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 서 명 : 치우천왕기 8권(자오지 한웅) 지 은 이 : 이우혁 펴 낸 이 : 이정원 출 판 사 : 도서출판 들녘 출판년도 : 2004년 12월 10일 봉 사 자 : 정웅희 <지은이 소개/ 이우혁> 1965년 5월 18일 서울 출생. 상문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기계설계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대학 때부터 아마추어 연극, 뮤지컬 등에 깊은 관심을 보여 13편 이상의 극에 연출. 출연하였으며, 하이텔 고전음악 동호회에서 한국 최초의 아마추어 오페라 ‘바스티앙과 마스티엔느‘를 각색, 연출하기도 했다. 1994년 <퇴마록>, 1998년 <왜란종결자> 등을 발표하여 수백만 독자들의 사랑 속에서 일약 대중 문학의 대표작가로 떠올랐다. 지금도 그는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좋은 작품을 발표하기 위해 작업실에서 작품구상에 몰두하고 있다. 이우혁 홈페이지 www. youk.co.kr <미디어서평> 한국 판타지 문학의 정점에 우뚝 선 작가 이우혁! 새로운 가능성, ‘영웅 판타지’의 세계가 열린다! 1994년 1월 ‘퇴마록’이 발간되었습니다. 1993년 PC 통신에서 회자되었던 그의 작품이 출간될 당시 그 작품이 그렇듯 오랜 생명력을 발휘하리라곤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습니다. 숱한 화제와 800만부라는 어마어마한 판매기록을 세우고 근 8년 만에 막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2003년 7월, 작가가 계속 관심을 가져왔던 ‘치우천왕기’가 출간되기에 이르렀습니다. 9년 동안의 자료 수집과 세 차례의 중국 방문으로 이 작품에 쏟은 작가의 열정은 정말 남다릅니다. 고작 2백 줄도 안 되는, 그것도 태반이 중복되는 자료 몇 줄을 가지고 한 사람의 일대기와 그 시대를 다시 구성한다는 것은 참으로 지난한 일이라고 작가는 고백합니다. 다시 말해 판타지의 기법으로도 어려운 일이었으며, 어쩌면 그 내용을 쓴다는 것 자체가 판타지라고 할 수도 있을 테니까요. 사전에 나와 있는 치우에 대한 소개는 이렇습니다. 치우(蚩尤):중국 고대 신화에 나오는 거인족의 우두머리. 염제(炎帝)의 후예이다. 전설에 의하면 81명의 형제가 있었는데 모두 동(銅)으로 된 머리와 철로 된 이마를 가지고 있었고, 머리 위에는 긴 뿔이 있었으며, 매우 모질고 사나웠다고 한다. 과(戈)?모(矛)?극(戟)?추모(酋矛:자루의 길이가 스무 자인 창)?이모(夷矛) 등의 병기를 만들었다. 황제(黃帝)와의 전쟁 중에 과부족인(?父族人)?풍백우사(風伯雨師)?이매망량(魅:도깨비)의 도움을 받았다. 치우는 연기를 빨아들이고 안개를 뿜으며, 공중을 날고 험한 곳을 뛰어넘을 수 있다. 후에 치우는 전쟁에서 패해 죽음을 당했으며, 그 피는 도리깨를 물들여 단풍나무 수풀을 이루었다. 고대 제(齊)나라에서는 8존천신(八尊天神)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치우는 그중 3번째로 모셔졌다. 진(秦)나라 말기에 유방(劉邦)이 기병할 때 패정(沛庭)에서 치우와 황제에게 제사를 지냈다. 후대에 와서 치우는 전쟁신으로 받들어졌다. 이 기록은 중국측에 나와 있는 자료를 근거로 한 설명입니다. 동으로 된 머리, 철로 된 이마, 다양한 병기를 사용하는 치우의 묘사를 보건대, 분명 그는 당시 철기문화를 선진적으로 수용했던 것이 분명한 것 같습니다. 주신족의 신시(神市)는 단군조선 이전의 나라요, 1500년간이나 계속된 나라이며, 치우(蚩尤)는 그 14대 황제로 황하유역에서 일어나서 회대(淮垈, 중국 회수와 산동 사이의 땅)를 정복한 왕입니다. 그리고 공손헌원(황제)는 지나족(중국)을 통일한 왕입니다. 치우와 황제는 지금으로부터 4천7백여 년 전 중국 하북성 탁록(啄鹿)에서 10년 동안 70여 차례나 싸웠는데 이것이 고대 동북아시아 최대의 전쟁이라고 전해 내려오는 그 유명한 탁록전쟁입니다. 비록 탁록전쟁에서 공손헌원(황제)에게 패한 치우이지만 훗날 군신으로 받들어진 것만으로 보아도 그의 용맹성을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튼 이 작품은 고대 역사의 진위성을 따지는 역사서가 아닌, 그야말로 90퍼센트가 작가의 상상력으로 탄생된 ‘영웅 판타지’입니다. 한국 판타지 제2부(제1부는 1998년에 발표한 ‘왜란종결자’)에 속하는 이 작품은 역사의 자료가 턱없이 부족한 고대 역사로의 무한한 상상력을 동원하여 독서의 즐거움과 고대신화로의 충실한 안내자 역할을 하기에 손색이 없을 것입니다. 화합이냐, 지배냐? 역사의 운명을 건 영웅들의 대혈전! 800만 독자를 사로잡은 이우혁의 힘이 되살아난다! ‘퇴마록’ 이후 9년을 고심한 끝에 펼쳐놓은 ‘치우천왕기’! 단군의 고조선 이전, 과연 우리 민족의 시원은 어디였을까? 작가는 채 200줄도 되지 않는 사료를 붙들고 9년의 세월을 고심했다. 단 한 줄의 자료라도 더 찾기 위해 엄청난 양의 독서를 했고, 역사의 원형을 찾기 위해 방랑자처럼 중국 각지를 떠돌기도 했다. 이제 2003년 7월, 그는 뛰어난 역사적 상상력으로 5000년 동안이나 잊혀져 왔던 우리의 선조, 치우천왕을 부활시켰다! 역사의 운명을 건 대혈전의 시작과 끝은? B.C. 2716년부터 B.C. 2696년까지, 드넓은 중국 대륙이 바로 ‘치우천왕’기의 무대이다. 신석기 시대의 말기이며 또한 청동기 시대가 마악 시작된 바로 그 지점에서, 주신족의 치우천과 그의 쌍둥이 동생 치우비의 목숨을 건 모험과 사랑이 시작된다. 모든 부족은 제 색깔대로 공존해야 한다는 화합 사상을 가지고 있는 치우천! 힘으로 천하를 통일해 하나의 강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지나(중국)족의 대족장, 공손헌원! 최고의 전략가이며 전술가인 두 영웅의 운명적인 대결과 엎치락뒤치락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박진감 넘치는 스토리의 힘은 시공을 초월한 상상력의 진수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 마법과 도술, 선인과 신수들이 등장하는 전설의 시대! ‘치우천왕기’에는 영웅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운명을 시험하는 선인들과 신수, 도깨비 등등 온갖 마법과 도술을 부리는 캐릭터가 쉴새없이 등장한다. 인간의 모습을 한 대선인 자부(紫負)와, 파괴와 무질서의 선인인 혼돈(混沌)이 공존하고, 언어의 시조(始祖)인 발귀리(發貴理)와 전설의 동물인 맥(貊), 곤륜산에 살았다는 대주술사 서왕모(西王母), ‘소녀경’의 주인공 소녀(素女) 등이 바로 그들이다. 마법과 도술을 쓰는 그들은 치우천왕과 공손헌원, 그 두 영웅 뒤에서 그들을 돕거나 방해하는 역할을 한다. 거대하고 웅장한 영웅 판타지, ‘치우천왕기’! 이 소설은 역사에 근거하고 있지만 작가가 주창하는 한국 판타지이다. 판타지적인 요소가 많으며, 그러한 요소 없이는 애당초 구성될 수도 없었다고 본다. 실제 역사에 남은 작은 편린으로 구성하느라 무리도 좀 따를 수 있으나 이 작품은 소설이며, 판타지인 이상 재미있고 흥미로운 구성이 단연 돋보인다. 차례 헌원의 약속 거듭되는 함정 그날 밤 유망의 재진격 한웅과의 담판 그림자의 정체 새로운 시작 자오지 한웅 맥달의 행방 소녀와의 결별 걷잡을 수 없는 혼란 헌원의 약속 동굴은 아주 크고 넓었으며, 온 사방이 길게 늘어진 종유석들로 뒤덮여 분위기가 자못 신비로웠다. 보통 동굴은 깊이 들어가면 갈수록 시원해지는 법이지만, 이 굴은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점점 더워지는 것도 신비했다. 마치 한여름의 땡볕을 쬐는 듯 동굴 속을 걸어가는 사람들의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갔다 반은 더위로, 반은 이 동굴을 차지하고 있는 주인에 대한 경계심 탓이었다. 사람들의 숫자는 왜 많았으나 몹시 긴장한 터라 그 누구도 섣불리 입을 열지 않았다. 동굴 안에는 조심스러운 발걸음 소리와 사람들이 들고 있는 관솔불이 가끔씩 '탁탁' 튀는 소리만 고즈넉하게 메아리칠 뿐이었다. 바람이 없는데도 자주깜박이는 불꽃은 여기저기 솟아 있는 종유석들 사이로 사람들의 그림자를 기괴하게 일렁거리도록 만들었다. 그들은 지나족이었다. 대열의 맨 앞에는 덩치 큰 끽구가 있었고, 그 뒤에는 두 명의 선인 광성자와 적송자가 반쯤 눈을 감은 채 걸어가고 있었다. 바로 뒤로 두 명의 신하를 좌우에 거느린 헌원이 걷고 있었으며, 그 뒤로 뭔가를 짊어진 오십 명이 넘어 보이는 긴 행렬이 뒤따랐다. 하지만 그들은 무기를 전혀 들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벌써 그렇게 한나절 넘게 동굴을 걸어 내려가는 중이었다. 갑자기 끽구의 뒤를 따르던 적송자와 광성자가 동시에 걸음을 멈추고 손을 치켜들었다. 그러자 뒤따르던 행렬이 그 순간 딱 멈추어 섰다. 모두가 바싹 긴장해 있었다. 천하제일의 장사라는 끽구 역시 긴장을 감추지 못해 땀을 줄줄 흘렸고, 선인인 광성자와 적송자도 온몸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조금도 얼굴빛의 변화가 없는 것은 헌원뿐이었다. 헌원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것이 옵니까?” 광성자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으며, 적송자는 여전히 반쯤 눈을 감은 채 헌원에게 말했다. “이제는 돌아가려 해도 늦었소이다.” 헌원은 조용히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그냥 돌아갈 마음은 애초부터 없었습니다.” 순간 동굴 전체가 나직한 소리로 웅웅거리며 울리기 시작했다. 뒤따르던 자들의 낯빛이 시퍼렇게 질리는가 싶더니 이내 다리를 후들후들 떨기 시작했다 그들은 지나족에서 손꼽히는 전사에다 힘센 장사들이었으나 두려움을 이기지 못했다. 헌원은 양옆을 따르던 두 사람에게 조용히 말을 건넸다. “풍후, 상백. 자네들이 부하들을 돌보게. 나 혼자 들어가 보겠네.” 풍후는 쉰 살가량 되어 보이는 남자로 곱상하고 영리해 보이는 외모에, 눈을 떴는지 감았는지 모를 정도로 눈이 몹시 작았다. 그는 항상 고개를 갸우뚱하게 기울이고 다녔다. 상백은 머리가 하얗게 세고 흰 구레나룻이 무성했으며 얼굴에 주름살이 많았지만 덩치가 크고 어깨가 떡 벌어져 있었다. 풍후는 버릇인 듯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런가요? 아, 그래야겠지요. 그렇게 하십시오, 헌원님.” 허나 상백은 생각이 달랐다. “너무 위험한 일이오니 헌원님께서는 제발 마음을 바꾸시어 헌원은 조용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해야 할 일일세. 자네가 나를 걱정하는 마음은 잘 안다네. 그러니 마음 약해지게 하지 말게.” 그러면서 헌원은 품안에 손을 넣어 무언가를 꺼내 손에 들었다. 그것은 바로 우린 구슬이었다. 그때 적송자가 입을 열었다. “비록 헌원님의 뜻에 따르기는 하지만 이 일은 아무래도 좋지 않아 보이오. 사람과 사람끼리의 일에 사람 아닌 것을 들이는 것은......” 헌원이 조용히 되받았다. “이미 여러 차례 말씀 드렸지만 제 뜻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자 광성자가 나직이 한숨을 쉬며 적송자에게 타이르듯 말했다. “도리가 없네. 그만 하게. 이것도 다 하늘이 정하신 일일 뿐.” 광성자는 헌원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여기서부터는 혼자 가시는 것이 좋겠소이다.” 앞장섰던 끽구는 몹시 불안한 눈길로 헌원을 쳐다보았다. “제가 같이 가겠습니다.” “아닐세. 자네 뜻은 고맙지만 혼자 가야만 한다네. 그 편이 훨씬 좋을 것이네.” 헌원은 보일 듯 말 듯한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우린 구슬을 두 손에 받쳐 들고 조심스레 앞으로 나아갔다. 끽구는 참지 못하고 그 뒤를 따르려 했지만 광성자가 그를 막았다. “헌원님 말씀이 옳아. 자네는 여기서 기다리게. 이건 헌원님께서 거쳐야 하는 시험이니.” 헌원은 조용히, 서둘지도 않고 느리지도 않은 차분한 발걸음으로 어두운 동굴 속을 걸어 들어갔다. 암흑 속이지만 횃불 하나 들지 않아 몇 걸음마다 종유석이나 석순에 부딪히기 일쑤였다. 그러나 당황하거나 놀라는 기색 없이 그냥 차분히, 마치 동굴과 하나인 것처럼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동굴 안을 웅웅 울리던 조용한 울림은 헌원이 깊이 들어감에 따라 점점 더 커져 마침내는 수백, 수천의 알 수 없는 존재들이 사방에서 떠들어대는 아우성처럼 변했다. 그럼에도 헌원은 조금도 흔들림 없이 차분하게 걸음을 옮겼다. 얼마를 그렇게 더 걸어 들어갔을까1돌연 그의 두 손에 들려 있던 우린 구슬에서 희미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우린 구슬의 빛은 어두운 동굴을 선명하게 밝힐 정도로 빛나고 있었다. 허나 헌원은 언제부터인지 눈을 감은 채여서 우린 구슬에서 빛이 솟아오르는 것도 미처 알지 못했다. 눈을 뜨거나 감거나 마찬가지인 어둠 속에서는 눈을 감은 편이 되레 편했기 때문이다. 허나 빛은 곧 사라지고 헌원은 이내 걸음을 멈추었다. 우린 구슬에서 빛이 솟구쳤다가 꺼짐과 동시에 헌원의 뇌리로 누군가의 사념이 곧장 흘러 들어왔기 때문이다. -누구냐? 무슨 일에도 거의 놀라지 않는 헌원이었으나 이 순간만은 약간 어깨가 움찔거렸다. 헌원은 마음속으로만 이야기할까 했으나 스스로 결의를 다지려는 듯, 큰 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지나, 화산족의 부족장인 공손헌원이다. 그대가 응룡인가?” -응룡? “이미 오래 전부터 내려온 거대한 뱀의 후손. 도를 얻어 신수가 된 그대를 우리 사람들은 응룡이라고 부른다..” 곧이어 그 존재의 비웃음 같은 느낌이 전해져 왔다. 내가 이름을 얻었는 줄은 나도 몰랐군. 그것도 지저분한 더운피가 도는 사람에게서. 헌원은 입술을 깨물었다. 헌원은 화산족 중에서도 뱀족에 속했다. 응룡도 뱀의 일종이며, 뱀은 차가운 피를 지니고 있다. 더운피를 가진 인간과는 본디 결코 함께할 수 없는 생물이다. 이 찬피를 가진 존재들과 더운피를 지닌 인간들은 이미 헤아릴 수 없는 긴 세월동안 서로를 죽여왔다. 그 오랜 기간 동안 이어져온 뱀의 인간에 대한 적대감은, 다른 더운피가 도는 동물들에게 갖는 감정보다 훨씬 더 강렬했다. 뱀족이 비록 뱀의 강인함, 뱀의 독기, 뱀의 모양새를 좋아하고 받들기는 했지만 인간과 뱀 사이의 본질적인 거리를 좁히기는 힘들었다. 허나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헌원이 침착하게 되받았다. “차가운 피가 도는 응룡이여, 그대와 우리 인간 사이에 골이 있다는 것은 안다. 그러나 나는 그대를 세상으로 이끌어내려고 왔다.” 역시 몸에 도는 피만큼이나 싸늘하면서도 빈정거리는 대답이 들려왔다. -네가 들고 있는 것이 발귀리 선인의 우린 구슬이 맞지? “그렇다.” -그것이 아니었으면 감히 내 굴을 기웃거리는 너 같은 인간을 만나주진 않았을 것이다. 그냥 짓밟아버릴 수도 있고. 그래도 헌원은 자신감 있는 눈길로 쏘아보듯이 어둠을 주시했다. 그 느낌이 기이하다는 듯한 응룡의 반응이 느껴지자 헌원이 차분히 말했다. “네가 뭐라 하던 나는 너를 데리고 가야 한다. 너는 나를 따라야 하니까.” -뭐? 그게 누구의 뜻이냐? 발귀리 선인의 뜻이냐, 너의 뜻이냐? “나의 뜻이다.” 순간 마치 컴컴한 어둠에 싸인 동굴 전체가 일렁이며 조롱하는 듯이 물결치는 것 같았다. -네가? 나를? “그대에 비하면 나는 작고 힘없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세상의 처음부터 계셔온 혼돈선인의 이름으로, 그리고 세상을 이끌 공손헌원의 이름으로 그대가 나와 함께할 것을 청한다.” 혼돈선인의 이름에 응룡이 반응을 보였다. -혼돈선인? 그분을 아는가? “직접 뵌 적은 없다. 허나 나는 그분의 뜻에 따라 세상을 이끌 사람이다.” -네가 선인들과 인연이 있었던 것 같기에 내가 정중히 대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뭐? 세상을 이끌어? 대선인이라도 그런 말은 함부로 하시지 않는다. 하물며 너는 선인도 아니다. 조금의 도력도 느껴지지 않는다. 헌원은 가슴을 펴며 당당히 말했다. “나는 도력으로 세상을 이끄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손으로, 사람의 말로, 사람의 생각으로 세상을 이끈다. 우리 지나족은 세상에서 가장 수가 많고, 가장 넓은 땅을 차지하고 있으며, 나아가서는 세상을 하나로 만들 부족이다. 나는 그 부족의 지배자이며, 앞으로 그들의 어버이로 영원히 기억될 사람이다 그리고 이 세상 전부를 지배할 것이다. 이것은 혼돈선인의 후예인 홍균선인에게서 전해진 예언이고, 나는 그 예언을 이룰 사람이다.” 응룡은 잠시 가만있다가 이윽고 '허'하며 좀 누그러진 태도로 되받았다. 확실히 보통사람은 아닌 듯하군. 허나 네가 가진 능력이 무엇이냐? 도력도 없고 별로 힘도 없어 보이는데, 대체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한단 말인가? “나는 사람의 말과 사람의 생각, 사람의 뜻으로 사람들을 지배하고, 그 사람들이 세상을 지배한다. 신수가 강을 뜯고 땅을 뒤엎을 힘을 지니고 있다지만 이미 세상은 사람으로 뒤덮여 있다. 사람 하나하나는 약해도 은 세상 사람들 모두의 힘은 그 어떤 신수보다도 강하다. 그 사람들을 모두 내 뜻대로 움직인다. 그리고 이 세상에 살아 숨쉬는 모든 것을 나와 나를 받드는 사람들의 지배 아래에 둘 것이다. 응룡, 그대도 예외가 아니다.” 갑자기 응룡이 껄껄거리고 웃는 듯했다. -사람이 나, 신수인 응룡을 부린단 말인가? 나 외의 그 어떤 존재도 나를 부릴 수 없다1 관심 없으니까. 응룡은 딱 잘라 거절할 뜻이 역력했으나 헌원은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이미 신수와 사람이 등을 돌리며 살던 때는 지났다. 그대는 신수들이 하나둘씩 차례로 굴복하여 사람의 발밑에 엎드리거나, 아예 세상에서 사라져 가는 것을 정말 모르는가?”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사람들은 감히 신수의 화를 돋우지 않으며, 신수 역시 괜스레 사람들을 건드리지는 않는다. 이건 선인들이 정한 약속이다. “응룡이여, 벌써 세상은 달라졌다. 그대가 뭐라 하던 앞으로의 세상은 도력과 선인의 힘이 지배하는 세상이 아니다. 이미 대선인들은 세상을 사람의 손에 맡겼으며, 그대 고립자들 또한 언제까지나 자기 혼자 숨어 지낼 수만은 없다. 이 세상에서 완전히 떠나거나, 아무도 모르게 죽어 없어지는 짓이 그대들의 운명이다. 이 세상이 사람의 것이 된다는 것은 그대도 눈치 채고 있겠지? 응룡, 그대는 신수 중의 으뜸, 가장 강한 존재라고 들었으니까.” 헌원은 이미 고립자의 존재와 이 세계의 흐름에 대해 어느 정도 식견이 있었다. 응룡은 한동안 생각에 잠긴 듯했다. 헌원은 전혀 서두르지 않고 묵묵히 기다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응룡이 다시 생각을 전해왔다. -너는 왜 하필 나를 찾아왔는가? 나는 더 이상 움직이기 싫다. 너도 알다시피 나는 차가운 피가 도는 뱀의 후손이다. 너는 생각조차 못할 점도로 아득한 옛날에 세상은 우리 일족의 것이었다. 그때의 우리는 너희가 감히 상상도 못할 만큼 강했다. 너희가 크다고 우러러보는 큰 나무들보다 더 우리의 몸이 컸고 내딛는 발걸음 소리만으로도 세상을 울리게 했다. 우리는 땅을 지배하고 세상을 거침없이 휩쓸었다. 그러나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아는가? 우리는 너무 강한 나머지 그 힘을 써선 안 될 곳에 사용했다. 우리 외의 그 어떤 것도 우리의 적수가 될 수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적으로 삼은 것이다. 나는 아무 이유도 없이 벌어진, 피와 찢어진 살점이 나귕굴던 우리끼리의 싸움에서 간신히 살아났다. 몇 번째인지 알 수 없던 싸움이었다. 그 싸움 후, 내 모습을 물에 비추어보고 나는 깨달음을 얻었다. 나는 같은 종족의 피를 뒤집어쓰고 있는 내 모습에서 혐오감을 느꼈고, 그때부터 세상을 떠나 릴은 굴로 들어갔고, 고기를 먹지 않음으로써 스스로를 죽음으로 이끌려 했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나는 죽지 않고 너무나도 긴 기간 동안 살아남게 되었고, 나의 종족들은 모조리 멸망하여 세상에서 찾아볼 수조차 없게 되었다. 지금 있는 자그마한 뱀이나 도마뱀은 몰락한 우리 종족과는 전혀 다른, 찌꺼기일 뿐이다. 세상을 지배하고 뒤흔들었던 우리 종족의 거대한 발걸음 소리는 이제 그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으며 그 소리를 기억해주는 자 또한 없다. 하하, 헌원이여. 세상을 지배하겠다고? 이미 세상을 지배했던 자의 말에 귀를 기울여보라. 세상을 지배했던 우리 종족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지금 세상을 지배한다는 사람들이 우리에 대해 무엇 하나 아는 것이 있는가? 아마 더 이전에도 우리조차 알지 못하는 어떤 종족 들이 있었을 테고, 너희 사람들 이후에도 지금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존재가 세상의 지배자라고 나설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게 어쨌다는 것인가? 지나고 보면 다 부질없고 허망하기 짝이 없는 것....... 응룡은 차분하게 긴 이야기를 풀어냈다. 헌원이 길게 한숨을 내쉬자 응룡은 조용히 덧붙였다. -다 부질없는 짓이다. 나는 서로를 죽이는 것이 싫어 세상을 등졌다. 선인의 이름이나 지배자라는 이름으로 청한다고 내 마음이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1 그런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대의 뜻을 이루는 데 왜 굳이 내가 필요한가? 그대의 말처럼 사람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면, 사람의 힘만으로 충분하지 않겠는가....... 헌원은 그 뜻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응룡이여, 그대가 말한 이야기는 정말 놀랍다 이미 그대들의 세상이 끝난 것은 그대에게는 아쉽고 안 된 일이며, 허무한 일일지 모른다. 그대는 모든 것이 의미 없고 끝없는 반복이라 말하지만, 지금 세상을 이루고 있는 인간에게 그런 말은 의미가 없다. 물론 우리 사람들도 언젠가는 실패하고 그릇된 길로 들어서서 스스로를 망치게 될 수도 있겠지. 허나 그럴지 모른다고 하여 아무것도하지 않으면 이 세상이 죽은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나는 이제 그대의 종족이 우리 인간들보다 먼저 있었다는 것을 안다. 그대는 그대의 일족이 허무하게 사라졌다고 하지만, 우리 인간들의 세상이 이루어질 틀을 닦았다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대가 생각하듯 인간들도 그대 종족을 모조리 잊은 것은 아니다 나 자신이 화산족의 뱀족이다. 우리는 뱀을 섬긴다. 차가운 뱀을 왜 섬기는지 이전까지는 잘 몰랐지만 나는 오늘에서야 분명히 알게 되었다. 잊혀졌지만 정말 잊혀진 것은 아니기에 우리 더운피가 흐르는 인간들이 너희 찬피가 흐르는 뱀족을 받드는 것이다.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 중에 헛된 것은 없다.” -헌원, 그대는.......우리 차가운 피 종족의 세상이 헛된 것이 아니었다고 말하는 것인가? 응룡의 울림 속엔 착잡한 느낌이 스며 있었다. 순간 헌원은 응룡이 품고 있는 가장 큰 감정은 바로 자멸해버린 자기 종족에 대한 슬픔과 회한 그리고 허무함이라고 정확하게 짙어냈다. 응룡이 자신을 따라나서느냐 아니냐는 바로 그러한 점을 적절히 짚어내느냐 못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그대들이 없어져버린 것은 안 된 일이고, 되돌릴 수도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이 아무 뜻이 없다고는 믿지 않는다. 내가 만들고 싶은 세상 또한 아주 먼 훗날에 보면 헛되다 할지 모른다. 하지만 나중에 헛되게 보인다고 지금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어찌 옳단 말이냐? 그대가 본 대로 사람은 너무나 나약하다. 하나만 떼어놓으면 들짐승 하나만도 못한 게 사람이다. 그러나 사람은 말과 생각으로 뭉쳐서 강인한 존재가 되었다. 그대의 종족이 이빨과 발톱의 힘으로 했던 일을 우리 사람은 말과 생각으로 해보려는 것이다. 그대는 세상을 지배해봐야 헛되다고 말하지만, 세상을 지배해야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세상을 바꾸어보아야 더 나은 세상이 열린다. 응룡, 나를 따르라. 나와 함께 세상을 지배하여 세상을 바꾸어보자. 나를 따르는 일은 곧 세상을 구하는 길이다. 비록 다시 피로 물든 나날을 보내게 된다 할지라도, 그 옛날 그대가 느꼈던 것처럼 의미 없는 나날이 아니라 새 세상을 만들어가는 의미 있는 일이다.” -너희 인간의 세상이 이루어진다고 나에게 무슨 도움이 된다는 것이냐? 헌원은 응룡의 마음에 약간의 야심이 있으나 그래도 뭔가 부족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두운 굴속에서 오랜 세월을 지낸 만큼 다시 나가고 싶은 야심도 있겠지만 이제껏 지내온 세월의 타성에 발목이 잡혀 있다고나 할까. 그래도 그의 본심은 다시 나가고 싶어 한다는 것을 헌원은 알 수 있었다. 응룡은 나름대로 생각이 깊은 존재였으나 역시 찬피를 지닌 난폭한 맹수였다. 비록 도력으로 억제한다고는 하나 움직이고 싶고, 날뛰고 싶고, 파괴하고 싶은 본능이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헌원에게는 그 본능이 필요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구실이 필요했다. 응룡이 못 이기는 척 숨겨진 본능에 몸을 맡길 만한 구실이....... 이윽고 헌원이 말문을 열었다. “응룡, 그대는 잊혀진 그대 종족의 옛날을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어보지 않겠는가? 내가 그렇게 해줄 수 있다.” 응룡은 놀란 듯했다. -무슨 소리냐? 그게 어떻게 가능하단 말이냐? “응룡, 그대는 더 이상 흉악한 뱀이 아니다. 그대, 그대 종족 모두가 그러하다. 나를 도와 세상을 평안하게 하는 하늘의 사자요, 신성한 힘을 지닌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대가 나를 도와 힘을 빌려주면 나를 따르는 부족과 내 모든 후손으로 하여금 그대를 기억하고 그대를 섬기며, 그대의 종족을 신성하게 여기도록해주겠다. 우리 인간의 대가 끊어지는 날이 와도 그 기억이 남는다면 우리 인간이 섬겼던 그대 종족의 그림자 또한 인간의 기억을 따라갈 것이다.” -나는 찬피가 도는 종족이다. 너희 따위는 보기만 해도 귀찮고 갑갑한....... 그런 우리를 더운피가 도는 너희 인간이....... 인간과 파충류는 이미 아득한 오래 전부터 언제나 적이었고, 본능적으로 적대감을 느껴 서로 대립하는 존재였다. 그런 상황에서 헌원의 말은 응룡에게는 충격이라 할 수밖에 없었다. 허나 헌윈은 자신 있게 되받았다.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세상의 지배자가 될 것이니까.” 응룡은 놀란 듯이 중얼거렸다. 그 느낌에 분명히 감격의 떨림이 있음을 헌원은 놓치지 않았다. -나는....... 나는 헛된 세월을 보낸 것이 아니었는가. 그렇게....... 죽어간 나의 종족들은 이렇듯 세상에 잊혀지지 않고 남아 있었던가. 그렇구나, 이것이 내 운명이었는가? 이 때문에 내가 그 긴 세월을 참고 기다리며 남아 있었던 것인가? 그렇다. 그렇구나! 응룡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와 더불어 동굴 전체가 우르릉 울리면서 석순들과 종유석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서 있기조차 힘들 정도로 발밑이 흔들리는가싶더니 땅거죽이 갈라지며 붉은 광채가 솟구쳐 나와 어둠을 밝혔다. 그 가운데에서 무시무시한 형체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거대한 머리가 높이 들려지며 타는 듯한 붉은 눈이 번쩍이며 헌원을 바라보자 헌원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부릅뜨며 입을 반쯤 벌렸다. 도마뱀을 닳은 커다란 머리와 무시무시한 이빨이 가지런히 돋은 큰 입, 작은 뿔과 돌기와 딱딱한 각질로 뒤덮인 흉측한 피부, 어마어마하게 큰 덩치를 지탱해주는 거대하고 굵은 꼬리, 그 모습 하나하나가헌원의 마음을 옥죄어 얼어붙게 만들 정도로 무시무시했다. 헌원의 몸에 흐르는 더운피의 오래된 감각이 그런 공포를 확산시켰는지도 모른다. 응룡은 굵직한 뒷발로 일어서면서 작은 앞발을 허공에 휘저으며 동굴이 쩌렁쩌렁 울려 귀가 멍멍해질 정도로 커다랗게 포효했다. 헌원은 그 무시무시하고도 흉포한 모습에 압도되어 몇 걸음을 물러섰다. 그러나 헌원은 거의 넋을 잃을 듯한 그 와중에도 우린 구슬은 놓치지 않고 꼭 쥐고 있었다. 그때 응룡이 콧김을 힘껏 내뿜으며 말했다. -어떤가? 이것이 내 본래의 모습이다. 대체 얼마 만에 다른 존재에게 보여주는 본모습인가! 하핫! 멋진가, 음? 보기만 해도 두렵지 않은가? 세상의 지배자라고 하는 그대마저도 뒷걸음질치는가? 하핫! 이런 나를, 이런 우리 종족을 정말로 사람들의 마음속에 신성하게 심어 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응룡은 다시 한 번 위를 쳐다보며 기괴하기 이를 데 없는 소리로 울부짖었다. 간신히 놀란 마음을 진정시킨 헌원은 잠시 생각을 가다듬고는 입을 열었다. “응룡이여, 그대의 모습은 과연 훌륭하다! 그러나 그대 말대로 사람들이 보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만 그대는 신수 아닌가? 자신의 모습 정도는 바꿀 수 있겠지?” -헌원이여, 내가 도력을 얻은 지 얼마나 되는지 아는가? 그런 내가 내 모습 하나 바꾸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는가? 허나 왜 내가 모습을 바꾸어야 하는가? 헌원은 이때라는 생각에 재빨리 말했다. “응룡이여, 우리 인간도 태어날 때의 모습과는 달리 옷을 입고 장신구를 걸쳐 겉모습을 꾸민다. 존경받는 사람일수록 더욱 잘 꾸며서 더 존경받는 존재로 바꾸어 나간다. 그대는 이미 나와 뜻을 같이하기로 했으니, 조금은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 좀더 존경받을 수 있는 모습으로 보이게 해야 할 것이다.” -내 본모습을 숨기고 거짓되게 굴라는 말인가? 그렇다면 우리 족속이 영광을 얻어야 무슨 소용이 있다는 말인가? 응룡이 눈을 부라리자 헌원은 말끝에 힘을 주어 대답했다. “인간은 누구나 옷을 입어 저마다 겉모습을 바꾸지만, 그것을 거짓되다고 말하는 자는 아무도 없다.” 응룡은 약간 혼란스러운 듯했다. 응룡은 오랜 세월 도를 닦은 신수이긴 해도 역시 고립자의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현명하지만 다른 존재와 대화하는 것을 알지 못했고, 속임수나 능란한 언변 같은 것을 알지 못했다. 비록 생각은 깊었으되 순진하기로는 어린아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헌원이 말했다. “더구나 응룡 그대는 우리 부족 전체의 상징이 될 것이다. 우리 부족은 화산족이지만, 실은 다섯 부족으로 된 부족이다. 나는 뱀 부족이지만, 사슴 부족, 물고기 부족, 구름 부족, 번개 부족 이렇게 다섯 부족이 모인 것이 화산족이다. 그대는 우리 화산족 전체의 상징이 되어야하므로 이 다섯 부족의 모습을 모두 갖춰야만 한다.” -내 본모습을 버리고, 다른 모습을 하라고......? 응룡이 얼떨떨한 듯 말끝을 흐리며 묻자 헌원은 힘주어 강조했다. “인간이 누구나 하는 것처럼 옷을 입는 것이다, 옷.” 응룡이 그래도 혼란스러워하며 승낙할 기미를 보이지 않자 헌원은 재빨리 덧붙였다. 헌원은 뛰어난 그림 솜씨와 상상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우선 그대의 몸은 너무 두껍고 무거워 보이는군. 그대는 하늘을 날 수 있는가?” -그 정도는 일도 아니지! “그렇다면 좀더 가볍고 민첩해 보이는 것이 좋겠다. 우선 응룡, 그대의 몸을 뱀처럼 길고 날렵하게 바꾸라.” 응룡은 주춤거리며 망설이는 듯했다. 이미 도력을 얻어 육신은 껍질이나 다름없었지만, 몇 천만 년이나 지니고 살아온 모습을 바꾼다는 것이 영 마음에 내키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자 헌원은 다그치듯 큰 소리로 외쳤다. “어서!” 순간, 응룡의 거대한 몸이 허공에서 한 번 빙글 꼬이듯 돌아가면서, 다소 둔중하던 몸이 기다란 뱀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었다. 다만 네 개의 다리만은 이전 모습의 앞발처럼 작고 짤막하게 매달려 있었다. 응룡은 공중에 뜬 채 조금씩 똬리를 틀면서 헌원에게 물었다. -이 정도면 되었는가? “좋군. 그리고 그대의 머리에 뿔이 솟아 있으면 더 멋져 보이겠다. 사슴을 닳은 뿔이 머리 에 솟으면 내가 머리에 모자를 쓴 것처럼 잘 어울리게 될 것이다.” -그런 것까지 해야 하는가? 응룡의 말에 불만이 섞인 듯했으나 헌원은 힘주어 되받았다 “인간 세상에서는 높은 사람일수록 더 화려하고 멋진 옷을 입게 되어 있다. 그대를 화려하게 꾸미면 꾸밀수록 그대를 높이는 것이란 말이지.” 다음 순간, 응룡의 머리에는 사슴을 닳은 커다랗고 화려한 뿔이 솟아났다. 그러자 헌원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내 말했다. “지금 그대의 몸 색깔은 그대의 변한 모습에 어울리지 않는군. 아, 그렇지. 물고기처럼 몸을 비늘로 두르고, 색깔을 번쩍이는 금빛으로 하라. 그러면 더더욱 멋질 것이다.” -왜 하필 금색인가? “금은 사람들에게 가장 귀한 물건이다.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이니 그대와 흡사하지 않는가?” 응룡은 반신반의하며, 다시 허공에서 몸을 틀었다. 그러자 응룡의 거칠고 둔탁하던 회갈색 피부에 반질반질한 금빛 윤기가 감도는 비늘로 뒤덮여 휘황찬란하게 번쩍였다. 헌원이 넌지시 물었다. “그대 스스로 그대의 모습을 느낄 수 있겠지? 얼마나 보기 좋은가?” -글세....... 그러나........ 말끝을 흐리는 것으로 보아 응룡 역시 자신이 만들어낸 모습에 점점 도취되어 가는 듯했다. 헌원은 그 느낌을 놓치지 않고 못을 박듯이 확고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대는 항상 구름을 몰고 다녀야 하며, 번개와 벼락을 쳐서 그대가 나타났음을 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 그러면 그대는 완전히 우리 부족의 상징이 되어 저절로 숭배를 받을 것이다.” 응룡은 곧 몸 주위에 현란한 다섯 가지 색깔의 구름을 만들어냈다. 이번에는 헌원이 정해주지 않았는데도 알아서 화려한 구름을 만든 것이다. 그리고 공중에서 멋지게 몸을 틀며 뇌성과 번개가 주변에 감돌게 만들었다. 그러한 응룡의 새로운 모습은 그 누가 보아도 멋지고 경탄을 자아낼 만했다. 헌원은 대단히 만족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룡, 그대는 아마 그대의 족속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지니게 되었을 것이다. 이제 그대와 그대의 종족은 더 이상 사람들의 적이나 하찮은 뱀 따위가 아니라, 이 멋진 모습을 지닌 용의 종족으로 영원히 떠받들어지고 기억에 남게 되리라.” 응룡도 새로운 자신의 모습이 황홀한 듯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문득 작은 소리로 웅얼거렸다. -하지만 이건 내 본모습이 아니...... 응룡의 말이 미처 끝나기 전에 헌원은 틈을 주지 않고 호통을 쳤다. “그럼 지금의 모습이 싫은가? 그대는 흥한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싶은가, 아름다운 모습으로 기억되고 싶은가?” 응룡은 대답하지 못하고 눈을 끔벅였다. 그의 눈빛은 비록 맑긴 했지만 처음 동굴에서 모습을 드러냈을 때의 흉포한 눈빛보다도 총기가 없어 보였다. 헌원은 나직하고도 단호하게, 마치 아랫사람을 대하듯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모습을 누가 주었는지 잊지 마라. 그리고 앞으로는 나를 주인으로 섬겨야 하는 거다. 그대는 나를 세상의 지배자로 만들어야 뜻을 이룰 수 있으니, 먼저 그대부터 나를 그대의 지배자로 섬겨야 하는 것이야.” -뭐? 그건........ “싫다는 것인가? 이미 자네는 승낙했어. 지금 그 모습이 그 증거가 아닌가? 어서 맹세하게나. 나를 그대의 지배자로 섬기겠다고.” 응룡은 한참 혼란스러워하다가 이윽고 화려하게 변한 자신의 몸을 둘러보고는 마음을 정한 것처럼 말을 전해왔다. -약속은 틀림없이 지키는 거지? “헌원의 이름으로 한 약속은 틀림없다네. 나, 헌원은 응룡의 족속인 용족과 응룡을 대대손손 영원히, 우리 지나족의 피가 영원토록 전해지는 그날까지 섬기고 받들며, 잊지 않고 사랑할 것을 맹세한다네.” 헌원의 맹세가 끝나자 응룡은 비로소 고개를 숙였다. -나 응룡, 헌원을 지배자로 받아들일 것을 맹세한다. “그리고 나의 명령에 따르고 복종할 것을 맹세해야 한다.” -그건....... 좀....... 갈수록 심해지는 것 아닌가? 우리는 동등한 관계가 아니었는가? “지배자는 주인이다. 주인의 말에 복종해야 비로소 주인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염려 마라. 그대나 그대의 종족에게 해로운 명령은 결코 내리지 않을 테니까. 내가 먼저 맹세한다. 그러니 너도 맹세해라.” 응룡은 한동안 혼란스러운 듯하더니 마침내 말했다. -좋다, 맹세한다. 응룡의 맹세가 떨어지는 순간, 헌원은 여느 때와는 전혀 다르게 활짝 웃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치우천....... 너는 신수를 굴복시켰다지만, 나는 신수를 내 부하로 삼았다. 어떠냐?’ 헌원은 비록 속마음을 드러내는 성격이 아니라서 겉으로 소리내어 웃지는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는 호쾌하게 웃고 있었다. 거대한 금빛에 휩싸여 있던 응룡은 잘된 것 같기는 하지만 뭔가 좀 이상하다며 연신 눈을 끔벅였다 헌원도 두 번 맹세했고, 자신도 두 번 맹세를 했으니 손해 보지 않았다는 것이 그나마 응룡이 내린 결론이었다. 거듭되는 함정 “아버지.......아버지가......” 치우비는 어깨를 부들부들 떨며 멍하니 선 채 같은 말만 되뇌고 있었다. 그 곁에서 치우비를 부축하던 보돈차르가 외쳤다. “비 안다! 어서 움직이게.” 그때 알한이 황급하게 소리쳤다. “남동쪽 부대 세 줄기가 우리 뒤쪽으로 돈다!” 보돈차르가 목청을 돋워 알한에게 물었다. “동쪽은?” 그 말에 좀 떨어져 있던 야율쿠리가 대답했다. “똑바로 온다!” 보돈차르는 눈을 크게 뜨고 마지막으로 다가오는 세 줄기 북동쪽부대를 바라보았다. 그 중앙의 부대는 치우우레의 부대였고, 나머지 두 줄기의 부대들도 서로 합치려고 할 뿐, 갈라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보돈차르는 치우비에게 다그치듯 말했다. “적은 세 방향으로 오고 있다. 남쪽으로 돌아들어오려 하고, 서쪽은 비어 있다. 맞서 싸울 텐가, 아니면 서쪽으로 피할 건가? 결정을 내려라!” “피할 수 없습니다!” 치우비가 돌연 소리쳤다. “형님이 신시 성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신시를 쳐야 합니다!” “세 방향에서 적이 몰려오고 있는데 신시를 어떻게 친다는 말인가?” 그때 야율쿠리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어떻게 할 거야? 이대로 기다리기만 할 건가?” 다급해진 보돈차르는 치우비를 채근했다. “비 안다, 어서 움직여야 한다. 움직이지 않고 그냥 이대로 당하겠다는 건가?” 야쿠타가 치우비에게 다가왔다. 얼굴이 눈물자국으로 얼룩져 있었으나 더 이상 눈물은 흘리고 있지 않았다. “비 형! 우레님은 나를 종살이에서 구해주신 분이고, 내 아버지이시기도 해요 하지만 이렇게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요.” 보돈차르도 한마디 거들었다. “어서 움직여야 한다!” 돌연 치우비의 눈에서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뭔가 결심한 듯, 입술을 굳게 깨물더니 약간 기울어져 있던 몸을 곧추세웠다. “적이 어떻게 오고 있습니까?” 치우비가 기운을 내는 듯하자 보돈차르는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에 차분하게 대답했다. “여덟 줄기로 나누어져 오고 있다. 하나하나가 오천은 될 듯싶은데, 남쪽에 세 줄기, 동쪽에 두 줄기, 북쪽에 세 줄기가 오고 있다.” 그에 대해 치우비 측은 손가락 대형으로 다섯 줄기의 병력을 지니고 있었다. 집게손가락은 보돈차르가 이끄는 몽골의 기병대였고, 가운뎃손가락은 야율쿠리를 위시한 키탄의 정예들이었으며, 넷째손가락은 초초룬, 툰툰이 이끄는 미아우족 전사들, 새끼손가락은 와난강, 와난수가 이끄는 마갸르 전사들이었다. 작은 주신의 전사들과 도깨비부대 등은 치우비와 함께 엄지손가락에 속해 있었다. 치우비는 곧 외쳤다. “보돈차르 안다, 안다의 집게손가락과 새끼손가락 부대가 남쪽을 맡아주십시오. 그리고 야 율쿠리의 가운뎃손가락과 초초룬의 넷째손가락 부대가 동쪽을 맡아 싸워주십시오.” 치우비가 다시 정신을 찾은 듯하자 보돈차르는 기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주신의 사울아비들과 겨뤄보는 것은 전사들에게는 꿈이다! 있는 힘을 다하겠다.” 상황이 급했기 때문에 야쿠타는 급히 발 빠른 전령들을 거느리고 치우비의 명령을 전하러 달려 나갔다. 보돈차르도 달려가려다가 치우비를 돌아보았다. “그럼 엄지손가락이 북쪽을 막을 건가? 좀 모자라지 않겠는가?” 보돈차르의 말에 고개를 저으며 치우비는 조용히 알한과 울라트를 불렀다. “알한, 자네는 나 대신 작은 주신 전사들과 차오스의 부대를 이끌게. 그리고 울라트, 너는 도깨비 부대를 이끌고 구리 옷을 입은 전사들을 지휘해라. 그래서 신시의 성벽을 쳐라!” 알한과 울라트는 깜짝 놀라 동시에 외쳤다. “그럼 북쪽은요?” 치우비는 조용히 한숨을 쉬며 말했다. “북쪽에는 아버님이 계시잖아. 북쪽은....... 북쪽은.......” “그럼 그냥 놔두자는 겁니까?” “알한!” 어이가 없어 목소리를 높이자 치우비는 고개를 푹 숙였다. 치우비는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자기를 치러오는 것도 괴로운데, 하물며 아버지와 어떻게 맞서 싸운단 말인가. 그때 옆에 있던 울라트가 마구 고개를 저으며 외쳤다. “안 돼요! 안 돼! 오라버니! 말도 안 돼! 그러면 다 죽어요!” “그만 해.” 치우비는 괴로운 듯 울라트의 말을 막았다. “나는....... 나는 죽어도....... 아버님을 공격하라고 말할 수 없어. 아버님이 설마...... 설마 나를 공격하시겠니?” 울라트는 어이가 없어 소리를 꽥 질렀다. “그렇지 않을 거면 왜 여기까지 오셨겠어요?” 치우비는 고개를 돌려 애써 울라트의 눈길을 피했다. 치우비의 얼굴은 괴로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때 알한이 나섰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습니다. 저도 치우우레님이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하지만 여기는 싸움터입니다! 상대가....... 쳐들어오는데 눈만 멀거니 뜨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모두가 그냥 가만히 앉아 죽으란 말입니까?” 알한의 말이 끝나자마자 치우비가 돌연 소리를 질렀으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아버님은....... 아버님이 그러실 리 없어!” 알한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그러면 제가 나서겠습니다. 제가 죽더라도 저는 치우우레님을 공격하지 않을 것입니다. 맹세하겠습니다. 만약 치우우레님이 저를 공격하지 않는다면 치우비님의 말이 맞는 거겠죠!” 그러자 울라트가 급히 알한을 말렸다. “만약 공격하면요?” 알한은 짐짓 커다란 소리로 웃었다. “치우우레님이 저를 죽인다면 그때는 치우비님도 싸울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평소 농담을 잘하는 알한은 지금 반쯤 웃음 띤 얼굴로 말했지만, 사실 농담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당황한 치우비의 얼굴빛이 창백해졌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알한님!” 알한이 껄껄 웃었다. “그렇다고 여기 가만히 있을 겁니까? 그러나저러나 죽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차라리 나 하나 죽어서 치우비님이 정신을 차리는 것이 낫지요!” 답답해 미치겠다는 듯이 울라트가 펄쩍 뛰며 쏘아붙였다. “오라버니! 정말 이럴 건가요? 우리 모두를 그냥 죽일 건가요?” 치우비는 괴로워 머리를 마구 쥐어뜯었다. “아버님이 그러실 리가 없어! 분명 좋은 뜻으로 오신 거야! 분명........!” 어느덧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울라트가 가슴을 탕탕 치며 외쳤다. “여기는 싸움터예요! 그리고 우리는 이겨야만 해요! 이기지 못하면 비 오라버니도 죽고, 오라버니를 믿고 여기까지 목숨을 걸고 달려온 벗들과 전사들까지 모두 죽어요! 그뿐 아니라 신시로 들어간 천 오라버니 일행도 다 죽는다구요! 그렇게 두고만 볼 건가요?” 형 이야기가 나오자 치우비는 잠시 고개를 들었으나 이내 고개를 푹 숙이며 쥐어짜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면 아버지를 내 손으로 죽이라는 거냐?” “그런 게 아니에요! 좌우간 방어는 해야잖아요!” “난....... 나는.......” 치우비가 말을 잇지 못하자 울라트가 날카롭게 되받았다. “오라버니, 못하시겠거든 차라리 내가 명령하겠어요! 지금 오라버니는 제정신이 아니에요!” 너무도 괴로워 정신이 혼미한 지경에 이른 치우비가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울라트는 알한에게 눈길을 돌렸다. “알한님! 알한님이 나가서 치우우레님을 막으세요! 치우우레님을 다치게 하지는 마시구요! 책임은 내가 져요!” 치우비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울라트는 노기를 이기지 못해 꽥 소리를 질렀다. “오라버니에게 실망했어요! 오라버니는 대장이잖아요!” 치우비의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나는....... 대장이 아니어도 좋아! 하지만 아버지와 어떻게.......” “정말 멍청하군요.” 울라트가 불끈하며 외치자 치우비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모든 것을 포기하는 듯한 목소리로 알한에게 말했다. “알한님, 부탁합니다.” 알한은 측은한 눈길로 치우비를 쳐다보았다. “괴로운 마음, 잘 압니다. 허나 힘을 내셔야 합니다. 치우우레님을 다치지 않게 조심하겠습니다.” “이런 망할! 제기랄! 미친!” 누구에게 하는지도 모르게 마구 욕설을 퍼부으며 울라트는 헝클어진 머리칼 사이로 매섭게 눈을 빛내며 외쳤다. “도깨비 부대!” 싱카에 이어서 항상 웃음을 던 마냥이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앞으로 나섰다. 울라트는 빈틈없는 표정으로 날카롭게 외쳤다. “너희도 알한님과 같이 가라!” 울라트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알한도 크게 소리쳤다. “차오스, 투르크 전사들을 거느리고 앞장서라! 작은 주신 전사들은 나를 따르라!” 옆에서 말없이 지켜보던 차오스 역시 좀 울적했으나 그런 것을 떨치려는 듯 크게 외쳤다 “가자! 명령이 있으면 어디라도 가야 한다!” 마침내 알한이 투르크 용병들과 도깨비 부대, 작은 주신 전사들 천여 명 정도를 불러내 줄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총대장이 무력감에 빠지자 그들의 사기도 전 같지 않았다. 알한이 애써 사기를 높이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안 그래도 힘든 싸움에, 적의 우두머리를 죽이거나 다치게 할 수 없다는 전제가 붙어 있으니 전사들의 사기가 위축되는 것은 막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다만 앞서 달려 나간 보돈차르가 이일이 퍼지지 않도록 잘 단속하여 야율쿠리와 초초룬은 그런 사정을 모른 채 힘껏 앞으로 달려갔다. 보돈차르 역시 곧 냉정을 되찾아 부하들을 빈틈없이 독려하며 말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안팎으로 적을 맞은 위험한 상황에서 총대장이자 전군의 대들보인 치우비가 저렇듯 무력한 모습을 보이자 보돈차르는 마음이 무거웠다. 한편, 아무것도 모르는 야율쿠리는 기세 좋게 소리쳤다. “저놈들은 가짜다! 주신 사울아비들이라지만, 주신을 잡아먹는 벌레 같은 놈들이다! 조금도 두려워할 것 없다! 나를 따르라! 우하핫.” 야율쿠리가 짐짓 호탕하게 웃으며 미친 듯이 달려 나갔다. 야율쿠리가 직접 가려 뽑은 키탄의 아홉 장사가 그 뒤를 따랐고, 나머지 전사들이 늑대 울음소리 같은 함성을 지르며 일제히 달려갔다. 용맹스럽고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는 부족의 기개로 키탄족은 항상 쐐기형으로 진격했고, 그 파괴력 또한 무시무시했다. “미아우의 전사들아, 뒤를 받쳐라!” 초초룬이 소리치자 미아우족의 전사들은 "와!" 하며 키탄족의 뒤와 양옆으로 달리며 넓게 퍼져 나갔다. 초초룬의 주위는 미아우족들 중에서 가려 뽑은 여덟 명의 남자전사와 여덟 명의 여전사가 지키고 있었다. 미아우의 진격방식은 언뜻 보면 질서가 없어 보였지만 미아우족은 원래 독가루나 독충을 쓰는 법에 능한 탓에 밀집대형보다는 흩어지는 편이 오히려 더 대단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여섯 줄로 서라!” 보돈차르는 매처럼 번득이는 눈빛으로 명령을 내렸다. 대략 삼천 몽골 기병들이 여섯 대열로 서면 한 줄에 오백 명이 되는 셈이다. 이는 상당히 넓은 면적을 확보하며 나아가는 방법이었다. 보돈차르는 신시를 공격하는 엄지손가락 부대를 보호하는 일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 넓은 진형을 선택한 것이다. 잘 훈련된 몽골의 기병 전사들은 순식간에 줄을 맞추어 대열을 가다듬었다. 몽골 기병들은 보돈차르의 치밀하고도 조직적인 훈련으로 주신이나 작은 주신의 사울아비들에 못지않은 정예가 되어 있었다. “화살을 세 번 쏘고, 적을 돌파한다! 가자!” 보돈차르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여섯 줄로 넓게 퍼진 몽골 기병들이 일제히 달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천천히 달리다가 적에게 다가갈수록 속도를 올리는 것이 그들의 전통적인 전투법이었다. “마갸르의 전사들이여! 비록 이곳이 신시이고 주신의 땅일지라도 우리는 벗을 도와 벗의 부족을 바로잡는 명예로운 싸움을 하는 것이다! 모두 용기를 내어 최선을 다하라!” 마갸르를 이끄는 와난강, 와난수 부자는 꼼꼼한 성격 그대로 장황하게 외치면서 전사들을 독려했다. 그들은 신중하게 돌 던지는 부대를 둘로 나누고, 다시 각각 그들을 보호하는 기병부대를 딸려 몽골 기병 양옆으로 흩어져 나아가게 했다. 마갸르의 기병들은 그리 수가 많지 않았지만 상당히 날래고 끈질겼다. 그리고 와난강, 와난수는 신중한 편이라 네 명의 마갸르족 작은 부족장들이 인솔하는 중앙부대를 예비대로 삼아 천천히 이동하도록 했다. 벗들의 기세 등등함과는 달리 치우비는 억지로 몸을 움직여 신시를 공격하는 시늉을 해보았지만, 금세 공격의 맥이 빠졌다. 비는 워낙 자기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그러니 아무리 큰소리를 내려 해도 힘이 없고 맥 빠진 듯한 호령밖에 나오지 않았다. 총대장의 목소리에 힘이 없자 신시를 공격하던 부하들과 지휘관들은 무슨 일이 생겼나 하여 금세 전열이 흐트러졌다. 울라트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이기지 못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차라리 물러서라고 해요! 그렇다고 금방 치고 나오지는 못할 거예요! 물러서 있다가 위험해지는 부대를 구해주는 게 낫겠어요!” 치우비는 몇 번이나 얼굴을 문지르며 정신을 차리려 했으나 여전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해 멍한 상태였다 그 와중에 울라트의 말을 듣고 치우비는 즉시 물러서서 방어를 굳히라고 명령했다. 치우비가 집중을 못하자 신시를 공격하던 부하들도 제풀에 힘이 꺾이기 시작했다. 신시에서는 지원부대가 온데다가 치우비의 부대가 힘을 잃은 듯하자 더욱 기세를 올려 맹렬하게 화살을 쏘아 올렸다. 갑옷을 입은 전사들과 방패수들이 애써서 화살을 막아냈지만, 힘이 꺾여 공격과 방어가 느슨해지자 치우비의 부대는 금세 성벽에서 밀려나기 시작했다. 신시를 지키는 사울아비들은 비록 기강이 해이해진 ‘안사울아비’들이었지만 그렇다고 이런 분위기를 눈치 채지 못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 그들은 치우비 부대의 상태를 재빨리 파악하고 계속 화살을 퍼부으며, 역공을 가할 채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때 울라트의 눈앞에서 뭐가 훌쩍거리면서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비울걸이 다시 돌아온 것이다. 비울걸은 치우비의 주변 분위기가 이상한 것을 보고 의아해서 물었다. “뭐야? 왜들 질질 짜는 거야? 얘, 덩치야. 너 왜 그러니?” 울라트는 급히 비울걸의 옷자락을 끌어당겼다. “문제가 생겼어요! 할아버지, 어떡해요!” “무슨 문제?” 비울걸은 그 기이한 얼굴을 한 번 갸웃했다. 순간 퀭한 구멍 같은 비울걸의 눈동자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눈 깜짝할 사이에 두 명의 단군은 스무 명의 작은 주신 전사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몸놀림이 눈에 보이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전사들이 급소를 얻어맞고 선 채로 정신을 잃어 장작개비처럼 퍽퍽 쓰러졌다. 남아 있는 뒤쪽의 몇 사람이 이를 악물고 무기를 휘둘렀으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는 단군들의 몸을 베기에는 어림도 없었다. 치우천이나 키타야, 구르마저도 미처 움직일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전사들이 픽픽 쓰러지자 두 명의 단군은 똑바로 치우천을 향해 날아 들어왔다 “멈춰라!” 치베의 긴장된 목소리가 울리자 두 명의 단군이 걸음을 멈추었다. 두 단군은 각각 수염이 희고 검은 것에 따라 흰 단군, 검은 단군이라 불리는 자들이었다. 그들의 얼굴은 여전히 싱글거리는 표정 그대로였다. 그러나 치우천의 앞을 막아선 치베의 표정은 심각했다 구리단검과 긴 구리검을 든 키타야와 구르 역시 굳은 표정이었으며, 유쌍은 얼굴빛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치베는 어느새 신호를 올릴 때 쓴 긴 활을 던져버리고 짧고 단단한 활을 손에 쥔 채 화살 두 대를 겨누고 있었다. “움직이지 마라.” 치베가 나직하게 말하자 중년 남자인 검은 단군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럴 수 있을까?” 그러자 이번에는 흰 수염의 늙은 단군이 되받았다. “그럴 수도 있겠는 걸?” “저놈이 그 정도입니까?” 검은 단군이 의외라는 듯이 짐짓 놀라는 표정을 짓자 횐 단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배운 녀석은 대접을 해줘야지. 얕보기만 하면 안 된다네.” 그 틈을 타 치베는 치우천에게 나지막이 속삭였다. “천 안다, 모두 데리고 가라!” 치우천은 속에서 불같은 것이 치밀어 올랐다. 치베가 두 단군을 상대한다는 것은 곧 목숨을 버리겠다는 의미였다. 비록 잠시나마 그들을 저지한다 해도 어디선가 사울아비 한 명만 튀어나오면 활을 돌릴 수 없는 치베는 잡히거나 죽게 될 터였다. “그럴 순 없다, 치베. 너와 나는 안다 아닌가? 죽어도 같이 죽는다.......” 치베는 씩 웃으며 목소리를 한껏 낮춰 되받았다. “너와 내가 안다니까 내가 이러는 것이다.” 그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며 늙은 단군이 다시 웃으며 말했다. “네 몸값을 너무 비싸게 치는 모양이다~l 네 솜씨가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내 팔 하나 정도일걸?” 검은 단군도 한마디 거들었다. “팔 하나 정도 버리더라도, 저놈을 놓치면 안 되지요.” 순간 횐 수염의 늙은 단군이 한 번 재빨리 팔을 휘저으며 말했다. 옷자락이 펄럭거림과 동시에 '펑' 하며 뭔가 터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렇지.” 치베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한 방울 흘러 내렸다. 방금 흰 단군의 손짓은 간단한 동작이었으나 놀라우리만치 빨랐다. 독수리처럼 눈이 밝은 치베도 그 손짓을 따라갈 수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리미와 개르를 단숨에 쓰러뜨린 단군의 놀림이라면 자신이 죽을힘을 다해 화살을 쏜다 해도 한 대 정도는 잡거나 쳐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단 한 대가 빗나간다면 나머지 한 대가 적중해도 두 명의 단군 중 한 명이 남는 셈이다. 치베가 땀을 흘리며 상황을 가늠하고 있을 때 키타야와 구르가 이를 갈며 앞으로 나섰다. “우리도 있다.” 검은 단군은 여전히 빙그레 웃으며 되받았다 “그래, 있군. 허나 어쩔 건가? 먼저 덤벼들 건가?” 키타야와 구르는 그럴 수 없었다. 아니, 치베도 먼저 움직일 수는 없었다. 저 무시무시하게 빠른 단군들에게 공격을 가하다가 자칫 빗나가는 순간 모든 것이 단박에 끝날 것이다. 저렇게 빠른 자들을 이기려면 먼저 덤벼들 것이 아니라 덤벼드는 것을 어떻게든 잡아내어 받아치는 수밖에 없었다. 크고 작은 싸움터에서 잔뼈가 굵은 키타야와 구르도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허나 그들은 이대로 시간을 끌면 안 된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이렇게 팽팽한 대치상태에서 사울아비 몇 명이 불쑥 나타난다면 치우천 일행은 그야말로 끝장이었다. 그리고 지금 당장은 주변에 아무도 없지만,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사울아비들이 몰려을 것이 분명했다. 물러설 곳도 없고, 물러나서도 안 되는 이 절박한 상황에 치우천은 속으로 이를 악물며 외쳤다. “당신들은 고시울률님의 사람들이오?” 검은 단군은 대꾸를 하지 않았으나 횐 단군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 더러운 이름을 함부로 입에 올리지 말거라.” 치우천은 그들이 고시울률의 부하는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시울률 밑에 웅크리기엔 그들의 기량과 실력이 너무도 뛰어났기 때문이다. 고시울률은 이렇듯 강하고 무서운 사람들을 부하로 거느릴 만한 배짱이 없는 인물이었다. “나는 한웅님을 고시울률의 손에서 구하고자 목숨을 걸고 신시로 들어온 것이오. 왜 나를 막으려 하시오?” 횐 단군이 아이처럼 맑게 웃으며 말했다 “아이야, 수를 쓰려고 하지 마라. 네 말에 속아주기엔 나는 너무 늙었단다.” 그러자 검은 단군이 말했다. “너나 고시울률이나 내가 보기에는 둘 다 똑같다.” “말로만 한웅님을 위한다고 하면서 뒤로는 자기 잇속만 챙기려는 놈들이지.” 흰 단군이 말하자마자 검은 단군이 말을 이어갔다. “지금 병들고 아프신 한웅님을 끼고서 신시를 통째로 집어먹으려는 놈이 바로 너 아니더냐?” 또다시 횐 단군이 ‘허허’ 웃으며 비아냥거리듯 되받았다. “고시울률이라는 늑대가 설치더니 너 같은 어린 범이 또 설쳐대다니. 그 꼴이 한술 더 뜨는 판이라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어 우리가 나선 것이다.” 두 단군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치우천은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나를 한웅님과 만나게 해주시오! 나는 한웅님을 지키려고 달려온 것이오!” 검은 단군이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호오, 거 참 감동적이로군.” 그러자 흰 단군도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그런데 왜 나에게는 한웅님을 잡아 빨리 항복을 받고 신시를 통째로 먹겠다는 말로 들릴까?” 치우천은 눈을 똑바로 뜨고 두 단군을 쳐다보았다. “나는 한웅님의 명을 어기지 않았는데도 공격을 받았소. 그리고 공격을 받았기에 나를 지키려고 신시와 할 수 없이 싸우게 된 것이오. 그러나 고시울률이 나에게 이렇게 노골적으로 싸움을 걸 정도라면, 이미 한웅님도 안전하시다 볼 수 없소! 그래서 목숨을 걸고 달려온 것이란 말이요.” 치우천이 격앙된 목소리로 외쳤으나 횐 단군은 싱긋 웃으며 귀를 후볐다. “그래, 그래. 한웅님, 한웅님. 그렇게 짖어대는 놈들 치고 좋은 놈들 못 보았다. 그런데 어쩌느냐? 한웅님은 우리가 지키고 있단다. 그러니 안심 하거라. 너는 우리를 못 당해내니 네가 도와주겠다고 해도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구나. 뭐, 어차피 우리 손에 죽겠지만, 그 입만 열면 나불거리는 한웅님 걱정일랑 그만 해도 좋다는 거다. 알겠니?” 싱글거리며 말하던 횐 단군의 한쪽 손이 눈 깜짝할 순간에 길게 늘어난 것처럼 흰 그림자를 이루며 치우천에게 덮쳐들었다. 그리고 검은 단군의 몸도 순간 번득이며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의 빠르기로 옆으로 움직였다. 키타야와 구르는 눈을 부릅뜨고 긴장하던 터라 크게 소리를 지르며 각각 흰 그림자와 검은 단군을 쫓아 달려들었다. 그러나 치베는 마치 조각처럼 꼿꼿이 서서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때 치우천은 치베가 눈을 감고 있는 것을 보았다. 치우천은 치베와 같은 명궁이 눈을 감는 이유를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치베는 시력이 놀라울 만큼 좋았지만, 그렇다고 눈에만 의존할 정도로 경험 없는 전사가 아니었다. 자신의 눈조차 속일 수 있는 두 단군의 몸놀림 앞에서는 차라리 눈을 감는 것이 낫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다. 치베의 표정에는 진정한 강적을 맞이해 예전에 볼 수 없었던 비장함이 흐르고 있었다. “텡그리시여! 내 안다를 위해.......!” 커다랗게 외치면서 치베는 두 대의 화살을 동시에 쏘아 날렸다. 그러나 화살들은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갔다. “힘을 주소서.......!” 치베의 외침이 끝나갈 무렵, 키타야는 흰 옷 조각이 얼굴을 스치자 허공에 칼을 휘두르며 제풀에 넘어졌고, 구르도 옷 조각에 발이 걸리면서 그 자리에 고꾸라졌다. 두 개의 번득이는 그림자는 두 단군이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찢어 내던진 옷자락이었다. 허공에 쏘아진 것 같던 치베의 화살 두 대가 '퍽퍽' 소리를 내면서 뭔가에 박혔다. 아무것도 없는 것 같던 허공에서 갑자기 하얀 무언가가 어른거리더니 흰 단군이 어이없이 웃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의 얼굴에는 허탈감과 놀라움이 섞여 있었다. 그는 치베의 화살 한 대를 손에 쥐고 있었지만, 나머지 한 대의 화살이 그의 어깨에 박혀 있었다. 상처 뒤쪽에서 피가 ‘푹’ 하고 뿜어져 방울방울 튀었다. 그러나 치베의 움직임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치베는 눈을 감은 채 활을 던져버리고 화살통에서 가장 긴 화살 하나를 뽑아들며 치우천에게 덮치듯 몸을 날렸다. 그러면서 나지막한 소리로 외쳤다. “나보다........ 나보다.......” 갑자기 몸을 날린 치베의 몸뚱이가 공중에서 뭔가에 걸린 듯 땅에 툭 떨어졌다. 치우천과 유창은 경악했다. 언제 나타났는지 검은 단군의 몸이 치베의 몸에 겹쳐 땅에 떨어졌다. 치베는 귀신같이 뒤로 돌아 치우천을 덮치려던 검은 단군의 기척을 눈치 채고 활을 잴 틈도 없이 급히 몸을 날려 치우천을 구했던 것이다. 긴 화살로 자신의 몸을 꿰뚫어 등 뒤의 단군의 몸까지 관통하게 한 것이 거의 찰나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제야 치베는 ‘헉’ 하며 신음소리를 내뱉다가 씨익 미소를 지으며 눈을 치떴다. 그러고는 맑은 눈으로 치우천을 올려다보았다. “더........ 소중한 내 안다를 위해........” 그리고 치베는 스르르 눈을 감았다. 검은 단군은 왜 치베가 몸에 상처를 내면서까지 자기를 공격했는지 아직도 깨닫지 못해 중얼거렸다. “대체....... 왜........?” 치베는 비록 서로 얼굴을 마·주 볼 수.E, 눈조차 뜨지 못했지만 억지로 웃어 보이며 몹시 힘겹게 속삭였다. “안 그러면 네가 피할 테니까.......” 한 대의 화살에 꿰인 두 사람 모두 고통스러워하며 용을 쓰자 화살이 툭 부러져버렸다. 치베는 몸에 힘이 빠졌는지 축 늘어졌다 허나 검은 단군은 약간 휘청거리다가 금세 몸을 일으켰다. 치베는 완전히 화살에 몸이 뚫린 상태였으나 검은 단군은 배에 화살이 좀 박히긴 했어도 움직일 만했다. 치우천은 느닷없이 벌어진 사태에 멍하니 몸을 떨다가 돌연 눈을 부릅떴다. 키타야와 구르도 막 천 조각을 걷어내고 다시 달려들려는 순간, 목덜미에 강한 타격을 받고 거의 동시에 쓰러져버렸다. “내 팔 하나짜리가 아니었구나......... 야만족이지만 대단한 놈이었구먼........” 피가 흐르는 자신의 어깨와 검은 단군의 몸을 번갈아 들여다보며 흰 단군이 씁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키타야와 구르를 단박에 쓰러뜨린 것도 물론 그였다. 그때 쓰러진 치베를 참담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치우천의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앞에 이제 유쌍만이 다리를 덜덜 떨며 서 있었다. 돌연 치우천은 무서운 힘으로 유쌍의 덜미를 잡아 저만치 던져버렸다. 그리고는 이를 악물고 칼을 휘두르며 검은 단군에게 달려들었다. 치우천은 칼솜씨가 그리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보통 사울아비 정도의 실력은 되었고, 더구나 치솟는 분노와 독기가 눈에 넘쳐흐르자 상대방도 의외라는 듯 한순간 기가 질려버렸다. “그는. 그는 야만족이 아니다! 몽골의 자랑스러운 전사이고, 나와 안다를 맺은 내 벗이며 형제다! 그의 이름은 치베! 치베라고 한다!” 한 번 칼을 휘두를 때마다 치우천은 있는 힘을 다해 소리를 질렀다. 허나 검은 단군은 배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세 걸음을 물러서자마자 보이지 않을 정도의 빠른 손놀림으로 치우천의 몸 여기저기를 쳤다. 그러나 치우천은 놀랍게도 전혀 충격을 받지 않은 듯했다. 검은 단군의 얼굴에서 놀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비록 스스로도 얕지 않은 상처를 입어 위력이 반감되기는 했겠지만, 리미나 개르 같은 거친 사나이들도 단박에 쓰러뜨린 자신의 공격이 치우천에게 먹혀들지 않는 것 같아 당황한 것이다. 치우천은 계속하여 미친 듯이 칼을 휘둘러대며 검은 단군을 압박해 나갔다. 검은 단군은 세 번이나 더 치우천의 몽을 후려갈겼으나 치우천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단군은 놀라움을 금치 못해 점점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치우천은 거의 비명에 가까운 기합성을 내지르며 칼을 등 뒤로 휘저었다가 있는 힘을 다해 검은 단군을 향해 내리쳤다. 검은 단군은 그 기세에 압도되어 피할 생각도 못한 채 급한 나머지 뒤로 넘어져 몸을 굴렸다 그러면서 검은 단군은 자기 몸으로 날아오는 칼날을 힘껏 후려쳤다. 그 아찔한 순간 칼날이 부러지면서 검은 단군의 어깨를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칼날을 부러뜨리지 않았더라면 아마 검은 단군의 몸은 두 토막이 났을 터였다. 그의 얼굴이 파랗게 질린 것을 보자 치우천은 더욱더 독기가 가득한 눈으로 그를 잡아먹을 듯이 내려다보며 외쳤다. “야만족이 아니다.......!” 치우천은 부러진 칼을 들어올렸다가 돌연 방향을 틀어 옆으로 집어던졌다. 그 칼은 똑바로 횐 단군 쪽으로 날아갔다. 횐 단군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그 칼날을 잡으려다가 문득 손을 거두었다. 그러자 부러진 칼은 횐 단군의 어깨에 박히지 않고 도로 튕겨 나와 땅에 쨍그랑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비로소 치우천은 헉헉거리며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간신히 말했다. “내 벗은...... 주신만큼이나 명예로운 몽골 사람이다. 야만족은 없다....... 누구도 야만족은 아니란 말이다.......!” 둘의 눈빛이 마주친 순간, 횐 단군은 숙연한 표정으로 조용히 눈을 깔며 치우천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자 치우천은 굵은 눈물을 주르륵 흘리면서 힘없이 "하하"웃으며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치우천은 전혀 내색을 하지 않았으나 검은 단군의 공격에 극심한 타격을 받았다. 단군의 공격은 그 하나하나가 서 있기조차 힘들 정도로 위력 있고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치우천은 누구보다도 참을성이 강했고, 고통을 견디는 힘이 있었다. 더구나 치베가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지자 그는 초인적인 힘을 짜내어 그 무서운 공격을 열 번 가까이 받아넘겼던 것이다. 이제 할말을 하고 나니 치우천은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정신은 맑아 억울하고 분하고 원통한 감정을 가눌 길 없었으나 몸은 전혀 움직일 가 없었다. 치우천은 마지막 힘을 짜내어 웅얼거리듯 말을 내뱉었다. “그 누구도 야만족이 아니란 걸 알아주면 고맙겠소......” 그리고 치우천은 입가에서 주르륵 피를 흘리면서 나무토막처럼 옆으로 쓰러졌다. 마지막 순간에 얼굴을 땅에 박으면서도 치우천은 치베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쓰러진 치베를 향해 손을 뻗고 싶었으나 손은 움직여주지 않았다. 이윽고 검은 단군이 이를 악물고 일어나 치우천의 손을 잡아 치베의 손을 잡도록 해주었다. 그러면서 애석하다는 듯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내 자네들을 얕본 것을 사과하네. 야만족이 아니라, 몽골의 전사였군. 야만족은 없다고 했는가? 잘 기억하겠네.” 그러자 흰 단군도 다가와 치우천에게 말했다. “대단하군, 대단해. 몸이 약한데도 그토록 용을 썼군그래. 지금은 손끝 하나 움직이지 못하겠지? 그러나.......내 말이 들리는가?” 치우천은 아직도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치우천이 눈을 약간 움직이자 흰 단군은 한숨을 푹 쉬었다. “우리가 싸움에서 졌네. 이 친구도 자네에게 이기지 못했고 나 역시 자네 칼에 맞았네. 그나마 운이 좋은 게지. 칼이 부러지지 않았으면 우리 둘 다 죽었을 걸세. 우리는 패배를 인정하네.” 옆에서 건은 단군이 중얼거렸다. 