던 바로 그 수정거울 카드였다. 레이는 단숨에 고개를 돌려 아이를 보았다가, 그것으로도 모자랐는지 세차게 날개를 퍼덕여 아이의 얼굴 앞으로 쌩하니 날아갔다. 코앞에 10엘리치(10cm)도 안될 만큼의 거리에 도착하자마자 다시 삿대 질을 시작하는 레이. "이게 무슨 짓이야! 난 수정거울 카드를 기대하고 왔단 말이야! 그런데 왜! 네 카드인 저게 저쪽에 가있는 거야! 앙! 말해봐! 변명을 해보라구 우!" 아이는 변명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 엘프가 도저히 변명을 할 시간을 주지 않는 것이다. 입을 뻐끔거리던 그녀는 한참을 기다려 레이가 겨우 진정을 찾는 것 같은 낌새를 보이자 질린 듯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기… 미안해요. 하지만 저도 훼온이 걱정돼서 그런 거라구요……. 훼 온이 루페르스에게 지면 안되니까." "그럼 우린! 난! 우리의 대전을 어떻게 되는 거야! 제대로 실력 발휘를 못한 대전은! 재미가 없단 말야! 그런 것도 모르는 거야!"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는 레이에게 아이는 진심으로 미안했다. 하지만 이미 저질러버린 것. 아마 훼이드리온도 많이 놀랐을 것이다. 그와 의논 도 하지 않고 몰래 카드 속에 밀어 넣어놨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훼이드리온을 이기게 해주고 싶었 다. 분명히 훼이드리온 정도의 실력이라면, 거기다 수정거울 카드까지 있 다면 분명히 이길 수 있으리라고 그녀는 생각한 것이다. '미안해, 훼온. 나… 결승에 올라갈 수 없을 거야……. 훼온이 루페르스 에게 지는 것보다는 낫잖아? 그러니까, 그러니까 꼭 이겨서 결승에 올라 가. 그리고 마스터가 되는 거야. 난 그거면 돼…….' 어쩌면, 이것이 그에게 할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녀는 마음이 쓰렸다. 그녀는 잠시 레이에게서 시선을 돌려 앞쪽의 관중 석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언젠가 그녀를 찾아왔었던 남자, 사르덴이 빙 글거리는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그는 마스터 카드 대회가 끝나는 대로 그녀를 집으로 데려가기 위해 오늘 이 에코에 도착해 조금 전에 그녀에 게 인사를 했다. 아이는 침울해지는 마음을 다 잡으면서 마지막으로 레이에게 사과했다. "미안해요, 기대에 보답을 못해줘서." 레이는 움직이던 날개를 잠시 멈추더니 공기를 타고 미끄러져 테이블 위에 발을 디뎠다. 고이 접히는 하얀 날개. 레이는 뭔가 생각하는 얼굴이 었다가 테이블 위를 다다닥 달려가 의자로 뛰어내렸다. '뭘 하려는 거지?' 갑자기 돌변하는 그녀의 행동에 아이가 의문을 품었을 무렵, 테이블로 인해 가려져 있는 의자 위에서 갑자기 하얀빛이 솟아올랐고, 아이가 그 빛의 정체를 깨달았을 때는 이미 일이 끝나있었다. 레이가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와 의자 위에 다리를 꼬고 앉아있었 다. 그녀는 그 모습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돔 내의 모든 사람이 다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말했다. "기권할래." "……네?" 잠시 뇌에 쌓여있었던 모든 것들이 날아가 버린 듯한 충격을 받은 아이 의 대답은 역시 느렸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돔 안은 침묵으로 휩싸여버렸 다. 그 모든 것이 엘프 여인의 한마디에서 비롯된 사태였다. "왜, 왜요?' 당황하며 묻는 아이. 레이는 일어선 채 그녀를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당연한 거 아냐? 기대했던 대전을 하지 못한다는데 더할 필요 없잖아. 어차피 난 게임을 즐기러 나온 거지, 우승해서 한번 더 마스터가 되어보 려는 생각으로 나온 게 아니거든. 그러니까 난 기권할래. 재미없어졌어." 코방귀를 고개를 매몰차게 돌린 레이는 간단하게 "흥. 잘 있어." 라는 인사를 남겨놓고 단상으로 걸어가 버렸다. 남겨진 아이는 갑작스런 사태 를 이해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여야만 했다. 루페르스는 옆 테이블에서 일어나는 작은 소란을 발견하고는 여전히 무 심한 태도로 "아하하하." 웃어댔다. "역시 레이다워. 목적을 잃어버리니 바로 집어치우잖아? 저게 바로 엘프 들의 장점이지." 너무나 태평스런 그를 보면서 훼이드리온은 오히려 자신이 더 걱정되는 것 같았다. "수정거울 카드 발동이에요. 깨지 않으면 진다구요. 그런데 그렇게 여유 있게 있어도 되는 겁니까?" "으흠? 아, 맞아. 그렇지? 수정거울을 소멸하지 못하고 내가 지게 되면 마스터 카드를 빼앗지 못하게 되는군." 루페르스는 교묘하게 훼이드리온이 알리는 질문의 의도를 피해가면서 대답했다. 한숨을 쉬는 훼이드리온이 응수했다. "또 말하지만, 전 결코 마스터 카드를 줄 용의가 없습니다." "나도 또 말하지만, 난 마스터 카드를 빼앗을 용의가 있어. 됐지?" 빙긋 웃는 루페르스는 능글맞게 "아하하." 소리내어 조소를 터뜨리더니 가만히 수정거울이 펼쳐져 있는 드레이프를 올려다보았다. 이미 루페르스 의 비술 화염천을 소멸시켜버린 후, 공중에 유유하게 떠있는 은빛의 거 울. 아무래도 저쪽에서 레이에게 버림을 받은 깜찍한 아가씨가 저질러 놓 은 장난에 완벽하게 걸려버린 듯했다. 솔직히 이렇게 웃고 있어도, 수정 거울을 깰 수 있는 방법이 완벽하지 않은 것이다. 아니, 수정거울을 깨는 방법은 이미 생각해놓았다. 하지만 지금은 이미 멀리 지나가 버린 후였다. 마법으로 카드를 조작할 생각도 없으니, 이 상 태로는 도저히 이길 방법이 없었다. 루페르스는 아주 간단히, 그 동안 보였던 집착이 허무할 정도로 아주 간 단하게 손을 들었다. "흠. 졌어." "에? 안 막습니까?" 훼이드리온은 갑작스런 그의 말에 레이의 선언을 들은 직후의 아이와 같이 당황하고 말았다. 루페르스는 든 카드를 툭 던져놓고는 어깨를 으쓱하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내가 무슨 마스터 카드의 신인 줄 알아? 현재 남아있는 걸로는 절대 안 돼. 그래서 솔직하게 패배를 시인하는 거야. 어차피 기회는 또 있으니 까, 지금 물러난다고 해도 곧 될 테지." "그건 또 무슨 말이죠? 벌써 세 번째 지면서 또 저에게 도전하겠다는 겁니까?" 기가 막히듯이 코웃음까지 치며 훼이드리온이 반문했고, 루페르스는 여 전히 흔들리지 않는 자세로 답했다. "당연한 걸 그렇게 일일이 물으면 입 안 아파? 난 카드 마스터를 절대 포기할 수 없다고. 그러니까 실력이나 잘 닦아 놓고 기다려. 오늘 같은 이런 운이 또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으니까." 어쩌면, 훼이드리온처럼 엄청난 강운을 가진 사람이라면 가능할 지도 모 르는 일이었지만,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루페르스는 드레이프를 거 두고 자신의 카드들을 마법으로 아공간 속으로 밀어 넣은 후, 유유자적한 움직임으로 몸을 일으켰다. "자, 결승 진출 축하해. 너의 그 사랑스러운 소녀와 대전을 하게 되었군, 그래? 행운인지 불행인지 구분이 잘 안 되는군. 아하하핫." 그는 이미 비어버린 자리를 뒤로 하고 단상을 거쳐 경기장 밖으로 사라 졌다. 경기장에 남은 자는 두 명의 결승 진출자, 아이 네드런과 훼온 레이엔트 뿐이었다. 둘은 각자의 테이블에 앉은 채 잠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뭔가 얼떨떨하게, 그리고 남는 것이 많게 끝나버린 준결승의 잔해들이 테이블 위에 너저분하게 널려있었지만, 그들은 잠시 모든 것을 잊고 서로를 응시 했다. '결승. 올라왔구나, 아이.' '결승이야, 훼온.' 이변이면 이변이었다. 결승 대전자들이 대회 첫 참가자들이라는 사실은. 그리고 그런 것이 또 마스터 카드 대회의 매력이었다. 이변의 속출. 그것 은 이미 이번 대회에서 여러 번 일어났던 일이었다. 그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마기의 목소리가 돔 안을 울렸다. "여러분, 1414년 마스터 카드 대회 결승 대전자들이 정해졌습니다!" 여기저기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웅장하게, 돔 안을 떠들썩하게 채 워나가는 거대한 박수 소리와 함성. 훼이드리온과 아이는 얼떨떨한 표정 으로 거북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관중석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와 함 께 박수 소리는 더욱 커져만 갔다. 눈짓으로 신호를 보낸 훼이드리온은 서둘러 카드를 챙겨 문 쪽으로 달 리듯이 걸었고, 그 뒤를 따라 아이도 달아나듯 경기장을 빠져나왔다. 대 기실과도 통하는 복도에는 여전히 관중들의 거대한 박수 소리가 벽과 바 닥을 울리고 있었다. 그 느낌에 아이가 땀을 닦아내며 거하게 한숨을 쉬었다. "후우……. 힘들었는지 아닌지 그것조차 헷갈리는 게임이었어, 정말." 훼이드리온이 복도를 걸어가며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뭐 잘 됐잖아. 이제 내일 결승만 하면 끝이야. 누가 이기게 될 까?" "글쎄? 훼온이 훨씬 실력이 좋잖아." "하지만 아이에게는 수정거울 카드가 있잖아." 언제 주머니 속에서 꺼냈는지 그의 손에는 은빛이 감도는 수정거울 카 드가 들려있었다. 아이가 수줍은 듯 약한 미소를 지었고, 그는 카드를 그 녀에게 내밀었다. "고마웠어. 이것 때문에 루페르스가 의외로 빨리 떨어져나갔어. 벌써 두 번이나 도움을 받는걸?" "헤에." 귀엽게 혀를 내밀며 웃는 아이. 그녀는 카드를 받아들고는 한동안 카드 에 남은 그의 온기를 느끼듯이 부드럽게 감싸쥐었다. 그새 그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면서 따뜻한 미소를 띄어 그녀의 얼굴에 또 한 차례 홍 조가 피어올랐다. 어느덧 박수 소리도 들려오지 않고, 그들은 복도의 끝에 도착했다. 게이 머들만이 들어올 수 있는 돔 출입문. 그곳을 향해 둘은 차근차근히 발길 을 옮겼다. 끼익. 이곳을 드나든 지, 벌써 5일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오늘 문이 열리는 소리는 새삼스럽게 그들의 머리 속을 자극하여 감각을 일깨웠다. "아, 벌써 날이 저물고 있어." "어라, 그렇네?" 돔 안에서 게임을 하고 있으면 무슨 마법이라도 걸린 듯이 시간이 빨리 흐른다. 몇 일간의 경험으로 그것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는 그들은 어느새 별빛이 하나 둘 씩 보이기 시작하는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아이가 작은 탄성을 질렀고,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훼이드리온은 계단을 밟고 내려섰다. "어, 미르? 에타? 여기 있었던 거야?" 계단 아래에 검은 로브로 온 몸을 감싼 채 서있는 미르와 그 옆에 쿠키 를 입에 물고 뭔가 멜로디를 흥얼거리고 있는 에타의 모습을 발견한 그 는 반갑게 손을 들어 인사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미르의 차가운 한마디. "미안하다." 감정없이 중얼거리는 듯한 그 말에 훼이드리온은 "어?" 라고, 후에 생각 하면 후회할 게 확실한 어벙한 반응을 하고 말았다. 그 사이 미르는 쏜살 같이 훼이드리온을 향해 돌진해 들어왔다. 소리 없이 허공을 딛고 나는 듯한 움직임. 그는 본능적으로 허리춤 왼쪽 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낭패였다. 칼, 돔 안에서 무기는 휴대할 수 없 다. 그렇기에 칼은 여관에 놔두고 온 것이다. 미르의 손은 훼이드리온의 오른쪽 허리, 마스터 카드가 들어있는 갈색주 머니로 향했다. 그것을 알아챈 그는 재빨리, 그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힘을 팔 근육에 쏟아 부어 갈색주머니를 사수했다. 팔을 움직임과 동시에 몸을 반 바퀴 돌려서 미르의 움직임을 최대한 방해하려 노력하는 훼이드 리온. 갑자기 벌어진 일이었지만 그는 의외로 재빠르게 상황을 대처하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미르는 암살자였던 것일까. 