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 서 명 : 치우천왕기 5 (신시에 이는 바람) 지 은 이 : 이우혁 펴 낸 이 : 이정원 출 판 사 : 도서출판 들녘 출판년도 : 2003년 9월 30일 <지은이 소개/ 이우혁> 1965년 5월 18일 서울 출생. 상문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기계설계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대학 때부터 아마추어 연극, 뮤지컬 등에 깊은 관심을 보여 13편 이상의 극에 연출. 출연하였으며, 하이텔 고전음악 동호회에서 한국 최초의 아마추어 오페라 ‘바스티앙과 마스티엔느‘를 각색, 연출하기도 했다. 1994년 <퇴마록>, 1998년 <왜란종결자> 등을 발표하여 수백만 독자들의 사랑 속에서 일약 대중 문학의 대표작가로 떠올랐다. 지금도 그는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좋은 작품을 발표하기 위해 작업실에서 작품구상에 몰두하고 있다. 이우혁 홈페이지 www. youk.co.kr <미디어서평> 한국 판타지 문학의 정점에 우뚝 선 작가 이우혁! 새로운 가능성, ‘영웅 판타지’의 세계가 열린다! 1994년 1월 ‘퇴마록’이 발간되었습니다. 1993년 PC 통신에서 회자되었던 그의 작품이 출간될 당시 그 작품이 그렇듯 오랜 생명력을 발휘하리라곤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습니다. 숱한 화제와 800만부라는 어마어마한 판매기록을 세우고 근 8년 만에 막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2003년 7월, 작가가 계속 관심을 가져왔던 ‘치우천왕기’가 출간되기에 이르렀습니다. 9년 동안의 자료 수집과 세 차례의 중국 방문으로 이 작품에 쏟은 작가의 열정은 정말 남다릅니다. 고작 2백 줄도 안 되는, 그것도 태반이 중복되는 자료 몇 줄을 가지고 한 사람의 일대기와 그 시대를 다시 구성한다는 것은 참으로 지난한 일이라고 작가는 고백합니다. 다시 말해 판타지의 기법으로도 어려운 일이었으며, 어쩌면 그 내용을 쓴다는 것 자체가 판타지라고 할 수도 있을 테니까요. 사전에 나와 있는 치우에 대한 소개는 이렇습니다. 치우(蚩尤):중국 고대 신화에 나오는 거인족의 우두머리. 염제(炎帝)의 후예이다. 전설에 의하면 81명의 형제가 있었는데 모두 동(銅)으로 된 머리와 철로 된 이마를 가지고 있었고, 머리 위에는 긴 뿔이 있었으며, 매우 모질고 사나웠다고 한다. 과(戈)?모(矛)?극(戟)?추모(酋矛:자루의 길이가 스무 자인 창)?이모(夷矛) 등의 병기를 만들었다. 황제(黃帝)와의 전쟁 중에 과부족인(?父族人)?풍백우사(風伯雨師)?이매망량(魅:도깨비)의 도움을 받았다. 치우는 연기를 빨아들이고 안개를 뿜으며, 공중을 날고 험한 곳을 뛰어넘을 수 있다. 후에 치우는 전쟁에서 패해 죽음을 당했으며, 그 피는 도리깨를 물들여 단풍나무 수풀을 이루었다. 고대 제(齊)나라에서는 8존천신(八尊天神)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치우는 그중 3번째로 모셔졌다. 진(秦)나라 말기에 유방(劉邦)이 기병할 때 패정(沛庭)에서 치우와 황제에게 제사를 지냈다. 후대에 와서 치우는 전쟁신으로 받들어졌다. 이 기록은 중국측에 나와 있는 자료를 근거로 한 설명입니다. 동으로 된 머리, 철로 된 이마, 다양한 병기를 사용하는 치우의 묘사를 보건대, 분명 그는 당시 철기문화를 선진적으로 수용했던 것이 분명한 것 같습니다. 주신족의 신시(神市)는 단군조선 이전의 나라요, 1500년간이나 계속된 나라이며, 치우(蚩尤)는 그 14대 황제로 황하유역에서 일어나서 회대(淮垈, 중국 회수와 산동 사이의 땅)를 정복한 왕입니다. 그리고 공손헌원(황제)는 지나족(중국)을 통일한 왕입니다. 치우와 황제는 지금으로부터 4천7백여 년 전 중국 하북성 탁록(啄鹿)에서 10년 동안 70여 차례나 싸웠는데 이것이 고대 동북아시아 최대의 전쟁이라고 전해 내려오는 그 유명한 탁록전쟁입니다. 비록 탁록전쟁에서 공손헌원(황제)에게 패한 치우이지만 훗날 군신으로 받들어진 것만으로 보아도 그의 용맹성을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튼 이 작품은 고대 역사의 진위성을 따지는 역사서가 아닌, 그야말로 90퍼센트가 작가의 상상력으로 탄생된 ‘영웅 판타지’입니다. 한국 판타지 제2부(제1부는 1998년에 발표한 ‘왜란종결자’)에 속하는 이 작품은 역사의 자료가 턱없이 부족한 고대 역사로의 무한한 상상력을 동원하여 독서의 즐거움과 고대신화로의 충실한 안내자 역할을 하기에 손색이 없을 것입니다. 화합이냐, 지배냐? 역사의 운명을 건 영웅들의 대혈전! 800만 독자를 사로잡은 이우혁의 힘이 되살아난다! ‘퇴마록’ 이후 9년을 고심한 끝에 펼쳐놓은 ‘치우천왕기’! 단군의 고조선 이전, 과연 우리 민족의 시원은 어디였을까? 작가는 채 200줄도 되지 않는 사료를 붙들고 9년의 세월을 고심했다. 단 한 줄의 자료라도 더 찾기 위해 엄청난 양의 독서를 했고, 역사의 원형을 찾기 위해 방랑자처럼 중국 각지를 떠돌기도 했다. 이제 2003년 7월, 그는 뛰어난 역사적 상상력으로 5000년 동안이나 잊혀져 왔던 우리의 선조, 치우천왕을 부활시켰다! 역사의 운명을 건 대혈전의 시작과 끝은? B.C. 2716년부터 B.C. 2696년까지, 드넓은 중국 대륙이 바로 ‘치우천왕’기의 무대이다. 신석기 시대의 말기이며 또한 청동기 시대가 마악 시작된 바로 그 지점에서, 주신족의 치우천과 그의 쌍둥이 동생 치우비의 목숨을 건 모험과 사랑이 시작된다. 모든 부족은 제 색깔대로 공존해야 한다는 화합 사상을 가지고 있는 치우천! 힘으로 천하를 통일해 하나의 강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지나(중국)족의 대족장, 공손헌원! 최고의 전략가이며 전술가인 두 영웅의 운명적인 대결과 엎치락뒤치락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박진감 넘치는 스토리의 힘은 시공을 초월한 상상력의 진수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 마법과 도술, 선인과 신수들이 등장하는 전설의 시대! ‘치우천왕기’에는 영웅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운명을 시험하는 선인들과 신수, 도깨비 등등 온갖 마법과 도술을 부리는 캐릭터가 쉴새없이 등장한다. 인간의 모습을 한 대선인 자부(紫負)와, 파괴와 무질서의 선인인 혼돈(混沌)이 공존하고, 언어의 시조(始祖)인 발귀리(發貴理)와 전설의 동물인 맥(貊), 곤륜산에 살았다는 대주술사 서왕모(西王母), ‘소녀경’의 주인공 소녀(素女) 등이 바로 그들이다. 마법과 도술을 쓰는 그들은 치우천왕과 공손헌원, 그 두 영웅 뒤에서 그들을 돕거나 방해하는 역할을 한다. 거대하고 웅장한 영웅 판타지, ‘치우천왕기’! 이 소설은 역사에 근거하고 있지만 작가가 주창하는 한국 판타지이다. 판타지적인 요소가 많으며, 그러한 요소 없이는 애당초 구성될 수도 없었다고 본다. 실제 역사에 남은 작은 편린으로 구성하느라 무리도 좀 따를 수 있으나 이 작품은 소설이며, 판타지인 이상 재미있고 흥미로운 구성이 단연 돋보인다. 차 례 두영웅의 첫대결(2) 생사의 기로에서 누가 승자인가? 모여드는 사람들 우린 구슬의 힘 새로운 출발 염제, 유망 움직이다. 당시 생활 및 시대적인 설정 주요 등장인물 두 영웅의 첫대결(2) 헌원이 이끄는 수천 명의 대군은 서서히 치우형제와 그 벗들이 있는 골짜기 주변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크게 지르는 함성도, 욕설도 없는 조용한 포위였다. 그 사이 골짜기 안의 치우군도 나름대로 조용히 싸울 준비를 갖추어가고 있었다. 보돈차르와 툰툰을 제외하고는 이렇게 큰 규모의 싸움은 처음이었다. 젊은 전사들은 모두들 흥분이 되는지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보돈차르가 치우천에게 지휘를 맡긴다고 하자 모두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응낙했다. 사실 치우천은 아직 젊고 경험이 없었지만 여러 부족이 섞여 있는 터라 구심점이 없어서 별수 없었다. 야율쿠리가 치우천에게 말했다. “골짜기를 벗어나는 게 좋지 않을까? 이러다간 갇혀버리겠다.” 치우천은 고개를 저었다. “아냐. 저쪽이 수가 더 많으니 좁은 곳을 막고 싸우는 게 낫다. 그보다 어서 움직여야 한다.” 치우천은 가슴이 마구 뛰어서 흥분을 제대로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그것을 보고 야율쿠리가 말했다. “천! 겁내지 마라. 저런 지나족 돼지새끼들은 겁낼 것 없다. 헌원이 별거냐? 헌원이 싸움을 잘한다는 말은 들어본 적 없다! 우리 키탄 전사들만으로도 다 때려부술 수 있다! 안 그러냐, 전사들아?” 야율쿠리가 호기롭게 외치자 근처에 있던 키탄족 전사들 모두 우렁찬 함성을 질렀다. 허나 치우천은 상기된 얼굴로 신중하게 말했다. “야율쿠리! 네 용기는 좋지만 저쪽은 많고 우리는 적다. 더구나 우리는 서로 손발을 맞춰본 적도 없으니, 머리를 써서 싸워야 한다.” 서로 다른 부족의 전사들을 한데 모아 싸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때문에 서로 다른 부족끼리 모여서 싸우는 것은 별로 좋지 않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런 예가 없지는 않으나, 아예 어느 한 부족이 주축이 되고 나머지는 그 부족의 움직임에 적당히 맞춰 싸우는 방법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치우천은 생각이 달랐다. 주축이 되는 부대를 정하면 통솔은 쉽지만 힘을 충분히 발휘할 수 없다고 여겼다. 여러 부족이 가진 개성을 살려 잘 활용하면 한 부족의 전사들보다 더 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오고 있었다. 치우천은 자신이 생각한 전략을 여러 사람에게 설명했다. 하지만 그 전략이 너무 복잡한 것 같아서 모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뭐가 그리 복잡하냐? 제길! 그냥 막 붙어서 싸워버리면 그만 아니냐?” 야율쿠리가 툴툴거리자 초초룬도 한마디 거들었다. “우리 미아우 전사는 왜 뒤로 세우느냐? 우리도 잘 싸울 수 있다!” 그저 마구잡이로 붙어서 싸우는 것밖에 모르던 각 부족의 전사들에게 치우천의 전략은 너무도 복잡하고 의외였다 더구나 꾀를 쓰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뒤로 물러서거나 속임수를 쓴다는 것도 취향에 맞지 않았고 그렇게 한다고 해서 쉽게 이길 것 같지도 않았다. 치우천은 답답한 마음을 억누르고 계속 사람들을 설득했다. 다행히 보돈차르와 구르, 양역 등이 치우천의 생각을 따르겠다고 나섰다. 그래도 다른 사람들은 여전히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키타야가 치우천을 대장으로 삼기로 해놓고 말을 안 들으면 어쩔 것이냐고 화를 내며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던 사람들과 한마터면 싸움까지 벌일 뻔했다. 결국 한참이나 아웅다웅한 끝에 각 부족 전사들은 간신히 치우천의 말대로 움직이는 데 동의했다. 그러느라 시간을 한참이나 지체했고, 이제 지나족의 군대는 서서히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치우천은 시간을 자꾸 끄는 것이 답답하여 발을 굴렀다. “서두릅시다!” 그때 치베가 달려와 소리쳤다. “천 안다, 지나족들도 여러 부족들이 섞여 있는 것 같다. 카린산 여인족 말고도 다른 부족도 있다!” “어느 부족?” “훈족과 타타르족도 있는 것 같다.” 그 말을 듣고 보돈차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테지. 지나족이 여러 천 명이나 되는 전사를 끌고 이렇게 먼 길을 오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주변의 다른 부족의 전사들을 끌어들여 저렇듯 많은 수를 채웠을 것이다.” “그보다 훈족을 조심해야 하네. 훈족은 말을 잘 타고 싸움에 익숙한 전사들이 많다네.” 구르가 조언하자 치우천은 다급하게 이야기를 받았다. “그보다 어서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게 급합니다. 그래야 제대로 싸울 수 있습니다.” 치우천이 조바심을 내자 보돈차르가 싱긋 웃었다. “천 안다. 서두르지 마라. 대장이 조급해하면 부하들이 불안해한다.” 모든 부족들의 지휘를 치우천에게 맡기는 것으로 결정이 나자 각 부족들은 그의 명에 따라 여기저기로 움직였다. 각 부족장 또는 부족의 대표자들이 치우천의 말에 따르고, 부족의 전사들은 자기 부족 대장의 말을 따르는 방식이었다. 형요 자매들에게는 각 부족들간에 연락을 취하는 일을 맡겼고, 도깨비들은 소녀와 울라트를 지키도록 했다. “너무 느려. 이래서는 안 되는데...... ” 치우천이 발을 동동 구르자 형요가 조심스레 충고했다. “나도 초조하지만, 천 너는 초조해하면 안 돼 저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그리 빨리 움직일 수 있겠어?” 각 부족의 전사들은 저마다 자리를 찾아 우왕좌왕하는가 하면, 물러서지 않겠다고 투정을 부리기도 하고, 자기는 숨지 않겠다고 부족장에게 맞서기도 했다 아무리 싸움일지라도,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거나 대장의 말이면 무조건 따르지는 않았다. 그 안에도 작은 우두머리들이 있어서 특히 더 했다. 결국 따르기는 하겠지만, 자신이 이해되지 않으면 잘 움직이지 않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 때문에 각 부대는 치우천이 생각한 대로 착착 움직여주지 않았던 것이다. “안 되겠다. 시간이 모자라. 형요, 너희 자매는 부족장들에게 어서 전사들이 자리를 잡게 하라고 전해. 난 나가서 시간을 끌어야겠다.” 치우천은 리미와 포리에게 손짓을 하여 따르게 하고 말을 타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러자 소녀도 말을 타고 달려 나왔다. “소녀님은 왜 나오십니까?” 치우천이 의아해하자 소녀는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말했다. “내가 있는데도 카린족이 쳐들어오다니...... 누가 왔는지 모르지만 내가 가서 꼭 봐야겠어요.” 치우천은 위험하니 관두라고 하려다가 소녀의 눈이 뭔가 결심한 듯 형형하게 빛나는 것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리미와 포리는 말없이 치우천의 뒤를 그림자처럼 따라왔다. 지나족은 이미 꾸준하게 움직여서 치우 일행이 있는 골짜기를 이백 보 점도의 거리를 두고 완전히 포위하고 있었다. 치우천이 말을 달려 나오자 지나족의 진(털 중앙이 조금 움직이면서 몇 사람이 마주 달려 나왔다. 바로 헌원과 지, 끽구와 그리고 처음 보는 초로(初老)의 남자였다. 치우천은 헌원과 이야기를 나눌 만한 거리에 이르자 곧 낭랑하게 외쳤다. “주신 사울아비 치우천이 공손헌원님께 인사드립니다.” 헌원도 침착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지나 화산족 헌원이 인사드리네. 몸은 많이 좋아졌는가?” “염려해주신 덕분에 많이 좋아졌습니다.” 그때 소녀가 말을 달려 지나족 왼편에 자리 잡고 있는 카린족들에게로 달려갔다 언제 따라왔는지 요요와 미요가 그 뒤를 따랐다. 허나 치우천과 헌원은 거기에는 눈도 돌리지 않고 침착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렇게 먼 길까지 직접 오시다니, 정말 뜻밖입니다.” 치우천의 말에 헌원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자네와 자네 아우의 일인데, 먼 길이라고 마다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하나같이 유명한 자네의 벗들도 만날 수 있게 되었는데 말일세.” “제 벗들이 모이는 것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지(知)가 애를 써주었네.” 헌원의 말에 지가 이상하게 생긴 커다란 눈을 빛내며 흥한 표정으로 웃었다. “자네가 꾀를 부린다는 것은 이미 들어서 잘 알고 있었지 필시 자네가 친구들에게 도움을 청하리라 믿었다네. 그래서 자네가 떠나자마자 사람을 풀어 살폈더니만, 아니나 다를까, 자네 벗들이 전사들을 끌고 움직이더군. 그래서 우리도 오게 된 것일세.” 치우천이 웃으며 되받았다. “정말 고생이 많으셨겠습니다. 이 많은 전사들을 끌고 오시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요.” 그러자 헌원 옆에 있던, 치우천이 처음 보는 초로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처음 보는군. 말은 많이 들었네. 나는 광성자라고, 도의 길을 걷는 사람일세. 카린산에서 도를 닦은 일이 있기에 헌원님을 돕게 되었네.” 치우천은 고개를 숙여 인사해 보였다. 그러면서 조용히 지나족의 진을 훑어보니, 지나 전사갸 아닌 다른 부족의 전사들아 훨씬 많아 보였다. 타타르나 훈족의 전사들이 대부분이고 지나 전사는 이천 명도 안 되어 보였다. 먼 길을 가기 힘들었기 때문에 이 근방의 부족들을 설득하거나 위압하여 대군을 편성했으리라. 치우천은 재빨리 생각했다. ‘그렇다면 헌원도 지휘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나만 그런 게 아니겠지.’ 얼른 생각을 접고 치우천이 외쳤다. “광성자님께도 인사드립니다. 그런데 뒤의 전사들은 못 보던 분들이 많군요. 여러 부족의 친구들이 오신 것 같습니다.” “훈족 나단선우의 부족과 타타르 유루칸족의 전사들이 헌원님을 도와주러 오셨다네. 카린의 쑤앙마이께서도 헌원님과는 오랫동안 친분이 있던 터라 전사를 보내주셨고 말이네. 이 정도는 되어야 자네가 섭섭하지 않지." 그때 끽구가 외쳤다. “이봐! 천! 이쯤 되었으니 순순히 우리를 따라가는 게 어떨까? 이제 네 밑천은 다 떨어지지 않았는가? 손을 들 때는 들 줄도 알아야지.” 치우천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인사는 그만하고 싶으신가 보군요. 좋습니다. 헌원님, 도대체 저와 제 아우 중 누구를 원하시는 것입니까? 도대체 우리 형제의 어디에 이 수많은 전사들이 고생할 만큼 가치가 있는지 저는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헌원은 여전히 웃지도, 찡그리지도 않은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자네 형제는 그만한 가치가 있다네.” “우리는 주신에서 쫓겨나고, 갈 데도 없는 그야말로 불쌍한 형제일 뿐입니다.” “말 돌리지 말게. 자네는 자부선인을 뵌 적이 있지?” 광성자가 외치자 치우천은 약간 흠칫했다.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이번에는 헌원이 위엄 있게 나섰다.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자네는 내 편이 되어줘야만 하네.” 치우천은 자조(自嘲) 섞인 소리로 ‘하하’ 웃었다. “자부선인을 뵌 적은 있지만 제가 눈이 어두워 그분을 몰라보고 가르침을 받을 기회를 차버렸답니다. 저는 눈이 멀어도 그렇게 멀 수가 없는 못난 놈이랍니다.” 치우천의 비아냥거리는 듯한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광성자가 엄숙하게 말했다. “혼돈선인께서 과거, 홍균선인께 전한 말이 있었느니라. 나는 홍균선인께 들었느니. 이 땅에 두 대선인이 있었으니 혼돈선인과 자부선인인데, 두 대선인은 가르침을 이을 이를 남겨두셨다 했느니. 가르침을 이어받은 두 사람이 힘을 합하면 못할 일이 없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영원한 적수가 될 것이며 온 세상이 싸움에 휘말릴 것이라고 말이야...... ” 치우천은 짐짓 대수롭지 않은 얘기라는 듯이, 흐트러진 자세로 웃으며 말했다. “그런 예언이 있었습니까? 거 참, 놀랍군요. 허나 헌원님, 헌원님은 앞날이 모두 정해져 있다고 믿으십니까?” “무슨 소린가?” “예언을 믿으신다면 앞날은 다 정해져 있다고 믿으시는 거겠지요. 그렇다면 저나 헌원님이 어떻게 될지도 다정해져 있으니 어떻게 한다고 될 일이 아닐 겁니다. 또 앞날이 점해져 있지 않다고 믿으신다면 모든 것이 사람 하기에 달린 일이니 그런 예언 따위는 믿지 않아도 될 것 아닙니까? 하하.” 광성자가 다소 노기섞인 음성으로 외쳤다. “그런 알량한 생각으로 대선인의 가르침을 희롱하지 마라! 하늘이 정한 일을 사람이 따를 수도 있고, 사람이 세운 일을 하늘이 이루시는 일도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이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고 둘로 딱 나누어 생각하면 안 되느니라! 대선인의 예언은 틀림없는 것이야!” “헌원님께서는 그럼 혼돈선인의 가르침을 이으신 분인가요?” “그렇느니라.” “그렇군요. 헌데 사람 잘못 보셨습니다. 저는 자부선인의 가르침을 이은 사람이 아니랍니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자부선인을 뵌 적은 있으되, 가르침은 전혀 받지 못했습니다. 온 세상을 싸움에 휘말리게 하고 헌원님과 영원한 적수가 된다구요? 아이쿠, 저는 그럴 위인이 되지 못한답니다. 주신에서도 쫓겨나고......” 그때 헌원이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런 처지임에도 자네는 많은 전사들을 거느리고 나와 맞서고 있지 않은가? 자네는 자부선인에게 가르침을 받지 못했다 말하지만, 요즈음 들어 자부선인을 만나 뵌 사람은 자네뿐일세. 그런 것 말고 내가 본 자네의 능력만으로도 나를 충분히 두렵게 하고도 남네.” 치우천은 그만 입을 다물어버렸다. 헌원이 타이르는 듯한 어조로 계속 말했다. “자네는 왜 나를 그리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것인가? 나는 자네가 좋고, 자네가 아깝네. 자네는 내 뜻과 다른 뜻을 가졌다고 들었네. 그 때문에 나를 따를 수 없다는 것도 자네가 가진 뜻은 대체 무엇인가?” 치우천은 흐트러진 자세를 바로 세우고 엄숙하게 표정을 바꾼 다음 말했다. “주신 사울아비 치우천이 말합니다. 저는 아직 어리고, 아는 것이 적어서 지닌 뜻도 그리 크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헌원님과 제가 갈 길은 서로 다른 것 같으니, 이제 제가 헌원님을 따를 수 없는 이유를 모두 말씀드리겠습니다.” 헌원은 묵묵히 치우천을 한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말하게나. 듣겠네.” 한편, 소녀는 급히 말을 몰아 카린산 여전사들이 주욱 늘어서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달리면서 소녀는 커다랗게 외쳤다. “나는 소녀다! 쑤앙마이의 열세 작은 자매였던 소녀다! 이곳의 대장은 누구냐?” 소녀가 몇 번씩이나 외치자 카린족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곧 카린족의 가운데에서 말을 탄 세 명의 여전사가 나왔다. 그중 한 명은 비냐였고, 다른 두 명은 예전 쑤앙마이의 집안을 지키던, 흰 호랑이 가죽을 두르고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여전사였다. “비냐! 유우! 가나! 나를 모르겠어?” 소녀가 외치자 비냐가 소리쳤다. “소녀! 너는 어째서 저 주신놈들이랑 같이 도망친 거야?” “그걸 모르겠어? 나는...... 나는...... !” 소녀가 말을 더듬는 사이 유우가 외쳤다. “소녀! 너는 어서 몸을 피해라. 우리는 쑤앙마이께 지나족을 도와 싸우라는 명령을 받았다.” 소녀는 치미는 화를 이기지 못해 있는 힘을 다해 외쳤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니! 저들은 무라를 도와 괴물을 물리쳐준 사람들인데!” 소녀의 말을 듣고 가나가 좀 맥이 빠진 듯 대답했다. “그건 알지만, 지나족이 흘린 피가 더 크잖아? 주신족은 몇 명이 죽었을 뿐이지만, 지나족은 더 많이 죽었어.” “그렇다면 아무 편도 들지 말아야지!” “그럴 수 없어. 이미 쑤앙마이께서는 헌원님의 명령을 들으라고 하셨어. 소녀, 너도 알지? 쑤앙마이의 명령은 거역할 수 없어!” “쑤앙마이께서는 어째서!” 소녀가 애가 타서 외치자 비냐가 거칠게 말했다. “너야말로 어째서 그러는 거냐! 저런 놈들이나 따라다니고! 상대가 누구건 우리는 쑤앙마이의 명령이 떨어진 이상 무조건 다 죽여야 한다! 너까지 죽이고 싶지 않으니 어서 물러서란 말야!” 성질이 거친 비냐는 당장 혼자서라도 달려 나가 싸움에 뛰어들 것 같은 기세였다. 소녀가 다시 외쳤다. “그럴 순 없어! 자매들아, 이건 옳지 못한 일이야_ 가려면 나를 죽이고 가!” “소녀! 쑤앙마이의 명령을 거역할 셈이냐?” 유우와 가나가 동시에 외치자 소녀는 지지 않고 안타까운 목소리로 외쳤다. “쑤앙마이는 내게 명령을 내리신 적이 없어! 나는 내 하고 싶은 대로 할 거야_싸우지 말라는 것은 주신 사람들 때문만이 아냐! 싸움이 나서 너희도 많이 죽고 다칠 것이 안쓰러워 못 보겠단 말야. 지나족들이 뭔데, 우리 카린족 여전사들이 그 돼지들의 말을 들어야 하는 거지? 응?” “그건 쑤앙마이의 명령이야!” 비냐가 날카롭게 외치자 소녀가 다시 맞받아쳤다. “쑤앙마이께서 지나족들을 도우라고 하셨지, 싸우라면 싸우고 죽으라면 죽는 지나족의 개가 되라고 하셨니? 응? 쑤앙마이께서도 사실 우리 자매들의 피를 보는 것은 원치 않으실 것 아냐? 싸우지 마, 응? 싸우는 척만 하고, 죽이고 죽고 하지 마! 응? 제발 부탁이야! 우리는 자매로 같이 자랐잖아.” 소녀가 눈물을 흘리면서 애처로운 몸을 가늘게 떨며 간절하게 하소연했다. 유우와 가나는 눈물이 핑 돌아 금세 눈시울이 붉어지자 고개를 숙였다. 다만 비냐만은 애써 고개를 돌리며 외쳤다. “안 들은 것으로 하겠어! 싸우지 않을 수 없어! 어서 돌아가서 숨어!” “너희가 날 죽이지 않아도, 너희가 치우천을 죽이면...... 나도 죽을거야!” 소녀는 마지막으로 외치고 눈물을 뿌리며 말을 달려 골짜기 안으로 들어갔다. 소녀와 비냐 등의 대화는 전부 카린 말로 한 것이라 지나족은 물론이고 요요와 미요도 알아듣지 못했다. 치우천은 헌원을 똑바로 바라보며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헌원님은 온 세상의 모든 부족을 하나로 엮어 하나의 부족으로 만든다는 생각을 하고 계십니다. 부족보다 큰, 나라를 만들려고 하시는지도 모르지요. 물론 아주 크고 훌륭한 뜻이며, 이 세상에 태어나서 무언가를 이루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 해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게 드는 큰 뜻입니다. 허나 그것은 절대 이뤄질 수 없는 꿈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때 지가 나서서 헌원 대신 물었다. “어째서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인가?” “첫째, 헌원님은 지나족의 이름으로 세상을 뭉치려 하십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우리 주신 말고도 자신의 조상과 살아온 방법을 아끼는 부족들이 많습니다. 모든 부족들은 여러 천 년 동안 나름대로 살아오며 사는 방법을 만들고 익혀왔습니다 이것을 버리고 모조리 지나족이 되어 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제 벗 한 사람은 그것은 아버지 어머니를 버리고 사는 것과 마찬가지 일이라고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처음부터 여러 부족이 있었던 것은 아니네. 그렇게 생각한다면 하나로 합쳐지지 못할 이유 또한 없지 않은가?” “그러나 받아들이지 않을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만약 모든 부족이 하나로 사는 것이 정말 하늘의 뜻이었다면, 왜 부족들이 똑같은 말, 똑같이 사는 법을 가지게 하지 않았겠습니까?” “흩어진 것은 다시 모을 수도 있는 법이고, 달라졌던 것들도 같아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저는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헌원님, 만약 저나 제 벗처럼 그 말에 따르지 않는 부족이라면, 헌원님께서는 그들을 쳐서라도 하나로 합치려 하실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럴 수도 있네. 나도 싸움은 싫네만.” “그렇게 되면 그 피는 강을 이루어 땅을 덮을 것이고, 슬픈 울음소리는 곳곳마다 메아리쳐서 하늘을 가릴 것입니다. 그래야만 할까요?” “.보다 큰 것을 위해서, 보다 영광된 앞날을 위해서라면 할 수 없는 일이네.” “그럼 두 번째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설령 헌원님이 전쟁을 벌인다 해도, 헌원님은 모든 부족을 정복하실 수 있다고 보십니까? 만약 헌원님이 주신이나 키탄, 마갸르, 몽골, 미아우, 타타르, 훈족 거기다 카린이나 창족까지 다 하나로 아우른다고 합시다. 허나 사람이 사는 곳은 지금 우리가 아는 곳만이 아닙니다. 내가 데리고 있던 도깨비들도 사람입니다. 그들의 땅은 가는 데에 만도 몇 해씩이나 걸릴 정도로 너무 멀고 우리와는 너무도 다릅니다. 카린 너머에는 과보족의 땅이 있고, 그 너머에는 내 도깨비인 리미나 개르가 살던 곳이 있으며, 또 그 서쪽으로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부족이 있습니다. 남으로도 싱카가 살던 곳이나 마냥이 살던 곳처럼 세상은 끝없이 넓게 있구요. 만약 헌원님이 우리가 아는 모든 부족을 합하여 큰 부족을 세웠다고 해서, 싸움이 없어지고 영원한 평화가 오겠습니까? 세상을 하나로 만들려면 우리가 아는 부족을 다 합치고 난 다음에도 과보족과 싸워야 하고 그 다음은 리미의 부족, 개르의 부족과 싸워야 할 것이고 싱카의 부족, 마냥의 부족이 가진 땅도 빼앗고 사람을 합쳐야 할 것 아닙니까? 모든 사람이 다 죽어 없어질 때까지 싸움만 하겠다는 말씀입니까?” 헌원은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으나, 지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외쳤다. “그들은 도깨비들 아닌가? 도깨비들의 부족을 합쳐서 뭐 하겠는가?” “그들은 도깨비가 아니라 사람입니다.” “그들은 도깨비들이야.” “좋습니다. 나중에 헌원님도 그들이 도깨비는 아니란 것을 아시게 될 것입니다만, 일단 넘어가도록 합시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정말 헌원님의 뜻이 이루어져서 세상을 하나로 만든다고 하지요 그러면 정말 평화가 오겠습니까?” “서로 맞서 싸우는 부족들이 없어지는데 무슨 전쟁이 있고 싸움이 있단 말인가?” 치우천은 갑자기 ‘하하’ 웃었다.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허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주신 사람이고 치우 집안사람이지만, 같은 집안 안에서도 치우가람, 바람 형제와는 앙숙이며 싸워야만 할 운명이 되었습니다. 제 외할아버지는 제 어머님의 아버지신데도 저는 그분과 싸리야 합니다. 한 집안 안에서도 싸움이 이리 많을 수 있는 게 사람 사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 많은 부족을 하나로 합치고, 서로 다른 사람들이 섞여 사는데도 싸움이 없고 다툼이 나지 않을까요? 부족이 커져도 아무 일이 없다는 것은 너무나 달콤한 생각일 것 같습니다.” “싸움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은 작은 일이다. 전쟁은 아니야. 원한이 있으면 같아야 하고, 말로 풀지 못하면 무기를 들 수도 있다. 그러나 부족과 부족들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서로 피를 흘리며 싸우지 않던가?” 치우천이 갑자기 빈정대듯 되받았다. “같은 부족 안에서는 싸움이 없고 갈라지는 일이 없습니까? 그렇다면 헌원님과 유망님은 왜 갈라섰습니까?” 그 말을 듣자 헌원이 처음으로 약간 주춤했고, 지가 곧 노기 떤 음성으로 외쳤다. “유망님과 헌원님은 뜻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헌원님의 뜻대로 이루어진다면 세상 사람들은 평안할 것이다!” 이에 치우천도 지지 않고 외쳤다. “그렇게 크게 만들어진 부족이 정말 갈라지지 않고 그대로 갈 수 있단 말입니까?” “잘 다스리면 된다. 잘 다스리면 되는 것 아닌가!” “헌원님을 얕보아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의 재주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한 사람이 그렇게 넓은 땅, 그렇게 많은 사람을 다스릴 수는 없습니다.” “부하를 쓰면 된다. 그리고 부하가 또 부하를 쓰고 또 부하를 쓰면 되는 것이다!” “믿을 만한 부하는 그렇겠지요. 허나 부하가 만약 윗사람의 뜻을 거스른다면? 릴은 물속은 들여다볼 수 있어도 사람 마음속은 들여다 볼 수 없으니 아무도 모릅니다. 주술사들조차도 앞날을 점치고 땅에 묻힌 것도 볼 수 있지만 사람의 마음속은 들여다볼 수 없습니다. 유망님만 해도 헌원님의 마음속을 미리 보실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헌원님도 모든 것을 다 뚫어보신다고 자신하실 수 있을까요? 하물며 헌원님이 돌아가시고 나면? 헌원님의 뒤를 이을 사람이 그만한 그릇일지 아닐지, 계속 그렇게 될지 아닐지 자신하실 수 있습니까?” 헌원은 치우천이 유망을 배신한 자신을 비난하자 생전 처음으로 얼굴에 노기를 띠었다. 그러나 말은 하지 않았다. 대신 지가 새빨갛게 변한 얼굴로 호통을 쳤다. “닥쳐라!” 창백한 안색으로 조용히 치우천을 노려보고 있는 헌원의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도 무시무시한 기분이 들어 압도당하는 듯했다. 그러나 치우천은 떨리는 손에 힘을 주며 외쳤다. “헌원님, 그런 식으로는 안 됩니다. 부족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 지도자가 가진 힘은 그만큼 강해집니다. 그러면 그걸 탐내는 자들도 많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지도자가 되겠다, 아니 내가 되겠다하고 일어서기 시작하면 예전보다 더 많은 피를 흘리는 전쟁이 일어납니다. 한번 갈라서면 지금보다 더 큰일이 날 것입니다. 예전에는 자기 부족만 지키고 이웃 부족만 이기면 그만이었지만, 이제는 모두를 굴복시키지 않으면 멈추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더욱 치열하게 싸우게 될 것입니다. 부족을 모두 합쳐 크게 세우면 싸움이 없다고요? 저는 반대로 생각합니다. 부족을 너무 크게 세우면 그 때문에 사람들은 더 싸우고, 피는 강물처럼 흐르고 묻히지도 못한 뼈가 사방에 깔리며, 억울하게 죽은 귀신들이 세상을 뒤엎을 것입니다.” 마침내 지는 화를 이기지 못해 이제는 새파란 얼굴로 커다랗게 외쳤다. “네 이놈! 좁쌀 같은 머리로 감히 세상의 큰일을 희롱하다니!” “좁쌀 같은 머리로도 희롱당하는 것이 세상의 큰일입니까? 세상의 큰일이란 것이 그렇게 하찮은 것입니까?” 그때 지를 물러서게 하고 헌원이 조용히, 그러나 몹시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네 뜻은 뭐냐? 이것도 저것도 다 안 된다는 것이냐?” “저는 뜻이랄 것이 없습니다. 다만 모든 것이 다 하늘 뜻대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사람들이 갈래갈래 나뉘어 아웅다웅 싸우는 것이 안쓰러울 뿐이라면, 사람들끼리 싸우지 않고 살 수 있도록만 하면 됩니다. 구태여 다른 부족을 정복할 필요가 어디 있습니까? 정복한 부족은 좋겠지만, 정복당한 부족사람들이 얼마나 비참해질지 생각해보십시오. 세상 모든 부족을 하나로 만든다는 것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헌원님의 방식으로는 안 됩니다. 모든 부족을 지나족으로 합친다는 것은 안 됩니다. 모든 부족이 그대로 살게 놓아두는 것이 좋습니다. 다만 모두가 평화롭게 지내면 그만 아닙니까? 서로 싸우는 것이 싫다면, 지나족이 그 일을 하면 됩니다. 지나족은 지금도 주신보다 땅도 넓고 사람도 많습니다. 굳이 다른 부족을 정복하거나 피를 흘리지 않아도, 지나족이 싸움을 말리고 중간에 서주면 싸움은 자연스레 없어질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온 세상 사람들을 평화롭게 만드는 길일 것입니다.” 뒤로 잠시 물러나 있던 지가 다시 외쳤다. “그런 짓을 뭐하러 하겠느냐! 얻는 것 없이 뭐 하러 그런 고생을 한단 말이냐!” 지의 말에 치우천이 맞받아쳤다. “세상 모든 사람을 위해서입니다! 그 때문에 다른 부족들을 하나로 만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세상 사람들도 중요하지만, 지나족이 가장 중요하다!” 핏대를 세우며 지가 외치자 치우천은 냉소를 띠며 말했다. “그러면 처음부터 그렇게 말하시지 그랬습니까? 아, 물론 좋죠. 자기 부족이 가장 중요하단 것을 누가 모르겠습니까? 그러니 자기 부족이 잘살고, 힘이 세지기 위해 다른 부족을 친다면 말리지 않겠습니다. 허나 저는 주신 사람입니다. 저는 주신을 위해 애써야겠고, 제 벗들도 각각 제 부족을 위해 싸워야겠지요. 자기 부족이 가장 중요하니까 말입니다. 지님, 그러면 처음부터 알아듣기 쉽게 말씀하시지, 왜 세상 모든 사람을 위해서라고 말해서 사람을 속이려 한단 말입니까? 저도 속을 뻔하잖았습니까!” 지는 너무도 화가 나서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이...... 이 녀석! 헌원님의 큰 뜻을 마음대로 깎아? 속...... 속임수? 저...... 저...... 혓바닥을 당장 잘라버려야!” 치우천은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헌원에게 말했다. “헌원님, 가르침을 주신 것, 감사합니다. 자기 부족만 생각하지 않고, 모든 사람을 위해 애써야 된다는 것, 잘 배웠습니다. 저는 그 길을 가려 합니다. 다 헌원님의 덕이겠지요. 그러려면 세상 모든 부족을 힘으로 누르려는 헌원님부터 막아야겠군요. 작고 힘없는 부족들의 힘을 모아서 말입니다. 그래야 가르침을 주신 은혜를 잘 받드는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하핫!” 이제 끝났다는 듯이 치우천이 크게 웃자, 헌원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때 옆에서 듣고만 있던 끽구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하더니 노기를 띤 무시무시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놈! 헌원님의 은혜를 이런 식으로 갚아, 응?” 끽구의 얼굴을 쳐다보며 치우천은 껄껄 웃었다. “은혜요? 은혜는 물론 같아야 합니다. 그런데 뭐가 은혜입니까?” 치우천의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이 끽구가 발을 구르며 소리쳤다. “맨 처음에 알지도 못하는 네놈을 유망님께 데리고 가 다리를 고쳐주려 한 것도, 카린산으로 가서 괴물을 물리치도록 한 것도...... ” 치우천이 끽구의 말을 가로채며 소리쳤다 “그것들은 은혜가 아닙니다! 유망의 막사에서 있었던 일을 치우가람 형제가 알게 된 것은 누구 때문입니까? 카린족이 은혜를 베푼 우리를 잡으려고 몰려와 있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들은 정말 은혜를 베푼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유망 막사 어쩌고는 무슨 소리냐?” 광성자가 의아한 듯 묻자 치우천이 웃으며 대답했다. “지님에게 한번 여쭈어보시지요 그때 그것을 아는 이는 상망님과 지님, 두 분뿐인데 제 생각에는 상망님은 아닌 듯하고, 지님이 하신 일 같으니까요.” 지의 안색이 해쓱해지고 입을 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치우천은 계속 말했다. “그뿐만 아닙니다. 주신 한웅님이 번개범의 습격을 받은 뒤, 마주친 늑대 떼는 도대체 누가 부린 것일까요? 그 일행에는 우리 형제도 있었습니다. 우리도 해침을 받은 셈이니 은혜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늑대를 부린 것이라니? 왜 딴청을 부리느냐?” “모르시는 일입니까?” “모른다!” 지가 딱 잡아떼었으나 치우천은 여전히 여유있게 웃으며 말했다. “그 일은 증거가 없으니 은혜 이야기로 돌아갑시다. 제가 받은 은혜는 그런 것들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상대를 위해준 것만이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태산 회의 때 헌원님은 저를 아끼시어 끽구님과 싸우는 것을 멈추어주셨습니다. 그 일은 제가 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헌원님은 아직 모자란 저에게 큰 능력이 있다고 힘을 북돋워주시고 저 자신이 용기를 내도록 해주셨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제가 잊을 수 없는 일입니다. 헌원님, 저 치우천, 비록 헌원님과 다른 길을 걷습니다만 그 은혜는 잊지 않을 것입니다. 제 목숨을 구해주셨으니 저도 나중에 기회가 생기면 헌원님의 목숨을 구해드리겠습니다.” 치우천이 말을 마치자 마침내 헌원은 크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자네 너무하는군. 첫째, 나의 뜻을 그렇게 마음대로 풀이해서는 안되는 거였네. 나도 모든 세상 사람을 위하려 생각하고 있는데 말일세. 자네의 이야기는 너무 지나친 감이 있어.” “뜻이 다른 사람들끼리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유망 막사의 일은 나중에 지에게서 들었네. 변명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그것은 내가 시킨 일이 아니네. 내 자네 형제를 얻기 위해 자네 형제들이 주신에서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을 막으라고 명한 적은 있네. 솔직히 인정함세. 그러나 지가 그런 고자질을 하여 그 때문에 자네 형제가 사막에 던져지게 될 줄은 몰랐네. 나중에 듣고 나도 많이 걱정 했었다네. 그리고 카린족에게 기인과 전사들을 보낸 것은 자네가 본 그대로일세. 허나 나는 자네들을 잃고 싶지 않았네. 이건 조금의 거짓도 없는 진실일세.” 담담한 태도로 솔직하게 말하는 헌원을 보자 치우천도 조금 마음이 흔들렸다. 치우천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알고 보니 그랬군. 사실 부족도 다른 처지에 그만한 모략은 부릴 수도 있긴 하다. 더구나 우리 형제를 크게 보아주어서 그런 것 아니겠는가? 정작 주신 사람들은 우리를 제대로 몰라주는데, 하필 헌원이 우리를 알아주다니......’ 생각을 거두고 치우천이 입을 열었다. “그러면 한웅님을 덮친 늑대는 무엇입니까? 비휴님과 관련 없다는 것입니까?” “비휴는 그곳에 간 일이 없네! 세상은 넓으니, 늑대를 부리는 사람이 꼭 비휴 하나라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겠는가?” 헌원이 단호하게 말하자 치우천은 한숨을 내쉬었다. 헌원이 지금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것도 유망이 한 일일까? 그럼 또 누가 늑대를 그렇게 부릴 수 있단 말인가? 가리족일까?’ 치우천의 표정이 복잡해지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헌원이 계속 말했다. “여러 이야기할 것 없네. 나는 많이 생각했네. 자네가 자부선인의 가르침을 이은 사람이라면 어떻게 하나, 하고 말일세. 아직 어린데도 자네 형제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 정말 두려웠네. 더구나 자네가 나와 뜻을 달리하는 것도 이미 눈치 채고 있었네. 자네가 나를 아는 것처럼, 나도 자네를 알 수 있었다네. 항상 어둠 속에서, 내 마음 속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네. 자네를 없애라고 장차 자네는 내 뜻을 펴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될 것이라고 그러니 자네 형제를 없애야 한다고.......” 헌원은 쓸쓸히 웃으며 말끝을 흐렸다. 쓸쓸해 보였지만, 여전히 당당한 헌원의 모습은 마치 커다란 산이 우뚝 서 있는 것 같았다. 치우천마저도 그 모습에 위압되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자네를 정말 해치려 했다면 나는 얼마든지 기회가 있었네. 그럼에도 자네를 해치지 않은 것은 자네의 능력을 얻거나, 자네 아우의 힘을 탐낸 것만도 아닐세. 나는 자네를 좋아했네. 어쨌든 자네는 나를 정말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일세. 그런 자네와 같이 힘을 합치고 싶었던 것일세.” “저도 그렇습니다. 헌원님만큼 큰 분은 아직 만나 뵌 적 없습니다. 다만 서로의 뜻이 다른 것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네. 나와 힘을 합치지 않겠는가? 같이 세상을 호령해보세.” 헌원의 은근한 말투에 치우천은 웃으며 되받았다. “헌원님이야말로 지금이라도 뜻을 돌리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굳이 전쟁을 하거나 다른 부족을 정복하지 않아도 충분하지 않습니까?” 그러자 끽구가 우악스럽게 외쳤다. “곧 죽을 놈이 여전히 큰소리! 네 놈의 그 잘난 벗들 몇몇이 이 많은 전사들을 당해낼 수 있을 것 같으니.” 치우천은 끽구를 노려보며 마주 소리쳤다. “덤벼보시오. 우리는 두렵지 않소.”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결국 헌원은 얼굴을 굳혔다. “정말 아쉬운 일이군 자네를 해치고 싶지는 않았는데...... ” “저도 헌원님과 싸우기는 싫었습니다. 허나...... ” 치우천은 크게 외치면서 입고 있던 겉옷을 양손으로 부욱 찢어서 땅에 내팽개쳐 버렸다. 그러고는 다시 소리쳤다. “더 이상 저도 어쩔 수가 없군요!” 헌원도 뭐라 대꾸하지 않았으나 역시 소맷자락을 찢어 땅에 팽개쳤다. 이제 두 사람은 원수가 되었다는 표시였다. 그리고 헌원은 침통한 얼굴로 뒤돌아보지 않고 진중으로 달려들어가며 지와 끽구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할 수 없다 반드시 죽여라.” 그 말을 하는 헌원의 얼굴에는 안타까운 듯하면서도 차라리 후련한 듯도 한, 복잡한 표정이 떠올랐다 헌원의 명이 떨어지자마자 끽구가 고함을 질렀다. “전부 나가라!” 끽구의 고함소리에 맞추어 지나측의 육천에 달하는 군대가 일제히 함성을 지르면서 산이 무너지듯 전진하기 시작했다. 치우천은 도깨비들과 함께 날듯이 말을 달려 골짜기 안으로 들어섰다. 치우천이 들어서자마자 준비하고 있던 보돈차르가 달려왔다. “지나족이 움직이는 것 같다!” 치우천은 서둘러 말을 달려온지라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헌원이 몹시 화가 났습니다. 단번에 우리를 공격할 것이지만, 뒤도 조심해야 합니다. 저를 절대 놓치지 않으려 할 것이기 때문에 많은 수로 우리를 에워싸고 덤비려 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키기타야 부족장은 왼쪽, 구르 부족장은 오른쪽, 초초룬은 뒤쪽으로 갔다. 잘해낼 거야.” 형요가 달려와 말하자 치우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보돈차르와 야율쿠리에게 고개를 돌렸다. “자! 이제 시작입니다. 제 꾀가 제대로 맞으면 다행이지만, 들어맞지 않을 때는 형요 자매를 보내 전갈하겠습니다. 꼭 그대로 따라주십시오. 만약 제가 풀피리를 높이 불면 무조건 물러서라는 뜻입니다.” “알고 있다, 천 안다.” 보돈차르가 자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자 야율쿠리도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염려 마라! 천! 흐흐, 드디어 끽구와 붙어볼 기회가 생겼구나! 이거 정말 신나는구나, 신나!” 싸움을 좋아하는 야율쿠리는 그야말로 힘이 펄펄 넘치는 것 같았다. 치우천은 그것을 보고 걱정스레 말챘다. “야율쿠리! 끽구와는 절대 혼자 붙으면 안 된다. 만에 하나 네게 무슨 일이 생기면 키탄 전사들은 어쩌느냐?” 그러면서 치우천은 쇠돌이와 부루벼락, 마파람을 불렀다. “쇠돌이! 너는 벼락 형과 함께 다니고, 마파람 형은 야율쿠리와 함께 다니며 그를 도와주세요. 꼭 둘이 같이 다니면서 혹 저쪽의 기인들과 만나면 힘을 합쳐 싸워야 합니다.” 쇠돌이가 볼멘소리로 투덜거렸다. “나도 끽구와 한 번 겨뤄보고 싶은데...... ” 쇠돌이를 보며 치우천이 씩 웃었다. “우리 전사 수가 비슷했다면 나도 그랬겠지만, 지금은 저쪽이 너무 많아 어쩔 수 없어. 좀 비겁해 보이겠지만 이건 전쟁이다. 우리는 무조건 두 사람이 한꺼번에 저쪽의 한 사람을 맡는다! 절대 지거나 다쳐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다만 카린족이 문제인데...... ” 치우천이 말끝을 흐리자 어느 틈에 왔는지 소녀가 끼어들었다. “카린족은 싸울 마음이 없을 겁니다.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정말입니까, 소녀님?” “지나족이 뭐가 예뻐서 목숨 걸고 싸워주겠습니까? 아마 섣불리 움직이지 않을 것입니다.” 치우천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 별안간 낄낄 웃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바람같이 달려왔다. 바로 비울걸이었다. “히히, 나도 짐을 좀 덜어주지! 네 고기 맛보기가 이리도 힘들 줄이야, 신도 울루라는 떡대들은 귀신을 부릴 줄 아니까 도깨비를 부릴 줄 아는 내가 맡겠네!” 치우천은 갑자기 사라졌던 비울걸이 다시 나타나자 기쁨에 겨워 목소리를 높였다. “비울걸! 어디 가셨었습니까?” “준비 좀 하느라고 말야. 좌우간 신도 울루 걱정은 말게!” 비울걸은 단숨에 말하고는 치우천의 대답도 듣지 않고 돌연 사라져 버렸다. 그때 양역이 다가와 물었다. “천! 나는 윌 하지? 여기서 놀고 있으란 거냐?” 치우천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있느냐? 너도 보돈차르님과 함께 나가라! 네 말 타는 재주가 제일 뛰어나니 그러는 게 좋아.” 대강 배치를 마치자 앞서나가 있던 치베가 큰 소리로 외치며 달려왔다. “지나족들이 다가온다!” 그 소리를 듣자 치우천이 힘차게 외쳤다. “모두 가자!” 치우천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보돈차르와 치베, 양역이 거느린 이백 명의 기마부대는 함성을 올리면서 요란하게 달려나갔고 그 뒤를 이어 야율쿠리, 쇠돌이, 부루벼락, 마파람이 이끄는 이백 명의 키탄 전사들이 줄을 지어 서서히 전진했다. 전사의 수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용맹 한 대장들이 골라뽑아 데리고 온 전사들이라 사기는 충천했다. 한편, 헌원은 상망과 지에게 보고를 듣고 있었다. 가장 꾀가 많은 지와 경험이 많고 노련한 상망이 작전을 짰기 때문이다. 먼저 지가 입을 열었다. “저쪽의 수가 적으니 에워싸서 모조리 잡아버릴 것입니다. 끽구가 이끄는 전사들과 나단선우가 이끄는 훈족의 말 탄 전사들이 앞에서 들이치고, 비휴가 천랑대로 도울 것입니다. 타타르 유루칸족의 전사들은 둘로 나뉘어서 양쪽의 벼랑을 올라가 그들을 덮칠 것이며, 신도 울루는 따로 오백 명의 전사들을 이끌고 저들의 뒤를 막을 것입니다. 저들은 꼼짝달싹도 못할 것입니다.” 헌원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물었다. “카린족은?” 상망이 대답했다. “일단 앞줄에는 세우지 않고, 어느 한쪽이 행여 밀리게 되면 집어 넣으려 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여자들이라...... ” 헌원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 없네. 카린족의 여전사들은 충분히 용감하다네. 그러니...... ” 헌원은 말끝을 흐리며 조금 생각하다가 상망에게 말했다. “이렇게 하세. 카린족은 일단 세우지 말고 그대로 구경만 하라고 하세. 내가 보기에 카린족의 여전사 대장은 몹시 성질이 급한 것 같으니, 분명 왜 자기들은 싸우게 하지 않느냐고 물어볼 것일세. 그때 상망 자네가 그녀의 화를 돋우도록 하게. 그러면 아마 카린 여전사들은 화가 나서 무섭게 싸워줄 것일세.” 상망과 지가 동시에 손뼉을 쳤다. “그거 좋은 꾀입니다!” 헌원은 다시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몽골족이 말을 잘타니 분명 앞장서 나을 걸세. 허나 훈족의 나단선우는 용감하지만 둔한 사람 같으니, 몽골족을 이기지 못할 수도 있네. 만약 나단선우가 물러서게 되면, 때를 놓치지 말고 카린족 여전사들을 돌진시키게. 몽골족이 지친 틈에 카린족 전사를 집어넣고, 다시 비휴가 천랑대를 부려 나아가게 하면 저들은 무너질 것일세.” 상망과 지는 즉시 고개를 끄덕이면서 웃으며 물러섰다. 헌원은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더 했다. “광성자 스승께도 말씀드려서 술법을 사용하도록 권하게.” “우리 수가 훨씬 많은데 그럴 필요까지 있겠습니까?” 지의 말에 헌원은 고개를 저었다. “이건 싸움일세. 쓸 수 있는 수는 한 번에 다 써야 한다네. 모조리 잡아버려야 한다네.” 같은 시각, 치우천은 형요에게 헌원과는 전혀 다른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이건 싸움이야. 그러니 쓸 수 있는 수를 다 써서는 안 된다. 남겨두었다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야 해. 초초룬에게 그렇게 전해라.” 초초룬은 뒤를 지키라고 한 것에 불만인 듯, 계속 둘째 형요를 시켜 말을 전해왔다. 초초룬에게는 미아우 말을 아는 둘째 형요가 가 있었고, 키타야에게는 셋째 형요, 구르에게는 넷째 형요가 가 있었으며, 첫째 형요는 주신 말을 알기에 치우천 옆에 있었던 것이다. 첫째 형요가 둘째 형요의 말을 전해주었다. “초초룬이 아주 불만이 많은 것 같은데?” “머지않아 싸우기 싫어도 싸우게 된다. 우리 수가 훨씬 적은 것을 몰라서 그러느냐고, 자꾸 투덜거리지 말고 기다리라고 전해!” 치우천은 불안하고 지친 나머지 짜증을 냈다. 둘째 형요가 물러서자 치우천은 높은 곳으로 급히 올라가 보돈차르와 야율쿠리의 부대를 지켜보았다 지나족의 군대는 적게 반달형으로 골짜기 입구를 에워싸고 있었고, 그 중간에 약 이천 명 가량 되어 보이는 전사들이 천 명씩 따로 뭉쳐있었다. 바로 끽구와 나단선우가 이끄는 부대였다. 그들이 고함을 지르면서 전진하자 거기에 맞서 보돈차르의 부대와 야율쿠리의 부대가 각각 전진하는 모습이 보였다. 나단선우의 부대에 기마병이 많았으므로 보돈차르는 그쪽으로 향했고, 야율쿠리의 부대는 끽구의 부대로 향했다. 양쪽 모두 함성을 지르며 돌진하는 광경을 치우천은 가슴이 터질 것 같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내가 잘못 생각하지는 않았을까? 여러 천 명의 벗들의 목숨이 나한테 달려 있다. 실수하면 안 된다! 실수하면 안 돼!’ 보돈차르의 기마부대가 질서정연하게 달려 나가자 그를 맞아 훈족의 부대도 역시 앞으로 우르르 몰려나왔다. 그러다가 훈족의 우두머리인 나단선우가 여섯 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앞으로 달려 나오자 보돈차르 역시 치베와 다른 두 명의 용사를 거느리고 달려 나왔다. 부족들끼리 전쟁을 할 때, 대장들이 앞장서서 나와 이야기를 나눈 뒤 싸움을 시작하는 것이 당시의 관습이었다. 보돈차르가 차분하고 침착한 표정으로 물었다. “나는 몽골의 보돈차르요! 훈족인 것 같은데,어느 부족이오?” 나단선우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붉은 물을 들인 가죽옷과 깃털로 꾸미고 있어서, 마치 불덩어리 같았다. 구레나룻을 길게 기르고 덩치가 크고 사나워 보이는 억센 남자였다. “나는 훈의 나단족, 나단선우다! 많은 선물을 주신 헌원님을 도와 너희 거지같은 쓰레기들을 청소하려고 이 외진 곳까지 오셨다!” 보돈차르는 냉랭하게 웃으며 되받았다. “왜 왔나 했더니, 전물을 받고 온 것이군? 진정한 전사는 물건이나 욕심 따위를 위해 싸우지 않는다. 전사가 싸우는 것은 세 가지 이유뿐이다! 명예! 벗! 약속 전사는 이 세 가지만을 위해 싸워야 하는 것이다!” “망아지새끼 같은 몽골족놈들이 잘도 나불거리는구나! 듣도 보도 못한 놈이 전사인 척하는 게냐?” 그때 치베가 보돈차르의 옆에서 외쳤다. “승냥이 같은 훈족의 욕심꾸러기야! 내 선물을 받아라!” 치베가 소리치며 획획 세 발의 화살을 내쏘았다. 순간 나단선우가 재빨리 커다란 돌도끼를 들어 치베의 화살을 막았으나 그 화살이 나단선우 양옆에 있던 전사들의 어깨와 뺨을 각각 꿰뚫어 말에서 떨어져 굴렀다. 나단선우는 몹시 화를 내며 외쳤다. “비겁하게 활부터 쏘다니! 죽여라!” 나단선우가 크게 외치며 무서운 기세로 달려 나가자 훈족들도 그 뒤를 따라 미친 듯이 고함을 지르며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보돈차르는 침착하게 마치 태산처럼 냉정하게 서 있다가 훈족이 화살의 사거리에 들어오자마자 그때를 놓치지 않고 외쳤다. “모두 쏴라!” 몽골 전사들은 모두 활을 재놓고 있다가 동시에 화살을 세 번 날렸다. 이백 개씩 세 번, 도합 육백 개의 화살이 날아들자 달려들던 나단 선우의 부하들은 말과 함께 고꾸라지며 와르르 넘어졌다. 그러나 훈족의 기세는 대단해서, 쓰러진 자기편을 짓밟으며 계속 들이닥쳤다. 보돈차르는 즉시 물러서라고 외치면서 말을 달렸다 몽골족의 기마술은 아무도 따를 수 없었으며, 그들은 말을 타고 달아나면서도 뒤를 향해 간간이 화살을 쏘아 날렸다. 만약 그 뒤를 쫓는 것이 훈족이 아닌 다른 부족이었다면 그냥 물러섰을 수도 있을 터였다. 그러나 훈족은 말 타면서 화살을 날릴 만큼은 아니었으되, 기마술이 뛰어난 부족이었다. 일단 싸움에 나서면 난폭하기 이를 데 없는 훈족은 계속 화살에 맞아 쓰러지면서도 두려움없이 몽골족의 뒤를 쫓았다. 나단선우는 맨 앞에 서서, 도끼를 휘둘러 화살을 쳐내면서 무섭게 돌진했다. 한편, 야율쿠리와 끽구의 부대는 전부 보병부대였기 때문에 맞붙을 때까지는 조금 더 시간이 걸렸다. 자기만큼이나 큰 말을 탄 끽구가 달려 나와 거대한 덩치를 보이자 용감한 키탄족 전사들은 그 기세에 잠시 술렁거렸다. 그러나 야율쿠리는 전혀 주춤거리는 기색도 없이 달려갔고 그 뒤를 마파람이 말없이 따랐다. “이게 누구냐! 지나족 제일의 뚱보 돼지 끽구 아니냐? 우하핫! 잘 만났다! 오늘 내가 너를 돼지찜으로 만들어주마!” 야율쿠리는 달려나가자마자 욕부터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끽구는 화가 나서 씨근거리며 외쳤다. “너는 누구냐? 보아하니 키탄족의 고양이새끼 같구나!” “나는 키탄 울크리족의 야율쿠리다! 너 뚱보 돼지를 찜쪄 먹으려고 여기까지 달려 오셨느니라! 자, 받아라!” 야율쿠리가 외치면서 기이한 무기를 꺼냈다. 여자 손목 같은 굵기에 거의 사람 키만큼 길다란 나무 막대기였는데 그 양끝에는 구리 도끼날이 달려 있었다. 야율쿠리는 그 긴 도끼를 미친 듯 휘두르며 끽구에게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달려들었다. 끽구는 급히 양손에 쥔 구리추를 엇갈리게 휘둘러 야율쿠리의 긴 도끼를 막았다. 두 사람의 무기가 부딪치는 순간, 둘 다 똑같이 시큰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이 키탄 놈의 힘이 꽤나 세구나!’ 끽구가 속으로 흠칫거리는 사이, 야율쿠리도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사람들이 끽구끽구 하더니만 정말 대단한 힘이구나! 비보다 더 센 것 같다!’ 다만 끽구는 아수타란과 싸우면서 얻어맞은 것과 불에 데인 상처 등이 아직 다 낫지 않아 평소보다 힘이 못했다. 야율쿠리는 힘도 강했지만 태산 회의 몽둥이 시합에서 금천에게 아깝게 패했을 정도로 싸움 실력도 타고 난 전사였다. 이 긴 도끼는 태산 회의 때 투르크의 긴 머리 전사가 기다란 몽둥이를 이용하여 금천과 막상막하로 싸웠던 것을 보고 만든 무기였는데, 그간 야율쿠리는 이 무기로 제법 오랫동안 연습하여 끽구를 상대로 써보게 된 것이다. 둘 다 보통이 아닌 솜씨로 싸우는지라 지나족과 키탄족 모두 전쟁 중이라는 것마저도 잠시 잊고 넋이 나간 듯 두 사람의 싸우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야율쿠리의 긴 도끼는 그 길이 덕분에 상당히 유리하게 싸움을 이끌어가서 끽구는 세 발짝이나 뒤로 물러섰다. 끽구가 든 구리 추는 짧아서 아무래도 불리했다. 야율쿠리는 끽구를 몰아붙이자 신이 나서 도끼를 더 휘둘러댔다. 그러나 다음 순간, 끽구가 우렁차게 소리를 지르면서 왼손의 구리추로 야율쿠리의 도끼를 막아내고는 오른손의 구리 추로 야율쿠리의 도끼를 내려쳤다. 그러자 끽구의 엄청난 힘에 세 개의 무기가 동시에 부러져 버렸다 하도 힘을 써서 바쳤던 구리 추와 내려친 구리 추가 야율쿠리의 도끼와 함께 부서져 버린 것이다. 야율쿠리는 도끼가 반 토막만 남자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르며 그 도끼를 던져 버렸다. 반만 남은 도끼는 무게가 맞지 않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신 야율쿠리는 긴 팔을 휘저으며 끽구에게 맨손으로 달려들었다. 그 모습을 보며 끽구는 놀라서 흠칫했다. ‘이런 미친 자식이 있나! 맨손으로 덤벼?’ 그러나 끽구도 맨손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야율쿠리는 끽구보다 덩치는 작았지만 역시 우람한 체구를 지녔고 팔다리가 길었다. 두 사람은 마구잡이로 엎치락뒤치락 싸우기 시작했다 야율쿠리가 끽구를 몇 대 더 때리고 찼지만, 끝내 끽구가 야율쿠리의 팔을 잡아 비틀기 시작했다. 야율쿠리는 있는 힘을 다해 버텄지만 힘으로는 역시 끽구를 당해낼 수 없었다. 그때, 마파람이 글자 그대로 바람처럼 달려오면서 품에서 세 개의 돌을 꺼내 던졌다. 마파람의 달리기는 말만큼이나 빨랐으며, 활 솜씨도 태산 회의에 나갔을 정도로 뛰어났지만 돌 던지기에도 상당히 능했다. 돌 던지기는 사울아비라면 누구나 익히는 기술이었기 때문이다. 끽구는 야율쿠리의 팔을 부러뜨리려 용을 쓰던 차라 미처 돌을 막지 못했다. 세 개의 돌 중 두 개가 끽구의 어깨를 맞혔고 한 개는 바로 끽구의 눈언저리를 맞혔다. “아이쿠!” 끽구가 눈에서 불이 번쩍 하는 것을 느끼며 한 손으로 눈을 감싸지자 야율쿠리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끽구의 배를 발길질하며 빠져나왔다. 끽구가 순간 중심을 잃고 ‘쿵’ 엉덩방아를 찧는 순간, 지나족들이 정신을 차리고 ‘와’ 하고 몰려오기 시작했다. 키탄족 역시 몰려나왔다. 마파람은 급히 야율쿠리를 일으켜 함께 뒤로 물러섰다. 어느 틈엔가 야율쿠리의 팔이 시퍼렇게 부어 있었다. 그럼에도 야율쿠리는 미친 듯이 웃으며 소리쳤다. “주신 사울아비! 봤냐? 내가 끽구를 넘어뜨렸다! 우하하하! 내가 끽구를 쓰러뜨렸다!” “그래 봤소, 봤어! 어서 무기를 드시오!” 삽시간에 눈이 시퍼렇게 멍든 끽구가 다른 전사의 무기를 받아들고 분노의 함성을 지르며 야율쿠리를 쫓아가려는 순간, 그 앞을 두 사람이 다시 막아선다. 바로 쇠돌이와 부루벼락이었다. 쇠돌이는 구리로 된 도리깨를 휘둘러댔고 부루벼락은 채찍을 휘둘렀는데, 둘 다 기다란 무기여서 끽구가 접근하는 것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다시 쇠돌이의 도리깨에 어깻죽지를 맞은 끽구가 비명을 질렀다. “이런 개새끼들! 무더기로 덤비다니! 다 죽인다!” 끽구는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부루벼락이 휘두르는 채찍을 온몸으로 받아내면서 마침내 쇠돌이의 도리깨 끝을 나꿔챘다. 그리고 단번에 무기를 빼앗으려는데 뜻밖에도 쇠돌이의 힘도 만만치 않아, 자신의 힘에 맞겨루는 것이 아닌가? ‘제기랄. 내가 언제 이리 약해졌단 말인가?’ 쇠돌이나 야율쿠리 모두 힘에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장사들이었지만 끽구는 그것을 모르고, 다만 자기가 힘이 약해진 것 아닌가 생각했다. 