말투가 덤덤한 것을 보니 생각보다 상처는 그리 심각한 것 같지 않았다. “그 칼은 내가 부러뜨린 것이고, 당신은 칼이 부러진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피하지 않았잖소?” 그 말에 흰 단군이 눈을 쓱 흘기자 검은 단군은 이내 입을 다물었다. 흰 단군이 다시 치우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이자들을 야만족이라 부른 내 어리석음도 사과하네. 그래, 맞네. 야만족이란 없지. 자네들이 이 싸움에서 이겼네. 신시의 흰 단군, 검은 단군을 이긴 자들은 자네들이 처음이니, 그 명예는 우리가 영원히 보장해줌세. 허나........” 흰 단군은 땅에 떨어진 구르의 칼을 집어 검은 단군에게 획 던지며 말을 이었다. “우리에게는 맡은 임무가 있네. 자네들의 목을 베어야만 하네. 우리가 자네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그뿐이라 몹시 아쉽구먼. 비록 자네들은 죽겠지만, 이기고 죽는 것이니 편히 안파견 한님의 곁으로 가시게나.” 그러면서 횐 단군은 치우천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해 보였다. 옆에서 지켜보던 검은 단군이 투덜거렸다. “아니, 그럼 내가 목을 베라는 거요?” “자네가 아니면 누가 하겠는가?보다시피 내 어깨에 화살 구멍이나 있잖은가.” 흰 단군이 은근슬쩍 발뺌을 하자 검은 단군이 씩씩거리며 되받았다. “내 배에는 구멍이 나지 않은 줄 아시오?” “아, 나는 아까 저 친구가 던진 칼에 어깨도 맞았어. 보기엔 별거 아니었지만, 워낙이 매섭게 던져 지금도 온몸이 저리다네.” “나도 아까 어깨를 맞았수다. 칼날은 날아갔지만 저 친구가 내리치는 힘이 너무 강해서 칼바람만으로도 내 몸이 벌써 반으로 쪼개졌는데 도력으로 간신히 몸을 붙이고 있는 거란 말이우!” “허, 그놈 참.......” 검은 단군이 박박 우기며 생떼를 쓰자 흰 단군이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리다가 다시 말했다. “솔직히 난, 이 친구 목을 벨 수가 없다네. 차마.......” “난들 하고 싶은 줄 아시우?” 그러자 흰 단군은 버럭 화를 냈다. “자네, 언제부터 이렇게 꼬박꼬박 말대꾸를 하게 되었나? 수염이 허옇게 센 늙은이에게 감히 대들다니!” 비록 치우천 일행의 목을 베어야 하는 입장이지만, 어느새 그들에게 마음이 기울어진 두 단군은 자기가 선뜻 나서서 목을 베기 싫어 아옹다옹하는 꼴이 되었다. 그때 갑자기 누군가 비척거리며 풀숲에서 걸어 나왔다. 두 단군은 아연 긴장하며 그쪽으로 눈을 돌렸으나 이내 허탈하게 웃음을 머금었다. 바로 유쌍이었다. 여전히 얼굴은 파랗게 질리고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되어 울고 있었다. “죽은........ 거예요? 다 죽은 거예요?” 두 단군은 처음부터 유쌍이 솜털도 가시지 않은 별 볼일 없는 어린아이란 것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잘생기기는 했으나 용기도 배짱도 없는 보통아이 같았다. 그래서 아예 관심 밖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치베가 쓰러질 때 치우천이 풀숲으로 던지기는 했지만 유쌍은 다시 뛰 쳐나오지도 못하고 그저 숨죽여 흐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어리다고는 해도 기개 있는 전사들과의 동행자치고는 너무도 유약한 모습이었다. 두 단군은 아무리 철이 없다지만 그 모습이 너무 비겁하여 유쌍을 쳐다보며 싸늘하게 비웃음을 보냈다. “아직 죽진 않았지. 곧 죽을 거지만.” 흰 단군이 말하자 검은 단군도 냉소하며 한마디 거들었다. “너는 오래오래 살 거다. 너 같은 것은 아무도 죽이고 싶어 하지 않을 테니.” 유쌍은 여전히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눈물과 콧물을 계속 흘렸다. 지금까지는 이름만 들어도 든든한 용사들이 항상 곁에 있어 자신도 괜스레 어깨가 으쓱했고 당당할 수 있었다. 허나 리미와 개르가 일격에 쓰러질 때부터 유쌍은 겁이 났고, 치베가 스스로 목숨을 던지자 경악했으며, 세상이 뒤집혀도 끄떡도 하지 않을 것 같던 치우천마저 쓰러져버리자 아예 생각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자못 영웅 행세를 해왔지만, 정작 의지했던 사람들이 다 쓰러져버린 지금, 절대 감당조차 할 수 없는 괴물 같은 두 사람을 홀로 대하게 되자 서 있을 수도 없을 만큼 두려웠다. “나........ 나는요.......” 유쌍이 훌쩍이며 간신히 뭔가 말하려 하자 검은 단군이 그 꼴이 보기 싫은 듯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입 다물어라! 기분이 다 망가진다!” 횐 단군도 차갑게 말했다. “그 자리에 엎드려 고개를 땅에 처박고 얌전히 있으면 목숨만은 살려주마.” 유쌍은 자신도 모르게 다급하게 엎드리며 고개를 땅에 처박았다. 그 모습을 보며 두 단군은 ‘쯧쯧’ 하며 혀를 찼다. 검은 단군은 치우천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거 기분 좋게 안파견 한님에게 보내야 하는데, 못 볼꼴을 보이는군. 내 저 녀석을 한칼에 먼저 죽여줌세. 어떤가?” 그 말에 유쌍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다. 순간 그때까지도 정신을 잃지 않고 눈을 뜨고 있던 치우천과 유쌍의 눈이 마주쳤다. 치우천의 눈빛이 맑았다. 조금도 화난 기색은 없어 보였다. 되레 유쌍을 보고 웃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치우천은 안간힘을 쓰며, 눈동자를 살짝 옆으로 움직여 보였다. 그 눈빛을 보자 치우천의 목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았다. -왜 나왔니? 어서....... 어서 가지. ‘아냐. 난....... 난 정말....... 허나 나는 싸울 힘도 없고....... 정말....... 정말로 나는.......’ 유쌍은 턱을 덜덜 떨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두 줄기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난........무....... 무서워. 미안해요, 치우천님. 미안해요, 정말........’ 유쌍이 간신히 눈을 떴을 때 치우천의 눈빛은 여전히 부드럽게 웃음을 머금은 듯했다. -괜찮아, 유쌍. 괜찮아. 넌....... 너는....... “너도 이제 우리 중 하나다!” 문득 치우비가 자신의 어깨를 툭 두드리며 했던 말이 귀에 쟁쟁했다. 언제였던가? 예전에 처음 치우 형제와 그 주변의 이름 쟁쟁한 영웅들을 만났을 때 너무나 기뻐서........ 너무나 기뻐서........ “나........ 나는........” 유쌍이 벌레처럼 기면서 몸을 일으키는 모습을 두 단군은 혐오감에 가득 찬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유쌍은 끝내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오줌을 질질 싸서 아랫도리가 흥건히 젖어 있었다. 눈살을 찌푸리며 검은 단군이 물었다. “무서우냐?” 유쌍은 다시 한 번 흐흑 거리더니 눈물을 쏟았다. “너....... 너무 무서워요 너무 무서워........” “집어치웟!” 검은 단군이 뼁 소리를 질렀다. “너 같은 것은 죽이라고 해도 죽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리 무서우냐? 이 머저리 같은 녀석!” “난....... 나는 무서워요 이래서는 안 되는데....... 안 되는데.......” 유쌍은 계속 중얼거리며 비칠비칠 무릎걸음으로 두 단군에게 다가갔다. 그 모습을 본 횐 단군이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 “무섭다면서 왜 기어오느냐?” 유쌍은 잠시 꺽꺽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무서워서....... 너무 무서워서 그래요.” “우리가 무서우면서 왜 오느냔 말이다! 냄새난다. 저리 갓!” “난....... 난 당신들이 무섭지만........ 더 무서운 건........” “뭐?” 두 단군이 의아하여 고개를 갸웃하는 순간, 유쌍은 돌연 날렵하게 두 손을 내뻗었다. 그러자 검은 단군이 얼굴을 굳히며 손을 휘저었다. 어느 틈엔가 단군의 손에는 알록달록한 독사 네 마리가 쥐어져 있었다. 무시무시한 독을 가진 뱀들이었다. 유쌍이 소매에서 날린 것이다. 솜씨는 왜 빨랐지만 단군들을 당해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놈이?” 검은 단군이 눈을 부라리자 유쌍은 통곡을 하면서 뒤로 넘어졌다. “이럴 줄 알았어, 이럴 줄........ 엉엉........” 유쌍은 엉금엉금 치우천 쪽으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더 이상 다리가 후들거려 걸을 수 없었다. 유쌍은 치우천을 향해 울면서 외쳤다. “안....... 안 될 것이 뻔한데. 난........ 난 비겁하게라도 사는 게 좋은데....... 정말 살고 싶은데. 도망....... 치고 싶었고........ 저런 바보짓 하기 싫었는데.......” 순간 치우천은 스르르 눈을 감으며 눈물을 흘렸다. 유쌍은 더 크게 울어대며 외쳤다. “그럴 수가 없어요!” 유쌍은 치우천의 다리를 부둥켜안고 하염없이 울어댔다. 그 광경을 보고 검은단군과 흰 단군의 표정이 해쓱해졌다 그때 갑자기 한편이 소란스러워지며 이윽고 수십 명의 사울아비들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유쌍은 이제는 정말로 끝났다 생각하며 울음을 삼키며 멍한 눈빛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때 누군가가 가볍게 머리를 쓰다듬는 것 같았다. 놀라서 보니 치우천의 손이었다. 괜찮다는 듯 다 이해한다는 듯한 따뜻한 손길이었다. 유쌍은 또다시 울기 시작했다. “제길! 도망갈까 다시 생각하는 중인데....... 이제 그러지도 못하겠잖아요!” 허나 유쌍은 마음이 한결 편안해진 듯, 그의 얼굴에는 두려움이나 공포의 빛이 거의 사라지고 없었다. 그 모습을 보고 두 단군은 말없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백여 명이나 되어 보이는 사울아비들을 몰고 온 덩치 큰 남자가 헐떡거리며 두 단군 앞에 달려와 고개를 숙였다. “하늘군대 작은스승 우발숭이 흰 단군, 검은 단군님께 인사 올립니다. 여기에 도깨비와 야만족 놈들이 들어와 한웅님을 잡으려 한다면서요?” 그러면서 우발숭은 여기저기 쓰러진 치우천 일행을 둘러보았다. “이놈들인가 보군요?” 흰 단군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이 사람들은 야만족이 아니야.” 검은 단군도 한마디 거들었다. “그놈들은 저쪽으로 갔어. 자, 한웅님께는 아무 일 없으니 염려 말게나.” 우발숭은 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군말 없이 두 단군에게 인사를 올리고 부하들을 몰고 서둘러 다른 쪽으로 달려갔다. 치우천은 눈을 감고 체념상태에 있었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었다. 그때 누군가가 치우천의 몸 여기저기를 탁탁, 재빨리 두드리더니 잠시 후에 그의 몸 안에서 뭔가가 울컥 하며 치밀어 올랐다. 치우천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벌떡 일으키며 ‘우욱’하고 토해 내 보니 시커먼 핏덩어리가 눈에 들어왔다. 핏덩이를 뱉고 난 순간 이상하게 몸이 개운해지며 고통이 많이 가셔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몸이 풀린 듯하자 치우천은 번쩍 고개를 들며 물었다. “대체 왜.........?” 검은 단군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좋아할 것 없다. 너희를 풀어주려는 것은 아니니까.” “다만 기회를 한 번 주려고 하는 것뿐이다.” 흰 단군이 맞받으며 설명했다. “우리는 네가 아주 간사하고 흉악한 놈이라 들었다. 너무 허황된 일을 많이 벌렸고 말야. 한웅님을 말로 꾀여 터무니없는 짓을 벌이는 놈이라 생각했지 더군다나 싸움이 벌어진 이 판국에 네가 여기 나타나다니! 그래서 우리는 한웅님을 지키는 김에 그 입까지 막으려고 아 예 보자마자 죽여 없애려 했다. 네 말에는 누구나 홀려서 넘어간다고 하더구먼. 허나 네 부하들이 제법 늠름하고, 저런 꼬마 겁쟁이마저도 덜덜 떨면서도 도망치지 않는 것을 보니, 네놈이 그렇게 속이 시커먼 거짓말쟁이 같지는 않구나.” “그냥 거짓말쟁이는 아니겠지요. 거짓말로 영웅을 속이기는 쉽지만, 되레 겁쟁이는 속이기 어렵지요 겁쟁이는 겁이 많고 자기만 챙기니까요. 하물며 겁쟁이가 스스로 목숨을 버릴 정도라면....... 거짓말로 는 절대 안 되겠지요.” 검은 단군의 말에 흰 단군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내가 가르쳐준 것 아니냐? 좌우간 그래서 너에게 작은 기회를 주려고 하는 것뿐이다.” 치우천은감사의 인사를 하려 했으나 흰 단군은 손을 저으며 이내 덧붙였다. “그래서 네가 바란 대로, 한웅님을 마지막으로 한 번 만나게 해주려는 것뿐이야. 뭔가 할 말이 많은 듯하니 시원하게 말이나 다하고 죽으라고 말이다. 너를 살려둘 수는 없어. 한 사흘 목숨을 더 붙이는 것뿐이니 고마워할 것 없다.” “한웅님을 뵈옵고 직접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저는 죽지 않을 것입니다.” 결의에 가득한 치우천의 말에 두 단군은 동시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지 않을 건데........? 사흘 후면 너는 죽게 되어 있어.” “제가 왜 사흘 후에 죽는단 말입니까?” 치우천이 좀 이상해서 되묻자 검은 단군이 대답했다. “너는 네 부하들로 하여금 신시를 공격하라 했고.........” “그건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지금이라도 멈출 수 있습니다.” “글쎄다? 한웅님의 명령이 있으셨으니 그대로 이루어질 텐데?” “한웅님과 저를 이야기하게 해주신다면, 저를 살려주시는 것과 다름없을 겁니다. 신시를 공격한 죄는 크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저를 죽이라는 명령은 아마도 고시울률의 짓이겠지요.” 그러자 두 단군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치우천은 고시울률이 수작을 부린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잠시 이야기를 끊고 치우천은 황급히 치베의 상처를 살폈다. 다행히 아직 숨은 붙어 있었다. 치우천은 기쁘고 반가운 마음에 들뜬 목소리로 단군에게 물었다.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뭐? 왜?” “이 친구를 죽게 둘 수는.......좀 부탁드립니다.” 치우천이 간절하게 말하자 검은 단군은 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녀석아, 그놈을 살려서 무엇 하느냐? 그놈을 더 고통스럽게 할 거냐?” “무슨 말씀입니까?” 두 단군은 다시 한 번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더니 이내 물었다. “너,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게냐?” “도대체 뭘 말입니까?” 치우천이 어리둥절해하자 두 단군은 또다시 마주보며 중얼거렸다. “이놈이 알고 보니 바보였던가 보요.” “정말 모르고 있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정말 모르고 제 발로 들어왔다는 건데, 그러면 멍청이 아니야?” “그런데 그렇게 멍청이 같아 보이지는 않으니 말이 안 되잖아?” “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그러자 횐 단군은 치우천을 측은하다는 듯 바라보며 말했다. “이 녀석아, 차라리 지금 죽는 게 나아. 네 녀석은 이미 죄 값으로 사흘 후에 솟대거리에서 갈가리 찢어져 죽이기로 정해졌다고 말했잖나? 다른 놈들 모두 함께!” “그건 한웅님의 뜻이 아닐 겁니다!” 치우천이 화들짝 놀라서 외치자 검은 단군은 혀를 끌끌 찼다. “글쎄다. 나는 그 명령을 한웅님이 직접 내리시는 것을 들었는데? 더구나 그 명령은 벌써 나흘 전에 내려진 것이란다. 더구나 너는 그 후에 신시를 공격하는 죄를 짓기까지 했으니.......” 치우천은 순간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나흘 전.......? 그렇다면 이건 이상하다! 내가 돌아오기도 전에 이미 나를 죽이기로.......? 그렇다면 내가 신시로 공연히 뛰어들었다는 건가? 치우천은 도저히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왜 신시 성문을 열고 나를 맞이한 척한 겁니까?” “그렇게 너를 잡으려고 한 것이지. 한웅님도 허락하신 일이라네. 한웅님은 네가 수십 천의 야만....... 아니, 다른 부족 전사들을 몰고 오는 것을 아시고는 대단히 화를 내시며 너를 잡을 방법을 찾으셨어.” “한웅님이 속으신 겁니다! 저는....... 저는 절대........!” 그 순간 흰 단군이 다시 치우천의 목 언저리를 슬쩍 손가락을 짚는가 싶더니 치우천은 온몸에 다시 힘이 빠지며 스르르 그 자리에서 쓰러져버렸다. 검은 단군이 지껄이는 말을 마지막으로 들으며........ “글쎄다. 모르긴 우리가 더 모르겠구나. 좌우간 네가 죽기 전 사흘 안으로 한웅님을 뵙게는 해주마. 그러나 네가 죽는 건 어떻게든 피할 수 없을 거야.” 치우천은 캄캄해지는 의식 속에서 필사적으로 생각의 끈을 놓치지 않으려 했다. 이것은 모략이라고........ 자신들 속에 있던 배신자의 정보로 고시울률이 한웅님을 협박하여 얻은 결과임이 분명하다고....... 그리고 어떻게든 사와라 한웅에게 이 일의 전모를 밝히고, 사와라 한웅이 독살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야 한다고........ 끝내 생각의 끈을 놓치고 치우천은 캄캄한 의식 속으로 깊이 빨려 들어갔다. 한편, 흙먼지와 함께 달려간 보돈차르의 몽골군과 와난강, 와난수의 새끼손가락 부대는 곧 남쪽에서 몰려온 사울아비 부대와 격돌했다. 그들은 길을 달려가는 와중에 간략히 작전을 토의해서 진형을 맞추었다. 보돈차르의 기병이 가운데에서 전진하고, 와난강과 와난수가 각각 마갸르 보병을 이끌고 양쪽을 감싸는 특이한 진형을 취하기로 한 것이다. 남쪽에서 올라오는 세 갈래의 사울아비들을 보돈차르와 와난강, 와난수가 각각 한 부대씩을 거느리고 그들과 맞서기로 이미 정해놓았다. 가운데 부대의 선두에 선 보돈차르는 침착한 지휘로 몽골 기병들을 이끌며 전진했다. 보돈차르가 앞서 있는 것을 보고 맞은편에서 오던 사울아비 부대에서도 한 사람이 조금 앞으로 나섰다. 그것을 보자 보돈차르는 몽골군의 전진을 멈추었다. 피차 화살이 닿지 않을 거리 였다. “나는 주신, 하늘군대의 사울아비 큰스승 고시가라라고 한다. 너희 어디서 온, 누구냐?” 사울아비의 대장이 앞으로 나서며 묻자 보돈차르는 침착하지만 커다란 목소리로 답했다. “나는 몽골, 보돈차르족의 보돈차르다.” “몽골 전사들이 어찌 감히 주신의 신시를 공격하는 것이냐?” “우리는 주신을 도와 지나족과 싸웠고,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런데 이번 싸움에 가장 큰 공을 세운 대장인 치우천을 신시에 잡아 가두었다. 이것이 과연 주신에서 공을 세운 사람을 대하는 방법인가?” 고시가라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말했다. “그는 주신 사람이니 안파견 한님과 한웅님이 만드신 법에 따라야 한다. 너희 몽골 사람이 참견할 일이 아니다.” “참견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우리도 그 일에 끼어들었고, 그는 나의 안다이다.” “지금 전사들을 돌려 몽골로 돌아간다면, 내가 책임지고 싸움 없이 가도록 해주겠다. 주신은 공연히 머나먼 몽골과 싸울 생각이 없다.” 고시가라가 자못 온건하게 말했으나 보돈차르는 코웃음을 치며 냉랭히 되받았다. “지금 치우천 안다를 풀어주고, 그런 짓을 꾸민 자들에게 벌이 떨어진다면 돌아가지 말라 해도 돌아간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으면 우리는 돌아가지 않는다!” 순간, 고시가라가 화를 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디 감히!” 보돈차르는 침착함을 잃지 않고 날카롭게 말했다. “주신이 비록 큰 나라이나 너희가 틀렸다. 너희가 옳지 않으니 우리는 너희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일이 어지 되었건, 감히 주신 신시로 칼과 화살을 돌린 이상, 무사하지는 못할 것이다!” 고시가라가 호통을 쳐도 보돈차르의 태도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먼저 칼을 돌린 것은 너희다. 우리 몽골에서 믿는 텡그리께서는 공을 세운 전사들을 가장 훌륭히 대접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너희가 믿는 안파견 한님은 그렇게 가르치시지 않고, 오히려 공을 세운 사람을 잡아 죽이라고 하셨는가?” 고시가라는 안파견 한님의 이름이 나오자 크게 화를 내며 외쳤다. “결국 피를 보자는 말이군! 좋은 말로 타이르려 했더니, 속셈을 드러내는구나!” 보돈차르는 눌리는 기색 없이 보기 드물게 길게 이야기했다. “고시가라 큰스승, 우리가 주신을 치러 여기까지 온 줄 아는가? 그랬다면 우리가 지나는 길에 주신 사람들을 왜 가만두었겠는가? 왜 주신 사람들이 우리를 환영하고 기뻐 맞이했겠는가? 우리는 다만 치우천을 풀어주고, 우리에게 정당한 대접을 해주기를 바랄 뿐이다.” “보돈차르 족장, 주신 안의 일은 주신에서 해결한다. 아무리 치우천이 네 벗이라지만 주신 사람이다. 네가 이러는 것은 너와 너희 부족전사들을 모두 죽이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까 말했듯, 너희가 틀렸으므로 나는 조금도 두렵지 않다. 텡그리께서는 우리 편이시며, 너희의 안파견 한님도 우리를 도와주실 것이니까 말이다.” 고시가라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커다랗게 소리를 질렀다. “보돈차르! 내 이름을 걸고 말하건대, 너희는 절대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보돈차르도 지지 않고 당당하게 맞섰다. “나 역시 일을 해결하기 전에는 돌아가지 않는다!” 고시가라가 다시 말머리를 돌려 사울아비들 사이로 돌아가자, 보돈차르도 말을 달려 자신의 부대로 돌아왔다. 돌아오자마자 보돈차르의 곁으로 다섯 명의 몽골족 소부족장이 달려왔다. 보돈차르의 오른팔이나 다름없는 부장들로서, 치베와도 잘 아는 사람들이었다. 보돈차르 는 목소리에 힘을 주어 짧게 명령을 내렸다. “지금 곧바로 전진한다!”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몽골 전사들 모두가 말의 배를 박차며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삼천 명의 전사들이 일제히 말을 달려 나가기 시작하자 반대편의 사울아비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싸움이 시작되자, 보돈차르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져 갔다. 몽골족은 탁월한 기동력을 발휘하여 적진을 흐트러뜨리면서 말을 탄 채 활을 쏘는 것으로 유명했다. 허나 지금 몽골족의 전술은 사울아비들에게 잘 먹혀들지 않았다. 동북아시아 전체를 누비면서 많은 종족들과 접해본 사울아비들은 몽골족의 전술이 어떤 것인지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주신 사울아비들은 몽골족이 전진하는 방향을 짚어 맞서지 않고 도리어 뒤로 물러서며 후퇴하고 있었다. 아니, 후퇴한다기보다는 양옆으로 갈라지면서 오히려 몽골족에게 화살을 퍼부어댔다. 비록 몽골 전사들보다 말 타고 활 쏘는 기술이 뒤떨어졌지만 주신의 활은 몽골 활보다 두 배 이상이나 멀리 나갔다. 때문에 도망치다가 거리가 벌어지거나 추격 방향에서 안전거리를 확보하면 그때 주신 사울아비들은 말을 멈추고 간헐적으로 화살을 날렸고, 몽골 전사들은 눈을 번히 뜨고 화살을 맞아야 했다. 몽골측에서도 이를 갈며 화살로 응사를 해보았지만, 그들의 화살은 주신 활에 비해 반도 날아가지 못했다. 전사들이 자꾸만 쓰러지자 소부족장 중 한 명이 보돈차르에게 외쳤다. “피해가 큽니다!” 보돈차르는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멈출 수 없다! 더 빨리 달린다!” 그러자 소부족장이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이러다가 포위당합니다! 뒤를 잡힙니다!” 몽골족은 간헐적으로 화살을 쏘아대는 사울아비들의 뒤를 따라잡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해 전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부 사울아비들이 몽골족을 유인하듯 전진하며 화살을 쏘아대는 반면, 그 외의 수많은 사울아비들이 둘로 갈라져 몽골족의 배후를 위협해 들어왔다. 그러나 보돈차르는 신경 쓰지 않는 듯, 계속 전진만을 외쳐댔다. “온다!” 새끼손가락 부대, 즉 마갸르족의 왼편을 지휘하던 와난수가 먼저 사울아비들의 움직임을 감지했다. 사울아비들의 수는 일만 오천은 되어 보일 정도로 많았으나 말을 탄자는 삼천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나머지 일만 이천 정도는 정식 사울아비가 아닌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들은 잘 통제되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속도 차이 때문에 사이가 많이 벌어진 마갸르군과 몽골군의 사이를 양쪽에서 파고들듯 밀려오고 있었다. “강이 녀석이 잘해주겠지.” 오른편을 지휘하고 있는 아들 와난강을 생각하며 와난수는 급히 마갸르 전사들에게 외쳤다. “자! 지금부터다! 모두 있는 힘을 다해 싸워라! 알겠는가?” 와난수의 고함이 떨어지자마자 마갸르족 모두가 커다랗게 소리를 지르면서 대답했다. 그러고는 돌연 힘을 내어 맹렬한 기세로 달리기 시작했다. 마갸르족의 모든 전사들은 말을 타고 있지 않았으며, 전투에 임해 말을 가진 사람들도 대부분 말을 풀어놓은 상태였다. 그 때문에 그들의 진군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았다. 허나 와난수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마갸르족들은 놀라운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마갸르 놈들이 갑자기 빠르게 움직입니다!” 고시가라는 사울아비 작은스승들의 보고를 듣고 눈살을 찌푸렸다. 먼발치에서 움직이는 마갸르족들의 속도가 갑자기 빨라진 것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고시가라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말도 타지 않은 놈들이 어떻게 저리 빨리 뛰는가?” 마갸르 전사들이 빨라진 데는 이유가 있었다. 치우천과 알게 되고 그가 유망에게 마술 같은 승리를 얻는 것을 본 와난수, 와난강 부자는 그후 오랜 생각과 고민 끝에 자신들의 마갸르 전사들을 강하게 만들 방법을 찾아냈다. 비록 하루아침에 작은 주신 전사들이나 사울아비들처럼 강하게 만들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한 가지, 마갸르 전사들을 빨리 달리게 만드는 것은 가능했다. 그것만큼은 치우천과 같은 머리나 조직력이 없어도 가능한 훈련 중 하나였다. ‘결국 전사들의 승패는 빠르기에서 결판난다! 더 빠르면 더 강해지는 것이다.’ 이런 결론을 얻게 된 와난강, 와난수 부자는 근 몇 달 동안 틈만 나면 전사들에게 달리기를 연습시키고 달리는 속도와 지구력을 높이는 데 열중했다. 덕분에 마갸르족 전사들은 비록 길어야 반나절 동안이지만, 다른 부대의 허를 찌를 수 있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와난수, 와난강 부자는 보돈차르와 이동하면서 잠시 사울아비들을 막을 방법을 궁리하다가 마침내 와난강이 제의한 이 작전을 구사하기로 결정했다 “달려라! 더 달려라!” 와난강도 미친 듯 말을 몰아 여기저기로 좌충우돌 달리며 전사들을 독려하고 있었다. 이제 사울아비들의 대다수가 보돈차르를 포위하려는 듯, 양옆에서 밀고 들어오는 것이 완연히 보였다. 그러나 그보다 마갸르 전사들이 출발은 늦었으되 도착은 빠를 것 같았다. 이대로라면 사울아비들은 포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포위를 당하는 셈이었다. “이런! 놈들에게 저런 수가 있었구나!” 고시가라는 손으로 말 등을 내리치며 분통을 터뜨렸다. 자신의 포위 작전이 되레 역포위를 당하는 상황이 되어 가는 것을 두 눈으로 뻔히 보면서도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었다. 그러나 고시가라는 크게 고개를 한 번 흔들고 뺨을 툭툭 쳤다. 그 모습을 보고 사울아비 작은스승들은 서로 얼굴을 번갈아 보면서 기대에 부푼 눈빛을 주고받았다. 고시가라는 하늘군대에서 ‘꾀주머니’라고 할 만큼 임기응변에 능한 인물로 명성이 자자했다. 그는 항상 묘한 꾀를 내기 전에 고개를 흔들며 자기 뺨을 치는 버릇이 있었으니, 지금 고시가라가 뺨을 치는 것은 이상황을 타개할 묘책이 있다는 뜻이었다. “됐다!” 와난강과 와난수는 양측에서 마갸르족을 몰고 들어오면서 환호성을 올렸다 이미 죽을힘을 다해 달린 마갸르족은 사울아비들보다 한발 앞서서 적과 앞을 막아섰다. 가까이 보니 그들은 사울아비라기보다는 주신 여기저기서 모아온 보통 장정들인 것 같았다. 그들은 작전대로 일이 되지 않고 역포위를 당해 앞이 막히자 몹시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더구나 앞이 막혔는데도 뒤에서 계속 밀려들어오는 통에 제대로 싸움도 해보지 못하고 이미 대오가 산산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서 와난강이 적진을 훑어보고 외쳤다. “아무나 잡을 것 없다! 말 탄 사울아비들만 잡아라!” 와난강은 날카로운 눈으로 주신 군대가 움직이는 것은 몇몇 사울아비들에 의해서라는 것을 알아본 것이다. 안 그래도 몇 되지 않는 사울아비들은 통제를 잃은 자기 군대에 휩쓸려서 제대로 달리지 못해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그런 사울아비들을 마갸르족들이 달려들어 하 나 둘씩 말밑으로 떨어뜨렸다. 허나 사울아비들은 역시 남다른 데가 있어 말에서 떨어진 뒤에도 완강하게 저항했다. 그들 대부분은 구리 무기를 가지고 있는데다 무기를 다루는 솜씨가 여간 뛰어난 것이 아니었다. 섣불리 서너 명 정도가 덤벼들었다가는 사울아비를 잡기는커녕 되레 무기가 박살나거나 실력에 밀려서 죽거나 다치기 십상이었다. 적어도 열 명 이상이 한꺼번에 덤벼야 간신히 잡거나, 잡지는 못해도 말을 빼앗고 도망치게 만들 수 있었다. 사울아비들을 잃은 주신 전사들은 그야말로 거미새끼처럼 뿔뿔이 흩어져 도망치기 시작했다. “다 죽이거나 잡을까요?” 부하가 의기양양하게 묻자 와난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밭이나 갈던 사람들을 사울아비들이 추려서 데리고 온 모양이다. 따지고 보면 치우천님과 같은 주신 사람이고, 전사나 사울아비도 아닌데 죽여 무엇하겠느냐? 다 흩어 도망치게 해주자.” 한편, 그때까지 사울아비들을 뒤쫓던 몽골 전사들도 환호성을 올렸다. 와난수 와난강의 역포위 작전은 보기 좋게 성공하여 주신 군대가 거미 떼처럼 흩어지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하늘군대 사울아비들도 별것 아니구나!” “이겼다! 이겼어!” 말단 전사들조차도 기뻐서 환호를 올리고 있는데 지휘자인 보돈차르가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그는 냉엄한 얼굴에 약간 웃음을 흘리면서 전사들을 둘러보다가 돌연 얼굴빛이 굳어졌다. 옆에 있던 소부족장이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보돈차르를 쳐다보았다. 보돈차르는 소부족장이 뭐라 묻지도 않는데 혼자 외쳤다. “아니다! 너무 쉽다! 이게 아니다!” 보돈차르는 미친 듯 말을 몰아 맨 앞으로 나섰다. 다들 달려가는 대형이었지만 보돈차르의 말이 그중 가장 빨랐기에 가능했다. 앞서 달려가는 사울아비들의 무리를 본 순간, 아차 싶어 보돈차르가 탄식하듯 외쳤다. “언제부터 사울아비들이 저렇게 줄었나? 응?” 그 뒤를 따라온 소부족장 하나가 얼른 대답했다. “아까부터 계속 조금씩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러나........ 도망치거나 뒤떨어지는 자들이 분명합니다.” 보돈차르는 입술을 깨물다가 크게 소리쳤다. “이제 겨우 반나절도 안 달렸다! 그런데 뒤처지는 자가 그리도 많겠느냐? 주신 사울아비들은 우리 못지않게 말을 잘 탄단 말이다!” 그때 뒤쪽에서 다급하게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쪽에 사울아비들이 나타났습니다! 큰일입니다!” 보돈차르는 순간 얼굴빛이 해쓱해졌다. “당했다!” 소부족장은 부들부들 떨면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렇게 흩어진 자들이 어떻게 대열을 이루고........” “저들은 사울아비다! 보통 전사들이 아니야.” 고시가라는 포위가 실패한 순간, 금세 묘책을 찾아냈다. 지금 쫓기는 시늉을 한 사울아비들이 뒤로 돌아 몽골 전사를 막을 수는 없었다. 대열을 갖출 시간도 없고, 대열을 뒤로 돌리다가 적의 공격을 받으면 그대로 전멸이었다. 허나 그런 추격전에서 하나둘씩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신경 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바로 그 점을 이용하여 고시가라는 사울아비들을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계속 일부러 낙오시켜 몽골군의 뒤로 돌린 것이다. 보돈차르가 직접 선두에 나섰다면 그 점을 눈치 챘을지 모르나, 보돈차르는 역포위의 성공 여부가 마음에 걸려 대열의 뒤에 남아 있던 탓에 미처 알지 못했다. “할 수 없다! 있는 힘을 다해 쳐 나가면서 천천히 왼쪽으로 돌아 뒤로 간다!” 보돈차르가 명령하자 소부족장들이 비명을 질렀다. 제아무리 말 위에서 살아가는 몽골족일지라도, 대군이 일제히 방향을 바꾸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앞뒤에 적이 있는 상황이고 보니 순식간에 엄청난 피해를 입을 수도 있었다. “그러면 자칫 완전히 포위됩니다! 다 죽습니다'” “이대로 뚫고 나갑시다! 사울아비들이 아무리 빨라도 우리 몽골족보다는 느립니다!” 그러나 보돈차르는 힘겹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저 마갸르족은 다 죽는다. 그렇게 할 수는 없다.” 그 말에 소부족장들이 일제히 외쳤다. “마갸르족 따위 때문에 우리가 죽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포위를 빠져나간 다음에 복수하면 됩니다!” “마갸르족에게 사울아비들이 몰리도록 한 다음, 우리가 다시 그들을 포위하면........” 급히 외쳐대던 소부족장은 '짝' 소리와 함께 채찍을 얼굴에 맞아 하마터면 말에서 떨어져 구를 뻔했다. 보돈차르는 화난 듯 외쳤다. “마갸르족이라도 지금은 우리의 벗이고, 우리와 함께 싸우고 있다! 나는 내 부하들이 더 이상 비겁한 말을 하는 것을 들을 수 없다! 다들 입을 다물어라!” 그러고는 더욱 목소리를 높여 크게 외쳤다. “내가 남을 위해 목숨을 버려야 남도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는 것이다!” 즉시 보돈차르는 앞장서서 달려 나가며 방향을 왼편으로 틀었다. 그러자 다른 몽골 전사들도 입을 다물고 그 뒤를 따랐다. “사울아비들이다! 말탄 사울아비들 무리가 나타났다!” 와난강, 와난수의 부대는 갑작스레 들이닥친 사울아비들의 대열에 산산이 흩어지고 있었다. 우왕좌왕하는 주신 부대들 사이에서 작전 성공의 기쁨을 맛보던 그들로서는 그야말로 자다가 뒤통수를 얻어맞은 격이었다. “사울아비들이 어디 또 있었단 말이냐? 보돈차르 족장이 그들을 몰고 나갔을 텐데?” 와난강, 와난수는 마구 헝클어지는 자신의 부대들 사이에서 있는 힘을 다해 방어전을 펼치고 있었으나 형세는 한마디로 난감했다. 대열을 갖춘 사울아비들의 위력은 엄청났다. 대략 백 명 단위로 여기저기서 구리 무기를 휘두르며 달려오는 주신 사울아비들의 말발굽에 마갸르 전사들은 제대로 저항도 해보지 못하고 짓밟혔다. 사울아비들은 낙오하면서 백 명 가량의 단위로 대열을 급히 갖추어 한편으로는 몽골군의 후미를 치는 한편, 대부분은 마갸르족 사이로 과감하게 돌파를 시도했던 것이다. 다섯 군데 중에서 네 군데가 돌파에 성공했으며, 제대로 저항도 못한 와난강, 와난수의 부대들은 갈가리 흩어져 앞뒤를 짐작할 수 없는 혼란 속에서 무너져 가고 있었다. 단 한군데, 와난강 직속의 돌 던지는 부대만이 죽을 각오로 돌을 던져서 간신히 돌파를 막아냈을 뿐이다. “과연 사울아비들은 다르구나. 이건 정말........” 와난수는 부하들을 단속하려 애쓰면서 탄식처럼 내뱉었다. 와난강은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되어 이를 부드득 갈며 속으로 외쳤다. ‘지나족과의 싸움도 겁났지만 사울아비들과 싸우는 것은 정말.......고작 몇 백 명이 이렇게 우리를 헝클어놓다니, 이놈들 정말 대단하구나!’ 보돈차르의 끈질긴 몽골 전사들도 끊임없이 뒤에서 사울아비들의 화살이 날아들자 동요하기 시작했고 계속 피해가 속출했다. 그러나 보돈차르는 멈추지 않고 평원을 반 바퀴 돌아 드디어 막 적들에게 휩쓸리려는 마갸르족 부대와 합류했다. 마갸르족 사이를 돌파하려던 일 단의 사울아비들은 보돈차르의 부대가 옆에서 나타나자 동요하며 스스로 물러섰다. “보돈차르 족장! 어떻게.......” 와난수와 와난강은 몹시 반가웠다. 마갸르족만으로 주신 사울아비들의 돌파를 막기는 역부족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돈차르와 몽골전사들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몽골 전사들의 피해도 제법 컸거니와 말들이 너무 지쳐 있었다. 몽골의 말들이 아무리 끈기 있게 달린다지 만, 죽기 살기로 몰아대어 무리한 이동을 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일단 물러선 사울아비들은 도망치지 않고 곧바로 보돈차르를 쫓던 부대와 합류하여 더 큰 무리를 만들어 단숨에 이쪽을 쓸어버리려는 듯 대열을 가다듬었다. “아, 너무 힘들겠군.......” 보돈차르는 이를 갈며 신음하듯 말했다. 몽골족이 여러 마리의 말을 가지고 있기는 하나, 그 여분의 말들을 갈아탈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수천 명이 탈 말을 끌어오고 그것을 갈아타면 대열이 흐트러져 단숨에 되잡히게 된다. 그러니 지쳐서 거품을 물고 있는 말들로 어떻게 적을 맞아 싸운단 말인가. 조금의 시간만 있으면 다시 대열을 갖출 수 있지만, 고시가라는 이런 기회를 적에게 내줄 만큼 머리가 모자라는 지휘관이 아니었다. 대열을 갖춘 주신 사울아비들이 다시 달리기 시작하려는 순간,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주신군과 보돈차르군 사이에 갑자기 거대한 그것이 나타난 것이다. 고시가라를 비롯한 사울아비들은 물론, 보돈차르나 와난수, 와난강도 깜짝 놀랐다. 여기서 ‘그것’을 보리라고 상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한편, 동쪽을 맡은 야율쿠리와 초초룬은 두 갈래의 사울아비 부대와 격돌하기 직전이었다. 야율쿠리가 거느리는 키탄 전사들은 기병의 숫자가 적었기 때문에 한데 똘똘 뭉쳐 빽빽한 대형을 취했다. 이는 기병의 돌파를 막기 위한 것으로 키탄족 특유의 과감한 전술이기도 했다. 그에 비해 초초룬의 미아우 전사들을 열 명 단위로 나누어져서 수백 개의 작은 조를 만들었다. 초초룬은 야율쿠리의 급한 성질을 잘 아는 터라 타이르듯 말했다. “나가서 싸우는 것은 안 돼. 우리가 할 일은 저들을 막아내는 것이다. 우리가 이기는 것보다 치우비가 신시를 공격하도록 지키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그것을 잊으면 안 된다.” 야율쿠리는 초초룬에게 씩 웃어 보였다. “너는 나를 바보로 아는 거냐? 나도 같은 생각이다. 물론.......” 야율쿠리는 손에 든 기다란 양날 구리도끼를 한 번 힐끗 바라보고는 말을 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몰고 나가 다 쳐 없애버리고 싶지만....... 좌우간 염려 마라. 나도 안단 말이다.” 초초룬은 웃으면서 반농담조로 말을 건넸다. “너회 키탄족 늑대새끼들은 우리 미아우 전사들이 지켜줄 거다.” 야율쿠리도 지지 않고 맞받았다. “비아우 전사들은 우리 키탄 전사들 든든한 등판 뒤에 숨어 있기나 해라.” 두 사람은 그 말이 씨가 되어 아옹다옹 말싸움을 벌였다. 그런 둘의 말싸움은 달려온 연락병의 보고로 중단되었다. “사울아비들이 옵니다! 수가 많습니다.” 둘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말다툼을 딱 멈추었다. 초초룬이 먼저 야율쿠리에게 말했다. “말 탄 사울아비들이 먼저 밀고 들어올 거다. 우리는 독을 써서 어떻게든 그들을 막아낼 테다. 우리가 흩어져 있으니 우리를 잡기는 어려울 거야. 다만 너희도 잘 버텨줘야 한다. 너희가 무너지면, 우리는 그야말로 하나씩 사냥을 당하게 된다.” “우리 키탄 사람은 절대 물러서지 않는다. 너희나 잘해라.” 야율쿠리가 호기롭게 말하자 초초룬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솔직하게 이야기하자. 아마 엄청 당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야율쿠리는 크게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 유명한 주신 사울아비들과 싸우는데 멀쩡할 수 있겠나?” “그래도 물러서지 않겠지?” “다 죽기 전에는 물러서지 않는다!” 그러자 초초룬은 씩 웃으며 목소리를 한껏 높여 명령을 내렸다. 야율쿠리의 부대 수천 명이 빽빽하게 한군데로 둥글게 모여들었고 초초룬의 부대는 그 주위에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어지럽게 퍼져 나갔다. 그리고 열 명 단위로 구성된 초초룬 부대의 전사들은 한자리 를 지키지 않고 계속 움직이며 주위를 돌아다녔다. 멀리서 보면 마치 불타오르는 태양과 같은 모습이었다. 그에 비해 이들과 맞서는 두 갈래의 사울아비 군대는 기병이 앞서고 보병이 뒤를 따르는 전형적인 대형이었다. 이윽고 사울아비 측의 돌파가 시작되었다. 허나 초초룬과 야율쿠리의 군대는 서로 아옹다옹하던 미아우와 키탄족 출신이었으나 지금은 놀랄 만큼 손발이 척척 맞았다. 말 탄 사울아비들의 무서운 돌격은 미아우 전사들의 독벌레와 독가루 공격으로 점점 그 대형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사람보다도 말이 먼저 독벌레와 독가루 냄새에 질겁을 하기 때문에 무시무시한 사울아비들의 돌파력도 제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사울아비들은 견디다 못해 말을 버리고 걸어서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되자 이번에는 물러서 있던 키탄 전사들이 몰려들었다. 키탄족 전사들이 사울아비보다 강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떼로 몰려다니며 사울아비들을 공격했고, 또 말에서 막 내려 힘들게 달려오는 사울아비들을 때맞춰 공격했기에 막상막하의 혼전이 벌어졌다. “잘한다! 역시 우리 키탄 전사들이 최고다!” “우리 미아우 전사들 덕인 줄 알아라.” 의외로 자신들이 밀리지 않고 고전하지 않자 야율쿠리와 초초룬은 저절로 신이 났다. 최고, 최강이라는 주신 사울아비와 동등하게 겨루며 밀리지 않는다는 사실이 자신감을 주었다. 허나 두 사람 모두 깨닫지 못한 사실이 하나 있었다. 그들은 왜 오랫동안 치우천과 늘 같이 다녔기 때문에 은연중에 사울아비들의 전술에 대해 통달해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러니 주신 사울아비들의 작전이 제대로 먹혀들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허나 최초의 공격에 실패하다시피 한 사울아비들의 대장은 일시 후퇴를 하더니 곧바로 대열을 정비하여 다시 휘몰아쳐 왔다. 전번처럼 한군데를 돌파하는 것이 아니라 산발적으로 흩어져서 여러 곳을 동시에 돌파하려 했다. 그렇게 되자 당장 미아우 전사들의 손이 부족해졌다. 더구나 독벌레나 독가루 등의 위력은 대단했지만 무한정 있는 것도 아니었다. 가진 독물을 다 사용한 미아우 전사들은 오히려 전투 능력이 없는 짐 덩어리에 가까운 존재였다. 그리고 물불을 가리지 않는 용맹한 키탄 전사들이라지만 막상 사울아비들의 돌파로 대열이 흩어지면 그 힘을 제대로 발휘할 수가 없었다. 승리에 찬 자신감도 잠시였다. 상황이 좋지 않게 흘러가자 야율쿠리는 늑대 울음소리로 울부짖으며 크게 외쳤다. “키탄 전사들이여! 사울아비들을 그냥 둘 것이냐? 몸으로 막아라!” 야율쿠리 자신이 앞장서서 돌파해 들어오는 사울아비 부대 하나를 막아서더니 곧바로 그쪽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야율쿠리의 좌우, 뒤로 많은 수의 키탄 전사들이 따랐다. 제아무리 사울아비들이 말을 타고 사람을 짓밟으면서 돌격해 들어온다 할지라도 수많은 키탄 전사들이 목숨을 걸고 무작정 덤벼들면 그야말로 진퇴양난이나 다름없었다. 수십 마리의 말과 수백 명의 사람들이 글자 그대로 몸으로 부딪히는 격돌이 벌어지자 살과 피가 튀고 처참한 비명과 고함소리가 땅을 흔들었다. 말과 사람의 몸뚱이가, 거침없이 무기를 휘두르며 달려드는 그 엄청난 기세를 이기지 못해 부러지고 쪼개지며 피가 하늘까지 물들이는 듯했다 흙먼지와 피로 뒤범벅이 되어 더 이상 적과자기편을 구분할 수도 없어 무작정 무기를 휘두르는 끔찍한 혈전이었다. 한순간의 대 격돌로 수십 명의 키탄 전사들이 순식간에 죽고 그 이상이 중상을 입었으나 그와 부딪힌 사울아비들의 손해도 막심했다. 더구나 줄을 맞춰 달리던 대열이 갑자기 충돌하여 정지했기 때문에 말이 쓰러지자마자 잇달아 넘어져 피해는 더욱 컸다.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자 악에 받친 키탄족 전사들도 사울아비의 돌파에 정면으로 맞서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엄청난 충돌이 일어나며 무기에 맞은 사망자보다는 서로간의 몸에 치이고 밟힌 중상자가 끔찍할 정도로 늘어났다. 너무도 야만적인 전술에 놀란 사우아비들의 큰스승은 일단 돌파 시도를 멈추고 부대를 물러서게 했다. “봤느냐? 하핫 사....... 사울아비들도 별........ 별거 아닌........” 온몸에 피 칠갑을 하고 얼굴까지 선혈에 붉게 물든 야율쿠리는 자못 호탕하게 웃으려 했다. 그러나 야율쿠리도 언제인지 모르게 온몸에 수십 군데의 크고 작은 상처를 입은 탓에 서 있거나 말을 하기도 힘들 정도로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대장이 그러했으니 부하들의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비록 사울아비들의 돌파를 몸을 던져 막아냈지만 키탄족이 단 한 번의 싸움에 입은 피해는 엄청났다. 더구나 사망자보다 부상자들이 훨씬 많아 전열을 가다듬을 수 없을 판이었다. 그에 비해 사울아비들은 비록 호 된 타격을 입었지만 다시 물러서서 대열을 갖추며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초초룬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독벌레와 약 가루도 떨어져 가고....... 야율쿠리와 키탄 전사들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었다. 한 번 더 저들이 몰려오면 더 이상 버티기 힘들겠다. 사울아비들이 과연 강하긴 강하구나! 더구나 저들의 전사가 더 많다. 한 번은 어떻게 막더라도 두 번 더 몰려오면 우리는 다 죽은 목숨이다.’ 초초룬은 자기도 모르게 장탄식이 흘러나왔다. 사울아비들과 자신의 전사들 사이에 아직도 전투력에서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양쪽 다 처음 맞붙는다면 그리 밀릴 것이 없었으나, 싸움이 격렬해지고 피해가 심해질 경우에도 사울아비들은 침착하게 다시 대열을 갖추는 반면, 자신의 전사들은 겁에 질려 대번에 침착함을 잃고 갈팡질팡하며 갈수록 힘이 떨어지는 것이 확연했다. 이대로라면 그야말로 전멸은 시간문제였다. 우비의 가슴은 미어지는 것 같았다. 저만치 서 있는 치우우레가 하들을 독려하여 이제 북쪽에서부터 치우비의 부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허나 치우비가 지휘하는 전사들은 신속하게 대응하지 못했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많은 수의 사람들이 치우우레를 알아보고는 술렁거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사람을 지난번에 봤다. 저 사람은 치우천, 치우비님의 아버지 아닌가?” “이럴 수가 있는가? 자기 아들들을 공격하러 오다니!” 여러 사람들이 분노했으나 몇몇 사람들은 의견이 달랐다. “이 일을 어떻게 하나? 저 사람을 공격하면 치우천님, 치우비님 얼굴을 어떻게 본단 말이냐?” “하지만 이미 자기 아들을 버렸잖은가? 당연히 우리도 싸워야 하는 것 아닌가?” 더구나 지금 총대장격인 치우비가 여전히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기에 대장급의 사람들끼리도 의견충돌을 일으켰다. 그때 알한이 끄는 한 무리의 투르크 용병들이 달려 가 치우우레가 지휘하는 부대를 막아서기 시작했다. 허나 알한의 짐작대로, 치우우레의 부대들은 알한의 부대에 가차 이 화살을 퍼부어댔다. 그것을 본 치우비는 끝내 아버지가 신들을 저버렸다는 생각에 더 마음이 상했다. 더구나 몇몇 주신 사울아비들은 화살을 퍼부으면서 큰 소리로 알한의 부대에게 소리치기까지 했다. “ 에서 태어났으면서 주신을 버린 치우천, 치우비 놈아! 너희는 이미 치우씨도 아니고, 주신 사람도 아니다!” “썩 물러가라! 나쁜 놈들아.” 대부분의 투르크 용병들은 그런 소리는 안중에도 없었지만 적어도 알한에게는 그 소리가 화살보다도 더 두려웠다. 알한은 투르크 용병들을 지휘하여 방패로 사울아비들의 화살을 막아낼 뿐, 공격 명령을 차마 내릴 수 없었다. 그 모습을 본 차오스가 으르렁거리듯 소리쳤다. “알한님! 지금 들이칩시다! 저쪽의 놈들 중 말 탄 사람이 몇 없는 것을 보니 모두가 다 사울아비들이 아닌 듯합니다. 별것 아닌 놈들 같으니 몰아치면 됩니다!” 알한은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진격 명령을 내렸다. 투르크의 용병들은 몹시 거친 자들이라 상대가 누구이든 일단 적이기만 하면 그것으로 족했다. 투르크 전사들이 일제히 몰려나가자 주신 전사들은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돌아서며 마구 욕을 퍼부었다. “주신을 배신한 것으로 모자라서, 이젠 아비까지 배신한다!” “너희가 애써 싸워봐야, 너희도 배신당할 것이다!” 투르크 용병들은 불같이 화를 내며 그들을 뒤쫓으려 했으나, 재빨리 알한이 명령을 내려 그들을 도로 불러들였다. 차오스가 씨근거리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저놈들은 입으로 싸웁니까?” “놈들의 꾀 같으니 넘어갈 것 없어.” 알한이 대답하자 차오스가 넌지시 말했다 “나는 치우비님이 왜 고민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자기 아버지라도 싸울 때는 싸워야 진정한 전사입니다. 그런데 저렇게 약해지면 안 되지요. 알한님, 저에게 말 잘 타는 백 명만 딸려주십시오 제가 단번에 들어가서 치우우레님을 죽이겠습니다.” “그래서는 안 돼!” 알한이 펄쩍 뛰자 차오스가 씩 웃었다. “제가 책임집니다. 그 다음에 제 목을 베십시오. 그러면 다 끝나는 것 아닙니까?” 알한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니까!” 그러는 중에 잠시 물러갔던 주신 군대가 다시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훨씬 많은 대열이 전진하기 시작했다. 알한이 거느린 전사들은 대략 천 명 정도였는데 적은 삼천 명도 넘어 보였다. 알한이 한숨을 쉬며 전세를 파악하고 있는 사이, 뒤쪽에 있던 도깨비부대에서 마냥과 싱카가 달려왔다. 싱카는 말을 탔지만 마냥은 말을 타지 않고 숨이 턱에 닿도록 달려온 것이다. 마냥은 알한을 보자마자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할 건가요? 알한님!” 마냥의 말에 이어 싱카도 한마디 보탰다. “도깨비 싱카가 말씀드립니다. 정말 어렵게 되었습니다.” 알한이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차오스가 나섰다 “비가 어렵단 말이오, 내가 가서 치우우레님과 같이 죽으면 그만 아니오?” 심각한 표정으로 싱카가 고개를 저었다 “주신족은 부모를 섬기지 않는 사람을 가장 나쁜 사람으로 여긴다고 들었습니다. 지금 치우비님이 괴로워하시고 싸울 엄두를 못 낼 정도로 말입니다.” “그러니 내가 나선다지 않소?” “허나 그렇게 치우우레님이 돌아가시면, 치우비님은 더 슬프고 괴로워서 못 싸우실 겁니다. 게다가 주신 사람들은 자기 아버지를 죽게 한 아들을 결코 용서하지 않을 거구요 그러면 치우천님과 치우비님은 영영 주신에 발을 붙일 수 없게 됩니다. 다시 작은 주신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당장 싸움이 문제가 아니라, 정말로 모든 게 틀어지는 겁니다.” 알한도 검고 긴 머리를 출렁이며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싱카. 그러니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알한은 자기 부하나 차오스를 제외하고 그 누구든, 물론 도깨비들에게도 존대를 했다. 그러자 싱카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방법은 한가지뿐입니다. 치우우레님을 다치지 않게 잡아오는 수밖에 없습니다.” “잡아온다고? 그것도 다치지 않게?” 차오스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소리쳤다. “가서 같이 죽는 것도 쉽지 않을 거요. 그런데 어떻게 적의 대장을 산 채로 잡아온단 말이오?” 차오스가 말도 안 된다는 듯이 고개를 마구 젓자 싱카는 눈을 반쯤 감고 합장을 한 채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와 마냥은 뜻을 모았습니다. 도깨비 부대도 그런 생각입니다 저희가 가겠습니다.” 알한은 손을 휘휘 저으며 외쳤다. “그건 죽는 길입니다!” “우리는 목숨이 아깝지 않습니다. 어차피 도깨비로 죽어갈 목숨을 치우천, 치우비님에게 빌린 것입니다. 이런 때 돌려드리지 않으면 언제 돌려드리겠습니까?” 싱카와 마냥이 조금도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자 알한이 나무라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무턱대고 뛰어봐야 성공할 리가 없습니다!” 고집스럽게 싱카가 되받았다. “힘든 것은 압니다만, 저는 요기입니다. 한순간 사람들의 눈을 흔들리게 만드는 재주는 부릴 수 있습니다. 치우우레님이 있는 곳까지 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빠져나을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더구나 치우우레님은 주신에서도 손꼽히는 용사이십니다. 형천과 맞싸워서 그리 밀리지 않을 정도인데, 무슨 수로 그분을 산 채로 잡는단 말입니까?” “도깨비 싱카, 말씀드립니다. 솔직히 저는 의심스럽습니다. 치우우레님이 간신히 보일 정도로 앞으로 나서기는 했지만, 더 앞으로 나오지 않는 것이 이상합니다. 혹시 다른 이유가 있는지도 모릅니다. 가짜이거나.......” 싱카의 말에 알한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러면, 치우비님같이 눈이 밝은 분이 자기 아버지를 못 알아보겠습니까? 나도 전에 신시에서 그분을 여러 번 뵈었습니다. 틀림없는 그분입니다.” “가짜가 아니라도, 무슨 협박을 받는지도 모릅니다.” 싱카가 단정적으로 말해도 알한은 계속 고개를 저었다. “보통사람이 아니라 치우 형제의 아버님이시고, 으뜸가는 사울아비십니다. 그런 분이 협박을 받는다고 마음에 없는 일을 하실 리 없지요. 솔직히 백에 하나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며, 괜히 목숨만 버릴 뿐 입니다!” 싱카가 괴로운 듯 인상을 찌푸리자 알한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저나 나, 알한은 바로 그런 일을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좋습니다! 갑시다! 아무리 될 일이 아니라지만 그 길밖에는 없지 않습니까!” “뭐.......뭐라구요? 알한님! 그러면 여기는.......” 차오스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알한이 그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차오스, 될 수 있으면 적을 마구 흩어주게.” “알한님! 알한님은 대장이십니다! 여기 부하들을 다스리고 또.......” 막아서는 차오스를 뿌리치며 알한은 큰 소리로 말했다. “대장이니까 가장 힘든 곳에 있어야 하는 거야! 이제부터는 차오스, 네가 대장이다! 대장의 명령이다! 알겠나?” 그러면서 알한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싱카, 마냥과 함께 달려갔다. 차오스는 몇 번 입술을 들썩이며 소리 나지 않게 욕을 해댔다. 순식간에 대장이 자리를 비우고 빠져나가자, 전사들은 좀 멍해져서 차오스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차오스는 몇 번 더 투덜대다가 혼잣말처럼 크게 외쳤다. “좋다! 알한! 이제는 내가 대장이다!” 그리고 차오스는 주변을 둘러보며 볼을 실룩이면서 입을 열었다. “제기랄, 모두 다 들어라!” 투르크 용병들이 큰 소리로 대답하자, 차오스는 마른땅에 침을 한번 ‘퉤’ 뱉으며 말했다. “대장으로서 명령한다. 알한님.......아니 알한은 이제 대장이 아니다. 제기랄 우리를 내버려두고 혼자 뛰쳐나갔다! 이젠 내가 대장이다. 누가 뭐래도 우리는 적과 마주하고 있다! 싸워야 한다! 그러니 대장으로서 나 차오스가 말하는데, 저 바보 같고 무책임한 알한 말이다......” 대뜸 차오스는 들고 있던 긴 창을 땅에 한 번 쾅 내리치며 말을 이었다. “저런 바보가 죽으면 세상이 재미없어진다! 절대 알한을 죽게 하지마라! 이게 새 대장인 나, 차오스의 명령이다! 알았나?” 투르크 용병들은 처음에는 "와!" 하고 웃다가 이내 “우!” 하며 커다랗게 함성을 질렀다. 빠르게 앞으로 달려 나간 알한과 도깨비 부대들을 따라 투르크 용병들도 무서운 속도로 그들을 감싸며 달렸다. 이윽고 그들은 주신 측의 군대와 정면으로 충돌했고 무기와 피가 어지러이 흩날리는 치열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그러자 주신군은 사방에서 기다렸다는 듯 그들을 포위하며 점점 거리를 좁혀들기 시작했다. 알한과 도깨비들이 죽을힘을 다해 주신군의 안으로 파고들었으나 치우우레의 모습은 점차 뒤쪽으로 파묻혀 갔다. 알한과 도깨비들은 많은 수의 주신 부대를 물리쳤으나 어느새 포위되기 시작했다. 알한은 몽둥이를 미친 듯 휘두르면서 싱카에게 외쳤다. “이상하군요. 치우우레님은 저렇게 뒷걸음질 칠 분이 아닌데?” 싱카도 두 자루의 칼을 허공에 띄워 적을 물리침과 동시에 기다란 몽둥이를 손에 들고 휘두르며 다급하게 대답했다. “그분도 고민하시나 봅니다!” 달려드는 주신군은 제대로 훈련을 받지 못한 듯 알한의 긴 몽둥이를 맞고 수없이 나가떨어졌다. 더구나 기이하게 생긴 싱카가 신기한 재주를 부리고, 마냥이 창을 휘두르는 등 도깨비들이 험악하게 무기를 쓰자 주신 부대는 그들을 에워싸고 버틸 뿐, 감히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쨍’ 하는 소리가 들리며 창을 휘두르던 마냥이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마냥이 손에 들고 있던 창은 어느새 반 토막이 나 있었는데 부러진 것이 아니라 깨끗이 잘라져 있었다. 마냥은 등 뒤에 멨던 새 창을 급히 꼬나들며 외쳤다. “구리칼!” 싱카와 알한이 마냥에게로 눈을 돌렸다. 그쪽에서는 스무 명 가량의 주신 사람이 무기를 들고 앞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복장이 유별나지는 않았으나 그들의 무기는 구리로 되어 있었고, 몸가짐이나 침착한 눈매가 매서웠다. 사울아비들이 분명했다. 싱카가 몽둥이를 하늘로 치켜들며 주문을 외우자 두 자루의 칼이 그들을 향해 날아들었다. 허나 그들 중 두 사람이 도끼와 긴 도리깨를 휘둘러 칼을 덜컥 공중에서 막아냈다. 나머지 사람들은 신경조차 쓰지 않는 듯 유유히 다가왔다. 알한이 입술을 깨물면서 말했다. “좋군요, 좋아. 마침내 진짜 사울아비를 싸움터에서 만나게 되는군요. 이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싱카, 여긴 내가 맡겠습니다.” 싱카는 잠시 알한을 바라보다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마냥과 함께 도깨비 부대를 이끌고 치우우레가사라진 방향을 쫓아 달려갔다. 그들은 피차 목숨을 건 상황이라, 구질구질한 말은 필요 없었다. 알한은 자못 반갑다는 듯이 크게 웃으며 외쳤다. “나는 투르크의 알한입니다. 지금은 작은 주신에 몸담고 있습니다. 태산회의에서 나를 본 사람이 있다면 내가 누군지 알 것입니다. 자, 내 몽둥이는 가볍지 않으니 당신들 모두 덤비기를 바랍니다.” 알한은 차오스와 용병부대 외에는 누구에게나 공손하게 말을 건넸지만, 싸움을 앞에 둔 상대에까지 존댓말을 하자 사울아비들 중 몇몇은 피식 웃었다. 허나 알한이 말을 끝내고 칼 열 자루를 만들 구리가 들어간 무겁고 긴 몽둥이를 빙빙 허공중에 휘두르자 바람소리가 윙윙 울려 퍼졌다. 그 기세에 사울아비들은 웃음을 거두고 걸음을 멈추었다. 이윽고 사울아비들 중 거구의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그 사내는 덩치는 크나 아직 소년이라고밖에 할 수 없을 정도로 앳된 티가났다. 어떻게 보면 치우비를 닮은 것 같기도 하여 알한은 잠시 미간을 실룩거렸다. “혼자 덤빌 겁니까? 나는 아이를 죽이고 싶진 않은데?” 그러자 그 소년은 씩 웃으며 말했다. “당신 같은 명예로운 전사에게 사울아비들이 어찌 떼를 지어 덤비리까? 아버지와 아들이 싸우는 판인데 나이를 가리다니요?” 그러면서 소년은 세 개로 나누어진 구리도리깨를 힘 있게 고쳐 쥐었다. 보통 도리깨는 긴 자·루에 구리 막대가 하나 달려 있으나 그 소년은 양쪽 끝에 구리 막대가 달린 기이한 도리깨를 가지고 있었다. 소년이 도리깨를 빠르게 휘두르자 양끝에 달린 짧은 구리 막대들이 파도치듯 돌며 기묘하게 움직였다. 알한은 그 움직임이 범상치 않은 것을 보고는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허! 어린 나이에 뛰어나군요?” 소년은 순박하게 씩 웃으며 되받았다. “제 이름은 광이라 하오이다. 치우 집안사람입지요.” “치우 집안이시라고요? 지금 누구와 싸우는지 알고 있습니까?” “알고 있으나, 한웅님의 명에 따라 저는 싸워야 하오이다.” 알한은 치우광의 말을 듣고 한숨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한집안 출신이라 그런 것일까? 치우광은 치우비보다 훨씬 어렸지만 큰 덩치나 순박한 미소 등이 어딘지 모르게 치우비를 연상시켰다. 알한은 씁쓸하게 웃었다 “치우 집안 분과 싸우는 것이 정말 내키지 않는군요.” 치우광 역시 공손하게 되받았다. “저 역시 알한님 같은 분과 싸우는 것이 마음에 내킬 리야 없지요. 싸움이란 할 수 없이 하는 것이지만, 참 더러운 것이네요.” 알한이 껄껄 웃으며 호기롭게 말했다. “그렇소! 더러운 것이니, 얼른 끝내버립시다!” 알한은 급히 몽둥이를 휘두르며 들어갔다. 치우광은 비록 나이가 어렸지만, 우두머리임에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과 이렇게 농짓거리를 하는 것을 사울아비들이 그냥 둘 리가 없었다. 사실 제아무리 알한이라도 사울아비 스무 명과 상대한다는 것은 자살행위이나 다름없었다. 다만 대장격인 치우광을 단번에 꺾으면 어떻게든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허나 치우광은 만만치 않았다. 알한의 몽둥이는 보기에는 가볍게 돌리는 것 같아도 치우비나 끽구 정도가 되지 않고서는 만만히 막아낼 수 없을 정도로 힘이 넘쳤다. 허나 치우광은 그런 알한의 몽둥이를 다섯 번이나 연거푸 막아냈다. 비록 뒤로 다섯 발짝이나 밀리기는 했지만 치우광은 순식간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 알한의 다섯 번 공격을 막았고, 그 사이에 두 번이나 도리깨 자루로 역습을 시도하기까지 했다. 알한은 치우광의 실력을 보고 속으로 몹시 놀랐다. “이번에는 제 차례입니다.” 치우광이 상기된 표정으로 도리깨를 휘둘러 들어오자 알한은 다시 몽둥이로 도리깨를 튕겨냈다. 그러나 도리깨에 매달린 짧은 자루들이 튕기듯 번번이 다가드는 통에 알한 역시 몇 번이나 땀을 짜냈다. 다시 한 차례의 격돌이 끝나자 치우광이 고개를 휘저어 땀을 떨궈내면서 입을 열었다. “알한님은 태산 회의 때 지나족의 금천과 겨루어보셨지요?” “그렇습니다.” “저는 어떠합니까?” 치우광이 다소 치기어린 미소를 지으며 정말 궁금한 듯 묻자 알한도 마주 웃어 보였다. “십 년만 더 애쓰면 금천도 이겨낼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오늘 무사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그러면서 알한이 다시 몽둥이를 휘두르자 치우광도 열심히 도리깨를 돌려 공격을 막았다. 그러나 알한과 치우광의 주위로 사울아비들이 계속 모여들었다. 치우광의 명령이 있었는지 아무도 나서지는 않았으나, 알한은 주변을 완전히 적이 에워싸자 왠지 꺼림칙했다. 이미 그 수는 백 명이 넘어선 것 같았다. ‘이기든 지든, 나는 오늘 죽겠구나.’ 알한은 속으로 탄식하며 최후의 각오를 했다. 그에게는 나중에 금천을 만나면 쓰려고 생각해두었던 비장의 한 수가 있었다. 그 비장의 수를 쓰려고 숨을 몰아쉬며 준비하는데 반대쪽이 소란스러워지며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알한님을 찾아라! 알한님을 찾아!” 투르크 용병들을 이끌고 달려온 차오스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를 듣자 알한은 힘이 솟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순간, 치우광이 대뜸 한 발짝 물러섰다. “알한님의 부하입니까?” “그렇습니다.” 치우광은 싱긋 웃으며 알한에게 말했다. “백 명 정도밖에 안돼 보이는데 여기까지 파고들다니 목숨을 걸고 알한님만 찾는 것 같네요.” 알한은 대답하지 않고 입술을 깨물었다. “저는 알한님을 이길 재주가 없으니, 이만 물러서겠습니다.” 치우광의 느닷없는 말에 알한은 깜짝 놀라 치우광을 쳐다보았다. 나이 어린 치우광의 눈에서 격렬한 감정의 빛이 은은하게 번졌다. “저는 애써서 싸웠습니다. 더 이상은 무리일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치우광은 돌연, 이제까지 정중했던 것과는 전혀 달리 무시무시하게 커다란 목소리로 둘레의 사울아비들에게 고함을 쳤다. “그런가? 그렇지 않은가?” 그 물음에 사울아비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물러난다!” 치우광은 딱 잘라버리듯 외치고는 다시 알한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조용히 말했다. “나중에 다시 겨룹시다, 알한님. 그리고 부디.......” 치우광은 부하 사울아비가 끌고 온 말 등에 날듯이 가볍게 올라타고는 사울아비들과 함께 오른쪽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수많은 사울아비들이 치우광을 따랐다. 그 방향은 치우비의 부대 쪽도 아니고, 치우우레 쪽도 아닌 제3의 방향이었다. 선봉에 섰던 수백 명의 치우광의 부대가 돌연 이탈하자, 다른 주신 전사들은 갑자기 혼란에 빠져 우왕좌왕하더니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에 차오스와 용병들이 알한에게 달려왔다. 얼마나 급히 말을 몰았는지 말들이 모두 숨이 턱에 닿아 부글거리는 거품을 입에 물고 있었다. 알한은 고개를 숙인 채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차오스가 다가와 말에서 뛰어내리며 알한에게 외쳤다. “이 바보 같은 알한 녀석! 도대체 뭐냐? 치우우레를 잡는다 해놓고 고작 여기 있었던 거냐? 응?” 알한이 그 말에 고개를 들자 차오스는 뒤로 움찔하면서 변명이라도 하듯 말을 더듬거렸다. “내가....... 지금은 내가 대장이잖나? 그러니 욕도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알한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맞지. 아니, 맞습니다. 차오스 대장” 그러자 차오스는 얼굴을 찡그리며 툭 내뱉었다. “그러면 대장으로서 알한에게 명령한다!” “하십시오, 대장.” 알한이 태연히 되받자 차오스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제는 다시 네가 대장이다. 알았나, 알한 대장? 아니....... 대장님?” 껄껄 웃는 알한을 쳐다보며 돌연 차오스의 눈가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차오스가 알한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안 죽어서 다행이오! 다시는 그러지 마시오!” 알한이 조용히 한숨을 내쉬는 사이 차오스의 나머지 부하들이 가까이 달려왔다. 그러자 알한은 다급히 그들에게 외쳤다. “잠간! 잠간! 적이 물러나고 있다! 멈추어라!” 투르크 용병들은 알한을 알아보고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곧이어 그 뒤로 한 떼의 사람들이 우르르 달려오고 있었다. 그들 중 맨 앞에 달려오고 있는 것은 바로 치우비가 아닌가? “치우비님!” 알한이 외치자 치우비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맹렬하게 달려 나오더니 말에서 구르듯 내려와 알한의 어깨를 두 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알한님! 내가, 내가 바보였소 내가 바보 같아서 알한님을 죽게 할 뻔했습니다.” 치우비는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알한이 뭐라 대답할 사이도 주지 않고 다시 외쳤다. 치우비는 몹시 격앙되어 있었다. “이건 내가 풀어야 할 일이오 나는 바보같이 피하려고만 했소. 하지만 이제 결심했소. 나는, 나 치우비는....... 비록 주신의 적이 되고, 아버지와 싸우는 한이 있어도 벗들을 죽일 수는 없소!” 치우비가 크게 외치자 투르크의 용병들은 모두 감격하여 “와!” 함성을 질렀다. 그러나 알한은 씁쓸한 표정으로 조용히 불렀다. “치우비님.” 치우비는 듣지 못한 듯 급히 말에 올라타며 외쳤다. “내가 모든 책임을 진다! 모두 내 명령에만 따르라! 우리 눈앞에 있는 것은 적이다! 모두........ 모두 쓸어버려라.” 치우비는 우렁차게 외치면서 다시 한 번 주르륵 굵은 눈물을 흘렸다. 알한이 급히 치우비의 말고삐를 홱 잡아채며 날카롭게 소리쳤다. “치우비님!” 치우비가 핏발 선, 피곤해 보이는 눈을 알한에게 돌리자 알한이 조용히 물었다. “치우비님, 치우광이라는 젊은 사울아비를 아십니까?” 치우비는 알한이 난데없는 이야기를 꺼내자 당황스러워하다가 이내 생각이 떠오른 듯 말했다. “광....... 광이라면........ 먼 동생뻘 되지만 친하지는 않은데요 이름은 들은 것 같습니다만.......” 알한은 조용히 치우광이 사라진 제3의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분이 저와 겨룬 대장이었는데, 지금 저리로 가셨습니다. 