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 서 명 : 치우천왕기 6(풀리는 매듭) 지 은 이 : 이우혁 펴 낸 이 : 이정원 출 판 사 : 도서출판 들녘 출판년도 : 2003년 9월 30일 <지은이 소개/ 이우혁> 1965년 5월 18일 서울 출생. 상문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기계설계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대학 때부터 아마추어 연극, 뮤지컬 등에 깊은 관심을 보여 13편 이상의 극에 연출. 출연하였으며, 하이텔 고전음악 동호회에서 한국 최초의 아마추어 오페라 ‘바스티앙과 마스티엔느‘를 각색, 연출하기도 했다. 1994년 <퇴마록>, 1998년 <왜란종결자> 등을 발표하여 수백만 독자들의 사랑 속에서 일약 대중 문학의 대표작가로 떠올랐다. 지금도 그는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좋은 작품을 발표하기 위해 작업실에서 작품구상에 몰두하고 있다. 이우혁 홈페이지 www. youk.co.kr <미디어서평> 한국 판타지 문학의 정점에 우뚝 선 작가 이우혁! 새로운 가능성, ‘영웅 판타지’의 세계가 열린다! 1994년 1월 ‘퇴마록’이 발간되었습니다. 1993년 PC 통신에서 회자되었던 그의 작품이 출간될 당시 그 작품이 그렇듯 오랜 생명력을 발휘하리라곤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습니다. 숱한 화제와 800만부라는 어마어마한 판매기록을 세우고 근 8년 만에 막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2003년 7월, 작가가 계속 관심을 가져왔던 ‘치우천왕기’가 출간되기에 이르렀습니다. 9년 동안의 자료 수집과 세 차례의 중국 방문으로 이 작품에 쏟은 작가의 열정은 정말 남다릅니다. 고작 2백 줄도 안 되는, 그것도 태반이 중복되는 자료 몇 줄을 가지고 한 사람의 일대기와 그 시대를 다시 구성한다는 것은 참으로 지난한 일이라고 작가는 고백합니다. 다시 말해 판타지의 기법으로도 어려운 일이었으며, 어쩌면 그 내용을 쓴다는 것 자체가 판타지라고 할 수도 있을 테니까요. 사전에 나와 있는 치우에 대한 소개는 이렇습니다. 치우(蚩尤):중국 고대 신화에 나오는 거인족의 우두머리. 염제(炎帝)의 후예이다. 전설에 의하면 81명의 형제가 있었는데 모두 동(銅)으로 된 머리와 철로 된 이마를 가지고 있었고, 머리 위에는 긴 뿔이 있었으며, 매우 모질고 사나웠다고 한다. 과(戈)?모(矛)?극(戟)?추모(酋矛:자루의 길이가 스무 자인 창)?이모(夷矛) 등의 병기를 만들었다. 황제(黃帝)와의 전쟁 중에 과부족인(?父族人)?풍백우사(風伯雨師)?이매망량(魅:도깨비)의 도움을 받았다. 치우는 연기를 빨아들이고 안개를 뿜으며, 공중을 날고 험한 곳을 뛰어넘을 수 있다. 후에 치우는 전쟁에서 패해 죽음을 당했으며, 그 피는 도리깨를 물들여 단풍나무 수풀을 이루었다. 고대 제(齊)나라에서는 8존천신(八尊天神)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치우는 그중 3번째로 모셔졌다. 진(秦)나라 말기에 유방(劉邦)이 기병할 때 패정(沛庭)에서 치우와 황제에게 제사를 지냈다. 후대에 와서 치우는 전쟁신으로 받들어졌다. 이 기록은 중국측에 나와 있는 자료를 근거로 한 설명입니다. 동으로 된 머리, 철로 된 이마, 다양한 병기를 사용하는 치우의 묘사를 보건대, 분명 그는 당시 철기문화를 선진적으로 수용했던 것이 분명한 것 같습니다. 주신족의 신시(神市)는 단군조선 이전의 나라요, 1500년간이나 계속된 나라이며, 치우(蚩尤)는 그 14대 황제로 황하유역에서 일어나서 회대(淮垈, 중국 회수와 산동 사이의 땅)를 정복한 왕입니다. 그리고 공손헌원(황제)는 지나족(중국)을 통일한 왕입니다. 치우와 황제는 지금으로부터 4천7백여 년 전 중국 하북성 탁록(啄鹿)에서 10년 동안 70여 차례나 싸웠는데 이것이 고대 동북아시아 최대의 전쟁이라고 전해 내려오는 그 유명한 탁록전쟁입니다. 비록 탁록전쟁에서 공손헌원(황제)에게 패한 치우이지만 훗날 군신으로 받들어진 것만으로 보아도 그의 용맹성을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튼 이 작품은 고대 역사의 진위성을 따지는 역사서가 아닌, 그야말로 90퍼센트가 작가의 상상력으로 탄생된 ‘영웅 판타지’입니다. 한국 판타지 제2부(제1부는 1998년에 발표한 ‘왜란종결자’)에 속하는 이 작품은 역사의 자료가 턱없이 부족한 고대 역사로의 무한한 상상력을 동원하여 독서의 즐거움과 고대신화로의 충실한 안내자 역할을 하기에 손색이 없을 것입니다. 화합이냐, 지배냐? 역사의 운명을 건 영웅들의 대혈전! 800만 독자를 사로잡은 이우혁의 힘이 되살아난다! ‘퇴마록’ 이후 9년을 고심한 끝에 펼쳐놓은 ‘치우천왕기’! 단군의 고조선 이전, 과연 우리 민족의 시원은 어디였을까? 작가는 채 200줄도 되지 않는 사료를 붙들고 9년의 세월을 고심했다. 단 한 줄의 자료라도 더 찾기 위해 엄청난 양의 독서를 했고, 역사의 원형을 찾기 위해 방랑자처럼 중국 각지를 떠돌기도 했다. 이제 2003년 7월, 그는 뛰어난 역사적 상상력으로 5000년 동안이나 잊혀져 왔던 우리의 선조, 치우천왕을 부활시켰다! 역사의 운명을 건 대혈전의 시작과 끝은? B.C. 2716년부터 B.C. 2696년까지, 드넓은 중국 대륙이 바로 ‘치우천왕’기의 무대이다. 신석기 시대의 말기이며 또한 청동기 시대가 마악 시작된 바로 그 지점에서, 주신족의 치우천과 그의 쌍둥이 동생 치우비의 목숨을 건 모험과 사랑이 시작된다. 모든 부족은 제 색깔대로 공존해야 한다는 화합 사상을 가지고 있는 치우천! 힘으로 천하를 통일해 하나의 강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지나(중국)족의 대족장, 공손헌원! 최고의 전략가이며 전술가인 두 영웅의 운명적인 대결과 엎치락뒤치락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박진감 넘치는 스토리의 힘은 시공을 초월한 상상력의 진수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 마법과 도술, 선인과 신수들이 등장하는 전설의 시대! ‘치우천왕기’에는 영웅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운명을 시험하는 선인들과 신수, 도깨비 등등 온갖 마법과 도술을 부리는 캐릭터가 쉴새없이 등장한다. 인간의 모습을 한 대선인 자부(紫負)와, 파괴와 무질서의 선인인 혼돈(混沌)이 공존하고, 언어의 시조(始祖)인 발귀리(發貴理)와 전설의 동물인 맥(貊), 곤륜산에 살았다는 대주술사 서왕모(西王母), ‘소녀경’의 주인공 소녀(素女) 등이 바로 그들이다. 마법과 도술을 쓰는 그들은 치우천왕과 공손헌원, 그 두 영웅 뒤에서 그들을 돕거나 방해하는 역할을 한다. 거대하고 웅장한 영웅 판타지, ‘치우천왕기’! 이 소설은 역사에 근거하고 있지만 작가가 주창하는 한국 판타지이다. 판타지적인 요소가 많으며, 그러한 요소 없이는 애당초 구성될 수도 없었다고 본다. 실제 역사에 남은 작은 편린으로 구성하느라 무리도 좀 따를 수 있으나 이 작품은 소설이며, 판타지인 이상 재미있고 흥미로운 구성이 단연 돋보인다. 차례 형천과 치우우레 부자 상봉 맥달의 고향 (神市)신시 새로운 무기 공상 진격 앞날을 보는 자 제사 맥달의 죽음 소녀와의 재회 다시 만난 번개범 폭풍전야 형천과 치우우레 “지금 무슨 말을 했느냐?” 막 입술에 닿으려던 토기 술잔이 툭 소리를 내며 고운 짙을 간 바닥에 떨어지더니 뒤뚱거리며 엎질러졌다. 점잖게 앉아 있던 형천은 술이 엎질러진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잠시 멍한 표정으로 앞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표정을 일그러뜨리기 시작했다. 낯빛이 붉어지면서 가느다란 핏줄들이 이마와 관자놀이에서 도드라졌다. “다시 한 번 말해보아라!” 형천은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 앞에 서 있던 전사는 한 번 어깨를 부르르 떨더니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위님의 부대는...... 다 죽어서 살아남은 사람이 없답니다. 그리고 네 개의 부대가......” 갑자기 형천이 손바닥으로 땅바닥을 쾅 소리나게 내리치자 엎어졌던 토기 술잔이 깨지며 산산조각 흩어졌다. “다 죽었단 말이냐?” “그...... 그런 것 같습니다......” 형천은 분노를 자제하려는 듯, 한동안 씨근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주신의 사울아비들이냐? 그들이 모조리 몰려나오기 시작했느냐?” “아......아닌 것 같습니다.” “뭐? 그럼 누구냐.l 어느 부족이냐?” 위의 부대마저도 괴멸되었다는 소식은 유망 측의 총사령관 격인 형천에게는 충격 그 자체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 치우천의 부대는 위의 부대를 포함하여 한 달 사이에 차례로 다섯 개의 지나족 부대를 공격하여 쓸어버렸던 것이다. 다섯 개 모두 각각 오천 명씩이나 되는 많은 전사들로 이루어진 대부대이다. 그러한 부대를 순식간에 전멸시킬 수 있는 부족이 몇이나 될까? 형천은 아무리 생각해도 짐작 가는 바가 없었다. 그때 소식을 전해온 전사가 더듬다듬 말했다. “듣기로는...... 작은 주신족이라고 합니다.” “작은 주신? 그런 부족도 있는가?” “생긴 지 몇 년 안 된 부족이라 합니다만.....” 형천이 갑자기 버럭 고함을 질렀다. “생긴 지 몇 년도 안 된 부족이 어떻게 우리 부대를 하나도 아니고 다섯씩이나 전멸시킬 수 있단 말이냐!” “그건...... 그건...... 위님이 돌아오셨으니 그분께......” 형천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거대한 체구의 형천이 분노하며 몸을 일으키자 소식을 전한 전사는 그 기세에 위압되어 다리를 후들후들 떨었다. “위는 어디 있는가?” “염......염제 신농님께서 찾으셔서......”. 형천은 획 몸을 돌려서 두말없이 막사의 가죽 휘장을 젖히며 성큼성큼 밖으로 나섰다. 형천이 쿵쿵 소리를 내며 걸을 때마다 밟힌 땅이 푹푹 파이며 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혔다. 다른 전사들도 형천의 표정을 보고는 모두 겁을 먹고 그의 앞길에서 허둥지둥 몸을 피했다. “이봐, 위. 그거 무슨 헛소리냐? 너 꿈꾸다 왔느냐?” 형천이 크고 호화롭게 꾸며진 유망의 막사에 들어섰을 때, 유망은 반쯤 누운 자세로 픽픽 코웃음을 치면서 말하고 있었다. 그 앞에는 먼지를 흠뻑 뒤집어쓴 위가 어딘가 좀 어색한, 기우뚱한 자제로 무릎을 꿇고 엎드린 채 땀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위가 머뭇거리다가 두려움에 질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 아니옵니다. 분명 그들은......” 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유망이 갑자기 높은 목소리로 크게 웃으며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아, 형천. 이 미친 자식의 말 좀 들어봐. 하하하, 우습구나! 정말 우습다구! 이렇게 우스운 일도 있군, 그래! 거 뭐냐, 작은 주신인가 뭔가 하는 코딱지만한 부족이 우리 다섯 부대! 스물다섯 천(이만 오천)을 다 죽였다더군!” 형천은 근엄한 말투로 천천히 되받았다. “저도 그 이야기를 듣고 왔습니다.” 유망은 배를 움켜쥐고 깔깔거리며 아예 몸을 몇 번 뒤틀면서 소리쳤다. “그래! 얼마나 우스운 일이야? 그런데 말야! 그놈들이 몇 명이었는지 알아? 위가 오천 명을 데리고 갔었지? 그런데 그놈들은 오백 명이었대! 오백 명! 우리 편은 다 죽고 열댓 명만 살아남았는데, 그놈들은 죽은 놈이 없다는군! 야! 웃겨! 정말 웃겨! 우리 지나 전사들은 다 밥버러지였었잖아!” 형천은 믿어지지 않아 입을 딱 벌렸다. 유망은 소리치다가 대뜸 인상을 찌푸리더니 갑자기 발작적으로 몸을 일으켜 눈부신 속도로 허리에 찼던 구리검을 빼어 들더니, 옆에서 시중들던 여자의 머리를 쳐서 반으로 쪼개버렸다. 그 여자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머리에 칼이 박힌 그대로 피를 뿌리며 나무등걸처럼 뒤로 넘어졌다. 유망은 그 칼을 다시 뺄 생각도 하지 않고 형천에게 고개를 돌려 웃으며 외쳤다. “형천! 웃기지 않아? 정말 웃기잖아, 웃어봐! 같이 웃어야지! 안 그래? 응?” 유망은 계속 목소리를 높여 떠들어대다가 벼락같이 몸을 돌렸다. 먼저 죽은 여자의 반대편에도 시중드는 여자가 또 한 명 있었는데, 유망은 그 여자의 목 줄기를 손가락으로 움켜쥐었다. 안 그래도 그 여자는 공포와 충격으로 몸이 굳어져 있었는데, 유망이 목 줄기를 움켜쥐자 눈물을 줄줄 흘리며 어깨만 가늘게 떨 뿐이었다. 유망은 여자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왜 안 웃어? 웃어야지!” 여자가 공포로 덜덜 떨며 돌같이 뻣뻣해진 얼굴을 애써 추슬러 간신히 입꼬리를 실룩거리자, 유망은 발작적으로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우두둑 하는 소리와 함께 그 여자는 목이 부러져 순식간에 시체가 되어 옆으로 털썩 쓰러졌다. 유망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비웃어? 이런 망할 년이!” 형천아 보다 못해 뭔가 말하려 하자, 유망은 별안간 또 활짝 웃으면서 형천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형천! 그놈들 대장이 누구였는지 알아?” 형천은 유망의 손가락 끝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보며 조용히 물었다. “염제 신농님, 또 연기를 마셨......?” 갑자기 유망이 주위가 떠나갈 만큼 큰 소리로 외쳤다. “묻는 말에나 대답해!” 형천은 할 수 없다는 듯 나직이 말했다. “모릅니다. 알고 싶습니다.” “치우천, 치우비! 하하! 바로 그 멍청한 소 같은 아우놈과 다리병신 녀석이라더군. 형천? 형천? 그 녀석들이 어떻게 거기서 날뛰고 있지? 응? 그놈들은 죽었다고 했잖아?” 형천의 눈이 크게 떠졌다. “정말......입니까?” 느닷없이 유망은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며 쏘아대듯 빠르게 말했다. “아...... 형천, 형천 내가 가장 믿는 부하 형천. 나는 그대를 존경해. 그대만을 믿고 있어. 그런데 내가 왜 거짓말을 하겠나? 왜 나에게 다시 묻지? 왜 내가 두 번 말하게 하지? 나를 믿지 못하겠나, 응?” 형천은 식은땀을 흘리며 급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염제 신농님의 말씀을 제가 어찌......! 하도 믿어지지 않는 말이라 되물었던 것뿐입니다! 용서해주십시오!” “되물어? 되물어? 그래, 그래. 그랬군, 그랬어. 그런데 말야, 나는 누구에게 되물어야 하지, 응?” 별안간 유망이 또 벼락같이 앞으로 튀어나오면서 엎드려 있던 위의 아래턱을 걷어찼다. 입술이 터지면서 피가 몇 방울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위가 뒤로 벌렁 나자빠지자 유망이 다시 외쳤다. “이 개야! 쓰레기야! 난 누구에게 되물어야하지? 왜 잘 놀리던 주둥이를 안 놀리지? 아가리를 찢어서 손바닥에 올려놓아야 놀리겠어? 응? 나도 그렇고, 위대하신 세상 제일의 장사 형천님도 되묻고 계시잖아! 응?” 위는 덜덜 떨며 다급히 외쳤다. “틀림......틀림없습니다! 염제 신농님께 어찌 허튼 소리를 하겠습니까? 틀림없이 그들 형제......” 유망은 위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달려들더니 인정사정없이 위를 발고 걷어차며 미친 듯이 중얼거렸다. 소리를 지르는 것도 아닌, 그저 높은 어조로 빠르게 말해서 마치 새가 재잘대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발길질은 그치지 않았고,가끔 위를 발길로 차는 소리가 더 커서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그 녀석들이 어떻게 살아났지? 내가 죽으라고 했는데? 난 그 녀석들이 죽었다고 들었는데? 내가 누구지? 염제 신농이잖아? 내 귀에는 분명 그 자식들이 죽었다고 들렸는데, 그 자식들이 왜 죽지 않았지? 네가 그랬어? 네가 그 녀석들에게 살아나도 좋다고 말했어? 누가 허락해뒀지? 응? 대답해봐! 누가 그런 거야? 내가 궁금해 하는데 왜 대답을 안 하지? 응?” 유망의 힘도 보통이 아닌데다 계속 옆구리와 배를 걷어차인 탓에 위는 숨이 막혀 대답을 하려고 해도 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당장이라도 숨이 끊어질 판이었다. 보다 못한 형천이 말없이 앞으로 한 발 나아가 위를 걷어차더니 저만치로 처박히게 했다. 그러자 유망은 형천에게 애교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 고마워, 고마워. 형천. 또 내 부하를 죽일 뻔했네. 그렇지? 잘했어, 잘했어. 염제 신농이 부하를 죽이면 되나? 미친 짓을 해서는 안 돼지. 그럼! 그런데 이놈은 뭐야? 오천 명이나 되는 부하를 다 죽이고 자기 혼자 살아왔잖아? 이놈을 어떻게 해야 하지? 그냥 둬야 해? 응?” 유망이 점점 목소리를 낮추자 형천은 바짝 긴장했다. 그동안 유망의 광태를 자주 보아온 형천이라 되레 목소리가 낮아지거나 웃을수록 위험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돌연 유망이 발작하듯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봐! 위라고 했냐? 나가! 빨리 나가! 내가 더 미치기 전에 어서 가! 죽기 싫으면 꺼지란 말야! 착하지, 응?” 위는 덜덜 떨며 터진 입술에서 흐르는 피를 미처 닦지도 못하고 구르다시피 막사 밖으로 빠져나갔다. 형천의 눈에 그때까지 억지로 참고 있던 눈물이 괴었다. “유망님 ......” 유망은 마구 손을 휘저으며 외쳤다. “알아, 알아, 내가 나빠. 내가 나빴어! 젠장. 이젠 좀 정신이 드는건가? 내가 정신 든 거야? 맞아, 형천? 응?” 형천은 주르륵 굵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이 형천, 목숨을 걸고 부탁드립니다. 제발 그 연기를 끊으소서. 더 이상 마시지 마소서!” 형천의 말이 끝나자마자 유망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마시지 말라고? 나더러 죽으라는 거야? 제기랄! 알아, 다 알아! 그거만 마시면 내가 미친놈이 되니까 그렇지? 하지만 내가 윌? 난 염제신농이야. 그걸 마셨다고 내가 못할 짓을 한 줄 알아? 응? 형천! 형천! 너도 날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 응?” 그러다가 유망은 쓰러진 여자들 시체 쪽으로 달려가 칼을 뽑아 들고는 시체를 마구 내려찍으며 외쳐댔다. “이 망할 년들이 너희 때문이야. 죽어! 또 죽어! 더 죽어! 염제 신농의 명령이다! 죽어!” 피와 살점이 튀어 사방은 금방 피범벅이 되어갔다. 급기야 칼이 부러졌는데도 유망은 부러진 칼로 계속 엉망이 된 시체를 찍어대었다. 형천은 더 참지 못하고 급히 유망을 뒤에서 끌어안으며 말렸다. “염제 신농이시여! 제발......그만 하소서!” 유망은 손에 들었던 피범벅이 된 부러진 칼을 떨구며 돌연 형천의 품에 아기처럼 파고들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형천...... 형천. 그래, 나는 염제 신농. 염제 신농. 헌데 또 잘못했나? 또 잘못했군. 그런데 말야, 그렇지 않아. 이 계집들은 죽일 년들이야. 나는...... 나는 연기를 마시지 않으려 했어. 그런데...... 이 계집들이 피웠어. 난 절대...... 절대 시키지 않았어. 하지만...... 하지만 냄새가 나니 참을 수 없었어. 난 염제 신농이야. 지나족의 지도자야! 그런데 이 계집들이 나를 미치게 했어. 죽어도 싸. 그렇지, 응? 그래서 죽였는데, 내가 잘못이야? 응? 형천, 내가 미친놈이라면 너도 죽였을 거야. 그러나 그러지 않았잖아. 잘못 없는 사람은 죽이지 않았잖아. 뭐가 옳지? 뭐가 틀린 거지? 내가 미쳤어? 미친 거야?” 형천은 눈물만 뚝뚝 흘릴 뿐, 차마 뭐라 말할 수 없었다. “염제 신농님은 영웅이십니다!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영웅이십니다! 연기를 끊으십시오. 그러면...... 그러기만 하면......” 유망은 형천의 품에서 울다가 갑자기 소리쳤다. “그건 헌원 놈이 가르쳐준 거야! 그래, 헌원 놈이 날 이렇게 만들었지. 날 궁금하게 만들어서, 연기를 피워보게 만들었어. 그런데...... 그런데...... 아직도 모르겠어. 일부러 그런 걸까? 그놈은 나에 대해 어찌 그리 잘 알았지? 한번 맛들이면 이렇게 계속 되리란 걸 어떻게 알았 을까? 그놈은...... 그놈도 해본 것일까? 그놈은 이겨내고 나는 못한 것일까?“ 형천이 힘주어 말했다 “염제 신농께서도 이겨내실 것입니다!” “그래, 이겨야지...... 이겨내야지...... 난 염제 신농, 무엇에도 지지 않아, 지지 않아! 이렇게 정신을 차리고 있는 걸. 형천을 믿고 있는 걸. 주신과 싸우는 한이 있어도, 결판을 내는 한이 있어도, 우리 지나족에게 넓은 땅을 주어야만 되니까...... 농사를 더 지을 수 있고, 더 많이 살아갈 수 있는 땅을......” 유망은 미친 듯 중얼거리다가 형천의 품에서 떨어져 나왔다. 그러더니 눈을 감고 이를 악물며 소리쳤다. “형천! 형천! 나를 묶어줘. 연기...... 연기가 또 마시고 싶어져. 어서...... 어서 나를 묶어! 입도 틀어막아! 어서!” “염제 신농님!” 형천이 왈칵 울음을 터뜨리며 외치자 유망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치우천이 살아왔댔지? 그놈은...... 그놈도 이겨냈어. 나도 질 순 없어. 그런 꼬맹이도 몸길이 막혀도 참고 버티고......사막에 버려져도 살아나는데........ 염제 신농! 염제 신농이......!” 유망이 이를 악물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서 묶어!” 형천은 힘 있게 고개를 끄덕이며 막사 가운데의 두꺼운 기둥에 유망의 몸을 밀어붙이고 굵은 가죽 끈으로 꽁꽁 묶기 시작했다. 그러는 중에도 유망은 계속 중얼댔다. “나는 염제 신농...... 염제 신농...... 그 꼬맹이보다 못한 게 뭐 있어? 사실 그놈을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에 들었어. 나는 염제 신농...... 죽은 사람을 살릴 순 없지만, 고칠 수 있으면 고치지. 그러나 놈을...... 난 고쳐주지 않았지 난 염제 신농인데...... 정말 후회돼. 그게 항상 마음에 걸렸어. 그래, 그놈은 안 죽길 잘했어. 마저 고쳐야지. 그 다음에 죽여야 해,하핫. 맞아!내 말이 틀려? 형천? 그런데 그놈 말야. 왜 그놈 생각이 자꾸 나는 거지? 왜 그런 어린 놈 하나가 이리도 마음에 걸리는 거지?” 빠르게 중얼거리다가 유망은 다시 눈을 번득이며 쉰 목소리로 외쳤다. “형천! 형천! 뭐 하는 짓이야? 네가 날 죽이려는 거야? 안 돼! 풀어! 연기! 연기! 어서 연기를.....!” 형천은 입술을 깨물며 유망의 말에도 아랑곳없이 유망의 몸을 묶었다. 유망이 발악하듯 외쳤다. “아무도 없느냐! 형천 이놈이! 이놈이......! 나를......” 형천은 재빨리 옷자락의 깨끗한 부분을 찢어내며 말했다. “입을 막겠습니다.” 곧이어 유망의 입에 둘둘 말린 천 조각이 밀어 넣어졌다. 그리고 형천은 유망을 향해 비장하게 말했다. “이겨내십시오, 염제 신농님 저도 이겨내겠습니다. 그놈들이 누구이기겠습니다.” 미친 듯 몸을 뒤틀며 신음하는 유망을 남겨두고, 형천은 무섭게 굳은 얼굴로 막사 밖으로 나가며 가장 믿는 두 명의 부하에게 유망을 절대 풀어주지 말고 돌보라고 일렀다. 그 다음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아무도 들어가서는 안 된다! 그리고 위를 불러라 이야기를 들어보아야겠다!” “형천과 축융은 어디쯤 있더이까?” 치우천이 알한에게 물었다. 알한은 지나족 떠돌이 같은 차림으로 온몸에 먼지를 뒤집어쓴 모습이었지만 눈빛은 여전히 빛났다. 알한은 지나족으로 위장하여 정찰을 나갔다가 며칠만에 돌아온 것이다. “형천은 유망과 함께 있고, 축융은 그쪽으로 가는 중이랍니다......” 그 곁에 서 있던 치베가 말했다. “하핫! 다섯 부대가 전멸했으니, 한데 뭉치는 수밖에 없지! 이제 얼마 남지도 않았을 거다!” 그 말에 알한이 웃으며 맞장구쳤다. “얼마 남지도 않았지요, 얼마 남지 않았어요. 기껏해야 오십 천(오만)정도 남았으니까요.” 그 말을 듣고 치베가 눈을 크게 떴다. “뭐? 오십 천이란 말야?” “그렇습니다. 우리가 여지껏 죽인 놈들을 다 합한 것의 두 배밖에 안 되죠.” 치베는 화난 듯, 발밑에 굴러다니던 돌멩이 하나를 힘껏 걷어찼다. “제기랄 뭐가 그리 많아? 지나족 놈들은 정말 많기도 하군, 그래!” 치우비가 걱정스러운 듯 입을 열었다. “오십 천 명이 하나로 뭉쳤다면, 문제가 크네. 여태까지는 오천 명 도를 상대했는데, 오십 천이면 너무 많아.” 곁에 있던 울라트도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훈련하고 있는 전사들을 더 데려와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들을 데려 온다면......” 그때까지 조용히 듣고 있던 치우천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그네들은 아직 힘을 더 키워야 해.” 그 말에 알한이 고개를 저었다 “벌써 두 해를 가르치지 않았나요? 물론 여기 데리고 온 전사들 보다는 못하겠지만...... 그들도 혼자서 지나 전사 두셋은 당해낼 수 있을 텐데요?” 이번엔 치우천이 고개를 저었다. “물론 그럴 테지요 그러나 더 가르친 다음에 내보내야 한 명이라도 덜 죽을 것이 아닌가요? 더구나 그들마저 다 끌고 오면 작은 주신 땅은 누가 지키지요?” 울라트가 머리카락을 한 번 획 휘젓다가 이내 추스른 후 말했다. “그럼 오백 명으로, 오십 천 명을 이겨본다는 건가요?” 치우천은 몸을 살짝 돌리며 다시 웃었다. “그거야 너무하지. 더구나 형천, 축융은 바보가 아냐.” “그럼요?” “왜 우리 오백 명만 생각하지? 지나족이 오십 천 명 몰려와 있는데도 나아가지 못한다는 것은, 그 앞에 오십 천 명을 막아보려는 무리가 있다는 것 아냐? 오십 천 명은 안 될지 몰라도, 좌우간 어느 정도 힘은 있겠지.” 그 말을 듣고 알한이 한마디 거들었다. “그 앞에는 미아우족과 마갸르족 전사들이 잔뜩 몰려 있다고 합니다. 여덟 천 명 정도 된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다들 살던 곳을 빼앗기고 싸움에 져서 밀려난 무리들이에요 죽기 살기로 버티는 것뿐이지만, 오래 버티기는 힘들 겁니다.” “미아우 족과 마갸르족은 지나족과 어느 정도 떨어져 있던가요?” “한 닷새 거리 정도요.” “알한님이 돌아오시는 동안 더 나아가지 않았을는지요?” 알한이 고개를 저었다. “지나족은 아직 움직이고 있지 않습니다.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습니다.” 치우천은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기다리는 겁니다.” “뭘요?” “마갸르, 미아우족이 모두 모이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들이 사방으로 흩어진 후에 말썽을 부리면 되레 시간이 걸리고 귀찮아지니까, 아예 다 모이기를 기다렸다가 한꺼번에 쳐부수자는 것이겠지요.” 치베가 툴툴거렸다. “그런 약해빠진 무리는 열천 명, 스무 천 명이 있어도 소용없다. 우리가 힘을 합해도 쉽지 않을 거야. 천 안다, 차라리 지나족이 홑어지기를 기다리자. 지나족도 우리 때문에 하나로 뭉쳐 나가기는 하지만, 우리가 숨어 있으면 다시 흩어져야 할 거다. 그때를 노리는 게 낫겠다.” 치베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치우천은 ‘음’ 하는 소리만 냈을 뿐,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았다. 그때 치우비가 슬쩍 물었다. “주신에서도 사울아비들이 와 있나요?” “한 천 명 와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알한이 말끝을 흐리자 치우비는 의아하여 알한을 재촉했다. “뭔데 그래요?” “잘 아시는 분이 그들의 대장이십니다.” “누가......?” 알한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치우우레님이 대장이라 들었습니다만......” 치우비가 퍼뜩 몸을 일으켰고, 치우천도 획 몸을 돌렸다. 치베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하하, 싸우지 않으면 안 되겠군. 좋다! 화살을 좀 많이 가지고 가면 그뿐이지! 오십 천 명이라고 별거냐?” 그러자 치우천은 손사래를 치며 조용히 말했다.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다, 치베. 머릿수는 무서운 거야. 더구나 상대는 형천과 축융, 유망이다. 이제까지 만났던 조무래기들과는 달라.” 치베가 웃으며 짐짓 점잖게 되받았다. “그래, 그래. 쉽지 않겠지, 천 안다. 언제는 쉽겠다고 말한 적 있었나? 그래도 다 이겼잖은가?” 치우천은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고는 이내 침착한 표정이 되어 말했다. “나는 이제 작은 주신의 부족장이다 아버님이 계시다고 해서, 그렇게 많은 적에게 무턱대고 달려들라고 명령할 수는 없다.” “그럼, 가지 않겠다는 건가? 그래서야 되겠는가?” 치베의 물음에 치우천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건 아니다 다만, 아버님 때문에 가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아예 이번 기회에 결판을 내는 것도 좋겠지.” 돌 같은 표정으로 서 있던 무라가 조용히 물었다. 무라도 이제는 어느 정도 주신 말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럼 오백 명으로 오십 천 명을 상대할 자신이 있나요?” “하핫, 무라님. 그건 말이 안 되죠 너무 많습니다.” “그럼 어쩌자는 겁니까? 결판을 낸다면서요?” 치우천은 묘한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결판을 내긴 내야죠. 좀 오래 걸리기는 하겠지만......” 그러면서 치우천은 저쪽에 세워놓은 물동이들 옆으로 걸어갔다 치우천이 빈 물동이 하나를 발로 툭 차자 그 물동이가 데굴데굴 저만치 굴러갔다. “이게 지금 유망의 군대다. 그렇게 생각하자. 저 물동이만큼 크지. 그리고 저렇게 나아가려고 한다.” 그다음치우천은 땅에서 작은 돌멩이 하나를 집어 들었다. 손가락마디 하나만한 작은 돌멩이였다. 치우천은 그것을 사람들에게 보이며 말했다. “이게 우리다. 이걸로 저 물동이를 어떻게 이겨내지?” 제일 먼저 알한이 외쳤다. “돌을 던져서 깨버리지요!” 그러나 치우천은 고개를 저었다. “이봐요, 알한님. 물동이가 같은 돌이라면 깰 수 없지요 더구나 안 깨지면? 그건 답이 못 됩니다.” 그러자 치우비가 나섰다. “앞을 막으면 될 것 같아. 걸려서 못 굴러갈 걸?” 그 말을 들은 치우천이 웃으며 그 돌멩이를 물동이 앞에 던지고 나서 물동이를 밀었다. 그러자 물동이는 데굴데굴 굴러가다가 돌멩이에 걸려 잠시 덜커덩하는 듯하더니 이내 돌멩이를 넘어갔다. 무게 때문에 돌멩이가 땅에 묻혀버린 것이다. 치우천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큰 돌멩이라면 그나마 되겠지. 그러나 우린 너무 작아서 저렇게 묻혀버려.” 사람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러자 치우천이 웃으며 물었다. “왜들 그래?” “그럼 무슨 방법이 있다는 거죠? 천 오라버니?” 울라트가 답답하다는 듯 묻자 치우천은 그 돌멩이를 빼내고 흙을 파기 시작했다. 한참을 파니 조그마한 흙 언덕이 만들어졌다. 그 다음 치우천이 물동이를 굴리자, 물동이는 흙 언덕을 넘어가지 못하고 덜컹 뒤로 되 굴러갔다. 치우천은 활짝 웃으며 물었다. “저렇게 해야 해. 툰툰의 부족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지?” “서둘러 달려가면 이틀이면 갈 수 있지.” 치우비가 고개를 끄덕이자 알한이 말했다. “그런데 툰툰의 부족은 다 합쳐봐야 몇 백 명도 안 되고, 전사는 오십 명도 안 뵉 텐데 그들을 모은다고 무슨 수가 나겠습니까?” 치우천은 웃으며 단호한 목소리로 마무리를 지었다. “일단 우리는 모두 그리로 간다.” “왔소! 왔소! 새까맣게 몰려왔소! 이를 어쩌오?” 마갸르족 친두 부족의 부족장 아사큔이 놀라서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그 주변에는 다른 다섯 명의 마갸르 부족장과 일곱 명의 미아우 부족장이 있었다. 그들은 형천과 축융이 이끄는 압도적인 수의 대군을 이겨내지 못하고 거의 전멸되다시피 하여 뿔뿔이 흩어져 간신히 도망쳐온 처지였다. 그러나 그 앞에 서 있는 치우우레는 눈을 부릅뜬 채, 꼿꼿이 서서 조금도 당황하는 기색 없이 물었다. “몇이나 되오?” “좌우간...... 좌우간 많소!” 아사큔이 침까지 튀며 말하자 치우우레는 씁쓸히 한번 웃더니 옆에 서 있던 치우벌에게 말했다. “자네가 나가서 제대로 보고 오게.” 치우벌은 고개를 꾸벅하고는 곧 성큼성큼 걸어 밖으로 나갔다. 치우우레의 옆에는 부소다솔도 있었는데, 그는 벌써부터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치우우레는 잠시 뭔가 생각하다가 부족장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다들 무서운 거요?” 부족장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치우우레는 한숨을 쉬며 생각했다. “이들 중 도움이 될 사람은 하나도 없구나! 쓸 만한 사람은 다 죽어버렸구나!' 물론 마갸르족이나 미아우족이라고 모두 허수아비는 아니었다. 몇몇 부족장은 대단히 용감하고 유능해서 형천이나 축융의 부대에도 치열하게 저항했다. 게다가 상당한 타격을 주며 부분적인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각 부족들은 서로 단결하지 못했다. 하나로 뭉치지 못해 수적으로 열세이다 보니 아무리 잘 싸워도 죽어나가는 전사들이 많았고 급기야는 포위되어 전멸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더욱 애석한 것은 용맹하고 뛰어난 부족장들일수록 자존심이 강하여, 단독 행동을 고집하다가 결국 괴멸되어 버렸다는 사실이다. ‘내가 조금만 더 빨리 왔더라도......’ 치우우레는 평생을 싸움터를 달리며 용맹을 떨치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마갸르나 미아우족 모두에게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고 치우우레의 말이라면 무슨 일이건 흔쾌히 들어줄 부족장들이 많았다. 치우우레는 될수록 많은 부족들이 함께 힘을 모아 싸워야 한다고 설득하려 했다. 허나 신시에서의 출발이 너무 늦고 말았다. 수십, 수백이나 되는 부족장들을 모으거나 만나볼 시간조차 없었다. 지나족의 군대가 팔만 명에 달한다고는 하지만, 이 넓은 지역의 마갸르족과 미아우족의 전사들이 모두 한데 모였다면 그 세 배는 넘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갸르나 미아우족은 모두 여러 개의 부족으로 자잘하게 나누어져 있었다. 더구나 같은 종족 내에서도 서로 원한이 쌓인 부족들이 하나둘이 아닌지라 조직적으로 뭉칠 수가 없었다. 그 와중에 마갸르나 미아우내부에서도 전사들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마을을 급습하여 약탈하는 일마저도 끊이지 않았다. 그 때문에 서로 우왕좌왕하다가 흩어져버린 부족이 많았다. 그들의 파멸을 마음속 릴이 아쉬워하며 치우우레는 입술을 깨물었다. ‘하다못해 두탄족과 파우족만 그렇게 되지 않았더라도.........’ 두탄족과 파우족은 서로 땅을 접한 미아우족과 마갸르족의 대부족들이었다. 그들은 공동의 적인 지나족이 다가옴에도 의견일치를 보이지 못하고 서로 싸웠다. 두탄족만 해도 칠천 명의 전사를 동원할 수 있는 대부족이었고, 파우족도 오천 명의 전사를 지닌 대부족이었다. 그리고 그들과 지나족 사이에 험한 언덕길과 우거진 숲, 늪지대가 있는 지형적인 이점을 활용하여 먼저 지나족을 쳤거나 미리부터 숨어서 항전했다면 지나족도 큰 타격을 입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두 부족은 지나족보다 서로를 더 증오하고 미워했기에 공동의 적을 앞에 두고도 쉽게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했다. 그리고 두 부족장 간에 싸움이 그치지 않았다. 후에 알게 된 것이지만, 그것은 바로 축융의 교묘한 이간술로 비롯된 것이었다. 두 부족은 지나족이 다가오는데도 전사를 보내지 못했다. 마을을 비워두었다가 습격당할 것이 두려웠기에 상호 견제만 하고 있었다. 축융은 불을 다루는 주술로도 무서운 사람이었지만 생각이 깊고, 한편으론 음흉하여 미리 첩자들을 보내 두 마을을 이간시켰던 것이다. 거기에 다시 사자를 보내어 지나족에게 항복하면 상대 부족의 땅까지 전부 주겠다는 제안을 했다. 파우족의 부족장은 대번에 그 술책에 넘어갔다. 결국 두탄족은 지나족의 습격을 염려한 나머지 전사들을 끌고 지나족과 싸우게 되었는데, 그 틈을 타 파우족이 두탄족을 습격했다. 파우족은 싸울 만한사람이 아무도 없는 두탄족의 마을을 점령하여 모든 것을 빼앗고 남아 있는 사람들을 죽이거나 노예로 삼았다. 갈 곳이 없어진 두탄족은 사기가 떨어져 형천의 부대에게 전멸당해 버렸다. 그런 다음 파우족은 희희낙락하며 축융의 말만 믿고서 스스로 무기를 버리고 지나족에게 항복했다. 파우족 부족장이 지나족에게 항복하자, 그들이 한 짓을 알고 있던 형천은 가차없이 말했다. 저 따위 배신자를 받아들여봐야 걱정거리만 떠안을 뿐이다. 그런 쓰레기 같은 부족은 없어지는 편이 낫다. 그리고 형천은 그들 부족의 남자들을 모조리 죽여 없애버리고 여자와 아이들은 모두 노예로 삼아버렸다. 잡혀왔던 두탄족 남자도 모두 죽음을 당하고 두탄족 여자와 아이들도 주인이 바뀌었다. 결국 지나족은 조금의 피해도 입지 않고 두 부족을 없애버린 셈이 되었다. 치우우레는 신시에서부터 두탄족과 파우족이 서로 힘을 합치게 해야 하며, 다른 부족들도 주신의 권위로 뭉치게 해야만이 지나족을 막아낼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었다. 허나 모른 척하거나 끝까지 빈정대기만 하는 』족들의 반대 때문에 뒤늦게서야 두 부족이 싸우는 곳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그가 왔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나 있었다. 두탄족과 파우족이 전멸하자, 다른 작은 부족들은 둑이 터지듯 도망치기에만 급급했다. 간혹 삼사백 명 정도의 작은 부족들이 지나족에 대항하기도 했으나 금방 짓밟혔다. 용감한 부족장들은 거의 다 싸우다 죽거나 자취를 감췄고, 이곳까지 몸을 피해온 부족장들은 뒤도 보지 않고 도망친 겁쟁이들뿐이었다. 더구나 그들은 그 와중에도 계속 아옹다옹하며 자기들끼리 싸움을 해댔다. 그동안 정황을 생각하던 치우우레의 미간의 골이 깊어졌다. ‘비겁한 부족장들과 서로 싸움질이나 해대는 맥 빠진 전사 팔천 명. 그리고 우리 사울아비 천 명. 도저히 힘들다. 이 일을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할까? 그때 부소다솔이 애써 침착한 척하며 치우우레에게 말을 건넸다. “아무래도 두탄족과 파우족이 망한 지금에는...... 일단 신시로 돌아가서 한웅님께 사울아비를 더 보내달라고 청을 드리는 것이 낫지 않겠나?” 치우우레는 씁쓸하게 웃으며 되받았다 “그게 통할 것 같은가? 지금 내가 거느린 사울아비 천 명을 데리고 오는 데도 반년이 걸렸네. 또 반년이 지나면, 마갸르나 미아우 부족은 하나도 남지 않을 거야.” 그러자 부소다솔은 온몸이 떨려오는 것을 간신히 추스르며 입을 다물었다. 그것을 보고 치우우레가 물었다. “부소다솔, 무섭나? 죽는 게 겁이 나는가?” 부소다솔이 대답하지 못하자 치우우레는 부족장들을 훑어보았다. 그들도 치우우레의 시선을 피할 뿐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자 치우우레는 서글픈 듯 웃으며 부족장들을 향해 말했다. “주신 사울아비 큰 스승 치우우레가 말하오. 나도 무섭소. 나도 죽는 것이 무섭소. 하지만 내가 죽는 것보다, 모든 마갸르나 미아우족이 다 없어지고, 지나족의 노예가 되는 것이 더 무섭소. 마갸르, 미아우는 모두 내 벗이었소 모두 주신의 벗이었소 그래서...... 그래서 나도 무섭지만...... 싸워야 하오.” 치우우레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치우우레와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치우우레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면 싸우지 않겠다는 말이오?” “그...... 그건 아니오. 하지만 적의 수가......” 아사큔이 변명이라도 하듯 중얼대는데 치우벌이 돌아왔다. 치우벌이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지나족의 한 부대가 나섰습니다. 수는 열다섯 천, 앞장선 사람은 형천입니다.” “형천?” “형천!” 순식간에 두려움이 서린 수군대는 소리가 부족장들 가운데서 퍼져나갔다. 그러나 치우우레는 침착하게 물었다. “나머지 서른다섯 천 명은?” “한나절 거리에서 움직이지 않습니다.” “우릴 끌어내려는 거다. 허나 함부로 움직이면 안 되지.” 치우우레는 잠시 생각하다가 단호하게 외쳤다. “내가 나간다. 치우벌! 부소다솔! 자네들은 부족장들과 함께 여기서 절대 움직이지 말고 있게나. 모든 힘을 다해 울타리를 완성시켜야 하네. 그게 우리 목숨 줄일세.” 치우우레는 일단 지나족의 진군을 저지하고자 나무를 베어 성벽과 같은 높은 울타리를 만들도록 시켰는데, 아직 완성되지 못했던 것이다. 치우벌이 물었다. “어느어느 부족을 데리고 가실 겁니까?” “사울아비 반만 데리고 가겠네.” “혼자는 안 됩니다! 형님!” 치우벌이 깜짝 놀라서 소리치자 치우우레는 껄껄 웃었다. “염려 말게. 형천 녀석에게 혼자 덤비기에는 내가 너무 늙었다는 것, 잘 안다네. 그런 짓은 안 할 걸세. 내, 좋은 수가 있다네.” 부소다솔도 비록 안색은 허옇게 되었지만 애써 입을 열었다. “나는......나는 별로 힘이 없지만......나도 데리고 가주게. 무섭긴 하지만...... 그래도......그......” 치우우레는 호탕하게 웃으며 부소다솔의 어깨를 탁 치면서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였다. “자네의 용기야말로 진짜 용기야. 허나 염려 말게나, 부소다솔.” 부소다솔이 서글픈 눈으로 올려다보자 치우우레는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러나 나는 자네의 진짜 힘이 필요하다네.” “무슨 힘 말인가?” “자네는 이제부터 지나족이 아니라, 먹을 것과 싸리야 한다네.” 부소다솔은 그 말에 눈을 크게 떴다. 허옇게 질린 안색은 그대로였으나, 그 눈은 미미하게나마 불타오르는 듯했다. 구천 명에 달하는 패잔병들에게 가장 큰 문제는 식량이라고 할 수 있었다. 셈이 밝은 부소다솔은 치우우레에게 식량의 부족을 자주 하소연했었다. 부소다솔은 자못 힘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싸워봄세.” 치우우레는 곧 껄껄 웃으며, 옆에 세워놓았던 커다란 도끼를 들어 어깨에 둘러메고 큰 걸음으로 막사를 나섰다. 막사를 나서자마자 치우우레는 곧 무섭게 얼굴을 굳히며 외쳤다. “사울아비들아! 왼손 편은 나를 따르고, 오른손 편은 여기를 지켜라! 모두 말에 타라!” 치우우레는 휘하의 사울아비를 여러 방법으로 다루었는데, 왼손 편, 오른손 편은 사울아비를 둘로 나눌 때 쓰는 방법이었다. 그 말을 듣고 왼편 다섯 명의 사울아비 스승이 소리치자, 다시 오십 명의 큰 사울아비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사울아비 큰 스승 밑에 열 명의 사울아비 스승이 있고, 다시 스승 밑에 열 명의 큰 사울아비가 있으며, 각 큰 사울아비가 열 명씩의 사울아비들을 거느리는 것이다. 주신에서는 오직 치우우레의 부대만이 이런 방법으로 움직였다. 오백 명의 사울아비가 일제히 움직이는 광경을 보면서 치우우레는 눈 꼬리가 시큰해졌다. 아들들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희네, 나래. 그 녀석들......’ 치우우레에게 이런 방법이 좋겠다고 이야기한 것은 바로 치우천이었다. 물론 그 말을 했을 때는 어렸고, 이름도 희네라 불리던 시절이었다. 치우우레도 처음에는, 그러지 않아도 잘 돌아가고 있는 일을 뭐 그리 복잡하게 할 필요가 있겠나 생각했으나, 실제로 치우천의 말대로 해보니 이전보다 더 빠르고 효율적으로 사울아비들을 지휘할 수 있었다. ‘그 녀석들...... 살았으면 왜 아니 올까? 다시 볼 수 있으려나......’ 치우우레는 안타까웠다. 여기서 형천과 부딪히면 당장은 어찌어찌 버텨본다고 해도 주신에서 다시 지원을 해주지 않는 한, 언젠가는 죽는 수밖에 없었다. 아들들이 살아 있다는 이야기는 양역에게 들었으나, 드러내놓고 내색할 수도 없는 처지여서 치우벌말고는 부소다솔도 모르고 있었다. 치우우레는 아들들이 보고 싶어졌다. “큰 스승께 아룁니다. 다 되었습니다.” 한 사울아비 스승의 말에 치우우레는 퍼뜩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치우우레는 다시 표정을 가다듬고 크게 외쳤다. “사울아비 큰 스승 치우우레가 말한다! 지금부터 우리는 형천 놈을 혼내주러 간다! 하지만 반드시 내 명령을 잘 들어야 하느니라! 알겠느냐?” 비록 수는 적지만 우렁찬 함성이 울려 퍼졌다. “저건 뭐냐?” 천천히 진군하던 지나족 부대의 선두에 섰던 형천이 옆에 있던 대(大)전사에게 물었다. 형천은 대인족이라 아홉 명의 대(大)전사를 거느리고 있었다. 그 아홉 대전사는 모두 하나같이 상당한 힘과 기술을 지닌 전사들이었다. 위도 그중 한 명이었다. 형천 옆에 있던 대전사는 눈이 아주 밝은 사람인지 즉시 대답했다. “말 탄 전사들입니다. 사울아비들 같습니다.” “몇이나 되나?” “대략...... 사백? 오백? 그 정도 됩니다.” 형천은 갑자기 고개를 갸웃하더니 오른손을 치켜들었다. 그러자 그 뒤를 따라 진군하던 부대가 멈추어 섰다. 지나족의 부대도 명령체계는 있었으나, 그 반응은 상당히 느려서 만 오천 명의 부대가 다 멈추어 서기까지는 한참이 걸렸다. 그때쯤 저만치에서 달려오던 기마부대는 형천의 눈에도 알아볼 수 있는 거리까지 접근했다. “치우우레!” 형천이 코웃음을 치며 말하자 옆에 있던 대전사가 물었다. “사울아비 큰 스승입니까?” 형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외쳤다. “방패!” 형천이 명령하자 방패를 들고 있던 전사들이 ‘와’ 하며 어지럽게 달려 나와 부대의 앞을 막았다. 그것을 보고 대전사가 물었다. “몇 명 안 되지 않습니까?” 형천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치우우레는 태산 회의 때 주신 한웅을 호위한 사람이다. 더구나 치우 집안사람이니 얕보아서는 안 된다.” 그때 치우우레의 부대가 화살이 닿지 않을만한 거리에 멈추어 서더니 일제히 서툰 지나 말로 소리쳤다. “형천! 멍청한 돼지야! 쓰레기 같은 놈아! 골이 텅텅 빈 개 같은 놈아! 우리와 싸워보자!” 그 말을 듣고 전사와 대전사들은 모두 앞으로 달려 나가려 했다. 그러나 형천이 외쳤다. “움직이지 마라!” “왜 그러십니까, 형천님?” “함정이다.” “예?” “우리를 화나게 하여 마구 전진시키려는 꾀다. 치우우레는 무조건 붙어서 싸우는 사람인데, 저렇게 나오는 것을 보니 죄를 쓰는 것이 분명하다. 저런 소리에 화낼 것 없다. 천천히 나가면 된다. 치우우레가 있는데, 사울아비의 수가 저렇게 조금일 리 없다. 섣불리 행동하지 말고 조심해라.” 형천이 부하들을 단속하는 사이, 치우우레의 부대는 앞으로 달려 나오면서 화살을 쏘아댔다. 주신의 활은 지나족의 활보다 훨씬 좋아서, 사거리를 비교할 수조차 없었다. 화살이 획획 날아들자 방패를 든 전사들은 열심히 화살을 막았다. 전사들이 화살을 마주 쏘려 했지만, 형천은 침착하게 말했다. “쏠 필요 없다. 그냥 막아내면 그만이다.” 치우우레의 사울아비들은 화살을 날린 뒤, 다시 형천을 욕하고, 다시 화살을 날리고 욕하기를 세 번 반복하더니 재빨리 뒤로 돌아 달려 가버렸다. 대전사들이 뒤를 쫓자고 말하자 형천은 고개를 저었다. “왜 뻔한 수에 넘어가느냐? 저 앞에 산골짜기가 있으니 서둘러 움직이면 좋지 않다. 우리는 아예 여기서 쉬고 내일 움직인다.” 대전사 한 명이 나섰다. “함정이 있으면 어떻습니까? 우리 머릿수가 훨씬 많지 않습니까? 그냥 들이치면 그만일 텐데요.” 형천은 웃으며 말했다. “우리가 머릿수가 많기 때문에 더 서두를 필요가 없지 않느냐? 우리는 나아가고 싶은 대로 나아가면 그만이다. 좌우간 끝에 가서 이기면 되는 것이다.” 치우우레는 한참 뒤로 돌아 달려가다가, 사울아비 한 명을 보내 형천의 부대를 살피게 했다. 형천의 부대가 더 이상 전진하지 않고 하룻밤 묵을 준비를 한다는 보고를 받자, 치우우레는 껄껄 웃었다. “내가 이제껏 한 번도 꾀를 쓴 일이 없었는데, 꾀도 한 번쯤은 쓸만한 것이군!” 치우우레는 사울아비들에게 외쳤다. “우리는 시간을 벌어야 한다. 지나 욕도 좀더 배워라. 아마 우리가 욕을 심하게 하면 할수록, 형천은 느리게 움직일 것이다. 울타리를 만들 시간을 벌어야 한다!” “예!!” 사울아비들은 모두 웃으며 크게 대답했다. 치우우레는 그런 식으로 이틀을 벌었다. 형천의 부대는 애초에 치우우레의 본진과 한나절 거리밖에는 떨어져 있지 않았으니 그 부대의 저지 작전은 성공적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형천의 부대는 조금씩 조금씩 진군하여 갔다. 그 사이에 울타리는 비록 엉성하기는 해도 대강 완성이 되어갔다. 이틀이 지나고 사흘째가 되자, 치우우레가 다시 욕을 하러 달려 나가자 지나족이 ‘우’ 하며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사울아비 한 명이 치우우레에게 말했다. “오늘은 따라올 것 같습니다!” 치우우레는 한숨을 쉬었다. “똑같은 수를 너무 많이 써먹었구나. 좌우간 따라온다면 별수 없다. 싸워야지. 너는 가서 치우벌과 부족장들에게 울타리를 지키라고 말해라. 그리고 사울아비들은 화살을 모두 꺼내 준비하라!” 치우우레의 사울아비들은 화살을 열두 대씩 가지고 있었다. 치우우레의 지휘 하에, 사울아비들은 일제히 말을 달려가서 화살을 쏘고 물러서고, 다시 지나족이 접근할 만하면 다시 화살을 쏘는 식으로 지나족들을 저지하려 했다. 그 방법으로 반나절 정도는 벌었지만, 어느새 화살은 떨어졌고 형천의 군대는 계속 약간씩의 피해를 내면서도 꾸준히 진군해왔다. 치우우레는 탄식했다. “형천도 대단하군! 절대 실수하지 않으려고 천천히 오기만 하는구나! 사실 저게 제일 무서운 것이다.” 결국 치우우레는 부하들을 몰고 나무 울타리로 둘러친 본진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럼에도 형천은 급히 뒤를 쫓지 않았다 천천히 전진할 뿐이었다. 절대 서두르지 않는 지나족의 진군은 치우우레 측 부족장들에게 공포심을 안겨주었다. 그것을 보고 치우벌이 외쳤다. “부족장들이여! 저들은 우리보다 두 배가 많다지만, 우리는 울타리가 있소! 여기 숨어 싸울 수 있으니 우리를 이기지 못할 것이오!” 치우벌이 외치는 사이, 형천의 부대는 주신의 화살이 닿지 않을 거리에 딱 멈추어 섰다. 그러더니 형천이 혼자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끽구만큼이나 거대한 거인, 형천은 호랑이 가죽옷을 입고 호랑이 가죽 발싸개를 했으며 목에도 호랑이 이빨이 주렁주렁 걸린 목걸이를 걸고 있었다. 그의 오른쪽 어깨에는 그야말로 끔찍할 정도로 큰 구리도끼가 둘러메어져 있었으며, 왼손에는 거대한 나무 방패가 들려 있었다. 세상 제일의 역사(力士)라는 형천이 걸어 나오자, 그 기세에 사람들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형천이 앞으로 나서더니, 차분하고도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나는 지나, 대인족의 형천이다! 염제 신농의 명을 받고 이 땅을 얻으러 왔다. 염제 신농께 엎드릴 것이냐? 우리 앞을 막다가 모조리 죽을 것이냐?” 형천이 외치자 뒤에 빽빽하게 늘어선 만 오천의 지나 전사들은 모두 입을 맞추어 “염제 신농! 염제 신농!”을 외쳐댔다. 그 요란한 소리에 이편의 기세가 꺾이자 치우우레가 급히 외쳤다. “나는 주신 사울아비 큰 스승 치우우레다! 그리고 여기는 마갸르와 미아우의 수많은 부족장이 있다! 우리는 여기서 모두 죽을지언정 지나족 염제 신농 따위에게는 항복할 수 없다!” 치우우레가 우렁차게 외치자, 부족장들은 모두 눈을 감고 남몰래 한숨을 쉬었다. 그러자 형천은 차분하게 외쳤다. “그런가? 나는 이제껏 항복한 부족은 그 누구도 괴롭혀 본 적이 없다. 지나족으로 받아들여 살던 그대로 살게 해주고, 손톱만큼도 건드리지 않는다. 그러나 감히 싸우려 드는 놈들은 한 놈도, 개 한 마리 닭 한 마리 남겨둔 적이 없다!” 그러자 치우벌이 참지 못하고 흥분하여 버럭 소리쳤다. “너희야말로 개 한 마리, 닭 한 마리 안 남을 줄 알아라!” “잘 알았다.” 형천이 껄껄 웃으며 몸을 돌려 돌아섰다. 그때 마갸르족의 몇몇 활 잘 쏘는 전사들이 형천에게 활을 쏘았다. 그러나 형천은 조금도 걸음을 늦추지 않고 그대로 걸어가다가, 뒤에 눈이 달린 것처럼 화살이 와 닿을 때쯤 번개같이 왼손의 방패로 등 뒤를 덮었다. 날아온 화살들은 헛되이 방패에 투두둑 박혀버렸다. 그것을 본 지나족은 일제히 환호를 하며 사울아비들과 마갸르족, 미아우족을 조롱해댔다. 그때 갑자기 마갸르족 사이에서 두 사람이 울타리를 훌쩍 뛰어넘더니 제비처럼 몸을 빙빙 돌려 땅에 사뿐히 내려섰다. 얼핏 보아 몸집이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대단한 몸놀림이었다. 두 사람의 손에는 활과 화살 통이 들려 있었다. 두 사람은 땅에 내려서자마자 먼지까지 일으키며 동시에 앞으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는데, 달리는 속도가 말만큼이나 빨라서 보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사람이 저렇게 빠를 수가 있는가?’ 그때 마갸르족 친두 부족장인 아사큔이 외쳤다. “아니! 저 녀석들이......! 전사도 아닌 어린것들이......!” 그 말을 들은 치우벌이 물었다. “전사도 아니라구요.” “그......그렇소. 저놈들은 내 심부름꾼에 불과한 놈들이오. 저런 하찮은 것들이......!” 그 순간, 달려가던 두 사람은 재빨리 형천의 좌우로 갈라져서 들고 있던 짧은 활을 획획 동시에 내쏘았다. 형천은 ‘흥’ 하고 코웃음을 치더니 화살이 날아오자 번개처럼 방패 끝과 도끼 끝으로 화살을 살짝 튕겨냈다. 그러자 두 개의 화살이 약간 방향이 바뀌더니 마주보고 화살을 쏘았던 두 사람의 얼굴을 노리고 날아가는 것 아닌가? 지나 전사들은 그 묘기에 놀라 '와!' 하며 소리를 지르려고 했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은 자기 쪽으로 되날아오는 화살은 신경도 쓰지 않고 다시 형천에게 화살을 쏘았다. 그때쯤 화살은 막 두 사람의 얼굴에 박힐 지경이었는데 다음 순간, 두 사람은 픽 소리를 내면서 화살을 이빨로 물어버렸다. 그리고 그 화살을 메워서 형천에게 다시 쏘아내는 것 아닌가? 형천은 양쪽에서 각각 두 개씩, 도합 네 개의 화살이 날아오자 재미있다는 듯 껄껄 웃으며 도리어 도끼와 방패를 땅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양손을 펴서 날아오는 화살을 타탁, 잡아챘다. 곧이어 눈부신 동작으로 그 두 개의 화살을 던지더니 뒤이어 날아오는 두 개의 화살을 맞혀서 땅에 떨어뜨렸다. 기가 막힌 형천의 실력에 다시 지나족이 환호하려는데, 두 사람은 이번에는 형천 쪽으로 미친 듯 달려들기 시작했다. 형천은 코웃음을 치며 무기를 집을 생각도 않고 두 주먹을 동시에 쥐어 보였다. 우두둑하고 마디 꺾이는 소리가 났다. 그런데 달려들던 두 사람은 형천의 손이 닿을 만한 위치에 오자 재빨리 한쪽 발을 뻗어 멈추어 서며 흙먼지를 형천에게 튀어 오르게 하고는 뒤로 달아났다. 하도 행동이 빨라서 형천도 잡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두 사람이기 때문에 한 명을 잡으려 하면 다른 한 명이 번갈아서 흙먼지를 튀어오르게 하는 판이라 형천은 한 명도 잡을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형천의 주위는 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올라 눈을 뜰 수 없을지 경이 되었다 그러다가 형천이 견디지 못한 듯, 눈에 티가 들어갔는지 얼굴을 손으로 감싸자, 두 사람은 다시 달려들며 일제히 화살을 쏘아댔다. 한두 개를 쏜 것도 아니고, 몹시도 빠른 손놀림으로 삽시간에 열 개 이상의 화살을 마구 퍼붓는 것 같았다. 그러자 지나족 측에서는 ‘저, 어’하며 걱정하는 소리가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이윽고 자욱한 먼지 속에서 형천이 털썩 땅에 무릎을 꿇자 놀라움과 흥분의 함성이 양편에서 일어났다. 하도 놀라운 일이라 지나족도, 주신 측도 움직이는 사람이 없었다. 천하제일 역사인 형천이 저렇게 쓰러질 줄은 아무도 몰랐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그제야 가쁜 숨을 몰아쉬며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리고 자욱한 먼지를 휘저으며 조심스럽게 땅에 주저앉은 형천에게 다가가는데, 갑자기 형천의 커다란 웃음소리가 들리면서 형천이 허리를 활짝 폈다. 그러면서 형천이 양손을 들어 보였는데, 그 양손에는 각각 열 개 이상의 화살이 쥐어져 있었다. 형천은 그 뿌연 먼지 속에서 눈으로 보지 않고도 날아오는 스무 개의 화살을 손으로 다 잡아낸 것이다. 두 사람이 깜짝 놀라 주춤하는 순간, 형천은 떠나갈 듯 소리를 지르며 있는 힘껏 땅에 발을 굴렀다. 그러자 둔중한 쿵쿵 소리와 함께 땅이 움푹 파이면서 주변의 돌이며 나무 같은 것들이 일제히 튀어 올랐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그 울림에 그만 넘어졌을 것이지만, 두 사람은 기가 막힌 속도로 위로 펄쩍 뛰어올라서, 그 울림을 피해 뒤로 내려앉았다. 그러더니 그중 한 사람이 마갸르 말로 외쳤다. “분하구나! 형천! 다음번에는 꼭 죽이겠다!” 그 사람의 기세는 우렁찼지만 목소리는 작고 가냘파 사람들은 그가 나이 많은 전사가 아니라 앳된 소년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때서야 알 수 있었다. 그러자 형천은 하늘을 보고 껄껄 웃으며 물었다. “괜찮은 놈들이군! 허나 아직 멀었다. 네놈들 이름이 뭐냐?” “나는 울쿠타다!” “나는 야쿠타다!” 그들은 바로 친두 부족장의 심부름꾼인 울쿠타 야쿠타 형제였다. 어린아이였던 그들도 몇 년 사이에, 아직 솜털이 보송보송하기는 했어도 키가 어른 못지않게 자라 있었던 것이다 두 소년이 큰 소리로 대답하자 형천은 다시 껄껄껄 호탕하게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세워 내밀어 보였다. “뭐 좋다! 우린 싸우고 있는 사이지만, 너희는 마음에 든다! 내, 오늘은 너희를 보아 공격하지 않겠다! 우리 다음번에는 더 멋지게 싸워보자, 더 재미있는 기술을 보여 달라!” 형천이 계속 호탕하게 웃으며 도끼와 방패를 집어 뒤로 돌아서자, 울쿠타와 야쿠타는 다시 번개같이 몸을 날려 자신 쪽의 울타리로 돌아왔다. 지나족이나 주신, 마갸르, 미아우족들은 모두 멋진 대결에 박수를 보내며 환호했다. 아사큔은 심부름꾼이 나선 것이 부끄러웠으나, 그렇다고 하루의 공격을 미루게 만든 두 사람을 책망할 수도 없어서 왔다갔다하기만 했다. 치우우레는 아직 앳되지만 당당한 두 소년이 마음에 들어서 그들을 불렀다. “이리 와보아라. 장하구나, 너희들.” 그러자 울쿠타와 야쿠타는 흥분으로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일제히 치우우레의 앞에 무릎을 꿇더니 약간 서툰 주신 말로 외쳤다. “아버님 같으신 치우우레님을 뵙게 되어 너무나 기쁩니다!” “아버님? 내가?” 치우우레가 의아하여 묻자 울쿠타 야쿠타는 동시에 대답했다. “희네 형님, 나래 형님의 아버님 아니십니까? 두 형님은 저희 형제가 가장 존경하는 분들입니다!” 울쿠타 야쿠타는 심부름꾼인 탓에 태산 회의 이후 치우 형제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의 이름이 치우천, 치우비로 바뀐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치우우레는 오랜만에 두 아들의 어렸을 적 이름을 듣자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치우벌은 그것을 보고 혀를 찼다. “형님, 또 시작이시네.” “이 녀석들아, 너희들이 내 아들들을 아느냐,1 형님이라고? 내 아들들과 친했느냐?” “태산회의 때 만났습니다. 희네 형, 나래 형은 어리고 심부름꾼인 저희에게 너무도 잘해주었습니다. 정말 좋은 형들이었습니다.” “주신 말을 잘하는구나.” “심부름꾼이라서 여러 부족 말을 할 줄 압니다.” “그렇게 활 쏘는 법은 누구에게 배웠느냐?” “그냥......우리 둘이 같이 생각해내고, 같이 연습했습니다. 정말 오래 생각한 건데......우린 누구도 피하지 못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형천은 정말 무섭네요.” 순간 치우우레의 눈에는 마갸르족인 울쿠타 야쿠타가 자기 아들들처럼 보이는 듯했다. 치우우레는 두 사람을 얼싸안고 눈물까지는 흘리지 않았으나 두 사람의 얼굴에 마구 텁석부리 뺨을 비벼댔다. 그것을 보고 아사큔은 쩔쩔매며 중얼거렸다. “아이구! 저 심부름꾼 놈들이......! 사울아비 큰 스승님에게...... 런! 죽고 싶으냐? 응?” 그때 치우우레가 아사큔을 쳐다보며 물었다. “아사큔 부족장께 나 치우우레가 말하오. 이 아이들이 정녕 심부름꾼이오?” “아......예......” “그럼 종으로 부리셨소?” “예. 저놈들은 그냥 어릴 때부터 밥이나 주고, 발이 좀 빨라서 심부름이나 시키던......” “이 아이들이 어떻게 심부름꾼이오? 당신 눈이 있소, 없소? 형천과도 당당히 맞선 아이들을 심부름꾼으로 부리다니!” 치우우레가 언제 감격하고 흐뭇해했었냐는 듯, 갑자기 목소리를 바꿔 인정사정없이 몰아붙이자 아사큔 부족장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아니...... 그게 아니고, 난 저놈들이 재주가 있는지 전혀 몰라서 이 아이들을 내게 주시오! 몸값은 충분히 드리리다!” “예? 아니...... 그건...... 그놈들을 왜......?” “내 사울아비로 만들 거요 왜, 불만이오?” 울쿠타 야쿠타의 얼굴은 안 그래도 형천과의 겨룸으로 흥분하여 빨개졌는데 그 말에 더더욱 사과처럼 새빨갛게 상기되었다. 아사큔의 얼굴도 붉어졌다. 치우우레의 행동은 아무리 사울아비 큰 스승이라 해도 부족장인 자신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눈을 부릅뜬 텁석부리 치우우레의 무시무시한 얼굴이 아무래도 심상치 않았다. 형천 못지않게 겁나 보였다. 하지만 아사큔도 부족장으로서의 자존심은 있었다. 그러다가 치우우레 발밑의 커다란 구리도끼가 눈에 들어오자 아사큔은 마음을 정했다. 아사꾼이 결국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이자 두 사람은 급히 치우우레에게 절을 하며 외쳤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사큔은 이럴 수도, 저릴 수도 없어서 쩔쩔맸고, 치우벌도 좀 의아하여 말했다. “형님, 이애들은 마갸르족인데...... 사울아비로 만들기엔......” 순간 치우벌은 치우우레가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자신을 쏘아보는 것을 깨닫고 황급히 능청스레 주워섬겼다. “시간이 좀 걸릴 것 같군요. 허허, 허허허!” 치우우레는 엄한 목소리로 울쿠타와 야쿠타를 보고 말했다. “너희는 이제부터 어린 사울아비다. 열심히 안 하면 사울아비는 못 될 거다. 조금도 봐주지 않는다. 알았느냐?” 울쿠타 야쿠타가 동시에 대답하자 치우우레는 치우벌과 다른 사울아비들을 죽 둘러보았다. “이 애들은 이제 내 아들들이나 마찬가지다. 알겠는가?” 사울아비들은 모두 어이가 없어 껄껄 웃었지만, 치우우레의 성품을 아는지라 모두 손뼉을 쳐주었다. 아사큔 부족장만이 불만스럽게 뭐라고 중얼거릴 뿐이었다. 아사큔은 울쿠타 야쿠타 형제를 마구 부리면서도 항상 구박만 해왔기 때문에, 야쿠타는 슬쩍 아사큔 부족장에게 혀를 내밀어 보이기까지 했다. 아사큔은 화가 치밀어 올랐으나, 감히 뭐라 할 수 없어서 발만 몇 번 구르고는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그 다음날부터 형천은 공격을 시작했다. 치우우레는 사울아비들로 하여금 시켜 각 부족의 전사들을 나름대로 통솔하게 하여 저항을 했다. 공격 방법은 단순하면서도 집요했다. 형천은 만 오천 명의 군대를 셋으로 나누어 오천 명 단위로 만들었다. 한 무리의 부대만 공격을 하게 하다가 그들이 지칠 만하면 물러서서 휴식을 취하게 하고 다른 부대를 내보냈다. 그런 식으로 번갈아 공격하게 되자 지나 전사들은 휴식을 충분히 취하게 되어 피로가 누적되지 않았으나, 수비하는 군대는 휴식을 제대로 취할 수 없었다. 형천의 부대는 많은 희생을 치를지도 모를 울타리 공격에 그렇게까지 적극적이지는 않았다. 허나 그렇다고 그냥 지켜볼 수도 없는 노릇이라 치우우레 측은 격렬하게 맞서야 했다. 울타리를 노리는 형천의 부대를 상대로 하루 종일 화살을 쏘아대야 하니, 화살 소비가 극심하여 사나흘만 지나면 다 떨어질 것 같았다. 그렇다고 화살을 쏘지 않을 수도 없었다. 치우우레도 부대를 둘로 나누어 번갈아 휴식을 취하게 하려 했지만, 단순한 나무 울타리와 가죽막사, 움집이라 아무리 잠을 청하려 해도 외부의 소리가 그대로 전달되었다. 게다가 적의 공격이 끊이지 않고 이루어지니 점점 피곤이 누적되어 가고 있었다. 보통 낮에는 싸우고 밤에는 자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형천의 공격은 낮밤의 구별조차 없었다. 치우우레는 고민하다가 모두 귀를 막고 잠을 자라고 했다. 그래도 사람들은 불안감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오히려 귀를 막으니 마음속의 불안감은 더욱 커져 갔다. 귀까지 막고 자다가 울타리가 무너지고 지나족이 몰려오면 눈도 떠보지 못하고 죽는다는 생각에 전사들은 휴식을 취하지 않고 불안하게 떠돌았다. 그러다가 막상 싸움에 투입되면 기력이 없어서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죽는 경우가 늘어만 갔다. 경험 많고 훈련이 잘 된 사울아비들은 대부분 시간이 되면 아무 데서나 자곤 했으나, 대부분의 전사들은 그러지 못했다. 수적으로 보아서는 이쪽이 구천 명이고, 지나족은 만 오천. 그러나 이쪽은 지형이 이롭고 나무 울타리를 끼고 있어서 꼭 불리하다고만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쪽은 통솔조차 일사불란하지 못한 오합지졸, 저쪽은 하나로 뭉쳐져 잘 단련된 전사들이다. 여기에 사울아비들의 힘과 치우우레의 지휘력이 더해져서 간신히 균형을 지키고 있는데, 전사들이 이렇듯 급격하게 기력이 떨어지면 조만간 그 균형은 무너질 것이 분명했다. 형천의 공격이 시작된 지 사흘째 되던 날, 치우우레는 치우벌 및 부족장들과 함께 회의를 열었다. “주신 사울아비 큰 스승 치우우레가 말하오. 형천은 지금 우리 편을 지치게 만들고 있소. 그랬다가 우리의 힘이 빠지면 한꺼번에 치고 들어올 생각인 거요.”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해 눈이 붉게 충혈 된 부족장들은 걱정했다. “이대로라면 싸우다가 잠들어서 모두 죽어버릴지도 모르오.” “그러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번갈아 가며 쉬어야 하오 잠을 자야하는데......” “그게 말같이 쉽겠습니까? 주신 사울아비들이야 그럴 수 있겠지만......우리 부족 전사들은 그런 경험이 별로 없습니다.” 치우우레는 텁석부리 수염을 쓸어내리며 신음소리를 냈다. 치우우레도 노련한 사람이라, 형천의 의도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비록 졸음을 이기기는 대단히 어렵지만, 사람은 단련되다 보면 스스로 틈틈이 자는 법을 터득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것이 일조일석에 되는 것은 아니다. “형천이 저런 방법을 쓰는 것을 보니, 오늘이나 내일 정도면 밀고 들어올 모양이구나. 허나 어떻게 할까? 막을 방법이 없구나. 화살이 거의 다 떨어져 가는데......” 그때 한 사울아비가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 달려와 외쳤다. “큰 스승님! 큰 스승님!” 치우벌이 대신 나무랐다. “왜 그리 호들갑이냐? 부족장들과 지금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모르느냐?” “압니다. 하오나 큰 스승님! 급히 나와 보십시오!” “형천이 밀고 들어오느냐?” 치우우레는 눈을 부릅뜨며 도끼를 치켜들고 일어섰다. 그러자 사울아비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누가 왔습니다! 아주 반가운 사람일 것입니다. 나와 보십시오!” “누가 왔다고?” 그때 부소다솔이 흥분한 얼굴로 달려 들어오며 외쳤다 “와...... 왔네!” “도대체 뭐가 왔기에 이 호들갑인가?” 치우우레가 밖으로 나가자 거기에는 처음 보는 사람이 히죽히죽 웃으며 서 있었다. 뚱뚱보에 능글맞은 서쪽 사람의 얼굴. 바로 시기르타였다. 시기그타는 치우우레를 보자마자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그 이름도 널리 알려진, 주신의 사울아비 큰 스승 치우우레님이십니까요? 저는 시기르타라고 합니다요! 서쪽의 장사꾼입죠!” 치우우레는 시기르타보다도, 시기르타의 뒤에 주욱 늘어선 소 떼와 소 떼의 등에 실려 있는 수많은 꾸러미들을 보고 더 놀랐다. “그렇소, 내가 치우우레요 그런데......” “헤헤, 싸우시느라 고생이 많습니다 그려. 자, 저걸 어서 실어 나르시지요.” “저게 대체 다 뭐요?” 시기르타는 축 처진 배를 출렁거리며 다시 체신없이 웃어댔다. “뭐긴 뭡니까? 소하고, 곡식, 화살, 무기들입니다요!” “저걸 가지고 뭐 하라는 거요?” “뭘 하다닙쇼? 소는 알아서 잡아드시고 또 가죽으로 쓰시고, 화살은 쏘시면 되는 것입죠 곡식이나 무기도 그렇구요.” 치우우레는 잠시 생각하다가 정중하게 표정을 바꾸었다. “사울아비 큰 스승 치우우레가 말하오. 우리는 물론 저것들이 아주 필요합니다. 하지만 무조건 내민다고 덥석 받지는 않습니다.” 시기르타는 ‘헤헤헤’ 하며 크게 웃었다. “뭐가 덥석 받는 것입니까요? 저는 이미 값을 다 받았습니다요! 이리로 날라 온 것으로 제 일은 끝났다굽쇼.” 부소다솔이 치우우레의 곁에서 속삭였다. “소가 삼백 마리나 되고, 얼핏 보기에도 화살과 무기가 아주 많구먼! 저것이라면 한 달은 버틸 수 있네!” 치우우레는 의아하여 물었다. “난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는구려. 누가 이것들을 보냈단 말이오? 주신 신시에서 보내셨소?” 시기르타가 낄낄 웃으며 대답했다. “반만 맞고, 반은 틀렸습니다 그려! 헤헤. 주신은 주신인데, 신시가 아니라 작은 주신에서 온 것들입니다요!” “작은 주신......?” 시기르타는 잠시 주변을 살펴 사람들이 자신을 주목하지 않는 틈을 타 재빨리 엄숙한 표정으로 치우우레에게 속삭였다. “아드님들이 보내신 것입니다. 이 시기르타, 인사드립니다.” “아......들?” “그렇습니다. 치우천 치우비 형제 말입니다. 그분들은 제 가장 큰 고객이고, 저도 그들에게 제 자신을 걸었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요.” 시기르타는 재빨리 원래의 낄낄거리는 태도로 돌아가 다시 몇 마디를 중얼거렸으나, 치우우레는 이미 치우천, 치우비의 이름을 듣는 순간, 눈앞이 어찔하며 눈물부터 났다. “그...... 그 녀석들이......?” 치우우레는 그 다음부터 귀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면서 속으로 부르짖을 뿐이었다. ‘안파견 한님! 감사하오이다! 하늘이시여! 감사하오이다!’ 그때 다른 사울아비가 달려오며 외쳤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왔습니다! 여자 두 사람하고 늙은이가......도...... 도깨비들을 데리고......” “여자? 아니, 그리고 도깨비가 싸움터에는 왜......?” 