끽구가 분통이 터져 있는 힘을 다해 도리깨를 나꿔채는 순간 구리로 된 도리깨의 굵은 사슬이 두 사람의 힘을 버티지 못하고 툭 끊어져 버렸다. 젖먹던 힘까지 쓰던 쇠돌이가제 힘을 이기지 못해 뒤로 나뒹구는 사이 끽구가 쇠돌이의 머리를 밟아버리려고 발을 들자 부루벼락이 재빨리 끽구의 발목을 채찍으로 휘감았다. 그러나 화가 끝까지 치민 끽구의 힘을 당할 자는 없었다. 끽구는 잠시 비틀거렸을 뿐, 도리어 부 루벼락의 채찍을 손에 쥐고 끌어당겼나. 부루벼락이 채찍을 놓치지 않으려고 버티자 끽구는 고함을 지르면서 벌컥 힘을 쏟아 아예 채찍째 끌어당겨 부루벼락을 저만치로 집어던져 버렸다. 정말 무시무시한 힘이었다. 마파람이 재빨리 부루벼락을 일으켜 세웠다. 다시 몽둥이를 주워들고 온 야율쿠리와 자루만 남은 도리깨를 든 쇠돌이가 끽구를 막아섰다. 끽구는 치민 화를 이기지 못해 고래고래 악을 썼다. “파리 같은 새끼들! 모조리 짓눌러 죽이겠다!” 끽구가 미친 듯이 날뛰자 쇠돌이와 야율쿠리가 힘을 합했어도 끽구를 막아내지 못했다. 거기에 마파람과 부루벼락이 가세했는데도 끽구를 쓰러뜨릴 수 없었다. 그는 길길이 날뛰는 성난 범 같았다. 게다가 수가 많은 지나 전사들과, 그들과 함께 편성되어 있던 말을 타지 않은 훈족 전사, 타타르 전사들이 우르르 몰려들자 마파람이 외쳤다. “야율쿠리! 물러서야겠소!” “아, 분하다, 분해! 끽구 이 멧돼지새끼! 목숨도 길구나!” 야율쿠리는 연신 억울하다고 외치면서 키탄 전사들을 물러서게 했다. 몇 발짝 물러서서 활을 쏘고 다시 몇 발짝 달아나다 활을 쏘고 하는 식으로 지나족을 저지하면서 물러서자, 끽구는 커다란 돌멩이를 주워 마구 집어던졌다. 화살에 맞아 쓰러지는 지나 전사도 많았지만 끽구의 돌멩이에 맞은 키탄 전사들은 비명조차 제대로 못 지르고 박살이 나버렸다. 끽구의 무시무시한 힘과 용맹에 키탄전사들은 몸을 떨었고 야율쿠리와 쇠돌이 등도 분하다고 외치면서 달아났다. 끽구는 분이 풀리지 않은 듯 계속 길길이 날뛰며 그 뒤를 따랐다 “겁쟁이들아! 거기 서라!” 보돈차르의 부대와 야율쿠리의 부대가 각각 나단선우와 끽구의 부대를 당해내지 못해 골짜기 안쪽으로 물러서는 것을 보고 헌원이 크게 외쳤다. “지금이다! 한 번에 몰아쳐야 한다! 비휴와 상망에게 사람을 보내라! 유루칸과 신도 울루에게도 연락하라!” 그와 동시에 높은 곳에서 상황을 보고 있던 치우천도 외쳤다. “키타야, 구르 부족장께 신호해라!” 보돈차르와 야율쿠리의 부대는 모두 황망하게 골짜기 안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나단선우와 끽구는 그것을 보고 기가 살아서 골짜기 안으로 앞 다투어 뛰어들려고 했다. 그러나 뒤에 처져 있던 지가 그것을 보고 외쳤다. “안 된다! 함정이야!” 하지만 이미 때는 늦어서, 골짜기 위쪽에서부터 커다란 돌멩이와 나무등걸들이 요란하게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미리 골짜기 양편에 올라가 있던 키타야와 구르 부대가 집어던진 것이다. 나단선우와 끽구의 부대는 앞 다투어 골짜기 안으로 뛰어 들어가다가 머리 위에서 돌멩이가 우박처럼 쏟아져 내리자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골짜기 입구가 좁았고 또 많은 전사들이 뒤에서 계속 밀고 들어오는 판이라 재빨리 뒤돌아 도망칠 수도 없었다. 쏟아져 내린 돌멩이들은 순식간에 백 명도 넘는 지나족과 훈족의 전사들을 깔아뭉개 버렸다. 나머지 전사들은 아우성치면서 뒤로 물러섰지만 약 이백 명의 전사들은 골짜기 안으로 뛰어든 다음이라 금세 빠져나갈 수도 없었다. 이때 치우천이 다시 신호하자 보돈차르와 야율쿠리의 부대가 재빨리 뒤로 돌아서서 고립된 이백 명의 적 전사들을 에워싸고 마구 죽이기 시작했다. 이미 골짜기 안으로 들어선 끽구와 나단선우는 너무도 사납게 날뛰어서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머지 이백 명의 전사들은 삽시간에 소리 한 번 질러보지 못하고 성난 키탄과 몽골족들에게 맞아죽었다. 골짜기 위의 키타야와 구르는 기뻐서 환호성을 올렸고, 일제히 소리를 높여 지나족들을 향해 비아냥거렸다. “제길! 꾀에 빠졌습니다!” 상망이 분해서 이를 갈자 헌원이 차분하게 말했다. “한 번 속았으나 우리 수가 훨씬 많다. 계속 밀어붙이면 얄팍한 꾀도 소용없다. 한꺼번에 사방을 다 친다!” 상망이 알았다고 외치자 연락병들이 일제히 달려 나갔다. 끽구와 나단선우는 안색이 새파랗게 질린 채 골짜기 밖으로 뛰쳐나가 남은 전사들을 물러서게 하려는데 비휴가 달려왔다. “헌원님의 명이다! 물러서지 마라! 한 번 당했다고 물러서면 더 손해다! 밀어붙여라!” 비휴가 외치면서 크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저만치 뒤에서부터 으르렁거리는 포효와 함께 천 마리가 넘어 보이는 늑대들이 땅을 까맣게 뒤덮으며 달려오기 시작했다. 바로 비휴의 천랑대였다. 비휴는 숨을 헐떡이는 끽구와 나단선우에게 말했다. “늑대들을 먼저 풀고, 그 다음에 다시 공격하자!” 나단선우가 크게 너털웃음을 웃었다. “늑대가 오려면 오래 걸린다. 놈들에게 쉴 틈을 주면 안 된다! 나, 나단선우가 싸우는 것을 잘 보아두어라!” 의기양양하게 외치면서 나단선우는 대답도 듣지 않고 다시 고함을 지르며 뛰쳐나갔다. 끽구는 나단선우의 모습을 보며 ‘허허’ 웃었다. “훈족은 용감하군! 그런데 타타르족은 뭐 하느냐? 유루칸은 어디 있지?” 비휴가 조용히 대답했다. “뭔가 하고 있을 것이다.” “천! 큰일이다! 적이 산을 올라와 공격하고 있어!” 셋째 형요와 넷째 형요가 동시에 달려와 떠들어대자 첫째 형요의 안색이 변했다 “왼쪽이냐? 오른쪽이냐?” 치우천 옆에 있던 툰툰이 묻자 첫째 형요는 두려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양쪽 다! 구르와 키타야 부족장이 둘 다 위험해!” “뭐?” 툰툰이 놀라 소리치자 치우천은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그때 전방을 살피던 미요가 달려와서 외쳤다. “천님! 천님! 앞에 늑대 떼가 나타났어요! 어디서 나타났는지 헤아릴 수도 없어요!” 그 말에 치우천의 안색이 창백해졌고 몸도 약간씩 떨리고 있었지만, 치우천은 마치 남의 일인 것처럼 담담히 말했다. “비휴의 천랑대다. 하지만 별수 없다. 보돈차르님과 야율쿠리가 어떻게든 막아주어야 한다.” “구르님과 키타야님은?” 형요가 묻자 치우천은 해쓱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할 수 없다. 버틸 수 있을 때까지는 버텨야 한다.” 그러자 툰툰이 다급하게 나섰다. “우리가 버틸 수 있는 것은 골짜기 속에 있기 때문일세. 그런데 높은 곳을 빼앗기면 우리는 꼼짝도 할 수 없네!” “어떻게 하시자는 말씀인지요?” 치우천이 묻자 툰툰이 얼른 대답했다. “뒤를 지키는 미아우 전사들에게 양쪽 골짜기를 지키는 데 도우라고 하는 것이 어떨까?” 치우천은 잠시 생각해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뒤는 비워둔단 말입니까? 분명 뒤에서도 쳐들어올 것입니다. 돕고는 싶지만 사람 수가 너무 적습니다.” 그러는 사이, 양쪽 골짜기에서는 타타르족들끼리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유루칸이 이끄는 타타르족의 군대가산을 기어올라 구르와 키타야의 군대를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눈 덮인 산등성이에서의 싸움이라 싸워서 죽는 사람도 많았지만 미끄러 떨어져 죽는 사람도 많았다. 죽어가는 자와 죽이는 자의 고함성과 미끄러져 떨어지는 자들의 처절한 비명소리가 사방을 메우기 시작했다. 같은 타타르족들끼리라서 서로 간에 욕설과 고함소리도 지독했다. 동시에 나단선우의 부대가 다시 한 번 정면을 매섭게 몰아붙였다. 보돈차르의 기마병들도 이미 화살을 다 써버린 터라 크게 고함을 지르면서 맞붙어 싸우면서 나아갔다. 훈족의 수가 많았지만 몽골족은 보돈차르의 질서정연한 지휘로 한 덩어리로 뭉쳐 적진을 여기저기 돌파했다. 더구나 그 앞에 선 보돈차르의 기마술은 그야말로 눈부실 지경이었다. 나단선우는 보돈차르를 벼르고 있던 터라 그를 잡으려고 죽어라 달렸지만 자기쪽 진영만 흐트러뜨렸을 뿐,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었다. 보돈차르의 기마대가 두 번 훈족의 진지를 돌파하자 엉성하게 열을 지었던 훈족의 대열이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눈을 번뜩이며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야율쿠리가 크게 고함을 지르자 잠시 기다리며 숨을 고르던 키탄족들이 일제히 달려 나갔다. 더 정확하려야 정확할 수 없는 순간이었다. 무리한 공격으로 숨이 차고 지쳐 대열이 흐트러져 우왕좌왕하던 훈족은 다시 키탄족의 급습을 옆에 서 받자삽시간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나단선우는 마구 소리치며 부하들을 한데 모으려 했지만, 바로 그때 누군가가 크게 외치며 달려들었다. “훈족 대장이 너냐?” 양역은 항상 적의 대장을 노리던 차에 지금이 절호의 기회라 여긴 것이다. 무서운 기세로 순식간에 말을 달려온 양역은 나단선우가 정신을 차릴 겨를도 없이 삽시간에 구리칼로 나단선우를 후려치고 지나갔다. 나단선우는 얼결에 돌도끼로 칼을 막기는 했지만 돌도끼가 구리칼을 당하지 못하고 부서지는 바람에 어깨에 큰 상처를 입고 말에서 떨어져 버렸다. 양역은 나단선우가 힘이 세고 싸움을 잘하기 때문에 맞서 싸우면 승산이 없다고 여겨 기회를 노려 기습한 것인데, 용케 성공한 것이다. 대장이 말에서 떨어지자 훈족은 일제히 비명을 질렀고 키탄족과 몽골족은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다. 그런데 양역이 다시 말을 돌려 나단선우를 끝장내려는데 갑자기 말이 크게 울면서 덜컥 걸음을 멈추었다. 양역은 말이 갑자기 멈추는 바람에 땅에 떨어져 데굴데굴 굴렀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던 마파람과 부루벼락이 놀라서 달려가려는데, 별안간 발이 땅에 엉겨 붙은 듯 달려갈 수가 없었다. 놀라 아래를 보니, 어느새 검은색의 나무덩굴 같은 것이 튀어나와 발을 휘감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게 뭐냐!” 그 나무덩굴은 빠른 속도로 나단선우가 쓰러진 곳을 중심으로 둥글게 퍼져가고 있었다. 거기에 있던 사람이건 말이건 모두 덩굴에 발이 감겨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러자 마파람이 외쳤다. “주술이다! 지나족에 주술사가 있다!” 검은색 나무덩굴은 무서운 기세로 둥글게 퍼져나가며 자라나고 있어 모든 사람들은 거기에 휘감기지 않도록 서둘러 피해야 했다. 그 덩굴은 훈족과 키탄, 몽골족 사이로 퍼져나가 싸우던 사람들을 둘로 갈라놓았다. 야율쿠리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이런 제길! 다 죽일 수 있었는데!” 아직은 높은 곳을 차지한 구르와 키타야외 군대들이 버티고 있었지만 유루칸의 전사들이 결사적으로 덤벼들어 양쪽 다 사상자가 빠른 속도로 늘어났다. 아무리 높은 곳을 차지하고 있어도 그 수가세 배 이상 차이가 나니 오래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유루칸은 구르 쪽을 공격하고 유루칸의 동생인 치미르칸이 키타야 쪽을 공격하고 있었는데, 부족장들은 서로 지독하게 욕을 퍼부었다. 부족장들은 서로 안면이 있을 뿐 아니라 사이도 좋지 않았던 것이다. “지나족의 돼지새끼들에 빌붙은 놈들아! 네놈들은 타타르족의 망신이다!” “주신족 놈의 개가 된 네놈들은 뭐가 나은 줄 아느냐?” 이미 화살이 떨어진 구르와 키타야의 부하들은 계속 돌을 집어던지다 못해 얼음덩어리, 눈덩이까지 집어던지며 열심히 싸웠다. 유루칸의 부하들은 수많은 사상자를 내면서도 계속 꾸역꾸역 올라와서 드디어 구르와 키타야의 전사들과 처전한 육박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앙가마이의 한 전사는 상처를 입자 크게 고함을 지르며 유루칸족의 전사 두 명을 한꺼번에 껴안고 벼랑 아래로 뛰어내려 함께 죽었다. 유명한 씨름꾼 보챠두의 두 아들이 이번 싸움에 와 있었는데, 그 둘 역시 무기를 들 틈도 없이 씨름 기술로 적을 마구 집어던져 벼랑으로 떨어뜨려 죽였다. 앙가마이와 앗수라트의 전사들은 치우 형제에게 입은 은혜를 모두 기억하고 있었기에 그야말로 필사적으로 싸웠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돌로 된 무기들은 박살이 나고, 화살은 이미 오래 전에 떨어지고, 활마저 휘둘러대다가 부러져 나갔으며, 집어던질 돌과 얼음덩이마저도 바닥이 났다. 그들의 수는 서서히 줄어들어 갔다. 한편, 다 잡은 훈족을 놓치게 되자 보돈차르는 이를 갈며 눈을 빛내며 외쳤다. “주술사가 방해를 하면 일이 힘들어진다! 치베! 치베!” 보돈차르가 치베를 부르자 치베가 즉시 외치며 달려 나갔다. “제가 주술사를 죽여 버리겠습니다!” 눈이 밝은 치베는 저만치에서 한 사람이 땅에 단정하게 앉아 눈을 감고 뭔가 손으로 fl속 허공에 동그라미를 그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바로 광성자였다. 그가 부린 주술이 틀림없다고 생각한 치베는 즉시 말을 타고 달려 나가며 활을 꺼냈다. 거리가 너무 멀었지만 치베는 있는 힘을 다해 활을 당겨 쏘았다. 그러나 화살은 안타깝게 거기까지 날아가지 못하고 도중에 떨어져 버렸다. 더구나 나무덩굴이 계속 번져 와서 더 전진할 수도 없었다. 양역과 나단선우 부근에 퍼져 있던 나무덩굴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끊임없이 움직여서 그 두 사람을 훨씬 비켜나 있었다. 나단선우는 비틀거리며 일어서고 있었지만, 아까 떨어진 양역은 몹시 괴로운 듯 신음만 할 뿐 일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말에서 떨어지면서 몹시 다친 모양이었다. 그대로라면 양역이 나단선우에게 맞아죽을 것 같았다. “양역을 구해야 한다!” 부루벼락이 안타깝게 외치자 마파람이 소리치며 달려 나갔다. “내가 해본다!” 마파람은 길다란 창 두 개를 들고 바람처럼 달려 나갔다. 그러다가 덩굴이 번져오는 곳에 이르자 창끝을 땅에 꽂으며 그 힘으로 몸을 허공에 날렸다. 그리고 몸이 떨어지려 할 때 나머지 창끝을 땅에 꽃아 다시 몸을 앞으로 날렸다. 창 두 개로 기막힌 재주를 부려서 마파람은 간신히 나무덩굴 위를 지나 양역의 부근에 떨어져 내렸다. 마파람이 양역을 채 일으킬 틈도 없이, 나단선우가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나단선우는 어 깨에 길게 상처를 입어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상처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 듯, 부서진 돌도끼를 미친 듯이 휘두르며 마파람에게 달려들었다. 마파람은 양역을 보호하며 있는 힘을 다해 싸웠지만, 나단선우의 힘에 밀려 점점 손이 어지러워졌다. 더구나 여러 명의 훈족 전사들이 다시 몰려들기 시작했다. 치베가 놀라서 급히 화살을 쏘아 몇몇을 죽여 마파람을 위기에서 구했다. 그러나 훈족 전사들은 그쪽으로 갈 수 있는 데 반해, 이쪽 전사들은 나무덩굴 때문에 갈 수 없었다. 정신없이 활을 쏘던 치베가 문득 손이 허전함을 느꼈다. 화살 통이 빈 것이다. “제기랄!” 치베는 분통을 터뜨리며 빈 활을 땅에 집어던졌다. 그와 동시에, 나단선우의 일격을 간신히 받아낸 마파람의 칼이 부러지며, 마파람은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며 땅에 쓰러져 뒹굴었다. 마파람은 얼른 몸을 추슬러 급히 양역을 들쳐 업고 비틀거리며 달아나기 시작했다. 워낙 걸음이 빨라, 비록 다친 몸으로 양역을 업었다 해도 웬만한 사람보다도 빨랐다. 지칠 줄 모르는 나단선우는 그 뒤를 쫓아가면서 걸리적거리는 키탄과 몽골 전사들을 마구 쳐 죽였다. 마파람과 양역이 물러서고 나단선우가 날뛰기 시작하자 훈족은 다시 힘을 얻어 몽골족과 키탄족을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쇠돌이와 부루벼락도 견디지 못하고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제길! 이대로는 안 되겠어!” 쇠돌이가 돌을 집어던지며 크게 외치자 부루벼락이 말했다. “우릴 도와줄 사람은 없는 건가?” 허나 보돈차르나 야율쿠리도 다른 사람을 도울 처지가 아니었다. 다시1 한 번 끽구의 부대가 나단선우를 돕기 위해 들이쳐 왔기 때문이다. “저놈들은 이제 끝이다! 한 명도 남기지 마라!” 끽구가 부러진 구리 추 대신 사람 키의 두 배는 넘을 듯한 커다란 구리 몽둥이를 휘두르며 말도 타지 않고 외쳤다. 그와 동시에 끽구는 달려오던 몽골 기마전사 한 명을 무서운 힘을 실은 몽둥이로 내려쳐 말과 전사를 한꺼번에 땅에 짓눌러 박살내 버렸다. 무시무시한 끽구의 위세에 키탄족과 몽골족 전사들은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더구나 그 뒤에 비휴가 부리는 천 마리도 넘는 늑대들이 포효하며 새까맣게 달려 들어왔다. 치우천은 참담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마치 넋이 나간 사람 같았다 모든 벗들은 있는 힘을 다해 훌륭하게 싸웠지만 그 수가 너무나 적었다. 이대로라면 몰살당할 판이었다. 그때 리미와 싱카가 치우천에게 달려왔다. “주인님1 우리도 싸우게 해주십시오!” 리미가 씩씩하게 외치자 싱카도 말했다. “저쪽에 주술사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한 번 막아보겠습니다!” 도깨비들은 이미 전날 거친 싸움을 겪은 터라 도저히 싸울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자청해서 나가겠다고 하자 치우천은 눈물이 핑 돌아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갈 데까지 갔구나. 이제 남은 것은 초초룬의 전사들뿐이다. 일단 뒤가 뚫리더라도, 당장 무너지는 것은 막아야 하지 않을까.......’ 치우천이 최후의 수를 생각하고 있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초초룬에게 보냈던 둘째 형요가 달려왔다. 그녀의 말을 듣고 첫째 형요의 안색이 변했다. “천! 뒤에도 지나족이! 신도 울루가 오백 명도 넘는 군대를 거느리고 오고 있대! 초초룬의 전사들만으로는 수가 너무 적어서......” “뭐!” 치우천의 안색이 그야말로 하얗게 변했다. 이제는 정말로 방법이 없었다. 싸울 수 있는 사람은 모조리 투입해 싸워 더 이상 남은 사람이 없었다. 치우천이 세운 전략은 골짜기를 방패삼아 사방에 부대를 배치하여 그들로 하여금 서로 연계하여 도와서 싸우는 것이었는데, 이렇듯 압도적인 수가 밀어닥치자 방법이 없었다. 더구나 비휴의 늑대무리, 카린족 여전사들까지 들이닥친다면 전멸은 시간 문제였다. 치우천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 같았다 ‘이제야말로 끝인가? 더 이상 어쩔 수 없단 말인가?’ 치우천은 비통한 나머지 자기도 모르게 크게 외쳤다. “아우야, 여기서........ 우리 형제가 벗들과 함께 모두 죽는가 보구나!” 생사의 기로에서 그때 치우비는 막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속이 메슥거리고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허나 정신이 들자마자, 미처 눈을 뜨기도 전에 수많은 사람들이 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 생각이 없는 와중에도 뭔가 일이 크게 벌어지고 있구나 싶어 눈을 뜨자, 자신이 어느 좁은 천막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주위를 돌아보니 자신의 짐과 형의 짐 등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일단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심상치 않았으므로 치우비는 제일 먼저 무기부터 찾아 들었다. 카린족에게서 얻은 커다란 돌도끼를 드는데 도끼의 무게가 예전 같지 않게 묵직하게 느껴졌다. ‘아참, 나는 아홉구비의 힘이 없어졌지.’ 도끼와 구리 단검 두 자루를 급히 챙긴 치우비는 막사를 나섰다. 밖에는 수많은 막사들이 빽빽이 들어섰는데, 이상하게 주변에는 한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치우비가 막사를 나서자 두 사람이 외치며 달려왔다. 바로 울라트와 소녀였다. 이 두 사람 말고는 모든 사람들이 싸움에 참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울라트는 반가운 마음이 들었지만, 상황이 워낙 다급하여 울상을 지으며 외쳤다. “기 오라버니! 일어나셨군요. 큰일 났어요.” “무슨 큰일이지?” 소녀가 얼른 울라트를 막아서며 서툰 주신 말로 말했다. “몸은 괜찮나요?” 치우비는 사실 속이 메슥거려 힘이 별로나지 않았으나 일부러 크게 대답했다. “멀쩡합니다. 힘이 펄펄 넘치는군요.” 그러자 울라트가 재빨리 재잘거렸다. “다행이에요! 지금 우리 편과 지나족이 막 싸우는데, 아무래도 우리가 밀리는 것 같아요! 어서 도와줘야 해요!” “지나족과 싸운다고?” 치우비는 의아하여 중얼거렸으나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뭔가 일이 벌어지긴 벌어졌군.’ 헌데 전에는 이런 급한 일에 닥치면 머릿속이 꽉 막힌 것처럼 잠시 아무 생각도 나지 않곤 했으나 지금은 머리가 몹시 맑았다. 또다시 울라트가 외쳤다. “이걸 어째요! 우리 아버지 쪽이....... 밀리는 것 같아요!” “아버지? 키타야님이 오셨니?” “맞아요! 아버지만 아니라 구르님, 보돈차르님, 야율쿠리님, 초초룬님 등등 모두 도와주러 와서 지나족과 싸우고 있다구요.” “뭐? 모두 모였다구? 난 대체 얼마나 정신을 잃고 있었지?” “이틀이에요!” “그런데 어떻게....... 아니, 지금 이럴 때가 아니다. 내가 가마. 울라트! 아버님은 염려 마라!” 치우비는 씩씩하게 외치면서 달려 나갔다. 울라트는 천하무적으로 믿어 마지않는 치우비가 정신을 차린 것만으로도 모든 일이 다 풀릴 것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소녀의 안색은 여전히 어두웠다. 치우비가 아무리 용감해도 혼자서 수천 명을 당해낼 수 없지 않은가. ‘마지막인가.......’ 소녀도 굳게 마음을 다잡고는 손에 작은 단검을 쥐고 치우천이 있는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울라트는 치우비가 정신을 차렸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소녀를 앞질러서 재빨리 달려갔다. “앗수라트의 전사들아! 마지막까지 힘을 내라! 한 놈이라도 더 죽이고 죽자!” 키타야는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여전히 용감하게 부하들을 독려하고 있었다. 키타야가 끌고 온 타타르족 전사는 이백오십 명이었는데, 이미 싸울 수 있는 자는 반으로 출어 백 명 남짓밖에 되지 않았다. 치미르칸이 이끄는 타타르족은 천삼백 명이나 되었는데 벌써 삼백 명 가까이 쓰러졌다. 그러나 앗수라트족이 더 많은 상대를 쓰러뜨렸어도, 사람 수의 비율은 오 대 일에서 십 대 일로 더더욱 불리해져만 갔다. 더구나 이제 치미르칸의 전사들은 비탈길을 거의 다 올라온 탓에 높은 곳에서 공격하는 이점조차도 없었다. 앗수라트족은 밀리고 밀려서 부상자들을 가운데 두고 둥글게 원으로 뭉쳐져 있었는데, 치미르칸이 이끄는 유루칸족은 그들을 빈틈없이 에워싸며 다가오고 있었다. “지독한 놈들이다! 하지만 이제 끝이다! 모조리 죽여 버려랏!” 구레나룻을 기른 곱슬머리 치미르칸이 크게 외치자 유루칸족의 전사들은 일제히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그때 갑자기 커다란 고함 소리가 들리면서 한 사람이 비탈을 날듯이 올라왔다. “내가 왔습니다! 키타야님! 비가 왔습니다!” “오오! 치우비님이다! 치우비가 왔다!” 앗수라트족은 마지막 벼랑 끝에 몰린 판국이었는데 치우비의 음성을 듣자 마치 구원이라도 받은 것처럼 웅성거렸다. 그 이릉을 듣자 유루칸족도 주춤하며 잠시 달려들던 것을 멈추었다. 태산 회의 때 이름을 날린 대용사 치우비의 이름은 유루칸족에게도 알려졌기 때문이다. 몇 명의 유루칸족 용사들이 앞을 막아서려 했지만, 치우비가 무지무지한 도끼를 휘두르자 제풀에 기가 꺾여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치우비는 훌쩍 몸을 날려 앗수라트족과 유루칸족 사이에 뛰어들었다. 치우비의 당당한 모습을 보자 잇수라트족은 환성을 올리면서 다시 사기가 충천해졌다. 치우비는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담담한 얼굴로 서서 조용히 유루칸족을 보고 있었다. 그런 치우비의 모습을 바라보며 치미르칸이 코웃음을 쳤다. “용사, 용사 하지만 아직 솜털도 안 가신 어린놈이 아닌가? 얘들아! 저 아이놈을 잡아 죽여라! 태산 회의의 대용사를 죽이면 그 명예가 아들손자들에게 전해질 것이다!” 치미르칸이 크게 외치자 유루칸족이 화답하듯 마주 고함을 질렀다. 유루칸족 중에서도 힘세고 난폭한 몇몇 전사들은 치우비를 먹잇감처럼 쳐다보며 손아 침을 퉤퉤 뱉으며 무기를 고쳐 쥐었다. 그때 치우비는 치미르칸의 목소리를 듣고 그의 위치를 파악했다.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의 말을 듣고 유루칸족이 함성을 지르는 것으로 보아 틀림없었다. ‘저놈이 우두머리다!’ 치우비는 소리조차 지르지 않고 갑자기 몸을 날려 달리기 시작했다. 막 치우비를 향해 달려들려던 유루칸족 전사들이 깜짝 놀라 앞을 막아서려 했다. 치우비는 무라에게서 배운 몸놀림을 이용하여 번개같이 그들 무리 하나를 피하고, 다시 앞을 막아서는 두 사람의 전사를 향해 도끼를 힘껏 휘둘렀다. 두 사람의 전사가 동시에 도끼에 밀려 허리가 꺾어지며 허공으로 떠오르더니 저만치 날아가 떨어졌다 말할 것도 없이 즉사였다. 다시 두 사람의 전사가 방패를 들고 치우비의 앞을 막아섰으나 치우비는 멈추지 않고 오히려 발에 힘을 주어 밀어붙이는 방패를 어깨로 들이밀었다. “어이쿠!” 치우비의 강철 같은 어깨에 밀린 방패가 산산조각이 나면서 두 사람의 전사는 치우비의 어깨에 받혀 비명을 질렀다. 더구나 두 사람의 몸은 치우비의 어깨에 얹힌 채 치우비와 함께 계속 밀려나갔다. 또다시 몇 사람의 전사들이 창을 찔러 들어왔다. 허나 창들은 치우비의 어깨에 받쳐던 유루칸전사들의 몸에 박혀버렸다. 맹렬한 기세로 치우비가 달려들자 깜짝 놀란 치미르칸이 외쳤다. “저런........ 저런 미친놈! 저놈을 막아! 어서!” 한꺼번에 수십 명의 전사들이 마치 인간 벽을 쌓듯 치우비의 앞으로 와르르 몰려갔다. 그러나 치우비는 달려들던 기세를 멈추지 않고 그들 한가운데로 두려움 없이 뚫고 들어가면서 더더욱 힘을 주어 밀어붙였다. 창과 칼과 방패들이 산산조각나면서 세 명의 전사들이 치우비의 어깨에 퉁겨 날아갔고, 두 사람이 치우비의 발에 짓밟혀 한사람은 목이 부러지고 한 명은 어깨가 박살나 버렸다. 성난 소가 직단을 헤치듯, 수십 명의 전사들을 단번에 뚫고 치우비는 치미르칸이 있는 쪽으로 곧바로 달려왔다. 일이 다급해지자 옆에서 치미르칸을 지키던 용맹한 전사 두 명이 동시에 고함을 지르며 덤벼들었다 그러나 치우비는 그들과 싸우는 대신 아직까지 어깨에 얹혀 있던, 창에 뚫려 엉망이 된 유루칸족의 시체를 집어던졌다. 피할 틈도 없이 한 명의 전사가 시체를 껴안고 나뒹구는 순간, 치우비는 몸을 껑충 날리면서 도끼조차 뻗지 않고 다른 한 명의 전사를 발로 차버렸다. ‘퍽’소리와 함께 전사의 아래턱이 발길질 한번으로 으깨어져 부러진 이빨들이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치미르칸은 너무도 놀라 얼이 빠져서 미처 몸을 돌려 피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다만 입을 반쯤 벌리고 남의 일인 양 멍하니, 달려드는 치우비의 얼굴을 바라볼 뿐이었다. 고함 한 번 지르지 않고, 조금도 일그러지지 않은 조용한 치우비의 표정을 본 순간, 치미르칸의 발은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저건...... 사람이 아니다!’ 다음 순간, 치우비는 처음으로 우렁차게 기합을 넣으며 크게 도끼를 휘둘러 치미르칸의 정수리를 내려쳤다. 치미르칸의 얼빠진 듯한 얼굴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단 일격에 몸이 으깨어져 박살나면서 둘로 갈라져 버린 것이다. 너무도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서 유루칸족의 전사들은 순간 넋이 나가고 얼이 빠진 것 같았다. 치우비는 치미르칸을 죽이기는 했지만 혼자 수많은 유루칸 전사들 속을 뚫고 들어와 있었다. 그러나 치우비는 조금도 겁내하거나 흥분조차 하지 않은 듯한, 담담한 표정이었다. 치우비는 차가운 눈길로 주변의 유루칸족 전사들을 둘러보았다. 그 눈길에 마주친 전사들은 모두 몸을 벌면서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러다가 치우비가 다시 크게 고함을 지르며 도끼를 뽑아 움켜쥐자 유루칸족의 전사들은 모두 비명을 지르면서 달아나기 시작했다. 실로 순식간의 일이었다. 대장이 눈 깜짝할 사이에 죽는 것을 보았고, 치우비의 무서운 힘을 보았기 때문에 더 이상 저항할 마음을 가질 수가 없었다. 몇 명의 전사들이 도망치지 말고 싸워 대장의 복수를 하자고 했다. 허나 일단 몇 명이 도망치기 시작하자 두려움은 순식간에 전염되었다. 천 명이나 되는 유루칸족의 전사들은 순식간에 썰물처럼 비탈을 구르듯 도망치기 시작했다. 거의 다 죽어가던 몰골의 앗수라트족들은 크게 환호성을 지르며 다시 유루칸족의 뒤를 쫓았다. 치우비는 유루칸족이 도망치자 비로소 크게 숨을 내쉬면서 도끼를 땅에 세워 몸을 의지하며 헐떡였다. 키타야가 한달음에 다가왔다. “치우비! 자네는 정말 굉장하네! 세상에 어떻게 치우비는 힘없이 웃어 보였다. “뾰족한 방법이 생각나지 않아서 모험을 했을 뿐입니다. 솔직히 속으로 죽는 줄 알았습니다. 대장을 해치웠어도 저들이 제때 덤볐다면 저도 살아나지 못했을 겁니다.” 힘겹게 말한 뒤 치우비는 숨을 몰아쉬며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짧은 동안의 싸움이었지만 예전보다 기운이 약해진데다 너무 무리하여 힘을 썼던지라 순식간에 탈진해버린 것이다. 한편, 반대쪽 산등성이에서는 앙가마이족의 구르가 역시 혈전을 벌이고 있었다. 구르는 키타야보다 냉정하고 침착하게 지휘를 하는 편이라 아직 포위되지는 않았다. 돌이나 화살도 조금은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미 저쪽 산등성이로는 유루칸족의 전사들이 올라와 앙가마이족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키타야와 치미르칸은 둘 다 앞뒤 가리지 않고 용감하게 싸우는 성격이고, 구르와 치미르칸의 형인 유루칸은 둘 다 차분하게 조금씩 전진하는 성격이라 이쪽은 저쪽만큼 사상자가 많지 않았다. 그러나 구르의 침착한 지휘도 유루칸족의 수를 당해낼 수 없었다. 결국 구르는 비통하게 한숨을 쉬었다. “이대로는 지키지 못할 것 같구나. 만약 내 명령이 떨어지면 마지막 돌과 화살을 던지고 비탈을 급히 내려가 도망친다!” 구르가 도망칠 준비를 하는데 갑자기 저쪽 산등성이에 올라섰던 유루칸족의 전사들이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푸른색의 연기 같은 것이 일어나면서 거기에 닿은 유루칸 전사들이 모두 비명을 지르며 땅을 뒹굴기 시작한 것이다. 구르가 의아하여 바라보는데,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지나족의 쓰레기들아! 우리 미아우의 독가루 맛이 어떠냐?” 바로 초초룬이었다. 초초룬이 거느린 미아우족 전사들은 모두 허리에 검은 가죽주머니를 차고 있었는데, 그 안에는 독가루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미아우족들은 말린 나뭇잎사귀로 얼굴을 빈틈없이 가리고 가죽 손 싸개로 감싼 손으로 독가루를 던져대고 있었다. 높은 산비탈이라 바람이 심했는데 그 바람을 등지고 독가루를 뿌려대니 견딜 수 없었다. “독가루다!” “미아우족의 독가루다! 아이쿠!” “나 죽는다! 살려줘!” 독가루는 몹시 지독하여, 그것을 조금이라도 마신 유루칸 전사들은 모두 캑캑거리며 목을 쥐어뜯으면서 땅에 구르고, 심한 자는 거품을 물고 기절하거나 그대로 죽어버리기까지 했다. 부족장 유루칸이 놀라서 소리쳤다. “기아우 놈들이 독을 쓴다! 제기랄 뭘 하느냐? 활을 쏴라! 활을!” 그러나 바람이 거세게 부는데다 독가루가 그 바람을 타고 마구 날아드는데, 활을 쏠 경황이 있을 리 없었다. 거기다가 구르가 그때를 놓치지 않고 마지막 남은 화살과 돌을 던지게 하니, 유루칸족은 갑자기 거짓말처럼 죽어 넘어져 갔다. 피해가 막대해지자 유루칸은 이를 갈면서 급히 외쳤다. “안 되겠다. 일단 물러서라 비탈을 내려가서 다시 싸울 준비를 해라!” 유루칸족이 급히 물러서자 앙가마이족은 뒤를 쫓으려 했으나 구르가 소리쳐 말렸다. “함부로 움직이지 마라! 그보다 화살과 돌을 다시 주워 모아라!” 구르가 부하들을 단속하는 사이 초초룬이 달려왔다. “구르 부족장! 아직 멀쩡하군요!” “고맙소, 초초룬! 그런데 당신은 뒤를 지키고 있는데, 왜 거기를 비워둔 거요?” 구르는 역시 노련하여 상황을 제대로 판단할 줄 알았다. 초초룬은 히죽 웃으며 털털하게 말했다. “지켜줄 사람이 있어서 왔수. 아무래도 여기가 급한 것 같기도 하구요.” “대체 누가?” 구르가 의아하여 눈을 크게 뜨자 초초룬은 ‘히히히’ 웃었다. 초초룬이 떠난 뒤편으로 쳐들어간 것은 신도와 울루였다. 신도 울루가 거느린 지나 전사들은 바로 치우 일행과 카린까지 동행한 그 전사들에다 백 명 가량을 더 투입하여 모두 오백 명이었다 그들은 골짜기 뒤를 돌아 배후를 칠 작정이었다. 그들은 끽구나 나단선우의 부대보다 훨씬 일찍 떠났지만, 먼 길을 돌아야 했기 때문에 싸움이 한창인 때에야 골짜기 뒤쪽에 다다랐다. 신도 울루는 골짜기 입구에 도달하자 곧 몇 사람을 보내 앞을 살피게 했지만 앞에 아무도 없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아직도 얼굴에 요요에게 긁힌 상처자국이 선명한 신도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뒤쪽은 지키는 놈도 없군.” 울루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가 모자라니 그럴 수밖에! 이대로 뒤를 들이쳐서 끝장을 내자!” 신도와 울루는 따라오던 전사들에게 소리쳐서 그대로 쳐들어가자고 외쳤다. 신도와 울루가 소리친 여운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갑자기 괴이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히히히........ 그렇게 될까?” “누구냐!” 신도가 버럭 고함을 지르자 저편 바위 뒤편에서 한 사람이 비틀비틀 걸어 나왔다. 바로 꾀죄죄하고 흉측하기 이를 데 없는 차림의 쭈그렁 노인, 비울걸이었다. 비울걸은 힘이 없는 듯 비척거리는 걸음걸이로 골짜기 어귀의 한가운데에 서더니 울상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내가 너희를 막기로 했어!” 순간, 지나족 전사들은 모두 참지 못하고 배를 움켜잡고 웃음을 터뜨렸다. 비록 무섭고 흥하게는 생겼지만, 금방 쓰러져 죽어도 이상할 것 같지 않은 노인네가 달랑 혼자서 무기도 없이 오백 명의 전사를 막겠다고 하다니, 웃기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나 전사 중 한 명이 깔깔거리고 웃으며 외쳤다. “노인네 혼자서는 좀 힘들 텐데?” “힘들긴 하겠지만....... 그렇지만....... 나밖에 없거든.” 비울걸의 목소리가 몹시도 처량해서 지나족 전사들은 다시 한 번 배를 움켜쥐고 웃음을 터뜨렸다. 신도 울루는 비울걸이 대단한 사람이란 것은 알았지만, 그들 역시 어이가 없어서 ‘픽’실소를 터뜨렸다. 앞서 소리쳤던 지나 전사는 좀 싱거운 사람이었는지 또다시 외쳤다. “너는 그렇게 사람이 없냐? 아들이나 손주들도 부르지 그러냐?” “아들도 없고, 손주도 없다네.” “그럼 무기도 없냐?” “나는 무기는 만져본 적도 없다네.” 비울걸이 그야말로 처량맞게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양손을 들어 더러운 옷소매를 탈탈 털어 보이자 지나족들은 더 참지 못하고 마구 웃었다. 개중에는 배를 잡고 데굴데굴 구르는 자도 있었다. “그럼 뭘로 우리를 막을 거냐?” “글쎄.......생각 좀 해야겠는데........좀 물러갔다가 나중에 천천히 오면 안 될까? 이 노인네에게 생각할 시간을 좀 줘야지.” 비울걸이 정말로 구걸하는 것처럼 말하자 지나족들은 급기야 눈물까지 흘리며 웃어댔다. 신도 울루도 기가 막혀서 웃었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면서 외쳤다. “비울걸! 무슨 수작이냐? 밟혀 죽기 싫거든 썩 물러서라!” 신도 울루의 목소리가 들리자 비울걸은 두 사람을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재미있었냐? 어땠어? 내가 좀 웃겼냐?” 신도 울루는 어이가 없어서 동시에 외쳤다. “그래! 웃겼다! 웃기는 수작 그만하고 비켜라!” 돌연 비울걸은 표정을 바꾸면서 엄청나게 크고, 냉혹하기 짝이 없는 음성으로 외쳤다. “그러면 다들 죽어도 되겠군!” 신도 울루는 그 말을 듣고 뭔가 섬뜩한 기분이 들어 웃음기를 거두었으나 대부분의 지나 전사들은 여전히 깔깔거리며 웃어댔다. 그러자 비울걸은 느닷없이 어깨를 힘 있게 펴면서 외쳤다. “나 비울걸, 언제나 혼자 다니지만 도깨비 왕이란 이름이 괜히 붙은 것이 아니다. 자, 이제 죽을 준비들 해라!” 비울걸이 외치면서 음산하게 웃음을 터뜨리자 별안간 땅에서 흰 연기 같은 것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 연기는 비울걸의 주위에도, 신도울루의 주위에도, 지나족들의 한 가운데에도 사방팔방 곳곳에서 피어올랐다. 지나 전사들은 그제야 놀라고 경계하며 무기를 고쳐 쥐었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비울걸이 크게 외쳤다. “할!” 순간 피어오르던 횐 연기들이 갑자기 형체를 갖추더니 순식간에 무시무시한 괴물의 형상으로 변해 지나 전사들을 덮쳐갔다. 실로 뭐라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몰골들이었다. 어떤 놈은 여러 개 달린 팔에 날카로운 손톱을 지녔고, 어떤 놈은 입만 있는 것처럼 크고, 입 안에 또 입이 달렸으며 줄줄이 날카로운 이빨이 돋아 있었다. 어떤 놈은 기둥처럼 굵은 다리 하나로 깡충거리며 뛰었고 어떤 놈은 뱀이나 지네처림 땅을 기어 다니며 흉악한 발톱을 휘둘러댔다. 허공을 획획 날아다니는 불덩어리 같은 것들도 있었다. “도깨비다! 괴물이다!” “도깨비들이다!” 도깨비들은 지나족의 앞만이 아니라 지나족들의 줄 한가운데에서, 또는 옆에서, 뒤에서, 머리 위에서 나타났다. 지나 전사들은 모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마구 무기를 휘두르며 허둥댔다. 말이 놀라 울부짖고 사람들은 내편 저편을 가리지 못하고 무기를 마구 휘둘러댔다. 사방팔방이 모두 도깨비들로 가득 차 있어 다른 사람은 보이지도 않는 것 같았다. 신도 울루조차도 처음에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복숭아나무 몽둥이를 사방으로 휘둘러댔다. 신도 울루는 몽둥이를 휘두르다가 서로 간에 한 대씩 때리고 얻어맞았다. 그제야 둘이 동시에 외쳤다. “제기랄 이건 허깨비다!” 도깨비들이 몽둥이에 맞는 느낌이 없자 신도 울루는 즉시 비울걸의 도깨비 무리가 실제로는 형체가 없는 허깨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 낸 것이다. 신도 울루는 즉시 소리쳐서 부하들을 수습하려고 했다. “이건 허깨비다! 헛것이니 속지 말아라! 없다 생각하면 그만이야!” 그러나 보통 전사들이 당장 눈앞에서 으르렁거리는 괴물들을 없다 생각하고 참아 넘길 수가 없었다. 지나족들은 이미 서로 뒤엉켜 마구 무기를 휘둘러 스스로의 무기에 맞아서 수도 없이 죽어 넘어지고 있었다. 그때 비울걸이 낄낄 웃었다. “뭐? 허깨비? 정말 허깨비인지 아닌지 볼까?” 비울걸이 다시 허공에 대고 일갈하자 허공을 날던 도깨비불들이 일제히 모여들어 신도 울루를 향해 덮쳐 들어갔다. 신도 울루는 급히 몽둥이를 휘둘러 자신들을 보호하려 했으나 도깨비불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더구나 그들이 와서 부딪힐 때마다 왜 타격이 심했다. 순식간에 신도 울루는 수없는 잔돌멩이에 맞는 것 같은 아픔에 비명을 질러댔다. 비울걸이 다시 낄낄거리며 웃었다. “잘난 척하더니만, 꼴좋구나!” 비울걸이 약을 올리자 신도와 울루는 울컥 화가 치밀어 도깨비불들이 마구 때리는 것도 상관하지 않고 동시에 손을 맞잡고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러자 신도 울루의 주변에 이번에는 검은 안개 같은 것이 피어오르면서 사방에 퍼져갔다. 그 검은 안개가 신도 울루를 에워싸자 도깨비불들은 감히 그 안개를 뚫을 엄두를 못내는 듯, 헛되이 허공을 날기만 했다. 비울걸은 그것을 보고 안색이 변했다. “역시 네놈들도 믿는 구석이 있었구나!” 비울걸도 양손을 크게 휘두르며 몇 번 돌리다가 땅을 가리켜 보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누런 연기 같은 것이 땅에서 뭉클뭉클 솟아오르면서 커다란 사람의 형상을 갖추어 갔다. 그와 때를 맞춰 신도 울루의 검은 안개도 기이한 사람의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다. 비울걸의 안개는 이윽고 형체가 또렷한 거대한 누런색의 도깨비의 모습으로 변했다. 키는 사람의 서너 배도 넘을 정도로 컸고 이빨이 튀어나오고 이마에 작은 뿔이 솟은 험상궂은 얼굴에 가슴이 떡 벌어지고 손이 엄청나게 컸다. 비울걸이 외쳤다. “도깨비 왕 비울걸의 명이다. 땅 도깨비야, 가서 저놈들을 혼내줘라.” 그에 비해 신도 울루가 불러낸 검은 안개는 하체가 분명치 않은 음산한 망령과 같은 모습으로 변했는데, 그 크기는 비울걸이 불러낸 땅도깨비와 맞먹을 정도로 컸다. 신도 울루도 지지 않고 외쳤다. “귀신들의 지배자, 신도 울루의 명이다! 죽은 자들을 다스리는 저승의 전사여! 저 녀석을 없애라!” 거대한 도깨비가 땅을 흔들면서 쿵쿵거리고 신도 울루를 향해 달려가자 검은 망령이 도깨비의 몸을 휘감아 돌면서 공격하기 시작했다. 땅도깨비도 지지 않고 거대한 손을 휘둘러 싸우기 시작했다. 두 거대한 두 괴물이 싸우는 모습이 서로 막상막하인 듯했다. 땅도깨비와 망령은 둘 다 불러낸 사람의 조종을 받아 싸우는 것이었기에 비울절과 신도 울루는 진땀을 흘리며 정신을 모았다. 비울걸은 계속 양손의 집게손가락을 관자놀이에 똑바로 대고 도깨비를 조종하고 신도 울루는 눈을 감고 똑바로 손을 마주잡고 앉은 채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비울걸과신도 울루의 힘이 서로 비슷하여 밀고 당기는 괴물들의 접전이 계속 되었지만, 이윽고 신도 울루의 망령이 점점 비울걸의 땅도깨비를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식은땀을 흘리던 비울걸이 갑자기 크게 소리를 지르자 땅도깨비는 있는 힘을 다해 망령을 몸으로 감아 안고 핑그르르 빠르게 회오리처럼 돌다가 둘이 함께 섞여서 공기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이윽고 땀에 흠뻑 젖어 눈을 뜬 신도 울루가 껄껄 웃었다. “하다가 못 당할 것 같으니 꽁수를 쓰는 거냐, 비울걸?” 비울걸이 헐떡이면서 맞받아쳤다. “제길! 네놈들은 둘이잖느냐! 더구나 나는 땅도깨비말고도 많은 도깨비를 불러내서 힘이 나눠졌어! 다음번에는 용서 없다!” “어딜 도망치려느냐?” 신도 울루가 외치자 비울걸이 낄낄 웃었다. “내가 도망치겠다는데 네놈들이 어쩔 가냐? 네놈들 부하들이나 챙기지, 그래?” 신도 울루가 놀라서 돌아보니 사방에 자신의 부하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고, 백 명도 넘는 시체와 부상자들, 버려지고 부서진 무기들만이 즐비했다. “이......이게......!” 신도 울루와 비울걸이 겨루는 사이 지나 전사들은 도깨비들의 환영과 도깨비불을 당해내지 못하고 서로 죽고 죽이다가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져 도망쳐 버린 것이다. 도깨비들에 거대한 괴물들까지 나타났고 대장의 명령조차 없으니 남아 있는 자가 있었다면 그게 더 이상 한 일이었을 것이다. 다 죽지는 않았어도 마구 흩어진 부하들을 수습하는 것은 금방 될 일이 아니었다. 부하들 일이 급하여 비울걸을 잡을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신도 울루는 급히 부하들을 부르면서 허둥지둥 달려갔다. 비울걸이 헐떡이며 숨을 고르다가 한마디 내쏘았다. “밥통들아! 부하는 돌보지 않고 그저 지는 게 싫어서......! 너희는 재주가 좀 있을지는 몰라도 대장감은 못 돼!” 치우천은 갑자기 지옥 밑바닥에서 기어 나온 듯한 기분에 환하게 웃었다. 울라트가 달려와서 치우비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전하기 무섭게, 이번에는 둘째 형요가 달려와서 비울걸이 혼자서 신도 울루의 부대를 흩어버렸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에 이어 셋째 형요와 넷째 형요가 달려와서 치우비가 치미르칸을 죽이고 키타야 부대를 구했다는 것과 초초룬이 독을 써서 구르 부대를 구했다는 소식도 알렸다. 세 방향에서의 위험이 한풀 꺾이자 치우천은 기뻐서 소리쳤다. “이제 됐다! 이길 수 있다! 형요! 급히 키타야와 구르에게 알려라. 비탈을 내려가서 나단선우와 끽구의 부대의 옆구리를 공격하라고! 한 번 더 타격을 주고 물러나면 우리를 쫓지 못할 것이다!” 형요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곧바로 달려갔다. 치우천 옆에 혼자 남은 울라트를 쳐다보며 치우천이 말했다. “이제 앞이 문제다. 비휴의 늑대무리가 오는데..... 저것만 잠시 막아낼 수 있으면 우리가 이긴다!” “못 막으면요?” 치우천은 그 말에 조용히 대답했다. “그럼 우리는 전멸이다.” 어느 결엔가 치우천 곁에 소녀가 다가와 말없이 서 있었다. 상황이 조금 나아졌다고는 하나, 아직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보돈차르와 야율쿠리는 끽구의 부대와 맞서 고전하고 있었고, 쇠돌이와 부루벼락은 나단선우의 부대에 밀리고 있었다. 더구나 나단선우와 끽구가 사자처럼 날뛰고 광성자가 불러낸 나무덩굴이 무섭게 번져 나가서 제대로 싸우기조차 힘들었다. 그때 다섯 명의 도깨비들이 고함을 지르며 달려왔다 비록 다섯 명이라고는 하나, 험악하고 괴상한 생김새의 도깨비들이 나타나자 지나족은 주춤했다. 특히 붉은 머리의 리미와 노란 금발의 개르는 머리빛깔만으로도 기가 질리게 만들었다. “도깨비다!” “치우 형제가 도깨비들을 불러냈다!” 훈족과 지나족 사이에 섞여 있던 유루칸족의 전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유루칸족은 앗수라트, 앙가마이와 같은 타타르족이라 치우 형제와 도깨비들의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그것도 몇 배 부풀려진 이야기를. 그 때문에 막상 도깨비들이 싸움터에 모습을 나타내자 유루칸족은 두려움에 떨며 동요했고 그에 전염되어 훈족의 전사들도 멈칫거렸다. ‘타타르족이 저렇게 무서워하다니! 도깨비들이 그리 대단하단 말인가?’ 그때 싱카가 앞으로 나서서 양손을 어지럽게 교차시키면서 주문을 외우자 싱카의 허리에 찼던 두 자루의 칼이 허공에 날아올랐다. 그 칼 두 자루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날아들자, 안 그래도 두려워하던 유루칸족은 비명을 지르면서 물러섰다. 싱카는 많이 지쳐 있던 참이라 그 칼로 사람을 해칠 자신은 없었다. 그러나 칼이 저 혼자 움직이는 것을 보자 유루칸족은 단박 혼란에 빠졌다. 거기에다 용감한 리미와 개르가 각각 붉은 머리와 금발을 휘날리며 몸을 돌보지 않고 돌진하자 훈족마저도 삽시간에 기세가 흐트러졌다. 부하들이 갈팡질팡 어쩔 줄 몰라 하자 나단선우가 목이 터져라 외쳤다. “바보들아! 도깨비들이라도 쳐 죽이면 그만 아니냐! 노란 머리, 붉은 머리 도깨비라도 별것 아니다!” 나단선우는 훈족이라 대륙의 서쪽에 있었기 때문에 머리색이 다른 도깨비들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서 부하들만큼 두려워하진 않았다. 사실 훈족들 중 다른 머리색의 도깨비가 있다는 이야기를 아는 사람은 왜 많았다. 그러나 유루칸족이 워낙 무서워하자 두려움이 전염되어 놀란 것이다. 안 되겠다고 생각한 나단선우는 말로만 외친 것이 아니라 직접 도끼를 치켜들고 싱카를 향해 달려갔다. 주술사를 먼저 죽이면 사태가 수습될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마냥이 싱카의 뒤에서 창을 던져대기 시작했다. 나단선우는 금발이나 붉은 머리의 도깨비는 들어보았지만 온몸이 칠흑처럼 새까만 도깨비는 듣도 보도 못한 터라 깜짝 놀랐다. ‘저런 도깨비까지 있었다니? 정말 무섭게 생겼구나!’ 마냥은 달려오면서 죽은 전사들의 창을 잔뜩 주워 짊어지고 있었는데, 적의 대장인 듯한 자가 달려오자 소리를 지르면서 창을 마구 집어던졌다. 새까만 마냥의 얼굴에서 눈의 흰자위만이 번득거려 빛나는 것 같았고, 소리를 지를 때마다 벌어지는 입이 피부색 때문에 더욱 새빨갛게 보였다. 나단선우는 마냥의 모습에 놀라고 기가 죽어서 마냥의 창을 세 개까지 막아 냈으나, 네 번째 창은 더 막지 못하고 머리에 맞았다. 원래대로면 즉사했겠지만 하필 네 번째 창은 돌로 만든 창끝이 무디어진터라 나단선우의 단단한 머리를 뚫지는 못했다. 그러나 나단선우는 눈앞에 별이 튀는 것과 동시에 머리에 피를 흘리며 기절해 쓰러졌다. 마냥이 단박에 대장을 쓰러뜨리자 훈족마저도 도깨비의 공포에 떨었다. 더구나 싱카가 주문 외우기를 마치자, 싱카의 주변으로부터 바람이 일어서 둥글게 사방으로 불어나갔다. 그런데 그 바람에 닿은 나무덩굴들이 힘없이 사그라지며 도로 흙으로 변해 부서져 버리는 것 아닌가? 나단선우가 쓰러지자 유루칸족과 훈족은 고함을 지르면서 제풀에 물러서기 시작했다. 끽구 역시 주술이 갑자기 깨어지는 것을 보자 어리둥절해하다가 유루칸족과 훈족이 물러서는 것을 보고 자신도 군대를 뒤로 물렸다. 보돈차르와 야율쿠리는 다 죽게 된 참에 다시 살아난 셈이었다. 그러나 물러서는 적의 뒤를 쫓을 힘이라곤 없었다. 이미 지칠 대로 지쳐 기진맥진해진 야율쿠리가 역시 피투성이가 된 보돈차르와 치베를 보고 물었다. “저놈들이 왜 물러나지?” 치베가 이를 악물면서 대답했다. “늑대다! 우리를 늑대와 싸우게 하고 그 다음에 다시 밀어붙이려는 것이다. 제길, 될 틈도 없군!” 보돈차르도 온몸에 묻은 피를 대강 닦아내며 말했다. “헌원도 제법이군. 자기편 피해를 줄이려고 번갈아 싸우게 하고 있어. 이대로라면 힘들겠다.” 지나족 부대는 힘들어지면 번갈아 나아가고 물러서며 조금씩이나마 쉬면서 싸웠지만, 이쪽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힘이라면 남 못지않다고 자부하는 야율쿠리마저도 다리가 후들후들 떨릴 정도였다. 그런데 그들이 미처 숨을 돌릴 여유도 없이 이번에는 비휴가 부리는 늑대들이 일제히 달려 들어왔다. 늑대들은 짐승이 별로 없는 카린산에 끌려오면서 먹이를 제대로 먹지 못해 모두 뱃가죽이 등에 붙을 정도로 굶주려 있었다. 그런 아귀 같은 늑대들이 무서운 기세로 밀어 닥치자 보돈차르마저도 얼굴빛이 해쓱해졌다. 그때였다. 골짜기 저편으로부터 바람같이 달려오는 흰 그림자 두 개가 있었다. 하도 빠르고 날렵하여 잘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야율쿠리가 놀라며 외쳤다. “저게 뭐지? 적인가? 뒤가 뚫렸단 말인가?” 치베가 눈을 부릅뜨고 한참 지켜보더니 소리 높여 외쳤다. “저건...... 저건 무라다! 무라가 탄 개명수다!” “무라? 그러면 카린족 아니냐? 그럼 적이 아닌가?” “모르겠다!” 비휴의 늑대 무리는 몽골족과 키탄족들의 바로 앞에까지 몰려와서 이빨을 드러내고 침을 흘리며 무섭게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키탄과 몽골 전사들은 이제 무기도 거의 부러져 없었다. 몽골족들도 말이 너무 지치고 늑대를 두려워했으므로 하는 수 없이 일제히 말에서 내렸다. 골짜기 안쪽에 여분의 말이 있었지만 그것을 갈아탈 틈도 없었다. 하도 상황이 급하니 늑대와 마구잡이로 싸울 참이었다. 그때 무라가 탄 개명수, 슈와 카가 훌쩍훌쩍 키탄과 몽골 전사들의 머리 위를 뛰어넘어 늑대들 앞을 막고 섰다. 길게 휘날리는 무라의 횐 머리와 창백할 정도로 흰 피부는 역시 개명수의 흰털 색깔과 어울려서 뭐라 말할 수 없는 분위기를 자아냈다. 보기만 해도 영물 같아 보이는 횐 호랑이를 타고 달려오는 흰머리 여전사의 모습은 싸움에 지친 전사들의 눈에 신이나 선녀로 보이는 것이 당연했다. 피투성이와 흙 범벅이 된 키탄 및 몽골 전사들과, 막 물러서려던 지나족, 훈족, 타타르족의 전사들도 일제히 멍청한 눈으로 무라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무라는 여전히 무뚝뚝한 표정으로 한번 싸늘한 눈빛으로 늑대들을 획 돌아보더니 타고 있던 개명수, 슈의 등을 가볍게 어루만졌다. 그러자 슈와 카가 갑자기 허리를 굽혀 힘을 주더니 있는 힘을 다해 엄청난 소리로 늑대들을 향해 포효했다. 카와 슈는 호랑이 중에서도 영물인 개명수라서 그 포효는 보통 호랑이의 것보다도 몇 배나 컸다. 늑대들은 단번에 캥캥거리며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늑대는 원래 호랑이 앞에서는 오금을 펴지 못하는 터였는데, 하물며 개명수 앞에서는 더더욱 힘을 낼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늑대무리가 단박에 혼란에 빠지자 뒤쪽에 있던 비휴의 안색이 변했다. 비휴는 다시 계속 휘파람을 불어서 늑대들을 다그쳤다. 비휴의 휘파람소리를 듣고 늑대들이 다시 용기를 내어 움직이려하자 무라가 날카롭게 긴 소리를 냈다. 그러자 카가 훌쩍 늑대들 무리로 뛰어들면서 무서운 힘으로 두 마리의 늑대를 후려갈겼다. 카의 앞발에 맞은 늑대 두 마리는 그 자리에서 피떡이 되어 으스러져 죽어갔다. 카는 다시 늑대 한 마리의 목을 물어 내던지면서 뒤에서 달려드는 늑대 한 마리를 꼬리로 후려쳐서 내동댕이쳤다. 카가 늑대들을 마구 죽이는 사이, 슈는 목을 높이 쳐들고 하늘을 향해 길게 울부짖었다. 그러자 사방에서 그에 화답하는 듯한 포효가 들리면서 골짜기 여기저기에서 흰호랑이들과 횐 표범들이 달려 나오기 시작했다. 횐 호랑이 개명수가 열두 마리였고 흰 표범은 서른 마리도 넘었다. 개명수들과 흰 표범들이 늑대들에게 덤벼들자 늑대 무리는 크게 혼란에 빠지면서 아수라장 같은 짐승들 간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개명수가순식간에 여기저기에서 나타나자 엄청난 수의 늑대들은 위협하는 듯 이빨을 드러내면서도 뒤로 슬슬 물러서기 시작했다. 수많은 짐승들이 몰려나와 서로 울부짖고 싸우는 광경은 인간들이 감히 끼어들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처절했다. 믿고 있던 천랑대가 삽시간에 반쯤 무너지자 먼발치에서 지켜보던 상망이 외쳤다. “저 계집이 끝내 일을 망치려 드는구나!” 헌원도 노해서 말했다. “저 여자는 쑤앙마이의 밑에 있던 무라 아닌가? 카린족은 나를 돕기로 되어 있었을 텐데?” “저 계집은 쑤앙마이의 말도 듣지 않을 모양입니다!” 헌원은 화를 내며 외쳤다. “카린족은 이 헌원을 배신할 참인가? 카린족은 왜 움직이지 않는 것인가?” 카린족은 아까 소녀의 말을 들은 후로 투지가 사그라져서 헌원이 두어 번이나나가라고 다그쳤지만 선뜻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헌원은 그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 번에 압도적인 힘으로 조금만 더 밀어붙였으면 되었을 것 같았는데, 이미 헌원측은 두 번이나 기회를 놓쳤다. 헌원은 분통을 터뜨리며 크게 소리쳤다. “어서 카린족에게 따져라!” 상망이 급히 대답한 뒤 카린족 여전사들에게 달려갔다. 비냐와 유우, 가나는 무라가 늑대들과 싸우는 것을 본지라 모두 안색이 변해 있었다. 상망이 도착하자마자 말에서 내리지도 않고 빈정대듯 외쳤다. “그대들 카린족은 어떻게 된 것이지1 이제는 저들을 도와 싸우기로 한 건가?” 비냐가 허옇게 질린 빛으로 말을 더듬었다. “그렇지..... 않소, 저건 무라가 혼자 한 짓이오.” “혼자? 저 많은 개명수를 무라 혼자 데리고 있었나?” 차분해 보이는 인상의 유우가 변명하듯 나섰다. “무라는 쑤앙마이의 개명수를 키우는 일을 했어요. 무라가 허락 없이 개명수들을 모두 끌고 나온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모르는 일입니다! 무라 혼자서 한.......” 유우의 말을 막아서며 상망이 성질을 부렸다. “혼자건 아니건 무라는 카린족이다! 그리고 우리 늑대무리를 엉망으로 만들고 있어! 더구나 그 때문에 다 이긴 싸움이 엉망이 되어가고 있다! 이 책임을 어떻게 질 텐가?” 비냐는 이를 으드득 갈며 몸에 힘을 주었다. 비냐의 사나운 얼굴이 더욱 일그러지고 눈 꼬리가 하늘로 치솟았다. “무라는 우리 자매지만, 쑤앙마이의 명을 어겼으니 그냥 둘 수 없다! 그리고 우리 카린족이 사내들 따위에게 겁쟁이 취급을 받을 수는 없다! 유우! 가나! 나가자! 가서 모조리 쓸어버리자.” 비냐가 외치고 난 다음 길게 하늘을 향해 소리를 지르자 카린족들도 높은 목소리로 함께 소리를 질렀다. 카린족의 전투의 함성이었다. 지금까지 움직이지 않아서 힘과 무기를 전혀 소모하지 않은 카린족들은 힘이 넘치는 듯, 싸움터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카린족이 움직였다! 이것 큰일이군!”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치우천의 안색이 다시 변했다. 소녀도 답답하여 부르짖었다. “꼭......꼭 싸워야만 했니1 자매들아.” 치우천은 급히 형요를 소리쳐 불렀다. “형요. 형또 큰일이다! 구르님과 키타야님이 벌써 움직였을 텐데, 카린족이 다시 덮치면 포위하는 게 아니라 되레 포위당해 버리고 만다! 어서 물러서게 해야 한다! 어서!” 형요도 안색이 변하며 외쳤다. “이미 자매들이 갔어! 다시 오려면 한참 걸릴 거야!” 치우천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구르와 키타야에게 억지로 적을 포위하라고 시킨 것은 자신이었다. 그러나 이대로라면 그들이 도착하여 포위가 이루어질 때쯤 다시 카린족에 의해 역 포위를 당할 공산이 컸다. 그렇게 되면 보돈차르나 야율쿠리의 부대는 어떻게 물러선다 해도 키타야와 구르 부대는 그야말로 한 사람도 살아나을 수 없었다. 필사적으로 타개책을 생각하던 치우천의 눈에 멀리서 좀 뒤처져 달려가는 초초룬의 미아우 전사들이 보였다. 치우천은 대뜸 하늘을 보고 바람의 방향을 살폈다. 바람이 지나족 쪽으로 부는 것을 느낀 치우천은 곧 외치면서 달리기 시작했다. “방법이 있다! 울라트! 소녀님! 도와주십시오!” 소녀와 울라트는 자신들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아 불안해하던 차에 치우천이 외치자 다급히 물었다. “뭘 하면 되죠?” “소녀님은 울라트와 함께 막사로 가서 아무것이나 잘 타는 물건들을 한데 모아 놓으십시오! 골짜기 어귀에 쌓아두시면 됩니다. 그리고 형요는 급히 초초룬에게 내 말을 전해줘!” 개명수와 횐 표범들이 늑대들과 싸워주자, 보돈차르와 야율쿠리 등은 최후의 힘을 짜내어서 남아 있던 끽구와 나단선우의 전사들을 향해 돌진했다. 그리고 때를 맞추어서 비탈을 구르듯 내려온 구르와 키타야의 부하들도 양쪽에서 협공을 가하기 시작했다. 나단선우가 상처를 입고 쓰러지자 훈족은 이미 제각기 흩어져서 후퇴하고 있었고, 유루칸의 부하들도 꽁무니를 빼기 시작했다. 동생 치미르칸을 잃은 유루칸이 슬픔에 빠졌고, 유루칸의 전사들도 전의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치우비와 도깨비들에게 놀라기도 했거니와, 애당초 자기들의 싸움도 아닌데 굳이 그렇게까지 싸울 것은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아직도 지나측의 부대는 천오백이 넘게 남아 있었고, 그에 비해 치우측은 수많은 전사들이 죽거나 다쳐서 싸울 수 있는 전사의 수는 오백도 채 안 되었다. 그나마 처절하게 전투를 치른지라 무기도 거의 다 망가져서 손에 맞지 않는 남의 무기를 휘두르는 판이었다. 키타야의 전사 백여 명과 구르의 전사 이백 명은 이제야말로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필사적으로 끽구와 비휴가 통솔하는 부대의 옆구리를 쳤다. 보돈차르, 야율쿠리, 쇠돌이와 부루벼락 등도 마지막 힘을 짜내어서 후들거리는 팔에 억지로 힘을 주어 다시 싸우기 시작했다. 비록 전사의 수는 아직도 월등했지만, 세 방향에서 공격을 받자 지나족은 다시 헝클어지기 시작했다. 더구나 지나족의 지휘관은 끽구와 비휴, 둘뿐인 셈이고 그에 비해 치우측은 대장격인 용사들이 많아서 지휘가 훨씬 더 일사불란한 편이었다. 지나족은 애써 대열을 유지하면서 가까스로 세 방향에서의 공격을 버텨내고 있었다. 끽구가 거의 앞장서다시피 하여 정면을 막자 비휴가 재빨리 움직이며 왼쪽을 막았고, 급히 달려온 지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오른쪽을 막아내고 있었다. 비휴가 전사들을 챙기느라 정신이 없어지자 비휴의 늑대무리는 개명수들에게 쫓겨 백여 마리의 시체를 남기고 어지러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개명수는 두 마리, 횐 표범은 일곱 마리가 죽었을 뿐이지만 살아남은 짐승들도 많은 상처를 입어 횐 몸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가장 상처가 심한 것은 앞장서서 싸웠던 카였다. 무라는 안쓰러웠던지 슈의 등에서 내려 카의 등을 한 번 쓰다듬어준 후 싸움터에 뛰어들었다. 개명수들의 상처가 심해서 더 이상 그들을 부릴 생각은 할 수 없었다. 슈도 고통스러워하는 자기 짝이 안쓰러웠던지 피에 물든 카의 몸을 천천히 핥아주었다. 상처 입은 개명수들과 횐 표범들도 역시 절뚝거리며 흩어져 사라졌다. 그런 판국에 새로 천여 명의 카린족 여전사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비냐는 성질이 거칠기 짝이 없었지만 전사들을 부리는 데에는 퍽 능란하여, 치우측 군대가 셋으로 나뉘어 있는 것을 파악하고 유우와 가나에게 삼백 명씩을 몌어주어 양 옆을 돕게 하고, 자신은 사백여 명의 여전사들을 끌고 가운데로 돌진해 들어갔다. 새로운 적의 군대가 나타난 것을 보고 치우측의 전사들은 모두 신음을 토해냈다. 그때 치우천이 날듯이 달려오며 외쳤다. “보돈차르님은 오른쪽으로 옮겨 키타야님의 뒤를 지켜주시오! 그리고 야율쿠리는 왼쪽으로 옮겨 구르님의 뒤를 지키고 싸우시오!” 치우천이 직접 나서서 외치자 정신없이 싸우던 보돈차르와 야율쿠리는 다시 정신을 수습하고 전사들에게 고함을 쳤다. “움직여라! 어서 움직여!” 보돈차르와 야율쿠리는 부하들을 잘 다스렸기 때문에 대장의 명령이 떨어지자 그들은 즉각 전열을 가다듬고 자리를 옮기기 시작했다. 쇠돌이와 부루벼락, 치베 등의 용사들이 상황판단을 잘하여 전사들을 중간 중간에서 독려하여 빨리 움직이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키탄과 몽골족이 다시 어깨를 맞대면서 순식간에 자리를 옮기자 치우의 진은 둘로 완전히 나누어졌다. 왼쪽에는 구르와 야율쿠리의 전사들이 서로 등을 맞대고 싸웠고, 오른쪽에는 키타야와 보돈차르의 전사들이 등을 맞대고 싸우기 시작했다. 구르의 전사들이 카린의 유우를 맞아 싸웠고 키타야의 전사들은 가나의 부대와 맞붙었다. 곧이어 무서운 속도로 비냐의 부대가 가운데로 뚫고 들어왔는데, 정작 정면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고 오히려 옆으로 움직인 야율쿠리와 보돈차르의 합공을 받는 꼴이 되어버렸다. 실로 아슬아슬한 간발의 차이였다. 만약 치우천이 조금만 늦었더라도 야율쿠리와 보돈차르의 부대는 힘을 비축한 비냐의 부대와 정면으로 격돌하여 전멸했을 것이다. 하지만 비냐의 부대는 무서운 기세로 달려왔기 때문에 오히려 방향을 돌릴 수 없어서 양측 면에서 협공을 받게 되었다. “이게 무슨 일이냐! 제길! 어떻게 이렇게 된 거지?” 비냐는 화가 나서 마구 고함을 질러댔다. 비냐의 부대가 헝클어지려 하자 끽구와 비휴가 부하들을 거느리고 일제히 달려들어 다시 그들을 도왔다. 이렇게 되자 치우측의 부대는 비록 둘로 나누어진 채 포위되기는 했지만 서로 등을 맞대고 싸울 수 있게 되어 오히려 유리해졌다. 그에 반해 지나족은 수가 월등했지만 보다 넓게 사방에서 싸워야했다. 특히 가장 많은 수가 밀집한 중앙부는 더욱 상황이 심각했다. 