저를 쉽게 죽일 수 있었을 텐데도 말이죠.” “그건......” “치우비님, 저들은 우리와 싸우지만, 우리 적이 아닙니다. 그렇게 싸워야 할 것 같습니다.” 치우비가 잠시 입을 다물고 치우광이 사라졌다는 쪽을 바라보자, 알한은 뭔가 더 말하려다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치우비는 돌연 마음을 가라앉히려는 듯 몇 번 깊은 숨을 쉬더니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침착하겠습니다.” 알한은 치우비를 보고 기쁘게 웃었다. “이제 꺼릴 것이 없으십니까?” “그렇습니다. 알한님, 감사합니다.” 치우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전보다 훨씬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작은 주신의 전사들과 투르크의 전사들이여! 지금부터 모두 어깨를 맞대고 빽빽이 대열을 맞추어라! 앞줄에 선 사람은 긴 창을 들고 방패를 들어라! 허나 적을 흩어버리면 될 뿐이니, 구태여 죽이려 애쓸 것은 없다!” 그 말을 듣고 차오스가 알한에게 물었다. “무슨 말씀입니까? 적을 죽이지 않으면.......” 알한이 가볍게 웃으며 차오스의 어깨를 툭 쳤다. “그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네.” 이윽고 치우비를 선두로 이천 명 가량의 부대가 빽빽하게 한데 붙어 섰다. 치우비는 도끼를 말 뒤춤에 매달고 커다란 몽둥이를 주워들었고 알한도 선두에 섰다. 이천 명의 전사들은 한 덩어리로 뭉쳐 치우비의 명령에 따라 맹렬한 속도로 달려 나갔다. 그 무렵, 느닷없이 빠져나간 치우광의 모습에 잠시 흩어지던 주신 전사들이 다시 뭉치려고 하던 차였다 그런데 한 덩어리로 뭉친 치우비의 부대가 무섭게 돌격해오자, 주신 전사들이 또다시 산산이 흩어졌다. 치우비는 그런 주신 전사들에게는 눈도 돌리지 않고 계속 적진을 돌파해 나갔다. 주신 전사들은 목숨을 걸고 싸우려는 기미가 전혀 없었고 그저 허덕거리며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치려고만 했다. 치우비는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했다. ‘치우광이 이렇게 한 것인가? 아무래도 이상하다. 아무리 그래도 아버님이 이끌고 온 부하들이 이렇게 약할 리가 없는데.......’ 그때 저만치에서 싱카와 마냥이 거느린 도깨비 부대가 악전고투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훨씬 많은 숫자의 적에게 포위되어 있으면서도 누군가를 에워싸고 있는 듯했다. 그 안에 치우우레가 있을 것 같아 치우비의 가슴이 마구 두근두근 뛰었다. “서둘러라!” 그러나 치우비의 부대도 아까와는 다른, 잘 조직된 사울아비의 부대와 맞닥뜨렸다. 그들은 다른 전사들이 흩어지는 것은 신경도 쓰지 않고 있다가 치우비의 부대가 돌진해오자 정면으로 막아섰다. 치우비와 작은 주신 전사들이 열심히 싸웠으나 그들의 실력이 생각보다 대단하여 쉽게 돌파할 수가 없었다. 치우비와 알한이 분전했지만 뛰어난 사울아비들이 많아 일대 혼전이 벌어졌다. 그때 차오스가 대열을 이탈하여 투르크 용병의 일단을 거느리고 도깨비 부대를 향해 달려갔다. 도깨비 부대를 에워쌌던 주신 부대가 우왕좌왕 갈피를 못 잡는 틈을 타 마냥과 도깨비 부대는 기를 쓰고 포위망을 뚫기 시작했다. 순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그때까지 도깨비 부대에 포위되었던 일단의 부대가 오히려 역공을 가해 도깨비부대는 한순간에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치우비와 알한은 사울아비들에 에워싸여 있었고, 차오스 역시 수많은 적을 상대하느라 그들을 도울 여력이 없었다. 마냥이 사방으로 창을 휘둘러 마침내 한쪽을 뚫자, 밀리기 시작한 도깨비 부대들이 와르르 몰려나왔다. 그 맨 뒤로 미친 듯이 달려 나오는 싱카의 뒤를 쫓는 자가 있었다. 바로 커다란 도끼를 들고 있는 치우우레였다. 그때 치우비는 네 명의 사울아비를 혼자 상대하다가 치우우레의 모습을 보자 돌연 벼락같은 고함을 지르면서 있는 힘을 다해 들고 있던 커다란 몽둥이를 내던졌다. 사울아비들은 치우비가 무기를 그냥 던져버릴 줄은 예상 못했던 듯, 그 몽둥이에 맞아 말에서 떨어져버렸다. 그리고 치우비는 번개 같은 동작으로 두 손을 뻗어 두 명의 사울아비의 팔을 나꿔챘다. 사울아비들은 치우비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면서 무기를 떨어뜨렸다. 치우비는 그 두 명을 양손에 쥔 채, 말에서 펄쩍 뛰어내렸다. 치우비의 손에 잡힌 두 사울아비는 꼼짝도 하지 못하고 치우비의 손에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치우비는 사나운 얼굴로 싱카 쪽으로 달려갔다. 치우비의 무서운 기세와 눈빛, 그리고 양손에 잡혀 인형처럼 대롱거리는 두 사울아비들 때문에 주신 전사들은 그 누구도 앞을 막아설 수도, 화살을 쏠 수도 없었다. 치우비가 달려오는 것을 보고 싱카는 급히 소리를 질렀다. “비님! 물러나십시오! 어서 물러.......” 그때 싱카의 뒤를 쫓던 치우우레는 막 돌을 던져 싱카를 맞히려 하던 참이었다. 치우비는 그 순간 아슬아슬하게 몸을 날리며 싱카를 얼른 저만치 밀어내고 치우우레가 던진 돌을 걷어차 버렸다. 그러자 치우우레는 노한 기색으로 커다란 도끼를 들고 멈추어 섰다. 치우비도 싸늘한 표정으로 치우우레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치우우레가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이런 못된 놈. 감히 네가....... 네가 한웅님을 배신하고 신시를 공격해?” 치우우레가 분노한 듯 번득이는 눈빛으로 외쳤지만, 그를 마주보는 치우비의 눈빛이 훨씬 더 매서웠다. 치우비의 눈빛이 무섭게 빛나자, 치우우레는 말을 잇지 못했다. 치우비는 아무 말 없이 두 손에 쥐고 있던 사울아비들을 허공에 들어 보였다. 그들은 이미 치우비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기절해 축 늘어져 있었다. “나는 아버지의 부하들을 다 압니다. 그런데 이들은 처음 보는 사람들이군요.” “뭐라고? 이 미친 녀석이 무슨 소리를......” 치우우레가 버럭 소리를 지르는데 치우비는 고개를 저으며 조용히, 그러나 또박또박 말끝에 힘을 주어 되받았다. “당신은 내 아버님이 아니야. 당신은 누구지?” 그때 주신의 사울아비들 중 여섯 명이 일제히 치우비를 향해 화살을 쏨과 동시에 네 명이 달려들었다. 순간 알한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 뛰어들며 긴 몽둥이를 빙빙 돌려 화살을 막아냈고, 차오스가 고함을 지르며 부하들 몇과 함께 네 명의 사울아비를 온몸으로 막았다. 그 틈을 타 마냥이 쓰러져 헐떡이는 싱카를 부축해 일으켰다. 화살들이 알한의 몽둥이를 맞고 튕겨나가자 알한이 치우비에게 외쳤다. “이 사람이....... 아버님이 아니란 말입니까? 하지만.......” 치우비는 음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오!” 그러면서 치우비는 사울아비들을 내던지고, 맨손으로 치우우레를 향해 달려들었다. 치우우레는 급히 도끼를 휘둘러 치우비를 막으려 했지만, 치우비의 손은 어느새 치우우레의 도끼날을 맨손으로 쥐고 있었다. 일단 치우비의 손에 잡힌 도끼날은 돌에 박힌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돌연 싱카가 다급하게 외쳤다. “등! 등입니다!” 치우비는 다른 손을 뻗어 치우우레의 등을 움켜쥐려 했다. 치우우레는 도끼를 놓고 날렵하게 양손으로 치우비의 손을 막으려 했으나, 한 손과 두 손이 부딪히자 두둑 소리가 나면서 치우우레가 비명을 질렀다. 치우우레의 두 손이 부러지고 말았다. 치우비는 치우우레의 등판의 옷자락을 길게 찢어냈다. 그러자 치우우레의 맨 등이 드러났고, 거기에는 기이한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치우비의 얼굴이 굳어졌다. “글자 주술?” 글자 주술이란 말 그대로, 치우우레의 이름을 글자로 등에 새겨 주술력을 부려서, 그 사람을 완전히 치우우레와 똑같이 보이도록 만드는 주술이었다. 치우비는 예전 태산 회의 때 글자 주술을 접할 기회가 있었기에 금방 눈치 챘다. 치우비가 손으로 치우우레의 등을 확 문지르자, 치우우레는 돌연 비명을 올리면서 그 자리에 쓰러져버렸다. 순식간에 그는 치우우레보다 조금 작은 키에, 땅땅한 체구를 지닌 남자의 모습으로 바뀌어버렸다. 알한이나 차오스는 물론 작은 주신의 전사들과 투르크 용병, 주신의 사울아비들마저도 이 변괴에 놀라 ‘헉’ 하며 숨을 삼켰다. 단 한명, 싱카만이 놀라지 않고 소리쳤다. “주술로 모습을 바꾼 것입니다! 잘하셨습니다! 치우비님!” 사울아비들은 대장이 쓰러지고 이상한 일이 벌어지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게다가 기세를 얻은 치우비의 부하들이 하늘이 떠나갈 듯 함성을 올리자 사울아비들은 황급히 몸을 돌려 우르르 달아나기 시작했다. 알한은 좋아서 싱글벙글 웃으며 말문을 열었다. “이제 아무 염려 없군요! 정말 대단한 주술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치우비도 이제야 안심이 된 듯 한숨을 필이 내쉬었다. 그러자 쓰러진 가짜 치우우레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외쳤다. “네......... 네가 어떻게 알았느냐? 어떻게......!” 그는 얼굴과 외양은 물론 목소리까지도 원래의 쉰 목소리로 변해 있었다. 그러자 치우비는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너는 아버지와 얼굴도 똑같고, 목소리도 똑같았다. 하지만...... 나는 알 수 있어.” “어떻게 알 수 있었단 말인가. 글자 주술을 깨다니! 이건......!” 치우비는 서글픈 듯 이를 악물고, 눈물을 흘리면서 천천히 말했다. “아버지는.......우리 어릴 때 아버지께서는 항상 바빠서 늦게 오셨기 때문에 우리 형제는 아버지를 잘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밤늦게 돌아오셔서도 형과 내가 자고 있을 때....... 항상 우리를 안고 볼을 비벼주곤 하셨지. 컴컴하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아무 말씀도 안 하셔서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아버지라는 것을 항상.......항상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네놈이........ 네놈이 아무리 모습이 같고 목소리가 같아도 내가 아버지를 몰라볼 것 같으냐? 더구나 내가....... 내가 이렇게 마음이 아픈데....... 아버지라고 마음이 아프지 않았을 리 있겠느냐? 허나 너는 조금도 슬퍼하지 않았어. 겉모습만 바꾼다고.......내 아버지 노릇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엉?” 치우비는 눈물을 주르륵 흘리다가 돌연 벼락같이 그자의 멱살을 잡아 들어올려 마구 흔들며 소리쳤다. “아버지께 무슨 짓을 했느냐! 어디 계시느냐!” 가짜 치우우레는 갑자기 큰 소리로 웃었다. 그러자 옆에서 차오스가 눈을 부라리며 욕을 퍼부었다. “저런 미친놈이?” 그런데도 그자는 더욱 크게, 마치 녹슨 구리를 긁는 것 같은 이상한 소리를 내며 미친 듯이 계속 웃어댔다. 뭔가 좀 이상하다고 생각한 알한이 급히 그자의 옆구리를 걷어차 웃음을 멈추게 했다. 그는 잠시 고통 때문에 숨을 컥컥거리다가 이내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너는 역시....... 그렇구나. 하하핫, 네 놈이....... 주술을 알아본 것은 용하지만....... 하하, 어떻게 할 것이냐?” 그자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양쪽에서 두 갈래의 전사 무리가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원래 북동쪽에 있던 세 갈래의 부대인 것이 분명했다. 그중 치우우레의 부대가 먼저 전진하고 나머지 두 부대는 대기하고 있다가 이 웃음소리를 신호로 달려오는 듯했다. 알한이 눈을 크게 뜨며 놀라 외쳤다. “그러면 함정? 비님을 끌어내기 위한.......” 가짜 치우우레는 계속 웃으며 말했다. “분명 네놈이 스스로 죽든지, 아니면 제일 앞장서서 뛰쳐나올 것이라더니 그 말이 맞구나.” “저런 비겁한 놈들.” 차오스가 씩씩거리며 가짜 치우우레의 멱살을 잡아 올리자 그자가 이죽거렸다. “싸워서 이길 수 있다고 보느냐? 너희는 이미 포위된 거야. 더구나 네놈들이 싸워서 이기면 치우우레의 목이 날아간다. 그는 저기에 붙잡혀 있단 말이다. 그러니 어서 무릎 꿇고 항복하는 게 어때?” “네놈들이 어찌.......! 어찌 우리 아버지를 잡느냐.1 아버님께 무슨 죄가 있다고!” 치우비가 분노를 이기지 못해 부르짖자 가짜 치우우레가 자못 당당하게 되받았다. “사울아비 큰스승이면서 한웅님의 명을 받들지 못하겠다고 버텼으며 자기 입으로 죽여 달라고 했으니 죽어 마땅하다! 그 덕분에 내가 이런 지경에 뛰어들게 된 것이 아니겠느냐?” “아버님이.......” 치우비는 다시 마음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그 말을 듣자 알한이나 차오스 역시 섣불리 적과 싸울 수도 없었다. 다른 전사들이나 도깨비들도 마찬가지였다. 비곡 한 부대를 물리치기는 했으나 현재 그들은 치우우레만을 목표로 삼았었기에 너무 깊이 들어왔고, 너무 많이 힘을 쓴 상태였다. 더구나 치우우레가 인질로 잡혀 있다지 않은가? 알한은 급히 치우비에게 말했다. “일단 빠져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버티고 있으면 섣불리 아버님을 해치지 못할 것입니다.” 알한의 말에 치우비는 얼른 정신을 가다듬고 서둘러 말을 찾아 올라탔으나 어느새 치우비의 주위로 수많은 적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치우비와 알한, 차오스 등이 거느린 병력은 고작 천 명 정도인 데 반해 그들은 만 명도 넘는 듯했으며, 이미 그들을 거의 완전히 포위하고 있었다. 차오스는 틀림없이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싱카는 너무나도 간사한 적들의 술수에 이를 갈며 분노를 삭였다. 알한만은 혹시 울라트가 구원부대를 보내주지 않을까 생각했으나 그럴 기미는 전혀 없었다. 사실 울라트도 이미 곤경에 처해 있었다. 신시 안에서도 이쪽의 병력이 줄어든 것을 파악하고 별동대를 성문 밖으로 내보내 한참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같은 시각, 울라트는 신시 성문을 열고 뛰쳐나온 부소눌하가 이끄는 사울아비들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울라트가 거느린 부하들은 작은 주신의 전사들이 주축이 된 정예였지만 사울아비들도 만만치 않았다. 특히 치우비나 알한, 차오스와 도깨비들이 모조리 빠져나간 상태라 지휘하기가 몹시 힘들었다. 더군다나 비울걸마저도 어디로 사라졌는지 오리무중이었다. 울라트 옆에는 울쿠타, 야쿠타밖에 없었다. 생전 처음 어려움에 맞닥뜨리자 울라트는 몸이 떨려왔다. 하지만 울라트는 어릴 적부터 치우 형제를 따라다니며 전투를 지켜보아온 터라 상황을 보는 눈이 있었고, 절대 물러서지 않는 오기도 있었다. 울라트는 곧 발 빠른 야쿠타를 시켜 갑옷 입은 전사들을 모아 1차 공격을 저지함과 동시에 울쿠타를 시켜 전사들을 돌려 옆구리를 치려고 했다. 하지만 사울아비들의 지휘관은 옆구리를 찔러오는 울쿠타의 부대를 무시하고 곧바로 울라트의 본진을 급습했다. “제기랄! 왜 이렇게 맘대로 안 되는 거야!” 울라트는 밀어닥치는 적을 보고서 어깨를 파르르 떨었지만 곧 앙칼지게 내뱉으며 소리를 질러 부하들을 독려하려 했다. 그러나 울라트는 체구도 작고 목소리도 크지 않아 부하들을 생각대로 부릴 수가 없었다. 울라트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옆에 있던 덩치 큰 전사들에게 외쳤다 “저 나무를 가져와라!” 울라트의 막사 부근에는 성을 공격하려고 베어둔 긴 통나무들이 많이 있었다. 네 명의 부하가 아주 기다란 통나무를 들고 오자 울라트는 곧 통나무 끝에 매달리더니 외쳤다. “높이 들어올려!” 전사들은 울라트가 무슨 장난을 하는가 싶어 어리둥절했지만 울라트는 욕을 하면서 서두르라고 다시 외쳤다. 네 명의 전사가 통나무를 들어올리자 울라트는 통나무 끝에 매달린 채 높이 솟아올랐다. “스구얼타는 왼쪽을 지켜랏 쿠루! 이 머저리야! 너, 작은 주신 전사 맞아? 물러서면 죽을 줄 알아!” 높은 곳에 올라가서 전황을 한눈에 보게 된 울라트는 앙칼지게 부하들의 이름을 일일이 부르면서 독려했다. 그러나 주신 사울아비들이 그런 울라트를 그냥 놔둘 리 만무했다. 기실 그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사울아비들은 우뚝 솟아오른 울라트를 향해 일제히 화살을 쏘아댔다. 나무를 버텨 세우고 있던 작은 주신 전사들이 놀라 통나무를 내리려고 했으나 울라트는 다급하게 외쳤다. “내리면 너희 죽을 줄 알아! 오른쪽으로!” 전사들이 급히 통나무를 오른쪽으로 기울이자 여러 대의 화살이 울라트의 몸 부근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더불어 울라트의 몸도 휘청하고 통나무에서 떨어질 뻔했지만 그녀는 필사적으로 통나무를 붙들고 매달렸다. 다시 화살이 날아오자 이번에는 작은 주신 전사들이 다시 통나무를 기울여서 화살을 피했다. 울라트는 이미 뺨에 화살 한 대가 스치고 지나가고, 어깨와 다리 등에도 화살이 스쳐서 피를 흘리기 시작했다. “울라트님! 내려오세요!” “내려오세요.” 작은 주신 전사들이 안타까워하며 소리쳤지만 울라트는 독하게 마음을 먹고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지면 어차피 다 죽는다! 죽는 게 무서웠으면 싸우지도 않았어!” 여린 소녀에 지나지 않은 울라트가 목숨을 걸고 투혼을 발휘하자 작은 주신 전사들도 용기를내어 무섭게 분발했다. 울라트는 치우비 군대의 살아 있는 깃발이나 다름없었다. 비록 지금 이 자리에 울라트 이외에는 지휘 할만한 대장이 없었으나, 수십 명씩의 부하를 거느린 소대장급 전사들은 죽을힘을 다해 곳곳에서 치열하게 싸워 사울아비들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저항이 완강해지자 사울아비의 대장은 크게 화를 냈다. 울라트가 적의 사기를 높이는 중심이라고 판단한 사울아비의 대장, 부소눌하는 커다랗게 외쳤다. “어떻게든 저 계집을 떨구어라!” 그러자 백 명이 넘는 사울아비들이 주신의 막강한 활을 재어 울라트를 노렸다. 울라트는 그래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지금 울라트가 화살을 겁내어 내려간다면 작은 주신 전사들의 사기가 금세 땅에 떨어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내가 죽지, 뭐. 그러면 화가 나서 더 잘 싸울 거야. 오라버니들, 잘 싸워줘요.” 백 데에 가까운 화살이 한사람을 노리고 일제히 날아들자 울라트는 눈을 질끈 감았다. 화살 날아드는 소리가 ‘쉭쉭’ 하고 들려왔다. 그 와중에 뭔가가 획 하고 지나가는 느낌이 드는 순간 이상하게도 화살이 전혀 몸에 꽂히지 않았다. 울라트가 깜짝 놀라 눈을 떠보니 작은 주신 전사들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고 있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땅바닥에 야쿠타가 뒹굴고 있었다. 야쿠타의 손에는 화살이 잔뜩 꽂힌 커다란 가죽 망토가 쥐어 있었다. 위기의 순간에 몸이 가벼운 야쿠타가 가죽 망토를 휘두르며 화살들을 받아냈던 것이다. 거의 죽을 목숨인 울라트를 야쿠타가 살려낸 셈이었다. 울라트가 환하게 미소 짓자 야쿠타도 씩 웃으며 일어나 먼지를 털며 울라트에게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였다. 순간 야쿠타의 몸에 두어 대의 화살이 꽂혀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울라트가 화살을 보고 걱정된 눈빛이 되자 야쿠타는 웃으며 말했다. “옷에만 꽂혔을 뿐이야! 빗맞은 거니까 염려 말라구!” 야쿠타는 아무렇지도 않게 화살을 툭툭 뽑아 내던지고는 우렁찬 목소리로 전사들을 독려했다. “연약하신 울라트님마저 저렇듯 목숨을 거시는데 전사로서 부끄럽지 않은가?” 울라트도 그때를 놓치지 않고 외쳤다. “모두 돌격!” 야쿠타의 말에 용기를 얻은 작은 주신 전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달려 나갔고 갑옷 입은 전사들 중 두 사람이 갑옷을 벗어서 긴 막대기에 갑옷을 붙잡아 매었다. 그것으로 울라트를 노리는 화살을 쳐내려는 것이다. 화살들이 다시 한 번 빗발쳐 날아왔지만 야쿠타와 갑옷 막대기를 멘 전사들이 모두 쳐내었다. 그리고 그때, 발 빠른 울쿠타가 사울아비들의 옆구리를 찔렀다. 사울아비들의 대장인 부소눌하는 혀를 찼다. 그리고 부대를 교묘하게 이동시켜 울쿠타의 습격을 피했다. 사실 이런 상황이라면 울쿠타는 기습을 포기하고 다른 방향으로 피해가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울쿠타는 고지식하게도 죽기 살기로 옆구리만을 하염없이 노리고 따라붙어 마침내 본격적으로 공격을 시작한 것이다. 한마디로 엉망진창인 싸움이었다. 부소눌하는 화를 이기지 못해 자신의 머리를 주먹으로 쾅쾅 치며 외쳤다. “이런 엉터리 같은 싸움이 있나! 치우비! 보돈차르 야율쿠리! 와난강 와난수는 다 어디 가고 이런 천둥벌거숭이 같은 아이들만 있는거냐!” 아무리 보아도 대장이라 할 수 있는 자들은 세 명에 불과했다. 대장 같아 보이는데도 죽을 각오로 화살 앞에 나선 울라트나, 부하들을 팽개치다시피 하고 그 화살을 쳐내는 데에나 신경 쓰는 야쿠타나, 한 번 따돌렸음에도 다시 죽기 살기로 멧돼지처럼 옆구리만 노리고 달려드는 울쿠타는 지휘력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부소눌하는 몹시 뛰어난 능력을 지닌 사울아비 중 하나였으며, 나름대로 치우천의 부대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해서 교묘한 전략을 짜두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마주친 치우천의 부대는 명성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기가 막힌 꾀나 통솔력을 보이는 대장은 하나도 없고, 대장이라고 할 수도 없는 어린것들이 무모하기 짝이 없는 짓만 하고 있었다. 오히려 더 너무 무모하기 때문에 자신의 꾀가 다 엉망이 되어 예측할 수 없는 상황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부소눌하는 간신히 치미는 화를 억누르면서 냉정하게 상황을 살펴보았다. 물론 이런 사분오열된 적진은 밀어붙이기만 하면 전멸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전력의 전부라고 생각하기엔 미심쩍기 이를 데 없었다. ‘몇 안 되는 숫자로 공상을 치고, 염제 신농과 형천의 군대도 물리친 작은 주신의 부대가 이렇게 난잡할 리 없지 않은가! 치우비나 다른 무서운 놈이 숨어 꾀를 부리는 것이 분명하다!’ 그때 갑자기 부소눌하의 부대의 왼편에서 돌이 쏟아져 내렸다. 사울아비 작은스승 한 명이 급히 달려와 외쳤다. “마갸르족입니다! 와난강, 와난수의 돌부대인 것 같습니다!” “역시! 함정이구나!” 부소눌하는 안타까움에 손바닥으로 무릎을 철썩 쳤다. “아쉽지만 굳이 함정에 빠질 이유가 없지!” 부소눌하는 유연하게 사울아비들을 뒤로 돌려 화살을 쏘아 엄호하며 순식간에 신시 성문 안으로 철수해버렸다. 간신히 사울아비들의 공격을 막아낸 울라트는 곧바로 나무에서 내려왔다. 그러자 저쪽에서 와난강, 와난수 부자가 달려왔다. “어떻게 오셨나요? 이기셨군요.” 기쁜 마음에 울라트는 목소리를 높이며 말하다가 아무래도 좀 뭔가 이상했다. 와난강, 와난수의 부대는 그야말로 만신창이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어서 호쾌한 승리를 거둔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뒤를 쫓는 자들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긴 것이 틀림없는 것 같았다. 와난수가 허탈한 듯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긴 것은 아니지만 이기긴 이겼네.” “그게 무슨 소리죠? 그런 게 어디 있어요?” 그러자 와난강이 피곤한 듯 말을 이었다. “보돈차르님과 우린 다 죽을 뻔했어. 아까 던진 돌이 우리에게 남은 마지막 무기였다네. 무기 좀 내주게나.” “그렇게 밀렸나요? 적은요?” “적의 말들이 다 도망갔으니 우릴 건드리지는 못할 걸세.” “그럼 이긴 것 아닌가요?” “그렇게도 볼 수 있지만, 우리가 한 게 아니래두!” 와난수가 허탈하게 말하자 울라트는 되받았다. “아! 비울걸 할아버지가 그랬나요?” “아니네, 비울걸님은 뵌 적이 없다네.” “그럼 누가 그렇게 해주었죠?” 와난수는 약간 내키지 않는 듯 입맛을 다셨다. “신수 덕분이네.” “신수요?” “그....... 모습은보이지 않았지만 검은 소용돌이 같은 구름과 벼락을 떨어뜨리는 것이 있었다네. 하도 날씨가 급히 변해서 이상하다 여겼는데, 작은 주신 사람 하나가 말해주더군. 바로 신수라고.” 울라트는 깜짝 놀라 물었다. “번개범 말인가요? 번개범이 왔나요?” 보돈차르와 와난강, 와난수의 부대를 구원한 것은 번개범이었다. 번개범은 특별히 누구를 노리고 공격하지는 않았지만, 갑자기 미친바람과 번개를 몰고 날아와 양군의 사이를 지나가버렸다. 그러자 고시가라의 부대는 더 이상 전진할 수 없었다. 신수를 본 일이 없는 고시가라였지만 윈가 알 수 없는 거대한 힘이 이 싸움에 개입했다는 것을 깨닫고 황급히 물러섰다. 더구나 고시가라는 주신에서도 하늘과 안파견 한님에 대한 신앙이 깊으며 주술이나 징조를 믿고 따르는 사람이었다. 고시가라로서는 이런 이상한 조짐이 나타나 싸움을 가로막는 것은 하늘의 뜻이며, 안파견 한님의 뜻이라고밖에 볼 수 없었다. 비록 다 잡은 적을 놓치는 것이 아쉬웠고 신시가 위험하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하늘의 뜻을 어길 마음은 들지 않았다. 고시가라는 결국 몇몇 반대하는 소부족장만을 남겨두고 과감하게 군대를 돌렸다. 이 싸움에 자기가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는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남은 소부족장들도 더 이상 싸우려 않고 멀찍이 물러나 다른 부대와 합류할 기회를 찾았다. 그 때문에 발 빠른 보돈차르 부대는 말을 갈아탄 뒤 신시를 돌아 야울쿠리와 초초룬 부대를 도우러 박차를 가해 달려갔다. 그와 더불어 와난수 와난강의 마갸르 부대는 무기가 거의 떨어져 야율쿠리와초초룬을돕기 전에 무기를 얻을 겸 울라트의 본진에 들른 것이다. 간략하게 정황을 설명한 와난수는 울라트에게 말했다. “어서 우리에게 망가지지 않은 무기를 주게. 야율쿠리 부족장과 초초룬 부족장을 도와야 하네.” 울라트도 상황이 급하다는 것을 깨닫고 급히 말했다. “지금 급한 때인데, 무슨 허락이 필요한가요? 다 때려 부수고 털어가도 암 말 않을 테니 이기기나 해요!” 그러자 와난강이 씩 웃으며 말했다. “이미 그러라고 했어. 좀 미안하지만, 시간이 없어서.......”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마갸르족의 전사 하나가 와난강에게 달려와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무기를 얻었습니다. 구리무기도 많습니다.” 그 말에 울라트는 펄쩍 뛰며 말했다. “아니, 그래도 구리 무기를 막 가져가는 건 안 돼요!” “나중에 다 돌려주겠네. 가자, 강아,” “예! 아버님!” 와난수와 와난강이 웃으며 서둘러 부하들을 몰고 가자 울라트는 화가 나서 펄쩍펄쩍 뛰며 외쳤다. “아무리 급해도 이게 뭐예요! 구리 무기는....... 안 되는데! 제대로 쓸 줄이나 알아요? 응? 지면 알아서 해욧!” 울라트가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치는데, 옆에 서 있던 야쿠타가 갑자기 핑그르르 몸을 돌며 그 자리에 픽 쓰러졌다. 울라트와 부하들이 깜짝 놀라 그의 몸을 살펴보니, 깊은 화살 상 처가 네 곳이나 있었고 그중 두 군데는 화살촉이 몸에 박혀 있었다. 보통사람 같으면 벌써 쓰러져 정신을 잃고도 남을 만큼 큰 상처였다. “빗맞은 게 아니었잖아! 아무렇지 않은 척하더니......!” 그러나 야쿠타는 이미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야쿠타! 죽지 미 눈을 떠! 눈을!” 울라트는 정신을 잃어 호흡이 점점 희미해져 가는 야쿠타의 멱살을 잡고 외쳤다 그러나 야쿠타는 눈을 뜨지 않았다. 울라트는 다시 이를 뿌드득 갈더니 야쿠타의 뺨을 마구 후려쳤다. 힘껏 네 대를 때리자 울라트의 손이 삽시간에 빨갛게 변했다. “야쿠타! 이놈! 지금 대장은 나야! 여긴 싸움터다! 그러니 어서 눈을 뜨고 일어나서 나를 지켜라! 명령이란 말이다!” 울쿠타가 울부짖듯 외치면서 또다시 있는 힘껏 야쿠타의 뺨을 갈기자 야쿠타의 입이 터졌는지 피가 푹 뿜어 나왔다. 주위의 사람들은 놀란 듯하면서도 애절한 눈빛으로 보고만 있었다. 그러나 울라트가 무지막지하게 때린 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야쿠타는 다시 ‘헉’ 하며 숨을 내쉬기 시작했다. 울라트는 급히 야쿠타의 몸에 박혀 있던 두 대의 화살촉을 맨손으로 거침없이 쑥쑥 뽑아냈다. 피가 솟구쳐 울라트의 손이며 얼굴까지 튀어 올랐지만 울라트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두 번째 화살촉을 뽑을 때 엄청난 고통이 있었는지 야쿠타는 ‘으윽’ 신음소리를 토해내며 눈을 번쩍 떴다. 그러자 울라트는 냅다 야쿠타의 따귀를 갈기면서 소리쳤다. “이 자식이 엄살을 피워? 얼른 일어나! 명령이란 말이다! 지금은 내가 대장이야, 이 자식아!” 울라트는 허리에 두른 끈을 풀어 피가 솟구치는 야쿠타의 상처 부위를 단번에 꽉 졸라맸다. 야쿠타는 너무도 고통스러워 끙끙거리며 몸을 반쯤 일으켰다. 그때 저만치에서 울쿠타가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면서 외쳤다. “저게 야쿠타를 잡네? 야! 이 미친.......!” 그러나 정신없이 달려오던 울쿠타는 옆에 있던 작은 주신의 전사인 스구얼타가 발을 걸자 땅에 처박혀버렸다. 울쿠타가 먼지투성이가 된 얼굴로 스구얼타를 쳐다보자 스구얼타는 험악하게 인상을 쓰며 말했다. “그 주둥이로 대장님께 뭐라고 했냐?” 야쿠타가 고통으로 신음소리를 내자, 울라트는 야쿠타의 칼을 뽑아 땅에 콱 거꾸로 꽃은 뒤, 칼자루를 억지로 야쿠타의 손에 쥐어주었다. “넌 명령을 따라야 해. 여기서 내 주위를 지키란 말야!” 이를 악물고 야쿠타는 축 늘어진 몸을 간신히 일으켜 세워 손에 핏줄이 불거져나을 정도로 칼자루를 잡고 매달렸다. 울라트 역시 지치고 맥이 풀려 쓰러질 판이었지만 혼신의 힘을 모아 다시 작은 주신 전사들에게 신시 성벽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작은 주신 전사들도 이미 지칠 대로 지쳤지만 울라트가 독기로 가득 차서 날뛰자 힘을 내서 공격을 시작했다. 더구나 야쿠타가 반송장이 되어서도 땅에 꽂힌 칼자루를 쥔 손을 절대로 풀지 않는 것을 보자 더더욱 분발할 수밖에 없었다. 울쿠타도 처음에는 울라트를 원망했으나 야쿠타가 필사적으로 몸을 추스르고 칼을 놓지 않는 모습을 보고 한숨을 내쉬며 미친 듯 성벽에 달려들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울라트가 저렇듯 있는 힘을 끌어 모아 끝까지 버티는 이유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울라트는 성 안으로 들어간 아버지와 치우천 일행이 걱정되어 미칠 지경이었다. 무엇이든 하면서 움직이고 있어야지, 그대로 있다가는 초조함을 이기지 못해 머리가 터질지도 몰랐다 비록 맹렬한 기세는 아니더라도, 계속 공격했기 때문에 신시 안에서도 섣불리 성문을 열고 나을 수 없었다. 이것만으로도 울라트는 기대 이상의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었다. 치우비와 알한 등은 새까맣게 양쪽을 에워싸며 다가오는 적을 긴장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양쪽으로 길게 포위하듯 다가왔기 때문에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어느 한쪽으로든 달려가도 두 개의 판자에 눌리는 것처럼 완전히 괴멸될 수 있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다 해도 완전히 포위되어 역시 전멸할 수 있었다. 이렇게 적은 숫자로는 묘수가 없는, 그야말로 난감한 상황이었다. 그때였다. 하늘이 컴컴해지면서 돌연 세찬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구름이 약간 끼었을망정 햇살이 비췄는데 갑자기 어두워지자 주신 군대만이 아니라 치우비의 부대마저도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알한이 소리쳤다. “치우비님! 왼쪽을 보십시오.” 치우비가 놀라 돌아보는 순간 몇 줄기의 번갯불이 번쩍이며 별안간 몸이 날아갈 것 같은 거센 바람이 휘몰아쳤다. 그리고 소용돌이치는 거대한 안개덩이 같은 것이 맹렬하게 달려들었다. 치우비와 알한은 틀림없이 전에 한 번 본 적이 있는 바로 그 모습이었다. “번개범?” 치우비는 깜짝 놀랐다. 그러나 그 안개덩이는 여러 줄기의 무서운 벼락을 내리꽂으며 치우비의 군대와 죽신 군대 사이를 휩쓸고 지나갔다. 벼락이 떨어지고 세찬 바람이 휘몰아치자, 주신 군대는 급히 뒤로 물러서며 더 나아갈 생각을 하지 못했다. 치우비의 부대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으나, 전에 번개범과 겨뤘던 사람들이 많이 끼어 있었다. 그 덕에 부하들의 혼란을 어느 정도 제어하며 가까스로 대오를 유지할 수 있었다. 허나 주신 군대는 처음 겪는 일인데다가 부대의 상당수가 정식 사울아비가 아니라 여기저기서 끌어 모은 보통사람들이라 그 혼란은 걷잡을 수가 없었다. 번개범과 맞선 경험이 있는 자들은 대부분 치우우레의 부하들뿐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두 갈래의 주신 군대 중 오른쪽 부대도 갑자기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미친 듯이 휘몰아치는 소용돌이 바람과 벼락 때문만이 아니라 누군가의 공격을 받은 것 같았다. 치우비의 부대는 숫자도 적고 공격할 만한 처지가 아니라 그저 우두커니 지켜보고만 있었다. 이윽고 부대 한편이 허물어지면서 일단의 부대가 그들을 돌파해 몰려나왔다. 그 선두에는 보돈차르가 있었다. “보돈차르님이.......? 어떻게 이쪽으로?” 그러나 치우비의 놀라움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보돈차르의 뒤를 따라 희고 커다란 형체가 날렵하게 달려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무라를 태운 개명수 카였으며, 무라는 등뒤에 한 사람을 업고 있었다. 치우비는 그것이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보았다. 바로 아버지 치우우레였다. 개명수 카는 무라와 치우우레를 함께 태우고도 날렵하게 달려와 치우비 앞에 멈추어 섰다. 치우비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와락 울음을 터뜨렸다. 씩씩하고 용맹스럽던 치우우레는 얼마 지나지 않은 사이에 훌쩍 마르고 온몸에 상처가 가득했으며 머리가 드문드문 하얗게 센 노인처럼 볼품없이 변해 있었던 것이다. “아....... 아버지! 이게....... 이게 도대체.......!” 치우비가 달려들어 치우우레를 안고 눈물을 흘리자 치우우레는 힘없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 녀석아....... 아무리 그래도....... 주신 사람끼리 싸우면....... 되느냐? 너는....... 벌을 받아야겠구나.” “할 수 없었어요. 아버지........ 저는.........” 그러자 치우우레는 쇠잔하기 짝이 없는 오른손으로 치우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다 안다........ 그래.........할 수 없는 일이지. 내가 너희를 왜........ 모르겠느냐.” 치우우레는 얼마나 지쳐 있었던지 그 정도 말을 하는 것만으로도 벌써 의식을 잃어가고 있었다. “비 안다, 아버님을 쉬시게 하게.” 치우비의 옆에 다가온 보돈차르가 조용히 말했다. 치우비는 그야말로 아버지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고도 많았으나 억지로 눌러 참고 아버지를 업으려 했으나 무라가 말렸다. “부하들에게 맡기세요.” 치우비는 이를 악물고 도깨비들 중 몇에게 눈짓을 했다. 이미 주신 군대는 일제히 후퇴하기 시작했기에 행동의 제약은 없었다. 치우비는 갑자기 울면서 주먹으로 있는 힘껏 땅을 쳤다. 땅바닥이 움푹 파이며 들어가는데도 성질에 못 이겨 두 번, 세 번 주먹질을 했다. 치우비는 고개를 번쩍 들고 분노에 가득 찬 목소리로 외쳤다. “어떤 놈이오? 누가 아버님을 저렇게 만들었소?” 무라가 치우비의 눈길을 피하며 얼버무렸다. “저도 모릅니다. 제가 치우우레님을 구했을 때....... 그분은 이미.........” “저건 어떻게 된 겁니까?” 치우비가 번개범이 일으키는 검은 회오리와 세찬 바람을 가리키며 무라에게 물었다. “번개범입니다.” “번개범이라는 것은 알지요. 그런데 번개범이 왜 끼어들었단 말입니까? 우리를 돕겠다고 나선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천님이 우린 구슬을 주셔서 번개범과 이야기를 할 수 있었습니다.” 치우비는 잠시 혼란스러웠지만 이내 정신을 가다듬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건 안 됩니다.” 그 말을 듣고 차오스가 불쑥 나섰다. “왜요? 신수가 싸워준다면, 단번에 신시를 무너뜨릴 수도 있을 겁니다!” 알한도 한마디 보탰다. “번개범은 이미 끼어들지 않았습니까? 더구나 자기 발로 달려와서 우리를 돕는다는 데 뭐 가 나쁩니까?” 치우비는 마음이 다급해지자 대꾸할 말이 잘나오지 않았다. 치우비는 답답하여 가슴을 두드리다가 외쳤다. “그게 아닙니다. 저도 고맙습니다만 번개범은 우릴 도와서는 안 돼요!” “하지만 이미 돕고 있지 않습니까?” “아이쿠, 큰일이네. 그러면 안 돼요! 안 돼!” 치우비가 발을 구르자 알한도 답답한 듯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궈며 물었다. “왜 안 된다는 겁니까?” 별안간 치우비는 평소와는 달리 엄청 빠르게 외쳤다. “번개범은 한웅님을 공격했고 가리족과 친해요. 그런 번개범이 우리 편에 서면 적들이 뭐라겠어요? 오래 전부터 주신을 칠 계획을 세웠다고 떠들어댈 겁니다! 그러면....... 형님이...... 형님이 신시에 들어가셔서 소식이 없는데! 꼼짝없이 당한다구요!” 그 말에 얼굴빛이 하얗게 질린 무라가 주저앉으며 외쳤다. “천님이....... 소식이 없다구요?” 치우비 역시 안타까워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애써 무라를 위로하려 했다. “하지만 난 형님을 믿어요. 고시울률이나 치우가람 놈에게 잡힐 리 없습니다. 반드시 사와라 한웅님을 직접 찾아뵙고, 모든 것을 바로잡을 거예요. 그러니........” 치우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무라가 소리쳤다. “그건 안 돼요!” 항상 돌같이 싸늘할 정도로 침착하던 무라가 소리치자 치우비뿐만 아니라 알한과 차오스, 도깨비들까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사와라 한웅! 바로........그가 이 모든 것을 꾸몄다구요!” 무라의 외침에 치우비는 너무도 놀라서 입을 딱 벌렸다. “말.......말도 안 돼요 한웅님이라니.......?” 무라는 재빨리 격한 감정을 추스르며 굳은 얼굴로 되받았다. “물론 믿기 힘드실 겁니다. 저도 믿기 힘들었어요. 허나.......” 잠시 숨을 고르며 무라는 묘한 동작으로 카의 머리를 돌려세우며 말을 이었다. “지금은 이야기할 때가 아닌 듯하군요. 어쨌거나 저들을 물리쳐야만 합니다. 그래야........” 무라가 잠시 말을 끊자 치우비는 눈을 끔벅이며 고개를 몇 번 젓더니 의외로 힘차게 말했다. “물론....... 싸워야죠!” 치우비는 도끼를 힘껏 움켜잡으며 무라를 돌아보았다. 그 눈빛은 결연했지만 그 안에는 슬픔과 분노와 의혹이 혼란스럽게 물결치고 있었다. 치우비는 자신 있는 듯한 어조로 무라에게 재빨리 속삭였다. “하지만....... 난 믿을 수가 없어요.” 무라는 치우비의 말에 답하지 않고 한 번 거친 숨을 내쉰 뒤 날카롭게 외쳤다. “갑시다!” 그 시각, 야율쿠리와 초초룬은 사울아비들의 세 번째 공격에 맞서 죽을 힘을 다 짜내며 분전하는 중이었다. 사울아비들의 공세는 집요하고도 강력하여, 야율쿠리와 초초룬의 부대는 어느덧 백 명에 가까운 사망자와 칠백 명이 넘는 부상자가 발생했다. 거의 전군의 오 분의 일이 죽거나 다친 참담한 상황에까지 온 것이다. 그러나 와난강, 와난수의 부대가 새로이 전열을 갖추어 밀려들고, 보돈차르의 기마병이 양쪽에서 달려들자 사울아비들은 더 이상 전진할 수 없었다. 원군이 밀려들자 이번에는 사울아비측은 방어로 진형을 바꾸어 싸우기 시작했다. 그들은 군대를 세 갈래로 나누어 각각의 방향을 완벽하게 방어했다. 그들의 지휘 솜씨는 보통이 아니었다. 그에 비해 보돈차르나 와난강, 와난수나 야율쿠리, 초초룬의 부대 모두가 몹시 지쳐 있어 강력한 공세를 퍼부을 수가 없었다. 이윽고 치우비의 부대마저 그쪽으로 이동해서 포위할 것처럼 보이자 주신측의 대장은 귀신같이 군대를 모아 후방을 경계하며 피해도 거의 입지 않고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때마침 날이 어두워지면서 세찬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어둠과 휘몰아치는 바람 때문에 더 이상 싸 움을 계속할 수 없었다. 세 갈래로 나누어져 들이닥친 신시의 지원군은 후퇴하면서 다시 하나로 합쳐져 삼십 리 정도 떨어진 널찍한 벌판에 진을 쳤다. 고시가라의 부대 대부분이 후퇴했고, 또 치우광의 부대가 전장을 이탈했기 때문에 야율쿠리 등을 상대하던 부대가 주력인 것 같았다. 그 대장이 누구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으며, 비록 다른 부대의 보통 전사들이 합류하여 그 수가 퍽 늘어났긴 해도 중심이 되는 사울아비들이 대거 이탈한 상태였다. 작은 주신은 이제 이전처럼 절망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치우비도 다른 군대들을 이끌고 신시 주변을 에워싼 본진으로 돌아왔다. 따지고 보면 번개범 덕분에 그나마 하루를 버텨낸 전사들은 모두 지쳐 드러눕다시피 했지만 치우비는 그럴 수 없었다. 가장 먼저 아버지 치우우레의 안부를 확인하고, 치우비가 돌아오자마자 엉엉 울음을 터뜨린 울라트를 달래야 했으며, 기타 부상자들이나 피해 상황까지도 둘러보아야 했다. 번개범은 어디에 숨었는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또한 치우비는 부상을 입은 야쿠타를 만났고, 경상을 입은 야율쿠리와 초초룬 등의 상태까지 살피며 각 부대가 겪은 싸움의 내력에 대해 보고를 받았다. 무라가 그 뒤를 계속 따랐지만 치우비는 무라에게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다만 어색한 마음에 괜스레 다른 사람들에게 굳이 묻지 않아도 될 것까지도 자잘하게 묻고 다녔다. 표정은 자못 태연했지만 치우비의 등덜미에서는 계속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결국 무라가 먼저 입을 열었다. “비님, 피하실 일이 아닙니다. 제 말을.......” 치우비는 하던 말을 딱 멈추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듯 시선을 굴리다가 고개를 숙였다.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건....... 그건 말이 안 됩니다.” 무라는 조용히 입술을 깨물다가 손을 저어 주변 사람들을 모두 물러가게 했다. 치우비의 명령은 아니었지만 주변에 있던 자들은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슬그머니 빠져나갔다. 치우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도 많이 생각해봤습니다. 허나.......허나 그건 말이 안 됩니다.” 무라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아직 많은 부분에서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무라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렇게 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치우비는 고개를 저으며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그럴 리 없습니다. 사와라 한웅님은 주신의 한웅입니다! 뭐가 아쉬워서 그런단 말입니까!” 무라가 냉랭하게 되받았다. “작은 주신의 무라, 이름을 걸고 말씀드립니다. 다른 것은 모르겠습니다. 허나 번개범을 기른 것은 한웅님이 명한 것입니다. 저는 이번에 그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답답한 듯 가슴을 쾅쾅 두드리는 치우비를 쳐다보며 무라는 계속 말했다. “번개범이 천님과 비님의 원수가 아닌 것은 이미 분명합니다. 그때 천님께서는 번개범과 혼자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들었습니다. 그에 대해서 두 분은 아무에게도 말씀을 하지 않으셨지요. 벌써 스물 몇 해 전, 가리족을 쳐부수러 나가신 것은 그때 최고의 젊은 사울아비로 이름 높으셨던 비렴님이었습니다. 그때 누군가가 가리족을 빼돌려 구름골에 살던 번개범과 가까워지게 만들었습니다. 번개범이 예전에 자신을 살려준 사람이 누구라고 말했는지, 비님은 들으셨습니까?” 치우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형님께 들었습니다.” 무라는 몹시 불안한 듯, 눈가에 그늘을 드리우며 말했다. “저 역시 그 이야기를 번개범에게 들었습니다. 저도 알고 있지만, 맞는지 확인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누구라고 들으셨습니까?” 치우비는 고통스러운 듯, 작은 목소리로 힘겹게 이야기했다. “제....... 아저씨인....... 치우괄괄님이라 들었습니다.” 무라는 조금 안심이 되는 듯, 숨을 훅 내뿜으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번개범이 거짓을 말하지는 않았군요.” 치우비는 손사래를 치며 무라의 말을 막았다. “그것은 아무 도움이 안 됩니다. 괄괄 아저씨는 이미 십 년도 더 전에 앓아누워, 말조차 못하는 산송장이 되었습니다. 그런 괄괄 아저씨가 어떻게....... 형님도 그럴 수는 없다고, 그것으로는 진실을 알 수 없다고 했습니다.” 무라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번개범을 만나러 가기 전, 천님께 이야기를 들었고, 다시 번개범에게 확인을 했습니다.” 치우비는 괴로운 듯 말했다. “우리 형제가 비록 치우가람 형제와는 맞서지만, 괄괄 아저씨는 좋은 분이셨습니다. 괄괄 아저씨는 어머니의 원수가 아닙니다. 그때 괄괄 아저씨는 먼 곳에 나가셔서 신시 근처에는 계시지도 않았습니다. 그때 괄괄 아저씨가 계셨다면, 어머님 혼자 번개범을 상대한다고 나가시지도 않았을 겁니다. 더구나 괄괄 아저씨가 한웅님을 해치려 했을 리 없습니다! 저희 아버님보다도 몇 배 더 한웅님을 위하던 분이셨습니다!” “물론 그럴 것입니다. 허나 그때 가리족을 구하여 구름골에 몰아넣은 것은 분명 치우괄괄님입니다. 허나 치우괄괄님 혼자 그랬을 리 없습니다. 누군가의 명령을 받고 그랬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 당시 치우괄괄님은 어떤 위치에 있었습니까?” 치우비는 괴로운 듯 대답했다. “이미 괄괄 아저씨는 치우웃뜸이셨고, 주신 다섯 집안의 하나로서 삼사에 못지않았습니다.” “그런 분에게 명령을, 그것도 그런 기이한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사와라 한웅님뿐입니다.” 무라가 잘라 말하자, 치우비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형님과 저도 이미 그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허나 그것은 말이 되지 않았습니다. 한웅님께서 번개범을 기르셨다면 어찌하여 번개범에게 자신을 습격하도록 했단 말입니까? 그리고 지난번 유망과의 싸움 때 번개범으로 하여금 지나족을 치게 하지 않고 어찌 마갸르족을 치게 했단 말입니까?” “저도 그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 때문에 몹시 헷갈립니다.” “천님도 그것은 말이 안 된다 했고, 그런 생각을 지우셨습니다. 형님은 아마 번개범과 가리족이 한웅님의 손을 떠나 다른 사람에게 들어갔을 것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그자야말로 주신을 혼란으로 몰아넣고, 우리를 위협하는 그림자라고 했습니다. 무라님은 그것을 알아내러 가신 것 아닙니까?” 무라는 치우비를 달래듯 차분하게 대답했다. “물론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그림자가 한웅님이라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말이 안 됩니다!” “지난번 천님과 이야기할 때 번개범은 싸움에서 쓰러진 뒤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것을 말할 수 없었고, 천님께서도 너무 놀라서 자세한 것을 묻지 못하셨습니다. 더구나 그때 번개범 안에는 비냐가 있었습니다. 비냐는 아직도 천님을 미워합니다. 그래서 많은 이야기를 할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 때문에 제가 간 것입니다. 저는....... 저는 비냐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들 중에서 실제로는 대단히 중요한 것을 알아냈습니다.” “어떤 것들 말입니까?” “저는 가리족들의 이야기를 들은 바 있습니다. 지난번 싸움 때, 천님과 비님은 가리족 전사들을 거의 다 물리치셨습니다. 가리족의 부족장마저도 비울걸님에게 목이 달아났습니다. 지금 구름골에 남아 있는 가리족은 거의 다 여자나, 늙은이, 아이들뿐입니다.” “그게 어쨌다는 겁니까?” 무라는 치우비의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번개범은 줄곧 주신에서 사람이 왔다는 이야기만 했습니다. 가리족은 우린 구슬이 없으니 직접 알 수 없었고, 다만 주신 사람이 계속 가리족을 먹여 살리고 번개범에게 명령을 내렸다는 것만 알고 있었습니다. 허나 그 주신 사람들을 직접 만난 것은 가리족족장과 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는 남아 있는 노인들에게 주신 사람들이 언제 왔는지, 어떤 이야기를 했었는지 전부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을 만났단 말입니까?” “비냐의 도움으로 그럴 수 있었습니다. 치우비님, 처음에 번개범과 가리족을 구한 것은 치우괄괄님이며, 그 일은 스물여섯 해 전의 일입니다.” “압니다. 형님이 고시울률님을 의심하지 못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그때는 고시울률님이 지금 같은 힘을 갖기 전의 일이니까요!” “그리고 팔 년 동안, 가리족은 매번 치우괄괄님이 보낸 사람과 만났습니다. 그 사람이 가리족이 다른 부족과 바꾸어 먹을 것을 구할 수 있는 값진 물건들을 전해주었지요 그리고 열여덟 해 전에 그 일을 맡은 사람이 바뀌었습니다. 가리족의 노인 하나가 그 일을 기억하고 있었죠. 그런데 열네 해 전에 그 사람의 발길이 뚝 끊어지고 말았답니다.” 돌연 치우비의 눈이 약간 커졌다. “그 때문에 가리족은 먹을 것을 구할 길이 없어서 근처 부락에서 도둑질하고, 사람을 잡아먹는 짓을 또 했습니다. 구름골 밖으로 나가면 부족이 전부 죽을 것이라는 주신 사람의 말이 있었지만, 배고픔 때문에 많은 사람이 굶어죽은 가리족으로서는 뾰족한 방법이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허나 가리족은 주신을 여전히 무서워했으며, 그중에서도 자신의 부족을 철저히 쳐부순 비렴님을 세상에서 가장 무서워했습니다. 그때쯤 비렴님은 삼사가 되셔서 풍백의 지위를 얻으셨다는 것을 가리족도 주워들었기에 더더욱 비렴님을 두려워했답니다. 때문에 가리족은 자신들이 구름골 밖으로 나왔다는 흔적이 남지 않게 매우 조심했습니다. 하지만 꼬리가 길어서인지 결국 가리족은 주신 사울아비들에게 발각되었고 서둘러 구름골 안으로 도망쳐 들어갔습니다. 이제는 분명 비렴님의 사울아비들이 올 것이니 다 죽었다고 생각했답니다. 그런데 주신의 원정군은 오지 않았고 두 해가 지난 후에 주신 사람이 와서 다시는 구름골 밖으로 나오지 말 것이며, 무엇이든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비렴님을 보내겠다고 했답니다. 물론 가리족은 벌벌 떨며 꼼짝도 못했지요.” “그게 어쨌다는 겁니까?” “그때 그 사람이 내려준 물건은 한웅님의 표식이 있는 물건들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그 표식을 지운 다음 쓰라고 했답니다.” 치우비가 조금 멈칫한 표정을 짓자 무라는 계속 말을 이었다. “한웅님이 내리시는 물건은 특별한 표시가 되어 있다 들었는데, 맞습니까?” 치우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천부인의 표시가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나 새길 수 없는 것이라 들었습니다만.” “감히 천부인의 표식을 함부로 새길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목에 칼을 들이대고 협박해도 새기지 않습니다. 천부인은 안파견 한님과 자부선인 때부터 내려온 주신의 상징입니다. 더구나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기에 천부인에 죄를 지으면 반드시 벌을 받게 됩니다.” 치우비는 잠시 심호흡을 하고는 이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한웅님이 뒤에 있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한웅님이 내린 물건을 모아서 주었을 수도 있잖습니까?” “말 두 마리에 가득 실릴 만큼 많은 구리 물건을 한 사람에게 내린 일이 있습니까?” 무라의 말에 치우비는 할 말을 잃었다. 천부인의 표식이 새겨진 한웅의 하사품을 받기란 무척 어려웠다. 치우우레처럼 한웅에게 충성을 바친 사울아비 큰스승의 집에도 천부인이 새겨진 한웅의 하사품은 네 개뿐이었다. 유망이나 헌원 같은 대부족장이라도 몇 번 받지 못했을 것이며 고시울률일지라도 열 개를 넘지 못할 것이다. “치우 집안이나 고시 집안 같은 오래된 집안이면 물건이 쌓여 있을 수 있나요?” 무라가 확인하듯 묻자 치우비는 고개를 저었다. 천부인의 표식이 찍힌, 한웅의 하사품 같은 귀한 것은 가진 것 자체가 영광이므로 특별히 다루며, 남에게 팔거나 줄 수도 없다. 더구나 그것을 지닌 사람이 죽으면 장례를 치를 때 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은 다음 그 물건들의 천부인 표식을 깎아낸다. 그 표시를 깎아내는 것은 그 사람의 영광된 공을 하늘에 계신 안파견 한님께 돌려보내는 의미이며, 그 뒤로 그 물건은 평범한 구리 물건이 된다. 또한 그 물건을 무덤에 넣기도 했다. 그 때문에 한 사람이 그렇게 많은 천부인 표식의 물건을 지닐 수가 없었다. 한웅의 창고를 직접 열 수 있는 사람만 제외하고. “그렇다고 한웅님이 스스로 그랬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한웅님 근처에 있는 사람이.......” 치우비가 궁색한 변명을 하자 무라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저는 주신 일은 잘 모르지만, 대주신의 한웅님 창고가 쉽게 열릴 리도 없고, 그만한 물건이 없어졌다면 난리가 날 것 같습니다만. 그맘때쯤 그런 소문이 있었습니까?” 치우비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짧게 고개를 저었다. “그때 저는 신시 안에 살았습니다. 더구나 한웅님의 창고가 털린 일은 신시가 세워진 이후로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한웅님 허락이 없이 물건이 나갈 수도, 설령 빼돌렸더라도 잠잠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치우비는 주먹을 쥐고 땅을 탁탁 치면서 말했다. “허나.......한웅님께서 왜 번개범을 시켜 스스로를 노린단 말입니까? 그럴 리가 없잖습니까?” “허나 사와라 한웅님말고는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힘없이 대답한 무라는 잠시 입을 다물고 서 있었다. 그러다가 치우비가 머리를 쥐어뜯자 무라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치우비님, 저는 세 가지를 알아내러 떠났었습니다. 첫째는 이 모든 일의 뒤에 서 있는 그림자를 찾으러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와라 한웅님말고는 아무도 할 사람이 없습니다. 이건........아무래도 치우천님의 머리를 빌리지 않고는 안 될 일이라 생각합니다.” 치우비도 고개를 끄덕였다. “형님이라면 확실하게 생각할 수 있을 테죠 허나 형님은 결국 신시에서 나오지 않았어요.” 치우비의 안색이 흐려졌다. 무라도 굳은 얼굴에 애석한 표정을 살짝 지으며 탄식했다. “사실 이것도 사와라 한웅님이 그림자라는 큰 증거가 됩니다. 치우천님이 신시로 들어가셨는데, 신시는 잠잠해요 치우천님이 한웅님을 만났다면 우리와 계속 싸우려 하지 않았을 테고 치우천님이 잡혔다면 당연히 그것을 알려 우리를 항복시키려 했을 겁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이건 정말......... 제가 조금이라도 빨리 와서 들어가지 않게 해야 했는데........” 마음이 착잡한 치우비는 가까스로 얼굴을 폈다. “저는 형님을 믿습니다. 더구나 치베와 두 부족장님이 같이 가셨으니, 웬만하면 괜찮을 겁니다. 설령 무슨 일이 있다 해도, 우리가 신시를 계속 누르고 있으면 어떻게 하지는 못할 겁니다.” 무라는 마지못한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무라나 치우비, 두 사람 모두의 얼굴에 수심이 드리워져 있었다. 치우비는 그 분위기를 깨려고 무라에게 물었다. “그런데 다른 두 가지 일은 무엇이죠?” “한 가지는....... 아직은 말씀드릴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무라는 두 번째 일을 말하기 싫어서 재빨리 말을 돌렸다. 그것은 바로 소녀에 관한 문제 였기 때문이다. “제 번째로는 누가 배신자냐 하는 문제입니다 지난번 회의에 있었던 사람들 중에 분명 치우천님의 계획을 알려준 사람이 있습니다. 그게 누구인지 알아내고 싶었는데, 만약 사와라 한웅님이 그림자라면 사울아비들 중 누구나 배신자가 될 수 있습니다.” 치우비는 한숨을 깊이 내쉬었다 “전....... 믿지 못하겠습니다. 사울아비 중 하나라면 쇠돌이, 벼락형, 도단이, 거서기, 삼 형....... 이렇게 다섯 중 하나라는 말인데......... 저는 그 누구도 의심할 수 없습니다!” “저도 도저히 누구라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사울아비 아니라도 누구든 의심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우리와 같이 싸우는 사람들은 아닌 게 분명하니, 결국 사울아비 벗들만 남습니다. 그러나 제 머리로는 대체 배신자가 누구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습니다.” “다른 것은 없습니까?” “없습니다. 부끄럽게도 그게 전부입니다.” 무라가 고개를 숙이자 치우비는 탄식했다. “형님이 계신다면! 형님에게 알릴 수 있다면!” 그러자 무라가 심각한 목소리로 되받았다. “천님께서도 아실 수 있을지 모릅니다.” “네? 어떻게요?” 치우비가 눈이 휘둥그레지자 무라는 살며시 웃어 보였다. “모두가 열심히 싸웠는데, 통 보이지 않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치우비는 잠시 생각해보다가 이내 무릎을 쳤다. “비울걸!” 무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제가 카를 타고 오다가 주신 부대를 뛰어넘으려 했을 때, 저는 비울걸님이 도깨비들을 부려서 그들의 진지 한구석을 엉망으로 만들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왜 돌격하는 부대들을 공격하지 않고 뒤떨어진 곳에 있는 진지를 공격하는지 이상하여 그리로 뛰어가 서 비울걸님을 만났습니다. 때마침 보돈차르님의 부대가 도착해 치우우레님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비울걸님도 아버님을 구한 은인이구려!” “그렇습니다. 보돈차르님의 도움도 있었죠. 그러나 비울걸님이 아니고서는 아버님을 그리 쉽게 찾을 수는 없었을 겁니다. 비울걸님 말로는, 이쪽의 부대는 주술력이 아주 강한 사람이 있었답니다. 그래서 자신이 나서서 흐트러뜨릴 수 없기에 대신 치우우레님을 찾으려 했다는군요.” “그러면 미리 말이라도 해주지 않고서! 원 참.......” 치우비가 허탈해서 중얼거렸지만 무라는 그에 대꾸하지 않고 그때의 일을 말해주었다. 무라는 비울걸에게서 치우천이 이미 신시로 들어간 것을 알았다. 그래서 무라는 비울걸에게 자신이 치우우레를 옮길 테니, 대신 신시로 들어가서 자신이 알아낸 정보를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신시는 주술이 잘 안 통하지 않도록 지은 곳이었다. 특히 한가운데로 갈수록 그 이 세어지는 곳이라 비울걸은 자신이 없었지만, 사와라 한웅이 그림자일지 모른다는 무라의 말에 놀라며, 치우천을 만나겠다고 하며 사라졌다는 것이다. “비울걸님은 아마 신시로 들어가셨을 겁니다. 치우천님을 만나게 되었으면 좋을 텐데........” 무라가 걱정스레 말하자, 치우비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울쿠타가 급히 달려와 말했다. “치우비님! 치우비님! 급히 오셔야겠습니다. 대장들이 다 모여 있습니다.” “무슨 일이냐?” “사울아비 대장 한사람이 찾아왔습니다. 알한님이 아주 반가워하시더군요.” “가봐야겠습니다.” 치우비가 말하며 그 자리를 떠나려 하자 무라가 재빨리 귓속말로 속삭였다. “저와 나눈 이야기는 아직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비울걸님이 오실 때까지는.” 치우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울쿠타를 따라 대장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기자 무라 역시 그 뒤를 따랐다. 그날 밤 치우천은 손이 뒤로 묶인 채 돌벽에 몸을 기댄 채 앉아 있었다. 어두컴컴한 골방에 창문 하나 뚫려 있지 않아 별빛조차 볼 수 없었다. 단지 단단한 나무문 틈으로 들어오는 빛이 없는 것을 보니 밤이 되었으리라 짐작할 뿐이었다. 치우천은 아까부터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자신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이 모든 일을 누가 꾸몄는지 처음부터 다시 천천히 따져 나가기 시작했다 여러 가지를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만 아직도 뭔가가 부족했다. ‘그림자는 누구란 말인가? 가면 갈수록 알 수 없구나.’ 치우천의 생각으로 그림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은 현재 상황으로 볼 때는 셋뿐이었다. 첫째는 고시울률이었다. 사실 정황을 보아서는 고시울률이 그림자라고 보는 편이 제일 이치에 맞았다. 번개범을 시켜 한웅을 습격하게 하고, 한웅에게 독을 먹이고, 치우천의 습격을 직접 지휘한 것은 고시울률일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아울러 치우가람, 바람 형제를 부린다는 점도 충분히 의심스러웠다. 허나 치우천은 고시울률의 성격이나, 그가 얻을 것이 별로 없다는 점에서 그가 그림자라는 확신은 들지 않았다. 더구나 고시울률은 번개범과 가리족과는 상관이 없었다. 맨 처음 가리족을 구름골로 끌어들인 사람은 치우괄괄이다. 허나 당시 고시울률이 치우괄괄을 부릴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치우괄괄은 물론 십여 년 전 풍병으로 말조차 못하는 폐인이 되어버렸으니 그가 그림자일 수는 없었다. 그리고 고시울률 같은 성격의 사람이 딸이자 치우천의 어머니인 미리내를 죽이고 시치미 뗄 수 있다고는 볼 수 없었다. 그렇게 본다면 두 번째로 의심할 수 있는 사람은 풍백 비렴이었다. 가리족을 쳐부순 사람이 비렴이니만큼 그들을 구름골에 몰아넣은 사람도 비렴일 수 있었다. 그리고 비렴은 이상하게 자신이 신시에 들어온 다음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삼사의 으뜸인 풍백의 지위에 있었고 주신보다는 다른 부족들에게 명망이 높으며 사람됨이 차분하고 생각이 깊어 큰일을 꾸밀 만한 능력이 있었다. 자신에게 호의적이었다고 해서 비렴을 빼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비렴이 의심스럽다면 삼사 모두가 의심스럽다고 볼 수도 있었으나 병예는 너무 늙어 패기가 없었고 신지울태는 조용한 성격이라 비렴을 도우면 몰라도 앞장설 수는 없을 것 같았다. 허나 비렴은 항상 충성스러웠고 번개범에 대항해 목숨을 걸고 싸웠으니 그 또한 말이 되지 않았다. 삼사 모두 목숨을 잃을 뻔했으니 말이다. 더구나 치우천은 삼사와 뜻을 같이하여 고시울률을 견제할 수 있는 유능한 도구이니 자신을 함정에 빠뜨릴 이유가 없었다. 비렴이나 삼사가 그림자일 가능성은 가장 낮았다. 세 번째로 의심스러운 것은 사와라 한웅이었다. 사실 고시울률의 권세가 크다지만, 그래도 한웅의 권세보다 클 수는 없었다. 사와라 한웅이라면 모든 것을 조종할 수 있었고, 충성스러운 치우천의 벗들 중 몇몇 사울아비들을 조종하여 뭔가를 알아낼 수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치우천이 신시로 오는 것에 대비하여 많은 군사를 동원할 권력을 지닌 것은 사와라 한웅뿐이었다. 사와라 한웅이 고시울률에게 속았거나 명분에 밀려서 군대를 동원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허나 자신을 제압한 두 단군의 경우, 그들은 고시울률도 미워하고 자신도 미워했다. 그런 사람을 부릴 수 있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사와라 한웅뿐이었다. 만약 두 단군이 고시울률의 부하라면 절대 자신을 살려두지 않고 목을 베어 싸움에서 승리하는 데 쓰려 했을 것이다. 치우천은 신시 안으로 들어오고부터 사와라 한웅을 의심하는 마음이 더욱더 짙어졌다. 그렇지만 사와라 한웅에게도 그런 짓을 할 이유가 없었다. 물론 치우천을 이용하여 고시울률을 쳐내어 권력을 확실히 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사와라 한웅 이상으로 의심가는 사람을 찾기 힘들었다. 허나 치우천은 사와라 한웅에게 충성을 맹세했으니 치우천을 굳이 제거할 이유가 없었다. 둘 다 없애는 것은 사와라 한웅이 죽은 후 주신을 더 혼란스럽게 할 뿐이다. 더욱이 사와라 한웅은 몹시 늙고 병들었으며 독에 잠식당한 상태인데다가 자식도 없으니 권력 때문에 아옹다옹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번개범 문제가 마음에 걸렸다. 목숨을 걸고 자살행위나 다름없이 습격을 받으면서까지 일을 꾸몄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만약 위의 셋 중의 누구도 아니라면, 치우천으로서도 그 정체를 알아내기란 정말 어려웠다. 분명 모습이 드러나지 않은 사람은 아닐 것이다. 주신에서 이렇듯 큰 힘을 발휘하면서 아무도 모르는 곳에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치우가람 형제나, 기타 다른 집안사람들이 일을 꾸몄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자신이 전에 생각한 대로 고시울률과 자신을 맞붙게 하여 둘 다 제거하고 주신을 통째로 손아귀에 넣으려 할지도 몰랐다 허나 그렇다 해도 위에서 말한 세 사람 중 누군가의 등 뒤에 붙어 그 힘을 업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런 엄청난 일을 꾸밀 수 없었다. 숨어 있는 그자가 누구인지 알아내려면, 그자가 누구의 힘을 업고 있는지부터 밝혀야 한다. 결국 그림자가 고시울률이냐, 사와라 한웅이냐를 구분하려면 번개범이 누구에 의해 움직였는지 알아내는 길밖에 없었다. 그것이 가장 큰 열쇠가 될 것이고, 그것만 알아낸다면 모든 것을 다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때문에 치우천은 무라를 번개범에게 보냈지만, 아 쉽게도 무라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이제 다 끝난 것이나 다름없으니, 생각해서 무엇하나?’ 허탈한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사흘 후에 죽는다고 했다. 이 밤이 지나가면 이틀이 남는다. 너무 시간이 없었다. ‘비가 잘 싸워준다면 혹시.......?’ 생각하던 치우천은 씁쓸한 마음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한웅님이 우리 편일 경우에는 그것으로 압력을 넣을 수 있다. 허나 한웅님이 우리 편이 아니거나, 그림자에게 굴복했다면 내 목은 달아날 것이며, 아우와 벗들도 모조리 위험해진다.’ 치우천은 신시에 오면서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여 군대를 동원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주신의 힘에 정면으로 맞설 수는 없었다. 자신이 군대를 직접 지휘한다 해도 오랫동안 훈련된 수많은 사울아비들을 쉽게 이길 자신은 없었다. 더구나 신시를 며칠 내에 함락한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았다. 지금 몰려온 지원군은 치우비와 벗들의 힘으로 어떻게 물리친다손 쳐도 단단한 신시의 성벽은 너무도 높았다. 공상처럼 미리 수를 써둔 곳도 아니니 결국 포위하면서 신시의 식량이 모조리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그런 중에도 지원군은 끊임없이 몰려올 것이고 결국 신시의 성벽이 그들의 무덤이 될 것이었다. ‘끝난 건가?’ 그러나 치우천은 다시 고개를 저어 그런 생각을 떨쳐냈다. ‘포기하지 않는다. 포기해서는 안 된다. 이보다 더 힘들고 위험한 경우도 나는 버티어냈다. 이번에도 버티고, 이겨내야 한다.’ 치우천은 함께 들어왔던 동료들의 걱정이 앞섰다. ‘다른 사람들은 어디에 있을까? 치베가 많이 다쳤는데 죽지는 않았을까?’ 문득 인기척이 들려왔다. 치우천은 누군가가 혹시 구하러 온 것이 아닌가 하여 귀를 기울였으나, 밖에서 어렴풋이 들리는 목소리가 태연한 것 같아 실망했다. 곧이어 빗장이 덜그럭거리더니 문이 열렸다. 두 명의 단군 중 검은 단군이 소나무 관솔횃불을 들고 있었고, 그 뒤에는 얼굴이 뽀얗고 뺨이 유달리 붉은 젊은 여인 한 명과 두 명의 사울아비가 보였다. 검은 단군이 웃으며 말을 건넸다. 어떻게 몸조리를 했는지 그가 상처를 입었다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잠깐 만나보아야 할 분이 계시다.” “한웅님이 부르십니까?” 치우천이 혹시나 하여 물었으나 검은 단군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그러자 젊은 여인이 살짝 치우천에게 인사를 했다. “불그네라고 합니다. 치우천님이시지요?” “치우천입니다.” 