미르의 손과 훼이드리온의 손은 동시에 갈색주머니를 잡았고, 주머니는 가차없이 허공으로 들어올려졌다. 그리고는 훼이드리온이 '앗!' 이라고 속으로 비명을 터뜨리는 와중에 입구 가 완전히 벌어져 내용물을 모두 토해버리고 말았다. "훼, 훼온!" 아이의 비명이 들려오고 훼이드리온은 급박한 상황 속에서 무언가를 해 보려했다. 눈앞에서 떨어지는 100여장의 카드들. 공중에서 모두 낚아챌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러나 이 자리에는 그 엄청난 짓을 할 수 있는 인물이 있었다. 미르는 절제된 동작, 그리고 인간의 한계를 이미 넘어선 빠르기로 손을 움직였다. 동체시력이라면 검술 수련으로 제법 단련이 되어있는 훼이드리 온에게도 그 잠깐의 시간동안 미르의 손은 단 한번도 보이지 않았다. 무 언가 휙휙 지나다니는 듯한 느낌이 들 뿐, 아니 나중에 가서는 그런 느낌 조차 들지 않았다. 아주 찰나의 순간. 그 시간 동안 훼이드리온의 눈앞에 떠있던 카드들은 모조리 사라져 미르의 로브 속으로 들어갔다. 남은 것은 훼이드리온의 손 에 허망하게 남겨진 갈색주머니. 불과 숨 한 번 쉴 시간 전까지만 해도 대마도사가 만든 마스터 카드를 보관하고 있던 그 주머니뿐이었다. "미안하다." 미르는 짤막한 한마디만을 남겨놓고 에타의 곁으로 이동했다. 방금 전의 빠르기보다 또 한층 더 빨라진 움직임이었다. 에타가 쿠키를 목으로 삼키고는 귀엽게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꺄하하하, 고마워, 훼온. 이로써 미르와 난 주어진 임무를 완수할 수 있 게 된 거야." "그, 그게 무슨 말이지?" 훼이드리온과 아이가 서둘러 계단 밑으로 달려 내려오며 소리치듯 물었 다. 에타는 조용해진 미르를 보면서 싱긋 웃었다. "원래 미르의 목적이 뭔지 모르는 건 아니잖아. 그리고 루페르스도 이미 아미를 준 것으로 아는데. 우린 이게 목적이라구. 중간에 친구가 되기는 했지만 임무를 망각할 수는 없는 거지. 그러니까 우린 이만 떠나야겠어. 더 알고 싶은 건 저 사람들을 따라와." 에타의 손가락은 오른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훼이드리온이 그쪽으로 급 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는 또 다시 무형의 둔기로 머리를 맞아버렸다. "……누님?" 다른 사람들도 보였다. 앞서서 달려오고 있는 건 아크릴 영지에서 만난 뮤트리드라는 경비대장. 그리고 그 뒤를 따라 언젠가 한번 만난 적이 있 는 금안 기사단의 기사와 바이마크의 아들 하이마크가 이쪽으로 달려오 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 무엇보다 충격적인 건, 왕성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어야 마땅할 자신의 소중한 누님, 메이린느가 온통 더러워진 드레스로 치장한 채 자신을 향해 다급하게 달려오고 있는 모습이었다. "대,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에타……?" 훼이드리온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에타와 미르는 어느새 그곳에 서 사라져있었다. 소리도 없이, 어떠한 반응도 없이. "무슨 일이지, 갑자기? 무슨 일인 거야, 훼온?" 자신과 똑같은 말을 내뱉는 아이의 말만이 그의 혼란스러운 머리를 두 드리고 있었다. --------------------------------------------------------------------- 음. 뭔가 굉장히 급박한 97편입니다. 미르가 결국 배신을 때리고 가버립 니다. 어떻게 해결이 날 것인가! 아하하하하핫! 어둠의 기사 DARK KNIGHT TEAM... 덧하나. 추천 감상 비평. 마지막까지 받습니다아- 덧두. GO CAMA 번 호 : 22 / 22 등록일 : 2001년 02월 20일 04:18 등록자 : 암음기사 조 회 : 74 건 제 목 : [카드 게임 판타지]『카드 마스터(Card Master)』#098 카드 게임 판타지(Card Game Fantasy) 카드 마스터(Card Master) 98. 인원은 순식간에 불어나 버렸다. 일행에서 두 명이 빠져나갔지만 그것을 뛰어넘는 인원이 다시 합류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재회의 기쁨을 나누는 시간조차 아깝다는 듯이 상황을 설명하고 이해시키기 위해 여관의 식당 에 모였다. 게이머들이 모여서 왁자지껄한 이곳만큼 비밀스럽게, 또 자유 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곳은 이 도시 내에는 없었다. 세 명의 건장한 기사와 한 명의 소년 게이머, 그리고 미모에 관해서는 서로 자웅을 가리고도 충분히 남을 소녀와 숙녀의 등장으로 식당의 분위 기는 한층 더 고조되었다(여러 가지 의미로). 슈란가트는 자신의 레이디를 노리고 접근해오는 막 되먹은 사내들을 향 해 살며시 검을 내보이며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사실 그것은, 지금은 없 지만 방금 전까지 그들을 에코까지 안내해주었던 호연과 루비누스라는 마법사 길드 최고 원로 둘을 경계하던 신경이 이곳까지 그대로 유지되어 버린 탓도 있었다. 어쨌든 훼이드리온과 아이를 비롯하여 메이린느, 슈란가트, 뮤트리드, 하 이마크는 한 테이블에 모여 앉아 목을 축일 수 있는 간단한 음료를 주문 한 후 서로의 숨을 돌이키는 시간을 가졌다. 훼이드리온과 아이는 미르와 에타의 갑작스런 배신으로 정신이 없었고, 메이린느와 세 명의 검사는 쉴 새 없이 에코까지 산을 넘어왔기에 쉴 시간이 필요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각자 나온 음료로 목을 축인 그들은 본격적으 로 본론에 돌입하려 했다. 그러나 그 전에, 메이린느가 훼이드리온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는 누님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이해하기 위해 잠시 멈칫 거렸지만 곧 그 뜻을 파악할 수 있었다. 뮤트리드를 제외한 새로운 인물 세 명에 대해서는 훼이드리온과 어떤 관계가 있다는 것 외에는 알지 못하는 아이는 이야기를 꺼내려던 훼이드 리온이 왜 갑자기 자신을 쳐다보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저기, 아이." "응?" 약간 주저하는 기가 보이던 그였지만, 곧 입을 열고 말았다. "미안하지만… 나중에 설명해줄 테니까 지금은 방에 올라가 있어줄래?" "뭐, 뭐라구?" 아이는 황당하다는 듯이 금방 목소리를 높였다. 아닌 밤중에 물벼락을 맞은 듯한 얼굴이었다. 훼이드리온은 연신 미안하다는 듯이 눈동자를 굴리며 말했다. "정말 미안해. 하지만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아무래도 아이가 들어서는 안될 이야기야. 그러니까, 미안하지만 아주 잠시만 자리를 피해 줘. 금방 올라가서 말해줄게. 응?" 아이는 그의 말에 무슨 반박을 달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푸른 눈을 보 는 순간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애절한 눈, 간절히 무언가를 호소하 는 그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고 그녀가 어떤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녀는 결국 좌중을 한번 둘러보다가 지그시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렇게 할게. 그 대신." 훼이드리온은 잠시 침묵했다. "빨리 올라와서 이야기해줘." 작은 한숨이 깃든 말이었다. 훼이드리온은 피곤한 얼굴에 싱긋 미소를 곁들이면서 대답했다. "응. 꼭 그럴게." 아이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 모두에게 간단히 인사를 하고 총총히 식당 밖으로 나갔다. 그녀가 문을 닫고 완전히 밖으로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 고, 훼이드리온은 표정을 완전히 굳혔다.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좋아요. 일단 제가 생각하고 있는 게 무엇인지 말할게요."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다이사를 한 모금 더 머금어 입안에 침이 고이게 하고는 말했다. "미르와 에타. 아까 봤죠? 걔들은 여행 중간에 만난 친구들이에요. 미르 는 케롯에서 만나서 셀라드리엔 강을 건너다가 동행이 되었고, 그 다음 날, 어디선가 미르를 쫓아온 에타라는 소녀가 고집을 부려서 동행하게 되 었어요. 우리들은 그렇게 여기 에코까지 오게 된 거예요. 그런데 오늘, 대 회가 한참 진행되고 내일이면 결승전인데 미르가 내 마스터 카드를 빼앗 아 달아나 버렸어요. 그리고 그 에타라는 소녀는 무언가를 알고 있는 듯 이 말하고, 마지막 말은 누님께 넘겼어요." "마지막 말?" "더 알고 싶으면 누님을 따라 오라더군요. 말씀해보세요. 아마도 에타가 남긴 그 말은 누님께서 이 기사 분들과 함께 여기까지 힘들게 절 찾아온 이유와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해요. 무엇이죠? 왕성에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요?" 메이린느는 왕성에서 떠나기 전의 모습과 어쩐지 굉장히 달라 보이는 동생을 어떻게 받아 드려야할 지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그녀는 곧 동생과 같이 표정을 굳히고는 그에게 여기까지 오게 된 경위를 이야기하기 시작 했다. "간단하게 말할 테니 잘 듣거라, 훼이야. " 얼마간 듣지 못했던 누님의 온화한 목소리를 들으면서 비극적인 생각을 해야한다는 사실이 그는 매우 싫었다. "말씀하세요, 누님." "왕성에서 반란이 일어났단다." "……네?" "말 그대로 반란이 일어났단다. 주동자는 왕성 수석 마법사 필로윈 셀 디바이어와 금안 기사단 단장 바이마크 폰 헤이스티론 경이고, 그들은 마 법사 길드와 금안 기사단이라는 거대한 두 개의 세력을 토대로 얼마 전 에 왕성을 완전히 잡아버렸단다. 아버님과 어머님께서는 본궁에 갇히신 채 나오지 못하고 왕성은 완전히 그 두 사람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어. 정확하게 말하자면 필로윈을 중심으로." '필로윈'이라는 이름을 말할 때마다 그녀는 잠시 숨을 격하게 내쉬었다. 그녀는 그 자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정은 남아있지 않았다. 훼이드리온, 마법왕국 라시엔트의 태자이며 후계자인 소년은 믿을 수 없 다는 듯이 입을 벌렸다. "설마… 디바이어 경과 헤이스티론 경이요? 그들은 정말 충신이었잖아 요?" "그래서 더 그런 거란다. 나태한 국정을 바로 볼 수 없었던 거지. 그래 서 결국 자신들이 직접 움직이겠다고, 그 편이 오히려 더 나을 거라고 반 란을 일으킨 거야. 나도 처음에는 그들을 믿었단다. 왕성의 상태는 대충 알고 있었기에, 이 편이 오히려 나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거였는데, 점 점 갈수록 그게 아니었어. 헤이스티론 경은 괜찮았지만 필로윈은 정 말……. 아무튼 결국 난 이렇게 도망 나와서 너를 만나기 위해 이곳까지 올 수밖에 없었단다." 낭패한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메이린느가 고개를 숙이자, 훼이드리온은 당황에 황당을 섞은 액체를 뒤집어쓴 듯한 기분을 겨우겨우 다잡으며 테 이블 위로 팔을 올려 이마를 잡았다. 뭔가 이야기를 듣자 대단히 꼬인 것 같았다. "일단 흥분하는 건 뒤로 하고 상황부터 판단을 내려야겠어요. 그러니까 에타는 이미 왕성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건가요? 그리고 누님을 만나서 이 이야기를 듣고 왕성으로 찾아오라는, 그런 이야 기가 되는 건가요?" "그렇게… 되는구나." "제길!" 메이린느는 동생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욕지기에 그만 놀라고 말았다. 불과 몇 주일 전까지만 해도 저런 말은 입에 절대 담지 않았던 그였는데, 여행을 하는 동안 어느새 성격이 이렇게 변해버리고 말다니. 