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 서 명 : 치우천왕기 7권(다가오는 검은 그림자) 지 은 이 : 이우혁 펴 낸 이 : 이정원 출 판 사 : 도서출판 들녘 출판년도 : 2004년 03월 29일 봉 사 자 : 정웅희 <지은이 소개/ 이우혁> 1965년 5월 18일 서울 출생. 상문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기계설계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대학 때부터 아마추어 연극, 뮤지컬 등에 깊은 관심을 보여 13편 이상의 극에 연출. 출연하였으며, 하이텔 고전음악 동호회에서 한국 최초의 아마추어 오페라 ‘바스티앙과 마스티엔느‘를 각색, 연출하기도 했다. 1994년 <퇴마록>, 1998년 <왜란종결자> 등을 발표하여 수백만 독자들의 사랑 속에서 일약 대중 문학의 대표작가로 떠올랐다. 지금도 그는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좋은 작품을 발표하기 위해 작업실에서 작품구상에 몰두하고 있다. 이우혁 홈페이지 www. youk.co.kr <미디어서평> 한국 판타지 문학의 정점에 우뚝 선 작가 이우혁! 새로운 가능성, ‘영웅 판타지’의 세계가 열린다! 1994년 1월 ‘퇴마록’이 발간되었습니다. 1993년 PC 통신에서 회자되었던 그의 작품이 출간될 당시 그 작품이 그렇듯 오랜 생명력을 발휘하리라곤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습니다. 숱한 화제와 800만부라는 어마어마한 판매기록을 세우고 근 8년 만에 막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2003년 7월, 작가가 계속 관심을 가져왔던 ‘치우천왕기’가 출간되기에 이르렀습니다. 9년 동안의 자료 수집과 세 차례의 중국 방문으로 이 작품에 쏟은 작가의 열정은 정말 남다릅니다. 고작 2백 줄도 안 되는, 그것도 태반이 중복되는 자료 몇 줄을 가지고 한 사람의 일대기와 그 시대를 다시 구성한다는 것은 참으로 지난한 일이라고 작가는 고백합니다. 다시 말해 판타지의 기법으로도 어려운 일이었으며, 어쩌면 그 내용을 쓴다는 것 자체가 판타지라고 할 수도 있을 테니까요. 사전에 나와 있는 치우에 대한 소개는 이렇습니다. 치우(蚩尤):중국 고대 신화에 나오는 거인족의 우두머리. 염제(炎帝)의 후예이다. 전설에 의하면 81명의 형제가 있었는데 모두 동(銅)으로 된 머리와 철로 된 이마를 가지고 있었고, 머리 위에는 긴 뿔이 있었으며, 매우 모질고 사나웠다고 한다. 과(戈)?모(矛)?극(戟)?추모(酋矛:자루의 길이가 스무 자인 창)?이모(夷矛) 등의 병기를 만들었다. 황제(黃帝)와의 전쟁 중에 과부족인(?父族人)?풍백우사(風伯雨師)?이매망량(魅:도깨비)의 도움을 받았다. 치우는 연기를 빨아들이고 안개를 뿜으며, 공중을 날고 험한 곳을 뛰어넘을 수 있다. 후에 치우는 전쟁에서 패해 죽음을 당했으며, 그 피는 도리깨를 물들여 단풍나무 수풀을 이루었다. 고대 제(齊)나라에서는 8존천신(八尊天神)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치우는 그중 3번째로 모셔졌다. 진(秦)나라 말기에 유방(劉邦)이 기병할 때 패정(沛庭)에서 치우와 황제에게 제사를 지냈다. 후대에 와서 치우는 전쟁신으로 받들어졌다. 이 기록은 중국측에 나와 있는 자료를 근거로 한 설명입니다. 동으로 된 머리, 철로 된 이마, 다양한 병기를 사용하는 치우의 묘사를 보건대, 분명 그는 당시 철기문화를 선진적으로 수용했던 것이 분명한 것 같습니다. 주신족의 신시(神市)는 단군조선 이전의 나라요, 1500년간이나 계속된 나라이며, 치우(蚩尤)는 그 14대 황제로 황하유역에서 일어나서 회대(淮垈, 중국 회수와 산동 사이의 땅)를 정복한 왕입니다. 그리고 공손헌원(황제)는 지나족(중국)을 통일한 왕입니다. 치우와 황제는 지금으로부터 4천7백여 년 전 중국 하북성 탁록(啄鹿)에서 10년 동안 70여 차례나 싸웠는데 이것이 고대 동북아시아 최대의 전쟁이라고 전해 내려오는 그 유명한 탁록전쟁입니다. 비록 탁록전쟁에서 공손헌원(황제)에게 패한 치우이지만 훗날 군신으로 받들어진 것만으로 보아도 그의 용맹성을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튼 이 작품은 고대 역사의 진위성을 따지는 역사서가 아닌, 그야말로 90퍼센트가 작가의 상상력으로 탄생된 ‘영웅 판타지’입니다. 한국 판타지 제2부(제1부는 1998년에 발표한 ‘왜란종결자’)에 속하는 이 작품은 역사의 자료가 턱없이 부족한 고대 역사로의 무한한 상상력을 동원하여 독서의 즐거움과 고대신화로의 충실한 안내자 역할을 하기에 손색이 없을 것입니다. 화합이냐, 지배냐? 역사의 운명을 건 영웅들의 대혈전! 800만 독자를 사로잡은 이우혁의 힘이 되살아난다! ‘퇴마록’ 이후 9년을 고심한 끝에 펼쳐놓은 ‘치우천왕기’! 단군의 고조선 이전, 과연 우리 민족의 시원은 어디였을까? 작가는 채 200줄도 되지 않는 사료를 붙들고 9년의 세월을 고심했다. 단 한 줄의 자료라도 더 찾기 위해 엄청난 양의 독서를 했고, 역사의 원형을 찾기 위해 방랑자처럼 중국 각지를 떠돌기도 했다. 이제 2003년 7월, 그는 뛰어난 역사적 상상력으로 5000년 동안이나 잊혀져 왔던 우리의 선조, 치우천왕을 부활시켰다! 역사의 운명을 건 대혈전의 시작과 끝은? B.C. 2716년부터 B.C. 2696년까지, 드넓은 중국 대륙이 바로 ‘치우천왕’기의 무대이다. 신석기 시대의 말기이며 또한 청동기 시대가 마악 시작된 바로 그 지점에서, 주신족의 치우천과 그의 쌍둥이 동생 치우비의 목숨을 건 모험과 사랑이 시작된다. 모든 부족은 제 색깔대로 공존해야 한다는 화합 사상을 가지고 있는 치우천! 힘으로 천하를 통일해 하나의 강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지나(중국)족의 대족장, 공손헌원! 최고의 전략가이며 전술가인 두 영웅의 운명적인 대결과 엎치락뒤치락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박진감 넘치는 스토리의 힘은 시공을 초월한 상상력의 진수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 마법과 도술, 선인과 신수들이 등장하는 전설의 시대! ‘치우천왕기’에는 영웅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운명을 시험하는 선인들과 신수, 도깨비 등등 온갖 마법과 도술을 부리는 캐릭터가 쉴새없이 등장한다. 인간의 모습을 한 대선인 자부(紫負)와, 파괴와 무질서의 선인인 혼돈(混沌)이 공존하고, 언어의 시조(始祖)인 발귀리(發貴理)와 전설의 동물인 맥(貊), 곤륜산에 살았다는 대주술사 서왕모(西王母), ‘소녀경’의 주인공 소녀(素女) 등이 바로 그들이다. 마법과 도술을 쓰는 그들은 치우천왕과 공손헌원, 그 두 영웅 뒤에서 그들을 돕거나 방해하는 역할을 한다. 거대하고 웅장한 영웅 판타지, ‘치우천왕기’! 이 소설은 역사에 근거하고 있지만 작가가 주창하는 한국 판타지이다. 판타지적인 요소가 많으며, 그러한 요소 없이는 애당초 구성될 수도 없었다고 본다. 실제 역사에 남은 작은 편린으로 구성하느라 무리도 좀 따를 수 있으나 이 작품은 소설이며, 판타지인 이상 재미있고 흥미로운 구성이 단연 돋보인다. 차례 유망의 움직임 진몽회의 검은 구슬 시람을 모으는 노래 공상 싸움 진몽회와 만나다 신시의 검은 그림자 만남과 헤어짐 흔들리는 마음 다가오는 검은 그림자 주요 등장인물 유망의 움직임 “틀림없겠지?” 얼굴을 조금 찡그린 채 형천이 무겁게 물었다 그 앞에 엎드린 중년의 지나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끝에 힘을 주었다. “틀림없습니다.” 그때 유망의 오른편에 앉아 있던 축융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는 믿기 힘들군. 아니, 믿을 수 없어.” 그 말에 형천은 다시 한 번 엎드린 지나인의 얼굴과 축융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말했다. “믿기 어렵겠지만 그럴 수도 있네. 치우천은 그러고도 남을 만한 녀석이야.” 축융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그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니네.” “무슨 말인가?” “치우천이 그런 식으로 공상을 친다는 사실을 못 믿는다는 게 아니네.” “그러면........?” “그런 중요한 계획이 어떻게 벌써부터 새어 나왔는지, 그게 믿기 힘들단 소리일세.” 엎드린 중년의 지나인은 축융의 말에 릴이 고개를 조아리며 다시 한 번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틀림없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러자 형천은 웃음 띤 표정으로 축융을 쳐다보았다. “자네는 너무 걱정이 많군.”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조심스러운 걸세, 조심은 많이 할수록 좋은 것이니까.” 축융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지나인에게 물었다. “이것을 누구에게서 들었다더냐?” “치우천의 바로 옆에 있는 사람에게서 들었다고 합니다. 이번 공상싸움에 참가할 대장 중 한 사람이랍니다. 태산 회의에도 나왔던 사람이라 했습니다.” “태산 회의 때 나왔을 정도라면 보통 인물은 아닌 것 같은데?” 형천이 혼잣말로 중얼거리자 축융은 다시 물었다. “그 사람에 대해서도 알아보았느냐?” “당연히 조금 알아보았습니다.” “이름이 뭐고, 어떤 인물이냐?” “이름은 도단이라 하고, 신시의 박수입니다.” “박수?” “주술사 말입니다. 눈먼 주술사입니다.” “눈이 멀었는데도 태산 회의 때 나왔다더냐?” 형천이 희한하다는 듯 묻자 지나인은 다시 고개를 조아리며 대꾸했다. “그랬다고 합니다.” “이번 공상 싸움에서도 대장으로 뽑혔다고?”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 짓을 했다던가?” “치우천과 사이가 나빠졌다고 합니다. 그 소문이 신시에서도 확 돌고 있습니다. 저도 직접 보고 확인한 겁니다.” 지나인이 신시에서 치우천과 도단이가 다툰 일을 자세하게 설명하자 축융은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그런데 공상 싸움에 대장으로 뽑혔다?” 그때 형천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렇다면 믿을 수 없다!” 형천이 고함을 치자 지나인은 흠칫하며 몸을 움츠렸다. 축융은 가느다란 눈을 더욱 가느다랗게 뜨고 형천을 바라보며 물었다. “자네도 안 믿어지지?” 형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일이다. 태산 회의에 나을 인물이라면 보통내기는 아니라고 봐야 한다. 더구나 눈먼 몸으로 태산 회의에 나오고, 공상 싸움에 대장이 된 주술사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런 사람이 말다툼 한 번 했다고 삽시간에 반대쪽으로 몸을 돌릴 리 없다. 설령 사이가 나빠졌다 해도 종족을 배신하는 짓을 할 리 없다!” 그러자 지나인이 코가 땅에 닿을 듯 엎드리며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주신에서도 그런 의심을 했다고 들었습니다만, 이미 시험을 거쳤다고 합니다.” “슨 소리냐?” 축융이 묻자 지나인은 바싹 마른 입술에 침을 발라가며 설명했다. “도단이라는 자는 자신의 마음을 보이기 위해 이미 한 사람을 죽였다는군요. 주신에서 상당히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었답니다. 맥달이라는 아주 유명한 선인을 죽였다고 합니다.” 말을 듣고 형천이 혀를 끌끌 차며 목소리를 높였다. “더 못 믿겠구나. 선인을 죽였다니! 더 못 믿어! 선인은 얼마든지 죽은 척할 수 있다! 정말 죽어도 살아날 수 있다는데, 하물며 죽은 척하는 정도야!” 지나인은 목을 움츠렸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게.......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주신 한웅까지 이 일에 대해 신시 전체에 공표를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주신 쪽에서도 그런 의심을 하고 이미 여러 번 조사를 했다고 합니다만 의심받을 점은 없었다더군요.” “석연치 않은데.......” 형천이 여전히 못미더운 듯 고개를 갸웃거리자 지나인이 말을 이었다. “믿기지 않는 점은 있지만, 치우천이 공상을 빼앗기 위해 세운 계획은 너무도 빈틈이 없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거짓 같지가 않군요.” 형천이 그 지나인에게 나가 있으라고 손짓을 했다. 지나인을 내보낸 다음, 형천은 축융에게 물었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글쎄......” 축융은 가느다란 눈을 힘주어 몇 번 껌벅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믿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없을 것 같기도 하네.” “난 믿지 못하겠네!” 형천이 약간 흥분한 기색을 보이자 축융은 일어서서 뒷짐을 지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서너 발짝을 내딛다가 잠깐 멈추어 서서 뭔가 생각해보고, 다시 서너 발짝 걷다가 뭔가를 생각했다. 이윽고 축융이 입을 열었다. “우선 그 도단이라는 작자에 대해 조금 더 알아야겠네. 우리는 태산 회의를 보지 못했으니 아는 사람을 불러야겠군.” 형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부하를 시켜 한 사람을 찾으라는 명을 내렸다. 명이 떨어지자 조금 뒤, 주술사 차림의 늙은이가 들어왔다. 그 사람은 바로 태산 회의 때 각 종족 전사들간의 대진표를 발표한 늙은 주술사였다. 늙긴 했어도 기억력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부르셨습니까?” 주술사가 들어오자 축융이 물었다. “너는 지난번 태산 회의 때 사람들을 다 기억하나?” “기억합니다.” “주신 쪽에서 도단이라는 작자가 있었지?” “있었습니다. 돌 던지기에서 가장 뛰어난 전사로 뽑힌 인물입니다.” “눈이 멀었다고 들었는데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더 갈채를 받았습죠. 눈먼 몸으로 마갸르족의 와난강, 와난수를 물리쳤을 정도였으니까요.” “나이는?” “아주 젊었습니다. 태산 회의가 몇 년 전 일이지만, 지금 스물댓살이나 되었을까요? 새파랗게 젊은 사람입니다.” 축융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됐다.” 주술사가 물러가자 형천이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그 말은 믿을 수 없네. 틀림없이 거짓말이야. 치우천과 짜고 한 짓이 분명해.” 축융은 웃으며 물었다. “그렇게 보이는가?” “그렇네. 눈먼 녀석이 돌 던지기를 배웠을 정도라면 끈기도 대단한 녀석이다. 거기에다 젊은 녀석이 배신이란 걸 그리 쉽게 할 리 없지......” “나도 같은 생각이야.” 축융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형천이 물었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 형천의 말에 축융은 씩 웃어 보였다. “어떻게 하긴? 속아주는 것이지.” “속아준다고?” “일단 속아준 다음에 그 뒤통수를 쳐야 하네.......” “그럴 수 있겠는가? 놈이 뭘 노리는지 알겠나?” 형천이 눈을 빛내며 묻자 축융이 대답했다. “그것까지는 모르겠네.” “그럼 어떻게 뒤통수를 치나?” 축융은 다시 몸을 곧추세우더니 천천히 뒷짐을 지고 걸으면서 말문을 열었다. “치우천 놈은 우리를 속이려고 뻔한 수를 썼네. 그렇다면 당연히 우리를 속이려고 공상 작전도 계획대로 밀고 나오겠지?” 형천이 코웃음을 한 번 치며 축융의 말을 받았다. “그러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우리 뒤통수를 치려 할 테고 어떤 수로 우리 뒤통수를 칠까?” “그걸 알아내야 하겠지. 몇 가지 짐작 가는 바가 있긴 하네만......” “그건 염제님을 뵙고 이야기하세.” “그렇게 하지.” 형천과 축융은 동시에 문을 나섰다. 유망은 여전히 나른한 자세로 호랑이 가죽을 깐 의자에 반쯤 몸을 기대고 있었다. 이제 유망은 어느 정도 마약기가 가셔서 온전한 정신으로 돌아왔으나 겉으로 보기에는 여전히 나른하고 지루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얼굴은 예전보다는 퍽 야위고 안색도 희게 변했으나 오히려 그 모습이 약해 보이기보다는 오싹해 보일 정도의 위엄이 있었다. 형천과 축융이 들어와 예를 올리자 유망이 조용히 물었다 “뭐 좀 쓸 만한 게 있어?” “주신에 심어놓은 사람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그래? 뭐래?” “치우천의 계획을 알아냈다고 합니다.” 유망은 피식 웃었다. “그 꼬마 놈이 꾀를 썼나 보군.” “저희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한번 말해봐.” 그러자 형천이 묵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치우천은 주신에서 데리고 온 삼천 명의 사울아비를 천천히 나아가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함정입니다. 다른 부족에서 온 천 명의 전사들만 데리고 있다지만 그들도 모두 멈추어 두었습니다. 그것도 함정입니다. 치우천은 대장급 몇 명만 데리고 바람처럼 빠르게 달려서 공상으로 내려올 것이라고 합니다.” 유망은 씩 웃어 보였다. “그렇게 안 하면 공상까지 올 수도 없겠지. 치우천 녀석은 머리가 꽤 잘 돌아간단 말야. 부하를 우르르 데리고 오면 눈에 띄게 되고, 눈에 띄면 계속 싸우면서 와야 하지. 그러니 대장들만 재빨리 오려는 거야. 그러나 그렇게 와서는 부하들이 없지 않나?” “주신에 심은 자의 말로는, 치우천은 가면서 부하를 모을 것이라 했습니다. 사실 이 부근에는 우리 지나족에게 좋지 않은 마음을 품은 미아우족이나 마갸르족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지난번 우리가 북쪽으로 올라가다가 그만둔 때문에 치우천의 이름은 그들에게 너무도 많이 알려져 있고요. 치우천은 그 작자들을 모아서 군대를 만들려는 것 같습니다.” “그럴듯하군. 그 녀석이 주신 한웅에게 두 해 안에 공상을 점령한다고 했다며?” “그렇습니다.” “그렇게 빨리 내려오지 않으면 두 해를 넘기게 될 테니 놈은 서두를 것입니다.” “서두르겠지 서둘러도 많이 서두를 거야.” 유망은 잠깐 생각하다가 말을 이었다. “그렇게 해서 그놈이 부하를 얼마나 긁어모을 것 같은가?” “듣기로는 만 오천을 모으려 한다는군요.” 동안 지나족은 생활의 규모가 상당히 커졌으므로 이제 만이라는 단위를 일상적으로 용하고 있었다. 형천의 말에 축융 한마디 거들었다. “치우천 녀석의 이름이 상당히 알려졌기 때문에 그 정도는 모일 것 같습니다. 여기저기 숨어서 우리에게 맞서는 미아우나 마갸르족의 떨거지가 꽤 많으니까요.” 그러자 유망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아주 고마운 일이군, 그래.” “예?” 형천이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자 유망은 얼굴을 찌푸렸다. “형천, 형천, 머리를 좀 써. 그건 아주 고마운 일이야. 그놈이 떨거지들을 싹 몰아서 한군데로 모이게 해주니 우리로서는 잘된 일이잖아. 그놈들을 일일이 다 때려잡으려면 너무 힘들거든. 그런데 모아놓으면 한 번에 다 잡을 수 있으니 놈이 우리를 도와주는 거지.” 갑자기 유망이 획 고개를 돌리더니 축융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축융?” “예!” 축융이 대답하자 유망이 물었다. “지금 공상에는 우리 전사가 얼마나 있지?” “십이만이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저기로 연락하면 오만은 더 모을 수 있습니다.” 유망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소리쳤다. “창힐을 불러!” 창힐은 마치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이내 들어왔다. 창힐은 키가 크고 몸은 말라 가냘팠으나 동작은 우아하고 부드러웠다. 얼굴은 희고 코가 컸으며 눈이 맑게 빛나는, 현명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창힐은 천천히 유망에게 인사를 올렸다. “염제 신농님의 부르심을 받고 창힐이 왔사옵니다.” 그러자 유망은 약간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창힐, 난 답답한 건 못 참으니까 오늘은 빨리빨리 이야기해야 해.” “빠르게 이야기하도록 하겠사옵니다.” 창힐의 말은 아까보다는 조금 빨라졌으나 그래도 느릿느릿했다. 그러나 그 음성은 맑았고 듣기 좋은 울림이 있었다. “창힐, 공상 성벽을 높이는 일은 다 완성되었나?” 유망은 창힐에게 공상의 성벽을 한 길 더 올리는 일을 시켰던 것이다. 예전에 공상의 성벽은 세 길이었는데, 한 길을 더 높여서 네 길로 만드는 일이었다. “앞으로 사홀 정도만 지나면 완성될 것으로 보옵니다. 미아우족들을 시키는 일이라 그리 쉽지는 않습니다만.” “식량은 잘 모으고 있나?” “식량은 당장 성문을 닫아도 석 달은 버틸 수 있사옵니다. 조금 더 준비를 한다면 여섯 달치까지 쌓아둘 수 있나이다. 땅을 깊이 파서 식량을 보관하기 때문에 상하지 않을 것이옵니다.” “물은?” “공상 옆의 강과 시내 말고도 스물네 군데의 우물을 새로 팠사옵니다. 성문을 닫아도 물 걱정은 없나이다.” “그러면 우리 십이만 명이 성문을 닫고도 석 달은 버티고 싸울 수 있단 말이지?” “식량과 물을 아껴서 사용하면 당장이라도 넉 달은 버틸 수 있사옵니다.” “화살과 무기는? 나무는?” 유망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꼬치꼬치 물었으나 창힐은 조금도 변함없이 느리면서도 확실하게 대답했다. “공상 안의 모든 집 지붕은 대나무를 짜서 얹게 했습니다. 그러니 화살대가 모자라면 그것으로 쓰면 충분하옵니다. 그리고 모든 기둥도 급하면 쓸 수 있도록 좋은 나무로 골라서 짓게 했으니 그것 역시 문제없사옵니다. 그리고 집을 지을 때 쓴 모든 돌들도 무기로 사용할 수 있도록 단단한 돌만을 썼습니다. 게다가 무너진 성을 신속하게 고칠 수 있게 다듬은 돌들도 쌓아 두었습니다. 공상 성안의 모든 것은 급할 때 무기로 사용할 수 있는 것들로만 만들어졌사옵니다. 조금도 염려하지 마옵소서.” 축융과 형천은 감탄한 눈빛으로 창힐을 바라보았다. 창힐이 차분하고 꼼꼼한 사람이라고는 알고 있었으나 이 정도로 치밀할 줄은 몰랐다. 창힐이 덧붙여 말했다. “그리고 공상성 안의 사람들은 모두 한 달에 두 번씩 훈련을 시키고 있사옵니다. 우리 지나 말을 배우게 하는 것은 물론이옵고 전사가 아닌 남자들에게는 급한 대로 쓸 수 있도록 화살과 무기를 만드는 훈련을 시키고 있으며, 여자들에겐 다친 사람의 상처를 돌보는 법을 가르쳤사옵니다. 모든 집에는 방 하나씩을 더 만들어서 여차하면 싸우다 지친 전사들이 쉴 수 있게 만들어 두었고 집집마다 상처에 바를 기름단지와 상처에 맬 천을 따로 두게 했사옵니다. 아이들에게도 성벽으로 전사들에게 줄 음식과 화살을 나르는 훈련을 시켜두고 있사옵니다.” “기막힌 준비로군!” 형천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외쳤다. 창힐은 그 말에는 전혀 관심도 보이지 않고 유망에게 말했다. “한 가지 여쭐 말씀이 있사옵니다.” “말해봐.” 아무렇게나 내뱉는 듯했으나 유망의 눈에도 놀라움과 대견함의 눈빛이 감돌았다. 창힐이 다시 조용히 말을 이어나갔다. “공상은 우리가 빼앗아 다시 세운 성이옵니다. 비록 우리에게 항복을 했지만 전사가 아닌 대부분은 미아우나 마갸르 같은 다른 부족 출신이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까지 잡아야만 하옵니다. 제가 미아우족에게 훈련을 시켜서 우리 전사들의 뒷바라지를 하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옵니다만 그들은 속으로 귀찮아하고 불만스러워할지도 모르옵니다. 그러니 그들의 마음을 잡기 위하여 조금 더 베풀어야 할 것이옵니다.” “뭐 어떻게?” “공상성에 사는 사람들에게 훈련을 받는 대가로 가죽과 비단, 구슬, 조개껍질을 내리는 것이옵니다. 염제 신농님의 이름으로 값진 것을 나누어준다면 그들은 훈련을 조금도 힘들어하지 않을 것이고, 우리 전사들은 그만큼 더 잘 싸울 것이옵니다.” 유망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어차피 싸움이 코앞인데, 준비가 그만큼 되어 있다면 재물을 아낄 필요는 없어, 창힐, 네가 잘 생각해서 나눠줄 수 있는 만큼 나눠줘라.” “염제 신농님의 보살핌에 다른 부족사람들도 고마워할 것이옵니다. 그러면 물러가오리까?” 그러자 유망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 “아니. 너도 좀 들어봐. 어느 미친놈이 우리 공상을 치러 온다는군. 싸움은 형천과 축융이 할 거지만 공상성을 만든 건 너니까 너도 듣는 게 좋겠어.” 창힐이 조용히 고개를 숙이자 유망은 형천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형천?” “예!” “너 같으면 이런 공상을 만 오천으로 칠 수 있겠어? 그것도 전부 어중이떠중이들을 데리고?” 형천은 즉시 고개를 저었다. “안 될 것이옵니다.” “축융 너는?” 축융도 고개를 저었다. “공상 성벽은 신시를 본 따서 돌로만 쌓은 것입니다. 그리고 십이만의 전사들이 지키는데....... 절대 무리입니다.” 그러자 창힐이 조심스레 물었다. “공상을 공격할 적이 만 오천이옵니까?” “그렇게 될 거라고 들었어.” 창힐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내 되물었다. “그러면 나가서 싸워도 우리가 충분히 이기지 않겠사옵니까?”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 치우천 놈은 꾀가 대단하고 부하들을 너무도 잘 다룬다. 맞붙어 싸워도 지지는 않겠지만, 우리 피해가 막심할거야.” “그자가 그렇게 무섭습니까?” “우리 수가 많다고 적을 얕보아서는 안 돼. 지난번에 우리가 물러난 것도 그놈의 꾀 때문이야. 하지만 성안에 버티고 있는데야 놈들이 어쩌겠어?” “그놈이라면 그래도 뭔가 꾀를 쓸 것이옵니다.” “그렇겠지? 그래. 안 그러면 어떻게 공상을 치겠어? 분명 그럴 거야. 그리고.......” 형천의 말에 대꾸를 하던 유망은 돌연 축융에게 물었다. “축융, 그리고 남쪽 전사들을 불러오려면 얼마나 걸리지?” “두 달 정도면 올 것입니다.” “두 달이라.......” 유망은 인상을 쓰면서 머리를 마구 긁적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치우천 놈이 제아무리 빨리 와도 앞으로 한 달은 걸리겠지? 아니, 놈이 신시를 떠난 게 한 달 전이라 들었으니 한 달 안에 도착할지도 몰라.” “그렇게 빨리 오겠습니까? 못 잡아도 두 달은 걸려야.......” “아냐, 놈은 그렇게 온다. 어쩌면 한 달 만에 올지도 몰라. 그래봐야 우리 편이 오기까지 한 달도 안 남는데....... 그 사이에 공상을 친다?” 그때 창힐이 조용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공상의 창힐이 한 말씀드리옵니다. 저는 전쟁은 잘 모르오나, 그래도 만 오천의 전사로 십이만이 지키는 이 공상을 공격한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사옵니다. 적어도 겉으로 공격해서는 누구도 이길 수 없을 것이옵니다.” 유망은 눈을 빛내며 창힐을 쳐다보았다. “더 말해봐.” “공상은 분명 단단한 성이옵니다. 이런 성은 겉으로 공격하는 것이 아니고 안에서부터 공격해야 무너질 것이옵니다.” “안에서 공격한다는 건?” “가령....... 굴을 판다거나.......” 창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유망이 부르짖었다. “그거다!” 유망의 외침에 형천과 축융은유망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유망 역시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며 물었다. “기억들 안 나나? 전에 치우천 그놈이 어떻게 도망쳤는지?” “맞습니다. 굴을 파고 도망쳤죠.” “그래. 놈은 틀림없이 굴을 파고 들어오려 할 거다. 우리는 전사도 많고, 성벽이 단단하고 먹을 것도 충분해. 하지만 굴을 파고 들어오면......” 그때 창힐이 차분한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 “굴을 판다면 성벽을 조심해야 합니다.” “무슨 소리야?” “공상의 돌 성벽은 단단하고 강하지만 만약 밑에서 굴을 판다면 무너질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자 형천이 무릎을 탁 쳤다. “그렇겠군!” 그런 형천을 잠시 쳐다보다가 창힐이 조용히 말을 이었다. “굴을 파는 것은 곧 알 수가 있사옵니다. 굴을 파면 많은 흙이 나오게 되는데, 그것을 감출 수는 없지요. 또 성벽 안쪽에서 우리가 성벽아래까지는 아니더라도 여기저기 굴을 파놓으면 될 것이옵니다. 그 굴 안에서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밖에서 굴을 파고 들어오는지 아닌지 알아낼 수 있습니다.” “그래, 그래. 아주 좋아, 창힐.”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는 유망을 보며 축융도 한마디 거들었다. “분명 그럴 것입니다. 그것밖에는 다른 수가 없지요 그리고 바깥에서 들어오는 자들을 경계해야 합니다. 치우천 놈의 끄나풀들이 성안으로 들어와서 불이라도 지르고 다닌다면 큰일이니까요.” “맞아, 그럴지도 몰라.” 유망은 대답하며 몸서리를 쳤다. 지난번 출정 때, 치우천의 부추김을 받은 미아우족의 게릴라작전 때문에 모든 것이 불타버려서 얼마나 비참하게 후퇴를 해야만 했는가? 그 생각을 하니 피가 거꾸로 솟고 진저리가 쳐졌다. “창힐, 놈들이 가까이 올 때쯤부터 성문을 꽉 닫고 바깥 놈들이 하나도 들어오지 못하게 해. 이번 싸움이 끝날 때까지. 알았지?” “염제 신농님의 말씀 받드오이다. 하온데 적이 오기 전부터 문을 닫아걸 필요는 없지 않겠사옵니까?” “그건 그렇지 않아. 놈은 꾀가 많으니, 조심해야 해. 그러니 오늘 당장 성안에 있는 사람들 얼굴을 모조리 조사하고, 바깥에 사는 놈이 성 안에 절데 들어올 수 없게 하라구. 알았지? 그리고 놈이 나타날 때 즈음에는 아예 문을 닫아걸어! 뭐든 확실하게 해야 해.” “알겠사옵니다. 유망님의 생각이 아주 깊으십니다. 틀림없이 그리하겠나이다.” “그리고 축융, 너는 놈들이 굴을 파는지 잘 감시해. 알았지?” “예!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놈들을 잡는 방법에 대해선 제게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놈들이 굴을 어디로 파는지 지켜보다가 그곳을 알아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부근에 전사들을 놓고 있다가, 놈들이 굴을 빠져 나오는 족족 모조리 죽여 버리면 더 쉽습니다. 아니면 끓는 물을 들이붓거나 연기를 피워서 한꺼번에 전부 죽여 버릴 수도 있구요.” “하! 그것 참 좋군! 아주 멋져. 좋아, 그렇게 해. 축융, 알았지?” “예!” “그리고 형천, 오늘 바로 남쪽 전사들에게 연락해서 모조리 올라오게 해.” “그들까지 부를 필요가......?” 유망은 고개를 저으며 열에 들떠서 외쳤다. “한 놈도 못 살아나가게 만든다. 특히 치우천 그놈이 못 살아나가게 해야 한다.” 그 말에 축융은 음산하게 웃어 보였다. “여기서 살아나가더라도 공상을 빼앗지 못하면 놈은 죽은 거나 다름없습니다. 신시에서 그놈을 용서하지 않을 테니까요.” “좋다! 이제 그놈은 송장이나 다름없어.” 유망은 주먹을 불끈 쥐며 외쳤다. 형천과 축융, 창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방어 작전은 완벽했고 한 치의 빈틈도 없었다. 이번에야말로 치우천이 살아나갈 길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진몽희의 검은 구슬(烏珠) 밤이 지나 하늘이 푸르스름하게 밝아지기 시작하고, 풀잎과 나뭇가지를 적시듯 아침 이슬이 내려앉기 시작할 무렵, 두 사람이 말을 타고 달리고 있었다. 두 사람이 말 위에 있기는 했지만, 정확하게 말하자면 두 사람이 말을 탄 것은 아니다. 한 사람은 말을 타고, 한 사람은 말 등에 가로 얹혀져 있었으니까. 앞을 가로막는 길게 늘어진 큰 버드나무 가지를 헤치고 지나가자 나뭇잎에 맺혀 있던 아침 이슬이 우르르 쏟아져 내려 두 사람과 말의 몸을 적셨다. 말을 몰던 사람은 쯧 혀를 차면서 자기 몸보다 말 등에 얹혀 있는 사람의 몸에서 이슬을 먼저 털어내 주었다. 말 등에 얹힌 사람은 뒷짐 진 상태로 묶여 있었는데, 이슬을 흠뻑 뒤집어쓰자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말을 타고 가던 사람이 투덜거리듯 물었다. “추우십니까요?” 그는 바로 상망이었다. 상망은 적당한 풀밭을 찾아 말을 세우고 말등에 얹힌 사람을 조심스레 내렸다. 그 사람은 바로 헌원의 딸 공손발이었다. 삼 년이 지나는 사이 공손발은 키가 제법 자랐고 얼굴도 애티를 벗어 퍽 여자다워졌다. 발은 추워서 파랗게 질린 얼굴로 사납게 외쳤다. “할아범 같으면 안 춥겠어? 꼼짝 못하고 바람과 이슬을 다 맞는데?” 그러나 발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치기가 어려 있어 아잇적 그대로였다. 상망은 혀를 끌끌 찼다. “그러니 왜 함부로 도망가십니까요?” “내가 언제 도망갔다구 그래? 난 말야.......” 상망은 마구 떠들어대는 발의 말은 듣지도 않고 주변에서 그나마 이슬에 덜 젖은 나뭇가지들을 주워 모으면서 타이르듯 말했다. “아가씨, 아직도 안 잊혀집니까요?” “누가 잊어? 제길! 난 꼭 그 멍청이 놈에게 복수할 거라구! 절대 안 잊어버릴 거야!” 상망은 피식 웃었다. “복수는 무슨 복수예요? 그럴 거였으면 지난번에 그놈이 우리 마을에 왔을 때 잡아버렸으면 그만 아니에요?” 공손발은 씩씩거리면서 얼굴을 붉혔다. “할아범은 몰라! 그놈을 내 손으로 끌고 와야 복수가 되는 거라구! 그러니까 할아범......” 공손발은 상망의 눈치를 살피며 대뜸 응석이 섞인 목소리로 졸라대기 시작했다. “나 좀 도와질, 응? 난 억울해서 잠도 안 오고, 좌우간 못살겠어! 그 놈을 내 손으로 끌고 와야 직성이 풀리겠단 말야, 응?” 상망은 공손발 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주워 모은 나뭇가지를 한 곳에 쌓아놓은 다음 가죽주머니를 꺼내 안에 들어 있던 잘 말린 잎사귀 가루를 조금 뿌리고는 부싯돌을 탁탁 치기 시작했다. “아가씨, 말도 안 되는 소리는 그만두세요. 뭘 끌고 온다고 그러세요. 아가씨, 그놈에게 도망가려는 거 아니에요?” “할아범!” 공손발은 화를 벌컥 내며 소리 질렀다. “내가 왜 그런단 말야? 내가 도망갈 거였으면 저번에 그 멍청이가 찾아왔을 때 벌써 함께 도망갔지!” 그때 불씨가 나뭇잎 가루에 옮겨 튀었다. 상망은 잠시 훅훅 불씨에 입김을 불었고 곧이어 불이 피어올랐다. 상망이 불을 피우느라 대답하지 않자 공손발은 발끈하며 외쳤다. “할아범! 내 말 안 들려? 난 도망 안, 간, 다, 구! 내가 소리를 질러서 멍청이 놈을 쫓아냈잖아! 틀려?” 상망은 몹시 지친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작은 나뭇가지들을 꺾어 불에 던지면서 중얼거렸다. 상망의 표정과 말투로 보아 이미 수없이 반복하여 닳고 닳은 말을 또 하고 또 하는 듯했다. “압니다요, 알아. 아가씨. 하지만 아가씨는 안 가신 게 아니라 못 가신 거죠. 아가씨를 데리고 간다면 그 멍청이는 절대 빠져나갈 수 없었을 테니까요.” “벌써 몇 번째 하는 이야긴지 모르지만, 난 안, 그, 랬, 어!” 공손발이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소리치자 상망은 슬픈 듯한 눈빛으로 발을 쳐다보며 말했다. “아가씨. 그러면 그 멍청이가 두 번째 왔을 때는 왜 저에게 그런 말씀을 하셨죠?” 그 말을 듣고는 얼굴이 더욱더 붉어진 공손발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내가 무슨 소리를 했다구!” “그 멍청이를 살려 보내주라고, 그 멍청이가 죽으면 아가씨도 죽어버리겠다고 저한테 협박 하셨잖습니까요?” “내가 언제 그랬어? 난 모르겠는데? 내가 잠꼬대했었나?” 공손발이 시치미를 떼자 상망은 한숨을 푹 쉬면서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리듯 물었다. “뭐 좀 드실래요?” “난 배 안 고파! 아니, 어쨌거나 이걸 풀어줘야 먹든지 말든지 할거 아냐!" “풀어주면 또 도망가려고 그러시죠?” “내가 왜 도망을 가!” 상망은 기가 막힌 듯 피식피식 웃었다. “제 눈에 재를 뿌리고 도망친 게 여섯 번이고, 이 늙은이가 잠잘 때 손발을 꽁꽁 묶어두고 도망친 게 네 번, 불쌍한 이 늙은이를 구덩이에 빠뜨리고 도망친 게 세 번입니다요, 아가씨 한 번만 더 저를 골탕 먹이시면 이 늙은이는 죽어버릴지도 몰라요.” 약이 바짝 오른 공손발은 발을 힘껏 구르며 쏘아붙였다. “흥! 두고 봐! 다음번엔 벼랑에서 밀어버릴 거니까!” “벼랑 근처에는 절대 안 가지요 암요, 저도 살아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요?” “칫! 집에다 불을 질러버릴 거야! 술에다가 뱀독을 타버릴 거라곤.” 공손발이 화가 치밀어서 무시무시한 소리를 하는데도 상망은 눈 하나 깜빡 않고 말린 고기를 꺼내 굽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가씨, 제가 죽으면 그때부터 아가씨 옆엔 비휴가 졸졸 따라다닐 건데, 그게 더 낫겠어요? 제가 낫겠어요? 그 녀석은 봐주는 법이 없으니 더 고달프실 건데요?” 감자기 공손발이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그런데도 상망은 고기만 쳐다볼 뿐,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공손발은 더욱 크게 엉엉 울더니 상망에게 애원하기 시작했다. “할아범, 할아범........ 나 좀 봐질. 난 할아범밖에 없는 거 알잖아, 응? 할아범은 내 맘 잘 알잖아,l 나 좀 도와주면 안 돼? 응?” 공손발이 서럽게 우는데도 상망은 아무런 표정 없이 무뚝뚝하게 되받았다. “그만 좀 우세요. 우는 걸 한두 번 봤으면 불쌍하기나 하지, 너무 많이 보니깐 이젠 별로 마음에 안 드네요.” “할아범! 정말 이럴 거야?” 공손발이 눈물 젖은 눈으로 무섭게 눈을 흘기자 상망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가씨, 아무리 그러셔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예요. 벌써 삼 년이 넘게 지났다구요. 이젠 그 멍청이는 아가씨는 다 잊어버렸을 거라구요. 그러니 함부로 도망가지 마세요. 아가씨 혼자 어떻게 신시까지 갑니까?” “그러니 내가 가야 하는 거야! 그 멍청이가 날 잊어버렸으면 죽여 버려야지!” 상망은 지치고 피곤한 듯 고개를 저으며 공손발에게 구운 고기를 내밀었다. “드세요.” “안 먹어!” “드시라구요.” 공손발은 화를 벌컥 내며 앙칼지게 쏘아붙였다. “손이라도 풀어줘야지!” 상망은 그제야 피식 웃고는 공손발에게 물었다. “도망 안 갈 거죠?” 공손발도 따라서 생긋 웃었다. “글쎄?” 상망은 한숨을 쉬고는 공손발의 줄을 풀어주었다. 그리고 고기를 넘겨주자 공손발은 흥 하고 코웃음을 치더니 그것을 받아먹기 시작했다. 상망은 서글픈 눈빛으로 공손발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가씨, 제가 아가씨가 도망가면 왜 그리 서둘러서 잡아오는지 아시죠?” 공손발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상망이 다시 말을 이었다. “제가 입을 다무니 망정이지, 헌원님이 아가씨가 이렇게 자꾸 도망간다는 걸 아시는 날엔 크게 혼나요 전 아가씨를 생각해서 그러는 거예요.” 공손발은 입술을 샐쭉거리며 종알거렸다. “아버지가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 “아가씨, 헌원님은 한번 하신 말씀은 반드시 지키세요. 헌원님은 벌써 아가씨를 두 번 용서해주셨어요 세 번째는 용서 안 하실 거예요.” 상망의 으름장에 공손발은 태연히 되받았다. “아버진 날 못 죽여. 혼내려면 혼내라지, 뭐. 좌우간 날 절대 죽이진 못할걸?” “헌원님이 아가씨를 무척 예뻐하시지만....... 그렇게 장담하실 순 없어요. 워낙 엄하신 분이라서.........” 공손발은 기분이 상한 듯, 먹던 고기를 내동댕이치며 외쳤다. “내가 아직도 어린애인 줄 알아? 아버진 날 못 죽인다니깐! 나도 다 알아!” 돌연 상망의 얼굴색이 변했다. “뭘 아신다는 거죠?” 공손발은 내동댕이친 고기를 발로 콱콱 밟으며 소리쳤다. “어머니가 다 이야기해 뒀다구! 아버진 내가 꼭 필요한 거야! 하지만 두고봐! 구슬을 얻어 온다고 내가 아버지 말대로 할 것 같아? 흥!” 상망은 충격을 받은 듯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아가씨........ 정말........ 아시는군요.........” 공손발은 크게 외쳤다. “알지! 우리 어머니는 누에선인 누조야! 그런 분이 아버지 시커먼 속을 몰랐을 거 같애?난........난 절대 아버지 말 안 들어!” “어머님이........ 아가씨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죠?” “말 안 해!” 공손발은 목에 힘줄이 불거지도록 크게 외치더니 이내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아까처럼 가식적으로 우는 게 아니라, 정말로 슬피 우는 소리였다. 상망도 코끝이 시큰해졌다. “아가씨, 하지만 헌원님은 아가씨를 사랑하세요. 너무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 된다구요. 헌원님은 아가씨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실 거예요. 전에 카린산에서 싸움할 적에 못 보셨나요?” 그러나 공손발은 고개를 저으며 계속 울었다. “전부 거짓이야. 아버진 내가 필요한 것뿐이야.” “그렇지 않아요.” “뭐가 그렇지 않다는 거야.” 공손발은 서럽게 흐느끼며 커다랗게 소리쳤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려고 했어! 어머니 말을 들었지만, 눈 꾹 감고 참으려고 했어! 모르는 척하고 그냥....... 그냥 살려고 했다구! 그런데........ 그런데........ 아버진 끝내 구슬을 찾아오라고 했잖아, 날 이용하지 않으려고 한다면 그 구슬을 뭐에 쓰려고 찾으려는 거지? 응?” “아닙니다, 아니에요 헌원님은 그 구슬이 혹 남의 손에 넘어갈까봐 찾으려는 것 뿐이라구요!” “흥, 웃기지 마, 상망. 그랬으면 진작에 찾지, 왜 이제 와서 찾는 거지? 내가 스무 살이 넘어서 이제 그 구슬을 써먹을 만하니까 찾는 거 아니야?” 상망은 막무가내로 몰아붙이는 공손발을 보면서 엄숙하게 말했다. “아가씨, 그렇지 않아요. 정말 그게 아닙니다요. 헌원님은 벌써 다섯 번이나 사람을 보내서 그 구슬을 찾으려고 하셨어요. 끽구도 갔었고, 이주도 갔었고, 지, 풍후와 상백도 갔었어요. 그러나 구슬은커녕 진몽희를 찾지도 못했습죠. 그래서 헌원님은 계속 불안해하고 안타까워하셨어요. 그래서 이번에는 제가 가는 겁니다요. 저 같은 늙은이는 재주는 없지만 발님과 함께 간다면 구슬을 얻을지도 모른다는 예언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예언? 혹시....... 지난번 쑤앙마이가 미안하다고 보내준 여섯 무녀가 한 말이야?” “예.” 공손발은 코웃음을 쳤다. “흥! 카린산 주술사 따위 말을 어떻게 믿어!” “그래도 그 여자들은 쑤앙마이의 가르침을 받은 주술사들입니다요. 틀린 적이 없습죠. 더구나 이번에 틀리면 영원히 카린산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맹세까지 했으니, 틀림없을 것 같아요.” “그래서, 그걸 얻어가서 날 이용하겠다는 거야? 할아범도 그럴거냐구?” 공손발이 다시 주르륵 눈물을 흘리자 상망은 착잡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아닙니다요 제가 그 구슬을 얻는다면, 반드시 헌원님께 잘 간직하시라고 할 겁니다. 아가씨, 아가씨는 제 친손녀나 다름없어요. 제가 어찌 아가씨를 해치는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요?” “하지만 아버지가 그렇게 명령하면?” 상망은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대답했다. “목숨 걸고 그러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까닭모를 감정에 복받쳐 공손발은 엉엉 울며 말했다. “할아범, 난 할아범을 믿어. 하지만....... 하지만 그렇게 되면 어떻게 해? 응? 내가 철없고 바보 같아서 도망가려는 게 아냐. 멍청이 녀석도 생각나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라구. 난 무서워. 난 지금도 아버지가 좋지 않지만....... 그래도 아버지야. 하지만 아버지가 만약........ 만약 그걸 쓴다면....... 난....... 난 정말 견딜 수가 없어 견딜 수가 없다구! 차라리 도망쳐버리는 게 낫잖아........” “쓰지 않으실 것입니다. 절대 쓰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아가씨, 생각해보세요. 진몽희는 하백족의 부족장이에요 하백족이 만약 우리의 적들 편이 된다면, 그거야말로 아가씨를 더 위험하게 하는 일입니다요. 헌원님은 그래서 그 구슬을 얻으려는 것뿐입니다. 염려 마세요, 염려하지 마세요.” 상망은 있는 힘을 다해, 걷잡을 수없이 흐느껴 우는 공손발을 달랬다. 상망의 눈에도 축축하게 눈물이 고였다. 한참을 목 놓아 울던 공손발은 아침 해가 붐하게 떠오를 때쯤에서야 눈물을 그쳤다. 상망은 공손발을 달래며 일으켜 세웠다. “가야죠, 아가씨. 부하들이 봅니다요. 아가씨, 아가씨가 그 사실을 안다는 걸 누구에게도 말하시면 안 돼요 이 할아범 말고는 아무도 믿으면 안 된다굽쇼 아셨지요?” 공손발은 훌쩍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난.......바보가 아냐. 할아범, 아무에게도 이야기 안 해. 아버지한테도.” 상망은 뭔가 말하려다가 길게 소리 없는 한숨만 내쉬고는 몸을 쭉 폈다. 공손발이 조금 가라앉은 소리로 말했다. “할아범?” “예.......?” “나를 도망치게 해줄 수 없어? 정말로?” “아가씨....... 그러실 필요 없다니까요.” “아주 도망가겠다는 게 아냐. 여기서 신시는 그리 멀지 않잖아. 한 번만 신시에 다녀올게. 응?” “아가씨, 압니다요. 그 멍청이 생각하시는 걸 알지요 아가씨는 이제 다 크셨죠. 그러니 더 생각나시겠지요. 허나 어쩝니까? 될 일이 아닌 것을.......” 상망은 조용히 공손발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이제는 도망치지 마세요. 그 녀석 일도 제가 어떻게든 해볼게요. 그러니 이 할아범에게 맡겨주세요 아셨지요?” “정말이야?” “제가 어떻게든 수를 내보겠습니다요. 아셨지요?” “정말 그럴 수 있어? 정말?” 공손발이 다짐하듯 되묻자 상망은 단호하게 말했다. “저는 아가씨께는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요.” 그 말을 듣고 공손발은 고개를 푹 숙였다. “알았어. 할아범......” 공손발은 풀이 죽은 모습으로 상망이 인도하는 대로 말 등에 올랐다. 상망은 말갈기를 잡고 앞길을 터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한편, 신시를 떠난 치우천 일행은 계속 남쪽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그들은 며칠 만에 치우벌과 포리 등이 새로 지은 거대한 나무 요새에 도착했으며, 그곳에서 도깨비들과 작은 주신의 전사들 오백 명과 합류했다. 치우천이 말문을 열었다. “여기서 며칠 머물면서 준비를 한다. 사람들도 좀 모으고.” 치우천은 치우비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치우벌과 포리가 만든 나무 요새를 둘러보았다. 포리는 놀라운 재주가 있어서, 요새는 섣불리 근접할 수 없을 정도로 튼튼해 보였다. 뿐만 아니라 요새 앞에 커다란 개울을 파서 쉽게 공격해오지 못하게 만들었고 삐죽삐죽한 장애물들을 사방에 묻고 대나무들을 심는 등 거의 완벽한 방어준비를 해놓고 있었다. 치우천은 그 모습을 보며 흡족한 듯이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면 문제없겠군. 포리, 정말 수고했다.” 그러자 치우비가 말했다. “형, 공상을 친다면 여기 방비를 이렇게 할 필요가 없지 않았겠어? 하긴 뭐 그때는 이렇게 될 줄 몰랐겠지만.” 고개를 갸웃거리는 치우비를 바라보며 치우천은 맑게 웃었다. “아니야. 지금도 여전히 이곳은 중요하다. 그리고 공상을 빼앗았다 해서 여기서 싸움이 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럴지도 모른다는 거다. 준비해서 나쁠 건 없지 않니?” 치우천은 알듯 모를 듯한 소리를 남기며 씨익 웃어 보였다. “이제 사람들을 모아야지.” 치우천은 사람들을 시켜 요새에 남아 훈련을 받던 전사들 중 공상공격에 참가할 사람들을 뽑았다. 어느새 공상 정벌의 소문이 여기까지 퍼졌는지 그곳을 지키던 와난강, 와난수 및 많은 부족장들과 수천 명의 전사들이 동행을 요청했다. 그러나 치우천은 와난강 와난수와, 말을 잘 탈 수 있고 또 적어도 세 마리 이상의 말을 가지고 있는 마갸르 전사 사백 명과 미아우 전사 이백 명만 받아들였을 뿐이었다. 신시에서 출발한 사람들 중 작전에 대해 논의한 열다섯 명은 치우천, 치우비, 쇠돌이, 부루벼락, 거서기, 삼, 부달, 도단이, 야율쿠리, 초초룬, 알한, 무라, 울쿠타, 야쿠타, 차오스 등이었다. 그중에 차오스와 유쌍은 번개범을 이긴 직후 이미 다른 일을 주어 밖에 나가 있었다. 그리고 울라트, 질쾌, 불쇠 등은 대장들이 아니므로 천 명의 전사들과 함께 처음의 숙영지에 남아 있었다. 그들에게는 따로 맡겨둔 일이 있었던 것이다. 아울러 치우천은 그곳에 소녀도 남겨 두었다. 그리고 양역은 삼천 명의 사울아비를 데리고 느릿느릿 진군하는 중이었다. 좌우간 여기서 치우천 일행의 열다섯 명에 리미, 마냥, 개르와 와난강, 와난수와 천 명 정도의 전사를 붙이게 되었다. 비울걸 또한 어느 틈엔가 사라져 버려 이곳에 있지 않았다. 그날 밤 치우벌의 주관으로 치우 일행 및 부족장 등이 참석한 연회가 열렸고, 그 자리에서 많은 사람들이 치우천에게 공상을 치는 계획에 대해 물었다. 그러나 치우천은 그저 담담할 따름이었다. “전사들이 너무 적지 않습니까?” 치밀한 성격의 와난강이 묻자 치우천은 딱 잘라 대답했다. “이번 싸움은 달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잘 달리지 못하는 전사는 소용없습니다.” “치우천 부족장을 못 믿는 것은 아닙니다만 공상으로 간다고 들었는데....... 이 인원으로 되겠습니까?” “이 인원으로는 안 되겠지요 그러나 가는 길에 많은 전사들이 모일 것입니다.” “그들로 되겠습니까? 미아우와 마갸르족은 모두 뿔뿔이 흩어지지 않았나요?”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미아우족과 마갸르족이 많이 죽고 흩어졌지만, 지금 여기서 공상까지 사이에 지나족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러니 다시 자기 마을을 찾아 모인 부족들이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너무 약하지 않겠습니까? 한번 진 전사들이라......” “한번 졌지만, 그 때문에 더 이를 갈고 지나족에게 복수할 기회를 찾고 있을 것입니다. 복수하기 위해 나름대로 열심히 힘을 쌓았을테구요. 그리고 그들은 이미 져서 흩어진 전사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제 말을 믿고 형천과 유망의 진지에 불을 질러 그들을 물러나게 만든 사람들입니다. 훌륭히 싸워주었으니, 이긴 전사들입니다.” “그들이 잘 모이지 않으면 어쩝니까?” “그럴 것이라면 지난번 싸움에도 힘을 빌려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와난강을 비롯하여 몇몇 사람들은 감탄했다. 치우천은 아무 준비도 없이 허허벌판으로 달려든 것이 아니었다. 그의 계산에는 아무도 생각 못했던 요소들이 있었던 것이다. 바로 지난번 지나족이 벌인 학살과 약탈에서 탄생한 미아우, 마갸르족의 분노의 힘이었다. 아울러 지난 싸움에서 치우천이 떨친 명성도 포함되어 있었다. 치우천의 깃발 아래에 모이지 않을 미아우나 마갸르족은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차라리 조금 시간을 더 들여 더 많은 인원을 모아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야율쿠리님이나 초초룬님의 전사들도 있을 텐데요?” “시간이 가장 중요합니다. 늦으면 이도저도 곤란해집니다.” “몇 명이나 모으려고 합니까?” “열다섯 천 가량 모으려고 합니다.” 사람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공상에는 적어도 십만의 지나 전사가 있었다. 그런데 고작 만 오천으로? 사람들이 의아한 나머지 더 물어보았지만 치우천은 그 이상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치우천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사람들은 치우천 일행들에게 물어 보았지만 역시 아무도 그에 대해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몇 사람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고, 몇 사람은 불편한 기색을 보였으며, 단 한사람 부루벼락만이 투덜거리듯 말했을 뿐이다. “공상? 그 정도는 문제도 안 돼요. 아이구, 나도 믿어지질 않으니 원......” 순간 도단이가 멀건 눈을 황급히 씀벅거리자 부루벼락은 얼른 입을 다물었다. 임시 사령관 격인 치우벌이 술잔을 들면서 말했다. “자자, 좌우간 그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니 함부로 알고자 할 필요는 없을 거요 잘 싸우라고 격려나 해줍시다.” 치우벌이 딱 자르고 나서자 모여 있던 다른 사람들도 더 이상 그 문제에 대해서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리고 각자 술을 마시며 식사를 시작했다. 그런데 한 명의 정찰병이 들어오더니 치우벌에게 뭔가를 귓속말로 속삭였다. 치우벌의 미간이 꿈틀하는 것을 본 치우천이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벌 아저씨?” “별것 아니다. 지나족 몇몇이 근처에 와 있다는구나.” “지나족이요?” 사람들이 웅성거리자 치우벌이 얼른 손사래를 쳤다. “지나족이라도 유망의 부하들은 아니다. 헌원의 부하 몇몇이 하백족을 만나러 간다는구나. 뭐, 여길 공격할 정도의 수도 아니고 헌원은 우리와 싸우지 않는다고 했으니 굳이 건드릴 건 없을 것 같다만......” 치우벌이 얼버무리자 치우천은 뭔가 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벌 아저씨. 헌원의 부족이 직접 우리와 싸우지는 않지만 그들 역시 지나족 아닙니까? 안 그래도 우리는 지나족들과 싸움을 준비하고 있는데, 그들이 이 근처를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건 좀 그렇지 않은가요?” 얼굴과 몸에 온통 천을 감고 눈과 입만 아주 조금 내놓아 음산한 분위기가 된 부달도 조용히 한마디 거들었다. “죽이진 않더라도 모두 잡아둬야 합니다.” 그러자 치우벌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좀 곤란하네.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사람이란 말야. 우리 요새 쪽으로 다가오지만 못하게 하고 지나가게 놔두는 게 좋을 거다.” “누군데 그러는 겁니까?” 난강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와난강, 와난수는 지나족들과의 싸움에서 수많은 부하들을 잃고 마을도 모조리 빼앗긴 터라 지나족에 한 원한이 극에 달해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치우벌은 대강 얼버무렸다. “헌원의 부하 중 상망이라는 자요 헌원의 신임을 쾌 받는 인물이니 건드려서 좋을 것은 없소 안 그래도 헌원이 유망의 편을 들어주지 않는 것은 우리에게는 다행 중 다행이오. 굳이 헌원을 건드려서 무엇 하겠소? 그렇지 않느냐, 천아?” 치우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건드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상망이 유망을 도와 허튼 짓을 할 사람은 아니지요 그런데....... 하백족은 어떤 부족입니까?” “여기서 조금 떨어진 강가를 지배하는 부족이다. 그 부족은 꽤 숫자는 많지만 다른 부족과 전혀 오가지 않는 부족이란다. 지나족 편도 아니고 우리 편도 아니며, 마갸르나 미아우족과도 담을 쌓고 지내는 부족이다. 신경 쓸 것 없다.” 그러자 야율쿠리가 말했다.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지 않습니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야율쿠리 족장?” 야율쿠리는 이미 부족장이 되어 있었기에 치우벌도 말을 높일 수 밖에 없었다. 야율쿠리는 ‘흠’ 하고 한 번 헛기침을 한 다음 말했다. “키탄 울크리족의 야율쿠리가 말합니다. 하백족은 물론 누구편도 아닌 부족이며, 숫자는 많지만 전사는 얼마 없는 부족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주술사는 대단합니다. 만약 헌원이 그들을 꼬여내어 주술사들의 힘을 빌린다면 그리 좋을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쨌거나 지나족 아닙니까?” “그렇다고 헌원의 부하를 그리 함부로 건드릴 수는 없지 않겠소?” “그들의 목적이 뭔지, 왜 여기까지 왔는지는 알아야 합니다.” 조용히 듣고 있던 치우천이 방금 들어온 정찰병을 향해 물었다. “지나족들이 얼마나 떨어진 곳에 있지? 그리고 숫자는?” “멀지 않습니다. 말을 타고 달리면 한나절이면 갈 만한 거리입니다. 숫자는 백 명 정도 됩니다. 상망말고 다른 대장은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빨리 움직일 수 있나?” “짐이 많은 것 같으니 빨리 움직이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짐이 많다? 틀림없이 하백족에게 선물을 보내려는 것 같군요.” 그 말에 치우벌이 치우천에게 물었다. “굳이 건드릴 필요가 있을까?” “상망이라면 안 그래도 한 번 만나볼 필요가 있었습니다.” “직접 가려고? 지금은 밤인데? 더구나 너는 헌원과 사이가 안 좋지 않으냐?” “그렇긴 합니다만 상망은 말이 통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서 치우천이 몸을 일으키자 치우비나 주신의 다른 사울아비들도 같이 일어서려 했다. 치우천은 그럴 것 없다며 치우비, 알한, 리미, 마냥, 울쿠타, 야쿠타 등 여섯 명만을 불렀다. 야율쿠리나 사울아비들도 같이 가고 싶어 했으나 치우천은 다 나설 필요 없다고 말렸다. 무라도 같이 가고 싶어 몸을 일으켰지만 치우천은 약간 쓸데없는 너절한 핑계를 늘어놓으며 무라마저도 떼어놓았다. 무라는 뭐라 대꾸하지 않고 다시 자리에 앉았지만 좀 마음이 상한 듯했다 다른 사람은 맡은 일도 있고 부족 일도 있다지만, 무라는 그야말로 카린족에서 홀로 떨어져 나온 홀홀 단신이어서 치우 형제의 옆을 떠난 적이 없었다. 이렇게 떼어놓은 일이 없어서 무라는 섭섭한 기색이 역력했다. 치우비는 무라가 안쓰러워 형에게 귓속말로 물었다. “무라님도 같이 가면 안 되나?” “이번만은 안 된다.” “왜 그러는데?” “그렇다면 그런 줄 알거라.” 치우천을 포함한 일곱 명은 다시 작은 주신의 도깨비 부대 오십 명을 데리고 요새의 북쪽으로 나섰다. 요새는 남쪽의 지나족을 방비하기 위한 곳으로, 백여 리에 걸친 높은 산맥의 중간쯤에 위치한 가파른 협곡 사이에 만들어졌으므로 북쪽은 비어 있었다. 지난번 시기르타가 물건을 전해준 것도 북쪽으로 왔기 때문이었다. 북쪽으로 요새를 나선 치우천은 정찰병의 안내를 받으며 말을 달렸다. 치우비는 다시 형에게 속삭였다. “그런데 왜 상망을 만나려는 거지?” 치우천이 피식 웃었다. “멍청한 녀석. 너 때문에 만나려는 거다.” “나?” “잘 된다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좌우간 말이라도 붙여봐야 하지 않겠니?” “무슨 말을 붙인다는 거야? 그리고 무슨 말이기에 무라님까지 떼어놓고?” 치우천은 참지 못하고 껄껄 웃었다. “네 이야기지 뭐겠니? 너는 벌써 잊었느냐? 