그리 넓지 않은 공간에 많은 전사들이 밀고 들어와서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거기다가 카린족 여전사와 지나족의 부대가 마구 뒤섞여 대오가 흐트러져 보돈차르와 야율쿠리 부대의 협공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자꾸만 쓰러져 갔다. 멀리서 그 상황을 보고 있던 헌원이 크게 탄식했다. “세상에! 저런 수가 있었다니!” 방금 치우천이 움직이게 한 방법은 정말로 교묘하기 이를 데 없어서 순식간에 허물어지던 상황을 완전히 역전시켜 버렸던 것이다. 상망도 기가 막히고 놀랍기도 해서 외쳤다. “정말 교묘하기 짝이 없군요!” 헌원이 갑자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치우천....... 나이도 어린놈이 전사를 저리도 잘 부릴 줄 알다니! 저놈이 크면 세상에 상대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상망!” “예!” “이제 더 볼 것 없다! 남아 있는 전사들을 모조리 데리고 나가라!” 그때 지나족은 헌원을 에워싼 오백여 명의 전사가 최후로 남아 있었다. 그들은 헌원의 호위대였는데, 헌원은 그들마저도 투입시키기로 한 것이다. 그야말로 최후의 밑천까지 모조리 거는 순간이었다. 최후의 수를 던진 헌원의 명령에 상망은 주저했다. “하지만 그러면 헌원님과 발님은 누가 지킬는지요......” “스무 명만 남게 하고 모두 나가게 해라! 어서 서두르게! 더 늦으면 우리가 진다!” “무라! 너는 어째서....... 우리와 싸우겠단 거냐?” 구르의 부대를 공격하던 유우가 구르 부대의 선두에 선 무라를 발견하고 놀라서 외쳤다. 그러자 무라는 여전히 돌처럼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물러서. 너와 싸우기 싫다.” “쑤앙마이께서는 지나족을 도우라고 말하셨어! 쑤앙마이의 명령을 어길 참이야?” 무라는 담담히 말했다. “미안하다. 난 이미 맹세했어. 쑤앙마이께도 죄송하다고 전해줘.” 유우는 용감하지만 평소에는 온순하고 착한 성격이었으며, 쑤앙마이의 열세 자매들 중에서도 무라와 가장 친했다. 유우는 무라와 싸우게 되었다고 생각하자 저절로 눈물이 솟구쳤다. “무라! 우리가...... 정말 싸워야 하니? 응?” 유우가 울면서 외쳤다. 무라도 표정이 변하지는 않았으나 두 눈에서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무라는 이를 악물고 두 주먹을 굳게 쥔 뒤 쳐들어 보였다. 무기를 쓰지 않는 무라가 싸움을 시작할 때 취하는 자세였다. 유우는 그것을 보고 ‘왁’ 울음을 터뜨리며 외쳤다. “쑤앙마이께서 용서하지 않으실 거야! 무라! 너는 그럼 죽어!” 무라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으나 여전히 굳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그러니 네가 날 죽여줘. 전사답게 죽고 싶다.” “저놈들이 그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니? 응1 네가 죽어줄 까닭이 어디 있어?” “난 그들을 믿는다.” 무라가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담담히 말하자 유우는 엉엉 울면서 들고 있던 창을 치켜들었다. 유우의 머리에 꽂혀 있던 공작의 긴 깃털들이 파르르 떨렸다 순간 무라가 유우에게 몸을 날려 달려들었다. 그러자 유우는 울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게 뭐야!” 함께 자라며 연습을 했던 유우는 무라에 대해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지금 무라의 움직임은 빠르기는 했지만 평소 무라의 싸우는 법과는 너무 달랐다. 조금도 방어를 하지 않고 허점이 그대로 보였던 것이다. 유우는 긴 창을 휘둘러 무라를 찌르려다가 창끝이 무라에게 닿으려는 순간 번개같이 창을 비틀어서 땅에 꽂아버렸다. 순간 무라의 주먹이 유우의 관자놀이 급소를 노리고 날아들다가 관자놀이의 바로 앞에서 딱 멈추어 섰다 둘 다 상대를 해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둘은 그렇게 멈춘 채로 잠시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무라가 먼저 조용히 말했다. “바보.” 유우는 엉엉 울면서 돌연 무라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재빨리 무라에게서 떨어지며 큰 소리로 외쳤다. “카린의 여전사들이여! 더 싸울 수 없다! 후퇴다! 후퇴!” 무라는 흠칫 놀라며 외쳤다. “유우! 그래선 안 된다! 싸움에서 물러서다니! 그럼 네가 벌을 받고 죽게 돼!” 유우는 눈물을 흘리며 빙긋 웃어 보였다. “차라리 내가 죽을래. 그게...... 그게 낫겠어.” “유우! 안 돼! 유우!” 유우는 환하게 웃으며 눈을 감고 말했다. “무라, 나의 자매. 나는 너를 믿겠어. 네 믿음이 옳았기를 바란다. 이제 안녕. 영원히 안녕........” 무라가 뭐라 외쳤지만 유우는 재빨리 돌아서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갔다. 카린족이 싸움을 멈추자 구르도 급히 외쳤다. “싸우지 마라! 저들이 물러가려 한다!” 구르의 부대도 싸움을 멈추었다. 서로 간에 전사들이 몇몇 쓰러지기는 했지만 피차 큰 피해는 없었다. 구르의 전사들이 조용히 바라보는 가운데 카린의 여전사들은 숙연한 태도로 몸을 돌려 일제히 무라에게 작별의 표시로 인사를 한 다음 유우를 따라 뒤돌아서 떠나가 버렸다. 유우의 부대가 떠나가자 목석같던 무라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주저앉아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구르와 구르의 전사들도 안쓰러워서 눈물을 글썽였다. 한편, 키타야외 부대와 싸우던 가나는 저쪽에서 카린족의 대열이 우르르 허물어지는 것을 발견하고 급히 창을 휘두르며 달려갔다 그곳에서는 치우비가 성난 곰처럼 닥치는 대로 카린 전사들을 집어던지고 있었다. 치우비가 쓰던 도끼도 이미 박살나 부서진 지 오래여서 아예 무기조차 들지 않고 맨손으로 카린 여전사들의 무기를 부러뜨리고 팔을 잡아 비틀고 덜미를 잡아 집어던지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아홉구비의 힘은 잃었어도 치우비의 힘은 여전했다.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다면 치우비는 예전에는 온 힘을 보이지 않으려고 반의 힘만으로 싸우곤 했는데, 지금은 전력을 다하고 있다는 것 정도였다. 그것만으로도 보통 전사들은 치우비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그것 을 보고 가나는 불같이 화를 냈다. “치우비! 네놈이 얼마나 강한지 한번 보자! 카린족의 가나가 여기 있다!” 가나가 커다란 창을 바람개비처럼 돌리며 달려들려는데, 가나가 치우비에게 다가서기도 전에 세 명의 형요 자매들이 일제히 뛰어나와 앞을 막아섰다. 넷째 형요는 간신히 움직이며 연락을 취하기는 했지만 아직 싸울 만한 상태는 아니었기에 뛰어들지는 않았다. “흥! 미친 계집 같으니! 너 따위가 비의 손가락 하나를 당해낼 줄 아느냐? 우리 자매가 상대해주마.” 세 명의 형요자매가 일제히 손발을 맞춰 기습해 들어오자 나는 기겁을 했다. 다행히 가나의 창이 아주 길었고 창 쓰는 법이 몹시 능란하여 어찌어찌하여 형요자매의 일격을모조리 쳐낼 수 있었다. 간신히 목숨을 건지다시피 한 가나는 화가 나서 외쳤다. “이 치사한 것들! 셋이 한꺼번에 덤벼?” 형요 자매는 일제히 깔깔 웃으며 외쳤다. “우린 원래 치사하다 어쩔래?” 그러면서 형요 자매는 가나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면서 가나를 에워싸고 마구 몰아붙였다. 세 명의 형요 자매는 모두 똑같이 생겼기 때문에 가나는 눈이 다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어찌어찌 세 번의 공격, 즉 아홉 번의 칼질은 창으로 막아냈지만, 급기야 가나의 창이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죽어라!” 순간 가나는 오른쪽 어깨와 왼쪽 다리에 칼을 맞았다. 들고 있던 창도 셋째 형요의 칼에 부러져 버렸다. 형요 자매가 일제히 쓰러진 가나를 향해 칼을 꽂으려는데 치우천이 황급히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죽이지 마라!” 형요자매의 칼이 가나의 목 줄기 앞에서 딱 멈추어 섰다. 치우천은 멀리서 외쳤다. “죽이지 말고, 인질로 잡아 물러서게 해라! 카린족과 싸워서 좋을 것 없다!” 눈치 빠른 형요 자매는 순간 치우천의 뜻을 알아챘다. 첫째 형요가 피를 흘리며 헐떡이는 가나를 안아 일으키자 형요 자매가 동시에 타타르 말로 외쳤다. “너희 대장이 잡혔다! 우리는 너희와 싸우기 싫으니 물러서라!1 그럼 너희 대장을 돌려보내 주겠다!” 몇 번 반복하여 외치자 카린족 여전사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부대장 격인 듯한, 나이 많은 여전사 한 명이 외쳤다. “가나님을 해치지 마라!” “어서 물러서라.너희는 우리 원수도 아니지 않느냐? 물러가면 뒤쫓지 않을 것이다!” 첫째 형요가 외치자 카린 여전사들이 약간 머뭇거렸다. 그러자 형요가 다시 악을 썼다. “빨리 가지 않고 뭐 하냐! 이만하면 너희 할 일은 다했잖느냐!” 그러자 카린족 전사들은 하나둘씩 싸우던 손을 멈추었다. 키타야의 전사들은 이미 거의 무력화된 상태라 상대가 손을 멈추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역시 손을 멈추었다. 치우비도 상황을 눈치 채고 자기가 방금 팔을 비틀어 쓰러뜨린 여전사 두 명을 일으켜서 웃으며 가라고 손짓을 해보였다. 나이 많은 여전사가 다시 뭐라고 카린 말로 외치자 카린족은 서서히 물러서기 시작했다. 형요는 그것을 보고 웃으며 가나를 놓아주며 말했다. “물러서. 여기서 싸우다 개죽음 당해봐야 지나족 좋은 일밖에 더 되겠어?” 가나는 비틀거리며 애써 형요의 부축을 거절하며 형요를 한 번 노려보고는 말없이 자기들 쪽으로 돌아갔다. 그러면서 가나가 외쳤다. “다음에 두고 보자! 도깨비 같은 계집들!” 형요 자매는 그 말에 깔깔 웃기만 했다. 가나가 돌아가자 카린족은 순순히 후퇴하기 시작했다. 치우천이 급히 달려와 말했다. “잘했다! 형요!” “헤헤.” 형요 자매가 웃자 치우천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가 불리하다. 이제 가운데만 처리하고 나면 물러나 후퇴한다. 모두에게 전해라. 알았지?” “알았어!” 형요 자매는 다시 번개같이 흩어져 갔다. 그때 치우비가 형을 발견하고는 반가워서 한달음에 달려왔다. “형! 형! 이제 좀 괜찮아졌어? 응?” 치우천은 아우를 다시 대하자 반갑기 그지없었으나 상황이 워낙 다급했으므로 먼저 지시부터 내렸다. “비야, 이럴 때가 아니다! 가운데가 다시 밀리고 있다. 네가 가서 끽구를 막아야겠다.” 치우비는 형의 얼굴을 보자 힘이 불끈 솟는 것 같아 씩씩하게 외쳤다. “좋아! 할 수 있어!” 치우천은 그런 치우비를 보며 걱정스레 말했다 “단, 조심해라. 너는 이제 옛날의 네가 아니다. 끽구를 맡기는 하되, 맞붙어 싸우진 마라! 알았니?” “알았어!” 치우비는 씩씩하게 달려 나갔다. 치우천은 내심 치우비가 걱정스러웠지만, 다른 사람들의 상태는 치우비보다도 더욱 심각했다. 치우천은 전사들이 일어서지도 몫할 만큼 지쳐 있는 것을 보면서 속으로 한탄했다. ’내가 너무 무리하게 사람들을 움직였구나. 이대로라면 도망치지도 못하겠다. 아, 치우천! 치우천! 너는 아직 모자라토 한참 모자라는구나! 사람들을 제대로 알고 싸우게 해야지, 네 욕심만 믿고 너무 몰아 붙였구나. 바보! 더 좋은 수는 없었단 말이냐?’ 치우천은 스스로를 책망하며 잠시 짬을 내어 자신도 열심히 움직여 남은 전사들을 수습했다. 아침에 시작한 싸움이었는데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 노을이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치우천은 돌아온 첫째 형요에게 말했다. “이제 초초룬에게 연락해라. 그 다음 일제히 물러서는 거다. 알았지?”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밀어붙여라!” 보돈차르가 크게 외치면서 정신없이 날을 달리며 부하들을 독려하자 지 역시 작은 체구에 어울리지 않게 고래고래 고함을 쳤다. “조금만 더 버텨라! 우리가 훨씬 많지 않은가!” 치우비는 여전히 속이 메슥거리고 어지러워 금방이라도 까무러칠 것 같았지만 이를 악물고 적의 전사들을 해치며 가운데로 나아갔다. 끽구가 그 무서운 힘으로 수도 없는 전사들을 쓰러뜨리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내가 아니면 끽구를 막을 사람이 없다! 비이 힘을 내라! 힘을 내! 형님은 이보다 더한 고통도 웃으며 참지 않았던가!’ 치우비가 도끼를 휘두르며 달려오는 것을 보고 끽구는 험상궂은 얼굴에 씩 웃음을 지으며 외쳤다. “치우비! 잘 만났다! 그래, 우리 이제 한 번 불어보자.” 끽구도 하루 종일 격전을 치르느라 몹시 지쳐서 숨을 헐떡이고 있었지만 기세는 여전했다. 치우비와 끽구가 드디어 정면으로 맞붙게 되자 주변의 키탄족이나 지나족 전사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두 사람의 주변에서 물러섰다. 이 괴물 같은 두 사람의 싸움에는 다른 사람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치우비는 힘을 잃기 전에도 끽구를 상대하기 어려웠던지라, 지금은 절대 정면에서 맞붙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치우비는 땅에 떨어져 있던 커다란 도끼를 집어 들고 외쳤다. “좋소! 끽구! 한 번 해봅시다!” 끽구는 커다란 구리 몽둥이를 휘두르면서 덩치답지 않게 몹시 빠르게 달려들며 몽둥이를 내려쳤다. 치우비가 힘을 주어 그 몽둥이를 막는 순간,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도끼가 반이나 부서져 버렸다. 양팔이 시큰거려 하마터면 도끼를 놓칠 뻔했으나 간신히 버텨낸 치우비는 생각했다. ‘역시 끽구의 힘은 무섭다. 힘으로 붙으면 안 되겠구나.’ 치우비는 즉시 부서진 도끼를 끽구에게 집어던지며 몸을 빠르게 놀려 끽구의 옆으로 돌았다. 끽구도 몸을 돌렸지만 치우비가 조금 더 빨랐다. 치우비는 끽구를 직접 공격하는 대신 땅에 떨어져 있는 돌칼 두 자루를 양손으로 들자마자 칼을 끽구에게 던졌다. 끽구는 몽둥이로 ‘탕탕’ 소리를 내며 그것들을 쳐냈으나 치우비는 그 사이 또 땅에서 돌 한 개와 창 한 자루를 집어던졌다. 끽구는 창을 몽둥이로 걷어냈지만 하마터면 돌에 얼굴이 맞을 뻔했다. 간신히 고개를 돌려 피하는가 싶었는데, 치우비는 이번에는 반쯤 부서진 방패를 집어 들어 끽구에게 내던졌다. 넓적한 방패까지 빙빙 돌며 날아오자 끽구는 기가 막혔다. “장난을 치자는 것이냐!” 끽구는 격노해서 몽둥이로 방패를 쳐서 박살내 버렸다 방패조각이 사방으로 튀는 틈을 타서 치우비는 재빨리 끽구에게 파고들면서 끽구의 아랫배를 발로 걷어찼다. 아수타란과 싸울 때 무라가 썼던 것과 비슷한 기습이었다. 치우비는 한번 본 남의 기술은 거의 그대로 따라할 줄 알았다. 끽구가 아랫배에 타격을 받고 뒤뚱거리며 두 걸음을 물러서자, 치우비 역시 물러섰다. 정확하게 치기는 했지만, 단단한 돌 벽을 친 것 같아 오히려 치우비의 발목이 뻐근해졌기 때문이다. ‘단박에 쓰러뜨릴 수는 없겠구나. 하지만 많이 맞으면 결국 쓰러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치우비는 다시 획훠 몸을 돌리며 끽구의 뒤로 돌아가서 끽구의 등을 후려갈겼다. 끽구는 화가 나서 외쳤다. “치우비! 장난 그만하고 당당하게 맞서 싸우자!” 그러나 치우비는 대답하지 않고 끽구가 몽둥이를 휘둘러대면 계속 무기며 돌을 집어던져 끽구의 정신을 분산시키고, 틈을 보아 벼락처럼 달려들어 몇 대 때리고 물러나는 소모전을 계속했다. 무기며 방패며 돌, 얼음조각을 집어던지다가 급기야 쓰러져 있던 시체까지도 마구 집어던졌다. 다른 사람이 던지는 것이라면 끽구는 별 신경도 쓰지 않고 맞아주며 역으로 공격했을 것이다. 하지만 치우비가 던지면 거기에 실린 속도와 힘이 대단해서, 피하든지 일일이 막아내야 했다. 그러면서 몇 대씩 얻어맞는 것이 처음에는 참을 만했지만 점점 시간이 갈수록 버티기 힘들어졌다. 끽구는 이를 악물고 정신을 똑바로 차렸다. “요놈!” 급기야는 정신을 차리고 벼르던 끽구가 갑자기 몽둥이를 내던지더니 달려들던 치우비의 왼팔을 잡아챘다. 치우비는 급히 발을 들어 끽구의 얼굴을 걷어차면서 팔을 빼려 했으나 끽구는 다른 손으로 치우비의 발을 막아냈다. 끽구의 손가락은 무쇠집게 같아서 치우비는 도저히 팔을 빼낼 수 없었다. 다시 세 번이나 주먹을 휘두르고 발로 찼지만 끽구는 팔을 풀지 않고 오히려 치우비의 몸을 돌려 뒤에서 허리를 끌어안아 조이려 했다. 끽구의 조이기에 걸리면 치우비도 허리가 온전하지 못할 것 같았다. 치우비는 마음이 급해져서 오른손으로 끽구의 팔을 후려쳤는데 운 좋게 관절 부위를 맞혔다. 아무리 끽구가 힘이 대단해도 관절부위는 보통사람과 다를 바 없었다. 끽구의 손에서 순간 힘이 풀리자 치우비는 간신히 끽구의 손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끽구가 빠져나가는 치우비의 등을 걷어차자 치우비는 넘어지며 땅에 얼굴을 박았다. 끽구가 다시 달려오며 치우비를 잡으려는 순간, 치우비의 손에 아까 끽구가 내던진 몽둥이가 잡혔다. 치우비는 급히 몽둥이를 크게 휘둘러 끽구가 다가오지 못하게 한 다음, 그 반동을 이용하여 몸을 폈다. 끽구의 몽둥이는 아주 길고 무거워서 보통 사람은 들어올릴 수조차 없었지만, 치우비는 그럭저럭 휘두를 수 있었다. 치우비가자기 무기를 휘두르자 끽구가 외쳤다. “그건 내 거다!” “버린 것이니 개가 쓰겠소!” 치우비가 껄껄 웃으며 몽둥이를 마구 휘둘러대자 무기가 없는 끽구는 접근할 수 없었다. 끽구가 치우비를 상대하느라 시간을 보내는 동안 다른 사람들도 혼전을 거듭했다. 비휴가 날쌘 몸놀림으로 부루벼락을 후려갈기고 팔을 꺾어 쓰러뜨린 것을 쇠돌이가 거대한 돌을 집어던져 비휴를 물러서게 하고 간신히 부루벼락을 구해냈다. 치베는 화살을 수워 모아서 날뛰는 비냐의 어깨에 화살 한 대를 쏘아 맞혔다. “맛이 어떠냐!” 그러나 비냐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역시 마주 활을 쏘아 치베의 다리를 맞혔다. “이건 어떠냐!” 치베가 몽골족 제일의 명궁이었다면, 비냐는 카린족 제일의 명궁이었던 것이다. 치베는 자기가 화살에 맞을 줄은 몰랐던 터라 놀라고 아파하며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둘 다 똑같이 부상을 입었지만 비냐는 더 난폭하고 사나워서 한쪽 팔을 못 쓰면서도 기이하게 생긴 칼을 휘두르며 덤벼들었다. 그것을 보돈차르가 말을 달려 나가 침착하게 상대하여 간신히 막아냈다. “치베! 물러서라!” 비냐의 칼 기술은 아주 기괴하고 흉악해서, 보돈차르는 말을 타고 상대하면서도 간신히 막아낼 수 있을 뿐이었다. 비냐가 어깨를 다치지 않았다면 아마도 막아내기 힘들었을 터였다. 그때 광성자가 새로운 술법을 쓰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싱카는 마냥을 데리고 결사적으로 달려들었다. “술법을 부리게 하면 안 된다! 방해해야 한다.” 싱카는 아무래도 술법으로는 광성자를 당해낼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싱카도 일종의 주술사라 할 수 있는 요기였던 만큼, 술법을 쓰다가 방해를 받아 중단하면 큰 피해를 입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이 필사적으로 지나족들 한가운데로 뛰어들어 마냥이 창을 던지고 싱카가 다시 억지로 칼을 날려 광성자를 노리자 광성자는 안색이 변하면서 피하는가 싶더니, 술법을 쓰다가 중단해서 무리가 왔는지 갑자기 피를 한 움큼 왈칵 토했다. 그것을 보고 지가 전사들에게 호통을 치자, 전사들이 일제히 활을 쏘아 마냥과 싱카를 공격했다. 마냥과 싱카는 간신히 도망쳤지만 몸에 두세 개의 화살이 박혀서 달리다가 풀썩 쓰러져 버렸다. 마냥과 싱카가 자칫 죽음을 당할까 싶어 리미와 개르가 재빨리 달려와 야수처럼 싸워 지켰다. 흉악한 두 도깨비의 모습을 본 지나족이 주춤거리자 그 틈을 타서 포리가 마냥과 싱카를 구해 달아났고 리미와 개르도 물러섰다. 순간 지나족과 카린족이 잠시 우왕좌왕하는 기색을 보이자 구르와 키타야의 남은 전사들이 달려왔다. 그 앞에 선 치우천이 커다란 목소리로 소리쳤다. “물러서라! 골짜기 안으로 피하라!” 그때, 골짜기 뒤편으로부터 백여 명의 미아우 전사들이 달려나왔다. 맨 앞에 선 초초룬이 외쳤다. “벗들이여! 모두들 일단 물러서라! 여기는 내가 맡는다!” “제길! 왜 인제 오는 거냐?” 야율쿠리가 투덜거리자 초초룬이 외쳤다. “나는 준비하려면 시간이 걸린단 말야!” 치우천은 그 사이에도 계속 골짜기 안으로 모두 물러서라고 외쳐댔다. 치우천의 목소리는 누구도 따를 수 없을 만큼 크고 울림이 있어서 모든 키탄과 타타르, 몽골의 전사들은 급히 몸을 돌려 골짜기 안으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치우비도 재빨리 끽구를 떼어놓고 물러섰다. “치우비! 꽁무니를 빼기냐? 승부를 가리자!” 끽구가 펄쩍 뛰며 외치자 치우비는 태연히 맞받았다. “다음에 봅시다.” 보돈차르도 비냐를 놓아두고 치베를 말에 끌어올려 물러섰고 도깨비들도, 쇠돌이와 부루벼락도 물러섰다. 전사들은 너무도 지치고 힘든 참이라 부상자들을 데리고 모조리 골짜기 안으로 몰려들었다. 뒷일은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다. 지나족과 카린족들이 그 뒤를 추격하려 하자 초초룬이 앞에 버티고 서서 크게 외쳤다. “모든 벌레들의 어머니, 미아우 초초룬의 명이다! 벌레들의 제왕 타타츄이트의 이름으로 나는 것, 기어다니는 것, 독을 지닌 것들은 나와서 나를 도와라!” 초초룬이 외치며 주문을 외우자 초초룬을 따라왔던 백여 명의 미아우 전사들은 등에 짊어졌던 나무상자 같은 것을 일제히 땅에 내려놓고 뚜껑을 연 다음 뒤로 물러섰다. 지나족과 카린족 등은 초초룬이 무슨 수작을 부리는지 의아하여 잠시 걸음을 멈추고 초초룬을 바라보았다. 그때 백여 개의 상자에서 검은 연기 같은 것이 피어올라 허공을 맴돌며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저게 뭐지?” 비냐가 아픔도 모르는 듯, 어깨에 꽂혔던 화살을 쑥 잡아 빼며 비휴에게 묻자 비휴른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르겠다는 뜻이었다. 그때 지가 달려오며 크게 부르짖었다. “제기랄! 독벌레다! 저건 벌레들이다!” “뭐?” 끽구가 기분이 나쁜지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미아우족이 지고 왔던 상자 안에는 벌통과 독벌레의 집 같은 것들이 가득 들어 있었던 것이다. 오랫동안 갇혀 있던 벌레들은 뚜껑이 열리자 미친 듯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초초룬이 품에서 이상한 가죽주머니를 꺼내 가루 같은 것을 허공에 몇 번 뿌리며 잘 들리지도 않는 기이한 소리를 냈다. 그러자 벌레들은 한데 뭉쳐서 빙빙 돌다가 지나족 쪽을 향해 날아들었다. “아이쿠쿠!” 삽시간에 비명소리가 지나족과 카린족들 속에서 터져 나왔다. 벌과 독벌레들이 마구 덤벼들어 쏘고 물어뜯기 시작한 것이다. 쫓으려 해도 벌레들은 잘 도망치지도 않았다. 물론 손으로 치면 간단히 죽는 벌레들이지만 그 수가 너무 많고 온 전신을 동시에 물어뜯으니 견딜 수 없었다. 더구나 벌에 쏘이면 아프기 그지없었고, 벌레들이 물면 미친 듯이 가려워지며 몸이 퉁퉁 부어올랐다. 견디다 못해 지나 전사들이 마구 몸을 쥐어뜯으며 울부짖기 시작했다. 이런 벌레 떼를 상대해서는 끽구의 힘도, 비냐의 용맹도, 비휴의 날쌤도 필요가 없었다. 지나족과 카린족을 혼란에 빠뜨린 초초룬은 크게 깔깔 웃으며 재빨리 뒤로 돌아 도망쳐 골짜기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 상망이 이끄는 지나속 최후의 부대 오백 명이 도착했다. 상망은 지나족들이 벌레 떼들에 뜯겨 우왕좌왕하는 것을 보고는 외쳤다. “불이다! 불! 불을 피워 쫓아라!” 그러면서 상망은 급히 말안장에서 큼지막한 주머니를 하나 꺼내들고 달리면서 마구 뿌려댔다. 상망은 의술에 능한 사람이라 여러 가지 약 가루를 잔뜩 지니고 다녔는데, 그중 벌레들이 싫어하는 냄새를 내는 약 가루는 얼마든지 있었다. 상망이 약 가루를 뿌려대자 벌레들이 견디지 못하고 일시 물러서며 윙윙거렸다. 그 틈을 타서 지나족과 카린족은 급히 부싯돌을 꺼내 횃불을 피워 들었다. 횃불이 없는 지나 전사 중에는 옷을 벗어 태워 휘두르는 사람도 있었다. 카린족은 모두 깃털로 된 어깨장식을 달고 있었는데, 깃털은 불이 아주 잘 붙는 물건이었다. 비냐의 지휘 하에 카린족은 일제히 어깨장식에 불을 붙여 벌레들을 쫓기 시작했다 상망이 뿌린 약 가루 냄새에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일제히 횃불과 불붙은 것을 휘두르자 벌레 떼는 모두 타죽거나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초초룬은 믿던 벌레 떼가 다 흩어지자 욕을 하면서 마지막으로 골짜기 안으로 뛰쳐 들어갔다. 그러나 지나족들 중 이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가려움과 고통으로 땅에 뒹굴었고 카린족도 칠십 명이나 되는 전사들이 기력을 잃었다. 그리고 땅에 뒹굴며 몸부림치는 사람들을 수습하느라 일시에 돌격할 수가 없었다. 그러는 중에 치우측의 전사들은 한 명도 남지 않고 골짜기 안으로 전부 도망쳐 들어가 버렸다. 상망과 지는 안타까워 발을 동동 구르며 서둘러 뒤를 쫓으라고 부하들을 닦달했다. “이제 저놈들은 끝장이다! 밑천이 전부 떨어졌으니 잡아 죽이기만 하면 되는데! 어서어서 길을 열지 않고 뭐 하느냐.” 그때 골짜기 안에서 누군가가 말을 타고 달려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끽구는 그게 누군지도 보지 않고 공격하라고 외쳤으나 비냐가 급히 말렸다. “멈추시오! 저건 우리 카린족이오.” 그 사람은 바로 소녀였다. 비냐는 비록 난폭하기는 했으나 소녀와 는 정이 남아 있었다. 비냐는 소녀가 도망쳐 나온다 생각하고 기뻐했으나, 끽구는 뭔가 석연치 않다는 듯이 투덜거렸다. “뭐? 그러나 저쪽에 있던 계집 아닌가?” “말조심하시오! 함부로 해치면 안 되오!” 그러면서 비냐는 말을 몰아 소녀를 마중 나갔다 소녀는 창백한 안색으로 달려 나오며 비냐의 이름을 계속 불렀다. 소녀는 자매 중에서도 아무런 힘이 없고 가장 아름다워서 열세 자매들 모두 소녀를 좋아하고 아껴주었다. 비냐는 미소를 띤 채 소녀에게 달려와 말했다. “소녀! 잘 생각했다! 우리와 같이 쑤앙마이께 돌아가자!” 소녀가 울먹이면서 말끝을 흐렸다. “날....... 날 다시 받아줄 수 있어? 난 죄가 많은데.....” 비냐는 날카로운 얼굴을 활짝 펴며 웃었다. “그럼! 우리는 자매잖아.” 소녀가 말 위에서 비틀거리자 비냐는 급히 말에서 내려 소녀를 부축해서 내렸다. 그러자 소녀는 비냐를 꼭 끌어안고 들릴 듯 말 듯한 힘없는 소리로 속삭였다. “날....... 용서해줄 수 있어?” “당연히......” 웃으며 말하던 비냐는 순간 옆구리가 뜨끔해지며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뭔가 잘못된 것 같아 팔을 저어 소녀를 밀쳐내려 했지만 소녀는 비냐를 꼭 끌어안고 놓지 않았다. “날....... 용서해줘, 자매.” 소녀는 조용히 중얼거리면서 비냐의 옆구리에 박았던 단검을 더욱 깊숙이 찔러 넣었다. 비냐는 다시 한 번 ‘헉’ 소리를 내며 의혹이 가득한 눈초리로 소녀를 쳐다보면서 스르르 숨이 끊어졌다 그러나 소녀는 얼굴색조차 변하지 않고 비냐를 안은 채 비냐에게 귀를 기울이는 듯하다가 돌연 외쳤다. “뭐야! 비냐! 왜 그래?” 그때 카린족들은 좀 먼발치에서 비냐와 소녀의 상봉을 보고 있었는데, 소녀가 외치는 소리에 모두 놀라 안색이 변했다. 소녀는 크게 소리쳤다. “뭐? 지나족이 너에게.....? 비냐! 비냐!” 소녀가 외치면서 손을 놓자 비냐의 시체는 풀썩 땅에 쓰러져 버렸다. 소녀는 커다랗게 비명을 질렀다. “지나족이 독을 썼어!” 순간 카린 전사들은 크게 놀라고 당황했다. 도대체 같이 어깨를 맞대고 싸우던 지나족이 왜 비냐에게 독을 썼는지 알 수 없었다. 더구나 그 말을 한 사람은, 비록 저편에 가 있기는 하지만 열세 자매 중의 하나로 받들던 소녀가 아니던가. 항상 쑤앙마이와 자대들에게 충성을 바치던 카린 여전사들로서는 그 말을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카린 전사들의 눈매가 변하면서 그들은 근처의 지나족들을 잡아먹을 듯한 눈으로 노려보기 시작했다. “뭐.......뭐냐! 우리는 그런 적 없다!” 끽구가 놀라서 외쳤다. 그러나 소녀는 다시 한 번 악을 썼다. “지나족 이 나쁜 놈들.” 그 소리에 카린 전사들은 일제히 분노하여 옆에 있던 지나족들에게 덤벼들었다. 지나족들은 어이도 없고 당황해서 순식간에 다시 혼란스러워졌다. 상망과 지가 재빨리 나서서 외쳐댔다. “무슨 짓이냐! 우리가 왜 그런단 말이냐! 속지 마라! 속지 마!” 상망과지는 급히 전사들에게 명하여 카린 여전사들을 해치지 말고 물러서라고 말했다. 그들이 재빨리 움직이지 않았다면 지나족과 카린족 사이에 혼전이 벌어졌을 것이다. 그러자 카린 전사들은 울고 장탄식을 내뱉으며 지나족들을 마구 욕하기 시작했다. 지나족은 삽시간에 기분이 울적해졌다. 그렇다고 카린족을 공격할 수도 없었고, 다시 대열이 흐트러져 카린족과 지나족이 마구 섞여 있었으니 돌격할 수도 없었다. 다만 그들이 떠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끽구는 어이가 없어서 상망에게 물었다. “이게 또 무슨 일이야?” 상망이 비휴에게 눈짓을 하자 비휴가 재빨리 달려가 비냐의 시체를 살폈다. 비냐는 독에 죽은 것이 아니었다. 비냐의 숨을 끊은 것은 바로 옆구리에 박힌 단검이었다. 그때 좀 뒤로 물러서 있던 소녀를 노려보며 비휴가 물었다. “카린족은 칼을 독이라 부르나?” 비휴가 화가 나서 단번에 소녀를 쳐 죽일 듯 다가오자 소녀는 비명을 질렀다 “자매들아, 지나족이 나마저 죽이려 한다! 저 녀석이...... 비냐의 시체에 칼을 찔렀다!” 소녀가 재빨리 둘러대자 카린족은 다시 무섭게 화를 내며 비휴를 향해 몰려들었다. 비휴는 당황스럽기도 하고 화도 나서 소리쳤다. “내가 언제 그랬는가!” “내가 봤어? 네가 단검을 찔렀지! 비냐를 독으로 죽이고 나에게 덮어씌우려고? 나를 죽여 입을 막으려는 거냐?” 카린족 여전사들은 일제히 비휴에게 윽을 퍼부으며 소녀를 보호하듯 그 앞을 막아섰다. 카린족을 이끌고 왔던 세 명의 자매 중 유우는 스스로 퇴각했고 가나는 패하여 물러섰으며 비냐마저 죽었으니 카린족은 대장이 없었다. 그러니 자연 소녀에게 의지하듯이 모여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카린족이 소녀를 에워싸자 지나족은 화가 나서 발을 굴렀다. 사실 카린족 중에서도 지나족이 이런 짓을 할 이유가 없다고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그들이 보아오던 소녀는 열세 자매 중에서도 예쁘고 항상 조용하며 아름다운 음악을 들려주던 그런 선녀같은 모습이었다. 그 소녀가 거짓말을 하거나 같은 자매인 비냐를 죽인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소녀는 여전사들이 자기를 보호하기는 하지만, 자칫 따지고 들면 뒤가 켕기는지라 급히 소리쳤다. “여전사들이여! 나는 이제 너희와는 다른 길을 걷는다. 허나 너희는 어찌할 건가? 자기편이던 비냐를 죽인 저 돼지 같은 놈들을 도와 목숨을 걸고 싸울 것인가? 물러서라. 쑤앙마이에서도 너희를 탓하지 않을 것이다. 싸움을 그만두고 물러서라!” “저런 간사한 계집!” 소녀가 카린족을 흩어버리려 하자 지가 펄펄 뛰며 욕을 했다. 그러면서 지가 조목조목 따지고 들려는데 지나 말을 아는 카린족 여전사들이 눈을 부라리며 외쳤다. “가까이 오지 마라!” “소녀님께 욕을 하다니! 죽여 버리겠다!” 소녀는 일이 잘 되어가자 카린족에게 작별을 고하고 재빨리 다시 골짜기 안으로 들어갔다. 카린족은 소녀를 지키려는 듯, 골짜기 입구를 되레 막고 섰다. “저 계집을 잡아야 한다!” “돼지 같은 지나족 놈들아! 감히 저분을 건드리면 다 죽을 줄 알아라.” 지와 카린족 사이에 다시 말싸움이 붙자 상망이 우울한 얼굴로 훌쩍 비냐의 시체 옆으로 가더니 말했다. “비냐님! 죽지 않았군요! 뭐라고요? 소녀가 칼을 찔렀다고요?” 카린족들은 상망의 말을 듣고 다시 흥분했다. “비냐님이 죽지 않았다고?” “소녀님이? 그럴 리가!” 그러자 상망은 한숨을 쉬고 외쳤다. “그것 보시오 카린족 전사들, 당신들은 속고 있소 속이려면 얼마든지 속일 수 있지 않소?” 상망이 재치있게 대응하자 카린족은 웅성거리며 혼란스러워졌다. 그러나 지금은 한시라도 빨리 치우천을 뒤쫓아 잡을 때이지, 카린족과 시시비비를 가릴 때가 아니었다. 상망은 다급히 말했다. “더 따지고 싶지만, 지금 그럴 때가 아니오. 비냐님은 용감히 싸웠고, 당신들도 우리를 도와 용감하게 싸워주었소 당신들 입장은 알겠소. 더 잡거나 싸워달라고 하지 않겠으니, 우리를 막지만 말아주시오.” 상망은 고개를 숙여 비냐의 맥을 자세히 짚어보고 몇 군데 혈도를 누른 다음 말했다. “비냐님은 숨이 끊겼지만, 아직 완전히 죽은 것은 아닌 듯하오. 내가 좀 조치를 했으니, 쑤앙마이의 여섯 무녀께 급히 보이면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르오. 비냐님이 낫거나 만에 하나 죽더라도 그 시체를 잘 조사해보면, 우리가 그런 짓을 했는지 아닌지 알 수 있을 것이오. 그러니 물러서 주시오 일이 급하오.” 상망이 차분하게 말하자 카린족은 수군거리며 다시 혼란에 빠졌다. 사실 소녀를 믿지 않을 수도 없었지만, 소녀의 행동은 너무도 의심가는 면이 많았다. 거기다가 비냐가 살아날 수도 있다는데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카린 여전사 네 명이 달려 나와 비냐의 시체를 안아들자 카린족의 부대는 빠르게 철수하기 시작했다. 상망과 비휴는 여자 하나 때문에 든든하던 지원군을 일었다고 탄식했고, 끽구와 지는 미친 듯이 화를 냈다. 더 이상 머뭇거릴 때가 아니라는 듯이 상망이 외쳤다. “이럴 때가 아니다! 더 꾸물거리면 놈들을 놓쳐! 이제 다 죽어가는 놈들뿐이니, 반드시 잡아야 한다!” “골짜기 위는?” 아까 돌벼락에 당했던 끽구가 조심스레 묻자 지가 외쳤다. “지금은 한 놈도 없다! 우리 전사도 많이 죽었지만, 놈들은 이제 몇 남지도 않았어!” 지나족은 이제 훈족, 타타르족에 이어 카린의 지원군마저도 모조리 잃었지만 아직도 그 수는 천오백 명이 넘었다. 그들은 마지막 힘을 짜내어 급히 골짜기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그때 치우천이 크게 외쳤다. “지금이다!” 치우천이 신호하자골짜기 안에 남아 있던 툰툰의 부족 수십 명이 일제히 불을 질렀다. 치우천은 아까 울라트와 소녀에게 잘 타는 물건을 골짜기 입구에 쌓아두라 일러놓은 터였다. 그 두 사람의 힘으로는 물건을 얼마 모을 수 없었지만, 초초룬이 나가서 벌레 떼를 부르는 동안 툰툰과 부하들이 달려와 물건 쌓기를 도와주었다. 워낙 상황이 급하니 막사니, 먹을 것이니 가죽이니 가리지 않고 탈수 있는 것은 모조리 모아 쌓아둔 것이다. 그래도 시간이 부족하여 초조해하자 소녀가 달려 나가 시간을 끌어주어 아슬아슬하게 시간을 맞출 수 있었다. 골짜기 어귀에는 강한 바람이 불고 있었는데, 잡동사니더미에 불이 붙자 삽시간에 치솟은 연기가 바람을 타고 골짜기 밖으로 불어나가기 시작했다. 마구 골짜기 입구로 달려 들어오던 지나족은 매캐한 연기가 바람을 타고 불어 닥치자 눈이 따갑고 매워 삽시간에 방향을 잃고 헤매기 시작했다 “주술이다!” “술법이다! 아이구! 주신의 풍백 우사가 왔나 보다!” 다시 지나족들 가운데서 누군가가 외쳐댔다. 주신의 풍백 우사는 대주술사로서, 바람을 바꾸고 안개를 불러낼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고 알려져 있었다. 물론 지금 치우천이 쓴 방법은 주술이 아니었지만 당하는 입장에서는 그렇게 보이는 모양이었다. 더구나 지나족 속에서 외쳐대는 겁쟁이의 목소리는 아까 도깨비를 두려워할 때와 비슷한 사람의 목소리처럼 들려 치우천은 미소를 지었다. ‘지나 전사 중에 어떤 겁쟁이가 저렇게 계속 소리를 지를까? 지나족이 아니라 아예 우리편 같구나! 정말 상이라도 주고 싶다!’ 끽구와 상망이 부하들을 수습하려 애쓰면서 버럭 소리쳤다. “무슨 헛소리냐! 풍백 우사가 여기 왜 온단 말이냐? 헛소리하는 놈은 목을 베어버린다!” 그러나 연기가 밀어닥쳐 앞을 볼 수 없자 방향을 잃은 지나족들은 우왕좌왕하며 자기들끼리 서로 부딪히는 대혼란에 빠졌다. 일단 방향을 잃자 서로 간에 걸려서 방향을 찾을 수가 없었다. 치우천은 높은 곳에서 그 모양을 내려다보다가 생각했다. ‘지금 한 번만 더 들이친다면......하지만 그럴 순 없다. 지금 더 싸우게 하면, 아예 도망갈 힘도 없어질 것이다. 지금 아니면 도망칠 수도 없다.’ 돌연, 치우천의 눈에 저 멀리 헌원과 발 등이 불과 스무 명밖에 안 되는 전시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서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머릿속에 하나의 생각이 스쳤다. ‘헌원도 있는 대로 전사들을 다 털어 넣었구나! 그렇다면 지금이 다시없는 기회다! 헌원을 잡으면 모든 일이 끝난다! 더구나 아우를 위해 발도 잡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도박이었다. 지금 연기에 휘말려 혼란에 빠졌다고는 하나, 지나족이 언제 다시 대열을 수습할지 몰랐다. 그렇게 되면 너무나 기력을 잃은 이쪽의 전사들이 모조리 학살당할 위험마저 있었다. 치우천은 잠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갈등했다. ‘지금 도망쳐야 하나? 아니면 헌원을 쳐야 하나?’ 순간 치우천은 욕심이 생겼다. 지금 헌원을 잡으면 정말 모든 일이 끝이라 생각되었다. 더구나 헌원을 놓치더라도 발을 잡아 아우의 원도 풀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우가 발을 잊지 못해 애타는 모습이 떠오르자 마음이 흔들렸다. ‘일단 싸울 힘이 없어진 사람들은 물러서게 하고, 기운 센 몇몇만 보내도 충분히 헌원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절충안을 택하기로 한 치우천이 급히 외쳤다. “모두들 이 틈을 타서 물러서시오! 그리고 비야! 너는 도깨비들과 말 잘 타는 전사 스무 명만 골라서 똑바로 뚫고 나가라!” “뚫고 나간다고?” 치우비가 의아해하자 치우천이 얼른 말했다. “가서 헌원을 잡는 거다! 헌원은 지금 호위병도 몇 없이 혼자 있다! 더구나...... 발도 그 옆에 있다! 갈 수 있겠니?” 치우비는 정신없이 싸우느라 발 생각은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형의 입에서 발 이야기가 나오자 더 생각하지도 않고 힘차게 외쳤다. “가겠어!” “헌원을 잡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 다른 것은 돌아보지 말고, 헌원만 노려라! 리미, 개르! 너희는 비의 앞을 막는 것들을 모조리 치워라! 그리고....... 나도 간다!” 치우천 역시 당당하게 외쳤다. 아우를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목숨을 걸고 도박을 하는 것이니만치 자신이 빠질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보돈차르가 그나마 상태가 좀 괜찮은 몽골 전사 스무 명을 급히 불러 치우비에게 붙여주자 치우 형제는 리미, 개르를 양옆에 거느리고 스무 명의 전사를 이끌고 무서운 기세로 달려 나갔다. 누가 승자인가? 치우비와 치우천은 한치의 망설임 없이 똑바로 지나족의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치우천이 치우비에게 외쳤다. “연기 때문에 방향을 잃을 수도 있다. 무조건 앞으로만 달려라!” 치우비는 대답 대신 커다랗게 고함을 지르면서 끽구에게서 빼앗은 구리 몽둥이를 빗자루처럼 휘두르며 앞장섰다. 치우비도 말할 수 없이 지쳐 있었으나 헌원을 잡고, 발을 데리러 간다는 생각에 마지막으로 힘을 짜내는 것이다. 치우비의 몽둥이에 맞은 지나족들은 덤불처럼 옆으로 나가떨어져 길은 간단히 열렸다. 끽구와 상망등은 연기 속에서 우왕좌왕하느라 그들과 마주치지 않았다. 치우비의 활약으로 치우천과 리미, 개르는 순식간에 지나족을 돌파하여 골짜기 밖으로 벗어났다. 해는 저물어 사방은 이제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이제 됐다! 달려라!” 그때 헌원은 부하들이 골짜기 안으로 들어간 후 그 안에서 안개인지 연기인지가 자욱하게 끼는 것을 보고 몹시 불안해하던 참인데, 곧 골짜기 안에서 수십 명의 전사들이 뛰쳐나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저건 누군가? 우리 편인가? 적인가?” 헌원 옆에서 몸을 추스르던 광성자는 감았던 눈을 뜨고 골짜기 쪽을 바라보다가 외쳤다. “저건....... 치우 형제입니다!” 헌원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럴 리가!” “틀림없소! 헌원님. 어서 몸을 피하셔야 합니다!” 헌원은 광성자의 말을 듣지 못한 듯 멍하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내 부하들이 전멸했단 말인가?” “그건 아직 알 수 없지만 일단 피하셔야 합니다!” 광성자가 다시 한 번 외쳤으나 헌원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 없습니다. 광성자 스승!” “무슨 말씀이오?” “부하들을 다 죽이고, 나 혼자 도망치란 말입니까? 이 헌원이......이 헌원이 등을 보이고 도망치라는 말입니까?” 헌원은 늠름하게 말하면서 등에 진 칼을 뽑아 들었다. “지나족의 전사들이여! 우리는 끝까지 싸운다! 저쪽도 스무 명, 우리도 스무 명이다! 절대로 질 수 없다!” 헌원의 말에 남아 있던 스무 명의 전사들은 모두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무기를 고쳐 쥐었다. 그러자 광성자가 다시 간곡히 말했다. “허나 저쪽에 앞장선 것은 치우비입니다! 누가 그를 막겠습니까?” “그러나 나는 물러설 수 없습니다!” 헌원의 결기서린 목소리에 포기한 듯, 광성자가 외쳤다. “전사들아! 헌원님을 모셔라!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그러면서 광성자는 결사적으로 헌원의 말고삐를 붙들고 늘어졌다. “광성자 스승! 이게 무슨 짓이오?” “헌원님! 헌원님의 몸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몸이 아닙니다! 헌원님의 몸은 지나족 모두의 것입니다! 나중에 저를 죽이십시오. 달게 목을 내밀겠소이다. 하지만 헌원님은 다치셔서는 안 됩니다! 이미 어두워지기 시작했으니 조금만 달아나면 저들도 쫓을 수 없을 것입니다.” 광성자가 애절하게 말하자 지나 전사 스무 명도 눈물을 흘리며 한 목소리로 외쳤다. “헌원님! 명을 따르지 못하는 우리를 모두 죽여주십시오! 하지만 헌원님을 지키는 것이 우리 일입니다!” 순식간에 지나족 전사들은 헌원을 말에서 내리게 하여 다시 힘센 전사가 탄 말 앞에 헌원을 태웠다. 광성자와 지나족 전사들이 빈틈없이 에워싸서 헌원은 그 말에서 뛰어내릴 수도 없었다. 헌원은 뭐라고 더 말할 수도 없어 계속 탄식만 내뱉었다. 그때 뒤쪽에 처져 있던 발이 느닷없이 자신의 말 란란을 몰고 달려오며 외쳤다. “치우비라고요? 그 멍청이가...... 그 멍청이가.......!” 그러고는 갑자기 크게 부르짖으며 달려 나갔다. “비! 이 못된 놈이.” “안 된다! 발아!” 헌원이 놀라서 급히 만류하려 했으나 발은 이미 저만치 달려 나간 뒤였다. 헌원은 크게 놀라서 외쳤다. “발을! 발을 구해라! 어서!” 광성자가 헌원을 막아서며 외쳤다. “제가 무슨 일이 있어도 발님을 구하겠습니다. 허나 헌원님은 나가서는 안 됩니다. 전사들아, 어서 달려라!” 광성자는 다시 한 번 울컥 피를 토하면서 급히 말머리를 돌렸다. 스무 명의 지나 전사들은 일제히 헌원을 에워싸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헌원은 거의 비명을 지르다시피 발의 이름을 불렀으나 지나 전사들은 눈물을 머금고 앞으로 달리기만 했다. 치우비는 형과 다른 전사들보다 한참 앞장서서 무서운 기세로 달려 나가다가 문득 발의 목소리를 듣고 멈칫거렸다. “발......” 발이 먼저 달려올 줄은 치우천도 미처 생각지 못하던 터였다. “비야. 발의 말은 나중에 들어라! 일단 헌원을 쫓아야 한다!” 치우비는 어쩔 줄을 몰라 그 자리에 멈추어 말머리만 빙빙 돌렸다. 그때 발이 달려오며 외쳤다. “비! 이 나쁜 놈아!” “발! 나와 같이 가자! 어서.......” 치우비는 발을 보자 반가운 마음에 발 가까이 말을 몰았으나 발은 비의 말은 듣지도 않고 느닷없이 치우비를 향해 작은 칼을 꺼내 휘둘렀다. 치우비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외쳤다. “이게 무슨 짓이야?” “너는....... 너는 우리 아버지를 해치려는 거지? 그렇겐 못해! 못해!” 발은 엉엉 울면서 자그마한 칼을 휘둘러댔다. 그런 것에 맞을 치우비는 아니었지만 발이 울며 괴로워하는 것을 보자 마음이 납덩이처럼 무거워졌다. “발아, 나와 함께 가지 않겠니? 응?” “닥쳐! 너야말로 왜 나에게 오지 않았지? 응?” “발, 어쩔 수 없었어. 너희 아버님이 우리를 잡으려고 이 많은 군사를 끌고 왔는데 어떻게......” “듣기 싫어! 네가 아버님을 따른다고만 했으면, 이렇게 되지 않았잖아!” “나도 할 수 없었어, 발아! 나는....... 나는 형님의 뜻을.......” “또 그 잘난 형! 너에게 형이 있듯, 나에겐 아버지가 있어! 너만 형의 말대로 하고 나는 아버지를 배신하라는 거야? 응?” 발이 외치면서 치우비의 가슴으로 작은 칼을 찔러 들어왔다. 순간 치우비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칼을 막지 않고 그저 가만히 있었다. 치우비의 가슴에 칼이 박히자 치우천과 리미, 개르 등도 놀랐지만 정작 칼을 찌른 발이 더 놀랐다. 발은 칼을 놓고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치우비가 서글프게 웃으며 가슴에 박힌 칼을 뽑자 피가 분수처럼 솟구쳐 나왔다. 비록 작은 칼이었지만 발이 흥분한 나머지 칼을 깊이 찔러댔고, 치우비는 전혀 방어하지 알아서 상처는 대단히 깊었다. 허나 치우비는 비틀거리면서 발에게 칼을 내밀며 힘없이 말했다. “내 잘못이다, 발. 너에게 미안할 뿐이야. 마음이 안 풀리면 더...... 더 찔러도 돼........” 발이 비명을 지르며 크게 울음을 터뜨렸다. “이....... 이 멍청이! 바보!” 치우비는 여전히 창백한 표정으로 힘겹게 말했다. “발아, 너와 나는.......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는지도....... 허나 난 널 원망하지 않아. 나는...... 나는 그래도 너를 항상........” 힘겹게 중얼거리다가 치우비는 그만 정신을 잃고 피를 쏟으며 말에서 굴러 떨어졌다. 치우천과 다른 전사들, 그리고 발이 동시에 비명을 질렀다. 치우천은 아우가 말에서 굴러 떨어지자 눈에서 불이 뿜어 나오는 것 같았다. 치우천은 불같이 노하여 칼을 뽑아들고 달려 나갔다. “발!” 평소 웃음만 흘리던 치우천이었으나 정말로 화를 내자 그 기세가 대단했다. 발이 놀라 어쩔 줄을 몰라 하는데 치우비가 힘겹게 손을 뻗으며 말했다. “발...... 어서 가, 어서........ 형님이 화났어........” “비 멍청아 너는.......너는 죽어 가는데........!” 치우비는 눈을 감으며 외쳤다. “죽지 않아. 나는 죽지 않아 꼭 너를 다시 만날 거야. 너를 찾아 갈 거야. 그리고........” 그러다가 치우비는 돌연 크게 고함을 치면서 죽을힘을 다해 몸을 일으켰다. 힘을 주자 가슴에서 다시 피가 솟구쳤다. 발이 어쩔 줄 모르고 머뭇거리는 사이, 무섭게 분노한 치우천이 칼을 휘두르며 발에게 달려들려 했기 때문이다. 그때 치우비가 가슴에 피를 철철 흘리면서 형의 앞을 막아섰다. “형....... 형! 제발........!” 그 말을 하자마자 치우비는 풀썩 통나무가 넘어지듯 다시 땅에 쓰러져 버렸다. 치우천은 아우를 짓밟을 수가 없어서 급히 말을 세웠다 불꽃이 이글거리는 듯한 치우천의 눈을 보는 순간, 발은 그 눈초리만 보고도 겁에 질려버렸다. 그러다가 발은 갑자기 눈을 감고 눈물을 주르륵 흘리면서 말에서 훌쩍 뛰어내려 꼿꼿이 섰다. 치우천은 급히 말에서 내려 아우를 감싸 안아 부축한 다음 외쳤다. “리미! 개르! 비를 돌봐라!” 그리고 치우천은 여전히 분노가 사그라지지 않은 눈빛으로 발을 향해 다가가려 했다. 그때 발이 조용히 말했다. “죽이세요. 차라리 나를 죽이세요.” “안 돼! 형님! 형님! 죽여서는 안 돼. 제발...... 제발......” 치우비는 의식을 잃어가는 중에도 흐느끼면서 힘겹게 외쳤다. 치우천은 아우의 목소리를 듣지 않으려는 듯 눈을 감았다. 손에 든 칼이 부르르 떨리는가 싶더니 치우천은 이내 한숨을 쉬며 발에게 조용히 말했다. “이렇게까지 했어야 했소?” 발은 눈물만 흘릴 뿐, 대답하지 않았다. 치우천은 다시 한 번 한숨을 쉬며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내가 잘못 생각한 것 같군요 나는 내 아우가 당신을 생각하는 것만큼, 당신도 내 아우를 생각한다고 여겼소. 그런데....... 그게 아니었던가 보군요.” 돌연 발이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나에게 뭘 바란 거죠? 부족도 아버지도 어머니도 다 버리고, 무턱대고 저 멍청이만 따라갈 거라 생각했나요? 그러면 왜 저 멍청이는 나를 따라오지 않는 거죠?” 치우천은 담담하지만 노기 띤 목소리로 되받았다. “그러면 내 아우가 당신 때문에 당신 아버지 밑에 그냥 엎드려야만 한단 말이오? 우리가 지나족과 싸우게 된 것은 당신 아버지와의 문제요.” “저 녀석이 내 아버지를 해치려 했어요!” “당신 아버지야말로 우리를 해치려 했소. 우리는 싸우고 싶어 하지 않았지만, 당신 아버지가 끝끝내 우리를 몰아붙인 것이오.” “그럼 비는 나를 왜 데려가려 했죠? 왜 나보고 같이 가자고 한 거죠?” “내 아우는 그냥 당신과 함께 가고 싶어 했을 뿐이오. 당신을 좋아했기 때문이오.” “나를 잡아간다고 내가 얼씨구나 하고 저 멍청이 녀석을 따라갈 줄 알았나요?” 치우천은 싸늘하게 비웃음 소리를 냈다. “솔직히 내가 그렇게 하라고 일렀소. 허나 비가 당신을 강제로 잡았소? 잡으려고 하기나 했소? 비가 당신을 잡으려 했다면, 당신이 저항이나 해볼 수 있을 것 같소? 또 당신이 비를 따를 수 없다면 그냥 말로 하면 되지, 왜 비에게 칼을.......” 발은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다물었다. 치우천은 한마디 더 내쏘았다. “당신이 비의 말대로 못해주는데, 당신은 비를 당신 종처럼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했소? 비가 얼마나 괴로워하는지 아직도 모르겠소? 당신이 비를 찔렀는데도 비는 당신 걱정만 하고 있는데...... 당신은...... 당신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말을 잇지 못해 돌아서던 치우천이 숨을 고르고 난 뒤 말을 이었다. “지금은 돌아가시오. 아우의 부탁을 저버릴 수 없구려 허나 다음번에는 반드시 당신과 당신 아버지의 목을 베어버리겠소.” 발은 뭐라고 더 말하려 했으나 말문이 막혀 입을 멜 수가 없어서 왁 하고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그때 광성자가 달려오는 것을 보자 치우천은 광성자에게 소리쳤다. “데려가시오 하지만 헌원과는 다른 쪽으로 달아나는 게 좋을 거요.” 광성자는 서글픈 표정으로 발을 억지로 말 등에 태우더니 반대편으로 달려가 버렸다. 그러자 개르가 풀죽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심장을 찔린 것 같지는 않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죽지 않을 겁니다.” 치우천은 의식을 잃은 아우를 보고 눈물을 글썽이면서 이를 갈며 말했다. “비야! 내 반드시 헌원을 잡으리라! 개르, 너는 비를 데리고 가라! 리미와 다른 이들은 나를 따르라! 헌원을 잡자! 헌원은 아직 멀리 못갔다!” 치우천은 다시 말고삐를 바싹 쥐고 헌원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이제 사방은 꽤 어두워져서 가까운 곳만 간신히 보일 정도였다. 그런데 갑자기 앞에서 어둠을 뚫고 많은 수의 사람들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헌데 모두 지나족의 전사들 아닌가.1치우천은 깜짝 놀랐다. ‘지나 전사들이 아직도 남아 있었단 말인가?’ 당황한 치우천 앞에 갑자기 거대한 두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지우천! 여기서 만날 줄이야!” 그것은 신도와 울루였다. 치우천은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신도 울루가 왜 여기 있단 말인가?’ 신도 울루는 비울걸의 도깨비들을 만나 부대가 뿔뿔이 흩어졌으나 곧 애써서 삼백 명 가량의 전사들을 다시 긁어모을 수 있었다. 시간도 많이 지체하고 기가 꺾인 신도 울루는 감히 더 나아가지 못하고 다시 헌원의 명령을 받으려고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마침 도망치는 헌원 일행을 만났다. 이에 헌원은 서둘러 발을 구하고 자신의 뒤를 쫓는 치우천을 잡으라 이른 것이다. 어둠 속에서 삽시간에 수백 명의 적과 마주치게 되자 치우천과 리미, 그리고 스무 명의 몽골 전사들은 몹시 당황했다. 뒤로 돌아서서 도망치려 했지만 지나족은 어느새 뒤까지 포위한 다음이었다. 치우천은 낙담하여 생각했다. ‘하늘이 나를 버리시는구나. 하필 이때 신도 울루가 돌아오다니! 내가 무리하게 욕심을 부려서 스스로 죽음의 길로 들어갔구나!’ 신도 울루는 크게 호통을 치며 치우천을 잡으라 외쳤다. 지나 전사들이 어지럽게 달려들자 리미는 치우천을 지키려고 필사적으로 싸웠다. 스무 명의 몽골 전사들도 죽을힘을 다했고 치우천도 있는 힘을 다해 칼을 휘둘렀지만 중과부적이었다. 결국 리미가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졌고, 스무 명의 몽골 전사들도 거의 다 죽어 넘어졌다. 이제 남은 것은 치우천뿐이었다. 바로 그때, 지나족의 후방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지며 누군가가 나타났다. 보돈차르와 야율쿠리, 키타야가 몇 명의 전사들만 데리고 급히 달려온 것이다. 키타야와 같이 온 보챠두의 두 아들과 툰툰의 두 아들도 보였다. 그들은 몇 명 되지 않았지만 하나같이 훌륭한 전사들이라서 뒤를 찔린 지나족은 잠시 갈팡질팡했다. 보돈차르가 날듯이 달려와 쓰러진 리미를 말에 태웠고 보챠두의 두 아들이 치우천을 호위했다. 야율쿠리는 마치 사자처럼 싸워서 앞 길을 텄는데 아무도 그 앞을 막지 못했다. 마침내 그들은 간신히 포위망을 돌파하는 데 성공했다. 일단 포위망을 벗어나자 그들은 뒤도 돌 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달아나는 길에 치우천이 헐떡이며 물었다. “어떻게 알고 왔지?” 야율쿠리가 그 말에 대답했다. “알려준 사람이 있다. 좌우간 천, 네가 안 죽어서 다행이다!” “비는?” “그 노란 머리 도깨비가 잘 데리고 왔더군.” “다른 전사들은? 무사히 후퇴했나?” 치우천의 말에 보돈차르와 야율쿠리의 낯빛이 흐려졌다. 키타야가 내키지 않는 듯 입을 열었다. “후퇴하지 않았다네.” “네? 그러면......?” “우리는 모두 자네 형제를 구하러 온 것일세. 자네 형제를 두고 어떻게 후퇴하겠는가?” 곧이어 보돈차르가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 “구르 부족장과 초초룬에게 지취를 맡겼으니, 별일은 없을 걸세.” 이미 날은 완전히 어두워져서, 피차간에 더는 싸울 수 없는 상황이었다. 보돈차르는 일행을 이끌고 골짜기로 들어가지 않고 한참을 돌아갔다. 밤이 릴을 무렵이 되어서야 그들은 어느 널찍한 벌판에 다다랐는데, 그곳에 남은 전사들이 모여 있었다. 그런데 그 수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적었다. 물론 부상자들이 많았지만 치우천이 마지막으로 헌원을 잡으러 나설 때 최소한 오백 명은 숨이 붙어 있었다. 그러나 지금 남아 있는 전사들의 수는 삼백 명도 채 안 되었다. 더구나 멀쩡했던 구르는 중상을 입어 숨만 간신히 붙어 있었고, 초초룬도 화난 듯 술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있었는데 온 몸이 피투성이였다. “이게......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치우천이 놀라서 외치자 보돈차르가 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천 안다, 자네가 헌원을 잡으러 나가고 난 뒤, 불태울 것이 없어져서 더 연기를 피울 수 없었다. 그래서 끽구와 비휴가 밀고 들어왔다. 우리는...... 우리는 미처 물러서지 못하고......” 비로소 상활을 파악한 치우천이 크게 부르짖었다. “물러서지 못한 게 아니라 물러서지 않은 것이지요? 저 때문에...... 저 때문에 물러서지 않았던 것입니까?” 보돈차르와 야율쿠리, 키타야 등은 모두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았다. 그때 후퇴했으면 최후의 타격은 입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보돈차르 등의 입장에서는 물러설 수 없었다. 기껏 치우 형제를 구하러 여기까지 왔는데, 치우 형제를 두고 물러설 수는 없었던 것이다. 지휘를 맡은 치우천이 빠져나간데다가 머뭇거리고 탈진한 상태에서 공격을 받아, 순식간에 막대한 피해를 입었던 것이다. 치우천은 눈물을 쏟으며 절규했다. “내 잘못입니다! 내 잘못 때문에 벗들을 저렇게......나는.......나란 놈은.......!” 치우천은 애통함을 이기지 못해 칼을 뽑아 들고 목에 갖다댔다. 그때 야율쿠리가 재빨리 호통을 치며 치우천의 손을 쳐내자 칼이 땅에 떨어져 버렸다. “무슨 짓이냐!” 보돈차르가 치우천에게 다가오더니 조용히 말했다. “천 안다, 네 잘못이 아니다. 이게 잘못이라면 명령을 듣지 않은 우리의 잘못이다.” “제가...... 제가 모두를 죽였습니다. 제가 욕심을 부려 무리하게 나서는 바람에.......아아......” 치우천이 목 놓아 비통하게 울음을 터뜨리자 키타야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이 무슨 바보짓인가! 내가 아는 치우천이 이런 남자였나?” “저는 바보입니다. 이 싸움에서 패해 모두를 죽게 만들었습니다. 나 같은 바보는......” 보돈차르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천 안다,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다섯 배, 여섯 배가 되는 지나족에 둘러싸였을 때, 솔직히 우리는 다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네가 우리를 잘 이끈 덕분에 우리는 그 많은 지나족과 훈족, 타타르족을 물리쳤다. 이건 이긴 싸움이다!” 키타야도 한마디 거들었다. “결과적으로는 잘 안 되었네만 헌원이 혼자 있는 것을 꿰뚫어보고 달려 나간 것은 결코 잘못한 게 아닐세! 나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네! 다음번에도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 해도 다시 그래 볼 것이네!” 야율쿠리도 외쳤다 “맞다! 우리는 칠백 명을 잃었지만 지나족과 훈족 개새끼들은 이천, 삼천은 죽었을 것이다! 이건 이긴 거란 말이다! 몇 배나 되는 전사들과 싸워서 더 많은 수를 죽였고, 저들이 잡으려는 너희 형제를 지켜내지 않았는가? 하핫! 그랬으면 승리를 기뻐해야지, 왜 슬퍼하는 것이냐? 응?” 술을 퍼마시던 초초룬도 어느 결에 다가와 맞장구를 쳤다. “젠장! 유루칸족의 치미르칸을 죽이고, 훈족의 나단선우를 고꾸라뜨렸고, 끽구와 비휴 같은 지나족들 모두 코를 납작하게 만들었으며, 헌원이 꽁무니가 빠지게 도망치게 만들었는데, 이게 왜 승리가 아니란 말이지?” 야율쿠리가 초초룬에게 눈을 찡긋하며 외쳤다. “하핫! 그래, 맞다! 잔치라도 벌이지 못할망정 왜 풀이 죽어 있나? 어차피 전사들은 싸우라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실컷 싸웠고, 조금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 이번 싸움은 두고두고 부족들간에 이야깃거리가 될 것이다. 그런데 뭐가 걱정인가?” 치우천은 더 말하지 않고 애써 속마음을 숨기고 입을 열었다. “그래, 내가 잘못생각 한 것 같다. 다들 힘써 싸워주었고, 잘해주었어!” 그제야 모든 부족장들이 웃는 낯을 지었다. 야율쿠리는 치우천의 등을 두들겨주기까지 했다. “그래! 그래야지!” “일단 다치거나 죽은 자들을 보살펴야 한다. 그리고 흩어진 전사들을 모을 수 있는 데까지 모아야 해.” 사실 치우천 쪽의 피해도 심각해서, 치우비, 구르, 양역 등은 정신조차 차리지 못하는 중상을 입었고 그외 부루벼락, 초초룬, 치베 등도 상당한 상처를 입고 있었다. 리미와 마냥, 싱카도 목숨이 위험하지는 않았지만 한동안 옴짝달싹할 수 없는 중태였다. 그나마 중요한 사람들 중 당장 죽을 것 같은 사람이 없는 것이 다행이었다. 보돈차르나 키타야, 야율쿠리 등도 크고 작은 상처를 입었지만 워낙 부상자들이 넘쳐나는 상황에서 그들은 상처를 입었다고 할 수도 없었다. 허나 모두들 너무 지쳐서 움직일 기력조차 없어 보였다. 그때 툰툰이 나섰다. “그 일은 내가 하겠네. 나는 늙어서 그리 큰 힘을 쓰지 못했다네. 나는 밤눈이 밝으니 내가 전사들을 모아보겠네.” 툰툰이 나서자 형요 자매도 말했다 “우리도 돕겠어! 우리 자매는 밤만 되면 힘이 나니까.” 그때 보돈차르가 걱정스레 물었다. “흑시 지나족이 여전히 우리 뒤를 쫓으면 어쩌지?” 치우천은 고개를 저었다. “지나족도 그럴 상황이 아닐 겁니다. 날이 밝을 때까지는 지나족도 움직이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겠군.” 치우천은 다른 사람들에게 뒷일을 부탁하고 조용히 물러섰다. 애써서 속마음을 보이지 않으려 했으나 치우천은 속으로 스스로를 몹시 책망하고 있었다. ‘이긴 게 아니다. 무라가 와서 도와준 것이나, 소녀가 나서서 비냐를 물러서게 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일방적으로 당했을 것이다. 운이 좋았을 뿐이다. 나는......나는 아직 멀었다. 헌원에게 진 것이다. 치우천! 치우천! 이 바보야! 너는 아직 멀었다!’ 비슷한 시각, 헌원도 치우천을 잡지 못했다는 말에 비통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을 잡을 수 없단 말인가? 더 쫓을 수 없는가?” 헌원이 안타까운 듯 묻자 끽구가 대답했다. “끽구가 아룁니다. 이제 너무 어두워졌고, 우리는 이곳 지리에 익숙하지도 못합니다. 그리고 다친 전사들이 너무 많아 쫓는 것은 무리일 것 같습니다.” “일이 틀어졌구나! 다 틀어졌어! 우리가 완전히 진 것 아닌가?” 상망은 애써 헌원을 위로하려 했다. “상망이 헌원님께 아룁니다. 비록 그 형제는 잡지 못했지만, 우리가 이긴 것입니다. 그놈들은 거의 다 죽어서, 산산이 흩어져 도망쳤습니다. 한 백 명이나 살았을까요? 열에 아홉을 쳐 죽였으니 우리가 이긴 것입니다.” 상망이 애써 과장하여 말하자 헌원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우리 피해가 더 크지 않은가?” 그러자 지가 나섰다. “지가 헌원님께 아룁니다. 우리 지나 전사들은 삼백 명 정도가 죽고 그 정도가 다쳤습니다. 허나 적은 구백 명 정도가 죽은 셈입니다. 훈족과 타타르족, 카린족들이 좀 피해가 있지만 어차피 우리 부족도 아니지 않습니까?” “치미르칸이 죽고, 나단선우는 숨만 붙어 있고, 카린족대장 세 명도 모두 패했다는데, 그게 좀 피해를 입은 것인가?” “하지만 우리가 이겼습니다.” 헌원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우리 편의 수가 여섯 배나 되는데도, 우리는 저들을 이기지 못하고 쩔쩔맸다. 더구나 나는 쫓겨서 도망치기까지 했다. 게다가 치우천 치우비 녀석들은 결국 잡지 못했어.” 헌원의 말에 지, 상망, 끽구 등의 얼굴빛이 모두 숙연해졌다. 그 모습을 보고 헌원은 다시 말을 이었다. “내, 자네들을 나무라는 것이 아니네. 자네들은 무척 잘 싸워주었어. 그래, 우리가 졌다고는 할 수 없지. 그러나 생각해보게. 만약 치우천에게 나와 같은 수의 전사가 있었다면? 하다못해 오백 명만 더 있었다면 어찌 되었을까......?” 헌원이 계속 침통한 어조로 말하자 광성자가 애써 몸을 추스르며 말문을 열었다. “광성자가 말씀드립니다. 헌원님께서는 우리가 지지는 않았지만, 헌원님 스스로는 치우천에게 졌다고 생각하시는지요?” 헌원은 다소 슬픈 듯한 눈으로 광성자를 바라보았다. “솔직히...... 