치우벌이 채 말을 끝내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낄낄거리는 흉악한 웃음소리가 들리며 시커먼 것이 허공을 획 날아왔다 치우벌과 다른 사람들이 깜짝 놀라 물러서며 경계하려는 순간, 그 시커먼 그림자가 땅에 사뿐히 내려서더니 다시 흉악한 목소리로 낄낄 웃으며 입을 열었다. “도깨비가 싸움터에 오면 안 될 이유가 어디 있소? 히히히......” 바로 비울걸이었다. 치우벌과 사울아비들은 비울걸의 흉악한 모습에 놀라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다만 치우우레는 아직도 중얼거리며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비울걸은 치우우레를 보고 웃었다. “허우대가 멀쩡한 사람이 눈물도 많으시구먼. 혹 치우우레님 아니시우?” 치우우레가 간신히 정신을 되찾고, 치우벌이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일인지 몰라 당황해하는데, 이번에는 흰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키가 큰 여인과 긴 검은 머리를 늘어뜨린 날씬한 소녀가 다가왔다. 그런데 그들의 뒤에는 머리색이 노랗고 혹은 붉거나, 피부색이 거무튀튀한 기이한 모습의 도깨비들이 수십 명이나 따라오고 있었다. 경계심을 잔뜩 돋운 사울아비들과 각 부족의 전사들이 무기를 든 채 그들의 주위를 빽빽이 에워싸고 있었지만, 도깨비들이나 두 명의 여자는 그런 것에는 신경도 쓰지 않는 듯했다. 그들은 물론 무라와 울라트였으며, 도깨비들 중에는 리미와 마냥이 끼어 있었다. 치우우레는 도깨비들이 우르르 몰려오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으나, 그중 무라를 알아보고는 인사를 했다. “카린의 무라마이 아니시오?” 무라는 예전 그대로 딱딱한 어조로 감정 없이 대답했다. “이제는 카린의 무라마이가 아니라, 작은 주신의 무라입니다.” 그때 울라트가 명랑하고도 애교 있게 치우우레를 보고 생글 웃으며 외쳤다. “아버님! 아버님! 반갑습니다! 인사드릴게요!” 부소다솔이 울라트를 쳐다보고 멍하니 중얼거렸다. “자네, 언제 저런 딸을 낳았나?” “나도 모르겠는데......?” 치우우레가 마치 뭔가에 홀린 듯 중얼거리자 울라트는 재빨리 재잘거렸다. “천 오라버니와 비 오라버니의 아버님이시니, 저에게도 아버님이시죠. 인사드립니다. 타타르 앗수라트족 키타야 부족장의 딸, 울라트입니다. 또 작은 주신의 치우천 부족장님의 여동생이기도 하구요.” 울라트가 단숨에 설명을 끝내고 곱게 절을 올리자, 치우우레는 얼떨떨하면서 그 절을 받으며 물었다. “작은 주신, 작은 주신하는데 희네 녀석이 부족을 세웠소?” “아이 참, 아버님도, 그리 딱딱하게 말씀하시지 마세요. 딸한테 말을 높이시면 어쩌시나요.” 울라트가 자못 간드러지게 말하자 치우우레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때 비울걸이 나서며 말했다. “나는 작은 주신의 도깨비 왕, 비울걸이라오 천 녀석을 나는 아들처럼 생각하고 있으니, 당신과는 형 아우나 하면 맞겠구려. 그래도 천아들이 부족장이니, 내 더 쪼그라들긴 했지만 당신을 형님처럼 모시리다. 형님, 반갑소!” 비울걸이 아주 친한 척 능청스레 말을 늘어놓았으나, 치우우레는 돌같이 서 있을 뿐이었다. 곧이어 붉은 머리 도깨비와 온몸이 새까만 도깨비가 앞으로 나오더니 웃으면서 치우우레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도깨비 리미가 주인님의 아버님께 인사드립니다.” “도깨비 마냥이 주인님의 아버님께 인사드립니다.” 조금은 부자연스럽지만, 도깨비들이 주실 말로 유창하게 인사를 하자 주위 사람들은 모두 놀랐다. 치우우레는 잠시 눈을 뚝 감고 머리를 몇 번 흔들다가 눈을 다시 뜨며 중얼거렸다. “이것이 꿈인가?” “꿈이라니요! 그러면 섭섭하지요!” 울라트가 애교스럽게 눈을 흘기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때 울타리 쪽에서 사울아비 한 명이 달려오며 외쳤다. “또 한 부대가 밀려옵니다!” 그 말을 듣고 치우우레는 급히 말했다. “무슨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지만, 나중에 이야기합시다. 지금은 그럴 때가......” 그러자 울라트가 샐쭉거리며 되받았다. “지금 이야기 안 하면 언제 하나요, 아버님!” 딸을 길러본 적이 없는 치우우레는 울라트의 애교에 어쩌지 못하여 얼굴까지 붉어져서 쩔쩔맸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할아버지! 뭐 해요! 어떻게 힘 좀 써 보라구요!” “허, 날이 갈수록 이 늙은이만 부려먹는구나. 제기랄, 자식만 소용없는 게 아니라 의붓딸도 전혀 쓸모없구나. 할아버지라고 좀 하지 말랬지? 너는 내 의붓딸인데, 딸이 애비보고 할아버지라고 하면 어떻게 해? 더구나 이 늙고 힘없는 놈한테 뭘 바라는 거나?” “맨날 늙은이라고 하니 할아버지라고 해야죠, 뭐! 더구나 아버님을 처음 뵌 날인데, 저 빌어먹을 놈들이 지랄하잖아요! 자근자근 밟아서 비틀어 버리라구요!” 울라트는 치우우레와 이야기할 때와는 전혀 딴판으로, 거침없이 험한 말을 마구 쏟아냈다. 그러더니 뒤를 보며 건방진 태도로 코끝으로 리미를 가리켰다. “리미! 마냥! 할아버지하고 함께 가봐. 다들 좀 조용히 시켜.” 울라트는 언제 애교스러웠냐는 듯, 찬바람이 쌩쌩 몰아치는 듯한 태도로 말했다. 특별히 소리를 지른 것도 아닌데, 주변의 전사와 사울아비들의 등에 괜스레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예!” “예! 헤헤헤.” 리미는 씩씩하고 엄하게, 마냥은 실실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자 비울걸은 뒷짐을 지고 천천히 걸어가며 말했다. “아이구, 허리야, 다리야. 쑤신다, 쑤셔. 늙으면 죽어야지. 의붓딸에게 구박받고 이 나이에 뒤치다꺼리나 하고, 무슨 놈의 신세가 이따위야? 퉷!” 비울걸이 침을 뱉으며 유유히 울타리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것과 동시에, 리미와 마냥이 도깨비들에게 손짓하자 도깨비들이 우르르 그 뒤를 따랐다. 치우우레는 이런 엉터리 같아 보이는 짓을 더는 두고 볼 수 없어서 뭐라 하려는데, 무라가 가만히 손을 들어 치우우레를 제지했다. 무라의 차분한 표정을 보고 치우우레는 뭔가 소리치려던 것을 멈추었다. 울라트가 자못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나섰다. “염려 마세요. 지나족은 오늘 못 와요.” 그 말을 듣자 치우우레는 일단 자리에 멈추어 섰다. “뭘 어떻게 한다는 거요? 아니......,거냐?” “두고 보라니깐요.” 울라트는 다시 애교스럽게 웃어 보였다. 치우벌은 더 참지 못해 외쳤다. “도대체 무슨 수작이냐! 사......” 치우벌은 사람도 아니고 귀신같은 것들이라 말하려다가 무라를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치우벌은 무라가 카린의 지체 높은 족장이었던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허나 이 무리는 제대로 된 사람이 하나도 없고 전부 귀신, 도깨비의 모임이라, 치우벌의 눈에는 이젠 아름다운 무라 마저도 귀신같아 보였다. 그러자 울라트는 치우벌에게 살짝 눈을 흘겨 손가락을 치켜세워 보이고는 고개를 살살 흔들며 말했다. “아저씨, 그러면 안 돼요 잘못하면 할아버지한테 혼나요.” 그때 얼굴이 퍼렇게 질린 마갸르족 부족장 한 사람이 몸을 덜덜 떨며 다가왔다. 그는 떨면서 울라트를 보고 물었다. “저...... 저분이...... 그러니까 할아버지가...... 타타르의 도깨비 왕...... 인가?” 울라트는 건방진 태도로 ‘흥’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그럼, 세상에 도깨비 왕이 둘이겠어요?” “어이쿠!” 그 부족장은 놀라서 그만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때 울타리 너머에서 ‘와와’ 하고 함성과 비명소리가 뒤섞여 들려왔다. 지나족이 무엇인가에 당하거나 난리가 난 것 같았다. 아직 전사는 한 명도내보내지 않았고, 울타리에 선 전사들도 화살 한 대 쏘지 않았는데 지나족이 왜 혼란스러워졌는지 치우우레는 알 수 없었다. 울타리 위에 선 전사들은 모두 울타리 끝에 매달려서, 넋이 나간 듯 밖을 내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치우우레도 달려가 보려 했으나, 어느새 울라트가 착 달라붙으며 재잘거렸다. “볼 것 없어요. 보긴 뭘? 할아버지는 맨날 저거야. 재미 하나도 없다구요. 보면 눈만 버려요 지나족을 다 죽일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뭘. 리미, 마냥도 있으니 한 이삼백 명이나 죽일까? 적어도 오늘은 못 덤빌 거니깐 한눈팔지 말고 같이 놀자니까요? 근데 아버님, 맛있는 거 좀 없나요? 아휴, 배고파.” 치우우레는 어이가 없어서 멍해졌다. 자기가 꿈을 꾸고 있거나 귀신에게 홀린 것 같을 뿐이었다. 갑자기 솟아난 도깨비 무리에게 당해 혼란에 빠진 지나족들은 리미와 마냥의 도깨비 부대가 가세하면서 무섭게 달려들자 급기야는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꽁무니를 빼버렸다. 도깨비들에 홀려 서로 죽고 죽여서 이백이십 명, 그리고 리미와 마냥이 이끄는 사십 명의 도깨비 부대에게 백칠십 명, 합하여 삼백구십 명의 많은 사망자를 낸 지나족 부대는 산산이 흩어져 본진으로 후퇴해버렸다. 형천도 크게 놀라 도깨비와는 함부로 대적할 수 없다 생각하고 일단 그날은 공격을 더 가하지 않고 대책 마련에만 부심했다. 치우우레는 정말로 비울걸과 리미 등이 지나족을 막아주자 몹시 기뻐하면서 그들과 무라, 울라트 등을 후하게 대접했다. 치우벌과 부소다솔, 각 부족장들도 뜻밖의 도움을 받자 기뻐서 그들을 아낌없이 환대해 주었다. 더구나 많은 식량과 화살, 무기가 도착하자 사울아비들과 각 부족 전사들의 사기도 올라갔다. 특히 울타리를 지키면서 비울걸의 능력을 본 전사들은 이제는 이길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마저 갖게 되었다. 시기르타는 대접을 사양하고 장사하러 가야 한다면서 곧 떠나버렸다. 치우우레의 대접을 받은 울라트는 울쿠타 야쿠타를 다시 만나자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리미, 마냥도 그 두 사람을 희미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울쿠타 야쿠타가 좋지 않은 환경에서도 훌륭하게 성장한 것을 보고 말수가 없는 무라도 두 사람을 칭찬해 주었다. 두려울 정도로 말수가 적고 엄숙해 보이는 무라에게서 의외로 따뜻한 칭찬의 말을 듣자 울쿠타 야쿠타는 얼굴이 다 붉어졌다. 그러나 치우우레는 아직도 미간의 골을 펴지 못했다. 비록 신기한 재주를 지닌 비울걸과 도깨비들의 도움을 받더라도, 식량과 무기가 많이 보급되었다 해도 형천의 만 오천 대군을 당해내기가 그리 쉬울 것 같지 않아서였다 울라트는 그런 치우우레를 힐끗 보더니 애교스럽게 웃었다. “아버님, 아버님.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가 이길 수 있어요 이제는 사정이 완전히 바뀔걸요? 그렇죠, 할아버지?” 그러자 옆에서 지저분하게 음식을 먹고 술을 퍼마시던 비울걸이 콕콕거리며 웃었다. “아, 의붓딸이 애비보고 할아버지라니, 이거 도대체 어떻게 되는 거야? 제기랄, 염려 마라. 염려 마.” 울라트는 싱긋 웃으며 치우우레에게 말했다. “이제까지 몹시 고달프셨죠? 잠도 못 주무시고요.” 치우우레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것을 어떻게 알았느냐?” “천 오라버니가 분명 그럴 거라고 말해주었죠.” “천...... 그 녀석이...... 그렇게나......” 치우우레는 울라트의 말 한마디로 치우천이 자신의 생각을 훨씬 뛰어넘을 만큼 똑똑하게 자랐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형천이 어떻게 움직일지, 치우우레가 어떻게 대처할지 치우천은 손바닥을 보듯 미리 읽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그 녀석...... 말 많이 자랐구나. 하긴, 원래 똑똑한 놈이었지. 나보다 백 배 낫겠구나. 이렇게 기쁜 일이 있을까?” 자식 이야기만 나오면 꼼짝 못하는 치우우레가 다시 눈물을 글썽거리자 울라트는 킥킥 웃었다. “이젠 염려 마세요. 잠 못 자는 건 지나족들일 거예요.” 그날 밤부터 지나족의 본진은 한시도 조용할 틈 없는 수라장이 되어갔다. 조용해질 만하면 여기서 도깨비가 나타나고, 또 조용해질 만하면 저편에서 도깨비가 나타나 사람을 놀라게 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경계를 철통같이 해도 여기저기서 마구 나타나는 도깨비들을 어쩔 수가 없었다. 칼로 베어도 베어지지도 않고, 창으로 찌르거나 돌로 쳐도 소용없었다. 도깨비들이 사람을 직접 해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흉악한 도깨비들이 마구 돌아다니는 악다구니 속에서 태연히 잠을 잘 만한 지나족들은 거의 없었다. 하룻밤이 지나자, 지나 전사들은 모두 눈이 새빨개지고 다리를 후들거렸다. 지독한 것은, 도깨비들이 밤에만 아니라 낮에도 가끔씩 나와 사람을 놀라게 한다는 점이었다. 급기야는 아무것도 아닌 것을 보고도 도깨비라고 무서워하고 소란을 피우는 전사들이 거의 태반이었다. 그것을 보고 형천은 이를 갈았다. “저쪽에 주술사가 있나 보다. 내가 실수했구나. 나도 주술사를 데려왔어야 했는데...... 이건 정말 어떻게 할 수가 없군!” 형천은 힘과 용기가 있는 대전사들과 함께 도깨비들을 직접 때려잡으려고 돌아다녔으나, 도깨비들은 형천이나 대전사들 부근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다만 힘없고 겁 많은 보통 전사들만을 괴롭힐 뿐이었다. 결국 형천은 다음날에도 공격을 하지 못하고, 이 골칫거리를 어떻게 해결할까 하는 회의만 하며 시간을 보냈다. 사람들이 아는 지식을 모아 말피, 닭피, 개피를 뿌리기도 하고, 특별한 나무를 태워 연기를 피우기도 했으며 몇몇 도깨비를 쫓기도 했다. 그러나 만 오천 명의 부데와 그 부대들이 사용하고, 살아가는 모든 것에 피를 묻힐 수도 없었고, 본진 전체를 연기로 덮을 수도, 또 그럴 만큼 많은 나무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틀째가 되자 이제 형천은 도저히 부하들에게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릴 수 없었다. 만 이틀 동안 한숨도 눈을 붙이지 못한 사람이 반이 넘었다. 막사에 들어가자면 도깨비들이 나온다고 수천 명의 전사들이 공터에 모여 밤이슬을 그냥 맞아가며 밤을 새우니, 힘이 날 리가 없었다. 혼자 떨어질 용기가 없어서 대소변마저도 참다가 바지에 싸버리는 경우까지 있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졸지도 못하고, 공포와 두려움에 빠져 충혈된 눈을 번득거리며 사방을 계속 두리번거릴 뿐이었다. 전사들이 기력을 잃고 급속히 쇠약해져 가자, 형천도 결국은 견디지 못하고 나흘째가 되자 본진을 철수시켰다. 형천의 군대가 물러나는 것을 본 부족장들은 치우우레에게 뒤쫓을 것을 권했으나 치우우레는 고개를 저었다. “지나족이 약해졌다지만 독이 잔뜩 올랐으니, 건드렸다가는 낭패다. 그냥 보내주도록 하시오 분명히 저들은 또 올 테니까 우리 준비나 갖추는 게 낫소.” 울라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말했다. “천 오라버니의 얘기와 같아요. 아버님, 형천이 분명 다시 오겠지만, 걱정 마세요 우리 편도 올 거예요.” 치우우레는 희망에 부풀어 눈을 빛냈다. “그러면 천, 비 녀석도 온단 말이냐?” 울라트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닐 거예요 두 오라버니는 지금 올 수 없거든요 하지만 오라버니의 벗들이 곧 달려올 거예요.” 울라트의 말대로였다. 이틀, 사흘이 지나면서 다른 부족의 전사들이 속속 달려오기 시작했다 “마갸르 나달타족의 와난강, 와난수요 작은 주신에는 큰 은혜를 입었소. 전사 팔백 명을 모아 도우러 왔소.” “비아우 반두고르시족의 차이특기요 은혜를 갚으러 전사 오백 명을 끌고 왔소.” 치우천은 자신이 각개격파한 다섯 방향의 지나족과 싸우던 부족들과 인근에 있는 벗들에게 연락을 취했던 것이다. 다섯 방향 중의 네 부족은 쾌히 원군을 보내왔다. 비록 하나하나의 수는 그리 많지 않지만 그들을 합하니 이천오백에 달하는 구원군이 더해졌다. 거기에 각 부족으로 보냈던 주신 사울아비들도 따라왔는데 그 수도 삼백 명 가량 되었다. 태산 회의 때의 젊은 사울아비들인 거서기, 삼, 부달, 마파람 등도 그들과 함께 왔다. 삼과 거서기는 아직 상처가 완쾌되지 않아 제대로 싸울 수는 없었으나 고집을 부려 달려온 것이다. 치우우레의 부대는 대뜸 만 이천 정도로 늘어났으며 사기도 한층 높아졌다. 게다가 시기르타가 계속 물건들을 실어 보급을 해주어서 치우우레 측의 방비는 한층 튼튼해졌다. 치우우레는 노련한 장수라 이러한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울타리를 튼튼하게 하고, 길 앞에 장애물을 설치했다. 아울러 통솔되지 않은 각 부족들을 다시 훈련시켜 명령체계를 갖추고 방어전술을 익히게 했다. 한편 형천은 유망이 있는 본진으로 후퇴한 후, 축융과 합류하여 더 큰 부대를 이루었다. 축융은 약 이만 명가량의 전사를 이끌고 서쪽에서부터 진군해 왔다. 덕분에 지나족 염제 신농의 전사는 모두 칠만 명에 달하는 엄청난 군세를 이루었다. 유망은 아직도 마약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한 터라 함께 출전할 수 없었다. 형천은 만 명 정도의 병력을 남겨 유망을 호위하게 했다. 그 다음, 형천과 축융은 함께 치우우레가 막고 있는 쪽으로 진군했는데 전사의 수는 육만 명에 달했다. 형천은 아직도 주기적으로 발작을 계속하는 유망에게 눈물로 절하며 막사를 나와 축융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이번에야말로 마갸르, 미아우의 찌꺼기들을 말끔히 쓸어버린다. 그리고 주신 땅 바로 앞에 군대를 모아놓고 주신과 담판을 짓는다.” 축융은 가늘게 찢어진 눈을 조금 크게 뜨며 물었다. “마갸르, 미아우족은 얼마나 되지?” “만 명도 안 된다.” “그런데 자네가 왜 물러섰지?” “도깨비들 때문에 견딜 수 없어서다.” “도깨비라......” 축융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뒷짐을 지었다. 그러고는 배를 출렁거리며 몇 발짝 서성거리다가 뒤를 돌아보며 이내 덧붙였다. “도깨비 같은 것은 염려할 필요 없다. 내 불 주술로 다 태워 버릴 수 있으니까. 그러나 주신이...... 가만있을까?” 형천은 ‘흥’ 하며 크게 코웃음을 치면서 되받았다. “주신의 바보 같은 늙은이들은 우리가 자기 땅만 안 넘어온다면 무엇이든 들어줄 것이다.” 축융은 슬쩍 웃으며 물었다. “주신에 심어놓은 끄나풀에게서 무슨 소식이 있었나?” 그 말에 형천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크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틀림없을 걸세.” 형천은 웃음을 머금고는 번뜩이는 눈빛으로 축융을 바라보았다. “주신 한웅은 곧 죽네. 우리가 실패하여 몇 년 더 살기는 했지만, 늙어 죽는 것이야 누가 어쩔 수 있겠는가? 주신 한웅이 없어지면, 주신은 갈팡질팡할 것이고......” 축융이 대신 말을 받아 이었다. “그 사이 우리는 마갸르, 미아우의 땅을 다 얻을 수 있을 테지.” “키탄도 그냥 둘 순 없네.” 형천이 덧붙이자축융은 살기 띤 웃음을 지으며 속삭이듯 물었다. “헌원은?” 형천은 딱 잘라 대답했다. “지나족의 지도자는 한 분뿐일세. 바로 염제 신농이시네!” 축융은 미소를 거두고 금세 찌푸린 표정으로 되받았다. “키탄보다는, 헌원을 먼저 밟아줘야 할 걸세.” “헌원은 별것 아닐세. 전사들을 잘 다룰 줄 모르니까. 헌원의 속은 나도, 염제 신농께서도 다 알고 있다네. 염려 말게.” 형천은 씩씩하게 웃으며 커다란 말 등에 훌쩍 뛰어올랐다. 축융은 한 사람의 노예를 말 앞에 엎드리게 하여 그 등을 밟고 힘겹게 말 위에 올랐다. “모두 나간다! 가자!” 형천이 큰 소리로 외치자, 많은 부장들의 외침소리가 여기저기 화답하듯 울려 퍼졌다. 이윽고 육만 명에 달하는 거대한 지나족의 전사 무리는 천천히 북쪽으로 진군을 시작했다. “뭐? 육십 천?” 치우우레가 깜짝 놀라 목소리를 높이자 정찰을 나갔다 돌아온 울쿠타는 자신도 모르게 목을 움츠렸다. “틀림없습니다. 헤아리는 데 하루 종일 걸렸습니다. 수가 많아서 그리 빨리 움직이지는 못합니다만, 그래도 나흘 정도 뒤면 이리로 몰려올 것 같습니다.” 울쿠타의 보고를 듣고 치우우레와 치우벌, 부소다솔을 위시한 대부분 부족장들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치우우레는 뒷짐을 지고 정신없이 왔다갔다하면서 중얼거렸다. 울라트와 무라, 리미와 마냥도 너무도 많은 적의 수를 생각하자 저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너무 많다 너무 많아......” 그 와중에 울쿠타는 한마디를 더 보탰다. “더구나 형천만이 아니라, 축융도 있는 것 같았습니다.” “축융? 불 주술을 쓴다는 그 축융 말이냐?” 치우벌이 묻자 울쿠타는 마치 그것이 자기 잘못인 양 죄스럽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울라트가 말했다. “흥! 지나족이 아무리 많아도 소용없어요! 할아버지가 들들 볶으면 모두가 다 잠을 못 자서 저절로 쓰러질걸요?” 그 말을 듣고 비울걸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축융 ...... 축융 ......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 그 돼지가 정말 불 주술을 그리 잘 쓴다면, 도깨비들도 소용없어.” “네?” 울라트가 놀라 소리치자 비울걸은 쯧쯧 혀를 차고는 말을 이었다. “도깨비들은 다른 것에는 괜찮지만, 불에는 약해 더군다나 축융은 주신 삼사가 비를 부르고 바람을 일으키는 것만큼이나 불을 잘 다룬다고 들었다. 그놈이 불 주술을 쓰면 도깨비들도 제대로 힘을 못 쓸 거야.” “뭐가 그래요? 할아버지는 겁쟁이야! 도깨비들도 겁쟁이구!” 비울걸은 일부러 흥하게 웃어 보이며 되받았다. “나야 원래 겁쟁이지, 뭐. 그럼 내가 좋은 사람인 줄 알았어? 뭐, 나도 하는 데까진 해보겠다만, 너무 도깨비들만 믿지는 말라는 거야.” 울라트와 비울걸이 아옹다옹하는 사이 무라가 조용히 물었다. “그러면 어떻게 하지요?” 그때 치우우레가 외쳤다. “다른 방법이 없으니, 그 사이에라도 울타리를 튼튼하게 하고, 화살과 돌을 준비해야 하오 비록 지나족이 많다고는 하나, 울타리를 이용하여 싸우면 물리칠 수 있소!” 그 말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그때 부소다솔이 다소 겁먹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축융은 불 주술을 잘 쓴다는데, 그가 울타리에 불을 질러 태워버리면 어떻게 하오?” 부소다솔의 한마디에 모든 사람들의 낯빛이 변하면서, 삽시간에 회의장 안은 불안한 웅성거림으로 가득 찼다. 치우우레는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외쳤다. “축융이 아무리 대단해도 한사람일 뿐이오. 한사람이 울타리 전부에 불을 붙일 수는 없을 거요! 절대 불을 붙일 수 없게, 그가 다가오지 못하게 하면 되오!” “누가 그 일을 할 거요?” 친두 부족장 아시큔이 외치자 사울아비 하나가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내가 막겠습니다! 목숨을 걸고 막을 것입니다!” 그 사람은 부달이었다. 그러자 옆에 앉아 있던 거서기도 벌떡 일어섰다. “나도 하겠습니다! 축융 따위, 저는 두렵지 않습니다!” 그러자 와난강, 와난수도 일어서며 외쳤다. “우리도 돕겠소!” 치우우레는 그들의 용기가 가상하여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때 울라트가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그런데 천 오라버니는 왜 안 오시는지 모르겠군요. 벌써 오시든지, 전사들이라도 보냈어야 하는데......” “뭔가 이유가 있겠지. 너무 염려 말아.” 무라가 걸걸하고도 조용한 목소리로 울라트를 안심시켜주자 울라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 커다란 눈망울에는 걱정의 빛이 가득했다 부자 상봉 나흘이 지나자 형천과 축융이 이끄는 육만의 대군이 사방을 까맣게 메우면서 몰려들기 시작했다. 울쿠타가 정찰한 그대로였다. 형천의 전술은 간단하면서도 집요한 것이었다. 그는 조금도 서두르지 않았으며, 여전히 부대를 셋으로 나누어 번갈아 가며 공격을 했다 이번에는 병력이 늘었기 때문에 치우우레는 더더욱 고전했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축융의 존재였다. 비울걸이 다시 도깨비들을 시켜서 지나군의 진중을 어지럽히려 했으나, 축융이 불 주술을사용하여 지나군의 진지 여기저기에 불기둥을 피워 놓았고, 또 도깨비들이 불기둥에 접근할 때마다 불덩어리들이 저절로 솟아나와 도깨비들에게로 날아갔다. 비울걸은 울타리 너머에 있었지만, 도깨비들을 눈과 귀로 삼는지라 이것을 알고 크게 화를 냈다. “축융 녀석! 정말로 불을 마음대로 다루는구나!” “도깨비들은 정말 불을 무서워하나요? 상대할 수 없나요?” 울라트가 묻자 비울걸은 씁쓸히 대답했다. “물론 그렇지 않지. 물도깨비를 불러 상대하게 하면 충분히 막을 수 있지.” “그러면 물도깨비를 불러내요!” 울라트가 외치자 비울걸이 발끈 성질을 냈다 “누가 몰라서 그러느냐? 하지만 물도깨비는 물이 많고 습한 곳에만 있단 말이다! 이렇게 바싹 마른 땅에서는 불러낼 수 없어! 네가 이 근처에 냇물을 파고 강을 흐르게 만들 수 있느냐? 그렇다면 당장이라도 불러낼 수 있다!” 울라트는 말문이 막혔다. 그곳은 건조하기 짝이 없는 평야지대라서 강물은커녕 변변한 냇물조차 없었고 기껏해야 우물이 몇 개 있을 뿐이었다. 결국 비울걸은 이런 상황에서 별반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렇게 되자, 그는 툭하면 화를 내고 신경질만 부려 되레 골칫거리가 되고 말았다. 첫날은 축융과 형천이 직접 앞장서지 않았고, 공격도 그리 거세지는 않았다. 치우우레가 신경 써서 나무 울타리를 보강하고, 시기르타가 많은 화살과 무기를 날라다준 덕에 그럭저럭 별 무리 없이 울타리를 지켜낼 수 있었다. 그러나 둘째 날은 축융이 앞장서서 군대를 몰고 나왔다. 축융이 직접 오백 명 정도의 전사를 거느리고 앞장서 나오는 것을 본 치우우레는 다급하게 외쳤다. “축융이 불 주술로 울타리를 태우려 할지 모른다! 반드시 막아야 한다!” 그러자 부달과 거서기가 이끄는 사울아비 삼백 명이 급히 말을 달려 나갔다. 거기에 와난강, 와난수가 이끄는 마갸르족의 돌부대 오백 명도 급히 그 뒤를 따랐다. 적이 다가오자 축융의 부대 중 백 명이 일제히 방패를 빼 들어서 축융을 겹겹이 방패로 덮어 보호했다 앞, 옆, 뒤만 아니라 위까지도 철저하게 덮어서 마치 커다란 거북 같았다. 부달과 거서기가 그리로 접근하자, 나머지 사백 명의 지나 전사들이 그 방패 주위를 호위한 채 천천히 다가들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한다!” 부달과 거서기가 각각 큰 칼과 도끼를 들고 달려 나가며 외치자, 사울아비들도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달려 나갔다. 울타리를 공격하던 지나족 부대가 그들을 막아서려 했으나, 와난강, 와난수의 부대가 돌을 우박처럼 퍼부어서 지나족들을 흩어버렸다. 부달과 거서기가 축융의 친위대와 충돌할 즈음, 축융은 방패 속에서 낄낄 웃으며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돌연 머리통만한 불덩이가 연속하여 몇 개씩이나 부달과 거서기 쪽으로 날아들었다. “이크!” 불덩어리가 날아들자 부달과 거서기도 놀랐지만, 말들이 더더욱 놀랐다. 멈칫하는 사이 불덩어리들은 사울아비들의 중간으로 떨어져 크게 폭발했다. 사울아비들과 말들의 몸에 불이 붙고 화상을 입어 대열이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불덩어리들은 계속 날아들 었고, 방패부대를 호위하는 사백 명의 지나 전사들도 일제히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다소 헝클어진 대오로 사울아비들과 지나 전사들 간에 육박전이 벌어지자 방패부대의 호위를 받는 축융은 유유히 방향을 돌려 울타리 쪽으로 향했다. 울타리 위에서는 화살을 마구 쏘아댔지만, 방패를 뚫는 화살은 없었다. 와난강, 와난수도 돌부대를 이끌고 마구 돌을 던져 지나 전사들을 쓰러뜨렸으나, 방패부대에는 접근할 수도 없었다. 그러자 부달은 커다랗게 고함을 지르면서 말을 거세게 몰면서 지나 전사들을 마구 짓밟으며 전진했다. 몇 명의 지나 전사들이 창을 들어 부달의 앞을 막으려 했으나 부달은급히 말머리를 치켜 올렸다. 동시에 말이 껑충 높이 뛰어 올라 지나 전사들의 머리를 넘어갔다. “됐다!” 부달은 탁월한 기마술로지나 전사의 포위망을 넘어서자 더 이상 주저하지 않고 똑바로 축융을 향해 돌진해갔다. 부달은 오른손에는 큰 칼을, 왼손에는 길다란 채찍을 휘두르며 앞을 가로막는 지나 전사들을 닥치는 대로 베거나 휘감아 쓰러뜨렸다. 부달이 무서운 용맹을 보이며 달려들자, 축융은 코웃음을 치면서 입에서 길게 불줄기를 내뿜었다. 부달이 급히 말머리를 돌려 불줄기를 피하자 되레 부달의 뒤를 쫓던 지나 전사들이 불길에 휩싸여 타들어갔다. 축융은 화가 나서 연달아 세 번이나 불줄기를 뿜었으나, 부달은 놀라운 기마술로 아슬아슬하게 피해냈다. 세 번째 불줄기가 어깨를 스쳐 어깨에 불이 조금 붙었지만 부달은 신경조차 쓰지 않고 외쳤다. “축응! 머리를 내놓아라!” 축융은 코웃음을 치며 다시 불줄기를 뿜고 동시에 양손을 떨쳐 두 개의 불덩이를 던졌다. 부달은 급히 불줄기를 피했으나 불덩어리까지 피할 수는 없었다. 부달이 칼로 하나의 불덩어리를 쳐내 불꽃이 사방에 퍼져 나갔으나, 두 번째 불덩이는 그의 등에 명중했다. 지나 전사들과 싸우던 거서기는 그것을 보고는 목이 터져라 외쳤다. “부달 형!” 부달의 몸이 불타오르면서 부달은 그만 말에서 굴러 떨어져 땅에 처박혔다. 이미 숨이 끊어졌는지, 등에서 불이 활활 타오르는데도 부달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축융은 다시 코웃음을 치고는 방패부대를 지휘하여 울타리 쪽으로 다가들었다. “이놈들!” 거서기는 미친 듯 도끼를 휘둘러서 지나 전사들을 베어 넘기며 전진해 나갔다. 와난강, 와난수도 집중적으로 거서기의 앞에 돌을 던져 거서기를 도왔다. 갑자기 지나 전사들이 ‘우’ 하고 갈라서며 거대한 사람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는 크게 웃으며 외쳤다. “어딜 가려는가?” 거서기는 이를 부드득 갈며 소리쳤다. “형천!” 그 사람은 바로 형천이었다. 보기만 해도 아찔할 정도로 큰 도끼와 거대한 방패를 든 세상 제일의 용사라는 형천. 거서기가 그 기세에 눌려 더 나아가지 못하고 주춤하는 사이, 와난강과 와난수는 형천을 향해 미친 듯 돌을 던지게 했다. 형천은 껄껄 웃으며 방패도 쓰지 않고 오른손의 도끼만 풍차처럼 휘둘러서 우박같이 쏟아지는 돌들을 모조리 튕겨냈다. 거서기는 그 틈을 노려 급히 말을 몰았다. ‘형천만 쓰러뜨리면 이 싸움은 이긴다! 내 목숨을 건다!’ 거서기는 말을 몰고 달려들다가 갑자기 말 위에서 몸을 날렸다. 말의 속도와 뛰어오르는 속도 “됐다!” 부달은 탁월한 기마술로지나 전사의 포위망을 넘어서자 더 이상 주저하지 않고 똑바로 축융을 향해 돌진해갔다. 부달은 오른손에는 큰 칼을, 왼손에는 길다란 채찍을 휘두르며 앞을 가로막는 지나 전사들을 닥치는 대로 베거나 휘감아 쓰러뜨렸다. 부달이 무서운 용맹을 보이며 달려들자, 축융은 코웃음을 치면서 입에서 길게 불줄기를 내뿜었다. 부달이 급히 말머리를 돌려 불줄기를 피하자 되레 부달의 뒤를 쫓던 지나 전사들이 불길에 휩싸여 타들어갔다. 축융은 화가 나서 연달아 세 번이나 불줄기를 뿜었으나, 부달은 놀라운 기마술로 아슬아슬하게 피해냈다. 세 번째 불줄기가 어깨를 스쳐 어깨에 불이 조금 붙었지만 부달은 신경조차 쓰지 않고 외쳤다. “축융! 머리를 내놓아라!” 축융은 코웃음을 치며 다시 불줄기를 뿜고 동시에 양손을 떨쳐 두개의 불덩이를 던졌다. 부달은 급히 불줄기를 피했으나 불덩어리까지 피할 수는 없었다. 부달이 칼로 하나의 불덩어리를 쳐내 불꽃이 사방에 퍼져 나갔으나, 두 번째 불덩이는 그의 등에 명중했다. 지나 전사들과 싸우던 거서기는 그것을 보고는 목이 터져라 외쳤다. “부달 형!” 부달의 몸이 불타오르면서 부달은 그만 말에서 굴러 떨어져 땅에 처박혔다. 이미 숨이 끊어졌는지, 등에서 불이 활활 타오르는데도 부달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축융은 다시 코웃음을 치고는 방패부대를 지휘하여 울타리 쪽으로 다가들었다. “이놈들!” 거서기는 미친 듯 도끼를 휘둘러서 지나 전사들을 베어 넘기며 전진해 나갔다. 와난강, 와난수도 집중적으로 거서기의 앞에 돌을 던져 거서기를 도왔다. 갑자기 지나 전사들이 ‘우’ 하고 갈라서며 거대한 사람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는 크게 웃으며 외쳤다. “어딜 가려는가?” 거서기는 이를 부드득 갈며 소리쳤다. “형천!” 그 사람은 바로 형천이었다. 보기만 해도 아찔할 정도로 큰 도끼와 거대한 방패를 든 세상 제일의 용사라는 형천. 거서기가 그 기세에 눌려 더 나아가지 못하고 주춤하는 사이, 와난강과 와난수는 형천을 향해 미친 듯 돌을 던지게 했다. 형천은 껄껄 웃으며 방패도 쓰지 않고 오른손의 도끼만 풍차처럼 휘둘러서 우박같이 쏟아지는 돌들을 모조리 튕겨냈다. 거서기는 그 틈을 노려 급히 말을 몰았다. ‘형천만 쓰러뜨리면 이 싸움은 이긴다! 내 목숨을 건다!’ 거서기는 말을 몰고 달려들다가 갑자기 말 위에서 몸을 날렸다. 말의 속도와 뛰어오르는 속도를 합하여 형천에게 화살처럼 날아든 것이다. 거서기가 크게 도끼를 휘둘러 형천의 머리를 쪼개려는 순간, 형천은 방패를 든 왼손을 한 번 떨쳤다. 방패가 세워져서 빙빙 돌며 날아가 덤벼들던 거서기를 맞히자, 거서기는 그 힘에 밀려 쿵쿵 소리를 내며 반대편으로 날아 땅바닥에 처박혀버렸다. 형천의 무서운 힘 때문에 거서기의 왼팔이 부러지고, 갈비뼈도 몇개나 부러졌다. 거서기는 왈칵 피를 토해내면서도 끝내 형천의 머리를 향해 도끼를 던졌다 허나 무섭게 빙빙 돌며 날아가던 도끼는 형천이 머리를 살짝 틀자 허무하게 빗나가버렸다. 와난강, 와난수의 부대는 그때까지도 미친 듯 돌을 퍼붓던 참이었으나 곧이어 지나족들이 ‘와’ 하고 밀려들어 육박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쏟아지던 돌이 그치자 형천은 뚜벅뚜벅 쓰러진 거서기 쪽으로 다가서려 했다. 그러자 거서기를 따르던 사울아비들이 미친 듯 달려들어 형천의 앞을 막아섰다. 허나 누구도 형천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단 한 번의 도끼질로 말과 사람이 두 쪽이 나고, 혹은 걷어차는 발길질 한 번에 말과 사람이 통째로 나가 떨어져 뒹굴었다 세 명의 사울아비가, 쓰러진 채 꾸역꾸역 피를 토하던 거서기를 구하러 달려가자, 형천은 왼손을 한 번 떨쳤다. 그러자 떨어져 있던 방패가 빙빙 돌며 허공에 떠올라서 세 사울아비의 얼굴을 차례로 맞혀 쓰러뜨렸다. 방패에는 긴 끈이 연결되어 있었고, 형천은 그 끈을 이용하여 방패를 마음대로 조종하는 기술을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명의 사울아비가 무참히 얼굴이 깨어진 채 쓰러지자 다시 방패가 거서기를 찍어버릴 듯 내리꽂혔다. 다시 한 대를 더 맞으면 거서기는 살아남지 못할 판이었다. 급한 나머지 다른 사울아비들 두 명이 뛰어들어 방패를 몸으로 껴안고 매달렸다. 형천이 마음대로 조종하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으려는 것이었다. 두 사람이 결사적으로 매달리자 방패는 빗나가 거서기 옆의 땅에 꽂히고 말았다. 그것을 본 형천은 기합소리를 한 번 넣으면서 왼손을 거칠게 끌어당겼다. 그러자 형천의 방패는 두 사람을 매단 채 허공으로 높이 솟아올랐다. 그 다음 형천이 왼팔을 힘 있게 휘젓자, 방패는 두 사람을 매단 채 다시 돌을 퍼부으려던 마갸르족 와난강, 와난수의 부대로 내리꽂혔다. 방패에 매달렸던 두 사람의 몸이 날아가 여러 명의 마갸르족 전사들과 부딪혀 박살이 났고, 방패에 찍힌 두 명의 마갸르 전사는 허리가 부러져서 즉사했다. 형천이 길게 소리 지르면서 왼손을 돌리자, 피로 물든 방패가 형천의 주위를 돌면서 사울아비들을 무참하게 쓰러뜨렸다. 축융은 이제 불줄기가 울타리에 닿을 만큼이나 가까이 접근해 가고 있었다. 울타리 위에서는 미친 듯 화살을 퍼붓고 돌을 던졌지만, 축융의 방패수들은 그것을 잘 막아내고 있었다. 간혹 커다란 돌이나 방패로 막기 어려울 만큼 제찬 화살이 날아오면, 축융이 방패 안에서 불 주술을 써서 불덩어리로 돌을 깨뜨려 버리거나 화살의 방향을 바꾸어 막아냈다. 축융이 점점 다가오자 치우우레가 외쳤다. “물을 준비하라! 울타리를 태워서는 안 된다!” 축융은 불 주술을 있는 대로 발휘하여 어마어마한 불줄기를 나무울타리에 내뱉기 시작했다. 울타리 위에서는 미친 듯 물을 끼얹어 나무 울타리를 태우지 않으려 했으나 축융의 불줄기는 너무도 거셌다. 준비했던 물은 계속 줄어들어 가는데, 축융이 내뿜는 불줄기는 조금도 약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때였다. 갑자기 쓰러져 불에 타고 있던 부달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지나 전사들은 모두 부달이 죽었다고 생각했기에 그에게 신경 쓰지 않았는데, 부달은 아직 죽지 않았던 것이다. 이미 형천과 지나전사들은 부달의 주위를 지나간 다음이라, 축융과 부달 사이에는 지나 전사들이 없었다. 부달은 등이 타들어가는 고통을 견디며 이 순간이 오기만을 기다렸던 것이다. 부달은 채찍과 칼을 마구 휘두르며 방패 부대의 뒤를 향해 뛰어들었다. 화살과 돌은 여전히 날아오고 있었으므로 대부분의 방패수들은 움직일 수 없었다. 다만 뒤에 있던 방패수들만이 부달을 막으려 덤벼들 뿐이었다. 갖고 있는 무기라고는 방패가 유일한 방패수들은 놀라서 급히 방패로 부달을 막으려 했지만, 부달은 마치 성난 댐처럼 방패부대를 쓰러뜨리면서 축융을 베려고 했다. 축융은 불줄기를 뿜어내던 것을 멈추고 급히 부달을 향해 불덩이를 내쏘았다. 허나 부달은 기합과 함께 칼로 불덩이를 내쳐 내버렸다. 그러면서 지나족 한 명을 채찍으로 쳐서 쓰러뜨리고 채찍을 버린 다음 방패를 빼앗아 들었다. 축융이 두 번, 세 번 불덩이를 내쏘았으나 부달은 방패로 불덩이를 계속 막아내며 귀신같은 형상으로 달려 나갔다. 방패는 이미 불타오르기 시작했으나 부달은 방패를 놓지 않았다. 부달의 등에도 여전히 불이 타오르고 있었고 머리카락에도 불이 옮겨 붙었으나 부달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축융! 축유-웅!” 부달은 이미 불덩어리가 되어버린 방패를 휘두르고 등에는 타오르는 불길을 업은 채 불귀신 같은 무서운 형상으로 축융만을 노리며 달려 들어갔다. “저 녀석이?” 먼발치에서 부달을 발견한 형천은 놀라서 급히 몸을 돌렸고 지나 전사들이 몰려와 사울아비들과 마갸르 전사들과 싸웠다. 형천은 다른 전사들에게 명령을 내릴 겨를도 없이 재빨리 달려갔다. 그때 울타리 위에서 줄을 타고 여러 사람이 뛰어내렸다 그것은 리미와 마냥, 그리 고 도깨비들로 이루어진 부대였다. 울타리 위에서는 울라트가 소리를 치고 있었다. “형천을 막아! 부달님에게 못 가게 해야 해! 안 그러면 울타리가 무너져!” 리미는 크게 소리를 지르면서 도끼를 휘두르며 앞장전고, 마냥은 형천에게 창을 던졌다. 곧이어 금발, 적발의 도깨비들이 일제히 고함을 치며 덤벼들자 형천도 잠시 놀란 듯 멈칫했다. 허나 역시 형천은 대단했다. 그는 잠시 멈칫했을 뿐,다시 부달과 축융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리미의 도끼와 마냥의 창, 와난강과 와난수의 돌 세례와 울타리 위에서 쏟아지는 화살까지도 모조리 방패와 도끼로 튕겨내면서, 형천은 무서운 속도로 달려갔다. 세 명의 도깨비가 형천을 막으려 했으나 형천의 발에 걷어차여 처박혀버렸고, 창을 휘두르며 달려들던 사울아비 두 명은 방패와 도끼에 맞아 두 동강이 나버렸다. 아무도 형천의 앞을 막을 수 없는 듯했다. 그때 한 사람이 울타리 위에서 무서운 기세로 소리를 지르며 뛰어내렸다 그 사람의 기세는 비록 형천일지라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했다. 형천은 잠시 멈추어 서서 의아한 듯 눈을 부릅떴다. “치우....... 우레?” 그 사람은 바로 치우우레였다. 치우우레는 차분하지만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형천을 바라보며 도끼를 든 손에 힘을 주었다. “형천! 더 이상 날뛰게 두지 않는다!” 형천도 웃음기를 거두고 도끼를 움켜쥐었다. 치우우레의 도끼는 형천의 도끼보다는 작았지만 보통의 도끼보다는 네다섯 배나 컸다. 그리고 형천의 뒤를 따라온 리미와 마냥, 와난강과 와난수도 각각 무기를 들고 형천의 주위를 에워쌌다. 형천은 조용히 주변을 살피며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치우우레가 우렁차게 기합소리를 내며 도끼를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축융 측....... 융! 비겁한 놈 덤벼라. 어서 덤벼!” 부달의 몸은 이제 거의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부달의 잔뜩 일그러진 얼굴은 웃고 있었다. 부달은 웃으면서, 소리 지르면서 축융을 향해 걸어갔다. 지나 전사들이 계속 방패를 들고 달려들었지만 부달의 칼이 어김없이 휘둘러질 때마다 전사들이 쓰러졌다. 축융은 계속 불길을 내뿜었으나 부달은 불덩어리가 된 방패로 축융의 불길을 박았다. 팔은 벌써 거의 타들어가서 숯이 될 지경이었지만 부달은 신경도 쓰지 않는 듯했다. 그때 울타리에서 줄을 타고 내려오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무라였다. 무라는 한 손으로는 물동이를 들고, 한 손으로 줄을 타고 내려오다가 반쯤 내려오자 번개같이 몸을 움직였다. 축융은 흰 머리의 무라가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 불덩이를 연신 무라 쪽으로 내쏘았으나 그녀의 번개같은 움직임을 따라 잡을 수는 없었다. 무라는 급히 부달에게 물을 끼얹으려 했으나 방패를 든 지나 전사들과 축융의 불덩이가 자꾸 무라를 방해했다. 무라가 내려가자 울타리 위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용기를 내어 내려오려 했다. 허나 축융이 고개를 들어 한 번 불줄기를 내뿜자 줄에 매달려 내려오려던 사람들은 불에 데어 땅에 곤두박질치거나 불이 붙은 채 비명을 지르며 울타리 위로 다시 올라갔다. 그 틈을 타 무라는 재빨리 부달의 몸에 물을 끼얹었다 그러나 이미 지나 전사들이 축융을 보호하려고 까맣게 몰려오고 있었다. 무라는 부달에게 외쳤다. “피하시오!” 몸에 붙은 불은 꺼졌으나, 부달은 보기에도 끔찍할 정도의 화상을 입고 있었다. 그는 극심한 고통에도 불구하고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축융을...... 막아야........ 하오!” 그러면서 부달은 다시 칼과 방패를 쥐고 소리를 지르며 축융에게 달려들었다. 무라도 움직이려 했지만, 지나 전사들이 마구 달려들기 시작한 마당이라 몸을 삘 수 없었다. 피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부달 때문에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무라는 부달의 뒤를 지켜주며 정신없이 지나 전사들을 쓰러뜨렸다. 축융은 부달이 악귀처럼 다가오자 뚱뚱한 얼굴에 노기를 띠며 소리쳤다. “내 평생 두 번째 보는 지독한 놈이구나! 이거나 먹어라!” 그러면서 축융은 양손을 세우고 입에서 다시 무서운 불줄기를 뿜어냈다. 그러자 부달은 ‘으아악’하는 비명 같은 고함을 지르면서 방패로 불줄기를 받아냈다. 그리고 축융을 향해 미친 듯 달려가기 시작했다. 도리어 축융의 불줄기 때문에 지나 전사들이 접근할 수 없어서 축융과 부달의 거리는 삽시간에 좁혀 들었다. 방패가 무서운 열기를 이기지 못해 부서져 나가면서 부달의 팔이 불덩어리가 되고, 이윽고 부달의 몸 전체가 불에 휩싸였다. 그래도 부달이 멈추지 않고 달려들자 축융은 뒤로 물러서려 했으나 지나족 방패병들에 막혀 물러서지 못했다. 그 순간 부달은 마침내 칼을 내려쳤다. “이........ 놈이!” 부달의 칼은 축융의 왼쪽 어깨에 깊숙이 박혔고, 곧이어 부달은 온몸에 불이 붙은 채 축융의 몸을 껴안고 뒹굴려고 했다. 축융은 재빨리 부달을 쳐냈지만 이미 축융의 몸에도 불이 붙어 옷이 마구 타들어갔다. 축융은 어깨에 피를 철철 흘리면서 부달의 몸을 세게 걷어찼다. 그때 뒤에서 무라가 달려오며 부달의 몸을 받았다. “다 죽여랏!” 축융은 어깨를 감싸 쥐며 외치고는 오른손을 한 번 허공에 휘저었다. 그러자 축융의 몸에 붙은 불들이 손짓 한 번만으로 얌전하게 꺼져 버렸다. 그때 지나 전사들이 우르르 몰려오자 무라는 부달의 몸에 붙은 불을 끄면서 급히 휘파람을 불었다. 그리고 부달의 몸을 들쳐 업고 무라는 흰 머리를 휘날리면서 지나 전사들과 싸우기 시작했다. 허나 부달의 몸 때문에 속도가 떨어진 무라는 차차 밀리기 시작했다. 그때 어디선가 날듯이 달려온 두 개의 흰 그림자가 있었다. 바로 휘파람 소리를 듣고 달려온 개명수 카와 슈였다. 카가 지나 전사들에게 덤벼들어 지나 전사들을 쫓아내는 사이, 슈는 무라에게 달려와 무라를 머리로 들어 등에 얹고는 도망치기 시작했다. 카도 지나 전사와 싸우기보다는 무라의 뒤를 보호하며 도망쳤다. 축융은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이를 부드득 갈았다. “망할 놈들! 하지만 이대로 물러서진 않는다!” 축융은 마지막으로 있는 대로 주술의 힘을 모아 거대한 불줄기를 울타리 쪽으로 뿜어냈다. 고통 때문에 얼굴이 새파랗게 변하고 온몸을 떨면서도 축융은 불줄기를 늦추지 않았다. 울타리 위쪽에서 계속 물을 뿌렸으나 축융의 불줄기는 너무도 강했다. 삽시간에 울타리는 불타오르기 시작했고 물을 뿌려 막으려던 전사들도 열기 때문에 접근할 수 없었다. 울타리가 거대한 횃불처럼 불타오르자 축융은 그제야 털썩 주저앉으며 외쳤다. “내 할 일은 다했다! 뒷일은 형천에게 맡기고 물러선다!” 방패수들은 축융을 에워싸고 서둘러 물러서기 시작했다. 한편 치우우레는 있는 힘과 기술을 다 짜내어 형천과 겨루고 있었다. 사울아비 큰 스승답게 치우우레의 힘과 기술도 대단했으나 형천의 힘을 당할 수는 없었다. 다만 리미와 마냥 등이 계속 형천의 앞뒤를 어지럽히고 있어서 근근이 버티고 있을 뿐이었다. 치우우레의 구리도끼는 형천의 도끼와 벌써 서른 번 이상을 부딪혀 불똥을 마구 튄 탓에 뜨겁게 달아올랐으며 스무 곳이 넘게 이가 빠져 있었다. 형천의 거대한 도끼도 마찬가지였다. 형천이 갑자기 방패를 휘두르며 리미를 맞혀 쓰러뜨리고 방패에 연결된 줄로 마냥의 발을 걸어 넘어뜨렸다. 그때 치우우레가 다시 몸을 빙빙 돌리며 달려들어 형천을 다섯 번이나 연속으로 공격했다. 치우 집안에서만 전해지는 도끼 쓰는 기술의 하나였다. 형천은 급히 도끼를 들어 막았으나 치우우레의 기세에 세 걸음이나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형천은 줄을 당겨 방패를 크게 휘둘러서 치우우레의 뒤를 노렸다. 치우우레가 낌새를 채고 재빨리 옆으로 몸을 날려 형천의 방패를 피하자 형천은 빙긋이 웃었다. “치우우레! 대단하군? 나를 세 발짝이나 물러서게 하다니!” 치우우레는 눈도 깜빡하지 않고 외쳤다. “저 세상까지 물러서게 해주마!” 치우우레가 이번에는 도끼를 옆으로 획획 그어대며 달려들었다. 그때 형천의 눈에 울타리가 불타오르고 축융이 물러서는 것이 보였다. 형천은 도끼와 방패를 휘두르며 치우우레의 공격을 일일이 받아내면서 외쳤다. “쓸 만한 기술이지만 나는 바쁘다!” 형천은 말과 동시에 방패로 치우우레의 도끼를 힘껏 밀어냈다. 치우우레는 버텨보려 했으나 형천의 엄청난 힘을 이겨낼 수가 없었다. 밟고 선 땅이 움푹 들어가면서 치우우레의 몸은 땅에 길고 깊은 도랑을 내며 뒤로 한참이나 밀려버렸다. 치우우레가 밀려나자 형천은 획 몸을 날렸다. 형천의 거대한 몸이 허공을 날아 가볍게 치우우레의 키를 뛰어넘자 치우우레는 급히 도끼를 허공에 저었으나 형천을 맞히지는 못했다. 형천은 급히 죽은 말 한 마리를 들어 어깨에 얹더니 불덩어리가 된 울타리 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화살이 우박처럼 쏟아졌으나 말 시체와 방패에 박힐 뿐이었다. 그것을 보고 치우우레가 외쳤다. “형천을 막아라! 형천을 막아!” 그러면서 치우우레는 형천의 뒤를 쫓아 달렸다. 마냥도 창을 던지고, 와난수와 와난강도 돌을 던져댔으나 형천의 방패에 모두 튕겨나가 버렸다. 형천은 미친 듯 불타는 울타리를 향해 달려갔다. 들고 있던 죽은 말로 불길을 막고, 방패를 머리 위에 많이 화살을 막아내며 울타리에 다가서자 형천은 기합을 넣으며 있는 힘을 다해 울타리를 죽은 말 몸으로 밀어붙였다. 이미 반쯤 불에 타들어간 울타리들이 형천이 밀어붙이는 괴력을 이기지 못하고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울타리 위를 지키고 있던 전사들은 공포를 이기지 못해 울타리에서 뛰어내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다시 한 번 형천이 힘을 주어 밀어붙이자 울타리는 삐걱거리며 기울다가 마침내 굉음을 내며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울타리가 무너졌다!” 순간 형천은 불타오르는 울타리에서 훌쩍 물러나와 의기양양하게 고함을 질렀다. 형천의 고함소리에 지나 전사들도 화답하듯 소리를 질러댔고 소리가 번져나가자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사만 명의 지나족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큰일이다! 울타리가 없으면 적들을 당해내지 못한다. 저곳을 지켜야 한다!” 치우우레는 급히 지나 전사들을 마구 베어 넘기며 울타리가 무너진 쪽으로 달려갔다. 마냥도 그 뒤를 따랐고 와난강, 와난수도 지나 전사들을 마구 베어 넘기며 그리로 달려갔다. 리미는 형천의 방패에 맞아 많이 다쳐서 금방 일어설 수가 없었다. 울타리 안쪽에서는 치우벌과 부소다솔, 부족장들 모두 얼굴색이 변하여 전사와 사울아비들을 모두 불러 무너진 울타리 쪽으로 몰아갔다. 지금은 울타리가 불타오르고 있어 지나족도 접근하지 않았으나 불만 꺼지면 무섭게 몰려들 것이었다. 울타리가 뚫리면, 육만 명이라는 어마어마한 수를 대적하지 못하고 주신, 마갸르, 미아우 부대는 결국 전멸할 수밖에 없었다. 울타리가 뚫린 곳을 어떻게든 지켜야 했다. 그러나 울타리 앞에서는 형천이 무서운 기세로 버티고 서 있었다. 그 누구도 형천을 물리칠 수 있는 사람이 없었고, 형천을 물리치지 않고는 울타리가 뚫리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경험 많은 치우우레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치우우레는 목숨을 걸고 다시 한 번 형천에게 도전해보기로 결심했다. ‘불이 꺼지기 전에 형천을 물리치든지, 아니면 모두 다 죽는 수밖에 없다!’ 울타리 위에서는 울쿠타와 야쿠타가 다시 용감하게 뛰어내렸다. 그리고 치우우레와 마냥, 와난수, 와난강 등이 형천을 에워싸려 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형천이 데리고 있는 다섯 명의 대전사들이 달려 나와 서로를 견제했다. 그때 지나족 쪽에서 유달리 커다란 말을 탄 큰 체구의 지나 전사 한 명이 달려 나왔다. 대뜸 그의 입에서 주신 말이 흘러나왔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치우우레는 갑자기 다리가 부들부들 떨려서 하마터면 들고 있던 도끼를 놓칠 뻔했다. 그 사람은 말을 타고 곧장 어리둥절해하는 지나족들 사이를 가볍게 뚫고 나오더니, 걸치고 있던 지나족 겉옷을 획 찢어 내던졌다. 바로 치우비였다. “비야!” “치우비?” “오라버니!” 치우우레, 형천, 울라트의 목소리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치우비는 자신의 말, 구름의 등에서 껑충 뛰어내려 치우우레와 형천 사이를 막고 섰다. 치우비의 손에는 커다란 구리칼이 들려 있었다. “아버님, 그간 걱정 많으셨지_aJ 제가 왔습니다. 저, 비가 왔습니다.” “비야! 정말....... 너구나! 너.......” 치우우레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외치자 치우비는 씩 웃으며 말했다. “우선 형천님과 이야기 좀 해야겠습니다.” 치우비는 담담한 표정으로 형천을 향해 돌아섰다. 몇 년이 지나는 사이 치우비는 키가 더 커졌고 체구도 더 우람해졌다. 형천보다는 작았지만 기세만큼은 그다지 뒤지지 않았다 치우비의 조용한 눈에는 불똥이 튀는 듯했다. 형천은 그것을 보고는 껄껄 웃으며 외쳤다 “하핫, 치우비. 네가 왔구나. 그래, 잘되었다.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오리라 생각했지!” 그리고 형천은 왼손의 방패와 오른손의 도끼를 다시 한 번 굳게 움켜쥐었다. 치우비도 조용히 커다란 구리칼을 양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마냥과 와난강이 앞으로 달려 나가 치우비를 도우려 하자 감격하여 울먹이는 표정이던 치우우레가 위엄있게 그들을 제지했다. “저 녀석, 다 컸다. 맡겨보자. 우리는 다른 놈들을 맡으면 될 것 같구나.” 노련한 치우우레는 치우비가 결코 형천에 비해 눌리지 않을 것 같다는 감을 잡은 것이다. 형천도 처음으로 긴장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형천이 조용히 말했다. “내 적수는 세상에 다섯도 안 된다. 너도 그중의 하나가되었구나. 자, 와라.” 형천이 말하며 도끼를 들어올리자 치우비는 담담한 표정으로 칼을 천천히 들어올려 약간 비틀었다. 몹시 느린 동작이었으나 무척 자연스러웠다. 그것을 본 형천은 얼굴을 굳혔다. ‘기술이 많이 늘었군! 쉽게 이기긴 힘들겠구나.’ 다음 순간, 형천은 왼손의 방패를 치우비에게 날리면서 도끼를 돌리며 짓쳐들어왔다. 치우비는 방패가 날아오는데도 꼼짝도 않고 서 있다가 방패가 막 와 닿을 순간에 가볍게 칼을 세워 앞으로 내리그었다. 순간 형천은 급히 왼손을 당겼으나 형천의 방패 한 귀퉁이는 치우비의 칼에 맞아 부서져 나가버렸다. 형천은 높이 뛰어오르며 도끼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맹렬히 휘둘러 치우비를 덮쳐갔다. 형천의 도끼에서는 질풍 같은 바람소리가 나고 도끼의 그림자는 치우비의 몸을 온통 뒤덮는 것 같았다 다음 순간, 쨍쨍하는 소리가 이어지듯 요란하게 울리고, 치우비와 형천의 몸은 무기들끼리 부딪혀 튀어 오른 불꽃들로 거의 가려지다시피 했다. 형천의 발이 땅에 닿는 순간, 땅이 파이면서 주변의 사람들은 발밑이 흔들리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런 무서운 기세로 형천은 치우비를 몰아붙이며 계속 달리듯 앞으로 나갔다. 그러나 치우비는 담담한 표정 그대로 줄곧 뒷걸음질로 달리며 무시무시한 형천의 도끼를 끊임없이 칼로 막아내고 있었다. 형천이 밀어붙이는 속도와 치우비가 물러나는 속도는 점점 빨라졌고 도끼와 칼이 격렬하게 부딪히는 속도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라졌다. 두 사람이 발을 디딜 때라 다 땅이 쿵쿵 파이며 수많은 질은 발자국을 남겼다. 튀어 오르는 불꽃들을 계속 튕겨내면서 두 사람은 마 치 유성이 불꼬리를 끌고 날아가는 것처럼 무섭게 움직였다. 치우우레나 마냥 등은 물론이고 지나족의 다섯 대전사들과 다른 전사들마저도 입을 딱 벌리고 두 사람의 격렬한 대결을 흘린 듯 바라보았다. 치우비를 항상 보아왔던 울라트나 마량마저도 이런 무서운 대결은 본 적이 없어서 숨을 죽였다. 그러다가 치우비가 울타리 쪽으로 몰리게 되자 마냥과 와난강은 놀라서 소리를 지르려 했다. 그때 치우우레와 와난수가 각각 두 사람을 제지했다. 치우우레와 와난수는 수없이 많은 싸움을 겪어온 사람들이라 똑같이 생각했던 것이다. 좀더 두고 보아야 안다. 치우비는 아직 조금도 칼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저렇게 칼을 쓰면서 울타리에 몰리는 것을 모를 리 없다. 과연 치우비는 울타리에 닿아 막히기 직전, 크게 한 번 호흡하면서 더욱 빠른 속도로 칼을 휘두르며 도리어 앞으로 치고 나왔다. 형천은 치우비가 갑자기 공세를 취하자 급히 도끼를 휘저으면서 방패를 한번 크게 휘둘렀다. 형천이 비록 방패로 공격을 했지만, 큰 범위로 공격을 했기에 자신의 도끼도 뒤로 늦출 수밖에 없었다. 치우비는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훌쩍 몸을 날려 형천의 방패를 뛰어넘으며 그의 뒤로 사뿐 내려섰다. 순간 형천은 갑자기 크게 기합을 넣으면서 몸을 뒤로 꺾어 재주를 넘으면서 도끼를 허공으로 내던졌다. 무시무시할 정도로 큰 도끼가 붕붕 돌며 날아들자, 치우비도 약간 당황한 듯, 공중에서 재빨리 몸을 틀어 간신히 도끼를 피했다. 곧이어 형천은 또다시 공중제비로 한 바퀴 넘고는 훌쩍 몸을 날려, 날아가던 도끼자루를 다시 붙잡고 치우비의 머리를 크게 내려찍으려 했다. 치우비는 급히 칼을 들어 형천의 도끼를 막았으나, 다음 순간 쨍 소리와 함께 치우비의 칼이 부러지고 말았다. 형천의 도끼도 한 귀퉁이가 떨어져 나갔지만, 그래도 온전했다. 두 사람의 힘을 버티지 못해 비교적 가느다란 치우비의 칼이 먼저 부러져버린 것이다. 비록 칼이 부러졌으나 치우비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도리어 왼손으로 부러진 칼날을 잡아 형천의 얼굴을 항해 던졌고, 형천은 황급히 방패를 당겨서 부러진 칼날을 막아냈다. 치우비는 부러진 칼을 미련 없이 던져 버리고 아직도 불타고 있는 무너진 울타리 쪽으로 급히 몸을 날렸다. 그러고는 울타리 기둥으로 세워진 커다란 통나무 하나를 집어 들었다. 치우비는 불붙은 통나무를 마치 칼이나 창처럼 사용하여, 형천 쪽으로 들이밀었다. 형천은 재빨리 방패로 막으며 도끼로 통나무를 내려찍었다. 불붙은 통나무를 도끼로 찍어 내리자 수많은 불똥과 불티가 사방에 튀어 올랐다. 치우비는 조금도 기세를 늦추지 않고 다시 계속 통나무로 형천을 찔러 들어갔다 형천은 계속 통나무를 찍어버렸으나 불티와 불똥 때문에 잠간 시야가 어지러워졌다. 치우비는 바로 그 순간을 노리고 있었다. 치우비는 번개같이 품에서 뭔가 무기를 꺼내더니 형천을 향해 휘 둘렀다. 형천이 급히 도끼를 들어 치우비의 무기를 막는 순간, 별안간 ‘쨍’ 하는 소리와 함께 형천의 도끼가 둘로 쪼개지고 말았다. “이럴 수가!” 형천은 깜짝 놀랐다. 치우비의 손에 들린 것은 번쩍거리며 빛나는 은색의 작은 단검이었다. 아무리 치우비의 힘이 세다고는 하나 그런 작은 칼로 어떻게 거대한 구리도끼를 두 토막 낼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치우비는 계속 그 단검을 휘두르며 형천에게 짓쳐들어왔다. 형천은 부서진 도끼와 방패로 다시 치우비의 칼을 막았다. 단검은 남은 도끼날을 다시 둘로 쪼개고 방패의 귀퉁이도 잘라버렸다. 형천은 부서진 도끼와 방패까지 던져 버리고 뒤로 급히 물러서면서 치우비의 손목을 잡으려 했다. 치우비는 손목을 틀어 피하면서 형천의 팔을 단검으로 그으려 했다. 둘은 한참을 겨루었으나 결국 치우비는 형천을 찌르지 못하고 형천도 단검을 빼앗지 못했다. 다만 형천의 팔은 단검에 몇 번 스쳐서 피투성이가 되었다. 그런데 돌연 공격해 들어오던 치우비가 훌쩍 뒤로 물러서며 외쳤다. “형천님! 괜찮습니까?” 형천은 노해서 부르짖었다 “헛소리! 네 걱정 따위는 필요 없다! 계속 해보자!” 치우비는 이마에 땀이 흐르고 온몸도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으나 이내 수줍은 듯 살짝 웃으며 말했다. “형천님 이야기가 아닙니다. 형천님 부하들 이야기” 형천은 그제야 놀라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자기편 진의 뒤쪽에서 연기가 마구 솟아오르고 있었고 뒤쪽의 부하들이 갈팡질팡하며 혼란에 빠져 있는 것 같았다. 형천이 놀라서 눈을 부릅뜨자 치우비가 말했다. “형천님, 부하들을 살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무슨 헛소리냐?” 형천이 다시 외치자 치우비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일이 급하여 저 혼자 달려오긴 했습니다만, 저 뒤쪽에서 왜 연기가 나는지 아십니까? 제 형님이 뒤쪽에 있습니다. 치베도, 알한도, 그리고 작은 주신의 전사 오백 명이 있지요 연기가 많이 오르는 것을 보니, 이미 형천님 부대의 먹을 것은 다 타버린 것 같습니다.” 형천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뭐....... 뭐라고? “그뿐만이 아닙니다. 형천님, 유망님을 잊으셨습니까? 이곳은 지나족의 땅이 아닙니다. 제대로 된 대장도 없이, 만 명 정도 전사를 모아 두었다고 안심하시면 안 되지요 이곳의 땅, 물, 짐승, 사람, 어느 것 하나 지나족을 반기지 않습니다. 여기 살던 모든 부족들이 다 죽거나 도망간 것이 아닙니다. 글쎄요, 마갸르나 미아우는 모두 유망님을 미워하던데, 지금까지도 유망님이 무사한지 모르겠습니다. 너무 마음 놓으신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형천의 이마에서 갑자기 땀이 물줄기처럼 흘러내렸다. “염제 신농님을? 하지만 누가!” 치우비는 짐짓 여유있는 표정으로 천천히 말했다. “제 형님은 이리로 달려오기 전에 먼저 미아우의 작은 마을을 찾아갔습니다. 그래서 미아우 말과 마갸르 말을 잘하는 사람들을 모아 사방으로 보냈죠. 형천님, 마갸르, 미아우는 그리 간단한 부족들이 아닙니다. 다 죽이고 항복받았다고 여기셨겠지만, 숨어서 이를 갈던 사람들이 의외로 많더군요. 서로 뭉치지 못해서 그렇지, 막상 뭉치니까 열천 명도 더 되더이다. 전부 목숨을 걸고, 죽더라도 지나족 한 명이라도 죽이고 죽겠다는 사람들뿐입니다. 지나족은 너무 원한을 많이 샀더군요. 그들이 지금 유망님을 만나러 갔답니다......” “거짓말! 거짓말이다!” 형천이 미친 듯 소리를 치자 치우비는 공손한 태도로 조용히 되받았다. “형천님, 지금 비록 이렇게 싸우고는 있지만, 저희 형제는 형천님의 은혜를 잊은 적이 없습니다. 형천님께 받은 은혜를 보답하는 마음으로, 지금 가시겠다면 막거나 싸우려 들지 않겠습니다. 먹을 것도 없고, 화살도 무기도 없이 싸울 수 있다면 말리지 않겠습니다만, 저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형천은 잠시 눈을 번득였으나 이내 잔잔한 눈빛이 되어 말했다. “그래, 좋다! 너희 형제, 훌륭하게 컸구나. 이번에는 내가졌다. 하지만 다음에는 이렇게 간단하지 않을 것이다.” 치우비는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누가 형천님을 가볍게 상대할 수 있겠습니까?” 형천은 가볍게 웃어 보이고는 여전히 늠름한 태도로 뒤로 물러났다. 지나 전사들도 형천을 따라 물러서기 시작했다. 치우비의 말을 듣자 치우우레는 지나족에게 화살을 쏘지 말라고 신호했고 지나족들도 풀이 꺾인 듯 공격하려 들지 않았다. 형천은 뒤쪽에서 달려온 부하들 몇을 불러 이야기를 들어 보더니 곧 침울한 표정이 되어 모두 후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치우비의 말은 사실이었다. 아무도 모르고 있었지만, 대담하게도 치우 형제와 부하들은 이미 나흘 전, 형천의 부대가 축융의 부대와 합류하여 진격을 시작할 때부터 지나족들 속에 섞여 있었다. 형천의 부하들은 그들이 축응이 새로 뽑은 부하들인 줄 알았고, 축융의 부하들 은 그들을 형천의 부하들인 것으로 알았던 것이다. 그들은 치우천의 명령에 따라 참을성 있게 기다리다가 마침내 싸움이 거세지자 일제히 활동을 개시하여, 형천 부대가가지고 있던 식량과 화살, 막사 등에 모조리 불을 질러버렸다. 가장 뒤쪽에서 식량을 지키던 지나 전사들은 몇 되지도 않았던 터라 간단하게 당해버렸다. 다만 축융의 활약 때문에 생각보다 빠르게 울타리가 무너지자, 치우천은 그것을 막기 위해 서둘러 치우비를 보내고 난 다음 부하들과 함께 사방으로 흩어져 숨어버렸다. 형천은 식량과 가죽 등 모든 물자들이 불더미에 휩싸인 것을 보자기가 꺾여버렸다. 물통과 물주머니들조차 다 망가져 있었다. 생각 같아서는 지금 당장 총공격을 하여 휩쓸어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이미 사기가 꺾인 판에 공격하라는 것도 무리였고, 치우천이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있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게다가 공격해도 하루 만에 완승을 거둔다고 장담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며칠만 싸움을 끈다면 지나 전사들은 모두 굶주려서 전멸될지도 몰랐다. 더구나 치우비의 말대로라면, 유망도 위험할 수 있었다. 형천은 입술을 깨물며 자책했다. ‘정말 귀신같은 꾀다! 완전히 당했다! 우리 편 수만 믿고 너무 방심했어! 할 수 없다. 일단 급히 유망님께 돌아가 보아야 한다. 유망님은 무사하실까? 그곳의 식량과 물건들까지 당했다면, 도저히 더 나아갈 수 없다. 공상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어서 물러서야 한다.’ 형천은 마침내 결심을 하고 총퇴각을 명했다. 치우우레는 뒤를 쫓지 않았다. 형천의 군대는 아직도 수적으로 우세하고 패해서 물러서는 것도 아닌 만큼 사기가 많이 꺾인 것도 아니니, 굳이 뒤를 쫓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형천의 군대가 썰물처럼 밀려가자, 마갸르족과 미아우족, 그리고 주신 사울아비들까지 모두 큰 소리로 환호하며 기뻐했다. 멀리서 지켜보던 수많은 전사들은 치우비가 혼자서 형천과 겨루어 형천의 군대 전부를 쫓아버렸다고 떠들어댔다 아들과 다시 만나게 된 치우우레의 기쁨은 뭐라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 기쁨은 마침내 치우천을 만나게 되었을 때 두 배로 커졌다. 치우천은 부하들과 함께 근처에 숨어 있다가, 지나족이 물러가고 난 후에 치우우레를 찾아온 것이다. 아저씨뻘 되는 치우벌도 몹시 기뻐했고 부소다솔이나 사울아비들도 뛸 듯이 기뻐했다. 부족장들도 태산 회의 때 이름을 떨쳤다가 사막에서 죽었다고 전해지던 치우 형제가 살아 돌아와 도움을 주자 크게 기뻐하며 잔치를 베풀려 했다. 그러나 치우 형제는 먼저 상처를 입은 거서기, 삼, 부달등을 찾아가 위로했다. 삼과 마파람은 제법 기력을 회복했고, 거서기는 많이 다쳤으나 조금 지나면 회복될 듯했다. 다만 부달만은 온몸에 너무 큰 화상을 입어 숨이 간들간들했고, 낫는다 해도 흉측한 몰골이 될 것이었다. 그러나 부달은 그런 와중에도 의식을 잃지 않고 치우 형제에게 타버린 손을 내밀며 아주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돌아올........ 줄 알았다. 반갑다....... 반가워.........” 치우천과 치우비는 반쯤 숯덩이가 된 부달의 손을 살짝 잡고 눈물을 글썽였다. 거서기와 삼, 마파람은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치우 형제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부달은 죽지 않을 거야. 부달은 사울아비 중의 사울아비다! 저 정도로 죽을 리 있나?” 삼이 호탕하게 말하자 마파람은 미소만 지으며 치우 형제의 손을 힘있게 잡았다. 치우비는 목이 메어 어서 나으라는 말밖에 못했고 치우천은 미소를 지으며 화답했다. “그래, 벌써 죽을 수는 없지. 우린 젊고, 할 일이 아직 많으니까!” 그날 밤은 큰 잔치가 벌어졌고, 그 자리에서 치우 형제는 부족장들과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었다. 말재주 좋은 알한이, 치우천은 이제 작은 주신이라는 부족의 족장이 되었음을 알렸다. 사람들은 모두 치우천이 단 몇 년 사이에 작은 부족을 크게 일으킨 것에 놀랐고, 따르는 부하들이 비록 수는 적지만 하나같이 막강한 전사라는 것에 크게 감탄하여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특히 치우천은 모두를 위기에서 구했고 이제는 작은 주신의 부족장이었으므로 나이는 젊었어도 몹시 정중한 대접을 받았다. 아버지인 치우우레마저도 정중한 태도를 취해 치우천은 되레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아버지, 이러실 것까지는 없습니다.” 치우우레가 근엄한 표정으로 딱딱하게 대답했다. “치우천님은 내 아들이기는 하나 엄연한 부족장이니 이런 자리에서는 함부로 대할 수 없소이다. 치우천님이 머리를 낮추는 것은 작은 주신 전체의 머리를 낮추는 것이니 그리 하시면 안 되오.” 언제나처럼 예의에 어긋남이 없는 아버지의 태도에 치우천은 웃으며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잔치 분위기가 무르익고, 치우천과 부하들이 부족장 및 대장들과 대강 인사를 마치자 아사큔이 물었다. “마갸르 친두 부족장 아사큔이 말하오. 치우천 족장께서 도와주신 덕에 형천이 물러갔소이다만, 곧 다시 쳐들어올지 모르니 대책을 마련해야 하지 않소?” 치우천은 여전히 싱그러운 미소를 보이며 차분히 대답했다. “작은 주신의 부족장, 치우천이 말합니다. 형천은 쳐들어오지 못할 것입니다. 아니, 제 생각대로라면 아마 공상까지 물러날 것입니다.” 부족장들은 웅성거리면서 의아해했다. 이번에는 와난수가 다시 물었다. “마갸르 나달타족의 와난수가 말하오. 형천이 비록 물러가기는 했다지만, 전사들의 수는 아직도 셀 수 없이 많은데, 왜 공상까지 물러난단 말이오?” 치우천이 차분하게 설명했다 “지나족은 많은 전사를 데리고 너무 넓은 땅을 빼앗았습니다. 더구나 그들은 마갸르족과 미아우족을 몰아내려고 지나는 마을들마다 모조리 불 지르고 사람들을 잡거나 내쫓았습니다. 물론 그 땅들을 차지하기 위해 한 짓입니다만 그들은 큰 실수를 한 셈이지요.” “왜 실수란 말이오?” 와난수가 묻자 치우천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들은 칠십 천 명이라는 엄청난 수의 전사들을 데리고 있습니다. 정말 그 수가 많아 싸워서는 이길 수 없을 정도죠 허나 그 많은 전사를 거느리려면 그만큼 먹을 것과 물건들 역시 많이 필요합니다. 헌데 지나족은 도중에 있는 마을을 모두 태우고 밭을 파헤쳤습니다. 물론 살던 사람들을 쫓아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만, 그 때문에 지나족 스스로도 먹을 것을 구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고 특히 보급 일을 주로 해온 부소다솔은 손뼉을 치며 외쳤다. “그렇소, 그렇소. 나는 그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잘 안다오. 사람들은 전사만 많으면 이기는 것이라 생각하는데, 많은 전사를 부리기는 정말 힘든 일이라오!” “부소다솔님 말씀이 맞습니다. 백 명이나 오백 명으로 된 부대는 좀 큰 부락에서 어느 정도 먹을 것과 물건을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몇십 천 명이나 되는 부대를 한데 모으면, 그 수가 바로 문제가 됩니다. 몇십 천 명이 한꺼번에 몰려가 밥을 먹을 수 있겠습니까? 큰 마을이라도 다음해에 뿌릴 씨앗까지 다 먹어도 모자랄 것입니다. 그게 바로 많은 군대의 약점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저 군대는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요?” 와난수가 다시 묻자 치우천은 살짝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당연히 어느 정도는 먹을 것을 들고 왔고, 나머지는 공상에서부터 계속 날라 오는 중입니다. 대강 살펴보니 형천의 부대는 한 스무날 먹을 것 정도를 가지고 있었고, 보름에 한 번 정도 다른 부대가 먹을 것을 날라 오는 듯하더이다.” “마갸르 나달타족의 와난강이 말합니다. 치우천 족장님. 그러면 아까 작은 주신 군대가 태워버린 것이 그것입니까?” 와난수의 아들 와난강의 물음에 치우천이 웃으며 대답했다. “전부는 아닙니다. 한 열흘치 되겠지요. 그리고 유망이 있는 곳에는 먹을 것이 더 많이 쌓여 있겠죠. 허나 지금쯤이면, 그것도 다 없어졌을 것입니다.” “어떻게 아십니까?” “저는 지나족 속에 숨어들어 가기 전에, 흩어진 전사들을 모았습니다. 아, 그리고 지나족들이 잡아 노예로 팔아넘기려던 사람들도 꽤 많이 구해냈죠 지나족들은 자기들이 짓밟은 땅에 마갸르나 미아우족이 하나도 없을 거라 생각한 모양입니다만, 너무 자만했습니다. 의외로 도망치거나 숨은 사람들이 아주 많더군요.. 