널 장가보내려면 상망에게 말을 거는 것이 가장 좋을 거다. 더구나 그 이야기를 들으면 무라님이 좋아하진 않을 거 아니겠니?” 치우비는 그제야 형의 말을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아울러 무라에 대한 미안한감정이 솟구쳐 올랐다. 더불어 형의 마음씀씀이가 고마워서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그때 치우천이 물었다. “넌, 무라님에게 어떻게 할 생각이냐? 설마 모르지는 않겠지?” “글세......” 치우비가 얼굴을 더욱 붉히자 치우천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눈치 빠른 네 녀석이 모를 리가 없지. 하지만 너는 공손발 생각뿐이지?” 치우비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무라님에게 미안해하고, 더 잘해주려고 노력하겠지?” “당연히 그래야지.” “멍청아, 그게 무라님을 더 괴롭히는 일이야. 모르겠느냐? 굳이 네가 잘해주지 않아도 나도 있고, 다른 사람들도 다 무라님에게 잘해드릴 수 있다. 너는 그냥 담담하게 하는 게 가장 좋단 말이다.” 치우천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나는 헌원과는 원수나 다름없다. 더구나 지난번에 헌원이나 공손발과 다시 마주치면 반드시 죽이겠다고 다짐까지 했어. 솔직히, 네가 공손발을 좋아하면 너나 나나 지나족이나 주신에게나 좋을 것은 하나도 없다. 무라님이 너무나 불쌍하지 않느냐? 그래도 마음을 바꿀 수는 없느냐?” 치우비는 한참 시무룩하게 생각하다가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마음이란 게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잖아......” 치우천은 혀를 끌끌 차며 힐끗 치우비를 쳐다보았다. “알았다. 좌우간 어쩌겠느냐, 너는 내 하나뿐인 아우인데. 이 녀석아, 그렇게 풀죽은 얼굴 하지 마라. 상망은 말이 통하는 사람이니 잘 될지도 모른다.” 치우천 일행은 밤이 늦도록 달려서야 지나족들을 찾아내었다. 그들은 짐을 쌓아놓고 불을 피운 채 자고 있는 것 같았다. 치우천은 알한을 보고 말했다. “잠든 사람들에게 우리가 우르르 가면 놀랄 것이니, 알한님이 가서 상망에게 말씀을 좀 전해주시지요 치우천이 찾아왔다고.” “그러죠.” 알한은 곧 말에서 내려 길다란 막대기 하나만 둘러메고 지나족 쪽을 향하여 천천히 걸어갔다. 치우천 일행은 뒤로 조금 물러섰다. 알한이 천천히 지나족들 쪽으로 걸어가자 지나족의 보초가 그를 발견하고 누구냐고 소리를 질렀다. 알한이 웃으며 말했다. “나는 작은 주신의 알한이라고 한다. 상망님을 좀 뵐 수 있겠나? 전할 말이 있다구. 나는 혼자니까 겁내지 말고.” 보초가 상망에게 달려가 상망을깨워 말을 전하자 상망은 놀라서 달려 나왔다. 알한은 씩 웃으며 상망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군요, 상망님.” “자네는 태산 회의 때 보았던 알한 아닌가? 여긴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가?” 알한은 피식 웃었다. 상망은 알한을 태산 회의 때 본 후로는 만난 적이 없었다. 허나 알한은 지나족들 사이에 묻혀서 카린산의 전투에도 참여했었다. 그래서 상망이 남 같지 않았던 것이다. “투르크족에서 나고 작은 주신에 몸을 담은 알한이 말합니다. 지금이 근처에 치우천님, 치우비님이 와 계십니다. 상망님께 드릴 말씀이 있다는군요.” “뭐라고?” 상망은 기겁을 했다. 알한은 그 모습이 우스워서 싱긋 웃었다. “우리는 싸울 생각이 없습니다. 치우천님이 상망님과 이야기를 하고 싶으시답니다. 이리로 모셔와도 되겠습니까?” 그러나 상망이 기겁을 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일행 중에 공손발이 있지 않은가. ‘아가씨가 지금 치우비 그 멍청이 녀석과 만난다면 도망가 버릴 거다. 아니, 도망가는 건 어떻게 막을 수도 있지만 멍청이가 눈이 뒤집혀 아가씨를 잡아 가버리면 어쩐단 말인가? 지금 있는 백여 명으로는 그 멍청이 하나도 당해낼 수 없지 않은가? 아가씨가 계신 것을 절대 알게 해서는 안 된다.’ 거기까지 생각한 상망은 급히 대답했다. “아니네, 아니네. 내가 가겠네. 이리로 올 것 없다네.” “굳이 그러실 것까지야......” “아니네. 내가 가봄세. 망은 행여라도 자고 있는 발의 눈에 띌까 봐 황급히 알한을 따라나섰다. 따라나섰다기보다는 알한의 등을 떠밀며 서둘렀다. 알한은 좀 이상하다 싶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밤길을 걸어 치우천이 있는 곳까지 왔다. “안녕하십니까, 상망님? 그동안 잘 지내셨는지요?” 치우천은 상망을 보자 명랑하게 웃으며 반갑게 맞이했다. 상망은 심사가 안 좋았던 터라 약간 뒤틀린 목소리로 되받았다. “자네들 때문에 내 속이 썩긴 하지만 죽지 않고 살아 있다네. 전보다 더 훤해졌구먼.” “별 말씀을요 상망님도 여전히 정정하시군요.” “자네들보다 먼저 죽을 수야 있는가?” 상망이 비아냥거렸지만 치우 형제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순간 치우비는 상망을 보자마자 발의 안부를 묻고 싶어 몸을 내밀려고 했다. 그러나 치우천이 조용히 눈짓을 해서 치우비를 제지하고는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화산 기슭에 계셔야 할 상망님이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오셨는지 궁금하군요.” “나도 다리가 있고 말을 탈 줄 아는데, 오지 못하라는 법이 어디 있는가?” “짐을 그리 많이 가지고 오신 것을 보니 누구를 만나려는 것 같은데요?” “장사하러 왔다고 생각할 수는 없는가?” “상망님 같은 분이 뭐가 아쉬워서 직접 장사에 나서시겠습니까? 부하가 많지 않으시니 싸우는 것도 아닐 테죠 분명 누군가를 만나러 오신 것이겠지요.” “귀신같은 놈!” 망은 속으로 혀를 내두르며 태연하게 되받았다. “ 다면 어쩔겐가? 누굴 죽이러 온 것은 아니지 않는가?” “여기는 마갸르와 미아우의 땅입니다. 지나족과 그들은 몹시 사이가 안 좋은데 설마 그들을 만나시려는 것은 아닐 테고....... 하백족을 만나러 가시는 길입니까?” 치우천이 능청스레 묻자 상망은 다시 속으로 외쳤다. ‘정말 귀신같은 놈!’ “그래, 그렇다면 어쩌려고 그러나1 하백족을 만나면 안 된다는 법이 있나?” “천만에요 그런데 하백족은 미아우나 마갸르, 주신, 키탄, 지나 등 누구와도 사귀지 않는 부족이라 알고 있습니다. 게다가 절대 남의 싸움에 낄 부족이 아니라고 들었습니다만.” “하백족과 우리가 손을 잡고 남을 공격한다고는 생각하지 말게. 우리는 하백족의 도움 같은 것은 필요 없다네.” “그러면 왜 그리 많은 선물을 가지고 가시는 겁니까?” “선물이 아닐세. 뭔가를 바꾸려 하는 것일 뿐.” “아주 귀한 물건인가 보군요?” “그렇지, 귀한 물건이야. 그러나 뭔지 알려고 하지는 말게. 난 말할 수 없으니까.” 치우천은 맑게 웃으며 잠깐 뭔가 생각하더니 피식거렸다. “그러면 너무 못난 짓이겠지요?” “뭐가 말인가?” “전 한 번 싸웠다고 해서, 지나족이 하는 일을 무조건 방해 놓기로 한다면 너무 못난 짓 아니겠습니까?” “자넨 못난 사람이 아닐걸세. 잘났지. 음, 아주 잘났어.” “그리고 상망님같이 높으신 분을 잡아서 헌원님을 협박하는 것도 못난 짓이겠지요?” “남자답지도 못하고, 전사답지 못한 짓이지. 그리고 난 죽기만 기다리는 늙은이일 뿐이네. 나 같은 게 인질이 되기나 하겠나?” “원, 별 말씀을.” 치우천은 웃으며 다시 한 번 상망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상망은 속이 약간 떨려왔다. 자신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지만, 발이 치우 형제의 손에 들어가면 그야말로 큰일이 아닌가? “협박하는 건가? 치우천은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상망에게 정중히 말했다. “아닙니다. 저는 그런 생각은 조금도 없으니, 그런 걱정은 하지 마시라고 드린 말씀일 뿐입니다. 상망님, 제가 한 번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러면 상망님도 저를 한 번 도와주시겠는지요?” “돕다니? 윌 도와? 날 안 잡아가겠다는 건가? 그게 날 돕는 건가?” “그런 못난 짓을 할 생각은 없습니다. 상망님, 상망님이 뭘 얻으러 가시는지 몰라도, 참 어려운 일이겠지요? 그러니 도와드린다는 것입니다.” “뭐가 어렵다는 거야? 그냥 선물을 주고 바꿔만 오면 되는 일인데!” 상망이 시치미를 떼자 치우천은 웃으며 고개를 저어 보였다. “상망님, 제가 알기로는 상망님은 헌원님이 몹시 아끼시는 분입니다. 여간해서는 이런 먼 곳까지 몌어 보내지 않을 건데요 그런 분이 몸소 오실 정도니, 그 물건을 구하는 일이 쉽지 않은 게 분명하잖습니까? 하백족을 설득하기가 쉬웠다면 그냥 선물만 보내면 될 것 아니겠습니까?” 상망은 섬뜩해져서 속으로 부르짖었다. ‘정말 귀신이군. 몇 년 사이에 더 똑똑해진 것 같구나!’ 치우천이 계속 말했다. “작은 주신의 치우천이 말씀드립니다. 뭔지는 모르지만 제가 상망님이 그 물건을 얻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그 대신 제 청을 한 가지만 들어주십시오.” “무슨 청인데 그러는가?” 치우천은 한 번 헛기침을 하고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제가 드릴 청이 무엇 있겠습니까? 제 아우에 대한 청이지요.” 그 말을 듣고 치우비는 얼굴이 붉어졌다. 상망은 뜻밖인지라 더듬거리며 물었다. “그러면....... 발 아가씨 일 말인가?” “그렇습니다. 저는 이제 작은 주신의 부족장이며, 비도 부족장의 아우입니다. 정식으로 헌원님께 전해주셨으면 합니다. 헌원님의 따님이신 공손발 아가씨와 제 아우를 맺어주십사 청을 드립니다.” 상망도 짐작은 하고 있었으나 치우천이 이렇게 당당히 나오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닐세. 자네는 벌써 우리 지나족과 여러 번 큰 싸움을 했네.” “싸우다가도 화해하는 것이 부족간 아닙니까?” “더구나 자네 아우는 두 번이나 화산 아래까지 찾아와서 아가씨를 잡아가려고 난동을 피웠어.” “비 녀석이 오죽하면 그랬겠습니까? 그 마음을 생각해주십시오.” “더구나 자네는 염제 신농님과 큰 싸움을 벌이고 있지 않은가? 물론 우리 화산족은 싸움에 끼고 싶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상망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치우천은 딱 잘라 말했다. “저도 압니다. 그러나 헌원님과 유망님은 같은 지나족일지라도 가는 길이 다릅니다. 헌원님이 유망님을 도우려고 했다면 벌써 많은 전사를 보냈을 것입니다. 상망님, 예전에 우리가 오갈 곳도 없었을 때 헌원님께서는 비에게 따님을 주시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도 자리가 잡히지 않았습니까?” “작은 부족의 부족장 정도로 자리가 잡혔다 하는가?” “그게 모자란다면, 주신의 웃뜸 사울아비는 어떻습니까? 그래도 모자라는 것일까요?” 치우천이 당당히 말하자 상망은 깜짝 놀라 외쳤다. “주신의 웃뜸 사울아비라고? 웃뜸 사울아비가 나왔느냐? 네가 웃뜸 사울아비가 되었느냐?” “아직은 아닙니다만 곧 될 것입니다. 두고 보십시오.” “믿을 수 없다, 믿을 수 없어 너희 형제가 대단한 것은 알지만 주신은 이미 수십 년 동안 웃뜸 사울아비가 없었다. 더구나 너희같이 어린에......” 치우천은 나직하지만 단호히 상망의 말을 잘랐다. “제가 웃뜸 사울아비가 되는 날, 헌원님께 정식으로 요청하겠습니다. 제 아우에게 따님을 달라고요 그 전에 주신다면 더 좋겠지만요.” 상망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주신의 웃뜸 사울아비라면 삼사와 비슷하거나 오히려 조금 더 높은, 주신의 사울아비 중에 최고의 자리였다. 헌원이 대부족장이라고는 하지만 주신이 최고의 부족으로 자리 잡고 있는 이때에 웃뜸 사울아비라면 그에 비해 절대로 모자라는 위치가 아니었다. 아니, 주신의 웃뜸 사울아비가 그런 요청을 한다면 헌원으로서도 거부할 수가 없었다. 웃뜸 사울아비 집안과 혼인을 맺는 것을 거부한다는 것은 주신을 거부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꼭 전쟁을 일으키거나 보복을 하지 않아도, 그 소문이 퍼지면 모든 작은 부족들은 동요할 것이다. 주신과 사이가 나빠질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작은 부족들이 불안해하고 이탈할 수도 있었다. 헌원은 지금 유망과 더불어 지나족을 반씩 나누어가진 입장이라 지배력이 굳건하지 않았다. 이런 와중에 그런 소문이 난다는 것은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었다. ‘대단한 녀석인 줄은 알았지만, 벌써 웃뜸 사울아비가 되려 하다니! 믿어지지 않는구나!’ 치우천은 상망의 눈에 불신의 빛이 깃들여 있는 것을 보고 못을 박듯 말했다. “공상 싸움에서 승리하면 웃뜸 사울아비 자리를 주시기로 한웅님께서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아마 상망님은 여기까지 오시느라 못 들으셨겠지만, 헌원님은 이미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만.” “지금 주신의 힘으로 우리를 협박하려는 것이냐?” “그렇지 않습니다,상망님. 제 아우를 생각하여 제가 많이 물러선 것입니다. 헌원님의 뜻은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모든 세상을 하나로 합치려는 것이 헌원님의 꿈이니, 언젠가는 헌원님이 주신을 공격하는 날이 올지도 모릅니다. 저는 그런 날이 오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전에 헌원님은 따님을 줄 테니 우리 형제가 헌원님의 밑에 서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거절했습니다. 누구의 밑에 서는 것은 친구가 되는 길이 아닙니다. 저는 다만 친구가 되고 싶은 것입니다. 헌원님의 따님을 비에게 보낸다면, 헌원님이 주신이나 주신과 가까운 다른 부족을 공격하기 전에 적어도 한 번은 더 생각해주실 것이며, 우리도 발님의 얼굴을 보아지나족을 쉽게 건드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더구나 비와 발님은 서로 좋아하는 사이잖습니까? 아무도 손해를 보지 않고, 모두가 평화롭게 사는 길입니다. 지나족이 무엇이 부족합니까? 왜 다른 부족들을 자꾸 건드리고 합치려 합니까? 제 아우와 발님으로부터 시작하여 싸우기보다는 평화롭게 사는 법을 찾도록 하십시다. 어떻습니까?” 치우천은 조금도 위세를 떨치거나 협박하는 투가 아니라, 진정으로 마음에서 우러난 목소리로 말했다. 상망은 한동안 입을 굳게 다물고 생각하다가 이윽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런 일은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네.” “저도 여기서 상망님의 답을 듣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제 뜻을 헌원님께 전해 주셨으면 하고 바랄 뿐입니다. 이 혼사는 결코 인질이 아닙니다. 작게는 괴로워하는 두 사람을 위해서, 나아가서는 지나와 주신 모두를 위해 좋은 일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좋아, 내 헌원님께 그렇게 전하도록 하겠네. 그리고 아가씨의 문제도 내 힘이 닿는 데까지 이루어지도록 애써보겠네. 사실 나도 아가씨가 가엾어서 미칠 지경이었다네. 아가씨는 이제 다른 남자에게 시집가서는 영원히 행복할 수 없을 거야. 내 늙은 목을 걸고 있는 힘을 다 하겠네.” 상망이 쾌히 응낙하자 치우비는 너무도 기뻐서 가슴이 터져나갈 것 같았다. 치우천도 생각보다 상망이 탁 터놓고 말하자 속이 다 개운해졌다. 치우비가 급히 다가와 상망에게 물었다. “상망님, 그게 정말입니까? 발이....... 아니, 공손발님이 정말 저 같은 것을 아직 잊지 않고 있습니까?” “어떻게 잊겠는가? 자네는 화산족 마을로 혼자 쳐들어와서 육십 명 이상을 때려눕히고 여러 명을 죽게 만들었어!” 그 말을 듣고 치우천이 끼어들었다. “갈라졌을 때 싸운 일에 대해서는 굳이 탓할 필요 없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네만......” 치우비는 몹시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완전히 아이 같았다. “하지만....... 하지만 발은, 아니 공손발님은 그때 저를 보고서도 따라가지 않겠다고 했어요. 저는 마음이 너무 아파서......” “떽 !” 대뜸 상망이 호통을 쳤다. “이 멍청이 같은 놈아! 아니, 이 멍청아! 너만 마음이 아팠겠느냐? 이 녀석, 그때 네가 아가씨를 데려갔다면 네가 아무리 기운이 세도 목이 붙어 있었을 줄 아느냐? 아가씨는 그걸 알고 일부러 그러셨단 말이다!” “아.......” “그리고 네 놈이 두 번째 왔을 때, 네 목이 어떻게 붙어 돌아갔는 줄 아느냐? 아가씨가 네 놈을 죽이면 목을 맨다고 나와 끽구를 협박하셨기에 그냥 놓친 척하고 물러섰던 거다. 정말, 그 때문에 헌원님께 혼난 것하고 내 속이 터진 걸 생각하면 그냥.......” 상망이 주먹을 들어 치우비를 후려칠 듯 하는데도 치우비는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상망은 치우비를 때리는 시늉을 해보이다가 치우비의 얼굴을 보고는 기가 막혀 한숨을 쉬었다. “정말 멍청이로구먼. 그렇게 좋으냐?” “좋은 것을 좋다고 하는 것은 멍청한 것이 아닙니다.” “원 참, 정말 멍청이로군!” 치우비와 상망은 둘이 서로 마주보며 껄껄 웃어댔다. 그것을 보고 치우천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 저희도 하백족의 일을 돕겠습니다.” 그러나 상망은 엄숙한 표정으로 손을 쳐들었다. “아닐세. 우리를 도와줄 필요는 없다네. 굳이 도움이 필요하지도 않을뿐더러 나는 다만 헌원님께 말을 전해드릴 뿐, 일이 이뤄진 것도 아니지 않은가? 도움은 필요 없네.” “그래도......” 치우비가 나서려 하자 상망은 딱 잘라 말했다. “필요 없다니까! 자네들 걱정이나 하게 자네가 웃뜸 사울아비가 못 된다면 자격도 없는 것이니 다시는 그런 말 꺼내지 말게나.” “형님은 반드시 그리 되실 것입니다! 제가 무슨 일이 있어도 그렇게 되게 만들 겁니다!” 치우비가 주먹을 불끈 쥐며 말하자 치우천은 치우비에게 눈을 찡긋거리다가 상망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알겠습니다. 상망님께서 잘 처리하실 수 있겠지요 좌우간 도움이 필요하시면 저 아래 있는 요새로 사람을 보내십시오. 혹 제가 없더라도 남은 사람들이 무슨 일이든 도와드릴 것입니다. 제가 그렇게 말해놓을 테니까요.” “말만 들어도 고맙네.” 그 말을 남기고 상망은 자신의 부하들에게로 돌아갔다. 치우천도 모두에게 돌아가자고 말했다. 치우비는 발과의 앞날에 희망이 보이는 듯 하자 기운이 펄펄 넘치는지 앞장서서 달려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알한이 치우천에게 물었다. “정말 그렇게 잘될까요?” “되면 좋고, 안 되도 할 수 없는 일. 허나 이 이상 내가 저 녀석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없구려. 좌우간 빨리 돌아갑시다.” “왜 서두르십니까? 사실 저들이 뭘 얻으러 왔는지는 알아봐야 하는 것 아닐까요?” “알아내면 안 됩니다.” “무슨 말씀이죠?” 치우천은 피식 웃었다. “상망이 안달하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까? 상망은 뭔가 감추는 게 있어요. 사실 내 이야기를 그렇게 덥석 수락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일거라 봅니다만.” “뭘 감춘다는 겁니까?” “저기 분명 누군가가 같이 있을 것 같더군요.” “네? 누가요?” “누구긴 누굽니까? 발이죠.” “예?” 알한이 깜짝 놀라자 치우천은 웃으며 말했다. “상망은 헌원의 뜻에 깊이 동감하는 사람입니다. 안 그러면 상망이 저리 순순히 제 말물 들을 리가 없어요. 그리고 안 그래도 자신을 잡아갈까 겁났을 텐데, 자기 혼자 순순히 우리들 쪽으로 오려 했을 리도 없구요. 즉 자기보다 중요한 누군가가 그 일행 안에 있고, 그 사람은 우리 눈에 띄면 곤란하다는 뜻이죠. 상망은 더구나 발님을 돌보는 사람이라서 거의 떨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결국 그렇다면 발이 저 일행 속에 있다는 이야기밖에는 안 됩니다.” 알한은 치우천의 예리한 상황 파악에 놀라워했다. “그렇군요! 그런데 그렇다면 한 번 만나게라도 해주시지.” “아직 때가 아닙니다. 발과 비 녀석은 꼭 제대로 맺어져야 합니다. 둘 다 철이 없어서, 섣불리 만나게 하면 만난 기쁨 때문에 무슨 사고를 칠 수도 있어요. 허허 지금까지 몇 년을 참아왔는데, 몇 달 더 못 기다리겠습니까? 더구나 비 녀석은 이번 일로 기분이 좋아져서 공상 싸움에서 큰 힘을 내줄 겁니다. 공상 싸움은 쉽지 않으니 저 녀석이 꼭 기운을 내야 큰 힘이 됩니다. 그래야 쉽게 이길 수 있어요 그것 말고는 저 녀석의 원을 풀어줄 방법이 없더란 말입니다. 하하.” “그리고 치우천님은 웃뜸 사울아비가 될 수 있을 거구요 아우 덕을 톡톡히 보시려는군요.” “아우를 이용하는 형이라고요? 무슨 말씀을? 웃뜸 사울아비가 될 것은 제가 아닙니다. 저 녀석이죠.” “예?” “절름발이가 무슨 웃뜸 사울아비가 된단 말입니까? 하하.” “우스갯소리하지 마십시오. 우스갯소리는 제 전문입니다 비님이 뛰어나기는 하지만, 천님이 위에 계셔야 합니다. 형 아닙니까?” “글쎄요? 하하........ 나중에 보십시오.” 치우천은 웃으며 말꼬리를 돌려서 알한에게 속삭였다. “차오스가 도착하면 부하들을 좀 시켜서 하백족 주위를 돌아보게 해주세요. 혹 발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안 되니까 말입니다.” 알한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건 염려 마십시오.” 치우천은 웃으며 높은뫼를 달려 치우비의 옆으로 달려갔다. 알한은 치우천의 뒷모습을 보면서 혼자 생각했다. ‘저 사람의 머릿속에는 뭐가 들었을까? 저 사람은 어디까지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도저히 감도 잡을 수 없구나.’ 사람을 모으는 노래 치우천 일행은 바로 다음날 낮에 다시 공상으로 출발했다. 부소다솔은 공상에서 사용할 물건들을 잔뜩 가지고 가야 하지 않겠냐고 했으나 치우천은 웃으며 그럴 필요 없다고 말했다. 다만 당장 같이 움직일 천 명 가량이 한 달 정도 먹을 식량과 무기들을 준비했을 뿐이다. 뽑힌 전사들은 최소한 세 마리 이상의 말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짐은 말에 실었다. 치우천이 떠나고 나자요새에서는 벌써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공상이 별것도 아니라 했으니, 아예 이 기회에 유망의 머리를 베고 형천을 죽일 계획이 다 있다는 소문도 있었고, 그 인원으로 공상을 치는 것은 말도 안 된다, 미아우나 마갸르족이 붙어봐야 몰살당할 것이라며 탄식하는 사람도 있었으며, 치우천이 아예 유망에게 항복해 버리려는 것이 아니냐는 소문도 돌았다. 그러나 치우천이 어떻게 그런 적은 인원에다 확실하지도 않고 훈련도 잘되지 않은 전사들로 공상을 점령하려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치우천은 요새를 떠나자마자 여덟 사람의 대장을 따로 불렀다. 부달, 쇠돌이, 부루벼락, 거서기, 삼, 초초룬, 와난강, 와난수 이렇게 여덟 명이었다. 치우천은 그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공상을 떨구고 못 떨구고는 여러분들의 노력에 달렸습니다. 비록 아직 공상에 도착하지 않았다 해도, 싸움은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모두 목숨을 걸고 싸운다 생각하고 일을 하시기 바랍니다.” “무슨 일을 하면 되는 거요?” 와난수가 묻자 치우천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먼저 노래 연습을 해야 합니다.” “노래?”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라 어리둥절해져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큰 싸움을 앞두고 갑자기 무슨 노래연습을 시킨다는 말인가? 걸걸한 성격의 부루벼락이 나섰다. “노래를 불러서 유망을 잡는단 말인가? 귀라도 터뜨릴 건가?” 치우천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야 없겠지요. 허나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대체 노래를 왜 연습해야 하는데?” “이제부터 여러분은 백 명씩을 거느리고 네 갈래로 나누어져서 따로 길을 가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크게 고함을 지르고, 악기를 울리거나 노래라도 부르면서 사람들의 눈길을 끌어야 합니다.” “뭣 때문에?” “마갸르와 미아우족의 남은 사람들의 눈에 띄어야 합니다. 아직 수많은 사람들이 흩어져 숨어 지낼 것입니다. 지나족들이 물러갔으니 마을을 다시 지은 곳도 있겠고. 아직도 불안하여 산 속에 숨어 지내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들을 모아야 하지만, 일일이 찾아다닐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노래를 부르고 크게 소리치고 다니면, 아마 미아우나 마갸르족의 전사들이 알아서 찾아올 것입니다.” 그리고 치우천은 나뭇잎 몇 개를 뜯어 멋진 솜씨로 풀피리를 불어 젖혔다. 그 가락은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정말듣기 좋게 시작되다가 조금 뒤에는 구슬프게, 그리고 더 뒤로 가서는 아주 비장하고 웅장한 풍으로 바뀌었다. 듣고 있던 전사들의 거친 마음이 징하게 울리다가 종내는 비장해져서 팔에 힘이 절로 들어갈 정도였다. “거, 아주 좋은 소리일세!” 삼과 거서기가 강탄하며 동시에 소리치자 치우천은 웃으며 말했다. “이 가락을 잘 익혀야 합니다. 그리고 가락만 있는 게 아니라 노래도 불러야 합니다. 내가 먼저 불러보지요 먼저 마갸르 말로 노래를 해보겠습니다.” 치우천은 조금 쑥스러운 듯 몇 번 헛기침을 한 뒤에 노래를 시작했다. 노래는 대강 다음과 같은 뜻이었다. 하늘도 푸르기 이를 데 없고 꽃나무 우거진 좋은 이 땅에 나 여기서 우리 땅에서 태어났다네. 이 흙에서 자라난 열매를 먹고 이 하늘에서 내려준 빗물 마시며 나 여기서 하루하루 살아왔다네. 하지만 지금은 땅도 짓밟혀 하늘도 흐려지고 비만 내리네. 정든 집은 불타서 잿더미 되고 정답던 부족 사람 흩어졌다네.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던가? 우리가 누구를 해쳤었던가? 다투려 하지 않고 욕심 내지 않고 편안히 살아가던 우리들인데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런 신세 되었나? 가자. 같은 말, 같은 어버이를 지닌 우리 부족이여. 우리는 더 이상 당할 수 없다. 힘을 내어 도끼를 들자, 힘을 내어 활을 들자. 하늘이여, 조상님이여 우리를 도우소서. 흩어진 우리를 모이게 해주시오 배고픔과 두려움에 질리고 쫓기는 짐승 같은 세월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하늘이여, 조상님이여 우리를 도우소서. 흩어진 우리를 모이게 해주시오 가자. 같은 말, 같은 어버이를 지닌 우리 부족이여. 치우천의 노래솜씨는 그리 뛰어나지 않았으나 목소리에 울림이 깊어서 듣기에 거북하지 않았다. 마갸르 말로 된 가사는 무척 운율이 잘 맞고 박자 또한 마갸르 사람들이 좋아하는 특유의 박자를 제대로 따른 것이었다. 썩 잘된 노래였고 저절로 사람의 피가 끓어오르게 하는 노래였다. 이 노래를 듣던 와난수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고 와난강은 아예 흐느껴 울었다. 사울아비들도 모두 침중한 표정이 되었고 인정 많은 치우비와 쇠돌이도 눈물을 훔쳤다. 온 얼굴을 천으로 감아 음산한 모습이 된 부달이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이 노래를 듣고도 달려 나오지 않을 전사는 없을 걸세.” 초초룬도 비슷한 신세가 된 많은 동족들을 생각하자 눈물이 고였으나 씩씩한 그녀는 눈물을 감추려는 듯 오히려 ‘흥’ 하며 코웃음을 쳤다. “쳇! 괜히 마음 약해지게 만들고 있어.” “미아우 말로 된 노래도 배워야 해.” 그러면서 치우천은 미아우 말로 된 가사로 노래를 들려주었다 가락과 맞추기 위해 몇몇 세부적인 부분은 다른 면도 있었으나 두 노래 모두 전체적으로는 같은 내용이었다. 마갸르 말은 다소 거칠고 투박한 면이 있는 데 반해 미아우 말은 콧소리가 많고 부드러운 편이었다. 그래서 마갸르 말로 된 노래가 끝 부분이 웅장하고 비장한 맛이 강한 반면 미아우 노래는 중간부분의 애달픈 가사가 사람의 마음을 흔들리게 했다. 미아우 노래를 듣자 뻣뻣하던 초초룬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흑 하고 흐느끼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 이거 정말 심하네! 술 생각나는구나!” 사람들이 한숨을 쉬고 감탄하는 사이 치우비가 형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형이 만든 노래 맞수? 형이 노래 좋아하는 건 알지만 이렇게 잘 만들 줄은 몰랐는데?” 그러자 치우천은 씩 웃으며 대답했다. “네 형수가 만들어주었다.” 이 노래들은 바로 소녀의 솜씨였다. 소녀는 음률에 대한 조예가 대단히 뛰어났기 때문에 치우천은 그녀에게 이 노래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소녀의 재주를 알기 때문이기도 하나 치우천 개인적으로는 신시에서 조금 서먹서먹해진 서로의 감정을 그것으로 완화해보려는 노력이기도 했다. 소녀는 이틀 만에 이 노래를 만들어냈다. 이 기막힌 노래가소녀의 작품이라는 것을 듣고 그제야 소녀를 알던 몇몇 사람들은 ‘아’ 하며 탄성을 터뜨렸다. 치우천은 다시 몇 번 헛기침을 하여 사람들의 시선을 주목시킨 다음 입술을 떼었다. “이 노래를 여러분들은 부하들에게도 알려 주십시오. 그래서 이 노래를 부르면서 천천히 나아가면, 분명 많은 수의 흩어진 전사들이 찾아올 겁니다. 그들에게도 노래를 가르쳐서 발을 맞추며 나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한 가지 중요한 점이 있는데, 숫자가 천 명을 넘으면 뭉쳐서 오지 말고 시 흩어져서 오십시오. 그리고 말이 있으면 반드시 끌고 오도록 해야 합니다. 천 명이 넘는 인원이 움직이면 지나족이 움직일지도 모릅니다. 천 명이 넘으면 새로 온 사람들 중 괜찮은 사람에게 다시 남은 사람들을 이끌게 하십시오.” “그러면 어디어디로 가야 하는가?” “부루벼락 형과 쇠돌이는 남동쪽으로 나아가고, 초초룬과 부달 형은 남쪽으로, 거서기 형과 삼 형은 남남서쪽으로, 그리고 와난강, 와난수님은 남서쪽으로 훑듯이 나아갑니다. 그렇게 하여 공상 위쪽의 아루타한 마을에서 만나기로 합니다.” “아루타한 마을? 파우족의 마을이었던 아루타한 마을 말이오?” 와난수가 묻자 치우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초초룬이 놀라며 펄쩍 뛰었다. “그 마을은 이미 불타버려서 아무도 없는데? 파우족은 완전히 망했어. 다 죽었다군” “ 가 모을 전사들은 모두 제각각 살던 사람들이야. 그들의 마음을 하나로 합쳐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는 지나족과 맞서 싸울 수가 없어. 그 불타버린 마을이야말로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합치기에 좋은 곳이야. 그곳에서 모여 공상을 치기로 한다.” “아루타한 마을까지 알다니, 참. 언제 거기까지 가봤지?"” 초초룬이 궁금해 했으나 치우천은 대답하지 않았다. 지난번 비울걸과 함께 동쪽을 여행하면서 치우천은 공상에서부터 신시까지의 마을들을 모두 머릿속에 넣어두었던 것이다. 그때 꼼꼼한 거서기가 다시 질문을 했다. “천 형, 떠돌던 미아우와 마갸르족은 분명 많이 모일 거야. 그러나 그렇게 사람이 많이 모이면 먹을 것은 어떻게 하나? 여기 우리들이야 한두 달 먹을 것은 가지고 있지만 사람 수가 늘어나면.......?” “아루타한 마을까지는 알아서 오도록 해야 해. 가진 것을 가지고 오든, 사냥을 해서든 말야. 하지만 아·루타한 마을로 오면 잘될 거야. 염려하지 말게.” “언제까지 가야 하지?” 삼이 흥분되는 듯 정색을 하고 물었다. “오늘부터 한 달 안으로 와야 합니다. 빨리 가면 스무 날이면 갈 수 있는 거리이니 그 정도면 사람들을 모으면서 와도 충분할 것입니다. 빨리 와도 좋을 것이 없지만 늦으면 곤란합니다. 몇 명이 모였건 한달 안에는 모두 아루타한 마을에 모이도록 해야 합니다. 말을 타지 않은 사람은 대열을 따라오기가 어려울 테니, 그들은 직접 데리고 오지 말고 따로 아루타한 마을로 모이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여 각각의 대장들은 백 명 정도의 전사들을 데리고 흩어져 나아가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남은 사람으로는 치우천, 치우비, 야율쿠리, 무라, 알한, 도단이와 울쿠타, 야쿠타, 리미, 마냥, 개르가 있었다. 치우천은 그중 울쿠타와 야쿠타에게 뭔가 다른 임무를 주어 따로 행동하게 했다. 그들은 가장 말을 잘 타는 작은 주신의 전사 다섯씩을 거느리고 각자의 길로 떠났다. 그리고 치우천은 남은 육백 명 정도의 전사를 거느리고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거의 다 작은 주신의 정예들이어서 행군 속도가 다른 부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비록 지나족은 모두 철수했다고는 해도, 끊임없이 소수의 정찰 병력을 보내 북쪽을 감시하고 있었으며, 요소요소마다 수십 명에서 수백 명 정도의 병력을 두어서 경계를 하고 있었다. 치우천은 똑바로 아루타한 마을로 가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올 것 같은 길을 찾아 지그재그로 진군하면서 그러한 초소들을 찾아 다녔다. 모두 여덟 개나 되는 초소를 발견했는데, 그 치우천의 부대는 초소를 발견할 때마다 그들을 공격하여 모두를 쫓아버렸다. 그때마다 치우천은 웃으며 말했다. “유망이나 형천은 역시 우리가 올 것을 잘 알고 있군. 다 쫓아버려야 해. 그래야 다른 사람들이 오기가 쉽지.” 그렇게 열흘 이상에 걸쳐서 길을 청소한 치우천 일행은 그 다음에는 굳이 남의 길을 치워주지 않고 곧장 아루타한 마을로 나아갔다. “다 치워야 하지 않을까?” 치우비의 말에 치우천은 씩 웃었다. “이 정도 치웠으면 우리 편은 그리 방해받지 않고 사람을 왜 모을 거다. 이미 숫자가 쾌 불어나 있을 테니, 저런 작은 무리의 지나족들은 싸우려 하지 않고 도망쳐버릴 거야.” 그렇게 하여 치우천은 스무이틀 만에 아루타한 마을에 도착했다. 열흘을 길을 치우는 데 보냈으므로 열이틀 만에 도착한 것이다. 도단이가 이러한 진군속도에 놀라워하자 치우천은 웃으며 말했다. “똑같은 천 명이 있어도 그 천 명이 적보다 두 배로 빨리 움직이면 I것은 천 명으로 볼 수 없다네.” “그렇겠지. 두 배로 빨리 움직이면 이천 명이 되는 셈이니까.” 도단이가 말하자 치우천은 가볍게 웃어 보였다. “이천 명이 될 수도 있지. 그러나 잘못 쓰면 똑같은 천 명일 뿐이고 잘 쓰면 수천 명도 될 수 있다네.” “그 말이 맞다. 백 천 명이 있어도 두 배로 빠른 천 명의 전사는 따라잡지 못하니까. 잘만 쓰면 아무리 많은 적도 상대할 수 있지.” 야율쿠골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맞받았다. 그러자 치우비가 웃으며 끼어들었다. “그러나 그건 도망치는 거지, 싸우는 것은 아니잖아? 막상 싸울 때는 그렇게 안 될걸?” 야율쿠리와 치우비가 아웅다웅하자 도단이는 그저 미소 지으며 고개만 끄덕였다. 불타버린 아루타한 마을은 글자 그대로 참혹했다. 수많았던 집들은 다 타버려 재와 썩은 숯덩이만 남았고 논밭은 모두 잡초만 들쭉날쭉 무성해서 을씨년스럽기 그지없었다. 거기에 유망의 군대에 학살당한 듯한 수많은 뼈들이 사방에 널려서 마·을이 공격받았을 때의 참혹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치우천은 일단 부하들을 시켜 한동안 기거할 움집을 짓도록 하고 사람들의 뼈부터 치우도록 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치우천 외의 다른 사람들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자가 불쑥 나타났다 바로 시기르타였다. “헤헤헤! 와 계셨군입쇼!” 시기르타는 치우천을 만나자 여전히 축 늘어진 배와 몇 겸으로 접힌 뺨과 턱을 출렁거리며 익살맞게 웃어 보였다. 시기르타는 수백 마리의 소와 짐을 실은 무리를 이끌고 있었다. “내가 먼저 도착하지 않았소?” 치우천이 웃으며 반기자 시기르타는 고개를 저었다. “헤헤, 아닙죠. 저는 벌써 이번에 두 번째 오는 것인뎁쇼 열흘 전에도 먼저 한 번 들렸었습죠.” “그런가요? 그런데 물건은?” 시기르타는 자기 부하들을 시켜서 마을 복판에 쌓인 잿더미를 들추게 했다. 그러자 그 밑에서 커다란 나무 널빤지가 나왔다. 그것을 뒤집자 그 밑에는 큰 굴이 파여 있었고, 그 안에는 가죽으로 만든 포대자루와 토기 항아리들이 그득했다. “헷헷. 벌써 마른 낟알과 가죽들을 여기에 한 번 놔두고 다시 갔다 오는 길입죠.” 치우천은 이미 신시를 떠나기 전에 사람을 시켜 시기르타에게 이 마을로 보급품을 싣고 오도록 말해두었던 것이다. 만 오천 명분의 한 달 식량을 부탁했었는데, 그 양이 너무 막대하여 시기르타 같은 거상으로서도 한 번에 그만큼을 나르기가 힘들어서 세 번에 걸쳐 싣고 왔다는 대답이었다. 치우천은 대견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열흘 만에 또 한 번을 오셨으니 참 빠릅니다? 이 근처에는 이제 미아우족이나 마갸르족의 큰 마을이 없을 텐데요?” 시기르타는 눈을 찡긋 해 보이며 헤헤 웃었다. “물론 그렇습죠. 그러나 제가 누굽니까? 세상 제일의 장사꾼, 시기르타가 아닙니까요? 다 구하는 방법이 있습죠!” “어디서 구했소?” 시기르타는 킥킥 웃었다. “어디긴 어딥니까? 지나족에게서 구했습죠. 바로 공상 근처에서 구해온 것입니다요! 지나족말고는 이렇게 많은 식량을 구할 데가 없습죠! 그렇다고 북쪽까지 수십 일 걸리는 길을 갈 수는 없잖습니까? 왜, 지나족에게서 구하면 안 됩니까요?” 치우천이 어이가 없는지 헛웃음을 지었다. “그거야 상관없는 일이지만, 공상 근처에서 어떻게 이 많은 식량을 구했소? 공상도 전쟁을 코앞에 두고 있으니, 식량을 함부로 팔지 않았을 텐데?” “물론 팔지 않으려 했습죠.” “그런데 어떻게 구했소?” 시기르타는 배를 출렁거리며 킥킥 웃었다. “치우천님은 머리가 좋으시지만, 장사 하나만은 저를 못 따릅니다요, 물론 전쟁을 앞두고 식량은 절대 팔려고 하지 않습죠. 그러나 살수 있는 방법이 있답니다.” “그 방법이 뭐요?” “식량보다 더 귀한 것과 바꾸면 되는 거죠." “식량보다 더 귀한 것?” “바로 무기와, 가벼운 보석입니다요.” 치우천도 그때서야 무릎을 쳤다. “그렇군! 좋은 무기는 당연히 팔리겠지. 그런데....... 혹시 구리 무기를 팔았소?” “염려 마십시오. 많이 팔지는 않았으니까요 어차피 염제 신농님의 전사들은 오랜 세월 동안 구리 무기를 모아왔기 때문에 제가 판 것 정도로 강해지거나 약해질 정도는 아닙니다요. 그보다 보석을 많이 팔았습죠.” “보석은 왜?” “전쟁이 나면 전사가 아닌 사람은 들고 뛰어야 하는데, 들고 뛰는데는 가볍고 값나가는 물건이 최고니까요 그래서 아주 잘 팔립니다요. 그래서 저는 아예 치우천님의 연락을 받고서, 식량을 싣지 않고 말에 가벼운 구리 무기와 보석만 조금 싣고 공상 쪽으로 달려갔습죠. 그래서 일단 무기를 바꾸고 소를 샀습니다요. 공상성은 이제 문을 닫아걸 것이고, 소는 풀을 먹어야 살기 때문에 막 팔아 치우거든요.” “성안에 마른 풀을 쌓아두지 않던가요?” “그건 말에게 먹여야 하는 것입죠. 그래서 소는 다 팔아버리고, 사람과 같은 낟알을 먹일 수 있는 돼지나 닭만 성안으로 들여보내고 있습죠. 그러니 공상 근처는 소 값이 쌀 수밖에 없습죠. 그래서 소를 모조리 산 다음 공상 밖의 마을들을 찾아갔습죠. 그런데 거기에서는 소 가 아주 비싸지요.” “어째서?” “공상성 밖의 사람들은 거의가 농사를 짓습니다요. 그래서 집집마다 낟알들이 그득그득하죠. 하지만 난리가나면 마을이 싸움판이 될 지도 모르니 어디로 도망가야 하는데, 그 무거운 낟알들을 다 싣고 떠날 수가 없잖습니까요? 여차하면 소등에라도 얹어야 조금이라도 더 물건을 실을 수 있기 때문에 소가 비싸고 먹을 것이 싸죠. 그래서 거기서 또 소를 반 정도 팔고 낟알을 잔뜩 구할 수 있었습죠. 그걸 여기 쌓아두고 다시 가서 이번에는 보석으로 먹을 것을 사오는 길입니다요. 이맘때쯤이면 치우천님이 다시 오실 것이고, 치우천님은 보석으로 값을 쳐주실 테니 나는 이제 더 많은 보석을 들고 홀가분하게 돌아가면 되는 겁니다요. 아주 남는 장삽죠 그러고 난 다음에는 서쪽으로 가서.......” 치우천은 시기르타의 상술이 놀랍기는 했으나 더 듣다가는 끝이 없을 것 같아 얼른 손사래를 쳤다. “됐소 그런데 당신이 이렇게 지키는 사람도 없이 이 많은 물건들을 묻어두고 갔을 줄은 몰랐소.” “이 아루타한 마을은 홀랑 타버리고, 사람 뼈들이 그득한데 어느 놈이 물건이 쌓여 있다고 생각하겠습니까요? 치우천님도 그 때문에 여기서 보자고 하신 것 아닙니까요? 헤헤......” “됐소, 됐어. 당신은 정말 세상 제일의 장사꾼이오.” “헤헤헤.” 시기르타가 두 번째 싣고 온 물건과 소들을 풀어놓자 아루타한 마을은 갑자기 먹을 것으로 가득 차다시피 했다. 다른 사람들은 치우천이 선견지명을 발휘하여 아루타한 마을을 순식간에 먹을 것으로 가득 채운 것을 보고 놀라워했다. 다시 며칠이 지나자 흩어졌던 네 갈래의 전사들이 많은 전사들을 데리고 모여들었다. 남동쪽으로 갔던 부루벼락과 쇠돌이는 삼천팔백 명의 전사를 모아서 늦는 것이 겁났던지 이틀 먼저 도착했으며, 남남서로 나갔던 거서기와 삼은 사천이백 명의 전사를 모아서 하루 먼저 도착했다. 그리고 지리를 잘 알고, 아는 부족이 많았던 초초룬과 부달은 딱 정해진 날에 오천사백 명이나 되는 전사들을 모아서 왔고, 와난강, 와난수도 육천백 명의 전사를 모아서 도착했다. 그런데 이 인원은 모두 말을 타고 올 수 있는 전사들의 숫자일 뿐, 걸어서 다시 이곳으로 오겠다고 한 전사들은 그보다도 훨씬 많다고 했다. 처음에는 몇 명, 몇십 명 단위가 모여들더니, 뒤로 갈수록 자기들끼리 소문이 퍼졌는지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 뭉쳐서 무더기로 찾아든 것이다. 나중에는 아예 천 명, 이천 명 정도로 조직된 군대가 합류할 정도였는데, 그들은 지나족과 싸워 복수하거나 재침을 막기 위해 그들 스스로 조직한 군대들이었다. 그런 산발적 저항을 준비하던 군대들이 모두 모이게 되자, 그 수는 생각보다도 엄청나서, 말을 갖지 않은 사람을 따로 떼어놓았는데도 이 정도 인원이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모인 전사들만 해도 이제는 거의 이만 명이나 넘을 정도였고 걸어서 이곳을 찾아오는 전사들의 숫자도 이보다 많으면 많았지 적지는 않을 것이란 소식이었다. 예상 밖의 성과에 치우천과 치우비등도 반가워했지만 각 지역을 뒤진 대장들이 더더욱 놀란 것 같았다. 그들 스스로도 이렇게 많은 숫자의 동지들이 모인 것에 뿌듯해하고 가슴 벅차 하고 있었으며, 지나족과도 한 판 해볼 만하다는 희망에 들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떠나갈 듯 목소리를 맞추어 그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가장 먼저 들어온 부루벼락과 쇠돌이가 인솔한 부대가 다음날 들어온 거서기와 삼 부대를 보면서 노래를 불렀고, 거서기와 삼 부대도 그들의 노랫소리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그 두 부대는 만나자마자 부족과 종족을 초월하여 서로 반가워하며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다. 그러한 가슴 벅찬 장면은 다음날 초초룬 부대와 와난강 부대가 들어오면서 절정에 달했다. 각지에서 모여든 부족의 전사들은 이미 미아우와 마갸르 노래를 부르고 또 부르며 왔기 때문에 그 노래를 외우지 못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이제 이만명이 넘는 수많은 부족의 전사들이 지평선을 뒤덮을 정도로 까맣게 모여서 같은 노래를 부르는 광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대부분의 대장들도 수많은 지나족의 물결은 본 적은 있어도 이렇게 많은 군대가 자기편이 되어본 적은 드물었다. 그래서 몹시 흥분하고 기뻐했다. 이 정도로 많은 숫자라면 공상이 아무리 크더라도 단박에 밀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정말 이렇게 모여들 줄은 몰랐었네.” 부루벼락이 말하자 거서기도 활짝 웃으며 끼어들었다. “도대체 전사들이 이리 많을 줄 어떻게 알았나?” 치우천은 말하지 않으려 했으나 사람들이 하도 기뻐하고 궁금해 하자 마침내 입을 열었다. “지난번 싸움에서 많은 마을이 불타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당한 것은 사실입니다. 정말로 모조리 죽음을 당한 마을도 있었습니다. 두탄족이나 파우족은 거의 하나도 살아남지 못했죠. 허나 지나족과 맞싸운 부족은 두탄족과 파우족뿐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비록 대부 분 져서 흩어졌지만, 모두를 죽일 수는 없는 법입니다. 나는 그들이 반드시 어디서든지 숨어서 살아남아 있으리라 믿었습니다. 그렇게 믿었기에 나는 저번에 형천과 유망의 먹을 것을 불태우는 작전을 썼는데, 제 생각보다도 더 훌륭하게 잘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저들을 믿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번에 형천과 유망을 습격하라는 말을 퍼뜨리면서, 서로 흩어져서 따로 움직이지 말고 가급적 모여서 움직여야 한다고 했었습니다. 덕분에 이렇게 모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속으로 대강 어림잡아 열다섯 천은 모일 것으로 믿었지만, 정말 제 예상 밖으로 많이 모여주었군요 고마울 뿐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열다섯 천이라는 숫자는 어떻게 나온 거야?” 야율쿠리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늘어선 전사들을 보며 치우천에게 묻자 치우천은 쑥스럽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거리며 대답했다. “지난번에 비울걸과 여행하면서 마을들을 잘 봐두었거든 전사가 얼마나 되고, 사람 수가 얼마나 되는지 대강 외워 두었는데, 전사 수가 대강 백이십 천에서 백육십 천정도 될 것 같더란 말야.......” “그래서?” “적게 잡아 백이십 천이라 해 두고, 지나족과 싸워 반이 죽거나 흩어졌다 치면 육십 천이 남지. 그중에 반을 모으는 것은 너무 힘들 것 같아 반의반만 모은다 생각하여 열다섯 천을 잡은 것뿐이야. 하하.” 야율쿠리는 어이없다는 듯이 껄껄 웃었다. “이제 보니 순 제멋대로였잖아. 나는 또 무슨 엄청난 죄가 있는 줄 알았더니만! 예끼!” 모두가 한참을 껄껄 웃었다. 그러자 무라가 조용히 치우천에게 말했다. “지금 저들에게 뭔가 한 말씀 하세요. 지금이 아주 좋습니다.” “지금요?” 치우천이 눈을 크게 뜨고 묻자 무라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치우천을 바라보며 딱딱한 말투로 이야기했다. “많이 모이기는 했지만, 부족도 다르고, 쓰는 말도 다른 데가 많은 훈련받지 못한 어중이떠중이 전사들입니다. 지금 이렇게 하나로 뭉쳤을 때 다잡아두고, 힘을 북돋워서 용기를 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자 야율쿠리나 초초룬, 다른 사울아비들도 한마디씩 거들었다. “자네가 아니면 누가 하겠는가? 어서 뭔가 말하게” 치우천은 힘 있게 고개를 끄덕이며 마을중앙, 식량이 쌓여 있는 가장 위쪽으로 올라섰다. 그러고는 양팔을 하늘을 향해 힘껏 벌리며 힘껏 목청을 돋우어 외쳤다. “용감한 미아우와 마갸르, 그리고 작은 주신의 전사와 사울아비들이여!” 치우천의 우렁찬 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지는 순간 노래를 부르던 이만 명의 전사들은 뚝 노래를 그쳤다가 이윽고 “와!” 하며 떠나갈 듯한 환호성을 올렸다. 그 함성에 치우천은 저절로 피가 끓어올랐고, 가슴이 벅차오르는 순간이었다. 치우천의 낭랑한 음성은 수만 명의 머리 위를 뚫고 모든 전사들의 귀에 똑바로 꽂히듯 퍼져 나갔다. 치우천은 우선 전사들에게 용기를 북돋아주고, 지난날 지나족의 침입에 대한 부당함과 지나족의 만행에 대해 열거했다. 더구나 황폐해진 아루타한 마을의 복판에서 하는 연설이라 더더욱 설득력이 있었다. 치우천이 한마디를 할 때마다 전사들은 흥분과 환호의 갈채를 보냈으며, 때로는 적개심에 이를 갈았고 금방이라도 싸우고 싶어서 안달이 날 지경이었다. 여기에 치우천은 다시 현재의 정황을 기탄없이 설명해주었다. 유망이 이끄는 지나족은 동쪽으로 밀고 나와서 살고 있던 부족들을 전부 지나족에 편입시키고 공상에 거대한 성을 쌓았다 그리고 이제는 북으로 밀고 올라와 모든 마갸르족과 미아우족들을 사로잡고, 그들의 말을 못 쓰게 하고, 그들의 풍습과 조상을 잊게 만들어 영원히 지나족의 종으로 만들려 하고 있다고 성토했다. 그런 짓을 막으려면, 바로 그들의 침략의 핵심이 되는 공상을 떨어뜨려야 하며, 그러한 큰 싸움은 바로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강조했다. 그리고 지금 우리 편 전사들이 많이 모였지만 지나족의 전사들은 더 많으며, 더 오랫동안 싸움기술을 익혀 온데다가 공상이라는 거대한 성벽 뒤에 숨어 있기에 어려운 싸움이 될 것이라는 것도 숨김없이 밝혔다. 그러므로 전사들은 대장의 명령에 절대 따라야 하고,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겨서는 안 된다, 명령을 어기는 것은 자신만이 아니라 이 수많은 전사들을 모두 해치는 것과 다름없으므로 명령을 듣지 않는 자는 그 자리에서 목을 벨 것이며, 이 명령을 따를 것을 맹세하라, 따를 수 없는 자는 이 자리를 떠나라고 외쳤다. 전사들은 모두 소리를 높여 명령에 따를 것을 각자의 신과 조상, 어버이의 이름으로 맹세했다. “어려운 싸움이 되겠지만 이것은 여러분의 싸움이다! 남을 위해 싸워주는 것도 아니고 남이 가진 것을 욕심내거나 남을 해치기 위해 싸우는 것도 아니다. 여러분이 살아온 땅과 여러분의 마을, 여러분의 가족과 친척, 여러분의 부족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다! 여기에는 많은 다른 부족의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같은 적, 지나족과 싸우는 전사들이고 형제들이다! 이제껏 사이가 좋았건, 좋지 않았건 그것은 상관없다! 우리가 이번에 지나족을 몰아내고 공상을 빼앗으면, 지나족은 다시는 쳐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여러분의 아들과 딸, 여러분의 땅과 밭, 여러분의 조상의 무덤과 신성한 장소들을 되찾자! 그리고 앞으로는 다시 싸우지 않도록, 다시는 싸우는 일이 없도록 서로를 믿고 형제가 되자!” 치우천의 마지막 말에 전사들은 모두 흥분하고 감동하여 몸을 떨었다. 그들 중에 마갸르족의 유명한 전사 한 명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는 미아우족의 다른 부족과 철천지원수같이 지내던 사람이었으나 곧바로 달려 나가 그 부족의 전사를 찾아 얼싸안으며 외쳤다. “이제 우리는 같이 싸운다! 우리는 이제 형제다!” 그것을 지켜본 전사들은 저마다 소리를 높이 지르며 서로 얼싸안고 기뻐했다. 수백 년에 걸친 오해와 원한, 갈등이 순식간에 잊혀지고 마갸르는 미아우를 용서하고, 미아우는 마갸르를 용서했다. 많은 사람들이 가슴이 벅차올라 눈물을 흘렸으며, 여기저기서 수많은 의형제가 맺어졌다. 비록 큰 싸움을 앞두고 있었지만 그날 밤은 내내 축제 분위기였다. 치우 형제도 대장들과 함께 진탕 취했고, 사람들 앞에는 거의 나서지않던 무라도 말술을 마시며 취해 놀랍게도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리기까지 했다. 그 웃음소리가 걸걸한 평소 목소리와는 달리 의외로 맑고 예뻐서 사람들은 취한 와중에도 의아하게 생각했다. 공상 싸움 아루타한 마을에서 큰 잔치를 벌인 치우군은 다음날 오후까지 쉬었다가 편성을 시작했다. 그대로 쳐들어가면 그만 아니냐고 투덜대는 사람도 많았으나 치우천은 그런 사람들을 설득했다. “여기저기서 모인 군대이니 자칫하면 제멋대로 움직일 수 있습니다. 대장을 뽑아 다스리게 해야 제대로 군대 구실을 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우리 인원이 너무 많아 잘 움직이게 하려면 좀 힘들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하려는 겁니까?” 와난강이 묻자 치우천은 웃으며 대답했다. “이번 싸움에서는 손가락처럼 움직이기로 합니다. 그러면 생각하기도 쉽고 알아서 움직이기 편할 겁니다.” “손가락?”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가운데 치우천은 군대를 다섯 부대로 나누었다. 우선 작은 주신과 도깨비 부대 등 가장 빠르고 기운 센 병사들 이천 명을 치우비와 리미, 마냥, 개르에게 맡겼다. 그런 뒤 치우천은 치우비에게 말했다. “너희는 가장 앞장서는 부대이니 바로 집게손가락이다. 여기저기를 가리키기도 하고 지르기도 해야 한다. 가장 빠르고 용감하게 움직여야 한다.” “염려 말라구.” 치우비가 씩씩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치우천은 삼천 명의 미아우족 군대를 편성하여 야율쿠리와 초초룬 에게 맡겼으며, 사천 명의 마갸르족 군대를 와난강 와난수에게 맡겼다. “이 두 부대는 가운뎃손가락과 넷째 손가락입니다. 집게손가락이 찌를 때는 물러서서 굳게 버티고 있다가 집게손가락이 적을 움켜쥘 때에는 한꺼번에 움켜쥐어야 합니다. 아시겠지요?” 치우천이 손을 쥐어 보이더니 곧이어 허공을 움켜쥐는 시늉을 해 보이자 와난수, 와난강은 껄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간단하지만 훌륭한 방법이군. 잘 알겠소이다.” 그 말을 듣고 야율쿠리도 웃으며 끼어들었다. “그러면 누가 가운데고 누가 넷째 손가락이냐? 어흠! 내가 더 힘이 세니까 우리 부대가 가운뎃손가락을 해야겠다!” 야율쿠리의 말을 가로채듯 와난강이 얼른 되받았다. “우리 마갸르 부대가 더 숫자가 많으니 우리가 가운뎃손가락을 해야겠소.” 둘이 아웅다웅할 것 같자 치우천이 웃으며 나섰다. “더 잘 싸우는 쪽이 가운뎃손가락을 하시구려. 공상에 도착하면 어느 부대가 가운뎃손가락인지 판가름 짓겠소.” 그러고는 쇠돌이, 부루벼락, 거서기, 삼, 부달의 다섯 사울아비에게 오천의 병력을 주며 말했다. “형들은 새끼손가락입니다. 작고 힘이 없어서 새끼손가락인 것이 아니라 지나족이 그렇게 생각하도록 작은 부대로 나누어져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적의 눈을 끌지 않게 움직이다가 생각지도 못하게 덮쳐들 수 있으니까요 사울아비 형들은 부하를 잘 이끌 줄 알 테니 이 다섯 천의 병사들을 각각 나누어 맡고 있다가 별도의 명령이 있을 때 움직이십시오.” 차분하여 생각이 깊은 거서기가 입을 열었다. “우리는 새끼손가락이지만 또 다른...... 그러니까 왼손이 될 수도 있겠군.” “그려, 그려. 새끼손가락이지만 왼손이 되기도 하는 거여. 내가 집게손가락을 할게요, 형들.” 쇠돌이가 능청스럽게 말하자 부루벼락이 웃으며 되받았다. “그래라. 내가 가운뎃손가락이다, 허허.” 그렇게 새끼손가락 부대를 맡은 다섯 사울아비들은 각각 천 명의 부하를 알아서 나누어 맡았다. 마지막으로 치우천은 알한, 무라와 함께 나머지 육천 명의 병력을 맡았다. “우리는 엄지손가락이 됩니다. 이번 공상까지 가는 길에 싸움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지나족은 적어도 한 번은 우리에게 덤벼볼 것입니다. 이들을 단숨에 물리쳐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손 모양으로 나아갈 것이며, 손 모양 그대로 움직일 것입니다. 모두 이것을 보십시오.” 그러면서 치우천은 오른손을 들어 보였다. 그리고 다섯 손가락을 쭉 펴 보이며 말했다. “우리는 이렇게 나아갑니다. 그러다가 적이 나타나면......” 치우천은 집게손가락을 똑바로 세워 허공을 찌르는 시늉을 해 보였다. “이렇게 찌릅니다. 그러다가 때가 되면 손을 펴서......” 치우천은 엄지손가락과 나머지 세 손가락을 펴서 뭔가를 움켜쥐는 듯하다가 재빨리 콱 잡는 시늉을 하며 말을 이었다. “이렇게 다 잡아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수가 많고 훈련할 시간도 없었으니 이 한 가지만 잘 생각하여 움직이면 됩니다. 제가 손을 높이 들고 ‘움직인다!’라고 외치면 모든 부하들이 그 손 모양을 보고 따라 움직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전사들은 모두 한꺼번에 잘 움직일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이 많은 전사들을 한꺼번에 움직일 방법이 없어서 걱정이었는데, 그 방법이라면 잘될 것이다. 좋다.” 부달도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말했다. 치우천은 싱긋 웃으며 한 가지를 덧붙였다. “그리고 새끼손가락 부대는 때로는 왼손 부대도 해주어야 합니다. 제가 왼손을 들며 '움직인다!'라고 하면 새끼손가락 부대는 왼손 역할을 해주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오른손으로 적을 쓸어 담기 좋게 눌러주는 일을 해아 한다는 것입니다 아시겠습니까?” “물론이지유!” 쇠돌이가 헤헤 웃으며 말하자 부루벼락도 자랑스러운 듯 한마디 거들었다. “천, 자네가 싸움을 보는 눈이 얼마나 틀림없는지 나는 아네. 자네 말대로 조금도 틀림없이 움직일 것이니 염려하지 말게나.” 삼도 차분한 말투로 격려해주었다. “사람들은 모두 자네를 믿는다네.” “감사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훈련할 시간이 없으니 가는 길에 제가 마구 명령을 내릴 겁니다. 그때마다 움직이면서, 길을 가면서 연습하도록 합시다.” 치우천은 그것으로 회의를 마친 후 곧바로 출발하자고 했다 아루타한 마을에는 도단이와 몇몇 작은 부족장들을 남겨두어 다른 전사들을 모으도록 했다. 치우천은 도단이에게 일러두었다. “자네는 모여드는 전사들을 잘 받아서 여기를 지키고 있게나. 말이 없는 부대는 빨리 움직일 수가 없으니, 일단 이곳을 잘 지키기만 하면 된다네. 아마 시기르타라는 장사꾼이 물건들을 싣고 한 번 정도 더 올 걸세. 그리고 작은 주신에도 사람을 보냈으니 그들도 며칠 있으면 도착할 걸세. 내 사람을 보내 어떻게 움직일지를 알려주도록 함세.......” 도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맡겨 두게나.” 치우천의 군대는 하루 동안 대강의 편성과 치우천의 작전을 숙지시킨 후 다음날 아침 일찍 기세 좋게 출발했다. 아루타한 마을에서 공상까지 서둘러 가면 닷새 정도 걸리는 길이었다. 그러나 이만 명이나 되는 많은 군대가 가기 때문에 아무리 모두가 말을 탄 부대라 할지라도 사흘은 더 걸릴 것 같았다. 치우천은 진군 대형은 다섯 갈래로 나누어져서 손 모양 그대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길을 가면서도 치우천은 때때로 ‘움직인다!’라고 외치며 손을 펼치거나 찌르거나 움켜쥐는 시늉을 해 보였고 그때마다 각 부대는 ‘움직인다!’, ‘움직인다!’라고 “와” 소리를 지르며 대형을 바꾸곤 했다. 말로는 간단했지만 각각 수천 명의 부하들을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일이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이렇게 움직이는 것은 일종의 놀이 같았기 때문에 말단전사들도 쉽게 이해하고 따라할 수가 있었다. 각 부대를 이끄는 대장들도 모두 나름대로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부하들을 다스렸다. “거치적거리거나 늦는 놈은 두들겨 패줄 테다!” 야율쿠리와 초초룬의 부대는 그 성격대로 늦는 자나 거치적거리는 자들을 찾아내어 거의 초죽음이 되도록 두들겨 패는 식으로 군기를 잡았다. 야율쿠리에게 걸리면 끝장인 것은 물론이고, 초초룬에게 걸려도 늘씬하게 두들겨 맞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야율쿠리가 더 아프게 때린다느니, 초초룬이 더 아프다느니 하는 소문까지 돌았다. 