그렇소, 광성자 스승.” “광성자가 말씀드립니다. 싸우기 전에 하는 준비도 싸움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헌원님은 놈을 얕보지 않고 더 많은 준비를 하셨고, 그대로 된 것입니다. 헌원님이 결코 졌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헌원은 힘들게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스승께서 말씀하시니 그렇다고 해두지요. 허나..... 나는 두렵습니다. 보면 볼수록 나는 그 녀석이 정말로 두렵습니다. 누가 승자인지, 누가 패자인지는 나중에 더 두고 보아야겠습니다만...... 그 녀석이 있는 한, 나는 편히 잠들 날이 없을 것 같습니다.” 헌원은 하늘을 보고 탄식하다가 이윽고 조용히 물었다. “발은 무엇하고 있습니까? 광성자 스승.” “그저..... 울고만 있습니다. 통 말을 하지 않습니다.” 헌원은 다시 한 번 길게 한숨을 쉬면서 이미 초롱초롱 빛나기 시작한 밤하늘의 별들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의 뜻은 어디 있을까......?” 그날 밤은 마지막 힘을 쏟아 부상자들을 정신없이 돌보느라 결국 모두가 완전히 곯아떨어졌다. 다음날 날이 밝자 다행히 좋은 소식이 있었다. 툰툰과 형요가 길을 잃거나 도망쳤던 전사들 칠팔십 명을 애써 수습해서 데리고 온 것이다. 그들 중 절반은 심하게 다쳤지만 그래도 그 사람들을 구한 것이 기뻐서 치우천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그때 보돈차르가 다가와 귀띔했다. “천 안다, 사람들의 기분을 풀어주어야 한다. 대장이라면 반드시 어제 싸움에 대해 누가 잘하고 잘못했는지 따져 말해야 한다.” 치우천은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았다. 그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다. 사실 치우천은 몹시 낙담해 있는 상태였지만, 해야 할 일은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곧 기운을 내어 말했다. “다친 사람 말고, 부족장과 대장들은 모두 모이시오!” 치우천은 차례대로 보돈차르, 키타야, 구르 등 부족장들의 공을 큰 소리로 조목조목 칭찬해주었다. 부족장들의 공은 그를 따르는 전사들의 공을 함께 말하는 것이므로 당연히 가장 먼저 말해야 했다. 그때마다 박수소리와 함성이 일었고 좀 침울하던 분위기가 일시에 밝아졌다. 그것을 보고 치우천은 생각했다. ‘보돈차르님은 정말 부하를 부릴 줄 아는구나. 순식간에 사람들이 힘을 내다니. 앞으로도 배울 점이 많겠어.’ 그 다음 치우천은 전사들을 이끌고 와준 야율쿠리, 초초룬, 툰툰 등의 공을 말하고 격려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부하들을 거느리고 오지 않은 사람들, 즉 치베, 형요 자매, 양역, 쇠돌이, 부루벼락과 마파람등의 공을 일일이 말했다. 말하고 보니 정말로 열심히 싸우지 않은 사람이 없고 공을 세우지 않은 사람이 없어서 치우천은 새삼 감격하여 목이 메어왔다. 그때 보돈차르가 다시 귀띔했다. “자네 아우의 공도 크다. 그리고 도깨비들도 공이 크잖은가?” “도깨비들은 그렇지만 비는...... 저와 비 때문에 모든 분들이 와준 것 아닙니까?” 치우천은 아우의 공을 내세울 것이 없다고 생각했으나 보돈차르는 고개를 저었다. “이건 싸움일세. 누가 잘 싸우고 못 싸웠는가 말하는 것이지, 누구 때문에 오고 말고 따지는 것이 아니다.” 치우천은 그 말이 옳다고 여겨서 다시 치우비와 도깨비들의 공도 말했다. 리미, 마냥, 싱카, 개르, 포리의 다섯은 사람들이 도깨비 신세인 자신들에게 박수를 쳐주고 환호해주자 감격하여 눈물까지 흘렸다. 치우천은 울라트도 안아서 치켜 올려주며 불을 지른 공과 도깨비들을 잘 가르친 공을 치하해주었다. 울라트가 얼굴이 빨개지자 전사들은 ‘와’ 하고 웃으면서 더 열심히 박수를 쳐주었다. 돌연 키타야가 가죽 모자를 쓰고 낡은 옷을 입은 전사 한 명을 데리고 앞으로 나와 말했다. “치우천, 이 사람이 누군지 아는가? 이 사람이 마지막에 달려와서 자네가 위험에 처했다고 알려주었다네.” 치우천이 보니 그 사람은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는데 딱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입은 옷은 낡았고 지나족 전사 같은 차림이었으며, 키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체구가 강철같이 다부졌다. 얼굴은 번듯한 미남형인데 조금 코가 높은 것으로 보아 서쪽 사람인 것 같았다. 그 남자는 밝게 웃어 보이며 서툰 주신 말로 말했다. “저번에 먼발치에서 뵌 적 있습니다. 기억 안 나십니까?” 치우천은 웃으며 솔직히 말했다. “제가 머리가 나빠서 잘 기억할 수 없군요 미안합니다.” 그러자 그 남자는 웃으면서 가죽 모자를 벗었다. 그러자 긴 머리가 출렁거리며 흘러내렸다. 그 특이한 모습을 보니 치우천도 그 남자가 누구인지 기억이 나서 크게 놀랐다. “알한! 태산 회의 때 좋은 솜씨를 보여주셨던 알한님 아니십니까?” 그 사람은 바로 .태산 회의 몽둥이 시합에 결승까지 올라갔다가 금천에게 애석하게 패한 투르크의 전사, 알한이었다. “머리가 나쁘시다더니, 잘 기억하시는군요?” 야율쿠리도 알한을 기억하고는 크게 놀라며 대뜸 물었다. “당신 같은 대단한 전사가 왜 지나족 차림을 하고 있는 거요? 그리고 여긴 어떻게 왔소?” 알한이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태산 회의 때 금천에게 진 것이 너무나 원통하여, 그대로 있다가는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아 혼자 부족을 떠나왔습니다. 그러나 금천은 대족장이라, 겨루기는커녕 코빼기도 볼 수 없었습니다. 나는 생각다 못해 지나족 속에 있으면 금천을 만날까 싶어서 지나족 전사들 속에 섞여 들어갔는데, 금천은 만나지 못하고 여기까지 오게 되었지 뭡니까?” “그래서요?” “그래,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도망치려 생각했는데, 지나족 놈들이 치우천, 당신과 다른 영웅들을 공격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나는 지나족과는 감정이 좋지 않아, 당신들을 조금도우려 했습니다. 도움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돕다니?” 야율쿠리가 의아해하자 알한은 껄껄 웃더니 평소와 전혀 다른, 아주 겁먹은 듯 가냘픈 소리를 내었다. “아이쿠! 큰일이다! 도깨비다! 치우비다!” 그 말에 치우천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크게 웃었다. 이제 보니 지나족들 틈에서 계속 겁먹는 소리를 질러서 지나족의 사기를 흐트러뜨린 사람은 지나족이 아니라 바로 알한이었던 것이다. 그의 목소리를 듣고 다른 사람들도 참지 못하고 ‘와’ 하고 큰 소리로 웃었다. 알한은 다부지고 힘센 전사였으나 말투가 퍽 차분하고 겸손했으며, 또 퍽 익살맞은 면도 있는 좋은 사람 같았다. 알한도 ‘허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치우천님, 당신은 이제 지나족의 적입니다. 나도 언젠가는 금천과 싸워 명예를 되찾아야 하니, 당분간 당신들과 함께 다니고 싶습니다. 저를 받아주시겠습니까?” 치우천은 몹시 기뻤으나 신중하게 말했다. “하지만 저는 집도 갈 곳도 없는 떠돌이 신세입니다. 많이 고생이 될 텐데요.” 알한이 호쾌하게 웃으며 되받았다. “금천은 이제 헌원의 부하이고, 세상에 헌원과 맞서는 사람은 당신뿐입니다. 나는 비록 지나족 편에 있었지만, 어제 당신의 싸움을 보고 감탄했습니다! 더구나 나는 워낙이 한 곳에 눌러 있는 성격이 못되어서, 떠돌이로 지내는 게 더 좋습니다. 전사라면 모험을 하면서 지내야지, 마을에서 빈둥거리고 지내서야 뭣에 쓰겠습니까? 다만 언젠가 지나족과 싸우게 되어, 금천을 상대하게 되면 꼭 저를 내보내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치우천과 모여 있던 모든 이들은 몹시 기뻤다. 알한은 금천에게 졌다고는 하나 태산 회의 몽둥이 겨룸에서 두 번째 자리를 차지한 대단한 용사였다. 그런 용사가 제 발로 걸어 찾아와 힘을 합해주니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야율쿠리 역시 싱글거리며 알한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전사는 전사를 알아보는 법! 알한님은 제대로 온 것이오. 나와도 한 번 겨뤄보는 게 어떨까요?” “지난번 야율쿠리님의 솜씨도 보고 감탄했습니다.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치우천은 알한을 환대한 다음 비울걸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비울걸은 신도 울루를 물리친 뒤 또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도 않았지만 치우천은 비울걸의 큰 공로도 잊지 않고 이야기했다. 그에 덧붙여 비울걸은 퍽 좋은 사람이니 앞으로는 그의 용모만보고 뭐라 해서는 안 된다는 당부도 했다. 사람들은 그의 공로가 크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지라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마지막으로 치우천은 무라와 소녀를 불렀다. 무라는 뭔가 말하려하다가, 채 말을 꺼내지 못하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치우천이 먼저 말했다. “무라님은 저희 형제를 위해 부족까지 버리고 도와주셨습니다. 비휴의 천랑대를 물리쳐주시고 카린족 한 부대를 물러서게 해주셨습니다. 무라님이 아니었으면 우리는 모두 위험했을 겁니다. 이 치우천, 평생 무라님의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무라는 잠시 생각하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카린족과 쑤앙마이를 미워하지 않으시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치우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카린족이 우리를 공격한 것은 쑤앙마이의 뜻이 아니란 것을 압니다. 무라님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무라는 많은 사람들의 환호를 받았는데, 무라의 용모와 개명수를 타고 다니는 신비한 풍모 때문에 더 많은 박수가 나왔다. 그러나 무라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고, 눈에는 슬픈 빛이 가득했다. 자신을 위해 희생한 유우의 생각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치우천은 소녀에게 말했다. “소녀님은 마지막 순간에 카린족 비냐를 물러서게 해주셔서 우리 모두를 구했습니다. 그런데 대체 어떤 방법을 썼는지 궁금하군요.” 치우천이나 누구나, 소녀가 여자인데도 혼자 용감히 나가 카린족 부대를 흩어버린 것만 알았지, 비냐를 기습하여 찔러 죽인 사실은 알지 못했다. 모두 물러서거나 불을 피우느라 제정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치우천은 소녀도 무라처럼 비냐를 설득하여 물러서게 한 것으로만 알고 물었다. 그러자 소녀는 조용히 얼버무렸다. “그냥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입니다. 저는 천님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전사들은 ‘와’ 하고 박수를 치며 휘파람을 불어댔다. 소녀의 말은 완전히 치우천에 대한 공개적인 감정의 표시로 들렸기 때문이다. 다들 소녀가 너무 아름답고 매혹적이며, 그와 어울릴 사람은 치우천 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환성이 더 컸다. 치우천도 얼굴을 붉히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해서 논공행상이 끝났다. 잠시 후, 초초룬이 조용히 다가와 치우천에게 속삭였다. “천, 할말이 있어.” “뭐지?” 초초룬이 더욱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 여자, 조심해야 해.” “무슨 소리야?” “저 여자는 어제 자기 자매를 찔러 죽였어. 다른 사람은 못 봤겠지만, 나는 맨 마지막에 물러섰기 때문에 그걸 보았어.” 그러면서 초초룬은 소녀가 비냐를 찔러 죽인 광경을 치우천에게 일러주었다. 그 말을 들은 치우천은 놀랍기도 하고 당혹스러웠다. 치우천 역시 소녀가 겉보기와는 성격이 다르다는 것은 눈치 챘지만, 이번 소녀의 행동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정말이야? 잘못 본 것 아니야?” “틀림없어.” 치우천은 몹시 당혹스러웠다. 사실 치우천도 소녀에게 호감이 일어 자꾸 마음이 끌리는 판이었다. 소녀가 비냐를 찌른 일은 비정하고 모진 면이 없지 않았다. 허나 이미 소녀를 좋게 생각하는 치우천은 그 일이 꺼림칙하지만 나쁘게만 생각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나를 위해 한 일 아니겠어? 모두가 도움을 받은 것도 사실이고..... 소녀님도 그 때문에 큰 희생을 치른 셈인데......” 초초룬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얼른 덧붙였다. “물론 저 여자는 너를 위해 한 일이겠지 그러나..... 너무 지독한 면이 있는 것 같다.” 잠시 입을 다물고 초초룬은 생각했다. “똑같이 천을 위해 한 일이라도, 무라는 달랐다. 무라는 무뚝뚝해 보이지만자매를 해치지 못하고 자기가 죽으려 했다고 들었어. 그러나 소녀는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자신을 믿고 달려온 자매를 죽였다. 돌 같은 무라는 아직도 울고 있는데 저 여자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슬퍼하지도 않는다. 저 여자는 겉으로는 아름답지만 마음속은 얼음이다. 무서운 여자다.” 순간 그 말이 막 입 밖에까지 튀어나오려 했지만 치우천의 눈치를 보고 초초룬은 입을 다물었다. 되레 소녀를 헐뜯는 것처럼 들릴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초초룬은 그저 털털하게 ‘허허’ 웃으며 얼버무렸다. “뭐 저 여자를 헐뜯으려고 하는 말은 아냐. 저런 마음 굳센 여자가 있으면 든든하긴 해. 그러나 말야, 저런 여자가 적이 된다면..... 그땐 문제가 클 거야. 그러니 저 여자 마음을 놓치지 않도록 해. 벗으로서의 바람일 뿐이야.” 치우천은 좀 당황하기는 했지만, 그저 초초룬에게 알았다고 간단히 대답한 뒤 그 일을 잊으려 애썼다. 지금은 초초룬과 오래 이야기를 나눌 상황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치우천은 대장들이 모인 가운데 이후의 거취를 정해야겠다는 생각에 다시 모두에게 외쳤다. “이제 돌아가야 하는데, 아무래도 지나족과 마주칠까 걱정됩니다. 흩어져서 가야 할까요, 아니면 어디까지 뭉쳐서 함께 가야 할까요?” 키타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물론 뭉쳐서 가는 것이 안전하겠지. 그러나 우리는 삼백 명도 넘으니 먹을 것이 걱정이네. 짐을 거의 다 태워버려서 다른 부족과 바꾸면서 갈 만한 것도 없고......” 보돈차르도 한마디 끼웠다. “여러분, 우리가 흩어지면 지나족의 습격을 받을지도 모르오. 그리고 치우 형제가 다시 위험에 빠질지도 모르잖소?” 고개를 끄덕이며 야율쿠리가 말했다 “어차피 우리는 적어도 일 년은 걸릴 생각으로 나온 것 아니오? 그러니 앞으로 치우천이 자리 잡을 때까지 같이 있읍시다. 어떻소?” 초초룬도 야율쿠리의 말에 동의를 표시했다. “일 년이 아니라 이 년도 괜찮아_ 부족은 별일 없을 거야. 다만 다친 사람들을 다 낫게 해서 돌아가는 게 좋겠다.” 부족장인 보돈차르와 키타야만은 때가 되면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허나 그때가 되어도 보돈차르는 치베와 남은 몽골 전사들은 당분간 치우천을 따르게 하고 키타야도 타타르 전사들을 모두 치우천에게 맡기기로 했다. 그리고 구르가 나으면 키타야와 교대하여 치우천을 지키기로 했다. 모두의 말을 듣고 치우천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나는 어디 갈 만한 곳도 없습니다.” “왜 갈 곳이 없나1 우리 부족은 크진 않지만, 자네들 정도는 받아들일 수 있다네.” 키타야의 말에 치우천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됩니다. 제가 여러분 중 어느 부족에 있다고 알려지면, 헌원이 또 사람을 풀어서 공격해올지 모릅니다. 더구나 주신과 저와의 문제도 풀린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애꿎은 여러분 부족까지 싸움에 휘말리게 됩니다.” “어차피 우리 모두는 이제 헌원과 원수가 된 셈인데, 뭘!” 초초룬의 말에 치우천은 다시 고개를 저으며 되받았다.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과 헌원이 싸웠다고 하지만, 굳이 헌원이 전사들을 먼 곳까지 풀어 여러분의 부족을 습격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있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이 먼 카린까지도 왔으니 그곳도 치려 할 것입니다. 직접 오지 않더라도 나단선우나 유루칸을 움직인 것처럼 그 근처의 부족들을 시켜 싸움을 붙일지도 모릅니다. 저는 이미 여러분께 큰 은혜를 입었고, 저 때문에 많은 전사들이 죽었는데, 다시 부족에까지 폐를 끼칠 수는 없습니다.” 보돈차르가 걱정스레 물었다. “그렇다고 주신으로 돌아갈 수도 없지 않은가?” “지금 당장은 갈 수 없겠죠. 언젠가는 반드시 기회를 보아 돌아가겠습니다만......” “기회?”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좌우간 저희 걱정은 더 이상 마십시오.” “그럴 수는 없다! 너희 형제만 달랑 놓아두면 무슨 일을 당할지 누가 아는가? 너희 형제가 강하기는 하지만 둘만 있으면 전사 백 명만 몰려와도 죽는 것은 뻔하지 않은가?” 야율쿠리가 소리 높여 말하자 치우천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별수 없어, 야율쿠리. 네 마음은 고맙지만 우리 두 형제 갈 곳도 마땅치 않은데 삼백 명이나 되는 전사들을 어디서 살게 한단 말야?” 그때 첫째 형요가 끼어들었다. “천, 내 말 좀 들어봐.......” “말해봐.” “내가 지난번에...... 괴물에게 우리 부모님과 마을사람들이 전멸 당했단 이야기를 했지?” “그랬지.” “그곳은 지금 아무도 살지 않지만, 쾌 넓은 곳이야. 마을도 거의 그대로 있고....... 그리고 말야, 그 마을에는 굉장히 많은 보물도 있어.” “보물?” 초초룬이 눈을 치켜뜨자 형요가 말을 이었다. “우리 부모님은 그 일대의 도둑왕이셨는데, 쌓아둔 보물이 없겠어? 엄청난 보물이 있다고 알고 있어. 다만 솔직히 우리 자매는 괴물이 무서워서 그 보물을 그냥 놔두고 있었거든. 뭐, 꼭 쓸 데도 없고.” 그러자 보돈차르가 웃으며 말했다. “그거 좋은 이야기로군. 보물이 있으면 물건들을 바꿔올 수 있으니 걱정할게 없지. 안 그러면 이 많은 전사들이 한 곳에 살기는 어려울 거야. 사냥에도 한도가 있고, 그렇다고 전사들에게 가축을 치고 밭이나 갈라 하면 싸움 기술이 무뎌질 테니까.” “하지만 그 보물은 너희 자매들의 것이잖아?” 치우천의 말에 형요는 갑자기 눈물을 뚝뚝 흘리며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아 외쳤다. “보물은 필요 없어! 우리 자매가 이제 사람답게 살게 되었는데 보물을 뭐에 쓰겠어? 다만...... 다만 피물을 잡아 윈수를 갚아줘! 보물은 다 가져서 네 뜻을 이루는 데 써줘. 제발.......” 형요 자매가 애당초 치우 형제를 따라다닌 가장 큰 이유는 괴물을 잡아 복수를 갚는 데 도움을 받기 위함이었다. 더구나 지금은 삼백 명이 넘는 전사들과 다른 부족의 영웅들까지 있으니 형요로서는 절호의 기회라 생각되었던 것이다 형요가 울면서 애원하자 다른 형요자매와 미요, 요요도 덩달아 울면서 사정했다. 그것을 보며 야율쿠리가 크게 웃었다. “하하핫! 뭐, 무릎까지 꿇고 빌 일이야 있나? 어떤 괴물인지 몰라도 한 마리뿐일 건데 이만한 수로 못할 일이 뭐가 있겠어?” 치우천은 고개를 저으며 야율쿠리에게 말했다. “그 괴물은 신수일지도 몰라. 신수라면 간단치 않아. 전에 주신 한웅님은 천 명의 말 탄 사울아비와 주신 삼사까지 계셨는데도 신수를 당할 수 없어서 위험했었어. 비의 힘으로도 생채기밖에 내지 못할 정도였다.” “비? 신수가 그리 강한가? 나는 믿을 수 없다!” 야율쿠리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자 초초룬은 짐짓 야무진 목소리로 한마디 끼웠다. “하지만 별수 없잖아!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어? 보물과 살 곳을 얻으려면, 그만한 위험은 겪어야 하는 거야, 천! 너는 사울아비잖아? 신수라고 해서, 꽁무니를 빼겠다는 거야?” “그렇지는 않지만 조심할 건 조심해야 한다는 뜻이야......” 치우천은 말끝을 흐리며 형요를 측은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우리 형제도 신수에게 어머니를 잃었는데, 형요 자매도 신수에게 부모님을 잃었으니 같은 고통을 겪는 셈이구나. 비록 신수가 무섭지만 형요도 우리의 벗인데 어떻게 돕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침내 결심한 치우천이 웃으며 형요를 일으키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형요, 언젠가 나를 구해주며 말했었지? 벗 사이에는 고맙다는 말이 필요 없다고......그런데 이렇게 무릎까지 꿇다니, 뭐 하는 짓이냐? 네 일이 내 일이고, 또 모두의 일 아니겠어?” 그러자 야율쿠리가 대신 크게 웃으며 외쳤다. “됐구먼! 뭐 더 볼 것도 없네! 다들 그리로 가자! 형요! 앞장서라! 괴물도 잡고, 얼마나 많은지 보물도 한 번 구경해보자! 하핫!” 야율쿠리가 넉살좋게 웃어대자 보돈차르나 키타야 등도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알한도 웃으며 말했다. “재미있군요, 재미있어요. 신수라니! 이렇게 오자마자 재미있는 싸움에 끼게 되다니, 제가 역시 제대로 온 것 같습니다. 제 솜씨도 한 번 보여드리지요.” “하지만 이렇듯 심하게 싸우고 난 뒤 또 괴물과 싸운다면.......” “무슨 소리냐? 우리 전사는 강한 상대와 싸울수록 강해지고 명예가 커지는 것이다! 안 그러냐?” 야율쿠리가 소리 지르자 주위에 앉아 있던 전사들이 ‘와’하며 함성을 지르며 화답했다. 부상자들마저도 껄껄 웃으며 함성을 지르다가 기침을 하기도 했다. 비록 사람들이 많이 다치긴 했어도. 그들은 모두 어제 싸움에서 이겼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많은 수의 적과 싸워서 한 사람이 최소한 대여섯 명을 상대했고, 두서너 명 이상을 죽이지 못한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단순한 전사들은 각자가 그렇게 용맹을 떨친 것만으로도 큰 영광이라 생각했다. 때문에 죽은 자들도 많았지만 침통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전사들은 처음에 치우천이 이리 움직여라, 저리 움직여라 할 때는 불만이 많았다. 그러나 나중에 보니 뭐가 어떻게 되었는지 잘은 몰라도, 좌우간 그렇게 움직여서 그 많은 적을 상대하고, 정말 평생 다시없을 정도로 원 없이 싸웠으며, 각자 커다란 자부심을 지니게 되지 않았던가? 전사들은 한결같이 치우천이 대장 역할을 잘해주어서 질 싸움에서 이겼다고 생각하여 사기는 아·주 높았다. 이제는 치우천이 시키면 불구덩이라도 뛰어들 기세였다. 치우천은 전사들의 사기가 높은 것을 보고 이윽고 용기를 냈다. ‘할 수 없다. 다른 방법이 없지 않은가? 잘 생각해보면 신수라 해도 상대할 수 있지 않을까?’ 치우천이 곰곰 따져 보니, 지난번에는 번개범이 갑작스럽게 나타나 생각할 겨를이 전혀 없었지만 이제 상대할 괴물은 형요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잘하면 이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쑤앙마이에게서 신수와 대화할 수 있는 ‘우린’ 구슬까지 얻지 않았는가. 이제와 생각해 보니 다 이렇게 되려고 하늘이 정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거기에다 치우천의 마음을 더더욱 움직이게 한 이유가 또 있었다. ‘우리 형제는 번개범을 잡아 어머니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 어차피 신수는 내가 넘어야 할 벽이다! 이 괴물조차 상대 못하면, 번개범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더구나 신수 한 마리도 상대 못하면서 한원을 이기고 그 뜻을 뛰어넘을 수는 없겠지! 용기를 내자! 용기를 내!’ 비로소 마음을 정하자 치우천의 뇌리에 한 가지 생각이 번뜩이며 스치고 지나갔다. ‘그렇구나. 이것은 하늘이 내린 기회일지도 모른다. 잘만 되면.......우리 형제는 주신으로 돌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치우천은 갑자기 떠오른 묘안에 기분이 좋아져서 크게 외쳤다. “좋습니다! 모두들 갑시다! 형요의 마을로! 괴물을 잡아 보물을 얻으면, 여러분께 나눠드리겠습니다!” 야율쿠리가 좋아서 크게 떠들어댔다. “하하, 괴물을 잡아 보물을 얻자 가장 용감히 싸운 자는 많은 보물을 나눠줄 것이다! 다들 힘내자!” 그 소리를 듣자 전사들은 또 다시 ‘와’ 환호성을 올리며 더욱 힘을 냈다. 그리고 모두들 힘을 내어 치우천의 뒤를 따라 일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모여드는 사람들 쿤룬산맥에서 형요가 살던 계곡까지 가는 데에는 약 한 달 반 가량 걸렸다. 그 계곡은 파루 계곡이라 불렸는데, 계곡을 넘어 험한 비탈을 하나 넘으면 형요 자매가 살던 넓고 평평한 분지가 나온다고 했다. 원래는 한 달 정도 가면 되지만 부상자들이 많아서 속도를 낼 수 없어 진군이 느렸다. 여러 명의 부상자가 길을 가던 중 죽기도 했으나 대부분은 차차 회복되어 무리는 안정을 되찾았다. 보돈차르나 야율쿠리, 키타야는 원래 많이 다치지 않았었고 치베나 초초룬도 그리 중상은 아니라 금방 털고 일어났다. 구르와 양역, 치우비의 상처가 제일 심한 편이라 한 달 정도 지나서야 완쾌가 되었다. 일주일 만에 정신을 차린 치우비는 계속 침울한 표정으로 눈물만 흘렸다. 발과의 일이 마음에 맺혀서 견딜 수 없는 것 같았다. 벗들이 애써서 발의 일은 이제 틀렸으니 잊어버리라고 충고해도 치우비는 묵묵히 입을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단가 한 달 정도 지나자 치우비는 예전과 다름없이 웃고 이야기하며 평상시와 비슷한 밝음을 되찾았다. 그러나 혼자 있는 밤이 되면 치우비는 하늘을 바라보며 한숨을 짓기도 하고 잘 때는 남몰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다른 사람과 어울릴 때는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으나 속으로는 발을 잊지 못해 괴로워하는 것이다. 누구보다도 아우를 생각하는 형 치우천이 그런 일을 모를리 없었다. 그러나 치우천으로서도 이 일에 대해선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었다. 치우천은 그런 아우의 모습이 안쓰러워 자주 한숨을 지었지만 아우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시간이 지나면 마음의 상처도 아물 것이라 생각할 뿐이었다. 차차 전사들이 회복되고 파루 계곡이 가까워지자 치우천은 줄곧 신수일지도 모를 고 괴물에 대적할 방법을 찾아 머리를 싸맸다. 형요자매는 물론이고, 다른 대장들이 모두 모여 식사를 하면서 의견을 함께 나누었다. 형요도 그 괴물에 대해서는 그리 많은 것을 알지 못했다. 다만 발자국이 사람 키만 하고 필이 파였으니 아주 큰 괴물일 것이며 덩치도 무게도 대단하리라 생각될 뿐이었다. 그 괴물이 단번에 백 명을 죽인 방법에 대해서는 치우천이 이미 생각하여 답을 얻은 바 있었다. “그 괴물에 대해 좀 알 것 같습니다.” “어떤 놈일 것 같은가?” 보돈차르가 흥미롭다는 듯이 묻자 치우천이 대답했다. “형요 자매는 마을사람들이 순식간에 백 명이나 죽었고, 그것도 모조리 순식간에 죽었다고 말했습니다. 미처 도망치거나 움직일 틈도 없이 말입니다. 더구나 모든 사람의 몸에 상처 하나 입지 않았다고 했구요.” “무서운 일이네. 그런데 그게 뭘까? 독도 아닌 것 같고......” 툰툰이 중얼거리자 치우천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되받았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죠 내 생각이 틀림없다면......그 괴물은 아주 차가운 놈입니다.” “차가운 놈?” “상처없이 사람들을 순식간에 죽이는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그 사람들은 모조리 얼어 죽은 것입니다.” “얼어죽었다고?” 야율쿠리가 놀란 듯 묻자 치우천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지난번 추운 카린산에 갔을 때 생각한 것이 있었다, 야율쿠리. 그곳은 몹시 추워서, 카린족들은 고기를 얼려서 보관하더군. 그런데 한 번 그렇게 얼린 고기가 다시 녹으면 흐물흐물해져서 아주 맥이 없어지고 금방 상하곤 했지. 카린 부족들은 그래서 일단 얼린 고기는 먹기 전까지는 녹이지 않는다고 했어.” 별안간 형요가 부르짖었다. “그러면 우리 부모님과 마을사람들도 얼었다가 녹았기 때문에 시체가 그렇게.....?” 치우천은 형요가 가엾은 듯 잠시 서글픈 눈길을 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파루 계곡이 밤에는 좀 춥기는 하지만, 얼음이 얼어붙을 정도는 아니야. 더구나 그때가 어느 계절이었지?” “봄이야, 봄이었어!” “그렇다면 날씨가 따뜻하겠군. 그분들은 괴물에 의해 단번에 얼어서 모두 죽고 난 다음, 너희가 돌아왔을 때쯤은 모두 녹아 있었던 거야. 얼었다가 녹으면 물이 많이 나오는 것 같던데,봄철의 계곡은 몹시 메마르니 그 물은 다 말라버렸을 테고. 아마 틀림없을 거야.” 다른 사람들은, 한갓 음식을 저장하는 방법을 보고 괴물의 정체를 생각해낸 치우천의 머리에 감탄했지만, 형요 자매는 다시 부모님을 잃은 슬픔에 눈물을 떨구었다. 요요는 알에 놓여 있던 고기를 보고는 가볍게 헛구역질을 하며 재빨리 저쪽으로 뛰어갔다. 그래도 사람들은 못 본 척했다. 치우천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 괴물이 백 명을 한꺼번에 죽이고 마을 하나를 통째로 얼려버릴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으니 분명 보통 놈은 아니다. 신수이거나 고립자일 거야.” “고립자는 또 뭔가?” 치베가 묻자 치우천은 그저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사실 고립자라는 말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치우천은 지난번 쑤앙마이에게서 이야기를 들은 뒤 무의식중에 그 이름이 입 밖에 나온 것뿐이었다. “뭐 신수의 일종이란 뜻이지.” “그렇게 무서운 놈이라면 조심해야 할 텐데......” 치우비의 말에 치우천이 싱긋 웃었다. “내 생각은 다르다. 차라리 괴물이 뭔가 한 가지 특별한 재주가 있는 편이 낫다. 괴물이 차가운 주술을 주로 부리는 놈이라면 되레 대적하기가 쉽지 않겠어?” 키타야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끼어들었다. “맞네. 괴물이 차가운 놈이라면, 우리는 불을 질러 놈을 상대하면 되겠군!” 그러나 치우천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도 있죠. 그러나 불로만 상대하기는 좀 무리일 겁니다.” “무슨 소린가?” “그 괴물은 마을 하나를 통째로 얼려버릴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설프게 불로 상대하다간 되레 당할 겁니다. 뜨거운 것과 차가운 것은 서로 상극이지만, 또 서로 부딪히면 아주 격렬해집니다. 그렇게 부딪히면 위험할지 모릅니다. 주신 부소 집안의 주술사나 지나족 축융처럼 불에 아주 익숙한 주술사가 있다면 몰라도, 지금 우리에게는 무리입니다.” “그러면? 같은 얼음으로 상대하자는 건가?” “지금 여름이 다 되어 가는데 어디서 얼음을 구하겠습니까?” 초초룬도 약간 건방지게 코웃음을 치며 한마디 보탰다. “맞아. 찬바람이 몰아치는데 불로 막을 수는 없잖아요 앞에다 불을 피우나요? 아니면 제길, 추위를 막으려고 몸에다 불을 지른단 말인가요? 그건 안 돼요.” “그러면 어떻게 하자는 것이지?” 키타야가 또다시 묻자 치우천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괴물을 물리치려면 결국 불을 쓰긴 써야 합니다. 그러나 그러기 전까지 괴물을 상대하려면 찬 기운을 버틸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야죠. 리미, 너는 추운지방에서 왔는데, 뭐 아는 것 없느냐? 이야기를 좀 들려다오.” 리미 등은 비록 도깨비였지만 계속 공을 세웠기 때문에 치우천은 대장들이 모인 식사 자리에도 말석이나마 끼워주었던 것이다. 파격적인 일이었지만 리미 등의 활약이 컸으므로 누구도 토를 달지 않았다. 말석에 앉아 있던 리미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도깨비 리미가 말합니다. 굳이 특별한 생각은 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네가 살던 추운 지방 이야기를 들려다오.” “알겠습니다. 제가 있던 곳은 겨울엔 무척 추웠습니다. 그래서 가을만 되면 좀더 남쪽으로 내려가서 옮겨 살다가 봄이 되면 다시 올라가곤 했습니다. 저는 열다섯 살 적에 아버지를 따라 곰 사냥을 가서 북쪽의 겨울을 한 번 겪어 보았는데,정말 대단했습니다. 그렇게 추운 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바로 물입니다.” 든 사람들이 의아한 눈빛으로 일제히 리미를 쳐다보았다. “물? 물이 왜 무섭지?” “너무나 춥기 때문에, 물은 순식간에 얼어버립니다. 눈물이나 콧물도 삽시간에 얼고, 오줌을 누어도 오줌이 금방 얼음기둥이 되어버릴 정도입니다. 어이쿠, 이거 식사 중에 실례했습니다. 좌우간 그 정도로 춥고 위험하기 때문에, 잘못하여 얼음이 갈라져서 강물에 빠지는 사람이 나와도 아무도 그를 구하지 않습니다.” “물? 물에 빠진 사람을 왜 구하지 않느냐? 너무 추워서 빠지자마자 죽어버리느냐?” 야율쿠리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자 리미가 이내 말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봐야, 그 사람은 온몸이 젖어 있기 때문에 금방 얼어 죽어버립니다.” “불을 피워 말려주면 될 잣 아닌가?” 키타야의 말에 리미는 살짝 웃었다. “불을 피우기는커녕, 옷을 벗을 틈도 없습니다. 숨을 서너 번 될 때쯤이면 꽁꽁 얼어붙고 마는 거죠 마차 지난번 카린산의 얼음시체들처럼 말입니다. 그런 사람을 건지려고 손이라도 내밀다가 손이 물에 젖으면, 그 손 역시 금방 얼어서 못 쓰게 됩니다. 제가 살던 곳에는 손이 없는 사람이 많은데, 바로 그런 사람을 구하거나 다른 일로 손이 젖어서, 스스로 도끼로 자신의 손을 잘라버린 사람들이라 들었습니다. 그 정도입니다. 손 싸개를 벗을 틈도 없으며, 벗으려다가 다른 손까지 젖으면 양손 다 못쓰게 되는 것입니다. 손이 얼어붙으면 온몸이 다 얼어붙고, 어차피 얼어버린 손은 녹자마자 썩어버리기 때문에 바로 잘라버렸다는군요. 그런데 도끼로 내려치는데도 손이 이미 꽁꽁 얼어버린 상태라 아프지도 않으며 피도 나지 않고 부러지듯 잘라졌다고 하더군요. 추위는 그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무서운 추위가 있다는 말에 흠칫하며 두려워했다. 보돈차르는 한숨을 길게 쉬며 탄식했다. “몽골 평원도 겨울이 되면 몹시 춥지만, 그 정도로 추운 곳 이야기는 처음 듣는다! 대단하구나!” 치우천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구나. 그러니 몸이 젖어 있으면 그야말로 큰일이겠군.” 리미는 사나워 보이는 용모답지 않게 몹시 차분하게 말했다. “맞습니다. 그러나 몸이 젖어 있지 않으면 사람도 추위에는 어느 정도 버틸 수 있습니다. 형요님 마을사람은 너무 빨리 죽은 것 같아 이상합니다. 형요님, 혹시 그날 비가 내리지는 않았는지요?” 형요는 리미의 말에 곧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외쳤다. “맞아 그랬던 것 같아! 그래서 우리는 흙투성이가 되어서 서로 놀렸었지! 기억이 나!” “역시 그렇군요. 괴물이 아무리 무섭다고 해도, 그때 비가 오지 않았으면 사람들이 그렇게 단숨에 꽁꽁 얼어붙지는 않았을 겁니다.” 치우천도 무릎을 치며 감탄했다. “그렇다. 리미! 아마 부족 사람들은 괴물이 나타나자, 마을을 지키려고 모조리 밖으로 나갔겠지! 그래서 비를 맞은 데다 괴물의 찬 기운을 쏘여서, 순식간에 모두 얼어 죽었을 거야!” “그렇더라도 괴물은 몹시 무섭습니다. 아무리 젖은 몸에 차가운 기운을 쐬어도 사람이 그렇게 단번에 얼어붙는다면 몹시 위험합니다. 그런 괴물과 싸우려면 모두가 눈을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눈?” “사람 몸 중에 눈은 항상 젖어 있는 곳이라, 가장 위험하기도 합니다. 물론 눈꺼풀을 계속 깜박거리니 웬만한 추위에는 별일 없지요 그러나 눈을 부릅뜨고 있다가 그렇게 강하다는 괴물의 찬 기운을 쏘이면, 눈이 얼어버릴지도 모릅니다. 저는 그게 걱정되는군요.” “그렇다면 괴물과 싸울 때 눈을 감고 싸워야 한단 말인가? 그래서야 어떻게 싸워?” 야율쿠리가 기가 막히다는 듯 헛웃음을 치며 묻자 치우천이 나섰다. “그러고서야 싸울 수 있겠나? 다른 방법을 찾아야지.” 리미가 약간 쑥스러운 듯이 머리를 긁적였다. “다만 조심해야 한다고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리미, 잘 말해주었다. 부끄러워할 것 없다. 그런데 북쪽 사람들이 추위를 이겨내는 방법에 대해 아는 것이 있느냐?” “따뜻한 가죽옷을 겹겹이 입어야 하는데, 반드시 두 겹 이상으로 입습니다. 안에 입는 것은 털이 몸에 닿도록 해서 몸을 따뜻하게 하고, 밖에 입는 것은 털을 밖으로 나오게 합니다. 그래야 몸이 잘 젖지 않고 묻은 물이 잘 털어지며, 바람을 막을 수 있습니다. 바깥의 것은 털이 긴 짐승 가죽이 좋기 때문에 곰이나 하다못해 늑대 가죽이라도 둘러야 합니다.” 사람들이 입을 모아 좋은 묘책이라며 리미를 칭찬해주었다. 돌연 초초룬이 킥킥 웃었다. “삼백 명의 전사가 모조리 안팎으로 가죽옷을 해 입으려면, 이 근처 짐승들이 씨가 마르겠구나.” “언제 그렇게 사냥을 하겠는가? 다른 부족과 말이라도 주고 바꾸어야지.” 치우천 역시 웃으며 되받자 야율쿠리가 익살을 떨었다. “아, 비휴가 안 오나? 비휴놈이 쳐들어왔으면 좋겠다.” “그게 무슨 소린가?” 키타야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야율쿠리는 키득키득 웃었다. “비휴놈이 오면 늑대를 수천 마리 끌고 올 것이니, 그놈들을 잡아 옷을 해 입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원, 사람, 실없기는.” 잠자코 듣고 있던 치베가 입을 열었다. “활을 더 큰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지난번에 번개범과 싸울 때 보니, 신수들은 너무 커서 보통 화살로는 가죽조차 뚫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 큰 활을 만들어야 한다.” “얼마나 크게?” 형요의 말에 치베가 짐짓 의젓하게 대답했다. “아주 커야 한다. 크면 클수록 좋다. 창보다 훨씬 큰 화살을 쏘게 만들어야 할 것이다.” “나 참, 그렇게 큰 활을 만드는 건 둘째 치고, 그걸 누가 당기고 겨누어 쏘느냐? 치베, 너도 될 말과 안 될 말은 좀 가려서 해라.” 형요가 핀잔을 주자 치우천이 손사래를 쳤다. “큰 활 만들기는 아무래도 쉽지 않겠지만, 치베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 신수와 싸울 때는 우리가 보통 쓰는 무기들은 너무 작아서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니 다른 방법을 써야 한다.” 잠시 말을 끊고 치우천은 모두를 둘러보았다. “아무래도 파루 계곡으로 들어가기 전에 준비를 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무턱대고 들어갔다가 괴물을 만나면 낭패니까요 제가 좀 생각한 게 있는데, 무기를 만들고 그걸 익히는 연습을 한 달쯤 해야겠습니다.” “좋은 생각이네.” “그리고 가죽 말인데, 아무래도 다른 부족들과 바꾸어야 할 것 같습니다. 리미, 한 사람당 가죽이 얼마나 필요하지?” “온몸을 완전히 감싸지 않으면 위험합니다. 그러니 옷 한 벌을 만드는 데 곰 가죽이라면 큰 놈이면 한 장, 작은 놈이면 두 장은 있어야 합니다. 늑대 가죽이라면 적어도 네 장은 있어야 할 겁니다. 그러니 사람 하나당 큰 곰 가죽 두 장이나 작은 곰 가죽 네 장, 아니면 늑대가죽 여덟 장은 있어야 할 겁니다.” 그러자 초초룬이 대강 셈을 해본 다음 한숨을 쉬었다. “장난이 아니네. 늑대 가죽 이천사백여 장? 그걸 구할 수 있을까? 그러려면 우리말을 다 팔아야 할 텐데, 말없이 어찌 움직이고 싸운담?” 그때 요요가 형요에게 눈짓을 하자 형요가 우물쭈물하며 말문을 열었다. “우리가 가진 물건들이 좀 있는데 말야. 우리가 보태도록 하는 게 어떨까?” 형요 자매는 자신들의 처지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그동안 도둑질을 했던 것과 물건을 빼앗긴 사람들이 괴물에게 죽음을 당한 일, 그리고 적지 않은 보물을 쌓아두었는데 그것을 그 근방에 감추어 두었다는 것 등등을 털어놓았다. 형요의 부모님이 수십 년 동안 모은 보물과는 비교할 수 없다 해도, 지나는 장사꾼들의 보물을 많이 털었던지라 늑대 가죽 이천사백 장 값어치는 되고도 남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그러면서 형요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솔직히 훔친 물건이라 쓰라고 주기가 부끄럽긴 하지만......” 치우비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저었다. “형요! 너희는 이제 도둑이 아니니, 그것들은 주인을 찾아 돌려주어야 하지 않을까?” 그때 구르가 웃으며 나섰다. “형요 자매가 물건을 빼앗은 사람들은 괴물이 거의 다 죽였다고 하지 않았나? 그러니 이제는 임자 없는 물건이네. 오히려 우리가 그걸 괴물을 잡는 데 쓴다면, 죽은 사람들도 고마워할 거요 형요님, 정말 고맙구려!” 치우천은 고개를 설레설레 젓다가 별수 없다는 듯 좋다고 말하자 형요는 ‘히히히’ 웃었다. 다음날 형요 자매는 몇 마리의 말을 끌고 그 물건을 가지러 급히 파루 계곡 부근으로 가기로 했다. 치우천은 괴물이 혹여 나타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형요가 자신 있게 말했다. “네 해 동안 괴물을 찾으려 해도 만나지 못했는데, 왜 하필 지금이겠어? 더구나 우리가 물건을 감춘 곳은 파루 계곡과는 좀 떨어진 곳이야. 우리가 서두르면, 열흘이면 돌아올 거야.” “거기가 어딘데?” 초초룬이 묻자 형요는 웃으며 혀를 쑥 내밀어 보였다. “그건 비-밀. 히히히.” 그리고 형요 자매는 급히 말을 달려 떠나갔다. 그동안 치우천은 주변의 굵은 나무를 베고 사냥을 하여 뭔가를 만들도록 지시를 내렸다. 아예 느긋하게 계획을 잡으니 다친 전사들이 나을 시간도 벌고, 다른 부족의 전사들끼리 서로 실력을 겨뤄 기량을 쌓을 수도 있으니 일석이조였다. 다만 삼백 명이 넘는 사람들의 식량이 문제라서 치우천은 그것이 걱정스러웠다. “이 많은 사람들이 사냥으로 살 수는 없습니다. 뭔가 대책이 있어야겠는데요.” “내가 부족에 가서 식량을 좀 실어오겠네.” 키타야가 나서자 치우천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전사들을 보내주신 것만도 고마운데, 그런 신세까지 질 수는 없습니다.” “그릴다면 모두 굶자는 겐가?” 치우천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키타야님, 구르님, 두 분은 이 근방을 좀 아시는지요?” “우리 부족 사는 곳과는 쾌 떨어져 있지만, 그래도 대강은 알지.” 그러자 치우천은 미소를 지었다. “우리는 사람이 많아서 걱정입니다. 그러니 사람이 많아야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되겠지요.” “무슨 소리인가?” “이 근방에서 도둑 떼가 많이 나오는 곳은 어디입니까? 유명한 녀석들이 있습니까?” 키타야와 구르, 보돈차르는 모두 ‘아하’ 하며 무릎을 쳤다. “정말 좋은 꾀다! 도둑들을 잡아 그놈들의 물건을 빼앗자는 게지?” 치우천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우리 정도의 전사들이 모였다면 웬만한 도둑들은 문제가 되지 않을 겁니다. 물론 물건을 주인에게 돌려주어야겠지만, 주인을 못 찾는 물건만 가지고 와도 왜 될 것입니다.” 구르가 웃으며 말했다. “염려 말게. 이 근처는 강하고 큰 부족이 없기 때문에, 도둑들이 우글거린다네.” 키타야도 한마디 덧붙였다. “주인을 찾아줄 것까지야 있는가? 우리가 도둑들을 잡아주기만 하면 물건 주인도 고마워할 것인데.”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저 치우천, 비록 힘없고 고달픈 신세지만 그런 사람들의 물건까지 가지고 싶진 않습니다. 형요의 물건이야 주인들이 대부분 죽었다니 돌려줄 수도 없지만, 그 물건들은 다르잖습니까. 돌려준다 해도 주인을 못 찾을 물건도 왜 될 테니, 그것으로도 충분하리라 생각합니다.” 보돈차르가 웃으며 말했다. “만약 정말 우리가 물건이 부족하다면? 그때도 모조리 돌려주어야할까?” 그 말에 치우천은 정색을 했다. “솔직히 정말 급하다면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는 그리 좋은 사람은 아니거든요 그러나 우리가 괴물을 이기고 형요 부모님의 보물을 얻으면 될 텐데, 구태여 욕심을 내어서 무엇 하겠습니까?” 자못 심각하게 말하는 치우천을 보며 보돈차르가 껄껄 웃었다. “솔직해서 좋군, 그래! 천 안다는 역시 헌원같이 위선을 떨지 않아 좋다. 아마 도둑을 물리쳐 물건을 돌려주어서, 사람들의 인심을 사려는 것도 머릿속으로 생각한 거겠지?” 치우천은 얼굴을 조금 붉히며 말했다. “생각 안 한 것은 아닙니다만, 꼭 그 때문에 그러는 건 아닙니다.” “좌우간 좋다. 좋은 일을 하는 것이고, 우리에게도 좋은 일인데 마다할 이유가 어디 있나? 더구나 전사들은 큰 싸움을 한 다음이라 또 몸이 근질근질할 거다. 전사들 훈련도 시킬 겸, 잘되었다.” “보름입니다. 보름 동안 도둑들을 되는 대로 잡으시고 꼭 맞추어 돌아오십시오.” 마침내 보돈차르와 치베, 양역과 마파람이 오십 명 정도의 전사들을 몰고 떠나고, 야율쿠리와 쇠돌이, 부루벼락이 오십 명의 전사를 몰고 떠났으며, 마지막으로 키타야와 치우비, 초초룬이 오십 명의 전사를 데리고 도둑들을 잡으러 떠났다. 구르와 툰툰 등은 나머지 사람들과 나무를 베고 사냥을 하며 치우천의 지휘 하에 기이한 무기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약속한 열흘이 지나자 형요가 많은 말들에 물건을 가득 쌓아서 돌아왔는데, 생전 처음 보는 네 사람의 험상궂은 사내가 따라오고 있었다. 저들이 누구냐고 치우천이 물으니 형요가 웃으며 말했다. “이놈들은 도둑들이야. 우리가 여자들이라고, 짐을 노리고 밤에 숨어들지 않았겠어? 그래서 잡아 죽이려 했는데, 살려만 주면 뭐든 하겠다고 싹싹 빌지 뭐야. 뭐, 우리도 도둑이었으 니 구태여 죽이는 것도 불쌍해서, 잡일이나 시키려고 끌고 왔지.” 네 사내들은 체구도 크고 험상궂었는데, 형요 자매에게 얼마나 혼이 났던지 형요가 눈만 한 번 흘겨도 엎드려 싹싹 빌며 죽어가는 시늉을 했다. 치우천과 툰툰 등은 그것을 보고 참지 못해 웃음을 터뜨렸다. 점잖은 구르도 오랜만에 크게 웃으며 도둑들에게 소리쳤다. “여자라고 우습게보았다고? 형요 자매가 어떤 사람들인데? 너희가 죽지 못해 안달이 났구나. 타타르족과 몽골족이 모두 쫓아다녀도 잡을 수 없었던 도둑 중에서도 대도둑인데, 너희 같은 피라미들이 감히 어쨌다고? 이거 참 웃기는군, 하하핫.” 형요도 배를 잡고 웃었다. “히히히, 이 큰 누님들을 건드리려 했으니 죽어도 싸지. 종살이시키는 것도 큰 덕을 베푸는 것으로 알아라! 내가 마음을 고쳐먹어서 그렇지, 전 같으면 모조리 껍질을 벗겨서 소금을 뿌려 끓여먹었을 거다!” 도둑들은 그 유명한 도둑 형요가 실은 여자들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기에 이 자매가 무서워 설설 기었고, 또 모인 사람들이 전부 부족장이라는 말을 듣고 더욱더 기가 꺾였다. 게다가 도깨비들을 보고는 몸을 덜덜 떨었으며 더욱이 치우비, 야율쿠리, 초초룬, 알한 등 태산 회의에서 이름을 떨친 용사들과, 유명한 주신 사울아비들까지 한데 모여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그야말로 까무러칠 정도로 놀랐다. 모두들 왁자하게 웃는 가운데 치우천이 점잖게 웃으며 한마디 했다. “형요, 아무리 도둑들이라도 나는 사람들을 종살이시키는 것이 싫다. 이 녀석들도 몸이 번듯하여 밥값은 하게 생겼으니, 싸우게 하여 죄를 씻는 기회를 주는 게 어떨까?” 그 말에 형요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도둑들에게 치우천의 말을 전해주었다. 도둑들은 그 말을 듣고 갑자기 크게 울면서 엎드려 미친 듯이 고개를 조아리며 뭐라 떠들어댔다. 치우천은 알아들을 수 없는 타타르 말 사투리였는데, 구르가 웃으며 그 말을 해석해주었다. “저놈들도 원래 도둑은 아니었다는군. 부족이 망해서 떠돌다가 굶주려서 도둑질로 살아가게 되었다네. 이왕 죽었을 목숨들이니 자네들 같은 영웅들 밑에서 싸울 수 있다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우겠다고 하는군.” 치우천이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형요는 도둑들에게 뭐라고 또 소리쳤다. 아마 받아주겠지만, 열심히 안 하고 딴 마음먹으면 용서하지 않겠다고 겁을 주는 모양이었다. 이윽고 모두가 다시 제 위치로 돌아가 일을 하는 사이, 툰툰은 구르와 그에 대해 다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허참, 그런 도둑들을 마구 받아들여도 될까요?” 심각한 표정으로 툰툰이 말하자 구르가 웃으며 되받았다. “형요 자매도 도둑이었지만, 누구보다도 용감하잖소?” “그래도 형요 자매와는 질이 다르지요 저런 잡 도둑들이 해봐야 뭘 하겠소?” 구르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치우천은 아직 나이는 어리지만 그의 그릇은 저런 자들도 모두 받을 수 있을 만큼 크다요. 나는 그렇게 믿소. 생각해보시오 우리는 모두 다른 부족인데, 어떻게 어떻게 하다 보니 정신도 차릴 겨를 없이 이렇게 한데 뭉치게 되었소. 그전에 우리 부족은, 미아우족은 모두 독벌레와 뱀하고만 사는 괴물들이라 생각 했었다오. 그런데 당신과 벗이 되어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지 않소?” 툰툰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허허’ 웃었다. “나는 타타르족은 잠도 양하고 잔다고 들었소. 그런데 만나 보니 다 같은 사람들이더구먼. 물론 양가죽 냄새가 좀 나긴 합니다만.” 악의 없는 말이라 구르도 껄껄 마주 웃었다. “그런 거요 치우 형제 밑이라면 모두 다 뭉칠 수 있을 거요 타타르족, 미아우족, 키탄족, 몽골족이 한데 어울릴 수 있는 것은 그들 아래뿐일 거요 또 투르크족의 알한에다가 거만한 주신 사울아비들도 몇 명이나 있잖소. 그것도 다 태산회의 때 이름을 떨친 용사들이오 카린의 무라와 소녀는 또 어떻소? 카린족은 다른 부족 일에는 코끝도 안 돌리던 여자들이고, 둘 다 높았던 사람들인데 자기 부족을 버리면서까지 그 형제를 도왔소. 거기다가 형요는 도둑들이었고, 비울걸은 사람들이 다 무서워하는 도깨비 왕이잖았소? 아이쿠, 다들 무서워하는 도깨비들까지 저리 용맹한 전사들로 바꾸어 놓았으니, 더 말해 무엇 하겠소?” 툰툰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보다 그 형제가 누구보다 뛰어난 영웅들이고, 그만큼 사람을 끄는 힘이 있는 것 같구려.” “그들은 먼저 자신이 사람들을 믿고 진심으로 대하기 때문에 사람들도 따르는 것이오. 더구나 모든 사람들을 가리지 않고 받아들이니....... 아마 그보다 그릇이 더 큰 사람은 없을 거요 내가 볼 땐 나이가 들면 헌원이나 유망보다 더 커질 거요.” “하지만 아무나 받아들였다가 배신하는 사람이 나오면......” 툰툰이 말끝을 흐리자 구르는 고개를 저었다. “힘으로 꺾어서 받아들인 사람은 언젠가 들고일어나지만, 마음으로 받아들인 사람을 누가 버린단 말이_또 툰툰 족장, 당신은 저 형제를 배신할 수 있소?” “그럴 수 없소! 그럴 수 없소! 내 아들들이 다 죽고, 부족이 망해도 저 형제를 배신한다는 건 꿈에도 생각할 수 없소 이거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내가 생각해도 정말 묘한 일이구려. 교활한 너구리, 나 툰툰이 이렇게 변하다니.” 구르도 툰툰을 마주보며 동감이라며 웃었다. 치우천은 이런 이야기들이 오가는 것도 모른 채 그저 기이한 무기를 만드는 일에만 신경을 썼다. 치우천이 하도 열성적으로 일하고 자신은 돌아보지 않자 소녀는 속이 상했지만, 같이 자란 무라와 함께여서 그렇게 서운하지는 않았다. 무라는 그저 돌 같은 태도로 조용히 소녀 옆에서 소녀의 이야기나 악기 연주를 말없이 들어주기만 할 뿐,거의 입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소녀는 커다란 위안이 되었다. 사실 열세 자매 중에서도 무라는 그런 성격 때문에 오히려 자매들이 더 좋아했고 큰언니처럼 따르던 터였다. 무라는 가끔 카와 슈를 타고 돌아다니는 것 외에는 없는 사람처럼 조용히 지냈다. 무기를 만들다 보니 어느덧 약속한 보름이 되었고, 세 갈래의 전사들이 돌아왔다. 그들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도둑들의 소굴을 쳐부쉈으며 많은 물건과 가축들을 빼앗아 가지고 왔다. 모두가 이미 험한 싸움을 겪어 자신감에 넘치는 전사들이고, 용감한 영웅들의 지휘를 받으니 도둑들 따위는 상대도 뵉 수 없어서 조금 다친 전사가 몇 있을 뿐, 죽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치베의 화살이나 야율쿠리의 용맹, 치우비의 힘과 기술 앞에 도둑들은 추풍낙엽처럼 나가떨어지고 전의를 잃어 대부분 항복해서, 큰 싸움조차 벌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많은 물건을 주변의 부족들에게 돌려주었는데도 물건과 가축들은 상당히 많아서 삼백 명이 아니라 천명도 무장시키고 일 년을 먹고살아도 남을 만한 양이었다. 게다가 보돈차르와 키타야는 각각 백 명이 훨씬 넘는 사람들을 이끌고 왔는데, 절반은 항복한 도둑들이고, 절반은 근처 부족들 중 따라 가겠다고 나선 젊은이들이었다. 보돈차르는 치우천과 비슷한 생각으로 그들을 받아들였고, 키타야는 마음 착한 치우비가 옆에서 도둑들이라도 죽이지는 말자고 부탁하여 데리고 온 것이다. 따라온 사람들 대부분은, 이 젊은 영웅들의 이야기를 듣고 피가 끓은 근처 작은 부족 젊은이들이 몇몇씩 모인 무리였다. 이 일대는 큰 부족이 없어서 부족들은 항상 도둑 떼에 시달려 왔는데, 그들을 물리친 영웅들 밑에서라면 지금보다 사는 게 훨씬 나으리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다. 그것은 치우천조차도 생각지 못했던 의외의 수확이었다. 다만 야율쿠리는 도둑들을 모조리 쓸어버리고 삼사십 명의 부족사람들만 데리고 왔는데, 치우천이 도둑들도 굴복시켜 부하로 삼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입맛을 쩝쩝 다셨다. “제길, 그럴 줄 알았으면 다 죽이지 말 걸 그랬나.” 아무튼 치우천은 새로 삼백 명 가까운 사람들이 늘어났고, 많은 물건이 생기자 몹시 좋아했다. 그러나 치우천은 새로 온 사람들을 모두 받아들이지는 않고, 하나하나 만나본 다음 힘이 세거나 믿을 만해 보이는 사람들만 받아들이고, 나머지 몇 십 명은 그냥 놓아주거나 돌려보냈다. 가족이 있는 사람은 모두 이곳으로 데리고 오게 하고 싶었으나 그것은 괴물을 물리치고 정착할 곳을 찾은 다음으로 미루었다. 그것만으로도 이백 명 가량의 전사들이 새로 생겼다. 그리고 치우천은 얻어 온 물건들을 쌓아놓고, 전사들이 무장하고 한두 달을 버틸 물건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조리 다른 부족 전사들에게 나눠주려 했다. 그것을 보고 보돈차르와 키타야,구르 등이 펄쩍 뛰며 말렸다. “우리는 괜찮네. 자네는 이제 새로 부하들이 생겼으니 물건이 많이 필요할 것 아닌가?” 야율쿠리도 외쳤다. “야야, 천! 정말 주려는 거야? 전에 보물 이야기는 전사들 기를 세워주려고 한 거야. 그럴 필요 없다구!” 그러나 치우천은 완강히 말했다. “아닙니다. 얻은 것은 나눠가져야 하는 법입니다 각 부족장들께서는 많은 전사들을 잃었으니, 그 가족들에게라도 주십시오. 더구나 이건 제가 얻은 것도 아니고 부족장님들과 전사들이 싸워서 얻은 것 아닙니까? 이만큼 남겨두는 것만도 제겐 염치없는 일입니다.” 치우천은 끝끝내 고집을 피워 물건들을 쓸 만큼만 남기고 모조리 각 부족장과 전사들에게 고루 나눠주었다. 부족장들은 사양하기는 했으나 일단 물건을 받으니 고맙고 기뻤다. 막대한 보상을 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왜 많았으나, 그보다도 치우천의 배려에 마음이 흐뭇했다. 그러고 나자 치우천이 입을 열었다. “이제 새로 온 전사들이 있으니 부족장들께서는 염려 마시고 돌아가 부족을 돌보셔도 됩니다. 그리고 가겠다는 전사들은 다 데리고 가십시오.” “무슨 소리냐? 괴물을 잡고, 네가 자리 잡는 걸 보기 전에는 안 간다! 제길! 나를 뭘로 보고 그런 소리를 하는 거냐? 이 야율쿠리, 한번 도와주기로 한 거면 끝까지 도와준다!” 야율쿠리가 외치자 다른 부족장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치우 형제는 너무도 고마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러나 치우천은 다시 목 메인 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집을 떠난 지 오래되었으니 돌아가고 싶어 하는 전사들도 있을지 모릅니다. 이제 사람은 충분하고, 더 모을 수도 있으니 돌아가고 싶어 하는 사람은 보내주십시오.” 간곡한 치우천의 말에 부족장들도 선선히 동의했다. 오히려 사람 수가 늘어나서, 오래 머무르는 것이 폐가 될 수도 있다고 여긴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떠나려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았고 그나마 집에 급한 일이 있는 사람들뿐이었다. 그들도 하나같이 다시 돌아와 같이 싸우기를 원했다. 치우 형제는 비록 은연중 부족장들보다도 위로 받들어지는 처지였지만 뽐내거나 위세를 부리지 않았고, 떠나는 말단 전사들까지 일일이 진심으로 환송해주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부족장들이 너무 그러면 체면이 서지 않는다고 말했으나 치우천, 치우비는 듣지 않았다. “체면은 남이 나를 생각해줄 때 생기는 것이지, 내가 나를 생각해 준다고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린 저 전사들 모두가 내 벗이고 형제들인데, 우리가 어떻게 마중조차 안 할 수 있단 말입니까?” 말단 전사들은 이런 치우 형제의 태도에 몹시 감격하여 눈물까지 흘리면서 내키지 않는 발길을 돌렸다. 보돈차르는 먼발치에서 그것을 보며 치베에게 물었다 “치베, 네가 보기에 저 형제는 어떤가?” 치베가 웃으며 간단하지만 명확하게 대답했다. “제가 대신 죽어도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보돈차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다. 저들의 행동 하나하나를 보아두어라. 지금 저런 행동이 만약 머리로 생각하여 하는 것이라면 그 사람은 정말 무서운 사람이다. 헌원이 바로 그런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저 형제는 조금도 머리로 생각하지 않고 마음 내키는 대로 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저절로 따르게 만들고 있다. 나도 저들 형제에게서 배울 것이 많구나.” 보돈차르는 과묵한 성격이라, 말로써 남을 칭찬하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그것을 아는 치베는 마치 자신이 칭찬을 들은 것처럼 좋아 연신 싱글벙글했다. 곧이어 보돈차르가 한마디 덧붙였다 “허나 저들은 아직 젊다. 나이가 들고, 더 높아지면서까지 저런 마음을 간직할 수 있다면, 저들은 분명 세상에 길이 남을 큰일을 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변한다면‥‥ 어찌될지 모르겠군.” “그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치베가 단호하게 말하자 보돈차르는 살짝 웃으며 되받았다. “나도 그러기를 바란다.” 우린 구슬의 힘 떠나는 전사들을 마중한 뒤, 치우천은 새로 만든 무기들을 부족장들에게 보여주었다. 부족장들은 그것들을 보고 깜짝 놀랐고, 무엇에 쓰는 것인지를 물었다. 그 무기들은 그만큼 예사로 쓰는 것들과는 달랐다. 가죽을 씌운 나무 방패들도 있었는데, 너무 크고 무거워서 들고 싸울 수도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끝을 뾰족하게 불에 그을린 아주 크고 기다란 통나무와 그 옆으로 길다란 나무막대기들을 열 개도 넘게 꽂아놓은 것은 무슨 물건인지 도통 알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그릇을 구울 줄 아는 사람에게 시켜서 급히 빚어 구워낸, 어린애 머리통만한 거칠고 동그란 그릇들이 잔뜩 쌓여 있었을 뿐, 흔히 무기로 생각하는 칼이나 창 따위는 하나도 없었다. 이것으로 어떻게 싸움을 한다는 것인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사람들이 의아해하자 치우천은 웃으며 대답했다. “잘될지 모르겠습니다만 한번 해봅시다. 연습을 해야 신수를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오백 명으로 불어난 전사들을 다시 치우천이 가려서 힘이 센 삼백 명이 추려지고, 나머지 이백 명은 가죽을 바꿔오고 옷을 만드는 일을 맡았다. 삼백 명은 또다시 각각 백 명씩으로 나누어 보름간 열심히 훈련을 했는데, 치우천은 굳이 부족장들이 아니라 마음에 두고 있던 재주를 지닌 사람들에게 각각의 훈련을 맡겼다. 구르가 한 부대를 맡고 양역이 한 부대를 맡았으며 의외로 마파람에게 한 부대를 맡겨 훈련을 시킨 것이다. 더구나 각 부대는 부족 구분조차 없이 모두 한데 섞여 있었다. 새로 뽑은 도둑들조차 몽골이나 키탄의 전사들과 나란히 땀을 흘렸다. 그러나 야율쿠리에게는 아무런 일도 주어지지 않았다. 자존심이 상한 야율쿠리가 드러내놓고 투덜거렸다. “나도 잘할 수 있는데, 그냥 놀고먹으란 거냐? 내가 데려온 키탄족 전사들까지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마구 섞어버리다니, 나를 무시하는 거냐?” 치우천은 항상 그랬던 것처럼 웃는 낯으로 야율쿠리를 달랬다. “야율쿠리, 너를 내가 왜 무시하겠느냐? 너는 더 중요하게 해야 할 일이 있다. 너만이 아니라, 다른 분들도 모두 할 일이 있다.” “정말 더 중요한 일이냐? 그게 뭐냐?” 야율쿠리가 금세 좋아 싱글거리자 치우천이 웃으며 말했다. “우리는 신수를 유인해야 한다. 보통 전사들에게 시키기에는 너무 위험한 일이니, 너처럼 강한 용사들이 나서줘야 하지 않겠어?” “제기랄! 유인? 그럼 또 도망치는 일이냐?” 야율쿠리가 웃음을 머금고 짐짓 화난 듯 외치자 모두 껄껄 웃었다. 사실 신수를 직접 상대하여 유인하는 일은 분명 몹시 위험할 것이었다. 