들을 모아, 유망이 머무는 곳을 마구 습격해서, 싸움을 걸지 말고 불만 지르고 도망치라고 일러주었습니다. 모르긴 해도 그들 모두는 복수하기 위해서라면 목숨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한두 무리가 노리는 것도 아니고, 길을 잘 아는 수백의 무리가 불을 지르러 숨어드는 판이니, 지나족은 막을 수 없을 입니다. 먹을 것이 다 타버리면 지나족은 절대 버틸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다들 치우천에게 감탄을 금치 못했다. 치우천은 하나의 싸움에 매달리기보다는, 상황을 넓게 보고 판단을 했는데 그때까지 그런 전략적 사고를 한 사람은 별로 없었던 것이다. 허나 와난강은 예리하게 한 가지를 지적했다. “그러나 듣자하니 창힐이 공상에 큰 도시를 건설했다고 합니다. 거기서 보름마다 식량을 날라 온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 식량이 계속 도착하면, 지나족은 다시 힘을 내서 싸우러 올 것입니다.” 치우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말씀입니다. 와난강님도 아주 생각이 깊으시군요. 그러나 그것도 준비해 두었습니다.” 와난강도 이번에는 정말 깜짝 놀랐다. “벌써요?” “아까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지나족은 이미 자기들이 빼앗은 땅에는 아무도 없다는 큰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미 작은 주신에 사람을 보내, 몇 갈래로 숨어서 먹거리를 나르는 지나족을 막고 먹거리를 모두 빼앗거나 불태우라는 명령을 내려두었습니다. 그들이 성공한다면, 더 싸울 필요도 없이 유망의 부대는 공상까지 도망칠 것입니다.” “먹거리를 나르는 지나족의 수도 만만치 않을 텐데_aJ 그들을 어떻게 이기겠습니까? 실례인지 모릅니다만 작은 주신의 전사들이 그렇게 많습니까?” 와난강이 묻자 치우천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백 명씩,세 부대를 보냈습니다. 작은 주신의 전사들은 그렇게 많지 않지요.” “고작 이백 명으로 수많은 지나족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치우천은 딱 잘라 말했다. “이길 수 있습니다!” “작은 주신의 전사들이 강하다는 것은 잘 압니다만.......지나족의 수십 천 명 먹거리를 나르는 사람들이라면 적어도 몇 천 명, 아니, 몇 십 천 명에 가까울지도 모릅니다. 너무 그 수가 차이나지 않습니까?” 와난강의 집요한 물음에 치우천은 막힘없이 술술 대답했다. “말씀하신 대로 수십 천 명의 먹거리를 나르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물론 사람 수는 많겠지요. 허나 비록 수천 명, 수십 천 명이 나른다 해도, 모두 다 짐에 치어서 헉헉거리고 있을 것입니다. 더구나 지나족들은 땅을 전력 차지했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누가 자신들을 공격한다고는 생각도 하지 않고 있을 것입니다. 도끼나 방패나 창도 제대로 들고 있지 않을 것입니다. 더구나 소나 돼지, 양 떼를 잔뜩 몰고 있을 것입니다. 한번 습격만 받으면, 대번에 혼란에 빠져 제대로 싸움 한 번 못할 것입니다.” 와난강은 진심으로 감탄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치우벌이 나섰다. “지나족이 그렇게 착각한다는 것은 어떻게 아시오?” “지나족이 착각하지 않았다면, 칠십 천 명의 군대를 한데 모으는 바보짓을 했을 리 없습니다. 그렇게 많은 전사가 있다면 한 오십 천 명 정도만 모으고, 나머지 이십 천 명 정도는 흩어져서 여기저기를 지키게 하여 뒤를 돌보게 했어야죠. 마을을 그대로 두고, 계속 군대를 남겨 먹거리를 나르는 부대를 지키게 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급히 밀고 나가는 데에만 신경을 쓰며 서두른 나머지 뒤에 군대도 남기지 않았고 마을도 전부 불태워버렸습니다. 이젠 아무도 없는 빈 땅이 되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단 하나 문제는, 제가 보낸 부대들이 먹거리를 나르는 지나족 부대를 찾아내느냐 못 찾아내느냐 정도입니다. 저는 거의 열에 아홉은 찾아낸다고 생각합니다만.......” 치우천이 논리정연하게 설명하자 모든 부족장들과 대장들은 화색이 만면했다. 그러한 대국적 견지에서 전략을 세우는 일은지금까지 듣지도 못했던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놀라움과 감탄은 더욱 더했다. “대단합니다! 정말 대단합니다!” 그날 잔치는 몹시 흥겹게 끝났다. 대부분의 부족장들은 이제 싸움이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하여 한껏 들떠 있었다. 잔치가 끝난 후에야, 치우 형제는 아버지 치우우레를 만나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먼저 치우천이 입을 열었다. “아버님, 유망이 물러가면 신시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그 말에 치우우레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그래야지! 유망이 물러간다면 네 공이 으뜸이다! 더구나 너는 작은 주신의 부족장이니 누구도 너를 어찌할 수 없을 거다.” “한웅님도 뵈올 수 있을까요?” “한웅님은 몸이 아프시지만...... 이번 같은 일에는 반드시 만나주실 게다. 보통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면 그때 여기 계신 부족장들도 모두 같이 가서 한웅님을 뵙게 해주십시요. 아버님께서 부족장들께 권해 보십시오.” 치우우레는 좀 의외라는 듯 눈을 굴렸다. “그거야 누가 마다하겠느냐? 그래 보마. 그런데 굳이 왜 그래야 하느냐?” 치우천은 씁쓸히 웃으며 대답하지 않았으나 다만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래야 제가 죽지 않을 것입니다, 아버님.’ 치우천의 예상은 그대로 적중했다. 형천이 대군을 이끌고 떠난 후 유망의 본진은 완전히 초토화되어 있었다. 사상자는 별로 없었으나 막사며 창고며 식량을 쌓아둔 곳들이 모두 불에 타버린 것이다. 매일 밤만 되면 여기저기서 수백 명의 전사들이 숨어들어와 불을 질러대는 것을 도저히 막을 수 없었다. 그들 대부분은 지나족에게 마을과 가족을 잃고 처절한 복수심에 불타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화살을 수십 개나 맞으면서도 끝내 횃불을 던져 불을 지르고 웃으며 죽어가는 자도 있었고, 자기 몸에 불을 붙인 채 뛰어들어 불을 지른 자도 있었다. 심지어는 여자나 조그마한 아이들마저도 숨어들어 불을 질러댔다. 여자들은 지나 전사를 유혹하여 방심시킨 뒤 보초를 살해하고 불을 지르기 일쑤였고 꼬마 아이들은 생각도 못한 조그마한 틈새나 개구멍으로 파고 들어왔다. 더구나 유망은 아직도 약 기운이 가시지 않아 묶여 있는 판이니 그를 대신해 제대로 지휘할 대장조차 멀었다. 굶주림에 지친 형천의 부대가 간신히 본진에 도착했을 때 유망의 부대는 그 형천의 부대보다도 더 거지꼴이 되어 있는 실정이었다. 게다가 축융은 상처가 덧나서 앓아눕고 말았다. 형천은 이를 갈면서 주변에 엉성하나마 울타리를 급히 치고 경계를 엄중히 했으나 그래도 밤마다 산발적으로 벌어지는 습격을 다 막아낼 수는 없었다. 굶주림과 피로에 지쳐 지나 전사들은 급속도로 쇠약해져 갔다. 그런 판국에 믿어지지 않는 소식이 형천에게 전해졌다. 공상에서부터 수많은 식량을 싣고 오던 지나족의 부대가, 도중에 습격을 받아 뿔뿔이 흩어져버렸다는 소식이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두 개의 부대가 흩어져버린 것이다. 형천은 고민에 싸였다. ‘창힐이 다시 식량을 보내오긴 할 것이다. 창힐도 바보는 아니니, 이번에는 전사들을 많이 딸려 보내겠지. 그러나 그것이 도착하려면 두 달도 넘게 걸린다. 두 달 동안 여기서 무엇을 먹고 버틴단 말인가? 우리가 잘못했다. 크게 잘못했다. 뒤를 든든히 지키지 않고 너무 앞으 로만 나갔구나. 다 내 책임이다. 허나 여기서는 일단 물러설 수밖에 없다.’ 공상으로 돌아가서, 다시 준비를 갖추고 오는 마침내 결심한 형천은 여전히 묶여 있는 유망에게 가서 엎드려 울며 고했다. “염제 신농께 아칩니다. 이제 물러서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저 형천이 재주가모자라고 생각이 짧아서, 염제 신농님의 이름을 더럽히고 지나족을 지게 만들었습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유망은 비록 아직도 묶여 있기는 했으나 전에 비하면 상당히 제정신이 돌아온 것 같았다. 유망은 도리어 평안한 눈으로 형천을 내려다보며, 잠시 생각하다가 눈을 감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것을 보고 형천은 목을 놓아 울며 외쳤다. “억울하고 억울한 일입니다! 우리의 힘은 충분하지만, 녀석들의 얕은꾀에 빠졌습니다. 염제 신농께서는 공상으로 돌아가시어, 이 원수를 반드시 같아주소서!” 그러면서 형천이 칼을 빼 자결을 하려 하자, 유망은 급히 몸을 꿈틀거리면서 고개를 마구 가로저었다. 옆에서 유망을 지키던 대전사들도 재빨리 달라붙어 형천을 말리려 했으나, 형천은 무서운 힘으로 대전사들을 떨쳐내며 외쳤다. “나는 염제 신농님께 반드시 이기겠다고 약속했다! 약속을 지키지 못했으니 죽어 마땅하다!” “그러지 마십시오! 형천님! 형천님이 이러시면 우리들을 누가 다스립니까?” 대전사들이 울며 매달렸으나 형천은 듣지도 않고 유망을 보며 외쳤다. “염제 신농이시여! 어리석은 저를 아까워 마십시요. 염제 신농께서 스스로 나서신다면, 마갸르나 미아우는 물론 주신도 염제 신농님의 상대가 못되나이다! 이, 형천, 죽음으로 맹세하오니 염제 신농께옵서는 반드시 이기십시오! 반드시 이기십시오!” 형천은 진심으로 외치면서 막 칼을 목에 찔러 넣으려 했다. 그때 한 명의 대전사가 머리를 써서 재빨리 유망의 입을 막은 천 조각을 빼냈다. 그러자 유망은 찢어질 듯한 목소리로 크게 외쳤다. “형천!” 유망의 낯익은 목소리에 형천은 움찔했다. 그러자 유망은 아주 권태로운 듯한, 그 특유의 목소리로 빈정대듯 말했다. “네가 언제 약속을 했어? 난 못 들었는데.......?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장난 치냐? 누구 앞에서 칼을 뽑는 거야?” 비록 빈정대는 듯한 말투였으나, 유망을 누구보다 잘 아는 형천은 그 안에 깃들여 있는 뜻을 깨닫고는 급히 고개를 숙이며 외쳤다. “죄송합니다! 염제 신농이시여!” 형천은 고개를 숙인 채 엉엉 목을 놓아 울었다. 그러자 유망은 슬며시 눈물을 한 방울 떨구다가 차분히 말했다. “머저리같이 왜 울어? 누가 죽었어? 전사들은 아직 멀쩡한데, 너도 멀쩡하고 나도 멀쩡한데 왜 우는 거야? 형천...... 땅은 다시 빼앗으면 되는 거야. 머저리같이 굴지 마.” 형천은 감격하여 고개를 더 깊이 숙였다. 그러자 유망은 다시 빈정대듯 말을 이었다. “아, 지겹군, 그래. 우리 공상으로 일단 돌아가자구. 마갸르 미아우놈들이 다시 마을을 세우기를 기다렸다가, 또 밟아주면 더 재미있지 않겠어? 그렇지? 하하하.” “그....... 그렇습니다. 공상으로 돌아가십시다.” 형천은 간신히 울음을 멈추고 유망을 묶은 줄을 풀려고 했다. 그러자 유망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아직 안 돼! 바보 이 형천...... 날 다시 바보로 만들 거야?” 형천은 눈물을 쓱쓱 닦아낸 다음, 대전사의 손에서 다시 천 조각을 받아들고는 유망의 입을 조심스레 막았다. 유망은 만족스러운 듯 옅은 미소를 띠며, 입이 막히기 전에 마지막으로 말했다. “공상에 도착할 때까지는 풀지 마.......” 형천은 유망의 입을 막은 뒤, 거친 발걸음으로 막사를 나서며 커다랗게 외쳤다. “모두 공상으로 돌아간다!” 그러면서 형천은 속으로 부르짖었다. ‘이것으로 끝난 게 아니다. 치우천...... 치우비...... 주신....... 나는 반드시 다시 올 것이다. 반드시 너희를 이기고, 이 땅을 차지할 것이다! 그때까지 기다려라! 기다려라!’ 맥달의 고향 유망의 대군이 공상으로 철수하고 있다는 소식은 며칠이 지나자 치우우레와 치우천 등에게도 전해졌다. 많은 마갸르와 미아우 부족장들은 환호하면서 지나족을 막아냈다고 좋아서 떠들어댔다. 치우천은 빙긋이 웃으며 차분하게 그들을 지켜보다가 어느 정도 주변이 조용해 진 후 입을 열었다. “유망은 다시 옵니다. 허나 먼저 공상까지 가야하고 다시 준비를 한 다음 와야 할 테니 올해는 움직이지 못할 것입니다. 겨울을 공상에서 나고, 내년 봄에 움직일 것이니, 그전에 여기서 그들을 막을 준비를 해두어야 합니다.” “우리 땅으로 돌아가서 지키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몇몇 부족장들의 말에 치우천은 웃으며 타이르듯 말했다. “일단 돌아가셨다가, 지나족이 다시 움직인다는 소리가 들리면 바로 이곳으로 모여야 합니다. 언제든지 떠날 수 있도록 준비해두었다가 말이죠. 집 같은 것을 너무 공들여 짓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 땅을 그냥 비워둔단 말이오? 또 지나족들에게 짓밟히게 한단 말이오?” 부족장 중 한 명이 투덜대자 친두 부족장인 아사큔도 한마디 거들었다. “아예 지나족 땅과 마주치는 곳에서 지나족을 막는 게 어떻겠소?” 치우천은 딱 잘라 말했다. “그래서는 지나족을 막을 수 없습니다. 시나족의 수는 너무도 많고 형천의 전사들은 용감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렇게 몰아두었다가 한 번에 지면 끝장입니다. 지난번에 뒷길을 잘 지켜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으니, 이번에는 형천도 마구 들어오지 못할 것입니다. 뒤에 많은 전사를 남기면서 올라오겠죠. 여기쯤 오면, 기세도 좀 꺾이고 그 수도 반 정도로 줄어들 것입니다. 그때 이겨야 합니다. 유망은 물러갔지만, 크게 진 것이 아닙니다. 내년에는 더 무섭게 쳐 들어올 테니까요. “하지만 마을이 다 타버렸는데 새로 지어야 하잖소? 그러면 언제쯤 우리가 마을로 아주 돌아갈 수 있다는 거요?” 치우천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한 번 유망을 크게 쳐부수어, 다시는 남의 땅을 넘보지 못하게 한 다음에야 아주 돌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치우천은 그러면서, 남은 마갸르와 미아우족의 부족장들에게 지나족이 다시 쳐들어오면 절대로 혼자 싸우지 말고, 이리로 모여서 싸워야 한다는 것을 다른 부족장들에게도 널리 알리라 했다. 그러고는 치우천이 덧붙였다 “싸울 수 없는 여자, 노인, 아이들은 전사들을 약간 붙여서 조용한 외딴 곳에 숨어 있도록 하십시오. 여기 모일 때는 전사들만 와야 합니다. 마갸르, 미아우의 전사들이 다 모인다면, 지나족들이 제아무리 수가 많아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마침내 부족장들은 치우천의 전략을 이해하고 갈채를 보냈다. 치우천과 치우우레는 부소다솔과 치우벌로 하여금 그곳에 모인 전사들을 지휘하여 지나족들을 막을 수 있는 커다란 요새를 짓도록 했다. 그때 포리가 치우천에게 말했다. “도깨비 포리가 말합니다. 나무 울타리는 좋긴 합니다만, 불타버릴 위험이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치우천이 묻자 포리가 진지하게 대답했다. “돌로 벽을 쌓으면 좋습니다만, 너무나 힘이 들고 또 여긴 돌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니 나무 울타리를 세우긴 하되, 그 둘레에 깊은 연못을 파서 물을 채워두고, 울타리 아랫부분에는 흙을 쌓아 덮어서 나무가 불에 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또 주변에도 가시나무와 대나무 같은 것을 심어두는 게 좋습니다.” “가시나무는 알겠는데 대나무는 왜?” 포리가 싱긋 웃었다. “지나족이 쳐들어오면, 대나무를 삐죽삐죽하게 잘라버립니다. 그러면 창을 꽂아둔 것이나 다름없으니 지나족이 쳐들어오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치우천은 감탄하여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좋은 생각이다. 너는 재주가 있구나. 좋다, 포리. 너도 여기 남아서 치우벌님과 부소다솔님을 도와 울타리를 짓도록 해라." "천 안다, 포리더러 남으라니? 그러면 너는 어디로 갈 거냐?" 치베가 묻자 치우천은 미소를 지었다. "신시로 가야 한다. 이제 때가 된 것 같아." "정말?" 치우비는 신시로 돌아간다는 말을 듣자 몹시 기뻐했다. 몇 년 만에 돌아가는 고향이던가? 치우천은 치우비가 들떠하는 것을 보고 웃었으나 기쁘기는 그도 마찬가지였다 허나 치우천은 단단히 타일러 두는 것을 잊지 않았다 "비야, 신시는 아직 안전한 곳이 못 된다. 고시울률님이나 치우가람, 바람 형제 등이 힘을 쥐고 있는 곳이야. 항상 조심해야 한다. 신시에 가면 할 일이 많다." 치우천은 포리뿐만 아니라 리미, 마냥, 비울걸 등도 모두 이곳에 두고 가기로 했다. 자칫하면 작은 주신이 도깨비들의 소굴이라는 소문이 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을 책임지기 위해 치우천은 고민하다가 치베에게 이곳의 일을 맡기기로 했다. 마침내 치우천은 치우비, 무라, 알한, 울라트와 함께 백 명의 전사들만을 거느리고 신시로 향하기로 했다. 물론 치우우레와 수많은 부족장들도 함께였다. 거기엔 다시 기쁨의 재회를 한 울쿠타 야쿠타도 끼어 있었다. 치우 형제는 울쿠타 야쿠타가 훌륭하게 자란 것을 보고 몹시 기뻐했는데, 이번 기회에 그들도 함께 신시에 가서 정식으로 사울아비 이름을 얻자고 권한 것이다. 유망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 요새를 세우는 곳은 지금의 산둥지방 남서쪽 부근이었다. 거기에서 신시까지는 조금 서두르면 보름 남짓이면 갈 수 있는 거리였다. 가는 길 내내 치우우레는 아들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 절반은 신시의 사정에 대한 것이고 절반은 치우 형제의 결혼 이야기였다. 치우우레는 답답한 듯 두 형제를 몰아세웠다. “너희는 이름도 받았고, 카린 산에서 괴물을 물리쳤으니 성인식도 통과한 셈이다 그러니 이제는 혼인을 서둘러야 할 게 아니냐?” 치우비는 그냥 얼굴만 붉히며 고개를 돌렸고 치우천은 못들은 척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치우우레는 다시 가슴을 치며 말을 이었다. “이번에 신시에 가면 반드시 혼인을 하거라! 이러다가는 나는 손주녀석도 보지 못하고 죽겠구나! 어디 마음에 둔 여자라도 있는 게냐?” 치우우레가 치우비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묻자 치우비는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그게....... 좀........그러니까요.......” “비? 있냐? 있는 게냐? 그게 누구냐? 응?” “그게.......” “있으면 어서어서 말해봐라! 혹시 너.......” 치우우레는 눈을 크게 뜨며 다그쳤다. “혹시 그........태산 회의 때 보았던 발이라는 아가씨를 마음에 두고 있는 게냐?” 치우비의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 그러자 치우우레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결국 그렇게 되는구나. 비야, 허나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니다. 헌원은 대부족장인데, 그리 만만히 딸을 얻을 수 있겠느냐?더구나 그런 아가씨가 작은마누라로 들어오려 하겠느냔 말이다.” “네? 작은마누라라뇨?” 치우비의 눈이 확 커졌다. 그러나 치우우레는 못 본 듯 중얼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주신 사람을 큰며느리로 맞아야 하느니라. 그래야 네 큰아들이 주신에서 계속 살아갈 것 아니냐?” “작은마누라는 생각도 해본 적 없습니다!” 치우비와 치우우레는 계속 옥신각신했다. 그것을 옆에서 지켜보던 치우천은 간이 콩알 만해 졌다. 공손발이라면 차라리 낫지만, 자신은 소녀와 좋아하는 사이가 아닌가? 더구나 이미 아버지에게 알리지도 않고 혼인을 해버렸으니 말이다. 치우우레는 한참이나 타이르다가 급기야는 화를 버럭 내다가 이내 마음을 가라앉히고 말했다 “좋다. 비 이 녀석! 네가 이제는 말도 안 듣는구나. 뭐, 알아서 해라. 너는 작은아들이니 네 자식 생각일랑은 별 관심 없다는 게냐? 그래도 상관없다면 나도 상관없느니. 그런데 헌원이 네게 딸을 준다더냐?” “그게.......” 치우비가 말끝을 흐리자 치우우레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재, 듣자하니 너희는 헌원과 싸움까지 했다던데, 그게 정말이냐?” “네.” “그런데 헌원이 딸을 주겠느냐? 응?” 치우비는 금세 얼굴빛이 어두워져서 한숨만 내쉬었다. 치우우레는 안쓰럽다는 듯 쯧쯧 혀를 차다가 치우천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천아!” “예.......” 치운천이 조그맣게 대답하자 치우우레가 다짐하듯 물었다. “너는 설마 별 문제없겠지! 사실 네가 큰아들 아니냐? 그러니 네 색시는 반드시 내가 골라주마. 너는 주신 사람 마누라를 얻어서 대를 이어야 돼! 안 그러냐?” 치우천 역시 꿀 먹은 벙어리처럼 되어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치우천은 마침내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아버님. 신시에 가면 말씀드리려 했습니다만, 지금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실....... 저는 이미 혼인을 했습니다.” “뭐?” 치우우레는 너무 놀라 하마터면 말에서 굴러 떨어질 뻔했다. 치우천은 용기를 내어 계속 말을 이었다. “미리 알려드리지 못해 죄송하기 짝이 없습니다. 더구나....... 그 여자는 주신 사람도 아닙니다.” 치우우레는 멍한 표정이 되었다가 이내 억지로 웃음을 지으려는 듯 얼굴이 씰룩거렸다. “그....... 그게 정말이냐? 이........ 이 녀석이........” 치우우레가 별안간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얼굴빛을 밝게 펴고는 말했다. “솔직해서 좋구나. 좋다, 이 녀석!사내라면 그럴 수도 있다! 좋다! 내 이해한다! 밖에서 오래 고생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게지!” 의외로 치우우레가 호탕하게 웃어넘기자 치우천도 한껏 졸였던 마음을 풀었다. 치우비도 금세 웃는 얼굴이 되었다. 치우우레가 목소리를 낮춰 조그맣게 물었다. “그래, 내 며느리는 예쁘냐?” 치우비가 웃으며 대신 대답했다. “그렇게 예쁠 수가 없습니다.” “그래? 허허! 이 녀석, 보는 눈은 있구나, 날 닮았어! 그래, 똑똑하냐?” 이번에도 치우비가 대답했다. “형수님은 아주 똑똑하시죠. 특히 물건소리를 잘 내어서, 듣기만 하면 아주 기분이 좋아진답니다. 더구나 못하는 일이 없고 이젠 주신 말도 잘하십니다.” 치우우레의 얼굴에 점점 웃음이 번져갔다. “그래? 그거 복덩어리구나. 작은마누라로 두기에는 딱 좋겠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치우천이 서둘러 되받았다. “아버님, 저는 마누라를 여럿 얻을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자 치우우레는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건 안 돼!” 치우우레의 목소리가 하도 커서 치우천과 치우비는 둘 다 찔끔했다. 치우우레는 화난 듯한 표정으로 외쳤다. “너는 큰아들이다! 그러니 주신 사람을 얻어야 하는 것이다! 안 그러면 우리 집안은...... 안 된다! 안 돼!” 치우천과 치우비는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치우우레는 한동안 씨근거리더니 약간 누그러진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그건 내 며늘아기에게 잘 타일러보마. 사람을 차별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치우 집안은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다. 우리 치우 집안은 지금은 비록 힘이 없다만, 그래도 고시, 부루, 신지, 부소 씨와 함께 주신의 다섯 큰집안의 하나가 아니냐? 언젠가는 한웅님이 나을 수도 있는 집안이란 말이다. 그렇게 때문에 치우 집안 큰아들의 아내는 반드시 주신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한웅님은 하늘에 고하여 안파견 한님께 제사를 드리시는 분인데, 어찌 다른 부족의 피가 섞인 사람이 될 수 있단 말이냐?” 치우우레가 길게 타이르자 치우천과 치우비는 조용히 들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치우우레의 말이 옳기는 했다. 그러자 치우우레가 다시 물었다. “그러니 그렇게 잘 타이르면 며늘아기도 똑똑하니 이해해줄 것이니라. 그런데...... 어느 부족 사람이냐?” 치우천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카린...... 족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치우우레의 동공이 커졌다. “뭐? 아니....... 너 그럼 혹시........!” 치우천은 입을 굳게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치우우레가 다그치듯 외쳤다. “그럼 혹시 소녀님이냐! 응?” 치우천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자 치우우레는 갑자기 눈에 눈물이 핑 돌더니 급기야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이럴 수가 어찌 이럴 수가 있느냐? 천, 네 이놈 네 이 놈! 내 너를 죽여 버리리라!” 별안간 치우우레가 도끼를 꺼내들려 했다. 깜짝 놀란 치우비는 얼싸안듯 아버지를 붙잡고 매달렸다. 치우천도 아버지가 왜 이러는지 몰라 놀라서 얼어붙다시피 했다. 치우우레는 치우비에게 잡히자 꼼짝하지 못했으나 계속 외쳐댔다. “천! 이놈 네가 나를 속이고 한웅님을 속였구나! 네놈은 정말 소녀님과 좋아지냈던 것이구나! 안파견 한님! 안파견 한님! 왜 저놈을 사막에서 건져주셨습니까?” 치우우레가 길길이 날뛰며 화를 내자 치우비는 황급히 말리며 외쳤다. “그게 아닙니다! 그게 아니에요!” 치우천도 곧 외쳤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아버님! 저는 떳떳합니다!” “뭐가 떳떳하냐?” “사막에 버려지기 전까지만 해도, 저는 소녀님과 아무 일 없었습니다. 그런데 같이 사막에 버려져서 고생을 하고, 그 다음 싸움을 할 때에도 소녀님이 목숨을 걸고 몇 번이나 저를 구해주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면서 정이 든 것입니다. 정말입니다!” 치우천이 애절하게 외치자 치우우레는 그제야 마음을 좀 가라앉히고 물었다. “정말이냐?” “아버님, 저는 아버님께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에휴...... 일이 그렇게 되었구나. 내가 좀 흥분했다. 그러나 틀림없는 사실이겠지?” “물론입니다” 그때 울쿠타, 야쿠타, 알한 등이 치우 부자사이에 소동이 일어난 것을 보고는 놀라서 황급히 달려왔다. 몇몇 부족장들도 달려왔다. 치우비는 아무 일도 아니라며 식은땀을 흘리면서 그들을 돌려보냈다. 그 사이 치우우레는 한참이나 뭔가 생각하다가 근심에 찬 표정으로 치우천에게 말했다. “천아,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니다. 너는 지금 사막에서 살아났고, 유망을 물리치는 큰 공을 세웠으니 신시로 갈 수 있는 것이다. 허나 소녀님을 마누라로 맞았다는 것은....... 또 꼬투리를 잡힐 수 있는 일이야. 나만 해도 놀라서 흥분하지 않았느냐? 더구나 너를 좋지 않게 보는 사람들이 신시에는 많단 말이다. 아무래도 이 일은 반드시 비밀로 해야겠구나.” 치우우레의 말에 치우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치우우레는 근엄하게 덧붙였다. “좌우간 아직은 절대 마누라를 얻었다는 말을 흘리지 마라. 네 부하들에게도 입 단속하라 이르고 말이다. 그리고...... 아무리 그렇더라도 큰마누라는 주신 사람이어야 한다! 내가 나중에 타일러볼 것이다. 알았느냐?” 마누라 말에 치우우레가 힘을 주어 말하자 치우천은 그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문제가 더 커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일단은 여기서 끝내자고 생각한 것이다. 그럭저럭 며칠동안 길을 가던 일행은 지금의 베이징보다 약간 북쪽의 어느 지역에 들어섰다. 주신의 변경이라 주로 마갸르족이 살고 있었는데, 마갸르족과 주신족은 비교적 사이가 좋은 편이라 별 일은 없었다. 어느덧 날이 저물어 일행은 될 마을을 찾았다. 황량한 벌판만이 이어지던 곳에 산으로 둘러싸인 아주 좋은 땅이 나타났다. 강이 흘러 물이 많고 대나무가 우거지며 짐승도 많은 풍요로운 곳이었다. 더구나 신시나 동북쪽으로 가려면 반드시 지나야 하는 곳이기도 했다. 물이 많고 풍요로운 그곳을 보고 사람들은 감탄했다. “살기 좋은 곳이군요. 근처는 다 황무지인데.” 알한이 말하자 치우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곳이 바로 지금의 탁록이었다. 당시 그곳에 사는 마갸르인들은 마갸르 말로 그저 ‘대나무골’이라는 평범한 이름으로 불렀다. 그곳에서 어느 중간 정도 크기의 마을을 찾은 일행은 그날 밤을 그곳에서 묵기로 했다. 치우천은 그날 밤에 치우비를 끌고 마을 부근으로 나섰다. “왜 돌아다니는 거야?” 치우비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치우천이 대답했다. “이런 중요한 장소가 있을 줄은 미처 몰랐다. 미리 봐둬야 한단 소리야? 여기엔 물이 많고 살기 좋기는 하지만, 뭐가 중요하단 거야?” "아주 중요한 곳이다. 생각해보렴. 지나 땅에서 주신으로 가려면 크게 두 갈래 길이 있다. 하나는 남쪽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는 길, 하나는 서쪽에서부터 동북쪽으로 올라오는 길. 그런데 여기는 그 두 갈래 길이 모이는 부근에 있지 않느냐?“ “그건...... 그렇군.” “더구나 여기는 물도 많고, 나무와 풀도, 짐승도 많다 땅도 아주 기름진 것 같더라. 많은 전사들을 먹여 살릴 수 있단 말이다. 여기에 전사들을 두면, 지나와 주신 사이의 길을 모조리 내리누를 수 있다.” 치우천은 주변을 돌아보다가 좀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나지막한 산등성이를 발견했다. 이미 해는 넘어가 주변에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으나 치우천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횃불을 지펴 들었다. “저기 올라가 보자.” 치우천과 치우비는 곧장 산등성이로 올라섰다. 밑에서 보기에는 높을 것도 없는 아주 낮은 산이었으나, 막상 그리로 올라가자 눈앞이 탁 트이는 것이 느껴졌다. 주변이 하도 평평하여 약간 높이 올라왔는데도 아주 먼 주변까지도 전부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치우비도 놀랐다. “야, 아주 잘 보이는데?” “기막힌 자리구나. 더구나 산 위도 평평하구나. 아주 좋다, 아주 좋아” 치우천은 너무도 좋은 지형을 발견하자 흡족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때 치우천의 눈에 뭔가가 들어왔다. “저건 뭐지?” 치우천이 가리킨 곳에는 나무로 깎은 막대기 같은 것이 서 있었다. 치우비가 다가가 보니, 그 막대기에 누군가가 무슨 무의 같은 것을 조각해 놓은 듯했다. “사이람 깎은 것 같은데?” 치우천은 다가가서 횃불을 들이대 보고는 깜짝 놀랐다. 치우비는 치우천이 왜 놀라는지 어리둥절하여 물었다. “왜 그래? 잘 깎은 것도 아닌데?” “이 무의........ 본 적이 있다.” 치우천은 다시 한 번 그 무의를 손으로 더듬으며 자세히 살펴본 다음 품에 손을 넣어 뭔가를 꺼냈다. 그 손에는 작은 목걸이가 들려 있었다. “맥달님?” 그것은 바로 치우천이 맥달에게서 얻은 목걸이였다. 치우천은 얼른 그 목걸이를 살펴보았는데, 과연 목걸이에 새겨진 무의와 나무막대에 새겨진 무의가 똑같았다. 치우비 또한 너무 신기해했다. 무의는 상당히 복잡하여 우연히 똑같은 무의가 새겨졌다고는 볼 수 없었다. “이럴 수가? 맥달님이 새긴 걸까?” 치우비가 중얼거리자 치우천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저건 새긴 지 수십 년은 되었어. 나무가 다 썩어 있잖니? 이건...... 좀 알아봐야겠다.” 치우천과 치우비는 서둘러 산을 내려갔다. 근처 마을 사람들에게 목걸이를 보여주며 혹시 아는 바가 있는지 여기저기 물어보며 다녔지만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한 노인이 중얼거리는 것을 들었다. “이 목걸이 혹시.......그 사람이 새긴 것 아닌가?” “누구 말입니까?” 치우천이 묻자 노인은 웅얼거리는 소리로 대답했다. “저 아래로 십 리 정도만 가면 다른 마을이 있는데, 거기 목걸이 만드는 늙은이가 산다오. 그 마을에서 사람을 찾아 물어보시구려.” 치우천, 치우비는 그 길로 십 리 길을 달려서 건너편 마을로 갔다. 그곳에서 이 사람 저 사람 찾아 물어보니, 마침내 그중 한 사람이 목걸이 만드는 노인의 움집을 알려주었다. “저리 가보세요.” 치우천, 치우비가 그 움집에 도착해 물어보자, 머리가 하얗게 세고 이마에 주름이 가득한 몹시 늙은 노인이 나왔다. “무슨 일인가?” “안녕하십니까?” 치우천이 정중히 인사하자 노인이 힐끗거리며 말했다. “주신 사람인가? 구리 무기를 찬 걸 보니 사울아비 같구먼.” “그렇습니다.” “그런데 나한테 뭔 일인가?” “물어볼 것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이 목걸이 말인데요.......” 치우천이 목걸이를 내밀자 노인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목걸이를 들여다보았다. “보자, 내가 만든 것 같기는 헌데....... 난 요새 눈이 어두워져서 말야........ 아! 내가 만든 거 맞구먼. 근데 이거 어디서 났나?” “우연히 얻었습니다. 이걸 누구에게 만들어주셨습니까?” “내가 만든 목걸이가 수십 천 개야. 어떻게 일일이 기억하겠어?” “그 목걸이에 새겨진 무의와...... 저 언덕 위 나무에 새겨진 무의가 똑같더군요. 그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그러자 노인은 비로소 미간을 펴며 무릎을 쳤다. “아! 그렇군! 생각나는구려! 그 사람 거였구먼! 아...... 거의 잊고 있었는데........” “누구 말입니까?” 노인은 돌연 경계하는 태도로 물었다. “그거......어디서 난 것인가?” 노인의 눈빛이 좋지 않아 치우천은 대강 둘러대었다. “주운 것입니다. 그냥 좀 궁금해서요. 좀 이야기 해주실 수 없습니까?” 치우천이 묻자 노인은 천천히 지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꽤 오래 전 일이지. 한 스무 해는 넘게 지났을 거 같구먼. 저 아래에 이상한 남자 하나가 들어와 산 적이 있지. 그 사람은 주신 사람이라고 들었다네.” “주신 사람이요?” “그렇네. 주신에서 온 사람인데, 처음에는 뭐에 쫓기다 왔는지 몹시 지치고 굶주려 쓰러진 것을 마을 사람들이 데리고 온 거지. 마을 사람들이 그를 살려냈는데 갈 데도 없는 것 같아 그냥 눌러 살라고 집까지 대강 만들어줬지......” 그 남자는 자신의 이름도, 무슨 일을 하던 사람인지도 전혀 밝히지 않았다. 다만 아는 것이라고는 그 남자가 주신 사람이라는 것과, 얼굴이 희고 잘 생겼으며 손발이 고와서 평생 거친 일은 해본 적 없는 사람 같았다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냥 그 사람을 ‘주신 사람, 주신 사람’ 하고 불렀다. 그 사람은 퍽 아는 것이 많고 마음씨도 친절하여 마을 사람들을 많이 도와주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종종 훌쩍 사라졌다가 며칠이나 지난 후에야 다시 나타나곤 했다. 그 사람이 어디를 다녀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몇몇 본 사람들에 의하면 산에 올라간다고 했다. 사람도 살지 않는 산에서 무엇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사냥을 하는 것 같지도 않았고, 나무를 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나 산에 갔다 올 때면 그 남자의 얼굴은 항상 싱글벙글 흐뭇한 표정이었다. “그러다가 말이야, 어느 날 그 주신 사람이 여자를 한 명 데려오지 않았겠나? 정말 아름답고 귀하게 생긴 여자였는데, 어디서 온 여자인지도 알 수 없었다네. 그런데 그 여자는 주신 사람을 따라올 적부터 배가 불러 있었지.” “그 주신 사람의 마누라였습니까?” 치우천이 묻자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좌우간 그 여자는 남자와 함께 오자마자 집안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네. 본 사람도 몇몇 없을 거야. 나는 그 앞에 살았기에 보았지만 말이네.” “그래서요?” 치우천이 되묻자 노인은 느릿느릿한 목소리로 계속 이야기를 이어갔다. 어느 날 밤 노인의 귀에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뒤이어 목을 놓아 울부짖는 소리도 들려왔다. 바로 그 주신 사람의 집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노인이 놀라서 달려가 보니, 주신 사람은 갓 태어난 아기를 안은 채 울부짖고 있었고, 그 여인은 조용히 잠자듯 누운 채 움직이지 않았다. 고운 얼굴이 놀랄 정도로 해쓱해져서 무서울 정도였다. 그 여인은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난산 때문에 죽은 것 같은데 그 여인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자세로 조용히 누워 있어서 으스스한 기분마저 들었다. 언뜻 듣기로는 그 여자는 도를 닦던 선인이었다는 것 같았는데, 선인이 저렇게 쉽게 죽을 리가 없다고 하여 노인은 믿지 않았다. “그땐 내 마누라도 살았었지 그래서 할멈이 아기 탯줄을 잘라주고, 씻겨주고 했다네. 그 여자는 저 산비탈에 묻어주었다네. 그 주신 사람은 그 뒤부터 아주 멍하게 정신 나간 사람같이 되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며칠씩이나 가만히 집구석에 앉아서 아기를 노려보곤 했다네. 그 착하던 사람이, 눈빛이 무섭기가 그지없더군.” 듣기만 하던 치우비가 입을 열었다. “아기를 노려보았다고요? 왜요?” “나도 잘은 모르네만, 그 주신 사람은 그 여자를 너무 사랑했던 것 같아. 그래서 아기가 태어나면서 그 여자가 죽은 것을 아기가 여자를 죽인 것이라 생각한 모양일세.” “그럴 리가요! 아기가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 오히려 그 여자가 남긴 자식이니 더 예뻐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더구나 자기 자식이었던 것 같은데.......” 치우비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듯 툴툴대자 치우천이 말했다. “네 말이 맞다. 하지만 그 사람‥‥‥ 불쌍하구나. 자기는 그런 생각을 하고 싶어서 그랬겠니? 사람 마음이 그렇게 마음대로 퇴는 것만은 아니지........” 노인 역시 치우천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렇다네. 그 주신 사람이 간혹 혼잣말로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리곤 했는데, 우연히 집 밖에서 한 번 들은 적이 있다네. 바로 자네가 한 말과 똑같은 말이었어. 하지만 주신 사람이 아무리 그렇게 생각하려고 해도, 자꾸만 그런 좋지 못한 마음이 드는 것 같았다네 그 아기는 아주 귀엽고 예쁘게 생겼는데, 죽은 내 마누라가 그 아기를 아주 귀여워했다네. 내 마누라는 혹시 주신 사람이 좀 이상해져서 아기를 어떻게 할까 봐 계속 그 집에 가서 아기를 돌보아주곤 했다네. 아기가 하도 예뻐서 마을 사람들이 거의 번갈아 돌보아주곤 했지.” 그러면서 노인은 이상하게 슬쩍 눈물을 비비면서 이를 갈았다. “사실 그 아기를 그렇게 돌봐주어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노인의 뜻밖의 태도에 치우천, 치우비는 깜짝 놀랐다. “예? 아니, 왜요?” “더 들어보라구!” 그때 이후로 주신 사람은 거의 폐인이 되고 차차 정신까지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 밭일도 하지 않고 사냥도 하러 가지 않아서 무엇을 먹고 지내는지도 알 수 없었고 나날이 마르고 수척해져만 갔다. 노인과 노인의 마누라는 먹을 것도 가져다주고, 아기도 돌보아주고 해서 그 부녀를 살렸다. 그런데 한 번은 주신 사람과 노인의 마누라가 크게 다투었다. 노인이 놀라서 달려가 보니 주신 사람이 아기에게 마구 욕을 퍼붓고 있었다. ‘너는 괴물이구나! 도깨비구나! 어미를 잡아먹은 것으로도 모자라느냐? 응?’ 노인의 마누라가 버럭 소리쳤다. ‘자기 자식에게 뭐 하는 소리예요?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다뇨?’ 주신 사람은 그때 술에 취해 있었다. 노인의 집에 술이 생겨 노인의 마누라가 불쌍히 여겨 갖다 주었는데, 그것을 마시고 주신 사람이 주정을 부린 것이다. 그러면서 주신 사람은 노인을 붙잡고 울었다. ‘내 자식이지만........ 저것이 대체 무엇입니까? 나는 무섭습니다, 무서워요!’ 노인이 왜 그러느냐고 묻자 주신 사람은 흐느꼈다. ‘저것이 갑자기 날카로운 소리로 웁니다. 그러면, 그러면 사람이 죽습니다! 저런 ......저것을 어떻게 하나요? 어떻게 해야 하나요? 나를 보고 크게 울면 나도 죽을 겹니다. 어떻게 합니까?’ 노인의 마누라는 말도 되지 않는 헛소리라고 욕을 했지만 주신 사람은 계속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노인이 한참 달래서 물어보니 놀라운 이야기가 주신 사람 입에서 흘러나왔다. 아기가 태어날 때, 그 아기는 이상하게 아주 높게 빽빽거리는 소리로 울었고 그러자 잠시 후 아기의 어머니가 죽었다. 그때만 해도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주신 사람도 그때는 그저 아내를 잃은 슬픔에 멍해져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주신 사람은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그 아기를 돌보아주러 온 아낙들 중 저 건너에 사는 뚱뚱한 할멈이 있었는데, 그 할멈은 아기가 귀엽다며 장난삼아 잠자는 아기의 뺨을 살짝 꼬집었다. 그러자 아기가 눈을 뜨면서 바로 그 높은 소리로 빽 울음을 터뜨렸다. 보통 때 칭얼거리며 우는 소리가 아닌, 아주 높은 소리로 빽빽 울더라는 것이다. 그 할멈이나 주신 사람이나 그때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는데, 다음날 그 할멈은 물에 빠져 죽은 채 발견되었다. 듣고 있던 치우비가 놀라 물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요? 그냥 우연히 일어난 일 아닐까요?” “나도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네. 그러나 그 주신 사람의 말을 들으니 그렇게만 생각할 수 없더군.” 어느 날, 저 건너에 사는 얼굴이 둥그런 아낙이 아기를 구경하러 왔는데, 또 아기가 그렇게 울었다. 주신 사람은 그때 무엇 때문에 아기가 울었는지는 못 보았지만 아낙이 무안한 듯 중얼대는 것은 들었다고 했다. 그 다음날 저녁, 그 아낙은 열매를 주우러 갔다가 갈기갈기 찢긴 채 발견되었다. 그 근처에는 무서운 짐승이 있다는 이야기가 없었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모두 의아하게 여겼다. 그때부터 주신 사람은 슬슬 아기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런 불운은 계속 되었다. 아기가 소리를 높여 미친 듯 울 때마다 그 아기가 보고 있던 사람은 반드시 며칠 내로 죽어 나갔다. 여섯 번째 사람이 죽자, 주신 사람은 극도로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아기의 비위를 거슬리면 죽는 수밖에 없다고 여긴 것이다. “난 믿을 수 없어요” 치우비는 고개를 휘휘 저으며 말을 이었다. “어떻게 아기가 그럴 수가 있나요?” “하지만 너무 이상한 일이었네.” 치우천이 조용히 뭔가 생각하다 물었다. “그 아기가 여자애였나요?” “그렇다네.” 그 말을 듣고 치우천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여자아기가 바로 맥달이라 생각한 것이 틀림없었다. 치우비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변명해주듯 말했다. “그 아기가 사람을 죽인 게 아니라, 죽을 사람에게 알려주려고 운 것이 아닐까요?” “좋게 생각하려면 그렇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었네. 아기를 만난 사람 중에 늙은이들도 있었는데, 그냥 조용히 곱게 집에서 죽은 사람도 있었어. 그러나 그 아기는 그런 사람을 만나서는 울지 않았다네. 결국 아기에게 뭔가 잘못 보인 사람들만이 이상한 일을 만나 죽어가는 것이었네. 정말 무서운 일이었지.......” 결국 주신 사람은 먼 마을에 사는 유명한 마갸르족의 무당을 불러서 푸닥거리를 청했다. 그 무당은 주술력이 대단한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그 사람은 들어와서 아기를 한 번 보자마자 부르짖었다. ‘이럴 수기 이럴 수가, 나는 할 수 없소 할 수 없소.’ 그때 아기가 큰 소리로 목을 높여 울었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무당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미친 듯 달려서 도망쳤는데, 도망치다가 발을 헛디뎌 굴러 떨어졌다. 떨어져 죽을 만큼 그다지 높은 곳이 아니었는데도 그 무당은 떨어지면서 뾰족한 돌에 머리를 부딪쳐 피를 흘리며 죽어버렸다. 사태가 이쯤 되자, 문제는 몹시 심각해졌다. 마을 사람들은 저주라고 수군거리기 시작했고, 아기를 불쌍히 여기는 사람들은 거의 없어져버렸다. 급기야는 그렇게 아기를 예뻐했던 노인의 마누라마저도 아기의 울음소리를 듣고 말았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말도 되지 않는 소리라고 말하던 그녀도 자신이 직접 아기의 울음소리를 듣자 안색이 변했다. 그녀는 이틀 동안 시름시름 앓으며 누워 지냈는데, 그러다가 갑자기 가슴을 부여잡고 헉헉대다가 숨을 거두었다. 일이 여기까지 이르게 되자, 마을의 부족장은 급히 조치를 취하기 위해 주신 사람을 찾았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과 공포에 떨면서 횃불을 피워 들고 준신 사람의 집을 에워쌌다. 주신 사람은 거의 미친 것처럼 머리를 산산이 풀어헤치고 아기를 안고 나오며 말했다. ‘이제....... 나도 갈 겁니다. 나를 보고 울었습니다. 나를 보고 울었어요...... 그동안 죄송했습니다. 내 손으로 처리하겠습니다.’ 결국 주신 사람은 스스로 아기를 처리하기로 약속하고는 아기를 안고 사라졌다. 며칠이 지난 다음, 먼 곳에서 주신 사람의 시체가 발견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나 아기의 시체는 함께 있지 않았다. 사람들은 주신 사람이 모질게 마음을 먹고 아기를 처치했을 테지만, 결국은 자신도 그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목걸이는 아기가 태어나기 전에 주신 사람에게 내가 선물한 것일세. 주신 사람이 쓰던 무의를 그대로 옮겨 새긴 것이야. 그 무의가 새겨진 뒷산에 있는 나무는 주신 사람의 마누라를 묻은 곳이지. 그 여자는 도를 닦던 사람이라 높은 곳에 묻어달라고 했다더군. 좌우간 이게 내가 아는 전부일세. 그건 내가 만든 것이지만, 그 무서운 아기 생각만 하면 지금도 밤잠을 설치곤 한다네. 이 근방에서 아기를 주워 기른 사람이 없으니 아기는 주신 사람이 잘 처리했겠지만......” 노인은 쩝쩝 입맛을 다시며 말을 맺었다. 치우천과 치우비는 해쓱하게 안색이 변한 채 노인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물러섰다. 치우비는 이야기의 대가로 조개껍질을 한 움큼 노인에게 쥐어주고는 얼른 형의 뒤를 따라갔다. 치우천은 낯빛이 변한 채 조용히 입을 다물고 걷다가 치우비가 다가오자 입을 열었다. “틀림없다. 맥달이다.” 치우비는 무거운 심정으로 되받았다. “난 믿기 어려워 왜 그리 사람들이 픽픽 죽어 갔을까? 맥달님이 정말 그랬을까?” 치우천은 고개를 저었다. “뭐라고 말할 수가 없구나. 좌우간 맥달은 그렇게 버려졌고, 그 다음에 자부선인께서 주워다 기른 것이 틀림없다. 비야, 자부선인께서는 맥달에게 말도 가르치지 않고 그냥 자라게 했었었지. 나는 그것을 오해하기도 했었는데, 이제 보니 맥달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무서운 여자구나.” 치우비는 애써 생각을 가다듬으며 되받았다. “내 생각에 맥달님은 앞날을 볼 수 있는 힘을 타고난 것 같아. 그래서 사람들이 죽을 걸 미리 알고서 그렇게 운 것 같아. 사람들을 해쳐 죽였다고 볼 수는 없어.” 치우천은 고개를 저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허나 그 사람이 말하지 않았니? 조용히 죽은 사람도 있다고 말야.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어. 이건 뭔가 수상해.” 치우비는 뭐라 대답할 수 없어서 입을 다물었다. 치우천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자부선인께서 맥달을 그렇게 놔둔 이유를 알겠어. 아, 나는 잘 알지도 못하고 자부선인께 대들어 결국 맥달을 풀어주게 했구나. 만에 맥달이 정말 그렇게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다면 정말 큰일이다.” “하지만 맥달님은 이제 그렇지 않잖아. 주신에서도 조용히 잘 지내시는 것 같던.......” “아직 모른다. 만약 맥달이 그런 무서운 힘을 발휘하면 어떻게 하겠니? 언젠가 본색을 드러내서 사람들을 죽게 하고, 주신을 위험하게 만들지 누가 알겠니? 그렇게 된다면 다 내 잘못이다. 내가 자부선인에게 대들어서 사람에게 주어진 일은 사람에게 떠 맡도륵 해야 한다 외치지만 않았어도......” 치우천은 눈을 빛내며 조용히 덧붙였다. “신시에 가면 맥달을 꼭 만나보아야겠다. 사람들은 그 여자의 정체를 몰라. 나밖에는 몰라. 더구나 누구에게 말해도 믿어주지도 않을 거다. 정말 위험하다고 생각되면.......” 치우천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무섭게 눈을 빛내며 말했다. “내가 처치해 버릴 거다. 내 책임이니까......” 치우비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려 했지만, 치우천의 표정이 하도 단호하여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저 걱정스레 연신 한숨만 될 뿐이었다. 신시 치우 형제는 착잡한 마음으로 길을 갔다. 치우우레에게는 맥달의 출생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며칠을 더 가자 주신 땅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오랜만에 말도 통하고 사람들 사는 것도 비슷한 곳에 오니 역시 좋기는 좋았다. 국경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지나족을 물리친 사울아비들이 왔다고 몹시 기뻐하며 환대해주었다. 어느새 소문이 여기까지 퍼진 모양이었다. 무라는 여전히 담담했지만 알한이나 울쿠타야쿠타는 주신에 왔다고 기뻐했다. 치우비는 그들에게 웃으며 말했다. “여기도 주신이기는 하지만 신시에 가면 더 깜짝 놀랄 거다.” “신시가 그렇게 커?” 야쿠타가 흥분되는지 얼굴이 약간 상기되어 묻자 치우비는 웃으며 대답했다. “크기도 크지만, 아주 깨끗하고 멋지단다.” 국경 지방에서 환대를 받은 일행은 다시 점점 안쪽으로 들어섰다. 국경에서 벗어나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사람들의 살림살이는 깨끗해지고 나아져 갔다. 그러나 그에 반비례하여 일행에 대한 대접은 별 볼일 없어져 갔다. 주신 땅 안으로 한참 들어서게 되자 이제는 사울아비들을 보아도 시큰둥하며 본체만체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신시 부근에 이르자 신시의 거대한 성벽이 먼발치에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성벽 밖에는 많은 마을들이 다닥다닥 붙어서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그렇게 크고 높은 돌 성벽은 처음 보는 것이라 알한이나 무라마저도 놀라워했다. 돌 성벽은 높이가 사람 키의 다섯 배는 될 듯했다. 그것을 만드는 데 백년 이상이 걸렸다는 신시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성이었다. 울쿠타 야쿠타는 먼발치에서 보기에도 너무도 많은 집들과 사람들에 놀라워했다. 그러나 신시 바로 부근에 이르자, 이제는 지나가는 사울아비들을 보면서 비웃거나 앞에서 길을 피하는 사람마저도 생겨났다. 부유한 사람들은 보통 사람은 구경조차 해보기 힘든 고운 색으로 물들인 옷을 입고 옥이며 보석, 금붙이를 화려하게 걸쳤으며 전부 얼굴이 희고 살이 쪄 있었다. 반면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도 비쩍 마르고 몰골이 추레한 사람들도 많았다. 그들은 대부분 종살이를 하는 사람들 같았는데 몹시 고생을 하고 있는 듯했다. 그것을 보고 먼저 입을 연 것은 종살이를 해보았던 울쿠타 야쿠타였다. “주신에서는 종을 너무 심하게 부리는 것 아니야? 우리 형제도 친 두 부족에서 종살이를 고달프게 했고 주인을 많이 원망했지만 그래도 저 정도는 아니었다구.” 하도 안쓰럽게 여위고 지친 늙은 종을 보고 울쿠타가 말하자 치우비는 마치 자신이 잘못인 양 얼굴을 붉히며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자 치우천이 입을 열었다. “문제가 있다. 전에 거서기 형, 삼 형 등에게서 들은 적은 있지만 신시는 정말 변했구나. 좋지 않다, 좋지 않아.” 그때 치우천은 처음으로 기이한 사람을 발견했다. 그 사람은 늙고 병든 늙은이였는데, 그 사람은 길가에서 계속 지나는 사람들을 붙잡고 뭐라고 떠들어대고 있었다. 가만히 보니 그 사람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조금씩 먹을 것을 달라는 것 같았다. 구걸을 하는 것이었다. 마음씨 고운 치우비가 얼른 달려가 그 늙은이에게 물었다. “어르신, 왜 이런 고생을 하십니까,l 집에 아무도 없습니까?” 그 늙은이는 이미 닳고 닳은 듯 억지로 과장되게 슬픈 표정을 지으면서 부르짖었다. “자식 놈들은 높은 분께 곡식을 못 내서 종으로 팔려갔소 아들 둘 딸 하나가 모조리 팔려갔고, 이제는 난 굶어죽는 수밖에 없소 날 좀 도와주시오.” 치우비가 놀라 목소리를 높였다. “이런 늙은 아버지를 놔두고 자식을 모조리 종으로 데려가다뇨? 아무리 곡식을 못 내도 그렇지, 그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죄를 짓거나 빚을 갚지 못하면 종살이를 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주신에서는 늙은 부모를 놓아두고 모든 자식을 다 데려가는 일은 없었다. 그러면 그 부모를 죽게 만드는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법이라기보다는 기본적으로 지키는 일종의 윤리 같은 것이었다. 그러자 노인은 울면서 말했다. “그런 것을 누가 따진답니까? 나 같은 늙은이는 죽건 말건 아무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창피스럽게도 먹을 것을 얻어먹고 살고 있지만, 그나마 주신 사람은 도와주질 않아요. 지나가는 다른 부족 사람들이 오히려 더 잘 도와줍니다.” “어르신 처지가 몹시 안 되었습니다.” “나만 아니라 그런 늙은이들이 수도 없다요. 나와 같이 지내던 두 늙은이는 전에 결국 굻어죽었다오. 한 할멈은 불을 못 때서 지난겨울에 얼어 죽고.” 그 말을 듣고 치우비는 몹시 화가 나서 눈물이 나오려 했다. 치우비는 뭔가 마음속에 울컥 치밀어 오르는 것을 간신히 억누르면서 일단 입고 있던 좋은 가죽 겉옷을 벗어 노인에게 걸쳐주고, 허리에 찼던 마른 고기를 모두 건네주었다. 노인이 너무도 고마워하여 연신 고개를 숙이며 절을 하려는데 치우비는 급히 그 자리를 떴다. 치우비는 치우천에게 달려오더니 눈물까지 글썽이며 분통을 터뜨렸다. “세상에! 몇 년 사이에 신시 인심이 이렇게 변하다니! 가뭄이 든 것도 아니고 병이 돌거나 홍수가 난 것도 아닌데 신시 부근에서 멀쩡하게 굶어죽는 사람이 있다구? 이것이 신시야? 주신 제일의 신시가 어째서 이런 꼴이 되었지?” 치우천도 마음이 아파 표정이 숙연해졌다. 치우우레도 몹시 언짢은 듯 말했다. “너희도 다 컸으니 내, 말해주마. 이것이 지금의 신시다. 땅을 많이 차지한 사람들이 그 땅에서 나는 곡식을 점점 많이 빼앗아가고 있다. 그래서 없는 사람은 더 없게 되고, 있는 사람은 더 많아진다. 한쪽에서는 귀한 물들인 옷을 입고 한 끼니에 소 한 마리씩을 잡아 좋은 부분만 먹고 버리는 짓을 하는데, 한쪽에서는 굶어죽는 사람이 즐비하다. 나도....... 나도 이런 꼴이 보기 싫다. 그래서 신시에는 잘 오려 하지 않는단다.” “한웅님께서는 이런 일을 아십니까?” “한웅님께서는 이미 몇 년 전부터 몹시 몸이 안 좋으시다. 그래서 나오시지 못하지. 그 틈을 타서 신시의 높은 사람들이 오만 짓을 다하고 있는 게야. 정말 답답한 일이다만, 조심 하거라. 신시 안에서는 절대 함부로 입을 놀려서는 안 된다. 신시 밖에서는 별 문제 아니다만, 신시 안에서 떠들다간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간다.” “뭐가 쥐도 새도 모르게 잡아갑니까? 귀신이라도 있습니까?” 치우비가 또 분통을 터뜨리자 치우우레는 고개를 저었다. “하늘군대가 잡아간다.” 치우비는 너무도 기가 막혀 외쳤다. “하늘군대가요? 아니, 하늘군대는 주신 사람을 잡으라고 만든 군대입니까?” “말하기조차 부끄럽구나. 허나 너도 차차 알게 될 것이다.” 말하는 사이 저만치 구석에 숨어 있던 초라한 몰골의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치우우레에게 다가왔다. “치우우레님! 치우우레님!” 그들은 몹시 더럽고 가난한 사람들이었는데, 치우우레를 알고 있는 듯했다 주신 사람보다는 다른 부족에서 온 사람들이 훨씬 많은 것 같았다. 치우우레는 별말을 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문 채 그냥 담담한 태도로 싣고 있던 음식이나 물건들을 그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나누어주었다. 받은 사람들도 한두 번 고개를 끄덕였을 뿐 굳이 공치사는 하지 않았다. 치우우레의 성격이 공치사를 듣는 것을 대단히 싫어한다는 것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은 다만 고마움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치우우레님 덕분에 산다고 자기들끼리 쑥덕거리며 가버렸다. 치우우 레는 이미 오래 전부터 신시에 올 적마다 힘없고 불쌍한 사람들을 돕느라 전력을 다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보고 무라가 치우비에게 말했다. “훌륭하신 아버님을 두셨어요.” 치우비는 기쁘다기보다는 눈물이 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많지도 않은 물건을 말없이 나누어주는 아버지의 모습이 당당하고 멋지다기보다는 왠지 한없이 가련하고 지쳐 보였기 때문이다. 치우비는 얼른 달려가서 아버지를 도와주었다. 치우천은 그런 아버지의 모습과 신시 주변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알한이 치우천에게 다가와 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치우천은 억눌린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눈물이 나을 것 같아서 참고 있는 중입니다. 신시에 오시라고 해서 못 볼 것을 보여드리는군요.” 알한이 한숨을 길게 쉬었다. “어디에서나 있는 일입니다. 너무 신경 쓰시지 마십시오. 투르크에서도 가난한 사람들과 부자들이 득시글거립니다. 허허.” 무라도 조용히 한마디 끼웠다.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잖아요 도울 수 있는 데까지는 도와야지만......” 그러나 치우천은 고개를 저었다. “안파견 한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이롭게 하라고 가르치셨는데, 누구는 너무 잘살고 누구는 너무 못사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잘난 사람이 잘살고 못난 사람이 못사는 것은 할 수 없지만, 못산다고는 해도 굶어죽을 지경까지 만들어서야 되겠습니까?”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을 무슨 수로 다 돕는단 말입니까? 더구나 게을러서 못살게 된 사람까지 다 도울 수는 없는 일입니다. 누구나 자신이 열심히 일해서 살아가야 하는 법이니까요.” 알한의 말에 치우천은 씁쓸히 웃었다. “그건 맞습니다만, 열심히 일할 수 있는 것을 안 해서 못살게 된 것이 아닌지도 모르지요. 아무리 열심히 일하려 해도 일할 게 없다거나 일을 해보았자 저것밖에 안 된다면, 그게 바로 문제 아니겠습니까? 아버님이 저들을 돕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만, 저렇게는 안 됩니다. 모두가 다 열심히 일할 수 있게 만들어주고, 일하고 땀 흘린 만큼 얻는 것이 있도록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안파견 한님의 뜻일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신시는......” 치우천은 말을 맺지 못하고 눈물을 감추려는 듯 잠시 하늘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신시 한가운데에는 솟대가 있습니다. 구리의 만든 아주 큰 솟대입니다. 저는 어릴 적, 신시에 들어가면 그 솟대를 보면 참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솟대가 부끄럽습니다. 쳐다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날 일행은 신시에 들어가지 못했다. 무슨 절차가 그리 복잡하고 따지는 것이 많고 까다로운지 알 수 없었다. 치우우레는 늘상 신시에 드나들던 사람이고, 치우천 치우비도 주신 사람이라 상관없지만, 알한이나 무라, 다른 부족장들은 의두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작은 주신에서 같이 온 백 명의 전사들은 들어갈 수조차 없었다. 치우우레는 보다 못해 자신이 직접 이아기 해본다고 먼저 신시로 들어섰으나 그날 밤이 되도록 나오지 않았고 결국 신시의 문은 굳게 닫혀버렸다. 덕분에 일행은 신시 밖에서 있는 허름한 빈집에서 하룻밤을 지낼 수밖에 없었다. 신시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서인지는 몰라도 다행히 신시의 문 밖에는 그런 허름한 빈집들이 많이 지어져 있었다. 하도 절차가 까다로워서 부족장들 중 짜증내는 사람이 많았으나 신시를 지키는 하늘군대의 사울아비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허름한 빈집들에는 신시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다른 부족 사람들도 많았는데, 심하게는 대엿새씩 기다리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투덜거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지만 신시 안의 물건이 제일 좋기 때문에 쉽게 포기하는 사람이 드물었고, 며칠씩 기다리더라도 신시에 들어가려 했다. 대부분의 다른 부족 사람들은 신시 물건을 사기 위해 수십 일씩 걸려서 신시까지 오기 때문에 여기서 며칠 더 걸리더라도 물건을 사가고야 만다는 것이다. 허나 넌지시 들리는 말에는 값진 물건을 몇 개 전해주면 그렇게 기다릴 것도 없이 쉽게 들어갈 수 있다는 얘기도 있었다. 치우비는 통탄스러워서 치우천에게 중얼거렸다. “예전에 신시에 들어가고 나가는 것은 어느 부족 사람이건 마음대로였잖아?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이런 고약한 법이 어디 있어?” “전에 사울아비 벗들이 하던 말의 뜻을 이제야 알 것 같구나. 신시는 썪어가고 있어. 아니, 이미 썩어버렸다.” 치우천이 눈을 빛내며 말하자 치우비가 넌지시 물었다. “이렇게 된 판에 신시에 와서 무엇 해,1 그냥 작은 주신에서 우리끼리 사는 게 낫지 않을까?” 치우천은 고개를 저으며 말끝에 힘을 주었다. “그건 안 된다. 작은 주신이 비록 많이 커졌다고는 하지만, 아직 조그마한 부족에 지나지 않아. 신시를 고쳐야 한다. 반드시......” 다음날 아침, 날이 밝자 치우우레가 신시에서 불만스러운 얼굴로 나왔다. 이제서야 이야기가 되었다며 치우우레는 부족장들에게 연신 미안하다고 말했다. 치우천이 차분하게 물었다. “도대체 누가 신시에 못 들어가게 하는 겁니까?” “고시울률님이다.” “역시......” 치우천이 무심코 중얼거리자 치우우레는 낯빛을 흐렸다. 치우우레의 괴로운 마음을 치우천은 잘 알고 있었다. 고시울률은 치우우레의 아내이자 치우형제의 어머니인 미리내의 아버지였다. 때문에 치우우레에게 고시울률은 아버지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아무리 치우우레가고시울률에게 화가 나고, 일이 잘못되어 간다고 생각해도 치우우레의 처지에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간혹 형제끼리 서로 죽이거나 부모가 아이를 죽이는 일도 벌어지던 때였지만, 그래도 자식이 부모를 해치는 것은 앞서의 일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엄청난 짓으로 생각되던 때였다. 그 때문에 옴짝할 수 없는 입장이 된 치우우레로서는 마음이 괴롭기도 했으리라. 치우우레가 짧게 말했다. “항상 조심하거라. 그리고 잘해주기 바란다.” 그 말을 하고 치우우레는 돌아서서 부족장들에게 가버렸다. 치우천은 숨을 한 번 깊이 쉬고는 신시 안으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신시 안에서는 치우천과 치우비를 맞이하기 위해 몇몇 반가운 사람들이 나와 있었다. 풍백 비렴과 태산 회의 때 만났던 젊은 벗들 중 사울아비가 아닌 도단이, 질쾌, 스름이가 마중 나와 있었던 것이다. 오랜만에 보는 비렴의 든든한 모습에 치우천과 치우비는 몹시 반가워했다. 다른 사람들도 무척 기뻐했다. 비렴은 싱글벙글 웃으면서도 여전히 무게 있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잘되었구나, 잘되었어. 너희 형제가 살아 돌아오다니, 정말 안파견 한님이 도우신 것이구나.” “그동안 별 일 없으셨사옵니까?” “천, 너는 이제 부족장이 되었다면서? 그래, 좋구나. 좌우간 이번에 큰 공을 세웠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정말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내, 한웅님께도 아뢰었느니라. 좀 있다가 다른 부족장들과 함께 한웅님을 뵙도록 하자.” “한웅님은 좀 어떠십니까?” 치우천이 걱정스레 묻자 질쾌가 대답했다. “한웅님은 몸이 좋지 않으시지만, 그래도 오늘은 한결 정신이 맑아지셨어.” “그러냐? 그리고 스름이님은 한결 더 예뻐졌군요.” 치우천이 농담을 하자 음침한 스름이의 얼굴에 그래도 밝은 미소가 감돌았다. “예뻐지긴 뭐가요 아직도 남자들이 전부 슬슬 피하기만 하는데.” 그러자 빙그레 미소만 머금고 있던 도단이가 차분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천형, 비형.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니 정말 반가워 나는 천형 형제가 죽지 않고 무사할 걸로 믿었었어. 정말 이럴 때는 눈을 번쩍 떠서 보고 싶은데...... 하하.” 치우천, 치우비는 한동안 그들과 환담을 나누었다. 도단이는 이제 박수 중에서도 상당히 높은 지위에 올라 있었고, 질쾌도 의술을 인정받아 이제는 작은 솟대단군 중의 하나가 되어 있었다. 스름이는 최근에 운사 신지울태의 제자가 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알한과 무라는 별로 기분 좋은 표정이 아니었다. 그들은 지나족의 수만 대군을 물리친 영웅 중의 영웅들이라 할 수 있었다. 허나 그런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베풀어주는 환영식 같은 것이 전혀 없는 것이 이상했다. 상은 고사하더라도 예전에 친했던 몇몇 벗들이 나와 맞아주는 것 말고는 잘했다는 말 한마디 건네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알한은 무라와 목소리를 낮춰 이야기를 나누었다. “투르크에서는 이 정도로 큰 전쟁에서 이긴 영웅에게는 엄청난 잔치를 베풀어주고 으리으리하게 환영식을 열어주는데 주신은 좀 다르긴 다른가 봅니다.” 말수 적은 무라는 그저 얼굴만 살짝 찡그려 보였을 뿐 말이 없었다. 그러자 울쿠타와 야쿠타도 한마디 거들었다 “아무래도 좀 이상해. 주신 사람들은 이긴 것을 별로 반겨하는 것 같지가 않잖아.” 치우천은 알한과 무라, 울쿠타, 야쿠타, 그리고 부족장들을 비렴과 벗들에게 인사시켰다. 알한과 무라는 이미 태산회의 때 먼발치로나마 본 적이 있는 사람들이었으나 부족장들은 태산 회의 때의 젊은 영웅들을 다시 보게 되어 몹시 반가워했다 특히 세상에 이름이 드높은 주신 삼사 중의 한 사람인 비렴을 만난 것을 몹시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눈치였다. 부족장들은 치우 형제와 작은 주신의 전사들의 활약으로 수만 명에 달하는 유망의 군대를 물리친 이야기를 마구 떠들어댔다. 그러자 비렴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야기는 나도 들은 바 있소이다. 정말 대단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소 주신에서도 사울아비들을 많이 보낼 수 없는 처지여서 걱정이 많던 참인데, 작은 주신에서 그 많은 지나족을 물리쳐 준 것은 정말 기쁜 일이오. 좌우간 어서 안으로 들어갑시다. 한웅님께옵서 기다리고 계시오.” 비렴은 성큼성큼 걸어 앞장을 섰고, 일행은 그 뒤를 따랐다. 신시는 사방이 모두 높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그 벽 안쪽으로 주욱 집들이 들어서 있었다. 그리고 신시의 중앙에는 커다란 길이 네 갈래로 나 있으며, 남쪽 길 주변에는 큰 시장이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솜씨 좋은 기술자들이 이 신시에 모여 있었다. 신시가 번화하기도 했지만 특이한 법이 있어서 신시의 기술은 으뜸이 될 수밖에 없었다. 바로 ‘솜씨 겨룸’이라는 것이었는데, 이미 신시에서 장사를 잘하는 기술자라 하더라도 다른 기술자가 솜씨 겨루기를 청할 수 있었다. 이 솜씨 겨룸은 항상 들어주어야만 했고 솜씨 겨룸에 응하지 않는 사람은 신시에서 장사를 할 수 없었다. 