반면 와난강, 와난수는 늦거나 거치적거리는 사람에게 한참 동안이나 따끔하게 훈시를 하는 것으로 벌을 주었다. “자네가 늦어서 이 많은 전사들이 모조리 싸움에서 질 수도 있다! 자네는 고향을 되찾고 싶지 않은가? 지나족에게 도움이 되는 짓을 하고 싶단 말인가!” 매일 저녁 와난강과 와난수는 걸린 사람들을 모아놓고 이런 연설을 했는데, 자그만치 저녁 무렵부터 한밤중까지 몇 시간 이상을 해댔다. 부자가 번갈아 가며 훈시를 해대는지라 듣는 것이 힘든 것은 물론, 다리가 아프고 창피하여 견딜 수 없을 정도였다. 참다못해 엉엉 우는 사람도 있었으며 아예 맞는 것이 낫다는 이야기까지 돌았다 “아이구, 잘했구먼! 오늘 저녁 쉴 때 내가 술 한 잔 내겄어! 자자, 다들 박수들 쳐!” 쇠돌이는 가장 빨리 신호를 발견하여 움직인 사람을 표창하고 사람들에게 우스갯소리를 해가면서 군기를 잡아갔다. 쇠돌이의 부대에서는 가장 늦은 사람이라 해도 두들겨 맞지는 알았다. 다만 저녁 때 쇠돌이와 씨름 다섯 번을 해야 할 뿐이었다. 쇠돌이는 항상 실실 웃으면서 부하들과 씨름을 했지만 쇠돌이와 씨름을 하느니 야율쿠리에게 두들겨 맞는 것이 덜 아플 거라며 투덜거렸다. 쇠돌이가 워낙 힘이 엄청난지라 쇠돌이에게 다섯 번이나 패대기쳐지고 나면 며칠은 앓아누워야 할 정도가 되었던 것이다. 그외 부루벼락이나 거서기, 삼은 위의 세 부대의 특성을 거의 섞어서 받아들였다. 거서기는 포상을 주로 많이 했고, 삼은 훈시를 했으며 부루벼락은 기분 내키는 대로 때리기도 하고 포상을 하기도 하는 등 종잡을 수 없었다. 그런데 부달의 부대만은 조금 달랐다. 부달은 음산해진 모습과 거의 공포감에 가까운 말투로 분위기를 휘어잡았다 부달은 말을 많이 하지도 않았으며 부하들을 나무라지도 않았다. 그저 딱 한마디를 했을 뿐이다. “세 번 실수하면 목을 친다.” 실제로 부달은 두 번 연속으로 늦어 거치적거린 사람이 발견되자 그 즉시 그 앞으로 조용히 다가갔다. 얼굴과 몸을 천으로 온통 감고눈매만 매섭게 빛나는 부달이 조용히 다가서자 전사들은 그 분위기에 압도되어 저절로 좌악 옆으로 갈라섰다. 그 복판에는 거치적댄 마갸르 전사만이 다리를 후들후들 떨며 서 있었다. 부달은 그 앞으로 다가서자마자 무서운 빠르기로 칼을 한 번 휘둘렀다. 순간 그 전사의 머리칼이 산산이 흩어져 날아갔다. 부달이 지닌 청동검은 예리하기 이를 데 없어 머리칼마저도 벨 수 있었던 것이다 머리칼이 썩둑 잘려나간 전사가 사색이 되자 부달은 조용히 말하며 돌아섰다. “다음번에는 목이다.” 이후 부달의 부대는 가장 빨리 움직이는 부대가 되었다. 다만 부작용이 있었으니, 가장 뒤에서 욕을 많이 먹고 사람들이 싫어하는 대장이 바로 부달이 되었다는 것이다. 선발대이자 집게손가락인 치우비의 부대는 독특했다. 치우비는 웃으며 겸손하게 한마디를 했을 뿐이다. “저는 잔소리는 하지 않겠습니다. 표나게 늦는 전사는 다른 손가락부대로 보낼 겁니다.” 그 말 한마디만으로도 치우비의 부대는 당장 숙연해졌다. 쇠돌이나 부루벼락 등의 부대는 모르지만, 야율쿠리에게 얻어맞거나 와난수 부자의 긴 훈시를 듣거나, 무시무시한 부달과 얼굴이 마주치는 것은 생각만 해도 등골이 오싹했기 때문이다. 또 이 부대는 원래가 작은 주신 출신의 정예병이 많아 벌을 받을 정도로 늦게 움직이는 자들이 적었다. 치우천의 부대는 치우천과 함께 움직였기 때문에 신호를 못 볼 염려는 없었으나 그 또한 다른 부대에 지지 않으려고 빠르게 움직였다. 치우천의 부대는 알한과 무라가 이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알한은 웃으며 전사들을 잘 달랬고 무라는 말이 없었으나 전사들은 무라를 거 의 여신처럼 좋아하고 떠받들어 그녀의 신경을 거슬리는 일은 죽어도 하지 않으려 스스로 애썼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치우천은 전사들에게 잘 부탁한다는 말 외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알한이 과거 작은 주신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퍼뜨렸다. 치우천은 부족장인데도 규칙을 어기자 스스로에게 매를 때렸다는 이야기였다. 그 소문이 퍼지자 전사들은 더더욱 엄히 규칙을 지키려 했다. ‘치우천은 정말 한다면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잘못하면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그러므로 굳이 처벌을 엄하게 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알아서 잘 움직였다. 이렇게 사흘 정도 진군하는 동안 치우천은 하루에도 수십 번이나 손을 들고 ‘움직인다!’를 외쳐댔다 어떨 때는 연속으로 전사들을 움직이게 하여 정신이 다 빠져나갈 지경이 되었다. 처음에는 놀이 비슷했으나 익숙해지면 익숙해질수록 치우천이 하도 혹독하게 움직임을 유도하는 바랑에 나중에는 전사들이 독이 오를 정도였다. 이런 짓을 왜 하느냐고 투덜대는 사람이 많았으나 나중에는 그런 생각을 할 틈조차 없었다. 그럭저럭 그렇게 수백 번 움직이고 나니 전사들은 어느 정도 그에 익숙해지게 되었다. 사람들 중에 눈이 좋은 사람들이 자연히 추려져서 옆 부대를 보는 임무를 맡게 되었고, 눈이 나쁘거나 좀 무딘 사람도 나름대로 살아남으려면 알아서 신호대로 움직이는 법을 익혀갔다. 옆 사람의 도움을 받기도 하고, 작은 무리를 지어 서로 간에 약속을 정하기도 했다. 그렇게 되자 자연히 사람들의 대오도 스스로 갖춰지게 되었다. 다른 사람이 중간에 끼면 신호를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각 부대는 급속하게 조직화되어 마구 흩어졌다가도 순식간에 원래의 대열을 찾아갈 수 있게 되었다. 무라와 알한은 단 사흘 만에 어중이떠중이였던 전사들이 잘 움직이게 된 것을 보고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정말 굉장합니다. 이런 간단한 방법으로 이렇게 많은 전사들을 정말 손가락처럼 움직이게 하다니!” 치우천은 피식 웃으며 되받았다. “그저 잔머리를 좀 굴린 것뿐입니다. 그냥 우르르 모여 가는 것이 아무래도 좀 그래서.......그러나 이 방법은 두 번 써먹을 방법은 못됩니다.” “왜요?” “이런 신호는 적이 알면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거든요 갑자기 싸움 한창 중에 ‘움직인다!’라고 소리를 질러 우리 편을 혼란스럽게 만들 수도 있구요. 그러니 이 방법은 딱 한 번만 써야 합니다. 다만 만들어진 대열은 공상 싸움이 끝날 때까지 대강 써먹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알한과 무라는 속으로 혀를 내두르며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한편, 공상의 유망은 그때서야 치우천의 부대가 아루타한 마을에 집결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지나족의 정찰병은 이미 아루타한 마을에서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죽을 힘을 다해 달렸어도 공상까지 도착하기에는 사흘이 걸렸기 때문이다. “이만 명이 넘는다고?” “아루타한 마을에 새까맣게 모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식량도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구요. 다 타버린 그 마을에 언제 그릴게 쌓아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숫자는 지나족의 예상을 넘어선 것이었다. 형천과 축융은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유망은 형천과 축융의 표정을 보고는 코웃음을 쳤다. “그래봐야 다 마구잡이로 긁어모은 어중이떠중이들이다. 이봐, 어디어디에서 모인 놈들인지 말해봐......” “그게....... 미아우족도 있고 마갸르족도 있습니다. 어느 한 두 부족이 아니라 사방에서 모인 놈들 같습니다.” “키탄이나 몽골, 타타르는?” “그들은 없었습니다. 다만......” 정찰병은 미아우 및 마갸르족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가 자기 눈으로 본 수십 개의 부족 이름을 늘어놓기 시작하자 유망은 발을 쾅 굴렀다. “그만 해! 됐어! 주둥이 좀 닥쳐주겠어!” 정찰병이 목을 움츠리자 유망은 형천과 축융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형천, 축융. 때는 지금이야.” “맞서 나갑니까?” “그놈들이 모인 지 며칠 되지 않았을 거야. 쥐새끼 같은 것들 당장 가서 밟아버리라구. 빨리 가면 갈수록 놈들은 우왕좌왕할 거야. 아주 잘되었군. 그놈들을 싹 밟아버리면 다시 북으로 치고 올라가도 아무런 뒤탈이 없을 거야.” “제가 가겠습니다.” 형천이 나서자 유망은 씨익 웃으며 되받았다. “그럼 네가 가야지, 내가 갈까?” “허허.” 형천이 민망한 듯 헛웃음을 짓자 유망이 말했다. “이봐이봐, 겁내지 말라군 나는 이제 연기도 끊었어. 난 머리가 맑아. 아주 맑단 말야.” 유망은 뭐라 중얼거리며 뒷짐을 지고 여기저기를 성큼성큼 다니다가 대뜸 물었다. “지난번에 우리, 참 고생했지?” “예.......” “그래, 고생했어. 배가 고파서 말을 잡아먹고, 물이 없어 피를 빨아 마시고, 풀뿌리를 캐먹으며 도망쳤지. 우리만 그렇게 당해서는 안 되겠지? 그렇지?” “물론입니다!” 소리친 것은 정찰병이었다. 얼결에 형천이나 축융보다도 먼저 소리치고 만 것이다. 정찰병이라 해도 유망에게 직접 털고를 할 정도이니 완전 말단은 아닌, 심복이나 다름없었다. 허나 이렇게 함부로 끼어드는 것은 결례인지라 형천이나 축융은 약간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자 유망은 웃으며 정찰병에게 다가가 차분하게 물었다. “그래, 그렇지.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저........뭐.......” 순간 정찰병은 식은땀을 흘리며 덜덜 떨었다. 유망은 미소를 지으며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 함부로 나서는 게 아니지. 그런데 넌 왜 아직도 여기에 있는 거지?” “물....... 물러가겠습니다!” “그래, 그래야지 그런데.......그냥 가? 뭐 잊은 것 없어?” 유망이 비꼬듯 묻자 정찰병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가 곧 입술을 깨물면서 대답했다. “왼팔을 잘라 바치겠습니다. 무기를 주시옵소서.” “어? 그건 왜?” 유망은 멍한 듯하지만 형형하게 빛나는 눈으로 정찰병을 바라보았다. “제 잘못을 갚으려면......” 정찰병이 각오한 듯 말을 하면서도 말끝을 흐리자 유망은 낄낄 웃음을 터뜨렸다. “멍청아, 누가 팔을 달래? 그걸 뭐 한대? 먹을까? 먹으면 그게 맛있을 것 같아? 맛있을까? 응? 이 멍청아! 그거 말고! 여기 두 대장에게 사과하란 말야!” 빠르게 쏘아붙이던 유망은 눈부신 동작으로 정찰병에게 다가와서 뒷덜미를 움켜쥐고 눌렀다. “자, 이렇게. 미안합니다. 주제넘게 나섰습니다. 죄송합니다. 얼른 해. 안할 거야?” “미....... 미안합니다! 주제넘게........ 나....... 나섰습니다. 죄....... 죄송.......” 정찰병이 간신히 말하자 유망은 그를 걷어차 저만치 굴러 넘어지게 만들었다. “너, 거기서 들어. 멍청아, 주제넘게 나서지 말고 듣고 있으라구! 함부로 입 놀리면 아가리를 도려내줄 거야.” 악담을 퍼부은 유망은 이내 미소 띤 얼굴로 형천과 축융을 쳐다보았다. “놈들은 이만 명이지만 아직 엉망진창일 거야? 그러니 우리도 이만 명을 데리고 그놈들을 친다. 지금 당장 출발하면 되는 거야. 지난번에 당한 것을 되갚아야지 안 그래?” 형천과 축융은 조용히 있었다. 유망이 다시 정찰병을 향해 눈짓을 하자 정찰병은 즉시 외쳤다. “그...... 그렇습니다! 그렇게만 하신다면 틀림없이 우리가 이길 것입니다! 염제 신농께서 하신 생각이니 조금도 틀림없......” 그러자 유망은 픽 웃으며 손을 들었고 정찰병의 입은 그 순간 딱 다물어졌다. 유망은 그것이 마음에 드는지 빙글거리며 다시 말했다. “자, 어때? 저 멍청이가 좋다고 했어. 그런데 치우천 놈은 멍청이가 아냐. 그렇지?” “물론입니다. 염제 신농님.” “그러니 우리는 저 멍청이가 좋다는 대로 하면 안 될 거야. 다른 수를 내야지, 안 그래? 우리만 속고 사나? 우리도 그 치우천이란 놈을 속여 보자구!” “다른 생각이 있으신지요?” 축융이 눈을 빛내며 묻자 유망은 웃으며 대답했다. “형천, 그대가 가. 이만 명을 데리고 서둘러서. 당당하게 맞서자고 하는 거야. 내가 직접 보여줄게 이렇게 말야!” 돌연 유망은 정찰병의 덜미를 잡아 얼굴을 퍽퍽 소리가 나게 두들겨 팼다. 유망의 기운이 엄청나서 정찰병은 금방 얼굴이 뭉개지고 정신을 잃어 늘어져버렸다. 형천과 축융은 기분이 좋지는 않았으나 염제 신농인 유망이 하는 일에 토를 달 수가 없었다. 형천은 속으로 생각했다. “연기는 끊으셨지만, 성격은 여전하시구나.” 유망은 정찰병의 얼굴을 계속 두들겨 패다가 대뜸 물었다. “그리고 네 부하 중에 용감한 놈들이 좀 있지?” “예. 대인족에 여섯 명의 대장이 있습니다.” “그놈들 중 세 명을 골라. 그래서 오천 명씩 주어서 빙 돌아가게 하는 거야.” “어디로........?” “어디긴 어디야? 아루타한 마을이다. 놈들이 거기 식량을 쌓아 두었다며?” “아......!” “형천 네가 서둘러 가면 놈들은 아직 출발 안 했거나 막 출발할 때 쯤 될 거야. 생각 같아서는 놈들이 마을에서 막 출발할 때쯤 형천 네가 놈들과 만나면 좋겠지. 뭐, 놈들이 출발 하지 않았어도 상관없어! 형천, 네가 나가면 놈들은 분명 식량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앞장서서 너희와 싸우려 할 거야.그 마을은 다타버려서 울타리도 없고, 며칠사이에 울타리를 세울 수도 없으니까.” 그러면서 유망은 정찰병의 머리채를 움켜쥐고 앞으로 확 잡아당겨 보였다. “이렇게 앞으로 나올 거야! 그러니 형천 너는 마을 앞쪽으로 밀어붙여서 놈들을 치고......” 시 말을 끊고 유망은 정찰병의 얼굴을 퍽 소리가 나게 때리고 난 후 다시 외쳤다. “그 사이 쥐도 새도 모르게 세 부대가 마을로 가서 모조리 태우는 거야! 이렇게 뒤통수를 치는 거지! 하하핫!” 유망은 미친 듯 웃으며 정찰병의 뒤통수를 퍽퍽퍽 세 번 후려갈겼다. 세 번째 쳤을 때 정찰병의 머리에서 빠직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유망은 싱긋 웃으며 마치 더러운 것을 잡았다는 듯 얼른 손을 놓고 살짝 뒤로 물러서자 정찰병의 몸은 털썩 바닥에 늘어져 버렸다. 죽지는 않았으나 완전히 기절한 상태였다. “그러면 놈도 이 꼴이 될 거야. 알아듣겠지?” “좋은 작전입니다!” 형천과 축융이 고개를 끄덕이자 유망이 덧붙였다. “놈들도 거지꼴이 되게 만들어줘야지. 형천, 솔직히 너 자신 없지?” “그러나 치우천 놈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굶고는 못 싸운다. 잡동사니 군대는 굻으면 대번 박살난다. 그때 놈을 잡아 찢어발기는 거다! 우리가 당한 것보다 몇백 배 더 처참하게 갚아 준다! 감히 이 염제 신농을 건드리는 놈은 어떤 꼴이 되는지 보여주지! 하하핫! 하하하핫!” 유망은 미친 듯이 하늘을 보고 웃어젖혔다. 축융이 먼저 뒷걸음질로 막사에서 나가고, 형천은 늘어진 정찰병의 몸을 들고 나가려 했다. 그때 유망이 형천에게 말했다. “형천?” “예......?” “내가 또 잘못한 건가?” “아니옵니다.” “네 얼굴에 그렇게 써 있는데?” “아닙니다. 좋은 작전이었습니다. 덕분에 아주 잘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저놈은 멍청이야. 건방져서 혼낸 게 아냐. 저런 놈은 당연히 벌을 받아야 해.” “왜 그렇습니까?” “저런 멍청이가 정찰을 하고 왔으니, 저놈 말을 믿을 수가 없어. 난 그게 무서워.” “저 사람은 최선을 다했습니다.” “아냐, 아냐. 치우천 놈에게는 또 뭔가가 있어. 나를 속이고 있어. 주신 사울아비들은 그렇다 쳐도 그놈과 한통속인 키탄 놈들도, 몽골놈들도, 타타르 놈들도 보이질 않다니! 멍청이! 멍청이! 저 멍청이 놈은 속은 거야! 뭔가 속았어! 뭔가....... 뭔가가......! 놈에겐 뭔가가 또 있는데......! 아, 내가 가서 보고 싶은데....... 그럴 수는 없으니! 답답해! 저 멍청이 놈이 답답하고! 내 자신이 답답하고!” 형천은 조용히 서 있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소리를 지르던 유망의 목소리가 이내 풀죽은 목소리로 바뀌었다. “형천?” “예?” 유망은 묘한 눈빛으로 땅을 내려다보며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생각해보니 좀 이상해. 몸조심해. 너를 믿지만, 치우천 놈은 무서운 놈이야. 아루타한 마을이 타버리기 전에는 절대, 절대 섣불리 놈과 싸우지 마. 아무리 어중이떠중이들이라 해도......” “형천은 문제없사옵니다.” “아냐! 그러지 마! 먼저 마을에 불을 지르고 시간을 끌어야 해. 마을을 태우는 데 실패하면 무조건 공상으로 돌아와. 알았어?” “저는 그리 약하지 않사옵니다.” “형천, 나는 정말 그대가 걱정돼. 그대가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는....... 나는 말야....... 솔직히 싸움이 싫어. 피를 보는 것도 싫고. 헌데 싫어도 해야만 해. 그러니 할 수 없이 내가 더 잔혹해질 뿐이야. 안 그러면....... 안 그러면 내 몸 안에서 뭔가가 부딪히고 부딪혀서........” 유망은 괴로운 듯 머리를 싸매고 신음하다가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그러니 조심해. 그리고 빨리 이기자. 어서어서 이기고 싸움을 끝내자. 응?” “알겠사옵니다.” 형천은 굳은 표정으로 엄숙하게 고개를 숙인 후 조용히 정찰병의 몸을 들고 막사를 나섰다. 유망은 다시 천장을 멍하니 응시하며 조그맣게 휘파람을 불며 흥얼거렸다. 그것은 바로 옛날, 치우천에게서 들었던 노랫가락이었다. 마약을 끊었지만 유망의 표정은 무척이나 쓸쓸하고 공허해 보였다. 마약에 취했던 때와 다를 것이 별로 없었다. 형천은 곧 세 명의 대인족 대전사들을 불렀다. 도한, 안생이라 부르는 두 명의 대전사와 위였다. 형천은 세 사람에게 각각 오천 정도의 전사들을 붙여주며 명령했다. “너희는 곧장 사람들이 다니는 길을 피해서 아루타한 마을로 간다. 들키지 않도록 앞길을 잘 살피면서 가야 한다. 절대 싸울 필요는 없다 스무날 뒤까지 도착해야 한다. 먼저 도착했어도 섣불리 나서지 말고 아루타한 마을 근처에 숨어 있다가 스무 날 째 되는 밤에 일제히 달려 나가 아루타한 마을에 쌓여 있는 주신과 마갸르, 미아우 놈들의 식량을 모두 불태우고 지키는 놈들을 싹 쓸어버리는 것이다. 알았나?” 도한은 과묵하고 눈이 작은 중년의 거한이었고 안생은 키는 컸으나 비쩍 말라서 마치 말린 생선 같아 보였으나 매서운 눈빛을 지닌 낭자였다. 두 사람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형천은 위를 바라보며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위, 너는 이번에는 꼭 공을 세워야 한다. 지난번처럼 염제 신농님을 실망시켜서는 안 된다.” 위는 지난번 유망에게 혼찌검이 났던 터라 부르르 어깨를 떨며 대답했다. “있는 힘을 다하겠습니다.” 사실 지난번 사건 이후 위는 유망을 몹시 두려워하게 되었다. 몇 대 맞았다고 무서워하는 것이 아니었다. 위는 유망의 광기를 직접 본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였고, 그 광기 때문에 겹을 먹게 된 것이다. 유망이 자주 광기를 부린다는 사실은 대부분 형천이나 축융 같은 높은 사람들만 알고 있었으며, 우연히 그런 모습을 본 사람들은 심복들을 제외하고 대부분 죽음을 당했다. 유망이 미친 짓을 한다는 것은 공공연한 소문이었지만, 그렇게 지독하게 비밀을 유지하기 때문에 염제 신농의 권위가 그나마 남아 있는 것이다. 위는 비록 대전사라는 높은 지위에 있었으나, 그런 모습을 직접 본 사람이니만치 여차하면 목이 달아날 위험이 있었다. 작은 실수를 해도 핑계 삼아 살려두지 않을 것이 분명했기에 두려움을 느꼈던 것이다. 형천은 다시 한 번 묘한 눈빛으로 위를 바라보았다. “정말 힘을 다해야 할 거야.” 위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번 진저리를 치면서 목을 움츠렸다. 형천은 세 명의 대전사와 만 오천의 전사를 출발시키고 다시 이만명의 전사를 집결시켰다. 속도를 중시해야 하기 때문에 모두가 말을 탈 줄 아는 자를 뽑다 보니 그 인원이 한계였다. 좌우간 형천은 더 이상 진다는 것은 생각하지도 않았다. 자신이 직접 나설 생각이었다. 그때 축융이 달려오며 물었다. “형천, 꼭 직접 가야 하나?” “내가 가는 것이 가장 좋을 걸세.” “아니,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네. 어차피 놈들의 실력을 알아보러 가는 길이네. 자네는 염제님 옆을 지켜주어야 하네.” “그러나 저놈들 중에는 치우비가 있을 걸세 그놈은 내가 상대해야 하네.” 축융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고 번번이 자네가 공상을 비우는 것도 좋지 않네. 다른 대전사들을 보냈다가, 놈들의 실력을 본 다음 그때 나가도 늦지 않네. 염제님은 이제 연기를 끊으셨지만, 사실 아직은 몹시 괴로우실 걸세. 자네가 옆에 있어야만 한다네. 염제님은 자네를 가장 믿으시니까.” 축융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고 유망이 형천을 걱정하던 것도 생각나서 형천은 푸욱 한숨을 쉬었다. “그러면 그럴까?” “대전사들이 많은데, 뭘 그리 걱정하는가? 한 다섯 명 정도를 한 번에 보내면 문제없을 걸세. 그들에게도 싸울 기회를 자주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믿을 만한 녀석들이 그리 없는데. 상대가 치우천이라면 절대 가볍게 볼 수 없네.” “이자들을 좀 보게나.” 축융이 짝짝 손뼉을 치자 다섯 명의 키가 크고 단단한 몸을 지닌 젊은 전사들이 막사로 들어섰다. 하나하나가상당한 힘이 있어 보였고 눈빛도 형형한 것이 보통 사람들 같지 않아 보였다. 그런데 다섯 명의 얼굴이 묘하게 닳은 것 같아 형천은 무의식중에 물었다. “닮았군. 누군가?” “검은곰 부족장 유웅씨의 다섯 형제라네. 이번에 우리 편을 들어 싸워주기로 하고 달려온 용사들일세.” “검은곰 부족? 그러면 헌원의 부하들 아닌가?” 검은곰 부족은 유웅씨라고도 불리는 부족장이 대대로 다스리는 쾌 큰 부족이었다. 이 부족은 헌원과도 친척으로 얽혀 있었으며 멀리는 주신과도 연관이 있었다. “그렇지 않네. 헌원의 밑에 있었지만, 지금은 우리 편이 되기로 했다네. 아주 뛰어난 용사들이니 한번 믿어 보세나. 특히 말을 타고 하는 싸움에 아주 익숙하다네.” 형천은 ‘아’ 하고 감탄했다. 이번 작전은 일단 빨라야 했다. 하루라도 공상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싸움을 할수록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형천 자신도 워낙 거구라 말을 타기 힘들었고 말을 타고 벌이는 싸움에는 그리 익숙하지 않았다. 형천은 축융이 정말자신을 생각해서 수를 낸 것을 알고 한 발 양보하기로 했다. “맡겨 주십시오. 저희 형제의 솜씨를 보이고 싶어서 수천의 전사들과 함께 먼 길을 왔습니다.” 다섯 형제는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형천에게 말하는 순간, 목소리도 그렇고 기세가 보통이 아니었다. 형천은 믿음직하다는 생각에 ‘흠’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공상을 지켜내면 이기는 것이다. 말 탄 부대는 달려오는 놈들과 싸우는 데 쓰이는 것이 옳은 일. 차라리 나보다 말싸움을 잘하는 자가 맡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래, 맡겨보자.’ “이상한걸요?” 알한이 혼잣말로 중얼거리자 치우천이 되물었다. “뭐가 이상합니까?” “지나족이 너무 안 보이는군요. 이제 지나 땅, 아니 지나족이 빼앗은 땅으로 들어섰는데, 지나족이 이렇게 안 보일 수 있나요? 지키는 사람들도 없고.” 치우천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곧 많이 보실 수 있을 겁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지나족도 우리가 많은 수로 쳐들어온 것을 알고 있을 게 분명하죠. 그러니 작은 부대는 우리 앞을 막지 않으려고 물러선 겁니다. 사실 그렇게 하라고 지난번에 작은 부대들을 밟고 다녔죠. 지나족들은 또 실수한 겁니다. 아무도 없이 다 공상으로 도망쳐 들어갔으니 우리가 이만큼 다가온 것을 모를 겁니다. 하지만 곧 많은 군사로 우리를 한 번 건드리려 할 것입니다.” “그러면 맞아 싸울 준비를 해야 하지 않나요?” 무라가 한마디 하자 치우천이 싱긋 웃었다. “그냥, 달립니다. 달리면 달릴수록 우리에게 유리합니다.” “예?” “나중에 보십시오.” 치우천은 더 이상 설명하지 않고 말 배를 조금 더 걷어찼다. 치우천이 다시 속력을 내자 알한과 무라는 따라붙을 수밖에 없었고, 치우천의 부대 역시 더 속도를 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자 손가락 대형을 유지하기 위해 다른 부대들도 일제히 속도를 올렸다. 그들의 전진 속도는 놀라울 정도였다. 작은 주신의 전사들 중 몽골족 출신이나 주신 사울아비 출신은 그래도 잘 적응했지만 나머지 전사들은 거의 탈진할 지경이었다. 정신없이 전진하는 가운데, 언제 신호가 날아들지 몰랐기 때문에 밥도 말 위에서 먹어야 했고 볼일도 말 위에서 해결해야만 했다. 말에서 떨어져 다치는 사람도 많았지만 부상자가 나와도 전진은 멈추지 않았다. 낙오자들은 결국 뒤떨어졌다가 밤이 된 후에 잠도 못 자고 죽을힘을 다해 찾아오는 수밖 에 없었다. 이미 지나족의 땅에 들어온 판이니 혼자 도망칠 수도 없었다. 그런 식으로 사흘이나 더 전진하자 어느덧 공상까지 고작 이삼 일 거리에 육박하게 되었다. 보통의 말 탄 부대보다도 두 배 가까이 빠른 진격속도였다. 그런데 그 사흘째 되던 날, 치우천은 앞에서 적이 몰려온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 수는 이만 명이 넘으며 거의 다 말을 탄 부대라는 이야기였다. 소식을 전한 사람은 치우비의 부대에 속한 작은 주신 전사였다. 치우천은 그에게 물었다. “저들도 자네나 우리 부대를 보았을까?” “장담은 못합니다만 못 보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이제 성을 나선 것 같습니다. 서둘러 전진하면서 우리처럼 대열을 짜면서 나가려는 듯합니다.” “대장이 형천이 아닌가 보지?” “아닌 것 같습니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 앞장서 있더군요.” “그들이 말을 잘 타던가?” “말 타는 솜씨가 대단했습니다.” 치우천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거, 고마운 일이네.” 알한과 무라가 왜 고맙냐고 묻자 치우천은 여전히 웃음기를 머금으며 대답했다. “지나족은 말을 잘 타는 전사가 드뭅니다. 그 정도라면 공상의 전사들 중에 말 잘 타는 사람들이 전부 나온 듯하군요. 그들을 한 번에 몰아주다니, 고마운 일이지요.” “어차피 저들은 공상을 지키는 게 가장 큰 일이니, 말을 잘 타고 못 타고는 중요하지 않을 겁니다.” 알한의 말에 치우천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되어야 우리가 끝내 이길 수 있습니다. 잘된 일입니다. 그럼 바로 전진합니다! 우리가 빨리 도착했기 때문에, 그들도 우리가 당장 덮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것입니다.” “조금 있으면 해가 저물 텐데....... 숨었다가 기습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무라가 말하자 치우천은 단호하게 되받았다. “그럴 것 없습니다. 오히려 있는 대로 소리를 지르며, 요란하게 쳐 들어가는 겁니다. 그래야 저들이 더 당황할 것입니다.” “어두워지면 싸우기가 힘들 텐데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알한을 보며 치우천은 자신 있게 말했다. “훈련은 괜히 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밤은 달이 밝을 테니, 어두워도 옆 사람은 볼 수 있습니다. 우리 대오는 옆 사람만 보면서 짜여진 것이라 이 정도 어둠에는 상관없습니다. 기회입니다! 이 때문에 우리가 그리 숨차게 달려온 것입니다! 모두 나갑시다!” 치우천은 말이 끝내기가 무섭게 손부터 치켜세웠다. 다른 사람들이 미처 뭐라 말할 틈도 없이 며칠 동안 고되게 훈련한 손가락 대형은 곧장 앞으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달려 나가면서부터 비로소 각 부대로 말 잘 타는 연락병들이 달려가서 적을 친다는 말을 전해주었다. 대장들과 전사들은 모두 놀랐으나 이미 대열이 달리는 상황이라 멈출 수도 없었다. 그냥 있는 그대로 죽을힘을 다해 달릴 뿐이었다. 유웅씨의 다섯 형제는 나이는 그리 많지 않으나 노련한 전사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끌고 온 부대를 포함해 이만 명이나 되는 많은 부대의 지휘권을 부여받고 퍽 긴장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루타한 마을 부근에 있을 것으로 믿은 치우 군대가 공상을 떠난 지 사흘정도 만에 덮쳐올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도 정찰병을 보내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기에 곧바로 앞에 치우 군대가 몰려온다는 연락을 받았다. 숨이 턱에 닿은 정찰병의 말을 듣고 다섯 형제 중 맏이인 우씽이 서둘러 말했다. “벌써 여기까지 오다니! 이제 곧 덮쳐오겠구나! 아우들이 어서 싸울 준비를 해야겠다!” 그러자 정찰병은 헉헉거리며 울부짖듯이 외쳤다. “곧 덮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올 것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놈들이....... 제....... 제 바로 뒤를 따라왔습니다! 죽을힘을 다해 달렸는데도 더 빨리 올 수 없었습니다! 놈들은 너무나도 빠릅니다! 대장님! 어서! 어서!” 놀란 다섯 형제가 막사 밖으로 뛰쳐나오자 이미 우두둑 하는 진동음이 느껴졌다. 수많은 말들이 무서운 기세로 달려오는 느낌이 분명했으며 거리도 얼마 되지 않았다. “미친놈들이다! 곧 어두워질 텐데!” 셋째인 우문이 외쳤다. 아닌게 아니라, 이미 해가 완전히 넘어가서 조금만 있으면 밤이 된다. 그러면 양쪽이 엉켜서 누가 누군지 모르게 되는 것이다. 둘째인 우항도 놀라움을 이기지 못해 부르짖었다. “놈들은 마갸르와 미아우의 어중이떠중이라고 하지 않았나? 런데 놈들이 이렇게 빠르냐?” 다섯 형제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부하들에게 말에 타라고 외쳐댔다. 지나 전사들도 놀라서 급히 먹던 음식과 마시던 물을 내팽개쳤다. 옷도 입지 못하고 알몸으로 말에 올라탄 자도 있었고 무기조차 들지 않은 자들까지 있었다. 더구나 점점 다가오는 무시무시한 말발굽소리에 지나 전사들은 당황하여 서로 부딪히며 평상시보다 더 갈팡질팡했다. “어서 말에 올라라: 무기를 들어라. 적이다! 적!” 첫째인 우씽이 눈에 핏발을 세우며 외치는 순간, 저쪽 굽이에서 시커먼 먼지구름이 일더니 말을 타고 까맣게 몰려오는 대군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적이다!” “치우 군대다!” 지나족들은 거의 공황상태에 빠져서 더더욱 허둥거렸다. 보통 사람보다 눈이 훨씬 좋은 막내 우륭이 이를 악물며 눈을 부릅뜨고 적의 군대를 바라보더니 외쳤다. “대단하네요!” “뭐가 말이냐?” “저게 어중이떠중이 부대라고요? 그럼 우리는 뭐죠?” “무슨 소리냐?” 우씽이 악을 쓰자 우륭 역시 악을 살듯 외쳐댔다. “저렇게 달리면서도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는 부대라구요! 도망쳐야 해요! 상대가 안 돼요!” 우씽은 상황 판단이 빠른 자였다. 그는 순식간에 상황을 냉정하게 계산하면서 재빨리 말에 오르며 외쳤다. “자랑스러운 검은곰의 전사들아! 내가 앞장선다! 그리고 다른 자들은 무조건 뒤로 물러선다! 무조건! 이건 명령이다!” “형님!” 둘째 우항이 눈물을 터뜨리며 부르짖었다. 다섯 형제와 함께 온 검은곰 전사들은 지나족 중에서도 매우 드문 정예기병이었다. 그래서 그들만은 이미 어느 정도 혼란에서 벗어나 말에 올라타 있었지만 나머지 만 칠천의 전사들은 아직 싸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우씽은 죽음을 각오하고 그 삼천 명만으로 앞을 막으려는 의도였고, 우항은 그것을 눈치 챘기에 울부짖은 것이다. 우씽은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당당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놈이 너무 빨랐다. 모든 것이 대장인 내 책임이다. 그러나 아우들아! 너희는 어서 물러서라! 하나라도 전사들을 살려서 물러섰다가, 다시 대열을 맞추어 놈들을 되치는 거다. 너희가 빠르면 나도 살고, 우리는 이긴다. 늦으면 나도 죽고 우리는 진다. 알았느냐? 어서어서 움직여랏!” 우씽의 판단은 정확했고, 그 상황에서는 최선의 선택이라 할 수 있었다. 나머지 네 형제 모두 범상한 인물들은 아니었기에 그들은 분노를 억누르며 환발하게 지휘하기 시작했다. 우씽은 죽을 각오를 하고 목에 핏대를 세우며 외쳤다. “가장 왼쪽 부대의 앞을 가로막는다! 무조건 몸으로 막는다! 가자!” “적이 나눠집니다! 일부만 앞으로 달려들고 나머지는 뒤로 빠지려나 봅니다! 그대로 전진할까요?” 선봉에 섰던 개르가 치우비에게 외쳤다. “형님에게서 신호는?” “없습니다!” 마냥이 외치자 치우비는 눈을 찢어질 듯 부릅뜨며 외쳤다. “신호가 없다면 그대로 돌진이다!” 치우비는 구름의 배를 박차며 길게 소리를 질렀다. 리미와 마냥도 소리를 질렀고 곧이어 치우비의 선봉부대, 집게손가락 부대는 모두가 처절하게 고함을 지르며 무서운 속도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그 맨 앞에는 치우비가 있었다. “지나의 전사들이여! 검은곰의 전사들이여! 놈들에게 질 수 없다! 단번에 들이쳐서 놈들을 박살낸다! 우리가 죽음으로써 전부를 살리고, 우리가 죽음으로써 반드시 싸움에 이긴다! 죽는 게 무서운가?” 우씽은 무시무시할 정도로 투지를 불태우며 목청 높여 검은곰 부족의 용감한 기마 전사들은 일제히 대답했다. “무섭지 않소!” “우리도 간다!” 말을 마친 우씽은 삼천 명의 기병과 함께 치우비 부대에 못지않게 무서운 기세로 돌진해 나가기 시작했다. “보통이 아니다! 대단해!” 약간 옆에서 무서운 기세로 돌진해 오는 우씽의 기마대를 본 치우천이 자신도 모르게 외쳤다. 자신의 기습은 틀림없이 성공적이었다. 이만 명의 지나족 부대는 갈팡질팡하다가 몰살당할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죽음을 각오하고 맹렬하게 돌진해오는 부대가 있는 것에 놀랐고, 뒷 부대가 그 틈을 타서 대열을 갖추려는 모습에 감탄했다. “형천, 축융 말고도 저런 자들이 있었나? 마치 몽골족 같구나!” 치우천이 감탄하자 알한이 외쳤다. “어떻게 합니까? 저들은 둘로 나누어졌습니다!” “조금 방향을 틀어서 놈들을 에워싼다!” 치우천이 우렁찬 목소리로 외치자 치우비의 부대는 약간 오른편으로 방향을 돌렸다. 그런데 우씽의 부대도 놀랍게 방향을 바꾸어 치우비의 부대와 그대로 맞부딪혀 나가려 하는 것이 아닌가? 무라가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비님의 부대! 적과 부딪힙니다!” 치우천이 놀라서 입을 딱 벌렸다. “저건....... 아니다! 저놈들은 미쳤어!” 아무리 기마대끼리의 격돌이라 해도 서로간의 거리가 좁혀지면 속도를 줄여야 하는데, 우씽의 부대는 조금도 속도를 줄이지 않고 있었으며 대열도 바싹 붙은 그대로였다. 양쪽에서 무서운 속도로 달리는 말들끼리 부딪히면 부딪힌 사람과 말들은 즉사를 면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렇게 부딪혀 오는 것은 자신들의 몸을 희생하여 상대의 속도를 줄이는 작전이 분명했다 더구나 맨 앞에서 달리는 치우비가 가장 위험할 수밖에 없었다. “피하게 해야 해요!” 무라가 다급하게 외치자 치우천은 순간적으로 생각했다. 지금 당장 닥쳐드는 우씽의 부대와 충돌하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 방향을 틀기 위해 움직인다 해도 모두가 적을 피할 수는 없었다. 도리어 우씽의 부대에 옆구리를 찔리게 된다. 더구나 치우비는 왼쪽, 즉 치우천의 엄지손가락이 달려드는 쪽으로 방향을 틀 수 밖에 없었다. 그러면 마구 달려오는 치우천의 부대와 엉키고 만다. 그러면 작전 자체가 흐트러진다. 치우천은 피가 맺히도록 입술을 깨물며 손을 들어올리며 외쳤다 “그대로 전진! 움켜쥔다!” 순간 무라가 부르짖었다. “비님이 죽어요.” 그 순간, 우씽의 부대는 비명 같은 고함을 지르면서 치우비의 부대 바로 앞까지 육박해왔다 양쪽 다 조금도 속도를 줄이지 않은 상태였기에 겁 없는 리미마저도 외쳤다. “주인님! 위험......!” 그러나 치우비의 귀에는 그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치우비는 이미 양손 모두에 커다란 도끼를 뽑아들고 있었다. 무서운 속도로 닥쳐오는 지나족의 부대를 닥치는 대로 몇 번 찍어 넘기던 치우비는 쾅쾅쾅 하며 계속 몸에 무언가가 부딪혀 오는 것을 느끼다가 돌연 눈앞이 캄캄해져 버렸다. 치우비의 선봉대는 우씽의 삼천 명의 기병과 정면으로 충돌하여 수없는 사상자를 내며 뒤엉켜 버렸다. 특히 앞줄에 섰던 백여 명의 전사들은 모조리 말과 함께 땅에 떨어져 내렸고 지나족의 삼백 명이 넘는 기병들도 똑같은 신세가 되었다. 그 위로 다시 수천의 기병대가 서로 밟고 들어오며 무기보다도 몸을 먼저 부딪혀댔다. 모두가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무라의 말을 무시한 치우천은 애써 정신을 차리며 외쳤다. “움직인다! 움켜쥔다!” 다시 한 번 신호가 떨어지자 달려가던 가운뎃손가락과 넷째, 새끼손가락, 그리고 치우천의 엄지손가락 부대는 일제히 우씽의 삼천 기병을 에워싸고 감아 들어갔다. “형님......! 아아....... 형님!” 다섯 형제 중 남은 네 형제는 맏이 우씽이 포위당하는 것을 보면서도 도무지 손을 쓸 수 없었다. “저....... 저놈들은 모두 사울아비들이냐! 마갸르 미아우 놈들이 어떻게 저렇듯 움직일 수 있지? 응?” 성격이 괄괄한 셋째 우문이 미친 듯 부르짖자 둘째인 우항이 목이 터져라 외쳤다. “어서 전사들 줄을 맞춰라! 그리고 저놈들을 도로 에워싸야 한다! 형님의 복수를 하자!” 우씽의 희생 덕분에 지나 전사들은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리고 말에 올라타 있었다. “형제들아! 네 갈래로 나누어져 저 적을 친다! 형님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마라!” 지나족은 혼란스러움에 우왕좌왕했었으나 눈앞에서 삼천 명의 아군이 천천히 전멸되어 가는 것을 보았고, 또 네 형제의 분발로 되레 기운을 냈다. 그들은 네 갈래로 나뉘어서 다시 돌진해오기 시작했다. 우씽이 몰고 온 삼천의 기병대는 일단 포위를 당하자 순식간에 괴멸되어갔다. 그러나 곧이어 지나족의 부대가 네 갈래로 갈라지며 돌진해오자 알한이 소리를 질렀다 “적이 나눠져서 돌격해옵니다!” 알한만 본 것이 아니라 지나족이 기세 좋게 돌격해오자 다른 부대들도 잠시 멈칫하는 것 같아 보였다. 치우천은 애써 치미는 흥분을 가라앉히며 다시 왼손을 들어올리며 외쳤다. “새끼손가락! 왼손 부대가 나간다!” 신호가 떨어지자 포위를 하고 있던 새끼손가락의 다섯 부대가 떨어져 나오며 전진했다. 그 부대들을 맡고 있던 다섯 명의 주신 사울아비들은 모두가 역전의 용사들이라 굳이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스스로 할 일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 정한 다섯 손가락의 위치에 따라 네 갈래로 나누어진 지나족 부대들을 하나씩 맞서 나갔으며 마지막 한 부대는 옆으로 돌았다. 유웅씨의 네 형제도 대단한 지휘력을 지니고 있었으나 더 이상은 전투대형을 고칠 수 없었다. 마치 이렇게 될 줄 알았던 듯 훈련까지 고되게 했던 치우군의 움직임도 따를 수 없었고, 주신 사울아비 용사들의 지휘력을 당해낼 수도 없었다. 와난강, 와난수 및 초초룬, 야율쿠리등이 이끄는 미아우와 마갸르의 전사들은 마치 우씽의 부대가 모든 지나족의 원흉인 양 이를 갈며 달려들었다. 그들의 복수심 어린 무기 앞에 지나족 전사들은 순식간에 시체가 되어 나뒹굴어갔다. “물러서면 나랑 씨름이 백 판이여, 백 판!” 쇠돌이는 거대한 구리도리깨를 휘두르면서도 계속 입심 좋게 떠들어댔고, 부루벼락은 신이 난 듯 채찍을 휘둘러서 지나 전사들을 연달아 넘어뜨렸다. “미친 지나놈들아. 맛이 어떠냐? 너희 땅으로 썩 물러나지 못해?” 거서기의 도끼와 삼의 긴 창도 쉬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옆구리를 찌른 부대를 맡은 부달은 음산한 모습 그대로 미동도 하지 않고 달려드는 지나 전사들을 팔 한쪽만 놀려서 번번이 두 동강내는 무서운 솜씨를 보였다. 상처를 입은 후에 칼 솜씨가 더 예리해진 것 같았다. 이윽고 부달과 삼에게 동시에 습격당한 막내 우륭의 부대가 산산이 흩어져 갈 때쯤 치우천은 다시 한 번 총진격 명령을 내렸다. 우륭의 부대는 지나족치고는 말달리는 솜씨도 능했고 싸움 실력도 상당했다. 그러나 이미 기세가 꺾인 터였고 활발한 치우군의 움직임에 따라 잡힌 형편이라 간신히 호각세를 유지하는 정도였다. 그때 치우천이 앞서 포위망을 폈던 부대를 동원하자지나 전사들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복수심은 충천했지만 이미 앞이 막히고 옆구리를 찔린 지나 전사들은 새롭게 사방을 에워싸 오는 치우군을 당할 수가 없어 결국 뿔뿔이 흩어져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는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치우천은 그 와중에도 다시 한 번 대열을 가다듬고 무섭게 에워싸는 식으로 달아나던 지나 전사들을 수없이 쓰러뜨렸다. 더구나 대부분의 지나 전사들은 싸움에 쫓겨 말을 잃었기 때문에 공상으로 되돌아간 전사들은 극히 드물었다. 지나족 전사들 중 죽은 사람은 오천이 넘었으며, 공상으로 간신히 도망친 전사들은 삼천 남짓밖에 되지 않았고, 나머지 만이 넘는 전사들은 말을 잃고 뿔뿔이 흩어졌다가 대다수는 후에 마갸르, 미아우족에게 잡혀 버렸다 허나 그것도 다섯 형제의 지휘력이 뛰어났기 때문에 그나마 피해를 줄인 것이다. 다섯 형제도 처참한 대가를 치렀으니, 돌격해 들어왔던 맏이 우씽은 죽은 후 시체조차 남지 않을 정도였으며 둘째 우항은 쇠돌이의 도리깨에 맞아 떨어졌다가 말에 밟혀 죽고, 막내 우륭은 삼의 창에 찔린 후 부달의 검에 목이 달아났다. 셋째 우문과 넷째 우민만이 도망쳤으나, 공상으로는 돌아가지 못했다. 그리고 검은곰 부족의 삼천 전사는 거의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다. 싸움이 끝나자마자 치우천은 허탈한 표정으로 알한을 돌아보았다. “아우는?” “아직 모릅니다만....... 비님은 그리 약한 분이 아니십니다.” “빨리 찾아보십시오. 아니, 내가 찾겠소.” “아닙니다. 일단 여기 계십시오. 제가 곧 알아보겠습니다.” 알한이 급히 달려간 사이 치우천은 무라가 눈물 젖은 눈을 내리깔며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것을 보았다 치우천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눈치 챈 듯, 무라는 곧 고개를 들더니 치우천에게 쏘아붙였다. “크게 이기니 좋은가요?” 아우를 희생시킨 것에 대한 무언의 항의를 하는 것 같아 치우천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으나 이내 냉정한 모습을 되찾았다. “내 아우는 죽지 않소.” “아무리 비님이 힘이 세다 해도 저렇게 매일매일 앞장만 서다가는 언젠가 죽어요. 죽는다구요! 하긴 그보다는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 더 중요하겠지요?” “내가 아우가 죽는 걸 바랄 것 같소?” 치우천이 벌컥 화를 내자 무라는 무심결에 말을 더듬었다. “그건 아니겠죠. 그러나....... 당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당신 아우가 죽어도 어쩔 수 없다고 하시겠죠?” “난 그렇지 않소!난....... 난........” 치우천은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이윽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 아우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합니다. 나도 싸움 때마다 그 녀석이 걱정되어 미칠 지경입니다. 그러나 그 때문에 그 녀석을 더 뒤로 돌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치우천은 무라를 비장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무라님, 욕하셔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이것만은 말씀드리겠습니다. 나에게 비 녀석은, 적어도 내 목숨보다는 훨씬 더 소중합니다.” “당신의 꿈 보다는요? 당신의 믿음 보다는요?” 무라가 조용하지만 날카롭게 묻자 치우천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건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녀석이 없는 세상은....... 도저히.......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군요. 생각하기도 싫고, 무섭습니다. 너무도 싫고 무서워서 그것을 피해왔는지도 모릅니다. 내 아우는 무적이라고 생각하고, 어떤 일을 겪어도 죽지 않는다고 혼자만 믿어왔는지도 모릅니다. 제 잘못이 크군요. 허나 무라님, 저를 믿어주십시오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무라는 대답하지 않고 조용하고도 정중히 치우천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 몸을 돌렸다. 그때 알한이 달려오며 외쳤다. “하힛 치우비님은 멀쩡하십니다. 염려 마십시오! 내가 뭐랬습니까? 치우비님이 그 정도로 다치겠습니까? 조금 다치기는 했지만....... 펄펄 날고 있습니다. 아무 문제없습니다!” 치우천은 그 순간 답답하고 억눌렸던 감정을 모조리 떨쳐버리려는 듯이 활짝 웃으며 그쪽으로 급히 달려갔다. 그러자 알한은 무라에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라님, 치우천님도 걱정이 많으십니다. 그분이야말로 우리 중에서 가장 힘든 분입니다. 그러니.......” 그러나 무라는 조용히 고개를 돌려 알한을 외면했다. 알한은 둥글고 큰 눈으로 무라를 잠시 바라보다가 쓴웃음을 짓고는 다시 활달하게 우스갯소리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무라의 미간에 잡힌 작은 주름은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공상성에 남아 있던 유망과 형천, 축융은 전사들이 떠난 지 사흘 만에 패보를 받고는 경악했다. 유웅씨 다섯 형제의 지휘는 절대 부족한 점이 없었고, 지나족의 그 누구보다도 뛰어났다. 그럼에도 완벽하게 패배를 당한 것은 치우천에게 기습을 허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웅씨 형제가 아니라 형천이나 축융이 갔더라도 그 기습은 눈치 채지 못했을 것이었다. 치우천 부대의 속도는 일반적인 지나족의 행군 속도를 완전히 초월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좌우간 철저하게 패했다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어느새 치우천의 군대가 공상과 지척지간까지 돌입한 것이 더 놀라웠다 놀란 유망은 급히 외쳤다. “빠르구나! 빨라! 이렇게 빠르다면 하루 이틀 내로 여기로 몰려올지도 모르겠다. 모두 서둘러라! 서둘러!” 유망은 행여 있을지 모르는 치우천 측의 불순분자들이 섞여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급히 공상 성문을 닫아걸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창힐을 불러서 다시 한 번 방어 준비에 만전을 기하라 명하고 성안에 남아 있던 전사들을 소집했다. 만 오천의 전사가 빠져나가고 이만의 전사들이 전멸하다시피 했어도 아직 그들의 수는 팔만 오천을넘어 구만 명에 가까웠다. 게다가 공상성 안에는 십여만에 달하는 비전투원이 있었다. 대부분 기술자, 장사꾼, 여자, 아이들이었으며 성 밖에 살던 사람도 많았다. 공상은 식량이 충분했으므로 노동력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여 모조리 데리고 들어온 것이다. 물론 성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던 사람들은 치우천의 공격 소식이 들리자마자 재빨리 미리 얼굴을 익혀 두었던 사람들뿐이었다. 조금이라도 낯설어 보이는 사람들은 가차 없이 쫓아내 버렸다. 유망은 치우천의 공격 소식이 들려온 후에 공상에 들어왔던 사람들 중 아직 나가지 않은 바깥사람들은 그날 강제로 모조리 쫓아버렸다. 혹시나 숨어 들어온 첩자가 있을까 염려한 것이다. 그 다음 축융을 시켜 공상 주변의 집과 밭 등 모든 것에 불을 지르게 했다. “그럴 필요까지 있습니까?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을 텐데요.” 축융이 조심스레 물었으나 유망은 단호했다. “어차피 싸움이 나면 밭은 못 쓰게 돼. 집도 놈들을 이기고 다시 지어주면 된다. 집을 놓아두면 놈들이 쓰라고 선물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야. 축융, 불은 지르되, 싸움이 끝나면 전부 새로 지어준다고 사람들에게 말해. 싸움을 앞두고 성안에 있는 놈들이 불만스러워하는 건 좋지 않으니까.” 축융은 굳은 얼굴로 알았다며 나갔다. 축융은 물론, 축융족 불주술사와 불부대는 불을 지르는 데에 최고의 솜씨를 지니고 있었다. 공상성 주위의 몇 천 채를 헤아리던 수많은 집들은 그날 하루 만에 모조리 훨훨 불타올랐으며 밭이나 나무들마저도 남김없이 타올랐다. 그것은 실로 장관이었으되, 어찌 보면 비정하고 잔혹한 광경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모두 피할 수 있었으나 미처 사람들이 데리고 떠나지 못해 버려둔 수많은 개, 고양이, 닭, 오리 등등의 작은 짐승들은 모조리 불에 타죽어 버렸다. 다만 소, 말, 나귀 같은 큰 동물들만 대강 성안으로 끌고 들어갔을 뿐이다. 성안에 들어갈 수 있던 사람들은 그나마 나중에 집을 지어준다는 약속이라도 받았지만, 성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밀려난 사람들은 졸지에 집과 모든 것을 잃은 유민이 되어 분노의 피눈물을 흘리며 뿔뿔이 흩어졌다. 아무리 신세가 막막해도 싸움터에 버티고 앉아 있을 배짱은 없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축융의 부대가 돌아오자마자 유망은 둑을 터서 공상성 주변에 파놓은 호수에 물이 흐르도록 만들었다. 공상성은 네 길 높이의 단단한 돌벽과 성벽 전체를 에워싼 물로 난공불락의 성이 되었다. 유망은 마지막으로 성벽의 높은 곳에 올라서 물이 차오르는 것을 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 옆에는 창힐과 형천, 축융이 있었다. “식량 준비는 얼마나 되어 있지, 창힐?” “성밖의 사람들을 몰고 오며 거둬온 것이 많아서 일곱 달은 충분히 버틸 수 있습니다.” "그래, 일곱 달. 치우천 놈이 아무리 잘났어도 일곱 달치 먹을 것을 날라 오지는 못했겠지.“ “일곱 달은커녕, 한달치도 없을 것입니다.” 유망은 킥킥 웃었다. “거기다가 아루타한 마을은 이제 곧 우리 손에 떨어진다. 우리 손에 떨어지지 않더라도 적잖은 피해를 입을 거야. 그리고 이 공상성에 가만히 있는 한, 아무리 치우천 놈의 꾀가 대단해도 우릴 어쩔 수는 없다. 그렇지?” 형천과 축융, 창힐은 일제히 머리를 조아렸다. “당연하신 말씀입니다.” 유망은 싱긋 웃으며 형천에게 물었다. “그 주신....... 신시에서 온 놈은 아직도 성안에 있나?” “어제 나갔습니다. 놈은 분명 우리에게 뭔가 요구하려 했던 것 같습니다.” “요구?” 형천이 씩 웃으며 되받았다. “그놈이 말하더군요. 치우천 녀석이 분명 땅굴을 팔 거라고 말입니다. 놈은 그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으려고 버텼는데, 뭔가 좀 뜯어내려고 그런 듯합니다.” “하하, 우리도 다 눈치 채고 있는 것을 가지고 생색을 내려 했다니? 당연히 아무것도 주지 않았지?” “당연히 그렇습니다. 결국 그놈은 나가면서, 무슨 큰 생색이나 내는 것처럼 그 말을 해주더군요. 들은 척도 안 했습니다. 껄껄.......” “우리가 이용하는 놈들이긴 하지만, 정말 빌어먹을 놈들이야, 하하. 주신에 그런 놈들이 몇몇만 더 있었어도 우리가 신시까지 먹을 수 있을 건데 말야. 하핫.” “그런 놈들은 지금도 충분히 많습니다. 썩어빠진 주신은 우리 적이 아닙니다. 다만 치우천 그놈만은 반드시 잡아야 합니다. 주신에서도 치우천 놈이 제발 죽거나, 하다못해 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듯합니다.” “불쌍한 놈이야. 그런데도 저렇게 죽기 살기로 싸우다니, 참.......” 유망은 잠시 복잡한 표정으로 생각하더니 창힐에게 말을 건넸다. “창힐, 땅굴도 막아낼 수 있겠지?” “물론이옵니다. 벌써 며칠 전부터 굴 파기에 소질 있는 사람들을 찾아냈사옵니다. 땅을 파고 들어가 살던 부족 사람들인지라 땅파기는 정말 뛰어나더군요. 그 사람들 백 명 가량과 다른 힘센 사람들로 사백 명 가량을 모아두었사옵니다. 이미 성 아래의 여기저기를 파놓고 있사옵니다. 놈들이 굴을 파고 들어오거나 성벽 밑을 파고 들어오면 바로 소리로 알아낼 수 있사옵니다. 그 다음은 바로 끓는 물과 연기를 피워서 굴 파던 놈들을 모조리 해치울 수 있사옵니다.” “전에 생각난 건데, 놈들이 굴을 아주 릴이 파면?” “성벽을 무너뜨리려면 그렇게 깊이 파서는 안 되옵니다. 성벽 바로 아래를 파야 성벽이 무너지는 법입니다. 그리고 성안으로 들어오려면 아무리 깊이 땅을 파도, 결국은 성안으로 뚫고 올라와야 하는 법, 소리를 안 내고는 도무지 할 수 없다 하옵니다.” “그것 말고 또 다른 방법은 없겠지?” 이번에는 형천이 나섰다. “제아무리 치우천 놈이 날고 기어도 그것 말고는 성벽을 기어오르는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건 간단히 막을 수 있습니다.” 축융이나 창힐, 그 밖의 다른 사람들도 모두 동감이었다. 유망은 만족한 듯 웃으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남쪽 전사들도 오겠지?” “당연히 달려올 것이옵니다. 그 전사만도 오만은 되옵니다.” “그래. 우리는 조금도 겁낼 것 없다. 느긋하게 앉아 있다가, 놈들이 먹을 것이 떨어져 쩔쩔맬 때, 한꺼번에 덮쳐 나가는 거야. 그러면 놈들을 모조리 잡을 수 있다. 특히 치우천, 치우비 그 두 놈은 반드시 없애야 한다!” 유망은 오랜만에, 높거나 뒤틀리지 않고 선명한 목소리로 엄하게 명령을 내렸다. 모든 부하들은 그 목소리에 용기를 얻어 힘차게 대답했다. “예!” 유망이 무리하다시피 서둘러서 공상의 방어를 굳힌 것은 잘한 일이었다. 유망이 성의 방어를 굳히자마자 하루도 안 되어서 치우천의 부대는 공상으로 돌입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치우천의 부대는 대부분의 말을 모두 버렸는지 거의 다 걸어서 공상 주위로 접근해왔다. 그 것을 이상하게 여긴 유망이 형천과 축융, 창힐 등에게 물었다. “저놈들이 왜 걸어서 오지? 말은 다 어쩌고?” “높은 성벽을 공격할 때는 말이 별로 소용없습니다. 더구나 말은 풀을 계속 먹여줘야 하니, 많이 끌고 오기 힘들었겠지요. 아마 오다가 어디로 치워버렸나 봅니다.” 창힐이 차분하게 대답하자 유망은 납득한 듯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유망이 관찰한 대로 치우천 부대는 부달과 이천여 명의 전사들에게 수만 마리의 말들을 맡겨서 어디론가 보낸 상태였다 말을 가진 것은 치우비 직속의 집게손가락부대 정도였다. 그리고 공상성 아래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성 주변을 에워싸다시피 있던 울창한 나무와 집 들이 모조리 불에 타버린 다음이었다. 아직도 검은 숯덩이에서 후드득 불똥이 떨어지며 재가 흩날리는 광경을 보면서 치우천의 부대는 숙연해졌다. 그러다가 네 길 높이나 되는 공상의 높은 성벽을 보고 치우천의 부대는 술렁이기 시작했다. 공상성을 마주보고 화살이 날아오지 않을 정도의 거리에서 멈춘 치우천의 부대는 즉각 회의를 열었다. “성벽이 정말 높더군. 넘기 어렵겠던데?” 삼이 불안한 듯 말하자 쇠돌이도 한마디 거들었다 “성벽을 넘으려면 사다리를 만들어야 하는데, 근처 나무가 다 타버렸으니 어쩌우?” 부루벼락이 투덜거리는 목소리로 되받았다. “성벽이 높아서 화살을 넘기는 것도 만만치 않을 거야. 하지만 놈들은 성벽에서 화살을 내리쏘면 되고 돌이며 끓는 물도 끼얹어댈 거야. 이거,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초초룬도 한숨을 쉬었다. “성안으로 냇물이 흘러들어가지 않아. 만약 물이 흘러들어간다면 독을 풀어서 모조리 없애버릴 수도 있는데.......” “아무리 독을 풀어도 백천 명을 어떻게 다 독으로 죽인단 거요? 말이 안 되잖소?” 와난강이 빈정거리자 초초룬은 벌컥 성질을 냈다. “한번 보겠어요? 하나 못하나?” “그만들 하십시오.” 이런 상황에서도 치우천은 빙긋 미소를 지으며 말다툼을 제지했다. 그러자 거서기가 차분하게 물었다. “천 형,그러면 이제 공상을 어떻게 뺏을 건지 말해줘야지 보름 만에 뺏을 거라고 했잖아?” 치우천은 지난번 공상 싸움 이후에는 속히 신시를 쳐야 한다는 말만 했을 뿐, 정작 공상 점령 계획에 대해서는 이후에 말해주겠다며 언급하지 않았다. “나, 키탄 울크리 부족장 야율쿠리가 말한다. 내가 보기에는 방법은 한 가지뿐이다. 아주 힘센 전사들만 골라서, 몹시 어두울 때 밧줄을 타고 조용히 성벽을 올라가는 것이다. 치우비나 내가 앞장선다면 금방 올라갈 수 있다. 일단 그렇게 들어가 성문을 안에서 열면 그만이다. 어떤가?” 그러자 와난강이 고개를 저었다. “마갸르의 와난강이 말합니다. 성벽을 올라갈때 들키지 않으리란 법이 없고, 성벽 위에도 전사가 없을 리 없습니다. 지나족이 누구처럼 바보들인 줄 아십니까?” “뭐요?” 와난강의 비아냥거리는 말투에 야율쿠리가 눈을 부릅뜨자 치우천이 차분한 목소리로 나섰다. “지금부터 내 말을 잘 들어주십시오. 이 싸움의 대장은 저입니다. 그러니 제 말을 따라주셔야 합니다.” 치우천의 말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간신히 주위가 조용해지자 치우천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여러분은 제 생각보다도 잘해주셨습니다. 이렇게 공상에 도착했으니, 반드시 성을 떨어뜨려야지요. 지금부터 제가 말하는 대로 서둘러 움직여 주십시오. 먼저 야율쿠리와 초초룬은 삼천 명의 전사를 골라서 보이지 않을 만한 곳에서 땅굴을 파는 것입니다.” “땅굴! 그렇군! 그 방법이 있었군!” 야율쿠리가 껄껄 웃으며 무릎을 탁 쳤다. “그리고 쇠돌이와 부루벼락 형은 역시 삼천 명의 전사를 데리고 땅굴에서 나오는 흙을 눈에 띄지 않도록 멀리 버리는 일을 해야 합니다. 흙을 쌓아둔다면 금방 저쪽에서 알아차릴 테니까요 나머지 대장들은 땅굴을 숨기기 위해 번갈아 가면서 공상을 공격하는 척하며 소리를 지르고 화살을 쏘아야 합니다. 성벽을 기어 올라가는 시늉을 해도 좋습니다만 절대 피해가 나지 않도록 항상 싸우는 척만 하다가 물러서십시오.” 생각보다 특별한 것이 없는 작전이라 대장들은 의아하여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삼이 물었다. “주신 사울아비 스승 삼이 말하오. 그게 다인가?” “아뇨, 물론 특별한 것도 있습니다. 야율쿠리, 초초룬?” “뭐지?” “땅굴은 하나만 파서는 안 된다. 한 열 개 정도 파는 것이 좋겠다. 그런데 땅을 파면서 언 제나 조심해라. 항상 귀를 열어두고 굴을 파야 한다. 우리가 굴을 파면, 저쪽도 그것을 알아차리고 막으려 할 거야. 발각되면 이번에는 저쪽에서 굴을 파고 올 거야. 발각된 낌새가 보이면, 그때는 즉시 굴을 빠져나와 도망쳐야 해 잘못하면 부하들을 많이 죽인다.” 야율쿠리가 인상을 쓰며 물었다. “놈들이 땅굴 파는 것을 쉽게 알아낼 수 있을까?” 치우천이 슬쩍 웃으며 대답했다. “아마 보통 부족장이 지키는 성이라면 모를 수도 있지. 허나 저 안에는 유망이나 형천, 축융이 있어. 우리가 제아무리 감춘다 해도 알아낼지도 몰라.” “만약 그렇게 파다가 모조리 들키면? 치우천, 우리는 식량이 그리 많지 않다. 가진 것은 잘해야 스무 날치 정도뿐이야. 공상까지 땅굴을 파려면 아무리 빨리 해도 보름은 걸릴 거라고.” 미간을 찌푸리는 야울쿠리를 보며 치우천은 웃었다. “보름....... 