치우천은 얼결에 마주 인사를 했으나 그 여인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여인은 군소리하지 않고 곧 따라오라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검은 단군이 치우천의 손을뒤로 하여 단단히 묶고, 가죽 끈으로 눈까지 가렸다. “누구를 만나는 것입니까?” 치우천이 묻자 검은 단군은 짧게 대답했다. “가보면 알게 된다. 좌우간 허튼 짓은 하지 말도록.” 치우천은 피식 웃었다. “그럴 힘도 없습니다.” 잠시 후 치우천은 불그네와 사울아비 두 명, 그리고 검은 단군의 호송을 받으며 걷기 시작했다. 눈을 가리고 있으니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었다. 잠시 후 문을 몇 군데 지나고 다시 문 하나를 통과하여 따뜻한 기운이 느껴지는 방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누군가가 치우천의 눈을 가린 것을 풀어주었다. 그 손길은 검은 단군과는 달리 여자 손 았다. 아마도 불그네인 듯했다. 을 가렸던 가죽 끈이 풀리자 치우천은 의아하여 눈을 크게 떴다. 치우천이 안내되어 들어온 방 안은 몹시 컸으며, 온갖 화려한 꽃과 보물들, 그림들로 가득 차 있었다. 치우천은 신시에서 자랐기 때문에 희귀한 그림들과 조각들을 보고 누가 만든 것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그 중 몇몇은 놀랍게도 부루버들이 만든 것 같았다. 그리고 방 안만큼이 화려한 옷을 입은 한 여인이 저만치 높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 머리가 희게 세고 얼굴에 주름이 자못 많은 노파였지만, 아직도 젊었을 때의 화사함이 은근히 스며 있는 듯한 위엄 있는 모습이었다. “네가 치우천이냐?” 치우천은 정중히 그 자리에 앉아 꼿꼿이 고개를 들고 대답했다 “맞습니다. 한데 뉘신지?” 노파는 슬쩍 미소를 지으며 되받았다. “죽지 못해 살아가는 할망구일 뿐이다.” 치우천은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가 다시 한 번 릴이 고개를 숙여 절했다. “처음 뵙습니다. 죽기 전에 한웅님의 마누라님을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노파는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내가 누구라고?” “한웅님의 큰마누라님이 아니시옵니까?” “그걸 어떻게 알았느냐?” 치우천 같은 중죄인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않고 마음대로 부를 수 있는 것, 검은 단군 같은 사람마저도 복종하게 만드는 것, 그리고 신시 안에 이토록 크고 넓은 방을 가지고 있으며 그녀의 나이와 차림새 등을 볼 때 딱 맞아떨어지는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허나 치우천은 복잡하게 설명하지 않고 간단히 되받았다. “달리 누구시겠습니까?” 노파는 노파답지 않게 손으로 입을 살짝 가리고 수줍은 듯 쿡쿡 웃더니 이윽고 말했다. “풍백께옵서 주신에서 제일 똑똑한 녀석이라 항상 말씀하시더니 틀린 말은 아니로구나.” 표정 변화도 없이 치우천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담담히 앉아 있었다. 그러자 노파가 말을 이었다. “그래. 내가 한웅님의 안사람, 부소구슬이다. 그런데 내가 왜 너를 불렀는지 알겠느냐?” 치우천은 역시 짧게 대답했다. “저를 풀어주려 하시거나, 아니면 저에게 묻고 싶으신 것이 있는 게지요.” “왜 그리 계속 짤막하게 대답하느냐?” “복잡하게 생각하는 것은 저의 일입니다. 마누라님께옵서는 그냥 듣고 판단하시면 되는 것이니까요.” 부소구슬은 다시 입을 가리며 쿡쿡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비위도 맞출 줄 아는 녀석이구나. 좋다. 내 너에게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느니라. 그리고 잘 대답하면 너를 풀어줄 수도 있느니.” 치우천은 그저 담담히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부소구슬은 살짝 눈을 찌푸렸다. “내 말을 못 믿는 게냐?” 치우천은 역시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부소구슬이 다시 말했다. “나는 한다면 한다. 한웅님이 두려워하는 사람이 세상에 단 세 명이 있느니라. 그중 누구를 가장 무서워하시는 줄 아느냐?” “마누라님이겠지요.” 치우천이 조용히 대답하자 부소구슬은 이내 손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그래, 한웅님은 나를 무서워하신다. 나는 시집오고 여태껏 한 번도 한웅님께 대든 적이 없고, 한웅님의 뜻을 따르지 않은 적이 한 번도 없다. 내 집안이 부소씨라고 하여 한 번도 부소씨 집안을 편든 적도 없고, 한 번도 무엇을 부탁해본 적도 없느니라. 하다못해 한웅님이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번째 계집을 얻으셔도 나는........ 나는........ 더구나 그분은 스스로 몸을 망치려고........” 부소구슬은 눈에서 불똥이 튈 것처럼 흥분하는가 싶더니 이내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아무 말도 아니다. 좌우간 그래서 한웅님이 가장 무서워하시는 사람이 바로 나다. 그것이 이 방에서 여러 십 년을 그냥 앉아 늙기만 한 대가였느니라.......” 부소구슬은 치우천이 유심히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을 깨닫고 마주 쏘아보며 물었다. “네가 그것을 알겠느냐?” 치우천은 깊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어찌 감히 안다 하오리까? 다만........ 안쓰러울 따름입니다.” “내가 왜 너를 불렀는지 짐작하겠느냐?” “묻고 싶으신 것이 있다 하지 않으셨사옵니까?” 부소구슬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하나 먼저 묻자. 너는 아주 큰 원수가 아주 큰 은혜를 베풀면 어찌하겠느냐?” 치우천은 말뜻을 알아듣기 힘들어 고개를 약간 갸웃거렸다. 그러나 이상하게 마음속에서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부소구슬은 다시 조용히 물었다. “또 하나 묻자. 내가 아주 큰 죄를 지은 사람에게 큰 은혜를 베풀면 죄가 같아지겠느냐, 그대로 남겠느냐?” 치우천은 돌연 얼굴빛이 해쓱하게 변했다. 그리고 굳은 표정이 되었다. 뭔가 감이 잡혔기 때문이다. 그러자 부소구슬은 치우천의 눈길을 피해 고개를 돌리면서 서글픈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는 네 어미와 친한 사이였느니라. 일이 그렇게 될 줄은 정말 몰랐느니라.......” 치우천이 갑자기 벌떡 자리에서 튕기듯 일어나자 문이 와당탕 열리면서 검은 단군이 빛살만큼이나 빠르게 날아 들어와 치우천의 어깨를 잡았다. “당장 죽고 싶으냐?” 검은 단군이 눈을 부라리며 손에 힘을 주자 치우천의 어깨에서 두둑하며 뼈가 탈골되는 소리가 들렸다. 허나 치우천은 불타는 듯한 눈으로 부소구슬을 노려보았다. 아픈 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때 부소구슬이 손사래를 쳤다. “검은 단군, 놔주시게. 그냥 놔두시게.” “그....... 그럴 수는.........” 검은 단군이 머뭇거리자 부소구슬은 인상을 썼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나가서 절대로 들어오지 마시게.” 검은 단군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깊이 숙인 후 방에서 나갔다. 치우천은 왼쪽 어깨가 빠진 채 똑바로 서서 부소구슬을 노려보고만 있었다. 부소구슬은 치우천의 시선을 피해 한숨을 길게 내쉬며 말했다. “나도 참 말하기 힘들었느니라. 역시 너는 단번에 알아채는구나. 아무도 몰랐겠지만.......네 어미를 죽게 만든 것은 바로 나다. 나, 부소구슬이다.” 한편, 치우비는 울쿠타를 앞세워 무라와 함께 대장의 막사로 들어섰다. 그 안에는 이미 다른 대장들이 둘러서 있었고 가운데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바로 그가 치우비를 찾아왔다는 사울아비 대장이었다. 치우비가 들어서자 알한이 먼저 치우비에게 다가와 말했다. “저 사람이 치우광입니다. 치우비님, 저 사람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다 위험했을 것입니다. 무슨 할 말이 있는 듯하니 들어보시지요?” 치우비는 찬찬히 치우광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키가 치우비의 귀에까지 되는 치우광은 덩치도 크고 기운이 넘쳐 보였지만, 얼굴은 아직 앳되어 보였다. 그리고 얼굴이 어딘지 모르게 친근감을 느끼게 했다. 치우광은 치우비를 보자마자 다가와 반갑게 말을 건넸다. “치우비님 맞으십니까? 저는 사울아비 작은스승 치우광이라고 합니다. 비님이 제게는 형님뻘 되십니다.” 치우비는 치우광의 내심을 알 수 없어 마음이 혼란스러워 그저 고개만 한 번 끄덕해 보였다 치우광은 그래도 개의치 않고 정색을 하면서 말을 이었다. “사울아비 작은스승 치우광이 말합니다. 저는 한웅님의 말씀을 어길 수 없어 부하들을 모두 데리고 싸움에 끼었습니다만, 알한님에게 패했습니다.” 곁에 있던 알한이 급히 외쳤다. “당신은 내게 진 것이 아닙니다! 당신 스스로 물러서지 않았습니까?” 치우광은 고개를 저었다. “꼭 힘으로 져야 진 것일까요? 저는 알한님의 용기에 졌습니다. 그래서 제 부하 모두와 함께 잡혔습니다. 그 탓에 치우우레님도 빼앗기고 부하들은 흩어지려 했습니다. 저희는 당장 개죽음을 당하기 싫어서 항복했습니다. 맞지요?” 치우광이 치우비에게 묻자 치우비와 알한, 무라 등은 치우광의 말뜻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치우광은 지금 치우비에게 항복하겠다는 뜻이었다. 치우광은 씩 웃으며 다시 말했다. "이번에는 치우비님의 먼 아우이자, 존경하는 치우우레님의 부하로 말합니다. 제기랄! 이게 도대체 무슨 짓입니까!” 느닷없이 치우광은 온화하던 얼굴을 찡그리며 냅다 소리를 질렀다. “세상에 안파견 한님이 기겁을 하실 일입니다! 아버지에게 나가서 아들을 죽이라고 명령하는 놈들이 세상 천지에 어디 있단 말입니까? 저는 비록 어리고 생각이 짧지만, 그런 짓거리는 도무지 볼 수 없습니다! 치우천, 치우비 형님들이 잘못했고 나쁜 뜻을 가졌다고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형님이라 불러도 되겠지요? 형님들이 목숨을 걸고 싸웠고 많은 공을 세웠다는 이야기를 듣고 제 가슴이 얼마나 두근두근 뛰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난데없이 주신을 공격한다고! 그걸 누가 믿습니까? 더구나 아비더러 책임을 지라는 것은 그렇다지만, 차라리 죽일 일이지 나가서 싸우라는 건 그 무슨 개소리란 말입니까! 이런 제기랄, 그 꼴을 나는 죽어도, 죽어도 못 봅니다! 제길! 제길!” 치우광은 흥분을 이기지 못해 엉엉 울었다. 치우비는 솔직담백한 치우광의 태도에 고개를 끄덕여 보였으나 무라의 표정은 그리 밝지만은 않았다. 무라는 치우비에게만 들리도록 살짝 귓속말을 했다. “정말 믿을 수 있는지 아직은 모릅니다.” 치우광은 치우비에게 엎드려 절하며 통곡했다. “저, 어린놈 치우광이 치우우레님의 말씀을 어겼습니다. 허나 저로서는 도저히 그 명령을 따를 수가 없었습니다! 치우우레님은 싸우지 않는다고 하셨지만, 죄송하게도 저는 싸웠습니다! 더구나 지금.......지금 스승님의 꼴을 보니........ 이건 분명........” 치우비는 조용히 숨을 가다듬고 치우광을 쳐다보았다. “네 얼굴을 전에 한 번 본 것도 같구나.” “알아보시기 어려울 건데요?” “아니, 본 것 같아. 네 아버님은 뉘시냐? 아니, 아니, 혹시 네 아버님이 치우눌님 아니셔?” “알아보시는군요!” 치우광의 눈물 젖은 얼굴이 환해지자 치우비는 치우광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그렇구나. 눌 아저씨가 너무 일찍 돌아가져서 힘들었을 텐데. 잘 컸구나.” 치우광은 잠시 코를 훌쩍이며 말했다. “아버님이 돌아가시자 저는 어머님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형님도 아시다시피 어머님이 마갸르 출신이시죠.” 치우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 그래서 어려서 보고 못 봤는데, 언제 돌아왔느냐?” “두 해 남짓 됩니다. 원래 마갸르족에서 그냥 살까 했는데, 형님들 이름을 듣고 저도 한번 뭔가 해보려고 무작정 주신으로 왔습니다. 치우우레님을 찾아갔더니 잘 대해주셔서........ 이렇게 사울아비 작은스승까지 됐습니다.” “어머님은?” “돌아가셨죠.” “안됐구나. 두 분 다 좋은 분이셨으니 안파견 한님 곁으로 가셨을 거야.” 치우비는 군대 문제 같은 것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치우광과 개인적인 이야기만 잔뜩 나누었다. 무라와 알한 등 다른 대장들은 좀 어이가 없었지만 그저 아무 말 없이 두 사람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들으며 서 있었다. 치우광은 치우 집안 아버지와 마갸르족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치우눌은 치우우레와 친척이었고, 그의 아내는 결혼한 지 두 해 만에 병으로 죽어 자식이 없었다. 그러다가 치우눌은 마갸르족의 어느 부족장이 바친 여인을 아내로 삼았는데, 그녀가 바로 치우광의 어머니였다. 치우눌은 치우광이 겨우 세 살 때 젊은 나이에 싸움터에 서 죽고 말았다. 그 때문에 치우광은 어려서부터 무척 힘들게 살았으며, 특히 어머니가 마갸르족인 탓에 많은 시달림을 받았다. 결코 ‘안사울아비’가 될 수 없는 처지였다. 그런 그 모자를 치우우레는 남모르게 보살펴주었고, 치우천 형제도 광을 불쌍히 여겨 가끔 어울려 놀아주기도 했다. 그러나 더 깊은 정을 쌓기도 전에 치우광의 어머니는 주신 생활을 견디다 못해 마갸르족으로 떠났다 치우광 역시 어머니를 따라 마갸르족에서 살았지만, 그의 어머니는 항상 치우광에게 주신 치우 집안의 남자임을 잊지 말라고 가르쳐왔다. 치우광이 열 살이 되던 해 태산 회의가 있었고, 그 무렵부터 치우천과 치우비의 무용담과 소문이 마갸르족에게까지 퍼졌다. 치우광은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꿈을 키우다가 마침내 두 해 전 어머니가 죽자 홀로 주신으로 왔다. 그러나 마갸르 출신의 사람을 치우 집안이라 믿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때문에 그는 몹시 고생을 하다가 마침내 치우우레를 찾아갔다. 치우우레는 그를 흔쾌히 받아 치우씨가 맞다고 확인해주었으며, 사울아비로 맞아주었다. 치우광은 몹시 체격이 좋고 힘과 기술이 뛰어나서 옛날의 치우비 못지않은 활약을 하며 한 해 반 만에 사울아비 작은스승까지 올라왔다. “대단하구나. 너 몇 살이냐?” 치우광은 머리를 긁적이며 쑥스러운 듯이 대답했다. “열일곱입니다.” “녀석, 대단하구나.” 치우비는 대견하여 말했다. 그때 치우광은 갑자기 생각난 듯 다시 표정을 엄숙하게 고쳤다. “그러고 보니 가장 중요한 것을 빼 놓았군요, 형님. 아이쿠, 아니 치우비 대장님.” “형이라 불러도 돼. 너 좋을 대로 불러라.” "그러면 안 됩니다. 저는 주신에 신물이 납니다. 저와 제가 거느린 사울아비들은 형님과 함께 싸울 것입니다.” “그래도 너희는 사울아비들 아니냐?” “신시에서 온 놈이 치우우레님을 얼마나 들볶았는지 아십니까? 치우우레님은 그저 신시로 가서 한웅님께 무릎을 꿇고 감옥에 들어가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놈은 치우우레님에게 꼭 앞장서서 나가 싸워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야 형님과 형님의 형님...... 아니, 치우천님이 꼼짝 못한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온갖 모욕에 수없이 매질까지 가했습니다! 치우우레님은 사울아비 중의 사울아비이시며, 큰스승님입니다! 그런 분을 도끼 한번 잡아보지 않은 새파란 놈이 뭇사울아비 앞에서 매질을 하다니요!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아니, 그런 법이 있는 주신이라면 따를 수 없습니다! 조금이라도 명예를 존중하는 사울아비라면 싸우지 않을 것입니다!” 치우광이 다시 흥분하여 씩씩거리자 치우비는 아버지가 당한 일이 머리에 떠오르는 듯하여 마음이 아팠다. 아버지 치우우레는 충분히 그럴 인물이었다. 치우비가 고개를 숙이고 분노의 눈물을 흘렸지만 치우광은 흥분한 나머지 그것도 모르고 계속 분통을 터뜨렸다. “치우우레님은 지금 보시다시피, 엉망이 되실 정도로 맞고 숨이 넘어갈 뻔하셨습니다! 보다 못해 저와 몇몇 사울아비들이 들고일어나려 했지만, 치우우레님이 막으셨습니다. 이건 치우우레님 당신의 일이니, 우리는 한웅님을 배신하면 안 된다고 말입니다! 결국 치우우레님이 꼼짝도 못하실 정도가 되자, 그놈은 저를 대장으로 삼고 신시에서 온 사울아비 한 놈을 치우우레님으로 변하게 하여 앞장서서 나아가게 했습니다.” 치우비는 아버지 일에 마음이 아파 그저 고개를 숙이고 굵은 눈물만 뚝뚝 흘렸다. 그때 무라가 딱딱하게 굳은 음성으로 물었다. “작은 주신의 무라가 감히 끼어듭니다. 용서하십시오. 그런데 그놈이 어떻게 치우우레님으로 변했습니까?” 치우광이 입술을 깨물며 대답했다. “그거야 주술을 써서죠. 우리가 진군하고 며칠 지나자 신시에서 그 사람이 왔죠. 그래서 글자 주술로 그 가짜 놈을 치우우레님으로........” “그게 누군데요?” “저도 얼굴도 못 뵈었습니다만....... 사랑들이 그러기를, 운사 신지울태님이라 했습니다.” 치우비가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었다. “신지울태님이?” “모르셨습니까? 그분 말고 누가 그렇게 감쪽같이 글자 주술을 쓰신단 말입니까? 더구나 그분은 여기 싸움터에도 나와 계신데요?” 그때 보돈차르가 물었다. “몽골의 보돈차르가 말한다. 주신 삼사 중의 운사 신지울태가 싸움터에 나와 있다면 이는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어디에 있단 말인가?” 치우광은 고개를 저었다. “어디인지는 모릅니다만, 저와 같이 오지는 않았습니다.” “내 쪽에도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내 쪽 적들의 대장은 고시가라라고 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보돈차르가 말하자 작은 상처를 잔뜩 입어서 얼굴에 온통 약초를 붙인 야율쿠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럼 우리 쪽이었나 보군! 그런데......” 야율쿠리가 말하려는데 초초룬이 말을 가로막고 나섰다. “미아우의 초초룬이 말한다. 그러나 우리 쪽 적들도 주술을 써서 싸우지는 않았다.” 치우비는 한숨을 길게 쉬었다. “신지울태님이 싸움터에 나오실 것 같지는 않았는데......” 그때 알한이 싱카를 힐끗 바라보며 눈짓을 하자 싱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도깨비 싱카가 감히 말씀드립니다. 글자 주술이 뭔지는 잘 모릅니다만, 치우우레님을 가짜로 만든 것 말고 주술의 힘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치우비는 할머니같이 따뜻한 느낌을 주던 신지울태가 적 쪽에 있다는 것이 믿기 싫었다. “신지울태님의 글자주술은 엄청나다 그분이 주술을 썼다면 우리는 버틸 수 없었을 거야.” 치우비가 침통하게 말하자 무라가 다시 나섰다. “그보다 삼사 중 한 분이 저편에 섰다는 게 마음에 걸립니다.” 치우비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삼사는 고시울률과는 분명 다른 편이었다. 병예가 비록 잡혀갔다지만, 지금까지 비렴은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신지울태가 적 쪽에 섰다면 이는 아주 문제가 심각했다. 신시 안에 치우 형제를 지지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뜻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이 일의 뒤에는 사와라 한웅이 있을 것 같았다. 한웅 이외에는 주신 삼사를 이렇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대체 왜? 치우비는 무라에게 의혹이 가득한 눈빛을 보냈다. 무라도 치우비의 뜻을 꿰뚫은 듯했으나 역시 고개를 옆으로 저었다. 치우비의 마음이 더 무거워져 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형이 점점 위태로워지는 듯했다. 알한이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치우광을 보고 말을 건넸다. “작은주신의 알한이 말합니다. 치우광님, 좌우간 잘 오셨습니다. 치우광님과 뜻을 같이하시는 사울아비들은 얼마나 됩니까?” 무거운 분위기에 짓눌린 듯했던 치우광이 싱긋 웃어 보이며 대답했다. “대략천 명 됩니다. 거의가 치우우레님의 밑에 있던 사울아비들입니다.” “그분들이 함께 싸워주실까요?” “저 못지않게 신시라면 이를 가는 사람들입니다.” 알한은 웃으며 좌중을 한 번 둘러보았다. 사울아비들로만 천 명이라면 대단한 군세였다. 비록 신시를 지원하러 나온 전사의 수는 모두 이만 명이 넘었으나 그중 진짜 사울아비들은 사오천 남짓밖에 안 되어 보였다. 그중에 천 명이 이쪽 편이 된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치우광은 자못 흥분이 되었는지 한술 더 떠서 물었다. “제가 알기로 치우천님, 비님은 결코 주신을 둘러엎으려는 게 아닌 것으로 압니다. 다만 신시를 좀먹는 무리들을 물리치고 깨끗이 하시려는 거겠지요?” “물론입니다.” 알한이 대신 대답하자 치우광은 자신 있게 가슴을 쳐 보였다. “저도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저를 앞장 세워주신다면 한 천 명은 더 끌어낼 수 있습니다. 신시에 이를 가는 바깥사울아비들은 얼마든지 더 있을 것입니다! 우리 편이 되기는 힘들더라도, 적어도 그들이 싸울 생각을 그만두고 물러가게 할 수는 있습니다!” 치우광이 호기롭게 말하자 모두의 얼굴이 밝아졌다. 다만 냉정한 보돈차르만이 조심스레 물었다. “몽골의 보돈차르가 말한다. 그들은 전부 주신 한웅의 명령을 받고 왔는데, 그렇게 쉽게 물러설까?” 치우광은 당당하게 외쳤다. “물론 겉으로는 그렇습니다! 허나 사와라 한웅님이 몹시 아프셔서 거의 바깥출입도 못할 정도라는 것을 알 사람은 다 압니다! 그러니 이번 명령은 분명히 고시울률이 내린 것입니다! 다들 그렇게 수군거리고 있습니다. 치우천님이 공상을 떨어뜨려서 사울아비 웃뜸스승이 되려 하니까 고시울률이 한웅님을 핑계대고 치우천님을 없애려 싸움을 벌인다고 말입니다! 벌써 몇 달 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누구라도 물러설 것입니다!” 그 말에 치우비는 문득 의혹이 떠올라 치우광에게 물었다 “고시울률이 사울아비들을 모으기 시작한 게 언제였지?” “한 달 반이 넘었습니다! 안 그러면 이렇게 금방 올 수가 있었겠습니까?” 치우비는 입술을 깨물며 다시 물었다. “광아, 누가 돌아다녔지?” “저희한테는 부루위단이 왔었습니다. 치우우레님에게 매질한 것도 바로 그놈입니다. 다들 아시지오.? 고시울률의 밑에 붙어 있는 그놈 말입니다.” 치우비는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허나 아무리 고시울률이라도 한웅님의 말을 함부로 지어낼 수는 없어. 그런 짓을 밖에서 벌이는 것이라면 속일 수 있겠지만, 신시까지 마음대로 할 수는 없잖아?” 그러자 초초룬이 한마디 끼웠다. “그래서 천 족장이 신시로 뛰어든 거잖아? 한웅이 위험하다면서. 제길.” 치우비는 혼란스럽고 의문이 계속 샘솟았지만, 여기서는 더 말할 수가 없었다. 그는 다른 대장들과 치우광이 좀더 이야기하게 놓아두고 무라와 함께 잠시 밖으로 나갔다. 막사를 나서자마자 치우비는 무라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한웅님이 승낙하지 않고서는 고시울률이라도 절대 이렇게 나설 수 없어요 더구나 다른 사울아비들까지 저렇게 떠들 정도라면 한웅님이 모르실 리가 없구요.” 무라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힘주어 되받았다. “그림자는 사와라 한웅님입니다. 그분이 아니고서는 이리 될 수가 없어요.” 치우비는 갑자기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그건 알겠습니다. 한웅님 아니고서는 아무도 이럴 수 없습니다. 허나...... 그분이 왜 그러시냔 말입니다.” “치우천님이 전에 말씀하셨어요. 그 그림자는 고시울률님과 치우천님, 둘 다 없애려 한다고요.” 치우비는 답답하여 가슴을 쳤다. “지금 주신에는 둘밖에 없습니다. 고시울률님이 모든 것을 쥐고 있고, 형님이 거기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헌데 왜 그 둘을 다 없애버리려 한단 말입니까? 사와라 한웅님은 형님을 밀어주려고 많이 노력하셨습니다. 그분은 너무 늙으셨고, 곧 돌아가십니다. 둘 중에 하나를 골라야지, 둘 다 없애려 할 이유가 없잖습니까?” “그 이유는 저도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치우광님 덕분에 그림자가 사와라 한웅님이란 것이 더 분명해졌습니다. 그 이유가 뭔지 찾아낸다면, 모든 것이 밝혀질 것입니다.” 무라가 나지막이 말하고 나서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자 치우비도 덩달아 하늘을 바라보았다. ‘형님이라면........ 밝혀낼 수 있을까? 하지만 형님은 지금 적의 손에 들어갔는데........’ “그렇다면........ 번개범을 키운 것이 마누라님이십니까?” 치우천은 불타는 듯한 눈으로 또박또박 말끝에 힘을 주어 물었다. 부소구슬은 그 눈빛이 두려운 듯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그렇단다.” “왜 그러셨습니까?” “그때....... 한웅님께서는 두 번째 마누라를 얻으셨다. 나는....... 나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한웅님의 마음이 변해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복수할 방법이 없다. 세상 어디를 둘러보아도 주신 한웅님을 겁줄 수 있는 것은 없다. 다만 신수 말고는 말이다.” 치우천은 똑바로 눈을 뜬 채 부소구슬을 노려보았다. “그래서요.......?” 지난날이 떠올랐는지 부소구슬의 목소리엔 원한이 서려 있었다. “그렇다. 죽어지내야 하는 나로서는 그것이 유일한 힘이었다. 나도 그것을 쓰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지만........” “재산 회의 때 번개범을 쓰신 까닭은 무엇입니까?” “재산 회의 때 한웅님은 그 여우같은 계집과 같이 가셨다! 그 자리에 누가 가야 하는가? 부루버들 그 계집이 가야 맞는가? 너는 그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느냐?” 치우천은 입술을 깨물며 되받았다. “원래대로라면 마누라님이 가셔야 맞을 것입니다.” 부소구슬은 돌연 콜록거리며 기침을 심하게 하다가 힘겹게 말했다. “그래, 내가 가야 했다. 나는 한웅님의 큰마누라다. 그러니 태산 회의 같은 큰 회의에는 내가 가야만 했다. 그것이 내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그런데 한웅님은 그러지 않았다. 그 여우같은 계집에게 흘려서 그 계집을 데리고 갔다! 때문에 나는....... 나는........” “번개범을 부리셨습니까?” 치우천이 날카롭게 묻자 부소구슬은 이를 갈며 말했다. “아깝게 실패했다. 허나, 허나......하늘의 뜻이니, 어쩔 수 없지.” 치우천의 눈빛에는 여전히 분노의 빛이 가시지 않았지만 이제 목소리는 다시 침착을 되찾고 있었다. “어머님과는 가까우셨습니까?” “그래, 미리내와 나는 가까웠다. 그러나 너희가 병에 걸려 미리내가 구름골로 달려갈 줄은 몰랐다. 거기서 번개범에게....... 내가 키운 번개범에게 죽으리라고는........” 치우천이 다시 싸늘한 눈빛을 보내자 부소구슬은 애원하듯 말을 이었다. “너에게 미안하구나. 정말 미안하구나. 이것만은 거짓이 아니다. 너는 알겠지? 알아주겠지?” 치우천은 잠시 표정을 꿈틀했으나 이내 냉담하게 되받았다. “왜 그런 일을 지금 말해주시지요?” “번개범이 알려지는 것이 두려웠다. 허나 지금 번개범은 쓸모없어졌다.” “한웅님을 용서하신 겁니까?” 부소구슬은 다시 콜록거리며 한참 힘들게 기침을 하더니, 몹시 화난 음성으로 소리쳤다. “난.......난........용서할 수 없다!죽어서 흙이 되어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한웅님은 늙어서 신시 밖으로 다시는 나가실 수 없을게다! 번개범이 아무리 신수라도 신시에 뛰어들지는 못한다. 그러니 필요 없어졌을 뿐이다. 이 일은그것과는 관계가 없다! 나는 내 죄 값을 치른 뒤 마음 편히 죽고 싶을 뿐이다!” “그 때문에 저를 놓아주시겠다는 것입니까?” 치우천이 조용히 묻자 부소구슬은 서글픈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 잘못으로 한 목숨을 죽게 했다. 벌써 여러 십 년이 지났지만 도저히.......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나도 이제 늙었으니 곧 죽을지 모른다. 죽기 전에 죄 값을 갚고 싶다. 어미를 죽였으니 자식이라도 살려서 내 죄 값을 같고 싶을 뿐이다.......” 돌연 치우천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감돌았다. “제가 나가면 신시를 무너뜨릴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생각 안 해보셨습니까?” 부소구슬의 눈빛에 갑자기 생기가 돌았다. “네 머리가 잘 돌아가지만, 너 하나 때문에 무너질 정도로 신시는 약한 곳이 아니란다. 너는 그냥 돌아가는 것이 좋을 게야. 죽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제가 신시를 무너뜨리면, 마누라님도 복수하시는 것 아닐까요? 그 때문에 절 놓아주시는 것은 아닙니까?” 부소구슬이 당황한 듯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 꼴을 볼 수 있을 정도로 내가 재수 좋은 여자였다면, 지금 이런 꼴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말을 하는 부소구슬의 눈빛에 허탈함이 가득했다. 치우천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부소구슬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말했다. “어차피 저는 그물 안에 든 고기 마누라님이 바라시는 대로 하옵소서.” 그러자 부소구슬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내가 원망스럽지 않으냐?” 치우천은 힘없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 까짓 것이 마누라님을 원망하여 어찌하겠사옵니까.” 부소구슬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너는 아직 내가 아까 물은 것에 대답하지 않았다.” 치우천은 침통한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죄를 짓고 은혜를 베풀면 죄 지었던 사람은 마음을 편히 가질 수 있겠지요.” “그러냐.........?” 부소구슬이 고개를 끄덕이자 치우천은 덧붙였다. “허나 원한을 가진 사람이 은혜를 입는다고 마음이 풀어지는 것은 아니옵니다.” “무엇이라?” “그것은 사람에 따라 다릅지요. 저울질할 사람은 저울질할 것이고, 원한만 생각하거나 은혜만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너는....... 어떠냐?” “꼭 말해야 하옵니까?” “말해야 한다.” 부소구슬이 단호하게 못 박듯이 말하자 치우천 역시 단호하게 되받았다. “원한은 원한이고 은혜는 은혜이옵니다.” 앉아 있던 부소구슬은 힘이 빠지는지 어깨를 풀썩 늘어뜨렸다. 그러더니 멍한 목소리로 물었다. “풀려나기 싫은 게냐?” 치우천은 긴장된 눈빛으로 조심스레 말했다. “마누라님이 진정으로 바라는 대로 하옵소서. 저는....... 한웅님을 배신하지 않사옵니다.” 그 말에 부소구슬이 몹시 기침을 심하게 하며 버럭 외쳤다. “이 녀석을 끌어내라!” 부소구슬은 거의 숨이 넘어갈 듯이 기침을 했다. 그러자 양옆의 문이 동시에 열리면서 네 명의 여자가 나와 급히 부소구슬을 부축했다. 그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기도 전에 검은 단군이 귀신처럼 다가와서 치우천의 눈을 가렸다. 그 귓전으로 부소구슬의 몹시 힘겨워하는 목소리가 기침소리에 섞여 들려왔다. “검은 단군 불그네야! 누구든......! 누구든 저....... 저놈을 얼른 성밖으로 내다버려라!” “가자! 이놈!” 검은 단군이 치우천을 가볍게 들어올려 마당에 동댕이쳤다. 몸이 완전히 너부러지기도 전에, 마당의 사울아비들이 다시 발길질을 하며 치우천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그들은 치우천의 눈을 가죽 끈으로 가리고 거칠게 치우천을 끌고 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치우천은 조금도 겁내지 않았고, 되레 만면에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한참을 걷던 치우천은 조용히 물었다. “혹시 불그네님도 옆에 있소?” 누군가가 치우천의 등을 툭 쳤으나 치우천은 개의치 않고 다시 물었다. “뭐 이런 것 가지고 그러시오? 불그네님이 계시오?” “있다, 이 녀석아.” 불그네가 화난 듯 쏘아붙이자 치우천이 싱긋 웃었다. “아가씨까지 내게 화내실 이유는 없잖겠소?” “마누라님을 그렇게 화나게 하다니! 마누라님은 화를 내시면 안 된단 말이다!” 불그네가 앙칼지게 말하며 치우천의 뺨을 찰싹 때렸다. 몹시 화가 난 모양이었다. 치우천은 뺨이 얼얼했지만 그래도 웃음을 거두지 않고 다시 불그네에게 물었다. “마누라님이 아프신 지 오래되셨소?” “그래, 이놈아! 십 년이나 고생하셨는데 저처럼 심해지신 건 오늘이 처음이다! 너 따위가 감히.......” “고맙구려.” 느닷없는 치우천의 말에 불그네는 의아해서 물었다. “뭐가?” “마누라님은 부루버들님을 싫어하시는 듯하오.” 치우천이 태연하게 말하자 불그네는 버럭 소리쳤다. “누가 그런 여자를.......!” 그때 검은 단군이 음산한 어조로 말했다. “그만 떠들어라.” 치우천은 소리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큰 화톳불이 부근에 있나보구려 따뜻한 걸 보니.” 검은 단군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치우천은 개의치 않고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그럼 성문 부근으로 다 온 것 같구려.” “그렇다. 네놈을 내버릴 테니, 당장 꺼지거라.” 검은 단군이 협박하듯 말하자 치우천은 여유롭게 되받았다. “난 안 가오.” “뭐야?” 검은 단군이 놀란 듯 외치자 치우천은 껄껄 웃었다. “난 안 간단 말이요.” “무슨 소리냐?” “나는 한웅님과 만나기 전에는 나가지 않소.” 검은 단군이 자못 신중하게 말했다. “무슨 헛소리냐, 치우천? 나는 네놈이 마음에 든다. 네놈을 죽이게 만들지 마라.” “나는 한웅님을 위하는 마음밖에 없는 놈인데, 한웅님이 왜 날 죽이시겠소?” 치우천의 말에 검은 단군이 다급하게 외쳤다. “무슨 헛소리냐? 한웅님이 아니라 내 손에 죽는단 말이다! 입 닥치지 못해?” 치우천은 씩 웃으며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검은 단군, 나도 하마터면 속을 뻔했으니 당신들은 정말 대단하오. 정말 뭐라 칭찬해도 모자랄 만큼 대단하오. 허나 나는 이제 거의 다 알았소. 당신은 나를 죽이지 않을 거요.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죽이지 않고, 무조건 성밖으로 내보내려 할 거요!” “이놈이 무슨 헛소리냐!” 검은 단군이 놀라서 호통을 치자 치우천은 여전히 웃음을 잃지 않았다. “당신은 한웅님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사람이오. 그렇지 않소?” “이놈이 무슨 헛소리를!” “이제 내가 모르는 것은 단 한 가지뿐이오 그리고 나는 곧 그것을 알아내러 갈 것이고, 모든 것을 밝힐 거요.” “이놈이 미쳤구나! 내가 너를 못 죽일 줄 아느냐?” 검은 단군이 외쳤지만 치우천은 고개를 저었다. “당신의 재주는 대단하지만 못 죽이오.” “마누라님의 명 때문에? 하지만 네놈의 입은 뭉개줄 수 있다!” “못할 거요.” 치우천이 태연하게 되받자 검은 단군은 옆의 사울아비가 허리에 찬 칼을 빼들었다 칼 소리가 들리는데도 치우천은 침착했다. “내가 그 이유를 말할 테니 들어보시려오?” “거 이놈의 입을 그대로 돌려보낼 수 없겠구나.” 검은 단군이 칼을 들이대도 치우천은 두려운 기색이 전혀 없었다. “여긴 성문 부근이오. 당신도 말했고, 이렇게 큰 화톳불이 있으니 성문 부근이 틀림없소. 하지만 근처에 사울아비는 당신들 말고는 하나도 없을 거요 당연하지. 신시에 날 풀어주는데 사람들이 바글거리면 곤란할 테니까. 게다가 누군가 근처에 있다면 내가 이렇게 떠들게 놔 둘 리도 없소. 아니, 나는 그렇다 해도 당신이 그렇게 크게 떠들 리 없지.” 검은 단군이 손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그래도 널 구해줄 사람은 없다!” 치우천은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정말 그럴까? 내가 신시에 어떻게 들어왔는지 모르셨나 보군요.” 별안간 치우천이 크게 허공을 보며 외쳤다. “눈부터 푸시오!” 그러자 치우천의 눈을 가렸던 가죽 끈이 스르르 풀리면서 땅바닥에 털썩 떨어져 내렸다. 불그네가 영문을 몰라 놀라며 땅에 털썩 주저앉았다. 검은 단군과 두 명의 사울아비들도 놀라서 몸을 흠칫했다. 다시 한 번 치우천은 여유 있게 외쳤다. “손도 풀어야지!” 단번에 치우천의 손을 묶은 가죽 끈이 끊어지자 손 역시 자유롭게 되었다. 그 모습을 보고 놀란 두 명의 사울아비와 검은 단군이 달려들려 했으나, 세 사람의 발은 마치 땅에 못박힌 듯 떨어지지 않았다. 검은 단군이 놀라서 외쳤다. “주술!” 검은 단군이 뭔가를 외치려 하자 치우천은 날카롭게 소리쳤다. “입부터 막아야지, 뭘 하나!” 다음 순간, 검은 단군의 입은 뭔가에 콱 막혀 소리를 낼 수 없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두 사울아비와 검은 단군의 몸이 땅바닥에 장작개비처럼 풀썩 쓰러지더니 땅에 달라붙기라도 한 듯 꼼짝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불그네는 쓰러지지는 않았으나 그녀 역시 손발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아래턱을 무언가가 꽉 틀어쥐고 있어 입도 뻥긋할 수 없었다. 치우천은 묶였던 손목을 몇 번 주무르고 휘둘러 저릿함을 풀면서 물었다 “검은 단군, 나에게 말해줄 수 있겠소이까?” 검은 단군이 의혹과 경악에 가득 찬 눈초리를 보내는 순간, 치우천 옆에 웬 시커먼 그림자 하나가 푸스스 나타났다. 바로 비울걸이었다. 비울걸은 이미 한참 전부터 치우천이 갇혀 있던 감옥 근처에서 애를 태우고 있었다. 그러나 치우천이 갇힌 곳은 신시 한웅의 거처 부근이었다. 주술이나 잡귀를 막는 수많은 조각과 부적, 그리고 둘러싼 집들조차도 일종의 진세를 형성한 곳이라 도깨비들이 힘을 쓸 수가 없었다. 도깨비를 부리지 못하면 비울걸은 단지 힘없는 늙은이일 뿐이었다. 그런데 치우천이 밖으로 나오자 비울걸은 모든 힘을 발휘해 모습을 감쪽같이 숨긴 뒤 치우천에게 간신히 접근했다. 그러나 치우천을 구해낼 힘은 없었다. 치우천은 의외로 담담하게, 좀 기다리라는 뜻을 전했다. 시간이 지나자 치우천은 검은 단군에게 끌려 다시 밖으로 나왔 고, 성문 쪽으로 갔다. 성문 쪽은 그나마 비울걸이 힘을 자유자재로 낼 수 있는 곳이었다. 비울걸은 무라에게서 얻은 정보를 치우천에게 모두 말해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치우천이 외치는 순간, 비울걸은 도깨비들의 힘을 단숨에 끌어내어 검은 단군과 다른 이들을 제압한 것이다. 비울걸은 치우천을 보며 물었다 “입을 풀어줘야 하나?” 치우천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검은 단군, 이제 나도 대강은 알겠소. 모든 게 한웅님이 꾸민 것이지요? 더구나 마누라님을 만나고 나니, 아주 많은 것이 풀리더군요.” 그러면서 치우천은 불그네를 보며 물었다. “자, 내 말이 맞다면 고개만 끄덕해다오. 해치지 않을 테니 염려 말고. 불그네, 네가 도와주어서 내가 깨닫게 되었는데, 왜 너를 해치겠느냐?” 불그네는 자신이 치우천을 도왔다고 하는 말에 기겁을 하며 몸을 비틀었다 “아니, 아니. 검은 단군, 오해 마시오. 불그네가 나와 한패라는 뜻이 아니오. 불그네가 아까 마누라님이 오래 앓으셨다고 해서, 내가 뭔가 알게 된 것뿐이니까.” “사실 난 하나도 모르겠다!” 비울걸이 불만 섞인 듯이 툴툴거리자 치우천은 웃으며 설명했다. “마누라님은 반은 정말을 말했고 반은 거짓을 말하셨습니다. 사실 전부 거짓말하는 것보다 그편이 더 알아보기 어렵죠.” 허나 치우천은 속으로 생각했다. ‘마누라님은 이것만은 거짓이 아니다라고 하셨다. 그러면 다른 모든 것은 거짓말이라는 뜻이 되겠지.......’ 하지만 검은 단군에게 부소구슬이 자신에게 눈치를 주었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무슨 소리지?” “마누라님이 번개범을 키우신 것은 맞을 겁니다. 허나 태산 회의 때 번개범을 시켜 한웅님을 치게 하신 것은 좀 뜻밖이더군요. 적어도 부루버들님이 미워서 그랬다고는 볼 수 없겠지요.” “왜?” 비울걸이 묻자 치우천은 불그네를 넌지시 바라보며 말했다. “마누라님이 저리 심하게 아프신 지 십 년이 되어간다는데, 태산회의에 그 몸으로 어떻게 가실 수 있었겠습니까? 결국 마누라님이 그 때문에 화가 나서 번개범을 쓰신 게 아니라는 뜻이죠.” “음?” 비울걸이 의아해서 고개를 갸웃거리자 치우천은 계속 말했다. “저도 한웅님을 항상 의아하게 생각해왔습니다. 이런 큰일을 벌일 수 있는 것은 한웅님 외엔 없을 거라고 말이죠. 헌데 두 가지 문제가 항상 제 덜미를 잡았습니다. 첫째는 한웅님이 그림자라면, 왜 스스로를 위험에 내 몰았는가 였습니다. 두 번째는 고시울률과 저, 둘 중 하나를 내치는 것은 그럴 수 있지만,왜 둘 다 내치려 할까 였지죠. 이 두 가지가 걸려서 저는 한웅님을 의심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마누라님이 번개범을 쓰신 것이라면, 적어도 첫 번째 의문은 풀리게 됩니다.” 비울걸이 눈을 끔뻑거리며 복잡하게 얽힌 생각을 정리하려는데, 치우천은 비울걸에게서 얼굴을 돌려 불그네를 보며 말했다. “불그네, 마누라님을 도우려면 나를 믿어줘야 해. 아까 이야기를 다시 묻겠어. 마누라님은 부루버들과 사이가 좋으신가?” 불그네는 움직이지 않았다. 다만 놀라움에 가득 찬 눈으로 치우천을 쏘아볼 뿐이었다. 치우천은 다시 차분하게 말했다. “불그네, 마누라님이 원해서 나를 부른 게 아니란 것 다 안다. 마누라님은 나에게 몇 번이나 애타게 부탁하셨어. 나보고 머리 좋다고 하신 건, 좋은 머리로 이 일을 파악해 달라는 뜻이 아니겠나? 검은 단군이 옆에 있다고 염려할 것 없어. 이미 그는 움직이지 못하니.......” 치우천이 비울걸에게 눈짓을 하자 비울걸은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손짓을 했다. 그러자 불그네의 입이 풀렸다. “정말....... 정말 당신을 믿어도 되나요?” 불그네가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치우천은 보기 좋게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맑고도 깨끗한 눈을 본 불그네는 몇 번 망설이다가 천천히 말했다. “쇤네는....... 쇤네는 많은 것을 알지는 못합니다. 다만.” “아는 것만 말하면 된다. 나는 마누라님을 미워하지 않아.” “마누라님은 당연히....... 부루버들을 싫어하시지요. 허나....... 또한 아주 무서워하세요........” 치우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았어.” “어떻게?” “마누라님의 방에 놓인 물건들 가운데 부루씨 집에서 만든 물건이 많더군. 나도 신시 물을 먹고 자란 녀석이라 그 정도는 알 수 있거든. 부루버들을 마누라님이 싫어하시는 건 당연하지. 허나 부루버들을 그리 싫어하신다면 선물로 온 물건들도 치워야 하는데 그걸 옆에 두고 계시는 건 부루버들에게 눌려서 그러시는 거겠지. 안 그래?” 불그네의 얼굴빛이 한결 밝아졌다. “정말 그래요. 정말.......치우천님이 도우신다면 어쩌면.......” 치우천은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불그네의 말을 막았다. “중요한 건 그게 아냐. 마누라님이 부루버들에게 꼼짝 못하시는 건 무슨 이유지? 더구나 남의 죄까지 덮어쓰시고.” “덮어쓰다뇨?” 치우천은 한숨을 쉬었다. “지금 말할 것이 못 된다. 허나 마누라님은 분명 스스로 원해서 그런 일을 하신 것이 아니야. 그분은 아무것도 모르고 계셔....... 마누라님은 분명 번개범을 키우셨고, 태산 회의 때 번개범을 부리기는 하셨을 거야. 한웅님말고 한웅님 표식을 쓸 수 있는 건 마누라님뿐일 테니까. 허나 마누라님은 워낙 조용하신 분이라 아무도 그런 생각은 하지 못했을 거야. 허나 그런 사실이 부루버들에게 알려지고, 그 때문에 마누라님이 부루버들에게 꼼짝 못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죄를 뒤집어쓰고, 나를 풀어주는 일을 맡게 되신 것 아닐까 ?번개범이 한웅님을 친 것은 결국 마누라님이 뒤집어쓰실 수밖에 없으니 말야. 이봐, 불그네. 나는 마누라님이 정말 번개범을 부려서 한응님을 치게 했다고는 생각지 않아. 다른 누군가가 번개범을 움직였고, 마누라님은 그걸 꼼짝없이 덮어쓰게 되신 것뿐이야. 마누라님은 지금 몹시 위험해. 아는 걸 더 이야기해줘. 그 일 뒤에 또 누가 있지? 부루버들 혼자 그런 일을 꾸몄을리 없잖아? 그 뒤에 누가 있지?” 불그네는 잠시 생각하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부루버들님은 벌써 몇 달째 밖으로 나오시지 않았어요. 허나 사람을 시켜서 마누라님에게 무슨 이야기를 전하시는 것을 자주 뵈었죠.” “무슨 이야기인지 들었나?” “들을 수는 없었어요.” “그럼 누가 왔었지?” “부루위단님이나 치우가람님이나........ 그런 분들요.” 비울걸은 깜짝 놀랐으나 치우천은 입술을 꽉 깨물었을 뿐,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불그네는 이제 거칠 것이 없다는 듯, 자신이 아는 것을 치우천에게 털어놓았다. 그리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그 이야기가 끝나고 한참 지나서야 치우천은 신음소리를 냈다. “역시......... 그렇구나. 그렇구나........” 비울걸은 뭔가 알듯 모를 듯, 답답하기 짝이 없어 치우천에게 꽥 소리를 질렀다. “뭐가 그렇다는 거야? 엉?” 별안간 치우천이 다급하게 되받았다. “비울걸, 시간이 없습니다. 이들을 풀어줄 수는 없으니, 꼼짝 못하게 하고 잘 숨겨두세요 마지막으로 목숨을 걸어봐야겠소.” “무슨 소리냐? 그리고 이제 빠져나가면 그만이지 뭔 목숨을 또 걸어? 지긋지긋하지도 않냐?” 비울걸이 소리치자 치우천은 고개를 저었다 “나도 나가고 싶지만 그래서는 안 됩니다. 비울걸, 나를 한 곳으로 데려다줘요. 그리고 나가서 비에게 알려주시오. 절대 싸우지 말고 기다리라고 말이오. 신수들도 절대 움직이게 하면 아니 되오.” “가만가만 대체 무슨 소리야? 너 혼자 놔두고 가라고? 어딜 가겠다는 거야? 난 저 솟대 길 너머로는 힘을 쓸 수가 없어!” 그때 웅성거리는 소리가 났다. 비울걸이 소리를 지른 탓에 자리를 비웠던 병사들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치우천은 서둘러 말했다. “비울걸! 작은 주신 족장으로서 명령하오. 어서 저들을 숨기고, 나를 옮겨주시오. 내 염려는 말고. 이제 한 가지만 더 알아내면 그만이오, 그리고 어떤 일이 있어도 이제부터는 끼어들지 마시오. 알았소?” 비울걸은 치우천을 계속 이런 호랑이 굴속에 놓아두고 가기 싫었으나, 명령이라는 데에는 할 수 없었다. 비울걸이 울상을 지으며 물었다. “저....... 어디로 갈 건데?” 치우천은 눈을 빛냈다. “고시울률.......님의 집!” 이미 많은 사울아비들이 저만치에서 다가오고 있는 화급한 상황이었지만 비울걸은 놀라움을 참지 못해 입을 벌리며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다음날 하늘이 몹시 맑았다. 시리도록 푸른 하늘 위로 철새 몇 마리가 줄을 지어 한가롭게 날았다. 이미 가을이었다. 신시 주위를 맴돌아 포위망을 갖춘 치우비를 비롯한 다른 많은 부족 군대들과 또 그곳을 노리며 하나로 뭉친 사울아비들의 군대들도 제법 쌀쌀해진 날씨 탓에 거친 천 옷을 벗고 두들겨서 무두질한 털가죽으로 몸을 감았다. 허나 당장 싸움이 벌어질 기미는 없었다. 한나절밖에 안 되는 어제의 접전에서 너무 많은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신시를 구원하러 온 세 방향의 구원군 중 치우광이 인솔하던 부대는 이미 흩어져버렸고 인질로 삼으려 했던 치우우레도 빼앗겼다. 치우광의 정예 사울아비들이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허나 고시가라의 부대는 비록 신수 때문에 추격을 하지 못해 결정타를 날릴 수는 없었어도 보돈차르의 몽골군과 와난수 부자의 마갸르 부대에 상당한 타격을 주었다. 그리고 신지울태가 끼어 있다는 또 다른 주신 부대는 야율쿠리와 초초룬의 부대의 전사들 상당수에게 부상을 입혔다. 양쪽 다 결정적인 전투를 치르지 않아 진형이 무너지지 않았고 죽은 전사의 수 역시 그리 많지 않았으나 쌍방에 다친 자들의 수는 만만치 않았다. 양측의 사기는 아직 비슷했고, 싸움은 자칫 장기화될 수도 있었다. 전날 밤, 와난수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좋은 전략 하나를 제안했다. 싸움이 워낙 갑자기, 예고도 없이 시작되었기에 신시 주변에 있는 많은 집들에는 아직 주신 사람들이 많이 숨어 있었다. 물론 어느 정도 신시 안과 연락이 닿은 사람들은 이미 신시 안으로 피했으나, 전혀 상황을 모르는 사람들은 다른 곳으로 피할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전사들도 아니고 민간인이니 해칠 수도 없었지만, 장차 적들이 밀려오면 상당히 거치적거리는 존재가 될 것이었다. 그래서 와난수가 이 문제를 해결할 묘안을 낸 것이다. “마갸르의 와난수가 말합니다. 한나절 정도 신시 성문 앞을 터주어서 사람들이 신시로 들어가도록 해줍시다.” “몽골의 보돈차르는 반대하오. 그러면 적이 더 강해지오.” “키탄의 야율쿠리도 반대하오. 그 사람들은 아주 많소. 그들이 전사가 아니라 해도, 전사들을 도울 수는 있잖소!” 보돈차르와 야율쿠리가 반대했으나 와난수는 고개를 저으며 완강하게 말했다. “아닙니다. 그렇게 하면 세 가지 이로운 점이 있지요.” 치우비가 와난수에게 물었다. “어떤 이로운 점이 있습니까?” “첫째로는 당연히 사람들 때문에 거치적거리는 일이 없어지게 됩니다. 우리만 아니라 적들도 거치적거리겠지만, 그 사람들은 본디 주신 사람들이니 우리에게 불리하게 움직이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두 번째로는 사람들을 놓아주고 위험한 곳에서 피하게 해주니 은혜를 베푸는 것이 됩니다. 치우비님은 어쨌건 주신 사람이시니, 신시를 공격한다면 좋은 소리를 듣기 어렵습니다. 허나 주신 사람들을 이렇게 대해주면 치우천, 치우비님이 나중에 주신에 뜻을 펴시는 데 분명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렇겠군요.” “세 번째로 저 사람들이 신시 안으로 들어가면, 신시의 먹거리가 더 빨리 떨어지게 될 겁니다.” 그 말에 치우비는 허탈한 표정으로 웃어 보였다 “신시를 떨어뜨리기 전에, 우리 먹거리가 더 먼저 떨어질지도 모릅니다. 신시에는 먹거리가 엄청나게 많습니다.” “그러나 저렇게 벽을 쌓고 지키는 성은 먹거리로 떨어뜨리는 것이 제일일 것입니다. 성벽이 너무 높아서 올라가는 것이 너무나 힘드니까요. 좌우간 뭔가 성을 위협하는 방법이 있다면 뭐든지 해보아야 합니다.” 때 알한이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작은 주신의 알한이 말합니다. 신시에서 저 사람들을 순순히 받아 들여줄까요?” 그러자 초초룬도 지나가는 듯이 한마디 했다. “하핫! 안 받아주면 저놈들이야말로 좋은 소리 못 들을 걸? 우리가 아니라 신시 사람들에게 다 맞아죽을지도 몰라. 먹을 게 하나도 없다 해도 안 받아들여줄 수 없지!” “좋습니다. 헌데 어떻게?” 치우비가 묻자 와난수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먼저 신시에 말해줘야겠지요. 치우비님이 말씀하시는 게 가장 좋을 것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치우비는 한잠도 못 자서 눈밑이 거무스레했으나 애써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곧바로 무라를 쳐다보며 물었다. “범개범은요?” “제가 비냐에게 말해서 물러서게 했지만, 멀리 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왜요? 번개범의 힘을 빌려 신시를 칠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번개범은 한웅을 공격했던 신수이니 번개범의 힘을 빌리면 그들은 당장 모든 누명을 뒤집어쓰게 된다. 치우비가 이해할 수 없다며 고개를 갸웃거리자 무라는 힘없이 말했다. “그 점에 대해 잘 말해두었습니다만....... 번개범이 가지 않는 것은 다른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무슨 일 말입니까?” “그것은....... 천님이 돌아오시기 전까지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싸움과는 관계없는 일입니다.” 무라가 그렇게 말하고 입을 다물자 치우비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도 무슨 일인가 궁금했지만, 그들도 무라의 돌 같은 입이 다물어지면 절대 다시 열리지 않는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다. 아무도 그 문제에 대해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때 장막 밖에서 울쿠타가 들어왔다. “비울걸님이 오셨습니다.” 치우비와 무라, 다른 사람들도 모두 반색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비울걸은 몹시 고생을 했는지 먼지가 잔뜩 뒤덮인 꾀죄죄한 몰골로 막사에 들어섰다. “아, 거 참. 우라지게 힘드는구먼. 일어나지 말어. 일어나지 말어......” “형님은요?” 치우비가 거의 덤벼들듯이 묻자 비울걸은 한숨을 푹 쉬었다. “네 형은 잡혔었지. 헌데 결국 내가 구했어. 그런데.......그런데 또 제 발로 잡혀가더란 말야! 좌우간 당분간은 절대 싸우지 말라고 하더구먼! 제기랄, 난 그대로 전했어. 뭐가 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 “네? 뭐가 어떻다고요? 형이 누구에게 잡혔단 말입니까?” “고시울률. 웃기게도 내가 직접 데려다 넘겨주었단 말야!” 야율쿠리가 벌떡 일어나며 버럭 소리쳤다. “할아범! 그건 천을 죽이는 짓 아닌가?” 그러자 비울걸도 지지 않고 맞받았다. “늑대새끼야, 그건 나도 알아! 하지만 그놈이 바득바득 우기는데 어떻게 해!” 그때 이번에는 야쿠타가 다시 장막으로 달려 들어오며 외쳤다. “고시울률입니다! 고시울률이 성문 옆에 나타났습니다! 치우비님을 찾습니다!” 치우비는 깜짝 놀랐다. “고시울률님이 직접?”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야쿠타는 몸을 떨었다. “치우천님만 빼고 다른 사람들을 모조리 잡아 성문 옆에 앉혔습니다! 뭔가 꿍꿍이가........” 야쿠타가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치우비는 벌떡 일어나 순식간에 장막을 헤치고 밖으로 나갔다. “가보자!” 다른 사람들도 우르르 치우비의 뒤를 따랐다. 회의에 끼지 못해 장막 밖에 있던 울라트도 마냥과 싱카를 데리고 따라갔고, 차오스도 알한의 뒤를 따라갔다. 성문 쪽으로 가다가 보돈차르가 억눌린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정말이군.........” 눈이 밝은 보돈차르는 벌써 성문 위의 광경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보돈차르는 고시울률을 직접 본 적은 없었으나 그 옆에 묶여 있는 것은 분명 아는 사람들이었다. 리미의 붉은 머리와 개르의 갈색 머리, 그리고 치베와 키타야, 구르, 유쌍까지 모두 있었다. 유쌍과 구르는 지친 듯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으나 리미와 개르, 치베, 키타야는 목을 빳빳이 세우고 있었다. 고시울률은 성문 옆 성벽에 앉혀 있는 그들의 옆에 서 있었는데, 비록 그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화려한 옷차림과 점잖은 풍채로 그가 고시울률임을 알 수 있었다. 성문이라 해서 누각이 딸린 후대의 성문이 아니다. 성문의 자리에는 벽이 없고 커다란 나무로 이어진 문이 달려 있을 뿐이며, 그 문은 위로 들어올리는 방식이었다. 그래서 고시울률과 인질들은 성문 옆 성벽 위에 올라서 있는 셈이 되었다. 치우비는 성난 눈빛을 하고 성문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화살이 닿을만한 거리로 들어서기 전에 무라가 슬쩍 치우비의 옷깃을 잡아끌었다. 고시울률은 성문 옆 성벽 위에서 뒷짐을 진 채 치우비의 모습을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을 뿐, 움직이지 않았다. 치우비가 커다랗게 소리쳤다. “작은 주신의 치우비가 말하오! 무슨 꿍꿍이요?” 우렁찬 치우비의 목소리는 신시 전체를 울리는 듯했다. 고시울률은 굳은 표정으로 살짝 고개를 갸웃하며 그리 크지 않은, 간신히 알아들을 만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많이 컸구나.” 치우비는 고시울률의 변화 없는 표정을 보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지금 당장 내 벗들을 풀어주시오 그리고 형님도 풀어주시오. 안 그러면 신시를 무너뜨리겠소!” 치우비가 더욱 큰 소리로 외치면서 날카로운 눈빛으로 쏘아보자 성벽 위의 사울아비들이 무심코 긴장의 빛을 띠었다. 화살이 닿지 않을 먼 거리에 있으면서도 섬뜩한 느낌을 줄 정도로 치우비의 눈빛은 강렬했다. 그때 고시울률이 다시 작은 소리로 말했다. “형과는 아주........ 다르구나.” “잡다한 소리는 듣고 싶지 않소!” 치우비가 외치자 이번에는 고시울률도 큰 소리로 외쳤다. “나는 주신의 고시울률이다! 너희가 어떻게 생각하건, 나는 주신과 신시를 지킨다. 너희가 신시를 무너뜨리려면 먼저 나를 쓰러뜨려야 할 것이야!” “형님과 벗들을 내준다면 신시를 공격하진 않을 거요! 먼저 비겁하게 형님과 벗들을 잡아간 것은 바로 당신이오!” 치우비가 무시무시한 기세로 소리치는데도 고시울률은 눈 하나 까딱 않고 대답했다. “그래, 그랬나? 하지만 수십 천의 전사를 끌고 신시를 억누르려 온 놈들을 내가 잡지 않으면 누가 잡는단 말인가?” “당신과 입씨름하기 싫소! 어서 벗들과 형님을 내주시오! 우리는 이미 당신이 부른 사울아비들 중 절반을 물리쳤고, 많은 사울아비들이 우리가 옳다고 믿고 우리 편이 되고 있소! 우리는 절대 신시를 무너뜨리거나 신시 사람들을 해칠 생각이 없소!” 고시울률은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 “그러면 나는?” “당신은 이미 용서받을 수 없소!” 갑자기 고시울률이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주신의 땅을 먼 동쪽, 바다가 맞닿는 곳까지 넓혔고, 땅을 갈고 씨를 뿌리는 일을 누구보다도 훌륭히 해냈다. 너희가 도끼와 활을 들고 사람을 죽이며 주신을 지켰다는 것은 나도 안다 허나 나는 씨앗과 쟁기로 주신을 지켜왔다. 나는 너희 같은 사나운 녀석들과 맞서 싸우기 싫다. 그런데도 나는 목숨을 걸고 너희와 맞서고 있다. 이게 내한 몸을 위한 것이라 보이나? 이런 내가 용서받을 수 없다고?” “입씨름하기 싫소! 나는.......” 치우비가 뭐라 더 말하기도 전에 고시울률이 손을 들어 펴 보이며 막아섰다. “너는 네 벗들을 풀어주지 않으면 신시를 공격해 무너뜨리겠다고 했다. 그런가?” “그렇소!” “그러면 네 벗들을 풀어주면 신시를 공격하지 않겠는가?” 고시울률이 너무나 담담하게 말하자 치우비는 좀 얼떨떨했으나 이내 외쳤다. “그렇소!” “그렇게 하면 모조리 물러가서, 두 번 다시 신시로 돌아오지 않을 셈인가?” 치우비는 잠시 생각하다가 힘차게 외쳤다. “내 고향은 주신이고, 신시요 나는 여기서 살고 싶소!” “그러면 언제든지 주신으로 활을 돌릴 수 있다는 말이군?” 고시울률이 빈정거리자 치우비는 몹시 화가 났다. “나와 형님, 작은 주신의 전사들은 주신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으며, 공상을 떨어뜨리고 지나족을 물러가게 했소! 그에 대한 보상으로 한웅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주신 사람으로 만들어준다 하셨소! 그 약속은 지켜져야 하오: 한웅님이 직접 하신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은 바로 당신이오!” 고시울률도 지지 않고 외쳤다. “흥! 어차피 너희는 못된 꿍꿍이를 지니고 그런 힘을 쓴 것이 분명하다! 많은 전사를 데리고 신시를 억누르려 한 놈들이 무슨 할 말이 있느냐? 약속을 어긴 것은 너희이니 약속을 지킬 필요가 없다!” “작은 주신 사람 모두가 주신 사람이 되는 것이 약속이었으니, 모두가 오지 않을 수 있겠소?” “그러면 왜 많은 다른 부족 놈들을 무장하여 데리고 왔는가?” “주신 혼자만으로는 유망을 막을 수 없었소! 그래서 많은 부족의 도움을 받았고, 그들도 함께 와야 했소! 더구나 당신이 우리에게 이런 짓을 할지 모른다고 우리는 이미 생각하고 있었소! 스스로를 지키지도 말란 말이오?” “너희가 전사들을 몰고 오지 않았으면, 너희를 잡으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고시울률이 억지를 쓰는 듯하자, 치우비의 뒤에 있던 보돈차르가 재빨리 귀띔했다. “어제 온 사울아비를 불러라.” 치우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소리쳤다. “치우광” 치우광은 이렇게 양쪽의 대장들이 나오는 자리에 끼게 되는 것이 흥분되는지, 상기된 표정으로 나섰다. 치우광이 치우비의 뒤편에서 나오자 신시 성벽 위의 사울아비들은 일제히 야유를 하며 욕을 퍼부었다. 그러나 치우광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자못 당당한 자세를 취했다. “배신자의 말은 듣고 싶지 않다! 귀가 더러워진다!” 고시울률이 외쳤으나 치우비는 전혀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당신들은 치우광이 배신자라고 하지만, 그는 주신이 틀렸다고 생각하오. 옳은 쪽을 따르려 한 것뿐이요. 치우광, 안파견 한님께 맹세하여 내가 묻는 말에 사실대로만 대답해라.” 치우광은 조금 떨리는 듯한 목소리였으나 기세 좋게 외쳤다. “주신의 사울아비 작은스승 치우광이 말하오. 나는 조금도 부끄럽지 않으며, 안파견 한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는데 사실만을 말하겠소이다!” 치우광이 외치자 치우비가 물었다. “치우광, 너는 언제 신시로 오라는 명령을 들었는가?” “한 달 반 전이요. 고시울률의 아랫사람인 부루위단이 직접 왔었소.” “조금도 거짓이 없겠지?” “없소! 나와 함께 온 천 명의 사울아비가 다 알고 있소! 다른 사울아비들도 다 비슷할 거요.” 치우비는 다시 고시울률을 바라보며 크게 외쳤다. “우리가 공상 싸움에서 이기고 난 후 신시로 출발도 하기 전에 당신, 고시울률은 사울아비들을 모으고 다녔소! 우리를 없애기 위해 말이오! 당신은 방금 우리가 군대를 모아 신시로 오지 않았다면, 우리를 해치려 하지 않았을 거라 말했소. 허나 치우광의 말대로라면 당신은 우리가 군대를 모아 신시로 향하기 전부터 사울아비들을 모았소! 이게 바로 당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증거요!” 돌연 치우비의 뒤편에서 “와” 하는 함성이 일어났다. 돌아보니 치우비 편의 전사와 사울아비들이 치우비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가 소리를 지른 것이다. 이것은 고시울률과 치우비의 대화만이 아니라, 양측 군대 전체의 대화이기도 했다. 싸움에서 옳다고 믿는 쪽이 사기가 높아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반면 신시 성벽 위의 사울아비들은 모두 조용했다. 그때 고시울률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너희가 나를 구덩이에 빠뜨리려 하는구나. 하지만 나, 고시울률은 그렇게 너희 말대로 놀아날 사람이 아니다! 너희는 이미 신시를 들이칠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며, 나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너희가 군대를 모아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기에 나 또한 군대를 모은 것이다. 만약 내가 미리 군대를 모아 대비하지 않았다면, 신시는 너희에게 포위되어서 바깥에 연락할 수도 없이 몹시 위험해졌을 것이다. 나는 신시를 책임지도록 한웅님께 직접 명령을 받은 사람으로, 어떤 일도 그냥 넘길 수 없었다! 내가 아니라 그 누구라도 신시를 생각하는 주신 사람이라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고시울률이 자신의 정당성을 외치자 신시 성벽 위의 사울아비들이 일제히 함성을 외치며 환호했다. 사실 고시울률의 말도 틀린 것은 아니었다. 치우비가 잠시 생각을 가다듬고 있는 사이, 치우광이 외쳤다. “사울아비 작은스승 치우광이 명예를 걸고 말하오. 고시울률님, 당신의 말은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습니다!” 고시울률이 버럭 소리쳤다. “무슨 소리냐? 배신자인 네가 왜 끼어드느냐?” 그러나 치우광은 끓어오르는 젊은 혈기로 가득 차 거침이 없었다. “당신 말대로 누가 그런 사실을 알려주었다면 당신 말이 맞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만약 그런 사람이 없다고 한다면 당신 말은 지어낸 말일 뿐입니다! 나는 명예를 걸고 안파견 한님 앞에 맹세하여 증인이 되었습니다. 나만이 아니라 천 명의 사울아비가 다 증인입니다! 그러면 당신의 증인은 누구입니까? 증인이 없다면 당신이 말을 지어냈다고 해도 할 말 없지 않습니까?” 치우광의 지적은 실로 날카로웠다. 치우비 측의 전사들은 다시 한번 함성을 올렸고 치우광이 데려온 사울아비들은 저마다 큰 소리로 외쳐댔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기에 치우광님을 따랐다!” “나도 그렇다!” “나도 주신 사울아비다! 사울아비는 옳은 길을 가야 한다! 주신이 내 고향이지만 주신이 잘못한다면 스스로 바로잡아야 한다!” 여기저기 사울아비들이 나서서 한마디씩 퍼붓자 신시 성벽 위의 사울아비들도 저마다 외쳐댔다. “다른 부족 놈들과 한패거리가 되어 외치는 배신자들은 떠들 자격이 없다!” “우리는 고시울률님을 믿는다!” “신시로 무기를 들이댄 놈들은 말할 자격이 없다! 사울아비가 아닌 짐승들일 뿐이다!” 양쪽의 사울아비들이 마구 외쳐대어 분위기가 순식간에 엉망이 되자 치우비가 큰 소리로 외쳤다. “그만! 입 다물라!” 그와 비슷한 때 고시울률도 함부로 떠들지 말라고 외쳤다. 그러나 치우비의 명령이 각 부족장들과 지휘관들에 의해 즉각 전해져 치우비의 진형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는데 반해, 고시울률의 명령은 전달이 늦었다. 때문에 신시 쪽에서 외치는 소리가 일방적으로 한참이나 맴돈 후에야 사방이 조용해졌다. 신시 쪽에서 떠드는 소리가 더 길게 이어지자, 싸움에 대해 잘 아는 사람들은 저마다 섬뜩한 기분을 느꼈다. 신시를 지키는 것은 사울아비들 중의 정예였는데도 각 부족이 뒤엉킨 치우비 측의 군대보다는 통솔이 덜 되고 있음을 간파한 것이다. 고시울률이 다소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이야기를 전한 사람을 밝힐 수는 없다. 그 사람이 위험하기 때문이다.” 그 말을 들은 치우비와 무라는 흠칫 놀랐다 고시울률의 말이 사실이라면 배신자는 사울아비들 중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 가운데 있단 말인가? 고개를 저으며 무라는 재빨리 치우비에게 속삭였다. “거짓말입니다. 그럴 리 없어요.” 치우비는 혼란스러웠다. 그때 고시울률의 말이 이어졌다. “쓸데없는 이야기는 그만 하자. 좌우간 우리는 무기를 맞대고 있다. 너희는 이들을 풀어주기를 바라는가?” 치우비는 뭔가 반박하려다가 고시울률의 마지막 말을 듣고 급히 외쳤다. “그렇소!” “그러면 신시를 공격하는 것을 멈추겠는가?” “형님도 풀어주어야 하고, 작은 주신 사람 모두가 주신 사람이 되어야 하오.” “지금 네 형은 풀어줄 수 없다.” “그러면 아무것도 필요 없소!” 치우비가 살기등등하게 흥분해도 고시울률은 흐트러짐 없이 침착하게 되받았다. “네 형은 내가 잡고 있지도 않은데, 어떻게 내 마음대로 풀어주겠느냐?” “그게 정말이오?” 치우비는 믿어지지 않았다. “나, 고시울률이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거짓말을 하겠는가? 맹세하는데, 나는 네 형을 잡아두고 있지 않다!” 날카롭게 외치는 고시울률의 말에 치우비는 약간 혼란스러웠다. 주변의 다른 사람들은 저마다 거짓말이라고 말했지만 치우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고시울률은 이런 뻔한 거짓말을 하지는 않을 거야. 형님이라면 어떻게든 빠져나왔을지도 몰라.” 알한이 급히 비울걸에게 뭔가 물어보려 했으나 비울걸은 어느새 또 사라져서 보이지 않았다. 마침내 치우비는 결심한 듯 크게 외쳤다. “그렇다면 형님은 빼고 말할 수 있소. 허나 형님이 신시에서 발견된다면, 당신이 어떻게든 보호해서 안전하게 우리에게 보내주어야 하오! 그럴 수 있겠소?” “네가 공격을 멈춘다면 그럴 수 있다. 허나 네 형 이야기만 빼고 다른 것은 약속할 수 있다. 네 벗들을 풀어주고, 작은 주신 놈들을 전부 주신 사람으로 받아주면 싸움을 그치겠는가?” 고시울률의 제안은 실로 파격적이어서, 치우비는 자기 귀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정말이오?”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물론이요, 나는 절대 주신 사람을 해치고 싶지 않소, 당신들이 먼저 공격해오지 않는다면 당연히 그릴 수 있소.” 돌연 고시울률이 묘한 어조로 물었다. “너희 대장은 네 형이라는데, 네가 그렇게 장담할 수 있는가?” “나는 형님의 뜻을 잘 아오. 형님이 이 자리에 계셨더라도 나와 똑같은 말을 했을 것이요. 만약 잘못한 점이 있더라도, 내가 책임을 지겠소!” 치우비는 가승을 두드리며 당당하게 외쳤다. 자신 있게 외치는 모습이 참으로 호탕하고 남자다워 치우비 측에서는 함성을 올렸다. “여기는 다른 부족의 부족장들도 많다. 그들도 과연 네 말을 들을까?” 고시울률이 묻자 보돈차르가 가장 먼저 외쳤다. “몽골의 보돈차르가 말한다. 나는 나의 안다 치우비의 말을 따를 것이며, 그가 물러서려 한다면 언제든 싸움을 멈추고 주신과 다시 친하게 지낼 수 있다! 텡그리의 이름으로 맹세한다!” 그 뒤를 이어 야율쿠리도 외쳤다. “키탄의 야율쿠리도 말한다! 너희 주신 놈들은 우리 키탄족이 싸움만 좋아한다고 잘못 알고 있지만, 우리도 이유없는 싸움은 싫다! 나는 치우비를 대장으로 인정했고, 대장의 말에는 반드시 따른다!” 줄줄이 초초룬과 툰툰이 목청을 높였고, 마지막으로 울라트가 앙칼지게 외쳤다. “나는 작은 주신의 울라트다! 비록 작은 주신 사람이지만 나의 아버지는 저기 잡혀 계신 키타야님이며 구르님과도 잘 안다. 그러므로 타타르의 앗수라트, 앙가마이는 모두 내 명령을 따를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울라트가 외치자 타타르족 전사들이 그렇다고 일제히 소리쳤다. 