만약 새 기술자가 와서 솜씨를 겨루어 이기면, 진 사람은 말없이 장사하던 터를 버리고 버나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그 때문에 신시의 기술자들은 항상 치열하게 솜씨를 닦아야만 했다. 그러나 신시 안에서 파는 물건은 그런 이유 때문에 밖에서 파는 물건의 다섯, 여섯 배 값을 받을 수 있었으며, 그럼에도 항상 물건이 모자라서 난리였다. 이런 제도 덕분에 신시와 나아가서 주신은 으뜸의 기술을 가진 부족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신시의 서쪽은 하늘군대가 머무는 곳이었다. 그리고 신시의 동쪽은 아주 높은 귀족들이나 이름난 집안의 으뜸 어른들이 사는 거주지였다. 그리고 신시의 중앙에는 커다란 솟대가 있는데, 그 주위에는 솟대 단군들의 집이 있었으며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단, 무당과 박수들의 거주지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신시의 북쪽은 한웅이 있는 곳으로, 한웅의 거주지와치의장이 함께 있었다. 물론 한웅을 모시는 사람들의 거주지도 함께 있었으며 한웅의 거주지는 신시 안에서도 다시 꽤 높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커다란 솟대 아래를 지나면서, 치우 천은 남몰래 고개를 숙이며 속으로 맹세했다. ‘안파견 한님이시여, 저는 신시를 바꿀 것입니다. 주신을 바꿀 것입니다. 도와주소서.’ 치우천과 치우비도 신시에 드나든 적은 많았지만 한웅의 처소에 들어가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신시 북쪽의 작은 성벽을 지날 때 다시 한참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했으며, 무기를 모두 놓아두어야 했다. 그 다음에도 다시 많은 하늘군대 사울아비들의 까다로운 절차를 거친 다음에야 한웅의 처소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고시울률이나 기타 높은 귀족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한웅의 거처는 그야말로 화려하고 으리으리했다. 더구나 먼지 한 톨 없이 깔끔하게 정돈이 되어 있어서 엄숙함이 더했다. 많은 부족장들은 그러한 분위기만으로도 기가 죽었다. 다시 여러 개의 문을 통과한 후에야 비로소 일행은 사와라 한웅을 볼 수 있었다. 사와라 한웅의 양 옆에는 우사 병예와 운사 신지울태가 있었다. “왔느냐?” 사와라 한웅이 다소 힘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치우우레가 슬쩍 눈짓을 하자, 치우천과 치우비는 함께 앞으로 나서서 사와라 한웅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치우천이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작은 주신의 부족장 치우천이 인사드리옵니다.” “그래...... 이야기는 들었다. 유망을 물리쳤다면서?” “저 혼자 한 것이 아니옵니다. 뒤에 계시는 많은 부족장들이 도와주셨나이다.” 사와라 한웅은 몇 번 기침을 하더니 슬쩍 힘없이 웃었다. “그래..... 안다, 알아. 여러 부족장님들, 다들 반갑구려. 내 몸이 좋지 않아 일일이 반겨주지 못하는구려.” 부족장들도 모두 나서서 사와라 한웅에게 인사를 했다.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사와라 한웅은 과거 치우 형제를 사막에 내친 것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 이야기를 나눈 끝에 사와라 한웅이 눈짓을 했고 곧 사울아비 여러 명이 구리거울과 장신구를 가져와 부족장들에게 선물로 내렸다. 그리고 사와라 한웅은 몸이 불편하다며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부족장들은 좀 허탈해했으나 사와라 한웅 대신 주신 삼사가 부족장들을 접대했으므로 그리 불만스러운 기색을 보이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때 신지울태가 슬쩍 치우천에게 귀띔했다. “한웅님께옵서 너희 형제를 따로 보고 싶으신 모양이야. 그러니 조금 있다가 살짝 빠져나가 뒷방으로 가야 할 것이야. 내가 밖에서 기다릴 것이니 나오도록 해야 할 것이야.” 치우천은 곧 눈짓으로 알았다고 응답한 후 잠시 시간을 보냈다. 그런 다음 치우천은 슬쩍 치우비를 불러 함께 밖으로 나왔다 밖에서는 신지울태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치우 형제를 데리고 여러 사울아비들이 삼엄하게 지키고 있는 복도를 한참 지나 어느 화려한 새 무 의 장식이 있는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신지울태는 당부의 말을 잊지 않았다. “한웅님은 몹시 편찮으시니, 행여라도 기분을 상하게 하면 아니 될 것이야. 지난날 한웅님께서 너희 형제를 사막에 버리셨지만, 그렇다고 한웅님을 원망해서는 아니 될 것이야. 물론 그러리라 믿지만. 그렇지?" 치우천은 고개를 힘 있게 끄덕여 보였다. 그러자 신지울태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방 안에 일렀다. “치우 형제를 데리고 왔사옵니다.” “들어오라 하게.” 안에서 사와라 한웅의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치우 형제는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은 의외로 깔끔하고 장식 하나 없이 밋밋하기 그지없었다. 태산 회의 때도 그러했는데, 아마도 사와라 한웅의 성격이 장식 같은 것을 몹시 싫어하는 듯했다. 사와라 한웅은 고운 이불을 덮고 누워 있었고, 그 옆에서 두 사람의 시녀가 시중을 들고 있었다. 사와라 한웅은 누운 채 시녀들을 보고 말했다. “너희는 나가 있거라.” 시녀들이 나가자 사와라 한웅은 몇 번 거세게 기침을 한 다음 가슴을 탁탁 치며 말했다. “천아, 비야. 그동안 잘 지냈느냐? 하하, 내가 너희를 죽이려 해놓고 이제 와서 이런 말 하기는 우습다만......” 치우천, 치우비는 동시에 황급히 말했다. “천만의 말씀이옵니다.” 사와라 한웅은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허나 할 수 없었느니라. 그때는 나도 그것이 옳다고 생각했을 뿐, 그런데 안파견 한님이 너희를 돌보아주셔서 너희가 살아났으니, 내 새삼 무엇을 말하겠느냐? 사막에서 어찌 살아났는지는 모르지만, 좌우간 너희는 내 원망을 참 많이 했겠지?” 일 없사옵니다. " 치우천이 정색을 하며 말하자 사와라 한웅은 힘없이 웃었다. “원망해도 괜찮느니라. 그러나 할 수 없었어. 한웅이란 자리도 쉬운 자리는 아니거든.” “정말 그렇지 않았사옵니다.” 사와라 한웅은 말하기가 힘든 듯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천천히 말했다. “하긴, 너희는 착한 녀석들이지. 너희 아버지 치우우레, 그 사람을 나는 참 좋아한다. 그 사람의 아들들이니 그 핏줄이 어디 가겠느냐? 듣자하니 천, 너는 부족장이 되었다면서? 이름이......좁은 주신이더냐?” “작은 주신이옵니다.” “허허, 그래. 작은 주신. 너희가 나를 원망했다면 새 부족에 그런 이름을 붙이지도 않았을 것이고, 전사들을 몰고 지나족과 싸우러 가지도 않았을 테지. 너희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내 그래서 너희를 불렀다.” 치우천은 속으로 사와라 한웅이 비록 늙고 아프지만 세상일을 보는 눈은 여전히 뛰어나다고 생각했다. 사와라 한웅이 계속 말했다. “안 그래도 유망이 마갸르와 미아우로 쳐들어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몹시 걱정했느니라. 그러나 사울아비를 보낼 만한 처지가 되지 않았어. 삼사는 보내야 한다고 말하지만 귀족들이 전부 반대하니 나도 별수 없었느니라. 귀족들은 주신 사울아비들의 피를 마갸르나 미아우 때문에 흘린다는 것도 좋지 않다고 여기기 때문이지. 그래 나가져는 사람은 말리지 않기로 하고, 아무튼 주신에서 사울아비들을 많이 움직이지는 않기로 한 것이다. 헌데 너희가 유망을 물러서게 만들었다니, 대단하구나.” 치우천과 치우비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만 숙였다. 그러자 사와라 한웅이 물었다. “듣자하니 유망의 군대는 수십 천이 넘었다는데, 너희 작은 주신 부족이 그렇게 크냐? 전사들이 수십 천이나 있느냐?” 치우천은 조용히 대답했다. “작은 주신의 전사라야 기껏 이천 명 정도가 있을 뿐입니다. 부족사람을 다 모아도 육칠천 명밖에 안 됩니다.” 사와라 한웅은 몹시 놀라는 듯했다. “겨우 이천 명으로 어떻게 수십 천을 물러서게 했느냐?”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치우천이 대답했다. “사실 그중 천 명은 아직 훈련이 덜 되어서, 이번에 끌고 나온 것은 천 명 정도밖에 안 되었습니다.” “허허, 이럴 수가. 그러면 작은 주신 전사들은 전부 비 너처럼 힘이 세고 강한 게냐?” 치우비는 황망히 고개를 저으며 공손히 말했다. “아닙니다. 그럭저럭 용감한 전사들이지만 한 사람씩 겨루면 주신의 보통 사울아비들과 싸워도 이기기 힘들 것입니다.” “그러면 대체 어떻게 한 것이지? 천 명으로 어떻게 수십 배의 사람과 싸워 이길 수 있단 말이냐?” 이번에는 치우천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저희 전사 한 사람과 다른 부족 전사 한 사람을 싸우게 한다면 아마도 누가 이길지 말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저희 전사 열 명과 다른 부족 전사 열 명을 싸우게 한다면 저희가 이깁니다. 저희 전사 백 명이면 다른 부족 전사 삼백 명도 이길 수 있고, 천 명이면 다른 부족 전사 다섯 천명도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이번에 지나족과는 직접 싸운 것이 아니고, 물러서게만 만들었을 뿐입니다. 유망이나 형천, 축융은 모두 대단한 사람들이니 결코 이대로 물러서지 않을 것입니다. 감히 말씀드리건대, 한웅께옵서는 지나족을 조심하시옵소서.” 사와라 한웅은 눈을 빛냈다. “아마도 네 재주가 있어서 전사들이 그리 강해진 것이겠지?” “네가 무슨 재주가 있겠사옵니까? 벗들이 잘해주는 까닭이옵니다.” “그건 나도 안다. 태산 회의 때 유명해진 젊은 영웅들이 너희 부족에 많이 가 있다더구나.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그렇게 될 수가 없느니 네 힘이 있기에 그리 되었을 것이다. 안 그러냐?” 사와라 한웅이 날카롭게 지적하자 치우천은 다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러자 사와라 한웅이 말을 이었다. “천아, 나는 원래 너희 형제를 하늘군대 큰 스승에 두려고 했다. 너희 형제의 사람됨을 내가 잘못 본 것은 아니었어. 다만..... 다만 지난 일이 마음에 걸리는구나. 너희 형제는 정말 그 일을 다 잊을 수 있겠느냐?” “물론이 옵니다!” “그러면 되었다. 너희 형제는 이미 큰 공을 세웠으니, 전에 말한 대로 하늘군대의 큰 스승으로 두기로 하마.” 그러면서 사와라 한웅은 한숨을 길게 쉬었다. “내가 늙고 몸이 아프니, 사람들도 내 말을 듣지 않는다. 이미 나는 이름만 한웅이지, 힘이 없어. 게다가 나는 움직일 수도 없으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다. 나는 젊은 사람들의 힘이 필요한 거다. 알겠느냐?” 치우 형제는 릴이 고개를 숙였다. 사와라 한웅은 두 형제의 모습을 보고 흡족한 듯 웃으며 타이르듯 말했다. “좌우간 앞으로 잘해주기 바란다. 너희는 다 좋은데, 사람들과 사이는 별로 안 좋은 듯하더구나. 사이가 좋은 사람과는 좋고, 사이가 안 좋은 사람과는 아주 안 좋아. 그런 것은 좋지 않다. 신시에 있으려면 말야.” 치우비는 사와라 한웅이 아마도 치우가람 형제와 고시울률을 말하는 것 같다고 여겨 좀 찔끔했다. 그러나 치우천은 딱 자르듯 말했다 “하늘군대 큰 스승으로 두어주심은 감사하옵니다만, 저희는 신시에 있을 수 없사옵니다.” 사와라 한웅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그건 왜냐?” “저는 작지만 부족장이옵니다. 제 부족을 버려두고 신시에 들어가 살 수는 없사옵니다. 다만...... 다만.....감히 청할 것이 있사옵니다.” “무엇인데 그러느냐.l 말해보아라.” “제 부족 전부를 주신 사람으로 받아주소서. 그것이 제가 바라는 것이옵니다.” 사와라 한웅만이 아니라 치우비마저도 놀랐다. 주신은 원래 혈족의식이 강해서, 다른 부족 사람과 잘 지내기는 해도 다른 부족 사람을 주신 사람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인색하기 그지없었다. 큰 공을 세운 사람이라야 간신히 주신 사람으로 받아주는 실정이었다. 그런데 한두 명도 아니고 육칠천 명이나 되는 수많은 부족 전체를 통째로 주신 사랑으로 받아달라는 것이 아닌가? 그야말로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사와라 한웅은 난감한 듯 물었다 “너희 부족은 원래 어느 부족이었느냐?” “마갸르, 미아우, 타타르, 키탄, 몽골, 카린족, 거기다가 창족이나 다른 수많은 사람들로 이루어진 부족입니다.” “허, 하나도 아니고 그 많은 다른 사람들을 그렇게 주신 사람을 만드는 건...... 아무리 그래도 쉽지 않다. 안 그래도 요즘 귀족들은 다른 부족들을 하나도 곱게 보고 있지 않느니라. 몇 사람이라면 모르지만...... 그렇게 많은 사람을...... 더구나 주신에 충성할지도 의문이......” 치우천도 쉽지 않을 것이라 짐작은 하고 있었다. 더구나 그 사람들은 모두 주신보다도 치우천을 떠받드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수십 배나 많은 유망의 군대를 물리친 정예 병력이다. 그 때문에 귀족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치우천의 존재를 상당히 거북하게 생각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사와라 한웅도 생각이 릴은 사람이니 그런 것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치우천으로서는 절대 물러설 수 없었다. 지금 이대로 아우와 함께 몸만 신시로 들어와 버린다면, 기반이 없는 그들은 뜻을 펴기는커녕 소리 소문 없이 당해버릴 수도 있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것만은 반드시 성공시켜야 했다. 그때 치우천이 뜻밖의 제안을 했다. “모든 사람이 주신에 큰 공을 세우면, 주신 사람이 되는 데 문제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어떻게 그러려느냐?” 치우천은 잠시 마음을 가다듬고 엄청난 말을 했다. “지금 주신은 지나족 유망 때문에 힘들 것입니다. 유망은 반드시 계속 쳐들어와서 주신과 지나족 사이에 있는 마갸르와 미아우를 몰아내려 할 것입니다. 그 땅을 지나족이 차지하면 주신으로서도 문제가 커집니다. 그렇지요?” “그건 그렇다만......” “지나족 유망이 그 먼 길에서 계속 공격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공상 때문입니다. 유망이 동쪽으로 나아가 창힐을 시켜 공상을 건설한 것은 바로 북쪽으로 밀고 나오려는 생각 때문입니다. 공상이 없으면 유망은 북으로 치고 올라 올 수 없고, 당연히 마갸르나 미아우는 조용해집니다. 한웅이시여, 지금이 기회입니다. 공상을 쳐서 빼앗으면 유망은 움직일 수 없습니다!” 치우천이 열변을 토하자 사와라 한웅은 홀린 듯 물었다. “공상을.....?” “그렇습니다. 유망의 지나족도 아주 큰 부족입니다. 사람은 셀 수도 없이 많고 지닌 땅도 주신보다 큽니다. 그런 유망과의 힘겨루기는 결코 한두 해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공상을 빼앗으면 우리가 단박에 이기는 것입니다!” 사와라 한웅은 놀란 나머지 말까지 약간 더듬었다. “물론..... 네...... 네 말이 맞다. 그러나 천아, 너 공상이 여기서 얼마나 먼지 아느냐? 공상을 빼앗으려면 공상까지 가는 땅을 다 빼앗아야 한다. 더구나 공상에는 수많은 지나족이 살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공상을 빼앗는다는 것이냐? 더구나 그러려면 얼마나 많은 사울아비가 있어야 하는지 알고 있느냐? 그런 많은 사울아비를 움직일 힘이 없느니라. 설마 작은 주신의 전사들만으로 공상을 빼앗겠다는 것은 아니겠지?” 치우천이 힘 있게 말했다. “물론 그럴 수야 없습니다. 허나 사울아비 삼천 명을 두 해만 맡겨주소서. 제가 공상을 빼앗아 보이겠습니다.” “자신 있느냐?” “일이 되고 안 되고는 하늘에 달린 것이옵니다만, 열에 여덟은 자신이 있나이다. 그것을 해내면, 작은 주신 전부를 주신으로 받아주소서. 간절히 드리는 부탁이옵니다.” 치우천이 말 하면서 고개를 숙이자 사와라 한웅은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 녀석의 말은 너무도 놀랍다. 도대체 지나족이 이미 빼앗은 땅 깊숙이 있는 공상을 무슨 수로 점령한단 말인가? 그것도 겨우 삼천 명의 사울아비로? 말도 안 된다. 허나 삼천 명이라면 해볼 만하다. 어차피 이대로라면, 유망은 계속 쳐들어 을 것이고, 그 정도는 손해를 입을지 모른다. 그러나 치우천이 공상으로 내려간다면 유망도 그들에 걸려서 섣불리 쳐 올라오지 못할 것 아니겠는가?일단 한해는 벌 수 있을지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굳이 손해 보는 일은 아닐 것이다.’ 사와라 한웅의 생각은 계속 이어졌다. ‘더구나 이 녀석 꼭 부탁은 너무 맹랑하다. 수천 명을 주신 사람으로 만들어 달라니? 허나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을 바라는 것이니 들어주는 척해도 상관없겠구나. 정말 공상을 점령할 수 있을 리도 없지만, 점령한다면 좋은 것이니 그 정도 부탁은 들어줄 수도 있을 테고, 실패하면 그냥 없어지는 것이니 내가 손해 볼 일은 없지 않은가?’ 한참 생각하던 사와라 한웅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정말 해보겠다면, 좋다. 해 보거라.” “감사하옵니다!” 치우천이 깊이 고개를 숙이자 사와라 한웅이 덧붙였다. “너무 황당한 이야기 같으나 너도 생각 없는 사람은 아니니 네 말을 한번 믿어보기로 하겠다. 대신 실패하면 혼날 줄 알거라.”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사와라 한웅을 만난 뒤, 그날 밤 잠자리에 들기 직전 치우비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치우천에게 말을 건넸다. “형님, 이건 좀 너무한 것 아니야? 겨우 삼천 명의 사울아비로 공상을 점령한다고?” 치우천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나도 그 말은 하지 않으려 했다만, 그 정도로 걸지 않으면 작은 주신이 받아들여질 리 없지 않겠니?”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 무리야. 겨우 삼천. 치우천이 웃으며 치우비의 말을 잘랐다. “삼천이 아니다. 이천이다.” “뭐?” “삼천의 사울아비는 물론 내주시겠지만, 그들을 믿을 수 없어. 우리 작은 주신의 이천 명만으로 해내야 한다.” 치우비는 눈이 뒤집힐 듯 놀랐다. “그건 말도 안 돼!” 치우천은 치우비가 놀라는 것을 보고도 연신 싱글거렸다. “난 아까 말했다. 열에 여덟은 자신 있다고.” “형, 형님. 공상에 지나족 전사가 얼마나 많은지 잊어버렸어? 적게 잡아도 백 천만이라고! 그걸 고작 이천 명으로 이긴다고? 더구나 유망이나 형천, 축융 등이 있는데?” 그러나 치우천은 여전히 태연했다. “된다, 비야. 너 겨울에 눈을 굴리며 논 적이 있지?” “난데없이 웬 눈 타령이야?” “그것과 마찬가지다. 눈덩이는 처음에는 작지만, 그것을 굴리면 점점 커져서 나중에는 사람만한 눈사람이 된다. 그것과 마찬가지야. 단, 때를 놓치면 안 된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어.” “나중에 알게 될 거다. 참, 비야. 내일 나와함께 오랜만에 불쇠 할아범 만나러 가보자.” 불쇠 할아범은 신시의 유명한 대장장이였다. 치우우레의 도끼도 그가 만든 것이고, 주신에서 구리 무기 다루는 솜씨로는 그를 제일로 쳤던 것이다. 그러나 치우비는 고개를 저었다. “난 내일 같이 못 가. 할 릴이 좀 있어서.” “그래? 그림 나 혼자 가보마. 무슨 일인데?” 치우천이 묻자 치우비는 이상하게 얼버무렸다. “그냥.......그런 일이 있어.” 그날 밤 형제는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치우비는 제아무리 형의 머리가 뛰어나다고는 해도, 이천 명 남짓한 작은 주신의 전사들로 공상을 점령한다는 것은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 그 걱정으로 제대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 반면 치우천은 스스로 생각한 전략에 흥분되어, 그것을 다듬고 또 다듬느라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새로운 무기 다음날 치우천은 불쇠 할아범을 찾아갔다. 치우비는 어디로 갔는지 아침 일찍부터 보이지 않았다. 불쇠 할아범은 얼굴이 대춧빛처럼 그을렸고 키는 작았지만 어깨가 떡 벌어지고 팔다리가 굵은 노인이었다. 머리며 수염은 허옇게 세었으나 눈빛만큼은 날카로웠고, 평소에 인자했지만 한번 성질을 부리면 아무도 말릴 수 없는 것이 불쇠 할아범이었다. 하지만 불쇠 할아범의 구리 다루는 솜씨는 실로 주신에서 제일가는 것이어서 그는 이 신시 성안에 솟대큰길 가에 대장간을 낼 수 있었던 것이다. 구리 만지는 것이 좋아 장가도 가지 않고 화로를 마누라 삼아 혼자 살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지금 불쇠 할아범은 그 대장간 앞에 뻣뻣하게 서서 맞은편의 키가 작달막하고 이상하게 생긴 남자를 쏘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치우천은 불쇠 할아범에게 다가가려 했으나 분위기를 눈치 채고 아는 체하지 않고 곧바로 구경꾼들 틈에 끼어 사태를 지켜 보았다. 불쇠 할아범 맞은편의 키가 작달막한 남자는 아무래도 주신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낮은 코에 눈썹이 짙고 눈이 둥글며 얼굴빛이 거무스레한데다 머리가 곱슬곱슬한 것이 아주 멀리에는 온 사람 같았다. “그래, 그러니까 자네가 나보다 더 좋은 칼을 만든다, 이건가?” 불치 할아범은 벌써부터 성질을 내고 있었다. 그러자 맞은편의 작달막한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신시 거리는 재주 좋은 사람이 가게를 여는 법. 자네 재주가 나보다 낫다면 그러는 게 당연하지만 길고 잔은 것은 대봐야 알 것이다.” 그 말을 듣고 치우천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했다. ‘솜씨를 겨루자는 것이구나. 이거 불쇠 할아범에게 감히 솜씨를 겨루자고 하다니, 대단한 사람인 것 같은데?’ 만약 솜씨 겨룸에서 진다면 불쇠 할아범은 두말없이 삶터를 내주어야 했기에 구경하던 치우천은 아연 긴장했다. ‘설마 불쇠 할아범이 지려고? 그러나....... 저 작자는 뭔가 있는 것 같다. 아주 먼 길을 온 모양인데 무슨 준비가 있을 거야.’ 치우천이 생각하는 사이 불쇠 할아범은 집 안으로 들어가더니 커다란 구리도끼를 들고 나왔다. 치우천이 보니 그것은 치우천의 아버지 치우우레의 것과 거의 비슷한 도끼였다. 불쇠 할아범이 그것을 대장간 앞에 있는 나무등걸에 쿵 하고 내려놓자 힘을 준 것도 아니었는데 도끼날이 나무에 푹 박혔다. 보기 드물 정도로 날카로운 무기였다. 그러자 구경꾼들은 ‘와’ 하면서 갈채를 보냈다. 그런데 그 이상한 사람은 번쩍번쩍 빛나는 희한하게 생긴 조그마한 칼을 꺼냈다. 두 뼘 정도의 길이에, 보통 칼처럼 길쭉한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구부러지고 휘어진, 좌우간 아주 기묘하게 생긴 칼이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 치우천은 놀라 속으로 부르짖었다. ‘저것이다! 저 칼을 가지고 있다니!’ 그것은 바로 전에 첸누의 털물 속에서 시기르타가 찾아내어 치우비에게 주었던 바로 그 ‘크리스’라는 단검이었다. 크리스는 무척이나 강해서 이미 치우비가 그것을 사용하여 형천의 도끼를 부숴버린 적이 있었다. 치우천은 은근히 걱정되기 시작했다. ‘이번 승부는 아무래도 불쇠 할아범에게 불리할 것 같다. 이를 어쩌지?’ 치우천이 생각하는 사이 그 사람은 불쇠 할아범의 도끼를 쑥 잡아 빼고 날을 위로 가게 하여 거꾸로 세우더니, 갑자기 칼로 도끼날을 내리쳤다. 사람들은 그 사람이 무슨 짓을 하는지를 보다가 대뜸 그 사람이 칼로 도끼날을 치자 ‘어!’ 하고 소리쳤다. 다음 순간, 그 작은 칼날이 도끼날을 푹 파고 들어갔다. 분명 그리 힘을 준 것도 아닌 듯했는데 칼날이 그 날카롭던 도끼날을 깨고 들어박힌 것이다. 완전히 박힌 것은 아니지만, 도끼날이 칼날에 상해버린 것만은 틀림없었다. 남자는 도끼날과 부딪힌 부분을 손으로 집은 뒤 칼날을 다시 꺼내고는 구경꾼들에게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 칼날은 매끄러운 것이, 조금도 상하지 않은 것 같았다. 구경하던 사람들 모두가 놀라 웅성거렸다. 불쇠 할아범도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불쇠 할아범은 칼날에 맞아 깨진 도끼날을 질린 표정으로 내려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그게 자네가 만든 칼인가?” 그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불쇠 할아범은 이대로 물러설 수 없다는 듯, 움집 안으로 들어가 한참 동안 뭔가를 찾아서 가지고 나왔다. 불쇠 할아범이 다시 손에 쥐고 나온 것을 본 구경꾼들은 모두 놀라서 ‘와!’ 하며 탄성을 내질렀다. 그것은 그 낯선 이의 칼만큼이나 작은 단검이었는데, 정말로 기가 막힌 물건이었다. 몸통이 검은 구리로 되어 있었고, 칼날에 금색을 입혀 햇살을 받아 번쩍거리는 것이 너무도 멋져 보였기 때문이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돌을 갈아 만든 석기를 사용하고 있었으며, 구리 무기는 사울아비 정도가 되어야 만져볼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검은 구리꺾등로 만 든 무기는 특히 귀했는데, 그런 검은 구리에 금색 날을 둘러 만든 칼은 구경꾼들로서는 난생처음 보는 것이었다. 옛날에 치우천은 불쇠 할아범에게서 그런 칼을 하나 뺏다시피 얻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칼은 태산 회의 때 카린의 누루마이에게 주었었다. 그러나 지금 불쇠 할아범이 가지고 나온 칼은 그 칼보다도 몇 배는 좋고 예리해 보이는 것 같았다. 불쇠 할아범이 애지중지하여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보물 중의 보물인 셈이었다. 불쇠 할아범은 그 칼을 들고 한참이나 만져보다가 그 사람에게 말했다. “자네의 칼이 내 이 칼마저 날을 상하게 하거나 부러뜨린다면, 나는 깨끗이 진 것일세.” 그 남자는 눈이 부신 듯 빛나는 훌륭한 칼에 조금도 걱정하지 않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불쇠 할아범이 다시 덧붙였다. “칼을 부딪치는 것은 우리 둘 말고 다른 사람이 하도록 하지. 힘으로 칼을 꺾는 게 아니라, 어느 칼이 강한지 확인할 수 있도록, 힘이 없는 사람을 골라야 해.” 그러자 구경꾼들이 맞다고 맞장구를 쳤다. “맞다. 그래야 한다.” 그중 나이 지긋한 사울아비 한 사람이 조용히 나섰다. “손만 빠르면 나뭇잎으로도 돌을 자를 수 있다. 손재주를 겨루는게 아니라 어느 칼이 강하고 날카로운지만 보면 된다.” 그 말에 그 남자도 좋다고 했고, 불치 할아범은 누가 칼을 부딪쳐 보겠느냐고 외쳤다. 그러나 다들 그런 칼을 만져보고는 싶어 했지만, 자칫 자기가 실수할까 봐 선뜻 나서지는 못했다. 그때 치우천이 번쩍 손을 들고 절룩거리며 앞으로 나갔다. 뜻밖에 치우천이 나타나자 불쇠 할아범은 ‘어’ 하면서 치우천에게 얼른 고개를 끄덕여 보였고 그 남자는 의아한 눈빛으로 치우천을 바라보았다. 앞으로 나서며 치우천이 남자에게 말했다. “불쇠 할아버지와 난 아는 사이요. 하지만 난 보다시피 다리가 온전치 못하고, 그리 힘도 없는 사람이니 내가 칼을 부딪쳐 보겠소이다. 힘을 주지도 않고 그리 날래게 하지도 않을 것이니 염려 마시요.” 불쇠 할아범은 한참 열이 올랐던 참이라 두말없이 좋다고 했고 그 남자도 눈을 한 번 기이하게 빛내더니 좋다고 했다. 그러나 치우천의 속셈은 따로 있었다. 바로 그 칼을 직접 만져보고 싶었던 것이다. 더구나 이런 생각도 있었다. ‘저 사람은 이 크리스를 만드는 법을 안다고 했으니, 저 사람 얼굴을 미리 익혀 두어야지?’ 치우천은 불쇠 할아범의 칼을 먼저 받았는데, 묵직하고 날카로운 것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칼을 받으며 날에 손톱을 살짝 대보았는데 손톱이 쑥 베어져 들어갈 정도로 날카로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남자의 칼을 받았는데, 그 칼은 과연 치우비가 가진 크리스와 비슷한 것 같았다. 다만 그 구불구불한 모양이나 크기 등이 치우비의 칼과는 약간 달라 보였다. 무게도 치우비의 크리스보다 조금 더 가벼운 듯했다. ‘이건 이상하군. 모양이 다르고 크기도, 무게도 다 다르구나. 만드는 법이 여러 가지인 것일까?’ 치우천은 잠시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무엇이든 치우천은 깊이 생각하는 버릇이 있었다. 구경꾼들은 기다리기 지루하다는 듯 치우천에게 어서 해보라고 재촉했다. 허나 치우천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양손에 칼을 잡고 이쪽으로 쥐었다 저쪽으로 쥐었다 해보았다. 그러다가 치우천은 문득 그 키 작은 남자에게 물었다. “정말 해도 되겠소?” 키 작은 남자는 여전히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불쇠 할아범은 조급하게 치우천을 보고 외쳤다. “해도 된다!” 치우천은 키 작은 남자를 향해 다시 물었다. “이건 구리가 아닌데요? 뭘로 만든 건가요?” 키 작은 남자가 서툰 주신 말로 대답했다. “절대 말해줄 수 없소.” “좌우간 구리는 아니지요?” 집요하게 묻는 치우천이 성가시다는 듯 남자도 조급하게 외쳤다. “그래. 어서 하시오!” 마침내 치우천은 양손에 힘을 주고는 두 칼을 똑바로 세웠다가 눈을 질끈 감고 ‘탁’ 하고 세게 부딪힌다. 물론 암암리에 불쇠 할아범의 편을 들 마음이 있었으므로 불쇠 할아범의 칼은 조금이라도 힘이 더 센 오른손에 쥐고, 남자의 칼은 왼손에 쥐었었다. 그러나 칼날이 부딪히는 순간 ‘쨍’ 하는 소리와 함께 두 칼이 똑같이 튕겨져 나갔다. 놀란 눈으로 치우천이 재빨리 살펴보니 두 칼 모두 부러지지 않고 멀쩡했다. 다만 두 칼에 약간씩 날에 흠이 가 있었는데, 불쇠 할아범의 칼날이 조금 더 깊이 들어간 것 같았다. 다급한 목소리로 치우천이 얼버무렸다. “저! 둘 다 괜찮군?” 속으로 치우천은 불쇠 할아범의 칼이 크리스에 버금갈 정도로 강한 것을 보고 놀랐다. 그러나 구경꾼들은 박수를 치면서 다시 더 세게 해보라고 외쳤다. 일단 상대의 칼이 각각 일격을 감당해내자 불쇠 할아범과 그 남자는 모두 놀란 듯했다. 치우천은 속으로 안 되겠다 싶었지만 구경꾼들이 외쳐대는 데에는 방법이 없었다. 다시 한 번 힘을 모아 있는 힘껏 두 칼을 다시 부딪치자, 쨍그랑 소리가 나면서 칼 하나가 두 동강이로 부서져 날아갔다. 부러진 칼은 바로 불쇠 할아범의 칼이었다. 구경꾼들은 ‘와!’ 하고 흥분하여 고함을 질렀다. 불쇠 할아범은 땅에 떨어진 금빛 반짝이는 그 칼이 마치 자기 목이라도 되는 것처럼, 갑자기 십 년은 늙어버린 것 같은 표정으로 처연하게 그 칼날을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러자 치우천이 재빨리 외쳤다. “저런! 이븐의 칼이 이겼네요!” 그 남자는 흡족하게 이빨을 드러내며 웃어 보였다. 치우천은 불쇠 할아범에게 다가갔다. “저분이 이겼네요. 불쇠 할아범, 미안한 이야기지만 이제 가게를 비워줘야겠습니다.” 치우천의 말이 야속하게 들렸는지 불쇠 할아범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안다만......” “솜씨를 겨루어서 졌을 경우 가게를 비워주고 신시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이건 정해진 약속이라구요.” 치우천이 일부러 호들갑을 떨며 크게 외치자 구경꾼들은 ‘우’ 하고 소리쳤다. 아무리 구경꾼들이라 해도 대부분은 주신 사람이고, 불쇠 할아범과는 안면이 있는 처지였다. 또 그중 많은 사람은 치우천과 불쇠 할아범이 친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치우천이 앞장서 저 불쇠 할아범을 몰아세우는 것이 구경꾼들에게는 영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중 몇몇은 화를 내며 욕을 하기도 했지만 치우천은 못들은 척 커다랗게 외쳤다. “왜 나를 욕하는 거요. 좌우간 이제는 저분이 여기서 대장간을 할 겁니다. 그렇겠죠?” 그 남자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치우천은 재빨리 외쳤다. “이제 저희 집에서 저분에게 이것하고 똑같은 칼 서른 자루하고 도끼 스무 자루를 부탁할 거요. 내가 제일 먼저 부탁한 거니깐 다른 분들도 순서를 지키시오!” 그 말을 듣고는 그 남자의 얼굴이 조금 일그러졌다. 그것을 보고 치우천은 속으로 됐다 싶어 쾌재를 불렀다. 그 남자의 칼은 치우천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재료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 재료는 지극히 구하기 어렵거나 만들기 까다로운 것임이 틀림없었다. 치우천은 짐짓 다짐하듯 그 남자에게 말했다. “어떻소? 이제 불쇠 할아범 대신 당신이 칼을 만들어야 하니, 잘해야 합니다. 날짜를 못 지키면 우리 아버지가 도끼를 들고 쫓아올지도 모르니까요.” 그 말을 듣자 남자의 얼굴이 조금 경직된 것처럼 보였다. “그....... 그건........” “기간은 보름이면 되겠지요? 이런 좋은 칼을 만들 수 있는 대장장이니까 더 빨리 되겠지만, 처음 오신 거니까 그 기일로 해드리지요.” “아...... 안 돼요. 그 칼 재료는 아주 구하기 어렵.......” “구하기 어려운 건 난 모릅니다. 다만 여기서 내기를 한 건 이런 좋은 칼을 팔려고 그런 거 아닙니까? 그러니 팔아야죠. 보름에 칼 서른 자루, 도끼 스무 자루요.” “안 되오 그렇게는 만들 수 없소이다. 이건...... 이건...... 십 년에 칼 하나만큼도 구하기 어려운 재료란 말입니다.” 그러자 치우천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아니, 그럼 이 칼을 더 팔 수 없단 말인가요?” “그래요...... 나중에......” “나중이라구요? 아니, 그러면 왜 이 칼로 재주를 겨루었죠? 자신이 팔 수 있는 물건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건....... 이건 재주 겨룸이었소. 팔 물건을 놓고 겨룬 것이 아니라........” “그렇다면 이 겨룸은 엉터리 아니오? 팔 물건을 놓고 겨룬 게 아니니 말이오.” “아니오! 나도 보통 구리 무기를 만들 수 있고 그러니까......” 남자가 다시 뭐라고 항변하려 하자 치우천은 계속 따지고 들었다. “그렇다면 구리 무기를 만들어 가지고 와서 다시 겨루어야 합니다. 여기 신시에서 가게를 내는 것은 많은 사람에게 좋은 물건을 대주라는 뜻으로 한웅님이 허락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팔지도 않을 그런 물건을 가지고 와서 겨루고, 나중에 구리 무기질이 더 떨어진다면 어때? 당신의 실력은 인정하겠습니다. 그러나 대장간을 놓고 겨룸을 하려면 우리들에게도 팔 수 있고 항상 만들 수 있는 무기로 실력을 겨뤄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람들에게 팔지 않을 거라면 여기 대장간이 있는 이유가 뭐요?” 치우천이 조목조목 따지자 구경꾼들도 이제야 치우천의 의도를 이해하고는 맞다고 아우성을 쳤다. 사실 그 칼 자체는 기이하고 훌륭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계속 만들어줄 수 없다면 어차피 큰 의미가 없지 않는가? 불쇠 할아범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고 남자의 얼굴은 흙빛이 되었다. 불쇠 할아범이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입을 열었다. “내, 이 나이까지 살면서 그런 좋은 칼은 처음 보네. 그러나 내가 여기서 이 나이가 되도록 일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좋은 무기, 좋은 기구를 만들어주기 위해서일세. 내, 그런 칼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은 인정하네만, 자네가 이 대장간을 맡으려면 항상 만들 수 있는 구리 무기를 가지고 나와 다시 한 번 겨루세나.” 남자는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었는지 묵묵히 자기 칼을 집어넣고 돌아섰다. 사실 그 모습이 안돼 보여서 치우천은 그 남자의 앞을 막아서며 넌지시 물었다. “너무 기분 나빠하지 마시구려. 그 칼, 팔수는 없소?” “안 파오! 하나밖에 없는 것이오!” “말 다섯 마리와도 바꿀 수 없소?” 치우천의 말을 듣고 사람들은 모두 놀랐다. 말 다섯 마리라면 좋은 구리칼 다섯 개와 바꿀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남자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안돼, 안 돼! 이건 바꿀 수 없소! 나는......나는 이제 여기 있을 없소!” 치우천이 목소리를 한껏 낮춰 말했다. “솔직히 당신은 그 칼 하나뿐이고, 대장장이 재주는 그렇게 좋지 않은 것 같소만? 당신이 가게를 하면 더 큰일 날 거요. 제 아버지 같은 이는 정말 물건이 시원치 않으면 도끼를 들고 달려오실 테니 말이요. 당신을 일부러 훼방 놓은 것이 아니라, 모두를 도우려고 그런 것입니다.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됐소. 난 가겠소.” 돌아서려는 남자를 재빨리 붙잡고 치우천은 귓속말로 남자에게 살짝 속삭였다. “당신은 그 크리스를 어디에서 얻었소?” 그 말을 듣는 순간, 남자의 얼굴에는 노기가 일순 사라지고 잠시 놀라는 눈빛으로 치우천을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남자는 말없이 고개를 돌리고는 사람들 사이로 사라지려 했다. 치우천이 다급히 그 남자를 다시 붙잡았다. “잠깐만, 나와 이야기 좀 합시다. 조용한 곳에서 말이오.” “당신하고 할말이 없소.” 남자는 이상하게 두려운 눈빛을 하고 그냥 돌아서서 가려 했으나 치우천이 씩 웃으며 물었다. “왜 나를 피하는 겁니까? 그 칼이 크리스란 것을 알아보는 게 뭐 두렵기라도 합니까?” 낭자는 두려운 눈빛으로 치우천을 돌아보더니 작은 목소리로 되받았다. “제발 좀 떠들지 마시오. 크리스, 크리스 하지 말란 말이오.” “이름조차 부르지 못할 게 뭐 있습니까?” “이건 아주 귀한 물건이고...... 흠....... 그리고 또....... 이름을 불러서는 안 되는 신기한......” 남자가 변명을 주섬주섬 늘어놓자 치우천은 코웃음을 쳤다. “귀한 것은 맞지만 이름을 부르면 안 된다는 것은 처음 듣는군요. 내 아우도 크리스가 하나 있지만, 잘만 쓰고 있습디다.” “뭐?' 당신 아우도 크리스가 있다고?” “그렇소. 어느 힘센 괴물을 물리치고 얻었소. 그런데 아까 당신, 크리스를 만드는 법도 안다고 들었는데 그걸 말해줄 수 없겠소? 재료가 아주 구하기 어렵다고 했는데, 무슨 재료를 쓰는 거요?” 남자는 흰 이를 드러내 보이며 웃었다. “그런 비밀을 쉽게 말해줄 것 같소?” 약간 비아냥거리는 듯한 남자를 보며 치우천이 차분하게 말했다. “내가 보기에 당신은 뭔가에 쫓기는 것 같구려. 당신은 먼 남쪽에서 온 사람 같은데, 멀리 여기 주신까지 와서 뭐가 그리 두려운 것이오? 전에 나는 어떤 장사꾼에게서 이 크리스 이야기를 들었는데, 먼 남쪽 부족은 이것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해서, 부족 전체의 목숨을 걸고도 바꾸지 않는다던데? 당신이 두려워하는 이유는 어쩌면......?” 치우천이 슬쩍 넘겨짚어 보았는데 의외로 들어맞은 것 같았다. 일순 남자의 표정에 불안감이 감돌았다. 다시 치우천이 한참을 좋게 설득하고 조용한 곳으로 가서 좋은 음식과 술도 대접하자, 남자는 마침내 입을 열기 시작했다. “당신 생각이 맞소. 나는 도망쳐 온 것이오. 당신 말대로 나는 여기서 아주 먼 남서쪽의 부족에서 온 사람이오. 고향을 떠나온 것도 이 크리스 때문이오. 아, 제길! 우리 부족은 아마 내가 죽을 때까지 나를 쫓아다닐 거요.” “그 크리스는 훔친 것이구려.” 치우천의 말에 남자는 한숨을 쉬었다. “나도 구리를 다루던 사람이었소 그런데 제사장이 가진 이 칼이 내가 만든 어떤 구리 무기보다 강하다는 걸 알게 된 거요 자존심이 몹시 상했소. 나는 크리스를 만드는 법을 알아내고 싶었소. 그래서 우리 부족에 전해지던 크리스를 훔쳐 달아난 거요 그러나.......” 잠시 남자는 힘없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 크리스는 만들 수 없소.” “왜 만들 수 없는 거요?” “이것의 재료는 하늘에서 내리는 것이오. 사람이 구할 수 없소.” “하늘에서?” 치우천은 의외라는 생각에 좀 멍한 태도로 물었다. 남자는 술을 다시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하늘에서 내려주는 것이오. 왜, 밤하늘을 가만히 보면 별똥이 떨어지지 않소? 바로 그것을 찾아내어 만든 것이오.” 치우천은 깜짝 놀랐다. “크리스를 바로 별똥별로 만드는 것이오?” “그렇소, 그러니 생각해보시오 하늘을 보면 별똥별은 많이 떨어지지만 그것을 어디서 찾을 수 있단 말이오? 그리고 별똥별 재료 중에서도 크리스를 만들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소. 보석 같은 것이 떨어지기도 하고, 푸석푸석한 돌멩이가 떨어지기도 하니까.” “그런 것을 어떻게 찾는단 말이오?” 남자는 술기운이 거나하게 돌았는지 실실 웃으며 말했다. “그냥은 가르쳐 주기 곤란한데.” 그 말을 듣고 치우천은 허리에 찼던 구리칼을 끌러 남자의 손에 쥐어주었다. “말해보시구려.” 남자는 그 구리칼이 상당히 좋은 것임을 확인하고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별똥은 굉장히 빠르오. 그래서 그게 떨어진 다음에는 땅에 구멍이 뻥 뚫려 있는 경우가 많소. 그리고 별똥은 몹시 뜨겁기 때문에, 그 구멍 주변에서 돌이 녹은 것처럼 뭉쳐 있소 말로 설명하기는 힘든데, 찾다 보면 알아볼 수 있을 거요 나는 우리 부족에서 크리스를 만들기 위해 별똥을 바치러 온 사람들을 많이 보아서 알 수 있소만...... 좌우간 그게 문제요 온 부족 사람들이 몇 해를 뒤져도 한 조각을 찾기도 어려우니, 그만큼 귀한 거요.” 치우천은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 “그 다음에는 어떻게 만드는 거요?” 남자는 다시 실실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 남자가 염치없어 보였지만, 호기심이 더욱 컸으므로 치우천은 입고 있던 아주 좋은 가죽옷까지도 벗어주었다. 남자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보통 구리는 녹여야 하지만, 별똥은 녹지 않소. 더구나 별똥을 불에 달구면 재료를 망친다고 하요 그러니 조금씩조금씩 서서히 두들겨서 만들어야 상하지 않고 단단한 칼이 되는 것이오. 아주 단단해서 두들겨도 거의 변하지 않는데,.꾹 참고 계속 두들겨야하오 한 개를 만드는 데 몇 년이 걸리기도 한다요. 그래서 별똥의 모양을 그대로 살리기 때문에 크리스 하나하나마다 그 모양이 모두 다른 거라오. 이제 되었소?” 치우천은 약간 낙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재료도 그렇게 구하기 어렵고, 만들기도 그렇게 힘들다니 역시 귀한 물건이구려. 많이 만들 수는 없겠군.” 남자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안 그러면 귀한 물건이라 할 수 있겠소? 내친김에 별똥도 보여드릴까?” 돌연 치우천의 눈이 빛났다. “가지고 있소?” “한 개 가지고 있소 같이 훔친 거요 그러나 너무 단단해서 몇 년이나 두들겨도 만들 수가 없지 뭐요, 제길. 어차피 신시에서 장사하기도 글러먹었으니 이제는 대장장이 짓도 집어치우고 싶구먼. 당신, 이것에 관심이 많은 듯한데, 사지 않겠소?” 치우천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사겠소.” “비싸다는 건 알겠지?” “뭘로 값을 치르는 게 좋겠소? 짐승? 구리 물건?” “소 백 마리만 내시오 그 정도면 나도 어느 조그만 부족에 자리 잡고 살 수 있겠지.” 남자는 자못 엄청난 값을 제시했으나 치우천은 가볍게 되받았다. “소 백 마리? 좋소. 그러나 소 백 마리는 가져가기 힘들 것이니, 아예 이건 어떻소?” 그러면서 치우천은 품안에서 가죽주머니를 꺼내 커다란 보석들을 보여주었다. 바로 싱카에게서 얻은 보석들인데, 알도 굵고 광채가 몹시 휘황찬란했다. 비상용으로 그 보석을 항상 주머니 가지고 다녔는데, 지금 이 자리에서 요긴하게 쓰이게 될 줄이야. 보석들을 보자 남자의 얼굴은 당장 탐욕스러움으로 번들거렸다. “그것도 좋소.” 치우천은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보석을 다 줄 테니, 별똥과 당신이 가진 크리스를 주시오 나도 크리스를 가져봐서 알지만, 이 보석들은 크리스의 값어치를 넘어서는 것이오. 어떻소?” “크리스까지 달라고? 별똥만으로 만족하시오.” 치우천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그 크리스 때문에 쫓기는 몸이 되었지 않소? 이제 지긋지긋하지 않소? 그것을 깨끗이 나에게 넘기고 이 보석을 팔면 죽을 때까지 놀고먹어도 충분할 거요 물건은 값어치를 알아보는 사람에게 팔아야지, 아무나 이렇게 비싼 값을 치르겠소? 잘 생각해보구려.” 남자는 한참 동안 고민하는 눈치이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조금만 더 내시오.” 치우천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더 주고 싶지만, 그리 값어치 있는 것을 가지고 있지 않소. 지금 아니면 당신에게 이 같은 기회가 다시는 없을 거요 나도 이제 곧 먼 길을 떠나야 하기에 다시 당신을 만나리라고는 장담할 수가 없소 이 보석으로 부자가 될지, 그냥 대장장이 자리를 찾아 떠돌든지, 알아서 하시오.” 남자는 마침내 결심한 듯 말했다. “좋소!” 그러면서 남자는 품안에서 가죽으로 겹겹이 싸둔 거무튀튀한 작은 쇳덩이 같은 물건을 꺼내 치우천에게 내밀고, 조금 전 불쇠 할아범과 내기를 했던 크리스도 꺼내 치우천에게 건넸다. 쇳덩이 같은 물건은 손가락 서너 개 정도의 작은 것이었으나 보기만 해도 거무튀튀하게 번들번들한 것이 몹시 강해 보였다. 치우천도 보석을 주머니째 건네주었다. 남자는 싱글벙글하면서 말했다. “좌우간 고맙구려. 이제부턴 편히 살겠군, 그럼 잘 있으시오.” 남자는 마지막 잔을 급히 들이켜고는 그 자리를 벗어나 왁자지껄한 사람들 사이로 사라져버렸다. 치우천은 새로 크리스와 별똥 재료까지 얻고 나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치우천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잠시 생각했다. ‘이제 보니 크리스는 바로 별똥으로 만드는 것이었구나. 별똥은 무척 찾기 어렵지만 그렇다고 못 찾으리란 법은 없다. 만약 이런 무기를 더 만들어낼 수만 있으면 정말 그 어떤 적도 무섭지 않다. 불치 할아범과 상의해보아야겠구나.’ 치우천은 행여나 잃어버릴까 크리스와 별똥 쇳덩어리를 조심스레 갈무리하고 불쇠 할아범에게로 갔다. 불쇠 할아범은 안 그래도 오랜만에 만난 치우천이 자기를 위기에서 구해주자 몹시 기뻐하며 치우천을 찾고 있었다. 그러다가 치우천이 다시 나타나자 불쇠 할아범은 반색을 하며 나와 맞았다. “희네야, 희네. 이 이거 정말이지, 네가 죽었다고 들었는데........ 나는 몹시 슬퍼서 며칠 동안 술만 마시고 지냈단다. 그런데 불쑥 나타나서 나를 도와주니, 뭐라 고맙다 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불쇠 할아범이 쇠가 깨지는 듯한 목소리로 떠들어대자 치우천은 웃으며 말했다. “저는 죽지 않았습니다. 여러 번 죽을 뻔하긴 했지만요. 그리고 지금은 희네가 아니라 천, 치우천이라 합니다. 한웅님께 이름을 받았답니다.” “그러냐? 우하하! 내 그럴 줄 알았지! 너는 보통 아이들과는 달랐어! 정말.......” 불쇠 할아범이 계속 떠들려 하는데 치우천이 얼른 말을 끊었다. “들어가서 이야기 좀 하실 수 있나요?” “무슨 일이냐?” “조금 아까 보았던 그 사람의 칼, 그것에 대해 말할 게 있습니다.” 치우천은 놀라는 불쇠 할아범을 떠밀듯이 대장간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공상 진격 “형! 어서 일어나!” 불쇠 할아범과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누다가 새벽녘에야 돌아와 잠든 치우천을 치우비가 깨웠다. 아직 잠든 지 얼마 되지 않았던 터라 치우천은 피곤한 듯 눈을 비비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왜 그러냐?” “한웅님께서 부르신대. 어서 가봐야 해.” 치우천은 깜짝 놀라 눈을 번쩍 떴다. “벌써?” 치우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리고 오늘 형이 만나봐야 할 사람도 있는데.......” 치우천은 한웅이 자신을 찾는다는 말에 치우비의 뒷말은 귓전으로 흘려들으며 급히 밖으로 나갔다. 치우우레가 이미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기다리고 있었다. “무엇 하느냐? 한웅님이 찾으신다. 서둘러라.” 치우천은 황급히 준비를 갖추었다. 그 사이 치우우레가 초조한 듯 서성거리다가 이내 다가와 물었다. “어제 한웅님을 뵈었는데 오늘 다시 찾으시다니.......그것도 신시의 높은 귀족들을 다 부르신 모양이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느냐?” 치우천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제가 말씀을 하나 드렸습니다.” “말씀을?” “공상을 쳐 보이겠다고 했습니다.” “뭐?” 치우우레의 안색이 순식간에 허옇게 질려버렸을 뿐만 아니라 뭐라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 사이 치우천은 갈 채비를 마쳤다. 그러자 치우우레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공상...... 유망이 새로 쌓았다는 그 공상 말이냐?” “다른 공상이 있겠습니까?” “뭐?....... 그곳을 어떻게 친다는 게냐? 사울아비를 수십 천, 수백 천을 부려도 아니 될 것인데........” “한웅님께는 사울아비 삼천만 빌려 달라 했습니다.” “너.........!” “서두르시지요. 한웅님께옵서 기다리시겠습니다.” 치우우레가 기가 막혀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이 치우천은 살짝 웃으며 먼저 집 밖을 나섰다. 치우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 뒤를 따랐다. 신시 가장 북쪽에 위치한 한웅의 큰 집,그 중앙에 위치한 널따란 회의실에는 많은 귀족들이 모여 있었다. 풍백, 운사, 우사의 삼사는 물론이고 주신의 가장 즌 다섯 집안, 즉 고시씨, 부소씨, 신지씨, 부루씨, 치우씨 집안의 웃뜸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그중 두사람이 치우 천의 눈길을 끌었다. 고시씨 집안의 웃뜸인 고시울률과 치우씨 집안의 웃뜸인 치우괄괄을 대신하여 나온 치우가람이었다. 고시울률은 막 회의장으로 들어서는 치우천을 편치 않은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고시울률은 키가 크고 몸도 다소 뚱뚱했으나 풍채가 좋은 푄이었고 멋진 긴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그의 표정에는 오랜만에 보는 외손주가 영 마땅찮다는 느낌이 가득했다. 그 건너편에는 치우가람이 눈을 가늘게 뜨고 묘한 미소를 머금으며 치우천을 노려보고 있었다. 치우천은 감정없는 무심한 눈빛으로 고시울률을 쳐다보았고, 치우비는 잡아먹을 듯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치우가람을 노려보았다. 고시울률은 조용히 치우천을 바라보았고 치우가람은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치우비의 시선을 슬쩍 피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귀족 한사람이 고시울률을 향해 입을 열었다. 부루집안의 웃뜸인 부루위단이었다. “듣자하니 이 아이들을 아신다 들었습니다만.......” 고시울률은 무심한 표정으로 부루위단에게로 눈을 돌리며 짧게 대답했다. “모르오.” “그렇습니까? 허나 들리는 바에 따르자면 따님 가운데 한 분이 이 아이들의 어머니라 하는 것 같았습니다만.......” 부루위단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고시울률이 딱 잘라 말했다. “그런 딸은 둔 적 없소. 그러니 이 아이들도 모를밖에.” 치우천은 속으로 역시 그렇구나 생각했다. 부루위단이 머쓱하여 입을 다물자 고시울률이 툭 던지듯 말했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흙탕물을 일으키고 있으니 어쩌겠소. 우리도 그래서 모인 것 아니겠소.” 그러자 우사 병예가 나섰다. “저들은 지나족 유망의 많은 군대를 막아낸 아이들이오. 어찌 미꾸라지라 말하시오!” 그 말을 귀족들 중 한 사람이 되받았다. “그 아이들이 유망의 군대를 막았는지 아닌지 어떻게 아오?” “무슨 말씀이시오?” 그러자 고시울률이 비아냥거리며 끼어들었다. “유망이 죽었소? 아니면 형천이나 축융이 죽었소? 지나족의 군대가 그리 많았다는데 그들이 다 죽기라도 했소?” “그것은 아니지만 유망이 마갸르와 미아우를 치던 것을 그만두고 물러간 것은 이 젊은이들의 힘이란 말이오.” “그랬는지 안 그랬는지 어떻게 알겠소? 유망의 목을 베어왔다면 또 모르지만 말이오.” “싸움이란 것이 꼭 누구를 죽여야만 끝나는 것이 아니오!” 병예가 화를 벌컥 내자 고시울률도 지지 않고 맞받았다. “그래서 싸움이 끝났소? 도리어 더 큰 싸움이 벌어질지도 모르지 않소? 애초에 유망이 무슨 짓을 하든 건드리는 것이 아니었소!” 보아하니 삼사와 고시울률은 이미 틈이 벌어져도 많이 벌어져 있는 모양이었다. 예전부터 의견 차이가 심하기는 했었다. 허나 이번 유망의 일 때문에 삼사와, 고시울률을 필두로 한 귀족들과의 사이는 극도로 악화되어 있었다. 치우천과 치우비는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비렴과 신지울태도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병예가 계속 귀족들과 아옹다옹하는데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한웅께서 납십니다!” 그 말에 모든 사람이 입을 다물고 조용히 줄을 지어 섰다. 곧이어 사와라 한웅이 누운 채로 네 사람이 떠멘 들것에 실려서 들어왔다. 그 뒤로 부루버들과 여러 무녀들, 솟대단군들이 줄을 지어 들어왔다. 들어오기 전부터 연신 기침을 해대는 사와라 한웅은 부루버들의 부축을 받아 한웅의 자리에 앉았다. 사와라 한웅은 기침이 조금 잦아들자마자 입을 열었다. “오늘 모두를 모이라 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한 가지 알릴 일이 있어서요. 다름 아닌 유망에 대한 문제 때문이오. 유망일 때문에 내 골치가 아프다오.” 그러자 고시울률이 앞으로 나아가 말했다. “한웅님께 아룁니다. 유망은 이미 공상으로 물러났습니다만, 제가 알기로는 전사가 그리 많이 상한 것은 아니라 들었습니다. 유망은 무슨 짓을 하건 그대로 두고, 차라리 그자를 달래서 싸움을 그치게 하는 것이 어떨까 하옵니다.” “그런다고 유망이 쉽게 싸움을 그만둘까?” 사와라 한웅이 입끝을 약간 씰룩이며 묻자 고시울률이 정중히 되받았다. “마갸르나 미아우의 일 따위에 더 신경을 쓸 필요는 없는 듯하옵니다. 유망이 그들을 어찌하건 그냥 두시고.......” 그때 비렴이 걸걸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것은 아니 되옵니다!” “그렴, 왜 그러나?” 사와라 한웅이 비렴에게 눈길을 보내자 고시울률은 자기 말을 끊은 비렴을 화난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비렴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당당히 말했다. “마갸르와 미아우는 주신의 좋은 벗입니다. 그들이 있기 때문에 주신은 지나족과 다투지 않고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을 그냥 내버려두는 것은 옳지 못한 일입니다.” 그러자 성난 목소리로 고시울률이 외쳤다. “고작 마갸르나 미아우 때문에 주신 사람의 피를 흘려도 된단 말이오? 지나가 아무리 사람이 많다고 해도 주신을 넘보지는 못할 것이오! 그런 판에 굳이 마갸르나 미아우 때문에 싸움에 끼어들어야 하는 이유가 대체 뭐요?” “그렇다면 고시울률님, 지나족이 마갸르 미아우의 땅을 다 차지하고 난 다음 주신을 넘보지 않으리라고 어찌 장담하실 수 있습니까?” “지나족도 바보는 아니오. 주신을 치는 것보다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더 좋은 줄을 알 것이오 그러니 우리는 이제 마갸르나 미아우 같은 작은 부족들은 잊어버리고, 큰 부족인 지나족과 사이좋게 지내면 될 것 아니겠소?” “마갸르와 미아우를 잃고 지나가 그 땅을 차지하면 키탄이나 다른 서쪽 부족과의 길도 끊기게 됩니다! 그러면 주신은 더 이상 세상 제일이 아니게 됩니다!” “말만 좋은 세상 제일이 무슨 소용이오? 그런 작고 힘없는 부족들 때문에 피를 쏟고 물건을 낭비하느니 차라리 알차게 사는 것이 더 낫지 않소?” “안파견 한님의 뜻은 모든 사람을 이롭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주신이 그 뜻을 받들자면 세상 제일이 되어야 하고, 또 작고 힘없는 부족들일지라도 모두가 제대로 살게끔 만들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비렴과 고시울률이 다시 논쟁을 벌이자 병예나 신지울태, 다른 귀족들도 모두 두 패로 나뉘어 말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 몹시 소란스러워지자 사와라 한웅이 외쳤다. “그만들 하게나.” 그러나 시끄러운 속에서 사와라 한웅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은 듯, 소란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사와라 한웅은 두 번이나 더 조용히 하라고 소리쳤고 그제야 모두들 입을 다물었다. 사와라 한웅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도대체 얼마나 더 같은 이야기로 싸워야 끝이 나겠는가? 한두 번도 아니고 몇 년째 다투니 이제는 지긋지긋하다네. 어차피 이야기가 합쳐지지 못하니 내가 말하겠소. 모두들 들으시요.” 사와라 한웅이 자못 강경한 어조로 말하자 모든 귀족들은 조용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사와라 한웅은 몇 번 헛기침을 하더니 치우천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자네, 좀 앞으로 나오게.” 치우천이 천천히 앞으로 나서자 귀족들의 눈길이 모두 치우천을 향했다. 질시 어리거나 비웃는 듯한 눈빛이 대부분이라 치우천은 뒤통수가 따끔할 지경이었다. 사와라 한웅이 웃으며 말했다. “이 사람은 치우천이라 하오 태산 회의 때 솜씨를 보였던 아이요. 아, 이제는 아이라고 하면 안 되지. 작은 주신이라는 부족을 세운 부족장이라오. 사실 나는 태산 회의 때 이 아이에게 하늘군대의 큰스승 자리를 주려고 했는데 일이 그렇게 잘되지 않았소. 그러나 이제 그가 돌아왔고, 좌우간 유망의 군대를 물리는 데 큰 힘이 되었다 하니 하늘군대의 큰스승 자리를 주려고 하오.“ 순간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고시울률의 안색도 좋지 않았다. 그러자 고시울률을 대변하듯 부루위단이 나섰다. “한웅님께 아룁니다. 아무리 그가 한 일이 작지 않다고는 하나 하늘군대의 큰스승도 결코 작지 않은 자리입니다. 그렇게 갑자기 그런 자리를 내리시는 것은 좀 무리인 줄로 아뢰요.” 그러자 옆에 섰던 교활해 보이는 귀족 하나가 한마디 보탰다. "하늘군대의 큰스승은 사울아비의 웃뜸입니다! 그만큼 싸움에 능하고 기술이 뛰어나야 합니다. 헌데 다리병신을 큰스승에 앉히다니요!" 그 말에 귀족들이 모두 큰 소리로 웃어댔다. 치우천은 약간 다리를 끌고 있을 뿐, 심하게 절지 않은 상태였으나 귀족들은 이미 치우천의 다리가 불편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치우가람이 소문을 냈을 터였다. 순간 치우천의 낯빛이 약간 해쓱해졌다. 귀족들이 치우천을 비웃자 별안간 뒤쪽에서 우두둑 소리가 커다랗게 들려왔다. 귀족들이 놀라 바라보니 저만치 뒤쪽에 서 있던 치우비가 불길이 치솟는 듯한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주먹을 꽉 쥐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소리는 바로 분노를 이기지 못해 치우비가 두 주먹을 불끈 쥘 때 터져 나온 뼈마디가 꺾이는 무시무시한 소리였다. 이토록 많은 사람들의 앞에서 형이 모욕을 당하자, 치우비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치우비의 이글거리는 눈빛을 본 귀족들은 황급히 시선을 돌리면서 웃음을 거두고 속으로 생각했다. ‘뭐 저런 괴물이 다 있나? 아까는 바보 같았는데 무슨 눈빛이 저리도 무섭게 변할 수가 있는가?’ 몇몇 귀족들은 치우비의 무시무시한 눈빛을 보고는 다리를 후들거리기도 했다. 치우비는 단지 주먹을 쥐고 눈을 부릅떴을 뿐, 다른 행동은 전혀 하지 않았는데도 그의 몸에서 발산되는 무서운 기운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것을 보고는 사와라 한웅이 껄껄 웃었다. “치우천은 비록 다리가 좀 불편하지만, 저런 힘센 아우가 있으니 둘이 함께 애를 쓰면 큰 일을 할 수 있을게요. 저 아이는 치우비라고 하는데 나는 저 아이도 하늘군대 큰스승으로 앉히려 하오.” 사와라 한웅이 딱 잘라 말하자, 치우비가 내뿜는 기운이 너무도 무서운지라 이번에는 귀족들이 찍소리 않고 입을 다물었다. 그것을 보고 사와라 한웅이 덧붙였다. “하지만 여러분 말씀대로 하늘군대 큰스승 자리는 그리 쉬운 것이 아니오. 더구나 저들은 작은 수신 부족 전체를 주신 사람을 받아들여 달라는 부탁을 하였네 그려 .” 그 말에 귀족들이 다시 웅성거리며 일제히 들고일어났다. “그건 아니 되옵니다.” “어디서 사는 누군지도 모르는 것들을 주신 사람으로 받아들이시다니요!” “작은 주신은 도둑들의 무리라고 알려져 있습니다!주신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일입니다!” 사와라 한웅은 다시 몇 번이나 소리를 쳐서 귀족들의 아우성을 가라앉혔다. 그러고는 여유 있게 웃으며 말했다. “알아들었으니 그만들 하시오 그러니까 여러분은 작은 주신 부족을 받아들이는 것은 어렵다는 말씀이시오?” “그러하옵니다!” 고시울률이 강경하게 외치자 사와라 한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게 여기오. 아무 공도 없는 자들을 주신 사람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는 법. 그래서 나는 조건을 하나 걸었소이다. 늙은이의 장난이라 여겨도 좋고, 이 늙은이가 유망 때문에 골치가 아파 견딜 수 없어서 망령이 들었다고 보아도 좋소이다. 나는 저 아이....... 아니, 작 은 주신 부족장에게 사울아비 삼천을 내줄 것이니, 작은 주신 족으로 하여금 공상을 쳐 빼앗으라 하였소!“ 순간 귀족들은 경악한 얼굴빛이 되었다. 비렴이나 병예, 신지울태도 얼굴빛이 변했다. 사람들은 모두사와라 한웅이 제정신인지 아닌지 의아하게 생각했다. 적지 깊숙이 있는 거대한 도시 공상을 단지 삼천의 사울아비로 빼앗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사와라 한웅은 아직 아무에게도 치우천의 제안을 이야기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고시울률마저도 당황하며 말을 더듬거렸다. “도...... 도대체 그것은 될 일이 아니옵니다! 유망의 군대는 수십 천, 수백 천이 넘고 오랫동안 북쪽을 노리며 훈련되어온 강한 전사들입니다. 더구나 형천과 축융 같은 무서운 장사들이 있으며 공상은 주신에서 수천 리나 멀리 떨어진 곳이온데.......” “나는 분명 치우천과 약속하였소. 치우천, 말해보게. 공상을 점령할 수 있는가, 아닌가?” 치우천은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대답했다. “해 보이겠사옵니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귀족들은 마구 치우천에게 소리를 질러댔다. 미친놈이라는 욕설까지도 퍼부었다. 그 와중에 부루위단이 목청을 높여 외쳤다. “흥! 그럴 수 없을 것이다! 백 년이 걸려도 거기까지 진격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모습에 사와라 한웅이 재미있다는 듯 빙그레 웃으며 되받았다. “작은 주신 부족장은 두 해 안으로 공상을 빼앗을 수 있다 하였소.” 귀족들은 기가 막혀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두 해?” 그럴 법도 했다. 싸움을 좀 아는 귀족들은 나름대로 계산을 해보았다. 공상까지는 그냥 달려가도 두 달은 넘게 걸린다 하물며 곳곳마다 공격해 을 것이 분명한 지나족을 물리치고 가려면 공상까지 진격하는 데에만도 두 해로는 턱없이 모자랄지도 몰랐다. 하물며 공상에 도달한다 쳐도, 공상처럼 성벽을 높이 쌓아올리고 수많은 사람이 지키는 곳을 공격하는 것이 금방 될 일도 아니었다. 보다 압도적인 수의 사울아비로 공격해도 두 해는 더 걸릴지도 몰랐다. 그런데 수십만의 전사가 있는 공상을 삼천의 사울아비를 공격한다는 것은 제아무리 사울아비들이 강하고 날래도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솔직히 주신의 모든 사울아비를 긁어모아 공격해도 이긴다 고 장담할 수 없었으며, 아무리 짧게 잡아도 족히 다섯 해는 걸릴 일이었다. “미친 짓입니다! 한웅께옵서는 올바로 생각하시어 이런 미친 수작에 속지 마소서!” “싸움을 모르는 철부지 어린애들의 말에 삼천 사울아비의 목숨을 버리지 마소서!” 귀족들이 이구동성으로 부르짖었다. 사와라 한웅은 몹시 재미있다는 듯 빙글빙글 웃으며 그 말을 잠자코 듣다가 입을 열었다. “다른 건 모르겠는데, 싸움을 모른다는 말은 하지 마시구려. 비렴, 자네 이 아이들이 요즘 무슨 일을 했는지 들었다면서? 어디 좀 말해 보겠나?” 비렴은 사와라 한웅의 말이 의외라는 듯, 몇 번 헛기침을 하여 목청을 가다듬더니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흠, 다른 부족들을 도우러 보낸 사울아비들에게 들은 바는 조금 있습니다만......”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말해주게나. 작은 주신의 전사들이 한 일말이네.” “작은 주신의 전사 오백이 저번 유망의 공격 때....... 지나족의 오천 군사를 짓밟았다고 합니다.” “오백으로 오천을?” 귀족들이 놀라 웅성거리는 틈을 타 비렴은 얼른 덧붙였다. “한나절 정도 걸렸다고 합니다. 저쪽에서 살아나간 사람은 몇십 명도 안 된다 들었고요.” 귀족들이 더 믿지 못하는 안색이 되자 고시울률이 소리쳤다. “작은 주신 전사들은 전부 귀신이란 말이오? 모두 목숨을 걸고 싸워도 힘든 일인 텐데, 뭐 한나절!” 비렴은 마지막으로 일침을 놓으려는 듯 말끝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작은 주신 오백 명 전사 중에 죽은 자는 하나도 없다고 하더이다. 마갸르나 미아우는 작은 주신 전사들을 이미 도깨비 군대나 하늘전사들이라 부르고 있소.” 귀족들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입조차 열지 못했다. 그러자 사와라 한웅이 재미있다는 듯 킥킥 웃었다. “그러니 한번 해볼 만하다 여기오. 공상을 빼앗는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유망도 더 이상 북쪽으로 치고 올라 을 수 없을 것이니 이 늙은이도 편해질 것이고, 작은 주신족의 용감함도 분명한 것이니 주신 사람으로 못 받아줄 것도 없지. 못한다면 알아서 책임을 지겠지, 허허 난 이제 늙어서 그런지, 젊은이들이 씩씩하게 나서는 것을 보는 게 즐겁구려. 그러니 더는 말하지 마오. 나는 치우천 부족장에게 공상공격을 맡기려 하오.” 사와라 한웅이 말하자 귀족들은 모두 작은 소리로 웅성거리기만 할 뿐, 반발하며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고시울률도 뭔가 말하려다가 그냥 코웃음을 치고 입을 다물었다. 분명 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무시하는 것 같았다. 사와라 한웅은 치우천을 좀더 가까이 오라고 일렀다. “치우천 족장, 만약 두 해 내로 공상을 빼앗는다면 작은 주신을 주신족으로 받아줌은 물론, 자네에게 하늘군대 전부를 맡길 수도 있다네. 그러니 잘 해보게나, 허허.” 마지막 말은 폭탄선언과 같았다. 하늘군대의 큰스승도 모자라 하늘군대의 최고의 자리를 준다는 것은 치우천을 최고의 귀족 중 하나로 만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하늘군대의 웃뜸 스승은 적어도 지위 상으로는 삼사와 비슷하거나 삼사보다도 조금 높은 자리로, 지금은 전쟁이 많지 않았으므로 비어 있는 자리였다. 그 말을 듣고 부루러단이 못마땅하다는 말투로 툭 내뱉었다. “그것은 나중에 이야기해도 늦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이런 말도 되지 않는 싸움이 정말 잘될 수 있을지 생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는 분명, 한다고 말했네. 잘되기만 한다면 이보다 좋게 풀릴 수 없지 않겠나?” 사와라 한웅의 말이 끝나자마자 고시울률이 한 걸음 나아가서 말했다. “그렇게 되기만 한다면야 좋겠사옵니다만 모든 일이 마음처럼 되는 것은 아니옵니다. 더구나 삼천 명의 사울아비 목숨이 걸린 일이며, 나아가서는 유망과 주신이 직접 큰 싸움을 벌여야 될지도 모를 일이옵니다. 공상을 빼앗으면 좋겠으나, 빼앗지 못할 때는 유망도 가만있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일을 섣불리 결정하기는 크나큰 무리인 줄 아옵니다.” “내가 정한다고 하는데도 말인가?” 사와라 한웅이 노기를 띠는데도 고시울률은 까딱도 하지 않았다. “하늘의 뜻을 물어야 하옵니다. 솟대에 제사를 지내고 단군과 무당, 박수들에게 하늘의 뜻을 물어야 하옵니다.” 고시울률이 고집을 꺾지 않았고, 부루버들까지도 줄곧 고시울률의 말이 옳다고 귓속말을 해대자 마침내 사와라 한웅은 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좋네. 아무래도 내 말을 듣기 싫다면 하늘의 뜻을 묻기로 하지. 어느 날이 좋겠는가?” 사와라 한웅이 옆에 있는,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솟대단군의 우두머리인 웃뜸단군에게 물었다 그는 의사나 무당, 점술사, 학자 등을 겸하는 뭇 솟대단군들의 우두머리로서 제사의 날짜를 정하는 것이 그의 주 임무였다. 웃뜸단군은 수염을 몇 번 쓰다듬으며 뭔가 골똘히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하늘은 싸움에 이기고 지는 것은 잘 가르쳐주시지 않사옵니다. 