보름이라....... 야율쿠리, 자네는 땅도 잘 파는군.” “뭐?” “난 울쿠타 야쿠타가 가장 땅을 잘 파는 줄 알았는데. 자네 말하는 게 그들이 말한 것과 똑같군.” “난 지난번에 지나족 막사에 잡힌 자네를 구해준 적도 있어. 울쿠타 야쿠타와 같이 땅을 팠지만.” “좌우간 열심히 해라. 발각되어도 그만이니 절대 미련 갖지 말고.” 여유를 잃지 않은 치우천을 보며 알한이 좀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치우천님 땅굴이 성공한다 해도, 과연 공상으로 몇 사람이나 넣을 수 있을까요? 공상 안에는 수십 천의 전사들이 있는데, 그 좁은 땅굴로 몇이나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알한이 걱정하자 치우천은 싱긋 웃었다. “글쎄, 아마 그 전에 발각되지 않을까 싶은데?” “그러면 땅굴을 뭐 하러 팝니까? “그럼 다른 방법이 있나요?” 치우천이 웃으며 되묻자 와난강 역시 심각한 표정으로 나섰다. “마갸르의 와난강이 말합니다. 그러지 말고 우리 전사들 중 지나말을 잘하는 자들을 골라서 성안으로 들여보내는 게 어떻겠습니까? 지난번에 말 탄 부대가 우리에게 져서 말을 잃고 도망친 놈들이 많습니다. 그놈들이라 하고서 성안으로 들어가게 한 다음, 틈을 보아 불을 지르고 다니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말끝을 흐리는 와난강을 보며 치우천은 고개를 저었다. “좋은 생각이긴 합니다만, 형천이나 축융이 속지 않을 겁니다. 갑자기 얼굴도 모르는 자들이 오는데 성안에서 받아들여줄까요? 오히려 그 전사들은 모조리 죽습니다.” “그러나 다른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몇몇이 죽더라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자 치우천은 단호히 말했다. “전사 하나하나, 아니 모두 헛되이 죽게 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도 죽이지 않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럼 뭡니까? 땅굴도 대강 파고, 공격도 대강 하면 공상성이 떨어집니까?” 집요하게 묻는 와난강을 향해 치우천은 쐐기를 박으려는 듯 말끝에 힘을 주었다. “떨어집니다! 보름째 되는 날, 떨어집니다. 아니, 떨어져야 합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그것은 지금 말할 수 없습니다. 여기 모인 여러분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혹시라도 실수하는 사람이 나오거나 엿듣는 자가 생길지도 모릅니다. 비밀은 일단 무조건 말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치우천님의 능력을 의심하는 것은 아닙니다. 당신의 명령이라면 무조건 따릅니다. 허나 정말 그렇게 놀다시피 하는 공격으로 공상이 떨어집니까? 주술이라도 쓸 겁니까? 기적이라도 바라는 겁니까?” “기적을 보여드릴 수도 있겠지요, 와난강님. 만약 우리가 사다리를 놓고 성벽을 넘으려 한다면, 비록 여러분들이 대단히 용감하기는 하나 이 인원의 전사들로 백 천이나 되는 지나 전사들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아마....... 힘들겠지요.” “그러면 만약 열 개의 땅굴을 모두 무사히 파서 공상성으로 기어들어간다 해도, 그 안의 전사들을 물리칠 자신은 있습니까?” “그것도 힘들겠지요.” “그래서 저는 꾀를 쓰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꾀는 절대 비밀이어야 합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만, 여러분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에 말씀드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약속드립니다. 저는 기적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보름째 되는 날, 공상은 떨어집니다. 제 약속이 지켜지는지 아닌지 봐주십시오.” 치우천은 외치듯 말하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람들은 멍하니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치우비는 형이 자리를 뜨자 재빨리 따라가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그럴 것까지는 없잖아?” 치우천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꼭 필요한 일이다. 공상을 떨어뜨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저들이 나를 정말 완전히 믿게 만들어야 한다. 비야, 우리가 다음에 나갈 곳은 신시다. 공상도 힘든 곳이지만, 신시로 칼을 돌리는 일은 정말 어려운 일이야. 내 말을 확실하게 따르도록 해두지 않으면 사람들은 마음이 약해진다. 알겠니? 공상을 얻기 위해 이러는 게 아니다. 공상은 이미 얻은 것이나 다름없어. 나는 다음번에 치게 될 신시 싸움을 위하여 준비하는 거야.” 치우비는 감탄에 겨운 표정으로 형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형은 역시 대단해.” “그걸 이제야 알았느냐? 하하, 비야. 너에게는 알려줄 수도 있다만......” “아냐, 나만 알 수야 있나? 나도 똑같이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 깜짝 놀라겠어. 안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흉봐.” “원 녀석도.” “형, 하지만 나는 의심 안 해. 나는 무조건 형을 믿고, 보름째 되는 날 공상이 떨어지리라 믿어.” 사실 치우천으로서도 생각한 것이 있고 자신도 있었으나, 어느 정도 조바심이 나는 터라 신경이 날카로웠다. 그러나 아우의 격려 어린 말에 치우천은 긴장이 약간 풀리는 듯했다. “너, 괜찮으냐?” “뭐가?” “저번 싸움에 다친 거.” “아, 그때는 정말 정신 없더라구. 놈들이 죽기 살기로 와서 부딪히는 바람에 말들에 깔려서 깜빡 정신이 나갔지 뭐야. 그러나 별로 다친 데는 없어.” 그러나 얘기와는 다르게 치우비의 몸에는 또 여기저기 상처와 멍이 가득했다. 치우천은 무라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후 열흘에 걸쳐 치우천의 부대는 무력하게 공상을 공격했다. 정확하게는 성을 공격하는 시늉을 했다고 보는 편이 맞다. “와” 하고 몰려왔다가 몇 발의 화살을 쏘고 돌을 몇 개 던지고 나서 금세 다시 물러가는 식이었다. 성벽을 지키는 형천은 나중에는 맥이 빠질 지경이 었다. 사상자도 거의 나오지 않았으며, 싸움이라기보다는 마치 어린애들 전쟁놀이를 하는 기분이었다. 그러면서 치우천의 부대는 비밀리에 땅굴을 파고 있었다. 비록 파낸 흙을 계속 은밀하게 버리고 있었으나 공상성 안의 유망 등은 그런 사실을 이미 훤히 알고 치우천 부대를 비웃고 있었다. 유망은 창힐을 시켜 공상성 안에도 많은 굴을 파서 적의 땅굴 위치를 찾아낼 준비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창힐은 공상성 안의 굴 파는 자들이 아주 능숙하고 열심이라 쉽게 치우천의 땅굴을 찾아낼 것이라고 보고했다. 형천이나 축융은 성밖으로 나가서 치우천 군대를 쳐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말했으나 유망은 허락하지 않았다. “굳이 저 꾀 많은 놈과 뭐 하러 싸워? 우리 전사를 한 명이라도 아끼는 것이 낫다. 이대로라면 절대 버티지 못해. 그런데 형천?” “예?” ‘“지금쯤은 아루타한 마을에 우리 전사들이 갔을 테지?” “아마 오늘쯤 마을을 덮칠 것입니다.” 형천과 유망은 흡족한 생각에 씨익 웃었다. 치우천이나 유명한 대장이 한 명도 없고, 전사도 몇 없을 아루타한 마을이라면 만 오천의 지나 전사들로 쑥밭이 될 것이 분명했다. 유망은 여전히 웃음기를 머금으며 다시 물었다. “그 소식이 언제쯤 치우천 놈에게 전해질까?” “아마 나흘이나 닷새 정도 걸린다고 봐야겠지요. 놈들은 말을 잘 달리니까요.” 마침 그때 치우천 부대가 파고 있는 땅굴의 소리를 찾아낸 것 같다는 보고가 왔다. 이것으로 열 개째의 굴을 찾아낸 것이다. 나머지 굴도 이미 흔적을 찾았고, 언제라도 연기와 물로 공격할 준비를 갖춰놓은 상황이었다. 유망은 흡족한 듯 손뼉을 치며 창힐을 쳐다보았다. “좋군! 좋아! 단번에 밑바닥으로 떨어뜨려주지. 창힐?” “예!” “놈들의 굴을 공격할 준비를 해라.” “예l!” 창힐의 지휘를 받아 지나족들은 급히 땅굴을 파 들어갔다. 마침내 치우천 쪽이 파던 땅굴과 마주치자 지나족들은 미리 준비해 두었던 나무에 불을 붙여, 매캐한 연기가 피어오르는 나무들을 굴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한참 있다가 다시 굴속으로 물을 퍼부었다. 치우천의 말대로 야율쿠리의 부하들은 저쪽에서 땅 파는 소리가 들리자 급히 도망쳐 나왔으나, 늦어서 연기에 질식하거나 물에 빠져 죽은 자들이 상당수 있었다. 더구나 공상성 쪽에서 연기를 밀어 넣고 다시 물을 부어대자, 치우천 쪽에서 비밀스럽게 파던 땅굴들에서 연기 가 역류해 나와 치우천의 진중에서는 연기가 모락모락 솟았다. 그것을 보고 유망은 미친 듯이 웃어댔다. 성벽을 지키던 지나족들도 모두 그들을 비웃으며 큰 소리로 욕을 해댔다. 일껏 애쓴 것이 허사가 되자 치우천 진영의 대장들은 모두 넋이 빠지고 힘이 없어진 듯했다. 그들은 치우천에게 무슨 방법이 없냐고 물었지만 치우천은 다만 기다리라고 할 뿐이었다. 하루가 더 지나자 이제 치우천 쪽은 더 이상 굴을 파지 않고 나무를 모아 사다리를 만드는 등 전에 없던 총공격과 같은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유망과 형천, 축융 등은 조금도 겁내지 않았다 “이미 저놈들은 축 처져 있습니다. 땅굴이 실패했으니 방법이 없겠지요.” 축융의 말에 형천도 껄껄 웃으며 한마디 보탰다. “더구나 놈들은 말도 모조리 버린 처지입니다. 돌아갈 길이 막막하겠군요.” 유망이 무척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아마 며칠만 더 있으면 더 놀라운 이야기가 들릴걸? 아루타한 마을의 먹을 것들이 다 타버렸다는 이야기 말야. 그러면 놈들은 분명 꽁지가 빠지게 달아나겠지.” 그러자 형천은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때가 기회입니다. 달아나는 것을 추격하여 모조리 쓸어버려야 합니다.” “당연하지. 놈들은 이제 말도 없다.” 그때 창힐이 자그마한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그러나 우리도 말은 거의 없습니다. 지난번 싸움에서 거의 잃어서......” “상관없다! 그놈들은 말을 타고 살았기 때문에 뛰는 것이 우리보다 느리다. 차라리 우리 지나족이 더 잘 달릴 것이다. 더구나 우리 전사들은 성안에서 편히 지내며 힘을 쌓았고, 저놈들은 이제 먹을 것마저도 거의 떨어져 가고 있다. 창힐, 잘 보아라. 이제 저놈들이 쌓아둔 식량은 거의 없다 그리고 저놈들에게 식량을 날라다주는 놈들도 하나 없어. 더구나 모든 놈들이 어깨가축처지고 힘이 전혀 없지 않은가? 저런 건 일부러 꾸며서 되는 일이 아니야.”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아무리 대장이 연기를 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해도, 말단전사 하나하나까지 맥이 빠진 모습을 저렇듯 완벽하게 연기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모두가 침울해하고 맥이 빠져 있는 것으로 보아 사기는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것이 분명했다. 더구나 유망의 초토화 작전 때문에 치우천 부대는 막사도 몇 개 짓지 못하고 있었다. 식량을 감춰두었을 리도 없었다. 치우천의 부대는 거의 괴멸 직전이었다. 유망이 기다리던 날이 되었다. 바로 포위를 시작한 지 열나흘 째 되는 날이었다. 그날, 멀리서 다섯 필 정도의 말이 북쪽에서 달려오는 것을 지나족의 정찰병들은 놓치지 않았다. 자세히 알아볼 수는 없지만, 그들은 먼지에 뒤덮이고 퍽 초췌해 보였다. 심한 싸움을 겪었던 듯, 온몸에 뒤집어쓴 피가 말라붙은 자도 있었다. 절대 멀쩡한 상태에서 보내진 연락병은 아니었다. 그런 보고를 받은 유망은 껄껄 웃었다. “아루타한 마을이 무너진 게 분명하구나! 그래서 치우천 놈에게 알리러 온 거야!” “이제 놈도 더는 버틸 수 없겠군요!” “당연하지! 그러나 치우천 놈은 꾀가 많거든! 이제 놈은 일부러 우리를 총공격하려는 시늉을 할 것이다. 그러다가 갑자기 돌려서 도망칠 게 분명해.” “염제 신농님의 생각이 맞사옵니다. 틀림없이 치우천은 마지막까지 꾀를 부릴 것입니다.” 참 보기 드물게 창힐이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유망은 근엄한 표정으로 대전사 이상의 대장을 모두 부르라고 했다. 대략 육십 명에 달하는 대장급 인원이 모이자 유망은 엄숙하게 명령했다. “이제 때가 왔다! 지루한 싸움은 끝이다! 놈은 분명 우리를 공격하는 척하다가 급히 도망치려 할 것이다. 그러나 그때가 바로 놈들을 쓸어버릴 순간이다! 모든 부대는 놈들을 추격할 준비를 해라. 놈들을 하나도 남기지 말고 마지막까지 뒤쫓아 잡아야 한다! 그 다음에 우리에게 맞서는 놈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모든 대장과 대전사들은 소리 높여 “염제 신농 만세!”를 외쳤다. 유강은 만족스러운 듯 창힐을 쳐다보았다. “창힐, 그래도 모르니까 너는 성에 남아 있어라. 전사 오천을 두고 갈 테니 뒷정리나 부탁한다.” 아니나 다를까, 치우천의 부대는 포위를 풀고 전부 한 덩이가 되어서 공상의 북쪽성문 쪽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기세가 자못 대단했으나 유망은 비웃었다 “그래봐야 도망치려고 발악하는 것뿐이다.” 그 말 그대로, 치우천의 부대는 성벽을 향해 맹렬하게 돌입하는가 싶더니 급히 방향을 바꾸어 북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유망의 생각이 그대로 맞아떨어진 것이다. 유망은 크게 웃으며 목소리 높여 명령을 내렸다. “전부 나가라! 저 시건방진 주신 놈들과 마갸르, 미아우 놈들을 모조 쓸어버리자!” 명이 떨어지자마자 공상의 성문이 열리고 지나 전사들이 물밀 듯이 쏟아져 나왔다. 거의 구만 명에 달하는 부대들이 각 대전사들과 대장들의 지휘를 받아 해일처럼 쏟아져 나오는 광경은 장관 중의 장관이었다. 물론 맨 선두에는 형천이 섰고, 유망은 전사들을 독려하다가 중간쯤에 나왔으며, 최후로 축융이 뒤를 맡았다. 축융은 세심하게 공상성의 거대한 성문이 다시 닫히는 것까지 확인한 후에야 추적을 시작했다. 거의 십만에 가까운 대군의 추격을 받자 치우천의 부대는 그야말로 식은땀을 흘리며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대장들은 그때까지도 치우천에게 혹시 무슨 수가 있겠지 하며 믿었는데, 마지막까지 이렇게 쫓기게 되자 치우천을 원망스럽게 쳐다보았다. 그때 치우천이 말끝에 힘을 주며 외쳤다. “자, 이제 다 되어간다. 나를 믿는다면, 하루만 죽을힘을 다해 달려가자!” “도망친다고 공상성이 떨어진답니까? 차라리 죽음을 각오하고 싸웁시다!” 쇠돌이나 부루벼락 등이 도망치는 와중에서도 목소리를 높였으나 치우천은 고개를 저었다. “하루만 더 참자. 하루만!” 그때 알한이 걱정스레 말했다. “저놈들이 쫓아오는 게 더 빠릅니다. 이대로라면 지쳐서 따라잡힙니다.” “놈들도 말 탄 부대가 있는데, 왜 안 따라오는 거지?” 치우비가 의아한 듯 묻자 치우천은 그 말에만 대답을 했다. “놈들은 우리 꾀를 겁낸다. 몇몇만 튀어나을 뿐 쫓아오지는 않을 거야. 잘 되어가니 염려 마라.” “잘되는 게 도망만 치는 게요?” 이제는 대장급들도 불만스럽게 외쳤으나 치우천은 계속 달아나라고 독려할 뿐이었다. 처음에 치우천 부대와 지나족들 간의 거리는 달려서 한 시간 정도의 거리였으나 반나절 정도 달린 후에는 거의 따라 잡힐 지경에 이르렀다. 그쯤 되는데도 매복도 없고 치우천이 무슨 꾀를 쓰는 것도 없는 듯하자 드디어 지나족의 말 탄 전사들이 돌출해 나오기 시작했다. 치우천은 급히 말을 가지고 있던 치우비의 집게손가락 부대를 뒤로 돌려서 그들을 막아냈다. 잠시 혼전이 벌어졌고 조금만 더 싸웠다면 치우 비의 부대가 그들을 전멸시킬 수도 있었겠지만, 지나족의 본대가 다시 달려오는 바람에 또 달아나야만 했다. 그렇게 어두워질 때까지 줄곧 달리기만 했던 치우천의 부대는 모두 기진맥진해졌다. 어느덧 치우천의 부대가 어느 골짜기로 들어섰을 무렵, 치우천 부대의 앞을 막아서는 큰 무리가 있었다. 앞장서 달리던 사람들은 적인 줄 알고 질겁을 했으나 그들은 바로 잠시 사라졌던 부달의 부대였다. 그런데 그들은 이미 처분한 줄로만 알았던 수만 마리의 말을 그대로 갖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살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 지칠 대로 지친 치우천의 부대는 환호성을 올렸다. 치우천은 갑자기 허공을 보고 크게 웃고는 우렁차게 외쳤다. “자! 이제 시작이다! 정말 여기까지 잘 와주었다! 모두 말에 탄다. 그리고 지나족의 부대를 피해 다시 공상으로 돌아간다!” “돌아간다고요?” 대장들은 모두 놀랐지만, 치우천은 그때서야 당당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제 공상은 빈 껍질이다. 그 안에 저 많은 지나족이 있을 때는 칠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된다. 놈들은 우리보다 빨리 갈 수 없다”, 말단전사들은 그저 “와!” 하며 외쳤으나 대장급들은 치우천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지나족의 모든 부대를 밖으로 유인한 것은 잘한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 급히 되돌아간다면, 지나족 부대도 서둘러 공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치우천의 부대가 아무리 말을 급히 달리고, 지나족의 부대가 맨몸으로 달려간다 해도 기껏 한나절이나 하루정도 차이다. 아무리 주력부대가 빠졌다고는 하나 공상의 높은 성벽은 그렇듯 간단히 넘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되레 공상 성벽을 공격하다가 뒤따라온 지나족들에 의해 앞뒤로 포위되어 전멸할 가능성이 훨씬 높았다. 그러나 그런 의견을 낼 시간조차 없었다. 지나족은 이미 뒤쪽을 바짝 따라붙고 있었기 때문이다. 치우천은 급히 치우비에게 말했다. “비야, 너는 지나족들을 습격하여 최대한 시간을 끌어라 이제 곧 어두워지니, 놈들은 지치고 혼란스러워서 오늘은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놈들이 추격을 멈추면, 밤을 새워서라도 공상으로 달려와라. 반드시 공상 서문으로 와야 한다. 무리하게 싸울 필요는 절대 없다. 알았지?” “알았어!” 치우비의 집게손가락 부대가 다시 지나족들을 막아 시간을 버는 사이, 치우천의 전사들은정신 없이 말에 올랐고, 말에 오르자마자 치우천의 명령이 떨어졌다. “골짜기를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다시 남쪽으로 갈 수 있다. 공상까지 있는 힘을 다해 나간다!” 이 골짜기는 치우천이 남으로 진군하면서 이미 보아둔 곳이었다. 북으로 똑바로 갈 수도 있었지만, 산을 끼고 오른쪽으로 돌아 다시 남으로 내려갈 수도 있었다. 치우천의 전사들은 몹시 지쳤지만 안간힘을 다해 말에 올랐다 부달은 이미 전부터 치우천의 명령을 받아 이 골짜기에서 말을 쉬게 했었기 때문에 말들은 기운이 넘쳐흘렀다. 치우천의 부대는 급히 골짜기를 돌아 남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한편, 치우비의 부대가 골짜기를 막아서자 약간의 혼전이 벌어졌다. 좁은 골짜기라 치우비의 부대를 포위할 수 없어서 형천은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주변이 어두워지자 치우비의 부대도 지나족을 어느 정도 헝클어 놓고는 이내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우리를 성밖으로 빼돌리려는 수작이었군요. 놈들이 말을 여기에 감춰두었을 줄은 몰랐습니다.” 형천이 허탈한 듯 외치자 유망은 코웃음을 쳤다. “그래봤자 얕은꾀에 불과해. 치우천 그놈은 내가 공상을 텅 비워두고 나왔으리라 믿었나 보지. 공상에는 아직 창힐과 오천의 전사가 있다. 성벽을 지키고 있으면 며칠은 충분히 버틴다. 되레 우리가 쫓아 에워싸면 그야말로 다 죽일 수 있다.” 의기양양한 유망을 보며 축융은 약간 신중론을 폈다. “허나 놈의 꾀가 있을지 모릅니다. 지금까지도 놈은 우리를 감쪽같이 속이지 않았습니까? 우리말을 먼저 없애고, 자기들 말을 감추어서 우리를 방심하게 한 다음, 성밖으로 끌어냈습니다. 혹시나 성이 무너진다면.......” “그럴 수는 없어!” 유망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공상성은 그리 물렁한 곳이 아냐! 오천 전사가 지키고 있어 약간 불안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만 명 절도로 하루 만에 떨어질 성은 아니다! 이미 땅굴도 다 막았는데 무슨 방법이 있겠는가?” “그렇다면 놈이 왜 공상으로 돌아갔을까요? 말을 얻은 김에 도망치면 살 수 있을 텐데, 공상으로 돌아간 것은 죽으러 간 것이나 다름없잖습니까?” “치우천 놈은 지금 마지막 발악을 하는 거다! 하루 사이에 죽을힘을 다해 공상을 떨어뜨리려고 얕은꾀를 쓴 거야! 그러나 공상은 하루사이에 절대 떨어지지 않는다! 절대!” 유망은 큰 소리로 장담했으나 사실 속으로는 불안했다. 창힐은 믿을 수 있는 인물이었고 오천이라는 전사도 그리 적은 수는 아니었다. 방어도 물샐틈없이 단단했다. 그럼에도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유망은 마음을 다잡고 이내 외쳤다. “우리도 서둘러 공상으로 돌아간다! 밤을 새우고 간다. 말은 앞에 적이 숨어 있나 잘 살펴라!” 하지만 지나족의 부대는 이미 하루 종일 달려온 터라 몹시 지쳐 있었다. 그렇다고 염제 신농의 말을 거역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또 전사들도 공상성이 걱정되어 두말없이 그 뒤를 따랐다. 그러나 매복까지 살피면서 진군해야 하는 터라 당연히 행군 속도는 느릴 수밖에 없었다. 치우천은 계속 소리 지르면서 부대를 독려하여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우리가 지나족을 이길 수 있는 것은 빠르기 때문이다! 그것으로 우리는 하루를 얻었다. 이제 공상은 거의 비어 있다. 그 성을 우리가 빼앗으면 되는 거다! 힘을 내라! 달려라! 달려!” 그러나 대장들은 누구 하나 치우천의 말이 실감나지 않았다. 유망이 바보가 아닌 이상, 아무리 맹추격전을 펼쳤다 해도 공상성을 비워두었을 리는 없었다. 그 높은 성벽에, 땅굴마저도 실패했는데 어떻게 유망의 본대가 다시 뒤를 따라잡기 전에 공상을 빼앗는단 말인가? 그 러나 질문할 틈조차 없을 정도로 치우천은 서둘렀고 흥분해 있었다. 드디어 보름째 되는 날, 해가 아침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떠오를 무렵, 치우천의 부대는 다시 공상성의 서문에 도착했다. 그리고 비슷한 시각에 치우비의 부대도 그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치우비의 집게손가락부대는 다른 부대에 비해 정예였기 때문에 조금 더 말을 빨리 달릴 수 있었던 것이다. 공상성을 지키던 창힐은 지나족의 본대가 아닌, 치우천의 부대가 다시 몰려온 것을 되고 놀라서 모든 전사들을 성벽 위로 오르게 해 전투태세를 갖추게 했다. 비록 많은 수가 빠져나갔어도 방어태세는 빈틈없었다. 골짜기를 겨우 벗어난 치우천의 이만 명 전사들은 지치고 힘든 몸을 조금 쉬면서 아직도 막막하게만 보이는 공상성의 우뚝 솟은 성벽을 보며 탄식을 했다. 그때 치우천이 홀로 앞으로 나아갔다. 솟아오르는 아침 해와 거대한 공상성을 등지고 우뚝 선 치우천의 모습은 모든 전사들의 눈길을 끌었다. 치우천은 차분하면서도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그동안 고생이 많았다. 이제 공상성은 우리 것이나 다름없다. 나는 보름 내에 공상을 떨어뜨리겠다고 여러분과 약속을 했고, 지금 그 약속을 지키고자 한다. 기적이라고 하면 그렇게 보아도 좋다. 아니라면 아니라고 해도 좋다. 하지만 나, 치우천은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며, 내가 말한 것은 무엇이든 이루어질 것이다.” 치우천은 잠시 말을 끊더니 이내 천지를 진동케 하는 아주 커다란 소리로 외쳤다 “내가 말한 대로 될 것이다! 공상성은 무너진다!” 치우천을 따르는 대장들과 전사들은 얼이 빠진 듯했고 성벽 위에 올라 있던 지나 전사들은 배를 잡고 웃어댔다. 그러나 기적이 벌어진 것은 그때였다. “무너진다!” “공상 성벽이! 성문이 무너진다!” 거대한 공상 성문과 성벽이 갑자기 굉음과 함께 흔들리더니 아래쪽부터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두꺼운 통나무로 만든 성문이 무너지는 돌 더미에 깔려서 산산이 부서지고 성벽 위에 올라섰던 많은 지나 전사들이 비명과 함께 떨어져 내렸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광경이었다. “무슨 일이냐! 어떻게 된 것이냐!” 차분하던 창힐마저도 놀라서 허둥댔으니 지나 전사들의 경악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치우천의 부대도 눈앞에서 벌어지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을 입을 딱 벌리며 지켜볼 뿐, 어느 누구도 말 한마디 하지 못했다. 기적이 벌어진 것이다. 그 순간, 치우천이 외쳤다. “모두 나가라!” 그 소리가 떨어지는 순간, 치우천의 이만 명 전사들은 밤새 쫓기듯이 달린 피로를 모조리 잊고 단숨에 달려가기 시작했다. 무서운 기세로 말을 몰아 성문을 뛰어넘어 성안으로 돌입한 전사들을 지나 전사들은 막지 못했다. 아니, 막을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기적을 눈앞에서 보고 사기가 충천해진 치우천의 전사들은 평소의 실력보다 두 배나 더 강해지고 빨라진 것 같았고,지나 전사들은 기가 꺾여 아무런 대항조차 하지 못했다. 더구나 지나 전사들은 성벽을 지키느라 그 담을 따라 주욱 분산되어 있었기 때문에 조직화된 저항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수적으로도 치우천의 군대가 네 배에 달했다. 성안에 민간인들이 셀 수 없이 많았지만 모조리 구석에 숨고 엎드려 항복할 뿐이었다. 한동안 공상성 여기저기에서 소규모 접전이 벌어졌으나 싸움은 눈 깜짝 할 사이에 끝났다. 야율쿠리가 순식간에 동문을 접수했고 와난강, 와난수는 북문을 점령했으며 거서기, 삼, 부루벼락 등은 남문을 점령했다 그리고 쇠돌이와 초초룬이 식량창고와 무기창고에 불을 지르려던 창힐을 추적하여 그를 생포하는 데 성공했다. 정말로 눈 깜짝할 사이의 대승이었다 치우천의 전사들이 환호하며 미친 듯 좋아하는 모습을 보자 치우천은 다급하게 외쳤다.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엄지손가락 부대는 성안을 뒤져서 남은 지나 전사들을 잡아내라. 새끼손가락 부대는 무기고를 뒤져 화살과 활 등을 찾아내라!” “화살은 또 왜?” 부루벼락이 묻자 치우천은 웃으며 대답했다. “이제부턴 우리가 성을 지켜야 합니다, 벼락 형 주인이 바뀌었으니까요.” “그래! 그래! 천, 아니 천 대장, 대장님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부루벼락은 치우천을 만난 이래 처음으로 치우천에게 존댓말을 하며 껄껄 웃으면서 달려갔다. 야율쿠리, 초초룬, 와난강, 와난수 등도 이미 꽁꽁 묶인 창힐을 끌고 급히 치우천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창힐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치우천의 얼굴조차 쳐다보지 않았다. 와난강과 와난수가 다가오자마자 동시에 치우천에게 깊이 고개를 숙였다. “치우천님은 하늘이 내신 영웅이시오! 정말....... 정말........ 우리는 치우천님과 같은 때에 산 것만으로도 영광이오!” 말은 하지 않았으나 야율쿠리나 초초룬도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때 한 떼의 주민들이 우르르 치우천 쪽으로 달려왔다. 부하들이 제지하려 했으나 치우천은 그들을 알아보고는 황급히 외쳤다. “잘 해주었습니다! 잘 해주었어요. 정말 고생 많았습니다!” 그들은 “와” 달려와서 치우천을 얼싸안고 환호했다. 부하들은 깜짝 놀라 그들을 바라보았다. 특히 묶인 채 아무 말도 않던 창힐은 그들을 바라보고 기겁을 했다. “너....... 너희들은........!” 아직도 흙투성이 옷을 그대로 입고 있는 그들은 바로 창힐이 땅굴방어를 맡겼던 일꾼들이었다. 창힐은 그제야 모든 것이 이해가 되었는지 장탄식을 터뜨렸다. “네....... 네놈들이......! 그러면 네놈들이 서문 밑을 파서 성문을 무너뜨렸구나!” 그러자 일꾼들 중 우두머리였던 자가 씩 웃으며 머리를 쌌던 두건을 팽개치고 웃었다. “이제 아셨나? 하하핫!” 그들은 창힐의 명을 받고 방어용 땅굴을 파면서, 비밀리에 따로 굴을 파서 서문 밑을 파 들어갔던 것이다. 그리고 그 굴을 나무기둥으로 받쳐서 간신히 무너지지 않을 정도로 세워 두었다가 치우천의 부대가 다가오자 나무기둥을 넘어뜨려 서문을 붕괴시킨 것이다. 창힐은 넋이 나간 듯 외쳤다. “그럴 리가 없다, 그럴 리가.......!너희는 치우천이 공상에 오기 전부터 성에 있던 자들인데.......공상성의 모든 사람들은 하나하나 다 조사했었는데........!" 그러자 그 일꾼은 배를 잡고 웃어댔다. “우리는 싸움이 시작되기 몇 달 전부터 여기 들어와 살았다! 너희들의 얕은꾀로 우리 천 부족장의 꾀를 당해낼 것 같으냐? 응?” 그 일꾼 대장은 놀랍게도 바로 툰툰이었다. 툰툰은 미아우족이었지만, 지나족과 많은 싸움을 한 관계로 지나족의 말이나 모든 것에 능숙했다. 치우천은 이미 신시로 떠날 무렵부터, 유망과의 싸움은 공상에서 결판이 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툰툰과 수백 명에 달하는 작은 주신의 전사들을 공상성에 잠입시켜 살도록 했던 것이다. 그 작은 주신의 전사들은 바로 지난번 유망과의 싸움 때 유망의 군량미 수송을 끊었던 부대들이었다. 치우천은 그들을 미리 공상에 잠입시켜놓고 있다가 이번 작전을 구상한 것이다. 치우천은 유망이나 형천 등이 보통이 아니니, 농성을 하면서도 반드시 신원을 검사할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그 신원검사는 싸움이 일어난 후에 성으로 들어오는 사람을 의심하는 것에 그칠 것이 분명하리라고 확신했다. 치우천은 그 허를 찌른 것이다. 오히려 툰툰과 작은 주신 전사들은 그 이전부터 공상에 들어와 있었기 때문에 의심은 커녕 더욱 신뢰를 받았던 것이다. 물론 그때부터 땅굴 작전을 구상한 것은 아니었다. 울쿠타와 야쿠타가 땅굴 작전이 좋다고 주장한 것이 그 계기였다. 허나 그 작전은 너무 위험해 유망이나 형천에게 탄로 나기 십상이었다. 그래서 치우천은 그보다 한 단계를 더 뛰어넘은 계책을 세웠다. 울쿠타 야쿠타를 공상성에 잠입시켜, 툰툰에게 지나족을 도와 굴을 파는 척하다가 서문 밑을 파라는 계획을 알려준 것이다. 물론 울쿠타 야쿠타가 그들에게 며칠간 굴 파는 법을 가르쳐 준 것은 물론이다. 울쿠타 야쿠타는 결국 공상 성문이 닫힐 때 이방인이라고 쫓겨나긴 했으나 그들은 자신들의 임무를 다했다. 창힐은 이를 갈며 외쳤다. “치우천! 네 꾀는 대단하다! 그러나 서문은 이미 무너졌고, 염제 신농님의 군대는 이제 곧 도착한다. 너희와 똑같이 서문으로 들어와 너희를 모두 죽일 것이다!” 치우천은 창힐의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서둘러 대장들을 죽 돌아보았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닙니다. 야율쿠리, 초초룬, 와난강님, 와난수님은 가운뎃손가락 부대와 넷째 손가락 부대를 끌고 서문을 막아야 합니다. 급히요!” “서문을 다시 만들려면 오래 걸릴 텐데. 한나절만 지나면 놈들이올 텐데 언제.......” 와난수가 당황한 듯 말끝을 흐리자 치우천은 빙그레 웃었다. “왜 성문을 다시 만든다고 여기십니까? 아직 북, 남, 동문이 있는데요. 성에 문이 꼭 네 개 있어야 되는 것도 아니지요” “그렇다면.......” 그때 툰툰이 허허 웃으며 나섰다. “나에게 맡기시오. 여기 창힐님은 공상 성벽을 높이느라 정말 고생 하셨다요.” “무슨 소리요. 툰툰?” 와난수가 묻자 툰툰은 한바탕 크게 웃고는 대답했다. “공상 성벽을 높이고, 만에 하나 성벽이 상할 때를 대비하여 많은 돌들을 다듬어 쌓아 놓았다요. 그걸로 그저 쌓아 올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오!” 성벽을 쌓을 때는 무엇보다도 성벽을 쌓기 위한 돌을 자르고 다듬는 일이 가장 힘들다. 그런데 그런 돌들이 이미 충분히 준비되어 있다하니, 수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달려들면 한나절 만에 성을 대강 쌓을 수도 있었다. 허나 치밀한 와난강은 다시 치우천에게 물었다. “아무리 그래도 급히 쌓은 성은 그렇게 튼튼하지는 못할 텐데요?” 치우천은 조용히 대답했다. “튼튼할 필요가 뭐 있습니까? 유망의 군대가 화가 나서 들이치기는 하겠지만, 그들을 왜 겁내겠습니까?” ‘아하’ 하면서 와난강은 그 뜻을 이내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유망의 군대가 많기는 하지만, 정벌군이 아니었다. 치우천의 뒤를 추격할 목적으로 일부러 몸을 가볍게 하여 급히 달려 나간 군대다. 즉 식량이나 장비를 최소한으로만 갖춘 부대이니 절대로 성을 오래 공격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거의 이틀 동안 달리기만 한 지친 몸으로 사다리 하나 없이 견고한 공상성을 공격할 수도 없었다. 치우천은 창힐을 돌아보며 말을 건넸다. “유망님과 창힐님이 워낙 꼼꼼히 준비를 하셔서 공상성 주변에서는 풀 한 포기, 물 한 모금도 구하기가 어렵죠. 우리 대신 그렇게 열심히 방어준비를 해주셨으니 얼마나 고맙습니까?” “그러나 너희는 여기 갇혀 모두 죽는다! 너희의 본거지였던 아루타한 마을은 우리가 이미 점령했을 것이다! 유망님이 그곳을 근거지로 하면, 너희는 돌아가지 못한다!” 창힐이 악을 쓰자 치우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창힐의 눈을 바라보았다. “정말 창힐님의 지혜는 뛰어나군요. 그런데 아루타한 마을이 떨어졌다고 했나요?” “우리는 이미 아루타한 마을에서 네놈에게 연락병이 온 것을 알고 있다! 거지꼴이더군! 그 마을로 우리 만 오천의 전사가 갔으니 무사할 리 없다!” 치우천이 껄껄 웃으며 되받았다. “정말 미안합니다만, 연락병은 우리가 이겼다는 소식을 전해주려고 급히 오느라 그런 것뿐입니다. 제법 큰 싸움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아루타한 마을은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창힐은 경악을 금치 못해 통곡이라도 하고 싶었으나 억지로 눌러 참으며 외쳤다. “그럴 리가 없다! 너는 이만 명 모두를 끌고 이리 왔고, 아루타한 마을은 분명 텅 비어 있었는데!” 치우천은 짐짓 ‘아’ 하며 탄성을 터뜨리면서 말했다. “그건 그렇죠. 우리가 떠날 때는 텅 비어 있었죠. 하지만 마갸르나 미아우의 전사들이 계속 그리로 모여들었습니다. 여기 공상으로 온 것은 말을 가진 사람들뿐이었거든요 마갸르나 미아우, 아니 어느 부족이라도 나름대로의 힘이 있는 법입니다. 설마 마갸르나 미아우 전사가 고작 이만밖에 남지 않았다고는 보는 건 아니겠지요? 적어도 스무 천....... 아니, 이만 아니면 삼만은 더 모여들었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거짓말!” “거짓말이 아닙니다. 창힐님. 당신들의 작전도 훌륭했습니다. 그러나 미아우와 마갸르의 전사들은 여기 이만 명만 모인 것이 아닙니다. 저는 분명 말했죠. 말을 많이 지닌 사람만 나와 함께 가고, 나머지는 아루타한 마을에 모여 있으라고요. 당신들은 공상성이라는 껍데기 안에 꽉 갇혀 있어서 상황이 급히 변하는 것을 알 수 없었을 테죠. 그게 당신들의 가장 큰 약점이었습니다.” “아.......아....... 설....... 설령 이삼 만이 있었다 해도....... 그 눈먼 놈 말고는 제대로 된 대장이 없을 텐데.......” 치우천은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창힐님의 말을 그 사람들이 들었으면 몹시 서운했겠군요. 도단이는 단순히 눈먼 소경이 아닙니다. 더구나 몽골족의 큰 영웅인 보돈차르님과 치베가 제대로 된 대장이 아니라고요? 그럼 누가 제대로 된 대장입니까?” “뭐...... 라고?” 요원의 불길 같은 기세로 북방 몽골족을 통합해가는 영웅 보돈차르의 이름은 이미 창힐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칭힐은 그가 왜, 어떻게 아루타한 마을에 있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 말도 되지 않는다. 그 멀리 있던 자들이....... 어찌.......! 몽골쪽이 아무리 빠르다고 하지만 그럴 시간이 없었어!” 치우천은 타이르듯 차분하게 말했다. “창힐님, 분명 시간이 안되지요. 내가 신시를 나서면서 바로몽골족에게 사람을 보냈다 해도, 그 사람이 아무리 빨리 달려갔다 해도 지금쯤이나 연락이 닿았을 겁니다. 그만큼 멀리 있는 사람들이지요. 그러나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내게는 아주 더럽고 괴팍하면서도, 아주 재주가 좋은 벗이 한 분 계십니다. 짐작하시겠습니까?” 창힐은 자기도 모르게 크게 소리쳤다. “도깨비 왕 비울걸!” “맞습니다. 비울걸입니다. 제 나쁜 버릇입니다만, 저는 누구도 놀도록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그가 이번 싸움에 왜 안 나타났겠습니까? 그 사람 스스로가 말보다 훨씬 빠를뿐더러, 그의 도깨비들은 불과 며칠 만에 사람들이 몇 달 걸려 갈 길을 획 날아가 소식을 전해줄 수 있지요. 그래서 보돈차르 안다와 치베 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출발했고, 말 잘 달리는 몽골 전사들이라서 벌써 아루타한 마을에 도착한 것뿐입니다. 그러면 시간이 맞겠지요? 이미 저는 공상으로 오기 전에, 보돈차르 안다와 치베 안다에게 우리 뒷길을 지켜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 두 사람과 이삼 만이나 되는 전사가 있는데 왜 지겠습니까? 지나 대인족의 세 대전사도 한가락하는 사람들이지만, 불쌍한 신세가 되었더군요. 둘이 죽고, 위...... 라던가 하는 그 대전사만 부하들을 모두 잃은 뒤 어디론가 도망쳤다는데요?” “이.......이........” 창힐은 차분한 성격이었지만 분노를 이기지 못해 거의 폭발할 지경이었다 치우천은 창힐에게 다시 한마디 했다. “똑똑한 사람일수록 자기 꾀에 넘어가는 법이고, 단단하다고 생각한 곳이 실은 가장 약한 곳이 되는 법입니다. 창힐님, 유망님은 이제 갈 길이 없습니다. 비록 많은 전사들을 거느리고 있지만,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굶주리고 힘 빠진, 어디에 발붙일 곳도 없는 신세입니다.” “유망님은 반드시 공상을 다시.......” 창힐이 애써 반박하려 하자 치우천은 고개를 저었다. “하루치 먹을 것도 없는 판에 어떻게 버티려 할까요? 힘이 날까요? 명령이나 통할까요? 아루타한 마을도 막혔으니 북쪽으로 갈 수도 없겠지요. 굶주려서 거기까지 갈 수도 없을 겁니다. 더구나 이 일대 마갸르나 미아우족들 그 누구도 유망님을 좋게 생각하지 않을뿐더러, 유망님이 마을들을 죄다 불 질러 버려서 먹을 것도 구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남쪽으로 가고 싶겠지만 그 길은 멀고도 멀죠. 일이 그렇게 되었으니 유망님이 수십 년을 두고 길러낸 전사들은 먹을 것을 찾아서 모두 흩어져버릴 것입니다. 창힐님, 저는 당신을 잡았지만 해치지 않겠습니다. 유망님께 말씀을 전해주십시오 지나족은 이제 지나족의 땅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미아우의 땅 한가운데 있는 이 공상성, 더구나 이렇게 단단하게 잘 정비한 공상성이 버티는 이상, 미아우의 땅은 여기 살던 미아우족에게 넘기고 돌아가야 할 겁니다 유망님은 욕심이 너무 크셨습니다. 그저 자신의 땅에서 사셔야 합니다.” 창힐은 듣다못해 분이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그만 기절해 버리고 말았다. 치우천은 조용히 고개를 저으며 다시 방어계획을 지시하기 시작했다. 야율쿠리와 초초룬, 와난강, 와난수는 급히 툰툰과 함께 부하들을 몰고 가서 무너져 내린 서문을 치웠다. 그리고 창힐이 미리 쌓아두었던 석재로 서문을 막으며 쌓아 올리기 시작했다. 알한과 무라는 공상성 안의 식량과 무기들이 엄청나게 쌓여 있다고 보고했다. 더구나 치우비가 공상성 안의 어느 창고 문을 부수고 들어갔다가 막대한 양의 가공되지 않은 구리덩이와 주석덩이들을 발견했다. 유망이 구리 무기에 욕심을 가지고, 어떻게든 구리 무기를 제작하려고 오랫동안 모아둔 것이 분명했다. 치우천은 다른 것은 그냥 가볍게 보아 넘겼지만 그 금속들을 보고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유망은 역시 대단한 사람이구나. 이렇듯 엄청난 양의 구리를 모아두었다니! 이렇게 많은 구리로 실험을 하도록 내버려두었다면 유망도 구리 무기를 대량으로 만들었을 것이고, 어쩌면 세상을 뒤엎었을지도 모른다! 정말 이건 대단하구나!” 치우비도 흥분을 감추지 못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형, 그러면 불쇠 할아범도 불러야 하겠네? 불쇠 할아범이 보면 기절할 거야. 이 정도라면 우리 군대 모두가 구리 무기를 갖겠는걸!” 치우천은 웃으며 치우비를 바라보았다.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런데 구리 무기를 그렇게 함부로 흩는 것은 안 된다.” “왜?” “구리 무기 하나가 몇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지 모르지는 않겠지? 너무 많은 구리 무기를 흩으면, 그중 여러 개는 못된 놈이나 적의 손에도 들어갈 수 있다. 이건 신중하게 써야 한다.” “그렇긴 해.” “좌우간 불쇠 할아범을 불러야겠구나. 지금 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이 구리를 잘 사용하는 일도 중요하다.” “그런데 불쇠 할아범하고 울라트, 질쾌에게 대체 무슨 일을 맡겼던 거야?” 치우천은 치우비의 질문을 가볍게 웃으며 받아넘겼다. “그건 차차 알게 된다.” 치우비는 휴 한숨을 쉬며 말끝을 흐렸다. “좌우간 형은 역시 대단해. 이 공상이 이토록 쉽게 우리 손에 넘어오다니 말야.......” “뭐다고? 이 녀석 좀 보게나.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쉬웠다고 하느냐?” “하하...... 그래, 쉽진 않았지. 다만 피를 적게 보고 빼앗아서 정말 다행이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치우비도 정말 속으로 감탄했다. 이 거대한 공상성을 빼앗는데 아군에서 죽은 사람은 고작 삼백여 명이었으며, 그중 태반은 사고나 명령불복종의 처단 등에 의해서였다. 공상성을 수비하던 지나족 역시 천여 명이 죽었을 뿐 사천여 명은 그대로 사로잡혔다. 이렇게 큰 싸움에서 이렇듯 적은 사상자만으로 목적을 달성한 예는 지금껏 없었다. 치우비가 그 정도로 놀랐을 정도였으니, 다른 사람들의 놀라움은 몇 배 더했다. 유망과 형천, 축융이 기진맥진하여 돌아왔을 무렵에는 이미 공상성의 서문은 돌 벽으로 막혀 있었고, 성벽 위에는 치우천의 군대가 그득했다. 그들은 모두 기뻐 웃고 소리치며 유망의 군대를 놀려댔다. 유망은 분노로 속이 뒤집힐 것 같았으나 방법이 없었다. 지나 전사들은 극도로 지쳐 있었으며 가진 것도 없었다. 추격전을 나간 상태라 무장은 갖추고 있었으나 성을 공격할 사다리도, 하루치의 식량도 없었다. 치우천이 성벽 위에서 외쳤다. “유망님, 이제 공상은 미아우족의 손으로 다시 들어갔습니다. 그러니 남의 땅을 넘보는 욕심을 버리고 원래 지나족의 땅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1 안 그러면 당신의 그 많은 전사들은 모두 굶어죽을지도 모릅니다. 서로의 땅을 지키면서 평화로이 살아도 충분한데, 왜 부질없는 욕심을 내십니까?” 치우천이 비아냥거리는데도 유망은 놀랍게도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을 뿐, 조금도 태도의 변화를 보이지 알았다. 오히려 형천과 축융이 더 화가 나서 펄펄 뛰었으나 유망은 되레 그들을 제지했다. “그만해. 내가 진 거야.” “염제 신농이시여! 허나........” 형천과 축융은 너무도 분하고 억울하여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으나 유망은 싱긋 웃을 뿐이었다. “이봐들, 왜들 우는 거야? 젠장, 우리가 다 죽었나?” 유망은 축융과 형천의 뒷덜미를 잡아 고개를 획 치켜 올리더니 말을 이었다. “눈 똑바로 뜨고 봐라. 우린 졌어. 제길, 실수한 것도 아니고, 할 수 있는 데까지 안 해본 것도 아냐. 그래도 진 건 진 거야! 그것도 완전하게! 젠장, 망할! 저놈은 괴물이야! 나, 염제 신농이 말한다. 우린 졌다. 그러니 깨끗이 물러가자. 젠장, 창피하구나! 창피해!” 유망은 돌연 성벽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큰 소리로 외쳤다. “치우천! 이 빌어먹을 놈아 네 놈이 이겼다! 허나 네 놈에게 한마디 묻고 싶다!” 치우천도 차분하게 맞받아 외쳤다. “말씀하십시오, 유망님.” “다리는 괜찮으냐?” 치우천은 유망이 뜻밖의 말을 하자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으나 이내 침착하게 대답했다. “많이 좋아졌습니다만 아직은 조금 불편합니다. 유망님말고는 누구도 고칠 수 없다고 하더이다.” “그러냐? 하하핫! 그렇단 말이지?” 유망은 미친 듯이 웃더니 다시 외쳤다. “치우천! 내가 언젠가는 네 다리를 깨끗이 고쳐놓겠다! 알겠지?” “고마우신 말씀입니다!” “하하핫, 치우천! 나는 이제 나를 이상하게 만들던 연기를 끊었다. 알고 있느냐?” “들은 적이 있습니다. 축하할 일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유망과 치우천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치우비나 알한도 그렇고, 형천이나 축융조차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때 유망이 다시 외쳤다. “조금만 지나면 남쪽에서 우리의 수많은 남쪽 전사들이 온다. 그들을 막을 수 있겠느냐?” 치우천은 역시 담담히 되받았다. “준비한 바 있습니다.” “너 없이도 말이냐?” “무슨 말씀이신지요?” “나 유망은 더러운 놈들과는 맺어지지 않겠다. 그런 놈들 힘을 빌려 너를 이기고 싶지는 않구나! 너는 얼른 주신으로 가야만 실 것이다! 똑똑한 놈이니, 내 말뜻을 알겠지?” 치우천은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유망이 다시 외쳤다. “우리 둘이 누가 더 부하들을 잘 키웠나 한번 보자. 물론 나도 돌아가야 한다. 허나 너 없이 공상이 지켜진다면, 나도 다시는 공상을 건드리지 않겠다. 허나 공상이 떨어진다면, 주신까지도 무사하지 못할 줄 알아라!” 치우천은 잠시 생각하다가 곧 정중하게 외쳤다. “염제 신농님의 뜻, 받들겠습니다!” 치우천은 지금까지 유망을 일컬을 때 항상 “유망님”이라고 발했다. 그러다가 지금 이 자리에서 처음으로 ‘염제 신농’이라는 경칭을 사용했다. 유망은 호탕하게 웃으며 물었다. “창힐이 안에 시지? 아직 살아 있겠지?” “그렇습니다.” “그를 돌려보내 나더러 돌아가라고 할 생각이었나 보지?” “맞습니다.” “그러면 됐다. 난 돌아갈 테니, 창힐에게 보여줘 봐라. 네가 공상을 지키는지, 못 지키는지! 그러면 됐다! 다시 보자!” 그리고 유망은 곧바로 명을 내려 서쪽으로 군대를 몰고 사라져 버렸다. 뒤를 쫓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치우천은 그런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치우비와 알한 등의 대장들은 치우천에게 궁금하다는 듯 눈길을 보냈다. 치우천은 그 시선들을 의식하고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왜들 그래?” “형, 유망이 무슨 소리를 한 거지?” “너는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느냐?” “반 정도밖에는 모르겠어.” “반은 알았느냐?” 치우천은 아우가 대견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번에는 알한이 나섰다. “저는 하나도 모르겠습니다. 유망이 윌 어쩌자는 것이고, 치우천님은 또 어찌하실 건가요?” “알한님은 내가 어찌했으면 좋겠습니까?” “제가 어떻게 압니까? 유망이 무슨 속으로 그런 소리를 한 것입니까?” 치우천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유망이 드디어 기지개를 켠 겁니다. 이제부터의 유망은 예전의 유망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강해질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저는 주신으로 급히 돌아가야 합니다.” “공상을 빼앗았으니 주신에도 가보셔야겠지만, 방금 남쪽에서 수 많은 군대가 올라온다지 않습니까?” “일단 모두 모이도록 해주십시오.” 유망이 순순히 물러갔기 때문에 사람들은 웃고 떠들며 기뻐하고 있었다. 그런 차에 치우천이 부르자, 모두는 급히 치우천에게로 달려왔다. 사울아비들 중 가장 연장자인 부루벼락이 쇠돌이, 거서기, 삼, 부달 등을 앞세우고 일제히 치우천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뭡니까, 벼락 형?” “나, 주신의 사울아비 스승 부루벼락이 말씀 올립니다. 이제 치우천님은 말씀을 높이지 마십시오.”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짓입니까? 무슨 말을.......” 부루벼락은 눈을 빛내며 정색을 하고 되받았다. “공상을 넉 달 만에 떨구면 치우천님은 웃뜸 사울아비가 되기로 하셨습니다. 이것은 한웅님께서 직접 하신 약속입니다. 이제 공상을 떨구셨으니, 치우천님은 웃뜸 사울아비십니다. 주신의 수많은 사울아비들을 모두 부리실 수 있는 웃뜸 사울아비가 되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날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웃뜸 사울아비로서의 체면과 위엄을 갖추십시오. 그래서 주신을 바로잡아 주십시오!” 부루벼락은 평소의 빈정거리고 장난기 어렸던 것과는 딴판으로 정중한 표정에 위엄 있게 눈을 빛냈다. 그러나 치우천은 허탈한 듯 웃어 보이며 뜻밖의 말을 건넸다 “아직 신시로 돌아가지 않았으니, 그 약속은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웃뜸 사울아비는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제가 아니라, 비가 웃뜸 사울아비가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보다도 치우비 지신이 놀라 펄쩍 뛰었다. “형! 그게....... 그게 무슨 말이야!” “못 들었느냐? 네가 웃뜸 사울아비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치우천이 다시 강하게 말하자 이번에는 부루벼락과 다른 사울아비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비가 가장 강한 것은 알지만, 그래도 자네의 머리가 없이는 결코.......” 말을 거의 하지 않던 부달마저도 조용히 말을 했지만 치우천은 고개를 저었다. “제가 웃뜸 사울아비가 되려고 하면 일을 망칩니다.” “무슨 소리인가?” “한웅님께서는 분명 저와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귀족들은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절름발이가 웃뜸 사울아비가 되려 한다고 수군거리며, 이 핑계 저 핑계로 깎아내릴 것입니다. 겉껍데기만 남은 웃뜸 사울아비 자리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웃뜸 사울아비는 제가 아니라, 가장 강한 사울아비인 비가 되어야 합니다.” 치우천은 정연하게 설명했다. 그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래도 쉽게 납득할 수 없었다. 허나 치우비는 달랐다. 비는 한참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이윽고 말문을 열었다. “형님 말이 맞는 것 같아. 내가 하는 게 낫겠어.” 치우천은 아우가 대견하여 씩 웃으며 되받았다. “맞다. 네가 하나 내가 하나 어차피 우리 형제에게는 마찬가지 아니냐? 내 머리를 쓰지 않으면 안 되고,네가 힘을 써주지 않아도 안 되는 거야.” 치우비 역시 웃으며 사람들에게 말했다. “다른 분들도 아무 말 마십시오. 그깟 자리에 오르고 말고는 문제가 아니지만, 제 생각에도 정말 그래야 뭔가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모인 사람들 중에서도 은근히 치우천을 더 믿는 사람들과 치우비를 더 따르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지금 저 두 형제에게는 조금의 의혹이나 욕심 같은 것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도리어 그들은 잠시나마 속된 생각을 했던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며 입을 다물었다. 그때 치우천이 흐뭇한 표정으로 치우비를 쳐다보았다. “아우야, 왜 그래야 하는지 너도 다 아는 것 같구나. 네 입으로 말씀을 드려라.” “그래야 해?” “어서.” 치우비는 잠시 멈칫했으나 형이 눈짓을 하자 몇 번 헛기침을 하다가 어울리지 않게 수줍은 듯 입을 열었다.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우리 일은 공상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신시를 깨끗이 하는 것이 또 다른 큰일입니다. 그런데 형님이 웃뜸 사울아비가 되면 번잡한 일에 휘말려서 다른 일들을 준비할 수 없을 것입니다. 둘째, 형님이 말한 대로 귀족들이나 다른 자들 이 걸고넘어지는 일이 많아져 몹시 번거로울 것입니다. 저희가 신시에 있을 때만 해도, 우리 형제를 해치려는 녀석들이 숨어든 적까지 있습니다. 허나 제가 그 자리에 오르면 그나마 나을 겁니다. 귀족들도 겁을 좀 낼 거고, 함부로 시비도 안 걸 테고, 어떻게 나오든 제가 막기 도 쉬울 거고요.“ 그 말에 사울아비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치우천은 병약한 자라해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무시했지만, 치우비에게는 그리 만만히 대할 수 없을 것이었다. 심할 경우 암살의 위협이 끊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 경우 치우비라면 훨씬 더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거서기가 나섰다 “하지만 자네 형제.......” 그때 부루벼락이 눈을 부라리자 거서기는 곧 당혹해하며 말을 바꾸었다. “아니, 죄송합니다. 신시의 그 귀족놈들도 항상 같이 생각한다는 것을 알 것 아닙니까? 혹시 그래도 놈들이 치우천님을 노린다면.......“ 그 말뜻을 이해한다며 치우천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거서기 형, 우리 형제가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조금 낫고 덜한 것이 있다오. 내가 웃뜸 사울아비에 있다가 죽으면 비는 그냥 보통사울아비 큰스승일 뿐이오. 별달리 큰 힘을 쓸 수 없지요. 그러나 아우가 웃뜸 사울아비에 있을 때 내가 죽으면, 아우는 가만있지 않을 거요. 웃뜸 사울아비로서 모든 힘을 모아 귀족들과 사생결단을 낼지도 모릅니다. 놈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그런 짓은 함부로 못할 겁니다.” 그 말은 맞는 말이었다. 결국 치우비는 치우천의 정책을 수행하는, 일종의 안전장치 같아 보였다. 그때 부달이 다시 입을 열었다. “놈들이 비님을 노리면? 한 놈 한 놈으로는 비님을 당할 놈이 없겠지만, 사람을 죽이는 방법이 꼭 칼을 쓰는 것만 있는 것은 아니잖소.” 그러자 삼이 대신 되받았다. “그렇긴 해도 이 방법을 쓰면 적어도 칼에 죽을 위험은 많이 줄어드는 것 아니오.” “내가 옆에 있으면 적어도 두 사람이 독에 당하는 일은 없을 걸!” 초초룬의 말에 이어 알한도 한마디 끼웠다. “저도 힘이 될 겁니다. 그리고 여러분 모두가 힘이 되어 준다면, 놈들이 어떤 해를 끼치지는 못할 겁니다. 그리고 제아무리 주신이라도 치우천님의 머리를 뛰어넘는 놈은 없을 겁니다.” 그제야 사람들은 완전히 승복을 했다. “끝으로 주신 사울아비 모두가 형님을 아는 것은 아니지요 소문만 듣고 비웃는 사람도 있을지 모의고, 형님의 힘만 보려는 자들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럴 경우 형님이 좀 곤란해집니다. 적어도 제가 그 자리에 오르면, 힘으로 넘보고 도전하는 놈들은 다 밟아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울아비들을 하나로 만들어야 우리가 신시를 정리하고 한웅님의 힘을 되찾는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치우비가 정연하게 말하자 사람들 중 쇠돌이가 중얼거렸다. “에휴, 누군 좋겠다. 힘만 센 줄 알았더니 머리도 우라지게 좋구먼 그려. 헤헤헤.” 부루벼락이 다시 쇠돌이 쪽으로 눈을 부라렸으나 치우천이 호탕하게 웃었다. “쇠돌이, 고맙네그려. 비 녀석은 원래 머리도 좋았다네. 생각하는 걸 귀찮아해서 그런 것뿐이지.” 치우비는 부끄러운 듯 뭐라고 중얼거렸으나 들릴 정도의 소리는 아니었다. 그러자 치우천이 여전히 웃음기를 머금으며 말했다. “좌우간 그 일 때문에 저는 어서 신시로 돌아가야 합니다. 귀족들이 공상이 벌써 떨어졌다는 것을 알면, 틀림없이 무슨 술책을 부릴 것입니다. 하루라도 빨리 제가 신시로 가 있어야 뭔가 대책을 세울 수 있거든요. 유망도 대단한 영웅이긴 합니다. 졌는데도 오히려 더 당당해지다니.” “그런데 유망이 한 말은 무슨 뜻이오?” 와난수가 묻자 치우천은 조용히 대답했다 “유망은 이제 주신의 귀속들과는 관계를 끊을 것입니다. 아니, 귀족들이 유망의 이용가치가 없다고 여길지도 모르죠. 그는 이제 저와 내기를 건 셈 입니다.” “공상성을 두고?” “그렇다고 봐야죠. 유망은 제 사정과 주신 사정을 훤히 아는 것 같습니다. 머서 가라고 충고까지 해주고요.” “그 사람이 다리를 고쳐준다는 건 무슨 소리요?” “이야기를 하자면 깁니다만, 뭐 간단하게 말하면 반드시 자기 손으로 저를 이겨보겠다는 거죠 같은 입장에서요.” “같은 입장?” “저는 아직 다리를 절고, 유망은 기이한 연기에 취해 살던 사람입니다. 유망은 지금껏 세상 사람을 우습게 보았는데, 정말 정신을 차린 것 같더군요 앞으로는 정말 무서운 사람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래 봤자 아닌가?” “유망은 절대 가벼운 사람이 아닙니다. 불과 몇 년 만에 수많은 미아우와 마갸르족을 짓밟은 것을 보십시오. 반쯤 미쳤을 때도 형천이나 축융 같은 사람들이 그를 절대 버리지 않는 것을 보십시오. 그 사람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사람들은 치우천이 정색을 하자 덩달아 숙연해져서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그럼 혼자 가는가?” 좀 어색해진 분위기를 깨려는 듯이 툰툰이 묻자 치우천은 웃어 보였다. “이번 공상을 떨구기로 할 때 한웅님과 웃뜸 사울아비만 약속한 것이 아닙니다. 성공하면 작은 주신은 모두가 주신 사람이 됩니다.” “그건 알고 있네만.” “귀족들이 질리도록 싫어하는 것이 바로 그 점입니다 그걸 막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제가 신시로 올라가는 도중에 죽이는 겁니다.” “그건....... 그렇겠지.” “그런데 주신의 귀족들도 작은 주신 전사들이 대단하다는 걸 압니다. 그러니 저 하나 죽이려고 한두 명을 보내지는 않을 겁니다, 하하. 아마 유망과 싸울 때보다 더 힘들지도 모르죠.” 사람들은 소름이 끼치는 것 같았다. 