울라트는 있는 힘을 모두 짜내듯이 외쳤다. “나, 그리고 앗수라트, 앙가마이족도 치우비님을 따른다!” 성벽 위에서 묶인 채로 있던 키타야가 크게 웃으며 외쳤다. “과연 내 딸이다! 앗수라트 부족이여!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울라트가 부족장이다. 알겠는가?” 별안간 고시울률이 굳은 표정을 풀었다. 어딘지 모르게 힘이 빠진 듯하고, 허탈해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면 우선 이 사람들을 풀어주겠다. 그러니 무기를 들지 마라. 내가 명령을 내려서 신시 밖의 사울아비들에게도 싸움을 걸지 말라 할 것이니, 너희도 싸우지 마라!” 고시울률은 묶인 사람들의 줄을 풀도록 명령하더니 사람을 시켜 넝쿨로 엮은 줄로 잡혀 있던 사람들을 차례차례 아래로 내려 보내기 시작했다. 의외로 일이 너무도 술술 풀리자 사람들은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무라를 비롯해 몇몇 사람들은 혹시나 고시울률이 무슨 수작을 부리지 않을까 바짝 긴장하며 여차하면 뛰쳐나갈 준비까지 했다. 그러나 고시울률은 아무 수작도 부리지 않고 모든 사람들을 내려 보냈다. 치베, 키타야, 구르, 유쌍, 리미, 개르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땅에 내려서자 곧 빠른 걸음으로 치우비 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치베는 많이 다쳐 있었기에 리미에게 업혀 있었다. 치우비와 다른 사람들 모두 혹여 화살이라도 날아오지 않을까 하여 신경을 곤두세웠으나 고시울률은 아무런 명령도 내리지 않았다. 그들이 앞으로 달려오자 치우비는 뛰쳐나가고 싶었으나 얼른 알한이 뒤에서 속삭였다. “끝까지 지켜봐야 합니다. 화살이 날아오는 거리로 들어가면 안 됩니다.” 마침내 치베를 비롯한 여섯 사람은 무사히 치우비 일행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잠시 뒤에 치우천을 따라 들어갔던 작은 주신의 전사 스무 명도 모두 무사히 풀려났다. 치우비와 모든 사람들이 기쁜 마음으로 그들을 맞이했다. 성벽 위 고시울률은 아무 말 없이 뒷짐을 지고 조용히 서 있었다. 치우비가 벅찬 마음을 가누지 못해 눈물을 글썽이며 대뜸 앞으로 달려 나갔다. 다른 사람들이 막으려 했으나 치우비는 듣지 않았다. 치우비는 성벽 꽤 가까운 곳까지 달려가서는 고시울률에게 고개 숙여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고시울률님! 감사하오. 당신은 정말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군요. 형님도 부탁드립니다.” 고시울률은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군대는 물리겠지?” “물론입니다. 약속만 지켜진다면, 곧 군대를 물리겠습니다.” 치우비가 씩 웃으며 외치자 고시울률은 돌연 한숨을 쉬었다 “네놈들을 당할 수가 없구나. 너희가 맞다니....... 아직 남은 것이 많지만....... 지금 당장 풀 수 있는 일이 아니겠지.......”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지만, 치우비는 귀가 밝아 그 말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치우비는 의아해서 물었다. “무슨 말씀입니까?” 그때 고시울률의 뒤편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누군가가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비야, 정말 잘해주었구나!” 치우비는 너무 놀라서 주저앉을 뻔했다. 바로 치우천의 목소리였던 것이다. 치우천은 목소리를 낮춰 다시 말했다. “아직 아무것도 말하지 마라. 미안하구나.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만, 아는 척하지 말고 하루만 더 기다려다오. 그러면 다 끝난다.” 곧이어 나지막한 목소리로 누군가가 치우천을 나무라듯이 쯧쯧 거리며 말했다. “너도 조금만 기다릴 것이지, 지금 함부로 말해서야 되겠느냐?” 그것은 바로 풍백 비렴의 목소리였다. 치우비는 자신의 귀를 믿을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이내 치우천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아우의 목소리를 들으니 너무 반가워서 그랬습니다. 죄송합니다, 비렴님. 그럼 가시지요, 고시울률님?” 고시울률은 아무 말 없이 성벽에서 내려섰다. 귀가 밝은 치우비는 사라지는 고시울률의 뒷모습을 보면서 고시울률의 근엄한 목소리를 들었다. “아직 너를 완전히 믿는 것은 아니다. 믿어지질 않아.” “믿게 되실 것입니다.” 치우천의 대답하는 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온 것을 마지막으로 그들의 목소리는 이내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치우비는 귀신에 홀린 듯도 하고 형의 목소리를 들으니 반갑기도 하여 눈물을 글썽이면서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무슨 일인지 알지 못했고, 양쪽 전사들은 여전히 긴장을 늦추지 않고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비록 포로들이 무사히 돌아왔다 하지만 치우비의 말 한마디로 다시 싸움이 시작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잠시 후 치우비가 천천히 돌아섰다. 그는 대장으로서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사람 좋은 표정으로 활짝 웃으며 외쳤다. “모두.......! 물러선다!” 유망의 재전격 “서둘러라 서둘러서 움직여야 한다.” 유망은 부하들을 다급하게 독려했다. 그는 형천과 축융 그리고 삼만 오천에 달하는 전사들을 이끌고 북진하고 있었다. 공상 싸움 이후 많은 병력을 잃은 유망이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이것이 전부였다. 쓸만한 전사들을 그야말로 최후의 한 명까지 긁어모은 대군이었다. 게다가 말과 소까지 거느린 거대한 유망의 행렬은 조금이라도 다치거나 늑장을 부리는 자가 있으면 기다리지 않고 가차 없이 남겨두고 행진을 재촉했다. “저렇게까지 서둘러 전사를 움직일 필요가 있습니까?” 축융이 의아한 듯 물었지만 유망은 고개를 저었다. “서둘러야 해. 이번이 마지막 기회인지도 모르거든.” 유망의 눈빛은 맑았으며 총기가 넘치고 있었다. 공상 싸움 이후, 유망은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하여 약을 괄고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왔다. 그런 그가 가장 먼저 한 것은 바로 동원령을 내린 일이었다. 그리고 하루라도 빨리 주신 쪽으로 치고 올라가라고 부하들을 다그쳤다. 형천은 유짱이 정상으로 돌아온 것을 몹시 기뻐했으나 유망의 서두름이 걱정되는 듯했다. “정말 그놈의 말을 믿을 수가 있습니까?” 형천이 걱정스러워하자 유망은 딱 잘라 말했다. “믿을 수 있을 거야. 모든 일이 그렇게 굴러가는 조짐이 보여. 이봐, 축융 너 잘 조사했지?” 축융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조사한 것은 틀림없습니다.” 유망은 갑자기 하늘을 보고 껄껄 큰 소리로 웃어젖혔다. “그래, 그래. 주신 동쪽의 사울아비들 모두가 신시 부근으로 향했다. 그리고 주신과 우리 사이의 국경을 지키던 사울아비들도 절반 이상 신시로 몰려갔다. 한마디로 모든 사울아비들이 신시로 모여들고 있는 거야. 이건 주신 신시에 무슨 일이 생겼다고밖에 볼 수 없지. 치우천 그 녀석이 무슨 일을 저질렀든지, 아니면 무슨 다른 일이 터진 거야.” “하지만 함정인지도 모릅니다.” 축융이 볼을 실룩거리며 불만스러운 듯 내뱉자 유망은 씩 웃어 보이며 말했다. “이봐, 축융. 그런 건 함정으로 팔 수 있을 만한 일이 아냐. 국경을 지키는 사울아비를 빼내면서 함정을 파는 머저리가 어디 있나? 더구나 신시의 귀족들은 전부 ‘싸움은 무서워! 싸움은 무서워!’ 노래를 부르는 판인데 함정은 무슨 함정? 핫핫!” 유망은 웃다가 대뜸 곁을 지키고 있던 호위병들을 쳐다보았다. “너희는 웃기지 않나,1 웃기는지 아닌지 구별할 대가리조차 돌아가지 않는 거냐?” 호위병들이 기겁을 하여 억지웃음을 지었다. 그중 몇몇은 공허한 너털웃음을 터뜨려 보였다. 유망은 기분이 좋은 듯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내 계획을 말해주지. 북으로 치고 올라가서 마갸르족 나무 울타리 요새를 무너뜨리고 공상 대신 성을 쌓아 우리 땅으로 삼는 거야. 거기는 넓고 평평하여 많은 사람을 둘 수 있거든. 공상보다 나은 곳이 될 거다.” 유망이 말하는 곳은 지금의 북경 지역이었다. 그러자 형천은 조심스레 말했다. “그곳은 물론 좋은 곳입니다만, 산도 없고 주변에 성을 쌓을 큰 돌이 많지 않아 지키기는 힘든 곳입니다. 그러려면 그 북쪽의 산맥 아래턱까지 밀고 나가야 합니다.” 유망은 허벅지를 철썩 후려치며 되받았다. “오, 그래! 맞다, 형천. 너는 역시 대단하구나. 다들 들었나? 형천의 말이 맞아. 그래, 그곳은 지키기가 쉽지 않지. 그곳이 싸움터가 되면 안 되니까 그 북쪽을 막아야 해. 그러려면 산맥을 넘자마자 바로 있는 보금자리, 바로 대나무골을 점령해야 한다! 그곳을 움켜쥐면 보급로 인 서쪽과 북쪽의 길을 모조리 틀어쥐는 셈이 되거든! 그곳을 잡으면 주신과 미아우와의 길이 끊기고 주신과 남쪽 마갸르와의 길도 끊긴다! 그래서 주신의 간섭만 막으면 미아우는 독 안에 든 쥐다! 공상도 다시 빼앗을 수 있고 마갸르의 절반인 남쪽 부족은 죽은 목숨이 된다!” “남쪽 마갸르와 맞닿아 있는 타타르족과 키탄은 어떨까요? 그들이 마갸르를 돕는다면......” 축융이 걱정스레 말끝을 흐리자 유망은 호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주신이 나서지 않으면 그들은 마갸르를 돕지 않아! 늑대와 양들이 돼지 떼를 도울 리 없다.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니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축융, 자네가 서로 으르렁거리게 만들면 될 테고 하하핫.” 유망도 치우천처럼 대나무골(현재의 탁록)의 전략적 가치를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었다. 그곳이 끊어지면 미아우와 남쪽 마갸르는 주신과 길이 닿기 힘들게 되며, 그 두 부족을 손에 넣을 경우 지나족은 주신을 능가하는 큰 세력을 장악하게 된다. 그리만 된다면 주신은 물러 설 수밖에 없다. 축융과 형천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유망의 성격은 그리 변하지 않았으나 머리는 확실히 맑은 것 같았다. 이러한 전략적 식견은 이전에 약에 취했을 때는 볼 수 없던 모습이었다. 그러나 형천은 만약의 경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치우천 녀석이 어떻게 나올까요? 주신의 다른 놈들은 모르겠습니다만, 그 녀석 하나는 상당히 부담되는데요.” 치우천 이야기가 나오자 유망은 되레 환하게 웃으며 인상을 활짝 폈다. “아.......세상 제일의 대용사 형천이 겁내는 놈이 있다니. 하긴 나도 그놈을 무시 못 하지. 그놈은 참 묘하다, 그렇지?” “묘하다니오.” 축융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유망은 킥킥 웃으며 말했다. “그놈은 우리를 참 여러 번 몰아붙였지. 부하들을 다 잃고 도망치기를 몇 번이나 했거든. 그런데도 난 이상하게 그놈이 밉지 않단 말야. 오히려 그놈 덕분에 나는 약을 끊게 되었고 말야. 더구나 나는 그놈 다리도 고쳐주기로 약속했거든.” 축융은 놀라 작은 눈을 억지로 크게 뜨며 물었다. “다리를 고쳐주신다고요?” 유망은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해줘야지.” “놈은 우리의 가장 큰 적입니다! 우리가 대나무골로 나갈 때도 그놈이 다시 나타나 방해할지도 모르고요! 그런데 어떻게.......” 유망은 갑자기 눈을 부릅뜨며 축융의 말을 끊었다. “축융?” “아....... 예?” “네가 내 위야? 내가 네 위야?” 유망이 싸늘한 목소리로 다그치자 축융은 얼굴이 흙빛이 되어 고개를 숙였다. “그 무슨 말씀을....... 당연히 저는 염제 신농님만을 섬기는 몸이옵니다!” “그런데 왜 말이 많아, 응? 내가 그 죽을 고생을 하여 약을 끊은 게 누구 때문인지 알아? 그놈과의 약속을 지키려고, 한번 있는 힘을 다해 서로 겨뤄보려고 그런 거야. 그걸 몰라? 응?” 유망이 말을 하며 흥분되는 듯 눈빛이 번쩍거리기 시작하자 축융은 겁에 질린 듯 더욱 고개를 조아렸다. “하오나.......” “젠장! 내가 누구냐? 염제 신농이다! 한번 한 말은 지킨다. 안 그러면 누가 나를 따르겠어? 그러니 한번 한 약속도 반드시 지킨다! 놈이 적이란 건 잊지 않아. 허나 적과의 약속도 지켜야 하는 거야. 난 그래서 공상에서 진 후 동쪽으로는 절대 나가지 않았어. 그리고 이제 한번 겨뤄보는 거야. 놈의 방식대로!” 유망이 너무 흥분하는 것 같아 형천이 나직한 목소리로 달래듯이 물었다. “놈의 방식이라뇨?” “치우천 놈은 머리로 싸운다. 놈은 칼도 도끼도 활도 들지 않지만 가장 무섭게 싸우지 나도 그걸 알았다. 어차피 싸움터에 나가봐야 내가 도끼를 들고 설칠 일은 없다 그러니 짜증만 났지 허나 이제부터 나는 머리로 싸울 거다. 하나의 싸움터나 당장 싸울 땅만 보는 게 아니라 미리 싸울 곳을 생각하고 어떤 일이 일어날지 재본다. 그게 놈의 싸움방식이고 이번에 내가 싸울 방식이야. 알겠어?” 유망은 마구 떠들자 기분이 한결 풀린 것 같았다. 그 눈치를 채고 축융이 급히 한마디 끼웠다. “염제 신농님은 역시 훌륭하십니다.” 그 말에 유망은 마치 몸에 붙은 검불을 털어버리는 듯한 목소리로 되받았다. “아부할 것 없어, 축융. 아부 안 해도 내가 너를 어쩌겠어? 겁먹지 마. 그러니까 아부 같은 것 하지 마라. 아부를 들으니 다시 약에 취한 것 같은 기분이 들잖아. 젠장, 하지 마.” 축융이 얼굴이 붉어져 조용히 고개를 숙이자 유망은 계속 말을 이었다. “하긴 내가 거기가 중요한 곳인 줄 아는데 놈도 모를 리 없어. 놈도 신시로 돌아가면서 분명 그곳을 지났을 거고, 그곳이 얼마나 중요한 곳인지 알 거야. 그러니 놈이 먼저 수를 쓰기 전에 우리가 빼앗아야 해. 먼저 빼앗으면 훨씬 유리해진다. 주신을 반 토막으로 줄일 수 있는 기회야. 더구나.......” 유망은 씩 웃으며 어깨를 들썩거렸다 “헌원 놈이 돕겠다고 나섰으니 더 좋고 말야.” 얼른 형천이 고개를 저으며 나섰다. “헌원을 믿으시면 안 됩니다.” “믿는 것이 아냐. 이용하는 거다. 헌원 놈은 북으로 치고 올라가서 동쪽으로 진군을 할 거다. 신시에 무슨 일이 터졌으니 치우천 놈은 금방 발을 뺄 수 없을 거야. 발을 뺀다 해도 우리보다는 헌원 쪽으로 먼저 가겠지. 놈도 헌원은 만만하게 생각하지 못하니까.” “대나무골이 그리 소중한 곳이라면 헌원을 제쳐두고 그리로 달려올 수도 있습니다.” “달려온다 해도 헌원을 무시할 수는 없을 테지 가진 힘의 절반은 빼놓고 올 테니 그것만으로도 헌원을 끌어들인 가치는 있다.” “조건이 너무 후했습니다.” 축융이 그것만은 참을 수 없다는 듯이 툴툴거렸다. 허나 유망은 고개를 저었다. “어허, 헌원에게 동쪽 지나족의 권리를 인정한 것 말야? 어차피 동쪽 지나족은 다 그놈 손아귀에 있는데 그깟 것을 가져서 뭐 하게?” “그것이 아닙니다. 헌원을 다음번 염제 신농....... 아니, 염제 바로 다음의 황제라는 지위를 주겠다고 하신 것이 아무래도.......” 유망은 손사래를 치며 껄껄 웃었다. “이름 좋지 않아? 내가 지어 주었지만 정말 그럴듯하단 말야! 염제 신농과 맞먹는 것 같잖아? 황제 헌원, 그러면 말야. 하지만 실속 없어 나는 신농씨야. 세상 사람들에게 곡식 심는 법을 알려준 신농씨의 후손이지. 하지만 헌원 놈은 별것 없어. 황제면 뭐 해? 공손씨에 뭐 변변한 조상이 있나? 유웅씨 핏줄에서 가지 쳐 나온 놈일 뿐이잖아. 그런 먹지도 못하는 이름 하나 던져주어 놈의 수만 명 전사를 끌어냈으니 대단한 이득이잖아.” 유망은 쉽게 말했으나 축융은 아무래도 석연치 않은 것 같았다. 그러자 다시 형천이 말했다. “치우천 놈이 대나무골을 되빼앗으러 올지 모릅니다. 무슨 계획이라도 있으십니까?” “하핫! 대나무골 옆에는 강이 하나 흐르지” “네? 그런데요?” “그리고 대나무골은 땅이 다 아주 고운 진흙이다.” “무슨....... 말씀인지?” 유망은 눈을 반짝이며 막힘없이 술술 말했다. “우리가 주신의 사울아비 놈들을 뭐 때문에 무서워할까? 바로 구리 무기와 싸움 솜씨지. 허나 가장 큰 이유는 놈들이 말을 귀신같이 잘 타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나무골로 강을 끌어들여서 그 주변을 여기 저기 물이 흐르는 뻘로 만들면 어떻게 될까?” 축융과 형천은 동시에 “아!” 하며 탄성을 터뜨렸다. 유망은 다시 한번 호들갑스럽게 웃으며 빠른 말투로 떠들어댔다. “말이 달리지 못하면 놈들은 반은 죽은 목숨이다. 아마 놈들 중에는 헤엄치는 법을 모르는 녀석들도 많을 거야. 허나 우리는 장강과 황하주변에서 잔뼈가 굵은, 헤엄 잘 치는 전사가 칠천 명이 넘는다! 치우천 녀석이라도 이건 어쩔 수 없을 거야! 하하핫!” 형천은 이제야 굳었던 표정을 풀며 입가에 웃음을 머금었다. “염제 신농님, 정말....... 정말 놀랍습니다. 이번에야말로 신농님께서는 치우천 녀석을 물리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놈에게 머리로도 이기실 수 있습니다!” “정말?” 유망이 몹시 좋아하자 형천은 다시 한 번 확신을 주듯 말했다. “이번에야말로 틀림없습니다. 벌써 신농님께옵서는 치우천 녀석을 능가할 만큼 모든 것을 넓게 보고 많은 생각을 하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반드시 그 녀석을 모든 면에서 이길 수 있을 것이옵니다.” “그 녀석을 이겨야겠지, 그래.” “틀림없습니다. 반드시 이기실 것입니다.” “놈이 정말 대나무골로 올까? 와야 하는데 말야.” “올 것입니다.” 형천이 말하자 유망은 입이 찢어질 정도로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그렇게 되면 좋겠어. 그놈의 그 반반한 낯짝을 다시 한 번 보고 싶다니깐? 놈이 헌원과 싸우다 죽으면 난 참 슬플 거야. 먼저 다리를 고쳐주고, 그 다음에 싸우기 시작해야지. 그래서 놈의 목을 베고.......아프지 않게 단번에 목을 베고....... 아주 커다란 무덤을 만들어줄 거야. 흙과 돌을 높이 쌓아서, 세상에 치우천이라는 잘난 놈이 있었다고 길이길이 알게 해야지 아....... 그런데 지금 뭣들 하고 있는 거야? 어서 서둘러!” 유망이 다시 정색을 하며 윽박지르자 잠시 멈추어 숨을 돌리던 행렬이 급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돌연 유망은, 등을 돌리고 제 위치로 가려던 형천을 넌지시 불러 세웠다. “이봐, 형천.” “예, 염제 신농님.” 유망의 얼굴엔 예전의 그 쓸쓸한 표정이 가득 어려 있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 응?” “예.” 유망은 갑자기 감상에 젖은 듯,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하늘을 올려다보고 말없이 한참을 있었다. 형천은 유망이 이런 표정을 짓는 것을 요 몇 년 사이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형천은 조용히, 방해하지 않고 정중한 태도로 유망의 말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유망이 입술을 떼었다. “나는 말야, 원래 사람을 고치는 신농씨였어. 그런데 허구한 날 싸움질이나 해대려니, 원 참....... 이 염제 신농이란 자리도 못해먹을 짓이야. 지긋지긋하기도 하고........” “허허.........” 너무도 솔직한 말이라 형천이 어이없다는 듯 웃자 유망도 웃으며 말을 이었다. “허나 치우천이라는 놈이 나와서 따분하지 않게 되었어. 이번에는 어떻게든 결판이 나겠지 안 그래?” “신농께옵서는 이기실 것이옵니다.” “그래, 그렇겠지? 그런데....... 그런데 그놈을 죽이고 나면 윌 하지? 그리고 또 내가 지면 그땐 또 뭘 하지? 다시 그 따분한 옛날로 돌아가겠지? 안 그래?” “치우천을 이기더라도 정복할 땅은 많고도 많습니다. 주신도 남아있고.......” “주신을 다 먹으려면 너무 힘들어. 힘들다기보다 그건 재미없는 싸움이야. 난 안 할 거야. 적당히 주신을 겁주고 우리 일에 못 끼어들게 하면 그뿐이지, 주신을 정복할 생각 같은 건 없어. 한평생이 걸릴지도 모르고........” “하오나 공상도 되찾아야 하며.......” “대나무골만 빼앗으면 공상을 굳이 칠 것도 없어. 에워싸고 몇 년 지나면 다 말라죽을 테니까. 창힐에게 그쪽은 떼어주면 알아서 잘하겠지.” “남쪽 부족들도 다시 한 번 손을.......” “그건 축융에게 몌어주면 그만이고......” “헌원은........?” “그건 형천, 네가 있잖아?” “허.......” 형천이 말을 잇지 못하자 유망은 키득거리며 말했다. “좌우간 이번 싸움에서 결판이 나면 말야, 형천. 우리 부족을 잘 돌봐줘야 해. 알았어?”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직 유망님은 젊으시고.......” “난 젊지 않아. 좀 있으면 머리칼과 수염도 허옇게 되겠지? 그 전에 하고 싶은 일이 있어 만약 말야, 이 싸움이 끝나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되든 말이지....... 지나족 대부족장 자리는 네가 가져라.” 유망은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말했으나 형천은 너무도 놀라 순간 몸이 휘청거렸다. “그.......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절대.......” “뭐가 그럴 수 없어? 내가 준다는데?” “저 같은 놈이 어떻게 그렇게 되겠습니까? 저는 절대.......” “대인족 부족도 쾌 크지만 네가 잘 이끌잖아. 염제 신농이 되어도 잘할 거야.” 형천은 거의 사색이 되어서 고개를 마구 저었다. “저는 신농씨가 아닙니다!” “난 자식도 없는 걸? 신농씨는 이제 없단 말야, 하하. 그래, 염제 신농 자리 같은 것 없애버리지, 뭐. 그리고 네가 해. 염제 형천이 되라고. 나, 농담하는 거 아냐........” 형천은 얼굴이 허옇게 질려서 멍하니 있다가 이윽고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염제의 자리는 결코 저처럼 힘만 있는 놈이 될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대인족 하나만도 저는 벅찹니다. 그보다도....... 저, 형천, 염제 신농님께 감히 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말해봐.” “이 형천이 염제 신농님께 드리는 말씀이 아니오라, 옛 친구이자 부족을 일으켜 세웠던 유망님께 드리는 말씀이옵니다. 허락해주시겠습니까?” 유망은 유쾌하게 껄껄 웃으며 형천의 어깨를 쳤다. “허락하고 말고가 아니라, 정말 오래 전부터 듣고 싶었던 말이었어. 허나 틀린 게 있어. 옛 친구가 아니라, 지금도 자네는 내 가장 가까운 친구야. 이야기해라, 내 친구여!” 유망이 목청을 높여 외치고는 이내 손짓을 하자 주변의 호위병들이 모두 저만치 물러섰다. 그러자 형천이 조용히 말했다. “그 옛날, 유망님이.......” “님이 뭐야? 처음 우리가 만났을 때, 네가 나보다 몇 살 위라고 항상 반말했으면서? 너는 항상 형 노릇을 했잖아? 뭐 지금도 그렇지만.......” “험험....... 그러면 편하게 말하겠습니다. 정말 그래도........” “된다니까! 안 하면 내가 형이라고 부른다?” “알았습....... 아니, 알았네. 우리가 처음 만나 함께 지나족을 일으키자고 한 지 벌써 삼십 년이 다 되어가는구먼. 참 길다면 긴 세월이었지.” 유망은 형천의 반말이 마치 듣기 좋은 음악이라도 되는 듯이 눈을 반쯤 지그시 감고 음미하듯 고개를 까딱거렸다. “그래. 그런데?” “그 긴 세월 동안 우리가 정복한 부족이 여든여섯 개고, 치렀던 싸움이 몇 백 번은 되겠구먼.” “그래....... 참 지긋지긋하게 많이도 싸웠어.” “그런데 말야, 유망....... 그 세월 동안 자네와 난 서로가 떨어진 적이 없어. 내가 많은 상처를 입고 죽어갈 때에도 자네는 절대 나를 버리고 도망치지 않았지........” 유망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자네가 죽을 뻔한 게 네 번이고, 내가 죽을 뻔한 게 두 번이지. 하지만 우리 중 아무도 서로를 버리고 간 적이 없어 적어도 염제 신농이 되기 전에는 말야.” 그러다가 유망은 코끝을 약간 찡그리며 덧붙였다. “내가 염제 신농이 된 다음에는 자네는 나와 함께 싸운 적이 없었어. 그래서 그럴 일이 없었지. 아, 그때부터는 참 지겨운 세월이었어.” “자네는 염제 신농이 된 다음부터 나와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몸이 되었기 때문이지.” “난 그게 지겨워.” “좌우간 듣게. 자네는 염제 신농이 되었지. 바로 그날이 내가 살면서 가장 기뻤던 날일세.” 유망도 감회에 젖은 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돌연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러니 염제 신농 자리를 내놓으면 안 된다는 말이야? 안 돼 난 그 자리에 더 있다간 미쳐버릴걸? 또 약에 취해 해롱거리다가 나와 자네, 우리 두 사람 모두 다 죽이게 될 거야. 정신 맑아진 김에 그만둬야 해!” “자넬 말리려는 게 아니야. 허나 생각해보게. 나에게 염제 신농을 맡을 능력이 있었다면 진작부터 자네를 밀지 않았을 거야. 그런데 이제 와서 덜컥 나에게 그 자리를 떠넘기려 한다면....... 그건 말이지........ 참 곤란해 유망 자네는 뭘 하려는 거지? 원래 사람 고쳐주는 일로 돌아가려는 건가?” 유망은 뜨끔한 듯 어깨를 움찔하다가 천천히 대답했다. “그....... 그래. 젠장 속일 수가 없군! 사람 고쳐주는 게 내가 타고난 일 같아. 그런데 사람 죽이는 짓을 하고 있으니 이거야, 원........ 난 말야, 이번에 결심했어. 아무리 자네라도 절대 말릴 수 없어 이번 치우천 녀석과 한판이 끝나면, 나는 어찌 되었건 염제 신농 자리는 그만 둘 거야. 그러니 날 말릴 생각은 말고......” 형천은 듬직하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리려는 게 아니야. 나는 항상 자네 옆에 있는데, 이제 나에게 그 귀찮은 자리를 넘기고 혼자 가버린다고? 그건 배신 아닌가?” “그러면.......” “나도 같이 가야지 이참에 그 빌어먹을 세상 제일 용사라는 자리도 덤으로 떼어놓고 말야. 그것도 오래 해먹으니 지겹더구먼. 나도 이제 좀 있으면 늙을 거고, 치우비나 끽구 같은 놈이 몇 년만 더 크면 틀림없이 날 잡아 죽이려고 덤빌 거야. 난 늙어 가는데 말야. 허허, 맞아죽기 전에 그만둬야지.” “나와....... 같이 간단 말인가?” 유망이 눈을 크게 뜨며 묻자 형천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어딜 가든,내가 같이 안 가면 마음이 안 놓여.” “나는 어디로 갈지도 안 정했어.” “어디로 가든 뭐가 걸리겠는가?” “그럼 그 빌어먹을 염제 신농 자리는 누구에게 주고?” “자네 좋을 대로 하게나. 자네 것이니 자네 마음대로 해야지. 그리고 이제부터 우리는 좀 편하게 쉬자구.” 형천이 넉넉한 미소를 지으며 가슴을 펴자 유망은 기분이 좋아 웃으면서 마구 발을 구르다가 또 하늘을 보고 큰 소리로 웃는 등 한참 법석을 떨었다. 덩치 하고 허우대 멀쩡한 염제 신농으로서의 처신은 아니었지만 형천은 그런 유망을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이윽고 마음을 추스른 유망이 힘주어 말했다. “그래, 이번 일만 해결하면! 주신이 꼼짝 못하니 이제 지나족도 문제없을 거고....... 다음번 염제 신농이나 다음번 세상 제일의 용사가 나올 때도 되었어. 그래, 우리가 이기면....... 이 빌어먹을 염제 신농자리 같은 건 창힐 놈에게나 줘버리자. 그놈은 침착하니까 사람들을 평화롭게 잘 다스릴 거야. 그리고 우리는 가는 거야! 하핫!” 형천은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면서 한마디 덧붙였다. “우리는 이만큼 했으면 충분히 했어. 이제는 될 때도 된 것 같아.” “그래, 그래!” 유망은 어린애처럼 들뜬 목소리로 맞장구쳤다. 그러다가 문득 다시 정신을 차리고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축융 놈에게는 말하지 마. 그놈은 좀 음흉한 놈이라서....... 헌원은 물론 말할 것도 없고.” “축융이 배신할 놈은 아니지만, 모든 걸 버리고 갈 사람은 못 되지. 말하지 않도록 함세.” “자네와 함께라........ 정말 좋군, 그래. 꼭 그렇게 하자.” 유망이 다시 한 번 다짐하자 형천은 웃으며 정중히 말했다. “하오면, 염제 신농께옵서는 이제 가던 길을 마저 재촉하시지요?” “알았어! 제길!” 유망은 퉁명스럽게 대답하면서도 호탕하게 웃었다. 그는 혼잣말로 ‘이번 싸움만 끝나면.......’이라고 수없이 되뇌며 다시 길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주신의 목줄이라 할 수 있는 대나무골, 탁록과 판천 지방을 공략하기 위해서. 한웅과의 담판 “동쪽의 고시울률이 한웅님을 뵈옵고자 하오!” “무슨 일이십니까?” 고시울률의 큰 목소리에 화답하며 나온 사람은 치우바람이었다. 이미 오래 전에 한웅의 집 근처를 지키고 있던 치우가람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치우바람은 이번 전투가 벌어진 사이 소속이 바뀌었다. 치우가람과 함께 사와라 한웅의 명에 따라 한웅의 집 근처를 지키게 된 것이다. 치우바람은 밖에 나오자마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때와 달리 고시울률이 백 명 가까운 사울아비들과 함께 한웅의 집 바로 앞까지 들어온 것이다. 고시울률 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아무 제재 없이 들어올 수 있었지만 부하들은 한웅이 있는 집 앞까지는 들어올 수 없었다. “어인 일로 사울아비들을 데리고 오신 것입니까?” 치우바람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묻자 고시울률은 차분하게 말했다. “내 큰 죄인을 잡았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네.” 고시울률이 눈짓을 하자, 몇 명의 사울아비들이 비켜섰다. 그 뒤에는 눈을 가리고 꽁꽁 묶여 재갈까지 물린 치우천과 아예 얼굴을 가죽주머니로 덮어씌운 몇몇 사람들이 있었다. 치우바람은 눈을 크게 뜨며 놀랐다. “치우천 녀석을 잡으셨습니까?” “그렇다네. 그런데 놈이 말하는 게 하도 이상해서, 한웅님을 꼭 뵈어야 할 듯하네.” “싸움은 어찌하고요?” 치우바람이 걱정스러운 듯 묻자 고시울률은 싱긋 웃어 보였다. “이미 모두 물리쳤네. 놈들은 도망치고 있다네.” 치우바람은 놀라면서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고시울률님의 공이 정말 크십니다! 하루 만에 놈들을 모조리 물리치시고 대장을 잡으시다니! 대단하십니다!” “그러니 어서 한웅님께 아뢰게.” 고시울률이 재촉하자 치우바람은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그는 몇 번 눈을 끔뻑이다가 말했다. “그게.......지금 한웅님께서 몸이 썩 안 좋으시다고 들었습니다만........” 갑자기 고시울률이 호통을 쳤다. “이보다 중요한 일은 없네! 어서 아뢰게!” “하오나.......” 치우바람이 자꾸 꾸물거리자 고시울률은 눈을 가늘게 뜨고 경멸어린 미소를 지으며 그를 노려보았다. “이리로 옮긴 지 하루밖에 안 되었는데, 참 많이 컸군, 자네?” “예.......예.......!” 치우바람은 얼굴이 벌겋게 되어서 급히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잠시 후 들라는 소리 대신 치우가람이 나왔다. 그는 재빨리 고시울률에게 인사하며 말했다. “하늘군대의 치우가람이 말씀드립니다. 한웅님께옵서 몹시 불편하시옵니다. 전하실 말이 있다면 저에게 알려주시면........” 고시울률은 순간, 싸늘한 표정이 되어서 치우가람에게 다가갔다. 치우가람의 바로 옆까지 간 고시울률은 그에게 말했다. “난 한웅님을 뵙고 싶다고 했네. 자네가 아니고 말야.” 그리고 고시울률은 조금 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너 따위가 알 일이 아니란 말이다. 알아들었나?” 치우가람은 꿈쩍도 하지 않고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되받았다. “한웅님께서 직접 명하신 일이옵니다. 잘못이 있다면 죽여주시옵소서.” 고시울률은 갑자기 껄껄 웃었다. “과연........! 과연.........!" 고시울률이 왜 웃는지 알 수 없어 치우가람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빳빳이 들고 고시울률을 쳐다보았다. 순간 고시울률은 냅다 치우가람의 뺨을 후려쳤다. “그럼, 죽어라!” 치우가람은 뺨을 맞았어도 미동도 하지 않고 뻣뻣이 서 있었다. 고시울률은 치미는 화를 이기지 못해 뒤에 있던 사울아비 한 명의 칼을 빼앗아 들었다. 사울아비들은 모두 놀라서 고시울률을 말리려 했다. 여기까지 칼을 가지고 온 것만도 큰 불경인데, 칼을 뽑는다면 제아무리 고시울률이라도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고시울률은 말리는 사울아비들을 뿌리치고 칼을 뽑아 치우가람을 내리치려 했다. 그때 안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멈추시오!” 고시울률은 마치 예상이나 하고 있던 것처럼 칼을 멈추었다. 돌연 꼼짝도 않고 서 있는 치우가람의 표정이 침통하게 바뀌었다. 곧이어 한웅의 집 안에서 여자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부루버들과 시녀들이었다. 부루버들은 나이를 먹어 몸이 약간 불었으나 여전히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웠다. 허나 그녀는 몹시 노기 띤 표정으로 고시울률에게 목소리를 높였다. “이 무슨 짓입니까1 여기서 칼을 뽑다니요? 한웅님께 반역하겠다는 것입니까?” 고시울률 역시 치미는 화를 간신히 억누르고 이내 웃으며 칼을 옆으로 내동댕이쳤다. 돌을 간 바닥에 쨍그랑 소리를 내며 칼이 떨어지자 고시울률이 이죽거리듯 말문을 열었다. “나는 그럴 배짱도 없는 놈이오. 잘 아실 것인데?” 전에 없이 고시울률의 말투가 무례하자 부루버들은 파르르 떨며 분노를 터뜨렸다. “당신이 아무리 고시씨의 웃뜸이라 해도 이런 짓은.......” 대뜸 고시울률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부루버들의 입을 막았다. “당신은 한웅님이 아니잖소이까! 한웅님의 여섯째 마누라에 불과하오. 나, 고시울률에게 그렇게 말해도 된다고 누가 그랬소? 당신 아버지도 나에게 그리는 못해!” 고시울률의 말은 부루버들의 아버지인 부루위단을 겨냥한 말이었다. 고시울률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으나 그동안 누구도 부루버들에게 이렇게 대든 사람이 없었다. 그녀는 금방 기절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펄쩍 화를 내며 험악한 말을 내뱉으려는 순간이었다. 그때 안쪽에서 사와라 한웅의 쇠약한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렇게 중요한 일이오?” 고시울률은 금세 예의를 갖추어서 고개를 숙였다. “고시울률이 한웅님께 말씀드리옵니다. 너무나 중요한 일이옵니다. 무례를 용서하소서.” “부하들을 왜 끌고 오신 게요?” “치우천과 부하들을 잡아오려면 부하들과 함께가 아니면 위험하기 때문이옵니다.” “성밖의 적은?” “물리 쳤사옵니다.” “사로잡은 자들을 풀어 주셨다던데?” 얼마 지나지 않은 일임에도 사와라 한웅이 정확하게 짙어 말하자 고시울률은 잠시 움찔했으나 곧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잔챙이들을 잡아 무엇하리까? 대신 치우천과 더 중요한 놈들을 잡았으니 마음 놓으소서. 모든 것을 소상히 말씀드리겠나이다.” “꼭 직접 이야기해야 하오?” “그러하옵니다.” “그럼 부하들은 놓아두고 안으로 드시오.” “아니옵니다. 몇 분을 같이 불러주셔야 하옵니다.” “누구를 말이오?” “큰마누라님과 부루 집안의 부루위단을 불러야 하옵니다. 그리고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이곳에서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큰 소리로 부르면 바로 들어올 수 있도록 밖에서 기다리게 해야 하옵니다.” 이 말에는 사와라 한웅도 놀란 듯 목소리가 떨렸다. “꼭 그래야 하오?” “그 정도로 중요한 일이옵니다.” 사와라 한웅은 잠시 아무 말이 없다가 이윽고 허탈하게 말했다. “삼사도 같이 부르시오.” 부루버들과 치우가람 형제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부루버들은 뭐라 외치면서 안으로 뛰어들려고 했으나 고시울률이 큰 소리로 막았다. “한웅님의 말씀이시오. 모두 가만히 기다리시오 여봐라!” 고시울률이 부르자 사울아비 대장으로 보이는 두 사람이 나와 고개를 숙였다. “아무도 여기서 꼼짝하지 못하게 하라. 그리고 한웅님의 말씀이 계셨으니 삼사와 큰마누라님, 부루위단 등을 모두 부르도록 하라. 누구든 여기서 떠나려 하면 용서하지 말라. 이것은 한웅님이 직접 내리신 명령이다 알았느냐?” “예!” 두 명의 사울아비 대장이 큰 소리로 화답하자 고시울률은 꽁꽁 묶인 치우천만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섰다. 사와라 한웅의 큰 방은 그의 성격을 보여주듯 별다른 장식이 없이 밋밋했다. 한웅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천부인의 문양과 커다란 솟대형상의 새 조각 두 개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사와라 한웅은 그 한가운데에 반쯤 누운 자세로 새털로 만든 이불을 덮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그 옆에는 두 명의 시녀가 있었는데, 고시울률이 들어오며 눈을 부라리자 서둘러 옆문으로 나가버렸다. 고시울률이 예를 올렸고, 치우천도 손이 뒤로 묶인 상태이지만 가까스로 무릎을 꿇고 사와라 한웅에게 예를 올렸다. 그러고 나자 치우천은 몸을 똑바로 일으키기가 힘들었다. 사와라 한웅은 못 본 듯 조용히 있다가 예가 끝나자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시오?” 고시울률은 푸욱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주....... 복잡하고도 어려운 일이옵니다.” 소시울률은 잠시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다가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모든 것이 얽히고 설켜서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는데, 매듭을 풀어내고 나니 부끄럽고도 암담할 따름입니다.” “뭐가 얽혔고 무슨 매듭을 어떻게 풀었다는 말씀이오?” 사와라 한웅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바깥을 보는 시늉 하며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 “이제 나를 잡아가기라도 하려는 거요?” 고시울률은 눈을 부릅뜨며 되받았다. “무슨 말씀을! 그럴 리가 있사옵니까?” “아니, 그러고도 남지 그러고도 남아, 하하.” 사와라 한웅이 허탈하게 웃자 고시울률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저는....... 그렇지 않사옵니다. 한웅께옵서는 제게 못마땅한 점이 많겠지요. 허나 저도 나름대로는 주신을 위해 평생을 바쳤사옵니다. 그것을 뒤흔드는 짓 따위는 하지 않사옵니다.” “그게 고시울률, 자네의 약한 점이지 또 무서운 점이기도 하고.” “뭐라 말씀드리기가 어렵나이다.” 고시울률은 얼굴이 벌겋게 되어 어정정한 자세로 거의 누워 있다시피 한 치우천을 일으켜 앉혔다. 사와라 한웅이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다가 물었다. “천에게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가?” 고시울률이 치우천의 입을 막은 재갈을 풀기 시작하면서 중얼거리듯이 대답했다. “들었지요. 아주 많이 들었습니다.” “자네는 저 아이를 싫어하지 않았던가? 마음에 쌓인 것도 많은 듯 한데?” 재갈이 하도 단단히 묶여 잘 풀리지 않자 고시울률은 힘을 주느라 이를 악물며 말했다. “싫어합니다. 이놈은 어미를 잡아먹은 놈이고 장차 주신을 말아먹을 놈입니다. 아직 쌓인 것도 그대로오이다. 허나 이번 일은 그렇게 넘어갈 것이 아니오이다. 어젯밤 이놈은 내 방에 뛰어들어 말할 기회를 달라 했소이다. 도망칠 수 있었는데도 그렇지 않고 말이외다.......” 마침내 치우천의 입이 풀리자 고시울률은 사와라 한웅에게로 시선을 들렸다. “저는 이놈만큼 번지르르한 말재주가 없으니, 한웅님께옵서 직접 들어 보시오소서.” 그리고 고시울률은 치우천을 향해 냉랭하게 말했다. “그대로 아뢰어보아라.” 비록 입을 묶었던 재갈 자국이 얼굴에 선명하게 나 있었으나 치우천의 표정은 태연하고 차분했다. 그러면서도 왠지 슬퍼 보이기도 했다. 사와라 한웅이 참지 못하고 먼저 물었다. “네가 직접 고시울률의 집으로 들어가 말하기를 청했더냐?” 치우천은 말이 잘 나오지 않아 몇 번 헛기침을 하고는 대답했다. “그러하옵니다.” “왜 그랬느냐?” 치우천은 길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모든 것을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아 그랬사옵니다.” “무엇을?” 사와라 한웅이 눈을 가늘게 뜨자 치우천은 다시 두어 번 헛기침을 하고 숨을 골랐다. “주신의 앞날에 대해서 말이옵니다.” “주신의 앞날이라.......” 사와라 한웅은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네가 맥달선인도 아닌데 앞날을 어찌 알겠느냐?” “정해진 앞날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앞날 말이옵니다. 혹은 우리가 준비한 앞날이겠지요.” “무슨 소리냐?” 사와라 한웅이 약간 목소리를 높이자 치우천은 깊이 고개를 조아렸다. “한웅님의 이야기를 입에 올리는 것 자체가 힘드옵니다. 부디 무슨 말을 하더라도 허락해주옵소서.” 사와라 한웅은 잠시 생각하다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 판국에 무슨 이야기를 못하게 하겠느냐? 꺼리지 말고 어서 말 하거라.” “한웅님께옵서 이 못난 것을 어여삐 여기시어 많은 힘을 주시려 한 것, 잊지 않고 있사옵니다.” “난 너를 사막에 버리기도 했잖았느냐?” 사와라 한웅이 씁쓸한 표정을 짓자 치우천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것도 잊지는 않고 있사옵니다.” “허........” “주신의 사울아비 큰스승이자 작은 주신의 부족장인 치우천이 한웅님께 감히 아룁니다. 저는 예전부터 아주 이상한 것에 대해 고민해 왔었사옵니다.” “무엇을 말이냐?” “누군가가 주신 안에서, 저를 숨은 눈으로 살펴보고, 저를 이용하려 한다는 것을 말이옵니다.” 사와라 한웅이 대답하지 않자 치우천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그뿐이라면 모르겠지만, 그 누군가는 저를 이용하여 무슨 일을 꾸미는 것 같았사옵니다.” “무슨........?” 사와라 한웅이 고개를 갸웃하자 치우천은 눈을 빛내며 말했다. “저와 고시울률님을 서로 싸우게 만들려는 일 말이옵니다.” “허.......” 탄식 같은 소리를 내뱉던 사와라 한웅이 이내 물었다. “너와 고시울률은 원래 사이가 좋지 않은 걸로 아는데?” “그러하옵니다. 비록 고시울률님께옵서 제 어머님을 딸로 두신 분이지만, 우리는 전부터 인연을 끊고 남남으로 지내왔사옵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제 어머님이자 고시울률님의 따님이셨던 미리내님이 돌아가신 이유가 서로 상대방 때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옵니다. 고시울률님은 이 못난 저 때문에 당신의 따님이 목숨을 내던진 것이라 믿었고, 저는 고시울률님이 신수를 건드리는 것이 겁나 따님을 혼자 가게 해서 결국 돌아가시게 되었다고 믿었사옵니다.” 사와라 한웅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야기는 나도 들은 바가 있다. 그놈이 아마 번개범이겠지.” “그러하옵니다. 번개범. 여기서 시작되어 저와 고시울률님은 몹시 사이가 나빠졌사옵니다. 그런데 한웅님께옵서는 저를 어여쁘게 보아 주셔서 높이 되게 해주셨사옵니다.” ‘너를 예쁘게 본 것이 아니라, 네가 그만한 일을 해냈기 때문이다.“ 그 사이를 고시울률이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그보다는 나에게 맞서는 녀석을 하나 두시려고 그랬을 테지요. 더구나 제가 제일 꺼림칙해하는 녀석이고 하는 짓도 자못 맹랑하니 딱 좋았겠지요. 저도 바보는 아니옵니다.” 상당히 무례한 말이었으나 사와라 한웅은 개의치 않는 듯했다. “치우천은 계속하라.” 사와라 한웅의 말에 치우천은 조용히 말했다. “그러나 저와 고시울률님, 둘 다 이해하지 못했사옵니다. 설마 그 일의 뒤에 한웅님이 계시리라고는 말이지요.” “내가 있다?” 치우천은 단호한 목소리로 즉시 되받았다. “저를 이용하여 고시울률님의 힘을 막으려 한 것은 충분히 이해되는 일이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번 신시 싸움이옵니다. 제가 신시를 치는 것도 마다하지 않으려 한 이유는 한웅님께옵서 위험하다 여겼기 때문이옵니다. 저를 키워주신 것은 한웅님이시옵니다. 헌데 신시의 분위기나 모든 것이 이상했사옵니다. 저를 싫어하는 고시울률님이 모든 것을 거머쥔 것이라 생각될 만큼 말이옵니다.” “너는 상을 받으러 들어왔다가 잡히지 않았느냐?” “저는 미리 생각하고 있었사옵니다. 제가 신시로 향하기 전부터 고시울률님의 아랫사람인 부루위단님이 먼 곳에서 사울아비들을 모았사옵니다. 그것은 제 곁에 누군가가 제가 말한 것을 고시울률님에게 털어놓았다는 뜻이기도 하옵니다. 저는 가급적 주신과 싸우지 않으려 했사오나, 위험한 일에는 대비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제 주변 사람들에게 말했었습니다. 그 일이 미리 알려지지 않았다면 이렇게 많은 사울아비들을 신시 주변에 모여들 리 없사옵니다.” “만에 하나를 대비하여 모을 수도 있지 않은가?” 치우천은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절대 아니옵니다.” “어떻게 장담하느냐?” “저는 신시 안에 있어서 싸움을 보지는 못했사오나 어떻게 하다 보니 바깥소식을 좀 전해 듣게 되었사옵니다. 헌데, 제 아비가 이번 싸움에 괄려왔다 하더이다.” “치우우레 말인가?” “그러하옵니다. 치우광이라는 사울아비가 우리 편에 들어 알려준 것인데, 부루위단님이 직접 그리 했다하옵니다 더구나 제 아비가 말을 듣지 않아 글자 주술로 다른 사람을 제 아비로 꾸미기까지 하였다 들었사옵니다.” 고시울률도 그것만은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돌연 사와라 한웅이 목소리를 높였다. “부루위단 밖에 있는가?” 소리가 안 들렸는지 아무런 응답이 없자 고시울률이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불러서야 부루위단이 조심스레 들어왔다. 사와라 한웅은 치우천에게 다시 말하라 한 뒤 부루위단에게 그런 일이 있었느냐고 물었다. 부루위단은 쩔쩔매며 대답했다 “그러하옵니다. 저놈과 저놈의 아우는 싸움을 잘하니, 꼼짝 못하게 하려면 그 방법이 가장........” “됐다.” 치우천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사와라 한웅이 먼저 손짓을 하며 부루위단에게 물러가라 했다. 부루위단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황급히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고시울률이 치우천을 보며 말했다. “사울아비를 준비하라 한 것은 네가 쳐들어온다는 말을 듣고 내가 시킨 일이지만, 그 일은 내가 시킨 것이 아니다. 우레는 내 아들과도 같은 사위인데....... 부루위단 저 작자가 윌 믿고........ 흠흠. 네놈들은 나와 상관없지만, 치우우레는 어쨌거나 내 사위다. 그 일은 나중에 따질 것이다.” “아버님은 사울아비 큰스승이옵니다. 그런 분을 단지 제가 심상치 않다는, 벌어지지 않은 일로 그렇게 함부로 대할 수는 없는 일이옵니다. 고시울률님은 정말 모르셨습니까?” 고시울률은 얼굴이 벌겋게 되어 버럭 소리쳤다. “네가 아무리 그런 눈으로 본다 해도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이런 일까지 있었다니........ 부루위단, 저 녀석을 가만두지 않겠다.” 치우천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고시울률을 쳐다보았다. “이제 잘 기억해두십시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도 다 설명됩니다.” “이제 다 이야기하지 않았느냐?” “한웅님께서 들으시라고 다시 할 것입니다.” 사와라 한웅은 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기만 했다. “좌우간 누군가가 분명 중간에 나서서 제 이야기를 고시울률님에게 전해주었사옵니다. 그것이 한웅님 아니셨사옵니까?” 사와라 한웅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자 고시울률이 나섰다. “한웅님께옵서 전해주시지 않았사옵니까? 저 녀석이 딴 마음을” 있다고 말입니다. " 갑자기 사와라 한웅이 화를 내며 외쳤다. “그렇다. 내가 그랬다. 그것이 어쨌단 말이냐? 나는 한웅이다. 나에게 죄를 물을 참이냐?” 마치 예상이라도 하고 있었다는 듯이 치우천은 침착하게 되받았다. “저도 주신 사람이옵니다. 어찌 그럴 수 있겠사옵니까? 저를 죽이시면 죽어야 하고, 저를 내치시면 내쳐져야 하겠지요.” “너희가 지금 나에게 따지자는 것이냐?” 그때 고시울률이 조용히 말했다. “한웅님께 따지거나 죄를 물으려는 것이 아니옵니다. 이 녀석의 말을 들으면 한웅님이 위험하기에 그런 것이옵니다.” “위험하다? 무슨 소리냐? 내가 일을 꾸며서 내가 이렇게 만든 것인데, 내가 위험하다?” 치우천은 잠시 고시울률에게 눈짓을 하고 대답했다. “한웅님께옵서 이야기를 하셨다는 것을 저는 어제야 깨달을 수 있었사옵니다. 사실, 그 전까지는 전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똑똑한 녀석이 왜 몰랐느냐?” “간단하옵니다. 고시울률님께는 외람된 말씀이오나, 한웅님을 제외하고 주신에서 가장 힘이 센 사람은 고시울률님이옵니다. 그래서 한웅님께옵서는 계속 고시울률님을 견제하기 위해 저를 키워주셨사옵니다. 그런데 제 이야기를 고시울률님에 미리 전한다면, 그것은 저를 죽이기 위한 방법밖에는 아니 되옵니다. 저를 키워주신 것은 한웅님이시온데, 한웅님께서 저를 죽이려 하는 것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사옵니다.” 사와라 한웅은 화가 치밀어 오른 표정으로 무섭게 외쳤다. “네 녀석은 생각보다 너무 컸고, 너무 무서웠기 때문이다. 아무도 믿지 못한 공상을 너는 몇 안 되는 수로 떨궜고, 주변 부족들에게 인정을 받아 엄청난 세력을 키웠다. 네놈이 마음을 달리 먹으면 고시울률보다 더 위험한 놈이 될 것은 뻔한 일이 아니더냐! 되었느냐? 내, 네놈의 목을 잘라버리리라!” 으르렁거리는 한웅을 쳐다보며 치우천은 통탄스럽게 말했다. “그것은 한웅님의 목을 스스로 치시는 것과 같사옵니다.” “신시를 쳐들어온 놈이 말이 많구나! 네놈이 정말 내 생각만 하는 심복이라는 게냐? 나는 네놈을 한 번 죽이려 한 적이 있다. 네놈은 잊었다고 했지만 절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 놈이 너무 크는 것은 위험하고, 나는 그것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없애버리려 한 것이다!” 치우천은 서글픈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맞는 말씀이오나.......그것이 전부가 아니옵니다.” “무슨 헛소리냐?” “아니옵니다. 언뜻 들어맞는 듯하오나 그뿐일 리가 없사옵니다. 그렇게 저어되면서 왜 저에게 사울아비 웃뜸스승 자리를 말하셨사옵니까? 그것만 없었더라도 제가 이리 위험한 사람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옵니다.” “네가 공상을 칠 줄은 정말 몰랐다.” “아니옵니다. 제가 공상을 정말 칠 줄 몰라 그랬다고는 믿어지지 않사옵니다. 되레 정말 공상을 칠 정도였기에 웃뜸스승으로 앉혀서 고시울률님과 맞설 정도로 만들려 하신 것이 분명하옵니다. 허나.......허나....... 이렇게 당장싸움이 일어나게 만든 것은 이해가 되지 않았사옵니다. 그래서 저는 한웅님이 위험하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나이다. 만약 고시울률님이 패하면 어찌 되겠사옵니까? 그렇게 따진다면 저는 더더욱 위험한 사람이 될 것이옵니다.” “네가 이길 리가 없을 텐데도?” 치우천은 싱긋 웃었다. “그러면 고시울률님이 이기면 어찌 되겠사옵니까? 그런 식으로 생각하신다면 되레 앞으로 고시울률님이 더더욱 위험한 사람이 될 것이온데요?” “너는.......” 사와라 한웅이 말을 채 잇지 못하자 치우천은 차분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러하옵니다. 어떻게 하든지 참 이상한 일이 되옵니다. 한웅님은 현명하신 분이옵니다. 그런 것을 생각하지 않으셨을 리가 없사옵니다. 그래서 저도 참으로 갈피를 잡지 못했고, 모든 것이 몹시 헛갈렸사옵니다. 누가 이기든, 한웅님께는 나쁜 일이옵니다. 만약 한웅님이 가운데 서 주셨더라면, 저는 저대로 그냥 남고, 고시울률님이 한웅이 되셨을 것이옵니다. 그러나 한웅님께는 그리 할 수 없는 뭔가 이유가 있어서 둘 다 시는 길을 만드셨습니다.” “둘 다 지다니?” 그때 고시울률이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저 녀석은 하나에서 열까지 한웅님을 생각한다고 했사옵니다. 더구나 저놈의 아우는 싸움에서 무서운 놈이고, 따르는 부족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러니 제가 이겨 저놈을 죽이더라도 모두를 다 죽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다른 부족도 복수심을 가질 것은 말할 것도 없지요 결국 제 땅은 저놈을 따르던 녀석들에게 침략을 받아 아수라장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제 힘도 없어지는 것이고, 결국은 제가 마음대로 사울아비를 써서 일을 저질렀다고 제 목을 칠 수 있겠지요.” 치우천이 그 말을 받았다. “만약 제가 이기고 고시울률님을 잡거나 목을 벤다면....... 나중에라도 신시에 다른 부족 군대를 몰고 온 것이나 또 다른 이유를 들어서 제 목을 베는 것은 쉬운 일이겠지요 누가 이기든 간에 우리 둘의 목은 붙어 있지 않을 것입니다.” 사와라 한웅이 씩씩거리며 외쳤다 “내가 미친 줄 아느냐? 내가 왜 그런 짓을 해? 너와 고시울률, 둘 다 문젯거리지만, 둘 다 없어지면 주신에 누가 남느냐? 그러면 네가 말한 두 가지 일이 다 내 발등에 떨어지는 것 아니냐? 그런 말을 누가 믿겠느냐?” 치우천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물론 그렇습니다. 만약 지금 싸움을 도맡다시피 한 제가 죽고, 신시 안의 일을 도맡아 하신 고시울률님이 없어지면 주신은 엉망이 될 것입니다. 더구나 한웅님이 몸이 편찮으시고 뒤를 이을 자도 없는 마당에 그런 일을 하실 리는 없지요 저도 그 때문에 이 모든 일들이 절대 믿어지지 않았사옵니다. 아무리 한웅님께옵서 제가 밉고 고시울률님이 탐탁지 않다 하셔도 주신을 망하게 하실 리는 없을 테니까요.” “네가 너무 이상하게 생각한 것이다. 나를 놀리려 들다니!” 돌연 치우천의 눈빛이 강렬하게 빛났다. “허나....... 이미 한웅님께옵서는 억지로 우리 둘을 부딪치게 하려 하셨습니다. 그럴 이유가 하나도 없는데도 말이옵니다. 더구나 그 때문에 신시가 전쟁에 빠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으셨사옵니다. 저는 한웅님께옵서 한마디만 하신다면 그것으로 웃뜸 사울아비건 주신 사람으로 돌아오는 것이건 포기하고 물러날 수 있었사옵니다. 그런데도 한웅님께옵서는 그런 길을 택하지 않으시고 저와 고시울률님을 부딪히게 만드셨사옵니다. 저 또한 한웅님이 이 모든 것을 꾸몄을 리 없다 생각하여 몹시 고민했사옵니다만, 만약 한웅님이 틀림없다면.......이 모든 일이 일어날 수 있는 한 가지 조건이 있음을 깨달았사옵니다.” “뭐라고?” “거북한 이야기지만 들어주소서. 한웅님께서는 이제 늙으셨사옵니다. 그 때문에 지금에 와서 고시울률님이나 저를 내치는 것은 될 일이 아닐지도 모르지요. 허나 한 가지가 있다면.......” “무슨 소리냐?” 사와라 한웅의 눈이 험악하게 빛났으나 치우천은 잠시 이를 질끈 악물다가 말했다. “한웅님, 한웅님께옵서 아드님을 얻으신 것이 아니옵니까? 바로 얼마 전에 말이옵니다........” 별안간 사와라 한웅이 거칠게 이불을 차내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순간 고시울률의 얼굴도 새파랗게 질렸다. 치우천은 눈을 딱 감았다. 실로 엄청난 말을 내뱉은 것이다. 사와라 한웅은 금방이라도 치우천에게 달려들 것 같았으나, 기침이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왔다. 고시울률의 이마에서 땀이 주르륵 흘렀고, 치우천마저도 이마에 땀방울이 비쳤다. 사와라 한웅의 기침이 좀 가라앉자, 치우천은 눈을 떴다가 이내 질끈 감고 말했다. “사울아비 큰스승 치우천, 목숨을 걸고 감히 말씀드리옵니다. 한웅님은 결코 까닭 없이 일을 벌일 분이 아니시옵니다. 더구나 이번 일은, 한웅님께는 어찌 되었거나 좋지 않은 결과만을 낳는 일이옵니다. 그러나 생각을 바꾸어서, 한웅님께서 지금 한웅님의 자리를 물려줄 수 있는 아드님을 얻으셨다면, 그리고 그 아드님이 너무도 어려서 앞날이 밝지 않다고 하면....... 이 모든 것이 설명되옵니다.” “헛소리!” 사와라 한웅이 괴로운 표정으로 부르짖었으나 치우천은 침착하게 계속 말했다. “아니옵니다. 그것 말고는 이유가 없사옵니다. 그 말고는 저와 고시울률님 등 모든 힘 있는 이들을 쳐 없앨 이유가 없사옵니다. 더구나 이일을 마치면 한웅님 또한 쉽지 않사옵니다. 그러므로 분명 한웅님은 아주 근래에 아드님을 얻으셨을 것입니다.” “내 나이가 몇이냐? 어찌.......” 사와라 한웅이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더듬거리자 치우천은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그 때문에 문제가 된 것이겠지요. 한웅님께서 오래 전에 아드님을 얻으셨다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것입니다. 허나 한웅님께서 어린 아드님만 남기고 돌아가신다면‥‥‥ 문제가 크옵니다. 한웅의 자리를 감당하기에 너무나 어리고, 더구나 나이 들어 얻은 자식이라 하여 말이 많을 것이옵니다. 하지만 한웅님께옵서는 아들을 한웅 자리에 앉히고 싶으실 것이옵니다. 그러려면 방법은 하나, 주신의 모든 힘 있는 자들이 없어져야 하옵니다. 한웅님께옵서 저를 키워주시다가 갑자기 내치려 가는 이 우,주신에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이 오는데도 이런 일을 벌이신 이유, 그 모두가 설명되옵니다.” 사와라 한웅은 무척이나 혼란스러워 보였다. 치우천은 마지막 방점을 찍으려는 듯이 힘 있게 말했다 “한웅님, 말씀해주소서.” 그러자 고시울률은 눈이 붉게 충혈 되어 섬뜩한 눈길로 사와라 한웅을 노려보았다. “한웅님, 말씀해주소서.......” 사와라 한웅의 얼굴에 혼란스러움과 번민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이미 저와 고시울률님 모두가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사옵니다. 제가 여기서 죽는다 할지라도 고시울률님께옵서는 이미 그에 대비하여 손을 써두었사옵니다. 이제는 엎질러진 물입니다. 말씀해주소서.” 사와라 한웅은 손을 덜덜 떨었다 손 떨림이 점점 번져 어깨와 수염까지도 걷잡을 수 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사와라 한웅은 떨림을 가까스로 추스르고 길게 한숨을 쉬며 힘없이 말했다. “너........ 너는 정말 무서운 놈이구나........ 그것을....... 그것을 어떻게..........” 치우천은 어깨에 힘이 풀려 자기도 모르게 몸을 숙이며 릴은 숨을 토해냈다. “정말로....... 그랬다면........” 갑자기 고시울률이 껄껄 웃었다. 고시울률은 이미 어제 치우천에게서 그럴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를 들은 바 있었다. 고시울률은 이미 나이 많은 사와라 한웅의 뒤를 이을 것으로 생각해왔고, 신시나 주신의 모든 사람들 또한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사와라 한웅에게 어린 아들이 있다면 그야말로 코앞의 전쟁을 능가하는 혼란의 예고나 다름없었다. 뿐만 아니라 고시울률의 인생 전체를 뒤집어버릴 수 있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그 때문에 고시울률은 원수같이 여기던 치우천의 말을 들어주고 그것을 확인 하러 함께 온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 사실이 진실임이 밝혀지게 되었다. “아주 좋은 소식이구려! 한웅님, 축하드리옵니다! 아드님이라니요? 대단하십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하하핫! 하핫!” “고시울률........” 사와라 한웅이 돌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까까지의 힘없는 목소리와는 전혀 다른, 섬뜩한 목소리였다. “나는 아직 죽지 않았다.” 고시울률 역시 섬뜩한 눈빛으로 한웅을 쏘아보며 재미있다는 표정을 억지로 지어 보였다.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되레 제가 섭섭하옵니다. 저를 그런 사람으로 보시지 마소서. 이런 좋은 일은 모두에게 알려야 하지 않겠사오이까? 더구나 그런 좋은 일을 위하여 이 치우천이나 저 고시울률이나, 모조리 쓸어버리고 신시를 싸움판으로 몰아넣기까지 하셨는데,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소이까? 하핫! 하하핫!” 고시울률이 아예 드러내놓고 비꼬자 사와라 한웅은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쳤다. “나는 주신의 한웅이다! 주신의 열세 번째 사와라 한웅이란 말이다! 이 주신의 모든 사람들은 내 말을 들어야 하고, 내 뜻을 따라야 한다!” 고시울률은 눈을 가늘게 뜨며 이죽거렸다. “알아 모시겠나이다, 한웅님. 누가 그것을 모르오리까? 이날까지 아무 불평 없이 당신을 위해 살아왔나이다. 그리고 앞으로 남은 날은 당신의 핏덩이, 징징거리며 똥오줌을 싸대는 갓난쟁이를 위해 살아가야겠지요. 그것이 한웅님의 뜻이라면 말입니다........” 고시울률이 험악한 말투로 내뱉었어도 사와라 한웅은 전혀 기죽지 않고 섬뜩한 목소리로 되받았다. “고시울률, 자네에게 내 잘못한 것이 있으니 무슨 소리를 떠들든, 여기서는 봐주겠네. 허나........ 그 아이에게......... 절대........절대 손댈 수 없네. 그 아이에게 손대면 자네는 죽네. 내가 죽어서라도 자네를 기필코 죽이고야 말겠네. 나는 아이를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있네. 내 가 죽기를 각오하면 누구든 같이 끌고 들어갈 수 있어. 이 점, 잊지 말게.......” “한웅께옵서 말씀하시면 따라야 하겠지요. 허나.......” 사와라 한웅이 손사래를 치며 고시울률의 말을 막으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 “북쪽의 땅을 고시울률, 자네에게 주겠네. 동쪽과 북쪽 땅에 솟대를 따로 세우고, 신시에 공물을 바치지 않아도 되게끔 해 주겠네.” 솟대를 따로 세운다는 것은 실질적으로 독립을 시켜준다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실로 엄청나게 파격적인 일이라 고시울률은 입이 딱 벌어졌다. “무슨 말씀이시오니까?” “단 두 가지만 들어주면 되네. 아주 쉬운 일일세.” 고시울률이 흥미를 보이자 사와라 한웅은 재빨리 덧붙였다. “첫째, 자네들 둘은 이 일에 대해 입을 다물어야 하네. 아니, 미리부터 알고 있던 걸로 해야 하네. 둘째, 신시의 싸움에 대해서는 오해였다고 해야 하네. 그래서 나와 이야기를 나눈 것으로 하면 될 걸세. 내가 책임을 지겠네.” 사와라 한웅은 늙었어도 여전히 민활한 사람이었다. 결국 타협을 하자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고시울률은 흥분되어 옷자락까지 떨며 생각에 잠겼다. 원래가우유부단한 성격이라 눈앞의 조건에 심히 마음이 움직이는 듯했다. “감히 한 말씀 드리오자면.......” 치우천이 한마디 끼우려 하자 사와라 한웅은 낮게 고함을 질렀다. “귀신같은 녀석! 허나....... 허나 좋다. 나는 한웅이다. 주신의 한웅이란 말이다. 내가 너희에게 사과를 해야 하는가? 엎드려 빌어야 하는가? 고시울률! 잘 생각해보게나. 치우천, 너를 건드리지 않을 테니 염려 말아라! 너는 웃뜸 사울아비로 만들어줄 것이며, 뭐든 달라는 대로 해줄 것이다. 나는 내 아들이 내 자리를 잇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이 일을 어떻게든 좋게 해결하려면 치우천과 고시울률을 달래서 둘 다 무사히 내보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잡음이 생기고 만다. 더구나 고시울률을 견제할 수 있는 치우천이라는 존재가 지금의 사와라 한웅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존재였다. 둘 다 함정에 몰아넣으려는 막판에 손바닥을 뒤집는 꼴이 되었으니 그들이 바라는 대로 무엇이든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고시울률은 뭐라 말이 없었으나 치우천이 의심스러운 듯 물었다. “한웅님께옵서는 정말 그것을 바라시옵니까? 다른 사람의 생각이 끼어들어 있는 것은 아니옵니까?” 사와라 한웅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다 내가 생각한 것이지, 다른 누군가를 위한 것이 아니다. 죽음을 바로 앞에 두고 자식을 보게 되니 너무도 예쁘고 무엇이든 해 주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래서 자네들에게 몹쓸 짓을 했다. 내 마음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내가 오래 살 수 있으면 몰라도........ 그럴 것 같지가 않다. 그러니 어린것이 너무나 걱정스러울 뿐이다. 그뿐이야. 그것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내놓을 수 있다.........” 사와라 한웅이 눈물까지 글썽이며 간곡하게 말하자 고시울률은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 “어머니는 누구입니까?” “바깥에서 낳아온 아이가 아닐세. 부루버들에게서 낳은 아이야. 그 아이가 여섯째 마누라이기는 하나 큰마누라 말고 남은 마누라는 그 애 뿐이지 않는가? 그러니 문제될 것은 없다네.” “저....... 그래도 참. 한웅님께옵서는 여든 살에 가까우신데....... 이렇게 늦게 나온 아이란 정말.......” 사와라 한웅이 불쌍해서인지 새로 얻게 된 땅에 욕심나서인지 고시울률의 태도는 한층 누그러졌다 우유부단하고 일이 벌어지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이라 그럴까. 아무튼 사와라 한웅은 다행이라는 듯 말했다. “사람들이 뭐라 떠들어대든 상관없네. 자네들 둘이 잘해주기만 한다면 모든 일이 잘될 것이야.” 치우천은 잠시 말을 끊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자신의 추측이 맞아 들었고 여기까지는 모든 것이 생각대로 잘 풀렸다. 그러나 사와라 한웅은 너무도 나이가 많았다. 나이가 많다고 아이를 못 가지라는 법은 없지만, 한웅은 오랫동안 병을 앓고 있었다. 그리고 그 상대가 부루버들이라는 말에 치우천은 다시 의심이 생겼다 초조한 기색으로 사와라 한웅이 다급히 물었다. “아까 삼사와 다른 사람들도 모두 부르지 않았던가?” 고시울률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러하옵니다.” “그러면 모두들 들라 하게. 이참에 이야기를 해야 하겠네.” “너무 급하신 것 아니옵니까?” 그러나 고개를 저으며 사와라 한웅은 서둘렀다. “그렇지 않으면 안심이 되질 않네. 모두 부르자는 것이 아니라 알만한 사람들만 부르자는 것이야. 삼사, 큰마누라와 버들이, 부루위단과 치우가람 형제 정도만 불러서 모든 것을 확실하게 하세나.” “운사 신지울태님은 성밖에 계십니다.” “그래도 괜찮아. 다른 사람만 부르도록 하세.” 고시울률은 곧 문을 열고 사람들을 모이게 하라고 외쳤다. 치우천은 사와라 한웅이 왠지 서두른다는 느낌과 더불어 어딘지 모르게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시울률은 계속 입을 다물고 있는 치우천의 얼굴을 쭈뼛거리며 쳐다보았다. 치우천은 지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사와라 한웅이 고시울률에게 넌지시 말했다. “목이 마르네, 저기서 술을 좀 가져다주게나.” 고시울률은 잠시 머뭇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지금 움직일 사람은 자신밖에 없음을 알고 구석에 놓여 있던 술을 한 잔 퍼서 사와라 한웅에게 건네주었다. 사와라 한웅이 잔을 받아들며 말했다. “고맙네. 천하의 고시울률이 직접 따라주는 술이로군.” “별 말씀을.” 사와라 한웅은 술을 천천히 마시다가 막 사람들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리자 다시 고시울률에게 말했다. “한 잔 더 줄 수 있겠는가?” 고시울률은 별 생각 없이 다시 술 한 잔을 따라왔다. 그 사이에 비렴과 병예, 큰마누라인 부소구슬과 부루버들, 부루위단과 치우가람 형제가 안으로 들어섰다. 그들이 한웅에게 예를 취하는 사이 고시울률은 사와라 한웅에게 술잔을 넘기고 옆에 가서 섰다. 사와라 한웅은 두 번째 잔을 마시지 않고 천천히 말했다. “지금 모두를 부른 것은 아주 중요한 할 말이 있기 때문이오.” 병예는 고시울률에게 강제로 붙잡혔고, 비렴도 비슷한 처지를 겪었던지라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한웅의 큰마누라 부소구슬은 치우천이 여전히 묶여 있는 것을 보고 가볍게 한숨을 쉬었으며, 부루버들과 치우가람 형제들은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부루위단만이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여기 두 사람과 이야기한 뒤에 나는 결심했소. 이제 나에게 아들이 있으니, 그 아이로 내 다음을 잇게 하고 싶구려.” 사와라 한웅이 그 말을 하는 순간 치우천은 재빨리 사람들의 표정을 살폈다. 비렴과 병예는 크게 놀라 눈을 둥그렇게 떴다. 치우가람과 치우바람 형제는 몹시 놀라는 시늉을 지어 보였다. 부소구슬은 길게 한숨만 내쉬었으며, 부루버들과 부루위단은 자못 얼굴빛이 밝아졌다. 비렴이 놀라 더듬거리며 물었다. “아드님.......이 있으셨습니까? 대체.......” 그때 부루버들이 자못 당당하게 나섰다. “몇 달 되었습니다.” 순간 치우천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부루버들의 등 뒤에서 어쩔 줄을 몰라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치우가람의 얼굴을 보았기 때문이다. 치우천은 너무도 놀라고 경악해 비렴과 사와라 한웅이 나누고 있는 이야기가 귀에 들리지 않았다. 묶인 채 꿇어앉혀져 있는 몸이 덜덜 떨렸다. 