누님의 입장 에서는 그렇게 환영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 뒤에 동생의 입 에서 흘러나오는 말에 그녀는 그를 이해해야만 했다. "뭐야… 완전히 놀아나는 기분이잖아……." 그랬다. 루페르스의 말에서부터 시작해서 에타의 말까지. 상황에 맞춰서 적절하게 맞아떨어지는 그 말들은 정말 누군가의 손에서 놀아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후계자 수련, 이 여행 자체가 어떤 목적을 위 해 계획된 듯한 느낌이 들어 그는 기분이 확 나빠져 버렸다. 누군가가 알 게 모르게 자신의 삶을 주무르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 누가 웃을 수 있겠는가. 메이린느는 동생을 위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을 질책했 다. 그렇게 좋아하고 아끼던 동생인데, 괴로워하는 동생을 위하여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한 자신의 모습. 그녀는 눈물이 나올 것만 같은 기분을 간신히 참아냈다. "훼이야." 그녀는 작게 동생을 불렀다. 잔뜩 찡그린 얼굴로,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것 같은 얼굴로 훼이드리온이 고개를 들었다. "네, 누님." 간신히 감정을 억누르는 듯한 목소리로 그가 대답했다. 메이린느는 슈란 가트를 잠시 쳐다보다가 조용하게 말을 이었다. "일단 왕성으로 가자꾸나. 필로윈은 점점 악행을 자행하고 있어. 그를 막을 사람은 이제 너밖에 없단다. 네 맘이 어떤지는 누나도 충분히 알겠 어. 하지만… 넌 라시엔트의 태자잖니. 국왕이 자리에 없는 지금 넌 그 자리를 대신해서 나라를 이끌고 반역자를 응징해야한단다. 맘을 정하거 라. 같이 돌아가겠니?" 훼이드리온은 등을 곧게 펴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리고 잠시 눈을 감 았다가 맘이 평정을 되찾은 듯한 기분이 들었을 때, 가볍게 눈동자를 움 직였다. "갈게요. 모든 이야기의 흐름은 왕성에 있어요. 가서 이야기를 반란을 진압하고, 그리고 이 꺼림칙한 기분도 털어내야죠." 메이린느를 비롯한 네 명은 그렇게 말하는 훼이드리온의 푸른 눈동자에 서 반짝이는 별을 본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훼온은 언제 올라올까.' 아이는 침대에 누워서 그를 생각하는 것도 이젠 슬슬 지겨워지고 있었 다. 금방 돌아온다고는 했지만, 솔직히 그 말에 기대를 품지는 않았다. 말 은 그렇게 해도 분명히 금방 올라올 수 없다는 건 서로가 아주 잘 깨닫 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냥 조속히 그가 돌아와 사정을 설명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문득 훼이드리온을 찾아온 네 명의 남녀가 떠오르는 아이. 마법사 길드 최고 원로라고 하는 두 사람의 안내자에 의해 게이트 산맥을 넘어왔다는 그들은 아무래도 보통 인물 같지는 않았다. 아크릴 영지에서 한번 봤던 기사도 있었고, 보통 실력일 것 같지는 않은 기사가 두 명. 그리고 가장 맘에 걸리는 자가 바로 훼이드리온이 '누님'이라고 칭했던 그 여인이었다. 척 봐도 훼이드리온의 누님이라고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닮은 얼굴과 금발의 머리카락. 아무리 옷이 더럽혀지고 지저분해졌다고 해도 그 기품 자체에서 흘러나오는 어떤 분위기는 아이로 하여금 그녀가 보통 인물은 아니라는 것을 짐작하게 만들었다. '정말 무슨 일인 걸까? 그렇게 되면서까지 훼온을 급하게 찾아오다 니…….' 미르와 에타의 갑작스런 배신. 에타가 마지막에 남긴 말에 따라 나타난 그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라 훼이드리온이 빨리 와서 설명해주 지 않는 한, 머리 속에서 꼬이고 꼬이는 사슬을 풀기는 매우 어려울 것 같았다. 그렇게 그녀가 나름대로 상황을 풀이하려 애쓰고 있을 때, 문득 문밖에 서 들려오는 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지금 있는 곳은 예전엔 에타와 같이 썼었던 객실의 방. 아무래도 거실로 누군가가 들어온 모양이었다. 아이는 몸을 일으켜 문을 열려고 했다. 그러나 그보다 한발 앞서 문밖에 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 있어?" 반가운 훼이드리온의 목소리였다. 아이는 옅은 미소와 함께 문을 열었 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조금 침울한 표정으로 서있는 그가 보였다. "훼온? 뭔가, 이야기가 잘 안된 거야?" "아니 잘 됐어……." '잘됐다면 좋은 거 아닌가?' 라고 생각하면서 그의 표정을 이해할 수 없 다는 얼굴이 된 아이는 일단 움직여서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그 뒤를 따 라 훼이드리온도 허리에 달려있는, 아무 것도 들어있지 않는 갈색주머니 만큼이나 힘없이 침대 위에 자리했다. "잘 됐다면 좋은 거잖아? 그런데 왜 이렇게 힘이 없어?" 그의 태도에 생긋 웃으면서 기운을 북돋으려는 그녀의 노력이 눈물겨웠 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축 늘어진 어깨를 하고, 아무 힘도 들어있지 않 는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결국 그녀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침묵하고 말았다. 그렇게 잠시 시간이 흐르고, 이윽고 훼이드리온이 입을 열었다. "이야기는 잘됐어. 대충 어떻게 되는 건지 알게 되었다고 할 수 있고… 그런데……" "…그런데?" "…너무 잘 되어서 문제가 생긴 거야." 그녀는 이해 못할 일이 또 생겼다는 예감이 들어 머리를 쥐어짤 준비부 터 했다. 그러나 곧 그녀의 머리 속에 들어있는 모든 생각들을 한번에 날 려버릴 거대한 위력을 가진 말이 훼이드리온의 입에서 가까스로 흘러나 왔다. "나… 돌아가야 할 거 같아." "……." 훼이드리온의 말에는 짙은 한숨과 슬픔이 베여있었다. "집에 큰일이 생겼대. 그래서 누님과 기사들이 날 데리러온 거야." "……." 아이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그저 멍했다. "미안해… 여기서 이렇게… 이렇게 허무하게 여행이 끝날 줄은 몰랐어. 그리고 이렇게 헤어질 줄도 몰랐구……." "……정말 가야하는 거야?" 간신히 입을 뗀 아이의 말은 그것뿐이었다. 아니, 그녀의 머리 속에서도 그 문장 밖에는 돌아다니지 않았다. 헤어져야한다. 그는 가야한다고 말하 고 있다. 이렇게, 이렇게 떠나야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훼이드리온은 차마 말로 또 할 수는 없었는지 천천히 고개만을 끄덕였 다. 아이의 입꼬리가 기묘하게 비틀렸다. 볼 근육이 수축되어 주름이 잡히더 니 이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눈매가 연해지더니 다시 선명해졌다. 그리고 얼굴 근육 전체가 풀어지더니, 다시 본 모습으로 돌아갔다. 어느새 그녀는 약하게 미소짓고 있었다. "가야한다면 가야지. 어쩔 수 없잖아? 가봐, 훼온. 난 괜찮으니까." 그녀의 미소는 아름다웠다. 그러나 훼이드리온은 가슴 한 구석을 파고 들어오는 예리한 감각에 뜻하지 않게 고통스러워 해야했다. 그녀의 미소 는 아름다웠다. 아무 슬프도록 아름다웠다. "가봐." 아이는 누구에게 던지는 것인지 조차 알 수 없는 어조로 말을 던졌다. 상관없다는 듯이, 가든 말든 상관없다는 게 아니라 남겨진 자신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듯이, 체념한 투라고 생각하지 충분한 어조였다. 훼이드리온은 무언가에 홀린 듯이 그녀를 안아버렸다. 두 번째 포옹. 따 뜻했다. 전신의 기운이 그녀의 존재 자체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 중에 훼이드리온이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꼭 돌아올게, 꼭. 기다리고 있어. 반드시 돌아올게." 자기 자신에게 거는 주문 같이 그는 그녀를 안은 채 계속 그 말만은 중 얼거렸다. 귓가로 흔들리는 아련한 숨결에 아이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울면 안 된 다는 생각 밖에는 들지 않았다. 훼온을 막으면 안 된다는 생각 밖에는 들 지 않았다. "괜찮아. 난 괜찮아. 집에 가서 일 잘 해결해." "꼭 돌아올게. 기다리고 있어." 둘은 더 이상 말을 나누지 않았다. 서로 부둥켜안은 그 모습 하나만으로 모든 것이 설명되었다. 감정 따위는 말로 나타내지 않았다. 아이의 어깨 를 감싸쥔 훼이드리온의 마음은 간절했고, 굳은 미소와 함께 훼이드리온 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있는 그녀의 눈은 뜨거웠다. 잠시 후, 훼이드리온과 아이는 몸을 떼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절대 잊지 못할 얼굴. 한번이라도 더 보고 기억하기 위해 그렇게 서로를 응시하던 둘. "다녀올게." 훼이드리온은 "갈게."라고, 혹은 "안녕."이라고 인사하지 않았다. 아이도 마찬가지였다. "다녀와." 친구 집에서 놀다가 잠시 집에 다녀온다는 아주 가벼운 어조의 인사를 나누는 둘의 모습에서 여린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건 결코 거짓이 아니다. 훼이드리온은 짐을 싸서 객실의 문으로 다가갔다. 등뒤로 아이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지만, 더 이상 뒤를 돌아볼 수는 없었다. 그는 문을 열고 나 가면서 한껏 미소를 지어 보이는 것을 이별의 마지막 장면으로 정했다. 탕. 문은 거침없이 다쳤고, 그 모습을 허망하게 바라보고 있던 아이는 끝끝 내 주저앉고 말았다. "흑, 흑……."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마는 그녀. 뜻하지 않은 이별. 그 짧은 순간 동안 억제한 감정이 순식간에 터져 그녀의 두 눈에서 흘러내렸다. 그녀는 바닥 에 엎드린 채 다시는 그치지 않을 것 같은 눈물을 흘렸다. '가지 마…… 가지 마, 훼온…….' 그의 마지막 뒷모습을 보면서도 밝힐 수 없었던 진심. 아이는 눈물을 애 써 그치려하지 않고, 그 말만을 속으로 되뇌고 또 되뇌었다. 이별. 사랑하는 사람과의 영원한 이별. 기약할 수 없는 약속만을 남겨둔 채 몸을 돌려야만 했던 훼이드리온은 식당으로 내려왔다가 또한 기묘한 남자를 만난다. "당신이 왜 이곳에 있는 겁니까?" "아아, 물론 같이 가려고." 검은 로브를 뒤집어쓰고 능글맞게 웃고 있는 남자. 마법사 길드 마스터 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고, 바로 오늘 낮까지만 해도 훼이드리온의 마스터 카드를 노리던 바로 그 남자, 루페르스였다. 훼이드리온은 그를 지나며 누님에게로 향하면서 차갑게 말했다. "이제 마스터 카드는 제게 없습니다. 당신의 아들이 훔쳐서 왕성으로 가 지고 갔습니다." "아아, 그 이야기는 나도 알아. 호연에게 들었으니까." "그런데 아직도 용건이 남은 겁니까?" 그는 몸을 돌리면서 간단히 답했다. "물론, 있어. 이번엔 순수하게 도와주려는 목적이니까." "믿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훼이드리온도 단호했다. "왕성에서 일어난 반란. 그 두 세력 중의 하나인 마법사 길드의 마스터 인 당신을 제가 어떻게 믿죠? 그리고 무엇을 도와주겠다는 겁니까?" 슈란가트의 뒤에 서있던 메이린느가 마법사 길드 마스터라는 자 앞에서 당당히 맞서고 있는 동생의 모습을 훔쳐보는 중에, 루페르스가 소리내어 "아하하하." 웃어 그녀를 놀라게 했다. 훼이드리온의 눈썹은 한층 더 구 겨졌다. "지금부터 출발한다고 하더라도, 왕성까지는 적어도 10일이 넘게 걸려. 말이라도 있어? 없잖아. 미르와 에타라면 왕성까지는 단 하루만에 주파하 고 말 거야. 아니, 어쩌면 벌써 도착했는지도 모르지. 그런데 그런 느림보 걸음으로 왕성으로 가겠다는 거야?" "그럼 어쩌자는 겁니까?" "나도 왕성에 볼일이 있어. 어차피 다 밝혀졌으니 말하는데, 반란의 뒤 처리는 해야하니까. 그러니까 그러던 중에 데려다주겠다 이거야. 