야율쿠리 등 다른 부족의 대장들은 설마 하는 표정을 지었으나 주신에서 온 사울아비들의 표정은 달랐다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다.” 부달이 이를 갈 듯이 말하자 부루벼락도 외쳤다. “사울아비들을 동원할 수도 있고, 주변의 다른 부족들을 움직일 수도 있다. 주신의 이름으로 부탁하면 이 일대에서 나서지 않을 부족이 없으니까.” 치우천은 머리를 긁적였다. “제가 가장 곤란하다고 여기는 것은, 제가 일껏 도와드린 분들과 싸워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와난강과 와난수가 부르짖었다. “무슨 소리요? 이 근처 마갸르와 미아우족 중에서는 그런 짓을 할 부족이 없소이다!” 치우천은 고개를 저으며 침통하게 말했다. “아닙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저는 저 혼자 힘으로 여러분을 구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주신 한웅님의 명령을 받고 왔습니다. 만약 주신에서 치우천을 죽이라는 명령이 내려온다면 여러분들의 부족장들은 과연 어떻게 할까요? 많이 괴로워할지도 모릅니다만 결국은 주신의 말을 들어줄 것입니다. 은혜를 베푼 것은 제가 아니라 주신이니까요.” “주신에서 해준 거라고는 사울아비 삼천을 내준 것뿐이오! 그나마 한 명도 도움이 되질 않았잖소.” 와난수가 벌컥 화를 내자 치우천은 정색을 하며 되받았다. “그건 아닙니다. 그런 명령을 받지 못했으면 혼자 올 수도 없었고, 부족장들이 모이지도 못했을 것이며, 미아우나 마갸르 전사들이 이렇게 뭉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더구나 여기 벼락 형, 삼 형,부달 형, 쇠돌이, 거서기가 어찌 저를 도왔겠습니까? 제가 모두 한 일이 아닙니다. 주신의 힘을 업었기에 저도 성공한 것입니다.” “그러면 어쩌려는 거요?” “저를 죽이러 올 사람들도 주신 편에 있는 사람들뿐입니다. 그러니 싸우지 않고 가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여기 모인 전사들만 아니라 거기에 야율쿠리, 초초룬의 부대들도 이제야말로 정말 필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수만 명을 끌고 가는 거요?” “갈 수 있는 한 가장 많은 수를 데리고 가야 합니다. 핑계를 만들어줄 수 있을 만큼 많아야죠. 안 그러면 섣불리 전쟁이 나서 피가 흐릅니다. 어떻게 한사람이라도 다치게 할 수 있습니까? 아예 싸움이 안 나도록, 날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이거야말로 대장으로서 할 일인 겁니다.”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유망의 십만 대군을 물리친 치우천이 몇 만 명의 전사를 끌고 북상한다면, 아무리 주신에서 명령을 내려도 그들과 싸울 멍청이는 없을 터였다. 또한 저쪽에서 아무리 닦달해도 상대가 안 된다며 거절만 하면 되는 것이다. 야율쿠리는 키탄족이라 직접적인 관계가 없었으나 스스로의 부족들이 절실한 관계에 있던 초초룬, 와난강, 와난수, 툰툰이 동시에 말했다. “치우천님의 마음에 우리는 정말 감사드립니다. 미아우와 마갸르 모두 치우천님의 은혜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항상 걸걸하던 초초룬마저도 틀에 박힌 소리를 하자 야율쿠리가 뒤에서 뭐라고 놀렸으나 초초룬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부끄러워하지도 않았다. 도리어 초초룬은 눈을 빛내며 치우천을 바라보며 말했다. “미아우의 초초룬 부족장이 말합니다. 우리는 벗이지만, 이건 더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나는 격식을 따지는 게 세상에서 가장 싫지만 그래도 이 말만은 해야겠습니다! 우리 미아우족에게, 치우천님은 너무 큰 은혜를 베풀었고 모두를 살렸습니다. 앞으로 내가 앞장서서 미아우족 모두는 치우천님을 잊지 않도록, 영원히 부모로 생각하고 은인으로 생각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도 진지하게 말해서 치우천마저도 입을 굳게 다물고 정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주신의 사울아비 큰스승 치우천이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하오, 초초룬 부족장.” 초초룬도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윽고 눈에 긴장을 풀고 한 숨 쉬 듯 말했다. “거 참, 정말 싫어했던 짓인데....... 죽기 전에 내가 이런 소릴 할줄 몰랐어.” 초초룬이 다시 걸걸하게 말하자 치우천도 표정을 풀고 장난스레 되받았다. “초초룬, 나도 정말 놀랐다. 근데 멋지던데?” “제기랄! 뭐가!” 그러면서 초초룬이 얼굴을 붉히자 야율쿠리가 놀렸다. “멋지다, 멋져! 초초룬 아주 여자답구나......” “너....... 죽고 싶으냐?” “그러면서 그런 소리는 어떻게 했어?” “뭐....... 해보니 못할 짓은 아니데. 히히.” 두 사랑의 대화에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치우천도 웃으며 모두에게 말했다. “우리도 언젠가는 그렇게 딱딱하게 말해야 할 날이 올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렇더라도 우리 모두는 벗입니다. 나도 영 어색하군요. 앞으로 중요한 일은 그렇게 하더라도 우리끼리 있을 때는 언제까지나 지금처럼 이야기하기로 약속합시다. 웃뜸 사울아비니 뭐니 아직 된 것도 아닌데 너무 딱딱합니다.” 치우천이 제안하자 가장 먼저 치우비가 긁적거리며 되받았다. “거, 정말 그래요 벼락 형까지 그러니, 내가 정말 못 견디겠네요, 하하.” 사람들이 다시 한 번 웃음을 터뜨리자 어색한 분위기가 풀렸다. 그러다가 야율쿠리가 물었다. “헌데 공상으로 유망의 남쪽 군대가 온다는데, 그건 어쩌고? 공상은 비워놓을 거야?” 치우천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여길 지킬 사람은 따로 있으니 걱정 마.” “누가?” “잊어버렸나? 삼천 사울아비들이 있잖아.” “뭐? 그 맥빠진 푸성귀 같은 놈들이 어떻게.......” 야율쿠리가 기가 막힌 듯 외치자 치우천은 싱긋 웃었다. “하지만 그들도 사울아비들이야. 주신 사울아비를 우습게 보지말게. 그들은 못 싸우는 것이 아니라, 안 싸우려 했던 것뿐이야. 허나 공상에 가둬두면 사정이 다를걸?” “무슨 소리야?” “그들이 받은 명령이 뭐겠나?” “그거야....... 공상을 점령하지 못하게 하라는 거겠지.” “그래. 허나 나는 공상을 이미 점령했어. 그들도 허탈하겠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지도 몰라 그런 와중에 그들을 공상에 두고 가버리면 그들이 어지할까? 더구나 적들이 밀려오면? 유망의 군대가 그들과 나를 딴 사람으로 생각해줄 리 없다는 사실을 그들도 잘 알고 있을건데?” 이번에는 쇠돌이가 물었다. “허나 공상을 버리고 도망가면유?” “그럴 수 없지. 그러는 것은 싸우다가 도망가는 것이 아냐. 그렇게 해도 나는 이미 공상을 떨군 것이고, 그 공상을 그들이 잃는 것뿐이야. 나는 곧 떠날 테니 책임도 없고, 공상을 퇴빼앗기면 그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못 돼. 그리고 그들은 그래도 사울아비들일세. 아무리 명령을 받아도 제 손으로 공상을 버리는 짓은 추호도 못 할 것이고, 그러는 사이 유망의 군대가 들이칠 것일세. 싫건 좋건 죽지 않으려면 싸워야겠지.” “그들의 수는 삼천뿐인데.......그게 될까?” 툰툰이 걱정스레 말하자 치우천은 고개를 저었다. “사울아비들을 추릴 때에는 고시울률님만 한 것이 아닙니다. 비렴님도 함께 추리셨어요. 이건 그들이 실제로는 아주 강한 사울아비들이란 소리입니다. 다만 고시울률님이 어떻게든 잘 싸우지 않도록 입김을 넣었을 뿐이죠. 그러나 저는 그들도 사울아비들이라 믿습니다. 그들 모두가 썩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다만 그들도 공상을 떨구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믿고 고시울률님의 뜻에 따르기로 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허나 막상 공상을 얻었고, 주위를 적이 에워싸는데도 그냥 도망갈 자들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때 부달이 조용한 목소리로 나섰다. “솔직히 말하게. 자네는 그들도 버리거나 적으로 만들지 않고 깨우쳐서 받아들이자는 거지?” 치우천은 부달이 자신의 참뜻을 알아주자 고마운 마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들도 소중한 주신의 사울아비들입니다. 부달 형.” 부달이 조용히 되받았다. “그런 놈들까지 버리지 않고 감싸 안다니. 귀족이란 놈들이 자네의 반의반만 되었어도 주신이 이 꼴은 안 되었을 걸세. 나는 여기 남아 있겠네. 그놈들이 머리가 안 돌아가면, 내가 일깨워주지.” “부달 형이 그래주신다면 정말 고마울 뿐입니다.” “그러면 내가 앞장설게.” 치우비가 몸을 돌리려 하자 치우천이 웃으며 말렸다. “비야, 너는 같이 갈 필요가 없단다.” “뭐? 그러면 나는 윌 하지? 공상을 지킬까? 아무래도 내가 형하고 같이 가야 해. 나는.......” 치우비가 고집을 쉽게 꺾지 않을 것 같자 치우천이 재빨리 말했다. “아니, 너는 할 일이 있지.” 치우천의 말에 치우비는 고개를 갸웃했다. “너, 보고 싶은 사람이 있지 않니? 이때가 기회다.” 그 말을 듣자마자 치우비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 모습을 보며 치우천은 속으로 생각했다. “녀석....... 좋긴 좋은가 보구나. 하지만 비야. 너를 계속 위험한 데에만 둘 수는 없단다. 너도 너 하고 싶은 일도 해야지.” 그러면서 치우천은 무라가 자신의 얼굴을 돌 같은 표정으로 조용히 보고 있음을 느꼈다. 치우천은 살포시 아주 옅은 미소를 보냈다. 치우천의 속마음을 읽은 것은 무라밖에 없는 듯했다. 전몽희와 만나다 지난번 우씽과의 기마전에서 넘어졌을 때 치우비는 크게 다치지 않았지만 치우비의 말 ‘구름’은 넘어져서 봬나 다쳤다. 다행히 다리가 부러지지는 않았지만 한동안 치우비의 큰 몸을 싣고 빨리 움직이는 데는 무리가 있었다. 치우천은 대신 ‘높은뫼’를 빌려주어 치우비는 지금 그 말의 등에 올라타 달리고 있었다. -그때 상망이 하백족을 만나러 가면서 분명 발도 데리고 온 것 같았다. 그때는 우리도 큰 싸움을 앞두어서 일부러 말하지 않았단다. 서둘러 가면 만날 수도 있을 게다. 발이 함께 온 것을 보면 일이 힘들거고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 일이 잘되었다 해도 얼굴은 볼 수 있을게다. 이제 너는 주신의 웃뜸 사울아비가 될 것이니 헌원에게 당당히 요구할 수도 있다 가서 만나거라. 치우천이 웃으며 하던 말들이 치우비의 귓가에 쟁쟁하게 맴돌았다. ‘발! 내가 간다! 내가 가!’ 치우비는 생각만 해도 좋은지 계속 미소를 지으면서 달리는 말에 박차를 가했다. 치우비의 뒤에는 세 사람이 따르고 있었다. 바로 도깨비 리미, 개르, 마냥이었다. 치우비는 새로 만든 요새에 다다르자마자 차오스와 유창을 불렀다. 그들은 치우천이 공상 싸움을 할 동안 하백족을 살피고 있었다. 차오스가 투덜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공상을 얻으셨다면서요? 거 참, 나 차오스도 거기 한 몫 했어야 하는 건데.”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합시다. 상망은?” 치우비가 급히 묻자 유창이 남자답지 않게 곱게 웃으며 나섰다.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치우비님. 그동안 제가 하백족 사이에 들어가 좀 알아낸 것이 있습니다.” “아이쿠, 또 너냐?” 치우비는 묻지 않은 것까지 장황하게 설명하는 수다쟁이 유쌍이 나서자 마음이 답답했다. 그러나 뭐라 대놓고 말할 수가 없어 급히 물었다. “혹시 상망과 발님이 같이 오지 않았더냐?” “어? 제가 말씀드리려 했는데, 알고 계셨나요?” ‘역시 형님의 생각은 틀림없구나!’ “동안 저는 물건들을 좀 가지고 가서 하백족에게 장사를 하면서 인심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간신히 알아낸 이야기들이 있지요 차근차근 들어보세요. 아주 힘들게 알아낸 중요한 이야기들이니까요.” “알았다. 말해보려무나.” 치우비는 곧 마음을 가라앉히고 유쌍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하백족은 다른 부족과는 조금도 연관을 맺지 않고 물을 벗 삼아 살아가는 부족입니다. 그래서 전사들은 적습니다만, 부족 사람 모두가 아주 물에 능숙해서 반은 물고기 같답니다. 더구나 하백족에는 특별한 주술사가 많은데.......” “상망과 발님 이야기부터 하면 안 될까?” “뭐든지 차근차근 들으셔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걸 다 알아내느라 저도 힘들었고, 이 이야기를 들으셔야 나중에 도움이 될 겁니다.” “알았다, 알았어. 이야기 해봐라.” 유쌍은 치우비의 급한 심정을 이해하는 듯 씩 웃어 보였다. 치우비는 누가 유쌍에게 자기 이야기를 한 것 같아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하백족은 원래 여자 선인이신 오로파라님의 후손들이라고 하지요. 몇 백 년 전의 여자선인이셨는데 그분은 두 명의 따님을 두었습니다.” “선인님도 따님을 두시나?” “낳아 기른 따님일 수도 있지만, 데려다 기른 따님일 수도 있지요. 좌우간 그 두 따님 중 한 분은 오로파라님의 가르침을 받아 물에서 살 수 있는 재주를 알고 계셨지요. 진오라는 분이신데, 그분이 바로 하백족을 세운 분이라고 합니다.” “선인님들은 죽지 않는다던데 오로파라님은?” “그분은 두 따님을 세상에 보내고 하늘로 오르셨답니다. 그런데 둘째 따님도 계셨지요 그 둘째 따님은 오로파라님의 뒤를 이어 선인의 대를 이으셨는데, 아주 유명하신 분입니다. 그분의 이름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실 겁니다.” “그분이 누구신데?” “타타츄이트! 모든 벌레들의 어머니이신 타타츄이트라고 불리는 분이십니다.” 치우비도 그 이름은 어디서 들은 것 같았다. 그런데 금방 생각이 나지 않아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갑자기 소리쳤다. “타타츄이트! 맞다! 그러면 초초룬의?” 유쌍은 헤헤 웃으면서 장난처럼 애늙은이같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분은 모든 벌레들을 부리실 줄 아는 신기한 도를 닦으셨지요.” “혹시 그렇다면 초초룬이 타타츄이트님의 가르침을 받아 그런 재주를 가지게 된 걸까?” “그럴 겹니다. 그런데 초초룬님말고도 타타츄이트님의 가르침을 받은 분이 또 계시지요 한 사십 년쯤 전에요.” “흠, 신기한 이야기이기는 하구나. 그런데 지금 그런 것을 왜 다 알아야 하지?” “관계가 있다니까요! 사심 년쯤 전에, 세상에는 타타츄이트님의 가르침을 받은 여자분 한 분이 세상에 나오셨지요. 그분은 지나족이셨으며, 후에 화산족의 젊은 영웅과 짝을 이루셨지요.” “가만.......화산족? 그러면 혹시.......?” 치우비가 뭔가 짚이는 게 있다는 듯이 말끝을 흐리자 유쌍이 눈을 빛냈다. “그렇지요! 그분이 바로 치우비님이 밤이나 낮이나 잊지 못하시는 공손발님의 어머님이십니다! 누조라고 불리는 분이신데, 그분은 모든 벌레들 중에서도 특히 누에라는 신기한 벌레를 다루는 법을 배우신 분입니다. 지나족은 비단이라는 아주 곱고 얇은 옷감을 만들어내는데, 그게 바로 다 누조님의 가르침 덕분이라는 겁니다!” 그러자 조용히 듣고만 있던 리미가 신기함을 참을 수 없다는 듯 대뜸 입을 열었다. “허! 거 참, 신기한 일이군. 나도 그 비단이란 옷감은 본적이 있는데 정말 얇고 곱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더군 그런데 정말 그것을 벌레가 만든다는 말인가? 아이구, 주인님, 죄송합니다. 말씀하시는데......” “아냐. 괜찮아, 리미. 그렇다면 이거 복잡하군. 초초룬이 타타츄이트님의 가르침을 받아 벌레를 다루는 것이 맞다면, 초초룬하고 발의 어머님인 누조님하고는 같은 스승을 모신 셈인데.......” “더 위로 올라가 진오님도 오로파라님에게서 배운 것이니 하백족도 가르침의 뿌리는 같다고 볼 수 있지요.” 리미가 끼어들어도 나무라는 사람이 없자 개르도 은근슬쩍 말을 끼웠다. “그런데 벌레들을 다루는 것하고 물을 다루는 것은 전혀 상관이 없는 것 같은데......” 유쌍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상관이 있습니다! 상관이 있지요, 오로파라 선인님의 스승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그걸 우리가 어떻게 알아?” 치우비가 좀 멍하게 되묻자 유쌍은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그게 바로 아주 먼 옛날의 대선인이신 발귀리님이시라는 겁니다! 그 이름을 아는 사람조차 별로 없지만, 하백족들을 알고 있더군요! 발귀리님은 세상에 처음 말을 만드신 분이며 모든 선인들의 어머니이시라고 합니다. 따지고 보면 오로파라님에게도 말하는 법을 가르쳐 주신 거라 합니다. 그리고 진오님께는 물과 말하는 법을 알려주신 것이고, 타타츄이트님께는 벌레와 말하는 법을 알려주신 거죠 참 신기한 이야기 아닙니까?” 유쌍의 말에 다른 사람은 모두 놀라며 신기해했으나 치우비는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자신과 형은 발귀리 선인을 이미 두 번이나 만난 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발귀리 선인을 그렇게 먼 옛적의 선인으로 말하는 것이 현실감 있게 와 닿지 않았던 것이다. 의외로 치우비의 표정에서 변화가 별로 없자, 유쌍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역시....... 다 믿기는 좀 힘들지요? 발귀리 선인이라는 분이 계시다는 이야기는 저도 좀 믿기 힘들었지요. 그러나 치우천님이 가지신 우린구슬은 발귀리 선인님께서 만드신 거라 하잖습니까?” “그건 그렇지. 그런데 왜 그런 선인들 이야기만 하는 거지?” “지루해 마냥은 뭐가 윈지 모르겠어.” 마냥이 돌연 검은 얼굴을 불쑥 내밀고 불만스럽게 이야기하자 유쌍은 약간 놀란 듯 입을 다물었다가 이윽고 말했다. “다 중요한 관련이 있다니까요 자, 발귀리 선인님이 우린구슬이란 신기한 구슬을 만들어서 신수와 사람이 말할 수 있게 하잖았습니까? 그런데 오로파라 선인도 그런 비슷한 구슬을 만드신 모양이더군요. 그 구슬의 이름은 푸린이라 하는데, 진오님에게로 전해져서 지금까지 하백족이 보관하는 가장 중요한 보물이라고 하더군요.“ “푸린구슬? 그게 뭐 하는 물건인데?” 리미가 묻자 유쌍은 또다시 머리를 긁적였다. “그건 아무도 모릅니다. 하백족 그 누구도 모르더군요. 진몽희님말고는 아는 사람이 없을 거예요.” “진몽희가 누군데?” “하백족을 이끄는 부족장이자, 주술사랍니다. 나이 많은 할머니라고들 하는데, 능력이 아주 대단하답니다. 하백족을 만드신 진오님의 후손인데, 진오님 이래로 가장 뛰어난 부족장이라는 말이 있어요 좌우간 이제 본론으로 넘어갑니다. 지나족에서 상망님과 공손발님이 온 것은, 헌원님의 명을 받들고 진몽희님을 만나 푸린구슬을 얻고자 하는 거라더군요!” “허! 헌원님이?” 치우비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내뱉고는 이내 중얼거렸다. “그 구슬이 대체 뭐길래? 그리고 발은 왜.......?” “그거야 저도 모릅니다요. 그런데 하백족 말로는 헌원님이 푸린구슬을 얻으러 온 것이 이번 한 번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미 다섯 번이나 찾아온 거랍니다.” “다섯 번이나?” “그렇죠. 놀랍게도 힘센 끽구도 왔었고, 머리 좋은 이주와 지가 각각 한 번씩, 생각 깊은 풍후와 상백도 왔었답니다. 그러나 그들은 푸린구슬은 커녕 진몽희를 찾아내지도 못했다고 하더군요.” “하백족을 찾아갔는데 진몽희를 왜 못 찾아?” “진몽희는 그들이 올 것을 미리 알고,자신을 찾아내면 한번 생각해보겠다고 하며 몸을 숨겨 버렸답니다. 더구나 진몽희는 부족 사람말고 다른 사람에게 한 번도 얼굴을 보인 적이 없거든요 목소리를 들은 사람은 좀 있지만요 그 목소리가 아주 늙은 할머니 목소리라 할머니라고는 그러는데, 사실 바깥에서 온 사람들 중 진몽희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지요 하백족은 진몽희님에 대해서는 절대 아무 말도 안하구요. 그러니 진몽희님을 찾아낸 사람도 아무도 없는 게 당연하죠.” “진몽희가 마을에 없었나? 너도 하백족의 마을에 몇 번이나 다녀왔다고 했잖아.” 치우비의 다그침에 유창은 멋쩍게 씩 웃었다. “그게...... 좀 그렇습니다. 하백족의 마을은 아무 패나 옮겨 다닐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이 숨으려 한다면 아무도 찾아낼 수 없답니다.” “뭐? 마을이 어떻게 옮겨 다니느냐? 하백족이 몽골족 같은 유목민이냐? 옮긴다 해도 왜 못 찾겠느냐?” “그건 저도 모릅니다. 좌우간 그렇다고 하니 그런가 보다 해야죠. 더구나 부족장 진몽희는 더 대단해서, 한번 숨어버리면 누구도 찾아내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끽구나 이주, 지 같은 사람도 다 실패했죠.” 그 말을 들은 개르가 코웃음을 쳤다. “흥! 재주가 대단한가 보군! 풍후, 상백이 누군지 몰라도 힘센 끽구나 똑똑한 이주, 지도 못했다는데 그럼 상망은 통과할 거란 말인가? 그 늙은이가 무슨 재주가 있다고?” 치우비는 개르의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상망은 보통 사람이 아냐. 겉모습은 좀 그렇지만 사람 고치는 솜씨가 대단하고, 싸움 솜씨도 대단할 거야.” “그 늙은이가 무슨 싸움을 하겠습니까?” 리미가 고개를 갸웃했으나 치우비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힘으로야 별것 없겠지. 그러나 상망은 대단한 재주를 가지고 있어. 나보고 끽구하고 상망하고 둘 중 하나와 목숨 걸고 싸워야 한다고 하면, 나는 상망과 싸우느니 차라리 끽구를 택할 거야.” “그 정도입니까? 정말로?” “정말일지 아닐지는 몰라. 뭐, 아무 힘이 없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만약 힘이 있다면 정말 무서운 사람일 거고, 나 같은 사울아비에게는 가장 껄끄러운 상대일지도 몰라 그런데 이상하단 말야. 대체 발은 왜 데려왔을까?” “그게 저도 이상했습니다만 그건 알 수 없었죠 다만 한 가지 짚는 게 있긴 합니다.” “그게 뭐냐?” “발님은 어린 여자고, 아무 힘도 없거든요 그러니 먼 길을 가려면 거치적거리기만 할 텐데, 같이 온 이유가 있긴 있을 거란 말이죠.” “질질 끌지 말고 좀 시원시원하게 이야기 해봐.” 개르가 답답한 듯 다그쳤으나 유쌍은 여전히 애늙은이처럼 태연스레 말꼬리를 늘였다. “뭐든 급히 하다간 빠뜨리고 놓치는 게 있게 마련이잖아요 그렇다고 제가 쓸데없는 이야기를 한 건 아니랍니다. 생각해 보세요. 저는 이미 다 말했다구요.” 치우비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푸린구슬은 오로파라 선인이 만드신 거고, 따지고 보면 진몽희나 발의 어머니 누조나 같은 스승을 모셨으니, 뭔가 관련이 있을 거 같긴 한데......?” “바로 그렇지요.” “그 관련이 뭐냔 말야?” 치우비가 답답한 듯 쏘아붙이자 유쌍은 헤헤 웃으며 눈가에 주름을 잡아 보였다. “그건 저도 모르겠는데요.” “ 이럴 줄 알았으면 초초룬도 불러올 그랬네. 좌우간 그럼 이야기 다한 거냐?” 얼른 유쌍이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이걸로 끝난 게 아니죠. 더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그게 뭔데?” “상망님하고 발님이...... 하백족에 붙들린 것 같습니다.” “뭐?” “어떻게 된 건진 모르지만, 그동안 하백족의 대접을 받으며 잘 있었는데, 지금은 붙잡혀 갇혀 있는 것 같더군요 그래서 저도 차오스의 도움을 받으러 급히 돌아온 것인데, 치우비님이 계실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그럼 그 이야기부터 해야지!” 치우비는 보기 드물게 화를 벌컥 내며 소리치더니 급히 일어섰다. “모두 나를 따라라. 리미, 마냥, 개르는 도깨비들을 준비시키고 차오스, 너는 네 부하들을 따라오게 해라. 괜스레 벌 아저씨나 다른 사람들에겐 알리지 말고.” 치우비가 급히 달려 나가자 리미와 개르, 마냥도 황급히 그 뒤를 따랐다. 차오스는 유쌍을 곱지 않은 눈길로 쳐다보며 쏘아붙였다. “답답한 녀석아, 그렇다면 그 이야기부터 해야지!” 유쌍은 변명하듯 우물거렸다. “갇혀 있지만 위험한 건 아닐지도....... 더구나 너무 서둘면......” “그래도 치우비님의 마음은 그런 게 아닐 거야. 자자, 너도 가자.” 차오스가 채근하자 유쌍은 머리를 긁적거리며 머뭇거렸다. “저...... 저는 갈 수 없는데요.” “뭐라고? 무슨 소리냐? 하백족 사이에 들어갔다 왔던 네가 안내해야 할 것 아니냐?” “아..... 저.......” 유쌍이 우물거리는데 밖에서 치우비의 목소리가 커다랗게 들려왔다. “유쌍! 앞장서라!” “네! 네! 갑니다! 가요.” 유쌍은 치우비의 목소리가 들리자 찔끔거리며 내키지 않는 듯한 걸음으로 나갔다. 차오스는 유쌍이 왜 저러나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곧 그 뒤를 따라나섰다. 유쌍의 안내를 받아 치우비는 깊은 숲 속으로 들어갔다. 물론 도깨비 부대와 차오스의 용병들도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숱 속을 헤매며 저녁 무렵까지 길을 간 후에, 어느 지점에 이르러 치우비는 멀리서 풍겨오는 아주 희미한 물내음을 맡았다. 치우비가 코를 쫑긋대자 유쌍이 입을 열었다. “물내음이 나죠? 하백족은 물이 없으면 못 삽니다. 어두워지기 전에 하백족의 마을에 닿을 수 있을 겁니다.” 물내음은 갈수록 짙게 풍겼지만 숲은 점점 울창해져 갔다. 마침내는 높이 자란 풀들을 칼로 걷어내지 않고는 뚫고 나가기가 힘들 정도였다. 리미 등과 함께 앞장서서 풀을 쳐내며 전진하던 치우비는 문득 주변에서 낯선 낌새를 챘다. “누가 있다.” 치우비가 쉿 소리를 내며 걸음을 멈추자 다른 사람들도 조용히 걸음을 멈추었다. 잠시 숲 속에 정적이 감돌았다. 그때 치우비의 앞으로 뭔가가 획 하고 날아들었다. 길다란 작살창이는데 촉은 뼈를 다듬어 만든 것이었다. 치우비는 그 창이 자신을 노린 것이 아니며, 자신의 바로 앞에 꽂힐 것을 눈치 채고 미동도 하지 않았다. 리미와 개르가 움찔하며 튀어나 가려는데 치우비가 가만히 손을 들어 막았다. 이어서 휙휙휙 하며 다시 숲 속에서 여러 자루의 창이 날아오더니 마치 자로 잰 듯 치우비의 발 앞에 나란히 박혔다. 정말 대단한 솜씨였다. 그때 유쌍이 나서더니 웃으면서 뭐라고 외쳤다. 아마 하백족의 말 같았는데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주신 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유쌍이 한참 뭔가 떠들어댔는데도 저쪽에서는 대답이 들려오지 않고 도리어 다시 세 자루의 작살창이 날아왔다 그 창들이 유쌍의 바로 발 앞에 와 꽂히자 유쌍은 찔끔하더니 울상이 되어 치우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치우비가 대뜸 크게 소리쳤다. “나는 주신의 사울아비 큰스승 치우비다! 우리는 싸우러 온 것이 아닌데, 하백족은 싸우고 싶은 건가?” 간신히 지나 말을 좀 하는 정도인 치우비가 하백족의 말을 알 리 없었다. 그저 주신 말로 소리친 것이었지만 소리는 쩌렁쩌렁하게 울려서 숲 속에 퍼져나갔다. 다른 사람은 깨닫지 못했지만 치우비는 숲속에 숨은 하백족이 자신의 목소리에 움찔 놀라는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치우비는 자기 앞에 떨어진 창들을 한 손으로 주욱 걷었다. 모두 여섯 자루의 창을 양손에 쥔 치우비는 그것들을 가볍게 뚝 꺾으며 다시 외쳤다. “나는 이름을 댔는데, 창을 던지기만 하고 대답은 없구나. 싸우자는 것으로 알겠다!” 그러자 숲 속 어딘가에서 좀 서툴고 투박하면서도 날카로운 주신 말이 들려왔다. “당신이....... 주신의 치우비요? 태산 회의의 대용사, 타타르의 영웅, 키탄의 구원자, 지나족의 악몽, 신수의 정복자라는?” “붙이는 게 뭐가 저리 많아?” 치우비는 좀 어리둥절했지만 상대의 주신 말이 의외로 쾌 능숙한 지라 이내 대답했다. 목소리로 보아 그 사람은 나이가 좀 많은 남자 같았다. “그런 것까지는 모르지만 여기 있는 나는 치우비가 맞소!” “정말 그 치우비요? 믿기 어렵소.” 치우비는 ‘하하’ 웃으며 외쳤다. “그깟 치우비가 뭐라고 거짓으로 이름을 댄단 말이오?” 그러자 그 목소리는 퍽 유창하게 되받았다. “대용사 치우비는 지나족과 싸우고 있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여기에 있단 말이오? 더구나 아무 상관도 없는 우리 하백족을 왜 찾아왔냔 말이오? 아무래도 당신은 주신 말을 잘하는 지나족 같소!” “당신들이 믿건 말건 나는 치우비요!” “좌우간 당신들은 우리 마을에 올 수 없소!” “손님으로 가도 안 되겠소?” “그렇게 많은 부하를 끌고 올 수 없단 거요!” “그러면 몇 명만 들어갈 수는 없소?” “한 명도 안 되오!” “원 참. 나 혼자 가도 안 되겠소?” 상대가 너무 빡빡하게 나오자 사람 좋은 치우비도 점점 기분이 꼬여갔다. 그러나 상대는 한술 더 떴다. “당신이 정말 그 유명한 치우비라면, 당신 한 사람은 받아줄 수도 있소. 그러나 무기를 모두 버리고 부하들도 멀리 가게 한 다음 들어와야 하오.” “조금 있으면 어두워질 텐데, 길도 모르는 내 부하들은 그냥 숲 속에서 잠을 자란 말이오? 짐승이 나오면 좋지 않잖소?” “저 정도 숫자로 무슨 짐승을 무서워하오?” “나는 사울아비인데, 무기까지 다 버리고 혼자 가라는 거요?” “당신이 우리 부족 마을에 오고 싶어 하는 것이지, 우리가 청한 것은 아니오!” “세상에 이렇게 인심 사나운 부족도 있단 말이오?” “지금 많이 봐주는 거요.” 치우비는 기가 막혀 유쌍의 얼굴을 바라보았지만 유쌍은 자기도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이건 좀 심하네요.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유쌍의 말을 듣고 치우비는 인상을 찌푸렸다. 분명 저 우두머리 같은 자가 억지를 쓰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치우비는 다시 외쳤다. “그러면 나 혼자 가면 되겠소? 무기도 놓고 말이오?” “아니오. 당신이 치우비라는 걸 보여줘야 하오.” “당신들이 믿건 안 믿건 나는 치우비고, 나는 내 이름을 두고 거짓말을 한 적이 없소!” “당신이 치우비란 걸 믿을 수 있도록 힘을 보여주시오!” “원 참...... 이게 무슨 어린애 장난인가?” 치우비가 어이가 없어 구시렁거리자 유창이 재빨리 말했다. “하백족은 의심이 많으니 힘을 좀 보여주세요.” 치우비는 내키지 않는 듯 쩝 입맛을 다시다가 다시 외쳤다. “좋소, 좋아. 내키지는 않지만 한번 바보짓을 해봅시다. 당신들은 치우비가 얼마나 힘센 사람으로 알고 있소? 내가 대체 뭘 해 보여야 믿겠소?” “치우비는 지나족의 형천이나 끽구에 비해 조금도 밀리지 않는 용사라고 들었소! 그런데 끽구는 우리 하백족을 찾아와 한 아름이나 되는 나무를 통째로 뽑아서 힘을 보였소. 당신도 그만한 것은 할 수 있겠지?” “허, 이거 좀 화나는데?” 치우비는 은근히 성질이 나서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한 아름이나 되는 나무는 때마침 보이지 않았다. 치우비는 다시 가만히 나무들을 살피더니 곧 몸을 획 날려 세 그루의 두꺼운 나무둥치에 쾅쾅쾅 소리를 내며 세 방의 주먹을 날렸다. 그러고는 날렵하게 처음에 있던 자리로 돌아오자 그제야 그 세 그루의 나무가 우지직 소리를 내며 각각 다른 방향으로 넘어져 버렸다. 그 나무들이 넘어지자 치우비가 다시 몸을 날리는 순간, 그와 동시에 세 그루의 나무가 쓰러진 세 방향에서 사람들이 휙획 튀어나왔다. 우비는 무라에게 익힌 솜씨를 발휘하여 무섭게 몸을 날리며 오른 손으로 한 사람, 왼손으로 한 사람의 덜미를 잡아채었다 치우비는 눈부신 동작으로 그 두 사람을 리미와 개르에게희 집어던지고 다시 뛰어올라서 나머지 한 명의 허리춤을 붙잡았다. 세 사람은 모두 작살창을 여러 자루 들고 있었으나 미처 반항도 하지 못하고 잡혀버린 것이다. 자신들이 잘 숨어 있다 생각했는데 나무가 자신들이 숨었던 곳으로 넘어지고 치우비가 너무도 빠르고 정확하게 덮쳐왔기 때문에 도무지 피할 재간이 없었다. 치우비는 세 번째 사람을 옆구리에 긴 채 획 원래 자리로 돌아왔는데, 내던져진 두 사람을 그제야 거의 동시에 리미와 개르가 받을 정도로 빨랐다 세 사람이 느닷없이 치우비에게 잡히자 숨어 있던 하백족들이 놀랐는지 창을 들고 여기저기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모습을 보며 치우비가 큰 소리로 외쳤다. “내가 당신들과 싸우려 했다면, 당신들은 하나도 남지 않았어! 자, 이젠 내가 치우비라는 것을 믿겠소?” 그때 치우비의 옆구리에 끼었던 사람이 파닥거리며 발버둥을 쳤다. 그 순간 치우비는 손에 오는 감촉이 아무래도 뻣뻣하지 않고 부드러운 데 놀라 무심코 손을 놓았다. 그러자 그 사람은 후닥닥 앞으로 빠져나오더니 치우비의 코앞에서 고개를 획 쳐들었다. 그자의 얼굴을 털자 치우비는 깜짝 놀랐다. 그 사람은 키도 크고 머리가 무척 길고 검었으며, 눈썹이 선명하고 눈매가 아주 매서워 보이는 여자가 아닌가? 더구나 그 여자가 머리를 쳐들면서 긴 머리카락이 치우비의 얼굴과 눈가를 후려쳐서 치우비는 순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때 그 여자는 뭔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외치며 치우비의 뺨을 철썩 후려쳤다. 치우비는 한 대 얻어맞고 얼떨떨하다가 두 번째로 다시 뺨을 후려치려는 여자의 손목을 탁 잡아버렸다. 그와 동시에 리미와 개르는 각각 잡았던 두 하백족의 목에 손을 댔고 차오스는 칼을 빼들었다. 그러자 뒤에 있던 하백족 한명이 창을 획 던지자 마냥이 눈을 빛내면서 역시 창을 던졌다. 놀랍게도 두 창은 허공에서 부딪혀서 중간에 떨어져 버렸다. 창끝이 맞닿을 정도로 정확하게 부딪힌 것은 아니지만 날아드는 창을 창으로 던져 맞히는 솜씨에 하백족들도 긴장한 듯했다. 그때쯤 하백족들도 우르르 창을 들었고 도깨비 부대와 용병들도 일제히 무기를 빼들었다. 돌연 치우비가 외쳤다. “잠깐!” 치우비의 목소리에 도깨비 부대와 용병들이 주춤하자 하백족도 창을 손에 든 채 동작을 멈추었다. 치우비는 맞은 것에는 개의치 않고 여자에게 말했다. “정말 싸울 거요?” 그러나 여자는 눈꼬리를 곤두세우고 입술까지 깨물면서 잡히지 않은 손으로 치우비의 뺨을 치려했다. 치우비는 부하들 앞에서 눈을 뻔히 뜨고 맞을 수만도 없어서 또 그녀의 손목을 잡아챘다. 그러자 여자는 귀청이 떨어질 만큼 마구 커다랗게 소리를 질러댔다. 치우비가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분명 욕을 하는 것 같았다. 그때 유쌍이 얼굴까지 파랗게 질려서 치우비에게 속삭였다. “자기 몸에 손대지 말라고 그러는 거예요.” “어?” 치우비는 순간 멋쩍어서 여자를 놓아주려 생각했다. 그러나 하백족과 자신의 부하들이 대치하는 터에 여자가 더 화를 내면 자칫 싸움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치우비는 하백족들의 초조해하는 듯한 얼굴을 훑어보고는 생각했다. ‘가만 보아하니 하백족들이 왜나 신경 쓰는 것 같네. 이 여자가 대장인가? 내가 무슨 짓을 한 것도 아닌데 이 여자는 별나게 왜 이럴까? 더구나 목소리가 아까와는 전혀 딴판인데? 흉내 내는 재주도 있나 보군. 좌우간 이 여자를 잡고 있으면 하백족이 창을 던지지는 못하겠지, 어차피 난 발을 구하러 온 건데 체면 차려서 무엇 해? 이 여자가 아주 중요한 여자라면 더 좋겠네.’ 그때 여자가 다시 소리를 지르려고 하자 치우비는 마음을 굳게 다잡고 여자에게 말했다. “나는 참을 만큼 참았소. 당신은 나를 모욕했고, 나는 그 빚을 좀 받아야겠소. 해치지는 않겠지만, 당신 마을로 가야 되겠소. 부하들더러 앞장서라고 하시오.” 여자는 화난 고양이처럼 마구 몸을 비틀면서 빠져나가려 했지만 치우비의 손아귀는 굳게 잠긴 쇠 자물쇠 같아서 아무리 힘을 써도 빠져나갈 수 없었다. 여자는 다시 마구 욕설을 퍼붓다가 치우비가 알아듣지 못하는 것을 깨닫고는 주신 말로 욕했다. “이 돼지 같고 소 같은 놈이! 어서 손을 놔!” 치우비는 여자의 욕은 아예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자가 발로 치우비의 몸을 걷어차자 그는 귀찮은 듯 여자의 양팔을 한데 모아 왼손에 쥐고는 아예 들어올리며 유쌍에게 눈짓을 했다. “마을로 안내하라고 좀 전해라.” 치우비의 명이 떨어지자 유쌍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지만 하백족의 말로 뭐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하백족들은 수군수군하더니 이윽고 모두 숲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두 명의 하백족 남자가 앞으로 나서며 화난표정으로 치우비에게 따라오라는 듯 손짓을 해 보였다. 치우비 일행이 모두 전진하려 하자 여자가 다시 뭐라고 소리쳤고 하백족들은 치우비에게 손을 저어 보이며 정색을 했다. “다 따라오면 안 된다는데요?” 유창의 말에 치우비는 쩝 입맛을 다셨다. “기미, 개르, 마냥만 따라와. 싸우러 가는 건 아니니까. 유쌍, 너도 따라와야지. 차오스, 너는 부하들과 함께 여기서 기다려.” 하백족은 여전히 많다는 듯했으나 치우비가 인상을 쓰자 군소리 없이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여자는 가면서 계속 하백족의 말과 주신 말을 섞어서 욕을 하고 발버둥을 쳤다. 귀찮아진 치우비는 여자를 장난기 어린 눈으로 노려보며 왼손에 힘을 조금 주었다. 여자는 손목이 아픈지 발길질을 멈추었다. 치우비는 여자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다시 길을 갔다. 조금 가다가 여자가 또 치우비를 걷어차려 하자 치우비는 다시 손목을 죄었고 여자는 아파서 발버둥을 멈추었다. 그런 식으로 길을 가면서도 여자는 조금만 손목이 풀어지면 다시 발버둥을 치고 욕을 했다. 치우비는 너무도 성가셔서 여자에게 툭 쏘아붙였다. “그만 좀 하시오 귀찮아 죽겠소.” “이 바보 멍청이 자식1 차라리 나를 죽여라!” 치우비는 여자가 하도 앙칼지게 종알거리자 짜이 났다. “당신은 여자니까 내가 해칠 수도 없고, 억울하기도 하겠지만 말이오. 이젠 좀 그만할 때도 되잖았소? 당신, 힘들지도 않소?” “그러면 날 내려놓으면 되잖아!” “그러면 당장 도망가거나 나한테 덤벼들 거 아니오? 더구나 난 당신들 마을에 꼭 가야 한단 말이오 가서 당신들 부족장인 진몽희님을 만나야 한단 말이오.” “그래서 윌 하려는지 모르지만, 너는 진몽희님을 못 만날 거다! 이나쁜 놈!” 여자가 여전히 욕을 했으나 치우비는 아무 데꾸도 하지 않았다. 한참 묵묵히 가다가 치우비가 여자에게 물었다. “팔 아프오?” “너 같으면 안 아프겠니? 어깨가 빠진다! 빠져! 거기다가 손목도 너무 아프단 말야!” 여자가 표독스럽게 퍼붓자 치우비는 귀가 멍해져서 귀를 후비적거리다가 여자의 손목이 퍼렇게 멍이 든 것을 보았다. 치우비는 안쓰러운 마음에 여자에게 타이르듯 말했다. “당신도 아플 거고 나도 팔이 아프군. 다치게 하긴 싫어요. 놔줄 테니 도망치지 말아요. 알았어요?” 치우비가 여자의 손을 놓아주자, 여자는 그 즉시 몸을 날려서 도망치려 했다. 그런 것을 치우비가 재빨리 발을 걸자 여자는 푹 넘어져 버렸다. 치우비는 다시 여자의 손목을 잡아 일으켜 세워주었다. “마음은 알겠지만, 피차간에 힘들 일이랑 하지 맙시다. 도망가지 말아요. 알겠죠?” 그러면서 치우비가 다시 여자를 놓자, 여자는 순순히 내려서서 조용히 따라왔다. 그러나 몇 걸음 그렇게 가는 듯하다가 여자는 재빨리 몸을 날려 옆의 풀숲에 뛰어들려 했다. 그 순간 치우비는 웃으며 여자의 발목을 걸었고 여자는 덤불에 얼굴을 처박으며 다시 넘어져 버렸다. 치우비는 쯧쯧 혀를 몇 번 차고는 다시 여자를 일으켜 세워주며 말했다. “벌써 두 번째네요 더 도망가려 하면 화냅니다.” 그때 여자는 갑자기 입에서 뭔가를 훅 내뿜었다. 가시 같은 것들이 번뜩여서 치우비는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하마터면 얼굴에 맞을 뻔했다. 날아간 가시들이 옆 나무에 푹푹 박힌 것을 보니 뼈로 만든 바늘 같았다. 생선가시 같은 것을 하나하나 잘 갈아 만든 예리한 물건이었다. 치우비는 인상을 쓰며 여자에게 경고했다. “재주가 대단하군. 그런데 이게 세 번째요 한 번 더 이런 짓을 하면 여자로 안 보고 전사가 싸움을 건다고 생각하겠소.” “그럼 어쩔건데?” 여자가 날카롭게 쏘아붙이자 뒤에 있던 리미가 협박하듯 말했다. “그러면 우리가 주인님을 지켜야지! 나 같으면 아마 그 대단한 가시가 나오는 입부터 막을 거다. 주먹으로 몇 대 맞으면 입이 아예 날아가 버릴지도 모르지.” 여자는 아까 치우비가 주먹 한 방으로 가볍게 나무를 쓰러뜨리는 것을 보았기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치우비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실제로는 백 번을 도망쳐도 여자를 두들겨 팰 생각은 없었다. 또 치겠다는 것은 리미이지 치우비가 아니었지만, 여자는 치우비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자 그 눈치를 보고 재미있다는 듯, 개르가 한마디 보탰다. “그 다음에는 도망 못 가게 종아리를 걷어찰지도 모르지. 네 다리가 바위만큼 튼튼하지 않으면 다리가 앞으로 굽어질 거다. 그 다음부턴 걷기가 좀 힘들지도 모르지.” 마냥도 싱글거리며 끼어들었다. “나 같으면 저 시끄러운 혀부터 뽑겠어. 잡아서 주욱 늘인 다음에 탁! 헤헤헤.” 그러자 여자는 얼굴이 해쓱해지더니, 마을에 도착할 때까지 조금도 반항하거나 욕을 하지 않았다 리미, 개르, 마냥은 웃으면서 농담을 한 것뿐이지만 여자가 보기엔 달랐다. 하나같이 흥악하고 무서워 보이는 도깨비들이 웃으며 농담을 하자 정말로 겁을 먹은 것이다. 치우비라면 아무리 겁을 주었어도 끝까지 도망치려 했을 것이다. 아직도 여자는 화난 고양이 같은 표정 그대로였고 씩씩거리기는 했지만 별다른 짓을 할 것 같지는 않았다. 여자의 손목이 퍼렇게 멍들고 부어오른 것을 보고 치우비는 히죽 웃으면서 미안하다는 듯 고개를 살짝 숙였다. “나도 이제 좀 살 것 같군요 멍은 금방 풀릴 겁니다. 아프게 했다면 미안합니다.” 허나 여자는 코웃음만 쳤다. 여자의 얼굴은 여기저기 먼지가 묻고 머리가 헝클어져서 그다지 미인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윤곽이 뚜렷하고 선이 고우며 입술이 두툼한 것이 퍽 육감적인 데가 있었다. 치우비가 다시 말했다 “미하다고 하는데, 대답도 안 하시오?” “말하면 시끄럽다면서!” 여자는 여전히 반말로 쏘아붙였다. 치우비는 그저 사람 좋게 허허 웃었다. “그런데 아까는 정말 미안했습니다. 그때 들은 게 남자 목소리라 난 정말 당신이 남자인 줄 알고 함부로 잡은 거랍니다. 그 다음에는 내친김이고, 자칫하면 부하들 사이에 싸움이 날 것 같아서 제가 미안한 짓을 했으니, 마음을 푸십시오.” 치우비가 정중하게 말하는데도 여자는 여전히 코웃음만 쳤다. 치우비는 개의치 않고 넌지시 물었다. “그런데 하백족 마을에 바깥사람들이 와 있지 않소?” “말할 수 없다!” “아, 다 알고 있으니 그러지 말아요. 지나족에서 온 사람들 있지 않소? 우린 그 사람들에게 볼일이 좀 있어서.......” “난 모른다! 알아도 말할 수 없다!” “정말 너무하는군. 알았소. 뭐, 당신 탓을 할 수는 없지 진몽희님은 나이 많고 훌륭한 부족장이라 들었으니, 나를 당신처럼 대하진 않을 거요.” “진몽희님은 아마 너를 잡아 토막 내서 물고기 밥으로 주실 거다.” 치우비가 은근하게 나오는데도 여자가 악담을 퍼붓자 어지간하던 리미는 속이 뒤틀렸는지 한마디 쏘아붙였다. “치우비님을 잡아? 너희 하백족 따위가 전부 덤벼도 치우비님 손끝도 못 건드린다. 그렇게 되면 내가 너부터 토막을 내서 물고기 밥으로 주도록 하마.” 개르도 씩씩거리며 끼어들었다. “네가 치우비님이 지나족의 악몽이라 했지? 그 말이 맞다. 치우비님은 너희 하백족보다 몇 백 배나 많은 화산족 마을에 두 번이나 혼자 들어가셔서 쑥밭을 만들고 나오신 분이란 말이다 네가 말한 끽구하고 수십 천의 전사들이 있는 속을 늠름하게 휘저으며 거의 다 쳐 죽이고 나온 분이야!” 사실은 거의 죽다 살아난 것을 개르가 너무 살을 붙여 과장되게 말하자 치우비는 멋쩍어 개르의 말을 막았다. “개르, 그만해라.” 그러나 리미와 개르는 멈추지 않았다. 이 여자는 치우비에게는 그렇게 당당했지만, 도깨비들에게는 욕은커녕 대꾸 한마디도 못했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 간신히 애를 썼지만, 사실 도깨비들이 무서워서 견디기 힘든 표정을 숨길 수는 없었다. 그것이 재미있어서 이번에는 마냥이 다시 여자에게 다가와서 시커먼 얼굴을 바짝 들이댔다. “히히, 우리 주인님은 말야.” 순간, 여자는 부르르 몸을 떨다가 그만 그 자리에 스르르 쓰러지며 기절해버리고 말았다. 느닷없이 시커먼 얼굴이 허연 이를 드러내며 얼굴 앞으로 다가오자 더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막상 이야기를 하려던 마냥은 당황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여 쩔쩔맸다. "내가 그리 무서운가? 마냥은 슬퍼요, 슬퍼." 치우비는 기가 막혀서 앞에 가던 하백족 남자에게 여자를 업으라고 했으나 그 사람들은 놀란 표정으로 손을 휘휘 저어 보였다. 치우비는 머리를 긁적이며 잠시 생각했다. ‘저 여자 성격이 굉장히 사나운가 보다. 같은 부족 부하들도 안 업으려 하네. 그런 성격에 내가 아까 손목을 잡았으니 난리칠 만도 하군. 어차피 욕먹은 것, 내가 업고 가는 게 낫겠다. 도깨비들이 업으면 깨자마자 또 기절할걸? 그나저나 정말 성격이 좋지 않은 여자구나. 골칫덩어리다.’ 치우비는 여자를 들쳐 업고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리미와 개르는 너무 못생겨서 여자를 기절시켰다고 마냥을 놀리며 유쌍과 함께 그 뒤를 따랐다 가면서 치우비는 유쌍에게 슬쩍 말을 붙였다. “제대로 가긴 가나 보다.” “어떻게 아시나요? 지난 번에 제가 간 길과는 전혀 다른데요.” “우리 주위에 하백족들이 늘어가고 있어. 아주 많구나. 뭐, 우릴 공격할 낌새는 없으니 염려 마라. 거의 마을에 다 와간다는 소리겠지.” 그때 유쌍이 울상을 지어 보이며 말을 더듬었다. “저....... 저는 이쯤에서 돌아갈 수 없을까요?” 아직 솜털도 다 벗지 못한 유쌍이 겁먹은 표정이 역력하자 리미가 싱긋 웃었다. “왜, 주인님을 믿지 못하겠느냐?” “그건 아냐! 그건 아닌데....... 좌우간........ 아이구! 나 미치네.” 유쌍은 머리까지 쥐어뜯으며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지만, 왜 그러는지 이유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숲 주변에서 보이지 않게 치우비 일행을 에워싼 사람들의 수가점점 늘어만 갔다. 조금 지나자 노련한 리미와 개르, 마냥도 똑똑히 느낄 수 있게 되었고 다시 조금 더 지나자 좀 둔한 유쌍도 많은 사람에게 에워싸여져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들은 섣불리 다가오지 않고 있었다. 한참을 걸어 어느새 별이 총총하게 떠오르는 밤이 되었을 무렵, 마침내 일행은 하백족 마을에 도착하게 되었다. 마을 어귀에 이르자 따라오던 하백족들은 더 이상 숨지 않고 몸을 드러냈다. 작살창을 든 하백족들 수백 명이 모여 눈을 번뜩이며 치우비 일행을 감시하는 가운데 치우비 일행은 하백족의 마을로 들어섰다. 개르는 긴장감을 풀려는 듯 유쌍에게 말을 건넸다. “하백족 집들 중 절반은 물에 세워졌나 보네 아마 뗏목을 엮어서 그 위에 세운 것 같은데? 그러니까 물에 떠서 마음대로 옮겨 다니겠지.” 유쌍은 픽 웃으며 개르에게 혀를 낼름 내밀었다. “그게 그렇게 쉬운 게 아니에요 아무리 그래도 부족장의 집과 물신을 모신 사당은 무척 무섭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큰 집이라면 아무리 물에 세워졌다고 해도 강가를 돌면 보여야 하는데, 하백족이 사라지면 그것 역시 감쪽같이 사라진단 말이에요. 그리고 조금 지나면 또 나타나고 그래서 하백족이 신기한 재주가 있다고들 하는 거예요.” 개르는 지지 않으려는 듯 고집스럽게 우겼다. “아마 집을 부수고 또 짓나 보지.” “억지 부리지 말라구요. 저렇게 큰 집을 어떻게 하루 만에 쉽게 헐고 또 짓는단 말이에요.” 유쌍의 말을 듣고 개르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유쌍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치우비는 그저 조용히 듣기만 할뿐이었다. 마침내 마을 한 가운데로 들어서자 다섯 사람의 하백족들이 앞으로 나섰다. 대부분의 하백족들은 고기비늘처럼 번쩍이기는 하지만 뭔지 모를 가죽옷으로 살짝 몸을 가린 반면, 그들의 차림과 장식이 화려한 것으로 보아 부족장이나 원로 같아 보였다. 오른쪽의 두 사람은 나이가 왜 든 남자였고 왼쪽의 두 사람은 나이가 약간 든 중년의 여자였으며, 그들 가운데 선 사람은 여자였는데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지팡이를 짚었으며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할머니였다. 치우비는 주름이 가득한 할머니의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저 할머니가 진몽희인 모양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 할머니가 앞으로 나서면서 상당히 정확한 주신 말로 또박또박 말했다. “여자선인 진오님의 후손인 우리 하백족은 손님을 맞이하는 일이 퍽 드물다오. 주신의 사울아비 큰스승 치우비님이 이런 외진 곳까지 무슨 일로 오시었소?” “주신 사울아비 큰스승 치우비가 사과드립니다. 마을에 찾아오고 싶었을 뿐인데 마음과 달리 좀 소란을 부렸습니다.” 할머니는 지팡이를 한 번 쿵 하고 땅에 찧어 보이면서 화난 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제멋대로 찾아오는 손님이 어디 있단 말이오? 어깨에 멘 우리 하백족 여전사나 내려놓고 말하시오.” “대단히 죄송합니다만 주변에 하백족 전사들이 너무 많은 것 아닙니까? 그 전에는 내려놓기가 좀 겁나는군요. 같이 무기를 내려놓고 조금 물러서면 내려놓지요.” 할머니가 다시 호통을 쳤다. “당신이 그 유명한 치우비라면서 그렇게 겁이 많단 말이오? 더구나 도깨비들을 우르르 데려오다니!” 할머니가 묘하게 자존심을 건드렸지만 치우비는 우직하게 말했다. “유명한 치우비가 아니라 열 명의 치우비가 있어도 저렇게 많은 작살이 날아오면 버텨낼 수 없지요 게다가 도깨비들이 다칠 수도 있으니까요.” “당신은 손님으로 온 거요? 싸우러 온 거요?” “손님으로 오고 싶었지만 손님 대접을 안 해주면 별수 없지 않습니까? 우리는 절대 먼저 힘을 쓰려고도 하지 않았고, 하백족을 다치게 하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이름도 밝히고 우리 뜻을 전했는데도 하백족이 먼저 우리를 멀리하더군요.” 할머니는 다시 지팡이로 땅을 몇 번이나 내려치면서 호통을 쳤다. “도깨비들을 우르르 몰고 왔는데 누가 순순히 응한단 말이오!" ” 치우비는 아차 싶었다. ‘그렇구나. 도깨비들이 너무 유명해져 이제 주신이나 마갸르, 미아우족은 그렇게 신기하게 보지 않는다. 그러나 하백족은 숨어사는 부족이니 도깨비들이 무서웠던 거야. 그 생각을 못 하고 내 생각만 했군.’ 치우비는 곧 솔직하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미처 그 생각을 못 했군요 그러나 이들은 도깨비들이 아니라 먼 곳에서 온 사람들입니다. 생김새는 좀 다르지만 모두 용감한 전사고 충실한 부하들입니다.” “당신은 주신 사람이라면서 부하들이 전부 도깨비들이니 내가 믿을 수 없는 것 아니겠소?” 치우비는 껄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이름을 그리 잘 아신다면, 내가 용감한 도깨비 전사들을 데리고 있다는 것도 이미 알았을 것 같소만.” 그때 치우비는 누가 자꾸 뒤에서 꿈지럭거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말하다가 슬쩍 돌아보니 유쌍이 자기 뒤에 바싹 붙어서 숨어 있는 것이었다. 치우비는 아무래도 유쌍이 하백족의 마을에 무슨 죄를 지은 것 같아서 속으로 켕기는 기분이 들었다. “좌우간 나는 싸우러 온 것이 아닙니다. 이 선물들을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치우비는 곧 부하들에게 말해서 요새에서 준비해온 약간의 선물들을 내놓도록 했다. 선물들 대부분은 주신의 앞선 물건들이었다. 고립되어 지내는 하백족에게는 잘 만들어진 물건들이 가장 좋다고 유쌍이 알려뒀기 때문이었다. 무기와 장신구, 수놓은 천과 물들인 가죽 같은 물건들을 보자 하백족들의 눈이 빛났다. 그러나 하백족들은 전혀 적의를 풀지 않았다 할머니가 지팡이로 땅을 두드리며 말했다. “하백족은 거지가 아니오! 물건을 내놓는다고 덥석 받지 않소! 사람부터 풀어주시오!” “물론 풀어드리겠소 그러나 먼저 창부터 좀 치우라고 하시오.” 할머니가 내키지 않는 듯 눈짓을 하자 하백족들은 겨누었던 창을 치우고 몇 발짝 물러섰다. 치우비는 여전히 기절해 있는 여자를 가리켰다. “이 여자분이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있군요.” 그러자 할머니가 급히 말했다. “우리가 받아 가겠소.” 치우비는 씩 웃으며 화제를 바꿨다. “그런데 먼저, 한 가지 물읍시다. 이 마을에 지나족들이 와 있지 않습니까?” “그런 건 왜 물으시오?” “우린 그 사람들을 만나러 왔습니다.” 할머니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것은 우리 하백족과 지나족의 문제요. 주신 사람이 끼어들 일이 아니오.” “그 사람들은 저와도 상관이 있습니다.” 할머니는 마음이 급한 듯, 눈을 빛내며 되받았다. “지금 여기까지 봐준 것만 해도 전에 없던 일이오 하백족의 일에 더 간섭하고 싶으면, 우리 부족을 싸워 이겨야 할 거요!” “싸운다고요?” 치우비는 도리어 자신 있게 눈에 힘을 주었다. 치우비가 한 번 눈을 빛내자 안광이 번득였고 그 눈빛을 본 하백족들은 전부 호랑이 앞에 강아지처럼 기가 꺾이고 풀이 죽어 자신도 모르게 뒤로 몇 발짝씩 물러섰다 할머니도 치우비의 눈빛을 보고는 몹시 놀란 듯 외쳤다. “대단하구나! 치우비! 정말 부족 전부가 싸워도 위험할 지경이구나! 하지만 우리 하백족은 물러서지 않는다!” 치우비는 얼른 눈빛을 거두고는 다시 사람 좋게 웃었다. “누가 싸우고 싶다고 했습니까? 이 여자 때문에 자꾸 그러시는데, 뭐, 그렇다면 좋습니다. 데려가십시오.” 치우비가 기절한 여자를 내려놓으려 하자 할머니는 조심스레 다가왔다. 그러자 치우비는 예리하게 물었다. “이 여자분은 굉장히 귀한 분 같네요. 손녀라도 되십니까?” “무슨 소리냐? 그 여자는 그냥 여전사일 뿐이니라.” “해치려는 것도 아닌데 전사 하나가 잡혀 있다고 이 난리입니까? 더구나 부족장님이 직접 여전사 하나를 잡으려고 이 위험한 치우비 옆으로 오시려고 하다니요 허허.” 할머니가 몸을 움찔하자 치우비는 싱긋 웃었다. “하백족의 마을에 지나족이 온 것이 처음이 아니지요? 끽구, 이주, 지, 풍후, 상백, 이 모두 다 아는 분들이지요?” 할머니는 부르르 몸을 떨며 여전히 입을 열지 않았고, 치우비는 여유 있게 계속 말했다. “그 사람들은 전부 푸린구슬을 얻으러 왔다던데, 진몽희님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다더군요. 시험이란 게 진몽희님을 찾아내는 거였다면서요? 그런데 그 사람들은 그냥 순순히 돌려보내 주시고서, 상망님하고 공손발님은 왜 잡아 두었나요? 혹시 상망님이 진몽희님을 찾아낸 것 아닙니까? 그래서 푸린구슬을 줄 수 없어서 지금 잡아둔 것은 아닌지요?” 대뜸 할머니가 호통을 쳤다. “이놈, 하백족의 얼굴을 더럽히려느냐? 우리 하백족은 절대 약속을 어기지 않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러면 왜 그 사람들을 잡아둔 겁니까?” “다 이유가 있다!” “전 납득이 안 갑니다” “제기랄, 네놈은 이미 다 알고 왔구나. 그렇다면....... 속일 것도 없다! 우린 떳떳하니까!” 할머니는 치미는 노여움을 거두지 않고 계속 외쳤다. “진몽희님을 찾아내는 시험은 이미 수십 년 전부터 해온 것이다! 그 시험을 통과하는 사람에게 푸린구슬을 내주라는 진오 선인님의 예언이 있었기 때문이야! 그리고 지금 잡혀 있는 지나족들은 그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다!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우리가 잡든 말든 우리 마음이다. 여태까지는 지나족들을 그냥 놓아주었지만 이번에는 놓아줄 수 없는 것뿐이야! 우리라고 그들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무턱대고 지나족과 싸우고 싶겠느냐? 그러나 할 수 없단 말이다!” 치우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되받았다. “알 만합니다. 형님이 계셨으면 훨씬 일이 더 쉬웠을 건데....... 멍청한 저로서는 이제야 이해가 되는군요. 상망님과 공손발님이 잡혀있는 것은 시험은 통과하지 못했지만, 답을 알아버렸기 때문이군요!” 할머니는 치우비에게 눈을 흘기며 쏘아붙였다. “거의 다 말해준 것이나 다름없는데 잘난 척 마라. 그래서 그들이 여기 있는 것뿐이다! 우 리 하백족이 다 죽어도 절대 그들을 풀어줄 수는 없어!” “상망님은 약속을 지키시는 분입니다. 절대 말하지 않는다는 맹세를 하면 되잖습니까?” “그렇지 않다! 상망 그 늙은이가 약속을 지킨다 해도, 헌원은 푸린구슬을 포기하지 않을 거야! 상망놈이 풀려나면, 분명 지나족의 누군가가 답을 알고 와서 푸린구슬을 얻어갈 것이다. 상망도 약속을 꼭 지킨다는 맹세는 죽어도 할 수 없다고 버티고 있단 말이다!” 의외의 말을 듣자 치우비는 약간 놀랐다. “상망님이 그러셨다구요?” “그래! 자기 입으로 맹세할 수 없다는데 어떻게 풀어주겠느냐! 더구나 우리는 진오 선인님의 가르침을 지켜야 해! 하백족이 다 망해도 그런 엉터리 식으로 푸린구슬을 내줄 수는 없다!” 치우비는 혼란스러워졌다. ‘그것 참, 그게 뭐 그리 대단한 물건이기에 그러지? 그렇다면 상망님도 목숨을 걸었다는 건데....... 대체 이유가 뭘까?’ “푸린구슬이 뭐기에, 그리 난리를 치는 겁니까?” 치우비의 물음에 할머니는 탄식하듯 대답했다. “조금도 쓸모없는 것이다!” “예?” “조금도 쓸모없는 거라니깐! 어떤 주술의 힘도 없고 아무 힘도 없는 시커먼 구슬일 뿐이다!” “그러면 뭐 하러.......” “이 녀석아! 구슬뿐이라면 나는 그냥 내줄 수도 있다! 그러나 진오선인님의 가르침이 있는데, 너 같으면 마음대로 하겠느냐? 주신 신시에는 천부인이 있다는데, 그것이 설령 힘이 없다 해도 마음대로내줄 수 있겠느냐?” “천부인은 하늘과 땅을 뒤엎을 굉장한 힘이 있다는데요?” “말이 그렇단 거다! 용사라는 사람이 왜 이리 멍청한 거냐!” 모욕적인 말이라 리미나 개르 등이 인상을 썼으나 치우비는 ‘멍청이’라는 말을 너무도 많이들은 터라 모욕 받았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치우비는 흥분한 할머니의 눈과 하백족의 분위기를 훑어보며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하백족의 처지도 딱하구나. 상망님이 뻣뻣하게 나온다 해도 해칠 수도 없는 노릇일 테니 상망님을 해치고 발님을 해치면 지나족과는 전쟁이고, 하백족이 제아무리 재주가 좋아도 단번에 전멸이다 그렇다고 부족을 세운 선인님의 가르침이 있었으니 그냥 놓아줄 수도 없겠구나. 이거 참.......형님이 계셨으면 금방 꾀를 냈을 건데......’ 한참 머리를 긁적이던 치우비는 순간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아마 틀림없을 것 같았다. 치우비는 곧 목소리를 가다듬고 외쳤다. “이제 보니 양쪽 모두 딱하게 되었군요. 내가 나서서 해결하면 어떻겠습니까?” 치우비의 말에 할머니는 묘한 눈빛으로 치우비를 바라보았다. 치우비는 자못 당당하게 말을 이었다. “이제 문제를 알았습니다. 그 때문에 양쪽 다 꼼짝 못 하는 거군요. 할머니 말씀대로라면, 누군가가 이 시험을 먼저 풀어버리면 상망님과 발님은 풀려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허, 제법이구나. 그건 그렇다.” “그러면 제가 시험을 한 번 받아보겠습니다.” “자네가? 정말 할 수 있겠나?” 할머니가 눈을 빛내며 묻자 치우비는 가슴을 두드리며 외쳤다. “물론입니다. 하핫! 이 문제는 이미 풀렸습니다!” “뭐? 무슨 소리냐?” “저는 진몽희님을 이미 찾았고, 잡았지 않습니까? 제가 잡고 있는 이 여자 분이 진몽희님이 틀림없습니다! 안 그러면 모두들 그렇게 이 여자 분에게 신경 쓸 일이 없으니까요! 그러니 저는 이미 진몽희님을 찾아내 잡은 것이고, 벌써 시험을 푼 것입니다.” “어떻게 그리 단정하는가? 진몽희는 부족장인데 분명 늙었을 것 아닌가?” 