그렇기에 치우천은 피해를 극소화하기 위해 가장 힘이 세고 재주가 많은 주요 인물들로 하여금 그 일을 시키려고 한 것이다. 그런 일은 일반 전사를 시키는 것이 상례였으나 치우천은 여기서부터 파격적인 방법을 제안한 것이다. 다들 부족장에다 용사들이었지만, 대부분 젊고 혈기 왕성한 사람들이라 치우천이 그들을 달래기에는 전혀 무리가 없었다. 그 모든 준비는 차질 없이 착착 이루어져 갔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치우천은 부족장들을 모두 불러 모았다. “이제 형요의 마을로 들어갑니다.” “괴물은?” 형요가 조바심이 나는 듯 묻자 치우천이 대답했다. “거기 있다 보면 나타나겠지.” “괴물을 찾는 게 아니란 말야?” “너희가 네 해 동안 찾아다녀도 찾지 못한 괴물을 내가 무슨 수로 찾겠어? 더구나 괴물을 찾아도 이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한꺼번에 괴물에게 몰려간단 말인가? 그러니 괴물이 스스로 오게 만들어야 해.” 치우천이 조목조목 설명해주자 형요는 납득이 되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들도 그 방법밖에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야율쿠리는 약간 김이 빠지는 듯했다. “만약 괴물이 안 나타나면?” “안 나타나면 할 수 없겠지. 허나......” 치우천은 말하다가 형요의 얼굴을 슬쩍 보고 웃으며 계속 말을 이었다. “내 생각에는 머지않아 나타날 거야. 여기 이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 살게 되면 떠들썩해질 것 아니겠어?” “만약 괴물이 없.......아니, 이미 떠나버렸으면 어쩌는가?” 치베의 말에 형요가 대뜸 눈을 부릅떴다. “없긴 왜 없어! 치베 너.....!” “나는 없다고 말하지 않았다. 떠났으면 어쩌냐고 말하는 거다.” “분명히 없......다고 말하려 했잖아 아직도 내 말을 안 믿는 거니?” “아니다! 아니야!” 치베가 입 한 번 잘못 놀렸다가 형요에게 호되게 당해 땀을 뻘뻘 흘리는 동안 키타야가 신중하게 나섰다. “그럴 수도 있네. 괴물이 마을을 덮친 것은 무슨 까닭이 있었을 것이네. 그게 뭔지는 모르지만 괴물이 목적을 달성하고 떠나버렸으면 어쩌는가?” 보돈차르도 한마디 끼웠다. “차라리 떠나버렸으면 문제가 없다. 그러나 만약 몇 년이 지난 다음에 돌아오면 어쩔 건가? 그때까지 계속 괴물만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치우천은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군요. 허나,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왜 그런가?” “제 생각대로라면 괴물은 떠나지 않았을 겁니다. 파루 계곡 부근에 계속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데요.” “어떻게 그렇게 단정 짓는가?” “마을사람들이 죽은 것은 네 해 전의 일입니다. 그 전까지는 형요자매 이름은 있지도 않았죠. 부모님들이 대신 그...... 도둑질을 했을 테니까요 그러나 괴물이 부모님을 죽인 후에 형요 자매는 도둑질을 시작했고, 이름이 알려졌죠. 그렇죠?” “그렇지.” “그리고 괴물이 지나가는 상인들을 죽인 건 형요 자매가 활동하는 동안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형요 자매가 그렇게 악명이 높아진 게 아닙니까? 그러니 그 괴물은 아직도 그 부근에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렇군! 그러나 괴물이 만약 우리를 보고 피한다면?” 구르의 말에 치우천이 고개를 저었다. “피해주면 차라리 다행입니다만, 그럴 것 같지 않습니다. 한 번에 백 명의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괴물이라면 신수가 틀림없고, 신수라면 우리 사오백 명이 몰려온다 해서 그걸 두려워할 리 없죠. 저는 도리어 괴물이 너무 빨리 덤벼들어서 기습을 받을까, 그게 더 걱정되는데요.” “만약 그렇게 된다면?” 양역이 걱정스러운 듯 묻자 치우천은 걱정 말라는 듯 웃었다. “그러면 내가 시간을 끌어봐야지.” “어떻게?” “어떻게라니,! 흠, 뭐 말이라도 해서 시간을 끌어봐야 하지 않겠어?” 황당할 정도로 솔직하고 태평한 태도인데도, 치우천이 말하면 그게 황당하지 않고, 정말 그렇게 될 것 같은 안도감마저 느끼게 했다. 항상 웃음을 잃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그만큼 대단한 재주를 보여주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허나 그것은 치우천만이 갖고 있는 희한한 매력 중의 하나였다. 그 말만으로 사람들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신중한 구르가 또다시 물었다. “신수와 어떻게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지?” “이걸 쓰면 됩니다.” 그러면서 치우천은 품속에서 고운 가죽으로 잘 감싼 작은 물건을 꺼냈다. “그게 뭐지?” “이건 ‘우린’ 구슬이라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진작 이야기했어야 했는데, 워낙 경황이 없어서 잊어버렸군요.” 우천이 쑤앙마이에게서 우린 구슬을 얻는 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에 모두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무라는 그때 그 광경을 보았지만, 워낙 과묵한 성격이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치우천은 가죽을 풀어 우린 구슬을 보여주고 그에 얽힌 사연을 설명해주었다. 그것은 아주 옛적에 선인들이 만드신 구슬인데, 신수와 이야기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힘이 있다고 합니다. 지난번에 카린산에서 싸웠던 괴물, 아수타란도 원래 선인이었는데 이것을 얻다가 괴물이 되어버렸다는군요.” 는 듯한 붉은빛이 도는 우린 구슬을 보고 모두가 신기해했다. “정말 그걸로 신수와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쑤앙마이께서 하신 말씀이니, 틀림없을 것입니다.” “그걸 사용하는 무슨 방법이나 주문 같은 게 있는 건 아닐까? 그건 아는가?” 신중한 구르가 걱정하자 치우천은 ‘아’ 하며 놀라는 소리를 내다가 다시 웃었다. “그렇군요. 그 생각은 미처 못했습니다. 그러나......만약 그런 주문 같은 게 필요했다면 쑤앙마이께서 말해주셨을 테니, 그냥 가지고만 있어도 되겠죠.” “정말 그럴까? 시험해보는 게 어때?” 치우비 역시 걱정스런 눈치를 보이자 치우천은 피식 웃으며 농담을 했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만...... 신수가 있어야지. 네가 끌고 올래?” “아이쿠, 형도 참.” 치우천은 웃으며 모두를 둘러보았다. “좌우간 어떻게든 되겠지요. 제아무리 상대가 신수라 해도, 우리도 준비를 할 만큼 했으니 그리 쉽게 당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들 용기를 냅시다.” 그로부터 이틀이 지난 날, 치우 일행은 모든 전사들을 끌고 파루 계곡으로 향했다. 오백 명에 달하는 전사 무리가 길을 가는 것이라 겁 낼 것은 없었지만, 사람 수가 많고 새로 만든 무기들이 무거워 길을 가는 속도는 상당히 느렸다. 형요는 열흘 만에 파루 계곡까지 왕복했지만, 전사들은 꼬박 보름이 넘어서야 파루 계곡 언저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앞장섰던 치우천이 말문을 열었다. “형요, 이제 파루 계곡까지는 그리 멀지 않지?” “오늘밤은 쉬고,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면 해지기 전에 도착하지.” “좋군. 이제야 왔구나. 그런데 혹 이 근처에 마을이 있어?” “저 앞에 가면 작은 타타르족 마을이 하나 있는데, 그건 왜? 우리가 다 묵을 만큼 큰 마을이 아냐.” “그래도 좋으니, 거길 좀 들러봐야겠어. 길을 알려줘.” “나도 같이 가면 되잖아?” “너는 워낙 유명한 사람이니 안 가는 게 좋을걸.” 치우천은 나머지 전사들에게 마을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야영을 하라고 이르고 치우비와 양역, 타타르 사람인 키타야와 구르, 몽골족인 보돈차르와 치베 등만 데리고 마을로 향했다. 그들은 마을사람을 놀라게 할까 봐 무기를 감추고 장사꾼처럼 보이게 하여 마을로 들어갔다. 아직도 치우가람 형제가 내건 현상금이 있을지도 모르기에 치우천, 치우비의 이름은 입에 올리지 않도록 조심했다. 그곳엔 대략 사오십 채의 천막이 있었고, 양을 치며 사는 전형적인 타타르족의 작은 마을이었다. 키타야는 마을에 들어가자 곧 부족장을 찾아 약간의 선물을 건네고 파루 계곡으로 가는 길을 물었다. 그러자 부족장은 놀라면서, 정색을 하고는 그곳은 몹시 위험하니 다른 길로 가는 것이 좋을 것이라 권했다. 키타야가 왜 그러냐고 묻자, 부족장은 그곳에는 형요 형제라는 무서운 도둑 형제가 있어서, 지나는 상인들을 모조리 죽인다고 말했다. 키타야는 속으로 웃으며 지금도 있느냐, 그렇게 무섭느냐고 묻자, 부족장은 고개를 저으며 한탄하며 말했다. “그놈들이야말로 이 근방의 재앙이오! 바로 보름 전에만 해도 마흔 명이 넘는 타타르족 장사꾼들이 지나갔다오! 그런데 그들은 파루 계곡에 들어선 다음날, 모조리 시체로 변해서 발견되었소! 상처 하나 없고 몸아 흐물흐물해진 이상한 시체로 변했단 말이오! 형요 형제는 너무 악랄하고 무서운 놈들이니.......” 그 부족장은 자기가 그토록 겁을 주는데도, 이 사람들은 무서워하기는커녕 도리어 잘되었다는 듯 서로 마주보며 미소를 머금는 것을 보고 어안이 벙벙했다. 부족장은 사람 좋은 늙은이라, 몇 번이나 간곡하게 만류해보았지만 그들은 고맙다는 말만 하고는 등을 돌려버렸다. 부족장이 탄식하듯이 중얼거렸다. “또 이름을 날리려고 형요 형제에게 죽는 사람들이 나오는구나. 자기네들이 무슨 끽구나 치우비라면 모를까, 불쌍하구나! 불쌍해!” 그 말을 듣고 키타야와 구르는 자신들 앞에서 걸어가는 치우비의 넓은 등을 보고는 참지 못해 껄껄 웃었다. 보돈차르 역시 나지막이 껄껄 웃었다. 치우비나 치우천은 타타르 말을 잘 몰라서 왜 그들이 웃는지 몰랐으나 부족장은 그것을 보고 화가 나서 외쳤다. “이 바보 같은 사람들! 반드시 후회할 거요! 형요 형제는 사람이 아니라 괴물이오! 괴물! 당신들은 다 죽은 목숨이오!” 마을 어귀를 나오면서 치우천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또 사람들이 죽었다는 것은 안 되었지만, 좌우간 괴물이 있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군요. 더구나 분명 파루 계곡 부근에 어슬렁거리고 있을 겁니다.” 순간 치베가 머리를 긁적였다. “제길, 이제는 정말 형요를 볼 낯이 없구나! 창피해서 어쩔까! 나는 그 말을 안 믿었었는데...... 정말 괴물이 설치고 있었다니!” 치우천이 웃으며 치베를 달랬다. “치베. 너도 조심하느라 그런 것이고 형요도 이젠 좋은 벗이니, 지나간 일로 그렇게 생각할 필요 없다. 그동안 형요 자매에게 수도 없이 치사하다느니, 쩨쩨하다느니 욕을 먹었으니 그 대가는 충분히 치른 셈이지.” 그때, 마을을 나서려는 치우천의 앞을 조그마한 타타르족 어린아이 하나가 달려와 막아섰다. 지저분하고 좀 쇠약해 보이는 그 아이는 열 살 가량 되어 보였다. 키타야가 쫓아내려 했지만 아이는 자꾸 뭔가 전할 말이 있다고 외쳐댔다. 키타야가 듣지도 않고 한 대 때려서 보내려는 것을, 아이들을 좋아하는 치우비가 말렸다. “뭐 그럴 것까지 있습니까?” 치우비는 웃으며 아이에게 허리에 찼던 주머니에서 말린 고기를 한 움큼 꺼내서 주려 했다. 그러나 아이는 고개를 저으며, 꼭 전해야 할 말이 있다고 타타르 말로 떠들어댔다. 구르가 그것을 보고 뭔가 석연치 않다는 생각에 아이에게 물었다. “무슨 전할 말이 있다는 거냐? 우리가 누군 줄이나 아느냐?” “틀림없어요. 낯선 일곱 사람이 이맘 때 찾아온다고 했어요. 그 예쁜 누나가 한 말이니 틀릴 리 없어요! 틀림없이 아저씨들일 거예요!” “누가 그랬는지 모르지만, 사람 잘못 봤다.” 구르가 그저 웃어넘기려는데, 아이는 계속 떼를 쓰듯이 외쳤다. “아니에요, 아저씨들이에요! 누나가 말한 것하고 똑같은 걸요! 누나가 말했다구요! 그 사람들은 아주 강한 용사들이고, 부족장들인데 반드시 이 말을 전해야 한다구요!” 구르와 키타야는 좀 이상하다 싶었지만 시치미를 뗐다. “우린 강한 용사도 아니고 부족장도 아니란 말이다.” 아이는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닐 거예요_ 아저씨들 중에 분명 그...... 뭐더라, 맞아요. 치우천 치우비 형제가 있을 거예요!” 그 말을 듣는 순간, 키타야와 구르의 안색이 확 변했다. 구르는 재빨리 아이의 손목을 잡았고, 키타야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누군가가 자신들을 알아보고 함정에 빠뜨린 것이 아닌가 싶어서였다. 그러나 아이는 당황한 기색 없이 생글거리며 웃었다. “정말 틀림없군요! 누나 말씀이 맞았어요. 아저씨들이 몹시 놀랄 테지만 안심하라고 했어요. 저는 아무에게도 그 말을 한 적이 없어요. 엄마 아빠에게도 말하지 않았다구요. 누나 말을 잘 들었단 말이에요.” 키타야와 구르는 몹시 황당하여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어서, 함정에 빠진 것 같지도 않았다. 키타야와 구르는 곧 치우천 등에게 그 말을 전해주었다. 치우천도 크게 놀라며 구르를 사이에 두고 아이에게 물었다. “그 누나가 누구냐?” 아이는 ‘헤헤’ 웃었다. “누군진 몰라요 아주 예쁜 누나였어요.” “언제 그런 일을 시켰지?” “일 년 전 쯤요. 하지만 난. 똑똑해요. 절대 잊어버리지 않았다구요.” 모두가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아이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일 년 전에 치우천 일행이 이 작은 마을을 찾아오리란 걸 안 사람이 있단 말인가?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사람이 일 년 전에 왔다구? 혼자 왔느냐?” “아니에요 굉장히 많은 사람들과 말...... 아주아주 큰 가마가 저 아래쪽을 지나갔죠. 아주아주 큰 부족장이랬어요. 그래서 마을이 다 난리가 났어요. 그런데 그날 밤에 내가 놀고 있는데, 아주아주 예쁜 누나가 와서는 나에게 부탁했어요! 세상에 그렇게 예쁘고 좋은 사람은 처음봤어요. 그 누나가 일 년 후에 일곱 사람이 들릴 건데, 그중 치우천 치우비라는 사람이 있을 테니.......” 치우천이 더 참지 못하고 부르짖었다. “맥달이다!” 치우비도, 양역도 얼굴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놀라 말을 더듬거렸다. “맥달님이....... 맥달님이 말을 남기셨던 거야!”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여자는 맥달이 틀림없었다. 일 년 전쯤이라면 주신 한웅이 태산 회의를 끝내고 지나가던 무렵이다. 추방당한 치우 형제는 몰랐지만 그때 사와라 한웅은 기습을 한 번 받자 또 위험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여, 길을 다르게 잡아 멀리 서쪽으로 나갔다가 다시 돌아서 신시로 돌아갔다. 그 와중에 이 작은 마을 부근에서 하룻밤을 지낸 적이 있는데, 그때 맥달이 마을의 이 꼬마에게 말을 남긴 것이다. 치우 형제는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었어도 대강의 상황은 그럭저럭 이해가되었다. 그러나 너무도 놀라웠다. 맥달의 예언이 이 정도로 정확한 것일 줄은 꿈에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지라 치우천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사람이 아냐! 그 여자는 사람이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놀랍다거나 반갑다기보다는 거의 공포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일 년 동안 자신이 걸어온 길은 스스로도 바로 앞을 짐작할 수 없었던 가시밭길이었다. 그런데 맥달은 모든 것을 정확히 꿰뚫어서, 치우 형제가 하필 이 마을에, 그것도 정확히 일곱 사람만 데리고 온다는 것까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치우천은 부르르 떨리는 몸을 주체할 수 없었다. 여태껏 수없이 죽을 고비를 넘기고, 신수나 대선인과 맞닥뜨렸어도 한 번도 이렇듯 떨린 적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이것은 힘이니 죽음이니 하는 것을 애당초 초월한, 공포라고도 할 수 없고 놀라움이라고도 할 수 없는 근원적인 두려움이었다. 치우천이라는 존재, 아니, 온 세상의 존재가 맥달 앞에서는 한낱 장난감이고, 먼지무더기만도 못한 것 같았다. 그것은 그러한 존재의 불안감에서 오는 떨림이었다. 아이는 치우천이 떠는 것을 보더니 생글거렸다. “아저씨가 치우천님인 것 같네요 누나가 살짝 그렇게 말했거든요 제일 많이 떠는 사람이 치우천님이라구요. 히히, 이건 말하지 말랬는데.” 키타야와 구르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눈을 감고 타타르족이 믿는 신의 이름을 수십 번이나 외웠다. 한참 지난 후에 아이의 말을 전해들은 치우천은 이제 거의 까무러칠 지경이었고, 다른 사람들도 너무 놀라서 현기증까지 났다. 냉정하고 침착한 보돈차르마저도 순간 다리를 휘청거렸다. 그러나 아이는 자신이 말할 때마다 큰 어른들이 계속 놀라는 것이 재미있다는 듯 신이 나서 말했다. “그 누나가 전하랬어요. 치우천님이란 분에게요 아이쿠, 거 뭐더라, 우....... 우....... 맞아. 우린! 우린 구슬을 꺼내서 양손에 꼭 쥐고 마음으로 간절히 바라야 쓸 수 있다구요.......” “우린 구슬이라고!” 치우천은 아이의 타타르 말은 알아듣지 못했으나 아이의 입에서 우린이라는 이름이 나오는 순간 참지 못하고 다시 부르짖었다. 그러나 아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신이 나서 말했다. “누나가 한 가지 더 말했어요. 누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치우천님 편이니, 꼭 믿어 달라구요. 이건 부탁이래요. 그리고 그때의 궁금증은 이미 다 풀렸을 테고, 앞으로는 위험한 일이 드물 테니 큰 걱정은 하지 말라구요. 그렇게 예쁜 누나가 아저씨 편이니, 아저씬 좋겠어요.” 사람들은 귀신에 흘린 듯, 어찔어찔해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치베는 너무도 두렵고 무서워서 땅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신도 울루의 귀신진에도 놀라 기절까지 했었지만, 그때보다 더 두렵고 놀란 것 같았다. 치우비도 놀라 얼굴이 허옇게 질렸으나 애써 정신을 가다듬었다. “맥달님은 정말 놀라운 분이시구나. 좌우간 그런 분이 우리 편이니 두려울 것 없다. 정신 차리자. 정신 차려!” 치우비는 멍하니 손을 뻗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는 무심코 주머니에 찬 구리 단검을 끌러 아이에게 내밀었다. 구리칼은 귀한 물건이었지만 치우비는 아이들에게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인심이 좋아서 몸에 지닌 것을 아낌없이 주곤 했다. 구리 단검을 받은 아이는 좋아서 입이 찢어져라 웃으며 외쳤다. “구리칼이다! 구리 칼! 와!” 키타야는 멍한 상태에서 간신히 입술을 떼었다. “그래, 착하지? 그건 네 거다. 오늘 한 이야기는, 앞으로 누구에게도 말해선 안 된다. 알았지?” 아이는 기뻐 팔짝팔짝 뛰며 말했다. “그럼요. 그때 누나가 그랬어요. 그분들이 구리칼을 줄 거라구요. 부모님이 어디서 났냐고 물으면, 그분들이 떨어뜨린 걸 주웠다고 하랬어요. 그러면 혼나거나 다른 사람들이 캐묻지 않을 거라구요. 하하! 신난다!” 아이는 신이 나서 팔짝거리며 벌써 저쪽으로 달려갔다. 키타야는 그 말을 듣고 자기가 지금 꿈을 꾸는 것은 아닌가 싶어 뺨을 몇 번 꼬집어보았다. ‘뭘 주고, 그걸 어떻게 쓸 것인지까지 알아맞히다니! 그것도 일년 전에! 아, 그 여자야말로 신이 아닐까? 대선인이 아닐까?’ 보돈차르 역시 약간 멍한 표정으로 키타야에게 왜 그러냐고 묻자, 키타야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몰라도 됩니다. 아니 모르는 게 더 낫습니다!” 마을로 돌아오는 내내, 치우천의 표정은 어두웠다. 치우비나 다른 사람들은 치우천이 왜 그런지 이해할 수 없었다. 치우비가 조심스럽게 형에게 물었다. “천, 왜 그래? 기분이 좋지 않아 보여.” 치우천은 애써 얼굴에 진 그늘을 걷으며 말했다. “그래 보이느냐?” “그래 보여.” 치우천은 씁쓸하게 웃으며 피하듯 발걸음을 옮겼다. 치우비가 바짝 형에게 다가갔다. “나도 놀랐고, 다들 놀라기는 마찬가지야. 그러나 그렇게 언짢아할 것은 없잖아? 맥달님은 우리를 도우려고 그런 말을 남긴 것인데......” 고개를 저으며 치우천은 의외로 고집스레 말했다. “나는 그게 기분 나쁘다.” “그럴 게 뭐 있어? 맥달님이 저리 신통하시니......” 그때, 웃으며 이야기하는 치우비의 말을 치우천은 매몰차게 딱 끊어버렸다. “그 여자 이야기는 안 했으면 좋겠구나.” 형의 뜻밖의 말에 치우비는 흠칫하며 얼굴에 웃음기를 거두었다. “형, 왜 그러는 거야? 좀 이상해 보여.” “이상할 것 없다.” “왜 그러는 거지?” 치우비가 집요하게 묻자 치우천은 이윽고 한숨을 내쉬었다. “답답해서 그런다. 무섭기도 하고...... 그 여자 생각만 하면 모든 것이 헛된 것 같고.....” “그런 생각을 왜 해?” “생각해보려무나. 그 여자는 모든 것을 다 안다. 우리가 죽지 않고 일 년 후에 우린 구슬을 얻어 이 마을로 오고, 괴물을 상대해야 한다는 것. 그러려면 우린 구슬의 힘이 필요한데 구슬을 어떻게 쓰는지 잘 모른다는 것까지 말야.” “그렇지. 하지만 그러니까 더 마음 든든한 것 아니겠어?” “든든하다기보다 무섭고, 두렵다. 비야, 너는 앞날이 다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니? 아니면 사람이 생각하고 결심하는 데 따라 변하는 것이라 생각하니?” “어, 그건......” “난 그게 불안한 거야. 맥달이 앞날을 다 알아보고 맞힐 수 있다는 건 앞날이 다 정해져 있다는 소리인 것 같아. 그렇다면 우리는 모두 꼭두각시란 말이냐? 우리만 아니라, 세상에 태어나 살아가는 그 많은 사람들이 모조리 정해진 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란 것이냐? 그렇다면 우리는 왜 피를 흘리며 싸우고, 온 힘을 바쳐 애를 쓰는 것이지? 애당초 그렇게 되도록 정해져 있는 것인데? 나는 헌원에게 큰소리를 쳤다. 앞날이 다정해져 있으면 어떻게 되든 이루어질 것이니 애쓸 필요 없을 것이고, 정해져 있지 않는다면 예언도 사람이 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깨질 수 있으니 그런 것을 믿을 필요가 없다고 말야. 그런데......” 치우천은 단숨에 말을 쏟아 붓다가 잠시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아무래도 맥달의 하는 양을 보니, 앞날은 다 정해져 있는 것 같구나. 나는 힘이 빠진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구나. 다 그렇게 되도록 정해져 있다면, 제기랄! 내가 왜 이렇게 힘을 써야 한단 말이냐? 내 삶은 내 것이다! 내가 생각한 대로 이루고 싶은 것이지, 정해놓은 대 로 따라가고 싶지는 않다! 허나 모든 것이 이미 다 정해져 있다면.......차라리......차라리 아무것도하지 않고 숨어 버리고 싶다. 아니, 그냥 이 자리에서 죽어버리는 게 더 속 시원하겠구나!” 이를 악물고 말하는 치우천의 모습에 치우비는 깜짝 놀랐다. “그게 무슨 소리야? 형답지 못하게!” “아니다. 자부선인께도 할말은 다하려고 대들었던 나다! 언젠가는 세상을 전부 편안하게 하려고, 그것만 바라보고 어떤 편한 일도, 내 몸 하나 편하게 하는 일에도 눈을 돌리지 않았고 목숨을 아낀 적도 없다 누구에게도 굽힌 적이 없고, 앞으로 굽힐 생각도 없다! 우리 형제, 아직 나이는 젊지만 내 목숨만이 아니라, 비, 네 목숨, 벗들의 목숨도 아낀 적이 없단 말이다! 헌원의 뜻에 맞서느라나는 수백 명이나 되는 벗들의 목숨을 잃게 했다! 그런데.....그런데 그 모두가 정해진 것이고 꼭두각시 짓을 하는 것뿐이라면...... 살아서 무엇 하느냐? 산다는 게 도대체 무엇이냐? 쑤앙마이는 말했었다. 대선인들이 이 세상을 앞으로는 사람이 주인되게 만들어 놓았다고 흥! 뭐가 사람이 주인이란 것이냐? 다 정해진 운명, 정해진 길을 눈 가리고 무작정 뛰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이냐?” 치우비는 형의 고민이 자신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깊다는 것을 깨닫고 심각하게 생각하며 달래려 했다. “형, 솔직히 나는 잘 모르겠어. 나도 잘 모르는데 다른 사람은 더더욱 모를 거야.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하늘이 정한 길을 우리가 따라가는데 뭐 그렇게 고민할 게 있단 말야?” 치우천이 쓸쓸하게 웃었다. “그래. 하늘의 정한 길을 따르는 것, 그것은 좋다. 그런데 말야, 하늘의 길은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잖느냐? 지나고 나서야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맥달이 하늘이냐? 그 여자는 사람이 아니란 말이냐? 하하, 세상의 지배자는 맥달이다! 헌원이건 나건, 주신 한웅님이건, 그 누구도 맥달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다. 앞날을 모조리 손바닥 들여다보듯 아는데 그 누가 맥달을 당해내겠느냐? 그 여자가 마음만 먹으면 누가 그 여자 상대가 되겠느냐? 그 여자가 하늘이다!” “하지만 맥달님도 하늘의 뜻을 어기지는 못할 거야. 주술사, 예언가들도 앞날을 짚어 점을 치잖아! 그러나 그건 하늘이 정한 것을 조금 일찍 읽어내는 것일 뿐이고......” “흥! 맥달이 그냥 읽어만 냈느냐? 그 여자는 우린 구슬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가르쳐주었다. 그게 하늘의 뜻이냐? 내가 구슬을 어찌 쓰는지 모르고 있는 게 하늘의 뜻이었던 게 분명해! 그러나 그 여자는 하늘의 뜻을 바꿀 수 있다.” “안 그럴 수도 있잖아_그 여자의 입을 빌려서 하늘이 가르쳐주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렇다면 그 여자가 하늘이다. 하늘이 되라고 하늘이 내신 것이 분명하다. 하하, 누가 그 여자의 상대가 되겠느냐? 모든 것을 다 알고, 미리 알아서 움직일 수 있는데, 세상 어떤 사람이 그 여자를 당해내겠느냐? 헌원이 애쓰는 그의 뜻, 내가 바라는 나의 뜻, 그 여자는 다 알고 있다. 누가 그 뜻을 이룰지, 뜻을 이루어도 그것이 나중에 어떻게 될지까지 다 알고 있다. 세상에 그 여자의 입보다 무서운 것이 어디 있겠느냐? 내가 죽을힘을 다해 헌원의 뜻을 막아도, 백 년 뒤에 헌원의 뜻이 다시 퍼진다고 한다면, 너는 죽을힘을 다해 헌원과 싸우고 싶겠느냐? 헌원이 뜻을 펴서 부족들을 합쳐 큰 나라를 세워도 그 나라가 금방 망하고 무너진다 말하면, 헌원은 그런 나라를 세우고 싶어지겠느냐? 하하! 멀리 갈 것도 없다. 내가 언제 죽는지, 네가 언제 죽는지, 헌원이 언제 죽을지 그 여자가 모를 것 같으냐? 그 여자의 눈에는 모든 것이 송장이고,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릴 흙덩어리일 텐데! 그 여자 때문에 세상 모든 일이 헛되고 헛된 것이고, 모든 사람들이 나면서부터 송장이나 다를 바 없이 될 터인데!” 치우비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로 멍하니 듣기만 할 뿐,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형의 말이 맞다고 생각한 때문이 아니라, 형의 태도가 너무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치우비가 형에게 조용히 물었다. “형, 형답지 않게 왜 그래? 왜 그렇게 흥분하는 거지? 나는 잘 모르겠어. 하지만 말야..... 어차피 모든 사람은 언젠가 죽게 되어 있잖아. 그래도 사람들은 모두 살려고 애쓰고, 또 그렇게 세상을 이루면서 살잖아. 그런 것과 마찬가지 아닐까?” 치우천은 조금 마음이 풀렸는지 아까보다는 한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네 말도 일리가 있구나. 하지만..... 나는 받아들이기 힘들구나. 힘이 나지 않고, 정말 사는 게 싫어져 그래, 모든 게 다 정해져 있는지도 모르지. 그 안에서 발버둥쳐야 하는 게 사람의 운명일지도 몰라. 그러나.....그러나단 한 가지 점에서, 하늘이 원망스럽다 차라리 모르게 하여 두실 것이지 왜 그런 여자를 내셨을까? 왜 그런 사람을 내셔서 사람을 조롱하게 만드시는 것일까? 왜 그나마 애쓰는 모든 것들을 헛된 것으로 만들어 버리시는 것일까? 왜 하필 지금이냐? 왜 하필 내가 사는 지금, 내 근처에서 그 사람이 나왔단 말이냐? 비야, 그 여자가 적이었다면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쫓아가 그 여자의 목을 베어버렸을 것이 다.” “뭐?” 놀라움에 눈을 치뜨는 치우비를 쳐다보며 치우천은 서글프게 웃어보였다. “그러나 죽이지 못하겠지. 도리어 내가 당해 죽을지도 몰라. 그래도 그게 낫지. 그 여자가 죽는다면 세상은 그래도 살 가치가 있는 것이고, 내가 죽는다면 이 세상은 역시 힘들여 살 가치가 없는 것이니.....죽는 게 낫겠지.......” “아이쿠! 왜 그런 생각을 한단 말야! 그런 분을.......” “하하! 다들 그렇게 생각하겠지! 예쁘고, 우아하고, 놀라운 재주가 있으니! 아마 그 여자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건 나뿐일지도 모르겠구나. 그리고 그 여자는 주신에 있으면서, 내 편을 들어준다고 한다! 내 마음도 다 알고 있겠지? 그래서 꼼짝 못하게 하려는 걸까? 나는 신수나 괴물, 헌원보다도 그 여자가 무섭다.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나는.....” 치우비는 더럭 겁이 나서 좋은 말로 치우천을 달래보았다. “형, 왜 그런 무서운 생각까지 하지? 난 도대체 알 수 없군,그래. 왜 그렇게까지 생각하는 거야? 그분은 그냥 도움을 주었을 뿐이야. 세상에 앞날을 점치는 주술사가 한두 명도 아니잖아. 부족마다 한두 명씩은 다 있고, 큰 부족의 주술사는 용한 사람도 많잖아. 그래도 사람들은 다들 잘들 살아왔고 말야. 주술사가 세상을 뒤집었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 없고...... 형, 너무 필이 생각하지 마. 전에 듣기로 앞날을 예언하는 일은 하늘의 뜻을 받아서랬어. 그러니 모조리 읽어낼 수 있는 건 아니란 말야. 하늘이 가르쳐주거나 허락하는 말만 하게 되어 있지,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다구!” “아우야, 네 말이 옳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난 불안하단다. 세상의 어떤 주술사도 맥달만큼 정확하지는 않았을 거야. 이해할지 모르지만, 만에 하나 맥달이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한다면, 맥달의 힘은 세상을 뒤집고 모조리 파괴해버릴 정도의 힘이야.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이 세상에 어떤 사람도 맥달만큼 무섭지는 않을 거야. 난 아무래도 받아들일 수가 없구나. 견딜 수가 없어.” 치우비는 애써 웃어 보이며 되받았다. “거 참, 답답하구먼. 그분은 좋은 분이고, 우리 편을 들어주잖아. 더구나 그분도 한 달에 여섯 번인가.........그것만 점칠 수 있댔잖아. 설마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겠어?” 치우천은 비가 간곡하게 이야기하자 짐짓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래, 네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치우천은 아우의 말에 맞장구를 치는 척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게 바로 두려운 점이란다, 비야. 맥달이 한 달에 여섯 번 점을 치는 것은 한웅께서도 아신다. 그런 한웅께서 달마다 여섯 번, 모두를 점쳐 묻지 않았을 리 없잖느냐? 주신을 이끌다 보면 알고 싶은 일이 몹시도 많으실 것인데! 그러면 분명 다른 일을 점칠 시간은 없었을 거야. 헌데 맥달이 어찌 내 일을 읽어냈느냔 말이다. 한웅님께서 한 번을 그냥 넘어가셨을 리도 없고, 내 일을 점치라 허락해주신 적도 없을 것인데! 더구나 보통 주술사는 뼈를 불에 태우거나 혹은 던져서 점을 치지만, 맥달은 아무 도구도 없이 그냥 점을 쳤다 아무리 생각해토 두렵다. 다른 사람 눈은 가렸을지 몰라도 나는 속지 않는다! 그 여자는......한 달에 여섯 번이 아니라 아무 때나 아무 일이나 다 읽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점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다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너무도 무서운 일이 아닌가.’ 그러나 차마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는 말이었다. 허나 형의 생각을 알 리 없는 치우비는 사람 좋게 웃으며 치우천을 다독거렸다. “그러면 됐지 뭘 그래? 형은 간혹 너무 많이 생각하는 게 병이야. 그냥 편하게 생각 하라구. 일단 할 일도 많잖아. 당장 괴물을 잡지 않을 거야? 살 곳을 찾지 않을 거야?” 치우천은 할 수 없다는 듯 픽 웃었다. “그럴 수야 있겠니? 코앞에 닥친 일인데.....” 치우비가 껄껄 웃으며 되받았다. “그럼 딴 생각은 하지 마. 나중에 맥달님을 만나게 되면 그때 직접 말해보는 게 어때? 나 같은 돌 머리하고 말하면 도움이 안 되잖아 난 잘 알아듣지도 못 하겠는걸?” 치우천은 애써 웃으며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으나 마음은 몹시 울적했다. ‘맥달, 맥달......그녀에 대해 알아봐야겠구나. 만에 하나 내 걱정대로라면, 맥달이야말로 헌원이나 신수보다 더 위험한 존재다. 그녀가 하늘의 뜻을 읽기만 하는 좀 뛰어난 주술사인지, 아니면 정말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위험한 존재인지 알아내야 한다......’ 키타야와 구르 등은 다시 일행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자마자 맥달에 대해, 몹시 놀라우며 대단한 주술사라고 입을 모아 사람들에게 말했다. 사람들은 신기해하며 그런 주술사가 우리 편을 들어준다면 모든 일이 다 잘될 것이라고 좋아했다. 그러나 치우천은 더 이상 그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하지 않았다. 다만 모든 준비를 갖춰 파루 계곡으로 들어가는 일에만 신경을 썼다. 이틀 뒤, 치우천과 부족장들이 거느린 전사 오백 명은 파루 계곡으로 들어섰다. 치우천 일행은 계곡 입구에서부터 백 명의 방패수를 앞세워서 조심스럽게 전진했다. 치우천은 삼백 명의 전사들에게 모두 준비한 털옷을 입으라 했다. 하지만 그렇게 껴입으니 모두들 땀이 나 서 움직이기 힘들었다. “이렇게 더워서야 어디 움직일 수 있겠어?” 야율쿠리가 투덜대자 치우천이 고개를 저었다. “더운 걸 좀 참는 게 낫지, 괴물과 부딪혀서 얼어 죽는 게 낫단 거냐?” 그러자 옆에 있던 보돈차르가 제안했다. “너무 더워서 이러다간 지쳐 쓰러질 것이다. 그러니 낮에는 쉬고 밤에만 길을 가자. 밤에는 계곡도 왜 추울 테니 털옷을 입고도 움직이기 좋지 않겠는가?” 형요도 한마디 거들었다. “괴물이 낮에 돌아다닐 것 같지는 않으니, 밤에 움직이는 게 나을거야.” 두 사람의 의견을 듣고 마침내 치우천은 승낙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백 명의 전사들은 낮에는 가급적 넓은 곳에서 쉬고, 밤에는 천천히 길을 갔다. 말을 타고 달리면 하루에 갈 수 있는 길이지만 많은 사람이 그렇듯 천천히 길을 가니 닷새나 걸렸다. 특히 형요의 마을로 가기 위해 자못 가파른 산등성이를 올라가는 것이 몹시 힘들어서 또 하루가 더 걸렸다. 마침내 산등성이 위로 올라간 순간, 치우천은 탄성을 질렀다. “허! 좋은 곳이군!” 앞서거니 뒤서거니 올라왔던 다른 부족장들 역시 모두 좋다고 감탄사를 연발했다. 형요의 부모가 살던 빈 마을은 산 위에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널찍하고 사방이 탁 트여 있는 전망 좋은 곳이었다. 더구나 고맙게도 사방으로 스무 채가 넘는 움집들과 두 채의 사뭇 큰 통나무집이 남아 있었다. 비록 집들이 심하게 자긴 했지만 조금만 손보면 당장이라도 들어가 될 수 있을 정도였다. 더구나 마을에는 릴은 우물이 두 개나 있었고, 뒤편으로는 깎아지른 듯한 벼랑이 있는데 그 벼랑에 릴은 동굴이 여러 개 뚫려 있어서 물건을 저장할 수도 있었다. 형요의 말로는, 그 동굴 중 몇 개는 아래쪽과 통하도록 뚫려 있어서, 외부의 공격을 받으면 그 동굴로 쥐도 새도 모르게 빠져나갈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시야가 탁 트여서 사방에서 누가 오고 가는지를 다 알아볼 수 있었고, 말을 타고 제법 달릴 만큼 넓은 평지도 있었다. 사방을 꼼꼼하게 둘러보던 구르가 말했다. “형요, 자네 부모님의 눈이 대단하셨군. 이런 곳에 자리를 잡으셨던 것을 보면 재주가 보통 아니셨겠어. 한 번 만나 뵈었으면 좋았을 것을.” “만나뵙다뇨? 부모님이 무사하셨으면 아직 도둑 왕이셨을 건데, 구르님과는 싸우게 되었을지도 모르잖아요.” “허허, 그런가? 하지만 우리 앙가마이나 앗수라트는 가난한 부족이라 장사를 다니지 않는다네. 가끔 장사꾼들이 오기는 하지만.” 그때 치우천이 말했다. “경계를 늦추면 안 됩니다.” “쥐죽은 듯 조용하잖은가?” “아닙니다. 형요가 떠나고 일 년이 다 되어 가는데, 이런 좋은 곳이 그냥비어 있는 게 더 이상한 일입니다. 이런 곳을 다른 사람들이 그냥 놔둔다면 무슨 까닭이 있지 않겠습니까?” “괴물......?” “그렇습니다.” 그때 새로 뽑은 도둑 출신의 타타르족 전사 한 명이 달려와 말했다. “움집들 뒤켠에 사람 뼈가 있습니다. 한 대여섯 명 되는데요.” “형요. 옛날 마을사람들은 너희가 다 묻어 주었댔지?” “하나도 빼놓지 않았어.” “그럼 그 뼈는 괴물에게 죽은 사람들인지도 모르겠다. 가보자. 뼈들에 손을 대지 말아라.” 치우천이 급히 달려가 보니, 역시 그 뼈들은 황급히 달아나다 죽은 듯한 모습으로 흩어져 있었다. 주변에 썩은 무기나 옷자락 같은 것도 그대로 남아 있었는데, 대강 보아도 썩 좋은 물건들은 아니었다. 아마도 뜨내기 산적들이 들어왔다가 괴물에게 쫓겨 도망치려다 그대로 죽어버린 것이 틀림없었다. 백골만 나뒹구는 그 광경에 치우천은 입술을 깨물었다. “분명 생각보다 일이 심각하군요.” “천 안다, 무슨 소리인가?” 치베가 묻자 치우천이 대답했다. “뼈가 너무 고스란히 누워 있어서 마음에 걸린다. 시체가 누워 있었다면 들짐승이나 날짐승이 뜯어먹어 어지럽게 흩어졌어야 하는데...... 전혀 그런 손을 탄 흔적도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그 괴물은 여기 자주 나타나는 것이 틀림없다. 그래서 짐승들도 가까이 오지 않는 게 분명해.” 치우천의 말을 듣고 사람들은 긴장한 듯, 말없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잠시 뒤, 야율쿠리가 호기롭게 입을 열었다. “차라리 잘되었다! 제기랄! 여기가 그럼 괴물 놈의 집이란 말이지? 오히려 화끈하게 빨리 처리해버릴 수 있겠구나!” 보돈차르도 한마디 거들었다. “그렇다면 이 근처를 뒤져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전사들에게 긴장을 풀지 말고 지키라 하고, 몇 명만 풀어서 뒤져보자.” “그러는 게 좋겠습니다.” 좋은 자리라고 신나하던 전사들은 다시 주의하라는 말을 듣고 모두 긴장한 표정이 되었다. 털옷들을 빈틈없이 껴입고 방패와 새로 만든 통나무 무기 등을 옆에 세우고 널찍한 공터에 전사들이 바로 서자, 각 부족장들은 몇 명의 전사들을 추려서 사방을 살펴보게 했다. 특히 무시무시해 보이는 동굴로 들어가는 전사들은 모두 긴장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드디어 한 떼의 전사들이 커다란 발자국을 발견했다. 그리고 동굴 안에 들어갔던 전사 중 하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뛰어왔다. “이상한 일입니다, 이상한 일이에요.” 전사가 타타르 말로 중얼거리자 전사의 부속장인 키타야가 물었다. “뭐가 이상하단 거냐?” “동굴 안에 물건들이 잔뜩 쌓여 있습니다. 그런데...... 아주 이상합니다.” “물건이 쌓여 있는 게 뭐가 이상하냐?” “물건 주위에 말뼈와 소뼈가 잔뜩 쌓여 있습니다.” “뭐?” 그 말에 사람들은 서로 얼굴을 돌아보았다. 흠흠, 잠시 목소리를 가다듬고 보돈차르가 물었다. “괴물이 그 동굴에서 잡아먹고 남은 뼈가 아닐까?” “아닙니다. 뼈만 있는 게 아니라, 죽은 말, 죽은 소들도 있는데 그냥 죽은 것들 같아요. 막 죽은 놈, 반쯤 썩은 것, 뼈다귀들 가릴 것 없이 아무렇게나 쌓여 있어서 냄새가 지독합니다.” 아무래도 좀 뜻밖의 보고라 치우천도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때 또 다른 전사가 달려와 말했다. “물건들이 잔뜩 쌓여 있는데, 몇 개를 풀어보니 다 썩어가는 과일들과 식량이었습니다. 가죽도 있고 헝겊도 있고 무기도 있긴 합니다만...... 거의 쓰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 말에 다들 더욱더 의아해했다 “물건들을 소나 말 시체와 같이 두면 당연히 못쓰게 누가 그렇게 쌓아둔 것일까?” 그 까닭을 알 수 없기는 형요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부모님이 쌓아둔 전 아닌데. 그 동굴은 물기가 많이 고여 있어 물건을 두기엔 나쁜 곳이야.” “괴물이 쌓아둔 게 아닐까?” 치우비가 중얼거리자 치우천이 웃었다. “괴물이 사람 물건을 뭐 하러 쌓아두겠느냐? 먹을 것이라면 몰라도, 헝겊이나 무기를 뭣에 쓰려고?” “그럼 누가 그런 거지? 뭐가 뭔지 정말 모르겠네.” “좌우간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된다. 좀 고생스럽더라도, 긴장을 풀지 말고 있어야 한다.” 전사들은 세 무리로 나뉘어서 교대로 밤을 세워가며 주변을 경계했다. 쉬는 전사들 역시 언제라도 입을 수 있도록 털옷을 가지고 다니게 했고, 큰 무기들은 언제라도 달려와 쓸 수 있도록 집 앞에 주욱 늘어놓았다. 독에 대해 잘 아는 툰툰이 혹시 독이 있지 않을까, 우물을 조사해 보았으나 다행히 물은 깨끗했다. 치우천은 비탈길 주변에 근처에 있는 큰 돌과 바위를 모아놓으라고 일렀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는데도 아무런 일이 없어, 전사들은 점차 긴장이 풀어졌다. 그러나 치우천만은 신경이 곤두선 채로 끊임없이 돌아다니면서 조금이라도 해이해진 전사들을 발견하면 화를 내며 벌을 주곤 했다. 치우천은 이제 큰 돌 말고 작은 돌도 옆에 쌓아두라고 말했다. 그러나 열흘이 지나고 나자, 모두가 지겨워했고 괴물이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느슨해졌다. 닦달하는 것도 한계가 있는데다 생각보다 시간이 너무 많이 흘러 식량 역시 점점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동굴 안에는 수많은 물건이 쌓여 있었지만 대부분이 썩어 있어 건질 만한 것이 별로 없었다. 그릇이나 장식품, 무기 등은 쓸 만한 것도 왜 있었지만 많이 자아 바꿔보아야 큰 값을 받기는 힘들었다. 무라는 그런 것들이나마 자신이 싣고 가서 바꿔보겠다고 나섰다. 비록 이곳은 타타르족과 몽골족의 지역이지만 카린족과 물건을 자주 바꾸는 큰 장사꾼을 알고 있으니, 그 사람에게 교역을 청해보겠다는 것이다. 안 그래도 치우천은 무라나 소녀가 걱정되던 참이었다. 무라는 주먹만 사용하니 신수와 싸울 때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몸을 사리지 않고 나설 것이 분명하니 그게 더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개명수가 있어도 마찬가지였다. 개명수가 비록 영물이고 용맹하지만 신수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되레 섣불리 덤벼들다가 한 방에 죽어버릴지도 몰랐다. 소녀나 울라트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치우천은 억지로 구실을 붙여서 소녀와 울라트까지 무라와 함께물건 바꿔오는 일에 보내버렸다. 치우천의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던 두 사람은 약간 투덜거리면서 무라와 함께 길을 떠났다. 부족장들은 전에 받았던 물건들을 내놓으려 했지만 치우천은 그것은 절대 안 된다고 일침을 놓은 뒤 형요를 불렀다. “형요, 네가 말한 보물을 한번 파내보자. 어디에 있지?” 형요가 웃으면서 눈을 찡긋하더니 물었다. “괴물은 꼭 잡아줄 거지?” “반드시 잡아준다. 염려 마라. 이대로는 전사들이 굻게 되었으니 안 되겠구나.” “보물은 누가 훔쳐가지 못하게 깊숙이 감춰두었거든. 그래서 쉽게 꺼낼 수 없어.” “어디에 있는데?” “바로 이 집 밑에.” “집 밑에?” “그래. 이 집은 아주 큰 바위 위에 세워진 것인데, 그 바위 밑에 보물이 있지. 그러니 귀신이 아닌 이상 어디 있는지 짐작도 못할 테고 훔쳐갈 수도 없을 걸?” 치우천은 감탄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빈틈없군. 보물을 꺼내려면 집을 헐어내고 큰 바위를 들어올려야 하니까.......” “히히, 우리 자매라도 못 훔치지. 우리가 도둑이었는데, 도둑 무서운 것을 모르겠어?” 결국 전사들은 집을 헐어냈다. 보물을 꺼낸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들뜨는 듯, 다들 웃는 얼굴이었다. 집을 헐고 나니 커다란 바위가 나타났다. 그러나 워낙 육중하여 백 명의 전사들이 달라붙어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다시 통나무를 베어 와서 지렛대로 삼아 이백 명의 전사들이 달라붙어서야 간신히 귀퉁이를 들어올릴 수 있었다. 전사들은 재빨리 귀퉁이에 나무기둥과 돌을 쌓아 바위가 무너지지 않도록 했다. 그 사이로 공간이 생겼고, 그 정도 공간이면 사람들이 드나들 수 있을 만했다. “바위 밑에 독벌레와 독사가 있을지도 몰라. 오래 전에 풀어놓았지만, 살아 있을지도 모르니 아직 들어가면 안 돼.” 형요가 단단히 주의를 주자 툰툰과 초초룬이 나서서 독가루와 벌레를 쫓는 약 등을 공간 속으로 한참을 불어넣었다. 스멀거리며 독벌레와 뱀이 몇 마리 기어 나오자, 초초룬은 그중 몹시 흥하고 구역질나는 생김새에 선명한 색깔의 벌레들을 보더니 무척 귀한 벌레라고 좋아하며 조심스레 잡아 나무상자에 넣었다. “그건 뭐 하게요?” 미요가 좀 언짢은 목소리로 묻자 초초룬이 신이 나서 대답했다. “나에게는 이거야말로 보물이다! 여러 마리 잡았으니 분명 암수가 있을 거야. 제대로 키워 많이 늘려야지. 그래서 독을 얻을 수 있거든!” “많이 늘린다고요?” 미요가 속이 느글거리는 듯 인상을 잔뜩 찌푸리는데, 툰툰이 끼어들었다. “이보게, 초초룬. 나도 좀 나눠줄 수 있겠나?” “안 돼! 내 거야!” “그러지 말고 나도 좀.......” 미요는 그 모습을 보고 요요에게 속삭였다. “난 그냥 줘도 싫은데. 아이, 징그러워.” 그때 저만치에서 망을 보던 전사 하나가 소리를 질렀다. “뭐가 다가온다! 아이콘 아주 빠르다.” 치우천이 깜짝 놀라 외쳤다. “괴물인가? 하필 이때?” 각 부족장들은 보물을 보려고 모여 있던 전사들에게 호통을 쳤다. “어서어서 움직여라! 털옷을 입고, 무기를 들어라!” 치우천은 기가 막혔다. 열흘이 넘도록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을 때는 꿈쩍도 않다가, 하필 보물을 꺼낸다고 다들 어수선할 때 괴물이 들이닥칠 줄은 정말 몰랐다. 물론 여전히 경계를 세워두기는 했지만, 보물을 꺼낸다는 말에 모두 신이 나서 다들 몰려와 구경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비가 허술했다. 치우천 본인마저도 마음이 다소 들떠 미처 부하들을 단속하지 못했으니 누구를 탓할 수도 없었다. 치우천은 털옷도 입지 않은 채 급히 달려 나가 괴물이 오고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치우비가 서둘러 털옷을 반쯤 걸치고, 형의 옷을 들고 달려와 치우천 옆에 섰다. “어이쿠!” 치우비는 너무도 놀라 무심결에 부르짖었다. 지난번 번개범은 회오리와 검은 구름의 모양으로 나타난 것에 비해, 이 괴물은 회색의 음산한 구름덩어리가 되어 달려오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구름이 스쳐지나간 곳은 삽시간에 하얗게 변해 괴물이 마치 횐 줄을 그으며 달려오는 것처럼 보였다. 모든 것이 순식간에 얼어붙는 것이 틀림없었다. “대단하구나!” 치우비가 탄성을 내지르자 치우천은 이를 악물었다. “비야, 겁나냐?” “겁나지. 하지만.......절대 물러서진 않을 거야!” 치우비가 결연한 목소리로 외치자 치우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조심해라, 비야.” “염려 마!” 치우천은 급히 아우가 내미는 털옷을 걸치며 부하들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부족장들이 힘껏 독려하고 지휘하여, 우왕좌왕하고 있는 삼백 명의 부하들은 차츰 대오를 갖추어가고 있었다. 치우천은 나머지 이백 명의 부하들에게 급히 돌 더미 주변으로 오라고 말했다. ‘저 정도면 문제없다. 차라리 잘되었다. 우리가 높은 곳에 있으니, 더 유리하다.’ 치우천은 자못 흡족하게 생각하며 크게 소리쳤다. “모두 움직여라! 방패부대!” 치우천이 소리치자 방패부대를 맡았던 구르가 되받아 크게 소리쳤다. 그러자 커다란 방패를 든 백 명의 전사들이 우르르 달려 나왔다. 방패들은 아주 큰데다 겉에 가죽을 씌웠으며, 두 명의 전사가 한 개씩 방패를 메고 있었다. 전사들이 달려 와 오십 개의 방패를 일제히 맞대어 비탈길에 줄을 세워 쿵쿵 소리가 나게 내려놓자, 순식간에 나무로 된 커다란 장벽이 주욱 세워졌다. 그리고 훈련받은 대로, 방패에 딸린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굵직한 나무 기둥으로 방패를 받쳤고, 다른 한 사람은 물주머니를 꺼내 방패에 물을 뿌렸다. 그때 음산한 구름덩어리가 바로 비탈 아래쪽에 다다랐다. 우천이 다급하게 외쳤다. 을 굴려라!” 우천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이백 명의 전사들이 일제히 커다란 을 아래로 굴렸다. 수십 개의 큰 돌들이 한꺼번에 아래로 굴러가는 습은 장관이었다. 우르릉거리는 소리가 사방을 메우며 먼지구름이 욱하게 일어났다. 마치 산사태가 난 것 같았다. 전사들은 흥분한 듯, 고함을 지르면서 계속 돌을 굴리려 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치우천이 황급히 막아섰다. “뭐 하는 거냐! 마구 굴리면 안 된다!” 그때 일제히 굴러 내리던 돌덩이들과 달려오던 회색 구름이 충돌했다. 순간, 회색 구름이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소용돌이쳤다. 그리고 몇 개의 돌덩이가 폭발하듯 산산이 부서지며 사방으로 돌가루를 날렸다. 그러자 회색 구름이 사라지며 시커멓고 거대한 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언뜻 보기에도 보통의 괴물이 아니었다. 신수임에 틀림없었다. 괴물의 몸은 거대하여 과거의 번개범에 견줄 만했는데, 등은 시커멓고 반질반질한 껍질로 덮여 있는 듯했다. 다리도 굵직하고 몸집도 둔중하여 마치 거대한 거북처럼 보였다. 다만 특이하게 머리가두 개라는 것 말고는 아주 큰 거북이라고 해도 될 정도였다. “거북괴물이네! 근데 머리가 둘이라니!” 희한하게 생긴 괴물을 보자 치우비가 외쳤다. 괴물의 크고 작은 두 개의 머리 중 큰 머리가 돌연 비탈 위를 향하자 사람들은 무시무시하게 번들거리는 괴물의 붉은색 눈과 마주쳤다. 그중 큰 머리가 아가리를 확 벌리는 순간 치우천이 재빨리 외쳤다. “어서 방패 뒤로 숨어라!” 그러나 대부분이 처음 신수를 보는지라, 넋이 나간 듯 멍하니 거북괴물을 바라보았고, 몇몇은 몸을 후들후들 떨며 주저앉기도 했다. 치우천이 다시 악을 썼다. “어서 숨어라!” 거북괴물의 벌린 입 주위로 횐 연기 같은 것이 잠시 모락모락 일어나는 것 같더니, 별안간 괴물이 힘껏 바람을 내뿜었다. 그 바람은 처음에는 투명했으나 날아들면서 허옇게 변하여 마치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것 같았다. 무시무시하게 차가운 기운을 뿜어내는지라 공기 중의 수분이 모두 얼어붙어 허옇게 보이는 것이다. “막아라!” 치우천이 외치는 순간, 그 무시무시한 차가운 바람이 오른편 방패들에 부딪혀 왔다. 물을 뿌려둔 방패는 순식간에 얼어붙으면서 커다란 얼음덩어리가 되었다. 치우천은 물이 일단 얼고 나면 더 얼 수가 없으니, 얼음으로 냉기를 막아보려는 생각으로 만든 방패였다 더구나 방패의 좁은 틈들마저도 얼어 모조리 메워졌기 때문에 바람은 조금도 새어 들어오지 않았다. 바람을 똑바로 맞지 않는데도 그 냉기가 엄청나서, 죽을힘을 다해 방패를 밀어붙이던 사람들의 털옷이 순식간에 성에로 뒤덮여 허옇게 변해 버렸다. 냉기에 직접 맞았다면 털옷이고 뭐고 없이 그대로 얼어 죽었을 것이다. 거북괴물의 무서운 냉기를 그럭저럭 막아내는 데 성공하자 치우천은 흥분에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 “막을 수 있다! 버텨라! 불 부대는 준비해라!” 치우천이 생각한 얼음방패는 냉기를 일차적으로 막는 데 성공했다. 다만 그 방패를 버티는 힘이 문제였다. 괴물의 입김은 차갑기도 하지만 불어대는 위력 역시 보통이 아니라서, 방패에 사람들이 벌 떼같이 달려들어 온몸으로 밀어대는데도 방패가 조금씩 뒤로 밀려 땅에 박은 기둥이 우지직우지직 소리를 내면서 부러지려고 했다. 그 모습을 보고 쇠돌이와 부루벼락 등이 급히 달려 나가 힘을 보탰다. 힘센 장사인 쇠돌이가 방패 하나를 아예 등으로 떠받쳐 밀자 밀리던 방패가 금세 제 위치를 찾았다. 부루벼락과 야율쿠리도 방패 하나에 같이 붙어서 방패의 기둥이 막 부러지기 전에 방패를 지켜냈다. “으악! 차가워!” 등판을 붙이고 밀어대던 쇠돌이가 비명을 질렀다. 냉기가 너무도 지독하여 두 겹의 털옷과 나무방패를 뚫고 쇠돌이의 등까지 냉기가 전해진 것이다. 급기야 치우비마저도 달려나가 다시 방패 하나를 밀어대어 방패들을 모두 온전히 지킬 수 있었다. 그 사이 불부대의 대장, 마파람은 부하들에게 불을 붙이라 소리치고 있었다. 줄을 매단 둥근 토기그릇을 주렁주렁 몸에 매달고 백 명의 전사들이 앞으로 나왔다. 그들은 방패부대가 밀리는 것을 보고 당장이라도 뛰어나가 도와주고 싶었지만, 참을성 있게 자신들의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각 전사들은 저마다 네 개씩의 둥근 토기를 매달고 있었는데, 그 토기 안에는 기름이 가득 차 있었고 심지가 박혀 있었다. 그들 중 앞에 선 열 명은 이미 횃불을 들고 있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달려 나오면서 토기 그릇에 비죽 튀어나온 심지에 불을 붙였다. 이윽고 괴물이 뿜어대던 냉기가 뚝 그쳤다. 치우천은 신이 나서 소리 높여 외쳤다. “불부대! 이때다!” 그러자 불부대는 불이 붙은 토기그릇에 달린 줄을 빙빙 돌리면서 ‘와’ 함성을 내지르며 달려 나왔다. 그와 동시에 방패부대는 일제히 방패를 옆으로 조금씩 젖혀 불부대가 토기를 던질 수 있도록 해주었다. 마파람은 본래 달리기도 잘하지만 돌 던지기에도 재주가 있어 전사들에게 돌 던지기를 가르친 것이다. 전사들은 마파람에게 배운 대로, 불붙은 토기를 빙빙 돌리며 달려 나가 일제히 던졌다. 토기들이 날아가다가 서로 부딪혀 깨지는 순간, 허공에 불벼락이 쏟아졌다. 토기 안에는 기름이 잔뜩 들어 있었던 것이다. 백 개의 토기 중 마흔 개 가량 토기는 거북괴물의 반질반질한 등과 몸에 떨어졌고, 나머지들은 근처의 땅에 떨어져 내려 주위는 온통 불바다가 되었다. 신수인 괴물도 놀랐는지 두 개의 머리를 크게 휘저으며 울부짖었다. “다시 돌을 굴려라!” 치우천이 크게 외치자 이백 명의 전사들이 남아 있던 돌을 일제히 굴렸다. 괴물은 몸에 불이 붙자 당황하여 마구 날뛰며 거대한 등판을 비탈에 부딪치려는 순간, 다시 돌이 굴러 내려오자 더욱 커다랗게 울부짖었다. 그중 작은 머리가 자신의 등 쪽으로 흰 안개를 내뿜자 등에 붙었던 불길이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그때 거대한 돌 하나가 굴러 내려가면서 괴물의 앞다리를 쳤다. 그리고 또 한 개의 돌이 무섭게 구르다가 무언가에 걸렸는지 튀어 올라서 괴물의 옆구리를 강타하는 순간 거대한 괴물의 몸이 휘청했다. “잘한다! 이길 수 있...... 아! 조심해라! 방패!” 치우천은 흥분해서 외치다가 당황하여 다급히 소리쳤다. 괴물의 큰 머리가 다시 위를 보고 입김을 내뿜은 것이다. 순간 괴물의 냉기가 처음과는 반대인 왼쪽으로 불어 닥쳤다. 대부분의 방패들은 바로 세워져 있었지만, 한 개의 방패가 바로 세워지기 직전이었다. 괴물은 영리하게도 바로 그 방패를 노리고 입김을 불어댄 것이다. “안 돼!” 치우천이 부르짖었지만 이미 늦었다. 미처 자리를 잡지 못한 방패는 대번에 퉁겨져 방패에 매달렸던 두 명의 전사와 함께 뒤로 날아올랐다. 그 두 사람의 몸은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허옇게 변하여 뻣뻣이 굳어버렸다. 단숨에 얼어버린 것이다. 그 두 사람만이 아니라, 그 양옆에 있던 네 사람마저도 냉기를 쐬어서 순식간에 뻣뻣하게 얼어붙어 버렸다. 나머지 사람들도 팔다리가 얼어붙어서 잘 움직이지를 못했다. 계속 저리도록 차가운 바람이 불어 닥치자 뒤쪽에 줄을 짓고 서 있던 통나무부대도 아우성을 치며 통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쾌 거리가 먼데도 냉기는 그곳까지 엄습하여 다섯 명의 전사들이 얼어 죽었다. 치우천은 목이 터져라 외쳤다. “틈을 메워라! 틈을 메워!” 구르도 외쳤다. “왼쪽 전사들은 모두 한꺼번에 움직여 틈을 막아라! 어서!” 명령을 받은 방패부대는 다시 일제히 방패를 들어서 줄을 지은 채 옆으로 이동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때를 놓치지 않고 괴물이 다시 입김을 불어댔다. 이동하려던 방패들과 전사들이 그 입김에 우수수 날아가며 차디찬 얼음덩이가 되어버렸다. 순식간에 다시 십여 명의 전 사가 얼어버리자 치우천은 눈에서 불똥이 튀는 것 같았다. “불부대! 다시 던져라!” 치우천이 외치고 마파람이 되받아 크게 소리치자 이미 다음 토기에 불을 붙여두고 있던 불부대의 전사들이 일제히 불붙은 토기를 던졌다. 다시 백 개의 토기가 날아들자 거북괴물은 두개의 머리로 일제히 커다랗게 포효하며 몸을 움츠렸다. 그러고는 놀랍게도 힘껏 위로 뛰어오르는 것이 아닌가? 비록 다시 열 개 정도의 토기와 허공에서 부딪혀 몸에 불이 붙었으나 뛰어오른 괴물은 까마득히 몸을 솟구쳤다. 비탈보다도 훨씬 높은 곳까지 날듯이 올라가는 괴물을 보고 모두가 공포에 질렸다. 거대한 체구와 무겁고 둔한 모습의 거북괴물이 저렇듯 높이 뛰어오르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다만 치우천만이 금세 정신을 차리고 또다시 외쳤다. “방패부대! 방패를 뒤로 돌려라!” 그러나 치우천의 명령을 따르기엔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괴물은 금세 다시 떨어져 내려 비탈 위 공터에 내려앉았다. 뒤에 처져 있던 통나무부대의 바로 앞이었다. 거북괴물의 발이 땅에 닿는 순간, 모든 사람들은 ‘쿵’ 하는 거대한 소리와 함께 땅이 출렁하고 요동을 치는 통에 몸을 비틀거렸다. 그와 더불어 사람들의 마음도 같이 철렁대며 내려앉았다. 작은 산만큼이나 커다란 괴물이 코앞에까지 육박해오자 전사들은 모두 공포에 사로잡혀 비명을 질렀다. 거북괴물은 제대로 돌에 맞아 다리와 옆구리에도 피가 좀 흐르고 있었으며, 몸 여기저기에 불이 붙어 있었다. 그러나 절대로 쓰러질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화가 머리끝까지 난 듯 마구 머리를 휘돌렸다. 괴물의 매서운 눈초리가 사방을 휘젓자 전사들은 몸을 떨었고, 그중 몇몇은 달아나려 했다. 순간 야율쿠리가 도망치려던 한 전사의 머리를 도끼로 쳐 깨뜨리며 큰 소리로 외쳤다. “도망치는 놈은 내 손에 죽는다!” 보돈차르도 도망치려던 몽골 전사의 몸을 창으로 꿰뚫어 죽이며 소리쳤다. “도망치면 다 죽는다! 싸워야 산다! 명령을 따르라!” 그때 통나무부대를 훈련시킨 양역이 목이 터져라 부르짖었다. “모두 나가라! 괴물의 다리를 노려라!” 양역의 명령에 괴물과 가장 가까이 대치하던 통나무부대의 전사들은 공포를 떨쳐내려는 듯 발악적으로 고함을 지르며 달려 나갔다. 물론 모두가 달려 나간 것은 아니었다. 모두 열 대의 통나무 창이 있었는데, 두 대의 통나무는 아까 냉기가 스치고 지나간 탓에 많은 사람들이 얼어버리는 바람에 나갈 수가 없었고, 다른 두 대의 통나무는 전사들이 공포에 질려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일단 한 명이라도 먼저 달리기 시작하면, 열 명이 한 개씩을 들고 있는 통나무라 무조건 앞으로 달려 나가게 마련이었다. 여섯 개의 통나무들이 일제히 죽어라 달려들자 괴물도 몸을 흠칫하면서 크게 포효하며 다시 냉기를 내뿜었다. 그러자 달려들던 한 대의 통나무, 즉 열 명의 전사가 통나무와 함께 순식간에 허연 얼음덩어리로 변해서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붙어버렸다. 순식간에 열 명이 한데 엉긴 얼음기둥이 되어버린 것이다. 달려들던 전사들은 모두 공포에 질려 있었으나 이미 뛰기 시작한 판이고 손에 통나무 자루를 잡고 있는 판이라 미처 그 자루를 놓을 생각도 하지 못해 대부분이 무조건 달렸다. 단 한 대의 통나무는 겁에 질린 몇몇 전사가 손을 놓아버리는 바람에 옆으로 기울어지면서 와당탕 넘어져 전사들이 땅에 어지러이 나뒹굴었다. 괴물이 다시 냉기를 뿜어내려 했으나, 이미 네 개의 통나무가 괴물의 바로 발치까지 달려든 참이었다. 괴물은 날쌔게 거대한 왼쪽 앞발을 높이 들었다가 달려드는 통나무를 그대로 짓밟아버렸다. ‘쿵’ 소리와 함께 무시무시한 무게에 짓눌린 통나무가 대번에 부러지면서 두 명의 전사가 찍소리도 못하고 오징어처럼 납작해졌다. 나머지 여덟 명도 달려들던 속도를 이기지 못해 혹은 데굴데굴 구르고, 혹은 괴물의 다리에 부딪혀 나가떨어졌다. 그러나 나머지 세 대의 통나무는 각각 괴물의 오른쪽 뒷다리에 두 대가, 오른쪽 앞다리에 한 대가 명중했다. 전사들은 이미 정신이 하나도 없고 죽었다 싶었기 때문에 있는 힘을 다해 통나무를 찍었다. 통나무가 괴물의 다리에 찍히는 순간, 달리다가 갑자기 멈추어 선 전사들이 또 어지럽게 넘어지면서 땅에 뒹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제아무리 신수인 괴물이라도 확실한 타격을 입은 듯했다. 통나무가 박힌 괴물의 다리에서 이내 피가 분수처럼 솟구쳐 오르더니, 괴물은 괴로운 듯 크게 비명을 질렀다. 더구나 오른쪽 앞다리와 뒷다리를 일제히 맞았기 때문에, 다리의 힘이 빠지자 중심을 잡지 못했다. 괴물은 더 버티지 못하고 비틀대다가 찢어지는 듯한 소리를 지르며 옆으로 ‘쿵’ 하고 넘어졌다. 미처 일어나지 못하고 나뒹굴던 다섯 명의 전사가 거대한 괴물의 몸에 짓눌려 역시 납작해져 버렸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미친 듯 털고 일어나 뒤로 달아났다. “넘어뜨렸다!” 괴물이 넘어지자 많은 사람들이 일제히 부르짖었다. 수많은 전사들이 죽어가는 것을 애타 지켜보던 치우천 역시 참지 못하고 크게 외쳤다. “신수를 넘어뜨렸다! 사람이 신수를 쓰러뜨렸다!” 다만 구르만이 침착한 목소리로 크게 외쳤다. “아직 괴물은 죽지 않았다! 방패부대! 괴물 앞을 막아야 한다!”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해주듯, 넘어진 괴물이 다시 한 번 길게 냉기를 내뿜었다. 환호하던 전사들은 미처 피할 겨를도 없이 순식간에 다시 스무 명 이상이나 얼음덩어리가 되어버렸다. 