어때, 고 맙지 않아?" 그때 뮤트리드가 둘의 대화 사이로 끼어 들었다. "태자 저하. 허락하십시오." 어느새 경어를 쓰고 있는 뮤트리드. 훼이드리온은 납득할 수 없다는 듯 이 고개를 돌렸다. 뮤트리드는 직접 루페르스에게 말했다. "당신이 마음을 먹는다면 우리들쯤은 우습게 제거할 수 있다는 것은 알 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습 니다. 저희들을 왕성까지 데려다주십시오." "하지만 이 태자 저하는 맘에 들어하지 않는가 본데?" 루페르스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훼이드리온을 가리켰다. 고개를 돌리고 있던 훼이드리온은 아예 완전히 몸을 돌려 다른 곳을 쳐다보았다. 뮤트리 드는 쓴웃음 비슷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태자 저하도 원하고 계실 겁니다. 누구보다 더 왕성에 빨리 도착하길 비는 분이시니까요." "좋아. 그럼, 왕성까지 바로 가면 되는 건가?" 루페르스는 자신까지 합쳐서 6명이나 되는 인원을 데리고 3번이나 연속 으로 공간 이동을 해야함에도 불구하고 아주 거뜬하다는 얼굴로 목적지 를 물었다. 그 물음에 대답한 것은 굳게 입을 다물고 있던 훼이드리온이 었다. "루비네 마을." "뭐?" "일단 루비네 마을에 들러 숀의 집에 가야합니다. 그곳에서 확인할 것이 있어요." 루페르스는 변덕스러운 태자의 모습에 훗 하고 웃어버리더니, 이내 태자 가 원하는 대로 루비네 마을까지 단숨에 공간 이동을 해왔다. 뭔가 휙휙 지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자마자 주위의 배경이 루비네 마을의 밥거리로 바뀌어버리는 것을 알아챈 그들은 일순간 흔들리는 몸을 지탱하면서 신 기하다는 듯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환상 따위가 아닌, 정말 루비네 마 을의 길이었다. "가죠." 루페르스가 건투를 빌며 사라지자, 훼이드리온은 발길을 재촉했다. 마스 터 카드를 빼앗기고, 남은 건 갈색주머니 달랑 하나. 게다가 왕성은 반란 으로 인해 발칵 뒤집혀있고, 그것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눌러버 릴 수 있는 힘이 필요했다. '카드 마스터.' 이제 마지막 남은 방법이었다. 카드의 현자 쇼너 히브리드가 남긴 기록 을 토대로 그는 카드 마스터가 될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을 찾으려하는 것 이다. ---------------------------------------------------------------------- 잠옵니다.(===) 잠와요오오. 어둠의 기사 DARK KNIGHT TEAM... 덧하나. 추천 감상 비평. 주세요오- 덧두. GO CAMA 덧석. 덧. 쓰기도 귀찮아. 털썩. 번 호 : 23 / 25 등록일 : 2001년 02월 21일 01:49 등록자 : 암음기사 조 회 : 24 건 제 목 : [카드 게임 판타지]『카드 마스터(Card Master)』#099 카드 게임 판타지(Card Game Fantasy) 카드 마스터(Card Master) 99. "태자 저하는 방안에서 무얼 하시는 걸까요?" 카를레오는 어젯밤 숀의 서재로 들어가서 날이 밝을 때까지 나오고 있 지 않는 훼이드리온을 걱정하면서 입을 열었다. 소파 반대편에 앉아 오랜만의 노고를 풀고 디오느 차를 마시고 있던 공 주, 메이린느는 동생이 들어간 방으로 지그시 눈길을 보내다가 이내 고개 를 저었다. "알 수 없죠, 훼이가 저 안에서 어떤 것을 알아내는 건지. 숀님의 말씀 을 따르자면 카드의 현자가 남긴 기록을 살핀다고 하지 않았나요?" "물론 그렇긴 하겠지만, 이렇게 조용하니 불안하네요. 혹시 피곤에 절어 서 잠이 들어버리신 건 아닐지." 애써 좋은 방향으로 생각을 떠올리지만 그렇게 맘이 풀리지는 않았다. 5 일만에 나타난 공주 일행. 그리고 얼마 전에 통신으로 뵈었던 태자가 숀 의 집에 도착하자, 마침 카를레오는 숀과 이런저런 학식을 나누고 있었 다. 훼이드리온은 숀을 만나자마자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는 곧바로 카드 의 현자가 남긴 기록을 보여주기를 요청했고, 숀은 그를 서재로 안내했 다. 그리고는 일행이 잠에 빠지고 아침에 일어나 식사를 끝내 차를 마시 며 그를 기다리고 있는 지금까지 그는 방안에 틀어박혀 있었다. 태자가 방으로 들어가면서 남긴 말을 떠올리며 카를레오가 한숨을 쉬었 다. "나올 때까지는 아무 방해도 말아달라고 하셨다지만 걱정되는군요. 어젠 척 봐도 신경이 곤두서 계시던데." "이별 때문일 거예요." 창 밖으로 보이는 푸른 하늘의 뜬구름을 잡는 듯한 메이린느의 말에 소 파에 기대어 요양 중이던 하이마크도 잠시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고요한 음색으로 말을 이었다. "카를레오도 알 테죠? 훼이와 동행하고 있던 그 소녀. 척 봐도 보통 사 이는 아닌 것 같이 보이던데요. 단순한 여행 동료가 아닌. 아마도 그 애 와의 이별 때문에 그럴 거예요. 태자로서 사명도 있지만 남자로서의 마음 도 있는 거니까." 역시 사랑하는 동생의 일이라서 그런 것일까. 그녀는 훼이드리온의 현 상태를 그렇게 정의 내리고 어두운 얼굴로 찻잔을 들었다. 어쩔 수 없는 운명에 휩쓸려서 사랑하는 사람을 버려야만 하는 나약한 인간의 모습. 그 건 꼭 동생이 아니라고 해도 슬픈 모습이었다. '하지만 훼이야. 넌 이미 정혼자가 있잖니.' 운명 중에서도 피할 수 없는 것. 그것을 숙명이라고 부른다고 그녀는 생 각했다. 모두의 침묵 속에 차를 마시는 소리만이 가끔 들려왔다. 이 집의 주인인 숀은 촌장으로서의 임무를 다하기 위해 출가한 상태였고, 그 대신 손님들 만이 잔뜩 거실의 소파를 차지하고 앉아 언제 나올지 모르는 태자를 기 다리고 있었다. 딸깍. 고요한 거실을 거침없이 내달리는 소리는 바로 서재의 문이 열리는 소 리였다. 모두의 행동이 잠시 멈칫거리더니 이내 숀의 침실 옆, 서재를 향 해 시선을 모았다. 서서히 열리는 문. 그 안에서 회색의 여행복을 입은 누군가가 걸어나왔다. 다름 아닌 훼이드리온이었다. 슈란가트는 태자 저하의 얼굴이 어젯밤과는 느낌이 다르다고 느꼈다. 그 리고 메이린느의 머리 소에서는 그 느낌이 좀 더 명확한 개념으로 떠올 랐고, 정작 입 밖으로 내보낸 건 카를레오였다. "…원하던 것을 찾으셨나요?" 훼이드리온은 대답하지 않고 소파 앞에 섰다. 밤을 샌 것이 분명한 그의 얼굴은, 그러나 전혀 피곤해 보이지 않았다. 메이린느는 어쩐지 맘에 떨 리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동생을 바라보았다. 그는 "흠." 하는 약한 음성을 내더니 이내 얼굴 앞으로 내려온 머리를 쓸어 넘기며 미소를 띄웠다. "레오. 공간 이동, 가능하지?" "네, 가능해요. 바로 가시는 건가요?" "응. 이 기분이 사라지기 전에." 카를레오의 미소가 밝아졌다. "찾으신 거군요?" 훼이드리온은 그 물음에 대해서는 말로서 답하지 않고, 그저 미소를지 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그 미소에서 모든 것을 느낄 수 있는 카를레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가볍게 쥔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을 두드렸다. "맡겨주세요. 단숨에 데려다 드릴게요." "누님께서도 가실 거죠?" 그의 대답에 미소를 지으며 훼이드리온이 누님을 바라보았다. 메이린느 는 동생의 눈길에 슈란가트, 그리고 하이마크를 슬며시 둘러보고는 가볍 게 화사한 웃음을 머금으며 답했다. "물론이란다, 훼이야." 그는 누님을 향해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을 가졌다. 사실 정신 없이 카드 의 현자의 기록을 파다가 깨달음을 얻고 눈을 떠보니, 거실의 음성을 막 아내기에는 서재의 문은 굉장히 얇았던 것이다. 그렇게 귀를 기울이지 않 아도 들려오는 누님의 목소리에 그는 방안에서 옅은 미소를 지었었다. 아무튼 가볍게 목을 움직인 훼이드리온은 마지막으로 뮤트리드를 바라 보았다. "저도 가겠습니다." 묻기도 전에 단단하게 대답하는 그를 향해 훼이드리온은 웃으며 입을 열었다. "감사해요." "별 말씀을요." 태자 저하의 신변을 보호하라는 주군의 명령이 아니라고 해도, 뮤트리드 는 마땅히 그렇게 해야한다고 생각했다. 이미 그는 태자이기 전에 의지와 신념이 강한 소년에게 반해버렸으니까(?). "그럼 가도록 하죠. 빨리 왕성을 돌려 받아야할 테니까." 태자의 위치. 한때는 부담스러웠고 지겨웠던 그 자리에 더없이 어울리는 모습으로, 목소리로 말하는 훼이드리온. 메이린느는 어느새 행복한 미소 를 짓고 있었다. '훼이… 많이 컸구나, 이제.' 더 이상 자신의 품안에서 매달리던 그런 소년이 아니었다. 성인식을 치 르고, 후계가 수련을 떠났으며, 이제는 그녀도 올려다보아야할 만큼 성장 해버린 동생의 모습. 괜히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참아내며 그녀는 밝게 웃었다. "그래, 그러자꾸나." 모든 것이 잘될 것 같은, 그런 느낌이 그녀를 즐겁게 했다. 훼이드리온과 메이린느, 그리고 그 뒤를 따라 카를레오, 뮤트리드, 슈란 가트, 하이마크가 차례대로 밖으로 걸어나왔다. 아침의 쌀쌀한 기운은 어 느새 지워졌고, 오파투스의 첫 번째 영역을 지나는 마스트의 눈은 따뜻한 축복을 지면에 떨구고 있었다. 아주 화창한, 거대한 일을 벌이기에 너무 안성맞춤인 그런 날이었다. 잠시 바람을 느끼듯 서있던 훼이드리온은 이내 카를레오를 바라보았다. 슈란가트가 검을 정리하고 메이린느의 옆에 서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카를레오는 태자의 시선에 몸을 돌렸다. "준비 되셨나요?" 훼이드리온은 텅 비어버린 갈색주머니를 여전히 허리춤에 묶고, 왼쪽 허 리춤에는 붉은 기운을 머금은 칼을 매단 채 간단히 고개를 움직이며 대 답했다. "응." 그가 피로하지는 않을까, 라는 생각은 애초부터 잊고 있던 카를레오는 그의 대답이 전과는 또 느낌이 틀리다는 것을 느끼며 눈이 보이지 않는 특유의 미소로 일행을 바라보았다. "흠. 그럼 가죠." 그렇게 그가 말하는 순간, 훼이드리온은 무언가 익숙한 느낌이 온 몸을 휘감는 듯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성질에 맞지 않아 상당히 껄끄러워했던 기분. 하지만 깨달음을 얻고 나서는 이제 완전히 그 것에 익숙해져버렸다. 공기의 움직임마다, 혹은 가만히 앉아있어도 느껴 지는 그것은 하루만에 그에게 복종하고 있었다. 어느새 그들은 왕성의 서문에 서있었다. 루비네 마을에서 왕성까지. 한 나절 거리는 눈 깜빡이는 순간에 건너온 마법의 위력은 역시나 그들을 감탄하게 만들었다. 훼이드리온은 거대한 서문을 올려다보았다. 이곳을 기준으로 저쪽은 왕 성이었고 이쪽은 수도였다. 굳건하게 안과 밖을 가르고 있는 성문과 성 벽. 저 안에 무슨 일이 있는지 아마 제대로 아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언제나 그랬듯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고, 가끔씩 서문 앞에 모여있는 그들을 신기한 눈초리로 쳐다보는 사람도 있었다. 잠시 감상에 빠져본 그는 곧 정신을 차리고 다시 서문, 아니 왕성 자체 를 바라보았다. 15년 동안 살아오다가 지난 5월 14일에 처음으로 바깥 세 상으로 떠났다가 오늘 6월 7일, 정확하게 3주일만에 귀환하는 것이었다. 그리 기쁘고 신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대신 무언가를 이루었다는 포부 와 함께 해야할 일에 대한 의무감이 충만했다. "슈란." 메이린느의 조용한 말에 슈란가트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쪽문으로 다가 갔다. 문 앞에 도착한 그는 손을 들어 쪽문을 두드렸다. 지루함이 가득한 호수에 빠졌다가 방금 건져낸 사람의 목소리와 비슷한 무의미한 음성이 쪽문 안에서 들려왔다. "누구십니까아?" 전 같았으면 아마 문이 열리면서 성문을 지키는 경비병이 나왔을 것이 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랐기 때문에 문이 열리지는 않았다. 슈란가트는 그 미묘한 차이를 느꼈는지, 잠시 끄응 대다가 곧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금안 기사단 제2대장 나이트 슈란가트이다. 문을 열어라." "어, 어헛, 제2대장님?" 