그러나 다만 이것이 주신에 좋은 일이 될지 안 좋은 일이 될지는 알려주시리라 생각되옵니다. 내일모레 정도가 적당하겠사옵니다. 이런 큰 일을 물어보려면 큰 굿을 해야 하니 준비할 시간도 필요하옵니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하게..... 그리고 그 선인님께도 여쭈어보세.” 선인 이야기가 나오자 웃뜸단군이 정색을 하며 되받았다. “이를 데가 있사옵니까? 그토록 신통하신 분께 여쭙지 않으면 누구에게 여쭙겠사옵니까?” 결국 그렇게 하여 공상으로 출병하는 일은 하늘의 뜻을 물은 연후에 정하기로 하고 그로써 회의는 끝났다. 비렴은 회의가 끝난 다음 한응의 집을 나오면서 치우천과 치우비를 불렀다. 한웅의 집을 둘러싼 높은 담장의 호젓한 곳으로 두 사람을 불러낸 비렴은 주위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다음 둘에게 말했다. “너희는 내 생각보다도 더 엄청난 말을 하였구나. 공상을 점령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터인데, 정말 할 수 있겠느냐?” “저는 사실 걱정스럽습니다만, 형이 뭔가 생각한 것이 있는 듯하옵니다.” 치우비가 걱정스레 말하자 비렴은 치우천을 보며 물었다. “정말 자신 있느냐?” 치우천은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될 것 같사옵니다. 그보다는 하늘의 뜻을 묻는 제사를 지낸다는데, 그것이 더 걱정이옵니다.” 비렴은 치우천의 말뜻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다. 솟대단군들과 박수, 무당들은 전부 고시울률님과 가깝지. 그러니 그들과 사울아비들이 어떻게 친해질 수 있겠느냐? 설마 싶기는 하지만, 솟대단군들이 고시울률님 편을 들어 점괘를 다르게 뽑지 않을까 그것이 걱정되는구나.” 비렴의 이야기에 담긴 심각함이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 치우비가 순진하게 물었다. “설마하니 하늘의 뜻을 전하는 단군이나 무당들이 누구 편을 들어 이야기하려고요?” “그것은 모르는 일이다. 세상에 사람의 마음을 어찌 알겠느냐? 사실 이번 일은 보통 일이 아니다. 귀족들은 내내 지나족을 건드리는 것에 반대해 왔는데, 너희가 이제는 유망의 본거지나 다름없는 공상을 직접 치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러니 단군들이 편을 들 수도 있다. 더구나 이번 일이 잘된다면 너희는 하늘군대의 웃뜸스승이 된다. 벌써 수십 년 동안 하늘군대 웃뜸스승은 없었느니라.” “왜 하늘군대의 웃뜸스승이 없었습니까?” 치우비가 묻자 비렴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웃뜸스승이 있으면 사울아비들은 하나로 뭉친다. 그러면 그 힘이 대단해지지. 그러면 귀족들의 힘이 약해질 수밖에 없는 법. 그래서 귀족들은 오랫동안 그럴 만한 공을 세운 사람이 없다고 하여 웃뜸스승을 세우지 못하게 해왔느니라. 허나 정말 너희가 삼천의 사울아비로 공상을 점령한다면 아마 주신이 세워진 이래 이보다 더 큰 공은 없을 것이야. 그러니 하늘군대의 웃뜸스승 자리도 당연하긴 하다만...... 조심하거라. 정말 조심하여야 한다. 유망과의 싸움도 그렇지만 귀족들도 조심하여아 하느니라. 이런 일 정도라면 그들은 못할 짓이 없느니. 한웅님께옵서도 귀족들을 마땅찮게 여기시지만 그들을 쉽게 건드리지는 못하시는 판인데, 네가 그 빌미를 준 것이다. 아마 그들은 너희를 그냥 두려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비렴이 걱정스레 말하자 치우비는 의아해했다. “아무리 그래도 우리는 주신에 공을 세우려는 것뿐인데, 귀족들이 어찌 해코지까지 하겠습니까?” “그것은 모르는 일이다. 아, 귀족들이 언제 주신을 생각했더냐? 그들은 그들 몸과 자기 집안만을 챙기려 할 뿐이다. 너희 형제가 하는 일이 하나에서 열까지 주신을 위한 것임을 나는 안다. 허나 속 좁은 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느니. 더구나 너희같이 젊고 뜻을 굽히지 않는 사람이 웃뜸스승이 된다면 귀족들로서도 편치 않을 것이니 그것을 조심하여야 한다는 말이다. 알아듣겠느냐?” 비렴이 진정으로 자신의 자식이나 손주나 되는 것처럼 걱정해주자 치우천은 몹시 고마웠으나 내색은 하지 않고 다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조심하겠습니다. 너무 염려 마소서 그런데 만약 하늘의 뜻을 묻는 점괘가 좋지 않게 나온다면 모든 것이 틀어집니다. 무슨 방법이 없겠습니까?” “그것에는 방법이 없다.” 그때 치우비가 생각났다는 듯이 한마디 끼웠다. “아까 한웅님께옵서 선인님에게도 묻는다 하시지 않았습니까? 선인님은 누구십니까?” 치우천도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여 물었다. “저도 그게 궁금했습니다. 신시에 선인님이 머물게 되었습니까? 몹시 궁금합니다.” 그 말에 비렴은 빙그레 웃었다. “너희는 잊어버린 모양이구나. 너희도 잘 아는 분이다.” “누구 말이옵니까?” 치우천 치우비가 궁금해 하자 비렴이 여유 있게 대답했다. “바로 맥달님이시다. 그러고 보니 그분이야말로 너희에게 도움을 주실 수도 있을 것 같구나.” 맥달이라는 이름에 치우천은 몸을 약간 움찔하며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치우비는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난 또 누구라고! 그 선인님이 바로 맥달님이셨군요! 그런데 다들 선인님이라 부르시는 모양이군요!” “그렇다. 맥달님은 통 바깥출입도 하지 않으시고 한 달에 세 번, 한웅님께서 찾으실 때만 앞날을 일러주시곤 한다. 그 말씀이 틀리는 법이 없어서 이제는 모두가 선인님이라 부른단다. 더구나 맥달님은 자부선인님에게서 배우신 분이라지 않더냐? 지금 하늘 아래 선인님들중에 자부선인님보다 더 큰 분이 어디 계시겠느냐? 모두가 존경하고 믿는 것이 당연하지 아마도 단군이나 무당들이 뭐라 해도 맥달님의 말은 그 누구라도 믿을 것이니 그분을 믿자꾸나.” 깐깐한 비렴이 흐뭇한 표정을 짓자 뜻밖에 치우천은 냉랭한 목소리로 되받았다. “그 여자는 선인이 아닙니다.” 엄청난 말에 비렴은 깜짝 놀랐다. “무슨 소리냐? 선인이 아니라니?” 치우천은 고집스런 표정으로 딱 잘라 말했다. “선인이 아니라 괴물입니다. 저는 그 여자를 믿을 수 없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선인은 도를 닦은 후 기를 얻어서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여자는 도를 닦은 것도 아니고, 다만 재주를 타고난 것뿐입니다 더구나 지금은 비록 조용히 있지만, 사람을 해치고 망하게 만드는 무서운 존재입니다!” 치우천이 과격하게 말하자 비렴의 낯빛이 변했다. 그러자 치우비가 형을 잡아 뒤로 끌며 얼른 말을 돌렸다. “형님이 뭔가 좀 오해하고 있는 듯합니다. 너무 괘념치 마십시오.” “그렇다, 천아. 너 그것만은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그분은 조용히 머물며 도움을 주실 뿐인데......” 치우천은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앞날을 읽어내어 말하는 것 자체가 사람에게는 재앙입니다. 저는 그 여자에 대해 잘 압니다. 자부선인께서 그녀를 선인으로 거두신 것도 아니고, 오히려 사람들에게 해를 줄까 두려워 묶어두신 것입니다! 앞날을 아는 사람과는 같이 지내서는 아니 됩니다!” “도대체 무슨 소리냐? 그분은 너를 도와 목숨을 건져주시지 않았느냐? 사막에 버려지기 전에 그분이 아니었다면 네 목숨이 지금까지 어찌 붙어 있을 수 있었겠느냐?” 이제 비렴도 화를 내기 시작했으나 치우천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제가 입은 은혜는 은혜일 뿐, 이것은 다른 일입니다. 앞날을 미리 다 안다는 것은 무서운 일입니다. 세상에 신수나 나쁜 선인, 괴물이 있다 해도 그보다 더 위험한 것은 없사옵니다. 더구나 지금은 조용히 있더라도 그 여자가 무슨 속셈을 가지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위험합니다. 너무도 위험합니다.” “네가 그렇게 떠드는 것까지도 그분이 아신다면?” 비렴이 정색을 하며 묻자 치우천은 당당하게 대답했다. “그래서 더 떠드는 것입니다. 그래야 제가 무사하지요 그 여자는 아무리 조용히 움직여도 다 알 수 있을 것이니, 도리어 대놓고 여기저기 떠드는 것이야말로 그 여자에게 맞서는 단 하나의 길입니다. 비렴님, 전에 치우가람 형제는 우리 형제를 사막에 버리면서 우리를 손끝하나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다치면 그들이 한 짓인 줄 누구나 알게 되기에 그런 것입니다. 그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런 무서운 존재에게서 몸을 지키려면, 아니 제가 살기 위해서라도 모든 사람에게 그 여자의 위험함을 알려야 합니다.” 치우천이 흥분을 가누지 못해 열심히 설명했으나 비렴은 허허, 하면서 헛웃음만 지을 뿐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러자 치우천은 하늘을 보며 탄식했다. “아, 비렴님마저도 몰라주시니 세상에 그 여자를 두려워하는 것은 저 하나뿐인 것 같습니다. 비렴님, 그 여자는 마음만 먹으면 주신만 아니라 세상을 통째로 뒤엎을 수가 있습니다. 비렴님 말씀대로 그 여자가 착하기만 하다면 다행입니다만, 만에 하나라도 그렇지 않거나 마음이 변한다면 세상은 뒤집어집니다. 그러니 무서운 것입니다. 신수가 산을 뒤엎고 땅을 갈라지게 하는 힘이 있어도 앞날을 아는 그 여자의 힘에는 발치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경계해야 합니다. 그 여자의 힘을 빌리는 일 따위는 절대 해서는 아니 됩니다! 아니, 그 여자의 말은 어느 것이건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치우천은 스스로가 옳다고 믿었다. 세상에 그보다 무서운 존재는 없다는 것이 치우천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허나 그의 말은 지나치게 추상적이어서 현명한 비렴조차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아아 등을 돌렸다. “네가 좀 이상하구나.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 비렴이 자리를 뜨자 치우비는 아직도 흥분하여 씩씩거리는 형을 보고 말했다. “형, 대체 왜 그래? 왜 맥달님을 그리도 미워하지?” “미운 것이 아니다. 무서운 것이다. 비야, 너는 알겠느냐,1 그 여자가 얼마나 무서운지?” 흥분하는 치우천과는 달리 치우비는 이상하게 말끝을 흐렸다. “나는 도대체 알 수가 없어. 그런 착한 분이 왜 무섭다는 거야?” 치우천은 치우비를 쳐다보며 답답하다는 듯이 탄식했다. “몇 번이나 이야기했는데도 알아듣지 못하는구나. 대체 그런 존재는 도무지......” 치우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치우비가 대뜸 한마디 던졌다. “형, 맥달님을 풀어달라고 할 때 형이 했던 말을 다 잊었어? 어째 형이 조금씩 변해가는 것 같아.” “무슨 소리냐? 나는 변하지 않았다 더구나 맥달을 내가 풀어 주었기에 내 어깨가 더 무거운 것이다. 그 여자를 알아보는 것은 나뿐이고 그러니.......” 치우비가 정색을 하며 치우천에게 물었다. “형, 기억 나? 전에 발귀리 선인님을 만났을 때.....” “음! 뜬금없이 그 이야기는 왜 하니?” 치우천이 묻자 치우비는 갑자기 생각이 바뀌었는지 말끝을 흐렸다. “응, 아냐. 문득 생각이 나서....... 좌우간 형, 너무 그렇게 생각하지 마. 비렴님조차도 형을 이상하게 생각하는데 자꾸 그런 이야기를 해서 뭐가 좋겠어? 나조차도 이해할 수가 없는데.......” 그때 누군가가 뒤에서 조용히 말을 건넸다. “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너무도 차분하고 고요하며 맑은 여자의 음성이었다. 치우천과 치우비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 서 있는 사람은 한없이 온화하고 조용해 보이며, 세상의 티끌이라고는 하나도 묻은 것 같지 않아 보이는 젊은 여자였다. 약간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 그 여자는 바로 맥달이었다. 앞날을 보는 자 ‘이거 어떻게 하지? 형이 말한 걸 다 들었겠네?’ 치우비는 갑자기 맥달이 나타나자 어쩔 줄을 몰라 얼굴까지 하얗게 질렸다. 허나 치우천은 약간 입술을 깨물었을 뿐, 오히려 침착하게 되받았다. “역시 알고 있었구려. 언젠가 이렇게 나타날 줄 알았소.” 맥달은 억지스럽게 살짝 웃어 보였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슬픔에 가득 차 있었다. 치우비는 그제야 당황스럽게 말했다. “맥달님, 너무 언짢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형이 뭔가 오해를.......” 치우천이 날카롭게 치우비의 말을 잘랐다. “난 오해한 것 없다. 내 입에서 나온 말, 내 머리로 한 생각이니 감추려 할 것 없다!” 그러자 맥달은 도리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야 치우천님답지요.” 치우천은 조용히 맥달을 바라보며 뭔가를 생각하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맥달님, 나는 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존재라고 믿고 있소. 지나족이나 신수보다도 더 무섭다고 말이오.” 맥달은 그 말을 듣고도 생긋 웃으며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사옵니다.” “고맙다니? 뭐가 고맙다는 거지요?” “비록 저를 위험하다 여기시지만, 그것은 저를 이해해 주신다는 뜻이기도 하니까요.” “이해?” 맥달은 아이 같은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차분하게 말했다. “저를 이해하시기에 저를 무섭다 여기시는 것이지요. 안 그렇습니까?” “하지만 나는 당신이 싫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당신을 경계할 것이오, 나를 어떻게 하든 맘대로 하시요 나는 두렵지 않소.” 치우천이 날카롭게 경고조로 말했지만 맥달은 온화한 목소리로 받아넘겼다. “제가 어찌 그러겠습니까? 치우천님은 제 은인이온데.” “은인이라니?” “이제는 거의 아시지 않았사옵니까? 제가 어디서 어떻게 태어났는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말이지요.” 그때 치우비가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아무래도 형이 좀 지나친 듯하여 둘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해보려는 생각에서였다. “저도 까맣게 잊어버리다가 이제 생각이 났습니다. 전에 태산회의로 가는 길에 맥을 타고 오셨던 분이 맥달님이시지요?” 맥달은 조용히 웃어 보였다. 그 미소는 아무리 보아도 세상 때가 묻지 않은 너무도 해맑은 웃음이라 치우비는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우리는 맥달님이 태어난 곳에 들렀었습니다. 대나무골 말입니다. 형님께 주신 그 목걸이 때문에......”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는 치우비를 보며 맥달은 살풋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대뜸 치우천이 외쳤다. “당신은 이미 다 알고 있지 않았소? 목걸이를 내게 주었을 때부터 우리가 그곳을 찾으리라는 걸 알았을 것 아니오?” 그러나 맥달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반대라고?” “그것을 드리면 치우천님이 제가 태어나 겪은 일을 아시고 저를 흥하다 생각하실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래도 드리고 싶어서 드린 것입니다.” 치우천은 잠시 이해가 되지 않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맥달이 다시 말을 이어갔다. “제가 치우천님을 도우면 도울수록, 치우천님께서는 저를 위험하다, 흥하다 여기시겠지요? 그래도 할 수 없었습니다. 총명하신 분이니 짐작하시리라 믿습니다.” 치우천은 약간 혼란에 빠졌다. ‘그렇구나! 맥달이 앞날을 다 안다면, 나를 도우면 내가 자기를 더 의심하고 두려워한다는 것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욕을 먹으며 나를 돕는 까닭은 무엇인가? 혹시.......’ 치우천은 문득 자기 몸에 걸려 있는 저주에 대한 생각이 떠올라 얼굴을 붉혔다. 그 생각을 하자 다시 맥달에 대한 반감이 되살아났다. “맥달님, 나를 돕는 까닭이 무엇이오? 왜 나를 돕는다고 하는 것이오? 그렇게 하여 내 마음을 붙잡아, 나중에 손아귀에 쥐고 흔들 생각이시오? 아니, 이미 다 알고 계실지도 모르지. 언젠가는 나도 맥달님에게 넘어가게 되어 있는 것이오? 그렇소? 대답해 보시오!” 맥달은 그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릴 듯이 슬픈 얼굴이 되었다가 이윽고 조용히 입술을 떼었다. “한 가지만 분명히 말씀드리겠사옵니다. 모든 것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옵니다.” “모든 것이 정해져 있지 않다?” “그러하옵니다. 많은 것이 정해져 있으며, 그것이 바로 하늘의 뜻이란 것입니다. 허나 사람도 하늘과 통하는 하늘과 같은 존재이니 사람의 뜻이 오로지 하늘에서 정해진 대로만 따라가게 되는 꼭두각시는 아니옵니다. 길은 항상 열려 있어서, 사람이 어느 길을 택하느냐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지게 되옵니다. 같은 길을 걷더라도 어떤 마음가짐으로, 어떻게 걷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옵니다.” 치우천은 잠시 생각해보다가 이내 물었다. “정해진 대로 따라간다면 그만이지, 그 안에서 뭐가 달라지는 것이 있겠소?” 맥달이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나 예를 들겠사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습니다. 그러나 죽을 때 죽기 싫어서 애걸하며 원통하게 죽느냐, 당당하게 죽음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삶을 조용히 정리하고 죽음을 맞이하느냐는 다르옵니다. 그렇지요?” “그건....... 그렇소만.......” “치우천님, 그와 비슷한 것이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걷더라도 당당히 걷느냐, 억지로 걷느냐는 사뭇 다르옵니다. 같은 험한 산에 오르더라도 스스로 산을 구경하려고 오르는 사람은 행복하고 힘이 나며, 남이 시켜 마지못해 심부름으로 오르는 사람은 불행해하고 발이 저절로 끌리는 것이옵니다. 하늘이 정한 큰 길이 있고, 사람이 그것을 따르게 되어 있다 하여 사람이 꼭두각시인 것만은 아니옵니다. 사람은 사람의 길을 걷고, 그것이 모여 하늘의 뜻이 되는 것이옵니다.” 잠시 호흡을 고르다가 맥달이 덧붙였다. “치우천님, 치우천님이 지금의 저를 있게 하셨습니다. 자부선인께 말씀하시어 저를 풀려나게 하셨을 때 치우천님은 말씀하셨지요? 하늘이 저 같은 요물을 낳아도 그것은 하늘의 뜻이 있기 때문이니, 하늘의 뜻을 넘겨짚지 말라고요 저는 그때서야 살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제 앞날이 바뀌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치우천님, 앞날은 완전히 정해진 것이 아니옵니다. 저 자신의 앞날도 제가 생각하지 못하는 방향으로 바뀌었사옵니다. 치우천님, 비록 저를 위험하다 여기시겠지만, 저를 도와주시옵소서. 저를 도와주시옵소서.” 그러면서 맥달은 무릎을 꿇고 공손히 치우천에게 머리를 숙여 보였다. 치우비는 깜짝 놀라 어쩔 줄 몰라 했고, 치우천마저도 놀라서 안색이 변했다 치우천이 다급하게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오? 게서 무슨 도움을 청한다는 것이오? 난 이런 절을 받을 수 없으니 어서 일어나시오!” 그러나 맥달은 고개를 들지 않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치우천님은 앞날을 깨뜨리시는 분입니다. 스스로 앞날을 열고 하늘의 뜻을 바꿀 수 있는 분이십니다. 치우천님만이 저를 도우실 수 있사옵니다.” “대체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소! 앞날을 다 아는 당신이 뭐가 모자라서 나에게 부탁을 한다는 거요? 믿을 수가 없소!” “제가 앞날을 안다고 하나 정해지지 않은 것은 알 수 없사옵니다. 치우천님은 앞날을 스스로 여시는 분이옵니다. 앞으로 여러 천 년에 걸쳐 사람들의 앞날이 치우천님에게 달려 있사옵니다. 치우천님이 택하시는 길, 걸으시는 길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이는 하늘이 내리신 것이니 스스로의 길을 소중히 걸으소서. 그리고 저를 도와주시옵소서.” “내가 앞날을 연다고? 허튼 소리 마시오!” “하늘은 치우천님에게 앞날을 붙이셨습니다. 치우천님이 생각하지 못하신다 하여도, 치우천님이 하시는 일이 바로 하늘의 앞날을 정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분은 몇 십 번을 다시 태어나도 만날 수 없사옵니다. 그 때문에 치우천님만이 저를 도우실 수 있는 것이옵니다.” 맥달의 하소연은 간절했고, 조금의 거짓도 없었다. 더구나 맥달의 말에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었다. 치우비는 더는 참지 못해 끼어들었다. “맥달님, 어떻게 도우면 되겠습니까? 저는 맥달님을 믿습니다.” 그러자 치우천이 나지막하게 호통을 쳤다. “비야!” 치우비는 이내 쑥스러운 듯 물러서며 치우천을 쳐다보았다. “형님, 아무리 생각해도 맥달님은 좋은 분이야. 일단 무슨 이야기인지 들어는 봐야 되지 않겠어? 형에게 도움을 청하는데 이야기도 듣지 않을 거야?” “하지만 이 여자는......” “형님은 누구든 도움을 청하는 사람을 거절한 적이 없잖아?” 치우비의 말에 치우천은 일부러 날카롭게 닫아둔 맥달을 향한 마음의 문을 조금 열었다. 아니, 아무리 치우천이 마음을 굳게 닫으려 해도, 한 톨의 가식이나 거짓이 없어 보이는 맥달의 부드러운 태도에 꺾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맥달은 예쁘다거나 아름답다기보다는 너무도 조용하고 우아했기에 악함이나 교활함 같은 것이 티끌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치우천도 조금씩 마음이 누그러졌던 것이다. 치우천은 잠시 생각하다가 한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내가 무엇을 도울 수 있는지 나는 모르겠소. 더구나 무슨 하늘의 뜻을 받았다는 말 같은 것은 없었던 걸로 해둡시다. 게다가 더구나 나는 아직도 당신을 위험하다고 여기오. 하지만 말은 해보시오. 당신은 위험한 것이오? 아니면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이오?” 맥달은 비로소 조금 얼굴을 펴며 고개를 들었다. “치우천님, 구태여 많은 말씀이나 설명은 드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옵니다. 치우천님의 생각은 다 맞습니다. 저는 위험한 재주를 지니고 있으며, 그 때문아 많은 사람이 다칠 수도 있습니다. 제가 원하지 않아도, 제가 입을 잘못 놀리면 하늘의 뜻을 빗나가게 하여, 저와 많은 사람을 망칠 수도 있사옵니다. 그러니 제게 도움이 필요한 것이옵니다.” “알았으니 말해보시오 나도 사실 묻고 싶은 것이 많소.” 치우천은 눈을 빛내며 되받았다. 비록 마음은 누그러졌어도, 치우천의 이성은 아직 긴장을 풀지 않았다. 그러자 맥달이 말했다. “이곳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이니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좋지 않사옵니다. 조금 뒤면 여러 사람이 지나갈 것이옵니다.” “그것을 어떻....... 아니, 당연히 알겠지. 좋소. 그럼 어디로 갈까요?” “일단 제 집으로 가시지요 솟대 부근에 있사옵니다. 긴 이야기가 될지도 모르오니 그곳에서 이야기를 들으시지요. 좋은 술도 준비해 두었습니다.” “내가 가리란 것을 다 아시었단 거요? 음, 하긴 그렇겠지.” 치우천이 복잡한 표정을 짓자 맥달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 “치우천님께는 숨기지 않겠사옵니다. 그런 것은 대강 알 수 있사옵니다.” “그러면 내가 반드시 따라간다는 것도 이미 아는 것이오?” “아니옵니다. 치우천님은 가실 수도, 가시지 않을 수도 있사옵니다. 그렇지 않으면 제가 무엇 하러 그리 간절히 청했겠사옵니까?” “그럼 가지 않........” 던지듯 말하려다가 치우비가 옆구리를 세게 쿡 찌르는 바람에 치우천은 말을 내뱉지 못했다. 하도 세게 찔러서 치우천이 움찔거리는 틈을 타 치우비가 재빨리 속삭였다. “형, 그건 안 좋아. 형님도 궁금한 것이 많았는데 잘됐잖아? 일단 가보자구.” 그러면서 치우비가 대신 나섰다. “가신답니다! 가신답니다, 맥달님.” 맥달은 살짝 웃고는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치우천은 화난 듯 치우비를 쳐다보았으나 치우비는 헤헤 웃는 표정을 지었다. 좋아하는 아우가 그렇게 나오자 치우천도 할 수 없다는 듯 허 하고 헛웃음을 흘리면서 맥달의 뒤를 따랐다. 사람이 북적거리는 신시였는데도 지금 맥달이 가는 길에는 이상하게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비록 약간 좁은 구석진 곳으로 가기는 했어도 한 사람도 마주치지 않는다는 것이 참 희한했다. 치우비는 신기해했으나 치우천은 이내 생각해보고 물었다. “지금 사람이 없는 곳으로만 골라 가시는 거요?” 맥달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대답했다. “그러하옵니다. 혹 저와 같이 있는 것을 다른 사람이 보면 누가 된다 여기실까 봐요.” “다른 사람 눈에 띄면 어떻게 되오?” 치우천이 심각하게 물었으나 맥달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답했다. “눈에 띄지 않사옵니다.” 치우천은 그 말에 돌연 심사가 뒤틀려 갑자기 소리를 버럭 질렀다. “사람 살려!” 치우비는 치우천이 왜 소리를 지르는지 몰라서 깜짝 놀랐으나 맥달은 그저 빙긋이 웃을 뿐이었다. 치우천이 그 큰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는데도 이상하게 아무도 달려 나오지 않았다. 치우천이 얼빠진 표정을 짓자 맥달이 재촉했다. “우리가 가는 길에서는 아무도 만나지 않사옵니다. 어서 가소서.” 치우비는 신기해했지만 치우천은 또 기분이 언짢아졌다. 누가 뭐라 해도 치우천은 이렇게 정해진 길을 걷는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또 그런 것을 다 아는 맥달이 미웠다. 치우천은 울컥 성질이 치밀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나는 가지 않겠소. 여기서 이야기하겠소.” 전혀 당황하는 기색 없이 맥달이 되받았다. “그럼 그리하소서.” 치우천은 예상과는 달리 맥달이 순순히 나오자 순간 맥이 빠졌다. “그럼 내 마음대로 된 거요?” 맥달은 몹시 곱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생각하소서.” 치우천이 기분이 흡족해져서 아예 다리를 꼬고 앉자, 그 모습을 보며 치우비가 킥킥 웃었다. “형, 자리라도 좀 펴고 앉아. 나도 앉게.” “자리?” 치우천이 놀라서 둘러보니, 자신은 맨땅이 아니라 풀을 이어서 만든 자리 위에 앉아 있었다. 약간 어두운데다 아래를 주의 깊게 보지 않아 자리 위에 앉은 것도 몰랐던 것이다. 치우천은 깜짝 놀라 외쳤다. “이게 뭐요? 혹시......?” 치우천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맥달이 조용히 바로 옆에 있는 큰 나무 뒤에서 술병과 토기 잔들을 꺼내오는 것이 아닌가? 치우천은 너무도 놀라 기가 탁 꺾여버렸다. “맥달....... 당신은 이미 알고 있었구려. 내가 여기서 주저앉을 것 까지도...... 그래서 자리를 깔아두고........또.......” 치우비는 재미있고도 놀라워 손뼉을 치며 껄껄 웃었다. 그러나 치우천의 기분은 참담했다. 치우천은 속으로 생각했다. ‘정말 당할 수가 없구나. 이런 여자를 어떻게 상대한단 말인가? 너무도 무서운 여자다. 지금 칼로 목을 베어 버릴까?’ 치우천은 돌연 살의를 느꼈으나 이내 생각을 고쳤다. “내가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건가? 아무리 그래도 이유 없이 칼질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더구나 그것도 저 여자는 다 알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때 맥달이 공손히 술 한 잔을 치우천에게 내밀었다. 아주 맑고 향기가 좋은 술이었다. 치우비는 킁킁 술 냄새를 빨아들이듯 맡더니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 “야! 이건 하늘 술이로군요! 어떻게 구하셨습니까?” 맥달이 내민 것은 신시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릴 때에만 쓰는 하늘 술이었다. 많은 과일과 곡식으로 배합하여 만든다는 술인데, 무척 향기가 좋고 맛도 뛰어나 가장 좋은 술로 쳤다. 다만 만드는 법이 철저하게 비밀에 부친데다가 하늘 제사를 올리는 술이라 하여, 보통 사람 은 평생 구경조차 할 수 없는 술이었다. 술 귀신인 치우비는 벌써 가슴이 다 두근거리는 듯했으나 치우천은 맥이 풀려 술 냄새도 느껴지지 않았다. 치우천은 마지못해 술잔을 받았다. 술잔을 받다가 맥달의 희고 고운 손과 손가락이 슬쩍 닿자, 순간 찌르르 하는 기이한 느낌이 왔다. 치우천은 깜짝 놀랐으나 내색하 지 않고 얼버무리듯이 물었다. “당신은 정말 모든 것을 다 아는군요 내 마음속도 다 아시겠군요?” 맥달은 곱게 고개를 저으며 치우비에게도 술을 따라주었다. “사람 마음속을 어찌 알겠습니까? 다만 겉으로 보이는 것만 알 뿐이옵니다.” 치우천은 맥달에게 일부러 충격을 주려고 험악하게 말했다. “나는 방금 한칼에 당신 목을 쳐버리려고 생각했었소.” 맥달은 순간 놀라서 술을 조금 흘렸다. 치우비도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맥달은 약간 부르르 떨다가 이내 평정을 되찾았는지 차분한 표정으로 치우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러지 않으실 것인데요. 하지만 놀랐습니다.” 맥달의 눈에 눈물이 약간 글썽거렸다. 그것을 보고 치우천은 속으로 생각했다. ‘일부러 꾸민 행동은 아닌 듯하구나. 다행히 사람 마음속까지는 읽지 못하는가 보구나. 그나마 다행이다.’ 치우천이 자세를 고치며 정중하게 말했다. “놀라게 했다면 미안하오. 허나 내 마음은 아직 그와 같소. 너무 가까운 척할 필요 없소.” 미안하다고는 했으나 매몰찬 말투였다. 허나 맥달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하옵니다. 치우천님이 저를 싫어하시는 것만큼 저도 제 자신이 싫으니까요.” 치우천은 그 말에는 대꾸하지 않고 되물었다. “천 가지 알고 싶은 게 있는데 솔직히 대답해주시겠소?” “그러리이다.” “당신의 앞날을 보는 힘은 나면서부터 있었던 것이오?” “그렇습니다. 이미 치우천님은 제가 어릴 적의 일을 들으셨으리라 믿습니다.” “그렇소, 들었소.” “제가 가리키기만 하면 사람들이 죽어나갔다고 들으셨겠지요?” “그렇소.” “변명은 아니옵니다만 저는 기억하고 있사옵니다. 저는 결코 사람들을 해코지한 것이 아니옵니다. 곁에 있던 가까운 사람이 느닷없이 죽어서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 놀라워서 그랬던 것이옵니다. 그것이 보이기 때문에 놀라 울었던 것이지, 결코 누구를 어찌할 생각으로 그런 것은 아니옵니다.” 치우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치우천은 무심하게 다음 질문을 이어갔다. “그래서 버려진 당신을 자부선인이 주우신 것이오?” “자부선인께옵서 저를 주우신 것이 아니라 맥이 저를 주웠사옵니다. 자부선인께서도 저를 귀여워하셨으나, 제가 제상에 누가 될까 싶으셨는지 저에게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고 그냥 두셨나이다.” “자부선인께서 말도 가르치지 않으셨소?” “그러하옵니다. 앞날을 볼 줄 아는 제가 철없이 말을 배워 떠들게 되면, 그 뒷감당을 누가 하겠습니까? 그래서 자부선인께서는 말을 가르치시지 않았사옵니다.” “나와 처음 만났을 때, 그러니까 태산 회의 때도 말이오?” “그렇사옵니다.” 돌연 치우천이 싸늘하게 웃었다. “당신의 말이 믿기지 않는구려. 내가 당신 말을 믿지 못하는 이유가 세 가지 있소 그 세 가지가 내 마음에 걸리기 때문에, 나는 당신을 믿지 못하는 것이오.” “저는 거짓을 말하지 않사옵니다.” 맥달의 말에 치우천은 고개를 갸웃해 보이며 되받았다. “먼저 첫째, 당신은 태산 회의 전까지는 어리고 말도 모르는 아이였소. 그런데 태산 회의가 끝나고 나서는 이렇게 자라고, 말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다 아는 여인이 되어 내 앞에 나타났소. 그 둘이 같은 사람이란 것을 나는 믿기 힘드오.” 맥달은 순순히 대답했다. “물론 믿기지 않으시겠지요. 허나 자부선인께옵서는 대선인이시옵니다. 그분은 제가 어린 채로 있는 것이 견디기 쉽다 여기셔서, 제가 자라는 것을 막아두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치우천님을 만나시고 난 후, 자부선인께옵서 막았던 시간을 풀어서 저를 자라게 해주셨나이다. 그리고 그 사이 저에게 말과 모든 것을 가르치셨나이다. 치우천님의 시간으로는 며칠 되지 않았겠지만, 저는 자부선인께옵서 막아두신 시간만큼 몇 년을 배우고 공부했는지 모르옵니다. 치우천님의 얼굴을 잊어버릴 뻔할 정도로 길었나이다.” 맥달은 마지막 말을 하면서 맑게 웃었다. 치우비는 아, 하고 놀라는 소리를 냈으나 치우천은 믿어지지 않아 다시 물었다. “시간을 그렇게 마음대로 하실 수도 있단 말이오?” “자부선인께옵서 못하시는 일은 거의 없사옵니다. 시간을 뒤로 돌리는 것은 안 되지만, 빠르게 가거나 느리게 가게 하는 것은 된다 들었사옵니다.”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였지만 치우천은 한동안 생각한 끝에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자부선인 정도의 대도력을 지닌 사람이 무엇을 못하겠는가? 치우천은 첫 번째 의문이 너무도 쉽게 풀리자 당황해하면서도 마음 한켠에는 이상한 안도감이 드는 것 같았다. 그런 마음을 억누르고 치우천은 다소 퉁명스럽게 입을 열었다. “또 한 가지 말이 되지 않는 것이 있소 당신은 나와 처음 만났을 때, 정말 말을 할 줄 몰랐단 말이오?” “그렇사옵니다.” “그러면 어떻게 내 말을 다 알아들었소? 말이 안 되지 않소?” 맥달이 살포시 웃었다. “그때, 쇤네가 대답할 때 시간이 조금씩 오래 걸린 것을 기억하시온지요?” “그런 것 같긴 하오만.” “쇤네는 앞날을 볼 수 있사옵니다. 그래서 앞날을 보고 치우천님의 말한 뜻을 미루어 알아낸 것이지, 말을 알아들은 것이 아니옵니다. 좀 생각하기 어려우실 것입니다만, 치우천님은 충분히 납득하시리라 믿사옵니다.” 그 말에 치우천은 놀라움에 겨워 흠칫거렸다 ‘그럼 내 말을 알아들은 것이 앞날을 보고 그런 것이란 말인가? 그럴 수도 있겠구나! 그러면 내 의심은 헛된 것이었나?’ 치우천이 잠시 입을 다물고 있자 맥달이 조용히 말을 이었다. “치우천님이 저를 두려워하시고 저어하시는 것은 지극히 맞는 일이옵니다. 쇤네 스스로가 생각해도 쇤네가 가진 힘은 너무도 두려운 것이며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것이옵니다.” 맥달은 공손하게 다시 치우천에게 술을 권하며 덧붙였다. “앞날을 안다는 것의 무게는 치우천님의 말씀대로 너무나 크옵니다. 세상의 재앙이 되고, 모든 것을 망가뜨릴 씨앗이 될지도 모르지요. 허나 이제 그렇게는 되지 않을 것이옵니다.” “왜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게요?” “치우천님이 계시기 때문이옵니다. 다른 분도 아니고 하늘이 정하신 분이 저를 저어하시고 다스리신다면, 저는 세상에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옵니다. 오히려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요.” 뜻밖의 말에 치우천은 하마터면 술잔을 엎을 뻔했다. “내가 당신을 다스린다고?” 맥달은 침착하게 엎어질 뻔한 술잔을 잡아 바로 세우면 차분하게 말했다. “생각해보신 일이 있는지요? 앞날을 안다는 것이 얼마나 불행한 일인지 말입니다.” 잠자코 두 사람의 말을 듣던 치우비가 물었다. “뭐가 그리 불행합니까? 좋을 것 같은데요?” 맥달은 약간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앞날을 알게 되면, 자신의 죽을 날과 죽을 모습부터 알게 되옵니다. 그것이 과연 행복하겠사옵니까?” 치우비는 몹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치우천은 굳은 표정을 지었을 뿐, 놀라지 않았다. 그만한 것은 이미 생각한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맥달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그뿐이 아니옵니다. 세상을 살 어떤 재미나 낙도 느끼지 못하게 되옵니다. 다 이미 언제 일어날지, 무엇이 일어날지 알고 있는데 세상을 사는 재미가 어디 있겠사옵니까? 해도 될 일, 해서는 안 될 일, 이루어질 일과 이루어지지 않을 일을 다 아는데 무엇에 애를 쓰겠사옵니까? 저와 같은 재주가 생기게 된다면, 결국 꿈꾸게 되는 것은 단 하나뿐이 될 것이옵니다.” “그게 무엇이오?” 치우천이 묻자 맥달은 처연하게 말했다 “무엇이라도 좋으니 내 생각이 틀리게 되는 일, 아니 내가 알아볼 수 없는 일을 찾는 것이옵니다. 그래야 그나마 사는 재미가 있지 않겠사옵니까?” “재미, 재미 하는데 사는 것은 재미로 사는 것이 아니오.” “물론 그렇사옵니다만 한번 생각해 보시지요 매일같이 이야기를 듣게 되어 있는데, 이미 다 알고 있는 이야기만 듣는다면, 이야기를 듣는 것이 좋겠습니까? 듣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까?” 치우천은 무거운 표정을 지은 채 대답하지 않았으나 치우비가 순진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듣지 않는 것이 좋지요 같은 이야기를 계속 듣는다면 저는 되레 짜증이 나서 화를 낼 것입니다.” 맥달은 고맙다는 듯 치우비를 향해 웃어 보이고는 치우천에게 말했다. “물론 사는 것이 중하나 사는 재미가 하나도 없다면 어떻게 하겠사옵니까? 어떻게든 사는 재미를 찾으려 하는 것이 사람 아니겠사옵니까?” 치우천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게 내게 바라는 도움이란 것이오? 당신을 다스려 달라는 것이?” “그렇사옵니다. 치우천님은 앞날을 이끄시는 분이오니, 저 같은 것은 치우천님의 앞날은 다 읽을 수가 없사옵니다. 그 때문에 저는 살 생각을 하게 되었사옵니다. 기억해 보시지요. 치우천님을 처음 뵙는 순간, 저는 비록 말도 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멍한 아이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치우천님의 앞날이 정해져 있지 않으며, 그 앞날은 치우천님의 뜻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제가 이전에 한 번도 만나 뵌 적이 없으면서 치우천님을 너무도 반가워한 것도 다 그러한 이유이옵니다.” 그 말에 치우천도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비로소 맥달의 행동이 이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저는 몹시 위험했사옵니다. 철없는 저로서는 자부선인님만 아니었다면 어떻게든 제가 보는 것을 틀리게 만들려고 무슨 짓이라도 하게 되었을 것이옵니다. 그 결과가 어찌되었건 말이지요.” 너무도 엄청난 말이라 치우천이 놀라서 물었다. “앞날을 본 것과 틀리게 만들 수 있소?” “방법이 있사옵니다.” “어떻게 말이오?” “될 사람에게 알리면 되오이다.” “될 사람이란 무엇이오?” “바로 치우천님 같으신 분이옵니다. 앞날을 스스로 일구어 바꿀 수 있는 운명을 받은 분, 그런 분에게 앞날을 일러서 정해진 방향을 어느 정도 트는 것은 가능한 일이옵니다. 하늘의 뜻이란 대략은 정해진 것이옵니다. 거의 대부분 틀림없이 맞게 되어 있사옵니다. 허나 그것이 틀리는 일도 있습니다. 또 맞지 않게 비트는 것도 가능은 하옵니다. 물론 저처럼 앞날을 볼 줄 아는 사람이 있어야 되겠지요.” “그렇소? 헌데 왜 그렇게 하지 않은 거요?” 맥달이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치우천님은 잘 아시지 않사옵니까?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말입니다. 세상일이란 한없이 복잡하여, 무엇 하나를 흩뜨리면 어떤 결과가 올지 모르는 것이옵니다.” “예를 들자면요.” 치우비가 묻자 맥달은 차분하게 설명해주었다. “가령 가뭄이 들 것을 짚어내어 미리 연못을 파고 물을 모아두었다고 하십시다. 그러하오면 좋은 일 같아 보이오나, 그렇게 되지 않을 수도 있사옵니다. 가령 연못을 파다가 누가 실수로 떨어져 죽거나 다쳤다고 하십시다. 물론 연못을 파는 일꾼은 종이나 그런 낮은 사람이겠지만, 먼 훗날 그 사람의 후손 중에서 한 나라를 일으켜 세우는 사람이 나오면 어떻게 되겠는지요?” 그러자 치우비는 놀랍다는 듯이 짐짓 눈을 크게 떴다. “어이쿠! 그러면 그 나라는 없어지겠군요!” 맥달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늘의 뜻은 그리 쉽게 변하지는 않사옵니다. 그렇게 되어도 그 나라는 서게 됩니다. 허나 다른 사람에 의해 약간 다르게 서게 되지요. 그 때문에 큰 싸움이 한 번 날 것이 두 번 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가령 큰 싸움이 한 번 더 나면 수천, 수십 천 명이 더 죽을 수도 있습니다. 원래 죽지 않아야 할 사람들이 더 죽는 것이지요.” 더욱 놀라움이 커진 치우비가 다시 물었다. “그럼 그 사람들 후손 중에 또 그런 사람이 나온다면 어쩝니까?” “그렇게는 되지 않습니다. 하늘의 뜻이 이그러진 것을 되잡는 길이기 때문에 그 가운데 더 희생되는 사람은 하늘 뜻과는 관련 없이 되게 마련이지요. 그러나 그것만 하여도 무서운 일이옵니다. 생각해 보소서. 저 때문에 많은 사람이 죽게 되는 것이옵니다. 그러면 어찌 그런 말을 할 수 있겠사옵니까? 그러나 일단 그런 일이 알려지면, 당장 눈앞의 사람들은 가뭄이 언제 오는지 알려주지 않는다고 저를 원망하옵니다. 참으로 힘든 일이 되지요.” “그러면 조용히 살면 될 것 아니오?” “그것도 마음대로 안 되옵니다. 앞날을 아는 자는 어떤 일을 자신이 해야만 하는지 알고 있사옵기에.......” “저, 그거 참 딱하군요.” 치우비가 탄식하자 맥달이 약간 서글픈 목소리로 되받았다. “앞날을 아는 자는 무엇 하나 마음대로 할 수 없사옵니다. 하늘은 내가 해도 될 말과 안 될 말을 점해놓고 있는 것이옵니다. 천님은 누구를 꼭두각시 삼는다 하셨지만, 저야말로 꼭두각시라 생각하지 아니할 수 없사옵니다. 그러니 꼭두각시에서 벗어나고자 어떻게든 앞날을 바꾸어 보려고 생각하게 되옵니다. 제 목숨을 버리고, 수많은 목숨을 버리게 되더라도 제가 본 것과 다르게 앞날을 틀고 싶어지게 마련인 것입니다. 생각이 그렇게 비틀리게 되옵니다. 치우천님께서 저를 두려워하신 까닭도 거기에 있을 것이고요 그렇지 않사옵니까?” “맞소. 바로 그거였소 그래서 나는 당신을 무조건 죽이려고까지 생각한 것이오.” 무심코 대답하면서 치우천은 어느새 맥달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내가 왜 이러는가? 이 여자에게 넘어가는 것 아닌가? 허나 이 여자의 말은 정말 맞다. 내가 미처 생각 못했던 것까지 말하고 있다. 그러면 굳이 귀를 막을 이유는 없지 않은가? 옳은 말은 어쨌거나 들어야 하지 않는가?” 비록 마음속에서는 아직도 맥달이 거북살스러웠지만 치우천의 이성은 그렇게 외쳤다. 맥달이 계속 이야기했다. “저만 해도 아슬아슬했사옵니다. 물론 자부선인께서 옆에 계시었으니 무슨 짓을 할 수는 없었겠지요. 그러나 자부선인께옵서 시간을 느리게는 만드실 수 있어도, 아주 멈추실 수는 없었사옵니다. 결국 저는 말은 배우지 못했어도 말과 생각은 다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혼자 깨닫는단 말이오?” “다른 사람의 앞날을 보면서 배우면 그만이옵니다.” “허...... 그것 참. 허나 자신의 앞날도 보일 것 아니오?” “그건 아니옵니다. 스스로의 앞날은 직접 볼 수는 없사옵니다. 다만 다른 사람의 앞날을 봄으로써 대강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뿐이지요. 그 때문에 내가 죽는 날이나 죽는 모습은 알 수 있어도, 그때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죽게 될 것인지까지는 모르옵니다.” “그래서 삶의 재미가 없다는 것이오?” “좌우간 그렇게 오랜 시간 생각하게 되어, 결국 스스로가 할 일은 그냥 목숨을 끊는 것밖에 없다고 여기게 될 것이옵니다. 사는 것에 아무런 보람이 없으니까 말이옵니다. 예정된 것보다 먼저 죽으면, 비록 죽더라도 지긋지긋하게 정해진 그대로인 앞날을 한 번이라도 비틀어 보게 되는 셈이니까요.” “죽지 않고 다른 사람의 앞날을 바꿀 수도 있는 것 아니오?” 그 물음에 맥달은 진지하게 대답했다. “그런 일은 단 한 번밖에 못하옵니다. 정해진 앞날을 바꾸면, 저 스스로가 제일 먼저 죽음을 맞게 되옵니다. 아무 이유도 없이, 그냥 타 버리는 촛불처럼 명이 다하는 것이옵니다. 앞날을 아는 자의 숙명이옵니다.” 치우천과 치우비는 입을 꾹 다물고 있을 뿐 차마 뭐라 대답하지 못했다. 맥달도 마음이 좀 무거워지는지 힘없이 말을 이었다. “결국 세상을 사랑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모든 것이 달렸다 하겠사옵니다. 세상을 사랑하오면 세상을 위해 스스로의 마음을 억누를 것이옵고, 미워하게 된다면 세상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겠지요. 치우천님, 저를 도와주시옵소서. 제가 세상을 사랑하게 만들어주소서 저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사옵니다.” “무슨 말이오?” “세상을 어찌 사랑할는지요? 세상은 너무도 어수선하고, 사람들 간에 서로 싸우고 죽이는 슬픈 일이 너무도 많사옵니다. 좋은 일도 있지만, 좋은 일 열 가지가 모여도 끔찍한 나쁜 일 한 가지가 더 제 마음을 파고듭니다. 앞으로도 얼마나 오랫동안 이런 죽음과 고통이 계속될지........ 상상도하실 수 없을 것이옵니다. 정말 너무도..... 너무도 무서운.......” 맥달이 말하다가 참지 못하여 낯빛이 변하더니 흐느끼기 시작했다. 1모습을 보는 순간 치우천은 맥달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은 점점 살기 좋아지지 않겠소?” “그.......그것이....... 모르겠사옵니다. 분명 많은 것이 나오고 편해집니다만....... 사람들이 더 행복해지는지는....... 저는 모르겠사옵니다. 오히려 생각도 할 수 없는 끔찍한 일들이 터지고.......아아......” 맥달이 눈물을 주르륵 쏟기 시작하자 치우비가 안쓰러워 급히 말했다. “맥달님, 그런 것은 보지 마십시오. 좋은 일만 보십시오. 아니, 보지 마십시오!” 맥달은 듣지 못하는 듯했다 마치 얼이 빠진 듯, 정신이 나간 것 같았다. 희고 곱던 얼굴은 극도의 공포에 휘말려 있었고 온몸을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보다 못해 치우천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만!” 치우천이 크게 소리를 지르자 맥달은 화들짝 놀라며 예지상태에서 벗어났다. 맥달은 급히 매무새를 추스르며 눈물을 감추었다. “죄송...... 죄송하옵니다. 무심코 그만...... 하지만 먼 미래에......여러 천 년 후에는 너무도 흥한 일들이.......여러 백 천, 아니 천의 헌의 사람들이 죽고......”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치우천은 목소리에 힘을 주어 또박또박 말했다. “그, 만, 하, 시, 오!” 맥달은 얼굴이 붉어져서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예...... 그만두었사옵니다. 감사하옵니다.” 치우천은 비로소 맥달의 처지가 몹시 불쌍하게 생각되었다. ‘알고 보니 이 여자의 처지는 퍽이나 딱하구나! 내 생각보다 더 심한 것 같구나. 여러 천의 천의 사람이 죽는다고?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다니! 더구나 모든 무서운 짓이나 말도 안 되는 끔찍한 짓들까지 다 보일 것 아닌가? 정말 무섭구나! 좋은 일 열 가지 보여도 무서운 일 한 가지를 보면 정신이 다 달아날 것이다 그런 것을 다 본다는 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나라면 아마 진작에 미쳐 버리거나 맥달이 말한 대로 스스로 죽어버렸을 것이다.’ 치우천은 진정으로 맥달을 불쌍히 여기며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맥달님, 내 한마디만 해주겠소. 세상의 모든 짐을 혼자 어깨에 지지 마시구려.” “예? 무슨 말씀이온지?” “맥달님, 왜 그리 먼 앞날을 보십니까? 그런 먼 앞날까지 꼭 맥달님이 간섭하셔야 합니까? 제가 본 사람 중에서는 쑤앙마이께서 가장 오래 사셨지만, 그래도 수천 년을 사시지는 않았습니다. 쑤앙마이께서도 보실 수 없을 정도의 먼일을 왜 걱정하십니까? 저는 앞으로 백 년도 못 살고 죽을 것이고, 맥달님도 별로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사람이 아무리 가진 힘이 있고 세상을 바꾼다 해도, 죽고 나면 모든 것이 끝입니다. 그때는 다른 사람들이 태어나서 살게 되고 모든 일을 해나갈 것입니다. 앞날의 일은 앞날의 사람들에게 맡기면 되는 것입니다. 눈을 돌리십시오. 괴로움이 덜어질 것입니다.” 치우천이 간곡하게 말하자 맥달의 얼굴에 희미하나마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맥달은 한참 생각하다가 돌연 생긋 미소를 짓더니 치우천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감사하옵니다. 마음의 짐을 많이 덜 것 같사옵니다.” 맥달의 진정으로 감사하는 마음이 치우천에게도 전해져 오는 것 같아 치우천은 오히려 좀 어색해졌다. 치우천은 어색함을 감추려고 급히 얼버무렸다. “별말도 아닌데 무슨..... 그리고 아까 세상을 사랑한다는 말, 말입니다. 그것에 대해 한마디 해도 되겠습니까?” 옆에서 치우비는 히죽 웃었다. 어느새 형의 말투가 ‘했소’ 투에서 ‘했습니까’ 식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이것은 형이 상대를 존중하기 시작했다는 의미였다. 맥달을 몹시 좋은 사람으로 생각하는 치우비로서는 기쁜 일이었다. 맥달은 반색을 하며 재촉했다. “말해주소서.” 치우천이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세상은 원래 엉망입니다. 많은 사람이 죽고 다치고 하죠 뭐, 저는 모릅니다만 먼 미래도 역시 그 모양이군요.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죽습니다. 죽고 새 사람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엔, 수십 천 또 그에 수십 천의 사람들이 죽는다니 앞날에는 사람이 참 많아지는 모양이군요 되레 사람이 많아졌으니 더 번창하게 된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맥달님, 나는 이 세상이 좋습니다. 지금 세상에도 뭐라 말할 수 없는 끔찍한 일이 많지만, 그렇다고 이 세상이 싫지는 않습니다. 세상이란 끔찍해서 싫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싫건 좋건 우리는 지금이 세상 속에서 사는데, 무엇을 따집니까? 한 사람이라도 덜 죽고 덜 다치게 만들고 한 사람이라도 덜 고통스럽고 웃으며 살게 만들려고 노력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l물론 아무리 애를 쓰고 아무리 먼 앞날이 되어도 모든 사람이 다 행복하고 다 웃으면서 살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안 될 일이라도 애쓰는 게 옳은 일이나, 무서워하거나 피하거나 하는 것이 사람의 길은 아니라 봅니다.” 치우천이 당당하게 말하자 맥달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다가 이내 살짝 눈물을 지었다. “고맙습니다. 진정으로 고맙사옵니다. 정말..... 정말 저는 잊고 있었사옵니다.” 치우천은 맥달을 보고 웃으며 한마디 덧붙였다. “그리고 정해진 앞날을 산다는 것도 괴로워 마십시오. 저는 어릴 때 비 녀석과 활쏘기나 칼 겨룸을 많이 하고 놀았습니다. 비 녀석은 보다시피 무척이나 세니 제가 이긴다는 것은 어림도 없었죠. 허나 하면 질 것이 뻔한데도 저는 비 녀석과 노는 것이 즐거웠습니다. 맥달님, 이루어지는 일만 생각하시지 말고 이루어지는 도중을 생각하십시오. 정해진 일이라도 그것을 이루어지게 하는 것, 이루어지는 것을 보는 것은 충분히 재미있을 것입니다. 결과만 보지 마시고 과정을 보십시오. 저는 결코 살 희망이나 재미가 없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만, 앞날을 안다고 하셔도 정해진 것만 이루십시오. 그래도 생각만 바꾸시면 충분히 사는 보람을 느끼실 수 있으리라 봅니다.” 마지막 말을 하면서 치우천은 온화하게 웃으며 맥달을 바라보았다. 맥달은 다시 한 번 주르륵 눈물을 쏟았다. 그러나 맥달의 눈물은 슬퍼서 흘리는 눈물이 아니고, 기쁨의 눈물이란 것을 치우천이나 치우비 모두 알 수 있었다. 맥달은 눈물을 연신 훔치며 치우천에게 고맙다고 말하려 했으나, 목이 메어 미처 그 말을 하지 못했다. 맥달은 간신히 안녕히 가시라는 말만 남긴 채 이내 몸을 돌려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러고 보니 꽤 시간이 지나 주변은 완전히 깜깜해져 있었다. 치우비는 어느새 맥달이 들고 온 술을 다 마셔버려 얼굴이 벌개졌다. 치우비는 형의 얼굴을 슬쩍 보며 물었다. “형님, 기분 좋아지셨수?” 치우천은 웃으며 말없이 맥달이 따라놓은 술을 훌쩍 마셔 비워버렸다. 치우천이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치우비는 치우천의 맥달에 대한 마음이 많이 풀렸다는 것을 눈치 챘으나 일부러 다시 물었다. “거봐, 맥달님은 나쁜 분이 아니라니깐?” 그러자 치우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네 말이 맞는 듯하구나. 악한 사람은 아닌 듯하니 그리 염려할 것은 없을 것 같다.” “내 말이 맞지? 형은 너무 의심이 많아.” “그러나 의심할 만한 일이긴 하다. 앞으로도 주의해야 한다. 앞날을 모두 본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이제 너도 좀 알게 되지 않았느냐?” 치우비가 웃으며 허리에 찬 커다란 도끼를 들어 보였다. “이것도 맞으면 위험하지만, 이게 함부로 휘둘러지는 것 봤수?” “그거야.....” 치우천은 모든 게 사람 마음에 달렸다는 뜻임을 알아채고는 그냥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알겠다. 맥달은 좋은 사람으로 일단 해두자. 생각보다도 훨씬 무거운 짐을 진 가엾은 사람이더구나. 허나.......” “또 뭔데?” “나는 좀더 두고 봐야겠다. 그러고 보니 세 번째 이유를 이야기하지 못했군.” “그게 뭔데?” 치우비가 물었으나 치우천은 대답하지 않았다. 굳이 자신의 몸에 걸린 저주에 대해 말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치우천은 속으로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중얼거렸다. ‘그렇다고 나는 당신 사람이 되지는 않을 거요, 맥달. 당신이 나쁜 사람 같진 않지만, 나에겐 소녀가 있으니까.’ 집으로 돌아간 치우 형제는 깜짝 놀랐다. 방안에 누가 들어와 마구 이것저것을 헤쳐 놓고, 또 댁이며 바닥에 칼자국을 마구 그어놓고 사라진 것이다. 더구나 그때는 집에 치우우레와 종들로 벅적거릴 무련이었다. 그런데도 침입자가 있었다는 것을 아무도 몰랐다니 치우비는 칼자국들을 보자마자 흥분하여 도끼를 움켜쥐었으나 치우천이 조용히 말렸다. “이미 갔으니 흥분할 거 없다.” “하지만 이게 뭐야? 왜 이렇게 엉망으로 만들어왔지?” 치우천은 냉랭한 표정으로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이건 경고하는 거다.” “경고?” 치우천은 그에 대답하지 않고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우리가 일찍 와서 자고 있었다면 위험했을 수도 있었겠구나. 하지만 우리가 오지 않으니까 그냥 경고만 남기고 간 거다. 앞으로도 조심해야 한다.” “대체 누가 이런 짓을?” 치우비가 묻자 치우천은 하하 웃으며 대답했다. “나중에 다 알게 되겠지. 우리는 오늘만 해도 적을 아주 많이 만들었으니까.” 아하, 하며 치우비 역시 씩 웃으면서 되물었다. “형, 그런데 재미있지 않아?” “뭐가?” “분명 맥달님은 이것도 알고 있었던 것 같단 말야. 그래서 굳이 오늘 우리를 불러낸 것 아니겠어?그러니 너무 염려 말라구. 아무래도 맥달님이 보이지 않게 우리를 지키시는 것 같으니까.” 치우비가 흐뭇해하며 말하자 치우천은 애써 고개를 저었다. “적어도 맥달님과는 적이 될 것 같지 않지만 난 아직 맥달님을 아주 믿지는 못하겠다. 그런 생각은 나중에 하자.” 그날 밤 치우천은 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자객이 들어왔다간 때문이 아니라 맥달 때문이었다. 맥달이 정말 자신을 지켜주는 것인지, 그녀를 정말 믿을 수 있는지, 그녀의 마음의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인지 자신도 모르게 깊이 생각하며 밤새 뒤척이다가 새벽녘이 되어서야 자신도 모르게 스르르 잠이 들었다. 반면 치우비는 자객이 또 오지는 않을까 싶어 밤새 경계하다가 잠을 설치고 말았다. 제사 치우 형제에게 이틀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치우천이 겨우 삼천의 사울아비로 공상을 친다는 소문이 어느 정도 퍼져서, 그동안 알고 지냈던 많은 사울아비 벗들이 치우천을 찾아왔기 때문이다. 거서기나 삼, 그리고 몸에 심한 화상을 입은 부달 등은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아 찾아오지 못했으나 양역, 부루벼락, 쇠돌이에다가 도단이, 스름이, 질쾌 등등까지 모두 치우 형제를 찾아와 소문이 사실이냐고 물었다. 그럴 때마다 치우천이 웃으며 대답했다. “해봐야 아는 것이지만....... 쉽지는 않겠지요.” 벗들은 모두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이면서도 그래도 치우천이 하는 일이니 믿는 눈치였다. 부루벼락이나 쇠돌이는 아예 탁 터놓고 가게 되면 자신들도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다. 치우천은 웃으며 말했다. “그럴 수 있으면 나도 힘을 빌리고 싶답니다. 벼락 형이나 쇠돌이의 힘이 누구보다 필요한 일이니까요.” “신시에 뭉개고 앉아 높은 것들 눈치나 보느니 그런 후련한 싸움에 한 번 나가고 싶다네. 잘 도와주게.” 그러나 치우비는 걱정이 앞서는 것 같았다. “안 그래도 힘든 일인데 그나저나 소문이 이렇게 퍼지면 유망이 미리 알고 대비할까 봐 걱정이야. 누구에게 들었지?” 치우천이 여전히 웃음을 머금으며 태연히 대꾸했다. “왜 소문이 안 나겠니? 숨긴다 해도 유망은 다 알 거다. 아마 내가 공상으로 간다는 걸 유망에게 알리지 못해 안달난 사람도 있을지 모르는데?” 그러자 도단이가 조용히 다가와 말을 건넸다. “이보게 천형, 난 그게 누군지 알 듯도 하다네.” 치우천도 조금 음성을 낮추었다. “정말인가?” “그래. 나는 눈이 멀어서 그런지 사람들이 내 앞에서는 조심을 좀 안 하는 편이지 그래서 이상한 이야기를 주워들었다네.” “그게 뭔가?” 치우천이 묻자 도단이는 조심스레 대답했다. “치우가람 형제의 일이네. 지나족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그 형제의 집에 자주 드나든다네. 주신 말에 능숙해서 다들 주신 사람으로 알지만 나는 알 수 있다네.” 도단이는 장님이니만치 남보다 귀가 몇 배는 더 예민했다. 그래서 아무리 주신 말에 능숙하다 해도 그 사람이 지나족 출신인지 아닌지 구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치우천은 일부러 태연하게 되받았다. “지나족이 드나든다고 의심할 것까지야 뭐 있겠는가?” "그게 아닐세. 이상한 것이, 그 사람 앞에서는 그 기세등등한 치우가람 형제들이 기를 못 편다는 말일세. 아무에게나 눈을 내리깔고 보는 녀석들이 쩔쩔매는 지나족이라니, 뭔가 수상하지 않은가?“ 치우천이 대답하지 않고 입을 다물고 있자 도단이는 작은 소리로 분통을 터뜨렸다. “아무래도 난 그놈들이 수상하네. 그놈들은 이제 고시울률님의 힘을 업고 하늘군대를 거의 손에 넣었다네. 치우 집안의 웃뜸인 셈이니 머잖아 대단해질 걸세. 그런데 그런 녀석이 지나족의 편을 든다면 문제가 있네. 주신에서 지나족들과 자꾸 싸우지 않고 넘어가려는 게 그 녀석들 때문이라는 소문도 있고.” 이윽고 치우천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타이르듯 말했다. “그건 대단히 위험한 소리네. 확실하지 않은 이야기는 해서는 안 된다네.” “그럼, 그냥 내버려둘 건가?” 치우천은 순간 아주 작은 목소리로 도단이에게만 들리도록 말했다. “아니지. 그러자면 자네와 내가 한 번 크게 싸워야 할 것 같네.” 도단이가 놀라서 감은 눈을 치뜨자 치우천은 도단이의 어깨를 툭 쳤다. 이틀 후, 제사 준비가 완료되었다. 신시 한복판에 거대하게 우뚝 선 솟대 부근에는 이미 울긋불긋한 꽃으로 제단이 세워지고, 커다란 나무를 깎은 제사용 상이 펴졌다. 주변의 단군들 집에서 제사상에 올릴 술이며 음식을 날라 오고, 제물로 올릴 소는 온몸에 꽃단장을 한 채 이른 아침부터 신시의 여기저기로 끌려 다녔다. 그렇게 소를 사람들에게 보인 이후 제물로 바치는 것이다. 근래에는 주신이 농사도 잘되고 전쟁도 없어서 사람들은 오랜만에 하늘에 올리는 제사를 보는 셈이라 아침부터 와글와글 솟대 부근에 모여들었다. 제사는 저녁때서야 시작되는데도 자리를 잡으려고 미리 나온 사람들이 그렇게 많았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자 하늘군대가 깨끗한 흰옷을 입고 나와 제단을 사람들이 건드리지 못하도록 경계했다. 솟대단군은 계속 제단 가운데 앉아 다른 단군들과 함께 제사에 쓸 불을 지피며 치성을 드리고 있었다. 제사에 쓸 불은 반드시 솟대단군이 붙여야 했다. 이윽고 해가 어둑하게 저물기 시작하자 단군들은 솟데단군의 지휘 하에 다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모두가 화려한 옷이었고 몇몇은 특별한 새털 옷이나 가죽옷을 걸치기도 했다. 이윽고 제사에 쓸 불을 솟대단군이 장작더미에 붙이자 거대한 불기둥이 솟대 바로 밑에 솟아올랐다. 바로 그 불기둥 옆에 치우 형제가 서게 되었다. 그들이 이번 제사에서 하늘의 뜻을 묻는 주역이기 때문에 맨 앞에 서게 된 것이다. 치우비는 긴장된 표정이었으나 치우천은 마냥 태평했고 오히려 좀 따분한 표정이었다. 이윽고 불이 활활 타오르자 단군들과 제사를 맡은 사람들이 요란하게 악기를 연주했다. 그에 맞추어 춤이 시작되었다. 제사 전에 추는 단군들의 춤은 무척 화려하고 의미가 깊어서 사람들이 가장 보기 좋아하는 것이었다. 어느새 솟대 부근에 몰려든 구경꾼들의 수만도 몇 백 명을 넘어 천 명이 가까울 듯했다. 단군들이 추는 춤은 안파견 한님이 멀리서부터 동쪽으로 해를 따라와서 자부선인의 힘과 천부인의 힘을 빌려서 사나운 맹수들과 신수들을 굴복시키고 사람을 평안하게 하며 주신을 세우는 내용이었다. 이것은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주신의 건국설화라고도 할 수 있는 신성한 춤이라 이 춤을 맡은 단군들은 아주 열심히 연습을 해야만 했다. 때문에 춤은 몹시 유연하고 조금의 틀린 데도 없이 손발이 척척 맞아 들어가 구경꾼들의 갈채를 받았다. 안파견 한님 역을 맡은 단군은 솟대단군 중 하나였는데 나이가 일흔이 넘었다고 하는데도 춤 솜씨가 대단하여 손짓 발짓 하나하나에 구경꾼들과 마음이 그대로 통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자부선인의 역을 맡은 젊은 단군도 그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능숙한 춤 솜씨를 보였다. 안파견 한님이 호탕하고 씩씩하면서도 자상한 몸놀림이 필요하다면, 자부선인은 우아하면서도 차분하고 그러면서도 아주 정확한 몸놀림이 필요하였는데 두 사람은 너무도 훌륭한 솜씨를 보여주었다. 다른 짐승이나 신수, 삼사 역을 맡은 단군들도 정말 열심히 춤을 추어 그들을 빛나게 했다. 치우천도 이 춤을 무척 흥미 있게 지켜보았다. 치우비는 눈이 빠져라 춤추는 모습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내 저렇게 멋진 솜씨는 처음이야. 저분들은 싸움 솜씨도 정말 뛰어나겠어.” “소리냐? 춤추는 것을 보고 싸움이라니?” “싸움도 몸을 놀리는 것이고 춤도 몸을 놀리는 것인데, 저 정도로 몸놀림이 틀림없다면 싸움기술도 뛰어날 수밖에.” 치우천은 치우비가 그저 싸움밖에 모르는가 싶어 혀를 찼다. 이윽고 안파견 한님이 주신을 제우고 하늘의 웃뜸이 되시려 몸을 버리고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하라는 유언을 남긴 채 하늘로 올라가는 것으로 춤은 마무리되었다. 사람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감동하석 우레 같은 박수를 보냈다. 그러자 이번에는 다른 곡조의 가락으로 딱딱이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곧이어 구리로 만든 거울을 두드리자 맑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악기가 그리 많지 않아 타악기와 부는 피리 같은 것 위주였지만 그래도 그 규모는 대단했다. 그러자 단군들과 무녀들이 나와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신을 모시기 위해 몸을 푸는 것이었다. 그때쯤 귀족들도 하나둘씩 나와 제사를 보기 시작했다. 고시울률이나 부루위단 등의 모습이 보였다. 그런 높은 귀족들은 아예 가마에서 내리지 않고 가마를 들고 있게 한 채 제사를 구경했다. 그들의 시선이 단군들의 춤보다도 치우 형제에게 못 박힌 것 같아서 치우비 는 좀 기분이 언짢았다. “왜들 우리만 쳐다보는 거야?” 치우비가 살짝 형에게 말하자 치우천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우리가 못마땅한가 보지, 뭘. 신경 쓸 것 없다.” 그때 큰 소리로 누군가가 외쳤다. “한웅님께서 납신다!” 사람들은 모두 길을 비키고 머리를 숙였다. 다만 춤추는 단군들은 신을 모시기 때문에 한웅의 행차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다. 제사는 주로 단군들이 집전하지만, 그래도 하늘에 올릴 제물을 바치거나 하늘의 뜻을 묻는 것 등은 하늘과 직접 통할자격이 있는 한웅이 직접 해야만 그 의미가 있었다. 사와라 한웅은 흰옷을 입고 다소 힘든 듯한 표정으로 제단에 올랐다. 그 뒤로 삼사가 따르고 있었으며, 삼사 뒤에는 삼사가 키우는 제자들이, 그 맨 뒤에는 뜻밖의 사람이 따르고 있었다. 치우비가 휘둥그레 눈을 뜨고 놀라 말했다. “저거...... 맥달님 아니야?” “맥달이 한웅님과 같이?” 치우천도 의아해했다. 맥달은 선인으로 존경받고 있다니까 절대 삼사의 제자라고는 볼 수 없었다. 그런데 왜 한웅의 뒤를 따라온 것일까? 제사에 참여하고 싶으면 따로 오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왜 굳이 한웅의 뒤를, 그것도 삼사의 뒤를 맨 뒤에서 따라온 것일까? 치우비나 치우천도 그 의미를 알 수 없어 어리둥절했다. 그때 웃뜸단군이 제사의 시작을 알렸다. “하늘이시여! 하늘에 계신 안파견 한님이시여! 안파견 한님의 뒤를 이은 주신의 한웅이 하늘의 뜻을 묻습니다. 부디 저희의 뜻을 갸륵하게 여기시어 제물을 받으시고 하늘의 뜻을 일러주소서!” 솟대단군이 크게 외치자 다시 큰 장작불 옆에 수십 개의 작은 불이 붙여졌다. 일곱 마리의 황소가 한웅의 손짓 하에 순서대로 목이 잘렸으며 잘린 머리는 제사상에 바쳐졌다. 그리고 크게 타오르는 장작불에는 많은 물건들이 바쳐져 불에 태워졌다 모두가 하늘에 바치기 위함이었다. 단군들은 모두 정신을 모아 신을 부르기 위해 더 힘차게 춤을 추었고 그들의 춤이 무르익으면 안파견 한님은 그들 중 한 명에게 내리셔서 말씀을 전할 것이었다. 그것이 잘 되지 않으면 안파견 한님이 아직 마음에 들어 하시지 않는 것이니 제물을 더 올리고 더 열심히 춤을 추어야 했다. 단군들은 그렇게 되면 술을 마실 수도 있었다. 그리고 더욱 마음을 비워 신을 받들기 위해 더더욱 맹렬하게 춤을 추어야 했다. 하룻밤 내내 춤을 추다가 지쳐 죽는 자가 나을 정도로, 신을 모시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었다. 그 모습을 보던 치우천이 불안한 듯 치우비를 쳐다보았다 “비야, 저 춤추는 단군들은 왜 다들 저리 젊느냐? 우리가 전에 보던 단군들은 왜 안 나왔느냐?” 치우천은 몸이 아팠기 때문에 의원 역할을 하는 솟대단군들과는 매우 가까웠다. 그러면서 신을 모시고 춤추는 단군도 몇몇 알게 되었지만 웃뜸단군과는 말 한 번 제대로 나누지 못했다. 아무튼 지금 나온 단군들은 모두가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다. 치우천이 신시를 떠난 지 여러 해가 되었다 해도 제사에서 춤을 추는 단군은 그리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었다. “나도 모르지.” 치우비가 고개를 갸웃하자 치우천은 입술을 깨물었다. “당했다!” 춤출 단군을 고르는 것은 웃뜸단군의 일이었다. 그런 웃뜸단군이 고시울률과 매우 가깝다는 것은 치우천도 알았지만, 미처 거기까지는 신경을 쓰지 못했던 것이다. “무슨 소리야?” “저 단군들은 아무래도...... 너무 젊다. 우리가 알던 단군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저건........” 고시울률이 제사를 방해하려고 일부러 뽑은 단군들일지도 모른다고 말하려다가 치우천은 입을 다물어버렸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증거가 없는 이상 함부로 말할 수는 없었다. 이런 하늘 제사를 놓고 함부로 입을 놀렸다가는 불경스럽다 하여 그냥 목이 떨어져도 할말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치우천은 몹시 불안해졌다. ‘이럴 수가 있나? 고시울률이 아예 단군들을 바꿔버린 게 분명하다. 감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지만, 단군들이 거짓되게 한님을 모신 척하고, 나가면 좋지 않다고 한다면 이 일은 끝장이다! 이런 하늘 제사에까지 손을 쓰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치우천은 참담한 심정이 되었다. 그때 돌연 사와라 한웅이 앞으로 나서더니 입을 열었다. “오늘은 춤을 추어 한님을 모실 필요가 없느니라.” 