개중에는 좋아서 손을 치켜들고 뛰다가 허공에서 얼어붙어 그대로 얼음덩어리가 된 채 땅에 떨어져 내린 전사도 있었다. 치우천도 즉시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외쳤다. “괴물은 이제 움직이지 못한다! 불부대! 괴물을 태워버려라!” 불부대도 많은 수가 얼어붙었지만 약 칠십 명 가량이 아직 살아 있었다. 더구나 괴물이 코앞에 있기에 이번에는 빗나갈 염려도 거의 없었다. 전사들은 괴물이 쓰러지는 것을 본 후부터는 더 이상 몸을 사리지 않고 이를 악물고 맹렬한 기세로 덤벼들었다. 괴물이 미친 듯 포효하며 몸을 꿈틀거렸지만 다리가 부러졌는지 일어서지 못하고 다만 그 자리에서 몸을 뒤척일 뿐이었다. 칠십 명의 불부대가 달려 나가며 토기를 던지자, 괴물의 몸 여기저기에서 다시 불기둥이 솟구치면서 괴물의 몸은 불덩어리가 되어갔다. 그런 와중에도 괴물이 발작적으로 냉기를 내뿜어 일곱 명의 전사가 얼어붙었지만, 구르가 방패부대를 침착하게 지휘하여 앞을 막아서서 피해는 그리 크지 않았다. 갑자기 괴물의 몸에 붙은 불이 순식간에 꺼지기 시작했다. 치우천이 깜짝 놀라서 보니, 괴물의 작은 머리가 고개를 높이 들고 약간 가냘픈 냉기를 뿜어대면서 불을 끄고 있었던 것이다. 치우천은 목이 터져라 다시 외쳤다. “불이 꺼지면 안 된다! 불부대! 다시 던져라!” 불부대는 이제 마지막 남은 기름단지를 일제히 괴물에게 던졌고 괴물의 몸은 또다시 불길이 타올라 불덩어리가 되어갔다. 그러나 이번에는 물의 작은 머리가 불을 끈다면 심각한 상황으로 바뀔 터였다. 치우천이 다급하게 외쳤다. “모두들 남은 통나무를 지고 괴물을 찔러라! 그리고 용기 있는 사람들은 괴물의 등으로 뛰어올라 작은 머리를 죽여라!” 툰툰과 초초룬도 서둘러 각자 가지고 있던 독가루를 꺼내어 전사들의 무기에 묻히게 했다. 치우비도 뭔지 잘 모르는 푸른 가루를 도끼날에 묻혔고 치베와 마냥, 형요 등도 무기와 화살촉, 창끝 등에 독가루를 되는 대로 찍어 발랐다. 몇몇 전사는 괴물에게 다가간다는 것이 두려운 듯 멈칫거렸으나, 많은 수의 전사들은 크게 함성을 지르며 각자 무기를 들고 괴물에게 달려 나갔다. 양역은 침착하게 전사들을 지휘하여 사십 명 가량 남은 전사들을 시켜 쓰지 않은 통나무들을 다시 들어올리고 있었다. 양역은 어느새 한 손에 피가 줄줄 흘러내리는 전사의 머리를 들고 있었다. 명령을 듣지 않고 도망쳤던 전사의 목을 쳤던 것이다. 양역은 쉬지 않고 계속 외쳤다. “괴물이 죽어간다! 용감하게 괴물을 죽여 상을 탈 것이냐, 비겁하게 도망치다가 이놈처럼 목이 달아날 것이냐?” 양역이 머리를 들고 외치자 모든 전사들은 섬뜩하여 잠시 흠칫거렸고, 겁을 먹었던 전사들조차 이판사판이라 여기고 대부분 무기를 들고 달려들었다. 보돈차르와 키타야도 줄기차게 전사들을 독려했다. “짧은 무기나 몽둥이는 소용없다! 도끼! 창! 그런 큰 것을 들고 찍어라! 껍질이 아니라, 무조건 살을 찍어라!” 쇠돌이도 크게 소리를 지르며 달려와 통나무 하나를 혼자 들어올리며 외쳤다. “제기랄! 이 거북괴물놈아! 나도 거북이 너도 거북이다! 누가 죽나보자!” 아까 냉기가 덮칠 적에 방패 하나를 등으로 밀어 막아내다가 등판에 얼어붙은 방패가 아직도 쇠돌이의 등에서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쇠돌이가 여기저기 등을 부딪쳐 방패를 부쉈지만, 큼지막한 판때기가 쇠돌이의 등에 붙어 있는 모양이 정말 거북처럼 보였다. 그러나 웃을 겨를도 없이 쇠돌이는 열 명이 드는 통나무를 혼자 들고 미친 듯 달리다가 괴물의 아랫배를 노리고 찔러버렸다. 릴이 들어가지는 않았으나 쇠돌이의 용기에 모두들 환호성을 지르며 용감하게 달려들었다. 괴물이 다시 냉기를 두어 번 뿜어냈으나 구르의 침착한 지휘로 그 냉기를 모조리 막아냈다. 괴물도 상처가 깊어 냉기가 아까보다 훨씬 약해졌고, 구르가 그만큼 침착하게 부하를 잘 다스리기도 했기 때문이다 치우비는 커다란 도끼와 방패 하나를 들고 크게 고함을 지르며 괴물의 등판 위로 뛰어올랐다. 괴물의 몸 여기저기 불에 타오르고 있어 괴물의 작은 머리가 계속 냉기를 뿜어내어 불을 끄는 참이었다. 치우비가 크게 외치면서 달려들자, 괴물의 작은 머리가 곧 뱀처럼 목을 비틀며 치우비에게 냉기를 쏘아댔다. 치우비는 방패로 냉기를 받아내다가 이내 팔이 싸늘해오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받아내다가는 팔이 얼어붙을 것 같아 치우비는 즉시 방패를 집어던지며 몸을 번개처럼 번득였다. 괴물의 작은 머리가 치우비를 노리고 냉기를 두 번이나 더 내쏘았지만, 치우비는 간신히 몸을 날려 그 냉기를 피했다. 그러나 치우비의 몸에 순식간에 허옇게 성에가 끼었고, 눈썹에도 자잘한 얼음덩어리가 달려 있었다. 치우비는 재빨리 몸을 굴리며 접근하다가 일순 높이 뛰어올라서 도끼로 작은 머리의 목을 후려쳤다. 작은 머리의 목에 도끼가 박히고 피가 솟구치자 치우비는 짧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됐다!’ 그때 별안간 작은 머리가 무섭게 포효하더니 무지무지한 속도로 길어지기 시작했다. 허공을 마치 나르듯이 솟아올라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보니 그 작은 머리는 거북의 머리가 아니었다. 거북의 딱지에 몸을 도사리고 있던 뱀처럼 보였다. 그러나 보통 뱀과는 달리, 머리에는 귀가 종긋 솟아 있고 잉어나 메기처럼 두 갈래의 긴 수염이나 있었다. 몸은 은색으로 번뜩이는 비늘로 덮여 있었다. 치우비는 그것을 보고 크게 놀랐다. ‘한 마리가 아니라 두 마리였단 말인가?’ 한 아름도 넘는 뱀의 두툼한 몸체가 순식간에 치우비의 몸을 둥글게 휘어 감으며 조여 오기 시작했다. 치우비는 놀라서 마구 도끼를 휘둘러 뱀의 몸을 내려쳤다. 뱀은 곳곳에 상처를 입었으나 워낙 비늘이 두껍고 강하여 그리 큰 상처는 아닌 듯했다. 제아무리 치우비가 강해 도 뱀에게 감겨 조여진다면 대번 몸의 뼈가 다 부러질 것 판이었다. “비를 구해라!” 치우천이 당황하여 크게 외치자 기회를 보고 있던 형요 여섯 자매가 이를 갈며 일제히 거북의 등판 위로 뛰어올랐다. 그리고 리미와 개르도 용감하게 달려 올라갔다. 싱카는 아스트라를 사용하여 불덩이를 내쏘았는데, 그 불덩이는 뱀의 머리에 맞고 요란한 소리와 함께 폭발했다. 뱀은 고통스러워서 미친 듯 날뛰었다. 그 덕분에 막 뱀에게 감겨 으스러지려던 치우비는 간신히 빠져나을 수 있었다. 싱카는 아스트라를 쏘고는 기진맥진해져서 쓰러지려 하다가 포리의 부축을 받았다. 마냥은 계속 창을 집어던졌고 치베도 계속해서 굵은 화살을 날렸다. 치베의 화살은 보통의 화살보다는 훨씬 큰 것이라, 그중 몇 개는 뱀의 비늘을 뚫고 살에 박혔다. 형요 자매도 비록 칼밖에 휘두르지 못했지만 미친 듯 칼을 휘둘러 뱀의 몸에서 여러 장의 비늘을 떼어내고 그 부분을 집중적으로 칼로 찔러댔다. 비록 하나하나가 그리 큰 충격은 아니었지만 하도 많이 맞으니 타격이 큰 듯했다. 더구나 전사들이 무기에 독을 발라 두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뱀은 점점 괴로워했다. 등판 위에서 뱀과의 격렬한 싸움은 계속되었지만 거북괴물과의 싸움도 치열했다. 거북괴물도 더 이상 움직일 수는 없었지만 틈만 나면 계속 냉기를 뿜어대곤 한다. 구르 부대의 방패는 이제 거의 다 부서져갔지만 그래도 필사적으로 괴물의 입 주위를 막고 서서 거북괴물의 냉기를 차단했다. 거북괴물도 이제 기진맥진해졌는지 뿜어대는 냉기가 보잘것없었다. 야율쿠리와 알한, 쇠돌이, 부루벼락 등은 넘어져 있는 거북괴물의 오른쪽 다리와 배를 통나무와 창 등으로 미친 듯이 공격했고 보돈차르와 마파람, 키타야는 버둥거리는 거북괴물의 왼쪽 발을 공격했다. 그러나 괴물의 왼쪽 두 발이 여전히 미친 듯이 허공을 무섭게 휘젓고 있어 보돈차르 등은 다가가지 못하고 부하들에게 계속 나무와 짚단 같은 것을 던지도록 했다. 불을 질러서 괴물을 태워 죽이려는 것이다. 거북 등판 위의 뱀은 기회만 나면 주술을 쓰려는지 계속 목을 높이 들고 하늘을 바라보며 입을 벌렸는데, 치우천은 그때마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몰아붙이라고 외쳤다. 치우비와 형요 자매, 마냥, 치베, 거기에다가 등판 위로 뛰어오른 알한까지 합세하여 있는 힘껏 괴물을 찍고 내려쳐서 뱀괴물에게 주문을 외울 틈을 주지 않았다. 마침내 뱀괴물은 커다랗게 하늘을 향해 울부짖다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우당탕 소리를 내며 거북의 등판에 쓰러졌다. 그와 거의 때를 같이하여 거북괴물도 길게 울부짖으며 처절한 비명을 지르다가 힘없이 털썩 고개를 떨구었다. 괴물의 발도 힘이 빠져 맥없이 땅에 늘어져 버렸다. “이겼다!” 치우비가 제일 먼저 기쁨을 참지 못하고 부르짖었다. 다른 전사들도 곧 괴물이 완전히 늘어진 것을 보고는 환호를 지르며 서로 부둥켜안고 기뻐했다. 형요 자매는 기뻐 소리 지르며 서로 얼싸안고 엉엉 울었다. 야율쿠리는 팔을 활짝 펴고 하늘을 향해 울부짖는 것처럼 길게 고함을 지르더니 다시 외쳤다. “신수를 잡았다!” 침착한 보돈차르 역시 흥분하여 크게 웃으며 외쳤다. “사람이 신수를 잡았다! 사람이 신수를 물리쳤다!” 구르는 눈썹과 얼굴마저 모조리 허옇게 얼어붙어 반쯤 얼어 죽은 형상을 하고 있었으나 호탕하게 웃어댔다. “또 이야깃거리가 생기는구나! 전설이 또 하나 생겼다! 아하하핫!” 알한 또한 기쁨을 누르지 못해 커다란 칼을 짚고 계속 ‘하하하’ 웃기만 했다. 초초룬과 툰툰은 직접 나서지는 않았으나 역시 좋아서 어쩔 줄 모르며, 자기 독이 더 강해서 괴물을 쓰러뜨렸느니, 자기의 독이 더 강했다느니 아웅다웅 거렸다. 쇠돌이와 부루벼락, 마파람과 양역 등도 모두 좋아서 어깨동무를 하고는 크게 주신의 사울아비들이 부르는 노래를 부르며 떠들어댔다. 치우천도 마음이 벅차올랐으나 애써 내색하지 않고 다만 큰 소리로 아우를 불렀다. “비야! 비이 괴물이 정말 쓰러졌느냐?” 치우비가 웃으며 마지막으로 거북의 등판에서 뛰어내렸다. “쓰러졌어!” 순식간에 축제 분위기로 뒤바뀌었다. 사람의 힘으로 정말 신수를 쓰러뜨릴 수 있다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절대 불가능이라 여겼던 일을 해낸 자신들이 너무도 자랑스러웠다.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얼어붙어 있었지만 잠시 그들의 일은 잊었다. 치우 형제는 서로 얼싸안고 기쁨을 나누었다. “형! 이겼어! 형의 말이 맞았어!” “그래! 이겼다. 번개범도 이길 수 있을 거다. 원수를 같을 수 있어!” 형제가 서로 부둥켜안은 채 그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갑자기 걸걸하고 위엄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했다, 잘했어. 치우천은 깜짝 놀라 치우비를 안았던 팔을 풀고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새 묘한 회색 안개가 감도는 곳에 두 사람만 달랑 서 있었다. 다른 사람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치우비는 크게 놀랐으나, 치우천은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들 앞에 빙긋 미소를 짓고 서 있는 사람, 그 사람은 검은색과 흰색의 머리를 반반으로 기르고 옷도 두 가지 색으로 나누어 입은, 키가 아주 큰 여자였다. 바로 발귀리 선인이었다. “발귀리 선인님!” 치우천이 반갑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여 크게 외치자, 치우비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물었다. “발귀리님이? 어디에?” 치우비가 몹시 놀란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웃고 있는 발귀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동안 잘 지냈느냐? 우리 언젠가 다시 만난다고 했었지? 상대가 말할 동안만 말하는 발귀리였으나 이번에는 발귀리가 스스럼없이 먼저 말을 건넸다. 게다가 입을 열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데도 자연스럽게 마음으로 전해져 왔다. 치우천이 문득 옆의 아우를 보니, 아우는 여전히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치우천이 이상하게 여겨 뭐라 입을 열려는데, 또다시 발귀리의 말이 들려왔다. -말할 것 없다. 네 아우는 나를 보지 못한다. 네가 나를 보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린 구슬 때문이란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와 있는 것입니까? 치우천이 입을 열어 말하지도 않았는데 치우천의 말이 발귀리에게 전해진다는 느낌이 왔다. 아주 신기한 기분이었다. 발귀리가 웃으며 말했다. -그것 한 개가 너에게 갔구나. 다 그렇게 되려고 그런 것이겠지. 네가 아수타란을 물리쳤지? -많은 사람들이 애써 싸워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발귀리는 그 말에는 대답 않고 말했다. -거기에다가 이제는 첸누까지 이겼구나. 첸누는 그래도 신수 중에서는 대단한 녀석이었는데...... -저 괴물의 이름이 첸누입니까? -그렇단다. 그런데 너, 첸누와 이야기를 해보았느냐? -그럴 틈이 없었습니다. 발귀리가 다시 신비롭게 웃었다. -너, 벗들이 많이 얼어붙어 죽어가는 모양인데, 그들을 살리고 싶지 않으냐? -이미 죽지 않았습니까? 그럴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있지. 첸누가 얼린 것이니, 첸누만이 살릴 수 있다. 첸누는 이미 죽지 않았습니까? -죽은 것이 아니다. 다만 죽음을 기다릴 뿐이다. 첸누는 졌으니, 이제 당연히 죽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뿐이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금방 나아 다시 움직일 수 있느니라. 신수가 그리 쉽게 죽을 것 같으냐? 치우천은 깜짝 놀랐다. 발귀리가 다시 신비하게 웃으며 말했다. -첸누와 싸운 것은 벗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지?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첸누와 이야기해보고, 벗과 상의해보아라. 의문이 풀리고 모든 것이 잘될지도 모르니까. -그럴 필요가 있습니까? 그냥 죽이든지 죽게 내버려두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발귀리가 다시 신비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무조건 죽이고 쓰러뜨리는 것이 너의 뜻이었느냐? 네가 첸누에 대해 그리 잘 아느냐? 치우천은 그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렇다. 나는 자신을 따르지 않는 것은 무조건 쓰러뜨리고 물리친다는 헌원의 뜻에 반대했었다. 신도 울루는 도깨비들을 다 죽여야 한다고 했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믿었다. 모든 것은 살아가는 이유가 있다. 신수라고 해서 다를 것이 없다. 내가 큰 실수를 할 뻔했구나.’ 발귀리가 다시 조용히 말했다. -지금 이 세상에 대한 이야기는 지난번에 쑤앙마이에게 들은 것 같던데? -대강 들은 바 있습니다만, 제가 모자라서 아직 많이 깨우치지 못했습니다. -쑤앙마이, 그 아이는 아직도 나를 할망구라고 부르더냐? 치우천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이다. 발귀리는 화사하게 웃다가 이내 타이르듯 말했다. -너 스스로 알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다. 모든 것을 아는 아이가 있으니 말이다. 순간 치우천은 맥달을 떠올렸다. -맥달을 말하는 것이옵니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치우천은 갑자기 마음이 무거워졌다. -발귀리님, 한 가지만 가르쳐 주십시오 간절히 바라옵니다. -뭔데 그러느냐? -앞날은 이미 정해져 있어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고 다만 따르는 것입니까? 아니면 사람들이 하기에 따라서 앞날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것입니까? 발귀리는 그 말을 듣자 다시 조용히 말했다. -그것도 그 아이에게 물어보는 게 좋을 텐데? 치우천은 좀 울적해졌다. 그러자 발귀리는 ‘호호’ 웃었다. -천아, 모든 것은 그 아이가 알고 있다. 그 아이는 나보다도 많이 안단다. 다만 한 가지만 말해주마. 네 길은, 네 스스로 걷는 것이다. -그러면 앞날이 꼭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닙니까? 발귀리의 얼굴에 신비한 미소가 떠올랐다. -정해져 있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어찌 그럴 수가 있습니까? -네가 정해져 있다고 믿으면 정해진 것이요, 정해져 있지 않다고 믿으면 정해져 있지 않은 것이다 치우천은 몹시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발귀리는 계속 웃으며 치우천에게 말했다. -아무튼 잊지 마라. 어떤 것이든 산 것이라면 함부로 해쳐서는 안 되는 법이다. -발귀리님의 가르침, 잊지 않겠습니다. -네 아우에게도 우린 구슬을 주는 게 어떻겠느냐? 그 아이에게도 일러줄 것이 있느니. 치우천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치우비에게 우린 구슬을 건네주었다. 치우비는 아무 생각 없이 그것을 받아들더니 곧 놀라는 듯하다가 이내 표정이 심각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우린 구슬을 형에게 돌려주면서도 치우비의 표정은 계속 굳어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치우천이 물으려는데, 다시 발귀리가 말했다. -네 이야기는 네게 한 것이고, 네 아우 이야기는 네 아우에게 한 것이니 물을 것 없다. 천아, 맥달 그 아이를 미워하느냐? 그 아이가 겁이 나느냐? -그렇습니다. 치우천이 솔직하게 대답하자 발귀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건 네 뜻이겠지. 네 운명이겠지...... 좌우간 나는 이제 가야 하느니라. -벌써 가시는 것입니까? 치우천이 섭섭한 표정을 짓자 발귀리가 웃으며 말했다. -천아, 너와 나는 세 번을 만날 거라 했었지? -그렇습니다. 이제 두 번 만나 뵌 것이지요. -아니다. 이제 세 번을 다 채웠단다. -예? -너와 내가 처음 만난 것은 네가 갓난아기 적이었단다. -예? 그렇다면...... 발귀리의 얼굴에 쓸쓸한 미소가 감돌았다. -나는 이제 세상에 녹아 들어갈 것이다. 시간이 별로 없구나. 그러나 나는 항상 세상에 남아 있느니라. 말(言)이 있는 세상에는 항상 내가 있는 것이다. 이 녀석, 그럼 잘해 보거라. 발귀리의 말이 끝나는 순간, 치우 형제의 눈앞이 갑자기 다시 밝아지더니 그들은 어느새 원래의 장소로 돌아와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느닷없이 주변 환경이 바뀌자 금세 적응하지 못하고 잠깐 몸을 비틀거렸다. 주변에서는 여전히 환호하고 기뻐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거북 신수 첸누도 죽은 듯 쓰러져 있었다. 치우 형제의 일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듯했다. ‘이게 어떻게 된 것일까? 그럼 내가 선 채로 꿈을 꾸었단 말인가? ‘정말 신기하기 이를 데 없구나. 아참, 내가 이럴 때가 아니지.’ 치우천은 잠시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다가 이내 소리쳤다. “잠깐 조용히들 하시오!” 치우천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기뻐 날뛰던 사람들이 정신을 가다듬고 치우천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치우천이 엄숙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지금 저 괴물이 쓰러졌다고는 하나, 아직 죽은 것은 아닌 듯합니다. 그리고 우리 편 사람들도 많이 죽고 얼어버렸으니, 너무 기뻐할 것만은 아닙니다.” 치우천의 말에 사람들은 숙연해졌다. 여기저기 얼어붙어 버린 사람들이 녹지 않고 그대로 조각처럼 굳어 있었던 것이다. 치우천이 계속 말을 이었다. “어떻게든 저 사람들을 살려야 합니다.” 그 말을 듣고 보돈차르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사람들이 죽은 것은 안 된 일이다. 그러나 이미 모두 죽지 않았을까?” “살릴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저 괴물이라면 방법을 알 수도 있습니다. 나에게 우린 구슬이 있으니, 괴물과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위험할지도 모르네. 그냥 불을 질러서 모조리 태워버리는 것이 낫지 않을까?” 구르가 신중하게 말하는데 치우천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먼저 사람들을 구할 방법이 있나 물어본 뒤에 죽여도 늦지 않습니다.” 치우천이 앞으로 나서자 사람들은 행여 괴물이 치우천에게 달려들까 봐 약간 거리를 두고 무기를 겨누었다. 치우천은 발귀리 선인에게 들은 바가 있으므로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치우천이 가까이 다가갔지만 괴물 첸누는 움직이지도, 감은 눈을 뜨지도 않 았다. 치우천이 우린 구슬을 꺼내 양손에 들자, 그때서야 첸누는 감았던 눈을 떴다 괴물이 다시 눈을 뜨자 사람들은 놀라며 긴장했으나, 치우천은 침착하게 마음속으로 첸누에게 말을 걸었다. -첸누? 네가 첸누냐? 순간,첸누의 의식이 치우천의 마음속으로 확 밀려들었다. 두서도 없고 앞뒤 가릴 수 없는 생각의 홍수라서 치우천은 눈앞이 아찔했다. 첸누는 비록 도를 닦은 신수였지만 사람이 아니라서, 사람처럼 말로 차근차근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치우천은 다시 한 번 힘주어 자신의 뜻을 전달했다. -첸누, 차근차근 생각해라. 나는 너와 이야기하고 싶다. 첸누의 의식 속에서 의아하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첸누는 우린 구슬을 알고 있던 듯, 그것을 보고 놀라는 것 같았다. 다시 한참동안이나 애를 쓴 후에야, 치우천은 첸누와 짤막하게나마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 -너는 누구냐. 내 이름을 어떻게 아느냐? 누구인데 우린 구슬을 가지고 있느냐? 너는 발귀리님을 아느냐? 만난 적 있느냐? 왜 나를 공격했느냐? 왜 나를 가만 놔두는 것이냐? 첸누의 질문이 한꺼번에 몰아치자 치우천은 다시 정신을 집중해서 생각을 정리했다. 치우천의 집중력이 대단하기에 망정이지, 보통 사람 같으면 머리가 터져나갈 정도로 고통스러워서 넋을 놓아버렸을지도 모른다. -천천히 생각해라. 한 가지씩 천천히! -첸누는 한참 복잡한 생각을 하다가 이내 진정했는지 천천히 의사를 전달해왔다. -그래, 내가 첸누다. 첸누란 이름은 발귀리님이 지어주신 것이다. -네가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 -나는 발귀리님을 만났었다. -그러냐? 그런데 왜 나를 공격한 것이냐? -네가 전에 이 마을에 살던 사람들을 죽였느냐? 첸누는 잠시 조용하다가 말했다. -그렇다. -왜 그런 짓을 했느냐? -그놈들이 먼저 내 알을 훔쳤다! -알? -그렇다! 나는 세상 동물들이 알을 낳고 새끼를 낳아 수가 늘어나는 것을 안다! 그래서 나는 도력을 모아서, 알을 낳았다. 그런데 새끼가 태어나기도 전에 사람들이 내 알을 네 개나 훔쳐 갔다. 저 북쪽 땅에서는 사람들이 나를 높이 받들고 제사도 지내며 위해주었다. 그렇게 사람들이 나에게 잘해 준다면, 내가 왜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이겠는가? -그렇다면 마을사람들이 네 알을 훔쳐갔기 때문에 그들을 죽였다는 것이냐? 첸누는 돌연 화를 벌컥 냈다. -그렇다! 나는 원래 여기 살지도 않았다 하지만 내 알을 훔쳐간 놈을 쫓아 여기까지 왔다. 그 때문에 겨울이 스무 번이나 지났다. 나는 함부로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 나는 사람들을 싫어하지 않는다. 치우천의 표정이 약간 심각해졌다 -네 알이 도둑맞은 것이 틀림없느냐? -그렇다. 나는 먼 북쪽의 찬 바다에서 살았고, 도를 닦았다. 그런 내가 왜 물도 없는 이런 곳까지 왔겠느냐? -그러면 알을 찾으면 되지, 왜 사람들을 모조리 죽였는가? 그리고 왜 지금도 사람을 계속 죽이는 것이냐? 첸누는 화가 나서 말했다. -너야말로 나를 처음 보면서, 왜 나를 공격한 것이냐? -네가 내 벗의 부모님과 마을사람들을 모두 해쳤기 때문이다. -벗? 벗이 뭐냐? 첸누는 벗이란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다. 치우천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네 등에는 뱀같이 생긴 신수도 같이 있는 것 같던데?그것도 네 머리냐? -그도 첸누다. 나도 첸누다. 허나 우리는 몸이 붙어 있지는 않다. -생각도 똑같이 하느냐? -그렇지는 않다. 하지만 그도 첸누, 나도 첸누다. 둘이 함께 첸누이고, 하나하나는 이름이 없다. -그것과 비슷한 것이다. 너와 같이 있는 그 뱀과 너는 벗이다. 서로 위험하면 구해주고 같이 친하게 지내는 것이 벗이다. 음, 똑같지는 않지만 비슷하다. 누가 뱀을 해치려 하면 네가 도와줄 것이다. 누가 너를 해치려 하면 뱀이 도와줄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누가 벗을 해치면 내가 돕는다. 누가 나를 해치면 벗이 나를 돕는다. 사람도 아닌 신수에게 사람이 가진 단어의 개념을 설명하기는 생각보다 퍽 힘이 들었다. 그러나 첸누는 조금 시간이 지나자 어느 정도는 이해한 것 같았다. 첸누는 신수들 중에서도 쾌 똑똑한 편이라 사람들의 습성을 나름대로 많이 이해하고 있는 편이었다. 도력이 높은 신 수들이라도 혼자 지내는 고립자들이 많았기에 도의 경지는 깊었지만 세상의 일이나 다른 존재를 대하는 법은 보통의 짐승들보다 크게 나을 것이 없었다. 이윽고 첸누가 이해했다는 듯이 말했다. -그래서 내가 네 벗을 해쳤고, 그 때문에 네가 날 공격한 것이냐? -그렇다. -네 벗은 이 마을에 살던 사람인가? 이 마을사람은 다 죽지 않았는가? -살아남은 사람이 있다. 너는 내 벗의 부모님과 마을사람을 다 죽였다. 첸누가 갑자기 간절한 태도로 말했다. -혹시.....혹시 그게 내 아이들이 아니냐? -뭐? -네 벗이라는 게, 너희와 생김새가 좀 다르고 자그마하고 귀여운, 내 아이들이 아니냔 말이다. 치우천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첸누의 새끼라면 역시 거북이나 뱀일 텐데, 왜 갑자기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일까? 첸누는 한참이나 자기 새끼에 대해 말했는데, 그 말을 듣다 보니, 첸누가 새끼라는 것은 거북이나 뱀의 모습을 한 괴물이 아니라 바로 사람을 말하는 것 같았다. 첸누는 거듭해서 설명을 했고, 똑같이 생긴 네 명의 새끼에 대해 말했다. 치우천은 처음에는 의아해하다가 문득 스치는 생각이 있어 깜짝 놀랐다. -혹시 형요 자매 말이냐? 아까 네 등판에 뛰어올라서 너를 공격한? -맞다! 치우천은 너무도 어이가 없어 혹시 첸누가 미친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사람임이 분명한 형요 자매를 보고 어떻게 자기 새끼라고 하는 것일까? 그러나 첸누는 애달픈 느낌을 강하게 풍기며 말했다. -슬프구나, 슬퍼. 나는 더 싸울 수도 있었다. 그래도 너희가 이겼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내가 더 힘을 내서 싸웠다면 지금만큼 이렇게 많이 살아남지는 못했을 것이다. 너희가 이겼다 해도 거의 다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 새끼들이 나를 죽이려는데, 내가 무엇 하러 더 살려고 하겠느냐? 치우천은 너무도 당황스러웠다. 이건 뭐가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된 것 같았다. 서둘러 치우천이 물었다. -너와 생김새가 그렇게 다른데, 어떻게 네 새끼라는 것이냐? 형요자매는 사람이지, 네 새끼가 아니란 말이다! 그러자 첸누는 곧 무섭게 화를 냈다. -속이지 마라! 그 애들은 내 아이들이다! -속이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아니란 말이다! 첸누는 무섭게 흥분했다. -그럴 리 없다! 나는 알을 네 개 낳았다. 그리고 나쁜 놈이 그것을 훔쳐갔다. 그리고 오래 지난 다음 내가 그 놈을 찾아냈을 때, 그놈은 네 마리의 새끼를 두고 있었다. 그리고 내 알은 이미 껍질이 깨어져 있었다. 그 네 마리는 모두 똑같이 생겼다! 나는 사람이 똑같이 생긴 네 마리의 새끼를 낳는 것을 본 일이 없다! 그러니 그것은 내 알이 깨져서 나온, 내 아이들이 틀림없다! 내 알은 똑같이 생겼으니, 새끼도 똑같은 게 당연하지 않느냐! 내 아이를 빼앗아 자기들처럼 키우다니! 그것만으로도 그놈은 용서할 수 없다! 그래서 모조리 죽여 버렸다! 치우천은 기가 막혀 뭐라 대꾸할 말이 없었다. 첸누의 애절한 마음이 느껴지는지라, 치우천마저도 잠시 동안, 형요 자매가 정말 알에서 태어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사람이 이런 거북괴물의 알에서 태어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첸누는 철석같이 그렇게 믿고 있는데다 그 증거로 삼고 있는 네 쌍둥이란 것이 아주 드문 터라, 뭐라 반박하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형요는 너와는 생김새가 전혀 다르고, 사람을 더 닳지 않았느냐? -그건 뭔가 주술을 부렸겠지! 몸이 커지거나 작아지게 만들 수도 있는데, 그깟 겉모습을 못 바꾸겠느냐? -그렇게 대단한 주술을 부릴 사람들이었다면 네 입김 한 번에 그렇게 속절없이 얼어 죽지 않았을 것이다! 치우천이 외치듯 뜻을 전하자 첸누는 잠시 씨근거릴 뿐, 혼란스러워했다. -나는...... 나는 그래서 내 아이들을 도우려 했다. 나는 내 아이들에게 걸린 주술을 풀어주고 싶었지만, 무슨 주술이 걸려 모습이 그렇게 변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도력을 써서 주술을 풀 방법을 찾으려 했지만, 잘 알 수 없었다. 치우천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걸리지도 않은 주술을 풀 방법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러나 첸누는 계속 중얼거렸다. 마치 고생 많이 한 아낙네들이 자기 신세타령을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생각했다. 지금 당장 나타나면 내 아이들이 놀랄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그래서 남몰래 내 아이들을 보고, 도와주려 했다. 내 아이들은 자꾸만 내 눈을 피해 돌아다니면서 사람들과 싸움질을 했다. 사람들과 그렇게 싸우니, 사람들의 새끼는 아닌 것이 분명하다. 내 아이들이 맞다. 치우천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으나 곧 심각하게 생각했다. ‘하긴, 신수나 짐승들이 보기에 사람들은 그렇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절박한 이유도 없이 서로 싸우고 죽이니까...... 더구나 형요는 도둑이었으니...... 아, 사람의 길이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 오히려 부끄럽구나.’ 첸누는 계속 주절거렸다. -내 아이들은 사람들이 가진 물건이 필요한 것 같았다. 아마 나쁜 사람들이 내 아이들에게서 빼앗은 것이겠지. 그래서 나는 내 아이들을 도와주려고 사람들을 얼리고 물건을 빼앗았다. 힘들었지만 뱀 첸누가 도와주어서 간신히 그 작은 것들을 옮겨다 동굴에 쌓아두기까지했다. 그런데 내 아이들은 그것을 가져가지도 않았다. 이 어미의 선물을 돌아보지도 않았다. 나는 섭섭했지만 언젠가는 아이들이 어미를 알아보리라 생각하며 계속 물건을 쌓았다. 치우천은 몹시 서글퍼졌다. ‘첸누는 정말 가엾구나. 사람을 일부러 죽인 것도 아니다. 다만 뭐가 사람에게 옳고 그른지 생각하지 못한 것뿐이다. 그러고 보니 형요의 책임도 없다고는 못하겠구나. 형요가 도둑질을 안 했으면, 첸누가 굳이 사람들을 해치지는 않았을 것인데......’ 이야기를 들을수록 비록 수많은 사람을 해쳤지만 첸누가 점점 가여워졌다. 치우천은 다시 첸누를 설득했으나 첸누는 조금도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첸누는 형요 자매가 자기 새끼라고 믿었고, 그래서 자기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되자 치우천은 난감해졌다. 형요 자매는 그냥 사람일 뿐이지 첸누의 새끼가 아니라는 것을 첸누가 알아듣도록 말해야하는데, 방법이 딱히 생각나지 않았다. 치우천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지난번 형요에게 들은 이야기가 바로 해결책이 될 것 같았다. -첸누, 잘 들어라. 네가 알을 잃어버린 것은 언제냐? -겨울이 스무 번 지났다. -그래. 너는 먼 북쪽의 아주 추운 곳에서 살았다고 했지? -그렇다. -그럼 네가 알을 잃어버렸을 때, 그것은 깨어 있었느냐? -아니다. -그럼 알이 언제 깨어났다고 생각하느냐? -알은 겨울이 세 번 정도 지나면 깨어난다. 그러나 내가 알을 잃고 북쪽마을에 갔을 때, 그곳에는 이미 알이 없었다. 알이 가까이 있으면 나는 알 수 있단 말이다! 그런데 알은 주변에 없었다. 나쁜 놈이 가지고 이미 멀리 가버린 것 같았다. 그 나쁜 놈이 가지고 있다가 깨어난 게 분명하다. 그래서 나는 정말 열심히 찾아다녔다. 그러다가 북쪽 마을에 살던 사람이 이곳 계곡에 와 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기 와보니 내 알들의 기운이 느껴졌다. 그리고...... 치우천이 첸누의 생각을 끊었다. -그래서 형요는 네 새끼가 될 수 없다. 형요는 이 계곡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그 북쪽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아주 어릴 적에 이리로 오게 된 것이다. 너는 겨울이 스무 번 지났다고 하지만, 형요는 겨울이 스물네 번 지나기 전에 태어났단 말이다. 네 알보다 네 번 겨 울을 더 겪은 형요가, 어떻게 네 새끼가 된단 말이냐? 치우천이 정연하게 이야기하자 마침내 첸누도 알아들은 듯했다 결국 납득이 가자, 첸누가 처량하게 말했다. -그러면..... 그러면 내 아이들은 어떻게 된 것이냐? 응? 치우천이 침울한 표정으로 물었다. -첸누, 너는 수거북 첸누를 만나서 알을 낳았느냐? -그런 것이 어디 있느냐? 세상에 첸누는 나 혼자다! 치우천은 진심으로 안 되었다는 듯이 말했다. -너는 모르고 있었구나. 내가 가르쳐주마. 알을 낳는 동물은 암컷과 수컷이 다 있어야 한다. 그래야 그 알에서 새끼가 태어날 수 있는 것이다. 암컷 혼자 있어도 알을 낳을 수는 있지만, 그 알에서는 새끼가 태어나지 않는다. 첸누, 미안한 이야기지만, 네 알에서는 원래 새끼가 태어날 수 없었다. 너는 거북이고, 알을 낳았으면 무척 많이 낳았을 것이다. 그 알들 중에서 새끼가 태어난 알이 있느냐? 아마 없었을 것이다. 치우천은 거북을 키워본 적은 없지만 닭을 본 적이 있었다. 암탉 혼자도 알은 낳지만, 그 알에서 병아리가 깨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렇게 설명한 것이다. 거북이 알을 많이 낳는다는 이야기는 지난번 진주를 구하러 바다에 갔을 때 주워들은 것이었다. 그러자 첸누는 비통하게 울부짖었다. -원래 태어날 수 없었다니! 그렇다면 그 네 개도..... 네 개마저도 그냥..... 치우천은 진심으로 첸누가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끼를 낳아 키우려는 생각은 원래 모든 생물의 본성이다. 첸누는 고립자였지만, 뒤늦게나마 그런 마음을 깨닫게 되었으니 포악한 신수라고 볼 수는 없었다. 오히려 불쌍하고 가엾은 생각이 들었다. ‘첸누는 아마 알들이 모조리 깨어나지 못하자, 빼앗긴 네 개의 알에 희망을 걸고 스무 해 동안 찾아 헤맨 것이 분명하다. 정말 불쌍하구나. 그리고 형요자매를 보자, 그저 자기 알에서 태어난 자기 새끼라고 믿은 것이 분명하다. 가엾은 일이구나. 정말 불쌍하구나.’ 첸누는 계속 울부짖었다 사람처럼 희로애락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신수라지만, 첸누의 마음은 비통하기 그지없어서 치우천은 마음이 아려왔다. ‘이런 슬픈 일이 있는가. 첸누가 가엾구나. 그리고 형요도 가엾구나. 도대체 누가 잘못하여 이런 일이 벌어졌단 말인가? 조용히 살던 첸누가 사람들을 죽이게 되고, 형요는 부모를 잃었는데, 도대체 누구의 잘못이란 말인가?’ 가장 근본적인 책임은 형요의 부모님에게 있지 않을까 싶었으나 치우천은 곧 생각을 바꾸었다. 신기한 알을 보고 주운 것이 사람에게 죄가 될 수는 없었다. 더구나 그 알은 어차피 깨어나지도 못할, 빈 알이었으니까. 아무도 남을 해치고 싶지 않았는데도 결국 수백 명의 사람이 죽고 첸누도 수십 년 동안 더할 수 없을 만큼 마음고생을 한 것 아닌가? ‘답답하구나, 답답해. 이 모든 것이 사람과 신수가 서로를 너무도 몰라서 생긴 일이구나. 정말 슬픈 일이야.....’ 그때 첸누가 조용히 말을 전해왔다. -내가 잘못했구나. 내가 바보였구나. 내 새끼도 아닌데, 내 새끼라고 생각하고 내가 사람들을 죽였구나. 나는 죽어 마땅하다. 오래 쌓은 도력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그냥 나를 죽여 다오...... 치우천이 잠시 망설이며 대답을 하지 못하자 첸누가 다시 말했다. -내가 너희 사람을 많이 죽였지만, 방금 얼어버린 사람들은 살아날 수 있다. 내가 풀어주마. 치우천이 대답하기도 전에, 첸누는 뭔가 조용히 주문을 외우는 것 같았다. 그때 숨을 죽이고 치우천과 첸누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첸누의 몸에서 붉은 기운이 갑자기 둥글게 퍼져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 기운은 몹시도 따뜻하고 온화해서, 서 있던 사람들 모두 털옷을 당장이라도 벗어버리고 싶을 만큼 더워졌다. 얼어붙은 채 굳어 있던 수십 명의 사람들도 그 붉은 기운을 쐬는 순간 서서히 몸이 녹으며 풀리자 ‘어이쿠’ 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 얼었다가 녹은 탓에 당장 기운을 쓰지 못했고, 몇몇은 죽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시 살아났다. 사람들이 살아나자, 남아 있던 사람들은 환호성을 올리며 기뻐했다. 사람들 대부분은 치우천이 첸누를 설득하여 얼어버린 사람들을 살려낸 것으로 믿고 있었다. 사람들의 공포심과 증오가 약간 덜어지고, 첸누에 대한 경외심 같은 것이 생겼다. 그러나 부모를 잃은 형요 자매만은 그렇지 않았다. “괴물! 얼려버린 사람을 살려주었다고 너도 살려줄 줄 아느냐?” 형요가 바락 악을 쓰자 치우천은 굳은 얼굴로 형요를 제지했다. 첸누는 어서 죽여 달라고 말하고 있었으나, 치우천은 우린 구슬에서 한 손을 떼었다. 그러자 첸누의 목소리는 뚝 끊어져 들리지 않게 되었다. 치우천이 슬픈 표정으로 첫째 형요에게 다가가자 형요는 불만스러운 듯이 물었다. “설마 저 괴물을 살려주자는 건 아니겠지?” 그 말에 대꾸는 하지 않고 치우천은 말없이 우린 구슬을 형요에게 건네주었다. “네가 정해라. 단, 먼저 이야기를 해보아라. 그는 첸누라고 한다.” “이름 같은 건 알 필요 없어! 그냥 죽이면 그만이야!” 형요가 막무가내로 고집을 부렸지만 치우천 역시 물러서지 않았다. “글쎄, 나는 말해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많은 궁금증이 풀릴 테니까 내가 나중에 이야기하는 것보다 네가 직접 듣는 것이 낫지 않을까?” 치우천이 차분하게 말하자 형요는 의아한 듯 망설이다가 결국 우린 구슬을 받아들었다. 치우천은 그쪽은 돌아보지도 않고 슬픈 듯 지친 듯, 움집 하나로 비틀거리며 들어갔다. 치우비는 이상하여 급히 형의 뒤를 따라갔다. “형! 왜 그래.?” 치우천은 괴로운 듯이 마지못해 말했다. “참 괴롭구나. 세상일이란 것이 이렇게 괴로운 것이구나. 비야?” “응?” “만약 말이다...... 어머니를 해친 번개범이 정말 그럴 수밖에 없는 까닭이 있어서 어머님을 해쳤다면......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 나는 그 생각을 하니 괴롭구나.......” “무슨 소리야?” 치우비는 영문을 몰라 눈을 크게 떴다. 치우천은 형요와 첸누 사이의 그 기이한 일을 전부 이야기해주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자 인정 많은 치우비는 눈물을 글썽였다. “둘 다 불쌍해. 이걸..... 이걸 어떻게 하지?” “너라면 어쩌겠니? 첸누는 형요 부모님의 원수지만..... 너무 가엾지 않으냐?” 치우비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부모의 원수를 갚아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살려주어야 하는지 자신으로서도 결정을 내리기가 쉽지 않았다. 치우천은 형요와 첸누의 일이 걱정이 되어 조심스레 물었다. “형요가 어떤 결정을 내릴까?” 치우비는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 아아, 하지만 번개범은......” “물론 번개범은 다르다. 그놈은 우리 어머님만 해친 것이 아니라, 주신 한웅님마저 해치려 했으니 용서할 수 없지 그러나.... 만약 번개범도 저런 기막힌 이야기가 있다면? 나쁜 짓을 하려던 게 아니고, 다만 나름대로 자기 자신과 사람들을 지키려 한 거라면? 나라면 어찌할까? 너라면 어쩌겠니?” 치우천과 치우비는 둘 다 한숨만 쉬었다. 물론 번개범은 포악하고 잔인하여 그런 사연은 없을 것이라 믿고 싶었다. 그러나 사람도 아닌 신수의 일을 어떻게 알겠는가? 만에 하나 그렇게 되어 원수를 갚을 수도 없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치우천은 한숨을 길게 내쉬며 입을 열었다. “우린 구슬의 힘은 대단하구나. 허허, 서로 다른 것들끼리도 말이 통하고 알게 되면 이렇게 되는구나, 우리 벗들도 다들 부족이 다르지만, 말이 통하고 서로 알게 되자 벗이 되었잖느냐. 그래, 말이 통하는 것, 그것만큼 중요한 게 없는 것 같구나. 그것이야말로 우린 구슬의 힘이고, 그 어떤 힘보다 더 강한 것 같구나.......“ 한참이 지나자 별안간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치우 형제는 곧 일어나서 밖으로 나섰다. 나가 보니, 거대한 첸누의 모습은 간 곳이 없고, 형요 자매 여섯이 모두 끌어안고 목을 놓아 울고 있었으며, 다른 사람들은 그 주위에 둥글게 서서 말없이 바라보고만 있었다. 치우천은 탄식하듯 말했다. “형요가 첸누를 용서해주었구나!” 치우비도 눈물을 글썽이며 한마디 끼웠다. “나는 형요가 옳았다고 생각해!” 치우천은 하늘을 보며 생각했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나는..... 나는 용서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허나 번개범을 저렇게 용서해야 하는 날이 오는 것은 아닐까? 두렵구나, 두려워.’ 새로운 출발 사람들은 울고 있는 형요자매에게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물어보았다. 형요 자매는 목 놓아 울다가 한참 후에야 간신히 자초지종을 털어 놓았다. 부모를 괴물에게 잃었으나, 그 괴물 역시 자신들을 자식으로 여기고 있었다는 기막힌 사연에 사람들은 어이없어 하면서도 형요 자 매들을 불쌍하게 여겼다. 형요가 훌쩍이면서 말했다. “치베의 말이 맞았어. 괴물이 사람을 죽인 건 우리 때문이야. 그러니 우리가 죄 값을 치러야 해. 그 괴물은..... 첸누는 부모님을 죽였지만..... 첸누를 죽인다고 우리 부모님이 살아오는 것도 아니야. 우리나 우리 부모님이 도둑질을 하느라 많은 사람을 죽여서 그 죄 값을 받는 거야......” 치베는 비록 형요와 항상 아웅다웅하던 처지였지만 애써 형요를 위로하려 했다. “그렇게 생각하지 마라, 형요 앞으로 그런 짓을 안 하면 그만 아닌가? 천 안다를 위해 그리고 죽은 사람들을 위해 더 많은 공을 세우면 된다.” 그러나 형요는 고개를 저으며 몸을 일으키더니 치우 형제에게 다가갔다. 다른 다섯 자매 역시 엉엉 울면서 그 뒤를 따랐다. 형요는 치우천에게 우린 구슬을 돌려주며 말했다. “치우천, 너에게 고맙게 생각해. 그리고 다른 벗들에게도 고맙게 생각한다. 보물은 꼭 너희가 바라는 세상을 만드는 데 써줘. 우리는 이제 떠나기로 했어.” “떠나다니! 무슨 소리냐?” 치우 형제는 크게 놀랐다. 다른 사람들도 웅성거리며 달려왔다. 형요가 굵은 눈물을 뚝뚝 떨구며 말했다. “어차피 우리 자매는 이 땅에서 태어난 것도 아냐. 이제 부모님 원수도...... 갚은 건 아니지만 다 해결되었으니, 우리가 태어난 곳으로 돌아갈 거야. 우리 부모님은 억울하게 추방당했잖아. 첸누도 그리로 돌아갈 거야. 우리와 같이 가기로 했어. 나는 돌아가서, 우리 네 쌍둥 이가 있다고 나쁜 일이 생기는 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 그래서 우리 부모님의 누명도 풀고, 우리 부족과 함께 살고 싶어. 너희와 헤어지는 것은 안타깝지만...... 우리와 똑같이 생긴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살고 싶어. 다시 쫓겨나는 한이 있더라도 꼭 가보고 싶어.” 모두가 안타까워했으나 형요 자매의 처지를 충분히 이해했기 때문에 더 이상 붙잡지는 않았다. 다만 애석하게 생각할 뿐이었다. 형요는 무척 서글픈 듯 목소리가 착 가라앉았다.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 우리는 많은 죄를 지은 몸이야, 많은 몽골 사람과 타타르 사람들을 해쳤어. 여기서 살 낯이 없어. 그리고 우리 같은 도둑들과 같이 다니면, 너희 형제에게도 좋지 않을 거야. 너희 형제는 이제 훌륭한 영웅들이잖아.” “너희가 도둑이었던 건 이미 지난 일이다! 세상에 한두 번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느냐? 치베도 말했잖아, 앞으로 죄를 짓지 않으면 그만이라고! 더구나 그 먼 길을 꼭 가야 한단 말야?” 치우비가 못내 아쉬워 설득하려 했지만 형요는 막무가내였다. “우리 과보족이 사는 땅은 멀지만, 못 갈 곳은 아니야. 부모님이 올 수 있었으니, 또한 되돌아갈 수도 있겠지 나중에 자리를 잡으면 꼭 한 번 만나러 올게. 아니면 사람이라도 보낼 테니 틈이 나면 꼭 만나러 와줘, 알았지?” 형요 자매의 결심이 굳은 것을 알자 사람들은 더 만류하지 못했다. 치우 형제도 붙잡지 않았다. 그동안 정이 든 형요 자매와 헤어지게 되자 사람들은 몹시 섭섭했으나 웃는 낯으로 순탄한 여행길을 빌어주었고 잘 살아가기를 바랐다. 그날 하루 종일 아수라장 같은 주위를 모두가 나서서 정리하고 다친 사람들을 한마음으로 돌본 뒤, 해가 저물어서야 형요 자매를 위한 잔치를 벌였다. 형요 자매는 평소에도 술을 잘 마셨으나 그날은 더더욱 엄청난 주량을 과시하며 수많은 전사와 영웅들을 곯아떨어지게 만들었다. 요요와 미요는 취하자 떠나기 싫은 듯 엉엉 울기도 했다. 잠시 짬을 내어 치우천은 치우비와 도깨비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형요 자매를 보니, 너희 일도 안 되었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너희도 원래 살던 곳으로 가고 싶다면 돌아가라.” 그러나 도깨비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자기들이 살던 곳은 너무도 멀고 험하여 돌아갈 수도 없으며, 너무 오랜 세월이 지나 부족을 찾을 수도 없을 것이라 말했다. 그러니 그냥 여기서 머물러 있는 것이 낫다며 계속 같이 있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리미가 웃으며 가장 먼저 말했다 “저는 울라트님 곁을 떠나지 않을 겁니다, 허허.” 마냥도 한마디 했다. “제가 살던 곳은 너무 멀어서, 가다가 늙어 죽을지도 몰라요 마냥, 여기가 좋아. 여기서 살래요.” 개르는 껄껄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우리 부족은 다 망해서, 돌아가 봐야 혼자 살다 죽는 수밖에 없습니다. 나를 돌려보내는 것은 나를 죽이는 것입니다. 껄껄껄.” 차분한 포리도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내가 살던 곳은 배를 타고 가야 하는 곳이라, 어차피 돌아갈 수 없습니다. 주인님, 지난번 주인님이 만드신 무기들은 아주 놀라웠습니다. 헌데 제가 살던 곳에서도 그런 물건을 만드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주인님 하시는 일에 제가 감히 나설 수는 없었지만, 앞으로 무언 가를 만드는 일이라면 제가 도울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허락해주시겠습니까?” 치우천이 소탈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다, 포리 그런 재주가 있으면 진작 이야기했어야지, 나 혼자 끙끙거리고 고생했잖느냐? 앞으로 잘 돕지 않으면 벌을 주겠다.” 도깨비들은 다같이 ‘와’ 하고 웃었다. 웃음이 멎기를 기다려 치우천은 싱카에게 고개를 돌렸다. “싱카, 나는 태산 회의 때 너와 비슷한 차림과 생김새의 사람들을 본 적이 있다. 너희 나라는 그렇게 멀지 않은 것 같은데, 돌아갈 생각이 없느냐?” 별안간 싱카가 치우 형제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도깨비 싱카, 주인님 형제분들께 고합니다. 싱카가 거짓말을 했습니다.” “거짓말?” “도깨비 싱카, 주인님의 덕분으로 이제 요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요기가 되었지만 마음은 무겁기만 합니다. 솔직히....... 저는 주인님을 이용하려 했습니다. 싱카는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저를 죽여주십시오.” “대체 무슨 소리냐? 알아듣게 말해봐라.” 치우천이 채근하자 싱카가 눈물을 흘리며 조용히 말했다. “도깨비 싱카가 말씀드립니다. 지난번에 말씀드린 적 있을 겁니다. 저는 원래 전사였지만, 주술의 힘을 얻을 양으로 요기가 되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곳에 오게 된 것이고요 요기가 되려면 아주 힘든 과업을 수행해야 한다는 신관의 예언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건 아시지요?” “그래. 그런데 그게 어째서?” “그..... 제 과업이란 것이..... 바로 신수를 굴복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뭐?” 치우 형제와 도깨비들이 깜짝 놀라자, 싱카는 슬픈 표정으로 계속 말을 이었다. “지난번 주인님은 신수의 알을 얻으셨습니다. 그때 혹시 그 알을 얻은 사람 이야기를 듣지 못하셨습니까?” 치우천은 약간 미간을 찌푸렸다. 치우천이 붕의 알을 얻은 일은 툰툰과 치우비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네가 어찌 알지?” “저는 알고 있었습니다. 제 동료가신수의 알을 얻으러 갔다가 돌아오지 않았으니까요 저와 제 동료는 신수의 약점을 노리지 않고서는 신수를 굴복시킬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 동료가 먼저 알을 훔치러 간 것입니다. 제 동료가 멀리서 연기를 피워 제게 알을 얻었다고 신호했는데, 그게 신수에게 발각된 모양입니다. 저는 제 동료를 구하려 했지만 이미 늦었고, 되레 신수를 노하게 만들었다고 남쪽 부족들에게 습격 받아 잡혀서 팔려오게 된 것입니다.” 치우천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래, 그랬구나. 그 알은 내가 직접 얻은 것은 아니고, 다른 사람이 그 죽어가는 사람에게서 얻어서 내게 준 것이다 알을 얻었던 네 동료는 비록 죽었지만, 대단한 용사였던 모양이다.” “그렇습니다. 그의 이름은 파라라냐인데, 저희 나라에서는 대단히 유명한 전사였습니다.” “그런데 그 신수의 알을 내가 가지고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지?” “냄새입니다. 냄새가 났습니다. 주인님의 몸에서 희미하게 풍기던 냄새는 제 동료가 신수를 진정시키기 위해 저와 함께 만들었던 약 냄새였습니다. 지난번에 나타났던 새 신수는 바로 그 알에서 깨어난 것이지요?” “그렇다.” 그때 치우비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그런데 네가 무슨 거짓말을 했고, 뭘 잘못했다는 거야?” “저는 비록 도깨비로 잡혀와 있었지만, 사실 도망치려고 마음만 먹으면 도망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부러 도망치지 않은 것입니다. 저는 제 혼자 힘으로는 신수를 굴복시킬 수 없다고 생각했기에, 그럴만한 힘을 가진 용사를 찾으려 생각했습니다. 차라리 여기저기 팔려 다니다 보면, 아주 강한 사람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결국 저는 태산으로 가게 되었고, 주인님을 만났습니다. 더구나 주인님을 보자마자, 저는 약 냄새를 맡고 주인님이 신수의 알을 가진 사람이란 것을 금방 알았습니다.” 치우비는 마냥 놀라워만 했지만, 치우천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한마디 했다. 도 그게 이상했다. 너는 칼을 잘 쓰고, 주술까지 부릴 줄 아는데 왜 잡혀 있는지 말이다. 너 정도라면 분명 아무 때나 도망칠 수 있었을 테니까.” “주인님은 이미 눈치 채고 계셨군요.” “아니다. 난 좀 이상하다 여겼을 뿐, 의심한 적은 없다.” “도깨비 싱카, 부끄러워 죽을 지경입니다. 저는 처음에는 아주 잘되었다 생각했습니다. 저는 과업을 완수하고 싶었기 때문에, 그 알을 다시 훔치려고 했습니다. 주인님이라고 이전 주인들보다 나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도깨비 취급을 받는 것도 지긋지긋했고, 주인 님이라도 죽여 버릴 생각까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새 주인님은 너무 좋으신 분들이어서..... 해칠 수가 없었습니다. 해치기는 고사하고 알을 훔칠 생각조차 들지 않았습니다. 예전의 난폭하고 사악한 주인들이었다면,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죽이고 빼앗았을 것입니다. 허나 이번만큼은 많이 망설였습니다. 밤에도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다시는 오지 않을 좋은 기회라고 생각될 때도 많았지만, 차마 손이 나가지 않았습니다.......” 치우비는 짐짓 쾌활하게 웃으며 싱카를 다독였다. “됐다, 됐어. 너는 좋은 사람이야. 죄를 짓지 않았잖아.” “아닙니다. 더 들어보십시오.” 싱카는 코를 한 번 훌쩍이고는 말을 이었다. “그러다가 그..... 번개범이라는 신수의 습격을 받았을 때, 저는..... 마침내 마음을 정했습니다. 이대로라면 어차피 모든 사람이 다 죽을 것 같았고 주인님들도 앞장서서 나섰기에, 그때 신수의 알을 훔쳐내기로 한 것입니다. 다들 정신이 없는 판이라 아무도 짐을 뒤지는 저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때 주인님의 매가 저에게 달려들었습니다. 저는 놀라서 그만 주인님의 매를 죽였는데, 그 바람에 신수의 알을 떨어뜨려.....껍질이 깨어져 알이 깨어난 것입니다.” 치우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탄식했다. “그렇구나! 어쩐지 좀 이상했다. 그때 짐이 마구 흩어져 날아가는데, 하필 그때 알이 깨어져 나온 것이 좀 이상하긴 했어. 더구나 마파람의 혼이 거기 들어갔는데, 날짐승인 마파람이 짐에 눌려 죽은 것이 좀 이상했다.” “저는 그때 무척 놀랐습니다. 그리고 몹시 후회했습니다. 제가 공연히 건드려서 한 마리도 벅찬 신수가 두 마리가 되었으니까요.” 그래도 치우비는 열심히 싱카를 변호해주려 했다. “싱카, 그 신수는 우리를 돕는 신수였다. 네가 그러지 않았으면, 번개범에게 우리 모두 다 죽었을 거야.” “그건 주인님의 운이 좋아서 그런 것뿐입니다. 저는 주인님의 매를 죽이고, 주인님의 물건을 훔치려 한 도둑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계속 속여 왔습니다. 주인님, 저는 교활한 놈입니다. 신수의 알이 깨져 버렸으니 더 이상 과업을 이루지도 못하고 요기도 될 수 없다 여겨서 몹시 낙담했지요. 다만 속죄의 의미로 주인님을 위해 열심히 싸워서 빚을 갚는다고만 생각했습니다. 주인님, 저는 나쁜 놈입니다. 주인님이 그렇게 잘 대해주시는데도 저는 항상 제 생각만 하고 있었고, 지난번 사막에 버려졌을 때는 주인님을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카린산에서 추격을 받을 때는 비울걸을 찾는다는 핑계로 혼자 위험한 지경에서 빠져나가기도 했습니다. 비울걸을 찾기는 했지만, 솔직히 추격 받는 게 겁도 났었습니다. 주인님을 도운 건 단순히 빛을 갚는다는 생각에서였을 뿐입니다. 빚을 다 갚았다 생각하면 언젠가는 도망칠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목이 메이는지 잠시 말을 끊은 싱카를 쳐다보며 치우천이 부드럽게 말했다. “괜찮다, 싱카. 잘못을 다 말하고 뉘우쳤으니 이제 괜찮다.” 싱카는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으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 “오늘 주인님은 신수를 굴복시키셨습니다. 그러자 저는 그동안 잘 되지 않던 술법이 갑자기 트이고, 머리가 맑아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제가 도운 주인님이 신수를 이겼기 때문에 저는 요기가 된 것입니다! 주인님, 저는 이제야 저에게 내려진 예언의 뜻을 깨달았습니다. 신수의 알을 훔쳐서 과업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주인님의 뜻을 돕는 것이 진정한 예언의 뜻이었던 것입니다! 주인님, 이제 이 도깨비 싱카는 영원히 주인님의 종입니다. 진심으로 저를 받아주시기를 바랍니다.” 치우천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자 치우비가 ‘하하’ 웃었다. “우습구나, 싱카! 대도둑이었던 형요 자매들도 벗으로 삼았는데, 네가 한 짓 정도는 따질 것도 없다. 형님 말씀대로, 앞으로 뉘우치고 그런 짓만 안 하면 너는 언제든 우리 벗이란다. 종이 아니라, 벗이란 말이다!” 싱카는 굵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아닙니다. 저는 이제껏 모두를 속여 왔습니다. 도깨비 싱카가 말씀드립니다. 저는 원래 제 나라에서 아주 높은 지위에 있었습니다. 부하도 많고, 아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이제 제가 지녔던 힘은 모두 주인님의 것입니다.” “허 ,그게 무슨 소리냐? 그런 말을 들으니 내가 섭섭하구나, 싱카, 너는 돌아가라. 너도 네 고향에서 잘 사는 것이 낫지, 왜 구태여 여기에서 이런 고생을 하느냐? 더구나 이제는 형요의 보물도 생기지 않았느냐? 우린 괜찮으니 너는 돌아가거라.” 치우비와 치우천은 환하게 웃으며 허락의 뜻을 비쳤으나 싱카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저는 이제 전사가 아니라 요기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인님의 도깨비 종일뿐입니다. 원래 요기나 종은 재산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것은 모두 주인님의 것입니다.” 치우비가 ‘허허’ 웃으며 말했다. “허 참, 네 나라는 아주 멀리 있어 네가 돌아가기도 힘든데, 그것을 언제 가져온단 말이냐? 네 물건보다 네가 여기 있는 것이 훨씬 좋으니, 그런 생각일랑 하지 말아라. 너는 내 말을 안 들을 셈이냐?” 싱카는 감격에 겨워 수없이 고개를 조아렸다 치우 형제는 싱카가 솔직하게 모든 것을 털어놓은 것이 마냥 대견하고 기쁘기만 했다. 밤새 잔치를 치르고, 그 다음날 치우천과 벗들은 바위 밑에 매장되어 있던 보물을 꺼내도록 했다. 그 보물은 정말 대단했다. 수많은 금덩이와 구슬, 보석이 있었고, 구리덩이도 많았다. 빛나는 조개껍질이나 구리무기, 구리 솥, 구리거울 등 종류도 다양하고 그 양도 막대하여 웬만한 큰 부족전체의 재산을 전부 합한 것만큼 될 듯했다. 그중에 황금빛으로 빛나는 둥근 알 껍질 한 무더기가 눈에 띄었다. 그것을 보고 치우천이 한탄했다. “이게 바로 첸누의 알 껍질인 모양이구나. 참 안된 일이다 형요, 이것을 가져가 첸누에게 주는 게 어떻겠어?” 형요는 좋다고 했다. 치우천은 곰곰 생각하다가 보물 중 무거운 구리 물건만 빼고 나머지 절반을 형요 자매에게 주려 했다. 그러나 형요는 펄쩍 뛰면서, 부모님의 원수를 같았으니 자기들은 필요 없다고 극구 사양했다. 치우천은 먼 길을 가려면 여비가 필요하고, 또 부족으로 돌아가면서 줄 선물도 있어야 하니 가져가야 한다고 설득했다. 그러나 형요가 완강하게 거절하여 결국 처음 치우천이 주려던 구슬과 금덩이 중 사분의 일 정도만 가지고 가기로 했다. 치우천은 나머지 보물을 쌓아놓고 그중 반 이상을 각 부족장과 전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부족장들도 한사코 사양했으나 치우천은 간곡하게 타일렀다. “여러분은 당연히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더구나 제가 이것을 드리는 이유는, 단순히 이 보물로 편하게 놀고먹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 물건을 잘 사용하여 여러분의 부족을 크게 일으키라는 데 있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이제 한 형제나 다름없는 벗들입니다. 여러분의 부족이 커지고 강해질수록 저도 커지고 강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는 턱없이 부족할지 모르지만 제 마음을 받아주십시오.” 부족장들은 치우천의 뜻이 큰 데 있음을 깨닫고는 그제야 물건들을 받았다. 그리고 다시 잔치가 벌어졌다. 그 잔치는 사흘이나 계속되었는데, 때마침 무라와 소녀, 울라트 등이 돌아왔다. 그런데 그들 일행 뒤로 코가 높고 기이하게 생긴 뚱뚱한 중년남자 한 명과 수십 명의 사람들이 졸졸 따라오고 있었다. 치우천을 보고 정중히 인사를 건넨 중년남자는 약간 천박스러운 웃음을 흘리며 아주 능란하게 주신 말을 입에 올렸다. “헤헤, 치우천님, 치우비님이십니까? 저는 시기르타라고 합니다. 서쪽의 장사꾼입죠 스키타이나 훈이나 서쪽 부족들은 저를 모르는 부족장들이 없습니다요. 무라님이나 카린 부족과도 간혹 장사를 했습니다만, 이렇게 주신의 젊은 영웅과 거래를 트게 되어 영광입니다요.” “주신 말을 아주 잘하시는구려.” “헤헤헤, 언젠가 주신과도 장사할 날이 올 것 같아 주신 말도 배워뒀습죠. 오늘 드디어 써먹을 날이 왔습니다 그려.” 치우비는 좀 간사해 보이는 시기르타가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치우천은 내색하지 않고 예의바르게 말했다. “다행이군요 그런데 어떻게 아무것도 없는 이런 곳까지 오시게 되었는지요?” 시기르타는 품위 없게 ‘킥킥’ 웃으며 말했다. “아무것도 없다니요? 무라님께 이야기를 들어보니, 형제 영웅님들께서는 신수를 물리치고 보물을 얻으셨다던데요? 가난뱅이들은 그런 보물의 값어치도 모릅지요. 저 정도 되는 장사꾼이라야 값을 매기고 장사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큰 꺼리가 있다는데, 아무리 멀어 달려와얍지요.” 치우천은 짧게 웃고는 치베에게 보물을 구경시켜주라고 했다. 시기르타가 나가자 무라는 언짢은 표정으로 치우천에게 살짝 말했다. “저자는 제가 데리고 온 것이 아닙니다. 카린족과 저자가 그리 친한 것도 아니고요 어디서 울라트가 철없이 말한 것을 주워듣고는 악착같이 달라붙어서 떼어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더구나 다른 장사꾼을 다 제치고 손해를 보면서까지 우리 물건들의 값을 아주 높이 쳐주었습니다. 