비록 공주를 데리고 도망을 갔다고는 하나, 그들 금안 기사단에 있어서 슈란가트는 단장 후계자로서 지명도가 높았다. 그런 기사 중 한 명일 것 이 분명한 그 목소리의 주인은 뭔가 콰당탕 소리를 내면서 한껏 요란을 피우더니 급히 문을 열어 젖혔다. "어, 어서 오십시오!" 당황하여 거수 경례를 붙이는 기사. 그의 곁에서 다른 기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이봐. 이제 파문된 사람이라고. 예의를 차릴 필요는 없어." '파문'이라는 단어가 슈란가트의 가슴을 살벌하게 후벼팠다. 이미 예상했 던 일이지만 막상 듣고 보니 상당한 충격이 엄습해온 것이다. 그는 별로 편하지 못한 얼굴로 대답했다. "예의 차릴 것 없다. 다 예상했던 거니까. 그나저나 들어가도 되겠나?" 그는 긴장한 표정으로 땀을 뻘뻘 흘리면서 말을 머뭇거렸다. 그러자 슈 란가트는 "흠." 하는 음성을 남기고는 막무가내로 쪽문으로 들어섰다. 문 을 지키고 있던 두 명의 기사가 당황하면서 "안됩니다!"를 외쳤지만, 그 말을 들을 그가 아니었다. 그는 당당하게 왕성 안에 발을 디디고 그들을 보았다. "디바이어님과 단장님은 어디에 계시는지 아는가?" "그, 그분들은 왜 찾으십니까?" "당연히 만나려고 그러는 거다. 모르는가?" 주저하는 표정으로 기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슈란가트는 더 이상 기대하 지 않는 얼굴로 고개를 돌려버리고 쪽문 밖으로 소리쳤다. "들어오십시오." 기다렸다는 듯이 건장한 기사, 뮤트리드가 무표정한 얼굴로 굳어있는 기 사 두 명을 훑어봐 주고는 안으로 들어오고, 그 뒤를 따라 메이린느가 조 심스럽게 들어왔다. 그 순간 기사들이 급히 고개를 숙인 것은 당연한 일 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더 이상 고개를 들 수 없었는데, 그 이유는 당연 스럽게도 훼이드리온 때문이었다. "태, 태자 저하?" 살짝 고개를 들었다가 쪽문으로 들어오는 태자의 모습에 충격을 먹고 고개를 떨구는 기사. 그 뒤를 따라 다른 기사가 눈짓을 해보았다가 역시 나 같은 반응을 보이며 무릎을 꿇었다. 그들이 생각하기로는 한 달쯤 전에 후계자 수련을 위해 여행을 떠난 그 태자가 공주와 함께, 그리고 파문된 기사와 함께 나타난 것이다. 전혀 예 상하지 못한 일이라 그 충격은 정도를 더했다. 훼이드리온은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고 있는 기사 두 명을 넌지시 내 려다보다가 이내 흥미가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지금은 오로지 필로윈 과 바이마크를 만나는 생각만을 하고 있는 그였기에 그 중간에서 여타 귀찮은 일에는 절대 신경을 쓰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그였다. "지금 시간이라면 아마도 집무실에 있을 거예요. 왕궁으로 가도록 하 죠." 그는 조금도 흔들림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말하고는 왕궁의 끝퉁이 가 살짝 보이는 방향으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의 푸른 눈에 황금빛의 별이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고, 그의 손은 아 무 것도 들어있지 않은 갈색주머니를 강하게 움켜잡고 있었다. 필로윈의 집무실. 루페르스는 여유 있는 포즈로 찻잔을 들어올려 입으로 가져가면서 입을 열었다. "이제 끝내야할 때지?" 대상 없는 질문. 하지만 그 대답은 책상에 앉아 보지도 않는 서류를 이 리저리 만지고 있던 필로윈에게서 나왔다. "네, 그렇지요." "성공할 거라고 봐?" 루페르스의 의미 없는 물음에 필로윈은 가볍게 장난스러운 미소를 머금 었다. "안 되도 할 수 없지 않습니까?" 풋, 하는 소리와 함께 루페르스도 장난스럽게 키득댔다. 마법사 길드 내 에서도 꽤 친한 사이인 두 사람의 모습은 굉장히 닮아있었다. 필로윈은 의자에 기대앉아 뭔가 기대하는 얼굴이 되어 중얼거리듯이 말 했다. "마스터도 느끼고 있겠지요? 무언가 거대한 존재감을 가진 자가 지금 왕궁을 향해서 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사람 중에 저런 존재감을 가지는 자가 얼마나 있을 것 같습니까?" 그는 책상 위에 올려져있는 푸른색의 마스터 카드. 미르가 가져온 훼이 드리온의 마스터 카드를 내려다보면서 미소했다. 루페르스는 십분 공감한 다는 표정으로 찻잔을 내려놓고 그를 바라보았다. 창문을 등지고 앉아있 는 필로윈의 모습. 루페르스의 시선은 그의 뒤, 창문 밖으로 향했다. "화창한 날씨군. 대마도사, 진정한 카드 마스터의 '재래'를 기하는 날로 는 아주 적당해." "동감입니다. 절대 실패할 리 없습니다." 모든 것을 끝마치기 전, 믿음에 가득 찬 얼굴로 필로윈은 천천히 자리에 서 일어났다. 그에 따라 루페르스도 소파에서 일어나 로브를 다시 천천히 어깨에 둘렀다. 오랜만에 돌아오는 태자를 맞이하기 위해, 그리고 이 게임의 마지막을 장식하기 위해 필로윈은 한발 앞서 나가며 넌지시 말을 건넸다. "자, 그럼. 갈까요?" 메이린느에 의해 그렇게 미움을 받는 반란의 주동자라고 생각할 수 없 을 만큼, 그의 미소는 깔끔하고 순해 보였다. 왕성 앞. 수많은 기사들이 둘러싸기 시작한 것은 왕궁 앞에 마련되어진 정원에 그들이 들어섰을 때였다. 훼이드리온을 선두로 거침없이 왕궁으로 향하던 그들은 어디선가 갑자기 튀어나와 포위하는 기사들을 향해 사나 운 눈길을 보내주었다. 특히 슈란가트와 뮤트리드의 눈길은 매우 매서웠 기에 검을 치켜든 기사들도 움찔대게 만들 정도였다. "막는다고 못갈 것 같습니까?" 전혀 동요되지 않는 모습으로 훼이드리온이 기사들에게 소리쳤다. 그들 의 표정에는 주저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하지만 누구 하나 자리를 비키지 는 않았다. 훼이드리온은 작은 한숨과 함께 작게 입을 열었다. "나이트 슈란가트, 뮤트리드, 하이마크. 뚫고 갈 수 있겠어요?" 태자의 말에 메이린느를 보호하며 서있던 슈란가트가 놀란 목소리로 물 었다. "이 인원을 말입니까?" 적게 잡아도 30은 넘어 보였다. 아무리 비전투인이 한 명밖에 되지 않고 전투인이 다섯 명이 된다고 하더라도, 이 정도는 무리였다. 마법사라고는 하지만 공격에 관련된 것은 몇 년 동안 잊고 지낸 카를레오에게 이당백 의 위력을 기대하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가야해요. 필로윈을 만나서 해결을 봐야합니다." 훼이드리온은 오직 앞을, 왕궁만을 보고 있었다. 걸리는 것은 모두 제쳐 버리고 가겠다는 그 의지에 슈란가트는 걱정스럽게 레이디를 내려다보았 다. 남성들에게 둘러싸여 완벽하게 보호받고 있던 그녀는 자신의 기사의 눈길을 느끼고는 고개를 들어 미소를 지어주었다.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슈란가트는 뮤트리드와, 하이마크, 카를레오의 동의를 얻어내듯이 눈길 을 보내고는 단단한 음성으로 답했다. "좋습니다. 한번 해보도록 하죠." "네. 최대한 안전하게 뚫고 나가기로 해요." 포위망을 검투로 뚫고 나가겠다는데, 과연 안전하게 나갈 수 있을 지는 미지수였다. 그러나 훼이드리온은 그런 사소한 문제까지는 생각지도 않는 다는 듯이 거침없이 허리춤의 칼, 500년 전의 검의 현자 샤렌 하르트의 검 마스트소드를 뽑아 들려했다. 그 순간, 갑자기 들려오는 잔잔한 목소리에 그들의 전방의 기사들이 좌 우로 쭈욱 갈렸다. "태자 저하가 안 보이니, 좀 비켜주지 않겠나?" 훼이드리온으로서는 절대 잊을 수 없는 목소리. 한때는 믿고 따랐지만 지금은 루페르스만큼이나 증오하기 이를 데 없는 남자, 필로윈이었다. 그 는 터져 나오는 분노를 담아 크게 일갈했다. "필로윈!" 물러난 기사들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낸 필로윈은 여전히 장난스럽게 웃 으며 대꾸했다. "어이쿠, 그새 목소리가 많이 커지셨군요, 태자 저하?" 비꼬는 투가 역력했다. 그는 태평스러운 몸짓으로 기사들의 포위망 속으 로 걸어 들어왔다. 훼이드리온은 다시 한번 그를 향해 크게 소리쳤다. "당장 기사들을 물리고 반란을 중단하십시오! 그렇다면 더 이상 죄를 묻 지 않겠습니다!" "아하하하, 어느새 유머까지 배워오셨습니까? 그나저나 말투가 많이 바 뀌셨군요. 전에는 좀 더 사근사근했었는데." 그는 아쉽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찼다. 그 모습은 명백히 도발하 는 자세라 메이린느는 꾹꾹 눌러 참고 있는 와중에서도 계속 눈을 부라 렸다. 문득, 필로윈의 웃음이 그치고 진지함이 달라졌다. "헛소리는 그만하시길 바랍니다, 태자 저하. 아직까지는 저하, 라는 호칭 을 사용하고 있기는 합니다만 언제 그만둘지 모르는 상황이거든요. 제가 원한다면 이젠 왕족 전체의 몰살까지도 가능합니다. 실재로 지금 국왕은 충격으로 드러누우셨기 때문에 이젠 제가 모든 실권은 장악했습니다. 아 시겠습니까, 이게 무슨 뜻인지? 이미 이 왕성은 저에 손에 넘어왔고, 큰 소리를 칠 수 있는 자는 태자 저하가 아닌 바로 저라는 말입니다." 그의 표정은 '차가운 비웃음'으로 해석될 수 있었다. 훼이드리온은 그의 얼굴을 보며 끓어오르는 열 때문에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대체, 대체 왜 반란을 일으킨 거지? 당신은 왕성 내에서도 손꼽히는 충 신이었잖아!" "깨달은 것이죠." 빙긋 웃으며 말하는 필로윈의 어투는 상황에 맞지 않게 아주 편안했다. "대마도사의 건국이래, 500년 동안 부강하게 자라온 마법왕국 라시엔트. 하지만 지금은 마법왕국이라는 이름이 무명할 정도로 나태해져있습니다. 귀족들, 심지어 국왕까지 국정에는 관심이 없고 자기들 뱃속만 채우려는 작자들이 넘쳐 나서 화를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이 이 나라의 대신 중 한 명인 왕성 수석 마법사로서 가진 불만이었습니다. 그리고 한 인간, 한 마법사로서 가지는 불만이 있었다면, 마법왕국임에도 불구하고 마법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왕족에 대한 것이었죠. 그렇지 않습니까, 태자 저하? 마법왕이라는 칭호로 불리면서도 마력조차 움직이지 못하는 왕. 그게 말 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이 대마도사가 건국한 이 나라의 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한번 터진 입을 닫혀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필로윈은 말을 하던 중에 열이 받았는지 씩씩대다가 다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러다가 어느 날 깨닫게 된 것입니다. 대마도사를 잃어버린 이 나라의 왕족에 충성을 할 필요는 없다. 차라리 내가 이 왕성을 이끌겠다. 그래서 이렇게 된 거고, 이젠 거의 성공 수준에까지 다다랐습니다. 유일한 걸림 돌은 바로 태자 저하 당신이십니다. 저를 막으시겠습니까, 아니면 순순히 항복을 하시겠습니까? 왕성 안에 들어온 이상, 이제 다시는 밖으로 나갈 수 없음은 물론입니다." "그거 때문이었나?" 훼이드리온의 음색은 너무나 조용해서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 완벽한 감정의 절제. 언젠가 한번 똑같은 음성을 내본 적이 있는 것 같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지금 그의 목소리는 너무나 조용하여 공 간까지 침묵 속으로 빠져들게 만들었다. "말씀하시지요." 필로윈은 빙긋이 웃으면서 그의 이야기를 재촉했다. "대마도사, 페인트 라시엔트가 건국한 마법왕국 라시엔트. 대마도사를 잊은 왕족에 대한 불만 때문에 반란을 일으켰다는 건가?" "뭐, 개인적인 사유는 그렇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공적인 이유겠지만 요." "나태한 국정?" "그렇습니다." 훼이드리온은 무표정하게 얼굴을 굳히면서 말을 이었다. "내가 이끌어주겠다." "……네?" "반란의 사유가 그것이라면 완벽하게 뒤집어주겠다, 내가. 내가 국정을 이끌어나가겠다. 그러면 되지 않나? 그럼 당신이 반란을 일으킨 사유는 없어지게 된다." 필로윈은 당돌한 그 말에 조소할 수밖에 없었다. "훗, 태자 저하께서요? 어떻게 하시겠다는 겁니까? 아니, 우선 제 믿음 부터 얻으셔야하지 않겠습니까? 만약에 저를 설득하실 수만 있다면 저도 반란을 중지하는 것을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만." 