도무지 믿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너무도 많은 과거의 사실들이 정확한 얼개를 가지고 딱딱 들어맞는 것이 느껴졌다. 치우천의 생각이 미처 정리되기도 전에 갑자기 큰 고함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치우천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사와라 한웅이 술잔을 떨어뜨리며 뒤로 넘어지려는 것을 비렴이 몸을 날려 부축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고시울률이 사색이 되어 물러서고 있었다. 울려 온 커다란 목소리는? 무슨 말이었더라? “독!” 우사 병예가 커다랗게 소리를 쳤으며 부소구슬이 기절해 쓰러졌다. 곧이어 부루버들이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질렀다. 치우가람이 품에서 짧은 칼을 뽑았고, 치우바람이 고시울률의 소맷자락을 잡았다. 고시울률이 고개를 마구 저으며 크게 외쳤다. “내가 아니다! 이게 무슨 짓이냐!” 그러나 사와라 한웅의 처절한 외침이 모든 것을 덮어버렸다. “고시울률.......! 고시울률이.......!” 한웅의 입에서 검은색 피가 솟구쳐 나오고 있었다. “나는 아니야!” 고시울률이 소리치며 치우바람의 손을 뿌리치고 밖으로 달려 나가려 했다. 그러나 치우가람이 재빨리 막아섰다. 고시울률이 다시 한번 아니라고 외치며 문을 박차는 순간 치우가람의 손에 들린 칼이 고시울률의 목을 겨누었다. “나를 죽이려 한다!” 고시울률은그 칼에 아랑곳하지 않고 발악하듯 외쳤다. 그와 동시에 치우가람도 외쳤다. “고시울률이 한웅님을 죽이려 했다! 움직이는 놈은 모두.......!” 비렴이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고 커다랗게 외쳤다. “단군을 불러와라! 솟대단군을......! 어서!” 병예는 한웅이 떨어뜨린 술잔을 집어 들며 부들부들 떨었다. “독이다!” 치우천은 아직도 꽁꽁 묶인 그대로였다. 별안간 속이 울렁거리며 눈앞이 물결치는 듯 흔들렸다. 뭐가 뭔지 하나도 알 수 없는 혼란스러움이었다. 아직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 그 술잔은 분명 고시울률이 사와라 한웅에게 건네준 것이었다. 그 안에 독을 탔다는 말인가? “말도 안 돼 ......” 고시울률이 사와라 한웅에게 직접 술을 건넬 기회가 있으리라고는 상상했을 리 없다. 고시울률은 맥달이 아니다. 그러면 원래부터 독이 있었는가? 아니다. 그럴 리 없다. 그러면 누가? 누가? 갑자기 치우천의 등에 소름이 돋았다. ‘한웅님이 죽이려 한다. 자신을 포함하여 우리 셋 다!’ 왜? 아이를 살리기 위해 고시울률을 죽이려는 것이다. 아까 말한 것이 바로 이런 의미였다. “그냥 두면 안 된다! 잡아라! 어서 잡.......” 발작에 가까운 사와라 한웅의 목소리였다. 평상시와는 울림부터가 전혀 달랐다 치우가람이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칼을 휘둘렀다. 그러나 고시울률은 놀라고 당황하여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치우천은 으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이를 악물며 있는 힘껏 몸을 날렸다. 손이 뒤로 묶인 채였지만 개의치 않았다. 고시울률이 죽으면 자신도 살아날 수 없다. 신시를 친 죄로 여지없이 죽음을 당하리라. 어떻 게든 그것만은 막아야 했다. 치우천의 머리가 아슬아슬하게 치우가람의 허리를 쳤다. 칼은 살짝 빗나가 고시울률의 목을 살짝 그었다. 고시울률은 흠칫 놀라며 급히 손을 뻗어 뭐라도 움켜잡으려고 허우적거렸다. 곧이어 치우천의 결박 지어진 팔이 잡혔다. 고시울률과 치우천은 함께 넘어지며 방문 밖으로 나뒹굴었다. 고시울률이 굴러 떨어지자 뜰 밖에서 기다리던 고시울률의 심복 사울아비들이 몰려들었다. 치우가람이 찢어지는 소리로 험악하게 외쳤다. “감히 움직이는 놈은 뭐냐!” 그러면서 다시 한 번 치우가람은 칼을 휘둘렀다. 이번에는 치우천과 고시울률이 동시에 칼에 베어졌다. 중상은 아니었으나 조금 깊게 베어져 선혈이 튀었다. 치우가람이 다시 칼을 휘두르는 순간, 사울아비 하나가 달려들어 구리칼로 치우가람의 칼을 막았다. 치우가람이 버럭 소리를 쳤다. “감히 한웅님의 집에서 칼을!” 그러자 그 사울아비가 이를 악물고 되받았다. “네가 먼저 꺼냈다!” 그 사울아비와 치우가람은 한참을 겨루었다. 치우가람은 짧은 칼 하나로 사울아비의 능수능란한 장검을 잘도 막아냈으나 찔러들지는 못했다. 한바탕 난리가 벌어지자 한웅의 집을 경비하던 다른 사울아비들이 여기저기서 몰려오기 시작했다. 치우천은 기가 막혔다. 이게 무슨 일인가? 그러나 지금은 다른 방법이 없었다. 치우천은 여전히 지금의 사태를 깨닫지 못하고 멍해 있는 고시울률에게 다급하게 외쳤다. “사울아비들을 둥글게 세우시오_ 그리고 나와 다른 이들을 풀어주시오!” 고시울률은 무슨 말을 하려 했으나 하도 놀란 터라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다른 사울아비 한 명이 칼을 휘둘러 치우천의 묶인 것을 단번에 끊어주었다. 치우천은 고시울률에게 급히 외쳤다. “잘못하면 모두 죽습니다!” “나....... 나는....... 그러지 않았어. 나는 아냐!” 고시울률은 몸을 덜덜 떨며 칼에 베인 상처에서 흘러내리는 붉은 피만 바라보았다. “내가 대신 명령하게 해주십시오!” 치우천의 외침에 고시울률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치우천은 즉시 커다란 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나는 치우천이다! 사울아비들은 내 명을 따르라!” 치우천의 목소리가 힘 있게 퍼지자 뭐가 뭔지 모르는 상황에서 혼란스러워하던 사울아비들이 일제히 눈을 돌렸다. “이쪽을 등지고 둥글게 둘러서서 아무도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 묶여 있는 내 벗들을 풀어주고 그들에게도 무기를 주라! 어서!” 치우천의 빈틈없는 명령에 고시울률을 따라왔던 사울아비들은 급히 훈련받은 대로 어깨를 맞대며 둥글게 몸을 돌려 밖에서 아무도 들어올 수 없도록 했다. 계속해서 치우천의 근엄하기 그지없는 명령이 이어졌다. “스무 명은 활을 재어 이쪽을 겨누라! 무슨 일이 생기면 가차 없이 쏴라!” 고개를 돌려 치우천은 안쪽을 보고 외쳤다. “감히 한웅님 집으로 활을 겨누는 것을 용서하소서! 모두들 움직이지 마십시오! 절대로!” 그때 두건을 씌운 채로 끌려왔던 사람들이 풀려났다 그들은 바로 치우천의 사울아비 벗들이었다. 고시울률은 이미 치우천보다 먼저 들어왔던 그들을 모조리 잡아두고 있었다. 치우천은 어젯밤 고시울률과 담판을 하면서 증인을 세운다는 명목으로 그들을 모두 데리고 왔던 것이다. 쇠돌이와 부루벼락, 거서기와 삼 그리고 도단이가 바로 그들이었다. 치우천은 급히 외쳤다. “자네들은 무기를 들고 내 곁으로 오게!” 그들 또한 전혀 일의 영문을 모르고 정신이 없어 했지만, 치우천의 명령에 따라 즉각 움직였다. 그때 안에서 탄식 섞인 비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아, 이게.......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냐?” “비렴님! 저를 믿을 수 있습니까? 저는 절대 주신과 한웅님을 배신하지 않습니다!” 치우천이 방 쪽으로 고개를 돌려 외치자 비렴은 잠시 멈칫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병예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병예님은 어서 가셔서 솟대단군 중 독을 잘 아는 사람을 데려오십시오. 혼자 가셔야 합니다.” “알았느니라.” 병예는 급히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섰다. 이번에 치우천은 고시울률에게 고개를 돌렸다. “고시울률님, 우리는 좋건 싫건 같은 배를 탄 것입니다. 고시울률님이 죽으면 저도 무사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저에게 맡겨주십시오 제가 일의 잘잘못을 밝히겠습니다.” 고시울률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치우천을 보았지만 이내 마지못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이 그나마 정리되자 약간 안정을 찾은 것 같았다. “그래....... 그렇겠지.......” 치우천은 고시울률이 데려온 사울아비들을 향해 말했다. “모두는 내 말을 반드시 따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마구잡이로 싸움이 시작되고 모두가죽는다. 당장 죽지 않더라도 죽어도 벗어날 수 없는 큰 죄를 짓게 된다. 내가 책임을 지겠다. 그러니 반드시 내 말을 따르라.” 그러자 부루버들이 앙칼진 목소리로 외쳤다. “네가 무엇이냐? 무엇인데 감히 나서느냐? 당장 저놈의 목을 치지 못할까?” 치우천은 부루버들을 노려보며 당당하게 되받았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모든 것을 아는 사람은 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내 말을 들으시오!” “치우천....... 네놈이......” 치우가람이 쇳소리 같은 목소리로 끼어들자 치우천은 그쪽을 벼락같이 노려보며 말했다. “입 다물라. 저자가 감히 제일 먼저 칼을 뽑아 휘둘렀다. 다시 움직이면 활을 쏘아 꼬챙이로 만들어라!” “이.......” 치우가람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부루벼락이 날쌔게 달려 나가 칼을 그의 목에 겨누었다 “조용히 해.” 그리고 치우천은 쇠돌이를 남겨두고 거서기와 삼에게 눈짓을 하며 다시 방으로 들어섰다. 그러다가 도단이가 가만히 있는 것을 보고는 그의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도단이는 장님이라 그 눈짓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치우천은 먼저 사와라 한웅을 보았다. 사와라 한웅의 입가에 피가 흘러내렸고, 힘겨운지 눈을 반쯤 감고 누워 있었다. 치우천은 조용히 말했다. “소란이 벌어져서 퍽 안 되었습니다만, 지금 아니면 밝힐 기회가 없을 듯하옵니다.” 그리고 치우천은 비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좀 어떠하십니까?” “글쎄다....... 도대체 이것이 어찌 된 일인지........” 치우천은 짧게 탄식하며 심호흡을 했다. “말하자면 아주 긴 이야기가 되겠습니다만.......짧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어떻단 말이냐?” “제가 알기로 힘으로나, 싸움 기술로나 비렴님을 당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한 사람만이 아니라 백 사람이라도 혼자 상대하실 수 있으니, 비렴님이 무기를 드신다면 아무도 서툰 짓을 할 수 없겠지요.” 치우천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는 덧붙였다. “비렴님이 모든 것을 판단하십시오. 다만 제가 말을 끝내기 전에는 아무도 움직이지 못하게 하셔야 합니다. 제 이야기를 들으시고, 다 들으신 후에 모든 것을 확인해보십시오 다른 사람들은 절대로 이곳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아 참, 세 사람이 더 있어야 합니다. 하늘 제사 때 춤을 추었던 흰 단군과 검은 단군, 불그네라는 큰마누라님의 계집종도 불러야 합니다. 검은 단군이 올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너도 무기를 버리겠지?” “물론이오이다. 제 말이 틀리다면 저를 벌주십시오. 맞는다면 제가 말한 자를 벌주십시오. 물론 한웅님은 아니시옵니다. 아무 잘못도 없으십니다.” 그러자 고시울률이 의아한 듯 치우천을 바라보았다. 치우천은 다시 한 번 못 박듯이 단호히 말했다. “한웅님이 잘못하셨다면 누가 죄를 물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이 일은 한웅님과 저, 그리고 고시울률님과의 다툼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저는 방금 깨달았습니다. 이 다툼을 꾸미고 부추긴 자는 따로 있습니다. 그들을 잡아 따져보면 못된 꾀가 밝혀질 것입니다.” “무슨 꾀 말이냐?” 치우천은 어이가 없다는 듯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주신을 통째로 말아먹는 꾀 말입니다.” 그림자의 정체 모두 무기를 내려놓고 비렴 혼자만 칼을 들고 있었다. 아직 아침나절이었으나 모든 문과 창문을 닫았기에 방 안은 왜 어두웠다. 방 안에는 정신을 잃은 듯이 보이는 사와라 한웅과 비렴, 부소구슬과 부루버들, 치우가람과 치우바람, 부루위단과 고시울률, 그리고 거서기, 삼, 도단이가 있었고 부름을 받고 달려온 횐 단군과 불그네가 있었다. 검은 단군은 비울걸이 잡아서 어디다 가두었는지 오지 못했다. 우사 병예가 데리고 온 솟대단군이 한웅의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아 방 안에는 적막함만이 감돌았다. 솟대단군은 가져온 보따리를 한참 뒤지더니 작은 토기병을 꺼내 안에 든 것을 한웅에게 먹인 뒤에 입을 열었다. “뱀과 벌레에서 뽑은 강한 독입니다. 허나 다행히 얼마 드시지 않아 크게 위험하시지는 않을 듯합니다. 잘 듣는 약초 물을 드시게 했으니 큰 염려하지 않으셔도 될 것이옵니다.......” 그때 치우천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다른 독의 느낌은 없습니까?” “무슨 말인가?” “아주 천천히 몸을 망가뜨리지만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는 독 말입니다.” 솟대단군이 잠시 머뭇거리자, 치우천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계속 한웅의 상태를 지켜봐달라고 말했다. 먼저 비렴이 근엄에 가득 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주신의 풍백 비렴이 말하오. 저는 물론 한웅님을 뫼시지만, 안파견 한님께 맹세하건대, 옳은 일만을 따르오. 삼사의 권한으로 내가 판단을 내리겠소.” 삼사는 경우에 따라서 한웅의 잘못을 말할 권한이 있는 유일한 직책이었다. 비렴은 계속 말을 이었다. “먼저 치우천의 이야기를 들을 것이고, 그에 반대되는 이야기도 들을 것이오. 제가 절대 함부로 이리 할 수 없는 분들도 계시지만 지금이 문제는 너무도 심각하니 제 말을 따라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는 지나간 그 어떤 비밀도 숨기지 말고 털어놓아야 하며, 여기서 나온 이야기는 절대 밖으로 나가서는 아니 되오 이참에 모든 것을 밝히지 않으면 아니 되니, 부끄러운 이야기나 옛날의 죄 역시 숨기지 말고 밝혀야 할 것이오. 저는 이 일의 판정을 내리는 것 말고는 어떤 것도 남에게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모두 다 사실대로 말할 것을 맹세했으면 합니다.” 비렴이 먼저 안파견 한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시작하자 한사람씩 걱정스럽고 불안한 눈빛으로 저마다 맹세를 했다. 비렴은 사울아비들에게 나머지 사람들이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감시하라 명령한 뒤에 치우천만 데리고 외진 방 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럼 이야기해보아라.” 치우천은 천천히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제 나름대로 이것저것 아귀를 맞춘 이야기입니다. 말하다 보면 높은 분들의 좋지 못한 이야기가 나올지도 모릅니다. 이해해주십시오.” “이를 말이냐? 너 역시 숨김없이 말해야 할 것이다. 나를 믿어라.” “비렴님말고는 이야기할 수도, 뒷일을 부탁할 수도 없습니다. 정말 비렴님이 계셔서 다행입니다.” “치우천, 나는 너를 좋은 녀석이라 본다. 허나 지금은 참 지긋지긋하고 싫은 녀석이기도 하다. 항상 말썽이 벌어지고 문제가 생기니 말이다. 허나 내가 너를 믿고, 네 말을 믿는 것은 네가 좋아서가 아니다. 아무리 내용이 엄청나더라도 네 생각이 가장 깊고, 네가 말하는 것이 가장 앞뒤가 맞으며, 가장 진실에 가깝기에 네 말을 듣고, 믿는 것이니라. 만약 네가 거짓을 말하면 언제든 너를 내칠 수 있다. 알겠느냐?” 비렴이 날카롭게 쳐다보며 말하자 치우천은 되레 흡족하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신 분이니 제가 더 믿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비렴의 빛나는 눈을 보며 치우천은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스물여섯 해 전, 비렴님은 식인종인 가리족을 토벌하러 나갔습니다. 비렴님과 함께 나선 동맹부족들은 가리족을 물리치고 전멸시켰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그때, 거의 몰락한 가리족을 몰아 번개범이 사는 구름골로 몰아넣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치우괄괄님이었고, 그는 한웅의 표식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치우괄괄님은 천부인의 상징이 새겨진 구리 물건을 주어 그들에게 팔아 쓰게 만들었습니다. 허나 그것은 사와라 한웅님이 직접 시킨 일이 아니었고, 큰마누라님이 시키신 일이었습니다. 나중에 확인해보시면 분명해질 것이오나 워낙 마음의 상처를 입을 수 있는 일들이니 조심해서 다루어주십시오.” “걱정 말고 말해보아라.” 치우천은 번개범과 부소구슬의 이야기부터 하기 시작했다. 부소구슬이 처음 번개범과 가리족을 기르기 시작한 이유는 한웅에 대한 증오심이었다. 이미 두 번째 부인을 얻은 사와라 한웅에 대한 반감의 표현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부소구슬은 몇 년 지나지 않아 그 일을 그만두었다. 열여덟 해 전에 그 일을 해주던 치우괄괄이 중풍으로 쓰러졌고, 그 다음 네 해 동안 치우 집안의 다른 사람을 시켰으나 종내는 그만두고 말았다. 번개범을 키우는 것이 힘겨웠을 뿐만 아니라, 자신도 이제 늙어서 일을 벌이기보다는 조용히 지내는 것이 좋을 듯했기 때문이다. 가리족은 두해 동안 물건이 오지 않자 혼란에 빠졌으나, 두 해가 지나자 다시 새 사람이 왔다. 즉 열두 해 전이며 치우천의 어머니 미리내가 구름골에서 아흡구비를 얻은 뒤 최후를 맞은 해였다. “어젯밤, 마누라님은 잡혔던 저를 신시 밖으로 내보내시려 했습니다. 그리고 그때 번개범을 부린 것은 마누라님이라고 말씀하셨지요. 허나 그것은 사실과 다릅니다.” “다르다니?” “마누라님은 번개범이 제 어머님을 해친 것으로 알고 계십니다. 하지만 저는 그때 어머님의 상처를 직접 보았고, 나중에 번개범과 직접 맞닥뜨려도 보았습니다. 비렴님도 아시겠지만 번개범은 보통 호랑이 정도의 크기가 아닙니다. 산더미만한 크기이지요. 제 아우는 몹시 덩치가 큰데 그놈의 눈꺼풀에 끼어 죽을 뻔한 적도 있습니다. 그런 번개범이 낸 상처라 보기에는 너무도 작았습니다. 제 어머님은 사람이 해쳤습니다. 그것도 가리족 같은 야만족이 아니라, 아주 예리한 구리 무기를 가진 사람이지요. 마누라님은 그런 세세한 것까지는 모르고 그냥 말씀하신 것이겠지요. 누군가의 꾐에 넘어갔든지, 협박을 받아서 말입니다.” “그럼 그게 누구란 말이냐?” “마누라님말고, 나중에 번개범을 부릴 생각을 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번개범을 얻게 되자 그 비밀을 유지하려고 주변에 지키는 사람을 두었겠지요. 어머님은 그 사람들에게 죽음을 당한 것입니다. 마누라님은 자신이 그런 것이라 생각하시고 아직까지도 슬퍼하시지만 말 입니다.” “흠.......” “좌우간 예전에 저는 그 사람을 그림자라고 불렀습니다. 드러나지 않는 사람이라서 말입니다. 일단 판단은 비렴님이 하시고, 이야기나 먼저 들으십시오. 그리고 일곱 해 전, 태산 회의가 열렸습니다. 그리고 그때 번개범이 나타나 한웅님의 행차를 습격했습니다. 저는 후에 번개범과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었고, 후에 제 벗 하나가 다시 구름골을 찾아가 번개범에게 들은 이야기를 모아왔는데, 그때 그 일을 시킨 것은 한웅님의 천부인 표식을 지니고 있는 주신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천부인 표식이라! 그건 한웅님말고는.......” “아니, 한 분 더 계십니다. 마누라님도 계시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다만....... 마누라님은 번개범에서 손을 떼셨지 않느냐?” 치우천은 빙긋 웃었다. “그 그림자가 마누라님을 협박했다면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뭔로 마누라님을 협박했을까?” “아마도 예전에 번개범을 기른 사실로 그리했겠지요. 사실 마누라님이 한웅님께 맞서기 위해 번개범을 기르기 시작한 것은 분명하니까요.” 비렴의 이마에서 땀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이것은 예사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너, 네 말에 책임을 질 수 있겠느냐?” 치우천은 살짝 웃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도 말씀 드렸다시피 마누라님께 직접 들은 말입니다.” “바로 어젯밤에 말이냐?” 치우천은 비렴에게 부소구슬, 고시울률과 나누었던 이야기를 모두 들려주었다. 비렴은 갈수록 막막해지는 것 같았다. “허....... 이것 정말 보통 일이 아니구나.” 치우천은 웃는 표정을 거두고 다소 심각한 얼굴이 되어 비렴의 표정을 살폈다 “이제 누가 그림자인 술 아실만도 합니다만......” 비렴은 눈썹을 찡그리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너무 복잡하구나. 여러 사람이 벌인 일들이 서로 얽힌 것 같다. 마누라님도 계시고 한웅님도 계시고 고시울률에 치우가람, 부루버들까지......” 치우천은 잠시 생각을 고르다가 느닷없이 말했다. “지나족도 분명 이 일에 끼어 있습니다.” “지나족?” “그렇습니다. 유망은 공상 싸움에서 정보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예전에 유망 스스로가 주신에서 정보를 얻고 사람들과 결탁하는 일은 그만두겠다고 말하기까지 했습니다.” “유망이라....... 유망이라........” “그리고 이건 짐작입니다만, 헌원도 끼어든 듯합니다.” “헌원이? 어째서?” “잊지 마셔야 할 것이 있는데, 태산회의 때 한웅님은 번개범에게만 당한 것이 아니라 늑대와 소 떼에게도 습격을 받으셨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늑대겠지요 늑대가 소 떼를 몬 것이니까요” “그런데 그것이 어째서?” “헌원의 부하 중 비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늑대를 마음대로 부리는 기인입니다. 예전 카린에서 저는 헌원에게 비휴가 그 일에 끼었냐고 직접 물었는데, 헌원은 ‘비휴는 간 적이 없다’고만 했습니다.” “헌원이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닐까?” 치우천은 고개를 저었다. “헌원은 절대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럼 헌원은 관련이 없잖느냐?” 치우천은 다시 슬며시 웃었다. “저도 처음엔 그런 줄 알았는데, 그렇게 보지 않을 수도 있더군요. 나중에 저는 몇 번인가 본의 아니게 거짓말을 해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그때 저는 이렇게 생각했죠. ‘거짓말 같은 것은 하늘의 노여움을 사니 절대로 할 수 없다. 더구나 거짓말을 하는 것은 내 스스로의 가 치를 떨어뜨리는 일이다. 그러니 할 수 없다’고요.” 비렴은 어이가 없는 듯 ‘허’ 하며 웃었다. “누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느냐?” “그래서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거짓말을 하지 않더라도, 상대가 다르게 생각하도록 말하면 그만이다.’ 그래서 그렇게 했더니, 마음도 편하고 거짓말을 한 것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물론 좋은 일은 아닙니다만 적어도 하늘이 벌을 주지는 않을 것 같더군요.” 말을 듣다가 비렴은 눈치를 챘다. “그럼 헌원도.......?” “그렇습니다. 헌원은 거짓말은 하지 않으니, 비휴가 직접 그리 간 것은 아닐 겁니다. 허나 비휴가 가르친 사람이나 부하가 갈 수도 있고, 늑대들만 풀 수도 있습니다. 헌원은 결코 ‘자기가 하지 않았다’고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비휴가 가지 않았다고만 했죠. 그렇게 많은 늑대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은 비휴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때 천 마리가 넘는 소를 풀어서 그런 일을 꾸밀 만큼 재산이 많은 사람도 몇 안 됩니다.” “그럼 헌원도 한웅님을 해치려 했단 거냐? 어째서? 사와라 한웅님은 헌원을 지나족 지배자로 올려준 은인이 아니더냐?” 치우천은 쓴웃음을 지었다. “헌원은 그런 은덕 하나로 감지덕지할 인물이 아닙니다. 그때 주신에 한웅님이 없어지면 누가 한웅님이 되었겠습니까?” “고시울률님이겠지.” “그러면 주신이 잘 돌아가겠습니까?” 비렴은 한숨을 쉬었다. 치우천은 이어서 말했다. “제가 보기에 우리 주신 입장에서는 헌원이 가장 위험한 사람입니다. 유망도 위험하나 헌원에 비할 바가 못 됩니다. 유망은 잦은 싸움으로 힘을 많이 썼지만, 헌원은 애당초 유망 쪽에 발길을 끊고 오랫동안 힘을 쌓아왔습니다. 유망이 주신을 한 번 정도 이겨보려 하는 사람이라면, 헌원은 주신을 통째로 먹으려는 사람입니다 모든 세상을 자기 손에 넣기 위해서라면, 헌원은 그 어떤 짓도 할 것입니다. 주신이 흔들리는 좋은 기회를 맞는다면 그 무엇이든 마다할 리 없습니다.” 비렴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물었다. “너는 어찌 헌원 이야기만 나오면 흥분하는 게냐? 너무 지나치지 않으냐?” “세상에 헌원의 마음속을 들여다볼 수 있는 것은 저뿐입니다. 유망도 위험하고 그림자도 위험하지만, 주신을 가장 위협하는 것은 헌원일 것입니다!” 치우천이 답답한 듯 약간 목소리를 높였으나 비렴은 당부하듯이 되받았다. “헌원이 그런 꿍꿍이가 있더라도 아직 일을 벌이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꼬투리를 잡히지 않은 이상 아무도 네 말을 믿지 않을 것이다. 믿는다 해도 어떻게 손을 쓸 수 없지 않느냐? 지금 중요한 이야기가 많으니 그 이야기는 그만 하자. 좌우간 그 이야기부터 결론을 내자. 그럼 번개범을 부려 한웅님을 습격한 것은 그림자라는 말인데.......” 비렴이 차분하고도 진중하게 말하자 치우천도 애써 흥분을 가라앉히고 말했다. “그렇습니다. 물론 유망도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거기에 헌원이 끼어들었는데, 헌원은 유망님의 계획이 만에 하나 실패할 것을 대비하여 두 번째 함정을 덧붙인 것이 틀림없습니다.” “뭐 하러 그렇게 복잡한 짓을?” “헌원은 신중한 사람입니다. 일이 성공하건 실패하건, 세상의 그 누구도 자신이 그런 것을 모르게 일을 꾸밀 사람이 바로 헌원입니다. 유망의 계획이 성공하면 좋은 것이고, 실패할 경우 두 번째 계획을 세우면 한웅님이 살아남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번개범이 강하다고는 하나 한웅님 옆에는 주신 삼사와 많은 사울아비들이 있습니다. 실패하기 쉽다고 여겼겠지요. 사실 그때를 돌이켜보면, 번개범이 사납게 날뛰었어도 한웅님에게는 조금도 피해를 주지 못 했습니다. 한웅님이 정말 위험했던 건 두 번째 습격이었습니다.” “그건....... 그렇구나....... “더구나 두 번째 습격으로 한웅님을 해치게 된다 해도, 사람들은 오히려 첫 번째 범인을 찾는 데 더 힘을 쓸 것이 분명합니다. 본 사람이 더 많을뿐더러 신수까지 나타났으니 더 놀라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계획도 첫 번째 계획을 세운 녀석이 신중하게 파 놓은 함정이라 생각하기 쉽겠지요. 저는 헌원과 몇 차례 겨루었지만, 헌원은 한 가지 수에 모든 것을 거는 계획을 짜지 않습니다. 몇 배씩 더 많은 사람을 쓰고, 몇 배로 더 많은 함정 을 파놓는 사람이 헌원입니다.” “헌윈 문제는 나중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다시 우리 문제로 돌아가자꾸나. 그러면 그 그림자는 누구란 말이냐?” 치우천은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 “짐작이 가지 않으십니까?” “물론 한웅님은 아니시겠지?” 치우천은 고개를 가로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한웅님이야말로 가장 크게 속고 계신 분입니다. 그러니 정말 일이 어려워졌지요. 그림자는 모든 책임을 한웅님이 뒤집어쓰도록 함정을 팠습니다. 우리는 일의 일부를 알아내어도 한웅님을 탓할 수도 없고, 한웅님 스스로가 그 그림자의 존재를 모르니까요 아니, 믿지 않으려 하시는지도 모르지요.” “믿지 않으려 하시다니?” “한웅님은 나이가 너무 많으십니다. 물론 나이가 많다고 아이를 보지 못하란 법은 없습니다만 한웅님은 이미 아주 오랫동안 병으로 고생하셨습니다. 더구나 독까지 드셨습니다. 그런 분이 과연 아이를 낳을 수 있을까요?” “솔직히 나도 믿어지지 않는다. 허나 한웅님 스스로가 자기 아드님이라 하시는데......” 치우천은 침울한 표정으로 천천히, 그러나 힘주어 말했다. “비렴님, 예전 일을 생각해보십시오. 제가 사막에 버려진 일 말입니다. 한웅님은 남자로서의 자존심을 아주 중요하게 여기는 분이십니다. 저는 그때 한웅님의 목숨을 구했으면서도 소녀 사건 때문에 한웅님의 자존심을 건드려 사막에 버려졌습니다. 너무나도 외람된 말씀입 니다만, 일단 그 모든 일과 함께 생각해보아도 되겠습니까?” "그래라. 다만 다른 사람에게 함부로 입을 놀려서는 아니 된다.“ “알겠사옵니다. 자, 한웅님이 어여뻐하시는 부루버들님에게 아들이 생겼다 들었을 때, 한웅님은 어찌하셨겠습니까? 아마 우리 못지않게 한웅님 스스로 의심하셨을 것입니다. 허나 전혀 증거가 없고, 아이를 보고 예쁘다는 마음이 드셨을지도 모릅니다. 한웅님은 정말 외로우신 분이셨으니까요. 고시 집안 분이시지만 고시울률님과는 결코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한웅님은 가까운 일가붙이들이 없습니다. 그렇게 외롭고 나이 많은 분에게 귀여운 아들이 태어났다고 하니 그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나이 많은 분들일수록 아기들을 좋아합니다. 한웅님 스스로도 처음에는 믿지 않으려 하셨겠지만 결국 그 아기를 예뻐하시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 하셨을지도 모르지요. ‘누가 뭐라든 이 아기는 내 아이다. 이 아이의 아버지를 의심하는 놈은 용서치 않을 것이다. 그보다 더 큰 망신이 어디 있는가? 내가 정을 주고, 내가 내 아들로 삼으면 그뿐 아닌가? 이 아기는 내 아이다!’하고 말이죠.......” 단숨에 말을 끝내고 치우천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비렴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나는 한웅님 곁에서 수십 년을 보냈는데, 네가 한웅님 성격을 더 잘 아는구나.” “한웅님 생각 하나에 목숨이 달려 있고 보면, 한웅님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치우천은 머리를 긁적이며 덧붙였다. “물론 한웅님의 뜻을 이어드릴 수도 있습니다. 한웅님의 피를 이어 받지 않아도 사실 별 문제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한웅님이 돌아가시고 나서를 생각하면....... 그럴 수 없습니다. 사와라 한웅님이 돌아가시고 그 아이가 한웅이 되어도 여전히 부루버들님이 있으며, 그 그림자가 뒤에 있습니다. 사와라 한웅님은 고시 집안의 두 번째 한웅님이시니 아드님까지는 한웅이 될 수 있잖습니까? 물론 고시울률님도 되실 수 있습니다만, 고시울률님이나 다른 사람이 다 없어진 상태에서는 당연히 부루버들님의 아버지인 부루위단님이 권세를 쥐겠지요. 아이가 철없는 동안에는 물론이구 철이 들어도 여전히 부루버들님의 손아귀와 그림자의 손아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아이는 그들 손에서 자랄 테니까요 결국 그러면....... 주신은 그림자의 손에 들어갑니다. 더 큰 문제는, 그러기 위해 주신의 힘을 다 떼어 팔아먹을 것 같다는 점입니다. 그 그림자는 자신의 능력을 너무 과신하고 있습니다. 못된 음모를 꾸미는 데는 제일이겠지만 그가 그밖에 많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는 믿기 어렵습니다. 그러면 그게 사람입니까? 하하, 좌우간 그렇다면 과거 그림자의 약점을 아는 지나족에게 땅을 떼어주거나, 다른 부족과 발길을 끊어 결국 지나족 세상이 되겠지요. 참....... 뭐라 말하기조차 힘듭니다만.......” “그럼 부루위단이 그림자란 말이냐?” “부루위단은 그림자의 손에서 놀아나는 사람일 뿐입니다.” “그럼? 네 생각, 너무 지나친 것은 아니냐?” “지나치지 않습니다. 하나도지나치지 않으며, 더 나쁘게 될 수도 있습니다. 헌원이나 유망이 당장 이 혼란을 틈타 쳐들어온다면 누가 막겠습니까? 제가 죽으면 제 아우나 다른 부족들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며, 고시울률님이 돌아가셔도 동쪽 땅은 거의 반란에 싸일 겁니다. 물론 신시를 함락시킬 만한 사람은 없을지도 모르지만, 주신은 그 날로 힘을 잃고 서서히 망해가기 시작할 겁니다. 그림자 한 사람의 욕심 때문에 말입니다. 하나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비렴은 몹시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그림자는 결국 한웅님의 아드님이라는....... 그 아이의 아버지란 뜻이겠지?” 치우천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바로 그 점을 이용하여 한웅님의 마음에 못된 생각을 심어주었을 것입니다. 뭐, 부루버들을 시켜 ‘이 아이의 앞날이 캄캄하다’라고 두어 번 울며 매달리게라도 했을지 모르죠. 한웅님은 자연히 아이를 지키려고 고시울률님과 저를 없앨 계획을 꾸미셨을 것입니다. 한웅님이 누구의 말을 듣고 움직이는 분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면 누군가가 한웅님 스스로 움직이도록 부추겨야 하겠지요. 정말 무서운 계략입니다.” “짐작이 간다만....... 나는 믿을 수 없다.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는구나.” 괴로운 듯 비렴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으나 치우천은 냉정하게 잘라 말했다. “모든 일이 하나로 얽혀 있습니다. 물론 많은 사람이 끼어 있고, 저마다 벌인 일들이 많아서 정말 알아내기 어렵습니다만, 그림자는 그 모두의 뒤에 있었습니다. 결국 그의 목적을 생각해보면, 주신을 자기 손에 넣겠다는 생각, 오로지 그 하나뿐이었습니다 고약하고도 대단한 놈입니다.” 치우천은 처연한 표정으로 위를 올려다보았다. 옛 생각이 떠오르자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처음에는 저도 그런 줄 모르고 많은 세월을 헤매었습니다. 그 그림자는 제 어머님을 해쳤으며, 지나족과도 내통했고 한웅님을 위험에 빠뜨린 이 모든 일들의 뒤에 있습니다. 그가 바라고 한 짓도 있고 모르고 한 짓도 있겠습니다만....... 다른 것은 다 말고라도 한웅님의 마누라와 정을 통해 아이를 낳고 그 아이를 조종하려는 음모를 꾸민 것만으로도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그 죄를 줄인다 해도 그 책임은 그가 져야 합니다.” “대체 그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나는 통 헷갈리느니.......” “일이 아주 복잡합니다만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그 그림자는 첫째로는 지나족과 내통한 자이며, 주신의 일을 잘 알고 수작을 부릴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신시에 있는 사람이겠지요.” “그렇겠지.” “두 번째로, 저나 고시울률님 등, 다른 힘 있는 주신 사람들을 몰아 낼 목적을 지닌 사람입니다.” “그도 그렇다.” “여기까지는 전에 생각했던 것입니다만, 답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허나 어제와 오늘 사이에 마누라님을 만나 뵙고 고시울률님과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마지막으로 한웅님을 뵙게 되어 모든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세 번째로, 그림자는 마누라님이 번개범을 부리는 것을 알 고 있었으며, 번개범을 직접 조종하거나 그것을 놓고 마누라님을 협박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 역시 신시에서 상당히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안 됩니다.“ “그도 그렇다.” “네 번째, 그림자는 부루버들님과 가깝고 자주 만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것도.......” 치우천은 살짝 실없이 웃어 보이며 말했다. “그리고 그림자는 어느 정도 젊은 사람이어야 할 것입니다.” “음? 그건 어째서냐?” “대단히 송구스러운 이야기입니다만...... 부루버들님과 가까워지려면....... 늙은 사람이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허....... 그렇다면 누구란 말이냐?” 비렴이 놀란 표정을 짓자 치우천은 주저하지 않고 단숨에 말했다. “이 모든 것을 만족시키는 사람은 단 한 명뿐입니다. 바로.......치우가람입니다!” 새로운 시작 “설마....... 정말 그 말이 사실이냐? 하지만 나는 이해가 되질 않는구나.” 비렴이 쉽게 납득하지 못하자 치우천은 다시 설명을 했다. “첫 번째와 네 번째부터 같이 풀어보겠습니다. 태산 회의에서 저는 유망의 막사에 잡혀 있었는데, 소녀의 도움을 받아 연락을 하려 했죠. 그때 제 아우가 소녀와 솟대 밑에서 만났는데, 개 백 마리를 들먹였던 사울아비 기술을 지닌 녀석과 싸웠습니다. 그 녀석은 치우가람 같았습니다만, 그때는 확실히 밝혀내지 못했습니다.” “그렇지. 그거야 증거가 없었지.” “헌데 중요한 것은 따로 있습니다. 그때 그 사실을 한웅님께 말한 사람은 부루버들님입니다. 그 말을 전한 사람이 치우가람이든 아니든, 좌우간 그 그림자는 태산 회의부터 부루버들님과도 가까웠다는 뜻이지요. 이 점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부루버들님과 치우가람이 얽혀 있다는 증거가 되어서? 허나 그때 솟대 밑에 나온 녀석이 치우가람이라는 증거가 없다.” “허나 치우가람말고 누가 있습니까? 부루버들님과 치우가람이 가깝지 않았으면 그 말이 한웅님께 전해질 리 없습니다. 솟대 밑에 만난 녀석이 치우가람이 아니라 다른 녀석이었으면 부루버들님을 뵐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부루버들님이 어떻게 제 아우와 소녀가 솟대 밑에서 만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단 말입니까? 그 말은 한웅님을 죽이려 한 음모에 치우가람과 부루버들님이 모두 얽혀 있다는 증거입니다. 증거는 없지만, 그것 아니고서는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때부터 치우가람과 부루버들님이 가까웠다는 말인가?” “분명합니다. 녀석이 내 아우의 눈에 띄어 겨루기까지 했는데, 그런 일을 마구 나불거리고 다닐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가까운 사람이나 일을 같이 꾸미는 사람 아니고는 먼저 이야기할 턱이 없습니다. 그때는 사막에 버려지는 판이라 저도 제대로 이야기하지 못했습니다만........” 비렴은 뭔가 골치 아픈 생각을 하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치우천은 마치 그 생각에 덧붙이듯 말했다. “치우가람은 젊고, 제법 여자들의 눈을 끌게 생겼습니다. 더구나 하늘군대의 사울아비 큰스승 자리를 맡아서 한웅님의 집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웅님의 집에 있는 부루버들님과 그 누가 만날 수 있겠습니까?” 치우천은 슬쩍 비렴의 눈치를 살피며 약간 짓궂은 말투로 말을 이었다.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저는 비렴님이 혹시 그림자가 아닐까 의심해본 일이 있었습니다. 고시울률님을 의심한 적도 있고 솟대단군을 의심하기도 했습니다. 나아가서는 제 아버님을 의심하기까지 했습니다. 허나 다들 부루버들님의 눈에 들기에는 좀 나이가 드셨더군요. 수염이 길게 자라신 분들 아닙니까?” 비렴은 비로소 맥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허 참.......나야 당연히 생각해보았겠지만 네 아버님까지 의심했느냐?” “의심한 것이 아니라 의심하려고 애써본 것이지요.” “과연. 좌우간 계속해 보거라.” “허나 어제 부루버들님에게 아이가 있다는 것을 아는 순간, 모든 것이 명백해졌습니다. 부루버들님은 나이 많은 한웅님을 모십니다. 그렇기에‥‥ 죄송한 말입니다만, 기왕 바람을 피운다면 조금이라도 나이가 많은 사람은 거들떠보기도 싫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더라도 다른 분들은 부루버들님과 가까이 지낼 수가 없습니다. 한웅님의 집을 지키는 사울아비들도 부루버들님의 거처에는 가까이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 부근은 아주 사나운 여자 종들이 지키지요? 그곳을 어떤 남자가 과연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한웅님말고는 딱 두 사람, 부루버들님의 아버지인 부루위단과 한웅님의 집을 지키는 치우가람, 그들만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마누라님의 종인 불그네의 말로도 부루버들의 말을 전하러 온 사람은 부루위단이 아니면 치우가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부루버들님이 몇 달 넘게 밖에 절대 나오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들었지요. 별것 아닌 이야기였지만 거기서 이번 일이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여자가 몇 달이나 바깥출입을 못하는 이유는....... 아무래도 아이를 가졌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죠.” 비렴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다. 그거야 치우가람을 문초하면 알 수 있겠지. 허나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그저 치우가람이 부루버들님과 바람을 피운 증거밖에는 나오질 않는다. 적어도 네가 말한 그 그림자라는 것이 분명해지려면 제대로 된 증거가필요하지 않겠느냐? 그렇다고 한웅님이 아이를 낳을 수 있나 없나 알 수 없는 노릇도 아니냐?” 치우천은 조목조목 따져 말했다 “치우가람 놈은 분명 주신을 말아먹으려 했습니다. 놈이 나이가 어렸고, 생각 또한 자주 바뀌었기 때문에 되레 그놈의 정체를 알아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너무 많은 짓을 저질렀고, 지위가 그리 높은 편이 아닌데다가 고시울률님의 밑에 웅크리고 있어서 설마설마 했던 겁니다. 허나 그놈은 다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움직였을 뿐입니다. 처음 치우 집안의 웃뜸이 되, 번개범의 비밀을 치우괄괄 아저씨에게서라도 전해 들었겠지요. 그때부터 놈은 야심을 가졌을 겁니다.” “그것까지 어찌 짐작할 수 있느냐?” “저는 그 녀석과 같이 자란 셈입니다. 놈이 감추고 있는 것은 몰라도 놈의 사람됨이나 변하는 과정을 모를 수가 없지요.” “하지만 말이다......” 비렴은 신중하게 말을 이었다. “네 말대로라면 번개범을 손에 넣은 것이 그림자라고 했고, 그림자는 치우가람이겠지?”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때 치우가람은 몹시 어렸잖느냐?” “제가 지금 스물넷이니 그는 지금 스물일곱일 겁니다. 열두 해 전이라면 열다섯 살이겠지요.” “그래, 맞다. 열다섯 살이다. 그런 나이에 번개범을 부린다고? 그건 좀........” 비렴이 이의를 제기했으나 치우천은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더 말이 됩니다. 그는 그때 치우괄괄 아저씨가 맡으셨던 웃뜸자리를 물려받고 큰 재산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치우괄괄아저씨는 마누라님의 명령을 받고 비밀리에 번개범을 감시했었습니다. 그 일을 다른 누구에게 말했겠습니까? 치우괄괄님의 성격으로 봐서는 남에게 그런 비밀을 절대 이야기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허나 치우가람만은 알 수 있었겠지요 열다섯 살이면 어리기는 합니다만, 그렇다고 전혀 세상일을 모를 나이는 아닙니다. 꾀 많고 호기심 많은 치우가람 녀석이라면 그런 재미있는 일을 놓칠 리 없었겠지요. 엄청나게 많은 종을 부리게 되고, 엄청나게 많은 재산을 가지게 된 열다섯 살짜리 꼬마야말로 그런 짓을 하기에 딱 알맞습니다.” “그건 참......” 비렴은 믿기 힘든 듯했으나 치우천은 신랄하게 파고들었다. “구름골에 신수가 있습니다. 허나 그놈은 아버지가 그것을 부리는 자들을 알아냈습니다. 그거야말로 얼마나 입맛 당기는 일이었겠습니까? 번개범을 손에 넣으면 세상이 모두 자기 것이 되리라는 망상에 사로잡혔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다시 천부인이 새겨진 집의 물건을 가지고 가서 가리족을 계속 부리려고 했을 것입니다. 게다가 믿음직스럽지 못해 주변에 지키는 사람까지 두고 말입니다. 아니면 물건이 모자라 마누라님을 은근히 찾아가 얻어냈는지도 모릅니다. 그 점은 마누라님께 비렴님이 물으시면 확인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헌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누군가가 구름골에 들어가서 번개범을 만났고, 그곳을 지키던 사람들이 그 사람을 죽였습니다. 바로....... 제 어머님 말입니다.......” 치우천은 다시 침통하게 말했다. “그때부터 치우가람 놈은 이유 없이 저희 형제를 괴롭히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그전부터도 탐탁치는 않았겠지만 죽이지 못해 안달할 지경은 아니었습니다. 저희도 그전부터 그놈 형제를 미워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어릴 적부터 같이 놀고 자랐습니다. 그런데 놈들이 우리를 미워하자 우리도 놈들을 미워하게 되었지요. 헌데 돌이켜보니....... 정말 그때부터 그놈이 먼저 변했던 것 같습니다. 그 후로 계속 우리를 못살게 굴고 쫓아내려 했으며 심지어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아마....... 아마도 제 어머니를 자기가 죽인 셈이라는 생각 때문에 그리 했는지도 모릅니다. 아아........ 그렇게 따지면 고시울률님과 우리가 갈라서게 된 것도 그놈의 농간이 아니라고는 못하겠지요. 그때 놈은 고시울률님의 밑에 달라붙었지요. 이제야 모두 이해가 되더군요.” 치우천은 어머니 생각에 눈물을 글썽이며 잠시 조용히 있었다. 비렴도 그런 치우천을 숙연하게 지켜보았다. 잠시 후 치우천이 입을 열었다. “좌우간....... 그렇게 키워오던 번개범이었지만 놈은 나이가 들면서 신수를 부리는 것이 몹시 까다롭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신수란 것이 속을 통 알 수 없고, 언제 어디로 날뛸지 모르는 존재니까요. 그래서 놈은 지나족과 내통해서 번개범을 이용하여 한웅님을 해치려 했지요 아마도 헌원과 내통했을 것입니다. 혹은 유망과도요 태산 회의 솟대 아래서 제 아우가 들은 이야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허나 그놈도 그때 한웅님의 행렬을 따라가지 않았느냐?” 치우천은 고개를 저었다. “싸움이 벌어졌을 때 그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싸움이 끝나고 나타났지요.” “놈은 무엇을 바라고 그렇게 했을까?” “그때는 지나족의 힘을 업고 일을 꾸며보려 했을 것입니다. 유망이나 헌원이 한웅님이 없는 틈을 타서 주신을 치고, 놈을 한웅으로 만들어주겠다고 했는지, 아니면 큰 땅이라도 떼어준다고 했는지 그것까지는 모르겠습니다. 그건 비렴님이 반드시 알아내주시기 바랍니다.” “흠......”그리고?" “그런데 그 일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놈은 제 아우의 고발로 조금 위험해졌습니다만, 그때 부루버들님을 시켜 되레 저를 모함하여 사막에 버려지게 했지요 이것도 작은 증거입니다만, 그 후 사막에서 저희 형제가 살아날까 봐 놈들은 말도 못할 정도로 엄청난 상금을 우리 목에 걸었습니다. 그 정도의 상금은 제아무리 치우 집안의 웃뜸이라도 걸 수 없을 정도의 높은 상금이었습니다.” “얼마나 되기에?” “아마 소 삼천 마리에 구리 솥 다섯 개, 구리칼 백 자루였다고 기억합니다.” “허!” 비렴이 놀라며 어이없어하자 치우천은 씁쓸하게 말했다. “놈은 자기가 지은 죄 때문에 저를 그만큼 껄끄러워했고, 또 그렇게 엄청난 물건을 지나족이든지 누구에게 받아 쌓아두고 있었을 것입니다. 놈을 다그치실 때 그런 많은 물건이 어디서 났느냐고 따지셔도 좋을 듯싶습니다. 좌우간 사실 순리대로라면 그 후에 놈은 한웅님의 의심을 받아 이렇게 높은 자리로 올라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루버들님과 고시울률님의 힘, 그리고 마누라님의 힘까지 업어 그렇게 되었으리라 봅니다.” “마누라님의 힘을 업었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놈은 사악한 꾀를 타고났습니다. 번개범을 끌어낸 것은 분명 그 놈입니다. 허나 놈은 마누라님에게 협박했을 것입니다. 마누라님이 키우던 번개범이 한웅님을 덮쳤다고 말입니다. 누구라도 그런 상황에서는 마누라님을 의심하게 될 것입니다. 애초에 번개범을 키울 생각을 한 것은 마누라님이시니까 말입니다. 그것을 빌미로 마누라님도 꼼짝 못하게 만들었겠지요. 어젯밤 마누라님이 저를 풀어주려 하신 것도 놈의 꾀일 것입니다. 제가 나서서 신시를 흔들어주어야 고시울률님과 저를 둘 다 쓰러뜨릴 수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치우천의 목소리는 어느덧 침울하게 변했다. “좌우간 놈의 목적은 주신을 송두리째 흔드는 것이겠지요. 안 그러고는 약해진 치우 집안 출신으로, 더군다나 전쟁터를 누비며 공을 쌓을 재주도 없는 처지에 그토록 높은 자리로 올라갈 수는 없을 것이니까요. 놈의 계획대로라면 주신은 지나족의 습격을 받아 몹시 위험해지고 힘 있고 능력 있는 사람들이 모두 떼죽음을 당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제가 나섰기에 주신은 지지 않고 지나족이 계속 졌습니다. 그건 놈의 예상과는 크게 다르게 벌어진 일이었겠죠. 제 이야기를 제가 하니 쑥스럽습니다만......” “너는 충분히 그만한 공을 세웠다. 자랑해도 절대 쑥스러워할 것 없느니.” 치우천은 그에 대꾸하지 않고 다음 이야기로 넘어갔다. “그 뒤 저는 유망과 싸웠습니다. 그런데 유망은 저에 대한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정보를 빼돌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도단이, 질쾌와 일부러 싸움을 하고 그들을....... 치우가람, 바람에게 접근하도록 일을 꾸몄습니다. 그때 문득 듣자니 아주 의미심장한 이야기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게 무엇이냐?” “자기들에게 협력하면 솟대단군이나 삼사자리 중 하나를 마음대로 줄 수 있다고 했다더군요. 그때는 그 말을 릴이 생각하지 않았습니다만.......” “그들이 무엇인데 그런 자리를 마음대로 해?” “물론 그런 일은 지금의 고시울률님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보다 훨씬 큰.......그러니까 한웅님을 등에 업지 않고서는 안 될 일이지요.” “그냥 허풍을 친 것인지도 모르잖느냐?” “놈은 절대 허풍을 치는 성격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때 놈은 도단이에게 맥달님을 죽이라고 시켰습니다. 물론 맥달님이 제 편을 들지 못하도록 그리 해야 한다는 이유로 고시울률님을 꼬드겼기는 합니다만, 그보다는 앞날을 빈틈없이 읽고 맞히는 맥달님이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박수인 도단이를 시켜 맥달님을 해치게 한 것이지요.” “흠.......” “그런데 그때쯤 놈은 계획을 바꾸었을 것입니다. 마침 부루버들님에게서 아이가 생기자, 놈은 그 아이로 모험을 건 셈입니다. 사와라 한웅님은 자존심이 강하시고 특히 여자에게 자존심을 세우려고 애쓰는 분이었습니다. 태산 회의 때의 일도 그렇고요....... 결국 놈의 계획대로 되어, 한웅님은 놈의 보이지 않는 손에 놀아나면서도 당신의 아이를 위해서 한 일이라고 믿게 된 것입니다. 한웅님이 드신 독도 그렇구요.” “독에 대해 더 아는 게 있느냐? 누가 해치려 했겠느냐?” 치우천은 서글프게 말했다. “누가 해치려던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한웅님은 자식을 지키려는 마음에 조금씩 독을 드셨을 것입니다. 그 독은 조금씩 몸에 쌓이기는 합니다만 양을 조절하면 죽지는 않습니다. 아니, 아예 약간만 드시고 그 이후에는 드시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만에 하나, 고시울률님이 일을 벌이면 자신이 드신 독을 고시울률님이 넣었다고 몰아붙이려는 생각이셨겠지요. 좌우간 조금 전 고시울률님이 독을 탄 것은 결코 아닙니다. 한웅님이 최후의 수단으로 독을 스스로 드신 것이 분명하지요.” “한웅님은 도대체 어찌하여......” “한웅님은 그 아드님이 인정받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누구라도 그렇게 의심하지 않겠습니까? 나이가 여든이 넘으시고, 더군다나 병을 앓으시는 분에게서 어떻게 아기가 생기겠습니까? 그렇지 않았다면 왜 아드님이 생기셨을 때 주신의 모든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으셨겠습니까? 그 아드님이 한웅님의 진짜 아드님이 맞는지 믿지 못할까 봐 그러신 것 아니겠습니까?” 비렴은 탄식하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은....... 맞다. 허나......” “한웅님께서 어찌하시건 비렴님이나 저는 그대로 따랐을 것입니다. 허나 모든 사람이 그럴 리는 없지요 더구나 고시울률님 같은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그런 일을 공공연하게 드러내는 것이 한웅님으로서는 견딜 수 없는 일이겠지요 적어도 웅님이 살아계신 한은 참겠지요. 허나 돌아가시면 분명 큰 문젯거리가 될 것이니, 그때를 대비하여 고시울률님이나 저를 모두 없애고, 나아가서는 문제가 될 사람을 제거하기 위해 방패막이로 독을 이용하실 생각까지 하신 것이 분명합니다. 생각해보면, 그 모험 하나로 저나 고시울률님을 모두 몰아낼 수 있는 기막힌 수였습니다.” “다 내 잘못이다. 내가 한웅님의 곁에 항상 있었어야 하는데.......” 비렴이 안타까운 마음에 고개를 떨구었다. “한웅님은 마누라님이 계시지만, 부루버들님과만 항상 어울려 지내셨습니다. 그리고 고시울률님이 실권을 쥔 상태에서는 한웅이라는 지위가 너무도 외로우셨을 것입니다. 부루버들님은 치우가람과 어울려 나름의 목적을 지니고 있었을 테니, 한웅님께 유달리 잘 해드렸겠지요. 그런 여인네와의 사이에 낳은 자식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만.......생각해보면 너무도 서글픈 일입니다. 대주신의 한웅이면서 스스로의 목숨을 담보로 자신이 죽은 뒤에 남을 어린 자식을 지키겠다는 생각을 하시게 된 것, 그리고 한웅이면서 주신 안에서 그런 싸움이 일어나게 스스로 만들었던 일이 말입니다.......아니, 어쩌면 오래 전부터 신시 전체가 반쯤 미쳐 돌아가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치우가람의 죄를 늘어놓았습니다만, 그리고 비렴님이 조사하시면 낱낱이 그 죄가 드러날 것입니다만 어쩌면 그 모든 일은 치우가람 혼자서 벌인 짓은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다른 사람이 엮이고,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이 모두 저마다의 욕심만 차리고, 자기에게 유리한 일만,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만 고집부리다보니 일이 이렇게 복잡하고 커졌을 것입니다. 고시울률님도, 부루버들님이나 부루위단도, 마누라님도, 한웅님도 이 문제에서 발을 모두 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작건 크건 얽혀 있으니, 이제 비렴님께서 신중하게 판단하여 그 일을 처리해주실 일만 남았습니다. 저는 그런 일은 모르며, 주제넘게 나설 처지도 아닙니다. 비렴님이 아니 계셨으면 저로서도 어떻게 건드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니다. 그게 삼사가 해야 할 일이고 내가 맡은 일이니, 좌우간 네 말대로 조사를 해보겠다. 치우가람이나 부루버들님은 물론이고, 마누라님이나 한웅님이라 해도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 내 안파견 한님께 맹세하건대 목숨을 걸고 이 일을 모조리 밝혀내리라.” 비렴이 신중하면서도 단호한 어조로 말하자 치우천은 고맙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그것만이 지금 주신을 구할 수 있는 길입니다.” 치우천은 이제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동안 쌓이고 쌓였던 모든 개인적인 일들과 주신의 묵은 문제들이 한꺼번에 해결되는 듯한 기분이었다. 비렴은 누구보다도 신중하고 사리에 밝았으며, 강직하기 까지 하여 이 일을 분명하게 처리해 줄 사람으로 보였다. 그때 비렴이 웃음을 띤 표정으로 말했다. “너는 이 일에 모든 사람이 얽혀 있다고 말했는데, 내 보기엔 너도 벗어나지 못할 듯하구나.” “무슨 말씀이시온지?” “너는 신시를 공격한 대장으로 되어 죄를 쓰지 않았느냐?” 치우천은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이미 고시울률님과 이야기하여 신시의 공격을 멈추었습니다. 멈추지 않을 수 없었지요.” “무슨 말이냐?” “네 아우가 잘 해주어서 무너지지 않은 것이 첫째고, 고시울률님에게 명분이 없는 것이 둘째고, 일이 크게 번지기 전에 싸움이 끝나버렸으니 제가 더 이상 죄를 쓰지 않을 것이 셋째며, 여기서 터진 일이 너무도 크기에 저의 일은 따지기도 힘들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을 밝힌 데는 저의 공로도 조금은 있을 것이며, 그것을 밝히고자 신시에 흠을 낸 것이니 용서받을 만도 하다 생각되고요.” 치우천이 입심 좋게 말하자 비렴은 ‘허허’ 하며 웃었다. “좌우간 너는 말 하나는 정말 잘하는구나. 정말 어찌하고 싶어도 할 수 없게 만드는구나. 네가 그렇게 휘저어 곯은 곳을 터뜨리듯 일을 벌이지 않았으면, 이런 문제들이 다 드러나 좋건 나쁘건 결말을 짓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한웅님의 문제나 마누라님의 문제, 부루버들님 과 아기의 문제 같은 것은 내 비록 삼사의 풍백이나 일이 터지지 않고서는 감히 꺼낼 수 없지 않겠느냐?” 치우천은 대답 대신 빙그레 웃었다. 비렴은 이내 덧붙여 말했다. “솔직히 나 역시 네가 감히 신시로 들어오고, 두 번이나 벗어날 기회가 있었으면서도 벗어나지 않은 것에 놀랐다.” “제가 나가면 제 몸 하나야 편하겠습니다만 다른 사람들이 더 많이 다칠 것이 두려웠습니다.” “신시를 공격하려 했으면서 다른 사람 걱정을 했다?” 치우천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림자 손에 신시가 넘어가게 되었으면, 저는 차라리 신시를 공격해 무너뜨렸을지도 모릅니다. 성벽 같은 것이야 다시 세우면 그만이지만, 주신의 기운이 이상하게 변하는 것은 두고 볼 수 없는 일입니다.” “너 자신을 위한 일이 아니었단 말이지?” 비렴이 묻자 치우천은 당당하게 가슴을 폈다. “저는 제 뜻을 위해 제 벗들이나 제 아우마저도 싸움터로 내모는 놈입니다. 무슨 일을 하건 나 자신을 위해 사는 놈은 절대 아닙니다. 제 뜻을 위해서라면 제 목숨이나 제 고생 따위는 하나도 두렵지 않습니다.” 비렴은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았다. 좌우간 너는 잡힌 몸이면서도 되레 이런 문제를 터뜨려 자유롭게 되어 그들을 물리쳤으니, 내 이미 여러 번 너에게 감탄했지만 다시 한번 감탄하지 않을 수 없구나. 너 하나만으로도 수천 명의 사울아비나 열 마리의 신수 이상이라고 본다.” “당할 수 없습니다.” 치우천이 다시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비렴은 잠깐 생각하다가 치우천에게 그만 물러가라 하면서 당부하듯이 말했다. “이번 일은 나에게 맡기거라. 성밖에 네 아우가 아직 군대와 함께 머물고 있지?” “그렇습니다.” “너는 일단은 신시 밖에 나가 있는 편이 좋겠다. 내가 일을 풀어볼 것이니, 너도 힘이 좀 되어 주거라.” “무슨 말씀이신지?” “번 일은 너무도 크고 위험해서 나도 좀 부담스럽다. 허나 네가 신시 밖에 수십 천의 군대를 거느리고 있다면, 신시 안에서 내가 움직이기가 좀 쉬워질 것 같아 하는 말이다. 내가 고시울률과 한웅님, 마누라님 일까지 다 조사해보고 네 말대로라면 순리대로 처리하마. 알아듣겠지?” 비렴은 이번 일의 해결에서 고시울률에게 압박을 가하기 위해 치우천의 군대를 이용하려는 것이었다. 아직 치우천의 군대가 밖에 있으면 고시울률로서도 치우 형제의 일을 다룰 때 신경이 쓰여 비렴의 말에 무조건 반대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치우천은 단박에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허나 제가 밖으로 나가면 안 되지 않습니까? 제 말이 틀릴 경우에 제가 도망치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나는 너를 잘 안다. 안에 있다고 너를 잡아둘 수 없고, 밖에 있다고 도망칠 녀석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네가 밖에 있는 편이 내가 움직이기 편하니 그리 하거라. 우사님과 함께 나가면 누구도 널 막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밖에 나가거든 운사 신지울태를 만나서 이 이야기를 들려 주거라. 그 사람은 한웅님의 성화에 못 이겨서 글자 주술을 쓴다고 나갔다. 네가 사람을 보내면 분명 만나러 올 것이다.” 비렴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자 치우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치우천이 물러나려 할 때 비렴은 조용히 덧붙였다. “네 말이 옳다면 이제 주신의 모든 것이 새롭게 시작될 것이다. 이번 일을 씨앗으로 해서 말이다. 네가 할 일이 많다.” 치우천 역시 조용하지만 흐뭇하고 홀가분한 기분으로 대답했다. “제가 해야 할 일이라면 하겠습니다. 새로운 시작이라면 더더욱 좋고 말입니다.” 이렇게 치우천은 비렴에게 뒷일을 맡기고 우사 병예의 마중을 받으며 신시 성문 밖으로 나섰다. 치우천이 돌아오기를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던 치우비는 물론, 야율쿠리나 초초룬, 보돈차르 등 다른 사람들의 기쁨은 이루 말할 것도 없었다. 미리 풀려나 있던 치베와 키타야, 구르, 유쌍, 리미, 개르도 역시 몹시 기뻐했다. 치베는 유쌍으로부터 치우천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후라 더더욱 기뻐했다. 알한과 차오스, 그리고 마냥이나 싱카 등의 도깨비 부대도 기쁨으로 가득 찼다. 울라트는 너무 기뻐서 깡충깡충 뛰었고 조금 기운을 차린 울쿠타와 야쿠타도 힘없는 미소를 띠며 치우천을 맞이했다. 치우천은 모든 대장들이 막강한 사울아비 부대를 맞아 애써 분전한 것을 듣고 모두의 공로를 치하했다. 그러나 자기 한 명이 없다고 효율적인 지휘가 이루어지지 않아 싸움이 어렵게 풀린 것이 내심 불안했다. ‘역시 내가 있어야 하나 보다.’ 치우천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전혀 내색하지 않고 그들의 분전을 일일이 치하했다. 이번 싸움의 결과를 살펴보건대, 치우비나 보돈차르, 와난수 와난강 등의 부대는 그리 큰 피해를 입을 만큼의 혈전을 치르지 않았으며, 피해가 큰 편인 야율쿠리와 초초룬의 부대 도 부상자는 많지만 사망자가 적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스러웠다. 수만 명이 붙어 싸웠지만 사망자는 몇 백 명에 달하지 않았고, 그 대신 부상자가 몇 천 명에 달했다. 주신 역시 한 부대가 뿔뿔이 흩어지기는 했지만, 고시가라의 부대는 번개범을 보고 하늘의 징조라 여겨 스스로 물러섰고 다른 한 부대는 승리한 참이라 피해가 적었다. 비록 적으로 싸웠지만 원래 같은 부족이니만치 피를 적게 흘렸다는 것은 다행 중의 다행이었다. 치우천은 특히 무라가 있는 힘을 다해 구름골에 다녀와서 번개범을 몰고 와 치우비 부대를 위험에서 구해준 것에 고마워했다. 무라는 당연한 일을 했다는 듯이 여전히 돌처럼 굳은 딱딱한 태도로 일관했다. 번개범은 이미 싸움이 끝난 것을 알았는지 어디론가 사라진 다음 이었고, 일행 중 단 한 명, 비울걸이 또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치우천은 치우광도 만났다. 치우광의 혈기 넘치면서도 해맑은 모습을 보자 치우천은 든든한 느낌이 들었다. 아직 조금 어린 감은 있지만 잘 자라면 치우비에 버금가는 큰 사울아비가 될 것 같았다. 사람들을 둘러보고 난 뒤 마침내 진영으로 돌아온 치우천은 쇠약해진 아버지 치우우레를 만났다. 치우천은 치우우레에게 신시의 일은 비렴에게 맡겼으니 잘 해결될 것이라고만 말해두었다. 한웅에 대한 충성심이 신앙심보다 더 깊은 아버지에게 추잡한 사건들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았다. 치우우레도 몹시 지친 터라 더 묻지 않고 그냥 힘없이 웃으며 고개만 끄덕였다. 치우우레의 쇠약해진 모습을 보자 치우천은 분노로 치를 떨었다. 부루위단을 절대로 용서할 수 없을뿐더러 반드시 자신의 손으로 처단하고 싶었다. 치우천은 치우비를 비롯해 무라와 몇몇 벗들에게 신시 안에서 벌어진 그 사건의 전말에 대해 그저 잘 처리될 것이라고 했을 뿐, 입 밖에 내지 않았다. 한웅의 위신은 곧 주신의 위신과 직결된 문제라서 아무리 벗들이라도 함부로 이야기할 수 없었다. 그저 간단히 사건이 곧 해결되리라고 암시했을 뿐이다. “그림자는 한웅님이 아니셨다. 그리고 그는 잡혀 있다. 그러니 앞으로는 염려할 것 없다.” “그럼 누구였습니까?” 무라가 묻자 치우천은 싱긋 웃으며 곧 알게 될 것이라고만 말했다. 우사 병예는 치우천을 비롯해 측근들을 모아놓고 피차간에 불필요한 싸움이 벌어진 것에 대해 애석하다는 뜻을 표하고, 주신과는 이제는 더 이상 싸우지 말고 평화롭게 지내줄 것을 당부했다 병예는 늙었지만 강단이 있어서 그의 목소리는 아직도 힘과 호소력이 있었다. 진영을 나선 치우천은 치우비, 병예와 함께 아직 신시 저만치에 머물고 있는 주신 부대를 찾아갔다. 그곳의 밝혀지지 않은 지휘관은 바로 운사 신지울태였다. “내가 자네 아버지에게 못할 짓을 한 것이야. 아무리 한웅님의 명령 때문이었다지만 자네 앞에서는 얼굴을 들 수 없음이야.” 신지울태는 치우천을 만나자마자 탄식 섞인 목소리로 털어놓았다. 글자 주술을 사용하여 가짜 치우우레를 만든 것은 바로 신지울태였다. 치우천은 처음 그 사실을 알았을 때는 화가 나기도 했지만 신지울태가 솔직하게 심정을 털어놓자 원망하는 마음이 많이 가셨다. 강요로 그랬다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치우천은 비렴이 당부한 대로 신시에서 있었던 일을 신지울태에게 모두 이야기했다. 그때 곁에서 그 이야기를 듣던 치우비 역시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특히 숨은 그림자가 바로 다름 아닌 치우가람이라는 데에는 분노를 이기지 못해 얼굴이 벌개졌다. 신지울태는 치우천의 긴 이야기를 듣고 나서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보니 내가 잘못한 것이야. 나도 내 뜻과 다르게 그놈을 도와 준 것이 되었어.” 치우천은 놀라며 물었다. “운사님이 말씀입니까?” “자네 사울아비 벗들의 이야기를 한웅님께 전한 것이 바로 나야. 나는 다만 한웅님이 안심하시라고 전했는데....... 그것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던 것이야....... 정말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야......” 신지울태는 제자인 스름이를 통해 그 이야기들을 전해 들었고, 스름이는 그 이야기를 삼에게 전해 들었다고 했다. 이는 치우천의 추측이 약간 빗나간 경우였다. 이제 알고 보니 스름이는 몇 해 전, 아내를 잃은 삼과 은근히 가까운 사이가 되어 있었다. 스름이는 비록 표정은 침울했으나 마음씨가 고우며 성격이 강직하여 믿을 만한 사람이었고, 치우천과 함께 과거 번개범과 맞서 목숨을 걸고 싸우기도 했다. 그런 성격인데다 운사 신지울태의 제자로 앞날이 촉망받는 사람이었으니, 삼은 스름이에게 그 이야기를 거리낌 없이 들려주었던 것이다. 스름이 또한 물론 비밀을 지켰지만 스승이자 할머니처럼 따르는 운사 신지울태에게는 입을 다물고 있을 수가 없었다. 신지울태는 한웅에게 그 말을 전했고, 한웅은 부루버들에게 말했고 부루버들을 통해서 마침내 치우가람에게로 그 말이 흘러들어가게 된 것이다. 아마 스름이나 삼 말고도 다른 사람 역시 다른 경로로 비밀이 새어나가게 된 것 같았다. 결국 배신자는 아무도 없었지만, 본의 아니게 모두가 이용당한 셈이었다. 치우천은 여기서 크게 깨닫는 바가 있어서 나중에 치우비에게 말했다. “말이라는 것은 정말로 무섭구나. 비밀이라는 것은 정말 자기 혼자만 알고 있어야 비밀이지, 아무리 믿을 사람이라고 해도 일단 입 밖으로 내뱉게 되면 어떻게든 퍼지게 되어 있구나. 발귀리 선인이 하신 말씀의 뜻 중에서 이제 더 깨달아지는 게 있구나.” “비밀이라고 혼자 알고만 있으면 다인가? 자다가 잠꼬대라도 하면 어쩌려고?” 치우비가 툴툴거리며 내뱉자 치우천은 피식 웃었다. “그래, 그것도 그렇구나. 비밀을 지키는 게 어쩌면 싸움보다 더 어려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치우가람 놈은 정말 그런 면에서는 귀신같은 놈이다. 마누라님이나 한웅님, 어쩌면 부루버들님이나 고시울률님까지도 그런 식으로 비밀을 캐내어 약점을 잡아 이용했을지도 몰라 자기가 앞에 나서지도 않으면서 주신 전체를 흔들려고 했으니.......” 아무튼 치우천은 신지울태에게 그 일에 대해 더 이상 뭐라 하지 않았다. 그러나 신지울태는 반드시 치우천을 위해 무슨 일이든 하겠노라고 몇 번이나 당부했다 잘못을 저지른 것을 일종의 빚을 진 것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자오지 한웅 꼬박 여드레가 지난 후에야 신시에서 소식이 왔다. 