할머니가 눈을 찌푸리자 치우비는 예리한 표정으로 되받았다. “진몽희님의 얼굴은 아무도 본 적이 없고, 목소리만 들은 사람이 있다 했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는 남자 목소리도 쉽게 내는 재주가 있으니, 이분이 진몽희님인 게 틀림없잖습니까? 더구나 할머니께서는 부족장인 것처럼 나섰지만, 한 번도 부족장이라거나 진몽희님이란 말씀을 안 하셨습니다! 다들 진몽희님이라면 부족장이니 나이도 많으리라 생각하겠지만, 그게 바로 함정 아니었습니까? 어떻습니까? 하하핫!” 치우비는 자못 당당하게 웃었고 리미와 개르 등도 “와” 하며 환호성을 올렸다. 마냥은 주인님 잘한다며 박수까지 쳤다. 그런데 하백족들의 반응이 약간 이상했다. 하백족들은 조용히 치우비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치우비와 도깨비들이 입을 다물자 이번에는 하백족들이 “와”하며 깔깔거리고 웃기 시작했다. 그러자 유창이 얼굴이 파랗게 질려서 발을 동동 굴렸다. “아이구! 틀렸나 봐요! 다들 그렇게 틀렸다고 비웃고 있어요.” 치우비도 순간 놀라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해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아...... 오랜만에 머리를 써봤는데! 내 딴에는 정말 잘했다고 우쭐했는데......! 이게 무슨 창피냐!’ 그때 갑자기 할머니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순간 하백족들은 웃음을 그치고 조용해졌다. 그러자 할머니는 천천히 치우비 앞으로 걸어 나오더니 한숨을 쉬었다. “자네, 머리가 그 점도밖에 안 되는가?” 한결 누그러진 말투이기는 했지만 치우비는 너무도 창피하여 얼굴이 벌게졌다. 치우비는 두말없이 여자를 내주었고 하백족의 다른 여인들이 그 여자를 부축해 갔다. 할머니는 혀를 끌끌 찼다. “다들 그렇게 속는다네. 아주 머리 나쁜 녀석들은 나를 진몽희님이라 하구 조금 머리가 돌아가는 사람들은 그 아이를 진몽희님이라고 하지 그러나 아닐세. 머리 좋은 사람들은 진몽희님을 직접 찾아 나서지만, 찾기가 아주 힘들지. 더구나 많은 위험을 이겨내야 하기에 자네라면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 이거 참 안타깝네. 지나족에게 구슬을 빼앗기느니 자네에게 주는 것이 좋았는데....... 그래서 일f부러 자네에게 많은 것을 알려주었는데......” 치우비는 얼굴을 붉히며 다소곳이 말했다. “제가 너무 성급했나 봅니다. 저는 바보 같아서 몰랐지만, 제 형님이라면 이 수수께끼를 풀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그러나 할머니는 고개를 저었다 어느새 할머니의 얼굴에도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깃들여 있었다. 강인하면서도 순진한 치우비의 성격이 퍽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자네 형님이라면 치우천님 말인가? 머리는 좋은 분이지만, 힘이 모자라서 아마 안 될 걸세. 아마 수수께끼는 풀겠지만, 진몽희님께 가려면 여러 가지 시험을 홀로 거쳐야 한다네. 자네라면 그걸 통과하겠지만, 자네 형님은 힘들 거야.” “왜 그렇습니까? 말씀 들어보니 할머님도 푸린구슬을 내주고 싶어 하는 모양인데, 그 구슬이 별것 아니라면서 왜 그토록 힘들게 지키는 겁니까?” “알고 싶다면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다고 맹세하게. 자네는 틀리고서도 화를 내지 않는 것을 보니 정말 마음이 착하군, 그래. 보통 용사들은 몹시 거친데.......” “착한 게 아니라 마음이 약할 뿐입니다 뭐, 하백족의 비밀을 남에게 알릴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맹세합니다.” 치우비가 맹세하자 할머니는 조용히 치우비에게 귓속말로 이야기를 해주었다. “자네는 믿을 만한 사람이네. 자네는 푸린구슬을 욕심내기보다는 우리 부족과 지나족을 도와주려고 시험에 든 것임을 안다네. 그래서 내가 특별히 말해주는 걸세. 푸린구슬에는 하백족의 미래가 있다네. 푸린구슬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것을 얻으려면 아주 머리가 좋고 또 힘도 세야 하네. 즉 대용사, 대영웅이어야 얻을 수 있다는 말일세. 그래서 그 푸린구슬을 얻는 사람이 나오면, 진몽희님은 그분의 아내가 되는 걸세.” 치우비는 그 말을 듣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예?” “진몽희님은 자네가 생각하는 대로 할머니도 아니고, 못나지도 않으시네. 설마 늙은 할머니를 대영웅과 맺어줄 만큼 우리 하백족이 뻔뻔한 줄 아는가? 하백족에서 가장 뛰어나고 가장 예쁜 여자가 진몽희님의 이름을 이어왔다네. 자네가 잡은 여자아이도 괜찮지 않은가?” “아주 아름다운 분이더군요.” “그 아이도 귀한 사람이기는 하네. 여차할 경우, 다음 진몽희님이 될 수도 있는 아이니까 말야. 허나 진몽희님은 아니지 그분의 동생이야. 진짜 진몽희님은 훨씬 더 아름다우시다네. 나이는 그 아이보다 두어 살 많으시지만 아직 젊으시고.” “알겠습니다. 그런데 대체 왜 그래야 하는 겁니까?” “그렇게 해야만 하백족을 이끄는 뛰어난 영웅이 나온다는 걸세. 그 대영웅과 진몽희님 사이에서 난 아이는 장차 세상을 바꿀 큰 영웅이 된다는 진오님의 예언이 있었기 때문일세.” “허, 그럴 줄 알았으면 함부로 시험을 하지 않을 걸 그랬습니다.” “솔직히 나는 자네가 시험을 통과해주길 바랐네만.......자네가 조금만 덜 성급했어도 좋았을 텐데. 그러면 내가 좀더 이것저것 눈치 채게 말해주었을 테고 수수께끼를 풀 수 있었을지도......” “아닙니다. 저는 그럴 수 없습니다. 아이구, 저는....... 저는 이미 마음에 둔 여자가 있답니다!” “뭐라구? 허, 그랬는가?” “그런데 꼭 혼인을 해야만 합니까?” “뭐, 영웅이 싫다면야 할 수 없겠지만, 그러면 푸린구슬은 도로 돌려줘야 한다네.” “허허, 이것 참. 어차피 저로서는 끼어들 수 없는 일이었군요.” “다 하늘의 뜻인 것을 어쩌겠는가? 자네도 실패했으니....... 영웅을 찾지 못하면 하백족은 지나족에게 다 죽을 걸세. 그렇다고 풀어줄 수도 없고.......” 할머니가 한탄하자 치우비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비록 시험에는 실패했지만, 사람은 풀어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어떻게든 상망님과 발님을 설득해보겠습니다. 만약 그래도 지나족이 쳐 들어온다면, 제가 대신 나서서 막아드리는 한이 있더라도.......” “자네가 정말 그럴 수 있는가? 가만....... 그러면 혹시 자네가 마음에 둔 사람이........ 그러고 보니 자네가 화산족 마을에서 난리를 피운 것도 다 여자 때문이라는 소문이 있던데, 혹 시.......?” 할머니가 눈치 빠르게 묻자 치우비는 다시 얼굴을 붉혔다. “맞을 겁니다.” 할머니는 골치가 아픈 듯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허! 그럼 발님을 잡아두면 지나족 말고도 자네 역시 우리 적이 되겠군!” “솔직히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풀어주신다면 제가 책임을 지겠습니다. 절대 비밀이 새지 않도록......” “흠......” 여전히 심각하게 인상을 쓰며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때였다. 할머니 옆에 있던 중년의 아름다운 하백족 여인이 나서면서 미아우 말로 소리쳤다. “유쌍! 숨어도 다 알아! 어서 나와!” 그러자 유쌍은 얼굴이 벌겋게 되어 내키지 않는 듯 쭈뼛거리며 나섰다. 그러자 그 여인은 눈물까지 지어가며 유쌍의 손을 잡고 달래며 수선을 피웠다. 영락없이 오랜만에 만난 연인 같아 보였다. 그러자 리미와 개르는 멍하니 서로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저 녀석....... 어느새 여자라도 후렸나?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이.......” 리미와 개르는 어이가 없어 껄껄 웃는데 갑자기 하백족 사이에서 여자 한 명이 또 달려 나왔다. 그리고 돌연 유창과 중년 여자를 가리키며 사나운 목소리로 외쳐댔다. 그런데 그것만이 아니라 세 명의 여자가 더 뛰어나오는 것이 아닌가? 모두가 멍하니 바라보는 사이 다섯 명의 여자는 유쌍을 가운데 놓고 마구 말다툼을 벌이더니 서로 유쌍을 끌고 가려다가 급기야는 따귀까지 때리고 울고불고 난리를 쳤다. 그러면서 유쌍을 마구 할퀴고 꼬집고 때렸다. 유쌍은 비명을 질렀다. “도와줘요!” “얼굴만 반반한 꼬마 바람둥이구나!” 리미가 껄껄 웃으며 빈정거리자 유쌍이 악을 쓰며 외쳤다. “안 그러면 하백족 이야기를 어떻게 들어요! 아이구! 이거........아파요!” 그러자 개르도 한마디 거들었다. “며칠 되지도 않는데 다섯? 에라이, 죽일 놈이 충분하잖아!” 그때 마냥이 입을 헤 벌리며 중얼거렸다. “마냥은 부럽다.......” 치우비 역시 우습기도 하고 기가 막히기도 해서 헛웃음을 지었다. “너 보기와 딴판이구나. 아니, 생긴 그대로구나. 내가 시킨 것도 아니고, 난 끼어들기 싫으니 네가 알아서 해라.” 의외로 하백족에서는 이런 문제는 스스로 처리하게 놔두는 듯, 하백족 사람들은 웃지도 않았고, 시끄럽다거나 조용히 하라는 등의 간섭도 전혀 하지 않았다. 그 사이에 유쌍은 이제 다섯 여자의 집중공격을 받고 거의 엉망진창이 되어 갔다. 그때 갑자기 하백족이 수선스러워지더니 하백족의 여자 하나가 울면서 뛰어나왔다. 그때까지 생각에 잠겨 있던 하백족의 할머니는 깜짝 놀라 그 여자와 몇 마디를 주고받았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는 치우비 일행은 멍하니 서 있었는데, 갑자기 하백족들이 일제히 주저앉더니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유쌍을 끌어당기며 싸우던 다섯 여자들도 유쌍을 놓고는 땅을 치며 통곡하는 것이 아닌가. 유쌍은 얼굴이 잔뜩 긁힌 채 치우비의 뒤로 재빨리 도망쳐 왔다. 영문을 모르는 치우비가 유쌍에게 다급히 물었다. “무슨 일이냐?” 유쌍은 퉁퉁 볼멘소리로 대꾸했다. “몰라요.” “장난하지 말거라. 무슨 일이냐?” “진몽희님이 죽었다나 봐요.” 유쌍의 말에 치우비 일행은 모두 깜짝 놀랐다. “뭐? 어째서?” “그것까지 내가 어떻게 알아요? 좌우간 우린 이제 상관없잖아요.” 순간, 할머니가 뭐라고 외치자 하백족들이 일제히 치우비에게 몰려왔다. 치우비는 놀라 물러서려 했으나 하백족들에게 적의가 느껴지지 않아 그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자 하백족들은 치우비를 높이 들어올려 세우고는 소리를 지르며 기쁨에 겨워 춤을 추면서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것 아닌가? 더구나 전사들뿐만 아니라 집안에 있던 여자들과 아이들까지 달려 나와 노래하고 춤을 추어댔다. 도깨비들도 마찬가지였지만 치우비의 어리둥절함은 더 했다. ‘이게.......어떻게 돌아가는 거냐? 뭐가 뭔지 모르겠구나!’ 백족 사람들이 치우비를 할머니 앞으로 데리고 오자 할머니는 우비에게 고개를 숙이며 크게 외쳤다. “백년 시험을 통과하신 영웅님께 인사드립니다!” 치우비는 너무나 어이가 없어 할말을 잃고 멍하니 서 있었다. 뭐라 할 틈도 없이 치우비는 거대한 부족장의 물 위에 세워진 집으로 안내되고 온갖 가지 음식이 가득 차려진 상 앞에 앉았다. 그러더니 아까 할머니 양 옆에 서 있던 네 명의 원로가 치우비에게 인사를 드리고, 계속해서 여러 하백족의 사람들이 인사를 올렸다. 더는 참지 못한 치우비가 소리를 쳤다. “이게 뭡니까? 뭐 하는 겁니까? 난 이미 시험에 떨어졌는데요?” 늘씬한 한 여인이 치우비에게 다가와 조용히 말했다. “제가 설명 드리겠습니다.” 치우비는 그 여자의 얼굴을 보다가 ‘앗’ 하고 소리쳤다. 비록 화려하게 치장하여 순간 못 알아보았지만, 그녀는 아까 자신이 잡았던 그 여자가 아닌가? “당신......?” 치우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을 잇지 못하자 그 여자가 대신 말했다. “제가 진몽희입니다. 시험을 풀어내신 영웅, 치우비님께 인사드립니다.” 신시의 검은 그림자 한편 치우천은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일단 사람을 보내 카라치 마을에서 기다리던 양역과 삼천 명의 사울아비를 부달과 함께 공상으로 밀어 넣은 것을 시작으로, 치우천은 이만 의 군대 거의 전부를 몰고 북진하여 아루파한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에 도착하니 도단이와 보돈차르, 치베가 치우천 일행을 반갑게 맞이했고 그들 중에는 공상에서 밀려났던 울쿠타 야쿠타 형제도 있었다. 그곳에는 이미 이만에 가까운 미아우, 마갸르족들과 보돈차르가 몰고 온 삼천 명의 몽골 정예기병이 있었다. 보돈차르는 오랜만에 만나는 치우천을 보고 무척 반가워했다. “천 안다! 정말 반갑다. 자네는 볼 때마다 점점 큰사람이 되어가는구나! 공상을 빼앗고 그 많은 유망의 전사들을 물리쳤다니! 정말 대단하구나!” “정말 반갑습니다! 이번 승리에는 보돈차르 안다와 치베의 도움도 컸습니다.” 그리고 치우천은 아루파한 마을에서 이후의 전략에 대해 회의를 했다. “일단 공상에는 양역과 부달 형이 있고 삼천 사울아비가 있지만, 만에 하나 대비하여 도울 군대를 남겨두려 합니다. 아루파한 마을도 길목을 잡을 수 있는 중요한 곳이니 다시 잘 세워야 할 겁니다.” 치우천은 전에 없이 치밀하게 군대를 여기저기에 배치했다. 치우천의 머리에는 모든 것이 들어 있었으나 지도조차 없이 말로만 하는 전략회의인지라 다른 사람들은 치우천의 의도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치우천의 다음 목표는 신시였다. 그러나 신시를 치는 것은 최악의 사태에 대비하는 것이며, 실제로 치우천은 신시를 치지 않고 일을 마칠 수 있기를 바랐다. 유망의 남쪽 군대가 몰려오고 있으니, 여차하면 아루파한 마을에 있는 보돈차르와 치베 등이 전사들을 데리고 공상에 있는 양역, 부달과 삼천 사울아비를 지원하도록 했다. 그리고 아루파한 마을에는 초초룬과 미아우 부족들이 집결하여 다시 마을을 정리하고 나무 울타리 를 두르게 했으며, 치우천은 울쿠타를 북쪽 요새로 보내 포리를 데려와 마을 수리에 힘을 보태게 했다. 그리고 북쪽 요새에는 와난강, 와난수와 마갸르 부족장들을 주로 배치했고, 중간 지점인 카라치 마을에는 툰툰을 배치하기로 했다. 모든 곳에 전사들을 보냈지만, 남아서 지킬 전사들은 모두가 말을 잘 타지 못하는 보병들, 즉 후에 아루타한 마을에 도착한 병력들이었다. 물론 서로 간에 긴밀하게 연락을 취하기 위해 약 천 명의 말 잘 타는 사람들을 정찰병으로 활용하게 했다. 그리고 야쿠타를 처음의 숙영지에 남아 있던 울라트, 불쇠, 질쾌와 천여 명의 전사들에게 보내어 다음의 말을 전하라고 했다. “일단 그곳 일은 질쾌가 맡고, 울라트와 불쇠는 북쪽 요새로 돌아왔다가 불쇠는 나중에 공상으로 옮겨 하던 일을 계속하라고 전하면 된다.” “그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데요?” 야쿠타가 묻자 치우천은 빙긋 웃을 뿐이었다. “그냥 그렇게만 전하면 알아들을 것이다.” 그리고 치우천은 가장 기동력이 좋은 보돈차르의 몽골 기병들에게 이미 신시를 향해서 오고 있을 작은 주신 사람들을 북쪽 요새로 안내하도록 했다. 그 호위는 야율쿠리의 군대가 맡을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치우천은 알한, 무라와 주신 출신 사울아비들만 데리고 당당히 신시로 북진하석, 주신 접경의 북쪽 요새에서 작은 주신 사람들을 기다리면서 공상의 싸움 결과를 지켜보다가 다른 사람들과 만나 신시로 귀환할 계획이었다. 물론 치우비도 그때쯤이면 합류해올 것이다. 치우천이 직접 대군을 이끌 것이므로, 주신 귀족들이 함부로 손을 쓰지는 못할 터였다. 그리고 치우천은 신시에 들어가서, 공상 점령의 쾌거를 인정받아 치우비를 웃뜸사울아비 자리에 앉히고, 작은 주신족을 모두 주신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전략의 요지였다. 대강의 전략을 듣고는 보돈차르가 입을 열었다. “몽골의 보돈차르가 말한다. 잘된 일이지만, 그렇게 간단하지 않을 수도 있다. 주신은 이미 수십 년 동안 웃뜸 사울아비가 없었다. 주신을 위협하던 유망이 일단 공상을 빼앗기고 힘을 잃은 이상, 주신 귀족들이 웃뜸 사울아비가 나오도록 가만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치우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럴 것입니다. 이 다음부터가 문제입니다. 몇몇 분은 알고 계시겠지만, 저는 신시를 쳐야 할 것입니다.” 이전에 이야기를 들었던 사람들은 덤덤했지만 나머지 사람들 모두가 깜짝 놀랐다. 치우천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이것이 마지막 단계입니다. 이 싸움은 이제껏 누구와 했던 것보다도 힘들 수 있습니다. 더구나 가급적 하지 말아야 할, 일어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싸움입니다. 그러나 더 이상 피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대로 둔다면 이제 제가 신시에 도착하는 즉시, 피바람이 몰아칠 것입니다. 그리고 한웅님과 삼사님 모두가 위험합니다. 우리는 신시를 치는 것이 아니라 신시를 좀먹어 들어가는 자들을 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주신만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부족을 구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도대체 무슨 일인데 그러는 것인가?” 치우천은 한숨을 한 번 내쉬며 대답했다. “이전에 대략 들었던 분도 있습니다만 자세한 것을 다 아는 사람은 제 아우뿐이었습니다. 제가 오늘, 모든 것을 다 이야기하겠습니다. 모든 것이 다 하늘이 정한 것 같습니다. 마치 저희 손으로 모든 것을 마무리 지어야 한다고 누가 새겨 놓기라도 한 것처럼 말입니다......” 모두가 극도로 긴장한 표정으로 치우천의 입만을 바라보았다. 치우천은 한동안 하늘을 바라보다가 돌연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입을 열기 시작했다. “신시에서는 아주 크고 뿌리 깊은 음모가 있었지만, 지금껏 누구도 그것을 알지도, 눈치 채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것을 알게 된 것은 세 사람 때문이며, 그 세 사람 덕분에 오늘의 제가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 첫 번째 사람은 바로 돌아가신 제 어머님이십니다......”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치우천의 어머니가 치우천에게 슬픈 추억으로 남았다는 것은 다 아는 일이었지만, 이미 돌아가신 지 십여 년이 넘는 어머니 때문에 음모를 깨닫게 되었다니! 치우천의 차분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저와 제 아우가 어려서 몹시 아플 때, 어머님은 구름골에 사는 신수 번개범에게서 아홉구비란 약초를 얻어오기 위해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어머님은 아홉구비를 얻으셨지만, 차마 입에 담기도 힘든 처참한 모습으로 끝내 목숨을 잃으셨습니다. 그 때문에 우리 형제는 어머니를 해친 번개범에 대해 그 후 십여 년이나 복수심을 불태워왔습니다. 마침내 지난번 번개범을 만나 겨룬 이후, 저는 번개범과 직접 마음을 열어놓고 여러 가지를 알아낼 수가 있었습니다. 비냐와도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번개범과도 이야기를 했습니다.” 야율쿠리가 흥분하여 뭐라고 외치려다가 다른 사람들이 노려보자 입을 다물었다. “우린 구슬이 있었기에 저는 번개범과 이야기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들은 이야기가 너무도 놀라운 것이라, 저는 그 이야기를 가슴에 묻고 정리될 때까지는 아무에게도 그것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모든 것이 밝혀진 것 같습니다.” 그때 알한이 의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번개범을 그냥 죽인 줄 알았더니, 이야기도 나누었단 말인가요?” “알한님, 번개범은 죽지 않았습니다.” “네? 아니, 그때 번개범은 비냐라는 여자의 몸과 함께 부스러져서 사라져 버리지 않았습니까?” 치우천은 다시 한 번 말끝에 힘을 주었다. “범개범은 죽지 않습니다. 물론 비냐도 죽지 않았구요.” 사람들은 모두 놀라서 웅성거렸다 그때 치우천을 따라 번개범과 싸웠던 사람들은 번개범에서 비냐가 나와 가리족의 정당성을 말한 뒤, 결국 번개범과 비냐가 같이 부스러져 먼지가 되어 버리는 것을 눈으로 보았다. 그런데 번개범이 죽지 않았다니? “번개범은 죽은 것이 아닙니다. 다만 도력을 써서 그렇게 보이게 만든 것뿐입니다. 제가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왜? 번개범은 자네 원수잖은가?” 보돈차르가 말하자 치우천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번개범은 제 어머니를 해치지 않았습니다. 번개범은 제 어머니를 만났으나, 해치기는커녕 도리어 어머니의 용감함에 감탄하여 구름골에서 자라는 약초는 무엇이든 따가도 된다고 허락해 주었습니다.” “아니....... 그럼 누가 자네 어머니를 해쳤는가?” “가리족이다! 그놈들이 그런 게 틀림없어! 놈들도 번개범을 따라 구름골에 살았으니까!” 화난 표정으로 툰툰이 말하자마자 초초룬이 돌연 외쳤으나 치우천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아! 가리족은 비록 사람고기를 먹는 사나운 족속이지만 자신들이 섬기는 번개범의 뜻을 결코 거스르지 않는다.” “그럼 누가 그랬는지 번개범이 가르쳐주었습니까?” 도단이가 묻자 치우천은 역시 고개를 저었다. “번개범도 어머님이 그렇게 된 것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소, 전혀.” “믿을 수 없구먼! 제기랄 믿을 수가 없어!” 괄괄한 삼이 돌연 소리쳤다. “하지만 그 번개범 놈은 한웅님을 습격하여 수많은 사울아비를 해친 놈이잖은가? 그놈이 그렇게 얌전한 놈일 리가 없다구.” “그건 삼 형의 말이 맞습니다. 번개범이 분명 한웅님을 습격하긴 했지요. 허나 번개범은 제 어머니를 해치지 않았습니다.” “그런 괴물의 말을 믿을 수 있겠는가?” “번개범은 비냐를 만났을 때 그녀를 해치지 않고 도리어 참혹하게 변한 비냐를 자기 몸에 넣어서까지 살리려 했습니다.” 그 말에 사람들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치우천은 말을 계속 이어갔다. “하지만 어머님을 누가 해쳤는지는 분명하지 않았습니다. 허나 중요한 사실이 있었지요. 예전 태산 회의 때에 저는 비렴님의 명령을 받고 한웅님을 지키기 위해, 유망의 막사에 숨어든 일이 있습니다. 그때 가리족이 유망의 막사에 드나드는 것을 보았지요. 그 당시 저는 비렴님에게서 가리족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람고기를 먹는 가리족은 전에 주신과 다른 부족들에게 쫓겨 전멸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지요 그런데 가리족은 전멸하기는커녕, 이번에 유망이 쳐들어오기 전에 미아우족을 들이쳐서 그들의 땅을 쑥밭으로 만들었습니다. 뭔가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확실히 이상하지! 아무리 신수를 앞세웠다 해도 전멸당한 부족이 다른 부족을 쳐들어간다는 건.......” 사람들이 웅성거리자 치우천이 손을 들어 보였다. “또 한 가지 있습니다. 지난번에 비냐는, 번개범과 가리족을 시켜서 한웅님을 해치려 했던 것이 다름 아닌 주신 사람이었음을 밝혔습니다. 그것이 누구인지는 비냐도 몰랐고, 번개범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주신 사람이란 것만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뭔가? 주신의 누군가가......” 차분한 거서기가 믿어지지 않는 결론에 도달한 듯 몸을 부르르 떨자 치우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주신의 누군가가 이 일을 시킨 겁니다. 그는 가리족을 치게 해놓고, 실제로 그들이 도망갈 구멍을 열어놓았습니다. 신수가 사는 구름골은 아무도 가지 않는 곳이니 충분히 가리족이 숨어살 수 있었지요.” “가리족은 풍백 비렴님이 직접 치셨다고 들었는데 그럼 그분 야율쿠리가 놀란 듯 중얼거리자 치우천은 잘라 말했다. “비렴님 혼자 친 것도 아니고 많은 부족과 사울아비가 있었는데 그분이 어느 결에 가리족을 빼냈겠나? 비렴님은 결코 아니야. 누가 그전에 미리 귀띔을 해서, 많은 가리족이 미리 구름골로 도망쳐 있게 만든 거지!” “가리족이 우연히 도망쳐 들어간 것은 아닐까?” 삼이 자못 심각하게 말하자 치우천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 “구름골은 좁은 골짜기입니다. 그리고 번개범이 있기 때문에 짐승들도 그곳에는 얼씬거리지 않습니다. 그곳에서 가리족은 무엇을 먹고 살았을까요?” 얼핏 가리족이 수상하다고 눈치를 챘다 해도 거기까지 생각한 사람은 아직 없었다. 치우천은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그 사람이 식량을 구해주며 가리족을 키운 것입니다 번개범을 이용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번개범을 이용하여 한웅님을 해치려 한 사람도 그입니다. 그리고....... 그리고 제 어머니가 죽음을 당하신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치우천은 주먹을 불끈 쥐고 이를 악물며 비통하게 외쳤다. “어머니는 보신 것입니다 아무도 없어야 할 구름골 안에 번개범만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것도 이미 모두 죽고 없어진 것으로 알았던 사람 먹는 가리족이 산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 때문에 어머님은 추격을 당했고, 그 와중에도 어머님은 이....... 이......... 못난 자식들을 위해 아홉구비를 놓지 않으시고....... 칼과 도끼에 맞으면서....... 도망쳐 오신 것입니다. 어머니는....... 어머니는 오른손에 아홉구비를 꼭 쥐고 계셨습니다. 그 때문에 칼도 써보시지 못하고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치우천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가운데 한 사람이 버럭 소리를 쳤다. “고시울률! 그가 틀림없어! 이럴 수가! 자기 딸을 죽이다니!” 그 사람은 바로 부루벼락이었다. 부루벼락은 미친 듯이 외쳤다. “아버지가 딸을 죽이다니! 그가 그런....... 그런 사람일 줄이야, 이 개만도 못한 놈 같으니!” 그때 치우천이 뜻밖의 말을 하며 막아섰다. “벼락 형! 말을 삼가시오. 그분은 내 외할아버지시오 못나고 모자란 분이지만, 그럴 분은 아니오!” “뭐....... 뭐라고?” 그 말에는 부루벼락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 모두가 놀랐다. 고시울률이야말로 한웅의 바로 다음 직책을 지녔으며, 충분히 그런 일을 꾸미고도 남을 속좁은 사람이란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아니란 말인가? 치우천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정말 미칠 것만 같았죠. 허나.......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보고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 그럼 누구란 말인가?” 사람들은 치우천의 믿어지지 않는 말에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계속 귀를 기울였다. 치우천은 어느새 눈물을 거두고 무섭게 눈을 빛냈다. “분명합니다. 그분을 좋은 사람이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습니다. 고시울률님에게 우리 형제는 말할 수 없는 구박을 받고 지냈습니다. 우리 아버지 역시 그러했지요. 그분이 우리 형제를 못 살게 굴려고 항상 생각했던 것도 사실이고, 지금도 우리 형제가 마뜩찮아 견딜 수 없어하는 것도 맞을 겁니다. 허나, 허나 그분은 자기 딸을 자기 손으로 죽일 만큼 모질지도 않으며, 그런 귀신도 모를 꾀를 낼 만큼 영리한 분도 아닙니다.” “그럼 도대체 누가? 치우가람 바람 형제놈들이우?” 이번에는 쇠돌이가 흥분하여 외쳤다. 그러나 치우천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우리 어머님이 돌아가실 때 그놈들은 우리 같은 아이였습니다. 그런 짓을 꾸밀 리 없지요.” “고시울률도 아니고, 치우가람 바람 형제도 아니라면 그게 대체 누구란 말이우? 난 아무리 생각해도 고시울률밖에 없다고 생각하는데?” “자자, 우선 이야기를 마저 들어보세.” 도단이가 쇠돌이를 달래자 치우천이 다시 말했다. “고시울률님은 아닙니다. 아직도 우리 아버님과 우리 형제가 살아 있다는 것이 가장 좋은 증거입니다 딸마저도 죽여야 할 만큼 그분이 모질었다면, 아버님이나 우리 형제를 죽이는 것은 문제도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천님의 어머님은 이미 돌아가신 후였으니 구태여 치우우레님이나 천님 비님을 해칠 이유가 없었잖겠습니까?” “그럴 수도 있습니다만.......” 치우천은 잠시 동안 뭔가 생각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좌우간 고시울률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요?” “고시울률님은 사와라 한웅님을 굳이 해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건 무슨......? 한웅님을 해치고 자기가 한웅이 되려는 것이 아닌가요?” 거서기가 다시 말하자 치우천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지금대로라면, 다음 한웅은 틀림없이 고시울률님이 되십니다. 사와라 한웅님이 돌아가신 다음, 다른 집안에 한웅 자리를 넘기느냐, 그냥 고시씨가 하느냐로 사람들의 의견이 갈라져 있기는 합니다만, 어느 집안도 고시씨 집안만큼 크고 힘 있지는 못합니다. 섣불리 한웅이 되려고 나설 사람도 없구요.” “그건....... 그렇네.” 부루벼락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고 삼도 동의했다. 부루벼락은 그래도 명문에 속하는 부루씨였고 삼도 들은 것이 많은 사람이었다. 한웅은 고시..치우. 부루. 부소. 신지 씨라는, 주신에서 가장 큰 다섯 집안 중의 하나에서 나온다. 그러나 고시씨 말고는 누구 하나 한웅으로 내세울 만한 사람이 없었다. 치우씨의 웃뜸인 치우괄괄은 병이 심해 움직이지도 못하는 산송장이라 치우가람이 대신 일을 하고 있었고, 부루씨의 웃뜸인 부루위단은 이미 고시울률의 충실한 부하였다. 부소씨의 웃뜸인 부소메는 사와라 한웅보다도 더 나이가 많아 언제 죽거나 노망이 날지 모르는 처지였고, 게다가 다음대에 변변한 인물이 없었다. 부소다솔은 정직했지만 겁도 많고 모자라는 것이 많은 인물인데, 그가 그중 나은 편이었다. 신지씨는 신지울태가 운사로 있는 것 외에 일체의 활동을 하지 않고 조용히 산 지 수십 년이 되어갔다 신지씨도 주신의 일에 참여해야 한다는 여론 때문에 신지울태가 대표로 나서다시피 한 셈이지만, 결코 그런 일에는 나서지 않는 것이 지금의 신지 집안의 방침이었다. 결국 그렇게 따지고 보면 설혹 사와라 한웅이 다른 집안에 한웅 자리를 넘긴다 해도 마땅한 사람이 없는 것이 실제의 형편이었다. 몇몇 사람들을 억지로나마 물망에 올릴 수는 있지만, 그렇게 되어봤자 실제로는 고시울률이 모든 힘을 장악할 것이 틀림없었다. 치우천이 계속 말했다. “그럼에도 실제로 한웅님을 노리는 번개범의 습격이 있었으며, 그것은 실패했지만 요즘 한웅님은 빠르게 기력이 떨어지고 계십니다. 지난번에 직접 만나 뵙고 난 후 저는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한웅님이 아무리 나이가 드셨다고 하나 병도 아닌 것 같은데 너무도 쇠약해지시는 것이 의심스러웠습니다. 그래서 나는 번개범을 만난 후에 무라님께 뭔가 한 가지를 알아보게 했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무라가 깜짝 놀랐다. “그게 이 일과 상관있었나요?” “그렇습니다. 미리 알려드리지 못한 것은 죄송합니다만.” “그게 뭐요?” 사람들이 무라에게 일제히 묻자 무라는 살짝 한숨지은 후 말문을 열었다 “저는 누가 다친 줄 알았지요. 그게 설마 주신 한웅님인 줄은 몰랐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아시다시피 카린족 출신입니다. 그래서 카린 사람들과는 좀 가까운 편이지요.” “그래서요?” 도단이가 흥미 있는 듯 묻자 무라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카린족에게는 여섯 명의 무녀가 있습니다. 모두 예전에 저와 함께 열세 자매 중에 속해 있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주술에도 능하지만 사람을 고치는 약이나 해치는 독에 대해서도 잘 압니다. 지금 헌원님을 돕고 있는데, 저는 시기르타에게 부탁하여 그들에게 이상한 독에 대해 물었고, 그들은 그것이 차이라시라는 독이 틀림없다고 이야기 해주었습니다.” “치이라시는 어떤 독입니까? 무서운 독입니까?” 와난강이 조용히 묻자 치베도 중얼거렸다. “아주 무서운 독인가 보군. 단번에 사람을 죽이기도 하는.” 무라는 고개를 저었다. “전혀 무서운 독이 아닙니다만 그래도 아주 무서운 독이라더군요.” “그게 무슨 소리요?” “그 독으로 사람이 죽으려면 적어도.......” 무라는 한 손을 들어 작은 복숭아 정도 크기라는 시늉을 해 보였다. “이만큼의 양을 먹어야 죽음에 이르기 때문에 그렇게 무서운 독은 아닙니다. 오히려 독 중에서 가장 약한 독일지도 모릅니다.” “허허, 그 정도라면 이 흙도 독이겠네. 그만큼 먹으면 죽을지도 모르니깐.” 쇠돌이가 흙을 집어 올렸다가 우수수 떨어뜨리며 실소를 터뜨렸으나 무라는 조용히 말했다. “그러나 이 독은 먹을 것이나 물, 어느 것에 섞어도 됩니다. 일단 섞으면 절대 냄새나 맛도 없고 색깔도 없어서 표가 나지 않을뿐더러, 워낙 독이 약하기 때문에 정말 독을 넣었는지 안 넣었는지 알아낼 방법이 없습니다. 독을 조금 넣은 음식을 다 먹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으니까요. 허나 그 독은 한번 몸에 들어가면 아무리 세월이 오래 지나도 결코 빠져나가지 않고 쌓이기만 하면서 차차 죽음에 이르러 몸을 망치게 됩니다.” 차이라시는 일종의 만성독약인 셈이었다. 순간 거서기가 갑자기 바닥을 주먹으로 쾅 내려치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러면 한웅님께서......?” 치우천은 재빨리 거서기의 입을 막았다. “그건 아직 모르는 일입니다. 무라님도 방금 말씀하셨잖습니까? 독을 섞었는지 아닌지 알아낼 방법이 없다고. 확실하지 않은 것을 함부로 말하다가는 되레 당합니다. 그러나 분명 의심스럽기는 합니다.” 사람들이 한숨을 쉬고 혹은 통탄하자 치우천은 다시 덧붙였다. “좌우간 지금 상태로는 한웅님이 위험합니다. 그리고 고시울률님이 정말모든 것의 가운데 있는지, 아니면 또 다른 사람이 있는지 알아내고 뿌리를 뽑아야 합니다.” 그러자 삼이 천천히 말했다. “나는 고시울률님이 가운데 있을 것이라 믿네. 고시울률님도 나이가 많지 않은가? 루라도 빨리 한웅이 되고 싶어서 서두르는 것 아닐까?” 그러나 치우천은 고개를 저었다. “차라리 그렇다면 별 문제가 아닐지도 모르죠. 그러나 한 번 이렇게 생각해보십시오. 그게 만약 계략이라면?” “무슨 계략말인가?” “고시울률님의 밑에 있지만, 고시울률님을 되엎으려는 사람의 계략이라면요?” “이해가 안 되네. 자세히 말해주게나.” “고시울률님은 굳이 위험하게 한웅님을 해치려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누군가는 자꾸 그런 짓을 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저는 한 번 이렇게 생각해보았습니다. 사와라 한웅님이 돌아가시고 고시울률님이 다음 한웅님으로 뽑힐 때, 그 누군가가 나타나서 사와라 한웅님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말한다면.......과연 어떻게 될까요? 그것을 분명히 밝히기만 한다면 고시울률님은 한웅이 되실 수 없을 것입니다. 이전 한웅을 해친 죄인이 한웅이 될 수는 없을 테니까요 그렇다면 그전까지 세력이 없거나 약한 누군가가 한번쯤 한웅의 자리를 노려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다섯 집안 출신이 아니어도 한웅이 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은 모두 경악하여 입을 딱 벌렸다. “그...... 그건 정말 너무나도 무서운 일이다!” 치우천도 심각한 표정으로 한마디를 보탰다. “문제는 또 있습니다. 한웅님의 습격에 나타났던 늑대는 아무래도 헌원님의 밑에 있는 비휴를 생각나게 합니다. 비휴는 그런 적이 없다고 말했지만 좌우간 적어도 주신에는 그렇게 늑대를 부리는 사람이 없습니다. 또 가리족은 유망의 막사에 드나들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주신에서 꾸며지는 음모가 지나족과도 어떻게든 연결이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생각해보는 것은 어떻습니까? 고시울률님은 한웅의 자리를 얻기 위해 사울아비들의 힘을 눌러왔습니다. 그 때문에 지나족과 어느 정도 거래를 하여 지나족이 땅을 늘리는 것을 눈감아주는 대신 한동안 안정을 누리려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누군가가 거기 끼어들어서, 도리어 지나족의 힘을 빌려서 한웅님을 해친 게 고시울률님이라는 증거를 손에 쥐려 한다면요? 그렇게 하여 정말 얻고자 하는 것이 단순한 귀족의 자기가 아니라, 더 큰 것이라면요?” “그........ 그건 좀 너무한 듯하네. 더구나 지나족이 뭐가 좋다고 그런 일까지 끼어든단 말인가?” 도단이가 놀란 듯 중얼댔지만 치우천은 단초하게 말했다. “가능합니다. 고시울률님이 다시 밀려나고 주신이 혼란스러워진다면 충분히! 그렇게 되면 결국 신시 안에서 사울아비들끼리의 싸움이 벌어지게 됩니다. 유망이 미안우와 마갸르를 치든, 헌원이 타타르나 몽골, 창족을 치든 주신은 개입할 수조차 없습니다. 더구나 주신 안에서 한웅 자리를 놓고 싸움이 벌어지면 쉽게 싸움이 끝나지 못합니다. 주신 안에서조차 뜻이 갈라지고 서로가 서로를 못 잡아먹어서 으르렁댄다면? 그리고 그게 오래 간다면,1 안에 숨은 누군가가 농간을 부려 주신 안에서의 싸움이 길어지게 만든다면? 어떤 다른 부족들도 주신의 힘을 믿거나 기대하지 알을 것입니다. 결국 그렇게 되면 몇 년 안에 주신은 지나족의 손에 의해 망할지도 모릅니다!” 치우천은 괴로운 듯 말하다가 한숨을 쉬었다. 사람들도 모두 긴장하고 놀라 몸을 가볍게 떨었으며, 주신의 사울아비들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눈을 부릅떴다. “그렇게 놓아둘 수는 없지! 그렇다면 그런 짓을 꾸미는 놈들은 지나족들일까?” 부루벼락이 묻자 치우천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대답했다. “그건 알 수 없지요.” “지나족이 아니라면 주신놈들이 그런다는 건데, 그렇게 하면 그놈들도 망하는 것 아닌가?그놈들이 뭘 바라고.......” “그들도 거기까지 바라는 건 아닐지 모릅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바로 그 직전까지! 즉 자신들이 힘을 얻는 순간까지만 바라는지도 모르죠. 주신이 그렇게 혼란스러워지면, 주신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위기감을 가질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서로 싸우기보다는 힘을 몰아주어서 혼란을 없애고 다시 단결해보려고 생각할 겁니다. 그렇다면 죄가 많은 귀족들보다는 새로 일어난 그 사람의 편을 들어줄 가능성이 높지요 일단 거기까지만 성공한다면, 그들은 무엇이나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사람들은 모두 놀라고 머리가 복잡한 듯 입까지 딱 벌렸다. 치우천은 거기에 결정적인 도장을 찍듯 눈을 빛내며 단호히 말했다. “귀족들을 모두 없애면 다섯 가문도 쑥밭이 됩니다. 그쯤 되면 아예 한웅 자리도 없어질지 모르지요 다섯 가문이 번갈아 이어온 한웅자리에 그 그림자가 앉을 수 없을지도 모르니까요 그러면 한웅이 아닌....... 이를테면 주신 왕이 생기는 것이지요. 아예 주신이라는 나라가 없어지고, 새 나라를 세우는 것이 그들의 목적인지도 모릅니다. 그 정도 목적이 있어야 이 모든 것이 이해가 됩니다.” 사람들은 너무도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에 멍해하기도 하고, 고개를 설레설레 젓기도 했다. 엄청난 이야기였지만 믿지 않을 수도 없었고 믿기도 힘들었다. 잠시 치우천은 숨을 길게 내쉬더니 말을 이었다. “이런 걱정은 제가 처음 한 것이 아닙니다. 주신에는 아직도 주신을 필이 걱정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지난번 번개범을 만난 후에, 제가 마음을 터놓고 상의한 분이 이런 생각을 하게 깨우쳐 주셨습니다.” “그게 누구신지요?” 격식을 갖춰 도단이가 묻자 치우천이 곧 대답했다. “아까 말한 세 분 중 두 번째 분이라 할 수 있지요 바로 풍백 비렴님이십니다 그분은 고시울률님과 맞서는 입장이시지만, 생각이 깊은 분입니다. 고시울률님이 그럴 이유가 없다는 것을 제게 말해주신 분이 바로 비렴님입니다. 비렴님이 고시울률님과 맞서시면서도, 막상 고시울률님과 크게 싸우는 일을 피하는 것도 다 그런 깊은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비렴님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저는 그 그림자 같은 사람이 신시에 있다는 생각이 굳어져 갔습니다. 이 생각이 맞다면 신시는 아무도 모르는 검은 그림자로 덮여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싸워야 할 적은 고시울률님이나 귀족들이 아니라 바로 이 드러나지 않은 자들입니다. 어쩌면 고시울률님은 그들에게 이용당하는 존재인지도 모릅니다. 고시울률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이용당하는 것인지도 모르죠.” “아무리 그래도 난 믿기 힘들구려. 그렇게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지만, 전혀 아닐 수도 있지 않소?” 도단이가 조용히 말하자 치우천은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내가 한 생각이지만 나도 믿기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오늘 내게 그렇다는 확신을 준 사람이 있습니다. 그분이 남긴....... 글자를 보았습니다.” “글자? 글자를 쓰다니?” 사람들은 놀라서 웅성거렸다. 치우천은 사람들이 떠드는 것을 개의치 않고 조용히 말했다. “많은 글자가 남았던 것은 아닙니다. 나도 글자는 거의 모르지만, 조금 몰래 배운 바가 있습니다. 바로 오늘 막사를 치는데, 제 막사 앞 나무에 글자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맞다’라고요.” “황당하군. 누가 장난한 것인지도 모르잖습니까?” 와난강이 말하자 치우천은 고개를 저었다. “장난으로 글자를 새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번에는 삼이 말했다. “그러나 자네도 뭐가 맞는지, 분간 못했다면서? 어떻게 ‘맞다’라는 말 한마디로 그렇게 단정 짓는가?” “그때 제가 생각하던 것이 맞다는 뜻일 겁니다. 그래서 알 수 있었습니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이미 저는 그런 식으로 여러 번 가르침을 받은 적 있으며,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웅성거렸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자네가 언제, 어디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안단 말인가?” “그게 대체 누군가?” “이건....... 말도 안 되는군!" “그가 바로 제가 말씀드린 세 번째 사람입니다.” “그게 누구요?” 사람들이 궁금해 하자 치우천은 이윽고 조용히 말했다. “바로....... 맥달님입니다.” “맥달님? 그분이 어떻게 여기 글자를......?” “이미 그분은 모든 것을 아시니까요 그래서 저는 분명 그런 사람이 신시에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돌아가신 분이 그걸 어떻게 알고.......!” 부루벼락의 말에 치우천은 돌연 무섭게 눈을 빛냈다. “다들 그분이 돌아가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믿었고요. 그러나......차차 마음을 가라앉히고 보니 그럴 것 같지 않았습니다. 맥달님은 앞날을 다 내다보는 분입니다. 저는 전에 신시에서 맥달님과 직접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고분은 분명 자신의 죽음도 잘 알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점차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그분은 죽지 않았을 거라 믿었습니다. 죽은 척하고 몸을 숨겨 어딘가 숨어 계실 것입니다.” 그 말에 도단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분은 돌아가셨는데?” “그럴 리 없다네. 자네도 알고 있지 않았는가? 질쾌도 그렇고.” “뭘 말인가?” “맥달님이 돌아가셨다고 질쾌가 말했다던데. 거짓말 아니었는가? 이제 그분은 위험하지 않을 거야. 나에게 숨길 것 없다네. 이제 이야기해도 될 걸세.” 그러자 돌연 도단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분은....... 돌아가셨네. 정말 돌아가셨어.” 치우천의 얼굴이 돌연 일그러졌다. “그게....... 무슨 말인가?” 갑자기 치우천이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도단이를 쳐다보자 도단이는 놀란 듯 어깨를 흠칫거렸다. “천, 자네가 나를 보고 있는가? 보이지는 않지만 너무 무섭다네.” “설마....... 설마 도단이, 자네였는가?” 치우천이 묻자 도단이는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내가 그분을 찔렀네. 자네 계획대로 치우가람 녀석에게 믿음을 주기 위해 내가 그분을 찔렀다네. 놈들은 나를 애당초 믿지 않으려 했네. 안 그랬으면 그놈들은 나나 질쾌를 절대 믿지 않았을 거야.” “허나....... 자네와 질쾌가....... 그분을 숨겨준 것이 아니었는가?” 그러자 도단이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나도 그러려 했네. 허나.......그분이 말씀하셨네. 소리 없이 그분 뒤로 숨어 들어온 우리에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이렇게 말씀하셨네. ‘망설이지 마십시오. 죽은 척하는 것으로는 그들을 속일 수 없습니다. 천님을 잘 도와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이네. 그래서 나는.......죄송하다고 말하고 힘껏 칼을 찔렀고....... 그분은 태연히 받아들이셨네.” 그 말을 듣는 순간 치우천은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여태껏 혹시나혹시나 해왔던 일이었지만 도단이의 말을 듣고 나자 일말의 기대마저도 허물어져 버린 것이다. ‘맥달! 맥달! 그러면 정말 죽은 것이오? 당신은 역시 알고서....... 알고서 받아들인 거란 말이오?’ 그러나 도단이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마저 말했다. “나는....... 나는 지금도 겁이 나네. 그....... 그 눈부신 흰옷을 입으신.......그분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피를 잊을 수 없다네. 그....... 그분은 쓰러지시며 말씀하셨네. 태워 달라고 말이네. 그게 그분 마지막 말씀이셨네. 질쾌가 숨을 거두신 것을 확인했고, 우리는 불을 질렀다네. 나도 슬펐고, 눈물을 흘렸네. 솔직히 그분의 집에 들어가기 직전까지, 나는 질쾌와 함께 그분을 빼낼 작정이었네. 그러나 그분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계셨어. 내가....... 내가 대체 어찌할 수 있었겠는가? 내 평생....... 가장 힘든 일이었네.” 도단이의 희게 뒤집어진 눈에서 눈물이 솟구쳐 나왔다. 그러나 치우천은 버럭 고함을 질렀다. “왜........? 왜 그랬는가?” 도단이는 슬픔에 겨운 어조로 조용히 되받았다. “왜라니? 나는.......나는 그놈들의 믿음을 얻어야 했네. 그게 자네의 작전이 아니었나?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성공해야 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우리는 다투는 척했고....... 비록 맥달님이 귀한 분이나 이 전쟁만큼 중요한 분은 아니었잖은가? 더구나 그분이 원하신 일이네. 자네를 위해 알고 하신 일이 분명하단 말이네.........” 치우천은 도단이의 말에 울음을 터뜨렸다. 많은 대장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치우천이 이렇게 울음을 터뜨릴 줄 몰랐기에 모두 놀라고 당황했다. 도단이도 몹시 당황한 듯, 하얗게 질린 얼굴에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내 책임을 피할 생각은 없었네. 신시의 일이 처리되면, 나 스스로 신시 사람들에게 내 죄를 밝히고 스스로 죽을 생각이었다네. 질쾌도 마찬가지일 걸세. 자네에게 말하지 않은 것은........ 정말.......그럴 필요가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네. 자네와 맥달님이 가까웠었나? 자네가 사막에 버려지던 때 이야기 나눈 것 말고는 자네는 맥달님을 만난 적이 없다고 알고 있었네. 자네........ 왜 그리 통탄해하는가? 혹시 맥달님과 가까웠던 것인가? 아........ 나는........ 나는 정말 몰랐네. 정말........” 순간 도단이는 스스로 혀를 깨물려고 했으나 옆에 있던 삼이 재빨리 도단이의 턱을 붙잡았다. “죽을 셈인가? 이게 뭔가?” 거서기와 부루벼락도 놀라 소리치자 사람들도 저마다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치우천은 울기만 할 뿐,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것을 본 야율쿠리가 갑자기 땅을 내려치면서 버럭 고함을 질렀다. “이게 뭐야! 모두들 조용히 해!” 야율쿠리는 무서운 기세로 치우천에게 외쳤다. “치우천! 너 왜 그래? 이 무슨 못난 꼴이냐! 네가 이 정도밖에 안되는 놈이었나? 그 여자가 뭐길래! 빠져 있기라도 했느냐?” 치우천은 비통함을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쳤다. “헛소리 마라! 너는 몰라!” 야율쿠리는 무시무시한 기세로 되받아 외쳤다. “치우천! 네 말대로 난 모르겠다. 나만 아니라 여기 누구도 모를 것이다. 그러나 여긴 대장들이 모인 자리다! 보일 행동이 있고 못 보일 행동이 있다! 나는 우리 울크리족을 위해 내 형들을 모두 내 손으로 쳐 죽였다! 아무리 못된 형들이고 나를 괴롭힌 형들이었다지만 어릴 때는 사이좋은 형들이었다! 그 형들이 어머니와 아버지를 죽이고 나는 그 형들을 죽였다! 하지만‥‥ 하지만 나는 참았다. 지금껏 눈물한 방울 흘린 적 없다! 치우천! 그 여자가 대체 뭐냐! 네 애인이냐? 스승이냐? 너는 나보다 못난 놈이었느냐?” 사람들이 야율쿠리를 말리려 했지만 야율쿠리는 거칠게 그들을 떨쳐내며 외쳤다. “나보다 못난 놈이라면, 나는 너를 따르지 않겠다!” 야율쿠리가 치우천을 후려갈기려는데 쇠돌이가 야율쿠리의 허리를 감싸 안고 매달려 간신히 제지했다. 분위기가 엉망진창이 되어 가자 사람들도 흥분했다. 그때 초초룬이 사방으로 눈을 흘기며 오싹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젠장, 다들 움직이지 미 움직이면 독을 푼다!” 그러자 와난수가 조용히 일어나 말했다. “마갸르의 와난수가.감히 한 말씀드리겠소. 우리 모두 좀 마음을 가라앉힙시다. 남의 사정을 안다고 할 수 없는 거요 치우천님께도 그만한 까닭이 있겠고, 나는 남이고 여러분도 남이니, 우리는 자리를 잠시 비우는 것이 좋겠소.” 그때 치우천이 갑자기 손을 쳐들었다 사람들은 치우천이 손을 들자, 모두 인상을 굳히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치우천은 이를 악물고 고개를 들어 옷소매로 얼굴을 닦았다. “못난 모습 보여서 죄송합니다. 계속 하겠습니다. 도단이, 자네 탓을 하는 게 아니니 자네도 침착해주게. 나도 그러겠네.” 그리고 치우천은 간신히 힘을 내어 얼굴을 굳히고는 신시를 공략할 전략에 대해 사람들과 마저 이야기를 나누었다. 치우천은 이때만큼 힘들고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은 적이 없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이 터질 듯한 슬픔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인연은 있었고 서로를 잘 이해하기는 해도 고작해야 서너 번 만났고, 몇 마디밖에 나누지 않은 사이였다. 그런데 왜 이리 괴로운지 치우천으로서도 알 수 없었다. 간신히 회의를 마치자 사람들은 곧바로 일어나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도단이도 조용히 일어나 나갔고 그의 옆에는 삼이 따랐다. 모두 나가는 순간, 치우천은 그 자리에 허물어지듯 쓰러져서 목을 놓아 하염없이 통곡했다. 만남과 헤어짐 “무슨 소리요? 아까 당신은 진몽희님이 아니라고 하잖았소? 방금 진몽희님은 죽었다고 했는데 왜 지금 당신이 진몽희님이라고.......” 치우비는 잠시 말을 멈추고 눈을 감더니 도저히 이해가되지 않는다는 듯 얼굴을 문질렀다. “난.......도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소.” “제가 설명해 드리지요. 아까 저는 진몽희가 아니었습니다. 다들 그렇게 알고 있었죠. 그때 당신은 시험을 풀지 못한 셈입니다. 헌데.......지금에야 알게 사실이지만....... 제 언니였던 진몽희는 그때 이미 죽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저는 그때 이미 진몽희였고, 치우비님은 그 시험을 푸신 겁니다.” 그러면서 진몽희가 된 여자는 눈물을 흘렸다. 방금 전의 사납고 암팡지던 태도는 오간 데 없고 완전히 부드럽고 여자다운 태도로 바뀌어 있었다. “언니는....... 언니는 아무도 볼 수 없는 강 밑 동굴 속에 있었지만 모든 것을 알고 있었나 봐요 이대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언니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겁니다.” 치우비는 비로소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문득 그 여자가 가여워졌다. “왜...... 굳이 귀한 목숨을.......” 진몽희는 여전히 눈물을 흘리면서 차분하고도 정중하게 말했다. “그러지 않으면 하백족은 머지않아 지나족에게 짓밟혀올 겁니다. 더구나 주신에게도 죄를 지었을 거구요 부족을 위해서는 그 길밖에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언니가....... 불쌍합니다.” 치우비는 얼굴도 본 적이 없는 그 여인이 가엾어서 눈시울을 붉혔으나 눈물을 보일까 봐 애써 눈물을 감췄다. “그러면 당신도 그 강밑 동굴에 갇혀야 하는 거요?” “그렇지 않습니다. 진오님이 내신 시험은 이미 풀렸고, 더는 되풀이 할 필요가 없겠지요.” “이제는 당신이 진몽희가 되었다고요?” “그러 합니다.” “그러면 상망님과 공손발님도 풀어줄 수 있겠습니까?” “물론 풀어드릴 수 있습니다. 지나족과 원수가 되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치우비는 진몽희가 두 사람을 풀어준다고 하자 반가운 마음에 다른 일은 더 이상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그러면 어서 풀어주시오” 그때 할머니가 정교하게 조각된 나무상자를 들고 와서 공손하게 진몽희에게 바쳤다. 진몽희도 정성스레 그것을 받아들고는 치우비에게 내밀었다. “받으소서.” “이게 뭡니까?” “우리 하백족의 보물인 푸린구슬입니다.” “아.......” 상자를 내미는 진몽희의 얼굴은 다소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러나 치우비는 별 생각 없이 그것을 받았다. “상망님과 공손발님이나 풀어주시구려. 나도 그들을 좀 만나면 안 되겠소?” “원하시는 대로 하소서.” 진몽희는 치우비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어느새 하백족들이 수십 명의 지나족을 집에서 데리고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상망과 공손발이 저만치에서 나왔다. 공손발은 나오면서 머리에 장식을 꽂으며 투덜거렸다. “비야! 이제 겁난다 이거야? 그런다고 내가 너희를 용서할 줄.......” “발!” 치우비는 너무도 반가워 공손발의 이름을 크게 외치며 달려갔다. 순간 공손발의 커다란 두 눈이 더욱 커졌고 마치 눈앞에 뿌옇게 안개가 긴 것처럼 아스라하게 변했다. 공손발의 손에서 장식이 툭 하고 떨어졌고, 상망도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치우비는 정신없이 달려 공손발 앞으로 가려 했으나 상망이 재빨리 앞을 막아서며 외쳤다. “안 돼!” 상망이 막건 말건 곧장 공손발 앞으로 달려가려는 치우비를 상망은 교묘하게 그 앞을 가 로 막으며 팔을 잡고 매달렸다. “뭐 하는 거냐! 너는 왜 여기 있는 거야?” 그러나 치우비는 상망의 말은 귀에 들리지 않았다. 치우비의 눈에는 공손발말고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발 내가 왔다! 이제 아무 염려 미 발.” 치우비는 매달리는 상망을 질질 끌며 공손발 앞까지 다가갔다. 공손발은 마치 정신이 나간 듯, 치우비가 바로 앞까지 왔는데도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다가 돌연 눈물을 한 방울 흘렸다. “비......? 정말....... 정말........ 너야?” 치우비는 더 참지 못하고 공손발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래! 나야. 내가 왔어. 정말....... 정말 반갑다. 더........ 더 예뻐졌구나, 발!” 발은 뿌옇게 안개 긴 것 같은 눈으로 멍하니 물었다. “나를....... 구하러 온 거야?” “그래. 이젠 걱정 안 해도 돼!” “난....... 나는 네게 못할 짓을.......”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발을 치우비는 와락 끌어안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 “보고 싶었다! 정말 죽고 싶을 정도로 보고 싶었어!” 상망이 뭐라고 계속 떠들어댔지만 이 순간 치우비와 공손발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돌연 발도 흐느끼며 치우비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비........ 멍청이! 왜 여기까지 왔어! 왜!” 결국 공손발은 커다랗게 ‘으앙’ 울음을 터뜨렸다. 치우비 역시 울음을 그치지 않고 계속 어깨를 들먹였다. “같이 가자 발? 응? 나랑 같이 가자!” “난....... 난 그럴 수 없어. 그럴 수........” 공손발이 흐느끼며 간신히 말하자 치우비는 조금 정신을 가다듬고 공손발을 다독였다. “발아, 발아. 염려하지 마. 나는 주신의 웃뜸 사울아비가 될 거야. 공상을 떨어뜨렸다구. 나는 정식으로 너를 맞아들일 거야. 헌원님도 반대하지 못하실 거야.” “하....... 하지만 나는........ 너를 찔렀잖아. 치우천님은 나를 용서하지 않을.......” “아냐! 아냐! 형님은 그렇지 않아. 