여전란 장난기, 그래서 믿을 수 없는 발언이었다. 슈란가트는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공주의 어깨를 감싸쥐면서 그녀를 진정시켰다. 그리고 그 동 시에 훼이드리온의 손이 움직이는 것을 확인했다. 훼이드리온이 여전히 조용한 음색으로 입을 열었다. "대마도사." "네?" "지금 이 자리에서, 대마도사를 찾아주겠다." 필로윈은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 없다는 듯이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되물어다. "대마도사를 되찾아주겠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말 그대로다. 지금 이 자리에서 지금까지 마법왕국 라시엔트가 잊고 있 었던 대마도사를 찾아주겠다는 말이다. 그 정도면 되지 않겠나? 당신의 믿음을 얻는 것은." 너무나 자신만만하게 단언하는 태자의 태도에 필로윈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충분히 예상한 상황이었지만 그는 너무나 단언을 하고 있었다. 필로윈은 조금 떨떠름한 상황 속에서 표정을 감추며 "흐음." 하고 음성을 내보았다. "좋습니다. 어차피 헛소리일 것 같지만, 한번 기대는 해보도록 하지요. 하지만 시간을 건너뛰는 것도 아닐 텐데 어떻게 대마도사를 찾아주겠다 는 겁니까?" 훼이드리온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허리 쪽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는 갈색주머니, 마스터 카드 보관을 목적으로 하는 그 카드 주머니를 풀 어서 들어올렸다. "그건 왜……?" "카드의 현자 쇼너 히브리드의 기록을 보았다. 그곳에는 예전에 레오가 나에게 해준 말과 비슷한 구절이 많더군. 레오, 대마도사는 마법사가 아 니었다, 라는 말 기억나?" 잠시 뒤쪽으로 눈길을 돌리는 훼이드리온. 카를레오는 갑작스럽게 자신 에게 이목이 집중되자 놀란 상태에서 떠듬떠듬 대답했다. "네, 네. 그렇게 말씀드렸었던 기억이 있어요." "난 그것을 토대로 기록을 찾아봤어. 대마도사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 가 있더군. 그가 태어난 고향, 리비엔에서부터 그의 흔적을 뒤쫓은 여행 이 고스란히 그 기록 속에 있었어. 결국 난 찾아냈지. 레오의 말과 비슷 한 구절을." 필로윈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그 노란 눈동자를 밝혔다. 호기심에 표 현. 훼이드리온은 주머니를 만지며 이야기를 이었다. "카드 마스터. 마법의 숲에서 만난 오거 로드는 진정한 의미의 카드 마 스터는 대마도사 한 명밖에 없다고 말했다. 난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 건 지 줄곧 궁금했었어. 하지만 계속 의문으로만 품어왔다가 게이트 산맥에 서 만난 골드 드래곤에게서 겨우겨우 힌트를 얻어낼 수 있었지. 카드 마 스터는 카드를 깨달은 자, 카드의 의지를 깨달은 자, 라는 것을." 순간적으로 훼이드리온의 푸른 눈에서 금색별이 떠올랐다. 이곳에 모여 있는 기사들조차 그 빛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그 금성은 훼이드리온 의 눈 안에서 형형히 빛을 내뿜었다. 필로윈이 떨리는 손을 로브 속에서 부여잡고 금성을 바라보고 있을 때, 훼이드리온의 이야기는 계속 되고 있었다. "이 금성안은 진실을 보는 눈이라고 한다. 대마도사는 이 금성안을 가지 고 있었지. 그래서 사물에 깃든 진실을 읽을 수 있었어. 그것을 이용하여 토대로 그는 카드를 만들었다. 그게 바로 마스터 카드, 지금에 와서는 게 임 카드로 이용되고 있는 바로 그 카드였지." 그들은 모두 할 말을 잃은 듯, 훼이드리온의 이야기에 도취된 듯이 입을 다물고 경청하고 있었다. 훼이드리온은 강한 어조로 이야기의 결론을 내 리려했다. "대마도사는 원래 마법사가 아니었다. 그 말은 사실이었어. 대마도사는 마법사로서 마스터 카드를 만든 것이 아니라, 마법사가 되기 위해 마스터 카드를 만든 거야. 바로 이 금성안의 능력을 이용해서." 훼이드리온의 여행을 따라 흘렀던 미스터리들이 지금 이 자리에서 그에 의해 하나씩 풀려가고 있었다. 그는 잠시 숨을 고르듯 침묵했다가 곧 다시 입을 열었다. "카드를 이용하여 카드에 내재된 의지를 일깨워 마법을 구현한다. 그것 이 바로 카드 마스터이고, 그는 대마도사라는 칭호를 얻어내었지. 진정한 의미의 카드 마스터는 대마도사 한 명뿐이라는 오거 로드의 말은 진실이 었던 거야." 여전히 그들은 정적 속에서 훼이드리온의 말만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 다. 처음에는 맘껏 비웃어주고 있던 필로윈마저도 어느새 훼이드리온의 말에 빠져들어 넋을 잃고 있었다. "하지만 대마도사는 곧 마스터 카드 자체에 두려움을 느끼고, 자신이 죽 을 때가 다 되었을 때 자신에 관련된 모든 기록을 말소시켜버렸지. 그리 고 차마 없애지 못한 것은 왕성 내 비밀창고의 방 하나에 넣고 그 방을 봉인시켜버렸어." 훼이드리온은 손에 든 갈색주머니를 다시 들어올렸다. "난 알 사람은 알다시피 그 봉인된 방의 문을 열고 들어가 이 갈색주머 니를 발견했어.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아무래도 그 문을 열 수 있었던 건 대마도사와 같은 능력, 이 금성안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닐까, 생각해. 맞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원래 이 갈색주머니에는 대마도사가 만든 마스터 카드가 들어있었어. 지금에야 미르, 아니 필로윈 당신이겠지? 당 신이 가지고 있겠지만." 이미 그는 상황을 거의 다 추리해내고 있었다. 필로윈은 조금 찔끔한 표 정이 되어 시선을 돌렸다가 이내 다시 '그게 뭐 어때서?' 라는 표정으로 당당하게 태자를 마주했다. 훼이드리온은 소리내어 웃지 않고 계속 말했다. "지금까지 알아낸 바에 따르면 대마도사의 카드만이 마법을 사용할 수 있어. 다른 카드로는 불가능하지. 원래 그런 목적이 아니었으니까." "그럼, 태자 저하. 저하께서는 카드 마스터가 되어 저의 믿음을 얻어내 시겠다는 겁니까?" "물론 그래. 대마도사를 되찾아주고, 마법왕 본위의 능력까지 생겨. 이래 도 불만을 내비칠 수는 없을 테니." 필로윈은 그의 말을 들으면서 조소했다. "하지만, 저하의 카드, 대마도사가 만들었다는 그 카드는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만?" 어투로 보아하니 "전 다시 드릴 맘이 전혀 없습니다만?" 이라는 말이 삭제된 듯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위기를 느낄 만하기에, 메이린느는 다 급하게 훼이드리온을 불렀다. 하지만 그는 잠시 고개를 돌리더니 슬쩍 미 소를 띄우고 다시 필로윈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는 미소를 지었고, 여전히 자신만만했다. "상관없어. 그 카드가 있든 말든 내가 이 자리에서 카드 마스터가 되는 것에는 일절 상관없어." 필로윈의 마이페이스가 무너져버렸다. "그,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 카드가 있어야만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응, 그랬지." "모순이잖습니까!" "모순? 아냐, 절대. 난 논리에 어긋난 말을 하고 있지 않아." 필로윈의 표정은 더더욱 구겨져 버렸다. 이 태자가 정말 헛소리를 하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대마도사가 만든 카드는 그것들만 있는 게 아니니까." "그게 무슨……?" "마스터 카드 중에 전설의 카드라고 불리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 갑작스런 태자의 질문에 필로윈은 잠시 머리를 굴려서 기억을 뒤졌다. 마스터 카드에 대해 책까지 썼던 그였기에 모를 리는 절대 없었다. 그는 이내 대답했다. "10대 마스터 카드를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래, 맞아. 10대 마스터 카드. 그 카드들은 무엇으로 이루어져있지?" "드래곤 카드와 사신 카드. 드래곤 카드는 레드 드래곤, 골드 드래곤, 화 이트 드래곤, 크림슨 드래곤, 블랙 드래곤, 블루 드래곤 카드가 있고, 사 신 카드로는 청룡, 백호, 현무, 주작 카드가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훼이드리온은 간단히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그래, 그 카드들. 10대 마스터 카드라고 불리는 그 카드들도 대마도사 가 만든 것들이야. 마스터 카드 중에서도 가장 최초로 만들어진 것들이 지.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겠어?" 필로윈은 '설마' 하는 얼굴로 그에게 되물었다. "그 10대 마스터 카드 마법을 사용하겠다는 겁니까?" "응, 맞아." 참으로 경쾌하고 매끄러운 대답에 필로윈은 헛웃음을 들이킬 수밖에 없 었다. "그 카드는 대륙의 게이머 중에서도 그 누구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여행 중에 그 카드를 찾아서 숨겨두기라도 하신 겁니까? 대체 어떻게 마 법을 사용하시겠다는 것이죠?" 따지기라도 하듯이 열을 올리는 필로윈의 앞에서 그는 여전히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 대책 없이 자신하는 태도에 필로윈도 더 따질 맘이 사라졌는지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곧 입을 열었다. "환상의 카드, 대소환사 카드를 알고 있지?" "그렇습니다." 이제 필로윈은 잠자코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로 결심했다. "마스터 카드의 역사가 500년이 지나는 동안 단 한번도 모습을 드러내 지 않았던 환상의 카드, 대소환사 카드. 의문이 생기지 않아? 왜 한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는지." 훼이드리온은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카드의 현자는 이렇게 기록을 남겨놨어. 환상의 카드라고 불리는 대소 환사 카드는 어쩌면 카드가 아니기에 보이지 않는 것일 지도 모른다, 라 고 장난스럽게 말이지. 하지만… 난 거기서 알아버리고 말았어. 대소환사 카드가 어떤 것인지, 어떻게 생겼는지." "……그게 무엇입니까?" "바로 이 주머니. 내가 찾아낸 대마도사의 마스터 카드를 담고 있던 이 갈색주머니가 바로 '대소환사' 카드야. 능력을 말하자면 사용자를 정말 '대소환사'로 만들어주지." 그들은 또 다시 할 말을 잃고 침묵에 빠져들었다. 어디서나 볼 수 있을 평범한 갈색의 주머니를 환상의 카드라고 말하는 태자의 태도가 너무 어 이없어서였다. 태자를 믿고 있던 하이마크조차 얼이 빠진 듯이 허망하게 먼 하늘을 바라보던 차였는데 더 이상 뭘 말하겠는가. 그런 요상한 분위기를 만들어낸 훼이드리온은, 그러나 전혀 흔들리지 않 는 듯이 당당하게 주머니를 들고 서서는 여전히 빛나고 있는 금성안을 뽐내며 입을 열었다. "보기나 해." 그 순간, 갈색주머니에서 금색의 빛이 흘러나왔다. 세상 어디에서도 다 시 볼 수 없을 화려한, 그러나 온화한 느낌이 되는 금빛. 그것은 훼이드 리온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금성의 빛과 정도를 같이 하면서 마치 숨 을 쉬듯이 밝혀졌다. 금색으로 변해버린 갈색의 주머니. 훼이드리온은 머금은 미소를 유지한 채 주머니의 입구로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금빛이 한층 더 강해지고, 강 한 햇빛조차 무시하면서 사방으로 빛이 퍼져나갔다. 필로윈이 한참 그 빛을 바라보며 '왜 눈이 아프지는 않는 건지.' 라는 생 각을 해보고 있을 때, 빛은 다시 어느 정도 삭으러들었다. 그리고 금성안 을 가진 훼이드리온의 손에는 언제인지 모르게 금색의 카드가 들려있었 다. "……그, 그것은?" 필로윈은 멀리서도 그 카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눈으로 확인한 것 이 아닌 그저 직감으로. "맞아." 