비렴이 직접 신시 성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 것이다 비렴은 치우천과 가깝게 지내던 사울아비 벗들을 모두 데리고 왔다. 무료하게 신시 밖에서 기다리던 치우천 일행은 반갑게 비렴을 맞이했다. 비렴은 치우천을 보자마자 치우천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모든 일이 잘 풀렸네. 천 자네의 추측을 모두 다 밝힌 것은 아니지만, 중요한 것들은 쾌나 밝혀냈어. 본 사람과 들은 사람들도 찾아냈지. 자칫하면 큰일 날 뻔했네.” 치우천은 반가운 소식에 환히 웃으며 말했다. “주신을 위해서 정말 다행한 일입니다.” 치우천은 더 묻고 싶었으나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비렴의 표정이 근엄하게 변했기 때문이다. “주신의 사와라 한웅님께서 치우천에게 전하라고 하신 말씀을 주신의 풍백 비렴이 전한다. 잘 듣거라.” 치우천은 곧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치우비도 얼른 고개를 숙였으나 치우 형제 주변에 서 있는 벗들은 주신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굳이 그러지는 않았다. 비렴은 엄숙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사와라 한웅께서는 이번에 신시에서 벌어진 싸움에 대해 마음 아파하셨지만 다행히 하루이틀 만에 일이 금방 진정되었으니 그 일에 대해서는 책임을 묻지 않는다 하셨다. 그리고 이전 공상 싸움에서의 약속을 지켜 큰 공을 세운 치우천을 주신의 웃뜸 사울아비로 삼는다. 그리고 작은 주신의 사람 모두를 주신의 사람으로 받아들인다. 이것은 한웅님의 뜻이고, 주신 삼사와 귀족들이 모두 동의한 일이니 치우천은 명령을 받아서 주신에 더더욱 충성하도록 하라.” 비렴의 말이 끝나자마자 주변의 사람들 모두 일제히 환호했다. 이제야 비로소 원하던 바를 이루게 된 것이다. 주신 사람이 된 작은 주신의 전사들은 이 소식을 전해 듣자 모두 얼싸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그들 대부분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힘없는 작은 부족 출신들이라 주신 사람이 된 것을 몹시 기뻐했다. 그러나 그 누구보다 기뻐한 사람은 치우비였다. “웃뜸 사울아비래! 형! 웃뜸 사울아비! 원 친 이게 정말.......! 정말......!” 치우비는 너무도 좋아 치우천을 번쩍 들어 빙빙 돌렸다. “이 녀석, 내려놔라! 이게 무슨........ 하하.......짓이냐? 하하........” 치우천은 아우가 기뻐하니 자신도 좋았지만 그보다는 치우비의 돌연한 행동에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웃었다. 그 틈에 치우천은 살짝 치우비에게 속삭였다. “너, 전에 내가 한 말을 잊었니? 웃뜸 사울아비는 내가 아니라 네가 되는 거다. 곧 너에게 자리를 물려줄 테니 기다리거라.” “허 참, 그건 너무.......” 그러나 치우비가 뭐라 하기도 전에 비렴이 다시 엄숙하게 말했다. “잠깐. 한웅님의 말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마저 듣거라.” 치우천과 치우비는 머쓱해져 이내 자세를 바로 하고 고개를 숙였다. 비렴이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그리고 치우천과 치우비는 신시로 들어와서 한웅님을 직접 뵈옵고 웃뜸 사울아비의 의식을 치르도록 하라. 그리고 자네들에게 이번에 못된 꾀를 꾸미다 잡힌 반역자들의 처리를 첫 번째 일로 맡기기로 한다. 그러니 어서 서둘러라.” 치우천 형제는 곧 큰소리로 대답했다. 치우천은 이미 그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어차피 이번 일은 자신의 머리로 풀어낸 것이다 그러니 지저분한 소문이 돌지 않도록 뒤처리도 자신에게 맡기려는 것이리라. 아울러 자의든 궁지에 몰려서든 한웅이 자신에게 큰 권력을 주게 되었으니 다른 감정을 갖지 않도록 직접 만나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비렴은 서둘러 신시로 들어가라고 재촉했다. 눈치를 보아 하니 치우천이 입이라도 잘못 놀려 소문이 퍼질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분명했다. 치우천은 즉시 비렴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몇몇 벗들은 다시 신시로 들어가면 또 위험에 빠지는 것이 아니냐고 걱정했지만 치우천은 이번에는 그럴 리 없다고 잘라 말했다. 신시로 들어가는 길에 치우천은 비렴과 주로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치우비는 사울아비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은 전에 고시울률에 의해 감금되었다가 치우천의 담판으로 풀려났다. 그리고 비렴이 진행했던 치우가람과 부루버들의 문초를 맡은 모양이었다. 부루벼락이 신이 난 듯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원래 그놈이 큰일 낼 놈인 걸 알고 있었지. 허나 사람들이 줄줄이 딸려 나오는데 정말 등골이 다 오싹해지더구먼그래. 허허, 그나저나 그놈을 쥐어 패는데 어찌 그리 속이 시원하던지......” 치우비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사람을 패면서 속 시원할 건 뭔가요?” 부루벼락이 낄낄거리며 치우비의 어깨를 툭 쳤다. “자네는 속도 좋네. 전에 자네들을 사막으로 끌고 가면서 그놈에게 몇 번이나 이를 갈았는지 모른다네. 헌데 놈은 아무리 두들겨 패도 절대 바른 소리를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면서 요리조리 빠져 나갈 구멍만 찾더구먼. 그 아우...... 치우바람 놈은 내내 입을 다물고 말아.” “헌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알아냈나요?” “부루버들 말야. 그 여자가 먼저 입을 열더군. 그리고 부루위단 그 덜 떨어진 귀족놈에게 좀 겁을 주니까 줄줄 쏟아놓고 말야. 놈들이 자꾸만 마누라님하고 한웅님을 들이대는데 환장하겠더구먼. 비렴님이 그 두 분과 직접 이야기를 나누셨는데도 말야. 좌우간 이 일에 엮인 놈들이 백 명도 넘으니 말 다했지 않은가?” 부루벼락이 사울아비를 대표하여 신이 나서 떠들어대는 동안 치우천은 약간 떨어진 곳에서 비렴과 조용히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저 말고 제 아우가 웃뜸 사울아비가 되면 안 되겠습니까? 한웅님이 들어주실까요?” 치우천이 조심스레 묻자 비렴은 넉넉하게 웃어 보였다. “안 될 것 없지 헌데 그럼 자네는?” “제 아우가 더 잘 어울리는 자리입니다.” 그러자 비렴은 살짝 입 끝을 올리며 물었다. “자네는 그것만으로는 모자라는가?” “그럴 리야.......” “내 이번 일 때문에 한웅님과 참으로 오랫동안 줄다리기를 했네. 한웅님은 많이 늙으셨고, 이번 일로 마음에 너무도 큰 상처를 입으셨네. 자네 이야기가 거의 다 맞아 들어가니 신기하기도 했네만, 그 때문에 몇몇 부분은 끄집어낼 수 없었지.” “무엇 무엇을요?” “번개범 이야기는 마누라님 문제가 있기 때문에 꺼내지 않았네. 부루버들이 죄인이 된 것으로도 충분하잖나. 마누라님까지 죄를 받게 한다면 주신이 뒤숭숭해지지 않겠는가?” “그건...... 알겠습니다.” “그리고 한웅님의 아기 문제도.......조용히 처리하기로 했다네.” “조용히 처리........라면 혹시.......” 치우천이 어두운 표정을 짓자 비렴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 어린것을 어찌 해치겠는가? 아무도 정체를 모르게 하여 자식 없는 부모에게 줄까 생각중일세.” “그게 좋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치우천을 바라보며 비렴이 다시 말했다. “치우가람과 부루버들과의 일을 대놓고 뒤져보니, 몇몇 부루버들 주변의 여자들도 이미 알고 있었더군. 그것만으로도 놈은 죽어 마땅하지.” “지나족과의 관계는 밝혀졌습니까?” “놈의 집에서 일하는 종들 중 몇몇 지나족 놈들이 수상해서 잡아들였지만 죽어도 입을 열지 않더군. 그 문제는 고시울률님과도 조금 얽힌 모양이라 손대기가 까다로워.” 비렴이 한숨을 쉬며 말하자 치우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시울률님도...... 역시.......” “그럴 만한 사람이지. 그 사람은 주신이 손해를 보더라도 싸움이라면 무조건 피하고 보니까. 허나 그렇게 되면 고시울률도 큰 죄를 묻지 않을 수 없는데, 자칫 문제가 더욱 커지네.” “앞으로의 일만 막으면 됩니다.” “그렇다고 내가 그냥 물러선 것은 아니니 너무 염려 말게 내, 아까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자네에게 전해줄 기쁜 소식이 하나 더 있다네.” “뭐? 그것만으로도 저는 충분합니다.” 치우천이 반색했으나 비렴은 지긋한 어조로 담담히 말했다. “자네가 충분하다 해도 주신은 충분하지 않네. 이미 주신이 얼마나 늙고 병들었는지 이번 일을 조사하면서 나 역시 몹시 놀랐다네. 주신에 자네 같은 사람이 필요해.” “이미 저는 주신 사람이 되지 않았습니까?” “주신 사람 말고, 주신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지.” 돌연 비렴이 목소리를 낮추어 말을 이었다. “내 그 문제 때문에 사흘이나 더 한웅님과 고시울률과 입씨름을 했네. 자네는 일단 웃뜸 사울아비가 되어야 하네. 그런 다음 자네는 다음번 한웅의 후보가 되는 게야.” 치우천은 순간 너무 놀라서 타던 말에서 떨어질 뻔했다. 침착한 치우천이었지만 이 이야기만큼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치우천은 재빨리 정신을 추슬렀으나 어깨가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치우천도 물론 자신이 한웅이 되려고 생각해본 적은 있었다. 그러나 그 일이 이렇게 빨리 다가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자신이 한웅이 된다 해도 적어도 고시울률이 죽은 다음의 한웅정도를 생각해보았을 뿐이었다. “한....... 한웅 후보라니요. 저는 감히 거기까지는.......” 비렴은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 “내 뜻만이 아닐세. 우리 삼사 모두의 뜻이라 보아도 좋아.” “하지만 그것은....... 정말 그것까지는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비렴은 껄껄 웃었다. “나에게까지 숨길 것은 없네. 신시를 들이쳐서 점령할 배짱을 가졌던 자네가 아닌가?” “신시를 친다고 한웅이 되라는 법은 없습니다! 저는 항상 한웅님께 충성하리라 생각했을 뿐입니다.” 비렴은 말을 잠시 멈추고 깊고 지혜로운 눈으로 치우천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자네, 전에 나에게 이야기했지? 자네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는다, 자네의 뜻을 위해서 산다고 말일세.” “그랬습니다만.......” “그렇다면 자네의 뜻을 위해 이번에는 대주신의 한웅이 되도록 애써보게나. 자네의 뜻을 펴는데 한웅님을 모시는 것과 한웅이 되는 것, 어느 쪽이 더 유리할지 잘 생각해 보게나. 물론 아직 자네는 고시울률 비해 모자라네, 허나 이제는 자네도 웃뜸 사울아비이니 다음 한웅 을 이을 자격이 있네. 물론 아직은 후보일 뿐이지. 이제 그 후보로 고시울률말고 한 사람이 더 늘어나는 걸세.” “고시울률님이 알면 코웃음을 칠 것입니다.” 비렴은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본 것처럼 말하는군그래.” “고시울률님도 아십니까?” “고시울률과 한웅님이 같이 있는 자리에서 내가 이야기를 꺼냈네. 정말 코웃음만 치더군. 몇 가지 일들을 덮어두는 조건으로 내가 참 힘들게 얻어낸 것일세. 물론 아직은 길이 멀겠지만 나는 자네를 믿네. 자네는 그 어떤 자리를 차지해도 거기에 휘둘리지 않고 마음껏 다룰 수 있는 사람이야.” 치우천은 입을 굳게 다물고 눈을 크게 뜨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비렴은 그런 치우천을 넉넉한 미소로 바라보다가 말했다. “사와라 한웅님은 안되셨네만, 이번 일에 너무나 충격을 받아 오래 사시기는 어려울 듯하네. 원래가 쇠약하셨는데 독을 드신데다가 살 희망을 잃으신 거나 다름없잖은가. 하루가 다르게 기력을 잃고 계시지 한웅님이 더 오래 사셔서, 자네가 고시울률을 누를 만큼 큰 공을 세우는 것을 보시기를 안파견 한님께 빌겠네. 안 그러면 수십 년을 더 기다려야 할 텐데, 자네나 나는 물론이지만 주신 사람 전체에 그건 너무 긴 시간일세.” 비렴은 조용히 당부하듯 말했으나 치우천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것은 행운이었다. 마치 그동안의 온갖 고생을 보상하기라도 하듯 너무도 커다란 행운이었다. 어쩌면 비렴이 그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서 만들어준 행운인지도 몰랐다 물론 잘되면 큰 행운이겠지만 자칫하면 더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허나....... ‘어차피 위험 속에서 살아온 나다. 그래....... 그렇다면 해볼 만하다. 내가 한웅이 된다면 신시와 주신을 새롭게 만들고, 우리를 위협하는 헌원과 유망을 누르기가 훨씬 더 쉬워진다. 치우천, 잘 기억해라. 네가 잘나 뽐내려고 한웅이 되는 것이 아니다. 세상 사람을 위해 그게 더 유리하기 때문에 너는 더욱 노력해야 한다. 지금보다 더욱더 노력해야 한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치우천은 문득 자신이 한웅이 되면 쓸 이름이 마음속에 떠올랐다 일이 잘 풀린다면 주신의 열네 번째, 잘 안 된다면 열다섯 번째 한웅이 될 그 이름은 바로 ‘자오지 한웅’이었다. 맥달의 행방 치우천은 신시의 한웅 집으로 들어가 사와라 한웅 및 고시울률, 그리고 삼사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치우비는 그 앞까지는 따라갔지만 집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웃뜸 사울아비의 후보는 치우천이었기에 아직 치우비는 그리로 들어갈 처지가 아니었다. 회의를 여는 커다란 방에는 드물게 사와라 한웅의 큰마누라인 부소구슬도 참석해 있었다. 솟대단군이 손을 쓴 덕분에 사와라 한웅은 제법 해독되었지만 그는 이번 일의 충격으로 거의 기력을 잃은 듯했다. 그저 건성으로 듣고 무슨 일이건 “자네들 좋을 대로 하게”라고 말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사와라 한웅에게 감정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치우천은 시들어버린 한웅의 모습을 보자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도리어 그동안 조용히 지내왔던 부소구슬이 한웅을 대신하려는 듯 이야기가 많았다. 치우천은 요 며칠 동안 신시 안에서 무슨 밀담이 오고갔는지 알 수 없었으나 왜 많은 일이 있었고 많은 거래가 있었음을 직감했다. 그리고 비렴뿐만 아니라 부소구슬도 치우천을 웃뜸 사울아비와 다음 한웅후계자로 올리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한 듯한 눈치가 보였다. 아마도 미리내의 죽음에 간접적으로나마 책임이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치우천을 대하는 고시울률의 태도는 다시 냉소적으로 변했다. 아니, 이전까지는 멸시하는 정도였지만 이제는 적대적인 눈빛마저 보이는 듯했다. 그러나 고시울률은 대놓고 삼사와 부소구슬에게 반박하지는 않았으며, 그저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대강 동의하면서 넘어갔다. 아마도 이전의 많은 잘못이 그 대가로 덮어졌으리라. 그 자리에서 치우천은 별 다른 의견을 제시하거나 비밀을 캐내려 하지는 않았으나 딱 한 가지만은 고집했다. “웃뜸 사울아비는 저처럼 허약한 놈이 맡을 자리가 못 됩니다 저보다 제 아우 비에게 주십시오. 그 편이 훨씬 낫습니다.” 비렴을 비롯한 삼사는 이미 치우천에게 그 이야기를 들은 바 있어 흔쾌히 동의했으며, 고시울률은 마음대로 하라는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되레 부소구슬이 의아하다는 듯 반대하고 나섰다. “그 자리는 공이 있어야 주는 것이다. 자네 아우가 공이 없지는 않으나 정작 그 자리에 앉아야 하는 것은 자네야. 자리라는 것이 그렇게 마음대로 남에게 미룰 수 있는 것이 아니야.” “웃뜸 사울아비라는 것은 수많은 사울아비들을 부리는 자리 아닙니까? 그런데 저처럼 몸이 편치 않은 녀석이 앉으면 사울아비들이 비웃으며 마음으로부터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제 아우는 힘과 용기가 아주 뛰어나니 그 자리에 앉을 만합니다.” 부소구슬은 치우비를 본 적이 없었기에 계속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 자네의 공에 보답하여 예전 한웅님께서 약속한 대로, 그리고 자네가 그럴 만한 역량이 있으니 그 자리를 준다는 것 아닌가?” “내 아우가 그 자리에 앉는 것이 제가 앉는 것보다 더 기쁩니다. 저는 그 뒤에 있으면 그만입니다.” 그 사이에 몸이 불편한 사와라 한웅이 연신 기침을 하자 결국 들것에 실려 처소로 자리를 옮겼다. 이제 부소구슬이 한웅의 권한대행이 된 셈이다. 한웅이 몸이 안 좋아지고 세상일에 의욕이 없어지기도 했거니와 이번 일로 부소구슬에게 단단히 빌미를 잡힌 모양이었다. 부소구슬은 상당히 고집이 세어 삼사는 한참을 설득해서야 간신히 그녀의 동의를 얻어낼 수 있었다. 다만 단서가 하나 붙었으니 치우천이 치우 집안의 웃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부소구슬은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치우괄괄은 이미 오래 전부터 치우 집안의 웃뜸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그 아들 치우가람이 그 일을 주로 맡았지만, 그는 이제 목이 떨어지게 되었으니 이제 치우천이 치우 집안의 웃뜸이 되어야 합니다.” 부소구슬은 다음번의 한웅 후보자로 치우천을 강력하게 밀기로 작정한 듯했다. 치우 집안의 웃뜸이면 웃뜸 사울아비가 되지 않아도 다음번의 한웅 후보는 될 수 있었다. 허나 치우천은 정중하게 사양했다. “치우가람의 죄는 용서할 수 없지만 치우괄괄 아저씨는 잘못이 없을뿐더러, 아주 훌륭한 분입니다. 그분에게 신세도 많이 졌습니다. 그런 분의 자리를 빼앗을 수는 없습니다. 더군다나 제게는 아버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그때 우사 병예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끼어들었다. “그건 말하고 말고 할 것도 없사옵니다. 치우괄괄은 이미 안파견한님 곁으로 갔답니다.” 부소구슬과 치우천은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병예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 자리에서는 이야기 하지 않으려 했는데.......치우괄괄은 거의 움직이지 못하고 말도 잘 못했지만, 귀는 들렸나 봅니다. 치우가람을 조사하는 중에 그 집이 소란스러워지자 무슨 일인지 대강 눈치 챈 것 같습니다. 종을 시켜서 그랬겠지만, 독을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치우천은 아무 말 없이 허탈한 표정을 지었고, 부소구슬은 이내 탄식하듯 말했다. “그러고도 남을 분이지요.” 병예는 쩝쩝 입맛을 다시면서 덧붙였다. “그 사람은 참 많은 일을 해왔는데....... 아들 농사를 잘못 지은 것 말고는 나무랄 데가 없었지요. 좌우간 일이 그리 되었으니 이제 치우 웃뜸은 치우우레말고는 맡을 사람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번에는 자연스레 치우천이 웃뜸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비렴도 한마디 거들었다. “내 치우우레의 성격을 보건대, 웃뜸을 맡고 싶어 할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기에는 그 스스로가 너무 꼬장꼬장하지요 아마 바로 치우천에게 넘겨줄 것입니다. 그러니 마누라님은 걱정 마시옵소서.” 그제야 부소구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사와라 한웅이 예전에 했던 약속, 즉 작은 주신의 사람 모두를 주신 사람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비렴이 이미 공포한 대로 반드시 지키라고 당부했다. 허나 몇 천 명이 넘는 사람이 한꺼번에 신시에 들어와서 살 수는 없으니 적절한 빈 곳에 자리를 잡고 살도록 하라는 조건을 내세웠다. 치우천은 겉으로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날아갈 듯 기뻤다. ‘드디어 바라던 것들을 이루었구나! 이제 작은 주신의 형제들도 주신 사람이 되었다 더구나 아우가 웃뜸 사울아비가 되었으니, 이제 녀석의 소원도 풀어줄 수 있게 되었어!’ 치우천이 가장 기뻐한 이유는 바로 아우 비 때문이었다. 비가 비록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았으나 공손발 생각에 여전히 힘겨워한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이제 웃뜸 사울아비의 이름으로 헌원에게 정식으로 청혼을 하면 그도 거절할 수 없으리라 그러면 아우 의 소원풀이와 함께 지나족과도 평화를 이룰 수 있을 듯싶었다. ‘다만 아직 유망이 있다. 유망은 분명 적어도 한 번은 일을 벌릴 것이다. 내 소식을 들으면 더더욱 그리할 것이다.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나 다름없다.’ 대강 이야기가 끝나가자 고시울률은 냉랭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먼저 일어나겠다며 밖으로 획 나가버렸다. 그가 나가자 이야기를 끝내겠노라며 부소구슬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람이 나가자 비렴이 치우천을 넉넉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자 자네 아우가 웃뜸 사울아비가 되었으니 하늘에 알리는 제사를 지내야 할 것이네. 그리고 사울아비들을 잘 다스리게 해야 할 것일세. 비록 자네 아우가 웃뜸 사울아비지만 자네도 웃뜸 사울아비나 다름없으니 많은 일을 거들어야 할 것이네.” “당연한 일이지요” “'허허, 이제 제사가 끝나면 자네 형제에게 지금처럼 말을 놓을 수도 없겠군그래.” “비렴님을 항상 스승님이나 아저씨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말씀은 마시지요.” 치우천이 펄쩍 뛰었으나 비렴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 아니야. 절대 그럴 수는 없는 일이네.” “그렇게 되면 제가 너무나........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몸 둘 바를 몰라서는 아니 되네. 높은 자리에 오른 만큼 더 많은 책임이 있고, 몸 두어야 할 곳이 훨씬 많아진 게야. 그걸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안 되는 것이니 한층 더 몸가짐과 말에 신경 써야 할 것이네. 높은 자리에 오른다고 거기 취해서 우쭐대어도 안 되고 주눅이 들어도 아니 되네. 그러면 큰일을 못하네. 알겠는가?” 비렴의 근엄한 충고를 치우천은 즉시 깨닫고 깊이 고개를 숙였다. “깨우쳐주셔서 감사합니다.” 비렴은 선선히 웃으며 말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맡아줄 일이 있다네.” “무엇입니니까?” "부루버들, 부루위단 부녀와 치우가람, 치우바람 형제는 모두 다 잡아들였다네. 다만 단군들 중 흰 단군, 검은 단군 두 사람이 이 일에 얽힌 것 같은데, 검은 단군은 앓아누운 것을 잡았지만 흰 단군만은 찾을 수 없었네. 뭐, 곧 잡히겠지만.” 비울걸이 데려갔던 검은 단군은 그의 재주에 걸려 꼼짝 못하고 있는 것을 비렴은 앓아누운 것으로 생각한 듯했다. 다만 횐 단군은 무예가 놀랍고 뭔가 사연이 깊을 듯한데 사라져버렸다니 왠지 찜찜했다. “그 단군들은 곧은 사람들인 것 같던데 왜 하필 치우가람 편이 되었답니까?” “모르겠네. 사람 속을 알 수 있는가? 다만 그런 단군들까지 자기편으로 만들다니, 치우가람 놈이 대단하기는 하네. 좌우간 그놈들을 그대로 둘 수는 없으니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좋겠는가?” “소문을 내지 않고 처리하려는 것이군요?” “그렇다네. 하지만 이건 한웅님의 위신과 고시울률의 체면이 걸린 일이라 잘 처리하지 않으면 아니 되네. 대놓고 목을 칠 수도 없지 않은가? 그러면 신시에 소문이 돌 테니까. 그렇다고 소리 없이 없애고 나서, 그들이 행방을 감추었다고 해도 역시 입소문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일세. 그 골칫거리들을 처리해달라는 것이 고시울률이 내건 조건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네.” 치우천은 머리를 긁적이며 생각하다가 이내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한 가지 방법이 있기는 합니다만.......” “무엇인가?” “전에 저는 사막에 갔던 적이 있습니다만.......” 비렴은 곧 그 말의 의미를 깨닫고 무릎을 탁 쳤다. “사막! 그거 괜찮군! 헌데 사막에 버리는 벌을 내리는 것도 죽이는 것과 다를 바 없잖은가? 소문이 돌 테니까 말야.” 치우천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사막에 버린다고 소문을 낼 수는 없지요 그게 아니라, 사막을 지나지 않으면 갈 수 없는 곳에 간다고 소문내는 거죠.” “사막을 지나지 않으면 갈 수 없는 곳?” “뭐랄까, 카린의 쑤앙마이는 대단히 유명한 선인이십니다. 그러니 부루버들이 아버지와 함께 그녀를 뵈러 간다고 하면 말이 되지요 더불어 치우가람, 바람 형제는 그녀를 호위하는 것이고요.” 비렴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런 수가 있구나! 그러다가 사막에서 길을 잃어 변을 당했다고 한다면 일이 매끄럽게 풀리겠군! 정말 자네 죄는 대단하군!” 비렴은 기뻐했으나 치우천은 그래도 어두운 표정을 거두지 않았다. “허나 그건.......저도사막에 버려져서 압니다만.......너무나도 잔인한 일입니다. 치우가람 놈이야 그러고도 남지만, 사실 치우바람 그 녀석은 형 하자는 대로 따라만 하는 순진한 녀석입니다. 싸움에서 여러 천 명을 죽이기도 한 저이지만, 그들이 죽기 전까지 받을 고통을 생각하면 참 마음이 답답하군요.” “자네, 마음이 그리 약해졌는가?” 비렴이 넌지시 말하자 치우천은 한숨을 쉬며 되받았다. “마음이 약해진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것도 아니고요. 죄는 어찌 되었건 다만 약한 여자인 부루버들과 어리석은 치우바람 놈이 받을 벌치고는 좀 지나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것뿐입니다. 헌데 언제 보낼 것입니까?” “오늘밤에라도 당장 보내야지. 늦어지면 그만큼 좋지 않으니까.” 치우천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좌우간 되었네. 이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하겠네. 전에 자네를 따라 사막에 갔던 자네 벗들에게 시키면 되겠군. 안 그래도 그중에 도단이가 이번 일에 가장 공이 컸다네.” “도단이가요?” “그렇다네. 도단이가 치우가람 형제에게 일부러 가까이 다가가서 뒷이야기들을 많이 캐냈네. 그가 없었다면 치우가람이 이렇게 만만하게 붙잡히지는 않았을 거야. 도단이가 대놓고 털어놓으니 놈도 배겨 낼 수 없었던 게지.” 비렴의 말에 치우천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도단이가 고생을 많이 했겠습니다.” “고생뿐인가? 지금 옥에 갇혀 있다네.” “예?” 치우천이 놀라자 비렴은 커다랗게 한숨을 내쉬었다. “도단이는 치우가람에게 가까이 하려고 큰 죄를 지었다고 하더군. 바로 맥달선인 말인데.......” 치우천의 안색이 순식간에 딱딱히 굳어졌다. 허나 비렴은 멈추지 않고 말을 이었다. “맥달선인을 도단이가 죽였다고 하더군. 그 죄는 반드시 갚아야 한다면서 자기 발로 옥으로 들어갔네. 분명 도단이의 공이 크기는 하나, 그런 잘못이 있다면 그냥 덮어둘 수만은 없는 일이어서........” 치우천의 심정도 몹시 착잡해졌다. “그건 제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제가 치우가람과 가까이 하라고 했기 때문에.......” “그렇다고 자네가 맥달선인을 죽이라 말한 것은 아니지 않는가? 도단이는 무엇보다도 자네를 볼 면목이 없다고 한다네.” 그때까지 잠자코 있던 병예와 신지울태도 한마디씩 거들었다. “도단이는 스스로 죽겠다며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있느니.” “앞은 못 보지만 참 아까운 아이인데....... 어떻게든 살릴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야.” “살려야지요. 도단이를 그대로 죽게 놔둘 수는 없습니다.” 치우천은 맥달의 이야기가 나오자 마음이 아팠지만 도단이를 그냥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병예가 한숨을 푸욱 쉬며 고개를 저었다. “도단이가 보통 고집이어야지. 옥에서 끌어내면 혀를 깨물고 죽겠다고 한다네.” 비렴이 슬쩍 치우천의 눈치를 살피며 끼어들었다. “비록 도단이의 죄가 있지만, 따지고 보면 그 일을 시킨 것은 치우가람이요, 고시울률이야. 그러니 고시울률을 생각해서라도 이 일을 밝힐 수는 없어 그러니 도단이를 꺼내도 관계는 만네만, 그 애가 나가지 않겠다고 하니 큰 문제일세. 더구나 도단이가 죽기라도 한다면 이 문제가 다시 떠들썩해질 것이고, 고시울률과 문제가 생겨도 크게 생긴다네.” 치우천이 놀라며 물었다. “맥달을 죽이라고 고시울률님이 시킨 것이 사실입니까? 짐작은 했습니다만....... 어떻게 알아내셨습니까?” 이번에는 신지울태가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저번에 자네가 같이 조사하라고 했던 마누라님의 몸종 불그네란 아이가 있었을 것이야. 자넨 기억할 것이야.” “기억합니다만.......” “그 아이는 유달리 귀가 밝은 아이였던 것이야. 그래서 하늘 제사 때, 치우가람파 고시울률이 맥달선인을 죽이려 한다는 소리를 들었던 것이야. 허나 그 아이는 너무 무서워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있다가, 이번에 치우가람의 죄를 묻게 되자 그 일까지 이야기해서 알게 된 것이야.” 치우천이나 그 누구도 알지 못했지만, 예전 하늘 제사 때 고시울률과 치우가람의 부근을 지나갔던 여자는 바로 불그네였던 것이다. 치우천은 굳은 표정이 되어 물었다. “그렇다면 고시울률에게도 책임을 물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 말에 강직하기 짝이 없는 비렴이 전에 없이 심약한 표정이 되더니 이내 한숨을 쉬었다. “그럴 수는 없네.” “왜요?” 비렴은 원통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몰라서 그러는가? 고시울률은 주신에서 가장 큰 힘을 쥐고 있다네. 신시 동쪽의 주신 반쪽은 고시울률의 손에 들어간 것이나 마찬가지잖은가? 자칫 고시울률에게 죄를 물었다가는 주신의 반쪽이 들고 일어나게 되네, 더구나 한웅님 문제도 다시 들춰지게 되고........ 더구나 한웅님도 편치 않으신데....... 자칫 아주 큰일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네.” “도단이를 달래서 마음을 돌리게 하는 일이 그래서 중요한 것이야.” 신지울태가 거들자 병예도 말했다. “이 일은 결국 자네가 해결해주어야 하네. 도단이를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천 자네뿐이니까 말일세.” 치우천은 입술을 깨물고 한참 뭔가를 생각하다가 돌연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고는 다시 고개를 갸웃거리며 곰곰이 생각하다가 신지울태에게 물었다. “운사님, 운사님은 다른 사람을 저희 아버님으로 보이게 하는 주술을 쓰셨지요?” 신지울태는 민망하여 얼굴을 붉혔다. “부끄러운 일을 왜 자꾸 들추어내는 것이야?” “들추려는 게 아니라 중요해서 그럽니다. 그렇다면 뭔가 없었던 일을 정말로 보이게 하거나, 하지 않은 일을 한 것처럼 믿게 만드는 주술도 가능합니까?” “주술은 난데없이 왜?” “중요하다니까요.” 치우천이 정색을 하자 신지울태가 천천히 말했다. “안 되지는 않을 것이야. 도의 힘이 깊은 사람이야 무엇인들 못하겠어?” “보지 않은 것을 보았다고 믿게 하는 것도 되겠지요? 그것은 눈을 속이는 것입니까? 마음을 속이는 것입니까? 그러니까....... 좀 말하기 힘듭니다만, 음, 없는 것을 만들어 보여주는 것입니까, 아니면 마음을 움직여 본 것처럼 믿게 만드는 것입니까?” 신지울태는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 알아. 두 가지 다 될 것이야. 허나 없는 것을 만드는 것은 굉장한 도력이 필요한 것이야. 그럴 사람은 세상에 많지 않을 것이야. 다만 상대방이 그렇게 강하지 않다면 그의 마음을 움직이는 편이 훨씬 쉬울 것이야. 마음을 움직여 보지 않은 것을 보게 만든다, 나라면 그렇게 할 것이야.” 그러자 치우천은 환한 표정으로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도단이를 만나봐야겠습니다!” 치우천이 서두르자 삼사는 뭔가 수가 생겼나 보다 싶어서 서로 마주보며 기뻐했다. “그러게. 어서 가보게나. 도단이는 감옥에 있네. 감옥 가는 길은 밖에 나가서 여기를 지키는 사울아비 작은스승에게 물어보게. 치우가람 놈들이 갇힌 곳이기도 하다네.” 치우천은 마음이 급했지만, 이제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자 문득 치우가람의 얼굴도 보고 싶어졌다. 다른 사람은 가엾기도 했으되, 치우가람은 그야말로 불구대천의 원수였다. 수많은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갈래 치다가 이제는 증오심이 되어 저절로 표정에 나타났다. 치우천은 비렴에게 부탁했다. “마지막으로 치우가람 놈의 얼굴을 한 번 보아도 괜찮겠습니까?” 순간 치우천의 눈빛이 증오로 이글거리는 것을 보고 비렴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자네는 변덕스러운 성격은 아닌 것으로 아는데?” “예? 그렇다고 생각합니다만.” “방금 전까지 그들이 불쌍하다고 한 사람의 눈빛치고는 너무 좀 그렇군.” 치우천은 허탈하게 미소를 지었다. “변덕이 아니라 경우가 다를 뿐입니다. 치우가람 놈은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을 뿐입니다. 한웅님을 속이고 제 어머님을 해치게 만들었으며 아버님을 저 지경으로 만든데다가.......그....... 그....... 맥달님에 이르기까지 모두의 원수 아니겠습니까?” 갑자기 맥달의 이야기를 하자 마음 한 켠에서 잊고 있던 그 무엇이 울컥 솟구쳐 오르는 것 같았다. 더불어서 걷잡을 수 없이 흥분이 되었다. 치우천의 얼굴이 느닷없이 붉어지자 비렴은 고개를 갸웃하면서 말했다. “자네를 이해하기가 참 힘들군그래. 좋을 대로 하게나. 오늘밤에 바로 떠나보낼 것이니 만나려면 지금 만나게.” 치우천은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기분을 애써 억누르며 간신히 말했다. “가보겠습니다.” 치우천은 비렴에게 인사하고 밖으로 나왔다. 밖에는 치우비가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다가 치우천을 보자 활짝 웃으며 뭔가 말하려 했다. 허나 치우천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고 느꼈는지 금세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다. “형, 왜 그래? 뭔가 잘못되었어?” 치우천은 억지로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다, 잘못되기는 허허, 아니, 잘못된 일 없사옵니다. 웃뜸 사울아비님.” “엥? 무슨 소리야?” “네가 웃뜸 사울아비가 되기로 했다.” “형이 아니구?” “전에 다 이야기해놓고 왜 또 그래1 네가 되는 것이 낫다.” 그러나 치우비는 기뻐하기보다는 치우천의 표정을 걱정스레 살피며 다시 물었다. “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 아우가 기쁜 소식에도 불구하고 자신부터 걱정해주자 치우천은 애써 얼굴을 폈다. “아니다. 도단이에게 문제가 생겼다는구나.” 치우천은 비에게 도단이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치우비는 놀라며 펄쩍 뛰었다. “그래서는 안 되지! 비록 죄가 있어도 그렇게 할 수는 그러다가 치우비는 맥달을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맥달님을 생각하면 그것도 참....... 더구나 죄는 죄인데......... 친하다고 풀어주는 것은.......” 치우비는 맥달을 몹시 존경하고 좋아하던 처지라 그 역시 마음을 정하기 힘든 모양이었다. 치우천은 치우비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그럴 수는 없지. 아무리 삼사께서 그러길 바라신다 해도 도단이에게 죄가 있다면 그냥 덮어둘 수는 없다.” “그러면 어떻게?” “도단이에게 꼭 물어봐야 할 것이 있다. 어쩌면 말이다, 도단이는 죄를 짓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치우비는 눈을 크게 뜨며 못 믿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건 말이 안 되잖아!” “그건 가서 말해봐야 안다. 어서 가자.” 치우천은 몹시 서두르며 사울아비 작은스승을 찾았다. 치우비는 치우천이 평소와는 다르게 유달리 서두르는 것을 보며 생각했다. ‘역시....... 맥달님 때문에 저러나?’ 형제는 한웅의 회의실 앞을 지키던 사울아비 작은스승에게 말하여 그의 안내를 받아 죄인들이 갇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사울아비 작은스승은 눈치가 좀 있는 사람이었던지, 이미 치우천이 웃뜸 사울아비가 되기나 한 것처럼 비위를 맞추려 했다. 전형적인 ‘안사울아비’의 모습이었다. 치우비는 좀 불쾌한 기분이 들었으나 치우천은 내색하지 않았다. 감옥은 한웅의 집 한 켠에 있는 나지막한 바위동산 밑으로 판 굴이었다. 굴속은 생각보다는 넓었고 곳곳에 사울아비들이 지키고 있었다. 사울아비 작은스승은 그중 한 토굴 방에 도단이가 갇혀 있다고 알려주었다. 어둡고 퀴퀴한 방에 도단이는 한가운데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삶의 의욕을 스스로 버린 탓인지, 그의 얼굴빛은 놀랄 만큼 수척해져 있었다. 치우천이 방으로 들어서자 도단이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천, 비 자네들 왔는가?” 도단이가 발소리만으로도 사람을 알아맞히는 것을 보고 치우천은 내심 놀랐으나 곧 부드럽게 물었다. “그래, 날세. 그런데 자네 지금 무엇 하는 겐가?” 도단이는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대답했다. “내가 한 짓을 정리하려고 하는 중일세.” “자네가 한 짓이라니?” 도단이는 다시 한 번 살짝 체념한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무슨 소리인가1 다 알고 있잖은가? 나는 이미 그전부터 이러려고 작정했다네.” 그때 치우비가 참지 못하고 호통을 쳤다. “자네 이러면 안 돼! 치우가람 놈을 잡는데 자네 공이 컸잖은가!” 도단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공은 공이라 할 수 있지만, 죄는 또 죄대로 가는 것일세.” 치우우천은 타이르듯 말했다. “삼사께서는 자네를 벌하기를 바라지 않으신다네. 한웅님이나 고시울률님도 역시 그러기로 뜻을 모으셨네, 자네는 이럴 필요가 없어.” 도단이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두 사람은 나를 용서하지 않을 걸세.” “음?” “우선 자네는 영영 그 일을 잊지 못할 걸세 자네가 맥달선인에게 품었던 마음, 지금에서는 알 것 같지만 그때는 정말 몰랐었네.” 치우천은 다급히 도단이의 말을 막았다. “나는 자네를 탓하고 싶지 않아!” “아니야. 자네는 나를 벌주지는 않겠지. 허나 잊지는 못할 걸세. 천, 자네는 내 벗일세. 나는 벗에게 그런 마음을 새겨둔 채로 살고 싶지는 않다네.” “아냐, 아냐. 자네는 나에 대해 너무도 잘못 생각하고 있어.” 치우천이 부정했지만 도단이는 웃으며 말했다. “자네가 정말 나를 용서한다면 마음이 편하겠네. 하지만 절대 나를 용서하지 않을 사람이 또 있어서 아니 되네.” “그게 누군가?” 도단이는 체념한 듯 허탈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바로 날세.” 치우비는 할 말이 없다는 듯 푸욱 한숨을 쉬었다. 허나 치우천은 도단이에게 바싹 다가가 말했다. “도단이, 나는 자네를 살리고 싶네. 아니, 살릴 것이네.” “자네가 아무리 재주가 좋아도 스스로 죽겠다는 사람을 말릴 수는 없을 것이라 생각되는데?” “아니, 나는 그럴 수 있을지도 몰라.” 치우천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대뜸 물었다. “자네, 사람의 피를 본 적 있는가?” “만져본 적은 많지만...... 본 적이야 있겠는가? 나는 날 적부터 눈이 보이지 않았는데 말야.” “그럼, 피가 무슨 색깔인지 아는가?” “붉은색이라고 이야기는 들었네. 그런데 그건 왜 묻나?” “그럼, 붉은색이 무슨 색인지 아는가?” 도단이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되물었다 “내가 그걸 어떻게 알겠는가? 나를 놀리려는 겐가?” 치우천은 돌연 따지듯 빠르게 말했다. “아니야, 아주 중요한 일일세. 자네는 붉은색을 본 적도 없어. 그런데....... 자네가 전에 했던 말이 있네. 맥달을 죽였다고 말할 때 자네는 마치 본 것처럼 이야기를 했어. 횐옷에 솟구치는 붉은 피를 잊을 수 없다고 분명 이야기했네! 그건 대체 어찌 된 것인가?” 순간 도단이의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몹시 충격을 받은 듯 도단이는 몸을 부르르 떨다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그랬네....... 그랬어........ 정말........ 정말 내가 어찌 알았지? 응? 그게 어찌 된 일이지?” 치우천은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 아직도 그것을 기억하는가? 자네가 ‘보았다’는 그 광경을 말이야.” 도단이는 얼이 빠진 것 같았다. 그뿐만 아니라 치우비도 놀라서 입을 딱 벌렸다. 도단이는 한참 인상을 쓰며 생각을 되짚어보려고 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냐, 못해. 못하겠네. 그 일이 기억은 나는데‥‥‥ 정작 내가 보았다는 그것은 무엇인지 기억조차 나질 않아. 내가 왜 그걸 ‘보았다’고 했는지도 모르겠네. 이게 뭐지? 어떻게 된 건가?응?” 치우천의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내 짐작이 맞다면, 자네는 주술에 걸린 것일지도 몰라. 맥달을 죽였다는 생각을 가지도록 그리고 맥달은 죽지 않았을지도 몰라.”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도단이가 부르짖듯 외쳤지만 치우천은 침착하게 되받았다. “나는 예전부터 맥달이 왜 스스로 죽음을 택했는지 이해가되지 않았네. 앞날을 다 꿰뚫어보고, 자기가 죽을 날을 다 안다는 사람이 그렇게 죽었다는 것이 이해가되지 않았네. 그때가 죽을 때였을지도 모른다 생각도 해보았네만, 그러기에는 그전에 그녀의 행동이 이해가되지 않았어. 그녀 정도의 신통력이면 자네가 오는 것도 분명히 미리 알았을 텐데 말야. 그녀는 그 바로 전에 자신이 살아야 할 이유를 내게 묻고 몹시 기뻐하는 것 같았거든. 그런데 그렇게 어이없이 죽음을 맞이했을 리 없다네. 더구나 맥달은 자부선인 밑에서 자란 사람이며, 주술력이 대단할 것일세. 내 짐작이 맞다면, 맥달은 죽지 않았어.” 치우비가 다급하게 물었다. “그러면 맥달님이 스스로 모습을 감추어버렸다는 거야?” “그랬을 것 같지는 않다. 맥달 스스로가 그럴 생각이었다면 그전에 나에게 자기가 살아야 할 이유를 묻지도 않았을 거야. 그냥 그 자리를 피했겠지. 그게 아니라, 누군가가 자신을 구할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랬다면 모든 것이 제대로 풀린다. 스스로 몸을 숨길 생각이었다면 그런 이야기는 왜 물었겠니? 맥달이 아니라 누군가가 구했을 가능성이 높다!” “허나...... 아니야, 그 자리에는 나만 있었던 것이 아니야. 질쾌도 있었어!” “질쾌도 같이 찔렀는가? 바로 그 점이 아주 중요하네.” 도단이는 한참 생각하다가 말했다. “아닐세. 질쾌는 사람을 구하는 단군이야. 사람을 찌를 수는 없다고 말했네. 허나 질쾌도 내내 같이 보고 있었네.” 치우천은 열에 들떠 외쳤다. “자네를 주술에 씌게 해서 헛것을 보게 만들었다면, 질쾌 또한 주술에 걸려 있었을 걸세.다만 그 주술을 쓴 사람은 자네가 장님인지 몰랐던 게 분명해. 그래서 그 광경을 본 것처럼 생각하게 만들고 맥달을 구해갔겠지, 원래대로라면 아무도 모를 일이지만, 자네는 원래 ‘본다’는 것을 모르는 장님이었기에 오히려 내게 그리 말하게 된 거야! 이제 분명해졌네. 맥달은 살아 있어. 그리고 그렇다면 자네도 더 이상 맥달을 죽인 죄를 안고 있지 않아도 된다네!” 도단이의 파리해진 얼굴에 핏기가 올라오는 듯했다. “그게.......그게 정말일까? 허나....... 분명 그 자리에는 불에 탄 여자 시체가 있었는데.......” “그냥 시체도 아니고 불에 탄 시체일세. 그 정도는 구하려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네. 더구나 그때 질쾌가 시체를 검사했다고 하네. 질쾌 스스로가 끼어든 일이었으니 자세하게 조사했을 리도 없고!” “그런데 누가......... 누가 그런 주술을 쓸 수 있지? 그런 재주를 가진 사람이 어디 있지?” “나도 모르네. 허나 운사 신지울태님께서는 싸움터에서 다른 사람을 우리 아버님처럼 보이게 만드는 주술을 쓰시기도 했다네. 내 아까 언뜻 물었네만, 운사님께서는 그 정도 주술은 쉽게 쓰신다는 듯이 말 했다네. 그러니 좀더 조사해보면 알 수 있을지 모른다. 맥달을 찾아야한다. 누가 데려갔는지는 모르지만 이렇게 오랫동안 소식이 없는 것을 보면 좋지 않은 상황에 처해 있을지도 몰라.” 치우비는 무심코 그보다는 맥달이 보고 싶기 때문이 아니냐고 물으려다가 급히 입을 다물었다. 치우비는 얼른 그 생각을 지웠다. “주술력이 대단한 사람이 데려간 것 같은데 자부선인님이 도로 데려가셨다면?” “자부선인께선 사람들 일에 그렇게 일일이 끼어들 분이 아니잖아. 더구나 그랬다면 맥이 알았을 거다. 허나 맥은 맥달이 죽은 것을 몰랐고 그 얘기를 듣고 정말로 슬퍼했었어. 그러니 사람들 중에 누군가 그랬다는 이야기인데........” 치우천은 핀잔하듯 말하고 나서 고개를 숙인 채 생각에 잠겼다. 치우비와 도단이도 숨을 죽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치우천은 다시 고개를 들고 도단이에게 물었다. “맥달을 구해내려면 그날 그 장소에서 맥달이 죽게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어야 한다. 그 일에 대해 아는 사람은 누구누구일까?” 도단이는 천천히 말했다. “나와 질쾌....... 그리고 치우가람과 치우바람뿐이야. 허나 그놈들에게 주술을 부릴 재주는 없잖아.” “그놈들이 다른 사람에게 부탁했을 수도 있잖은가?” “말이 안 되네. 치우가람과 치우바람은 맥달님을 죽이려던 놈들인데 그놈들이 또 구해냈을 리는 없잖은가?” 그 말을 듣고 보니 치우천도 막막해졌다. “정말 넷 말고는 아는 사람이 없을까?” “더 있을 수가 없어. 우리 넷이 있는 자리에서 그 이야기를 했고 바로 그날 밤에 일을 치렀으니 어디로 새나갔을 리도 없잖은가.” 치우천이 할말을 잃자 도단이의 얼굴이 다시 해쓱해졌다. 도단이가 풀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안 되겠네 나도 잠시나마 희망을 가졌네만...... 자네의 그 생각은 추측에 불과하네. 내가 뭔가에 헛 씌었을 수도 있어. 나도 뭔가 석연치는 않지만, 그것만으로 맥달님이 죽지 않았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네. 내 마음을 돌리려는 자네 뜻은 눈물겹도록 고맙네. 허나 내가 지은 죄는 여전히 죄일세. 맥달님이 살아계신 것이 확실해지지 않는 한, 나는 마음을 돌릴 수 없다네.” “도단이! 그러지 말게나. 일단 나와 함께 더 조사를.......” 치우천이 간곡하게 말했으나 도단이는 막무가내였다. “나를 자꾸 추하게 만들지 말게. 이 정도로 되었네. 고마우이. 내가 더 해줄 말은 없는 것 같네.” 그리고 도단이는 아예 등을 돌리고 뒤로 돌아 앉아버렸다. 치우천은 희망을 막 손끝에 잡은 듯하다가 도로 놓쳐버린 듯한 처참한 기분이 되었다. 잘만 하면 도단이도 구하고 맥달을다시 볼 희망도 가질 수 있었는데 말이다. 허나 치우천은 포기하지 않고 말했다. “도단이, 자네, 죽을 생각은 아직 하지 말게 내 무슨 일이 있어도 맥달이 죽지 않았음을 밝혀내고야 말 것이네!” 그때 도단이가 조용히 말했다. “천, 고깝게 들릴지도 모르겠네만, 그러지 않는 편이 오히려 나을지도 모르네.” 치우천은 놀라서 물었다. “무슨 소리인가?” 도단이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자네, 맥달님에 대한 감정이 남다르지?” “무슨 소리야? 자네가 어찌 알고?” “자네 같은 철석간장을 가진 사람이 회의 중에 목 놓아 울기까지 했네. 이미 우리 벗들은 다 안다네. 허나 자네는 이미 안사람이 있지 않은가? 더구나....... 이런 말을 하기는 그렇네만....... 이제 다시 볼 수 없을지 모르니 내 자네를 위해 죄다 까놓고 말하겠네. 그 사람을........가벼이 보면 안 되네.” 치우천은 영문을 몰라 눈을 커다랗게 떴다. “무슨 소리인가?” 도단이는 탄식하듯 내뱉었다. “자네 안사람만큼 예쁘고 재주 좋은 여자는 드물 걸세. 그래서 누구나 자네를 부러워했다네. 허나 작은 주신의 낭자들은 더 이상 자네를 부러워하지 않는다네. 그 이유가 뭔지 아는가?” “자네, 형수님에게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겐가?” 치우비가 놀랍고도 화가 나서 급히 말꼬리를 돌리려 했으나 도단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내 얼굴이 다 화끈거리네만 그래도 참고 듣게나. 이미 자네 안사람이 독하고 무서운 여자라는 소문은 작은 주신 사람들이 다 알고 있네. 다만 자네 낯을 보아 누구도 말을 하지 않는 것뿐일세. 작은 주신 사람은 다 아는데, 자네 한 사람만 모르고 있는 것일세. 겉으로는 다정다감하고 온순하기 그지없지만 사실은 자기 자매를 눈도 깜짝 않고 찔러 죽일 만큼 독하다고 말야. 물론 여자가 강단이 있는 게 나쁜 것만은 아닐세. 독도 잘 쓰면 약이 되듯, 자네에게도 많은 힘이 되어줄 수 있지. 허나‥‥‥ 허나 자네가 맥달님을 계속 찾는다면.......” “맥달과 나와는 아무 관계가 없었네!” 치우천은 궁색하게 변명했다. 허나 도단이는 못 들은 듯 자기 할말만 했다. “어떤 사람은 많은 마누라를 거느리고 살기도 하지만, 자네 안사람이나 맥달님 같은 여자들은 세상에서 둘도 찾아볼 수 없는 그런 사람들일세. 여럿을 마음에 두어서는 안 된다는 뜻일세.” 치우천은 가슴속을 바늘로 찔리는 것 같았다. 허나 치우천은 내색하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내 안사람을 결코 배신하지 않는다네. 맥달님을 구하려는 것은 그녀를 존경하기 때문이네 그리고 자네를 구하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다소 떨리는 듯한 치우천의 말을 듣고 도단이는 조용히 되받았다. “자네 안사람에게 감정이 있는 것은 아닐세. 그분과 자네가 함께 소리를 낼 때에는 정말 이렇듯 어울리는 사람들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라네. 허나 자네가 자네 마음을 어떻게 정하지 않는다면, 자네보다 자네 안사람이 자네를 용서하지 않을지도 모르네.” 치우천은 말문이 막혀 대답하지 못했다. 도단이는 차분히 말을 맺었다. “나는 눈이 보이지 않는 대신, 다른 감이 좀 예민한 편일세. 자네 집안일까지 나서서 이야기했네만, 내 말이 틀리기를 바라네. 허나 천, 조심하게. 지나족 수십 천의 칼이나 신수가 수십 마리 몰려와도 눈도 깜짝 않을 자네지만 자네 안사람만은 조심해야 할 것일세, 나도 맥달선인만은 못해도 앞날을 점칠 줄 아는 박수일세. 나에게는 그런 느낌이 있다네. 이제 정말 더 이상 할 말이 없네.” 그리고 도단이는 조개껍질처럼 굳게 입을 다물어 버렸다. 치우천은 더 할말이 없어 망연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뒤통수를 호되게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치우비가 어색한 분위기를 견디다 못해 형을 잡아끌다시피 하여 밖으로 나오자, 치우천이 풀죽은 목소리로 물었다. “비야, 네가........ 네가 보기에도 그러니?” “음? 뭐....... 뭐가?” “네 형수 말이다. 정말....... 나 말고 다른 작은 주신 사람들이 다 그렇게 알고 있니?” 치우비는 우물쭈물하며 형의 눈빛을 피하려 했으나 치우천이 다시 한 번 따져 물었다. “지난번 무라에게서 약간은 들었다 허나....... 허나 도단이도 알 정도라면........ 정말로 작은 주신 사람들이 다 안단 말이냐? 너도 아니, 응? 솔직하게 말해봐!” 치우비는 단념한 듯 짧게 발했다. “그런 것 같아.” 치우천은 낙담하여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비야, 나는 말이다 분명히 네 형수를 사랑한다. 아무리 독한 마음씨라고 해도.” “그래, 그래.” “헌데....... 맥달 말이다 이미 죽었을지도 모르는데....... 왜 이러는지 나도 모르겠다. 내가 왜 이러지? 나는 정말 맥달을 미워했던 사람인데....... 네 형수만큼 예쁘고 다정한 여자도 아닌데 말이다. 응?” 치우비는 형을 달래듯 조심스럽게 말했다. “형이 잘한다는 것은 아냐. 허나 사람 마음을 어떻게 하겠어?” 그러면서 치우비는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그렇게 된다면 나야말로 안 이러게?” 치우비가 솔직하게 말하자 치우천은 갑자기 우스워져 피식 웃었다. “형제가 다 여자 때문에 꼴좋구나, 하하.” 치우천이 돌연 웃자 치우비도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난 형은 안 그럴 줄 알았는데, 히히.” 그러면서 치우비가 넓적한 손으로 치우천의 등을 툭 치자 치우천은 훨씬 마음이 풀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난 네 형수를 배신할 마음은 없다. 맥달과 맺어진다는 생각, 꿈에도 해본 적이 없어.” “알아, 알아. 형이 그럴 사람이 아닌 거.” “죽어도 난 네 형수를 배신 안 한다.” “당연하지 허나........” 소녀도 그렇게 생각할까 하고 치우비는 물으려다가 그 말을 꿀꺽 삼켜버렸다. 치우천이 비록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조금 맥달 쪽으로 기울어졌다고 해도 그것이 꼭 죄라고 보이지는 않았다. 사실 여러 명의 마누라를 데리고 사는 남자들도 많고 많았다. 허나 치우비가 보기에도 소녀의 경우는 결코 그런 일을 용납할 사람 같지 않았다. 예전에도 가끔씩 소녀는 천연스러운 기색으로 맥달의 일을 치우비에게 묻곤 했다. 겉으로는 푼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감은 빠른 치우비는 그 부드러운 물음 속에 릴이 숨어 있는 가시를 느끼고는 재빨리 말을 돌려 버린 적이 많았다. 형수인 소녀에게 항상 덤덤하게 할 일을 다 했지만, 실제로 그녀를 마음속으로 탐탁하게 여긴 적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소녀가 독한 성격을 그대로 보여주었다면 지금보다는 더 호감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허나 소녀는 그런 마음을 깊숙이 감추다가 의표를 찌르듯 보이곤 했기 때문에, 치우비는 그녀를 싫어한다기보다는 두려워했다. 이런 상황에서 도단이가 터뜨린 말은 어쩌면 치우비가 형에게 하고 싶었던 말인지도 몰랐다. 치우비는 조심스럽게 형에게 말을 건넸다. “형, 형은 이상하게 맥달님 이야기만 나오면 평상시와 달라져. 그래서 사람들이 다 그렇게 생각하게 되는 걸 거야. 아이쿠, 물론........ 물론 마음대로는 안 되겠지만 표 좀 안 나게 해봐. 그러면 형수도 모르고 넘어갈 거야. 어차피 형이 무슨 죄를 지을 사람도 아니고........” 치우비의 말이 끝나자마자 치우천이 심각하게 물었다. “비기야, 너도 맥달님을 좋아했잖니?” “그야 그렇지. 허나 형과는........감정이 조금 다를지도........” “좌우간 말이다. 네가 그렇다고 해서 공손발이 너를 구박하거나 원망할까?” 오랫동안 꺼내지 않았던 공손발 이야기가 나오자 치우비는 다시 찔끔했지만, 곧 허허 웃으며 말했다. “난 그런 생각을 해본 적도 없어. 그리고 나는 그분을 존경할 뿐인데, 뭘.” 별안간 치우천이 날카롭게 말했다. “나도 그래. 적어도 나는 내 마음을 다스리려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내가 죄를 지은 것처럼 찔끔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안 그러니?” 이럴 때의 치우천은 바늘 끝조차 파고들어갈 틈이 없을 정도로 원칙론자가 되는 것을 잘 아는 치우비는 두루뭉술하게 말끝을 흐렸다. “글쎄........ 뭐 그렇겠지.” “나는 주신에 큰 도움이 될 그 사람을 구하고, 또 내 벗인 도단이를 구해야 한다. 나는 맥달님을 찾아내고 말 거야. 내 마음보다 그 일들이 우선이다. 너에게 말해봐야 소용은 없지만....... 아니, 나 스스로에게라도 분명히 해두고 싶다. 알겠니?” “그래, 그럼!” 치우비는 사람 좋게 웃으며 이내 덧붙였다. “형은 세상에서 제일 잘난 사람이지만, 만약 형이 세상에서 가장 못나고 가장 나쁜 사람이어도 난 형 편이야. 알지?” 진심 어린 치우비의 말에 치우천도 마음이 많이 풀리는 것 같았다. “이 녀석, 하는 말하고는.” 치우천은 아차 싶어 잠시 말을 끊다가 이내 덧붙였다. “아까 공손발 이야기를 꺼내서 미안하다. 너도 그동안 참느라 괴로웠을 텐데.” “뭘, 괜찮아.” “그런데 이제는 괴로워하지 않아도 된다.” “무슨 소리야?” “이제 너는 대주신의 웃뜸 사울아비다. 정식으로 당장 내일이라도 헌원에게 사람을 보내서 공손발을 네 색시로 달라고 요청할 거다. 그러면 제아무리 헌원이라도 절대 거절할 수 없을 거야. 예전에 약속한 것을 이제야 지키게 되었구나. 녀석아, 좋겠다! 하하!” 치우천이 엄숙하게 말하다 끝에 가서는 웃음을 터뜨리자 치우비는 잠시 멍해졌다가 입을 함박만큼 벌리면서 껄껄 웃었다. “형! 고마워!” “녀석, 그동안 참 오래 마음 고생했다. 이제는 즐겁게 지내라. 더 힘내고. 알겠니?” “그럼!” 치우비가 싱글벙글 입가에 하나 가득 웃음을 머금고 있을 때 사울아비 작은스승이 다가왔다. 그제야 치우천과 치우비는 이야기를 멈추었다. “이제 일이 끝나셨습니까?” 그가 묻자 치우천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 잡혀 있는 죄인들을 만날 수는 없을까? 치우가람 말이네.” “예? 안 될 것은 없습니다만........ 무슨 일로?” “꼭 물어봐야 할 것이 있어서 말일세.” 사울아비 작은스승은 좀 난감해하다가 말했다. “비렴님께 여쭈어봐야겠습니다만.” “그럼 그리 하도록 하지.” 이미 비렴의 승낙을 받았으나 그래도 절차를 밟아야 했기에 치우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울아비 작은스승은 웃으며 얼른 손사래를 쳤다. “그러실 것 없습니다. 제가 금방 여쭈어보고 오죠. 웃뜸 사울아비 되실 분을 오라 가라 했다고 나중에 제가 한소리 먹습니다.” “그런 것 가지고 누가 뭐라 한다 그러시오?” 치우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이야기했으나 치우천은 웃으며 치우비의 말을 막았다. “그럼 부탁하오.” “저야말로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헤헤.” 사울아비 작은스승이 달려 나가자 치우비는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웃뜸 사울아비가 되면 안사울아비도 다스려야 하는군 그래. 힘들겠는 걸?” 치우천은 웃으며 치우비를 쳐다보았다. “세상에 쉬운 일만 있는 건 아니지. 그렇다고 그들을 모조리 나쁘게만 볼 것은 없어, 그들에게도 배울 게 있단다.” “아부하는 거?” 치우비가 비웃듯 묻자 치우천은 고개를 저었다. “다른 사람 기분을 맞추는 재주도 재주다. 아부하는 습관만 안 배우면 되잖니. 그것도 기술이라면 기술이야. 다만 나쁜 건 아무 때나 아부부터 하는 그 못된 습관이지. 너도 이제는 좀 넓게 볼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치우가람 놈의 낯짝은 뭐 하러 보려구?” “치우가람 놈이 잡혀 이제 끝장나게 되었단다. 그것을 생각하니 온갖 생각이 나서 그런다. 더구나 그때 맥달 일을 아는 건 그놈 형제뿐이잖아. 더 늦으면 다시는 못 볼 테니 반드시 물어봐야 하겠다.” 치우비도 곧 얼굴을 굳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순한 치우비였으나 치우가람에 대한 증오심은 형과 다를 바 없었다. “그 녀석들 어떻게 되는데?” “사막에 버려질 거다.” 그 말에 치우비는 잠시 놀라고 안쓰럽다는 표정을 짓다가 이내 얼굴을 굳혔다. “그래도 싼 놈들이야!” 사울아비 작은스승이 금방 돌아와 곧 그들을 안내했다. 치우가람이 갇힌 곳은 도단이가 있는 곳과는 달리 굴곡이 심하고 더 깊은 굴속이었다. 겹겹이 사울아비들이 지키고 있는 문을 지나 그들은 마침내 치우가람 형제가 결박당한 채 초췌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방에 들어섰다. 그들의 옆방에는 부루버들과 부루위단등의 죄인들이 잡혀 있다고 작은스승이 귀띔을 해주었다. 허나 그들에게는 볼일이 없었다. 치우가람과 바람 형제는 그동안 얼마나 얻어맞았는지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허나둘 다정신은 멀쩡했다. 치우바람은 눈을 돌려 외면했으나 치우가람은 독기가 가득 고인 눈빛으로 치우천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여긴 왜 오셨나? 직접 죽이러 오셨나?” 치우가람이 쉰 목소리로 빈정대자 치우비가 화를 참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 “너, 전에 한웅님께 지은 죄가 있다면 좋게 죽지 못할 거라고 맹세한 적이 있지? 이제 그 맹세대로 되게 되었구나. 꼴좋다!” “흥! 내가 재수가 없어서 그리 된 것뿐이다. 잔말 말고 죽이려면 단숨에 죽여라.” 치우비는 여전히 독살 맞은 치우가람이 징그럽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지독한 놈이구나. 너 같은 놈은 죽어서도 안파견 한님께서 더 나쁜 곳으로 쫓아내실 것이다. 이제 네놈들도 사막에 버려지게 되었으니 꼴좋게 되었다. 우리가 당한 만큼 한 번 되게 당해봐. 너는 사막을 잘 안다니 혹 우리처럼 살아나올지도 모르지. 아마 안파견 한님이 못나오게 만드실 테지만. 거기서 죽어 비울걸이 부리는 도깨비나 되렴.” 치우비가 악담을 퍼붓는데도 치우가람은 개의치 않고 한껏 비웃으며 되받았다. “네놈들이 이겼다고 생각하지 마라. 내가 죽어도, 네놈들도 편히 죽지는 못할 것이다. 내가 먼저 안파견 한님 곁에 가서 네놈들을 기다리고 있다가 거기서 다시 한 번 죽여주겠다.” 치우가람이 독살 맞게 말하자 치우비는 질렸다는 듯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러자 치우천이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치우가람.” “왜 부르느냐?” “나는 마지막으로 물어볼 것이 몇 가지 있어서 너희를 찾아온 것이다. 대답해줄 수 있겠느냐?” 치우가람은 갑자기 미친 듯 웃다가 말했다. “못 한다! 못 해!너희 놈들이 좋아할 일은 하나도 해줄 수 없다!” 그러나 치우천은 개의치 않고 되받았다. “이제 우리 서로 다시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 분명히 할 것은 분명히 해놓는 편이 나만이 아니라 너희를 위해서도 좋을 거라 생각한다. 너희는 왜 우리를 그토록 미워했느냐? 우리 어머님을 돌아가시게 만들어서?” 치우가람은 순간 흠칫하며 입을 다물었다. 그때 잠자코 슬픈 표정으로 있던 치우바람이 채근했다. “형, 말 좀 해봐.” “입 닥쳐!” 치우가람이 표독스레 쏘아붙이자 치우바람은 찔끔하다가 이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그건 난 나중에 알았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입 닥치라니까!” 치우가람이 소리치는데도 치우바람은 못 들은 척 계속 말했다. “너희 형제가 그것을 알면 우리를 그냥 두지 않을 테니....... 우리는 너희 형제를 어떻게든 없애야만 했다. 너희 형제에게는 정말 미안하구나........” “입 못 닥치냐?” 치우가람이 크게 소리치자 치우바람도 덩달아 외쳤다. “이제 우린 죽을 거야! 이제 사막에서 죽을 건데........! 아직도 그래야만 하겠어? 응?” 치우바람은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치우가람에게 애원했다. “이제 그만....... 그만하자구. 난......... 난 정말 후회돼.” “못난 놈!” 치우가람이 이를 부드득 갈며 고개를 돌려버리자 치우바람은 엉엉 울면서 말했다. “그래, 모든 게 잘못된 거다. 다 잘못된 거야. 나와 우리 형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어.......” 치우비는 치우바람이 우는 모습을 보자 마음이 아파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치우가람이야 어찌 되었건 치우바람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치우천은 냉정했다. “그러면 치우바람, 한 가지만 더 묻자. 이것을 솔직히 말해주면 비록 너희를 살려줄 수는 없어도, 내 너만은 마음으로부터 용서해주마.” “용........ 서.......?” 치우바람은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치우천은 힘주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치우가람은 코웃음을 치며 눈을 돌려버렸지만 치우바람은 강한 호기심을 보였다. “좋다, 말해봐라.” 치우천은 뜻밖의 질문을 했다. “맥달선인이 정말 죽었느냐?” 그 말에 치우바람은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고, 치우가람은 고개를 획 돌리며 쏘아붙였다. “죽었다. 더 할 말이 없다!” 치우천은 긴장된 음성으로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허나...... 뭔가 이상하다. 석연치 않아.도단이는 박수다. 배냇장님이란 말야. 그런데 그는 맥달님을 칼로 찌를 때 솟구치는 붉은 피를 보았다고 했다! 눈먼 도단이가 어떻게 피를 볼 수 있겠느냐? 아니, 본다는 느낌을 어떻게 가지고 있었겠느냐?” 그 말에 치우가람이 어깨를 흠칫거렸고 치우바람은 눈을 크게 떴다. 치우천은 계속 말했다. “물론 아닐 수도 있다. 그냥 그런 느낌을 받았다는 것일지도 몰라. 헌데 그게 주술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멀쩡한 다른 사람을 아버님처럼 보이게 만드는 주술이 있다면, 한사람에게 헛것을 보게 만들어 사람을 찌르지 않고도 찌른 느낌이 들게 하는 주술도 있을 것이다. 그런 주술이었기에 눈먼 도단이가 볼 수 없는 것을 본 것 같은 착각을 했을 것이다. 나는........그렇게 생각.......” 대뜸 치우가람이 냉랭하게 치우천의 말을 끊었다. “누가 알고 그렇게 주술까지 써주겠느냐? 말도 안 된다. 그 여자는 네 편이라 하늘 제사에서 우리를 방해했으니 죽여야만 했다 더구나 내 아우 때문에라도 죽어 마땅했다.” “내 이야기는 왜 해?” 치우바람이 버럭 소리치자 치우가람도 지지 않고 되받아 외쳤다. “네놈이 그 여자에게 흘려서 정신이 나가지만 않았어도 그렇게 서둘러 죽이지는 않았을 거다!” 그러다가 치우가람은 다시 치우천에게 말했다. “이봐, 천. 그 여자를 왜 찾는지는 모르겠다만, 이미 죽어 불에 타버려서 가루도 안 남았을 거다. 더 꼴도 보기 싫으니 이제 그만 꺼져라.” 그때 치우바람이 간절한 목소리로 치우천에게 말했다. “천아, 나는 이제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바라지도 않는다. 허나 나는 어린 아들이 있다. 그 아이는........ 어지 되지? 응?” “아들이 있었느냐?” “그래, 아직 열 살도 안 된 어린애다. 그 아이까지 벌을 받는 것은 아니겠지? 응?” 그것은 치우천도 모르던 일이라 뭐라 말할 수 없었다. 치우가람은 치우바람을 다시 한 번 쏘아보았으나 치우바람은 그 눈길을 아예 무시했다. “그 아이가 죽지 않게 해다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아이를 한 번 보게 해다오 부탁이다. 제발 부탁이야.” “못난 놈!” 치우가람이 날카롭게 외쳤지만 치우천은 잠시 인상을 흐리다가 조용히 말했다. “그런 어린애라면 벌을 받지는 않을 것이다. 너무 염려 마라.” “아니야. 나는........ 나는 너무도 불안하다. 한 번만 그 아이를 보게 해주면 내 꼭 보답하겠다. 정말이다.” 아무 말이 없는 치우천을 대신하여 치우비가 불쑥 말했다. “네놈들을 용서할 수는 없지만, 음....... 마지막 소원이니 들어줄게 아니, 애 써볼게. 그러니....... 맘 편히 가거라.” “비야, 쉬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치우천이 조용히 말했지만 치우비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불쌍하잖아. 작은스승이 우리에게 설설 기던데 그 정도는 할 수 있을 거야. 그 아이 이름이 뭐냐?” 치우바람은 어깨를 들썩이며 기뻐했다. “그냥 누리라고 부른다. 제대로 된 이름은 아직 없고 좌우간 고맙다 정말 고맙구나.” 치우천은 약간 누그러진 표정으로 치우가람에게 물었다. “너에게는 아이가 없느냐?” 으르렁거리는 표정으로 치우가람이 쏘아붙였다. “그런 것, 없다!” “부루버들과의 사이에 난 아이는 그럼 누구 아기지?” “그건 한웅님의 아이다!” “이미 다 드러난 일이다. 아직도 고집을 부리느냐?” “흥! 나는 인정한 적 없다! 치우천, 네가 이겼다고 생각하지 마라!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하핫! 끝나지 않았어!” 치우가람은 발작적으로 웃으며 덧붙였다. “두고 봐라! 나는 살아날 거다! 사막에서 네놈이 살아난 것처럼 나도 살아날 것이다! 그리고 너희 형제 놈들을 다 죽이고, 주신을 쓸어버리고 내 나라를 세울 것이다! 반드시 그렇게 하고야 말 것이다! 아직 끝난 게 아니다! 끝난 게 아냐!” 치우천은 탄식하며 말했다. “치우가람, 너는 아직까지도 헛것을 보고 있구나. 홀려 있어. 이루지 못할 꿈을 나쁜 꾀와 나쁜 수법으로 이룰 수 있다고 믿고 있어. 네가 지금껏 해온 일들이 옳은 것이었다고 생각하느냐?” “너와 내가 무엇이 다르냐? 네놈도 머리를 썼고 나도 머리를 썼을 뿐이다. 네놈도 사람을 수없이 죽였고, 나도 그랬을 뿐이다. 다를 것이 없다! 다만 넌 재수가 좋았고, 난 운이 없었을 뿐이다!” 치우천은 담담히 되받았다. “아니, 그렇지 않다. 너는 남을 속이려 머리를 썼지만 나는 남을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머리를 썼다. 너는 자신을 위해서 사람을 죽였지만 나는 정당한 이유 없이는 사람을 죽이려 하지 않았다. 