나를 여기로 보내준 것이 형님이란 말야. 발, 이젠 정말 걱정할 것 없어. 정말로 걱정할 것 없어!” “그게.......정말이야? 난....... 나는.......” 발은 감격에 겨워 말을 잇지 못했다. 그때 돌연 치우비는 뒷덜미에 서늘한 기운을 느꼈다. 반사적으로 치우비가 몸을 돌려보니 수십 명의 하백족이 자신에게 창을 겨누고 있지 않은가? 그 앞에는 할머니와 네 명의 원로가 얼굴빛이 허옇게 변해서 씨근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서 진몽희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치우비님! 무엇 하는 게요? 이게 무슨 짓이오.” 할머니가 무척 화가 났는지 큰 소리로 외쳤다. 치우비는 갑자기 하백족들이 왜 이러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대체 갑자기 왜들 이러십니까? 나는.......” 얼빠진 듯한 치우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할머니가 발까지 구르며 소리쳤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오?” “도대체 무엇이 부끄럽다는 겁니까?” 그때 상망이 조그맣게 속삭였다. “자네, 혹시 하백족의 시험을 통과한 겐가?” “그렇습니다.” “혹시 저들이 주는 푸린구슬을 받았는가?” “그렇습니다.” 상망은 푹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는 정말 머리가 안 돌아가나? 그렇다면 그게 무슨 의미인지 잊어버렸단 말인가? 여기서 대놓고 이러면 저들이 화내는 게 당연하잖나!” 그때서야 치우비는 아차 싶어서 울상을 지었다. ‘가만...... 하백족은 영웅을 진몽희님의 짝으로 맞이하기에 앞서 이 시험을 치르도록 하고, 푸린구슬을 준다고 했다. 그렇다면 진몽희님을 나와....... 맺어주려고 할 텐데.......그 앞에서 발과 껴안아 버리기까지 했으니.......’ 생각이 그에 미치자, 하백족들이 왜 갑자기 신경을 곤두세우는지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발을 보는 순간 너무 기쁘고 정신이 없어서 방금 들었던 사실마저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선두에 선 할머니의 분노가 대단한 것 같아 치우비는 변명하듯 말했다. “저....... 저는 발을 좋아한다고 말 했잖았습니까?” 할머니는 다시 지팡이를 땅에 쾅 찧으며 외쳤다. “자네는 이미 푸린구슬을 받았네! 그렇다면 진몽희님과 혼인을 해야지!” “아이구....... 그건 제가 얼결에 받은 겁니다. 정 그러시다면 받지 않고........” 순간 상망이 끼어들어 다급하게 소리쳤다. “발 아가씨는 그걸 가져가야만 하네!” 동시에 진몽희도 외쳤다. “그러면 일이 다 틀어져요! 당신이 그렇게 나온다면, 우리 언니는 왜 죽은 거죠?” 하백족의 할머니도 소리쳤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야 자네는 진몽희님과 혼인을 해야 해! 안 그러면 죽는다!” 그 말을 듣자 발은 왈칵 성질이 치밀어 앙칼지게 소리쳤다. “비! 그러면....... 그러면 우릴 풀어주려고 저 고양이 같은 년이랑 혼인한다고 했단 말야? 이 멍청잇!” 순간, 고분고분했던 진몽희가 다시 암고양이처럼 눈을 빛내며 받아쳤다. “누굴 보고 멍청이라고 하는 거야! 지나족 계집!” 그 눈빛을 본 발 역시 지지 않고 외쳤다. “고양이 같은 계집! 멍청이! 얼른 그거 돌려줘! 난 안 가도 돼! 도로 잡혀 있어도 된단 말야!” “누구 마음대로!” “망할 놈의 하백족! 우리 아버지가 싹 쓸어버릴 거다!” 삽시간에 일이 엄청나게 꼬이자 치우비는 혼란스러워서 넋이 다 빠져나갈 지경이었다. 진몽희와 할머니, 하백족의 원로들이 마구 소리를 지르자 하백족 전사들이 창을 앞세우고 다가오기 시작했구 저만치에 있던 리미와 개르, 마냥, 유쌍이 무기를 뽑아 들었으며, 막 풀려난 지나족의 전사들도 여차하면 맨손으로라도 달려들 기세였다. 이렇게 나가다가는 큰일이 벌어질 것 같아 치우비는 있는 힘을 다해 크게 소리쳤다. “모두들 그만두시오!” 치우비가혼신의 힘을 모아 소리를 지르자 사방이 쩌르렁 울렸다. 하백족들도 놀라서 자기도 모르게 우르르 뒤로 물러섰고 몇 명은 엉덩방아를 징기까지 했다. 치우비는 틈을 주지 않고 다시 외쳤다. “하백족과는 다투고 싶지 않소! 그러나 상망님과 발님을 잡혀 있게 둘 수도 없소! 하백족은 나와 싸우려는 것이오!”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치우비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기도 두려울 지경이었고, 몸에서 풍겨지는 엄청난 기세 때문에 하백족들은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보통의 하백족은 물론이고, 하백족의 원로들의 생각도 똑같았다. ‘아까까지는 덩치만 크고 멍해 보이기만 했는데........ 정말 화를 내니 아무도 상대할 수 없다는 용사가 틀림없구나!’ ‘정말 하늘이 낸 용사가 틀림없다. 그냥 보낼 수 없다! 하백족이 저 사람을 놓치면, 다시는 저만한 영웅을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잡아두어야 한다!’ 할머니는 생각을 정리하고 마음을 독하게 다잡은 뒤 커다랗게 외쳤다. “치우비님을 다치게 하고 싶지는 않소만, 이미 예언은 이루어진 것이니 진몽희님과 혼인하지 않고서는 절대 가실 수 없소! 가려거든 우리 부족을 다 죽이고 가시오!” 치우비는 하백족 속에 들어와 있으니 도망치기는 어렵겠지만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정말 이럴 거요?” 치우비가 다시 소리치자 이번에는 진몽희가 치우비에게 간곡하게 하소연을 했다. “우리 하백족은 무엇이든 해드릴 수 있는데....... 제....... 제가 그리도 마음에 안 드십니까?” 진몽희가 애처롭게 이야기하자 순간 치우비의 마음이 흔들렸다.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그때 발이 치우비의 팔을 매섭게 꼬집으며 쏘아붙였다. “뭐?” 치우비는 몹시 당황해서 무섭던 그 기세가 순식간에 흩어져 버렸다. 그러자 진몽희는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치우비님이 그러시면 우리 부족은 어찌하라는 것입니까? 진오님의 예언을 지키지 못한다면 우리 부족 사람들은 다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을 위해 죽은 저희 언니는 어찌합니까? 저는 또 어찌합니까?” “너는 또 왜 끼어드는 거야! 뭘 어쩌라는 거야!” 발이 다시 화를 내며 소리치자 치우비는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어서 황급히 말했다. “하백족 여러분, 저는 애당초 발과 상망님을 구하러 온 것입니다. 진몽희님이 예쁘시기는 하지만....... 흠, 아니 뭐, 솔직히 그렇잖아, 발아. 그렇지만 저는 그런 일에 대해선 전혀 알지도 못했습니다. 저는 비록 여기서 싸우다 죽는 한이 있어도 발을 배신할 수 없습니다 저에게는 발뿐입니다. 그리고 싸우기도 싫습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오!” 할머니가 다시 뻣뻣하게 나오자 치우비는 입술을 깨물고 발에게 살짝 속삭였다. “발, 미안해 하백족이 너무 많아서 너를 데리고는 못 갈 것 같아. 그러니 너, 어서 가.” 그러더니 치우비는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 “정 그러시다면 푸린구슬을 들려드리고 제가 대신 남을 테니 발과 상망님만 보내주십시오 시험을 못 통과한 것으로 치면 되잖습니까? 제가 남는다면 발이나 상망님은 시험에 대해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자 발이 울면서 치우비에게 매달렸다. “안 돼! 비! 그러면 저 고양이가 무슨 수작을 부릴지도 모르잖아.” 치우비는 발을 보고 싱긋 웃으며 말했다. “나를 믿어, 발. 너를 배신하느니 나는 차라리 내 손으로 목을 찔러 죽어버릴 거야.” 그 말에 발은 깜짝 놀라 외쳤다. “죽는단 소리하지 마! 네가 죽으면....... 아니, 너 따위는 죽어도 되지만....... 아니, 아니. 정말 그런 건 아니야. 알지? 응? 너는 날 데려 가야잖아. 응? 약속했잖아 웃뜸 사울아비가 된다면서? 응?” “난 괜찮아.” 치우비는 발에게 눈을 찡긋해 보였다. 그러자 발은 울상이 되어 억지로 인상을 써 보이며 으름장을 놓았다. “비 멍청이! 너 따위 도움은 필요 없어! 너 어서 가 버려! 저들은 날 못 건드릴 거야. 그러니 네가 가라구.” “못 봐주겠군!” 할머니가 호통을 치자 발과 치우비는 흠칫하며 입을 다물었다. “좌우간 치우비님은 갈 수 없소!” 마치 선포하듯이 지팡이를 쿵쿵 내려찧는 할머니와 진몽희를 번갈아 쳐다보며 발은 울먹울먹한 표정으로 외쳤다. “진몽희, 너도 비가 좋은 거야? 넌 비를 본지 하루밖에 안되었잖아! 이 멍청이가 뭐가 좋다구 그래!” 그러나 진몽희는 고개를 살짝 돌린 채 대답하지 않았다. 발은 진몽희가 이미 치우비에게 필은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거의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발은 약이 올라 발을 동동 구르다가 꽥 소리를 질렀다. “좋아! 좋다구! 내 양보할게. 진몽희, 너도 이 멍청이에게 시집오면 되잖아! 대신 내가 언니야. 알아?” 발의 성격으로 볼 때 대단히 충격적인 말이었지만 이 말에 가장 놀란 것은 치우비였다. “발! 나는 절대 그렇지 않을 거야! 절대!” “잘난 척하지 마! 네가 입 발린 소리한다고 누가 좋대? 사내놈들은 전부 여자를 줄줄이 거느리는 거 좋아하잖아.” “나는 아냐!” “주신 남자들도 다 그렇다던데, 윌 그래?” “발. 주신에도 그런 사람들이 많지만, 우리 치우 집안 남자들은 안 그래. 아버님도 어머님 한 분밖에 없으셨고 형님도 그래. 나도 발 너 하나뿐이야. 너와 안 이루어지면 나는 혼자 살 거야.” 참으로 묘하고 위험한 상황 속에서 치우비와 발은 험하게 입씨름을 벌이긴 했어도 마치 둘의 마음을 확인하는 것 같아 더없이 흐뭇했다. 그러나 그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하백족 사람들은 울화통이 터질 지경이었다. 보다 못해 원로 중 한 명이 소리쳤다. “우리 부족은 지나 화산족에 비하면 훨씬 적소! 그러나 발님은 부족장 헌원님의 딸일 뿐이고 진몽희님은 하백족의 족장이오! 어떻게 작은마누라로 갈 수 있단 말이오! 우리 부족을 이렇게 모욕해도 되는거요?” 한동안 잠자코 있으면서 생각을 정리한 상망이 점잖게 입을 열었다. “하백족 진몽희님께 지나 화산족 상망이 말씀드리오. 치우비님과 발님의 마음이 저토록 굳으니, 당신들이 무슨 소리를 해도 저분들의 마음을 바꿀 수는 없을 것이오. 치우비님과 발님은 이미 몇 년 전에 만나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도 항상 서로만을 생각한 한 쌍이라오 주신족이나 화산족 중에는 그것을 모르는 사람이 드물 지경이오. 아무리 하백족 진오 선인님의 예언이 있었다 해도, 갑자기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드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우리 하백족의 시험은 이미 치러졌소!” 할머니가 소리치자 상망은 차분히 되받았다. “잘 생각해보십시오. 비록 실패했지만, 만약 내가 시험에 성공하면 어떻게 하려 했습니까? 나 같은 늙은이더러 진몽희님과 혼인을 올려야 한다고 했겠습니까? 모르긴 몰라도, 아마 푸린구슬만 주고 진몽희님과 혼인을 올릴 영웅은 계속 찾지 않았을까요? 푸린구슬은 바로 그런 경우에 쓰려고 있는 것 아니었습니까?” 상망의 날카로운 지적에 하백족들은 입을 다물었다. 상망은 하백족 할머니가 입을 열지 못하도록 계속 조목조목 짚어갔다. “푸린구슬이 진오님의 예언의 징표라고는 하나 그것을 만든 분은 진오님이 아니고 오로파라님입니다. 애당초 모든 일은 푸린구슬 때문에 빚어진 일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푸린구슬을 진작에 바꾸어 주었다면 이런 일은 생기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잘 생각하십시오. 지금 욕심을 부려 치우비님을 억지로 잡아둔다 해도 치우비님은 결코 뜻을 굽힐 분이 아닙니다. 치우비님도 영웅이지만 형 치우천님은 이제 주신은 물론 마갸르, 미아우, 키탄, 타타르, 몽골족까지 모두 떠받드는 대영웅입니다. 그런 분이 아우가 잡혀 있는 것을 그냥 보고 있을까요?” 할머니가 파르르 떨며 외쳤다. “협박하는 것이냐!” 상망은 여유 있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백족이 저나 발님을 해치지 못한 것은 첫째, 우리가 죄가 없기 때문이고, 둘째 헌원님의 힘을 무서워하기 때문이란 걸압니다. 그러나 치우비님과 친한 부족들이 화산족보다 훨씬 가까이 있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그때 진몽희가 하DIG게 질린 얼굴로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좋습니다. 그러면 당신들 모두 가십시오. 우리 부족이 힘이 없으니 할 수 없군요. 대신 푸린구슬은 도로 돌려주고, 저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고 맹세하십시오.” 치우비는 잘되었다 싶어서 얼른 그러겠다고 말하려 했지만 상망이 손사래를 치며 나섰다. “왜 그리 푸린구슬을 아끼시오? 그것만 없다면 지나족의 누구도 하백족을 건드리지 않을 겁니다. 푸린구슬은 단순한 보물이 아닙니다. 하백족에게는 소용이 없지만, 공손발님에게는 목숨이 달린 문제란 말입니다!” 치우비는 깜짝 놀랐다. “뭐요? 목숨이 달렸다고요? 그게 정말인가요?” 발은 훌쩍이며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고, 상망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네. 푸린구슬을 가진 사람은 언제든 발님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다네. 그런 위험한 물건이라 다른 부족의 손에 있는 것을 그냥 놔둘 수가 없는 것일세.” 그러자 하백족의 할머니와 네 명의 원로가 동시에 외쳤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저 지나족 아이가 오로파라님의 기운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란 거냐?” “발님은 헌원님과 누조님 사이에서 나신 따님이시오 그리고 누조님은 타타츄이트님의 제자이시며, 아시다시피 타타츄이트님은 오로파라의 둘째 따님이셨소이다. 오로파라님의 기운이 발님에게 이어지지 못할 리 없지 않소? 하백족이 그 구슬을 소중히 감추어 두고 있었던 것은 고맙소만, 발님의 몸을 지키기 위해서는 이제 우리가 그것을 얻어야 한단 말이오!” 상망의 말을 듣고 하백족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치우비가 큰 소리로 외쳤다. “하백족에게 묻겠습니다. 이 구슬이 정말 공손발님의 목숨을 빼앗는 힘이 있습니까? 솔직히 말해주십시오!” 그 말에 진몽희가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것은 오로파라선인님이 만드신 것, 오로파라님의 기운을 간직한 사람에게만이 소용이 있습니다. 발님에게 그 기운이 전해졌다면....... 그럴 수 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즉시 치우비는 품에 넣었던 푸린구슬을 꺼내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것을 발에게 선뜻 내밀었다. “이것이 하백족의 보물이라고는 하지만, 누구도 발을 위태롭게 할 수 없소! 누구라도 자기 목숨을 남에게 맡기고 싶지는 않을 것이오! 나는 더 이상 이 일로 시간을 끌지 않겠소! 허나 하백족에게는 빚을 졌으니 나중에 하백족이 무슨 부탁을 하더라도 나는 거절하지 않겠소! 안파견 한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리다!” 치우비가 단호하게 잘라 말하자 하백족들은 또다시 웅성거렸다. 상망 역시 다짐하듯 외쳤다. “푸린구슬을 주신다면 헌원님은 은혜를 잊지 않으실 것이오. 우리.지나족도 하백족의 일이라면 힘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가장 큰 두 부족을 원수로 삼느냐, 벗으로 삼느냐의 기로에 서 있소. 결코 푸린구슬이 아깝다고 생각할 때가 아닙니다!” 원로들과 할머니, 진몽희 등은 자기들끼리 뭔가 상의를 했다. 발은 걱정이 되는지 치우비의 팔을 잡으며 살짝 기대자 치우비는 그녀를 안심시키려는 듯 어깨를 토닥거렸다. “발, 아무 염려 마라. 꼭 돌려 보내줄게.” 마침내 할머니가 나서서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할 수 없군, 할 수 없어. 하늘이 하백족을 버리시는구먼. 푸린구슬은 우리 하백족이 보관하기는 했으나, 오로파라님의 기운이 이어지지도 않았고 힘을 끌어낼 재주도 없으니 우리가 주인 노릇을 할 수 없겠군. 그렇다면 이제 돌아가시게.” 그 말이 떨어지자 리미, 개르와 마냥 등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으며, 잡혀 있던 지나족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일이 잘 풀리게 되자 치우비도 웃으며 고개를 숙여 고마움을 표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제 하백족은 제 벗입니다 결코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하백족 역시 싸움을 바라지 않았는지 평화롭게 일이 끝나자 기뻐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할머니는 잔치를 베푼다고 했지만 상망과 치우비는 그럴 것까지는 없다고 정중히 사양했다. 치우비와 발, 상망은 서둘러서 하백족의 마을을 나섰다. 치우비는 이제 마음이 느긋해진 터라 왜 이리 서두르느냐고 했지만 상망의 의견은 달랐다. “진몽희라는 그 계집의 눈빛이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네. 분명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 같단 말씀이야. 어서 가는 게 좋겠네.” 치우비는 설마 싶었으나 상망의 눈을 믿고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어 말없이 발걸음을 빨리 했다 얼마나 갔을까. 어느덧 일행은 하백족의 마을에서 빠져나왔고, 기다리고 있던 차오스, 용병들과 합류하게 되었다. 이제 안심할 수 있게 되자 치우비와 발은 몹시 기뻐했다 오랜만에 다시 만나게 되고, 또 치우비가 만사를 제치고 자신을 구하러 와주었다고 생각한 발은 치우비에게 더 이상 까탈을 부리지 않고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너무 밤이 깊은지라 그날 밤은 숲 근처에서 쉬기로 했다. 치우비와 발은 꼭 붙어서 잠도 자지 않고 계속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동안 있었던 모든 오해가 풀리고 앞으로는 모든 일이 잘되어갈 것만 같았다. 허나 상망 역시 자지 않고 근처에 웅크리고 앉아 있어 비와 발은 상망의 눈치를 보면서 그날 밤을 지새웠다. 그렇게 치우비와 발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며칠을 보냈다. 상망은 처음에는 아무 말도 않고 있었지만 며칠이 지나자 더는 참지 못해 근엄하게 말했다. “이제 우리는 돌아가야 한다네.” 치우비는 못내 섭섭하고 아쉬워 볼멘소리로 되받았다. “벌써요?” “자네도 바쁘지 않던가?” “그건 그렇습니다만.......며칠만이라도 더 있으면 안 될까요?” “자네가 며칠 시간이 있다 해도 우리에겐 시간이 없다네. 나는 푸린구슬이 발님의 목숨을 앗을 수 있다는 것을 하백족에게 말했다네. 하백족이 그 점을 이용하려 할지도 모르고, 꼭 하백족이 아니라도 그것을 노리는 놈들이 나오면 정말 골치 아파지네. 그러니 어서 돌아가야 해.” “할아범! 구슬은 할아범이 가져가면 되잖아! 나도 비랑 같이 가고 싶은데.......” 애원하는 발을 보며 상망이 고개를 저었다. “아가씨, 며칠 때문에 평생 후회하시려고 그러세요?” “무슨 소리야?” “아가씨, 생각을 해보세요. 지금 아가씨가 마음대로 도망가면 아버님이 틀림없이 화내실 거라구요.” “비는 이제 웃뜸 사울아비가 되잖아. 주신의 웃뜸 사울아비가 나에게 혼인하자고 하면 영광이지, 뭐! 나도 그 정도는 안다구!” 발이 당당하고도 거침없이 나오자 되레 치우비의 뺨이 붉어졌다. “그건 저도 압니다요. 하지만 저 녀석은 아직 웃뜸 사울아비가 애써 타이르는 상망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발이 대뜸 화를 냈다. “할아범! 누구 맘대로 이 녀석 저 녀석이야? 더 이상 그런 소리는 하지 말라구!” 상망은 기가 막힌 듯했으나 이윽고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알....... 알았습니다요. 조심하겠습니다요.” “그래야지! 저이는 이제......호홋. 좌우간, 알잖아” 발은 괜스레 쑥스러워 생글거리며 얼굴을 붉혔고, 치우비는 아예 사과처럼 얼굴이 붉어진 채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상망은 몇 번 헛기침을 하더니 점잖게 한마디 했다. “흠흠, 비님은 아직 웃뜸 사울아비가 된 것은 아닙니다요. 그러니 일단 그 자리에 오른 다음에 아버님께 청혼을 하는 것이 순서입죠 아버님은 까다로운 분이시잖습니까요? 더구나 전에 비님은 아버님과 크게 싸우기까지 하잖았습니까?.그런 맺힌 것을 풀려면 서둘러서는 안 됩니다요 모든 것을 차근차근 해야 합죠.” 그 말에 치우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발이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정말........ 고집을 꺾을까?” 상망은 치우비를 힐끗 보며 대답했다. “헌원님은 비록 치우천님과 뜻이 다르다지만, 이렇게 두 집안이 가까워지게 된다면 이건 세상을 위해서 아주 좋은 일입죠 더구나 주신은 이제 공상을 빼앗아 유망님의 힘을 한풀 꺾이게 만들었어요. 그리고 치우비님이 웃뜸 사울아비 자리에 오른다면 아버님도 마다하실 수 없습죠 허허, 이것만은 헌원님도 아직 모르실 겁니다. 들으시면 깜짝 놀라시겠지요. 좌우간 그렇게 되면 전에 있던 모든 불미스러운 일을 잊고 지나족과 주신은 다시 화해하게 될 것입니다요 그러기 위해서라도 지금은 행동을 조심해야 합니다요. 아무리 주변 일이 돌아가는 게 그렇다 해도, 헌원님의 마음을 건드려서는 자칫 일이 틀어질지도 모르니까 말입니다요.” 발도 결코 머리가 안 돌아가는 편은 아니라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상망의 입가엔 정말 친손녀를 대하는 할아버지처럼 따뜻한 미소가 떠올랐다. “저도....... 전에 약속했잖습니까? 꼭 일이 이루어지게 힘을 다한다고 말이에요 그리고 이번에 푸린구슬을 얻는 일에 비님이 도움을 주신 것을 알면 아버님도 마음을 푸실 겁니다요 이제 아무 걱정하실 필요 없다구요. 비님, 부디 발님을 잘 부탁드립니다요.” 상망이 정중하게 치우비에게 인사를 하자 치우비도 급히 깍듯이 인사했다. “상망님을 저는 할아버님같이 생각합니다. 이러실 것 없습니다.” 상망은 낄낄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내가 비님의 할아버지면 헌원님보다 윗줄에 서게 되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겠소? 그냥 늙은 종이라 생각하시구려.” “허허...... 저는 참.” 치우비는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비님은 정말 좋은 색시를 얻는 겁니다. 좀 짓궂은데도 있지만, 속마음은 착하기 그지없답니다. 더구나 저렇게 예쁘고 정이 릴은 색시가 그리 흔하겠습니까?” “맞습니다, 맞아요!” 치우비가 좋아서 어쩔 줄 모르자 발이 입을 샐쭉거렸다. “멍청이! 그렇게 좋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좀 멍한 데는 있지만, 솔직히 비님만한 사내가 없습죠. 힘도 있고 용기도 있고 마음씨도 좋은데다.......” “그렇지? 그렇지?” 발이 아이처럼 좋아하자 상망은 껄껄 웃었다. “그렇게 좋아요? 나 같으면 조금은 부끄러워하겠구먼.” “할아범! 날 놀리는 거야?” “아닙니다요, 아니에요 이 할아범은 세상에서 아가씨가 가장 소중합니다요. 아가씨가 행복하시면 그것으로 그만이에요. 헤헤, 꼭 행복하십시오. 비님, 발님을 잘 부탁드립니다요.” “염려 마십시오.” “그러면 아쉬워도 지금은 일단 헤어집시다요. 저도 이제부터는 앞장서겠습니다요. 치우비님은 얼른 신시로 돌아가셔서 청혼 준비를 하시고, 저는 아가씨와 함께 돌아가 헌원님께 잘 말씀드리겠습니다요.” “정말 감사합니다, 상망님.” 치우비와 발은 헤어지는 것이 아쉬웠지만 둘 다 곧 틀림없이 만나리라 믿고 아쉬운 작별을 했다 발은 물론 상망도 내내 싱글벙글한 얼굴이었다. 치우비 역시 신이 나서 길을 가다가 될 때면 술을 마시고 얼근하게 취해 춤추고 노래하며 즐거워했다. 리미, 개르, 마냥, 차오스, 유쌍 등도 몹시 좋아했다. 유쌍이 여자란 어떻다고 자랑스레 떠들어댈 때마다 리미나 개르는 유쌍이 하백족 여자들을 꼬인 것 때문에 여자들에게 할퀸 자국이 여기저기 있으면서도 그런 소리만 한다고 놀려댔다. 아무튼 치우비에게는 즐거운 기다림이었다. 신시로만 돌아가면 웃뜸 사울아비 자리에 오를 것이고, 그렇게 되면 발과 맺어지는 것은 틀림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 두 사람의 앞길에는 치우비나 발, 상망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운명이 먹구름처럼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흔들리는 마음 치우천의 부대들은 여전히 맹렬한 속도로 북진하여 주신 접경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주인공인 치우천은 활기를 잃고 맥이 없는 것처럼 보였으며, 대장들의 분위기도 예전만큼 활기차 보이지 않았다. 마침내 아루파한 마을을지나 북쪽의 요새에 도착했을 때, 대장들은 서로 상의하여 그곳에서 며칠 머물기로 했다. 그것은 야율쿠리가 그렇게 제안했기 때문이다. “두 형제는 붙어 있어야 하는데, 하나가 떨어지니 외로워서 그런가보다. 치우비가 오면 천도 기운을 좀 낼 거다, 하핫. 여기서 며칠 기다린다고 일이 잘못되진 않을 거다.” 치우천은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열이 올라 심하게 앓아누웠다. 그러면서도 치우천은 서두르지 말고 상황을 살필 것이며, 공상에서의 일이 정리되면 여러 곳에 분산된 보돈차르, 치베, 툰툰 등의 부대를 재정비하라고 일렀다 그리고 며칠 지나지 않아 여기저기에서 속속 소식이 전해져 왔다. 가장 먼저 공상의 소식이 치우천에게 전해졌다. 발 빠른 야쿠타가 가져온 정보였다. 치우천은 거의 드러누워 앓다시피 하고 있었으나 대장들을 불러서 야쿠타의 말을 듣게 했다. 야쿠타는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활짝 웃으며 말했다. “우리가 이겼습니다!” 공상 싸움의 전모는 이러했다. 유망의 남쪽 전사들 오만 명이 몰려와서 그곳을 지키던 삼천 명의 사울아비들과 만 명 가량의 미아우, 마갸르 군대와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그 사울아비들은 비록 싸울 의지가 없던 자들이었으나, 막상 성안에 갇힌 신세가 되자 더 이상 피하지 않고 격렬하게 저항했다. 거기에는 양역의 지휘와 부달의 선무가 큰 역할을 했다. 유망의 부대는 주술사들까지 동원하여 갖은 방법으로 공상의 성벽을 넘으려 했으나, 사울아비들은 죽을힘을 다해 엿새 동안 공상을 지켜냈다. 엿새가 지나자 아루타한 마을에서 대기하던 나머지 만 명 정도의 미아우, 마갸르 연합군이 보돈차르와 치베의 지휘로 성을 공격 하던 지나족의 배후를 들이쳤다. 안팎에서 적을 맞이한 지나족은 순간 허물어질 뻔했으나, 용케 전열을 수습하여 하루 반을 버티어냈다. 그런데 이번에는 지나족 쪽에서 원군이 도착했다. 그들은 후퇴하던 유망의 부대에서 추려낸 정예들로, 축융이 이끌고 있었으며 그 수는 만 명 정도였다. 다시 외부의 원군이 도착하자 보돈차르와 치베의 부대는 한때 위기에 빠졌다. 그때 공상을 지키던 양역이 기회를 잡아 성문을 열어 보돈차르와 치베의 부대를 재빨리 성안으로 들였다. 언제 지나족에게 되잡힐지 모르는 다소 무모한 작전이었으나 다행히 몽골족들의 활 솜씨로 지나족의 접근을 막을 수 있어 모두 성안으로 무사히 들어갔다. 그러자 축융은 성안의 병력이 많이 늘어난 것에 좌절하여 포위를 풀고 자신들의 땅으로 후퇴했다. 공상성에서는 그들의 뒤를 쫓지 않았으나 곳곳에 숨어 있던 미아우족과 마갸르족들은 밤마다 다시 그들을 습격하여 지치게 만들어 커다란 손해를 입혔다. 처음에 육만에 달 했던 지나족의 부대는 이만 명에 달하는 사상자와 포로를 남기고 뿔뿔이 흩어져 패주했다는 소식이었다. 그 소식을 듣고 모든 대장들은 환호성을 올렸으며, 열에 신음하던 치우천도 오래간만에 웃음을 보였다. “잘되었습니다. 양역, 부달 형, 보돈차르 안다와 치베 안다의 공이 큽니다. 아마 이제 유망도 섣불리 움직이지는 못할 것입니다. 아무리 일러도 내년까지는 공상 근처로 나을 수 없습니다. 유망이 정말 나와 한 내기를 지킨다면 다시는 안 나올지도 모르죠.” 모두가 승전의 기쁨에 들떴으며, 특히 땅을 모두 잃었던 마갸르와 미아우족들이 가장 좋아했다. 북쪽요새에 모여 있던 미아우나 마갸르 부족장들은 치우천의 은혜를 잊지 않겠다고 하며, 자신들의 땅으로 돌아가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치우천은 두말없이 돌아가라고 대답했다. 몇몇 대장들은 그들의 전사들을 더 모아서 신시에서의 싸움에 대비해야 하지 않느냐고 귓속말을 했지만 치우천은 듣지 않았다. 부족장들이 물러간 후 치우천은 그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저들은 더 이상 싸우고 싶어 하지 않으며, 하루라도 빨리 고향에 돌아가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잡아둘 필요는 없습니다. 어차피 이 일은 가능한 한 적은 사람들로 해결해야 합니다. 신시는 제 고향입니다. 가급적 큰 싸움은 피해야만 합니다.” 다시 며칠이 지나자 이번에는 천 명의 사울아비들과 불쇠와 울라트, 소녀 등이 북쪽 요새에 합류해왔다. 소녀는 치우천이 아프다는 이야기를 듣고 눈물을 지으며 슬퍼했고, 당장이라도 치우천을 만나고 싶어 했다. 그러나 치우천은 소녀보다도 불쇠와 울라트를 먼저 불렀다 불쇠와 울라트 모두 치우천이 아픈 것에 놀라며 안부를 물었으나 치우천은 괜찮다고만 말하면서 누가 들을세라 조용히 물었다. “일은 잘되었나요?” “글쎄, 그럭저럭 해나가는 중이라네. 자네가 만들라는 것은 다 만들었네만, 그것의 비밀은 아직도 풀 수가 없네.” “쉿! 그것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도 알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편이라도요.” 치우천이 경계의 빛을 띠자 불쇠는 고개만 끄덕였고, 대신 울라트가 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요, 염려 마세요. 그 일을 하는 사람들조차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고 있어요.” “울라트, 사람은 얼마나 풀었지?” “시기르타에게 부탁하여 풀었으니 만 명도 넘을 거예요 머지않아 소식이 올걸요?” 치우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불쇠에게 다시 물었다. “그런데 비밀은 아직 풀기 어렵습니까?” “아직은 통 모르겠네.” “그러면 일단 만든 물건들은 여기 놓아두시고 공상으로 가십시오. 거기에는 유망이 모아놓은 엄청난 양의 구리와 주석이 있습니다. 그것으로 이번에 만든 것과 똑같은 물건들을 많이 만드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것’의 비밀도 계속 밝히도록 해보시구요.” “알았네. 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것의 비밀을 밝히고야 말겠네!” “그런데 오라버니 리미, 개르, 마냥은 잘 있나? 안 보이던데?” “아마 금방 도착할 거다. 비가 그들을 데리고 갔거든.” “빨리 왔으면 좋겠네요. 도깨비 부대가 없으니 나는 아무것도 아니더라구요. 힘도 없고 줄 풀린 활 같아서 너무 심심하기도 하고 말이에요 비 오라버니도 괜찮지요?” 치우천은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지. 그 녀석은 이제 소원풀이를 했을걸?” “소원풀이요?” 치우천은 치우비가 아마도 발을 만났을 것이라고 알려주며 울라트에게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도 시집가야 하지 않겠니?” “어? 날 놀리나요? 난 시집 안 가욧!” “어디 봐둔 남자라도 없느냐?” “자꾸 놀리면 화낼 거예요!” 치우천은 오래간만에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다음으로 치우천은 소녀를 만났다. 소녀는 여전히 아름답고 우아했으며 다정다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러나 치우천은 그녀를 만나는 것이 반갑다기보다는 왠지 불안하고 거북했다. 아무리 그녀를 마음속으로 붙잡아 두려고 노력해도 잘되지 않는 것이다. 소녀는 치우천의 걱정을 하며 극진히 간호를 해주었고, 한시도 치우천의 곁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소녀와 치우천을 보며 사람들은 두 사람의 금슬이 아주 좋다고 했다. 그러나 치우천은 느낄 수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어딘가 금이가 있다는 것을. 그러나 어디서부터 시작된 금인지 알 수도 없었고, 그것을 밝혀 따져서 털어낼 수도 없었다. 두 사람이 주고받는 이야기는 항상 따뜻하고 다정했으나, 이야기가 겉돌고 자꾸만 끊기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다시 두 사람이 만난 둘째 날 밤,소녀는 요 근래 불쇠와 울라트와 함께 이상한 물건을 잔뜩 만들던 이야기를 했다. “구리로 그런 이상한 물건을 만드는 것도 무슨 생각이 있으셔서겠지요? 무기도 아니고 이상한 판 같은 것을 왜 만들려고 하시는지, 알아도 될까요?” 그러나 치우천은 무심하게 고개만 끄덕이며 ‘응’ 했을 뿐이었다. 소녀가 다시 물었다. “무엇에 쓰시려는 것이죠?” “음.” 소녀는 살짝 한숨을 쉬었다. 순간 치우천은 화들짝 정신을 차리며 쑥스러운 듯 얼른 사과했다. “미안하오. 듣지 못했소. 다시 한 번 말해줄 수 없겠소?” 소녀는 슬픈 듯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 “저를 곁에 두고도, 하실 생각이 그리도 많은가요?” “아니오 나는 다만.......” 치우천은 당황하여 변명하려 했으나 소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천님은 왜 자꾸 멀리 달아나려 하시는지요? 제가 아무리 따라가려해도 자꾸만 멀어지시는 이유가 무엇인지요?” 치우천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치우천의 마음속에는 소녀가 비냐를 죽인 사실이 마치 목에 가시처럼 걸려 있었다. 그리고 잊으려 해도 잊혀지지 않는 맥달의 모습이 남아 있었다. 그 두 가지가 치우천의 마음을 뒤엉키게 하고 있는 것이다. 치우천은 용기를 내어 비냐의 일을 물을까 하다가 한숨을 쉬며 그만두어 버렸다. 소녀는 치우천이 한숨을 쉬자 조용하지만 날카롭게 말했다. “요 며칠, 마음이 상하는 일이 있으셨다 들었습니다.” 치우천이 대답하지 않자 돌연 소녀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여자 하나가 죽은 것이, 그리도 마음 상하셨습니까?” 소녀가 자기 마음의 틈을 날카롭게 집어내자 치우천은 흠칫거렸다. “누가 그러오?”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맥달.......그 여자와 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지요?” “아무 일도 없었소!” “천님, 저는 천님을 믿습니다. 천님이 아무 일도 없으셨다니 아무 일도 없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마음으로도 아무 일 없었습니까?” 입술을 깨물며 다부지게 묻는 소녀를 잠시 멀거니 쳐다보며 치우천은 필이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이 생각하는 것 같은 일은 절대 없었소. 마음으로도 나는 선인으로서 맥달을 안타깝게 생각했고, 나를 도와준 은인으로서 맥달에게 미안했으며, 한 사람으로서 맥달을 불쌍히 여길 뿐이오.” 그러면서 치우천은 지금껏 맥달과 있었던 일을 모두 소녀에게 이야기해주었다. 자부선인의 맥을 타고 온 맥달을 처음 만났던 일과 맥달이 자신을 도왔던 일, 신시에서 만나 나누었던 이야기며, 맥달이 곳곳에 남긴 예언에 이르기까지 하나도 숨기지 않았다. 치우천은 그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들떠 약간 흥분하기까지 했다. 치우천은 마지막으로 가장 최근에 겪은 맥달의 이야기를 했다. “내가 한참신시에 숨어 있는 인물이 정말 있느냐, 없느냐를 고민할 때, 나는 내 막사 바로 앞에 있는 나무에서 그 글자를 발견했소. ‘맞다’라고 되어 있었소. 이곳은 태산에서 주신으로 갈 때 거치는 길이기도 하니, 맥달이 미리 알고 새겨둔 것이 분명했소. 그래서.......” 치우천은 문득, 소녀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어깨를 바르르 떨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소녀의 눈이 이글거리며 타오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치우천은 놀라서 말을 잇지 못했다. “당신.......” 그러자 소녀는 조용하고도 섬뜩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아는....... 치우천님은 항상 침착하고 차분했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의 이야기를 하실 때는 그렇게 들뜨시는군요?” “당신, 이상하게 생각 마시오. 하도 놀라운 재주가 있는 사람이라.......” “놀랍죠, 놀라워요 그러나 그 예언이나 재주나 신수보다도....... 더 놀라운 게 있어요. 어떻게....... 어떻게 그 여자는 당신 마음속을 그토록 꽉 채울 수 있었지요?” 소녀는 파르르 떨며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그러나 소녀는 눈을 부릅뜬 채 조금도 깜박이지 않았고, 몸도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불타오르는 얼음 덩어리를 본 듯한 기분에 치우천은 몸을 떨었다. “몇 년을 같이 살아온 저보다도....... 몇 번 만나지도 않은 여자가....... 당신의 마음속에 더 가득했던가요? 당신에게....... 나는 무엇이지요?” 다그치는 소녀의 말에 치우천은 울컥 토해내듯 외쳤다. “나에게는 당신뿐이오! 당신, 왜 자꾸 그러는 거요? 내 옆에는 무라님도 있고, 울라트도 있으며 초초룬도 있소. 그들처럼 맥달님도 그런 좋은 벗일 뿐이오!” “아니에요 거짓말하지 마세요. 당신의 마음에는 그 여자가 가득해요.” “왜 그러는 거요? 질투하는 거요? 제발 그만두시오! 맥달은 이미 죽었소!” 치우천이 소리치자 소녀도 순간 놀라울 정도로 무서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래요! 죽었어요! 나는....... 나는 억울해요! 산 여자라면 싸울 수도 있지만, 죽은 여자와는 싸울 수조차 없어요. 죽은 여자가 당신 마음을 가져가고, 나에게는 껍데기만 남긴 건가요? 네?” 치우천은 소녀가 안쓰럽기도 했지만 동시에 부아가 치밀었다. “그게 무슨 소리요? 어떻게....... 어떻게 그런 소리를.......!” 소녀는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허리에서 단검을 꺼내어 재빨리 자신의 목에 겨누었다. “나도....... 나도 죽으면 그 여자만큼 생각해줄 건가요? 아니, 내가 죽어야만 그래 줄 건가요?” “그러지 마시오!” 치우천은 너무도 놀라 소녀에게 뛰어들어 손목을 비틀어 단검을 빼앗으려 했다. 그러자 소녀는 단검을 떨구고 울음을 터뜨리며 치우천을 마구 밀쳐내려 했다. “소녀, 이러지 마시오. 그녀가 죽어서 마음 아픈 것은 사실이오. 그러나 나는 곧 그녀를 잊을 것이오. 나에게는 당신뿐이오 당신이 원한다면 내 목숨을 줄 수도 있소!” 치우천이 눈물을 흘리며 간절하게 말했지만 소녀는 울면서 고개를 마구 저었다. “당신은 영영 그 여자에게서 벗어날 수 없어요!그 여자는 당신을 옭아매었어요! 그 여자는 예언의 힘으로 당신이 가는 곳마다 글자를 남기겠죠! 잊을 만하면 생각나게 만들고, 당신에게 빛을 지우겠죠! 그것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나요? 어떻게 잊을 건가요? 나는....... 나는 당신을 원해요! 당신 껍데기가 아니라, 당신의 모든 것을 원한다구요! 당신은 내 것이에요!” 치우천은 안타까워 되받아 소리쳤다. “나는 이미 당신 것이오!” 갑자기 소녀는 몸을 비틀더니 치우천을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치우천의 귀에 대고 조용히 말했다. “나는....... 나는 괴로워요 견딜 수 없어요 두 번 다시....... 두 번 다시 그 여자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해요 그래야만 돼요 나는 참을 수 없어요.......” 그러면서 소녀는 떨어뜨렸던 단검을 조용히 들어 자신과 치우천의 목에 동시에 갖다대며 속삭였다. “차라리........ 우리 같이 죽어요.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도록 우리 둘 다 이대로....... 이대로 계속 있도록........” 치우천은 나지막하면서도 침착하게 되받았다. “그래야만 하겠소?” 소녀는 치우천의 말은 못 들은 듯, 치우천의 몸을 어루만지며 치우천의 귀에 감미롭게 속삭였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소녀의 분위기에 지금 치우천이 무슨 소리를 해도 소녀의 귀에는 들리지 않을 것 같았다. “당신....... 나는 당신의 것....... 당신은 내 것.......” 차가운 구리단검의 날이 목을 스치자 치우천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소녀를 밀쳐낼 생각은 아예 들지도 않았다. 무서웠지만 황홀했고 또 끔찍했으나 감미롭기도 했다. 소녀는 치우천의 귓불을 살짝 깨물면서 두 사람의 목에 동시에 닿은 단검에 힘을 주려고 했다. 그때 치우천의 귓가에 한 줄기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공상을 정벌하러 나섰을 때 불렀던 노랫소리였다. 그 노래는 퍽 유명하게 되어, 미아우나 마갸르족들은 어디서나 그 노래를 불러대곤 했던 것이다. 그 노랫소리에 치우천은 문득 정신을 차렸다. 갑자기 등에서 식은 땀이 흘러내렸다. 치우천은 눈을 감은 채 애써 조급함을 감추며 천천히 말했다. “저 노래가 들리오? 당신이 지어준 것이오. 그 덕분에 나는 공상을 얻었소. 저 노래의 힘이 없었다면 이기기 힘들었을 것이오. 나는 당신을 잊지 못할 거요........” 순간 소녀의 손이 움찔했다. 그리고 귓불을 깨물었던 소녀의 입에서 조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제...... 노래가 좋았나요?” “하늘을 두고 맹세하건대 세상 그 어떤 소리보다도 좋았소.” 소녀는 고개를 들어 치우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소녀의 눈은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으며, 음울한 그림자 같은 것은 말끔히 사라져 버렸다. “제가 지난번에 물건을 하나 만들었는데....... 보시겠어요?” 소녀는 마치 철없고 순수한 어린 소녀처럼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치우천은 소녀의 너무도 급격한 변화에 당황했으나 내색하지 않고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싶소.” 그러자 소녀는 급히 몸을 일으켰다 아까 손에 들려 있던 단검은 분명 놓지도 않았는데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소녀는 몸을 돌려 아까 가지고 왔던 듯한 상자를 열었다. 거기에는 정교하게 만들어진 악기가 들어 있었는데, 예전에 소녀가 켜던 물건 소리, 즉 일종의 비파와 비슷했다. 그러나 전에 보았던 비파보다는 줄이 두 개 더 많았고 크기도 달랐다. 치우천은 그 모습을 보면서 혼란에 빠졌다.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소녀는 치우천과 함께 죽으려고 했었다 치우천은 전혀 저항할 수 없었다. 그런데 저렇게 들뜬 아이 같은 행동이라니....... ‘저 여자는 나를 너무도 좋아하는구나. 부끄럽게도, 내가 저 여자를 좋아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하게!’ 이내 다른 생각이 스쳤다. ‘저 여자는 나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무서운 여자인지도 모른다. 비냐의 일을 보아도 그렇다. 저 여자는 잔혹하고 무서운 여자다!’ 그러나 치우천의 눈에 소녀는 절대 잔혹하고 사악하게 보이지 않았다. ‘설혹 그렇다 해도 그것은 치우천, 너를 너무도 사랑하기 때문이다! 제 정신이 아닌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불쌍한 일이다. 그리고 네 책임이다!’ 순간 치우천은 불안해졌다. ‘허나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마음속 깊은 곳에서 또 다른 소리가 울려왔다. ‘저 여자는 너를 사랑하는 게 아냐. 자신의 자존심을 사랑하는 것뿐이야......’ ‘그렇지 않아!’ 속으로 번민하던 치우천 앞에 소녀가 눈을 빛내며 앉았다. “전보다는 소리가 나을 거예요. 천님도 풀피리를 불어주시겠어요?” “그....... 그러리다........” 이윽고 소녀는 연주를 시작했다. 이전의 소리도 듣기 좋았지만, 새로 고쳐 만든 이 악기의 소리는 전보다 훨씬 맑고 뛰어났다. 치우천의 풀피리 솜씨도 대단했지만, 소녀의 연주는 치우천의 솜씨로는 아예 따라잡을 수도 없는 높은 곳에 있는 것 같았다. ‘이런 고운소리를 내는 사람이 나쁜 생각을 할 리 없어 이 여자는 누구보다 아름답고, 재주 많은 여자다 치우천, 치우천. 이상한 생각은 하지 마라. 아까 일은 무심코 한 일임이 분명해. 장난이었을 뿐이야. 그리고 죽은 사람은 이제 잊어라. 그래, 잊어.’ 치우천은 점점 소녀의 음악에 취해 갔다. 두 사람의 가락은 너무도 듣기 좋게 잘 어우러져 밤하늘에 퍼져 나갔고, 근처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넋을 잃고 귀를 기울였다. 허나 연주를 하면서 소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치우천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번 한 번....... 한 번만이야. 너는 용서 받을 수 있어. 치우천.......너는 내 음악을 알아. 그것만으로도 용서 받을 수 있어. 허나 다시는....... 다시는 그러지 마. 나는 네 모든 것이 필요해......... 모든 것이........’ 다음날, 얼굴에 화색이 만면한 치우비가 도깨비 부대와 차오스의 용병대를 끌고 요새에 도착했다. 그러나 치우비는 이미 와 있던 형이 몸이 좋지 않다는 소리를 듣자 금세 울상이 되어 달려갔다. 치우천의 엎을 떠나지 않던 소녀가 미소 지으며 치우비를 맞았다. “천님은 괜찮으실 겁니다. 너무 염려 마세요.” 치우천도 차분하게 치우비를 맞아들였다. “나야 항상 아프지 않았느냐? 별로 심하지 않으니 염려 말거라.” 그리고 치우천은 아우에게서 발과 상망의 이야기를 들었다. 치우천은 잘되었다고 말하며 반드시 둘의 혼인을 이루겠다고 약속했다. 아울러 헌원이라도 이런 혼인을 절대 거절할 수 없을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우리가 유망에게 지고 있다면 몰라도, 이긴 이상 헌원도 어쩔 도리가 없다. 헌윈이 이런 제의를 거절하면, 모든 부족들이 전부 지나족에게서 이탈할 거야. 더구나 아직 유망이 아주 망한 것도 아니며, 유망은 자신을 돕지 않은 헌원을 좋게 보지 않을 거야. 거기에 주신과도 적이 된다면 헌원은 발붙일 곳이 없다. 비록 나중에는 어떨지 모르지만, 헌원은 승낙하지 않을 수 없을 거야.또 누가 아느냐? 이 기회에 헌원이 마음을 고쳐서, 주신과 지나족들이 평화롭게 된다면 그거야말로 잘된 일이지.” 누구도 따를 수 없는 머리를 가진 치우천이 그렇게 잘라 말하자 치우비의 기분은 날아갈 것 같았다. 치우천의 얼굴도 좋아하는 아우를 대하자 오래간만에 밝은 빛이 돌았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공상에서의 위협이 사라지자 여기저기 배치되어 있던 대장들도 맡았던 곳을 원래의 부족장들에게 넘기고 북쪽 요새로 속속 달려왔다. 부달과 양역 그리고 마을 수리를 돕기 위해 내려간 포리를 제외하고 다른 사람들은 차례대로 북쪽 요새에 도착했다. 초초룬, 돈차르, 베 등도 도착하여 오랜만에 만난 벗들과 회포를 풀었다. 그리고 며칠이 더 지나자 은 주신에서 모든 인원이 집결하여 동쪽으로 왔다. 야율쿠리 및 키타야와 구르의 지휘 하에 이천 명 정도의 사들과 만 명에 가까운 비전투원들이 모두 짐을 짊어지고 옮겨온 것이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싱카도 끼어 있었고 여전히 괴이하기 그지없는 기인, 비울걸도 함께 있었다. 우천은 몸도 많이 좋아졌으니 내친김에 이제 본격적으로 움직이자며 대장들을 모이라 했다. 물론 이 요새에 있는 모든 대장이 모인 은 아니었다. 치우천이 하는 일은 자칫 신시를 놀라게 할지도 모르기에 치우벌이나 부소다솔 등에게는 알리지 않았다. 기 모인 대장은, 우선 주신 사람으로는 치우천, 치우비, 도단이, 돌이, 부루벼락, 거서기, 삼, 이렇게 일곱 명이었다. 질쾌는 원래 머물던 자리에서 울라트가 시기르타에게 부탁했던 일을 대신 맡아 지휘하고 있었고, 부달과 양역은 공상에 남아 었다. 거기에 작은 주신의 치베, 무라, 알한, 울라트와 리미, 개르, 마냥에키타야, 구르까지 아홉 명이 함께 했고 다른 부족 사람으로는 보돈차르, 야율쿠리, 초초룬, 와난강, 와난수, 울쿠타, 야쿠타, 툰툰, 유쌍으로 아홉 사람이 있었으니 모두 스물다섯 명이었다. 모두가 한자리에 모이자 치우천이 입을 열었다. “이제 작은 주신의 사람들도 모두 도착했으니 신시로 가면 됩니다. 그러나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될지는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주신 귀족들이 어떻게 나올지는 그때그때 상황을 보아야 합니다. 아마 대략 세 가지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치우천은 세 가지 경우를 하나하나 설명하기 시작했다. “첫째, 우리를 도중에서 습격하는 경우입니다 주신 사울아비들이 나올지, 다른 부족들이 나올지는 모릅니다만 이것은 귀족들이 대놓고 우리를 거부하는 경우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맞아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가로막는 자들을 물리치고 나면, 곧장 신시로 달려가 신시를 점령해 버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아직 신시의 귀족들은 우리를 얕보고 있을 것이며, 설령 얕보지 않는다 해도 이 소식을 들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당장 주신 전체에 퍼져 있는 사울아비들을 한데 모으고 싶겠지만, 그럴 시간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최대한 빠르게 움직여서 귀족들을 치고 한웅님을 구해내야 합니다. 이 경우 야율쿠리의 키탄 전사들과 초초룬의 미아우 전사들, 그리고 보돈차르님의 몽골 전사와 키타야, 구르님의 타타르 전사까지 모두 동원하여 최대한 빨리 일을 끝내야 할 것입니다.” 생각이 필은 구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분명 자네 생각대로 될 수 있을 걸세. 허나 주신 사람들이 결코 좋게 생각하지는 않을 거야. 아무리 그래도 주신 사람들은 신시가 다른 부족들에게 떨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을지 모르네.” 구르가 예리하게 지적했으나 치우천은 이미 그것에 대해 생각한바가 있었다. 치우천군의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이 이끄는 군대의 기반이 주신에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많은 부족들의 지지를 받고는 있지만, 자칫 잘못하면 '다른 부족들의 앞잡이가 되어 주신을 말아먹는 것이 되어 주신에 발을 붙일 수 없을지도 몰랐다. 그런 비난을 막기 위한 방법도 이미 생각해둔 바가 있었다. “그건 맞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만약 귀족들이 우리를 기습한다면, 사울아비들만으로는 힘이 모자랄 것이라 여길 것입니다. 즉 이 근처의 미아우건 마갸르건, 아니면 지나족이라도 끌어들여서 우리를 막고 시간을 벌려고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주신 사람들은 귀족들을 먼저 욕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단 며칠이면 주신의 땅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고, 싸움도 주신 땅에서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다른 부족을 먼저 끌어들인 것은 우리가 아니라 귀족들이 되는 셈이지요. 이 소문을 낸다면 결코 우리가 불리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인원을 다 합하면 몇 만이 된다. 그렇다 해도 신시를 점령하는 것은 쉽지 않을지도 모르는데.......신시는 수백 년을 걸쳐 만들어진 주신의 서울일세. 공상도 크긴 하지만 신시에 비할 바는 아니야. 그렇게 했을 경우 사방에서 사울아비들이 몰려오기 전에 신시를 떨어뜨릴 확률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나?” 보돈차르가 차분한 목소리로 묻자 치우천은 조용히 대답했다. “열에 셋 정도입니다.” 순간 사람들이 수군거리며 웅성댔다. 치우천은 항상 필승의 작전을 세운 후에 움직이는 사람인데, 열에 셋 정도라면 너무도 불리한 것 같았다. 보돈차르는 눈을 빛내며 다시 물었다. “만약 싸움이 길어지고, 주신 밖에서 사울아비들이 달려온다면?” “그러면 열에 하나도 이길 확률이 없습니다. 저는 주신 사울아비들의 위력을 누구보다 잘 압니다.” 야율쿠리가 헛기침을 한 뒤 입을 열었다. “그러면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되겠군. 그런데 두 번째 경우는 뭔가?” 치우천은 여전히 차분하게 사람들에게 말했다. “두 번째 경우는 우리를 습격하지 않고 순순히 저를 신시에 받아들이되, 저나 제 아우가 웃뜸 사울아비가 되기 전에 저희 형제를 해치우려 하는 경우입니다.” 앞서 했던 이야기보다 더 충격적이었는지 사람들은 일순 긴장했다. 팽팽한 긴장 속에서 키타야가 한숨을 지었다. “그래, 그래.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오.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이 무너지지. 자네 형제들이 없다면 이 많은 부족들이 하나로 뭉칠 수 없을 테니.......” “그렇다면 우리는 어쩌지?” 야율쿠리가 침통하게 묻자, 치우천이 변함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에게 습격이 없거나, 설령 습격이 있다 해도 주신 귀족들이 보냈다는 증거가 없다면 우리도 경솔히 움직일 수 없습니다. 주신 사람들의 마음을 거스른다면 당장 신시를 빼앗는다 해도 금방 사방에서 몰려든 사울아비들에 의해 단숨에 빼앗길 것이며, 신시를 지켜낸다 해도 주신은 조각조각 찢어져 버릴 것입니다. 그러느니 차라리 우리 형제가 죽는 게 나을 정도로요.“ 초초룬이 눈을 빛내며 어색하게 웃으면서 끼어들었다. “그런 소리하지 마. 아마 그렇게 되면, 여기 있는 벗들이 전부 다 서로 싸우게 될지도 모르지. 치우 형제가 있으니 모두 잠자코 있지만, 두 사람 빼고는 남보다 못하다는 사람은 하나도 없지 않겠어?” “난 그럴 생각이 없소.” 툰툰이 재빨리 이야기했다. 구르는 '허' 하며 고개를 숙였고 키타야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정작 치우천은 호쾌하게 웃었다. “그렇게 될지도 모르지, 초초룬. 그러나 그럴 필요는 없지 않은가? 우리는 모두 벗인데 말야.” 웃음기를 거두고 초초룬이 심각하게 되받았다. “물론 그래. 나는 절대 너희 형제를 배신 안 해. 다른 사람도 그럴거야. 우리는 너를 중심으로 뭉쳐 있기 때문에 서로 간에 화도 내지 않고 다투지도 않아. 하지만 너희가 없어지면 다시 몽골은 타타르와, 타타르는 키탄과, 키탄은 마갸르와, 마갸르는 미아우와 싸우게 될 거야. 지금 당장은 몰라도 몇 년 안으로 또 그런 일들이 벌어질 거야. 그러니 너희 형제는 꼭 살아야 한단 말야. 그래서 너희의 뜻대로, 세상을 확 뒤집어서라도 사람들이 싸우지 않고 평화롭게 살도록 만들어야 한단 말야. 나도 물론 너희 형제가 고맙고, 너희를 돕기 위해서라면 있는 힘을 다하겠지만, 그건 결코 주신 잘되라고 그러는 게 아냐. 죽는단 소리는 아예 하지 마. 너희 형제 목숨은 이제 너희 형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구!” 초초룬은 오랜만에 열변을 토했다. 다소 표현이 거칠기는 했지만 정말 있는 그대로를 솔직하게 말한 것이기에 초초룬의 말에 다소 불쾌했던 몇몇 사람들도 끝내는 인정하며 박수를 쳐주었다. 특히 야율쿠리는 껄껄 웃으며 휘파람까지 불었다. “와! 부족장이 되더니 멋있어졌네? 말을 아주 잘하네!” “놀리지 마! 젠장!” 초초룬은 화난 듯 툭 쏘아붙였으나 부끄러웠던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 모습에 야율쿠리가 싱글거리며 익살을 부렸다. “얼굴이 조금만 그 말솜씨를 따라갔어도 내가 데려갔을 텐데........히히.” “너, 이 자식! 죽을래? 키탄 놈아! 전쟁이닷!” 야율쿠리와 초초룬이 아웅다웅하는 것을 치우비가 간신히 말리고 나자 치우천은 웃으며 말했다. “계속하죠. 그 경우, 여러분은 신시 부근에서 눈을 부릅뜨고 신시를 지켜보셔야 합니다. 만약 귀족들이 누군가를 보내 우리를 몰래 해치려 한다면, 여러분들이 일종의 위협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억울하게 죽음을 당할 경우, 가만있지 않겠다는 정도만 보여주셔도 큰 힘이 될 것입니다. 만약 비가 무사히 웃뜸 사울아비의 자리에만 앉는다면, 그때부터 사울아비들의 힘은 비가 다스릴 수 있으므로 귀족들을 하나하나 쳐나갈 수 있겠지요.” “그러나 놈들이 그렇게 가만있을 리는 없소.” 삼이 외치자 부루벼락도 한마디 보탰다 “내, 창피한 이야기라서 말을 안 하려 했지만, 우리 부루씨 집안만 해도 절대 가만 안 있을 거요 부루버들 그 여자만 해도 나와는 한집안이지만 여우같고 귀신같아서 눈도 마주치기 싫은 간교한 여자요. 눈을 번히 뜨고 비가 웃뜸 사울아비가 되게 놔둘 놈들이 아니오!” “물론 놈들이 뭔가 다른 꾀를 부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어떤 방법으로 그럴지는 잘 알 수 없습니다. 밤에 사람을 보내 우리를 죽이려할지도, 아니면 우리를 함정에 빠뜨리거나 죄를 뒤집어씌울지도 모르죠. 그것은 우리가 그때그때 알아서 막아낼 수밖에 없습니다. 다행히 이번 공상 점령에 대한 상에는 웃뜸 사울아비 자리만이 아니라 작은 주신 사람들 모두를 주신 사람으로 만드는 것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단 제 아우는 신시 밖에 있어야 합니다. 모든 것이 정해진 다음에 들어와야 하지요 허나 저와 치베, 무라님, 알한님, 울라트와 도깨비들은 저와 같이 움직일 수 있습니다. 거기에 여기 계신 사울아비 스승들이 도와주시고, 삼사님의 힘도 얻을 수 있다면 아마 어지간한 위험에서는 몸을 지킬 수 있을 겁니다.” 대뜸 초초룬이 고개를 마구 휘저으며 버럭 외쳤다. “그것만 가지고는 안 돼! 독! 독을 잊었어? 내가 아니면 독에는 안전하지 못해! 나도 너희 형제와 같이 가겠어!” 그러나 치우천은 난색을 표했다. “초초룬 족장은 이미 미아우 전체의 대족장이나 다름없는 몸인데, 작은 주신 사람이 되겠다는 거요?” “제길! 그럴 수야 없지. 