그러자 웃뜸단군이 놀라서 물었다. “그것은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렇지 않고서 어떻게 한님을 모십니까?” “선인님의 특별한 말씀이 계셨느니라.” 그러면서 사와라 한웅이 돌아보자 한 사람이 앞으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 바로 맥달이었다. 우아한 모습으로 맥달이 나타나자 사람들은 모두 존경과 감탄의 신음소리들을 토해냈다. 맥달이 그간 몇 년 동안 얼마나 사람들의 마음을 끌게 되었는지 알 것 같았다. 맥달이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오늘 한님께옵서는 사람의 입을 빌리기보다 누구라도 알 수 있는 징조를 직접 보여주실 것입니다. 제사를 정성껏 모시면 반드시 응하실 것이니 정성을 다하소서.” 웃뜸단군의 표정이 약간 일그러졌으나 맥달의 말이라 듣지 않을 수 없는 듯했다. 그때 치우천은 재빨리 저 멀리 고시울률과 부루위단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그들은 놀란 듯, 당황한 듯 보였다. 치우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생각했다. ‘역시........’ 그래 고시울률의 가마 밑으로 누군가가 재빠르게 나타났다. 사람들 틈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들은 바로 치우가람치우바람 형제가 틀림없었다. 그들은 급히 고시울률과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치우천은 그것을 보다가 고시울률과 눈이 마주칠 뻔했다. 치우천은 얼른 고개를 돌려 맥달을 바라보았다. 맥달의 조용한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었다. “안파견 한님이 기꺼워하신다면 반드시 하늘에 조짐을 보이실 것이고 기꺼워하지 않으신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밤하늘이 밝아지고 하늘에 칼이 나타나면 안파견 한님이 기꺼워하신다는 뜻으로 아소서.” 사람들은 모두 의아해했다. ‘밤하늘이 어떻게 밝아진단 말인가? 그리고 어떻게 하늘에 칼이 나타나는가? 말도 안 되는 것 같은데?’ 치우천이 듣기에도 그것은 너무 의외의 말이었다. 아무리 하늘이 징조를 보여서 기적이 일어난다 해도 그런 기이한 일이 일어나는 것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하늘이 조짐을 보인다 해도 보통은 나뭇가지가 꺾어지거나 피어오르던 불이 꺼지거나 더 거세진다거나 하는 등 의 징조가 대부분이었던 것이다. 웃뜸단군도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물었다. “정말 한님께옵서 그런 조짐을 보이실 것이란 말이오?” 맥달은 웃으며 차분히 대답했다. “제사를 받자옵는다면 징조를 보이실 것이고 그렇지 아니하다면 보이시지 않을 것입니다.” 맥달은 이미 예언에 있어서는 절대적인 존재가 되었는지 웃뜸단군조차도 별말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며 물러섰다. 치우비와 치우천은 둘 다 반신반의하며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날까, 하늘이 정말 그런 조짐을 보일까, 걱정이 앞섰다. 그런데 맥달은 한술 더 떠서 덧붙였다. “이번 제사는 지나족을 칠 것이냐 말 것이냐 하는 일을 하늘에 묻는 것으로 아옵니다. 하늘이 칼을 보이게 하신다면 그 칼의 방향으로 알 수 있겠지요 칼이 아래를 향하면 하늘이 기꺼워하신다는 것이고 칼이 위를 향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겠지요. 전에 보이지 않은 조짐을 보이실수록 하늘의 뜻이 더 굳다는 것을 아실 수 있을 것이옵니다.” 맥달은 이미 일이 일어나기 전부터 해석까지 내리고 있었다. 사실 하늘의 조짐이 나타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풀어 해석하는 데에도 큰 문제가 있었다. 물론 하늘이 직접 말로 가르쳐 옳다, 그르다 하는 것이 아닌지라 귀에 걸면 』걸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맥달이 아예 딱 잘라 말하자 이제는 더 이상 이견을 제시할 수조차 없었다. 한켠에서 고시울률이 치우가람에게 귀엣말로 물었다 “저것이 무슨 소리인가? 하늘에 어찌 칼이 나타나는가?” 치우가람은 재빨리 대답했다. “맥달님이 말하는 칼 모양은 아마 별똥이 떨어지는 것을 말하는 듯 합니다. 그것 말고는 없겠지요. 하지만 이 일은 이미 글렀습니다. 염려 마십시오.” “어째서 그런가?” “맥달님은 칼끝이 아래를 향해야 이 일이 이루어진다 했습니다. 하지만 별똥이 떨어지더라도 별똥은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니 칼끝이 아래를 향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맥달님도 이 일에는 반대하시는 모양입니다.” 그때 옆에 있던 치우바람은 말도 하지 못하고 황홀한 듯 맥달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치우가람이 옆구리를 쿡 찔렀으니 치우바람은 정신조차 차리지 못했다. 치우가람이 다시 한 번 세게 치우바람의 옆구리를 지르며 속삭였다. “내가 아버지께 널 보살피겠다고 맹세만 하지 않았어도 넌 내 손에 죽었어. 바보 멍청이놈! 정신 못 차려?” 그때 고시울률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뜻밖이군. 맥달님은 저 녀석들 편을 들 것으로 생각했는데.....?” 치우가람 역시 나지막이 되받았다. “좀 이상하기는 합니다. 어쩌면 이런 것이 아닐까요?” “뭐 말인가?” “이번에 공상으로 싸우러 가는 것은 솔직히 말도 되지 않는 일입니다. 그래서 저 형제를 살리려고 일을 그르치게 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군. 허, 그러면 그냥 둘 것을 그랬나?” 고시울률의 말에 치우가람은 사악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속삭였다.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제가 있으니까요.” 그때 그들 뒤에서 누군가가 흠칫 놀라는 것을 아무도 보지 못했다. 그 사람은 머리에 긴 수건을 눌러쓴 여자였는데, 치우가람과 고시울률과는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 여자가 곧 사람들을 헤치고 급히 빠져나가느라 약간 소란을 피웠어도, 치우가람은 그쪽을 한 번 힐 끗 보았을 뿐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절대 이야기를 들을 수 없는 거리였기 때문이다. 맥달을 흘끔거리며 치우바람이 고시울률에게 말했다. “고시울률님, 맥달님을 반드시 우리 편으로 만들어야 하옵니다. 신시에서 맥달님의 힘은 너무도 크옵고 따르는 사람도 많사옵니다. 그러니.......” 돌연 치우가람이 다시 치우바람의 옆구리를 세게 내지르며 말했다. “그건 조심하십시오. 그 사람은 선인이라 그 어느 것에도 유혹되지 않습니다. 적이 되지 않게만 조심하시면 별일 없을 것이옵니다. 여차하면 제가 처리하겠사옵니다.” 고시울률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형제가내 앞길을 치워주니 든든하기는 하네만.......무작정 처리한다면 뒷일을 감당하기 어려워질 수도 있어.” “하지만 치워야 한다고 여겨지면 미루지 말고 치워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화를 부릅니다.” “그렇다면 자네에게 맡김세. 단, 이번 일을 잘 살펴보고 나서 말야.” 고시울률은 연신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안파견 한님은 내가 하는 짓을 다 눈감아주실 걸세. 나도 주신을 위해 이러는 것이니까......” 고시울률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치우가람 형제가 허리를 굽실거리며 대답했다. “여부가 있사옵니까?” 맥달의 말 때문에 춤추던 단군들은 조금 맥이 풀린 듯했지만 그래도 한웅과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이라 춤사위를 눈에 띄게 늦추지는 못했다. 사람들은 맥달의 말을 전해 듣고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웅성거렸다. 치우 형제도 다소 불안해하는 기색을 보였으나 맥달은 여전히 조용하고 차분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돌연 하늘을 계속 지켜보고 있던 단군 중 한 사람이 소리쳤다. “저기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하늘을 향했다. 그러고 보니 어두웠던 밤하늘이 어느새 약간씩 밝아져 가고 있었다.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소리쳤다. “하늘이 조짐을 보이신다!” “하늘을 보자!” 순간 하늘이 확 밝아졌고 사람들은 놀라서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보통 별똥은 하늘 위에서 아래로 비스듬히 내리꽂히듯 떨어지는 법이었는데, 이번만은 정말 땅에서부터 하늘로 불덩이 같은 별 하나가 솟구치고 있었다. 그것도 너무도 밝고 길게 꼬리를 끌고 있는 커다란 별이었다. 더구나 그 별이 올라감과 동시에 하늘에서 작은 별똥 하나가 엇갈리게 스치고 지나가서, 순간 하늘에는 정말 칼 같은 모양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칼끝은 맥달이 말한 대로 아래쪽을 향하고 있었다. “저...... 저건........!” 치우비도 너무 놀라고 신기하석 벌린 입을 다물 줄 몰랐다. 치우천도 역시 신기하기는 마찬가지였으나 이내 생각을 가다듬었다. ‘맥달의 말이 맞았구나. 헌데 하늘이 정말 조짐을 보이신 것인가? 아니면 맥달이 이미 이렇게 될 것을 알고 말한 것인가?’ 치우가람 바람 형제나 고시울률도 놀란 나머지 뭐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살아생전 이런 신기한 일은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사와라 한웅도 병들고 지친 몸을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으켜 세웠고 솟대단군들이나 웃뜸단군도 입을 딱 벌렸다. 더구나 일반 백성들의 경우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하늘이 조짐을 보이셨다!” “안파견 한님이 하늘에 조짐을 보이셨다!” 별이 꼬리를 끌며 사라지고 밤하늘이 다시 어두워지자 사람들은 웃으며 소리를 질러댔다. 제사에 별 관심 없어 잠들었던 사람들도 일어나 밖으로 달려 나오기까지 했다. 사와라 한웅은 오랜만에 크게 웃으며 외쳤다. “안파견 한님께서 조짐을 보이셨느니라! 이번 싸움은 주신에 크게 이로울 것이니 모두들 힘을 내라! 오늘은 마음껏 밤새 즐기고 뒤풀이를 하여도 좋다!” 하늘이 뚜렷한 조짐을 보여준 것은 아주 반갑고 길한 일이었다. 사와라 한웅의 말이 떨어지자 사람들은 모두 좋아서 환호성을 올렸다. 이럴 때는 단군들이나 구경꾼들이 한데 어울려 신명나게 노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사람들이 몰려와서 제사의 주인공인 치우 형제를 높이 둘러메고 노래를 부르며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치우천과 맥달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 맥달은 살짝 웃고만 있다가 조용히 사라졌다. 삼사도 기분이 좋아 크게 웃으며 술을 마셨고 사와라 한웅조차도 병든 몸이었지만 술 한 잔을 따라 단군들에게 술을 들라고 권했다. 음악이 떠들썩하게 울려 퍼지고 횃불과 모닥불이 곳곳에 피워졌으며, 사와라 한웅의 명령대로 한웅의 창고에 보관되었던 좋은 술과 음식이 끝없이 날라져 왔다 사람들은 모두 마음껏 먹고 마시며 노래하고 춤추며 놀았다. 다만 고시울률과 몇몇 귀족, 그리고 치우가람 형제 들만이 인상을 찌푸린 채 말없이 돌아갔을 뿐이다. 뒤풀이가 무르익어 갈 때쯤, 치우 형제의 벗들인 젊은 사울아비들이 모두 몰려와 치우천과 치우비에게 축하한다는 인사를 건넸다. 그즈음 치우천은 많은 사람들이 권한 잔을 받아 이미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부루벼락과 쇠돌이 등이 치우천과 함께 가겠노라고 제의하자 치우천은 호기있게 좋다고 말했다. 치우비는 쇠돌이와 어깨동무를 하고 저만치 가서 아예 술독을 통째로 말리고 있었다. 그때 도단이가 치우천에게 다가가 말을 건넸다. “천형, 축하하네. 이제 공상싸움에서 이기기만 하면 천형의 앞날은 탁 트인 것이야.” 치우천은 전에 없이 취한 듯 껄껄 호탕하게 웃어 보였다. 질쾌도 한마디 거들었다 “천형이 우리를 잘 이끌어주기 바라네.” “그래서 말인데......” 질쾌 옆에 있던 도단이가 조심스럽게 약간 쑥스러운 듯 덧붙였다. “나도 이번 싸움에 함께 갈수는 없겠는가? 신시에 있으니 답답하기도 하고, 이런 큰 싸움에 뭔가 도움이 되고 싶기도 한데.......” 그러자 치우천은 딱 잘라 말했다. “그건 안 되네.” 벗들에게 모두 친절했던 치우천이 뜻밖의 태도를 보이자 주위에 모여 있던 벗들 모두가 의아해하며 치우천을 쳐다보았다. 치우천이 웃으며 덧붙였다. “자넨 도움이 안 돼.” 그 말을 듣고 도단이가 무안한 듯 머쓱하게 되받았다. “그런가?” 옆에서 부루벼락이 치우천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에이, 이봐 천. 그래도 말이 좀 심하지 않은가?” 치우천은 부루벼락을 보고 은근한 목소리로 충격적인 말을 했다. “눈 훤히 뜬 사람도 위험할 싸움입니다. 눈 먼 사람 뒤치다꺼리까지 할 수는 없잖습니까? 허허.” 도단이는 순간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질쾌도 갑자기 인상을 찌푸렸다. 부루벼락이 깜짝 놀라 목소리를 높였다. “이보게, 천. 자네 취했군.” 그러자 도단이는 조용히 말했다. “그렇군. 나는 소경이라 싸움터에서 앞가림을 못할지 모의겠네. 그럼 다리병신인 자네는 어떤가?” 그러자 치우천은 술잔을 내던지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흥흥해지자 질쾌는 도단이를 끌고 뒤로 물러섰고 부루벼락은 치우천을 안다시피 하며 앞을 막아섰다. “왜들 그러나? 다들 취했구먼! 취했어!” 그때 질쾌가 으르렁거리듯 소리쳤다. “천형 자네 그리 안 봤는데, 변했군. 부족장인지 뭔지 되고 나더니 변한 건가?” 치우천이 냉랭히 눈을 돌리며 되받았다. “맘대로 생각하게. 내 아우가 곁에 없었던 걸 다행으로 여기게.” 질쾌나 부루벼락은 그 뜻을 알고 있었으나 어이가 없어 되물었다. “무슨 소린가?” “앞으로 나와 마주치지 않는 것이 좋을 걸세.” 치우천이 싸늘히 말하자 질쾌는 순간 발을 구르며 땅에 침을 두어 번 뱉고는 도단이를 끌고 사람들 사이로 사라져버렸다.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부루벼락이 치우천에게 속삭였다. “이봐 이봐, 천. 자네 왜 그래? 정말 취했군, 취했어!” 치우천은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난 취하지 않았습니다. 전혀요.” 다음날이 되자 치우천은 술에서 깨어났다. 치우천이 간밤에 한 말을 이미 치우비도 알고 있었기에, 치우비는 눈을 뜨자마자 치우천을 나무랐다. “천, 어제 정말 이상했어. 도단이에게 어떻게 그럴 수 있지? 형 같지가 않았다구. 형이 잘못한 거야.” 치우천이 웃으며 태연스레 물었다. “정말 그렇게 보였느냐?” “당연하지! 형, 그러면 안 돼! 나 아주 실망했다구!” 치우비가 벌컥 성을 내자 치우천은 선선히 웃으며 말했다. “그래, 미안하구나. 그러면 도단이에게 내 사과하마. 네가 말 좀 전해줄 수 있겠느냐? 내가 가기는 좀 그렇구나.” 사람 좋은 치우비는 형이 사과한다는 말에 금세 화를 누그러뜨리며 흔쾌하게 대답했다. “그럼! 역시 어젠 취한 거구나. 내, 금방 다녀올게.” 치우비가 나가자 치우천은 치우비의 뒷모습을 보며 소리 없이 웃었다. 그러나 치우비가 도단이를 찾아갔지만 도단이는 치우비를 만나주지 않았다. 그냥 종을 시켜서 만날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몇 번을 더 간곡히 사과하러 왔노라고 청했지만 너무도 성의 없는 대답만 돌아오자 치우비는 속이 뒤틀렸다. ‘이런, 도단이도 속 좁은 놈이었구나!’ 결국 치우비는 부아가 치밀어 도단이의 집 밖에서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댔다. 근처 사는 사람들이 싸움이 났나 하고 구경나올 정도였다. 그래도 도단이는 끝끝내 나와 보지 않았다. 치우비는 욕을 퍼붓고 돌아와 버렸다. 씨근거리며 치우비는 형에게 말했다. “형, 이제 보니 도단이도 많이 변했더구먼. 내가 그렇게 간곡히 말해도 코빼기도 안 비치다니, 그럴 수가 있어?” 치우천은 자못 한숨을 지어 보였다. “할 수 없지 어쩌겠느냐?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치우 형제와 도단이가 다투었다는 소문은 신시에 확 퍼진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알 만한 사람은 알 정도로 퍼져 나갔다. 그러나 치우형제는 그날부터 싸움 준비를 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서 그 일에 신경을 쓸 시간조차 없었다. 그날 밤, 도단이와 질쾌는 누가 볼세라 조용히 어둠에 숨어 누군가의 집을 향하고 있었다. 그 집은 신시 동쪽에 있는 큰 집이었다. 바로 치우웃뜸인 치우괄괄의 집, 다시 말해 치우가람과 치우바람의 집이었다. 문 앞에서 두 사람은 조용히 사람을 불렀다. 지키는 종이 나타나 자 도단이와 질쾌는 자신들의 이름을 대며, 치우가람, 치우바람을 만나러 왔다고 말했다. 종은 안으로 들어가더니 한참이나 시간을 끈 뒤에 나와서 따라오라고 전했다. 도단이와 질쾌가 종의 안내를 받아 치우가람, 치우바람 형제의 처소를 찾아갔을 때, 그 안에서는 여자의 울음소리와 낄낄대는 술 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질쾌의 미간이 꿈틀거렸으나 도단이는 마치 그 장면을 환하게 보는 것처럼 질쾌에게 고개를 저어 보이고는 안으로 넉살좋게 들어섰다. “오랜만이구려?” 안에 들어서는 순간, 질쾌는 눈살을 찌푸렸다. 술을 마시는 것은 그렇다 쳐도, 그 방안에는 다른 부족으로 보이는 여자들이 옷도 제대로 걸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 여자들이 울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필경 서로가 눈이 맞아 자기 발로 온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치우바람과 치우가람은 도단이와 질쾌가 들어오자 취한 듯한 눈을 조금 치떴다 “너희가 웬일이냐? 난데없이 우릴 다 찾아오고.” 그 말을 도단이가 되받았다. “찾아오면 안 되는 거요?” “올 사람이 아닌데 왔으니까 그렇지.” 그러자 질쾌가 짐짓 굽실거리며 나섰다. “저희가 방해가 되었나요? 아이쿠, 그럼 죄송합니다. 나중에 다시 옵죠.” “이 자식들이! 너희가 좋으면 오고 아니면 나가고! 너희 맘대로냐?” “나가려면 기어서 나가! 개 같은 것들아!” 치우바람과 치우가람이 욕을 퍼붓자 질쾌는 화가 났으나 전혀 내색하지 않고 오히려 간사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넌지시 말했다. “전에 보니 치우천 치우비 그것들하고 뭔가 잘 안 맞으시는 것 같던데...... 내 얘기가 필요 없으시다면 우린 가겠수.” 순간 치우가람이 바람에게 슬쩍 눈짓을 하자 치우바람이 불러 세웠다. “잠깐!” 질쾌와 도단이가 멈추어 서자 치우바람이 물었다. “너희, 그게 무슨 소리냐? 치우천 녀석들 이야기는 왜 해?” “그냥 해본 거요” 그 두 사람을 보며 치우가람이 냉랭하게 말했다. “흥! 너희는 그놈들 편 아니었나? 무슨 바람이 불어서 나한테 온 거냐?” “못 믿겠으면 관두시오.” 치우바람은 흥, 코웃음을 치며 비아냥거렸다. “그럼 관둬라, 자식들아! 어디서 개수작이야,l 뭔 꿍꿍이가 있는 거냐?” 그러면서 치우바람은 느닷없이 질쾌의 발을 걸어 넘어뜨렸다. 도단이를 부축하고 있던 질쾌가 넘어지자 도단이 역시 넘어지고 말았다. 질쾌는 넘어지면서 꽥 소리를 질렀다. “이런 젠장 할! 난데없이 사람은 왜 쳐? 난 이래봬도 한웅님을 모시는 단군이란 말이다! 네 놈들도 천이나 비 놈들처럼 똑같은 치우 씨구나! 내 서러워서!” 질쾌 말엔 관심 없다는 듯이 치우바람은 코웃음을 쳤다. “무슨 꿍꿍이인지 말해봐. 왜 여길 기웃거리는 거지? 너희, 희네 그 자식이 보냈지? 너희는 못 나가, 바른대로 털어놓지 않으면 여기서 죽을 줄 알야.”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도단이가 소리쳤다. “뭐? 희네라면 그 치우천 말이냐? 너희야말로 그놈하고 한패지? 젠장, 질쾌 이 바보야! 같은 치우 씨라고 내 못 믿는다 했지? 좋아 여기서 죽여라! 난 소경이라 싸울 수도 없으니 원통하구나!” 도단이가 희게 뒤집힌 눈에 줄줄 눈물까지 흘리자 치우바람은 어안이 벙벙하여 치우가람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치우가람이 물었다. “너횐 태산 회의 때부터 희네 형제하고 죽이 맞아 시합에도 같이 나갔던 그놈들 편 아니냐? 내가 너희 놈들을 어떻게 믿어?” 도단이는 여전히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되받았다. “흥! 너희야말로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뺀다고, 난데없이 나타난 놈들이 오랫동안 고생한 우리 친구들을 밀어내고 급기야 대용사 자리까지 처먹었는데 벗으로서 분하지도 않느냔 말이다! 다른 녀석들은 몰라도 우린 겉으로만 그냥 할 수 없이 그랬지, 속으로 좋게 생각하진 않았어. 더구나......” 있을 법한 일이라 치우바람은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치우가람은 잠시 말을 멈춘 도단이를 보며 채근했다. “더구나 뭐?” “더구나 그놈들은 이제 변했어. 무슨 부족장이니 뭐니 하고 한웅님한테 철썩 붙어서 큰 싸움까지 맡게 되었잖느냔 말이다. 이제 높으신 몸이 되니 전에 알았던 사람들을 걸레짝처럼 내팽개치는 판인데, 분하지 않느냔 말야!” 그때 도단이와 질쾌를 데려왔던 종이 치우가람과 바람에게 작은 소리로 귓속말을 한다. 치우가람은 몇 번이나 틀림없느냐고 묻는 듯 했고 종은 계속 틀림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치우가람이 물었다 “그래서 우리에게 바라는 게 뭐냐?” 도단이는 부드득 이를 갈며 대답했다. “너희가 보다시피 난 날 적부터 소경이라 속으로 항상 피눈물을 흘리며 살았다. 그것을 싸잡아 놀린 놈은...... 결코 용서할 수 없어. 나는 바라는 것 없다. 다만 내 분한 것을 풀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하고 싶은 거다.” 그 말에 이어 질쾌도 한마디 거들었다. “나도 마찬가지다. 난 너희 같은 사울아비들이 싫다. 세상이 다 자기들 것인 양 알고, 우리 같은 단군 박수는 발치에 긴 때만도 안 보잖느냐. 우리는 귀족도 아니고, 사울아비들이 제일 센 세상이니 뭐를 더 어쩌겠느냐? 분하다! 분해!” 두 사람의 말에 치우가람은 안색을 바꾸어 음험하게 웃으며 질쾌와 도단이를 일으켜 주었다. 그리고 울고 있는 여자들에게 외쳤다. “너희, 재수 좋구나. 썩 꺼져!” 여자들이 사라지자 치우가람은 손수 술을 따라 질쾌와 도단이에게 건네주었다. “내 몰라 뵈었군. 나쁘게 생각 마시게” “뺨치고 얼르고, 이게 뭐여?” 질쾌가 일부러 씨근거리자 치우바람이 허허 웃었다. “그 희네인지 치우천인지 하는 놈이 여간 여우같은 놈이 아니라서 우리도 조심해야 하거든.” 치우가람 역시 웃으며 끼어들었다. “그러니 말해보시지. 분명히 말하는데, 난 아직 자네들을 믿지 않아. 말이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살아 나갈 생각일랑 하지 않는 게 좋을 걸?” 그러면서 치우가람은 슬쩍 옷깃을 제쳤는데, 거기에는 번들번들한 구리 가시가 돋힌 채찍이 둘둘 말려 있었다. 도단이는 봉사라 보지 못했으나 질쾌는 그것을 보고, 과연 무서운 녀석들이라는 생각에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짐짓 어깨를 으쓱하며 치우가람이 한마디 더 했다. “두 사람 다 돌 던지기로 아주 솜씨가 좋으시다더군. 허나 막사 안에선 내 손가락 하나 못 당할걸.” 질쾌나 도단이는 돌 던지는 솜씨가 대단하다지만 이렇게 처소 안이라면 칼이나 채찍 같은 무기를 결코 당해낼 수가 없다. 더구나 치우가람은 절대 보기와는 달리 결코 만만한 녀석이 아니었다. 두 사람의 표정을 살피며 치우바람이 나섰다. “우린 항상 개망나니지. 그래야 우릴 개망나니로 보고 정말 개들이 우습게 보고 붙거든.” “그러면 간단히 잡아먹지. 뼈도 안 남겨. 우린 그런 사람들이야. 알겠어? 그러니 똑똑히 말해.” 도단이와 질쾌의 표정이 일순 진지해졌다. 도단이가 갑자기 엄숙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다행이군.” “뭐가 다행인가?” “정말로 그냥 개망나니였다면 우리가 죽여 없앴을 거다. 우리 이야기가 새나가면 안 되니까.” 도단이가 차갑게 웃으며 손을 펼쳐 보이자 도단이의 손가락 사이에 끼어 있는 네 개의 작은 돌멩이가 보였다. 그런데 그 돌멩이는 무엇을 묻혔는지 보통 것과 달리 푸른빛이 기분 나쁘게 빛나고 있었다. 질쾌도 히죽거리고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만든 독을 바른 돌멩이다. 우리는 이미 다른 약을 써서 독이 듣지 않지만 다른 이는 스치기만 하면 살이 썩어 들어간다.” “너희야말로 비밀을 지킬 자신이 있느냐? 우리와 힘을 합치겠느냐? 그렇지 않으면 차라리 같이 죽자.” 마지막 도단이의 말에 치우바람과 치우가람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도리어 치우가람의 얼굴에 흡족한 듯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치우가람이 물었다. “너는 무엇을 줄 수 있나? 그리고 뭘 바라나?” “네가 정말 줄 수 있나?” “네가 정말로 주면, 나도 준다.” 도단이가 조용히 말했다. “난 우사가 되고 싶다. 그리고 여기 질쾌는 솟대의 웃뜸단군이 되기를 원한다.” 박수인 도단이로서 올라갈 수 있는 최고의 직위는 우사였고, 단군인 질쾌는 웃뜸단군이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직위였다. 원래 치우가람 정도에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치우가람과 치우바람은 태연했다. “너희.......진짜 같군.” “줄 수 있나?” 그러자 치우가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가 주는 게 그만하다면.” “우리가 줄 것은 작은 것과 큰 것이 있다.” “작은 것부터 말해봐.” “그것에도 간을 치러야지.” 이번엔 치우바람이 되받았다. “작은 것의 값은 너희 목숨이다. 살려 보내주마.” “태산 회의 시합의 영웅 치우천 치우비의 값이 그 정도밖에 안 되느냐?” “너희에겐 너희 목숨이 더 비싸지. 그리고 우사와 웃뜸단군은 그놈들보다 비싸.” 치우가람의 말에 치우바람이 킥킥 웃었다. “그리고 그놈들은 이제 똥값이거든.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으니까.” 치우바람이 으스대듯 말하자 치우가람이 그의 어깨를 툭 쳤다. “바람아, 그래도 들어두자. 좋다. 조개껍질 다섯 꾸러미와 돌소금 말을 얹어주마.” 조개껍질 한 꾸러미면 좋은 말이 두 필이었고 돌소금도 생활에 꼭 필요한 귀한 것이라 이만큼의 재물도 대단한 것이었다. 그때 질쾌가 침을 꿀꺽 삼키자, 그 소리가 자못 긴장되었던 분위기를 가볍게 깨뜨렸다. 치우바람이 웃으며 말했다. “젊고 용한 단군께서도 욕심은 있으시군.” 질쾌는 조금 무안한 듯 얼굴을 붉히며 되받았다. “누구는 밥 안 먹고 사나?” 마침내 치우가람이 껄껄 웃음을 터뜨렸고 한결 누그러진 태도로 품에 있던 가시 돋힌 구리 채찍을 꺼내 구석에 던져버렸다. 그러자 도단이도 그 소리를 듣고 웃으며 돌멩이를 품안에 집어넣었다. 치우가람은 그것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눈뜬 이보다 더 눈이 밝으시군.” 도단이가 웃으며 대꾸했다. “눈 대신 귀로 살아왔으니까.” “좌우간 이야기나 들려주게. 이야기가 가치 있는 것이면, 내 반드시 자네들 바라는 것을 이루게 해줌세.” “자네들이 그럴 힘이 있는가?” 치우바람은 웃으며 호기 있게 말했다. “우리는 그저 겉보기에는 하늘군대의 큰스승 정도지. 그러나 실제로는 삼사도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다. 다만 티내지 않는 것뿐이다.” 그러자 도단이가 심각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번에 치우 형제가 공상을 쳐 빼앗는 데 성공한다면, 아주 일이 잘못될 것이다. 그릴지 않으냐? 더구나 한웅님도 그놈들을 밀어주고 계시지 않으냐?” “그건 그렇지. 그러나 공상을 뺏는 것이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닐 텐데?” “나는 그놈들이 어떻게 할지 대강 안다. 그렇게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놈들은 무서운 놈들이야. 어쩌면 공상을 정말 빼앗을지도 모른다.” 치우가람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다는 거냐? 고작 삼천 명의 사울아비로 뭘 어쩐다는 거지?” “삼천 사울아비뿐이 아니다. 그놈은 작은 주신의 부족장이기도 하다.” “그래봐야 전사도 몇 안 되는 조그마한 부족 아닌가? 그것도 멀리 떨어져 있는.” 치우가람의 말에 도단이는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그 작은 부족의 몇 안 되는 전사가 신수를 잡은 것을 아는가?” 치우가람과 바람은 깜짝 놀랐다. “신수를? 그게 정말이냐?” “그렇다. 그리고 작은 주신의 전사 오백이 지난번 싸움에서 유망의 지나 전사 오천과 싸워 이긴 것을 아는가?” “그건 들어서 알고 있지만......” “한 번만 이긴 것이 아니다. 될 새 없이 싸워서 한 달 사이에 다섯 번 그러니까 스물다섯 천의 지나 전사들을 죽여 없앴다. 나는 그것을 같이 싸웠던 사울아비들에게서 직접 들었다.” 치우가람과 치우바람의 안색이 굳어졌다. 믿어지지 않는다는 눈치였다. 이윽고 치우바람이 외쳤다. “믿을 수가 없다! 그놈들은 괴물이냐?” “신수도 이긴 놈들이다. 괴물보다 더하다. 그 작은 주신에 어떤 놈들이 모여 있는지 아느냐?” 치우가람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자 이번에는 질쾌가 나섰다. “괴물 같은 치우비 놈은 물론이고 태산 회의 때 두 번째를 차지한 몽골의 치베, 개명수를 부리는 카린의 무라, 몽둥이 시합에서 금천에게 아깝게 진 투르크의 알한, 같은 시합에서 세 번째를 한 키탄의 야율쿠리, 벌 떼를 부리는 미아우의 초초룬이 다 거기 있다. 타타르족의 유명한 용사들도 잔뜩 모여 있고 부족장도 여럿 거느리고 있다고 들었다. 놈들은 타타르의 도깨비 왕도 데리고 있으며, 도깨비 군대까지 거느리고 있다 들었다. 그러니 신수도 이길 수 있는 것이지......” 야율쿠리나 초초룬은 그들과 함께 지내는 것은 아니었지만 질쾌는 그렇게 말했다. 치우가람은 느닷없이 바닥을 주먹으로 쾅 쳤다. 치우바람도 화를 버럭 내며 소리쳤다. “그 작은 주신은 괴물들만 모인 곳이냐? 뭐? 타타르의 도깨비 왕? 그게 정말이냐?” “정말이다.” 치우바람은 기가 막힌 듯 고개를 마구 저었다. “타타르의 도깨비 왕은 타타르나 몽골 전체를 벌벌 떨게 만드는 괴물인데, 그런 놈까지 데리고 있다고? 도대체 믿을 수가 없다!” 그때 치우가람이 흥분을 가라앉히고 냉랭하게 말했다. “그게 문제가 아니다. 치우천 놈은 공상 싸움에서 이기면 그놈들을 전부 주신 사람으로 받아들여달라고 한웅님께 말했다. 그게 더 큰 문제다.” “뭐? 그 괴물 같은 놈들을?” “괴물이라기보다는 힘센 놈들이 많긴 하다. 그런 놈들을 전부 주신으로 끌고 오겠다는 말은 뭐냐? 그놈들이 주신으로 다 들어오면 누구도 치우천 놈을 함부로 건드릴 수 없을 것이다. 그놈은 그 거지 떼 같고 쓰레기 같은 야만족들의 힘을 업고 주신을 휘둘러보겠다는 거다. 이거 큰일이다 그놈의 뜻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컸구나.” 치우가람과 치우바람이 낭패한 표정을 짓는 것 같아 도단이는 흡족한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그 정도 되는 놈이니 그런 황당한 소리를 한 것이다. 그러니 내 도움이 필요할 것이고” “네가 무슨 도움을 줄 수 있단 거지?” 치우가람이 대들듯 외치자 도단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치우천 놈은 주신에서 자기편을 들 놈들을 이번 싸움에 많이 데리고 가기로 했다. 그런데 너도 알다시피 나와는 말이 통하는 벗들이 좀 있지. 치우천 녀석과도 친하다만 나와도 멀지 않으니, 나에게 말을 숨기지는 않는다. 나는 이미 그놈들이 어떻게 움직일지 알고 있다.” 순간 치우가람의 눈이 빛났다. “그럼 말해라. 그것만 알면, 놈이 공상에 가기도 전에 뼈를 묻게 만들어줄 수 있지.” 도단이는 뜨지 못하는 눈을 한 번 찡긋거리며 물었다. “몰래 다른 사울아비들을 보낼 거냐?” “그러지 않고도 방법이 있다.” “유망과도 말이 통하느냐?” 도단이가 묻자 치우가람이 대답하지 않고 치우바람이 대신 말했다. “우리는 누구와도 다 통할 수 있다. 그러니 삼사도 사실 우리 손바닥 위에 있는 것이지.” 도단이는 무심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치우가람과 치우바람은 눈을 빛내며 그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이야기가 끝나자, 치우가람과 치우바람은 한숨을 내쉬었다. 치우바람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런 게 정말 될 리가 없어. 어떻게 그렇게 말처럼 쉽게.......” 고개를 젓는 치우바람을 날카롭게 쏘아보며 치우가람이 큰 소리로 나무랐다. “닥쳐. 정말 그럴 법하다. 치우천 그놈은 괴물이다. 정말 괴물이야.” “이제 할말은 다했다. 약속은 지킬 줄로 믿겠다.” 도단이가 조용히 말하자 치우가람은 돌연 히죽히죽 웃었다. “아직은 안 되지.” “무슨 소리냐? 이것이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란 말이냐?” “아주 중요한 이야기다. 하지만 우사 자리와 웃뜸단군은 이 정도 이야기 하나보다는 비싸다.” “뭘 바라는 거냐? 너희에게 이보다 중요한 이야기가 어디 있다는 거냐?” “이야기는 좋다만, 너희가 우리 편이라는 보장이 있어야지. 너희가 한 가지 일을 해주어야 우리가 정말 너희를 믿을 수 있겠다. 할 수 있겠느냐?” “무슨 일 말이냐? 우리가 싫다면?” 치우가람은 눈을 빛냈다. “그러면 너흰 죽는다. 내가 셋을 세기도 전에.” 질쾌가 발끈하려는 것을 도단이가 제지하며 물었다. “무엇을 바라는 거냐?” “한 사람을 없애주었으면 한다.” “누구를 없애달라는 거지? 우린 그럴 힘이 없다. 돌 던지기 밖에는 재주가 없지 않는가?” 어느새 도단이의 등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치우가람이 느물거리며 말했다. “우리는 그 사람에게 다가가기 어렵지만 너희는 쉽게 갈 수 있을 것이다. 가는 것이 어렵지, 해치우는 것은 아주 쉬울 것이다. 어린아이만큼 쉬울 것이다.” “그게 대체 누구냐?” 질쾌가 불끈거리며 묻자 치우가람이 조용히 대꾸했다. “요즘 신시에 들어와 설치고 다니는 여자가 한 명 있지 않으냐? 선인이라고 사람들이 떠받드는 그 여우 말이다. 그 계집을 없애주어야겠다.” 순간 도단이와 질쾌는 깜짝 놀라 동시에 외쳤다. “맥달님을....... 말인가? 그건 어째서?” 그러자 치우바람이 갑자기 눈물이 글썽글썽한 눈으로 형을 쳐다보며 더듬거렸다. “형...... 허나 맥달님은....... 그녀는.......” 대뜸 치우가람이 빽 악을 썼다. “머저리 같은 녀석! 바로 너, 머저리 때문에 그 계집을 없애주는 거다! 고맙다는 소리는 못할망정, 계집에게 눈이 삐어서는.......!” 치우가람은 화난 눈을 도단이에게 돌리며 외쳤다. “알아들었지? 그 계집을 죽여서 너희가 딴마음이 없다는 것을 보여라. 너희는 단군, 박수이니, 그 계집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것은 쉽지 않은가?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소리 소문 없이 죽어 없어질 것이다. 그 계집만 없애면, 다음 우사와 웃뜸단군 자리는 너희 것이다. 알아서들 해라!” 치우가람은 소리치고는 자리를 박차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치우바람도 눈물을 주룩 흘리면서 형을 부르면서 밖으로 나가버렸다. 도단이와 질쾌는 이 뜻밖의 일에 멍하니 서로의 얼굴을 바라볼 뿐이었다. 아무래도 잘못 걸린 것 같았다. 맥달의 죽음 하늘에 올린 제사의 성공으로 이제 치우천의 공상 출병은 기정사실화되었다. 사와라 한웅은 다음날 주신의 귀족들과 삼사, 높은 직위의 사울아비들을 모두 모이게 하여 공상으로 출병하러 갈 삼천 명의 사울아비를 뽑도록 했다. 고시울률이나 부루위단 등의 안색은 좋지 않았지만 이미 하늘의 뜻이 전해진 다음이라 별다른 토를 달지는 못했다. 다만 고시울률은 조심스레 삼천 명의 사울아비를 빼내는 것은 큰 일이며 공상 출병도 만만한 일은 아니니 신중히 가려 뽑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치우천이나 치우비는 삼천 명의 사울아비를 직접 뽑고 싶다고 말했지만 고시울률은 간단히 그들의 의견을 묵살했다. “자네들은 이제 신시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잖은가? 사울아비들을 뽑는 일은 신시에 있던 사람들이 더 잘할 것이네. 그저 자네들은 잘 싸워주기나 하게. 자네들 책임이 아주 크니까.” 고시울률의 말은 타당성이 있었기에 누구도 그에 대해 이견을 제시하지 못했다. 그 외에는 한없이 무료한 의식적인 일만이 남아 있었다. 누구를 만나고 누구에게 설명을 듣고, 잔소리를 듣고 충고를 듣고...... 하루종일 한웅의 집에서 시달린 치우비는 밖으로 나서면서 몸서리를 쳤다. “어이구, 이거 참 힘드네. 뭐가 그리 복잡한 거야? 싸우는 것보다 더 힘드네.” 다시 한 번 진저리를 치는 치우비를 쳐다보며 치우천이 웃었다. “주신에서 한웅님이 제일 힘드시다. 사와라 한웅님은 늙고 병드셨지만 그래도 좋은 한웅이시다.” 치우비는 돌연 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그런데 고시울률님 말을 어떻게 생각해?” “뭐 말이냐?” “고시울률님이 사울아비들을 뽑으면 분명히 그 안에 사람들을 많이 심어놓을 것 같아. 그래서 우리를 감시하려 들지도 모르잖아.” 치우천이 맑은 소리로 하하 웃었다. “너도 이제는 제법 머리가 돌아가는구나. 허나 그것뿐일까?” “그럼 뭐?” “내 말이 맞는지 틀리는지 두고 보아라. 내 보기엔 싸우지 못할 사람들만 뽑아 보낼 것이다.” “뭐? 사울아비가 왜 싸우지 못한단 말야?” “싸우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싸울 마음이 없거나, 아예 지려고 작정한 사람들만 보낼지도 모른단 말이다.” 치우비는 믿어지지 않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건 말도 안 돼.고시울률님이 아무리 그래도 주신을 지게 만든다고까지는....... 더구나 싸움이란 게 그렇지 않잖아. 한창 싸우는 데 힘을 다하지 않으면 자기가 죽는 판인데 싸우지 않을 리 없잖아?” 치우천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싸우기 전에 도망가 버리면 싸우다 죽지 않아도 되겠지.” “하지만 사울아비들인데.......” “염려 말거라, 비야. 다 생각했던 대로란다. 어차피 나는 그 삼천 명으로 싸우자는 것이 아니란다.” “그럼 작은 주신의 이천 명 전사로 싸운다는 거야? 너무 적잖아?” 치우천은 주위를 한 번 둘러본 다음 잔뜩 목소리를 낮췄다. “공상같이 큰 성을 공격하려면 이천이든 오천이든 상대가 안 되는 건 마찬가지다. 그렇게 싸우는 게 아니지.” “난 잘 모르겠어.” “비야, 자세한 건 공상에 가서 말해주마 그나저나 올 때가 되었는데.......” “누가?” 치우비가 의아한 듯 묻는데 때마침 저만치에서 알한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무슨 일입니까, 알한님?” 치우천이 묻자 알한은 숨을 몰아쉬며 입을 열었다. “다행히 만났군요. 누가 찾아왔습니다.” “누가 말입니까?” “미아우 사람인데 치우천님, 치우비님을 잘 안다고 하더군요.” “미아우 사람? 그럼 초초룬이나 툰툰입니까?” “아뇨, 아주 젊은 남자입니다.” 치우천과 치우비는 누가 찾아왔는지 감이 잘 잡히지 않아 알한과 함께 급히 집으로 돌아갔다. 돌아가 보니 얼굴이 앳되고 아주 귀엽게 생긴 소년 한 명이 서 있었다. 그 소년은 두 사람을 보고 퍽 반가워했지만 막상 두 사람은 그를 어디서 본 것 같기는 한데 누구인지 전혀 기억할 수가 없었다. 소년이 웃으며 작은 구리 단검 하나를 꺼내 보였다. “기억 안 나세요?” 그러자 치우비는 이마를 탁 치며 외쳤다. “그렇구나! 너, 유쌍이구나! 툰툰의 막내 유쌍 맞지? 많이 컸구나!” 그는 바로 몇 년 전 태산 회의에 가던 길에 툰툰의 집에서 만난 툰툰의 막내, 유쌍이었던 것이다. 그때는 아주 어린아이 같았는데, 어느 새 유쌍은 부쩍 자라 아이티를 벗어가고 있었다. 다만 곱게 자라서 그런지 아직도 행동이나 웃는 모습이 아이처럼 퍽 귀여웠다. 유쌍은 귀엽게 씽긋 웃으며 말했다. “제가 뭘요, 나래님. 아니, 치우비님에 비하면 조그만 아이 같네요.” 치우비는 껄껄 웃으며 스스럼없이 장난삼아 유쌍의 머리를 마구 흐트러뜨렸다. 치우천도 오랜만에 반가운 사람을 만나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냐? 전에 비가 신시로 찾아오라 하여 찾아온 것이냐?” “그것도 있지만, 큰일을 알려 드리려구요.” “무슨 일이냐?” “아버님이 꼭 전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천님, 비님의 벗들이 몹시 위험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누가 위험하다는 거냐?” 치우비와 치우천이 동시에 묻자 유쌍은 즉시 대답했다. “야율쿠리님과 초초룬님입니다. 두 분 다 큰일 났습니다.” “대체 무슨 일인데 그러느냐? 말해보아라.” 치우천과 치우비가 안색이 변하여 묻는 사이 무라와 울라트가 치우천과 치우비의 처소로 왔다. 울라트는 안 그래도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다. 신시까지 왔는데도 두 오라버니는 여기저기 불려 다니느라 바빠서 울라트에게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무라는 사람들을 꺼리는 성격인데다 외모가 특이하여 눈길을 끄는 것이 싫어 아예 밖으로 나가지 않았고 알한도 투르크족이라 용모가 좀 다르다는 것을 알았기에 참을성 있게 집에서만 있었던 것이다. 활달한 울라트는 단짝이던 도깨비들도 없고 아무도 자신과 놀아주지 않자 답답해서 폭발할 것 같았는데 마침 이런 소식을 듣고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어떤 놈이 야율쿠리님하고 초초룬 언니를 그렇게 했담? 어서 말해 봐요!” “그럼 이야기합니다.” 야율쿠리는 좀 거칠기는 했지만 영리하고 힘이 세어 태산회의 이후 키탄족에서 으뜸가는 젊은이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야율쿠리는 서자여서 형들의 질시를 받고 있었다. 한 번 치우천에게 하소연한 적이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초초룬 역시 비록 여자였지만 태산 회의 때 이름이 알려졌는지라 오빠들에게 질시를 받았다 그런데 초초군의 부모는 남자 같고 거친 초초룬이 거추장스럽고 형제간에 알력이 벌어지는 것이 싫어서 초초룬을 얼른 시집보내려고 마음먹었다. 거기까지는 치우천 치우비도 대강은 알고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세세하게 말하지 말고 요점만 얼른 말해봐.” 치우비가 채근하자 유창이 고개를 저었다. “저도 마음이 급하지만 이건 중요한 일이라 들었습니다. 중요한 일이니 차분하게 다 말해야 옳지요.” 치우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말이 맞다. 비야, 잘 듣기나 해라.” 유창은 다시 조리 있게 차분히 설명했다. 그런데 초초룬은 마음에 드는 남자가 없다고 성질을 부리고, 미아우 남자들은 유명한 여걸 초초룬을 몹시 두려워하는지라 초초룬은 마땅한 남편감을 구할 수 없었다. 그래서 초초룬의 부모는 나이만 늘어가는 딸을 위해서, 생각다 못해 부족을 달리하여 키탄족에게까지 청혼을 넣었다. 그 이유인즉슨 태산 회의 때 초초룬이 야율쿠리와 친했다하니 혹여 일이 이뤄지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에서였다. 그것이 키탄족의 사정과도 대강 맞아 떨어졌다. 그 무렵, 야율쿠리를 그나마 귀여워하던 키탄 울크리 부족장이 아파 누워서 큰아들인 야율판이 부족의 일을 맡았는데, 야율판은 소심한 성격이라 힘센 아우를 얼른 치워버리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야율판은 야율쿠리에게 알리지도 않고, 아예 야율쿠리를 미아우의 데릴사위로 보내 버리겠다고 말한 것이다. 치우비는 기가 막히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여 껄껄 웃었다. “두 사람은 원래 엮일 팔자였군, 그래! 그래서 어떻게 되었지? 뭐가 위험하다는 거야?” 유쌍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렇게 일이 되었으면 위험하다 할 까닭이 없지요 더 들으세요.” 유쌍은 퍽 말재주가 좋았다 비록 무기는 잘 쓰지 못할 듯한 몸이었지만 말재주 하나는 실로 그럴듯해서,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마치 자신이 직접 본 일처럼 사건들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키탄과 미아우의 혼사는 당사자들은 까맣게 모르는 채 척척 진행되어 아주 소상한 것까지 다 결정되어 버렸다. 그런데 언제까지 당사자들을 모르게 할 수는 없는 법이라, 양측의 부모는 은근히 자기 자식들에게 물었다. 야율쿠리의 몸 아픈 아버지는 초초룬이 어떤 아가씨냐고 묻고, 초초룬의 부모는 야율쿠리가 어떤 남자냐고 물어본 것이다. 두 사람은 만나면 아옹다옹하지만 속으로는 친한 벗 사이라 당연히 입에 침이 마르도록 훌륭한 사람들이라고 칭찬을 늘어놓았고 양측의 부모는 이제 다 된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소동은 그때부터였다. 야율쿠리는 자기가 결혼한다는 것, 그것도 초초룬에게 데릴사위로 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처음에는 농담 말라며 믿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그게 사실이라는 것을 알자 불같이 화를 내며 길길이 날뛰었다고 한다. ‘초초룬은 좋은 여자지만 그건 벗일 때 이야기다. 나는 그런 우락부락한 여자와 살고 싶지는 않다!’ 그것은 초초룬도 마찬가지였다. ‘야율쿠리는 영웅이지만 싸움판에서의 이야기다. 그 녀석은 싸움밖에 모르는 놈이니 좋은 전사이기는 해도 좋은 남편은 죽어도 못된다. 그런 놈과 사느니 차라리 죽어버리는 것이 낫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터졌다. 야율쿠리의 울크리 부족이나 초초룬의 미아우족은 모두 큰 부족으로, 부족장들끼리 한 약속을 함부로 어길 수 없는 처지였다. 더구나 두 사람이 결혼하기 싫어서 해댄 이야기들이 눈덩이처럼 보태져서 서로 상대방의 귀에 들어갔다. 상대방의 험담을 듣고 두 사람은 다시 길길이 날뛰었다. 야율쿠리는 당장 초초룬을 때려죽인다고 달려 나가려다가 말리는 종 두 명을 반쯤 죽일 정도로 두들겨 패기까지 했고, 초초룬은 야율쿠리를 독살해버린다고 날뛰어서 아무도 접근조차 하지 못했다. 치우비는 우습기도 하고 놀라기도 해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원 참, 그렇다고 둘이 서로 죽인다고 날뛸 건 또 뭐야? 정말 둘이 싸울 건가?” 그러자 평소에는 말 한마디 없던 무라가 불쑥 입을 열었다.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두 사람은 쑥스러워 그러는 것뿐이죠. 사실 두 사람은 혼인하면 더 괴로워질 겁니다. 그냥 벗으로 지내면 죽을 때까지 변치 않을 것입니다만.......” 치우천과 치우비, 알한과 울라트는 놀라서 무라를 바라보았다. 무라가 이렇게 말을 많이 한 일도 드물거니와, 말투가 딱딱하지 않고 퍽 감상적인 것 같아 신기해서였다. 그러나 무라는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려 있다는 것도 눈치 채지 못하고 계속 덧붙였다. “남자와 여자 사이라고 하여 꼭 혼인을 하여야만 된다는 법은 없습니다. 좋은 벗으로 지내는 것이 더 좋을 수도 있지요 저는 그렇게 생각.......” 무라는 말을 하다가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고는 금세 입을 다물고 다시 돌 같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치우비는 그 순간 뭔가 마음에 찡하는 것을 느꼈다. 무라의 마음을 무심코 들여다본 것 같아서였다. 잇달아 그것은 어느 정도 억지로 잊고 있던 해묵은 감정을 건드려 치우비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치우비는 둔하고 멍한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 그런 감정적인 면에는 본능적으로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머리보다 가슴으로 더 빨리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무라도 비록 표정은 다시 딱딱해졌으나 속으로는 몹시 당황하고 있는 듯했다. 눈치 빠른 치우천이 그런 두 사람의 심정을 눈치 채지 못할 리 없었다. 치우천은 얼버무리듯 유쌍을 쳐다보았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느냐? 몹시 궁금하구나.” 유쌍은 아무것도 모르는지라 그냥 “네” 하며 다음 이야기를 이어갔다. 울라트와 알한은 의미 있게 웃으며 그냥 사람들을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좌우간 두 사람은 부족 내에서 큰 소동을 일으켰다. 일단 부족간에 한 약속이니 절대 어길 수 없다는 다그침을 받자 두 사람은 몹시 괴로워했다. 그러다가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두 사람은 부족에서 사라져버렸다. 양측의 부모들은 몹시 놀라서, 두 사람이 어디로 갔을까, 찾아다녔다. 그러나 두 사람의 행방은 찾을 수 없었다. 야율쿠리의 형은 아우가 부족을 망신시켰다고 생각하여 가족회의를 열었다. 마침 다른 형들도 야율쿠리를 눈엣가시로 생각하던 터라 가족들은 야율쿠리를 영원히 쫓아내고, 그가 다시 돌아오면 죽여 버린다는, 좀 지나치게 과격한 결정을 내려버렸다. 야율쿠리의 부모는 안 된다고 외쳤지만, 도리어 그것이 빌미가 되어 집안 식구들끼리 싸움이 일어났다. 병든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갇혀 부족장 자리를 빼앗기고 어머니도 감금되었다. 이왕 일을 저지르자 야율쿠리의 형들은 뒷일이 무서워졌다. 야율쿠리는 힘이 세고 사람이 좋아 부족들간에 인망이 높았는데, 형들은 자기들이 못된 짓을 저지르자 뒤가 켕겨서 한 술 더 떠 못된 짓을 해버렸다. 그들은 야율쿠리의 생모를 잡아 인질로 삼으려 했는데, 야율쿠리의 생모는 쫓기다가 아들에게 짐이 되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 싶었는지 벼랑에서 몸을 던져 죽음을 택했다. 일이 그렇게 되자 야율쿠리의 아버지도 울화가 도져서 병으로 세상을 떠나버렸다. 형들은 서로간에 책임을 미루며, 또 싸움을 시작하여 이제 울크리 부족은 산산이 쪼개져 서로 싸우는 피바다가 되었고, 다른 키탄족들마저도 서로 나뉘어 편을 들다가 말려들어 키탄족은 대혼란에 빠졌다는 것이다. 거기까지 이야기를 듣던 치우비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알한도 한마디 거들었다. “야율쿠리님 한 분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기다니,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군요.” 그러자 치우천이 딱 잘라 말했다. “야율쿠리 때문에 생긴 일이 아닙니다. 키탄족이 전부터 안고 있던 불씨가 터진 것뿐이죠. 그런데 야율쿠리는 어디로 갔지?” “우선 미아우 이야기도 들으십시오.” “그래. 미아우는 또 어떻게 되었느냐?” 미아우는 미아우대로 불똥이 터졌다. 초초룬이 사라진 것이 야율쿠리의 경우처럼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으나, 초초룬의 미아우족은 난데없는 부족의 습격을 받아 크게 당했다. 상대는 바로 사라진 줄 알았던 식인부족, 가리족이었다. 가리족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치우천은 깜짝 놀라 외쳤다. “가리족은 전에 번개범을 섬겼다는 그 식인종들 아니냐? 비렴님께서 그자들은 이미 오래 전에 망했다고 하셨는데......?” “그들의 수가 많은 것은 아닙니다. 몇 안 되는 자들이 쳐들어왔을 뿐입니다. 허나 그들에게는 무서운 무기가 있기 때문에 미아우가 당한 것이죠. 하다못해 재주가 뛰어난 초초룬님이 있었다면 어찌했겠지만.......” “무슨 무기가 있기에?” “그놈들은 신수를 앞세우고 왔습니다.” 그 말을 듣고 치우천과 비가 동시에 소리쳤다. “번개범!” “그렇습니다. 바로 신수 번개범이 앞장서서 날뛰었답니다. 대체 세상에 누가 신수를 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 때문에 미아우족은 싸우지도 못하고 모두 도망쳐버렸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죽은 것은 아니라 들었습니다만, 미아우의 마을은 폐허가다 되고 이제 가리족들이 날뛰고 있습니다. 지난번 유망의 공격 이후로 미아우족의 작은 부족들은 산산이 흩어졌는데, 그나마 가장 큰 부족이었던 초초룬님의 부족마저 그 모양이 되었으니, 미아우족 전체도 난리가 난 셈입니다.” 그때 알한이 나서서 물었다. “그런데 초초룬님과 야율쿠리님은 어찌된 것인가? 그분들이 위험하다 하지 않았는가? 그분들이 사라졌다면서 위험한지는 어떻게 아는가?” “아까는 사라졌다 말했지만 저는 얼마 전에 두 분을 뵈었습니다.” “두 사람을 보다니?” “두 분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우리 마을을 찾아오셨거든요 며칠터울을 두고요.” 당연히 그럴 거라는 생각에 치우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툰툰의 부족은 키탄과 미아우 딱 중간쯤에 있지. 더구나 거기서 다시 신시로 올 수도 있지. 두 사람은 갈 데가 없으니 그리로 가본 것 같구나. 여차하면 신시로 우리를 찾아오려 했는지도 모르고.” “그런데? 너희 부족에 잘 있다면 위험할 것 없잖아?” 울라트가 한마디 끼우자 유쌍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지금은 안 계시니까 문제죠.” “그게 무슨 소리야?” “두 분은 처음 우리 마을에서 만나자마자 며칠 동안 싸움만 하셨습니다. 말씀을 하다가 주먹질까지 하더군요. 초초룬님이 그렇게 무서운지 저는 처음 알았습니다. 그 힘센 야율쿠리님에게도 지지 않고 대들며 서로 두들겨 패더군요.” 치우비는 기가 막혀 피식 웃었다. “그거야 야율쿠리가 봐주는 거지. 사실 힘으로는 어떻게 상대가 되겠느냐? 야율쿠리가 여자를 정말 있는 힘을 다해 때릴 사람은 아니거든. 좌우간 그래서?” “그러다가 두 분은 또 며칠 동안 술만 마시더군요. 그러더니 두 사람은 불쑥 함께 떠나버렸어요 아버님이 저보고 급히 치우천님께 알리라 해서 이렇게 온 겁니다.” “왜 떠났기에?” 울라트가 초조하게 묻자마자 치우천도 물었다. “툰툰님이 무엇을 알리라고 했느냐?” 유쌍이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아버님이 두 분의 이야기를 엿들었데요. 두 분은 어차피 돌아갈 수도 없고, 자기들 때문에 큰일이 생겼으니 힘을 합해 번개범을 죽여주겠다고 했나 봐요. 율쿠리님이나 초초룬님이나 전에도 상대한 적이 있다면서 호기를 부렸다나요 그런데 사실은 두 분은 죽으러 간 것 같다고 아버님이 말씀하셨어요. 어차피 죽을 것, 치우천님 비님의 원수와 싸우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셨다고......” 순간 치우천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바닥을 주먹으로 내려쳤다. “바보들! 그건 안 돼!” 치우비도 놀라서 외쳤다. “야율쿠리나 초초룬이 약하지는 않지만, 단둘이서 어떻게 번개범을 이긴다는 거야? 아이쿠, 이거 큰일이네, 이거 큰일이야!” 무라와 울라트, 알한도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울라트가 간신히 입술을 움직이며 말했다. “두 사람은 자기들 때문에 부족에 큰일이 생기니까 죽으려 하는 것 같아요. 하지만...... 하지만...... 하필 또 번개범이라니...... 이건 도대체가.......” 알한도 한숨을 내쉬며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갑자기 큰일들이 터졌군요. 이거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습니다.” 치우천은 얼굴이 하얗게 되어서 중얼거리듯 말했다. “안 된다. 그 둘을 죽게 둘 수는 없어. 그들은 우리 목숨을 여러 번 구한 벗들이다. 절대, 절대 죽게 내버려둘 수 없다!” “그것도 하필 번개범! 어머니의 원수!” 치우비가 무섭게 눈을 빛내며 주먹을 불끈 쥐자 치우천은 결심한 듯 크게 소리쳤다. “번개범과는 어차피 결말을 지어야 했다. 허나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무라님, 카와 슈는 근처에 있습니까?” 무라도 긴장한 듯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신시에 데리고 올 수는 없었습니다만 신시 밖에 잘 숨어 있습니다. 필요합니까?” “카와 슈만큼 빠른 동물은 없겠지요. 무라님, 급히 서두르시면 작은 주신까지 며칠 만에 가실 수 있겠습니까?” 무라는 잠시 헤아려 본 다음 대답했다. “닷새면 갈 수 있습니다.” 치우천은 초조한 표정으로 유쌍을 쳐다보았다. “유쌍, 야율쿠리와 초초룬이 너희 마을을 떠난 것이 언제지?” “일곱 날이 지났습니다.” “늦다, 너무 늦어.” 신음하듯 내뱉는 치우천을 쳐다보며 치우비가 침통하게 말했다. “일곱 날이면 이미 두 사람은 번개범이 사는 곳에 가고도 남았을 시간이야. 이미 늦지 않았을까?” 치우천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번개범은 가리족과 함께 미아우족을 쳤다고 했으니, 원래 살던 구름골에 있지 않고 그 근방에 있을 것이다 거기서 초초룬의 부족 땅까지 가려면 며칠 더 걸릴 것이다. 더구나 가리족과 함께 있으니 두 사람도 섣불리 번개범과 싸우지는 않을 거야. 우선 잘 살펴보려 할 테니 아직 대엿새 정도는 시간이 있다. 허나 작은 주신에 오가기에는 너무 급하다.” 그때 알한이 물었다. “사울아비들은 안 됩니까? 삼천의 사울아비를 받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신수와 싸우는 훈련이 전혀 되어 있지 않습니다. 할 수 없지. 무라님, 얼른 작은 주신으로 떠나주십시오 그리고 제 말을 전해 주십시오.” “전사들을 최대한 빨리 끌고 오겠습니다. 그래야.......” 무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치우천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전사들을 모으기는 하되, 치베에게 이렇게 이르십시오. 보돈차르님과 힘을 합하여, 키탄을 치라고요.” 그 말에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아니, 왜 난데없이 키탄입니까?” 알한이 놀라 부르짖자 치우천은 조리 있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야율쿠리를 구해도, 그가 돌아갈 곳이 없으면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야율쿠리를 구하지 못하면, 그의 원한이라도 풀어주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키탄이 저렇게 서로 싸우면, 분명 지나족에게 먹혀 버립니다. 주신을 위해서도 그것은 좋지 않습니다. 무라님, 전사들을 보낼 곳은 바로 키탄족입니다. 작은 주신에는 치베와 구르, 키타야 족들이 계시니 보돈차르님의 도움을 받으면 서로 싸치 산산조각 난키탄족을 금세 수습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키탄 전사도 몇 만이나 될 건데 겨우 수천의 우리 전사로 잘될까요? 더구나 키탄과 서로 피를 흘리면.......” 치우천은 힘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주신 전사들에게, ‘우리는 야율쿠리님의 부대다!’라고 소리 지르게 하십시오. 그러면 키탄족은 싸우려 들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치베에게 말해서 적의 대장만 노리라고 하십시오. 대장만 쓰러뜨리면, 큰 싸움은 없을 것입니다.” 무라는 감탄하여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러면 여기는 어떻게 하시려고요? 번개범은?” “작은 주신에 도착하시는 대로, 비울걸에게 전해주십시오 그는 재주가 많으니 금방 올 수 있을 것이며 혼자만으로도 한 군대와 맞먹으니 큰 힘이 됩니다. 비울걸과 신시의 뜻 맞는 사울아비들, 그리고 아버님의 사울아비들을 움직여본다면 해볼 만합니다!” 그러고는 치우비를 쳐다보며 치우천은 다급하게 외쳤다. “비야, 다른 사람은 믿을 수 없다. 부루벼락 형과 쇠돌이에게만 전갈을 보내라. 그리고 아버님께는 내가 여쭈마. 최소한 오백 사울아비는 필요하다. 고시울률이 보내줄 허수아비들은 절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어떻게든 용감한 사람들로 오백은 모아야 한다. 작은 주신의 전사가 백 명 있으니 사백은 더 모아야 번개범을 잡을 수 있다!” “그런데 아버님이 사울아비를 내주실까? 워낙 엄한 분이라......” 치우비가 난감한 표정을 짓자 유쌍이 당당하게 말했다. “우리 툰툰족도 오십 명의 전사가 있습니다. 저와 함께 왔습니다. 신시 밖에서 기다리고 있지요!” 일의 가닥이 잡혔다는 생각에 알한도 웃으며 호기 있게 외쳤다. “아, 재미있습니다. 재미있어요! 치우천님, 신시에도 투르크의 떠돌이가 많더군요. 신시에 돈을 받고 싸움 해주는 투르크 전사들이 있는 것 아십니까?” “그렇소?” “예. 그 두목이 전에 내 밑에 있던 놈이더군요, 허허 내가 놈을 좀 비틀면 한 오십 명은 토해낼 것입니다. 싸움터에서 잔뼈가 굵은 놈들이니 사울아비들에게도 그리 뒤지진 않을 겁니다.” 치우천은 크게 웃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좋습니다. 그럼 그것으로 해봅시다. 사울아비를 움직이면 또 고시울률님이 방해할 것이 분명하니, 사울아비들은 쓰지 않겠습니다. 알한님, 그들은 돈을 받고 싸움을 해준다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창피한 일이지만요.” 치우천은 품에서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비상용 주머니 하나는 크리스를 사느라 이미 사용했고, 다시 준비한 그 주머니에는 오색이 영롱한 보석이 잔뜩 들어 있었다. 그것은 전에 형요의 보물을 찾은 것과 싱카가 바친 보물들을 잘 갈무리한 것들이었다. “이것이면 몇 명이나 더 움직일 수 있겠습니까?” 알한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대답했다. “그거라면 그들을 전부 사을 수도 있습니다. 놈들의 목숨은 이제 치우천님 것이 될 것입니다. 그들은 좀 거칠기는 하지만, 절대 도망치거나 약속을 어기지는 않습니다. 비록 상대가 신수라고 해도요.” “좋습니다, 알한님. 애써주십시오.” 알한에게 주머니를 건네고 나서 치우천은 크게 외치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된다. 이길 수 있다!” 치우천의 외침에 모두가 힘이 솟는 듯했다. 치우천은 불타는 듯한 눈으로 말을 이었다. “여러 곳에서 큰일이 터졌지만, 그렇다고 그 어느 것도 버릴 수는 없습니다. 어느 하나도 바로잡기 어려운 일입니다만 다른 것도 아닌 나를 위해 목숨을 걸었던 벗들의 일입니다! 우리도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하나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당연히!” 치우비가 맞장구를 치자 울라트도 소리쳤다. “나도! 그리고 잊지 말아요! 울쿠타 야쿠타도 있어 내가 바로 끌고 올게!” 무라 역시 조용하지만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좋습니다! 몸이 부서지더라도 나흘 만에 달려가 전해보겠습니다. 그리고 키탄족의 싸움에는 저도 끼겠습니다.” 알한이 호탕하게 웃으며 한마디 보탰다. “역시! 역시! 전사로 태어나서 한 번만해보아도 원이 없을 일들이 치우천님 곁에서는 줄줄이 생기는군요! 역시 사람은 자리를 잘 잡아야 하는 겁니다! 저를 믿으십시오!” “모두들...... 대단해요! 대단합니다...... 여러분은 정말 이야기 듣던 대로 영웅들이고...... 그리고.......” 유쌍은 생전처음 느껴보는 벅찬 감격에 눈물을 글썽였다. 그러자 치우비가 씩 웃으며 유창의 어깨를 두들겼다. “대단하다고? 너도 이제 우리 중 하나다!” 유쌍은 기쁨을 이기지 못해 그만 울음을 터뜨렸다. 그때 누군가가 급히 밖에서 외쳤다 “치우천님! 치우비님! 큰일입니다! 나와 보세요.” 치우천의 집에서 부리는 나이 많은 종의 목소리였다. 치우천이 웃으며 말했다. “또 큰일인가? 이거 뭐 정신이 없군.” 치우천은 혼자 밖으로 나갔다. 곧이어 치우천의 얼어붙은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야!” 치우비는 형의 목소리가심상치 않자 놀라서 급히 달려 나갔다. 그러자 충격으로 얼어붙은 듯한 형의 얼굴이 보였다. 키탄의 분열이나 벗들의 위급을 듣고도 그런 표정을 짓지 않았던 치우천이었다. 치우비는 아직 듣지도 못한 일이지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목소리를 높였다. “무슨 일이야?” 치우천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소식을 가져온 종이 대신 말했다. “신시에 큰 난리가 났습니다요. 선인 맥달님이 돌아가셨대요, 세상에 그런 고우신 선인님을 누가 해친 것인지......! 신시가 하늘의 저주를 받을까 두렵습니다요! 난리가 났어요.” 그 말에 치우비도 뭐라 말할 수 없는 충격으로 몸을 비틀거렸다. 맥달과 그렇게 친한 것은 아니었다. 허나 맥달이 누군가에게 죽음을 당했다는 말은 감성적으로 충격이라 할 수밖에 없었다. 치우천은 가까스로 정신을 가누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도대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누가..... 누가 그녀를 해칠 수 있단 말인가? 앞날을 보는 사람을 누가 어떻게......?" 치우비는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종에게 다시 한 번 물었다. “맥달님을 누가 죽인 것이 분명한가?” “당연합죠! 등 뒤에서 누가 칼을 꽂았다는데요? 솟대단군 질쾌님의 말씀이시니 분명한 사실입죠 벌써 신시는 발칵 뒤집혔습니다.” 그러면서 종은 작은 소리로 재빨리 말했다. “두 분은 어서 피하십쇼.” “무슨 소리냐?” 치우비가 소리를 버럭 지르자 종은 울상이 되어 대답했다. “맥달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이리 많은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요. 그런데 그들이 마구 떠들더군요. 분명 치우천님이 죽인 것이라고......” “형님이 언제!” 치우비가 흥분하여 발을 구르자 치우천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내가 항상 그녀를 욕하고 다니지 않았느냐? 사람들이 그러는 것도 당연하다.” “형님은 안 그랬잖아.” “내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하지만 그것을 누가 믿어주겠느냐?” “형님은 한웅님을 만나고 있었고, 또 그 다음에는 여기서 우리와 함께 내내 이야기를.......” “‘우리와 함께 있었다.’란 말은 사람들이 믿지 않는다.” 치우천은 마치 온몸의 기운이 다 빠져나간 듯이 허탈하게 말했다. “그들이 두려운 것이 아니다. 나는......나는 믿을 수 없다. 그녀는 아무도 죽일 수 없을 것인데....... 분명 아무도 죽일 수 없는데........ 어째서? 스스로 죽음을 택한 것인가? 죽을 것을 알고도 피하지 않은 것인가? 그렇다면 왜?” 치우천은 감정보다도 이성적으로 심한 혼란에 빠진 듯했다 어느새 치우천의 집 밖에서는 사람들의 아우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선인님을 해친 벌 받을 놈들은 나와라!” “너희 놈들이 선인님을 해치다니! 하늘이 무섭지 않으냐?” 그때 말굽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면서 사람들이 와 하며 흩어져 갔다. 아버지 치우우레가 사울아비들을 몰고 달려온 것이다. 그렇게 되자 사람들도 더 이상 소란을 피울 수가 없었다. 치우우레는 급히 집으로 들어오며 외쳤다. “천이 비야, 맥달님이 돌아가시고...... 사람들이 떠드는 것 들었느냐? 응?” “형님은 절대 아닙니다!” “그건 당연하지. 그러나 왜 그런 소문이 도는 것이냐? 이건....... 이건 이해가 가질 않는구나!” 치우천은 비로소 약간 평정을 찾은 듯했다. 치우천은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이건 함정입니다.” “함정?” “공상 싸움을 바라지 않는 사람들의 함정입니다.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허나...... 맥달님이 어떻게 죽을 수 있는지........” “등에 칼이 꽂히면 죽는 수밖에 더 하겠느냐? 등에 칼을 꽂고 집에 불을 질러서 시체까지 타버렸느니라. 솟대단군이 틀림없다 하였으니 믿을 수밖에. 나도 참혹하여 볼 수가 없더라. 그렇게 좋은 분이었는데........” 치우우레는 감정이 격한 듯 울먹였다. 그러자 치우천은 일부러 냉랭히 말했다. “아버님이 왜 우십니까?” “이 녀석아, 너는 잊었느냐? 그분이 너를 구해주신 일을.......” 그 말에 치우천은 다시 멍한 표정이 되어 비틀거리며 땅에 주저앉았다. “잊지 않았지요. 잊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납득이 가질 않습니다. 아니, 정말 이상합니다. 그리고......그리고 왜 이리 텅 빈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일까요?” 치우비가 눈물을 글썽이며 물었다. “어떻게 하지, 형?” 간신히 힘을 짜내 치우천은 냉정하게 되받았다. “뭘 어쩌느냐? 맥달이 우리랑 무슨 상관이냐? 우리는 정한 대로 움직인다. 신경 쓸 것 없다.” “움직인다니 무슨 소리냐?” 치우우레가 의아하여 묻자 치우천은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버님, 공상으로 떠날 사울아비가 준비되려면 몇 날이나 걸리겠습니까?” “그야 한 두어 달은 걸리겠지 그 정도 준비는 해야......” “되었습니다. 저는 내일 어디를 좀 떠나야 할 것이니 뒤를 부탁합니다.” “뭐? 떠나? 이 녀석아, 한웅님께옵서 찾으시면 어쩌고 떠난단 말이냐? 응?” 그러나 치우천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치우비를 끌고 처소로 들어가 버렸다. 