그러니 강제로 쫓을 수도 없더군요.” 소녀도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끼어들었다 “저 사람은 천박해요! 남는다면 무슨 짓이든 할 사람입니다! 수단이 좋아서 못 구하는 물건은 없으니 할 수 없이 거래를 하지만, 너무 뻔뻔스러워서 카린 사람들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치우천이 웃으며 물었다. “저 사람이 물건은 잘 구해옵니까?”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구해는 오지만, 워낙 생색을 내고 비싼 값을 부르기 때문에 다들 욕해요 그래도 그자는 눈 한 번 깜빡하지 않죠.” “속이거나 사기를 치지는 않습니까?” “그렇지는 않죠. 하지만......” 그러자 치우천은 대범하게 되받았다. “장사꾼이 물건을 잘 구하고 장사를 잘하면 되지, 꼭 전사나 영웅일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마침 우리는 새로 자리를 잡아서 필요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닌데, 잘 데려왔습니다.” 곁에 있던 치우비가 내키지 않는 듯 말했다. “나도 별로 마음에 들진 않는데? 욕심이 많아 보여.” 치우천은 아우를 타이르는 듯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우리 중에 욕심꾸러기가 없어서 안 그래도 걱정하던 참이다. 사람이 제대로 살려면, 욕싱 많고 수단 좋은 뻔뻔한 사람도 하나쯤은 필요한 법이란다.” “그런 사람을 뭣에 쓴단 말야?” 치우천이 고개를 저었다. “저 사람은 욕심꾸러기에다 뻔뻔하지만, 조금도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만큼 스스로에게 자신이 있다는 말이겠지. 그렇다면 그도 재주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는 거야.” 그때 시기르타가 입을 헤벌리고 축 처진 배를 출렁거리면서 들어왔다. 그러고는 들어서자마자 엄지손가락을 세워 쑥 내밀었다. “아주 엄청난 보물이군요. 히히! 내가 냄새 하나는 기가 막히게 맡는단 말씀이야! 오래 묻힌 것 같기는 하지만, 그래도 잘 간수해두었더군요 내, 뭐든 구해드리리다. 필요한 게 있으면 말씀만 하시구려!” 치우천이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물었다. “그렇게 대단합니까?” “저 정도면 큰 부족의 부족장이 가진 것보다 더 많습죠!” “그럼 뭐가 제일 좋은지, 각 물건들이 어디가 좋고 어디가 흠이 있는지 가르쳐주십시오.” 그러자 시기르타가 반색을 했다. “그건 곤란합니다요.” “왜 그렇습니까?” “저는 장사꾼입죠 그러니 물건을 살 때는 깎아서 싸게 사고, 팔 때는 붙여서 비싸게 팔아야 하는 법입죠! 그런데 내가 물건을 사기도 전에 물건의 가치를 다 알려드리면, 내 밑천이 싹 드러나는 것 아니겠습니까요? 그럼 재미가 깎이죠.” 치우천은 호탕하게 웃으며 되받았다. “그러면 다 깎아서 말해도 되지 않겠습니까?” 시기르타가 정색을 하며 대꾸했다. “저 시기르타, 막 굴러먹은 놈입니다만 거짓말은 절대 하지 않습죠. 장사꾼이 거짓말을 하면, 그날로 목숨이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전 생각합니다요. 거짓말을 하는 건 장사꾼이 아니라 사기꾼입죠.” “알겠습니다. 그러면 시기르타님이 보기에 가장 값진 물건이 뭔지 하나만 뽑아보십시오 값은 말을 안 해도 되구요.” 그러자 시기르타는 ‘헤헤’ 웃으며 말했다. “장사를 해먹으려면 보는 눈이 있어야 합죠! 그 눈 하나는 제가 세상에서 으뜸입니다! 자신 있습죠! 같이 나가 봅시다요!” 시기르타는 밖으로 나가 잔뜩 쌓인 물건들을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손에 헝겊을 감고 대뜸 두 가지 물건을 집어냈다. 한 개는 비록 반짝이기는 했으나 메추리알만한 크기의 투명한 보석이었고, 다른 한 개는 몹시 낡아 불그스레한 빛을 띤, 꼬불꼬불한 모양의 기이하게 생긴 단검이었다. 그 겉에는 아주 정밀한 장식이 잔뜩 새겨져 있었다. 치우천은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 보석보다 훨씬 큰 보석이 얼마든지 있는데 왜 이런 작은 보석이 가장 값지다는 것인지, 그리고 훌륭하고 거대한 구리무기가 잔뜩 쌓여 있는데, 왜 이 낡디 낡은 단검이 가장 귀한 물건이라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시기르타가 품안에서 헝겊을 꺼내 땅에 펴더니, 자신 있게 그 두 개의 물건을 내려놓았다. “좋은 게 많습니다만 이 두 가지가 최고죠.” 치우천이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다른 보석도 많은데 왜 이 작은 보석이 최고라는 겁니까?” 시기르타가 크게 웃으며 대답했다. “이 두 가지가 최고입니다.” “크지도 않잖습니까? 더구나 이것과 같은 보석도 왜 있는데 그중 하필 이 작은 것이.......” 그러자 시기르타는 여전히 싱글거리며, 그것과 거의 같은 투명한 보석 몇 개를 왼손에 들고, 자기가 고른 보석을 오른손에 들었다. “한번 비춰보십쇼.” 치우천은 여러 개의 보석을 자세히 비춰보다가 이윽고 ‘아’ 하는 소리를 냈다. 비슷한 다른 보석들도 다 투명하고 맑았지만, 자세히 비춰보니 속에 은은하게 잔금이 가 있기도 하고, 희미하나마 색깔이 좀 얼룩덜룩 번져 있었다. 허나 시기르타가 고른 보석은 그야말로 잔금이 전혀 없고, 투명하고 맑기가 눈이 부실 정도였다. 치우천이 그제야 놀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시기르타가 낄낄 웃었다. “이제 아시겠습니까요?” 치우천도 웃으며, 이번에는 녹슨 칼을 가리켰다. “이건 왜 귀한 거요?” “이건 정말, 아는 사람이 아주 드문 물건입니다요.” 계속 웃으면서 시기르타는 세워져 있던 좋은 구리 칼 한 자루를 집어 들었다. 그 칼은 신시에서 만든 듯한 아주 좋은 것이었다. 시기르타가 그 칼의 날을 세우고 아까 골랐던 낡은 단검을 집어, 두 개를 쨍 소리가 나게 부딪혀 보였다. 치우천은 깜짝 놀라 두 눈을 크게 떴다. 구리칼은 대단히 좋은 것이었는데도, 놀랍게도 칼날이 쑥 들어가 이가 빠져 있었다. 그런데 그 낡은 단검은 말짱한 것이 아닌가. “이....... 이럴 수가! 구리보다 강한 것이 있다니!” 치우천은 놀란 나머지, 자신의 손으로 다시 두어 번 두 개의 칼날을 부딪쳐 보았다. 낡은 단검에서 녹이 좀 떨어지기는 했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그 녹슨 단검은 작기는 했어도, 같은 크기의 구리단검보다 훨씬 가벼웠다. 치우천은 흥분을 감추지 못해 치우비를 소리쳐 불렀다. 그리고 그것을 보여주자 치우비도 깜짝 놀라 외쳤다. “세상에! 이것이야말로 정말 보물이야.” 치우비가 녹슨 단검을 휘두르자 구리칼은 단번에 쨍 소리를 내며 두 조각으로 잘라졌다. 비록 녹슨 단검을 썼다고는 하나, 치우비의 힘을 보고 시기르타는 깜짝 놀랐다. 치우비는 아무래도 자기 눈이 믿어지지 않아, 커다란 구리 도끼 하나를 집어 들고 시기르타에게 물었다. “이것보다도 강할까요?” 시기르타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비뚤게 치지 않고 똑바로만 내려치면 그 칼이 부러질 리 없지요.” 치우비는 그 말을 듣고 구리 도끼를 거꾸로 세워 날이 위로 오게 만든 다음, 녹슨 단검으로 힘껏 내려쳤다. 다음 순간, 다시 쨍 하는 금속성을 울리며 커다란 구리 도끼가 잘린 듯이 두 토막이 나버렸다. 시기르타는 그것을 보자 흠칫거리며 얼굴빛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런 일은 칼만 좋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무시무시할 정도의 힘없이는 그렇게 커다란 도끼가 두 토막이 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우비는 그런 것은 신경도 쓰지 않고 여전히 그 단검의 날이 생생한 것을 보고 무척 신기하여 다급히 물었다. “이게! 이건 대체 뭘로 만들어진 거요?” 시기르타는 치우비의 힘에 놀랐는지라 두말없이 대답했다. “그건 저도 모릅니다. 다만 그것은 크리스라고 하는데, 아주 먼 남서쪽의 검은 피부 가진 사람들이 만든 칼입죠 세상에 그보다 더 좋은 칼은 없을 것입니다요.” “크리스? 그럼 이런 짧은 칼 말고 더 큰 칼이나 도끼도 있겠군요.” 치우천이 묻자 치우비도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그런 칼이나 도끼가 있다면 제상 제일이다! 끽구나 형천도 무섭지 않을 거야! 그런 칼이나 도끼를 좀 구해줄 수 없겠습니까?” 그러자 시기르타가 펄쩍 뛰었다. “아이쿠! 제가 아무리 수단이 좋아도 그건 안 됩니다. 없는 것을 어떻게 구합니까? 그런 긴 칼이나 도끼 같은 게 있다는 이야기조차 들어본 적 없습니다요 그 짧은 칼만 해도, 대단히 귀중한 것입죠 저도 솔직히 이야기만 들었지, 직접 본 건 처음입니다요 그 모양이 꾸불꾸불하여 퍽 특이한데다 아주 세밀하게 장식이 되어 있어서 짐작해본 것입죠. 남쪽 부족은 그 칼 하나를 부족장 목숨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요. 아니, 부족 전부가 망해도 그 칼만은 지킵죠. 하나하나가 다 이름이 있고, 전설입니다요. 소문으로는 하늘에서 직접 내려 보낸 칼이라고 합니다. 아마 남쪽 부족을 다 뒤져도 열 개도 안 나을 겁니다. 그런데 큰 칼이나 도끼라뇨? 그건 좀....... 헤헤헤.” 순간 치우비와 치우천은 실망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칼이 무척 좋지만 너무 작아서 싸움에 쓰기에는 좀 힘들겠는걸? 급할 때는 도움이 되겠지만.” 치우비가 아쉬워하자 치우천이 껄껄 웃었다. “그렇게 귀한 것이라니 더는 욕심을 낼 수 없겠구나. 그 칼은 네가 써라. 비록 작지만 그래도 대단 하잖느냐?” 치우비는 물욕은 없었지만 이런 좋은 칼을 얻자 아주 될 듯이 기뻐했다. 치우천은 기뻐하는 치우비를 보며 짐짓 점잖게 타일렀다. “이번에는 애들에게 막 줘버리면 안 된다.” “알았어! 이거야 어떻게 그러겠어?” 시기르타는 아깝다는 듯 입맛을 쩝쩝 다시며 한마디 덧붙였다. “듣기로 크리스는 살아 있는 것이라서 매일 기름을 발라줘야 된다고 들었습니다. 안 그러면 죽게 되고, 죽으면 부스러져 저절로 못쓰게 된답니다. 귀한 것이니 잘 쓰십쇼.” 치우천은 시기르타의 애석해하는 눈빛을 보고는 그가 골라낸 가장 좋은 보석을 선뜻 시기르타에게 주었다. “알겠소 정말 고맙구려. 저건 내 아우에게 주기로 했으니, 이건 당신이 가지시오.” 시기르타는 의외의 선물에 깜짝 놀랐다. “아니, 이것도 굉장히 귀한 겁니다! 크리스가 귀하다지만 이것도 그에 못지않은.......” “괜찮습니다. 우리에게 좋은 것을 숨기지 않고 가르쳐주셨으니, 받으셔도 됩니다.” 시기르타는 저절로 입이 헤벌어지려 했지만, 돌연 정신을 차린 듯 얼굴이 굳어졌다. “그릴 수는 없습니다. 저는 장사꾼이지 거지가 아닙죠. 그냥 주는 건 안 받습니다. 또 제게 원하는 걸 말해주십쇼 그러면 바꿉시다요!” “그럼 당신이 지고 온 짐에서 아무거나 적당히 주시구려.” 시기르타는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저는 여기 식량이 급하다기에 먹을 것을 주로 싣고 왔습니다요. 그 짐에 소와 말까지 다 넘겨도 이 보석 값어치에는 훨씬 못 미칩니다요! 이 시기르타, 이익을 남기면 좋긴 하지만 두 배 이상으로는 절대 안 남깁니다요. 두 배 넘게 남기면 그건 사기를 치는 겁죠. 돌아가신 아버님이 그렇게 말씀 하셨습니다요!” 시기르타는 소 서른 마리와 그 등에 많은 양의 식량을 가득 싣고 왔다. 그런데도 그 보석의 가치가 산더미 같은 식량보다도 더 크다는 소리를 듣고 치우천은 놀랐다. 치우천은 곰곰 생각해보다가 입을 열었다. “당신은 장사꾼이지요?” “그렇습니다요!” “그러면 내, 당신과 큰 거래를 하기로 하지요 그 보석으로 당신의 장사 수완을 사겠소. 당신이 앞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물건들을 서로 좋은 값에 구해다주는 조건으로 말이오. 어떻소?” 시기르타는 그 말에 감탄한 듯, 얼굴빛을 더욱 엄숙하게 했다. 말투까지도 갑자기 정중해졌다. “제가 사람을 제대로 봤군요. 이 시기르타, 원하는 바입니다. 저도 그런 큰 거래를 하고 싶어 온 것입니다. 거래를 하려면 지금은 작아도 막 뻗어나갈 부족하고 해야지, 지금은 제아무리 커도 망해가는 부족과 할 수는 없지요.” 치우천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무기를 좀 구해주시오. 돌무기는 필요 없고, 구리무기를 구해주면 좋겠소.” “지금도 많은데 얼마나 더 필요하십니까?” “한 오백 자루는 더 있어야겠소. 창 삼백 자루, 도끼 백 자루, 칼 백 자루가 필요합니다.” 치우천이 제의한 것은 그야말로 엄청난 양이었다. 신시에서조차 새로 된 사울아비들이 구리무기를 제대로 얻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시기르타는 조금 흠칫하더니, 재빨리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두 달마다 백 자루씩 날라 오겠습니다. 거의 일 년은 걸릴 렌데, 괜찮겠습니까?” “좋습니다. 값은?” 시기르타는 땀까지 흘리며 뭔가 한참 생각하고 계산하더니, 이윽고 말했다. “여기 있는 물건의 반은 가져가야 할 겁니다.” 치우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간단히 말했다. “좋습니다. 그럼 가져가십시오.” “예? 지금 가져가라고요?” “나도 대강은 압니다. 그 정도 물건은 보통 밑천으로는 구할 수 없을 겁니다. 그러니 먼저 그만한 보물을 가져가십시오. 나머지는 두 달마다 물건을 가져왔을 때, 바꾸기로 하죠.” “제가 보물만 먹고 도망쳐버리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그러면 당신은 장사꾼이 아닌 사기꾼이 되는 거죠, 하하. 그건 농담이지만, 그러면 앞으로 나와는 거래를 못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대범한 치우천을 쳐다보며 시기르타는 기분 좋게 웃었다. “하하! 좋습니다! 제가 오늘 임자를 제대로 만났군요! 염려 마십쇼! 틀림없이 약속을 지키리다!” 이내 시기르타는 뻔뻔하고 능글맞은 표정으로 바꾸었다. “그럼, 여기 있는 보물의 십분의 일을 실어가면 되겠습니다그려. 내, 싣고 온 식량하고 소는 다 드리리다. 나도 첫 장사하는 기분으로 드리는 것이니 받아주십쇼 그리고 식량과 가죽도 제가 싼 값에 두 달마다 쓸 만큼 날라드리리다. 오백 명어치면 될까요?” “처음에는 오백 명어치, 그 다음에는 천 명어치, 그 다음에는 천오백 명어치, 이렇게 구해 오십시오. 그 값도 드리겠습니다. 힘들어서 못 구해온다 하시지나 말구요.” “그만큼 빨리 사람을 늘릴 자신이 있으십니까?” 시기르타의 예리한 눈빛을 못 본 척, 치우천은 태연히 말했다. “당신도 그에 맞는 큰 장사꾼이 되어야 합니다.” 손뼉을 치며 시기르타는 껄껄거리며 외쳤다. “좋습니다! 좋소이다! 이제야 원을 풀어보겠구먼!” 시기르타는 다시 한 번 커다랗게 웃으며 저쪽으로 가더니 짐을 모두 내려놓게 하고는 곧장 길을 떠났다. 치우비와 무라, 소녀 등은 시기르타가 그냥 뺑소니 쳐버리는 게 아니냐고 걱정했으나 치우천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사람이 아냐. 저 사람은 진짜 장사꾼이니까.” 다음날 형요 자매는 눈물을 흘리면서 치우 일행과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사람들은 무척 섭섭해 했고 특히나 소녀와 친했던 요요와 미요는 함께 얼싸안고 울기까지 했다. 형요와 이래저래 인연이 많았던 보돈차르와 치베도 선물이라면서 자신들이 얻은 값진 물건들을 억지로 얹어주었고 몽골 전사 몇 명들에게 며칠 동안 호위하여 길을 다녀오라고까지 일렀다. 형요를 떠나보내고 난 후, 치우천은 부족장들을 불러 모았다. “그동안 여러분이 많이 도와주셔서, 저희 형제가 살아났고 이렇게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정말 저희 형제는 죽어서도 이 은혜를 잊지 못할 것입니다. 아직 저희는 작고 힘이 미약하지만 여러분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반드시 불러주십시오 여러분의 일이 제 일이기도 하니 항상 달려가 돕겠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어떻게 할 건가?” 구르가 걱정스러운 듯 묻자 보돈차르가 나섰다. “천 안다, 자네는 주신으로 돌아갈 기회를 찾는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새로 사람들을 모으려는 것 같은데, 그 사람들과 주신으로 가려는 건가?” 치우천이 고개를 저었다. “전사 몇백 명을 모았다고 주신으로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이제 말씀드립니다만...... 저는 공을 세울 기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공을 세워?” 사람들은 모두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치우천이 담담히 말했다. “제가 보건대, 유망과 수신간의 전쟁은 이제 피할 수 없는 듯합니다. 전에 제가 동쪽 바닷가에 갔을 때, 미아우족은 거의 형천의 군대에 밀려서 도망치거나 항복하고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한해 가까이 지났으니, 아마 유망은 동쪽의 미아우족들을 모조리 항복시키고 세력을 넓히게 되었을 것입니다. 아니, 벌써 그렇게 되었는지도 모르죠. 축융도 남쪽을 쳐서 세력을 넓힌다고 들었고, 창힐은 미아우족이 대부족을 이루고 있던 공상에 신시를 닮은 큰 도시를 세운다고 들었습니다. 그들이 동쪽과 남쪽을 다 치면, 그 다음은 북쪽입니다. 공상에 도시를 세우는 것도 북쪽을 치기 위해 근거지를 만들려는 게 분명합니다. 헌원도 이제 유망의 뒤를 봐줄 테니, 유망이 더 망설일 이유는 없겠죠. 유망이 북쪽의 미아우와 마갸르를 친다면, 주신도 끼어들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주신과 지나족이 맞붙게 됩니다. 저도 그렇게까지는 되지 않았으면 합니다만..... 그러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치우천이 단숨에 정세를 예측하자 다들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보돈차르는 곰곰이 뭔가 생각하다가 눈을 빛내며 짧게 물었다. “그래서?” “주신과 지나가 맞붙으면 그때야말로 제가 움직일 때입니다. 저는 일단 여기서 모은 군대를 끌고 가서, 주신을 도와 싸울 것입니다 운이 좋아 거기서 공을 세운다면.......” 그러자 보돈차르가 껄껄 웃으며 무릎을 탁 쳤다. “좋은 생각이군! 좋은 생각이다! 천 안다는 어차피 하늘의 심판에서 살아났다. 거기에다가 그런 공까지 세운다면 누구도 천 안다를 함부로 대할 수 없겠지.” 구르도 한마디 거들었다. “천 자네는 지난번 처음 전사들을 거느렸으면서도 훌륭하게 싸웠어. 헌원이나 상망, 끽구, 비휴도 자네를 이기지 못했잖는가? 자네가 사람들을 다스려 군대를 만들면 누구든 이길 수 있을 걸세. 유망이나 형천이 무섭다 해도 문제없다고 보네.” “사실 그런 공을 세우지 못해 주신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좋으니, 주신이 싸움에 휘말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전쟁은 날 것 같습니다.” 보돈차르는 치우천의 등을 툭툭 치며 말했다. “좋다. 천 안다. 아주 좋은 생각이다. 그때가 되면 나에게 알려다오. 나도 있는 힘껏 돕겠다.” 키타야와 구르도 고개를 끄덕이며 나섰다. “우리도 돕겠네.” 보돈차르나 키타야, 구르, 툰툰 등도 모두 작별을 아쉬워했지만, 그들은 부족장의 몸이니 오랫동안 부족을 비워둘 수가 없었다. 그들은 기회가 나면 자주 만나자고 약속한 뒤 남은 전사들을 거느리고 떠나기로 했다. 키타야는 울라트에게 같이 가자고 했으나 울라트는 이번에도 가지 않겠다고 떼를 썼다. 키타야는 좀 섭섭한 듯 혀를 끌끌 찼다. “딸자식 키워봤자 헛일이구나, 허허.” 보돈차르는 치베에게 치우 형제와 함께 있으라면서 오십 명의 몽기병을 치베에게 딸려주었다. 야율쿠리가 못내 아쉬운 목소리로 치우천에게 말했다. “이봐, 천. 나는 부족장의 아들이지만, 우리 어머니가 큰마누라가 아니라서 은근히 눈치가 보인다. 내 위로는 배다른 형이 셋이나 있는데, 다들 부족장 자리에 욕심을 내고 서로 싸우고 있어. 아버지가 살아 계시니 나도 이렇게 전사를 끌고 다닐 수 있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나도 어떻게 될지 몰라. 솔직히 그때가 되면 형들이 날 살려둘지나 모르겠다. 만약 그렇게 되면 도망이나 쳐야지, 뭐. 난 갈 데도 없다. 그때 나를 모른 척하지 마라.” 치우천이 웃으며 야율쿠리의 어깨를 툭툭 쳤다. “내가 왜 너를 모른 척하겠느냐? 차라리 그런 생각 말고 네가 부족장이 되는 게 어떠냐?” 치우천의 말에 야율쿠리는 깜짝 놀랐다. “형이 셋이나 되는데 어떻게 그러느냐?” “너희 형을 만나보지는 못했어도 내, 알 것 같다. 배다른 아우라지만 부족장 자리에만 눈이 어두워 서로 싸우고, 아우를 해치려 하는 사람은 부족장감이 못된다. 너희 부족을 위해서도 그런 사람이 부족장이 되면 안 좋을 거야. 울크리 부족에 너보다 뛰어난 젊은이는 없다고 들었는데.” 쑥스러운지 야율쿠리는 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난 거느린 부하도 별로 없고 세력이랄 것도 없다. 보잘 것 없는 게 아니라 아예 없단 말이다. 제길, 우리 울크리족은 아주 크다. 천명도 넘는 작은 부족을 쉰 개도 넘게 거느린 대부족이란 말이다. 그런 부족의 부족장 아들이 벗을 돕기 위해 수단 방법을 안 가리고 긁어 데려온 전사가 고작 이백 명이다. 이게 무슨 뜻인지 알겠지?” 오만 명이 넘는 울크리 부족이라면 전사가 오천 명은 넘는다고 봐야 한다. 그런 부족의 부족장 아들이 애를 썼는데도 고작 이백 명밖에 거느리지 못한 것은 그만큼 야율쿠리의 입지가 좁다는 뜻이었다. 제대로 대접을 받는 부족장 아들이라면 최소한 오백 명은 데리고 왔을 것이다. 똑같이 이백 명 정도를 데려왔어도 보돈차르, 키타야, 구르의 부족은 만 명은커녕 육칠천밖에 안 되는 소부족이었으니까. 야율쿠리는 침통하게 말을 이었다. “더구나 태산회의 때 이름이 좀 알려져서, 아버지는 나를 좋아하시지만 형들이 나를 보는 눈이 무서울 정도다. 전에는 그냥 보기 싫어하더니만, 이제는 틈만 나면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다. 솔직히 그런 꼴도 보기 싫고 수모도 당하기 싫어서 돌아가고픈 마음이 없다. 아예 가지 않고 여기 사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그때까지 조용히 있던 초초룬이 입을 열었다. “나도 비슷하다. 나는 여자라서 오빠들이 별 생각 안 하고 잘해주었는데, 태산회의 때 좀 튀었더니 그 다음부터 영 눈치가 떨떠름해. 내가 무슨 여부족장이라도 되려는 줄 아는 것 같다. 그렇다고 뭐 날 죽이지는 않겠지만, 잘못하면 이상한 놈팽이에게 강제로 시집가게 생겼다.” 야율쿠리가 키득거리며 초초룬을 놀렸다. “초초룬, 뭐가 이상한 놈팽이냐? 누군지는 몰라도 널 데려갈 만큼 용기 있는 놈이라면 대단한 용사 아니겠느냐,1 아마도 장님이겠지만.” 초초룬은 야율쿠리가 놀리는 말엔 신경 쓰지 않고 계속 말했다. “제기랄! 차라리 그냥 시집가주는 척하고 첫날밤에 다 죽여 버릴까? 그렇게 한 예닐곱 놈만 죽이면 아무도 나에게 장가 안 들려 할 테니까 편하게 지내지 않겠느냐? 야율쿠리, 너도 나에게 장가들어라. 내가 첫날밤에 죽여줄 테니!” “어떻게 죽여줄 건데.1 히히.” 두 사람의 대화에 사람들이 껄껄 웃어댔다. 야율쿠리와 초초룬은 허물없이 친했지만, 둘 다 상대에게 연애감정 같은 것은 손톱만큼도 없다는 것을 모두들 잘 알기에 더 우스워했다. 치우천이 손사래를 치며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야율쿠리, 초초룬. 내가 너희 일을 좀 생각해보마. 너무 걱정하지 마라.” 그러나 그들 둘은 조금 생각해보고는, 스스로 힘을 길러두는 게 좋다고 여겼는지 결국 돌아가겠다고 했다. 그 다음 치우천은 양역과 쇠돌이, 부루벼락과 마파람 등 네 명의 사울아비들에게도 말했다. “양역, 쇠돌이, 벼락 형, 마파람 형. 형들도 주신으로 돌아가십시오.” “꼭 가야 하느냐? 제길, 희네야. 난 가기 싫다.” 양역이 눈물까지 짓자 치우천은 간곡히 말했다. “역아, 나는 꼭 주신으로 돌아갈 거다. 그러니 너희도 돌아가야 해. 조금만 참으면 다시 만날 건데 너희가 주신의 죄인이 될 필요는 없잖아. 너희는 초초룬을 만나러 왔다가 늦어진 것이니, 초초룬이 잘 말해주면 별일 없을 거다. 우리 신시에서 다시 만나자. 응?” 아쉬웠지만 치우천의 말이 옳은지라 네 사람은 돌아가기로 했다. 치우천은 가장 친한 친구 양역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고, 치우비도 정이 들 대로 든 쇠돌이와 부루벼락 등 세 사람을 모두 끌어안고 울었다. 양역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물었다. “저희 아버님께 너희 형제 무사하다고 알려도 될까?” 그러자 치우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님께만이라도 알려드려야지. 하지만 치우가람, 바람 형제 놈은 조심해라.” “염려 마라, 제길. 그놈들은 꼴도 보기 싫다.” 그렇게 사람들이 다들 떠나기로 하자 다시 며칠에 걸쳐 송별의 잔치가 베풀어졌다. 며칠 후, 부족장들과 벗들이 하나둘씩 모두 떠나자 치우천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이제 너희는 나를 따르기로 했으니, 내 말을 잘 들어라. 첫째, 나는 앞으로 주신으로 돌아갈 사람이다. 그러니 너희도 나를 따르려면 주신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제일 중요한 것이 말(言이)다. 그렇다고 너희 부족의 말이나 풍습을 버릴 필요는 없다. 하지만 주신 말만은 할 줄 알아야 한다. 이제부터 주신 말을 배워라.” 뜻밖에 사람들은 환호성을 터뜨렸다. 그들 대부분은 자기 부족에 절망하거나 부족이 망해버린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주신은 지나와 함께 가장 크고 번성한 부족이니, 주신 사람이 된다는 것은 오히려 사람들이 간절히 바라는 바였다. 사람들의 환호가 잦아들기를 기다렸다가 치우천이 다시 말했다. “그 다음, 너희는 모두 전사들이다. 그러니 잘 싸워야 한다. 그러나 내 밑에서는 그냥 지금처럼만 해서는 안 된다. 새로운 싸움 기술을 익혀야 하고, 대장이 명령하는 대로 빈틈없이 빠르게 움직이는 법을 배워야 한다. 평상시에는 다들 벗이지만 싸움에 나설 때 명령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즉시 목을 벨 것이다. 알겠느냐?” 사람들은 새롭게 각오를 하고 온 터라 모두 우렁차게 대답했다. 치우천은 마지막으로 힘을 주어 말했다. “이곳은 넓어서 많은 사람이 살아갈 수 있다. 너희 중에는 가족을 남겨두고 온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그러니 데려올 사람이 있는 사람은 모두 데려와도 좋다. 또 여기 있는 것이 힘들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떠나도 좋다. 기간은 넉넉잡아 여섯 달이다. 여섯 달 내로 가족들을 데리고 돌아오든지 그냥 떠나도 뭐라 않겠다.” 삼백 명의 사람들 중 반이 넘는 수가 모두 가족을 데려오고 싶어 했다. 그러나 돌아오지 않겠다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때 싱카가 나서서 말했다. “주인님, 도깨비 싱카가 간절히 바랍니다. 저에게도 한 일 년 동안만 시간을 주십시오. 저는 요기가 되었으니 제 나라로 가서 과업이 이루어진 것을 알려야 합니다. 저보다도 제 벗, 파라라냐를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일 년 내로 꼭 돌아오겠습니다.” 치우천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내 종이 아니라고 몇 번이나 말해야 되겠어?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라, 싱카.” 순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치우비가 물었다. “길이 멀고 험한데, 혼자 다녀올 수 있겠어?” 싱카는 의심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을 걱정해주는 치우비의 마음에 감격했는지 지그시 눈물 젖은 눈으로 대답했다. “저는 이제 요기가 되었습니다. 요기는 어디든 혼자 다닐 수 있습니다. 염려 마십시오.” 그렇게 하여 싱카도 떠났다. 그러자 치우비는 허탈하여 틈만 나면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치베, 알한, 무라, 소녀, 울라트와 도깨비들이 남아 있었지만 사람들이 많이 모여 왁자지껄하다가 조용해지면 마음이 허전했던 것이다. 치우천은 어느 정도 주변이 정리되자 소녀와 부부가 되기로 했다고 사람들에게 알렸다. 소녀는 안정이 되자 끊임없이 뜨거운 눈빛을 보내왔고, 치우천으로서도 소녀의 그러한 유혹을 마냥 참아 넘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치우천은 아직 주술이 걸린 몸이었지만, 맥달에 대해 호감보다는 반감이 더 강했기에 오기가 솟았다. ‘맥달이 건 주술인지 뭔지 모르지만, 그것이 정말로 나를 지배한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나는 이것도 이겨낼 것이다.’ 더구나 치우천은 소녀가 자신만 보면 한숨을 가볍게 쉬며 고개를 숙이는 것을 언제까지나 못 본 척할 만큼 냉정한 남자도 아니었다. 벗들이 있을 때 혼례를 하는 것이 좋지 않았겠냐고 치베가 말했으나, 치우천은 웃으면서 혼례를 치르려면 시간을 많이 허비해야 하니, 오히려 폐가 될 것 같아 말하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물론 벗들에게 알리기가 쑥스러웠던 것도 한 가지 이유였다. 사람들은 너나없이 이 경사를 몹시 기뻐하며 아낌없이 축하해주었다. 치베나 알한, 울라트는 물론이고 돌 같던 무라마저도 생글생글 웃으며 기뻐했다. “섭섭하지 않나요?” 리미가 울라트를 보고 슬쩍 묻자 울라트는 새침을 떨었다. “이젠 안 그래! 나도 컸다구.” 그럼에도 울라트는 조금은 섭섭한 마음이 남은 눈치여서 리미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사실 은근히 서운한 감정을 가진 것은 무라였다. 무라는 치우천을 한 남자로서 좋아했다기보다는 인간 대 인간으로 존경하는 입장이었고, 오히려 치우비에게 알듯 모를 듯한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무라는 한 번도 그런 감정을 내비친 적은 없었지만 자매인 소녀가 사랑을 이루는데 자신은 짝사랑을 하는 처지라서 마음 한구석이 아려왔던 것이다. 하지만 무라는 평상시와는 전혀 다르게 활기찬 몸놀림으로 그러한 아쉬움을 달랬다. 무라가 소녀를 위해 밤을 새워가며 두들겨 만든, 금으로 된 머리장식은 너무도 정교하고 아름다워서 모두가 감탄의 말을 쏟아냈다. 냉정하고 차갑게만 보이던 무라에게 그런 훌륭한 손재주가 있을 줄은 아무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소녀는 무뚝뚝한 무라가 조용히 다가와 말없이 머리에 장식을 꽂아주자 감격하여 무라를 끌어안고 고맙다며 마구 울었다. 그 와중에 알한은 이 혼례는 부족장의 혼례나 다름없는 만큼, 성대하게 치러야 한다고 하면서, 혼례 잔치는 모든 사람들이 다시 다 모이고 시기르타에게 혼례 잔치에 필요한 물건을 모두 구한 다음에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게까지 오래 기다릴 필요가 있겠냐는 사람들의 말에 알한은 웃지도 않고 딱 시치미를 뗐다. “물론 그래야 하구 말구요 잔치가 커야 얻어먹을 게 많지 않습니까?” “그거 얻어먹자고 두 사람을 그때까지 기다리게 하자는 거냐?” 치베가 핀잔을 주자 알한은 일부러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받았다. “네? 누가 기다립니까? 천님, 소녀님, 두 사람 말입니까? 에이, 뭐 하러 기다립니까? 미쳤어요? 전 혼례 잔치 이야기를 했을 뿐이라구요! 두 사람이 좋아서 같이 자겠다는데 누가 뭐라겠습니까?” 사람들은 알한의 익살에 배를 잡고 웃어댔고 치우천과 소녀는 얼굴이 새빨개졌다. 알한이 계속 익살을 부렸다. “우리 투르크족에서 혼인은 원래 여자 쪽 부모 허락을 받아야 하죠. 하지만 안 그래도 잘들 같이 자던데요, 뭘? 나만 해도 에헴! 아직 장가는 안 갔어도 여러 여자랑 자봤습니다. 그러니까 그게.......이름이...... 사만, 아이샤, 주니키...... 아이고! 너무 많아 헷갈리는구나!” 급기야 사람들이 배를 잡고 데굴데굴 구르며 웃어댔다. 알한의 이야기보다도 유명한 전사인 알한이 동그랗게 눈을 뜨고 시치미 딱 떼는 표정이나 말투가 너무도 우스워서였다. 물론 치우비도 함께 웃었으나 마음 한편으로는 아쉬운 마음이 솟구쳐 올랐다. 바로 발에 대한 그 리움이 되살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치우천이 그런 치우비의 마음을 모를 리 없었다. 사실 치우천도 처음에는 아우의 마음을 헤아려서 혼례를 올리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조금 더 생각하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 비는 발과는 맺어질 수 없다. 비도 잘 알고 있을 거야. 그러니 오히려 내가 먼저 혼인을 해서 잘사는 모습을 보여주면, 아우도 곧 다른 여자를 만날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거다.’ 다른 여자라고 해봐야 지금 있는 여자는 울라트와 무라 둘뿐이었다. 울라트는 너무 어리니 남은 것은 무라인데, 치우천은 무라가 겉보기와는 다르게 퍽 마음이 따뜻하고 올바른 것을 알고 은근히 아우가 무라와 짝이 되었으면 싶었다. 치우천은 무라가 여전히 차갑게 굳은 표정이지만 간혹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애절한 눈빛으로 먼발치에서 아우를 바라보는 것을 몇 번이나 본 적이 있었다. 그래서 치우천은 아예 본보기를 보여주려는 생각에 자신이 먼저 소녀와 혼인을 하겠다 말한 것이다. 다시 큰 잔치가 사흘에 걸쳐 벌어진 다음, 치우천과 소녀는 드디어 한방에 들게 되었다. 소녀는 방으로 들어서면서 치우천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이제 주신 말에 어느 정도 능숙해져서 치우천과 이야기할 때 소녀는 더 이상 지나 말을 쓰지 않았다. “천님, 몸이 걱정되시지요? 주술도 걱정되시구요.” 치우천은 소녀가 주술 이야기를 꺼내자 흠칫거렸다. “그걸...... 어떻게 알았습니까?” “쑤앙마이께서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저를 택하시다니 저는 감격했습니다.” “무슨 그런 말을 하십니까?” “천님, 너무 걱정 마십시오 저에게 방법이 있습니다.” “방법이라니요?” “남자가 힘을 쓰지 않고도 기쁨을 맛볼 수 있는 방법 말입니다. 설령 주술에 걸렸어도 그 때문에 천님의 몸에 해가 되는 일은 없을 것이옵니다. 둘이 같이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은 많답니다. 더욱이 주술은 언젠가 풀릴 것이니, 천님께서는 너무 신경 쓰지 마소서.” “정말로 그런 방법이 있소?” 소녀는 쑤앙마이로부터 최초의 방중술을 배워 익힌 여자였다 남자가 여자를 과하게 탐하게 되면 힘을 잃고 쇠약해지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소녀는 그런 방법을 쓰지 않고도 비슷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밤, 두 사람은 밤이 아주 깊을 때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은 날이 새도록 잔치를 벌였다. 혼자 조용히 술을 마시다가 취해 잠들었던 치우비는 저 멀리 어디선가 큰 짐승이 우는 소리를 들은 듯했다. 그 소리는 전에 만났던 맥의 소리와 비슷하다고 치우비는 꿈결에서 생각했다. 다음날 치우천은 해가 중천에 뜬 다음에야 밖으로 나왔다. 치우천이 나타나자 치베나 알한 등이 괜스레 히히 웃으며 농담을 던졌으나 치우천은 빙그레 웃으며 얼굴을 붉힐 뿐, 아무 말도하지 않았다. 다만 바로 다음날부터 사람들을 모아 말 타는 법이나 무기 다루는 법을 훈련시키기 시작했다 치우천의 지시는 꼼꼼하기 짝이 없었다. 치베는 활 쏘는 법과 말 타는 법을 훈련시키게 했고, 무라는 주먹 쓰는 법을, 알한은 몽둥이 쓰는 법을, 치우비는 도끼나 칼 다루는 법을 가르치도록 했다. 또 리미는 도끼 던지는 법, 마냥은 창 던지는 법, 개르는 큰 칼 휘두르는 법 등을 가르치게 했으며 포리는 곁에 두고 함께 새로운 무기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소녀와 울라트는 남은 식량과 가죽 등을 헤아리는 살림을 맡았다. 훈련에 임하면 치우천은 냉엄하기 짝이 없어서 전사들에게 조금도 쉴 틈을 주지 않았고, 훈련이 끝나면 돌을 모아 쌓거나 땅을 평평하게 고르거나 집을 짓고 나무를 쌓는 등의 일을 계속 시켰다. “전사들의 불평이 심해. 죽을 맛이라고 하는데.” 치우비가 좀 안쓰러워 말했으나 치우천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슬슬해서야 언제 강해지겠느냐? 훈련을 강하게 해야 강해지는 법이다. 정 힘들다면 닷새는 열심히 훈련하고 하루 정도는 쉬고 잔치를 벌이게 해라 그리고 가장 게을리 하는 자는 쫓아버린다고 해.” 치우천은 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쉬는 날이 돌아오면 성과를 직접 눈으로 보고 가장 실력이 더딘 자는 쫓아내거나, 혹 다시 하겠다고 싹싹 비는 자는 매를 때린 후에야 받아주었다. 치우천이 이렇듯 서슬 퍼렇게 나오자 전사들도 정신을 바짝 차렸다. 몇몇 불평분자도 있었지만 각각의 대장들이 또 다들 무섭고 엄격해서 안 들리는 곳에서 그저 불평만 늘어놓을 뿐이었다. 견디지 못하고 도망치는 자도 간혹 나왔지만 치우천은 그런 이들은 내버려두고 찾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 달 정도가 지나자 전사들은 이제 어느 정도 익숙해져서, 처음처럼 앓는 소리를 내지는 않았다. 알한이나 치베 등은 전사들의 실력이 많이 늘었다고 좋아했지만, 치우천은 가차 없이 아직도 멀었다고 말해 다들 무안해하는 일도 많았다. 치우천은 치우비, 치베, 무라 알한 등에게 엄격하게 지시를 내렸다. “나는 지난번 싸움에서, 전사들의 실력이나 마음가짐이 얼마나 승패를 좌우하는지 알았다. 싸움에서는 약하면 죽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고생을 하더라도, 그게 진짜 싸움에서 전사들을 하나라도 더 살리는 길이다. 조금도 사정을 봐주지 마라. 욕은 내가 모두 먹겠다. 싸움에서 한 명이라도 더 살리고, 이기기 위해서라면 나는 무슨 짓이든 다하고, 무슨 욕이든 다 들을 수 있다.” 다시 한 달 정도가 지나자 시기르타가 약속대로 무기와 식량, 가죽 등을 가득 싣고 왔다. 시기르타는 치우천을 보자마자 죽는 소리부터 했다. “구리무기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입니다. 비싸게 주어도 구하기가 어렵더군요. 주신 신시에서 구리무기를 다른 부족에게 절대 주지 말라고 했대요. 아마 지나족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전사들이 되레 줄어든 것 같습니다?” “가족들을 데리러 간 거요 약속했던 백 개는 가지고 왔소?” “힘들기는 했지만......헤헤, 제가 누굽니까? 바로 시기르타 아닙니까?” 시기르타는 한껏 생색을 내긴 했어도, 약속한 백 개 정도의 구리무기는 가지고 왔다. 남아 있던 사람들은 새로 구리무기를 얻게 되자 몹시 기뻐했다. 치우천은 새로운 물건들이 많이 오자 그것을 정비하기 위해 며칠 동안 훈련을 쉬기로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치우비가 눈에 띄지 않는 것을 깨달았다. 치우비의 말 구름도 보이지 않았고 리미와 개르도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여 치베와 알한에게 물어보자 그들도 모른다고 했다. “사냥이라도 갔나보지, 뭐.” 그러나 그날 밤이 퇴어도 치우비와 리미, 개르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날에도 역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자 치우천은 불길한 생각이 들어 몹시 걱정했다. 그것을 보고 알한이 안심하라는 듯이 짐짓 태연스레 말했다. “치우비님을 해칠 수 있는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리미, 개르가 같이 가지 않았습니까? 멀리 사냥이라도 갔나 보죠. 염려하지 마세요.” 그래도 치우천은 아우가 걱정되어 미간을 필이 찌푸릴 뿐 웃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천하장사인 아우도 형의 눈에는 갓난아기처럼 보이는 모양이라고 치베가 웃자 알한도 껄껄 웃으며 말했다. “나는 고향을 떠난 지 이 년이 되어 가는데, 아마 아무도 내 걱정은 안 할 겁니다. 아마 내가 죽었다고 해야, 그제야 어? 하고 이상해할 테지요. 그런데 천님은 좀 걱정이 심하십니다. 사내라면 마음 내키는 대로 잠시 돌아다닐 수도 있죠, 뭘. 리미, 개르도 같이 갔는데......” 치베도 한마디 거들었다. “천 안다. 도둑들을 걱정하나? 그런 것들이 비 안다의 상대나 되겠는가? 더구나 리미, 개르를 보기만 하면 전부 놀라서 달아나 버릴 텐데 뭐가 걱정이란 말이냐?” 그래도 치우천은 걱정을 떨칠 수 없어 밤잠도 이루지 못하고 한숨만 내쉬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뭔가 짚이는 것이 있어서 불안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달래는데도 계속 동생 걱정만 하는 그를 보고 소녀는 속이 상해 질투가 날 지경이었다. 그렇게 형의 속을 썩이던 치우비는 꼬박 열흘이 지나서야 돌아왔다. 리미와 개르도 같이 돌아왔는데, 세 사람 다 몸에 잔상처가 수두룩했고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것이, 무슨 큰 싸움이라도 치르고 온 것 같았다. 치우천은 아우가 왔다고 하자 반가워하는 기색을 보였다가 이내 표정을 고쳤다. 그러고는 밖으로 천천히 나와 엄한 표정으로 화를 내며 외쳤다. “이 녀석아! 도데체 어디 갔었어! 응? 말도 없이 말야!” 그러나 치우비는 우울한 표정만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치우천은 답답한 듯 화를 내며 야단을 쳤다. “왜 대답이 없느냐? 어디 갔느냐니까? 이 꼴은 또 뭐냐? 어디 가서 누구와 싸우기라도 했느냐? 응?” 그러자 보다 못해 리미가 엎드리며 말했다. “주인님은......” 잠시 말을 끊고 리미가 치우비의 눈치를 보자 치우비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말했다. “미안해, 형.” 그러자 치우천은 역시나 싶어서 화를 버럭 냈다. “너...... 혹시.......!” 치우비는 미안하다는 듯 고개만 계속 숙일 뿐, 조개껍질처럼 을 열지 않았다. 우천은 마침내 참지 못하고 외쳤다. “너...... 혹시 화산에 갔었느냐? 발 때문에 헌원의 마을로 갔던 것이냐?” 치우비는 그 말을 듣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파루 계곡은 지난번에도 지나갔던 곳이라 치우비는 그 길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파루 계곡에서 헌원이 있는 화산까지는 무척 멀었지만 좋은 말로 빨리 서두르면 닷새 점도면 갈 수 있는 길이었다. 치우비는 발을 보고 싶어 그 먼 길을 갔던 것이다. 더구나 헌원의 부하들에게 들키면 몹시 위험한데도 치우비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치우천은 마음이 아팠지만 그런 내색을 하지 않고 엄히 꾸짖었다. “이 녀석아. 그러다가 헌원에게 잡히면 어쩌려고.” “미...... 미안해, 형. 하지만......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 마침내 치우비는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그동안 꾹 참고 내색하지 않으려던 감정이 한꺼번에 폭발한 것이다. 그것을 보고 치우천도 가슴이 아팠지만 마음을 강하게 먹고 계속 아우를 나무랐다. “이 녀석! 헌원이 어떤 사람인데, 딸자식 하나 단속 못하겠느냐? 네가 힘이 좀 세다지만 그 많은 지나족들과, 십육기인을 혼자서 당해낼 수 있을 것 같았느냐? 더구나 너는 이제 혼자 몸이 아니다. 내가 있고, 부하들이 있고, 신시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아버님과 각 부족의 많은 벗들이 있는데, 어떻게 네 맘대로 그런 짓을 해?” 형이 사정없이 꾸짖자 치우비는 괴로운 듯 눈물을 펑펑 쏟았다. 한참나무라던 치우천의 목소리도 이윽고 떨리기 시작했다. 간신히 눈물을 참고 있는 것이다. “바보 같은 녀석아, 그렇게...... 그렇게 힘들었느냐?” 치우비는 소처럼 목을 놓아 울었다. 다른 사람들도 치우비의 순정이 그렇게까지 강하리라고는 생각 못하던 터라 다들 치우비를 딱하게 여겼다. 치우천은 감정을 추스르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많이 다치지는 않았느냐? 무슨 심한 꼴은 당하지 않았니?” 그러자 뒤에서 숙연히 서 있던 개르가 입을 열었다. “숨어 들어가는 데까지는 성공했습니다만...... 발님을 만나고 있는데...... 발님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래서....... 수백 명의 지나 전사가 우리를 쫓아왔습니다만 다행히 도망칠 수 있었습니다.” 치우천은 다시 놀랐다. “뭐? 발을 만났다고?” 이번에는 리미가 대답했다. “예, 제가 죽일 놈입니다. 주인님이 하도 마음 아파하셔서, 제가 그러면 그냥 확 잡아서 데려오자고 말씀드렸습니다. 저를 죽여주십시오.” “만나기까지 했다면 왜 데려오지 않았느냐?” “치우비님이 강제로 그러는 건 안 된다고 하셔서......” 치우천은 다시 화를 벌컥 냈다. “이 녀석아 그럼 데려올 생각도 없으면서 뭐 하러 갔느냐? 응?” 치우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발을 한번만이라도 보고 싶어서 간 것이라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리미는 자기 부족은 여자를 다 그렇게 납치해오는데, 여자들이 처음에는 울고불고 반항해도 잘 대해 주고 천천히 달래면 다 마음 붙이고 사는 법이라고 말했다. 치우비도 그 말을 듣고 리미와 개르에게는 발을 납치해오겠다고 했었다. 그러나 실제로 자신은 절대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발을 만나게 되면 같이 가자고 권해는 보겠지만, 싫다고 하는데 강제로 잡아올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치우비는 분명 발이 거절하리라 예감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보고 싶은 마음을 더 이상 억누를 수가 없어서 무조건 그 길을 떠난 것이다. 치우천은 답답한 듯 발을 한 번 굴렀다. “비야, 발과 너는 이제 끝이다. 네가 그렇게 미련을 두어도 헌원이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이고, 발도 너를 따르지 않을 거야. 너 혼자 그래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니? 응? 그런 바보 같은 짓 다시는 하지 마라! 두 번 다시는 하지 마라!” 치우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같이 가자고 간절하게 말해도 발은 오히려 화를 내며 소리를 질러 사람들을 부르지 않았던가. -멍청아! 내가 어디를 간단 말야! 보기도 싫어! 다시는 오지 말란 말야! 그러나 그때, 그런 발의 눈가에 무언가 반짝이는 것을 치우비는 분명히 보았다. 아니, 보지 못했어도 상관없었다 치우비는 발을 단념할 수 없었다. 치우천은 치우비에게 호되게 벌을 내렸다. 치우천도 마음이 아팠지만, 대장이 자기 멋대로 행동하여 열흘이나 자리를 비웠으므로 더 큰 벌을 받아야 한다며, 매를 백 대나 때리게 했다. 리미와 개르도 오십대씩을 얻어맞고 거의 인사불성이 되어 끙끙 앓았고, 치우비는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거의 반송장이 되었다. 때리는 사람들이 질려서 나중에는 좀 살살 하려고 눈치를 보았지만, 치우천은 그런 사람들까지 열 대씩 매질하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다시 아우를 때리게 했다. 치우천이 그렇게 아끼는 아우를 엄하게 다스리는 것을 보고 전사들은 모두 숙연해졌다. 치우천은 아우가 다 맞는 것을 끝까지 앉아 지켜보다가 안으로 들어갔다. 치우천은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울음이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왔다. 행여 밖으로 소리라도 새어나갈까 봐 가죽조각을 입에 물고 밤새 울었던 사실은 소녀밖에 알지 못했다. 치우비의 상처는 보름이 지나서야 거의 아물었다. 치우비는 묵묵히 형이 시키는 대로 전사들을 조련하기 시작했으며, 지난 일은 전혀 개의치 않고 쾌활한 태도를 보였다. 치우천도 그제야 조금 안심하고 아우를 좋은 말로 달랬다. 그런데 시기르타가 다시 한 번 무기를 가지고 와서 잔치가 벌어지자, 치우비는 또 사라져 버렸다. 이번에는 리미나 개르도 데리고 가지 않고 혼자 없어진 것이다. 치우천은 걱정이 되어 펄쩍 뛰었다. “또 갔나 보구나. 이거 큰일이다. 이걸 어쩌지? 응?” 침착하던 치우천은 이번엔 마치 물에 빠진 개미처럼 당황스러워했다. “지난번은 헌원도 설마 했겠지만, 한 번 겪었으니 이번에야말로 더 삼엄하게 지킬 거다. 그런데 또 갔다면 비는 죽을지도 모른다. 죽을지도 몰라!” 치우천은 정신 나간 사람처럼 허둥대었고, 남몰래 엉엉 울기까지 했다. 치베와 알한도 몹시 걱정이 됐지만 그렇다고 함부로 군사를 끌고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러나 열흘이 지나자, 용케 치우비는 다시 절룩거리는 자신의 말, 구름을 타고 나타났다. 온몸은 전보다 더 만신창이였고, 몸에 화살촉이 두 개나 박혀 있어 그 주위가 온통 피투성이였다 치우천이 다시 아우를 나무랄 사이도 없이 치우비는 형 앞에 오자마자 말에서 미끄러져 떨어지며 기절해버렸다. 치우천은 안도감에 눈물을 흘리면서 부르짖었다. “이 멍청한 녀석이 아무리 너라도 그렇지, 네가 헌원의 부하 전부와 싸울 수 있느냐? 이 꼴이 대체 뭐냐? 응?” 치우비가 다시 완쾌되는 데는 한 달이나 걸렸다. 치우천은 아우에게 즉시 벌을 내리려 했지만 다른 사람들이 모두 나서서 빌고 사정해서 벌은 몸이 나은 후에 다시 주기로 했다. 치우천은 치우비에게 그런 바보 같은 짓은 제발 그만두라고 야단도 치고, 달래도 보고, 나중에는 울면서 빌기까지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형이 그러는 것을 볼 때마다 치우비는 몇 배나 더 괴로워하면서, 숨죽여 눈물을 흘렸다. “형! 미안해! 정말 미안해! 그러나....... 그러나 이건 정말 어쩔 수가 없어! 차라리 나를 죽여줘. 응?” 치우천은 미쳐버릴 것 같았다. 아우의 마음을 몰라주는 발이 너무도 원망스러웠다. 허나 치우천은 다시 마음을 굳게 먹고, 치우비의 몸이 낫자 이번에는 백오십 대의 매를 때리라고 명령했다. 모두 깜짝 놀란 표정을 짓는 사이 치베가 외쳤다. “천 안다, 아무리 그래도 백오십 대는 너무하다! 그러면 죽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치우천은 눈물을 억지로 참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비는 명령을 어겼으니 할 수 없다. 지난번 범한 잘못을 다시 범했으니, 그에 따라 벌도 늘어야 한다.” 결국 치우비는 다시 백오십 대의 매를 한 대도 빠짐없이 모조리 맞았다. 이번에는 정말 위중해져서, 한때 숨이 넘어갈 지경에까지 이르러 주위 사람들이 혼비백산했다. 보다 못해 울라트가 울면서 처음으로 치우천에게 마구 대들기까지 했다 치우비가 다시 앓아눕자, 치우천은 해쓱해진 얼굴로 치베와 알한, 무라에게 말했다. “저러다가는 정말 내 아우는 죽을 것이다. 다시 한 번만 더 가면, 헌원의 손에 죽든지, 내 손에 죽든지 할 거야.차라리 발을 잡아오면 좋을 텐데, 그러지도 못하고 얼굴만 보고 오느라 저 고생을 하다니......” “무슨 수가 없을까? 비 안다를 가둬두면 어떨까?” 치베가 안타까운 심정으로 말하자 치우천이 되받았다. “가둬두면 속이 타서 죽을 거다. 저 녀석이 일부러 저러는 것이 아냐, 자기도 참을 수 없어서 그러는 것이니...... 정말 더는 못 보겠구나.” 치우천은 눈물을 주르륵 흘리다가 갑자기 큰 소리로 외쳤다. “차라리 내가 발을 데려오겠다. 그러지 않고는 비가 죽겠어!” 그러자 치베나 무라, 알한이 펄쩍 뛰었다. 치우비는 천하장사라서 그나마 살아 돌아오기라도 했다. 그러나 치우천이 간다면 살아 돌아올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 전사들을 다 끌고 간대도 그리 많은 수도 아니니 소용없을 것이었다. 치우비 혼자라면 힘도세고 마음대로 숨어 다닐 수도 있으니 오히려 유리했지만, 섣불리 몰려갔다가는 모조리 개죽음을 당할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그것은 치우비에게나 해당되지, 치우천은 절대 무사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치우천은 자기가 머리를 쓰면 된다고 자꾸 고집을 부리면서 정말로 혼자 떠나려 했다. 모두가 나서서 말렸지만 치우천은 버럭 호통을 쳐 사람들을 물리치고 높은뫼를 타고 달려가 버렸다. 급해진 치베는 막 회복해가는 치우비에게 달려가서 호되게 꾸짖었다. “비 안다! 네가 참지 못하니, 천 안다가 가서 발을 잡아오겠다고 고집을 피운다. 벌써 떠났다! 이걸 어쩔 셈이냐?” 치우비는 깜짝 놀랐다. 치우비의 힘과 용맹과 기술로도 두 번째는 거의 죽을 뻔했었다. 먼발치에서나마 발을 볼 수조차 없었다. 다만 부하들을 거느리고 쫓아오던 상망과 끽구가, 무슨 생각이었는지 아주 심하게 몰아붙이지 않아서 그나마 목숨을 줍다시피 건졌었다. 하물며 형이 간다면 절대로 살아 돌아올 수 없을 것이다. 치우비는 급히 구름을 타고 미친 듯이 달려가서 거의 하루가 지난 저녁에야 간신히 치우천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치우비는 형에게 달려가 울면서 외쳤다. “형님! 형님! 그래서는 안 돼! 가면 안 돼!” 치우천은 못들은 척 달려가져 했으나 치우비가 말까지 버리고 죽을 힘을 다해 달려서 높은뫼의 갈기를 붙잡고 늘어졌다. 치우천이 호통을 쳤다. “놔라! 차라리 내가 죽지, 너 죽는 꼴은 못 본다.” “안 돼, 형. 형님! 내가 잘못했어! 내가 잘못했어! 다시는.....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 약속해1 맹세할게. 그러니 제발 그러지 마.......” 치우비가 울부짖자 치우천은 그제야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에서 내려 아우를 얼싸안았다. 치우천의 마음은 말할 수 없이 아팠다. “내가...... 내가 못난 놈이다. 형이랍시고 아우 마음에 못을 박았구나. 뜻을 세운다고 아우를 이렇게 힘들게 했구나.......” 얼마나 그렇게 울었을까. 형제는 마음을 추스르고 나란히 말머리를 돌렸다. 돌아오는 길에, 치우천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비야. 이제 네 마음 알겠으니, 더 이상 발을 잊으라고는 안 하겠다. 그러나 서두르지 마라. 내 언제건 기회를 보아 발을 네게 오도록 해주마. 내 약속하마. 그러니 기다려라. 응? 그래 줄 수 있겠니?” 치우비도 가슴이 메어졌으나 꾹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할게, 형. 내가 너무 못나서......” 치우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별안간 치우천이 목소리를 높였다. “못나다니! 내 아우가 어디가 못났느냐? 마·음이 그렇게 지극한 것이 못난 것이냐? 못난 것은 발이며 헌원이다! 이런 지극한 마음도 몰라주는 그들은 하늘의 벌을 받을 거야!” 치우비는 발까지 천벌을 받을 것이라는 말에 조금 움찔했으나 뭐라 대꾸하지는 못했다. 그냥 한없이 착잡하고 괴로울 뿐이었다. 치우천의 마음도 똑같이 착잡했다. 치우천은 속으로 치우비에게 이렇게 말했다. “비야, 허나 발 스스로가 마음이 없다면 나로서도 방법이 없다. 나만이 아니라 너도 방법이 없을 거야. 세상에 누구도 못하는 일이 단 하나 있으니 바로 사람의 마음이구나......” 돌아온 치우천은 다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돌아오자마자 즉시 매를 칠 준비를 하라고 시킨 것이다. 이번에는 치우비를 치는 것이 아니라 치우천 스스로 매를 맞아야 한다고 말했다. “나 스스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혼자 뛰쳐나갔으니 아우의 죄와 똑같다. 내가 비록 부족장이지만, 다른 사람과 다른 취급을 받을 수 없다. 똑같이 쳐라.” 치우비가 놀라서 사정하고, 다른 사람들도 그럴 수 없다고 아우성쳤으나 치우천의 고집은 누구도 꺾을 수 없었다. 치베가 씩씩거리며 외쳤다. “천 안다! 이게 뭐냐? 너는 부족장이다! 부족장은 원래 마음대로 할 수 있는데, 왜 벌을 받아야 한다는 거냐?” “부족장이어도, 내 부족에서는 나보다도 정한 약속이 우선이다. 부족장이라도 잘못하면 벌을 받아야 한다. 부족장은 죽으면 그만이지만, 부족 전체가 지키는 약속은 영원한 것이다. 어서 나에게 백 대를 쳐라!” 소녀까지 나와서 치우천의 마음을 돌리려 했지만 치우천은 죽어도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부하들조차 차마 치우천을 때릴 수 없어서 차라리 자신들이 매를 맞겠다고 나섰다. 그러자 치우천은 추호도 망설임 없이 그 전사들에게 열 대씩의 매를 때리게 하고 다른 사람을 불렀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도 역시 못 때리겠다고 했다. 치우천은 또다시 서슬이 퍼래서 똑같은 벌을 주고 또 다른 사람을 불렀다. 이대로 가다가는 모든 사람들이 매를 맞고 앓아누울 판이었다. 그렇다고 곧이곧대로 치우천에게 백 대를 쳤다가는 체력이 그리 뛰어나지 않은 치우천이 그 자리에서 죽어버릴지도 몰랐다. 모두가 당황하여 난리가 났는데 마침 알한이 기막힌 꾀를 냈다. “천님, 알겠습니다. 그러나 천님이 잘못 헤아리신 게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알한님?” “전에 비님은 열흘 동안 말없이 나가 있었기에 백 대를 맞았습니다. 그러나 천님은 하루 나가 있었으니 열 대만 맞으면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치우천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내가 미처 헤아리지 못했군요. 그러나 저는 부족장이니 두 배의 벌을 받아야 합니다. 스무 대로 하십시오.” 결국 치우천은 전사들이 보는 앞에서 몽둥이로 스무 대를 얻어맞았다. 정확히는 스물 두 대였으니, 치우천이 맞는 중에도 이번 것은 힘이 빠졌으니 때린 자를 벌주고 다시 치라고 호통을 쳐서 두 대를 더 맞은 것이다. 전사들 중에는 이해하지 못하고 고지식하다며 속으로 비웃는 사람도 몇몇 있었지만 대부분은 어쨌거나 한번 정한 약속은 그렇게 철저히 지켜야 하는 것임을 새삼 깨닫고 몸가짐을 조심하게 되었다. 소녀는 너무도 속이 상해서 처음으로 치우천에게 싫은 소리를 했으나, 그는 아무 대꾸도하지 않았다. 치우비는 형이 자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 생각하고 다시는 뛰쳐나가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물론 발을 잊을 수는 없었으나 자기가 이백 대를 맞는 것보다 형이 스무 대를 맞는 것이 더 가슴 아팠기에 치우비는 아무리 발이 보고 싶어도 다시는 섣불리 행동하지 않았다. 다시 한 달 가량이 지나자, 떠났던 전사들이 저마다 가족들을 데리고 돌아왔다. 돌아오지 않은 사람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가족과 형, 동생, 친구들까지 데리고 왔다. 심한 경우 아예 열 집 점도 되는 작은 마을사람들을 통째로 데리고 온 사람마저 있었다. 그렇게 되자 사람들은 크게 불어났다. 전사 아닌 사람들도 많아지자 치우천은 그런 사람들로 하여금 땅을 갈아 씨를 뿌리거나 가축을 치게 했다. 치우천은 사람들이 땅을 가는 것을 유심히 보다가, 나무로 만든 쟁기가 자주 부러져서 일이 늦어지자 시기르타에게 말했다. “구리로 쟁기를 만들면 훨씬 좋겠군요.” 시기르타는 말도 안 된다며 펄쩍 뛰었다. “아니, 그렇게 귀한 구리로 쟁기를 만들다뇨! 무기 만들기도 벅찹니다요!” “우리에겐 일손이 적은 데 비해, 전사는 비교적 많으니 식량을 구하는 것도 큰일이 아닙니까?” “하지만 구리 다루는 사람은 신시에만 있습니다. 그러니 그런 것을 만들 방법이 없습지요.” 할 수 없이 치우천은 구리 도끼나 칼 중에서 두툼한 것을 골라 밭을 갈도록 했다. 귀한 구리무기로 밭을 간다 하여 사람들은 놀랐으나, 구리무기는 잘 부러지지도 않았고 훨씬 힘주어 깊게 갈 수 있어서 밭을 갈기가 한결 쉬웠다. 그 후로 열린 낟알들이 놀라울 정도로 탐스러워서 마을이 풍족해졌다. 치우비나 치베, 무라 등 뛰어난 영웅들의 지도를 받은 전사들은 하나하나의 실력이 상당한 경지에 이르러, 다른 부족의 보통 전사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강병(强兵)이 되어갔다. 다시 일 년이 지나고 싱카가 돌아왔다. 싱카는 자기 나라에서 많은 보석을 가지고 돌아와 그것을 모조리 치우천에게 바쳤다. 그리고 키타야나 구르, 보돈차르는 반년에 한 번 정도는 사람을 보내 소식을 전해주고, 울라트와 약속한 대로 머리색과 피부색, 생김새가 다른 도깨비들을 몇 명씩 거두어 보내주곤 했다. 그중에는 리미나 개르 등과 같은 곳에서 와서 말이 통하는 자들도 있었다. 리미나 개르는 몹시 기뻐했으나, 마냥과 닳은 도깨비는 지극히 귀한지 한사람도 오지 않아 마냥은 섭섭한 마음을 금치 못했다. 치우천은 그들을 따로 편성하여 울라트에게 맡겼고, 울라트는 다시 그들을 리미, 마냥, 개르에게 맡겼다. 어느 날, 치우천은 반가운 손님을 맞았다. 비울걸이 불쑥 치우천을 찾아온 것이다 “헤헤, 이놈아. 나를 떼어놓을 수 있을 것 같아?” 치우천은 비울걸을 반갑게 맞아들여 환대했다 비울걸은 예전과 다름없이 무례한 태도로 거침없이 먹고 마시기 시작했다. 치우천은 비울걸이 거의 다 배를 채웠을 때쯤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비울걸, 이제 기다리던 이야기를 들려주겠소.” 그러자 비울걸도 시시덕거리던 태도를 버리고 조용히 되물었다. “이제 때가 된 것 같으냐?” “그렇소. 이제부터 재미있는 이야기가 시작될 겁니다.” “자신 있느냐?” “자신 있습니다. 이 치우천, 비울걸님께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이제는 제 곁에 머물러주십시오.” “뭐? 이 녀석아, 나는 도깨비 왕이야. 도깨비들을 데리고 너희와 같이 살란 말이냐?” “상관없습니다, 비울걸. 당신은 이 치우천을 어떻게 보는 것입니까? 도깨비 왕이건 도깨비 부하건, 내가 그런 것을 가리고 받아주지 못할 사람 같습니까? 비울걸 당신이 나를 그렇게 작게 보았다면 왜 나를 믿고 도왔단 말입니까?” 비울걸은 감개무량한 듯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괴기스럽거나 장난만 치던 비울걸의 모습은, 퍽 현명하고 자상한 할아버지처럼 변해 있었다. 이윽고 비울걸이 입을 열었을 때, 시커멓게 구멍만 남은 것 같던 그의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정말...... 정말 나를 받아줄 수 있느냐? 내가...... 내가 정말 다시 사람들과 같이 살 수 있는 것이냐?” 치우천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옆에 있던 치우비가 껄껄 웃으며 비울걸의 냄새나는 몸을 다짜고짜 와락 끌어안았다. 비울걸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허허 웃으며 몸을 뒤틀었다. “놔라 놔! 