그러니 일단 작은 주신으로 들어갔다가, 나중에 너희가 무사해지고 난 다음에 날 쫓아내면 되잖아! 제길!” 그 말에 야율쿠리가 또 토를 달았다. “너 미쳤냐? 미아우의 대족장이 남의 부족에 들어갔다가 쫓겨난다고? 미아우족 사람들이 창피해서 전부 다 칼을 물고 죽게 만들겠다는 거냐?” 그때 조용히 있던 툰툰이 씩 웃으며 나섰다. “초초룬님, 염려 마십시오. 갈 사람이 있답니다.” 이미 초초룬은 미아우 전체의 대족장처럼 받들어졌기 때문에 툰툰도 그 밑에 있게 된 거나 진배없었다. 때문에 툰툰은 과거와는 달리 초초룬에게 깍듯한 태도를 보였다. “그게 누군데? 당신?” “아닙니다. 저 역시, 작지만 우리 부족을 이끌어 얍죠. 허나 저는 아들이 많으니 하나 정도 쫓아내는 건 상관없습죠.” 그러면서 툰툰은 유쌍을 가리켜 보였다. 유쌍은 쩝 입맛을 다시며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같은 말이라도 쫓아내는 게 뭐냐구요, 쫓아내는 게. 아버지가 자식사랑에 저토록 무디다니, 원 참......” 그러자 치우비가 웃으며 농담을 했다. “유쌍 저 녀석은 여자들 후리는 재주가 뛰어나서, 신시를 뒤집어 놓을지도 모르겠는데요?” “아이구, 무슨 소리를 하시나요?” 사람들이 장난처럼 웃고 떠들자, 정색을 하고 있던 치베가 돌연 화를 냈다. “지금 시시덕거리고 있을 때인가? 큰 싸움을 앞두고 대체 이 무슨 꼴들인가!” 치베가 위엄 있게 나무라자 모두 조용해졌다. 치우천은 속으로 웃으면서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좌우간 우리는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웃뜸 사울아비의 자리를 얻어내야겠지요. 그래서 사울아비들의 힘을 앞세워 일단 한웅님을 해치려는 음모를 밝혀내고 귀족들을 하나씩 쳐내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알한이 입을 열었다. “그럴 경우에는 어느 정도 성공할 확률이 있다 보십니까?” “대략 반반이라 생각합니다. 놈들이 무슨 수를 쓸지 알 수 있다면 열에 아홉은 문제없지만요.” 그때 줄곧 우울한 얼굴로 앉아 있던 도단이가 외쳤다. “내가 알아다 주겠소!” “자네가?” 부루벼락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도단이는 전에 없이 강렬한 목소리로 말했다. “신시에서 일을 꾸민다면 필시 치우가람 형제 놈들이 빠지지 않을거요. 나는 그들에게 몸을 팔았으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놈들의 계획을 알아오겠소이다.” “도단이, 그건 위험하네. 공상이 떨어진 이상, 놈들이 더는 자네를 안 믿을지도 몰라.” 치우천이 말렸으나 도단이는 막무가내였다. “아냐. 자네는 물론 조금 다른 수를 썼지만 틀림없이 땅굴 작전으로 공상을 점령했어. 비록 공상이 떨어졌다 해도, 나는 놈들 입장에서는 잘못된 정보를 준 것이 아니야. 놈들을 다시 믿게 만들 수도 있다네. 좌우간 나는 이미 발을 들여놓았으니, 내가 알아서 하겠네.” 도단이는 고집을 피웠고 치우천은 그런 도단이의 모습이 안타까워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러자 조용히 있던 거서기가 물었다. “그러면 세 번째 경우는 무엇이오?” “그건 귀족들이 알아서 나와 협력하려 할 경우요 그럴 확률은 거의 없다고 보지만, 나에게 뭔가 제의를 할지도 모르는 일이오. 그럴 경우 물론 적절히 타협하는 척하면서, 그들의 약점을 찾아내야겠지요. 되레 일이 훨씬 쉽게 풀릴 것입니다. 귀족들이 약하게 나온다면 이미 일은 거의 된 것이나 다름없으니, 어느 정도 안심해도 되겠지요.” 그때 나지막한 목소리가 오랜만에 울려 퍼졌다. 거의 입을 열지 않던 무라의 목소리였다. “다른 경우에는?” “어떤 경우 말입니까? 무라님?” 치우천이 되묻자 무라가 조용히 말했다. “나는 잘 모르지만, 그중 어느 한 가지 방법만 쓴다는 보장은 없지 않나요? 다른 부족을 시켜 우리를 기습하고, 치우천님 치우비님과 타협하는 척하면서 또 두 분을 죽이려 한다면요? 그럴 경우 우리는 어떻게 움직여야 하나요?” 치우천은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를 습격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당연히 싸워야겠지요. 허나 그들이 주신 사울아비들이 아니거나, 신시의 귀족들이 시켰다는 증거가 없을 때는 신시를 쳐서는 안 됩니다. 두 번째 경우로 보고 조심해야겠지요.” “만약 이 이야기가 그들에게 새어 나간다면요?” “그런다면야 저는 죽은 목숨이겠습니다만,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여기 모인 분들은 모두 저와 죽음을 함께한 벗들입니다. 저는 모두를 믿습니다.” “허나 치우천님, 여기서의 작전이 알려지면 그야말로 낭패입니다. 한 사람이라도 배신하는 사람이 나오면 모든 것이 틀어질 수 있습니다. 주신 땅으로 들어간 후에 누가 일부러 사울아비들과 싸움을 벌인다면 어쩔 거죠? 신시에 우리 계획을 일러바치고, 치우천님을 혼자 떼 어 놓은 다음에 해치면요?” 무라가 열을 올렸으나 치우천은 태연했다. “나는 모두를 믿습니다. 믿는 사람들에게 배신당한다면 그거야말로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치우천은 딱 잘라 말하고 무라가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이제 모두들 준비를 합시다. 싸움이 없으면 다행이겠지만, 있어도 당할 수는 없으니 준비는 튼튼히 해야 되겠지요.” 사람들이 모두 일어서서 밖으로 나가는데, 무라는 혼자 조용히 앉아 있다가 치우천을 불렀다. “왜 그러십니까, 무라님?” “아무래도 이상하군요. 치우천님.” “뭐가 이상하다는 겁니까?” “치우천님은 공상 싸움 때에도 비밀이 새어나갈까 봐 진짜 작전에 대해서는 결코 말하신 적이 없어요. 그런데 아직 신시에 도착하려면 멀었는데,.굳이 이렇게 모든 것을 말하실 필요는 없지 않나요? 뭔가 숨기시는 것이 있지요?” 치우천은 재빨리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제가 그 정도로 서툴렀습니까?” “둔한 나도 눈치 챌 정도이니, 조금만 눈썰미 있는 사람이라면 눈치 챌 겁니다. 치우천님, 혹시 우리들 중 배신자가 있나요?” 치우천은 얼굴빛을 흐렸다. 무라는 비록 싸늘한 표정을 풀지는 않았지만 눈빛은 여전히 빛났다. “그래서 그 사람을 찾아내시려는 건가요?” 치우천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싸움에 나는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이번 상대는 유망이나 형천처럼 힘이 강한 것은 아니지만, 아주 위험하고 두려운 상대입니다. 분명히 말해, 이번 싸움의 진정한 상대는 고시울률도 아니고, 치우가람 형제도 아닙니다. 귀족들도 아닙니다. 지난번 이야기했듯, 누군지 도저히 알 수 없는 사람이 숨어 있습니다. 솔직히 저는 아직 우리들 속에 그 사람의 그림자가 숨어 있다고는 믿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이 잘못될 경우, 모든 것이 허사가 되고 우리 모두 끝장입니다. 신시를 떨구는 것보다, 그 보이지 않는 적과 겨루는 일이 더 힘들다는 것입니다.” 무라가 차분한 어조로 짧게 말했다. “제가 돕게 해주세요.” “특별히 무라님이 도와주실 일은 없습니다.” “정말인가요?” “물론입니다.” “저는 머리도 좋지 않고, 말도 잘하지 못합니다만 항상 당신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천닙은 지금 몹시 조급하십니다. 뭔가 위험에 빠져 있습니다. 천님, 천님은 스스로 모험을 하고 계신 것인가요?” 치우천은 눈을 감았다. 무라의 말이 맞았다. 지금의 치우천에제 고시울률이나 치우가람, 바람 등은 큰 적수이기는 하나 이기지 못할 적은 아니었다. 그러나 치우천의 걱정대로, 치우천과 고시울률 등을 부딪치게 하여 이익을 보려는 제3의 세력이 있다면, 이야말로 무서운 적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때문에 치우천은 스스로 위헌을 자초하여, 상대의 뿌리를 캐내려고 일부러 정보를 흘리고 사람들에게 미리 작전을 말한 것이었다. “적어도 저는 의심하지 않으시겠지요?” “무라님은 그럴 수 없습니다. 무라님은 제 아우와 더불어서 제가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보돈차르님도 절대 그들과 상관있는 분이 아닙니다. 키타야님과 울라트, 구르님도 아니겠지요. 그분들은 주신과는 너무도 먼 곳에서 오신 분들입니다. 도깨비들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밖의 사람들은....... 정말 이런 말을 하고 싶지 않지만 모두가 가능성이 있습니다.” “만약 배신자가 있다면....... 그것은 분명 주신 사울아비들 중 하나이거나, 주신과 가까운 미아우, 마갸르족 사람일 것입니다.” 확신에 찬 무라의 말에 치우천은 고개를 저었다. “저희 어머님이 죽음을 당한 것은 이미 열 몇 해 전의 일입니다. 그때부터 계획된 일입니다. 다만 저는 그 와중에 끼어든 사람이겠지요. 제가 세상에 나선 것은 태산 회의 때부터입니다. 우연히 우리와 만난 사람은 믿을 수 있지만, 그 외의 사람들은 믿기 힘들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목숨 걸고 싸운 동료들을 믿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무라가 긴장하여 말하자 치우천은 조용히 말했다. “아마 제가 신시로 걸음을 돌리지만 않았다면 그 사람은 저를 그냥 두었을 것입니다. 알 수 없는 배신자도 계속 제 옆에 있었을 것입니다. 허나 신시를 깨끗이 하지 않고는 헌원의 길을 막을 수 없습니다.” “혹시 헌원이나 유망이 끼어든 것은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부루벼락님이나 쇠돌이님, 거서기님, 삼님, 도단이님 모두가?” 치우천은 체념한 듯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그들을 의심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럴 가능성이 있을 뿐입니다. 허나 가능성이 있는 것은 그들뿐만이 아닙니다. 비렴님,병예님, 신지울태님도 반드시 우리 편이라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아니....... 제 아저씨인 치우벌님이나 제 아버님일지도 모릅니다.” “설마요!” “저는 그분들이 배신자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배신자가 아니라는 증거가 없을 뿐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번 기회에 그 배신자를 잡아야 합니다. 반드시요!” “배신자가 정말 있는 것입니까? 저는 정말....... 믿을 수 없습니다.” “있습니다. 맥달님이 예언을 남겨 주었습니다. 저는 맥달님의 말은 정말로 믿습니다.” 무라는 한숨을 쉬며 조용히 물었다. “그렇다면 그분들을 제쳐놓으시면 되지 않습니까? 그리고 다시 계획을 세울 수는 없습니까?” “그분들 없이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분들을 다 빼고 남는 사람이 몇입니까? 더구나 신시 안에 이미 계신 분들을 어떻게 빼고 생각할 수 있습니까?” “치우천님, 그러면 배신자가 생길 경우에 대비하여 다른 계획을 세워두신 바 있습니까?” “세울 수가 없습니다. 다만 마음의 대비를 하고 있을 뿐입니다. 무라님, 제가 머리가 조금 돌아간다고 해도, 상대가 저를 훤히 알고 저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는 이길 수 없습니다. 차라리 아무 작전없이 움직이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때그때 최선을 다할 뿐이지요.” 솔직히 털어놓는 치우천의 모습은 너무도 힘들고 지쳐 보였다. 무라는 조용히 치우천을 바라보다 입술을 깨물며 생각에 잠겼다. 곧 치우천은 표정을 고치고 편안하게 웃어 보였다. “덕분에 마음이 많이 가벼워졌습니다. 무라님은 정말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주시는군요 제 안사람이 무라님을 따르는 마음, 이제야 잘 알겠습니다.” 그때 무라는 충격적인 말을 했다.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치우천님, 저는 비냐를, 그리고 번개범을 만나고 싶습니다.” 치우천은 의외의 말에 대번 안색이 변했다. “무슨 말씀입니까?” “치우천님이 처음에 그 보이지 않는 자의 낌새를 채신 것은 번개범 때문입니다. 천님은 분명 그 알지 못할 상대가 번개범을 키우고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번개범은 죽지 않았다고 말하셨지요. 그렇다면 천님은 어디 있는지 아실 것입니다. 그 번개범에게 저를 보내주실 수 없습니까?“ “무라님, 대체 왜......?” “치우천님, 저는 부하들에게서 비냐가 아직 살아 있다는 이야기를 이미 들었습니다. 그리고 비냐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요.” 무라의 입에서 뜻밖의 이야기가 나오자 치우천은 몹시 놀랐다. “그것을 어떻게 알았습니까?” “지난번 번개범과 싸울 때, 비냐가 자기 입으로 말하는 걸 들은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니 제 귀에도 들어오게 마련이지요.” “비냐가 자기 입으로 말했다고요? 그녀는 저와 우린구슬로.......” “아닙니다. 치우천님은 중간에 우린구슬을 떨어뜨렸고, 그래서 비냐가 직접 주신 말로 말했다고 합니다. 그것을 아직까지 모르고 계셨다니....... 정말 충격이 크셨던 모양이군요.” 어떤 일에나 태연하던 치우천도 지금만큼은 자신도 모르게 손이 떨렸다. 참으로 묘하게도, 치우천은 아직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때 비냐가 소녀의 잔학함을 큰 소리로 외치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들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들이 자신의 낯을 보아 자신의 귀에는 절대 그 이야기가 돌지 않게 했지만, 실제로 이미 많은 사람들이 소녀의 행동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을. ‘이 일을 어떻게 하는가? 사람들이 떠드는 것이야 별 문제없지만....... 무라님이....... 무라님이.......’ 무라는 보기보다는 정이 깊어서 같이 자란 열세 자매들에 대한 사랑이 극진했다. 싸움터에서조차 자기가 죽을지언정 같이 자랐던 유우를 죽이지 않으려 할 정도였다. 같이 자란 비냐를 소녀가 죽였다는, 그것도 조금의 감정도 없이 잔혹하게 살해하려 했다는 것을 무라가 안다면 그녀가 어떻게 나올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 때문에 치우천은 그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지만, 이제 보니 자기만 빼고 모든 사람들이 그 사실을 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 “비냐를 누가 그랬는지도....... 아십니까?” 순간 무라의 얼굴이 더욱더 창백하게 변했다. “비냐는....... 아주 추악한 몰골로, 죽다 살아난 모습이라더군요. 분명 한 번 죽었다가 살아나서, 죽은 것만 못하게 되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비냐를 그렇게 만든 것이...... 바로 소녀라는 말도 들었습니다.......” 치우천은 간신히 입을 열어 물었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러자 무라의 냉정한 표정이 삽시간에 허물어지더니 그 맑은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모르겠습니다. 허나 저는...... 치우천님을 돕고 싶습니다. 비냐는 분명히 뭔가 더 아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비냐가 아니라도 번개범은 더 말할 것이 있을지 모릅니다. 치우천님, 저는 카와 슈, 그리고 수십 마리의 개명수를 어릴 때부터 길렀습니다. 비냐가 번개범과 금방 친해진 것처럼, 저는 사람보다 호랑이들과 더 쉽게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지난번 치우천님은 번개범과 싸웠으니, 번개범도 분명 뭔가 숨기고 있을지 모릅니다. 저라면 알아낼 수 있습니다! 지금 치우천님의 방법도 틀리지는 않습니다만 너무 위험합니다. 제가 알아내겠습니다. 그 숨어 있는 자의 정체를 밝혀내서, 배신자를 제거하겠습니다. 그리고.......” 무라가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이자 치우천은 망연하게 무라를 쳐다보았다. “정말 소녀가 범인인지 확인하고 싶으십니까?” 치우천이 허탈한 듯 묻자 무라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비록 카린을 떠났지만....... 비냐와 소녀는 둘 다........ 제 자매였습니다. 저는....... 저는 어떻게든 해야 합니다. 소녀가 치우천님의 안사람인 것을 잘 압니다. 그 때문에 모른 척하려고도 생각해보았습니다. 허나....... 이대로 있을 수는 없습니다.” 무라는 돌연 몸을 일으켜 치우천에게 정중히 절을 했다. “치우천님, 제가 반드시 알아내겠습니다. 목숨을 걸고, 무슨 짓을 해서라도 배신자를 알아내고 치우천님을 지키겠습니다. 그러니 제 자매들의 일을....... 제게 맡겨주십시오. 그러실 수 없다면, 지금 죽여주십시오!” 치우천은 실로 암담했다. 정말 무라의 생각을 듣고 보니 그것만이신시에 숨어 있는 검은 그림자의 정체를 밝힐 수 있는 유일한 방법 같았다. 번개범은 자신과의 대화를 극도로 꺼렸으며, 그때 자신은 생각이 다 정리되지 않아서 어머님과 관계되었던 옛일에 대해 상세히 묻지도 않았다. 더구나 치우천은 그때 자신은 번개범과는 다시 만나지 않겠다는 약속한 바도 있으니 무라를 보내는 것이 유일한 방법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된다면 소녀는 어떻게 된단 말인가? 치우천은 눈을 감고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다. ‘치우천, 치우천아. 소녀는 너를 위해 그런 것이지만, 그녀의 죄는 죄대로 가야 한다.’ 그러나 다른 생각도 들었다. 수많은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 치우천을 가운데 두고 번갈아 꾸짖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는 안 된다! 지금까지는 나를 생각하여 무라가 참고 있었지만, 내가 소녀를 무라에게 맡기고 무라가 직접 비냐를 만나 그 참혹한 모습을 본다면 무라는 소녀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치우천아, 너는 사랑하는 사람, 너만 믿고 있는 여자 하나를 지켜줄 수 없단 말이냐? 그까짓 꿈이 무엇이고 주신이 무엇이냐?’ ‘네가 무라의 윗사람이라고 소녀를 지켜준다면 네가 그동안 비난했던 귀족들이나 악한 자들과 무엇이 다르냐? 너는 네 아우도, 네 자신도 잘못하면 벌을 받아야 한다고 외쳐왔다. 그런데 단순히 그녀가 너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녀가 네게 모든 것을 걸었다는 이유로 모 든 것을 버릴 것이냐? 이것은 작은 일이지만, 너는 여기서부터 허물어진다. 그렇게 되면 모 든 것이 다 허물어질 것이다!’ ‘너는 사랑하는 사람 하나 지켜주지 못한단 말이냐? 그것도 모두 너를 위해 한 짓인데 네가 시킨 짓이라 아니라고, 책임을 회피할 생각이냐? 너는 그 정도밖에 안 되는 녀석이었더냐?’ 치우천은 치열하게 번민했다. 미칠 듯한 혼란과 고통이 치우천의 가슴을 후벼 파는 가운데, 치우천은 마침내 땀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무라님께....... 맡깁니다. 다만....... 다만 소녀와의 옛정을 잊지 마시길.......” 무라는 눈물을 흘리며 치우천에게 다시 한 번 고개를 깊이 숙이는가 싶더니 번득 하는 순간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 치우천은 고통스럽게 이를 악물며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치우천의 마음은 어느덧 정리되어, 칼을 품은 것 같은 굳은 결심만이 앙금처럼 남았다. ‘마음이 아프다. 마음이 아프지만....... 무라야말로........ 무라야말로 소녀의 일을 심판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따른다. 그리고 소녀가 죽으면....... 나도 따라 죽는다. 그뿐이다.......’ 다가오는 검은 그림자 마침내 치우천의 군대는 주신 접경을 넘어서서 신시로 향했다. 치우천의 예상과는 다르게, 주신 접경에서는 아무도 치우천의 부대 앞을 막지 않았다. 오히려 주신 변방의 주민이나 사울아비들은 공상을 점령한 영웅들이 온다고 그들을 크게 환대했다. 보름이나 행군할 동안 아무도 치우천의 부대를 건드리지 않았다. 대장들은 아마귀족들이 두 번째 작전을 꾸미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나 치우천의 생각은 달랐다. 치우천은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침통함을 금할 수가 없었다. ‘분명 누군가가 내 작전을 귀족들에게 알렸다. 그렇지 않고서는 고시울률이 우리를 막지 않았을 리 없다. 그러나 아무에게도 속을 털어 놓을 수 없다니, 정말 괴롭구나.’ 지금 치우천에게 가장 걱정스러운 것은 계획이 새어나가는 일이 아니었다. 믿었던 벗들 사이에 배신자가 있다는 소문, 그것이야말로 치우천에게 가장 큰 적이 될 수 있었다. 서로 간에 불신의 눈빛이 보이기 시작하면 여러 부족으로 이루어진 이런 부대 따위는 금방 허물어진다. 생각해보면 이 군대는, 서로간의 수평관계는 그리 굳지 못하고, 거의가 치우천과 각 부족들 간의 수직관계로 짜여져 만들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런 부대에 의심의 눈초리가 돌면 사기가 떨어짐은 물론이고, 어느 작전도 먹혀들지 않는 혼란에 빠져, 결국은 전멸할 수밖에 없다. 그 때문에 치우천은 스스로 함정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누구에게도 상의하거나 속을 터놓을 수 없었다. 치우비나 몇몇은 물론 믿을 수 있었지만 배신자라는 감정을 숨기면서 태연히 행동할 수 있을 만한 사람은 없었다. ‘싸움이 벌어지면 그때그때 대응하는 것이 차라리 낫다. 내 목숨을 노리더라도 어느 정도 막아낼 수 있다. 상대가 내가 세워놓고 사람들에게 알린 계획 정도만 알고 대비한다면 나 또한 그에 어느 정도는 순간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 놈들이 함정을 파놓는다면 나는 태연히 함정으로 들어가서 빠져나와주겠다! 허나 나는 상대가 누구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들이 정말 원하는 게 무엇인지, 또 무엇을 위해 움직이는지도 모른다. 만약 상대가 내가 일부러 계획을 흘린 것을 눈치 채고 전혀 다른 쪽에서 나를 친다면 나는 당할 수밖에 없다. 적어도 상대가 누구인지만 알 수 있어도.......무라님이 과연 해내실 수 있을까?’ 무라야말로 치우천이 가진 마지막 비장의 한 수였다. 무라가 갑자기 사라진 이유는 치우천조차 모르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녀가.부하 한 명에게 카린에 다녀온다는 말 한마디만 남기고 없어졌다는 보고를 받자 치우천은 누구보다도 놀라는 시늉을 해보였던 것이다. 숨어 있는 배신자에게 그 연기가제대로 먹혀들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그러는 사이에 시간은 흘러, 친우천의 부대는 어느새 신시 바로 밑에 이르렀다. 아무도 그들의 앞을 막지 않았고, 도리어 환영하고 박수를 보내주기만 했다. 치우천의 목숨을 노리는 사람도 없었다. 의외로 귀족들은 이번만큼은 치우천을 위하여 커다란 환영대를 세우고 신시 의 성문을 꽃으로 장식까지 해놓고 있었다. 치우천을 따라온 대장들은 상대가 너무도 신사적으로 나오자 허탈하기도 했으나, 한펀으론 두근거리는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치우천이 신시의 남쪽 성문 근처에 이르자, 우사 병예가 직접 이끄는 한 무리의 사울아비들이 나와 치우천을 영접하며 격려해주었다. “주신의 사울아비 큰 스승 치우천은 흉악한 유망의 무리를 공상에서 몰아내어 주신의 벗 미아우족과 마갸르족의 땅을 되찾게 하는 큰 공을 세웠다. 사와라 한웅께옵서는 치우천의 큰 공을 기뻐하셔서 신시 안에서 큰 잔치를 베풀기로 하였으니 치우천은 신시 안으로 들라.” 그러나 예상대로 치우천과 그가 지명한 몇 사람들만 신시 안으로 들어서는 것을 허락받았을 뿐, 나머지 부대는 모두 신시 밖에 기다리고 있으라는 명이었다. 물론 수만에 이르는 부족들의 집합체 같은 치우천의 군이 신시 안으로 들어가겠다고 고집을 부릴 수도 없는 일이었다. 치우천의 작은 주신 부대는 신시에서 오 리 정도 떨어진 곳에 머물렀으며 나머지 미아우, 마갸르 등의 군대는 신시에서 십 리 되는 곳에 머물렀다. 그러나 야율쿠리, 초초룬, 보돈차르는 따로 각각 오천 정도씩의 부대를 신시에서 수십 리 떨어진 곳에 머물러 있게 했는데, 이렇게 많은 타부족 군대가 신시 주변에 머문 일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사람들은 말했다. 물론 그들도 공상 싸움에 공을 세웠기 때문에 그런 허락이 떨어졌겠지만, 의외로 순순히 허락한 것이 더욱 미심쩍을 정도였다. 치우천은 신시에 같이 들어갈 사람으로 작은 주신 사람들만을 골랐다. 치베, 키타야, 구르, 리미, 개르, 유쌍과 작은 주신의 용감한 전사 스무 명이 그들이었다. 사울아비들도 오랜 원정을 마쳤으니 각기 따로 신시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부족장들은 일단 같은 날 신시에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대기하기로 했다. 치우비는 알한, 울라트, 마냥, 싱카, 비울걸, 울쿠타, 야쿠타, 차오스등과 함께 나머지 작은 주신 전사들과 도깨비 부대, 용병대와 남아 있기로 했다. 작은 주신이 통째로 옮겨왔기 때문에 그들 중에는 씨름꾼 보챠두와 그의 아들들도 있었다. 치우천은 신시로 들어가기 직전 치우비를 불렀다. “우리는 지금 호랑이 굴에 들어가는 것이나 다름없다. 너와 같이 가고 싶지만, 네가 밖에서 군을 이끄는 게 더 중요하다. 우리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치베가 신호할 것이니 잘 보고 행동해라. 치베가 불화살을 아주 높이 쏘아 올릴 것이고, 너는 눈이 좋으니 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불화살이 한 번 오르면 작은 주신 부대들에게 싸울 준비를 하게하고, 두 번 연달아 오르면 사방의 부대를 모두 모이게 해라. 만약 세 번 오르면 더 볼 것도 없이 즉시 신시를 공격해라. 물론 불화살이 오르지 않아도 누군가가 공격해오면 상대가 누구든 싸워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화살 석 대를 올리면 울라트가 싣고 온 나무상자들을 부숴서 그 안에 든 물건을 써라.” “그게 뭔데?” “네가 전에 가시덤불을 들어 한웅님을 구할 때 가시에 긁혀 몸이 상했지? 그것을 보고 만든 물건이란다. 그것 말고도 여러 가지가 있지만, 모든 것은 우리가 함께 겪은 일들 속에 있 단다. 너는 항상 나와 함께한 내 아우가 아니냐?” 치우천이 환한 미소와 더불어 알들 모를 듯한 말을 남기자 치우비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지금 이야기 해주면 안 돼?” “그것들은 위험한 때가 아니면 아직 써서는 안 되는 물건들이란다. 좌우간 조금도 어긋나면 안 된다. 알겠지?” “염려 마! 나도 같이 가고 싶지만.......” “녀석, 내 걱정은 말아라. 누가 아느냐? 아무 일 없이 잘 풀릴지 말이다.” 이윽고 치우천은 신시의 커다란 성문을 통과하며 깊이 심호흡을 했다. ‘이제 시작인가.......’ 그러나 치우천이나 치우비나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하는 일이 벌어졌다. 치우천 일행이 성문을 통과하자마자, 갑자기 요란한 소리를 내며 신시의 성문이 닫히기 시작했다. 치우천과 일행만이 아니라 그들을 안내하던 병예마저도 깜짝 놀랄 정도였다. 순간 병예에게도 창이 겨누어져 병예는 즉시 한쪽으로 끌려 나갔다. 아무리 병예가 주술력이 강해도 예기치 못한 사이에 들이밀어진 창에는 어찌할 수 없었던 것이다. 성문이 닫히자마자 사방에서 사울아비들이 “와” 하고 쏟아져 나왔다. 용병에 능한 구르와 키타야는 즉시 작은 주신 전사들로 하여금 치우천을 둥글게 에워싸도록 했다. 그러자 치우천은 즉시 치베에게 말했다. “치베! 화살을 준비해라! 우선 한 대!” 치베는 사울아비들이 다 뛰어나오기도 전에 예의 그 놀라운 활 솜씨로 불화살을 쏘아 올렸다. 그러는 사이 뛰쳐나온 수백 명의 사울아비들은 치우천의 부대를 완전히 포위하여 무기를 겨누었고, 작은 주신의 전사들도 그에 질세라 이를 악물고 무기를 마주 겨누었다. 그때 저쪽에서 누군가가 천천히 말을 타고 걸어왔다. 바로 고시울률과 부루위단 그리고 치우가람과 치우바람 형제였다. 그들의 모습을 보고 치우천은 코웃음을 쳤다. 치우바람이 짐짓 씩씩거리며 커다랗게 외쳤다. “치우천! 이 주신의 배신자 놈이 감히 다른 부족 놈들을 수도 없이 끌고 와서, 신시를 치려고 해? 썩 항복하고 꿇어 엎드려!” 치우천은 침착하게 되받았다. “신시를 칠 거였으면 내가 여기 왜 들어왔겠나? 이런 야단스러운 환영이라니. 고시울률님, 좀더 그럴듯한 함정은 없었소?” 고시울률은 한동안 치우천을 조용히 지켜보더니 위엄 있게 입을 열었다. “네가 공상을 친 재주는 인정한다. 하지만 신시에서 소란을 피우려고 하는 건 용서할 수 없지.” “내가 언제 신시를 쳤소? 나는 공상을 쳤고, 상을 받으러 온 것이오. 그런 내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이렇게 둘러싸는 겁니까? 일껏 공상을 점령했더니 상으로 목을 자르겠다는 말씀이오?” “주신은 공을 세우면 이런 식으로 갚느냐?” “흥! 세상 모든 부족들이 비웃을 것이다!” 치베와키타야, 구르등이 나서서 마구 욕을 했고, 특히 유쌍은 조금도 겁을 먹지 않고 신시가 다 울릴 만큼 큰 소리고 욕을 퍼부었다. “너희 놈들은 신시에 앉아서 백성들 긁어먹는 것 말고 뭘 했느냐? 애써 싸리 지나족을 막아낸 전사들을 이런 식으로밖에 못 대하다니! 이 썩은 돼지비계 같은 놈들아!” 부루위단은 그 욕설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이 치우천을 보며 비꼬았다. “미친 녀석! 네놈의 검은 속을 누가 모를 줄 아느냐? 공을 세웠다고 다른 부족의 도적들을 잔뜩 끌고 와서, 신시를 뒤엎으려 한 것이 네놈이 아니더냐?” 그 말에 치우천이 버럭 고함을 치며 맞받았다. “신시는 이미 뒤집어졌지 네놈들이 돼지코로 긁고 지나가서 벌써 신시는 몇 번이나 뒤집어졌어. 한웅님도 몰라보는 썩은 귀족 놈들! 그리고 거기에 달라붙은 구더기 같은 것들! 안파견 한님도 네놈들의 썩은 냄새에 코를 싸매고 얼굴을 돌리실 것이다!” 주신에서 안파견 한님을 두고 하는 욕은 욕이라기보다는 아예 사생결단을 하자는 무서운 저주나 다름없었다. 똑같은 욕이라도 안파견 한님을 빗댄 욕은 그야말로 전 집안이 동원되어 죽을 때까지 싸워도 시원치 않을 최고의 욕이었다. 치우천이 그런 무서운 욕지거리를 퍼붓자 부루위단은 화를 이기지 못해 손을 벌벌 떨었다. “저런....... 저런 고얀........!” 치우천은 더욱 크게 외쳤다. “너희도 낯짝이 있다면 한웅님께 말씀 드려라! 나는 공상을 떨어뜨렸으니 주신의 웃뜸 사울아비나 다름없고, 여기 모인 사람들은 더 이상 다른 부족이 아니라 주신 사람들이다! 나, 치우천! 사와라 한웅님을 뵙기를 청한다!” “고약한 놈이로다. 우리는 한웅님의 명을 받아 나온 것인데, 네놈이 뻔뻔스럽게 한웅님을 팔아?” 치우가람이 으르렁거리듯 말하자 치우천은 냉랭한 표정으로 되받았다. “흥! 항상 한웅님 핑계만 대는 놈들아 네놈들이야말로 한웅님을 앞세워 못할 짓이 없는 놈들이다!” “잔말 말고 무릎을 꿇어라! 네놈은 도망 못 간다!” “도망? 내가 왜 도망을 가느냐? 나는 잘못이 없다. 너희가 먼저 나를 공격했다 신시의 모든 사람들이 똑똑히 알고 있을 것이다. 내가 아니라 너희들이 도망가야 할 것이다!” 치우천은 크게 웃고는 치베에게 버럭 소리쳤다. “석 대!” 그러자 치베는 다시 연속하여 석 대의 불화살을 쏘아 올렸다. 그것을 보고 고시울률은 조용히 물었다. “신시를 치려는 거냐?” 전혀 거리낌 없이 치우천은 당당하게 대답했다. “앉아서 당할 수는 없소이다. 주신과 한웅님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신시는 한 번 청소할 필요가 있소!” “벌써?” 치우비는 형이 들어가자마자 성문이 닫히고 연달아 불화살이 오르는 것을 보고 경악했다. 그러나 어느 정도는 미리 예상했던 일인지라 치우비는 각 부대에 울쿠타와 야쿠타를 비롯해 사람들을 보내는 한편, 급히 도깨비 부대와 용병대에게 울라트가 싣고 왔던 상자를 부수라고 했다. 도깨비 부대와 용병대들은 순식간에 상자를 부수고 안에 들어 있는 것을 꺼냈다. 그 안에는 생전 처음 보는 구리 무기들과 가죽 끈이 달린 구리판, 그리고 구리 그릇이 가득했다. “이게....... 뭐야? 무기는 알겠는데, 다른 건......” 치우비가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도깨비들 중 한 명이 급히 외쳤다. “치우비님! 여기 사람 그림이 그려져 있습니다!” 치우비가 달려가 보니 넓적한 구리판들에 사람의 몸이 그려져 있었고, 구리 그릇에는 사람의 머리가, 그리고 가늘고 길며 둥근 구리판에는 사람의 팔과 다리가 그려져 있었다. 치우 비는 순간, 치우천의 말이 생각났다. -모든 것은 우리가 함께 했던 일들 속에 있단다. 치우비는 과거 가시덤불을 안고 돌진하면서 숱하게 몸을 다쳤던 일을 떠올렸다. 그러고 나자 그 구리 조각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었다. 치우비는 뒷면에 사람의 몸이 그려진 구리 조각 하나를 들어 자기 팔에 걸친 다음, 가죽 끈을 움켜쥐었다. 그것은 치우비의 팔에 꼭 맞았다. 그리고 사람의 몸이 그려진 가장 커다란 구리판을 들어 목 밑에 대었다. 도깨비들과 작은 주신 전사들은 놀라서 외쳤다. “구리 옷이다! 구리로 된 옷이다!” 그때 울라트가 나서더니 빨리 서두르라고 채근했다. “오라버니! 그것을 입어요! 그리고 너! 너 !너! 힘이 가장 세다고 믿는 녀석들만 저걸 입어!” 글자 그대로 그것은 구리로 된 옷, 바로 갑옷이었다. 그때까지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구리 무기를 만드는 것도 힘겨웠던 때에 구리로 그렇게 크고 알맞게 휘어진 몸 모양을 만든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신시 제일의 대장장이 불쇠 할아범을 치우천이 데리고 간 이유는 비록 따로 있었으되, 전사들 천 명을 공상 싸움에 참가 시키지 않고 놓아둔 이유가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치우비는 자기가 다쳤던 것을 잊지 않고 이것을 만들어낸 형의 마음에 감격하여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구리로 된 갑옷은 바로 형의 마음이었다. ‘형! 나는....... 이제 누구도 겁나지 않아. 누구도!’ 치우비가 몸과 팔, 어깨, 그리고 허벅지에까지 온몸에 구리 갑옷을 걸치고 몸을 펴자 주위에서 찬탄의 함성이 일어났다. 최후로 치우비가 구리 그릇처럼 생긴 것을 보다가 머리에 쓰자, 이제 치우비는 얼굴과 손, 정강이 아래 말고는 완전히 구리로 감싸져 있었다. 번들거리는 구리로 감싼 치우비의 거대한 몸은 세상의 무엇도 그것을 뚫을 수 없을 것 같아 보였다. 그리고 힘센 전사들 몇몇이 달려 나와 자신들의 갑옷을 입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울라트의 지시를 받은 것 같았다 실제로 구리 갑옷은 너무도 무거워 보통 힘을 지닌 사람들은 절대 입고 쉽게 움직일 수 없었다. 또한 상자를 모두 부수니 스무 벌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불쇠가 고심참담했으나 그 이상은 만들어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사기를 올리기에는 충분하고도 남았다. 그리고 치우비는 옆에 떨어져 있던 아주 길다란 자루도끼를 집어 들었다. 그 도끼는 자루까지 온통 아주 질 좋은 검은 구리로 만들어져 무게가 엄청났으며, 또 보는 것만으로도 무서울 정도로 예리하고 컸다. 갑옷 역시 무척 무거워서 보통 사람은 거기에 눌려버릴 정도였지만, 힘을 타고난 치우비에게는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치우비가 갑옷을 다 입고서 도끼를 들고 양팔을 활짝 펴며 크게 함성을 지르자 작은 주신의 전사들은 모두 소리 높여 환호했다. 이때 이미 신시의 실벽 위에는 많은 사울아비들이 올라가 활을 겨누고 있었지만, 치우비의 엄청난 모습을 보자 모두 얼이 빠지고 기가 죽어서 화살을 당길 엄두도 내지 못했다. 곧이어 치우비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주신은 형님을 배신했다! 공을 세운 우리를 도리어 죽이려 하고, 형님을 성안에 가두었다! 이것은 모두 썩어빠진 귀족들의 짓이다! 작은 주신의 전사들이여! 우리의 적은 신시다! 공격!” 그러면서 치우비와 스무 명의 갑옷 전사들은 일제히 성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다른 전사들도 고함을 치면서 성벽으로 향했다. 이미 그들은 사다리와 갈고리 밧줄 등의 성 공격무기를 감춰두고 있었다. 사울아비들 황급히 달려오는 전사들을 향해, 특히 갑옷을 입은 전사들을 향해 화살을 날리기 시작했다. 화살이 일제히 쏟아지자 전사들은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고, 수많은 화살들이 전사들의 몸에 맞았다. 사울아비들의 솜씨는 결코 녹녹치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 화살들은 구리판으로 된 갑옷을 뚫지 못하고 모두 촉이 부러진 채 땅으로 떨어져 버렸다. 활이 약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주신이라도 수없이 쏘아대는 화살촉을 모두 구리로 만들 형편은 아니었기에 대부분의 화살은 뼈 촉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니 활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화살은 절대 구리 갑옷을 뚫을 수 없었던 것이다. 성벽에서 쏘아대는 화살이 전혀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자 전사들은 크게 기가 살아서 함성을 질렀고, 성 위의 사울아비들은 비록 노련했으나 크게 당황하여 갈팡질팡했다. 신시 성벽의 사수들은 모두 대단한 솜씨를 지녔기에 활만 믿고 돌이나 끓는 물 같은 준비는 굳이 해놓지 않고 있었다. 이 판에 투구와 갑옷을 입은 전사들이 달려오자 대처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틈을 타서 순식간에 스무 개의 사다리가 성벽에 걸쳐졌다 갑옷을 입은 전사들은 선두에 서서 몸을 화살을 받아내며 성벽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드디어 최초의 갑옷과 투구가 싸움터에 등장한 것이다. “미친놈들.” 성을 공격하는 소리가 들려오자 고시울률은 점잖게 웃으며 빈정거렸다. “지금 신시가 텅텅 빈 상태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공상을 보름 만에 무너뜨린 우리 부대요 신시라고 별수 없소이다. 사울아비들은 아직 흩어져 있고, 이제야 오는 중일 텐데?” 치우천의 말을 듣고 고시울률은 크게 웃었다. 그리고 부루치단과 치우가람 형제도 함께 웃었다. 치우가람이 한쪽 눈을 살짝 찌푸렸다. “그렇다고 너희 같은 쓰레기들이 신시를 떨굴 수 있다고 보나? 신시 안의 사울아비만 열천은 넘는다!” 치우천도 냉랭히 웃으며 대꾸했다. “내가 그 정토도 생각 못했으리라 믿었나? 공상의 지나족은 우리의 여섯 배였지만 모조리 쫓겨났다.” “호? 그래? 사울아비하고 지나족 떨거지들이 같은 줄 아나 보지?” “너희는 내 꾀에 이미 빠졌어. 내가 가장 처리하기 쉬운 쪽으로 움직여주었으니까.” “흥! 네놈 부하들이 잘 싸우는 것은 네놈이 있기 때문이다. 네놈이 여기서 죽어버리면 저놈들은 허깨비들이다.” 치우천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씩 웃어 보였다. “누가 고분고분 죽어준다고 했나?” “네놈이 아무리 재주가 좋아도 성문은 닫혔고 겨우 스무 명뿐이다! 빠져나갈 수 있다고 믿는 건 아니겠지?” 치우천이 갑자기 크게 웃었다. 고시울률은 눈살을 찌푸렸고, 부루위단은 놀랐으며, 치우가람, 바람은 고개를 갸웃했다. “뭐가 우습지?” 치우천은 웃음을 멈추고 말했다. “설마 내가 정말 멍청하여 스무 명만 데리고 왔다고 믿는 건 아닐테지? 우리가 적게 온 것은, 적어야 쉽게 빠져나갈 수 있기 때문이야.” 말을 채 맺기도 전에 치우천은 큰 소리로 한 사람을 불렀다. “비울걸!” 말이 떨어지는 순간, 온통 시커먼 옷을 입고 회색머리를 어지럽게 흩날리는 비쩍 마른 흉악한 노인이 치우천 앞에 귀신처럼 나타났다. 바로 비울걸이었다. 기이한 노인이 갑자기 나타나자 고시울률과 치우가람 형제는 놀라서 화살을 쏘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그보다는 비울걸이 한 발 더 빨랐다. 치우천을 에워싸고 있던 사울아비들이 화살을 쏘기도 전에 거대한 누런 먼지구름이 땅에서부터 무서운 기세로 솟구쳐 올랐다. 그러면서 한데 엉기고 뭉쳐서 거대한 사람 형상을 만들어 갔다. “도깨비다! 땅 도깨비다!” 사울아비들이 놀라 아우성치는 사이, 거대한 땅 도깨비는 양팔을 휘두르며 크게 포효했다. 고시울률과 부루위단의 말이 놀라서 뛰어올라 부루위단은 하마터면 말에서 굴러 떨어질 뻔했다. 그러자 치우가람이 외쳤다. “도깨비건 뭐건 쏴라! 쏴!” 사울아비들은 곧 마음을 가다듬고 화살을 우박처럼 쏟아 부었다. 땅 도깨비는 화살을 맞으면서도 계속 소리를 지르며 커다란 통나무 같은 활을 휘둘러댔다. 사울아비들은 용감하게 화살을 퍼부으며 창을 앞세우고 도깨비들에게 돌격해 들어갔다. 문득 치우가람이 보니, 치우천과 스무 명이 넘는 사람들은 그 사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것이 아닌가? 그리고 다음 순간, 거대한 땅 도깨비가 갑자기 생명을 잃고 허공에서 우수수 부서져 내려 사방에 흙먼지가 가득했다. 말을 타고 돌진하던 사울아비들은 흙더미에 깔려 마구 넘어졌고, 먼지 때문에 앞을 분간하지 못하고 성벽에 들이받고 나가떨어졌으며, 자기들끼리 부딪히고 화살을 서로 날려 순식간에 손해가 막심했다. “놈들이 빠져나갔다! 찾아라! 찾아” 치우바람이 먼지가 들어간 눈을 움켜쥐고 소리쳤으나 치우천과 부하들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찾을 수 없었다. 먼지투성이가 된 고시울률은 이를 부드득 갈며 치우가람에게 외쳤다. “놈을 찾는 것보다 신시를 공격하는 놈들을 쳐부수는 게 우선이다! 치우가람! 모두 나가게 해라!” “알겠습니다!” 치우가람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성벽에 화살을 올리고 연기를 피워라! 신호를 해라!” 그러면서 치우가람은 음흉하게 웃어 보였다. “네놈들이 잘났다고 하지만 절대 이길 수 없다. 너희는 꼼짝도 못하고 항복할 수밖에 없어!” 치우비가 막 성벽 위로 기어 올라가던 참이었다. 그때였다. 높은 곳에 올라간 치우비의 눈에 멀리서 일어나는 먼지구름이 보였다. “저게 뭐지?” 치우비는 순간 안색이 변하면서 급히 외쳤다. “일단 물러서라! 구리 옷을 입은 전사들이 화살을 막으며 일단 물러서서 대열을 갖춰라!” 치우비의 명이 떨어지자 훈련을 잘 받은 작은 주신의 전사들은 즉시 물러서서 후퇴를 시작했다. 알한도 어느새 갑옷을 한 벌 걸치고 화살을 막아내다가 치우비에게 달려와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적입니다! 신시 밖에도 적이 수없이 많습니다!” 순간 알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미친놈들 신시를 싸움판으로 만들려는 건가요?” 치우비 역시 분노를 이기지 못해 이를 바드득 갈았다. “나쁜 놈들! 우릴 속이려고 백성들에게 알리지도 않았어!” 신시 성벽 주변으로 수많은 집들이 가득 차 있었다. 만약 공성전만 일어난다면 이 많은 집들이 모두 상하지는 않을 것이나, 성밖에서 접전이 벌어진다면 수많은 백성들이 어떻게 해서 도망친다 해도 이 집들과 재산은 모조리 짓밟힐 수밖에 없었다. 그때 눈이 밝은 야쿠타가 소리쳤다. “남동쪽에서 먼지가 세 줄기 일어납니다!” 다른 정찰병들도 외쳤다. “동쪽에서도 두 줄기 일어나고 있습니다!” “북동쪽에서도 세 줄기 먼지가 보입니다! 적이 엄청난 것 같습니다!” “침착해라! 어차피 한 번은 치러야 할 일이었다!” 보돈차르가 나서서 치우비 측의 대열을 다시 정비하기 시작했다. 이미 연락을 받은 야율쿠리, 초초룬, 보돈차르의 부대가집결하여 이쪽의 군세는 거의 삼 만에 달했지만 모두 여덟 줄기나 되는 먼지구름의 기세로 보아 적들의 수도 엄청난 것이 분명했다. “주신의 사울아비란 사울아비는 다 모았단 말인가?” 알한이 자기도 모르게 내뱉자 눈을 감고 있던 싱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하나하나가 적어도 오륙 천은 넘습니다.” “저들 모두가 사울아비는 아닐 거이 아무리 주신이라도 사울아비가 그렇게 많을 수는 없어!” 야율쿠리가 애써 부정하려 하자 초초룬이 냉정하게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사울아비들이 이끄는 부대야. 더구나 전부 구리 무기를 가지고 있을 거라구! 지나족 따위와는 감히 비교할 수 없을지도 몰라!” “도대체 형님은 어디 가신 거야?” 치우비가 외치는 순간, 치우비 옆에 먼지구름이 일어나면서 비울걸이 귀신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비울걸이 무뚝뚝하게 한마디 했다. “네 형은 지금 한웅인가 뭔가 하는 늙은이를 구하러 갔다. 여긴 너에게 맡긴다고 하면서.” 치우천은 리미와 개르를 앞세우고 구르와 키타야를 양옆으로 하여 스무 명의 전사들과 함께 한웅이 사는 큰 집으로 달려가는 중이었다. 일단 고시울률과 치우가람의 눈에서 벗어나자 예상대로 치우천의 앞을 가로막는 사람이 없었다. 사울아비라고 해서 특별한 차림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더구나 신시에 적이 쳐들어온 상황에서는 신시의 솟대 부근을 지나는 것은 당연히 사울아비라고 생각하지, 설마 그들이 밖에서 들어온 자들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것은 미리부터 계획한 일은 아니었다. 치우천은 원래 비울걸의 힘을 빌려 성밖으로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지금 신시 안으로 뛰어들면 오히려 사람들의 의심 없이 사와라 한웅을 구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몇 사람이 치우천의 앞을 막았지만 그때마다 치우천은 “신시에 적이 쳐들어와서 한웅님을 지켜야 한다!”라고 소리쳤다. 덕분에 치우천은 전혀 의심받지 않고 신시 가운데를 지나 솟대 길을 거쳐 한웅의 거처로 향할 수 있었다. 리미와 개르는 얼굴이나 머리칼이 눈에 띌까봐 풀잎으로 엮은 해 가리개를 머리에 눌러쓰고 있었는데, 두 도깨비나 키타야, 구르, 유쌍 모두 치우천의 놀라운 담력에 혀를 찼다. 실로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빠른 순간에 허를 찌른 행동이었다. 치우천은 한웅의 큰 집에 뛰어들면서 급히 외쳤다. “신시 성밖에 적이 쳐들어왔다. 사울아비들은 모두 나가서 도우라! 우리가 한웅님을 옮겨 뫼시겠다!” “너는 도대체 누구냐?” “나는 하늘군대의 사울아비 큰 스승 양역이다! 비렴님의 명을 받고 한웅님께 알리러 왔다! 어서 한웅님이 계신 곳으로 안내해라! 그리고 가마를 준비하란 말이다! 일이 아주 급하다!” “그런 일은 우리가 할 것이니......” 그러자 치우천은 두말없이 그 사울아비의 얼굴을 후려쳐서 쓰러뜨리며 외쳤다 “꾸물거리는 놈은 모조리 목을 베겠다!” 실로 치우천은 대담하기 짝이 없었다. 사실 보통 때라면 이렇게 간단하게 한웅에게 갈 수는 없을 것이었다. 허나 신시는 지금껏 세워진지 수백 년이 지났지만, 이렇게 공격을 받은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아직 조직이나 임무가 철저하게 분담되지 않은 때라 한번 혼란에 빠지자 금방 수습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사울아비들은 모두 놀라 허둥지둥하며 한웅이 타는 큰 가마를 가지러 사라져 버렸다. ‘잘될 것 같다!’ 치우천은 생각했다. 그런데 그때, 돌연 뒤쪽의 문이 열리면서 두 사람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한 사람은 나이 많은 노인이었고 한 사람은 중년의 남자였는데, 둘 다 어디선가 본 사람들 같았다. “당신들은 뭐요? 어서 한웅님이 있는 곳으로 안내를......” 치우천은 다시 한 번 외쳤으나 그 두 사람은 놀랍게도 빙그레 웃을 뿐, 조금도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다음 순간, 두 사람이 동시에 손을 조금 움직인 것 같았는데 어느새 리미와 개르가 머리에 덮었던 해 가리개가 둘로 쪼개져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리미와 개르는 수많은 싸움을 거친 용사 중의 용사였는데, 그들조차 느끼지도 못할 만큼 두 사람은 빠르게 움직였던 것이다. “당신들은.......!” 외치던 치우천은 순간 두 사람이 누구인지 기억이 났다. 그들은 바로 하늘 제삿날 춤을 보여주었던 두 명의 단군이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리미와 개르의 해 가리개를 베어 넘기고도 여유 있게 미소만 짓고 있었다. 그들 중 노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 녀석들이 사울아비로 보이나?” 그러자 중년남자가 정색을 하며 답했다. “도깨비는 사울아비가 될 수 없지요.” “그러면 저놈들이 왜 여기서 난리일까?” “글쎄요 한웅님이 어쩌고 하는 것을 보니 정말 한웅님을 어떻게 할 것 같은데요?” 순간 리미와 개르는 서로 슬쩍 눈빛을 교환하고는 동시에 무서운 기세로 달려들었다. 리미와 개르의 도끼가 두 사람의 머리를 정확히 노리고 날아들었으나 두 사람은 태연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러는데 가만두어도 되겠는가?” 순간 치우천이나 키타야, 구르 등은 모두 입을 딱 벌리고 다물지 못했다. 리미와 개르의 도끼는 정확하고 빠르며 힘이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움직이지도 않은 것 같았는데, 어느새 리미와 개르의 뒤편으로 와서 있는 것이 아닌가. 도끼가 빗나가 허공을 가르자 리미와 개르도 크게 놀랐다 다음 순간, 뭐가 번쩍 하는 것 같더니 리미와 개르는 컥 소리를 지르며 저만치에 처박혀 버렸다. 그러면서 중년 남자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노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가만두면 안 되겠지요.” 갑자기 치우천의 등에 소름이 확 솟아올랐다. 하늘 제사 때 이 두 사람이 추던 춤을 구경하면서 치우비가 했던 말이 생각났던 것이다. -내 저렇게 멋진 솜씨는 처음이야. 저분들은 싸움 솜씨도 정말 뛰어나겠어. -무슨 소리냐? 춤추는 것을 보고 싸움이라니? -싸움도 몸을 놀리는 것이고 춤도 몸을 놀리는 것인데, 저 정도로 몸놀림이 틀림없다면 싸움기술도 뛰어날 수밖에. ‘비 녀석은 형천이나 금천을 보고도 그런 소리를 한 적이 없었다. 저 사람들이 앞을 막는다면....... 이건 정말 큰일이다!’ 더구나 두 사람은 아무 무기도 들고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들은 맨손으로 리미와 개르의 해 가리개를 베어냈단 말인가? 더구나 리미와 개르는 수많은 싸움을 치르는 동안 단련되어 도끼에 맞아도 쉽게 쓰러지지 않는 강골들인데 단 한 번 손놀림에 꼼짝도 못하고 기절해 있었던 것이다. 키타야와 구르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치우천의 앞을 막아섰고, 다시 그 앞을 스무 명의 작은 주신 전사들이 에워쌌다. 그러나 두 사람은 여전히 능청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떠들어댔다. “무릎을 꿇지 않을 것 같은데 저 녀석들이 윌 믿고 그러겠나?” “우리가 늙었다고 우습게 보는 모양이네요.” “내가 늙었지, 네가 늙었느냐? 벌써 늙은이 취급을 당하다니 너도 참 그렇구나.” “저런, 기분이 상하는군요. 그러면 어쩌죠?” “어떻게 할까?” “전부 없애버리지요, 뭘.” 두 사람은 우스갯소리를 해대며 미소 띤 얼굴로 천천히 앞으로 다가섰다. 그러나 전사들은 물론 키타야, 구르, 치우천마저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이상하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숨겨진 실력을 지닌, 이 사람 같지도 않은 두 단군들 앞에서 치우천과 부하들은 마치 뱀 앞에 선 쥐 같았다. “뭐라구요? 형님이 신시 안에?” 치우비가 놀라서 외쳤다. 그러나 비울걸은 냉정하게 말했다. “네가 형을 믿는다면, 네 형이 하는 대로 놓아두어라. 네가 할 일은 저 녀석들에게 겁먹지 말고 저놈들을 모조리 쳐부수는 일이다.” “하지만....... 저들은....... 저들은 모두 주신 사람들인데........” 치우비가 힘없이 말끝을 흐리자 보돈차르가 일갈했다. “비 안다! 정신 차렷! 여긴 싸움터다! 우리를 치는 자는 누구건 적이야, 앉아서 죽고 싶은 건가? 자네가 대장이다! 자네 형은 지금 없단 말야!” “우리가 질 리 없습니다! 치우비님! 명령을!” 알한이 짐짓 활짝 웃어 보이자 치우비는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모두 준비해라. 손가락 대형이다!” 치우비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차오스가 나서서 외쳤다. “들었느냐? 자! 모두 움직여라! 움직여!” “늦는 놈은 가만 안 둔다!” 야율쿠리가 버럭 소리치자 초초룬도 한마디 거들었다. “자! 잘들 해보자! 어려울 것 없다!” 이미 작전을 새워두었던 만큼 각 부대는 다시 대열을 세워서 손가락 대형으로 열을 맞추었다. 그때쯤 여덟 개로 나뉘어 달려오는 사울아비 부대들 중 가장 앞장선 부대 하나는 치우비측 전사들의 눈에 보일 정도로 가까워져 있었다. 전사들이 돌격을 하기 위해 마음을 가다듬고 있을 무렵, 눈이 밝은 야쿠타가 갑자기 펄쩍 뛰어오르며 외쳤다. “치우비님! 저....... 저건........!” 순간 보돈차르가 재빨리 야쿠타의 머리를 눌러 주저앉히며 나직하게 말했다. “입 다물어라.” 냉정하기 짝이 없는 보돈차르의 이마에 땀이 흐르고 있었고, 손이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몽골족이라 역시 따를 자 없이 눈이 밝은 보돈차르도 그 사람의 얼굴을 보았던 것이다. 야쿠타는 보돈차르에게 찍혀 눌리면서도 자기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보돈차르님! 알....... 알려야.......!” “그러면 우리는 전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럴 수는.......! 이럴 수는 없어요! 이럴 수는 없어!” 야쿠타는 미친 듯이 눈물을 흘리며 악을 썼다. 순간 치우비의 눈이 야쿠타를 향하자 보돈차르는 스르르 눈을 감았다. ‘이런.......’ “무슨 일이냐? 야쿠타? 말해라!” 치우비가 외치자 보돈차르는 푸욱 한숨을 쉬었다. “비 안다, 자네를 믿네. 마음을 굳게 먹게.” 치우비는 보돈차르가 왜 그러는지 알 수 없어서 다시 야쿠타에게 물었다. “너....... 왜 그러느냐? 뭘 보았느냐?” 야쿠타가 울음을 터뜨리며 외쳤다. “이럴 순....... 이럴 순 없어요. 저........ 저 사람은........ 적군의 맨 앞에 선 사람은........!” 치우비도 그 사람의 얼굴을 보았다. 순간치우비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면서 다리에 맥이 풀려 주저앉으려는 것을 보돈차르가 팔을 꽉 잡아 버텨주었다. 보돈차르는 주르륵 땀을 흘리며 치우비에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비 안다,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한다, 굳게!” 그러나 치우비에게는 더 이상 보돈차르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여덟 개로 나뉘어서 자신들에게 덮쳐드는 사울아비들, 그중에서도 맨 앞에 서서 무서운 기세로 달려오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치우비의 아버지 치우우레였던 것이다 “슈! 빨리! 조금만 더 빨리!” 같은 시각, 무라는 개명수인 슈에게 계속 외치고 있었다. 무라의 흰머리와 백옥 같던 피부는 먼지로 뒤덮였고 아름다운 슈의 몸도 흙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그 옆을 달리는 카의 꼴 역시 하나도 나을 것이 없었다. 개명수들은 호랑이보다도 힘이 세어 며칠을 달려도 지치지 않는다고 했지만, 그런 카와 슈는 혀를 반쯤 빼물고 있었다. 무라는 정신이 아득하여 금방이라도 슈의 등에서 떨어져 내릴 것만 같았다. 벌써 나흘째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달리기만 했던 것이다. 그러나 무라는 이를 악물었다. ‘어서 가야 해! 늦으면....... 늦으면 끔찍한 일이 벌어져!’ 번개범과 비냐 그리고 가리족들을 만난 무라는 비록 번개범은 자세한 것을 알고 있지는 못했지만,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알아냈다. 그리고 무라는 자신이 알아낸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치우천이 걱정했던 신시의 검은 그림자는 분명 존재했다. 그리고 그 그림자는 지금 무서운 일을 벌이고 있었다. “달려! 슈!” 무라는 다시 한 번 슈에게 외쳤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모든 것이 허물어질 것이었다. 치우천과 치우비의 목숨도, 그리고 그의 많은 벗들과 전사들, 부족들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과 같았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결과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라는 다시 한 번 슈의 등을 꽉 움켜쥐었고 슈도 주인의 마음을 눈치 챈 듯, 있는 힘을 다해 다리를 뻗었다. 푸른 나무가 가득한 숲 속을 한 줄기의 하얀 번개가 스쳐가는 것 같았다. 8권에 계속 ■주요 등장인물 진몽희 하백족을 이끄는 여부족장 같은 존재로, 사람 이름이라기보다는 직책의 이름이다. 진몽희는 하백족의 시조인 여선인 진오의 예언이 이루어질 때까지 계속 세습해야 하는 이름이다 오로파라 태곳적 선인인 발귀리의 가르침을 받아 도를 얻은 옛 선인. 두 명의 딸을 두었는데 첫째가 진오이고. 둘째가 타타츄이트이다. 두 딸 모두 나름대로 도를 얻어 선인이 되었다. 오로파라는 스승인 발귀리가 우린구슬을 만든 것을 보고 자신도 그를 본 떠 푸린구슬을 만들었다 오로파라가 남긴 기운은 간혹 대를 이어온 후손 여자들에게서 나타나는데, 그 힘은 푸린구슬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진오 여선인 오로파라의 첫째 딸로. 하백족을 세웠으며. 하백족의 진몽희가 세습되어 가도록 예언을 남긴 인물이다. 오로파라에게 물과 말하는 법을 배워서 물을 다음대로 다룰 수 있었다고 한다. 진오의 후예인 하백족은 그래서 물에 아주 능하고 물가가 아니면 살지 못한다. 타타츄이트 여선인 오로파라의 둘째 딸로. 초초룬에게 가르침을 준 스승이기도 하다. 미아우족에게는 모든 벌레들의 어머니라 숭상 받고 있지만 다른 부족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오로파라에게서 벌레들과 말하는 법을 배워 힘을 쌓아갔다. 누조 타타츄이트의 후예로 벌레 중에서도 누에가 가진 능력을 읽을 수 있다. 누에를 쳐서 비단의 원료를 만드는 법을 알려주었기에 누에의 어머니(누조)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젊은 시절 헌원과 결혼하여 발을 낳았다. ) 비단이 지나족의 특산품이 된 것도 이 누조 덕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