치우비가 언뜻 보니 치우천의 안색은 하얗게 질려 있었고 온몸에는 힘이 없어 보였다. 치우비가 당황하여 얼른 물었다. “형? 왜 그래? 어디 아파?” “아니다. 아프지 않아. 비야, 너도 어서 움직여라. 신시가 난리판이니 어차피 사울아비들을 움직일 수가 없다. 아버님께는 절대 알리지 말고 아까 말한 대로 준비해라 헌데.......” 치우천은 돌연 탄식하듯이 말했다. “내가 왜 이러는지 나도 모르겠구나. 맥달이 죽은 건 잘된 일인데.......그렇게 생각해 왔는데......왜 이리 마음이 무거운 것이지? 왜 이리 힘이 없는 것이지?” 치우비는 형을 보며 잠시 생각했다. 자신도 그런 경험이 있었다. 바로 발을 만나지 못해 작은 주신에서 애태울 때 그러했었다. 치우비는 그때 자신의 모습과 지금 형의 모습이 겹치자 순간 흠칫했다. “그렇다면 형님이......? 설마....... 형님은 그분을 아주 싫어했잖아. 이제 겨우 조금 안 것뿐인데........” 치우비는 억지로 그런 생각을 지웠으나, 여전히 치우천의 얼굴은 침통했다. 소녀와의 재회 치우천이 맥달을 해쳤다는 소문은 다음날 날이 밝자 더욱 쫘악 퍼졌다. 아는 사람들은 물론 치우천이 그럴 이유도, 그럴 시간도 없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퍼져 나가는 소문은 막을 수가 없었다. 선인이었던 맥달의 죽음은 신시 전체에서도 큰 충격이었는지 사와라 한웅도 이례적으로 슬픔을 표시하고 나섰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맥달이 죽었을 시간은 치우천이 사와라 한웅등과 이야기를 나누던 때라 사와라 한웅은 조금도 치우천을 의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도리어 사와라 한웅은 헛소문이 퍼지지 않게 하라고 엄히 일렀다.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사와라 한웅은, 치우우레에게서 치우천이 사울아비가 준비될 동안 신시 밖의 일을 본다고 하자 되레 좋다면서 두말없이 승낙했다. 소문의 당사자가 신시에 없는 편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동안 사울아비들을 준비하는 일은 고시울률과 비렴이 함께 맡도록 했다. 일이 오히려 시원하게 풀린 셈이었다. 무라는 그날 밤 바로 출발했고 알한도 밤이 새도록 투르크족들을 찾아다니다가 새벽이슬을 맞으며 돌아왔다. 알한이 고용한 용병은 모두 삼백 명이었다 투르크족이 백 명 가량, 나머지는 각양각색의 잡다한 종족이 섞인 거친 전사들이었으며, 그중 두목과 몇몇이 알한을 따라왔다. 용병의 두목은 투르크족으로 차오스라는 자였는데, 그는 치우천을 보자마자 대뜸 물었다. “신수와 싸우러 가는 게 정말이오?” “정말일세.” 치우천이 웃으며 시원스레 대답하자 차오스는 허허 웃었다. “말은 좋소만, 정말 싸울 수 있소? 당신은 도저히 신수에게 덤빌만한 용사로는 안 보이는데?” “치우천님은 누구보다 용감하며 전사를 잘 다루시네. 우리는 이미 신수를 한 마리 굴복시킨 적이 있어.” 알한의 말에 차오스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허풍 치지 마시오. 난 믿지 않소.” “난 거짓말을 안 해! 나도 그 자리에 있었다. 차오스, 내 말을 정말 못 믿나?” 알한이 정색을 하며 다그치자 차오스는 그래도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딴청을 피웠다. “보석을 받은 것은 좋지만 당신이 유능한 대장이 아니라면 이번 일은 사양하겠소. 무능한 대장을 따라갔다가 허무하게 죽고 싶지는 않단 말씀이야.” 차오스가 빈정대자 치우비는 말없이 일어서서 차오스 옆으로 갔다. 차오스는 막대기를 잘 쓰는 투르크속답게 커다란 구리 몽둥이를 등에 짊어지고 있었는데 치우비가 웃으며 말했다. “한마디로 실력을 보여 달라, 이건가?” 치우비는 여전히 입가에 웃음을 머금으며 태연하게 차오스의 구리 몽둥이를 한 번 꽉 쥐었다가 놓았다. 차오스가 놀라 돌아보니 그 단단한 구리 몽둥이에 치우비의 손가락자국이 완연하게 찍혀 있었다. 구리 몽둥이를 휘거나 부러뜨리는 것보다도 훨씬 더 무서운 힘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차오스는 깜짝 놀라며 더듬거렸다. “당신은...... 당신은 누구요?” “나는 치우비라고 한다.” 순식간에 새파랗게 질린 안색으로 차오스가 물었다. “당신이 바로 태산 회의의 대용사 치우비요? 그럼 저분은......?” “내 형님이시지.” “그러면 치우천님이시군요. 이거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이 차오스, 눈이 있어도 소용없군요. 이런 눈은 뽑아버려야.......?” 치우비는 호들갑 떠는 차오스를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보다가 알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알한님, 이 사람에게 말 안 했었습니까?” 알한이 킥킥거리며 말했다. “그래야 재미있지 않습니까? 요 녀석이 놀라는 걸 한 번 보고 싶어서요.” 차오스가 얼른 머리를 조아리며 황급히 말했다. “두 분과 함께라면 신수가 아니라 하늘과 싸워야 한다 해도 기꺼이 가겠습니다! 주신 보석은 받지 않겠습니다! 두 분의 명령을 듣는 것만으로도 저희에겐 영광입니다!” 치우천이 껄껄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그럴 것까지는 없네. 받을 건 받아둬야지.” “그보다 저희에게도 살길을 주옵소서!” 차오스가 돌연 무릎을 꿇으며 외치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치우천과 치우비는 의아하여 차오스를 내려다보았다. 차오스는 고개를 들며 이내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듣자하니, 치우천님께서는 이번 공상 싸움에서 이기시면 작은 주신 전부를 주신 사람으로 만들어주겠노라 하셨다는데, 정말 그렇습니까?” “어찌 그런 것이 다 소문이 났는가?” 치우천이 묻자 차오스는 고개를 저었다. “소문이 난 것은 아닙니다만 제가신시에 있은 지도 이제 여러 해가 넘었습니다. 그런 일은 알 수 있습죠.” “그래서?” “저희 모두는 전사로서 큰 뜻을 가지고 신시로 찾아온 놈들입니다. 그러나 신시의 높은 양반들은 저희를 개나 소처럼 부릴 뿐, 사람대접을 해주지 않습니다. 저희가 살길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값진 물건을 많이 모아 그것으로 사람답게 사는 길, 또 하나는 주신 사람이 되는 길입니다. 그러나 물건을 모으자면 목숨을 걸어야 하고, 그런 일을 얼마나 겪어야 사람답게 살만 한 물건을 모을지 아득하기만 합니다. 그 전에 전부 죽어 나가자빠지겠지요. 그러니 저희도 데려가 주소서 그리하여 저희도 사람답게 살도록 해주소서. 이것만이 저희의 바람입니다!” 차오스가 처절한 목소리로 말하며 넙죽 절을 하자 치우천은 미간을 찌푸렸다. 차오스가 기분 나빠서라기보다 신시와 주신의 일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다. 치우천은 알한에게 슬며시 물었다. “차오스는 전사로는 어떠한가요?” “저야 이기지 못할 겁니다만 투르크에서는 그래도 몇 손가락 안에 들던 전사죠.” 알한의 말에 치우천은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그런 전사가 모여드는데도 신시는 받아들일 줄 모르는구나. 다 같은 사람인데도 주신 사람은 주신 사람만 제일인 줄 알고 나머지는 개나 소로 보는구나. 허, 내가 주신 사람인 것이 부끄럽다.” 치우천은 차오스를 일으켜 세웠다. “차오스, 너도 사람이고 나도 사람이다. 나는 주신 사람이고 너는 투르크 사람이지만 주신 사람이 잘난 것도 아니고 투르크 사람이 못난 것도 아니다. 적어도 주신을 세우신 안파견 한님은 그리 가르치시지 않았다. 나를 따르거라.” 차오스는 너무도 기뻐 들뜬 목소리로 커다랗게 외쳤다. “감사합니다!” “이제 너는 내 말에 무조건 따라야 한다. 신수와 싸우는 일은 간단한 것이 아니다. 한 사람 한사람의 싸움 기술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여럿이 한사람처럼 척척 손발이 맞게 움직이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강한 용사들을 모아두어도 신수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너는 네 부하들을 잘 다룰 수 있는가?” “제가 죽으라 하면 다 나가죽을 놈들입니다!” “좋다. 우리는 날짜가 얼마 없다. 그 사이에 너는 부하들에게 신수와 싸우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우리는 급히 움직여야 하지만 그 사이에도 계속 가르쳐야 한다. 못 가르치면 신수에게 다 죽을 수밖에 없다. 할 수 있겠느냐?” “하겠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 이 차오스의 능력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차오스는 자신 있게 말했다. 그리하여 치우천이 원래 데리고 온 작은 주신의 전사 백 명과, 차오스가 거느린 용병들 삼백 명이 신시를 나서게 되었다. 용병들은 흉터 투성이에 각양각색의 복장과 머리, 장식을 한 무시무시한 분위기의 전사들이었지만 차오스가 그들을 꽉 잡아놓았는지, 치우 형제나 다른 사람들에게 절대로 무례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 울라트는 그들을 보고 샐쭉거리며 중얼거렸다. “뭐, 이 사람들이나 내 도깨비들이나 거기서 거기네.” 다시 치우 형제를 따라가게 된 울쿠타 야쿠타는 울라트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물었다. “도깨비? 네가 도깨비들을 데리고 있어?” 울라트는 생긋 웃으며 한껏 뽐냈다. “내가 바로 그 유명한 작은 주신의 도깨비 부대의 대장 울라트란 말씀이야. 나는 타타르 앗수라트 부족장 키타야의 딸이지. 유명한 도깨비 전사 리미, 마냥, 싱카가 내 부하들이란 말야. 알아들었니?” 울쿠타 야쿠타는 약간 기가 죽은 듯했지만 호기심이 이는지 계속 울라트에게 도깨비들에 대해 물어보았다. 치우비는 한껏 으쓱거리는 울라트를 보며 씩 웃을 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치우천의 얼굴 한구석에 여전히 수심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것을 보고 치우비가 물었다. “형, 왜 그래? 무슨 걱정 있어?” “아니다, 걱정은 무슨.” 치우천은 말을 돌렸으나 사실 그는 맥달의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죽음이 자신의 마음을 왜 이리 파고드는지 알 수가 없었다. 살았을 때는 위험하다 여기고 그녀를 없애려는 마음까지 있었는데, 죽었다는 소리를 들으니 왜 이리 허전한지 도대체가 모를 일이었다. 철천지원수인 번개범과 싸우고, 야율쿠리와 초초룬을 구하러 가면서도 그보다 맥달 쪽에 더 마음이 가는 이유를 치우천도 알지 못했다. 신시 밖으로 나서자, 유쌍이 말한 대로 쉰 명 정도의 미아우족 전사들을 데리고 합류했다. 그리고 지난번 신수와 싸울 때 도움을 주었던 부루벼락과 쇠돌이가 만사를 제쳐두고 몇몇 사울아비들과 함께 찾아와 와 치우 형제의 마음을 기쁘게 해주었다. 그리고 그들과 동행한 사람중에는 뜻밖의 인물이 한 명 끼어 있었는데, 바로 스름이였다. 스름이는 운사 신지울태의 제자가 되어 있었으나 갑갑하여 견딜 수 없다는 핑계로 죽자살자 쇠돌이의 뒤를 따라왔다는 것이다. 사실 스름이가 이번 일에 따라나선 이유는 따로 있었다. “신지울태님은 예전에 번개범 때문에 아직도 몸이 좋지 못해 고생하고 계십니다. 저는 부모님도 없고 신지울태님이 할머님처럼 저를 거두어주셨는데 이런 기회에 제가 복수를 하지 않고 어떻게 가만히 있겠습니까?” 스름이는 음침하기 짝이 없는 외모를 지녔지만 생각은 도리어 당차고 꿋꿋한 데가 있었다. 그런 스름이를 차마 떼어버릴 수가 없어서 치우천은 웃으며 맞아들였으나 싸움에는 경솔히 나서지 말라고 일렀다. 부루벼락과 쇠돌이의 힘과 기술은 대단히 뛰어났으므로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쌍은 아버지 툰툰에게도 사람을 보내어 되는대로 전사들을 긁어모아 초초룬의 마을 근처에서 합류하겠다고 말했으나 치우천은 그것만은 완곡히 거절했다. 지금부터 길을 가는 동안 번개범을 상대할 방법을 찾아 훈련을 거치지 않은 전사들은 필요 없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치우천은지난번 첸누와 싸울 때 있었던 치우비, 알한, 부루벼락, 쇠돌이, 스름이 등과 차오스까지를 불러 함께 번개범과 싸울 방법에 대해 논의했다. 부루벼락과 쇠돌이는 지난번처럼 불과 나무기둥으로 공격하자고 말했다. 그러나 치우천은 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됩니다, 벼락 형. 지난번에 싸운 첸누는 찬 기운을 뿜는 신수였으니 그리 싸운 것입니다. 이번에 싸울 번개범은 전혀 그것이 먹혀들지 않을 것입니다.” “왜 먹히지 않을까?” “첸누는 거북괴물이라 덩치도 크고 움직임이 둔했지만 번개범은 범 신수라서 날래기가 이를 데 없습니다. 나무기둥으로 번개범을 맞힐 수는 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더구나 뭐죠?” 알한이 묻자 치우천은 인상을 쓰며 말을 이었다. “첸누는 찬 기운을 뿜어대어서 방패로 그럭저럭 막을 수 있었지만 번개범은 벼락을 떨어뜨립니다. 떨어지는 벼락을 무슨 재주로 막겠습니까? 나무기둥을 맞히려 해도, 번개범 근처에만 가면 벼락이 떨어지기 때문에 헛되이 죽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전에 보니, 번개범은 첸누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몸이 빠릅니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머리를 싸매고 생각해보아도 떨어져 내리는 벼락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더구나 치우천도 맥달의 죽음 때문에 마음이 뒤숭숭한지, 그리 용한 생각을 짜내지 못했다. 그러자 스름이가 음침한 표정 그대로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예전에 다른 신수와 겨뤄본 적이 있다던데, 그 이야기를 좀 들려주실 수 있나요?” 치우비와 쇠돌이 등이 그 이야기를 해주자 스름이는 한참 생각하다가 문득 말했다 스름이가 갑자기 말을 꺼내자 쇠돌이는 자기도 모르게 흠칫했다. 스름이가 워낙 음침한 인상을 주었기 때문에 놀란 것이다. 허나 스름이는 쇠돌이의 놀라는 모습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신수는 크니까 가까이 달라붙으면 어떻게 해볼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번개범의 벼락과 회오리가 문제요 놈이 회오리로 변하면 달라붙을 방법이 없소.” “회오리로 변하는 건 움직일 때뿐이고, 그놈도 싸울 때는 모습을 드러낸다고 들었는데요?” “그래도 벼락을 어떻게 막겠소?” 치우천의 말에 부루벼락이 농담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내가 그렇게 대단하다니, 거 기분 좋구먼.” 부루벼락은 실없이 껄껄 웃기까지 했으나 아무도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좀 머쓱했는지 부루벼락은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다물었다. 스름이는 그쪽으로는 아예 눈도 돌리지 않고 다시 말했다. “예전에 신지울태님이 번개범의 벼락을 막는 주술을 펴신 적이 있지 않았나요?” “그렇기는 하오만.......” 치우천이 무겁게 말하자 스름이는 입가에 웃음을 띠웠다. 기분 좋아 웃는 듯했지만, 결코 못난 얼굴도 아닌데 아무리 보아도 스름이의 미소는 음침하게만 보였다. “저도 그 주술을 배우기는 했습니다. 신지울태님이 가르쳐 주셨어요.” 그러자 치우비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스름이님을 무시하는 건 아닙니다만, 신지울태님조차도 번개범의 주술을 막기 힘들어 쓰러지기까지 하셨습니다. 그건 좀 무리예요.” “내가 신지울태님만큼 주술을 잘 쓸 수는 없겠지만, 한 두어 번은 막아낼 수 있을 겁니다. 그 사이 힘센 용사들이 달라붙으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요?” 그 말을 듣자 치우천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 방법밖에 없겠군요. 허나 번개범에게 달라붙으려면 그냥은 안 됩니다. 그렇지, 갈고리와 줄을 써서 매달리는 방법밖에 없겠군요.” 대뜸 치우비가 무릎을 탁 치며 한마디 거들었다. “번개범은 아주 길고 두꺼운 털로 덮여 있었어. 그러니 갈고리를 던지면 잘 걸릴 거야. 일단 그놈 몸에 달라붙는 게 문제지만, 달라붙기만 하면 잘될 거야. 지난번 나는 그놈의 몸을 꿰뚫은 적이 있어. 놈도 피가 솟았다구. 덩치가 크긴 해도 마구 찌르다 보면 죽을 거야.” 치우천은 치우비의 생각에 좀 문제가 있다 여겼지만, 별다른 방법이 생각나지도 않고 하여 일단 그렇게 하자고 회의를 마무리 지었다. 덕분에 치우 형제를 따르게 된 복잡한 내력의 수백 멍 전사들 모두에게 며칠 내로 만들든, 얻든 간에 단단한 갈고리를 몇 개씩 구해야 한다는 엄명이 떨어졌다. 혼자 있게 된 치우천은 생각을 가다듬었다. ‘쉽지 않다 스름이가 번개범의 벼락을 몇 번이나마 막아내고, 또 전사들이 번개범에 달라붙는 데 성공한다 해도 번개범이 회오리로 변하기만 하면 다 날아가 버릴지도 모른다. 적어도 번개범이 회오리로 변하지 못하도록, 어떻게든 그 방법을 찾지 못하면 이기기 힘들다 그 런데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을까?무슨 방법이 없을까?’ 치우천은 그것만을 골똘히 생각하다 보니 어느새 맥달의 기억이 조금씩 희미해져 갔다. 치우비는 새로 얻은 용병 전사들을 만나보았는데, 그들은 비록 흉포하고 거칠기는 했지만, 그래도 꾀 솔직하고 꾸밈은 없는 사람들 같았다. 치우비의 소문을 듣고 간단한 도전을 해오는 경우도 있었다. 차오스는 화를 내며 헛수작 말라고 으름장을 놓았으나, 치우비는 웃으며 차분히 그들의 도전을 간단히 받아넘기곤 했다. 치우비는 아홉구비의 힘을 모두 잃은 후 몇 년간 죽을힘을 다해 기술을 연마해왔다. 그냥은 도저히 지울 수 없는 발의 생각을 잊어보려고 더 죽을힘을 다해 몰입했는지도 몰랐다. 덕분에 치우비는 힘은 줄었어도 기술로써 그것을 메울 수 있을 정도의 경지에 도달했다. 그래서 형천과 겨루면서도 패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치우비에게 아무리 싸움을 일로 살아온 용병들이라도 상대가 되지 않았다. 용병들은 치우비의 힘과 기술에 감복하여 진정으로 다시 한 번 충성을 맹세했다. 치우비도 나름대로 비록 이들 중 자신을 이길 자는 없지만, 이들도 무서운 전사들이라는 것을 느끼고 그들을 가볍게 보지 않았다. 허나 그들을 통솔하는 데에는 문제가 따랐다. 바로 싸움 방식을 이해시키는 것이 문제였다. 그들 하나하나는 의문의 여지없이 강했다. 작은 주신의 전사들보다는 분명히 강했고 주신의 사울아비들과도 맞먹을 점도였다. 수없는 싸움에서 살아남았다는 전사로서의 긍지가 있었으며, 모두가 자기의 독특한 기술과 수법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자기들이 수련한 싸움 방식을 버리고 공통된 명령을 따르게 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알한과 차오스,치우비가 애를 쓰고 있으니 조만간 체계는 갖추어질 테지만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치우천은 몹시 걱정스러워졌다. ‘아무래도 무리인가....... 이런 훈련이 덜 된 전사들로 번개범을 잡을 수 있을까? 야율쿠리와 초초룬은 무사할까? 무라는 제때에 도달했을까? 치베와 보돈차르님이 키탄족의 일을 잘 수습해줄까? 비울걸은 왜 오지 않는 것일까? 그리고...... 맥달을 왜? 누가 해친 것일까?’ 그날 해가 저물자 그들은 근처의 한 미아우 마을을 찾아 묵기로 했다. 그래도 오백에 가까운 인원이라 어차피 노숙을 해야 했지만 갈고리 만들 재료가 모자라 그것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마을로 가야 했다. 치우천은 머리가 복잡하여 무리에서 떨어져 혼자 거닐면서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때 한 노파가 치우천에게 절뚝거리며 다가왔다. 그 노파는 치우천이 누군지 묻지도 않고 대뜸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더니 치우천의 손에 널찍한 나무판자 하나를 쥐어주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느릿느릿한 동작이었지만, 치우천은 생각에 잠겨 약간 얼이 빠진 상태라 무심코 그것을 받아 손에 쥐었다. ‘이게 뭐지?’ 나무판자를 들여다본 치우천은순간 안색이 변했다. 그는 급히 주변을 둘러보며 노파를 찾으려 했으나 노파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 치우천은 노파를 포기하고 급히 달려가며 스름이를 찾았다. “스름이님! 스름이님!” 막 저녁 준비를 하고 있던 사람들은 치우천이 스름이를 찾자 궁금하여 모여들었다. 말린 고기를 씹고 있던 치우비도 다가와 물었다. “무슨 일이야?” “비, 너 스름이님을 못 보았느냐?” “조금 아까까지 저기 있던데......?야쿠타에게 불러오라 보냈으니 있으면 올.......” 치우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치우천은 기다리지 않고 직접 스름이를 찾아 나섰다. 눈치가 이상하다 여긴 치우비는 형의 뒤를 따라나섰다. 마침 야쿠타와 함께 달려오는 스름이를 본 치우천은 다짜고짜로 그 나무판자를 내밀었다. “스름이님! 이것 좀 보아주십시오!” 나무판자를 받아들자마자 스름이 역시 안색이 변했다. “이걸 대체 누가?” “누가 줬냐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이게......그것이 맞습니까? 저는 그것으로 보입니다만.......” 스름이는 두려운 낯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 맞습니다.” 치우비가 나무판자를 보니 거기에는 뭔지 알아볼 수 없는 작은 무늬들이 뭔가로 빽빽이 쓰여 있었다. “이게 뭔데 그래?” 치우천은 주변을 살피고는 아주 작은 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글자란 것이다.” 치우비는 깜짝 놀라 눈을 둥그렇게 떴다. “글자? 그러면 신지울태님이 쓰시는 그 주술 아니야?” 스름이도 바싹 긴장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함부로 말하시면 안 됩니다. 글자는 몹시 두려운 것입니다.” 허나 치우비는 이 빽빽한 무늬가 주술일지는 몰라도, 그렇게 두려운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두려울 거야 뭐 있겠습니까?” 치우비의 말에 스름이는 고개를 저으며 치우비에게 되물었다. “치우비님, 사람을 죽지 않게'할 수 있겠습니까? 멀리 떨어진 사람에게 아무도 보내지 않고 자신의 뜻을 알릴 수 있겠습니까? 가만히 앉아서 수백, 수천의 사람들에게 자신의 뜻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치우비가 기막혀하자 스름이는 목소리를 낮춰 말끝에 힘을 주었다. “글자에는 그러한 힘이 있습니다. 그러니 절대, 절대 함부로 말하지 마십시오.” 치우비는 몹시 놀라서 입을 꾹 다물었다. 치우천은 치우비가 조용해지자 떨리는 목소리로 스름이에게 물었다. “이 글자들을....... 읽으실 수 있습니까?” “읽을 수는 있습니다. 신지울태님께 배운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치우천님에게 쓴 것인데 제가 읽어도 되겠습니까? 그것은 남의 마음을 훔치고, 남의 말을 엿듣는 것과 같은 나쁜 일입니다.” “스름이님이 인어주시지 않으면 저는 글자를 모르니 읽을 수가 없습니다. 읽어주십시오.” 치우천이 허락하자 스름이는 침을 삼키고는 침착한 목소리로 다짐하듯이 말했다. “천님의 부탁이니 들어드립니다만 제가 글자를 읽었다는 것은 누구에게도 말하시면 안 됩니다. 저도 여기서 읽은 것은 금방 잊을 것이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안파견 한님의 이름으로 맹세합니다.” 치우천도 조심스레 맹세를 했다. 글자는 처음의 한웅이었던 안파견 한님의 부하였던 신지혁덕이 만들었다고 전해졌다. 글자는 이름을 가진 모든 것과 뜻을 지닌 모든 것을 못 박아 고정시키는 무서운 주술력을 지녔다고 믿어졌기에 아주 소수의 허락받은 사람만이 읽을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주신 신시에서도 신지씨나 삼사의 제자 말고는 글자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이 거의 드물었다 글자를 마음대로 읽는 것은 남의 마음을 훔치는 일이라 하여, 극히 큰 죄를 짓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스름이는 떨리는 손으로 나무판자를 잡고 한동안 들여다보다가 치우천을 힐끗 보았다. “정말 놀랍습니다. 이것을 누가 쓴 것인지 아시겠습니까?” “짐작은 할 수 있습니다만......” 치우천이 흥분하여 잠시 말을 끊었다가 잠시 스름이의 눈빛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맥달, 맥달님이 쓰신 것 아닙니까?” 스름이는 놀라며 두 눈을 크게 떴다. “맞습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또 다른 누가 있겠습니까? 그나저나 뭐라고 쓰여 있습니까?” 치우천이 묻자 스름이는 잠시 나무판자를 더 들여다보다가 몇 번이나 놀라 안색이 변했다. 이윽고 스름이가 조용히 말했다. “맥달님은 정말...... 정말 놀라운 분입니다. 그런 분은 다시는 세상에 나기 힘들 것입니다.” “맥달님이 뭐라고 쓰셨나요?” 치우비가 다시 나서서 다그쳤다. 치우비는 맥달이 죽은 이후 몹시 섭섭했으나 형이 크게 상심하는 것을 보고 애써 내색하지 않았다. 그러나 맥달이 미리 남긴 글자가 나타나자 치우비도 마음이 들뜨기는 치우천과 마찬가지였다. 스름이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맥달님은 모든 것을 아셨나 봅니다. 맥달님은 죽었다고 알려졌어도 이렇게 뜻을 전할 수 있으니, 그렇게 생각하지는 말아 달라시는군요. 글자색을 얼핏 보니 이것은 퍽 오래 전에 쓰여진 것 같은데......” “또 다른 말은 없소?” 치우천이 묻자 스름이는 고개를 갸웃하며 약간 더듬거렸다. “맥달님은 치우천님이 번개범과 싸우러 갈 것도 아셨나 봅니다. 번개범을 만나거든...... 이게 무슨 글자인가? 그렇군. 우린..... 우린을 잊지 말라 적으셨는데, 우린이 대체 뭡니까?” 치우천은 자신도 모르게 외쳤다. “잊지 않았소, 우린 구슬은 잘 가지고 있소 또 다른 말은?” “그리고 이렇게 적으셨습니다. 하늘 높이 풀피리를 불라고요.” “풀피리? 난데없이 웬 풀피리란 말이오?” “나도 그건 모릅니다. 아무리 맥달님이 남긴 글자지만 이건 도대체 모르겠네요. 번개범을 만나면 싸우기도 급할 텐데 풀피리를 불라니? 뭔가 짚이시는 것이 있습니까?” 스름이도 궁금한 듯했지만, 당사자인 치우천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난데없이 웬 풀피리란 말인가? 치우천이 멀뚱한 표정을 짓자 스름이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그리고 끝에 이렇게 적으셨군요. 살아 있지 않아도 이렇게 뜻을 전할 수 있다면 산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죽지 않았다 하여도 마음이 전해지지 않는다면 죽은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부디 큰일을 이루소서....... 이게 전부입니다.” 스름이가 읽기를 마치자 치우천은 하늘을 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살아 있지 않아도...... 뜻을 전할 수 있다면 산 것과 무엇이 다르냐....... 죽지 않았어도 마음이 전해지지 않으면 죽은 것과 무엇이 다르냐고...... 그렇게...... 그렇게 적었단 말이지요?” “그렇습니다.” 치우천은 돌연 하늘을 보며 외쳤다. “그렇지 않소!” 스름이와 치우비는 의아하여 치우천을 바라보았으나, 치우천은 그 두 사람에게 말하는 젓이 아니었다. 맥달에게 외치는 것이었다. 치우천은 마음속으로 맥달에게 더욱 커다랗게 외쳤다. ‘당신은 앞날을 볼 줄 아니 이렇게 글자를 숨겨 나에게 보이면 모든 것이 같다고 여기는 것이오? 정말 그러한 것이오? 죽지 않았어도 마음이 전해지지 않으면 죽은 것과 무엇이 다르냐는 말......그것은 무슨 뜻이오? 당신은 다 알면서 왜 죽어버린 것이오? 나는 아직 당신에게 물을 것이 많단 말이오! 왜 나에게 저주를 걸었는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 것인지, 사람의 앞날은 정말 정해진 것인지....... 왜 그런 대답은 해주지 않는 거요?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면 내게 물을 필요도 없는데 왜 물었던 거오? 나는 정말 정해지지 않은 앞날을 걷고 있는 거요? 그럴 수 있는 거요? 모든 것을 안다면, 그것을 대답해주어야 하지 않소? 그것을.......!’ 치우천은 까닭을 알 수 없는, 너무도 안타까운 마음에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꺼려하고 기분 나빴던 여자였는데, 솔직히 그런 것들을 정말 알고 싶었던 것도 아닌데 왜 이리 마음이 쓰이는지도 알 수 없었다. 돌이켜보니 맥달은 치우천을 이미 여러 번 도우면 도왔지, 한 번도 방해한 적이 없었다. 치우천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해친 적이 없었다. 자신의 죽음은 피하지 않으면서, 그녀는 이미 오래 전부터 여기저기에 글을 남기고 이야기를 남겨서 치우천이 어려울 때마다 도움을 주어왔다. 사와라 한웅의 분노에서 목숨을 건지게 해주었고, 우린 구슬의 사용법을 일러주었으며, 신시에서 공상 출병을 허락받게 만들고 이제는 번개범과 싸울 때도 자신을 도우려 하고 있었다. 치우천은 속으로 부르짖었다. ‘내가 속이 좁았다. 내가 속이 좁았구나. 그렇게 커다란 고통은 안은 사람에게 내가 너무했다. 그녀는 자신의 죽음은 피하지 않으면서 나를 돕는 길만을 남겨두었다. 나는 빛을 진 것이다. 내가 그녀를 죽인 것이나 마찬가지다. 내가 그녀에게 싫은 소리를 해대니까, 그리고 그녀가 나를 도우니까 나를 미워하는 놈들이 나를 수렁에 빠뜨리려고 그녀를 해친 것이다. 그녀는 어찌해서...... 다 알았을 텐데....... 다 피할 수 있었을 텐데......!’ 치우천이 몹시 침통해하자 치우비는 말없이 스름이에게 눈짓을 했다. 스름이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나무판자를 그 자리에 내려놓고 조용히 자리를 떴다. 치우비는 슬프고 애틋한 기분으로 그 나무판자를 소중히 집어 품에 넣었다. 딱딱한 나무판자지만 마치 맥달의 손을 잡아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치우비는 코를 한 번 훌쩍거리고 눈을 마구 비빈 다음 치우천을 돌아보았다. 치우천은 여전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맥달은 아마 저런 것을 많이 남겼을 것이다. 나는 살면서 저런 글자들과 계속 마주치겠지. 맥달, 맥달....... 당신은 내게 같을 길이 없는 빛을 지우는구려. 그것들과 마주칠 때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당신의 빛을 무엇으로 같지? 나는 아직도 당신이 두렵고 꺼려지는데, 그런 빛을 나에게 지워서 어쩌자는 것이지? 죽었어도 뜻을 전할 수 있다면 산 것과 다를 바 없다고? 아니, 다르오. 분명히 다르오. 맥달, 당신이 틀렸소. 당신은....... 당신은 정말 틀린 거요.’ 치우비가 다가와 형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형, 그만 생각해. 어차피 이 세상 분이 아니잖아. 그분 뜻을 생각해서라도 그분의 말을 잊지 않으면 그뿐 아니겠어?” 치우비가 말하자 치우천은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급히 고개를 돌리며 침울하게 말했다. “비야. 뜻을 전할 수 있다면 죽어도 산 것이라는 말, 네가 보기에는 맞느냐? 너도 그렇게 생각하느냐?” “글쎄.......” 우비가 말끝을 흐리자 치우천은 애타는 목소리로 말했다. “비야, 너는 죽지 마라. 어떤 일이 있어도 죽지 말아라. 나는....... 나는 이상하게 견딜 수가 없구나. 나는 힘들다, 힘들어. 맥달이 죽은 후로 이상하게 힘이 빠지고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보이는 구나. 내가 왜 이러지? 왜 이러는 것이지? 그깟 여자 하나 때문에?” “형, 좀 쉬어. 형이 많이 힘든 것, 나는 알아. 이럴 때는 쉬어. 술이라도 마시고 자라구. 응?” 항상 당당하고 활기차던 형이 오늘따라 이상하게 작고 왜소하게 보였다. 치우비는 형의 그리 작지 않은 몸을 가볍게 부축하며 걸음을 옮겼다. 치우천은 극도로 혼란스러운지 그저 힘없는 병자처럼 치우비의 부축을 받아 걸어갔다. 그동안 정신적인 긴장이 쌓여 마침내 탈진해버린 것 같았다. 치우천은 마치 취한 듯 아우에게 말했다. “비야, 죽지 마라. 절대로....... 응?” “나는 염려 마, 형. 형이야말로!” 문득 치우비는 발귀리 선인의 말이 떠올랐다. 지난번 치우천과 함께 발귀리 선인을 만났을 때 발귀리 선인은 자신에게 말했었다. -네 형을 보살펴라. 네 형은 천만 사람을 보살필 것이고 천만 사람을 이끌 것이지만, 정작 네 형을 보살펴주고 힘들 때 이끌어줄 사람은 너뿐이란다. 때가 될 때까지는 절대 형의 옆을 떠나지 말거라...... -저는 형 옆을 떠나지 않을 겁니다! 치우비가 외치자 발귀리 선인은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착한 아이야. 그러나 세상에 헤어지지 않는 사이란 없단다. 그러니 헤어지기 전에 더욱 애쓰거라. 헤어지게 될 때 헤어지기 싫어 가슴이 저리고 마음이 미어지도록 아쉽고, 죽고 싶을 정도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못한다면 이미 헤어진 것이나 다를 바 없단다. 발귀리 선인의 말을 정확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치우비는 속으로 다시 한 번 결심하고 있었다. ‘내 형이야........ 다른 사람도 아닌 내 형이야. 형, 염려 마. 내가 있어. 내가 옆에 있다구!’ 며칠이 지나자 치우천은 다시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알한이나 차오스 등과 함께 전사들을 훈련시키기도 하고, 고리를 건 다음 잘 떨어지지 않도록 갈고리 모양을 통일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그 얼굴 한구석에 살짝 드리워진 정체 모를 어둠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치우비는 느낄 수 있었다. 그날 저녁, 뜻밖의 손님이 치우 형제를 찾아왔다. 바로 여전히 썩는 냄새와 음산한 표정의 비울걸이었다. 비울걸이 킬킬거리며 거침없이 막사 안으로 들어서자 치우천과 치우비는 깜짝 놀랐다. “비울걸!” “우리 부족장께서 뭔 고양이새끼를 잡으러 간다며? 그래서 내 할 일도 없고 해서 와봤지, 히히.......” “잘 오셨소! 무라님이 제때 도착한 모양이구려. 치베와 보돈차르는?” “무라에게서 자네 말을 전해 듣고 급히 달려 나갔지. 안 그래도 우리 역시 키탄족이 이상하다는 소문은 들어 알고 있던 참이었어. 그러나 그 뭐야, 그 소같이 생긴 미련한...... 야율뭐라든가하는놈 집이 뒤집힌 것은 몰랐지. 치베놈도 급히 달려 나가더군. 키타야 족장과 구르 부족장도 같이 갔어. 씨름꾼 보챠두도 갔고.” 치우비는 약간 걱정스러운 투로 물었다. “다 나가면 작은 주신에는 누가 남아 지키죠?” “염려 마라. 리미와 마냥, 싱카 등등이 지키고 있으니까. 그나저나 우리 부족장, 내 반가운 사람하고 같이 왔다네.” “반가운 사람이라고요?” 치우천의 말이 끝나자마자 누군가가 막사의 휘장을 젖히며 안으로 들어섰다. 바로 소녀였다. 치우천은 놀라면서도 반가워서 외쳤다. “소녀! 당신이 왔구려! 헌데 여긴 어떻게......” “보고 싶어서 온 것이지요. 신시에 가시더니 저는 아예 잊어버리셨나요?” 소녀가 곱게 눈을 흘기며 웃자 치우천은 허허 마주 웃어 보였다. “그럴 리가 있소? 헌데 우리는 지금 위험한 싸움을 하러 가는 길인데.......” “아무리 그래도 너무 오래 못 보았으니 그렇지요 그동안 제 생각은 안 했던 것 같군요?” 치우비는 돌연 억지스러운 웃음을 과장되게 터뜨렸다. 치우천은 눈치 없는 아우에게 눈을 한 번 흘기고는 소녀에게 말했다. “그럴 리가 있소? 주신에 너무 많은 일이 생겨서 정신이 없었소. 이번 싸움만 잘되고 나면 다같이 신시로 들어갈 수 있을 거요.” 눈치 빠른 소녀는 치우비의 당황해하는 웃음소리를 듣고 뭔가 좀 이상하게 여기는 듯했다. 치우천 역시 조금 당황했으나 내색은 전혀 하지 않았다. ‘내가 맥달 생각을 좀 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나는 그녀와 아무런 일도 없었다. 다만 가엾고 아깝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런데 저 바보 녀석은 왜 눈치도 없이........’ 치우천은 얼른 생각을 거두고 소녀를 따뜻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좌우간 여기까지 오느라 퍽 고생했겠소. 너무 반갑소.” “고생은요, 뭘. 비울걸님이 주술을 써서 단숨에 날아온걸요. 하루밖에 안 걸렸어요.” “자네는 쉬웠겠지만 나는 힘들어 죽을 맛이었어. 이봐, 부족장, 내 당신 마누라를 옮겨오느라 힘들어 죽겠으니 어서 술이나 좀 내. 주신의 좋은 술 말야!” “제가 드립죠.” 치우비는 난처하던 차에 잘됐구나 하고 비울걸을 끌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두 사람만 남게 되자 소녀는 환하게 웃으면서도 묘한 눈빛으로 치우천을 응시했다. 길을 떠나면서도 적당히 단장한 소녀의 얼굴과 몸매는 여전히 눈부실 만큼 화사했다. “ 정말, 신시에서 아무 일도 없었어요?” “ 야 많았지. 별일이 다 일어났었소. 그 때문에 싸우러 가는 것 아니겠소?” “ 무라한테 이야기는 대강 들었어요. 그런 싸움 일 같은 것 말고요.” “싸움 일말고야 무슨 별일이 있겠소?” “괜스레 시치미 떼지 마세요. 저를 놀리려는 거죠? 아버님은 뵈었어요, 뵙지 못했어요,l 도련님 눈치를 보니 아무래도 좀 이상한데.” 그때서야 치우천은 치우비가 당황한 것이 맥달 때문이 아니라 아버지 치우우레 때문이었음을 깨달았다. 치우우레는 소녀 같은 외지사람을 큰며느리로 삼을 수는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l 그제야 치우천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내가 왜 이러지? 너무도 당연한 생각조차 까맣게 잊고 맥달 생각만 하다니. 내가 맥달에게 너무 신경을 쓰는 것 같구나. 그런데 이 사람에게 그 일을 어찌 말한담. 나중에 공을 세우고 아버님을 설득해보려 했는데, 이렇게 들이닥치다니! 거짓말을 할 수도 없고 어쩐다?’ 치우천이 당황해하며 아무 말이 없자 소녀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혹시...... 일이 잘못되었나요? 주신 한웅님 때문에요?” “우리 나중에 이야기하면 안 되겠소?” “싫어요! 뭔가 잘못되었군요! 지금 말해 봐요!” “아........” 치우천은 한숨을 한 번 내쉰 다음 천천히 말했다. “정말 당신에게 낯을 들 수 없구려.” 그러면서 치우천은 아버지 치우우레의 말을 솔직하게 그대로 전해주었다. 소녀는 처음에는 치우천을 마주보다가 차츰 고개를 돌린 채 그 이야기를 조용히 들었다. 그러다가 치우우레의 말을 치우천이 전할 때부터는 소녀는 손톱을 조금씩 물어뜯기 시작했다. 치우천의 힘 겨운 듯한 목소리 사이로 소녀가 손톱을 물어뜯는 소리가 작게 파고 들어왔다. 그 소리가 들려올 적마다 치우천은 신경이 날카로워졌지만 꾹 참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 이상하게 정말 힘이 드는 일이었다. 눈앞의 부인은 비록 집에서 인정받지는 못했어도 자신이 가장 사랑하고 아끼던, 더구나 무엇 하나 흠잡을 데 없는 온순하고 아름다우며 매혹적인 여인이 아닌가. 그런 여인에게 이런 말을 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이렇듯 왜소하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치우천이 정말 힘겹게 아버지의 이아기를 다 전했을 때에도 소녀는 여전히 무심한 듯, 시선을 다른 곳에 둔 채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정말 면목 없는 일이오. 허나 내가 공을 세운 후 아버님을 잘 설득해보리다. 그러니 염려 마시오. 나는 절대 다른 여자를 생각하지.......” 치우천은 말하면서 소녀에게로 고개를 돌리다가 흠칫했다. 소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손톱을 물어뜯다 못해 자신의 손가락 끝을 물어뜯어서 이미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소녀는 조금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듯,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치우천은 놀라서 급히 소녀의 손목을 잡았다. “그만하시오 손가락을 다쳤.......” 치우천이 손목을 잡는 순간, 소녀는 사나운 기세로 치우천의 손을 획 뿌리쳤다. 치우천은 깜짝 놀랐다. 소녀는 지금껏 몇 년이나 같이 살면서도 한 번도 자신에게 화를 내거나 성질을 부린 적이 없었다. 그런 소녀의 행동이 너무도 뜻밖이라 치우천은 몹시 당황했다. 그 순간, 치우천은 이글거리며 불타오를 듯 빛나는 소녀의 눈빛을 보았다. 소녀가 그런 적의와 증오가 넘치는 눈빛을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놀란 치우천이 눈을 씻고 다시 보자, 소녀의 그런 눈빛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소녀는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말했다. “그래서....... 그래서 당신은 아버님의 말을 그대로 따른단 말인가요? 나를 버린다고요?” “누가 당신을 버린다 했소? 아버님은 내가 나중에 잘 설득한다고 하지 않았소?” 소녀는 구슬프게 흐느끼며 말했다. “하지만 그럴 거면 그때는 왜 설득하지 못했지요? 이제 저에게 싫증이 나셨나요? 저 하나로는 부족한가요? 다른 예쁜 계집 생각이라도 나던가요?” “그게 무슨 소리요? 그럴 리가 있소?” 소녀는 돌연 치우천을 와락 껴안았다. 그러면서 치우천에게 울며 말했다. “저는 카린의 소녀예요 저는 천님 때문에 부족도 자매도 키워주신 쑤앙마이의 은혜도 내 자존심마저도 다 버렸어요. 저에게는 당신밖에 없어요. 아시죠?” “내가 그것을 왜 모르겠소? 나에게도 당신밖에는......” “천님, 치우천님. 다른 여자는 안 돼요 누구도 다른 여자가 당신을 넘보게 할 수는 없어요. 나를 작은마누라로 삼는다고요? 그러면 큰마누라를 둔다는 것인가요? 나는...... 나는 그것을 절대 참을 수 없어요. 나는 당신 것이에요 그러니 당신도 내 것이에요. 나는 절대로 절대로 당신을 놓칠 수 없어요!” 소녀는 거의 울부짖다시피 외치며 치우천을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치우천은 최후의 말을 듣고 왠지 등골이 오싹해졌으나 곧 소녀의 등을 두드리며 달랬다. “나는 다른 여자는 모르오. 관심도 없소. 그런 염려일랑 하지 마시오. 그렇군. 아버님이 아무리 우기셔도, 내가 마누라를 얻지 않으면 그뿐 아니오? 나는 당신을 얻은 것만으로도 고마워서 몸 둘 바를 모른다오.” 치우천이 다정하게 말하자 소녀는 곧 애써 눈물을 닦으며 치우천에게서 떨어져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제가 좀 못난 꼴을 보였지요? 하지만.......” 소녀의 미소는 정말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웠다. 치우천은 웃으며 소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하나도 못나지 않소. 되레 눈이 부시오. 몇 년이나 보아왔어도 볼 때마다 더 예뻐지는 것 같구려.” “내가 늙어 쭈그렁 할망구가 되어도 그런 말이 나올까요?” “당신은 늙어 할망구가 되어도 너무도 고운 할망구...... 아니, 마나님이 될 것이오, 하하.” 치우천이 우스갯소리를 하자 소녀도 겨우 기분이 풀린 듯 마주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가 소녀는 미소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여자 생각은 해서는 안 돼요 제가 전에 한 말이 있지요? 카린 여자들은 마음이 굳세어서 결코 배신하는 걸 용서하지 않는다고요 저는 그중 더 마음이 굳센 편이고요” 치우천은 돌연 등골이 오싹해졌다. 여전히 곱고 아리따운 모습의 소녀였으나 이상하게도 한기가 서린 것 같아 보였고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치우천은 애써 미소를 지으며 억지로 대답했다. “잘 알고 있소 그렇게 딱 잘라 말하니 더 멋지구려.” 소녀는 다시 유순하고 조용한 모습으로 치우천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잊지 않으시면 되었어요. 내가 좀 무례했던 것 같네요.” "우리는 이미 부부사이인데 뭐가 무례요 다른 집은 머리끄덩이를 잡고 싸움질하면서도 잘만 산다는데.“ 치우천은 우스갯소리를 했으나 마음은 몹시 무거웠다 소녀의 모습도 예전 같아 보이지 않았다 맑은 물에 비친 모습이 물결이 흔들리는데 따라 변해 보이듯, 소녀의 모습도 그렇게 일그러져 보이는 것 같았다. 자꾸 옛날 생각이 떠올랐다. ‘이 사람은 마음에 독을 품고 있다. 독한 사람이다.’ 치우천은 자꾸만 마음속에서 누군가 소리를 지르는 것 같아 괴로워 견딜 수 없었다. ‘아니다. 이 사람은 나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린 가련한 여자다. 나만을 사랑하고, 내가 사랑하는 여자일 뿐이다.’ 애써 되받아 마음속으로 소리를 질러보았지만, 그 소리는 마음을 시원하게 울려주지 못했다. 축축한 앙금 같은 것이 마음에 서리는 것 같았다. ‘내가 왜 이러지? 내가 왜......’ 치우천은 괴로웠다. 아까 손목을 뿌리치면서 한순간 보인 소녀의 무서운 눈빛이 아무리 애를 써도 잊혀지지 않았다 정말 무서운 눈빛이었다. 치우천의 마음에서 또 자신의 목소리가 소리쳤다. ‘이 여자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건 네가 아니다. 스스로 버렸다고 생각한 그녀의 자존심일 뿐이야!’ ‘아니다! 아냐!’ 치우천은 안간힘을 다해 자신에게 술을 따르는 소녀에게 웃는 얼굴을 지어 보이고 있었지만, 마음은 이미 산산이 갈라져서 부서질 것 같았다 단 한 번 힐끗 본 그 눈빛이 왜 이리 마·음에 걸리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너무도 괴로웠다. 그날 밤, 치우천은 술을 많이 마신 척하며 그냥 쓰러져버렸다. 소녀는 실망스러운 눈빛으로 그 옆에서 가만히 잠을 청했다. 둘 다 자는 것 같았지만 실은 둘 다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다시 만난 번개범 마구 비명을 지르는 것만 같은 노랫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온몸에 갖가지 칠을 하고 문신을 새긴 반 벌거숭이의 사람들이 미친 듯이 춤을 추었다. 그것은 춤이라기보다는 발작과 더 흡사했다. 그런 미친 듯한 춤판 가운데에는 커다란 불이 이글이글 불타오르고 있었으며, 그 중간에는 사람이 몇 명은 들어갈 듯한 커다란 토기 단지가 있었다. 단지에는 물이 끓고 있었고 야릇한 안개 같은 것이 계속 피어올랐다. 그 단지 위에는 두 사람의 남녀가 막대기에 양팔을 묶인 채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춤추는 사람들 너머로는 많은 수의 전사들이 돌도끼와 창으로 땅을 두들겨대며 연신 비명과 같은 고함소리를 질러댔다. 그들의 앞에는 이미 사지가 잘린 사람들의 시체가 즐비했고 피가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어두운 밤하늘에 걸린 핏빛 달이 그런 광란의 현장을 묵묵히 비쳐주고 있었다. 갖가지 화려한 새털과 가죽, 뼈다귀 같은 것을 몸에 주렁주렁 걸친, 음산한 분위기의 덩치 큰 남자가 높이 세운 흙더미 위에 팔짱을 끼고 서서 광적인 춤을 보고 있다가 이윽고 두 팔을 높이 치켜들며 하늘을 향해 뭐라고 소리를 질러댔다. 그러자 춤추던 자들이나, 무기로 땅을 두들겨대던 자들 모두가 동시에 하늘을 향해 똑같은 소리를 질러댔다. 그것은 물론 식인종이라는 가리족이었다. 그들은 이제 막 묶여 있던 두 명의 제물을 끌어내리기 시작했다. 이미 심한 싸움을 겪었는지 기절한 상태인 두 사람의 남녀는 바로 야율쿠리와 초초룬이었다. 가리족의 족장은 두 사람이 끌어내려지자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마구 질러댔다. 다른 가리족들도 두 사람에게 원한 섞인 눈빛을 보내며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야율쿠리와 초초룬은 번개범을 잡으려다 가리족과 맞닥뜨려서 둘이서 수십 명의 가리족을 해치우며 분전하다 잡힌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더욱 참혹한 형벌이 내려질 터였다. 나무에서 끌어내려진 야율쿠리는 정신을 간신히 차리고는 눈을 뜨자마자 가리족들을 향해 침을 뱉었다. 그러자 몇 명의 가리족이 보기만 해도 끔찍한 가시가 잔뜩 돋힌 채찍을 들고 야율쿠리를 후려치려 했다. 그러나 야율쿠리는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마구 외쳐댔다. “죽일 테면 죽여봐라! 더러운 놈들아! 너희가 날 어떻게 죽여도 난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다!” 막 야율쿠리를 후려치려던 가리족은 손을 치켜 올린 순간 멈칫하더니 그대로 푹 쓰러져버렸다. 깜짝 놀란 다른 가리족들이 보니 그자의 머리에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이 꿰어져 있었다. 그와 동시에 돌연 사방에서 외침소리가 들려오면서 화살이 날아들었다. 그럴 줄은 꿈에도 모르고 춤을 추던 자들은 화살에 맞아 픽픽 그 자리에 쓰러져 갔다. 커다란 주걱으로 단지를 젓던 자도 머리통이 화살에 꿰인 채 단지의 끓는 물에 빠져버렸다. “모조리 쳐라!” 밤하늘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소리를 지르는 것은 치우천이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치우천만이 아니라 무기를 휘두르며 달려드는 전사들의 눈에도 전부 핏발이 섰다. 사람을 잡아먹는 자들에 대한 맹목적인 분노는 작은 주신의 전사건 미아우족이건, 용병들이건 똑같았다. 그들은 악귀 같은 표정으로 춤을 추고 있던 자들을 닥치는 대로 학살했다. 내려치는 칼과 도끼에는 추호의 망설임도 없었다. 가리족들은 급히 야율쿠리와 아직도 정신을 잃고 있는 초초룬을 쳐 죽이려 했다. 야율쿠리는 꽁꽁 묶여 있었지만 최후로 남은 힘을 모아 가리족들 의 배를 들이받으며 마구 반항했다. 그때 누군가가 무섭게 달려들면서 손을 휘젓자 네 명의 가리족의 머리가 동시에 쪼개지며 날아가 버렸다. 그 사람은 바로 치우비였다. “야율쿠리!” “치우비!” 둘이 동시에 부르짖었다 치우비는 급히 야율쿠리를 묶은 밧줄을 풀려 했으나 가리족 두 명이 창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치우비는 한손에는 커다란 도끼를, 한 손에는 번쩍거리는 꼬불꼬불한 단검을 들고 있었다 치우비가 동시에 양 손을 휘두르자 달려들던 한 명의 가리족은 도끼에 허리부터 두 동강이가 났고 다른 한 명은 머리가 세로로 둘로 확 갈라진 채 쓰러졌다. 치우비가 급히 단검을 휘젓자 야율쿠리의 몸을 묶은 줄이 단숨에 끊어졌다. 경황이 없는 판국이었지만 그 와중에도 단검이 너무도 날카로운 것을 보고 야율쿠리는 놀랐다. 치우비는 또 다른 가리족 한 명을 냅다 발로 차서 허리를 분질러 버리고는 외쳤다 “뛸 수 있어?” 야율쿠리는 급히 일어나며 외쳤다. “물론!” 그러면서 야율쿠리는 분노의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던 한 명의 가리족을 나꿔 채서 팔로 목을 감았다. 우두둑 소리와 함께 그자는 눈이 비어져 나오며 목이 부러져 즉사했다. 야율쿠리는 크게 늑대처럼 울부짖은 후 외쳤다. “뛸 수 있지만, 뛰지 않는다! 이놈들을 다 죽일 거다!” 야율쿠리는 맨손이었으나 분노에 가득 차서 무기를 집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야율쿠리도 보기 드문 장사 중 한 명이었으며 체구가 크고 특히 손발이 길었다. 야율쿠리가 손발을 휘두를 때마다 한 명씩의 가리족이 뼈 부러지는 소리를 내며 나뒹굴었다. 그때 수십 명의 가리족들이 야율쿠리와 치우비를 향해 일제히 창을 던지려 했다. 그러나 알한이 키보다도 더 긴 몽둥이를 휘두르며 그 복판에 뛰어들었다. 그와 동시에 알한이 몽둥이를 등에 지듯 하면서 무서운 속도로 돌리자 와장창 소리가 정신없이 울려 퍼지면서 순식간에 그 십여 명의 가리족이 피떡이 되어 나뒹굴었다. 알한은 다시 날렵하게 몽둥이를 짚고 길게 몸을 날리더니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초초룬을 들쳐 업고 뛰기 시작했다. 그러자 치우비도 외쳤다. “야율쿠리! 일단 물러서자! 가리족의 수가 생각보다 많다!” 그러자 야율쿠리는 다시 한 번 늑대처럼 울부짖더니 외쳤다. “난 안 간다!” 그러면서 야율쿠리는 부글부글 끓고 있는 큰 단지를 냅다 발로 찼다. 우당탕 소리와 함께 커다란 단지는 엎어지고 안에 든 것이 끓는 물과 함께 사방에 튀었다. 그 안에서 끓고 있던 것은 조각조각 잘라진 사람들의 팔과 다리, 그리고 머리였다. 치우비는 그것을 보는 순간, 속이 뒤집히면서 동시에 눈에서 불길이 솟았다. 야율쿠리는 미친 듯이 고함을 질렀다. “이게 내 부하들이다! 이놈들이......!” 가리족과 싸우던 용병들과 작은 주신의 전사들도 그것을 보았다. 몇몇은 싸움의 와중에서도 참지 못하고 칼을 휘두르며 토악질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을 보는 순간 그들 모두는 무서운 적의에 불타올랐다. 가리족이 야만적인 식인종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고 그들에 대한 적의도 있었다. 그러나 참혹한 현장을 직접 본 것과 말로만 들은 것은 천지 차이였다. 모든 전사들은 이성을 잃고 무섭게 무기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부루벼락과 쇠돌이 등도 미친 듯이 무기를 휘둘러댔다. 특히 부루벼락의 채찍은 뱀처럼 무섭게 파고들며 가리족들의 몸을 절단 내었다. 용병들은 의외로 더더욱 분노했다. 용병들은 거친 싸움에서 살아남은 잔혹한 자들이어서 그들이 분노하자 그 광기는 가리족마저도 압도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가리족들을 죽이고, 죽은 시체마저도 마구 내리쳐 난도질을 치기 시작했다. 약간 떨어진 곳에서 스름이, 비울걸과 함께 그런 광경을 보고 있던 치우천이 다급하게 외쳤다. 소녀는 울라트와 함께 막사에 머물러 있었다. “그래서는 안 된다! 정신들 차렷! 차오스! 차오스!” 그러나 차오스마저도 이미 이성을 잃고 닥치는 대로 가리족의 머리통을 쪼개고 있었다. 치우비마저도 미친 듯 날뛰며 평소 자제하던 힘을 있는 대로 끌어내고 있었다. 치우비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힘을 있는 대로 쓰자 정말 무시무시했다. 주먹 한 방에 머리가 수박처럼 박살이 나고, 한 번 손짓에 목이 부러지다 못해 머리가 떨어져 나가버리기도 했다. 치우천은 다급하게 외쳤다. “정신들 차렷! 줄을 맞추고, 대열을 지키란 말야.” 그때 알한이 초초룬을 업고 돌아오자 치우천은 급히 초초룬을 스름이에게 넘기며 외쳤다. “알한님! 차오스를 한 대 쳐서라도 정신이 들게 해주시오! 나는 아우를.......” 알한은 퍽 침착한 편이라 이성을 잃지 않고 있었으나 그런 그도 눈에 핏발이 선 채 씨근거리고 있었다. 알한도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끼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왜 그러시는 겁니까? 모두 잘 싸우고 있잖습니까?” 고개를 마구 저으며 치우천이 외쳤다. “잊었소? 우리가 싸울 것은 가리족이 아니오! 바로 신수 번개범이오! 이런 엉망인 상태에서 번개범이 나타나면, 모두 끝장이란 말이오!” 치우천의 전사들은 모두가 무서운 용맹을 발휘하고 있었으나 이미 그들은 군대가 아니었다. 제각각 분노에 미친 듯 날뛰는 하나하나의 개인에 불과했다. 치우천은 뛰어가면서도 목이 터져라 외쳤다. “뭉쳐라! 뭉쳐야 한다! 흩어지면 안 된다!” 그때 길고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다른 전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급히 도망치던 가리족의 우두머리가 분 것이었다. 순간 갑자기 맑았던 밤하늘에 자욱한 안개 같은 것이 끼면서 돌연 우르릉거리는 천둥소리가 들렸다. 미친 듯 날뛰는 전사들 쪽으로 달려가던 치우천이 놀라서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번개범......!” 순간 치우천은 전사들 쪽으로 다시 달려들며 외쳤다. “줄! 줄을 지어라! 번개범이 온단 말이다!” 치우천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오랜 훈련을 받아온 작은 주신의 전사들은 그나마 멈칫했다. 그들은 곧 놀라며 급히 산산조각으로 부서진 가리족의 시체들과 도망치는 자들에게서 손을 떼고 한편으로 몰려서기 시작했다. 그러나 용병들은 제대로 통제가 되지 않았다. 이미 용병들 중 반수 이상이 흥분하여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는 가리족들의 뒤를 쫓아 여기저기 흩어져버렸다. 그것은 미아우족도 마찬가지였다. 유쌍과 몇 사람만이 구역질을 참지 못해 엎드려 있던 덕에 남아 있었을 뿐, 대부분의 전사들은 분노에 미쳐서 가리족의 뒤를 쫓아 흩어진 다음이었다. 치우천은 급히 다시 소리쳤다. “작은 주신의 전사들아! 너희만이라도 모여라. 남은 사람 모두 칼질을 그만두고 한데 모엿! 신수가 온다! 번개범이 온단 말이다!” 치우천이 필사적으로 외치자 전사들은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리며 모여서 맞아 싸울 준비를 시작했다. 치우비와 부루벼락, 쇠돌이도 정신을 좀 차렸고 알한은 차오스의 따귀를 쳐서 정신이 들게 한 다음 끌고 오다시피 했다. 알한이 마구 화를 냈다. “네 잘난 용병들 좀 봐라! 저게 군대냐? 네가 대장 맞느냐? 다 흩어져 버렸잖느냐? 너희 때문에 우리는 더 위험해졌다! 어떻게 책임질 거냐?” 그러나 그럴 사이도 없이 불어오는 바람이 점점 심상치 않게 거세지며 사방에서 우르릉거리는 천둥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몇 해 전, 한웅의 가마가 습격을 받을 때와 똑같았다. 치우천은 이를 갈며 외쳤다. “제기랄! 흩어지지만 않았어도 그러나 할 수 없다! 모두 죽을 각오를 해라!” 신수를 한 번 상대해본 작은 주신의 전사들은 그나마 약간 얼굴이 해쓱해졌을 뿐 떨지 않았으나, 신수를 처음 보는 미아우의 남은 전사들이나 용병들은 몹시 긴장하여 후들거리고 있었다. 밤하늘을 매섭게 찢는 듯한 바람이 점점 거세게 몰아치면서 저만치 앞의 나무들이 갑자기 와르르 부러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때 치우천이 커다랗게 소리쳤다. “스름이! 비울걸! 준비하라!” 치우비도 이를 갈며 외쳤다. “오늘 끝장을 낸다! 어머니의 원수! 한웅님의 원수!” 곧 무서운 회오리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번개범이 다가오는 것이 분명했다. 치우천은 큰 소리로 외쳤다. “갈고리를 준비하라! 기회는 두 번 다시없다!” 작은 주신의 전사들 모두가 일제히 갈고리를 꺼내들었다. 용병들과 미아우의 남은 전사들은 멍하니 있다가 작은 주신 전사들이 갈고리를 꺼내드는 모습을 보고는 주섬주섬 갈고리를 꺼내들었다. 부루벼락이 껄껄 웃으며 호기롭게 외쳤다. “오늘 한 판 해보는 거다!” 쇠돌이도 사기를 북돋우려고 크게 외쳤다. “신수라고 별거냐? 치면 죽는다!” “나를 잘 보아라! 나는.....” 야율쿠리 역시 혼신의 힘을 다해 소리치다가 돌연 눈을 까뒤집으며 그 자리에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 극심한 고통을 이기지 못해 탈진해버린 것이다. 치우천은 급히 야율쿠리를 초초룬과 함께 스름이 곁으로 옮기게 했다. 이윽고 치우천의 이백도 채 안 되는 전사들 앞에서 땅이 불쑥 솟구쳐 올라오더니 서서히 형체를 갖추어가기 시작했다. 용병들과 미아우족들은 놀라서 기겁을 했으나 알한이 큰 소리로 외쳤다. “우리편이다! 도깨비 왕 비울걸님의 땅 도깨비다! 이런 든든한 우리편이 있으니 겁먹을 것 없다!” 비울걸이 불러낸 땅 도깨비는 모두 세 마리였다. 비록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비울걸 역시 긴장한 것이 틀림없었다. 한 마리도 불러내기 힘들다는 땅 도깨비를 한꺼번에 세 마리나 불러내는 일은 이제껏 없었다. 거대한 체구의 땅 도깨비들이 나타나 ‘우우우’ 하고 육중한 고함을 지르자 치우천의 전사들도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그와 동시에 무시무시한 회오리바람이 나무들을 우르르 쓰러뜨리며 무서운 기세로 불어 닥쳤다. 너무도 무서운 기세라서 눈조차 뜰 수 없었다. 순간 세 마리의 땅 도개비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그 회오리바람으로 뛰어들었다. 땅이 갈라지고 하늘이 뒤집히는 것 같은 요란한 굉음과 함께 한 마리의 땅 도깨비가 회오리바람에서 튕겨 나오며 부서져 버리자 사방으로 흙덩이가 튀었다. 그러나 나머지 두 마리의 땅 도깨비는 거대한 회오리바람을 어깨로 밀어붙이고 있었다. 회오리바람은 땅 도깨비에 막혀 나아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잠시나마 못 박혀 버렸다. “막았다!” 치우비는 크게 환호성을 지르며 제일 먼저 훌쩍 앞으로 달려나가며 외쳤다. “나가라!” 그와 동시에 부루벼락과 쇠돌이, 알한도 비명 같은 고함을 지르면서 뛰쳐나갔다. “와!” 그 뒤를 이어 이백 명의 전사들이 갈고리를 휘두르며 일제히 달려 나갔다. 용기 있게 뛰쳐나간 사람도 있고, 멍하니 넋을 잃고 있다가 덩달아 달려 나간 사람도 있었으며, 죽기 아니면 살기라는 식으로 악을 쓰며 달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때 회오리바람이 사라지면서 번개범이 거대한 형체를 드러냈다. 거대하기 짝이 없는 땅 도깨비마저도 번개범에 비하면 아이 같았다. 달려가던 전사들은 번개범의 아름드리 나무만한 무시무시한 이빨과 불덩이 같은 눈, 그리고 어마어마한 덩치를 보고 비명을 질러댔다. 그러나 너무도 커다란 공포 때문에 감히 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모두가 죽기 살기로 달리고 있었다. 순간, 번개범이 거대한 이빨로 이미 밖으로 튕겨 나와 있던 땅 도깨비의 어깨를 찍어버렸다. 땅 도깨비의 몸이 반으로 갈라지며 우르르 무너지는 순간, 다른 땅 도깨비가 주먹을 휘둘러 번개범의 아래턱을 후려갈겼다. 그리고 나머지 땅 도깨비는 필사적으로 번개범의 목을 얼싸안고 매달렸다. 물거나 할퀼 수가 없게 되고, 조그마한 사람들이 잔뜩 몰려들자 번개범은 눈빛을 무섭게 빛냈다. 그러자 마른하늘에서 무서운 번갯불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땅에 내리꽂히기 시작했다. 번개범이 몸을 보호하려고 벼락을 때린 것이다. 번개 한 줄기가 달려오던 사람들 사이에서 작렬하자 일곱 명이나 되는 전사들이 한 방에 숯덩이가 된 채 사방으로 터져 나가버렸다. 시체조차 찾을 수 없는 참혹한 죽음이었다. 게다가 스무 명도 더 되는 전사들이 벼락을 맞은 충격 때문에 쓰러져 일어나지 못했다. 번개범의 벼락은 실로 가공할 만한 것이었다. “스름이님! 어서!” 치우천이 외치자 진작부터 저쪽 숲 속에서 머리를 풀고 앉아 힘을 모으던 스름이가 앙칼지게 고함을 질렀다. 다시 한 번 번개범이 여러 줄기의 벼락을 아래로 내리꽂는 순간, 땅에서도 그에 대응하듯 벼락이 쳐 올라 왔다. 허공에서 벼락끼리 충돌하자 무서운 폭음이 일어났고 앞장서서 달리던 몇몇은 그 폭발의 충격파에 휘말려 저만치 나가떨어졌다. 그러나 맨 앞을 달리는 치우비와 쇠돌이는 그 충격에도 밀리지 않고 계속 달렸다. “장하오! 스름이!” 치우천은 자신도 모르게 감탄의 말을 쏟아냈다. 스름이의 주술은 바로 신지울태가 사와라 한웅을 보호하기 위해 썼던 주술과 같았고, 놀랍게도 신지울태의 주술에 비해 결코 약하지 않았다. 아직 젊은 스름이가 그런 대단한 힘을 보이자 치우천은 절로 용기가 나서 크게 외 쳤다. “달려라! 달려!” 마음껏 달릴 수 있었다면 이번에야말로 치우천은 앞장섰을 것이다. 상대는 다름 아닌 어머니의 원수였기 때문이다. 허나 자신은 달릴 수 없는 몸이었고 또 지휘를 해야 했다. 그러니 마음만큼은 누구보다도 초조했다. 치우비는 귀청이 터져나간 것처럼 멍멍하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으며, 술에 잔뜩 취했을 때처럼 눈앞이 몹시 흔들려 보였으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렇게 열심히 달렸으나 아직 번개범에게 단번에 갈고리를 걸 만한 거리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늘님! 안파견님! 어머니! 제게 힘을 주십시오!’ 치우비는 죽을힘을 짜내어 달렸다. 그때 번개범이 다시 한 번 있는 힘을 다해 몸을 떨쳐 땅 도깨비를 떼어냈다. 땅 도깨비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땅에 넘어져 손을 두어 번 버둥거렸으나 번개범이 발을 들어 짓밟아 버리자 산산조각으로 깨진 흙무더기로 변해버렸다. 그것을 먼발치에서 본 스름이가 악을 썼다. “누가 이기나 보자!” 스름이는 이미 너무나 무리한 주술을 써서 코와 입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치우천은 모르고 있었지만 스름이가 신지울태보다 주술력이 강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다만 스름이는 아직 젊은데다가 온화한 신지울태와는 다르게 강단이 있어서 죽으면 죽었지, 조금도 힘을 아끼거나 물러서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스름이가 마지막 힘을 짜내어 다시 주술의 힘을 끌어내자 이번에도 역시 땅에서부터 번개범에게로 벼락이 솟구쳐 올라왔다. 피하고 말고 할 사이도 없었다. 번개범 스스로도 이제껏 수없는 벼락으로 많은 존재들을 박살내었지만, 자신이 벼락을 맞아보기는 처음인 듯했다. 번개범이 무시무시한 비명을 지르는 사이, 가장 앞장선 치우비가 마침내 갈고리가 걸릴 만한 거리까지 달려가는 데 성공했다. “이 야아아아!” 치우비가 있는 힘을 다해 던진 갈고리는 허공을 무섭게 날아가 번개범의 미간에 정확히 꽂혔다. 치우비는 즉시 갈고리를 잡아채며 거기에 매달린 질긴 가죽 끈에 몸을 실었다. 뒤이어 두 번째로 달려든 쇠돌이도 갈고리를 던졌다 그 다음 몇 명의 전사가 다시 갈고리를 던지려는데 번개범이 포효하며 앞발을 휘저었다. 막 가죽 끈에 매달려 몸을 솟구치던 쇠돌이는 간신히 그 앞발을 피했으나 허공에서 몸이 미친 듯이 대롱거리자 비명을 질렀다. 그 거대한 앞발에 맞은 전사들은 그 자리에서 온몸의 뼈가 박살나면서 걸레 같은 형상으로 저 멀리에 처박혀버렸다. 몇 명의 용병들이 공포에 질려서 걸음을 멈추려 하자, 뒤에서 달려들던 차오스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물러서면 어차피 죽는다. 너희는 다 겁쟁이였는가?” 그러면서 차오스는 미친 듯 갈고리를 집어던졌고, 그 갈고리는 번개범의 왼쪽 어깨에 걸렸다. 다시 휘두르는 번개범의 앞발에 차오스가 맞을 것 같자 조금 뒤에서 따라오던 알한이 몸을 던졌다. 아슬아슬하게 차오스를 밀어내 번개범의 앞발을 피하게 한 알한은 차오스가 건 갈고리 줄을 재빨리 잡고 매달렸다. “그건 내 거다!” 차오스가 소리치자 알한은 그 와중에도 웃으면서 되받았다. “이젠 내 거라네.” 차오스는 씩씩거리며 옆의 용병의 갈고리를 빼앗아 다시 집어던졌으나 그 갈고리는 번개범의 이빨에 맞고 튕겨 나왔다. 그때 치우비는 마치 바람에 매달린 연처럼 몸이 흔들리는 와중에도 필사적으로 번개범의 머리 위로 기어 올라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번개범의 머리 위로 올라간 치우비는 커다랗게 기합성을 넣으며 왼손으로 번개범의 이마 털을 잡고 오른손으로 허리에 찼던 도끼를 꺼내들어 마구 번개범의 이마를 내려찍기 시작했다 번개범은 놀라서 고개를 정신없이 흔들어댔다. 치우비는 거대한 번개범이 머리를 휘젓자 어지러워서 멀미가 날 지경이었다. 그러나 치우비는 죽을힘을 다해 번개범의 털을 악착같이 붙잡고 매달리면서도 도끼질을 멈추지 않았다. “죽어라! 죽어! 어머니의 원수! 죽어라!” 번개범의 가죽은 무척 두꺼웠으나 결국 치우비의 마구잡이 도끼질을 이기지 못해 피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번개범은 몹시 당황하여 앞발을 들어 이마를 문질러버리려고 했다. 그것을 보고 치우천은 발을 구르며 커다랗게 소리쳤다. “비야! 피해라! 피해!” 아득하게 들려오는 치우천의 목소리에 눈을 돌린 치우비는 거대한 앞발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보고 기겁을 했다. 치우비는 도끼를 챙길 겨를도 없이 매달린 줄을 한 손으로 잡으며 대뜸 몸을 날려버렸다. 아슬아슬하게 철퍽 하는 소리와 함께 번개범의 앞발은자기의 이마를 찍었고 치우비는 줄에 대롱대롱 거꾸로 매달렸다. 치우비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으나 자신의 눈앞에 번개범의 거대한 눈동자가 있는 것을 보았다. “이놈! 같이 죽자!” 치우비는 처절하게 비명을 지르면서 번개범의 눈으로 몸을 날리며 발을 내뻗었다. 너무도 순식간의 일이라 번개범이 눈을 감기 바로 직전이었다. 치우비의 발이 번개범의 눈을 차고 들어가자 번개범은 미친 듯 포효했다. 그때는 이미 쇠돌이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번개범의 몸 위에 매달리기 시작한 때였다. 많은 사람들이 개미 떼처럼 달라붙어 제각기 몸에 지닌 무기로 여기저기를 찔러대자 번개범은 고통스러워하며 길길이 날뛰었다. 번개범이 제아무리 크다지만 사람들이 온몸을 찔러대는 것은 견디기 힘든 듯했다. 많은 사람들이 갈고리 줄을 놓쳐 떨어지고, 재수 없는 사람은 번개범의 발에 밟혀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납작해져 버렸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죽을힘을 다해 매달렸다. 모두가 죽기 아니면 살기라는 악에 치받쳐 있었다. 치우천은 눈을 빛내며 외쳤다. “되었다! 잡을 수 있다! 조금만 더 힘을 내라!” 그때, 치우천은 번개범의 몸 주위에서 다시 바람이 서서히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 지금까지는 생각대로 일이 잘 풀린 편이었지만, 아직 대비할 수를 찾지 못한 문제가 하나 있었다. 바로 번개범이 회오리로 변하는 것이었다. 제일 우려했던 일이 벌어지려 하자 치우천은 목이 터져라 외쳤다. “비울걸! 스름이! 어떻게 좀 해봐라! 놈이 회오리로 변하려 한다!” 그러나 스름이는 이미 두 번째의 큰 주술을 쓴 탓에 코와 입에서 피를 펑펑 쏟으며 쓰러진 후였다. 비울걸도 세 마리의 땅 도깨비를 불러내고, 또 그 도깨비들이 다 부서져버린지라 자신도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과 피곤함을 느끼고 있던 터였다. 