늙은이 허리 부러진다!” 치우비가 물러서자 치우천이 웃으며 말했다. “비울걸, 저는 당신이 좋습니다. 꼭 당신의 재주가 탐나서 그러는 것만은 아닙니다.” “그럼 뭐냐? 내가 그렇게 예쁘냐?” 치우천은 맑게 웃으며 되받았다. “그럴리가 있습니까?” “그럼 뭐냐?” “당신은 재미있는 사람이고, 누구보다도 웃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당신의 그런 점이 좋습니다. 사람들에게 쫓겨나고 도깨비들과 살면서도, 사람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험한 고생을 하면서도 당신은 웃음을 잃은 적이 없었습니다. 당신이 도깨비 왕이고 재주가 많다지만, 내가 정말 당신을 존경하고 좋아하는 것은 바로 그 이유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같이 새로운 출발을 하는 겁니다. 누구나 웃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 그것이 내 꿈입니다. 우리 같이 갑시다. 어떻습니까?” 비울걸은 갑자기 미친 듯 소리를 내어 웃더니, 치우천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리고 치우천의 어깨에 기대어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며 엉엉 목 놓아 한없이 울었다. 그 울음은 비울걸의 지난 오랜 세월 동안의 한과 고통과 고뇌를 모두 토해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치우천은 마치 자신이 아버지라도 된 것처럼, 함께 눈물을 흘리며 늙은 비울걸의 등을 다독여 주었다. 누구도 건드릴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도깨비 왕 비울걸도 이렇게 치우천의 옆에 서게 되었다. 치우천은 전사들의 실력이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른 것 같자, 일단 근처에 있는 도둑 떼들을 쳤다. 그렇게 하여 사람을 늘리고 필요한 물건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면서 치우천은 부근에서 악명 높은 부족들, 즉 다른 부족을 함부로 침략하는 도둑 같은 부족들을 하나하나 쳐서 합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치우천의 부족이 명성을 얻자 근처의 작은 부족들이 소문을 듣고 제 발로 찾아와 합쳐지기도 하고, 다른 부족의 전사들이 일부러 찾아오기도 하여, 아직 대부족이 되려면 멀었지만 그래도 부족은 점점 커져갔다. 그 일대의 타타르족이나 다른 부족들은 치우천의 부족을 ‘작은 주신족’이라 불렀다. 그렇게 세월은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갔다. 염제(炎帝) 유망, 움직이라 그로부터 삼 년이 흐르자, 마침내 유망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형천의 부족이 동쪽의 미아우족을 모두 정복하고, 축융의 축융족이 남쪽의 부족을 정복했으며, 창힐은 공상에 거대한 벽을 쌓아 도시를 건설했다. 그렇게 되자 유망은 마침내 야심을 드러내어, 치우천의 짐작대로 북쪽으로 진격을 시작했다. 지금의 북경 부근에 있던 미아우족들이 싸우다가 밀려나고, 그 언저리에 있던 마갸르족들이 미아우족의 편을 들어서 전쟁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유망이 길러낸 지나 전사들의 수는 압도적이었고 형천이나 축융 등의 용맹을 당해낼 자가 없어서 미아우족과 마갸르족은 점점 밀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되자 마침내 주신도 싸움에 끼어들 수밖에 없었다. 마갸르족과 미아우족들은 드디어 주신이 움직이자 기뻐했으나 막상 주신 사울아비들이 도착하자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유망이 이끄는 지나 전사들은 여러 갈래로 나뉘어 진격하고 있었으나 전체를 합치면 거의 팔만 명에 달했다. 너무나도 엄청난 군세였기 때문에 그때까지 없던 ‘만’이라는 숫자 단위가 처음으로 쓰이기 시작할 정도였다. 마갸르족 나달타 부족과 미아우족 후냐 부족이 함께 지나족과 싸우고 있는 맨 서쪽 전선 한 곳에만도 지나족은 오천 명에 가까운 병력을 보내놓고 있었다. 그런데 주신에서 보내온 사울아비는 겨우 백 명 남짓이었다. 주신 사울아비가 혼자서 열 명을 당해내는 정예라고 하지만, 제아무리 주신 사울아비라도 백 명밖에 안 되는 사람을 원군이랍시고 보낸 것은 너무도 맥이 빠지는 일이었다. “주신 한웅께서는 아직 일의 심각성을 모르시는 것 같소!” 마갸르족의 용사인 와난수가 사울아비들을 이끌고 온 거서기와 삼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그도 태산 회의 때 참석했기 때문에 거서기와 삼을 대강이나마 알아보았다. 태산 회의 때 돌던지기에서 도단이에게 아깝게 패했던 사람이 바로 와난수였다. 와난수 바로 옆에는 역시 태산 회의에 아버지와 함께 갔던 아들 와난강이 착잡한 표정으로 팔짱을 긴 채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그 둘은 나달타 부족의 으뜸가는 용사들이라 싸움터에서는 몹시 용맹스러웠으나, 지금 그들의 어깨는 처져 있었다. 거서기가 한숨을 쉬며 항변했다. “주신 사울아비 거서기가 말하오. 주신 한웅께서는 많은 사울아비를 보내셨소. 그러나 사울아비들 또한 여러 갈래로 나누어졌기 때문에 여기는 백 명밖에 올 수 없었던 것이오.” 그러자 와난강이 끼어들었다. “마갸르 나달타 족의 와난강이 말합니다. 지나족 역시 군대를 여러 갈래로 나누어 보냈습니다. 그런데 지나족은 오천인데, 주신 사울아비는 백 명이라니요 주신의 힘이 원래 지나족의 오십분의 일밖에 안 되었습니까? 그렇다면 더 싸울 것도 없이 지나족에게 모두 항복하는 게 어떻습니까?” 거서기와 삼은 할말이 없었다. 주신의 정세는 날이 갈수록 엉망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렇다고 주신이 급속도로 쇠락의 길을 걷고 있거나, 가난의 구렁텅이에 빠진 것은 아니었다. 역설적으로 주신은 모든 것이 너무 풍요로워서 썩어 들어가고, 썩어 들어감으로써 약해져 가고 있었다. 고시울률의 지휘 하에 다른 부족의 종을 써서 농업 생산량이 대량으로 늘어나자 주신은 차츰 외부와의 교역을 소홀히 하게 되었고, 종으로 부리는 다른 부족을 멸시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되자 차츰 주신의 그늘에 있던 부족들이 하나둘씩 이탈하기 시작했지만 사와라 한웅은 그래도 현명한 사람인지라, 가급적 다른 부족들을 돕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애썼다. 그러나 고시울률을 비롯한 귀족들은 그 풍요는 모두 주신만의 것이며, 다른 부족을 돕는 것은 낭비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러다가 사와라 한웅이 노환에 들게 되자 반은 폐인이나 다름없어 일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게 되었다. 그 틈을 놓칠세라 고시울률 등의 귀족과 부루버들을 필두로 하는 외척들이 실질적인 권세를 잡았다. 그들은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으며, 엄청난 부를 쌓았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곧 주신의 힘이라 믿었고, 가난하거나 작은 다른 부족의 뒤치다꺼리에 일일이 신경 쓰지 않는 것이 더 낫다고 믿었다. 가난뱅이 부족들이 다 망해버리면 훨씬 세상이 좋아진다고 공공연하게 떠드는 귀족도 있었다. 그런 와중에 반항하는 부족이 생겨나면 귀족들은 사울아비들을 보내 철저하게 짓밟았다. 유망과 대치하고 있는 싸움터에는 백 명 단위의 사울아비밖에 보내지 않으면서, 그러한 작은 부족의 반란에는 수천 명 단위의 사울아비들을 보냈다. 유망의 일은 어차피 해결될 것이며, 감히 주신을 건드리지 못할 테지만, 그런 무엄하고 천한 놈들은 절대 그냥 둘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밖으로 내보내는 사울아비들은 점점 줄어들었고, 도움을 받지 못해 주신을 원망하다가 지나족에 편입되는 부족들이 늘어갔다. 태산 회의 때의 젊은 사울아비들이나 주신의 삼사는 있는 힘을 다해 주신의 옛 기강을 회복해보려고 했지만 번번이 실권을 움켜쥔 귀족들의 반대에 부딪혀서 흐지부지되곤 했다. 더구나 사와라 한웅이 앓아눕자, 그동안 사와라 한웅에게 지은 죄가 있어서 기를 펴지 못했던 치우가람 치우바람 형제가 득세를 했다. 그들은 고시울률과 뜻이 맞아서, 사울아비들마저도 모두 손아귀에 넣고 순식간에 대귀족 못지않은 권세를 누렸다. 치우 집안에서만도 치우 형제의 아버지 치우우레나 치우벌 등 강직한 사울아비들은 거의 내쫓기다시피 변방으로 나가고, 어릴 적부터 무예보다 멋만 부리는 것만 배운 풋내기 사울아비들이 우쭐거리며 신시를 활보했다. 신시의 주신 사람들조차 땀 냄새, 흙냄새가 풍기는 사울아비들은 ‘바깥사울아비’라 부르며 천하게 여기고, 번쩍이는 장식과 화려한 물을 들인 옷으로 잔뜩 멋을 낸 사울아비들을 ‘안사울아비’라 부르며 우러러보고 흉내 내기를 즐겼다. 그들에게 칼은 장식품이요, 간혹 말 안 듣는 ‘천한’ 부족의 목을 재미삼아 치는 도구일 뿐이었다. 그러니 이번에 파견 나온 거서기나 삼은 당연히 바깥사울아비였다. 삼은 재작년에 돌림병으로 아내를 잃었으나, 태산 회의의 영웅이면서도 아직 마땅히 시집을 여자조차 없는 판이었다. 신시 안에서는 ‘바깥사울아비’에게는 딸을 주지 않는 것이 상례였다. 삼은 신시 밖 여자도 괜찮다고 했으나 삼의 부모님은 체면을 내세우며 어떻게든 신시 안사람과 혼인해야 한다며 아들이 무능하다고 꾸짖는 판이었다. 오히려 아들더러, 그런 천한 부족것들 뒤치다꺼리는 그만두고 높은 분들께 잘 보이고 인사도 부지런히 다녀서 안사울아비가 되라고 부추겨서, 삼은 그때마다 귀를 막고 울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믿었던 부하들도 더 견디지 못하겠다며, 싸움기술보다 멋 내는 법이나 배워서 안사울아비가 되겠다고 뛰쳐나가곤 했다. 태산 회의 때 다른 벗들의 신세도 거의 비슷했다 그들의 큰 뜻과 뛰어난 재주는 고귀하신 안사울아비들에게는 단지 웃음거리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얼마 되지 않는 힘으로나마 어떻게든 해보려고 목숨을 걸고 뛰었다. 그러나 아무리 올곧은 뜻을 지녔다 해도 자신들이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는지, 그들 스스로가 확신할 수 없는 판이었다. 거서기와 삼은 물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울 각오가 되어 있는 진정한 사울아비였다. 그래서 자신들만 태산같이 믿고 있다가 낙심하는 마갸르족이나 미아우족을 보기가 민망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미아우 부족장인 샤우옹도 안색이 좋지 않았다. 나달타의 부족장 걸걸주이는 아직 나이가 많지 않아 외삼촌인 와난수가 부족 일을 도맡아 하고 있었는데 아직 소년에 불과한 걸걸주이도 한숨을 내쉬며 주신은 믿지 못하겠다는 말을 하자, 삼이 더 참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외쳤다. “주신 사울아비 삼이 말하오! 우리가 비록 수는 적지만, 우리를 앞에 두고 그렇게까지 말하는 것은 심하다고 보오! 내일 싸움에서 우리가 앞장설 테니, 당신들은 주신 사울아비들이 어떻게 싸우는지 잘 보아두시오!” 삼이 얼굴색까지 변하며 외치자 와난강이 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마갸르 나달타족의 와난강이 말합니다. 사울아비 삼님께서는 너무 노여워 마십시오. 우리의 말이 너무 지나쳤음을 진심으로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러자 거서기가 나서서 조용히 말했다. “주신 사울아비 거서기가 말합니다. 우리의 수가 적은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삼 형이나 마갸르, 미아우 분들도 마음을 가라앉히십시오. 우리끼리 아웅다웅 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지나족 유망 놈만 좋아하지 않겠습니까?” “미아우 후냐족 부족장인 나, 샤우옹이 말하오. 적은 오천도 넘는데, 우리는 이천 명도 안 됩니다. 마갸르족 전사가 천 명이고, 우리 미아우 전사가 팔백 명이오 반도 안 되는 수로 싸워 이길 수 있겠소?” “주신 사울아비 거서기가 말합니다. 이렇게 해보면 어떻겠습니까? 우리 수가 비록 적지만, 우리 사울아비들이 앞장서서 적들 한가운데를 뚫고 나가며 적을 흐트러 놓을 테니, 미아우족과 마갸르족 여러분은 그 틈을 타서 두 갈래로 나뉘어 적을 공격하십시오. 우리는 적진을 돌파하고 바로 뒤돌아서 다시 세 방향에서 적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럴듯한 전략이라 와난수, 와난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곧 와난강은 예리한 눈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마갸르 나달타족의 와난강이 말합니다. 그런데 백 명밖에 안 되는 사울아비들로 저 많은 수의 지나족을 뚫을 수가 있겠습니까? 사울아비들의 힘을 못 믿는 것은 아닙니다만...... 너무 희생이 클 것 같아 드리는 말씀입니다.” 사실 작전 자체는 그리 문제가 없지만 수적으로 적과 엄청난 차이가 난다는 것이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그것을 모를 거서기나 삼이 아니었지만, 그들은 주신의 이름이 깎이는 것을 보느니 차라리 죽음을 무릅쓰고 무리한 돌파를 강행하려 했던 것이다. 와난강이 다시 말을 이었다. “어차피 힘을 합쳐야 하고, 사울아비들께서 그렇게 용감하게 싸워주시겠다는데 우리라고 물러설 수는 없지요 제가 돌던지는 전사들 백 명을 이끌고 뒤를 지켜드리겠습니다. 우리 함께 멋지게 싸워봅시다.” 어차피 힘든 싸움이 될 것이지만 와난강이 그렇게 말하자 거서기와 삼은 고마운 마음에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날, 날이 밝자 마자 지나족이 먼저 소리를 지르며 싸움을 걸어왔다. 지나족의 대장은 형천이 부족장으로 있는 대인족의 위(危)라는 자였다. 위는 키가 무척 크고 팔다리가 길었으며, 얼굴에 흉터가 가득해서 몹시 인상이 사나웠다. 싸움에서 왼쪽 눈을 다친 애꾸눈 위는, 그 비뚤어진 눈과 길게 그어진 릴은 흉터로 더욱 험악해 보였다 그 흉터는, 태산 회의 때 나왔던 헌원의 부하 알유와 다투어 칼 시합을 하다가 그렇게 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위는지나족 치고는 보기 드물게 기마술이 뛰어나 말을 타고 싸울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마갸르와 미아우의 겁쟁이들아. 싸울 용기가 없으면 썩 항복해라! 기어서 내 앞까지 온다면 목숨만은 붙여주마!” 위가 한껏 거드름을 피우며 욕을 해대자 마갸르와 미아우 전사들은 모두 흥분하여 펄쩍 뛰었다. 거서기와 삼은 백 명의 사울아비에게 목숨을 아끼지 말고 싸우자며 비장한 연설을 한 다음 말에 올랐다. 백명의 사울아비가 고함을 지르며 무섭게 돌진하자 와난강이 이끄는 백명의 돌부대가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마갸르의 나달타족 전사들은 왼쪽, 미아우 후냐족 전사들은 오른쪽에서 전진했다 위는 그것을 보고 가소롭다는 듯이 낄낄 웃었다. “몇 되지도 않는 것들이 꾀를 쓴답시고 뿔뿔이 흩어져 오는구나! 죽으려고 환장했군! 나가자! 지나의 전사들아! 염제신농님을 위하여! 가자!” 지나 전사들은 크게 ‘염제신농, 염제신농’이라고 마치 주문처럼 외치면서 일제히 달리기 시작했다. 오천 명의 전사들이 한꺼번에 똑같은 소리를 외치면서 다가오는 모습은 가히 위압적이라 마갸르나 미아우 전사들은 은근히 기가 죽었다. 그러나 사울아비들은 전투에 임하면 오로지 싸움에만 집중하는 고된 훈련을 오랜 기간 받아온 ‘바깥사울아비’였으므로 누구 하나 동요하거나 겁먹지 않고 적을 향해 똑바로 돌격해 들어갔다. 결사대나 다름없는 백 명의 사울아비들이 말을 타고 달리며 일제히 화살을 날리기 시작하자 지나 전사들 중 몇몇이 비명을 질렀다. “사울아비다!” “아이쿠! 주신 사울아비들이 있다!” 사울아비들이 있다는 것은 이제 주신도 싸움에 끼어들겠다는 이야기인지라, 지나족은 잠간 술렁거렸다. 그러나 위가 보니, 사울아비들의 기세는 대단했지만 수는 고작 백 명밖에 되지 않는 듯했다. “겁먹지 마라! 사울아비라고 사람이 아니더냐? 그놈들도 치면 맞고, 찌르면 죽는다! 사울아비의 목을 베는 사람은 큰 상을 내리겠다!” 위가 큰 소리로 외치자 지나 전사들은 다시 용기를 내어 발악적으로 사울아비들에게 부딪혀 왔다. 순식간에 피와 무기 조각이 사방에 날리면서 수많은 지나 전사들이 쓰러졌다. 사울아비들이 지닌 구리무기의 힘은 대단해서 지나족들은 순식간에 서른 명 이상이 쓰러져 갔다. 그러나 지나족 전사들이 자꾸 몰려들어 앞을 막아서자, 진격 속도는 점점 느려졌다. “일일이 맞서 싸우지 말고 짓밟고 나아가라!” 삼이 긴 창을 빙빙 돌려 두 명의 지나 전사를 쓰러뜨리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 백 명의 사울아비는 다시 대열을 갖추면서 일제히 앞으로 내달렸다. 말을 탄 사울아비들이 지나 전사들을 짓밟으며 무서운 기세로 달려들자 위가 외쳤다. “우리도 말을 풀어라! 소와 말을 풀어 앞을 가로막아라!” 비록 소수였지만 사울아비들의 기세가 맹렬하자 위는 꾀를 쓴 것이다. 지나 전사들이 급히 수백 마리의 소와 말을 아낌없이 풀어놓자 사울아비들은 밀려드는 소 떼와 말 떼에 밀려서 갑자기 대열이 흐트러지며 둘로 나누어졌다. 적을 돌파하기 전에 사울아비들이 둘로 나누어지자 양쪽이 오십 명 정도밖에 되지 않아서 제대로 된 대열을 만들 수가 없었다. 사울아비들의 수가 조금만 많았으면 그대로 돌파할 수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백 명으로는 역부족이었다. 거서기는 당황하고 놀라서 외쳤다. “다시 뭉쳐라! 돌파해야 한다! 안 그러면 적에게 에워싸인다!” 그러나 지나족은 틈을 주지 않고 미친 듯이 가운데로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더구나 위는 양쪽에서 진격해오는 마갸르나 미아우족은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고 중앙의 사울아비들에게만 신경을 썼다. 위의 기마술은 대단하여 마치 몽골족 같았다. 그는 양손에 큰 칼을 하나씩 쥐고 미친 듯 달려들어서 한 명의 사울아비와 맞부딪혔다. 서로 한 대씩 공격을 주고받아 위의 가슴팍에 피가 흘렀으나 위는 버텨냈다. 반면 사울아비는 충격을 받아 말에서 떨어져서 수많은 지나 전사들에게 짓밟혀 산산조각으로 찢겨져 나갔 다. 순식간에 사울아비가 그렇게 쓰러지자 지나족들은 사울아비도 별 것 아니라는 생각에 사기가 높아졌다. 삼은 그것을 보고 눈에서 불꽃이 치솟는 것 같았다. “지나족 외눈깔이 여기 주신 사울아비 삼이 있다! 나와 겨뤄보자!” 삼이 미친 듯이 창을 휘둘러 피바다를 만들면서 위에게 달려들자 위가 맞받아 소리쳤다. “어디서 거지같은 놈이 날뛰느냐? 혓바닥을 뽑아버리겠다!” “네 눈깔부터 마저 뽑아주마!” 삼이 화가 나서 무섭게 덤비자 위는 두어 번 싸우는 시늉을 하다가 뒤로 꽁무니를 빼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위는 교활하게 삼을 슬슬 피하면서 다른 지나 전사들과 싸우는 사울아비들을 뒤에서 후려쳐 떨어뜨려 죽게 만들었다. 성격이 불같은 삼은 더더욱 화가 나서 악착같이 위의 뒤만 쫓았는데 거서기가 그것을 보고 크게 외쳤다. “삼 형! 쫓지 마! 속임수야!” 삼이 그 말을 듣고 급히 말을 돌리려는 순간, 화살이 우박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위는 삼의 기세가 사나웠고 대장인 것 같아 보이자 그를 약 올려 화살부대가 있는 곳까지 유인해왔던 것이다. 순식간에 화살이 하늘을 덮을 듯 까맣게 날아오자 삼은 입술을 악물었다. ‘오늘 내가 여기서 죽는구나! 하지만 헛되이 죽을 수는 없다!’ 삼은 크게 소리를 지르면서 무서운 속도로 창을 휘둘렀다 삼은 태산 회의 때는 활쏘기에 출전했지만 사실 그는 주신족 내에서도 손꼽히는 창의 명수였다. 그렇게 수없이 쏟아지는 화살들은 거의 대부분 삼의 바람개비처럼 돌아가는 창자루에 맞고 퉁겨나가 땅에 떨어졌다. 일순, 지나 전사들은 삼의 엄청난 솜씨를 잠시 넋 빠진 듯 바라보았다. 삼도 비록 무서운 솜씨를 보였지만 온전한 것은 아니었다. 세 개나 되는 화살이 몸에 박혀 있었다. 그러나 삼은 화살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듯, 다시 창을 휘두르며 달리기 시작했다. 지나족은 무시무시한 삼의 창끝을 피해 개미새끼처럼 흩어져 달아나기 바빴다. 그러나 사람의 힘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라 상처를 입은 삼의 창끝은 점차 느려져 갔다. 도끼를 휘둘러서 지나 전사들을 베어 넘기고 있던 거서기가 그것을 보고 다급하게 외쳤다. “안 되겠다! 삼 형이 죽겠다! 사울아비들아 스승을 구해라!” 거서기가 간신히 수습한 사울아비들을 데리고 삼을 구하려는데, 다시 한 번 화살 벼락이 쏟아져 내렸다. 사울아비들은 일제히 어깨를 맞대어 붙어 서서 화살을 무기로 쳐내거나 혹은 커다란 가죽 같은 것을 휘둘러 화살을 걷어내기도 했다. 그러나 말까지 보호하기는 힘든 일이라 열 필도 더 되는 말들이 화살을 맞아 비명을 지르면서 쓰러지거나 날뛰다가 주인을 떨구고 도망쳐 버렸다. 거서기가 간신히 삼을 구해내기는 했으나 이미 삼은 기력을 너무 쓰고 피를 많이 흘려서 의식을 잃어가고 있었다. “삼 형! 정신 차려! 이렇게 죽을 수는 없다구!” 그때 위가 큰 소리로 명령을 하자 지나 전사들이 다시 한 번 화살벼락을 쏟아 부었다. 사울아비들은 죽을힘을 다해 무기로 화살을 쳐내고 가죽을 휘둘러 화살을 막았으나 또다시 네 사람이 쓰러졌다. 그때, 와난강이 이끄는 돌부대가 죽을 각오로 뚫고 들어오며 마구 돌을 날 리자 지나족의 화살부대는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다. 와난강은 놀라운 솜씨로 연달아 세 명의 지나족 활잡이의 얼굴에 돌을 맞혀 피투성이를 만들어 놓은 다음 거서기에게 외쳤다. “괜찮습니까?” “삼형을 부탁합니다!” 말을 마친 거서기는 다시 말을 달려 나가려 했다. 와난강은 거서기의 앞을 막아서며 소리쳤다. “돌파는 힘듭니다! 물러섭시다!” 이미 둘로 나뉜 사울아비들은 지나 전사들에게 포위되어 있었다. 나달타 족의 좌군이나, 미아우의 우군도 압도적인 지나 전사들을 맞아 싸우느라 조금도 전진하지 못하고 있었다. 천 명 가량의 양쪽 군대는 자기들의 한 배 반이 넘는 천오백 명씩의 지나 전사들과 싸우느라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러고도 지나족은 다시 이천 명이나 되는 인원으로, 합해봐야 이백 명도 안 되는 사울아비들과 와난강의 돌부대를 겹겹이 포위해 왔던 것이다. 특별히 위가 작전 지시를 한 것이 아니라 상황이 저절로 그렇게 흘러간 것이다. 방금 와난강이 죽을힘을 다해 포위망을 뚫지 않았다면 거서기와 삼도 갇혀버렸을 것이다. 허나 와난강의 권유에 거서기는 고개를 저었다. 안쪽에 오십 명의 사울아비들이 완전히 포위되어 분투하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내 부하들이 저 안에 있소. 난 그들을 구해야 합니다! 와난강님, 당신은 부하들을 데리고 물러서시오!” 거서기는 와난강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크게 소리치며 혼자 미친 듯이 지나 전사들의 포위망으로 뛰어들었다. 그러자 와난강도 단단히 각오하고 부하들을 이끌고 돌을 던지게 하여 거서기를 도왔다. 거서기가 도끼를 마구 휘두르며 포위망을 돌파하자 갇혀 있던 사울아비들 이 외쳤다. “거서기님! 왜 오셨소? 우리만 죽으면 되는데 왜 오셨소?” 사울아비들이나 거서기 모두 눈물이 고였다. 이 사울아비들은 ‘바깥사울아비’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면서도 묵묵히 거서기와 삼을 따라 목숨을 걸고 싸우던, 자신의 수족 같고 가족 같은 부하들이었던 것이다. 거서기는 솟구치는 눈물을 삼키며 크게 외쳤다. “우리 오늘, 같이 죽자! 그러나 주신 사울아비가 어떤 사람들인지, 적에게 똑똑히 보여주고 죽자!” 사울아비들만 아니라 그 뒤를 따라 들어온 와난강도 감동하여 이를 악물고 외쳤다. “마갸르의 전사들아 보았느냐? 우리도 질 수 없다. 우리도 싸운다!” 이미 돌이 다 떨어진 판이라 마갸르 전사들은 일제히 짧은 돌칼을 뽑아들거나 죽은 지나족의 무기를 주워들어 싸우기 시작했다. 차마 눈뜨고는 볼 수 없는 참혹한 혈투였다. 사울아비들이나 마갸르족 전사들도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워서 지나 전사들의 시체가 무더기를 이루었지만, 그래도 물밀듯이 몰려오는 지나 전사들의 수는 끝이 없었다. 위는 피해가 너무 심하면 전사들을 조금 물러서게 했다가 다시 덤비는 식으로 사울아비들과 마갸르족의 힘을 빼놓았다. 그렇게 세 번을 밀어붙이자 마갸르족 전사들이 힘이 빠져 더 이상 싸우지 못하고 땅에 쓰러져 헐떡이기 시작했다. 사울아비들도 휘청휘청하다가 그만 엉덩방아를 찧고는 다시 일어나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다. 와난강은 자기 아버지나 미아우족이 행여 포위망을 뚫어주지 않나 싶어 그쪽을 보았다. 마갸르족이나 미아우족도 열심히 그들을 구하려 했지만, 지나족들에게 막혀 제대로 전진하지 못했고 이미 사기도 꺾여버렸다. 그 참에 다시 한 번 지나 전사들이 공격해오자 사람들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주저앉아 버렸다. 무기도 거의 다 박살이 나버렸고 주워서 쓸 것도 없었으며, 상처가 심한데다 지치고 기력이 빠져서 죽으면 죽었지, 더는 싸울 수가 없었다. 위는 다 이겼다고 생각했는지 입가에 웃음을 흘리며 한껏 비아냥거렸다. “지나 전사들아, 주신 사울아비들이 그렇게 강하다던데, 하나씩 잡고 붙어보아라. 어디 얼마나 강한지 보자꾸나.” 지나 전사들은 마구 웃었다. 이제 그나마 억지로라도 서 있는 것은 거서기와 와난강, 두 사람뿐이었다. 지나 전사들은 조롱하듯, 화살도 쏘지 않고 앞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피투성이가 된 거서기가 피식 웃으며 와난강에게 말했다. “그러게 물러서랬잖소.” 와난강도 역시 만신창이가 되었으나 똑같이 웃으며 대답했다. “당신이 안 물러서는데 내가 왜 물러서야 하오?” 그때 키가 크고 굵은 몽둥이를 쥔, 텁석부리 장정 하나가 걸어왔다. “나는 지나 대인족의 전사 쑨이다. 내 손에 죽더라도 이름은 아는 게 좋겠지. 누가 너를 죽였는지는 알고 죽.......” 순간, 거서기는 날쌔게 쑨에게 달려들며 다리를 걸었다. 놀란 쑨은 힘을 믿고 버텨보려 했으나 거서기는 쑨의 힘을 역으로 이용하여 재빨리 두 번이나 다리를 더 걷어차 쑨을 쓰러뜨렸다. 쑨이 넘어지는 순간, 거서기는 날쌔게 쑨의 몽둥이를 빼앗아 들고 쑨의 머리를 내려쳤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쑨은 머리가 박살나서 하던 말도 다하지 못하고 죽어버렸다. 거서기가 코웃음을 치면서 중얼거렸다. “너 따위 조무래기의 이름은 알 필요가 없다.” 그러자 다른 지나 전사 한 명이 나섰다 역시 대인족의 전사 같았는데 어깨가 딱 벌어지고, 손에는 큰 도끼를 들고 있었다. “한가닥하는 놈이구나! 나는 지나 대인족......” 그 전사가 말하는 순간, 갑자기 얼굴에 커다란 돌멩이 하나가 날아들었다. 마치 벼락이 떨어진 것처럼 피하지도 못하고 정통으로 돌을 맞은 그 전사가 피를 뿜으며 고개를 숙이자, 와난강이 재빨리 달려들어 도끼를 빼앗아 단숨에 목을 쳐버렸다. 무딘 돌도끼라 목이 날아가지는 않았지만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자 지나족은 질겁을 했다. 와난강은 씁쓸히 웃으며 말했다. “나도 지나족 돼지의 이름 따위는 알고 싶지 않다.” 그것을 본 거서기가 껄껄 웃었다. “지고 싶지 않은가 보구려!” 와난강도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 한번 해봅시다, 누가 더 많이 죽이나. 이제 무기도 생기지 않았소?” “좋소, 좋소. 저 세상에 가서 누가 더 많이 죽였나 맞혀봅시다.” 두 사람의 호기가 하늘을 찌를 것 같자 지나 전사들은 멈칫거리며 감히 더 나서는 자가 없었다. 그것을 본 위가 화를 벌컥 내며 외쳤다. “뭐 하는 거냐? 그냥 쓸어버렷!” 지나 전사들이 다시 일제히 달려들 준비를 하는데도 거서기와 와난강은 둘 다 죽음을 각오한 듯, 얼굴은 약간 굳어졌지만 눈 한 번 깜빡거리지 않았다. 그때 뒤쪽에서 지나 전사 하나가 크게 외쳤다. “군대다! 뒤다!” 위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과연 뒤쪽으로부터 오백 명이 넘어 보이는 군대가 무서운 기세로 달려오고 있었다. 어디서 나타난 군대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자신들이 모든 마을을 점령하고 불을 지르며 왔는데 저 군대는 도대체 어디서 나타났단 말인가? “저들은 누구냐? 우리 편이냐, 적이냐?” 위가 외치자 말을 잘 타는 지나 전사 하나가 상황을 보러 달려 나갔다. 그러나 채 상황을 알아보기도 전에 대답은 그쪽에서부터 전해져왔다. 그 전사가 말을 달려 몇 발짝도 가지 않았을 때, 난데없이 화살하나가 무서운 기세로 날아오더니 그 전사의 목을 꿰뚫어 버렸기 때 문이다. 주인 잃은 말이 몇 번 ‘힝힝’ 울다가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려 달아났을 뿐이다. “적이다!” 지나 전사들이 외치자 위가 크게 소리쳤다. “제길! 또 있었구나! 하지만 별것 아니다! 기껏 해야 오백도 안 된다! 중간에 있던 부대를 뒤로 돌려라!” 마갸르군과 미아·우군은 아직까지 지나족과 싸우고 있다지만, 중앙에 이천 명이나 되는 지나 전사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위는 그 인원으로 오백 명 정도의 군대를 쓸어버리는 것은 문제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천 명의 지나 전사들이 소리를 지르며 달려 나가자 저쪽의 군대는 달려오다가 다시 질서정연하게 방향을 바꾸었다. 오른쪽으로 방향을 확 튼 것이다. 위는 화가 나서 고래고래 소리쳤다. “저놈들이 겁을 먹었다! 모조리 따라가 잡아라!” 지나 전사들은 다시 오른쪽으로 우르르 몰려서 달려갔다. 모두가 말을 타고 있는 상대편 부대는 하나같이 말 타는 솜씨가 대단했다 그러나 몽골족 같지도 않았고 아무리 봐도 어느 부족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저놈들은 어느 부족이냐? 어디서 어중이떠중이들이 모인 것이냐?” 위는 의아해했으나 이내 놀라움으로 바뀌었다. 숨이 턱에 닿도록 오른쪽으로 달려간 지나 전사들과 그 부대가 맞부딪히려는 순간, 그 부대는 순식간에 다시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일제히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너무도 일사불란하여 마치 뱀이 몸을 꼬는 것 같았다. 오백 명이면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니지만 또 결코 적은 수가 아닌데도 너무나 유연하게 방향을 틀어서 마치 한 사람이 하나의 말을 돌리는 것 같았다. 그에 반해 지나 전사들은 우왕좌왕하며, 방향을 바꾸려다 서로 부딪히고 충돌하여 삽시간에 대오가 산산이 흐트러졌다. 위의 표정이 그제야 벌레 씹은 얼굴이 되었다. “보...... 보통 놈들이 아니다! 어디서 저런 놈들이 생겨났단 말이냐? 주신 사울아비들이냐?” 싸움터에서 이렇듯 군대를 돌리고 여기를 치고 저기를 막는 것은 누구나 생각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전사들을 훈련시키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 때문에 대부분의 부족장들은 그저 무턱대고 진격하여 힘으로 부딪히는 싸움만을 했고, 잘 해야 숨어 있다가 기습을 가하거나, 방향을 한 번 정도 바꾸어서 싸우는 정도였다. 그러니 오백 명의 부대를 마치 자신의 손발처럼 능숙하게 부릴 수 있는 부족장은 이때껏 없었다. 그것도 말을 타고 달리면서 말이다. 위도 바보는 아닌지라 그것을 보고 놀란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기가 막히게 방향을 틀어 이천 명의 전사들을 산산이 흩어 한쪽으로 따돌린 그 부대는 조금도 속도를 떨어뜨리지 않고 왼쪽으로 치달려 마갸르족과 대치한 지나족의 배후로 매섭게 들이쳤다. “당했다!” 위가 얼굴색이 허옇게 변하여 부르짖었다. 실로 눈 깜짝할 사이의 일이었다. 마갸르나 미아우는 여전히 고전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잘 버티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라면 대부분 마갸르나 미아우가 있는 측면으로 합세하기보다는 이천 명의 중앙부대와 먼저 싸웠을 것이다. 그런데 저 군대는 중앙의 이천 명의 부대를 귀신같이 따돌리고 오히려 가장 잘 싸우는 마갸르족을 도우러 간 것이다 안 그래도 마갸르군과 혈전을 치르다가 순식간에 배후에서 습격을 받자 지나 전사들은 위가 어떻게 손을 써볼 틈도 없이 붕괴되어 갔다. 느닷없이 나타난 그 부대는 지나 전사들을 향해 화살을 세 번 일제히 날리더니 한꺼번에 고함을 르며 말에서 내렸다. 활을 는 것이나, 말에서 내리는 것이나 모두 한 사람이 내리는 것처럼 손발이 척척 맞아 보기만 해도 저절로 두려움이 생길 정도였다. 백 명의 부대는 말에서 내리자마자 긴 창을 앞세우고 지나족의 부대로 밀고 들어왔다. 창에 찔리지 않으려고 지나 전사들이 마구 흩어지며 방패를 들어 막자, 창을 찔러대는 사람들 사이로 다시 도끼를 전사들이 뛰어나왔다. 그들은 무섭도록 빠르게 달려서 눈 깜짝할 사 이에 도끼로 방패들을 산산이 찍어 부수고 그 뒤에 숨었던 지나 전사마저 나뭇단처럼 베어 넘기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칼을 든 부대가 나왔는데, 그들은 긴 칼을 휘둘러 도끼부대를 엄호하며 다른 적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그리고 뒤에 남았던 전사들이 화살을 날리는데, 얼핏 자기편에게 화살을 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으나 그들의 솜씨는 하나같이 대단하여, 싸우려고 덤벼들던 지나 전사들은 바로 적을 코앞에 두고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화살에 맞고, 다시 적의 무기에 맞아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죽어갔다. 그러고 나자 이제는 창부대가 일제히 돌진하여 적을 찌르며 앞으로 나아갔고 같은 과정이 눈부실 정도로 빠르게 착착 진행되어갔다. 위가 너무도 놀라고 어안이 벙벙해 소리조차 지르지 못하는 사이, 지나 전사들은 완전히 포위당하여 순식간에 전멸해 버리고 말았다. 마갸르족도 기세를 올려 공격해왔기 때문에 완전히 협공당한 상태에서 도망조차 치지 못하고 남김없이 죽어버린 것이다. 순식간에 천 명이 넘는 지나 전사가 시체로 변했지만, 상대편은 거의 피해조차 입지 않았다 그들은 적이 무력화되었다고 생각하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일제히 뒤로 몸을 돌렸다. 아직 오백 명 정도의 지나 전사들이 남아 있었지만, 그들은 공포와 절망에 빠져 제대로 저항도 하지 못하고 마갸르족의 성난 칼날 아래 줄줄이 쓰러졌다. 나머지 지나족 이천 명의 전사들은 그제야 분노의 함성을 지르며 달려왔을 때는, 천오백 명을 눈 깜짝할 사이에 해치운 그 오백의 전사들이 이미 우르르 말에 올라탄 후였다. 위는 자신의 눈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귀...... 귀신이다! 믿을 수 없다!’ 누가 지휘하는 군사들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는 놀랄 만큼 정확하게 싸움의 향방을 읽고 있었다. 보통은 승리감에 도취되어 마지막 한 명까지 적을 다 잡아 죽이려 했을 텐데, 그자는 다른 이천 명이 도착하는 시간과 자신의 부대가 다시 대열을 갖추는 시간까지 계산하여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놀라울 정도의 냉정함과 상황 판단력, 치밀한 두뇌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위는 발악하듯이 외쳤다. “물러서라! 상대가 안 된다! 물러섯!”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마구잡이로 달려오던 이천 명의 전사들이 위의 명령을 제대로 따를 리 없었다. 순간, 오백 명의 전사들은 다시 일제히 셋으로 갈라지며 달리기 시작했다. 한 부대는 중앙을 돌파하고, 두 부대는 신속하게 양옆으로 움직였다. 그렇게 오백밖에 안되는 수가 네 배나 되는 이천 명을 포위했는데, 신속하고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것이 거의 도술의 경지였다. 이천 명의 지나족들은 아우성만 쳤을 뿐, 순식간에 당한 포위에 변변한 대항조차 하지 못하고 무참하게 쓰러져 갔다 그 믿어지지 않는 멋진 포위는 눈을 번히 뜨고 당하고 있는 위의 눈에도 웅장하게 보일 정도였다. 죽을 목숨을 건진 거서기와 와난강은 간신히 남은 사울아비들과 함께 도망쳐서 높은 곳으로 몸을 피했다.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외쳤다. “살았소! 살았어!” 와난강이 기뻐서 외치자 거서기도 소리쳤다. “그런데 저 군대는 도대체 어느 부족일까? 난....... 난 저런 군대를 본 적이 없어. 무섭다! 정말 아름다울 정도로 무섭다!” 그러다가 거서기의 안식이 돌연 확 피어올랐다. “저건......! 저건.......!” “왜 그러시오?” 와난강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거서기는 갑자기 굵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신음하는 삼을 안아 일으켰다. “삼 형! 보시오! 그가 왔소! 그들 형제가 왔소!” 삼은 약간 정신이 들었는지 신음하며 중얼거렸다. “형.......제........?” “그렇소! 내 눈을 믿을 수 없소! 어서 눈을 뜨고 저들을 보란 말이오! 치우 형제가 돌아왔단 말이오!” “뭐라고?” 삼은 믿을 수 없다는 듯, 힘겹게 눈을 크게 떴다. 그들의 눈에는 먼발치에서 몇몇 전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우렁찬 목소리로 명령을 내리는 횐 얼굴의 청년이 보였다. 몇 년 전보다 키도 더 크고 환해진 것 같은 그 청년의 화사한 얼굴, 그것은 바로 치우천이었다. 그때 와난강이 물었다. “태산 회의의 그 치우 형제요.” “그렇소!” 거서기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하자 와난강이 소리쳤다. “그렇구나! 그럼 저 사람이 치우비요?” 와난강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는 지나 전사들을 무참하게 뚫고 호랑이처럼 날뛰는 한사람의 거인이 있었다. 체구는 더 커지고 늠름하여 아무도 당할 수 없을 것 같은 당당한 위풍이 있었다. 그가 손에 든 엄청난 도끼를 번득일 때마다 사람과 말이 한꺼번에 박살나며 멀리까지 떨어져 나갔고, 앞을 막는 자는 누구든 순식간에 박살이 나서 쓰러져 갔다. 바로 치우비였다. 그 오른편에는 붉은 털과 금빛 털을 휘날리는 기이한 모습의 도깨비들과 횐 호랑이를 타고 흰머리를 휘날리는 매혹적인 여전사도 있었다. 검고 긴 머리를 휘날리며 자기키보다 더 큰 몽둥이를 휘둘러 수십 명을 혼자 때려눕히는 놀라운 전사도 보였고 말을 타고 달리면서도 활을 들 때마다 틀림없이 한 사람, 어떨 때는 두 사람을 한꺼번에 꿰뚫어 버리는 무서운 궁수도 보였다. 그뿐만 아니라 오백 명에 달하는 모든 전사 하나하나가 영웅이고, 호걸처럼 보였다. 와난강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멍하니 외쳤다. “저들은...... 저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군대입니까? 치우 형제가 하늘 군대를 데려온 것입니까? 도깨비에 선녀까지 부릴 수 있다니.......치우 형제는 선인이었습니까?” “믿을 수 없다. 난 믿을 수 없다. 저건....... 저건 사람들이 아니다!” 위는 수없이 쓰러져 가는 부하들을 보면서 계속 헛소리처럼 중얼거렸다. 이번에도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포위한 양 측면의 병사들은 참을성 있게 화살만 쏘면서 적을 가두기만 하고, 중앙으로 파고 든 부대가 완전히 돌파하기를 기다렸다. 중앙을 파고든 치우비와 개르, 리미의 용맹은 실로 대단했는데, 그들은 압도적인 수의 지나 전사들 틈을 파고들면서도 조금도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지나 전사들이 아우성을 쳤다. “도깨비다!” “아이쿠! 저건 치우비다! 태산 회의의 치우비다!” 치우비를 알아본 몇몇 전사들이 외쳐대자 지나 전사들은 순식간에 공포에 빠졌다. “치우비다! 그 치우비다!” “혼자서 헌원님의 마을을 쓸어버렸다는 치우비다!” 지나 전사들은 삽시간에 전의를 잃고 무너져 갔다. 그것을 먼발치에서 보던 울라트가 활짝 웃으며 치우천을 쳐다보았다. “비 오라버니가 헌원님 마을에 간 것도 헛일은 아니었네요!” 삼 년이 지나는 사이, 열다섯 살이 된 울라트도 이제는 키도 컸고 몸매도 늘씬해져 처녀가 다 되어 있었다. 다만 큰 눈언저리와 얼굴에는 아직 앳된 기색이 남아 있었지만 수줍었던 과거를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활달하고 야성적인 아름다움이 넘쳐흘렀다. 또한 그런 천진해 보이는 얼굴 사이사이로 보는 사람을 오싹하게 만드는 날카로움이 지극히 매력적이었다. 소녀처럼 절세미인은 아닐지라도 사람들의 눈을 끌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의 멋진 여자가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치우천이 웃으며 대답했다. “지나족 중에 알한이 또 있는 게 아닐까?” 치우천은 햇볕을 쐬며 고생을 했는데도 이상하게 얼굴이 조금도 그을지 않고 오히려 더욱 희게 빛났다. 다만 입 언저리와 턱 아래쪽에 조금씩 가뭇가뭇하게 수염자국이 보이기 시작한 것과 눈빛이 더욱 내쏘는 것처럼 형형해진 것 정도가 달라졌다면 달라진 점이었다. “지나족 부대가 방금 무너졌어요. 천 오라버니, 점말 대단해요 오라버니의 생각이 그대로 맞아 들어가고 있어요.” 들뜬 울라트의 말을 치우천이 조용히 되받았다. “오늘 싸우는 지나족은 철저히 짓밟아야 한다. 불쌍하지만 할 수 없다.” 울라트는 짐짓 장난스레 웃으면서 외쳤다. “물론이죠!” 왼쪽 군대들에 이어 중앙의 군대마저도 전멸이 거의 확실시되자, 위도 더 이상 멍하니 바라보고 있지는 않았다. 위는 있는 힘을 다해 오른편 군대에게 달려가, 무조건 도망치라고 명령했다 미아우족의 공격이 거세졌지만, 위는 무슨 일이 있어도 물러서라고 외쳐댔다. 오천 명 중 벌써 삼천오백 명이 전멸 당했지만, 나머지 천오백 명이라도 건져볼 생각이었던 것이다. “물러서라! 더 싸울 수 없다! 후퇴다! 후퇴!” 위가 소리소리 지르면서 오른쪽 군대를 물리자, 지나 전사들은 허둥지둥 싸움터에서 물러서서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때 중앙의 지나족은 아직 전멸하지 않고 간신히 버텨내고 있었는데, 위는 그것을 구원할 생각도 않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멀리서 그것을 보던 치우천은 눈살을 찌푸렸다. “지나족 대장의 솜씨도 제법이다. 그런데 사람됨이 틀려먹었군. 부하들을 버리고 자기만 도망칠 궁리를 하는구나.” “그럼 어떻게 할까요? 비 오라버니에게 뒤를 쫓으라할까요?” 울라트가 묻자 치우천은 싱긋 웃었다. “그럴 것 없다. 그들은 도망 못 쳐.” 간신히 천 명 정도의 전사를 수습하여 달아나던 위 앞에 한 사람의 노인이 나타났다. 여전히 꾀죄죄하고, 시커먼 옷에 귀신같은 형상의 비울걸이었다. 다만 그 옷은 전보다는 깨끗하여 냄새는 좀 나긴 했어도 악취까지는 아니었고, 삼단처럼 흩어져 있던 머리칼도 상투 비슷하게 엉성하게나마 틀어 올린 모습이었다. “얘들아, 너희 어디 가니?” 위는 비울걸을 전혀 몰랐기에 버럭 소리쳤다. “웬 미친 늙은이가 망령을 부리느냐? 얘들아, 그냥 밟아버려라!” 위는 포악하여 다짜고짜 죽이라는 소리부터 했다. 그 소리를 듣고 비울걸이 혀를 쯧쯧 찼다. “못된 놈이군. 그러니까 외눈깔이 되었지, 쯧쯧. 남은 눈깔마저 잃기 싫으면 마음부터 고쳐먹어!” 비울걸이 호통을 치자 위는 다시 불같이 화를 냈고 네 명의 전사가 비울걸에게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들이 비울걸에게 미처 다가가기도 전에 갑자기 일제히 비명을 지르더니 얼굴에서 피를 쏟으며 땅에 뒹굴었다. 비울걸은 그들을 싸늘한 눈초리로 노려보았다. “치사하게 힘없는 늙은이를 죽이려 해? 기왕 죽겠지만 죽어도 외눈깔로 죽어라.” 그 네 사람은 모두가 위처럼 눈에서 피를 철철 흘리고 있었다. 물론 모습을 숨긴 도깨비들이 한 짓이었지만 그것을 모르는 위와 지나족은 놀라서 목을 움츠렸다. 비울걸은 검은 눈구멍을 번뜩이며 코웃음 치듯 말했다. “적이지만 착한 놈들이면 내가 좀 봐주려고 했는데, 못된 놈들이니 봐주지 않겠다. 다 죽을 줄 알아라.” 비울걸이 들연 손가락을 관자놀이에 대고 중얼중얼 주문을 외우자 땅이 갑자기 출렁이며 솟구쳐 올랐다. 위의 말이 놀라 크게 울며 뛰어오르는 바람에 위는 그만 땅에 떨어져 버렸다. 지나 전사들의 놀라움과 혼란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솟구쳐 올라간 땅은 두 마리의 거대한 누런색의 땅 도깨비로 변해, 아름드리 나무만한 흙 몽둥이로 마치 비질을 하는 것처럼 지나 전사들을 쓰러뜨리기 시작했다. 거대한 몽둥이에 휩쓸린 지나 전사들은 여기저기가 부러지고 멍이 들어서 다시는 일어서지도 못했다. 거기에다 수없이 많은 흉악한 형상의 허깨비들이 다시 땅에서 솟아올라지나 전사들을 덮쳤다. 아수라장이 된 지나족들을 차가운 눈길로 바라보며 비울걸은 싸늘하게 말했다. “죽더라도 잘 알아둬라. 이 몸은 작은 주신의 도깨비 왕, 비울걸이다. 저승에 가서 누가 물으면 내가 보냈다고 해라. 앞으로도 많이 보낼 것이니, 기다리고 있으라고.......” 허깨비들이나 땅 도깨비는 직접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으나 지나 전사들은 상처입고 허깨비에 흘려 서로가 서로를 죽이고 있었다. 이윽고 중앙의 지나족을 전멸시킨 치우비의 부대가 달려오고 그 뒤를 따라 마갸르족, 미아 우족의 부대가 몰려왔을 때는, 비울걸은 땅 도깨비와 허깨비들을 거두고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 버린 후였다. 천 명에 달하던 지나족 태반이 이미 죽어 있었으며, 그나마 살아남은 지나족들도 도망칠 생각도 못한 채 얼이 빠져 울기도 하고 미쳐서 히죽히죽 웃거나 마구 발작하듯 날뛰고 있었다. 마갸르 나달타족을 이끌던 와난수가 놀라움을 이기지 못해 말을 더듬거렀다. “누가..... 누가 이렇게 한 거지?” 미아우 후냐 부족장 샤우옹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게 무슨 일이오? 나는 정말 도깨비에 흘린 것 같구려.” 그러자 말을 타고 그들을 스쳐 지나가던 치베가 껄껄 웃으며 한마디 했다. “도깨비에 홀린 것 맞소.” 샤우옹과 와난수는 놀라서 치베에게 더 물어보려 했지만, 치베는 어느 틈에 달려 나가 지나 전사들에게 화살비를 퍼붓기 시작했다. 치우비도, 알한도, 무라와 리미, 개르도 마갸르족이나 미아우족에게는 그냥 웃기만 할 뿐 조용히 남은 지나족들을 소탕하는 일에만 전력을 다했다. 마갸르족이나 미아우족은 정말 귀신에 홀린 기분이라서 손조차 쓰지 못하고 멍하니 있었다. 불과 반나절, 아침만 해도 활발히 움직이던 오천 명에 달하던 지나전사들 중에 해가 중천에 오를 때까지 살아남은 자는 거의 없었다. 미아우와 마갸르족이 잡은 포로 칠백 명 정도를 제외하고, 도망쳐 목숨을 건진 자는 오십 명도 안 되었다. 말에 깔렸던 위는 오히려 그 덕에 발각되지 않고 숨어 있다가 나중에 밤을 틈타 도망쳤다. 그에 반해 치우천 부대는 고작 열네 명의 사망자와 육십 명 정도의 경상자를 냈을 뿐이었다. 그나마 그들은 싸우는 틈틈이 깔끔하게 시체와 무기까지 빈틈없이 싹 거두어 한 명도 다치거나 죽은 사람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와난수와 샤우옹은 우두머리인 치우천에게 무슨 말이라도 묻고 싶었지만 치우천은 빙긋 미소만 짓다가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그들이 다가서기도 전에 말 한마디 없이 부하들을 이끌고 바람같이 사라져 버렸다. 부하들도 모두 웃으며 그들에게 손짓은 했지만, 끝까지 입을 열지 않고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와난수와 샤우옹은 자기 부하들과 함께 먼지구름만 보며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혹시 하늘에서 내려 보낸 군대가 아닐까요? 아무리 봐도 사람들 같지 않소이다.” 와난수가 한참 있다가 입을 열자 샤우옹도 몸을 떨며 말했다. “나는...... 나는 도깨비들을 많이 보았소. 그들은 분명...... 조상님의 혼령일 게요 우리 미아우족의 조상님들이 도와주신 게 분명하오.” “그럴 리가! 우리 마갸르족의 신이 보내신 군대가 틀림없소!” 와난수와 샤우옹이 아웅다웅하는데 와난강이 달려와서 외쳤다. “우리가 이겼습니다. 지나족은 다 죽어버렸어요!” 뒤에 따라오던 거서기가 와난수와 샤우옹에게 말했다. “그들은 조상님이나 하늘군대가 아닙니다.” “사울아비님은 그들이 누군지 아시오?” 거서기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좀 압니다. 제 자신이 부끄럽군요. 그들은 옛 친구들입니다.” 별안간 와난강이 아버지에게 외쳤다. “아버지! 태산 회의의 대용사 치우비를 잊으셨나요? 그 치우 형제라구요!” 그 말에 와난수와 샤우옹은 몹시 놀랐다. “뭐라고! 그들은 사막에서 죽었다던데?” 그러자 거서기는 껄껄 웃으며 흥분에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 “죽지 않았습니다. 치우 형제는 죽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싸움을 보셨습니까? 보셨습니까? 믿어지지 않습니다. 열 배가 넘는 적을 한나절 만에 남김없이 쳐 죽이는 싸움을 보셨습니까? 그러고도 죽은 사람하나 없는 그런 싸움을 생각이나 하신 적이 있습니까? 그들을 이제, 세상 누구도 당해낼 수 없을 것입니다!” 말 등에 눕혀져 있던 삼도 간신히 고개를 들고 외쳤다. “죽지 않았을 뿐더러....... 더 강해졌다. 그들은...... 그들은 신시로 돌아올 것이다! 두고 봐라, 거서기 나는 믿는다. 그들은 죽음에서 살아서 돌아왔다. 아무도 그들을......그 형제를 막지 못할 거야. 그들이 신시를 바꿀 것이다. 주신을 구할 거야!” 와난수와 샤우옹도 놀라움과 흥분이 뒤엉킨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저런 영웅들이 주신 사람이라면..... 이건 정말 하늘이 내신 거요, 이 전쟁은 주신이 이길 거요! 지나족이 많다 해도 반드시 이길 거요!” 거서기는 기쁨에 겨워 두 팔을 활짝 펴고 하늘을 향해 외쳤다. “하늘이시여! 안파견 한님이시여! 하늘이 무심치 않아 저런 영웅들을 보내셨군요. 하늘은 주신을 버리지 않으셨군요! 고맙나이다! 정말 고맙나이다!” 거서기의 커다란 목소리는 광활한 벌판을 메아리치면서 티 없이 맑은 하늘로 솟구쳐 오르는 것 같았다. 거서기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그 형제는 분명 주신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일그러지고 비뚤어진 주신을, 신시를 그들의 큰 힘으로 바로 잡아 주리라 믿었다. 몸을 가누지 못하는 삼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마음에는 이제 머지않아 신시에 몰아닥칠 바람을 기다리는 꿈으로 가득 찼다 그것이 부드러운 산들바람이든, 모든 것을 쓸어버리는 폭풍우든 간에 말이다. 다만 하루라도 빨리, 가능하다면 당장에라도 그 바람이 불어오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6권에 계속 *당시의 생활 및 시대적인 설정 소설의 내용과 등장인물들의 행동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그 시대적인 설정과 그에 대한 근거를 문답형식으로 4권에 이어 싣습니다. * 배경이 상당히 고대인데, 당시의 전투에서 전략이나 포진법 같은 것이 있었겠는가? 있었다고 봅니다. 대부분의 전략이나 전술은 싸움이 있으면 당연히 생기게 마련입니다. 가령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이 서로 편을 갈라 눈싸움을 한다고 할 때에도, 꾀를 생각하여 상대를 유인하여 집중공격을 하거나, 숨었다가 포위를 하는 등의 방법을 사용합니다. 이러한 유인, 매복, 포위 등의 전술은 싸움이 있는 곳에서는 어디에서나 생길 수 있다고 봅니다. 고대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다만 그러한 전술들이 가령 삼국지식으로 ‘구호탄랑지계’와 같은 이름이 붙지 않았을 뿐이며, 문자화되어 남지 않았을 뿐이라 봅니다. 또 한 가지, 그러한 전술이나 전략은 누구나 생각할 수는 있었겠지만, 그것을 수행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전사들은 직업군인이 아니라, 단지 신체 건강한 장정일 뿐입니다. 그러한 전사들에게 일관된 명령체계를 훈련시키고, 눈앞의 싸움보다는 대국적 견지에서 본 명령을 따르게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신무기가 많은 현대의 군대에서도 그러한 이유 때문에 가장 먼저 제식훈련부터 가르치는 것이 보통입니다. 서양 고대 전쟁사에서 가장 유명한 한니발이나 스키피오의 전투도, 그 기본은 매복, 유인, 포위라는 세 가지 기본형을 적절히 뒤섞은 데 있습니다. 그들을 최고의 전술가라 부르는 이유는 다만 그들의 꾀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각 부대를 그렇게 질서정연하게 통솔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고, 전황의 돌아가는 사태를 잘 파악하여 적절한 배치와 적절한 명령을 내렸다는 데 그들의 진정한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본인은 현재 하북성 탁록현에 자취가 남아 있는 치우채(치우의 요새)를 답사해 보았는데, 고대임에도 불구하고 그 요새가 전황을 한눈에 알 수 있는 지형적 요지에 자리 잡고 있고, 요새 자체가 세 개로 나누어져서 유기적 연관성을 지니고 배치되었음을 확인했습니다. 치우북채를 제외하고는 극히 남은 흔적이 적기는 했지만, 요새를 세 개로 나누어 배치했다는 것은 각 부대의 특성을 살린 최소한 세 개 부대 이상의 편제를 가지고 있었다는 이야기이며(가령 선발대 -주력부대 혹은 지휘부대 -보급 혹은 지원 부대, 이는 곧 당시 시대보다 훨씬 앞선 전투감각을 지니고 있었다는 뜻이라 생각했습니다. 그에 반해 황제성은 평지, 농토의 중앙에 자리 잡고 있어서 평상시의 다스림에는 적합했을지 몰라도 전시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싸움이 벌어지면 지형적 이점과 관측의 이점을 지닌 고지를 서로 점령하려는 것이 통례인데, 전설대로 치우가 황제를 공격했다면 황제는 왜 눈을 뻔히 뜨고 그러한 지형적 요지를 상대에게 내주었는지 의문입니다. 두 가지 견해가 있을 수 있는데, 하나는 탁록을 침략한 것이 치우가 아니라 황제(헌원)이거나, 황제의 전투감각이 치우보다 훨씬 뒤떨어졌다는 추측이 가능합니다. 고대이기는 하나 부대를 최소한 세 개로 편성하여 배치할 정도의 감각이라면 전쟁에 있어서도 그러한 매복, 유인, 포위의 3대 전술을 응용한 복합적 전술을 사용하고도 남는다고 판단했습니다. * 등장인물 중에서 어디까지가 실제 존재했던 인물이고 어디까지가 가상의 인물인가? 당시는 문자가 막 발명된 시기이니만큼 비록 문자로 기록되었다 해도 구전의 전설 이상의 정확성을 지니고 있었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사서에 기록된 인물이라고 하여 꼭 그대로 실존한 인물이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다만 중국 측의 인물은 거의 한사람도 예외 없이 기록에 등장하는 인물들입니다. 헌원, 유망, 발은 물론이며 끽구, 이주, 상망 등은 <장자>에 수록되어 있고, 비휴나 십육기인, 광성자, 적송자, 알유, 이부, 위, 풍후, 상백, 소녀, 현녀 등도 모두 기록된 인물입니다. 주신측의 인물은 치우천(소설의 치우천), 약간의 재야사서에서 치우비, 과보, 형요 등의 인물들의 이릉이 보입니다. 사와라 한웅도 13대 한웅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외의 인물은 전부 포설상의 설정으로 창조해낸 인물이며, 맥달도 그중 하나입니다. 주신과 지나를 제외한 기타 종족의 사람들 역시 거의가 가상의 인물이며, 보돈차르 정도만이 실제 기록이 남은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 본문중에 마을. 부족, 대부족, 나라의 구분이 모호한 것 같다. 무슨 원칙이 있는가? 있습니다. 교통이나 편제가 발달하지 않은 시대에, 한 마을(씨족)의 규모는 사람이 걸어서 하루에 이동할 수 있는 반경 이상이 될 수 없습니다. 저도 그렇게 상정했지만, 이것은 고고학적인 산출방식이기도 합니다. 아울러 그 반경 이내에서 생산되는 생산량이 마을의 인구수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구가 그 수보다 늘어나면, 좋든 싫든 마을은 갈라져 나가 새 지역을 개척해야만 합니다. 혹은 생산력을 늘리는 수단을 강구해야 합니다. 지금 소설의 배경이 된 시기는 아직 빈 땅은 많지만, 물과 가까운 비교적 비옥한 땅은 거의가 임자가 정해져서, 한참 땅 빼앗기의 분쟁이 일어나기 시작할 무렵입니다. 아울러 땅에서의 생산력을 늘리기 위한 수단들이 대대적으로 강구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그러한 마을이 역시 연락이나 통제가 가능한 범위 내에서 묶인 것이 한 개의 부족입니다. 그리고 그 부족들이 전쟁이나 복속 등의 과정을 거쳐 하나의 지배세력 단위로 뭉친 것이 대부족입니다. 이 대부족과 나라와는 거의 비슷하다고 볼 수 있는데, 당시는 비록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으로 나누어진 지는 한참 되었지만, 실질적인 국가건설에 필요한 관료조직이나 경찰, 행정기능 등은 아직 나타나기 직전입니다. 그러므로 주신 같은 경우는 발달되어 (신시를 건설하고 삼사 등의 직책을 두어 기본적 행정이나 관료가 생겼으므로) 나라라고도 칭할 수 있지만, 그 외의 부족은 아직 대부족의 단계일 뿐입니다. 가령 주신은 삼사와 같은 제도적 관료가 있고 치우씨, 부소씨 등 귀족이라 할 수 있는 가문이 존재하여 어느 정도의 국가적 체계를 갖춘 면모가 보이는 반면, 황제측은 모두가 그냥 신하로만 기록되며 업무분장이나 관료적 체계는 갖추어지지 않은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姓)조차도 세습되지 않아 황제 헌원의 성은 공손이고 이름은 헌원인데, 아버지는 소전이며 다시 그 자손은 제곡 고신, 전욱 고양 등등에서처럼 성씨조차 확립되지 않은 모습을 보여줍니다. 소설상에서 헌원이 꿈꾸는 것은 그러한 지배적인 제도가 다 갖추어진 국가의 건설이므로 그럴 경우에만 간혹 나라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입니다. 비슷한 예로, 이보다는 몇백 년 뒤이지만 ‘일리아드’나 ‘오딧세이’의 배경을 들 수 있습니다. 비록 그 안에서는 나라나 왕이라는 표현을 쓰지만, 일리아드의 영응들이 침략하는 트로이는 하나의 도시(즉, 부족과 다를 바 없습니다)이며, 각 나라의 왕들도 따지고 보면 관료체제를 지니지 못한 부족장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서로 무리지어 엮이기도 하며 싸우기도 합니다. 그 시대가 조금 지난, 그 영웅시대를 노래했던 호메로스의 시대 정도에 다다르면 같은 도시국가라고는 해도, 비로소 국가로서의 체계가 확립된 아테네나 스파르타가 등장합니다. 아테네와 트로이를 다 같은 국가라고 단정하는 것은 무리가 있겠지요. 당시 비교적 국가다운 형태를 갖추고 있던 ‘나라’는 고대 이집트와 주신뿐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 치우 형제가 뛰어나고 재주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사람들의 마음을 끌거나, 헌원이 집착하게 만들거나, 부족을 모을 수가 있었을까? 과학이나 체계적인 지식이 쌓이기 이전 시대에 가장 중요한 것은 현명한 인간의 지혜였습니다. 훨씬 후대인 춘추전국시대의 예를 들자면, 한 사람의 현명한 사람을 발탁함으로써 한 나라가 흥성하고, 한 사람의 착실한 군주를 얻음으로써 한 국가가 위세를 떨친 일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춘추시대의 제나라의 명재상 관중을 가리켜 “한 사람으로 국가가 흥하고 망했다”고 했지만, 당시의 명재상, 명군주들은 거의가 그와 같은 면모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뜻이 크고 남보다 앞선 생각을 가진 현명한 사람을 모시기 위해 국가 규모의 암투와 경쟁이 벌어졌고, 백면서생에서 일순간에 재상으로 발탁되어 천하를 좌지우지한 사례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더욱이 자신의 나라에서 쓰지 못할 현자는 다른 나라에서도 쓰지 못하도록 죽이는 사례가 많았고, 그 때문에 전쟁으로까지 번진 사례까지 있습니다. 하물며 본문상의 시대는 문자가 퍼지기도 전의, 덜 발달된 시대였으니만큼 한사람의 힘이 전체 세상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정도는 춘추전국시대보다도 더더욱 컸다고 봅니다. 헌원이 치우천을 얻거나 죽이려고 한 것은 바로 그런 맥락에서이며, 조금도 과장되거나 지나치게 묘사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치우천이 영리하여 순식간에 새 부족을 형성하고 사람을 모으는 것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주요 등장인물 비냐, 유우, 가나 : 쑤앙마이가 직접 길러낸 열세 작은 자매의 사람들. 열세 작은 자매는 모두가 독특한 지식과 기술을 가지고 있으며. 열세 작은 자매는 무라, 비냐, 유우, 가나, 아란다, 지스카. 그리고 여섯 무녀에다 소녀이다 나단선우: 훈족의 부족장으로 용맹하지만 머리는 그리 좋지 못하다. 카린산의 싸움에서 용맹을 떨쳤지만 큰 부상을 입어 치우 형제를 원수로 생각한다. 특히 도깨비들에 대한 증오심이 강해진다. 시기르타: 후대의 서하, 누란 등 중앙아시아 출신의 장사꾼으로 퍽 품위 없어 보이는 뚱보지만 실제로는 대단히 명석한 인물이다. 치우천의 신뢰와 사람됨을 보고 그와 계속 거래하여 많은 도움을 준다. 와난수(완안수): 태산 회의 때 도단이 등과 돌을 겨루었다가 아깝게 진 마갸르족의 유명한 부자(夫子) 용사로 와난강의 아버지이다. 후에 금나라의 국성 (國姓)이 되는 완안 씨의 시조로 설정되어 있다. 와난강(완안강): 마갸르족 와난수의 아들이며 용감한 용사이다. 위(곤): 유망의 으뜸가는 부하인 형천이 데리고 있는 대장격의 전사. 음험하고 잔인한 성격이며 한번 마음에 담은 상대는 반드시 해치고야 마는 모진 성격이다. 과거 알유와 시합을 하다가 실수고 왼쪽 눈을 잃게 되었는데. 그 때문에 나중에 많은 일을 벌이게 된다. 지나족으로서는 드물게 말을 타고 싸울 수 있는 기마술에 능하다. *신수 소개 첸누: 공룡시대 이전 고생대 · 중생대 때의 거북류가 원형인 신수 변온동물인 파충류(거북)였으나 기이하게 얼음과 차가움을 좋아하게 되어 도력을 얻게 된 특이한 존재이다. 혼자 도를 닦지 않고 우연히 같은 굴에 들어간 뱀과 같이 도를 닦아서 둘이 한 몸이 된 것처럼 항상 같이 다니며. 사고나 사유도 공유한다. 그 때문인지 맥을 제외한 다른 신수에 비해 머리가 좋고 사람의 말을 가장 잘 알아듣는 편이다. 사방을 얼리는 냉기를 뿜고 우박과 눈을 내리는 능력까지도 지닌 신수이다 후에 사신(四神) 중의 현무(玄武)의 원형이 된다.