파르르 떨리는 필로윈의 입술을 보면서 훼이드리온은 즐겁게 입을 열었 다. "10대 마스터 카드 중, 골드 드래곤 카드이지." 황금으로 이루어진 듯 금색의 빛을 옅게 흘리는 그 카드에는 금빛으로 빛나는 드래곤의 형상이 그려져 있었다. 아무리 눈썰미가 없는 사람이 본 다고 해도, 그것은 절대 '골드 드래곤'이었다. 훼이드리온은 그 카드를 왼손으로 옮겨 잡았다. 그리고 똑바로 세워 필 로윈에게 보이듯이 그 카드를 들고는 자신 있는, 힘이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이 카드의 의지를 읽으면." 금성안이 금빛의 카드로 향했다. 태자의 입이 작게 열렸다. "골드 드래곤 소환." 대소환사 카드의 능력은 사용자 자체를 대소환사로 만들어주는 것. 대소 환사는 대륙 어디에서든지 10대 마스터 카드를 불러와서 카드 마스터가 드래곤과 사신의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한 카드, 아니 주머니였던 것이 다. 거대한 금빛의 소용돌이가 골드 드래곤 카드를 중심으로 허공까지 솟구 쳐 올랐다. 그곳에 있는 마법사 둘, 필로윈과 카를레오는 그것이 무엇인 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거대한 마력의 소용돌이. 마력이 금빛을 띄며 소용돌이로 형상화되는 정 도의 강력한 마력의 움직임이었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몸을 추스렸다. 이 정도의 강력한 마력의 움직임은 근처의 마법사가 가지는 능력조차 깨어 버릴 정도의 위력을 자랑하기 때문이다. 몰아치는 바람과 거대한 금빛의 기둥. 그리고 그것을 일으킨 채 여유 있 게 웃고 있는 훼이드리온은 진정으로 카드 마스터로서의 자각을 한 듯했 다. 곧 금빛의 기둥이 걷히고 훼이드리온을 제외한 이들은 또 한번 비명을 지르고 싶은 기분이 되어야만 했다. 마력이 흔들고 지나간 그곳, 왕성의 창공에는 거대한 금빛의 도마뱀, 말 그대로 전설의 종족인 골드 드래곤이 떠있었던 것이다. 형용할 수 없게 거대하게 빛나는 거대한 몸집과 한번 흔들어도 모든 것 을 날려버릴 듯한 날개. 그리고 온화하게 빛나는 금빛의 눈동자. 그 눈동자가 자신을 이곳으로 소환한 대소환사에게 향했다. 드래곤의 눈 빛이 이채롭게 빛났다. [……카드 마스터. 이루었구나, 소년.] 훼이드리온은 반갑게 인사했다. "오랜만이군요, 골드. 와줘서 감사합니다." [아니다, 소년. 대소환사, 카드 마스터의 부름을 받고 오는 건, 당연한 일. 그것은 대마도사 때부터 약속되어진 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감사함 을 느낀다, 소년 그대에게.] 500년 만에 나타난 초유의 존재. 카드 마스터가 된 소년은 필로윈을 향 헤 시선을 내리며, 골드 드래곤에게 물었다. "무엇을요?" 골드의 말. 그것에 필로윈을 비롯하여 훼이드리온에게 반하는 행동을 하 고 있던 모든 기사들은 동시에 무릎을 꿇었다. 거대한 중압감을 가진 골드의 말. [카드 마스터가 이 땅에 재래함을.] --------------------------------------------------------------------- 99편. 카마 사상 최대의 분량을 자랑하는 편인 것을 알립니다. 이걸 올리 면 몇줄이 나올까, 상당히 궁금하군요. 아하핫. 자아, 그럼. 다음 편 대망의 완결편. 100편.입니다. 어둠의 기사 DARK KNIGHT TEAM.. 덧하나. 추천 감상 비평. 받습니다아- 덧두. GO CAMA 덧석. 혜리양. 넣었어, 됐지? :) 번 호 : 24 / 25 등록일 : 2001년 02월 21일 03:50 등록자 : 암음기사 조 회 : 10 건 제 목 : [카드 게임 판타지]『카드 마스터(Card Master)』#100 <10장'운? 카드 게임 판타지(Card Game Fantasy) 카드 마스터(Card Master) 100. 훼이드리온은 오랜만에 와보는 누님의 방에서 따뜻한 햇빛을 받으며 시 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가 왕성에 들어와서 카드 마스터가 되어 반란을 진압한지 벌써 일주일 가량이 지난 후였다. 그동안 훼이드리온은 누님과 함께 아픈 국왕을 대신하여 왕성 안의 모든 귀족들의 저택에 직접 찾아 가 충성의 약속을 받아냈다. 그리고 그로서도 나름대로 믿음을 줄 수 있 는 말을 했고, 무엇보다 대마도사의 재래를 기쁘게 여긴 그들도 쉽게 태 자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무엇보다 껄끄러웠던 건 반란의 주동자였던 필로윈과 바이마크의 처리 건이었는데, 이 것은 훼이드리온이 둘을 용서함으로서 종결되었다. 반란 이었든 뭐였든, 그 둘이 왕성을 잡은 후 나라 안 곳곳에서 올라오던 상소 문은 일체 끊어졌고 좋은 쪽으로 발전을 했던 것이다. 훼이드리온은 그 점을 높게 사 그들을 용서하는 대신, 앞으로도 계속 나라에 충성하면서 국정을 도와달라는 부탁을 하였다. 필로윈과 바이마크는 눈물까지 머금으 며 그에게 "감사합니다, 태자 저하!"를 연창 할 뿐이었다. 그렇게 바쁜 시간을 보내고 오랜만에 누님과 휴식을 가지게 된 훼이드 리온은 소파에 깊게 몸을 묻힌 채 나른한 기지개를 폈다. 그때 동생의 눈 을 바라보고 있던 메이린느가 살풋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금성안은 이제 지워지지 않나 보구나." 훼이드리온은 눈을 만지다가 이내 피식하고 웃고 말았다. "카드 마스터로서 완벽하게 자각을 했으니까요." 그녀는 동생의 대답에 미소의 농도를 더욱 진하게 만들었다. "훼이가 카드 마스터가 되는 것… 운명이었나 보구나. 그래서 그렇게 거 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던 거니?" "거부감…은 있었어요. 하지만 이젠 아니에요." 문득 그는 슬픈 얼굴이 되었다. 그 이야기를 떠올리자 게이트 마을에 두 고 와야만 했던 아이가 생각났던 것이다. 갑자기 어두운 표정을 짓는 동생을 유심히 바라보던 메이린느는 곧 그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는 걱정이 담긴 목소리로 동생에 에게 물었다. "미르는 아직 도착을 안한 거니?" 미르. 훼이드리온은 필로윈에 의해서 미르를 만나게 되었지만 화를 내지 않았다. 그것은 미르의 직업상 의무이자 임무였고, 그렇기에 당연했으니 까. 그들은 다시 친구 관계로 회복되었고, 미르는 그래도 미안한지 훼이 드리온이 거절을 하는 것을 뒤로 하고 아이의 소재를 알아보기 위해 직 접 게이트 마을로 향했다. 그게 그저께의 일이었다. 훼이드리온은 넌지시 고개를 끄덕이며 창 밖을 바라보았다. 화창한 날 씨. 그래서 더욱 더 아이가 생각났다. "아직…도착 안 했어요." "아니, 했다." 화들짝 놀라다, 라는 표현이 너무나 잘 어울리게 메이린느와 훼이드리온 은 방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로브는 벗었지만 여전히 검은 색 일색을 하고 있는 미르가 언제 들어왔는지 카펫 위에 서서 둘을 바라보고 있었 다. 아직 소년의 행동에 적응을 하지 못하는 누님을 미안하지만 뒤로 미뤄 두고, 훼이드리온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미르에게 다가갔다. "어떻게 됐어, 미르? 아이는? 기다리고 있으라고 말하고 온 거야?" "못했다." 무감정하게 입을 여는 미르. 훼이드리온은 순간적으로 아려오는 가슴을 느끼며 재차 입을 열었다. "왜? 뭐 때문에?" 미르는 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해야만 했기에, 곧 천천 히 말했다. "내가 갔을 땐. 이미 여관에 없었다." "찾아봤어야지! 다른 곳에 있을 지도 모르잖아!" "내가 안 찾아봤을 거라고 생각하나." 최후의 가능성마저 미르의 말에 무너졌고, 훼이드리온은 비틀거리며 소 파에 걸터앉아버리고 말았다. 솔직히 그도 그녀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또한 자신이 그녀를 데리러갈 수 있을 거라고도 생각지 않았다. 하지만 만약에 그녀가 있다 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면 정혼을 파기하고서라도 그녀를 데리러 가 려했다. 그가 왕성으로 돌아와서 한참 반란 뒷수습으로 바쁘던 6월 8일. 신성제 국 하쉴로츠에서 다시 전문이 왔던 것이다. 내용은 '성녀께서 건강을 되 찾아 15일까지 수도로 가겠습니다.', 이제 결혼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훼이야." "지금은 아무 말도 하지 말아주세요, 누님. 지금은……." 괴로워하는 동생의 거절에 메이린느는 자신도 눈물을 머금고 고개를 돌 려버렸다. 훼이드리온의 마음이, 절실하고 간절했던 그 마음이 직접 피부 를 타고 느껴지는 것 같아 슬프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기분이 되어버 렸다. "……미안하다." 미르의 공허한 한마디만이 어느새 슬픔으로 가득 찬 공주의 방을 메아 리쳤다. 6월 15일. 훼이드리온은 자신의 방에서 완벽한 예복을 갖추어 입고 멍청한 얼굴로 탁자에 자리해있었다. 왕성 최고의 재단사가 만들었다는 예복은 그의 수 려한 용모에 너무나 잘 어울려 마치 하나의 그림을 보는 듯한 착각을 일 으켰지만, 그는 조금도 즐겁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을 찾지 못한 채, 사랑하지도 않는 여인과 결혼해야하는 운명. 태자로서 나라를 위해 당연한 그 운명을 훼이드리온은 저주하고 싶 었다. '달과 운명의 여신 하실루스여. 그녀는 당신의 자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도 이럴 수 있으신 겁니까.' 아이도 자신을 사랑했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애절하게 웃었던 이별의 그때. 그녀의 그 모습을 도저히 잊을 수 없는 훼이드리온은 이윽고 또 다 시 눈물을 떨구고 말았다. 기약할 수 없는 약속을 하고는 떠나야했던 그 모습. 그 장면. 그때의 기억이 다시 떠오르고, 그는 두 손으로 이마를지 탱한 채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삼켰다. "……흑, 크흑…" 누구에게도 보이면 안될 태자의 눈물. 태자이며, 이젠 대마도사의 재래 라 일컬어지는 카드 마스터인 자의 눈물. 아무도 없는 곳에서 훼이드리온 은 그렇게 조용히 흐느꼈다. "…태자 저하? 성녀께서 수도로 입성하셨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대궁전 으로 이동하셔야합니다." 문밖에서 아르 집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자가 돌아왔을 때 그렇게 기뻐하며 반겨주었던 그. 훼이드리온은 금방 눈물을 닦고 거울을 보며 얼 굴을 매만졌다. 어쨌든 이젠 모든 왕성을 대표하는 자신이었다.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서는 절대 안되었다. "알았어요. 지금 나갈게요."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옷을 단정하게 정리한 그는 "흠." 하는 소리와 함 께 얼굴 근육을 긴장시켰다. 이제부터는 완벽하게 태자의 모습은 해야했 다. 사랑을 잃고 무너지는 모습 따위, 그 스스로도 용납할 수 없었다. 카펫 위에서도 뚜렷한 소리가 들려올 정도로 또박또박 문으로 걸어간 그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여전히 건장한 체격의 아르 집사와 시종 몇이 복도에서 대기를 하고 있었다. "밖에 마차가 대기하고 있습니다. 가시지요." "네, 그래요." 의미 없는 답변과 함께 훼이드리온은 조용히 앞장서서 1층으로 내려갔 다. 기다리고 있던 시종들이 공손히 인사하면서, 차분한 미소로 훼이드리 온에게 축하의 말을 던졌고, 그는 그것을 힘들게 웃으며 받았다. 저택의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곧 마차의 모습이 보였다. 하얀 백마 두 마리가 마차에 구속당한 채 푸르륵 소리를 내며 금방이라도 달 리고 싶은 듯 발로 땅을 긁고 있었고, 그 움직임에 따라 조금 흔들거리는 마차는 역시 하얀 바탕에 금색으로 치장되어진 고급스러운 디자인의 것 이었다. "오르시죠." 마부가 훼이드리온에게 인사하는 동안, 아르 집사가 마차의 문을 열고 말했다. 훼이드리온은 별 다른 행동 없이 그냥 평범하게 마차에 올라 한 쪽에 자리했다. 