운으로 말하자면 네놈이 훨씬 운이 좋았고, 나는 늘 살아남으려고 허덕거려야 했다.” “말은 여전히 잘하는구나. 하지만 누구나 남보다 강해지고 싶고 자신의 적은 죽여 없애고 싶어 하는 법이다. 모든 산 것들은 다 그리 하는데, 내가 잘못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치우천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치우가람, 짐승들은 그리 한다. 사람들은 그것이 싫어서 무리를 짓고 법을 만들고 가르침을 이으면서 모여 살게 되었다. 모여서 다같이 살기 위해 함부로 다른 사람을 해치거나 속이는 것은 나쁜 짓이라 정하게 되었다. 너는 사람들 속에 살면서 그만한 것도 모르느냐? 그렇게 살고 싶으면 너 혼자 짐승들과 살 것이지, 왜 다른 사람들을 속이고 약점을 잡는 짓을 했느냐? 사람들 속에 모여 사는 덕을 누구보다 가장 크게 본 주제에 자기 혼자만의 이익을 따진다면, 그 몰염치만으로도 죽어 마땅하다. 네가 아직도 이 모양인 것을 알았다면, 더 큰 벌을 받게 해도 모자랄 것을 그랬구나.” “나도 꿈꾸던 것이 있다. 내가 꿈꾸는 세상은 지금과 다르다. 모든 것이 바뀌는 세상이다! 나는 그것을 위해 애쓸 뿐이다!” 치우가람이 궤변을 늘어놓자 치우천은 화가 치미는지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 있는 세상의 이치도 제대로 모르는 녀석이 새 세상이라고? 네놈이 꿈꾸는 세상은 빛깔만 좋은 독버섯 같은 것이다. 되지도 못한 소리나 늘어놓는 너야말로 사람 독버섯이고!” 치우천은 소리를 지르고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치우비는 치우가람을 쏘아보다가 이내 측은한 눈길로 치우바람을 쳐다보고는 그 뒤를 따라 밖으로 나섰다. 치우비는 그날 밤, 사울아비 작은스승에게 부탁하여 치우바람과 그의 아들 누리를 만나게 해주었다. 누리는 어렸지만 몹시 똑똑하고 마음씨가 굳세어 보였다 두 부자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치우비는 알 수 없었으나, 누리는 밖으로 나오자마자 울면서 치우비에게 매달렸다. “아저씨, 저를 죽이지 않으실 거죠?” 치우비는 조그마한 아이가 울며 매달리자 쩔쩔맸다. “아니다, 아니야. 너를 왜 죽이냐?” “아버지가 아저씨만 믿고 따르래요 제발 부탁해요 저를 키워주세요. 우리 집에는 이제 아무도 없어요.” “네 엄마는?” 누리는 엉엉 울며 소리쳤다. “없어요. 없어졌어요.” 아마도 함께 연루되어 벌을 받는 것이 두려워 자식마저 내팽개치고 달아난 것이 분명했다. 일이 그렇게 되었으니 누리를 맡을 사람이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치우바람이 처형되었다는 소문이 나면 가족들은 먼 곳으로 내쫓길 것이 분명하며 누리는 죽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치우비는 몹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허....... 이것 참........” 엄밀히 따지자면 누리는 원수의 자식인 셈이다. 물론 아이에 대해 그런 감정을 가질 만큼 치우비는 속이 좁지는 않지만, 그 아이가 장차커서 어떤 감정을 품을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 때문에 난처해하는 치우비에게 누리가 말했다. “아버지는 죽는데요. 허나 아저씨를 조금도 원망하지 말고, 잘 따르라고 하셨어요. 맹세할게요. 그러면 반드시 보답할 거예요.” 치우비의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누리는 아주 똑똑하고 영리하며 눈빛이 맑아 보였다 치우비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답은 무슨 보답이냐. 씩씩하게만 크거라.” 그러면서 치우비는 누리를 번적 들어 어깨에 올려놓았다. 비록 홀몸이지만 아이를 키우게 되었다는 걱정 같은 것은 하지도 않았다. 누리는 그제야 울음을 그치고 치우비의 목을 다정하게 꼭 끌어안았다. 치우천은 치우비가 누리를 데려온 것을 보고 놀라며 한편으론 걱정했다. 허나 치우비는 신경도 쓰지 않고 친아버지라도 되는 듯이 누리와 놀아주었다. 치우비가 누리를 몹시 귀여워했고, 누리는 눈치도 빠르고 아주 영리했기 때문에 도깨비들과 치베, 알한, 차오스 등 되든 사람들이 누리를 반겨주고 귀여워했다. 울라트는 누리의 어머니처럼 일일이 챙겨주었고, 말이 없는 무라 역시 누리에게 따뜻한 눈길을 보냈다. 마침내 치우가람은 치우바람, 부루버들, 부루위단 등의 죄인들과 함께 사막으로 옮겨졌다. 그때의 호송을 맡은 것은 바로 이전에 치우천을 따라 사막에 갔던 부루벼락, 쇠돌이, 마파람 등 네 명이었다. 양역과 부달은 여전히 공상에 남아 있었기 때문에 그 일행에 끼지 못했다. 예전에는 곤경에 처한 치우천 형제의 처지에 피눈물을 흘리면서 갔던 길이었으나 이제는 복수를 하는 후련한 심정으로 갈 수 있어 부루벼락 등은 모두 통쾌해했다. 그들은 예전에 치우가람이 했던 그대로, 그들을 꽁꽁 묶고 입에 재갈까지 물려 사막으로 옮겼으며, 한 모금의 물만 주고 사막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버리고 돌아왔다. 그들이 겪은 고통은 치우천이 겪은 것과 거의 같았으나 그들에게는 치베나 마냥처럼 재주를 지닌 사람도, 비울걸 같은 기인을 만나는 행운도 없었다. 그들은 사막에서 길을 잃고 헤맬 뿐이었다. “어디야....... 어디로 가야 하는 거야.......” 나이를 먹은 부루위단이 중얼거리며 사흘째 되는 날 가장 먼저 쓰러졌다. 부루버들은 아버지가 쓰러지자 독한 마음으로 머리에 꽂았던 뾰족한 구리비녀로 목을 찔러 자살했다. 다른 몇몇 사람들은 애초부터 치우가람을 저주하며 사막일망정 다른 길을 찾겠다고 떠난 뒤라 이제 남은 것은 치우가람, 치우바람 둘뿐이었다. “형...... 어디로 가지: 어떻게 하지?” 치우바람이 바싹 마른 몸으로 힘겹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치우가람은 독기를 품은 눈으로 끊임없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는 마침내 소리쳤다. “저기다!” 치우가람이 가리킨 곳에 물웅덩이와 푸른 나무그늘이 보였다. 그러나 사막을 몇 번 다녀본 치우바람은 고개를 저었다. “저건 헛것이야. 형도....... 형도 잘 알잖아......” “아니다! 헛것이 아니야! 헛것이 아니어야 한다. 나는 살아날 거다! 나는 살아날 거야!” 치우가람은 막무가내로 신기루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아니라고 외치는 아우를 잡아끌다시피 하며 힘겹게 걸음을 걸었다. 신기루인 줄 뻔히 알면서 그는 애써 합리화했다. 세상의 이치에 자신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신기루 같은 자연의 이치까지도 자신에게 맞추려 들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치우가람은 자신과 아우를 속이며 죽음의 길로 한 발짝씩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의 마지막 여정은 그가 살아온, 길지 않지만 복잡했던 생애와 많이 닳아 있었다. 소녀와의 결별 치우가람 형제가 사막에서 최후를 맞이할 때쯤, 치우천 형제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다. 일단 야율쿠리와 초초룬, 보돈차르, 키타야, 구르 등의 부족장들은 모두 자기 부족으로 돌아갔다. 그들에게 공상을 치는 것을 도운 데 대한 정당한 대가가 주어졌음은 물 론이다. 비록 신시 싸움에서 적지 않은 사상자를 내기는 했지만 그들은 주신과 감정의 앙금을 남기지 않고 산뜻한 마무리를 지었다. 치베를 필두로 하여 유쌍과 알한, 차오스 등은 작은 주신 쪽으로 떠났다. 그곳 작은 주신의 사람들과 합류하여 그들을 신시 주변으로 데려오기 위해서였다. 그중 알한은 특별한 임무를 수행 중이던 불쇠와 질쾌 등을 데리고 오라는 명령도 받았다. 종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비울걸은 며칠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고 나니 신시에 남은 사람은 치우 형제와 울라트, 도깨비 부대와 무라뿐이었다. 울라트는 무라와 함께 누리의 뒷바라지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치우가람과 부루버들의 일은 별 탈 없이 조용히 마무리되었다. 비록 우여곡절이 많았으나 신시는 어느덧 예전의 활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뒤에 하늘 제사가 있은 뒤 치우비는 정식으로 웃뜸 사울아비의 자리에 올랐다. 치우 형제는 며칠 동안 잔치를 치르면서 수많은 사람들과 만남의 자리를 가졌다. 술에 대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치우비도 곤드레만드레가 되어 곯아떨어져 아침에 제대로 일어나지 못할 정도였다. 치우우레는 비렴의 방문으로 그간의 사정을 모두 듣고 일단자신이 치우 집안의 웃뜸을 맡은 후 곧바로 치우천에게 물려주기로 했다. 치우우레는 상당히 쇠약해진데다가 병까지 얻어 쉽게 자리를 털고 일어나지는 못했지만, 두 아들이 그렇듯 높은 위치로 올라가게 되자 가슴이 벅찬 나머지 밤마다 감동의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치우천은 거서기와 삼을 불러 헌원을 방문해달라고 부탁했다. 치우비의 혼담을 넣으려는 것이다. 두 사람은 두말할 것 없이 좋아하며 염려하지 말라고 큰소리를 치며 길을 떠났다. 치우비는 좋아 입이 헤벌어졌지만 왠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 두 사람이 출발하자마자 두 형제와 삼사 등은 머리를 맞대고 치우비가 웃뜸 사울아비의 자리에 오른 것을 기회로 주신을 새롭게 하기 위한 계획에 착수했다. 우선 능력은 있으되 별로 출세하지 못했던 불우한 ‘바깥 사울아비’들을 요직에 앉히는 것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태산 회의 때 이름을 떨친 부루벼락, 쇠돌이, 거서기, 삼, 부달, 마파람 등은 물론이고 양역이나 치우광 등도 저마다 계급을 올릴 예정이었다. 그렇다고 바깥사울아비들만 모조리 진급시키는 것은 아니었다. 비록 적으로 마주쳤지만 신시 싸움에서 자못 빼어난 솜씨를 보인 고시가라와 신시 방어의 책임자였던 부소눌하 같은 사람들도 공정하게 계급을 올리거나 후하게 포상할 계획을 세웠다. 이 문제를 놓고 치우비가 치우천에게 먼저 말을 꺼냈다. “재주 있는 사람을 높이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참에 재주 없는 녀석들을 잘 골라버려야 하지 않을까?” 치우천은 싱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웃뜸이 되자마자 사람들을 깎아버리면 좋은 소리 못 듣는다. 일단은 후하게 시작하는 게 좋아. 또다시 좋은 기회가 있으니 그때 쳐내도 된다.” “언제?” “조금 있으면 치우가람이 죽었다는 기별이 올 거다. 그러면 그때쯤 해서 서서히 쳐내는 거야.” 치우천의 생각은 좋았으나, 실제로 일이 그리 만만하게 진행되지 않았다. 고시울률은 치우비가 웃뜸 사울아비가 되는 것까지는 아무말없이 있었으나 치우천이 본격적으로 움직이자 사사건건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 치우가람 일당이 없어졌다고 고시울률의 세력이 줄어든 것은 결코 아니었다. 비렴을 비롯한 삼사와, 거의 폐인이 되어버린 사와라 한웅 대신 나선 부소구슬이 치우천의 편이었으나 그래도 수적으로는 고시울률의 세력에 밀렸다. 결국 치우천의 첫 번째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고시가라나 부소눌하 같은 안사울아비들은 대부분 원안대로 지위가 올랐지만 젊은 사울아비들은 약간의 상을 받는 정도로 그쳤을 뿐, 지위가 올라가지 못했다. 치우 형제는 낙담했지만 그들을 모두 치우비의 직속 휘하로 옮기는 것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치우비는 한숨을 쉬었다. “말이 좋아 웃뜸 사울아비지, 이거 뭐 하나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네. 빛 좋은 개살구 같아.” “고시울률이 잔뜩 벼르고 있으니 쉽지 않은 게 당연하지. 하고 싶은 일이 많았는데, 좀더 기회를 기다려야 될 것 같구.” 치우천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때 치우비가 넌지시 물었다. “천, 요즘도 맥달님 찾고 있지?” 치우천은 은근슬쩍 무시하며 대답하지 않으려 했으나 치우비가 집요하게 다시 물었다. “그렇지? 사람들이 수군거리더라고.” “뭘 수군거린단 말이냐?” “형이 너무 애타게 찾는다고 말야. 형, 형 기분은 알겠지만 너무 표 나게 그러지는 말아. 형수가 알면 좋아하지 않을 텐데.......” 허나 치우천은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맥달이 죽었는지 그렇지 않은지 알아야내 속이 시원해지겠다. 은혜를 입은 사람의 행방을 알려고 하는 게 뭐가 잘못이란 말이냐? 더구나 도단이의 생사가 걸린 일이다 그냥 둘 수 없어.” 치우비는 잠자코 입을 다물어버렸다. 치우천이 잘못하고 있다고 볼 수도 없었다. 허나 소녀가 이 일을 알면 절대로 좋아하지 않을 것은 분명했다. 물론 도단이를 구하는 것은 중요했다. 그러나 그렇게 소문날 정도로 직접 돌아다니지 않아도 될 터인데, 치우천은 사람도 쓰지 않고 미친 듯이 홀로 찾아다녔던 것이다. 굳은 표정으로 치우천은 고집스럽게 말했다. “내 알아서 할 테니 그런 소리는 마라. 그래도 그동안 알아낸 게 좀 있다.” “뭘 말야?” “우선 그런 헛것을 보게 만드는 주술을 쓸 수 있는 사람들을 알아 봤지. 신시 안에 대략 일곱 명이 있더구나. 주술사는 여러 백 명 있지만 그 정도 재주가 있는 사람은........” 치우비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혀를 내밀었다. “신시 안의 주술사를 모조리 찾아다녔단 말야? 그러니 소문이 안 날 수가 있나!” 그러나 치우천은 못들은 척, 아니 정말 듣지 못한 듯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전부 그런 일은 모른다고 하더란 말야. 딱 한 사람, 조사하지 못한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얽혔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그쯤 되자 치우비는 흥미가 일어 살짝 물었다. “그게 누군데?” “전에 하늘 제사 때 춤추던 두 단군 중 횐 단군이다.” “아, 그 사람?” 치우비는 횐 단군과 직접 마주친 적은 없었지만 리미, 개르, 키타야, 구르, 치베 같은 용사들을 단숨에 꺾어버린 무서운 실력을 지닌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었다. “아무래도 그 사람이 수상하다. 두 단군 중 검은 단군은 주술력이 그리 세지 않지만 횐 단군은 대단하다고 하더구나. 더구나 횐 단군은 아직도 잡히지 않았어. 허나 그가 만약 맥달을 빼돌렸다면........” “그 단군들은 치우가람과 한패거리였잖아.” “그래서 더 이상한 거다. 게다가 횐 단군 외에는 그럴 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 없어. 그러니 횐 단군을 찾아내는 일에 좀더 신경을 써야겠다.” “검은 단군은?” “검은 단군은 그때 잡혀서 벌을 받고 신시 밖으로 쫓겨났으니, 역시 찾을 수 없지. 손발의 힘줄을 끊기고 혀를 베었으니........” 그 형벌은 주신의 법으로 내린 것이 아니라 솟대단군이 내린 것이었다. 안파견 한님을 모시는 단군으로서 부정한 짓을 하거나 탐욕을 부리는 짓을 하면 단군들 전체를 부정 타게 한다 하여 그런 무지막지한 형벌을 내리는 것이다. 게다가 단군들만의 조직체인 솟대 거리에서 벌어지는 일이라 치우천이나 삼사는 개입할 수가 없었다. 솟대단군은 고시울률과 가까운 사이라서 괜한 소문이라도 날까 두려워 치우천이 손쓸 틈도 없이 재빨리 처리해버린 것이 분명했다. “그럼 찾을 수가 없잖아.” 치우천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찾아야 한다. 맥달을 찾아야 도단이가 살잖아. 이미 도단이는 반쯤 죽어간다. 억지로 물을 먹여 목숨을 잇고는 있지만.......” “그런데 정말 횐 단군일까? 횐 단군이 뭐 하러 맥달님을 빼돌린단 말야?” 그 말에 치우천은 길게 탄식했다. “나도 모른다. 허나 흰 단군 말고는 그럴 사람이 없다.” “형, 내 한마디 할 테니 고깝게는 듣지 마 맥달님이 안되셨기는 하지만 정말 살아 계신 게 맞을까? 도단이가 이상한 말을 하기는 했지만....... 도단이도 잘 모르겠다고 하는 판이고....... 아무 증거도 없잖아. 차라리 도단이를 그냥 설득해보는 게 어떨까? 응?” 허나 치우천은 고집을 꺾지 않고 그 후에도 계속 횐 단군과 맥달의 행방을 찾아다녔다. 어떨 때는 공식적인 회의마저도 빠뜨려 고시울률의 비웃음을 사고, 비렴을 화나게 한 일도 있었다. 문제는 뜻하지 않은 곳에서 터졌다. 분주하게 돌아다니다가 간신히 늦은 밤에 잠자리에 들려던 치우천에게 무라가 찾아온 것이다. 치우천은 뜨끔한 기분이었다. “번개범과 비냐를 만나러 갈 적에 나는 소녀의 문제를 무라에게 맡긴다고 했다. 그동안 아무 말이 없었는데 오늘 결국 그 이야기를 하려는가 보다.” 아니나 다를까, 무라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그동안 바쁘신 것 같아 이야기를 드릴 기회가 없었습니다만 더 늦기 전에 말씀 드려야 할 것 같아서 늦은 밤에 찾아왔습니다.” “안사람 이야기입니까?” 치우천이 한숨을 쉬며 묻자 무라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비냐와 왜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비냐와 번개범에게 치우천님의 처지도 잘 설명을 했습니다. 그러나 역시 쉽게 마음을 풀 수는 없다고 합니다......” “그렇겠지요.” 치우천이 고개를 끄덕이자 무라는 조심스레 말했다. “비냐는 조건 한 가지를 걸었습니다. 쉽다면 쉽고, 어렵다면 어려운 길입니다.” “어떤 것입니까? 내가 대신 감당할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하겠습니다. 어찌 되었건 나를 위해 한 일이었고, 또한 그녀는 내 안사람 아닙니까?” “치우천님이 하실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비냐는 소녀가 직접 사과하기를 바랍니다. 자기와, 다른 자매들과 쑤앙마이께 잘못을 털어놓고 사과하면 마음을 풀겠다고 합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그 정도로 화를 풀 수 있다고 합니까?” “그렇습니다.” 치우천은 안도감이 일어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들떴다. “그렇다면 당연하고도 쉬운 일 아닙니까? 대체 뭐가 어렵다는 것입니까?” 무라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물었다. “소녀, 그 애가 그렇게 할까요?” “하도록 해야죠. 제가 잘 타일러보겠습니다.” “쉽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소녀는 은근히 속마음이 굳답니다.” “그 점은 잘 압니다만, 이유야 어쨌건 자신이 죽게 만든 사람에게 사과 한번 하는 것이 뭐 그리 힘든 일이겠습니까? 그렇게라도 비냐님의 마음이 풀린다면 응당 해야 할 일이죠.” 치우천은 일이 잘 풀렸다며 좋아했으나 무라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허나 무라는 더 말하지 않고 할 말을 다했다며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며칠이 더 지나자 작은 주신의 사람들이 신시 어귀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있었다. 치우천과 치우비는 작은 주신의 전사들을 모두 이끌고 신시 밖으로 마중을 나갔다. 오랫동안 떨어져 있던 가족들을 만나는 자리라서 사람들은 모두 들뜨고 유쾌한 기분이었다. 저만치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자 전사들은 저마다 달려 나가 가족들을 만나 반가움과 기쁨을 눈물을 흘렸다. 치우천도 소녀에게 달려갔다. 소녀는 쾌 긴 기간 떨어져 있었음에도 나이를 먹기는커녕 전보다 더 화사해진 것 같았다. 소녀는 치우천을 보자마자 생긋 웃으며 조용히 절부터 했다. “새삼스럽게 이게 뭐요?” 치우천이 웃으며 묻자 소녀도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큰 소원을 이루신 것을 축하드리는 것입니다.” “허허, 참. 자, 어서 갑시다. 내, 신시 구경을 시켜 주리다.” 치우천은 소녀를 반갑게 맞아서 신시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뒤에는 치우비가 흐뭇한 표정으로 뒤따르고 있었다. 소녀는 신시에 처음 와 보는 것이라 몹시 신기해하며 들떠했다. 카린도 신비한 곳이지만 이렇게 신시처럼 사람이 많고 번화한 곳은 아니었기에 더더욱 그랬을 것이다. 소녀의 용모는 워낙이 출중한데다 이국적인 면모까지 있어 금세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소녀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넋을 잃고 쳐다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적어도 그날 하루, 치우천과 소녀는 그간에 알게 모르게 쌓였던 앙금이 허물어지고 다시 화목을 되찾는 것처럼 보였다. 허나 바로 다음날, 예기치 않은 곳에서 문제가 터졌다. 바로 한웅의 집에서 열린 회의에서 문제가 생긴 것이다. “치우웃뜸께서는 아주 예쁜 안사람이 있으시더군요. 놀랐습니다.” 귀족 중의 하나가 빈정대듯 치우천에게 말을 던졌다. 치우천은 무심히 넘기려 했으나 계속 주고받는 귀족들끼리의 빈정거리는 대화가 충격적이었다. “어느 먼 부족 출신이라던데........ 맞습니까?” “참 모양새 좋군요. 한웅 후보라고 나온 분의 큰마누라가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먼 부족 출신이라.......” 곧바로 이어진 아주 작은 목소리가 벼락같이 치우천의 귀를 쳤다. “잘못하면 대주신의 한웅에 잡종 피가 섞이겠군.” 순간 치우천은 매섭게 눈을 치뜨며 그 소리가 들린 곳을 노려보며 외쳤다. “지금 지껄인 게 누굽니까?” 그러자 늙수그레한 귀족 하나가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귀도 밝구려. 나요 왜, 내가 못할 말을 했소?” 치우천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으로 쏘아보았지만, 귀족들은 무더기로 례를 지어 있었기에 전혀 겁내는 기색이 없었다. 치우천은 말끝에 바짝 힘을 주어 말했다. “내 안사람은 카린 출신입니다. 그리고 카린은 가장 큰 선인 중 한분인 쑤앙마이께서 다스리는 곳이고, 안사람은 쑤앙마이께서 직접 키운 열세 자매 중의 하나입니다. 적어도 당신보다는 지체가 높은 것 같습니다만, 말 한번 곱게 하시는군요. 쑤앙마이 앞에서 한번 그런 말을 해보시지요?” 카린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쑤앙마이의 이름은 생존해 있는 대선인 중의 하나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 귀족은 조금 질린 얼굴이 되어 입을 다물었다. 허나 다른 귀족들이 또 꼬투리를 잡고 나왔다. “티탄에, 마갸르에, 몽골에, 미아우족도 모자라 카린 부족의 힘까지 업으신 줄은 몰랐구려. 거, 대단하오. 그런데 치우천님은 한웅이 되면 주신을 지키려는 것이오? 아니면 주신을 그런 다른 부하들에게 내주려는 것이오?” “주신 한웅은 주신을 위해 애쓰는 자리요 다른 부족 좋은 일 시켜주라고 맡는 자리가 아니오.” 여기저기서 걷잡을 수 없이 수많은 말들이 쏟아지자 갑자기 분위기가 소란스러워졌다. “흥! 수천 명의 떨거지를 주신 사람으로 받아들이고, 아예 주신을 다 조각조각내서 나눠주려는 모양이지.” “이게 뭣들 하는 거요? 조용들 하시오!” 참다못해 비렴이 호통을 쳤지만 귀족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비렴, 당신에게도 묻겠소. 당신은 치우천을 다음 한웅 후보로 추천했지만, 우리는 이해할 수 없소.” “왜 안 되오? 적어도 당신들 전부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공을 세운사람이오! 이제는 치우웃뜸이기도 하니 함부로 입 놀리지 마시오!” 비렴이 열을 냈지만 그 귀족은 다시 말했다. “치우천의 공이 크다니, 그건 그렇다 칩시다. 그런데 치우천이 한웅이 되면 치우씨에서 첫 번째 한웅이 나오는 것이니 적어도 세 번은 치우씨가 한웅이 될 것이오. 아마 치우천은 자기 자식이 생기면 그 아이를 한웅으로 만들려고 하겠지. 그런데 치우천의 마누라가 다른 부 족 출신이니 치우천 다음으로 계속 잡종 한웅을 모셔야 한다는 거 아니오?” “주신 한웅은 주신의 순수한 피를 받은 사람이 아니면 안 되오! 안파견 한님이 가만두시지 않을 걸?” 사태가 이 정도로 추악해지자 치우천이나 비렴 등도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어느 귀족은 아예 노골적으로 큰 소리로 빈정거렸다. “치우웃뜸께옵서는 참 고민되겠구려! 한웅 자리를 먹으려니 예쁜 마누라를 내어놓아야 하고, 마누라를 그냥 두려니 한웅 자리가 멀어지는구나!” “뭐, 사람들을 수없이 잘도 죽였잖소? 마누라 하나쯤 쓱싹해버리는 건 일도 아닐 테지.” 치우천은 귀를 막고 싶을 지경이었다. 마침 치우비가 없기에 망정이지, 치우비가 있었다면 당장 피를 보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결국은 나이 많은 병예와 늦게 들어온 고시울률이 조용히 하라고 호통을 쳐서 일단 잠잠해지기는 했으나, 치우천은 회의 내내 혼란스럽고 고통스러움을 감내해야 했다. 마침내 회의가 끝나고, 치우천이 나갈 때 신지울태가 어깨에 손을 얹으며 따뜻하게 한마디해주었다. “고시울률 그 늙은 너구리가 자네를 의식하여 더러운 짓을 하는 것이야. 자기가 나서지 않고도 대신할 사람이 많이 있으니 말이지. 치우웃뜸, 자네는 그렇다고 꺾여서는 아니 될 것이야. 저런 더러운 수작에 기운을 잃어서는 안 되는 것이야.” “감사합니다, 운사님. 헌데........” “무엇이야?” “정말 주신 한웅은 다른 부족 출신의 어머니를 둔 예가 없습니까?” 지울태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은 아직 없다고 들었음이야....... 이렇게 안 되란 법이 있는 것도 아니야. 아버지가 자네면 그만이지 무엇을 더 따질 것이야? 다른 부족들을 봐. 특히 부족장이 되면 여러 부족 여자를 얻는 건 당연한 일이야. 그런 것을 문제 삼는 사람도 없고 말이야. 시끄럽게 떠드는 참새들 소리는 귀를 막으면 그뿐이야.” 치우천은 신지울태가 몹시 고마웠지만 괴로운 심정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아직 선례가 없다면 이것이야말로 치우천의 큰 약점이 될 수도 있었다. 이 문제는 한웅의 회의석상에서만 그치지 않고 순식간에 신시 전체에 퍼졌다. 고시울률이 뒤에서 조종하여 악선전을 퍼뜨리는 것이 분명했다. -치우천은 주신 출신이지만, 어딘가 의심쩍다. 다른 부족들의 힘을 업었고, 한웅이 되려 한다는데 마누라까지 듣도 보도 못한 서쪽의 먼 부족 출신이라고 한다. 치우천이 한웅이 되 면 신시는 다른 부족 야만족 놈들에게 짓밟히고, 주신은 망할 것이다. 이번에 신시를 치다 말기는 했지만 신시로 활을 돌릴 수 있는 녀석이 한웅 후보가 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이런 정도는 치우천은 그나마 각오한 바였으나 어처구니없는 소문까지 떠돌았다. 한 번은 치우비가 밖에서 대판 싸움을 벌여, 혼자서 열댓 명의 사람들을 두들겨 패 초죽음을 만들어놓은 사건이 벌어졌다. 웃뜸 사울아비가 밖에서 주먹을 휘두르는 것은 결코 보기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만한 것쯤은 치우비도 알고 있는데도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은 치우비가 도저히 참지 못할 일이 분명했다. 치우천이 놀라 치우비를 불러 물어보니, 치우비는 계속 얼굴만 붉으락푸르락할 뿐, 입 을 꾹 다물었다. 급히 다른 사람을 불러 알아보니 기막힌 소문이 떠돌고 있었던 것이다. -치우천의 마누라는 쑤앙마이에게서 사람을 홀리는 재주를 배운 여우라더라. 예전에 자기 자매도 가리지 않고 찔러 죽인 요물인데, 치우천은 거기 홀려 있다. 치우천이 한웅이 되면 그 요물의 새끼가 한웅이 될 것이니, 그날로 주신은 망할 것이다. 그런 소리가 귀에 들어오는데 치우비가 참을 리 없었다. 떠들어대는 자들을 죽이지 않은 것이 오히려 다행이었다. 그런데 치우비가 주먹을 쓴 다음날에는 한술 더 떠 엄청난 소문이 떠돌았다. -치우천의 아우, 치우비도 지나족 여자를 마누라로 얻는다더라. 형제가 마찬가지다. 마누라들이 하나뿐인 것을 보니 그 여자들에게 휘둘려 다른 부족들에게 주신을 팔아먹을 것이 분명하다 그놈들을 쳐 죽여야 주신이 편안해진다. 치우비는 물론이고 전각이 깊은 치우천으로서도 이러한 악 소문, 악 선전들은 정말 참기 힘들었다. 치우천은 이런 악 소문에 대처할 뾰족한 방법을 찾아낼 수 없었다. 치우 형제가 지나가면 그래도 상당수의 주신 사람들은 부러움과 동경의 눈초리를 보냈지만 어디선가 그늘진 곳에서는 항상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치우비는 사울아비들을 풀어서 헛소문을 퍼뜨리는 사람들을 엄하게 다스리자고 했으나 치우천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신시는 고시울률의 손아귀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 효과를 거둘 수 있을지 의문이었으며, 자칫 신시를 공포 분위기로 몰아간다고 더 큰 악선전이 돌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소문은 또 다른 곳에서 치우천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다. 바로 치우천의 집안에서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한 것이다. “당신 아우가 주신의 웃뜸 사울아비가 되고 당신이 치우 집안의 웃뜸이 된 것이 맞나요? 어째서 그런 소리들이 떠돌도록 그냥 바라보고만 있는 건가요?” 치우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소녀가 먼저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인 것이다. “사람들이 되는대로 떠드는 소리인데 그것을 어쩌겠소. 더구나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지어내서 퍼뜨리는 말이니 신경 쓰지 마시오.” “어떻게 신경을 안 쓰나요! 당신은 이제 힘이 있잖아요!”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까지 막았다간 정말 더 난처해질 거요 굳이 당신에게 말하는 사람도 없을 텐데, 괜스레 귀를 곤두세우지 말고 대강 넘기시구려.” 소녀는 막무가내로 치우천을 졸라댔다. 따지고 보면 자신의 치부가 소문에 섞여 있던 것이 놀랍고도 두려워서였다. 그러나 소녀 스스로만 다른 사람들이 모른다고 생각할 뿐, 사실은 모두가 다 알고 있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날은 대강 그렇게 넘어갔으나 다음날이 되자 소녀는 더욱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당신, 내가 부담스러운 거죠? 주신에서 먼 카린족 출신이라서 나 때문에 한웅이 안 되면 어쩌죠? 나를 버릴 거죠? 그렇죠? 당신은 한웅자리가 더 중요할 것 아니에요?” 소녀가 눈물까지 줄줄 흘리면서 말하자 치우천은 기가 막혔다. “그게 무슨 소리요' 뭔지는 않겠지만 나는 당신을 절대 버리지 않소 아무리 그래도 당신은 이러면 안 되오 나를 적으로 삼는 놈들이 좋아할 것 아니오?” “아니에요 당신은 내게 마음이 멀어졌어요. 멀어졌어!” 소녀는 앙칼지게 외쳤다. 치우천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치우천은 계속 일이 잘 풀리지 않는데다 악선전까지 돌자 신경이 몹시 날카로웠다. “당신, 정말 왜 그러오? 난 주신 한웅이 못 되어도 당신을 버리지는 않소. 아니, 버린다는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이상하구려. 왜 그러는 거요.” 소녀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내가....... 내가 자매를 찔러 죽였대요, 내 자매를.......사람들이 떠들어요.......!” “비냐 말이오?” 치우천은 무심코 말했으나 소녀가 갑자기 눈을 치켜뜨며 외마디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당신!” 소녀는 어깨를 와들와들 떨었다. 치우천은 아차 싶었으나 기왕 엎질러진 물이라 생각하고는 이참에 무라와의 약속도 지켜야겠다는 생각에 조용히 타이르려 했다. “이미 알고 있었소. 무라도 알고 있고 허나 잊지 마시구려. 그 때문에 당신을 욕하는 사람도 있지만 개의치 마시오. 나는 당신이 나를 위해 그리 한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소 당신 대신 내가 감당하고 싶은 심정이라오. 나를 믿고........” 순간 소녀가 째지는 듯 소리를 질렀다. “거짓말!” 치우천은 놀라서 잠시 멍해졌으나 이내 다시 말을 이어갔다. “거짓말이 아니오. 그 때문에 무라를 구름골로 보내서 비냐와 번개범과 이야기해 보도록 부탁하기까지 했었소. 비냐는 지금 반쯤 죽은 참혹한 꼴이 되어 번개범의 몸속에서만 살아갈 수 있는 신세가 되었다오. 그랬지만 무라의 말을 듣고 신시 싸움에서 나를 도와주었소. 어쨌거나 가엾지 않소? 그러니 직접 한 번 찾아가서 사과를 하고.묵은 감정을 푸는 것이........” “사과를 하라고요? 내가....... 내가 왜요?” “어쨌건 당신이 비냐를 찌른 건........ 사실이잖소 나를 위해 한 일이니 내가 옳다 그르다 하고 싶지는 않소만, 이제는 비냐도 적이 아니니 옛정을 생각하여 사과는 할 수 있잖소.” “나는........ 나는 잘못한 게 없어요! 그때 비냐는 적이었어요!” “그건 나도 아오. 허나........” “나는 당신을 위해 그런 거예요!” 소녀가 표독스럽게 소리를 지르자 치우천은 몹시 괴로웠다. “잘 알고 있소 만약 내가 사과를 해서 될 일이라면 내가 당장이라도 달려갔을 거요 허나 당신에게 사과를 받고 싶어. 하니 당신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구려. 이것으로 마음의 응어리가 풀릴 수 있다면 좋은 일 아니겠소?” 허나 소녀는 불신이 가득한 표정으로 되받았다. “사과라고요? 그걸로 된다고요?” “그렇게 들었소.” “그럴 리가 없어요, 그럴 리가! 나를 죽이려 할 거예요!” “그렇지 않을 거요.” “당신이 어떻게 아나요? 당신은 나를 보내고 싶어 하는 것 같군요? 대체 왜........?혹시..........” 치우천은 좋게 타이르려 한 것인데 소녀가 느닷없이 악다구니를 썼다. “날 죽이려는 거죠!” 치우천은 기가 막혀 한참 동안 말도 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하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무....... 슨 소리요.” “사과하라는 건 거짓말이지요? 나를 그리 보내서 비냐의 손에 죽게 만들려는 거죠?” “말도 안 되오! 무라가 직접 듣고 온 일인데.......” “무라 언니가? 당신도? 모두가........ 모두가 짰군요!” 치우천은 당황하여 말문까지 막혔다. 허나 소녀는 계속 앙칼지게 외쳤다. “모두가 날 비웃고 있었어! 나를 놓고 뒤에서 수군거리고 있었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모두가 날 미워하는 거죠? 그렇지?” “그건 아니오. 절대로.......” “이제 알겠어! 다 알겠어! 날 비냐에게 보내서 나를 죽이고 한웅이 되려는 거지!” 소녀는 울면서 소리를 바락 지르며 별안간 놓여 있던 물건들을 닥치는 대로 치우천에게 집어던지면서 외쳐댔다. 치우천은 너무 놀라서 소리쳤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이게 무슨 짓이오?” 갑자기 소녀는 이를 빠드득 갈면서 치우천을 섬뜩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나........ 나는 너에게 모든 것을 걸었는데........ 이제 바라던 것들을 이루니까 내가 거추장스러워졌어? 응?” “무슨 소리냔 말이오!” 치우천은 어이가 없어 자신도 커다랗게 소리를 질렀다. 온순하고 아름다운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소녀는 표독스러움만이 가득했다 “뻔해! 뻔한 일이야! 한웅이 되려고 하니 독하고 야만족 출신인 나는 이제 거추장스러워진 거야. 그래서 나를 증오하고 있는 비냐에게 보내서 없애고, 새 마누라를 얻어서 살려는 거야. 그러면 모든 게 잘 되겠지! 이 나쁜.........” “기가 막히는구려. 정말 어이가 없소 내가 왜 그런단 말이오? 그깟 사람들 소문이 무서워서 내가 하나뿐인 마누라를 죽이려 한단 말이오? 당신, 나란 사람을 어찌 보고 있는 거요?” 치우천이 불같이 화를 내자 소녀는 약간 누그러지는 것 같았지만 이내 미친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 그러면 왜 나를 비냐에게 보내려는 거야? 응?” “내가 말했잖소? 당신의 일을 어떻게든 풀어보려고 나도 애를 썼소. 그래서 비냐와 자매들, 쑤앙마이께 사과만 하면 되도록 답을 받아 왔다지 않소?” “아냐, 못 믿어. 못 믿어. 비냐는 죽었어. 그리고 내가 죽인 게 아냐. 지나족이 독을 써서........” 치우천은 안타까운 마음에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사실대로 말해도 되오. 나를 위해 한 짓이니 탓하지 않소. 쑤앙마이께서나 다른 자매들도 당신에게 손끝 하나 못 건드릴 거요.” “내가 당신 마누라라서?” “당연하지 않소? 더구나 내가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라 말하려는데 대뜸 소녀가 말을 끊었다. “흥! 그러면 다른 사람이 마누라가 되면 나 따위는 소용없겠지?” “해도 해도 너무 하는구려 그게 무슨 소리요?” “내가 모를 줄 알아? 내가 전에 말했지? 나에게 너밖에 없으니, 너에게도 나밖에 없어야 한다고! 다른 여자가 있는 걸 모를 줄 알아?” “다른 여자라니!” 치우천은 너무나 기가 막혀 펄쩍 뛰었다. 허나 소녀는 집요하게 따지고 들었다. “나도 눈이 있고 귀가 있어. 내가 온 다음에도 나는 뒷전으로 돌리고 그렇게 열심히 찾아다니는 그 맥달이라는 여자! 내 말이 틀려?” 치우천은 입술을 깨물며 한탄하듯 되받았다. “그 사람과 나는 아무 관계가 없소! 다만 은혜를 입었고, 재주가 아까운 도단이라는 친구 문제가 얽혀 있기 때문에........” “집어치워! 다 집어치워! 너는 거짓말을 하고 있어! 그걸 내가 모를 것 같아? 응?” 소녀의 외침이 날카롭게 치우천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떳떳하지 못한 일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다고 자부하는 치우천이었지만 그래도 마음에 걸렸다. 치우비나 도단이가 그런 걸 걱정할 때가 아니라고 했으나 스스로를 속일 수는 없었던 것이다. 치우천은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래....... 그렇다면 미안하오. 내 이참에 솔직하게 다 이야기하리다. 그러니 제발, 제발 소리 좀 낮추시오.” 소녀는 화가 나서 쌕쌕거리면서 잠시 입을 다물었다. 치우천은 괴로워서 반쯤 눈을 감고 조용히 말했다. “맥달과 나는 옛날부터 인연이 있었소. 당신을 만나기 오래 전부터 말이오. 허나 절대 남자 대 여자로서 가까이 한 적도 없고, 그럴 마음을 가진 적도 없소 처음에는 그 사람을 무섭다 생각하고 몹시 미워했지만, 그 사람도 몹시 괴롭고 힘든 길을 가는 사람이라 생각하고 불쌍히 여기게 되었소. 그냥 그뿐이오.” “그러면....... 왜 그렇게 열심히 찾아다니는 거지? 이미 죽은 사람이라면서?” “내 벗인 도단이의 목숨이 걸려 있고 중요한 죄인 중 하나인 횐 단군과도 얽힌 일이라 조사하지 않을 수 없었소 아니, 좋소. 내가 찾아내고 싶은 마음이 앞섰다는 것을 인정하오. 그 사람 생각을 많이 했다는 것도 인정하오. 허나 당신이 생각하는 것 같은 그런 관계는 아니란 말이오. 조금도 거짓.없이 하는 말이오. 나에게는 당신뿐이오 당신도 잘 알잖소?” 소녀는 갑자기 공허한 울림으로 깔깔 웃었다. 치우천이 소녀에게로 눈을 돌리자 소녀는 치우천을 매섭게 째려보았다. “천, 기억 나? 그 어두웠던 유망의 토굴. 그리고 태산 회의가 끝나고 사막에 버려지게 되었을 때의 일? 그때도 너는 나와는 아무 관계가 없었으며, 아무 일도 없었다고 사람들에게 말했어. 그러나 지금은 어떻지? 응? 하하. 너는 머리가 좋지만, 머리만 너무 믿어. 마음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정말 모르는 거야, 아니면 숨기는 거야?” 치우천은 답답하고 괴롭기도 하여 짜내듯 말했다. “나는 숨기는 게 없소 좋소.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나도 더 뭐라 할 수 없구려. 맥달 그 사람 생각이 자주 나고, 불쌍하고 보고 싶기도 하오. 그것으로 그렇게 부풀려 생각한다면 내가 윌 어쩌겠소? 더구나 죽은 사람 아니오?” “죽지 않았다고 믿으니까 그리 찾고 있잖아!” “찾을 가망이 거의 없다오.” “찾거나 찾지 않거나 그건 상관이 없어! 이미 당신 마음에는 그 여자가 꽉 들어차 있고, 나같이 독하고 야만족 출신인 여자는 쫓겨난 거나 마찬가지인걸!” “내 마음속에는 아직도 당신이 꽉 차 있소 한구석밖에 없는 맥달보다 훨씬 더.” “정말이야?” “정말이요.” 소녀는 코웃음을 치며 냉랭하게 되받았다. “당신같이 마음이 강한 사람이 부족장들 앞에서 울음을 터뜨렸는데도?” 치우천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때의 일을 소녀가 어찌 알고 있는가 의아했고, 그 일을 꼬집어 이야기하니 할말이 잃었다. 소녀는 고삐를 늦추지 않고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내가 죽어도 당신, 그럴 수 있을까?나는 당신이 아우 때문에 운 것 말고는 눈물을 흘리는 걸 본 적이 없어 그것도 사람들 앞에서는 절대로! 당신은 그런 남자야. 그런 당신을 모든 사람 앞에서 울게 만든 그 여자가....... 당신 마음에 한구석밖에 없다고?” 할말을 잃은 치우천은 한참 만에 가까스로 말문을 열었다. “그때 울음이 터진 이유는 나도 모르겠소. 정말이오. 사람의 마음이 어찌 뜻대로 되겠소?” “뜻대로 안 되니까 이제 그 여자에게 갔다는 것 아니겠어? 응?” 소녀는 갑자기 벌떡 일어서더니 시렁 위에 얹어두었던 악기를 꺼내 바닥에 내동댕이쳐 박살내버렸다. 그 악기는 ‘슬’이라는 것으로 소녀 스스로 개조하석 치우천과 함께 연주하던 물건이었다. 치우천도 그 악기를 잘 알고 있었다. 그 악기가 눈앞에서 산산이 박살나는 것을 보자, 치우천의 마음도 더없이 착잡해졌다. 어디서부터인지 모르게 금이 가 삐걱거리던 두 사람의 사이를 그나마 메우던 것이 바로 음악이었는데, 이제 그것마저도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는 생각에 치우천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정말....... 이럴 거요?” “난 더 이상 미움 받으며 살기 싫어! 당신도! 무라 언니도! 모두가 날 비웃고 욕하고 있 어! 나는 더 이상 마음에 없어! 난 귀찮고 지긋지긋한 계집일 뿐이야!” 치우천은 참다못해 한마디 했다. “만약 당신이 그렇게 되었다면, 당신 스스로가 자초한 거요.” 소녀는 순간 힘을 잃은 듯 스르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치우천은 그런 소녀가 안쓰러워 조용히 덧붙였다. “당신도 잘못이 있고, 나도 잘못이 없다곤 못하오. 허나 당신이 어떤 여자든 상관없소. 나는 당신을 사랑하오. 그리고 함께할 것이오. 다시 시작해보지 않겠소?” 치우천의 말에 소녀는 다시 발작적으로 울면서 치우천에게 매달려 마구 뺨을 비볐다. 그러다가 소녀는 독기 품은 목소리로 치우천에게 말했다. “안 돼......... 안 돼. 이제........ 끝이야. 때가 된 것 같아 우리 같이..........” 서늘한 감촉이 치우천의 뒷덜미에 느껴졌다. 소녀가 비수를 꺼내 지난번처럼 같이 찔러 죽으려는 것이다. 치우천은 안타깝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다. 이제 모든 것이 이토록 허무하게 끝나는 것인가 싶어 허탈한 나머지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다만 치우천은 마지막으로 감 정을 이기지 못해 한마디 내뱉었다. “죽더라도 이미 죽은 사람을 질투하지 마시오. 자, 우리 편안하게 갑시다.” 소녀는 그 말에 되레 자극받은 듯 날카롭게 소리를 지르며 치우천의 뒷덜미에 비수를 꽂으려 했다. 그때 치우천의 방문이 박살나면서 두 사람이 동시에 뛰어 들어왔다. 번개처럼 빠르게 뛰어 들어온 두 사람 중 하나가 맨손으로 소녀의 비수를 잡아 단박에 찌그러뜨렸고, 다른 한 사람은 소녀의 손목을 잡아 그녀를 치우천에게서 떼어내 구석으로 내동댕이쳤다. 앞 사람은 치우비였고, 두 번째 사람은 무라였다. “형수! 아무리 형수라도 형을 해치려 하면 용서할 수 없소! 이러면 안 돼요!” 치우비는 눈을 꼭 감고 조용히 앉아 있는 치우천의 앞을 막아섰다. 그리고 무라는 소녀 앞에 태산처럼 버티고 섰다. “형, 괜찮아?” 치우비가 묻자 치우천은 아직도 눈을 뜨지 않은 채 씁쓸히 말했다. “부끄럽구나. 네가 어떻게.......” “아, 그렇게 집이 떠나가라 하고 소리를 지르는데 누가 못 들을까?” 치우비는 대뜸 소리치고는 소녀를 힐난하듯 쳐다보았다. “형수, 형수 마음은 이해하우. 하지만 형님에게 칼을 휘두르다니! 이건 안 되는 거요!” 무라는 돌같이 딱딱한, 그 특유의 표정으로 말없이 소녀를 내려다 보았다. 눈빛마저도 한 가닥의 감정도내비치지 않고 고요했다. 그런 무라의 시선을 감히 맞받지 못해 소녀는 눈을 돌렸다. 무라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비냐에게 사과하러 가지 않겠어?” “뭐?...... 네가 뭔데!” 소녀는 무라의 시선을 애써 피하며 힘없이 외쳤다. 소녀가 가장 따르고 또 가장 마음속으로 두려워했던 사람은 무라였다. 여전히 무라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또다시 나직하게 말했다. “자매의 이름으로 너에게 말한다. 여러 번 말하지 않는다. 구름골을 들러 카린으로 가라. 그래서 비냐와 쑤앙마이께 사지해.” 마치 무라의 모습이 산이 되어 자신을 짓누르는 것 같은 위압감을 느꼈지만 소녀는 안간힘을 쓰며 말했다. “싫어. 난 저 남자를 위해 그런 거야. 저 남자가 책임져야 해.” “저 사람을 사랑해서 네 스스로가 그런 것이니, 그 책임은 네가 져야 해.” “그럴 순 없어!” 그제야 무라는 탄식하며 말했다. “이제 분명해졌다. 너는 치우천님을 사랑한 것이 아냐. 치우천님, 아니, 세상에서 가장 훌릉한 남자에게 사랑받고 싶었을 뿐이야. 너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아. 너 스스로도 사랑하지 않고, 세상의 아무도 사랑하지 않아.” “그렇지 않아!난........난 사랑을 위해서라면 내 목숨까지 버릴 수 있어!” 무라는 아주 가볍게, 살짝 웃었다. “고작 그런 정도로 사랑이라고? 그건 허영이야.” 그러더니 돌연 굵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소녀, 당장 여기를 떠나라. 나까지 자매의 피를 손에 묻히고 싶지는 않다.” “그건........” 치우천이 놀라 뭐라 말하려 했으나 무라가 조용히 막았다. “치우천님은 예전에 이 아이의 처리를 제게 맡겨준다 약속하셨습니다. 치우천님의 안사람이 되기 전부터 제 자매였습니다. 그러니 제게 맡기십시오.” 치우천은 그래도 뭔가 더 말하려 했으나 치우비가 치우천의 입을 막았다. 그뿐만 아니라 치우비는 형을 가볍게 덥석 안아 들고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형, 미안해. 하지만 이게 가장 낫겠어.” 나가면서 치우비는 소녀에게 한마디 던졌다. “형수, 사랑하는 사람을 죽이려 드는 법은 없다우.” 치우천과 치우비가 나가자 무라도 조용히 등을 돌려 밖으로 나가면서 한마디 남겼다. “다시는 보지 말자.” 무라가 방을 나서자마자 소녀의 광기어린 웃음소리가 방에서 울려 퍼졌다. 울음 섞인 그 웃음소리는 날카롭고도 섬뜩했으며, 끝내는 처절한 목소리가 오랫동안 밤하늘에 메아리쳤다. “너희들....... 너희들 모두....... 날 나쁜 여자로 만들었어! 그래! 좋아! 그렇다면 나쁜 여자가 되어주겠어! 누구보다도 나쁜 여자가 되어 너희 모두에게 앙갚음하고야 말 거야! 호홋! 호호흣........!” 걷잡을 수 없는 혼란 다음날 아침, 치우천의 집에서 소녀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치우천은 소녀를 찾지는 않았지만, 낙심하여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가 되었다 더구나 쑤앙마이로부터 치료를 받은 후 별 문제가 없던 다리에 다시 저릿저릿한 통증이 파고들었으며, 온몸에 불덩이처럼 열이 솟구쳤다. 아예 바깥출입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치우비는 형이 너무나 걱정이 되어 바깥출입을 상가고 시중을 들었다. 치우천은 고열로 신음하면서도 치우비와 주신의 일로 걱정이 태산 같았다. 그때마다 치우비는 걱정 말고 몸부터 나으라면서 위로해주었다. 치우천은 한 번은 이렇게 중얼거렸다. “사와라 한웅님이 왜 칼자기 힘을 잃었는지 이제 알 것 같다. 내 다리 병이 무서웠지만 마음의 병에 비할 바는 못 되는구나........” 치우천이 힘겹게 중얼거리자 치우비는 그저 쓴웃음만 지었다. 무라는 소녀의 일이 바깥으로 퍼지지 않도록 입단속을 단단히 시켜놓아 그 일에 대해 아는 것은 울라트나 리미, 개르 등 아주 가까운 몇몇 사람들뿐이었다. 울라트도 몹시 마음 아파했으나 슬기롭게 마무리 짓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뭘 더 어쩌겠어요. 마침 천 오라버니가 아프시니 집안에 병이 도졌다고 하고, 소녀 언니도 병 때문에 카린으로 돌아갔다고 하면 될 거예요.” “좋다.” 무라가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울라트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그래도 소녀 언니는 나와 참 잘 지냈는데....... 아마도 이제 다시 못 보겠지요? 그렇게 고운 사람은 다시는 볼 수 없을 거예요.” 무라는 침울하게 고개를 숙였다. 무라도 누구 못지않게 마음이 아팠으나, 전혀 내색하지 않고 꿋꿋하게 버텨냈다. 어느 날, 의외의 소식이 들려왔다. 그 소식을 가져온 사람은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시기르타였다. 그는 치우천을 만나러 신시로 오는 길에 알한이 인솔해오던 불쇠와 질쾌 등의 일행을 만나 함께 오는 중이었다. 그러나 시기르타는 치우천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는 바삐 서둘러 치우천의 집에 먼저 도착한 것이다. “아이쿠, 치우천님. 이렇게 누워 계시면 제 장사는 어찌 합니까요?” 시기르타가 나름대로 위로하는 말임을 아는 치우천은 고열로 신음하면서도 애써 미소를 지었다. “이대로 죽더라도 걱정은 마시구려. 내 죽어도 안파견 한님과 당신과 거래를 터줄 테니.” 시기르타는 ‘히히’ 웃으면서도 여전히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슬쩍 말했다. “그게 아니라, 큰 장사가 기다리고 있는데 이렇게 누워 계시니 안타까워서 그럽죠.” “큰 장사?” “그렇습죠, 큰 장사. 치우천님, 지나족이 요즘 크게 움직이는 것을 아십니까요?” “지나족이라면.........? 유망?” “그렇습니다요, 유망입죠 형천과 축융을 비롯해 모든 부족장을 다 끌어 모아 수십 천의 전사들과 함께 지금 북쪽으로 올라가고 있다고 합니다요.” “그럴 것이라 생각은 했소. 헌데 북쪽이라면........ 어디를 노리고?” 치우천의 눈이 빛나자 시기르타의 눈 역시 빛났다. “아마 가는 길을 보아서는 동쪽 길을 타고 올라서서 대나무골을 향한다는 이야기가........” 별안간 치우천은 눈을 커다랗게 뜨며 몸을 반쯤 일으켰다. “대나무골?” “형, 왜 그래?” 곁에 있던 치우비가 놀라며 급히 치우천을 부축했다. 시기르타는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러십니까요?” 치우천은 바짝 긴장된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대나무골 정말 거기가 틀림없소?” “그들이 올라가는 길을 보면 거기밖에 없습죠. 더구나 전사들끼리 대나무골로 왜 가는지 모른다고 수군거리기도 한다더군입쇼.” “이건 예삿일이 아니야 비야, 날......... 날 일으켜다오.” 치우천은 몹시 놀라며 전에 없이 서둘렀다. “대체 왜 그래?” “전에 말했잖느냐. 대나무골은....... 정말 중요한 곳이다. 북쪽과 동쪽의 길을 모두 끊을 수 있기 때문에 제일 중요한 곳이야. 그곳을 나만 눈여겨본 것이 아니라 유망도 눈여겨보았구나. 이거 문제가 커진다. 어서 움직이지 않으면 돌이키기 힘들 수가 있다!” 허나 치우천은 도저히 걸음을 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치우천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치우비에게 부탁했다. “비야, 비야. 그러면 네가 대신 비렴님께 아뢰고, 급히 사울아비들을 끌고 대나무골로 먼저 가야 한다. 다른 부족장들에게 서둘러 알려야 하고........ 대장들이 대부분 밖에 나가 있으니........ 너와 치우광만이라도 가야 한다. 어서 서둘러라.” “거긴 우리 땅이 아니라 마갸르족 땅이잖아. 그리고 아직 싸움이 난 것도 아닌데 귀족들이 말을 들을까?” “그러면 안 된다. 대나무골에 지금 있는 마갸르족들은 형천 축융을 상대로는 닷새도 못 버틸 거다. 그리고 연락이 닿으면 이미 일은 끝난 다음일 거야. 대나무골을 빼앗기면 미아우와 마갸르족의 절반은 주신과 완전히 끊어져 서서히 죽어갈 수밖에 없다!” 치우천은 사태가 너무 심각한 터라 마지막 힘을 짜내듯 힘겹게 말하다가 결국 까무러치고 말았다. 치우비는 치우천이 안쓰러워 어쩔 줄을 몰랐으나 치우천을 얼른자리에 눕히고 형의 당부대로 급히 밖으로 달려 나가려 했다. 그때 시기르타가 치우비를 불러 세웠다. “형님이 아프시니 아우님에게라도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요.” “나중에 이야기합시다. 지금은.......” “아니, 아니, 중요한 일입죠 대나무골로 가실 때는 몸을 가볍게 해서 가시라구요.” 시기르타가 정색을 하며 말하자 치우비는 얼른 이해가 가지 않아서 물었다. “무슨 말입니까?” “제가 이럴 줄 알고 이미 먹을 것과 쓸 물건들을 싣고 대나무골 쪽으로 움직이라 일렀습니다요, 히히. 그러니 준비하느라 시간을 끌지 말고 사울아비들만 급히 빼내서 달려가도 충분히 싸울 수 있도록 이 시기르타가 대비를 해놓았단 말씀입지요, 헤헤헤.” 치우비는 시기르타를 감탄에 겨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시기르타는 이미 일이 이렇게 돌아갈 것을 손금 보듯 예측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나무골의 전략적인 가치나 돌아가는 정세들을 치우천만큼이나 예리하게 보지 않고서는 도무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시기르타, 이제 보니 당신 정말 대단하군요.” “저는 그저 장사꾼일 뿐입죠 잔머리는 있습죠만 목숨을 걸 배짱이 없답니다요 그러니 걱정 마시고 잘 싸워주기나 하십쇼. 저도 큰 손님을 위해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야 하니까요. 허나 값이 쪼오끔, 아주 쪼오끔 비쌉니다요, 헤헤헤.” 시기르타는 늘어진 뱃살을 출렁거리며 체신없이 웃었으나 그 눈빛에 따뜻한 격려의 빛이 서려 있음을 치우비는 놓치지 않았다. “부르는 대로 주겠소. 염려 마시구려.” 치우비는 곧 불쇠와 질쾌를 만날 틈도 없이 곧바로 한웅와 집으로 달려갔다. 치우비가 나가자마자 도착한 불쇠와 질쾌는 치우천이 정신이 들 때까지 한참을 기다렸다가 치우천과 뭔가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어디론가 가버렸다. 불쇠와 질쾌가 치우비와 울라트를 만나지 않고 바람같이 사라지자 사람들은 의아해했다. 치우비의 예상대로 사울아비들을 대나무골에 투입하는 데에는 고시울률을 비롯한 귀족들의 격렬한 반대가 뒤따랐다. 아직 난리가 난 것도 아닌데 공연히 사울아비들을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치우천이 회의에 나왔다면 전략적으로 설명해줄 수 있었겠지만, 치우비는 비곡 그 뜻은 깨닫고 있다 하나 이모저모를 조리 있게 설명하기에는 말재주가 부족했다. 비렴이 그나마 편을 들어주었으나 병예나 신지울태마저도 대나무골을 선점해야 한다는 것에는 약간 의구심을 보였다. 그러나 치우비는 치우천처럼 말솜씨는 없었지만 대신 뚝심이 있었다. 치우비는 밤이 깊어져 귀족들이 돌아가려 하자 팔을 걷어붙이며 딱 잘라 말했다. “주신에 큰 일이 닥쳤는데 편하게 잠이 오시오? 나는 이 일이 결판날 때까지 집에도 가지 않을 것이고, 먹지도 마시지도 않을 것이오!” 귀족들은 치우비의 오기에 꼼짝 못하고 밤을 지새울 수밖에 없었다. 날이 밝자 귀족들 중 몇은 지쳐서 꾸벅꾸벅 졸기까지 했다. 그러나 치우비는 끄떡도 않고 계속 똑같은 이야기를 열변을 토하며 어서 출병해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마침내 치우비의 고집에 못 이겨 고시울률이 지쳐 승낙을 하는 데까지 이틀이 걸렸다. 그러나 이번에는 출병 규모가 벽에 부딪쳤다. 고시울률은 치우비의 직속이라 할 수 있는 작은 주신의 군대만 거느리고 가라고 했으나, 치우비는 그것으로는 절대 부족하며 많은 지원이 있어야 한다고 버텼다. 치우천의 상태가 최악인데다가 믿을 만한 부족장과 벗들이 멀리 있는 이때, 최소한 치우광이나 고시가라, 부소눌하 같은 유능한 대장들을 동원해야 되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다 보니 회의는 또 늘어져 사흘이 더 지나갔다. 고시울률은 지쳐서 나가떨어졌고 귀족들도 태반은 자리를 비웠으나 치우비는 닷새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도 완강하게 버텼다. 결국 치우비의 뚝심에 밀린 고시울률은 오천의 사울아비를 동원하는 것에 동의했다. 치우비는 그제야 씩씩거리며 일어나다가 한웅의 집을 나오는 순간 나무에 기댄 채 잠이 들어버렸다. 고시울률 역시 집으로 들어가 아예 누워버렸고 삼사마저도 자리를 지킬 수 없었다. 그러던 중 누구도 예기치 않던 엄청난 일이 그날 밤, 치우천의 집에서 터졌다. 깊은 밤, 치우천은 고열로 신음하고 있었다. 울라트와 무라가 지극히 간호했으나 그들도 몹시 피곤해했기에 치우천은 가까스로 그 두 사람을 설득해 멀리 심부름을 보내 쉴 기회를 주었다. 그런 탓에 집안에는 리미와 개르 등 도깨비 부대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 데 문득 문 밖에서 리미의 겁먹은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 주인님........ 저 리미입니다.” 치우천은 손끝 하나 까딱할 수 없었지만 간신히 입을 열었다. “무....... 무슨 일이냐?” “주인님....... 안주인님이........ 오셨습니다. 이건 참....... 안으로 모셔야 할까요?” ‘소녀가?’ 치우천은 반가운 마음보다는 불안한 생각이 스쳤다. 마음을 돌려 찾아왔다기에는 너무 늦은 밤이었고, 리미의 목소리가 아무래도 이상했다 “모셔라.” 곧이어 방문이 열리고 사뿐사뿐 소녀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소녀는 불을 밝히지도 않고 리미에게 퉁명스럽게 말했다. “멀리 떨어져 있어, 리미.” 그러나 리미는 소녀에게 눈을 부라리며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 챈 치우천이 힘겹게 말했다. “물러서 있어라, 리미. 괜찮다. 아무도 듣지 않게 해라.” “예, 주인님.” 리미가 문을 닫자 소녀는 발랄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많이 아픈가 보네요? 일어나시지도 않네? 아니, 못 일어나시나?” 치우천은 쓴웃음을 지었다. 소녀는 쾌 무거워 보이는 큼지막한 보따리를 세 개나 손에 들고 있었으나 무슨 보따리인지 알 수 없었다. “다시 돌아오기로 한 거요? 보고 싶었다오.” 치우천이 안간힘을 써서 말하자 소녀는 킥킥 웃었다. 어딘가 음산하고 광기서린 듯한 소리였다. “돌아와요? 아뇨 다만 꼭 해주고 싶은 말,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어서 온 거예요.” “돌아오지 않는 거요? 아쉽구려.” “정말 아쉬울까요? 후훗, 무라가 없네. 무라에게도 보여주고 싶었데.” 어두운 방에 어스레한 달빛으로 윤곽만이 보일 뿐 소녀의 얼굴은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소녀는 돌연 커다란 보따리 하나를 치우천의 몸 위로 던지듯 놓았다. “선물이에요.” 묵직한 보따리가 얹힌 순간 치우천은 뭔지 모르게 좋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치우천은 놀라서 물었다. “이게 뭐요?” “당신이 그렇게 핑계 대느라 안달이 났던, 그 친구의 목. 이제 한번 또 핑계를 대보세요. 누구였더라? 도단이라고 했던가?” 그 순간 치우천은 숨이 컥 막히는 것 같았다. 도저히 자신의 귀를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보따리 밑에서 그제야 서서히 배어나오는 축축한 것이 있었다. 그 촉감과 냄새는 틀림없이 사람의 피였다. 치우천은 거의 비명을 지를 뻔했으나 애써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그럴 리 없어! 그럴 수 없어!” “그럴 수 있어요.” 소녀는 생글거리며 교태 어린 목소리로 되받았다. 치우천은 온몸이 덜덜 떨렸지만 이를 악물고 말했다. “도단이는....... 한웅님의 감옥 깊은 곳에 있어. 절대 당신이 목을 벨 수 없어!” “아니, 할 수 있죠. 눈먼 장님인데다가 죽겠다고 마음먹은 사람이라 기운이 하나도 없었구요. 목을 베는 게 좀 힘들긴 했지요.” “당신은 거기 들어갈 수 없어!” 치우천이 악을 썼지만 목에 걸린 듯한 쇳소리만 나을 뿐이었다. 믿어지지 않아서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소녀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사악하게 킥킥 웃으며 다시 보따리 하나를 던졌다. “이건 또 뭐요!” “그건 더 안 믿어질 텐데요? 당신에겐 대단한 선물이거든요.” 그것 역시 사람의 목임에 틀림없었다. “이런 선물은 필요 없소!” 치우천이 소스라치게 놀라자 소녀는 깔깔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 가장 싫어하고 껄끄러워하는 사람이거든요. 당신 외할아버지기도 했던가? 고시울률이라고.” 치우천은 놀라움을 넘어 아예 까무러쳐버릴 뻔했다. 고시울률의 목이라니! 세상의 그 누가 이렇듯 간단히 고시울률의 목을 벨 수 있단 말인가? “당신은 거짓말을 하고 있어! 그럴 수 없어! 아니, 이건 꿈이야! 꿈!” 소녀는 다시 한 번 오싹 소름이 돋을 정도로 길게 웃었다. “고시울률은 사울아비를 꺼리지, 여자를 두려워하지는 않아요. 더구나 제 얼굴도 모르더군요. 아주 힘이 좋았지만, 그래도 나이는 있는지 금방 곯아떨어지더군요.” 치우천은 차라리 이대로 까무러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 그대로 소녀는 정체를 숩기고 고시울률을 유혹하여 목을 벤 것이 분명했다. 숨이 턱 막혀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몸에 부들부들 경련이 일었다. “그건 말도 안 돼. 그럴 수는 없어! 절대로!” “도움을 받은 사람이야 있죠. 주 많아요. 몸뚱이로 그에 대해 충분한 대가를 치렀지요!” 치우천이 뭐라 하기 전에 소녀는 얼른 덧붙였다. “물론 이 모든 것을 나 혼자 한 것은 아니에요 허나 말이죠, 당신이 쓰레기를 보듯 내던진 나를 보석같이 여기는 남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당신은 그것을 알아야 해요 이 사람처럼 말이에요.” 그러면서 소녀는 마지막 보따리를 다시 치우천의 몸 위로 던졌다. 치우천은 거의 정신을 잃을 지경이라 누구냐고 물을 수조차 없었다. “이 사람은 무슨 사울아비 스승인데, 한웅의 집을 지킨다던가? 감옥도 이 사람이 지키고, 고시울률의 집도 이 사람 말 한마디면 들어갈 수 있더군요. 나와 몇 번 자고 나더니 아주 말을 잘 듣던데요? 무슨 짓이든 시키는 대로 다하고 말이에요. 당신과는 달라. 아주 달라.........” 치우천은 꺽꺽거리며 울기 시작했다. 극에 달한 분노를 이기지 못해 별안간 폭포처럼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소녀는 치우천이 우는 모습을 보고 깔깔 웃었다. “지금 당신도 이렇게 만들 수 있지만, 그건 당신에게 너무 은혜를 베푸는 거예요 당신의 모든 것을 다 망치고 망가뜨린 다음에 당신 스스로가 비참하게 죽도록 만들어주겠어요 그래도 나를 비참하게 만든데 비해 작은 보답일 뿐이지만요.” 치우천은 울다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말하려는 생각이 있던 것도 아니고 그저 입에서 새어나온 것에 지나지 않았다. “당신이 사람이오? 내가.........내가 그렇게 만든 거요?” 소녀는 오싹한 소리로 까르르 웃었다. “난 사람이 아니에요 그리고 당신이 절반, 내가 절반 만들었지요.” 소녀는 치우천의 몸 위에 있는 사울아비 작은 스승의 목을 발로 툭 쳐서 바닥에 굴리고는 말했다. “이제 잘해 봐요 아, 한 가지 사실을 잊었네요. 내가 이들과 억지로 몸을 섞은 건 아니라는 점은 분명히 알아두세요. 당신처럼 비실비실한 사람들보다는 훨씬 낫던데요? 그리고 질투하지는 말아요. 당신이 말했듯이 이젠 전부 죽은 사람들이니까.” 소녀는 깔깔 웃으며 방을 빠져나갔다. 리미와 다른 사람들은 멀리 떨어져 있어 아무 말도 들을 수 없을뿐더러 치우천의 방을 나온 소녀의 태도가 너무도 당당하여 감히 그 앞을 막지도 못했다. 리미는 의아하여 얼른 치우천의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치우천은 이미 기절해 있었다. 리미는 그제야 모든 것을 깨닫고 급히 도깨비 부대를 풀어 소녀를 찾으려 했지만 그녀는 이미 모습을 감춘 뒤였다. 그녀가 한 짓을 리미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도단이나 사울아비의 목은 제쳐두더라도 고시울률의 목을 치우천이 가지고 있으면 엄청난 화근이 될 수 있었다. 리미는 이대로라면 치우천이 몽땅 죄를 뒤집어쓸 수 있음을 즉시 깨달았다 지금 당장 주변에 도움을 청할 사람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리미는 서둘러 집의 가장 후미진 곳에 땅을 파고 세 개의 머리를 묻었다. 다음날, 오천의 사울아비를 동원하는 데 성공한 치우비가 의기양양하게 돌아왔다. 그러나 그를 처음 맞이한 것은 바로 간밤에 벌어진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리미가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고 치우비는 눈이 뒤집힐 것 같았다. 치우비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소녀가 무슨 재주로 고시울률과 도단이의 목을 땄단 말인가? 더구나 치우천은 이 일에 충격을 받고 아예 정신을 잃어 한동안 깨어나지 못해 치우비는 치우천에게 아무 말도 들을 수 없었다. 낮이 되어서야 간신히 정신을 차린 치우천은 한 차례 피를 토하기까지 했다. 신시는 고시울률의 느닷없는 죽음으로 발칵 뒤집혔다. 그의 위치에 비해 너무나도 어이없는 최후였다. 치우비 역시 차라리 까무러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만에 하나 누군가가 그 범인의 얼굴을 기억해낸다면 소녀임이 알려지게 되고, 영락없이 치우천에게 모든 죄가 씌워지게 된다. 치우천이 한웅이 되기 위해 아내를 시켜 정적을 유혹해 암살했다는 의혹을 피할 방법이 없었다. 더구나 그의 목은 치우천 집 안에 매장되어 있으니 누가 수색이라도 한다면 끝장이었다. 치우비는 엄청나게 충격적인 이 일을 울라트나 무라 등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리미의 입을 단단히 막았다. 그러나 이틀도 못 되어 고시울률을 암살한 사람은 치우천일 것이라는 소문이 신시에 파다하게 퍼졌다. 고시울률이 그나마 통제하던 귀족들이 저마다 분노에 들떠 제멋대로 행동했고 치우천과 치우비를 잡아 죽여야 한다느니, 족쳐야 한다느니 하는 말을 공공연하게 해댔다. 그러던 귀족들이 위험한 신시에 더는 있을 수 없다며 가족들을 이끌고 신시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삼사와 부소구슬 등은 몹시 놀라 사건의 진상을 캐기 위해 노력했지만 오리무중이었다. 전혀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시간을 끄는 사이 유망의 대나무골 침공 소식은 사실로 밝혀졌다. 유망은 전광석화처럼 대나무골을 덮쳐 단 사흘 만에 그곳에서 살던 마갸르족에게 완전 항복을 받아내고 길목을 점거했다. 게다가 주신의 기병이 힘을 쓰지 못하도록 강둑을 터 뜨려 부근을 물바다로 만들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런 판국에 출동하기로 한 사울아비들은 귀족들의 선동에 휩쓸려 고시울률이 다스리던 동쪽 지방에서부터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치우천을 몰아낸다는 것보다는 고시울률이 없어진 이때, 자신이 패권을 잡아보겠다는 얄팍한 야심가들이 준동하기 시작한 것이 다. 비록 인덕이 모자라고 단점도 많았지만, 새삼 고시울률이란 존재가 얼마나 큰지, 자칫하면 주신 전체가 반란과 내란에 휩싸일 판이었다. 삼사의 고민도 엄청났으나 반란을 막는 데에만도 벅찰 지경이었으며, 부소구슬조차도 고민에 시달리다가 끝내 앓아누워버렸다. 가장 충격이 큰 치우천은 몇 날 며칠 동안 전혀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바야흐로 최대의 위기가 닥친 주신, 그 모든 짐이 치우비의 어깨위로 떨어졌다. 그 와중에 지나족에게 발과의 혼담을 주선하러 갔던 거서기와 삼이 풀죽은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들이 전한 이야기를 듣고 치우비는 몸을 떨었다 -헌원의 부족도 이미 주신을 압박하여 북쪽에서 동쪽으로 대나무골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 길목들이 점령당했으니 몽골족이나 타타르족, 키탄족과의 길도 이제 끊어져버린 것이나 마찬가지다. -유망의 군대는 북쪽에서부터 치고 올라와 미아우족과의 길을 막았으며, 주신으로 치고 올라을 조짐이 보인다. 유망은 결코 쉽지 않은 상대인데다 마침내 헌원이, 그것도 유망과 함께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치우천이 정신이 있었더라도 수습하기 어려울 정도의 엄청난 위기 상황에서, 치우비에게 개인적으로 결정타를 안긴 마지막 소식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나족과 싸움이 붙으면....... 그게 끝날 때까진 전혀 혼담이 안 되겠군.” 치우비는 침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의 어깨는 벌써 축 처져 있었고 힘이 반쯤 빠져나간 듯했다.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던 것이다. “참 안된 말이네만......... 초.......... 공손발님 말이오. 그게.........” 잠시 거서기가 우물거리자 삼이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뜸들이지 말게! 정말 안됐네만, 공손발은 죽었다고 하오!” 초조하게 귀를 기울이고 있던 치우비는 순간 눈앞이 하얗게 변하는 것 같았다. 헌원이고 유망이고 대나무골이고 치우비의 머릿속에서 한순간 싹 사라졌다. 다만 발의 얼굴만이 릴은 소용돌이에 잠기듯이 빙글빙글 맴돌며 희미해져 갈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