그러나 비울걸은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며 마지막 힘을 짜내어 도깨비불들을 불러냈다. 순식간에 땅에서 솟아오른 도깨비불들은 허공을 휘저으면서 번개범에게로 날아들어 번개범의 눈을 어지럽혔다. 번개범은 치우비에게 한쪽 눈을 찔려 눈을 잘 뜰 수 없는데 뭔가 빛나는 것들이 어지러이 덮쳐오자 회오리로 변하지 못하고 날뛰기만 했다. 치우비는 이를 악물고 다시 한 번 번개범의 눈을 찌르려고 했다. 그러나 치우비가 다시 몸을 날리는 순간 번개범의 커다란 눈꺼풀이 치우비를 덮쳐왔다. 치우비는 번개범의 눈을 다시 한 번 찌르는 데 성공했지만, 그 자신도 번개범의 눈꺼풀에 짓눌려서 끼어 버리고 말았다. 눈꺼풀에 긴 것인데도 몸에 가해지는 압박이 엄청나서 치우비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그때 번개범이 다시 눈을 비비려는 듯 앞발이 치우비 쪽으로 향했다. 거기 휘말리면 제아무리 치우비라도 단박에 으스러질 것 같아 치우천이 비명을 질렀다. 그때 부루벼락이 어디서 났는지 커다란 밧줄을 집어던졌다. 부루벼락은 채찍을 다루는 데 아주 능해서, 던진 밧줄이 허공에서 크게 올가미를 만들면서 번개범의 앞발에 걸렸다. 정말신기에 가까운 묘기였으나 감탄하고 어쩌고 할 사이도 없이 부루벼락은 찢어지게 외쳤다. “모두 매달려!” 부루벼락과 몇몇 전사들, 그리고 치우천까지도 재빨리 죽을힘을 다해 그 밧줄에 매달렸다. 그러나 번개범이 앞발을 눈으로 가져가자 사람들이 와르르 줄에 끌려가며 넘어져 뒹굴었고 줄도 뚝 끊어져버렸다. 물론 그 몇 사람이 번개범의 앞발을 끌어당길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번개범의 앞발이 가는 방향을 약간 비트는 데에는 성공했다. 번개범의 무시무시한 앞발은 치우비가 눌려 있는 눈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철퍽 하며 부딪혔고 그 충격에 번개범은 눈을 번쩍 떴다. 그러자 눈꺼풀에 눌렸던 치우비도 자연스레 풀려나서 땅에 떨어져 내렸다. 상당히 높은 곳에서 떨어진 것이라 치우비는 금세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 온몸 여기저기가 안 아픈 곳이 없었다. 치우천은 넘어져 흙투성이가 되었으나 아우가 일단 목숨을 건지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허나 다음 순간, 비울걸과 도깨비들의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번개범의 온몸에서 회오리가 솟아오르는 것을 보고 치우천은 절망적으로 외쳤다. “모두 떨어져!” 그러나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번개범의 온몸은 다시 한 번 바람으로 에워싸이면서 무섭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는 제아무리 죽을힘을 다해 매달려도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다. 매달렸던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면서 바람에 튕겨나가기 시작했다. 비록 사람들이 분전하여 번개범을 온통 피투성이로 만들었지만, 숨이 끊어질 정도는 아니었다. 회오리바람이 점점 거세짐에 따라 사람들은 마구 떨어져 땅에 처박혔고, 이미 처박혔거나 쓰러져 있던 사람들의 몸은 바람에 밀려 지푸라기처럼 여기저기로 날아갔다 쇠돌이와 알한은 최후의 순간까지 매달리며 계속 번개범을 찔러댔으나 결국은 버텨내지 못하고 떨어져 나갔다. 치우비의 몸이 바람에 밀려가려는 것을 치우천과 부루벼락이 힘을 합해 간신히 붙들었다. 다음 순간 번개범의 거대한 몸은 커다란 회오리가 되어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그리고 화가 치민 번개범의 분노의 상징처럼 무서운 벼락이 다시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쓰러져 신음하던 사람들은 마구잡이로 벼락에 맞아 숯덩이가 되어 박살나기도 하고, 회오리에 휘말려 온몸이 부스러지기도 했다. 어느새 회오리바람은 온 주위를 에워싸서 어디로 몸을 숨기거나 피할 수조차 없었다. 치우천은 이미 너무나 지쳐 눈도 뜨지 못하는 아우의 몸을 있는 힘을 다해 부둥켜안고는 탄식했다. ‘어머니의 원수도 갚지 못하고 여기서 죽는가......?’ 바로 그때 치우비가 가냘픈 소리로 중얼거렸다. “형님...... 피리...... 풀피리....... 맥달님의 말을...... 어서......치우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부루벼락이 외쳐댔다 “천! 아직 저쪽에 틈이 있다! 저리로 일단 피하자! 그러면 빠져나갈 수도 있다!” 과연 부루벼락의 말대로, 회오리는 그들 주위를 빈틈없이 에워싼 것은 아니었다. 한쪽 구석에는 아직 바람이 미치지 않는 틈이 있었다. 치우천은 순간 번민했다. ‘풀피리를 불 것인가, 도망칠 것인가?’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치우천의 마음속에서는 두 가지 목소리가 격렬하게 대립했다. 지금 이 판에 풀피리를 불어서 무엇을 어쩐다는 말인가? 그보다는 지금이라도 틈을 보아 도망쳐야 한다. 회오리가 더 심해지면 정말 죽을 수밖에 없다! 너뿐만 아니라 네 아우도 죽는단 말이다! 곧이어 다른 목소리가 외쳤다. -맥달을 믿어야한다. 맥달의 예언은 네 생각을 앞지른다. 그대로하면 반드시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녀를 믿어야 한다! 앞의 목소리가 또다시 외쳐댔다. -그녀를 어떻게 믿는가? 너는 그녀를 믿지 못했잖은가? 그러자 다른 목소리가 맹렬하게 반격했다. -정말 믿지 못하는가? 치우천! 정말 맥달을 믿지 못하는 것인가? 너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지 않는가? 그녀를 두려워한 것도, 그녀를 질투한 것도 그녀의 능력을 네가 믿었기 때문이 아닌가? 세상에서 그녀의 능력을 가장 확실하게 믿는 사람이 바로 네가 아니었던가? 치우천은 순간 결단을 내렸다. 그는 부루벼락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바닥에서 풀잎 하나를 쥐고는 입에 가져가 풀피리를 불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부루벼락은 어처구니가 없어 눈이 뒤집힐 지경이었다. “천! 미쳤나? 이게 무슨......?” 그러나 더 말할 사이도 없이, 회오리는 이제 그나마 남았던 빈틈마저도 완전히 메운 채 그들을 덮쳐 들어왔다. 그러나 치우천은 이제 생사를 도외시한 채, 조용한 마음으로 풀피리 부는 데에만 점신을 쏟고 있었다. 이상하게 마음이 고요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치우천은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결국 당신을 믿기로 했소, 맥달. 지금 안파견 한님 곁에 계시오? 내 말이 들리시오? 내 피리 소리가 들리시오? 순간 치우천과 부루벼락의 눈앞이 깜깜해지면서, 번개범이 변한 무시무시한 회오리가 바로 그들의 머리 위로 덮쳐들었다. 치우천도 더는 버티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아버리자 무시무시한 폭음이 치우천의 귀를 때렸다. 더 이상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밝혀진 원흉 치우천은 자신도 모르게 감았던 눈을 서서히 떴다. ‘내가 아직 살아 있나? 왜 이리 조용하지? 벌써 안파견 한님의 곁으로 온 것인가?’ 그러나 조심스레 눈을 뜬 치우천은 의외의 광경에 놀라서 입을 딱 벌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에게 덮쳐들던 번개범의 거대한 몸이 바로 눈앞에 나가떨어져 있었다. 회오리로 변하기 전부터 번개범은 비록 온몸이 피로 물들어 있었다 해도 분명 멀쩡했는데, 지금 번개범은 혀를 빼문 채 거의 죽은 것처럼 보였다. 더구나 번개범의 몸은 온통 시커멓게 그슬려 있었고, 모락모락 연기가 솟으며 털이 타는 고약한 냄새가 났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여?” 치우천만이 아니라 막 눈을 뜬 부루벼락도 몹시 놀란 기색이었다. 그때 쿵쿵 하는 묵직한 발걸음소리가 들렸다. 땅이 울릴 정도로 큰 소리였다. 저 건너에 뭔가 있는 것 같았으나 번개범의 산 같은 몸이 앞을 가리고 있어서 보이지 않았다. 치우천은 황급히 반쯤기어서 번개범의 몸이 가리지 않는 곳으로 갔다. 그곳에는 번개범 못지않은 한 마리 거대한 짐승이 당당히 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신수인 맥이었다. “맥!” 그때 치우천의 머리 위에서 무엇인가가 날카롭게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위를 올려다본 치우천은 다시 한 번 깜짝 놀랐다. 온몸에서 불을 내뿜고 있는 거대한 새가 천천히 치우천의 머리 위를 선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것은..... 붕.......?” 그때 맥이 이상하게도 슬픈 듯, 화난 듯한 눈빛으로 조용히 치우천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맑고도 빛나는 눈을 들어 치우천에게 뭔가 의미 있는 듯한 눈짓을 해보였다. 치우천은 얼떨떨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여 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을 수가 없었다. 하늘에서 붕이 서서히 내려앉아 두 발로 성큼성큼 걸어 치우천의 옆으로 왔다. 붕의 몸에는 이미 불이 꺼져 있었는데, 붕은 치우천 옆으로 와서 부리 끝으로 치우천의 등을 약간 떠밀었다. 신수에게도 표정이 있다고 한다면 뭐랄까, 붕은 마치 웃음을 짓거나 어리광을 부리 는 듯한 표정이었다. 치우천은 이 신수들이 왜 이러나 의아해하다가 마침내 깨달았다. ‘그렇구나! 우린 구슬! 이 신수들은 나와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게로구나!’ 치우천은 급히 품안에 넣어두었던 우린 구슬을 꺼냈다. 치우천은 우린 구슬을 손에 제대로 쥐기 전에 먼저 맥에게 보였다. 맥의 눈빛이 아무래도 슬프고도 화가 난 것 같아 자칫 기분을 거스를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러자 맥은 조용히 우아한 긴 코를 끄덕여 보였다. 마침내 치우천은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 우린 구슬을 손에 들었다. 순간 지난번 첸누와 이야기했을 때처럼 복잡하고도 분명한 감정들이 파도처럼 밀려들어왔다. 그러나 맥은 첸누보다 똑똑해서인지, 그때만큼 의사를 전달하기가 힘들지는 않았다. 맥이 다짜고짜 물었다. -내 아이는 어디 있지? 무슨 말입니까? -내 아이 말이다. 내 아이를 보여줘. -당신의 아이라면......? -네가 이름을 지어서 내게서 빼앗아간 내 아이 말이다. 그 예쁘고도 귀여운 아이! -아...... 맥달 말입니까? 맥달의 생각을 하는 순간, 치우천은 맥이 왜 예전부터 자신을 탐탁지 않게 보아왔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맥은 맥달을 완전히 자신의 아이로 생각하고 있었기에 그녀의 마음을 자신에게서 앗아간 치우천을 미워하는 것이었다. 그러나.그 순간 치우천은 맥달의 죽음을 생각하고 말았다. 우린 구슬을 통한 마음의 대화는 감정을 숨기기가 어려웠다. 생각하지 않으면 되지만, 맥달의 이야기가 나오자 그렇지 않아도 치우천의 마음을 내내 어지럽히던 맥달의 죽음이 생각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순간 맥은 꿈틀 하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내 아이가 죽었다고? 그럴 리 없다! 치우천은 슬픈 마음으로 말했다. -그러나..... 사실입니다. -아니다. 그럴 리 없다. 내 아이는 죽을 수 없다. 죽어서는 안 된다! 맥의 비통하고도 놀라는 마음이 치우천의 가슴을 후벼왔다. 치우천은 뭐라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그만큼 맥의 마음이 절실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뭐라 할말이 없군요. 저도..... 저도 정말...... -네가? 흥? 나는 네가 밉다! 맥은 돌연 화를 벌컥 냈다. 마음의 대화라 외치는 것이 들리지 않았지만, 귀가 멍멍할 정도로 소리 지르는 것과 같은 울림이 있었다. -네가 내 아이의 마음을 도둑질해갔다. 내 아이는 항상 너만 생각하고, 네 이야기만 했다. 네가 하늘이 정해준 짝이라고, 세상에서 단 하나, 내 아이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라고 나에게 말했다. 그런데..... 너는 그 아이를 죽게 만들었다고? 너는 대체 뭐 하는 놈이냐? 자부선인께서도 너를 높이 말하시고 내 아이도 너를 대단하다 말해서 나도 억지로 슬픈 것을 눌러 참고 너를 도왔다. 내가 번개범과 싸워준 것이 이것이 두 번째다! 나는 싸움을 좋아하지 않지만, 내 아이의 부탁이라 어쩔 수 없었다! 너 같은 놈을 누가 좋아할 줄 아느냐? 내 아이가 바래서 할 수 없이 싫어하는 싸움까지 했는데! 너는 그 아이를 죽게 놔뒀단 말이냐? 맥의 마음은 숨김이 없었기 때문에 치우천은조금 아까싸움의 경과까지도 알 수 있었다. 번개범은 치우천이 우두머리란 것을 알고 단박에 그를 죽여 분을 풀려고 덤벼들었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번개범은 무방비 상태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 근방에는 이미 맥이 붕과 함께 와 있었다. 이미 오래 전 태산 회의 때부터 맥달은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을 알고 맥과 헤어질 때 맥에게 부탁을 해두었던 것이다. 맥이 계속 외쳤다. -내 아이는 죽지 않았다. 그러나 죽은 것과 마찬가지지 이제 내 아이는 나를 떠났다. 다시는 보지 못한다고 내 아이가 말했었다. 그러나..... 죽을 줄은 몰랐는데..... 정말 몰랐는데...... 치우천의 마음도 울적하기 짝이 없었다. 비록증거는 없었지만 치우천은 맥달을 죽게 만든 자가 틀림없이 신시의 귀족들이며, 그 이유는 자신을 곤란하게 만드는 데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맥달의 죽음은 자신의 탓이라고 번민하던 차였다. 거기에 맥의 마음을 접하고 나니, 자신이 지금껏 맥달에 대해 생각해왔던 것이 모두 오해였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녀는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나를 대해왔던 것이구나. 나는 못난 놈이다. 그런데도 나는 못나게 그녀를 의심하고, 질투했다. 거기다가 결국은 죽게 만들었다. 나는......나는 그녀의 마음을 받아들일 자격이 없었다. 죽어도 얼굴을 들지 못할 것이다......’ 치우천이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자 맥이 불쑥 말했다. -너도 아주 나쁜 놈은 아니구나. 아.....내 아이는 정말 죽었구나. 슬프구나, 슬퍼...... 대체 어찌 그 아이가 죽을 수 있지? 모든 것을 다 아는 아이가...... 치우천은 좀 민망하여 급히 마음을 정리했다. 자신도 모르게 한 생각이 맥에게 전해졌던 것이다. 치우천이 탄식하며 말했다. -모두가 저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저는..... 저는 맥달의 마음을 몰랐습니다. 그리고 받아주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맥달은 모든 앞날을 다 알고 있는데, 그런 일을 당하리란 것을 몰랐을 리 없지요 그러니 그녀의 죽음은 그녀 스스로 받아들인 것이라 봐야 할 겁니다. 그리고 그 책임은..... 나에게 있습니다. 치우천이 침통하게 말하자 맥은 되레 조용히 되받았다. -아...... 하늘이 이렇게 정한 것인지도 모르지. 되었다. 이제 다 지난 일이니 어찌하겠느냐? 너를 더 미워한다고 내 아이가 살아 올 것도 아니고...... -다 내 탓입니다. 어차피 당신이 구해준 목숨이니 화가 풀리지 않으면 도로 거두어 가십시오. 치우천은 진심으로 말했으나 맥은 허탈한 듯 웃었다. -솔직히 그러고 싶다. 그러나 나중에 저 세상에서 내 아이를 무슨 낯으로 대하겠느냐? 내, 다만 한 가지만 말하마. -무엇이든 말씀하십시오. -너는 내 아이를 잊으면 안 된다. 알겠느냐? 내 아이의 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단 말이다. 내 아이가 너 때문에 얼마나 슬퍼하고, 괴로워하고, 또 얼마나 기뻐했는지 아느냐? -무슨 말씀입니까? 맥은 차분히, 슬픈 듯이 말했다. -내 아이는 모든 것을 안다. 그렇게 태어났다. 그 아이는 자기가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서 너 하나뿐이라고 말했었다. 네가 얼마나 대단한 놈인지. 흥! 내가 보기에는 형편없는 놈인데! 그리고 그 아이가 너를 얼마나 생각하는지 종종 내게 말하곤 했었단다. 그러면서도 그 아이는 울었다. 너 때문에 앞으로 그 아이가 얼마나 고통스러워할지, 얼마나 슬픔을 참아야 하고, 앞날을 말하고 싶은 것을 참고 지켜봐야만 하는지 그것까지 다 보였기 때문이다. 너는 그 고통을 알겠느냐? 그 아이는 평생 한 번도 견디기 힘든 고통을, 아니 죽을 때까 지 겪어야 하는 그 모든 고통을 매일매일 모조리 겪어야 하는 아이다. 그런 아이가 불쌍하지도 않느냐? 네가 그 아이에게 얼마나 상처를 주었는지, 네가 그 아이를 알기 전부터 그 아이를 얼마나 눈물짓게 하고 고민하게 했는지 아느냐? 그것은 실로 치우천도 미처 해보지 못했던 생각이었다. 다른 무슨 말보다 일평생의 고통을 매일매일 모조리 겪어야 한다는 맥의 말이 맥달이 했던 말과 어우러져 치우천의 마음을 후벼 파는 것 같았다. 치우천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그러자 맥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너는 이미 다른 여자가 있지? 그 아이는 그것도 알았다. 자기가 어떻게 해도 그렇게 되리라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견디지 못할 일이지만, 그 아이는 견디어내지 않더냐? 너에게 말 한마디 하지 않았겠지. 그 아이는 세상의 모든 고통을 참아내야 하는 것이다 그중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이 네가 주는 고통이었을 것이다...... -그만, 그만하십시오. 치우천은 눈물을 펑펑 쏟으며 자기도 모르게 외쳤다. 그러자 맥은 조용히 말했다. -그래, 너도 괴롭구나. 알았다. 나는 비록 짐승이었고 신수이지만, 자부선인님의 깨우침을 받아 어느 신수보다도 사람의 마음을 잘 안다. 그러나 그런 나도, 남자 여자가 만나 좋아하는 것이 왜 그리 복잡한지는 도저히 알 수가 없구나. 아마 죽는 날까지 도를 닦아도 그것만 은 알 수 없을 것 같구나...... 맥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이내 말을 이었다. 좌우간 내 아이는 죽었고, 너도 뉘우치고 있으니, 네게 걸린 저주도 풀어주도록 하마...... 치우천은 비록 슬픔을 가누지 못했으나 그 말에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제 몸에 걸린 저주요? 그렇다면......? 그 저주는 맥달이 건 것이 아니었느냐고 자연스럽게 생각하자 맥도 그 마음을 읽었는지 한숨을 쉬었다. 그 착한 아이가 네게 어찌 그런 짓을 하겠느냐? 그건 내가 건 것이다. 너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네가 다른 여자들 일로 내 아이를 괴롭힐 것을 알았다. 그래서 다른 여자를 건드리지 못하게 하려고 너에게 그런 수를 부린 것이다. 허나 저는 태산회의 이전부터 그런 저주에 걸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찌...... 맥이 웃으며 말했다. 너는 기억나지 않겠지, 어렸으니까. 이 녀석아,자부선인께서 너를 모르고 계셨을 줄 아느냐? 네가 아주 아기 적부터 자부선인께서는 너를 살펴보고 계셨다. 나도 선인님을 태우고 너희 집에 자주 갔었단다. -하지만 그때는 맥달도 아주 어렸을 것 아닙니까? 어떻게 그것을 그때 알았는지요? -맥달이 앞날을 보고 싶어서 보는 줄 아느냐? 아기 때부터 그녀는 모든 것을 보았다. 그리고 나는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고! 아직도 모르겠느냐? 치우천은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모든 의문이 풀렸다. ‘그랬구나...... 모든 것이 그렇게 된 것이구나. 그러니 나로서는 짐작할 수도 없었구나.’ 치우천의 생각에 이어 맥이 말했다. -그런 것이 바로 하늘의 뜻이란 것이다. 내가 알량하게 수를 부렸다 해도 다 하늘이 정하신 대로였어. 하하, 내 아이를 위해 저주를 걸었는데, 그 때문에 네가 내 아이를 멀리하게 되었다니....... 나도 책임이 없다고는 할 수 없구나...... 참, 할말이 없구나, 할말이 없어! 치우천은 밀려드는 회한과 맥달에 대한 생각으로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해 서 있기조차 힘들었다. 치우천은 그 자리에 천천히 주저앉았다. 그러자 맥이 말했다. -나는 이제 너와는 다시 만나지 않겠다. 내 아이가 죽었다니, 다시는 내가 사람 세상에 나타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제 세상일에 관여하기 싫으니 자부선인님 곁으로나 가야겠다. 허나 내 아이는 전에, 네가 아주 힘든 일에 몇 번 더 휘말리게 된다더구나. 그때를 위해 저 병아리 녀석을 데려왔으니 잘 알아서 해라. 저 바보 같은 병아리를 그럴듯하게 키우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느냐? -병아리요? 붕 말입니까? 그러고 보니 붕은 처음 알에서 나왔을 때보다 많이 자랐고 풍채도 의젓해진 것 같았다. -그렇다. 다른 궁금한 것은 그 녀석과 말해보아라. 나는 이제 너와 이야기하고 싶지 않구나. 녀석, 내 아이를 잊으면 아니 된다. 알겠지? 맥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돌아서서 사라져 갔다. 치우천이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살아남은 전사들이 자신의 뒤에 우르르 모여 있었다. 물론 신수가 두려워치 치우천의 뒤에 숨어 있는 것이기도 했지만, 그들 중에는 신수가 나타나 번개범을 물리친 것을 본 사람이 많았다. 또 그 신수가 치우천과 이야기까지 나누는 듯하자 모두들 치우천은 정말 신수를 부릴 수도 있는 하늘이 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작은 주신 출신 전사들의 얼굴에는 자부심과 자랑스러움이 가득했고 용병이나 미아우족들의 눈에는 경외심과 존경심이 가득했다. 치우천은 그런 눈빛을 받는 것이 퍽 부담스러웠으나 일단 지금은 붕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순서라서 붕을 보면서 우린 구슬을 다시 손에 쥐었다. 그러자 붕이 대뜸 외쳤다. -엄마! 치우천은 놀랍고도 우스워서 말했다. -나는 네 엄마가 아니란다. -엄마 맞아. 알에 있을 때 엄마가 옆에 있었고. 엄마가 먹을 걸 뒀어. 나에게 붕이라는 이름도 줬잖아. 엄마 맞아. 치우천은 약간 어이가 없었다. -알에 있을 때 어떻게 먹이를 주었다는 거야? -난 모르지만 그랬어. 기억 나는걸? 치우천은 잠시 생각이 가다듬었다. ‘전에 분명 마파람의 혼은 이놈의 몸을 떠났는데? 아, 그래도 이 녀석은 마파람의 기억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게로구나.’ 치우천은 그런 사실을 설명하려 했으나 붕이 아직 너무 어려서 그런 분별력도 없었고, 과거의 기억도 뒤죽박죽으로 엉켜 있어서 도무지 설득해볼 수조차 없었다. 붕은 세 살배기 어린아이와 다를 바 없는 아주 천진하고 어린 상태였으니 설득 같은 것이 될 리가 없었다. 치우천은 할 수 없이 설득을 포기하고 조용히 물었다. -맥이 나에게 해주라는 말이 있었느냐? -응. 저 고양이 놈하고도 이야길 해보랬어. -번개범과? -응 -죽지 않았니? -죽지 않았어. 맥 엄마가 들이받고 내가 불로 태웠지만 신수는 그리 쉽게 안 죽어. 맥도 엄마냐? -날 키워주고 가르쳐 줬는걸? 그러니까 엄마잖아? ‘이 녀석은 아무나 다 엄마라고 하는구나. 굳이 나를 엄마로 부르건 말건 신경 쓸 것 없겠다.’ 마음이 좀 가벼워진 치우천은 붕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도와질서 고맙구나. 너는 참 착하구나. 붕은 기분이 좋은지 으쓱거렸다. -그래, 난 착해, 붕은 착해. -그러면 이제 가보렴. 도와저서 고마웠다. -가야 해? 나랑 놀면 안 돼? 치우천은 난처해졌다. -놀다니? 나는 그릴 수가 없어. 바쁘단다. -또 싸우러 가야 해? 엄마는 싸움만 해? 싸우는 게 좋아? 치우천은 한숨을 내쉬었다. =싸우는 게 좋을 리야 있느냐? 아마 세상에서 싸움을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 나일걸? 그러나 하늘이 자꾸 나를 싸우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드시는구나. 그래서 참 힘들어...... 그러자 붕은 재잘거렸다. -내가 싸워줄까? 붕이 다 해치워줄게. 그깟 사람들은 상대도 안돼. 난 날 수도 있고 불태워 버릴 수도 있으니 어느 부족이든지 다 내가 없애버려 줄게..... 철없이 말하는 붕에게 치우천은 화를 냈다. -그런 짓은 하면 안 된다! -왜 안 돼? 엄마가 싸우느라 고생하는 거 싫어. 내가 쉽게 다 죽여줄 수 있는데..... 치우천은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붕아, 그건 안 된다. 사람이 할 일은 사람이 스스로 해야 하는 법이란다. 사람은 목숨을 버리고 피를 흘리며 싸운다. 그리고 피를 흘리거나 죽는 걸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피를 흘리지 않거나 죽지 않고는 얻을 수 없는 것도 있는 법이란다. -붕, 모르겠어. 잘 모르겠어. 나랑 안 놀 거야? 붕이 풀죽은 듯이 묻자 치우천은 붕이 측은해졌다. 치우천은 다시 자상한 태도로 대답했다. -붕, 나는 네 엄마지만 너를 키워줄 수가 없어. 맥 엄마처럼도 해줄 수가 없단다. 난 너무 작은 엄마잖니 안 그래? 치우천이 애써 우스갯소리를 하자 붕은 깔깔거렸다. -맞아. 작은 엄마야. 아주 작은 엄마. 그래도 난 좋은데..... -붕아, 마음만이라도 고맙구나. 너는 좋은 아이구나. 너는 진짜 엄마가 있어. 내 언젠가는 진짜 엄마를 찾아줄게. -진짜 엄마가 뭐야? -그러니까...... 너와 똑같이 생기고 똑같이 날 수 있고 똑같이 살 수 있는 그런 엄마 말야. 알겠니? -와! 정말 그런 엄마도 있어? 정말 찾아줄 거야? -그래, 꼭 찾아보마. -알았어 붕, 너무 좋아. 진짜 엄마 보고 싶어. 하지만 엄마도 좋아. 붕은 마구 떠들어대면서 날개를 펄럭거리더니 돌연 무엇을 발견했는지 까마득히 날아올라 이내 사라져버렸다. 치우천은 맥과 이야기하고 또 철없는 붕과 이야기하니 골치가 다 지끈거릴 지경이었다. 그러나 아직 감정의 앙금이 가장 많은 원수, 번개범이 남아 있었다. 치우천은 몇 번 심호흡을 한 다음, 조용히 번개범 앞으로 다가갔다. 사람들은 놀라서 치우천을 말리려 했으나 번개범을 가까이서 보고는 기가 질려 감히 나서지를 못했다. 더구나 치우천이 번개범과 마주보고 있는 것이 꼭 마음으로 이야기하는 것 같았으므로 이제는 치우천 도 신수만큼 두려워하게 되었다. 치우천이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살펴보니, 번개범은 죽은 것처럼 보였으나, 아직 숨은 쉬고 있는 것 같았다. 치우천은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으로 번개범을 노려보다가 우린 구슬을 손에 쥐었다. -번개범? 그러나 번개범은 마음을 닫은 채 아무런 대답도, 마음도 보이지 않았다. 치우천은 화가 났으나 꾹 참고 몇 번을 더 불러보았으나 번개범은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좋다. 그럼 완전히 죽여주마. 치우천이 비로소 감정을 드러내자 기이하게도 색다른 느낌이 전해져 왔다. -안 돼! 치우천은 깜짝 놀랐다. 그것은 번개범의 느낌이 아니었던 놀랍게도 그것은 인간, 그것도 여자의 느낌이었다. -당신은 누구요? 순간 그 여자는 적의를 감추지 않고 외쳤다. -뻔뻔스럽게 나를 모른다고? 그러나 치우천은 그게 누구인지 정말 알 수 없었다. -도대체 누구요,l 사람 같은데? -사람..... 그래, 사람이지. 사람이었지...... -나는 번개범과 이야기하는데 어떻게 당신이 대답하는 것이오? 그러자 그 여자는 깔깔거리며 허탈한 듯 웃더니 말했다. -당연히 그렇지. 나는 번개범 속에 있으니까. -번개범 속에 있다고? 그럼 이 흉악한 놈에게 잡아먹혔소? 그 말에 여자가 돌연 앙칼진 목소리로 외쳤다. -닥쳐! 너야말로 흉악한 놈이야! -대체 무슨 소리요,l 당신도 사람이라면서 왜 이런 나쁜 신수의 편을 드는 거요? -너는..... 너는 정말 나를 모르겠다는 거냐? 번개범이 왜 나빠? 나쁜 것은, 정말 흉악한 것은 네놈이야! 치우천은 어이가 없었다. 저 여자는 거짓말을 하거나 꾸며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 진심이 분명했다. 그런데 다짜고짜 왜 흉악하다고 욕하는지 알 수 없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난 정말 알 수가 없소 -정말..... 모르겠다는 거야? -정말 모르겠소. 그 여자는 한동안 생각하는 듯하다가 이윽고 말했다. 정말 모르는 것 같은데? 그런 느낌이 들어. 신기하군. 그건 무슨 주술이냐? 나를 속이는 것은 아니겠지? -이건 우린 구슬의 힘이지, 주술이 아니오. 먼 옛날 발귀리 선인께서 만드신 구슬이오. -그랬었군. 그런데 정말 모르겠다는 거야? -몇 번을 말해야 하겠소? 나는 정말 모르겠소. 아무 기억도 나질 않소. -그럼 기억나게 해주지! 여자가 앙칼지게 외쳤다. 다음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번개범의 이마가 스르르 갈라지면서 그 안에서 한사람이 번개범의 가죽을 헤치고 비척거리며 걸어 나온 것이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보고 치우천은 경악했다. 분명 키가 큰 여자의 모습이기는 한데, 온몸이 반쯤 썩어 들어가서 도저히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는 할 수가 없었다. 저런 몰골을 하고 어떻게 살아 있는지, 더구나 왜 번개범의 머릿속에 들어가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그 여자는 알아들을 수 없는 낯선 언어로 말했으나 우린 구슬 덕에 그 뜻도 동시에 마음속으로 들려왔다. “나를 모르겠나? 내가 썩어버려서 기억할 수가 없나?” 그녀의 말은 바로 카린 말이었다. 치우천은 알아들을 수가 없었으나, 카린 산에 갔던 경험이 있기에 그 말이 카린 말이라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그 말을 듣고 나니 희미하게 기억이 나기 시작했다. 큰 키, 거침없는 말투, 치우천에 대한 원한...... 치우천은 놀라서 외쳤다. “그러면 혹시 당신은.......?” 그러자 그녀는 빨갛게 충혈 되어 불타는 것 같은 눈빛으로 치우천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 보았다. “그래, 나는 비냐다. 네가 내 자매의 손에 죽게 만들었던 그 비냐다!” 그녀는 바로 카린에서 헌원의 추격을 뿌리칠 때 죽었다고 들었던 비냐였다. 죽었다고 들은 그녀가 왜 여기 이런 몰골로 번개범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지 치우천은 도저히 짐작조차가지 않았다. 그때 우린 구슬의 힘이 비나의 마음속에 있는 기억을 그대로 치우천에게 전해주기 시작했다. 비냐는 그때 소녀에게 찔려 거의 숨이 끊어졌다. 그것도 한 번만 찔린 것이 아니었다. 소녀는 태연하게, 자신과 함께 자란 친자매 같은 비냐를 몇 번이나 릴이 찌르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갔다. 그때 비냐의 마음속에는 죽음에 대한 공포보다도 놀라움이 더 크게 자리잡았다. 치우천은 놀라 부르짖었다. “소녀가..... 소녀가 정말 그랬는가?” 비냐는 화를 벌컥 내며 쏘아붙였다. “그러면 내가 이 꼴이 되어서까지 거짓말을 하겠는가?” 치우천은 또다시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그때 초초룬의 말이 사실이었구나. 나는 그 말을 듣고도 믿지 않았다. 아니, 좋게 생각하려고만 했다. 비냐와 소녀는 별 관계가 아닌 줄 알았다. 그러나 비냐는 지금도 그것을 그토록 마음에 둘 만큼 소녀와 가까웠구나. 정말 무서운 일이다. 아무리 나를 위해서라지만 그토록 가까웠던 사람을 태연히 찌를 수 있을 정도라면......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 나를 찌를지도 모르지 않는가?’ 치우천은 지난번에 문득 보았던 소녀의 무서운 눈매를 떠올리며 다시 한 번 몸서리쳤다. ‘그렇구나. 나는 그녀가 원래 순하고 착한 것으로만 알았다. 비냐도 그랬을 것이다. 간혹 보이는 독한 모습은 그녀의 모습이 아니라고 믿었다. 그러나......실제로는 정반대였구나. 독한 모습이 그녀의 모습이고 순한 모습이 지어낸 것이라면....... 그녀는 이미 나와 몇 년을 살면서도 단 한 번도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는 말인가?’ 자신을 너무 사랑해서 그런 것이라고 애써 좋게 생각하려 해도 치우천은 자신도 모르게 두려움에 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비냐는 너무나 자신의 이야기에만 몰두해 있어서 치우천의 마음을 돌아볼 생각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비냐는 계속 자신의 이야기만을 울부짖듯 토해냈다. 처음에는 무의식적으로 카린 말로 외쳤으나 나중에는 치우천을 의식한 듯 서툰 주신 말로 소리쳐댔다. 그 때문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그 이야기를 거의 다 들을 수 있었으나 치우천은 하도 경황이 없어서 그런 것에는 미처 주의를 기울일 수 없었다. 비냐의 이야기는 정말 기막혔다. 원래대로라면 죽어야 당연한 중상이었으나 비냐는 워낙 강하고 거친 수련을 거친 몸이라 완전히 죽지는 않았다 더구나 상망이 마지막 숨이 끊어지는 순간에 혈도를 막아 응급조치를 해준 덕에 비냐는 쑤앙마이에게 옮겨지게 되었다. 그러나 비냐의 상처는 너무도 심하여, 쑤앙마이의 힘으로도 죽어가는 비냐를 완전히 낫게 할 수는 없었다. 쑤앙마이는 아끼던 작은 자매들을 잃고 너무도 속이 상했던 터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비냐를 살리려 애썼다. 그 때문에 절대 쓰지 않는 금단의 주술까지 사용했지만 비냐를 낫게 하지는 못했다. 다만 죽음을 할 수 있는 데까지 늦춘 것이 전부였다. 그러면서 쑤앙마이는 비냐와 함께 출전했던 유우와 가나에게 말했다. ‘유우, 가나. 너희는 어쨌거나 지고 돌아왔다. 그 벌로 비냐를 살려내라. 무슨 방법을 쓰든지 비냐를 살려야 한다. 멀리 동쪽 미아우 땅에는 번개범이라는 신수가 사는 구름골이라는 산이 있는데, 그 산에는 온갖 귀한 풀이 자란다. 그 풀들로만 비냐를 살릴 수 있다 서둘러 라. 그리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비냐를 살려내라!’ 쑤앙마이의 엄명이라 유우와 가나는 산송장이나 다름없이 된 비냐를 싣고 먼 길을 떠났다. 그런데 워낙 먼 길을 가다 보니 쑤앙마이조차 예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비냐의 몸이 죽어 썩어 들어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쑤앙마이의 엄청난 주술과 비냐의 초인적인 끈질김으로 완전히 죽지는 않았다. 그것은 인간으로서 견디어내기에는 너무도 처절한 일이었다. 젊고 활달했으며 자부심이 강하던 여인이 온몸이 썩어 들어가는 송장, 아니 그러면서도 죽을 수도 없는 기막힌 처지가 되자 유우와 가나는 차라리 비냐를 죽여주려고까지 했다. 그러나 비냐는 눈빛으로 그들을 제지했다. 비냐는 절대 죽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비냐를 그토록 지탱하게 만든 것은 바로 자신을 배신한 소녀에 대한 증오와 배신감이었다. 나아가서 비냐는 누구보다도 좋아했던 소녀가 자신을 이렇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결국 비냐는 치우천이 소녀를 그렇게 제정신이 아니게 만들었으며, 소녀가 자신을 찌른 것도 치우천의 강요 때문에 그랬을 것이라고 스스로 결론지어 버렸다. 그 이후 비냐는 모든 적개심과 복수심을 치우천에게로 돌렸다. 그러면서 비냐는 생각했다. ‘마침 내가 가는 구름골에 사는 번개범은 그 치우천 놈의 원수라고 들었다. 복수를 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어차피 나는 틀린 몸, 치우천 그놈을 죽일 수만 있다면 내 몸을 번개범에게 바쳐 산 채로 뜯어 먹혀도 좋다!’ 결심한 비냐는 구름골 부근에 도착한 어느 날, 유우와 가나를 따돌리고 빠져나갔다.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는 비냐가 도망칠 수 있었던 것은 그녀를 여기까지 싣고 온 자신의 개명수 덕분이었다. 그 개명수는 이지나라고 불렀는데, 무라에게 카와 슈가 있는 것처럼 이지나는 비냐의 개명수였으며, 어려서부터 비냐와 함께 자라서로 마음이 통하는 상태였다 이지나는 비냐의 마음을 눈치 채고 홀로 비냐를 싣고 구름골로 올라갔다. 결국 이지나는 비냐를 번개범에게로 인도했다. 비냐는 죽어도 좋다고 마음을 굳게 먹고 있었으나, 막상 거대한 번개범과 마주치자 마음이 떨려왔다 이지나는 번개범을 보자마자 공포에 질려 달려들었으나 물론 번개범에게 단 한 방을 맞고 죽어버렸다. 비냐는 이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어떻게든 자신의 마지막 뜻, 즉 치우천을 죽여 달라는 뜻만 전할 방법을 찾으려 했다. 그런데 운 좋게도, 번개범도 개명수와 비슷한 일종의 호랑이라 할 수 있었다. 그래서 호랑이를 잘 다루는 비냐는 번개범의 기분과 심리를 잘 알 수 있었는데, 듣던 것과 달리 번개범은 자신의 영역에 들어온 낯선 인간에게 적의를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비냐를 신기해하며, 호기심을 보였다. 비냐는 눈빛으로 번개범이 자신에게 적의를 드러내지 않는 것을 보고 의아해했으나 어쨌거나 일이 잘되는 것 같아 좋아했다. 그러나 비냐는 이미 몸이 많이 썩어 들어갔을 뿐만 아니라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었고 입조차 놀릴 수 없었다. 그런데 번개범은 낯선 몇몇 인간들을 불러내어 비냐를 맡겼다. 그들은 바로 번개범을 섬기는 가리족이었다. 가리족은 주신 사울아비들과 비렴의 추격을 피해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구름골 안에서 번개범과 함께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번개범은 절대 난폭하거나 사람들을 해치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들을 아주 잘 대해주었으며. 사람들과 같이 사는 것을 아주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다. 가리족은 번개범의 눈치를 알아차리고 비냐에게 구름골에 있는 귀한 약초들을 아낌없이 먹여주었다. 비냐는 다시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고 말도 할 수 있게 되었으나 일단 썩어 들어가기 시작한 몸은 부패를 멈추지 않았다. 그것은 어떤 약초로도 회복할 수 없었고 비냐는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으며 머지않아 정말로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번개범은 스스로 도력을 발휘해 비냐를 자신의 머릿속에 넣어 자신의 도력으로 살 수 있도록 해주었다. 번개범의 몸속에 있는 동안 비냐는 고통도 느끼지 않았고, 몸이 더 썩지도 않았다. 더구나 그렇게 호의를 보이는 번개범에게 비냐도 감복했다. 호랑이를 부려왔던 반쯤 죽은 카린족 여전사와 번개범은 진심으로 마음이 통하는 좋은 벗 사이가 된 것이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여서 치우천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이미 우린 구슬은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치우천의 손에서 미끄러져 땅에 떨어져 있었다. 치우천은 비냐가 토해내는 이야기에 온정신을 집중한 터라 구슬이 땅에 떨어졌다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정말 번개범이 사람을 좋아한다고? 나는..... 나는 믿을 수 없다. 번개범은 약초를 지키고 그것을 구하러 오는 사람을 모두 죽인다!” 비냐는 자신이 좋아하는 번개범을 치우천이 욕하자 참을 수 없다는 듯 소리쳤다. “헛소리다! 번개범은 이미 도를 닦은 신수인데 그런 약초 따위를 왜 중요하게 생각하겠느냐? 번개범이 그런 자그마한 약초를 먹겠느냐? 아니면 무엇에 쓰겠느냐? 왜 번개범이 약초를 지킨다고 생각하는 거지? 사람들이야말로 바보들이다!” 치우천은 그래도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다. 나는 믿을 수 없다. 우리 어머니는 번개범에게 죽었다. 나와 내 아우를 구하기 위해 아홉구비를 얻으러 갔다가 참혹하게 죽음을 당하셨다! 나는 그것을 절대 잊을 수 없다!” “헛소리! 번개범은 착하기 이를 데 없는 신수다!” 그러자 어느 틈엔가 정신을 차렸는지 치우비가 치우천의 옆으로 다가와 으르렁거리듯 외쳤다. “번개범은 사람을 잡아먹는 사악한 가리족과 어울리지 않는가? 어떻게 번개범을 착하다고 할 수 있느냐?너는 저것이 안 보이느냐?” 치우비는 분노한 눈빛으로 저만치에 엎어져 있는 사람 고기를 끓이던 가리족의 단지를 가리켜 보였다. 그러나 비냐는 조금도 기세를 늦추지 않고 씨근거렸다 “나도 저런 짓이 좋다고는 하지 않았다! 나도 가리족이 싫다. 번개범에게도 가리족은 나쁘다고 가르치려 했다! 그러나 번개범은 절대 한번 벗으로 삼은 사람을 배신하지 않는다.” 갑자기 비냐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우습다. 우습지 않으냐? 누가 더 나쁘냐? 한번 사귄 벗이 나쁜 사람이라도 결코 배신하지 않는 번개범이 나쁘냐? 어릴 적부터 같이 자란 친자매 같은 나를 눈 하나 깜빡 않고 찔러 죽이는 사람이 나쁘냐?” 비냐의 말에 치우천과 치우비는 모두 충격을 받았다. 치우천은 안색이 하얗게 질렸고, 치우비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어깨를 떨고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 다 입을 열지 못했다. 비냐는 마치 상처에 소금을 뿌리듯 처절하게 외쳐댔다. “나는 번개범의 머릿속에 들어가서 번개범과 마음이 통하게 되었다. 번개범은 항상 궁금해 했다. 왜 사람들은 서로를 죽이는가? 차라리 먹으려고 죽이는 가리족이 낫지 않는가? 먹지도 않고 서로를 죽이는 사람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말이다. 너희는 가리족이 사람을 먹는다고 욕했지? 저기를 보아라! 너희가 한 짓을 보아라! 가리족과 너희가 대체 뭐가 다르지, 응?” 비냐가 가리킨 곳에는 치우천의 전사들이 죽인 가리족의 시체들이 처절하게 널려 있었다. 극도의 분노 때문에 전사들은 인정사정 보지 않고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가리족들을 학살했다. 이미 죽은 자를 난도질하기도 했고 아직 죽지 않은 자의 온몸을 쪼개고 찢어내기도 했다. 이제와 비냐의 말을 듣고 보니, 그 시체 무더기와 가리족이 죽인 야율쿠리의 부하들 중에 어느 쪽이 어느 쪽인지 구분하기가 힘들었다. 치우천조차도 뭐라 대답할 말을 금방 찾을 수가 없었다. 치우비도 마찬가지였고 그 누구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 크게 호통 치는 소리와 함께 뭔가가 획 날아들었다. 사람들이 놀라서 보니 그것은 사람의 머리였다 가리족의 부족장의 머리가 분명했다. 곧이어 검은 옷을 걸친 비울걸이 홀연히 모습을 나타냈는데 항상 빈정거리던 그의 얼굴에는 보기 드물게 분노의 빛이 어려 있었다. 비울걸의 잿빛 수염은 스스로 토해 낸 피로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 그도 스름이처럼 너무 지나치게 도깨비들의 힘을 끌어냈기에 무리를 했던 것이다. 그러나 비울걸은 그럼에도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가리족의 추장을 쫓아 도깨비들을 시켜 목을 베어 오는 길이었다. 비울걸은 전에 없이 엄한 어조로 외쳤다. “나는 도깨비왕 비울걸이다. 사람 같지도 않고 도깨비 같지도 않은 계집이 말도 되지 않는 소리로 우겨대는구나.” “뭐가 말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냐?” 비냐가 악을 쓰자 비울걸이 되받아쳤다. “나 번개범, 모두가 바보다. 물론 지금 우리가 한 짓은 지나친 데가 있다. 나도 잘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럼 가리족이 한 짓이 옳으냐? 범이 범고기를 먹느냐? 사람이 사람을 먹 는 것, 먹을 것이 없어 그러는 것도 아니면서, 과연 사람을 먹는 것이 옳은 일이냐?” “나도 옳다고 말한 적은 없다. 그러나 그들도 나름대로 생각이 있다. 그들도 사람이 가장 귀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래서 먹는 것이다. 가장 귀한 것을 제물로 바치고 그 증거를 보이려고 먹는 것이다.” “그러니 헛소리라는 것이다. 가장 귀한 것이 사람이라고? 그러면 왜 그들 스스로의 모가지를 바치지 않느냐? 같은 귀한 것이라도 자기 모가지가 더 중요할 것이니, 다들 자기 모가지를 베어 바치면 될 것 아니냐? 네 말 대로라면 가리족은 왜 자기들끼리는 안 먹고, 다른 부족만을 잡아먹는 것이지?” 그 말에 비냐는 할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비울걸이 노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이번 일이 아니더라도 내, 언젠가는 가리족의 남은 찌꺼기들을 가만 두지 않으려 했다. 우리가 한 짓이 가리족이 한 짓과 다를 바 없다고? 너는 카린에서 우리 전사들을 얼마나 많이 죽였지1 왜 네가 한 짓은 가리족과 똑같다고 하지 않느냐? 응? 그리고 자매에게 죽을 뻔해서 분을 이길 수 없다고? 너는 죽지 않았잖느냐? 그럼 그런 자매에게 너는 왜 복수하려는 것이냐? 너도 똑같이 그런 복수를 부르고 싶은 것이냐?” 비냐가 다시 뭔가 말하려 했으나 치우천이 침울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잠깐,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정작 중요한 물음에는 아직 대답하지 않았다. 번개범은 사람들을 위해주고 사람을 해치는 것을 싫어한다고 했는데, 왜 우리 어머니를 해쳤는가?” “나는 믿을 수 없다 번개범은 이유 없이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 분을 삭이지 못한 치우비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화를 냈다. “그러면 한웅님의 가마는 왜 덮쳤는가? 그건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인가? 가리족의 부탁을 받고 그런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 “뭐가 아닌가? 너는 잘 모르겠지만, 가리족이 번개범을 시켜 한웅님의 가마를 덮쳤고, 수많은 사울아비들을 죽였다. 우리 형제도 그때 죽을 뻔했다. 번개범이 사람을 위한다면 가리족이 그런 부탁을 해도 한웅님 가마를 습격하는 짓은 하지 말았어야 하지 않은가?” 그 물음에 비냐는 놀라운 말을 했다. “나도 알고 있다! 번개범과 붙어 있으면서 번개범의 생각을 다 알게 되었다. 그건 이유가 있었단 말이다!” “대체 무슨 이유냐?” “번개범은 가리족을 살리려고 그런 것이다! 흥! 너희는 가리족이 무슨 물건을 받고 너희 한웅을 습격한 줄 아는 모양이지? 웃기는 소리 마라! 가리족은 살아남기 위해 그 일을 맡아야 했고, 번개범은 자기 벗이라 여기는 가리족을 위해 내키지 않은 짓을 한 것뿐이다!” 이번에는 치우천이 외쳤다. “뭐가 살아남기 위해 한 짓이냐? 유망이 가리족을 시킨 것인데! 유망은 남쪽부족이고 가리족은 훨씬 북쪽에 있는데, 유망이 가리족에게 해코지라도 한단 말이냐?” “유망?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유망이 시킨 것은 맞지만, 그 뒤에 누가 있었는지 알기나 하느냐?” “유망 뒤에 또 누가 있다고?” 비냐는 조롱하듯 웃어 보이며 씹어뱉듯이 말했다. “누가 가리족을 내몰아서 땅도 없는 처지로 만들었지?” “그건 주신과 주변 여러 부족이 힘을 합해 그런 것 아니냐?” “잘 아시는군! 그러면 가리족이 누구를 제일 두려워하지?” “그건 당연히 주신..... 아니, 그렇다면!” 치우천이 깜짝 놀라자 비냐는 처절하게 비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래, 주신이다. 주신에서 그렇게 시켰다 자기네 한웅을 죽여 달라고 말야. 그래서 가리족은 나서지 않을 수 없었던 거다. 주신은 이미 가리족이 구름골에 숨어사는 것을 다 알고 있었다. 다만 모르는 체했을 뿐이었어. 바로 번개범을 써먹기 위해서 말이 가리족은 더 이상 숨어살지 않기 위해서라도, 쫓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무슨 수를 쓰든 너희 한웅을 없애지 않으면 안 되었던 거야! 그래서 번개범에게 사정했고, 번개범은 내키지 않았지만 너희 한웅을 덮친 거다! 이제 머리가 좀 돌아가느냐? 자기네 한웅을 죽이려는 잘난 주신 놈들아” 그 말에 치우비뿐만 아니라 치우천조차도 몸이 휘청할 정도의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가리족을 조종하여 사와라 한웅을 공격한 것이 유망이 아니라니? 아니다. 유망이 아니라고는 하지 않았다. 유망 뒤에 또 누가 있다고 했다. 이건......이건 무서운 일이다. 엄청난 일이다!’ 치우천은 순식간에 사태를 짐작하고는 몸서리를 쳤다. 정말 무섭기 짝이 없는 사실이었다. 자신도 이미 전부터 주신 쪽에서 지나족과 끈이 닿는 자가 있다는 냄새는 맡고 있었다. 그 런데 그들은 이미 자신의 생각보다도 훨씬 더 오래 전부터 엄청난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럴 만한 사람은...... 그때 치우비가 커다란 목소리로 외쳤다. “좋다! 다른 것은 다 좋다! 그러나 우리 어머님이 죽음을 당했다! 바로 이 구름골에서! 우리 형도 우리 어머님의 끔찍한 모습을 보았다! 그것은 누구 짓이냐? 번개범의 짓이 아니라는 거냐? 주신이나 한웅님의 일은 모른다 쳐도, 우리 형제는 어머님의 일은 죽어도 잊을 수 없다! 그럼 누구냐? 왜 그랬느냐?” 그때 치우천이 돌연 떨리는 목소리로 힘없이 말했다. “비야....... 잠깐, 잠간만 멈추어라.......” “왜 그래?” 치우비는 흥분하여 씨근거리면서도 형에 대한 존경심은 잃지 않았다. 치우비가 순순히 한 발 뒤로 물러서자 치우천은 파랗게 질린 얼굴로 비냐에게 말했다. “비냐......부탁이다. 번개범과 이야기하고 싶다. 나는 그를...... 믿는다.” “무슨 소리야!” 치우비가 놀라서 부르짖었다. 그러나 치우천은 치우비에게 가만있으라고 손짓을 해보이고는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나도...... 나도 믿고 싶지 않다. 차라리 사실을 모르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러나 알아야겠다. 제발 부탁이다. 번개범이 마음을 열게 해다오 우리는......우리는 사실을 알고 싶을 뿐이다.” 치우천의 목소리는 전에 없이 떨렸으며,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작은 주신의 전사들이나 알한, 비울걸 등도 처음 들어보는 침통한 목소리여서 소름이 다 끼쳤다. 그 거친 비냐조차도 너무도 처절한 치우천의 표정에 눌렸는지 말없이 한참 뭔가 생각하며 치우천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번개범의 머리를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치우천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땅에 떨어졌던 우린 구슬을 집어 들었다. 치우비는 너무도 궁금하고 의아하여 거의 폭발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치우천은 그런 치우비에게 조금만 기다리라는 듯 힘겹게 눈짓을 했고, 치우비는 필사적으로 참아냈다. 치우천은 조용히 눈을 감고 용기를 내려는 듯 몇 번 심호흡을 한 다음 우린 구슬을 손에 쥐고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폭풍 전야 눈 깜짝할 사이에 두 달이라는 시간이 흘러갔다. 맥달의 죽음으로 인해 시끄러웠던 신시는 언제 그랬냐는 듯 이내 평온을 되찾았다. 그리고 두 달이 지난 지금 신시는 다시 떠들썩해지고 있었다. 바로 유망을 치기 위해 신시를 출발하는 하늘군대의 젊은 큰스승인 치우천과 치우비 형제와 그를 따르는 수십 명의 벗들, 아울러서 삼천 명의 사울아비가 머나먼 공상으로 출병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사와라 한웅은 병이 한층 악화되어 직접 그들을 배웅하지는 못했으나 주신의 삼사는 모두 그들을 격려하며 꼭 이기고 돌아오라는 당부의 말을 전했다. 귀족들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맨 앞에서 자기 말 높은 뫼를 타고 앞장선 치우천은 생기 넘치는 모습이었으나 그 눈만은 예전과 달리 마치 매처럼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그 옆에서 자기 체구에 걸맞은 우람한 말, 구름을 타고 있는 치우비도 예전의 사람 좋은 얼굴과는 달리 어딘가 범접할 수 없는 날카로움 같은 것이 엿보였다. 치우천과 치우비의 뒤에는 양역, 부루벼락, 쇠돌이, 거의 건강을 회복한 거서기, 삼, 부달 등의 젊고 유명한 사울아비들과, 그들을 돕겠다고 자청하여 나서서 한웅님의 칭찬을 받은 다른 부족장들이 있었다. 특히 부달은 온몸이 타들어가서 흉악한 몰골로 변해버린 터라 온몸에 거친 천을 둘둘 감은 기괴한 모습이었음에도 전혀 불편한 기색 없이 함께 말머리를 나란히 했다. 부달의 기이한 모습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으나 부달에 대해 아는 사람들은 그의 용기와 떳떳함에 남몰래 감탄하며 한숨을 쉬었다. 얼굴이 그렇게 망가졌지만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것은 실로 대단한 일이었다. 또 그들 중에는 유달리 눈에 띄는 두 부족장이 있었는데 바로 야율쿠리와 초초룬이었다. 한 명은 강하고 억센 모습 때문에, 한명은 북쪽 부족 중에서는 보기 드물게 여자 부족장이라는 점 때문에 눈길을 끌었다. 그 외에도 울쿠타 야쿠타 등의 모습도 보였고 대열의 뒤에는 알한과 차오스가 이끄는 투르크 용병들의 행렬도 있었다. 그리고 맨 마지막 끝에는 전혀 의외의 인물들이 따르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도단이와 질쾌를 위시한 박수, 단군들과 불쇠를 비롯한 몇 명의 대장장이 들이었다. 사람들은 전쟁하러 나가는 사울아비들의 뒤에 단군, 박수에다가 대장장이까지 따라가는 것을 보고 신기해하며 떠들어댔다. “싸우러 가는데 단군, 박수는 왜 가나?” “뭐, 가다가 굿이라도 하려는 게지. 그리고 다친 사람이 나오면 단군이 고쳐주게 하려고 데려가나 봐.” “싸움판에서 굿은 뭔 굿이야. 이거 우습구먼. 거 앞부분은 볼 만한데 뒤로 가니 어중이떠중이가 다 있는 게, 이기기 어렵겠는걸.” “예끼, 그럼 주신 사울아비가 진단 말인가? 벌 받을 소리하지 말라구!” “그뿐이 아냐. 멀쩡히 장사 잘하던 대장장이 불쇠 영감은 왜 데려 가냔 말야? 싸움판에서 불 달구고 구리를 녹여 그제야 칼 만들어 쓸 생각인가? 원 참, 그거야말로 희한한 일일세그려.” “그러게나 말이야.” 좀 싸움을 안다는 자들은 침까지 튀어가며 나름대로 떠들어댔다. “공상이 여기서 얼마나 먼데, 저거 가지고 싸워 이길 수 있을까? 젊은이가 괜히 철없이 나서서 삼천 명을 모두 죽이는구먼, 쯧쯧.” “그게 뭔 소리여? 하늘 제사에서 분명 잘 풀린다 하지 않았어? 안파견 한님에게 벌 받으려고 그려?” “그게 아니지. 하늘 제사에서 이긴다고 한 건 맥달님이었어. 근데 맥달님은 바로 돌아가시지 않았어? 필경 맥달님이 하늘 뜻을 잘못 읽어서 벌을 받으신 거란 말이지.” “제길, 하늘님이 벌을 내리실 거면 벼락이나 쾅 치시면 되지, 왜 등 뒤에서 칼을 꽂았겠어?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구!” “저 앞장선 큰스승이 죽였다는 말이 있던데?” “그거야 아무도 모르지. 원 세상에, 어느 놈이 죽였는지 그렇게 좋은 분을 죽이다니. 그놈은 분명 온몸이 썩어서 뒈질 거여!” “좌우간 이 싸움은 애당초 글러버린 거라고. 삼천 사울아비가 적은 것은 아니지만 공상이 어디고, 지나족이 얼마나 많은데? 새 발의 피여. 다 죽을 거야. 다 죽을 거. 에이, 몹쓸 세상.”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수군거리며 떠들어댔으나 치우천이나 치우비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모두가 엄숙했고 조용해서 두려운 기운마저 감돌았다. 그에 비해 고르고 골라 뽑았다는 삼천 사울아비는 되레 좀 이상했다. 그들은 힘도 없고, 사기가 충천하지도 않았으며, 어딘가 맥이 풀린 것 같아 보였다. 몇몇 사람은 사울아비가 저게 무슨 꼴이냐고 분통을 터뜨리기도 했다. 또 다른 사람들은 대장이 저런 것을 그냥 두니글러 먹었다. 대장감이 못된다고도 열변을 토했다. 그러나 치우천 등의 앞선 이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듣다 못한 야율쿠리가 성질을 부리려 했으나 옆에 있던 초초룬이 급히 야율쿠리를 막았다. “이봐, 그러면 안 돼. 치우 형제에게 누를 끼쳐서야 되겠어? 참아, 참으라구.” 야율쿠리는 치우 형제라는 말에 한숨을 푹 쉬며 입을 굳게 다물었다. 둘은 치우천에 의해 구조되어 치료를 받아 정신이 든 다음, 아무런 말도 듣지 못한 채 각자의 부족으로 돌아갔다. 둘 사이의 혼사는 틀림없이 없었던 걸로 될 테니 앞으로도 좋은 벗으로 지내라는 치우천의 웃음 섞인 당부와 함께 돌아가 보니 의외의 사태가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야율쿠리의 형들은 이미 줄줄이 잡혀 동굴에 갇혀 있었고, 야율쿠리가 도착하자마자 부족 사람들은 부족장을 칭송하며 모여들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부족의 일이 깨끗이 정리되고, 자신은 울크리의 부족장이 되어버린 것이다 치베와 보돈차르, 무라가 성공적으로 일을 해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사방으로 갈라져서 자기들끼리 내키지 않던 싸움을 하던 키탄족들은 이미 저마다 부족장이라고 나서는 야율쿠리의 형들에게 경멸감을 느끼고 있던 터였다. 그러던 참에 밀고 들어온 야율쿠리의 군대라는 작은 주신 전사들에게, 키탄 전사들은 옳다구나 하고 싸우지도 않고 앞 다투어 무기를 던지고 손을 들었으며, 부족장이라고 잔뜩 거드름만 피우던 야율쿠리의 형들을 모조리 묶어서 항복했다. 야율쿠리는 부모가 모두 비명횡사한 것을 알자 슬픔과 분노를 이기지 못해 형들의 목을 서슴없이 베어버렸다. 그로써 야율쿠리는 이제 아무런 문제없이 울크리 부족 전체를 다스리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초초룬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치우천이 언제 소문을 냈는지, 초초룬은 가리족을 섬멸하고 신수 번개범을 물리쳤으며 잃었던 부족의 마을을 고스란히 되찾은 여자 영웅이 되어 있었다. 여기에는 지난번 유망과의 싸움에서 치우천에게 신세를 진 많은 미아우, 마갸르 부족장들의 협조가 컸다 아예 큰 부족장들이 초초룬을 만나기 위해 인사를 오는 판이었다. 물론 그때까지의 부족장은 초초룬의 아버지였다. 그는 초초룬의 오빠들 중 하나에게 부족장 자리를 물려줄 생각이었으나 다른 부족장들이 자꾸만 초초룬을 칭찬하고 그녀를 미아우 제일의 영웅이라 칭송하자 귀가 솔깃해졌다. 원래 초초룬의 아버지는 명예나 소문에 집착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딸이 나서서 잃었던 마을과 명예를 회복한 판이니 그녀의 오빠들도 아무 말을 할 수 없었고 초초룬은 뭐라 말 한마디 할 틈 없이 다음 부족장으로 뽑혔다가 아예 며칠 만에 아버지의 강권으로 부족장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두 사람 다 치우천 덕에 목숨을 건졌을 뿐만 아니라 부족 전체의 위기를 넘겼고, 더구나 부족장자리까지 얻게 되었으니 치우천의 출병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은 가장 정예의 용사들을 있는 대로 긁어모아 치우천의 출병에 참가하려 했다. 그 수는 수천 명에 달했다. 그러나 치우천은 차분한 목소리로 그들에게 말했다. “도와준다니 고맙다. 그러나 신시로 올 필요는 없다. 주신에는 삼사백 명, 그것도 힘없고 늙은 전사만 데리고 오면 된다.” “나는 사천 명의 전사들을 데리고 올 수 있다. 그런데 삼사백? 그것도 늙고 힘없는 사람만 데려오라니? 천, 자네 제정신인가?” 야율쿠리가 소리를 버럭 지르자 치우천은 잔잔히 웃으며 되받았다. “물론 전사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강하면 강할수록 좋다. 허나 나는 신시에 데려올 사람을 이야기한 것이다. 나머지는 그냥 부족에서 언제든 출발할 수 있도록 준비만 시켜두면 된다.” 초초룬은 야율쿠리처럼 묻지 않았다. 그녀는 치우천의 잔잔한 미소 사이에 전에는 볼 수 없었던 서릿발 같은 날카로움이 깃들여 있다는 것을 눈치 채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가장 약하고 늙은 힘없는 전사 약간씩만 끌고 출병식에 참가한 것이다. 무엇인가 큰 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그들도 조금씩은 눈치 채고 있었다. 그것이 어떤 일인지에 대해서는 치우천은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다만 치우천이 저렇게 긴장할 정도라면, 필경 상상도 할 수 없는 큰 일일 것이라고 벗들은 생각했다. 긴 행렬이 신시를 나서자, 치우천은 삼천 명의 사울아비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여러분은 이제부터 먼 길을 가아 한다. 나는 큰 스승으로서 여러분을 다스려야겠지만, 여러분은 주신의 용감한 사울아비들이니 내가 안심하고 믿을 수 있다. 허나 다른 부족의 군대는 다스리기가 몹시 힘드니, 나는 당분간 그들을 좀 가르쳐 사람답게 만들어볼 생각이다.” 치우천의 말에 사울아비들이 킬킬거리며 웃어댔다. 삼천의 사울아비들 중 진지한 태도를 보이거나 자기들의 큰 스승인 치우천에게 존경하는 태도를 보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치우비나 다른 사울아비 벗들이 두 눈을 부릅떴으나 치우천은 전혀 내색하지 않고 말했다. “그러니 여러분은 일단 남쪽으로 먼저 출발한다. 지휘는 작은 스승 양역이 맡아줄 것이다. 일단 미아우의 남쪽 마을인 카라치 마을까지 천천히 가도록 하라. 넉 달 내로만 가면 된다. 나는 적당한 곳에서 다른 부족의 군대들을 좀 훈련시킨 다음, 넉 달 후 카라치 마을에서 여 러분과 만나겠다. 그때 공상을 치는 계획에 대해 이야기해주겠다. 알겠는가?” 사울아비들은 잡담을 해대다가 늘어진 소리로 마지못해 대답했다. 서둘러 가면 두 달도 안 걸릴 거리를 넉 달 동안 놀면서 천천히 가도 된다고 했으니 안 그래도 늘어진 자들이 더 늘어질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울아비 벗들은 치우천이 왜 그리 느리게 움직이는지 의아해했지만 치우천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양역이 내키지 않는 듯 사울아비들을 몰고 떠나자 쇠돌이가 그제야 불만을 토로했다. “저것들이 사울아비 맞아? 어디서 호미질이나 하다 온 놈들 같구먼.” 나이가 좀 있고 생각이 필은 거서기가 그 말에 대꾸했다. “일부러 저런 것들을 보낸 거야. 하늘군대를 쥔 사람이 누군데? 치우가람 형제가 아닌가? 그러니 저런 것들만 보내는 게 당연하지.” 부루벼락도 한마디 끼웠다. “저런 것들하고 같이 싸우느니 나 혼자 싸우겠다.” 삼은 걱정이 되는 듯 혀를 끌끌 찼다. “큰일이오. 저들은 못 싸울 뿐만 아니라 아예 싸울 생각이 없는 듯한데, 저런 것들을 어떻게 부려 머나먼 공상을 뺏는담? 다른 부족 사람을 가르칠 것이 아니라 저놈들이야말로 되게 다스려야 할 것 같은데?” 그때 치우천이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모두 모이게.” 이미 막사 안에는 치우천과 치우비가 앉아 있었다. 여러 사울아비들과 야율쿠리, 초초룬 등이 모두 모이자 치우천은 지체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그들의 수는 말없이 자리를 지킨 울쿠타 야쿠타까지 합하여 열다섯 명이었다. “우리는 이제부터 바로 출발합니다. 그러니 저녁을 서둘러 지어 먹도록.” “어디로 간다는 겁니까?” 쇠돌이가 묻자 치우천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어디긴 어디겠는가? 공상이지.” 쇠돌이는 깜짝 놀라 눈을 둥그렇게 떴다. “아니, 그럼 사울아비들은 어쩌구요? 천명도 안 되는 사람 수로 간단 말입니까?” 치우천은 웃음을 거두고 눈을 빛냈다. “그럼 저, 삼천 사울아비가 삼백 명 몫이라도 해줄 것 같은가?난 애당초 저들은 생각도 하지 않았네.” 모든 사람은 깜짝 놀랐다. 거서기가 제일 먼저 물었다. “그러면 다른 수가 있습니까? 지금 있는 천 명으로 어떻게 해본다는 것입니까?” 치우천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천 명은 여기 남아 있어야지 한 명도 빠짐없이 그대로.” 모든 사람은 너무 놀라 이젠 아예 할말을 잊었다. 부루벼락마저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럼 군대도 하나 없이 우리끼리만 가서 공상을 친단 말인가?” 그러자 야율쿠리가 껄껄 웃으며 끼어들었다. “하하하. 그렇군, 그래. 내 이럴 줄 알았지. 천, 자네 생각이 있었군. 그래 군대가 없기는 왜 없소? 우리 울크리 전사만 사천이 기다리고 있소이다!” 초초룬도 생긋 웃으며 말했다. “우리 미아우 전사도 이천 명이 있습니다.” 그때 치우천이 헛웃음을 지으며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 이야기는 왜 하나? 그 사람들을 움직일 것도 아닌데?” 이번에는 야율쿠리와 초초룬의 안색이 변했다. “아니, 그러면 누가 또 있나?” “아무도 없어.” 치우천의 말은 이제 놀라움을 넘어서 거의 기절할 정도였다. 그러자 얼굴을 천으로 칭칭 동여맨 부달이 억눌린 듯하게 변한 목소리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부달은 불에 데어 목소리까지 변해버렸던 것이다. “그러면..... 혹시..... 유망에게 항복하자는 것이오? 나는 절대 그럴 수는.......” 치우천은 살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항복은 무슨 항복이오? 우리는 공상을 빼앗으러 가는 것이오.” 부루벼락이 더 참지 못하고 한 번 주변을 둘러보고 사람 수를 헤아린 다음 냅다 외쳤다. “여기 열다섯 명이서?” 그러자 치우천은 천연덕스럽게 되받아쳤다. “그렇습니다, 벼락 형. 여기 열다섯 명이 가는 거요 더 많아지면 곤란해집니다.” “미쳤군! 미쳤어! 부루벼락이 소리치며 길길이 날뛰는데 치우천은 웃으며 아예 관심 없다는 듯이 말을 돌렸다. “앞서 떠난 사울아비 삼천 명이 카라치 마을에 도착하려면 넉 달이 좀더 걸릴 겁니다. 분명히 그것도 늑장을 부릴 테니까요 그러니 우리는 그때까지 공상을 점령하고, 다시 카라치 마을에서 그들과 만나야 합니다. 그러려면 서둘러야죠. 공상을 점령하는 데 보름은 걸릴 것 같으니까요.” “보름!” 침착한 거서기조차도 놀란 소리로 부르짖자 부달은 아예 포기한 듯 얼굴에 두른 천을 쥐어뜯었다. “난..... 난 안 들은 것으로 하겠어. 삼만 명의 사울아비로 일 년을 쳐도 힘들 것인데......여기 열다섯 명으로 보름?” 괄괄한 삼은 아예 바닥을 주먹으로 냅다 쳤다. “장난치는 건가? 아무리 자네라도 이건 너무하잖아.” 그때 잠자코 있던 도단이가 입을 열었다. “장난이 아니요 나는 어제 천형과 함께 이 계획을 잘 생각해보았소. 나도 처음에는 놀랐지만, 분명히 잘될 수 있으리라 여깁니다.” 그러자 부루벼락이 외쳤다. “도대체 무슨 계획이오? 공상에 누가 있는지 아시오? 형천이 있소, 형천! 더구나 축융, 창힐, 유망! 그들이 거느린 지나 전사가 백 천이 넘는단 말이오! 그런데 우리 열다섯 명이?” 모두가 흥분하여 길길이 날뛰자 도단이가 차분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물론 우리는 열다섯으로 출발합니다. 데리고 온 천 명은 여기 두고 나머지 삼천 명은 빈둥거리며 진군하게 놓아두고요 그러나 천형의 말씀이 맞다면, 우리가 공상에 도달할 때는 열다섯 명이 아닐 겁니다.” “열다섯이 아니면? 그리 된다면 나는 차라리 도망가 버릴걸세. 그러니 열넷이 되겠지?” 부루벼락이 비아냥거려도 치우천은 여전히 침착했다. “그때까지는 한 달 정도 걸릴 테니, 그때 우리는 적어도 열다섯 천으로 불어나 있을 것입니다. 그 힘으로 공상을 칩니다.” 치우천의 말에 모든 사람들은 입을 딱 벌렸다. 설령 치우천이 자부선인 같은 대선인이라도 그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일 같았다. 그러나 그 다음 떨어진 치우천의 말은 사람들을 더욱 경악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우리는 아슬아슬하게 실패합니다. 공상을 치는 데는 열다섯 천으로도 부족하죠. 그렇게 져서 열나흘 만에 물러나야, 우리는 정말 보름 만에 공상을 빼앗을 수 있는 겁니다.” 좌중은 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너무도 놀랍고 어이가 없어서였다. “난, 난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소, 설명을 좀 해주겠소?” 마침내 삼이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외치자 도단이가 조용히 말했다. “뭐, 따지고 보면 간단한 일입니다. 한번 그들을 속이는 거죠 허나 그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속는 척하면서 우리에게 되레 엎어 씌우려 할 겁니다. 우리는 그걸 한 번 더 엎어 씌우면 되는 겁니다.” 치우천이 웃으며 덧붙였다. “그리고 이렇게 일을 실없이 복잡하게 하는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공상 따위를 점령하는 것보다 훨씬 큰 일이 있는 겁니다.” 이제 부루벼락이 눈까지 부라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실없이 복잡하게 한다고? 공상을 점령하는 것을?” 거서기 역시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더구나, 공상 따위라뇨? 공상을 점령하는 일보다 더 큰 일이 뭡니까?” 치우천은 말없이 잠시 고개를 숙였다가 이내 고개를 들며 활짝 웃었다. 그의 목소리는 밝고 생기가 있었다. “신시를 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웅님을 구해야 합니다.” 7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