시종들에게 몇 가지 지시를 한 후 아르 집사가 반대편에 올라 문을 닫자, 마차는 곧 천천히 움직이며 출발했다. 작은 흔들림 속에서, 조금씩 귀에 닿는 말의 발자국 소리에서 훼이드리 온은 알 수 없는 안타까움을 느꼈다. 이 마차를 타고 대궁전으로 가 이국 에서 온 성녀와 결혼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럼 이제 정말 끝이다. 더 이상 의 기회가 없는 완벽한 끝. '하지만… 이제 의욕도 없어.' 무료하게, 아무 힘없는 푸른 눈동자는 마차의 창문을 통해 뒤로 움직이 는 배경을 그냥 보고 있을 뿐이었다. 마차는 천천히 움직여 대궁전 앞에 도달했다. 많은 사람들이 와있었고, 걔 중에는 왕성 바깥, 지방에서 올라온 귀족들도 있었다. 모두들 대궁전 안, 그리고 밖에서 마치 축제라도 여는 듯 흥겹게 술잔을 들고 분위기를 즐기고 있었다. "내리십시오." 훼이드리온은 마차가 이미 정지한 줄도 모르고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 고 있다가, 아르 집사의 말을 듣고 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아, 네." 힘없이 대답하면서 마차에서 내려서는 훼이드리온. 그를 발견한 많은 사 람들이 곳곳에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그저 아르 집사의 이 끌림대로 대궁전 안으로 들어섰다. 성인식 때와 별반 달라진 게 없는 대궁전. 훼이드리온은 역시나 별다른 감흥을 받지 않고 하얀 카펫이 길게 깔려 단상까지 이어진 길을 지나 대 궁전의 앞으로 갔다. 피로한 얼굴의 아버지, 국왕 카드리온이 키보다 더 큰 의자에 앉아 훼이 드리온이 걸어오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훼이드리온은 무릎을 꿇고 앉 아 인사를 하고 다시 일어나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병환은 많이 나으셨는지요?" "많이 괜찮아졌다, 태자. 오늘 따라 더 애비를 닮은 거 같구나. 어허허 허." 가벼운 농담까지 던질 정도면 정말 많이 나은 모양이었다. 훼이드리온은 어머님, 왕비 에스린느에게도 인사를 했다.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어머님." "노고는 무슨, 마땅히 해야할 일이니라. 예복이 잘 어울려서 다행이구나, 태자야." "감사합니다, 왕비님." 고개를 숙이면서 인사한 훼이드리온은 누군가 한 명이 빈다고 생각하고 는 국왕과 왕비 주변을 살폈다. 확실히 누군가 이곳에 없었다. 왕비가 그런 태자의 모습을 살피고는 인자한 미소를 띄며 말해주었다. "공주는 조금 후에 도착할 거란다." "아, 네. 그렇군요." 훼이드리온은 입을 다물고 뒤편을 둘러보았다. 여기저기서 자신을 보고 수근대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런 의미 없는 수다에는 전혀 신경이 쓰이 지 않았다. 그는 예식이 있을 대궁전이 어떻게 치장되었는지가 더 궁금했 다. 화려한 색유리. 천들로 치장된 기둥들. 엄청나게 화려하지는 않고 적당 히 기준을 맞춘 그 화려함은 예식장의 수준을 떨어뜨리지 않게 적당한 고품격을 느끼게 했다. 그가 예식장 안으로 둘러보며 "흐음…" 하고 감명을 받고 있을 때, 밖에 서 시종의 외침이 들려왔다. "성녀께서 오십니다!" '드디어……인가.' 만약 두 달 전쯤과 상황이 같았다면 충분히 기쁠 수 있을 상황이었다. 원하지 않는 결혼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러나 이젠 아니었다. 그래서 그 는 축 늘어진 어깨를 겨우 추스르며 국왕을 대신해 성녀를 환송하러 밖 으로 나갔다. 대궁전 왼편에서부터 다가닥다가닥 소리가 천천히 들려오더니 이내, 마 차의 행렬이 길게 이어져 들어왔다. 하얀 백마와 하얀 마차. 신성제국에 서 오는 손님 아니랄까봐, 보는 이로 하여금 어떤 신성한까지 느끼게 만 드는 마차들이었다. 훼이드리온은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바이마크와 만나 짧게 인사를 나누 고 마차가 정지하기를 기다렸다. 이내 정지한 마차. 훼이드리온이 먼저 앞서 다가가자 마차의 문이 덜컹 하며 열리며 한 남자가 땅으로 내려섰 다. 그가 훼이드리온에게 다가와 깊게 허리를 숙였다. "마법왕국 라시엔트의 태자이신 훼이드리온 레이틴 라시엔트님 되시지 요?" "네, 그렇습니다." 남색의 로브에 흰색의 선으로 포인트를 준 듬직한 체구의 그가 고개를 들어 화사하게(?) 웃었다. 훼이드리온은 이 남자는 어디선가 본 것 같은 기분을 느꼈지만 이내 공식적인 자리라는 생각에 지워버렸다. "신성제국 하쉴로츠의 재상, 사르덴 드 데카드라고 합니다. 성녀님을 모 시고 왔습니다." 그, 사르덴은 잠시 돌아서서 아직 문이 열려있는 마차 안으로 넌지시 말 했다. 이곳까지 오는 내내 말없이 슬픈 표정만을 짓고 있었던 성녀님이 과연 제때 나와 주실까, 하는 작은 걱정을 안고서. "성녀님. 나오십시오." 훼이드리온은 한 발자국쯤 뒤로 가야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몸을 움 직였다. 이제 곧 결혼을 할 여자를 만나게 된다고 하니 조금 들뜨는 기분 이기도 했지만, 역시 곧 식어버렸다. 어떤 여자든 그에게는 이제 별 상관 이 없었다. 사르덴이 잠시 마차 안으로 고개를 넣어 몇 마디 하더니 다시 고개를 내밀었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조금 쑥스러우신가 봅니다. 이제 나오신 답니다." 훼이드리온의 눈동자가 자연스럽게 마차의 문으로 향했다. 문으로 가려 져 있던 곳에서 하얀 드레스를 입은 누군가가 마차 밑으로 나오려하고 있었다. 은빛의 머리카락. 그리고 얼굴을 가리고 있는 하얀 천. 호리호리하지 않 고 적당하게 살이 잡혀 소녀임을 알려주는 몸. 훼이드리온보다 약간 작은 키를 가진 성녀는 그 자체에서도 성스러움을 느낄 수 있을 만한 조용한 움직임으로 땅에 디디고 섰다. 그녀가 있음으로 해서 그 공간 자체가 신 격으로 승격되는 느낌. 그건 꼭 훼이드리온의 머리 속에서 도는 생각은 아닐 것이다. 훼이드리온은 천으로 가려진 그녀의 얼굴로 시선을 보냈다. 얼굴이 보이 지 않았지만 눈동자가 투명하다는 것은 알고 있다. 성녀의 생김새가 그렇 다고 들었으니까 말이다. 그는 짧은 숨과 함께 그녀를 에스코트하기 위해 조금 다가섰다. 그때, 조신하게 손을 모으고 서있던 성녀의 아름다운 목소리가 그의 뇌리 속으 로 스며들었다. "……훼온?" '훼온이라. 그래, 여행 중에는 저런 이름을 썼……긴 했는데, 성녀가 그 걸 어떻게 아는 거지?' 훼이드리온이 성녀를 향해 '에?' 라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을 때, 성녀 가 얼굴을 가리고 있던 천을 거칠게 확 잡아뜯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소 리쳤다. "훼온! 나야, 아이!" "……에?" 그녀가 훼이드리온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성녀의 신성함 따위는 어디론 가 집어 던져버리고 사랑하는 여인의 모습 그대로, 사랑하는 연인의 품으 로 말이다. 훼이드리온은 갑자기 돌변하는 성녀의 태도에 적응되지 않는 얼굴로 멍 하니 있다가, 갑자기 느껴지는 성녀의 따뜻한 체온에 정신이 확 돌아왔 다. "아, 아이? 아이라구?" "응, 나야 훼온……." 흐느낌이 묻어나는 성녀, 아이의 목소리. 훼이드리온은 은빛의 머리칼 속에서 익숙한 향을 맡았다. 그동안 그렇게 그리웠고 보고 싶었던 그녀. 난생 처음으로 사랑을 느꼈으며 그로 인해 슬픔까지 느껴야만 했던 그녀. 훼이드리온은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느끼고는 아이를 품에 안 았다. 가늘게 떨고 있는 그녀의 몸이 그를 더없이 행복하게 만들었다. 아 이였다. 그의 사랑, 아이였던 것이다. "아이……." 그렇게 다시 불러보고 싶었던 이름. 기묘한 운명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 는 성녀와 태자로서의 만남. 그들만의 사정을 알 리 없는 사람들의 웅성 거림 속에서 그들은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오랜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 었다. '다행입니다, 성녀님.' 사르덴. 여행 중간에 태자를 만난 바 있는 그는 이미 모든 것을 파악해 버리고 성녀의 행복을 진심으로 축복했다. 모두들 오늘 처음 만난 태자와 성녀가 오래 시간동안 사랑해온 연인 같 이 강하게 포옹하고 있는 모습에 어리둥절해하고 있을 때, 하지만 그 중 에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한 미소를 짓고 있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필로윈과 루페르스였다. 루페르스는 아슬아슬하게 대궁전에 도착했다가 그 장면을 보고는 즐거 운 듯한 미소를 지으며 필로윈에게 다가갔다. "보기 좋은 장면이야." 필로윈이 그에게 시선을 잠시 돌렸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군요." "저것도 예상했던 거야?" 마스터의 물음에 태자의 후계자 수련을 둘러싼 모든 것을 계획했던 필 로윈은 넌지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저건 정말 운명이라고 밖에 할 수 없습니다. 제 계획은 완벽했 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허점도 있었군요. 기분 좋은 허점이지만." 그는 만족한 듯한 미소를 지으며, 아직까지도 끌어안고 있는 태자와 성 녀, 훼이드리온과 아이린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1414년 6월 15일. 오파투스의 첫 번째 영역에서 빛나는 마스트의 눈이 위넨스의 손길과 함께 네트릴리라의 생명들을 축복해주고 있는, 훼이드리 온과 아이린이 여행에서 만난 지 꼭 한 달이 되는 날의 행복하고 아름다 운 장면이었다. <카드 마스터 完> --------------------------------------------------------------------- ...完입니다. 카드 마스터. 100편을 끝으로 이제 더 이상 올라오지 않는 것 입니다. 아하하하(메마른 웃음). 드디어. 완결을 하게 되었군요. 어쩐지 시원하기도 하고, 또한 섭섭하기 한 것이... 지금 맘이라면 정말 200편 300편 갈 때까지 계속 쓰고 싶습니다. 훼이와 아이의 사랑 이야기라든지, 카드 마스터에게 도전해오는 게이머들 이야기라든지. 생각나는 건 많습니다. 정말. 또 이야기를 만들게 된다면. 나중에 카드 마스터2라는 제목으로 이야기를 만들게 된다면, 정말 쓰고 싶 은 것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제 카드 마스터는 이것으로 끝내겠습니다. 이 뒷 이야기들은 여 러분들이 스스로 만들어내보세요. 그동안 이 미천한 자까 팀군이 여러분들 을 리드해왔지만, 이젠 아닙니다. 카드 마스터의 세계 안에서 여러분들의 무한한 상상력으로 또 다른 이야기들이 탄생되었으면 합니다. 2000년 5월부터 2001년 2월. 세기를 뛰어넘으며 적어왔던 자까 팀군의 글. 카드 마스터 100편의 이야기는 오늘 부로 이렇게 끝을 맺겠습니다. 다음 글에서 더욱 좋은 모습으로 여러분들을 찾아 뵐 것을 굳게 맹세하면 서. 팀군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어둠의 기사 DARK KNIGHT TEAM... 덧하나. 추천 비평 감상. 완결 후에도 받습니다.(^^^) 덧두. GO CAMA 덧석. 완결편이라도. 덧.은 빠질 수 없겠죠?(^^^) 번 호 : 25 / 25 등록일 : 2001년 02월 21일 03:57 등록자 : 암음기사 조 회 : 6 건 제 목 : [공지] 카드 마스터 100편 완결입니다.(^^^) 뭔가. 시원하면서도 섭섭한 그런 오묘한 느낌이네요. 이게 완결...이라는 것이 기분이로군요. 아하하. 글을 쓰면서 완결.이라는 것을 해본 것은 꽤 되기는 하지만. 카마는 조금 더 특별한 것 같아요. 왜일까요.(^^^) 하하. 아무튼. 이제 더 이상 이곳에 글을 올릴 일은 없겠군요. 과연 추연란에 제가 다시 올라올 수 있을까요? 그랬으면 좋겠지만. 하하하. 다음 글도 꼭 좋은 글로 찾아뵙겠습니다.(^^^) 그때까지. 팀군. 잊지 말아주시길-!(>.<)/ 어둠의 기사 DARK KNIGHT TEAM... 덧하나. 꾸벅.(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